引 言 그로부터 이 년이 흘렀다. 序. 그러고보니 벌써 육 년 가까이 되었군..... 第 一 章 괴 이 한 訪 問 者 1 사형! 사형!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 왜, 저번에 흑상표국(黑象票局) 사람들이 묵어가면서 들려준 그 천축고수이야기 말입 니다. 아, 그 괴상한 비무자(比武者)말이군... 예, 그래요.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그리 호들갑이냐? 오늘 일과도 다 마치지 않고서... 아, 이번에 장로 한 분이 서장(西臧)에 갔다오지 않았어요? 그랬지. 거기서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에요! 웃통을 벗고 땀을 딱아내던 건장한 청년이 아직 어린 소년을 보면서 물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그 신비괴인이 서장에도 나타났다는 거에 요. 소년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청년을 보았 다. 자신들에게 대사형(大師兄)이라 불리는 청 년을. 청년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다가 어린 소년 에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에 신경쓸 거면 좀더 수련에 열중하는게 어떻겠냐? 청년의 태도에 실망한 소년은 입술을 삐죽 이며 가버렸다. 그러나 소년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청년의 얼굴은 몹시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조용한 산의 도장(道場)에는 선거(仙居)의 아취가 넘쳐 흐르고, 이제 봄기운이 산속 깊 숙이 침투한 덕에 나뭇잎들은 푸르름을 과시 하고 있었다. 여러채의 소박하나 장엄한 색채를 띤 도관 들이 몇 개 씩 이어 서 있고, 그 복판에는 커다란 연무장(鍊武場)이 누워 있었다. 그 후원(後園). 곤륜검문(崑崙劍門)이라 칭해지는 이 도장 의 문주(門主)가 거처하는 곳에서는 몇 사람 이 앉아 심각한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 었다. 이윽고, 청의를 가다듬어 입고 단정한 자 세를 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음 대(代) 곤륜검문의 문주로 내정 (內定)되어 있었고, 동배(同輩)들에게는 대 사형이라 불리는 청년이었다. 당대 문주인 곤륜신원(崑崙神猿) 이장천 (李長天)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왔느냐? 이장천은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 었다. 청년은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원래 그가 끼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으 나, 차세대의 곤륜검문을 이끌어갈 그는 반 드시 알아야 한다는 장로(長老)들의 결정으 로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자는 약 일 년동안 천축의 뭇고수를 연파하였소. 입을 연 사람은 막 서장에 다녀온 장로 선 인수(仙人手) 노량(盧亮)이었다. 소제가 조사하러 서장에 갔을 때 그 자는 이미 서장의 각 사찰을 돌면서 그 비무행을 하고 있었소. 그리고 결과는 천축과 마찬가 지였다는 것이오. 아마, 소제가 이곳에 돌아 오는 동안 그 자도 이리로 올 것이 틀림 없 었소이다. 노량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문주인 이장천은 아무 말도 없이 그에게 다음 말을 재촉하였다. 노량은 다른 두 명의 장로가 아무 말도 없 이 침묵하는 것이 좀 이상하기는 했으나, 다 시 말을 계속했다. 천축에서의 그 소문은 확실한 사실이었 소. 그 자는 정말로 천축의 이름난 고수는 물론이고 은거하여 있는 기인이사(奇人異士) 들까지 찾아다니면서 비무를 하였소. 그리고 모두 이겼소. 아무도 그 자에게 이기지 못했 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패배를 자인(自認)했다고 하더군요. 다음 대 문주라 할 수 있는 청년, 관악(關 嶽)이 의아한 눈으로 노량을 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못했다. 장로들의 회의에서 그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불쑥 문주인 이장천이 말했 다. 할 말이 있다면 하거라. 관악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천축의 은거기인들은 그 성 정(性情)이 몹시 괴팍하여 좀처럼 남과 싸우 지도 않을 뿐더러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승복하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 이 그 신비고수의 도전을 받고 싸운 뒤, 패 배를 자인했다는 것이... 관악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의문을 말해햐 할지 몰라 조금 머뭇거렸다. 애당초 그 이상한 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회의에 참석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가 평소의 장로들 태도하고는 달랐다. 그랬기에 그는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그 천축고수 에게 신경을 쓰는 것일까? 곤륜검문은 강호의 은원에 간여하지 않은 지가 벌써 백 년이 넘었다. 이제와서 새삼 강호의 고수, 그것도 가까 이 있는 아미(峨嵋)나 청성(靑城), 점창(點 蒼)등의 유수한 문파의 고수도 아니고 멀리 천축에 있는 떠돌이 괴객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두 명의 장로 중 선학수(仙鶴手) 조일산(趙一山)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너도 알 때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그에게서 한 장의 비무첩(比武帖)을 받았 다. 관악은 놀라서 사부인 이장천과 다른 장로 들를 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장 의 서찰을 내보였다. 그 서찰은 관악뿐 아니라 노량 마저 경악 하게 만들었다. 아니, 벌써 그가! 노량의 입에서 튀어나온 경악성과 달리 관 악의 눈은 서찰의 겉에 쓰여 있는 글에 놀라 고 있었다. <곤륜검문의 운룡십삼회(雲龍十三廻)를 보 고자 하오.> 그리고 찍혀있는 손자국 하나. 그 손자국은 벙어리 장갑을 끼고 찍어놓은 모양이었다. 흡사 장난이라도 하듯. 그때 비로소 관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 을 수 있었다. 운룡십삼회! 운룡십삼회는 별호에서 연상되듯 몸을 날 리는 신법(身法)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검법(劍法)이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으로 널리 알려진 곤륜파의 절기에서 변화되어 나온 절세무쌍 의 검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곤륜파 전체의 절기가 아니 라 오직 곤륜검문만의 절기였다. 세상의 은원에서 벗어나 오직 선도(仙道) 의 오의(奧義)를 추구하는 곤륜검문의 은자 (隱者)들이 이루어낸 검술. 그 이름은 곤륜검문의 이름보다도 더 알려 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곤륜파는 알아도 그 안에 곤륜검 문같은 분파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곤륜파로 칭해져도 극소수의 몇몇 수뇌급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곤륜검문 에 운룡십삼회라는 최상승의 검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위력이 천하칠대검법(天下七大劍法)에 버금간다는 것은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었 다. 관악 조차도 다음 대 문주로 내정된 다음 에야 그런 검법이 있다는 것을 겨우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운룡십삼회의 이름을 천축의 비 무자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노량은 서찰을 한 번 뒤집어 보였다. 음... 역시... 그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한 가 닥 신음이 새어나왔다. 서찰의 뒤에도 한 줄기 글이 적혀 있었다. <곁들여 금안행운(金雁行雲)의 신법도 보 고 싶소.> 그리고 찍힌 예의 벙어리 장갑 모양의 괴 이한 장인(掌印). 관악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금안행운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장천은 그의 의중을 짐작하듯 무거운 표 정으로 입을 열었다. 금안행운은 본문의 문주만이 익히는 비전 신법(秘傳身法)이다. 관악은 놀라서 얼굴이 희게 변하고 있었 다. * * *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차가웠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한 사람이 곤륜검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를 보게 된 곤륜검문의 제자들 표정이 이상해져 갔다. 사람이 이상했고, 행색은 더욱 이상했던 것이다. 아직 서늘하다고는 해도 계절은 점점 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백포(白布)로 칭칭 감 아매고 있었다. 얼굴을 비롯해서 손까지 모조리 둘둘 감싸 놓은 모습은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휘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어 백포위로 삐져나온 산 발한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보고 있던 사람 들은 더욱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눈동자는 보였다. 얼굴의 윤곽도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얼굴을 전부 붕대 로 감싸듯이 둘둘 말아놓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저 눈 아래만 둘렀으려니 했는 데 그게 아니었다. 눈만 빠금히 내놓고 눈 아래 위를 모조리 흰 천으로 휙휙 감아 놓은 것이다. 아니 흰 천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원래는 흰천일지 몰라도 이제는 때가 타서 잿빛이 되어 있는 것이다. 손도 마찬가지였다. 벙어리 장갑이라도 낀 것처럼 손가락의 구 분은 엄지와 엄지가 아닌 것만 구별할 수 있 게 하고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둘둘 말아놓은 것이다. 얼굴아래의 목까지 둘둘 말아 귀도 드러나 지 않게 해놓은 그를 보면서 곤륜검문의 제 자들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머리카락은 안싸고 산발하여 흩어 놓 았지? 등에는 역시 자신의 얼굴처럼 흰 천으로 둘둘 말은 삼척 길이의 몽둥이 같은 것을 매 고 있었다. 검(劍)인가? 곤륜검문의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도리질할 수 밖에 없었다. 검을 저렇게 두툼하게 싸놓을 리는 없는 때문에. 그는 천천히 연무장의 한 복판에 섰다. 산발로 마구 흩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 날렸을 때, 그의 앞에 선 곤륜검문의 제자들 은 비로소 그의 눈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 다. 무, 무슨 사람 눈이... 무서운 눈도 아니고 영민한 눈도 아니었 다. 눈이 있어야할 자리에 눈이 있기는 있었 다. 한데 칙칙하게 내비치는 눈은 무슨 쇳조각 이 눈에 박힌 것 같고, 희게 보여야할 눈자 위는 충혈된 것처럼 붉은 것이다. 곤륜검문의 제자들은 그에게 뭐라고 할 수 가 없었다. 오는 손님은 모두 하루를 묵어갈 수 있었 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이 산중에서 그것은 그 들에게도 즐거운 체험이기도 했다. 한데 이 손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연무장 의 한복판에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곤륜검문의 제자들은 또 한 번 놀 라야 했다. 평소에는 좀처럼 외인(外人)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장로들과 장문인이 나타난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대사형 관악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봉하고 있는 것이 더욱 의혹을 부채질했다. 저자가 누구기에.... 장문인 이장천이 앞으로 나서며 한마디 인 사를 했다. 먼길 오셨군요. 그리고 나서 침묵이 이어졌다. 뭐라고 해 야할 지를 몰랐던 것이다. 노량이 말했다. 좀 일찍 오신 것 같군요. 칙칙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괴인이 처 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연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의 입을 감싼 부분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른 곳과도 약속이 있어서... 나직하고 탁하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 이장천의 흰 눈썹이 살짝 일그러들었다. 다른 곳이라면? 곤륜오문(崑崙五門)의 사람들이오. 이 말에 이장천과 노량, 관악 세 사람의 얼굴에 기막힌 표정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도 그의 칙칙한 눈빛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노량이 물었다. 그는 이 사람이 한 가지 절기를 지니고 있 음은 알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이 다. 분뢰수(奔雷手)... 노량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괴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저 분뢰수라고들 하더군요.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괴인 분뢰수가 겪었던 많 은 사람들이 보였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이었 다. 허무맹랑한 듯한 그 말에 당황하고 있는 표정. 관악이 젊은 혈기에 그만 발끈해서 앞으로 나섰다. 이름을 물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대질 않고 대뜸 자신의 절기 이름을 내놓다니. 이런 무뢰한... 장문인의 목소리가 관악를 막아섰다. 물러서라. 관악은 내심 못마땅했으나 감히 사부의 명 을 거역할 수는 없는지라 다시 자신의 자리 로 돌아갔다. 이장천은 관악를 물러서게 한 후에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괴인 분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들도 관악도 긴장하여 바라보았다. 이 대결은 그들이 대신해 줄 수가 없는 것 이다. 금안행공의 신법을 아는 것은 오직 장문인 뿐이었다. 그들조차도 괴인 분뢰수의 도전장에 쓰여 진 것을 보고서야 그 이름을 알았던 것이다. 곤륜신원 이장천은 지그시 괴인 분뢰수 앞 에 섰다. 그의 흰 눈썹 아래 늘 감겨 있던 두 눈이 활짝 열려 있음을 본 곤륜검문의 제자들은 놀라고 있었다. 언제나 잔소리나 하며 비실비실 거리던 장 문인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감돌며 그의 몸 에서 뻗어나오는 한 줄기 막강한 기세(氣 勢)!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알아볼 수 없었던 곤륜검문 주인의 참모습이었다. 괴인 분뢰수의 붉은 눈자위가 한층 더 붉 어졌다. 칙칙한 눈빛은 이장천의 검(劍)이 자신의 미간(眉間)으로 쇄도할 때도 여전했다. 오장(五丈)의 거리를 단 한 순간에 도약하 여 허리에 걸친 검을 쭉 뻗어오는 이장천의 모습은 그야말로 일대검선(一代劍仙)의 신위 (神威)를 보이고 있었다. 곤륜검문의 제자들은 이제서야 장문인이 얼마만한 고수인가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 앞에선 저 괴이한 눈빛의 사나이, 분뢰수가 이제 곧 피를 뿌리며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 다. 바로 그때 분뢰수의 몸이 움직였다. 우르르르... 한 순간, 곤륜검문의 모든 사람들은 우뢰 소리가 일어난다고 느꼈다. 콱! 연무장 바닥으로 한자루 검이 박혀들었다. 아--! 장로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터져나 왔다. 금안행공의 신법에 이어진 운룡십삼회의 가공할 검세가 한 순간에 차단당하고 곤륜신 원의 손에 들린 검이 퉁겨져 나가 바닥에 박 혀버린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느낀 것은 오직 한가지. 괴인 분뢰수의 동작이 그야말로 번개를 방 불케 했다는 것이다. 전에 이런 초식을 본 적이 있소? 무뚝무뚝한 목소리가 장내에 퍼질 때 비로 소 곤륜검문의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돌아왔 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느닷없이 장문인이 손에서 빛을 뿜어내며 오장거리를 단숨에 날았다는 것과 괴인 분뢰수가 지금 장문인의 턱밑에 벙어리 장갑을 낀 것처럼 백포로 둘둘 만 한 손을 대고 다른 한 손으로 장문인의 팔뚝을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장천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팔뚝 을 누르고 있는 분뢰수의 손을 내려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본적이 없소. 그의 흰눈섭 아래 두 눈에서는 침통한 빛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말 할 여지 없이 깨끗하게 패한 것이다. 전에 나와 같은 사람을 본 적도 없소? 느닷없이 이어지는 말에 이장천은 괴인 분 뢰수를 쳐다보았다. 분뢰수의 칙칙한 눈에는 승리의 기쁨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붉게 충혈되어 있을 뿐이다. 이장천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없소. 괴인 분뢰수는 손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포권하며 말했다. 비무해주어 고맙소. 2 핑! 핑! 핑! 피잉! 연속적인 음파가 낮게 깔리면서 날카로운 칼빛이 달빛에 번뜩였다.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하늘의 달조각이 지상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푹! 허공을 맹렬히 가르던 보도(寶刀)가 땅에 내리 꽃혔다. 월광도(月光刀) 사준우(史俊于)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으으... 신음하던 그는 다시 분뢰수의 눈을 보았 다. 온통 때묻은 백포로 감싼 얼굴아래 유일하 게 드러난 그 칙칙한 눈. 다, 다시 한번 부탁해도 괜찮겠소? 사준우는 분뢰수에게 말했다. 다섯 번이었다. 그는 벌써 다섯 번이나 괴인 분뢰수에게 덤벼들었고, 그때마다 오초(五招)를 넘기지 못하고 칼을 땅에 처박고 말았다. 옆에서는 이장천이 묵묵히 팔짱을 낀 채 보고 있었다. 사준우가 결코 방심하거나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준우는 이미 곤륜도 문(崑崙刀門)의 비전도법인 용비도(龍飛刀) 를 아낌없이 사용했던 것이다. 검문의 운룡십삼회와 쌍벽을 이루는 도법 (刀法). 용비십구도(龍飛十九刀). 역시 운룡십삼회와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은 비장의 도법이었다. 사준우는 다섯 번이나 덤비면서 용비도를 십오초나 썼다. 그러나 매번 결과는 똑같았고, 그는 자신 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분뢰수에게 한번 더 해보자고 조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우드득... 우드득... 월광도 사준우의 팔뚝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내공을 끌어올려 집중시키자, 사준우의 눈 에서 광채가 일렁거렸다. 피이잉! 길고 장중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장내가 온통 시퍼런 칼그림자로 뒤덮히며 용의 울부짖음같은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이장천의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용비도를 연환세(連環勢)로 한꺼번에 펼 치다니... 우르르르... 다시금 예의 우뢰소리가 울려나왔다. 분뢰수의 몸은 그 자리에서 부르르 떠는 듯 하더니 하늘의 번개가 갈라쳐지듯 도영 (刀影)을 반으로 갈라 놓았다. 부르르 떠는 듯한 처음의 움직임 속에서 손그림자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사준우의 손에서 칼이 벗어나는 광경을 이장천은 벌써 여섯 번째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한번도 깜박이지 않고 그 광경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푹! 다시 보도가 땅에 꽃혔다. .... 이제는 사준우도 더 이상 졸라볼 수가 없 었다. 분뢰수는 고요한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눈자위의 붉은 기운이 천천히 사그러들었다. 어떻소, 이번에는 우리 두 사람의 연환공 격을 받아보는 것이? 이장천이 침묵에 빠져 있는 사준우를 곁눈 질하며 분뢰수에게 말했다. 분뢰수에게 이 제안을 하기 전에 사준우는 반드시 한 번 겨루어보겠다고 고집을 세웠었 다. 분뢰수의 음성은 언제나와 같이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곤륜의 양의인(兩儀刃)을 보여주겠다 면.... 할 말을 잃고 있던 사준우의 얼굴에 벼락 맞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장천을 돌아 보았 다. 이장천도 역시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어 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사준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소! 보도를 다시 집어들더니 크게 대답한다. 이제보니 그는 정말 우리 뱃속에 든 벌레 수까지 세는구나! 어쩌면 그 때문에 곤륜오 문을 한자리에 부르려는지도... 이장천이 생각에 잠기려는데 사준우가 다 시 소리쳤다. 자, 자,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이장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나란 히 서서 칼을 들었다. 몇 대(代) 만에 다시 곤륜의 도와 검이 합 쳐지는 것인지 감회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괴인 분뢰수의 칙칙한 눈가에 사그러들던 붉은 기운이 다시금 짙어지기 시작했다. 분뢰수가 곤륜검문에 닿은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한 마리 선학(仙鶴)이 검문의 상공에서 울 음소리를 내며 내려오고 있었다. 학이 미처 지상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학에서 뛰어내렸다. 그자는 어디있지? 곤륜검문의 제자들은 놀라서 뭐라고 말해 야 할지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있는데 학에서 뛰어내린, 이제 완연히 중년의 티가 나는 사나이가 걸걸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 다. 어디 있느냐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십년 만이라 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았다. 장문인은? 그는 조급하게 다시 물었다. 검문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막 나서서 대 답하려고 할 때였다. 아니... 벌써 오시다니... 한 사람이 도관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왔 다. 노량이 선학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중나온 것이다. 그를 보자 학에서 내린 중년의 사나이는 얼른 달려가서 그의 손을 덥석잡고 물었다. 그자가 여기 온다는 얘기를 들었소. 아마 이미 와 있을 텐데... 설마 벌써 보낸 것은 아니겠지? 노량은 어이없어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 다. 운부(雲府)에 이미 사람을 보냈는데 전갈 을 받고 오신게 아니군요. 어? 본부에 사람을 보냈다고? 그제서야 중년의 사나이는 머리를 긁어대 며 자신이 성급하게 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노량은 자신의 눈 앞에 선 곤륜운궁(崑崙 雲宮), 자신들을 운부(雲府)라고 지칭하는 또 하나의 곤륜오문의 주인을 찬찬히 보았 다. 정말 저 급한 성미는... 노량은 내심 쓴웃음을 흘렸다. 운부의 주인인 운해룡(雲海龍)은 성미가 급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 사실은 천산장문인(天山掌門人)에게 놀러갔었는데, 글쎄 며칠 전까지 그 자가 머 물다 갔다지 뭐요. 그래서 그 자를 한 번 보 려고 곤륜산을 돌다가 다시 가서 천산장문인 에게 물었더니 이리로 간다하잖겠소? 그래서 겨우 부랴부랴 달려왔는데...우리 집엔 무슨 일로? 숨쉴 사이없이 한꺼번에 좔좔 늘어놓는 운 해룡을 보면서 노량은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운해룡이 말하는 그 자란 물론 분뢰수임이 분명했다. 운해룡은 아마 자신에게 분뢰수의 도전장 이 왔다는 사실도 모르고 혼자서 여기저기 들썩거리며 다닌 것이 분명했다. 결국, 운해룡은 자신이 찾고자 한 자가 어 디 있다는 노량의 이야기를 듣기가 무섭게 그리고 달려가고 말았다. 괴인 분뢰수는 화원을 거닐고 있다가 운해 룡을 만났다. 그를 보기가 무섭게 운해룡은 다짜고짜 손 을 휘둘러댔다. 그의 장력이 화원의 꽃들을 휘청거리게 할 때, 분뢰수의 몸은 먹구름 사이를 질주하는 번 개와 같이 운해룡의 면전으로 움직였다. 쿠르르... 잔잔한 뇌성(雷聲)이 울리는가 하는 순간 운해룡은 반사적으로 내딛은 발로 지면을 밀 며 뒤로 물러섰다. 운해룡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을 뻗어내었다. 분뢰수의 동작이 보여준 신속함에 운해룡 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핑, 하는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 린다 싶은 순간에 분뢰수의 둘둘말린 두 손 은 이미 운해룡의 가슴을 짚고 있었다. 운해룡이 경악하여 그를 보았다. 칙칙한 눈빛에 눈자위가 기묘하게 벌겋게 충혈된 것이 보였다. 분뢰수가 물었다. 전에 이런 초식을 본 적이 있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운해룡이 답했다. 없소. 나같은 사람을 본 적은? 어...없소. 운해룡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여 고개를 내젓자 그의 가슴을 짚고 있던 분뢰수의 손 이 거두어졌다. 운해룡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사이에 분 뢰수의 몸은 어느 새 화원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운해룡은 그저 멍하니 멀어져가는 분뢰수 의 뒷등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 * * 그 다음 날, 곤륜선문(崑崙仙門)과 곤륜비문(崑崙飛門) 에서 온 사람들이 도착했다. 관악은 거의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오 문(五門)의 손님을 대하기에 정신이 없을 지 경이었다. 곤륜검문에 이렇게 한꺼번에 이십 명 가까 운 인원이 손님으로 몰려든 경우는 없었다. 그 인원은 곤륜검문의 전체 제자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 * * 곤륜선문에서 온 사람은 장문인이 아니라 장로였다. 아, 실은 본문에서 일이 좀 있어 제가 대 신 왔읍니다. 넉살좋은 미소를 띄우며 담송(譚松)이 말 했다. 그는 오면서부터 줄곧 고개를 휘휘 돌리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운궁주와 사문주는 벌써 왔다면서요? 어 디에? 담송의 말에 노량이 답했다. 모두 거처에 쉬고 계십니다. 그럼, 이쪽 으로. 노량을 뒤따르며 담송이 물었다. 한데 운궁주와 사문주의 성질로 보아 이 미 한 번은 그 자와 부딪쳤을 텐데? 넌지시 묻는 그를 돌아보는 노량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곧 보시면 아실 겁니다. 담송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의 뒤를 따 라갔다. 담송은 정말 보고 알았다. 앙숙이라는 검문과 도문의 두 문주, 그리 고 혼자 날뛰기 좋아하는 운궁의 궁주가 머 리를 맞대고 앉아 온통 종이위에다 선을 그 어대고 있었다. 담송은 그것이 삼원세(三元勢)의 도해(圖 解)임을 알아보았다. 이들이 설마 제정신인가? 담송은 그들이 당당한 곤륜의 오대고수(五 大高手)라 꼽힐 만한 실력자들임을 알고 있 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도해를 보면서 연수합 공(連手合攻)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들어온 지도 모르고 도해에 열중하고 있었다. 담송은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그도 다음날 에는 그들과 합세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섬단운(一閃斷雲) 곡비(曲琵)는 서둘지 않았다. 그는 먼저 하루를 푹쉬어 여독(旅毒)을 해 소하고 다른 곤륜지문의 사람들을 만나보려 고 했다. 일섬단운 곡비가 그들을 찾는 것은 매우 쉬웠다. 곤륜비문을 제외한 네 곤륜지문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 고 있었다. 얼핏보니 연수합공의 도해였다. 곡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천축과 서장의 소문을 주의깊고 들어서 분뢰수의 무공을 연구한 바가 있었 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 기에 그는 그들에게 합류하여 머리를 맞댈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곤륜비문의 비전절기 비운축전(飛 雲逐電)이었다. 일섬단운 곡비는 자신의 능력으로 펼쳐지 는 비운축전이면 괴인 분뢰수의 가공스럽다 는 신법, 섬전영(閃電影)을 격파할 수 있음 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견지에서 다른 문파는 항상 느 렸다. 그렇기때문에 곤륜비문은 다른 문파보다 우위에 서고 있었다. 바로 곤륜제일쾌(崑崙第一快)의 명성은 그 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넋이 다 빠진 곡비를 향해 그 칙칙한 눈빛 을 던지며 분뢰수는 나직하게 물었다. 전에 나와 같은 사람을 본적이 있소? 곡비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이토록 믿을 수 없는 가공할 속도 를 자랑하는 신법을 지닌 자는 있을 수가 없 었다. 곡비가 알고 있는 강호의 상식으로는 그러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지금 눈 앞에 그 런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곡비의 뇌리에 한가지 생각만 남았다. 섬전이 아니고 섬전영이기에 본문의 비운 축전으로 잡지 못한 것일까? 어쨌든 그는 패했다. 괴인 분뢰수는 연속해서 곤륜의 오대고수 라 할 만한 사람들을 물리치고도 그 칙칙한 눈빛에는 기쁜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키고 일섬단운은 그것이 자신 들이 너무 상대가 되지 않아서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일섬단운 곡비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연수 합공을 연구하는 자리로 움직였다. 이제 곤륜의 자부심은 거기에 달린 것이 다. 분뢰수의 충혈된 듯한 눈자위가 이제 벌건 광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다섯 사람의 위세가 그를 흥 분시키는 때문일까?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칙칙한 눈빛에 강화된 붉은 기운이 겹치는 듯하며 알 수 없 는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도 곤륜오문의 다섯 고수는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곡비의 발뒷꿈치는 그대로 들려져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괴인 분뢰수의 섬전영에 부딪쳐 보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견지에서 일단 서로의 몸이 직 접 맞부딛힌다면 승산은 그에게 있었다. 분뢰수의 놀라운 승리는 상대가 미처 어떻 게 해보기도 전에 끝내버리는 그 무서운 속 도에 있다는 것이 곤륜제일쾌의 전통을 이어 가는 일섬단운 곡비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아니라면... 뒤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이미 그의 몸은 번개를 쫓기위해 튀어나가 고 있었기에. 그와 동시에 곤륜신원의 운룡십삼회가 다 시금 그 모습을 재현해 내었다. 소리없이 허공을 휘어감는 검광(劍光). 그 뒤에 이어 막바로 피잉, 하는 낮은 음 파가 일어나며 한가닥 도광이 검광을 뒤따랐 다. 용비십구도였다. 그 뒤를 이어 운해룡의 옥룡장(玉龍掌)이 느릿하게 다가들었다. 담송은 각 장문인들 틈에 끼어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그들은 과연 당당한 곤륜지문의 문주들로 써 손색이 없었다. 그가 과연 선문의 대표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은 접어두고 그의 주먹은 혼자서는 전 혀 건드려 보지도 못했던 상대를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분뢰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며 몇 개의 그 림자가 남았다. 그의 몸은 번개가 분화되듯이 갈라서고 있 었다. 우르르... 뇌성벽력이 장내를 온통 뒤흔들었다. 3 떠나가는 분뢰수를 보면서 그들은 경이로 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천하에 저토록 놀라운 사람이 있을까? 담송의 눈가에 암울한 빛이 어렸다. 그는 분뢰수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에게 진 것은 별로 억울하지 않았다. 오 히려 그의 환상적인 분뢰수를 보았다는 것은 담송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사문의 명예는 그런 개인적인 감 정에서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자신이 곤륜선문의 문주 가 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담송으로서는 그것을 먼저 생각할 마음가 짐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말려야하나....? 담송의 눈빛이 더욱 암울해졌다. 문득, 이장천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 다. 우리 중 전에 저 사람을 본 적이 있는 사 람이 있소?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곤륜신원 이장천을 보았다. 이미 분뢰수 자신이 직접 물어본 것이나, 그들 중 아무도 그를 전에 본 적은 없었다. * * * 분뢰수의 걸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그의 섬전영이 뭇고수의 경악을 부르는 것 에 비하면 이렇게 평범하게 걸어가는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곤륜검문에서 떠나 하루를 천천히 걸 었다. 평범한 사람이 하루를 걸을 수 있는 만큼 을 그는 하루동안 걸었다. 칙칙한 눈빛을 흘리며 걷는 그의 걸음은 느릿느릿해 보이지만 일정한 속도에서 떨어 지지 않는 침착하고 안온한 걸음이었다. 그러던 그가 멈추었다. 사방이 울울창창한 숲의 복판 빈 터였다. 분뢰수는 거기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 렸다. 이마까지 덮은 백포자락. 그의 몸에서 맨살로 보이는 유일한 곳은 다시 보아도 칙칙한 빛을 뿜어내는 눈뿐이었 다. 그는 눈을 반개(半開)한 채 그대로 계속 서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분뢰수의 입에서 작고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끝내 곤륜의 선운비뢰(仙雲飛雷)는 볼 수 없단 말인가? 그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분뢰수의 눈자위가 더욱 붉게 충혈되었다. 마침내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담담한 기품이 배어나와 흡사 세외도원경 에서 거니는 학과 같은 사나이. 그런 사나이가 지금 분뢰수 앞에 우뚝 섰 다. 그가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 세우며 분뢰수 를 응시하자, 그의 조용한 자태는 곧 장중한 거악준령의 위압감을 불러일으켰다. 분뢰수의 눈이 더욱 칙칙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타난 사나이를 바라 보았다. 숲에서 나온 사나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이젠 여기 나 혼자 뿐이요. 그는 괴인 분뢰수를 주시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떻든 분뢰수의 모습은 변화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전신을 낡은 백포로 휘감아 눈만 내놓아서가 아니었다. 당신과 정식으로 비무를 하겠소. 그의 말이 나오자, 분뢰수는 고개를 끄덕 여 주었다. 이미 숲에 있던 매복은 물러난지 오래였 다. 하지만 분뢰수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사나이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나는 곤륜선문의 당대문주인 곤룡선(困龍 仙) 궁일평(宮一平)이라 하오. 강호에서는 나를 곤륜파의 장문인으로 부르오. 곤룡선 궁일평! 곤륜오문에서도 그의 존재는 아주 특이했 다. 그야말로 곤륜오문의 제일인자(第一人者) 이며 실질적인 곤륜파의 수장(首長)이었던 것이다. 이제 선운비뢰를 보여주겠소. 궁일평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흘렀다. 분뢰수의 눈자위에 붉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는 천천히 벙어리 장갑처럼 백포로 감아 놓은 손을 들어올렸다. 곤룡선 궁일평의 눈빛이 찬연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분뢰수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열기를 억누르려고 애 썼다. 자신은 당당한 대곤륜파의 장문인이다. 함부로 떠돌이와 싸울 신분이 아닌 것이 다. 그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사 문(師門)의 명예여야 했다. 함부로 겨루다 패하여 사문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되뇌이고 되뇌이며 자신에 게 타이른 것은 분뢰수의 별볼일 없는 칙칙 한 눈동자를 보면서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 다. 분뢰수의 입에서 선운비뢰의 이름이 떨어 지자, 궁일평은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당대(當代)에서 선운비뢰를 익힌 자는 오 직 그뿐이었다. 또한 그는 선운비뢰가 불패(不敗)의 무공 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어떤 상대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가공할 무공이라 할지라도 그 독 보적인 선운비뢰앞에서는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분뢰수가 절대무적의 존재가 아닌한 곤룡 선 궁일평은 결코 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궁일평의 깊은 곳에서 타오르던 열기가 마 침내 터져나왔다. 그래서 그는 혼자 괴인 분뢰수의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 * * 반나절을 검문에서 보내며 형식적인 인사 를 마치기가 무섭게 담송은 장문인과 약속한 장소로 달렸다. 그는 말리고 싶었다. 분뢰수같은 무인(武人)은 일생에 한 번 만 나보기 힘든 상대였다. 그런 상대와는 당당히 겨루는 것이 더 나 았다. 비록 패배하면 당장은 곤륜파의 명성에 흠 이 되겠으나, 그것은 앞으로의 곤륜파를 위 해서는 정말 엄청난 득이 될 수 있었다. 담송은 그래서 궁일평을 설득하고 싶었다. 담송이 도착했을 때 궁일평만이 홀로 누워 있었다. 평소 깔끔함을 좋아하던 궁일평이 숲 한 복판에 벌렁 누워 있었다. 아니, 곤륜십이객(崑崙十二客)은 어딜가 고.... 놀란 담송이 가까이 갔을 때 궁일평의 입 가에 맺힌 피가 눈에 띠었다. 자...장문인! 담송의 경악성을 들은 궁일평은 고개를 들 었다. 피식 웃는 궁일평의 모습을 보며 담송은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혼자서? 궁일평은 툴툴 웃으며 말했다. 바보같이... 자꾸 덤비다가 이 꼴이 되고 말았어요. 사형, 부축 좀 해주시겠어요? * * * <벌써 일년하고 사개월이 흘렀다.... 그들 가운데 분뢰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그들은 전에도 이 무공을 본적이 없었 다.... 그들은 나를 본적이 없었다... > 第 二 章 殺 手 堂 1 곤륜의 산을 타고 사천성(四川省) 어림으 로 나서면서 분뢰수는 어디로 나갈지 가늠해 보았다. 사천성에는 유명한 문파가 많았다. 아미(峨嵋)가 가까이 있었고, 청성(靑城) 이 있었다. 또한 무산(巫山), 점창(點蒼) 등도 있는 곳. 이러한 곳이 사천성이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앞에 늘어선 길을 보았다. 넓은 지평선이 흘깃 보였다. 그리고 얼핏 눈썹같은 산이 눈에 들어왔 다. 첩첩이 늘어선 산들 사이로 보이는 눈썹 (峨嵋). 분뢰수의 발걸음은 그 눈썹을 향해 나아갔 다. * * * 아미산에는 구로동(九老洞)이 있다. 일흔 두개의 동굴가운데에서도 꼽히는 동 굴이다. 아미팔경(峨嵋八景)중의 하나인 구로선부 (九老仙府)는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말이었 다. 구로선부는 예로부터 도가(道家)의 성지 (聖地)로 알려져 있고, 주위의 경관 또한 빼 어나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 다. 하지만, 그 구로동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산턱의 동굴은 사람이 인적이 드물었다. 앞에는 선경(仙景)이 펼쳐져 있으나, 이곳 은 그것과 무관한 곳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이 동굴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백포괴인(白佈怪人)을 보는 산발괴인(散髮怪人)의 표정은 이상야릇 했다. 그가 왜 자신의 시야를 막고 거기 서 있는 지도 궁금했지만백포에 싸여 암울해 보이는 눈만 드러난 얼굴이나, 단단히 감싸 손을 손 같지 않게 만들어놓은 꼴이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 그를 보고 있는 동안 자신 의 식어 버린 피가 뜨거워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야릇하기 짝이 없었다. 한 사람은 보고 한 사람은 가로막고 서 있 었다. 왜 거기 서 있오? 정말 멋대가리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산발괴인은 자신의 질문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가로막고 있는 괴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아미의 반도(叛徒)라는 성불패(成 不敗)요? 산발괴인, 성불패의 얼굴이 묘하게 씰룩거 렸다. 그는 자신을 반도라고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사나이의 말에 화가 나 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피가 점차 더워지듯이 마음은 절로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지금 이 사람과 싸우고 싶어하는가? 하지만 왜? 성불패는 끓어오르는 승부욕을 가라앉히려 고 했다. 그가 이 동굴에서 바깥과 교류를 끊고 사 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 성불패의 앞에 선 분뢰수는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아미파의 최고수(最高手)라고 들 었소. 성불패는 눈을 감았다. 흘러내린 머리사이로 보이던 그의 번쩍거 리는 눈빛이 사라졌다. 난 성불패요, 하지만 아미의 최고수는 아 니요. 성불패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을 이었 다. 아미의 최고수는 현(現) 장문인의 십대제 자(十大弟子) 가운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 요. 성불패는 말하는 중에 자신의 승부욕을 억 누르는데 성공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에게 기쁜 일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들 가운데 아미파의 비전(秘傳), 복호 살수(伏虎殺手)를 익힌 사람이 있오? 괴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성불패의 눈이 뜨여졌다. 괴인은 칙칙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 다. 성불패는 괴인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짙어 졌다는 것을 알았다. 목젖으로 타고 넘은 침이 아래로 내려가자 뱃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졌다. 그 뜨거움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성불패는 자신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 을 억제하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가 이 동굴에서 보내온 시간이 한꺼번에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성불패는 알았다. 자신은 너무나도 간절하게 이 자와 싸우고 싶어한다는 것을. * * * 그자는 이미 아미로 들어섰오. 아마 곧 당도할 것이요. 노도사(老道士)의 어투는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주름진 얼굴에 나타나는 연륜(年輪)은 어 떤 일에도 쉽사리 동요할 것 같지 않았다. 노도사의 앞에는 그만큼 나이들어 보이는 노승(老僧)이 앉아 있었다. 그는 아미의 현 장문인인 혜당대사(慧堂大 師)였다. 지금 노도사의 말을 듣고 있는 혜당대사의 마음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간간이 천축과 교류하는 사람들이 전해오 던 소문의 주인공이 이곳으로 오다니... 그로서는 흥분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천의 많은 문파 중에서도 아미파를 제일 먼저 찾는다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더우기 당금 사천의 패자(覇者)라 하는 청 성파의 장문인이 그 소식을 가지고 직접 찾 아온 것은 정말 통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당대사는 주변에 늘어선 문도들과 청성 파의 손님들을 보면서 야릇한 즐거움을 느끼 고 있었다. 청성파의 장문인 적우자(摘羽子)는 조용히 절의 문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곤륜을 지났다면 당 연히 그 다음에는 우리 청성파를 먼저 찾았 어야 했다... 그런데, 그자가 왜 이쪽으로 온 것일까? 적우자는 그자에 대한 소문을 더 많이 듣 고 있었다. 그는 이번이야말로 청성파의 입지를 명실 상부한 사천제일(四川第一)로 끌어올릴 절호 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인 분뢰수는 어디까지나 절 기(絶技)와 고수를 먼저 찾았다. 비록 아직 은 그자의 이름이 이 중원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적우자에게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문대로라면 사천에서 그자가 가 장 먼저 찾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청성파의 장문인인 적우자였다. 적우자에게는 그만한 비장의 절기가 있었 다. 그자는 왜 아미를 먼저 골랐을까? 적우자는 이 점을 궁금히 여기고 아미파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이미 분뢰수가 곤륜파의 검문에 머물 고 있을 때부터 그의 행로를 추적하고 있었 다. 절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도포를 두루고 등뒤에 검을 맨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 공(輕功)을 감추지도 않고 다급하게 적우자 앞에까지 이르렀다. 적우자의 눈섭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냐? 청년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자는 지금 저 뒤쪽으로 돌아가고 있읍 니다. 적우자의 늙은 얼굴이 한층 더 많은 주름 을 만들어냈다. 혜당대사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했다. 아미의 경내(境內)에 들어선 자가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갈 곳은 한 군데 밖에는 없었다. 청년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적우자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 렸다. 혜당은 시선을 돌리는 대신 안색이 대변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막아라! 그가 조사동(祖師洞)으로 못가게 막아! 빨리! 턱에서 박박민 머리까지 벌개져 소리치는 혜당을 보며 적우자의 눈빛이 모호하게 변했 다. * * * 나를 찾을 필요가 있었을까? 노승(老僧)은 걸걸한 목소리를 내뱉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괴인 분뢰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자가 존경하는 사부의 유서(遺書)를 눈 하나 깜짝않고 북북 찢어 내버리는 모습을 볼 때부터 기분이 상해버린 것이다. 감히 네까짓게 뭔데 하고 단숨에 패버리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것은 그 스스로 사부 의 유언을 저버리는 짓이기에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분뢰수의 칙칙한 눈동자를 직 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그 칙칙한 눈빛을 정면으로 본다면 도저히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 이다. 분뢰수의 음성은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 다. 아쉽게도 당신의 유일한 전승자는 복호살 수만을 익히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소. 빌어먹을 놈의 목소리는 또 왜 저 모양인 가? 이 자는 성불패를 찾아갔었단 말인가? 그리고 성불패로서는 도저히 만족을 할 수 가 없었단 말인가?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것인가? 노승은 아예 벽(壁)으로 돌아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고, 그 앞에선 분뢰 수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미의 철승(鐵僧)은 결코 상대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미파의 제일고수인 아미철승(峨嵋鐵僧) 혜과(慧過)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분뢰수의 두 눈을 직시했다. 혜당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렸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오늘처럼 달린 적을 꼽아본다면 다섯 번이 되지를 않을 것이다. 그는 급했다. 뒤에서 적우자와 청성문인이 따라오는 것 은 문제가 아니었다. 철승은 결코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아 미파의 치부(恥部)였다. 그런 그가 분뢰수와 대적한다면 일은 크게 벌어지는 것이다. 아미파의 전통에 그런 오 점(汚點)을 찍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대(代)에... 적우자는 혜당의 무공이 생각밖으로 뛰어 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구(巨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공은 자신에 버금가는 것이다. 더우기 대대로 아미의 경공(輕功)은 청성 보다 뒤떨어졌다.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일대기재 (一代奇才)가 아니면 아미문하는 경공면에서 는 청성문하에게 처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별볼일 없어 보이던 혜당이 자 신과 맞먹은 경공을 선보이는 것은 적우자에 게는 의외일 수 밖에 없었다. 또 뭐가 감추어져 있길래 저토록 급할 까? 적우자는 오늘에야 아미의 전모(全貌)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철승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손에 염주(念珠)가 쥐어졌다면 그것을 굴 리는 형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염주대신 돌멩이가 구 르고 있었다. 맨질맨질하여 광택(光澤)이 이는 돌맹이. 분뢰수의 눈자위가 조금 더 붉어져 있었 다. 그 아이는 최고였어... 그로서 충분히 볼 건 다 본게 아닌가? 철승은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분뢰수의 눈빛에 어두운 광채가 일렁거렸 다. 그의 전신에 그림자가 어린 듯, 침묵이 휘 적거렸다. 철승은 자신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 했다. 하나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복호살수만으로도 아직 부족하다는건 가....? 이게 아니야, 아니라고... 철승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사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언제나 자상하게 자신을 감싸주던 사부 굉 덕상인(宏德上人)의 얼굴을 지금 볼 수만 있 다면 자신의 동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얗게 물든 수염, 그 수염처럼 빛나는 눈 섭, 언제나 넉넉했던 미소. 그리고 그 흰 눈섭아래 빛나는 칙칙한 눈 동자! 철승의 눈이 감겼다. 이마에서 천천히 땀방울이 스며나오고 있 었다. 그의 사부의 눈동자는 절대 칙칙하지 않았 다. 칙칙한 것은 지금 그의 앞에 버티고 서서 입을 꽉다문채 자신을 흔드는 저 무지막지한 놈의 눈동자이다. 결국 철승은 대정신공(大靜神功)을 일으켰 다. 제발 가라... 가! 강호상에 명성이 자자한 아미의 대정신공 이었다. 혜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에 찢어진 낡은 종이가 비추고 있 기 때문이다.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금족령(禁足令)을 찢어버리다니... 그는 전대(前代) 장문인의 금족령을 누가 감히 찢었는지 따지고 화낼 정신이 없었다. 단지 그 금족령에 묶여 있는 사람이 뛰쳐 나오면 어쩔까가 가장 걱정이었다. 부스스... 철승의 손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대정신공을 돋우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으 니 부서지는게 당연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이마에는 핏줄까지 솟구쳐 있었다. 대정신공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력을 다스리는 철승의 늙은 얼굴을 보며 분뢰수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조금 사그러들었다. 혜당은 누군가가 조사동의 입구어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산발한 머리에 손을 무엇인가로 감싸고 있 는 괴인. 혜당은 그가 누군지보다 우선 동굴안에 사 람이 그대로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급했 다. 혜당이 동굴입구까지 왔을때 동굴 안에서 우우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대정신공을 사용하여 펼치는 항마 후(降魔吼)였다. 항마후를 펼치다니... 혜당의 놀라고 있었다. 대정신공의 목적은 살적방신(殺敵防身)이 아니었다. 따라서 항마후도 무림절기로는 별 가치가 없었다. 그런 항마후를 펼치는 목적은 오직 자신의 심마(心魔)를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혜당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괴 인에게 눈을 돌렸다. 그자는 지금 아미의 장문인을 아미의 조사 동 앞에 서서 막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 나직한 항마후가 계속 흘러나왔다. 혜당은 괴인의 행색으로 그가 분뢰수임을 짐작하였지만, 지금은 그가 문제가 아니었 다. 돌연 분뢰수의 시선이 자신을 피해 조사동 으로 들어가려는 혜당을 향했다. 칙칙한 눈빛이 한층 더 짙어져갔다. 무슨 짓을 하려는게냐? 철승의 노호(怒號)가 터졌다. 아직 분뢰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 실린 살기만으로도 철 승은 분뢰수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철승의 노호가 떨어지자, 엉겁결에 혜당이 뒤로 물러섰다. 철승이 자신에게 한 말인줄 알았던 것이 다. 괴상한 일이군... 장문인의 지위로 저렇 듯 겁을 먹고 있다니... 뒤따라온 적우자의 심중에 의심이 싹텄다. 조사동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소리는 그도 도착하자 마자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미파의 조사동앞으로 나아 가지 않았다. 공연히 다른 문파의 일을 일일이 간섭하려 든다고 오해받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사제! 자네는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거 지? 감히 내게... 혜당은 말을 미처 끝맺을 수가 없었다. 그가 철승에게 말을 붙이기가 무섭게 분뢰 수의 그림자가 코앞에서 어른거렸기 때문이 었다. 그저 눈앞에 분뢰수의 모습이 보였다고 느 낀 순간 분뢰수의 두 손이 허공에서 번뜩거 렸다. 혜당은 한 순간 온몸이 손그림자로 짠 그 물안에 갇히는 것을 체험했다. 혜당의 몸이 그 그물에 갈가리 찢겨지려는 순간, 쿠우웅! 어디선가 강대하기 이를데 없는 장력(掌 力)이 밀려들었다. 손그림자는 웅대한 장력을 맞이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혜당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이기는 했으나, 명색이 일파(一 派)의 지존(至尊)이라는 자신이 어디서 온지 모르는 떠돌이 과객(過客)에게 꼼짝못하고 당할 뻔 했다는 생각이 그를 침묵시켰다. 우르르... 은은히 울리는 천둥소리가 그를 비로소 제 정신이 들게 만들었다. 철승은 언제 자신이 장력을 펼쳤냐는 듯이 벽에 기대고 앉아 버린 다음이었다. 그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금 서로 한 수(手) 교환한 것을 자책하 고 있었다. 그는 장력을 펼치기가 무섭게 눈을 질근 감고 있었다. 분뢰수의 손은 그래서 멈추었다. 그의 고 개가 혜당에게로 돌려졌다. 혜당은 분뢰수의 시선이 다시 자신을 향한 것을 보았다. 온몸이 절로 떨렸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 였다. 너무나도 빠르다... 빠른 것이 무공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나,분뢰수의 빠름은 자신으로서는 어 떻게 해볼 차원이 아니었다. 분뢰수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 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소? 당신네 문파의 탄 금지(彈琴指)와 적하신공(赤霞神功)이 어떤 위력이 있는가? 이 말에 혜당이 어쩌고 저쩌고 하기도 전 에 적우자의 얼굴이 먼저 놀람으로 가득차 버렸다. 그는 적하신공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청성파는 예전에 아미파와의 비무(比武)에 서 패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미파의 고수가 사용한 것이 적하신 공이었다. 그 고수이후에는 아미파에서 적하신공은 아예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단 지 남은 것이 있다면 적하신공의 부록격인 복호살수라는 기초(奇招)가 있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혜당의 얼굴이 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분뢰수라는 괴 인이 각파를 찾아 다니며 겨룬다는 것을 알 았지만, 설마 비장의 절기를 노리고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다. 당황으로 벌겋다 못해 까맣게 변하는 혜당 의 얼굴색이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분뢰수의 눈자위가 점차 충혈되는 것이 보 였다. 철승의 갈라터진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 두는게 좋을거다! 네가 무슨 짓을 한다해도 난 네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아! 절 대로! 철승의 얼굴은 한층 더 늙어 보였다. 분뢰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철승을 보았 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그가 고개를 돌릴 때 철승은 고개를 숙여 그의 눈길을 피했다. 가슴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온 몸이 떨려 왔다. 일생일대의 기회. 아미에 입문하여 무도(武道)의 길에 접어 들면서 철승의 가슴 속에서 자라온 그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 기회. 그 절대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철승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사부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겠 다... 두번 다시 그분을 실망시켜드리지 않 을 것이다... 되뇌이는 철승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 다. 혜당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제, 자네는 이 사람을 이길 수 있겠 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철승의 눈에 확 불 꽃이 튀었다. 그러나 철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았다. 혜당은 철승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품에 서 염주를 꺼냈다. 백팔 개의 서천보살자(西天菩薩子)로 이루 어진 염주! 이 염주가 바로 아미파의 장문영부(掌門令 符)인 백팔염주였다. 아미파의 문하라면 누 구도 이 염주로 내리는 명은 거역할 수 없었 다. 아미의 당대 장문 혜당이 혜과(慧過)에게 명한다. 그대가 가진 바 전력을 다하여 이 손님의 도전을 받아들이라. 부디 본파의 명 예를 지켜주기 바란다. 혜당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철승 혜과는 눈을 뜨고 아미장문인의 얼굴을 보았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혜당의 마음속을 환하게 꿰뚫어 볼 수가 있었다. 혜당은 지금 자신을 이용하여 아미의 명성 을 천하에 떨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서장과 천축의 뭇 고수들을 연파한 신비의 고수, 분뢰수를 꺾음으로서.... 못난... 철승 혜과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으나, 그 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비록 혜당이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명했다 하더라도 그는 아미장문인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부가 직접 지목한 아미장문인 인 것이다. 혜당은 이미 뒤로 물러서 있었다. 철승 혜과는 주름진 얼굴에 쓴웃음을 매달 며 분뢰수를 보았다. 자네는 참으로 끈질기군. 분뢰수는 대답대신 칙칙한 눈에 붉은 기운 을 더 깊이 실었다. 우르르... 분뢰수의 손이 뇌성을 동반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승 혜과의 몸에서 잔잔한 기운이 걷히고 그대신 보다 뜨겁고 맹렬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허공에 그려지는 분뢰수의 손그림자를 보 며 철승 혜과의 눈빛이 노을빛으로 물들어갔 다. 혜과는 손을 가슴 언저리까지 끌어올렸다. 손가락은 무엇인가를 가볍게 짚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미끄러지듯 움직 였다. 안력이 조금만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금(琴)을 연주하는 모습임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혜과는 금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었 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순간 허공에서 맹 렬한 파공음이 일어났다. 핑핑! 이것이 바로 아미가 천하에 자랑하는 탄금 지였다. 순간, 분뢰수의 몸은 혜과의 시야에서 벗 어나고 있었다. 우레소리는 여전히 동굴을 울리고 있었다. 혜과는 적하신공을 전신에 유포시키며 거 푸 복호살수를 전개했다. 파아아... 뜨거운 열기가 사납게 동굴을 가득 메웠 다. 이미 탄금지의 지력(指力)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피한다해 도 복호살수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복호살수를 피하려면 지력에 격중 당할 것이다. 혜과는 자신이 완벽한 승세를 잡았다고 여 겼다. 그러나, 분뢰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는... 등 뒤에서 우레소리가 일어났다. 꽝! 무언가 거칠 것 없이 강력한 기운이 육중 하게 자신의 등뒤에 부딛치는 것을 느끼며 혜과는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지면서 혜과는 망연하게 자신의 등뒤 에 서 있는 분뢰수를 보았다. 2 적우자의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분뢰수는 이미 아미 조사동의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적우자의 발밑은 온통 지력(指力)으로 파 여 있었다. 이것이 탄금지? 동굴안에서 뿌려진 지력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서, 퉁겨지고 퉁겨졌음에도 적우자의 발끝까지 이르러 손가락만한 구멍을 여러 개 나 뚫어놓은 것이다. 곧이어 동굴안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기운 이 적우자의 살갗에 닿았다. 비로소 적우자는 제정신을 차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앞에 분뢰수가 서 있 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적우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적우자는 그의 눈자위에 어린 붉은 기운을 보자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적우자의 가슴 속에 웅지(雄志)와 패기(覇氣)가 끓어올랐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청성의 장문인 적우자 도사가 아니오? 적우자는 분뢰수의 대답을 듣고 앙천대소 (仰天大笑)를 터뜨렸다. 그는 한참을 웃었다. 평생에 걸쳐 그는 자신이 이토록 통쾌하게 웃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웃음을 그친 적우자가 물었다. 내게서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가? 분뢰수는 손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 다. 대라신공(大羅神功)과 벽운도(劈雲刀)가 곁들인 비류보(飛流步)가 보고 싶소. 적우자의 얼굴 가득히 미소가 어렸다. 좋아! 장문인을 따라온 청성제자들의 얼굴에 괴 이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대라신공은 언제나 장문인이 아깝게 잃어 버린 절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청성검파(靑城劍派)라고 불 릴 정도로 검법(劍法)을 중시하는 문파였다. 대체 무슨 도법(刀法)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세류표(細柳 飄)가 아닌 무슨 비류보라니...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적우자의 전신에 푸른 광채가 어리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언제나 장문인의 신물(信 物)로만 알고 있었던 그의 불진 속에서 한자 루의 폭이 좁은 도(刀)가 튀어나왔다. * * * 그자가 아미경내를 벗어날 다음까지도 혜 당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미, 청성 양파의 신비속에 감추어져 있 던 절기들이 바로 눈앞에서 격파당하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고 문하생들이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혜당이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는 분뢰수가 사라지고 난 후에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버리고 만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 다. * * * 되었군. 아미장문인 혜당은 손에 천리구(千里鳩) 한 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발에는 작은 전서통(傳書筒)이 매달린 천 리구였다. 그의 서탁에는 아직도 먹이 마르지 않은 붓이 벼루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의 손에서 천리구가 놓여졌다. 그것은 곧바로 하늘로 쭉쭉 올라가다가 사 라졌다. 혜당은 조용하고 잔잔한 눈으로 날아가는 천리구를 지켜보았다. * * * 전서통을 손에 쥐고 손의 임자는 다른 전 서통을 천리구의 발에 매달았다. 그가 쥔 전서통에는 아미제이십구신(峨嵋 第二十九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새로 천리구에 매단 전서통에는 아미 제삼십신(峨嵋第三十信)이라고 새겨져 있었 다. 천리구는 다시 자신이 온 아미산으로 돌아 갔다. 아미제이십구신의 전서통안에서 둘둘 작게 말린 종이하나가 흘러나왔다. - 분뢰수 사천 출현. - 혜과, 적하신공. 탄금지 사용. 대성(大 成)한 것으로 추정됨. - 청성파 적우자, 대라신공노출. 벽운도, 비류보 발견. 간단한 몇줄의 글이 쓰여있었다. 손의 임자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매력적인가... 아직까지 그 앞에 서 무공을 감춘 자가 없으니... 푸드득. 푸드득. 또 한 마리의 천리구가 날아들었다. 그 전서통에는 곤륜제삼십신(崑崙第三十 信)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손은 전서통을 곤륜제삼십일신(崑崙第三十 一信)으로 바꾸어 주었다. 천리구는 다시 날아갔다. - 곤룡선 궁일평, 무기한 폐관. - 검문, 도문. 공동전인을 두어 양의인(兩 儀刃) 전수. - 운해룡, 아들의 행방탐문. - 곤륜비문, 삼년봉문(三年封門). 손의 임자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깝게 되었어... 하나 그런다고 바뀔 일 은 없을 것이다. 파라라락... 갑자기 격한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손의 임자는 그것이 만리구(萬里鳩)임을 알아차렸다. 만리구의 전서통에는 천축의 범문이 새겨 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지금까지 읽 었던 것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손의 임자는 대혈제십오신(大血第十五信) 으로 새겨진 전서통을 십육신의 전서통을 바 꾸어 주고는 만리구를 새장안에 넣었다. - 마라도왕(魔羅刀王) 사후, 마라도(魔羅 刀) 유실(遺失). - 대혈문주(大血門主) 공석(空席). - 범천사(梵天寺) 행적 추적중. 성공가능 성 희박함. 손의 임자는 미간이 곤두섰다. 천축은... 이미 틀렸나? 그는 조용히 하늘을 보았다. 밤의 어둠이 감싸는 가운데 별들이 초롱초 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뢰수...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지? 의도적인가, 아니면 그저 우연이 이 시국에 나타난 것인가? * * * <이곳에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의 감 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곤륜에 들어서 서 부터, 아니 천산에 닿았을 때부터 무엇인 가 내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 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분뢰수를 알 것이 다...> 3 적우자는 앞서 가는 분뢰수를 보았다. 그자는 성도(成都)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자의 발걸음은 경쾌하여 이틀이 채 못되 서 성도에 다다를 것이 확실했다. 적우자의 뒤에는 단지 두 제자만이 따르고 있었다. 그 두 제자만이 적우자의 경공을 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우자는 자신이 뒤따르는데도 눈하나 깜 짝하지 않고 자기갈길을 가는 분뢰수에게 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무심해 보이는 행동속에서 자신과 비슷 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했다. 적우자가 청성파에 입문(入門)한 것은 불 과 열 두살때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입문이라기 보다는 노 예처럼 팔려 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사부는 홍수(洪水)로 인한 유민(流 民)들 틈에서 우연히 어린 적우자를 발견했 고,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사부는 적우자를 제자로 달라고 하 지 않았다. 적우자를 단번에 알아본 것처럼 사부는 적 우자의 아버지도 단번에 파악한 것이었다. 얼마받겠소? 그 한마디로 흥정이 시작되어 적우자는 가 족의 배를 채우기 위해 팔려왔다. 노도사가 설마 굶어죽이겠느냐, 너에게는 오히려 복(福)이라고 말하면서도 울던 누나 가 있었다. 누나의 말대로 노도사는 적우자를 굶기지 도 않았고, 적우자가 생각한 것처럼 노예로 부리지도 않았다. 그는 적우자에게 사제(師弟)의 연(緣)을 맺기 전에 먼저 이년 동안 한 곳에 맡겨 적 우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 렸다. 그리고 나서야 적우자는 노도사를 사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청성파의 장문지재(掌門之才)로 보낸 청년 기, 그 뒤로 장문인이 되어 지금까지 사십여 년이 흘렀다. 이마에 주름이 잡히면서 젊은 날의 호기가 사라진 지금, 그는 자신에게 옛날의 웅지와 패기를 돌려준 사나이를 쫓고 있는 것이다. 분뢰수... 그대는 무엇때문에 이런 비무 행을 하는가? 마음 속에 의문을 입밖으로 내놓지 않았지 만, 적우자는 그의 사연을 알고 싶었다. 그 자신도 누나를 찾기 위해 청년기를 비 무행으로 보낸 일이 있어서 그런 것 일지도 몰랐다. 적우자의 상념은 분뢰수의 가는 방향이 드 러나면서 끊어졌다. 성도를 향해 걷던 분뢰수의 발걸음이 언제 부터인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방향을 알고 있었다. 그곳이라면 나도 약간 볼일이 있었지... 그것은 살수당(殺手堂)이라는 곳이다. 대체 분뢰수는 왜 갑자기 살수당을 찾아가 려고 하는 것일까? 분뢰수가 살수당의 근처에 다다랐을 때 몇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 그들의 앞길을 막 아섰다. 검은 옷에 얼굴까지 눌러쓴 검은 복면. 그리고 가슴에 찍힌 몇송이의 붉은 꽃잎 들. 적우자는 그들이 살수당의 혈화살수(血花 殺手)임을 알아보았다. 가슴에 찍힌 꽃잎이 하나에서 다섯까지로 각기 다른 오인(五人)의 혈화살수는 살수당 의 정예인 것이다. 그들의 뒤로 또 한 사람의 검은 복면을 눌 러쓴 흑의인이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은은한 정광(精光)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살수당주(殺手堂主)일 것이 다. 그는 분뢰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뢰수의 칙칙한 눈빛 아래 흰 눈자위가 드러나 있었다. 적우자는 자신도 모르게 기이한 한기(寒 氣)를 느꼈다. 언제보아도 분뢰수의 칙칙한 눈은 섬뜩한 그 무엇을 담고 있었다. 적우자는 급히 고개를 돌려 혈화살수들을 쳐다보았다. 그대들은 빈도에게 볼 일이 있는가? 아니 면, 이 사람에게 볼일이 있는 건가? 빈도는 그대들에게 받을 빚이 있기는 한데... 살수당주의 정광어린 눈이 힐깃 적우자를 보았다. 복면 안의 입이 열린 듯, 말소리가 새어나 왔다. 우리는 청성파에도 저 자에게도 볼 일이 없소. 귀하들은 본당에 무슨 볼일이 있어 온 것이오? 적우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었다. 상대의 태도는 이미 수동(受動)으로 몰려 있는 것이다. 적우자는 물론이거니와 청성파내에서도 살 수당주에 대해 평소 불만이 없지 않았다. 게 다가 살수당이 청성파 인물을 청부살해한 적 이 있으니 원한까지 겹쳐 있는 것이다. 그때 분뢰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우리 뒤를 밞고 있는 것이오? 뒤를 밞다니? 살수당주가 냉혹하게 말했다. 하나 적우자는 그의 음성에서 움찔하는 기 색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쪽으로 온 것이군... 적우자는 픽, 하고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분뢰수와 살수당이 무슨 관계로 어떤 일을 하던 이미 죽은 청성파 인물에 대한 빚은 자 신이 갚아야 하는 것이다. 적우자가 성큼 다가오자 그의 앞에 늘어서 있던 혈화살수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적우자 를 막아섰다. 적우자의 눈가에 살기(殺氣)가 떠올랐다. 혈화살수도 적우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맞부딛쳤다. 쾌액! 혈화살수 중 선두에 선 자가 검으로 그대 로 꿰뚫듯이 찔러온 것이 시작이었다. 적우자의 몸은 갑자기 쭉 늘어나 보였다. 엿가락이 늘어져 뻗듯이 그의 발은 땅에 붙어 있는채로 허리위가 늘어나 보이는 것이 다. 다음순간에 그에게 검을 뻗었던 혈화살수 의 머리가 적우자의 발아래에서 그대로 뭉개 지고 있었다. 적우자의 발끝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혈 화살수 둘이 그의 허리어림을 칼로 그어왔 다. 적우자의 몸이 휘청거리듯 하며 한쪽으로 원호를 그리며 움직여 붙었다. 칼을 휘두르던 혈화살수 한 명은 적우자가 괴상한 신법으로 자신의 곁에 바짝 붙어오 자, 눈에 독기(毒氣)를 머금고 그대로 적우 자의 머리를 쪼개듯이 칼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당연히 가슴과 배 부위가 활짝 열렸다. 그러나 만약에 적우자가 그곳을 노린다면 필경 동패구사(同敗具死)가 분명하였다. 적우자의 얼굴에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상대가 대뜸 양패구상의 수법으로 나올줄은 몰랐던 것이다. 적우자의 손이 어느새 파란 빛으로 물들어 갔다. 적우자는 파랗게 변한 손을 혈화살수 의 칼날에 마주쳐갔다. 콱! 적우자의 두 손가락이 칼날을 움켜쥐었다. 혈화살수의 눈에 놀라 어쩔줄 모르는 빛이 떠올랐다. 그들도 사천에서 내노라하는 검수(劍手)들 이다. 그런데 그 칼을 손가락 두개로 잡아버리다 니! 그가 움찔하는 순간에 적우자의 손가락은 그의 칼날을 부러뜨리고 있었다. 땅! 적우자는 손에 쥔 부러진 칼날을 그대로 놀라고 있는 혈화살수의 목에 박아넣었다. 크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 비명의 여운을 느낄 사이도 없이 또다 른 혈화살수가 달려들어 적우자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적우자는 한 손에 든 불진 을 휘둘러 불진끝의 술로 그의 칼날을 휘어 감았다. 챙하는 음향이 들리는 순간, 그의 불진에 서 은은한 청광(靑光)을 번뜩이며 칼이 부러 져 버렸다. 적우자의 몸은 어느 새 혈화살수에게 바싹 붙어있었다. 그의 다른 한손이 푸른 빛을 머금은 채로 혈화살수의 배를 내리찍고 있었다. 왁! 괴상한 비명이 터지고 배를 맞은 혈화살수 는 뒤로 비척거리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자신들의 동료 셋을 잃고 둘만 남은 혈화살수들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두려 움이 나타났다. 그들은 설마 청성파 장문인의 무공이 이런 정도일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한 것이다. 그들이 겁을 먹고 추춤하는 순간이었다. 못난 것들! 싸늘한 소리가 그들의 귓청을 때렸다. 순간, 겁먹고 주춤하던 둘이 그대로 적우 자에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적우자는 불진을 허리 꽂고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대고 두 손을 내지르듯이 때리는 시 늉을 했다. 달려들던 혈화살수의 남은 두명은 으악하 는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뒤로 자빠져 버렸 다. 적우자는 이제 분뢰수의 뒤로 물러서 있었 다. 이제 조촐하니, 볼 일들 볼 수 있겠지? 살수당주의 얼굴은 복면에 가리워져 어떤 표정인지 보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에서 식은 땀이 배 어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수당의 추적조(追跡組)가 들통난 것은 이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혈 화살수가 쓰러진 것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상대를 전혀 모르고 청부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일이 어긋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칙칙한 눈의 괴물! 자신이 얼굴을 가리려고 검은 복면을 한 것과는 달리 저 괴물의 얼굴을 싼 백포는 그 것만으로도 어딘가 소름이 돋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살수당주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저 괴물이 자신을 노리고 왔 다는 점이었다. 분뢰수는 살수당주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 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자위가 서서히 붉 어져가고 있었다. 적우자는 뒤에 서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 었다. 두 명의 청성제자는 뭔가 괴이한 분위기가 분뢰수와 살수당주의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얼마 전에 그들이 느 꼈던 것이다. 분뢰수의 말이 들려왔다. 혹, 색명검(索命劍)을 익히지 않았소? 살수당주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그는 참으려고 했으나 음성이 떨려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그런 검법의 얘기는... 난... 살수당주의 마음속에는 경악과 의혹이 가 득 담겨 있었다. 보면 볼수록 괴이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고련(苦鍊)끝에 연성한지 이제 겨 우 사흘 밖에 안되는 검식을 어찌 알고 있는 가? 자신은 아직 그 검식을 펼친 적도 없는데! 분뢰수의 칙칙한 눈빛이 이제 완연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수당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분뢰수를 잡아 먹을 듯 이 노려보았다. 챙! 그의 허리에 감겨 있던 연검(軟劍)이 뽑혀 져 나왔다. 피루르르, 쉭! 쉭! 바람을 가르는 연검의 소리였다. 칼날이 휘청거리며 움직이는 것은 아까 적 우자가 몸으로 펼치던 세류표와도 닮았다. 허공을 수놓은 검광(劍光)은 꽃을 만들고 있었다. 살수당주의 걸음걸음은 무겁고 차분했다. 반대로 그의 손에 들린 검은 휘어지고 싶 은 대로 휘어지는 것이 버들가지같았다. 가 볍고 날렵한 검세(劍勢)가 쉴새없이 허공을 휘저어댔다. 그러나 우레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분뢰수의 몸은 살수당주의 검이 허공에 검 화(劍花)를 수놓을 때마다 그림자를 남기며 흐르고 있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그 움직임에 살수당주의 매서운 검법이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수당주는 이를 악물고 검을 가슴에 세웠 다. 이미 백수십번의 칼질을 해대었지만, 상대 는 그저 소리없이 자신을 응시하며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네놈이 꼭 이 검식을 보아야한단 말이지... 살수당주는 난화검(蘭花劍)으로는 도저히 이 괴물같은 놈을 어쩔 수 없다는 점을 뼈저 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길은 이제 두 가지 뿐이었다. 여기서 죽든가... 아니면 도망가서 죽든 가. 그는 도망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그의 검이 저 괴물을 찢어놓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인 것이다. 가슴에서 휘청대던 살수당주의 검이 꼿꼿 이 섰다. 살수당주의 눈에서 매서운 광채가 흘렀다. 그토록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그의 검은 곧장 뻗어 분뢰수의 가슴을 겨 냥하고 움직였다. 파파파파! 마치 수십 개의 뇌전(雷電)이 사방을 휩쓸 고 지나가듯 수십 가닥의 검광이 분뢰수를 난자해 들어갔다. 아! 적우자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 다. 난화검도 좋은 검법이지만, 지금 이 검법 은 확실이 대단한 것이었다. 저것이 색명검인가? 적우자는 이미 분뢰수와의 대결을 통해 그 가 관심을 갖을 만한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 의 것인가 짐작할 수 있었다. 색명검은 확실히 분뢰수가 노릴만한 위력 을 지니고 있었다. 순식간에 살수당주의 모습이 검광에 가리 워져 보이지 않았다. 분뢰수의 눈자위는 이미 벌겋게 변해 있었 다. 우르르... 적우자의 귀에 들리는 그 우레소리가 사방 으로 퍼지는가 싶은 순간, 파아아... 검광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갈라지며 살수 당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적우자는 똑똑히 보았다. 색명검식의 무서운 장막이 그대로 찢겨져 나가며 살수당주의 손에서 연검이 퉁겨져 오 르는 광경을.... 살수당주의 눈이 활짝 뜨여져 눈가에 경련 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색명검식이 어떻게 그토록 허 무하게 갈라질 수 있는지 도무지 믿을 수 없 는 심정이었다. 돌연, 짜릿한 무엇인가가 온몸을 질주하는 느낌을 받고 살수당주는 그대로 쓰러지고 있 었다. 어느 새 분뢰수가 그의 가슴을 강타하 고 있었던 것이다. 쓰러지는 살수당주의 눈가에 경련이 사라 지며 그의 눈이 감기었다. * * * 푸드득, 천리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살수제백이십오신(殺手第百二十五信). - 살수당, 추적조 미행발각. 분뢰수 직접 찾아옴. - 혈화살수, 적우자에게 괴멸. - 적우자, 대라신공, 세류표사용. - 당주, 색명검식 전개. - 단 일 수에 절명. - 살수당 신당주 요망. 쾅! 손이 거세게 탁자를 후려쳤다. 바보같은 자식들! 손의 임자는 무섭게 분노했다. 살수당의 추적조가 어떻게 발각났는가 하 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주가 피하지 않은 것이었다. 살수당주는 그가 심혈(心血)을 기울인 자 이기에 그의 분노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 말고 다른 자에게 다시 색명검식을 전수하려 면 몇 년이나 걸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잠시 생각을 거듭했다. 결국 그는 결정을 했다. - 대지급명령(大至急命令). - 분뢰수의 정체, 목적을 밝힐 것. 또한 그의 등장이 파급할 영향력을 파악하라. * * * <... 도마뱀은 꼬리를 자르고 달아난다. 그들도 도마뱀인가? 깨끗하게 꼬리를 자르 듯, 실마리를 끊어놓았다. 이로써 더 확실해 졌다. 그들은 나를 알고 있는 것이다...> 第 三 章 鐵 劍 飛 環 1 적우자는 비로소 생각이 났다. 그는 살수당주가 사용한 색명검식에 관해 언젠가 들어본 듯한 생각이 들어 줄곧 기억 을 더듬어 생각해 낸 것이다. 염왕검법(閻王劍法)의 삼초식가운데 하나 다... 적우자는 의외의 일을 겪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염왕검법은 이백 년 전에 천하에 악명(惡 名)을 떨치던 무서운 검객(劍客)의 절학(絶 學)이었다. 삼초식으로 이루어진 염왕검법은 오묘무쌍 하기 그지없어서 가히 천하무쌍(天下無雙)의 검법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았으나, 그 검객 의 행실은 결코 환영받을 수가 없었다. 그자는 전인(傳人)을 두지 못했다고 들었 거늘...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염왕검법을 익혔다면 삼초식을 다 알든가 아니면 아예 몰라야 하는데 살수 당주는 유독 한 초식만 익혀 선보인 것이다. 저 자는 또 어떻게 그가 한초식의 염왕검 법을 익힌 것을 알았지? 그의 앞에서 성도로 들어가는 분뢰수가 그 래서 또 괴이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뢰수의 기괴 한 행색을 보고 뭐라고 했을 것이고, 성도의 관원(官員)이 보았다면 당장 그를 붙잡아 수 상하다고 문초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그림자와 같이 성도 안으 로 숨어드는 분뢰수를 본 사람도 없었고, 그 의 행동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뒤따르던 적우자와 두 청성문하가 그 의 은밀한 행동에 어이없어 하고 있을 뿐이 었다.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그토록 조심스러운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기는 했다. 그런 괴이한 행색으로 돌아다닌다면 아무 래도 귀찮은 일을 겪기 마련이고, 강호에 몸 담은 자는 언제나 그런 일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다. 적우자는 그가 가는 골목골목을 뒤따라 가 는데 아무 문제도 느끼지는 못했으나, 그가 이런 골목골목을 잘 알듯이 가는데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분뢰수가 이곳 사람이었나? 두 청성제자는 장문인의 인도로 헐떡헐떡 거리며 겨우 따라 붙을 수 있었다. 그들이 성도를 잘 알기에 그나마도 가능한 일이었다. 적우자는 분뢰수의 행적을 좀 따르다 그가 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살수당을 그대로 찾아간 것처럼 지금 분뢰 수는 강호인이 많이 모이는 주루를 찾아가는 중인 것이다. 만보루(漫步樓)! 성도안의 이름없는 뒷골목 한 곁에 자리잡 은 널직한 주루(酒樓)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겉모습을 보고 그저그 런 작은 주루로 알기 쉬웠지만, 강호인으로 성도에 온 자는 거의 다 한 번씩 들리는 주 루였다. 그 규모도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은 꽤 넓은 편이었다. 한밤중임에도 주루 안쪽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붐비는 듯 보이기까지 하였 다. 역시 여기로군... 적우자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예상했으니, 그다지 놀라지않아야 하 겠지만 그래도 적우자는 정말 분뢰수가 만보 루로 들어가는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백(師伯), 그는 도대체 어떻게 여기를 알고 있을까요? 이번에 처음 중원에 온 것이 라 듣지 않았읍니까? 적우자는 겨우 따라와서 묻는 자신의 사질 을 돌아보았다.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음 대 청성장문인의 재목 중 하나이니 당연할 지도 몰랐다. 지금은 유명해져 있지만 전에 이름이 알 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왔다갔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사부님. 분뢰수가 그렇게 나이들 어 보이지는 않읍니다. 역시 다음대 장문인의 재목으로 여기어지 는 적우자의 제자가 말했다. 송학(松鶴)아, 넌 그가 나이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어떻게 판단했느냐? 자신의 제자, 송학을 보며 적우자가 물었 다. 송학은 멈칫하여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 다. 기실, 그는 분뢰수를 전부터 알던 것도 아 니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본 적도 없었다. 본 것이라고는 그의 놀라운 무공, 그리고 그 흑적색(黑赤色)이 일어나는 눈부위밖에 없지 않은가? 그의 목소리가 젊게 들려서... 머뭇거리던 송학도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적어도 분뢰수정도의 공력을 지닌 강호인에게 목소리를 바꾸는 것은 그렇게 어 려운 일이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자신에게 시켜도 목소리를 바꾸는 정도는 그다지 어렵지가 않은 일이었다. 착 실한 내공만 지니고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적우자는 끌끌 혀를 차면서 만보루로 걸어 갔다. 송학도인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문 채 사부 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분뢰수를 찾은 것은 적우자의 사질인 송추 도인(松秋道人)이었다. 아무리 만보루라지만 얼굴을 감추고 오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그러나 만보루가 보통 주루와 다른 점은 그런 사람을 묵인하고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분뢰수는 가만히 앉아서 차를 받아놓았을 뿐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적우자는 따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만보루는 늘 그렇듯이 번잡함을 보이고 있 었다. 적우자는 잠시 주위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 어보고 오늘의 화제가 무엇인가 알 수 있었 다. 분뢰수의 일은 아니었다. 지금 만보루에서 가장 큰 화제는 기련산맥 (祁連山脈)에 나타났다는 괴물이야기였다. 소문은 약 일년 전부터 간간이 있어온 것인 데, 이번에 그것이 아주 무서운 괴물임이 밝 혀졌다는 이야기였다. 적우자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고보니 벌써 일 년이나 그 쪽에서 이 상한 일이 터진다고 하더니... 그러니까 그것이 강호의 고수들이 갔는데 도 마찬가지였다는 거야! 생각좀 해봐! 공동 파( 派)와 점창파(點蒼派)에서 그 일에 끼어들었다가 이번에 아주 개망신 당한 꼴이 잖아!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지, 그래도 이 번에 그들이 나섰기에 괴물이 있다는 것을 확인까지 했잖아. 전에야 그것이 무슨 귀신 인지 괴물인지 전혀 몰랐지만 이번에는 그 래도 그것들이 사람닯은 괴물인지는 밝혀졌 지. 밝혀지긴 뭐가 밝혀져? 이번에 공동파 쪽 사람이 죽고 점창파에서는 괴물때문에 미쳤 다고 하던데. 결국 무슨 괴물인지는 전혀 모 른다는 거 아냐 그래도 그들은 내놓라하는 자들인데 그꼴 로 돌아오다니... 그건그렇고 사마형(司馬 兄), 앞으로 어쩔거요? 사마형이라 불린 텁석부리는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쯧쯧, 하필이면 이럴때 그런 표물을 맡아 가지고... 사마형도 참 운이 없소. 텁석부리와 같이 앉아 있던 사람들이 안되 었다는 투로 혀를 찼다. 적우자는 그 사마형이라고 불린 사람을 흘 깃 보았다. 어? 그 때 풀이죽어 눈치를 보던 사마형이란 사내도 우연찮게 적우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마형이란 텁석부리는 눈이 화등잔만 해 지더니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듯이 적우자에게로 다가왔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겠읍니다! 당장 넙죽 절하는 사마충(司馬沖)을 보며, 적우자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텁석부리 사마충은 다름아닌 송학의 친 구였던 것이다. 송학이 자신의 제자로 들어오기 전에 사마 충은 먼저 강호에 뛰어들었었고, 그는 자신 의 사문에 송학을 적극추천했던 것이다. 결국 송학은 청성문하에 들어와 자신의 제 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때의 작은 소란으로 적우자는 이 사마충과 안면을 익혀놓은 것이 다. 그런데 사마충이 곤란한 처지라고 다들 동 정하는 판에 자신이 끼어들었으니 다음에 벌 어질 판은 뻔했다. 과연 송학은 사마충이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우자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역시 송학보다는 송추가 더 장문인에 걸 맞다... 단지 송추의 관상(觀相)이 문제이 니... 송학이 인재이기는 하나 송추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떨어졌다. 단지 아쉬운 것은 적우자가 보기에 송추는 단명(短命)할 상이었다. 그로인해 만약의 경우를 위해 송학에게도 장문인의 준비를 갖추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사마충은 자신의 사정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문득, 적우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표물(票物)이 기련산을 지나 가야한다 이거군. 맞나? 그렇읍니다. 사마충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적우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지나가는데 문제가 있을까? 대체 무 엇때문에 그런 괴물걱정부터 하지? 사마충이 고개를 들어 적우자를 보며 말했 다. 그,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 괴물은 이번 제가 나르는 표물같은 것은 반드시 덮쳤읍니 다. 어르신, 도와주십시요! 적우자의 얼굴에는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슬며시 주위를 살펴보니, 그가 누군지 몰 라 어리둥절하는 사람들끼리 수근거리고 있 었다. 사마충은 그를 계속 어르신이라고만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지난날 적우자를 만 난 일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송학은 옆에서 빤히 적우자를 간절한 빛으 로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대로 하라고 하면 당장 자신이라도 가서 돕겠다고 나설 표정이 었다. 적우자가 고개를 돌리다가 보니, 분뢰수가 빤히 그를 보고 있었다. 찻잔을 들어올리며 적우자는 정말 난감하 기 짝이 없었다. 저 친구가 같이 가겠다면 고려해 볼 만하 지... 괴물을 상대로 거의 괴물을 데리고 가 는 것이니 재미도 있을테고... 그러나 이런 생각은 단지 생각으로 끝날 뿐이었다. 사마충은 계속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간청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하! 사해표국(四海票局)의 철면호 (鐵面虎)가 저렇게 못난 사람이었다니, 정말 강호의 소문은 거짓이 많군! 느닷없이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어투는 중얼거리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나, 만보루를 온통 덮으려는 그의 목소리로 보아 일부러 시비를 거는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 고 있었다. 적우자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고개가 절로 돌아가 웃고 있는 자를 향했 다. 지금 큰소리를 내고 있는 자가 자신까지도 함께 비웃은 것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진 것 이다. 철면호 사마충을 비웃는 사람은 기괴한 용 모를 지닌 장한이었다. 오른팔은 길어서 무릎까지 닿아 있었는데 왼팔은 보통사람과 같은 정도였다. 두 다리 는 짧아 보기 흉했고, 등에는 혹이 볼록 솟 은 것이 눈에 확 띄였다. 얼굴은 온통 털로 덮인 것 같았다. 적우자는 이런 기괴한 용모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저 녀석이 사마충에게 시비를 거 는 것이지? 적우자는 이상한 생각에 사마충을 보았다. 사마충의 얼굴에 노기(怒氣)가 엿보였다. 송학은 자신의 친구가 모욕당하자 울화가 치민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장비신타(長臂神駝)다! 누군가가 떠들었다. 장비신타는 히죽이 웃으며 사마충을 보았 다. 건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적우자와 송학, 송추를 거쳤으나 전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적우자는 빙긋 웃었다. 장비신타의 사문(師門)은 아는 사람이 없 었다. 그리고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때 그의 공력은 일류의 수 준을 보이지만, 어떤 때는 건달만도 못한 경 우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담력이 약한 것으로 들려오는 자였다. 그런 자가 청성파 장문인을 알아보고 시비 를 걸리는 없다. 하나 장비신타의 다음 말이 그의 기대를 산산히 무너뜨렸다. 헤헤헤, 아무리 청성파 장문인 앞이라지 만, 너무 비참해 보이는데 사마충! 어때 기 왕에 사정을 하려면 나에게 하는 것이? 늙은 도사보다 내가 낫지, 암 낫고말고! 좌중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적우자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장비신타는 사마충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청성파 장문인인 자신에게 시비를 걸 고 있었다. 그것이 명확하게 표현된 이상 물러설 길은 없었다. 당대의 청성파가 사천제일(四川第一)의 패 자(覇者)라 불리는 것은 그가 이런 경우 물 러선 때가 없기 때문이지 그의 수도(修道)가 깊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적우자의 눈빛이 칼날처럼 장비신타에게 꽃혔지만 장비신타는 눈섭 하나 까닥않고 있 었다. 송학과 송추, 두 도인의 얼굴에는 어이없 는 빛이 가득했다. 적우자는 눈은 장비신타에게 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신을 긴장시킨 채 팔방(八方)을 감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저런 망둥이를 내세우고 진 짜는 뒤로 숨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순간, 적우자는 한가지 괴이한 점 을 깨달았다. 분뢰수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장비신타는 유들유들한 눈으로 태연자약하 게 적우자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비신타의 안색이 의아한 표정 으로 물들었다. 적우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기 때문이다. 주름진 얼굴에 가득찬 미소는 장비신타를 당 혹하게 만들었다. 왜 웃으시오? 내 얼굴에 뭐 묻은 것이라 도 있소? 털이 가득하다! 송학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그는 아까부터 울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있 었다. 저런 덜떨어진 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함 부로 구는 것인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우자가 손짓을 해서 송학을 앉혔다. 장비신타는 송학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 절하다가 그가 다시 앉는 것을 보고는 킬킬 거리며 웃었다. 내 얼굴에 털이 가득한 것은 그래도 보기 나 좋은 것 아니오? 저렇게 주름잡혀 언제 관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얼굴보다 훨씬 낫다 고 여기지 않소? 이 말은 좌중을 놀라게 하기에 족하고도 남았다. 좌중의 눈이 일제히 적우자에게 박혔다. 사천에 명성이 자자한 적우자가 결코 이대 로 물러설 까닭이 없는 것이다. 송학, 송추의 얼굴은 거의 하얗게 질리다 시피 변해 적우자를 바라보았다. 평소 적우자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모욕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옆에 있던 사마충마저도 얼굴이 노래지고 있었다. 그도 과거 송학과의 일로 이 청성파 장문 인이 한번 화가 나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아 는 터였다. 그런데 정작 좌중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적우자는 피식 웃으며 장비신타를 보고 있었다. 장비신타는 적우자가 가만히 있자 더욱 기 세등등하여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본인도 이 몸의 이야기에 수긍 하니 주제를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료. 노도사, 당신이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 으니 필히 등선(登仙)하실 거요. 장비신타의 말은 점점 더 심해졌다. 적우자는 여전히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 다. 좌중은 점차 의혹이 깃든 눈길로 적우자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절대 저렇게 웃고 끝날 적우자가 아닌 때문이었다. 마침내 적우자가 입을 열었다. 이봐, 주위를 잘 둘러보고 이야기하는 것 이 좋지 않겠나? 누가 자네를 돌보겠다고 했 더라도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일이 벌 어진 다음에 알게 되는 법이지. 적우자의 말을 듣던 장비신타의 낯빛이 변 해 얼른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송학과 송초, 사마충 등 그의 얼굴을 보던 사람들은 더욱 의아해졌다. 적우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눈알만 굴려서 보이는게 뭐가 있 을까? 뒤는 전혀 보지도 못하잖아. 장비신타는 이제 마구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 어디갔지? 어디간거야? 장비신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좌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저런, 저런 아까 여기 있던 사람하고 함 께 나가는 것을 못보았나? 아까 얼굴에 백포 를 두른 사람하고 말이야. 송학과 송초, 두 도인이 놀라 얼른 분뢰수 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찻잔에서는 김이 올라오고 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성도의 화려한 저택이 즐비한 가운데 그 지붕위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달도 없는 밤인데도 한 사람의 눈은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이 눈에 확 띠일 정도였다. 허름한 복장에 마치 주루의 점원같은 모습 이나, 그가 발산하는 기세는 일류고수를 넘 어선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였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 었다. 자신이 왜 도주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워 하 는 판이었다. 주루에서의 일은 장비신타라는 바보를 이 용해서 잘 풀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앞의 이상한 녀석이 끼 어든 것이다. 그것도 장비신타의 일에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라, 대뜸 자신을 쏘아보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저 칙칙한 눈동자. 그것이 기묘한 광채를 뿜어내며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하면서 거의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도 하지않고 무조건 달아났던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간파할 것 같으면 얼른 달아날라는 훈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기 도 했지만,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쳐다보고만 있었는데도 달아났다는 것 은 문제가 있었다. 왜지, 저녀석이 뭔데? 이 청살수(靑殺手) 가 달아나야 했지? 청살수는 아무리 궁리해도 무엇이 자신을 이렇듯 막무가내로 달아나게 만들었는지 이 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왜 저 이상한 작자와 대치하고 있는지도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청살수는 괴인과의 거리를 신중히 계산해 보았다. 그의 앞에 이미 얼굴을 칭칭감아놓은 괴인 이 불과 세걸음을 두고 가까이 와 있었다. 벽공장 한방 거리다. 청살수의 주먹이 은연중에 꼭 쥐어졌다. 살수당에는 인재가 많군. 불쑥 튀어나온 한마디에 청살수의 기세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확실히 그는 살수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괴인이 그것을 알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지만 청살수를 움찔하게 만드는 것은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기묘한 어감(語感)이었다. 이 괴인은 틀림없이 살수당의 누군가를 상 대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괴인의 승리로 결말이 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그의 눈앞 에 이 괴인이 서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니까. 청살수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상가는 살수는 오색살수(五色殺手) 의 다른 넷, 그리고 당주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들 중 누구를 상대했다는 거지? 청살수는 상대방이 허풍을 칠 것이라는 생 각은 조금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허풍쟁이도 저런 강렬한 압박감을 일 으키지는 않는다. 청살수는 긴장 속에서 저절로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벽공장을 펼치려는 자신의 생각은 이미 달 아난지 오래였다. 칙칙한 눈이 슬몃 붉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청살수는 다시 한걸음을 물러서고 있 었다. 콰직! 그의 발밑에서 하나의 기와가 깨어졌다. 필요이상의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뭘 겁내지? 청천수(靑天手)는 도망가려고 익혔나? 눈 앞의 괴인이 비꼬는 듯 내놓는 말에 청 살수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화가 나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악으로 몸이 굳어졌다. 그가 청살법(靑殺法)이라 하는 청천수를 익힌 것을 아는 자는 단지 두 사람, 청천수 를 전수한 자와 일을 시킬 권한을 가진 살수 당주뿐이었다. 청살수는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청살수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저 괴인에게 덤비는 것 뿐이었다. 결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팟! 청살수의 손이 쳐들리는 순간 그의 손에서 푸른 연기와 광채가 한꺼번에 퍼져 허공을 퍼렇게 물들였다. 드디어 청천수가 괴인을 향해 뿜어져 나갔 다. 분뢰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천수의 파 란 연막(煙幕)을 보고 그대로 두 손을 치켜 올렸다. 두 개의 힘이 마주쳐 나갔다. 콰아아... 겉으로 보기에는 청살수가 파란 연기를 피 우고 분뢰수는 그 앞에서 손으로 허공을 매 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전부이건만 실제로 부딪치는 두 사 람은 자신들을 조여오는 상대방의 괴이한 힘 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청천수의 기이한 경력이 그대로 뒤틀리고 있었다. 청살수의 입가에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청살수는 마침내 균형을 잃고서 뒤로 주춤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다가 지붕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진 청살수는 두번 다시 올라오지 않았 다. 분뢰수가 그가 떨어진 곳으로 다가갔을 때 바닥에는 한웅큼의 선혈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청살수는 소리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장비신타는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그 놀라운 신위(神 威)를 가진 고수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지금 적우자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비신타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이 청성파 장문인이 그렇게 쉬운 상대도 아니고, 사천 일대에 명성이 자자한 것도 실력이 있기 때 문이 분명했다. 장비신타는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음씩 물 러섰다. 다른 사람들은 일이 어떻게 되려는가 궁금 한 듯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우자의 눈길이 장비신타에게서 떠나 다 시 분뢰수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거기에는 다시 분뢰수가 앉아 있었다. 장비신타는 적우자가 자신에게서 눈을 돌 릴 때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송학, 송추도 그저 내버려둘 뿐이었고, 사 마충은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자신도 나서지 않았다. 장비신타는 부리나케 문을 제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안으로 퉁겨져 들어왔다. 누, 누구요? 장비신타가 묻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달아나는 그를 누가 잡았는지 의아했던 것 이다. 왜 그냥 달아나지? 칙칙한 눈빛아래서 암울한 목소리가 울렸 다. 장비신타의 털이 가득한 얼굴에 경련이 일 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방금 전까지 주루의 한귀퉁이에 앉아 있던 백포의 괴인이었다. 그, 그건... 장비신타는 무슨 변명을 해야할 지 몰랐 다. 그가 자신의 망발이 실패로 돌아가자 살 기위해 달아나던 중임을 주루의 모두가 보고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새삼 또 무엇이 궁금하다는 것인 가? 장비통신권(長臂通神拳)이 아깝지 않은 가? 느닷없이 장비신타를 가로막았던 괴인이 말했다. 주루의 사람들이 모두 의아한 기색이 되었 다. 장비신타가 권법(拳法)에 조예가 있음은 이미 알고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 도 수준인가는 몰랐다. 짐작하건데 형편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 지않다면 저렇게 못난 꼴을 보일 리가 없으 니까. 그런데 이 백포괴인은 지금 그에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장비신타는 땀을 흘리며 괴인을 바라보았 다. 당신...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나? 분뢰수. 보여다오! 장비통신권을. 적우자는 약간 기괴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장비통신권이 시시한 권법은 아니었다. 그 러나 그렇게 오묘한 권법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분뢰수는 그것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분뢰수는 한걸음씩 성큼성큼 장비신타에게 다가가고 장비신타는 겁을 먹은듯 발을 끌면 서 뒤로 비척비척 물러서고 있었다.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분뢰수라 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천축과 서장을 뒤흔 들었던 이 이름이 아직 이곳까지는 퍼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 몇 사람은 분뢰수라는 말에 흠칫하여 주시하기 시작했다. 장비신타가 부르짖었다. 왜, 왜 그러는거요? 뭐, 뭘 바라는 거 요? 분뢰수의 발걸음이 딱 멎었다. 칙칙한 눈이 겁먹은 장비신타를 주시하였 다. 만난 곳. 2 적우자는 쓴 웃음을 지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매한가지로군. 분뢰수가 장비신타를 앞세워 찾아가는 곳 은 장비신타가 암중에 자신을 돕기로 한 자 를 만났다는 곳이었다. 장비신타가 안내한 곳은 성도에서 조금 벗 어난 곳에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당이었다. 무후(武侯)를 섬기는 듯한 사당에는 학창 의에 백우선을 든 영정(靈幀)이 한폭 놓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특이한 것이라고는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매우 이상한 것이 사 당의 한복판에 놓여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시신(屍身)이었다. 시신을 본 장비신타의 털투성이 얼굴이 부 르르 떨렸다. 시신은 자신을 돕겠다며 적우자에게 시비 를 걸라고 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에 죽어서 누워있는 것인가? 송학의 말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이자는 만보루의 점원이 아닙니까? 만보루에는 여러 점원이 있다. 그렇지만, 바로 얼마 전에 자신들에게 차를 날라다 주 었던 점원을 못알아 볼 까닭은 없는 것이다. 적우자는 분뢰수를 보았다. 그의 칙칙한 눈빛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약간 충혈된 눈자위도 그대로였다. 송추가 앞으로 나서서 시신의 가슴을 들쳐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약간 젖은 듯이 보이는 가 슴팍을 들추자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흔적이 있었다. 붉게 박힌 손자욱이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 듯 눈에 확 뜨이고 있었다. 분뢰수는 사라졌던 청살수가 시체가 되어 다시 나타났는데도 아무 말없이 시신을 지켜 볼 뿐이었다. 적우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적염장(赤焰掌)이로군.... 그것은 이상한 여운을 담고 있었다. 적염장은 염왕검법과 동시대에 등장했던 희대(稀代)의 살수(殺手)의 절기였다.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우연일까? 어떻게 두가지 절기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 러낸 것일까? 적우자의 머리속은 헝클어져갔다. 무엇인 가 꼭 집히지는 않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벌 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비신타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 다. 자신을 돕겠다던 자가 난데없이 없어져 이 런 곳에 죽어있을 까닭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송학과 송추는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헛되이 끝나고 말았 을 뿐이다.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 시신이 어떻게 여기 놓여있는가는 한가 지 답만이 있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이곳 에 와서 저 괴이한 붉은 손자욱을 남긴 고수 에게 맞아 그대로 절명했다는 것이다. 만보루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마충은 돌아온 적우자 일행을 보고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문으로 막 들어서는 적우자에게 다가 와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와 적우자 일행이 어울리는 동안 분뢰수 는 만보루의 주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만보루의 주인은 화노인(華老人)이라고 했 다. 화노인은 술만 마시면 한때 자신이 한자루 검을 들고 천하를 주유했노라고 떠들어대는 노인이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화노인은 평소 잘하던 소리를 모두 접어둔 채 바쁘게 장부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의 앞에 선 백포괴인 을 보고서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손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차라도 한 잔 더 하시겠읍니까? 분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노인의 주판 옆에 놓인 찻잔에 벙어리 장갑처럼 감 아놓은 손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엄지를 담 갔다. 화노인이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분뢰수의 엄지가 그의 주판 옆에 가 볍게 찻물로 무엇인가 쓰는 것이었다. 화노인은 잠깐 멍한 표정이 되더니, 예, 방이라면 이쪽으로... 하고서 그를 안내해 가는 것이었다. 적우자는 사마충의 말을 반쯤은 듣고 반쯤 은 흘리면서 한편으로 분뢰수를 살피고 있었 다. 그러다가 그가 화노인과 가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큼성큼 화노인이 앉아있던 계산대를 살 펴본 적우자의 안색이 변했다. 분명히 분뢰수가 무엇인가 찻물로 쓰는 것 을 그는 보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물기조차 없이 말라있는 것이다. 적우자는 다른 사람의 의아한 시선은 무시 하고 막 화노인이 분뢰수를 데려간 안쪽으로 달려갔다. 청성문하의 두 도인은 갑작스런 장문인의 행동에 놀라 얼른 뒤따를 수 밖에 없었고, 사마충은 어이없는 그들의 행동에 놀라면서 도 뒤따르고 있었다. * * * 화노인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 신의 앞에 앉아 있는 분뢰수를 보고 있었다. <철검비환(鐵劍飛環)을 보고싶소.> 분뢰수가 그의 앞에 찻물로 썻던 내용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 것이다. 화노인은 한동안 밀실로 데려온 분뢰수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화노인이라 부르는 것처럼 그는 화씨 성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고, 노인 (老人)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만보루의 손님들 앞에 서 자신의 이름 두자가 풍렬(楓烈) 이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철검은 이미 십여 년간이나 자기손으로 만진 적도 없었다. 한때는 팔목에 늘상 차고 다니던 금환(金 環)도 이제는 팔목에서 그 자욱도 남지 않을 정도로 멀리하고 있었다. 화노인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보니 벌써 이십이년, 아니 이십삼 년? 깜깜한 지난 세월동안 그는 이 만보루에 처박힌 채로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이 분뢰수는 어떻 게 단번에 자신을 알아본 것일까? 서로 한참을 노려보듯이 대치하고 있는 것 도 이젠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한쪽은 궁금증을 억지로 참고 있 고, 한쪽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 이니 결국 궁금증을 참는 쪽이 질 수밖에 없 었다. 화노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나?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 내손에서 철검과 비환이 떠난 것이 언제인데 오늘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 더우기 난 자네에게 얘기한 적도 없는 데 말이야. 한 번 입을 열자 화풍렬의 입에서는 폭포 수와 같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뢰수는 일체 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 눈으로 화풍렬의 희끗한 머리카락 과 그 아래의 주름가득한 얼굴을 볼 뿐이다. 화풍렬은 다시 입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는 침묵에 빠져들어 분뢰수를 쳐다보았다. 만보루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몰리는 만큼 그 가운데서 강호의 소식도 꽤나 빨리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뢰수에 대한 소문은 그자가 서장 에 있다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성도의 만보루에 나타날 줄 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눈앞 에 나타나 철검비환이라는 이름을 떠오르게 만들다니. 화풍렬은 아직도 이것이 실감나지가 않았 다. 분뢰수는 화풍렬이 한가지를 묻고선 그대 로 침묵하는 것을 그저그런 모습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풍렬은 이제 스스로 입을 열 마음이 없 었다. 이런 태도로 언제까지고 있을 자신도 있었 다. 그러다가 지치면 그냥 가겠지. 분뢰수와 화풍렬이 기묘한 대치를 벌이는 동안 그들이 있는 밀실을 찾아오고 있는 사 람도 있었다. 적우자는 거의 한시진을 만보루에서 헤매 여야 했다. 만보루의 주인이 기고(奇高)한 공력을 지 닌 것을 알아냈으니 그는 당연히 분뢰수의 다음 행동이 무엇인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적우자는 정말 신기해 하 고 있었다. 그도 이 만보루에 그렇게 자주 왔지만 만 보루의 주인이 화노인으로 바뀐지는 벌써 이 십여 년, 그 별볼일 없어 보이는 주름투성이 의 수다장이 노인이 분뢰수의 관심에 들만한 고수였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늘상 별볼일 없는 곳으로 여기고 있던 만보루의 내실(內室)이 이렇게 복잡하 게 엉켜있을 줄은 상상해 본 일이 없었다. 꼬불꼬불 엉킨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하 나의 미로(迷路)였다. 의도적으로 사람을 헷 갈리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여태 이것을 몰랐다니... 여기 온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거늘... 자책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만보루를 생각한 것 이다. 송학도인과 송추도인은 그야말로 우왕좌왕 이었다. 장문인은 복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그 들은 당연한 듯히 뒤따르려 했는데, 어이없 게도 한 순간에 장문인의 행적을 놓치고 만 것이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송학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이토록 비범함을 감춘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못했다.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송추가 감탄이 섞인, 그러나 초조한 어투 로 말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도 제대 로 판단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사마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송학을 따르려고 했으나, 송학과 송 추가 이 좁은 복도에서 갑작스레 지워진 듯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사마충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가 알기로 절대로 이 만보루의 크기는 사방 이백 걸음을 넘을 수 없었다. 그건 좁은 공간에 밀실을 마련했다 하더라 도 그 규모는 별로 클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만보루가 그동안 알던 모습하고 다르 다는 것은 약간 그에게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 자신에게 달라진 것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마충이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은 그가 송학의 뒤를 잃어버린지 꼭 밥한끼 먹을 시 간이 지나서면서 부터였다. 그의 걸음으로 보아 거의 천(千) 걸음 이 상 걸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는 아직도 처음의 자리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사마충은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것이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대 책이었다. 지금까지 만보루에서 큰 일이 없었듯이 자 신이 이러고 있는 동안 역시 누군가가 나타 나 다시 자신을 밖으로 데려다 주기를 기다 리는 것, 그것이 지금 사마충이 택한 계획이 었다. 송추는 벽에다가 손을 대고 걷고 있었다. 그의 뒤를 송학이 바싹 붙어 마찬가지로 벽에다 손을 대고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택한 이 밀실의 미로탈출법 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은 반드시 이 미로 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밥한끼 먹을 시간이 되지 않 아 그들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같은 자리를 따라 도는 것은 분명 아니었 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밀실의 미로안에 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지껏 그들이 걸은 거리를 생각한다면 그 들은 이미 성도 밖에까지 와 있어야 했다. 적우자는 두 사람을 보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적우자임에도 둘은 꼼짝 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 을 듯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마치 엄숙한 결투를 보는 듯 했다. 적우자는 잠시 눈을 껌벅거리며 두 사람을 다시 살펴보았다. 칙칙한 눈의 분뢰수는 그 모습 그대로였 다. 칭칭감아놓은 얼굴과 손, 그리고 낡아서 잿빛을 머금은 옷. 그 앞에는 지금까지 적우자가 한번도 심각 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화노인이 마주 앉 아 있었다. 신광(神光)이 번쩍거리는 눈초리로 보아서 결코 자신보다 하수(下手)로 여기어지지 않 는 화노인이었다. 적우자는 피식 웃었다.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들 있는거요? 적우자의 물음에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비로소 화노인이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이놈은 뭐하는 녀석이오? 왜 설마 모른다고 할 참은 아니겠지요, 만보루주? 적우자는 특히 만보루주라는 말에 힘을 주 었다. 그동안 잘도 속여왔다는 칭찬이며, 따지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능청스러웠던 화풍렬이 새 삼스럽게 순진한 대답을 해올리는 없었다. 그는 배시시 웃다가 적우자를 보며 말했 다. 난 도대체 이런 녀석은 생전 보다보다 처 음 보겠는걸. 아니 어떻게 되먹은 녀석이 자 기 용건만 달랑 내놓고 내 물음에는 한마디 대꾸가 없어. 설마 네가 분뢰수를 모른다고 할 참인 가? 적우자가 이렇게 입밖으로 내지않는 생각 을 떠올리는데 분뢰수가 불쑥 물었다. 화선생(華先生), 정말 나를 처음 보는 것 이오? 적우자는 분뢰수의 이 질문이 무엇인가 뜻 이 있다는 생각을 퍼뜩 떠올렸으나, 구체적 으로 무슨 뜻인가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칙칙한 분뢰수의 눈빛 속에 무엇인가 순간적으로 번뜩거리다 사라진 듯한 막연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내가 널 알 까닭이 없지 않느냐? 널 알면 내가 이렇게 궁금해 할 것 같으냐? 화풍렬의 어투는 신랄하다고 느낄 정도였 다. 난데없이 나타나 시비를 거는 것이 못마땅 하다는 투가 역력했다. 적우자는 이 만보루주 화노인의 정체가 궁 금했다. 나도 궁금하군요. 보아하니 무명소졸은 아니신 듯한데 명호를 알려주시지 않겠소? 화풍렬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적우자와 분뢰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요새 강호에는 이렇게 전부 제멋대로인 사람들만 사나? 적우자의 눈에 위협적인 빛이 감돌았다. 분뢰수가 앞에 버티고 있는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자신까지 무시한다면 정말 그냥 둘 생각이 아니었다. 적우자가 일으키는 기세를 보자 화풍렬은 단번에 그의 심중을 간파했다. 분뢰수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적우 자 까지 가세한다면 곤란하기 짝이 없는 노 릇이었다. 할 수 없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내 이름은 화풍렬이오. 됐소? 적우자는 화풍렬이란 이름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화노인이 누군지 생각해보는 것이었 다. 철검비환. 갑자기 분뢰수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말이 적우자의 눈초리를 더욱 매섭게 만들었다. 철검비환 화대공(華大公)? 적우자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외침이 흘 러나왔다. 화풍렬이란 이름으로 이십여 년 동안 모습 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 뿐이었다. 한자루 철검과 한쌍의 금환으로 명성을 날 렸던 고수. 그는 적우자보다도 선배였다. 그런 사람이 난데없이 만보루주라니 적우 자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장사한 것도 꽤 오래되었지 만, 오늘같이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군. 이게 도대체 뭐야? 내가 강호에서 발씻은 것이 언 제인데 이렇게 나타나서 보채고 있지? 그런 것은 십년 전이나 찾아와 물어야 하는 것 아 닌가? 화풍렬은 자신을 화대공이라 부르는 적우 자의 놀란 음성을 듣자 이제는 신경질난 어 투로 지껄였다. 만약 적우자가 이상한 일을 겪은 날이 아 니었다면 그의 이런 말에 십분 양보하며 물 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점원차림을 하고 죽어있는 시 신을 보았고, 그가 도와준다는 말에 분수도 모르고 자신에게 시비를 걸던 장비신타를 보 았다. 적우자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냉소(冷笑)가 새겨졌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하다고 생각하 지 않소, 선배? 화풍렬은 적우자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푹 쉬었다. 분뢰수가 있는 쪽은 의도적으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겪은 일이 어디 한 두가지인 가? 그래도 난 개입은 하지 않았어! 생각해 보면 잘 알거 아닌가? 여기서 제법한다는 녀 석들이 삼년 전에도 장보도(藏寶圖)를 놓고 싸운 일이 있었지만, 난 끼어들지도 않았어. 이제와서 무슨 일이 터진다고 끼어들 까닭이 없지. 냉정하게 내놓은 말이었다. 적우자는 이곳에서 벌어진 삼년 전의 난투 극을 기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으나 청성문 하의 몇 사람이 이곳에 머물다가 본 일이었 다. 그거야 내 목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고, 오늘 일은 나한테 바로 관계되는 일이 아니 오? 적우자가 두껍게 주름잡힌 얼굴을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 화풍렬은 그의 이런 말에 어처구니없어 입 을 다물었다. 적우자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본문의 제자들은 아직도 밀실의 미로에 갇혀 있을 것이요. 화선배, 그냥 그 러고 계실작정이요? 화풍렬의 절로 쩍 벌어졌다. 세상에... 청성파의 명성이 왜 사천을 흔 드나 했더니 바로 철면신공(鐵面神功)의 대 가가 있었기 때문이군 그래, 정말 엄청나서 절로 겁이 나는데. 얼굴에 철판을 댔다고 놀리기는 했으나, 화풍렬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열린 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사방에 달린 문이 모두 활짝 열리자, 저쪽에서 어, 하고 놀라는 소리가 몇마디 들려왔다. 적우자가 보니, 송학과 송추가 모습을 드 러내고 있었고 사마충도 보였다. 불과 오십여 걸음의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여지껏 헤매이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절로 적우자의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자신도 설마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그 렇게 헤매였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최소한 이것보다 세배 정도의 자리는 차지 했으리라 생각했던 터라 적우자의 놀라움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철검비환 화대공이 이런 기관진도(機關陣 圖)의 대가(大家)란 소리는 들은 적이 없거 늘...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적우자는 감탄을 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탄하는 중에 적우자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함께 어리고 있었다. 철검비환 화대공의 성격은 그렇게 잘 참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방을 못견디게 만들 정도로 활 활타는 쪽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계속해서 한 사람의 눈 길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적우자가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줄 곧 적우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분뢰수를 외면 하고 있었다. 분뢰수의 눈자위에 붉은 기운이 조금씩 짙 어지고 있었다. * * * <그는 처음부터 끼어들 생각이었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가 나서서 암살을 막았을 것이다....> 第 四 章 票 行 1 사마충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만보루의 화노인이 그 철검비 환 화대공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마충의 나이는 이제 사십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런 그가 한창 청운의 꿈에 불타고 있을 때, 사천에서 제일가는 고수를 고르라면 언 제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협객이 있었 다. 철검비환(鐵劍飛環) 화대공(華大公). 바로 그였다. 한자루 철검이 바위를 가르면 대지가 통곡 하고, 한쌍의 금환이 허공을 나르면 하늘이 울부 짖는다. 이것이 철검비환이라는 그를 묘사하여 사 천에 떠돌던 이야기였다. 그런 그가 만보루의 주인이었다니 사마충 은 정말 자신이 눈이 있어도 장님이라는 생 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신화적인 명성을 떨쳤던 일 대고수가 있었는데도 지금까지 그를 그저 그 런 노인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사마충으로서 는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마충은 입을 벌리고 경이로 가득찬 눈길 을 주고 있으나 그 눈길을 받는 화풍렬은 전 혀 거기 신경쓰고 있지를 못하였다. 지난 날 대공(大公)이라고까지 불리웠던 자신이 그 사이에 너무 소심해졌다고 자책을 하면서도 그는 지금 분뢰수에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난국을 어떻게 빠져나가나... 녀석이 원하는대로 한판 붙어? 하지만 그러면 놈들 의 눈에 띄일테고...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 이란 언제 찾아올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철검비환의 대공이라고 불리 운 전대고수 화풍렬은 바로 자신이 그런 처 지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적우자는 화풍렬이 계속해서 망설이는 것 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 화 풍렬이 분뢰수를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 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송학과 송추 두 도인은 멀뚱멀뚱 사부와 분뢰수, 그리고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던 만 보루주, 알고보니 엄청난 고수인 화풍렬을 번갈아가며 지켜볼 뿐이었다. 뭐라해도 자신들이 떠들어댈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마충은 할 말이 있었다. 철면호 사마충의 진지한 태도는 소문이 자 자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진지한 태도와는 별개로 분뢰 수는 그의 표행(票行)에 따라 나서게 되었 다. 적우자는 어이가 없었다. 발단은 뜻밖에도 화대공 때문이었다. 철검비환 화대공이 사마충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무조건 자신은 이 표행이 재 미있겠다면서 따라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분뢰수도 이 표행에 따르게 된 것 이다. 화대공이 철검비환의 수법을 보여줄 때까 지 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모양이었 다. 화풍렬은 분뢰수가 표행에 까지 따라오자 넌덜머리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적우자는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송학과 송추를 보았다. 변함없이 그들은 자신을 시중들 준비를 갖 추고 있었다. 송학, 동전을 다오. 송학은 적우자의 말이 떨어지자 그가 늘 사용하던 동전 여덟개를 꺼냈다. 적우자는 손안에서 동전을 흔들어보다가 활짝 뒤집었다. 뒤집어진 손바닥에는 동전들이 앞, 뒤로 마구 섞여 있었다. 송추는 그것을 보지 못했으나, 송학은 얼 핏보았다. 사, 사부님! 송학이 놀라서 신음하듯 외쳤다. 적우자는 이미 주먹을 쥔 후였다. 송학이 창백한 표정이 되어 적우자를 바라 보자, 송추는 무슨 점괘가 나왔는지 궁금하 여 적우자와 송학을 번갈아 보았다. 적우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슨 신복(神卜)이라도 되느냐? 뭘 그리 놀라고 있느냐? 조용히 하거라. 적우자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려던 송학은 나직한 마지막 말에 그만 입 을 다물고 말았다. 적우자는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 다. 다음대의 청성파는 크게 번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무사하기만 하면. 그러나... 적우자는 송추를 바라보았다. 송추는 무슨 괘가 나왔길래 송학이 놀라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대충 그것이 불길한 괘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적우자가 친 점 가운데 불길한 점괘말고는 맞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럼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으니 우리도 가자. 도대체 기련산맥에 무슨 괴물이 나타 났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만보루의 점원은 의외로 많았다. 그들은 일을 잘 분담하여 주인이 부재중에 도 만보루를 운영해나가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적우자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는 것도 당연 했다. 여기가 화씨세가(華氏世家)의 본거지 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뭐가 화씨세가야! 이몸은 아직 미혼(未 婚)이라고! 화풍렬의 화내는 말에도 적우자는 들을 척 도 하지 않고 계속 탄성을 흘리고 있었다. 과연! 회계(會計)를 맡은 녀석... 요리를 책임진 녀석... 객방을 책임진 녀석... 주루 를 다스리는 녀석... 그런데, 화씨세가의 총 관(總官)은 누구지요? 이놈이! 졸졸 따라다니며 중얼거리는 적우자를 보 며 화풍렬은 화를 내면서도 일단 만보루를 정리해 놓았다. 송학과 송추는 그런 장문인을 따라면서 기 이한 시선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전 에는 한번도 저런 장문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뒤쪽에 신경을 곤두세 우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아무 말 없이 오직 칙칙한 눈빛을 흘리며 분뢰수가 따르고 있었다. 일이 벌어진 것은 마굿간이었다. 만보루의 마굿간에 도착하여 화풍렬은 이 제 일년 넘게 일을 한 마굿간지기에게 잘하 라고 당부하며 돌아섰다. 그 때 분뢰수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송학과 송추는 뒤따라오던 그가 왜 갑자기 앞으로 나서는지 이해를 못했다. 화풍렬도 적우자도 갑자기 그가 왜 마굿간 지기를 하고 있는 아육(阿六)에게 다가서는 지 몰랐다. 아육도 갑자기 자신의 앞에 얼굴과 손을 칭칭 동여맨 이상한 녀석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주인인 화풍렬을 쳐다 보았다. 분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손을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아육을 짓이 길 듯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우르르... 살기같은 것은 없어도 뇌성(雷聲)을 동반 한 그 손에 맞아서 무사하기를 기대하는 것 은 무리였다. 아육이 그대로 짓이겨지는 줄 알고 송학과 송추의 눈이 휘둥그래져 갔다. 적우자나 화풍렬은 입을 놀란 표정이었으 나 전혀 말릴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아육은 그 손에 맞아 죽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뒤로 젖히면서 구른 것이다. 경쾌한 몸놀림은 그가 무공이 있던 없던 평범한 마굿간지기는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꽈르르... 미처 아육이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분뢰수의 두 손이 그를 향해 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멋대로 이름붙인 섬전영(閃電影) 의 신법이 발휘되었고 그의 손은 아육을 이 번에는 정말 확실하게 박살낼 것이었다. 몸을 다 일으키지도 못한 아육은 두 손으 로 분뢰수에 대항하고 있었다. 아육의 손은 분뢰수처럼 칭칭 감아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손을 보는 사람은 그의 손 을 칭칭 감아놓은 분뢰수의 손보다 더 이상 하게 볼 수 밖에 없었다. 불타고 있는 것이다. 뻘건 화롯불을 보듯이 그의 손바닥은 벌겋 게 변해 불길이 일고 있었다. 적염장! 적우자의 입이 떨어졌다. 화풍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분뢰수의 손은 그 적염장력을 일으 키는 아육의 손에 부딪치지 않았다. 부딪친 것은 분뢰수의 팔꿈치였다. 허공에는 손그림자가 남기고 팔꿈치로 적 염장을 맞이한 뒤 분뢰수는 팔을 쭉 폈다. 아육의 두 팔이 좌우로 벌어졌다. 이미 파고든 분뢰수의 몸에서 뻗어나온 손 은 아육의 머리를 좌우로 감싸듯 하고는 손 뼉을 쳤다. 쩌억! 기괴한 음향과 함꼐 아육은 그 자리에 그 대로 멈추어섰다. 아육의 머리에는 벙어리 장갑으로 눌러놓 은 듯한 기괴한 장인이 남았다. 손에서 일던 적염장의 기운은 다 사라졌는지 불길도 없어 졌다. 잠시 이어진 침묵동안 송학과 송추는 분명 하게 볼 수 있었다. 아육의 눈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고, 입에 서는 주르륵 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랫 도리에서도 줄줄 대소변을 다 흘리고 있었 다. 분뢰수는 잠시 아육을 보다가 자신의 등에 늘 질머지고 있는 검을 싸놓은 듯한 길죽한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 보자기를 약간 풀렀다. 그 안에서 혹시 절세(絶世)의 신검(神劍) 이라도 나올 것인가 하고 보고 있던 송학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분뢰수는 짐을 다 펼치지 않았다. 삼분의 일쯤 펼쳐놓은 그 안에서는 조그마 한 벼루와 먹, 그리고 붓 한자루가 나왔다. 대뜸 벼루를 말먹이 물통에 넣었다 빼서는 먹을 가는 분뢰수를 가리키며 화풍렬이 적우 자에게 물었다. 저녀석 지금 뭐하는 거야? 적우자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 다. 그리고 곧 분뢰수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붓에 먹을 듬뿍 먹이고는 그대로 아육의 얼굴에 남은 장인(掌印)위에다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곧 간다.> 한쪽 뺨에 쓴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뺨에 는, <오대살법(五大殺法)을 기대한다.> 2 적(赤)과 청(靑)이 나타났으니, 남은 것 은 셋 뿐이군요. 황백흑(黃白黑)의 세 가지 에 해당하는 살법(殺法)까지 나타난 다면... 화선배! 말을 하던 적우자의 주름이 깊어졌다. 희끗한 머리에 질근 동여맨 영웅건(英雄 巾). 다시 끄집어낸 철검(鐵劍)을 허리에 매었 으나 무거운지 몸이 기울려고 하였다. 팔목 에는 언제 끼웠는지 금환(金環) 한 쌍이 빛 나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 전의 모습을 되찾은 철 검비환의 대공 화풍렬은 비척거리다가 문지 방에 걸려 쓰러지고 있었다. 그만한 고수가 그런식으로 쓰러질 까닭이 없었다. 사마충은 묵묵히 지켜보았고, 송학과 송추 도 어이없는 듯 보고만 있었다. 적우자는 그가 아까부터 계속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며 혀를 찼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점원 중 둘 이 살수(殺手)였다는 것이 그렇게 충격이었 나요? 화풍렬은 고개를 홱 젖히며 적우자를 쏘아 보았다. 난 절대 저 녀석하고는 안 싸워! 화풍렬이 가리킨 것은 분뢰수였다. 그런 말을 듣고도 분뢰수는 일체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우이독경 (牛耳讀經)이었다. 왜요? 대신 물어본 것은 역시 적우자였다. 화풍렬이 버럭 화를 내었다. 저놈이 이겨봐! 내 얼굴에다가 쓸 거 아 냐! 분뢰수 화대협(華大俠)을 이기다라고! 대협? 누가요? 적우자가 유들유들하게 되물었다. 화풍렬이 얼굴을 씰룩이며 막 호통을 치려 하는데 적우자가 얼른 말을 가로채며 중얼거 렸다. 세상에 어떤 대협이 정체를 감추고 이십 여 년이나 강호를 탐문하며 보내요? 이 말에 화풍렬의 입가를 막 떠나려던 말 이 다시 삼켜졌다. 이 고약한... 적우자는 화풍렬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키 득거리며 웃었다. 송학의 얼굴은 그런 적우자를 보면서 어두 워졌다. 평소 장문인의 태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면서 송추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송학의 그 런 태도를 보고는 더욱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송학은 왜 그러는지 말을 하지 않 았다. 사마충은 화풍렬이 준비가 끝나자 얼른 앞 장 서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표국으로 안내 했다. * * *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손에는 작게 말려있다가 지금 펼쳐진 종이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거기에는 조 그마한 글이 쓰여 있었다. - 성도 이대살수(二大殺手) 사(死). - 분뢰수 오색살수(五色殺手)에 도전. 단 두 줄이었다. 살수당주... 오색살수... 그놈들을 키우 느라 얼마나 투자를 했는데... 불과 사흘이 못되어 셋이 죽어자빠져? 파다닥! 날개짓 소리에 그는 겨우 자신의 화를 가 라앉혔다. 자신에게 냉정하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 면서 새로 들어온 전서(傳書)를 받아보는 그 는 약간 기분이 풀렸다. - 물건 확인. 사해표국이 표행. - 철면호가 책임. - 준비완료. 흐흐흐... 좋아, 그것만 손에 넣으면... 분뢰수, 네놈이 어떤 놈이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내 모든 것을 쓸어넣어도 그것만 손에 넣기만 하면... 천하가 바로 내 발아래 굴복하리라.... 낮게 울리던 그의 웃음은 점차 커져서 사 방으로 울려퍼졌다. 그의 웃음소리에 온갖 새들이 제각각 울어 대기 시작하였다. * * * 사해표국의 국주(局主)는 이제 자신이 은 퇴해야 할 나이라고 생각했었다. 머리는 이제 호호백발이었고, 한창때는 언 제라도 들고 휘두를 수 있는 감산도(坎山刀) 가 이제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재롱을 부리는 손자, 손녀를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만난 도적과의 싸움에서 패해 이름모를 길 위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만해도 구역질이 날 만큼 싫었다. 그는 이제 편안한 노후(老後)를 보내고 싶 었다. 환갑(還甲)을 바라보는 나이에 표행은 걸 맞지 않았다. 그런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표국이 날로 번성하였고, 이제 자신이 손털고 물러설 정 도로 유능한 표사(票士)들이 많다는 것이었 다. 철면호 사마충은 그 가운데에서도 발군이 었다. 그를 만난 것이 벌써 십오륙 년을 넘어가 고 있었다. 한창 젊은 이십대에 들어와 이제 사십을 바라보는 사마충은 어떤 면에서는 국주인 자 신의 분신과도 같았다. 그를 보면서 사해표국의 국주 개산도(開山 刀) 하비랑(河非螂)은 자신의 은퇴를 더욱 깊이 다짐할 수가 있었다. 저,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하비랑은 조심스럽게 화풍렬을 보며 물었 다. 화풍렬은 하비랑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 려보았다. 왜? 너보다 어릴까 걱정되냐? 그,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을 더듬는 하비랑을 보며 화풍렬은 더욱 눈을 부라렸다. 참, 별걸 다 유세하는군... 적우자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억울하면 너도 나이먹어! 귓전에 적우자의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화 풍렬이 소리질렀다. 쟁쟁 울리는 그 목소리 가 사방으로 퍼졌다. 여느 젊은이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하비랑은 뭔가 기막힌 듯한 표정이었다. 노인네 셋이 대화를 하는 동안 사마충은 송학과 송추를 대접하고 있었다. 넓은 대청에서 분뢰수는 우두커니 서서 화 풍렬을 보며 암울한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사마충은 그에게 다가가 합석하자고 권했 다. 아무 말 없이 분뢰수는 그를 따랐다. 어차피 대청안에 놓여진 탁자였기에 아무 곳에서나 서로를 잘 볼 수 있었다. 사마충은 분뢰수를 합석시키고는 다시 표 국국주인 하비랑 앞으로 갔다. 하비랑은 자신보다 훨씬 선배라 할 수 있 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망연(茫然)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마충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국주님, 이 분들이 이번 표행에 저희를 돕겠다고 하셨읍니다.... 국주님? 사마충은 고개를 들다가 하비랑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불러 보 았다. 그 말에 하비랑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사 마충을 보았다. 음... 그래, ...이번 표행에 도와주신다 니 정말 고맙습니다. 주인된 입장에서 어떻 게 감사해야 할 지... 고마와 할 필요없어. 따로 노잣돈 마련하 기 귀찮아 졸졸 따라가려는 것 뿐이니까... 불쑥 내놓는 화풍렬의 말에 적우자는 어이 없었다. 그러나 화풍렬의 표정은 진지하여 농담하 는 걸로 보이지가 않았다. 하비랑은 다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이런 변변치않은 표국을 도와주시겠다니, 저로써는 감히 뭐라 감사드릴지 모르겠읍니 다. 이번엔 저도 함께 가며 대접하는 것이 도리이겠군요. 사마충이 듣다가 놀라 하비랑을 보았다. 그는 하비랑이 전부터 은퇴를 염두에 두어 표행에 나서지 않은 것이 거의 일년이 넘었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비랑의 표정은 좀 굳어 있기는 하지만 단단히 결심한 듯 물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결국 사마충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표행을 앞두고 이런 저런 말다툼은 단지 불길한 운을 불러들일 뿐이라고 여기기에 사 마충은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하비랑은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을 집어치 우기로 작심(作心)하여 다시 표행에 나서기 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화풍렬과 적우자를 보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아직 자신은 젊다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을 고치고 뒤뜰에 홀로 선 하비랑의 옆에는 커다란 감산도가 한 자루 꽂혀 있었 다. 그에게 개산도라는 명성을 얻게 해준 거도 (巨刀)였다. 힘이 센 그가 젊을 적, 호기(豪氣)를 부리 며 만든 칼이기도 했다. 무게가 삼십근이나 하는 거도를 한 손에 잡고 하루종일 휘두를 수 있는 장사가 바로 하비랑이었다. 그럼에도 그 역시 사람인지라 이제는 슬슬 하며 은퇴를 생각한 것이었으나, 젊을 적의 오기(傲氣)가 되살아난 지금 그는 나이를 잊 고 다시 감산도의 위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 이었다. 하비랑은 거도를 움켜쥐고 확 치켜 올렸 다. 팔뚝에 힘줄이 꿈틀거리며 거도가 하늘을 찔렀다. 하비랑은 한동안 거도를 노려보았다. 얼마전에 들다가 문득 무겁다는 생각이 들 게 한 칼이었다. 이얍!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하비랑의 팔이 움직 이며 삼십근의 감산도가 허공을 가르기 시작 하였다. 슁... 슁... 육중한 소리가 일어났다. 좋군. 짧게 들려온 한마디에 하비랑은 허공에서 칼을 그대로 세웠다. 비스듬히 하늘을 찌르고 있는 칼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하비랑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그로 하여금 젋을 적의 힘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하비랑은 만족감을 느끼며 비로소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사마충이 분뢰수라고 소개한 괴 인이 서 있었다. 다, 당신은 내가 육합도문(六合刀門)의 문하임을 어찌 알아 보았소? 하비랑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가 육합도문의 문하임은 이제 그 자신도 잊고 있는 과거의 일이었다. 더우기 정식 제자도 아니었고, 단지 몇개 의 초식을 그럴싸하게 흉내내는 정도에 지나 지 않아 누구도 그가 육합도문에서 기본적인 무예를 익혔다는 것은 알아보지를 못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나 타고난 신력에 그 럴싸하게 휘둘러대는 감산도가 그로 하여금 개산도라는 이름을 얻게 해준 것이다. 어째서 내공심법(內功心法)은 익히지 않 았소? 불쑥 내놓은 분뢰수의 말에 하비랑의 가슴 한 복판은 삐죽한 송곳으로 후벼내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정식으로 입문하기도 전에 쫓겨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제대로 된 도법은 한평생 익 히지를 못했다. 이자가 이상한 괴인이라더니... 정말 괴 상한 물건이로군! 아무 대답도 없이 하비랑이 망연자실하여 지켜보기만 하자 분뢰수는 가만히 마주 보았 다. 결국은 하비랑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그대로 있다가는 분뢰수의 말을 듣는 것보 다 먼저 관속에 들어가는 것이 빠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난 정식으로 입문하지 못해서 제대로 된 도법을 익히지 못했소. 당연히 내공심법은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 한 번 쫓겨나고 나 니 오기가 생겨서 다른 곳에는 가보지도 않 았고, 결국 부모님이 주신 몸의 기력만 믿고 오늘까지 버텨온 것이요. 따지고 보면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 것이오. 그런데...그대 눈 엔 내가 육합도문의 제자로 보이오? 마음을 가라앉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 용한 음성을 흘리는 하비랑을 보면서 분뢰수 는 고개를 끄덕였다. 훗, 참 이상한 일이군. 내가 익힌 것은 강호에 널리 알려졌다고 할 수 있는 몇 개의 기본동작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육합도 의 냄새가 나다니... 자조(自嘲)섞인 하비랑의 말에 분뢰수는 고개를 저었다. 하비랑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은 육합도법에 제대로 입문하였소. 이 말을 끝으로 분뢰수는 멀어져갔다. 하비랑은 우두커니 서서 그를 지켜만 보았 다. 글쎄... 원래 육합(六合)이란 것이 내외 겸수(內外兼修)를 바탕으로 하니까... 아무 리 기본적인 동작이라도 어느 정도의 내공의 기틀은 담겨 있기 마련이지. 그것도 각파에 따라 다 달라서 비슷한 동작임에도 문파마다 특색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고. 그런데 하국 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시오? 적우자는 하비랑의 말에 대답하다가 이상 한 생각이 들어 되물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며 자신을 따로이 불 러내 던져진 질문을 그저 그러려니 생각할 수는 없었다. 원래 좀 이름만 있으면 과장해서 다 안다 고 하면 했지 절대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강호인이었기에 난데없는 하비랑의 질 문은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더우기 이름 난 사해표국의 국주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기도 하였다. 한 번 보아주시겠읍니까? 하비랑은 말을 하기가 무섭게 자신의 감산 도를 휘둘러보이기 시작하였다. 적우자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볼 뿐이 었다. 아주 착실한 육합도로군.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화풍렬이 중얼거리 는 소리가 들렸다. 한손에는 마른 안주를 쥐고 한손에는 술병 을 쥔 채 약간 취한 기색으로 나타난 것이 다. 적우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육합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 이 많아 보인 것이다. 하비랑은 칼을 거두고 멍한 표정으로 화풍 렬을 보았다. 정말... 이게 육합도법으로 보입니까? 화풍렬은 안주를 입에 넣으며 되물었다. 아니면? 난 잘 모르겠군요. 어째서 육합도법이라 고 생각하시지요? 적우자가 물었다. 저녀석이 육합도법에 대해 묻고 펼쳤으니 육합도법이겠지. 안그래? 화풍렬의 대답에 하비랑은 실망한 표정이 었고, 적우자는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말 안돼지. 하지만 도법의 기본이 되는 걸 다시 생각해서 보라구. 오의(奧義)를 생 각해.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 말고 오의를 관찰해봐. 적우자의 얼굴 주름이 한겹 더 늘었다. 듣 고보니 하비랑의 도(刀)는 육합도의 오의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제대로 배워 저런 모습이 나 올 리가 없었다. 그럼, 훔쳐배워? 얼토당토 않는 생각에 적우자는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화선배 말도 맞기는 한데.... 하국주, 무 슨 영문인지 우선 들어나 봅시다. 결국 적우자는 묻고 말았다. 화풍렬은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며 컥하는 소리를 내며 적우자를 보았다. 몹시 이상한 표정이었다. 적우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왜 뭐가 잘못 되었어요? 아니, 어째서 당대 청성파가 이정도 수준 에 머물고 있는지 갑자기 이해가 안가서... 어떻게 들으면 비꼬는 말인데 비꼬는 투가 아닌지라 적우자마저도 이상한 얼굴이 되었 다. 하비랑이 천천히 분뢰수가 던진 말부터 시 작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마충은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국주까지 나서는 표행이 되어 일이 커질대로 커지고 만 것이다. 특히나 얼마전 서장에서 표행에 돌아온 흑 상표국사람이 떠든 얘기가 성도 전체에 파다 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분뢰수는 지금 성도에 자리잡고 있는 강호인 사이에서는 거의 표적이 되다시 피 하고 있었고, 사천의 패자라고 일컬어지 는 적우자와 그의 문하생, 장장 이십여 년간 이나 보이지 않던 철검비환 화대공의 등장까 지 마구 소문이 나서 사마충으로는 도저히 배겨날 길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차례나 다른 표국과 성도의 무 인(武人)들이 들락날락 사해표국에 얼쩡거리 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화대공이나 적우자가 나서는 것 도 아니었고, 결국은 이번 일의 발단이 된 자신이 나설 수 밖에 없는데 이게 여간 번거 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빨리 표행을 떠나야지 도저히 못견디겠 다... 이것이 사마충의 생각이었다. 고수들이 같이 가겠다는 지금이 시기적으 로 좋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사마충에게 고민스러운 일은 갑작스레 따라 나서는 국주 하비랑이었다. 더우기 하비랑은 이번 표행을 사마충에게 전적으로 맡기고는 자신은 일개 표사처럼 따 라나설 것을 분명히 다짐한 것이다. 사마충으로서는 이것 저것 다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사마충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어릴 적부터 사귀어온 송학과 침착하고 사려 깊은 그 사형이라는 송추가 곁에서 이것저것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표행과 같은 일에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강호의 일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사마충인지라, 당금 사천에서 제일간 다는 청성파의 손꼽히는 인재들인 두 사람이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표물을 정리하면서 사마충은 이틀이 지나 서 출발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출발! 큰 소리와 함께 사마충이 손짓을 함에 따 라 표행이 시작되었다. 분뢰수와 적우자일행, 그리고 하비랑은 뒤 에 따로 마차를 타고 있었다. 선두에 자리잡 은 화풍렬은 마상(馬上)에서 꾸벅꾸벅 졸면 서 마차에서는 되도록 떨어져 짐수레에 붙어 있었다. 드디어 기련산으로 향하는 멀고 먼 표행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 * * - 표행출발, 물건 확인. 틀림없음. - 분뢰수, 적우자참가. 하비랑도 합류. - 철검비환의 출현 사실로 확인. 그래도 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힘차게 말하려 애를 쓰지만, 쪽지를 든 손 과 목소리는 저절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3 표행은 순조로왔다. 더우기 지나는 길이 청성파의 본거지를 경 유하는 곳이라 더욱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 다. 청성파에는 굳이 머물 필요가 없다하여 오히려 표행이 서둘러지기 까지 했다. 그동안 적우자는 자신의 문파에 단지 편지 한 장만을 보내었을 뿐이었다. 표행은 점창산 근계에 이르렀다. 거의 보름가까이를 쉬지않고 달린 결과였 다. 그동안 철검비환 대공 화풍렬은 오직 말 위에서 먹고자는 모습을 보여 표사들을 감탄 시켰다. 원래가 표사들은 말 위에서 먹고자는 일에 익숙하였다. 그러나 무림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쉽게 익숙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화풍렬의 과거 명성에 대해서 반신 반의하다가도 표사들은 이미 그에게 크게 기 대는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적우자의 참석은 그들로 하여금 더 욱 자신만만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사천경계를 지나는 동안 누가 감히 사천의 패자라는 청성파 장문인을 건드리겠는가? 그리고 표사들의 우상이었던 국주 개산도 하비랑의 합류도 사기(士氣)를 올리는 데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만약 점창산 근계에서 아무 일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십여일이 못되어 기련산맥에 이르 렀을 것이다. 점창파 장문인 마덕위(馬德位)라 하오. 그가 나타난 인사를 건넸을 때 사마충은 어리둥절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표행을 나선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점창의 경계를 지난 적도 여러번 이었다. 그동안 점창파와의 관계는 그럭저럭 원만 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지나는 동안 가볍게라도 인 사를 차릴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난데없이 점창파의 장문인이 직접 자신들이 오기를 기 다리다가 불쑥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한 것 이다. 사마충은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상대한 것은 점창파의 속가 제자였고, 일대제자이상의 수뇌급 인물들과 의 대화는 한번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개 표국의 표사를 어느 문파 의 장문인이 직접 대면하자고 하는 경우란 없는 것이다. 예... 저, 전 사마충이라고 합니다. 찾아 뵙고 인사할 참이었는데... 사마충이 미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마덕 위의 눈은 술병을 입에 꼽고 있는 화풍렬을 향해 있었다. 사마충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맺혔다. 역시... 사람은 이름이로군... 점창장문인이 기다리던 것이 사해표국의 표행인 것은 사실이나, 그가 만나고자 하는 것은 역시 그 표행에 참석하고 있는 고수들 이란 점이 이제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마덕위의 눈은 곧 다시 사마충을 향하고 있었다. 국주께서 직접 참석하셨다고 들었는데? 사마충은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예, 뒤에 마차에 계십니다. 청성파 장문 인께서도 함꼐 계십니다. 마덕위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떠졌다. 단정한 얼굴에 예의바르게 말하고는 있지 만, 사마충이 은근히 자신을 비꼬는 듯한 느 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마덕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팔자로 늘어진 수염과 투박하게 보이는 마 덕위의 걸음은 웅크린 호랑이가 걷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완연하게 높은 공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 화풍렬이 술병을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별... 한가한 놈... 다 있군...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화풍렬의 말은 마덕 위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마덕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차앞에 서서 정중히 말을 꺼냈다. 적우자께서 거기 계시오? 마덕위가 잠시 뵙고자 하오. 커다란 사륜마차의 휘장이 살짝 걷히면서 적우자의 주름진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우린 전에 본적도 없는데? 적우자는 얼굴만 내밀고 이야기하고 있었 다. 마덕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따로 조용히 드릴 말이니 잠시 시간을 내 주시지 않겠소? 마덕위가 약간 높은 언성으로 말했다. 그 러나 적우자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하지, 난 이게 편한데. 마침내 마덕위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 다. 적어도 점창산 근계(近界)에까지 점창파의 장문인이 직접 나왔다면 명성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나와서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이 아닌가? 더구나 자신이 직접 보자고 말까지 꺼냈는 데 저런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엇때 문인가? 마덕위의 얼굴에 끓어오르는 노화(怒火)가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덕위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적우자는 멀 뚱멀뚱 휘장만 살짝 걷고 얼굴만 내밀고 있 는 것이었다. 마덕위는 한동안 그런 적우자를 노려보았 다. 적우자는 눈을 껌벅거리며 마덕위를 보았 다. 할 말이 없으면 저기 길을 막고 있는 물 건들을 치우지. 우린 갈길이 좀 바쁘거든. 아무 말하지 않고 노려보는 마덕위를 향해 불쑥 한마디를 던지듯 내놓고는 적우자는 다 시 휘장을 닫고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마덕위는 정말 기가 막혔다. 그는 이 표행을 접대한다고 자신의 문하생 이십여 명을 말까지 태워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문하생들을 길을 막고 있는 물 건이란 한마디로 무시해버리는 적우자가 기 꺼울 까닭이 없었다. 울화가 치민 마덕위의 손이 절로 자신의 등에 찬 검으로 옮겨가려고 할 때였다. 불쑥 휘장안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마덕위는 너무나 뜻밖인지라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뒤로 두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튀어나온 사람을 보고 마덕위의 표정은 더 욱 괴상하게 변했다. 이건 또 뭐하는 녀석이야?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도 부족한지 손까지 감아놓은 이상한 작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대는 점창파의 마단걸(馬單杰)과 어떤 관계인가? 입이 열렸는지 어떤지 알아 차리기도 전에 터진 나온 말은 마덕위의 표정을 한 순간에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단걸이 이번에 기련산에서 행 방불명이 되었다는 거지? 화풍렬이 취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덕위의 얼굴은 절로 찌푸려졌다. 마단걸은 당대 점창파의 최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를 찾아 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청성파에 서 기련산까지 간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점 창파의 장문인 마덕위이 직접 나타나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헌데 왜 직접 가지는 않고 부탁을 하려는 거지? 왜 겁나나? 최고수도 실종된 판에 귀 하신 장문인께서는 더욱 나설 수가 없으신 가? 화풍렬의 말은 처음부터 비꼬는 투가 역력 했다. 이야기가 이렇게 까지 심해지자 마덕위도 마침내 더이상 참을 수가 없는지 얼굴이 온 통 벌개져서 화풍렬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풍렬은 입에 술병을 꽂으며 노 려볼테면 노려봐라 하는 식으로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적우자는 흘깃 분뢰수를 바라보았다. 점창파의 마단걸이 강호에 이름난 점창 최고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 만으로 분뢰수의 흥미를 끌 수 있었을까? 적우자의 머릿속에는 요 몇년 마단걸이 폐 관하여 점창의 실전절기(失傳絶技)를 연성하 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길이 없었다. 그를 찾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오? 적우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지나가듯이 물 었다. 마덕위의 붉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변 하고 있었다. 물었던 적우자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화풍렬이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푸후후, 이제보니 그녀석에게 뭔가 받을 것이 있는 표정인데? 도대체 그녀석이 뭘 가 지고 있길래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것이냐? 관일창(貫日槍).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마덕위의 얼굴에 순식간에 땀이 주루룩 흘 렀다. 그의 눈길은 분뢰수에게 박힌 채 벗어날 줄 몰랐다. 화풍렬이 과거의 그 유명한 철검비환 화대 공인줄 모른 것은 마덕위 자신이 생각해도 그리 큰 실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 얼굴을 둘둘 만 괴상한 놈은 또 뭔가? 그, 그, 그것은... 마덕위이 말을 더듬었다. 적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문파의 장래가 마단걸의 손에 걸렸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겠군. 관일창법(貫日槍法)이 점창에 있었다는 이 야기는 오랜 전설이었다. 그것이 어느 때에 나타나 어떻게 사라졌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그것이 사일검 법(射日劍法)을 창법에 응용한 것이라고 까 지 하나 그 진상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간혹 무림의 원로들에게 물어도 그들 역시 전설로 들었을 뿐 실제로 본 일이 없다는 신 화적인 창법(槍法)이었다. 몸이 달아오를만 하군 그래. 그 마단걸이 란 녀석이 관일창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군. 그런데 비급같은 것도 없이 녀석이 혼자 만 그걸 익혔다는 거야? 그건 좀 이상하군. 뒤따라 화풍렬이 중얼중얼 거렸다. 노인네 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덕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간단하게 지껄이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늙 은 생강이 겉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매운지 실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덕위은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소. 그는 내 사촌동생인데 어떤 기연 (奇緣)을 얻었는지 그 창법을 연성한 것이 오. 그래서 이번 기련산의 괴사(怪事)를 해 결하면 본파의 위상을 올릴 수 있다고 하며 간 것인데... 말을 다 맺지 못하는 마덕위의 이야기는 적우자에게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일파의 장문인이었기에 마덕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덕위은 말을 맺지 못하다가 분뢰수를 보 면서 물었다. 그런데 이 일은 오직 단걸과 본 장문인만 이 아는 일이었소. 당신은 대체 그것을 어떻 게 안 것이오? 그러나 마덕위의 물음은 헛된 것이었다. 입을 다문 분뢰수는 일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기련산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 * <....관일창법은 두 사람이 익히고 있었 다. 한 사람은 사라지고 이제 한 사람이 남 았다... 그는 사라진 사람을 찾으려 하지 않 고 있다...> 第 五 章 點 蒼 山 1 사실 이 일은 공동파에서 본파에 요청해 와서 시작된 일이었지요. 공동파쪽에서는 이 미 일년이 넘도록 그 정체불명의 괴물로 인 해 상당한 피해를 입은 모양이더군요. 그래 서 결국 두달 전에 가까이 있는 본파에 연락 을 해서 함께 고수를 파견하여 그 괴물의 정 체를 밝히려 한 것인데, 그만....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 마덕위를 보면서 적 우자는 약간 경이로운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탁트인 대청은 성하장원(星河莊院)의 거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덕위의 인도로 당도한 장원은 실로 넓었 다. 마굿간과 방이 넉넉하여 표사들에게 모두 방 하나씩을 배당할 수 있었고 다섯 대의 마 차가 모두 장원에 머물 수 있을 정도였다. 장원안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대청에 네 사람이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고, 중앙 에 놓인 탁자에는 술과 다과가 모두 준비되 어 있었다. 말석이나마 참석한 하비랑은 자신이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것도 대단한 영광이라는 생각 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한 철검비환 화대 공이야 선배명숙이니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나, 명성이라고는 돈많은 상인(商人)들 에게 좀 알려진 사해표국의 국주라는 것이 고작이고, 흑상표국이나 비호표국(飛虎票局) 처럼 뒤에서 버티고 있는 문파도 없는 하비 랑으로서는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더우기 마덕위가 점창파의 장문인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면 보일수록 하비랑은 지난날 자 신과 비교해서 별차이가 없던 그와의 틈이 이토록 대단하게 벌어졌구나 하는 마음으로 인해 더욱 착찹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풍렬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접대 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를 않는지 줄곧 술 병을 찾아 부지런히 입에다 퍼넣는 일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마덕위의 말은 계속되었다. 사실 이 괴물은 괴물이라고 하기에도 미 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럼 에도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금은보화를 노린 다거나 값나가는 표물이 아니고 순 약재나 지방특산의 음식류를 털어가기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읍니까? 먹기위해서가 아니면 그런 것만 노리고 가져갈 이유도 없으니 말입니 다. 게다가 무림에 내놓아 일류로 부족해서 절정이라고까지 일컬어질 고수들이 찾으러가 서 없어지니 더욱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고수? 누가? 점창파의 일류가 강호일류 (江湖一流)고 천하의 절정고수였어? 언제부 터? 느닷없이 꼬부라진 소리로 화풍렬이 비웃 음을 토해내기 까지 마덕위는 진지하게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웃어오는 말 을 듣자 마덕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 어졌다. 적우자는 아무 말도 않고 단지 세이경청 (洗耳敬聽)한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때문에 마덕위는 화풍렬의 말에 얼굴을 붉 히면서도 결국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걸은 점창파의 비전중에서도 절기라고 할수 있는 관일창법을 익혔기에 이번기회에 그 위력을 시험해 본다고 이 일에 적극적으 로 나섰읍니다. 그리고 공동파에서도 공동삼 수( 三秀)가 나섰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 지요. 마덕위는 얼굴이 침울해져서 잠시 말을 멈 추었다. 화풍렬은 이미 취해 엎어져서 이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코를 골고 있었다. 마덕위는 그런 모습을 흘깃 보았으나, 적 우자의 진진한 표정을 보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당대 사천제일문파로 손꼽히는 청성파 장 문인조차 간섭하지 않으려는 선배에게 뭐라 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종일관 자신의 지위를 존중하는 태도로 귀를 기울이는 하비랑을 보아서도 말 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일에 본파와 공동파에서 파견한 인원 은 총 이십오명이나 되었읍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기련산 어귀에 들어가자 마자 행방불 명이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대책을 세울 여 지 조차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마덕위가 적우자를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 로 보며 말했다. 적우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하비랑이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닫았다. 하국주, 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 이런 때 는 침묵이 좋은 것이 아니요. 적우자가 하비랑에게 권하자, 마덕위도 동 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권했다. 표국자들의 귀가 밝다는 것을 누가 모르 겠소? 혹여 들은 이야기라도 있다면 주저말 고 얘기해주시오. 쑥스러운듯 머뭇거리던 하비랑이 결국 입 을 열었다. 그 괴물이 나타난 곳이 기련산이라고 하 기에 전부터 떠도는 말이 생각나서 말입니 다. 전에 무슨 전(殿)이라고 하는 단체가 그 곳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았읍니까? 아, 연혼전(練魂殿) 말이군. 그러나 그들 은 이미.... 그러니까 삼년이 다 되어가는 군, 완전히 망해버렸답니다. 마덕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하비랑은 그 말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일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쓰러진 것뿐 아닙니까? 일대일(一對一)로 우두머리 가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잔당(殘黨)이라도 남아 있다면... 마덕위의 표정이 굳어지며 은은한 노기마 저 배어나왔다. 자신이 하는 말을 뭘로 알고 하비랑 정도가 토를 다느냐하는 표정이 역력 했다. 그럴수도 있겠군. 적우자가 하비랑의 말에 동의하자 마덕위 는 다소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자가 어떤 자인데 잔당을 남겼 겠읍니까? 그리고 설혹 그 자는 그냥 넘어갔 다라도 그 수하를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 잔 당이 남았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적우자는 역시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마덕위는 멍청해졌다. 그러고보니 적우자는 지금껏 자신의 의견 을 내놓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약은.... 마덕위가 부아를 터뜨리려 할 때 적우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뭏든 아직 기련산까지는 멀고 점창산은 지나야 하니 가면서 천천히 계속 의논해 봅 시다. 오늘은 밤도 늦었으니 우선 잠을 자야 여독(旅毒)이 풀릴 것 같군요. 요새 나이가 들어서인지 잠을 못자면 다음날 거동이 불편 해서... 적우자는 이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하며 하 비랑과 함께 물러가겠다는 것이었다. 마덕위는 시간이 시간인지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마덕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거 처로 물러나고 말았다. 장내에는 곧 화풍렬만이 남아 있게 되었 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여 술병을 쥐었다. 고개를 드는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비추어 들고 있었다. 칙칙한 눈에 충혈된 눈자위. 까불지 말아.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 야. 그냥 날 쳐죽이는 쪽이 더 빠를걸. 그보 다 한가하면 저녀석한테 신경 좀 쓰지. 말은 요란한데 정말 도움이 될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잖아, 안그래? 꿀걱하는 소리가 나며 술이 넘어가는 소리 를 내며 화풍렬의 눈이 기광(奇光)이 번뜩이 고 있었다. 분뢰수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2 자, 가라. 퍼드덕 거리며 나는 천리구는 힘차게 사람 의 손을 벗어나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원래 자신이 태어난 곳까지 도달한 다음, 다시 그동안 지냈던 이곳으로 되돌아올 새였 다. 그래서 이 새는 귀한 전서(傳書)를 실어나 를 수 있는 것이다. 새를 날린 마덕위는 만족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장원의 쪽방이라고 해야 좋은 작은 방이었 다. 그러나 한쪽 문은 대청으로 직접 통하게 되어 있었고 양옆의 창은 장원의 좌우를 모 두 엿볼 수가 있었다. 이곳은 장원의 중심(中心)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라도... 지금의 나라도 그들은 어찌 해 볼 수가 없지... 하물며 다 늙은 폐물(廢物) 에 얼굴이나 가리고 다니는 반쪽이 그들을 어찌할 수 있겠나... 죽음도 두려워 않는 그 들을... 흐흐흐... 그는 자신의 허리에 걸쳐놓은 검을 천천히 쥐어보았다. 그러다 손이 자신의 허리춤으로 올라갔다. 둥근 대나무를 두른 것 같은 허리띠가 팽 팽하게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손의 감촉을 음미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관일창법이 있는 이상, 점창은 이제 대문 파의 말석(末席)이 아닌 수석을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때 그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당신이 점창장문인으로 있는 한 그 자리는 차지할 수 없는 자리일 겁니다. 마덕위의 미소는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덕위의 굳은 눈동자에 문턱의 그림자 아 래 서 있는 한 사람이 비추어 들었다. 그건 무슨 소리지? 마덕위의 앞에 선 사람은 마덕위의 눈가에 끼인 살기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직시 하고 있었다. 마장문인, 당신은 정말 너무 어리석습니 다. 마덕위의 안색이 한층 더 굳어졌다. 아무 대답하지 않는 마덕위의 귓전에 다시 신랄한 어투가 쏟아졌다. 화풍렬이라는 늙은이가 화대공임은 당신 은 몰랐습니까? 알고 있다. 지난 이십여 년간을 콧배기도 비추지 않았던 폐물이지. 마덕위가 노기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폐물은 폐물일겁니다.. 그러나 관일창법 이란 말이 떨어진 다음에도 아무 것도 모를 허수아비는 아니지요. 마덕위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어렸다. 그래서? 그가 뭘 눈치채기라도 했단 말인 가? 그의 냉소(冷笑)섞인 물음에 그 앞의 사람 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림자를 벗어나 마덕위의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당신은 이화신창(梨花神槍) 양조이(楊槽 異)와 철검비환 화대공의 대결에 대해서 정 말 아무 것도 들은 적이 없습니까? 마덕위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도대체 저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마덕위의 멍한 표정을 보자, 그 앞에 선 자는 더욱 탄식을 토하며 말했다. 양조이는 지금 마장문인이 옆구리에 차고 있는 그 창보다 훨씬 정교한 창을 가졌던 사 람입니다. 그런 상대와 겨루었던 화대공이 당신의 허리에 찬 창(槍)을 못 알아 보았겠 읍니까? 게다가 관일창의 이야기를 들은 다 음에 당신이 그것을 익혔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겠읍니까? 적우자마저도 당신에게 경계 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길게 늘어지는 말을 들으며 마덕위의 표정 은 점차 딱딱해져 말이 끝날 때쯤에는 철판 을 깐 것처럼 변해 있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마덕위를 조용히 응시하 였다. 마덕위도 그를 응시하였다. 한동안 둘은 서로를 노려보듯 하였다. 마덕위가 입을 열었다. 넌 지금 내가 실수했다고 하는 것이냐?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잔잔한 대답에 마덕위의 몸이 가늘게 떨렸 다. 실수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마덕위의 손이 허리에 찬 검이 아니라 그 위의 띠로 올라갔다. 더 큰 실수를 하시렵니까? 나직한 소리가 울렸다. 마덕위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떨 었다. 그것은 그가 조직(組織)에 대해 가지 고 있는 순순한 공포의 영향력이었다. 그는 그 공포를 떨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눈 앞으로 뿌연 것이 주욱 깔렸다. 그리고 마덕위의 가슴팍으로는 누런 연기 가 다다르고 있었다. 괘씸한! 마덕위는 상대가 자신의 허를 찌르기 위해 놀리는 말투를 던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은 허리띠를 풀러 내고 있었다. 쉬이잉! 거친 바람소리가 일어나며 마덕위의 허리 띠는 쭉 펼쳐지며 한 자루의 창이 되어 있었 다. 그리고 댕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렀 다. 마덕위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누런 연기를 일으키는 손이 거기 붙어있었 다. 마덕위의 무릎이 절로 꺽어졌다. 입가에서는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 나 마덕위 자신은 그것이 더럽고 깨끗하고를 더이상 따질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절명(絶命)한 것이다. 쓰러진 마덕위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천천 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뚝 서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분뢰수를 발견했다. 아무 말없이 분뢰수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양 옆으로 뚫린 창문에서도 한 사람씩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름진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시선이 분뢰수의 뒷쪽으로 향하자 사마충 과 송학, 송추 두 도인이 보였다. 마덕위의 인도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이곳 에 이르렀을 때 그는 분뢰수를 비롯한 여럿 에게 인사를 했었다. 그것은 그가 다음대 점창의 장문인으로 내 정되어 있었기때문이었다. 사마충이 믿을 수 없는 듯 중얼거리는 소 리가 울려퍼졌다. 대체.... 진조운(陳操芸), 당신이... 진조운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독안에 든 쥐와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겁먹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한사람 한사람을 돌아보던 그는 천천히 말 했다. 날 어찌 해보겠다면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덤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중한 도전에 응하기라도 하는 듯 분뢰수 의 발걸음이 앞으로 내딛어지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은 가만이 서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진조운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서는 모락모락 누런 연기가 일어 났다. 네가 황살수(黃殺手)냐? 옆 창문으로 얼굴만 보이고 있던 화풍렬이 물었다. 진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겁들이 많으시군요. 그러고서야 어떻게 저를 잡겠읍니까? 적우자가 진조운의 비꼬는 말에 냉랭한 대 꾸를 하였다. 부골독(腐骨毒)에 중독되는 것보다는 널 놓아주는게 낫지. 진조운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분뢰수를 보았다. 당신은 내가 황살수인 것을 알면서 부골 독이 겁나지 않소? 쟁쟁한 고수라는 청성파 의 장문인과 화대공까지 저렇게 멀찍이 떨어 져 있는데? 분뢰수는 대답대신 한걸음 더 내딛었다. 그 눈가에는 핏줄이 어린 것이 보였다. 그 러나 전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태도같은 것은 없었다. 진조운도 조용히 미소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세 방향의 사람을 돌아보았다. 더 머물며 얘기를 나누고 싶으나 오늘은 본파의 장문인을 바꾸어야 하는 날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지막 말이 나올 때 그의 몸은 등 뒤의 벽으로 화살이 쏘아지듯이 날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진조운의 등이 벽에 닿자, 벽은 두부가 부 서지듯이 무너지며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다. 분뢰수는 다시 천천히 한걸음을 내딛으며 그런 진조운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적우자나 화풍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진조운은 다시 무너지는 벽을 뚫고 안으로 튀어들어왔다. 쉬이이잉--! 긴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하비랑이 무거운 감산도를 고쳐잡으며 자 신의 앞을 응시하였다. 진조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비랑을 보 았다. 자신이 등뒤의 벽을 뚫고 나가기가 무섭게 감산도가 떨어져 내릴 줄은 전혀 생각을 못 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개산도 하 비랑이 저 무식한 감산도를 휘두를 것이란 생각은 정말 못했었다. 육합개정(六合開頂)이라니... 진조운은 다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하비랑 을 보았다. 그가 펼친 것은 분명 명맥이 끊어진 육합 도법의 육합개정이었다. 십 몇년간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육합도법 이 자신의 퇴로(退路)를 막고 나타났다는 것 은 진조운에게 매우 특별하게 비추어졌다. 하비랑은 단지 칼을 쥐고 바라보고만 있었 다. 그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단지 분뢰수가 또 한걸음을 내딛고 있을 뿐이었다. 진조운은 잠시 분뢰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서 당신에게는 내 부골독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까? 청천수도 적염장도 안통했다. 황연권(黃 煙拳)도 안통하겠지. 분뢰수를 대신해 적우자가 말했다. 진조운은 그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서 비웃 음을 흘렸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황연권이 아닙니다. 그럼 펼쳐봐. 분뢰수의 도발적인 말에 진조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대살법은 그 하나하나가 익히기 까다로 운 것이고 그 중 자신이 익히고 있는 황연권 은 더욱 위험한 것이다. 자신에게도 위험하 고 대적하는 상대에게도! 진조운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그의 손은 누런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며 오그라들듯 주먹이 쥐어졌다. 방금 전 마덕위를 쓰러뜨릴 때와는 전혀 다른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쿠우우... 주먹에서 일어나는 누런 연기는 공처럼 뭉 치고 있었다. 진조운에게서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며 그 는 분뢰수를 향해 다가섰다. 이제 손만 뻗으면 그대로 상대의 어깨를 짚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진조운의 두 주먹이 그대로 분뢰수의 얼굴 과 배를 향해 뻗어갔다. 분뢰수는 그러한 것을 보았는지 못보았는 지 그대로 다시 한걸음 나아갔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앗하고 놀랄 때, 분뢰 수는 진조운의 두 팔 사이에 있었다. 진조운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자신은 두 주먹을 교차시킬 듯이 내밀었는 데 어떻게 분뢰수가 자신의 엇갈린 팔 사이 로 들어와 있는지 그는 전혀 알 수가 없었 다. 분뢰수는 두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진조운 의 양쪽 관자놀이를 그대로 짚어갔다. 풀썩. 간단하게 진조운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화 풍렬도 적우자도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하비랑이나 사마충, 송학, 송추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신화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 는 것 같았다. 누런 공이 매달린 듯한 진조운의 두 주먹 이 그대로 분뢰수의 몸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분뢰수는 그 팔 사이로 들어가 있 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분뢰수는 쓰러진 진조운을 조용하게 내려 다 보았다. 3 유홍광(劉洪廣)은 머리에 털나고 이런 꼴 을 겪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점창파에 들어오고 한때는 장문인 의 물망에 까지 오른 만큼 그는 문파에 대하 여 강한 긍지(矜持)와 자부심(自負心)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들의 본거지 에서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거꾸러 지다니... 그것도 남의 손이 아닌 바로 그 제자의 손 에 말이다. 뛰어가는 유홍광의 앞에 또 한 사람이 달 리고 있었다. 황의(黃衣)를 걸친 소녀였다. 손에 칼을 쥐고 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유 홍광의 눈에도 거칠게 보였다. 수수(秀秀)! 유홍광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도 앞서가는 소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소녀는 단지 달리면서 잠깐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했다. 유숙부! 그리고는 횅하니 앞으로 뛰는 것이었다. 유홍광은 다급하게 외쳤다. 수수! 서둘지 마라! 서두르면 안돼!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성질이 급한 편에 속하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 달려나가는 황의소녀는 기련산에서 실종된 마단걸의 딸인 마수수였다. 유홍광의 다급한 외침이 마수수를 따라잡 기도 전에 마수수는 이미 사건의 현장에 뛰 어들어 소리지르고 있었다. 어떤 놈들이 감히 본파에서 살인(殺人)을 했느냐! 소녀라고 하기에 너무 엄청난 소리가 쩌렁 거리며 울려퍼졌다. 사마충은 평소같으면 이렇게 소리지르는 꽃다운 아가씨를 보면 귀엽다고 웃고 말았겠 지만 지금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손에 시퍼런 칼을 들고 살기등등하게 외치 는 마수수의 모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수수! 물러나거라! 뒤따라온 유홍광이 외쳤을 때 장내의 인물 들은 모두 황의소녀 마수수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무슨 계집애 목청이 저 모양이냐... 화풍렬이 어이없어 하며 중얼거렸다. 이 늙은이가! 마수수의 입에서 험상궂은 말이 튀어나오 기 전에 그 앞을 유홍광이 막아섰다. 수수, 좀 가만있거라! 유홍광은 일단 씩씩거리는 마수수를 가라 앉혀놓고 손님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적우자에게서 멈추었다. 아니! 적우자 선배님! 언제 오셨읍니까? 놀란 유홍광의 말에 적우자도 놀라 되물었 다. 우리가 온 것도 몰랐었냐? 저는 사해표국 사람들이 묵고간다는 말만 들었는데... 그의 이 말에 하비랑과 사마충의 입가에 저절로 쓴 웃음이 매달렸다. 점창파에서 그들을 별로 중요시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의 확인에 지나지 않았으나 역시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홍광은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쓸 틈이 없었다. 그의 눈에는 손에 창자루를 잡고 쓰러져 있는 마덕위의 모습이 들어왔고, 무너진 벽 에 걸쳐 누워있는 진조운이 보였다. 진조운의 손에 감도는 누런 연기가 아직도 다 가시지 않아 유홍광은 똑똑히 볼 수가 있 었다. 저, 저건 독(毒)... 무슨 독인지는 몰라도 유홍광은 대번에 사 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마덕위의 가슴 찢겨진 옷 사이로는 독장 (毒掌)에 당한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오기 전에 들었던 일이 거짓이 아니 라는 증거가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이다. 도대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유홍광은 장내의 사람들을 돌아볼 뿐이었다. 이놈이 감히! 사태를 대략 듣고 난 유홍광의 얼굴에 분 노가 어리어 진조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진조운은 쓰러진 채로 그대로였다. 유홍광은 이미 그를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진조운은 도무지 어떻게 제압당했는지 전혀 움직일 기색이 아니었다. 유홍광은 적우자를 보았다. 적우자는 고개를 저으며 분뢰수를 향해 눈 짓을 했다. 그러나 분뢰수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한 쪽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꿀꺽, 꿀꺽...... 화풍렬의 술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유홍광은 분뢰수에게 진조운을 풀어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그것은 유홍광 뿐이 아니었다. 장내 누구도 분뢰수에게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화풍렬은 술이 취했는지 곧 어슬렁 거리며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더불어 분뢰수도 장내를 떠났다. 그러는 동안 유홍광은 몇번이고 물어야한 다고 다짐을 했으나 목구멍에 걸리는 말은 꺼내지지를 않았다. 적우자가 그런 유홍광을 보면서 넌지시 말 했다. 어차피 이놈은 황살수이니 물어도 소용은 없을거야. 유홍광의 안색은 완전히 백지(白紙)처럼 변하고 말았다. 황살수라니요? 그럼 이놈이 오대살법 가 운데 황살법을 익혔다는... 나오는 대로 말을 하던 유홍광은 자신이 본 누런 연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고 입 이 저절로 닫혔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곁에 있던 마수수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 왔다. 그러나 곧 유홍광의 손짓에 의해 마수수는 입을 다물었다. 마수수에게는 유홍광은 아버지와 동격(同 格)이었다. 유홍광과 마수수의 아버지는 항상 같이 어 울리는 사이였다. 적우자가 돌아서며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자러가야겠네. 우린 내일 일찍 좀 떠나야겠어. 그리고 하비랑과 사마충 역시 정중하게 예 를 표하고는 물러나 버렸다. 결국 장내에는 점창문인들만이 망연한 모 습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날이 밝았다. 정원에는 새들이 지저귀며 새로운 날이 밝 았음을 알리고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유홍광의 마음은 특히 더 무거웠다. 지금 점창파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떤 판단 도 내릴 수 없었고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유홍광의 행동을 막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에게마저 변고가 생길 경우 더 이상 점창파를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친구의 딸이지만 자신의 딸과도 같이 여기는 마수수 때문이었다. 그는 마단걸에게 만약의 경우 자신이 마수 수를 돌보겠다고 약속했었다. 단걸... 자네가 없는 동안 내가 수수는 내가 보살피기로 했네만... 그러나 지금 유홍광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신에게 점창파의 앞날이 걸린 이상 최선 을 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쾅!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마수수였다. 언제나 걸치고 다니는 황의를 걸치고 두 손을 허리에 짚었는데 옆구리에는 장검 한 자루가 달랑 매달려 있었다. 이목이 뚜렷한 만큼 장검도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화사해 보이는 입술이 열리며 어울리지 않 아 보이는 거친 질타가 쏟아졌다. 유숙부! 도대체 뭘 그리 망설이시는 거에 요! 아니, 이대로 저 사람들에게 망신만 당 한 채로 끝날 건가요? 그래가지고 어디 점창 파를 대문파라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도 가 요! 같이 가서 기련산의 그 이상한 녀석을 잡아 보이자고요! 그러면 누가 감히 저희를 비웃겠어요! 느닷없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일장 웅변 (雄辯)을 토해내는 마수수를 멍하니 보던 유 홍광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문인의 죽음이 기련산맥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 다. 말없이 마수수를 보던 유홍광의 눈에서 웃 음기가 감돌고 마침내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마수수도 활짝 웃었다. 그래, 가자. 가서 네 아버지도 찾고 점창 파의 위세도 찾자. 사해표국의 표행에는 새로이 단월검(斷月 劍) 유홍광이 참석하게 되었다. 입가에서는 한숨만이 맴돌았지만 아무도 그가 한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 었다. 그것은 사해표국의 국주인 하비랑도 마찬 가지였다. 사마충은 그래서 더욱 고민이었다. 잘된 일이군요, 사마형. 송학의 격려도 사마충에게 별 도움이 되지 를 못했다. 이제 사해표국의 신용(信用)이 어떤 꼴이 될지 감감했던 것이다. 유홍광은 마수수와 함꼐 점창문인 십여 명 을 거느린 채 표행의 선두를 맡아주었다. 이제 점창파 영역내에서는 어떤 자들도 감 히 이 표행을 건드릴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 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표국의 신용이 어찌 되겠는가? 아마도 이 표행은 사 해표국의 깃발만 걸고 실제로는 점창파의 표 국이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게될 지도 몰랐 다. 그러나 사마충을 뒤따르는 표사들의 생각 은 전혀 달랐다. 일개 표사로서, 아무리 우두머리 입장이라 고는 하지만 대문파(大門派)의 사람들앞에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하는 사마 충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영웅적으 로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눈길을 사마충은 더욱 부담스러워 하 고 있었다. 그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깊은 경험 의 표사는 뒤쪽 마차안에서 역시 대단하기 짝이 없는 두 노인네와 함꼐 콧배기도 비추 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노인 네들조차도 대단하다고 하는 분뢰수가 표행 의 중간에 서서 걷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분뢰수의 모습은 사마충만이 아니고 표사들에게조차 경이로운 것이었다. 사마충은 분뢰수를 눈에 담고서 천천히 송 학에게 말했다. 그래... 잘된 일이야... * * * - 표행은 성하장원을 통과. - 황살수 생포됨. 두 줄의 글로 인해 그는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남아 있는 살수는 오직 둘 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은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엇인 가가 방해한다는 느낌이었다. 흐흐흐... 설마... 루주(樓主)가 살아있 기라도 한단말인가? 나에게 이 모든 것을 물 려주고 죽은 것이 아닌가? 그가 아니라면 이 렇게 모든 것이 도막나듯 끊어질 수 있을 까? 그는 가장 생각하기 싫은 것을 생각하느라 자신의 손에 쥐어진 천리구가 파닥거리는 것 을 모르고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천리구의 몸에서 피 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구구구, 거리는 천리구의 비명은 커져도 그의 귓전에 하나도 들어오지를 않고 있었 다. 한 마리의 죽음으로 인해 주위의 많은 새 들은 덩달아 요란하게 울부짖고 있는 곳이었 다. * * * <또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나는 것을 보았 다. 죽은 자가 날린 비둘기가 한 마리... 그 리고 또 한 마리가 날았다.> 第 六 章 山 1 사마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걱정한 것과는 달리 유홍광이 자신의 의견을 상당부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점창파의 위세를 내세워 자신을 완전 히 무시했어도 사마충으로서는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홍광은 처음 성하장원을 출발할 때와는 달리 공동산 경계에서부터는 사마충 에게 표행의 경로를 물어보았고, 사마충이 말한대로 표행의 선두를 이끌어주었다. 기련산맥을 넘어가는 표행은 대부분 정해 진 길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사마충이 선택한 길은 공동산( 山)을 경유해서 기 련산맥(祁連山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유숙부! 왜 우리까지 그들에게 인 사를 해야한다는 것이에요? 옆에서 보고 있는 사마충은 좀 민망해졌 다. 마수수의 말이 전혀 근거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동파와 점창파의 우열은 언제나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好事家)들의 이야기거리였 다. 그런데 지금 점창파가 이곳을 지나면서 먼 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일단 지 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마수수는 통고만 해도 충분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마충의 눈에 이 표행이 사해표국 의 밥벌이라는 것을 조금도 이해못하는 마수 수가 그리고 곱게 보이지는 않는 것도 당연 한 일이었다. 점창파가 지원하는 비호표국(飛虎票局)이 라면 무엇때문에 공동파에 인사차 들리겠는 가? 예쁜 아가씨이기는 하지만... 전혀 마음 에 들지 않아! 사마충은 입밖에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 렸다. 유홍광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수수, 사마표두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이번 일에 우리가 불청객이란 것을 생각해야지. 그러나 마수수는 이런 점잖은 충고를 전혀 들을 기색이 아니었다. 다시 뭐라고 떠드는 마수수의 말은 전혀 사마충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사마충의 신경이 저쪽에서 오는 일행에게 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홍광도 그 일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아갔다. 마수수는 더욱 언잖은 듯 입을 다물고 낯 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미 유홍광은 다가오는 공동파의 일행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마중나와 주어 고맙습니다. * * * 공동산( 山)에는 광성자(廣成子)라는 옛 선인(仙人)의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선도(仙道)쪽보다는 불가 (佛家)의 세력이 공동산에 더 큰 영향을 끼 치고 있었다. 당대 공동파의 근거지는 산중에 위치한 사 원이었다. 공동의 장로 요공(了空)의 안내를 받아 표 행은 귀원사(歸源寺)에 닿았다. 사마충은 유홍광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성하장원을 출발할 때 이미 공동파에 연락을 취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귀원사에는 손님을 맞이할 준 비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화풍렬이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술단지였 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화풍렬은 술단지 를 들고 입에다가 쏟아붓고 있었다. 성도에서 떠나 공동산까지를 불과 며칠이 라는 짧은 기간동안 온 일행이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세 먹고마시며 일행이 피로를 푸는 동안 요공은 적우자 일행과 하비랑, 사마충등을 따로 대불전(大佛殿)으로 안내했다. 요공이 화풍렬에게 다가와 합석을 권하려 하자, 화풍렬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술단지를 기울일 뿐이었다. 화선배, 꼭 참석하시라 부탁드리겠읍니 다. 요공은 그래도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화풍렬은 눈동자만 굴려 요공을 보았다. 요공의 눈빛은 진지하였으나 화풍렬은 다 시 손만 내젓을 뿐이었다. 그러나 요공은 다만 빙긋이 웃으며 그 자 리에 서서 화풍렬을 지켜보았다. 화풍렬은 이제는 아주 신경도 쓰지않겠다 는 듯 술단지를 더욱 기울였다. 좔좔거리는 소리가 퍼지며 술은 그대로 줄 기줄기 화풍렬의 입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야, 이녀석아! 빨리 이리오지 못해! 난데없이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가 화풍렬 의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울려퍼졌다. 놀란 화풍렬은 고개를 세우며 술단지에서 입을 떼고서 자신에게 소리지른 사람을 보았 다. 흰 눈섭이 보이고 주름이 눈까지 덮어내린 노승(老僧)이 화풍렬을 향해 서 있었다. 어찌나 늙었는지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 는 것처럼 노승은 좌우로 동자승에게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런 노승에게서 어찌 방금같은 낭랑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는지 좌중은 순식 간에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특히 공동파 사람들은 아주 숙연한 자세로 노승을 향하고 있어 노승의 동작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화풍렬은 귀신이라도 본 듯 멍한 표정으로 노승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도대체 여태 안죽고 살아 있었어 요... 어른한테 하는 말버릇이! 이리와! 노승의 말에 화풍렬은 한숨을 푹 내쉬다가 옆에 뜯지않은 술단지 하나를 들고는 어슬렁 거리듯이 노승을 따라갔다. 요공과 함께 부축받은 노승이 들어오는 것 을 보자 적우자의 안색은 대번에 변하고 말 았다. 적우자는 이 노승을 사십년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적우자의 사부와 함꼐 와서 소개받은 것이다. 노승은 요심(了心)이란 법호를 가진 원로 (元老) 선배였다. 아마도 이 노승은 당대무림(當代武林)을 통털어 가장 높은 배분의 선배가 틀림없을 것이었다. 적우자가 공손히 인사를 하자 요심은 주름 진 낯을 더욱 구기며 웃은 소리를 내었다. 허허... 정말 자네 오랜만이군. 아주 의 젓해졌어. 벌써 일흔이 다된 적우자였으나 요심에게 는 여전히 사십년 전의 모습으로 비추이는 듯했다. 적우자는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사부보다도 선배인 이 노승은 사십 년 전에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였던 것이 다. 그래 그래 모두 앉으라고. 이봐, 화가야! 너도 빨리 들어와 앉아. 화풍렬은 술단지를 손에 올려놓은 채로 얼 굴이 구겨져서 들어왔다. 요심이 좌정하고 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은 모두 이 노승을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다. 요심은 물끄러미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 다. 뭐에요? 빨리 말씀하세요. 화풍렬이 못참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요심은 나직하게 장탄식을 토해내었다. 휴우-- 이봐, 부탁 좀 하겠네. 우리 애들 좀 찾아주겠나? 공동삼수라고 이름난 망나 니 녀석들 말이야. 기어이 제 놈들 고집대로 하더니 소식이 끊어졌지 뭔가? 부탁 좀 하자 고. 듣자하니 자네들은 이번에 점창파와 함 께 그리고 간다며? 요심의 말에 앉아있던 사마충은 자신도 모 르게 하비랑을 보았고 하비랑은 입이 저절로 벌어져서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는 표정이 가득하여 요심과 요공을 번갈아 볼 따름이었 다. 얘기가 어째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지? 사마충으로서는 기련산맥을 무사히 통과하 는 것이 관건이었다. 기련산맥을 통과해서 표물을 무사히 전한 다! 그것만이 지금 사마충이 생각하는 전부라 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런 표행을 돕기 위해 화풍 렬이 따라오고 적우자가 따라오는 것이라 생 각하는 사마충이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가는 곳마다 서로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도데체 자신들이 표물을 운반하는 표행을 하고 있는건지 강호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는 협객행(俠客行)을 하고 있는건지 도무 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화풍렬은 켁켁거리며 넘어가던 술 몇 모금 을 도로 뱉어냈다. 적우자는 설마 이 노선배가 이렇게 노골적 으로 이야기를 끄집어 낼 것이라고는 생각못 해서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나 곧 지난 날에도 이 요심이란 승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는 무조건 하고 마는 사람임을 기억 속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요공은 옆에서 그저 모르는 척 아무 소리 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요심과 같은 요자배(了字輩)항렬이었 다. 그러나 요심은 요자항렬의 최초의 사람이 고, 요공 자신은 요자항렬의 마지막 사람이 었다. 그 이유는 요공의 사부가 그의 재질을 높이 사서 거의 두 배분을 무시하고 그를 직 접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요공의 지위는 공동파에서 상당 히 높은 것이나 그만큼 조심스러워 하는 점 도 있었다. 지난 번에 점창파에서 도와주어 기련산맥 의 길목에 출몰한다는 그 이상한 것을 잡으 러 가긴 했는데 그만 아직까지 죽었는지 살 았는지 소식조차 없어! 그래 내가 답답해 죽 겠어. 요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풍렬이 말 을 받았다. 그것도 괜찮군요. 요공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화풍렬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화풍렬은 그 한마디만 하고 그냥 술단지를 들어올려 입가에 대고 있었다. 공동삼수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읍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정중한 태도로 적우자가 물었다. 요공이 고개를 저었다. 적우도사, 우리가 알면 여태 가만 있었겠 소? 사실 짐작가는 것이라고는 그 연혼전인 가 하는 놈들이 기련산맥을 한동안 휘어잡았 으니 그 잔당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 뿐이 오. 적우자는 흘끔 요공을 보았다. 설마 공동삼수가 실종된 다음에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역시 정중한 태도이기는 했으나 적우자의 말투는 매우 신랄하였다. 요공도 이를 느낀 듯 약간 붉어진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성과가 있을 리가 없지요. 무능력하고 허 세만 부릴 줄 알지 할 줄 아는게 있겠어요? 목소리는 어린 티가 나는 아가씨이지만 꺼 내놓는 말은 공동파에게 상당한 모욕이었다. 수수! 뒤늦게 유홍광이 외쳤으나 이미 마수수의 말은 나온 뒤였다. 요공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 마수수를 보았 다. 허허허허.... 어린 아가씨가 정말 보는 눈이 있네... 요심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도저히 부축을 받아 다니는 노인의 목소리 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쩌렁거리며 울리는 요심의 말소리였다. 유홍광은 그 자리에 일어서서 포권하며 사 과했다. 죄송합니다. 질녀가 아직 철이 없어서 결 례를 했읍니다. 아니, 아니야. 사실인걸. 우리 애들이 철 이 없어서 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아가씨 아 버님까지 행방을 모르게 되었지 않은가? 당 연한 말을 한거야. 요심이 고개를 저으며 한 말에 요공은 불 만의 기색은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 앞에서 뭐라고 하기에는 워낙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요공뿐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 다. 그러나 화풍렬만은 한마디했다. 사람을 찾아놓고 그런 말을 해야 농담이 되지요. 그 말도 맞아. 하하하하... 요심이 웃었다. 요공은 정말 대책없는 표정이 되어 요심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자제해 주시지않고... 요공의 불만이 어찌되든 요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 이봐! 자네도 이리 들어와 앉지 그러 나? 요심은 분뢰수를 보고 말했다. 분뢰수는 전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그저 가만히 있었다. 화풍렬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칙칙한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 확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절 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유홍광은 묵묵히 서 있는 분뢰수를 보고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히려 잘 되었구나. 이 노승이라면... 생각이 떠오르자 유홍광은 조심스럽게 말 을 꺼냈다.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읍니다만... 어? 부탁? 뭔데?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 다니... 허허허... 이게 몇년 만인지? 그래, 말해보게나. 비록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얼굴은 온통 쭈그렁바가지같은 요심이었으나 그 낭랑한 목소리는 진정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마력같은 힘을 담고 있었다. 유홍광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말할 수 있 었다. 예, 실은 이번에 저희 장문인의 변고때 저 분이 한 사람을 잡아주었읍니다. 그런 데... 어떻게 했는지 도저히 저희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읍니다. 요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있지? 오는 동안 줄곧 마차안에 처박혀 있던 진 조운이 실려나왔다.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손가락하 나도 마음대로 못움직이는 그대로였다. 요심의 주름잡힌 앙상한 손가락이 진조운 의 몸을 천천히 더듬어나갔다. 유홍광은 요심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알 아볼 수 있을까하다가 쓴 웃음을 짓고 말았 다. 온통 주름만 보이는군... 요심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봐, 너도 꼼짝못했냐? 요심의 질문에 화풍렬은 일체 답하지 않았 다. 그저 술단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 었다. 적우자가 이 질문에 눈살이 찌푸러들어 화 풍렬을 노려보았다. 역시 보이는 것은 술단 지뿐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태 저대로 내버려두었 어? 속은 기분에 울컥하는 적우자의 귓전에 혀 를 차는 요심의 말이 들려왔다. 쯧! 화가야, 넌 아직도 그 성질을 못버렸 구나... 유홍광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물어보아야 할 것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지금껏 그것을 참아온 것이다. 어떻게 되겠읍니까? 요심은 유홍광의 얼굴쪽으로 얼굴을 돌렸 다. 그러나 그 주름진 얼굴이 웃는 것인지 아 니면 우는 것인지 유홍광은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요심은 손가락을 들어 화풍렬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저녀석의 장기(長技)라고 해도 무방 한 수법이지... 저녀석의 검법이 이런 걸 주 로 하지. 이 말에 유홍광은 어리둥절해져서 화풍렬 을 보았다. 지금껏 이 꾀죄죄해 보이는 주정뱅이 늙은 이가 이십여 년 전 철검비환 화대공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유홍광은 반신반의하고 있었 다. 아무리 보아도 지난날 그토록 엄청났다던 고수의 풍모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다만, 적우자가 한발 양보하는 것을 보 고 자신도 한발 양보한다는 태도를 유지한 것이다. 요심의 말은 화풍렬이 진조운을 깨울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화풍렬은 도저히 그런 능력을 가진 인물로 는 보이지 않았다. 좋아, 좋아. 심문은 청성장문인과 화가가 있으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남아서 보고싶은 분은 보시고.... 난 저 손님하고 잠깐 따로 이야기를 해보고싶어... 요심이 느긋하니 가리킨 것은 분뢰수였다. 2 귀원사는 큰 절이었다. 요공이 전체 규모가 삼천간이라고 자랑스 럽게 말하지않아도 이미 모두 놀라고 있을 만큼 큰 규모의 절이 바로 귀원사였다. 공동산의 정경과 어우러진 귀원사의 모습 은 웅장함을 당당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좋았 다. 이 귀원사가 자리한 곳보다 좀더 산 정상 에 가까이 가게되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암 자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암자에는 평소 공동파의 제자들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곳에는 공동파의 장로들이 기거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로원(長老院)이라고 해도 좋은 암자 에 몇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공동 파 제자는 매우 드물었다. 다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요공만이 자주 귀원사로 내려와 그들에게 낯익은 사람이었 다. 암자의 고적(孤寂)함으로 인해 산새들의 지저귐은 다른 곳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려왔 다. 그곳에 분뢰수가 요심과 함꼐 와 있었다. 자, 들어가지. 요심은 요공의 부축만을 받고 있었다. 암자에 올때 요심은 동자승들을 귀원사에 있게 하고 요공의 부축만을 받은 것이다. 요공은 그런 일에 익숙한 듯 능숙하게 요 심을 부축하고 있었다. 분뢰수는 묵묵히 요심의 주름진 얼굴을 바 라보았다. 안 들어가겠나? 요심이 다시 물었다. 분뢰수는 그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 는지 그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요심의 축 늘어진 볼이 부푸는 듯하며 웃 음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이 방은 내가 머무는 곳이야. 다른 것은 없어. 난 자네에게 잠깐 보여줄 것이 있을 뿐일세. 분뢰수의 눈빛이 모호하게 흐려졌다. 칙칙하고 암울한 가운데 재처럼 꺼져드는 기묘함이 사방을 휘저어 놓았다. 요공은 분뢰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벌써 일년 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저 대막(大漠) 건너펀 의 서천지계(西天之界)에서 대막을 가로질러 들려온 전혀 확인할 근거가 없는 소문에 불 과했었다. 한데 지금 그 소문을 요공은 몸으로 체험 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기 곤란한 어떤 숨막힘같은 느 낌이 온몸을 옭아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한 순간에 불과했다. 분뢰수가 요심을 따라 방으로 걸음을 옮기 면서 그 이상한 느낌은 사라진 것이다. 요공은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인가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들이 지저귐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 왔다. 분뢰수 앞으로 요심은 불쑥 낡은 책 한 권 을 내밀었다. 책은 너덜너덜 거리고 있었으나, 그 위에 써있는 글자는 지금 막 써놓은 듯한 묵향(墨 香)과 함께 약동하고 있었다. 요심은 책을 내놓고 잠시 선정(禪定)에라 도 빠진 듯 침묵 속에 머물렀다. 낭랑하고 웅장하게 퍼지던 요심의 목소리 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꼭 태풍이 지난 후의 연못과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분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을 슬쩍 보고 그만이었다. 요심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처럼 가만 히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 다. 이것은 광성자의 비급일세. 요심이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분뢰수는 여전히 침묵속에 빠져 있었다. 요심의 얼굴에 주름이 한층 더 늘어났다.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익히고 있었다면 좋을 뻔 했는데... 불과 얻은지 일년이 못되었다네, 그래서 난 그저 가지고만 있지. 요심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분뢰수의 태도에는 전혀 아무런 반응이 없 었다. 흡사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세 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분뢰수는 광성자 의 비급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요심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조급하 게 굴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일년 전에 대막을 가로지르는 상인(商人)에게 들은 이야기를 아주 잘 기억 하고 있었다. 지금 눈 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 산발(散髮)해서 그냥 내버려둔 머리카락. 칭칭감아놓은 얼굴에서 빠꼼히 드러내논 칙칙한 암적색(暗赤色)의 눈. 엄지만을 내놓고 다른 네 손가락은 모조리 묶어놓은 기괴한 손. 무엇인지 모를 길죽한 보따리. 어느 한 가지 그가 전해 들었던 것과 일치 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다면 성격에 관한 부분도 맞을 것이 다.... 금은보화가 아니라 그보다 열배 더 귀한 것에도 전혀 관심없는 사나이. 관심있는 것은 오직 강한 상대. 그를 가리켜 서천지계의 사람들은 최고의 투사(鬪士), 투사중의 투사라 불렀다. 그런 그가 간 곳은 천축(天竺)이라고 요심 은 들었다. 그리고 천축에서 서장으로, 곤륜을 거쳐 이제 이 사천에 들어선 것이다. 자네는 나와 싸워보고 싶은 것인가? 요심은 불쑥 물었다. 이 말에 분뢰수가 처음으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분뢰수에게서 발산되고 있는 거미줄같은 분위기는 요심을 휘어 감아갔다. 싸움이란 말은 분뢰수에게 기묘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단지 싸움 은 싸움이란 상황을 생각나게 할 뿐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뢰수가 듣는 싸움 이란 지상(至 上)의 권위를 가진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분뢰수의 눈빛이 명확하게 이 뜻을 드러내 고 있어 요심은 모르척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이십년 만 젊었어도 자네하고 한 번 싸워주었을 텐데... 이렇게 늙어 그렇게 못하게 된 것이 유감일세. 요심의 모습은 요심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 하고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앙상하게 마른 몸, 나뭇가지 같아 보이는 팔과 다리. 그리고 거 동조차 어려워 부축을 받는 그는 자신의 말 대로 늙어서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 다. 그러나 분뢰수의 눈빛은 더욱 암울해져가 고 있었고, 눈자위의 붉은 기운은 한층 더하 고 있었다. 덜컥!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기묘한 분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네가 분뢰수냐? 대뜸 들려온 소리는 요심이 미처 뭐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들어온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건장하고 튼튼한 몸매와 굵은 팔뚝이 눈에 확 띄는 두 승려. 그러나 그들의 몸에 새겨진 나이테도 그만 큼 선명했다. 분뢰수의 눈이 먹이를 찾은 짐승과 같이 번뜩이며 그들을 향했다. 요심은 이젠 입을 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분뢰수와 자신의 두 사제(師弟)는 이제 한 바탕 싸워야 한다. 지난 삼십여 년간을 자신이 붙들어놓고 꼼 짝못하게 했던 공동쌍독( 雙毒)은 이미 분뢰수의 거미줄에 걸린 것이다. 요공은 열린 방문을 보며 입만 벌리고 있 었다. 그는 이해하기 곤란한 상황이 되면 생각하 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있 었다. 두 사형이 폐관(廢關)을 마치려면 아직 이년은 더 있어야한다. 그런데 그 두 사형은 연공관이 아닌 자신 의 코 앞에 와 있었다. 휙휙하는 거친 바람소리를 남기며 두 사람 은 암자의 넓은 마당위로 옮겨섰다. 그들을 따라 천천히 방에서 분뢰수가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도 얌전하고 손과 발도 얌전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요공의 눈에는 사냥하기 전에 절뚝 거리는 호랑이가 보였다. 이글거리는 두 눈의 붉은 기운은 칙칙한 눈빛을 덮어버리고 흩어진 머리카락은 암자 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휘날렸다. 불과 사방 오장 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세 사람이 마주 보고 선 것이다. 요공,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요심이 멍하니 서 있는 요공에게 물었다. 저,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도대체 어떻게 요위(了威)와 요좌(了左) 두 사람이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요공은 전 혀 몰랐다. 그렇지만 이미 나타난 공동파의 문제원로 들은 온몸에서 강렬한 기세를 발산시키고 있 었다. 요심이 가볍게 혀를 찼다. 저래가지고 일초(一招)나 제대로 버틸 까... 이보게, 분뢰수! 저 녀석들을 그 진조 운인가 하는 녀석처럼 만들어줄 수는 없겠 나? 괜찮다면 정신만은 말짱하게 해서 말이 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요공의 낯빛이 절 로 변했다. 요공이 듣기에 너무도 기막히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요위와 요좌는 전혀 듣지 못했 다. 지금 그들에게 보이는 상대는 분뢰수이고, 그들의 귓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는 분뢰수의 옷자락스치는 소리와 침착하게 내딛는 발걸 음 소리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요좌와 요위는 꼼짝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요좌의 손이 움직였다. 요위가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요공은 자신이 본 것을 기억했다. 요심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오 고 그의 머리는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지금 요좌와 요위가 땅위에 몸을 누 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요공은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은 아니었을까 다시 생각해보았다. 허공을 가르는 하얀 번개. 그 하얀 번개가 한 순간에 분뢰수의 몸에 서 뻗어나온 것이다. 몇 줄기의 번개가 번쩍 거리며 요좌와 요위의 가슴을 짓이기는 장면 이 선명했었다. 사람의 손이 번개가 될 수 있다는 말인 가? 요공 자신의 손놀림도 매우 빨라 한때 섬 전수(閃電手)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손놀림도 결국은 손그 림자를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지저귀던 새들마저도 어디로 달아났는지 암자에는 바람소리가 스칠 뿐이었다. 요공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 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고동치는 것도 확연하 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열기가 그의 온몸을 휘저어갔 다. 분뢰수(奔雷手)라... 진정 명실상부한 이 름이군... 요심의 나직한 감탄이 장내를 가득 매울 수 있었다. 덕분에 요공은 자신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요공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었다가 자신에 게 쏟아지는 이상한 눈빛을 느끼고는 깜짝놀 랐다. 그 눈빛은 무엇인지 암울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고 그 기분을 바꾸려면 누구와 싸 워야한다는 사명감마저 들게 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들려온 늙은 목소리 한가닥 이 요공을 진정시켰다. 아직 미숙한 애들이지... 찬물을 뒤집어 쓴다해도 이렇게 정신이 번 쩍 나지 않을 것이다. 요위와 요좌, 두 사형 도 요심의 눈에는 애들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도 그런 애가 되려했었 다. - 그 앞에서는 누구든 투사(鬪士)가 되고 만다! 그 서천지계에 널리 퍼진 소문을 요공은 절실하게 체험한 것이다. 요심의 말은 계속되었다. 괜찮겠지... 한번쯤은 정신이 들도록 맞 아보는 것도. 진조운의 목에서 켁켁하는 소리가 들려오 자 화풍렬의 손이 멈추었다. 적우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불진을 쥔 손에 슬몃이 힘을 주었다. 진조운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라면 그 는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부시독을 언제라도 뿜어낼 것이다. 그러면 그 자신뿐 아니라 앞 으로 청성파를 이끌어 가야하는 재목 둘이 위태로워진다. 그리고 공동파는 한바탕 난리를 치룰 것이 다. 화풍렬은 천천히 돌아서서는 술단지를 안 아들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없어. 겨우 일어난 녀 석이니 말썽은 부리지 못할 거야. 그뒤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수수였 다. 진조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건가요? 평소 대사형이라고 깍듯이 공경하던 목소 리의 질타였다. 진조운은 그 목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처지 를 생각해낸 듯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케케하는 소리가 진조운의 목젖을 타고 올 라왔다. 나한테... 무슨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하 나... 바보로군... 힘겹게 흘러나오는 소리지만 비웃은 어투 가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마수수가 벌컥 화를 내며 칼자루를 잡아갔 다. 수수! 가만히 좀 있어라. 유홍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수수를 만류 하고서 진조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조운은 그 눈길을 피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마주 볼 뿐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 자랑스러운가? 유홍광은 그가 전혀 죄책감같은 것이 없음 을 깨닫고 침울하게 물었다. 거친 소리의 대 답이 돌아왔다. 뭐가 부끄러워서? 챙! 쇳소리와 함께 분노한 마수수의 칼이 그대 로 진조운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칼은 아무소리도 없이 그대로 불진에 휩싸여 멈추고 말았다. 마수수는 화가 나서 붉게 물든 얼굴을 돌 려 적우자를 쏘아보았다. 그의 불진은 여전 히 마수수의 장검을 휘어잡고 있었다. 유홍광의 질책이 떨어졌다. 그만두지 못하겠니! 수수, 이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거냐! 크크크... 내가 유일한 단서란 말이군 요... 목숨을 구해주어 고맙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진조운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적우자는 차갑게 그를 한번 보았다. 진조운의 얼굴에는 비틀린 웃음이 그어져 있었다. 화대공께서 그리 외면하지 않으셔도 좋을 겁니다. 당신이 누구라는 것도 모를줄 알았 읍니까? 진조운의 비웃는 말투에도 화풍렬은 그저 뒤돌아서서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진조운의 말이 많아지면서 그의 목젖에서 는 점점 더 심하게 케케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거기에 말소리도 함께 나왔다. 날 우습게 알면 곤란합니다... 당신들은 내게서 들어야 할 말은 있읍니다... 그러나,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진조운의 말에 유홍광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지금 자신들이 심문하려는 상대는 분명 고 통으로 인해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가 가 다른 사람에게 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그 러나 진조운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수라고 큰소리는 치고 있어도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읍니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전부지요... 진조운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엇! 화선배! 적우자가 놀라 외쳤다. 화풍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진조운의 입에서 토해지는 피 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흘깃 보고는 마는 것이다. 진조운은 다시 피와 함께 말을 토해냈다. 구천회(九天會)가 아무리 신비롭게 굴어 도 결국... 굴복하고 말겁니다... 구천회? 유홍광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터졌다. 말로만 듣던 신비로운 단체였다. 이른바 강호의 기인이사(奇人異士)들로 구 성되어 무림의 정의(正義)를 지킨다는 정체 불명의 조직. 그 이름이 거론된 것이다. 적우자는 의아한 기색으로 진조운을 보다 가 화풍렬을 돌아보았다. 진조운이 어째서 막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지 적우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고 있었고 혀 를 깨물 힘도 없을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진조운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승에 남기 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남겼다. 부, 부시독이다! 누군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누군지 알려고 들 겨를이 없었다. 진조운의 몸에서 풀썩거리며 솟구치는 누런 연기는 틀림없는 독연기였다. 닿으면 중독되고 중독되면 죽을 것이다. 모두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화풍렬은 그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술단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코로 이상한 냄새가 스며 들었다. 대불전에 있던 여러 사람은 그것이 해로운 것인지 어떤지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가 없 었다. 냄새를 맡는 순간에 뱃속이 되집어지 고 구토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수수는 특히 심하게 구역질을 했다. 눈도 돌리지 않고 진조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조운의 시신은 누런 연기에 휩싸이면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살 아있던 자가 누런 물이 되어 흐르고 살갗아 래 감추어져 있던 피와 살이 같이 흘러내리 는 광경이 마수수의 얼굴을 흙빛으로 만들고 구역질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수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렇게 심하게 구역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 요공은 눈자위를 문지르며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눈위로 퍼렇게 멍이 든 것이 보였다. 웃통을 벗어본다면 몸에도 몇 군데 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번개에 맞았는데 멍이 든 정도로 끝난 거라면 다행이면 다행이었다. 결코 심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정신이 번쩍 드는군... 이제 그가 생각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그리고 요공은 결정을 주저하는 성격이 아 니었다. 그는 이제 최강(最强)의 조직(組織)에 가 입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분뢰수가 아무리 강해도 단지 혼자일 뿐이 다. 아니, 분뢰수보다 몇배나 강한 그 누구라 해도 결국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광성자의 비급을 절반가량 익힌 자신이 문파 에 별 도움이 못되듯이. 그것이 요공이 생각한 점이었다. 이것은 공동파의 장래를 위해 정말 잘 생 각한 것이다. 지금 요공은 자신의 결정에 잘못된 점을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그것은 무얼 뜻하는가? 바로 자신의 결정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닌 가? 요공은 흡족해졌다. 더 이상 그 앞에 가는 분뢰수가 대단해 보 이지 않았다. 그는 문파도 없는 떠돌이에 지나지 않는 다. 아무리 대단한 무예를 지녔어도... 분뢰수는 대불전 앞에 서서 우두커니 그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요공은 그가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졌다. 늘 보아도 별로 유심히 볼만한 것은 없는 어느 절에나 있는 대불전이기 때문이었다. 요공이 대불전 가까이에 왔을 때 뛰어나오 는 마수수를 볼 수 있었다. 마수수는 입을 가리고 뛰어나와서는 그대 로 구역질을 하다가 결국 구토를 하고 말았 다. 요공은 멍하니 있다가 얼른 대불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수수가 토할만큼 역겨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더우기 지금은 심문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 어야 할 시간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귀여워 보여도 거칠기 짝 이 없는 마수수였다. 그런데 왜 저 사내같은 계집애가 구역질을 하다가 구토를 하고 난리 를 치는가? 설마 고문이라도 한다는 건가? 대불전 안에서 고문을 한다면 그것은 공동 파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이며 도전으로 밖에 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요공의 몸이 분뢰수를 지나 대불전 안에 들어섰을 때 눈섭은 일그러들었고 손은 저절 로 입으로 옮겨갔다. 웩! 아무 대책도 없이 서둘러 들어갔던 터인지 라 요공은 그저 몸이 반응하는대로 따를 뿐 이었다. 요공은 한 순간에 뱃속에서 나온 쓴물을 토하고서 적우자를 보았다. 적우자는 낯을 좀 찡그리고만 있을 뿐이었 다. 그 뒤에는 송학과 송추 두 도인도 말없이 서 있었다. 요공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꿀꺽, 꿀꺽거리는 소리를 내는 화풍렬의 모습을 보고 요공은 물었다. 도대체 저게 뭡니까? 누렇게 물들은 채로 남아 있는 뼈무더기가 있었다. 어디서 저런 뼈무더기가 생겨났을까? 적우자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저녀석이 진조운이라네. 진... 비영검(飛影劍) 진조운? 요공은 자신이 아까 본 진조운의 모습을 뼈무더기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요공은 유홍광을 보고 말했다. 그가 독이 라도 푼 것일까? 모르겠소. 저녀석이 말을 하다가... 모르긴 뭘 몰라. 저녀석은 황살수야. 오 대살법 가운데 황살법(黃殺法)을 익힌 놈이 라고. 저 죽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그런 놈이지. 화풍렬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직한 음 성이었으나 대불전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 말 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나 요공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럼, 화선배는 저렇게 될 줄 알고 있었 군요? 적우자가 조용히 물었으나 화풍렬은 대답 하지 않았다. 적우자는 그것말고도 물을 것이 많았다. 화선배! 그러나 화풍렬은 대답없이 적우자와 일행 을 뒤로 하고 천천히 대불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요공은 잠시 고개를 돌리고 큰 소리로 나 가는 화풍렬에게 물었다. 화대공! 이 시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 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불에 태워.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아궁이 에 넣고 잘 태우라고. 그리고 아궁이를 다시 만들어. 그러면 될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화풍렬은 대불전에서 몸을 감추었다. 유홍광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그는 모든 단서를 잃어버린 셈이 되 고 만 것이다. 그가 가장 믿었던 진조운의 자백(自白)은 헛되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점창파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 니 유홍광의 머리는 온통 걱정거리로 가득찼 다. 적우자가 누렇게 변색되어가는 진조운의 남은 뼈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대단한 놈이군... 그 지경에서 저렇게 죽 어버리다니... 고개를 돌려보자 방금 전 입구 근처에서 보이던 분뢰수의 모습도 구토를 하느라 밖으 로 뛰어나간 마수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 다. 적우자는 하비랑을 보았다. 일이 어떻게 되든지 실제로 잃을지도 모르 는 것을 가지고 있는 자는 사해표국이었다. 앞으로의 표행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사해 표국에서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요공은 뼈무더기를 보고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귀원사의 행자승들이 불려와 조심스럽 게 진조운의 잔해를 치웠다. 요공은 특히 주의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어찌되었건 독이 남아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홍광은 요공에게 사의를 표했다. 죄송하게 되었군요.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읍니다. 공연히 폐를 끼 치게 되었읍니다. 요공이 고개를 저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단순히 점창파의 문제만 은 아닌 것 같군요. 아무래도 이번 괴사(怪 事)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요공이 거의 예의상 빈말로 한 것 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적우자가 옆에서 감 탄했다는 듯이 한마디 하였다. 대단한 견식이군! 이 녀석만 해도 벌써 오색살수 가운데 세번째 나타난 녀석이야. 정말 이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지. 점창파만 이 아니고 본파도 노림을 당했으니 말이지. 요공은 물론이고 유홍광도 얼굴이 대변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오색살수 중에서 세번째로 나타났다고 요? 아연해서 되묻는 요공은 쳐다보지도 않고 적우자는 단지 그 말만 남긴채로 대불전에서 나가고 있었다. 송학은 그 뒤를 따르고 송추가 남아 그들 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듣고있던 요공이나 유홍광의 얼굴이 점차 납빛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특히 분뢰수에게 셋이 모두 잡히거나 죽었 다는 이야기는 요공을 어지간히 놀라게 만들 었다. 이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요공을 착잡 하게 만들었다. 오색살수의 명성이 드날리게 된 것은 다분 히 공동파때문이기도 했다. 거의 이백 년 전에 공동파에는 십이룡(十 二龍)이라 불리우는 인재들이 있었다. 그들 이 있음으로 인해 공동파가 이후로 백년동안 천하제일파(天下第一派)로의 명성이 확고부 동해진다고 여기어지던 바로 그때, 오색살수 가 나타났었다. 그리고 불과 다섯 살수(殺手)에게 공동십 이룡이 모두 암살당한 것이다. 그로인해 공동파의 명예는 말로 할 수 없 을 만큼 추락했고 반대로 오색살수의 악명 (惡名)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이백 년 동안 전해오던 문파의 치욕이 요 공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둘은 남아 있다는 말이 겠군요? 그렇게 묻는 요공을 보며 유홍광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들었다. 이제 요공도 이 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 다. 공동삼수가 멋대로 뛰쳐나간 일은 그만두 고라도 오색살수에 관한 일은 그냥 넘길 수 가 없었다. 만일 그들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면 요공은 그들을 필히 만나러 가야했다. * * * <그는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第 七 章 넋 빠 진 襲 擊 者. 1 사마충으로서는 좋아해야 할지 곤란하다고 해야할지 전혀 표현할 길이 없었다. 표행에는 고수(高手)가 있으면 좋은 것이 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수가 이렇게 우글거리는 표행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표두(票頭)인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고수들이 돕겠다고 나섰으니 더욱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두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마충이 하비랑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 으나 하비랑도 역시 난색을 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평소의 표행에서 이런 고수들이 한 두 사 람만 있었으면 하고 바란 자신이 얼마나 바 보스러웠는가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곁에 송학은 씨익 웃으며 좋게 생각하라는 말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사마충의 입에서 다시 긴 한숨이 나왔다. 기련산맥을 통과하는 길안내는 요공이 맡 았다. 평소 공동파의 활동근거지라고 할 수도 있 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요공은 매우 상세하게 길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길안내를 받으면서 사마충은 속이 조마조마했다. 기실 같이 온 고수들은 그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습격해 주기를 바랄지 몰라도 사마충 자신은 전혀 그런 것을 원하는 마음이 없었 다. 지금 사마충은 자신이 뭐하러 이런 바보같 은 표물을 맡았는지 정말 후회가 막심하였 다. 설마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고작해야 약초(藥草)가 아니면 음식류에 불과한 것을... 산세(山勢)가 가파른 곳은 눈으로 보이기 만 할 뿐이었다. 요공의 길안내는 매우 훌륭했다, 적어도 지금 사마충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비랑은 사마충의 눈에 나타난 피로를 이 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로서는 사마충을 도울 길이 없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사마충을 돕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난관을 극복하면 사마충의 명성은 확고 해질 것이고, 그것은 표사로서의 완벽한 성 공을 뜻하는 것이다. 하비랑은 그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행이 너무 많아... 눈에 들어오는 고수만 해도 벌써 몇명인 가? 적우자는 사천제일고수라 공인되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화대공의 명성이 조락했다고는 해도 그 실 력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짓은 바보나 하는 일이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동행까지 있었다. 이들만큼은 안된다고 해도 요공대사나 유 홍광이 또 어떤 사람인가? 감히 일개 표국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일 행인 것이다. 그리고 일개 표국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고수들이 기대하는 대로 터지고 말았 다. 사마충은 하비랑에게 경악한 시선을 보냈 다. 하비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적우자를 보 았다. 적우자의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눈길은 화 대공을 찾았다. 화대공은 말위에 엎어져서 코를 골고 있었 다. 저게 뭘까요? 천천히 돌아서면서 요공이 유홍광에게 물 었다. 유홍광은 멍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나 유홍광의 말에는 자신이 없었다. 저런 누더기를 걸치고 풀어헤친 머리카락 을 보이는 정도는 강호의 기괴한 일에 익숙 해졌다고 자부하는 단월검을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단월검 유홍광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의 눈동자가 확 다 풀어져 있는 상태란 것이었 다. 그 상태로는 결코 앞이 보일 수가 없었 다. 마수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런 상처를 입고 어떻게 계속 움직 이는 것이지요? 뒤에 있던 사마충도 바로 그것이 묻고 싶 었다. 아랫배가 갈라져서 내장이 보였다. 그 내장이 흘러내릴까봐 손으로 주섬주섬 챙겨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내장을 끄집어 내놓았는지 창 자가 다 말라비틀어진 것이 눈에 확 띄였다. 표사들은 완전히 얼어서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조여들어오고 있는 이 일단의 괴 물들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 피가 무엇인지 알고 상처가 무엇인지 아는 표사들인지라 저런 상처로 걸어다닌다는 것 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 슨 뜻인지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저 물건들은 절대 사람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표사 중 몇은 그대로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몇은 기절했다. 어느 틈엔지 표행은 포위가 되어 있었다. 함정으로 제발로 걸어들어간 셈이 되어버 린 것이다. 요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째서 이 길 위에 이런 것들이... 요공이 생각한 경로에는 이런 것들이 없어 야 했다. 그가 이 표행에 참가한 것은 말그대로 참 가하는데 의의를 둔 것이지, 정체불명의 괴 물을 잡아서 공동삼수의 행방을 확인하는 것 이 아니었다. 혹시나 뭐가 나온다면 이런 것들이 아닌 다른 것이 나와야했다. 그는 바로 그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곳에 자신외에는 공동파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럴 때 약간 위안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에 불만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공동파는 저런 녀석들과 어떤 관계 이지요? 저것들이 올지 알고서 한 사람도 안 데리고 온 것인가요? 요공대사! 뭐라고 말 좀 해주시지요! 마수수가 손에 칼을 들고 묻고 있었다. 칼을 든 것은 마수수만이 아니었다. 이미 일행은 모두 칼을 들고 있었다. 구토를 하는 표사도 역시 손에 칼을 손에 단단히 쥐고 있 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철(鐵) 의 병기말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굳이 있다면 자기자신뿐이었다. 요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소저, 그런 때문이라면 나도 안왔을거 요. 유홍광은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살폈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한쪽에는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 금계령(金鷄嶺)이 보 이고 있었다. 길 한편에는 숲이 자리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 한복판에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로든 가기 좋 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으로 는 모두 저 이상한 것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 이다. 꾸르륵... 이상한 소리를 목젖으로 울려내며 살아있 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를 사람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적은 수가 아니었다. 적우자가 말에 엎어진 화풍렬을 끌어내렸 다. 말들은 비틀거리고 있다가 푹푹 고꾸라지 고 있었다. 아니! 이, 이게! 표사가운데 한 사람이 놀라서 외쳤다. 누구에게나 바람을 타고 비릿한 향기가 느 껴졌다. 모두 조심하시오! 몽혼향(夢昏香)인 것 같소이다! 유홍광이 외쳤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몽혼향을 맡고 쓰러지는 것이 낫다 고 생각한 표사 몇 명이 그대로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쓰러져버렸다. 몽혼향을 뿌린다 면 최소한 죽일 뜻은 없는 것이 아닌가? 말들이 모두 쓰러졌다. 이제 달아나려면 자기자신의 발로 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살길이 보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저 이상한 것들은 철벅거리며 걷는 것이 매우 불안해서 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드디어 나타났군! 적우자가 화풍렬을 부축하자 화풍렬이 꼬 부라진 혀로 한 말이다. 좋으시겠읍니다! 어쩌려고 하는 겁니까! 적우자는 화풍렬에게 한마디 쏘아 붙이다 가 그가 몸을 일으키며 서려하자 어이가 없 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기색이 완연했 다. 그런데 일어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화풍렬은 술냄새를 확확 풍기며 다가오는 것들에게 다가갔다. 화선배! 저게 뭔지는 아시는 겁니까? 요공이 소리질렀다. 그는 화풍렬이 무엇인가 알 것이라고 생각 했다. 적어도 철검비환의 대공이라고 불리웠 던 화풍렬에게는 아직도 한 수가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기대대로 화풍렬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낙백실혼인(落魄失魂人). 그리고 적우자는 말로만 듣던 철검비환 화 대공의 비환(飛環)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화풍렬의 두 손에서 쏘아져나간 비환은 정 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 다. 비환은 두 줄기 금빛을 남기며 허공으로 마냥 올라가고 있었다. 찌이이--- 잉! 격렬한 소리를 일으키며 비환 두 개가 마 주쳤다. 끅끅거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가서는 자들의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들어갔다. 그러나 구토를 하던 표사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환 두개는 연속적으로 허공에서 충돌하 며 격렬한 음파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치치치치칭! 그 소리는 점점 더 표사들의 힘을 북돋우 았고 다가서는 자들의 움직임은 더욱 둔해지 며 표정을 일그러뜨리게 만들었다. 적우자는 비환을 던지고 기우뚱하며 균형 을 못잡는 화풍렬을 부축했다. 그게 뭡니까? 낙백실혼인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한마디로 넋나간 녀석들이야. 산 것도 아 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고 바로 저꼴 이지. 사술(邪術)에 걸린 사람입니까? 곁에서 듣던 하비랑이 물었다. 화풍렬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런 상태로 다시 제정신이 들었다고 해도 며칠, 아니 몇 시간도 못가서 쓰러져 죽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요공이 물었다. 치치칭--! 화풍렬의 비환이 허공에서 부딛치는 소리 가 더욱 맹렬하게 사방을 갈랐다. 뭘 어떻게 해, 그냥 한칼에 쳐서 완전히 죽이라고. 그것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리가 없잖아! 저지경으로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이 야! 가장 먼저 이 말을 따른 것은 하비랑이었 다. 그에게 제일 먼저 낙백실혼인이 덤벼들었 기 때문이다. 비환 두 개가 마주치는 소리 때문인지 낙 백실혼인은 아주 사나와져서 마치 야수처럼 덤비고 있었다. 하비랑의 감산도가 한바퀴 도는가 하더니 그대로 달려드는 자의 어깨로 떨어졌다. 써억! 단 일격에 왼쪽 어깨에 떨어진 감산도가 그대로 심장까지 짓이겨 들어갔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하비랑이 어리둥절 했다. 그러나 그 방심의 순간에 감산도를 맞은 자의 오른손이 그대로 하비랑의 심장을 향해 날듯이 파고들었다. 이 손이 닿는다면 하비 랑의 가슴에는 구멍이 나고 심장은 부숴질 것이다. 하비랑은 그것을 본 순간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아무 소리도 없이 파고 들던 손이 손목째 잘려서 허공으로 퉁겨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잘라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보니 다름 아닌 송학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놀란 표정이 되어 있는 하비랑에게 송학이 물었다. 괜찮소. 간신히 대답은 했지만 하비랑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짧은 한 순간에 생사(生死)를 넘나든 것이 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고 그것도 난전(亂 戰)이 되고 말았다. 표사들은 처음에 당황했으나, 유홍광의 지 휘를 받은 점창문인들의 도움으로 곧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송학과 송추 두 도인이 맹호처럼 날뛰는 모습은 그들을 충분히 격려하고도 남 았다. 쉭쉭대는 칼소리가 울릴 때마다 낙백실혼 인들은 쓰러져갔다. 팔, 다리가 잘려도 움직이며 꿈틀대기는 했으나 계속해서 머리까지 잘라버려자 더 이 상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다. 요공은 자신이 안내해 온 길에 이들이 나 타난 것이 불만이었다. 나오려면 오색살수나 나올 것이지... 그가 한번씩 소매를 휘두르며 주먹으로 칠 때마다 낙백실혼인들은 한 사람씩 쓰러져갔 다. 그러는 가운데 힐끗 분뢰수를 쳐다본 요공 의 눈살이 찌푸려들었다. 분뢰수는 표행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그 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기괴하게도 그의 주위로는 덤비는 낙백실혼인이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서 되도록 멀리 공격하려고 들 기를 쓰는 듯이 까지 보이는 것이다. 마치 분뢰수 주변에는 보이지않는 괴물이 라도 버티고 있은 듯한 광경이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는 표사들은 매우 편하게 도살극(屠殺劇)을 벌이고 있었다. 화풍렬이 날린 비환은 아직도 허공을 맴돌 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무더기의 뭔지 모를 사람닮은 괴물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자 사방에는 비릿한 피내음 이 가득했다. 다행히 일행 중에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진저리가 절로 쳐지는 싸움이었고, 그로 인한 피로가 모두를 감싸고 있었다. 잠시 장내에는 어이없는 싸움에 대한 침묵 이 감돌았다. 이제 끝난 것인가? 간신히 지친 몸을 반드시 세우던 표사 한 사람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음산 (陰散)하고 소름끼치는 커다란 소리가 쩌렁 쩌렁 울려퍼졌다. 후하하하하! 끝나? 이제 시작인데? 2 . 퀭하니 뚫린 눈에서 광기(狂氣)가 절절 흘 러 넘치고 있었다. 기괴하게 솟구친 전신의 근육이 찢겨져 너덜거리는 옷사이로 환히 보 였다. 그 자의 주위로 그와 비슷한 행색을 한 자 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나타나고 있었다. 방금 전에 표행을 공격했던 무리들과 다른 점은 이들에게 상처가 없다는 정도일까? 그러나 곧 지금 나타난 자들이 아까의 낙 백실혼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 드러났다. 이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 지 말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크크... 곱게 쓰러졌으면 좋을것을 바보 같이 대들다니... 그것이 너희들의 목숨을 재촉했다! 저녀석들과 같은 꼴이 될 것이 다! 그 말에 표사들은 자신들의 손에 쓰러진 낙백실혼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절로 몸 이 떨리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처럼 표국 밥을 먹는 표사들 이다. 그리고 저들과 싸우다가 잡혀 저런 몰골이 된 것이다.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장내를 휘어감았다. 습격자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주 변을 감싼 자들의 선두에 선 자였다.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손에는 기괴한 무늬가 보이는 징을 하나 들고 있었다. 절에서 사용하는 바라와 한쪽 같은 형태의 징은 가만히 들고 있는대도 기분나쁜 소리를 나직하게 토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화풍렬이 날린 비환과는 정반대 였다. 표사들은 듣기만해도 소름이 쭉 끼친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러나 반대로 습격하 려는 자들은 그 소리에 신음을 흘리며 즐거 워하고 있었다. 신음소리가 어우러져 징소리는 더더욱 음 침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점창문인들은 이마에 땀이 배어나오 도록 내공을 써서 이 소리에 대항하고 있었 다. 화풍렬이 날린 두개의 비환이 서서히 떨어 져 내리자 그 괴상한 징의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덩달아 신음소리도 커졌다. 그래, 너희들이 주범이라는 말이지... 나직한 화풍렬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렸 다. 사방으로 퍼지던 음산한 분위기는 그 순간 강제로 세워진 것 같았다. 적우자는 한동안 그 괴이한 습격자들을 쳐 다보았다. 눈빛이나 행동거지가 아까와 같았다. 단지 말을 하고 있는 점이 확연히 달라보였다. 그로인해 아까보다 더욱 끔찍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뒤틀린 채로 꿈틀거리는 근육이 뼈를 부수 기라도 하듯이 투툭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뭡니까? 간단하게 다시 적우자가 화풍렬에게 물었 다. 그로서는 이것이 무슨 괴물인지 판별할 수 가 없었다. 뭐긴 아까 놈들하고 같은 것들이지... 굳 이 다른 것이 있다면 이놈들은 제손으로 낙 백산(落魄散)을 복용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낙백인(落魄人)이라고 해야겠지? 낙백산이라니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상하게도 선명해서 일 행과 습격자 모두에게 똑똑히 들리고 있었 다. 유홍광은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높은 내공으로 소리를 전하는 것이다. 상 당한 공력이 소모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 도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요공은 낯을 찌푸린 채로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말로는 미망산(迷妄散)이라고도 하 지... 이 말에 적우자도 섬칫할 수 밖에 없었다. 미망산의 사건은 불과 삼년도 지나지 않은 것이기에 적우자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때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섭혼루(攝魂樓)에서 만들어낸 강한 중독성의 약물, 미망산! 그것을 복용한 자는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 니었다. 사부와 사형제는 물론 부모형제마저도 몰 라보게 만드는 약물이었기에 미망산이라고 불리운 것이다. 뿐만아니라 육신(肉身)에 변화를 일으켜 인간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당시 섭혼루가 천하무림에 남긴 상처는 아 직도 다 아물지 않았다. 청성파에도 그로인한 타격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지금 나타난 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화풍렬이 말하고 있었다. 섭혼루는 이미 패망했지 않읍니까? 적우자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섭혼루 사건은 연혼전과 더불어 그야말로 최근의 일이었다. 그것을 화대공이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인가? 누가 아니래... 저것들이 어디서 그걸 얻 어 쳐먹었는지 몰라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겠지... 화풍렬의 손이 등에 걸쳐놓은 철검으로 옮 겨가고 있었다. 허리에 매었다가 무거워서 뒤뚱거리며 걷 게되는 것이 싫다고 등에 옮겨 맨 철검이었 다. 티티팅! 치치칭! 칭! 칭! 기괴한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면서 주변에 나타난 새로운 낙백인들은 점차 강렬 한 살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화풍렬의 손도 덩달아 빨라지는 듯 철검이 스르릉거리며 느릿하게 빠져나오다가 쉭 하 고 한 순간에 다 빠져나올 것 같이 움직였 다. 그러나 철검은 끝내 다 빠져나오지를 못했 다. 화풍렬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 하는 순간에 화풍렬의 손이 멈추어진 것이다. 난 아직 상대를 양보한 적이 없소. 분뢰수의 칙칙한 시선이 화풍렬을 빤히 응 시했다. 그는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낙 백실혼인들과 일행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풍렬의 손에서 검 이 뽑히려는 순간 한마디를 한 것이다. 짧은 한마디를 꺼낸 뒤 분뢰수는 다시 침 묵속에 빠져들었다. 화풍렬은 멍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킥킥거 렸다. 적우자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뒤를 조심하게! 분뢰수의 등뒤에서 커다란 체구의 낙백인 하나가 덮치고 있었다. 퍽! 하얀 번개가 선명하게 곡선(曲線)을 그리 며 분뢰수를 덮치던 자의 뺨에 꽂혔다. 요공은 그 장면에 익숙했다. 자신도 그렇게 맞았지 않은가? 그런데 맞은 녀석의 태도가 이상했다. 멍청하니 그 자리에 서서 눈만 껌벅이는 것이다. 전혀 맞은 것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화풍렬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움직이지마! 넌 힘쓰면 바로 죽는다! 그 말은 확실히 분뢰수에게 맞은 괴인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맞은 느낌 이 없자 괴인은 코웃음을 치며 올리고 있던 두 팔로 분뢰수를 내리찍었다. 하나 그 팔이 반도 내려오기 전에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찌이익! 투두둑... 무슨 일이 벌어졌나 모두가 주의를 기울였 을 때 이미 분뢰수를 덮치던 자의 팔이 그대 로 찢어지고 있었다. 땅바닥에 투둑거리며 떨어진 것은 그의 팔 뚝 뼈였다. 살갗이 찢어져 그대로 노출된 근육은 꼬이 면서 뒤틀리고 있었다. 적우자를 비롯하여 유홍광도 그것이 자신 의 뼈를 자신이 뽑아내는 광경임을 곧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오직 근육이 스스로 살아있는 듯 꿈틀대면 서 벌어진 일이다. 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해서 자 신의 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는 자신이 단지 팔에 힘을 주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자신의 앞에 선 이상한 녀석을 때려잡으려 고 팔에 힘을 주었는데 자신의 팔근육이 먼 저 자신의 뼈를 끄집어 낸 것이다. 그러나 떨어지는 뼈를 보면서도 그의 입에 서는 헤푼 웃음이 흘렀다. 화풍렬은 그 헤푼 웃음을 똑똑히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온몸이 절로 찢겨지 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고통을 모르고 있었 다. 그것이 낙백산의 마력(魔力)이었다. 저건... 파경(破勁)입니까? 옆에서 적우자가 물어왔다. 분뢰수가 방금 쓴 한 수(手)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화풍렬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 다. 아니, 경파(勁波)라는 것이다... 적우자가 흠칫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겁을 모르고 고통도 기억 못하는 낙백인들이 분뢰수의 등뒤로 몰려들 고 있었다. 동료의 참상(慘狀)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서서히 분뢰수의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들을 귀찮아 하는 눈 빛이 선명하게 비추어졌다. 요공은 다시 하얀 번개가 치는 것을 보았 다. 분뢰수의 손이 그 발원지였다. 어째서 저렇게 보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직접 손이 뻗어오는 것이었다. 그런 데 눈으로 보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하 얀 번개가 허공을 가르고 뿜어지는 광경이었 다. 다시 몇 명의 근육이 살갗을 찢고 뼈를 끄 집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표행에 접근을 멈 추지 않았다. 겁을 먹은 것은 표사들쪽이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괴물들의 접근은 갑자기 멈추어 졌다. 분뢰수가 완전히 돌아선 다음이었다. 돌아선 분뢰수의 눈자위는 보통때와는 달 리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눈. 그것은 붉은 빛으로 충혈되었던 눈과는 또 다른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 모습이 이상한 정적을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 정적을 깰 수 없는 듯 조용해졌 다. 괴기스러운 징소리도 멈추어졌다. 분뢰수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 다. 꺼져! 그 순간 무시무시한 비명과 함꼐 낙백인들 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와아.... 끼이이익! 보고있던 화풍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적우자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낙백인들은 마구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달아나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분뢰수 외에는. 그러나 단 한마디로 그들을 쫓아버린 장본 인은 칙칙한 눈빛을 흘리면서 서 있기만 했 다. 황당하군... 딱 한마디로 상황설명을 한 사람은 요공이 었다. 뭐하는 거에요! 저대로 그냥 둘건가요? 지금까지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내야 지요! 갑작스런 마수수의 외침이 터졌다. 수수, 네 말이 맞다. 유홍광이 짧게 말했다. 퍽! 뒤이어서 짧은 타격음이 들려오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았다. 유홍광이 마수수를 가볍게 쳐서 쓰러뜨린 것이다. 사마표두, 이 아이를 부탁드리겠소. 점창 파까지 이 애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오. 유홍광은 말과 함께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건너주고 있었다. 사마충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며 유홍 광에게 묻고 말았다. 이, 이건? 세상에 공짜란 없소. 간단한 한마디와 함께 유홍광은 점창문인 들을 한번 쭉 둘러 보았다. 선택은 너희들이 하는 것이지. 따를 자는 따르고 남을 자는 남아라. 그리고 유홍광의 몸은 그대로 달아나고 있 는 낙백인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요공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급히 소 리쳤다. 그만 두시오! 그것들은 제정신이 아닌 자 들이요! 상대할 자가 아니란 말이요! 그러나 그런 만류를 우습게 여기는 듯 이 미 유홍광의 뒤를 이어 화풍렬과 적우자 등 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었다. 점창문인들은 어찌할까 주춤하는 듯하다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유홍광을 따라 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막 하비랑이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하비랑은 자신의 팔뚝이 꽉 움켜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마충이 그의 팔뚝을 꼭 잡고 고개를 젓 고 있었다. 그만두십시요! 국주, 가셔봐야 짐만 될 뿐입니다. 냉정한 그의 말이 틀린 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비랑의 눈길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사해표국을 자수성가(自手成家)로 세운 하 비랑이었다. 결코 섣부른 짓은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비랑의 입에서 긴 한숨과 함께 겨우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알았네... 요공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못박힌 듯이 서 있었다. 어째서 저런 바보 짓들을 하는 거지? 의아한 생각에 요공이 인상을 쓰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런 질풍이 바로 그의 머리위를 스치 고 지나갔다. 요공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외쳤 다. 누, 누구냐! 니 할애비다! 누군가가 요공을 비웃는 말만 남긴 채로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철면호, 잘한 짓이다. 또 누군가가 낭랑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 다. 하비랑도 사마충도 지나가는 자들이 둘인 것은 알아보았다. 난데없이 표물속에서 두 개의 희끗한 그림 자가 튀어나온 것을 본 것이다. 언제 표물속에 사람이 숨어 있었던가? 요공은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을 눈으로 뒤 쫓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요공의 눈은 그대로 확 뒤집어질 만큼 놀라고 있었다. 저, 저들이! 그리고 요공의 몸은 그대로 그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낙백인들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 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것을 피할 줄 을 모르는 것처럼 마구 부딛히며 달리고 있 었다. 거기에 힘도 무지막지하게 세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몸으로 들이 받는대도 어지간한 나무는 그대로 부러지고 있었다. 부러지는 것은 나무뿐이 아니라 낙백인들의 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지지 않 았다. 유홍광은 어찌 되었든 쫓아가기는 쉽게 되 었다고 생각했다. 더 생각하는 것은 소름만 끼칠 뿐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달아나게 된 것일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일행중의 단 한사람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유홍광은 달리면서 손을 칼자루에 올려놓 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는 쟁쟁한 고수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사라진 점창제일고수(點蒼第一 高手)의 행방을 찾아내는데 정말 큰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 것은 경험으로 얻은 지혜였다. 어느 순간에도 방심하지않고 주의를 기울 이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유홍광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적우자는 사방의 산세가 점점 깊어져간다 는 것을 살폈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 다. 왜 저렇게 무조건 달아나기만 하는지도 궁 금했다. 화대공은 혹시 알지도 몰랐다. 그러나 화 대공도 지금 뛰느라고 거의 아무 생각도 하 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 지... 그들 뒤에는 분뢰수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 다. 그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아마도 철검비환의 절기와 대적하기 전에 는 화대공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애들은 어떻게 하지... 생각이 송학과 송추에게 미치게 되자 적우 자는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다음대의 청성파의 대들보인 것이다. 달리는 도중에 적우자의 눈은 자신도 모르 게 분뢰수에게 향했다. 그가 지켜준다면 안심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과연 그가 그렇게 해주어야 할 이 유가 있는가? 아무 것도 없었다. * * * <누군가가 뒤따라온다... 그들은 어젯밤에 표물 속에 숨어들었다. 그들이 나를 따라오 는 것은 아닐까?> 第 八 章 모 여 드 는 사 람 1 화풍렬은 인상을 찌푸렸다. 뒤따라오는 분뢰수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지금 낙백인들이 달 아나는 방향이었다. 달아나는 방향으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예 전에 연혼전이 있던 방향으로 보이고 있었 다. 역시 그들이었나? 화풍렬은 부시독으로 자살한 진조운의 마 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는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만일 그들이 예상했던 자들이라면 그말도 일리가 있었다. 구천회(九天會)의 지금 힘으로는 상대하기 곤란한 적수였다. 적우자는 점차 깊어지는 산중을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자신도 산을 근거지로 사는 도사였다. 그러나 지금 이 길은 너무 깊었다. 단지 산이 아닌 전체 산맥이기도 한 것이다. 이래가지고는 길 잊어먹기 딱 알맞겠 군... 가면서 무엇인가 증표를 남길 필요는 없었 다. 달리고 있는 낙백인들이 온갖 증표를 남겨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그렇게 다니고 있다면 그것은 돌아나가는 길에는 별로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적우자는 은연 중에 손을 휘둘러 곳곳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송학과 송추, 두 도인은 장문인의 행동을 보고서 곧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들도 함꼐 눈에 띄는 흔적을 만들면서 달렸다. 두 개의 그림자가 멀찍이서 달리고 있는 자들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걷듯이 뒤따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느린 것은 아니 었다. 한가롭게 숲을 가로지르며 부러진 나무, 곳곳에 남겨진 핏자욱을 따르면서도 그들의 행동은 여유가 있었다. 산이 깊어지고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데도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행동에는 지장없다는 태도였다.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잘도 가는군. 글쎄... 틀림없이 그 연혼전이 있던 방향 이로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중 사람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커보였다. 까칠까칠한 머리카락이 산발이라도 한 것 처럼 사방으로 흩날리며 흘러내렸다. 머리에 쓰고 있는 테는 이마 부분에 돌출부가 있어 얼핏보면 뿔이 돋아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흑포(黑袍)! 그 옷자락 사이로는 철갑(鐵鉀)이 언뜻 보 였다. 머리하나 작은 사람이 다시 말했다. 역시 그놈이 살아있었던 걸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요물(妖物)이 생겨날 수가 없 었겠지. 그가 요물이라고 지칭한 것은 달리다가 바 위에 부딛히고 어깨가 으스러진 채로 또 비 척거리며 달리는 낙백인이었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세가닥 가느다랗게 보 이는 수염이 냉소(冷笑)와 바람에 흔들렸다. 흥, 저까짓 것들이 요물이라고? 흑포인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작은 자가 백삼(白衫) 자락을 털어내면서 흑포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목소리를 낮춰! 여지껏 한 일을 허사가 되게 하려는 거냐? 흑포인의 수염가득한 얼굴에 노골적인 비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허사라... 그런데 저 뒤에 따라오 는 녀석은 어떻게 할 궁리지? 백삼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 뒤에 따라 붙어 열심히 달리고 있던 요공은 한 순간 그들이 나무에 가리워 보이 지 않았어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 다. 하지만 다음에 그들의 행적이 보이지 않게 되자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허둥지둥 그들이 있던 자리까지 갔 을 때 아무런 흔적도 볼 수 없게되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멀리서는 요란스럽게 달리고 있는 낙백인 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며 신경을 곤두세우자 바람이 나뭇잎을 뒤흔드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런 자취도 없이 자신이 쫓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요공은 절로 입안이 말라들어감을 느꼈다. 한창 신나게 몰아붙이던 상황에서 갑자기 역습을 당한 기분이 요공을 몰아세웠다. 도대체... 그 자신이 굳이 몸을 감출 생각을 하고 달 린 것이 아닌 만큼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다 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가롭게 움직이던 그들이 단 한 순간에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지금 자신 은 그저 발만 동동구르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 최소한 왜 따라오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 다. 요공은 가만히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입술 을 질근 깨물밖에 도리가 없었다. 좋소, 좋아, 만날 기회가 오늘 아니래도 있으리라 믿소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요공은 누 구에게 들으라는 듯이 또렷하게 내뱉았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하여 낙백인들과 뒤따 라간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 다. 요공이 사라진 뒤에 나뭇등걸 그림자 속에 서 백삼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흑포인은 허공에서 쑤욱 빠져나왔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나 그림자가 무슨 벽이라도 되는 듯이 나타난 것이다. 웃기는 놈이군... 자기가 우리한테 무슨 볼 일이 있다는거야? 흑포인의 입에서 조소(嘲笑)가 흘렀다. 백삼인이 입술을 살짝 비틀며 중얼거렸다. 녀석이 볼 일이 없으면 손을 대고 있는 놈들이 볼 일이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추적을 계 속했다. 그들은 이 추적을 위해 오랜 준비를 한 것 이다. * * * 화풍렬은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낙백인들을 쫓는다는 기분이 사라지고 자 신이 덫을 향해 달려드는 미친 짐승같이 생 각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꽃을 향해 몸을 던지 는 나방같이도 여겨졌다. 콰직! 화풍렬의 발아래서 거칠게 나뭇가지 하나 가 분질러졌다. 왜 서는 겁니까? 적우자가 드센 콧김을 흘리며 우뚝 선 화 풍렬을 보고 물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왜 저 미친 놈들을 따 라가는 미친 년 꼴이 되어야 하는거야? 야! 점창파 꼬마! 이리와봐! 한창 뒤따라 뛰는 것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던 유홍광의 귓전에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 졌다. 유홍광은 한 순간 쿵소리를 내며 땅에 엎 어지고 말았다. 내... 내가... 넘어지고서 유홍광은 자신이 넘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뛰다가 넘어질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예전에 거꾸로 박아놓은 칼날 위에 서 비무한 경험만 없었어도 유홍광은 이 일 을 그냥 무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유홍광은 전혀 그냥 넘길 기 분이 아니었다. 벌개진 얼굴로 유홍광은 거의 백보가량 처 져있는 화대공을 향해 마구 달려갔다. 적우자가 가운데 서지만 않았어도 유홍광 은 이 주정뱅이에 터무니 없이 내공만 무직 막지한 노인네를 한대 갈길 수 있을 것이었 다. 적우자가 가운데 서서 말했다. 화선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좀 지나치 지 않읍니까? 목이 날아간 다음에는 늦으니까! 매몰찬 화풍렬의 말소리는 유홍광에게 비 웃듯이 들렸다. 천리전음(千里傳音)을 이런 식으로 사람 발 거는 곳에 쓸 수 있는 고수가 천하에 몇 이나 되겠는가? 목이 왜 날아갑니까? 거칠게 묻는 유홍광의 주위로 점창문인들 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화풍렬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뚫어져 라 흩어보았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눈길인데도 점창문인들 은 자신이 창에 꿰이는 느낌에 소름이 끼쳤 다. 유홍광은 한 순간 당황했다. 너, 너희들! 얼굴에 그게 뭐냐! 점창문인들의 얼굴에 은은히 검은 기운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가볍게 중독된 증상이었다. 이제 어떤 놈팽인지 얼굴이라도 보이는게 어떻겠느냐? 화풍렬의 냉랭한 소리가 숲에 울려퍼졌다. 한 사람이 나무위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옷은 몸에 꽉 달라 붙어 있었다. 그로인해 온몸에 울퉁불퉁하게 보이는 근 육이 유난히도 불거져 보였다. 얼굴에다 뒤집어쓴 귀면(鬼面)만으로 부족 한지 그는 온몸에 주렁주렁 조그마한 귀면을 매달아놓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져 있고 매달린 수십개의 조그마한 귀면이 반딧 불같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놈팽이가 한 말씀 올리겠소이다. 여러 분,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신다면 이놈팽이와 더 다투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돌아가시 지 못한다면 이놈팽이와 아주 피터지게 한바 탕해야 할 것이외다. 나타난 자의 기괴한 행색과 난폭한 어조가 적우자의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적우자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성큼성큼 나타난 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분뢰수가 나서는 것을 보고 적우자는 재미 있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나타난 귀면의 사내 를 보았다. 저녀석은 무슨 재간이 있을까? 적어도 분뢰수의 관심을 끌만한 재간 한 가지는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귀면의 괴한은 난데없이 칙칙한 괴인 하나 가 나서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하는 누구요? 이놈팽이는 귀하의 신분 을 알고 싶소. 난 분뢰수, 넌 흑살수(黑殺手)! 잠시 장내에 짙은 침묵이 깔렸다. 마침내 오색살수 가운데 흑살수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멈추었잖아? 저 화가녀석이...! 지켜보고 있던 흑포인과 백삼인은 멀리서 이 대치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달가워 하는 태도가 아니었 다. 원하는 것은 낙백인들의 본거지가 드러나 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흑살수의 출현과 함께 백삼인의 입 술이 말리면서 미소가 나타났다. 저거봐라! 드디어 꼬리가 보이는데... 흑살수는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분뢰수 를 노려보고 있었다. 산발(散髮)해서 흩어놓은 머리는 자신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가린 것도 자신이 귀면을 썼다면 상대는 미련스럽게 백포로 감아놓은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정말 여러가지로 미련한 녀 석인 것 같다. 손까지 감아놓은 것이다. 그것도 주먹을 쥐거나 손을 확실히 펼수 없도록 단단히 매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 다. 어째서 이 녀석이 우리들을 훼방놓고 까 발리려하는 걸까? 죽어간 세 살수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흑살 수는 말없이 분뢰수를 노려보았다. 덤비지 않을거면 비켜. 분뢰수에게서 말이 나왔다. 흑살수의 눈빛이 노여움으로 물들어버렸 다. 덤비지 않을거니까 돌아가. 흑살수가 흉내내어서 대답을 했다. 보고 있던 화풍렬이 소리내어 웃었다. 큰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유치하다, 유치해! 분뢰수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 으로 한걸음 나갔다. 흑살수는 간격을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하얀 번개가 치면서 간격을 없애버렸다.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오른쪽 어깨에 달린 귀면 하나가 산산조각이 난 다 음이었다. 치익! 박살난 귀면에서 파란 불꽃이 확 튀었다. 불꿏은 곧장 흑살수의 오른쪽으로 화살처 럼 쏘아져나갔다. 화르륵거리는 거친 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불길이 일어났다. 흑룡귀염전(黑龍鬼焰箭)!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홍광은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요공이 달려오면서 소리친 것이다. 분뢰수의 말소리가 다시 퍼지고 있었다. 비켜라. 다소 점잖아 진 말이었으나 듣고있던 흑살 수의 눈빛은 살기(殺氣)로 가득찼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흑살수는 두팔을 가슴앞에 엇갈리면서 괴성(怪聲)을 질러댔 다. 끼이이이-! 어떻게 들으면 새울음소리같기도 하고 말 로만 듣던 용울음소리같기도 한 소리가 짜랑 짜랑하게 사람들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흑살수의 온몸에서 파란 불꽃이 마구 피어 올랐다. 불줄기로 변한 불꽃은 그대로 꿈틀거리면 서 뱀처럼 죽죽 허공을 가로질로 분뢰수에게 덮치고 있었다. 오대살법 가운데 가장 흉폭한 것으로 소문 난 흑살법(黑殺法)이 펼쳐진 것이다. 파란 불줄기는 분뢰수의 몸을 확연히 휘어 감은 순간에 검은 빛을 뿜어내며 불기둥으로 변해 솟구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점창문인들은 다급하게 적우자와 화풍렬의 뒤쪽으로 피했다. 유홍광도 얼른 뒤로 물러 섰다. 검은 불기둥이 승천하는 용이라도 된 듯이 그들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것이 보였고 흑살수는 그 뒤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줄기 소름끼치는 비명은 그들 귀 에 선명하게 들렸다. 보지않았어도 어떤 결과인지 예측한 적우 자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오색살수중 남은 자는 이제 백살수(白殺 手)뿐이었다. 상당한데. 엄청나게 빠르잖아! 그분보다 더 빠를까? 묻고 있는 흑포인을 백삼인은 거들떠 보지 도 않았다. 한동안 노려보듯이 불기둥을 피해 다시 내 닫는 일행을 지켜보던 백삼인이 눈섭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너 혹시 전에 저런 놈 본 적있냐? 갑작스런 백삼인의 질문에 흑포인은 굵은 목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난생 처음 보는 놈 같은데... 저런 무공은? 역시 생판 처음이지. 백삼인은 고개를 돌려 흑포인을 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백삼인을 보 며 흑포인이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거냐? 도대체 저런 놈이 어디서 나타났느냔 말 이다. 2 숲이 우거진 곳을 벗어나면서 눈에 뜨이는 것이 바위의 밭이었다. 돌덩이의 비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린 흔적 처럼 조각난 돌무더기가 골고루 깔려있는 마 당같은 곳이었다. 요공은 감회가 서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 았다. 그 자신도 몇년 전에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과는 달리 이곳은 숲이었다. 그리고 그 지하에는 돌로 이루어진 은밀한 건축물이 있었다. 이 돌무더기 더미가 바로 그 잔해(殘骸)였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변하기 전에 그 건축 물은 연혼전(鍊魂殿)이라고 불리웠었다. 요공은 하마터면 그곳에서 제정신을 잃고 꼭두각시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이곳은 전에 말로 듣던 그곳같아 보이는 군요... 유홍광이 입을 열었다. 화풍렬은 고개를 뒤로 제치고 술호로를 기 울이고 있었다. 유홍광은 적우자를 돌아보았다. 그와 점창문인들은 이미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이 언저리에서 낙백인들의 행방이 끊어졌 다. 마치 모래속에 스며든 물같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 것 같군... 적우자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신도 이곳에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화풍렬은 술이 들어가자 생기가 돈다는 얼 굴이 되었다. 입술을 소매로 닦는데 분뢰수가 한쪽에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흩어놓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충 혈된 눈이 보였다. 그는 칙칙한 눈빛으로 사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얼 찾고 있는거지? 화풍렬이 물었다. 모두가 분뢰수 쪽을 쳐다보았다. 위급할 적에 그보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기대에 차있는 시선은 분뢰수에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듯, 그는 그 저 눈길을 사방으로 움직이고만 있었다. 아무 것도 못찾을 거다. 이곳은 연혼전의 본전(本殿)이 있던 곳이지만 이젠 폐허에 지 나지 않아. 적우자가 화풍렬의 말에 미심쩍은 표정으 로 쏘아보았다. 도대체 이십년간이나 물러나 있던 사람치 고는 아는 것이 아주 많았다. 정말 구천회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의문이 머리속을 맴돌았지만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구천회에 정말 몸담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고 시인할 턱이 없는 것이다. - 천하의 정의를 수호할 뿐 명예를 바라지 않는다. 적우자가 우연히 전해 들은 구천회의 행동 지침가운데 하나였다. 저쪽으로 가자. 무슨 소리가 난 것같아. 화풍렬은 조용히 말하면서 움직이고 있었 다. 모두들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은 아무도 무슨 소리같은 것을 듣지 못했기때문이다. 적우자는 힐끗 분뢰수를 보았다. 그는 소리가 들렸어도 가만히 있었을 것이 다. 잘 가는군. 저 화가놈 이곳에서 살았던 거 아닌가? 흑포인의 말에 백삼인의 고개가 좌우로 흔 들렸다. 수염이 나풀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잘 알아? 자신의 뻣뻣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흑포 인이 물었다. 삼백장(三百丈)의 거리가 없었다면 흑포인 의 목소리때문에 벌써 뒤따르는 것이 발각났 을 터였다. 그 자식한테 물어봐야겠어. 대답해줄까? 흑포인의 어투에 놀리는 기색이 있었다. 세상에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자부하는 백삼인이었다. 그러나 흑포인은 그런 백삼인보다 하루를 더 지껄일 수 있는 인물을 알고 있었다. 자, 가자. 어느 쪽인지 분명해졌으니 먼 저 가서 기다려 보는 것이 나을거다. 냉랭하게 말하면서 백삼인이 몸을 움직였 다. 흑포인은 그가 아까부터 저 백포복면의 요 상한 녀석한테 상당히 신경쓰면서 인상을 계 속 구기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뒤따 랐다. 화풍렬은 소리가 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나 유홍광은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가 없었다. 철검비환 화대공이 실력은 이미 엎어지면 서 겪어보았으나 노인네가 귀가 그렇게 잘들 릴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어쩐지 뭔가 감추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홍광은 이 자리에서 자신과 친분이 가장 두터운 사람을 떠올렸다. 적우자와 요공이었다. 그러나 적우자는 화대공을 완전히 믿는 눈 치였고 요공은 갑자기 왜 따라온 것인지 통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정도까지는 이해를 못해줄 것도 없었지만 왜 또 저렇게 사방을 두리번 거리 는 것인지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경계를 하는 태도는 분명 아니었다. 마치 자신들이 우리에 갇히기라도 한 것같은 태도 인지라 유홍광은 정말 기분이 나쁜 것이다. 무엇하나 홀가분한 것이 없었다. 그런 유홍광의 눈에 진짜로 기분나쁜 것이 보였다. 작은 관제묘(關帝廟)가 보였다. 별로 이상할 것은 없는 그냥 관제묘였다. 그러나 일행가운데 그 관제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이 첩첩산중(疊疊山中)에 관제묘가 왜 엎어져 있는 것인가? 여기로 온 것이군요, 화선배. 적우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관제묘의 입구에 남아있는 피와 살점이 모 두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뒤인데도 불구하고 선 명하게 보이는 핏자욱이 음산함을 한껏 과시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몸에 오한이 났는지 몇 사람이 부르르 떨었다. 유홍광은 떨고 있는 점창문인들을 보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소름이 돋는 판이니 위로할 수도 없었다. 모두들 아무 말없이 있는 것이 상책이란 듯이 입을 다물었다. 자, 들어가자고. 설마 저 좁은 곳에 그 넋빠진 녀석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기야 하겠 어? 화풍렬의 목소리가 울렸다. 별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으나 이제와 서 물러나자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깐! 화대공! 기다려주십시요! 요공이 멈춰세웠다. 불러놓고서 입술을 깨물던 요공은 마침내 비장한 각오를 굳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읍니다. 어디서부터? 화풍렬은 별일이 아니란 듯이 되물었다. 요공은 그 침착한 모습이 격려가 된 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표행에서 떨어져 나간 다음부터 입니다. 표물에 숨어있다가 여러분이 떠나기가 무섭 게 뒤쫓고 있었읍니다. 요공의 말에 유홍광이 의아한 듯이 물었 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 있다는 말이지요? 요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는 그들을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 이었읍니다. 여러분들과 저의 사이에서 사라 졌어요. 듣고있던 적우자가 고개를 갸웃뚱한 채 물 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요? 비로소 요공의 얼굴에 조심스럽고 두려워 하는 표정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유홍광은 이 승려가 얼마나 대담한 사람인 지 알고 있었다. 이 가운데 그보다 더 잘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담한 승려가 겁을 낼 사람이 누구일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노화상이라도 쫓아왔다는 것은 아닐 테지... 요공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서 천천히 말했 다. 흑마왕(黑魔王)과 백마신(白魔神)입니 다. 흑포전갑을 두룬 흑마왕은 툴툴거리며 웃 었다. 저 망할 자식이 우리 얘기를 하는 모양인 데... 백삼자락을 툭툭 털면서 백마신이 중얼거 렸다. 그게 낫겠지. 적어도 귀찮게 하는 놈은 없을 테니까. 흑마왕은 뻣뻣한 수염이 가득한 얼굴을 두 터운 손으로 문질렀다. 저번에 이 일대를 다 조사했지만 아무 것 도 못찾았는데 과연 기대한 것이 나올까? 백마신의 얼굴에 한겹 서리가 내린 듯 차 가움이 감돌았다. 그 때는 연혼전이 부서지기 전이고. 만약 을 위한 것은 언제나 좀 떨어뜨려서 감춰놓 는 법이잖아. 아마 저 관제묘가 입구정도 될 걸. 저것들이 우리얘기를 듣고 안들어가면 어 떻게 되는 거냐? 앞으로 나가던 백마신이 멍한 표정이 되어 흑마왕을 돌아다 보았다. 저 화가 놈이? 어림없지. 화풍렬은 요공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알았어. 그리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두 기막힌 표정으로 보는 가운데 분뢰수 만은 그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적우자는 자신을 보고 있는 송학과 송추를 돌아보았다. 송학을 거둔지는 벌써 이십 년 가량이었 다. 송추를 자신이 돌보기 시작한 것은 근 삼년간의 일이었다. 송추의 사부인 적우자의 사제가 죽은 다음 부터였다. 적우자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칠십이 넘어가는 자신이야 언제 죽어도 별 로 애석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직 사십이 채 못되어서 한창때인 두 재목이 자신과 같 이 죽는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진작 떼어놓고 왔어야 하는건데... 난감해 하는 적우자의 눈치를 보고 있던 송학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사부님, 안들어가실 겁니까? 적우자는 어이없어 물었다. 넌 들어가고 싶으냐? 사부님께서 그만두시겠다면 그만두어야지 요. 미묘한 어감의 말이었다. 옆에서 송추가 거들었다. 저희 걱정은 하지 마십시요. 이미 본문에 들어오면서 생사(生死)의 구애됨을 벗어날 것을 서약하지 않았읍니까? 송추의 말은 사람을 움직이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 도전적인 말투가 드러나는 송학과는 달랐 다. 적우자는 우울한 표정이 되어 나직히 탄식 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이미 관제묘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요공은 다시 한 번 기막힌 꼴을 당하는 자 신이 한심했다. 유홍광도 이미 관제묘를 향하고 있었고 그 뒤를 점창문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미 낙백인들을 따를 때부터 각오를 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공포스러운 이름이라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모두가 다 관제묘에 들어간 다음에도 요공 은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도 저들을 따라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있어야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요공은 별로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장래가 이제 겨우 확고하게 되는 시점인데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는 곳에 뭐하러 들어간단 말인가? 왜 넌 그냥 남아있지? 요공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얼마 전에 그가 지나가면서 한 말이 다시 금 요공의 귓전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니 할애비다! 너무나 개성있는 목소리라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다. 요공은 반사적으로 최대한 빨리 몸을 돌렸 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요공 자신도 큰 키에 속하지만 그런 자신 보다 좀 더 커보이는 백마신이 예리한 눈빛 을 번뜩이며 있는 것이 눈에 확 띄였다. 그리고 방금 말한 흑마왕이 그 옆에 서 있 었다. 흐... 흑마왕... 님... 떨리는 목소리가 저절로 공손하게 흘러나 오고 있었다. 흑마왕은 투박한 웃음소리를 내고 말했다. 아부하지마! 저 안에 몇이나 들어간 거 냐? 요공은 찔금하고 놀랐다가 그가 묻는 말에 관제묘를 보았다. 대략 이십 명 가량... 그 전에 들어간 넋나간 놈들은? 백마신이 요공의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 그것은 요공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본 것이라고는 유홍광과 점창문인 십 여 명, 그리고 적우자 일행. 화풍렬과 분뢰 수라는 괴인이 전부였다.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는 놈이야... 흥미가 사라진 듯한 백마신은 관제묘를 아 래위로 흩어보았다. 흑마왕도 더 이상 요공에게 신경쓰지 않았 다. 두 사람은 마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 신들 뿐인 것처럼 관제묘를 둘러보고 있었 다. 요공의 입술이 가볍게 깨물렸다. 살짝 혀 끝으로 피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요공은 아 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얼마 되지 않는 크기니 들어 가면 땅속을 헤매이게 될 것 같군. 백마신이 중얼거렸다. 흑마왕이 퉁명스럽 게 물었다. 다른 수는 있냐? 없어! 그럼, 들어가지. 그리고 흑마왕과 백마신은 이를 갈며 서 있는 요공을 남겨둔 채로 관제묘로 들어갔 다. 3 적우자는 저절로 긴장이 되는 자신을 깨달 았다. 관제묘에서 지하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 것 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핏자국이 빠져들고 있는 벽을 두들겨서 금 세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지하로 들어오면서 부터는 문제가 심각했다. 캄캄하다는 말이 무색한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적우자는 대라신공을 돋우웠다. 눈빛에 파란 기운이 감돌았지만 보이는 것 은 고작해야 한자정도가 고작이었다. 내가 이러니... 송학과 송추는 손을 꽉 붙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적우자가 그들에게 시킨 일이다.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한 덕에 유홍광과 점 창문인들도 손을 맞잡고 있었다. 화풍렬은 앞에서 휘적휘적 걷는 모양이었 다. 불과 서른걸음을 들어온 다음부터 이 모양 이었다. 길이 갈라지는지 어떤지 전혀 구별할 방법 이 없었다. 함부로 불을 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위로는 여유가 좀 있고 밑은 맨땅인가? 적우자는 감각을 있는대로 동원했다. 화풍렬이 앞에 멈추어 선 것을 알자 적우 자는 냉큼 다가가서 물었다. 화선배, 뭐가 보입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안보여. 잠깐동안 적우자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 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럼 넌 보이냐?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뒤에 서 혼비백산한 사람은 유홍광이었다. 한 사람은 사천제일의 문파 장문인이고 한 사람은 한때 사천제일고수로 추앙받던 고수 였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 대책도 없이 들어올 수가 있단 말인가? 자, 잠깐만! 두 분 잠깐만 거기계세요! 유홍광이 다급히 소리쳤다. 이대로는 아무 것도 안된다는 생각에 물러 나서 다시 의논해보자고 할 참이었다. 조심해라! 그 때 갑자기 화풍렬이 외친 소리였다. 유홍광은 무엇인가 덮쳐오는 감각에 온몸 이 바싹 긴장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긴장시킬 수 있는 것은 칼날같은 종류뿐이었다. 반사적으로 유홍광은 자신의 손을 쥐고 있 는 점창문인을 땅에 깔아버렸다. 그 뒤에 손에 손을 잡고 있던 모두가 한꺼 번에 바닥에 엎어졌다. 유홍광의 몸도 그대로 앞으로 엎어지고 있 었다. 소리도 없이 무엇인가가 뒷머리를 선뜻하 게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손으로 만져보니 끈적끈적하게 피가 묻는 것이 느껴졌다. 유홍광은 버럭 소리질렀다. 뭡니까? 비도(飛刀)인가? 뭐 그런건가 보다! 화풍렬의 무책임한 대답이 들려왔다. 유홍광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소리도 없 이 칼이 날아다니는데 하는 말이 그건가 보 다라니... 챙! 챙! 갑작스럽게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 다. 뛰어! 적우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어디 로 뛰란 말인가? 뒤이어 누군가가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유홍광과 점창문인들은 그대로 그 소리나 는 방향으로 달렸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달리는 중에도 챙챙거리며 칼부딛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비명같은 것 은 일체 없었다. 유홍광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으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소리나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 뿐이었다. 점창문인들은 부딛쳐 구르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달리니 당연 한 일이기도 했다. 이 바보같으니라고! 그러고 당황하지 말 고 차라리 불을 켜라! 갑작스럽게 바로 옆에서 떠드는 소리에 유 홍광은 덜컥 가슴이 주저앉는 줄 알았다. 화풍렬이 언제 왔는지 바로 자신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뭘로 불을 켭니까? 당황한 유홍광의 물음이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갑작스럽게 앞 이 환해지고 있었다. 유홍광은 처음 눈이 부셔서 뭔지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이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적우자가 그 빛 앞에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송추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막대기 끝에서 환한 빛이 뻗어나오고 있었 다. 비로소 사방이 눈에 들어왔다. 유선생, 이것을. 아직도 어리벙벙해 있는 유홍광에게 송학 이 송추가 가진 막대기 같은 것을 내밀고 있 었다. 엉겁결에 받아들고 보니 백리화통(百里火 筒)이었다. 백리를 가는 동안에는 횃불대신에 쓸수 있 으며 훨씬 밝다는 물건이었다. 백리화통을 손에 쥔 유홍광은 즉시 점창문 인 쪽을 돌아보았다. 가슴이 쓰라렸다. 뒤따라온 자의 수효가 고작 넷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반 이상이 중간에 떨어진 것이다. 화풍렬이 중얼거렸다. 중간에 갈림길에서 다른 곳으로 빠진 모 양이군. 갈림길이 있었읍니까? 유홍광이 비통하게 물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못봤냐? 녀석들이 우글거 리고 있는 것도 못봤어? 그러고도 날아오는 칼은 잘도 피했군. 유홍광은 화풍렬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적우자가 손에 검을 든 채 다가왔다. 아무래도 상상밖으로 이 지하의 규모가 큰 것 같군요. 그리고 말로듣던 연혼전과 비 슷한 것 같습니다. 화풍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감감한데. 너무 무 모하게 뛰어들었나? 역시 무책임한 말이었다. 유홍광은 땅을 치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 으나 자신을 쳐다보는 점창문인들의 질린 눈 을 보고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마라. 언제나 피를 보고 사는 강호인 이 아니더냐? 그러나 말하는 자신에게도 기운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화선배, 이 지경에서도 그렇게 입을 다물 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읍니까? 적우자가 한 말이다. 화풍렬은 흘깃 적우자를 보았다. 백리화통의 불빛에 사방이 두루 비쳐지고 있기는 했으나 별로 소득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지하동굴에 서 있다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높이가 삼장 정도 되는 폭이 이장인 지하 동굴. 그것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길게 뻗 은 통로는 어느쪽에서 자신들이 나왔는지 조 차 헷갈릴 정도였다. 글쎄... 나도 듣던 것하고는 이야기가 달 라져서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유홍광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아무거라도 아는대로 이야기를 해주십시 요! 강한 어조로 말하는 유홍광은 보면서 화풍 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청성파의 세 사람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대 사천제일문파(四川第一門派)라는 칭 호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실 력도 없이 무위(無爲)로 된 것은 더더욱 아 니었다. 그러나 지금 일행의 반을 순식간에 실종당 한 점창파의 사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화풍렬은 천천히 사방을 살피면서 말을 시 작했다. 별로 할 이야기는 없고... 굳이 말하자면 성도(成都)를 출발할 적에 줏어 들은 이야기 가 전부야. 적우자와 송학, 송추는 말을 들으면서 앞 뒤를 막아서고 경게를 하였다. 이쪽으로 구룡(九龍)의 몇이 온다는 뭐 그런 이야기지. 유홍광의 귀가 번쩍 띄였다. 당대 천하최고(天下最高)라 꼽히는 아홉 명 가운데 몇이 온다는 이야기는 아주 희망 적인 소식이었다. 구천회 이야기는 없읍니까? 적우자가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 그는 약간 화가 난 기색이 완연했다.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분뢰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언제 어디로 가든지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권리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그만한 고수 한 사 람이 일행 전부의 목숨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화풍렬이 구룡에 대해 한 말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둔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무책임했다.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구룡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분뢰수를 어떻게든 붙들었어야 했다. 적어도 구천회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사람을 희생시켜서 는 안되는 것이다. 화풍렬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구유(九 幽)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 * * 쿠지직... 살이 갈라지면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버티고 있던 점창문인은 자신의 팔 이 뜯겨져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고통이 느껴지지를 않았다. 눈이 흐릿해져서 그런지 세상이 온통 뒤집 어져 보이고 있었다. 손으로 문지른 입가에 는 하얀가루가 묻어났다. 이게 뭘까? 아까부터 사방에서 표행을 습격했던 괴물 들이 이 흰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이상했다. 온몸이 타는 것같 은 감각이후로는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를 않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칼을 휘둘렀다. 마구 휘두른 칼이지만 전혀 피할 줄 모르 는 괴물들인지라 무조건 칼에 부딛히고 있었 다. 하지만 그는 전혀 멈출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는 조천(趙川)이란 이름보다 자신이 점창파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비록 일행에게서 갈라졌지만 그는 혼자가 아닌 점창파의 문인이었다. 그는 그 이름을 지켜야했다. 그 이름이야 말로 자신이 살아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이었 기에, 그래서 그는 있는 힘껏 칼을 휘둘러댔 다. 그가 아닌 다른 자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다. 죽어서 저승에 가더라도 그는 염왕(閻王)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는 점창파요! 라고. 그리고 붙들린 것이다. 이 괴물들은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단지 점창문인 조천의 팔 다리를 종이장 뜯듯이 뜯고 있을 뿐이었다. 조천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뢰수라고 하 던 이상한 작자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는 광경이었다. 저 자는 왜 그냥 둘까? 조천이 살아서 한 마지막 상념이었다. 일행에서 갈라선 점창문인들은 모두 조천 과 같이 되고 말았다. 이성(理性)을 상실한 낙백인들이 기괴한 힘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지는 그들 사이로 분뢰수가 걷고 있었다. 마치 가벼운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가볍게 걷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는 그토록 포악한 행동을 일삼 는 낙백인조차도 감히 가까이 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분뢰수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암울한 광채 는 지하의 어둠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듯 사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듯 지하를 계속 돌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과연 그는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第 九 章 움 직 이 는 屍 身 들. 1 사방을 가득 매우고 있는 것은 온통 맵고 무엇인가 썩어가는 듯한 역겨운 냄새였다. 그것을 막는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고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지는 동안 냄새에도 익 숙해졌으리라 생각했던 자신감도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냄새가 끊임없이 변화해서 익 숙해 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변해도 한결 더한 역겨움을 불러일 으키는 것이니 더욱 짜증이 났다. 그러나 유홍광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참고 견디는 일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불과 네 명밖에 남 지 않은 문하를 위해서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송학이 가볍게 손을 건드려왔다. 유홍광은 뒤에 손을 만져 신호를 보내주었 다. 그리고 그 신호는 마지막에 서 있는 송추 에게 전해질 것이다. 적우자가 선두에 서 있었고, 두 명의 청성 문하가 앞과 뒤를 맡아주었다. 그리고 유홍 광은 화풍렬과 함께 중간에 끼인채로 점창문 인들의 피해를 줄여보겠다는 것이 이 대형이 짜여진 까닭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 일까? 유홍광은 궁금해했다. 일행 가운데 자신들 이 가는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소리지? 적우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었다. 대라신공을 운용해도 이 지하의 어둠에서 는 한자 가량이 한계였다. 그래서 적우자가 소리를 통해 상황판단을 해야 했다. 적우자가 들은 소리는 매우 긴 울림을 가 지고 전해지고 있었다. 가자! 화풍렬의 나직막한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 려왔다. 적우자가 뭐라고 하기 전에 화풍렬은 그 쪽으로 일행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적우자에게도 그 밖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우선은 무엇라도 부딛쳐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이 지하를 헤매이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들려오는 소리가 선명해짐에 따라 일행은 바싹 긴장하게 되었다. 얼마전에 그들은 그런 소리를 싫토록 들었 기 때문이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는 소리... 그런 소리가 메아리쳐서 귓전에 자욱하게 들려오는 것이다. 담이 약한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못할 그런 끔찍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귀에 익숙한 낙백인들 의 괴상한 고함소리가 섞여 있었다. 점차 크게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일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몇개의 모퉁이 를 돌아서 소리의 발원지에 이르렀을 때 비 로소 그들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거처온 곳과는 달리 요란스런 소 리가 한창 흘러나오고 있는 곳은 아주 밝았 다. 대낮의 해빛아래는 아니었지만 이제껏 어 둠 속에서 더듬어가지고 온 일행에게는 대낮 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거기에 그들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 정도의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찌이익! 두두둑! 우지직... 시끄럽고 귀에 거슬리는 것은 멀리서 들을 때보다 더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귀에 들리는 소리를 깡그리 지워버리고 있었다. 적우자의 얼굴에 짙은 주름이 한겹 더 늘 었다. 화풍렬은 기가 막혀서 두리번거렸으나 잘 못 본 것은 아니었다. 유홍광과 그 나머지 일행은 아주 질린 얼굴이 되어 그저 눈에 비 추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그들 눈에 낙백인이 사람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 앞에서 낙백인과 치고 받는 물 건들과 비교하면 그랬다. 비록 몸이 찢어지는 경우라도 헤죽거리고 마는 낙백인이었지만 그들은 피를 흘리고 근 육이 꿈틀대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 낙백인과 싸우고 있는 것 은 피도 흘리지 않았고 꿈틀대는 근육같은 것도 없었다. 그것은 단지 썩어가는 인간 육신의 빈껍데 기였다. 얼굴이고 손이고 드러난 부분의 곳곳이 썩 어서 흰 뼈가 드러나 있는 시신(屍身)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신들의 한편에서 그것들을 조 종하여 낙백인과 싸우는 자가 보였다. 온몸이 시뻘겋게 물든 승포(僧袍)로 뒤덮 인 자였다. 흡사 피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진홍(眞紅) 의 법의를 입은 중이 시신을 움직이고 있었 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말 한마디 가 울릴 때마다 시신들은 어기적거리며 낙백 인들을 향해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 다. 낙백인의 비정상인 몸에서 나오는 괴력(怪 力)도 이 시신들의 앙상하게 드러난 손뼈에 붙들리면 소용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유혈(流血)과 부서진 살점만 이 남게 되는 것이었다. 다만 낙백인들의 움직임만큼은 시신에 비 해서 압도적인 빠르기를 보이고 있었다. 낙 백인들의 손에 시신이 들어올려져 사정없이 패대기 쳐지면 시신도 부서지고 말았다. 넋이 빠져나간 자들과 이미 죽은 시신과의 결전! 상상도 못한 광경에 적우자와 그 일행은 그저 우두커니 서서 볼 뿐이었다. 정말 대단한 볼거리군. 흑마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백마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른 곳은 거치지 않고 그저 화풍렬과 적우자가 가는 방향으로 둘은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괴상한 소음부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 그 얼굴말이 한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흑마왕이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둘의 대화는 전음으로 이루어져 곁에서도 엿들을 수가 없었다. 불과 이십여 걸음 떨어 진 곳에서 지켜봄에도 적우자나 화풍렬이 눈 치채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글쎄... 분뢰수가 갈림길에서 갈라섰을 때 이 일행 을 쫓기로 한 것은 백마신의 생각이었다. 아마 따로 볼일이 있겠지... 볼일? 그럼 녀석을 따라가는 것이 낫지 않았겠나? 흑마왕의 질문에 백마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함정에 가까이 가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지역에서 잘 아는 상대 와 싸울 때는 불리하다. 가장 상식적인 답변 이 백마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백마신의 말을 끊는 한마디가 있었다. 오랜 만이군. 백마신은 멈칫해서 흑마왕을 보았다. 어둠 속에 동화(同化)된 듯이 숨어있는 둘 이지만 서로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 었다. 그들은 이 지하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충분 히 볼 능력이 있었고, 지금은 불빛이 비추이 기 까지하는 상황이었다. 뭐라고? 백마신의 의아한 듯한 표정과 질문에 흑마 왕의 뻣뻣한 수염이 꿈지럭거렸다. 그는 백마신을 보지않고 한창 치고받는 낙 백인들과 시신들의 격전장을 향해 눈길을 주 고 있었다. 그걸 보고 백마신은 방금 전에 자신에게 오랜만이군 이란 말을 던진 것이 흑마왕이 아님을 알아 차렸다. 적우자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시신을 조정하던 진홍의 승포를 걸친 자가 자신들에게 똑바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정확히 자신들 가운데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우자는 자신 의 등뒤로 눈길이 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풍렬도 이 눈길을 느꼈다. 도대체 누구를 보는 거지? 의아한 기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등뒤로 오직 점창문인 둘과 송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진홍의 승포를 걸친 기분나쁜 자의 시선은 그 뒤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눈길은 실로 끔찍했다.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재는 듯한 시선 이었다. 푸하하하하--- 그 시선을 받던 일행 중의 누군가가 갑자 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크고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모두들 등골이 오싹해졌다. 전혀 웃을 때가 아닌데 터져 나온 웃음은 그만큼 기괴하게 여겨진 다. 알았다! 알았어! 이제 알았다! 이건 꿈이 야! 안그래? 모두들 잘 보라고! 이건 결코 현실이 아니야! 꿈이라고 꿈! 유홍광은 그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막기에는 늦었다. 갑작스런 웃음을 터뜨린 점창문인 왕추(王醜)은 미친 듯이 앞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열 사람이 나란히 서있을 수도 있는 넓은 통로였다. 유홍광은 갑자기 대형에서 이탈해나간 왕추을 잡을 수는 없었 다. 화풍렬과 적우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뛰 어나가는 점창문인을 볼 뿐이었다. 자, 보라고!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것들 이 있을 수가 있어? 이건 거짓이라고! 자, 잘보라고! 이게 진짜 있는 것이라면 난 천하 무적의 검객이다! 왕추은 소리지르면서 한창 싸우고 있는 격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의 왼쪽에는 시신들이 삐걱대며 다가오 고 오른쪽으로는 낙백인들이 번들거리며 광 기넘치는 눈을 빛내며 뛰고 있었다. 자, 아무렇지도 않잖아! 자... 정말 잠시동안 그는 싸움터의 한복판에서 손을 흔들며 칼은 땅에 꽂아놓은 채로 있었 다. 그 모습에 유홍광과 남은 일행들은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둬! 위험하다! 다급히 소리지른 것은 적우자였다. 그러나 적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추의 머리는 시신의 손뼈에 두부처럼 으스 러지고 한쪽 팔은 낙백인의 손에 쥐어져 그 대로 어깨에서 잡아 뽑히고 있었다. 왕추의 머리를 으갠 시신의 손뼈는 그대로 왕추의 몸을 잡아채는 동작을 했다. 그로인 해 왕추는 낙백인과 시신에게 양쪽으로 당겨 지게 되었다. 쩌억! 기분나쁜 음향이 유난히도 선명하게 모두 의 귀에 들어왔다. 유홍광의 눈은 감겨질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데리고 온 점창문하 가운데 남 은 것은 셋뿐이었다. 칼을 쥐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 니... 유홍광은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그의 눈에는 온통 분노와 원한만이 이글거리고 있 었다. 화풍렬은 유홍광의 팔뚝을 붙들었다. 유홍광의 튀어나가려던 몸이 세워졌다. 화 풍렬의 꾸짖음이 유홍광의 귓속으로 파고들 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적우자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모두 물러서! 적우자의 외침에 분분히 물러서며 보니 낙 백인과 싸우던 시신들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일행을 향해 움직여 오고 있었다. 낙백인들은 시신들이 자신들을 버려둔 채 다른 곳으로 향하자 자신들의 앞에 방치된 채로 서 있는 진홍의 승포를 입은 자를 덮치 고 있었다. 진홍의 승포를 입은 자는 고개를 뒤로 제 끼면서 웃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즐 거운 일을 하는 사람같아 보였다. 적우자와 화풍렬은 희미한 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왜 시신들이 갑자기 낙백인들을 놔두고 그 들을 덮쳐오는 것일까? 도대체 서로 죽어라고 싸우던 적을 팽개치 고 옆에서 구경하는 자신들을 공격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자신들 중에 무슨 원한이라도 가진 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을 교환하면 서도 적우자나 화풍렬은 서로 아무 것도 모 른다는 점만을 확인했다. 적우자는 선두에서 덮쳐오는 시신을 맞이 했다. 시신의 손뼈가 마구 덜렁거리면서 적우자 의 머리와 가슴을 쓸듯이 긁어내려오고 있었 다. 쉬이익! 한줄기 바람이 적우자의 전신을 휘어감았 다.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은 적우자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바람이 일고 나서 적우자에게 덤비던 시신이 그대로 박살 나 날아가고 있던 것이다. 놀란 유홍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자 적우자의 손에는 어느틈에 검이 쥐어져 있었 다. 한 손에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에 불진을 쥔 적우자의 몸에서는 아련한 푸른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런 적우자에게 이번에는 낙백인 하나가 허공에 몸을 띄우며 덮쳐왔다. 높이 떠서 그 대로 아래로 올라타듯이 적우자를 깔아뭉개 려고 하는 것이다. 적우자의 손에 든 검이 퍼런 광채를 쭉 뻗 어내었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낙백인의 몸은 그대로 두 동 강이 나서 흩어지고 있었다. 과연 당대 청성 장문인이 비범하다는 말 이 사실이었군... 진홍의 승포를 입은 자가 크게 외치는 소 리가 들렸다. * * *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인다... 깨어나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누구일까? 그는 이 지하에 있다. 그를 만나야한다.> 2 적우자는 가슴 속에서 부글거리는 노여움 을 참아야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간 점창문인을 그는 마 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런데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정신을 빼앗겨 손써볼 기회마저 놓친 것이다. 낙백인은 자기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건 무조건 공격했다. 완전히 무차별공격을 퍼붓어대는 것이다. 그러나 시신들은 한 사람의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화풍렬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아니! 왜 우릴 잡아먹으려는거야! 미친 놈들은 저쪽이잖아!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유홍광은 그들 을 몰고 뒤로 달아나야했다. 유홍광은 칼로 가슴을 후벼패이는 기분이었다. 남은 세 점창문인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화풍렬은 엉거주춤해가면서 송학의 뒤에 서고 있었다. 송학의 앞에서 적우자가 검을 쥔 채로 한 걸음 한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그 한걸음마다 시신이 하나씩 부서지고 덤 벼드는 낙백인이 동강나고 있었다. 그러나 적우자는 긴장에 긴장을 더하고 있 었다. 시신을 앞세우며 다가서는 진홍의 승포! 그 위세는 절대 자신보다 하수(下手)로 여 겨지지 않았다. 흐-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서 보기만 할건 가? 오랜만인데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 지? 진홍의 승포가 한 말이다. 그 말에 적우자도 화풍렬도 퍼득 깨달았 다. 자신들의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버렸다. 누가 있어 자신들의 이목(耳目)을 벗어나 뒤 따를 수 있단 말인가? 적우자는 소름이 쭉 끼쳤다. 그들이 누구이든 지금껏 따르면서 구경만 했다면 자신들에게 호의는 전혀 없는 것이 다. 흑마왕과 백마신인가? 들어오기 전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적우자의 입술이 바싹 매말라갔다. 진홍의 승포를 입은 자가 한 말은 원수가 하는 말이 라기 보다는 정말 오랜 만에 만난 사람이 하 는 말투였다. 적우자! 뛰어라! 화풍렬이 등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적우자의 옆에서 한줄기 질풍이 일 어나며 적우자에게 달려드는 시신이 박살이 나고 있었다. 적우자는 즉각 뒤로 몸을 퉁기며 돌아보았 다. 유홍광과 남은 일행은 이미 샛길로 빠져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송학이 기다리고 있으면서 적우자를 불렀 다. 사부님, 이쪽입니다! 적우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로 달리고 있었다. 등뒤에서는 진홍의 승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과연! 철검십이파(鐵劍十二波)가 틀림없는데! 이봐, 너도 나와서 놀아보지 그 래? 그리고 사방을 치달리는 바람소리가 들렸 다. 적우자는 더 빨리 내닫으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저 개자식을! 흥분한 백마신이 뛰어나가려고 했다. 흑마 왕이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전음(傳音)으로 백마신의 귓속에 들려주었다. 기다려봐라. 저놈이 진짜라고 생각하는거 냐? 진짜다! 세상에 저런 개자식이 또 있을 리가 없어! 멈추기는 했으나 백마신의 어조는 강경하 기 짝이 없었다. 흑마왕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수염을 만지 작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백마신을 저렇게 앞뒤 가리지 않게 흥분시킬 수 있는 자라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게 진짜 적마승(赤魔僧) 놈이라 구....? 믿을 수 없다는 어투로 말하는 흑마왕이었 다. 백마신은 이미 허리춤에 둘러놓았던 은사 연편(銀絲軟鞭)을 끌러 손에 감아쥐고 있었 다. 이제 기회가 오면 당장 뛰쳐나갈 것이다. 화풍렬은 손에 든 철검에 더욱 힘을 가했 다. 자신의 검이 빗나간다면 오히려 상대방에 게서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 은 칼에 맞는 것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 다. 아예 아무 생각도 없겠지... 속으로 마구 욕을 하면서 화풍렬은 분뢰수 에게 전혀 보이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검법 을 있는대로 펼쳐내고 있었다. 파라라락.... 마치 허공에 깃발을 흔들어대는 소리가 화 풍렬의 철검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덤벼드는 것들은 깃발에서 일어나 는 바람에 밀리기라도 하듯이 뒤로 밀려났 다. 쉬익! 간혹가다가 허공을 끊어놓듯이 내리쳐지는 철검은 그 앞에 놓인 것은 무조건 박살이 나 게 만들었다. 천하칠대검법의 하나인 철검십이파의 위용 이었다. 무도(武道)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감 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검법이었다. 그러, 시신의 뒤에서 낙백인의 공격을 마 주치며 화풍렬의 검법을 감상하고 있는 적마 승은 웃고 있었다. 화풍렬은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올 랐다. 상대방이 자신이 시신들과 티격태격하는 것을 비웃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어찌 해볼 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이야야--- 기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화풍렬의 검이 소용돌이를 만들기라도 하듯이 뱅글뱅 글 화풍렬의 머리위에서 돌았다. 파파파팍! 칼날이 일으키는 경풍(勁風)에 달려들던 시신들이 날아가버렸다. 화풍렬도 덩달아 날아가기라도 하듯이 슬 며시 옆으로 빠지고 있었다.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어딜 가려고? 적마승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덤벼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시신의 거북스러운 움직임과 는 판이하게 달랐다. 날렵하고 날카로왔다. 화풍렬은 달아나려던 생각을 버렸다. 그리 고 다시 생각하고 결정했다. 위잉! 두 개의 금빛이 허공을 가로질러서 적마승 에게로 접근해갔다. 곡선을 그리며 빙돌듯이 날아가는 두 개의 팔찌! 적마승은 두 손으로 하나씩 날아드는 팔찌 를 쳐내었다. 까깡! 맨손과 날아드는 팔찌는 쇳소리를 내면서 부딛쳤다. 화풍렬은 검을 곧게 뻗어 적마승을 향하게 세웠다. 팔찌는 그대로 화풍렬에게 돌아오고 있었 다. 화풍렬은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다른 한 손 으로 태연하게 팔찌를 받아들었다. 짧은 순 간이지만 노린다면 충분히 노리고 덤벼들 수 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적마승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철검비환의 연환탈명수(連環奪命手)에 속 을 까닭이 없었다. 팔찌를 회수한 화풍렬의 발은 그대로 전질 보(前疾步)를 밟으며 적마승에게 다가왔다. 손에 쥔 칼에서는 하얀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불빛에 반사되는 듯한 광채였지만 그 것을 보는 적마승의 표정은 굳어지고 있었 다. 시신들은 정면으로 나서는 화풍렬의 기세 에 밀리기라도 한 듯이 엉거주춤하다가 뒤로 우르르 밀려나고 있었다. 화풍렬은 적마승에게 정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말고는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 었던 것이다. 젊은 놈이 굉장히 세구나... 화풍렬은 자신의 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적 마승이 아주 젊다는 점에 놀라고 있었다. 아 무리 보아도 불과 삼십정도에 불과한 어린애 (?)였다. 적마승은 다가오는 화풍렬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다가가던 화풍렬은 멈칫하였다. 진홍의 안 개같은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 이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검에 달라붙으려 하 고 있었다. 화풍렬은 긴장해서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 다. 적양신공(赤陽神功)... 적마승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리 철검의 검기가 강기( 氣)의 경지에 이르렀다해도 적양신공이라면 절대 그보다 못하지 않은 것 이다. 점창파의 사일검법(射日劍法)은 폭포아래 에서 그 초식의 완성을 확인한다. 폭포아래 로 단숨에 뛰어들어 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하고 난 후에 다시 돌아나온다. 그러는동안 신고있는 신발과 입고있는 옷 에 물한방울도 닿지 않는다면 그때 사일검법 은 완성된 것이다. 유홍광은 이미 오래 전에 사일검법을 완성 시켰다. 동배 중에 그보다 먼저 사일검법을 완성시킨 사람은 오직 마단걸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유홍광은 팔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멈추거나 할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 게 쏟아져내리는 이 화살의 홍수를 막으려면 물샐 틈 없이 칼을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화살이 날아오는 기세는 빠를 뿐 아니라 파괴적이었다. 유홍광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으로 마 구쳐내는 것뿐이었다. 최고의 초식을 최대의 힘으로 전개하니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서 공력이 고갈되는 증상까지 나타나려 하고 있 었다. 막 또 하나의 화살을 쳐내는 순간 유홍광 은 옆구리에 날아드는 화살을 느끼고 죽는가 싶었다. 손에서 저절로 맥이 풀렸다. 카각! 거친 소리가 나며 유홍광의 좌우에서 칼빛 이 번득였다. 잠시 뒤로 물러나 쉬게나. 나직한 적우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홍광이 검을 고쳐잡으며 뒤로 물러서자 그 자리에 송학과 송추가 나란히 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물러난 위치에는 점창문인 셋이 기가 죽은 표정으로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적우자는 맨 뒤에 서서 뒤를 지켜주고 있 었다. 유홍광은 소매로 땀을 훔치며 호흡을 가다 듬었다. 여유만 있다면 회복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 지 않을 것이다. 내공을 운용하면서도 유홍광은 걸음을 재 촉했다. 앞에 또 무엇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이 화살이 쏟아지는 통로는 빨 리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 나보다 열살이나 아래인데 공력은 나 못 지 않구나... 유홍광은 송학과 송추의 검법을 보면서 생 각했다. 제대로 익힌다면 사일검법이나 청성 파의 청풍검법(淸風劍法)이나 엇비슷한 수준 이었다. 게다가 둘이 함께 펼치고 있으므로 자신처 럼 미련하게 힘을 낭비하고 있지도 않았다. 한동안 전진하고 나서 화살이 멈추었다. 앞에는 세 갈래의 길이 어둠을 집어삼킨 채로 버티고 있었다. 가야할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일행은 꼼꼼 하게 통로를 살펴보았다. 아까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백리화통에 불을 켜서 살핀 결과 한 방향 으로는 아무런 흔적이 없어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두 곳과는 달리 이곳에는 인골(人骨) 이나 사람의 잔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홍광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않고 적우자 를 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해도 좋을 리는 없었다. 적우자는 얼굴에 잔뜩 주름을 만들면서 고 민하고 있었다. 결론은 흔적이 있는 두 길 가운데 한 쪽으 로 가자는 것이었다. 적우자가 생각하기에 흔적이 없다는 것은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 는다는 의미뿐이었다. 그러나 점창문인 셋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아무 흔적도 없는 통로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있는 적우자와 유홍광을 향해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저... 아무 흔적도 없는 곳이 더 안전하 지 않겠읍니까? 설마 그 괴물들이 흔적을 치 우지도 않을테고 이렇게 큰 통로에 흔적도 남기지 않는 함정이 있을리가 없겠지요? 눈치를 보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적우자가 보기에는 반드시 그리로 가자는 의견표시였 다. 유홍광이 어이없는 눈빛을 보내며 막 꾸짖 으려 할 때였다. 다시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이 길에서 생로(生路)를 찾아보려는데 괜 찮겠읍니까? 그의 말이 힘이 된 것처럼 점창문인 셋은 서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유홍광은 말문이 막혀서 셋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들이... 적우자는 아무말 없이 한동안 통로를 쳐다 보았다. 다 함께 그 쪽으로 가자. 마침내 입을 열고는 불쑥 말하는 적우자였 다. 송학과 송추는 낯빛을 굳히며 입을 열려고 하였다. 그때 그들 귀로 나직한 소리가 흘러 들었다. 저 녀석들은 짐을 덜어 주려고 하는 수작 이다. 별 수 없지. 그리고 누가 아냐? 녀석 들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이들은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는 통로로 접어들었다. 시뻘건 안개에 하얀 검빛이 미끄러지고 말 았다. 화풍렬의 얼굴에는 검푸른 기운이 맴돌았 다. 적양신공과 맞서기 위해 전력을 다 기울 이고 있는 중이었다. 적마승과 화풍렬의 싸움에는 시신들도 제 멋대로 날뛰는 낙백인도 끼어들 수가 없었 다. 격렬한 검기(劍氣)와 사나운 열기(熱氣)가 마주치면서 일으키는 가공할 기운이 두 사람 사이로 무엇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줄기 은빛이 그에 못지 않은 위 세로 끼어들고 있었다. 마침 화풍렬이 철검개천(鐵劍蓋天)의 변화 로 적마승을 온통 휘어감다싶이 할 때였다. 적마승도 적양신공을 잔뜩 일으켜 적양수(赤 陽手)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철검에서 쏟아지는 경기(勁氣)가 적양수의 방어와 부딛치면서 쇳소리를 일으킬 때 그 틈바구니를 한줄기 은빛이 파고들었다. 쐑! 화살처럼 적마승을 찔러오는 은빛은 화풍 렬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고 적마승을 즐 겁게 만들었다.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날아드는 은빛을 보 고 적마승은 정말 즐겁게 웃어대서 화풍렬이 어리둥절해 손이 늦추어질 정도였다. 왓하하하! 드디어 네가 손을 쓰는구나! 소리를 지르면서 적마승은 이미 철검개천 의 권역(圈域)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화풍렬이 아차하고 검을 세우며 방어자세 를 취하자 적마승이 피식 웃으며 놀렸다. 솜씨는 괜찮은데 경험이 얕군. 겨우 웃는 소리에 놀라다니... 화풍렬은 창피했다. 적마승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린 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쏟아내지만 눈빛을 번득이며 틈을 보는 수 뿐이었다. 은빛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연이은 공격속에서 화풍렬은 그것이 채찍 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보자 화풍렬의 손은 더욱 늦추어져 자신을 방어하려고 할 뿐이었 다. 당대에 편법(鞭法)의 달인이라면 새북(塞 北)에 산다는 편왕(鞭王) 고일립(高一立)이 었다. 그의 편법은 막강하고 오묘해서 그를 천하 오패(天下五覇)의 다음자리에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저렇게 흐느적거리면서 기다란 채찍은 쓰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채찍은 굵기가 어른팔목만하고 길이는 이장 오척, 그래서 대홍편(大虹鞭)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채찍이었다. 누굴까? 화풍렬은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길이 없었 다. 자신을 도왔지만 적일수도 있었다. 단지 저 앞의 진홍의 승포가 미워 자신을 도울 수 도 있는 것이다. * * * <아직도 멀었나? 그가 부르는 소리는 점점 더 뚜렷하게 들려온다... 어쩌면 그는 나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 다...> 3 흐느적거리면서 걷고 있는 분뢰수가 적우 자의 눈에 띄인 것은 송학이 들고 있는 백리 화통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정말 상황이 좋지가 않았 다. 천정이 한덩어리씩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것을 보고 일행은 왜 자신들이 선택한 통로에 아무 흔적도 없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지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듯 무너져 내 리는 광경을 보고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빨 리 앞으로 뛰는 것말고는 없었다. 유홍광은 그저 점창문인 하나를 낚아채서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송학과 송추도 한사 람씩 낚아채서 달렸다. 적우자는 뒤에서 대라신공을 돋우워 앞으 로 죽죽 밀어내면서 달렸다. 번개가 옆에서 달린다해도 지지않을 만큼 빨리 달린다고 자부해도 좋을 만큼 달렸다. 그리고 이제 막 새로운 갈림길에 다 왔을 때 그들의 앞에 어른 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선두에 서서 달리던 유홍광은 자기도 모르 게 발을 늦추었고 뒤따르던 일행도 덩달아 늦출 수 밖에 없었다. 적인가? 아닌가? 그가 분뢰수였다. 빨리! 급박한 적우자의 말에 일행은 늦추어졌던 발을 날렵하게 놀리며 얼른 통로를 벗어나려 고 했다. 분뢰수는 이미 다른 통로로 빠져들고 있었 다. 갈림길에 선 일행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행적을 찾았다. 분뢰수! 잠깐만! 적우자가 막 외칠때였다. 지쳐서 주저앉아 고개를 한껏 제치던 유홍 광이 비명을 질렀다. 송학과 송추는 비명을 지르는 그를 보고 고개를 제끼다가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적우자는 보지 않고도 무거운 것이 머리위 에서 소리도 없이 하강(下降)하고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피한다면 자신만이 겨우 피할 수 있을 것 이다. 당장에 대라신공의 푸른 광채가 일행을 휘 어감았다. 그리고는 모조리 분뢰수가 있는 방향의 통 로로 집어던져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적우자 자신보다도 다음 대의 인재를 살리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 때 적우자의 눈이 분뢰수의 칙칙한 눈 빛과 맞닥드려졌다. 칙칙한 눈안에서 무엇인 가 빛나고 있었다. 어? 뇌전(雷電)이... 적우자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 했다. 분뢰수의 한 손이 일행의 머리위를 가리켰 다. 그리고 일행 모두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한덩어리의 질풍(疾風)이 일어났다. 난데없는 맹렬한 돌개바람같은 것이 일행 의 머리위를 지나갔다고 생각될 때 머리위에 서 콰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우자는 활이 퉁겨지는 것처럼 튀어나가 며 일행을 밀어대었다. 그러는 그의 뒤쪽으 로 돌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렸다. 콰아앙!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이 적우자의 몸에도 하나 부딛쳤다. 그러나 대라신공의 호신진기에 그대로 퉁 겨져 나갔다. 바닥에 엎어졌다가 뒤돌아본 유홍광의 턱 이 저절로 떨렸다. 박살이 나서 쏟아져 내리면서도 떨어지던 것의 위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통로에서 만난 천정의 덩어리보다 더욱 거 대한 덩어리가 그들 머리위에서 떨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저... 저걸 벽공장(劈空掌)으로 쪼개다 니... 유홍광으로는 상상도 못해본 위력이었다. 어디갔지? 적우자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그제서야 일행은 자신들을 도와준 분뢰수 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적우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분뢰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이 멍청아! 뭘 봐? 빨리 칼이나 휘둘러! 갑작스럽게 욕을 먹자 화풍렬은 열이 뻗쳤 다. 그러나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화풍렬의 검은 부르르 떨면서 다시 깃발을 흔들러대는 소리를 울려내었다. 그 와중에도 화풍렬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를 힐끔 쳐다볼 수 있었다. 그가 누군지 알자 화풍렬은 이제 쳐다보지 도 않고 무조건 최강의 검법으로 소문난 철 검십이파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환으로 밀어 부치면서 보여 주었다. 은사연편(銀絲軟鞭)은 그런 철검십이파의 사나운 위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돕고 있었다. 하하하! 이봐, 백마신! 그래 칠십 년 만 에 만난 죽마고우에게 이럴 수 있어? 아주 뼈도 못추리게 할 모양이네? 파라라락! 철검이 내는 소리. 쉬이이... 피잉! 핑! 은사연편이 내는 소리. 콰직! 으지직! 쩌억! 세 번째 소리에 적마승이 얼굴을 붉히면서 고래고개 외쳤다. 야! 이 꺼먼 놈아! 그만두지 못해! 흑마왕이 주변에서 어기적거리는 시신과 낙백인을 손에 걸리는 대로 부수고 작살내고 있었다. 그것이 세번째 소리가 나는 까닭이 었다. 싫어! 그 말을 하면서 흑마왕의 손놀림은 점점 더 빨라지면서 시신을 먼저 부숴대었다. 낙백인과의 싸움에 많이 부숴져 그나마 얼 마 없던 시신들은 삽시간에 다 박살이 나서 흩어졌다. 적마승은 까르르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백 마신의 입에서 차가운 소리가 서리내리듯이 튀어나왔다. 닥쳐! 조용히해! 시끄럽다! 이놈이! 그리고 뒤이어 터지는 무지막지한 욕지거 리. 뭐라고해도 적마승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 다. 흑마왕은 이미 그들 뒤로 다시 돌아와 있 었다. 세 사람이 치고받는데 통로는 그리 넓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사이로 흑마왕의 거구가 통과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흑마왕은 오고가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적마승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는 흑마왕이 뒤에서 덮칠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와 화풍렬의 충돌 중에 그들 사이 에 있던 낙백인이나 시신은 몽땅 깨지고 으 스러져 버렸다. 남은 것은 적마승 자신의 뒤에 버티고 싸 우는 시신들과 낙백인들이었다. 그런데 왜 저 꺼먼 놈이 내것만 부쉈지? 과연 적마승의 뒤에서 괴성을 울리면서 낙 백인들이 덮쳐오고 있었다. 고수간의 대결에 서 일어나는 엄청난 위세가 뚜럿하게 드러남 에도 덮치는 것은 낙백인이 제정신이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싸움의 위세에 모두 밀려나가 떨어 졌다. 적마승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장탄식이 터져나와 화풍렬과 백마 신, 흑마왕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세 사 람이 동시에 생각한 것이 같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 임마! 그렇다고 손을 멈출 화풍렬이나 백마신이 아니었다. 적마승도 방어를 허술하게 만들지 는 않았다. 이미 칠십 년이나 지났어도 우리의 원한 은 여전한 것인가?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도 않나? 아아... 이미 칠십 년이나 지났건 만... 화풍렬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해야 서른밖 에 안되어 보이는 놈이 아까부터 칠십 년 타 령이었다. 흥! 개자식! 죽여줄테니 걱정말아! 백마신이 노성(怒聲)과 함께 은사연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백마신이 앞으로 내달았 다. 곁에 있던 화풍렬은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수레바퀴가 앞으로 굴러가듯이 백마신이 채찍을 굴리면서 돌진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정말 신편(神鞭)이 되었군? 그 럼, 백옥수(白玉手)도 대성하였겠고... 그럼 마(魔)도? 그 말을 끝으로 적마승은 붉은 안개가 어 리운 두 손을 한꺼번에 죽 밀어내면서 몸을 뒤로 움직였다. 낙백인들은 뒤로 물러나는 그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쿵! 쿵! 쿵! 한꺼번에 덤벼들던 세 명의 낙백인이 적마 승의 몸에 닿기가 무섭게 핏덩어리가 되어 퉁겨졌다. 적양신공이 극점에 달해 일어난 현상이었 다. 바람처럼 통로 한끝에 서서 적마승은 씨익 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두 손이 소매 속으 로 들어가 있었다. 백마신도 멈추었고 화풍렬은 그저 빨리 가 라하는 표정이었다. 어떤가? 마치 자신의 손으로 죽인 놈에게 놀림받는 것 같아 기분 더럽지? 적마승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대해 백마 신이 한 일은 널부러져 있는 낙백인의 시체 한구를 발로 걷어차서 날려보낸 것이었다. 적마승은 낭랑한 웃음을 남기며 사라졌다. 적우자는 발바닥이 뚫리고 있다는 것을 알 았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 정도는 귀찮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의 눈 앞에서 송추가 핏덩어리가 되어 엎어져 있었다. 지금 그 송추의 유해위로 거구의 사내가 엎어지고 있었다. 송추가 마지막으로 보인 검의 경지는 적우 자가 기대한 송추의 재능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몸(身)과 검(劍)이 한덩어리가 되어 적을 꿰뚫어버린 것이다. 다만 미숙했다. 그래서 적을 죽이고 그 자 신이 물러나지 못해 저 거구의 사내가 죽는 순간에 날린 한 쌍의 갈고리를 몸에 박고 말 았다. 그래도 대단한 일이기는 했다. 낙백산을 복용하여 그 힘이 얼마나 커졌는지 모를 고 수와 겨루어 동귀어진(同歸於盡)한 것이니 까. - 시왕(屍王)이 이일에 끼어있다! 이제 이것은 적우자에게 확신이었다. 시왕의 추종자 가운데 손꼽히는 고수 하나 가 송추와 같이 이승을 떠난 것이다. 더구나 는 낙백산을 복용하고 있었다. 지난 날 시왕이 섭혼루에 몸담았다는 이야 기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송추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 적우자의 머리 위에 들려져 있는 송학도 마 찬가지였다. 송학은 자신으로 인해 사부가 곤경에 빠졌 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송추의 몸 에 박히는 갈고리를 보면서 내닿지 않았다면 함정이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기에 빠져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적우자가 왜 자신을 집어올리려고 그 함정에 뛰어들었겠는가? 적우자는 송추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자신 들 모두가 마전(魔箭)에 관통당했을 것이라 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덮어놓고 분뢰수를 따르려고 한 것이 문제 였다. 앞에서 송학과 같이 가던 송추는 어둠 속 에서 자신들을 겨누는 무엇인가를 발견하자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신검합일(身劍合 一)로 날아 공격해 들어갔다. 숨어있던 고수 하나가 그에 맞섰고 결국 함께 쓰러졌다. 송학은 그 다음에 그들을 향해 내달았고, 그때 밑바닥이 열렸다. 떨어지는 송학을 적우자가 받아들었지만 솟구치려 할때 마전이 쏟아지자 그대로 떨어 져 내려 밑에 솟은 칼끝을 밞았다. 적우자는 칼끝을 밞고 다시 솟구치는 정도 는 그다지 어려워 하지 않았다. 대라신공을 돋우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바닥에 박힌 칼날은 보통이 아니었 다. 그것은 날카롭기가 천하제일이라는 귀왕인 (鬼王刃)이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적우자는 발바닥이 관통당해 버 렸다. 적우자는 휘익소리가 나게 한팔로 송학을 휘둘러 다시 유홍광 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 리고 꽂혀 있는 자신의 발등을 다른 발끝으 로 가볍게 밞으며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적우자의 몸은 수직으로 위로 솟구쳐 올랐 다. 깊이가 이장 가량 되는 함정이 순식간에 적우자의 발밑에 가라앉고 있었다. 허공에 멈칫한 적우자의 한쪽에는 적(敵)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점창파 사람들과 송학이 자리 를 잡고 있었다. 쉬익! 마침 날아드는 마전을 불진으로 쓸어버리 며 적우자는 적을 향해 허공에서 몸을 퉁겨 날아갔다. 어깨를 마전에 관통당한 유홍광도 그 광경 에 저절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 있던 점창문인 오문천(吳文 淺)은 마전에 목이 뚫려 비명 한마디 못내고 횡사(橫死)를 하고 말았다. 치치칭! 칼날이 칼날을 퉁기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저쪽에 버티고 마전을 쏘아대던 자들이 쓰러 지고 있었다. 그순간 어둠 속에서 빛나며 다시 적우자를 덮쳐오는 것이 있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송학이 소리쳤다. 적우자가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강적을 만난 모양이었 다. 함정의 넓이는 삼장 가량이었다. 건너뛰려 던 송학은 유홍광을 돌아보았다. ? 기묘한 유홍광의 표정에 송학이 멈칫하고 말았다. 갑자기 유홍광이 부르짖었다. 단걸! 그 순간 송학은 머리끝이 쭈볏해졌다. 이 제 점창문인의 안위를 걱정할 틈이 없었다. - 관일창법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이라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점창파는 당장 다시 명실상부한 대문파의 자리를 되찾겠 지... 사일검법만 해도 우리 청풍검법에 별 로 뒤지지 않지 않느냐? 머리속에 적우자가 한 말이 둥둥거리고 있 었다. 송학은 당장 몸을 퉁겨 삼장을 가로질렀 다. 청성파의 세류표(細柳飄)에 이정도는 어 려운 것이 아니었다. 날아드는 송학을 향해 또 무엇인가가 덮쳐 들었다. 날카로운 기세가 여지없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송학은 그대로 검을 누여 휘둘렀 다. 무엇인가 검에 걸려 잘리는 듯했지만 비명 이 없었다. 내려선 송학의 눈앞에 핏발세운 중 한 사 람이 잘려나가 팔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노 려보고 있었다. 그 복장은 눈에 익었다. 공동파의 요공과 같은 형식이었다. 공동삼수? 송학은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조건 맞서 싸웠다. 한 사람이라도 그가 막아야 적우자의 부담이 덜 할 것이고 그러면 더 안전한 것이다. 적우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 창이 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의 섬전(閃電)이라고 여기어질 정도로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창끝은 보이지도 않았 다. 비류보로 반사적으로 피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그때 옆에 송학이 느껴졌다. 이런! 적우자는 그대로 불진을 뻗어 섬전을 감아 쥐었다. 불진의 술이 그대로 갈라지며 창은 적우자의 팔뚝에 박혔다. 불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심장까지 뚫렸을 것이다. 동시에 창대가 두동강이 났다. 적우자의 검이 그순간을 놓치지 않고 육박 해 들어갔다. 막 적우자의 칼이 창대를 따라 사람을 배 어버리려고 할 때 두 가지 소리가 울렸다. 하나는 소름끼치는 징소리였고, 하나는 유 홍광의 외침소리였다. 안됩니다! 적우도장! 덤빌 때와 마찬가지로 섬전처럼 창을 휘두 르던 그림자가 사라져갔다. 정말 점창의 마단걸인가? 뒤늦게 적우자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 다. 송학이 상대하던 자도 달아났다. 그는 송 학에게 팔을 잘리고 몸에 십여개의 검상(劍 傷)을 입은 뒤에도 팔팔하게 뛰어 달아났다. 송학은 그가 입은 검상이 멀쩡한 사람이라 면 전혀 거동도 못할 지경이란 것을 알고 있 었다. 소름이 쭉 끼쳐왔다. 괜찮으냐? 창백하게 질린 송학을 향해 적우자가 물었 다. 그러나 정작 괜찮지 않은 것은 적우자 자 신이었다. 도대체 아까 그 철부지 어린 놈은 누구닙 까? 검을 집어넣으며 화풍렬이 물었다. 흑마왕은 겁먹지 않는 그를 대견하다는 듯 이 보았다. 삼년 전에 오십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등장한 그들을 무시하는 자는 한 둘이 아니 었다. 그러나 삼년이 지난 지금 흑마왕과 백 마신은 천하오패에 버금가는 무서운 인물로 다시 명성이 자자했다. 철검비환 화대공이라해도 그들 수준에 미 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화풍렬은 넉살좋게 그들에게 묻고 있었다. 내 동갑내기 웬수다. 백마신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화풍렬은 잠 시 넋나간 표정이 되었다. 같은 연배라고요? 기겁을 한 표정으로 화풍렬이 소리쳤다. 믿어지지 않았다. 백마신이 사십대로 보이는 것은 이미 들어 서 알고 있어 넘어갈 만했다. 그런데 적마승이란 작자가 동갑내기라 니... 화풍렬은 멀뚱멀뚱 둘을 다시 쳐다보았다. 흑마왕은 얼굴에 뻣뻣한 수염이 가득이라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백마신 은 매끈한 얼굴에 흰 살갗, 주름없는 모습이 아무리 많아도 사십대였다. 화풍렬은 백마신을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겁먹을 백마신도 아니건만 왠지 지금은 그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역시 아까 그 적마승인가 하는 자와 무엇 인가 있기 있군. 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긴급시에 서로 이를 갈고 싸울 만큼 지독한 원한이 뭘까? 화풍렬로서는 이해가 가지않았다. 그들이 말대로 동년배라면 이미 구십은 훨 씬 넘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도 록 지울 수 없는 원한이란 것이 대체 있을 수가 있는 것일까? 사람이란 망각을 할 줄 안다. 그리고 이미 칠십 년이 지났다고 자기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 정도면 부모의 철천지 원수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뒤로 물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무슨 원수를 지었길래 그토록 난리 였읍니까? 궁금해하지마. 궁금해요. 그럼 궁금하는 걸로 그쳐! 묻지마! 제가 주선을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적이 많아 좋을 것이 뭐가 있겠어요? 끈질기게 묻는 화풍렬을 백마신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안그래도 싸늘한 기세가 무럭무럭 일어나 는 백마신이 마음먹고 노려보자 그건 아주 한 겨울의 추위가 달아날 정도의 무섭고 예 리한 한기(寒氣)가 주변을 마구 짓이기는 것 이었다. 그러나 화풍렬은 눈을 꼿꼿이 뜨고 마주 보았다. 이 낙백인의 소굴에서 그만한 고수를 끌어 들인다는 것은 큰 소득이었다. 비록 시신을 부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손잡아도 무방했다. 더우기 시신은 이미 흑마왕 손에 모조리 부셔지지 않았던가? 흐흐, 이야기 해주지 그래. 이놈도 고집 이 어지간한데... 듣고도 해결할 수 있으면 그도 대단한 것 아니냐? 흑마왕이 옆에서 한마디했다. 백마신은 힐끗 흑마왕을 잡아먹을 듯 노려 보았다. 화풍렬은 그래도 그 한마디에 더 힘을 얻 은 듯이 백마신을 향한 눈빛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백마신은 잠시 화풍렬을 더 노려보다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알고 싶으냐? 화풍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신이 다시 느릿하게 말을 했다. 내가 녀석하고 칠십 년 전에 어떤 원한을 맺었는가 알면... 정말 이 안에서만이라도 화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말을 할듯 하다가 다시 묻는 백마신의 태 도는 오히려 화풍렬을 감질나게 만들었다. 걱정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재촉을 받자 백마신은 천천히 끊어서 말했 다. 그러니까 내가 녀석하고 맺은 원한은... 화풍렬의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까지 듣고 멍청해져 버렸다. 녀석을 내가 칠십 년 전에 갈가리 찢어 죽였다는 거야. < 1 권 끝 > 第 十 章 復 活 한 자 , 죽 는 자 1 죽은 듯한 침묵이 사위(四圍)를 감싸고 어둠이 날개를 펴 그 위를 덮어버렸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들리는 소리라고는 거친 숨소리가 전부였다. 유홍광은 수직(垂直)으로 잘려진 창대를 들고 서 있었다. 적우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싸매었다. 송학은 단지 송추의 시신(屍身)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 다. 점창문인 둘은 자신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던 곳을 가볍게 뛰어넘어 데려다 준 송학을 경이(驚異)의 눈으로 보았다. 아 무리 봐도 자신들과 엇비슷한 삼십 중반의 도인(道人) 송학의 실력은 정말 뜻밖이었다. 유홍광은 백리화통에 반짝거리는 창날의 아래에 시선을 고 정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분명하게 본 것이지만 아직도 그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본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는 증거가 지금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마단걸(馬單杰).> 선명한 세 글자가 창날에 아로 새겨져 반짝이고 있었다. 그 녀석이 맞는 거냐? 조용한 적우자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어도 유홍광은 뭐라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적우자도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의 불진이 찔러오는 기세(氣勢)를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이렇게 팔이 찔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나선 (螺旋)의 경력(勁力)에 휘말려 팔은 끊어지고 가슴 한 복판이 그대로 관통당했을 것이다. 관일창(貫日槍)이라... 발바닥은 완전히 관통되어서 발등이 피로 젖어 있었다. 바르고 싸매고 해서 이제는 움직이는 데는 별반 지장이 없 었다. 팔뚝도 붉게 물들어 있지만 어차피 검(劍)은 오른손으로 휘 두를 것이니 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고, 다만 불진을 휘두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 것이다. 창이 가슴에 박히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송학의 멍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이십 여 년간을 함께 생활한 동문사형의 죽음은 송학 에게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의 시신이 눈앞에 널부러져 피를 흥건히 쏟아내고 있지만 여전이 믿기지 않는 일인 것이다. 적우자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과 이년여 전에 그 자신도 경험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제가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난 후 송추는 자신 이 거두어 가르친 것이다. 학아! 나직하지만 짦고 힘있는 소리가 송학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 다. 송학은 흠칫하여 자신의 사부를 보았다. 적우자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劍)을 거두어라. 송학의 어깨가 가만히 떨렸다. 검을 거둔다는 것이 무슨 뜻 인지 송학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송추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명백하게 깨 달았다. 송추의 시신을 수습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도 받아들 어야 했다. 그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일행 가운데 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유홍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백하게 정해놓고 있었다. 그는 백리화통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검을 뽑아들었다. 적우자는 물끄러미 그런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도 역시 이제 대비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학아, 내가 천라불진(天羅佛塵)을 몇 식(式)까지 가르쳐주 었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송학의 온몸이 그때문에 바르 르 떨렸다. 팔식(八式)입니다. 평정하게 대답하려고 했으나 목소리는 절로 떨리고 있었다. 유홍광마저도 적우자의 이 말에 놀라 돌아보고 있었다. 적우자는 잠시 소리없이 웃으며 송학을 보았다. 복잡한 뜻이 담긴 웃음이지만 송학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송추의 몫까지 해야하는 것이다. * * * <향내가 난다....> * * * 화풍렬은 눈을 부릅뜨고 백마신을 노려보다가 눈길을 흑마 왕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런 철검비환 화대공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눈길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진짜인가? 화풍렬은 방금 백마신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그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짦은 순간이지만 그 뜻은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제가 그런 말을 믿을 바보로 보여요? 네 눈에는 내가 너까짓 것 하고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 이냐? 백마신은 진지하게 되물어왔다. 대들듯이 묻던 화풍렬이 오히려 머쓱해지고 말았다. 흑마왕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화가야, 지금 저 녀석이 한 말은 사실 그대로다. 화풍렬은 흑마왕의 말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서 반문했다. 그냥 죽은 사람도 아니고 갈가리 찢어죽였다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요? 야 이놈아! 시체도 어기적거리고 걸어다니잖아! 백마신이 배알이 뒤틀린다는 투로 말했다. 화풍렬은 머쓱해졌다. 그러나 다시 떠들었다. 그거야 시정(屍精)을 움직이는 구시술(驅屍術)이지요. 죽 어서 시신도 못남긴 자를 어떻게 살려내요? 그것도 젊은 모습 으로 다시 되살리다니요! 아무리 신기하고 희안한 일을 많이 듣고 겪은 화풍렬이라도 이 일만큼은 괴사(怪事)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걸어다니는 시신도 평범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강호의 기인(奇人)들이 시신을 움직이는 수법은 적 어도 수백 가지는 되었다. 그 중에는 아주 유치한 속임수 부 터 심오한 술수에 이르기까지 수준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혹세무민(惑世誣民)에 이용되었다. 근본적으로 시신을 움직이는 술수라는 것부터가 사술(邪術) 인 것이다. 젊은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적어도 녀석이 죽을 당 시보다는 십여세나 늙었는걸. 흑마왕이 킥킥대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백마신과 화풍렬의 표정은 있는대로 굳어져서 흑마왕을 쳐다보았다. 흑마왕은 미처 그들 둘이 생각도 못한 것을 보았던 것이다. 화풍렬이 갑자기 배를 쥐고 웃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돌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하하하... 그럼 살려낸지 십년도 넘었겠네요? 백마신의 표정은 심각할 대로 심각해져 있었다. 흑마왕도 무언가를 느낀 듯 말없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다시 말을 한 것도 화풍렬이었다. 도대체... 그럼, 그동안 또 다른 사람도 충분히 살려냈겠 군요? 이 연혼전이라는 것부터가 겨우 삼년 전에야 노출된 것 이니 말입니다. 적우자는 오른손에 검을 쥔 채 선두에 서고 있었다. 늘 옆구리에 차고 있던 불진은 송학의 허리로 옮겨가 있었 다. 차고 있어도 한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쓸모가 없 었다. 바로 뒤에서 유홍광이 백리화통을 비춰주고 있었고, 그 뒤 로 점창문인 둘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배후를 맡은 송학은 방금 전해받은 천라불진의 후반 사식 (四式)을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귓가에는 적우자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이 맴 돌고 있었다. - 만약의 경우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 너만 돌아가게 된다 면, 표운봉(飄雲峯)아래서 천라불진을 펼쳐보아라.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적우자가 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송학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져서 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심호 흡을 하다가 숨을 급작스럽게 멈추었다. 적우자의 발걸음은 이미 멈추어 있었다. 한동안 소리없이 멈춰있던 일행 모두가 이제는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유홍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향(香)일까요? 적우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실제 느끼기는 했지만 몸에 끈 적거리며 달라붙는 듯한 기분은 얼마 전부터 계속되었다.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았으니 독향(毒香)은 아니라고 생각하 는 것이 고작이었다. 송학은 뒤에 아무도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럴 때 앞뒤로 적을 만난다면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을 것 이다. 더우기 상대는 마단걸이나 공동삼수 같은 고수들마저 낙백 인을 만들 정도였다. 백 번 조심해도 모자란 일이다. 적우자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 몰라요! 화풍렬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당장 흑마왕의 눈이 도끼가 되어 화풍렬을 찍을 듯했다. 같이 왔잖아! 사방에 쩌렁거리는 고함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셋 가운데 누구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곳에서 공격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래도 몰라요. 녀석은 줄곳 그저 따라오기만 했고 자기가 누구냐는 말에는 그저 분뢰수라고만 했다고요! 화풍렬이 화들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흑마왕이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 었다. 더우기 다시 강호에 나타난 지난 삼년간은 정말 더했 다. 분뢰수? 흑마왕과 백마신이 동시에 외쳤다. 그놈이 여기까지 왔다고? 백마신이 중얼거렸다. 그는 성도(成都)에서 나름대로의 소식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흑상표국으로부터 나오는 소문도 듣고 있었다. 천축을 뒤흔드는 괴인에 대해서도 물론 들었다. 너한테 도전했어? 흑마왕이 짙은 눈섭을 꿈지럭거리며 화풍렬을 아래위로 쏘 아보며 물었다. 이마에 장식으로 달린 뿔이 당장 튀어 나오기 라도 할듯이 까닥거렸다. 화풍렬의 얼굴 주름이 더 많아졌다. 그래요. 흑마왕이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의도적인지 동굴 전체로 더욱 쩌렁거리며 소리가 퍼졌다. 2 낙백산에 대해서 좀 알려주시겠읍니까? 적우자는 심각하게 묻고 있는 유홍광을 보았다. 구불거리는 길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낙백인들이나 움직이는 시신, 어느 쪽도 이렇게 기척없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도 많이 알지는 못해... 그리고 그 해독법은 전혀 모른 다는 것이 맞겠군. 유홍광은 아연한 표정으로 적우자를 보았다. 해독법이 없다고요? 그래. 적우자의 단호한 음성은 결코 헛소리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 었다. 단지... 만성독약이 아닙니까? 그냥 조심해서 끊는... 안돼. 그런 식으로 끊을 수 있는 여느 만성독약과는 달라. 낙백산이 그런 정도의 약이라면 섭혼루가 그토록 맹렬하게 강 호를 뒤흔들수는 없었겠지. 적우자는 유홍광의 말허리를 자르며 더욱 분명하게 말했다. 유홍광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적우자는 과거에 섭혼루에 의해 낙백산을 복용한 사람을 알 고 있었다. 그때 적우자는 그를 구하지 못했고, 그는 결국 죽었다. 그 사실은 유홍광도 알고 있었다. 낙백산은 섭심술(攝心術)이나 미혼술(迷魂術)과 함께 사용 하는 것이다. 그 시술자(施術者)를 죽이고서야 무엇이건 할 수 있어. 적어도 점창제일고수가 낙백산에 당했다면 그보다 더 강한 시술자가 있다는 이야기야. 이어지는 적우자의 말에 유홍광은 말문이 막혔다. 듣고 있던 송학의 눈섭이 일그러들었다. 적우자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에게 한 사람을 연상시켰다. 송학의 사숙이었던 사람... 그리고 송추의 사부였던 사람. 이년 전에 그가 낙백산에 희생되었었다. 적우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만약 시술자가 없이 그냥 낙백산을 복용한다면 그건 자기 자신을 환각(幻覺)에 밀어넣는 짓이야. 하지만 너도 보았듯이 그 환각은 몸에 일어나는 변화가 함께 하는 환각이다. 단순히 자기 혼자 꿈꾸는 망상이 아니야. 유홍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낙백인들의 뒤틀린 모습과 광기어린 눈빛이 선명하게 떠올랐 다. 그리고 거기에 결코 겹쳐서는 안되는 얼굴 하나가 겹쳐졌 다. 단걸... 유홍광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송학은 잠시 사부를 엿보았다. 지금 송학의 등에는 자신의 검집과 송추의 검이 함께 매어 져 있었다. - 검(劍)이 곧 사람이다(劍卽是人). 청성파의 검법비결(劍法秘訣)에 들어있는 구절에 따라 송추 의 시신은 거두지 못했으나 검은 거둔 것이다. 사부님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적우자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송학의 말대로 그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 지 않았다. 분뢰수... 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널려있는 낙백인들이 흘린 피내음이 코를 찔렀다. 시신의 썩은 냄새도 함께 밀려들었다. 사방으로 통로가 열려 있었고 어둠이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 다. 화풍렬의 눈으로도 겨우 삼장 가량이 보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흑마왕이나 백마신은 마치 전부 보이는 것처럼 여유 있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앞이 꽉 막힌 석벽(石壁)을 향해 태연 히 다가가고 있었다. 흡사 그 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설마 저 벽이 가짜라도 되는 것일까? 화풍렬은 무엇인가 환술(幻術)이라도 전개되었는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흑마왕은 벽앞에 오자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콰쾅 ! 무너져 내리는 벽을 보면서 화풍렬은 어이가 없었다. 두께가 두 자 가까이 되는 벽에는 흑마왕이 걸어서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렸다. 백마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냥 흑마왕을 따라 그 구 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화풍렬도 어쩔 수 없는 듯 뒤따랐다. 아니 뭐 저런 자들이... 소문에 듣던 것보다 훨씬 과격(過激)한 사람들이었다. 지하의 건축은 전체적으로 변화가 가능하도록 이루어져 있 었다. 벽과 벽이 움직이고 통로가 바뀌는 일이 가능한 보기드 문 기관건축(機關建築)이었다. 화풍렬 자신도 그와 비슷한 기관건축이 있는 만보루에서 지 내 왔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지하의 기관건축은 만보루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단지 방문을 이용하고 시각의 착각을 일으켜 원근감(遠近 感)을 혼란시키는 정도가 고작인 만보루의 규모와는 그 기본 적인 수준부터 맞지 않았다. 움직이는 벽의 두께가 두자 이상이고 전체적인 지하의 넓이 는 거리감각을 엉망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화풍렬은 이 지하의 건축규모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것 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걸 누가 만들었나? 역시 연혼전이 완 전히 망했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을까? 움직이는 벽의 한귀퉁이를 뚫고 막혀있어야 할 통로를 내닫 는 흑마왕과 백마신을 쫓으며 화풍렬은 자신이 왜소하다는 느 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흑마왕이 멈추었다. 앞에서 장애물을 한주먹에 부수어 가며 가던 그가 멈춘 것 이다. 뒤따르던 두 사람도 멈추었다. 뭐야? 백마신이 짜증섞인 투로 물었다. 이상한데... 겨우 나온 흑마왕의 말투는 정말 의혹에 가득차 있었다. 백마신이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면서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거 어디서 들었던 물건 같지 않아? 백마신은 그 말에 사방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틀림없는 그 건축이다. 궁금증을 일면 잠시도 참을 수 없는 화풍렬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흑마왕과 백마신이 흘깃 화풍렬을 쏘아보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화풍렬은 시침 뚝 떼고 두 사람을 멀뚱 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어째서 요새 걸리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뻔뻔스럽 지? 한숨섞인 말을 남기며 흑마왕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풍렬은 불빛 한점 없는 가운데 혼자 멍하니 있을 수는 없 었다. 결국 그는 내친 걸음이라고 따라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화풍렬이 들어갔을 때 흑마왕의 모습이 어둠에 동화(同化) 되기라도 한듯이 흐릿하게 보였다. 좀 더 저쪽에 서 있는 백 마신이 입고 있는 하얀 유삼(儒衫)으로 인해 더 잘 보일 정도 였다. 놓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가는 화풍렬 의 귀에 기묘한 속삭임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이게 여기 붙어 있는거야? 화풍렬은 처음에는 당혹해하다가 곧 그것이 백마신의 목소 리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갑자기 음성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해서 일순 못알아 들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직하지만 쩌렁거리는 흑마왕의 목소리가 들 렸다. 뭐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지만 역시 흑마왕도 조심스러운 태도였 다. 이 때는 화풍렬도 둘이 무엇을 놓고 이야기하는지 볼 수 있 었다. 눈 앞에는 기괴한 작은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백골(白骨)이 춤추는 형상을 한 조각이었다. 마치 뼈만 남아 기뻐 웃는 얼굴과 들썩거리는 팔, 다리의 뼈가 당장이라도 오르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화풍렬은 한 순간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닌가 의심했지 만 그의 앞에 놓인 조각은 진품(眞品)이었다. 적어도 화풍렬 만큼은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게? 놀라는 화풍렬을 내버려 둔 채로 백마신은 다시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흑마왕이 뒤돌아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화풍렬의 어깨 를 툭치며 말했다. 잔말말고 따라와. 식은 땀이 절로 새어나오는 그를 놓아두고 흑마왕도 발걸음 을 옮기고 있었다. 화풍렬은 그들을 따라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조각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그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장장 칠백 여 년동안 강호상에 전혀 출현하지 않았던 고루 문( 門)의 명패와 같은 조각이었다. 화풍렬은 자신이 본 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서둘러 흑마왕의 뒤를 따르는 수 뿐이었다. 백리화통을 앞세우고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가면서 유홍광은 자신이 점점 더 밑으로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 다. 분명하게 경사가 기울어진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 하면 평평한 길을 걷는 느낌뿐이었다. 그러나 미묘한 감각이 점점 밑으로 내겨간다는 점을 경고하 고 있었다. 적우자가 분뢰수를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유홍광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마단걸을 찾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하(地下)는 보면 볼 수록 사람을 미혹(迷惑)시 키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거대한 것을 지하에 만들었을까? 이것이 유홍광이 지하에 대해 떠올린 생각 전부였다. 그 말고는 그의 머릿속에 가득찬 것은 오직 낙백인이 되어 서 날뛰는 마단걸을 어떻게 본래대로 되돌릴까 하는 문제였 다. 적우자의 말로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홍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포기하기에는 그동안 쌓아올린 탑이 너무 컸기 때문이 다. 상념에 상념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그저 적우자의 뒤만 보 면 걷던 유홍광은 우뚝 발을 멈추었다. 적우자의 걸음도 역시 멈추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뭐가 달라졌는가 하던 유홍광도 퍼뜩 깨달을 수 있었다. 백리화통의 빛과는 다른 빛이 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여 린 빛이었지만 이 지하에서 처음으로 보는 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어디선가 한번 정도 들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그로인해 소름이 돋고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기대한 손님은 아니라도 대접은 해야지? * * * <무슨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죽음이 느껴진다...> 3 얼마나 왔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걸은 거리만 족히 십리는 되었으리라는 것만은 짐작으로도 확실했다. 그럼에도 아직 지하는 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풍렬은 컴컴한 어둠은 무서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닥쳐들어오는 정적(靜寂)이 주는 공포는 능히 화풍 렬의 마음속에 냉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는 온통 기둥과 벽이 끝없 이 이어지고 있었다. 화풍렬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앞에서 걷고 있는 백 마신의 뒤를 따라가는 것 뿐이었다. 백마신은 부지런히 사방을 살피면서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도 그 속도는 걷기만 하는 화풍렬보다도 빨랐다. 흑마왕의 행동은 더욱 놀라워서 가끔 나타나는 장애물을 그 대로 부수어 대고 있었다. 콰아아... 지금도 족히 장정 두 사람이 간신히 손을 맞잡아야만 닿을 수 있는 두께의 기둥 하나가 그가 장난처럼 휘두른 주먹에 맞 아 사방에 파편을 뿌린 채 박살나고 있었다. 그 기둥이 두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텐데 흑마왕의 손에서 는 말 그대로 두부처럼 으스러지고 있었다. 진정 무서운 권력(拳力)이다! 도대체 무슨 권법을 연마하 였기에 저런 위력을 보이고도 조금도 지치지 않는거지? 화풍렬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막 물어보려고 할 때 흑마왕이 그 자리에 우뚝 서고 있었다. 멈칫하며 앞을 보니 백마신이 서서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화풍렬은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말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 다. 이 지하에서는 그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는 점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아래다. 백마신의 말이었다. 화풍렬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백마신 을 쳐다보았다. 흑마왕이 우렁거리는 음성을 나직이 깔며 말했다. 어느 정도나 되지? 백마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발을 가볍게 굴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화풍렬은 자신의 발로 전해오는 가벼운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삼 척(三尺)에서 사 척(四尺) 정도는 되겠지... 간단한 대답이 나오자 흑마왕은 후욱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두둑... 팔뚝에서 거센 소리를 흘려내며 흑마왕이 보통사람의 머리 통만한 주먹을 치켜올렸다. 아니, 설마...! 화풍렬은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흑마왕은 지금 바닥을 부수려 하는 것이었다. 넓게 펼쳐진 광장은 수십장이나 되어보였다. 백리화통이 밝히는 불빛은 이제 필요가 없었다. 어디선가 새어들어오는 듯한 빛으로 사방이 밝은 달밤처럼 보이고 있었 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때문에 적우자와 일행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온통 웅크린 것처럼 수그리고 앉아있는 시신(屍身)들이 눈 에 들어왔다. 이 이상한 썩는 냄새는 아마도 이 시신들의 것 이 분명할 것이다. 어림잡아 한복판 쯤 되는 곳에 네 개의 동상을 사위(四圍) 에 두고 한 사람이 붉은 승의를 펄럭이며 서 있었다. 적우자는 를 잊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맞댄지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번 보기 싫은 사람을 꼽으라면 지금 당장 꼽을 첫번째 인물인 때문이다. 꼴에는 분명히 반갑게 보일려는 것처럼 웃고 있었지만 반가 울리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일행의 심정은 적우자와 한결같았다. 한가지 생각에 적우자의 안색은 매우 미묘하게 흔들렸다. 화대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화풍렬 혼자서 그와 대적하고 일행은 달아났었다. 그런데 저자가 저렇게 서 있다면 과연 그와 대적했던 화풍렬의 안위 가 염려스럽지 않을리 없는 것이다. 저, 저, 저것 좀... 갑작스럽게 점창문인 한 사람이 벌벌 떠는 소리를 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주의를 오직 적마승에게 집중시키고 있던 적우자는 그제서 야 곳곳에 널려 있는 핏덩어리들을 알아차렸다. 단지 핏덩어리 뿐이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고깃조각처럼 널려 있는 것들이 원래 사람 의 몸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이, 이건... 일행의 누군가가 신음하듯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말을 다 듣지 않아도 일행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다 름아닌 낙백인들의 찢겨진 조각이 널려 있다는 것을. 유홍광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만에 하나라도 저 조각 중 하나가 마단걸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우자의 시선은 다시 적마승에게 향했다. 지금 이 피의 향연을 주도한 것은 틀림없이 저 진홍의 승의 를 걸친 괴승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들이 될 수 도 있었다. 학아. 손을 쓸 때는 절대 망설이지 말아야한다. 느닷없이 내놓은 말에 송학은 흠칫하고 놀랐다. 적우자의 시선은 저기 서 있는 진홍승포의 괴승에게 집중되 고 있었다. 십 삼...사 장 정도... 적우자의 눈이 거리를 재고 있었다. 진홍의 승포를 걸친 자의 손이 소매자락 속으로 살짝 들어 갔다가 나왔다.. 그 한동작에 적우자의 움직임도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 어 느새 수중의 장검을 아래로 반쯤 늘어뜨렸던 것이다. 빙긋이 웃으며 적마승이 손을 들어보였다. 손에는 조그마한, 그러면서 빨간 장난감 같은 양날의 도끼 가 들려 있었다. 적우자의 안색이 한층 더 무거워졌으나 그것을 보는 사람은 적마승뿐이었다. 적마승은 그의 손이 추호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은채 검극을 제어하는 것도 보았다. 유홍광은 자신이 비추는 불빛에 환히 드러나 보이는 작고 빨간 양날도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송학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저절로 한손이 칼 자루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적우자의 몸이 앞으로 쭉 늘어났다. 순식간에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뒤에 있던 유홍광이나 송학마저 어리둥절할 만큼 갑작스런 움직임이었다. 적마승은 갑자기 자신과 적우자의 사이가 절반으로 줄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때는 이미 적우자는 자신의 삼 장 앞에까지 나와 있었다. 적마승의 손이 슬쩍 움직였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는데 그 순간 그의 손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며 시뻘건 혈광(血光) 한 가닥이 적우자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쾌액! 섬뜩한 붉은 빛 한줄기가 그대로 적우자의 목을 관통할 듯 이 뻗었다. 하나 적우자의 몸이 빙글 맴돌자 붉은 혈광(血光)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대신 적우자의 몸을 빗나간 붉은 빛줄 기는 그대로 일행을 덮칠 듯이 뻗고 있었다. 적우자는 검을 들어 곧장 전진하며 단번에 상대방의 목을 겨누었다. 쉬이이잉 찰나, 난데없이 들려온 괴성(怪聲)에 적우자의 몸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팟! 무언가가 머리위를 스치며 붉은 빛줄기가 날았다. 그것이 바로 적마승의 손에 들린 작은 손도끼라는 것을 적 우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뒤에서 유홍광의 경악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비, 비마월(飛魔鉞)! 불과 여섯 치 정도의 작고 붉은 양날 도끼.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움직이고 있는 그 붉은 도끼의 명성 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비마월은 마도(魔道)에서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열 가지 살인병기(殺人兵器)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 가공할 위력은 오랜 세월동안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었 다. 적마승은 시신을 움직이는 것과는 다른 진짜 무서운 절기 (絶技)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적마승의 얼굴도 약간 굳어졌다. 비마월은 상대방이 쉽게 피해낼 수 있는 병기가 아니었다. 비마월의 이름을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긴장하고 몸이 굳어 질 것이다. 그렇게 심신(心身)이 흔들린 상대는 영락없이 비 마월의 제물(祭物)이 되었다. 그러나 적우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비마월을 보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동요하지 않는다 면 비마월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 밖에 없다. 마도(魔道)에서 손꼽히는 살인병기(殺人兵器)를 두려워 하 지 않는 상대라면 실력이 뛰어나거나 바보일 것이다. 그러나 청성파의 장문인이 바보일 리는 없었다. 재수 없군.... 적마승은 다시 미소를 떠올렸다. 아무 걱정도 없이 웃는 듯한 순간에 비마월이 그의 손을 떠 났다. 허공을 직선으로 끊으면서 비마월은 적우자의 목젖을 향해 소리없이 날았다. 진인사(盡人事) 대천명(待天命). 적우자가 지난 수십년간을 믿어온 구절이었다. 굳이 그것을 믿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의미에 감격해서라든가 곱씹어보니 믿을만하다던가 하는 까닭은 아니었다. 단지 생이별한 누나를 찾기위해 십여 년 씩이나 사천일대를 이잡듯 뒤지고 결국 포기하였을 때, 청성산 아래 작은 마을에 서 누나를 만나게 된 것이 그 까닭이었다. 누나는 청성파의 제자가 된 그를 먼 발치에서라도 지켜보기 위해 청성파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 감동은 그로 하여금 세상의 인연을 끊고 도인(道 人)이 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적우자는 그뒤로 진인사 대천명 을 자신의 신조로 여기고 있었다. 노력해서 안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아 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때문에 적우자는 지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왔다. 자신의 목숨을 앗으려 드는 비마월은 오래전에 돌아가신 사 부조차도 만나면 피하라고 일러주었던 마병(魔兵)이었다. 그러나 지금 적우자는 피할 여지가 없었다. 그 자신의 삶을 통털어 가장 위험한 모험을 하는 것이다.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날 수 있는 자신이기에 기꺼이 할 수 있는 모험이기도 했다. 유홍광은 갑작스럽게 허공에 붉은 빛줄기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로 손이 갔다. 표현할 수 없는 살 기가 깔리는 사방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붉은 빛줄기는 적우자를 꿰뚫지 못했다. 적우자는 상처입은 발을 들어올린 채 다른 한 발로 가볍게 지면을 짚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얼음조각이라도 탄듯이 그의 몸은 빙글돌 면서 적마승에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적마승은 돌고 있는 적우자의 검이 그림자에 들어가서도 여 전히 빛을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마음 속에 낭패감이 밀려들자 적마승의 미소는 더욱 짙어져 갔다. 송학은 적우자가 피해낸 붉은 빛줄기가 곧장 자신을 덮치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검을 절반가량 뽑아내다가 자신도 모르 게 비명을 토해내었다. 앗! 미처 뭐라고 말도 하기전에 이미 비마월은 곡선을 그리며 다시 적우자를 향해 날고 있었다. 한번 던진 후에 일으키는 비마월의 움직임은 보는 사람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쉬이이익! 비마월은 더 이상 소리없이 날지 않았다. 비마월은 한번 노리고 그만인 그런 병기가 아니었다. 끊임 없이 목표를 향해 다시 날아드는 절세(絶世)의 마병(魔兵)인 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유홍광은 소름이 쭉 끼쳤다. 비마월이 날고 있는 모습은 사람이 던진 것이 아니라 스스 로 생명을 가진 채로 날아다니는 듯한 광경이었다. 직선으로 움직일 때는 소리가 없고 곡선을 그릴 때는 기분 나쁜 파공음을 흘리는 붉은 도끼! 송학은 등줄기에 저절로 식은 땀이 배고 있었다. 비류보(飛流步)와 세류표(細柳飄)의 두가지 경공신법이 함 께 발휘되고 있음에도 적우자는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고 있었 다. 그것이 송학에게는 두려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적우자는 태연자약했다.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지처럼 몸이 흔들리고 겨우 땅에 대고 있는 한쪽 발끝은 물살에 떠내려가는 나뭇잎 처럼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적우자의 손에 들린 검(劍)은 자신의 의지라 도 가진 것처럼 적마승을 향하고 있었다. 적마승이 던진 비마월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다니는 짧은 동안 이미 적우자는 적마승 앞에 와 있었다. 검이 채 닿기도 전에 검에서 뿜어나오는 검기(劍氣)가 그의 몸을 그물처럼 꼼짝달싹 못하고 얽어매고 있었다. 자신의 미간을 파고들려는 칼끝을 보면서도 적마승의 미소 는 짙어져만 가고 있었다. 염병할...또 죽는건가... 바로 이때 적우자는 순간적으로 왼쪽에 자리잡은 동상을 시 야에서 놓치게 되었다. 그것은 비마월이 그의 왼쪽 시야를 가 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로 전혀 대세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 을 것 같았다. 하나 때로는 사소한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시야가 다시 열린 그 짧은 순간에 적우자는 똑똑이 볼 수 있었다. 동상의 왼쪽 손에서 무언가 섬광이 번뜩거리며 자신의 심장 을 찔러오는 새하얀 광망(光芒)을... 그와함께 온몸을 질주하는 피가 울부짖는 소리를 생전 처음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똑... 똑... 똑.... 장내에는 죽음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송학은 일순 뭐가 어찌된 일인지 몰랐다. 지금 눈에 들어오 는 광경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송학의 귀에는 일행의 거친 숨소리보다도 지금 바닥 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리고 있 었다. 한창 날뛰던 십대(十代)에 입문하여 지금껏 거의 이십여 년 을 조석(朝夕)으로 모시던 사부였다. 언제나처럼 그 사부는 지금도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와는 달리 지금 그의 심장에서 고동치는 핏방 울이 바로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적마승은 일장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적마승의 옆에는 동상이 서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동상인 줄 알았던 거구의 사내였다. 머리에 쓴 청동(靑銅)의 투구와 가슴의 철갑(鐵鉀). 그것이 그 사내를 완전히 동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 만 지금 적우자의 가슴을 찌른 왼팔의 하얀 갈고리같은 칼날 은 그가 동상이 아님을 보이고 있었다. 비마월도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투두둑... 그 사나이의 손을 감싸고 있던 무쇠장갑이 박살나서 떨어지 고 있었다. 댕그랑, 툭, 툭... 청동의 투구가 반쪽이나 바닥에 구르고 철갑이 으스러지듯 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송학은 자신이 본 것을 한참이나 되새기고 있었다. 한 사람이 동상으로 위장(僞裝)해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부조차도 속을 정도였다. 상대는 그런 능력 을 보이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던진 비마월을 받아내고 마혼구(魔魂鉤)를 사 용하는 자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에게 자신의 사부가 당해야하는가? 송학이 멍하니 있는 만큼 유홍광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비마월과 마혼구가 한자리에 나타나다니... 마혼구는 비마월과 함께 마도의 가장 무서운 열 가지 살인 흉기중의 하나였다. 오랫동안 강호무림에는 마혼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가공할 위력만큼이나 사용 방법이 너무도 힘들어 아무도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공포의 마혼구가 이 지하의 광장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 낸 것이다.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동상이었던 자가 자신의 부서진 철갑 을 내려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가 청성장문인인가? 적마승의 뺨에는 조금전에 적우자의 검에서 뿜어나왔던 검 기에 갈라진 상처자국이 있었다. 적마승은 자신의 뺨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핏자국을 슬 쩍 손으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가 당대 청성장문인이었지... 흘러나오는 말소리도 눈앞에 벌어진 상황도 송학의 눈에 제 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송학의 뇌리에 가득 박혀 있는 것은 바닥에 눕듯이 쓰 러지고 있는 적우자가 전부였다. 적우자의 몸이 완전히 바닥에 눕자 비로소 송학은 이제까지 자신이 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으아아! 비명과 같은 괴성이 터지며 송학의 검이 눈부신 빛을 뿜어 내었다. 그의 몸은 어느새 땅을 박차고 시신들을 타넘어 빛살같은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작스럽게 천정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송학은 바로 자신의 앞에 선 두 괴인과 맞부딪칠 수 있었을 것이다. 콰르릉! 우렁찬 음향과 함께 천정은 무너졌다. 동시에 그 안에서 새까맣게 보이는 그림자 하나가 비호(飛 虎)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와함께 새하얀 그림자가 희끗거렸다. 흑영(黑影)과 백영(白影)의 움직임은 흥분한 송학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앞에 장애물이 생겼다고 여긴 순 간에 송학의 몸은 반사적으로 그들을 피해서 전진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야 임마! 미쳤어? 천둥같이 사나운 소리가 송학의 귓속으로 파고든 순간에 송 학은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잡힌 것이 아니었다. 교묘하게 혈도(穴道)를 제압당해서 송학은 그대로 축늘어진 채로 그 자리에 붙들리고 만 것이다. 갑작스럽게 고막을 패대기질 치듯이 뚫고 들어오는 목소리 에 송학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화선생... 송학의 입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앞을 가로마고 있는 거대한 흑포괴인이 누군인지 또 그 옆에 선 훤칠한 백의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의 목덜미 를 움켜쥔 사람이 누군지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화풍렬은 송학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찡그린 눈살을 펴려했 느나 눈에 들어오는 적우자의 모습이 눈살을 더 찌푸려들게 하고 있었다. 적우자... 단숨에 천정을 뚫고 뛰어내린 흑마왕의 눈동자는 동상이었 던 자에게 꽉 틀어박힌 듯했다. 이제 겨우 삼십대에 들어서는 청년의 조각상과 같은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불빛에 파랗게 반짝이는 몸에 새겨진 패인듯한 상처가 꿈지 럭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정말 청동(靑銅)으로 만들어진 사람 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백마신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어리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 높이에 자리한 흑마왕의 어깨를 툭 치며 경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축하한다. 네 친구 녀석도 살아났는데... * * * 별없는 캄캄한 밤과도 같은 어둠이 깔린 지하! 그 앞에 뚫린 구멍은 지금까지 분뢰수가 내려온 것보다 더 아래로 길을 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암울하고 칙칙한 눈이 그 구멍을 향하고 있었 다. 빛이 있다면 지금 분뢰수의 눈자위에 맻힌 핏줄기가 선명하 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칙칙한 분뢰수의 눈속에서 희미하 게 번쩍이는 뇌전(雷電)같은 광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분뢰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 구멍으로 움직였다. 사람이 걸어 지나가기에는 충분하지만 그것을 구멍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었다. 마치 애벌레가 뚫고 간 듯한 구멍이었기 때문이다. 그 구멍의 저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향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 속을 헤집어놓고 온몸에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향기(香氣)! 그것이 이 커다란 벌레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분뢰수의 눈자위는 차츰차츰 더욱 붉은 핏 발을 세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느껴보지 못했던 강대한 적과의 싸움이 도래 한 것이다. * * * <들린다... 이 안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가?> 第 十一 章 이 년 전 의 이 야 기 1 흑마왕의 표정이 기괴해져 있었다. 두터운 수염이 가득한 얼굴에서 부리부리한 눈이 꿈벅거리 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의 흑마왕은 아직도 자신의 눈길을 동상으로 있 다가 적우자의 검에 투구와 동갑(銅鉀)이 부서진 자를 향해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자의 몸은 적어도 흑마왕 자신에 못지 않은 근육과 체력 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다만 키가 흑마왕의 어깨 높이에 불 과했다. 흑마왕은 아직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청마군(靑魔君)...? 겨우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백마신은 전혀 상대를 의심할 필요도 없 다는 듯 이미 허리 춤에서 꺼낸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쳐보이 고 있었다. 쫘악! 확실하다. 하나가 살아났다면 다른 하나도 살아날 수 있었 겠지. 경쾌한 채찍소리와 백마신의 냉혹한 말투는 백리화통에 의 해 밝혀지고 있는 지하의 어두운 공간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 었다. 화풍렬은 이래저래 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런 괴상한 상황은 충분히 즐기면서 감상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적우자의 모습은 그런 화풍렬의 즐거움을 한 순간에 지워버렸다. 화풍렬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송학을 붙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적우자는 그렇게 쓰러져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때 문득 화풍렬은 또 한사람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뢰수... 어디 있는 거지? 왓하하하하....! 적마승의 웃음소리가 장내를 가득매웠다. 다른 곳에서라면 그의 웃음소리는 정말 기쁨에 가득차서 도 대체 무슨 즐거운 일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 분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유홍광의 등골에서는 소름이 돋았고,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줄줄 새어나왔다. 삐걱거리던 시신들은 이제 완전히 일어서 있었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진짜 동상 세 개뿐이었다. 네개의 동상 가운데 하나가 느닷없이 움직여 적우자를 습격 한 것은 이미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나 머지 세 개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또 기습을 노리고 가만히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동상일까?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는 동상과 사람을 분별할 수 없다는게 분명해진 상황이었다. 유홍광은 단지 검을 꾹 쥔 채로 자신의 뒤에서 떨고 있는 두 문인을 지키는 것에만 신경을 세울 뿐이었다. 지금은 그것 도 자신에게 벅찬 것이다. 이거 정말 즐거운 만남이군. 안그런가? 적마승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적마승은 여전히 즐거운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 다. 백마신 노선생, 기분이 아주 더러운 모양이구려. 어째서 그럴까? 난 칠십 년만에 만난 그대 얼굴이 너무 반가운데... 조롱섞인 어조가 아니더라도 틀림없는 비웃음임을 알 수 있 는 말이었다. 쫘악! 두 손으로 움켜쥔 채찍을 좌우로 잡아당기며 백마신이 냉혹 한 어투로 말했다. 지옥에서 기어올라오면서 재주가 하나 더 늘었군. 적마승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호오, 난 몰랐는걸. 그래 노선생, 내게 어떤 재주가 더 생 긴 것 같소? 자신있게 울려퍼지는 그 말소리는 지하의 시신들을 더욱 꿈 틀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유홍광과 점창문인 둘은 그 광경에 놀라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를 자신의 귀로 직접 들을 수가 있었다. 뒤로 달아나는 것말고는 그야말로 방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 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마신은 적마승을 노려보면서 한자한자 끊어 내뱉 고 있었다. 전보다 더 잘 짖어대! 적마승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그러나 얼굴의 미소는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옆에 서 있던 청마군이 묵묵히 자신을 흩어보는 흑마왕 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혁련.... 넌 짖지마! 막 말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마왕은 그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 앞에 일어서 있던 썩은 시신들이 흑마왕의 몸에 부딛치 기가 무섭게 깨져나갔다. 그리고 허공을 메우는 무서운 음향! 슈아앙! 커다란 주먹이 그대로 청마군을 짓이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먹을 청마군은 단지 오른손만을 내밀어 마주치 고 있었다. 빠악! 격렬한 음향에 놀란 것은 서로 맞부딛힌 두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구경하던 유홍광 일행이었다. 한 순간에 청마군의 오른팔에 보호구(保護俱)가 깨져서 흩 어지고 있었다. 백마신의 눈동자가 그 광경을 예리하게 새겨담았다. 적마승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짓던 유쾌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기에 좋고 활달한 웃음이었다. 다른 곳에 서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이런, 이런, 들켜버렸군. 그래 이제 어쩌시겠소? 콩당거리는 가슴을 안고 있던 유홍광은 이들의 대화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 옆으로 송학을 끌고 오던 화풍렬은 짤막하게 중얼거렸 다. 공력의 차이가 있다. 유홍광은 어리둥절하다가 퍼득 깨달았다. 주먹과 손이 마주친 다음에 한쪽의 팔 보호구가 깨졌다는 것은 그 쪽의 공력이 쳐지기에 생긴 일이다. 적어도 일대일에서 흑마왕은 청마군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다. 저 무시무시한 마혼구를 사용하는 상대를! 그러나, 저자는 마혼구를... 유홍광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마혼구의 위력을 생각하자 걱 정이 먼저 되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마혼구의 가공 할 위력은 그 차이를 매울 수도 있었다. 이 멍청아! 지금 네가 그 걱정할 때냐? 화풍렬의 핀잔이 터지자 유홍광은 반사적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꿈틀거리던 시신들이 발을 질질 끌면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 오고 있었다. 썩는 냄새가 확확 풍겨왔다. 유홍광은 점창문인 둘이 덜덜 떨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썩어문드러진 채로 움직 이는 시신이라면 겁을 먹는 것이 너무도당연했다. 쉬익! 송학의 손에 쥐인 검이 허공을 갈랐다. 쾅! 가까이에서 먼저 움직여 달려들던 한구의 시신이 그대로 날 아가 버렸다. 칼날이 휘둘러졌음에도 날아가 버린 광경을 보자 화풍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던 송학을 놓아주었다. 이제는 그도 냉정을 되찾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송학은 몸이 자유로워지자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전 진하려 들었다. 청마군과 흑마왕은 한번의 교환 이후로 석자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흑마왕의 얼굴에 갈등 비슷한 빛이 어렸다. 너... 진짜 살아났구나... 한번의 격돌로 흑마왕은 상대방이 누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와서 살아난게 무슨 상관인가? 냉혹한 말투가 쩌렁쩌렁 울리며 뒤를 이어 채찍이 곧게 뻗 어나오고 있었다. 백마신이 득달같이 내닫으며 적마승을 공격해오고 있었다. 적마승은 뒤로 두 걸음 재빨리 딛고 입술을 오무려 휘파람 을 불었다. 끼이이이이... 괴상한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천천히 아장거리며 움직이던 시신들의 눈가에 퍼런 빛이 어리며 움직임이 훨씬 더 빨라졌 다. 화풍렬의 손에 당장 철검이 들려지고 휘둘러졌다. 파라락! 순신간에 몇구의 시신이 날아갔다. 유홍광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시신의 팔다리와 머리를 깡그리 절단(切斷)해 버렸다. 그렇지않으면 계속 움직일 것 같아서 였다. 그 자신도 지금처럼 빨리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나를 착실히 도막내는 사이에 몇 구의 시신 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이다. 악귀(惡鬼)로 돌변한 시신들의 움직임은 실로 무서운 것이 다. 파라라락! 깃발 흔드는 소리가 다가오며 멈칫하고 있는 유홍광에게 달 려들던 시신들이 한꺼번에 퉁겨져나갔다. 뭉쳐야된다! 화풍렬은 한마디를 던지고 머뭇거리는 점창문인 둘을 송학 쪽으로 밀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유홍광은 배후를 맡고 송학은 선두를 맡게 되었 다. 그 중간은 화풍렬이었다. 하지만 곧 배후나 선두의 방향은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시신을 누가 먼저 쳐내느냐하는 문제만 남은 것이다. 일행이 시신들과 뒤엉킨 사이에 청마군과 흑마왕은 대치상 황이었고, 바로 옆에서는 백마신이 일방적으로 적마승을 몰아 붙이고 있었다. 하나 적마승도 단순하게 피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괴상한 휘파람이 울릴 때마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시신 들이 백마신을 향해 덮치고 있었다. 백마신은 처음 선공(先攻)으로 일곱 차례 휘두른 채찍이 모 두 빗나가자 이번에는 자신이 방어해야된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덤벼드는 시신들은 적어도 십여구는 넘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와 손톱이 어둠속에서 유난히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휘리리릭! 경쾌한 음향과 함께 백마신이 휘두르는 채찍이 소용돌이처 럼 백마신을 위에서 아래로 휘어감았다. 멋모르게 덤벼들던 시신들이 그 소용돌이에 휘감기자 그대 로 퉁겨지면서 부서지고 말았다. 적마승의 입가에 미소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야, 과연 굉장하군! 신편(神鞭)이 바로 그런 거야! 비꼬임보다는 칭찬에 가까운 음성이었으나 백마신의 눈꼬리 는 확 치켜올라가며 분노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적마승이 지껄일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부터가 못마땅 했기 때문이다. 흑마왕이나 백마신과는 달리 그들의 뒤쪽에 있는 중인들은 그들처럼 여유있게 싸울 처지가 못되었다. 특히 유홍광은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설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라면 팔다리가 날아가는 것만으 로 싸움은 끝났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산 사 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유홍광의 검은 매번 상대를 착실하게 도막낼 수 밖 에 없는데 그러는 동안 몇 구씩 더 달려드는 것이다. 그 틈을 화풍렬이 메워주지 않았다면 유홍광은 벌써 시신들 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을 것이다. 야! 너 지금이 연무(練武)할 때냐? 자꾸 그럴래? 뒤에서 화풍렬이 고함을 치는 소리가 유홍광의 귓전을 울렸 다. 나더러 어쩌란 거야? 울컥하여 화풍렬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유홍광은 바 로 그때 옆에서 한구의 시신이 손톱을 곤두세우고 달려드는 것을 감지했다. 화풍렬이 그대로 놓아준 시신이었다. 섬칫한 순간에 유홍광은 반사적으로 방어의 절초(絶招)인 일락서봉(日落西峯)을 휘둘렀다. 쉬잉! 거센 바람소리를 듣는 순간에 유홍광의 귀에는 다시 화풍렬 의 목소리가 울렸다. 좋아, 이제 겨우 사태를 파악했냐? 꾸짖는 듯한 말이었지만 유홍광은 새롭게 깨닫는 바가 있었 다. 그동안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일검법을 돌아보 게 된 것이다. 일락서봉에 휘말린 시신은 단 일검(一劍)에 저멀리로 날아 가고 있었다. 더우기 그 시신에 부딛힌 다른 시신이 부서지는 상황까지 일어난 것이다. 마치 송학이 청풍검법으로 날려대는 듯한 광경이었다. 송학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시신 한구가 어김 없이 퉁겨지듯이 밀려나고 있었다. 더우기 왼손에 든 불진이 한번 흔들리면 불진의 술이 시신 의 목을 휘어감고 그대로 저편으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흔들거리는 듯한 신법과 바람같이 움직이는 검세(劍勢)! 거기에 나풀거리는 불진의 술! 유홍광은 자신보다 십여세나 어린 그의 경지가 자신보다 훨 씬 탁월해 보이는 이유가 공력(功力)의 우위가 아니라 전개방 식(展開方式)의 차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그 뒤로 유홍광의 일검은 송학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한구 씩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달려드는 시신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엎어지고 퉁겨져서 뼈가 으스러지고 꺽어져 덜렁거리는 팔 을 매단 채로 시신들은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화풍렬의 성난 목소리가 장내를 쩌렁하게 울렸다. 이자식들아, 뭐하는거야! 당장 칼 못치워! 꾸지람을 들은 점창문인 두 사람이 자라목이 된채 움츠려 들었다. 그들이 도움이 되고자 칼을 뽑아 휘두른 것 까지는 좋았는 데 오히려 유홍광이나 송학의 동작을 자꾸만 막아섰던 것이 다. 대체 누굴 찌르겠다는 거야! 빨리 치워! 다시 화풍렬의 소리가 터졌다. 점창문인 둘은 허겁지겁 칼을 집어넣다가 손을 살짝 베이기 까지 했다. 화풍렬은 세차게 한번 철검을 휘두르고는 그대로 바닥에 꽂 았다. 부욱! 북! 한 순간에 두 사람의 소매가 떨어져 맨팔뚝이 드러났다. 저, 저희가 하겠... 살짝 베인 상처까지 싸주려는 화풍렬을 보면서 점창문인 한 사람이 허겁지겁 말을 꺼내다가 꿀꺽 삼키고 말았다. 화풍렬이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고까짓 거 싸매려는 줄 알아?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고, 검으로 안되면 주먹으로 밀란 말이다! 거친 말과 함꼐 화풍렬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주먹을 분뢰 수의 손처럼 찢은 소매로 둘둘 말아버렸다. 그것을 보던 두 점창문인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맨손으로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화풍렬은 간단하게 보충해서 말했다. 이런 밥통같은 놈들! 저건 썩은 시체야! 그냥 치면 부서 져! 그 말에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파고들어오는 시신의 얼굴 을 그대로 갈겨댔다. 쾅! 유홍광과 송학 둘만으로는 다 막을 수 없었기에 파고든 시 신이었으나 간단한 주먹 한방에 머리가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터진 채로 시신은 그대로 팔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박살낸 점창문인을 움켜쥐려 하고 있었다. 쉬익! 거센 바람이 일며 화풍렬이 소매를 펄럭이는 순간에 그 시 신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다가 분쇄되고 있었다. 이 얼간아! 머리가 아니라 몸을 쳐! 팔다리를 꺽으란 말이 다! 그래서 던져! 한 순간의 위기가 깨우쳐 주었는지 두 점창문인은 그대로 금나수법(擒拿手法)을 동원해 달려드는 시신들을 마구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유홍광과 송학은 그들의 도움에 잠시 숨을 돌릴 여가를 얻 을 수 있었다. 쓸모없던 두 사람이 갑자기 큰 도움이 되어 일행은 좀 나은 상황이 되었다. 휴우,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화풍렬은 철검을 바닥에 박아 둔채로 한마디를 하고는 사방 을 주의깊게 돌아보고 있었다. 흑마왕은 청마군과 어울렸고, 백마신은 적마승을 향해 사정 없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말 신편이란 말이 어울리는군... 백마신의 채찍은 이미 채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때는 검(劍)처럼 베고, 어떤 때는 창(槍)처럼 찌르는 가하면 막대기(棒)처럼 상대방을 때리려 들 때마저도 있었다. 한자루의 채찍이 갖가지 병기의 효용을 다 보이는 것이다. 단지 그 채찍에 맞는 것은 적마승이 아니라 달려드는 시신 들이었다. 끼이이이.. 적마승의 휘파람은 사람이 듣기에는 역겹고 기괴하여 오싹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시신 들은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떼들 처럼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 는 것이다. 화풍렬이 특히나 주의를 기울여 본 것은 흑마왕과 청마군의 격투였다. 얼핏보면 흑마왕의 우세인 싸움이었다. 주로 청마군이 막고 흑마왕이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풍렬에게는 의혹이었다. 공력의 차이가 뚜렷한데 저토록 버틸수가 있나? 그리고 이 의혹은 곧 풀렸다. 자세히 드려다 보고 있자 청마군이 방어를 한다고는 하지만 흑마왕의 주먹을 막을 때마다 거의 뼈마디가 으스러질 정도로 타격을 받는 것이다. 단지 그러고나서 푸른빛이 살짝 스친다고 생각한 순간, 그 의 몸은 원상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풍렬은 청마군이 무엇을 연성했는지 깨닫고 속으로 경악 을 금치 못했다. 청령지신(靑靈之身)을 연성했구나! 그 순간에 흑마왕의 일권이 다시 청마군의 허리어름을 긋고 지나갔다. 콰악! 비록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다지만 여력(餘力)만으로 살점이 움푹 패일 정도였다. 그러나 청마군의 몸에서는 패인 살점이 떨어지는 일은 일어 나지 않았다. 마치 청동이 우그러들듯 우그러들었다가 다시 푸른빛이 스 치듯이 일어나는 순간에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청마군이 부족한 힘으로 흑마왕과 맞설 수 있는 연 유였다. 화풍렬은 지켜보던 중에 유홍광이 자신에게 바싹 붙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두 점창문인도 옆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모두 송학에게 보조를 맞추고 있었는데 송학이 앞으로 나아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풍렬은 단번에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겠지... 송학이 나가는 방향에는 적우자가 쓰러져 있었다. 화풍렬은 바닥에서 철검을 뽑아들고 보조를 맞추었다. 유홍광과 두 점창문인도 이제는 요령을 터득하기라도 했는 지 훨씬 과감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괴변(怪變)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2 치이이이익.. 희미하고 어스름한 빛 사이를 밝히고 있는 백리화통의 불빛 보다 더욱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들과 냄새. 썩은 냄새와 정체를 알수 없는 향을 뚫고 들어온 새로운 냄 새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가장 많이 맡았던 냄새이기도 했 다. 날고기를 굽는 바로 그 냄새였다. 그러나 구워지고 있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자였다. 비록 제정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낙백인인 것 이다. 유홍광은 자기 발로 딛고 걸어온 길에서 이런 일이 터져나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나쁜 꿈이라 도 이렇게 고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괴성(怪聲)을 지르며 불길에 휩싸여 날뛰는 낙백인! 공포(恐怖)와 고통(苦痛)이 무엇인지 몰랐던 낙백인들이 공 포에 젖어 괴로와 하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그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을 때 유홍광은 그가 머리가 셋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고 팔이 여섯이 아니라서 또 놀랐다. 적어도 지금 저 미친 낙백인을 겁을 줄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정도의 괴물이 아니면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유홍광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타난 것은 십대 (十代)의 어린 소년과 이제 겨우 어린 티를 벗은 약관(弱冠) 의 청년이였다. 불길에 소리지르며 뛰쳐나온 낙백인들은 그 괴력을 유감없 이 발휘하여 시신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더우기 그 몸에 붙은 불은 닿기가 무섭게 시신들에게 옮겨 붙어 재를 만들어 버릴 정도로 거센 것이었다. 그 다음에 유홍광이 할 일은 물샐 틈없이 칼을 휘둘러 불꽃 이 튀지 않게 하며 달려드는 시신을 퉁겨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유홍광은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불길에 휩싸인 마단걸을 보지나 않을까하는 생 각이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야! 비청(飛靑)! 비아(非兒)! 느닷없이 터져나온 고함소리는 바로 유홍광의 뒤에서 일어 났다. 화풍렬이 낙백인들의 뒤에서 뛰쳐나온 소년과 청년을 보고 서 소리지른 것이다. 고함소리가 아니더라도 장내의 움직임은 각자의 위치에서 새로 자리잡는 것으로 일단락(一段落)되고 있었다. 흑마왕과 백마신은 자신들의 상대와 갈라서는 순간에 적우 자의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어느 쪽도 결정적이라고 할 우세가 없는 상황에서의 무모한 싸움은 기력(氣力)의 낭비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장내에 날뛰고 있는 것은 불꽃을 흘리는 낙백인과 적마승의 명령으로 일단 피하는 시신들이었다. 낙백인들은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에는 무조건 달려들고 있었다. 야, 이 자식들아!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이리로 몰고 오는 거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화풍렬이었다. 과연 그 말대로 낙백인들은 쫓기고 있었다. 어린 소년과 약관의 젊은이. 둘이 나타나자 낙백인들이 무조건 그 반대방향으로 달아나 려 들고 있는 것이다. 대공 할아버지! 어린 소년이 외쳤다. 백삼(白衫)을 걸친 소년은 막상 소리는 질렀으나 곧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선 남색장포(藍色長袍)의 젊은이를 바 라보았다. 화풍렬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철검을 내던졌다. 파라라락! 날아가면서도 깃발흔드는 소리를 내던 철검은 일행과 둘 사 이를 그대로 갈라놓을 듯한 기세로 땅에 꼿혔다. 콰악! 유홍광은 자신의 옆구리를 스치면서 요란하게 지나가는 철 검의 음향에 등골이 써늘해졌다. 맞을 리야 없었겠지만 그 기세의 격렬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철검에 스치기만 했는데도 낙백인들이 마구 쪼개지고 있었 던 것이다. 남색장포의 젊은이는 슬쩍 머리를 긁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백삼의 소년과 함께 일행 쪽으 로 걸어왔다. 지켜보던 유홍광이나 송학, 점창문인 둘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날뛰는 낙백인과 제멋대로 흩어져서 다시 길 을 막기 위해 뭉치려드는 시신들, 어느 쪽도 지켜보는 사람이 편안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데도 이 두 어린 애송이들은 전혀 상관하는 표정이 아 니었다. 더우기 화풍렬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보채고 있 지 않은가? 빨리 오지 못해! 힘들어 죽겠잖아! 유홍광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삼켰다. 도대체 여직껏 무엇을 했다고 힘들다는 것인가? 명성이 자 자한 철검비환의 화대공의 실력은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자신 들만 죽어라고 몸부림치고 있지 않았던가? 두 애송이의 출현과 함께 백마신과 흑마왕의 안색이 조금 일그러졌다. 오랜 만이군요. 두 마인(魔人)이 슬쩍 고개를 돌려 보는데 남색장포의 젊은 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흑마왕도 백마신도 일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화풍렬이 불만섞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흥, 불과 이년 사이에 크게 진보했구나? 유홍광은 크게 의아했다. 도대체 이 두 애송이가 누구기에 자신은 평생가도 한번 만 날까 말까하는 절정고수들과 면식(面識)이 있단 말인가? 이런 저런 상황에 상관없이 송학은 자신이 목표했던 적우자 의 시체 옆으로 가까이 오자 그대로 적우자의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묵묵히 사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두 눈 가득히 담고 있었다. 기괴한 방울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딸랑....딸랑.... 화풍렬은 그 방울소리와 펄쩍 뛸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이, 이 소리는! 시왕령(屍王鈴)인데? 녀석도 여기에 있었나? 말을 받은 것은 흑마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청마군에게 꽉 틀어박혀 있었다. 청마군이나 적마승도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방울소리를 듣 고 있었다. 이 독특한 방울의 주인과 그들은 백마신등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계속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송학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 송추가 죽은 것은 시왕(屍王)의 휘하 고수때문이었다. 적우자가 상처입은 것도 그때문이었다. 상처가 아니었더라면 마혼구의 공격을 불진으로 막아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과거로 흘러갔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시 왕을 맞이하는 것은 송학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시왕의 행차는 송학의 두 눈을 부릅뜨게 만 들었다. 시왕의 교자를 이끄는 네 명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 은 여인(女人)들이라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시왕의 주변에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 움직이는 사 람이 더 많다는 것도 이미 들을 만큼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 었다. 그 시신들은 번뇌시(煩惱屍)라 하여 특별한 과정을 거친 것 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시왕(屍王)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좁은 통로를 감안했는지 지금 거느린 번뇌시는 이십여구에 불과했다. 그 뒤를 따르는 나머지 삼십여 명은 낙백인이었다. 그러나... 그 시신 속에 송추의 시신이 끼어있다는 것은 송학으로서는 정말 상상해 본 일이 없었다. 자신의 등뒤에는 검이 매어져 있는데 그 검의 주인은 시신 인 채로 움직여 자신의 앞에 나타나다니... 송학의 이런 생각은 금방 표정으로 드러났고, 그 표정은 곧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노기(怒氣)로 변해버렸다. 순간적으로 적우자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지 않았다면 송 학은 그대로 뛰어나가 교자위에 앉아 있는 누런 피부에 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깡마른 노인(老人)을 두 쪽으로 갈라놓으려 했을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 유홍광은 아무리 속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전혀 효과가 없었 다. 말로 듣던 시왕의 행차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시왕이 입가에 벌겋게 흘러내리는 핏물때문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좋게 볼수 없는 새빨간 덩어리 범벅을 쟁반 에 수북히 쌓아놓고 시왕은 한주먹씩 퍼서 입에다가 쳐넣고 있었다. 그로인해 그의 입가는 온통 새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홍광의 속을 메스껍게 만들고 있었다. 인육(人肉)을 날로 먹는단 말인가? 그런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새빨간 저 고깃덩어리의 모양이나 흘러내리는 붉은 핏물이 그것이 원래 사람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 었다. 점창문인 둘은 이미 그 자리에 얼어붙어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너 말이다, 아직도 그 장난이냐? 도대체 무엇때문에 산딸 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게냐? 화풍렬이 낯을 있는대로 찌푸리면서 투덜거렸다. 시왕의 눈길이 화풍렬에게로 내리박혔다. 시왕의 손은 여전히 그 시뻘건 덩어리와 입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화풍렬은 한마디하고는 인상을 쓰며 마주 노려보았다. 카칵! 이십 여 년이나 보이지않아 뒈진줄 알았더니... 이 곳에는 왠일이지? 시왕은 여유있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쇳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름대 로의 위풍마저도 풍길 어투였다. 그러나 화풍렬에게서 튀어나온 것은 노골적인 비웃음이 전 부였다. 고기는 입에도 대지 못하는 놈이 산딸기가지고 툭하면 사 람을 놀라게하는 못된 버릇은 여전하구나. 몇년 동안은 섭혼 루에서 개노릇한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여기에 무슨 일로 나타났지? 시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화풍렬을 노려보았다. 지난 날, 거의 이십여 년 전에 그는 화풍렬과 싸운 적이 있 었다. 직접 싸웠다기보다는 화풍렬이 제풀에 지쳐 달아난 경우였 다. 하지만 시왕은 그 한판의 싸움에 화풍렬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애써 제련한 번뇌시를 이십여 구나 때려부수고 달아 났기 때문이었다. 유홍광은 화풍렬과 시왕이 어떤 관계인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호기심은 저만치 치워놓은 채 그의 눈 길은 시왕을 호위하고 나타난 번뇌시들의 선두에 선 몇몇 낙 백인 가운데 토막난 창을 들고 서 있는 자에게 사로잡혀 있었 다. 그를 보는 순간 유홍광의 눈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다름아닌 마단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홍광으로 하여금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곳에 들 어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단걸은 광기서린 눈빛을 뿌리며 뒤틀린 근육 을 꿈지럭거리는 낙백인(落魄人)에 불과했다. 전혀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유홍광을 알아보는 기미가 없었 다. 크카카카...! 느닷없이 화풍렬을 보던 시왕이 쇠가 부딛치는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이 기괴한 웃음은 듣고 있는 사람을 현기증나게 만 드는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유홍광이나 송학, 점창문인 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갈(喝)! 갑자기 옆에서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터져서 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고 점창문인 둘은 반사적 으로 귀를 막았다. 시왕의 웃음소리도 뚝 그쳤다. 그의 시선은 남색장포의 젊은이에게 고정되었다. 네놈! 화룡(火龍)인가? 간단하게 묻는 것이나 유홍광은 충분히 놀랐다. 송학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금 남색장포의 화룡이라는 젊은이를 보게 되었다. 글쎄... 난 연비청(燕飛靑)이라고 합니다. 연비청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면서 화풍렬을 보고 웃었다. 웃는 연비청의 모습은 더 이상 유홍광의 눈에 그저 그런 애 송이가 아니었다. 단지 한마디로 시왕의 웃음을 멈추어세운 그가 그저 그런 애송이일 까닭이 없었다. 송학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화룡 연비청! 구룡(九龍)의 여덟째? 이 말은 나직하기는 했지만 유홍광에게는 분명하게 전달되 는 의미가 있었다. 유홍광은 반사적으로 조그마한 백삼의 소년을 보며 말을 흘 리고 있었다. 소, 소신룡(少神龍)? 맞아, 이놈이 한비(韓非)야. 화풍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고는 두 손을 연비청과 한 겸의 어깨위에 척하니 걸치고는 나직하게 둘에게만 들릴 정도 로 중얼거렸다. 너희들, 여기서 날 따돌리면 내가 홧김에 죽는다는 걸 잊 지 말아라. 나직한 소리였지만 흑마왕은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큿하 는 콧방귀를 뀌었다. 모조리 다 들었다는 비웃음섞인 눈초리 도 함께였다. 그러나 유홍광과 송학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의 믿기지 않 는 모습을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시왕은 천하오패(天下五覇)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난 이년여동안 그 천하오패보다 더욱 엄청난 명성 을 휘날리는 신예(新銳)가 바로 구룡이었다. 어리다고는 들었어도... 이렇게 어리다니! 유홍광은 자신이 그들나이 때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겨우 아장거리며 무공에 입문하여 걸음마를 하고 있 을 나이에 이들은 천하에 구룡무적(九龍無敵) 천하독보(天下 獨步) 라는 여덞자를 새겨놓은 것이다. 더우기 그것이 지금보다 더 어린 이년여 전이라니! * * * <누군가가 있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인가?> 3 희미하게 보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는 어둡다는 것뿐이었다. 벌레구멍이 끝나는 곳에는 다시 넓은 광장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흘러오는 빛이 있기라도 한듯, 이곳도 어스름한 달빛아래와 같은 정경을 보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천정아래의 광장 사방에는 불근거리며 솟아있는 반쪽 기둥들이 묘한 배치를 이루며 솟아 있었다. 그 기둥들은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적이 모든 소리를 키워놓는 기묘한 공간! 분뢰수는 자신의 앞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곳 같아 보였지만 그 어둠 속에는 석상처 럼 서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분뢰수의 눈자위가 충혈되어갔다. 그의 앞에는 도전자가 나타난 것이다. 생명이 없는 자들이나 그들은 지금 분뢰수를 가로막고 있었 다. 가로막은 자를 피한 기억은 적어도 분뢰수에게는 없었다. 분뢰수가 앞으로 나아가자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명이 없으나 생명을 가진 자에 대해 어떻게 움직 일지 알고 있는 것이다. * * * 자, 이제 그럼 편을 한번 갈라볼까? 느닷없이 백마신이 내놓은 말이었다. 안그래도 앞뒤로 포위당한 듯한 상황에 혼란스러운 지경이 던 일행은 모두 백마신을 쳐다보았다. 백마신은 냉랭한 표정으로 한번 사방을 돌아보고 이야기했 다. 그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 연비청을 향해 있었다. 꼬마, 이년 전의 빚을 보류해주겠다. 이 안에서는 서로 협 력하는 것이 어떻겠나? 연비청은 약간 묘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제가 빚이 있어요? 네놈들, 아홉이 그분 께 저지른 일을 우리가 그냥 넘어가 리가고 생각한 거냐? 그런 어림도 없는 수작을! 흑마왕이 팽이처럼 몸을 돌려 정면으로 연비청과 한비의 얼 굴을 난자하듯이 쏘아보며 소리쳤다. 장내는 한 순간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유홍광은 이때만큼은 마단걸에게서 정신을 돌릴 수 있었다. 적어도 이년 전에는 명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구룡이 느 닷없이 혁혁한 명성을 이루게 된 사건... 말은 들었지만 정말 그 가 저 두 마두(魔頭)의 주인인 가? 연비청은 슬몃 머리를 긁으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빚이 있다고 하지요. 어떻게 협력하는 겁니까? 백마신의 눈초리가 이번에는 시왕을 향했다. 너! 어쨀테냐? 이년 전처럼 너희 섭혼루와 연혼전이 힘을 합쳐 덤빌테냐? 아니면 우리에게 협력해서 저 죽지못한 놈들 을 죽이겠느냐? 시왕의 누런 얼굴이 꿈틀거렸다. 백마신의 협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천하오패의 한사람인 자신에게 저토록 광망스럽게 까불어대 다니! 다른 자 같았으면 벌써 박살을 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백마신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이십대에 강호를 향해 온갖 꿈을 키울때 백마신 과 흑마왕은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라있던 자들이다. 그리고 오십여 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나타난 그들은 기괴 하게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당대의 천하오패 중 누구라도 이 둘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쪽에 버티고 있는 화풍렬도 신경쓰이는 존재였다.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화풍렬은 여전히 건재하여 저 보기싫은 철검을 짚고 있었다. 그 위력은 자신이 애지중지하 는 번뇌시를 부수기에 족한 것이다. 게다가 저 구룡의 애송이들... 시왕의 가슴에는 밝은 곳이라면 분명하게 보일 얼룩같은 반 점이 하나 있었다. 백팔번뇌시(百八煩惱屍)를 거느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는 시왕을 홀로 상대해서 패배시키고 상처를 입힌 존재! 다시 돌아온 저 흑마왕과 백마신을 수하로 복속시킨 그 를 패배시킨 아홉 가운데 둘인 것이다. 비록 구대일(九對一)의 싸움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는 그런 숫적인 우세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절대무적(絶對無敵)인 그 를 최초로 한 번 이 겨보았다는 점이기에. 단지 혼자서 연혼전을 붕괴시키고 시왕 자신조차 껄끄러워 하던 연혼전주(練魂殿主)를 흔적도 없이 말살하고, 자신이 그 힘에 놀라 몸담았던 섭혼루의 주인마저도 패배시킨 그 는 틀 림없는 절대무적이었다. 그 절대무적의 신화를 깬 자들이 바로 구룡인 것이다. 그리고 저편에는 벌써 일년 가까이 싸워온 둘이 서 있었다. 파란 피부를 드러낸 자와 붉은 승포를 휘감은 자. 연혼전의 떨거지인 그 둘은 일년 동안 시왕을 막아서 그가 연혼전의 비전(秘傳)을 얻는 것을 막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지만 혼자 계속 발버둥쳐봐야 별 상황 변동은 있을 수가 없었다. 좋아, 이 패거리들을 이용해 볼까... 생각을 마친 시왕의 입이 열렸다. 좋다. 어차피 깨야 할 놈들이니 협력을 하지. 백마신의 눈이 살짝 감기면서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이 시왕에게는 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이 때 적마승의 나직한 휘파람이 울리며 대열을 갖춘 썩은 시신들이 꿈틀거리며 다시 일행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흑마왕이 다시 팽이처럼 돌면서 무더기로 밀려오는 시신을 향해 거칠게 주먹을 내밀었다. 쉬잉! 거대한 질풍이 갑자기 장내를 휩쓸기라도 한듯 시신들의 대 열 한귀퉁이가 삽시간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대회천신권(大回天神拳)! 화풍렬은 마침내 흑마왕이 익힌 권법이 무엇인가 알아보았 다. 이 엄청난 위력의 권격(拳擊)이 기묘한 침묵을 다시 장내에 몰고 왔다. 시왕은 속이 은근히 떨릴 수 밖에 없었다. 저 정도 위력이면 내 번뇌시들이 도저히 못버티잖아! 나름대로 수작을 부려보려던 생각이 저만치 달아났다. 침묵을 깨며 청마군이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과연 권왕(拳王)의 왕(王)을 칭할 만하군. 흑마왕이 낯을 굳히며 냉정한 어투로 대꾸했다. 칠십년 이란 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다! 청마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럼 협력의 증표로 서로 예물을 교환해 볼 까? 백마신은 잔잔한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백마신을 향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이 백마신과 흑마왕을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시왕, 너부터 내놓아야겠지? 한구의 시신과 한사람의 낙백 인! 말을 간단히 꺼내면서 백마신이 가리킨 한구의 시신은 송추 였고 한사람의 낙백인은 마단걸이었다. 시왕의 얼굴 가죽이 한겹 더 생겨난 것처럼 무표정해졌다. 백마신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를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다. 유홍광은 흥분으로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영문을 알수는 없지만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일이 이제 서야 성취되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 낙백산은 어떻게 하지? 유홍광과는 반대로 송학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백마신의 마음이 그렇게나 좋은 사람이라면 왜 사람들이 그 를 진짜 마신(魔神)처럼 무서워하고 떨겠는가? 게다가 이들은 은퇴했다고 하면서 거의 오십년을 성도 근처 에 머물며 주변의 문파들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해왔다. 청성파조차도 그들로 인해 지난 오십여 년을 성도에서 함부 로 행동하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추론을 세우기에 바쁠 때 백마신 은 턱하니 송학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시왕에게 또 말하고 있 었다. 그렇게 인상쓸 필요는 없어! 이쪽도 한구의 시신을 줄테니 공평한 거야! 그러면서 그가 지목한 한구의 시신은 적우자였다. 송학은 자신의 어깨로 그가 손을 올릴 때 무의식적으로 피 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백마신의 동작은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할 것을 똑똑히 알고 일부러 송학의 어깨로 손을 올린 것이다. 백마신의 손이 어깨를 짚은 순간부터 송학의 얼굴에는 땀방 울이 맺히고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힘이 자신의 내부를 눌러 오는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목소리... 흑마왕이 적우자를 들어올렸다. 시왕의 표정은 누가 봐도 좀 이상한 것이었다. 틀림없는 당대 사천제일고수라는 적우자다. 청성파 장문 인. 이만하면 교환할만 하지? 백마신이 다시 말했다. 울듯 말듯한 표정을 짓다가 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화풍렬은 기가 막혀 할말을 잃고 있었다. 시왕의 시체수집(屍體收集)에 관한 괴벽(怪癖)이야 이미 알 고 있었지만 설마 백마신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연비청이나 한비는 그저 멀뚱거리 며 지켜만 볼 뿐이었다. 유홍광은 당연히 이 조건을 마음에 들어하겠지만... 점창파의 미래를 걸고 들어온 유홍광이니 이럴 때 다른 생 각을 할 까닭이 없었다. 과연 유홍광의 시선은 다시 마단걸에게 박혀 있었다. 물론 저놈의 낙백산은 풀어주어라. 백마신이 마단걸을 지목해서 말하자, 시왕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낙백산은 해독되지 않는 약이다. 본왕이 건 섭심술(攝心 術)이나 풀어줄 수 있지. 백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로. 거래가 성립되는 순간에 송추의 시신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지며 재로 변하고 있었다. 시왕의 구시술이 갖는 기묘한 특징이었다. 송학은 다시 마음 한 구석이 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미 죽었다고는 해도 그가 다시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살아있던 것처럼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적우자의 시신이 흑마왕의 손에 날려 시왕에게 건너 질 때는 분노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백마신에게 붙들려 있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적우자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시왕의 손가락이 까닥거리며 마단걸을 몇번 가리켰다. 마단걸은 그 손가락이 가리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창에 관 통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휘청이다가 조그맣게 소리를 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신음인줄 알았지만 유홍광은 선명하게 그 소리를 알아듣고 있었다. 호..옹....과....앙... 기력을 짜내어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단걸! 얼른 유홍광은 그를 받쳐 들고 뒤로 물러섰다. 유홍광의 심중에는 격렬한 감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겨우 마단걸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죽으려고 하는 것이 다. 멍청아! 그자식이 뒈지기 전에 빨리 네 볼일을 보란 말이 다! 이 소리는 유홍광은 선명하게 들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 혀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귓전을 파고드는 그 소리에 유홍광은 퍼뜩 정신이 들어서 마단걸을 붙잡고 물었다. 단걸, 관(貫)과 사(射)의 서(書)를 어디에 맡겨놓았지? 유홍광이 묻고 있는 것은 관일창법의 비급과 사일검법의 주 해서(註解書)였다. 바로 거기에 점창파의 미래가 달린 것이다. 마단걸은 유홍광을 알아본 것처럼 그 말도 알아들은 듯 힘 겹게 입술을 달작이며 뭐라고 하고 있었다. 화풍렬이 그 입술을 읽어내었다. 그러나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수? 그 계집애말이군. 그런데 무슨 혼수(婚需)? 제 딸년 시집보낼 걱정인가? 저 유가놈 그럼 완전히 헛고생이잖아? 마단걸이 힘겹게 내놓은 것은 겨우 두 마디였다. 수수와 혼수였다. 그러나 그 두마디로 유홍광은 충분했다. 그렇구나! 수수의 혼수단지! 그 바닥의 빈 공간! 마단걸은 자신의 외동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딸이 다섯살도 되기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왔었다. 마수수의 혼수단지는 바로 그 준비를 위해 마련된 것이고 유홍광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기도했다. 그리고 그 단지바닥에는 작은 비밀의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 다. 원래 마수수가 시집가서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쓸 수 있도 록 따로 마련한 금붙이를 그 안에 넣어두려고 했던 작은 공 간! 거기에 마단걸은 관일창법과 사일검법의 주해서를 넣어놓은 것이다. 이... 이... 백! 마! 신! 유홍광은 정신없이 마단걸을 품에 안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끔찍한 쇳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소리를 지른 것은 시왕이었다. 그는 적우자의 시신을 안고 있는데 그 눈에는 온통 사기당 한 사람의 노여운 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백마신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송학은 그의 압제에서 풀려나 있었다. - 네 사부는 이미 탈겁(脫劫)했다. 저놈이 부릴 수 있는 시 신이 아니다! 넌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어! 이 말이 송학의 귓전에 파고든 것은 송학이 백마신의 손에 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기세를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할 때였 다. 이, 이 자식은 탈겁해버렸잖아! 시왕의 분노한 음성이 백마신의 말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화풍렬의 얼굴이 보기드물게 놀라운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 었다. 수도(修道)하는 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장 애를 소멸시키고 영원(永遠)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했을 때를 일컬어 강호에서 탈겁이라 했다. 시왕의 구시술이 통하지 않는 시신이 두 종류가 있었다. 죽은 자를 누구라도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이 가공할 사술 (邪術)의 예외는 이미 죽어버린 연혼전주의 구시술에 걸린 시 신과, 수도의 성과로 탈겁한 자들의 시신이었다. 살아서 고수였던 자일수록 시왕에게는 충실한 수족이었고 괜찮은 위력을 가진 물건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내놓라하는 수하와 동귀어진한, 그야말로 쓸 모가 많은 송추의 시신대신에 받은 것이 탈겁해서 아무 쓸모 도 없는 진짜 빈껍데기일 줄을 생각못한 것이다. 정말 칠십 년 동안 세상에는 벼라별 놈이 다 생겼다니 까... 어떻게 저놈이 공평이란다고 정말 공평할 것을 기대하 는 놈까지 있다지? 노골적으로 우롱하는 소리를 지껄인 것은 적마승이었다. 그는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일체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다가 이제서야 입을 여는 것이다. 시왕의 눈동자가 흉폭한 빛을 발하며 적마승을 향했다. 그런데 적마승의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을 본 것처럼 즐거운 모습이었다. 저 새끼는 알고 있으면서...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 자신은 이미 일년이나 싸운 적수인 것이다. 각기 조직의 최고봉인 주인들이 죽고 난 후 계속 싸워온 상 대에게 호의를 베풀 까닭이 어디에도 없었다. 우두득... 갑작스럽게 주먹을 움켜쥐면서 뼈부러지는 소리를 낸 것은 흑마왕이었다. 자, 이제 거래는 성립된 거다! 왜, 뭐 불만이라도 있어? 시왕의 얼굴이 누런 빛에서 검은 빛으로 왔다갔다 했다. 도저히 상대할 종자가 아닌 것이다. 화풍렬은 거의 입을 못다물고 질려 있었다. 천하오패 가운데에서도 그 악명(惡名)이 자자해서 만나면 우선 피하고 보라는 시왕이 바로 코앞에서 무자비하게 농락당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농락당한 시왕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불끈거리는 것 이 고작이라니! 백마신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멍청한 것을 자랑하고 싶거든 저놈들한테 붙어! 아직 늦지 않았잖아? 그리고는 적마승을 향해 돌아섰다. 그 등뒤로 시왕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흥! 이미 내 덕을 보고 있는 줄이나 알아! 저것들이 풍기 는 냄새가 그냥 썩은 냄새인줄 아냐? 바로 부시독(腐屍毒)이 린 말이다! 흐흐, 네 녀석들은 이 몸이 미리 손을 써놓았기에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란 말이다! 손가락으로 적마승과 청마군의 앞에 늘어선 시신들을 가리 키며 거의 거품을 물다싶이 하며 떠들었지만 백마신이나 흑마 왕은 이미 시왕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대신 어린 목소리가 그런 시왕에게 한마디를 하였다. 낙백인이 썩을까봐 손을 쓴게 아니고요? 이 말은 그대로 시왕의 정곡을 찔렀다. 시왕의 눈이 고리를 만들면서 지껄인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소신룡 한비는 눈하나 깜짝않 고 딴청을 할 뿐이었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유홍광과 송학이었다. 이 시체에 미친 작자를 마구 건드리는 배짱이 요 작은 꼬마 의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그러나 시왕은 발작을 하지 못했다. 지금 흑마왕이나 백마신이 자신들의 패거리라고 선포한 이 상 그들을 건드린다는 것을 곧장 이 지하에서 자신만이 고립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연혼전의 비결만 손에 넣으면 네놈 들을 모조리 박살내주겠다... 목적이 있는 만큼 시왕도 감히 함부로 그들을 적대시 할 수 는 없었다. 이제 장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다. 이미 한패거리가 되기로 한 침입자들과 이를 막으려하는 적 마승과 청마군 사이에 긴장감과 사나운 시선들이 오갔다. 윙, 윙, 윙... 백마신이 손에 든 채찍을 돌리는 소리가 잠시 광장을 제패 했다. 흑마왕은 주먹을 어루만지며 청마군을 쏘아보았다. 이제 천명(天命)를 거슬리는 저런 요물(妖物)들을 제거할 차례인가? 당연하게 들어야 할 말이 흑마왕에게서 나왔기에 화풍렬은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흑마왕의 입에서 나온 가장 정상적인 말이었던 것이다. 시왕의 눈은 퉁방울처럼 튀어나오려다가 말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시왕이 기가 막히고 황당해 한 것은 화 풍렬에 못지 않았다. 딴 놈이면 몰라도 오십년 전부터 제일 악랄한 자를 고르며 언제나 손가락안에 꼽히던 작자가 천명이 어째고 어째? 이때 백마신의 말이 이어졌다. 화가야, 우리가 방금 착한 일 하는거 봤지? 이 말에 화풍렬은 방금 전에 백마신이 느닷없이 유홍광과 송학을 도운 까닭을 깨달았다. 착한 일 한 사람을 외면하면 천벌받는다며? 말의 내용은 부드러운 편에 속하나 말을 하는 흑마왕의 박 력과 자욱하게 배어나오는 공갈(恐喝)분위기는 화풍렬을 어이 없게 만들고 있었다. 들은 지금 자신에게 더 이상 꽁무니빼지 말고 앞으로 나서 라고 욱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연비청은 주먹을 입에 대고 고개를 숙인채 킥킥거리고 있었 다. 한비도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화풍렬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도 뒤에 숨기가 곤란하게 된 것이다. 유홍광과 송학도 쓴 웃음을 짓는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또다시 이들이 생각도 못한 변고(變故)가 터졌 다. 第 十二 章 還 魂 老 人 1 쿠쿠쿠쿠..... 지면을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震動)! 가히 지진(地震)이라고 해도 좋을 거대한 진동이 광장 전체 를 휩쓸고 있었다. 그 위에 서 있던 침입자 모두와 지키려고 버티는 청마군, 적마승까지 모두 쓰러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꿈틀거리던 시신이나 정신이 나가 있는 낙백인들은 대부분이 폭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여저기에 쓰러지고 있었다. 화풍렬은 넘어지려던 점창문인 둘을 붙들면서 소리쳤다. 이게 대체 뭐야! 그러나 아는 사람은 일행중에 없었다. 진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멀리서 지하를 울리며 전해져 오는 거대한 울림소리가 있었다. 우르르르... 밖에서 들었다면 틀림없이 번개가 쳐서 천둥이 운다고 생각 했을 엄청난 우레소리가 울리나오고 있었다. 적마승의 고개가 그대로 홱 돌아가면서 청마군에게 물었다. 아직 여기를 통과한 놈은 한놈도 없잖아! 그러나 청마군은 자신을 노려보는 적마승의 시선보다는 흑 마왕의 시선에 눈을 겨누고 대답하였다. 아니, 아까 한 놈 지나갔어. 너무나 태연한 대답인지라 적마승은 잠시 말도 못하고 청마 군을 쳐다보았다. 그가 화풍렬과 싸우고 돌아온 그 시간에 누군가가 통과했다 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냥 두었어! 소리지르듯이 묻는 말에 청마군은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 다. 네가 부리는 시신이 그냥 두기에. 적마승은 이 대답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가 부리는 이 썩은 시신들은 침입자를 무조건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침입자를 그냥 보낸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마구 통과를 시켰다는 말이냐? 이 말에는 청마군이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그건 아니야. 나타난 걸 보고 막 움직이려고 하니까 벌써 통과했더군. 이 말은 장내를 순식간에 경악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백마신이나 흑마왕은 청마군이 어떤 자인가를 알기에 미처 그가 어떻게 하기 전에 이 광장을 통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 하는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가공할 신법(身法)을 구사한다면? 한 순간에 둘이 서로 마주보자 동시에 서로 생각이 통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마신의 채찍이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고 발걸음이 앞으로 향했다. 흑마왕의 팔뚝에서는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 다. 이제 볼 것 없이 그대로 뚫고 가겠다는 의사를 확연히 보인 것이다. 그러나 화풍렬은 다른 생각을 하고 그대로 그 말을 입밖으 로 내고 있었다. 분뢰수? 유홍광이나 송학도 같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길 그냥 지나갔지? 시왕도 자신의 생각이 있기에 턱을 덜덜 떨면서 적마승의 뒤에 뚫린 통로의 어두운 공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 그 안을 가본 적이 있었다. 저 통로를 제대로 따라가면 좀더 지하로 내려가는 벌레구멍 같은 동굴길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지하에는.... 사왕진(死王陣)이 발동한 것이냐? 떨리는 음성을 흘리는 시왕을 유홍광과 송학 등이 주시하였 다. 그가 말한 사왕진이 무엇인가 해서였다. 그러나 백마신이나 흑마왕은 잘 알고 있었다. 화풍렬도 알 고 있었다. 하지마 그것이 지하에 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끼이이.... 적마승이 갑자기 날카롭고 높은 휘파람을 불어대었다. 형언하기 곤란한 휘파람소리는 사람의 골을 파내는 듯한 소 름돋는 빛깔로 퍼져나갔다. 그리고는 적마승은 뒤돌아서서 청마군을 잡아 끌며 사라지 고 있었다. 백마신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거기 서지 못해! 위이잉! 위이잉! 콰직! 콰직! 맹렬한 채찍소리와 함께 격한 파괴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진은 썩은 시신의 패거리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었다. 뒤이어 흑마왕의 권격이 쭉 뻗어나왔다. 파아아... 소리도 없이 뻗은 주먹앞에는 시신들이 그대로 산산이 가루 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지켜보던 화풍렬은 등골에 식은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대파멸마권(大破滅魔拳)이다! 는 틀림없이 그 권왕지왕(拳 王之王)의 진전을 이었다! 엄청난 위력이 작렬함에도 시신들의 피해는 의외로 적은 편 이었다. 그런식으로는 어려워! 놈들은 진세(陣勢)를 구축하고 있 다! 시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화풍렬이 따라 소리를 질렀다. 야! 너는 자칭 시왕이란 놈이잖아! 저것들을 어떻게 비켜 서게 못하냐? 시왕은 이 한마디에 자존심이 그대로 구겨지고 있었다. 독살스럽게 화풍렬을 노려보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근본적으로 이 지하의 시신들은 연혼전주의 힘에 지배받고 있었다. 이미 죽은 연혼전주이건만 시왕은 그의 구혼력(拘魂力)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그보다 더욱 뛰어난 구시술을 지녔던 자 가 바로 죽은 연혼전주였었다. 그래서 내가 연혼전에 안가고 섭혼루로 간 것인데... 지금 다시 화풍렬이 그의 아픈 곳을 난자하고 있는 것이다. 닥쳐! 저것들은 이미 혼주(魂主)가 정해진 놈들이다! 내 말에 따르는 것들과는 달라! 그러나 반박을 하며 보니 화풍렬은 혀를 내밀며 약을 올리 고 있었다. 시왕은 일곱구멍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치밀 었으나 지금은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어쨌든 밑으로 빨리 내려가야겠군요. 이 혼란한 와중에 담담한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져 모두 의 시선을 끌었다. 흑마왕과 백마신은 그 목소리가 울리자 뒤로 물러서고 있었 다. 꼬마! 손을 쓸꺼면 어서 써라! 흑마왕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의 대파멸마권에 걸리는 시신은 그대로 가루가 되지만 그 수는 기껏해야 두구에서 세구일 뿐이었다. 연비청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흑마왕과 백마신이 뒤로 물러서자 연비청의 소매자락이 바 람에 휘감긴 것처럼 펄럭거렸다. 쉬쉬쉭! 동시에 가느다란 실같은 여린 빛이 그물처럼 사방을 휘저어 갔다. 시왕이 비명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야! 타협한 것을 잊지마! 내 것은 건드리면 안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무서운 불길이 치솟으 며 달려드는 썩은 시신들을 모조리 휘어감고 있었다.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시신들을 분쇄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타오르는 광경이 아니라 그대로 짓이기는 광경이었 다. 유홍광은 비로소 연비청이 왜 화룡이라고 불리우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광경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것이 다. 송학은 그 엄청난 불길을 보자 시왕의 손에서 다시 바닥에 버려져 있는 적우자의 시신을 들어 안았다. 그리고는 한쪽 불길에 그 적우자의 시신을 던져 넣었다. 송학의 눈에는 어느새 축축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부님....! 사나운 불길이 치솟으며 연비청의 모습이 흡사 그림자처럼 보일 때, 연비청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 다. 알아서 주의를 하시지요. 시왕이라는 분이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 말이 자기 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자신의 외침에 대한 대 꾸였음을 시왕이 깨달은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우르릉! 연속적으로 울려오는 뇌성(雷聲)을 들으면서 적마승과 청마 군은 벌레구멍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직도 계속 누군가가 사왕진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꼴인데도 환혼노인(還魂老人)은 꿈쩍도 않는다는 건 가? 적마승이 불만섞인 말을 하였다. 그의 옆얼굴에는 희미하게 그어진 날카로운 칼자욱에서 핏 방울이 아롱지고 있었다. 청마군이 흘깃 고개를 돌리다 말했다. 그 청성장문인... 정말 대단한 자였다. 탈겁의 때가 아니 었다면 우리와 동귀어진 했을지도 몰라. 적마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기에 제압당했을 때 그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것은 몇번을 겪어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반드시 살아난다. 그래서 복수하고 말겠다. 난 죽지 않아! 꼭 살아남을 것이다. 적마승 마음 속의 되뇌임은 은연 중에 더욱 굳어져 가고 있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의 미소도 한결 짙어져 갔다. 글쎄... 내 금강승(金剛僧)의 법신(法身)을 못깰 수도 있 지 않았을까? 청마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적마승의 얼굴에 아롱진 핏방울이 그의 법신이 깨뜨려 질 뻔 했음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이다. 시왕은 꾹꾹 눌러 참으면서 길을 안내하였다. 지하에는 쓸데없는 많은 구멍이 나 있었다. 결국은 제자리 를 맴돌게 하는 그런 구멍들이다. 연비청의 화선(火線)을 발출해서 연혼전의 시신들만 거의 다 불태웠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에 번뇌시가 세 구씩이나 휩쓸리고 말았다. 더우기 불을 보고 날뛰던 낙백인도 몇 타버리고 말았다. 이놈... 반드시 갚아주겠다. 이를 갈면서도 시왕은 지금 당장 이들의 힘이 필요한 곳이 있었다. 일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대치상황이 이제 겨우 깨어진 것이 다. 연혼전주가 흔적도 못찾을 정도로 박살이 나고 섭혼루주가 비명횡사를 한 다음에 남은 세력내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자부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연혼전의 비결을 손에 넣는 것이 수월 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에 와보니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빌어먹을 환혼노인(還魂老人) 자식만 없었어도... 때문에 시왕이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런 시왕의 인내심을 자극하는 사람은 화풍렬이었다. 왠만하면 그냥 내려서 네 발로 걷는게 좋지 않겠냐? 도대 체 이 좁아 빠진 통로를 이 빌어먹을 교자를 끌고 가야하겠 어? 아까부터 같은 소리였다. 화풍렬의 말만큼 통로는 좁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풍렬은 일부러 그의 속을 긁어대고 있는 것이 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그 소리를 못듣는 것은 유홍광과 점창 문인 둘이었다. 그들로서는 옆에서 겅충거리고 뛰는 번뇌시부터가 영 불안 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혹시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중에 끼어있으면 어 쩌지? 어떻게 보면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충분히 걱정할 수 있 는 요인이었다. 특히 유홍광은 방금 전까지 낙백인으로 날뛰던 마단걸의 생 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기왕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라 유홍광은 숨이 끊어진 마단걸 을 송학이 적우자를 화장(火葬)한 것처럼 불에 넣었다. 그러나 그가 불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예 자신이 불속에 들어간듯한 느낌이었다. 단걸... 기어코 너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창파는 등을 보일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일에서도 물러설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송학은 등에 두 자루의 검을 매고 있었다. 그 한자루는 사부의 것이고, 한자루는 동문의 것이다. 모든 짐을 지어야한다는 부담감이 송학을 더욱 냉정하게 만 들고 있었다. 누가 낙백인을 만들었는가는 밝혀졌다. 그럼 대체 왜 저자 는 표물을 강탈해서 이목을 끌었지? 이것이 송학의 의문이었다. 콰콰쾅! 연속적인 천둥소리가 일행의 모든 상념을 앗아가 버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공통의 관심사가 떠올랐다. 분뢰수가 과연 저기에 있는 것인가? 2 적마승과 청마군이 벌레구멍을 빠져나왔을 때 그들 눈 앞에 는 늘 보던 광경이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그들을 맞이한 것은 뱃속까지 울릴 정도로 강렬한 음 파(音波)와 마구 부서져 흩날리는 돌조각이었다. 엄청나군. 적마승이 외쳤다. 외친 소리가 바로 옆의 청마군에게도 제대로 들리지를 않았 다. 쾅! 쾅! 쾅! 연속으로 들리는 폭음(暴音)은 이 광장에서 벌어지는 상황 을 표현하는 소리였다. 하얀 번개가 광장 전체를 질주하고 있었고 보통보다 큰 키 의 괴인(怪人)들이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난무(亂舞)를 펼쳐 놓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몇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 청마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왕진을 구성하고 있는 시신이 어떤 것인데... 적마승의 입에서 가볍게 휘파람소리가 울려나왔다. 어지러운 폭음속에서도 이 가벼운 휘파람소리는 광장 전체 에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사람이 듣기에는 역겹고 귀가 따가운 이 휘파람소리는 사왕 진에 큰 변화를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저 덤벼들기만 하던 우람한 체구의 시신들이 갑 작스럽게 흉흉한 녹색의 눈빛을 빛내기 시작했다. 분뢰수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홍등(紅燈)처럼 빛나기 시작 한 것도 이때였다. 그 다음 순간에 분뢰수의 두 손이 마주치면서 뇌성벽력이 장내를 질타하였다. 꽈르르... 적마승의 휘파람소리에 변화를 보이던 시신들 동작이 순간 적으로 멈칫해졌다. 괜한 놈을 자극한 것 같은데? 적마승이 유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지시를 내리기전에는 단지 미련스럽게 자리를 지키면 서 분뢰수를 잡아 찢으려만 들던 사왕진의 시신들이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뢰수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분뢰수의 온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기묘한 위세(威勢)! 그것이 장내를 정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 위세에 휘말린 듯 시신들의 움직임도 멎어 있었다. 청마군이 조심스럽게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지름길로 빠져야 되겠다. 저놈은 여기서 막을 수 없을 거 야. 적마승은 문득 고개를 돌려 청마군을 보았다. 진중한 모습을 보이는 청마군과 미소를 짓는 적마승의 눈길 이 마주쳤다. 좋아. 가야지! 환혼노인이 어떤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면 이대로 무너질 수 밖에 없겠지... 둘은 광장의 한쪽 벽에 붙어 달렸다. 그들이 광장을 반쯤 돌았을 때 분뢰수의 사면팔방(四面八 方)으로 뿌연 먼지가 천공(天空)의 뇌운(雷雲)처럼 일어났다. 빨리! 적마승은 그 안에서 풍겨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청마군은 이미 움직임을 더욱 가속시 키고 있었다. 벌레구멍을 찾기가 무섭게 시왕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가 막 교자의 폭을 줄여 들어가려는데 그 안에서 거친 바 람이 몰려나온 것이다. 어째서? 이곳에는 바람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는데? 확실히 이 지하는 정적(靜寂)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지진이라도 난듯이 흔들리는가 하면 아련하 게 우레소리가 들려오고 이제는 사나운 바람마저 일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저놈이 이 좁은 통로까지 교자를 끌려고 하네! 적당히 좀 하고 내려라, 뭐 좋은 교자라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려던 시왕은 콧구멍에서 김이 모락모 락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화풍렬은 넉살좋게 중얼대고 있었다. 어? 희안한 재주구만! 어디서 그렇게 코를 벌름거리는 재 주를 익혔어? 시왕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살기(殺氣)가 목을 조르듯이 쏟 아졌지만 화풍렬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유홍광이 조마조마해서 검을 쥔 손에 더 힘을 넣고 있 었다. 콰콰콰... 파도가 연속으로 밀어닥치듯이 우레소리가 일어나며 벌레구 멍으로 부터 음산한 귀곡성이 흘러 나왔다. 사, 사왕소(死王嘯)! 떨리는 목소리가 저절로 시왕에게서 터져나왔다. 방금 전까지도 물컹거리는 것처럼 손에 잡힐 듯한 살기를 뿜어내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온통 놀라움과 기괴함으로 가득찬 표정이 떠올랐다. 백마신의 눈가가 조금 실룩였다. 그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마왕은 자신의 뻣뻣한 수염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의외의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화풍렬이 물었다. 그게 뭡니까? 백마신은 흘깃 그를 보다가 나직하게 신경질적인 어투로 대 꾸해주었다. 아까 명패를 봤잖아! 그 말에 화풍렬마저도 침묵에 접어들었다. 백마신이 말하는 것은 이곳의 입구에서 발견했던 고루문의 명패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사왕소가 고루문의 명패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 가? 화풍렬은 더 묻고 싶었지만 백마신의 표정이 너무나 험악해 서 더 입을 열지 못했다. 칠십에서 구십에 달하는 원로들의 침묵은 연비청의 한마디 로 깨졌다.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자는 분은 없을테니 들어갈까 요? 화룡 연비청의 말은 유홍광을 더욱 속타게 만들었다. 어쩌지... 이제와서 물러난다고 할 수도 없고... 더 들어 간다는 것도 위험하고... 유홍광은 자신의 어깨위에 놓인 책임감의 무게를 이렇게까 지 실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거의 그 무게의 대부분을 마단걸이 한몸에 싣고 있었다. 불과 이십 오세에 사일검법의 오의를 터득하고 십년간의 칩 거(蟄居) 끝에 관일창법을 복원해내는 기재(奇才)가 마단걸에 게는 있었고 유홍광 자신에게는 없었다. 대신 유홍광은 그가 신경쓰지 않도록 문파의 세세한 잡무를 모두 도맡아 했다. 그리고 강호상에서 점창파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게 만드 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장문인이 되지 못한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언제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 터지는 강호를 유람 하며 견문을 쌓는 길을 선택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문인은 죽고 제일고수라는 마단걸마저 비명에 사 라진 지금, 점창파가 다시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의 등뒤에서 벌벌떠는 기색이 역력한 문인 둘도 그 자신 의 책임이었다. 갈등하는 유홍광의 귀에 구원의 목소리를 넣어 준 것은 뜻 밖에도 송학이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이 이상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 군요. 유홍광은 거기에 동조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어 누구나가 그 의사를 알 수 있 었다. 잘됐네요. 그렇지않아도 혼자서 어떻게 나갈까 걱정하던 차인데... 저하고 같이 나가세요. 괜찮지요? 송학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나가겠다고 한 것은 한비였 다. 한비는 잠깐 연비청에게 동의를 구하고는 유홍광을 보며 말 을 이었다. 저, 손이 좀 많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으실래 요? 유홍광은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백마신이나 흑마왕은 전혀 뒤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 다. 그들은 그저 밀고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화풍렬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나가거든 꼭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알겠어? 내가 홧병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널 잡아먹을지도 몰라!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데도 유홍광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지하에 내려와서 그가 본 것을 생각하니 화풍렬의 장난 기 어린 말마저도 쉽게 들을 수가 없던 것이다. 자, 가라구! 뭘 기다려? 송학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는 이제 화풍렬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마 도 그는 저 구룡의 둘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을 것이 다. -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그를 생각한다 면 단지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 이런 표행에 따라나서지는 않 을 터이니... 사부 적우자가 따로 한 말이 맞는 것이다. 더 이상 그자신이 머물 필요가 없었다. 주저없이 송학이 돌아서 나가자 그 뒤를 소신룡 한비와 유 홍광 일행이 뒤따랐다. 화풍렬은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는 연비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아주 비장하게 말했다. 너... 절대 날 떼놓으면 안돼! 연비청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미 시왕과 흑마왕, 백마신은 벌레구멍 안 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행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경공에 뒤쳐지는 일부가 떨어져 나간 면도 있으나 점점 심 상치 않게 들려오는 굉음(轟音)이 발걸음을 재촉한 때문이었 다. 마침내 그들이 벌레구멍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때아닌 돌풍(突風)이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잘게 스러져가는 굉음의 마지막 소리가 귀속으로 파 고들 때 시왕의 놀란 음성이 겨우 새어나오고 있었다. 파, 팔대사왕(八大死王)! 분뢰수는 중앙에 서 있었다. 산발하여 흩어내린 머리카락이 장내를 휩쓰는 돌풍에 휘말 리기라도 했는지 제멋대로 흩날렸다. 칙칙한 눈빛은 붉은 기운에 휩싸여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가 보는 것은 이제 막 벌레구멍을 통과한 일행이 아니었다. 지금 그 자신의 팔방을 지키고 서 있는 여덞 명의 괴인이었 다. 시왕이 팔대사왕이라 부른 자들이었다. 온몸은 갈색으로 채색된 듯이 보였고, 그 갈색 피부밑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은 마치 낙백인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일곱 자에 달하는 큰 키였다. 그러나 기괴하게도 눈가에는 아무런 생기도 실려있지 않고 단지 어두운 구멍이 뚫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분뢰수의 주변에는 이들말고도 다른 자들이 또 있었다. 그들의 모습도 서 있는 여덞 괴인과 별로 달라 보이지는 않 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가슴에서 배부위가 그대로 산산이 파열되어 바닥에 구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일격(一擊)에 박살이 나있는 광경이었다. 시왕은 그렇게 쓰러진 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 절대로 하나씩 쓰러뜨릴 수는 없다! 사왕진에 타격을 가하려면 반드시 전체를 한꺼번에 공격해야돼! 그런데... 화풍렬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진 자들이나 서 있는 자들이나 어느쪽도 살아있는 것같 지가 않은 것이다. 저게 산 놈들이야, 죽은 놈들이야? 나직하게 웅얼대는 소리에 연비청이 조용히 말했다. 저 복면인을 빼고는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간단한 한마디에 화풍렬은 미심쩍은 얼굴이 되었다. 시신에 대해서 강호제일(江湖第一)의 대가(大家)라는 시왕 이 움직이는 번뇌시들도 저런 두툼한 근육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오래묵으면 묵을수록 그 근육은 지독하 게 손상이 되어 깡마른 것이 고작이었다. 단지 번뇌시는 묵으면 묵을수록 강해진다는 특징이 있었고, 그것이 시왕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런데 근육이 시간이 지나도 건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만 든 자의 능력은 시왕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 니겠는가? 시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팔대사왕을 비롯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일흔 두구의 사 왕친위대(死王親衛隊)가 모두 한 사람의 작품이었다. 연혼전주... 곱씹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상상한 경지를 넘어 서는 자였다. 일흔 두 개다! 나직하지만 쩌렁거리는 음성은 흑마왕이 낸 것이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사왕친위대의 수를 센 것이다. 시왕은 세지 않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백마신이 담담하게 말했다. 틀림없는 고루문의 후예였단 말이지... 그러나 그 말투에는 더할나위 없는 분노와 증오가 함꼐 하 고 있었다. * * * <죽어서도 움직이는 자들... 이들은 강하다... 그러나 나의 뇌고진천(雷鼓震天) 일격을 견디지 못했다... 다시 나타난 여 덟... 이들은 뇌운비상(雷雲飛上)에 위치를 노출시켰다... 사 왕진은 이미 깨어졌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더욱 강해진 다... 난 들어간다...> 3 뭐? 이미 뒈져버린 놈이 만들었다고? 그런데 지금도 저렇 게 움직여? 넌 손도 못쓰고? 화풍렬은 경악이 충만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 말은 뒤로 가면서 점차 시왕을 벅벅 긁어놓는 비 웃음을 싣고 있었다. 상황은 기괴한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일행 중에 누구도 분뢰수와 팔대사왕 사이에 끼어들고자 하 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돌아서 통과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화풍렬과 시왕처럼 그저 서서 입씨름이나 하며 구경하 는 것이 고작이었다. 닥쳐! 저놈들의 혼주는 저놈들 자신이란 말이다! 아무 것 도 모르면서 까불지 말어! 시왕은 누런 얼굴이 시커멓게 변색될 만큼 화가 치밀어 있 었다. 만일 이 자리에 화풍렬만 있었다면 벌써 손을 써도 수백 번 은 썼을 것이다. 헤에? 죽은 놈들이 생각이라도 한단 말이냐? 화풍렬이 놀리는 말을 던지자 백마신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를 돌아보며 픽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어떻게 알았지? 저녀석들은 죽어서도 생각하는 놈들이지. 백마신의 말에 화풍렬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반대로 시왕의 얼굴은 소리없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보통내기가 아니군... 구시술에 대해서도 잘아는 모양인데... 백마신은 눈길을 시왕에게 돌렸다. 너는 알겠지? 어느 놈이 사망일혼(死亡一魂)을 가지고 있 는지? 시왕은 잠시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팔대사왕의 비밀은 여덞이 하나의 혼(魂)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하나의 혼이 바로 사망일혼이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죽어서도 생각하고 혼주가 사라진 지금에 도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구시술에 있어서 혼주의 죽음은 곧 구시술의 파해(破解)였 다. 그 예외가 바로 사왕진의 근간이 되는 팔대사왕이었다. 이들만큼은 혼주의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쿠우우우--- 갑작스럽게 기괴한 진동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리고 사왕소가 그 뒤를 이었다. 귀에 들리는 소리대신에 뱃속을 뒤집어 놓을 듯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분뢰수를 중심으로 자욱하게 뻗어나오는 아련한 기운이 선 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건 마치... 구름의 바다같다... 화풍렬은 자신이 느낀 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느낀 것이다. 팔대사왕은 그 기운에 맞서서 분뢰수를 가운데 둔 채로 맹 렬히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점차 중심으로 가해지는 압력이 증가되었다. 시왕은 사왕진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그 중심에 서 받을 압력과 위세에도 끄덕없는 분뢰수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 깔린 돌들이 마구 구르고 박살이 나서 널부러진 시 왕친위대가 뒹굴어다녔다. 희미한 동굴안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광풍(狂風)이 난무하 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면을 타고오는 맹렬한 폭음이 터져나오며 팔대사 왕이 일제히 퉁겨졌다. 분뢰수는 그 중 하나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시왕은 말도 못한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사망일혼을 찾아낸다는 것은 시왕 자신처럼 귀혼지기(鬼魂 之氣)를 직접 보고 아는 자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저런 엄청난 압력 속에서는 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왕이 눈앞에서 복면괴인은 그 일을 하려들고 있었다. 분뢰수는 몰아치는 질풍과 돌덩어리, 조각난 시신들 속에서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분뢰수의 손이 하얗게 쭉 늘어나는 광경에 지켜 보던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서 뒤로 한걸음씩 물러섰 다. 그 손이 닿은 곳은 팔대사왕 중 하나의 목이었다. 하얀 번개가 목을 스치는 듯한 다음에 사왕의 목은 허공을 날고 몸은 그대로 바닥에 철판처럼 엎어져 버렸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머리에서 느닷없이 뿌연 안개와 같은 것 이 스며나왔을 때 시왕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사망일혼! 이 비명같은 소리가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뿌연 안개 덩어리 복판을 하얀 번개가 가르고 지나갔다. 끼이이이... 기괴한 소리가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순간에 팔대사 왕의 나머지 일곱이 그대로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붙잡고 버티던 기둥이 사라진 것처럼 형편없 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분뢰수의 몸이 빛살같은 속도로 앞에 뚫린 구멍 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놀랄 틈도 없이 그 다음에는 발밑으로부터 거센 폭 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쿠르르릉! 딛고 있는 땅이 꺼져 내려앉는 광경에 화풍렬은 어이가 없 었다. 뭐야, 뭐? 이건 두부로 만들기라도 했냐! 순간 시왕은 입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시왕의 교자는 그대로 허공을 딛고 날기라도 하는 것처럼 광장 저편의 분뢰수가 사라진 구멍을 향해 움직여 갔다. 번뇌시들이 그 뒤를 따랐고 백마신이나 흑마왕은 이미 시왕 의 교자 앞에 있었다. 연비청은 허공으로 무조건 솟구친 화풍렬의 발을 붙잡았다. 대공! 앞으로 갑니다! 윽! 던지지마! 기겁을 한 화풍렬이 소리를 질렀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연비 청에 의해 내던져지고 있었다. 연비청은 그 다음에 몸을 틀면서 무너져 내리는 바닥을 징 검다리 짚듯이 짚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서 흘깃 뒤를 본 백마신이 은연 중에 감탄할 정도로 부 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과연 구룡의 명성이 완전히 엉터리는 아닌데... 하지만 저 정도로...? * * * <이제 곧 만나게 된다... 나를 부른 자를...> * * * 분뢰수는 천천히 자신에게 몰려오는 향연(香煙)을 바라보고 만 있었다. 사왕진을 격파한 다음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광장을 넘 어섰다. 그리고 마구 뒤엉켜서 나타난 어두운 통로안에서 그는 한 방향으로 곧장 가고 있었다. 제멋대로 뒤엉킨 통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표시를 해놓아 도 소용없는 철저한 미로(迷路)였다. 그리고 자욱한 잿빛 향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향연이 가득 통로를 메우고 있건만 분 뢰수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단지 짐승이 맹목적으로 먹이를 찾아가듯이 무엇인가 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두운 통로의 한구석에서 그를 지켜보는 적마승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였지만 눈꼬리를 살짝 치켜뜰 수 밖에 없 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전혀 망설이지도 않고 길을 헤매이 지도 않고... 설마 환혼노인과 아는 놈인가? 그럴리는 없을텐 데...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사왕진을 무슨 장난처럼 때려부 셔? 손에는 한번 불을 뿜으면 집채만한 바위도 가루를 찾기 어 렵게 한다는 무서운 진천통(震天筒)을 들고 있지만 적마승은 감히 사용할 생각은 꺼내지도 못했다. 진천통이 뿜어내는 불길의 위력이 대단해도 팔대사왕이 동 시에 발산하는 경기(勁氣)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나 다름 없는 때문이었다. 설사 광장을 붕괴시킨다 한들 소용없었지 않은가? 게다가 이 교묘한 미로를, 그것도 몽신연(夢神煙)이라는 내 가공력(內家功力)을 손상시키는 향연을 가득 채워놓은 이 미 로를 마음대로 헤집고 돌아다니는 상대를 어떻게 함부로 공격 하겠는가? 옘병... 겨우 그 패죽일 놈을 만났나 했더니... 어디서 저 런 빌어먹을 놈이 나타난 거야... 불만이 쌓이면 싸일수록 적마승의 웃음은 즐겁고 유쾌해졌 다. 청마군은 그의 미소를 보고 그의 내심을 알아차렸다. 거기에는 그도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역시 아무 짓도 않 고 분뢰수를 그냥 내버려두는 중이기도 했다. 그래서 분뢰수는 두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이 미로를 그 냥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온 일행은 아예 그 입구언저리에서 부 터 멈추어 서 있었다. 백마신의 인상이 아주 험악해져 있었다. 흑마왕은 그 이유가 몽신연 때문이라는 것보다는 곳곳에 보 이는 적마승의 흔적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적마승이 남긴 흔적은 몽신연이 뿜어져 나오는 배치방법이 었다. 다름아닌 백마신과 적마승이 함께 만들었던 절명십이관(絶 命十二關)인 것이다. 좀 늦게 당도한 시왕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 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미로가 얼마나 복잡한지 이미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시왕의 입꼬리에 득의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흐흐...네놈들은 평생 머리를 썩혀도 이 미로를 뚫을 수 없을 것이다. 시왕은 이미 미로를 통과하는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잿 빛 향연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교자를 몰았다. 하나 채 두 걸음도 떼어 놓기 전에 교자 앞을 맨 두 여자시 신이 그대로 앞으로 자빠지는 것이었다. 시왕의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 이게... 반사적으로 공력을 써서 교자를 뒤로 밀쳤을때 그와 혼교 (魂交)가 끊긴 두 구의 여자시신은 순식간에 재로 변하고 있 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교자를 호위해 가던 번뇌시조차 향연안으 로 내딛는 순간에 재가 되고 있었다. 이거 바보아냐? 흑마왕이 어이없는 듯 중얼거렸다. 틀림없는 바보맞아요. 뒤이어 말한 것은 화풍렬이었다. 화풍렬은 얼굴 가득히 기쁨과 환희를 담고서 시왕을 이리저 리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시왕이 쓰러지지 않는 것을 몹시 애석하게 여 기는 표정이었다. 시왕의 눈에는 독기(毒氣)와 냉혹한 살기(殺氣)가 함께 어 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시왕을 휘어잡았다. 독살스럽게 고개를 돌린 시왕의 눈에 백마신이 비추어졌다. 불과 사십대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구십이 넘은 그야말로 절 정고수(絶頂高手)에 속하는 마인(魔人)이었다. 그 옆에는 훤칠한 백마신의 키보다 머리하나가 더 올라온 흑마왕이 보였다. 역시 백마신 못지 않는 작자였다. 그리고 그 뒤에 당장 갈가리 찢어죽여도 속이 시원치못할 밉상이 있었다. 확 쓸어버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화풍렬이 느긋하게 자신을 쏘아보면서 철검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도저히 숫자로 상대가 안되는 일당이었다. 몽신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냐? 백마신의 차가운 음성이 머리꼭대기부터 쓸어내리듯이 시왕 을 덮쳤다. 지독한 놈... 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냥 가게 내 비둬? 울화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시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몽신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자 흑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시왕을 아래위로 살 펴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구시술로 먹고산다는 놈이 고루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시왕은 가슴팍 한 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고루문이 지금 이것과 무슨 상관이요? 화풍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그야말로 무식을 드러내는군! 하긴 그게 네놈의 모든 밑천이지... 시왕은 무섭게 화풍렬을 노려보았으나 화풍렬은 눈섭하나 까닥하지 않고 여전히 히죽거렸다. 연혼전주가 고루문의 후인(後人)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 겠지? 그러나 그는 죽었소. 알고 있다. 그런데 살아나지 않은 것은 확실한 거겠지? 시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하오. 그런데 누가 이 지하를 관장하지? 흑마왕이 찌를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시왕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환혼노인이라는 늙다리가 있소. 자그마치 이백사십이나 살 았다는 괴물이오. 시왕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행의 행동이 갑자기 경직되었 다. 사람이 이백하고도 사십년을 산다는 것이 우습거나 간단한 일이 아닌 때문이었다. 좋군. 그놈 상당히 똑똑한 녀석인가본데. 그놈도 고루문과 관련이 있을까? 어쨋든 그놈이 만만치는 않았겠지? 백마신이 소매자락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며 말했 다. 시왕은 마치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말투에 얼굴 근 육이 저절로 꿈지럭 거렸지만 이번에도 역시 고개만 움직였 다. 지금까지 오직 그 때문에 막혀있었다고 해야 옳았다.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백마신은 주머니 안의 가루를 손 에 조심스럽게 털면서 다시 말했다. 몽신연은 고루문에서 반도(叛徒)를 응징할 때 쓰는 향(香) 이다. 그걸 사용하면 혼의 교섭이 끊어지지. 그리고 내가고수 들은 정신을 잃기도 하고 내공에 막대한 타격을 받는다. 백마신은 손안에 든 가루를 천천히 앞으로 뿌렸다. 새하얀 가루는 향연을 따라 천천히 맴돌면서 미로를 향해 퍼져나갔다. 연비청이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도와드릴까요? 백마신은 힐끔 그를 보더니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으면서 경 쾌하게 대답했다. 좋지! 이 잡종새끼가! 적마승이 광분(狂奔)하여 뛰쳐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미로는 온통 화염(火焰)에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향연 속에 날려오는 새하얀 가루를 보는 순간에 적마승과 청마군은 지면을 뚫기라도 하듯이 바닥을 파고 들었 다. 그리고 미로 전체에 시뻘건 화마(火魔)가 덮쳐든 것이다. 아직도 불길이 너울거리는 가운데 튀어나온 적마승의 얼굴 은 보기드물게 분노를 그려내고 있었다. 청마군은 그런 적마군의 목을 팔뚝으로 감아쥐고 있었다. 그만둬! 네가 죽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나까지 죽게된 다. 잊은 것은 아니지? 청마군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적마승은 겨우 진정을 했 다. 그리고 다시 얼굴에는 호쾌한 웃음이 떠올랐다. 환혼노인... 그 자식이 어떤 얼굴을 할지 재미있겠군... 그리고 그 둘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第 十三 章 죽 음, 過 去 1 네가 나를 불렀는가? 당당하게 퍼지는 질문은 어느 곳에서라도 할 수 있는 말이 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어느 곳에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말이 토해진 곳도 아무 곳이 아니었다. 어둠이 자신의 패권을 내세우는 지하! 겹겹이 둘러쳐진 미로의 방어관문과 그 위에 놓여진 사왕진 을 비롯한 장애물! 그런 것이 놓여진 장소는 절대로 아무나 갈 수 있는 평범한 곳일 수가 없었다. 그곳은 빛보다 그림자가 더 많이 퍼진 넓은 방이었다. 가히 사람 백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방이라기보다는 광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분명히 방이었다. 사방 벽에 그려진 부조(浮彫)가 온통 죽어가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서 이탈하는 혼백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솥이 하나 놓여 있었다. 커다란 세 발달린 솥의 겉면에는 사방 벽의 부조만큼이나 음침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괴수(怪獸)가 쳐박혀 있었다. 그것은 조각이 아니라 살아있는 괴수를 그대로 쳐박아 놓은 바로 그대로였다. 그 솥에서 뭉클거리며 솟는 연기는 마치 괴수들의 입김처럼 역겨운 냄새를 뿌리며 이 거대한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뢰수가 서 있는 곳은 이 이상스런 방의 입구였다. 미로를 벗어나 거대한 석조(石造)의 문을 건너 들어온 곳이 바로 이 이상한 방이었다. 그러나 분뢰수의 눈빛 속에는 방안의 이상한 정경같은 것은 들어오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 칙칙한 눈속에 투영된 것은 솥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본 채로 서서 노려보는 노인(老人)이었다. 상반신을 알몸으로 그대로 드러낸 몰골이었다. 깡마른 몸집이 볼품없었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이 분명 했다. 머리카락의 절반은 눈처럼 새하얀 백발(白髮)이었고, 나머 지 절반은 젊은이의 윤기있는 검은 머리보다도 더욱 윤기를 머금은 검은 빛깔이었다. 노인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얼굴의 주름조차도 그 검은 머 리카락으로 드리워진 부분은 젊은 청년처럼 매끄럽기까지 한 괴이한 자였다. 특히나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충분한 것은 노인의 눈동 자였다. 사람의 눈과는 전혀 다른, 마치 어두운 밤 늑대의 눈을 뽑 아 박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지금 분뢰수에게 고정되어 당장이라도 씹어서 삼킬 듯한 광망(光芒)을 줄기줄기 뻗어내고 있었다. - 네가 나를 불렀는가? 마치 메아리처럼 분뢰수가 발한 음성은 아직도 노인의 귓전 을 맴돌고 있었다. 그 자신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가득 풍기는 사람이어서 일 까? 노인은 분뢰수를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너는 누구냐? 이번에는 노인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의 혼백을 집어삼키기라도 할듯이 처절한 비명에 가까 운 음성이 울려퍼졌다. 단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고통을 받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분뢰수는 그런 목소리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 는 듯 다시 물었다. 네가 불러놓고도 나를 모른단 말이냐? 노인의 눈썰미가 조금 움추려들었다. 노인은 방금 전 분뢰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외우던 묵주(默 呪)의 구절이 머리속에서 맴돌는 것이 느꼈다. 내가 부른 것이 산사람인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되새겨 보던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우러졌다. 내가 널 불렀다고? 그럴리는 절대 없었다. 그가 부른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죽은, 그 기간만 해도 이미 칠백 년이 넘어버린 옛날의 혼(魂)이었다. 절대 저런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설마 환생(還生)을 했단 말인가? 그러나 환생이라면 내 점 쾌에 분명하게 그 출생이 드러났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노인은 그런 분야에 있어서 자신이 고금 제일(古今第一)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부심이 아니었기에 그는 더더욱 자신의 능 력을 믿고 있었다. 장장 이백여 성상(星霜)을 보내면서 직접 경험한 결과인 때 문이었다. 그렇다. 냉정한 소리가 노인에게 들려왔다. 그순간 분뢰수는 솥 앞까지 와 서 있었다. 노인은 웃으면서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즐거워 웃는 모습이 아니라 죽어서도 괴로 워 어쩔줄 모르는 듯한 웃음이었고, 안간힘을 써서 겨우 움직 이는 듯한 동작이었다. 크크크... 내가 널 불렀는지 한번 확인을 해보자... 노인의 손이 펼쳐졌다. 손에는 꿈틀거리는 검은 안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솥에다가 넣었다. 솥안이 심한 요동을 치는 음향을 내었다. 마치 솥안의 괴수들이 자신들을 향해 던져진 다른 무엇을 몰라내려는 듯한 격한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은 남을 속이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그것도 틀리 는 말은 아니야. 자신의 속을 누가 볼 염려가 없으니 마음놓 고 거짓을 토해내는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 환혼노인(還 魂老人) 앞에서 그런 장난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마! 환혼노인의 입가에는 자신을 속이려는 자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짙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째째쨍! 솥이 격한 파열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뭉클거리며 솟구치는 연기는 솥에 새겨진 괴수의 형상을 한 채로 사방을 흩어져 방안을 메웠다. 분뢰수는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환혼노인의 독특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누구나 다른 자에게는 거짓을 말해도 자신은 알고 있기 마 련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설혹 자신마저도 말한 것이 거짓인 지 진실인지 판별하지 못한다해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거짓 과 진실의 경계가 그어져있기 마련인 법! 환혼노인의 머리카락이 요동을 쳤다. 괴수들의 형상이 그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이 보 였다. 자! 보여라! 네가 누구인지! 고통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방의 괴수 사이를 누비고 달렸다. 분뢰수의 칙칙한 눈빛이 혼미(昏迷)함으로 물들어갔다. * * * <이자는 보여준다고 했다. 내가 누군인지! 이제 알수 있게 되는 걸까?> * * * 다 막힌 건가? 화풍렬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또다시 시왕은 울컥 화가 치밀어올 랐다. 지금까지 길안내를 한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길이 막혔다면 자신을 무능하다고 욕하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길은 다 막혀 있었다. 시왕은 아무 말도 하지않고 무너져 내린 통로를 쏘아보기만 했다. 이렇게 만든 것은 백마신과 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약 (火藥)을 대준 저 화룡이라는 애송이였다. 시왕은 자신의 번뇌시를 일격에 재로 만들 수 있는 지독한 화약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저 화룡이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저놈을 죽여야지... 시왕이 마음 속으로 되뇌일 때 차분한 소리로 연비청이 말 했다. 길이 있을 겁니다. 이 지하건축의 규모로 보아서 이렇게 한 갈래 길만이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게 어디있느냐 하는 거지. 백마신이 예리한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는 아까부터 이 무너진 통로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 고 있었다. 너무 쉽게 무너졌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무너뜨릴 목적이 었다는 건데... 한동안이나 아무 말없이 모두가 막힌 통로만을 지켜보았다. 흑마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됐어! 뭘 고민해! 그냥 뚫고 가자! 그 말과 함께 흑마왕은 앞으로 성큼 성큼 나아가 주먹을 휘 둘렀다. 콰쾅! 소리없이 뻗어나간 일격이 무너진 통로에 닿자 무너진 바위 덩어리들이 그대로 부서져나갔다. 흑마왕의 두번째 주먹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뻗었다. 첫번째 주먹에 뒤이어 바로 내뻗은 것이다. 쉬이잉! 격한 음향이 들리면서 부서진 바위들이 그대로 밀려나갔다. 화풍렬은 절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인간도 아니야... 저렇게 길을 열다니... 어떨까? 그놈이라면 천천히 길을 찾아서 올텐데? 적마승이 청마군에게 물었다. 청마군은 잠깐 눈섭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흑마왕이 옆에 있다. 칠십 년은 긴 세월이다. 놈은 분명히 권왕지왕의 진전(眞傳)을 대성(大 成)했다. 그 성격에 그런 능력이 생겼다면 정면으로 뚫고 올 것이다. 적마승은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렇군. 그 미친 맷돼지같은 성질로 길찾는 것을 참고 볼 까닭이 없겠지... 청마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환혼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적마승은 천천히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무너져 내린 미로의 석벽 한쪽에 숨겨진 좁은 통로였다. 미로는 애초에 무너뜨리고 다시 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 었다. 불과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공간밖에 되지 않는 좁은 통로 였다. 그리고 이 지하에는 이런 통로가 거미줄처럼 깔려 있었다.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가 가도 도움이 되기에는 늦었지. 그 럼 녀석은 분명 달아나겠지? 좋아, 결정했다. 달아나는 길목 에 미리 가 있자! 그게 최선이다. 청마군은 잠시 적마승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은? 적마승이 피식 웃었다. 한오라기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 로 쓸어넘기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환혼노인이 달아날 상황에 다른 것에 신경쓸 필요는 없겠 지? 청마군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적마승이 지닌 복수심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정도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문에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 * * 분뢰수의 눈에서 뇌전(雷電)이 춤추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것은 자욱한 향연이었다. 향연은 뿌옇게 분뢰수를 휘어감으려 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켜보는 환혼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반혼향(返魂香)이 일척 이내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 다... 솥에서 뿜어나오는 연기는 분뢰수의 몸에서 한자거리에서 온갖 기묘한 변화를 다 보이고 있었다. 사방 벽에 새겨진 악귀의 형상처럼도 변하고 솥에 박힌 괴 수의 형상으로도 변했다. 이리저리 변하면서 끊임없이 분뢰수에게 다가가려 드는 것 이다. 큰소리만 치지 말고 어서 보여봐. 느닷없이 흘러나온 말에 환혼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고 하얀 머리카락이 춤을 추며 솟구쳤다. 그 아래 드러난 젊음과 늙음이 범벅된 표정이 나타났다. 노여움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흐흐흐... 네놈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분뢰수는 천천히 솥을 사이에 두고 걸음을 옮기었다. 환혼노인에게는 그것이 솥을 돌아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태 도로 보였다. 덩달아 그도 솥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네가 제법 하는 모양인데...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 말을 하면서 환혼노인의 노란 눈이 곧장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뭉클거리고 있었다. 사왕진을 단숨에 깼군! 대단해... 정말 대단해! 말은 쉽게 하지만 환혼노인은 등골에 식은 땀이 배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앞에 있는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 왔는지 이해가 되고 있었다. 누굴까? 이놈은... 그자말고도 이런 놈이 또 있을 줄은 정 말 상상도 못했다... 입술을 축이면서 환혼노인은 다시 중얼거렸다. 천하에 너와 같은 자를 일컫는 말이 바로 절대고수(絶對高 手)란 말이지... 너는 틀림없이 절대고수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실수야! 환혼노인은 조금씩 더 움직였다. 분뢰수가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빨리 움직였기 때문이다. 환혼노인의 움직임에 따라 사방에 퍼지는 향연도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환혼노인이 또한번 움켜쥐는 손짓을 하자 허공에서 새까만 것이 그의 손에 가득 잡혔다. 환혼노인은 다시 그것을 솥에 넣었다. 솥이 격렬한 신음을 흘리는 순간에 검은 향연이 치솟았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해도 결국 그걸 쓰기위 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 하고 목표를 확실히 겨누어야 하겠 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에 이미 나는 네 목표에서 사라 지고 없어! 알겠어? 왜 네가 내 상대가 못되는지? 이 몸은 사 람의 혼을 꿰뚫어본다! 환혼노인의 말이 줄줄이 엮어지는 동안 분뢰수는 침착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솥을 끼고 돌았다. 솟구친 검은 연기가 허공에서 줄기줄기 분뢰수를 향해 뻗어 갔다. 사방의 귀신조각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음향이 허 공에서 울려나왔다. 케에에--- 문득 분뢰수의 걸음이 멈추었다. 환혼노인의 노랗게 빛나는 눈속에 승리의 환호가 어리었다. 그는 이제 자신할 수 있었다. 반혼향은 통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진실 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네놈을 발가벗겨 기게 만들어주겠다! 환혼노인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정말 한두번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막강한 자라도 그의 환혼술(還魂術) 앞에서는 무 력한 존재인 것이다. 검은 연기는 분뢰수를 완전히 휘어감고 있었다. 환혼노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리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속이고 감추려는 자라도 자신 의 혼백 앞에서는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지금 네놈의 본색이 나타난다--! 환혼노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치 죽어가는 짐승이 마지막으로 질러내는 비명과 같은 처 절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분뢰수에게 엉겨있는 검은 연기는 여전히 그대로 뒤 엉긴 채로였다. 환혼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이 괘씸한! 아예 말문이 막힐 만큼 기가 막힌 일이었다. 환혼노인이 이백여 년을 살아오면서 만난 희안한 놈들 가운 데에도 이런 희안한 놈은 없었다. 네놈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환혼노인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져 나오자 검은연기가 서서 히 밀려나왔다. 뇌전의 빛이 더욱 강렬하게 분뢰수의 눈속에서 번득였다. 너는 나를 불렀다. 말해라. 내가 누구인지! 나직한 음성이 울리자 사방의 귀신조각이 요동을 치고 솥의 괴수들이 울부짖기라도 하듯이 끔찍한 소란이 방안을 뒤흔들 었다. 환혼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뒤도 한걸음 물러섰다. 한가지는 확실한 것이다. 자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행패를 어떻게 부리고 사람을 어 떻게 죽이며 물건을 어떻게 때려부수는가는 아주 잘아는 놈이 란 것이었다. 내가 부른 것은 마교교주(魔敎敎主)의 혼인데... 그럼 저 놈이 마교교주의 환생인가?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분뢰수의 눈자위가 하얗게 변해가면서 끔찍한 살기가 배어 나와 살갗을 난자(亂刺)하는 때문이었다. 좋아! 좋아! 기다리라고! 네놈 자신이 몰라도 알아내는 수 가 있으니까! 환혼노인이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놈 두고보자... 마음 속에 분명한 되뇌임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는 사람이 들으면 그 자리에서 까무칠만한 끔찍한 괴성(怪聲)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그러나 분뢰수는 끄덕도 없이 환혼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다시 물컹거리며 솥으로 뭉쳐들었다. 환혼노인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그의 손에는 녹색을 발하는 반죽이 쥐어졌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중얼거림이 이어지면 서 노랗게 빛나던 눈동자에 핏빛이 조금씩 섞여 들었다. 스산한 중얼거림이 계속되자 날뛰던 귀신조각들이 움추려들 고 솥의 괴수들이 겁을 집어먹은 듯이 얌전해져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방안 전체에는 저승에서 불어오는 듯한 차갑 고 혹독한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가져다 놓아도 단숨에 얼어버릴 듯한 써늘함이 이어지는 가운데 환혼노인의 비명같은 고함소리가 터졌다. 끼아! 그리고 방안 전체가 침묵에 접어들었다. 고요함과 정적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 속에서 환혼노인은 손에 든 녹색 덩어리를 분뢰수에게 던졌다. 덩어리는 분뢰수의 몸 가까이에 이르러 녹색의 안개가 되어 분뢰수를 휘어감았다. 그 안에서 괴이한 형상이 갖추어져 갔다. 환혼노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나직한 웃음과 함께 득의의 빛을 띠우고 있었다. 이제 네놈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 원히 나의 노예가 되는 것이야... 한없이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왕진을 격파할 만한 절대고수가 수하로 거두어지는 것이 다. 자신이 죽기전에는 누구도 그를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환혼술에 의해 노예가 된 자들의 생사(生死) 는 바로 그만이 결정할 수 있기때문이었다. 녹색의 안개가 완전히 분뢰수를 덮어 이제는 그가 녹색 덩 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환혼노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 왔다. 으악? 너! 너! 너는! 2 콰르륵...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를 밀어버리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흑마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대한 문의 테두리에는 온통 악귀(惡鬼)와 마물(魔物)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 때문에 흑마왕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아 니었다. 백마신이 뒤에 붙어서 따라오다가 그 문을 보았다. 웃기는군. 이게 도대체 뭐야? 장애물을 깨고 지나가는 흑마왕에게 선두를 양보한 채로 나 중에 나온 시왕이 대답했다. 뭐냐니? 그것도 역시 고루문의 양식이 아니오? 그러나 백마신에게서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콧방 귀였다. 시왕의 누런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천하오패 가운데 가장 대적하기 까다롭다는 말을 들은 지가 수십년이었다. 그 동안 이렇게 자신을 우롱하고 무시하며 얕잡아보는 작자 는 하나도 없었다. 누구도 이렇게 자신을 업신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순서가 다르군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한마디한 것은 역시 화풍렬이었다. 시왕을 깔아뭉개는 일에 가장 적극적인 것이 화풍렬이었다. 이십여 년 전에 번뇌시에게 밀려 달아난 원한이 생생한 화 풍렬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도 안되는 놈이 저렇게 까불다니... 시왕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백마신은 좀 이상하다는 눈으로 화풍렬을 쳐다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순간 화풍렬은 찔금하고 말았다. 시왕을 골리는 일에 열중하다가 그만 자신의 비밀을 노출시 킨 셈이 된 것이다. 연비청이 옆에서 말했다. 고루문의 배열을 이렇게 바꿀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 흑마왕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시신을 부리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거다. 이 안에 서... 채 흑마왕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안쪽에서는 상상도 못해본 끔찍한 비명과 괴성이 터졌다. 끄아아악! 일행이 느닷없는 그 소리에 어리둥절할 때 발디디고 있는 땅이 울렸다. 우르르...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우레소리! 분뢰수다! 화풍렬이 소리질렀다. 굳이 그가 소리지르지 않아도 일행은 모두 알고 있었다. 사왕진을 격파할 때 나온 소리와 같은 뇌성(雷聲)이 울린 것이다. * * * <달아났다... 내가 누군지 말도 하지 않고서...> * * * 문을 지나 직각으로 꺽여진 통로를 달려들어간 일행 앞에는 과연 분뢰수가 서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화풍렬이 놀라 소리쳤다. 그는 분뢰수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은 아니었다. 일행 모두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었다. 사방의 벽이 다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바닥은 엉망으로 뒤 집어져 있었다. 원래 무엇이 있는지 도저히 알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기... 시왕은 경악으로 말을 흘리다가 분뢰수의 앞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거다! 반혼정(返魂鼎)! 마침내 그는 자신이 목표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시왕이 미처 회심의 미소도 짓기전에 일행이 있는 자리와 분뢰수가 선 자리 사이로 천정이 떨어지고 있었다. 쿠르르... 한 순간에 뒤로 물러선 일행은 앞에서 분뢰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로 갔지? 땅으로 꺼졌나? 화풍렬의 외침에 흑마왕이 마주 소리쳤다. 눈이 좋구나! 맞아! 땅으로 파고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행은 분뢰수가 서 있던 자리 로 뛰었다. 콰콰쾅! 연속적인 큰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다시 허물어지고 있었다. 역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박차고 위로 솟구쳤 다. 시왕마저도 번뇌시에게 대신 둘러메게 했던 교자를 박차고 올라야 했다. 바닥은 한번 더 붕괴를 한 다음에야 안정이 되었는지 잠잠 해지고 있었다. 덩달아 무너지던 사방 벽도 완전히 허물어져 거대한 지하광 장이 드러나고 있었다. 넓고 높은 지하광장의 사방에는 백골과 돌기둥이 마구 널려 있었다. 역시... 고루문의 연혼대전(練魂大殿)이었군... 흑마왕이 중얼거렸다. 그거야 연혼전을 이름으로 걸었을 때부터 의심하던 바이 고... 도대체 여기에 무얼 만들어 놓았던 거지? 백마신이 시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시왕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목표로 하고 왔던 반혼정의 박살난 파편이 사방에 널 려 있었다. 저렇게 박살이 났으니 표면에 새겨진 비결같은 것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천정이 떨어지는 순간에 시왕은 반혼정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바닥에 붙이면서까지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망할 얼굴말이한 분뢰수란 놈이 반혼정을 그대로 쪼개면서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백마신이란 작자는 자신에게 또 무엇을 묻고 있다 니... 아직 하나가 더 있다! 반혼정이 없어도 놈을 잡는다면! 시왕은 마음을 다지면서 대꾸했다. 반혼실(返魂室)이란 곳을 여기에 만들어 두었었소. 백마신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럼, 여기 있던 놈이 죽은 놈을 살린 그놈인가? 시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쪽 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 다. 아직은 놓치지 않았소. 저쪽의 비밀통로는 놈도 모르는 것 이니까! 섭혼루주가 이곳을 발굴해 내면서 만들어놓은 통로가 있소! 놈을 잡을 수 있어! 시왕의 마지막 말은 거의 반말에 가까웠다. 하나 흑마왕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좋군. 꼭 잡아야 할 놈이지. 백마신은 이미 그쪽을 향해 나아갔다. 마도(魔道)의 세 괴인이 가는 것을 보면서 화풍렬이 연비청 을 바라보았다. 너도 꼭 잡아야 하냐? 연비청은 물끄러미 화풍렬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화풍렬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멍청이지... 연비청은 싱긋 웃으며 앞서 달리는 번뇌시의 뒤를 따랐다. 화풍렬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뒤쫓았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구룡을 만나는 것이었으니 연비청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크웩! 입을 열기가 무섭게 검은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환혼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놈이라니..... 그놈이!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 전신에 타격을 받았지만 환혼노인은 허겁지겁 일어나 달렸다. 그의 등뒤에는 두꺼운 석벽이 내려와 있었다. 두께가 족히 일장은 되는 석벽이 겹겹이 뒤에 쌓여 있었다. 반혼실의 탈출로였다. 추적자를 막기위한 차단벽이 모조리 하강했음에도 환혼노인 은 전혀 안심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고 있었다. 쾅! 쾅! 쾅! 으으... 개같은 놈! 십척(十尺)짜리 청석벽(靑石壁)을 무 슨 두부조각으로 알어? 저따위로 부수다니... 욕을 하면서도 환혼노인은 또 하나의 기관을 움직이고 있었 다. 청석벽이 마지막으로 내려온 곳에서 이십여장 가량을 달린 후였다. 콰르르르륵! 이번에는 통로에 온통 잔돌이 쏟아졌다. 한꺼번에 길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벽처럼 막혀 있던 곳의 문이 열렸다. 환혼노인은 무조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에게는 지금 선택의 여지같은 것이 있을리가 없는 것이 다. 그래서 그는 우악스러운 흑마왕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말 았다. 그래도 쓸데가 있기는 하네? 화풍렬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들렸다. 백마신이 써늘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렇지 않다면 살려둘 필요가 없겠지. 시왕은 자신을 놓고 하는 말에 전혀 귀기울이는 모습이 아 니었다. 환혼노인을 향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놈에게 뭐 볼게 있어서 그렇게 보는게냐? 하긴 요상하지 만 시체를 닮긴 했군.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면서 흑마왕이 말했다. 칠척장신의 백마신보다도 더 큰 흑마왕의 손은 두껍고 넓었 다. 환혼노인의 목을 쥐고도 손가락이 두개나 남는 것이다. 시왕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환혼노인만 노려보고 있었다. 환혼노인은 숨쉬기조차 버거운 터라 말할 엄두도 못내고 있 었다. 게다가 자신을 붙든 자의 얼굴을 보자 그야말로 전의상실 (戰意喪失)이었다. 이렇게 되다니... 절망감에 빠진 환혼노인의 머리속에 기이한 감각이 파고든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환혼노인은 그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기공(奇 功)이 펼쳐진 때문임을 금방 알았다. 비결을 말해라! 그러면 마왕고루(魔王 )를 움직일 수 있고 이런 녀석들 쯤은 한 순간에 날려보낼 수 있다! 마치 자신이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떠오르는 상념은 분 명히 타인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그게 누군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천하에 마왕고루 같은 것을 탐내는 정신나간 밥통은 그가 알기로는 한 사람뿐이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지금 여기 어떤 놈이 와있는지도 모르는 게... 콰직!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으로 의사를 전하려던 환혼노인은 소 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느닷없이 두 무릎이 으스러졌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눈알 돌리는게 마음에 안들어서... 아프냐? 그의 두 무릎을 가볍게 움켜쥐는 것만으로 으스러뜨린 것은 목을 쥐고 있는 흑마왕이었다. 아플리가 없지. 이백 사십이면 전신의 감각이 남아있을리 가 없잖아? 백마신이 잔잔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작은 못이 몇개 놓여져 있었다. 못은 곧 환혼노인의 살갗을 뚫고 내장 안으로 박혀들었다. 흑마왕이 목을 움켜쥔 탓에 소리는 못내고 있지만 환혼노인 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시왕은 잠깐 사이에 흑마왕이 환혼노인의 무릎을 부수고 백 마신이 그를 고문하는 광경에 어이가 없었다. 왜 그러는 거요? 간신히 물었을 때 흑마왕은 환혼노인의 목을 더 세게 조르 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화풍렬은 아예 말을 하지도 않았다. 저 작자들이 저러는 이유가 있을 턱이 있나... 그야말로 기분 나쁘면 사람을 쳐죽이는 자들에게 굳이 이유 같은 것을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화풍렬이었다. 왜냐고? 백마신이 입가에 냉소를 떠올리며 대답해주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겨우 없애버린 철천지 원수놈을 뭐하 러 도로 살려내? 살려낼 놈이 그렇게 없어? 백마신의 말을 듣던 흑마왕이 그대로 환혼노인을 바닥에 팽 개쳐 버렸다. 목이 놓여났으나 일순 숨을 들이쉬지 못하고 환혼노인은 입 만 벌린 채로 소리없는 신음을 내고 있었다. 환혼노인은 그런 와중에도 눈을 노랗게 빛내고 있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들의 약점을 잡아야 하는 것이 다. 그래서 그는 이들의 마음을 더듬고 있었다. 반드시 살아난다! 여기서만 벗어나면 된다! 환혼노인을 지탱하는 마음 속의 기둥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 다. 쿠르륵, 쿠르륵... 괴이한 음향이 환혼노인이 나온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환혼노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버, 벌써! 이제는 그가 시간을 끌 여지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환혼노인은 숨통이 열리기가 무섭게 되는대로 말을 꺼냈다. 흑마왕! 너는 친구를 살려놓았는데... 콱! 흑마왕의 발이 그대로 환혼노인의 허벅다리에 올려졌다. 육중한 체중이 아니더라도 바위를 부술 수 있는 힘이 우러 나오고 있었다. 청마군말이군. 맞아, 죽기전까지 좋은 친구였다. 그리고 놈이 죽어서 나는 감사하게 놈의 모든 것을 갖을 수 있게 되 었고 경쟁자가 없어져서 자연스럽게 사부의 모든 진전을 이었 다. 그런데 지금와서 놈이 새파랗게 살아나? 그럼,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전부 놈에게 주어야 한다는 거냐? 우지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우러나왔다. 환혼노인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제 그의 눈에는 앞에 선 자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 고 있었다. 자신의 다리를 부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흑마왕은 검은 빛의 욕망 속에 무서운 마성(魔性)을 감추고 있는 것이 선명 하게 들어왔다. 근본적으로 은혜같은 것은 그 자리에서 잊고 원한은 죽어서 도 간직하는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파괴욕(破壞慾)! 그것이 흑마왕이었다. 채찍을 풀어서 두 손으로 당겨보며 냉소를 머금은 채로 자 신을 쏘아보는 백마신은 증오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하얀 얼굴아래에는 탐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베풀어지는 잔혹성이 그 탐욕을 뒷바 침하고 있는 자가 바로 백마신이었다. 이놈들의 이름은 세가지 절기를 상징한다고 하더니... 그 냥 그대로도 일리가 있는 이름이었어... 마신(魔神)과 마왕(魔王), 이들은 누가 뭐라해도 자신을 무 조건 박살내려는 태도가 분명하게 보였다. 환혼노인의 눈은 그 뒤에 있는 시왕을 흘깃 스쳐갔다. 시왕은 몇 번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 쥐고 있는 환혼술의 비결뿐이었 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할 일도 한가지였다. 너같은 놈한테는 어림도 없다! 자신의 존엄한 연구를 저따위 시체에 미친 멍청이에게는 절 대 넘길 수 없었다. 환혼노인의 눈은 연비청과 화풍렬에게 향했다. 그들을 보는 순간에 환혼노인은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틀렸다! 저자들은 절대 날 구할 수 없어! 정기(正氣)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고 있는 둘은 지금 환혼 노인에게는 더 나쁜 영향력을 끼칠 것이었다. 환혼노인의 입술이 절로 깨물어졌다. 백마신의 채찍이 그를 감고 조이기 시작해서가 아니었다. 메워진 통로를 뚫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환혼노인의 결단을 더욱 빠르게 만든 것이다. 푸우! 혀끝을 깨물고 머금은 피를 그대로 뿜어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장내를 뒤덮은 시뻘건 광채! 시왕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눈부신 홍광(紅光)과 함께 환혼노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목을 쥐어오는 우악스러운 손길! 무, 무슨 짓이냐! 목을 잡히고도 소리를 질러대는 시왕을 흑마왕이 의외란 듯 이 자상하게 쳐다보았다. 재주가 좋군. 그런데 머리가 보기보다 아둔한데? 백마신이 옆에서 흑마왕의 말을 거들었다. 방금 네가 우리에게 하려고 한 짓을 먼저 우리가 한번 해 보려는 것 뿐이야.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내,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다는 거냐? 시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백마신이 냉소를 머금으며 채찍으로 쫘악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세상에 전심공(專心功)을 쓸 줄 아는 자가 너 하나뿐인 줄 알았느냐? 너같이 구시술을 장기로 하는 놈들의 특기가 교령 술(交靈術)하고 그건데 우리가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어? 그러나 이런 말에 시왕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전심공이나 교령술은 누가 엿듣고 어쩌고 할 것이 전혀 아 니었다. 그런데도 이 둘이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시비를 걸다 니...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두두둑! 시왕의 목에서 격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끄으으... 비명도 함께 새어나왔다. 듣고 있는 화풍렬은 목언저리가 섬뜩해지고 있는데 쥐고 있 는 흑마왕은 아예 표정이 없었다. 시왕의 손이 올라가려고 하자 백마신이 어깨와 팔꿈치를 잡 아 뽑아놓았다. 팔이 덜렁거리며 늘어진 채 시왕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연비청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흑마왕은 이름 그대로 마왕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까까지 붙들려 있던 환혼노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피를 뿜어낸다 하는 순간에 일어난 붉은 광채와 함께 환혼 노인이 사라지고 시왕은 그대로 흑마왕에게 붙들린 것이다. 뭐라고 참견할 틈도 없고 끼어들어 손을 쓸 여지도 없었다. 백마신이 아예 그것을 막기라도 할 듯이 그들과 흑마왕 사 이를 가로막아 버린 때문이었다. 시왕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꿈틀거리던 몸도 이제는 완전히 죽었는지 잠잠했다. 백마신은 흘깃 화풍렬을 보았다. 화가야, 걱정되냐? 슬쩍 한마디를 던지는가 하더니 킥하는 웃음을 흘리며 덧붙 였다. 걱정할 것은 없어! 아직 우리는 구천회 같은 벌집을 쑤셔 놓을 담량은 없으니까. 너무 뜻밖의 말에 화풍렬은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화풍렬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흑마왕은 얼굴에 뒤집어쓴 피 를 닦아내면서 한쪽 구석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안으로 한줄기 핏자 욱이 이어지고 있었다. 화혈분신(化血分身)까지 쓰며 달아날 줄은 생각못했는 데... 이봐, 정말 놓친 건 아니겠지? 흉폭한 빛을 흘리며 백마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백마신의 얼굴에 얼음과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그러면서 백마신은 가볍게 한 손을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을 마주 짚었다. 연비청과 화풍렬은 그 손가락 사이에서 가느다란 은빛이 반 짝이는 것을 보았다. 은빛은 벽의 구멍으로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고루문의 근거지이고 연혼대전의 위치가 아까 그곳 이라면 놈이 달아날 곳은 한군데뿐이지... 안그래? 말을 하면서 백마신은 여전히 들려오는 쿠르륵 거리는 소리 가 나는 방향을 흘깃 쳐다보았다.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자! 불쑥 튀어나온 흑마왕의 한마디에 이제 넷이 남은 일행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3 엉망으로 구져진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 시왕이었다. 계속 다가오는 쿠르륵 소리. 희미한 빛만이 남은 어둠 속에서 정적을 깨는 쿠르륵 소리 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시왕의 주위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누군가가 있었으면 볼 수 있을 것이나 아무도 없었기에 그 것이 무엇인지 설명조차 해줄 수 없는 괴상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시왕을 둘러싼 채로 잠시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시왕의 몸뚱아리는 누군가가 들어올리는 것처럼 허 공에 뜨고 있었다. 다섯 명의 가슴 부위까지 뜬 시왕의 몸은 그대로 허공에 들 린 채로 정지했다. 쿠르르...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 그 가운데 시왕의 머리맡에 있던 두 인영이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내민 손은 그대로 시왕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마치 물속이라도 들어가듯이 헤집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한방울의 피도 떨어지지 않았다. 두두둑! 다시 목뼈를 분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뼈가 부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흑마왕의 손에 빛이 꺼졌던 시왕의 눈빛이 다시 되살아아났 다. 원독(怨毒)이 깊이 새겨진 눈빛이었다. 꾸루룩! 목젖이 크게 울리면서 시왕의 목이 두어바퀴 회전했다. 그리고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끄... 지독한 놈... 부러뜨리는게 아니라 아주 으스러뜨리 다니... 시왕의 몸이 바로 세워지고 있을 때, 쿠르르... 마침내 음향의 발원자(發源者)가 이제는 막혀 벽이 된 곳을 허물고 들어왔다. 대치(對峙)! 다섯 괴인은 자연스럽게 시왕을 호위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 었다. 시왕은 분뢰수라고 일컬는 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구 흩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을 만난 듯이 휘날리고 있었 다. 그 아래 동그란 눈동자가 음울한 기색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음울함을 뚫고 뇌전이 춤추고 있는 것이 엿 보였다. 등뒤에 걸치고 있는 몽둥이 자루같은 보따리... 얼굴과 손을 칭칭감아놓는 낡아보이는 백포(白布)... 시왕은 그런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감히 보이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자신 의 비밀을 상대가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 되새겨보아도 목숨이 끊어질 절대절명의 단 한번 의 위기때에 겨우 모습을 보였던 자신의 비밀을 상대가 눈도 돌리지 않고 보고 있는 것이다. 후우, 재수가 없는 놈이구나... 하필이면 본왕의 수신오위 (守身五衛)를 보게되다니... 안된 일이지만 죽어줘야겠어! 시왕이 음산하게 말하는 것을 분뢰수는 전혀 듣고 있지 않 았다. 동그랗게 보이던 눈동자가 반쯤 접혀지고 있었다. 지금 그가 찾는 것은 이 자리에 없었다. 희미한 핏자욱만 남긴 채 벽구석에 작은 구멍을 뚫고 사라 진 것이다. 분뢰수는 움직였다. 시왕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또다시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행동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 다. 흐흐흐... 네놈이 사왕진을 깬 정도로 기고만장해 있느냐? 그럼,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가르쳐주마! 다섯 괴영(怪影)이 꿈틀거렸다. 몸안에서 무엇인가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이 요동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시왕의 앙상한 몸이 부풀어 올랐다. 찌익! 마포(麻布)로 짜여진 윗옷이 삽시간에 찢겨져 나갔다. 이제 시왕의 몸은 앙상하지 않았다. 마치 흑마왕을 꽉꽉 눌러 뭉쳐놓은 것처럼 단단한 근육이 시왕의 몸을 휘어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괴영이 흐릿하니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 그 자리에 없던 자들이 또 사라진 것이다. 다만 시왕이 흉흉한 살기를 뚝뚝 흘리며 분뢰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분뢰수의 눈이 시왕을 향했다. 구유음신(九幽陰身)을 대성했군. 불쑥 한마디 내놓는가 싶더니 분뢰수의 발걸음은 다시 핏자 욱이 남겨진 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왕의 기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크흐흐, 잘도 아는구나! 말 한마디와 함께 분뢰수가 가야할 길이 막혔다. 시왕이 그 자리에 장애물로 서 있었다. 분뢰수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반쯤 접혀져 보이는 눈동자에서 뇌전이 더욱 강렬하게 춤을 추었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상대해주마. 비켜. 시왕의 얼굴에 어이없는 기색이 스쳐갔다. 그리고 조소(嘲笑)가 새겨졌다. 다음에는 저승에서 만나야 할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왕의 손이 쭉 뻗어오고 있었다. 채 손이 닿기도 전에 허공을 찢어놓는 울부짖음과 함께 예 리한 경력(勁力)이 분뢰수를 덮치고 있었다. 분뢰수의 눈자위가 하얗게 변해갔다. 시왕은 자신이 번개보다 더빨리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그가 분뢰수와의 간격을 반도 좁히기 전에 분 뢰수의 두 손이 쭉 앞으로 뻗어졌다. 시이이잉! 거대한 계곡을 지나가는 세찬 바람이 내는 소리가 시왕의 귀에 들리는 순간, 시왕은 자신의 살갗이 그대로 부서져 나가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뢰수의 모습은 이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뽀얀 영상만이 눈 앞에 있을 뿐 이었다. 시왕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있었다. 시왕의 몰골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좁은 공간을 모조리 뒤덮은 맹렬한 바람은 시왕의 누런 살 을 모조리 긁어내버리고 있었다. 하나 시왕의 몸에서는 한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대신 누런 고름같은 것이 온통 터져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이 거센 질풍은 시왕의 몸이 완전히 한구의 백골(白骨)이 되어버릴 때까지 불었다. 그것은 거의 눈한번 깜작일 정도의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시왕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백골이 꺼덕거리면서도 여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백골의 두개골에서 소리까지 새어나오고 있었다. 카칵! 이... 이런... 이런 경풍(勁風)이 존재하다니... 그 말고는 누구도... 누구도 이런 능력이 없으리라... 여겼는 데... 띠엄띠엄 새어나오는 소리는 틀림없는 말이었다. 분뢰수는 의외란 듯 백골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의외의 광경이었다. 백골의 뼈마디마디에서 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품은 점차 커지면서 백골을 온통 휘어감아갔다. 그리고 두개골의 눈구멍 안쪽에서는 빨간 콩알같은 두개의 거품이 꿈틀거리며 분뢰수를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거품이 둥글게 백골을 완전히 감싸 안았을 때 분뢰수가 비 로소 말했다. 구유명옥백골체(九幽冥玉白骨體)를 대성했군... 다음에 분뢰수의 몸이 조금 돌면서 백골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암울한 눈빛을 붉은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시왕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놈... 너를 그냥 두지 않겠다! 이 시왕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그 목소리에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이년여에 걸친 자신의 진보(進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었다. 시왕은 단순히 말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구멍 안쪽의 빨간 거품이 쭈욱 뻗쳐서 그대로 분뢰수 를 꿰뚫르려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순간에 분뢰수의 뽀얀 영상이 더욱 흐릿해졌다. 그리고 옆으로 그 모습이 흘러가는 순간에 분뢰수의 왼손에 서 하얀번개가 일어났다. 콰악! 거친 소리가 울리면서 백골이 된 시왕의 오른쪽 가슴 아래 갈비대가 순식간에 으스러져 사라져버렸다. 끽! 괴기스런 비명이 울리는 순간에 시왕의 주위에 다섯 개의 둥근 잿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잿빛 덩어리는 물을 흩어 뿌리는 바가지처럼 몇겹의 거품을 일으키며 시왕의 백골을 감싸려고 했다. 그와중에 고개를 돌려 분뢰수를 똑똑히 보려던 시왕은 분뢰 수가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분뢰수의 뒤를 거품이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시왕은 사왕진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 혼자서 사왕진을 격파하는 문제라면 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왕오위(屍王五衛)로 칭해지는 분신과 같 은 이 수신위가 다섯이나 있었다. 이들이 있는 한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 이 천하오패로 수십년간 강호를 누벼온 시왕의 유일한 신념 (信念)이었다. 이년 여 전에도 절대무적(絶對無敵)이라 칭해지는 존재에게 서 살아남았기에 그 신념은 더욱 굳세져 있었다. 그리고 이년 여 동안 그는 구유명옥백골체를 완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신이 절대무적의 존재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시왕은 자신의 앞에서 두 손을 내밀며 자신의 머리위치에서 교차시키려는 분뢰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시왕이 자랑하는 명옥기(冥玉氣)를 그 대로 돌파한 것이다. 그것이 시왕을 두렵게 만들었다. 아, 안...!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뇌성(雷聲)이 울려퍼졌다. 콰르릉! 분뢰수의 두 손은 완전히 교차되어 시왕이 머리가 있던, 이 제는 가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머리가 있던 자리에 대 신 놓여져 있었다. 목뼈도 없었다. 등뼈도 일부분이 날아가 버렸다. 아직도 우레소리가 남아있는 가운데 시왕의 머리없는 백골 은 바닥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 두개골에서 튀어나온 듯한 한방울의 피가 돌위에 떨어지 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분뢰수의 발이 짓뭉개었다. 이로서 시왕은 그 존재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분뢰수의 시선은 여파로 부서지고 있는 벽을 향하고 있었 다. 그 아래에는 환혼노인의 핏자욱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백마신은 신경질적으로 은사(銀絲)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적마승은 즐겁게 그 한쪽 끝을 쥐고 웃고 있었다. 백마신은 쪼그리고 앉아 웃고 있는 적마승을 보는 것이 싫 었다. 게다가 자신이 환혼노인에게 박아놓은 낚시바늘처럼 작은 은제(銀製) 갈고리를 적마승이 들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다. 적마승이 앉아있는 계단은 뒤로 쭉 이어져 나선(螺旋)을 그 리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중턱에서 지금 적마승이 실의 한닥을 쥐고 있었다. 계단위로는 방울방울 떨어진 핏자욱이 이어지고 있었다. 적마승은 실실 웃으며 은사를 당겨보았다. 백마신은 울컥 화가 치미는 듯 거칠게 잡아채듯이 다시 은 사를 잡아당겼다. 흑마왕은 환혼노인이 빠져나온 벽의 작은 구멍을 보다가 고 개를 돌렸다. 적마승의 왼쪽에 청마군이 우뚝 서 있었다. 상반신을 여전히 퍼런 맨살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어지간하면 이제 그만 하세요. 뒤에서 보고 있던 화풍렬이 기가 막혀서 구경하고 있다가 결국 한마디 했다. 백마신은 고개도 돌리지않았고 실을 놓지도 않았다. 단지 더욱 신경질적으로 적마승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그리 억울할 것도 없잖아? 네가 내가 아는 것을 알듯이 나도 역시 네가 아는 것을 아는 정도 아닌가? 게다가 칠십 년 을 더 산 노인이니 그동안은 또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보고 들 었을까? 웃으며 중얼거리던 적마승은 히죽이 더욱 얄밉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십여세 때 하던 짓을 아흔이 넘은 지금도 하는군 그래... 적마승이 손에서 실끝의 작은 갈고리를 놓았다. 늘어진 은사는 순식간에 백마신의 소매자락으로 사라져버렸 다. 흑마왕이 묵묵히 청마군을 보다가 말했다. 반갑다고 해야하나? 청마군의 손이 등뒤로 돌아갔다. 허리어림을 만지는 듯하더니 한자루의 기형도(奇形刀)를 불 쑥 꺼내는 것이었다. 화풍렬의 눈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청마군이 끄집어낸 도(刀)를 알아본 때문이었다. 불과 한자를 조금 넘는 길이에 너비는 세치나 되었고 생김 새는 언월도(偃月刀)를 닮았다. 일컬어 군왕도(君王刀)라 칭해지는 기문병기(奇門兵器)였 다. 천하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렇지, 친구. 생사(生死)를 넘어서 자네를 보니 난 무척 반갑다네. 청마군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울렸다. 그러면서 아까는 죽일 듯이 서로 싸웠냐? 화풍렬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꺼내놓지는 못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점차 경직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흑마왕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언제나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매우 나직하고 은근 하게 깔리면서 조용한 말을 만들어 냈다. 우정(友情)과 천도(天道)를 생각해서 얌전히 다시 죽어주 면 안될까? 어떻게 얻은 목숨이든 소중한 것이라네. 청마군이 조용히 대꾸했다. 화풍렬은 뒤에서 입만 쩍 벌린 채 연비청을 향해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연비청은 단지 장내를 차분한 태도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럼 전에 자네 목숨을 빼앗은 녀 석을 치워놓고 새롭게 시작해볼 생각은 없나? 흑마왕은 말하면서 힐깃 적마승을 보았다. 백마신이 맞장구쳤다. 아주 바람직한 의견이군. 청마군이 문득 적마승을 쳐다보았다. 뭘봐! 네 머리를 부순게 나냐? 저 백귀(白鬼)녀석이잖아! 청마군의 눈이 스산한 빛을 뿌리며 백마신에게로 돌아섰다. 그게 다 네 덕이었지. 비마월로 가슴을 뚫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한가하게 머리를 부수었겠나? 백마신이 차갑게 이죽거리며 말했다. 적마승이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리며 크게 말했다. 와하하! 그건 이 자식이 내 다리를 칼로 끊어놓은 것으로 청산되었지! 남은 건 저 백귀라고! 듣고 있던 화풍렬은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작자들은 어떤 관계인 거지? 죽었다 살아났다더 니 그 전에는 어떤 사이인지 짐작도 못하겠군... 적마승의 말이 이어졌다. 그틈에 저 꺼먼 녀석이 내 내장을 부순 거야 적이었으니 이해하겠지만 그 때 동료라는 놈이 뒤에 서 있다가 뒷통수를 쳐? 그것도 모자라 끌고가서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니? 적마승의 눈웃음속에 살기가 짙게 흘렀으나 백마신은 눈하 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놈은 그래서 동문(同門)이라는 놈이 독을 써서 날 죽이 려 들었냐? 적마승은 이 말에 활짝 웃었다. 헤? 알고 있었냐? 말과 말이 오가는 가운데 넷 사이에는 무형(無形)의 증오와 살기, 원한이 제멋대로 춤을 추며 긴장을 더해가고 있었다. 화풍렬은 인상을 팍팍 쓰며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튀어나오 려는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래, 넷 다 천하에 없이 잘났다! 그러는 중에 갑작스레 와르르하는 소리가 났다. 환혼노인의 핏자욱이 남겨진 작은 구멍이 난 벽. 그 벽이 느닷없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불쑥 튀어나온 한 사람. 분뢰수! 화들짝 놀란 화풍렬이 얼른 뽑아들고 있던 철검을 등뒤로 감추었다. 총망중에도 그가 자신과 아직 비무를 하지 않았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뢰수의 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 핏자욱을 따라 계단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허깨비가 움직이는 것처럼 계단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었다. 적마승과 청마군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분뢰수를 긴장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그런데 분뢰수는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첫번째 계단이 시작되는 곳, 그 양 옆으로는 기둥을 대신한 넓고 높이가 삼장에 달하는 거대한 석벽이 있었다. 그 석벽이 받치고 있는 것은 망혼대(望魂臺)라는 글자가 새 겨진 계단 정면의 위쪽 두꺼운 돌로 만들어진 현판이었다. 그 한쪽의 석벽에 분뢰수가 그대로 부딛혀 갔다. 꽈꽝! 미처 분뢰수의 몸이 닿기도 전에 석벽은 굉음을 울리며 무 서운 진동과 함께 파열되고 있었다. 그 여파는 그대로 석조현판으로 이어졌고 그 다음에는 맞은 편 석벽까지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천정에서는 돌비가 쏟아져 내렸다. 화풍렬은 분뢰수가 석벽을 깨뜨리며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자기 앞에서 등을 보이던 흑마왕과 백마신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 쏟아지는 돌덩이들을 뚫고 암습(暗襲)을 하겠다고? 생각해보나 마나 제정신이 아닌 작태였다. 그러나 흑마왕과 백마신은 그 돌덩이가 쏟아지는 한복판에 서 적마승과 청마군을 만나고 있었다. 청마군이 손에 든 군왕도가 대각으로 흑마왕을 내리찍으려 들었다. 흑마왕은 그대로 왼주먹을 내뻗으며 팔뚝에 찬 무쇠붕대로 군왕도를 거꾸로 후려갈기려 들었다. 백마신의 채찍은 창이라도 되는 듯이 쭉 뻗어 막바로 적마 승의 심장을 향해 찔러가고 있었다. 슬쩍 채찍을 피하는 적마승의 오른쪽 소매속에서 한줄기 붉 은 광망(光芒)이 그대로 채찍을 타고 감아돌았다. 쉬이이잉! 기둥을 감으며 올라가는 뱀처럼 붉은 빛줄기가 된 비마월이 울부짖으며 채찍을 나선으로 감으며 백마신의 손을 겨누며 움 직여갔다. 백마신은 채찍을 그대로 위로 휘둘렀으나 비마월은 여전히 채찍을 따라 또아리를 틀며 날고 있었다. 찌잉! 군왕도와 부딛힌 흑마왕의 무쇠붕대는 그대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흑마왕은 오른손으로 대파멸마권을 전개해 그 대로 청마군의 가슴을 찍어가고 있었다. 우직하는 소리와 함께 청마군이 그대로 뒤로 벌렁 뒤집어지 듯이 넘어갈 때 흑마왕의 목덜미로 붉은 빛줄기가 날아들었 다. 손잡이까지 타고오는 비마월을 보고 백마신은 채찍을 잡은 오른손을 풀고 그대로 그것을 후려갈기려 들었었다. 하얀 옥빛으로 번뜩이는 백마신의 손에 채 닿는가 싶은 순 간에 비마월이 방향을 바꿔 흑마왕의 목덜미를 찍어간 것이 다. 무쇠붕대가 박살나 허공을 메우는 찰나에 흑마왕의 왼손은 그대로 활짝 펼쳐져 비마월을 움켜쥐려고 들었다. 쉬이이잉! 비마월이 울부짖음과 함께 방향을 바꿀 때, 파악! 격한 음향을 뿌리며 백마신의 왼쪽 소매 속에서 튀어나간 두치 정도의 작은 은필(銀筆)이 중간부분에서 터지고 있었다. 은하(銀河)가 쏟아지듯이 가느다란 실가닥들이 한꺼번에 적 마승의 상반신을 휘어감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마월을 회수하면서 동시에 적마승은 두 팔을 교 차시킨 채로 얼굴을 그 사이에 파묻고 최대한 상체를 웅크렸 다. 그 순간, 치이익! 청백(靑白)의 빛깔을 머금은 도기(刀氣) 여러가닥이 흑마왕 을 덮치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흑마왕은 반사적으로 두 개의 권력(拳 力)을 한꺼번에 사용해서 주먹을 마주쳤다. 뒤로 뒤집어지는 듯하면서 완전히 한바퀴를 돌며 군왕도로 흑마왕을 겨누고 도기를 발출시킨 청마군은 그 순간에 자신의 앞에서 마주친 두가닥 경력이 도기를 휘어버리는 것을 똑똑히 보면서 뒤로 밀려났다. 백마신은 자신의 은필추혼사(銀筆追魂絲)가 적마승의 상반 신을 덮어버리자 그대로 은필을 낚아채었다. 보통 이런 경우 덮어씌운 것이 바위덩어리라도 산산조각이 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가닥이 모조리 중간에서 토막나고 있었 다. 적마승이 웅크린 몸을 활짝 펼치며 웃고 있었다. 그의 상의는 모두 찢겨져 나갔으나 맨몸에는 상처가 없었 다. 오른편 팔뚝에는 비마월이 살아있기라도 한것처럼 움직이며 어깨를 타고 넘어 적마승의 등뒤로 숨고 있었다. 네 명의 마인(魔人)이 충돌하는 중에 쏟아낸 내가경력(內家 勁力)은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격돌하려던 네 사람의 동작은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소 리로 인해 멈추어졌다. 끼아아아! 화풍렬은 유부(幽府)의 귀신(鬼神)이 호곡(號哭)하는 소리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음성을 듣자 적마승과 청마군의 얼굴은 그대로 굳 어지며 한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환혼노인! 계단 옆의 빈공간을 감지하고 단숨에 쳐들어간 분뢰수는 밑 으로 뚫린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 통로에는 곳곳에 기관매복(機關埋伏)이 설치되어 있었으 나 대부분 분뢰수가 통과한 다음에야 발동하였다. 마지막에 설치되어 있던 철문(鐵門)의 기관매복은 분뢰수가 가한 일장에 발동하지도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나타난 널직한 방. 반혼실과 같이 넓지는 않으나 한사람이 기거하기에는 충분 히 넓다고 할 수 있는 방이었다. 거기에 핏자욱이 이어져 있었다. 환혼노인의 행색은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온통 윤기가 사라져 탈색(脫色)되어 있었다. 젊음이 공존하던 피부는 온통 썩은 것처럼 푸석거리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짓이겨져서 너덜거리는 무릎... 드러난 이빨사이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과도한 공력을 소모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환혼노인의 손가락 사 이에는 작은 종이가 한장 접혀지고 있었다. 지금 막 쓴 듯 종이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피로 쓴 편지조각을 들고 환혼노인은 공포에 질린 채 분뢰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적마승과 청마군이 그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비밀실로 바로 들어왔다. 그런데도 분뢰수는 어느새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으, 역시 대단하다! 마음 속의 격동과는 다르게 환혼노인의 손은 재빨리 움직이 고 있었다. 편지조각은 작은 통에 넣어졌고 벽한귀퉁이는 이미 열려서 밤하늘의 별이 몇조각 보이고 있었다. 흐흐흐... 과연 마도(魔道)의 전설을 잇는 절대자(絶對者) 답구료... 그러나 당신이 침묵한 이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 니오... 떨리는 목소리는 저절로 공대(恭待)하는 말투를 흘리고 있 었다. 분뢰수의 눈동자가 둥글게 드러났다. 나는 누구지? 환혼노인의 입가에 괴이한 웃음이 어리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작은 통은 그대로 밤하늘 속으로 던 져졌다. 분뢰수의 눈이 그것을 쫓았다. 그 순간에 환혼노인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귀곡성이 터지며 방안의 기물들이 박살나며 한줄기 강대(强大)한 힘이 분뢰수 를 후려갈기고 있었다. 끼아아아! 분뢰수의 눈은 여전히 밤하늘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의 몸은 옆으로 비껴서고 있었다. 그리고 손은 하얀번개를 그리며 그대로 환혼노인의 관자놀 이를 소리없이 꿰뚫고 있었다. * * * <이자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저 새를 잡 으면 나는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第 十四 章 尾 絶 蛇 1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기 거북한 상황이었기때문이다. 대신 백마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너같은 놈이 금강승(金剛僧)의 법신(法身)을 연성 할 수가 있지? 적마승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너따위가 백옥수(白玉手)를 가지고 설치는데 안될건 또 뭐 야? 다 무너져 내린 한복판에 불과 서너자의 거리를 두고 서있 는 넷을 보면서 화풍렬은 기가 막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다시 둘의 대화를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금강승법신은 불문(佛門)의 상승공력(上乘功力)이고, 백옥 수는 도가(道家)의 선천기공(先天氣功)이었다. 저런 작자들이 정말 금강승법신에 백옥수를 연성했단 말인 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나? 쩌억! 쇠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흑마왕의 어깨부분의 흑포자락이 갈라지면서 그 안에 받쳐 입고 있던 쇠로 만든 견갑(肩鉀)이 부서진 것이 보였다. 흑마왕은 부서진 견갑을 툭툭 쳐서 털어버리듯이 벗어내버 렸다. 맨어깨가 드러났다. 청마군은 말없이 드러난 흑마왕의 어깨와 팔뚝을 살피고는 나직한 한숨을 토해내었다. 칠십년이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세월이군... 조용히 흘러나오는 말에 흑마왕은 소리없이 웃었다. 당연하지. 안그렇다면 저놈이 내옷을 찢을 수가 있겠어? 적마승이 투덜거렸다. 기교(技巧)를 비교한다면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그러나 이 두 쌍은 칠십 년이란 시간의 차만큼 공력의 차이 가 벌어져 있었다. 청마군의 도기가 흑마왕에게 아무 상처를 주지 못한 것과 백마신의 은사가 적마승의 웃옷을 찢어내고 맨살을 벌겋게 긁 어놓은 것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연비청은 화풍렬을 잡아끌었다. 멍청하게 넷을 보고있던 화풍렬은 그냥 끌려가다가 흠칫했 다. 연비청이 자신을 잡아당기며 가고 있는 방향은 분뢰수가 부 수고 지나간 방향이었다. 그러나 벽에 가까이 붙어 간다고는 하지만 누구도 이 둘을 가로막거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죽었나? 청마군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적마승은 힐끔 비명소리가 들렸던 곳을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런 거 같군. 툭, 툭. 돌을 걷어 차면서 적마승과 청마군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 다. 뒤에 걸리적거리는 돌따위는 그대로 밀려났다. 그들은 동시에 뒤로 도약하여 계단 위에 섰다. 백마신과 흑마왕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적마승이 다시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다시 또 보자고. 노인네들이 일찍 죽지만 않는다면 시간은 많으니까! 그리고는 몸을 돌려 청마군과 함께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백마신과 흑마왕은 그들을 쫒지 않았다. 대신에 화풍렬의 뒤를 쫓아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나름대로 아담했을 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아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거센 폭풍이 잔뜩 웅크리고 이 방안에 억지로 들어왔 다가 좁은 창을 뚫고 사라져 버린 듯이 엉망이었다. 화풍렬은 멍하니 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을 장식한 기물은 모조리 다 부서져 있었고 바닥에는 아까 흑마왕에게 잡혔던 자와 비슷한 몰골을 하고 있는 자가 관자놀이 부분이 함몰되어 죽어 있었다. 아까 그자인가? 아닌가? 화풍렬은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무릎이 으스러진 것을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온통 탈색된 머 리카락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연비청은 묵묵히 돌아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기껏 달아나서 여기 죽어있군. 흑마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용한 가운데 울려서 그런지 유난히도 쩌렁거렸다. 맞아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데도요? 화풍렬이 미심쩍어서 다시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화혈분신 같은 걸 시전하니까 저 모양 이지. 냉담한 백마신의 중얼거림이었다. 말하면서 백마신은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자리를 유심히 살 피고 있었다. 기물이 다 부서진 가운데 벽에서 그대로 튀어나와 탁자모양 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백마신의 관찰대상이었다. 백마신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려놓고 저어보았 다. 돌바닥에 피자욱이 흐름을 형성하며 거꾸로 움직여가며 글 자가 이루어졌다. - 그가 나타났다! 분뢰수가 바로 그이다! 돌위에 희미하게 파여진 자국으로 핏물이 흘러들어가며 글 자를 형성했던 것이다. 글자가 전하는 의미를 보며 백마신의 눈살이 찌푸려들었다. 화풍렬은 오리무중의 글보다는 그것을 이루어내는 백마신을 눈을 치켜뜨고 보고 있었다. 재주도 좋아... 흑마왕이 백마신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백마신은 눈살만 찌푸리고 무엇인가를 골돌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개만 저을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생각난듯 화풍렬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분뢰수가 안보이잖아! 어디로 갔지? 연비청이 환하게 뚫린 창밖을 가리켰다. 아직은 보여요. 흠칫 놀란 화풍렬이 밖을 보았다. 저 멀리서 하얀 그림자 하나가 지상을 번개가 누비듯이 달 리고 있었다. 저게 분뢰수라고? 도대체 어딜 가기에 저렇게 정신없이 달 리는거지? 아마도... 저걸 쫓는 것으로 보이는 군요. 연비청이 조용히 말하며 저편 하늘의 한점을 가리켰다. 까마득해서 별빛 사이로 보이는 아주 작은 점 하나가 움직 이고 있었다. 화풍렬은 공력을 돋우워서야 그점을 볼 수 있었다. 제게 뭐지? 새인가? 만리신응(萬里神鷹)이다. 차가운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백마신이 눈을 빛내며 보고 있었다. 대단한 놈이군. 흑마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화풍렬은 어이가 없었다. 만리신응을 쫓아가다니... 역시 저놈도 미친 놈이야. 그러나 정말 화풍렬을 기겁하게 만든 것은 그 다음에 연비 청이 한 말이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도와드린 만큼 뭔가를 바래도 되지 않겠 읍니까? 느닷없이 꺼내놓는 말이었다. 백마신과 흑마왕의 눈섭이 자연스럽게 살짝 치켜올라갔다. 화풍렬은 갑자기 연비청이 실성을 했나 하고 보니 아니었 다. 연비청은 두 마인(魔人)을 보면서 싱긋 웃어보였다. 웃는다고 꿈쩍할 작자들이 아니야! 화풍렬은 뭐라고 말도 못하고 쥐고 있는 칼자루에 힘만 주 고 있는데 연비청은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백마신이 은은한 살기를 드러내며 물었다. 무얼 바라느냐? 화풍렬이 듣기에 그 말은 수틀리면 갈기갈기 찢어놓겠다는 말과 똑같은 말로 들렸다. 화풍렬이 눈치를 주려고 보니 연비청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 으로 지껄이고 있었다. 사천 땅 전체의 약재(藥材)는 두 분이 쥐고 계시지요? 그러면서 슬며시 소매자락에서 두 손을 끄집어내는 것을 보 며 백마신과 흑마왕의 낯이 구겨졌다. 그런데? 백마신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좀 많이 필요해서요. 그러면서 연비청은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흐흐, 그럼 아까 그 꼬마는 여기에 있는 약재를 털러간거 로군? 흑마왕이 어처구니 없는 듯 실소(失笑)하며 물었다. 과연 탁월한 식견이십니다. 연비청의 대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장강(長江)의 일 때문이냐? 백마신이 더욱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연비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두 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좋아! 흑마왕이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백마신이 무엇인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듯하며 돌아섰으나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화풍렬은 눈을 돌려 연비청의 손 을 보다가 그만 짧은 비명을 토해내었다. 윽! 그, 그거... 그거잖아! 연비청은 화풍렬을 보면서 미소했다. 왜요? 좋은 물건인데요. 그의 손에는 천뢰화(天雷火)라는 이름을 가진 구슬이 두개 씩 들려 있었다. 당대에 누구도 화룡의 손에 들린 천뢰화 네개를 무시할 수 는 수는 없었다. 그제서야 화풍렬은 백마신과 흑마왕같은 거칠기 짝이 없는 자들이 어째서 연비청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는지 알 수 있었 다. * * * 유홍광은 낯을 잔뜩 일그러뜨렸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 다. 좋은 일이긴 한데... 그러나 눈 앞에 쌓인 물건을 보면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송학은 묵묵히 있었다. 한비는 배시시 웃으면서 점창문인 둘에게 이것 저것 해야할 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약고(藥庫)를 지키다가 송학에게 목이 잘려 쓰러진 낙백인의 시체 몇 구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약고 안에는 지금 유홍광의 낯을 일그러뜨린 약 재가 꼭 산더미같이 버티고 있었다. 한비는 그것을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홍광이 그걸 거절할 처지가 아니란 점이었다. 지하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줄곧 도움을 받은 처지에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명분까지 있는 부탁이고 보니 앞장서서 나서면 나섰 지 물러날 길이 없는 것이다. 묵묵히 있던 송학이 입을 열었다. 장강을 따라가면서 약재를 풀려면 이것가지고는 부족하지 않을까? 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여덟째 형이 지금 그 백마신과 흑마왕이란 노선배들에게 붙어 있는거지요. 말을 너무 태연자약하게 해서 물어본 송학이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한비를 도와 산중에 위치한 약고에서 약재를 실어나르고 말았다. 2 그는 뛰었다. 뛸 수 밖에 없었다. 뛰지 않으면 저 새를 놓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분뢰수는 머리 위 허공을 나르는 새, 만리신응 을 따라 뛰고 있었다. 눈 앞에 산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협곡이 나타났다. 그 산마다 계곡마다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겠지만 지금 분 뢰수의 눈에는 오직 한마리 새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미 쉰 두 개의 크고 작은 강물위을 그냥 뛰었다. 어쩌면 하루정도 더 뛰면 지칠 지도 몰랐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않았다. 만리신응이라고 쉬지도 먹지도 않고 계속 나를 수는 없을테 니까! 저놈도 어디엔가는 내려 앉을 것이다. 도연락(陶連樂)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 자신보다 경공이 빠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자신과 필적하는 자가 있을 뿐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천하오패의 하나인 도왕(盜王)이 놀라운 신 법을 지녔다고 하나 쾌속함으로 자신보다 빠르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곡비(曲琵)정도라야 나와 쾌(快)를 논할 수 있지... 누군가 앞을 뛰고 있으면 도저히 못 참는 성질, 그것이 바 로 그가 지닌 경공의 밑천이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진 것이다. 그것도 더할 나위없이 처참하게 지고 말았다. 백리를 뛸 때는 그럴 수도 있거니 했다. 그럼 저놈도 천하오대경공(天下五大輕功) 중 하나를 익혔 나? 면양(綿陽) 부근에서부터 이백리를 뛰고 산을 넘고 협곡을 건너뛰며 사천성 험한 길을 만들어가면서 뛰는 동안 그는 생 각이 약간 바뀌었다. 아무래도 저놈은 다섯개 다 익혔을 거야... 그러나 그자가 강물에 물방울 하나 튀기지 않고 가릉강(嘉 陵江)을 달려서 건널 때는 천하의 도연락도 그대로 쓰러져 버 렸다. 그리고 그는 절망했다. 차라리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우연히 저놈을 보지만 않 았다면 이렇게 절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상비호(水上飛虎) 도연락이 모르는 경공도 있었 던 것이다. * * * <저놈의 새가 진짜 만리를 날려나....> * * * 저편에 삼협(三峽)이 내려다 보이는 백제성(白帝城)이었다. 그리고 천금장(千禽莊)에서는 그 백제성이 멀리 보였다. 천금장의 주노야(周老爺)는 마음씀씀이가 괜찮은 사람이라 고 소문이 나 있었다. 사람도 제대로 먹기 힘든 이 때에 새들까지 먹이고 있으니 그런 소문이 날 만도 했다. 간혹 가다가 지나가던 온갖 새들이 천금장으로 날아드는데, 매나 비둘기가 전혀 싸우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것만 보아도 그 소문은 근거가 있었다. 오늘도 주노야는 귀머거리 하인에게 일거리를 주고서 자신 이 키우는 새들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그가 자리에 앉아 하늘을 보니 아직 어스름하니 동이 트려 면 좀 더 시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도 그렇듯이 하인도 이런 시간에는 잠이 없었다. 늘상 하는 일이 있어서였다. 주노야는 새로 온 비둘기를 보고 있었다. 발목에는 늘 보던 전서통(傳書筒)이 채워져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이 새겨있어야 할 부분에는 곤륜제삼십이신 (崑崙第三十二信)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주노야가 기대하고 있던 답장이었다. 때문에 주노야의 입가에 가볍게 미소가 떠올랐다. 구구구... 천리구는 모처럼 돌아온 집이 반가운 듯이 울었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곧 이어진 강한 울음소리에 뚝 그치 고 말았다. 까아악!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주노야의 비둘기들은 모두 이 신응(神鷹)이 나타나면 소리 를 죽이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리신응은 항상 중요한 결과를 급히 알리기 위해서 사용되 었다. 지금 날아오는 만리신응도 무엇인가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만리신응의 울음을 들은 때부터 주노야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자신이 키운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것이 어떤 녀석인지 당장 알아낼 수 있는 주노야였으니 지금 날아온 저 만리신응 도 자신이 키웠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노야의 얼굴은 불신(不信)과 회의(懷疑), 그 리고 경악(驚愕)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짓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저 만리신응은 이미 죽은 자를 향해 날아온 것이다. 손은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손의 주인이 떨기때문에 손도 덩달아 떠는 것이었다. 만리신응을 움켜쥐면서 손은 더욱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이 훈련시킨 새이니 만치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만리신응의 특징은 주인을 찾아간다는 점이었다. 누구든지 이 만리신응의 주인은 하늘 아래 어느 장소에 있 더라도 만리신응이 가져오는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새를 키울 수 있었기에 그는 색명당주(索命堂主)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지금 새롭게 자신만의 야심을 가질 수 있었다. 만리신응을 움켜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 신응의 발목에는 아무 것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대신 신응이 발톱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작은 통이 있었다. 거기에는 대지급(大至急)이라는 석자가 새겨져 있었다. 핏방울도 묻어 있었다. 그러나 손은 감히 그 통을 열어볼 생각을 못한 채 떨고만 있었다. 그 때 손의 임자는 담담하면서 기품있는 목소리를 다시 듣 게 되었다. 앞으로는 영영 듣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를... 뭘 그리 망설이나? 열어보지 않고서. 주노야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 하는 사람의 목소리 를 다시 듣게 되었다. 이럴리가 없다! 그는 틀림없이 죽었다... 그러나 주노야는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단아하고 기품있는 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외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 다. 주노야의 몸이 천천히 돌았다. 도는 순간순간이 그에게는 영겁(永劫)과도 같은 긴세월로 느껴지고 있었다. 돌아섰을 때 주노야는 돌아서기 전의 주노야와는 판이하게 달라보였다. 순식간에 수십년을 늙어버린 듯한 몰골이 되어 있었기때문 이다. 당신이었군... 주노야의 입이 떨어졌다. 주노야의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자가 우아하고 기 품있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지. 틀림없는 바로 나일세. 그럴리가 없어! 당신은 틀림없이 죽었다고 했어! 그건 몇 번이나 확인한 거야! 절대... 주노야의 거친 반박은 소리없는 잔잔한 미소에 가로막혔다. 나도 내가 죽었다고 여기었으니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살아있 네.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沈默).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새들이 제멋대로 우 짖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손이 다시 떨렸다. 죽고 싶지 않는 주인의 심정을 손은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 다. 그러나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가장 강한 무예라면 염왕색(閻王索)의 일초검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손의 주인이 상대해야 할 자는 바로 그 일초를 전수해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손이 익히고 있는 염왕색은 단지 염왕검법의 세 부 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저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 설사 완전한 염왕검법을 익혔다 해도 질 수 밖에 없는 상대 였다. 유감이네. 어떤 말을 해도 이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한 기품이 배어나 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언제나 그러했다. 은은하게 풍겨나오는 기품은 만인(萬人)을 굴복시키는 위력 을 지녔다. 그의 태도는 언제나 단정하면서 엄숙했다. 지난 이년간 많은 기대를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군. 자네는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 주노야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주노야의 눈은 저절로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 었고 눈섭이 바들거리고 있었다. 목젖으로는 마른 침이 쉬임없이 넘어가려고 시도했다. 무, 무슨 실수를 했단...? 말은 중간에 저절로 삼켜졌다. 기품이 흐르는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잔잔한 설명을 꺼냈다. 미절사(尾絶蛇)라는 이름의 의미를 기억하나? 주노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절사! 꼬리를 자르는 뱀! 그 뜻은 주노야가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오직 그것이 주노야가 맡은 임무이기도 했다. 상대방은 말없이 잠시 주노야를 응시했다. 주노야는 그 침묵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손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확연히 깨닫고 있었다. 손의 임자가 죽으면 그 다음에 손이 가야할 운명의 길은 썩 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죽은 사람의 손이 다른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 그래서 손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던 자신 의 모든 기능을 총동원했다. 먼저 허리를 더듬고 그 다음에 앞으로 뿌리는 것이다. 소리없이 칼빛이 새벽을 갈랐다. 주노야의 손은 살수당주의 손보다 훨씬 더 심오하게 염왕색 의 검초를 발휘했다. 너무나 심오해서 이 일초만으로 색명검법이라고 까지 불리 우는 검법이 발휘된 것이다. 후우...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안에도 말할 수 없는 고아한 풍치가 흘렀고 단정한 기품 이 배어나왔다. 주노야는 미칠 것 같은 자신의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이때 보다 더 확연히 느낀 적이 없었다.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뽑혀져 펄떡 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 * * 말종(末種)은 배가 고팠다. 그것이 전부였다. 굶어죽기 직전의 배고픔은 사람을 거의 반미치광이로 만들 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말종은 평소에는 도저히 갈 엄두를 못냈을 곳에 다 가가고 있었다. 백제성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말종의 두려움은 배고픔과 더욱 사나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굶어죽을 것인가? 맞아죽을 것인가? 자조(自嘲)가 배인 생각 속에서 말종은 고민했다. - 먹고죽은 귀신이 떼깔도 좋다. 이 속담을 말종은 전혀 믿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죽어도 좋아질 떼깔이 없으니까. 그러나 과연 참을 수 있을까? 말종은 배가 등짝에 달라붙는다는 것을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굶주림이 두려움을 이기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조금 먹을 수 있으면... 말종의 걸음걸음은 점차 백제성을 향해 빨라지고 있었다. 허기진 걸음이 백제성이 지척에 달했을 때 저절로 서버렸 다. 무섭다. 두려움이 배고픔을 이기고 있었다. 말종의 발은 뒷걸음질쳤다. 배가 고프다! 무섭다! 두가지 다른 방향을 가지고 말종의 마음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마음 속에 떠오른 고민은 다른 사람에 의해 간단하게 해소 되었다. 거기 누구요? 백제성에서 한 사람이 나오면서 말을 건 것이다. 말종은 그대로 뛰어 달아났다. 눈에 새들이 날아가는 광경이 비추어졌다. 단지 사람의 기척만 느끼고 달아난 것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를만큼 오고 만 것이다. 눈이 핑돌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말종은 다시 배가 등짝에 철썩 붙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저곳이라면... 새들을 저만큼이나 기르고 날릴 수 있는 곳이라면 그래도 사람인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아사(餓死)가 눈에 어른거리는 말종에 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운명은 말종을 분뢰수에게 인도하고 있었다. * * * <다왔다! 드디어 내려앉았다!> 3 분뢰수는 만리신응이 지상으로 내리꼿히는 광경을 오십여리 밖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 위치도 확인하였다. 이미 이천리 가까운 거리를 달려 쫓아온 다음이었다. 사천성의 지형(地形)이란 것이 명장(名將)이 울고다니는 악 명높은 촉도(蜀道)였기에 분뢰수는 만리신응과 상당히 떨어지 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미 만리신응이 내려앉은 곳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분뢰수의 몸은 그곳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었다. 만리신응이 내려앉은 곳에서 새떼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분뢰수의 눈동자가 의문을 싣고 칙칙하게 빛났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물어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분뢰수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칙칙한 눈은 백제성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천금장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곳을 향해 거 의 전력을 기울이다 싶이 해서 달리고 있었다. 섬전영(閃電影)이라 불리우는 그의 신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날아오르는 새떼는 이제 모두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었 다. 어떤 것들은 북(北)으로, 어떤 것들은 남(南)으로 모두 제 각각 자신들이 갈곳이 있다는 듯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가고 있었다. 분뢰수는 그런 것은 일체 바라보지도 않고 오직 천금장만을 향해 가고 있었다. * * * 말종은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좋았다.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 넓은 장원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하늘이 말종에게 내린 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말종도 아직 살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난 죽지 않는다! 오래 살거다! 배고픔은 사람의 감각을 극한(極限)으로 키워주는 일면이 있다. 말종은 개보다 훨씬 빨리 좁쌀과 사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 먹기위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새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도 당연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야생의 새가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길들이 새가 먹는 것이면 사람이 즐겨 먹을 수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말종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잘 빻아놓은 사료는 씹지 않아도 침과 적당히 섞기만해도 죽처럼 꿀떡꿀떡 삼킬 수 있었다. 좁쌀은 또 별미였다. 열려진 새장안으로 손만 뻗으면 말종이 지금껏 먹었던 무엇 보다도 맛있는 별미들이 앞을 다투어 잡혀주고 있었다. 언젠가 들었던 극락(極樂)이 이런 곳일까? 말종은 모이통에 담긴 물도 마셔가며 입에다 부지런히 넣었 다. 하얀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천금장의 담을 넘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번개가 담장을 넘어갔다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눈을 부빌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지만 아무도 본 사람 이 없었다. 분뢰수는 즉각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넓은 방의 창가에 서서 죽어있는 자를 보고 있었으니 착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리신응도 그 옆에 죽어있었다. 전서통은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환혼노인의 피가 묻은 바로 그 작은 통이었다. 죽은 자는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분뢰수는 그의 심장이 끄집어내지고 터져서 바닥에 팽겨쳐 진 것을 보았다. 죽은 자의 몸에서 새어나온 피는 방바닥을 모조리 적셔놓기 로 작정하고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더운 기운이 핏속에 맴돌고 있었다. * * * <도대체 무엇때문에 난 여기까지 온 것인가? 새도 죽어있고 사람도 죽어있다. 나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 * * * 천금장의 대문은 주노야가 머무는 거실의 반대편에 있었다. 누구든지 대문을 통해서 천금장에 들어오는 사람은 먼저 새 들의 인사를 먼저 받아야 했다. 사방이 탁트인 듯이 널직한 공간에 담벼락마저 멀리 서 있 어 꼭 평원에 선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공간이 대문을 들어서 자마자 사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가득 놓여진 새장. 굳이 천금장(千禽莊)이라 이름지은 이유를 묻지 않아도 누 구나 이곳이 왜 천금장인지 다 알게 만드는 다양한 종자의 새 들이 새장안에 있었다. 규모도 작지 않은 천금장이 이 새들로 인해 좁아보이기도 하였다. 말종은 새장 사이에 있는 넓직한 탁자를 보았다. 그 위에 놓인 떡도 보았다. 둥글게 빗어놓은 떡이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뱃속이 어느 정도 채워진 다음이어서인지 말종의 행동은 좀 대담해져 있었다. 떡을 향해 손을 뻗은 것이다.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제 확실했다. 어스름한 동녁이 서서히 해가 뜨고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달 은 아직도 자신의 시간을 주장하면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말종은 좁쌀도 한웅큼 쥐고 있었다. 떡과 좁쌀을 함께 먹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말종은 한손에 움켜쥔 좁쌀에 떡을 꾹 찍어 입안에 쑤 셔넣으려 하고 있었다.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을 먹는다는 기분이 말종을 신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잘 묶어놓은 헝겁은 이번에 방 해가 되었다. 좁쌀이나 다른 새모이를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굵직한 떡이 들어가기에는 지장이 많았다. 말종은 입언저리의 헝겁을 턱아래로 당겼다. 이제 떡이 들어갈 만큼 입을 벌릴 수가 있었다. 한웅큼의 떡을 베어물었을 때 말종은 천금장의 안쪽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움직임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발을 한번씩 번갈아 가면서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삐걱대 야할 바닥이 전혀 소리가 없었다. 마치 유령이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처럼 그가 다가온 것이 다. 말종은 다급해졌다. 겨우 입에 밀어넣은 떡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말종은 있는대로 떡을 구겨서 입에 찔러넣었다. 좁쌀을 잔뜩 묻힌 떡은 입안을 긁으면서 잘 넘어가지 않았 다. 제대로 씹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래도 말종은 마구 밀어넣었다. 이번에 못먹으면 얼마나 있어야 또 한번 떡을 입에 넣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허겁지겁 떡을 밀어넣는 동안 말종의 얼굴을 가린 헝겊은 그대로 떨어졌다. 희미한 달빛과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가운데 분뢰수의 눈에 말종의 모습이 똑똑히 비추어졌다. 말종은 상대방이 자신을 똑똑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하지만 이미 떡은 억지로 밀어넣어서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좁쌀을 마저 다 입에 털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손에 든 좁쌀을 막 털어넣던 말종은 목이 콱 막히는 것을 깨달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집어넣어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캑! 캑!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데 뭔가 이상했다. 말종은 다시 자신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증오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지금 그냥 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안 되었다는 동정의 연민도 없었다. 비웃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말종은 그렇게 자기를 보고 있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얼굴은 때묻은 백포로 둘둘 싸매었다. 손도 얼굴처럼 둘둘 말아 놓았다. 머리카락은 속발(束髮)해서 올리지도 않은 채 그저 산발해 서 흩어놓았다. 등뒤에는 틀림없이 몽둥이 같은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입도 열리지 않았는데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 려왔다. 처음에 말종은 그것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멍하니 그를 보자 그는 또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을 보고 묻는 말이었다. 말종은 이자가 정말 괴상한 자라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보면 자신을 일곱, 여덞짜리 꼬마로 알았다. 그보다 십년(十年)은 더 살았지만 체구가 그 모양이니 당연 한 일이었다. 얼굴을 가린 헝겊을 지금처럼 내려놓으면 우선 다들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퍼렇게 변하고 붉은 반점같이 일그러져 있는 자신의 손과 같은 얼굴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종은 손도 얼굴처럼 헝겊으로 잘 싸놓고 동냥을 다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풍창(大風瘡)에 걸려 문둥이라고 불리우는 자신은 동냥을 하기도 전에 거리에서 쫓겨나고 잘못하면 그대 로 돌을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말종이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 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말종에게 이 괴상한 자 가 물어본 것은 단지 이 한마디였다. 맛있니? 第 十五 章 만 남 1 동이 터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붉어져오는 대지(大地)가 긴 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천금장이 아스라히 보이는 곳에서 그는 보고 있었다. 그가 천금장을 벗어나고 얼마되지 않아서 천금장 뒤를 넘어 들어간 자도 보았다. 정말 섬전(閃電)같군...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본 것은 틀림없이 분뢰수였다. 문득 그의 손이 얼굴로 올라가고 있었다. 왼쪽 뺨에 길게 그어진 네 줄기의 손가락 자욱이 만져졌다. 좀더 깊게 파고들었다면 뼈까지 긁어낼 정도로 세차게 파고 들었던 손가락이었다. 손은 내려가서 가슴을 만졌다. 금의(錦衣) 안쪽에도 있는 비슷한 상처가 느껴졌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상처였다. 너는 여전하구나... 주노야를 공포에 젖게 만든 단아한 기품이 흐르는 목소리였 다. 그는 미소지었다. 그의 등뒤에 있던 부복하고 있던 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천금장에 매설된 화약(火藥)은 만근에 달합니다. 언제라도 명만 하신다면... 그만둬.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다시 또다른 미소가 그의 얼굴을 채웠다. 그 정도에 끄떡할 놈이 아니지... 지금은 내버려두어야 할 때야... 전서통은 모두 빠짐없이 비워두었겠지? 예.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손은 허리춤까지 내려갔다. 청홍의 광채를 뿌리는 요대(腰帶)에서 손은 멎었다. 주노야의 심장을 그대로 뽑아내 일그러뜨린 손이었다. 주노야의 손이 전서통을 갈아치우는 역할을 한다면 그의 손 은 능히 천하를 움켜쥘 수도 있는 손이었다. 당분간 미절사는 꼬리가 없다. 그리고 그는 돌아섰다. 천금장에서 귀머거리 하인이었던 자는 이마를 땅에 대며 깊 은 경의를 표했다. 꼬리가 없는 뱀은 꼬리가 자랄 때까지 모든 활동을 중지한 다는 것이 그들 조직의 행동지침이었다. 비어있는 전서통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할 것이다. 백살수(白殺手)... 이제 처음 인원 중에는 너만 남았나? 기품있는 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하늘을 보았다. 동이 터오던 하늘은 이제 푸른 빛을 일렁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근처에도 가지마라. 때가 되면... 그는 떠나갔다. 부복하고 있던 백살수는 그가 떠나고서 한동안 그대로 있다 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사방을 주시한 다음에 비로소 몸 을 일으켰다. 백살수의 눈길은 천금장을 향했다. 운이 좋은 놈이군... 하지만 청적황흑(靑赤黃黑)의 빚은 꼭 갚아줄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누구에게 굳이 들으란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백살수도 떠났다. * * * 말종은 세상에서 온갖 꼴을 다보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자부해오고 있던 것이 오늘 이 괴상한 자 앞에서는 모조리 박살나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뒷걸음질도 치지 않고 증오를 토해내지도 않는 그에게 말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베풀어 주 었다. 자신이 챙긴 좁쌀을 나누어 먹자고 한 것이다. 이곳에 먼저 온 것이 자신이었으니 선점(先占)의 권리가 있 다고 생각하는 말종이었다. 그래서 말종은 자신이 그 정도의 아량은 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쇳조각이 빛나는 듯한 이상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그의 맨얼굴도 자신과 별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 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종의 아량을 받은 이 괴상한 자는 좁쌀을 두 손에 받고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먹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말종은 자신의 코로 뭔가 들어갈 때의 기분을 기억했다. 코로 뭘 먹는 일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도 아니고 재미있는 일도 아니며 맛있는 일도 아니었다. 두 손을 비비적거려 좁쌀을 아주 미세한 부드러운 가루로 만들어서는 코로 들이마시다니! 말종은 보고 있다가 자신의 손에 아직 남아있는 좁쌀을 비 비보았다. 그의 손에 있는 좁쌀은 가루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먹어요? 분뢰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말을 건 꼬마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꼬마가 아니었다. 입이 벌어지지 않아. 꼬마는 멋대로 범벅이 되어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 다. 말은 어떻게 해요? 분뢰수는 가루가 된 좁쌀을 모두 들이쉬었다. 이렇게. 소리는 분명히 울려퍼졌다. 입도 벙긋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별로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더우기 내가공력(內 家功力)을 지닌 고수라면 요령만 알면 간단한 일이다. 꼬마는 자못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말종은 자신의 눈썰미가 얼마나 예리한지 잘알고 있었다. 척보아서 먹을 것이 나올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고 자 신을 향해 돌을 던질 사람과 그저 달아날 사람을 판단하는 것 은 말종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십여 세 이전부터 홀로 떠돌아다닌 말종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그 예리한 눈썰미때문인 셈이다. 이 눈썰미가 없었다면 굶어죽든 맞아죽든 금방 죽었을 테니 까! 나쁜 사람같지는 않은데... 거짓말을 잘하네... 비록 자신의 예리한 눈썰미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는 분명히 보이지 않을만큼 조금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걸 감추려고 음식까지 코로 들이키다니... 말종은 상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지금까지 자신이 남을 동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도 깨 닫지 못하고 있었기에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그가 말했다. 난 거짓말하지 않아. 말종의 마음 속에 섬뜩한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은 자신의 속을 본 것이다. 분뢰수와 말종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종은 자신의 특유의 눈빛을 적극 살리고 있었다. 슬며시 감은 것처럼 눈을 반개(半開)하여 내려다보듯이 고 개를 뒤로 제끼고 보는 것이다. 마음 속에 뭔가 캥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말종의 이런 눈빛 을 대하면 슬쩍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말종 자신은 한번도 자신의 눈빛을 본적이 없었다. 거울 앞에 서 본 일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눈빛을 보고 한 말은 똑똑히 기 억하고 있었다. - 저런 독종(毒種)... 그리고 종종 그런 눈빛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맨얼굴을 볼 때처럼 겁을 먹는다는 것을 안 후로 자주 써먹는 비장의 무기였다. 그러나 분뢰수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말종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오히려 말종이 답답했다. 쇳조각처럼 칙칙하게 번뜩거리는 눈동자가 실핏줄까지 드러 난 벌개진 눈자위에 둘러싸여 있는 것말고는 알 수 있는게 없 었다. 답답한 말종은 다시 튀어나온 분뢰수의 말에 속이 덜컥 내 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궁금할 때는 묻는 것이다. * * * <이 꼬마를 죽일까?> 2 말종은 천금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불과 새벽에서 아침에 이어지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지금까 지 겪었던 일가운데 가장 기괴하고 이상한 일을 겪은 것이 기 억에 생생했다. 머리를 둘둘 말아놓고 손가락도 싸매고 산발한 사나이. 어쩌면 남자가 아닐지도 몰랐다. 등에 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처럼 대풍창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대풍창보다 무서운 다른 병에 걸린 것일까? 어떤 것이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얼굴을 내놓으면 곤란한 일때문에 그렇게 말아놓은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말종의 생각은 또 끊어졌다. 아니라고 했다. 꿈은 깨면 사라지고, 몽상(夢想)은 눈만 돌려도 깨어진다. 그러나 이 새벽의 포만감과 함께 이 정체불명의 괴상한 자 는 말종의 옆에 서서 함께 천금장을 보고 있었다. 차라리 말종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대꾸라도 하지않으면 나을텐데 이 작자는 꼬박꼬박 대꾸를 해서 속을 긁어놓고 있 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이렇게 묻는 말에 들을만한 대답은 없었지만 말종은 또 물 었다. 뭐가? 어떻게 내 생각을 그렇게 아느냐고요! 언성이 자연스럽게 높아졌지만 분뢰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천금장을 향해 두었던 시선을 허공(虛空)으로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일에 어지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하 던 말종은 무시당하는 일이 여전히 기분 더럽게 한다는 것을 되새기고 있었다. 포기하고 말종은 발걸음을 옮겼다. 당분간이지만 말종은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언제나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포대자루 안에는 좁쌀과 몇가 지 새모이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에는 고기도 섞여 있었다. 인가(人家)나 마을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거지라면 몰라도 말종의 처지에서는 한번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저승길 에 발을 놓는 짓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말종은 그런 목숨을 건 모험의 필수품으로 이 포대 자루를 꼭 가지고 다녔다. 이것도 몇년 전에 목숨을 내건채 얻은 것이다. 그 뒤로 말종은 널려 있는 빨래를 훔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정말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말종은 우뚝 섰다. 조그마한 그가 우뚝 선다고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니고 새살 이 돋는 것도 아니었다. 왜 따라오는 거에요? 성난 말종의 목소리가 터졌다. 분뢰수는 그의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나 보려고. 말종은 어이가 없어 하다가 분뢰수의 눈에 신기한 것을 보 는 듯한 흥미가 어려있음을 깨달았다. 날... 구경거리로 알아? 울컥 화가 치밀어 소리지르려던 말종은 갑자기 세상이 핑핑 도는 것을 보았다. 어, 어, 어...? 혀가 굳어져 버렸다. 이상한 녀석은 여전히 쇳조각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 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더욱 빨리 돌더니 암흑(暗黑)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따사로운 햇빛이 나뭇잎을 뚫고서 반짝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한들거렸다. 말종은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재미있는 싸움이었어.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는 생각할 여지가 없었 다. 단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닌 괴상한 눈동자가 당장 머 리속에 떠올랐다. 말종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겨우 일어나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몸에 기운이 다 달아나고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마구 소리지르며 난리를 치고 싶었다. 얼굴을 가진 헝겊을 치워버리고 노골적으로 상대를 우롱하 고 싶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보기만 해도 역겨운 손을 내밀어 이 괴상한 자가 겁먹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자는 그런 손을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얼굴과 손을 이미 저렇게 싸놓았으니 이자도 자신 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 앉은 말종을 분뢰수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 말종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겨우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 꼈다. 눈 앞의 산발한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신경을 쓴 결과였다. 황급히 손을 얼굴에 가져가 보니 헝겊이 없었다. 말종은 이미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를 악물면서 말종이 물었다. 무슨 싸움이 재미있었어요? 네몸의 병(病)과 독(毒). 의혹의 빛이 말종의 눈에 어리었다. 독이라니요? 묻고 있는 말종의 기억 속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가 기억 났다. 거의 사흘 간이나 쓰러져 기어다녀야 했다. 살아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두 번 다시 독이라는 것에 가까이 하고 싶지를 않았다. 목덜미를 만져봐. 간단한 말에 말종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목덜미를 만져보 고 있었다. 당장 걸리는 것이 있었다. 꼭 목덜미에 가시가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걸리는 게 있었다. 독침이다. 상대방은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말종 은 전혀 재미가 없었고 등골이 욱씬 거리고 있었다. 왜, 왜 내게 이게 박혀있지요? 네가 거기 들어갔으니까. 말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자신이 천금장에 들어간 일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얼씬도 하지 않았겠지만 자신은 분명 누구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고 천금장에 들어갔다. 어디 들어가기만 했는가? 손에 걸리는 먹을 것은 전부 뱃속에 쳐넣지 않았던가? 하지만 도대체 저 장원에 독침을 쓰는 사람이 있던 것일까? 독을 쓰는 사람은 흔히 볼 수 있는 자가 아닐 것이다. 손에 뽑혀나온 독침은 불과 손톱만한 길이에 지나지 않았 다. 말종이 아무리 신경이 둔하다고 해도 이렇게 작은 침으로 기척도 없이 찌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재주였다. 그런 사람이 평범할 까닭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지요? 겨우 말종은 생각을 정리하다가 묻고 말았다. 독사에게 물려서 산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이기 위해 쓴 독이 어떻게 우연이 해독될 수 있겠는가? 그런 우연은 있을 턱이 없었다. 내가 해독시켰다. 분뢰수는 말종을 보면서 말했다. 별다른 감정없이 한 말이지만 말종의 마음 한구석에는 실망 이 소리지르고 있었다. 기분좋았는데...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걸... 고통이 있다거나 두려움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순간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독이 완전히 퍼져 의식을 잃을 때 말종은 두번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이름이 뭐냐? 말종의 내심과는 상관없이 분뢰수는 묻고 있었다. 이 질문 하나에 말종은 가슴팍에 칼을 맞는 기분을 느꼈다. 쿡 찔러들어오는 뜨거운 것! 말종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푸주간 주인이 자신에게 던진 고깃칼에 맞아 죽을 뻔 한 것 이 언제였는지 이젠 거의 잊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뢰수의 한마디 질문이 다시 그 기분을 살려버린 것이다. 말종. 그냥 그렇게들 불러요. 간신히 대답을 하면서 말종은 웃으려고 했다. 인간말종(人間末種)이란 소리로 말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대화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이름은 있어야 하기에 이름으 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말종 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사치였다는 것은 지난 삼년 동안 말종이라고 그를 부른 사람이 없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삼년 전에 우연히 지나가던 자가 보고서 천형(天刑)을 받은 인간말종이라고 중얼댄 적이 있을 뿐이었다. 말종 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냥 누구나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부르는 이름이었다. 나오지 않는 웃음은 접어둔 채로 말종은 물가로 움직여갔 다. 목이 말라서였다. 푸대자루는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었다. 말종을 평원에서 숲으로 옮겨오며 분뢰수가 가져온 것이었 다. 근방은 이미 여러차례 다녀본 경험이 있기에 말종은 그대로 물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질근 눈을 감으며 물을 마시는 말종을 분 뢰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침의 차가운 시냇물이 말종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서 말종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배가 아직 꺼지지 않은 것이 좋았다. 배만 고프지 않으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말종의 귀에 또 비수(匕首)같은 한마디가 찔러들어왔다. 그 얼굴이 마음에 들어? * * * <죽이고 싶은 표정이 되는군. 이 꼬마는 재미있다.> 3 세상에 별의 별 재수없는 인간을 다 보았어도 이렇게까지 재수없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재수없는 인간들은 말종의 겉모습만 보면 무조건 욕을 하거나 무조건 기피하며 멀리서 혀나 걷어차고 동정을 보내었다. 아니 그나마 동정심이라도 품는다면 개중에 재수는 없어도 착한 축에는 낀다고 할 수 있었다. 심보가 고약한 인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욕부터 먼저 해 댔고 그 다음에 돌을 집어들었다. 말종이 심하게 반항할 기미가 안보이면 손에 든 돌의 대부 분은 날아왔다. 돌을 집어든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세게 나가는 것이 말종 이 터득한 처세술(處世術)의 한가지였다. 그러면 뒤에 어찌되든 달아날 기회는 일단 생겼다. 그런데 이 괴상한 작자는 재수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겉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놀라거나 혐오감을 보이거나 하 는 기색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말종이 절대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괴한 재주가 있었다. 거기에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면서 약을 올리는 말투. 만약 말종이 나이에 걸맞는 체격만 되었어도 죽자고 한판 붙어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종의 체격은 기껏해야 일곱이나 여덞살 짜리 꼬마 와 겨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씨익! 거친 숨소리가 말종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 밖에 없었다. 푸대자루를 움켜쥐는 것도 힘든 손가락으로는, 종종 뒤틀리 는 다리로는, 그리고 이렇게 작은 체격으로는 더 이상 무얼 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얼굴이 마음에 들어? 간신이 화를 억누르는 말종의 귀에 분뢰수는 한번 더 똑같 은 말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쌓인 것을 행동으로 보일 수가 없을 때 갓난아기면 누구나 하는 일을 말종도 하고 말았다. 으아앙! 땅을 치고 통곡(痛哭)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서럽게 울고 있는 말종을 분뢰수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 참견도 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다. 말종은 지금껏 받아온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풀고 있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홀로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이 이순간에 모조리 다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 운거냐? 겨우 울음을 그친 말종에게 분뢰수가 물었다. 말종은 그 순간 다시 서러움이 치솟았으나 이제는 눈물이 나오지를 않았다. 단지 이를 악물고 분뢰수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래! 다 울었다! 욕지거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입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듣고서 자신을 죽이려 들면 이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누가 막아주겠는가? 하기야 인적이 많은 곳이라 해도 자신을 때려죽인다고 하면 말리기보다는 도와주려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분뢰수는 아무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말종을 마주 쳐다보 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 를 보고만 있었다. 그동안 말종의 머리에는 온갖 욕이 다 떠올랐다. 그러나 상대방의 괴상한 쇳조각같은 눈을 보면 입밖으로 튀 어나오는 것은 한가지도 없었다. 말을 한 것은 분뢰수였다. 그런데 왜 울었냐? 말종은 기가 막혀서 눈만 껌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작자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나같은 꼬마를 그런 식으로 놀리 고 부끄럽지도 않고요? 말종은 따졌다. 다른 사람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 작자는 자신과 말이 될 것 같아서였다. 최소한 그는 자신을 기피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두껍게 감싼 까닭에 표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말종 은 그의 눈빛이 그대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는 누가 불쌍하고 누가 부끄러워 해야한다는 것인지 하고 묻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종의 생각뿐일 수도 있었다. 나같은 가엾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놀리는게 옳다고 생각 해요? 언제나 누군가가 떠들면 귀기울여 듣기만 하던 말종이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남에게 이야기할 때가 오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꿈속에서 그리던 일이었다. 누가 가엾어? 눈빛과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말종은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자신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팔꿈치까지 높이 들어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종을 보며 분뢰수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태도같다고 여기자 말종은 다시 말했 다. 내가 가엾지 않아요? 전혀! 잠깐 말종은 눈알을 굴렸다. 무슨 뜻일까? 이해가 잘 안되었다. 자신의 병은 천형(天刑)이라 불리우며 모습은 누구나 달아 나는 흉칙한 몰골이었다. 오죽하면 우연히 슬쩍 거울에 비추인 자신의 얼굴을 엿보는 것만으로 칠년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자기가 외면했겠는가? 그런데 이 사나이는 도무지 그런 자신의 병을 인정하려 들 지 않는 것이다. 혹시? 가장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 속에 묻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말종은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도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이 사나이 역시 견디 기 힘든 일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 속을 그냥 들여다 보잖아? 결국 말종은 묻고 말았다. 저... 나와... 같아요? 차마 곧이 곧대로 같은 병에 걸렸느냐고는 물을 수 없었다. 분뢰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말종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얼굴을 저렇게 해놓고 다닐까? 음... 혹시 병은 아니지만 얼굴에 뭔가 흉측한 것이... 이런 생각이 들자 말종은 더 이상 그에게 얼굴에 대해서 물 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 얼굴을 보았잖아? 말종은 한 순간에 여러번 생각을 바꾸다가 결국 묻고 말았 다.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요? 문득 분뢰수의 자세가 경직되었다가 풀렸다. 그러나 말종의 눈에는 그저 마냥 그런 모습으로 밖에는 보 이지 않았다. 절정고수(絶頂高手)만이 볼 수 있는 찰나의 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을 유심히 보는 말종을 보면서 분뢰수는 천천히 말했다. 나도 몰라. * * * 장강(長江)의 물결이 삼협(三峽)을 굽이치며 거센 기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느 곳이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강변에서 두 사람이 굽이 치는 장강을 보며 앉아 있었다. 높이 자라 사람 키만한 갈대가 가득 한 자리였다. 작은 꼬마와 산발한 사람. 누가 봐도 괴상한 행색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그들을 볼 다른 사람이 없었다. 왜 풀러보지 않지요? 말종은 벌써 사흘째 물어본 말을 또 묻고 있었다. 분뢰수는 사흘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종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아직 푸대자루에는 먹을 것이 잔뜩 있었다. 그것은 말종이 들 정도를 넘어선 아주 무거운 푸대자루가 되어 있었다. 사흘 전 아침 그들은 다시 천금장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이번에는 푸대자루를 최대한 벌렸을 뿐 아니라 주인잃은 이 불을 뜯어서 거대한, 말종이 생각하기에 자신정도 체격의 사 람이 한 스무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푸대자루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천금장을 깡그리 쓸어담았다고 할 수 있었 다. 또랑또랑 눈을 빛내는 말종에게 분뢰수는 사흘만에 대답을 해 주었다. 안풀러져. 그뿐이었다. 분뢰수는 다시 침묵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안풀러진다고요? 그럴리가? 어디 한번 봐도 되요? 마지막 말을 말종은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서 조심스럽게 물 었다. 자신이 다가간다는 것을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뢰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종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도무지 매듭이 보이지 않았다. 목까지 이어진 이 백포(白布)는 그냥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 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 옷도 벗겨지지 않았다. 손을 감싸고 있는 백포도 마찬가지였다. 누렇게 때가 끼인 백포. 단지 백포 한자락이 이토록 기묘한 것일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말종에게 던져진 수수께기였다. 도대체... 칼을 구해 끊어보면 안될까요? 어이없다는 말을 하려던 말종은 번쩍 떠오르는 생각을 곧장 말했다. 분뢰수는 그 말을 듣고서는 물끄러미 말종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등에서 몽둥이 자루같은 보따리를 끌러내렸다. 보따리가 펼쳐지면서 붓과 작은 벼루, 먹이 나왔다. 그 다음에도 계속 펼치자 말종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섬뜩하 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고 말았 다. 오싹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런 것이 나왔다. 처음에는 전신을 휘어잡는 그 느낌때문에 말종은 그것이 무 엇인지 제대로 볼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는 말종의 어깨를 분뢰수가 툭툭 쳐주었다. 그제서야 말종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칼 한자루. 단도(短刀)였다. 새까만 빛을 과시하는 한자 정도의 단도 한 자루가 바로 그 것의 정체였다. 겨우 칼 한자루가... 어이없어 하던 말종은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일어나는 섬뜩 함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야수(野獸)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분뢰수를 본 말종은 그렇게 자신을 보 는 것이 그가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 칼이다. 침묵을 깨며 분뢰수가 한마디를 했을 때, 말종은 다시 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도 보았다. * * * <묘한 꼬마다. 마라도(魔羅刀)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았다.> 第 十六 章 怪 疾 1 말종은 벌떡 일어났다. 꿈이 생생하게 뇌리에서 춤추고 있었다. 도저히 잊으려고 해도 잊기 힘든 꿈이었다. 그 칼때문이다... 말종은 자신이 그런 꿈을 꾼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분뢰수는 우두커니 서서 달을 보고 있었다. 거세게 춤추며 흘러내려가는 장강의 한쪽 귀퉁이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아래였다. 백제성은 저 멀리서 자태를 뽐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말종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다. 동냥을 갈 필요가 없는 지금 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 다. 마음 속에 펄떡거리며 뛰노는 것은 방금 전에 꾼 꿈이었다. 꿈속에서 말종은 분뢰수가 보여준 칼을 든채 마구 날뛰고 있었다. 악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말종은 그 칼로 사람들을 마구 베고 쪼개었다. 그 칼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말종을 괴롭힌 자들이 었다. 기억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던 그들이 말종이 생각하 기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는 꿈. 그 칼때문이야! 말종은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생각 했다. 분뢰수가 마라도라고 알려준 그 괴상한 칼로 강변의 돌멩이 를 치자 돌멩이는 그대로 쪼개졌다. 좀 큰 돌을 가져다가 찔러보자 그냥 그 안에 쑥 박혔다. 새까만 단도는 정말 날카로운 보도(寶刀)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말종을 놀라게 만든 악마같은 괴수가 그 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희미한 선(線)과 얼룩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그 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괴수였다. 눈으로 보아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대신에 마음 속을 그 대로 파고드는 그 괴이한 기세! 그것이 마라도에 있었다. 하지만... 저 사람의 백포는 베어지지 않았어. 말종은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털고 일어섰다. 자신을 분뢰수라 부르라는 그의 얼굴과 손을 감싼 백포는 그토록 날카로운 마라도에도 손상되지 않았다. 말종이 다가가자 분뢰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스름한 달빛아래 산발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흩어졌 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말종은 그냥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분뢰수는 말종이 깨었을 때부터 줄곧 그 자세 그대로 서 있 었다. 말종이 얼굴을 가린 헝겊이 바람에 날릴 듯이 펄럭거렸다. 손으로 움켜쥐어 다시 잘 묶는 말종을 보면서 분뢰수가 물 었다. 그 얼굴... 마음에 드는 거냐? 같은 말을 세 번째 듣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말종은 울부짖지도 않았고 분뢰수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음에 안들어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체념이 서린 말을 꺼내놓는 말종에게 분뢰수는 평생동안 절 대 잊을 수 없는 말을 해주었다. 왜 어떻게 못해? 분뢰수는 놀리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개가 달린 새가 자신이 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 럼 분뢰수는 말종이 당연히 고칠 수 있는 병을 치료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던 것이다. * * * 사람은 태어나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무리 적 어도 한번은 온다. 분뢰수는 내게 온 행운이었고, 나는 그 기 회를 잡은 것이다. * * * 마을이나 인가에 숨어드는 것은 주로 깊은 밤보다는 새벽이 었던 터에 말종은 동이 터오는 광경에 익숙했다. 밤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경계심이 커져서 생각보다 숨 어들어가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지만 날이 밝는 새벽이면 경 계심이 작아져 오히려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해져 있던 아침의 동트는 광경이 이 날은 유난 히도 새롭게 여기어졌다. 밤 사이에 분뢰수가 설명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고 뒤가 어떻게 되든 말종은 피해갈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장강에서는 되도록 멀어지는게 좋을 거에요. 왜? 언제나 가장 잘 하는 말이 왜였다. 말종은 분뢰수가 그렇듯이 천천히 말했다. 지금 장강을 따라서 괴질(怪疾)이 번창하고 있거든요. 그 때문에 사람들 인심도 아주 고약해져서 얻어먹기도 어렵구 요. 말종의 뇌리에는 요 며칠동안 굶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 이유는 괴질로 인해 마을마다 경계를 세우고 낯선 사람 을 극도로 회피하는 경향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속에서 헝겊쪼가리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가장 먼저 의심받을 짓이었다. 괴질에 걸린 사람을 구별하기위해 무조건 벗기고 보는 것이 었다. 심지어는 속옷까지 벗어보이라는 판이었으니 말종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굶을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상관없어. 분뢰수는 간단하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무시했다. 근본적으로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상관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장강을 주름잡는 수적(水賊) 조차도 이 일에 앞장서서 의협심(義俠心)을 보이겠다고 난리 라구요. 말종의 이야기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근본적으로 이 사나이는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러니 피한다는 생각같은 것은 어느 구석에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그걸 가르쳐 주려고요? 분뢰수는 붉게 물들었다가 파랗게 변해가는 하늘을 보면서 짧게 답했다. 아무곳이나. 말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것인지 진담을 하 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이 말종은 그를 한번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그는 자신과 비 슷하기도 하면서 제일 좋은 사람이었다. 분뢰수가 고른 장소는 그가 말한 그대로 아무 곳이었다. 강변을 따라 갈대밭이 끝나고 나오는 바위들의 밭이었다. 울퉁불퉁 언제 물살에 떠내려온 것처럼 깔려있는 바위들은 큰 것은 사람키보다 높았고 작은 것도 머리만한 것들이었다. 말종은 그런 돌밭에서 무얼 하자는 것인지 몰라 그저 분뢰 수가 하는 짓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분뢰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돌을 줍는 일이었다. 장난이었나? 별로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실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콰직! 줏어들었던 바위를 순식간에 박살내는 것을 보고 말종의 눈 은 저절로 동그랗게 변했다. 사람이 바위를 두 손 사이에 끼우고 눌러 부서지는 경우를 생전 처음 보았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칼, 마라도를 보는 눈으로 말종은 분뢰 수를 다시 보고 있었다. 무도(武道)란 것은 바로 싸움이다. 싸우지 않는 것은 무도 가 아니야. 그저 춤이지. 말종이 의아한 빛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도는 왜요? 배운다며? 되묻는 말종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분뢰수가 대꾸했다. 말종은 조금씩 기가 막히기 시작한 눈빛으로 또 물었다. 언제요? 분뢰수는 말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까. 제가 무도를 배운다고 했다고요? 분뢰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종은 자신과 분뢰수가 한 이야기를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언제 자신이 무공을 익힌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단지 이 더러운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그 자 가치료법(自家治療法)이란 걸 배우겠다고 한 기억은 있었다. 그게 바로 무공이란 말이었나? 그래. 말종의 생각에 분뢰수가 바로 대답해 왔다. 이제는 그것도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무공을 익힌 사람은 병도 들 지 않고 오래 산다는 건가요? 하지만 장강에서 제일간다는 고 수도 노환으로 죽었다던데요? 잘못 배웠겠지. 대답이 참 간단하고 수월하게 나왔다. 그리고 너무 태연자약한 대답이라 말종은 할말을 잃었다. 잘못 배웠기때문이라는데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멍하니 있는 말종 앞에서 분뢰수는 설명을 곁들여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이 타격기(打擊技)란 것까지는 기억 을 했으나 나중에 뭐라고 했는지는 말종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눈 앞에서 쩡쩡거리며 바위가 마구 부서지고 있는 광경에 넋을 꺼내놓고 구경하기 바빴던 것이다. 우엑! 말종은 현기증을 느끼고 토했다. 방금 전에 자신이 부딛힌 바위는 그대로 박살이 나 있었다. 말종이 부딛히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얼핏 기억에 남는, 타격기의 종류가 대분(大分)해서 두 가지란 말에 그 중 하나를 또 설명해 달라고 했을 뿐이었 다. 그래서 분뢰수가 격타(隔打)의 시범을 다시 보여준다며 말 종을 들어서 그대로 패대기질 치듯이 바위에 내리 꽂았고 그 바위는 지금 박살나 있었다. 분뢰수의 손은 바위와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그 사이에 말종이 끼어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분뢰수의 설명은 이것이 물체를 격(隔)한 타격기란 것이었 다. 그 다음에 분뢰수는 토하고 있는 말종에게 똑똑히 보라면서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역시 직접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장 정도 떨어진 거리의 바위가 깨지고 있었다. 설명은 이것이 공간을 격한 타격기란 것이었다. 토하면서도 말종은 이 설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잘 알아 듣고 있었다. 맞기는 자기 몸이 맞았는데 바위가 박살났으니 못알아 들으 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격타와 함께 타격기를 대분한다는 접타(接打) 의 시범이 있었다. 굳이 무슨 오묘한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분뢰수의 손에 닿 고 발에 밞힌 돌은 그냥 무조건 부서지는 광경이 말종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분뢰수는 다시 한번 더 설명을 했다. 모든 타격기는 이 격타와 접타가 혼재(混在)하여 이루어진 다. 이 마지막 말에 말종은 한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이대로 손이 깨질때까지 바위를 쳐야하나? 아니면 그냥 달 아나? 아마 말종이 달아난다 해도 분뢰수는 잡지 않을 것이다. 말종은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 * * <상당한 끈기가 있는 꼬마다.> 2 배가 고픈 사람들이 몰려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가고 있었다. 빠악! 쩌억!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지만 돌이 부서진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그런 음향이 아침내내 들려온 것이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 꼼짝도 하기 어려웠지만 가만이 있 다가 굶어죽기에는 배가 너무 고파 무조건 움직이는 중이었 다. 그러다가 꼬마귀신을 또 만난다면 뭔가 또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꼬마귀신을 잡아먹든지... 정오(正午)에 가까와지는 시간에 그들이 두 사람을 보았을 때 눈이 뒤집어진 것은 순전히 배고픔때문이었다. 말종은 끼니를 때우는 즐거움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 때 저쪽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는 멈칫 놀라고 말 았다. 그들이 어떻게 여기와 왔는지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 었다. 단지 그들이 보내는 탐욕스런 시선이 자신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포대자루에 가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들과 이미 여러날을 먹을 것을 둔 숨바꼭질을 한 말종이 었으니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 다. 게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말종의 귀에 들렸 을 때는 아침에 분뢰수가 보인 그런 힘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 이 한(恨)이 될 정도였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들은 말종의 포대자루를 두 개나 빼앗 어 갔었다. 못된 귀신이 우리 먹을 것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무엇때문에 그렇게 외쳤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얼굴이 울긋불긋하고 제멋대로 얽힌 작은 귀신이 입 에 한껏 털어넣는 것은 분명히 먹을 것이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겪어본 일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먹을 것이란 사실보다 그 먹을 것을 얼굴도 없는 큰 귀신하고 얼굴이 흉한 작은 귀신이 함께 먹고 있다는 것이 그들을 분노로 밀어넣고 있었다. 큰 고을에서는 그들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모두들 저렇게 먹 어대고 있었다. 이십 여명의 배고픈 사람들은 무섭게 달려들었다. 말종은 포대자루를 지켜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분뢰수가 그를 끼고 장강으로 뛰어든 것이다. 강물 위를 달리는 분뢰수는 틀림없는 귀신으로 비추어졌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리며 자신들의 전 리품을 챙기었다. 이제 그들은 굶어죽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사(餓死) 직전에 있던 이십 여 명은 독사(毒 死)하고 말았다. 뭐요? 독이 그대로 남아있다고요? 말종은 어이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분뢰수는 그들이 모두 독사할 것이라 이야기 한 것이다. 어째서... 하지만 우리도 먹었잖아요! 막 따지려던 말종은 문득 분뢰수가 자신의 독을 해독시켰다 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 그럼... 해독하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죽겠군요! 분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종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생각한 분뢰수와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칙칙하고 암울한 눈이 그저 무섭고 잔인한 쇳조각으로만 보 였다. 과연 그와 함께 다녀야 할까? 아무리 자신에게 던져진 지푸라기라지만 말종은 갈등했다. 그들은 그렇게 되어도 괜찮아. 분뢰수는 무뚝뚝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말종은 의혹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럴 때는 그저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바로 이 분뢰수라는 자임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자기들 아이를 이미 모두 먹어치운 자들이야. 독사하는 것 도 그들이 선택한 운명이지. 말종은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분뢰수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독에 죽는 것이 오히려 행운일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아이를 버리는 자를 말종은 절대 좋 게 보거나 관대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설혹 자신의 아이가 대풍창이라는 천형에 걸렸다해도 어머 니라면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 * * <점점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아이는 정말 잘 배운다.> * * * 장강의 수로맹(水路盟)은 매우 번잡했다. 지금 그들은 연일 몰아닥치는 장강 도처에서 벌어지는 변고 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에 수로맹같은 수적들이 걱정한다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번일에 개입하지 않으면 앞으로 장강 수로 에서 어떻게 행세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삼협에 자리한 수로맹의 무산분타(巫山分陀)도 바쁘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무산분타를 해가 뉘엇뉘엇 넘어갈 때 두 사람이 방문 했다. 무산분타주(巫山分陀主)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기근이 들면 어쩌고 괴질이 돌면 어쩐다는 것인가? 최근에 먹을 것이 떨어져 수적으로 돌아선 자들이 장강을 휘젓고 다니는 문제로 인해 수로맹은 골치를 썩고 있었다. 전통적인 수적들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강호의 방식대로 처 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단지 배고파서 강도질을 하겠다는 무지렁뱅이들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죽인다는 것도 힘든 것이 분타마다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 면 이 문제는 장강 전체에 한꺼번에 터진 일이었다. 괴질로 인해 이런 혼란이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 가? 그래서 해야할 일이 산더미같은 무산분타주 추풍교(追風蛟) 손노삼(孫老三)에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방문객이 반가울리 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수하를 이미 이십 여명이나 패대기를 쳐서 며칠 동안 거동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손노삼이 열이 뻗 치는 것은 당연했다. 때문에 수하가 놀래서 그에게 보고하는 순간에 손노삼은 대 뜸 자신의 박도(朴刀)를 움켜쥐고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의 손에 들린 박도는 날이 예리한 보도는 아니지만 장강 에서는 알아주는 칼이었다. 손노삼이 이 한자루의 무딘 칼로 삼협을 휘어잡았기 때문이 었다. 말종은 사시나무가 어떻게 떠는지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 었다. 분뢰수에게 맞고 쓰러진 수적들은 하나같이 인상이 고약해 보였다. 평소의 말종이었다면 멀리서 보고 일단 달아났을 그런 자들 인 것이다. 물론 그런 자들이 으악거리며 나뒹구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기는 했다. 평소 그렇게 보고싶던 장면이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리 센 사람이라도 어떻게 수백 명이 버글대는 이 수적의 본건지에 쳐들어올 생각을 했는지 말종은 우선 이 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뻣친 수염을 가득 달고서 보기에도 무식 하게 생긴 칼을 들고 나타난 손노삼을 보자 말종은 온몸이 굳 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야? 손노삼은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꾹 움켜쥐었다. 보통내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으나 이렇게 와서 개판을 만들 그런 자로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확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손노삼은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고수면 고수답게 고수나 찾아가 놀일이지 무엇하러 이런 수 적떼에게 덤빈단 말인가? 박도를 움켜쥔 손이 저절로 떨렸다. 너무 과하게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귀하는 무엇때문에 본맹에 시비를 거는 것이요? 손노삼의 입에서 일생에 열번도 채 나오지 않았던 정중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이 개뼉다귀야! 좀 봐주라! 속으로 저절로 욕이 나왔다. 기세등등하게 나서서 먼저 고 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삼협을 칼한자루로 휘어잡고 수로맹의 분타주 자리도 그 칼 한자루로 차지한 추풍교 손노삼이 어떻게 마주서기가 무섭게 굴복을 할 수 있는가? 최소한 뽑은 칼을 치울 명분이라도 필요한 것이다. 당신에게 한가지를 물어보려고 왔을 뿐이요. 비록 얼굴을 가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일말에 양심은 있는 고수라고 생각되었다. 무엇을 묻겠다는 거요? 무산파(巫山派)의 비응(飛鷹)이 지금 어디에 있소? 손노삼은 오늘 자신이 죽어야하는 날인가 아닌가 궁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죽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런 날에는 장강에서 낚시질을 해가지고 물고기를 날로 먹 으면 정말 맛있을 것이다. 거기에 백건아(白乾兒) 한병이면 신선도 부럽지 않을 것이 다. 그렇다고 친구를 배반할 수는 없지... 손노삼은 무산비응 동백기(董百忌)가 자신의 이런 노심초사 를 알아주지 못할 것이 좀 분했지만 칼을 쥔 손에 힘을 조금 빼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결사전(決死戰)의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가 분뢰수의 다음 한마디에 그만 들이쉬던 숨이 목에 걸리고 말았다. 정말 파동(巴東)에서 술장사하는 백노인이 그요? 케엑! 목에 걸린 숨을 토하느라 손노삼은 눈물까지 나왔다. 맞아! 어떻게 알았냐? 은근히 속으로 나오는 쾌재는 뒤로 제끼고 손노삼은 얼굴 가득히 경악을 싣고 물었다.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손노삼이 기대한 대로 방문객은 그냥 돌아갔다. 하지만 손노삼이 얼굴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그 혼자 방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말종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수적의 본거지를 쳐들어갈 적에는 무슨 비응이 어쩌고 하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거에요? 묻는 말종에게 분뢰수는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가끔은 이렇게 뜻밖의 수확도 있는 법이지. 정말 생각못했던 수확이었다. 무산비응 동백기가 죽지않고 살아있다면 신녀사(神女梭)의 수법도 아직 강호에 남아 있을 것이다. 말종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또 물었다. 아까 그 무식한 칼 든 사람한테서 알아낸 건가요? 분뢰수는 고개를 끄덕주었다. 아마 추풍도 손노삼은 상대방이 자신에게서 동백기의 이야 기를 알아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할 것이다. 단지 손노삼이 동백기에 대해 마음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떠 올렸던 것만으로도 분뢰수는 그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었던 것 이다. 3 분명히 그 손가 놈이야! 동백기는 저주했다. 입으로 사내대장부가 어쩌고 하며 떠든 것이 몽땅 공짜 술 을 먹어치우기 위한 헛소리임이 지금 밝혀진 셈이다. 추풍교 손노삼이 떠들지않았다면 저 요상한 녀석이 어떻게 지금 자신의 앞에서 저따위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무산비응 동백기가 당신이군. 상대방이 그렇게 묻는다고 곧이 곧대로 그렇소라고 할만큼 순진한 동백기는 아니었다. 강호에서 굴러먹은지가 몇년인가? 이럴 때는 손발이 날아갈 각오를 하고 무조건 시침을 떼는 것이었다. 예? 손님,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내일 동이 튼다 음에 다시 오시는게... 동백기는 말을 하다가 상대방의 눈빛이 붉어지는 것처럼 느 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살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기분이 묘해지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전같으면 저런 눈빛을 받았을 때 동백기는 당장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 상대방에게 도전했을 것이다. 그건 절대 안돼. 동백기야, 네가 한 짓을 잊은 것은 아니 겠지? 악몽에서 벗어나는 수백일의 밤을 한숨도 잘 수 없었던 기 억이 동백기의 뇌리에서 피어올랐다. 거기에는 산발하고 얼굴을 가린 요상한 자의 옆에 있는 작 은 요괴(妖怪)같은 녀석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난 단지 신녀사의 암기수법을 한번 보고자 할 뿐이오. 다시 흘러나온 말에 동백기는 이자가 틀림없이 자신을 제대 로 찾아왔다는 점을 명백하게 깨달았다. 예? 그러나 동백기의 입에서는 여전히 노망(老妄)을 일으키기 직전의 노인이 보이는 헤픈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종은 우스웠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상대앞에서 자신을 감추려고 온 갖 수단을 다 쓰는 저 노인의 모습은 우스울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자신을 감추어야하는 사연은 또 무엇일 까? 동백기라는 노인은 여전히 자신이 동백기가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분뢰수가 물러날 리는 없으니 결국은 동백기가 저 노인임은 밝혀질 것이다. 꼭 그렇게 하지않아도 좋을텐데... 말종은 분뢰수가 말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분뢰수는 그에게 무도란 싸움이며, 강한 자를 향한 끊임없 는 승부욕이 그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무산비응 동백기가 익힌 신녀사라는 암기수법은 근 오십년 간 가장 정교하고 뛰어난 것이라고도 했다. 동백기는 끊임없이 못알아 듣는 척 하며 자신의 눈앞에 선 요괴를 향해 자신이 무산이 어딘지도 모르는 파동 토박이임을 인식시키려고 했다. 더불어 자신의 이름은 동만복(董萬福)으로 무슨 기(忌)라는 불길한 글자가 이름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 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소리는 담벼락에 대고 연정(戀情)을 고백 하는 얼빠진 사춘기 소년의 넋두리와 비슷해지고 있었다. 진짜 질긴 놈이다! 속으로 감탄을 하면서 동백기는 상대방이 그나마 사파(邪 派)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다행으로 여기었다. 사파의 인물이라면 이렇게 얌전히 자신과 입씨름하지 않을 것이다. 대뜸 뒷방에 자고 있는 자기 딸을 인질로 삼으면 삼았지... 정말 그렇게 시침을 떼겠다면 나도 할 수 없지. 동백기는 그의 말투가 갑자기 상당히 거칠고 퉁명스럽게 변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분뢰수는 그대로 뒷방으로 난입하였다. 여태껏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노인네 흉내를 내다가 갑자기 실력을 보일 수는 없어서 멀뚱거리던 동백기는 분뢰수가 딸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보자 안색이 헤쓱해지고 말았다. 설마 옷을 찢거나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찌익하는 소리가 들리며 무릎아래 치 마가 찢겨나갔다. 동백기가 이제 열다섯이 된 딸에게 선물한 예쁜 옷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옷이 얼마나 비싼 것인가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무, 무슨 짓입니까? 외치는 동백기를 보면서 말종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낸 노망난 늙은이 흉내가 다 사라지고 남 은 것은 보통 노인으로서는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번쩍이는 눈 빛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맨살은 보이지 않겠지... 동백기는 속치마가 무사하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찾으려 했다. 이것도 마저 찢어야 자신이 누군지 말하겠나? 동백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요괴는 지금 자신의 딸 속치마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무엇인가 동백기의 머리를 쿵쿵 내리치는 기억이 있었다. 동백기의 이마에 땀방울이 사태를 이루었다. - 이놈도 마저 죽여야 조용해 지겠군. 아, 아빠... 자다가 목덜미를 잡힌 채 들려나온 딸이 정신을 차리고 겁 에 질려 하는 말이 들려왔다. 동백이의 딸은 이제서야 잠이 완전히 깬 것이다. - 으앙... 엄마... 둥둥 머리가 북처럼 울리면서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동백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면서 지금까지 병든 닭처럼 보이던 그의 몸이 우두둑거리며 건장하고 강인한 원래의 무산 비응의 진면목을 되찾았다. 그러나 동백기의 마음은 과거로 치달리고 있었다. 이건 업보(業報)야... 동백기는 울부짖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엄마를 찾는 아이... 그리고 그 미간에 박히는 암기... 그것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신녀사였다. 당연히 던진 것은 동백기 자신이었다. 그 악몽에서 벗어난 것은 이년전 그에게 가해진 고통때문이 었다. 자신이 저지른 참혹한 짓에 대하여 하늘이 당연히 내린 천 벌에 그는 감사했었다. 그래서 지금 이나마 살아있는 것이기도 했다. 당신 연혼전에 끌려갔었나? 분뢰수는 이미 동백기의 딸을 다시 잠들게 해놓았다. 새로운 사실이었다. 동백기는 이년 전 연혼전에 끌려갔었던 고수(高手)였다. 연혼전의 패망과 함께 풀려난 그는 완전히 강호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어 살려고 작심한 것이다. 우연히 안면이 있는 추풍교 손노삼은 그를 보고 알아보았지 만 그의 비밀을 지켜주었다. 천하에서 가장 정교한 신녀사는 두번 다시 쓸 수 없었다. 그가 저지른 죄악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바로 그 자신의 손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때 자신의 손에 죽은 아이는 어이없게도 딸과 비슷한 또 래였다. 동백기는 자신의 뱃속으로 마구 백건아를 부어넣었다. 이미 손노삼을 원망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 은 자기자신에 대한 저주였다. 사람이니 만치 실수도 할 수 있고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변명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동백기였다. 백건아를 세 병째 들이부었을 때 동백기의 눈에는 말종이 자신의 신녀사를 맞고 죽은 꼬마와 동일하게 보였다. 울부짖으며 잘못했다고 하는 동백기를 말종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저 마냥 울고 마냥 잘못했다는 것이다. 당황한 말종이 뒤로 물러서자 동백기는 덮석 말종을 안아왔 다. 그 바람에 헝겊이 벗겨져 내리기까지 했는데 동백기는 일그 러진 말종의 얼굴을 보고는 오히려 더 우렁찬 방성대곡(放聲 大哭)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모두 내 잘못이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빼고는 기묘하게도 말종의 마음에 접혀들어오는 소리였다. 분뢰수는 단지 우두커니 서서 동백기와 같이 우는 말종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말종이 물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같이 덮어놓고 서럽게 울어주기는 했으나 말종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까지 부둥켜 앉고 우는 모습이 아직도 말종의 뇌리에 꽉 틀어박혀 있었다. 애를 죽였어. 너만한 꼬마를. 말종은 갑자기 등골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만한 꼬마라면 자신과 같은 처지였을까? 동백기라는 자는 진짜 흉악한 자가 아니었을까? 몸이 저절로 떨렸다. 그것은 분뢰수의 이어지는 말에 조금 진정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자신이 일부러 그런 것은 물론 아니야. * * * <이상한 일이다... 그자의 고통이 왜 이리도 내게 즐겁게 느껴질까? 정말 통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자도 내가 누 군지 몰랐다.> 第 十七 章 사 람 과 사 람 1 파동을 떠나 장강을 타고 가는 여행은 즐거운 것이었다. 적어도 말종은 더할 나위없이 즐거웠다. 아무도 자신에게 간섭하는 자가 없었고 대화할 상대가 있었 다. 먹을 것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분뢰수는 먹을 것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말종을 감동시켰다. 마을에 숨어든다거나 외로이 떨어진 인가를 찾는다거나 하 는 일은 없었다. 분뢰수에게는 이 세상이 모두 자신의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 와 같았다. 전혀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먹 을 수 있는 음식이 된 것이다. 다만 무엇을 먹든지 분뢰수는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흐흐흐... 이놈! 네가 삼협의 추풍교를 우롱하고 떠난 놈 이냐? 가로막고 나선 자들은 둘이었다. 각자 하나씩의 쪽배를 타고 손에는 십자인(十字刃)을 들고 있었다. 한사람은 홍포(紅袍)를 입고 만형십자인(卍形十字刃)을 쥐 었고, 다른 한사람은 청포(靑袍)에 윤형십자인(輪形十字刃)을 쥐었다. 이들은 장강 수로맹에서 온 자들이었다. 홍포를 걸친 자는 홍의만탈(紅衣卍奪) 가룡수(賈龍修)였고 청포를 걸친 자는 청의륜마(靑衣輪魔) 용저기(容猪己)였다. 불과 석자 정도의 널판지를 대어 만든 쪽배위에 두 사람은 평지에 선 사람처럼 서 있었다. 폭이 불과 두 자이고 길이가 석자이니 그냥 판자조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종은 그들이 그런 것을 배라고 타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들이 소문으로 듣던 수상객(水上客)들이고 생각했다. 수상객은 수로맹의 고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것까지는 말종도 몰랐다. 아는 것은 오직 그들이 수상객 이라는 것 뿐이었다. 저렇게 작은 판자쪽을 타고 장강을 오르내리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다. 안그래도 본맹이 몹시 바쁘고 번잡한 터에 너같은 놈까지 설치다니! 아무리 우리가 바쁘더라도 뜨거운 맛을 보여주어야 겠다! 가룡수가 크게 외치면서 만형십자인을 회전시키기 시작했 다. 만자형(卍字形)의 십자인은 낫과 같은 칼날을 가지고 돌기 시작했다. 쉭, 쉭, 쉭, 쉬이이... 용저기도 음산한 미소를 띠우며 바퀴처럼 생긴 십자인을 돌 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두갈래가 되어서 울려퍼졌다. 하얀 광채를 뿌리며 도는 쇳덩어리는 말종의 눈을 핑핑돌게 만들었다. 어지러움이 일어나면서 말종은 아예 뱃전에 달라붙었다. 수로객이 탄 것만큼 작은 것은 아니나 분뢰수와 말종이 탄 것도 작은 조각배라고 표현하면 알맞은 크기였다. 뱃전에 말종이 달라붙자 조각배는 옆으로 기울어지려고 했 다. 분뢰수의 발이 천천히 다른 한쪽을 지긋이 밞아서 배의 균 형을 잡을 때 요란하게 울려퍼지던 십자인의 회전음(回轉音) 이 바로 말종의 머리위에서 일어났다. 분뢰수의 눈이 자신들로부터 떨어졌다 싶은 순간에 가룡수 와 용저기가 십자인을 던진 것이다. 가룡수의 만형십자인은 그대로 곧장 분뢰수의 목을 향해 요 란하게 날아왔지만 용저기의 윤형십자인은 낮게 깔리면서 수 면(水面)을 스치듯이 날아왔다. 파파팟! 물살이 요란하게 갈라졌다. 물가에 새들이 그 요란한 소리에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 다. 말종은 뱃전을 움켜쥔 채 뻣뻣해지고 말았다. 수면을 스치듯이 날고 있는 칼날이 바로 자신의 목을 겨눈 채 거리를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캉! 쇠와 쇠가 부딛히는 소리가 나면서 말종을 향해 날던 윤형 십자인은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그 위에 만형십자인이 겹쳐져서 가라앉는 것이 말종에게 보 였다. 두 개의 십자인은 모두 분쇄(分碎)되어 있었다. 귓전에는 분뢰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심심하지는 않지? * * * 제기랄! 흉년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 모 양인거야! 수로맹의 맹주 유봉월(劉蜂月)은 울화가 치밀었다. 장강 곳곳에 퍼진 괴질은 그들의 근거지마저도 위협하고 있 었다. 무엇보다도 육선문(六扇門)이 유봉월의 기분을 언잖게 했 다. 괴질이 발병(發病)한 원인을 찾고 해결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태워 없애고 괴질에 걸린 자는 다 죽이자고 덤 비는 것이었다. 수로맹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호족(豪族)의 눈으로 보면 그저 마을 몇 개 태우고 청소한 다고 생각하면 그만일지 몰라도 수로맹과 같은 강호의 인사 (人士)들에게는 그 마을 몇 개가 바로 활동의 근거지일 수 있 는 것이다. 더우기 만리장강을 제패한다는 수로맹의 신출귀몰함은 그렇 게 강가에서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이대로 괴질에 걸린 사람들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이번 장강의 사태에 강호의 인사들이 도움을 주 기 위해 많이 나서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육선문 쪽에서도 수로맹이 책임지기로 한 곳은 일단 왕래(往來)만을 금한다고 통보해왔다. 문제는 장강이 만리(萬里)라는 점이었다. 전부다 신경쓸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반면에 괴질은 만리에 걸쳐 골고루였다. 이런 저런 문제로 머리가 지근지근 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수상객 중에서 십대고수(十大高手)로 꼽힌다는 가룡수와 용저 기, 두 놈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장강을 타고 호북성을 지나고 있는 괴인을 건드렸다는 것이 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배첩을 올려 자신들의 패배를 설욕해 달라고 하소연 해 온 것이다. 이틀 전에 당했다고 했으니 지금은 상당히 내려와 있겠 지... 다른 때 같으면 이 두 놈을 그냥... 가룡수와 용저기의 기반은 수로맹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배후(背後)가 좋은 녀석들이다. 지금 하소연을 해온 것도 그 배후를 믿고 하는 것이 틀림없 었다. 무엇보다도 이 둘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자는 이 기회에 수로맹의 패권을 쥐려는 속셈도 보였다. 흥! 네놈들 정도로 수로맹을 다스릴 수 있을 것같으냐? 게 다가 이번 일에는 네 까짓 놈들이 생각도 못한 고수들의 청탁 이 있다는 걸 알면 아마 기절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입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수로맹 맹주의 체통이 영 엉망이 되기때문이었다. 아무리 구룡의 하나라곤 하지만 불과 십칠세 밖에 안된 애 송이에게 그냥 깨졌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구룡의 요청을 수로맹주 유봉월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 * * 퍽! 간단했다. 떼거지로 덤빈다고 해도 물 위에서 상대하기는 쉬운 일이었 다. 배를 박살내면 되니까... 마지막 배 한척이 그대로 가라앉으며 수로맹의 습격자들은 모두 헤엄쳐서 달아나고 있었다. 그나마 그들이 물질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었다. 이틀 전에 두 명의 수상객이후로 심심찮게 많은 자들이 자 꾸 나타나서 분뢰수와 말종의 조각배를 가로막았다. 물론 분뢰수의 안중에 그들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말종이 보기에도 수상객 이후에는 그들만큼 위협적인 자는 오지 않았다. 이상하군. 느닷없이 분뢰수가 중얼거렸다. 말종은 그가 거의 이틀만에 한 말에 얼른 대꾸하듯이 물었 다. 뭐가요? 분뢰수는 천천히 헤엄쳐 달아나고 있는 자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강변에 사람이 보이지를 않아. 이 말에 말종도 무엇이 이상한가를 깨달았다. 장강을 끼고 사는 여러 마을의 사람들에게 장강은 곧 생활 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동안 전부 분뢰수를 노리고 습격하는 자들만 이 있었다. 괴질이 번진 때문이겠지요. 말종은 곧 대답해주었다. 분뢰수는 고개를 저었다. 장강 전체가? 그럴리는 없어. 벌써 삼협에서 파동에 이르 기까지 거의 모든 나룻터에 사람이 없었어. 그 다음에 분뢰수는 곧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말종은 그의 눈빛이 모호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보다 눈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는 점을 이미 잘 아는 말종이었다. * * * <누군가가 나를 노리는가? 하지만 전혀 아무 기척도 느낄 수가 없다. 과연 한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만리에 달하는 강에 괴질을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2 그곳은 나중에 생각해도 정말 조그마한 나룻터였다. 그냥 지나치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곳에 분뢰수는 조각배를 대었다. 말종은 숨쉬기에 바빠서 그냥 따라내릴 뿐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배를 타고오는 동안 분뢰수는 한가지 토납법(吐納法)을 가 르쳐 주었다. 신기한 것은 그대로 숨을 쉬면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말종은 이 토납법을 즐기고 있었다. 몸에 가득 포만감이 느껴지는 기분과 손가락마디마다 퍼지 는 감각이 말종에게는 환락(歡樂)이었다. 제대로 잘 하는군. 그럼, 이제 보법(步法)이다. 정신없을 정도로 토납법에 열중하는 말종에게 분뢰수가 툭 던지듯이 한 말이었다. 그들이 파자구(破子口)에 닿을 때까지 말종은 이 보법도 즐 기게 되었다. 파자구는 나룻터에 비견될 만큼 조그만 마을이었다. 사람도 드물게 보이는 이 작은 마을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지금 장강을 휩쓸고 있는 괴질에 걸려버 린 것이다. 말종은 세상에서 자신의 병만큼 고약한 것은 절대 없으리라 는 생각을 이 파자구에서 깨끗이 씻어버렸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수척한 모습, 산 사람이라기 보다는 백 골에 씌워놓는 살가죽 덩어리라고 생각하기가 더 쉬워 보이게 만드는 괴질이었다. 구토(嘔吐)가 저절로 나오는 것을 말종은 한가지 생각으로 겨우 참을 수 있었다. 너는 잘났냐? 말종, 넌 썩어 문드러지는 사람이잖아... 말종이 이 괴질에 걸린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종이 본 것은 병의 초기증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 파자구에서야 말종은 괴질에 걸린 사람이 왜 그토록 심 한 배척대상이 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파자구의 초입에서 본 사람들은 거의 꼼짝도 못한 채 그 몰 골로 모두 누워 있기만 했다. 묘하군. 불쑥 분뢰수가 한마디 했다. 말종은 어리둥절하다가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고 무엇이 묘 한지 이해했다. 깨끗하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깨끗하게 있을 수 있을까? 아마 안될 것이다. 누군가가 돌보아 주기전에는 어림도 없 다는 것이 상식이다. 파자구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누워있는 병 자들은 모두 깨끗했다. 비록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잘 씻기워져 있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는 저녁 무렵까지 파자구에서 혼수상태인 병자 들을 구경하며 보내고서 풀렸다. 귀신이야! 소년은 말종의 맨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소리를 질러댔다. 땀이 배어나오고 있기에 구석에 숨어서 닦던 말종도 놀라 부리나케 뛰었다. 분뢰수는 그냥 마을이 다 보이는 곳에 묵묵히 서서 저녁놀 을 마주보고 있었다. 말종은 분뢰수에게 딱 달라 붙어서야 비로소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기가 막혀서 소리지른 소년을 노려보았다. 괴질에 걸려 뼈만 앙상하고 누렇게 뜬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아직도 고래고래 귀신이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 었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귀신이면 넌 시체다! 속으로는 마구 욕을 하지만 결국 입밖으로는 한마디도 안나 왔다. 자신이 병에 일부러 걸리지 않았듯이 저 빌어먹을 자식도 일부러 괴질에 걸리지 않았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년의 등뒤에는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파자구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돌아온 것이다. 고칠(古七)! 왜 또 호들갑이니? 난리를 치던 소년 고칠은 누군가가 말한 한마디에 조용해졌 다. 대부분이 괴질에 걸린 병자인 사람들 사이로 백의(白衣)를 걸친 소녀(小女)가 나타났다. 분뢰수와 말종은 그 소녀를 보고 의외란 생각을 하였다. 말종은 병자들 사이를 가르고 갑자기 나타난 소녀가 특이하 게 비추어보여 놀랐다. 굉장히 귀엽다... 이것이 말종이 운령(雲靈)에게서 처음 받은 인상이었다. 운소저! 저놈은 진짜 귀신이에요! 얼굴이 울긋불긋... 고칠, 나도 눈이 있다는 것을 잊었니? 옥쟁반에 구슬을 굴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목소리였다. 찰랑거리는 목소리는 무슨 벼락이라도 되는 듯이 고칠을 조 용하게 만들었다. 운령은 아무리 보아도 십대(十代)로 보였다. 누구시지요? 말을 하면서 운령은 분뢰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무예를 모르는 듯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이제 겨우 보법을 배운 말종이지만 요 열흘간 분뢰수를 공 격하던 자를 보면서 보는 눈이 생긴 다음이라 단번에 그걸 알 아볼 수가 있었다. 지나가던 나그네요. 분뢰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운령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단지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대신 환영해도 되겠어요, 촌장님? 촌장이라 불리운 노인은 고칠과 별다를게 없이 앙상하게 말 라 있었다. 그러나 그 노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고칠보다 병이 얕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운소저가 원한다면 좋소. 전적으로 한 사람을 믿을 때 보이는 깊은 신뢰가 촌장노인 의 말에서 느껴지자 말종은 다시 이 귀여운 소녀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종은 잘 알 고 있는 때문이었다. 고칠이 다시 소리쳤다. 하지만, 저녀석은 귀신이라구요! 운령은 돌아서면서 소리질렀다. 고칠, 너 자꾸 무례하게 굴거니? 짐짓 화난 태도를 보이자 고칠은 금방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런 화난 운령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화가 났을 거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장내에 아무도 없었다. 잠깐 보여주지 않을래? 음... 고칠이 좀 경망스러워 기분 나쁘게 굴었어도 용서해줘. 그다지 나쁜 아이는 아니거든. 말종은 아무소리도 못하고 물끄러미 운령을 보고만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여 빈집을 한채 내주고 운령은 따로이 들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이 소녀 한 사람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이 말종에게는 못내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분뢰수는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듯 그저 덤덤한 태도 일 뿐이었다. 말종은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했다. 이 운소저라는 아가씨는 겁이 없는지 아니면 호랑이 간을 빼먹은 것이 분명했다. 말종이 보기에도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닌 마을 사람들을 향 해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어지간히 대담하지 않고는 불가 능한 일이었다. 놀랄거에요. 말종은 한마디를 생각끝에 말했다. 운령은 웃었다. 꼭 매화가 한꺼번에 피는 것 같네...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겨울에 얼어 죽을 뻔하다가 본 매화(梅花)가 어째서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대풍창에 내가 얼마나 놀라는지 한번 보지 않을래? 말종은 태어나서 두번째로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이 두번째 충격은 첫번째 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 다. * * * <도대체 내가 이 소녀를 언제 보았을까? 도무지 기억이 나 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눈에 익은 소녀다.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닐까?> 3 파자구는 참으로 분주하게 돌아가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것이 말종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신기하게 보였다. 마을 전체에 괴질이 감돌아 모두 병자인 이 마을이 어떻게 이렇게 재빠르게 돌아가는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새벽에 이들은 모두 일어나 물가로 나갔다. 말종은 그들이 그렇게 새벽부터 설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가고 남아 있 는 병자들을 보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하는지 곧 이해가 갔 다. 새벽부터 그들의 몸은 누렇게 변해가면서 온몸에서 고름같 은 땀을 흘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에 진동하는 악취(惡臭)... 말종은 이 괴질이 무조건 배척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를 깨 달았다. 물가에 간 자들은 그런 악취를 내는 고름을 씻어내고 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모두 작은 그릇을 하나씩 들고서는 또 물가로 갔다. 돌아올 때 그들은 손에 든 그릇에 물을 조금씩 담아오고 있 었다. 그 물을 준비된 큰 항아리에 담아 놓는 것이다. 말종은 그 다음에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들을 씻어주 리라고 생각했다. 처음 이 파자구에 들어섰을 때 병자들이 깨끗하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을 퍼온 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많아야 한번에서 두 번 정도를 왕복하고 나면 꼼짝을 못하 는 것이다. 그렇게 픽픽 쓰러지는 그들은 그 다음에 겨우 그늘로 들어 가 햇빛을 피하면서 오들오들 떠는 것이다. 그들의 몸은 닦아낸 후인데도 여전히 심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저들을 씻겨주는 거지? 당연한 의문은 곧 풀렸다. 그들이 그릇에 물을 담아오는 동안 큰 솥에다가 약재를 넣 고 끓인 운령이 마포(麻布)와 단지를 가지고 항아리의 물을 푸고 있었다. 말종은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이런 병자들을 과연 저 갸날퍼 보이는 소녀가 닦아준단 말 인가? 저렇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자들을? 자신들의 형제자매 앞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누워만 있을 뿐 아무 말도 않고 있는 저들을 운소저가 왜 닦아 주어 야 하는가? 말종이 생각하는 동안 이미 운령은 사람들의 고름이 엉긴 몸을 마포로 닦아 주고 있었다. 사시(巳時)가 되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운령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모두 씻겨주었다. 물을 퍼오고 쓰러져 있던 자들은 조금씩 기운을 회복한 듯 솥에 끓인 약재를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가에 가서 그릇에 물을 받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저 물은 턱도 없이 모자라잖아? 게다가 항아리는 열 개가 넘고 저렇게 큰데... 가만히 보고 있던 말종은 생각을 거듭할 수록 이상하게 여 길 수 밖에 없었다. 정오(正午)는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다. 줄곧 분주한 사람들은 또 쭈그리고 앉아서 쉬고 있었다. 말종은 운령이 마련해준 집 창가에서 계속 파자구의 돌아가 는 사정을 보고 있었다. 분뢰수는 집안 침상 위에 어제 밤부터 정좌(正坐)하고 앉아 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종은 그래서 한편으로 밖을 보고 한편으로 그가 일어나기 를 기다리는 것이다. 말종의 마음 속에는 의문이 많았지만 분뢰수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해결될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그들의 속마음을 볼 수 있는 분뢰수 인 것이다. 운령은 약재를 골고루 움직이지 않는 병자에게 먹이고 있었 다. 물을 푸고 약재를 조금씩 마시고... 말종이 본 것은 오직 이것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운령은 그들을 씻겨주고 닦아주었다.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할까? 말종은 자연히 궁금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식사를 하겠지. 등뒤에서 늘 같은 분뢰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종이 고개를 돌려보자 분뢰수는 암울한 눈빛으로 마을을 가로질러 오는 운령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보자기로 덮여 있었으나 본능적으로 말종은 그것이 먹을 음 0 식임을 간파(看破)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프겠네요. 미안해요. 좀 바빠서요. 살짝 웃으며 말하는 운령을 말종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 다. 어제 그녀는 말종을 놀랄 만큼 놀라게 했고 오늘 새벽부터 충분히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토록 세심하게 또 신경써 주리라고는 생각 못한 것이다. 꺼내놓은 음식은 곧 작은 탁자위로 올라갔고 운령은 말종을 쳐다보았다. 왜? 내 얼굴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써 있어? 말종은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녜요! 대답은 번개처럼 나왔으나 오히려 그게 더 무안해지는 것이 다. 운령은 킥킥거리고 웃었다. 살짝 드러난 이를 보면서 말종은 또다시 매화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 생각하기 싫은 하얀 눈까지 생각났다. 백설(白雪)이 온천지를 가득 채울 때, 말종이 가장 싫어하 는 때이다. 얼어죽기 딱 좋은 때이니까! 하지만 운령이 웃는 모습은 그 때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핀 매화... 저 여자는 왜 날 무서워 하지 않지요? 가만히 운령이 돌아나간 다음의 빈 자리를 멍하니 보던 말 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무서운데? 말종은 언제나와 같은 분뢰수의 말투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렇게 생겼잖아요. 그러면서 헝겊을 다시 풀러내리고 얼굴을 분뢰수에게 들이 대었다. 자신이 보기싫어서 남에게도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지금 이렇게 내미는 것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쓰는 비장의 수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뢰수에게 이러는 것은 단지 심술났다는 표시에 지 나지 않았다. 저들보다 나은데. 분뢰수는 툭 하니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확실히 운령은 말종을 무서워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 여자라면 어떻게 저런 괴질병에 걸린 자들 틈에 있겠 는가? 냄새나는 악취... 보기 끔찍한 몰골... 나하고 저들하고 누가 더 나을까? 결국 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까지 떠올랐다. 네가 나아. 멍청한 표정으로 말종이 분뢰수를 보았다. 항상 보이는 쇳조각같은 눈이 암울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 다. 말종은 그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또 침묵으로 접어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깐만요! 왜요? 왜 내가 더 낫다는 거에요? 묻고 싶지 않았지만 말종은 묻고 있었다. 나아서 뭘 어째겠다는 건가? 그래봐야 흉측한 몰골이고 끔찍한 꼬락서니가 아닌가? 묻고나서야 말종은 자책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걸 물었는지 한심했다. 이런 한심한 물음에 대답을 누가 하겠는가? 뜻밖에도 분뢰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 이유도 말종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었다. 넌 저들을 생각해주잖아. 칙칙한 눈빛이 사라지며 분뢰수는 다시 정좌하고 있었다. 고칠은 괴물 꼬마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운소저는 언제나 처럼 마음이 좋아 그냥 넘어갈 지 모르지 만 고칠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왜 저따위 자식이 우리 마을에 온 거야? 고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는 전혀 짐작도 못하고 가까 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칠은 손에 슬쩍 쥔 나무토막을 확인했다. 얼굴을 가리는 헝겊을 들추어서 망신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고칠에게 조금씩 다가오던 괴물 꼬마가 헝겊을 통해 들릴락 말락 말을 걸었다. 이봐, 뭐좀 물어도 되겠어? 고칠은 고개를 홱 돌렸다. 최대한 깔보는 시선으로 고칠은 고개를 저었다. 너까짓 거하고 할 말 없어! 말종은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비척거리며 가는 고칠을 보 고만 있었다. 고개도 제대로 못돌리고 비실거리는 녀석조차도 말종을 무 시하고 있었다. 말종은 마을 촌장노인이 생각났다. 그라면 저런 식으로는 대하지 않을 것이다. 촌장노인이 어디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누워 꼼짝도 못하는 병자들과 함께 있었다. 말종은 그리고 갔다. 뒤에 다시 생각해보고 정말 바보짓이 라고 자조(自嘲)했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소녀는 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 마을에 머물러 있는가? 왜 다른 사람은 다 병들어 있는데 저 소녀만은 멀쩡한가? 불과 하루 밤동안 궁금증이 쌓이고 쌓여서 누군가에게 묻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오랜 삶이 가져다 주는 경험이 생기면 사람은 나름대로의 통찰력이 생긴다. 그런 노인들은 어떤 상황이든 대강은 각오를 하고 받아들인 다. 그래서 말종을 보는 촌장노인은 고칠처럼 신경질적이지는 않았다. 단지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눈을 감았다. 우리가 너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지마라. 너처럼 천벌을 받은 자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우리가 운소저의 기분을 상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란 점을 명심해! 그리고... 되도 록이면 빨리 이 마을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군. 결국 다른 자에게는 말도 못붙이고 말았다. * * * <이제는 알았을까? 자신처럼 겸손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직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第 十八 章 小 鳳 凰 1 언잖은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말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분뢰수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촌장노인의 말도 그다지 틀렸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자신 이 한심스러웠다. 이 파자구에 사는 사람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들이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괴질은 평생 구경 도 못하고 살 수도 있었을 테니까. 아니 그들이 사는 파자구가 장강근처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불운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종은 어디에 있더라도 이 빌어먹을 병에서 벗어나 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단지 운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 받기를 원할 수가 있겠는가? 하루 해가 넘어가고 있는 동안 말종은 그렇게 앉아있었다. 저녁 노을이 지면서 분뢰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로 가자는지 몰랐지만 말종은 그냥 따라나섰다. 어찌 되었든 이 사나이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자이다. 그리고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운소저를 제외하면 세상에 유일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어디로 자신을 데리고 가든지 그것은 그의 마음이지만 결코 거부하고 싶지 않은 말종이었다. 단지 저녁노을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분뢰수는 멍하니 저녁놀을 보고만 있는 것이다. 말종도 다른 생각은 접어둔 채 그저 저녁 노을을 바라보려 고 할 때였다. 그 저녁 놀을 등에 업고 노을만큼 엄청난 보따리를 등에 진 사람이 파자구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종은 대충 어림잡아 보았다. 분뢰수와 함께 천금장에 있는 것을 싹쓸이 했을 때 포대자 루가 저만큼 컸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클까? 얼핏보아서도 건장한 사내가 파자구의 한 복판에 이르렀을 때 운령이 그를 마중하고 있었다. 말종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굴까요? 자신은 들을 수 없는 거리라도 분뢰수라면 들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분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말종도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울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저자는 누구인가? 왜 운소저는 저렇게 뛰어나가서 저자를 맞이하는 것인가? 마을 사람은 그 주변에 모여들어 그 사나이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자신과 분뢰수가 들어올 때는 그토록 차가운 시선을 보내더 니! 오빠야. 말종은 갑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굳이 분뢰수의 한마디를 들은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쇳조각같은 눈으로 유심히 자신을 보고 있어서도 아니 었다. 이제는 자신을 놀리고 있는 눈빛이라는 것을 알기에 약이 올라서도 아니었다. 왜 질투를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누이로 보기에는 아주 잘 어울리는 오빠와 누이동생이었 다. 그의 이름은 운고(雲高)라고 했다. 그는 분뢰수를 보고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나서 유감이오. 말종은 어이가 없었다. 만나서 유감이라니?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첫마디는 처음뵙겠소가 틀림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유감이라고 하는지 말종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을 때 운고가 입을 열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우리 아버님을 보신 적이 있소? 훤칠한 키에 수려한 몸매, 그리고 누가 보아도 대장부다운 태도. 눈섭 끝이 치켜올라가고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번쩍이며 콧 날이 쭉 뻗었다는 점이 없으면 그야말로 풍류공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이 있기에 그는 한눈에 보아도 대단한 청년 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말종은 그런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 그렇게 부러워하는 자신이 창피했다. 하필이면 어쩌다가 그 분 눈에 띄었소? 고개를 끄덕이는 분뢰수에게 운고가 한 말이었다. 그는 다분히 분뢰수를 책망하는 기색이었다. 운고의 아버지는 곤륜운궁, 운부의 주인인 운해룡이었다. 분뢰수는 묵묵히 그저 그렇게 운고를 보고만 있었다. 나더러 꼭 당신과 한번 싸워보라고 성화를 하시더군요. 운고의 말이 떨어지자 말종은 자신도 모르게 운령을 보고 다시 분뢰수를 보았다. 분뢰수가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면? 혹시 저 소녀가 슬퍼하지는 않을까? 미안하지만 싸우고 싶더라도 좀 기다려 주면 안되겠소? 난 성질이 급한 편이라 싸우면 앞뒤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당 신과 싸우면 의형제들에게 미안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하 는 말이오. 운고는 이렇게 말했다. 분뢰수는 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될까요? 말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깥에서는 달빛 아래 모두가 더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무엇으로 만든 음식인지 매운 기운이 가득하게 파자구를 점 령해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 피워진 이상한 향. 향냄새가 자욱하게 마을 곳곳에 퍼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편 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눕고 있었다. 운고가 가져온 향과 음식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바닥이 나고 만 것이다. 마음씨 고운 누이동생이 이런 오빠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다 면 얼마나 괴로워할까? 말종은 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강하다. 분뢰수는 짧게 끊어 말했다. 아저씨보다는 약하잖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종이 속삭였다. 그는 구룡 가운데 한 사람이야! 구룡이 뭔데요? 분뢰수는 쇳조각같은 눈동자로 말종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안절부절하면서 겨우 입을 연 말종이었다. 잠시 말종을 보던 분뢰수가 말했다. 곤륜파라는 이름을 알지? 모를리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영단묘약(靈丹妙藥)이란 것이 혹시 자신의 천 형을 치료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공상을 해본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하지만 곤륜파라는 신선들의 모임은 언제나 꿈속에서나 본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말종에게 분뢰수가 말했다. 그가 곤륜파다. 간혹 사람들은 자신이 꿈에서 본 일이 사실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말종은 아직까지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말종이 꿈에서 꾸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곤륜파의 고수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저렇게 식량이나 날라주고 있는 가? 아마도 누이동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이 곤륜파이니 저 운소저도 곤륜파인가? 말종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구룡은 당대에 그야말로 막강한 아홉 명의 신진(新進) 고수 라고 했다. 사람들이 그런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분뢰수의 말속에서 내 가 그보다 낫다는 자부심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단지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은 선명하 게 느껴졌다. 아마, 누가 말려도 싸우는 것은 못말리겠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것처럼 엉망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때문에 이런 생각에 젖어드는지 부터가 말종에게는 수수께끼였다. 분뢰수를 만난지 이제 겨우 보름? 배가 불러서야... 평소 자신이 하던 일이라고는 어떻게 배를 채우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전부였다. 단지 하루를 살아나가기 위해서 말종은 모든 생각을 집중시 키며 살아왔다. 배를 채우는 문제는 곧장 목숨을 건 일의 연속이었다. 돌에 맞아 죽느냐... 굶어죽느냐... 그 갈림길에서, 사람들의 냉대(冷待)속에서, 인간말종(人間 末種)의 취급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온 소년이었다. * * * <잊었던 감정을 되찾고 있다... 행복할까?> 2 저곳이 파자구입니다. 그는 최대한 경의(敬意)를 표하면서 말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그런 경의를 받는다고 좋아할 인물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항상 그런 사람들로 가득차 있으니 전혀 고마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홍의만탈 가룡수는 청의륜 마 용저기를 덤으로 해서 당장 새벽이 오기 전에 고깃밥이 되 어 버릴 것이다. 그자는 저곳으로 들어갔읍니다. 가룡수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용저기와 가룡수가 배에 오른 후에 단 한번도 무릎을 펼 수 없었다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듯 그는 무심히 강을 내려다 보 고 있을 따름이었다. 유봉월... 이 개새끼... 수로맹주 유봉월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를 몰아내려는데 협조한 것도 좋았다. 일부러 분뢰수라는 작자에게 시비를 건 것도 괜찮았다. 그렇게 해서 수로맹주라고 거들먹거리는 유봉월을 귀찮게 굴고 아울러 파멸(破滅)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한때는 그들과 함께 수상객으로 불리웠던 놈이 갑작스러운 기연(奇緣)으로 수로맹주까지 된 것에 대한 질투심도 없다고 는 할 수 없었다. 과연 그들이 한 행동은 효과가 있어서 한사람의 인원이 아 쉬운 유봉월은 계속해서 괴인 분뢰수에게 자객을 보내었다. 단지 그들이 모두 수로맹의 삼류고수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가룡수와 용저기는 완전히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유봉월의 그런 태도는 성의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따졌다. 두번째 배첩을 보냈을 때 유봉월은 자신이 상대를 너무 얕 잡아 보아서 미안하다며 자신이 아끼는 절정고수(絶頂高手)를 보내 그 괴인을 혼내주겠다고 답해왔다. 그가 아끼는 절정고수란 말에 그들은 유봉월이 도대체 누구 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서 동원 할 수 있는 눈과 귀는 다 동원했었다. 그래서 마침내 동정호(洞庭湖) 수룡방(水龍幇)의 방주인 오 극헌(吳極軒)이 가까이 와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을 알자 가룡수는 코웃음쳤다. 오극헌을 사람들은 수룡도(水龍刀)라고 부르며 대단한 고수 로 생각하지만 그는 근 삼년 가량을 자리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다고 해도 자신들만한 능력을 보이리라고는 생 각되지 않았다. 유봉월이 답장에 자신이 파견한 절정고수의 길안내를 부탁 했을 때 그들이 쾌히 승낙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오극헌 정도로는 절대 분뢰수를 꺽을 수 없다! 이미 곤륜과 아미, 청성같은 대문파(大門派)를 굴복시킨 그 를 가전도법(家傳刀法)이나 겨우 익힌 오극헌이 어떻게 꺽겠 는가? 그들은 오극헌이 오면 실컷 데리고 놀려주다 분뢰수에게 던 져줄 생각이었다. 오극헌이 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극헌은 분뢰수를 물리치기 위해 파견된 절정고수의 길안 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정호에서부터 이곳까지. 그리고 이곳에서부터는 그들이 길안내를 맡아야 하는 것이 다. 유봉월... 이 빌어먹을 자식! 네가 파견을 했다고? 아마도 무릎꿇고 애걸복걸했다면 맞는 말일 것이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독왕(毒王) 곡인도(谷人屠) 앞에서 그저 무릎을 꿇고 이제부터의 길안내를 맡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봉월이 어떻게 곡인도같은 인물을 보낼 수 있었는지 그들 에게는 불가사의한 일로만 여겨졌다. 지금 독왕 곡인도는 천천히 파자구를 향해 다가가는 배위에 서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곡인도는 천하오패중에서도 가장 독한 사람이었다. * * * 운고는 눈쌀을 찌푸렸다. 손에 든 전서(傳書)를 보고 낯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운령은 옆에서 그런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다가 팔을 붙들었 다. 침착하게 행동하세요. 운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운령을 보았다. 난 언제나 침착해! 치,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요? 일부러 치기(稚氣)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운령을 보면서 운 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그의 기분이 언잖다 싶으면 운령은 저런 말로 자신 을 위로해주고는 했다. 그런 모습을 못 본 것이 근 이년이 되었나? 무슨 일인데요? 운령은 다시 물었다. 지혜로운 누이였다. 자신처럼 성급하고 막되먹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덮어놓고 가출한 자신이 걱정된다고 따라올 만큼 대담한 면도 있기는 했지만. 별거 아니다. 잠깐 다녀올 곳이 생겼어. 그 말을 끝으로 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운령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처음 운부(雲府)를 떠날 때와 비교하면 운고의 성격은 상당 히 침착해지고 온건해 진 셈이었다. 모두가 다른 여덞 의형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운고는 전보다 훨씬 치밀해졌고 더욱 이지적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이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되는 일을 감정에 맡 겨 판단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 운고가 잠시 다녀온다고 가는 길을 운령은 막을 수 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몰라. 보고있던 말종은 운고가 홀로 파자구를 떠나는 까닭을 분뢰 수에게 물었다. 그러나 즉각 돌아온 대답. 분뢰수가 운고에게 별 흥미가 없다는 의미였다. 말종은 그가 이미 운고의 무공을 다 안다고 하며 심드렁해 하던 모습을 기억해 내었다. 그러나 아직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운령에게 관심을 갖느라고 운고가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휴우!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말종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 을 지워버렸다. 번잡해져서 이것저것 궁리하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분뢰수가 가르쳐준 토납법을 시행하면서 방안을 왔다갔다 하며 보법을 연습했다. 그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말종은 다음 날 아침까지 밤새도록 방안을 수백번 왕복을 하고 말았다. * * * 날이 밝아왔다. 파자구에도 어김없이 떠오른 태양이 보였다. 밤새 방안을 걸었음에도 말종은 전혀 졸립지가 않았다. 아침이 다가오는 새벽녁부터 다시 파자구는 부산한 움직임 을 보이고 있었다. 운령은 어제보다 더 바빴다. 운고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말종은 슬쩍 분뢰수에게 틈나는대로 물었지만 분뢰수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령이 바쁘게 고름에 절은 마포를 모으고 냇가로 가져간 다음이었다. 촌장노인이 비칠거리며 분뢰수와 말종이 있는 작은 집으로 왔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얼굴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서 해골에 누런 거죽을 씌워놓은 모습. 말종은 그 모습을 하고 위엄을 부리려는 그가 우스웠지만 웃지는 않았다. 자신의 용모도 그에 못지 않음을 잘알고 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촌장노인은 자신의 용모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 다. 다 같은 처지이니 굳이 여러말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 오. 떠나시오. 간단한 말이었다. 그 뒤로 좀 긴 말이 이어졌지만 결론 그만 떠나달라는 것이 다. 말종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이 있었다. 촌장노인은 무엇때문에 다 같은 처지 란 말을 썼을까? * * * <내가 기다리는 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 * * 정오가 다 되었다. 촌장노인이 통고를 한 뒤로 분뢰수와 말종은 그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예 무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창가에 앉아 밖과 안을 오가는 시선을 던지던 말종은 흠칫 하고 놀랐다. 분뢰수는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말종은 뒤따랐다. 차가운 시선들이 두 사람을 스쳐다녔다. 그가 떠나기로 했다면 말종도 떠날 것이다. 저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말종이 알바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은 높은 곳을 찾아 조그마한 파자구를 내려다 볼 뿐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파자구의 한쪽 높은 지형은 내려다 보기 좋은 위치였다. 한눈에 파자구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장강도 보였다. 거기에는 화려한 모양의 범선(帆船)이 떠있었다. 저런 범선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그 범선에서 누군가가 작은 배를 몰고 내리고 있었다. 범선을 그냥 몰고서는 파자구의 작은 나룻터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부지런히 허리를 굽히면서 쫒배 위에서 까지 위엄을 부리려는 독왕 곡인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었 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일 뿐이지 감히 표정 으로라도 드러낼 수 있는 심정이 아니었다. 우라질...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나서는 뭐? 아침?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차까지 한잔 음미(吟味)하고 쪽배에 탄 곡인도가 쫄쫄 굶고 기다린 그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장강 수상객에게 사공질까지 시키다니... 장강 수상객 중 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라있는 가룡수와 용저 기가 모는 쪽배를 타고 천하오패의 하나인 독왕 곡인도는 파 자구로 향하고 있었다. 저... 누구지요? 말종은 그들이 파자구를 향해 오는 것을 보며 걱정이 되었 다.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아니나 멀리서 보아도 저렇게 화려 한 범선에서 내린 자가 무엇때문에 파자구로 오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혹시 그들은 이 파자구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 불이라도 지르게 하면? 괴질이 창궐(猖獗)한 파자구는 그렇게 하기에 정말 좋은 마 을이었다. * * * <저놈들은 누굴까? 내가 기다리던 놈들인가?> * * * 파자구의 참상이 한눈에 들어왔을 때 가룡수는 토하고 싶어 서 고개를 돌렸다. 용저기의 인상도 자신과 별로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그럴 담량이 없었다. 그래서 넘어오는 쓴 물을 억지로 삼키고 있었다. 쓸만한 병이로군. 독왕 곡인도처럼 그들은 감탄하고 싶지 않았다. 이 따위 것을 볼 마음은 한조각도 없었다. 온몸에 배어나오는 고름... 앙상한 몰골... 그냥 뼈다귀에 씌워놓는 가죽인가? 게다가 비칠거리면서 달아나는 모습들! 가룡수와 용저기는 태어나서 본 수많은 비참한 것들이 사실 별로 비참하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유봉월... 미친 놈! 이런 것을 해결하겠다고? 새삼 수로맹주의 담량이 쇳덩어리로 생각되는 그들이었다. 파자구는 작은 혼란으로 가득차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 아주 단순하게 행동했다. 모조리 운령에게로 달려간 것이다. 적어도 운령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막강한 힘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그들은 운령을 앞세우고 있었다. 운령은 그들의 기대처럼 뒤로 물러서거나 하지 않고 파자구 의 침입자들 앞에 섰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가룡수와 용저기는 자신들도 모르게 곡인도를 쳐다보았다. 정말 궁금한 것이다. 이런 마을에 어떻게 저런 고운 소저(小姐)가 있을까? 곡인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을 본 그들은 더욱 이 생각을 깊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곡인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낮게 흐르는 물같은 저음 (低音)이었다. 그 안에 담겨진 중후함... 네 성(姓)이 혹시 운(雲)이 아니냐? 운령은 곡인도가 던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운령(雲靈)이었다. 어디서든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굳이 그것을 감출 마음도 없고 또 감출 상황도 아닌 것이 다. 네가 바로 구룡과 함께 있다는 소봉황(小鳳凰)이구나... 곡인도의 음성은 약간의 놀라움이 실려 있었다. 용저기는 뒤로 자빠질 정도로 놀랐다. 가룡수는 눈 앞이 팽팽 돌았다. 저 고운 소저는 마음씨도 고운지 백의에 고름을 묻히고 있 었다. 손에는 고름이 묻은 마포가 있었다. 이런 쓰레기들이 저런 소저를 부려먹어? 한 순간 그들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나중에 곰곰히 생각 해보고 용저기가 결론을 내렸다. 그 소저때문이야. 그런 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어. 말종은 분뢰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침입자들이 마을에 불지르려는게 아니라 운소저를 납치해가 려고 하는게 아닌가? 어떻게 그 꼴을 본단 말인가? 아, 아저씨! 불러대는 말종을 쳐다보지도 않고 분뢰수는 독왕 곡인도만 노려보고 있었다. 말종은 그 기색을 알아차렸다. 배운 토납법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저 자는 강한가요? 분뢰수의 눈속에서 붉은 기운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 강하다. 싸워보고 싶지 않으세요? 말종의 입에서 싸움 에 대한 말이 나오자 분뢰수는 움직였 다. 지상(至上)의 명령을 받은 사람의 행동이었다. * * * <이자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 2 권 끝 > 第 十九 章 大 血 神 鼎 1 쉬잉, 쉬잉, 쉬잉... 중앙에서 앞뒤로 그대로 뻗은 칼날은 바람개비처럼 수평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전방의 칼날과 후방의 칼날이 비스듬 히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돌기 시작하자 섬뜩한 음향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두 자루가 한꺼번에 돌아가니 더욱 듣는 사 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소리가 일어났다. 대혈문(大血門)의 비곡(秘谷)에서 수련한다던 문주의 수제 자가 너냐? 묻는 어조는 매우 퉁명스러웠다. 묻고 있는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묻는 말을 알아들는 사람은 장내에서 셋에 불과 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괴인, 그리고 천축어(天竺語)를 알고 있던 운령과 독왕 곡인도였다. 그외의 사람은 갑자기 분뢰수에게서 흘러나온 괴상한 소리 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하늘에서 내려온 괴상망측한 벌거숭이 같은 자의 입에서도 마찬가지의 괴성(怪聲)이 웅얼거리며 흘러나오는게 아닌가? 이것은 그가 지면에 닿자마자 했던 말처럼 알아들을 수 조 차 없는 그런 소리였다. 운령은 의아한 빛으로 분뢰수를 보았다. 그 괴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가져간 대혈신정(大血神鼎)을 돌려받으러 왔다! 간결하면서 투박한 어조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의 두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한쌍의 칼날을 가진 두 자루의 괴병도 주인의 의사를 위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쉬잉, 쉬잉, 쉬앙... 가룡수와 용저기는 그 음향을 듣는 것만으로도 저 괴인이 어느 정도까지 십자인을 수련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절정(絶頂)이다! 놀라기는 곡인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가 놀란 것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대혈신정이라니... 그게 왜 이곳에 있단 건가? 그의 뇌리속에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자연히 그의 시선은 분뢰수를 향하게 되었다. 십자결(十字決)로 매듭지을까? 분뢰수가 여전히 천축어로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대혈문의 괴인은 눈을 번득였다. 지금 분뢰수가 하는 말은 그에게 실력있으면 가져가 보란 뜻이었다. 괴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자신하고 있었고, 그래서 저 먼 이역 (異域)의 천축에서부터 여기까지 저 분뢰수라는 작자를 찾아 온 것이다. 쉬잉, 쉬잉, 쉬잉... 칼바람 소리가 더욱 드세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십오륙보 사이로 압축되었 다. 괴인은 두 눈을 점차 강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보통사람 들은 아예 기가 질려 꼼짝도 못하게 만들 눈빛이었다. 과연 파자구의 사람들은 단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질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독왕 곡인도는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하늘에서 떨어진 괴인의 내공이 최상승지계(最上乘之界) 에 이른 것을 그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수는 어느 곳에나 흔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설마... 정말 대혈문에서 왔다는 건가? 독왕 곡인도의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질 때 그의 앞에 선 용 저기와 가룡수는 자신들도 모르게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치다 가 아예 못박혀 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말은 못알아 들었지만, 지금 얼굴을 가린 작자와 마 주선 하늘에서 떨어진 괴인이 무엇을 펼치려고 하는지 알아본 것이다. 십자결! 인정사정 없으며, 옆에 있는 자도 자신의 불운(不運)을 탓 할 수밖에 없는 공포스런 위력의 십자인 최후초식이 지금 그 위용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 었다. 대결은 순식간에 아주 엄청나게 끝났다. 그 광경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기에 보고있던 사람들의 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지금 자신들이 본 것을 잊을 수 없도록 아주 확연하 게 새겨놓은 것이다. 뒤늦게 분뢰수를 따라 내려오던 말종마저도 그 광경을 언제 어느때라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처음부터 겁을 집 어먹고 뒤로 잔뜩 물러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룡수와 용저기도 마찬가지였다. 거센 포효 같은외침은 아직도 장내를 맴돌고 있었다. 처음 괴인이 두팔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앞으로 내뻗으며 두 손에서 돌리고 있던 한쌍의 칼날을 내던지며 지른 외침이 었다. 그리고 그 외침은 길다란 비명과 함께 장내를 떠돌고 있었 다. 먼저 벌거숭이 같은 괴인이 손을 쓴 것은 분명했다. 분뢰수는 단지 자신의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고 있을 뿐이 었다. 괴인이 내던진 두 개의 일자형(一字形) 칼날은 불과 그의 손을 떠나 두 세걸음 앞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날고 있는 것은 한쌍의 일자형 칼날이 아 니라 분명한 십자인(十字刃)이었다. 그토록 요란했던 십자인의 가공할 회전음은 완전히 사라져 정적을 이루었고, 울려퍼지는 것이라고는 괴인의 울부짖는 듯 한 외침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치 수레바퀴가 맹렬히 구르듯 칼날은 보이지 않고 둥근 테두리만 보인 채 날아가던 십자인이 그대로 분뢰수에게 잡혀 버렸던 것이다. 분뢰수는 그것을 그저 손만 내밀고 기다리는 것이 지겹기라 도 한 것처럼 몸을 앞으로 움직여 너무도 수월하게 십자인을 잡아버린 것이다. 너무 한 순간에 이루어진 동작이라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독왕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어째서 그토록 무서운 위세로 날아가던 십자인이 분뢰수의 손에 맥없이 붙잡히고 말았는지 도무지 이 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분뢰수의 손에 잡힌 한쌍의 칼날은 괴인의 손에 들렸을 때 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돌아갔다. 그대로 하얀 두개의 원반 이 나타난 것이다. 분뢰수가 편안하게 벌리듯이 두 팔을 젖히는 동안 칼날은 사라지고 원반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다시 두 손을 앞으로 뿌리는 순간에 두 개의 원반은 분뢰수의 세걸음 앞에서 합쳐 졌다. 동시에 푸른 섬광(閃光)이 피어오른 것이다. 그것이 천공(天空)을 가르는 뇌전(雷電)과 같다는 것은 모 두들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왜 그 뇌전이 두 개의 원반이 합쳐지는 순간에 나타 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괴인을 휘어감아버렸는지는 아무도 아 는 사람이 없었다. 뇌전이 괴인을 휘어감을 때, 원반은 다시 두개로 갈려져 벌 거숭이인 괴인의 몸을 마구 난자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괴인의 몸 곳곳에서 저렇게 많은 피가 괄괄 흐를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독왕 곡인도는 그 짧은 순간에 원반이 정확하게 괴 인의 벌거벗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무릎 안쪽, 팔꿈치 안쪽, 발목, 손목 따위의 중요한 신체의 마디마디를 베었음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아아아아...! 쿵! 외침과 비명이 범벅 되는 가운데 벌거숭이의 몸이 그대로 대자(大字)가 되어 뒤로 철판처럼 넘어갔다. 그의 몸을 베고 허공에 치솟았던 두개의 원반은 이제 다시 한쌍의 기형인(奇形刃)으로 모습을 드러낸 채 지면을 향해 쇄 도해 들어고 있었다. 그 곳은 바로 괴인이 나자빠진 곳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원 반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팍! 두 개의 칼날은 괴인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 들어 땅 에 거의 절반 이상이나 쳐박혔다. 휴우....! 말종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칼날에 그대로 뚫리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이 그대로 흘 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 자신은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자신들이 본 것을 떠올리던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분명하게 알았다. 뇌, 뇌, 뇌전교격(雷電交擊)! 곡인도가 독왕이라 불리우는 것은 단지 그가 독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강한 무공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는 독(毒)의 왕 을 칭할 만큼 뛰어난 독술(毒術)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약(藥)에 대해서도 많이 알았고, 향(香)에 대 해서도 민감했다. 그런 그가 코속으로 흘러드는 구린내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를 모를리가 없었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자신들이 아랫도리에 큰 것, 작은 것 가 리지 않고 모두 싸놓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너무나 경악한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곡인 도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놈들이 수상객들 중에서 십대고수라니.... 분뢰수는 느릿느릿 쓰러져 있는 괴인에게 다가갔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왜 그가 쓰러진 벌거숭이에게 다가가는지 아는 사람 도 없었다. 단지 곡인도만이 자신의 앞에서 구린내를 피우는 둘을 그대 로 잡아 뒤로 팽개치고 그 광경에 유난히 안광을 빛낼 뿐이었 다. 분뢰수는 벌거숭이 괴인의 머리 맡에 앉았다. 아직도 괴인의 관절 마디마디에서는 피가 괄괄거리며 쏟아 지고 있었다. 분뢰수의 벙어리장갑을 낀 듯한 손이 괴인의 옆머리를 툭툭 쳤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벌거숭이 괴인의 몸에서 그렇게 맹렬히 쏟아지는 피의 양이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장내에 있는 사람들중 괴인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 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피하지 않고 받으려 한게 가상해서 살려는 주겠는데, 난 대혈신정은 가지고 있지 않아. 여전히 천축어로 괴인에게 말하는 분뢰수였다. 지혈(止血)을 받아서인지 괴인의 눈에는 고통의 빛이 가시 고 생기(生氣)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 눈에는 분노의 빛이 번뜩였다. 뭐라고? 웃기지마라! 본문의 신조(神鳥)가 너를 지목했다! 허튼 말로 빠져나갈 생각말고 날 죽여! 벌거숭이 괴인은 노여운 불길이 이글거리는 음성을 격하게 토해내었다. 하나 그 말은 분뢰수에게 단 한 마디만이 먹혀 들어 갔을 뿐이었다. 일어서는 분뢰수의 눈길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피는 멎었다고 해도 벌거숭이 괴인은 아직 움직일 수가 없 었다. 분뢰수의 칙칙한 눈길이 향하는 곳을 향해 겨우 고개만 돌 릴 뿐이었다. 그리고 분뢰수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자신이 쓰러질 때보다 더한 비명을 울리고 말았다. 안돼--! 하지만 이 절규(絶叫) 같은 외침은 천축어를 알아듣는 몇만 이 겨우 알아들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미처 그가 무엇이라 했는지 신경쓸 여지가 없었 다. 분뢰수에게서 터져나온 청량하고 맑은 기성(奇聲)때문이었 다. 끼이이....! 얼핏 무슨 새소리 같다는 생각만 나는 그런 소리였다. 천공(天空)의 빨간 점은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으로 무엇인가가 그대로 하강(下降)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강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 웅변해주고 있었다. 그 크기를 굳이 측정할 필요는 없었다. 곧 모두가 그것이 엄청나게 크고 시뻘건 새임을 알아 보았 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괴조(怪鳥)는 몹시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 내고 있었다. 그 적의(敵意)를 받는 대상은 독왕 곡인도였다. 곡인도는 자신이 새의 적개심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장중(場中)을 한번 쭉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단지 그의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지 모두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운령만이 평온한 기색으로 그를 마주 바라볼 뿐이었다. 곡인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내가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군. 좋소, 시간은 아 직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내일 봅시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돌아서서 가룡수와 용저기를 재촉해 배 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그때쯤에는 자신들이 어떤 실태를 저질 렀는지 깨닫고 온통 수치심에 얼굴이 벌개져 있어서 그저 앞 서가는 곡인도를 정신없이 따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로인해 그들중 누구도 등을 보이고 가는 독왕 곡인도의 얼굴이 짙은 패배감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아본 사람이 없었 다. 곡인도는 자신의 모습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한 마리 개 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곡인도로 하여금 이토록 심한 패배감을 느끼게 한 것일까? 곡인도의 모습이 멀리 사라질 쯤에야 비로소 분뢰수의 눈자 위의 붉은 기운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 * * <대혈신정이 독왕이란 자의 손에 있다면 장강일대에 이 정 도 소란을 떠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대혈신정을 가 지고 있지 않았다. 마라도(魔羅刀)에 아무 반응이 없다. 대혈 신정은 이 근처에 없다. 누구인가?> 2 만리장강(萬里長江). 그 긴 강가에 있는 무수한 나룻터가운데서도 유달리 작은 나룻터 마을 파자구. 지금 이곳은 마을이 형성된 이후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괴질과 이상한 방문객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온통 겁에 질 려 있었다. 그 가운데 마을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방문객은 새 한마 리였다. 거대한 괴조는 자신을 보고 겁먹고 숨어있는 사람들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괴조의 행동은 마치 자신이 그만큼 대우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듯이 당당했고 제멋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대뜸 아무 집이나 골라 주저앉아 버린 것이 그 한 가지였 다. 다행이라면 마침 그 집이 빈집이었다는 것이다. 운령은 온통 정신이 없었다. 이 괴조는 어찌된 영문인지 분뢰수의 손짓에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뢰수는 그 괴조를 자신이 묵고 있는 바로 옆집에 또 주저앉게 만들었다. 새와 사람이 모두 제멋대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나... 마음속에 궁금한 것이 무수히 많았지만 운령에게는 당장 해 야할 일이 있었다. 부상한 저 벌거숭이 같은 괴인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려니 와 처음 예상과는 달리 쉽게 죽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독왕 곡인도는 배에 올라 그대로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버 렸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오극헌이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들을 보 기전에 잽싸게 숨어버렸다. 장강은 넓은 곳이고, 그들은 그 위를 마음대로 질주하는 수 상객이었다. 하나 물은 많았지만 오물로 더럽혀진 몸을 씻어내리기는 쉽 지 않았다. 오극헌이 의아한 눈초리를 하고 물었어도 그들은 그저 대답 을 피하고 입을 다물뿐이었다. 도무지 말할 건덕지가 없는 창 피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온 독왕 곡인도는 극심한 패배감에 몸을 떨고 있 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자신이 누구인가? 천하오패의 일인(一人)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독왕 이 아닌가? 그것은 그가 열 살에 독공(毒功)에 입문해서 이십년이 지나 삼십세에 얻은 명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 십여년의 각고수련 끝에 마침내 무 형지기(無形之氣)로 독을 격출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저 분뢰수라는 자에게 그것이 통하지 않은 것이 다. 무려 일백여가지의 독을 살포했고 그것을 해독시켰다. 분뢰수가 널부러진 벌거숭이에게 다가가는 동안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독왕이 발출한 독은 두 사람에게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 분뢰수와 일봉(一鳳)! 특히나 신경써서 살포한 이십칠 종(種)의 독이 분뢰수에게 는 아예 접근조차 못했고, 운령이란 계집애는 처음부터 독기 (毒氣)가 전혀 먹히지를 않았다. 구룡 의 능력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운령에게 무엇인가 피 독주(避毒珠)따위의 기진이보(奇珍異寶)라도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뢰수는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그자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독을 막아낸 것이다. 무형지기를 막아낸 호신지기(護身之氣)를 분명하게 감지한 곡인도는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분뢰수의 독술이 독왕이라 불리우는 자신보다 막강하다는 말인가? 곡인도가 이토록 지독한 패배감을 맛보기는 난생 처음이었 다. 적어도 독에 관해서는 자신이 일인자(一人者)라는 자부심이 산산조각났기 때문이었다. * * * 운고는 터덜거리며 돌아왔다. 그리고는 입을 딱 벌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뭐야? 이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히 어마어마하게 크긴해도 새가 틀 림없었다. 그러나, 운고가 이 거대한 괴조에 대해 묻기도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뭐에요? 그꼴이! 운령의 물음에 운고는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좋은 꼴은 아니었다. 온통 흙투성이에 소매자락까지 너덜거리고 있었다. 좀 더러워진 거 뿐이야... 더러워졌다고요? 운령은 기가차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운고는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쓴 웃음을 지었다. 운령이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옷에 묻은 진흙 얼룩이 아니었 다. 그 진흙얼룩에 가리워진 핏자욱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흘린게 아닌데... 누가 흘렸든! 또 무슨 짓을 한 거에요? 운령의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앙칼진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 운고는 그런 운령의 노력이 번번이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모질어지지 않는 사람이 운령이었기 때문이다. 노려보는 운령의 눈망울이 떨리는 것을 보고 운고는 감추려 던 생각을 버렸다. 일단 눈망울이 떨리기 시작하면 고집을 꺽 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운고가 평생에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이 바로 누이가 우는 모습이었다. 아, 별일이 아니라니까. 이가장(李家莊)의 놈들이 이곳으 로 몰려온다기에 그러지 말라고 좀 타일렀어. 그러는 중에 좀 옥신각신한 것 뿐이야.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으니 안 심해도 좋아. 운고는 재빨리 운령을 다독이며 말했다. 정말이지요? 지난번처럼... 절대 정말이다! 그때 분명히 약속했잖아! 어제 온 전서(傳 書)까지 보여줄까? 운고의 마지막 말에 운령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운고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운령을 보다가 그저 고개를 절 레절레 흔들고 결국 자신이 받았던 전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운령이 그토록 자신의 말을 재삼재사 확인하려는 것도 사실 은 그가 전에 한 짓 때문이었으니 누구 탓을 할 필요도 없었 다. 더욱이 이렇게 흙투성이에 피까지 묻혀온 다음이니 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촌장은 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가장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거의 얼어 붙어가고 있었다. 이가장은 이 일대에서는 막강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파자구 정도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는 그런 가문 이었다. 그런 그들을 운고가 어쨌다는 말을 듣자 가장 먼저 걱정되 는 것이 그 보복이었다. 아무리 운고가 천하에 없는 장사라 해도 어떻게 수백 명에 달하는 이가장의 장정들을 당해내겠는가? 더욱이 이가장의 장정들은 거의 대부분이 강호인(江湖人)이 라 하지 않던가? 촌장의 아래위 턱이 저절로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있 었다. 마을이 순식간에 몰살당할 수도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 혼자서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결정할 일도 아니 었다. 촌장은 자신도 모르게 엉거주춤한 태도로 마을 사람들에게 가고 있었다. 령아, 아무래도 떠나야겠구나... 운고는 흘깃 떨면서 가는 촌장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운령은 전서를 흝어보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좀더 있으면 안될까요? 이곳에 위험은 이제 없잖아요? 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 사람들이 겁을 먹은 다음이야. 종종 겪는 일이었다. 수로맹의 연락을 받고 이가장의 행동을 알아차린 운고가 단 신(單身)으로 몰려오는 이가장의 이백에 달하는 장정을 상대 해 되돌려 보낸 것 따위는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 었다. 그들은 운고가 떠난 다음 자신들이 화풀이 대상이 되지않을 까 그 걱정만 할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이 얼마나 안전해졌는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결국 소용없는 일이었다. 단지 자신들이 떠나면 그들은 언젠가 그것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어쩌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근본적으로 협객(俠客)이란 떠도는 부랑아(浮浪兒)정도로 여기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 가요? 말종은 섭섭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생각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었다. 보기싫은 사람들이 우글거리지만 꼭 한 사람 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령도 떠나. 분뢰수는 여느때처럼 딱 잘라 말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말종은 따지지 않았다. 단지 그가 말한대로 운령이 떠난다면 말종도 더 머물고 싶 지 않았다. 그때 말종의 귀에 무슨 짐승이 우슨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누가 내는 소리인지는 보지 않아도 말종은 알수가 있 었다. 저 벌거숭이 차림의 괴인은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전혀 기가 꺽이지 않은 채 저렇게 요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다. 말종은 단지 요상한 소리로 여겼지만, 그 말은 천축어였다. 분뢰수! 그냥 두지 않을 테다! 대혈신정을 내놓지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거야! 끊임없이 위협을 하지만 정작 말하는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 가 단지 말뿐임은 잘 알고 있었다. 분뢰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천축에서 여기까지 저 괴조를 탄 채로 추적해온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 괴인은 해냈다. 난 가지고 있지 않아. 이 말은 이미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벌거숭이 괴인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신조는 너를 지목했어! 이 가루라(迦樓羅)를 우습게 여기 지 마라! 분뢰수는 그가 자신을 지칭한 말을 듣자 고개를 갸웃뚱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루라! 금시조(金翅鳥)를 뜻하는 천축어이다. 그러나 그보다 대혈문에서는 문주를 가리켜 가루라라고 불 렀다. 네가 문주라고? 벌거숭이 같은 괴인, 가루라는 움찔했다. 사실 그는 아직은 문주라고 하기에 자격이 모자랐다. 무공이 약해서가 아니라 문주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통력의 상징인 대혈신정앞에서 맹세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혈신정을 찾아 돌아가면 그는 틀림없는 가루라로 인정받을 것이다. 대혈신정을 찾는 그의 여행은 그에게 삶의 최고의 가치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직은 아니군. 분뢰수는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가루라를 자칭한 괴인은 몹시 자존심 이 상한 듯 외쳤다. 난 가루라다! 분뢰수는 상대하지 않을 듯 몸을 돌리다가 나직하게 중얼거 렸다. 내 일에 협조한다면 넌 그 순간부터 진짜 가루라가 될 수 도 있지... 짙은 여운이 깔린 이 말은 자칭 가루라를 크게 놀라게 만들 었다. 그가 아는 한 이 분뢰수란 자는 절대 허언(虛言)을 내뱉지 않았다. 그 자신이 계속해서 대혈신정을 내놓으라고 졸랐지만 정말 분뢰수가 그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신조가 그를 지목했기에 그는 분뢰수의 말을 반신반의 (半信半疑)하고 있던 것이다. 대혈신정이 없다면서... 하나 신조는 그를... 생각을 굴리던 자칭 가루라의 안색이 갑자기 무표정해지면 서 굳어졌다. 그대... 마라도를 가지고 있는가? 분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칭 가루라는 눈을 번뜩였다. 마라도의 가치는 결코 대혈신정에 뒤진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것 또한 대혈문의 잃어버린 보물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대혈신정이 도둑맞은 것이라면 마라도는 강탈당했을 뿐이었다. 천축최고의 강도(强盜)에게... 가루라는 이제 자신이 진짜 가루가임을 자각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는 분뢰수에게 서약했다. 그대가 내게 진실을 보이는 한 이 가루라는 그대에게 협조 하겠다. 단, 그대는 진실을 보이는 자로써 반드시 대혈신정을 찾는 일에 협조해주어야 한다! 분뢰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종은 둘이서 아까부터 무슨 괴성(怪聲)을 토해내다가 마 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눈을 뗴지 않고 유심히 바라 보았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이 두 괴인은 타협을 한 것같아 보였다. 아저씨, 저 사람에게 뭐가 필요한게 있나요? 마음 속으로 되뇌였지만 분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기다리던 자가 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그를 찾아간다.> 3 흐흠, 이 녀석을 타고 왔다? 그럼, 가루라인가? 운고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괴조를 바라보았다.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사람 키의 두 배를 가볍게 넘어 서는 이 거대한 괴조에 대해서는 운고도 알고 있었다. 운부(雲府)의 선학(仙鶴)도 상당한 영물(靈物)로 취급되지 만, 이 괴조는 그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새였다. 선학이 단지 친구로써, 그리고 하인으로써의 역할이라면 이 괴조는 그 반대로 사람을 하인취급하였다. 그리고 이 괴조가 친구처럼 친근히 대한다면 그는 곧 가루라, 대혈문의 문주로 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까지 왔다든? 운령은 묻는 오빠의 말에 자신이 들은 그대로 대답해 주었 다. 운고는 살짝 검미(劍眉)를 꿈틀거렸다. 대혈신정이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운고를 운령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운고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그어졌다. 이제 슬슬 조각들이 맞추어지는군... 대혈신정이 중원에 있다면 장강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고, 누군가 대단한 사람이 가지고 있겠지... 좋아, 예정대로 하자! 령아, 형제들에게 가 자!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겁먹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 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운고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운령은 무엇인가 주저하고 있는 표정이었 다. 운고는 안색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너무 착해서 탈이다... 때로는 좀 각박하게 구는 운령을 보고 싶은 운고였다. 잠깐만요. 이야기할 사람이 있어요. 마을 사람? 아니에요. 그 말에 운고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저 불쌍하면 무엇이든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버릇이 운 령에게 있었다. 다만 그때마다 운부는 거의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상처입은 새나 개, 고양이 따위의 조그마한 꼬마 아가씨에 게 어울리는 것만 데리고 들어온 것이면 그러지도 않았을 것 이다. 운령은 가끔 백년에 한번 볼까말까하는 독사가 불쌍해보인 다고 데리고 들어오는 적이 있었다. 때로는 곤륜을 제집으로 아는 흉폭한 삵쾡이도 몇 마리씩 끌고 들어왔고... 다른 때라면 몰라도 그들 남매는 지금 마을 사람 중 누구도 데리고 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운령이 쪼르르 달려가는 방향이 괴조가 턱하니 버티 고 앉은 집의 옆집인 걸 보자 운고는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으익! 설마... 그러나 이미 그 꼬마의 병을 꼭 완치시키겠다고 자신 앞에 서 되뇌이는 운령의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 운고는 그저 한숨 만 푹푹 내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 말종은 운령을 믿어지지 않는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을 본 것은 이 번이 두번째였다. 말종은 가슴이 벅차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말종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운령은 분뢰수를 돌아 보았 다. 저희에게는 충분히 이 아이를 치료할 방법이 있어요. 그리 고 살아가는데 약간의 보탬이 되어줄 수고 있고요. 이 아이가 우리와 같이 가는걸 허락해 주시겠어요? 정중하게 묻는 말이었다. 분뢰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말종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종은 자신을 보는 칙칙한 눈빛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 다. 최초로 자신을 외면하지 않은 사람의 눈빛은 운령만큼 따뜻 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심하고 차갑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말종은 철석같이 믿었 다. 네가 결정할 문제다. 간결한 한마디가 나오자 말종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 다.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여러번 생각할 것도 없이 운령과 함께 가는 쪽이 말종에게 는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이 마음씨 고운 아가씨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말종은 행복 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선뜻 운령과 함께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지 말종 자신도 몰랐다. 운령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는 말종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약속할께. 네가 병이 낫게 해주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처 럼 살 수 있도록 해줄께.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말종은 두번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그 말은 반드시 지켜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확연 히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운령은 절대 거짓이나 불가능한 말을 할 것 같 아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말종은 쉽게 대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에요? 정말 나보고 결정하라는 건가요? 속으로 되뇌이며 말종은 계속 분뢰수에게 묻고 있었다. 못믿겠어? 운령은 다시 열심히 말종에게 말을 하려고 했다. 령아. 생각할 틈도 안줄거냐? 뒤에 따라온 운고가 조용히 말했다. 운령은 그제서야 말종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 다. 그리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도 알았다. 말종은 분뢰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수한 의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자신이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그저 한 없이 강하기만 한 사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사람... 때에 따라서는 생명 같은 것은 싹 무시하는 냉 혹한 사람...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최 초로 자신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함께 다녀준 사람이 그 눈 앞에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말종은 그를 따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 보다는 운령을 따라가서 얻을 행복이 더 크다는 점을 분명하 게 깨닫고 있었다. 결국 결정은 처음부터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종은 운령에게 대답하려고 했다. 그렇게 입을 열려는 찰나에 붉게 눈자위를 물들인 분뢰수가 불쑥 한마디를 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나? * * * <비교당해서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난 천하무적(天下無 敵)이어야 하니까...> * * * 두근거린다.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말종은 온몸을 떨었 다. 가슴 속 깊숙이 파묻어 놓았던 감정들이, 포기하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증오(憎惡)! 분노(憤怒)!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원한(怨恨)! 그 모든 것이 부글거렸다. 말종은 분뢰수를 보았다.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눈으로 말종을 응시할 뿐이었다. 말종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깊이 파고들지 않기를 바랬다. 저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향한 자신의 나약하기 짝이 없 는 증오와 분노가 분뢰수에게는 또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스러 워 보일까? 말종은 운령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자신의 증오와 분노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운령의 백의는 얼룩이 져 있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돌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그녀를 시녀로 생각하기라도 하는가? 또다시 말종은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들에 대한 증오가 되살아났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일어 났다. 그들은 무슨 권리로 운령의 보살핌을 받는가? 그들은 무슨 권리로 자신을 그토록 학대했는가? 운령은 무엇때문에 저들을 돌보는가? 말종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 다고 운령의 보살핌을 받겠다는 것인가? 그제서야 말종은 몸이 성하다해도 자신은 어느 곳에서나 이 방인(異邦人)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운령은 말종의 눈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당 황했다. 그 눈빛 한가닥 한가닥에 새겨진 짙은 한(恨)을 보았 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막 운령이 다시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였다. 어깨에 짚어오는 손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운고임을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란 전음성(傳音聲)도 들렸다.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기회를 빼앗으려 하지 마라. 운고의 말은 중후(重厚)한 힘을 가지고 울렸다. 운령은 운고가 저 사나이를 신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 고 말종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능력도 있다고 인정한 것도 알았다. 운령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말종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말종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설마 자신에게 이런 순간이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 순간도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한 역할 같은 것은 없었 다. 오직 떠밀리고 휘말려서 죽지 않고 살아남겠노라고 지내 온 것이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전부였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지금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 지 결정할 기로(岐路)에 선 것이다. 두 갈림길은 분뢰수와 운령이었다. 말종은 자신이 고개를 드는 순간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앞으로 말종이 살아가야할 길 전부를 결 정하게 될 것이다. 분뢰수를 따르게 되면 병이 낫고 않고는 떠나서 힘을 얻게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토납법과 보법을 통해 이미 몸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 힘이면 지금처럼 무조건 도망다니며 살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말종이 염원하고 또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운령을 따르게 된다해도 도망다닐 필요는 없을 것이 다. 운령은 반드시 자신을 잘 돌보아줄 것이고 병을 치료해 줄 것이다. 제아무리 천형(天刑)이라 해도 운령의 손길앞에서는 무너지 고 말 것이다. 그럼 이 추악한 세상의 못된 자들은 어쩌지? 갑자기 말종은 고개를 들었다. 운령을 보고 있었다. 운령은 말종의 눈가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만으로 운령은 말종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 다. 미안해요... 꼭 함께 가고 싶었는데... 난 그럴 수가 없어 요... 난... 차마 운령 앞에서 자신이 당한 만큼 세상에 그대로 앙갚음 해주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말종이 삶을 지탱해온 한 기둥이었다. 보통사람과 같은 삶을 염원한 만큼 말종은 자신이 받은 것 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문득 가루라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퍼런 하늘 저 꼭대기에는 빨간 점 하나가 떠있었다. 장강의 물결은 그들의 옆을 따라 일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 다. 뒷물결은 기어이 앞물결을 제치려는 듯이 용솟음치고 있 었다. 자그마한 쪽배에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앞쪽에 분뢰수가 우뚝 서서 바람을 냄새맡고 있었다. 말종은 그저 뱃전에 기대어 물만 보고 있었다. 그 때 가루라가 말종의 어깨를 치며 말을 건 것이다. 어눌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말종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잘... 고른 거야... 저 사람... 진짜... 투사(鬪士)다. 잘 하지는 못하는 말이지만 말종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말종의 결정을 잘했노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말종은 자신이 정말 잘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 었다. 분뢰수가 불쑥 내놓은 한마디에 그토록 격하게 흥분한 자신 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내게 무슨 짓을 했나? 하지만 결국 결정은 자신이 했다. 그리고 흥분했다고는 해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감정이 분명했다. 결정한 이상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말종은 이미 오래 전부 터 터득하고 있었다. 가루라는 다시 더듬거리고 있었다. 후회... 하지 않을거야... * * * <아마 후회하겠지...> 第 二十 章 長 江 1 마침내 가루라는 마라도(魔羅刀)를 볼 수 있었다.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오는 마라도의 자태에 가루라는 완전 히 취한 듯이 보였다. 말종은 그가 보이는 기이한 눈빛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 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분뢰수는 그것을 보여주고는 더이상 가루라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가루라 또한 더이상 아무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쪽배 에 한껏 등을 기대고 멍한 표정으로 하늘의 빨간 점을 응시하 고 있었다. 얼마동안 강을 타고 가면서 겨우 회복했는지 가루라는 말종 을 붙들고 그 더듬거리는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람은... 투... 사가 되어야... 해... 가루라가 더듬거리는 말의 요지(要旨)는 말종이 선택한 것 이 투사의 삶이었기에 옳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말종은 전혀 긍정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들으면서 흐르는 강물에 머리를 쳐박아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미쳤냐? 평생 싸움질이나 하면서 돌아다니게? 범선(帆船)은 천천히 쪽배를 따르고 있었다. 덩지가 크기 때문에 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덩지가 커서 깃폭이 넓고 더 빠른 그러한 범선이었다. 선두에는 가룡수가 의혹의 눈으로 작은 점처럼 보이는 쪽배 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받은 임무는 쪽배를 눈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독왕은 그와 용저기에게 그 임무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놓쳐도 별 상관은 없다. 다만 내가 너희에게 이 약을 줄 필요가 없겠지. 그 약이 무엇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어느 틈엔지 가룡수와 용저기는 자신들이 중독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해독약은 독왕 곡인도가 가지고 있었다. 둘은 번갈아 가면서 쪽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릎뜰 수밖에 없었다. 쪽배는 의외로 잘나갔기 때문에 조금만 한 눈 팔면 놓칠 수 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로맹주의 전용선(專用船)이 바로 뒤에 따 라붙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봉월은 빙긋이 웃었다. 기분이 좋을 뿐 아니라 통쾌하기까지 했다. 배를 옮겨타면서 본 것이 그토록 맘에 들 수가 없었다. 가룡수와 용저기를 뒤돌아볼 여가조차 없게 만든 곡인도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곡인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봉월의 목 언저리에 매여 있는 끈을 보자 더욱 언잖았다. 어제의 패배가 아직도 선하게 느껴졌다. 유봉월은 그가 자신의 목을 힐끗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 을 보고는 픽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받은 결혼선물이 여전히 맘에 안드나? 곡인도는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들어 멀리가고 있는 쪽배를 가리켰다. 유봉월은 그 손가락끝을 힐끔 보고는 곡인도를 향해 말했 다. 뭐, 걱정할 것 없고. 그보다 왜 갑자기 이 일에 끼어든 것 인지 좀 설명해 줄 수 없겠나? 응, 처남? 유봉월과 곡인도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누구도 생각못한 일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두 척의 범선은 느리게 보이지만 확실하게 물살을 타고 달 리고 있었다. 강물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머리카락을 한껏 날려주었다. 수로맹주의 전용선은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바로 뒤에 붙어 서 계속 따라왔다. 오극헌은 두 배의 간격을 유지하도록 하고 유봉월에게 다가 왔다. 오랜만입니다, 맹주. 근래에 몸은 좀 괜찮아지셨소? 예까지 오느라 수고하셨 소. 오극헌은 담담히 웃었다. 동정호에서 수룡방이 대단한 위치를 점한다고 하지만 장강 전체에서는 수로맹의 유봉월이 제왕(帝王)이었다. 자신은 그 제왕의 일개지방을 담당하는 제후(諸侯)에 지나 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봉월은 언제나 정중하게 행동했다. 때문에 장강 일대가 완전히 그에게 복속된 것이라고 오극헌 은 생각했다. 그가 장강일대의 패자(覇者)로 있는 이상 이러한 괴질의 만 연에 대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수룡방을 휩쓴 괴질을... 아, 아직 소개도 안드린 모양인데, 이봐요! 악소협(岳小 俠)! 유봉월이 갑자기 자신의 전용선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소 리질렀다. 곡인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손을 모으고 자시고 할 것없이 그냥 소리쳐도 유봉월은 자 신의 음성을 눈에 보이는 장강전체에 다 퍼뜨릴 능력이 있었 다. 목소리를 들은 가룡수와 용저기는 순시간에 얼굴이 시뻘건 물감이라도 끼얹은 듯이 변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존심이 상해서 더욱 뒤돌아볼 수가 없었 다. 하지만 뒤에 소개하는 말을 듣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뒤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소개하리다. 이 소협이 구룡중 일인인 악무극(岳無極)이란 분이요. 속발(束髮)한 머리인데도 살짝 새어나온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나렸다. 간단히 말해 준수(俊秀)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제멋대로 보이는 듯한 자유분망한 기 질이 가득 배어나오고 있었다. 몸에 걸친 백의(白衣)가 그다지 깨끗하지 못함에도 별로 개 의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곡인도는 신중한 표정으로 보았다. 수로맹주의 전용선에서 이 수룡방의 배에 까지 떨어진 거리 는 오장(五丈)이었다. 단 한번에 건너뛰는 일이 쉬울 턱이 없었다. 그런데 이 제멋대로 보이는 애송이가 그것을 해낸 것이다. 지금의 곡인도에게는 그게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나이때 곡인도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잠시 긴장감이 감도는 듯했던 곡인도의 표정은 곧 풀려졌 다. 독왕이라 불리우는 그의 오만한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유봉월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곡인도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표 정이었다. 악무극은 배시시 웃었다. 실없는 듯이 보이는 웃음 끝에 불쑥 손을 독왕 곡인도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가 악무극이오. 오만무례(傲慢無禮)함이 절대 곡인도에게 뒤지지 않는 어투 였다. 곡인도가 냉소를 흘리며 막 꾸짖으려 하는 순간, 팟! 악무극의 소매 속에서 소리도 없이 세가닥의 광채가 쭉 뻗 어서 곡인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한가닥 광채만이 남아 곡인도의 목끝에 바싹 대어졌 다. 곡인도의 눈썹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세 가닥으로 멋지게 늘어진 그의 수염가운데 턱에서 자란 수염은 바람에 깨끗하게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내가 바로 구룡 중의 천룡(天龍)이고 검법을 논할 때에는 검제(劍帝)를 칭하는 악무극이오. 어떻소? 오연(傲然)한 미소를 띠우며 악무극이 물었다. 능풍검(凌風劍)인가? 좋군.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곡인도는 이미 이 검법에 단단히 쓴맛을 본적이 있었다. 천하칠대검법(天下七大劍法)의 하나인 이 능풍검에... 그렇소? 그럼 말이 되겠군. 어쩌겠소? 내가 중독사(中毒 死)하기 전에 당신을 죽이는 걸 바라시오? 악무극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묻고 있었으나 유봉월은 전혀 태연한 표정이 아니었다. 곡인도가 왜 갑자기 오만한 표정으로 돌변했는지 단번에 알 아차린 것이다. 막 유봉월이 뭐라고 하기 전에 악무극은 이미 소매자락 안 으로 검을 거두고 있었다. 해독해 주어 고맙다고 해야겠지. 구룡중에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독왕 곡인도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펼친 독공이 순간적으로 간파당했 고 자신의 목이 떨어질 뻔한 것이다. 게다가 해독을 시키기가 무섭게 상대방은 또 금방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만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곡인도는 다시 악무극을 중독시 켰을 것이다. 유봉월은 경직된 곡인도의 표정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목에 매어둔 피독주(避毒珠)를 보낭(寶囊)안으로 회수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곡인도를 다룰 방법이 생긴 것이다. 네째형, 상당히 뻔뻔스럽군. 자칭 천룡이라니? 운고가 중얼거렸다. 곡인도는 수로맹주의 전용선에 타고 있는 운고남매를 보고 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운고가 희희덕거리며 악무극에게 하는 말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유봉월은 그런 그의 행동이 극도로 손상된 자존심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력을 논하자면 자신은 간신히 무공으로 그와 오백초를 겨 룰 수준이었다. 그나마 아내가 결혼예물로 준 피독주가 아니면 그 앞에서는 단 일초에 쓰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누이가 결혼하면서 피독주를 가져간 일에 곡인도는 극도로 분노했었다. 때문에 거의 왕래가 없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었다. 유봉월은 그가 절대 자신을 도우려고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 고 생각할 수가 없었고, 곡인도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는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불만있으면 다섯 째, 너도 천룡해라. 악무극은 웃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유봉월은 모두에게 착석(着席)할 것을 권했다. 백의 소매자락에 봉황을 수놓은 운령이 제일 먼저 앉자 뒤 이어 운고, 악무극이 앉았고, 곡인도도 앉았다. 유봉월은 천천히 앉으며 오극헌에게도 앉으라 하고 좌중을 돌아보고는 운령을 향해 말했다. 어떻소, 운소저. 그 옷이 맘에 드오? 운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유봉월은 짐짓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곡인도를 똑바로 쳐다보 며 막바로 물었다. 하하하, 어떤가? 이곳이 좀 더 환해지지 않는가? 기왕이면 자네 마음속도 좀 보여준다면 더욱 환해지지 않겠나? 곡인도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전에 누이를 빼앗길 때 이미 겪어 보아서 알지만 유봉월은 절대 말로 싸워 누구에게 질 상대가 아니었다. 질 것같으면 상대방 십팔대 조상까지 캐내서라도 반드시 이 기는 사람이었다. 듣고 싶은게 뭔지 말해주면 내 이야기 하리다. 뭐긴 뭐겠읍니까? 이 괴질에 대해 지닌 바 의견만 들으면 되지요. 운고가 딱 잘라 말했다. 유봉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곡인도를 주시할 뿐이었다. 곡인도는 내심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좌중을 돌아보았 다. 적어도 구룡일봉(九龍一鳳)이 자신의 의견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악무극을 기준으로 생각컨데 그들 정도의 능력이면 이미 나 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저 운령이라 아가씨 도 파자구에 있었지 않은가? 의견이라... 이것이 단지 전염병이 아니라 누군가가 퍼뜨 린 독이라고 하면 간단하겠군. 혼잣말 하듯이 곡인도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도 유봉월이 나 운고 남매, 악무극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오극헌만은 그대로 눈이 부릅떠지고 있었다. 그, 그게 도대체... 곡인도는 그의 더듬거리는 말따위는 무시하고 그대로 혼잣 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독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독효(毒效)가 발휘될 때 는 이미 온몸이 짙은 고름에 휩싸여 알아 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오. 그리고 완전히 사망한 자에게서는 그 독의 흔적조 차 찾을 수 없소. 솔직히 말하자면... 곡인도는 잠시 말을 끊으며 좌중을 쭉 흝어보고는 말을 이 었다. 당대(當代)에 나 이외에 이런 독술을 지닌 자가 있다는데 난 정말 놀랐소. 어떻게 만리(萬里)에 걸친 장강 일대에 독을 뿌릴 수가 있 지? 유봉월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나 묻고 있는 그의 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다른 사 람의 눈에 분명하게 보였다. 하나의 물건, 당연히 희대(稀代)의 보물이요. 그리고 이런 정도의 능력이면 충분히 가능하오. 그러면서 곡인도는 그들이 앞에 놓고 앉은 원형 탁자 위에 서 찻주전자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한 손 위에 찻물을 부었다. 맑고 투명한 가느다란 물줄기가 곡인도의 손에 닿으면서 순 식간에 오색(五色)으로 변화하였다. 그 변화는 여전히 부어지고 있는 찻주전자 꼭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곡인도가 뚜껑을 열고 좌중에 주전자 안을 보여주었을 때 주전자 안에은 오색으로 반짝이는 이상한 찻물이 담겨져 있었 다. 한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곡인도는 명백하게 한가지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흐르는 물을 거슬러 독이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2 말종은 여전히 강을 내려다 보기만 했다. 가루라는 흘깃거리며 뒤에 따라오는 범선 두척을 지켜보았 다. 분뢰수는 단지 조각배의 선두(先頭)에 서서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루라가 천축어로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왜 저들을 달고 가지? 분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루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 자신도 말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필요하지도 않은 말을 상대에게 강요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달고 가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도, 동정호(洞庭湖)가 발원지라고요? 오극헌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동정호에서부터 퍼졌다니? 그건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적어도 그가 그 괴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동정 호에는 그런 괴질이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곡인도는 그 발원지가 동정호라고 말하는 것이다. 곡인도는 말을 이었다. 이 독의 특징은 전염병처럼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 전염병 같다는 거지. 게다가 잠복기간이 있어서 독에 중독된 이후로 발작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시전자가 그 시차 (時差)를 조절할 수도 있고. 여전히 악무극과 운고 남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곡인도는 그들이 이미 여기까지 알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유봉월도 아마 대강은 들은 표정이었다. 그렇지않다면 그는 계속 놀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독이라는 말을 믿지 못하다가 곡인도가 보여준 솜씨에 비로소 수긍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발원지와 발원지가 아닌 곳의 차이는 분명히 있 다. 보아서 알겠지만 쏟아내는 고름이 다르다. 이 말에 오극헌은 어리둥절해졌다. 고름범벅이 되어 비쩍 말라가는 사람은 보았지만 거기에 어 떤 차이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동정호에서 오는 동안 곡인도가 본 것은 그도 거의 다 보았다. 파자구만 제외하면 곡인도의 길안내는 다 자신이 하지 않았 는가? 발원지에 있는 자들은 잠복기간이 길어서 뼈까지 고름에 쩔어 있지. 하나, 발원지에서 멀어질수록 고름은 살갗 언저리 에서나 설치지. 곡인도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유봉월은 다 믿을 수가 없 었다. 어쩌면 자기 능력을 과시하며 자신을 망신시킨 악무극을 슬 쩍 중독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 유봉월의 얼굴에는 당장 그 표정이 떠올 라 있었다. 곡인도는 써늘한 냉기가 실린 미소로 그 표정에 답하며 나 직하나마 힘있게 말했다. 동정호 군산(君山)에 가면 확실해 질 것이다. 갑자기 유봉월의 얼굴에 번쩍거리는 듯한 생기가 감돌았다. 지금 말하는 곳이 혹...? 귀역(鬼域)! 독왕 곡인도의 얼굴에 가득 오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때는 악무극과 운고의 얼굴에도 경이(驚異)가 살짝 피어 올랐다. 동정호 넓은 곳, 어디가 발원지인지 구룡은 아직 단정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몇군데 후보지 가운데 귀역이 들어가 있었을뿐... 하늘의 빨간 점은 그저 그렇게 못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보 였다. 어둠이 찾아오고 조각배는 강변에 멈추어져 있었다. 말종은 긁어모은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 었다. 전과는 달리 손이 잘 움직여져 쉽게 불을 붙일 수가 있음을 말종은 느끼고 있었다. 가루라는 입술을 반쯤 벌리고 묵묵히 하늘만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주시하는 것은 별과 함께 떠있는 괴조였다. 빨간 점은 점차 확대되면서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쉬이잉... 거센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괴조는 그 거대한 위용을 자 랑하고는 가루라의 옆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으아! 불이 꺼졌어! 말종이 불평을 했다. 괴조가 내려앉으며 겨우 붙으려던 불꽃이 휙 날아가 버린 것이다. 가루라는 말종이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는 다가왔다. 손에는 일자(一字)의 칼날로 나뉘어진 십자인을 들고 있었 다. 말종은 갑자기 그가 칼날을 선보이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섬 뜩한 느낌을 받고는 엉거주춤했다. 달아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못한 것이다. 가루라는 두 개의 칼날을 교차시키더니 그대로 서로를 마주 대고 긁었다. 카르릉! 마찰음과 함께 말종이 쌓아놓는 나뭇가지에 불꽃이 흩날리 며 쏟아졌다. 화르륵! 순식간에 불꽃은 타올랐다. 그러는 동안 분뢰수는 장강이 흐르는 것을 감상하는 듯 그 저 강만 보고 있었다. 범선은 멈추지 않았다. 조각배를 지나쳐서 그대로 장강의 물줄기를 타고 가고 있는 것이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멍청하니 강변의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더이상 분뢰수 일행의 조각배를 눈이 빠져라 볼 필 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독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독왕은 여전히 그들을 하인부리듯이 부렸다. 그리고 빌어먹을 수로맹주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 두고보자! 유봉월! 감히 입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욕설만이 그들의 입속에서 아 우성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가룡수와 용저기의 위로가 된 것은 일봉(一鳳)으로 꼽 히는 운소저가 자신들처럼 강변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은 일봉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루라는 지나가는 범선을 보다가 분뢰수를 돌아보았다. 분뢰수는 이제 정좌하고 모닥불 가에 앉아 있었다. 가루라의 입술이 달짝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듯 그대로 닫혔다. 지금은 무슨 말을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말종은 이미 모닥불 가에 편안하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 다. 가루라는 조각배가 멈춘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려 웠다. 하지만 역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저 분뢰수는 말을 할 것이다. * * * 새벽이 되어 강변은 고요한 물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조각배는 강변에 끌어올려져 있었다. 분뢰수는 동터오는 아침노을을 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괴조는 그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며 다시 날아오를 기세였 다. 고개를 까닥할 때마다 괴조의 이마에 뿔 같은 혹이 아침의 여명(黎明) 속에서 번뜩거렸다. 새빨간 깃으로 뒤덮인 전신이 더욱 붉어보였다. 가루라는 분뢰수의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 렸다. 설마 신조를 타고 가자는 것은 아니겠지... 가루라에게 있어서 신조는 성스러운 새였다. 대혈문이 존재한 이후, 신조는 대혈문주와 언제나 함꼐였 다. 대혈신정과 신조! 이것이야말로 대혈문주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나 기괴하게도 저 분뢰수란 자는 이 신조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역대(歷代) 대혈문주만이 가능한 일을 저 자가 하고있는 것이다. 대혈문 사람이 아닌데도...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가루라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에는 장강이 요란하게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쉬잉! 귓전을 스치고 거센 바람이 흘렀다. 아마 밑에서 본다면 지금 신조는 빨간 점일 것이다. 말종은 그저 분뢰수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었다. 날아오를 때는 아예 눈도 뜨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래도 살 짝이나마 눈을 뜨고 있었다. 이 거대한 새는 사람을 태우고 나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하나 기분나쁘면 태우고 가는 자를 언제라도 떨어뜨릴 줄도 알았다. 가루라는 말종의 뒷자리에 앉아 십자인을 잡고 있는 손가락 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불가능하지만 않다면 이대로 뒤에서 분뢰수를 치고라도 싶 었다. 하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누구보다 신조가 그것을 거부할 것이 분명했다.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가는 동안 밤새 그들을 지나쳐 간 범 선 두 척이 점처럼 보였다. 가루라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알아 보았으니 분뢰수도 당연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뢰수는 지상을 내려다 볼 마음이 없는지 그저 하 늘만 보고 있었다. 이 높은 고공에서 보는 하늘은 온통 새파란 물이 들어있었 다. 어라? 먼저 가잖아! 악무극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어이없는 듯 소리쳤다. 어제 밤에 범선이 속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모닥불을 피우 고 강변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빨간 점이 되어 천공을 가르 고 있는 것이다. 동정호에 간다면 우리보다 먼저 갈 수 있을거요. 저 새는 하루에 만리를 날거든. 운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악무극이 못마땅한 듯 또 소리쳤다. 이런! 태워달라고 할 걸! 곁에서 듣고 있던 유봉월이 잠깐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염려마시오. 우리도 이틀안에 당도할 수 있오. 게다가 그 귀역이란 곳이 그리 만만한 곳이 절대 아니오. 처음 나타나고 사십년이 흘렀으나 그곳에 들어갔다가 아직까지 살아나온 사 람이 있다는 말은 못들었오. 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듣던 가 룡수와 용저기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노라하는 수상객들조차 귀역은 문자 그대로 금역(禁域)이 었다. 대담하기로 소문난 수적들도 그 근처에서는 장사를 포기하 는 곳이 바로 귀역인 것이다. 그런데 저 미친 유봉월은 도대체 무얼 믿고 그리고 가는 것 인가? 저 새파란 애송이 둘? 아니면 독왕 곡인도? 그들이 진짜 용이나 독의 제왕이라도 귀역에서는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 가룡수와 용저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기회가 생기면 물로 뛰어들어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중독사(中毒死)하는 쪽이 훨씬 더 나을 테니까... 뱃길이 계속되는 동안 운령은 간혹 바람을 쐬는 일말고는 일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운고는 지금 바람을 쐬며 서 있는 누이동생을 잠시 바라보 고 말을 걸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느냐? 운령은 고개를 돌려 운고를 똑바로 보았다. 아무 것도... 말끝을 흐리는 것은 뭔가 심각한 일을 생각할 때였다. 운고의 인상이 그대로 구겨졌다. 뭐냐? 왜? 적어도 깊이 있는 생각이란 점에서는 누이동생이 자신보다 몇배 더 낫다는 것을 아는 운고이기에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 분뢰수라는 사람이 어디선가 본듯한데... 잘 모르겠어 요. 도대체 어디서 보았는지... 운고는 인상을 좀 폈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순간에 그의 얼굴은 처음보다 한층 심하게 구겨 졌다. 운령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혹, 그 가 아닌가 해서... 악무극도 덩달아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운고가 운령의 의문을 전하고 나서였다. 둘은 그대로 인상을 구긴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형(大兄)은 아직 소식이 없는데? 악무극이 말했다. 우리가 언제 한자리에 붙어있기라도 했소? 아마 우리를 찾 는데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럴리가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형제 모두 가 알지. 마음만 먹으면 대형은 언제라도 우리를 찾을 수 있 어. 설혹 우리가 숨어있다해도! 하물며... 우리가 대형을 찾 으려는 마당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운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년 여동안 소식이 없는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요? 악무극은 몸을 돌려 장강의 물결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만약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잖아. 운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 그건 진짜 만약이었다. 그 가 대형을 죽이려 한다면 그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이년여 전에도 그 는 구룡을 모조리 말살(抹殺)할 수 있었 다. 세인(世人)들이 구룡의 승리로 알고 있는 그 싸움에서 실제 로 구룡은 제대로 한번 그 를 건드려 보지도 못하였다. 다만 그 가 스스로 물러섰을 뿐이었다. 그런 그 가 홀로 있는 대형을 죽이려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단지 하늘이 기적을 선물한다면 모를까... 3 곡인도의 눈빛이 점차 살벌해지고 있었다. 이틀의 뱃길. 마침내 대낮에도 밤이 내려앉아 있는 듯한 귀역이 보이고 있었다. 독중의 제왕이라 자처하는 곡인도는 자욱하게 흘러나오는 독기(毒氣)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건 그가 수룡방주 오극헌과 지나쳤던 보름 전보다 훨씬 더 심해져 있었다. 아마도 귀역안에 있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완성하기 직전 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 천독만화공(千毒萬化功)을 익힌 내 몸이 독기에 경련을 보이다니... 그러나 곡인도의 몸이 독에 반응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사 람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임을 곡인도는 알고 있었다. 독왕이라는 자신은 어떤 미약한 독이라도 그 존재를 감지하 지만 다른 자들은 아닌 것이다. 구룡이라도 자신들을 침범해오는 독만 알아차릴 뿐인 것이 다. 자신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것에 곡인도는 내심 불안해 하고 있었다. 당대에 자신에 필적하는 독공을 지녔을 가능성이 있는 자가 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분뢰수를 제외한 다른 자가... 어쩔 셈인가? 가루라는 결국 자신의 성질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틀동안 저 침침한 흑색(黑色)이 맴도는 안개만 보고 있어 서 인지도 몰랐다. 하나 사실은 그 안에 있을 것이 확실한 대혈신정때문이라는 것을 가루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분뢰수는 그런 가루라의 심정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냥 내 려앉은 자리에 눌러 앉아 이틀을 보낸 것이다. 신나는 것은 말종뿐이었다. 물고기를 낚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 군산어귀에는 사방이 온통 먹을 것뿐이었다. 예전같으면 전혀 먹을 것이라 여기지 않았을 많은 것이 지 금 말종에게는 전부 먹을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낚시질을 해서 잡은 물고기까지 있었다. 세상에서 먹는 일보다 행복한 일은 아직 모르는 말종이었 다. 분뢰수는 칙칙한 눈빛으로 가루라를 보았다. 가루라의 참을성이 이미 바닥났다는 것은 말종까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물고기를 굽고 있는 말종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해서 가루라와 분뢰수를 지켜보았다. 조금 더 기다린다. 구룡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 악무극은 조그만 배를 내려 따로 떠났다. 운고는 그대로 운령과 함꼐 유봉월의 배에 남아있었다. 음... 언제 쳐들어갈 생각이오? 유봉월이 물었다. 운고는 잠시 귀역을 보았다. 둘째 형님이 일을 시작할 겁니다. 유맹주, 조금만 기다리 면 될 겁니다. 유봉월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그 분은 어디에? 운고는 묵묵히 손가락으로 귀역을 가리켰다. 아연실색한 유봉월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설마... 혼자서 저기 들어가 있단 말이오? 운고는 유봉월을 돌아보며 조용히 웃었다. 벌써 하루 전에 들어갔을 겁니다. 이제는 유봉월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배는 귀역의 안개에 기대기라도 한 듯 느릿한 삐걱소리를 내며 동정호에 떠 있었다. 그 뱃머리에 곡인도는 말없이 서서 운고와 유봉월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구룡이란 애송이들은 훨씬 대담했다. 아직은 그 자신도 단신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독왕 곡인도는 천천히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무엇이 있는가 알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 * * 한쪽은 아직도 어둠이 감싸고 있었고 한쪽은 완연한 대낮임 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귀역에 기대고 선 한 척의 범선은 더이상 귀역안쪽으로 파 고들 생각은 없는 듯 닻을 내리고 있었다. 수룡방주 오극헌은 이미 떠났다. 가룡수와 용저기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올라있었다. 자신들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저 망할 곡인도 는 그들을 본체만체 하고 있었다. 침침한 안개가 술렁거리며 더욱 그들의 기분을 언짢게 하고 있었다. 가룡수는 용저기를 돌아보며 거센 어조로 말했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용저기도 비장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럽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소! 둘은 그대로 뱃머리에 서서 안개를 바라보는 곡인도에게 다 가갔다. 만형십자인과 륜형십자인이 둘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둘은 곡인도를 앞에 두고 섰다. 세 사람의 자리는 품(品)자를 이루었다. 막 가룡수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돌연 곡인도의 손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에 둘이 들고 있던 십자인이 곡인도의 손에 잡혀져 있었다. 그 순간에 가룡수와 용지기는 그대로 기겁을 하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곡인도는 두 자루의 십자인을 그대로 안개 속으로 날렸다. 휘르르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간 십자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곡인도의 얼굴에 냉엄한 빛이 감돌았고 커다란 외침 이 터졌다. 가자! 곡인도는 그 말과 함께 그대로 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놀랐다가 그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해졌 다. 물위에서 가자고 하면 배가 가는 것이다. 그런데 곡인도는 그냥 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곡인도를 보고서 가룡수와 용저기는 또 다 시 경악을 하여 아랫도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곡인도는 지금 물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운고가 운령을 안고 달리는 것은 가룡수와 용 저기의 눈에 미처 들어오지도 않았다. 쯧쯧! 이런 일이 있나... 그대들은 옷이나 갈아입고 배를 지키게! 뒤에서 유봉월이 하는 말을 듣고 가룡수는 비로소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말도 제대로 못 듣는 용저기의 어깨를 툭 치며 유봉월도 물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표정이 되던 가룡수는 다음 순간에 어이없는 표 정이 되었다. 유봉월은 수상객들이 타는 조그만 배에 올아 있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삿대를 휘휘 젓는 것이다. 그 속도는 물위를 달리는 둘에게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시작했군. 분뢰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루라는 눈을 번득이며 안개를 노려보았다. 안개가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안개에 서린 뭔지 모를 기운도 사그라 들고 있었 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 안개를 두들겨 팬듯한 인상이 드는 것 이다. 분뢰수는 힐끔 말종을 보았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갈까? 말종은 어떻게 가야할지 몰랐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분뢰수는 조각배에 올랐다. 가루라는 여전히 안개를 노려보며 뒤따랐다. 대혈문의 신조는 천천히 기지개를 펴듯이 날개를 펴며 날아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 셋에 조각배까지 들고 왔다지만 이틀이나 쉰 것은 엄 청난 게으름이었다는 듯, 괴조의 날개짓은 유난히 거친 바람 을 일으키고 있었다. 분뢰수의 뒤에 말종이 바싹 붙자 배는 저절로 앞으로 나아 가고 있었다. 이제 이들도 귀역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이상한 일이다. 꼭 환혼노인과 비슷한 누군가가 저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혹시 그자도 나를 알까?> * * * 저곳인가?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가룡수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우선 꼼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것은 마찬가 지였을 것이다. 지금 가룡수처럼 목을 움켜쥐인 다음에는 누구나 숨도 쉬기 힘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가룡수의 목은 한 손에 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겨우 손가락 세개정도에 잡혀있었다. 이마에 뿔이 돋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괴인. 가룡수 평생에 처음보는 이 괴인은 한손에 가룡수를 다른 한손에는 용저기를 쥐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 검은 장포로 몸을 감은 괴인에 비하면 좀 작 은, 그러나 가룡수와 용저기에 비하면 훨씬 큰 백의인이 귀역 을 노려보며 저곳인가라고 묻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쉰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가룡수도 용저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어디로 숨었는지 알길이 없는 수로맹의 졸개 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동정호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는 수룡방주 오극헌 이었다. 오극헌은 아주 신물이 난다는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확실히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백마신과 흑마왕이란 두 괴물에게 당한 것이 아직 삼년 이 채 지나지 않았다. 겨우 일어난 것이 얼마 전인데 다시 그 악몽이 살아나고 있 는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한 그 악몽이... 독왕이란 녀석도 들어갔다고? 쩌렁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백마신은 예리한 눈빛을 돌려 오극헌을 보았다. 오극헌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서 서둘러 흑마왕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싫어도 말투는 저절로 공손해지고 있었다. 뭘 새삼스럽게 따집니까, 따지긴... 그냥 들어가면 될 일 을 가지고... 태평스러운 소리가 오극헌의 뒤쪽 배난간에서 들려왔다. 뱃전에 등짝을 기대로 서서 호로를 기울려 술을 퍼넣고 있 는 지긋한 노인이었다. 백마신과 흑마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화풍렬을 노려보았 다. 뭐, 시왕에 비하면 틀림없는 애송이 아닙니까? 게다가 독 공에 최고수일지는 몰라도 무공이라면 천하오패에서도 바닥을 기는 수준이 분명한데... 화풍렬은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다. 백마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빌어먹을 꼬마들하고 합작을 하게 되어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지... 흥! 지금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흑마왕이 이죽거리며 귀역을 노려보았다. 갈겁니까? 말겁니까? 화풍렬은 마지막 한방울까지 털어낸 호로를 강에 던지고는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둘이 어쩌거나 말거나 자신은 가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간다! 가! 배나 내려. 쓴 맛을 느끼며 토해내는 백마신의 말 뒤에 흑마왕이 중얼 거렸다. 배요? 누가 젓게요? 나 배저을 줄 몰라요! 어리둥절한 화풍렬이 말했다. 흑마왕은 힐끔 오극헌을 보더니 다시 자신의 손에 쥐여진 가룡수와 용저기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동정호의 약골(弱骨)은 못저어도 장강에서 소문난 뱃사공 이 둘이나 있잖아. 가룡수와 용저기는 열심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머리통이 박살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귀역에서 살지 죽을지는 나중 문제였다. 수로맹주의 전용선은 나룻터에 대는 일이 없었다. 대신 나룻터를 왕복하는 작은 배를 가지고 다녔다. 지금 그 작은 배는 가룡수와 용저기의 능숙한 노질에 쭉쭉 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가룡수와 용저기가 두번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을 인물들을 태우고... * * * <누굴까? 이 삼엄한 기운은...> 第 二十一 章 突 入 1 귀역(鬼域). 사십여년 전에 홀연히 동정호 군산 옆구리에 붙은 갈대밭은 이렇게 불리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는지 아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로 흘러나오는 귀곡성이 이십여년 간을 지속했을 때 호기 심에 들어간 자들은 아직껏 나온 자가 없었다. 이런 실종자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 명도 귀환한 자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새인지 동정호에는 이 자욱한 안개에 뒤 덮인 곳을 귀역이라고 부르며 금기시 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는 것은 이제는 거의 외지(外地)에서 처음 온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엉긴 듯한 안개는 대낮에도 귀역을 휘어감아 흩어지 지 않았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는 처음 귀역 이 생길 때부터 아는 사람이 없는 셈이었다. 조각배는 멈추어졌다. 뱃길은 이제 없었다. 진흙이 바닥에 검게 깔린 것이 보였다. 가루라는 의아한 빛으로 그 진흙 땅을 보았다. 눈썹이 저절로 꿈지럭거렸다. 말종이 신기한 듯 말했다. 와! 물이 흐르잖아요! 진흙 바로 그 아래 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물위에 흙이 떠있는 것이었다. 떠있는 섬이란 건가? 천축어로 중얼거리는 가루라의 말을 말종은 알아듣지 못했 다. 대신 자신과 똑 같은 이유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가자. 분뢰수는 한마디하고 그대로 그 진흙땅을 밞으며 나아갔다. 말종은 그대로 그 뒤를 따랐다. 가루라는 잠깐 그들이 밞는 것을 보다가 뒤따랐다. 이제와서 물러설 길은 없었다. 대혈신정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되찾아야 할 기보(奇 寶)였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마라도까지 되찾아야 하는 것이 가루 라의 의무인 것이다. 얼마인가 가다가 분뢰수는 멈추어섰다. 가루라가 곁에 까지 와도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종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저 신기한 기둥이었던 것을 보 고 있었다. 이미 바닥은 더이상 진흙이 아니었다. 돌을 깐 바닥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것. 분명 그것은 기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붕괴되어 한쪽면만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뚜렷한 손자욱 하나와 함꼐... 이건 틀림없는 범천사(梵天寺)의 쇄마인(碎魔印)이다! 가루라의 놀란 외침이 터졌다. 천축에서 손꼽히는 신비문파라 여겨지는 대혈문도 범천사의 신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범천사에 대해 그나마 알고 있는 것도 가루라 자신이 대 혈문 출신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역만리 이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가루라 에게 큰 충격을 주는 일이었다. 어째서지? 왜? 도대체... 가루라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분뢰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뒤통수만 보는 가루라는 분뢰수의 눈자위가 조금 붉어져 있 음을 알 수 없었다. 귀망진(鬼芒陣)이 상당히 약해졌는데도 안개가 여전하다 니... 어이가 없군. 운고는 운령을 내려놓으며 기가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것만 있지는 않겠지요. 운령이 말을 받았다. 곡인도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도 않고 땅바닥만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그는 살아오면서 독을 다루느라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기괴한 것을 보며 지내왔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위에 떠서 그 위의 사람을 받쳐주는 진흙 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진흙이 살아 있는듯 발바닥 밑에서 움칠거리는 느낌까지 받을 때는 소름까지 돋는 것이다. 과연 이것만으로도 귀역이라 불리우기 충분하군... 뒤따라 배를 갖다댄 유봉월은 일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우 두커니 배 위에 서서 내려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장강을 제패한 수로맹주라는 그도 이런 황당한 진흙이 있다 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운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운령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 남매에게는 이런 기괴한 진흙따위는 별로 신기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곡인도도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그 앞에 놓인 것은 이런 진흙따위가 전부가 아닐 것이 분명한 때문이었다. 유봉월은 한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자각하면서 유봉월은 그대로 일행을 쫓았다. 그러면서 유봉월은 온몸에 끈적거리며 달라붙어오는 귀기 (鬼氣)를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왜 여기 있는거야! 흑마왕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백마신은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이 떠있는 진흙을 노려볼 뿐이었다. 흑마왕은 누구를 향해서인지 끊임없이 온갖 욕을 다 해대었 다. 화풍렬은 발끝으로 쿡쿡 진흙덩이를 찍어보았다. 으... 징그러워... 당장 화풍렬의 입에서도 못마땅한 것에 대한 불평불만이 쏟 아졌다. 가룡수와 용저기는 노를 붙들고 눈이 튀어나오라고 진흙덩 이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저절로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진흙덩이가 그대로 당장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 럼 보였다. 턱이 쉬임없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울려댔다. 시끄러워! 그만 닥치지 못하겠어! 차갑게 백마신이 소리쳤다. 화풍렬의 불만을 토해내던 입이 딱 닫혔다. 하지만 흑마왕 은 홱 고개를 젓히고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오십년간 쉬었다해도 이런게 여기있다는 정도의 정 보는 가지고 있어야 했던거 아냐? 지금까지 여기서 나온 놈이 없는데 알게 뭐야! 백마신도 못마땅한 것이 가득찬 듯 마주 쏘아부쳤다. 화풍렬은 이들이 이 진흙덩이에 대해 무엇인가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뭔데 그러세요? 의아한 듯이 묻는 화풍렬을 노려보며 백마신이 대답해주었 다. 고루문( 門)의 부토(浮土)라는 거다. 화풍렬의 얼굴에 주름이 한층 더 짙어졌다. 이미 연혼전이 고루문의 후신(後身)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 귀역이란 곳은? 아마 연혼전주 녀석이 죽기 전에 만든 거겠지. 놈은 우리 사부와 같은 연배였으니까. 흑마왕이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앞으로 갔다. 백마신은 혼자 멍청하니 손가락을 꼽는 화풍렬을 두고 나아 갔다. 화풍렬은 도대체 구십이 넘어 백에 가까운 저들보다 한세대 나 위였던 연혼전주가 이년전에 몇살이나 되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한다면 이 귀역이란 것은 아주 새로운 것이 틀림 없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그들을 따르려는 화풍렬을 보고 가룡수가 용기를 내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저, 저희는...? 화풍렬은 잠깐 돌아보고 한마디했다. 따라갈래? 그냥 가지... 가룡수와 용저기는 노를 바람개비처럼 휘날리며 배를 몰고 귀역 밖으로 그들이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달아났다. * * * 귀역의 안개는 그 어둠을 벗어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씩 조금씩 그 어둠은 사라지고 차츰 안개가 갖는 본연의 빛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귀역의 전체에서 배어나오는 귀기(鬼氣)는 한겹 더해진 듯, 더욱 짙어져가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 그 어둠에 짙눌려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한 것 을 원통하게 여기기라도 하듯이... 가루라는 기괴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둠이 걷히면 당연히 밝은 기운이 일어나 이 요상한 귀기 가 약해져야 하는데 그 반대인 것이다. 오히려 귀기가 더욱 강렬해지고 있는 것이다. 설마... 그것이 이 귀기를 감추기 위한 위장(僞裝)이었다 는 건가? 확인할 길이 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일 경우를 생각하자 가루라는 온몸에 절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럴 경우 상대가 누구든 절대 쉽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 다. 극단적인 경우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채 죽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잘하는군. 거의 다 부수었어. 분뢰수가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에요? 말종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목소리는 저절로 떨리고 있었고 분뢰수의 옷자락을 꼭 움켜 쥐고 있었다. 도무지 이렇게 이상한 곳에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 다. 그러나 분뢰수는 대답대신 다시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가루라는 말없이 자신이 계속 나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 고 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떤 경우라도 그는 물러설 여지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으... 이거 정말 사람 못살게 구는군... 도대체 밑에 뭐가 있길래... 화풍렬이 쉬임없이 불평불만을 토해내었다. 끊임없이 꿈지럭거리는 바닥이 그의 신경을 있는대로 긁어 대는 것에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잠깐 조용하다가 다시금 시 작한 것이다. 흑마왕이 앞으로 가다가 쓰윽 돌아보며 웃었다. 밑에 뭐가 있는지 그렇게 궁금해? 한번 볼까? 그리고는 손을 진흙에 쿡 쑤셔넣었다. 흑마왕의 팔뚝까지 진흙에 박혔다가 나왔을 때 화풍렬의 입 은 저절로 딱 서고 말았다. 진흙에 엉겨서 썩어가는 시신(屍身) 한구가 대롱대롱 흑마 왕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목을 움켜쥐어 끄집어낸 것이다. 화풍렬은 자신의 발밑을 보면서 신음했다. 설마, 이 아래가 모두? 흑마왕이 픽 웃어 긍정을 표했다. 저게 바로 고루문의 시마(屍魔)란 거다. 들어는 보았을테 지? 백마신이 조용히 냉정한 목소리를 깔았다. 화풍렬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져 오고 마른 침이 저절로 꿀떡거리며 목젖을 타는 것을 깨달았다. 이 부토란 것은...? 그럼... 마왕선(魔王船)이다. 이 귀역은. 백마신의 목소리가 한겨울의 바람소리처럼 울렸다. 한순간 화풍렬은 자신이 왜 뒤로 자빠지지 않았나 어이가 없었다. 이미 사라진지 수백년이 된, 이제는 절대 다시 볼 수 없으 리라 여기었던 마교(魔敎)의 부전지비(不傳之秘)가 나타난 것 이다. 자신의 눈 앞에 둘도 마교의 후예라지만 마교의 절기는 전 혀 쓴 적이 없었다. 마교절기는 수백년간 한번도 다시 나타난 적도 없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절전(絶傳)되어진 것이다. 하, 하지만... 마왕선은 교주만이 타는 것 아닙니까? 간신이 입을 연 화풍렬의 말에 백마신의 얼굴에 냉기가 겹 겹이 둘러섰고 흑마왕의 얼굴에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 랐다. 배교자(背敎者)가 무슨 짓을 못하겠나?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터진 이 말에 비로소 화풍렬은 이 들이 고루문에 대해 그토록 짙은 증오심을 보였는가를 깨달았 다. 백마신과 흑마왕은 아직도 마교인(魔敎人)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위와 구속력을 가진 존재를 고루 문은 지난 세월동안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 바닥에 널린 시마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 히 있기만 하는 거지요? 화풍렬은 그들의 분노와 배신감이 더욱 표면으로 들어나기 전에 얼른 말을 돌리려고 했다. 격한 감정에 이들이 내보일 것이라고는 닥치는대로 때려부 수려는 파괴욕(破壞慾)말고는 있을게 없었다. 연혼전주 놈이 뒈진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지. 여전히 손에는 시마를 하나 들고 있는 채로 흑마왕이 간단 하게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놈들에게 영기(靈氣)를 보내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꿈지럭거리지도 못할테니까. 백마신이 하는 말을 들으며 화풍렬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가 이 시마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는 연혼전주 못 지않는 자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시왕조차도 한수 접고 들어가는 연혼전주에 비견되는 자라 니... 마, 만약 이것들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 는 겁니까? 화풍렬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들이 선 이장 정도 주변에서 머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 다. 진흙 범벅이 된 시마들이 무슨 대나무가 자라기라도 하듯이 땅에서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느릿하니 보이는데도 순식간에 상반신이 올라왔고 끅끅대는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아직도 대답이 듣고 싶냐? 흑마왕은 손에 쥔 시마가 꿈틀거리면서 자신을 향해 팔을 흔들어대며 다리로 차는 시늉을 하려들자 그대로 손아귀에 힘 을 주며 말했다. 우두둑! 간단하게 시마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고 흑마왕이 손을 떨 치자 저쪽편에 날아가 박혀버렸다. 아니 됐어요... 맥이 탁 풀린 음성으로 화풍렬이 중얼거렸다. 걱정할 것 없어. 이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니까... 부토가 완전히 엉겨붙어 있지 않으니 부수는 것은 쉬울거야. 느긋한 듯 백마신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서는 당장 강철이라도 끊어놓을 듯한 예기(銳氣)가 흘러나오고 있 었다. 화풍렬은 정말 이제 시신이 꿈지럭거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아무리 때려부수면 된다지만 입맛 떨어지게 만드는 것들을 몇번씩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저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곡인도는 자신이 건너온 떠 있는 진흙 아래서 솟구치는 인 영들을 보며 어이없어 하며 내뱉았다. 사방을 둘러싼 안개를 돌파하고 들어온 지금 그들이 밞고 있는 것은 돌바닥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밞고 온 진흙아래 저런 것들이 숨어있다니! 더욱 이상한 것은 그것들이 바깥을 향해 나아갈 뿐 이미 통 과해 들어온 자신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 누가 따라 들어온 모양이지요. 운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의형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운령은 말없이 썩어움직이는 시신들을 보았다. 어느새 눈가 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니? 운고가 말해자 운령은 고개를 돌리며 안쪽을 바라보았다. 유봉월은 식은땀이 등골에 좍좍 흐르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과연 귀역은 귀역인 것이다. 괜히 따라왔나? 하지만 후회는 이제 너무 늦어 있었다. * * * <자, 이제 어떻게 할텐가? 이래도 피할 수가 있겠나? 더이 상 너는 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 콰악! 진흙범벅된 몸뚱아리는 으스러지면서도 고통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시신이었기 때문이다. 흑마왕의 권격은 여지없이 닿는 것을 부셔내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팽팽한 회초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휘익! 그 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덤벼들던 시마의 몸은 두 쪽 이 나고 있었다. 백마신의 은편이 벌인 일이었다. 뒤에서 보면서도 화풍렬은 흑마왕과 백마신의 공력에 경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움직임은 그토록 경쾌하기 이를데 없음에도 그 안에는 실로 무거운 기운이 실려있는 것이다. 파라라라... 깃발흔드는 소리는 뒤에서 달려드는 시마들을 향한 화풍렬 의 철검이 울려대는 소리였다. 셋은 품자(品字)를 이루고 전진하고 있었다. 흑마왕과 백마신이 앞에 서 있었고 화풍렬이 뒤에 좀 쳐져 있었다. 지겹군! 흑마왕이 격한 외침을 토해내었다. 그러나 이 진흙 밑에 얼마나 많이 이 시마가 숨어있는지는 도무지 짐작해낼 방법이 없었다. 화가야! 비환을 써! 백마신이 외쳤다. 화풍렬은 철검을 휘두르다가 되물었다. 두분 귀에 상당히 거슬릴텐데요? 그의 비환은 마성(魔性)을 억누르는 소리를 울려댈 수 있었 다. 그것은 사기(邪氣)도 물리치는 것이다. 당연히 흑마왕이나 백마신이 별로 좋아할 소리는 아니었다. 우리보다 어떤 놈 귀에 더 거슬릴걸! 백마신이 냉엄한 태도로 답했다. 말은 저러지만... 수틀리면 그걸 핑계로 날 잡으려드는거 아냐?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화풍렬의 두 손은 이미 철검 대신에 금환을 겨누고 있었다. 어디로 날릴까요? 앞! 짧은 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달려들던 시마들이 사방으로 비산(飛散)되었다. 흑마왕이 순간적으로 전신을 회전시키며 권경(拳勁)을 사방 으로 뿌려댄 것이다. 채채채챙--- 긴 여운을 끌며 한쌍의 금환이 앞으로 날았다. 그리고 화풍렬도 화살처럼 그 금환을 따라 움직였다. 금환은 앞으로 뻗다가 잠시 허공에 멈칫하며 채챙대는 소리 를 울렸다.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덤벼들던 시마들은 기우뚱거리다가 뒤로 자빠지기 시작했다. 다시 일어서서 덤벼들려 하는 것이 역력했지만 금환이 허공 에서 울려대는 소리는 다시금 시마들을 진흙바닥에 구르게 만 들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화풍렬이 선두에 선 품자가 되어 셋은 매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들어가야 하나? 유봉월이 꺼림칙한 기분을 어쩔 수가 없어서 한마디했다. 그러나 그 말고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 이 없었다. 곡인도는 잠시 유봉월을 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직은 그렇게 늦지 않았다. 물러서기는 어려워도 여기 머 물수는 있겠지. 유봉월은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고양이가 쥐생각하는가? 함께 온 이상 모두가 함께 행동하 는 거야!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곳은 곧 안개까지 걷히게 될 것입니다. 단지 그 전에 안에 파고들어야 합니다. 운고가 하는 말에 곡인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려는지 이해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끈적거리는 귀기는 유봉월을 위협할 수는 있어도 이 구 룡의 애송이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는게 분명했다. 심지어는 운령마저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곡인도의 표정을 보며 운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안개가 걷히기 전에 저 안에 있는 자들과 결판을 내야 다른 피해가 없습니다. 그 다음 운고는 누구의 말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운령과 함께 그들 앞에 열린 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곡인도는 힐끔 유봉월을 보고는 그대로 그 뒤를 따랐다. 유봉월 역시 성큼성큼 뒤따랐다. 가루라는 뭐가 마음에 걸리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을 안 순간 이미 가루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봐! 바닥이 돌고 있다! 분뢰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가볍게 고개만 끄 덕였다. 가루라는 어이가 없었다. 물위에 뜬 동동 떠있는 흙덩어리에 돌로 만든 건축물이 올 려져 있고 그것이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딛고 있는 것이 정말 돌인지부터가 의심스러 웠다. 마치 배 위에 있는 느낌인 것이다. 가루라는 이것이 정말 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작은 섬에 근접할 수준의 배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말종은 사방에서 느껴지는 섬칫함에 분뢰수에게 찰싹 달라 붙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나빠지는 곳이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안개 속에 헤매일 때는 그래도 그럭저럭 바깥이란 것에 어느 정도 안도감이 들었는데 그 괴물이 새겨진 이상스 런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부터 영 엉망인 것이다. 어라? 그새 다 없어질리는 없는데...? 화풍렬이 어이없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진흙덩이 속의 시마들의 요격권(邀擊圈)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일단 돌바닥을 딛은 후로는 시마들은 다시 진흙속으로 잠복 해버리고 만 것이다. 화풍렬을 의아하게 만든 것은 먼저 간지 얼마 되지 않는 운 고 남매와 수로맹주의 행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마신이 차게 말했다. 다른 곳에 닿았을 거다. 똑같은 방향으로 들어왔는데요? 흑마왕이 끌끌 혀를 차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돌고 있는게 느껴지지 않느냐? 백마신도 한마디 던지고는 그대로 나아갔다. 화풍렬은 잠깐 무엇이 도는가 하다가 자신이 딛고 있는 바 닥이 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설마 이 마왕선이란 것이 원형으로 맴돈다는 건가? 그렇다면 화풍렬이 저 기분나쁜 시마들을 뚫고 있는 동안 운고 등이 닿은 곳은 다른 쪽으로 가 있을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저게 도대체 뭐야! 흑마왕의 욕이 터져나왔다. 이 욕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고 한참을 계속되었다. 듣고 있던 화풍렬은 마치 이세상에서 가장 몹쓸 것이 눈 앞 에 나타난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마신도 차가운 빛을 번뜩이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을 노 려보고 있었다. 안개는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도 그 농도를 거두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비교적 흐릿하나마 앞에 있는 것의 윤곽이 어 렴풋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거대하게 솟구쳐 있는 반구(半球)의 건축. 그리고 그 한 복판에 우뚝 솟아오른 석탑(石塔). 그게 왜 그리도 몹쓸 것인지는 화풍렬이 이해할 것이 아니 었다. 단지 그것이 원래 그들이 아는 마왕선에는 없어야 한다는 것만이 흑마왕이 내뱉는 욕속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전부였 다. 이러고 있지말고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듣고 있다가 한마디하는 순간 화풍렬은 자신이 불가침성역 (不可侵聖域)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마왕과 백마신이 그를 쏘아보는 눈길에 짙은 살기가 실려 있는 것이다. 합작이고 나발이고 이녀석부터 요절을 내버려? 흑마왕이 으스스하게 목소리를 깔며 중얼거렸다. 그럴까? 백마신의 냉기서린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핫핫핫! 두분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할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쾌활하고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화풍렬이 말했다. 지금 화풍렬보다 더 쾌활하고 명랑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 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흑마왕과 백마신은 그런 모습을 냉랭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둘의 시선이 화풍렬에게서 그 뒤로 움직였다. 자박자박... 화풍렬도 자신의 등뒤에서 누군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자신의 등뒤라면 저 괴상한 건축이 있는 곳이었다. 하나 그것을 알면서도 화풍렬은 감히 뒤돌아볼 수가 없었 다. 당장이라도 저 흑마왕의 손에 쥐일까 겁나는 것이다. 대공, 여전하시군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나 즐기 시고요.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무극! 화풍렬은 이제 돌아서서 얼른 다가오고 있는 악무극을 껴안 았다. 이게 얼마만이냐? 그야말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태도였 다. 그런 모습을 보며 흑마왕과 백마신은 냉소만 그릴 뿐이었 다. 악무극의 시선은 조용히 두 마인을 살펴고 있었다. 문득, 악무극이 조용히 웃었다. 단단히 준비해 오셨군요. 백마신은 자신의 허리뒷춤에 찬 보따리를 보면서 악무극이 꺼내놓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되물었다. 네 녀석들은 다 오긴 한 거냐? 악무극은 웃었다.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왔지요. 화풍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말은 누군가는 빠졌다는 뜻인데 상황은 그렇게 여유가 있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거냐? 화풍렬이 물었다. 지금 그가 물을 수 있는 전부이기도 했 다. 생각한 것처럼 잘 풀리지 않아요. 목어(木魚) 둘째형이 귀 면사주(鬼面四柱)를 부셔놓기는 했는데 이 안개가 풀리지 않 는 겁니다. 게다가 난데없이 백무귀곡로(白霧鬼谷爐)가 있지 뭡니까. 악무극이 덤덤하게 말했으나 듣고 있던 세 사람은 전혀 다 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고 있었다. 귀곡사주를 부셔? 그 맨질맨질한 대머리 꼬마가? 흑마왕이 자신이 느끼는대로 토해내었다. 마왕선이 언제나 몰고 다니는 어둡고 침침한 안개를 일으키 는 귀면사주는 그렇게 쉽사리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마신은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악무극 을 노려보았다. 화풍렬은 귀면사주가 무엇인지는 몰랐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백무귀곡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그로인해 놀 랄 수밖에 없었다. 구천회의 보물이 이곳에 있다는 말에 놀란 것이다. 결국 역할이 바뀌었어요. 원래 둘째형이 저와 운다섯째 하 고 함께 들어가고 세째형이 바깥을 마무리 짓기로 했거든요. 아니면 목어 둘째형이 바깥을 맡고 세째형은 저하고 들어가고 운고 남매는 밖에 있고... 그런데 저 운고녀석은 막무가내로 쳐들어갔지 뭡니까. 뭐?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백마신이 어이없어 물었다. 그렇게 멋대로 들어갈 수 있는 마왕선의 내부가 아닌 것이 다. 문이 열렸으니 들어갔지요. 잠깐동안 백마신과 흑마왕의 얼굴에 어처구니 없어 기막히 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적어도 이 문제는 그들만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온 것이다. 마왕선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 마왕지문(魔王之門)은 모르 는 자가 함부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살(自殺)이 소원이면 열어보는 것이 지름길인 문이 바로 이 마왕선의 마왕지문이었다. 벌써 누가 열어놓았단 말이냐? 흑마왕이 음침하게 물었다. 그런 거 같습니다. 안 그러고는 열릴 수가 없을테니까. 악무극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의 앞쪽에는 기묘한 건축이 버티고 있었고 뒤에는 진흙 범벅된 시마들이 끊임없이 울어대는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누군가가 계속 일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3 운고는 통로를 살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은 둘째 문제였고 언제까지 이 렇게 빙빙 돌아다녀야하는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폭이 삼장인 이 통로는 앞으로 뚫린 것이 아니라 옆으로 뚫 려 있었다. 운고는 들어오자 마자 그냥 막바로 왼쪽을 택해 움직였다. 누가 무엇이라고 말할 겨를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곧장 걸은 셈이었다. 운고가 택한 방향은 회전하는 방향의 반대방향이었다. 최대한 빨리 길을 찾기 위해서 운고가 택한 방법이었다. 운령은 그 뒤를 따르고 있었고 곡인도와 유봉월도 달리 어 떤 의견을 가진 것이 없어 그저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운고는 걸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계속 생각 했다. 이미 계획에서는 어긋나 있었다. 구룡이 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침입을 했다면 이 귀역을 차지하고 있는 자 들은 반드시 그에 대처할 것이고, 그러는 와중에 틈은 생길 것이 분명했다. 바깥은 다른 의형제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 믿었기에 운고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묘하게도 위협적으로 느껴 진다. 무엇이 날 위협할 수가 있지?> * * * 너 도대체 그게 무슨 요사스런 신법(身法)이냐? 화풍렬은 잠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악무극 이 옆으로 두치정도 움직인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 해서 물었 다. 그는 정말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어느틈엔가 움직여 있던 것이다. 꼬마가 움직인게 아니야. 이 마왕선이 움직인 거지. 백마신이 말했다. 손은 악무극이 서 있는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풍렬은 그제서야 그와 악무극이 선 바닥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선을 경계로 악무극이 선 자리와 자신이 선 자리가 따로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화풍렬은 바깥 쪽 진흙과 안쪽의 돌이 따로 돌고 있다고만 생각했다가 이 점을 알게 되자 좀 기가 막혔다. 결국 이 마왕선은 안쪽으로 가면 갈수록 바깥 쪽과는 다른 속도로 맴돌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희미한 경계선을 사 이에 둔 채로. 어째서 이렇게 해놓은 겁니까? 화풍렬이 묻자, 악무극이 대신 대답했다. 대공, 여전히 생각하기 싫어하시는 군요. 침입자를 분산시 키는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있습니까? 듣고보니 화풍렬은 이해가 갔다. 똑같은 방향에서 계속 물밀듯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이 마왕 선은 절대 같은 방향으로 떼거지의 적은 맞이하지를 않는 것 이다. 단지 미묘한 시차로 사방에서 멋대로 흩어져 들어오는 적만 맞이 할 뿐이었다. 하나 쳐들어오는 자가 고수일때는 이야기가 좀 다르지. 흑마왕이 음산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뭐가 다른지 보여주어도 괜찮겠지. 백마신이 이 말을 받으며 악무극을 쏘아보았다. 왜그러지요? 악무극이 물었다. 밖은 너희들이 확실히 책임질 수 있겠지? 차가운 백마신의 질문에 악무극은 픽 웃었다. 그건 걱정마세요. 저 진흙 아래의 시마까지 모조리 없앨 작정이니까. 오래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뭐? 야, 저걸 어떻게 금방 다 없앤다는거냐? 화풍렬이 기가 막힌 표정이 되어 따졌다. 일일이 다 없앤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불장난하는 거는 저한테 묻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압니 까? 여덟째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 하겠지요. 강호에서는 녀석의 팔이 천개라고 하지 않습니까 악무극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구룡의 여덟째 연비청은 화룡이라고도 불리웠으나 천비룡 (千臂龍)이라고도 호칭되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저걸 다 태울 만큼의 화약을 어디서 구 해? 화풍렬은 여전히 못미더운 표정이었다. 악무극이 낄낄대며 웃었다. 저도 똑같이 물었더니 여덟째가 저런 것들에게는 화탄 몇 개와 등잔기름이면 충분하다더군요. 등잔기름은 수로맹에서 원하는 만큼 구해주고 있고요. 이 말을 뒷받침 하듯이 점차 엷어지는 안개너머로 부토가 깔린 쪽에서 일어나는 소동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흠, 아마 이제 기름을 뿌리나 보군요. 바깥은 맡기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세째형이 아무리 대단해도 고전(苦戰) 할 것 같거든요. 뭐? 철무위(鐵武威)가 고전을 할 거같아? 화풍렬이 기겁을 해서 서둘러 뛰었다. 흑마왕과 백마신도 역시 함께였다. 악무극이 뒤에서 하는 소리에 흑마왕과 백마신은 살기를 일 으키고 있었다. 아, 그 빨간 옷 입은 중하고 덩치 큰 퍼런 친구도 그 안에 있던 거 같았어요! 운고는 선두에 서서 걷다가 멈추어섰다. 양 옆의 벽에는 이제까지 처럼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별다 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고는 자신의 몸을 감싸오는 기묘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운고의 멈춤은 뒤따르던 운령과 유봉월, 곡인도까지 멈추게 했다. 일단 멈추기는 했으나 운고는 무엇이 위험한지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령아! 안되겠다. 좀 봐줄래? 운고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운령은 벽을 살피고 바닥 을 살폈다. 뭔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저걸 한번 눌러 보실래요? 운고는 운령이 가리키는 바닥의 돌을 향해 천천히 손을 펴 고 미는 시늉을 했다. 그르륵! 운고의 손바닥이 가리킨 바닥의 돌은 밑으로 가볍게 두치정 도 들어가며 기관음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소나기였다. 위에서 밑으로 쏟아지는 짧은 화살의 소나기는 소리조차 없 어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곡인도의 입가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절묘한 기관이 있음에 놀랐고, 그걸 순식간에 간파해 내는 운령에게 놀란 것이다. 과연! 구룡일봉이라 하더니 꼽힐만하다. 내심 경악해서 보는데 운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이게 다는 분명히 아닐텐데... 좋아! 이렇게 한번 해보자! 이번에는 운고가 두 손을 동시에 밀어내며 옥룡장(玉龍掌) 을 사용했다. 우우웅! 한 사람이 그대로 밀고 지나가는 듯한 경풍(勁風)이 통로에 이르는 순간, 파! 파! 파! 좌우 벽에서 파란 불꽃이 연속으로 터져나왔다. 폭죽이 터 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위에서는 아까의 소리없는 화살소나기가 다시 퍼부 어졌다. 한순간에 통로는 화살비와 불꽃이 점령해버린 것이다. 흠, 제법이네. 운고가 중얼거렸다. 이미 운령을 잡아끌며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선 다음이었 다. 곡인도와 유봉월도 물러서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운령의 말에 둘은 소름이 돋았다. 아니에요. 역시 직접 지나가야 연환기관이 모두 동작하는 모양인데요. 흑마왕은 두 팔을 휘휘 돌려보았다.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팔뚝에서 나고 있었다. 화풍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백마신이 이 벽의 두께가 일장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으나 자신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팔힘 자랑하려는 흑마왕도 분명히 듣고서 뚫겠다는 것 이니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발단은 문을 찾자는 화풍렬의 말이었다. 흑마왕은 퉁명스럽고 간단하게 말했다. 빙빙 돌아 어느 구석에 쳐박힌 줄 알고 그걸 찾고 있어? 그리고 지금 힘자랑이었다. 먼저 소리없는 일격이 벽에 박혔다. 쿠욱! 팔꿈치까지 들어간 주먹을 한번 슬쩍 비틀어 빼고는 무시무 시한 음향을 동반한 제 이격을 그 구멍에 넣었다. 다시 슬쩍 비튼다고 생각했을 때 벽은 흑마왕의 키에 맞추 어서 두 자가량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대파멸마권과 대회천신권이 번갈아 가며 벽을 으스 러뜨려 허물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이 보인다 싶은 순간에 흑마왕의 몸은 뒤로 쏘 아진 화살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화풍렬은 갑자기 덮쳐오는 흑마왕의 등짝을 보고는 반사적 으로 옆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흑마왕이 자신을 덮치려는게 아니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벽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허공으로 튀어오른 것을 보았고 그 뒤를 이어 새파란 귀화(鬼火)가 한무더기 쏟아지고 있었 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라도 되는 듯이 귀화는 곧장 뻗어 한동 안 끊이지를 않았다. 백마신은 아예 처음부터 옆으로 비껴서서는 구경만 하고 있 었다. 흑마왕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옆으로 내려서고는 이를 갈 았다. 빌어먹을 자식! 배교자 주제에 갖출 것은 다 갖추었잖아! 세 사람은 이 파란 불줄기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안으로 진 입하였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한 끈적거리는 귀기... 이제 어디로 가지요? 몸에 달라붙는 기분나쁜 분위기를 털어내려고 화풍렬이 경 쾌하게 물었다. 어디긴... 돌고 있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가는거지. 백마신이 답했다. 또 아까 같은 것이 튀어나오지 않는 겁니까? 여긴 내부의 가장 바깥쪽 껍질이야. 저 귀화만 조심하면 돼. 안쪽에는... 글쎄... 뭐가 있을지... 백마신은 생각에 잠겨들어가는 듯 말이 점차 흐릿해지고 있 었다. 가자.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흑마왕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화풍렬은 백마신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확실히 이 안에서 무엇인가가 꿈지럭거리는 듯한 느낌을 이 들은 모두 받고 있었다. 그것은 절정에 이른 무인(武人)만이 갖는 특이한 감각이었 다. 투두둑! 사슬이 끊어졌다. 운고는 자신의 팔에 엉긴 사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운령이 말한대로 연환기관을 움직이는 사슬은 벽 속에 숨겨 져 있었다. 온통 녹이 슬어있는 것 같은데도 기관을 정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슬이었다. 됐어요. 그럼 가요. 말을 꺼내면서 운령은 그대로 걸었다. 운고는 사슬을 감은 채로 얼른 그 옆에 보조를 맞추었다. 행여 자신이 틀렸을 경우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걸 막기위 해 운령은 직접 그 통로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곡인도나 유봉월은 나이어린 아가씨의 자신감 넘치 는 행동으로 밖에 해석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고한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대담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들 앞의 기관은 이미 동작을 멈추었고, 그들 은 그 통로를 지나갈 수 있었다. 일행의 그림자가 통로 저편으로 사라질 무렵, 천정에는 눈 이 하나 나타났다. 천정 곳곳에 새겨진 기괴한 조각들... 그 가운데 우연인 것처럼 새겨진 눈이 꿈벅거리며 지나간 일행을 흘깃 보고는 다시 그들이 해체시킨 기관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조각인양 부릅뜬 채로 가만히 있었다. 第 二十二 章 亂 戰 1 말종은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분뢰수를 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인 적은 한번도 없 었다. 그런데 지금 분뢰수의 태도는 어딘지 전과 달리 좀 망설이 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왜 그러세요? 말종은 결국 물었다. 분뢰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천정을 보고 있었다. 가루라는 아까부터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두 손에 쥔 십자인 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어떻게 이런 요상한 곳을 이만큼 들어왔는데 한번도 공격받 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가루라 자신이 기관건축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이기는 해도 이 기분나쁘고 재수없어 보이는 곳이 무엇인가 튀어나오게 만 들어져 있음은 알아 볼 수가 있었다. 헌데 아직 한번도 그런 것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좀 기다려보자. 한참을 그냥 서 있다가 분뢰수가 한 말이었다. 가루라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또? 말종은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오면서 줄곳 분뢰수가 한 말이 조금 기다려보자는 것이 었다. 구룡이란 사람들이 일을 치루는 동안만이라며... 그러나 가루라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지금껏 안전했던 것도 그 때문임을 어렴풋이 깨 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인도의 기분은 개판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자신을 무용지물(無用之物)로 여겨본 일 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귀역에 들어와서 그는 줄곧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앞에서 길을 뚫고 있는 것은 운고 남매였다. 그들은 어떤 난관이 오더라도 무조건 돌파하겠다는 기세로 앞장을 서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고 나설 수도 없었다. 곡인도는 이런 기관건축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독을 사용하는 암기라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 던지는 것을 연구했지 용수철이나 기계(器械)를 사용하는 것은 꿈에도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신조는 오직 무공과 독술에 매진하게 만들었고 천하제일의 독공을 연성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얹혀가는 신세라니! 자존심이 강한 그로써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유봉월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온몸에 달라붙어오는 이 귀기가 신경을 긁어대고 있는 때문 이었다. 그리고 섬뜩하게 무엇인가에 노림받는 듯한 느낌... 이건 좋지 않아... 수로맹주로서의 그의 경험은 그에게 계속 위험신호를 보내 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생기는 긴장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유봉월마저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콰르륵! 돌덩이가 쏟아졌다. 일행은 벽에다가 길을 하나 더 만들고 전진하고 있었기에 그 돌무더기가 옆에 구르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화풍렬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마신은 이 안의 함정에 대해 잘 알았다. 그가 지목할 때마다 흑마왕은 그 괴력으로 기관을 세우고 멈추며 부셔대는 것이었다. 저... 얼마나 이러고 가야합니까? 다시 통로로 나서 걸으면서 화풍렬이 물었다. 백마신이 흘깃 보고는 말했다. 다음 마왕지문까지. 화풍렬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들어올 때는 문찾기가 귀찮다고 벽을 뭉갠 흑마왕이 기관을 해체하며 전진하는 것이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또 벽을 뭉개면 안되나요? 바보자식! 이 바깥 껍질이 다 무너지는 걸 보자고? 흑마왕이 소리쳤다. 화풍렬은 순간 목을 움추리며 놀랐다. 다 무너져? 이 안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건 충격이었다. 벽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 천정이 다 무너진다니... 그제서야 화풍렬은 이해가 갔다. 이 마왕선이 어떤 것인지... 근본적으로 침입자를 죽이는게 목적인 섬 같은 거대한 배였다. 이건 뭐야? 백마신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벽에 구멍이 뚫렸고 끊어진 사슬이 보였다. 바닥에는 따끈한 열기가 배어있었다. 누가 이렇게 깔끔하게 부셨지? 흑마왕이 감명받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연환기관의 축이 되는 사슬을 찾아내 깨끗하게 절단한 것이 다. 이런 식으로 전진한다면 상당한 거리를 힘안들이고 지나 갈 수 있었다. 그 기관파괴술(機關破壞術)은 흑마왕은 감동시키고 있었다. 백마신이 잠시 쭈그리며 바닥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계집애도 왔군. 천정의 눈은 다시 꿈벅거렸다. 저쪽에서 흑마왕이 선두에 서고 화풍렬이 그 뒤를 따르며 마지막에 백마신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해체된 기관을 가느라 별로 어려운 것을 느끼 지 않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눈은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는 듯 다시 한번 껌벅거렸 다. 그리고 그대로 부서졌다. 부서진 눈은 그저 돌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백마신의 소매 속에서 은빛이 번득하는 순간이었다. * * * <다들 모이고 있다. 이제 어떻게 대항해 올텐가?> * * * 어? 운소저! 말종이 놀라 외쳤다. 저쪽에서 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운고 남매였다. 그리고 그 뒤에 한번 본 적이 있는 곡인도가 있었다. 한 사람은 말종이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풍채가 좋고 당당한 걸음걸이에 메기수염이 유난히 잘 어울 리는 사람이었다. 운령은 멍한 표정으로 분뢰수와 말종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그들이 여기 와 있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새를 타고 이 방향으로 난 것은 알았지만 설마 바로 이 귀 역에 들어왔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분뢰수를 보았다. 칙칙한 눈빛에 충혈된 눈자위.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곡인도는 기분이 더욱 언짢았다. 설마 이 자리에서 저 괴물 같은 자식을 또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못한 것이다. 유봉월은 미소지으며 분뢰수에게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 수로맹주 유봉월이라 하오. 그러나 분뢰수는 본체만체였다. 유봉월은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만 더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이 귀역 안에서는 이런 일 로 성질을 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뭘하고 있던 거요? 운고가 결국 묻고 말았다. 대답은 가루라가 천축어로 혼잣말처럼 했다. 구룡이 일치르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어차피 회전하 는 이곳에서 이렇게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은 수단이 었다. 다만 운고는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기회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운령이 조용히 물었다. 이 귀역에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지요? 말종은 얼른 분뢰수를 보았다. 도대체 이곳에 뭐하러 들어왔는지 아직까지 말종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 가루라라는 괴인은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했지만 분뢰수 는 왜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아마도 비슷한 일이겠지. 기왕에 들어온 것이니 모두가 한 곳에 뭉쳐가면 좀더 쉬워질거야. 분뢰수가 말했다. 유봉월이 이 말을 받았다. 좋은 의견이요. 그럼, 이제 모였으니 가는게 어떻겠소? 한자리에 있으면 더욱 끈적거릴 것 같은 귀기에 유봉월은 움직이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분뢰수의 눈빛이 잠깐 유봉월을 향했다가 그들이 온 통로로 움직였다. 아직. 또 올 사람이 있다. 백마신의 눈썹이 곤두섰다. 흑마왕은 툴툴 불평을 쏟아내었다. 화풍렬은 반갑다고 운고를 껴안았다. 말종은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두 사람을 보며 간이 콩알만해 지고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하게 깨닫고 있 었다. 가루라마저도 흑마왕과 백마신의 섬칫한 분위기에 놀란 표 정이 역력했다. 곡인도는 미간이 좁혀들어서 오십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두 마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비교해 그리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훨씬 깊은 공력이 엿보이기까지 했 다.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살벌한 기세가 물씬 배어나오는 것이다. 유봉월의 입가에 미소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오극헌에게 들었다. 오극헌이 이들에게 당한 뒤의 그 참담한 꼴을 보기도 했다. 과연... 소문보다 더하군... 백마신이 나직하고 싸늘하게 목젖을 울리며 위협적으로 음 성을 토해내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대답은 운고가 해주었다. 기다렸지요. 이쪽이 기다렸다가 합류하자고 해서요. 괜찮 은 의견이지요? 어차피 합작하기로 말도 되어있었는데. 백마신의 눈은 분뢰수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보고 말았을 뿐이었다. 좋아, 그래 다음엔 어쩌자는 거지? 흑마왕이 퉁명스럽게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곧, 마왕지문 이 이리로 돌아온다. 분뢰수가 대답했다. 대답하면서 분뢰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간다. 기대해봐. 그때 백마신의 손이 움직였다. 번쩍! 은빛 한줄기가 허공을 갈랐고 그 위에 어지럽게 박혀있는 조각 가운에 눈의 조각을 부셔버렸다. 백마신은 음랭한 시선을 분뢰수에게 던졌다. 진작에 부셔도 좋을 것을 일부러 상대에게 이쪽의 전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했다. 하나 어찌된 영문인지 백마신은 일체 거기에 대해 말할 기 분이 아니었다. 아직 분뢰수에게는 석연치 않는 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어쩌면 그와 흑마왕의 그분 일수도 있는 자이기에 백마신 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분뢰수가 허공에 중얼거린 말과 그 다음에 백마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감시하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누구도 이런 곳에서 적의 감시를 빠짐없이 받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짐작만 해도 긴장되기 충분한 것이다. 흠... 역시 왔군. 담담한 음성에 한없은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는 뒤로 돌아섰다. 바닥에 부복하고 있는 자는 아까부터 그에게 한 가지를 탄 원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해도 이것은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부복한 자가 간다해도 별 도움이 될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부복한 자는 저 침입자들을 해치우겠노라 장담하 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뺨에 그어진 네줄기 상처가 거울에 투영되었다. 좋아. 너의 능력으로 모두를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의 마지막 말은 부복한 자에게는 과분한 충고였다. 부복한 자는 애당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탄원한 것은 아 니었다. 단지 흑청적황(黑靑赤黃)의 넷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에게 남은 삶의 마지막 목표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자신을 지금껏 돌보아준 저 기품있는 사람에게 절을 하면서 그는 뒤로 물러섰다. 설혹 그가 죽어도 흑청적황의 복수는 그 자신에 의해 마무 리될 것이었다. 자신의 복수도! 2 마왕의 문 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문은 굳게 닫힌채로 돌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어느 틈엔지 그것은 이미 일행의 정면에 와 있었다. 기분나쁜 괴인상(怪人像)을 새겨놓은 문. 그것이 마왕지문 이었다. 백마신은 유난히 눈을 번득이며 분뢰수를 노려보듯 하고 있 었다. 어떤 방식으로 마왕지문을 열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그 방법에 따라 분뢰수가 누군지 밝혀낼 수 있었다. 강호제일의 소식통이란 녀석을 족쳐서도 알아내지 못한 그 의 정체를! 기련산맥에서의 일 이후로 백마신과 흑마왕이 가장 먼저 찾 은 것은 만사통(萬事通)이라는 애송이였다. 사람들은 그를 강호기인(江湖奇人) 중에서도 원로라고 하지 만 백마신과 흑마왕에게는 틀림없는 애송이였다. 그리고 이 애송이와는 이미 삼년 가까이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애송이를 족친 결과는 더 헷갈리는 것이었다. 분뢰수가 누군지 전혀 짐작도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그분 이 아닐까 였으나 만사통은 간단 하게 물었다. 무공이 닮았습니까? 대답은 전혀 아니 였다. 얼굴말이까지 하고 싸돌아다니는 녀석이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 다음 만사통이 한 말은 더 걸작이었다. 알고 계세요? 그자는 절정에 이른 일류고수들에게 전에 자 신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있다는데... 만사통은 그가 누구인지 그 자신조차 모른다고 지껄인 것이 다. 그리고 이 경우 그분 일 가능성은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해 도 좋았다. 절대 자신이 누군지 잊을 그런 그분 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백마신과 흑마왕이 자신할 수 없는 것은 만사통이 툭 내뱉듯 던진 마지막 질문때문이었다. - 그분 이 원한다면 그렇게 못하겠어요? 그 답은 그 분 은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 다는 것이었다. 결국 분뢰수의 정체에 관해서는 보류였다. 대신에 그들은 최대한의 정보망을 움직여 청마군과 적마승 을 찾았다. 그런 와중에 화룡이란 꼬마와의 약속이 얽혀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이 교활한 꼬마는 자신들이 주는 약재를 받으면서 슬쩍 말 을 흘렸다. 청마군과 적마승이 어디로 가는지 구룡의 한명이 보았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말임은 당연했다. 구룡은 자신들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만큼 바보가 아니니 까. 결국 그로 인해 약재를 건넨 가릉강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 이 귀역 어딘가에 청마군과 적마승이 있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반드시 죽여없애야 하는 둘이... 이런 빌어먹을! 하나도 모르겠다! 백마신은 속으로 욕설을 터뜨렸다. 분뢰수는 마왕지문을 열었다. 그저 손으로 밀어 연 것이다. 어딘선가 무엇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마왕지문의 안 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이 파괴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단지 밀어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가장 단순한, 그러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흑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분뢰수의 괴력은 정말 의외였다. 그러나 일행에게 의외의 일은 문이 열린 다음에 또 있었다. 한사람이 서 있었다. 전신에 하얀 백의를 두룬 자였다. 얼핏보면 문사(文士)로나 보일 그런 자였다. 단지 손에 사람 목을 자르기에 충분한 커다란 곡도(曲刀)를 하나씩 들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가 나타나는 순간 곡인도는 독기(毒氣)를 느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 앞에 선 분뢰수가 모를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모른다면 자신의 독공이 안통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곡인도는 그 독기가 사방으로 그물질 하듯이 퍼지는 것을 깨달았다. 분뢰수는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자는 거지? 알 수 없었지만 곡인도가 할 일은 간단했다. 은연중에 천독만화공을 운용해서 독기를 거두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저게 누구야? 화풍렬이 말했다. 일행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짙은 살기를 띠고 곡도 한쌍을 든채로 일행을 노려보던 자 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어렸다. 난... 그때 분뢰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백살수(白殺手)지. 지금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어 미안하 군. 백살수는 자신의 말을 끊는 분뢰수를 무서운 분노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너...! 그를 향해 곡도를 겨누고 막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에 백 살수는 하얀 번개 한줄기가 자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백살수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때 분뢰수는 자신의 뒤에 말종을 대롱대롱 매달고 마왕지문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고꾸라지면서 백살수는 누군가가 자신의 독을 거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살수가 자랑하는 산화독(散化毒)은 공력을 흩어버리고 흐 느적거리게 만드는데 누구도 그런 증상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다. 의식이 희미해지기 전에 백살수는 독왕 곡인도를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 새겨진 비웃음을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 졌는가 깨닫고 죽어갔다. 어차피 오장육부가 으스러진 그로서는 더이상 살 수가 없는 것이다. 흠... 시왕보다 쓸만하군. 조용한 듯 말하지만 울리는 목소리가 흑마왕에게서 으스스 하게 흘러나왔다. 독왕 곡인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시왕보다 쓸만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가자. 백마신이 짧게 끊어 말하고는 마왕지문으로 들어갔다. 화풍렬이 굳어진 곡인도를 보며 어깨를 툭 쳐주었다. 신경쓰지마. 시왕이 목뼈 좀 으스러졌다고 죽을 놈이 아니 잖아? 너도 그렇고. 곡인도의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 하는 것을 화풍렬은 보지 못했다.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유봉월은 갑자기 자신이 이곳에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에 뇌 리를 지배당했다. 유맹주. 함께 들어가시지요. 어차피 기호지세(騎虎之勢)입 니다. 운고가 곁에서 말하고는 운령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유봉월은 힐끗 곡인도를 보고는 안으로 접어들었다. 운고의 말대로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뒤였다. 이대로 호랑이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밥이 되어 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내가 제일 맛없지 않을까? 호랑이는 바로 문뒤에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한마리가 아니라 여러마리였다. 하나같이 머리꼭대기부터 푹 눌러쓴 두건사이로 뚫어놓은 두개의 구멍으로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왕지문의 정면은 그대로 벽이었고 역시 좌우로 통로가 열 려 있었다. 그 통로에 나란히 들 서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건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정광(精光)이 번득거려 여간한 고수가 아님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분뢰수는 묵묵히 마왕지문 앞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 다. 허리뒷춤에 대롱대롱 매달린 말종은 두건을 푹 눌러쓴 자 들이 보이는 기세에 압박감을 느꼈다. 분뢰수는 왼쪽을 골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안중에는 가로막고 있는 자들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 도 않는 듯했다. 기다리시오. 할말이 있소. 문득 뒷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분뢰수는 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앞쪽을 향해 그대로였다. 뒤이어 나온 일행은 자신들이 그대로 좌우로 협공당할 위치 임을 알고는 긴장을 하다가 말을 거는 소리를 들었다. 분뢰수가 걸음을 멈춘 것을 응답으로 여긴 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여러분, 돌아가주십시요. 당장 그 대꾸가 돌아왔다. 미쳤냐?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게! 화풍렬이 소리친 것이다. 대공! 무슨 할말이 있는지 한번 해보시요. 운고가 화풍렬의 입을 막으며 물었다. 우리가 오랜 염원끝에 이제 대업(大業)의 성취가 눈 앞에 있소이다. 여러분으로 인해 그것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오. 잠시 일행은 기막힌 표정으로 말하는 두건복면인을 멀뚱거 리며 쳐다보았다. 이 자식아! 그 꼴 보기 싫어 왔는데...뭐가 어째? 정말 별 웃기는 놈 다 있네! 흑마왕이 쏟아부었다. 당신들의 대업이 무엇이길래 장강일대의 무고한 양민이 그 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소. 이 일은 그냥 넘길 수 있 는 것이 아니오. 운고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오. 대의(大義)를 위해서 작은 희생(犧 牲)... 두건복면인의 말은 튀엣하는 침뱉는 소리에 당장 끊겼다. 화풍렬이 세차게 침을 뱉아버린 것이다. 그런 헛소리는 하나마나한 것이지! 분뢰수의 발걸음은 다시 옮겨지고 있었다. 운고의 음성도 싸늘해져 있었다. 세상에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남을 희생하는 대의 같은 것 은 없다! 그 말이 맞구료. 그럼, 보시오. 돌연 분뢰수의 앞쪽에 있던 자 가운데 하나가 말하며 자신 의 두건을 벗었다. 순간적으로 좌중은 침묵에 빠졌다. 그는 괴질을 앓고 있었다. 적어도 운고와 운령은 그 점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은 아니오. 다만 우리의 대법 (大法)을 시행하는 중에 벌어진 부작용이었소. 우리도 그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소. 그리고... 그대들 구룡이 이 일에 나서서 피해를 줄여준 것에 대해 감사도 하고 있소. 일그러져 거의 뼈만 남은 듯한 그의 얼굴은 근엄하고 비장 함이 저절로 배어나오고 있었다. 우리를 믿고 이일에서 물러서주기를 바라오. 이것이 그가 꺼낸 결론이었다. 돌연 가루라가 말했다. 더듬거리고 어눌한 괴성 같은 소리였으나 틀림없는 말소리 였다. 그... 그럼... 대혈신...정! 대...혈신정을 돌...려줘! 두건을 벗은 자는 잠시 가루라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곤란하오. 대혈신정은 우리의 대업에 꼭 필요한... 그의 말은 쉬잉거리는 칼날의 회전음에 끊어졌다. 가루라의 양손에서 십자인이 회전하고 있었다. 난 도둑놈 말은 믿지 않아! 분노한 가루라는 그대로 천축어로 내뱉고 있어 두건을 벗은 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저 무섭게 돌아가는 칼날이 날아들 것임은 당장 알 수 있었다. 쉬이익! 한 쪽 손에서 칼날이 떠났다. 그리고 칼날은 순식간에 두건 을 벗은 자의 허리를 동강내려 들었다. 반사적으로 두건을 벗은 자는 허리 춤의 패검을 뽑아들고 내리쳤다. 카앙! 거센 금속음과 함께 갑자기 허공에 반쪽의 십자인이 세워진 순간에 남은 반쪽이 덮쳐들었다. 세워진 반쪽과 새로 날아든 반쪽이 합해지는 순간 십자인은 거세게 회전하며 두건을 벗은 자를 토막내어 버렸다. 이 순간에 분뢰수는 말종을 집어 올려 던졌다. 으악! 갑작스런 꼬마의 고함에 놀란 것은 운령이었다. 날아오는 말종을 본 두건복면인 하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옆으로 쳐내려 들었다. 말종의 몸이 두건복면인의 손에 박살이 날 듯 보였다. 그런데 복면인의 팔이 말종에게 닿기가 무섭게 부서져 나가 는 것이 아닌가? 말종은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그 자리에서 뚝 떨어졌으나 아무런 통증도 없자 그저 어리둥절해 있었다. 맞아! 격타로구나! 말종이 그 생각을 했을 때 분뢰수는 다시 그의 옆에 서 있 었다. 말종은 얼른 다시 분뢰수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괜찮군. 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살수를 쓰는 것은 제정 신이란 증거지. 분뢰수의 음성은 유난히 암울하게 울려퍼졌다. 뒤이어 화풍렬의 대소(大笑)가 터졌다. 뭐? 자신을 희생해? 날아오는 애를 쳐죽이고 보자는 놈들 이? 그는 분뢰수가 사용한 경파(勁波)를 알아보았다. 단지 쳐낼 목적이었다면 그의 팔은 그냥 한번 저리고 끝났 을 것이다. 살심(殺心)을 품고 공력을 끌어올렸기에 오히려 팔이 부서져 나갔던 것이다. 미처 화풍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자신들 사이로 끼어든 분뢰수를 보고 두건복면인들이 당황해 할때, 그들 사 이로 하얀 번개를 뿌리며 분뢰수가 지나갔다. 말종을 대롱대롱 매달고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행은 분뢰수가 치고나간 방향 으로 움직였다. 혼자 남은 것은 곡인도였다. 아직 멀쩡히 남아있던 또 한쪽의 두건복면인들은 다급하게 달려들다가 곡인도가 활짝 펼치는 손바닥을 보고 주춤거렸다. 그만 오라는 뜻으로 펼쳐보이는 손바닥에 왜 자신들이 섰는 가를 깨닫기도 전에 곡인도는 주먹을 쥐며 그들을 아래로 잡 아채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 모습은 곡인도의 낚아채는 손길에 그들의 목숨이 걸린 듯한 광경이었다. 정말 괜찮은 놈인데... 달리면서 뒤를 돌아본 흑마왕이 다시 중얼거렸다. 3 유봉월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 자신이 얼마나 대담한 사람인가 자신했기에 그는 이 귀 역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자신의 실력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곡인도조차도 이 귀역에서는 조심스러운 것을 보며 유봉월 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두건복면인을 독으로 몰살시켜 독왕의 명성을 확인시켜주면 서도 곡인도는 침중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 통로에는 적들이 떼거지로 출몰했다. 느닷없이 귀두도(鬼頭刀)를 움켜쥐고 나타난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같이 쌍검을 쥐고 춤추며 달려드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수준은 유봉월이 보건데 수로맹의 일류수준 고수에 비견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아야하는 분뢰수나 흑마왕, 백마신은 그 수준으로 막을 수 있는 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일단 살기가 오가고 피튀기는 싸움이 시작되자 흑마왕과 백 마신은 그대로 분뢰수의 양옆에 서서 선두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인상이 훨씬 짙었다. 운고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운령만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 었다. 이렇게 짙게 오가는 살기와 살육전(殺戮戰)은 운령이 싫어 하는 것이었다. 화풍렬은 그저 입을 벌린 채로 주절거리며 뒤따르고 있었 다. 무시무시하군... 저러니 마도(魔道)라고 하지... 쯧, 좀 사정봐주가며 때려도 좋잖아? 저렇게 대가리를 박살낼 거까지 는 없는데 말이야... 그러나 화풍렬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죽어가는 자들에 대 해서는 눈꼽만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동정심을 받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화풍 렬이었다. 통로는 거의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었다.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뒤따르기 만 하던 화풍렬이 운고에게 불평할 정도였다. 하나 운고는 울고있는 운령을 말없이 달래느라 그런 화풍렬 의 불평은 받아주지를 않았다. 결국 화풍렬은 운령에게 화를 내었다. 죽어 마땅한 놈들한테는 동정하지 말랬지! 넌 도대체... 하지만... 저렇게 할 것까지는... 꾸짖는 화풍렬의 말에 운령은 울며 대꾸했다. 화풍렬은 아예 짜증을 내려했다. 대공, 알면서 그러세요? 운고가 전음으로 한마디 던졌다. 화풍렬은 더이상 운령에게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기어이 정 말 우는 여자는 싫어라는 말을 꺼내었다. 천천히 뒤따르던 곡인도가 냉소와 함께 물었다. 허리에 찬 것은 연검(軟劍)으로 보이는데 우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막는게 어떤가? 훗! 머저리 같은 놈! 그 칼이 뽑히면 아마 네 목이 먼저 달아날게다. 어느새 들었는지 싸늘한 백마신의 외침이 터졌다. 막 퍼석소리를 내며 흑마왕이 가로막은 낭아봉(狼牙棒) 떼 거지의 마지막 한명을 박살날 때였다. 운령은 부르르 떨었다. 손이 허리춤에 가 있었다. 그리고 곧 운고의 손에 잡혔다. 안돼. 그러지 말아. 대공의 말씀대로 이들은 동정받을 자 격이 없는 자들이다. 꼬마 아가씨! 뽑더라도 우리가 안보이는데서 뽑아. 그걸 선물한 분을 생각해서. 흑마왕이 중얼거렸다. 큰 목소리라 못들은 사람이 없었다. 흐흠, 연환공세를 오히려 즐긴다는 건가? 과연... 그들답 군. 그런데 그들뿐인가? 그럴리는 없을텐데... 기품있는 목소리는 의구심을 담아내었다. 그의 수하는 조용히 부복한 채로 명령을 기다렸다. 이미 모든 보고를 한 다음이니 그에게는 이제 명령을 기다 릴 일만 남은 것이다. 바깥쪽은 어떤가? 질문이 나왔다. 그의 질문에 수하는 고개를 읖조리며 말했다. 속하들은 오직 안만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는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명령을 내릴 사람 은 그 말고 또 있었다. 훗, 얕잡아 보고 있는건가? 후회하게 될텐데... 그래도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번 함정은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까... 구룡과 그의 얼굴에 이 네줄기 상처를 남긴 자를! 말종은 자신이 왜 구토를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사방에 피내음이 깔리고 제멋대로 뒹굴며 죽어가는 자들... 그 한복판에 말종은 분뢰수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구토를 하지 않고 있었다. 말종은 단지 분뢰수에게 배운 것만을 기억하며 숨을 쉬었 다. 그 말고는 달리 말종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분뢰수의 좌우를 점령하고 살육을 즐기는 저들은 처음 본 그대로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쳐오는 자를 그냥 물리치지 않았다. 박살을 내버렸다. 그 무자비함을 말종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간혹 분뢰수가 쳐낸 자가 그들 앞으로 퉁겨지면 여지없이 박살이었다. 그나마 온전하게 시신을 남기는 것은 분뢰수에게 일격으로 죽는 자들 뿐이었다. 저러고 지치지도 않네... 말종은 그렇게 동료들이 당하는 걸 보면서 계속 달려드는 자들에게도 실망을 하고 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자들이었다.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토록 역겨운 싸움은 본 기억이 없 었다. 왜 이런 싸움을 하는거지요? 왜! 마음속으로 울부짖는 말종에게 분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통로를 지나갈 뿐이었다. 마치 지금 그 말고는 아무 것도 그에게 가치있는 일이 없다 는 태도였다. 한동안 흐드러진 살육이 계속되었고 그것이 끝났을 무렵 일 행은 또 다른 마왕지문에 도달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상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세번 째 마왕의 문은 저절로 열렸다. 끼익거리는 소리는 흡사 자신의 가슴이 열려 내장이 쏟아질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안에서 걸어나온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느낌을 일행에게 던져주기까지 했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전포(戰袍)였고 손에 든 것은 거 대한, 하얀 빛이 번뜩이는 양날 도끼였다. 얼굴에는 관제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상(神像)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무형지기(無形之氣). 그러나 분뢰수의 시선은 천정으로 향해 있었다. 백마신은 자신의 앞에 나선 자는 무시한 채 그 시선을 따라 가 보았다. 거기에는 조각해 놓은 눈이 깜박거리며 내려다 보고 있었 다. 쉬익! 경쾌한 음향과 함께 백마신의 소매가 한번 펄럭였고 천정의 눈은 부서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마왕의 문을 열고 나선 자가 입을 열었다. 소용없는 짓. 백마신의 눈썹이 꿈틀하는 순간에 그가 선 옆의 벽에서 낄 낄대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석벽에 거품처럼 솟아나는 얼굴 하나. 백마신의 소매가 다시 펄럭하는 순간에 그 얼굴은 박살이 나버렸다. 그러나 낄낄대는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흑마왕이 선 쪽의 벽에서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 다. 흑마왕은 아무 말없이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이목구비를 갖추고는 말을 했다. 제법이지만... 여기서 너희들은 쉬어야겠다... 흑마왕이 역시 아뭇소리 하지 않고 주먹으로 그 얼굴을 갈 겨버렸다. 쿡! 얼굴은 으스러져 사라졌다. 그러나 낄낄대는 소리는 이제 사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내는 얼굴뿐 만이 아니었다. 벽에서 사람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무 장식도 무늬도 조각도 새겨지지 않은 벽이 불룩거리다 가 사람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그 형상이 벽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비단 일행이 선 자리의 벽만이 아니었다. 바닥과 천정에서도 솟구치고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에 선 독왕 곡인도는 자신의 등 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유봉월은 돌이 사람이 되는 황당한 일에 그저 헛웃음만 흘 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화풍렬은 안그래도 기분이 안좋은데 옆구리 쪽 벽에서 얼굴 이 나타나며 사람의 형상을 이루려 하자 그대로 금환을 들어 후려쳤다. 퍼석하며 깨지는 것이 영락없는 돌인 것을 확인하자 화풍렬 은 진저리를 치며 물러섰다. 야, 너 이게 뭔지 알겠냐? 운고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은 심각하지만 무엇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곡인도는 선두의 분뢰수가 묵묵히 서 있고 일행이 기분나빠 하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뒤에서 솟아나온 석상(石像)들은 기괴한 웃음을 싣고 다가 오고 있었다. 곡인도는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낄낄대는 소리에 한가지 소리가 첨가되었다. 처참한 비명소리였다. 일행은 사방에서 몰려나오는 이 요상한 것들에 놀라다가 이 비명소리에 돌아보았다. 석상 하나가 자신의 온몸을 쥐어뜯다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곡인도는 거기에 무심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의 시선이 모이자 곡인도는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 꼴에 사람이었군. 많은 의미가 실린 한마디에 일행은 이것이 고도의 사술(邪 術)임을 깨우쳤다. 그러나 말을 한 곡인도는 분뢰수의 시선이 여전히 처음 마 왕의 문을 나온 자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자는 곡인도를 보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과연 독왕의 명성은 허언(虛言)이 아니로군. 하나 물어도 되겠소? 곡인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들은 독이 통하지 않는데 그대는 어떻게 독사(毒死)시킨 것이오? 곡인도의 얼굴에 오만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들이 나의 독에 당했다고? 그건 잘못 보았군. 난 이들을 중독(中毒)시킨 것이 아니라 해독(解毒)시켜주었는데. 이 뜻밖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가면속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뿌렸다. 그대는 날 비웃는건가? 그런 되먹지 못한 소릴... 독에 대해 아는가? 곡인도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대답하기 전에 자신이 말을 이었다. 화석향(化石香) 같은 기독이 다시 출현한 것은 뜻밖이지만 설마 독공만을 연구한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다면... 실망이로 군. 가면속의 눈동자가 의혹으로 빛났다. 그러나 백마신과 흑마왕의 눈동자에는 순간적으로 놀란 빛 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화풍렬은 입속으로 몇번 화석향거리며 따라했다. 화석향? 화석향이라... 엑! 화석향!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난 화풍렬이 놀라 외쳤 다. 사람의 몸을 천천히 굳어가게 만드는 독이 바로 화석향이었 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기독(奇毒)의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 었다. 특수한 형태의 사공(邪功)과 결합하게 되면 중독자(中毒者) 를 석상처럼 변모시키며 바위 같은 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두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고 그 사공과 복용법은 비 밀이었다. 곡인도 역시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해독법을 우연한 기회에 입수했었고 지금 써먹은 것이다. 하나 화풍렬이 화석향에 대해 놀란 것은 그 효용보다는 과 거 그것을 사용했던 어떤 사악한 마두(魔頭)에 대한 기억때문 이었다. 그 마두 말고는 화석향을 사용했던 사람이 없었다. 이건 무슨 징조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해결해야 할 것은 저 문을 가로막고 있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화석향에 대한 말이 오가면서 의혹으로 물들었던 눈빛이 이 제는 광기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허연 양날의 도끼가 바람소리를 일으 키고 있었다. 마치 가루라의 십자인이 돌듯 그의 도끼가 도는 것이었다. 가루라는 그것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앞에는 아직도 팔팔하게 움직이는 석상들이 있었 다. 그들이 원래 사람이고,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바 없었다. 다만 자신을 향해 기분나쁜 향내를 풍긴다는 것, 가루라에 게는 더이상의 이유는 필요없었다. 그대로 부셔대는 것만이 남은 일이었다. 곡인도는 자신의 주변으로 가까이 오는 석상은 그저 쏘아보 았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으스러지고 있었다. 일행은 석상과 뒤섞인 채로 잠깐 치고받았다. 화풍렬과 운고는 단지 운령을 좌우로 감싸고 맹렬히 손발을 휘둘렀다. 결과는 금방 드러났다. 백마신의 채찍이 가면의 도끼를 휘어감은 순간에 흑마왕이 그대로 그 가슴을 후려갈긴 것이다. 다급히 긴 도끼자루로 막았으나 대파멸마권은 석벽도 으스 러뜨리는 것인지라 그대로 자루가 부서지고 그의 가슴도 으스 러졌다. 싸움이 끝났을 때 분뢰수는 이미 말종을 매달고 마왕의 문 을 지나고 있었다. 第 二十三 章 伏 魔 神 龍 1 곡인도를 낙오시키도록 해라. 죽여도 좋다. 담담하지만 음성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고심한 계획이 곡인도에 의해 너무 쉽게 허물어진 것이 그 원인이었다. 산화독에 의해 적어도 절반 정도는 더이상 싸우지 못할 것 이라 생각했었고, 화석향에 의해서 충분히 타격을 가할 수 있 으리라 생각했다. 하나 독왕 곡인도는 이 두가지를 모두 간단하게 해결한 것 이다. 명성에 걸맞는 실력이었으나 적(敵)인 지금 별로 반가운 일 이 아니었다. 자신의 명령을 받은 부하가 나간 뒤에 그는 천천히 자리에 서 일어섰다. 억세게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 던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좋아... 마지막 싸움이니 마음껏 설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나직한 읖조림에는 단아함과 기품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흉내내거나 그러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아니 었다. 세번째 마왕지문을 넘어들어오면서 흑마왕과 백마신의 얼굴 에 아연한 기색이 완연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갑자기 그 자리에 뿌리내린 듯이 서서 자신들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차츰 그들의 표정은 어이없는 빛에서 시작해서 기막 히는 표정, 그 다음에는 분노로 일그러져 들었다. 화풍렬은 갑작스런 흑마왕과 백마신의 표정변화에 도대체 저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 다. 그저 이곳은 지금까지와 같은 통로가 아니었다. 화풍렬이 보는 시각에서는 그러했다. 단지 좀 넓직한 공간에 앞에는 궁전의 담벼락 같은 것이 둥 글게 둘러쳐져 있었다. 아마도 저 담벼락을 따라 돌다보면 다시 또 마왕의 문이 나 타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이지? 궁금증은 곧 풀렸다. 흑마왕이 분노한 기색으로 말한 것이다. 이 안을 모조리 다 제멋대로 바꾸버렸군! 그들에게 있어서 마왕선은 존엄의 대상이었다. 그곳을 멋대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있던 운고와 운령은 살짝 눈썹을 찌푸 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오는 동안 흑마왕과 백마신은 그래도 이 마왕선의 통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안이 바뀌었다는 것은 지금부터는 전혀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위험이 가중된 것이다. 혹은 투덜대며 혹은 경계의 기색으로 일행이 앞으로 두어걸 음 갔을 때 가루라가 고함을 쳤다. 멈춰! 짧은 한마디와 함께 가루라는 십자인을 두 방향으로 동시에 내던졌다. 회전하는 칼날은 그대로 바닥을 긁으며 수레바퀴처럼 굴러 다녔다. 그리고 관(棺)이 솟았다. 흑마왕 같은 거한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큰 관 세개였다. 가루라는 되돌아오는 십자인을 받으며 그 관들을 매섭게 노 려보았다. 그 얼굴에는 방금 전 흑마왕과 백마신이 떠올렸던 분노의 기색이 몇배로 더 커져서 나타나 있었다. 운고는 그 까닭을 알았다. 관이 열리면서 그것은 더욱 분명해졌다. 흑마왕보다도 더 큰 거한들. 관에서 나온 그들이 웃고 있었다. 대혈거령인(大血巨靈人)이로군... 신음 같은 소리는 곡인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희대의 기보, 대혈신정. 그것이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행은 의혹이 깃든 눈으로 가루라를 보았다. 어떻게 그는 조금의 기척도 없는 상황에서 저것을 알아 본 것일까? 저 대혈거령인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곡인도는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숨 같 은 것은 쉬지 않는 괴물이기 때문이었다. 흑마왕과 백마신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저 가루라의 정체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대혈거령인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것 은 대혈문의 주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루라는 이를 뿌드득거리며 갈고 있었다. 대혈거령인은 대혈문의 비밀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자는 문주의 직속제자 뿐이었다. 배신자가 있다! 바로 자신의 사형들 가운데! 그것이 가루라가 이를 가는 까닭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대혈신정이 이 멀고먼 이역의 땅에 흘러왔는 지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살아 돌아갔을 때나 갚을 수 있는 빚 이기도 했다. 십자인을 움켜쥔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가루라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나 그들과 싸우려는 가루라와는 달리 그들은 가루라가 아 닌 다른 자를 노리고 있었다. 가운데 선 대혈거령인이 손가락으로 직접 지목을 하며 말했 다. 우린 그대와 싸우려 한다. 도망칠텐가? 그가 이렇게 지목받아 도망칠 사람이 아님은 유봉월이 누구 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봉월은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바보짓하지말고 거절해라, 이 멍청아! 곡인도는 웃었다. 나쁘지 않는 제안이었다. 흑마왕이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이봐, 그렇게 히죽거릴 필요없어. 고집도 필요없다고 여겨 지는데? 곡인도는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처음으로 그는 이 일행의 선두에 한번 선 것이다. 그리고 힐끔 분뢰수를 보았다. 분뢰수는 묵묵히 그 침울한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 다. 말종은 삼대일이 공평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신호해도 분뢰수는 반 응이 없었다. 가루라는 어이가 없는 듯하다가 다시 분노를 폭발시키며 십 자인을 회전시켰다. 설마 내가 모욕받아도 좋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테 지? 느닷없이 들려온 익숙한 천축어는 가루라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당당히 앞으로 나선 곡인도의 오만한 얼굴을 보며 가루라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 저들이 원래 자네 몫임은 인정하지. 하나 저들과 싸 우며 사문(師門)의 중대사를 저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에 빠지 겠나? 아니면 내가 저들의 도전을 받기를 승락하겠나? 가루라는 곡인도의 긴 말이 의미하는 한가지를 알아차렸다.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루라의 칼날은 땅바닥으로 박혀들었고 그는 팔짱을 낀 채 로 그저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뒤에서 무슨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껄이는지 몰라도 사태 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눈치로 알아차린 화풍렬이 운고의 옆구 리를 쿡쿡 찔렀다. 지금 독왕 곡인도가 일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임 을 상기시키려 하는 행동이었다. 돌아온 것은 운고의 전음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공, 그냥 지켜보세요. 기막힌 표정이 되어버리는 화풍렬을 보며 운고는 심각한 표 정으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얼어죽을! 도대체 이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그러나 운령마저도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을 보자 화풍렬은 머리를 싸매고 무슨 시간이 필요한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잘 봐둬. 이게 진짜 싸움이다. 말종에게 하는 분뢰수의 말은 모두가 들었다. 등뒤로 들려오는 말에 곡인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자신의 앞에 품자로 서 있는 자들을 보며 곡인도는 숨을 가 다듬었다. 당장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대혈거령인 셋은 그대로 자신에게 육박해오고 있었다. 그 순간에 곡인도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셋은 오직 자신을 멈추기 위한 사석(死石)인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고 있었다. 일행이 그걸 알아차린 것도 금방이었다. 곡인도의 오만한 미소는 충족된 자존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곡인도의 몸은 왼쪽의 대혈거령인 정면으로 움직였 다. 정면과 오른 쪽에서 달려들던 둘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 다. 덮쳐오는 콩알만한 쇠붙이때문이었다. 독왕두(毒王豆)에 맞으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은 그 자리 에서 한줌 누런 물이 되어버린다. 강호에 잘 알려진 일이었다. 곡인도의 두 손은 자신과 일대일로 맞선 대혈거령인과 그대 로 마주쳤다. 일체의 방어도 없이 그대로 두 손바닥 사이에서 이름난 독 왕의 머리를 짓이기려던 대혈거령인은 입으로 마구 피를 토해 내며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가슴에는 오색의 장인(掌印)이 영롱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독신수(五毒神手)! 일제히 놀란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가루라는 피를 뒤집어쓴 곡인도의 모습에 저절로 눈 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곡인도는 쓰러지는 대혈거령인의 양 옆으로 움직여 자신을 공격해오는 두 대혈거령인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들이 일제히 두 손을 겹쳐서 쳐올 때는 그 웃음과 함께 자신의 두 손을 내밀어 마주쳐가고 있었다. 쩌억! 거센 소리가 살과 살이 딱 달라붙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무시무시해서 형언(形言)할 수 없는 비명이 두명의 대혈거 령인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그들은 손에서 부터 짓뭉개져 녹아들고 있었다.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아직도 녹아들고 있는 둘은 비명을 지르는 표정이 역력했으 나 독기에 가슴이 녹아 더이상 소리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곡인도는 처음 대혈거령인이 자신에게 토해낸 피를 머리부 터 뒤집어 쓴 채로 그 자리에 오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침묵은 곧 깨어졌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겠니? 말종은 분뢰수의 말을 알수 없었다. 단지 지금 우뚝 서 있는 곡인도가 풍기는 기백(氣魄)에 혼 이 빨려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루라는 자신의 허리춤을 겨우 가리고 있는 천조각사이로 조그만한 알약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곡인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이걸 당신에게 주고 싶소. 괜찮겠소? 곡인도는 천천히 돌아섰다. 오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필요없다. 난 독왕이라 불리우는 사람이다. 가루라는 더이상 권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대혈거령인의 혈독(血毒)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둘을 제거해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틀림없을 것이다. 유봉월은 무슨 소리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곡인도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만으로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이, 이봐! 정신차려... 곡인도를 부축하려던 유봉월의 팔뚝은 그대로 운고에게 붙 잡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운령이 쓰러진 곡인도 옆에 앉았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곡인도는 운령을 보았다. 운령의 왼쪽 소매 안에서 반짝이는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곡인도는 그때 비로소 왜 운령에게 자신의 독기가 통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굉장한 걸 가지고 있군... 이 말을 겨우 마치고 곡인도는 의식을 잃었다. 대혈문의 혈독이 그를 죽이지는 못해도 며칠간 인사불성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유봉월은 기막힌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 렀다. 눈 앞에서는 자기 아내의 모습이 선하게 비추었다. 오라버니가 무슨 위험한 일을 할지 모르니 잘 감시하고 도 와달라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적이 없는 곡인도였기에 그 말은 한귀로 듣고 흘렸는데 지금 어느새 다시 그의 귓전으 로 되돌아와 쟁쟁거리고 있었다. 운령은 다시 일어났다. 염려마세요. 며칠 쉬시면 회복하실 겁니다. 유봉월은 그 말에 별로 안심이 되지를 않았다. 귀역에서 그런 말을 들어 반가울 까닭이 없었다. 운고는 잠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화풍렬을 보았다. 화대공... 화풍렬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부드러운 운고의 음성때문이었다. 여태껏 운고가 이렇게 부드럽게 말해서 쉬운 일이 생긴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웃는 운고의 얼굴에 화풍렬은 달아날 곳이 있으면 당장 달아나고 싶었다. * * * <사투(死鬪)하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걸 아는 순간 부터 꼬마는 어른이 되겠지...> 2 후훗, 그래? 감추어논 한 수까지 있었단 말이군. 제법인 데... 곡인도가 그렇게 성장할 줄은 생각못했군. 단정한 기품이 넘치는 웃음과 말이었다. 설사 그가 저잣거리의 막되먹은 욕을 한다 하더라도 그 기 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언제나 그 담담한 기품을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이제 대계(大計)를 발동시켜라.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 안에 새겨진 강렬한 의지는 명령을 받는 사람에게 선명 하게 전달되었다. 그건 안돼! 반대한 것은 백마신이었다. 그는 화풍렬이 남는 것에 간단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그의 의견에 흑마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쓰러진 곡인도를 보살피기 위해 유봉월은 남아도 좋지만 화 풍렬은 안된다는 것이다. 운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고 운고는 그것을 알고 있었 다. 유봉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별도움이 될 곳이 없는 사람이 고 화대공은 긴급시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쓰러진 곡인도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봉월만 남는다면 한꺼번에 죽을 가능성도 농후했 다. 유봉월은 저 백마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기가 찼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 자신이 수로맹주이고 장강의 패자고 어쩌고 해도 본신 (本身)의 실력이란 것은 이 귀역에서 전혀 통할 수준이 아님 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있을께요. 말한 것은 운령이었고, 이 말에 운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 운령을 보는게 고작이었 다. 백마신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반대하거나 하지는 않았 다. 말종은 자꾸 분뢰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나 분뢰수는 아 무 반응도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듯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화풍렬은 자신이 남지 않아도 되는 것은 좋았지만 운령이 남는다는 말에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운령을 한참이나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꼬마 계집애가 지금 나하고 맞먹겠다는 건가? 그가 아는 한 운령은 무공을 익힐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총명함은 상상불허였다. 이년 전까지만 해도 아예 걸어다닌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운령이었다. 그러나 운고는 몸을 돌리며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자. 그럼, 여러분 가시지요. 뒤를 찔금거리며 돌아보면서 화풍렬은 자신이 남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곱씹는 것이 고작이었다. 멀거니 가는 일행을 보면서 유봉월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고작 어린 아가씨와 자신이 독왕 곡인도의 유모노릇이라 니... 기연(奇緣)을 얻어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자부한 그의 자부심은 이제 어디가서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휴우--- 엑! 한숨을 내쉬던 유봉월이 기가 막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일행은 저 벽을 무너뜨리고 가서 보이지 않았다. 유봉월을 놀라게 한 것은 쓰러져서 의식이 없던 곡인도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난 때문이었다. 다 갔군. 그냥 누워계세요. 운령이 말했으나 곡인도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묻은 피를 닦아낸 얼굴은 창백하고 파리했다. 무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유봉월은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곡인도는 그 창백한 얼굴에 냉엄한 표정을 띠우며 중얼거렸 다. 내가 가면 네 오빠가 좀더 안전하다는 것을 모르냐? 그런 걸 바랄 오빠가 아닙니다. 운령의 대답은 주저없이 명쾌하게 나왔다. 곡인도는 코웃음을 쳤다. 부상자를 돌보고 어쩌고 하면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바 보를 비웃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령의 반짝이는 눈빛에 비웃음은 멈추고 말았다. 갑작스런 착각이 분명했다. 느닷없이 운령의 눈속에서 수많은 별무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한 것을 본 기분이었다. 더이상 그 눈을 보는 것이 불안해서 곡인도는 힐끗 운령의 왼쪽 팔뚝을 보았다. 팔뚝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장신구가 소매안으로 숨고 있었다. 보기에도 영롱한 빛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곡인도는 그것이 단지 꾸미기 위한 장신구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더더구나 구하려고 한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저 대혈문의 가루라가 혈안이 되어 찾으려는 대혈신정이나 자신이 남모르게 비장(秘藏)하고 있는 자하정(紫霞鼎)보다도 더욱 엄청난 보물이었다. 곡인도의 눈은 다시 운령의 허리춤으로 갔다. 보통사람은 그저 허리띠로 보겠으나 독왕 곡인도의 눈에는 틀림없는 연검이었다. 무형지기에 반응하는 걸로 보아 신기(神器)가 틀림없었다. 보기드문 보검이로군. 정말... 그 가 준 것인가? 곡인도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흑마왕이 한 말에 대한 확인이었다. 운령은 곡인도가 지칭하는 그 가 누구인지 알았다. 말없이 운령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유봉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보았다. 아직까지 유봉월은 그들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알 수가 없 었다. 세상에 그로 지칭되는 사람이 한둘인가? 그것도? 곡인도의 시선이 살짝 운령의 팔로 갔다가 얼굴로 움직였 다. 운령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곡인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가자. 지금 저들은 나를 떼어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다. 이것이 기회다. 유봉월은 곡인도를 붙들었다. 이봐! 그만두라고! 훗, 갑자기 왜 내 걱정을 하는 거지? 유봉월은 비웃음을 띠는 곡인도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자네몸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이럴 때 나서는 건 전혀 자네답지 않은데? 곡인도는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다시 옮겨지고 있었다. 적의 허를 찔러야 하는 법. 그리고... 여기있으면 안전하 다는 보장은 누가 해주지? 흑마왕이 때려부신 담벼락은 다섯 자 두께였다. 담벼락 안은 이제껏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끈적거리는 귀기만 제외한다면... 아래 위로 이어진 계단의 통로. 중앙에 무엇인가를 휘감고 있듯이 길게 이어진 계단은 둥근 모퉁이를 돌아서는 보이지 않았다. 갈 길은 아래와 위, 두 방향이었다. 때려부수고 들어온 흑마왕이나 바로 뒤따른 백마신은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고민을 했다. 그러나 말종을 매달고 들어온 분뢰수의 걸음은 전혀 망설임 없이 아래로 향해 가고 있었다. 어이없어 하며 마주보던 흑마왕와 백마신은 그대로 그 뒤를 따랐다. 화풍렬은 투덜거렸다. 왜 아래로 가는지 말이나 해주면 누가 잡아먹냐? 그러나 운고는 흘깃 천정쪽을 한번 보고는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화풍렬도 군시렁거리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계단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장 정도의 폭이었던 것이 어느 틈엔지 일장 정 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음산한 귀기는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치익! 칙! 괴상한 소리와 함께 선두에 선 분뢰수의 좌우로 십여자루의 장창이 찔러들었다. 휘잉! 느닷없는 질풍이 분뢰수의 좌우를 휩쓸고 그 다음 찔러들던 장창은 버들가지처럼 휘어지다가 뚝뚝 부러져 나뒹굴었다. 계단 아래로 구르는 창대의 소리가 요란했다. 바로 분뢰수의 뒤를 따르던 흑마왕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 계단에는 바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창대를 꺽을 정도의 맹렬한 바람이 불었는가? 이거 도대체 정체가 뭐지...? 전혀 처음보는 기괴한 수법이었다. 분뢰수의 발걸음은 처음과 똑같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멈추었다. 그의 앞에는 단지 계단만이 있었다. 분뢰수는 좌우의 벽을 한번 쭉 돌아보고 있었다. 흑마왕은 그가 멈출 때 반사적으로 사방을 주시하였다. 그 때 그의 뒤에 있던 백마신의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놈! 여기다 감히 저걸 설치하다니!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묻기도 전에 그들이 내려온 계단 위 쪽에서 고함성이 터지며 십여명이 몰려내려오고 있었다. 맨 뒤를 맡고 있던 운고는 당장 콧속을 스며오는 향기와 함 께 덮치는 철판 같은 칼날을 보았다. 떨어지는 칼날은 살기보다는 위협성이 더 짙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 일행을 저 계단아래로 밀어내리려는 것임 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저 아래 뭐가 있기에? 운고의 머리에 의문이 떠올랐을 때, 운고의 몸은 이미 그들 을 지나쳐 그들이 내려온 계단 위쪽에 가 있었다. 뭐, 뭐야? 이것들! 놀란 화풍렬의 목소리는 그 다음에 욕으로 변했다. 한쌍의 금환이 허공에 무지개를 만들면서 덮치던 자들은 계 단 아래로 구르고 화풍렬은 운고 옆에 가 있었다. 바로 아래 있던 백마신이 우선 욕부터 했다. 이 망할 녀석들이 떠넘기기를 해? 그 다음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밀려내려오던 자들을 스치고 계단 위쪽으로 움직였다. 흑마왕은 한순간 도약으로 그들을 넘어버렸다. 분뢰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몰려내려오면서 이들을 계단 아래로 밀어낼 수 있으리라 자 신했던 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 앞에는 분뢰수와 말종이 있었다. 한순간 이들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리고 일제히 분뢰수를 난도질쳐 들어갔다. 분뢰수의 몸은 그림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허공을 후려갈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직 분뢰수가 딛지 않은 아래쪽 계단을 딛고 있었다. 십여명이 한꺼번에 그 아래 계단으로 밀려떨어진 셈이었다. 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문은 곧 풀렸다. 아래쪽 계단의 상하좌우에서 엷은 막이 드리워진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그 반대로, 아 니면 대각으로, 막은 사람을 관통하면서 드리워졌다가 사라졌 다. 그 다음에는 그 막이 지난 자리를 단면(斷面)으로 굴러다니 는 토막난 시체만이 남았다. 단백사(斷魄絲)? 화풍렬이 나직하게 떨리는 음성을 토했다. 아니다. 단열수막(斷裂水幕)이란 거지. 백마신의 차가운 음성이 화풍렬의 말을 정정했다. 화풍렬은 말문을 닫았다. 역시 마교의 부전지비였다. 말종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단지 이 끔찍한 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분뢰수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은 거꾸로 분뢰수 의 옷자락에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말종은 깃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대롱거리 며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말종은 아직도 구토를 하지 않는 자신이 신기하기 짝이 없 었다. * * * <누굴까?> 3 뚫린 벽의 구멍으로 들어선 곡인도는 아래 위로 열린 계단 을 쭉 둘러 보았다. 뒤따라 들어온 유봉월은 과연 이 위와 아래 어디로 먼저간 일행이 들어갔는지 판단해보려고 흔적을 찾으려 했다. 하나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귀를 기울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에서 은은하게 울려오는 소리는 마치 자신의 뒤에도 무 엇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곡인도는 창백한 얼굴로 잠시 위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걸음 을 계단 아래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 이봐, 그쪽으로 가는게 맞아? 대답없이 곡인도는 그저 내려갔다. 운령도 그를 따르자 유봉월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갔 다. 그들을 떼어놓은 일행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곡인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자신들이 너무 늦게 이동하든가. 유봉월은 곡인도가 창백한 채로 움직이는 모습이 어떤 의미 를 갖고 있는지 잘 아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설혹 배속에서 내장이 쏟아져도 곡인도는 눈썹 하나 까닥하 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런 창백한 표정을 하고 땀을 흘리며 느릿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자같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할 고통 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봉월은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왕 곡인도가 그렇게 지독스러운 면이 없었다면 독왕이라 불리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깨끗하게 해놓았군... 곡인도의 중얼거림은 나직했으나 분명했다. 그들 앞에는 부러져 나간 창대가 구르고 있었다. 벽에 박힌 일부분과 계단에 구르는 일부분. 곡인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갔다. 유봉월은 뒤따르다가 일부러 창대를 한 번 밞아보았다. 유난히 검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이 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 이다. 부러진 창대는 유봉월이 바짝 공력을 일으켜도 끄덕없었다. 이, 이게 뭐야? 단지 강철이라고 할 정도를 넘어서는 강한 재질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그런 것을 이토록 간단하게 날릴 수 있었는가? 새삼 유봉월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않는게 좋아. 독이 남아도는 녀석들이 니... 앞서가던 곡인도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유봉월은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품속으로 집어 넣어 피독주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발바닥이 후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곡인도의 말대로 창대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수로맹주의 두터운 가죽신을 뚫고 전해질 만큼 지독스러운 독이! 얼마나 내려갔을까? 곡인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좌우의 벽을 둘러보기 시작 했다. 한동안 벽의 이곳저곳을 툭툭 건드려 보고 있었다. 반응은 금방 나타났다. 스륵! 소리도 없이 한쪽 벽에서 두께가 여섯자나 되는 돌로 된 문 이 열린 것이다. 곡인도의 몸이 빠르게 열려진 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다음순간에 곡인도는 실망한 듯 그대로 다시 내려갔 다. 유봉월은 열린 사이로 빼꼼히 드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 그저 빈방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는 누군가가 숨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대략 십에서 이십? 갑자기 유봉월은 이 좁아져 가는 계단에서 뒤에서 습격을 당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봉월은 앞서 걸어가는 곡인도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문의 구조로 보아 어떤 기척을 느낀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에 가까웠다. 더욱이 이런 끈적거리는 귀기에 휩싸여서는 제아무리 기세 (氣勢)에 민감한 절정고수라도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터벅거리듯이 내려가던 곡인도는 짧게 대꾸했다. 냄새. 유봉월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태 짐작도 못한 곡인도의 새로운 능력을 알게 된 것이지 만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냄새로 추적을 한다는 것. 유봉월은 개에게나 가능한 그일이 사람에게서 가능할 때 느 끼는 경외심보다는 곡인도에게 이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 는지가 더 궁금했다. 전에 만났던 곡인도는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만난지 일년도 못되어 전혀 다른 고수가 된 듯하군... 그렇다면 지금 유봉월은 그에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곡인도가 멈추어섰다. 유봉월도 멈추었고 말없이 따르던 운령도 멈추었다. 특이하다고 할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벽에서 물이 졸졸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서는 선명한 피냄새가 느껴졌다. 곡인도처럼 예민한 코가 아니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비릿 한 냄새였다. 그 다음에 깨끗하게 절단되어 굴러다니는 고깃토막들... 옷자락이 잘 씌워져 있었다. 갑자기 유봉월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 각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강호에서 이런 식으로 살상을 저지르는 자가 있다면 그 즉 시 공적(公敵)으로 지목당할 것이다. 왜 이렇게 한거지? 이건 좀 너무한데... 설령 뒤에서 습격당했다고 해도 이건 심한 짓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유봉월의 귀에 냉랭한 비웃음이 들어왔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한가하기도 하군. 그들이 한 짓이 아니야. 저 벽에서 새는 물이 한 짓이지. 곡인도의 말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물이 사람을 토막내었다고? 그런... 물? 물! 갑자기 유봉월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그 안개를 거두어 갔다. 그리고 식은 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곁에 있던 운령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는 데... 단열수막이겠지. 이곳에서 마교의 기술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지? 바깥쪽은 마왕선이었잖은가? 그러면서 곡인도는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유봉월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곡인도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수백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마교의 장인(匠人)들은 이런 살인기관(殺人機關)과 파괴술(破壞術)에 있어서는 신공(神工)으로 불리워지지. 그럴만 하지 않은가? 이런 기관을 만들고 사용했으니... 유봉월은 곡인도가 단열수막을 칭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다. 곡인도가 유난히 암기쪽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 이 아니었다. 과연 내려가면서 곡인도는 유심히 좌우의 연약한 물줄기를 살피고 있었다. 실가닥보다도 가는 틈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계단을 씻 어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릿한 냄새는 여전했다. 문득 곡인도는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자상한데... 우리를 위해서 장애물은 깨끗하게 치워준 셈이니... 운령은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는 곡인도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 기관을 파괴한 것은 아마 그 분뢰수였을 것이다. 흔적이 그것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었다. 실보다 가는 틈사이로 폭포수보다 더 센 압력의 물이 뿜어 져 나와 바위를 가르게 만든 것. 그것이 단열수막의 정체였다. 남겨진 흔적은 단열수막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그 가느다란 틈을 진동시켜 물줄기의 분사(噴射)되는 속도와 압력을 뒤틀 어놓은 것이다. 일행 중에 그런 환상에 가까운 쾌수(快手)를 지닌 자는 분 뢰수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경파 같은내가경력을 실을 수 있는 사람도 분뢰수 하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럼, 우리가 뒤따를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유봉월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물었다. 곡인도가 그 질문에 어이없는 듯 유봉월을 돌아보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모를리가 없잖아. 우아한 분노. 그의 분노는 확실히 우아했다. 마구잡이로 얼굴이 붉어져서 아무 것이나 내동댕이치는 그 런 분노는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의 기품있는 태도에는 이런 우아한 분노가 어울리는 것이 다. 뒤따르고 있다... 혈독이 그를 낙오시키지 못했다고? 한동안 그는 분노에 찬 눈길을 허공에 두었다. 잘못은 부하가 아닌 자신에게 있었다. 독왕 곡인도를 너무 얕보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 후후후... 그래도 천하오패의 하나란 말이지... 좋아, 원 하는대로 대접해주지. 가서 모든 인원을 동원해 침입자를 공 격하도록 해라. 그의 부하는 부복한 상태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도 보고할 것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뭐냐? 약간 불쾌한 기색이 어린 물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기품은 여전했다. 그러나 보고를 듣는 동안 그의 분노는 더욱 짙어졌다. 그의 부하가 하는 보고는 바깥에 관한 것이었다. 상관하지마라. 안에 들어온 침입자에 모든 인원을 집중시 켜. 어차피 이곳은 버리기 위한 곳. 대법이 끝나는대로 이동 할 것이다. 곡인도는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깨닫 고 있었다. 우선 그의 몸은 전혀 정상이 아니었다. 무리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알 고 있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자신을 비장해둔 비수(匕首)로 여기고 앞서가는 녀석이 길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대한대로 되었다. 자신의 독공을 깨끗하게 막아내는 분뢰수는 일부러 지나가 는 길의 기관을 모조리 뒤집어 엎어놓은 것이다. 다시 쓸수 없도록! 문제는 적도 자신이 뒤따르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기관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칼들고 달려드는 녀석들 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유봉월이 이럴 때 조금이라도 더 듬직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 귀역의 칼잡이들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저 녀석이 수로맹의 거지 같은호법들이라도 몰 고 들어왔으면 쉬워졌을 것인데... 전력으로 싸우고 있는 유봉월에게 불만을 토할 때가 아니었 다면 나오는대로 비웃어주었을 것이다. 유봉월은 정신없이 바빴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부터 뒤에서 달려드는 자까지 모조리 혼 자 상대하는 것이다. 그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으니까. 곡인도의 독도 지금은 기대해서는 안되었다. 독공이란 것이 그리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곡인도는 자신의 공력을 다 사용해서 겨우 움 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유봉월은 있는 실력 없는 실력 다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손에는 반자 정도 되는 두개의 넓적한 쇠조각을 든 채로 난 무(亂舞)를 추는 듯한 유봉월의 모습은 지나가던 무신(武神) 이 보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괜찮은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 곡인도는 그게 결코 오래 갈 것이 아니란 점을 누구보 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점차 살기가 무디어지고 손이 둔해지다가 어디 한구석 칼이 라도 맞으면 그 다음 칼은 무더기로 맞게 될 것이다. 하나, 둘... 모두 아홉! 벽에 기대로 선 곡인도는 맞은 편에서 운령이 걱정스런 눈 으로 자신과 유봉월을 보고 있음은 외면하고 있었다. 대신 앞 뒤에서 이제는 좌우로 보이는 적의 수를 세었다. 일체의 기척도 없이 곡인도의 무형지기가 발출되었다. 한순간에 유봉월의 손에 덤비던 자들이 픽픽 쓰러져갔다. 유봉월은 그들의 손이 갑자기 둔해진 것을 느끼고 더욱 맹 렬한 살수를 펼친 것이다. 마지막 한 명까지 쓰러뜨리자 곡인도는 재빠르게 앞장서서 걸었다. 유봉월은 그런 곡인도의 손이 입가로 가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운령도 몸을 돌리는 순간에 곡인도의 입가에 피가 배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미 곡인도는 계단을 멀쩡한 사람인 듯 걸어내려가 고 있는 것이다. 유봉월은 손이 땀에 젖은 것을 느끼며 전율하고 있었다. 덤벼든 자들의 실력이 수로맹의 호법보다 상위에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수로맹의 호법들도 유봉월이 사용하는 십이쌍경음(十二雙磬 吟)을 이십여초 이상 받아내지 못했다. 도대체 이 귀역은 어떤 곳이란 말이지?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전진하는 것뿐이었다. 답답한 가슴을 묻어둔 채로 유봉월은 말없이 운령의 뒤를 따랐다. 운령의 손은 자신의 허리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곡인도가 칭찬한 희대(稀代)의 보검이 그 안에서 나직하게 울고 있었다. 얼마가지 못해 다시 방해자가 나타났다. 우선 이들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알아보는데는 오래 걸릴 수가 없었다. 뒤틀린 근육,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이런 것에 신경쓰기도 전에 앞으로 내밀어지고 있는 창대에 갖다 붙인 네모난 철판같이 생긴 칼날! 이 철판 같은칼날은 창대에 붙은 부분을 제외하고 모서리 세 부분이 모두 잘 갈아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계단 아래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찔러들어왔 다. 유봉월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뛰쳐나가며 쌍경(雙磬)으로 맞 서갔다. 낙, 우엑...! 낙백산을 복용... 곡인도는 다급히 말하려다가 참았던 피를 토하며 다시 손으 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유봉월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새기기도 전에 이 괴상한 것 들이 정말 이상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었다. 내력(內力)이 전해오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발출한 내가경력(內家勁力)이 전부 먹히기까지 했 다. 그런데 그뿐인 것이다. 막무가내로 밀어오는 힘은 또 엄청났다. 곡인도는 유봉월이 앞에 신경을 쓰는 동안 뒤쪽 천정쪽에서 세가닥 실이 내려오고, 거기 매달려 덮쳐오는 세 개의 인영이 더 있음을 알았다. 코끝에 걸리는 향기. 그들도 역시 낙백산을 복용한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곡인도의 눈이 독심(毒心)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죽는니 모조리 죽이고 죽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미처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길 겨를이 없었다. 느닷없이 귀기가 사라진 때문이었다. 아니 쫓겨서 없어진 것이다. 곡인도가 자신이 착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안 것은 운령을 보면서 였다. 운령은 왼손으로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리듯 하고 있었다. 그 팔목을 타고 화려한 그물에 얽힌 보석무더기 같은장신 구들이 운령의 까만 머리카락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운령의 눈빛은 분명히 별무더기가 한꺼번에 터져나 오는 그것이었다. 그 보석의 영롱한 빛과 뚜렷한 운령의 눈빛이 귀기를 쫓아 내는 것이다. 운령의 오른손은 허리에 가서 움직였다. 그 다음에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던 암습자 셋은 계단 위로 거꾸로 처박히고 있었다. 곡인도는 이때 자신이 본 것이 정말인지 난생 처음으로 한 번 의심해보았다. 능소능대(能小能大)하다는 용(龍)! 운령의 오른손에 용이 또아리를 틀며 꿈지럭거리더니 한순 간에 거대해지며 허공을 휘감았던 것이다. 허공의 암습자만이 용의 제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직 힘으로 유봉월을 밀어대던 정면의 셋도 한순간 울부짖 는 용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에 모두 나뒹굴고 있었다. 곡인도는 그제서야 비로소 한가지 보검을 기억해내었다. 그 움직임이 문자그대로 용과 같다는 절세기진(絶世奇珍)! 복마신룡검(伏魔神龍劍)이었다. * * * <누굴까?> 第 二十四 章 龍 鬪 野 1 흑마왕은 계속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인형(人形) 같은놈들 때문에 지겨워져 있었다. 선두에 가는 분뢰수는 모든 기관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이어지는 이 별볼일 없는 암습자들은 계 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끊이지않고 뛰어내리고 있었다. 아무 특징도 없이 그저 죽어라고 달려들기만 한 고만고만한 녀석들처럼 지겨운 것은 없었다. 기분전환에 조차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구미가 당기는 녀석이 내려왔다. 그 녀석은 대파멸마권을 한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제이격 으로 날아간 대회천신권도 역시 다른 한손으로 막아내고 있었 다. 모처럼 괜찮은 적수였다. 흑마왕의 발이 날아가려는데 상대는 옆으로 비끼며 한마디 로 그 동작을 막았다. 여전하시군요. 뒤에 선 운고는 그제서야 흑마왕의 거대한 체구에 가려진 그를 보았다. 셋째형! 큿, 그래 오랜만이다. 흑마왕이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운고는 그가 상대를 알고도 그런 사나운 일격을 가했음을 알았다. 백마신이 어이없는 듯 흑마왕을 쳐다보았다. 너... 미쳤냐? 빌어먹을! 지루하게 쏟아지잖아!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화풍렬은 나타난 이십대 후반 의 청년을 끌어안고 있었다. 무위(武威)! 이 못된 자식! 그동안 그래 한번을 안찾아오 냐? 대공,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말종은 나타난 청년을 바라보았다. 운고처럼 날카로운 기상은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모난 턱과 굵은 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얼굴이었다. 허리춤에는 휘어진 칼을 하나 달랑 매달고 있었다. 손잡이 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서역의 반월도(半月刀). 그럼에도 운고와 공통된 점이 있었다. 굳건하고 당당한 기상은 둘에게 공통된 것이다. 굉장하구나... 단지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당당할 수 있다는 것에 말종은 새삼 경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굳이 구룡의 셋째라고 하지 않더라도 언제 어느 곳에 머물러도 변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임을 느끼며 말종은 계속 그를 흝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저것들하고 같이 내려온 거냐? 흑마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백마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 위에서부터 쳐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백마신이 의아한 기색이었다. 운고도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혼자서요? 응. 모두 바빠. 잠깐동안 일행은 철무위라 하는 이 청년을 멍하니 쳐다보았 다. 운고가 어이없어 다시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래. 철무위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리고 동작은 더욱 신속했다. 막 내려오던 자들은 한순간에 모두 사방 벽에 부딪히며 나 뒹굴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 그들은 다시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흑마왕은 주먹을 들으려다 몹시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죽이지도 않고 상대를 제압해 버린 것이다. 이년 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깨끗한 수법이었다. 그게 뭐냐? 저희 둘째 형님께 배운 겁니다. 뒤에 있던 가루라가 이상한 표정이 되어 천축어로 중얼거렸 다. 범천사의 나한포(羅漢抱)... 말종은 그 말은 못알아들었지만 가슴 깊이 감명받고 있었 다. 죽이려드는 자를 전혀 다치지 않고 제압한다는 것. 독왕 곡인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말종은 그에게 빨려드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뭐라고 하는거냐? 화풍렬이 천축어를 아는 운고에게 물었다. 운고는 애매한 웃음으로 답했다. 너! 치사하게... 화풍렬이 막 화를 내려는데 철무위가 돌아서며 말해주었다. 나한포라는 겁니다. 나한포! 흑마왕이 크게 숨을 들이키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백마신은 아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위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운고의 심각한 말투가 곧 일행을 경각시켰다. 아직도 간간이 떨어져 내리는 자들이 있었다. 철무위는 앞으로 나아가며 딱 부러지게 끊어 말했다. 여기는 형제들 가운데 너와 나 둘뿐이어야 하는 일이지. 운고의 날카로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밖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분명했다. 철무위의 말은 이어졌다. 이분들과 합작을 하게되어 불행 중 다행인 거다. 백마신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꼬마들하고 합작을 하게 되었지? 무슨 일이 터지고 있는거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백마신과 달리 흑마왕은 단도직입적 으로 물었다. 실은 이 귀역을 감싸고 있는 안개를 지우려고 했는데 의외 의 방비가 되어 있어서요. 거기 형제 넷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고! 흑마왕이 수염을 곧두세우며 물었다. 철무위는 앞으로 가며 낮게 말했다. 섭천대진(攝天大陣)이 있었습니다. 그걸 넷이 해결하겠다고? 어처구니 없어하는 태도를 전혀 숨기지 않고 백마신이 말했 다. 그러나 흑마왕은 전혀 다른 뜻에서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여기 그게 왜 있어? 그걸 알려면 밑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침착하게 말하는 철무위를 따라 일행은 움직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추인 자신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앞에 놓여진 탁자 위에 찻물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되물었다. 섭천대진을 발동했다고? 예. 그에게 그 보고를 한 부하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는 섭천대진을 발동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와 같은권한을 가진 다른 한 사람이 명령을 내렸 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이곳은 어차피 버리면 되는 곳이다. 아까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들을 끌어들여 일망타진하려는 것이 처음의 목적이었다. 굳이 전력으로 사수(死守)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는 것 이 처음 의논한 결과였었다. 단지 대법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면 충분한 것이다. 섭천대진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포진한 것에 지나지 않았 다. 그리고 그걸 굳이 드러내어 이쪽의 전력을 짐작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의논한데로 하지 않고 굳이 섭천대진을 발동시킨 것일까? 상대방의 고집이 왜 갑자기 발동한 것인가? 그는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바깥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부하는 여전히 바닥에 이마를 댄 채로 떨면서 보고를 했다. 상황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구룡가운데 넷이 달려들어 섭천대진을 조이고 있었다. 그건 그가 생각해도 뜻밖이었다. 설마 넷 정도로 섭천대진을 무너뜨리려 생각할 줄은 짐작 못한 것이다. 아니 그가 생각하던 구룡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었다. 그 가 개입한 것일까? 보고가운데 그를 어이없게 만든 것은 수로맹의 활약이었다. 애당초 논외(論外)로 여기고 있던 수로맹의 행동은 철저하 게 이 귀역의 약점을 찌르고 있었다. 아마 구룡이 제안한 대로겠지...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은 없었다. 자신이 자신의 일을 하듯이 상대도 상대의 일을 하고 책임 을 질 것이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지금의 결론이었 다. 화풍렬은 진저리를 쳤다. 이미 이 귀역 곳곳에 사라져서 먼지덩이가 된 마교의 물건 이 튀어나오는데만 해도 신물이 나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삼백년 전에 문제를 일으킨 마두의 자랑거리까지 연 이어 나타나다니! 화석향에 이어 섭천대진이라니! 내가 이러다가 제명에 못가지... 편안히 살면 문제없이 백 살까지 살 자신이 있는 화풍렬이 었지만 요즘 들어와서 종종 자신이 비명횡사하지 않을까 걱정 되는 상황이 많아졌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마구 날뛰는 저 두 마인만 해도 골이 찌근거렸다. 그리고 옆에서 작지도 않은 칼날을 까닥거리며 걷는 이 벌 거숭이 녀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천회가 섭혼루에 이용당한다고 분개하며 훌쩍 떠나서 자 신을 쓸쓸하게 만들었던 못된 꼬맹이 녀석은 이년 동안 다커 서 저 앞에 휘적거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세월은 노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거지... 감회에 젖는 동안 화풍렬은 이 계단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 다. 마침내 일행은 밑바닥에 닿은 것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저그런 반구형의 텅빈 광장. 처음에는 그렇게만 보였다. 그러나 그런 텅빈 광장을 향해 철무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반월도를 쭉 뽑아 들었다.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광채가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제서야 말종은 이 반월도가 주인만큼 예사롭지 않다는 것 을 알았다. 철무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장을 이곳저곳 가늠하다 가 반월도를 슥슥 내리그었다. 그리고 정경이 변했다. * * * <이제 시작인가?> 2 허공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여전히 앞은 반구형의 광장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지 는 않았다. 산산조각 난 허공 뒤로 서 있는 자들이 있었다. 말종은 어떻게 허공이 산산조각이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마치 종이가 찢겨져 흩어지는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사 라진 것이다. 백마신은 이것이 사술(邪術)로 이루어진 눈속임이었음을 알 아차렸다. 그리고 철무위가 단숨에 이것을 깨버린 것도. 이놈 이년 전하고는 아주 딴판이네. 그런데 어떻게 된 거 지? 이 사술은 삼백년 동안 재현된 적이 없는건데? 백마신의 생각은 뚝 끊겼다. 하얀 두건을 푹 눌러쓰고 눈만 내놓은 자들. 그들은 좌우로 길게 한줄을 만들며 늘어서 있었다. 일행을 덮치기 위한 듯 반원을 만든 채로 였다. 백마신의 생각을 끊은 것은 그 반원의 끝머리에 있는 두 인 영이었다. 붉게 타는 듯한 승포. 맨질맨질 거리는 머리 아래 얼굴. 백마신의 손이 뒤에 매어놓은 보따리로 움직였다. 우두둑. 흑마왕이 주먹을 쥐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그의 눈은 푸른 빛이 은은하게 맴도는 거한을 쏘아보고 있 었다. 자신보다 머리하나 정도 작은, 그러나 그만큼 불거진 근육을 가진 동상 같은자. 청마군은 이미 군왕도(君王刀)를 뽑아들고 있었다. 찰칵. 소리는 장내에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군왕도의 칼날이 한자가량 더 튀어나왔다. 원래의 폭보다는 좁은 작은 군왕도가 하나 더 이어진 것같 아 보였다. 우드드... 점차 흑마왕의 전신이 검은 빛으로 변하며 뼈마디가 부러지 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군왕도는 다시 찰칵 소리를 내며 한자가 더 튀어나왔다. 백마신은 보따리 안에서 병기(兵器)를 끄집어 내었다. 철무위는 힐끗 뒤돌아보고는 다시 앞쪽에 늘어선 두건의 복 면인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백마신과 흑마왕은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만난 것이 다. 팽팽한 긴장감이 일행을 휩쓸어갔다. 두건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을 자각한 화풍렬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같이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여태까지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철검은 이미 손에 쥐어져 있었다. 숫자를 논하자면 유리함 같은 것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비겁한 자식! 그런 것 까지 들고오다니! 투덜거리는 소리가 긴장감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적마승이 백마신의 병기를 보고 한 말이었다. 백마신의 병기가 끄집어져 나올 때 일행은 놀라고 있었다. 아홉 개의 쇠막대기를 이어놓은 채찍. 구절철편(九節鐵鞭)이라 불리우는 이 병기는 마디를 이루는 쇠막대기의 길이와 무게 특성이 만드는 자에 따라 모두 달라 졌다. 그리고 이 병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은 전통적으로 신편 (神鞭)이라 호칭되어졌다. 기문병기(奇門兵器)의 십절(十絶) 가운데 꼽히는 하나였으 므로. 그래도 한때는 동문이었는데 눈꼽만한 정도 안남았냐? 적마승의 말이 이어졌다. 백마신이 히죽이 웃었다. 키릭, 키릭... 구절철편을 이루는 쇠막대기가 회전하며 마찰음을 일으켰 다.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너에 대해 좋은 추억도 있긴 하더 군. 그래? 어떤 좋은 좋은 추억? 적마승이 언제나처럼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화해할 수 있으면 언제라도 화해하겠다는 듯한 미소였다. 널 찢어 죽일 때 내가 가장 행복했었다는 추억이지. 되살 아나서 반가워. 내게 또 행복을 맛볼 기회를 주어서 말야. 말이 끝나가며 백마신의 몸은 엄청난 살기에 휩싸이고 있었 다. 그리고 살기가 발산되는 순간에 백마신은 그대로 적마승에 게 달려들고 있었다. 여기서 끝장을 볼까? 흑마왕이 쩌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주먹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어나고 있었다. 포효하고 울 부짖는 마귀(魔鬼)가 날카로운 뿔이 돋은 채로 그의 몸을 휘 어감고 있는 듯했다. 군왕도가 다시 찰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최대의 길이인 다섯 자로 늘어났다. 도기(刀氣)가 쭉 뻗었다. 흑마왕이 성큼 다가가 청마군이 발산하는 도기에 마주쳤다. 철무위는 반월도의 끝을 앞으로 내밀며 공력을 돋우워 낭랑 하게 외쳤다. 물러서시오. 이 귀역은 없어져야 하는 곳. 막아설 일이 아 니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두건복면인들의 소매자락 속에 감추 어져 있던 탄자(彈子)였다. 핑! 핑! 핑! 쉬잉, 쉬잉, 쉬잉! 탄자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칼날이 바람개비처럼 회전하 는 소리에 막혔고 탄자는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가루라가 나서서 막아내고 있었다. 십자인이 그의 손안에서 이루어졌고 회전하고 있었다. 가자! 외친 것은 화풍렬이었고 뛰어나간 것은 운고였다. 철검이 격한 울음소리를 토하며 지면에 그대로 내리꼿혔다. 콱! 쿠르르르... 그 다음에는 지면을 타는 괴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말종은 그 순간에 분뢰수의 발도 바닥을 세게 밞았다는 것 을 알았다. 대롱대롱 매달리듯이 찰삭 붙어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두건 복면인들이 느닷없이 자신들의 발밑이 진동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순식간에 그들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치며 일행 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이들을 맞이한 것은 철무위였다. 반월도가 허공에 편월(片月)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하나의 조각달이 나타날 때마다 두건 복면인은 한사람씩 지 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말종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달을 만들고, 그 달은 또 어떻게 다른 사람 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가? 운고는 지면을 미끄러지며 장력을 연이어 뿜어내고 있었다. 일장 이상 솟구쳐있던 두건 복면인들은 그때마다 허공에서 뒤쪽으로 튕겨지듯 추락하고 있었다. 마치 쇠뭉치를 얻어맞고 날아가는 광경이었다. 치잉! 치치치칭! 경쾌한 음향이 철무위의 주변을 휘감으며 반구의 광장을 누 벼나갔다. 철무위의 몸주변에는 두개의 금빛이 빙글거리며 철무위를 호위하듯 날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탄자가 마주쳐 튕겨졌다. 철무위의 반월도가 더욱 선명하게 달을 그려내었다. 일장의 충돌이 끝나고 철무위는 다시 지면에 발을 딛었다. 처음 이십오인 가량 되었던 두건 복면인들은 이제 절반 정 도가 추락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면에 발을 딛었을 때는 자신들에게 밀려오 는 연환장력(連環掌力)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휘리리링! 막 장력의 여파를 이기고 자세를 잡으려던 두건 복면인들은 느닷없이 날아오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보았다. 그 출발점에는 벌거벗은 듯한 가루라가 서 있었다. 곧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던 두 수레바퀴는 그들로부터 다 섯걸음 정도 앞에서 느닷없이 꺽어져 맞부딪히고 말았다. 그리고 두건 복면인들이 순간적으로 십자(十字)가 자신들의 눈 앞에 나타난 느낌을 받았을 때, 하나가 된 수레바퀴는 다 섯 배 이상 빨라져 그들을 덮쳐왔다. 순간적인 속도의 변화는 그들이 느끼기에 수레바퀴가 날아 오다가 그들로부터 다섯걸음 앞에서 지워진 듯한 것이었다. 십자인의 기습은 두건복면인을 다시 몇 명 쓰러뜨리고 있었 다. 삽시간에 팔다리가 튀어오르고 바닥이 피로 젖어갔다. 가루라가 되돌아오는 십자인을 회수하는 순간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메아리쳤다. 백마신은 적마승을 보고 빙긋 웃어주었다. 그의 구절철편은 몸을 한바퀴 돌아 머리위에서 끝마디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바로 그 끝마디에 소리없이 날아온 붉은 섬광(閃光)이 충돌 하고 튕겨진 것이다. 적마승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런 막대기 같은장애물에 부딪히면 비마월은 반원을 그리 며 그 뒤에 숨은 자를 덮친다. 그런데 지금 거꾸로 튕겨져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그것은 백마신의 구절철편 마디마디가 회전하고 있다는 뜻 이었다. 그 쇠막대기의 겉에 새겨놓은 기둥을 타는 용의 형상이 끊 임없이 돌고 있는 것처럼. 비마월은 방해받은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적마승을 향해 예기를 뿌렸고 구절철편의 거친 파공음이 그 뒤를 따랐다. 적마승의 온몸이 순식간에 붉은 안개에 휘감겼다. 그 안개는 비마월을 사로잡았고 구절철편의 타격을 가로막 아갔다. 하나 다음순간 적마승은 뒤로 굴러가고 있었다. 승포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드러난 상체에는 상처자욱 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백마신은 차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일어서고 있는 적마승을 노려보았다. 폭발적으로 덮쳐드는 검은 그림자의 예리함을 청마군은 전 혀 피할 생각이 없었다.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마염인(魔染刃)이라면 강호에 서 꼽는 십대마공(十大魔功)에 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신 청마군은 군왕도의 기세를 그대로 한데 몰아 마주쳐 나갔다. 먼저 쓰러지는 자가 누군지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순전히 자신의 청령지신을 믿고 덤벼드는 태도였다. 누가 보아도 무모한 짓이지만 흑마왕은 전혀 무모하다고 생 각하지 않았다. 이미 마염인이 청령지신을 완파(完破)하지 못하는 것이 드 러나고 있는 것이다. 섬뜩한 강기( 氣)의 칼날. 그 마염인이 베어도 청령지신은 그 효용을 잃지 않았다. 도가(道家)에서 손꼽는 호신공력이 틀림없었다. 그런 수비가 없는 무조건적인 공격이 둘 사이에 오가는 순 간에 둘은 더욱 가까이 달라붙어있었다. 흑마왕은 한순간 의혹에 사로잡혔다. 이런 식으로 달라붙으면 유리한 것은 자신인 것이다. 이 놈이 되살아나면서 바보가 되었나? 한가닥 상념이 떠오르는 순간에 자신이 뿜어내는 마염인에 지지않을 섬뜩한 예기가 목을 찔러오는 것을 느끼고 흑마왕은 반사적으로 두 주먹을 맞부딪혔다. 콰앙! 그리고 갈라서면서 흑마왕은 자신의 머리카락 한줌을 베어 내 간 것이 청마군의 팔뚝에서 유유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 았다. 마혼구! 화풍렬은 철무위를 호위하고 돌아오는 비환을 받아들었다. 눈동자가 주시하는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풍렬은 고개 를 저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해도 좋은 흑마왕과 백마신이나 기 괴하게도 필살의 일격은 먹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몰리고 있는 청마군이나 적마승이 필살의 일격을 노 리고 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답은 하나로군. 저들은 염라국에서 돌아올 적에 둘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 왔다는 것. 화풍렬은 철검을 뽑아들며 힐끗 분뢰수를 돌아보았다. 조그만 꼬마를 달랑 매달고 분뢰수는 한가하기 짝이 없었 다. 하지만 조금전에 그가 자신이 내리찍은 철검경파(鐵劍勁波) 에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철검경파에 그런 위력을 나타낼 수는 없었을 것이 다. 어찌되었든 일행이 압도적인 우세로 싸우고 있는 것은 다행 이었다. 머리수가 부족하다는 불리함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러나 화풍렬은 자신의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곧 알 수밖에 없었다. 적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았다. 동료의 목숨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한꺼번에 등장했다면 훨씬 더 자신들에게 유리했을 텐데 이 제서야 기어나온 것을 보면 분명했다. 새로 땅바닥 뚜껑을 열고 튀어나온 자들은 으스스한 분위기 를 뿌려내고 있었다. 불과 다섯 명이지만 그들은 귀역의 화신(化身)이라도 되는 듯이 끈적거리는 귀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눈빛이 뿌려대는 무심한 독기(毒氣).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게 만드는 다섯. 검푸른 장포에 똑 같은빛깔의 두건을 뒤집어 쓴 자들이었 다. 독공의 고수들이다. 백마신이 곁눈으로 보고 경고를 발했다. 흑마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짐짓 명랑한 목소리가 일행의 뒤쪽에서 울려나왔다. 다행이로군. 아직 잔치가 끝나지 않았으니. 그 말과 함께 귀역의 귀기가 달아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느닷없이 해가 등장한 것처럼 밝은 기운이 장내 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비오는 듯한 땀을 흘리며 독왕 곡인도는 다 섯 괴인을 보고 웃었다. 이제 저들이 대혈거령인을 희생시키며 굳이 자신을 낙오시 키려 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천하에 오독신마(五毒神魔)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자가 독왕말고 누가 있다는 것인가? 하나 다섯 검푸른 두건의 복면인들은 독왕 곡인도보다는 뒤 에 나타난 운령을 보고 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3 양보해주겠지? 그래야 비장한 비수가 솜씨를 발휘할게 아 닌가? 곡인도는 분뢰수의 곁을 지나며 나직하니 말했다. 분뢰수는 묵묵히 보일듯 말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말종은 똑똑히 들었고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저런 창백한 얼굴로 싸우려는 것인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한 곡인도가 왜 굳 이 나서서 싸우려는지 이해할 건덕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가루라는 감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철무위는 뒤로 살짝 물러서며 반월도를 고쳐잡았다. 곡선배, 이 일은... 끼여들지마, 애송이! 내가 저놈들 편에 서는 걸 보고싶 어? 자신의 말허리를 자르는 곡인도의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님 을 철무위는 잘 알고 있었다. 더이상 아무 말하지 않고 철무위는 그가 앞으로 나서는 것 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곡인도도 문제지만 운령도 그에게는 걱정거리였다. 얼빠진 놈! 지금이 장난칠텐줄 알아? 비교적 점잖은 태도로 흑마왕이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곡인도의 허락 같은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곡인도가 손을 쓰면 흑마왕도 주먹을 날릴 참이었 다. 그러나 곧 흑마왕의 행동은 멈추어졌다. 군왕도를 꾹 움켜쥔 두 손, 그 팔뚝 사이로 마혼구가 번득 이고 있었다. 청마군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침착했고 일격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백마신도 마찬가지였다. 적마승은 히죽히죽 웃으며 끼여들테면 끼여들어보라는 식이 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오독신마 가운데 하나가 말문을 열었 다. 누가 먼저든 쓸어버린다! 그리고 오독신마 다섯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어두운 그림자가 배어있는 다섯 가지 빛이 그들의 손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곡인도의 손도 오색으로 물들어갔다. 오독신수(五毒神手)... 화풍렬은 어이가 없었다. 저 다섯은 오독신수를 익히고 있었다. 곡인도와 마찬가지로 오독신수를 익히고 있는 것이다. 이십오(二十五) 대 오(五)로군. 백마신이 중얼거렸다. 그 의미를 곡인도는 잘 알았다. 오독신수에 배어있는 다섯가지 독. 익히는 자에 따라서 종류는 항상 달라진다. 저 앞의 다섯이 나 되는 오독신마는 모두 다른 종류의 독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다. 자신의 오독신수가 다섯가지의 독이면 저들은 스물다섯가지 의 독을 한꺼번에 뿌릴 수가 있었다. 곡인도는 웃었다. 그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유봉월은 전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집센 바보임은 알았지만 저렇게 아둔한 짓을 사서 할 것 이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더더구나 이렇게 손해보는 짓을! 힘을 합치면 쉬운 일을 고집스럽게 혼자 하려는 것이다. 유봉월은 뭐라고 한마디 하지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 그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에 오독신마 다섯과 독 왕 곡인도는 격돌하고 있었다. 곡인도의 손도 다섯 가지 빛깔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오독신마들의 오독신수는 어딘지 섬뜩한 그림 자가 배어있었다. 오독신마 중 둘은 곡인도를 노렸고 나머지는 일행을 공격하 려고 들었다. 그들이 받은 지시는 이 침입자들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라 는 것이었다. 굳이 곡인도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곡인도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독왕두가 날아다니며 그들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자신이 독공의 고수였기에 아직껏 독왕두의 독이 해독 되지 않는 독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결정은 한순간이었고 다섯은 한꺼번에 곡인도를 쓸어버릴 것처럼 달려들었다. 누군가 하나는 독왕두에 맞을 수 있어도 나머지 넷은 그 틈 에 곡인도를 박살낼 것이다. 하하핫! 잘봐라! 이게 바로 독왕의 힘이다! 앙천광소(仰天狂笑)! 그리고 독왕 곡인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롱한 빛의 안개. 순간 백마신이 중얼거렸다. 백대 이십오로군. 적마승도 미소하며 혼잣말로 중얼댔다. 전세역전인가? 화풍렬은 멍하니 이제 옷자락만 남아있는 오독신마를 보았 다. 한순간에 그들을 녹여버린 곡인도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 이번에는 정말 못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백가지 독을 한꺼번에 사용한다는 독공의 환상을 보여주고 는 그대로 푹 쓰러진 것이다. 정말 있는 것이었나? 키릭, 키릭... 구절철편이 소리를 내었다. 우드득. 흑마왕의 팔뚝에서 울려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제 귀역을 방어하기 위해 남아있는 것은 둘뿐이었다. 청마군과 적마승. 이들은 곡인도의 독공이 쓸어가는 좌우의 끝에 위치하여 그 범위를 피한 것이다. 처음 일행을 막고 나섰던 두건 복면인들은 모두 독공에 휩 쓸려 사라진 다음이었다. 철무위와 운고는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반월도를 휘두르고 내가장력을 사용해서 단지 제압해 놓았 던 자들도 모조리 독에 휩쓸린 것이다. 독왕 곡인도의 독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가 여지없이 보여준 셈이었다. 좋아, 좋아. 그럼 우리도 결말을 지어야 하는건가? 유쾌한 듯 지껄이고 있는 자는 적마승이었다. 그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조용히 있던 분뢰수가 앞으로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선 것 이다. 분뢰수는 조용히 쓰러져 있는 곡인도를 보았다. 곡인도는 창백한 얼굴에 가득 오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 다. 말종도 그 미소를 보았다. 무엇인가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말종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그토록 곡인도를 만족시킨 것인지를... 나와. 분뢰수의 한마디는 크지 않았다. 그대신 무엇보다도 확고하게 듣는 사람의 가슴속을 파고드 는 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분뢰수의 발이 들려졌다가 바닥에 내딛어졌다. 쿵! 화풍렬의 철검경파에 금이 가있던 바닥은 그대로 깨져 튀어 올랐다. 분뢰수의 발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시뻘건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모두들 나타난 것 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사람이라고 할 것 이 아니었다. 흑마왕보다도 두배는 더 큰 체구. 그리고 가죽부대처럼 너덜거리고 있는 살갗. 그 아래에는 시뻘건 근육이 흐드러딘 실가닥처럼 나풀대고 있었다. 뼈도 보였다. 우엑! 화풍렬이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운고와 철무위가 어처구니가 없어 화풍렬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에 구역질을 할 철검비환 화대공이 아니었다. 그보 다 몇배나 더 심한 꼴도 보고 살아온 그가 겨우 저정도에 이 렇게 헛구역질을 할 까닭이 없었다. 과연 돌아본 그들은 보았다. 화풍렬의 손가락은 바닥 한 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철무위의 눈속에 투명한 빛이 살짝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이제는 화풍렬이 무엇때문에 손가락질을 하는지 그도 알았 다. 너는 꺼져. 어서 나와. 분뢰수가 다시 말했다. 나타난 이상스런 것 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무슨 담요가 덮치는 것처럼 분뢰수를 덮어가고 있었 다. 흐느적 거리며 움직이는 동안 무릎 아래로 보이던 것은 땅 바닥에 질질끌려 뭉개져갔다. 두 손이라고 생각되는 두 부분이 허공을 제멋대로 휘저으며 분뢰수를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유봉월이 소리쳤다. 저, 저거 태극신장(太極神掌)? 일행은 일제히 그 이상스런 것이 하는 동작을 주시하였다. 단지 백마신이나 흑마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을 겨냥하고 있는 날카로운 기운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바위도 뚫고 강철을 가를 수 있는 예기(銳氣)를. 유봉월은 전에 맞서 본 적이 있었다. 거의 삼십여년간 천하오대장공(天下五大掌功)의 수위를 다 투던 태극신장과 겨루어본 그는 골수까지 그 동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대결이 아니었다면 그는 시체처럼 장강을 떠내려가지 않 았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휘말려 십이쌍경음의 절기와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틀림없네? 헛구역질하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화풍렬이 중얼거렸 다. 그러나 의문이었다. 저게 무엇이길래 저런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적마승이 툴툴 거리며 답을 주었다. 기억안나나 보군. 하기야 네가 죽인 녀석들을 다 기억하려 면 밥먹을 시간도 없을테니 벌써 죽었겠지만. 잘 생각해 보라 고. 저봐, 소리내는 것도 어렴풋이 들리지 않아? 그 말대로 저 이상스런 것은 희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목 언저리가 완전히 풀어헤쳐진 실타래같아 귀를 기울이기 전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백마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옥소(地獄笑)인가? 그 특이한 음파는 분명히 기억에 남아있었다. 적마승이 웃었다. 역시 기억하고 있군. 잘 보라고. 누굴까? 천룡당주(天龍堂主)? 의혹이 깃든 음성이 백마신에게서 흘러나왔다. 갑자기 화풍렬은 멍청이가 된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천룡당이란 것은 섭혼루의 조직가운데 하나였다. 악명높고 지독스러운... 그런데 저 요상한 것이 천룡당주라니? 전혀 사람같지 않은 저것이! 돌연 운고가 소리쳤다. 이건... 되살리고 있던건가? 적마승이 운고를 돌아보며 웃었다. 과연 구룡은 비범하군. 저 멍청이는 알아보고도 반신반의 하고 있는데... 철무위의 손에 들린 반월도가 살아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원 호를 그렸다. 옆을 지나는 운령을 호위하는 동작이었다. 운령은 그대로 독왕 곡인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무도 방해하거나 하지는 못하였다. 유봉월은 그것을 깨닫고 급히 곡인도에게 다가갔다. 운령의 손이 곡인도의 미간을 짚어가자 곡인도의 창백한 얼 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만 해둬. 독공은 그의 삶이야.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운령의 귓전을 가느다랗 게 파고들어온 한마디가 운령의 손을 떼게 만들었다. 유봉월은 얼른 곡인도를 업었다. 괴물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유봉월은 뒤로 물러섰다. 운령은 가만히 분뢰수의 뒷쪽에 서 있었다. 말종은 감히 뒤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누가 와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뒤돌아볼 마음이 없었다. 부드러운 기운이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분뢰수를 덮치려고 꿈지럭거리며 다가오던 천룡당주라는 이상한 것은 저절로 허 물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나오기가 싫은가? 다시 한번 분뢰수의 말이 메아리쳐졌다. 철무위의 반월도가 원호를 그리다가 한번 거칠게 허공을 그 었다. 그 순간에 화풍렬이 손가락으로 지목했던 곳의 허공이 종이 짝처럼 찢어져 나갔다. 그것은 처음과 마찬가지의 광경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조용히 한사람이 좌정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향로 하나가 자욱한 흑연(黑煙)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향로를 보는 순간에 가루라의 괴성이 쩌렁거리며 울렸고 격렬한 회전음이 장내를 메워나갔다. 쉬잉, 쉬잉, 쉬잉... 운고는 가루라가 지르는 귀를 째려는 듯한 괴성이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대혈신정을 당장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보내 줄테다! * * * <도대체 모르겠다. 저 놈은 누구지? 그리고 위에서 난리를 치는 놈은 또 누굴까?> 第 二十五 章 決 判 1 1 귀역의 안개가 울부짖고 있었다. 한번도 침공받지 못한채 군림해온지 사십여년. 그 불가침의 귀역이 지금 불길에 휩싸여 있고 어둠을 간직 해 보는 이를 떨게 만들었던 안개를 지금 그 존재자체가 희미 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둥글게 귀역을 휘감아 타오르는 불길 속에 서 반구의 거대한 건축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솟아 있는 높은 탑.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귀기가 온몸에 달라붙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괴한 탑이었다. 온세상을 내리누르는 듯한 위압감을 보이며 우뚝 선 그 탑 은 불길에 가리워져 그림자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탑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조그만 점들이 보였다. 그 점들은 몇 개 되지 않았으나 오르락 내리락 할때마다 탑 은 거대한 신음을 토하며 한귀튕이씩 무너지고 있었다. 수로맹 휘하의 수적들은 자신들의 수적 생활에 화려하게 쌓 여가고 있는 귀역격파의 날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 광 경을 보고 있었다. 어떤 요괴가 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동정호 군산의 귀역은 옛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 * * 맑고 담담한 눈. 살며시 그어진 기품있는 미소. 그는 그렇게 자신의 앞을 둘러보고 있었다. 반구형의 천정 전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듯 그는 그렇게 조용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오랜 만에 보는 얼굴이 여럿 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다시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다시 만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얼굴들이었다. 독왕 곡인도는 유봉월에게 업혀 뒤로 피신해 있었다.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천하오패 가운데 셋이 이 귀역을 공격하는데 가담했다는 것 이 나쁠 리는 없었다. 하나는 눈 앞에 쓰러져 있었고 다른 둘은 바깥에서 구룡의 몇과 힘을 합쳐 섭천대진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아마 철무위는 천하오패의 둘이 가담한 일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도 지금 막 그 소식을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한사람에게 향했을 때 그 사람은 벼락같이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 조용히 대답했다. 죽었었지요. 화풍렬은 백마신이 처음 적마승을 보았을 때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의 손에는 아니지만 예전에 그 소식을 듣고서 얼 마나 기뻐했었던가? 그런데 그것이 지금 물거품이 되어 눈 앞에서 사라지고 있 었다. 두번 다시 보지 않게 되리라 해서 기뻐했던 그 얼굴이 눈 앞에서 웃은 꼴은 거의 화풍렬을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고 있 었다. 이 못된 놈! 상관월(上官月)! 죽었다고 하더니 아직 살아 있었느냐?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저런 놈을 여태 살려 두 었지? 죽었었지요. 상관월은 기품있게 웃으며 대꾸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돌려 운고와 철무위를 훓어보며 물었다. 그렇지? 너희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잘 알고 있지 않느 냐? 시선은 철무위에게 멎었다. 휘리리링! 상관월에게 두 개의 수레바퀴가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다섯 걸음 앞에서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 부딪 혔다. 선명한 십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싶은 순간에 날아드는 속 도가 몇배로 더 빨라져 상관월의 목을 베어왔다. 순간적으로 한곳에서 사라진 물건이 다른 곳에 나타나는 그 런 광경이었다. 그러나 상관월의 목은 베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뻗고 있는 한 손에 두자루의 칼날이 붙들려 있었다. 가루라의 얼굴이 경직되어 버렸다. 십자인의 손잡이가 정확하게 잡혀 있었다. 상대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고수인 것이다. 마치 분뢰수같은... 왜 그러느냐, 무위? 날 못 알아보기라도 하는 거냐? 철무위는 무겁게 굳어진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사부... 갑자기 유봉월은 세상이 뒤집어 진 듯한 느낌이었다. 사부라니? 대체 누가 누구의 사부라는 건가? 설마 구룡 중 한 사람의 사부가 귀역의 주인이었다는 것인 가? 그런데 왜 그 제자가 귀역을 공략하는 것이지? 유봉월의 생각은 뒤죽박죽이 되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 다. 개자식! 사부? 세상에 사부가 다 얼어죽었냐? 구천회를 그 렇게 말아먹은 것으로 부족하더냐? 왜 또 나타난 거야! 화풍렬의 이어지는 고함소리는 유봉월을 더욱 당황하게 만 들었다. 구천회라니? 왜 그 이야기가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이지? 유봉월이 얻은 십이쌍경음은 한때 구천회에 몸담았던 전전 대(前前代)의 고수가 남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절기를 얻은 자에게 구천회의 취지를 설명하였 고 천하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유학(遺學)을 써달라고 얼마나 간곡하게 부탁하였던가? 대공, 그만 하십시요. 철무위가 화풍렬의 계속되는 욕지거리를 막았다. 화풍렬의 눈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철무위를 훓어내렸다. 그리고 으러렁거렸다. 뭐야? 너는 아직도 저 물건을 사부라고 여기는 거냐? 무위는 화장로(華長老)처럼 막무가내가 아니니까요. 상관월의 조용한 음성에 유봉월의 시선은 바쁘게 화풍렬의 위아래를 오르내렸다. 그도 구천회의 장로인가? 도저히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유봉월은 갑자기 흑마왕과 백마신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들도 혹? 그건 진짜 말도 되지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봉월은 아예 일체 생각하지 않 기로 했다. 그때 침착한 한마디가 흥분한 화풍렬을 가라앉혔다. 넌 누구지? 분뢰수의 한마디에 화풍렬은 잠깐 말문을 닫았다가 곧 키득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크게 웃어제꼈다. 맞다! 맞아! 도대체 넌 뭐하는 물건이냐? 상관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화풍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노기로 물들고 다시 고함이 터 져나왔다. 웃지마! 꼴보기 싫어! 운고가 화풍렬의 곁에서 그의 손을 붙들었다. 화풍렬은 운고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오는 따뜻하고 맑은 기 운을 느꼈다. 바로 자신이 가르쳐준 청명지기(淸明之氣)였다. 진정하세요. 운고의 말에 화풍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분노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내가 누구냐... 그걸 네가 모른단 말인가? 재미있군. 상관월은 분뢰수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잔잔한 수면아래에 거센 폭풍이 맴돌듯 그의 눈빛은 침잠한 가운데 전신의 기세가 폭풍이라도 일으킬 듯이 일어나고 있었 다. 넌 날 알아? 분뢰수가 다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칙칙하고 암울한 쇠조각 같은눈빛 속에 의혹이 깃들었다. * * * <저자는 날 아는가?> * * *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않나? 상관월이 유쾌한 듯 말하였다. 그러나 그를 아는 화풍렬이나 운고, 철무위 들은 그 안에 감추어진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유쾌함은 다음에 벌어질 일의 예고(豫告)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천금장에서 네가 나에게 한 짓을 그대로 재현(再現)해 놓 았는데... 그걸 못보았나? 상관월의 말에 말종이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없던 천금장. 새들조차 날아가 버린 텅빈 장원. 그리고 독. 거기서 말종은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보아주는 분뢰수 를 만났었다. 그러나 상관월의 말에 실린 천금장은 온통 죽음으로 가득찬 곳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 희망도 없는 오직 절망과 죽음만이 감도는 곳으로. 분뢰수의 눈이 빛났다. 암울한 가운데 비춰들어오는 서광이라도 받은 듯이 빛난 것 이다. 그럼, 너로군. 그 만리신응을 죽인 것이. 화풍렬은 순간 기련산 연혼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분뢰수가 쫓던 만리신응. 갑자기 화풍렬은 머릿속을 메운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상관월은 분명히 죽었던 자였다. 누가 확인했던 그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되살아난 것이다. 그게 새삼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찢겨진 붉은 승포를 걸친 자도 군왕도를 휘두르는 거한도 역시 되살아났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화풍렬은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 미친 놈이 널 살렸다는 거야? 왜? 그놈은 연혼전의 부 전주였던 놈인데 왜 섭혼루주(攝魂樓主)인 널 살려? 연혼전주 는 놔두고... 상관월은 화풍렬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는 환혼노인이라 하지요. 연혼전주와 다른 길을 가는 사 람이었습니다. 혼의 지배(支配)가 목적이 아닌 혼을 통한 사 자(死者)의 부활! 그것이 목적이었지요. 하나 그의 힘으로는 연혼전주에게 거역할 수 없었던거고. 다행히... 제거가 된 셈 이니 또 볼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운고는 철무위에게 눈짓을 했다. 철무위는 굳이 그 눈짓을 보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상관월은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느긋하게 말할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 다. 그리고도 부족한지 상관월은 계속 또 말을 하려고 하고 있 었다. 거기 뭐라고 써 있었나? 분뢰수의 물음은 돌발적인 것이었으나 상관월은 그가 무엇 을 묻고 있는 것인지 알았다. 분뢰수는 만리신응의 발밑에 매달린 쪽지에 무엇이 쓰여 있 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상관월은 분뢰수를 보며 웃었다. 그가 나타났다. 분뢰수가 그 이다. 그렇게 써 있었네. 분뢰수는 한동안 상관월을 보았다. 말종은 분뢰수를 살짝 올려다 보았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종은 바람 같은것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말종이 느끼는 것은 의혹이었다. 왜 묻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마음도 읽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저렇게 묻고 있는 것일까? 그것뿐인가? 분뢰수는 다시 물었다. 상관월은 말없이 분뢰수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육년 전에만 해도 넌 그저 평범한, 단지 약간의 자질이 있 는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삼년이란 짦은 기간에 엄청난 변화를 보였지. 기연(奇緣)만으로는 이룰수 없는 성취 였어. 아마 그 혈겁에서 홀로 살아남은 때문이라고 생각은 되 지만, 너의 변화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가히 절대무적 (絶對無敵) 이라 불리울 만했으니까. 갑자기 장내에는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렸다. 철무위도 운고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보였다. 화풍렬은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흑마왕과 백마신은 이제 자신들의 숙적(宿敵)은 안중에도 없는 듯 뚫어지게 분뢰수만을 보고 있었다. 유봉월은 첩첩산중처럼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 듣지 못했 다. 난데없이 왠 육년이 어쩌고 저쩌고 인지... 쨍그랑, 가루라의 두 자루 칼날은 바닥에 뒹굴었다. 말을 하며 상관월이 놔버린 것이다. 그 점을 좀 기대하기는 했지만 네가 정말 그 정도까지 성 장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넌 단지 무공만 높아진 얼간이가 아니었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을 했어. 저 둘을 수하로 거두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상관월의 말이 진행되면서 장내는 완전히 정적의 지배를 받 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상관월은 분뢰수가 그 라고 말하는 것이다. 흑마왕은 분뢰수가 과연 자신들의 그분 인가 유심히 살폈 으나 아무 것도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힐끔 백마신을 보아도 역시 의혹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분뢰수가 그분 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이년 전, 넌 구룡을 이용해 자신의 행적을 숨겨버렸다. 패 배했다는 헛소문을 남기고 사실은 잠적한 거지. 철무위도 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유봉월도 그 가 누군지 알았다. 그리고 과연 상관월이란 저자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 궁금했 다. 과연 구룡은 그 에게 이용당한 것인가? 그 는 아직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상관월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음성이 사라지고 정적이 완벽하게 사위를 물들이려 할 때였다. 쿠르릉! 거대한 신음을 토하며 반원의 천정이 날아가버렸다. 깨끗하게... 그리고 일행은 무엇인가 터무니 없는 것이 하강(下降)한 것 을 깨달았다. 오싹한 기운이 사방을 누볐다. 철무위는 갑자기 부르르 떨었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저 느낌은 분명히 섭천대진의 중앙에 있던 그 사악하게만 느껴지던 무엇 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무엇 이 이 자리로 하강할 수 있는 것인 지 알 수가 없었다. 구룡의 넷은 아무 일도 없는 것일까? 갑자기 땅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쑤욱 돋아났다. 운고는 기괴함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런데도 떨어져 내리는 동작 같은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보인 것이 바닥에서 돋아나는 장면이었기에 기괴한 것이었다. 상관월이 정중하게 말하는 소리만이 들렸다. 오셨소? * * *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야? 그게 나란 말인가? 그런데 왜 난 그 와 싸워야 할 운명이란 거지?> 2 갑작스런 기괴한 정적 속에서 일행이 제정신을 유지하게 만 든 것은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부드럽고 맑은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꼬마 계집애가 희한한 물건을 가지고 있군... 저게 뭐지? 상관월은 그 치떨리게 만드는 음성에 끄덕도 없는 듯 조용 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는대로 이것저것 다 연결한 물건이지요. 피독주에서 피 사주(避邪珠)까지. 선천신수(先天神數)로 따져서 잘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치떨리게 만드는 음성은 여전히 클클대는 소리를 내며 중얼 거렸다. 정말 희한한 물건이군. 계집애도 희한한데 저런 희한한 물 건까지 가지고 있다니... 확실히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운령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저 치떨리는 음성을 발하는 자에 대항하고 있 는 것이었다. 가루라는 전신을 휘어감는 요사스런 귀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휘감긴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끈적거리기만 했던 귀기와 직접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귀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는 살벌한 귀기. 그런 것이 실제로 있었다. 유봉월은 그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구룡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운 다섯째. 한마디와 함께 철무위는 자신의 반월도를 칼집에 넣어 운고 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운고는 반월도를 받아들며 철무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 다. 나타난 자가 얼마나 막강한 자인지 아직 운고는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단지 철무위가 자신의 진짜 실력을 보이려한다는 점은 분명 하였다. 구룡 가운데 신수비룡(神手飛龍)이라 칭해지는 철무위가 본 신실력을 발휘하려 할 정도면 얼만큼 강한 것일까? 운고는 칼집째로 어깨에 걸쳤다. 화풍렬은 그런 그들이 새삼 대견스러웠다. 한눈에 보아도 나타난 자는 공포스러운 힘을 가졌다. 오죽하면 흑마왕과 백마신이 놀라 물러서며 일행에 다시 합 류했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쳐다보아도 이건 그저 그림자였다. 흑마왕이 펼치는 기괴한 마공과 같은 것일까? 바로 그때 그 음성이 들렸다. 비켜. 후일 화풍렬은 일생동안 들었던 말 가운데 이때 들은 이 말 을 가장 황당했던 말 순위보의 제일위로 올려놓았다. 갑자기 일행은 뜨악해서 분뢰수를 보았다. 안그래도 호시탐탐 일행을 주시하며 누굴 먼저 잡을까하는 기색이 완연한데 분뢰수는 거기다가 불을 질러댄 격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가지 생각이 일행 모두에게 떠올랐 다. - 그가 정말 그 인가? 그 라면 무슨 말을 아무 곳, 누구에게나 해도 뭐라고 따질 자는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에 이미 저세상에 가 있을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단지 일행의 생각이었을 뿐, 저 그림자와 같은 자, 그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비웃고 있었다. 본황(本皇)의 색심탈혼(索心奪魂)에 필적하는 기문공력(奇 門功力)이로군. 그런데 겨우 그걸로 본황을 물러서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으스스한 음성이 듣는 사람을 절로 떨리게 만들었다. 화풍렬은 자신이 그 음성이 아니라 그 내용에 전신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겨우 한자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사(邪)... 천황(天皇)! 백마신과 흑마왕이 이구동성으로 놀란 외침을 토해내었다. 운고는 셋이 지칭하는 이름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유봉월은 자신을 휘어감는 끈적거리는 귀기에서 빠져나오려 고 기력을 돋우다가 이말을 들었다. 그리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유봉월은 섭천대진이란 것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단지 그 앞에 두 자가 더 붙어있어 당장 생각해내지 못한 기억이었다. 사신(邪神)이란 두 자가. 크크크, 귀여운 것들... 그래도 본황이 누군지 기억을 하 는구나... 그래, 삼백년이란게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 백마신과 흑마왕은 이미 자신들의 숙적 같은것은 일단 눈에 서 제껴놓았다. 이건 곤란한 놈인데... 마주 볼 필요도 없이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둘은 손을 합칠 준비를 끝낸 상태가 되었다. 적어도 사천황(邪天皇)이란 자는 그 정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콰지직! 느닷없이 바닥의 돌이 그대로 깨어져 나갔다. 운령은 자신의 앞에 튀어오르는 돌조각을 보고 분뢰수를 보 았다. 말종은 손을 감싸고 있는 옷자락이 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기운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음을 느꼈다. 당황하는 순간에 이미 말종은 운령의 앞까지 밀려나 있었 다. 이와 반대로 분뢰수는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서 돌이 요란한 음향과 함께 깨지고 있는 것이 다. 그림자와 같은 자태로 선 사천황은 분뢰수의 눈빛을 보았 다. 하얗게 변한 눈자위는 백옥(白玉)처럼 빛나고 그 안에서 뇌 전(雷電)이 번득이고 있었다. 웃었다. 사천황은 웃었다. 그의 웃음은 요란하였고 소름이 돋게 만드는 것으로 부족한 지 뼈를 가는 듯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크크크카카카카캬...! 아무도 그것이 사신소(邪神笑)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공을 돋우고 정신을 가다듬어도 파고들어오는 웃음에 뼈 가 갈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말종은 저절로 아래 위 이를 마주치고 있었다. 오금이 저려오는 것이다. 발은 저절로 운령에게 몸을 기대도록 움직였다. 창피하고 어쩌고를 따질 틈이 없었다. 단지 운령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맑고 부드러운 기운만이 유 일한 안식처로 느껴지는 것이다. 말종은 자신이 뒷걸음질쳐 운령에게 기대는 동안 옆을 지나 휘적휘적 걸어 앞으로 가는 철무위를 보았다. 그건 말종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때문에 철무위의 모든 것이 말종의 뇌리에 똑똑히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한손은 붉은 기운을 띠었고 다른 한손은 푸른 기운을 머금 은 채로 얼굴과 목덜미 아래 쪽으로 은은하게 금빛이 맴돌고 있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신소는 멈추어졌다. 사천황은 분뢰수는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철무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철무위의 손과 살갗에서 빛나는 광화(光華)를 주시하고 있 었다. 크흐흐... 아까 섭천대진에서 빠져나간 놈이구나... 이 말속에는 짙은 원한(怨恨)과 분노(憤怒)가 실려 있어 듣 고 있던 화풍렬은 어리둥절했다. 전생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사천황은 이를 갈며 한자한자 똑똑히 내뱉었다. 너! 혼원태극수(混元太極手)를 익혔겠지? 철무위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단번에 자신이 익힌 공력을 알아볼 줄은 생각못한 것 이다. 상관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천황이 분노하고 있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삼백년 전에 자신을 때려죽인 절기(絶技)를 익히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물론 철무위가 그런 것을 알리가 없었다. 상관월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가 아는 한 철무위는 청허신수(淸虛神手)를 익혀 신수(神 手), 두 자를 별호에 담게 된 것이다. 설마 고금최고(古今最高)의 수법(手法)이라는 혼원태극수 를 익히고 있을 줄이야... 철무위를 마지막으로 본 이년 전과 지금, 너무도 달라져 있 었다. 앞으로 나서던 철무위는 문득 멈추었다. 그를 멈추게 한 것은 분뢰수였다. 분뢰수는 단지 뒤로 고개를 돌리고 한번 고개를 까닥 했을 뿐이었다. 하나 그 속에 담긴 살기에 철무위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천황은 뜻밖의 광경에 철무위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야 했 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살기가 자신에게 쏟아 지고 있는 것을 느낀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정면에서! 이렇게 배짱좋은 놈을 만난 것은 통털어 두 번째였다. 첫번째 녀석은 제법 살기를 뿜어내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 다. 때문에 사천황은 그를 좀 얕잡아 보았었다. 그래서 맞아 죽었던 것이다. 이번에 이놈은 얕잡아 볼 마음이 싹 가실 만큼 지독스러운 살기를 내뿜어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내뿜고 있던 귀기마저 흐려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겁먹을 사천황은 아니었다. 몸에 입은 가벼운 상처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사신섭천대진(邪神攝天大陣)까지 펼쳐 붙잡으려 한 놈도 바 로 눈 앞에 있었다. 모든 일은 다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웃기는 복면꼬마를 때려죽이고 저 애송이를 죽이면 기분 이 상당히 괜찮아 질 것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삼백년 전의 복수가 될 것이다. 겨우 한쪽 팔 하나 밖에 없는 주제에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 고 목숨을 앗아갔던 삼백 년전의 그 놈도 혼원태극수를 익힌 자기 후인(後人)이 바로 자신 사천황에게 죽는 것을 알게 되 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 지금의 사천황에게 방심이란 없었다. 삼백년 처럼 멍청히 서서 적의 공격을 감상하는 일은 두번 다시 있을 수가 없었다. 환마보(幻魔步)가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 다. 물위에서도 그대로 걸어다닐 수 있는 천황비전의 절기, 환 마보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신법(身法)이다. 누구도 환마보를 펼치는 자를 정확하게 노리고 칠 수는 없 는 것이다. 이러한 사천황의 생각은 즉각 수정되었다. 환마보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놈이 바 로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느닷없이 짓쳐들어오는 하얀 번개는 위협적이었다. 어라? * * * <우선 이놈을 때려죽이고...> 第 二十六 章 決 判 2 1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철무위가 걸음을 멈추기가 무섭게 분뢰수는 질풍보다 더 빨 리 내딛었다. 그리고 분뢰수의 왼쪽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번개.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 가공스러운 번개가 그림자처럼 보이는 사천황을 꿰뚫는 것은 자신이 숨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보고 있던 자들의 눈에는 또 하나의 번개가 그려지 는 광경이 선명하게 비추어들고 있었다. 하얀 번개가 아니었다. 새까만 번개가 나선을 그리며 분뢰수의 왼쪽에서 피어오른 번개에 그대로 마주치고 있던 것이다. 키이잉! 기괴한 소리가 울려퍼졌고 분뢰수가 동작을 멈추었다. 사천황의 모습도 더이상 그림자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귀신이라도 깃든 것처럼 한올한올이 위로 치솟아 꿈틀거렸다. 그 아래 고목(枯木)과 같은 일그러진 피부에 싸인 얼굴. 온몸을 휘어감고 있는 흑적색(黑赤色)의 기괴한 가죽. 노란 빛에 광기(狂氣)가 엿보이는 눈동자. 사천황은 웃고 있었다. 소리없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일행은 솜털이 다 곤두서고 있었다. 겨우... 빠른 것 하나가지고 본황을 넘봤다는 거냐?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분뢰수는 말없이 사천황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조금 뒤였다. 그리고 붉은 기운 속에서 백옥처럼 눈자위가 번들거리고 있 었다. 눈빛은 점차 쇳조각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말종은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바로 자신의 손이었다. 그러나 무서움 때문이 아니었다. 이 점을 깨닫고 말종은 의 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무서워하지도 않는데 왜 떨고 있는 것일까? 손을 떨게 만드는 기묘한 흥분에 말종은 자신이 조금씩 익 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하지. 분뢰수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두 손을 가만히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휘날려 갈듯 가벼운 자세였다. 자세를 취하자 차츰 가벼운 음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음 향은 곧 그 정체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르르... 난데없이 우렛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분뢰수는 여전히 가만히 두 손을 내민 그대로였다. 사천황도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흑적색 장갑낀 손이 검은 광채를 일렁거리며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손가락이 모조리 엉겨붙은 듯한 광경 다음에 사천황의 두 손은 더이상 손의 형체로 보이지 않았다. 손목이 자루인 한자 반 길이의 도(刀)가 매달려 있었다. 혼암도(混暗刀)! 화풍렬은 이제 상대가 진짜이건 아니건 삼백년 전의 사천황 의 절기가 재현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삼백 년전에 천하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저주 받은 마인! 사신(邪神)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최초로 불패(不敗)의 절기, 분뢰수가 그들 앞에 확 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과 다섯 걸음을 사이에 두고서였다. 분뢰수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우렛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사천황의 주위로는 손짓에 따라 모여든 것처럼 생각되는 황 진(黃塵)이 말려올라가고 있었다.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광경과 똑같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분뢰수의 뇌운비상(雷雲飛上)이었다. 그리고 사천황의 두 자루 혼암도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먹구름은 그대로 갈라지며 사천황을 피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나 그러는 동안 사천황의 흑적색 가죽옷이 조금씩 무엇인 가에 베인 듯 갈라지고 있었다. 상관월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천황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돌처럼 굳은 얼굴로 혼암도를 거칠게 흔들어 대었다. 먹구름이 거센 바람을 만난 듯하더니 황진이 흩어졌다. 분뢰수의 눈빛 속에 뇌전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며 두 손 바닥이 손가락 하나 사이를 두고 붙었다. 콰콰콰! 거센 천둥소리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음파가 덮쳐들때 사천황은 혼암도를 맞부딪히고 있었다. 카카카! 격렬한 음파가 천둥소리에 대항하였다. 철무위는 눈썹을 곤두세웠다. 싸우고 있는 그들사이에 모든 것이 이미 먼지덩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정도 음파가 단지 다섯 걸음 안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은 싸우는 둘의 공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분뢰수는 상대가 자신의 제이격, 뇌고진천(雷鼓震天)도 별 타격없이 받아내는 것을 보았다.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당연히 만났어야 할 적수를 만난 것뿐이었다. 제삼격도 연이어 펼쳐졌다. 사천황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혼암도를 그어대기 시작했 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세번째 공격은 단지 방어만으로 맞서 기에는 너무 선(線)이 많은 것이다. 츠츠츠츳.... 뇌정균천(雷霆均天)이라 이름지어진 분뢰수의 세번째 공격 은 무수한 번갯불의 소나기였다. 손이고 뭐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삽시간에 사천황은 전신이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혼암도가 춤을 추며 그의 온몸에 달려드는 번갯불을 갈라놓 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혼암도의 공격이 방어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 다. 크아아아! 사천황은 끔찍한 비명소리를 외치며 혼암도를 거칠게 마주 치고 흔들거리며 분뢰수의 머리를 찍어왔다. 역습으로 나선 것이다. 한자반에 지나지 않았던 혼암도는 다섯 걸음 사이를 한번에 메꿔버릴 길이로 확대(擴大)되어 있었다. 보고 있던 상관월의 눈빛이 한순간 번쩍였다. 이 공격에 과연 분뢰수가 대항할 수 있을까? 그런 소나기가 퍼붓는 공격을 한 다음에는 동작이 둔해지거 나 균형을 잃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방어가 가능할까? 방어는 없었다. 단지 분뢰수는 그대로 맞받아치는 공격을 해왔다. 사천황의 혼암도는 뒤틀리고 휘어져 허공으로 비켜나고 있 었다. 이런! 강기( 氣)로 된 칼날이 뒤틀려? 어이없는 것은 생각뿐이었고, 사천황의 몸은 그대로 줄어들 듯 하며 분뢰수의 반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하마터면 공중으로 날려질 뻔 한 것이다. 피하는 것이 사천황이 한 전부는 아니었다. 당연히 혼암도가 제 형태를 찾았고 분뢰수의 허리어림을 사 정없이 파고들어갔다. 하나 처음 사천황을 놀라게 한 분뢰수의 신법은 이 공격을 그대로 빗나가게 만들었다. 허공으로 치솟은 분뢰수의 손은 바람개비처럼 돌고 있었다. 휘리리릭! 분뢰수의 몸도 덩달아 돌고 있었다. 표풍휘운(飄風揮雲)에 이은 선풍나운(旋風拿雲)이었다. 사천황의 머리가 움켜쥐일 듯한 거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치켜올려진 혼암도가 순간적으로 별무리를 뿜어내었다. 거기에 휩싸인 듯 분뢰수가 밀려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분뢰수는 이미 허공에서 몸을 바로 잡고 있었다. 사천황은 그 침착한 행동의 다음이 공세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볼 것도 없이 혼암도가 암흑의 장막을 드리우며 사천황을 휘감았다. 그 위로 쏟아진 것은 거대한 질풍이었다. 콰콰콰콰.... 분뢰수의 모습은 아예 흐릿해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거운 질풍이 사천황에게 집중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바람을 맞은 것처럼 바닥이 패여나갔다. 하나 사천황이 펼친 검은 장막은 흩어지지 않았다. 상관월의 눈이 빛났다. 그 검은 장막 안에는 이미 사천황이 없었다. 분뢰수의 질풍 같은공격이 시작된 시점에서 사천황은 지면 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과연... 그 신속함에 감탄하는 순간에 분뢰수의 발아래를 뚫고 한줄 기 검은 광채가 솟구쳐올랐다. 사천황이 자랑하는 지사공(地邪功)이었다. 삼백년 전에 강렬한 장공(掌功)을 자랑하던 자들이 이 괴이 한 사공에 걸려 제대로 겨루어보지도 못하고 뭍하게 죽어갔 다. 철무위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검은 광채가 솟구칠 동안에도 분뢰수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름 속에 머무는 듯 흐릿해 보였으나 검은 광채는 넓게 휩 쓸며 분뢰수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뢰수가 검은 광채에 막 관통당하려는 순간에 지면 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다. 상관월도, 철무위도 이 순간은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보 지 못했다. 당하고 있던 사천황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흐릿한 영상은 그대로 검은 광채에 지워졌다. 대신 그 바로 반걸음 옆쪽에서 꿈틀거리며 뇌전 한가닥이 구렁이처럼 쏟아져내렸다. 반사적으로 환마보가 딛어지며 지사공이 쓰여졌으나 어깨 한쪽이 불덩이 같은 기운에 강타당한 것이다. 사천황의 심중에 가득 분노가 일어났다. 감히 자신을 건드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끼아아아--- 격렬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지며 장내에 폭풍이 움추렸다 터져나가고 있었다. 콰콰쾅! 분뢰수가 있던 자리엔 이제 구멍이 하나 남아 있었다. 지사공을 풀고 지면으로 박차고 나온 사천황은 곧 자신이 구름의 바다에 빠진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착각이 아니었다. 최초의 공격에 받았던 날카로운 구름의 압력 같은 것이 느 껴진 순간에 혼암도가 바람개비처럼 다시 검은 장막을 만들어 갔다. 콰르릉! 폭발이었다. 작은 공간안에서 터진 뇌성벽력은 무서운 폭발이었다. 자신을 가둔 구름의 바다가 한꺼번에 진동한 것이다. 혼암도는 사천황의 진기(眞氣)가 흩어지면서 사라지고 말았 다. 사천황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바로 그 코 앞에 분뢰수가 서 있었다. 화풍렬은 멍청해졌다. 순간적으로 우르르하는 우렛소리가 일어나고는 그 소리가 커졌다 싶은 순간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몇번, 그리고 끝이었 다. 귓전에 들리는 것은 아련한 비명과 몇가지 기성(奇聲)이 섞 인 우렛소리가 전부였다. 눈으로 본 것은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꿀꺽. 누구의 목젖을 타고 침이 넘어갔는지 화풍렬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눈 앞에는 걸레가 된 사천황이 비척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그 옆은 무슨 짓을 했는지 푹 파인 구멍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화풍렬은 슬쩍 전음으 로 물었다. 운고! 뭐냐? 어떻게 된거야? 운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제대로 본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흑마왕과 백마신의 표정을 보니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천황의 목에서 꾸르륵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몸의 핏줄은 분뢰수의 운해경동(雲海驚動)에 다 터졌고 진기는 가닥가닥 흩어져 버렸다. 하나 사천황은 아직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꿈틀거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들어올려 분뢰수의 허를 찌르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분뢰수의 눈이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며 사천황은 자신의 최후비기(最後秘技)가 완성된 것에 기뻐할 수 있었다. 크크크... 괴기스런 웃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분뢰수의 마지막 절초가 터져나왔다. 하얀 번개의 연속타(連續打)였다. 치리리릿! 처음에는 배에서 시작해서 사천황을 들어올렸고, 머리를 그 대로 넘어가서 뒤로 떨어질 때까지 하얀 번개는 하얀 무지개 를 만들었다. 사천황의 몸은 완전히 짓이겨진 상태에서 그대로 분뢰수의 등뒤로 떨어져 내렸다. 패대기질 쳐진 것이다. 기우뚱하던 분뢰수의 발이 사천황의 머리를 밟았다. 으석! 깨어졌다. 위험하다! 비켜서! 고함은 흑마왕과 백마신에게서 터져나왔다. 철무위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덩달 아 소리쳤다. 어서 피하시오! 말종은 스물거리며 일어나는 안개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연기일지도 몰랐다. 머리까지 박살난 사천황의 누더기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잿 빛의 안개는 그물처럼 분뢰수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게 잔해(殘骸)가 아니라 본체(本體)라는 생각이 든 까닭 을 말종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했다. 분뢰수와 싸우던 자는 그 몸이 완전히 박살난 지금 계속 싸 우고 있었다. 그것은 시커먼 구멍 속에 빛이 반짝이던 그 두 자루의 칼보 다 더욱 위험한 것이 틀림없었다. 분뢰수는 아예 피할 마음이 없는지 그 자리에 여전히 그대 로 서 있을 뿐이었다. 피, 피해요! 어서! 말종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음 속으로 다급히 외칠 수밖 에 없었다. 말종은 마음 속으로 외쳤으나 흑마왕이나 백마신은 달려들 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사천황이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시도하는지 알 아 볼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마교에서 무수히 시도되었던 전설의 사술, 이혼겁백(移魂劫魄)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시전되고 있었으니 못알아 볼 리가 없었다. - 혼(魂)을 옮겨 육신(肉身)을 빼앗는다. 재수가 없으면 그 육신에 깃든 힘도 빼앗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흑마왕이고 백 마신이고 재미있는 꼴은 못볼 것이다. 철무위도 몸을 날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상관월의 손이 철무위를 견제하고 있었다. 뛰쳐나간다면 철무위는 순식간에 상관월에게 쓰러질 것이 다. 상관월은 다른 일에 빠진 철무위를 충분히 격살할 수 있을 것이다. 백마신은 미소가 지워진 적마승을 보고 섰다. 흑마왕도 넉넉한 태도 대신에 음침한 눈빛이 스물거리는 청 마군의 군왕도가 까닥거리는 것을 보고 섰다. 귀기(鬼氣)가 그들에게서 춤추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과 동문이었던 백마신과 흑마 왕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들을 지배해서 자신들을 막으려하는 것이었다. 대신 운고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철무위의 반월도를 뽑아들 었다. 하나 운고는 갑자기 허공에서 무엇인가에 걸린 듯 보였고 다음 순간에 반월도는 그저 공중에다가 용의 비늘 같은 광채 만 남기고 말았다. 운고는 오히려 더 뒤로 튕겨지며 경악하고 있었다. 허공에 그물처럼 퍼진 괴이한 경력(勁力)이 무엇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자욱했던 귀기가 실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을 막아섰다는 것 에 운고는 더욱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곁에 있던 가루라가 떨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운고를 황당 하게 만들었다. 마, 마라왕(魔羅王)이야... 저걸 할 수 있는 것은 전설의 마라왕뿐이야... 천축의 전설에 등장하는 무서운 마왕 중의 마왕이 마라왕이 었다. 가루라는 사천황을 마라왕으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 * * <우선 이 놈을 죽이고...> 2 상관월은 언제나의 기품이 넘치고 남는 미소를 지었다. 싱거운 싸움이었다. 사천황이 저 이혼겁백을 완성시킨 것이 일년 전이었다. 당시 그는 그것을 자신의 최후비기라 부르며 자신만만해 했 었다. 누구든지 이길 수 있노라고... 자신은 이것으로 불패(不敗)의 경지를 이루었노라고... 그러나 상관월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그렇게 불패의 상황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대는 절대무적(絶對無敵) 이 진정 존재할 수 있음 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다시 겨루게 된다면 상관월은 그 절대무적 을 능가할 수 있어야 승산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천황을 만류했다. 자신이 연성하고 있는 절기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 고... 그것이 완성된 것이 닷새 전이었다. 사천황은 지금 그대로 분뢰수에게 엉겨붙어 있었다. 이대로 잠시면 분뢰수라는 자는 사라지고 그 육신을 사천황 이 사용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육신이란 빈껍데기이니 당연한 일이다. 새삼 천금장 주노야가 아까워지기까지 했다. 당시 연성중인 절기가 미완성인 때문에 상관월은 그를 죽여 흔적을 없애야 했다. 분수를 모르는 시왕에게 낙백산의 제조법을 가르쳐주었고 미절사(尾絶蛇)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벌을 내린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상관월 자신이 너무 상대를 과대평가하여 수족을 잘 랐다는 말을 들어야 한 일이었다. 사천황은 지금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끝났군. 조용히 미소하며 상관월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직 아니야. 철무위는 갑자기 상관월의 동작이 끊어지고 얼굴이 경지되 는 것을 깨달았고, 그 순간에 내딛으려 하였다. 혼원태극수가 아니라 청허신수만으로도 저렇게 엉겨붙은 사 기(邪氣)의 덩어리에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무위의 동작도 그대로 멈추어졌다. 분뢰수의 온몸을 휘감았던 잿빛 안개. 그 안개가 밀려나고 있었다. 사천황이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백마신은 적마승의 얼굴에 절반가량 미소가 되돌아오는 것 을 보았다. 흑마왕을 보니 그쪽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귀기가 걷히고 있었다. 분뢰수의 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풍렬이 중얼거렸다. 때가 많으면 귀신도 쫓아낸다는 건가? 그 말에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운고는 일리가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분뢰수의 옷자락에 언제나 절어 있던 누렇게 배인 때자욱들 이 허공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옷의 원래 바탕인 듯한 흰 빛이 환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 얼굴을 가린 백포에서 손을 감싼 곳까지 온몸이 빛나는 것이다. 잿빛 안개는 허공에 튀어나온 때자욱에 밀려나고 있었다. 기이아아-- 괴상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뇌리에 들여오고 있었다. 잿빛 안개가 엉겨서 박살난 사천황의 머리를 다시 만들었 다. 만들어진 머리에서 입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 분뢰수의 머리 를 물려고 들었다. 그러나 춤추는 머리카락은 둘둘 말아놓은 얼굴의 백포에서 솟구친 검은 고리 같은 때에 보호를 받고 있었다. 때자욱들은 차츰 검은 띠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그 띠에 닿을 때마다 잿빛의 안개는 조금씩 으스러져 사라 지고 있었다. 끼이이이이... 마지막 몸부림처럼 소용돌이 치며 덮치던 잿빛 안개는 최후 의 비명 같은 울부짖음만을 뇌리에 새겨놓고 완전히 이 검은 띠에 먹히듯이 지워져 버렸다. 사천황은 완벽하게 없어진 것이다. 육신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도... 그리고 환하게 빛나던 분뢰수도 원래처럼 되돌아갔다. 누렇게 낀 때가 그의 옷자락을 가득 수놓았다. 저거 때 맞냐? 화풍렬이 운고에게 물었지만 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인상만 쓰고 있었다. 상관월은 조용히 자신을 보고 있는 분뢰수를 보았다. 결국은 그 자신이 옳았다. 상대는 이혼겁백이 통하지 않는 자이다. 때문에 자신은 그 최후의 절기를 완성해야만 했다. 그동안 습격받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섭혼루 휘하 최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미절사는 잠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설욕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정좌하고 있던 다리를 풀고 상관월은 일어섰다. 그때 그에게 똑똑히 들려온 말. 대화를 좀 할까? 화풍렬은 운고보다 더 심하게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대화? 사람 같은 놈하고 하는 것이지 저런 놈하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봐! 화풍렬이 벌컥 소리부터 질렀다. 그 놈하고 대화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대화야! 집어치워! 그 놈은 무슨 말이든 쓸모있는 말따위는 않는 놈이라고! 꽥꽥대는 화풍렬의 말에 상관월은 웃어보였다. 그리고 분뢰수에게 말했다. 저 말은 대체로 옳은 말이지. 우리가 할 대화란 것은 쓸모 있는 것이 없을 거야. 넌 내가 누군지 안다고 했지? 그럼 쓸모있는 대화가 이루 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분뢰수의 말투는 강경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백마신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부터 해대고 있는 분뢰 수를 어이없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싸우기로 작정한 상대가 이쪽의 위협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과연 상관월은 냉랭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누군지 알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없는 것이다. 흥! 아는게 없으니까 뒤로 빼는거다! 저런 놈이라고! 저놈 은! 화풍렬이 야유를 보냈다. 상관월은 거기에 응답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더 심하게 야유를 보내려던 화풍렬의 입이 딱 굳어졌다. 그리고 곧 경악성이 새어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그, 그 검(劍)은? 맑은 기운이 뚜껑이 날아가버린 귀역의 광장을 가득 메웠 다. 방금 전까지 가득차 있던 귀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가고 말 았다. 운령이 가지고 있는 조마파사(照魔破邪)의 기보로도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철무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혀 그 자세에는 흐트러짐도 없었고 방심도 하지 않았다. 많이 컸구나... 상관월은 감회가 어린 음성을 흘렸다. 이년 전에는 자신의 이와 같은 기세를 보고 철무위는 방심 했었다. 그래서 단번에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운고가 기가 막힌 듯 소리쳤다. 왕자검(王者劍)을 손에 넣었다니... 화풍렬은 아예 입을 봉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장내에서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상관월이 손에 든 검과 운령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보석 들만이 장내에 유유히 그 존재를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 맑고 부드러운 기운. 세상의 사악함을 씻어내주는 그 기운은 두개의 기보에서 끊 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혈신정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연기도 검이 출현한 이후로는 멎어버렸다. 가루라는 그제서야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귀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한동안 입을 봉하고 있던 화풍렬이 겨우 입을 열었다. 네놈... 그 물건을 어떻게 찾았느냐? 상관월은 웃었다. 화장로께선 당연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화풍렬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한층 더 깊은 주름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네놈! 네놈은 이미 구천회를 이용해 섭혼루를 만들었다! 구천회 조사(祖師)들 앞에 그 죄를 씻을 길이 없는 놈이 전혀 뉘우칠 생각은 않고 다시 그 장보(藏寶)에 손을 댔단 말이 냐? 격한 분노에 휩싸인 화풍렬은 전신을 부들거리고 떨었다. 이 말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것은 흑마왕과 백마신이었다. 군림신병(君臨神兵) 왕자검(王者劍)! 보통 왕자군림검(王者君臨劍)으로 일컬어지는 저 무서운 신 병(神兵)이 여태껏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구천회가 소장한 때 문이라니!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구천회의 힘은 더욱 깊고 막강하다 는 사실이 충격을 던진 것이었다. 하하하! 상관월은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크게 메아리쳐졌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맑은 웃음소리였다. 귀기에서 풀려난 듣고서 유봉월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자가 섭혼루를 만들어 그 마겁(魔劫)을 일으킨 사악 한 자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웃음을 거두며 상관월은 분뢰수를 보았다. 쓸모있는 이야기도 하나 쯤 있겠군. 자네 구천회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바보스런 조직인지 알고있나? 분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월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왕자군림검을 손에 쥔 그의 말을 가로막을 자는 없어 보였 다. 천하최강(天下最强)이란 수식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 큼 막강한 조직이지.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지 아나? 기껏해 야 강호에서 포악하게 구는 하찮은 놈들을 징계하는 게 전부 야.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사는데 그들 눈에는 오직 강호만 이 보인다는 거지. 자네라면 내가 구천회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겠지. 한마디로 정신나간 노인네들의 친목회지. 저 화장 로를 보게. 구천회의 대장로(大長老)라 할 수 있는 공동파의 요심대사가 살아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네. 상관월의 눈 속에 짙은 노여움이 떠올랐다. 천하창생(天下蒼生)을 말로만 위하면 무얼하나?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 쓰지도 않고서 모조리 비밀투성이로 만들고 말로 만 천하창생을 위한다고? 화풍렬의 입가에 쌀쌀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죽어 망령이 되어 썩은 놈을 도로 끌어내었냐? 그렇지. 전혀 천하창생하고 인연이 없는 저 놈들도 살려내 었지. 흑마왕이 중얼중얼 화풍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백마신은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직 합작은 계속이었다. 굳이 따로놀면서 벼락을 골라 맞을 필요는 없는 법이다. 상관월은 한번 쓰윽 적마승과 청마군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실험이었소. 적마승은 파랗게 드러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이제 우리는 약속을 지킨 것 같은데... 그쪽은? 상관월은 품 속에서 작은 병을 둘 꺼내 하나씩 던져주었다. 백마신은 막아보려고 했으나 순간적으로 몸을 휘어감는 매 서운 검기(劍氣)에 굳어지고 말았다. 병을 받아든 둘은 날렵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흑마왕이 수염을 꿈지럭거렸지만 그도 역시 검기에 눌려 꿈 쩍할 수가 없었다. 상관월이 웃고 있었다. 나에게 약속을 잘지키라고 그렇게 잘 가르친 분은 화장로 인 것 같은데... 내가 틀렸소? 화풍렬은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뭐야? 이년 전 난 확실히 죽었소. 심장이 터지고 버려졌으니 살 았다고 할 수 없었지. 하나 나는 뚜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 었소. 아시겠소? 화풍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일월광명신공(日月光明神功)을 대성한 때문 임을 알 수 있었다. 천상의 신병, 일월륜(日月輪). 바로 그것의 힘이 되는 놀라운 신공절학(神功絶學)을 상관 월은 서른이 되기 전에 대성했었다. 구천회에서도 손꼽히는 천재(天才)가 바로 상관월이었다. 그 천재성으로 인해 상관월은 은퇴한 강호기인이어야 한다 는 구천회의 불문율을 깨고 십세에 구천회에 입회하게 된 것 이다. 그때 환혼노인이 내게 왔소. 그는 내게 한가지 약속을 하 면 살려주겠다 하더군. 갑자기 분뢰수의 눈빛이 한번 반짝였다. 상관월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 이었다. 환혼노인의 염원에 내가 협조하기로 해서 난 되살아났소. 염원? 그게 사천황이라도 살리자는 거였냐? 화풍렬은 되는대로 뱉어냈다. 그냥 듣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요. 원래 그는 사천황의 사손(師孫)이었소. 그의 사 문은 그것만을 목표로 세워진 것이었으니 그의 이백년 삶의 목표도 그것일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난 사천황이 죽어도 관여하지 않은 것이지만. 이 말에 화풍렬은 물론 철무위마저도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 다. 그러나 상관월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왕자군림검을 손에 든 그가 사천황에게 진다고 생각하는 사 람은 없었다. 오히려 몇 명의 사천황을 상대할 수 있을까가 관심의 대상 일 수 있었다. 알겠나? 내가 왜 널 협공하지 않았는지? 몰라. 분뢰수는 딱 잘라 대답했다. * * * <이자가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3 상관월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자넨 언제나 전혀 타협을 하지않지. 오직 자신이 마음먹은대로 밀어붙이기만 하고... 잠깐 상관월은 깊은 감회가 어린 눈으로 분뢰수를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검에 맑은 기운이 겹겹이 둘러쳐졌다. 어차피 사천황은 쓰러져야 할 자이지. 다만 내가 손대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일이라 그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래서 너의 손을 빌린 것이다. 상관월의 말이 차츰 냉기를 담아갔다. 분뢰수는 칙칙하게 물든 눈빛으로 묵묵히 상관월을 보았다. 그에게 의문은 오직 한가지였다. 날 잘 아는가...? 왕자군림검이 분뢰수를 향했다. 누구도 얼굴에 이런 상처를 주고 가슴에 구멍을 내 심장을 박살낸 자를 잊지는 못하는 법이지. 설혹 그 가 얼굴을 가리 고 자신의 능력을 속이더라도. * * * <이자가 말하는 것이 정말 나인가?> * * * 안개가 사라진 귀역으로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귀역이라 불리울 곳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대신 귀역의 한복판에서는 기이하게 맑고 깨끗한 기 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검이 군림신병인 까닭은 그 안에 숨겨진 십절천검(十絶 天劍)의 절학때문이다. 이건 능히 네가 가진 지존신병(至尊神 兵)을 꺽을 수 있다! 삼엄하게 일어나는 검기가 하늘을 찔렀다.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하듯 보던 분뢰수가 말했다. 난 그런 것 없다. 상관월이 차갑게 웃었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 검기가 그대로 분뢰수에게로 쏟아졌다. 분뢰수의 몸이 그대로 번개처럼 움직였다. 십전(十全)! 기합성이 터지면서 한순간에 분뢰수는 그대로 검기를 뒤집 어 쓰고 있었다. 아무도 이 싸움에 끼여들 엄두를 못내었다. 상관월의 검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철무위는 당장 혼원태극수를 펼치려고 했다. 하나 뒤엉켜 돌아가는 분뢰수의 신법은 너무도 빨랐고, 왕 자검의 견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큰일이다! 분뢰수가 그 이건 아니건 철무위는 일단 그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지금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노래하 고 있었다. 구궁(九宮)! 검기가 세력을 이루며 사방으로 휘몰아쳐갔다. 분뢰수는 용케도 그 쏟아져 붓는 검기를 피한 것일까? 쳐다보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일행은 분분히 물러설 수밖 에 없었다. 운고는 구룡도(九龍刀)를 전개해 검기의 여파를 막아내며 운령을 끌어당겼다. 상관월의 검세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끼여들지 않으면 그도 관심없다는 것이었다. 화풍렬도 비환을 펼칠 기회를 노리고 있으나 그저 손에 금 환 두개를 들고 발만 구를 뿐이었다. 같냐? 다르냐? 백마신은 처음부터 멀찍이 물러서서 이 말만 중얼거리고 있 었다. 흑마왕도 눈을 부릅뜬 채로 유심히 분뢰수만을 쳐다보고 있 었다. 그들은 만사통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분뢰수? 아니 그런 이름을 쓴 녀석이 하나 둘입니까? 손 좀 빠른 녀석들은 끽하면 갖다 붙이는 이름이 무슨 섬전수(閃 電手)에 뇌전수(雷電手)가 아닙니까? 장력이 좀 세서 돌이라 도 좀 깬다하면 무슨 쇄옥수(碎玉手), 발좀 빠르면 무영(無 影)이니 귀영(鬼影)이니... 한두번 있는 녀석들이 아니잖습니 까? - 불패의 분뢰수라고요? 그런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래 도 분뢰수란 이름으로 날리던 사람이라면 백팔십년인가? 이백 년인가 전의 섬전무영(閃電無影) 독고대협(獨孤大俠)이 쓰던 분뢰십팔수(奔雷十八手)가 있겠지요. 그런데 그거야... 두 분 도 상대할만 할걸요... - 굳이 무공수법에서 신분을 알아내시려면... 죽어라고 쫓 아다니면서 보법(步法)을 캐는 수밖에 없지요. 아시잖아요? 두 분이 섬기는 그분 의 신법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아 무리 그분 이라도 그것까지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할 겁니다. 어떤 무인(武人)도 보법까지 다 숨기지는 못하잖아요? 만 약... 그것까지 감춘다면 포기해야지요. 어떻게 찾아냅니까? 그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나 기다리는 수밖에 ... 마지막 말에 둘은 만사통을 죽지 않을 만큼 패놓고 왔다. 만사통이 그분 의 정보통만 아니었어도 그 자리에서 죽였 을 것을... 결국 보법을 캐는 수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둘은 욕을 했다. 빌어먹을! 포기야! 아예 발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분뢰수의 섬전영(閃電影)은 팔의 움직임에 다리를 떠맡기는 것이었다. 마치 물속을 날아가는 새와 같았다. 다리는 물살에 맡기고 움직이는 것은 날개뿐이었다. 따로이 보법이 존재하지를 않는 것이다. 육합(六合)! 이미 팔극(八極)과 칠진(七眞)의 두 식이 넘어가 있었다. 그 때마다 소용돌이치듯 벼락이 내리뻗듯 상관월이 휘두르 는 왕자검은 분뢰수를 사로잡으려 들었다. 스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바위가 쪼개지는 검에 사로잡혔을 때의 결과는 누구나 잘아는 토막난 조각이었다. 하나 분뢰수는 아직 여전히 피하고만 있었다. 그로인해 끼여들지도 못하고 구경만 해야하는 화풍렬은 속 이 탔다.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라고 말하려 철무위에게 고개를 돌리 니 의외로 철무위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인 아닌가? 야! 너 정말 아직도 저 물건을 사부라 생각하는거 아냐? 운고가 철무위를 걷어차려 내닫는 화풍렬을 붙들고 조용하 게 말했다. 진정하고 보세요.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 말에 화풍렬은 다시 분뢰수를 보았다. 운고의 말이 맞았다. 분뢰수는 상관월과 십여 걸음 떨어져 있었다. 격전의 시작무렵에는 그 두배나 떨어져 있던 거리였다. 피하는 동작이 아니라 소용돌이의 나선(螺旋)을 따라 접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저러지? 아까처럼 그냥 한방에... 철무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어가 너무 두텁습니다. 대공, 절대 끼여들지 마세요! 다짐까지 받으려는 철무위의 말에 화풍렬은 그저 금환을 움 켜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자세히 보면 볼수록 상관월의 검법은 특이했다. 공격적으로 보이나 실은 철저한 방어에 검의 위력을 비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왕자검이 어지간한 쇳덩이는 그저 대기만 해도 알아 서 쪼개져 주는 보검(寶劍)이란 점이었다. 상대가 분뢰수 하나가 아니라 여기 있는 자 모두라도 달라 질 상황이 아닌 것이다. 셋째형, 형제들을 불러볼까요? 운고의 말이 떨어지자 철무위는 그대로 긴 휘파람 소리를 터뜨렸다. 있는 힘을 다한 철무위의 휘파람 소리에 유봉월의 간이 콩 알만해졌다. 하늘을 찌르는 기세가 실려 있었다. 으... 좀 살살 불어! 그래도 다들 알아들을 거 아냐! 화풍렬이 곁에 있다가 귀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그런 화풍렬의 귀로 더 엄청난 기합성이 흘러들어왔다. 오행(五行)! 천도(天道)! 그리고 상관월의 손에 들린 왕자검이 눈부신 광채를 뿌려대 기 시작했다. 철무위는 그 순간에 이젠 정말 누구도 틈을 볼 수 없는 검 법이 등장한 것을 보았다. 검기성강(劍氣成 )! 별빛처럼 빛을 뿌려대는 검은 굳이 왕자검이 아니라도 다들 피하고 보는 것이다. 그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 이미 최상승공력(最上乘功力)을 지녔으니 손에 뭘 들어도 마찬가지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대와 실력이 백지한장 차이로 미세할 때는 가지고 있는 병기의 우열은 생사(生死)를 가르는 분기점(分岐點)이나 다름없었다. 어? 저자식이! 미쳤어! 운고 저 녀석 좀 어떻게 해야겠 다! 말과 함께 화풍렬의 금환이 날았다. 운고도 즉각 반월도를 뽑아들고 구룡도를 펼치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일어섰다가는 눈먼 검기에 맞고 도움을 청해야 할 판이었 다. 가루라는 사문의 기보를 반드시 지켜야 했다. 잃어버리면 찾아와야 하고 자신의 생명을 걸어서라도 지켜 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보인 대혈신정이 차가운 돌바닥에서 단지 무시 무시한 절대고수가 쏟아내는 힘의 여파에 부서질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 꼴을 보려고 이역만리 신조를 타고 온 가루라가 아니었 다. 분뢰수가 자신을 도와준다고 한 말은 틀림없었다. 도저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곳까지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 이고 마라왕으로 보였던 그런 괴물을 꺽지도 못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이었다. 그래서 가루라는 배를 땅바닥에 쭉 깔고 바닥을 기어 대혈 신정에 가까이 간 것이다. 상관월은 분뢰수의 섬전영이 얼마나 빠른지 잘 알고 있었 다. 사천황의 환마보마저도 그에 비하면 느림보였다. 지사공의 괴이함도 넉넉히 감상하고 피해낼 수 있는 가공스 럽고 경이로운 신법이었다. 때문에 사방을 감지하고 오직 십절천검에 의지해서 싸우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리고 그때문에 가루라의 동작도 일찍 알고 있었다. 아직은 대혈신정이 그에게 필요했다. 그 안에는 심혈을 기울여 제련한 마병(魔兵)이 있었다. 그걸 통째로 저 얼간이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왕자군림검에는 없는 살기를 지닌 마병이 그가 해야할 일에 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상관월은 그대로 사상(四象)의 외침을 토해내었다. 그 중 한가닥의 검기가 빗나간 듯 정확하게 가루라를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상관월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기회를 얻었다. 분뢰수가 그 검기를 막아선 것이다. 삼재(三才)! 한순간 전세가 뒤집어지는 것을 보고 흑마왕이 눈을 동그랗 게 뜨고 가루라를 보았다. 백마신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눈살이 찌푸려들었다. 과연 그분 이 저런 놈을 구하기 위해 상대에게 목숨을 담 보로 내걸 것인가? 아니었나? 기대에 따라 큰 실망감이 둘을 감쌌다. 순간적으로 얻은 기회는 절호의 기회로 이어졌다. 분뢰수의 손을 감싼 흰 천이 갈라졌다. 얼굴을 가린 백포도 베어져 나풀거렸다. 앗! 말종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능력이 도저히 닿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 찾아온 정적을 통 해서 말종은 마라도에 끄덕도 없는 분뢰수의 백포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렁찬 기합이 다시 울리며 그 날카로운 검은 분뢰수의 심장을 향해 예리한 기운을 토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콱! 경쾌한 음향을 통해 무엇인가 관통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것이 검객이었다. 상관월은 분명하게 느꼈다. 자신의 오른쪽 뒤로 돌아가는 분뢰수를 분명히 찔렀다. 그러나 이 경우는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상관월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왕자검이 이런 소리를 낼 턱이 없는 것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상관월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과연 그 소리는 관통한 소리가 아니라 붙들린 소리였다. 아직도 검강(劍 )을 발하는 군림신병 왕자검이 그 본연의 날카로움도 검강의 위력도 무시당한 채로 분뢰수의 왼손에 잡 혀 있었다. 그 빛에 스쳐도 혼백이 으스러질 검강인데... 분뢰수는 가볍게 붙잡은 검인(劍刃)을 밀어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언제나 손가락 가운데 엄지만 빼고 감겨있던 손이다. 그러나 지금 분뢰수는 다섯 손가락을 꼼지락 거릴 수 있었 다. 손가락도 둘둘 말려 있어 맨손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것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칼날에 스친 얼굴의 백포가 찢겨져 나풀대고 있었다. 아직도 그 아래에 한겹의 백포가 더 있는 것은 손과 마찬가 지였다. 그러나 분뢰수의 눈빛은 이미 상관월의 손에 들린 검을 바 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강렬한 탐욕이 번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 * * <벗을 수 있다! 저자가 날 몰라도 이걸 벗을 수 있다!> * * * 멀리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둘이 아니고 넷 정도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긴 소리도 둘이나 이어지고 있었 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월과 분뢰수의 대결에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이미 십절천검의 팔절(八絶)을 구사한 상관월에게 남은 것 은 단 이절(二絶)뿐이었다. 음양(陰陽)과 태극(太極). 그리고 상관월 자신의 십절천공(十絶天功)의 깊이가 승패를 가를 것이었다. 기(氣)를 모으고 호흡을 가다듬는 절세고수의 기세는 방원 십장을 뒤덮었다. 그리고 곧 오장으로 압축되었다. 그 다음에는 단 일장으로 축소되었다. 상관월은 그저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눈마저 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격에 걸어볼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승산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 분뢰수란 가면을 쓰고 있는 그 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분뢰수는 움직여지는 왼손 다섯 손가락을 꿈지럭거리고 있 었다. 굴레가 벗겨져 얻은 것... 그것은 이제 막 맛보는 자유였다. 저 검은 더 많은 자유를 그에게 줄 수 있었다. 격돌(激突)! 음양에 이어지는 태극은 그것만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 다. 주변에서는 검세에 휘말린 분뢰수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이 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일그러진 사이로 한가닥의 굵고 하얀 번개와 다 섯가닥의 작고 가는 번개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예상한 것보다 더 정교하고 섬세하며 빠른 반격에 상관월은 남은 힘을 바닥까지 샅샅이 끌어올렸다. 마치 자신의 공격을 미리 알고 막고 역습을 해오는 듯한 상 황이었다. 상관월은 마침내 이대로는 자신이 먼저 지쳐 파탄을 보이게 되리란 점을 깨달았다. 정말 무력(武力)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었다. 이년 전에도 지금도! 그러나 그 대단한 적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상관월의 손에 들린 왕자검이 순식간에 거대한 검기를 토하 며 분뢰수를 쓸어왔다. 철무위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곧 그것은 경악으로 바뀌 었다. 그리고 운령이 가느다란 비명을 올렸다. 상관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분명한 것이다. 대혈신정을 꼭 부둥켜 안고 엎어진 채로 꼼짝도 하지 않으 려는 가루라를 질질 끌고 나온 운고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화풍렬의 입에서 비겁한 자식이라는 욕이 터지는 것 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 * * 삼재와 음양의 검기로 후방을 차단한 채로 그대로 태극의 검강을 밀어낸다. 놈은 반드시 앞으로 전진해서 승리를 얻으 려 할 것이다. 그때 태극의 검강이라면 충분히 놈을 두쪽 낼 수 있다. * * * 상관월은 평생 단 한번 자신의 생각이 빗나간 것을 경험했 다. 이년전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 그는 죽었었다. 환혼노인 같은 괴인이 없었다면 그는 한번의 실수로 영원히 끝장났을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가 있을 수 없었다. 십절천검에도 실수할 여지가 없었다. 삼재의 검기가 정면이 아닌 후방을 덮치듯이 쏘아지자 분뢰 수는 역시 앞으로 전진했다. 음양의 검기가 쏟아져 후방을 휘어감자 기대한 대로 분뢰수 는 앞으로 다시 나왔다. 이제 그와 분뢰수의 거리는 손이 닿을 거리였다. 완벽하게 상대방을 근접거리로 끌어당긴 것이다. 상관월의 입가에 가득 승리의 웃음이 실렸고 그의 손에 들 린 왕자검은 무서운 검강을 일으켜 방원 삼장을 초토화 시켜 버렸다. 왕자군림검이 제 위력을 발휘한다면 그 파괴력이 얼마나 멀 리 미칠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험해 본 사람이 없는 때문이었다. 상관월도 그것은 시험해 보지 않았다. 대신 상관월은 자신이 응축시킨 검강이 근접거리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수십번 정교하게 시험해 보았다. 아무 것도 그가 발휘하는 태극의 검강에서 견딜 수 없었다. 그 라도 마찬가지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상관월은 자신의 가슴에 틀어박히는 무형의 강기를 느끼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으익?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화풍렬은 당황했다. 철무위도 운령도 돌아서 본 운고도 자신들이 본 것을 분명 하게 알고 있었다. 상황은 분명했다.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검강이 응축되어 작열(灼熱)한 순간 에 분뢰수는 그냥 뒤로 뛰었다. 그의 섬전영이라 칭해지는 동작은 눈부시게 빨라 그것은 누 가 보아도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 뛰는 동작에 놀란 상관월이 안색이 하얗게 변해 보고만 있을 때 하얀 번개로 보이는 그의 손이 자신의 가슴언저리에서 원호(圓弧)를 그리고 내가강기(內家 氣)를 쏟아낸 것도 당연한 무학의 도리였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백마신과 흑마왕마저도 멍청해질 정도 로 뜻밖의 일이었다. 겨우 백마신이 나직하게 한마디했다. 아니었나? 상관월은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당연하게 여기었던 생각이었 다. 그 생각을 바탕으로 그의 모든 분뢰수 타도 계획은 이루어 졌었다. 지금 이 대결의 마지막도 그 결과 이루어진 공격이였다. 만일 그 전제가 틀린 것이라면? 그 와 분뢰수가 동일인이라는 그 전제가 틀린 것이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패배란 결과가... 너... 누구지...?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마지막 일격은 확실했다. 상관월은 자신이 소생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새 삼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환혼노인도 없었고 사천황도 없었다. 그들의 연구결과는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었다. 그 와 버금가는, 절대무적의 지존(至尊)으로 불리우는 그 와 버금가는 이 녀석은 도대체 누구지? 대답은 힘있고 간단명료했다. 곧 알게 되겠지! 第 二十七 章 離 別 세상일이란 열에 한가지나 자신이 의도한대로 되는 것일 까? 난 잘 모르겠다. 아마 분뢰수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때 그 왕자검에 그토록 미련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의 이별(離別)이후로 난 많은 것을 보았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처럼 신기하고 이상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섭혼루주였다는 자가 죽었을 때 왕자검은 이상한 변화를 보 였다. 그자의 요대(腰帶)가 저절로 풀려지고 또 보기 싫은 자 광(紫光)을 일으키며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이상한 형체로 변했다. 난 그걸 똑똑히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운소저 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똑똑히 느껴졌 다. 당시 내 능력으로 볼 수 없었던 분뢰수의 모든 동작을 난 정말 분명하고 똑똑하게 알 수 있었다. 우습게도 정작 운소저는 다 못보았다고 했지만... 그 왕자검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쌍마(雙魔)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왕자검의 본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화노인의 말에 의하면 그 끝이 세갈래로 갈라진... 아마 삼 첨양인도(三尖兩刃刀)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칼날이 시작 되는 부분에 보라빛 불꽃이 아롱거리는 그 저주혈마도(咀呪血 魔刀)가 왕자검의 평소 모습이란 것이다. 워낙에 위험한 물건이라 아무도 못쓰게 구천회에서 숨겨놓 은 것을 섭혼루주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말은 숨겨놓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틀림없이 어딘 가에 버려두었던 것이 분명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요기(妖氣)로 물들이는 그따위 요상스 런 칼을 구천회가 지켰을까? 터무니 없지... 차라리 천길 낭떠러지나 대막(大漠) 모래바람 속에 밀어넣 고 말겠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 왕자검의 실체에 실망하고 분노한 것 은 역시 분뢰수였다. 아마 화노인의 말을 듣고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뭐라나... 자신을 알고 완전히 극복한 자만이 왕자검을 드 러나게 한다나? 분뢰수는 화를 내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얀 눈자 위가 번쩍거리는 모습이 누구든 걸리면 그 자리에서 작살낼 태도가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를 되도록 서둘러 떠났다. 그 바람에 난 구룡의 넷을 먼발치에서 보고 만족해야 했다. 아, 천하오패의 검왕(劍王) 모용두(慕容斗)와 도왕(盜王) 도천성(都天星)도 보기는 봤다. 허깨비처럼 껑충거려서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을 못해서 그 렇지... 하지만 우리는 떠나면서도 그 왕자검의 본래 모습이란 저주 혈마도를 가지고 있었다. 분뢰수는 그걸 어떻게든 써볼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백포를 벗겨내려고 했던 것이다. 한 두어달 지나고 나서야 포기했는지 그저 쳐다보고만 있게 되었지만 기대는 나도 했었다. 마라도에도 전혀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그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백포가 썩썩 잘려져 나가는 검을 그대로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라도는 결국 우리가 가졌다. 가루라를... 자처한, 사실은 그는 진짜 가루라였다고 한 다... 그는 오로지 대혈신정만 부둥켜 안고 신조에 올랐다. 마지막에 그는 우리를 보고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아마 천축 어 였던 모양이다. 못알아들었지만 금방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성질 급한 화노인이 운소저의 오빠 목을 팔뚝으로 휘어감고 는 이렇게 말하자 운소저의 오빠가 알려준 것이다. 너 치사하게 굴다가 죽을래? 가르쳐 주고 살래? 화노인의 행동은 정말 유치했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으면 운 소저의 오빠는 그대로 달아났을 것이다. 화노인은 원래 그런 면에서 한번 사람을 볶아대기 시작하며 끝이 없는 성격이라고 했다. 게다가 구룡은 섭혼루가 구천회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고 구 천회와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지냈다고 했다. 그 바람에 평소 구룡과 유난히 가까이 지냈던 화노인은 이 년여 간을 재미 하나도 없이 보낸 것 때문에 그들을 보면 어 떻게든 볶아보려고 벼르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직접 화노인에게 들은 말이니 거짓말이라면 쫓아가서 따질 수밖에 ... 화노인의 정정함은 정말 대단하다. 그는 이십여년이 흐른 지금도 귀역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 이다. 가끔 내가 그에게 제이(第二)의 요심대사를 보는 것 같다고 하면 화노인은 그자리에서 뒤로 벌렁 누으며 끔찍해를 연발한 다. 하지만 실제로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그가 강호에 신출내기로 나왔을 때도 요심대사 는 그 모습이었고, 자신이 얼굴에 주름이 생겨서 쭈그렁바가 지가 된 이후에도 그 모습이라 어이없다는 이야기는 늘 듣게 되고 만다. 그러나 화노인이 틈만 나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요심대사 가 아니었다면 아마 미절사는 아직도 섭혼루주를 기다리고 있 었을 것이다. 화노인 말에 의하면 그건 요심대사가 순전히 자기 문파를 위해서 한 일이 어쩌다가 우연히 천하의 공익에 합치된 것이 라는데 그 말이 오히려 믿기지 않는 것은 왜일까? 하도 화노인과 농담을 많이 주고 받아서 일까? 어쩐지 나도 요새는 그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화노인은 내가 가루라의 말대로 안돼어서 좋다지만 난 내가 분뢰수와 멀어지는 것 같아 싫다. 가루라는 분뢰수를 마라왕으로 생각했다. 마라왕이 아니고서는 그런 무시무시한 능력이 있을 턱이 없 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마라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운소저의 오빠가 해준 말에 의하면 그가 떠나기 전에 한 말 은, 분뢰수, 그대는 마라도의 정당한 주인이다... 그대가 마라 왕이니까... 글쎄... 그럴까? 분뢰수는 그럴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마라도를 가지고 다닌 이유도 혹시나 그걸 어떻게 좀 잘 갈 면 그 지긋지긋한 백포를 베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가 분명 했다. 하지만 역시 그것도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혹 왕자검을 끄집어내는데 성공했어도 백포를 싹둑싹둑 잘라내는 것은 실패했을 것이다. 귀역을 떠나서 두시진이 못되어서 백포는 다시 원래대로 돌 아가버렸으니... 나중에 아미산에 갔다가 청성파의 장문인 송학도인을 만났 을 때 줏어들은 이야기로 보아 그 백포는 아마 천변만화의(千 變萬化衣)의 일종일 것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 하나 줏어들으려 거기까지 간 걸 보면 아직도 난 어린 소년의 마음을 완전히 벗지는 못한 모양이다. 내가 본 송학도인은 지긋이 나이들어가는 중년 후반의 도인 이었는데 분뢰수가 만난 애송이 송학도인은 어떤 모습이었을 까? 어쩌면 지금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연코 키는 내가 더 크고 체구도 내가 더 우람하 다. 그건 요공선사가 장담한 일이다. 그는 미절사에 가입해서 공동파를 천하제일문파(天下第一門 派)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가 천하제일의 면벽기간을 명 받았 다. 아마 요심대사가 좀더 엄격했더라면 요공은 자신이 필히 자 살하고 말았을 것이라 강조한다. 자신은 미절사가 섭혼루의 조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구천 회의 일부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그것이 그의 잘못인 것은 아니지만 요심대사는 타인의 힘을 빌어 커보이려는 그의 꼴이 보기 싫다면서 시간나면 면 벽기간을 일년씩 올려주고 있다. 저번에 보았을 때 이백년이었으니 이번에 가보면 또 한 이 삼십년은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요공선사가 기죽을 사람도 아니다. 아부와 아첨을 잘만하면 요심대사는 사오십년씩 팍팍 기간 을 감해준다. 한가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어떻게 이런 양반들이 공동파의 제일배분의 어른인지 잘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분뢰수는 내게 그런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철이 없던 당시에 난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뭐, 지금이라고 별 다를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보다 내가 더 행복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지금 분뢰수는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아니 아예 분뢰수가 누군지 모르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귀역의 싸움은 오직 수로맹의 활약으로 기억하는 판이니 그 것도 당연한가? 구룡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찾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화노인도 요새는 그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모조리 등선(騰仙)이라도 했나? 당시 귀역 결전에 참가했던 여섯 말고도 셋이 더 있는데 한 명은 나와 비슷한 나이이다. 그런데 그도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에는 소신룡(少神龍)이라고 불리웠고 그로부터 십년이 못지나 무영신룡(無影神龍)이라고 불리웠다. 화노인은 한마디로 도둑놈이란 소리야하고 그 별호를 마음 에 들어하지 않았다. 줏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구룡의 대형은 귀역의 싸움 이전 거의 이년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귀역 결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구룡의 일곱째는 그를 마중 나갔었다고 한다. 그 가 바로 구룡 일곱째의 친형이었다. 그 막연히 절대무적 이라고만 불리웠던 그 의 동생이 구룡중 한 명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내게는 뜻밖이었다. 때문에 그 의 소식을 알려고 귀역결전에서까지 빠질 수밖 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당시 그 의 행방은 귀역의 승패를 가르는 열쇠였으니... 돌아온 구룡의 대형이 늘어놓은 푸념은 화노인이 잘 꺼내는 이야기꺼리의 한가지다. 가장 화노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낮도 없고 밤도 없고 두리뭉실한 명역(冥域)의 이야기다. 구룡의 대형은 그 를 따라 물건너고 산을 넘어 무조건 북 상(北上)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노인은 이 이야기를 꼭 자신이 겪은 것처럼 말한다. 나도 어지간하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꼭 직접 간 것처 럼 말이다. 누구든 같은 이야기를 한 삼백 번쯤 듣게 되면 그럴 수 있 다! 아뭏든 거기서 몇바퀴를 굴러다녔는지 걸어다녔는지 빙빙 도는 동안에 갑작스럽게 천재지변이 일어나 길이 모조리 뒤엎 어 졌다고 했다. 그래서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화노인은 이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아주 즐기며 이야기한다. 햇볕이나 제대로 쪼이고 새벽과 저녁을 맞이할 수만 있는 곳이면 모조건 좋다는 생각을 하며 구룡의 대형은 그 의 흔 적을 찾아 누볐다. 그래서 결국 다섯 달만에 그 흔적을 찾았다고 한다. 이 말을 할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다섯달인줄 알았느냐하는 점인데 화노인은 내가 갔냐? 하며 외면해 버린다. 말은 꼭 직접 간 것처럼 하면서. 그래서 그 흔적을 따라 내려오다가 쪄죽을 뻔 했다는 것이 다. 어떻게 된 것이 한동안 사막으로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인 데 북해 저편에서 헤매이다 보면 머리가 돌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말을 하면 화노인은 그거야 네 이야기겠지. 라며 콧방귀만 뀐다. 그럴만도 했다. 구룡의 대형이 지닌 공력은 그 를 따라 떠 날 당시 이미 귀역에서의 신수비룡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 그런 공력이면 그 정도에 미칠 수는 없다. 내가공력이 심후한 사람은 마음이 점차 명경지수(明鏡止水) 를 닮게 되어간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뢰수가 이 두가지를 묻고 다닐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 이런 초식을 본적이 있소? - 나 같은 자를 본 적이 있소? 왜 이렇게 묻고 다녔는지는 당시 내게 설명해 주지않았다. 하나 결국 난 알게 되었다. 그 명경지수 같은 마음이 문제였다. 어지간한 자라면 분뢰수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주 똑똑히 보고 읽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와 기세를 겨루고 자신의 동작을 깊이 감추는 고수들일 경우 그 마음속은 깨끗해서 쉽게 노출되지 않는 깊 이를 가지고 있다. 그 깊이가 문제였다. 일류일수록, 절정에 다다른 사람일수록 읽어내기가 곤란한 것이다. 당장 생각하는 것은 쉽게 보여도 깊이 간직한 기억이나 생 각은 전혀 엿볼수가 없다. 결국은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분뢰수에게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 았다. 그리고 그것이 단서가 되어 구룡의 대형은 무조건 분뢰수의 뒤를 쫓는 무모한 짓을 하고 말았다. 하나 그것도 일리가 있는 행동은 맞았다. 느닷없이 서천지계(西天之界)를 누비며 날뛰는 고수가 누군 지 확인할 필요는 있는 것이었느니까. 어처구니 없게도 구룡의 대형은 중원에 들어올 때까지 한번 도 분뢰수를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중원에서도 못만났으니 아예 한번도 못본 셈인가? 그들은 분뢰수를 그 로 착각했었다. 그럴만도 했다. 그 에 오직 개인으로 맞서서 필적할 고수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난 조금 반대한다. 아무도 분뢰수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화노인과 종종 벌이는 논쟁은 여기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다. 둘은 혹시 동일인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면 화노인은 아니라고 벅 벅 우긴다. 우선 그래야 말싸움이 되니까... 그 는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한다. 상처입고 그 자리에서 죽을지는 몰라도 일단 앞으로 내딛은 발을 뒤로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뢰수의 말에 따르면 그런 정신나간 녀석이 다 있을까? 라지만 그 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뢰수는 섭혼루주와의 결투에서 마지막 순간에 분 명히 뒤로 물러났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분뢰수와 그 가 동일인이 아니라고 확신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분뢰수가 정말 그 일지도 모른다. 섭혼루주의 정보망은 매우 치밀했고 그는 어지간한 일에 절 대 실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수할 때마다 한번씩 죽어서 이제 없으니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불확실한 경우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한다는 것이 그의 성품이라는 이야기다. 난 전혀 믿을 수가 없다. 확인하면 뭐하나? 그 귀역에서 결국 독왕은 그의 계산에서 벗어났다. 아직도 눈에 선하고 귀에 들린다. 저주혈마도를 움켜쥐고 있는 분뢰수에게 독왕이 중얼거린 말이 들고만 있지말고 우선 좀 휘둘러보지 그래? 였는데 그를 안고 있던 수로맹의 유맹주가 뒤로 자빠질 정 도로 놀랐었다. 그의 권고는 당시 섭혼루주가 쓰러지면서 사방에서 튀어나 온 짐승 같은 작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묘하게도 섭혼루주가 죽기전에는 꼼짝도 않고 있다 가 죽은 뒤에나 튀어나왔다. 화노인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그건 아마 동귀어진(同歸於 塵)의 최후수단이었을 것이라 한다. 다만 독왕이 벌떡벌떡 일어나서 뚫고 돌아다닌 때문에 영 별볼일이 없어졌지만. 그의 독왕두는 피와 살에 닿으면 그대로 녹여버린다. 그 짐승 같은 자들도 그래서 그렇게 녹아버렸다. 너무 간단해서 난 무슨 눈이 햇빛에 녹는 것으로 착각했다. 화노인은 그것이 잘한일이라고 하지만 결국 운소저는 울었 다. 눈물이 흔한 사람은 아닌데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죽는걸 보 면 자주 운다고 그런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난 참으로 어리석다. 자신을 말종(末種)이라고 부르는 멍청한 짓부터 시작했으니 당연히 바보다. 지금 내 이름은 말종이 아니다. 분뢰수가 마지막에 내게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말종 이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인간말종이 아니다. 단지 아주 나쁜 놈일수는 있다. 차라리 말종이 더 낫나? 귀역이후로 우리는 육개월을 함께 다녔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내 썩어서 문드러진 손이 감각을 되찾았고 결국 새살이 돋 기 시작했다. 자신의 썩은 살갗 사이로 뚫고 나오는 새살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설명해주어도 잘 모를 것이다. 난 왜 사람들이 날 그토록 멸시했는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 고 있다. 그러니 내 기분을 설명해주어도 아마 모를 것이다. 그 감격을 만끽하고 있을 때 그 무지막지한 사나이는 내게 헤어지자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시 난 절정고수는 커녕 삼류 얼간이도 아니었다. 내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따르고 있었는지 잘 아는 분뢰수 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난 충격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바보 같은 어린애였다. 차라리 그의 바지자락이라도 붙잡고 죽이라고 했으면 좋았 을 것을 난 멍청하게 낫지 않아도 좋으니 같이 있을 수 없냐 고 물었다. 안돼. 좀 여유있게라도 이 대꾸가 나왔다면 나도 조금은 똑똑하게 행동했겠지만 그는 언행(言行)의 속도가 언제나 다른 사람보 다 몇 십배 빠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까무러친 나를 깨우고 그는 이렇게 아 직까지도 생생한 말을 들려주었다. 너 아직도 인생 끝난 꼬마냐? 난 강경하게 대꾸했다. 끝나지 않았어(未終)! 좋은 이름이군. 그래서 지금의 내 이름이 결정되었다. 그래도 그는 아주 무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홀로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내게 가만히 들려주었으 니까... 난 그 이야기를 몽땅 한마디도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오히려 분뢰수보다 더 유창하게 외칠 수도 있다. 입이 막혀서 말소리가 코로 나오는 사람보다 유창한 것은 당연한가? 한때는 조금 잊기도 했는데 빌어먹을 꼬맹이 둘을 데리고 다니면서 모조리 다 기억해내었다. 이 놈들은 나보다 더하다! 한 놈은 아무데서나 데굴데굴 구르며 거품무는 것이 특기이 고, 또 한놈은 팔다리 한쪽씩 없는게 자랑인 녀석들이다. 하도 꼴보기 싫어 좀 패주었더니 울고 불고 난리를 떨었다. 거기가 만보루만 아니었어도 그냥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났 을텐데! 이 고약한 화노인이 이 놈들에게 내 어린 시절을 털어놓았 던 것이다! 무슨 권리로! 떽떽거리며 따지고 있을 때는 이 꼬마 둘은 단단히 세뇌가 되어서 아예 목을 맨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뇌미종(雷未終) 을 얕보지 마라! 분뢰수가 날 떼어놓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네 놈들도 곧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유는 좀 바꿔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분뢰수는 자신이 죽을지 살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날 뗴어놓는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 가 칩거하고 있다는 지존부(至尊府)로 가는 것이니... 문제는 과연 그 를 분뢰수가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 다. 지존부에는 정상인 사람이 없다. 거기서는 흑마왕이나 백마신이 정상이다. 끽하면 사람을 두들기고 패죽이는 곳이었다. 만일 거기서 나혼자 남게 된다면 그날 저녁 반찬거리인가? 분뢰수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어떤 사람 이야기를 했다. 자신과 비슷한 행색이라고 했다. 단지 흑포(黑佈)로 감싼 것이 다르다고 했다. 온몸을 흑포로 둘둘말은 자. 그가 불패의 절기, 분뢰수(奔雷手)를 창안한 자라고 한다. 분뢰수가 처음 자신이 어디 있는가를 알았을 때 그는 서천 지계에 있었다. 거기서 그가 기억한 것은 그 흑포로 둘둘 만자의 말도 안되 는 이름하고 구식(九式)으로 이루어진 절기, 분뢰수 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천하무적인지 확인해 주겠다는 약속!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오직 그것을 단서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으러 다닌 것이다. 서천지계를 다돌고 서역을 거쳐 천축에서 이 중원까지... 그동안 자신과 비슷한 사람은 커녕 그 분뢰수 의 창안자가 자기 이름이라고 내놓은 황당한 자구(字句)를 별명으로 가진 자도 없었다. 아니, 가끔 건달들이 그런 별호(別號)를 쓰고 있었다고 했 다. 그 흑포괴인은 따지고 보면 내 사조(師祖)인데 아주 성질 고약한 작자가 틀림없다. 성(性)은 복성(復性)으로 무적(無敵)이요, 이름은 신마(神 魔)라니... 이 따위니 분뢰수가 그 모양인 것도 당연하다! 얼굴이나 보일 수 있으면 아는 사람을 찾는 것이 쉬워지기 라도 할텐데 그것도 안되니 분뢰수의 답답함은 어느 정도였을 까? 나라면 자살(自殺)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분뢰수는 내가 너였다면 벌써 환 생(還生)을 한 세번은 했을거라고 대꾸해 주었다. 난 내 병과 싸우느라 칠년을 소모했고, 그가 가르쳐준 벽력 수(霹靂手)란 걸 익히느라 다시 팔년을 소모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도 나 이전에 이걸 익힌 사람은 없 으리라는 점이다. 분뢰수 이전에 분뢰수 를 익힌 사람이 없듯이. 다시 나왔을 때 내가 그의 소식을 못들은 것은 당연했다. 단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사람을 피해 달아나기만 했던 당시의 나는 이세상에서 소원하는 것은 뻔했다. 먹을 것과 사람들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내 어리석음의 결론이었다. 지금의 난 또 바라는 것이 있다. 단 한번만이라도 분뢰수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이 벽력수 뇌미종 이라 불리우는 지금의 나 를 보여주고 싶다. 단 한번만이라도... < 未 完 之 終 > 後 記 다 썼습니다! 다 읽으셨습니까? 재미는 있었는지... 글쓴 이 욕은 안나오셨는지...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글을 마칠 때까지 줄기차게 염두에 둔 것이라고는 소장(所 藏)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글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과연 갖고 싶으신가요? 이 경혼기(驚魂記) 를 갖고 싶으시다면 제 나름대로의 성 공작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라면 당연히 확실한 실패작이겠지요. 그럴 경우 또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면받는 글이 굳이 책으로 나올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입니다. 독자의 서가(書架)에 당당한 소장품의 한 종류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단히 과분한 욕심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 미련을 버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읽고 그냥 던져버리는 책은 제 자신이 우선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쓴 글이 그런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면 실망 밖에 할 일이 없군요.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강은 이미 건넜다 고 누가 그랬 는지는 몰라도 지금 꼭 제 심정입니다. 이 경혼기 는 이미 쓰여졌습니다. 남은 것은 제가 실망하느냐 마느냐인데 결정은 제가 할 것 이 아니라 아쉽습니다. 독자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럼, 언제나 건강하시길. 성하지절(盛下之節) 풍종호(風從虎) 배상(拜上) ** 이건 추천사거든요, 이 추천사와 뒤의 서문은 1권 재교 지 출력시 같이 출력해 주세요. 또 다 른 武 俠 을 위 하 여 ....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솜씨도 솜씨려니와, 글 전체에서 풍기는 어딘지 모르게 음습하고 괴기(怪奇)스런 분위기가 읽 는 순간부터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도저히 무협을 처음 쓰는 신인(新人)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지 않아서 글을 쓴 작가를 몇 번이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까 지 했다. 그만큼 <경혼기(驚魂記)>는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전해준다. 국내무협을 흔히 정통무협(正統武俠)과 기정무협(奇情武 俠), 그리고 절대무협(絶代武俠)으로 분류할 때 이 <경혼기> 는 이들 중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아주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이다. 굳이 말한다면 풍종호(風從虎)만의 괴기무협(怪奇武俠) 이 라고나 할까? 글 전체에서 뿜어나오는 신인다운 패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갈수록 오리무중이 되어 가는 복잡하고 흥미로운 사건들과, 연속되는 괴이한 기문이사(奇聞異事), 그리고 끊임없이 등장 하는 기인(奇人)들과 마인(魔人)들..... 그야말로 책을 처음 손에 잡으면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읽는 사람의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떼지 못 하게 하는 특이한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 다. 서쪽 하늘이 불게 물들 때 핏빛 노을을 등에 지고 천축(天 竺)에서 온 괴이한 방랑자, 분뢰수(奔雷手)! 그는 번갯불 같은 손으로 상대를 격파시키고는 항상 묻는 다. - 이런 초식을 본 적이 있소? - 나 같은 자를 본 적이 있소? 그는 왜 이렇게 물어야 하는가?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그의 눈은 무엇을 쫒고 있는 것일 까? 자기 자신을 찾아 천하를 방랑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너무도 신비스럽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다. 또한 음산한 분위기속에서도 간간히 흘러나오는 재치어린 대사와 기인(奇人)들의 요절복통할 행각은 폭소를 자아내게 할 뿐만 아니라 글 전체의 수준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침체에 빠진 국내무협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도오>와 <생 사박>으로 무협팬들을 열광케한 좌백(左栢)에 이어, 특이한 감성과 예리한 필치를 지닌 풍종호의 등장으로 이제 국내무협 의 르네상스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국내무협계에 뜨거운 바람을 몰고 올 풍중호의 출도(出道) 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독자제현들과 함께 풍종호의 앞으로의 행로(行路)를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겠다. 용대운(龍大雲) 올림. 序 文 제목이 뭐니? 없는데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무슨 제목을 정하고 써대기 시작한 것이 아니니 제목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사람을 웃겼습니다. 나도 덩달아 웃었지만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 제목도 없이 시작을 했는지... 그저 일단 시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글은 나가고 있는데 여전히 제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다가 봉창두들기듯이 줏어듣고 새겨놓은 경혼 (驚魂) 이란 말이 좋다고 생각되어서 일단 제목의 두자를 건 졌습니다. 그 다음에 달랑 경혼으로 무얼 어쩌자고 하는 생각에 삼국 지(三國志)의 지(志)도 붙여보다가 그냥 서유기(西遊記)의 기 (記) 로 낙착을 보았습니다. 혼(魂)을 좀 놀라게 하는 이야기 하는 정도의 뜻입니다. 별로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소설(小說)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없는 소설쓰면 천벌받는다... 옆에서 늘 이 말을 외워주는 분이 계시고, 글이 읽기가 힘 들다고 나 대신 머리싸매고 고민해주는 분도 계십니다. 일일이 그분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아부가 될 것이니 명기 (明記)는 피하고, 앞에 분은 대도오(大刀傲) 가 있고 뒤에 분은 태극문(太極門) 외에 기타등등 많이 있습니다. 달랑 경혼기(驚魂記) 만 있는 저... 어쩌다가 이렇게 쓰게되었는지 책이 되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봐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도 신세진 분들이 많아서 언제 다 갚을지 걱정이 됩니다. 소설로 보고 재미있다고 여긴 뒤 갖고 싶은 마음이 들게 쓰 고 싶었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나요? 판단은 이미 독자(讀者)의 몫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풍종호(風從虎) 배상(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