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제4권 애정연가 지은이:문한솔 출판사:성인문 욕망의 늪 01 "누님, 안에 계신 거 다 안다니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저희도 바쁘다구요." 방문 밖 사내들의 목소리는, 일견 정중한 듯하면서도 분명 비아냥거리는 투가 분명했다. 나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하여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누님'이라니. 지금 이 방안에는 최마담과 나밖에 없다. 그런데 분명 나는 아니고, 그렇다 면 이 호텔 안에 최마담을 누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나말고 더 있단 말인가?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반응이었다. 낯빛이 달라진 최마담이 침대 위에서 벌떡 허리 를 일으켰다. 좀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초점을 잃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새 경악으로 가 득차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니 그간 그렇게 능란한 수완을 발휘하던 단란주점 여사장 최마담 의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다물지도 못한 채 몸마저 부르르 떠는 것 같았 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두커니 어쩔 줄 모르고 선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발갛게 젖어 희 번덕이는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밖의 사내들은 마치 그러한 정황을 알기라도 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틈에 최마담 은 허연 몸뚱이 그대로 후닥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님......?" 문밖에서 숫제 으르대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저......누, 누님......" 누님을 찾아대기는 방안의 나도 마차낙지, 얼빠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으려는 나를 향해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쪽 손가락을 입술 위에 대어 보였다. 일단 아무 소리 내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밖의 사내들이 방을 잘못 노크했거나 엉뚱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 무슨 황당한 노릇이란 말인가. 분명 최마담은 저 목소리의 주인공들과 아는 사이인 것 같았 다. 최마담은 서둘러 자기가 벗어 던졌던 목욕 가운을 다시 주위 입으며 빠른 시선으로 주변을 훑 어보았다. 그러더니 문쪽으로 다가가며 대뜸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아마도 나더러 어딘가에 몸을 감추라는 뜻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나를 반강제로 화장실 안으로 떠밀었다. 내가 어어...... 하는데도 최마담은 문을 닫으며 한 번 더 쉬잇. 하는 모양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결국 나는 찍소리도 못한 채 그녀가 시 키느 시키는 대로 쥐죽은 듯 숨어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어찌 이런 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길어 봐야 수십 초도 안 걸렸을 상황이었으나.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오늘 모든 일이 그랬다. 여기까지. 이 호텔방 안의 호화스런 침대 위까지 흘러 들어온 것은 그 렇다고 치자. 그건 저 누님이 나를 의도적으로 유혹하려던 것으로 해석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내 가 원했건 안 원했건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소란을 피우고 있는 저들은 또 무어란 말인가? 거기에 이미 그들의 목소리만으로도 익숙한 듯한 저 최마담의 반응은?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 는 것이 하나 있었다. 실처럼,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미처 불을 켜지 않은 욕실 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필경 그녀가 서두르느라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그게 실수인지 아 닌지 따질 계제가 아닌지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벌어진 틈새로 눈을 가져갔다. 그 사이로 환한 호텔방 안이 절반쯤 들여다보였다. 최마담은 속옷 따위는 챙겨 입을 생각도 하 지 않고 힐끗 거울만 들여다보고 단단히 가운을 여미는 중이었다. 서둘러 머리핀을 찾아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수습하는 그녀를 보아 하니 밖에 있는 사내들이 누구건 간에, 일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 심산인 듯했다. 그녀가 옷장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곧바로 방문으로 다가서는 것 이보였다. 나는 엿보고 있는 걸 들킬지 몰라 잠시 화장실 문에서 몸을 피했다가 다시 문틈으로 귀를 가져 갔다. 화장실 안에서는 방문 쪽까지는 보이지 않았지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그러자마자 당장 마주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휴......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요? 뭐 딴 것이라도 했수?" 그와 동시에 키득거리는 남자 웃음소리가 하나 더 방밖의 사내는 최소한 두 명은 되는 것 같았 다. "뭡니까..... 샤워하시던 중은 아닌 것 같은대...... 클클클, 한참 재미 보시던 모양이네?" 추근대는 말투, 아니나 달라 행여 들리기라도 할까 봐 잔뜩 목소리를 낮춘 최마담의 앙칼진 음 성이 들렸다. "뭐야 너희들, 여긴 왜 왔어? 어떻게 알고서?" 이럴 수가. 역시나 그들은 거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가? 나는 잔뜩 몸을 굽혀 화장실 문가에 귀 를 기울이면서도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헤헤...... 저희야 원래 누님 보디가드들 아니우. 그리고 이쪽 동네야 원래 우리 바닥인데 모르는 게 어딨다구." 최마담의 앙칼진 대꾸에도 상대편 사내들 목소리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누가 보냈어? 그 사람이야?" 그 사람? 그 사람이라니. 누가 최마담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 그거야......아침에 우리 사장님 따돌리고 나오셨다면서요. 하도 뭐라 그러시길래 나와 봤다 가. 우리도 한참 찾은 거죠 뭐" 갈수록 황당한 대화였다. 사장님이 시켜서 따라왔다? 그럼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속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끼며 귓바퀴를 문틈에 밀착 시켰다. 그 때였다. 낮게 깔진 그녀의 새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튀어나왔다. "야! 어딜 들어오려고 그래!" "에헤. 누님도 멀리서 왔는데 그럼 들어오라고도 안 할 거요?" 아차차, 사내들 중의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서려는 것 같았다. "야 안 돼. 여자 혼자 있는 방에 뭐하러 들어와 아무리 호텔이라도 그렇지!" 순간 가슴이 콩알만해졌는데, 다행스럽게 최마담이 한사코 그들을 제지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 란 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나를 들킬까 봐 필사적이리라. "후후, 왜요? 안에 꼬불쳐 놓은 애인놈이라고 있으신 모양이네? 하기야 우리 누님이 이런 데 총 맞았다고 혼자 올리는 없으시지. 암."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기겁하여 숨소리마저 멈추어야 했다. 이번 사내의 목소리는 마치 안에 대고 소리를 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톤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분명 방안에 있는 누군가를 의 식하고 내는 목소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을 그렇다고 그들이 막무가내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최마담 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 그럴 의사까지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가, 나가서 얘기해. 자꾸 이러면 그이한테 이를 거야!" "어 어어...... 허 참. 진짠가 보네?" 그 다음은 끝을 들을 수 없었다. 최마담이 억지로 그들을 문바깥으로 밀어냈는지 대신 방문 닫 히는 소리만이 들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이, 확실히 '그이'라고 누군가를 지칭했다. 나의 의구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이'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잠시 말설이긴 했지만 두려움보다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지배했다. 게다가 문득 밑을 내려다보니 내가 농구화까지 신고 있는게 아닌가. 그렇다면 카펫이 깔린 바닥이니 소리가 날 리 만무하다. 평소에 없던 과감성이 나를 그렇게 충동질 하고 있었다. 슬며시 화장실 문을 열어 젖혔다. 나는 어느새 슬금슬금 방문쪽으로 다가갔다. 02 방문에 조그만 어안렌즈가 눈에 띄었다. 희미한 목소리들이 복도 쪽에서 들려왔는데, 우선 나는 눈을 방문의 렌즈로 가져갔다. 복도 전경이 내다 보였다. 한구석의 새까만 머리채는 최마담의 것이 듯했고, 그녀는 그 누구의 침입도 막겠다는 듯이 등을 방문에 바짝 기대고 선 포즈였다. 언뜻 보기에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태도로 보아 아마도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리라. 맙소사, 나는 그제야 그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볼 수 있었다. 최마담의 맞은편에 삐딱하게 선 두 사내- 그들은 척 보기에도 건달같이 보였다. 중간 키와 조금 큰 키, 차이나 칼라의 양복과 가죽 점퍼...... 영락없는 건달의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인상이 정확히 그랬다. 무슨 말들이 오가는 것 같은데, 그 내용까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인터 콤을 보며 켜볼까도 했지만, 혹시나 바깥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기에 이내 단념해 버렸다. 대신 최 대한 숨소리마저도 죽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복도의 동정을 살폈다. 주로 중간 키의 가죽점퍼와 최마담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는 귀찮다는 듯 귓구멍을 쑤 시며 퍽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 "누님, 우리가 뭐 한두 살 먹은 애들입니까. 보아 하니 술 한잔하신 것 같은데...... 그럼 척하면 딱이지." "아니라니까! 정말 나 혼자 왔다니깐 그러네?" "진짜 혼자 맞아요? 내가 한 번 확인해 볼까요?" 그 말에는 흠칫, 안에 있는 나와 최마담이 동시에 놀랐다. 그녀가 더 단단히 방문을 막아서는 듯. 뒷머리가 방문의 렌즈를 완전히 가리고 섰다. 나는 실제로 그들이 들이닥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한쪽으로 잔뜩 몸을 웅크렸다. 여차하면 문 뒤에라도 숨을 생각이었다. "후후,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술먹고도 말짱하신 걸 보니 괜히 또 어린애 하나 잡는 거 아니에요." 뭐라고? 뜨악! 어린애 하나 잡는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설마...... 놀랄 만한 일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거지로 보아 이미 최마담, 아니 나와 최마 담이 이 호텔 안에서 무얼하고 있었는지 낱낱이 알고 있다는 투, 그런 고로 그 낱말은 나를 지칭 하는 게 틀림없는 까닭이다. "어휴, 맘대로들 생각해. 그냥 바람 좀 쐬러 나왔다, 왜. 너희들 몰라? 요새 나 골치 아픈 거." 최마담도 조금은 안에 숨어 있는 내게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뒤로 돌린 손으로 방문 고리를 부여잡는지 조그맣게 찰칵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정말 007영화보다도 더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나는 겁이 난 것도 사실이지만, 너무도 황 당한 상황인지라 어리벙벙해 지기까지 했다. 아찔했던, 벌거벗은 나체로 덤벼들던 누님과의 애무 장면을 들킬 뻔했다는 당혹감만이 아니라- 겉보기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은 사내들의 말투, 거기에 서로 익히 아는 사이임이 분명한 누님과 그들과의 관계가 나를 황당하게 했던 것이다.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게다가 '사장님'? '그이'라니? "이런 거...... 우리 사장님이 아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우. 이거 곤란하네. 우리야 본래 누님을 먼저 알았으니 이러지만, 다른 애들이 와서 누님 이런 데 있는 거 알면 어쩔 거요. 이거...... 참." 그것이 은근한 위협성 발언임은, 안에서 듣는 나로서도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후......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 자......!" 얼레, 최마담은 이런 결과를 미리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좀 전에 옷장에서 꺼내간 것이 지갑이 었던지 그녀는 뒤적뒤적하더니 그들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지폐가 아닌 것으로 보아 적어도 수 표 몇 장은 될 것 같았다. "올라가서 저녁 값이나 해. 그리고...... 섭섭한 것 같으면 나중에 가게에 들러. 내가 술 한잔 줄 테니깐!" 그리고 그 행동의 여파는 금방 돌아왔다. 사내 중 하나가 그것을 챙기며 당장 비굴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우리가 언제 이런 것 바라서 그랬나. 그냥 사장님하고 누님 사이에 끼여서 우리도 입 장 곤란하다는 것뿐이었지 뭐......"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심지어 허리까지 굽실거리는 가죽점퍼와 차이나 칼라. "그러니까 그이한테는 나 오늘 머리 좀 식히러 왔다고...... 알지?" 그러자 사내들의 화담이 시원스럽게 터져나왔다. "클클...... 걱정 마십쇼. 사실 우리야 사장님보다는 누님하고 더 오래 얼굴 맞대지 않았수? 푹 쉬 시다가...... 천천히 올라 오시우." "알았어. 얼른 올라가. 괜히 또 나 귀찮게 하지 말구!" 아마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는 것 같았다. 사내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러서는 모양이었다. "에...... 그럼 재미 보세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그러다가 티 내시면 우리도 곤란합니다!" 그 말에 나도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무리하지 말라, 티내지 말라...... 아아, 정녕 저들은 최 마담이 아무리 부인해도 이 안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훤히 다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정신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나는 후다닥 도로 화장실 쪽으로 잽싸게 튀어 돌아갔다. 설사 그렇다 하여도 최마담에게 내가 바깥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음을 들켜서는 안 되리라는 판단이었다. 재빨리 화장실 문을 닫고, 덜썩 커버가 내려진 좌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젠장,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 낯선 사내들과 최마담의 관계는 정녕 어떤 것이란 말인가? 그녀의 행동거지를 뻔히 알고 있 는 듯한 그들. 그들은 왜 이곳까지 우리를 뒤쫓아 왔을까? 아침에 그다지도 허둥대던 최마담,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이번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자기네 사장님을 따돌렸다고? 그럼 최마 담이 정말로 누구의 감시 속에서 도망이라도 쳤다는 얘기? 불현 듯 아까 혼잣말로 뇌까리던 최마담의 말이 떠올랐다. '왜 내가 고른 남자는 날 싫어하고, 만날 남이 남나 쫓아 다니는 걸까? 그 새끼도 그래. 난 싫었 는데, 자꾸 날 따라다녔어.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자고. 살 섞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그 뜬금 없던 남자 얘기- '그이'라 부르던 그 인물이 바로 그 사람 아닐까? '그이'라고? 내가 알기로 그건 결코 아무에게나 붙이는 호칭이 아니었으니...... 아까 오는 길 들 렀던 국도변 한식집에서 누님이란 호칭에 화를 내던 최마담이 상기되었다. 그녀가 무어라고 했었 나. 우리가 불륜의 커플처럼 보인다고, 남들이 야릇하게 생각한다고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 그렇다면 말이다. 그녀의 그 '그이'와 최마담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그것은 그냥 하는 소 리가 아니고 실제 상황이 될 수고 있는 일 아닌가? 정말 몸서리를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더군다 나 좀 전의 그 건달풍 사내들을 보아 하니, 이건 정녕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도통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 그저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03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다시 이 화장실로 들어온 직후에 방문 닫히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 이후 방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문소리가 났으니 최마담이 방안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할 터,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사내들이 가버렸으니 이제 나와도 된다거나, 아니면 좀더 숨어 있어 달라거나, 그 어떠한 기별도 없는 것이다. 의아한 나는 주춤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만에 하나 내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당황해 하고 있음을 그녀가 알아차려서는 안 되겠기에 나는 욕조 위 거울로 옷 매무새까지 살펴보았다. 이제야 보니 아까의 그 아슬아슬했던 흔적이 바지춤이며 셔츠 여기저기에 남아있었다. 바지는 구겨졌고 셔츠 단추는 풀려있고...... 어쨌든 화장실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고 빼꼼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의외로 최마담은 방 한복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도로 침대로 자거나, 모르는 척 얼굴이라도 돌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생각에 빠진 듯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물끄러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라 리 침착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태도에, 도리어 내가 뜨끔할 정도였다. 마땅히 들으리라 예상했던 변명이나 해명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 이 누님이 갑자기 왜 이러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아아...... 나 어지러워. 동생......!" 그녀는 대뜸 깍지 낀 두 손을 내 목에 두르고 내 반응은 살필 생각도 하지 않고 매달렸다. 정말 로 온몸에 힘이 빠진다는 듯이 몸 전체를 내맡기는 포즈였다. 그 바람에 나는 뭐라고 얘기 꺼내려다가 그대로 멈추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마치 말을 봉쇄라도 하는 것처럼 연달아 콧소리를 냈다. "술기운이...... 나 이제 취하려나 봐." 그녀는 선 채로도 흐느적거리며 내게 온몸을 밀착시켰다. 아니 숫제 부벼대고 있다는 것이 올바 른 표현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말문이 막힌 채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내 목덜 미를 간질이고 있었고, 흠뻑 젖은 그 느낌이 뜨거운 숨결을 더해왔다. "어, 누, 누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비록 그 사내들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가운을 훌렁 벗어버리고 나를 무아지경으로 이끌기도 했지만, 그런데 지금 최마담의 모습은 아까보다 더욱 정신이 없어 보 였다. 어느새 가운자락 밖으로 드러난 최마담의 한쪽 허벅지가 부드럽게 내 다리 사이를 마찰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얇은 천만으로 가려진, 금세라도 출렁이며 비어져 나올 것 같은 그녀의 젖가슴이 내 가슴팍을 아주 짓눌러 왔다. "부탁이야, 동생...... 나...... 침대로 좀 데려가 줘......" 아련한 그 목소리는 아까 사내들에게 불의의 방해를 받기 전보다 한층 더 은근해진 것 같았다. 연기로 따지면 이건 정말 고도의 연기였다. 내 입에선 억눌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인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아까 침대 위에서 그녀의 손길이 아스라이 다가왔을 때만 해도 나의 이성은 거의 무너졌었다. 그녀가 자신의 거웃한 둔덕을 내게 부벼왔을 순간에는 거의 본능의 뜻에 따를 까도 했던 나였다. 그것은 지금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내가 작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낯선 사내들과의 대화를 부분적으로 엿들었다는 사실을 최마담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리라. 어떡해야 하나. 풀어야 할 의문부호들만이 머리 속에 가득차 한꺼번에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제길헐. 나는 일부러 그녀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때 맞춰 최마담의 입술 새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이......" 나는 털썩, 그녀를 침대 위에 던지듯 뉘어주었다. 벌어진 가운 자락 사이로 그녀의 탄탄한 살결, 특히나 출렁이는 가슴의 두 계곡이 들여다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한쪽 다리가 가운자락 밖으 로 비어져 나와 자칫하면 그 은밀한 심연이 보이기 직전이었다. "여, 여기 누우세요. 그리고...... 한참 주무세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 한껏 침착하나 목소리로 말했으나 가슴이 떨려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 까 교묘히 나를 흥분시키던 그 속살을 다시 마주하는 탓이었다. 최마담은 내가 침대 위에 누이는 동안에는 나를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끌 어 당겼다. 함께 침대에 눕자는 의사표시였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그 사내들로 인해 방해받았던 일을 계속 진행시키며 하는 줄로 지레 짐작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살며시 손을 목뒤로 돌려 그녀의 손을 풀어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등과 옆구리로 재차 손을 뻗어왔지만, 나는 그마저도 몸을 틀어 팔꿈치로 밀쳐냈다. "그, 그냥 쉬세요. 힘드시다면서......" 그녀는 아스라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예상과 다른 내 행동에 은근히 놀랐으리라. "왜 그래. 응......?" 불만족스런 눈초리였다. 그녀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건 나도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엉뚱한 사 내들의 방문만 없었어도 어쩌면 지금쯤 나와 이 침대 위에서 한창 벌거벗은 육체의 향연을 벌이 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 아직도...... 추해 보여? 날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 "아, 아니요!" 얼결에 나는 즉각 대답을 했다. "그...... 좋아한다는 여자친구 땜에 그런 거야?" 다시 거세게 고개를 젓는 나. "그런데 왜 그래......? 이 누나 갖기 싫어? 내가...... 이렇게 자기한테 부탁하는 데도?" 후......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당위성을 설명하기란 내게 너무나 벅찬 과제였다. 사내들이 들 이닥치기 직전만 해도 애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눈물까지 보태던 그녀. 이 방안에 더 머물러 있다가 또 어떤 일일 당할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무작정 이를 악물었다. "저, 절대로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저는...... 그냥 나가겠어요." 또 한 번 최마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가다니, 어딜 가?" 그녀의 반문이 튀어나왔다. "나 아직 차 못 모는 거 알면서 어딜 가겠다는 거야? 어디 근처 술집에라도 가고 싶어?" "그건 아니구요...... 저는......" 글쎄다. 간다면 어디로 갈 수 있으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재우고 이 호텔을 빠져나가고 싶었 다. 그저 허름하기는 해도 내 자취방이 그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하려던 찰나 나는 그 말을 도로 삼켜야했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 던 누님이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한 것이다. 그녀가 다시금 내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은 듯 다급한 행동 이었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 창희! 나 알아, 나 안다구. 지금 동생 화났지? 그렇지? 내가 아까 주 책 맞게 굴어서, 노처녀가 동생 좋아해서 싫은 거지!" 그녀는 허겁지겁 당혹한 목소리마저 냈다. 꼭 내가 가버리면 영영 놓치기라도 할까 봐 염려하는 기세였다. "제발, 부탁이야. 미안해. 나...... 나는 자기를......" "누, 누님......!" 어휴, 어찌나 내 허리를 잡고 늘어졌는지 하마터면 침대 위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나, 나 귀찮게 하지 않을게. 제발, 제발 날 두고 가지 말아." 금세 울음기가 배어날 것 같은 목소리였다. 또 한 번의 애원이었다. "자기...... 여기 있다 가. 오늘, 오늘밤만......!" "어...... 저, 저는...... 아, 알겠어요......!" 아뿔싸, 나는 허둥지둥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다시 뉘어야 했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동침할 의 도는 전혀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이 자리를 피하려 했던 공식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벌어졌 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 속에 되살아났던 것이다. 얼떨결에 아침 일찍 붙들려 나와 얼떨결에 호텔 가족탕이란 곳에 들어섰으며, 얼떨결에 이 최마 담과 벌거벗은 몸매를 서로 드러냈고, 또한 얼떨결에 이 호텔방 안까지 끌려 들어와 자칫 정사를 나눌 뻔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정체 모를 남자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해 못할 모든 사건들, 거기까지 나는 한마디로 말해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 셈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내 이유였다. 자기를 여자로 보느냐 아니냐의 유혹에서 시 작하여 밑도 끝도 없이 내게 보여준 호의 - 그 의혹이 전부 해소되기 전에, 그녀의 요구가 무엇이 든 간에, 지금 그녀의 행동이 진짜건 아니건 간에 내가 거기에 응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내 진짜 하고픈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는 정반대의 표현을 해야만 했다. "안, 안 갈게요. 그러니 누님, 잠깐만요!" 04 내가 왜 그런 말을 했겠는가. 그녀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염려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서있는 나를 끌어당겨 고개를 묻고 있는 위치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랬다. 눈물이라도 어렸는지 얼굴을 부벼대는것까지는 좋다. 하지마 왜 내 바지 앞섶, 정확히 내 하복부 위를 지분대느냐 말이다. 바지 앞춤만 지나면 바로 그곳이었다. 허겁지겁 나는 그 위험 한 부위에서 그녀를 떼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에게 대책이 없기도 했다. 정말로 여기서 나간다면 어쩔 것인가. 이제 호텔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읍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이곳, 최마담이 차를 몰고 따라나서지 않 는다면 돌아갈 길이 막막하기도 했고 더군다나 아침에 그 호들갑 통에 나오느라 주머니에는 집으 로 돌아갈 차비나 제대로 들어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애꿎은 한숨만 연신 새어 나왔다. 꼼짝없이, 여기 이 누님과 하룻밤을 지새워야만 할 운명일 것 같았다. 내가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그녀를 떼어놓자 최마담은 다시 침대에 눕지 않고 나는 안 았던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진짜 머리가 아프기라도 한 자세였다. 계면쩍은 나는 방 한가운데로 빠져나와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팔을 내려 침대시트를 구겨지도록 쥐었다. 자세 히 보니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까까지의 애걸하던 톤에서 한풀 꺾인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어왔다. "혹시...... 아까 내가 숨어 있으라고 해서 그런 거야?" "아, 아니에요......" "그 남자들 때문에...... 그런 거지?" 뜨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나는 적잖인 긴장을 했지만 애써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먼저 의문점에 대해 묻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하면 내가 호텔 방문 뒤에 숨어 있 었음을 눈치 챌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그렇지? 알 것 같아. 동생 의심하고 있는 거 아냐?" 의심?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최 마담은 다소 묘한 방식으로 맞공세를 하고 있었다. "대체 내가 어떤 년이길래 호텔 방까지 남자들이 찾아오나, 그런 생각하는 거지? 그것도 자기랑 같이 있는 때에 난데없이 말이야." 얼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의혹을 정면으로 짚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방향성이 나와 는 너무나 틀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또 웬일, 으흐흑, 최마담이 오열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그렇고 그건 술집 년, 그것도 서른 넘어 마담 자리나 꿰찬년한테 건달패나 찾아오고...... 죽고 싶어...... 동생, 동생이 그런 생각 할 줄은...... 흐흑......!" 이, 이게 아닌데. 후다닥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이제 엎드려 어 깨까지 들썩였다. "창희, 자기는 내가 그런 년이라고 생각해? 몰랐어. 정말...... 차라리, 차라리 내가......" "그, 그런 말 마세요......!" 차라리, 차라리...... 그 다음에 이어질 말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갑작스런 그 반응에 어째야 할 지 난감해진 나는 엉거주춤 그녀 곁에 주저앉아 등을 감싸안았다. "그런 것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일부러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애쓰며 달래기 시작했다. "누님...... 저는......"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듣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그래요. 아까 당황하기는 것 같아서...... 혹시나 저 때문에 난처하신 줄 알고......" 최대한 돌려서라도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흘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웅크린 그녀의 어깨가 파르 르 떨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님이..... 누님이 곤란한 게 싫어서 일부러 자리를 피하려 그랬던 거예요. 정말이에요!"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침대 위에 눕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는 애써 분위기 를 바꾸기 위해 내 편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로 작정했다.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그럼 되잖아요. 제가 오해하지 않게...... 대답해 주실 수 있죠? 아까 그 사람들이 누군데......" 질문한 뒤 잠시 나는 그녀의 대꾸를 기다렸다. 바로 그것이 내가 알고 싶은 첫 번째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제야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정말이야, 그 말......?" "예. 저 믿을게요." "그건...... 동생은 잘 몰라서 그래...... 나 원래...... 이곳에서도 일했었어. 아주 어릴 적이기는 하지 만......" 최마담은 비로소 흐느낌을 그치고 숨을 골랐다. "여기 근처 룸싸롱에서...... 한 2년 있을 때...... 그때 알던 애들이야...... 진짜 동생들......" 과연 그런 걸까. 그들이 '누님 얼굴 안 지가 더 오래되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좀 얘기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따른다면 그건 오래 전의 이야기일 텐데, 오늘 사장님이 어쩌고..... 란 얘기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그녀가 지금 둘러대고 있는 건인가. "기분 나빴던 거야, 동생......? 미안해. 나도 그 친구들이 올 줄은 몰랐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그럼 그 사장님, 그이 운운은 무슨 말인가요- 나는 불쑥 이렇게 물으려다 움찔했다. 그녀가 슬 그머니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훔치는지 눈자위에 올린 손은 거두지 않았지만. "그런데...... 왜 저더러 그렇게 갑자기 숨으라고......?" "아...... 그, 그건...... 원해 그렇잖아. 나처럼 올라가서 가게하나 가질 정도 되면, 이 동네에선 꽤 소문이 나기 마련이라서 그런 것 있잖아. 잘 모르던 애들도 괜스레 하는 척하고...... 용돈이나 타 쓰려는 수작으로...... 아이 참...... 분위기가 깨고 나쁜 인간들!" 최마담은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며 작게 인상마저 지어보였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녀의 말에 그 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님이 여기 계신 줄을 어떻게......" "얘기했잖아. 이런 바닥 원래 좁다고. 사실 여기 종업원 애들 중에도 아는 얼굴들이 있어. 그러 니까 안 거겠지...... 그보다...... 나 오늘 너무 많이 우는 것 같아." 그 말이 나는 당장 머쓱해졌다.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눈물을 보인 것이니 오히려 미안할 정도 였다. "그래도 나...... 창희를 위해서라면 괜찮아. 자기가 나 믿어주기만 하면...... 내가 그랬지? 이 누 님, 어떤 것이든 줄 수 있다고." 이것 참. 뭐라 할말이 없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어느새 자기가 훌쩍이고 있었다는 것을 잊은 모 양인지 누님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색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자꾸......" "아니야. 나...... 어차피 뭐든 다 얘기하고 싶었어. 오늘은." 무엇이든...... 꿀꺽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렇다면...... 하는 생각기 들었다. "그, 그럼요. 누님...... 아까...... 제가 하라는 대로 뭐든 다 하겠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뭐 하나 물어 봐도 되나요?" 동의의 표시로 최마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질문에는 의표를 찔렸다는 듯 움 찔하는 반응을 숨기지 못했다. "낮에 이곳에 올 때...... 기억하세요? 급하게 서두르고 욕까지 하셨어요. 그때 그러셨죠? 이따가 얘기해 주겠다고." "그, 그건......" "대답해 주신다면 저 가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다소 치사한 방법일지도 모르나, 내게는 그것이 유일한 수였다. 어쨌든 나를 원하는 것은 그녀 쪽이지, 내가 아니기에. "꼭...... 대답해야 되겠어?" "예. 말씀해 주세요." 한숨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네, 라고 나는 짤막이 대꾸했다. 그러자 최마담은 침대 위 이불을 끌어당기며 등을 돌린 채 돌아 누워버렸다. "사실...... 나...... 쫓아다니는 사람이 하나 있어. 매일 같이...... 하도 집요하게 굴길래. 그래서 그 사람 피하려고 그랬던 거야. 그 뿐이야...... 정말로." 그럴까. 석연치 않은 대답이다. 그럼 아까 '우리 사장님을 따돌리고' 운운하던 건달들의 말은 무 엇이란 말인가. 나는 꼬치꼬치 더 캐묻고 싶어졌다. 아니 차라리 아까 들은 얘기를 다 동원해서라도 추궁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마음 한구석에서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한 배짱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뭔가 더 큰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말을 아껴야겠다는 직 감이 들었던 것이다. 일부러 말을 돌리던 척,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온천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이 얄팍한 커튼 너머로 비쳐 보았다. "이런 곳...... 오늘 저말고 다른 사람하고도 언제 오신 적 있으세요?" 아마도 내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면 최마담이 당황해 하는 표정이 보였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건만...... 다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약간 멈칫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색함을 깼다. "아...... 아니. 전에 온 적은 있지만...... 그저 목욕하러 한 번 온 것 뿐이야. 애들하고...... 다른 사 람들하고는 온 적 없어. 누구랑 이 안에까지 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런가요...... 하는 뜻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정의 뜻이었다. 어느덧 내 마음속에 이 모든 일들의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아까 화장실에 숨어 있다 나왔을 때 불안하게 서성이던 최마담이 떠올랐다. 거기에다가 지금 들 은 대답들.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족탕. 이 호텔방, 모두가 그녀에게는 익숙하게 보였다. 그리고 더욱 내 머리 속을 아프게 울리 는 것은 아까 사내 중 한 명이 던지고 간 말이었다. 애 하나 잡는다- 씁쓸한 웃음이 치밀어 올랐 다.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더 이상 묻는다는 것도 소용없는 얘기였다. 어쨌든 확실한 건 그녀가 의도적으로 나란 놈을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그녀의 고백 처럼 젊은 시절에 하고 싶었던 근사한 대학생과의 연애에 대한 욕망인지 향수인지는 몰라도, 지금 은 나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그게 돈과 몸을 동원한 공세이기는 하나 무릎까지 끓으며 매달리는 것으 로 증명되고 있었다. 결코 마음이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비록 누군가가 나를 절실하게 원한 경우를 많이 겪어보지 못 한 나였지만, 이 순간에는 수많은 망설임이 찾아들고 있었다. 욕조 속에서 들여다본 그녀의 매끈하던 살이 덩어리지듯 눈앞에 보였다. 헐떡이며 내 하반신에 밀착되던 그녀의 아랫배와 그 언덕, 그 느낌이 아직도 내 몸을 훑는 것 같았다. 훌렁 던져진 가운 속에 보이던 풍만한 가슴, 뽀얀 삼각주 안에 언뜻 보이던...... 어쩌면 나는 진 작에 그녀의 전라 속에 파묻혔을 수도 있었으리라. "제발...... 자기 이리 와서 같이 누워. 나 조금 힘이 들어서 그래." 자기.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수작을 걸려는 뉘앙스였다. 드디어 나는 고민 끝에 몸을 일으켰다. 05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모든 신체기관이 나를 덮쳐왔다. "누, 누님......!" 내 말은 전혀 저항수단이 되지 못했다. 입술, 허리, 팔, 허벅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마담 이 나를 감아버렸다. 하도 동시다발적이라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내 가슴팍을 더듬었 다. 허리와 허리가 밀착되었다. 그녀의 한쪽 허벅지는 재빠른 동작으로 내 몸을 파고들었다. "아아...... 나를 그만 좀 애타게 해, 제발....." 헐떡이는 그 음성도 짧았다. 갑자기 막혀 버리는 내 입- 최마담의 입술이 순식간에 내 입술을 덮어온 것이다. 어어...... 그녀의 입술이 가득 벌어지며 내 입 속으로 혀를 들이밀더니 마구 내 입 속을 휘저었다. 불의의 기습에 놀라면서도, 엉겁결에 얽혀드는 내 혀. 거미, 하고 표현했었다. 그건 정말 그랬다. 집을 지을 땐 굼뜬 듯 보였다가, 먹이가 걸려들었을 때에 더 없이 날쌘 거미의 공격. 그 거미의 다리처럼 최마담의 사지는 내 오관을 무차별로 더듬어 댔다. 아찔했다. 헉, 하고 내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빠져나갔다. 내 허리께를 휘감은 그녀의 한 손은 밑으로 내려와 둔부를 쥐더니 거세게 끌어당겼던 것이다. 마치 그녀는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면밀히 연구한 사람 같았다. 몇 초 만에 나는 무장해제를 당한 병사처럼 되어버렸다. 안돼, 아직은...... 아직은 안 돼...... 라는 다급한 신호가 머리 속에서 울려 나왔지만 내 사지는 정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 창희가 먹은 것...... 뭔지 알아......? 그 쓰다던 술." 가쁘게 그녀가 속삭였다. "그거...... 쓸개주였어." 그랬구나. 역시 주도면밀한 최마담이다. 그런데도 기어이 이렇게 된 것이다. 그녀의 곁에 눕는다 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말이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비틀었다. "아, 안 돼. 싫어, 입 맞춰 줘......" 내 고개를 따라오려는 듯 그녀는 다급하게 입술을 더듬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 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오늘 밤 안으로 모든 일들을 매듭짓고플 따름이었다. "누, 누님...... 하,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 항거이자 확인을 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한마디라도 더하기 위해 서둘렀다. "아까 하신 말처럼...... 제가 누님이 원하는 대로하면 누님은 앞으로 절대 다시는 저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제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구요. 그 말...... 지킬 수 있으세요?" 나는 그녀의 목욕가운이 이미 헤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돌아눕자 허연 나신이 출렁 이며 마치 빛을 발하듯 드러났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앞으로 희창이와 보영이의 일, 다시는 얘기하지 않겠다구요. 그건...... 제가 해결하고 싶어요. 아니...... 보영이와 제가 해결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지만 내 말은 계속될 수 없었다. 그 푹신한 침대 속에서 솟아 나오듯, 하얀 두 팔이 내 얼 굴로 뻗어왔던 것이다. 다시 혀가 얽혀들었다. 그럴수록 자꾸만 나는 생각을 잃고 있었다. 시작처럼 갑작스럽게 최마담의 혀가 다시 빠져나가더니 곧이어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마주보았다. "고마워, 고마워, 동생......! 나 동생이 하라는 대로 뭐든지 할게, 정말, 정말이야!" 그녀의 눈물- 그것은 내 대답 하나로 애원에서 감사의 눈물로 바뀌고 있었다. "우선 오늘 일은 우리끼리만 아는 걸로...... 그렇게 해주세요."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이 내려다 보였다. "저...... 저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전....... 그 사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누님 말처럼 이번 한 번뿐이에요. 제게는...... 아셨죠?" "알아, 동생...... 난 동생에게 비밀을 지켜 줄 거야. 동생 애인에게도, 동생 친구들에게도...... 우리 ...... 하룻밤의 불장난이라고 해도 난 영원히 동생과의 오늘을 간직할 자신 있어. 여기는...... 여긴 우리밖에 없어. 아무도 모를 거야."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택을 해야만 했고, 이제 내 입은 꾹 다물어져야 했다. 한 번만, 한 번 만이라고 그녀가 말했었다. 기실 나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웠기에 그럴 수 있 었던 것이다.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설사 이번이 끝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름대로 이 최마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카드를 갖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모를, 그리고 안다 해고 어쩌지 못할. 최마담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줘...... 나 씻고 올게." 그녀는 벗은 몸 그대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랬다. 바로 그런 것이 잠자리 예의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아는 것이었다. 그런 것만 보아도 저 누님이 어떤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거리낌없이 온몸을 던져 대던 유혹, 현란한 기교에 묻어나는 익숙함, 저 능숙한 행동거지들...... 거기에 아까 그 사내들의 모습이 겹쳐져 흐릿한 하나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후우, 나는 그녀가 욕실로 사라지자 침대 위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마침내 이렇게 예정된 결 과로 흐르는 것인가. 봉사...... 그것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복잡한 우여곡절 거치기는 했어요, 이제 남은 것은 나의, 그녀를 위한 나의 봉사뿐이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쩌다 내 몸뚱이 하나가 저 누님에게는 이다지도 소중한 것이 되었단 말 인가. 어이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아니 었다. 갖은 고생을 겪은 최마담- 어찌 보면 그 밑바닥 삶에서 꿈꾸고 간직해온 단 하나의 소원을, 지 금 나를 통해서 이루려는 게 아닌가. 어찌 보면 이 비밀스런 사건, 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서로가 나누게 되는 것은...... 나보다는 그 녀쪽의 의미가 훨씬 큰 것일 게다. 그 밑에 깔린 의도가 탁한 것이기는 할지라도.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나는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오늘뿐이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은 오늘로써 마지막이다. 나는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신경을 집중하려 애썼다. 첫 번째는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졌던 일이었다. 두 번째는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서였다. 그러니 세 번째만큼은 내가 원하는 기회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눈물까지 흘리면서 나를 원하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하루 종일 내 곁에서 스스 럼없는 모습으로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하물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수없이 많은 남자를 거쳤을 저 노처녀 술집마담도 지금 은 나에 대한 순정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 내가 순간적으로 정리한 생각이 었다. 어느덧 잠시 동안의 물소리가 그치고, 누님이 돌아오고 있었다. 희미한 욕실 불빛에 비친 그녀 를 보니 타월 하나만을 몸에 감은 채였다. 이미 그녀에게서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색기 어린 얼굴이 있을 뿐, 엉거주춤 나 는 침대 위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다음 순가 나는 황홀한 경치를 마주했다. 이제는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스르르 소리없이 바 닥으로 떨어진 타월. 마치 후광처럼 열려진 화장실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빛 한가운데에 누님 이 있었다. 그 뽀얀 나신이 내 눈앞에 숨김없이 드러난 것이다. "동생...... 동생이 원하는 걸 말해 줘. 난 지금부터 동생 거야." 야릇한 톤으로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에는 앞에 펼쳐 진 광경이 너무 아까웠다. 정말 넋이 나갈 만한 광경이었다. 풍만한 곡선의 젖가슴 아래로 이어지 는 우윳빛 살결, 그 매끄러운 하복부의 선...... "좋아. 그럼, 누님이 자기를 위해서 봉사할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침대위로 올라온 누님- 그녀는 너무나 도발적인 자세를 보였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 몸 위로 다가서고 있었다. 얼결에 내 허리가 뒤로 넘어갔다. 최마담은 그렇게 내 몸을 공략해왔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내게 들이미는 그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누님의 입술과 혀 끝은 다시 한 번 내 입술을 애타게 더듬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손이 다가와 내 옷의 단추를 하나씩 끌러갔다. 허리춤에서 상의를 끄집어내곤 손수 그것을 벗겨냈다. 능숙한 손놀림에 의해 나의 상체는 금세 벌거숭이가 되었으나, 갖은 기교를 부리는 그녀의 입술 과 혀로 인해 아뜩해진 나는 그런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하......!" 입술이 떼어지며, 가쁜 탄성을 내지르는 누님, 다시 고개를 숙인 그녀는 이번에는 내 발가벗겨 진 상체 위에 입술을 갖다댔다. 엇, 나 역시도 외마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래쪽에서는 또 하나의 작업이 벌어지고 있 었다. 열심히 혀를 놀리면서도 그녀의 손을 재빠르게 내 허리띠와 바지를 풀어 헤쳤다. 그것만으 로도 머리 속에 피가 몰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내 가슴팍에서 멀어지고...... 그 손길은 내 바지자락을 한꺼번에 벗겨 내 리고 있었다. "창희...... 아아!" 탄성이 반복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동작을 돕기 위해 하반신을 들어 올려야 했다. 나의 중심부는 이미 그 정도로도 충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 누, 누님......!" 다짜고짜, 예고도 없이 그녀의 수그린 얼굴이 아래쪽을 향했다. 그녀의 뺨이 닿는 걸 느꼈다. 갈수록 그 안은 뜨거워지는데, 최마담은 그 견딜 수 없는 열기를 자신의 맨얼굴로 식히려는 듯 숨가쁘게 서둘렀다. 다시 한 번 내 하체 위로 다가온 그녀의 손에 의해 흘러내리듯 마지막 보루도 벗겨져 버렸다. "정말...... 자기!" 그녀의 감탄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녀의 코앞에 가릴 것 없이 드러난 또 하나의 나. 그리고 이어서...... 나는 물끄러미 넋이 나가 바라보고만 있던 시선을 거두어야만 했다. 당연히, 가려짐에 의해서. "아......!"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지만, 나는 온 신경이 집중된 저 아래 하복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 보 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가쁜 숨만을 거듭 내쉴 뿐이었다. 봉사. 철저한 누님의 봉사였다. 또 한 번 까무러칠 것 같은 아뜩함이 밀려왔다. 달래듯,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자꾸만 더 깊숙한 곳을 향해 전진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는 것도 모자라 아랫입술까지 세게 깨물어야 했다. 머리통이 온통 하얘지 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지금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최마담이었다. 내 흥분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관자놀이의 맥박은 물론이요, 더 없이 뻐근하게 통증을 느끼는 부위도 있었다. "그, 그만...... 그만요......!" 그 아뜩한 와중에서, 나는 가까스로 허리를 틀 수 있었다. 민망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전 에 내 머리 속이 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헐떡이며 그녀의 숨 고르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그보다도 더 가쁜 숨을 몰아쉬 어야 했다. 간신히 정신이 들까 말까인데, 한번 불붙기 시작한 누님은 도무지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상체를 내 몸 위로 끌어올렸다. 내 얼굴에 뭉클한 촉감이 닿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어서, 창희......!" 내 머리 위에서 아련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고삐가 풀린 셈이었다. 거절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간청해서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목마른 샘을 찾듯이 허 겁지겁 계곡에 얼굴을 묻었다. 내 입술 안에 다다른 그 정점, 나는 한껏 그 곳을 입안에 물었다. 마치 짜낼 듯이. 누님은 내 고개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듯 자신의 젖가슴을 내 얼굴에 문질러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녀의 이 아찔한 계곡을 처음 들여다보았던 순간을 상기했다. 그 단란주점 카운터위로 쏟아지듯 얹혀지던...... 단지 유륜 주위만을 배회하는데도, 그녀의 교성은 거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아뜩한 기성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최마담이 거세게 내 어깨를 떠밀었다. 자신이 직접 행동을 취하려는 보양이었 다. 이럴 수가...... 나는 그 순간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마치 철벅거리는 웅덩이 같은 느낌이 내 국부에 전해졌던 것이다. 미끄러지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이 어 울렸다. 색기, 진짜 색기로 가득 찬 누님이었다. 밝힌다, 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나는 지금에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속칭 요분절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능숙한 몸짓이었다. 요동하는 그녀의 둔부에서 는, 실제로 요란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내 코앞에는 두 반원이 리드미컬하게 상하로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 초현실적인 광경- 그에 따 라 순식간에 내 인내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가뜩이나 그녀의 입술과 혀에 농락 당한 뒤였으니, 나는 금세 절정을 맞이하려 했던 것이다. "아, 그, 그만......!" 그건 차라리 구조신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비명 같은 최마담의 목소리에 흠칫 귀 가가 째지고 말았다. "안 돼, 안 돼! 아직 안 된단 말야, 이 병신아......!" 그런 나락의 한복판에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말이다. 그녀의 실체가 이 숨김없이 적나라 한 공간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문턱에서 멈출 수 있 었다. 문득 눈을 뜨자 색기에 젖은 눈동자로 내 눈을 들여다보는 최마담의 얼굴이 보였다. 내 당황한 표정을 읽었을까, 다소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쓰던 그녀가 두 손으로 내 뺨을 쥐며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조금만 더......! 이 바보야 아직 아니야!"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내 얼굴 위로 오더니, 또 한 번 내 혀를 깊이 빨아들였다. "누, 누님......! 저, 저는......!" "참아, 참아 줘. 나, 조금 더 동생을 몸속에 간직하고 싶어서 그래......!" 자기로서도 자신의 망측한 반응이 무안했는지, 재빨리 말투를 바꾸었다. 꼭 자신의 실수를 황급 히 감추는 사람처럼. 그녀는 남자 쪽 상황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느껴지는 한 가지 생각. 참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 글거리는 욕구와 욕심이었던 것이다. "천천히...... 아아......" 나긋하게 내 손을 맞잡아 자신의 땀에 젖은 젖무덤 의에 얹더니, 이내 그녀의 무릎을 세웠다. 그렇다면- 내겐 이제 한 가지 일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다급히 그녀의 허리가 젖혀지면서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내 손을 맞잡은 그녀의 손이 나는 일 으켜 세웠다. 아뜩한 그녀의 외침이 가쁘게 재촉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그녀의 몸을 타고 누를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06 먼동이 터올 때까지도, 자는 척 했어도 나는 아주 잠깐이라도 잠들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그래 야 했다. 최마담은 자신이 자초한 격렬했던 육체적 피로 탓으로 내 곁에서 깊은 숨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침대보 속은 아직도 축축이 젖어 있을 정도였다. 분명 뭔가를 깨닫고 있었기에 잠이 들어선 안 되었다. 일견 착잡한 머리 속이긴 해도 오히려 새 삼스러워지는 생각들, 그것이 내 머리 속을 또렷하게 만들고 있었다. 뼈마디가 욱신거릴 지경으로 피곤이 몰려왔다. 마치 머리통속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전부 빠져 나가 소진된 듯, 텅 빈깡통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쓸개주라는 정력제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뭔가 뿌듯한 감정마저 생기고 있었다. 그 계기가 어쨌건 간에, 내가 선택했던 것이었으니까. 분명 어제 나는 이 방문을 박차고 떠날 수도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얼마든 거부할 수 있었 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같이 일어나 그녀와 함께 편히 돌아갈 생각도 안 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토록 나를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했던 저 누님의 얼굴을, 그 욕망의 밤이 지난 후에도 바라볼 용기는 내게 없었다. 내 결정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정녕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점이 나 를 두렵게 만들었다. 본의든 아니든 내가 뿌린 유혹을 탐한 것은 내가 아닌 그녀의 까닭이었다. 만약 누군가 하룻밤의 쾌락을 찾은 이가 있어, 지금 이 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묻고 싶다. 아니 충고하고 싶다.. 한차례의 폭풍우로 상대방이 그 욕구를 채운 직후에, 불을 켜고 그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고. 자신의 본능만을 쫓아 따른 후의 만족감 어린 그 얼굴을...... 잠든 최마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어제 정사가 끝난 후 그녀의 얼굴을 보았었다. 까놓고 얘기해 그건 내게 충격이었다. 스스로의 욕구를 해소한 후에 변모하는 얼굴, 그것이 얼 마나 추한지 나는 목격했던 것이다. 그 상대에게도 내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더욱 두려운 것은 그것이기에 나는 한껏 인기 척을 죽이며 침대 위에서 내려섰다. 다리가 후들거릴 단계는 아니었지만, 일어설 때 핑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옷가지들은 여기저기 침대 주변 방구석에 흩어져 있었고, 새로 다림질했던 터라 그다지 구김 이 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 속옷 중 하나- 팬티-가 최마담의 엉덩이 한쪽에 눌려 있어 빼내기 가 힘들었을 뿐, 나머지는 별반 이상이 없었다. 벌게진 눈으로 하품을 참으며, 나는 옷장에서 그녀의 핸드백을 조심스레 꺼내 소리가 나지 않도 록 뒤졌다. 잔돈 몇 장. 그게 내가 찾는 전부였으나 잠시 망설이던 나는 물건 하나를 더 끄집어냈다. 구리 고 나서 거울 앞에 섰다. 언젠가 영화나 소설에서 본 장면 같았다. '누님께. 제가 어제는...... 사실 내일부터 시험기간이라. 죄송합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오늘은 올라가자마자 도서관에 갈 거예요. 아마 다음 주까지 그럴 것 같습니다. 집에는 늦게 들어 갈 거구요. 푹 쉬었다 올라오세요. 창희' 립스틱으로 또박또박 거울 위에 글씨를 적은 뒤, 나는 발소리를 죽여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약간 의 차비를 빌린다는 말은 적지 않았다. 행여 또다른 빌미를 저 누님에게 제공할 필요는 없는 데 다가, 아마 그 정도의 돈은 그녀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액수이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나는 꿈이라도 꾸는지 찡그린 얼굴로 누운 최마담에게 무언의 말을 건넸다. '이제 알 것 같아요, 누님' 이란 말을. 이제 나로서는 저 최마담이 내게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할 무기가 있었다. 아직도 부 지기수의 의혹들이 따르기는 했으나 그만하면 내게도 고민한 대가는 되었다. 거짓이 있다면, 그녀가 나를 그저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면, 더는 그것이 반복되지 못하도 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정면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호텔 프런트 직원은, 어제와 다름없이 친절한 자세로 내게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문제 가 된 것은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길이었는데, 종업원들은 한두 시간 후 떠날 호텔 셔틀버스 를 이용하라 권했지만 혹 그 사이에 최마담이 깨어나 찾아 나서기라도 할까 봐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만 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자취방에 도착하면 무조건 잠이나 자둘 요량이었다. 설마 학교에 간다고 했으니 최마담이 전화 를 걸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당장 내일부터 나는 집에도 밤이 이슥해서나 돌아올 형편이었으니 그러려고 해도 그녀 로서는 불가능하리라. 물론 나는 그녀가 원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는지 이곳에 올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 렇기에 일단 다음 주부터 시작될 학교 시험만으로도 은근히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처지가 묘한지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나만의 계획은 일주일 뒤면 자연스레 처리될 것이었다. 애정의 트라이앵글 07 시험기간에는 너나없이 바쁘게 보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 시험은 모두 주 중반 이후 에나 잡혀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올라온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자취방 안에서 곯아떨어질 수 있었다. 하긴 그 전주부터 일찌감치 시험준비를 해왔으니 굳이 말하자면 마지막 총정리만 남은 것 이기도 했고, 뭐 부모님이 보신다면 야 실망스러우시겠지만 그거야 실로 치열했던 정사의 후유증 이므로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예측대로 최마담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니 연락이 있었다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 든 나는 연이틀 밤잠을 설쳤던지라 누가 업어갔다 해도 몰랐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실수는 다음날 있었다. 월요일, 일찍 일어나기로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자명종 소리도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첫 수업이 시작됐을 시간, 나는 후닥닥 몸을 일으켜 학 교에 나가야 했다. 바로 최마담과의 주말여행, 전말 느꼈던 내 아련한 마음....... 나는 그것을 풀고 싶었다. 선영이 누나- 늦잠까지 허용한 내가 눈을 뜨자마자 떠올린 건 그녀의 이름이었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있었고, 또 반갑게 수줍은 대화도 나눌 수 있 었는데...... 확실히 그날은 뭔가가 잘못된 날이었다. 그랬으면서도 최마담과 엎치락뒤치락 우여곡절을 치르 느라 그 사실을 잊고 있던 내가 스스로 안쓰러웠다. 여자의 마음이란 도저히 예상불능이란 말을 그 동안 숱하게 들어오긴 했지만, 그날 선영이 누나 의 태도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 사건은 그런 흔하디 흔한 말로 치부하기에는 너 무나 설명이 부족했다. 그날 선영이 누나가 웃어 보이기는 했었다. 비록 그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우울한 낯빛을 보 이기는 했었지만, 그날만큼은 날 위해 웃어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끝이다. 정녕 내가 뒤쫓아가 꺼냈던 이야기들, 내가 그간 궁금했던 그 속사정들 이 누나에게 그다지도 힘든 이야기였던가. 쫓기듯 피하던 그녀, 그녀와 내가 함께 밤을 보내고 나왔을 때 내게 고맙다며 해주던 말...... 만 약 그게 내 잘못이라면 나로서는 어쨌든 사과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선영이 누나에게 는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마 학교 안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터였다. 바쁘다고는 했지만 학교에 안 나왔을 리는 없을 터, 그녀를 찾으려면 서둘러 그녀가 교내에 머물고 있을 동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고학년일수록 전공수업이 많으니 시험도 당연히 전공을 중심으로 치른다. 그리고 대부분 전공과 목은 일정에 상관없이 교수님들이 일반적으로 통고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쩌면 아직 수업을 계속 하는 시간도 남아있을 것 같았다. 월요일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 처음 호기심을 갖게 된 한 사건- 우연히 그녀의 치마 속을 훔쳐 보고, 내 다친 뒤통수를 그녀가 살펴주던 날 - 도 월요일이었다. 아예 이번에는 선배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고 다니기로 했다,. 따라서 지난번처럼 학회실만 막 연히 뒤질 게 아니라 학생회실부터 시작하여 선배들이 있을 만한 장소나 강의실을 모두 이잡듯이 뒤져나갈 생각이었다. "선영이? 글쎄...... 모르겠는데?" "응, 이 수업듣기는 들어. 어...... 그런데 오늘은 안 나온 모양이네?" 그러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들이는 대답은 고작 이런 것들 뿐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를 알리고 다닌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워낙 조용하고 그림자 같은 성격 탓일까. 심지어는 선영이 누나의 여자 동기들마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통 안 보이잖아?" "전에 봤을 때 어디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아 참, 교수님 도와 일한다고 했었지. 아마?" 제길헐,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얘기들이었다. 그럼 도대체 선영이 누나는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분명히 듣는 강의인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일부러 수업에 빠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 프 로젝튼가 학술교륜가 하는 일도 지난주에 끝났다고 했는데. 계속 어두운 먹구름 같은 예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녀가 학교에 없다는 결 론을 내리고 나서야 허탈하게 학생회실로 돌아왔다. "얌마, 너 어떻게 된 거냐?" 학생회실에 들어선 나를 맞이한 건 희창이였다. "으응...... 나?" "그래, 왜 요새 안 보여? 자취방에 전화해도 안 받고, 그렇다고 집에 전화해도 짱이 너 안 들렀 다고 하시던데?" 그렇지. 지난 반 달 동안 부모님께 들르지도 못했다. "설마, 지금 학교에 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냐......" 기운 빠진 내 대답에 희창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나는 만사가 귀찮아 인상을 찌푸 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레, 너 어디 아파?" 후, 나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어디 봐, 아닌 것 같은데?" 호들갑스럽게 희창이는 내 이마에 손바닥가지 얹었다. 멋쩍어진 내가 짐짓 손을 뿌리치자 그는 더욱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열은 없고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얼굴이 아예 반쪽인데." 나는 고개를 돌리며 손을 저었다. 내심 뜨금하기도 했다. 아직도...... 꼭 지난 주말의 흔적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리 속은 선영이 누나에 대한 생각으로 꽉차 있으니 더 욱 그랬으리라. 녀석은 내 썰렁한 반응을 보고는 한층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짝, 무릎을 쳤다. "아항, 알겠다!" 뭘 알겠다는 건지, 그제야 녀석을 흘끗 바라보자 그는 주변 사람들을 싹 둘러보고는 슬그머니 내 쪽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너, 임마 오늘 그거지?" "그거라니......?" "있잖아, 그거......" 희창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 모양으로 무어라 주절거렸다. "뭐?" 녀석을 다시 한 번 눈치를 보며 잽싸게 귀옛말을 속삭였다. 생. 리. 그의 입모양은 그것이었다. "뭐야, 새꺄!" 종내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야 했다. "맞잖아, 짱이 너 그거 아냐? 그럼 왜 그러냐, 꼭 바람맞은 놈처럼." 다시금 그는 손가락을 딱 퉁겼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혹시 너 싸웠냐?" "싸워? 내가 누구랑 싸워." "누구긴 누구야. 걔지...... 예지." "아냐, 쨔샤!"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 목소리가 컸던지 학회실 안의 선배들이 일제히 나 를 돌아보았다. "이짱,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헤헤, 농담이다, 농담. 뭘 그런 걸 갖고...... 그러니까 거꾸로 더 그런 것 같잖아. 진짜 사랑싸움 한 것같이......" 푸우,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이 꺼낸 그 예지 이야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일일 것이다. 일주일 전 보영이가 실은 자기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왔던 것이고, 더군다나 그를 따돌리고 내 자취방까지 쫓아왔다는 것을. 이제 보니 녀석과도 며칠만에 얼굴을 맞대는 것이다. 녀석을 봤던 게 그날이었으므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희창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째야 하나. 갑자기 자리에도 없는 보영이가 원망스러워졌다. 어째서 그녀는 나를 이렇게 곤란 한 지경으로 몰아넣은 걸까. 분명 희창이가 나보다 돈도 많고, 외모도 뛰어난 데 말이다. 머리도 아파오고 난처하기도 해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는데 희창이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왜?" 실눈을 뜨고 돌아보자, 녀석은 딴은 퍽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있잖냐, 너 지금 별일 없지?" "음...... 그렇기는 한데, 뭐 할 얘기라도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런 건 아니고...... 니가 들으면 재미있을 얘기다." 글쎄다. 무슨 얘기일까? 그러자 나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맞아. 생각해 보니 나도 너한테 부탁할 게 있다." 이 얘기를 빨리 꺼내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혹시나 내가 계획한 날 녀석에게 다른 일이라도 생 기면 곤란해질 문제였다. 나는 내친김에 먼저 얘기를 시작했다. "너...... 시험 끝나구 차 좀 빌리자." "엉? 내 차?" "그래, 아...... 걱정하지 마. 내가 몰겠다는 게 아니고 너도 별일 없으면 도와주고." 희창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짐 옮길 일이 좀 있어. 그래서 너도......" "짐? 뭐 이사하고 갈 거야. 아항, 알겠다. 너 입주과외 들기로 했구나!" 그렇다 내 계획이란 그것이었다. 일단 며칠만 와서 지내라고 한 현주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 기로 한 것이다. 토요일 밤, 호텔 방에서 밤을 새며 결심한 사항이었다. 우선 최마담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원 했든 원하지 않았던, 그려나 내 전화번호를 알고 또 자취방까지 들락거리는 상황이 내게는 큰 짐 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언제 그녀가 불쑥 들이닥쳐 용돈이라며 수표를 던져주거나, 나를 노리개 취급하듯 맘대로 굴 게 놔둘 수는 없었다. 비록 지금은 보영이가 지난번 예지와 마주쳤던 날, 나의 관계를 단념했다고, 또 자기가 희창이 와 내 일을 해결하겠다 고는 했지만 그건 그녀와 나 사이의 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희창이의 눈 치를 보니 그다지 진전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희창이와 나 사이의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알친구인 이 녀석, 이 녀석과의 문제는 남자 대 남자의 문제 아닌가. 어쨌든 그러기 위해선 맨 먼저 최마담과의 관계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였다. 근사한 스포츠카를 이삿짐 차로 대용하는 것이 미안하기는 했지만, 정 안되면 며칠간 왔다갔다 하기로 했으니 자취생인 내게 대단한 짐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럼...... 언제?" "일단 다음 주말일고는 했는데, 시험 끝나는 대로 곧장 갈까 해." "흐음...... 그렇단 말이지." 희창이로서는 만만한 아지트가 사라지는 판국이니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의 그러한 얼굴 표정을 읽으며 화제를 바꾸기 위해 희창이가 하려던 말을 되물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네 얘기는 뭐냐?" "내 예기...... 아, 그건...... 야.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걸. 왜 그 얘 기억하지? 안다......" 그때였다. 학회실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나는 무심결에 그것으로 시선이 갔고, 그 순간- 내 시야에 언뜻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학회실 문 옆의...... 08 아차차, 내가 왜 그걸 볼 생각을 안 한 걸까. 그건 학생회실의 화이트 보드였다. 언제나 과 사람 들이 뭔가를 적고, 사람을 찾고, 또 약속을 잡는 그것 말이다. 하도 딴 생각에 잠겨 있느라 무의식중에도 그걸 쳐다 볼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는 아니나 달라 한 구석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메모가 있었다. '창희, 4시에서 5시 사이. XX호프' 장소와 시간만을 적은 간략한 내용, 순식간에 내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선영이 누나, 누나가 적어놓은 것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저번에 그렇게 뜬금 없이 사라졌으니, 어쩌면 미안해서라도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시간을 보니 벌서 네시 반, 나는 그런 기대로 홱 고개를 돌려 희창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저걸 적었느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아니 하마터면 내 입에서 선영이 누나가 적은 거야? 하는 물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깜빡하고 있었네...... 너한테 말해 준다는 걸." 녀석은 내 기대감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전혀 실망스런 대답을 내놓았 다. "정호선배야." 정호선배? 배정호? "몰라? 정호선배?" 모를 리가 있느랴. 그런데 왜 그가 나를 찾는 거지- 희창이는 그런 내 의문점까지 알아서 답해 주었다. "모르겠어. 아까 나 수업 끝나고 들어왔는데 불쑥 너 어디 있느냐고 묻더라. 모른가도 그랬더니 적어 놓고 가던 걸...... 너 만나면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지난번 우연히 선영이 누나와 예지와, 모두가 한꺼번에 마주친 날이 기 억났다. 행여 그날 못 마신 술을 사준다는 것은 아닐 테고...... 최근에는 지난주 교수님을 쫓아간 술자리 에서 잠시 부딪친 것 외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나를 호출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희창이도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어쨌든 가봐라. 급하게 찾는 것 같았어." 어쨌은 그 바람에 희창이가 할 얘기가 잇다는 것도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끼이익...... 나는 지정된 그 호프집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으나 실내는 어둠 침침, 조용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내 등 뒤 구석에서 정호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여기 있다!" "어...... 선배님." 그는 가장 깊숙한 곳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내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는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나는 바라보았다. "수업은 다 끝난 거냐?" "예...... 예." 급할 것이 없는지라 느릿느릿 나타난 나이건만 그는 그런 나를 탓할 생각은 없는지 그저 담배 연기만 피워올렸다. "거기 앉아라!" 엉거주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대뜸 이런 말부터 꺼냈다. "술...... 마셔도 되지?" "술이요? 뭐 별로......" 별반 거절할 이유가 없는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일까, 나한테 수를 권하다니. 정호선배의 까무잡잡한 얼굴에 신중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 무슨 일이세요?" "어...... 너랑...... 너랑 얘기 좀 할 게 있어서 불렀다." 나랑 얘기를?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묵묵히 내게 맥주를 따라주었다.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나는 일단 손을 모아 그 잔을 받고 그에게도 잔을 권했다. "아니, 됐다. 나는 내가 따라 마실게." 이상하다 내가 따르는 술을 사양하는 정호선배. 그는 자작한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무, 무슨 일이신데......" 내가 다시 묻자 후우, 그는 한숨을 쉬고서야 용건을 꺼냈다. "우리 툭 터놓고 얘기 좀 하자." 툭 터놓고?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더니, 뒤따르는 말에 나는 적이 놀라야만 했다. "남자 대...... 남자로서." 예? 남자 대 남자로? 갑자기 웬......?" 비록 같은 과 한 학번 위 선배이기는 했지만, 워낙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그간 나와 는 별 교류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 대 남자로 할 말이 있다? 당연히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얘기는 들어봐야 했다. "예, 그, 그러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신데......" 계속 담배연기만 내뿜던 그는 피식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후훗...... 좋아, 후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자존심 상하기도 하지만......" 자존심?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선후배 관계까지 들먹이는 건가. 나는 앙연 긴장을 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후아, 퍽 어려운 이야기인 듯 정호선배는 심호흡을 가다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대경실 색할 질문을 내놓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너...... 박선영이랑 무슨 관계냐?" 박선영? 선영이 누나? 이게 무슨 얘기냐. "사나이끼리, 또 형으로서 묻는 거다. 너 내 동기 선영이랑 어떤 사이냐?" 나는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 사람이 그걸 왜 내게 묻는 걸까? "말해 봐. 너하고 걔랑 사귀니?" 이건 또 웬......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갑자기 무, 무슨 말씀인지......" "이유는 알 것 없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창희 너, 선영이 좋아해?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남자 와 여자로서 말이야." 그는 목이 타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 요새 보아 하니 너랑 선영이 따로 학교 밖에서 만나는 모양이더라. 다 알고서 묻는 거니 까, 거짓말하지 말고......" 엉? 내가 누나와 따로 만난다고? 정호선배는 마치 피의자를 심문하듯 나를 다그쳤다. 나는 그때 까지 벌려진 턱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냐? 무슨 사이야, 너희 둘?" 따로 만났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비록 요 며칠새 얼굴 보는 게 힘들기는 했어도, 몇 주전만 해도 따로 술 한잔은 물론이요, 같이 외박가지 했으며...... 바로 지난주에는 회식자리에 서 빠져 나와 단둘이 커피도 마셨으니까. 그러나 그녀와 나, 누나와 내가 무슨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 라, 이런 질문이 어째서 정호선배 입에서 나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왜 이 선배가- 아하, 나는 그제서야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닌 모 양이었다. 요새 들어 내가 선영이 누나와 가까운 사이라는 눈치 빠른 과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 는 일, 하지만 이 선배는 필시...... 무언가 선영이 누나와 자신을 결부시켜 질문하고 잇는 것 같았 다. 나는 허둥대며 대꾸했다. "아, 아무 관계 아니예요...... 그, 그냥 누나가 잘해줘서...... 그리고, 우린 따로 만난 적도......"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일단은 부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 말에 은근히 눈꼬 리를 치켜올렸다. "그래?" 나는 엉겁결에 강한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의 말투는 영 미심쩍다는 톤이 었다. "이봐, 창희 너...... 내 말 못 알아들었냐?" "예......?" "내가 그랬잖아, 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 속이려 들지 말라고." "소, 속이려 들다니요?" "후...... 너 언젠가 학교 앞에서 선영이랑 술 마시러 그 골목에 가지 않았어?" 흐익,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경악했다. 이건 또 뭔 얘기인가. 그는 이제 제법 오래된, 선영이 눈와 내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 바로 그날 밤의 술자리를 말하고 있었다. "아, 아녜요 그, 그건...... 그날은 그냥 선영이 누나랑 우연히......" 피식, 그 말에 정호선배가 비웃는 눈초리를 보냈다. "또 지난주 금요일이던가...... 그때가 1차 끝나고 너희끼리 따로 나갔었잖아." 금요일? 바로 자신이 중간에 은근슬쩍 나타났던 그날을 말하는 것이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치 나와 선영이 누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한눈에 꿰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걸 이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걸까. 도저히 앞 뒤 판단이 되지 않아 머리 속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되살려 보았다. 낯빛이 바뀌던 누나, 황급히 술자리를 빠져 나오고...... 그리 고 그녀를 쫓아갔을 때에 뭔가 도망치듯 허둥거렸었다...... 순간 등줄기에 싸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혹시나...... 정호선배, 이 사람이 선 영이 누나를 좋아하는 관계?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다? 그들 사이에 내가 본의 아니게 끼여 들어 서? "시치미 떼지 마라. 너희들 학생회실 안에서 그렇고 그런 모습 보였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깐. 그랬다며...... 너희 둘 아침부터 껴안고서......" 학생회실? ...... 정호선배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까 하는 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아주 차가운 것이 내 가슴속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아, 마침내 나는 실마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으니- 예지, 예지였 다! 난 틀림없이 기억하고 잇다. 그 나를 좋아한다는 친구 얘기를 할 적에...... 뭐라고 했었나. 그 친 구가 내 머리를 간호해 주던 선영이 누나를 착각해서, 나는 안아주는 게 아니었냐고 물었다. 둘이서 밥을 먹을 때엔 또 뭐라고 했었나. 나와 그 누나가 술마시러 가는 걸 누가 봤다고, 그녀 에 대해선 신경 끄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까지 했었다! 앞 뒤 사정을 따져보기도 전에 그녀에 대한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 얘기들은 분명 예지가 내게 귀띔했던, 그녀만 알고 있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 모든 얘기를 여기 이 정호선배가 알고 있다- 이 사실은 예지와 이 선배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명확한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얘기를 반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편이 발뺌을 하는 데 좋을 성 싶었기 때문이다. "에, 에이...... 아, 아녜요. 커피숍에 갔던 건 사실이지만, 그...... 학회실 일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때는 제가 머리에 혹이 나서 선영이 누나가 봐주느라 그런 거죠. 다들 아는 얘긴데......"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나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투른 연기지만 나는 신빙성을 갖추기위해 제법 별 일 아니라는 투로 헛웃음마저 곁들였다. "그리고 술을 마신 건...... 저뿐 아니라 희창이도 합석했었어요. 그건 희창이한테 확인해 보셔 도......" 계속되는 나의 부인에 묘하게 얼굴을 찡그리는 정호선배.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그도 아마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내게 허점을 보이고 말았다. "정말이냐? 내가 듣기로는...... 지현이 얘기하고는 틀린데?" 09 지현이,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이름이다. 꿀꺽,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예지가 그랬다면 별반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대체 누가 그런 얘 기를 한 겁니까?'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수였을까, 정호선배는 내게 기 대하지 않은 대답까지 해준 셈이었다. 지현이, 김.지.현. 이제야 그 모든 궁금증이 풀어졌다. 예지가 분명히 얘기했었다. 자기의 친한 친구가 나를 보았노라고. 그랬구나. 그 미지의 주인공이란 다름 아닌 지현이었던 것이다. 그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전 혀 엉뚱하게도 정호선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큰 키에,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는, 우리 과 내에선 그런 대로 잘 노는 여학생 축에 속하는 동기.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동안 예지가 말한 여자애가 바로 지현이었음을 알아차라지 못한 데는 그 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딴은 잘 나가던 그 여자애가 지금은 휴학 중이었으니까. 그것도 바로 이번 학기부터. 예상 밖이었다. 지현이는 예지와는 모든 면에서 반대인 여자였다. 자그맣고 귀여운 체구인 예지 에 반해 한여름에도 부츠를 신는 늘씬함을 자랑했었고, 차분하고 순진한 예지에 비해 진한 화장에 약간은 공주병 증세를 갖고 있는 여자애가 바로 그녀, 지현이였으므로. 그리고 예지의 이야기로는 분명 그날 선영이 누나와 나를 훔쳐본 그 여학생이 나를 좋아하고 있 다고 했는데...... 그럼 그녀가 나를 점찍어 두었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우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했다. "니 말 진짜야?" "예, 지, 진짜로요. 그, 그 술 마실 때도 제가 아니라 그 누나가 사준 거예요...... 그런데 저랑 사 귀다뇨?" 나의 대답에 꿈틀, 정호선배의 양미간이 움직였다. "그래?" 노려보던 눈길을 거두며, 그가 다시 담뱃불을 붙였다. "그, 근데...... 선배, 가, 갑자기 왜 제게 그런 말을?" 이번엔 내 차례였다. 선영이 누나가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길래 이 선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단 말인가? 이번에는 내가 칼을 휘두를 차례였다. "그건 내가 선영이랑...... 아,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다. 그건 니가 알 바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단지 그게 궁금해서 이리도 심각하게 불러다 놓고 얘기한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네 말은 그럼 선영이랑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니란 거냐?" 예, 그럼요- 나는 이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너 확실한 거지? 정말로 너하고 걔랑 아무 일 없는 거지?" 틀림없이 뭔가 있었다. 내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그의 속마음과 선영이 누나에 대한 관계다. 그 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선배가 내게 이런 다짐까지 요구할 필요가 없지 않나. "거,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그,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죠, 뭐. 적어도 아직까지는......" "적어도 아직까진?" 아차차, 말 실수. "하, 하하...... 그, 그런 게 아니라...... 혀, 형이 너무 진지하게 물으셔서 농담으로...... 그래요, 농 담, 농담이에요. 정호선배!" 실없이 웃으며 말꼬리를 흐리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괜히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기 야 내가 이렇게 나온다면 자기가 생각해도 꽤 심상치 않은 해프닝이니 말이다. 목이 탄 나는 거품이 다 사그라진 맥주 잔을 그 즈음에야 들고 벌컥거렸다. 가슴 한 구석에 심각한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대목에서 문득 큰 걸림돌에 부딪힌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 얘기는 어쩌면 선영이 누나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선영이 누나, 그녀와 이 선배와의 사이는 어떤 것이란 말인가. 얼마 전, 우연히 내가 마주친 그 경양식집에서 낮술도 불사하며 진지해 보이던 두 사람...... 그래 서, 그래서 그녀는 커피숍에서 나를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쫓기듯 불안해하던 그녀. 그럼 그게 정호 선배를 의식하고 있었던 얘기일까. 나 같아도 그런 장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으리라. 아무리 후배라 해도, 서로 좋아하고 있는 한 쪽에서 보기에 상대방이 특정한 사람과 술을 마시고 함께 커피숍을 들락거린다면- 좋게 생각될 리가 만무했다. 그럼 정녕 선영이 누나가 이 선배와 그런 사이란 말인가? 정호 선배가 그녀를 좋아하고, 어쩌면 그녀도? 몸속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생겨났다. 아니 마음속에 통증이 생기고 있었다. 속쓰린 신물 같은. "그, 근데 서, 선배......" 그렇다면 우선 이 어색한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뭔가 골똘한 표정인 정호 선배는 그제야 얼굴을 들고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저 지금 약속이...... 같이 안 나가실 거예요......?" "아니야. 난 혼자 생각 좀 할 게 있다. 바쁘면...... 먼저 일어나도 돼." 후유, 다행이다. 그는 내게 오직 선영이 누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만이 고작인 모양이었다.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뵐게요, 선배." 또 다시 침울한 표정인 그의 앞에서 짐짓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땅히 선영이 누나에게 그 이전부터 일종의 호기심 어린 호감 을 갖 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응당 더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도 없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그날 아침 여관방에서 내게, 그 원래의 남자친구인 졸업한 선배도 듣지 못한 자신의 비리까지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 그녀와 내가 진지하게 그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 또한 없었 다. 그러니 지금 내가 선영이 누나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참, 선영이한테는 이 얘기 하지 말아라......!" 돌아서는 내 뒤통수를 향해 정호 선배, 그가 빼먹지 않고 일침을 놓았다. 그의 말을 귓가로 흘 린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황급히 빠져 나올 뿐이었다. 그와 얼굴을 맞대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저 선배는 나와 선영이 누나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속속들이.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가슴 아픈 비밀들이 드러나지 않 았다는 것이 유일했다. 그녀의 비리와, 내가 해준 약속......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새롭게 발견했던 그 뭉클한 추억들. 그런 누나, 선영이 누나- 그런 그녀와 나 사이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오해하고 있다. 피식, 헛웃 음이 아련하게 튀어나왔다. 그 순간 내가 기억하는 건 내 팔을 베고 쌔근대는 숨소리를 내주던 평 화로운 그녀의 모습이었다. 아랫입술이 아프게 깨물리는 내 머리 속으로, 그날 보았던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심각하던 두 사람, 그들 둘이서 나눈 대화란 필경 서로의 속마음에 대한 고백 비슷한 것일 터. 하지만 분명 그 결과는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정호선배가 진 상을 파악하고자 이렇게 내 속을 떠볼 까닭이 없었다. 그렇기에 비로소 대충 정호 선배의 상황을 짐작한 내게는, 이제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아 있었다. 예지, 예지를 먼저 찾아야 했다. 선영이 누나는 만나려 온종일을 돌아 다녔어도 무소용이었지만, 예지는 그렇지가 않다. 어느 구석엔가 그녀의 연락처가 있으리라. 제일 먼저 확인 가능한 것은 선영이 누나와 정호 선 배의 관계가 아니었으니, 필경 정호선배가 저 정도로 나와 선영이 누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예지도 정호 선배와 그만큼의 밀접함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정호 선배는 내가 물었을 때 한사코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뻔한 일, 그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알아야겠다. 그게 내 다짐이었다. 기분이 무척 나빠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입에 올린다는 자체가 달가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0 한걸음에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대뜸 전화기부터 집어들었다. 예지의 전화번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집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전화를 받는 쪽은 그녀가 말하던 새엄마 라는 분인 모양이었다. "저...... 그럼 창희라고 하는 과 동기인데요, 늦어도 좋으니 꼭 좀 전화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중요한 얘기라서 그러는데...... 죄송하지만 꼭 부탁 드리겠습니다." 상냥한 그 목소리에, 나는 재삼 당부를 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그만큼 내게는 이 사안이 중대 했다. 어떻게든 예지에게 사실을 알아낼 작정이었다. 대체 정호 선배와 선영이 누나가 무슨 관련 이 있으며, 또 그녀 자신과 지현이란 그 여자애는 어떤 관계인가를. 선영이 누나.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초저녁인데, 설마 내가 찾지 못한 새에 학교 근처 에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가에게 전화로 물어 물어 그 누나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 면 소문이 퍼질 수도 있고...... 정호선배, 그의 귀에 그 말이 들어갈 수도 있다. 정호선배, 그와 선영이 누나는 무슨 관계일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까 그는 그런 말을 내게 가리지 않고 해댄 걸까. 몇 주 전 그녀가 정호선배를 홀로 두고 일어설 때, 그 순간 나를 보며 짓던 표정이 기억났다. 간절했던 그 눈길- 내가 그대 그녀와 직접 얘기할 수 있었다면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을. 안타까움에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선영이 누나, 누나는 어디 있기에 내가 만날 수 없나 요. 자문자답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엎치락뒤치락, 모든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내심 두려운 가정은 단 하나였다. 행여 선영이 누나와 정호선배가...... 서로 사귀는 사이라는 것.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제길,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 자신이 우스웠던 것이다. 내가 왜 그 사실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그 명분이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골치 아픈 머리 속을 가다듬기 위해 수건을 집어들었다. 냉수마찰이라도 해야 답답한 속이 풀어질 것 같았다. 그때 삐리릭, 전화기가 울려댔다. "여보세요......?" 시큰둥, 기운 빠지게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나는 대충 일으켰던 몸을 벌떡 세웠 다. 이 목소리는! "창희니...... 나...... 나야, 선영이......" 아아, 선영이 누나. 이심전심, 아니 텔레파시일까. 이렇게 그녀 생각에 골몰한 타이밍에 그녀의 전화가 걸려오다니, 나는 감격하여 놀라움도 잊고 있었다. "누, 누나! 지, 지금 어디예요?" 나는 허겁지겁 인사도 생략한 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 학교 부근이면 제가 나갈게요. 아니, 시내라도 괜찮아요......!" 그런 내 무례함에 건너편의 그녀는 당황한 듯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나는 행여 전화가 끊기기라 도 할까 봐 두려움에 연신 다그쳐댔다. "누나, 선영이 누나......!" 천만다행으로 잠시 후 그녀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냐...... 지금...... 지금 여기 우리 집이야. 나 집에 있어......" "어...... 그, 그래요......" 순간적으로 낙담하는 내 마음. 물론 그 정도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저, 선영이 누나, 누나 내일 학교 올 거죠? 그럼 내일 저 좀 만나요, 네?" 다짜고짜 일방적인 제안에 선영이 누나는 어색한 침묵만을 흘렸다. 후,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소 리가 건너왔다. "누나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꼭요......!" "모, 모르겠어...... 내일은. 그보다도...... 너 오늘, 아까 정호 만나지 않았니......?" 얼레, 정호선배? 이 누나가 어떻게 그 사람과 내가 오늘 같이 있었다는 걸 알지? "그러지 않았어? 정호가 너랑......" "예...... 예. 그, 그런데 그걸 누나가 어, 어떻게?" 이상한 노릇이었다. 적이 놀란 내 귓가로 다시 길게 한숨 짓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걔...... 걔가 너한테...... 뭐라던? 내 얘기...... 내 얘기 따지지 않았어?" 이럴 수가. 선영이 누나는 모든 상황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렇게 될 바에 자기와 나눈 이야기 를 말하지 말라던 정호선배의 다짐은 소용없지 않은가. "그랬지? 정호가 너한테 내 예기 물어봤지? 그러고 나서 너한테 뭐라고 막 대하지 않았어?" "그, 그게...... 사, 사실은......" 별 수 없이 시인하는 나였다. 또 한 번 그녀에게서 침묵이 돌아왔다. 나는 어떻게 돌아가는 상 황인지 파악할 길이 없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서, 선배가...... 물어봤어요. 자기가 먼저...... 누나랑, 선영이 누나랑 내가...... 무슨 관계인지 털어 놓으라고요. 전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어요. 그 선배가 왜 내게 그런 걸 묻죠?" 이젠 더 이상 한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선영이 누나의 얘기는 한층 내 눈을 휘 둥그레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창희야. 걔기 너를...... 너를 의심하는 것 같아......" 의심? 그럼 정말로 내가 그녀와 사귀는 것으로? 그럼 아까 정호선배 그 사람이...... 역시 내 추 리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가 나는 연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질 일이다. 아니 그럼 우리가 삼각관계란 말 아닌가? "미안해. 사과할게. 그런 의심 받게 해서. 그 애랑 나 사이의 일인데......" 잠깐이나마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얘기를 듣는 것인지 종잡 을 수가 없었다. "그럴 것 같아서...... 그래서 전화한 거야. 그리고......"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일 나 집에 있어야 해. 학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나중에...... 나중에 보자...... 정말 미안해."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아, 안 돼요! 누나, 누나 잠깐만요!" 안 돼, 끊지 말아요! 이미 늦은 뒤였다 딸칵,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공허히 울리고 있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멍청한 뚜, 뚜- 신호음뿐이었다. 안 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어찌 이런 일이...... 그 단조로운 메아리는 곧장 내 가슴속으로 이 어져 울리기 시작했다. 오직 나만이 망연자실, 자취방 안에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11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게 속이 편할 성싶었다. 한 차례 거센 비바람이 내 마음속을 헤집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과연 선영이 누나와 정호 선배의 관계는 사실이었단 말인가. 나는 그 선배와 독대를 할 때만 해 도 설마 그럴 리가 없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저 선영이 누나의 전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아니면 그 사실은 정호 선배에게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 사과를 한다니, 그렇다면 그 뜻은 자기들 사이에 내가 훼방꾼이 된다는 말이었나. 그래서 정호 선배는 내게 경고 를 한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도록 내버려 둔 게 엄청 후회되었다. 묻고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막연히 그녀를 찾아다닐 게 아니라 일단 전화번호라도 알아두었어야 했다. 머리를 쥐어뜯기도 모자랄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거의 뜬눈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려 학교에 도 착하니 사뭇 비장한 각오까지 느껴졌다. "김예지......!" "어...... 안녕, 창희야." 예지는 난데없이 도서관까지 나타난 나를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지금...... 나랑 얘기 좀 하자." 내 목소리가 거슬렸을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 같았다. "나......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좀 나와 봐." 예지는 아직 자초지종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일방적인 통고를 해대는 내게 영문을 모르 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만을 되돌렸다. "응...... 아, 알았어." 도서관 밖으로 나온 나는 일단 담배부터 한 개비 피워 물었다. 답답함은 그 연기로도 가셔지지 않았다. 착한 예지는 고맙게도 금방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어디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펴보 았다. 마땅한 구석이 발견되지 않기에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래도 되니?" 하지만 나는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성큼성큼 앞장을 서서 가까운 후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제서야 내 무뚝뚝한 얼굴을 읽은 모양인지 자그마한 예지는 서둘러 내 발걸음을 뒤쫓았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너한테 몇 가지 물어 볼 게 있어. 그래서 그래." 나는 부러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후문을 나서면 정문 쪽만큼은 아니지만 몇 군데 자그마한 커피숍이나 카페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고른 나는 선뜻 안으로 들 어가 자리를 잡았다. 은근히 놀란 기색의 예지는 미처 주문한 차가 나오기도 전에 내게 조심스런 눈초리로 물어왔다. "창희 너...... 화났어?" "응, 아니. 아냐, 그래. 약간." 알쏭달쏭한 내 말에 예지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조금 주눅이 들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 기 딴에는 그 이유를 찾으려는 듯 골똘한 모습이었다. "저기...... 그쪽 집하고 얘기 잘 안 된 거야?" "응......?" "있잖아. 현주네 집. 거기에서 안 좋은 얘기 들었어?" 끙,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실 나로서도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 몰라 난간했던 것이다. "그럼...... 아, 아니겠구나. 나를 찾아온 건. 혹시...... 그날 일땜에 그러니?" 그날? "지난번에...... 내가 갑자기 찾아갔을 때 말야. 그날 지나고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그...... 보영 씨라는 분이랑?" 그날이라...... 지난번 자취방에 노트를 전해주러 왔다가 당혹스럽게도 보영이와 마주친 말을 얘 기하는 가 보다. 나는 그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어리둥절한지 복잡한 표정 을 지었다. 조용한 성격이 그녀로서는 나의 이런 예기치 못한 행동이 적잖이 당황스러울 게 분명 했다. 그렇게 그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도리어 몇 초간 심호흡을 해야 하는 건 내 편이었 다. "예지야. 너......" 쓴 입맛을 다시느라 얼굴을 문질렀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 예지에게도 화를 내도 될 일이었으므 로, 쉽사리 얘기를 꺼낸다는게 주저되었다. "그래, 그냥 솔직하게 물을게. 나...... 나는 어제 정호선배 만났어!" 역시나, 대번 던진 그 말에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는 1.5배는 커지는 듯했다. "물론 지현이 얘기도 들었고. 그러니까 말해 줘. 너랑 지현이. 아니 정호 선배랑 선영이 누나, 다들 어떻게 된 일들이야?" 그랬구나, 하는 표정으로 예지의 아랫입술이 깨물림을 놓치지 않고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런 그녀를 똑바로 보며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선배가 그러더라. 나랑 선영이 누나하고 무슨 관계냐...... 그러면서 지현이 이름도 우연히 나 왔던 거야. 맞니? 너한테 그 전부터 말해 주지 않은 아니...... 그게 지현이 맞아?" 그것으로 충분했다. 예지는 할 말을 잃었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렸다. "미, 미안해......" 그녀가 처음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아니...... 네가 미안해 할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건...... 그건 말야 창희야."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생각을 가다듬느라 애쓰는 내게 그녀가 찬찬히 얘기를 꺼냈다. "원래......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같은 소모임에 있어. 같은 동아리에. 그게...... 고시준비를 하는 우리 과 학생들만 모인 건데...... 그 중에 정호 오빠랑, 나랑, 지현이가 같은 시험을 준비해. 그 중에 회장이 정호 오빠고. 그래서......" 아하, 그런 영문이었었구나. 응당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그들이 어째서 가까운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지현이가 자기 얘기를 숨겨 달라고 한 건 그 때문이었어. 너도 알겠지만...... 걔 이번 학기 휴학 한 이유도 그거였거든, 나나 정호 오빠는 학교를 다니면서 치르겠다고 했는데, 지현이는 시험 삼 아 내년부터 도전하겠다고 하길래...... 일부러 자기 얘기는 너한테 말아 달라 그랬고......" 그 순간 내 멍청함을 탓해야 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줄곧 학교 안에서 만나는 예지의 주변사람들 중 하나라고만 짐작했지, 설마 학교에 없는 인물까지인지는 미 처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과내 소모임이라고 했으니 아마 적어도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은 세미나 정기적 만남을 가 졌으리라. 그러니 내가 알 수 없었던 건 당연한 논리였다. "미안해. 일부러 너한테 숨긴 건 아니야. 지현이가 복학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 생각했 어............그러는 게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예지의 해명은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내게 필요한 해명은 그런 게 아니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예지 니 얘기는...... 그렇게 해서 지현이 얘기도 듣게 되었단 말 이고......" 그랬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어야만 했다. 좀더 민감한, 아주 심각한 화두가 남아있는 까닭이었 다. 그 의혹은 현재 그 대상인 물을 만날 수 없기에 그녀를 통해 알 수 있는 방법만이 유일했다. "그런데 선영이 누나 얘기는 뭐지? 솔직히 나는 그 얘기부터 들어야겠어. 대체 정호선배랑 선영 이 누나...... 무슨 사이인지." 그 대목에서 예지는 문득 얼굴을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짐짓 진지하게 정색을 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는데......" "아는 데까지만 얘기해 줘. 걱정마. 내가 정호 선배한테 그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어제 나는 분명히 그 사람에게서 들었단 말야. 아니 거이 무슨 경고였어. 그 선배 말은......!" 예지는 틀림없이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들에 관 련된 말을 한다는 것이 어느면에서 그녀에게 꺼림칙한 일이라는 건 이해되기도 하였다. 나는 정 안 되면 사정이라도 하고픈 마음이었는데, 의외로 예지의 대답은 순순히 나오고 있었 다. 12 "사실은...... 나도 두 사람이 사귀는지 어쩌는지 까지는 몰라. 정말이야. 그런데...... 언젠가 지현 이랑 창희 네 얘기를 할 때였어. 맞아. 너하고 선영 언니, 학회실에서 같이 있는 걸 봤다고 지현이 가 내게 걱정할 때였던 것 같아. 우리는 처음에 반 지나가는 이야기로 한 거였지만...... 그때 우연 히 그 얘기를 들은 정호 오빠 반응이 좀 달랐던 거야. 그리고...... 우리 만날 때마다 그 오빠가 계 속 물었어. 너희 선영이 봤냐고......" 아직은, 그런 예지의 대답이 부족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고로 두 사람이 사귀 는 관계냐 아니야, 그러자 차마 까놓고 물을 수고 없는 일인지라 나는 조심스레 말을 돌려 물어야 했다. "그저 그것 뿐이야?" "으응...... 그렇지만 언젠가......" 이번에는 예지가 스스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양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는데, 무언가 나를 긴장 시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즉각 나를 그녀의 다음 이야기에 속으로 섬뜩함을 곧 바로 맞이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랬어. 그날 뒤풀이에 술 마시러 간 자리에서...... 자기는 선영이 언니 사정 다 안다고, 선영 언니 남자 친구랑 헤어진 비밀도......" 비밀- 와르르, 나는 찰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이게 무슨 얘기 인가. 남자 친구와 헤어진 사실까지 안다니! 심장이 급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리, 선영이 누나의 가슴 아픔, 그것을 나말고 다른 사 람도 알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너한테도...... 아마 그런 뜻에서 그런 걸 거야. 그 오빠가...... 그때 술 취했다고는 하지만...... 정 말 선영이 누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 내가 보기에도......" 띄엄띄엄, 건너편 예지에게서는 부연설명이 간간이 덧붙여지고 있었어도, 이미 나의 귀는 꽉 닫 힌 지 오래였다. 아니 들을 겨를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정말 그랬단 말인가. 선영이 누나와 정호 선배는. 나도 내가 왜 이런 감정에 휩싸이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나 이외에 선영이 누나에 대한 비밀 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참기 힘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알았어. 그만...... 그 얘기는 그쯤이면 됐어!" 버럭 소리를 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나는 다급히 뇌까렸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고, 설마 이런 얘기까지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던 것이다. 언뜻 예지의 얼굴에 당혹스런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니가 오해를 받았다니 미안해. 내가 좀더 일찍 정호 오빠나 지현이 얘기를 해줄 걸......" 정호 선배, 지난번 그와 선영이 누나가 만나고 있던 날 예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럼 신경 쓰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저 언니한테는...... 너는 몰라도 돼'...... 진정 그런 걸까. 내 가 선영이 누나에 대해 신경을 꺼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런 거...... 선영 언니한테 묻지 그래? 너 그 언니랑 친하지 않아?" 오히려 예지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충고해 주고 있었다. 왜 아니겠니...... 나도 그러고 싶었어, 라는 말을 할 수 없기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쩌랴. 애꿎 은 예지에게 화살을 돌려서는 안 되기에 죄없는 어금니만 깨물밖에 "그, 그래...... 근데 만나기가 힘들어. 선배들도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고...... 듣기에는 지난 학 기랑 주소가 바뀐 모양이던데......" 차분해져야 하는데도 내 대답에는 풀죽음이 묻어 나왔다. 만의 하나 예지가 알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지만 그녀도 안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보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만 두자. 이런 얘기는...... 어차피 다른 사람들 문제니까......" 본심과는 다르게, 나는 얼버무리기라도 하려는 뜻에서 말을 돌렸다. 어쨌건 간에 예지에게 수상 한 눈치를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근데...... 창희야."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내가 침울한 눈빛으로 건네보자 그 녀는 수줍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너...... 지현이 어떻게 생각해?" 지현이, 지현이라...... 젠장, 생각 같아서는 얼굴을 찡그리고픈 기분이었다. "내 생각엔 너희 두 사람...... 어울릴 것도 같은데.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정호 오빠나 선영 이 언니한테 오해 사는 것보다는...... 떳떳이 니가 지현이한테 관심 보이면 그런 의심 안 받을 거 아냐?" 허허, 쓴웃음이 올라올 참이었다. 김지현, 내가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을까나. 방학 전이니 정식으로는 두어 달은 된 것 같은데. 물론, 그녀야 나를 간간이 내가 모르게 학교 안에서 보아왔으니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글쎄 난 아직 그런 생각한 적이 없어서......" 얼렁뚱땅 넘기는 게 최선이었다. 어쩌면 예지가 보기에 그렇게도 보이리라. 사람은 원해 정반대 가 도리어 잘 맞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지와는 정반대, 새침데기 공주 스타일 지현이. 분명 겉보기로는 나와 틀린 데가 많았다. 오죽 했으면 예지와 그녀가 친하다는 사실에도 속으로 기겁을 했으랴. "그, 그렇잖아...... 어제야 그 애 얘기를 들었으니까......" "으응...... 그렇지. 하기야......" 예지로서는 약간 실망스런 답변일 터. 그렇기는 해도 내겐 지금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 었다. "이, 이제 그만 가자. 내가...... 내가 너무 니 시간 뺏은 거 아니니?" 나는 난감한 질문도 피할 겸 엉덩이를 들었다. 그에 따라 예지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도서관까지 바래다주는 동안, 우리는 별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별로 말할 기분이 아 니었고, 예지도 그런 모양이었다. 묵묵히 도서관 앞까지 돌아왔을 때, 예지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잔뜩 흐리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보았다. 정말 하늘은 진한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응...... 으응." 내가 멍청하게 대꾸하자 그녀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내일부터 진짜 시험이구나...... 창희 너...... 바빠서 선영이 언니 찾을 시간도 없겠네. 그치?" 어라. 나는 뜬금 없는 그 말에 속으로 뜨끔하여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묘한 표정을 띠고 있다가 마주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우산 갖고 오길 잘 했는 걸. 나 이제 다시 들어갈게. 안녕......!"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예지는 몸을 돌려 총총걸음으로 도서관 안으로 달려갔다. 나는 적이 어안 이 벙벙하여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선영이 누나...... 예지의 그 말에 여운이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예상대로 나는 당장 다음 날부터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동거 13 예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가히 틀린 말은 아니었 다. 나는 일주일 동안을 꼬박 시험준비에 매달려야 했다. 아무리 예지의 노트가 있어도 워낙 수업 을 등한히 했던 게 문제였다. 시험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간 내내 아무리 학 교 주변을 맴돌아도 여전히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도 없었다. 학생회실에도, 강의실에도, 일부러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마다 들러보았던 그 가슴 설레던 버스 정류장에도...... 그 어디에도. 미안해, 대신 사과할게...... 도대체 뭐가 내게 미안하단 말인가. 내가 오해받은 것이? 정호선배 가 나서게 된 것이? 그렇다면 수화기 너머로도 가슴 저리게 잦아들던 선영이 누나의 그 목소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 마지막 대화를 곱씹으며 일주일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후...... 드디어 한 과목 남았구만. 어쨌든 고맙다. 이 노트 덕분에 그런 대로 지나가는 구나."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얌마...... !" 이제 시험도 끝나가고 있었다. 내 답답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야, 장이야!" 희창이가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녀석은 느지막이 나타나 내가 총정리한 예지의 노트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내가 요 점정리를 다시 해준 예지의 노트 말이다. "응...... 으응." "뭐야? 왜 그렇게 얼이 빠졌어? 꼭 소박맞은 여편네 같은 몰골을 하고서 말이야." "어...... 아, 아냐." "너 설마...... 이 형님한테 요거 해주느라 고생했다고 티 내는 건 아니겠지?" 피식,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비록 희창이가 둘도 없는 친구이기는 하나, 요즘 그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 그냥...... 시험 생각하느라고." 얼버무리는 나를 그가 요상스럽다는 눈초리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시험 때문이다. 시험. 중간고사는 아직 한 과목 남지 않았나. "짜식, 아닌 것 같은데...... ? 뭐 어쨌거나, 내일 시험 끝나면 어쩔 거냐?" "시험 끝나면...... ? 술이라도 마시자고?" "야야, 그건 당연한 거지. 누가 그 얘기하는 거냐? 너 저번에 나한테 부탁한 거 있잖아?" 부탁...... 난 그제야 생각이 떠올랐다. "입주과외 때문에 그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며. 그래서 내 차 좀 빌리자고...... 글피가 토요일 인데, 어쩔 거야? 미리 얘기 하지만 다음 주에는 안 돼. 시험도 끝났으니 보영이랑 놀러 가야하니 까." 그랬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현주 어머니와 약속했던 날짜가 훌쩍 다가와 있었다. 시험 끝나는 대로 들어가겠다고 했으니,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말에 짐을 옮겨야 된다는 얘기였다. "뭐뭐 옮길 건데?" "그, 글쎄...... 옷장이며 책상은 그 집 아저씨 것 그대로 쓰라고 했으니, 그저 옷이나, 내 컴퓨 터 정도만 들여놓으면 되겠지 뭐." 흐흠, 희창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면 자기 차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 이었다. "집에는 얘기한 거냐. 부모님께?" "아...... 아니.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려고." 어쩔까 하는 망설임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며칠만 왔다갔다하기로 했기에, 일단은 그냥 넘어갈 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내보고 확정이 되면 상의를 드리고 방을 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이번 토요일을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최마담이 문제였던 것이다. 아닐 수는 있지만, 내 짐작으로는 시험이 끝난걸 알면 최마담 쪽에는 필경 귀찮게 전화를 걸어 올 것이 뻔했다. "그래...... 토요일날 그냥 짐 옮기자." 나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맘대로 하라는 듯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나 방 옮긴다고 얘기하지 말라 줘. 저기...... 보영이나 누구한테도." "보영이? 왜?" 녀석이 반문하는 통에 속이 뜨끔했다. 그건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보영이, 최마담- 그 모 두가 내 자취방을 들락거리는 여자들이라고 어찌 밝힐 수 있으랴. "그, 그냥...... " "알았어. 누가 보면 빚쟁이 피해 도망가는 줄 알겠다. 임마." 다행히도 희창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 더 묻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영 이가 안다면 언젠가 최마담도 알게 될 것이므로. "타라. 자취방까지 모셔다 줄게.' 그러다 보니 어느덧 주차장에 도착했고, 희창이가 차문을 열며 제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거기가 어디라고...... 난 그냥 걸어갈게." "왜 임마, 타. 그래도 내가 노트 빌린 값은 해 줘야지." "아냐. 냐...... 사실 들를 데가 있어서 그래. 그러니 먼저 가라." 나는 굳이 사양을 했다. 사실이었다. 지난 일주일 간 그래 왔듯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좋아. 그럼 토요일에 짐 옮기기로 하구...... 하여간 땡큐다. 노트 빌려줘서."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지만, 기분은 얼굴만큼 상쾌하지 않았다. 희창이의 차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있다가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 인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후문이 아닌 정문 쪽. 자취방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기까지 나는 지나가는 긴 머리 여자들마다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 늘도 역시나였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버스 정류장을 둘러보았다. 역시 선영이 누나는 발 견할 수 없었다. 아니, 숫제 긴 머리 여학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쓸쓸히 자취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주네 집에 전화나 하리라. 14 "어쭈, 일찍 일어났구나." 아침 일찍 나타난 희창이는, 라면박스는 챙겨 넣은 내 짐보따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정말 별 것 없네?" "내가 얘기했잖아. 그냥 옷하고 책이나 몇 권 가져갈 거라고...... " "어디...... 이것부터 실으리?" "그래. 그건 트렁크에 좀 넣어 줘." 짐을 싣는 데에 채 십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반 하숙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런 면에 있어서는 내게 하등 부담될게 없었다. 그런 현주네 아파트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차에 실린 짐을 각기 양 어깨에 지고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현관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벨을 누르고 나서, 희창이를 흘끗 보았다. 그에게는 이른 아침, 녀석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손 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현주 어머니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혹시나 그녀가 지난번처럼 야스러운 옷차 리을 하고 있을까 봐 내심 불안해졌다. 어깨 위로 흘러내릴 것 같던 그 속옷 뺨치게 아슬아슬하던 현주 어머니의 의상. 아마 녀석이 그 런 모습을 본다면 당장 자기가 과외를 하겠다고 덤빌지도 모른다. "누구세요?" 안에서 현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선생님!" 다소 생소한 감이 없지 않은 호칭, 그렇지만 이제 곧 익숙해져야 할 호칭이었으므로, 나는 멋쩍 게 대꾸했다. "그래. 문 좀 열어 줘." 찰칵, 문소리가 났다. "어머, 이렇게 일찍 오세요?" 젊디젊은 그 목소리, 현주 어머니가 손을 닦으며 안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 뒤편에서는 현주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간 어머니에게 꽤 잔소리를 들었는지, 지난번과는 달 리 반기는 인상이었다. "아, 예...... 안녕하셨어요?" 꾸벅, 마주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재빨리 그녀를 살폈다. 행여 민망한 차림새가 아닐까 했는데, 나의 이사를 생각해서인지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실내복 차림이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짐은요?" "짐은...... 이게 전분데요. 이 친구랑 같이 들고 온...... "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희창이의 인사말이 튀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전 창희 친구 희창이라고 합니다!" 어쭈, 적이 떨떠름해진 내가 돌아보자 녀석은 헤헤거리는 표정으로 한껏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희창이는 한눈에 현주 어머니의 인상을 보고 호기를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예, 그러세요. 아유...... 저는 짐이 많으실 줄 알고 관리실에다 리프트 내려 달라고 할 참이었 는데...... 어머나, 어쩌죠? 방 청소도 제대로 안 했는데...... " "아뇨, 아닙니다. 청소는 저희가 해야죠!"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는 그녀를 말리며, 나는 미리 구경해 두었던 방으로 서둘러 짐을 옮겼 다. 아니나 다르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 희창이 녀석. 아하, 이제 알겠다, 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는 것으로 역시 무언의 답을 했다. "짐 더 있으세요? 있으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진짜 이것뿐인 걸요." 의외로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지난번 인사차 왔을 때만 해도 깨끗하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소도 안 해두었다는 현주 어머니의 말은 겉치레인 것 같았다. "그럼 짐 정리해 드릴게요. 어디...... 이것부터 풀까요?" 그래도 못내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박스에 손을 대는 현주 어머니.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심결에 돌아보다 기겁을 했다. "아, 그, 그건...... !" 나는 후닥닥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서 그 박스를 뺏어들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어 쩔 수가 없었다. "아니예요, 이거라도 제가...... " 아차차, 찰나 투둑, 테이프로 봉해둔 라면 상자의 입구가 터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 는 옷가지들- 그건 공교롭게도 내 속옷이 든 박스였던 것이다. "어머." 현주 어머니도 내용을 알아차린 듯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하하, 놔, 놔두세요. 제, 제 친구도 있으니까...... 저희가...... " 나는 행여 그녀가 볼까 봐 허둥지둥 가리기에 바빴다. "호호, 그럼 그러세요. 저는 손 안 댈게요."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물러났다. 나도 모르게 귀밑이 화끈거렸다. 그대까지 문가에서 신기한 듯 우리의 작은 소동을 쳐다보고 있 던 현주도 배시시 웃어 보일 정도였다. "현주 뭐해? 선생님들한테 방해되니까 우리 나가자." "엄마, 저기 아빠 방인데 이제 선생님이 쓰는 거야?" "그래. 저기 남자가 쓰는 방이야. 자...... " 그런 모녀간의 대화와 함께 그제야 방문이 닫혔다. 어휴, 나는 한숨을 쉬며 속옷박스를 든 채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이야." 희창이가 방 한가운데에 서서 감탄사를 토해내는 소리였다. "으응...... 괘, 괜찮지...... 어, 그러고 보니 침대도 들어놓으셨네." 그 감탄사의 의미를 파악한 내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려 했지만 그냥 넘어갈 녀석이 아니었다. 그이 음흉한 웃음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 새끼. 어쩐지 갑작스레 입주과외를 한다길래 이상하다 했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잖아?" "무, 무슨 얘기야?" "야, 시침 떼지 마. 아님 뭐야 저 아주머니?" 정말 녀석의 껄떡거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희창이가 재빨리 내 곁에 다가앉으며 채근 했다. "근데...... 우와, 저 아줌마 아까 그 아이 엄마 맞는 거야? 계모 아냐? 꽤 미인인 걸?" "그, 그래...... 아까 개 어머니 맞아." "저렇게 젊어?" "으응, 뭐라더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시집 온 거래." 별 감출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는데, 그럴수록 희창이의 눈초리가 의뭉스럽 게 바뀌었다. "크크크...... 짜식, 앞으로 몸살 꽤나 나겠네. 솔직히 말해 봐 저 아주머니 땜에 여기 들어온거 지?" "뭐? 아, 아냐 짜샤!" 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펄쩍 뛰었다. "에이...... 아니긴 뭐가 아냐? 젊고 혼자 사는 유부녀, 거기에 용돈도 벌겠다...... 이 형님한테 털어놔 봐 짜샤." "아, 아니라니깐! 새꺄, 넌 어째 머리가 그쪽으로만 도냐? 생각해 봐라. 이래봬도 이제 저 현주 한테는 선생님인데, 내가 미쳤어?" 강력히 부인은 하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벌게졌던 얼굴이 재차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보았던 현주 어머니의 아찔했던 자태가 상기되었던 까닭이다. 그 심연까지 가물거리던 허연 속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던 어깨끈...... 희창이는 그런 나 를 향해 여전히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그럼 뭐야? 네 입으로 자유로운 게 좋다면서...... 갑자기 집에도 알리지 않고 여기엔 왜 왔는데?" "그, 그건...... " 그 대목에서 나는 그만 말문이 딱 닫히고 말았다. 이곳으로 온 이유, 어찌 그것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렇잖아. 짜샤. 엊그제는 나더러 이사하는 것도 비밀로 해 달라며. 뭔데 그래? 설마 예지 피해 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최마담, 나아가 보영이까지 내 자취방을 들락거릴 까 봐 피해 나왔다는 얘기...... 지난주 최마담과의 정사...... "그, 그거야 나도 용돈 좀 벌어야 되고...... 어머니 아버지한테 부담 좀 덜어드려야 하잖아. 그 러니까 만날 부실하게 먹고 다닌다고 걱정 끼쳐 드리는 것보다야...... " "그래?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희창이에게는 그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았다. 녀석의 묘하게 치켜뜬 눈꼬리, 피식거리는 입꼬리,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돼, 됐어. 이짱. 얼른 이 짐이나 좀 풀자. 너 나 도와주러 왔으며 빨랑 할 일이나 해야지!" 나는 얼렁뚱땅 짐 상자를 들며 딴청을 피울 도리밖에 없었다. 15 "아유...... 벌써 가시게요?" 짐 정리는 채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한 박스 남짓한 책이야 그냥 책꽂이에 꽂아 놓았고, 옷 따위야 옷장 안에 그대로 정리하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사실 할 일이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 가 나머지는 왔다갔다 하면서 가져오면 되므로...... "예에...... 이, 이 친구 약속이 있다고 해서요." "아이 참, 그래도 우리 현주 선생님 도와주시러 온 건데...... 안 되겠다. 여기 차 한 잔이라도 하고 가세요." 실제 미안한 듯, 현주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향해 눈웃음을 치며 붙잡았다. "예, 그, 그럼...... " 희창이가 못이기는 척 눌러 앉으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송구스러운 표정 을 지어 보이며 대뜸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아, 아니에요. 이 친구 바쁘대요. 죄송합니다!" 내가 언제? 라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희창이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자칫 곤란해 질 수도 있는 이 자리를 빨리 끝내야 했다. "네에...... 그러면 나중에 놀러 오세요." "그, 그러겠습니다. 자주 놀러...... " 나는 희창이를 잡아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야, 창희 너 왜 그러냐? 너 진짜 아까부터...... " 투덜거리는 녀석. 나는 녀석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얌마, 암만 그래도 초면에 실례잖아. 나도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러니까 너 더 이상하다. 고작 한 번 와 보고서 집까지 옮기기로 결정 하다니?" "어이구, 너 오늘 보영이랑 놀러 간다며? 바쁘지 않아?"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직접 녀석의 차문을 열어 희창이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희창이를 돌려보내고 나서 다시 과외방으로 돌아왔다. 그 새 현주는 어디 놀러 가기라도 했는지 거실 안에는 현주 어머니만 있었 다. 나는 계면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얼추 정리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청소와 정돈은 이제부터인지라,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로 했다. 생각없이, 늘 입는 헐렁한 반바지를 꺼내들었다가 다시 옷장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내 자취방과는 달랐기에 반바지 입기가 왠지 주저됐던 것이다. 트레이닝 운동복이라도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손에 운동복은 든 채 막 입고 있던 바지를 벗는 찰나. "어머!" "엇!" 동시에 외마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뿔싸, 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렸던 것이다. 엉거주춤 바지 가랑이에서 한쪽 발만 빼내고 있던 나는 그 황당한 상황에 기우뚱, 하마터면 방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어머머, 죄, 죄송해요!" 휘둥그레진 내 눈과 현주 어머니의 동그래진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허겁지겁 방문이 다시 닫 혔다. 바지 속에 넣은 발을 빼야 하는 건지 아니면 넣어야 하는 건지,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조차 까먹 을 정도였다. 멍청하게 몇 초를 흘려보낸 뒤, 얼빠진 내 귓가에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 하는 현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제길, 내가 허둥대던 꼴을 본 걸까. "어, 예, 예" "저기...... 제가 들어가도...... " "자, 잠깐만요!" 나는 헐레벌떡 벗으려던 바지를 다시 치켜올렸다. "이...... 이제 됐습니다." 미처 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빼꼼이 열리며 현주 어머니가 살짝 웃는 얼굴로 찻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하도 오랫동안 방을 비워놔서 저도 모르게 그만...... 호호, 짐 정리는 다 끝내셨어요?" "저...... 뭐 대충, 대충 끝냈습니다." 나는 그저 뒤통수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커피 좀 드세요. 청소 같은 건 제가 할게요." 예의상 발언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그녀는 책상 위에 다소곳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얼레, 그런데 커피만 권하는 것이 아니었다. 침대로 다가간 그녀는 침대가에서 침대를 매만지더 니 선 듯 무릎을 모으며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침대...... 어쩐지 모르겠네요. 저쪽 방에 있던 건데." 침대. 맞다. 침대까지 들여놓아 주다니. 나로서는 과분한지라 감사해야 할 일. "아, 아뇨. 이, 이러실 것까지는 없었는데...... " "으응, 아니에요. 원래 현주 방에 있던 거지만, 요새는 둘만 지내잖아요. 그러니 선생님이 쓰시 는 게 더 나은 걸요. 앞으로도 그렇고...... " 앞으로도...... ? 그녀는 아예 내가 이 집에서 계속 기거하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커피 식어요. 어서 드셔요." 아차, 그렇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아직도 내가 그대로 방안에 서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쨌든 현주 어머니는 아직 방안에서 나갈 의사가 없는 게 분명했다. 어쩔 것인가. 나는 하는 수 없이 책상의자에 앉았다. "아까 오신 분은...... 학교 친구세요?" "그, 그 친구요? 예." "훗, 저 좀 놀랐어요." "어...... 왜요?"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창희 학생하고 너무 다르더라구요, 분위기가......" 그, 그런가? "그 친구 분 여자들 꽤나 울릴 것 같아. 그렇죠?" 허 참, 별 것에 다 신경을 쓰는 현주 어머니였다. "후후, 그래도 난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이 더 좋더라...... 뭐랄까, 성실할 것 같고...... 여자들한 테 잘해 줄 것 같고...... " "아, 아니요...... 제가 뭘...... " 칭찬인가 호기심인가? 딱히 맞장구치고 어려운 언사인지라 나는 생글거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 해 고개를 돌리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하나가 내 귀를 자극해 왔다. 리 드미컬하게 삐걱거리는 그 소리. 어찌 보면 익숙하기도 한. 나는 무의식중에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는데, 다음 순간 -꿀꺽,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 갔다. 그 원인은 현주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녀가 딴 짓을 하고 있던 건 아니다. 그저 다리를 꼬고 앉아 흔들흔들 몸을 흔들고 있었을 뿐...... 그러나 그 소리가 나는 곳이 문제였다. 아마 침대가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사람의 신경 을 무한히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리를 까닥이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좀더 정확히 말해 그 삐걱거림의 박자는 그녀의 둔부 바로 아래 질펀하게 눌린 곳이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언젠가의 내 몽정과, 저 멀리 취중에 겪었던 창녀촌의 첫 경험을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제야 내 시선을 느낀 현주 어머니가 슬그머니 동작을 멈추었다. "어머...... 좀 그렇죠?" "예?" 화들짝 놀라는 나. "현주가 좀 부잡스러워서 그래요. 이 침대...... 하도 위에서 뛰어서 스프링이 많이 망가졌나 봐 요." 훅,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 얘기는 ......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잠시나마 그 리드미컬한 삐걱 거림에 빠져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는 게 아닌가. "나중에...... 누구랑 같이 눕지도 못하겠네 어쩌면 좋지?" 그런 나의 당황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킨 현주 어머니는 정말로 걱정이라는 듯 허리를 굽힌 채 침대 이쪽저쪽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아니 급기야는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은 채 몸 전체로 침대를 눌러댔다. 나는 머리통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야릇한 자태- 무릎을 침대 위에 얹 고 여기저기 침대를 매만진다- 였으니, 그녀는 거의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에요...... 괘, 괜찮은데요!" 입안이 바싹 얼어붙은 내가 더듬거렸지만 이미 그런 말을 하기엔 늦은 타이밍이었다. 현주 어머 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에요, 그래도......" 아뜩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나는 소리라도 질러 그녀의 행동을 제지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당장 위에서 잠을 자야 하는 침대, 비록 실내복 차림이라 해도 그 위에서 젊은 여자가 엉 덩이를 돌려대고 기어다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노릇이었다. "저...... 커, 커피 다 마셨......" 그 순간 내가 고작 생각해 낸 것은 그 말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찰나 컵받침 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머, 안 다치셨어요?" "어, 죄, 죄송합니다!" "놔두세요. 제가 치울 테니......" 어쨌든 천만다행으로 현주 어머니의 주의를 끌기는 한 셈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를 침대 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16 아예 현주 어머니는 기왕 이럴 바엔 자기가 청소건 뭐건 다 해치우겠다고 나섰다. "아녜요, 창희 학생은 잠깐 나가 계세요. 이런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녀는 나를 떠밀다시피 바깥으로 내몰았다. 나는 송구스러워 뭐 도울 일이라도 없겠느냐고 했 지만, 현주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잠시 텅 빈 거실에 앉아 망설였으나 아무래도 어색했다. 차라리 현주라도 있으면 나았을 텐 데...... 나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챙겨 들었다. 씁쓸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담배 한 개비도 마음대로 피울 공간이 없었던 것이 다. 차차 익숙해지겠지. 아파트도, 이 집도...... 그런 생각으로 나는 장차 내 방이 될, 아니 지금부터 내 방인 방문을 두들겼다. "녜, 선생님." 청소에 열중하던 현주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머, 왜요?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아, 아뇨. 그, 그냥 이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려구요." "예에...... 뭐 쓰셔야 할 물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사다드릴게요." 예, 하는 뜻으로 나는 멋쩍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방문을 닫으려 했다. "참, 그리고...... 거기 신발장 있죠? 그 위에 선생님 몫으로 열쇠 준비해 놨어요. 여기 현관 열쇠 예요." 열쇠라...... 하기야 지난번에 자유로이 출입을 하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적이 놀랄 수밖에 없 었다. 그러면서 약간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 추천을 했다고 쳐도, 첫 입주 날부터 집 열쇠를 맡긴다는 것이 다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여자 둘밖에 없는 집안, 불쑥 들이닥쳤다가 서로 간에 못 볼 장면이라 도 보게 되면 어쩌려는 것인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현주 어머니가 얘기한 곳에는 정말 예쁜 열쇠고리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챙겨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파트를 나왔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열쇠는 하나만 있었던 것이다. 문을 잠그고 나오느라 혹인해 보니 그것 은 현관 열쇠였다. 깜빡하신 걸까. 상식적으로 보기에 현관 열쇠보다는 내가 있게 될 그 방의 열쇠이어야 맞은 터. 그러나 분명 열쇠는 그것이 전부였다. 나중에 달라고 해야겠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냥 돌아섰다. 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나오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아파트 단지 는 깨끗한 편이었고, 주변에는 놀이터며 산책로가 그런 대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그저 담배나 두어 갑 사놓을 작정이었다. 자취생 첫 번째 수칙이 그것이었다. 어디에 가든 슈퍼나 가게 위치를 알아둘 것. 그런 고로 아 파트 입구에서 구멍가게를 찾은 나는 음료수를 하나 사들고 목을 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아파트의 창들이 훤한 불빛을 하나 둘 늘어놓고 있었고, 잘 닦 여진 도로 위로도 가로등들이 켜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번듯하게 세워진 아파트와 함께 보랏빛 하늘을 감상했다. 이 시간의 거리 는 늘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낮과 밤의 중간쯤? 낮이라면 주변이 너무 밝아 눈에 띄지 않을 빛들, 또 밤이라면 확연히 눈에 띨 그 불빛들이, 이 무렵에는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특별하지도 않고, 반면에 아주 사소하지도 않은 그런 것들처럼 말이다. 게다가 생소한 회색빛 건물들과 아울러 보고 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세상이 온통 한 가지 빛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꼭 무슨 거대한 우주도시 한복판에라도 서있는 기분이었다. 하긴 지 금까지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낯선 탓도 있을 게다. 그런 까닭에 오늘은 그저 짐만 들여다 놓겠다고 할 걸, 하는 내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 만 지금쯤이면 현주 어머니가 방 청소를 끝냈을 것이기에 이제 나로서는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 에 없었다. 그렇게 널찍한 아파트 단지 입구, 막 그곳에 머물렀던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어......?" 내 입에서는 순간적으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필경 그것은 상대방도 똑같은 것 같았다. 다만 그녀 쪽은 눈만 휘둥그레졌을 따름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예기치 못한 맞닥뜨림에 인사말도 잊고 멀뚱멀뚱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 다. 날렵하게 커트친 머리. 갸름한 인상의 얼굴.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다미씨!" 그랬다. 안다미. 그녀가 내 앞에서 경악한 낯빛을 숨기지 못한 채 서있었다. "아...... 아...... 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 "기, 기억하시죠? 저...... 창희요, 왜 그 단란주......" 단란주점에서의 소개팅, 그걸 어찌 잊을 수 있나. 그러나 나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길가 에서 술집 얘기를 꺼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저 모르시겠어요? 한달 전쯤에 보영이랑 희창이랑 같이 술 마셨잖아요!" 모르겠다. 이사한 첫날이어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어, 다미는 어색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는 것에 발맞춰 한 걸음 물러서는 게 아 닌가. 마치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언 듯 보아 난감함이 가 득한 것 같았다. 아예 모르는 척 하려는 것일까? 어이가 없어진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물론 장소가 다른 탓이기는 했어도 지난번보다는 긴 스커트, 블라우스가 아닌 헐렁한 남방- 그 래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거대한 가슴은 감추지 못했다. 틀림없는 안다미, 그녀였다. "안...... 안다미씨 아니에요?" 나는 정녕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지는 모른다는 생각에 재차 물었다. 그런데 그제서야 모기 소리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예?" 워낙 작은 목소리인지라 나는 한 발짝 더 다가가야 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소리로 속삭였다. "마, 맞다구요...... 알아요. 창희씨라는 거!" 얼레,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나는 도무지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다미는 재빠르 게 주변을 흘금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근데 왜 그러세요......?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어, 아니에요. 제발 저만큼 떨어지면 안 돼요? 누가 본단 말이에요!" 이건 또 무슨 얘기냐. 누가 보면 안 된다? "아니 그, 그냥 지금 저 아는 척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어처구니가 없는 그녀의 요구였다. 아니 뭐 단란주점 접대부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마주 선 뒤쪽을 바라보던 다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커졌다. 그것도 놀라는 정도가 아닌 기절초풍할 광경이라도 목격한 듯이. "엄마, 난 몰라!" 비명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괴물이라도 쫓아오는 거야? 나는 덩달아 의 아한 눈초리로 등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는 중형차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차는 우리를 지나 십여 미터쯤 지나치다가 갑자기 끼익, 멈춰 섰다. "어떡해, 봤어. 봤다구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다미가 외쳤다. "도망쳐요, 뛰어요!" "예? 엇!" 내 마지막 목소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내 팔뚝을 붙든 그녀가 마구 끌어댔기 때 문이다. 벌써 다미는 발걸음은 뜀박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다, 다미씨!" 그녀가 하도 거세게 붙잡은 통에, 나도 그녀를 따라 엉겁결에 뛸 수밖에 없었다. "빨리, 빨리요!"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멈춰선 차 안에서 남자인 듯한 그림자 하나가 빠져 나오는 광경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저 차 때문에? "어,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하지만 다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겐 생소할 수밖에 없는 동네의 골목을 꾸불꾸불 돌아 달리고만 있었다. 적어도 몇 분 이상 그렇게 달린 것 같았다. 거리로는 무려 오륙백 미터는 족히 달린 것 같고, 다미의 어깨 너머로 숨 찬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 그녀의 핸드백인지 가방인지가 길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다미씨, 이거!" 그제서야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것을 줍느라 멈추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지구 끝 까지라도 달려갈 가세였다. 17 내가 가방을 주워들자 다미는 비로소 한 건물의 담에 기대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가 방을 건네려다 말고 벽을 짚고 한참을 헐떡여야 했다. "헉, 헉...... 무, 무슨 일이에요? 자, 이...... 이 가방 받아요."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가방을 받아든 그녀가 갑자기 그 가방으로 내 팔이며 어깨를 후려쳤던 것이다. "몰라요! 내가 뭐라 그랬어요! 아는 체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녀에게서 히스테리컬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난 몰라, 이제 어떡해, 어떡하냐구!" 도무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나는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다가가 침착하게 물었다. "아, 아니...... 왜 그러는 건데요? 내가 뭘 어쨌다고!" 어...... 그러나 나는 말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안다미, 그녀는 한쪽으로 고래를 돌리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양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울고 있다. 그녀가. "몰라요, 이거 다 창희씨 책임이라고요!"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저더러......"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사람 붙잡고 냅다 도망치더니 이젠 눈물까지 보이다 니, 내 머리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보, 보지 말아요...... 아이 참!" 다미는 그제야 자기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이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휴,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알아야 책임을 지든지 말든지 할 거 아녜요?" 어이없음을 지나 이제 화가 날 판국이었지만 정황이 하도 뒤죽박죽이기에 일단을 자그맣게 목 소리를 낮춰야 했다. 후, 길게 끄는 한숨소리가 다미 쪽에서 새어 나왔다. 뭔지 몰라도 엄청 복잡한 일임에는 틀림없 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훌쩍이며 말을 꺼냈다. "아까...... 그 차 멈췄죠? 그렇죠?" 역시 그 차 때문이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나가던 차 한 대 선 것을 가지고 왜 그 리도 난리법석을 떠는 걸까? "아, 아까 우리 뒤에 자가용이요?" 끄덕끄덕, 대답 대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 그리고 ...... 사람들이 내렸어요. 근데 왜요?" 아차, 사람까지 내렸다는 내 말이 실수인 것 같았다. 그녀는 기겁을 한 눈초리로 나는 돌아보고 는 금방 발을 구르며 안달을 했다. "몰라몰라, 정말!" 다시 그녀의 목소리에서 울음이 배어 나왔다. "흐흑, 그럼 나 오늘 못 들어간단 말이에요!" 아앙, 자칫하면 그녀는 주저앉아 목이라도 놓고 울 것 같았다. "모, 못 들어간다니요? 어디를요? 아니, 아니지...... 아까 그 차가 누구 차길래 그래요, 예?" 그러나 다미는 일언반구도 없이 훌쩍거리고만 있었다. 더욱 짙어지는 의혹에 나는 그녀에게 다 시 한 번 묻는 수밖에 없었다. "대답 좀 해 봐요. 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 그런 건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할 것 아니 에요. 무슨 일이에요? 누구 차인데 그렇게......" 뭐라뭐라, 다미의 말이 들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예? 누구 차요?" "사장님 차요. 박사장님 차라구요!" 박. 사. 장. 아하! 전에 보영이한테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다미를 첩처럼 거느린다는 그 작자, 자기 가정 놔두고도 그녀에게 아파트까지 마련해 주고 들른 다는 그 작자. 그것만이 아니다. 나더러 다미를 꼬셔낸 놈이라느니 어쩌니 하며 주먹가지 휘둘러...... 한 판 주 먹다짐까지 벌였던 그 중년 사내. 그렇다면? 맙소사, 그럼 아까 그 현주네 아파트 단지에 다미의 아파트가 있었다는 얘기인가? 머리 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우연의 일치도 정녕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매 맞는 여자, 다미 18 한참 동안을 그렇게 훌쩍이고 있는 다미의 곁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떨떠름하게 서있어야 했다. "사장님이 나 이러는 거 알면...... 나 혼난단 말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창희씨도 봤을지 몰라 요...... 그럼 나 정말......" 듣고 보니 딱한 일이었다. 비록 우연한 일이기는 했으나, 내가 박사장이란 작자에게 어떤 존재 였나. 다름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늘씬하게 망신을 주었던 게 바로 나 아니었나. 그 당시야 오해고 뭐고 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또 나중에라도 그 실상을 알았는지 어쨌는 지는 모르지만, 오늘 떡하니 나와 다미가 어울리는 광경을 보았다...... 이건 나름대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야 몰라도, 적어도 그녀에겐 그랬다. 그렇기에 나는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르는 체 해야 할지 도통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 어쨌든 그만 울어요...... 이, 미안하게 됐어요." 흘끔, 길 가던 행인들의 야릇한 눈길이 느껴졌다. "사,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럼 어떡하라구요, 이제 갈 곳도 없는데!"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나는 자세히 봤다면 얘 기가 틀려지겠지만, 나는 그저 길가에서 우연히 다미를 만나 잠시 알은체한 게 전부아닌가. 그런 데 그걸 가지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다지도 서럽게 울다니. 그렇다고 그녀가 결코 장난 삼아 떼를 쓰는 것 같지는 않은지라 중간에 낀 나만 한심스럽게 된 모양새였다. "몰라요, 창희씨 땜에 나는....." "왜, 왜요? 저 정말 잘 곳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다미는 지쳤다는 듯 고개만 힘겹게 끄덕였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정 말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다는 듯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벌떡, 몸을 곧추 세웠다. 그리고 미 처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겁에 질린 눈으로 허둥대며 다시 빠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다, 다미씨!" 이곳도 아직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 이봐요!" 뒤쳐진 내가 부르는 데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쫓아갔다. "어딜 가는 거예요, 잘 곳도 없다면서!" 그러나 그녀는 연신 손으로 눈물자국을 훔치면서 뒤쪽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찾아다니고 있을 거예요. 나 빨랑 도망가야 한다구요!" 여기까지요? 나는 어이가 없어 뒤를 확인해 보았으나 어두운 골목길 안에 누군가 우리를 잡으 러 오는 기색은 없었다. "아, 아무도 안 와요!" "아니에요, 난 알아요. 지금 쫓아오고 있어요." 그녀의 발걸음은 숫제 달음박질에 가까웠다. 숨이 차서일까, 목소리마저 떨리는 듯했다. "그, 그래도 잠깐만요, 다미......" 급기야 그녀를 세우기 위해 팔을 붙들었는데-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떨고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무심코 잡은 그녀의 손목, 그것이 마치 사시나 무 떨 듯 떨리고 있는 게 아닌가? 진짜 겁에 질린 것이다. "다, 다미씨......" 나는 순간적으로 기겁을 하고 말았다 "놔, 놔줘요. 나 붙잡히면 안 돼요." 이, 이럴 수가. 나는 그때에서야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 그 건 내 마음속가지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공포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나 숨어야 한다니까요, 제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박사장, 도대체 그가 어떤 작자이길래 이 아가씨 를 이토록 겁에 질리게 한다는 말인가?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내가 숨겨 줄게요. 그러니 일단 진정 좀 해요. 어차피 지금 어디 갈 곳 도 없다고 했잖아요." 나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듯 그녀의 팔을 안고 조용히 이끌었다. "어, 어디로......" 실성한 사람처럼 넋 나간 목소리로 묻는 그녀에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를 믿으세요. 걱정 말라요.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안심할 수 있어요." 다행히 다미는 내 뜻을 따라주었다. 그녀의 팔을 통해 떨림이 전해져 왔다. 기사도정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두워진 밤거리에 쫓기는 한 여자,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내가 떠올린 안식처는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19 "자, 올라와요. 계단 조심하고요." 내가 생각해 낸 장소는, 바로 내 자취방이었다. 나는 아직도 떨고 있는 다미를 부축해 옥탑방으 로 올라갔다. 그랬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평상시에 이십여 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책이며 옷가지들을 정리했기에 다소 썰렁하기는 했어도, 고작 한나절 남짓 비워둔 상태였으므로 내 자취방은 그대로 들어서도 괜찮을 상황이었다. "여, 여기가 어딘데요?" 불안한 눈초리로 다미가 물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씩 웃어 보였다. "으응...... 사실은 내 자취방이에요." "창희씨...... 자취방이요?" "예, 우선 좀 앉으세요." 그녀는 내 자취방이라는 말에 비로소 한숨 돌리는 모습이었다. 일전에 학교 근처에 자취방이 있 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버럭 화를 내더니, 오늘은 왠지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순순히 자리에 앉자 나는 구석에 치워 둔 이불더미에서 담요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좀 춥죠? 웃풍이 세서...... 이거라도 좀 덮으세요." 끄덕끄덕, 다미는 이런 내 말에도 별반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지저분하죠? 이해하세요. 남자들 방이란 게...... 다 이런 거니까."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밝은 낯으로 계속 말을 시켰다. 행여 여기도 불안해 어디론가 도망칠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그나저나 나로서는 이후의 일이 막막했다. 막상 들어와 놓고보니 다음엔 어째야 하는 것인지 판 단이 서지 않았다. "저...... 다미씨. 어떡할까요? 혼자 계시는 게 편하겠어요?" 눈물자국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그러니까 내 얘기는...... 오늘 여기서 혼자 주무시는게......" 솔직히 말해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뭐 훔쳐 갈 물건도 없는 방, 더군다나 열쇠도 갖고 있 으므로 다미 하나쯤은 자고 가도 되리란 생각이었다. 아니, 나야 어차피 현주네 있을 테니까 며칠 더 있으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 창희씨는요? 여기 다른 방 있어요?" "예? 아하...... 아, 아니요. 저야 뭐 그냥 다른 친구네 가서 자도 되고......"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미가 고개를 세게 가로 저었다. "아, 안 돼요! 그럼 가지 마세요!" 거의 발작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적이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히스테리라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해요. 제 말은...... 제 말은 그냥 조금만 같이 있어주세요. 정 부담된다면 새벽에 나갈게 요." 허 참, 그녀는 내가 가고 나면 당장 박사장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는 듯 정색을 하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다미씨가 괜찮다면 나도 뭐......" 하지만 속으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면 어쩐다...... 이 아가씨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하긴 좀 전의 모습들로 보아 누군가가 곁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될 성도 싶었다. 새삼스레 이 다미란 아가씨에 얽힌 의문들이 되살아났다.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박사장이란 중년 사내와의 사이는, 보영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듣긴 했지만 지금은 그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두려움에 질려 도망을 다닐 지경이라면, 대체 그게 어떤 관계이며, 또 어떤 연유에서일까? "저...... 창희씨." "어...... 예" 잠시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다미가 조그맣게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불편한 것 아녜요?"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있어서 다미씨가......"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여기는 창희씨 방인데......" "에이, 그런 생각 마세요. 원래 다 그런 걸요, 뭐...... 혼자 사는 방이야 그냥 친구들도 수시로 왔 다갔다하는 거고...... 제 친구들도 자주 와서 자고 가는데요, 뭘." "여자...... 친구도 와요?" "그, 그건......" 나는 다소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여자 친구라. 따지고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거쳐갔으니 말 이다. 물론 자고 간 것은 아니지만 보영이, 심지어 빨래까지 해놓고 간 최마담...... 그리고 정말 '자 고 간' 예지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더군다나 그 중 두 사람은 다미와 가까운 사이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손을 내저었다. "노, 놀러는 왔었어요. 자고 간 건 아니지만......" "누구...... 애인이요?" "아, 아뇨. 당연히...... 아, 아시잖아요. 저한테 애인이 있다면 희창이가 그때 다미씨랑 소개팅하 라고 끌고 갔겠어요?" 멋쩍게 웃음까지 곁들였어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다만 멍한 시선으로 방바닥만을 응시하고 있 었다. "그럼...... 저도 친구인가요?" 그게 그렇게 되는건지, 나는 선문답 같은 그녀의 말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럼요. 친구...... 친구죠. 저는 이짱 아니 희창이 친구도, 다미씨는 보영이 친구니깐......" 어라, 그런데 이 아가씨가 도 왜 이럴까? 그만하면 실컷 울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 말이 떨어 지자마자 눈가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말이 실수였나? 그렇다면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해줘야 하는 거였나? "왜...... 왜 또 울어요?" "고마워요......" "네?" "고마워요. 친구라고 해 줘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겨우 친구라는 말에 우는 아가씨. 그것도 사춘기 여학생도 아니고, 다 큰 그야말로 말만한 처녀가 그런 말에 눈물을 보이다니 왠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이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기로 했다. "그, 그보다도 다미씨...... 그만 울고 좀 씻지 않을래요? 자꾸 우니까...... 예쁜 얼굴일 엉망이잖아 요." "미, 미안해요......" 나는 먼저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건너편 화장실을 가리켰다. "안에 수건 정도는 있어요." 그제야 다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는...... 다미씨 갈아입을 옷 좀 찾아볼게요. 이따가 주무시려면 치만 좀 불편할 거예요." 나는 그녀가 욕실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우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아직까지 현주네로 연락을 못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여보세요?" 현주 어머니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어머, 선생님 왜 아직 안 돌아오세요?" "아, 예. 죄, 죄송합니다." "아유, 걱정했어요. 지금 어디 계신 거예요? 저녁 다 차려놓고 현주랑 기다리고 있는데." 젠장,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일단 자취방에 돌아왔다는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예, 지, 지금...... 저희 집이거든요. 아뇨, 부모님 댁에...... 그래서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자고 가 야 할 것 같아서......" "어머, 그래요?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아, 아니요......뭐 좀 가져갈 것도 있고...... 갑자기 생각나는 바람에...... 죄송해요." "네에...... 그럼 그러세요. 대신 내일은 꼭 오실 거죠? 꼭 오셔서 주무셔야 해요." 예, 예, 알겠습니다...... 꼭 자러 와라- 과외 공부가 중요한게 아니고 내가 그 집에서 자르냐 안 자느냐가 더 중요한 듯한 현주 어머니의 말투에 신경이 거슬렸지만, 나로서는 첫날부터 송구스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기에 꾸벅 수화기에 대고 고개까지 숙여가며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외박 아닌 외박 허락을 맡은 나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 중에 그녀 가 입을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마침 옷가지를 전부 가져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비교적 깨끗한 티셔츠 몇 장이 남아있었다. 다미는 눈자위가 시커메진 얼굴로 돌아왔다. 머리가 약간 헝클어지기는 했어도 그나마 얼굴의 눈물기는 지워졌다. "저기...... 바닥에 있는 옷들 중에 하나 입으세요. 바지는 제가 입던 거라 좀 그렇지만, 셔츠들은 깨끗해요." 그녀는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단란주점 룸을 뛰쳐나가던 예전 그 모습과는 상당히 달 라 보였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시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차례인지라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창문께로 다가갔다. "돌아서 있을게요. 얼른 갈아입으세요." 뭐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등뒤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보아 내가 권하는 대로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서있을 때의 사건 하 나가 기억났던 것이다. 그때도 그랬었다. 다른 게 있다면 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예지가 아니라 다미라는 것 뿐. 또한 그때와 달리 누가 불쑥 찾아올 수 있는 한낮이 아니라 밤이라는 차이가 있 을 뿐이었다. 그렇다. 밤...... 창문 밖으로는 시커먼 어둠만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담뱃재를 털기 위해 창문을 열려고...... 그런데...... 그 창문에 뭔가 비치는 게 아닌가. 본디 이런 허름한 다세대 주택이 다 그렇지만, 내 방의 창은 홑창이었다. 즉 간유리가 아닌 투 명한 유리 한 장에 커튼만 둘러쳐진 창문이었던 것이다. 어두운 창문 밖, 밝은 방안, 그러니 당연히 유리창으로 방안이 훤히 반사되는 상황- 바로 거기 에서 나는 전혀 상상치 못한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리창에 비친 방안의 정경, 맹세코 다미의 그 거대한 젖가슴을 훔쳐보려는 의도에서가 아니 었다. 그녀는 나와 등을 마주 댄 자세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으니 나는 그녀의 허연 등허리만 감상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탓에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나는 하마터면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하나, 둘, 셋, 넷...... 세기를 포기해야 했다. 흐릿했지만 확연히 드러나는 그녀의 뽀얀 살결, 거기에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멍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20 너무나 놀란 나머지 순간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의심도 했다. 그러나 그건 정녕 내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깨 위에 티셔츠 자락을 걸친 채 팔을 끼 기 위해 몸을 비틀고 있었는데, 그 뱀 같은 줄기들이 마치 문신같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건 결코 지난번 옷벗기 게임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다미 는 한사코 상반신만은 가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담배를 쥔 손가락이 떨려왔다. 아파트에서 여기까지 도망쳐 오는 동안 내내 무서움에 몸을 떨던 다미...... 설마 그럼 그것이? "이제 돌아 서셔도 돼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눈초리를 돌리자 다미는 방바닥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 다미씨......" 나는 뭐라 말을 꺼내려다 꿀꺽 목구멍으로 삼켰다.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해 보였기 때문이다. 방금 본 멍자국들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정말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단란주점에서 보았을 때는 나도 생각지 못한 자리여서 그 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 자리에서부터 뭔가에 놀란 토끼마냥 안절부절못하던 그녀, 그리고 자신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히스테리를 부리고...... 또 갑자기 나를 만난 게 박사장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에 떨며 여기가지 도망쳐 온 그녀.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그녀의 속살에 아로새겨진 그 엄청난 흔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젠 의문의 정도를 넘어서 차라리 두려움까지 엄습해왔다. 더더욱 모를 일은 지금 그녀의 얼굴이었다. 조금 전 거리를 달음박질칠 때만 해도 거의 저신 나 간 사람처럼 굴던 이 아가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멍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있지 않은가. 설마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그녀의 등에 난 맷자국 뿐만 아니라, 아예 이제까지의 일들 전 부를 말이다. "안...... 앉을 거예요?" "예......예."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그녀 곁에 다가앉았다. 무엇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지 몰라 잠시 더듬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다그치고 싶었지만, 좀 전까지 겁에 질려 있던 그녀에 게 심하게 굴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녀더러 입었던 옷을 벗어봐라 어째라 하는 것은 아예 불가 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답답한 나는 혀로 입술만 축여댔다. "괘...... 괜찮은 거예요?" 망설이며 묻는 나에게 그녀는 눈만 끔벅이며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서 분명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술에 취했다 거나 하여 초점이 흐린 눈동자는 익숙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생판 다른 눈빛이었다. 뭐 랄까, 아예 초점이 없는, 동공이 팽창된 그런 눈이었다. 한마디로 생기가 없었다. 새침데기 같던 첫 인상, 그때의 그 시선은 어디로 갔는지 그저 썩은 동태눈알을 한 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나는 내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무 의미 없이 나를 마주보는 그녀의 얼굴이 왜 그렇게 저를 보시나요, 하고 묻는 듯했다. 나는 난처하여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불편하시죠......" 어떤 톤도 느껴지지 않는 다미의 목소리였다. 마치 읊조리듯 단조로운. "죄송해요......"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어차피 제가 앞 뒤 못 가린 점도 있는데......" "그래도...... 어쨌든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정말 큰 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보이 며 또 한 번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이에요." 잘못했다니, 난데없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내 자취방에 폐를 끼친 것은 죄송하다 할 수도 있 다. 그러나 잘못했다고? "자, 잘못이라니요? 뭐가요?" 어이없이 그녀를 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마치 주인에게 용서를 비는 노예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내가 무릎을 꿇라고 명령하면 정말 그렇게라도 할 것 같았다. "다, 다미씨...... 그러고 있지 말아요. 왜 그래요? 진짜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용서...... 용서해 주세요." "예? 제가요......?" 점점 더 황당한 노릇이었다. 누가 보면 이 아가씨가 아주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로 착각할 것 같았다.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미씨......"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것인가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지금 분명히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닐 텐데...... 어......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 황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다미. 벌을 서듯 무릎을 가리고 있던 담요 위로 공손히 맞잡은 손, 그 위로 뭔가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 이래요? 예?" 나는 놀라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등으로 그녀의 눈물방울이 그치지 않고 똑똑 떨어졌 다. 다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소리 죽여 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도, 도대체...... 지금껏 그렇게 울어 놓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랬다. 이건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그녀가 지금 보이는 반 응은 의도적인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쇼크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게 사죄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조건 반사, 맞다. 그녀는 지금 거의 무 의식중에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창문으로 비치던 그녀의 멍자국들, 울며불며 쫓기던...... 분명 그것과 관련이 있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일단 그녀를 달래는 것이었다. "다, 다미씨...... 잠깐만요. 좋아요. 내가 다 용서할게요. 용서한다구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그만......" 아무 말이든 주워 섬겨야 했다. 안정을 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제 내 얘기 들어요. 내 말 들으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화라도 내겠다. 뭐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지라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어휴, 다음 말을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순간 다미가 다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아, 아뇨...... 아, 알았어요. 화...... 화내지 마세요." 이것 참, 그녀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꼭 내 명령에 복종이라도 하는 꼴이었다. "자, 자요...... 이제 말씀하세요." 이런 경우를 두고 점입가경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제...... 이제 안 울게요." "어...... 예.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젠장, 나는 당황하여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급변하는 다미의 모습에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 야 할지 난감해졌던 것이다. "다, 다미씨...... 제, 제가 우리는 친구라고 했죠?"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랬잖아요. 우리는 친구라고. 그새 까먹었어요?" "아, 아니요."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있잖아요. 친구...... 친구 사이엔요. 그,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다미씨는 보영이나......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얘기해요?" "아니요. 하지만......" "아뇨, 아니면 됐어요. 나는 다미씨 친구니까, 친구한테 대하듯 편하게 말하라구요.. 아셨죠?" 그렇게까지 얘기했으나 다시금 다미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녀의 수긍을 재촉하려 가볍게 그 녀의 손을 쥐고 어깨를 토닥였다. "예...... 죄송해요." "아니구 참, 죄송하다뇨! 방금 얘기했는데 또 그런다!" 내가 짜증 섞인 투고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다미는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동의를 표시했 다. 후, 내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요...... 그럼 다미씨도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거예요. 알았죠?" "네......" 이제 조금 분위기가 진정된 느낌이었다. "있잖아요. 친구 사이...... 라면 내가...... 편하게 말해도 될까?" "예. 그러세요." "아니아니, 그러지 말고 다미씨, 아니 다미 너도 편하게......" 하지만 이번에는 다미 쪽에서 먼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저는 이게 편해요." "이, 이봐, 그래도......" "아니에요, 저는 창희씨 편하시면 돼요. 저도 창희씨가 그렇게 얘기하는 게 좋아요." 이런...... 내가 반말을 하는데도 존댓말이 편하다고?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였으나, 그래도 아까 처럼 멍해 보이지는 않았다. "말씀...... 계속하세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단란주점에서 말하던 게 입이 배어서 그런가? 글쎄, 꼭 그렇지도 않을 텐데...... 하여간 그 문제로 계속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나는 어설픈 말투로 계속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말야...... 나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아까 왜...... 그렇게 도망친 거니? 그 박사장 한테 너...... 뭐 무서운 것 있어?" 역시나 그녀에게선 예상한 반응이 나타났다. 흠칫, 놀라는 기색이 보인 것이다. "그렇잖아. 전에 우리 술 마실 때도 그랬고...... 보영이가 박사장이나 니 얘기 꺼내면......" "그, 그걸 왜......?" 왜 물으세요, 그 말에는 선뜻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차마 그녀에게 등에 있는 멍자국의 원인이 뭐냐고 묻지는 못할 터, 설사 묻는다 해도그녀가 수 치스러움에 대답할 리도 없을 것 같았다. "그, 그건...... 다미 너도 알잖아. 나 박사장이랑...... 너희 가게 앞에서 싸웠던 거. 그건 오해였는 데...... 나는 이해가 안 돼. 솔직히...... 박사장하고 너하고 아무리 같이 지낸다고해도......" 순간 그녀의 어깨가 약하게 덜리며 내 말을 끊었다. "보영이...... 보영이한테 얘기 들어셨군요." 21 "그, 그게......"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째야 하나. 보영이에게 얘기를 들었 다고 시인을 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게 나을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눈 딱 감고 사실대로 말하기로 작정했다. "그, 그래. 맞아, 보영이한테 얘기 들었어. 하,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혹시라도 나 때문에 다미 니가......" 제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이 그랬다. 다미와 박사장의 관계야 둘째치더라도, 만약 나 로 인해 다미가 앙갚음을 당한다면- 그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수초간 흘렀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라도 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다미 가 조심스레 침묵을 깨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 정말이야?"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끄덕끄덕, 확실한 걸까? 선뜻 믿기는 힘들었으나 그렇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그랬다. 잠시 내가 착각에 빠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바로 아까 언뜻 보았던 그 멍자국이었다. 그렇다면 그 멍자국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그럼 다미씨...... 아까 그렇게 도망친 이유가 뭐야? 그 박사장이란 사람...... 나말고 다른 이 유로 겁내는 거야?" 그 말에 이 방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다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숨기지 말고 얘기해 줘. 무슨 이유야? 그 사람이 널 괴롭히기라도 하는 거야?" 그때였다. 괴롭힘이란 단어에 다미가 파리한 입술을 깨물며 금방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 아니요.!" 라는 대답이 즉각 튀어나왔다. 정말 아니라는 듯 그녀는 거세게 머리까지 흔들어댔다. "아녜요, 그...... 그런 건 아녜요!" "진짜야?" 아무래도 의심쩍어 재차 물었다. "정말 아니라고? 그럼 말이 안 돼. 그렇다면 아까는 왜 그렇게 벌벌 떨면서 도망친 거야? 겨우 나하고 길거리에 서서 잠시 얘기 나눈 것뿐인데?" 아무래도 내 상식으로는 다미의 말은 전후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건...... 그건 제가...... 아, 아녜요. 어쨌든 그건 아니에요." 내 추궁에 당황한 듯, 그녀는 같은 얘기만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의구심은 짙어만 갔 다. "다미씨, 내가 보기엔 다미씨가 아니야. 아까 내가......" 내가 봤어, 다미씨의 등에 나 있는- 이 말을 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차마 그 이야기까 지 꺼내기는 주저스러웠던 것이다. 관자놀이가 흥분으로 인해 벌떡벌떡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갑갑했다. 차라리 가놓고 얘 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두서없는 말만 계속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보기에 분명...... 아까 너는 겁에 질려 있었어. 틀림없이 그랬다고. 그러니 그 얘기는 박사장이란 놈한테 네가 무슨 도망칠 이유가 있다는......" "제발!" 그 순가 내 말을 막는 다미.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절규하듯 말했다. "제발, 제발...... 그만해요!"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숨 가쁘게 말을 이어갔다. "그만해 줘요. 그만...... 나한테 그런 말 묻지 말아요...... 나는...... 나는......" 그러면서 문득 얼굴을 들어 나를 마주보았는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 았다. 그녀의 표정은 아타까운 애원,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말할 수 없어요. 제가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 아니에요, 창희씨, 창희씨하고는 상관없는 일 이에요!" "다, 다미......" "그리고 내가 상관없게 해드릴게요. 부탁이에요, 묻지 말아 줘요!"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다는 그녀의 얘기조차도 다른 이유, 즉 박사장 때 문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미는 아직도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이건 제 문제예요. 창희씨는 알 필요 없잖아요, 네?" 그런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옳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내 가슴은 놀라움과 분노로 빠르게 뛸 따름이었다. 어떤 거대한 악과 마주선 느낌이었다. "나, 나는 다미 너를 돕고 싶어. 대체 니가 왜 이러는지......" 그러나 다미는 그 말마저도 재빨리 가로채 버렸다. "제발요, 그냥 아무 말 하지 말아줘요. 오늘 얘기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요. 보영이, 희창 씨...... 비밀로 해 줘요. 내가...... 내가 나중에 다 얘기할게요!" 이렇게까지 되고 나니 나로서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미와 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다미는 내게 더 이 상 묻지 않겠다는 확답을 듣기위해. 그런데...... 그 침묵을 깨는 소리는 미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울려왔다. 삐리릭, 예고 없는 전화벨 소리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잽싸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마치 결정 적인 순간에 방해를 받아 화풀이라도 해야겠다는 것처럼. "여보세요!" "어머, 깜짝이야!" 아뿔싸, 이건. "어머,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누님, 이라고 얘기하려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다미가 보였던 까닭이다. "호호, 나야...... 뭐하고 있어? 갑자기 고함을 다 지르고." 아아, 이럴 때 하필이면 최마담이 전화를 걸어오다니. 대단히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아, 저...... 그, 그게 아니라......" "아유, 아까부터 전화 걸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그날도 그렇게 아침부터 싹 사라져 버리고." 나는 당혹스런 눈초리로 다미 쪽을 건너다 보았다. "어!" 무심결에 나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응, 왜 그래?" 최마담이 물었지만, 나는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미, 그녀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옷가지의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여보세요, 창희?" 전화선 너머에선 최마담이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내 시야에 뭔가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는데, 뭔가 하니 셔츠자락, 다름 아닌 다미가 걸치고 있 던 내 옷이었다. 훅,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몽땅 다 드러나고 있었다. 까만 브래지어와 팬티만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다미의 나신이 바로 내 코앞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적나라하게 펼쳐진 것이다. 맙소사, 넋이 나갈 노릇이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하등 부끄러울 게 없다는 듯, 다미에게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팬티 스타킹으로 감싼 긴 다리 위로 치마가 울려지고...... 다음에는 내 머리통이 하얘지도록 눈 부신 그 젖무덤이 아뜩하게 들어왔다. 팽팽히 당겨 올려진 두 개의 반구는 브래지어로 가리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천조각이 간신 이 아래를 받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성싶었다. 정말이지 그 아찔한 자태를 묘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그 무아지경을 깨뜨리는 것은 최마담의 짜증스러운 목소리뿐이었다. "창희? 전화 끊긴 거야?" "아, 아니오." "근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언뜻 등을 돌리는 다미. 그에 따라 나는 다시 한 번 섬뜩한 그 상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랬다. 결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어처구니없이 망각하고 있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침내 옷자락이 사르르 내려지는가 싶더니, 다미는 이제 내 담요를 얌전히 챙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차 싶었다. 그녀는 지금 나가 버릴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수화기를 가리고 그녀를 불렀다. "다, 다미씨,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최마담에게 재빨리 뇌 까렸다. "자, 잠깐만요! 그러나 그렇게 양해를 구하려던 것이 도리어 화근이었다. "어머, 별일이네. 창희, 나 지금 창희한테 갈까 하는데, 괜찮지?" "아, 안 돼요!" 발작하듯 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머나, 왜?" 빨리 둘러댈 말을 찾아야 했다. 다미는 이제 자신의 핸드백마저 챙겨들었다. "지, 지금 친구들 와 있어요." "그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기가 막힌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가려야 했다. 웬만하면 전화를 그냥 끊어 버릴까도 했는 데, 그랬다가는 정말로 최마담이 달려올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다미야!" 다미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수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속삭였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괜히 제가 여기 있어서...... 창희씨한테 부담만 드리고 있으니까." 그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곧바로 자취방을 빠져나갔다. 미처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로서는 아무런 제지도 할 수 없었다. 손에 든 수화기에서는 뭐라뭐라 신경질적인 소리만 계속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지금? 진자 친구들 와 있는 거 맞아?" 어휴, 나는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네, 맞아요. 맞다구요!" "으응...... 하긴 그렇겠다. 시험도 끝났다니깐 술 한잔 하는 거구나?" 귀찮다는 투의 응대였지만, 최마담은 눈치채지 못 했는지 자기 말만 마냥 조잘거렸다. "후훗, 나도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어차피 오늘은 주말인 걸 뭐. 손님 놔두고 어딜 간다고...... 동 생 그래도 설마 여자 친구는 아니겠지? 아니, 이렇게 전화만 하고 있으니 그렇네. 우리 자기 목소 리 들으니......" 그냥 해 본 소리라니 울컥 속으로 뭔가가 치밀었다. 그럼 이반 장난전화를 내가 붙들고 있었단 말인가. 대충 전화를 끊고 허겁지겁 골목가지 뛰어내려갔을 때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직후였다. 다미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보영이 방으로 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뒤쫓아가 보려 했으나 단념해야 했다. 간다 한들 내가 어쩔 것인가? 다시 자취방에 들어와 앉아있자니 마치 무슨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현 듯 나타나 몸서리를 치며 도망치던 다미, 그녀의 영문 모를 상처들...... 그리고 또 다시 사 라져버린 그녀. 혹시나 아까처럼 두려움에 지친 모습으로 어딘가를 배회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까닭 모 를 죄책감이 엄습했다. 정녕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미가 저렇게 된 걸까? 그 의문은 밤새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선영이 누나를 찾아서 22 다미 사건으로 인한 여파는 다음날 현주네로 돌아갈 때까지도 계속 됐다. 여전히 얼떨떨함을 지 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뭐에라도 흘린 것처럼 말이다. 물론 괜스레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취방에서 잡동사니 몇 가지를 들고 나오 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요일인데도 아파트 안에는 현주 혼자만TV를 보고 있었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아니 어머 니와 마주친다면 그 호들갑스런 성격에 어제의 그 급작스러운 일을 꼬치꼬치 캐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어머니 안 계시니?" 아이와 단둘이 있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점잖고도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현주에게 물었다. "네!" "어디 가셨는데?" "모르겠어요. 어디 놀러 가셨나 봐요...... 화장하구, 치마 입구, 스타킹 신구 나가셨어요." 놀러 나가셨다...... 일요일인데 아이를 두고 외출이라. 의아하긴 했지만, 나는 화장하고 스타킹 신고 나갔다는 현주의 말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역시 아이는 아이인가 보다. 방에다 짐을 옮기고 나니 딱히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그래서 졸지에 아 이 보모 노릇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다행히도 현주가 먼저 내 방문을 두들기 고 빼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으응, 왜?" "있잖아요, 엄마가 선생님 들어오시면요...... 부엌에 밥 차려 놓으셨다고 드시래요. 그리고......"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뾰로통하게 종알거렸다. "아직 숙제 안 끝낸 거...... 선생님한테 검사 받으래요." 아항, 그렇지, 나는 되레 아이가 나보다 낫다고 자책해야 했다. 과외 선생님, 내가 선생님이란 사실을 그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래." 나는 현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부엌으로 나가 부엌으로 나가보았다. 식탁 위에는 정말 로 고운 식탁보에 덮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수저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런 대로 정성스레 마련된 밥상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멋쩍게 식탁에 앉으니 현주가 쪼르르 달려 와서 뭔가를 부스럭대었다. "어...... 너도 밥 안 먹었니?" "으응, 아니에요. 선생님 국이요!" 허허, 아이가 전자레인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그릇을 꺼내 내 앞에 놓는 게 아닌가? 이것 참, 강북 집 외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거짓말 좀 보태 눈물이라도 나올 지경이었 다. "고, 고맙다." 이래서 아마도 딸이 더 낫다는 얘기를 하는 모양이다. 끽해야 열살짜리 초등학교 4학년인 현주 가 제법 익숙하게 부엌일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식사를 마치자 빈 그릇도 척척, 잘 치웠 다. 덕분에 지난밤부터 굶었던 배를 두들기며 포식할 수 있었다. 다미에 대한 생각도 더 이상 떠오 르지 않았다. "자, 현주야...... 우리 그럼 공부하자." 이제는 내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차례였다. 나는 아이 방에 놓인 앉은뱅이 탁자를 사이에 두 고 숙제를 시켰다. 현주는 공부하자는 말에 흥이 안 나는 듯 꾸물거렸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밥값이라도 하려면 당 연히 해야 할 의무였다. "아니, 전과나 학습장은 덮어. 그런 것 베끼면 무슨 소용 있어. 모르거나, 틀린 문제 있으면 내 가 가르쳐 줄게." 뭐 따지고 보면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마찬가지였지만, 가정교사가 할 일이 무언가. 나는 엄 한 얼굴을 하고 현주를 대했다. 숙제란 산수문제 몇 개와 글짓기가 고작이었다. 나는 현주가 마친 숙제를 쓱 훑어보고 본격적으 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틀린 문제는 맞을 때까지 다시 풀도록 해주고, 맞춤법 같은 것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는 데엔 채 한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이는 어머니의 말대로 소심하기는 했어도 머리는 따라주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다음부터 문제지라도 사와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 다로 날을 잡아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는 알파벳부터 시작한다면 그리 성가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책을 덮자마자 현주는 이제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공부라는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성가신 일인 것 같았다. "근데요...... 선생님." 문득 아이가 배시시 웃음을 띄우며 내게 질문을 했다. "응, 왜?" "저기요...... 제가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그래, 그러렴." 나는 허리를 펴고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현주는 무슨 어려운 질문이라도 하려는 듯 머 뭇거렸다. "제가요, 저 이제부터 과외 받는다고 친구들한테 얘기했거든요...... 남자 선생님이라니까 친구들 이 물어보라던데......" 남자 선생님이라니까 물어본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혹시나 현주의 입에서 다소 난감한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선생님은 애인 있으세요?" 으잉! "우리 반 여자 애들이...... 선생님 잘 생겼냐고 묻길래, 전 잘 모르겠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럼 여자 친구 있냐고 물어보래요. 있으면 잘생긴 거구, 없으면 못생긴 거라구요." 이렇기에 시대가 바뀐다는 걸까. 겨우 초등학교 아이들이 벌써 그런 것에 관심을 갖다니. 웃어 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질문이었다. 내가 황당하여 피식거리자 호기심이 더하는지 현주가 바싹 다가앉으며 턱까지 괴고 다시 물었 다. "그게요, 있으면 이름가지 물어봐야 한 대요. 있어도 없는 척, 가짜로 있다 그런다구요!" 이런. 현주는 장난이 아닌 제법 진지한 자세였다.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넘어가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그거야......" 글쎄다. 뭐라고 하나.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 없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할 판국이었다. "있으세요, 없으세요?" "이, 있기는...... 아니 이, 있지 물론......"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애인이에요, 그냥 여자 친구예요?" 어이구...... 이 아이가 대체 그 차이가 뭔지나 알고 묻는 걸까. "혀, 현주야. 너 애인이랑 여자 친구랑 뭐가 다른 줄이나 아니?" 현주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럼요, 애인은요...... 선생님이 좋아해야 되는 거래요. 그러니까, 여자 친구는 여자가 선생님을 좋아해도 모르지만요, 애인은 선생님이 좋아해서...... 그래서 만나는 그런 거죠 뭐." 당차면서도 확신에 찬 이야기. 일견 그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애인이세요, 아님 여자 친구세요?" 재차 물어오는 진지한 현주의 얼굴에 나는 그만 갈수록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애인이 없다고 한다면 아이는 금세 낙담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 그야...... 당연히 애...... 애인......" "와...... 진짜요? 이름이 뭔데요? 선생님 애인." "이, 이름?" 기가 막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아는 이름들을 떠올려 보았다. 예지, 보영이, 다미...... 하지만 딱히 가운데 딱히 애인, 아닌 심지어 여자 친구라 부를 만한 이름 이 없었다. 아이의 얘기에 따르면 그런 여자들은 그냥 친구라 부를 사이였기 때문이다. "아니, 선생님..... 가르쳐 주세요오!" 현주는 떼라도 쓸 기세였다. 그때였다. 머리 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름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 다. 자기가 좋아해야 한다고, 응당 그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좋다라는 게 아닌 것은 확실하고- 그 순간 왜 그 이름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뇌까렸다. "서, 선영이." "예? 선영이요? 야아, 이름 예쁘다!" 얼렐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스스로도 놀라 멍하니 현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현주는 알 아낸 것이 기쁘다는 듯 손뼉까지 쳐댔다. "헤헤, 가서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이름 보니까 얼굴도 예쁠 것 같아요. 그쵸? 참, 성이 뭐예 요?"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꺼낸 그 이름, 아이는 그 이름을 연습 장에 또박또박 적어놓기까지 했다. "만난 지 오래 되셨어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후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연신 질문을 퍼부어 대는 현주에게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쉴새 없이 질문이 이어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어디까지 갔느냐는 질문까지 나올 판국이었다. "그, 그만...... 그 얘기는 그만 하자." "선생니임......!" 어떻게든 이 정도에서 끝을 내야 했다. "나, 나중에. 나중에 더 얘기해 줄게. 지, 지금 아 얘기하면 재미없잖아!" 조금 더 있다가는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아 허둥지둥 아이 방을 나서려는데, 새침해진 현주가 등 뒤에서 계속 종알거렸다. "선생님, 우리 엄마 말이 맞았어요. 엄마가요, 선생님은 아마 애인 있으실 거라고 했어요. 어떻 게 아냐고 했더니요, 자기가 질투 나는 거 보면 그렇대요!" 질투? 마지막 그 말이 더 찔끔거릴 얘기였다. 23 내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문을 열어 젖혔다. 기분이 묘해졌다. 왜...... 내가 그 순간 선영이 누나의 이름을 떠올린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해야 한다는 이유, 그것뿐이었는데 무의식중에 그녀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창틀 곁에는 큼지막한 유리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필경 방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현주 어머니의 배려인 듯했다.나는 담배를 하나 빼물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야릇한 일이었다. 현주의 그 농담 같은 이야기로 인해, 내 기분이 어느새 일주일 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시험 전부터 그토록 눈이 빠지게 찾아다녔던 그녀......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는 자 취방을 떠난 온 터라 그 아련한 목소리조차 듣기 힘든 상황이었다. 새삼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졌 다. 안 되겠다. 뭔가 결심해야 했다. 비록 오해나, 쓸데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킬지라도, 나로서는 방 도가 없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아까 무의식중에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에 대해서. "여, 짱이! 늦었네......?" 월요일, 늦잠 끝에 오후가 되어서야 강의실에 들어서는 나에게 희창이 녀석이 손을 흔들어 보였 다."얼레,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역시...... 불알친구가 달리 불알친구겠는가. 내가 말 하지 않아도 녀석은 대번에 눈치를 챘다. "아침부터 안 보이길래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뭐 안 좋 은 일있구나?" "아, 아냐...... 아무 것도." "아니긴 뭐가 아냐, 짜샤! 우리가 한두 해 아는 사이냐? 척하면 딱인데...... 왜 그래? 혹시 너...... 그 미인 아줌마랑?" 미인 아줌마? 하기야 이 녀석은 내가 토요일 밤에 다시 자취방에 돌아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찌푸려지는 내 눈썹을 보며 희창이가 금세 얼굴을 바꾸었다. "큭큭, 농담이야, 농담. 니가 하도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선영이 누나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학교에서 볼 수 없는 것인지. 그러나 그녀를 찾으려 해도 집이나 연락처조차 모르고 있다. "어라, 상당히 심각한 얼굴인데? 니 얼굴 보니까 장난이 아니구만!" 휴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정도일까. 그런 내 복잡한 심정을 알 리 없는 희창이는 연신 고개 만 갸웃거렸다. "요새 너 도통 이상하다? 시험기간 전부터 내내...... 너 저번에도 그랬잖아?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그러나 희창이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잠자코 녀석의 뒷덜미를 붙들고 고갯 짓을 했던 까닭이다. "어...... 뭔데? 밖으로 나가자고?"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내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원래는 제일 먼저 예지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가 걸렸다. 즉 정호선배나 다른 사람의 귀에 내가 선영이 누나를 찾는다는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예지는 왠지 불안했다. 더군다나 지현이란 제 3의 이름까지 알게 된 현 시점에서는. 거기에 비하면 비밀로 해달라 따위의 다짐을 받을 필요가 없는 인물이 희창이 아닌가. 게다가 누나와 나 사이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상담 대상으로는 적격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좋아좋아, 뭐 중요하게 상의할 거라도 있는 모양인데...... 어디 얘기해 봐라, 이 형님한테...... 내 가 아니면 누가 들어주겠냐?" 일단 한적한 교정 구석 계단에 녀석을 앉힌 뒤 나는 녀석의 진지해 보이는 얼굴을 확인하고 말 을 시작했다. "그, 그게 말이지...... 사실은......" 자초지종, 모든 걸 털어놓았다. 우선 지난주 내내 선영이 누나를 찾아다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 우연히 경양식 집에서 목격한 선영이 누나와 정호선배의 만남, 그리고 아쉬웠던 그녀와의 짧은 대 화와 그 다음에 정호선배가 나를 불러 일종의 경고성 발언을 했다는 사실가지 전부 이야기했다. 심지어 선영이 누나가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사과를 했다는 것도 얘기해 주었다. 그도 얘기를 듣고 보니 그 동안 심각했던 표정이 이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랬단 말야? 근데...... 창희 너...... 그러다 정말 선영이 선배랑 그렇고 그런 사이 되는 거 아냐?" 가슴속으로 서늘한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무슨 의미냐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내 말은, 그렇고 그렇다는 게...... 너랑 그 선배하고...... 무슨 오해가 아닌, 진짜 사이로 변 하면 어떻게 하겠냐는 뜻이야. 그렇잖아, 지금 너는 마치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은 것뿐이라고. 하 지만...... 실제로 니가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그때는 어쩌려고?" 나는 뜨악하여 시선을 돌렸다. 상상이 아닌 현재의 내가 선영이 누나를 좋아하게 된다? 아니 그 렇다면 내가 지금 그녀를 좋아하기에 이다지도 근심하고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 는 듯한 단호한 표정을 지어 돌려보냈다. "하기야 뭐......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다마는......" 내가 그렇게 나오자 이번엔 오히려 희창이가 주춤거렸다. "그럼 내 생각에는...... 명희선배를 찾아가 보는 게 어때? 그 선배가 선영선배랑 제일 친하니 까...... 그 선배라면 함부로 소문 내지 않을 거 아냐. 너랑 나 같은 사이니까."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유명희, 명희 누나- 희창이의 말대로 그녀는 선영이 누나와 단짝친구이다. 학구파답게 차갑고 안경까지 쓴 샐쭉한 인상이어도, 그렇기에 여린 심성의 선영이 누나와 어울려 다니는 것이다. "그, 그럴까......? 그럼 그 누나는 지금?" 지난번 교수님과의 술자리에서 선영이 누나와 내게 술을 권하던 그녀를 상기했다. 그날, 그녀는 고맙게도 뒤쫓아오던 정호선배를 막아주기까지 하지 않았었나. 어쩌면 그녀는 그날 고의적으로 정호선배를 따돌렸던 게 아닐까. 그 사람이라면 일단 신뢰할 수 있다. "에이, 간단하지. 그 선배 조교보로 근무하잖아. 대여섯 시쯤 끝날 테니까. 이따 수업 끝나고 찾아가 보면 되지!" 아아, 넓죽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말썽쟁이 희창이였지만 오늘은 제법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 과 사무실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보며 희창이가 뭔가 다짐하는 투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 그렇다면 내 생각에는 말이야. 뭔가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확실히 해두라고? 알 듯 말 듯한 내 표정을 보며 녀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아, 아니다. 창희 니가 알아서 잘 하겠지 뭐...... 후훗, 그냥, 정호선배 정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선배. 별로 선영이 누나에게 좋은 소리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정호선배에게 신경 쓰지 말라니- 뭔가 가물가물한 게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됐다, 됐어. 그저 그렇다는 얘기야. 그나저나 이제 마지막 수업인데 안 들어갈 거냐?" 하지만 말뿐, 희창이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일어섰다. 아니야, 혼자 있고 싶다...... 이런 대 답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한두 시간만 기다리면 되겠네. 명희선배...... 과 사무실에 있을 거다. 알지?" 이제 혼자 남은 내 머리 속에, 선영이 누나에 대한 상념이 다시 몰려왔다. 희창이 녀석의 말대로 내가 왜 이다지도 지극한 걸까. 정호선배와 그녀가 대체 어떤 사이냐는 것에 내가 왜 이다지도 목을 맨단 말인가? 조바심 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릴뿐이었다. 24 똑똑, 조교실을 노크한 뒤 나는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다행이었다. 이미 조교형은 퇴근을 했는지 과 사무실 안에는 조교보인 명희 누나만이 자리를 지 키고 있었다. "저...... 명희 누나!" "응, 창희구나. 웬일이니?" "지금...... 바쁘세요?" 그녀는, 내가 머뭇거리자 의외라는 듯 안경알을 반짝였다. "아니, 그렇진 않은데...... 왜?" "저...... 잠깐 드릴 말씀이...... " "그래? 그럼 어차피 나도 업무 끝나가니까 여기서 얘기해도 되겠지?" 아무도 없으니 괜찮기야 하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괜스레 긴장이 됐다. "뭔데, 중요한 거니?" "아, 아뇨. 그 그게...... 선영이 누나 일인데요." "뭐? 선영이?" 이상했다. 눈썹이 묘하게 치켜지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는 자세로 바뀌었다. 까딱까 딱하는 그녀의 신발코가 나를 주눅들게 했다. "얘기해 봐. 선영이 뭐?" "저...... 그 누나 요즘 왜 학교에서 안 보이는지 아세요?" 그 말에 명희 누나의 입술이 야릇하게 말려 올라갔다. "왜...... ? 걔랑 무슨 약속 있었어?" "아, 아뇨......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그냥 궁금해서요!" 왠지 내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기분이 켕긴다. 그런데 그녀는 책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식을 전해주었다. "걔 이제 학교 못 나와. 아니 안 나와!" "예에...... ?" 이 무슨 황당무계한 얘기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어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 어째서요?" "선영이 이번 학기 휴학처리 됐어. 그래서 시험도 안 봤잖아. 중간고사 전에 교수님이 인정하시 면 휴학할 수 있으니깐." 입이 떡 벌어졌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헤매고 다녔어도 그녀를 만날 수 없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왜, 왜요? 혹시 아프기라도 한 거예요?" 나는 명희 누나에게 다가서며 다그치듯 물었다. 마치 선영이 누나가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 게 그녀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글쎄...... 그거야 걔한테 직접 물어보렴. 그렇잖아. 그건 개인적인 일인데 설사 안다 해도 내가 말하긴 좀 그렇잖아." 항의하는 나를 무심하듯 명희 누나가 올려다보았다. 그건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선영이 누나에게 직접 물으려 해도 도대체 방도가 없지 않은가?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공손히 다시 물었다. "그, 그럼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선영이 누나 연락처 아세요?" "알지, 주소록에도 나와 있잖아?" 그녀는 흘긋 나를 돌아보았다. 젠장, 그거야 저도 알죠. 그렇지만 그 주소는...... "그, 그건 아는데요. 그 번호가 아니던데요. 이사라도 갔는지...... " 웬일일까. 일순 명희 누나의 눈썹이 작게 찡그러졌다. "맞아. 얼마 전에 선영이네 이사 갔어.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아하! 그랬구나. 이제서야 나의 숱한 의문들이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 니었다. 나는 애원이라도 하고픈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누, 누나 누나는 아세요? 선영이 누나 바뀐 연락처나...... 아니면 혹시...... 지, 집이라 도 어딘지 좀...... " "선영이네 집? 알긴 아는 데...... " "그, 그럼 좀 가르쳐 주세요!" "글쎄...... 그걸 니가 알아서 뭐하려고?" 꿀꺽,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저...... 아...... 그, 그게...... " 그렇게 허둥대는 나를 명희 누나의 시선이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무언가 망설이는 모습이었 다. "음...... 이거 원래는 선영이가 비밀로 해달라는 건데...... 하지만 좋아. 너라면...... " 너라면, 나는 그 말에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 그녀를 얼싸안고 감사를 드려도 부족 할 것 같았다. 후...... 뜻 모를 한숨소리를 내더니, 명희 누나는 내게 선영이 누나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의외 로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주면서. "어떻게 가는지는 알지?" "예, 고, 고맙습니다. 누나!" 꾸벅 절을 하는데, 그녀가 다시 책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내게 말했다. "그렇지만...... 아마 오늘은 소용없을 거야." "네?" "오늘은 소용없을 거라고...... 가 봤자." 솔직히 그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떨떠름해졌다. 그러나 어쨌든 내 속내를 들킨 셈이 됐으니 얼굴이 붉어질 판이었다. "걔 오늘 아마 공항 나갔을 거야. 부모님이 외국 나가신다고해서." "어...... 예에...... " 이 대목에서 나는 더 이상 실망스러운 눈치를 보일 수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저 그럼...... 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오늘 집에 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영이 누나의 집주소를 적은 쪽지를 얻었으니, 이게 어디냐. 가슴이 벅차 오를 지경이었다. 도망치듯 조교실을 빠져나가려는데 명희 누나가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참, 창희 너...... 선영이한테...... " "예?" "아, 아냐, 됐어.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가 봐." 입술에 볼펜을 문 채 명희 누나는 뜻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멈췄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어쨌든 다시 책상 위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목 례를 보낸 뒤 사무실 문을 닫았다. 지금 무슨 얘기를 듣든지,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머리 속에는 오직 선영이 누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25 번호판을 누르는 내 손가락이 가볍게 떨려왔다. 그것은 귓가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윙윙거리는 소음만 가득차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조용하고, 차분한 이 목소리- 내 숨을 멎게 만드는 그 음성은 일주일 전과 변함이 없었다. 만약 목소리를 물감으로 바꾸어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어떤 색일지는 몰라도 금방 내 손에 묻어날 것 같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뭐라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 데...... 그런 다짐만 혀끝에서 빙빙 돌뿐. 아니다. 차라리 아무 말하지 말자. 거기 있으면 된다. 지금은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수화기를 가린 채 조용히 전화기를 내렸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서둘러 학교를 떠났다. 수업이 끝난 지 채 십여 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강의실을 나올 때 희창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왔다. 저 멀리 강변으로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 아마도 그녀는 계속 집에 있을 것이 다. 아니 꼭 있어 주기를 바랐다. 선영이 누나의 집은 강남의 한강을 옆에 낀 대형 아파트촌이었다. 학교 앞에서 그곳까지는 한 시간 남짓,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뭐랄까, 신기했다. 나와 헤어질 때마다 누나가 이 길, 이 거리를 보며 돌아갔으리라 생각하니 그 런 대로 익숙한 그 도로도 새삼 달라 보였다. 마침내 어제 명희 누나가 가르쳐준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고, 나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동 호수 까지 거듭 확인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공중전화를 찾아 다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삐리리...... 삐리리리...... 한 시간 전보다 수화기를 든 손이 더 떨리고 있었다. 제발, 부디. 영원 같은 그 신호음 몇 초. 그것이 마치 내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삐리리...... 딸칵. 드디어...... "여보세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쿵쾅쿵쾅, 두방망이질 치는 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질까 걱정될 정도였다. "여보세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하나, 둘, 숫자를 세었다. "저...... 누나!" 누나, 선영이 누나, 이 말이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누나 저예요, 창희예요!" 첫 마디를 꺼내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전화기 건너편의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선영이 누나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창희, 창희라구요...... 선영이 누나." 나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으응...... 차, 창희야......" 서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양상이었다. 마침 인근에 공사장이라도 있는지 둔 중한 트럭소리가 들려왔다. "지, 지금 어디야......? 공중전화인 것 같은데......" "저, 저요? 어...... 저는 지금......" 망설임이 찾아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말하면, 행여 그녀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지금...... 누, 누나 집 앞이에요. 저...... 누나 집 앞에 와있어요!" 다시 이어지는 침묵. "누, 누나...... 좀 나올 수 있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누나. 그 동안 이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럼에도 수화기에서는 한동안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야속함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 알았어...... 나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마지못한 듯 나의 위치를 확인한 그녀는, 조그만 한숨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좀 전까지의 설렘과는 달리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에 나마저 덩달아 침울해졌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일이십 분여. 나는 어둑어둑한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에 기대어 묵묵히 발부 리에 걸린 보도블록만 응시했다. 그녀가 나올지 어쩔지, 방금 전 통화를 끝내고도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나온다 해도 과 연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조차도 머리 속에서 뒤엉켜 버린 상태였다. 그러다가 문득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었다. 그때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가 보였다. 후아, 나는 허공을 쳐다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선영이 누나, 그녀가 내게 다 가오는 것만으로도 내 몸이 뻣뻣해지리라 짐작했었는데, 묘했다.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오히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침착하고 편안한 기 운에 잠길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했다. 안 그래도 억지 미소라도 지어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했지만 내 입가는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반가운 그녀의 모습이었다. "안녕...... 창희야." 수줍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선영이 누나. "누, 누나......!" 애써 씩, 웃어 보이며 그녀의 얼굴을 뜯어봤다. 뭔가 고단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꼭 마음 고생 을 한 사람처럼. "웬일이니...... 다 저녁때 여기까지......" 나는 할 말 대신 그저 실없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선영이 누나는 그런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나와 조금 떨어져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엉거주춤 한 발자 국 뒤쳐져 따라갔다. 너무나 익숙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머릿결, 다소곳한 어깨, 뒷 무릎 위로 찰랑이는 스커 트 자락. 그런데...... 오늘따라 왜 그녀의 키가 작아 보이고, 어깨 또한 이다지도 왜소해 보이는 걸까.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한강 고수부지야. 그리고 갈래? 나......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묵묵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저...... 오늘...... 뭐 하셨어요? 하루 종일......"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나......? 으응...... 그냥 책 읽고...... 음악 듣고...... 그랬어." "잘 가셨어요? 누나 부모님은?" 맞아, 부모님이 멀리 외국에 가셔서 외로운 건지도 몰라...... 이 누나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던 선영이 누나는 그제야 살짝 내 쪽을 바라보았다. "어, 어제 학교에서...... 명희 누나에게 물어봤어요. 이제 누나가...... 학교 안 나온다고 하시길 래......" "명희...... 명희가 뭐라고 해?" "아뇨, 그냥...... 누나 집만 물어봤는데요. 전화번호랑......" 그래? 그녀는 물끄러미 내 눈을 응시하다 잠자코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참, 한 시간쯤 전에 그냥 끊어진 전화 있었죠? 죄송해요. 그거...... 제가 건 거예요. 누나 집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꺼내며 관심을 끌어보려 했지만 누나는 소리 없는 웃음만 지어 보일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둑처럼 생긴 차도 밑을 지났다. 그러자 탁 트인 강변이 펼쳐졌다. 드문드문 선 가로등 불빛에 선영이 누나의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이 드러났다. "우리...... 저기 앉을래?" 그녀가 가리킨 곳은 강둑 바로 위 계단처럼 이어진 곳이었다.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군데 군데 아베크족처럼 보이는 남녀가 띄엄띄엄 앉아있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강물에는, 건너편에서 흘러나온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녀는 강물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더니, 발치께의 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강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앉으려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어 저...... 잠깐만요. 마실 것 좀 사올게요." 냉큼 가판점으로 뛰어가 누나 몫의 음료수와, 내가 마실 캔 맥주를 사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도 그녀는 가만히 강물을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녀 곁에 앉으며 나 는 살며시 음료수를 건넸다. "바람이 많이 부는데...... 춥지 않으세요?" 간편한 면스커트에, 스타킹도 신지 않은 그녀가 걱정되었다. "아니...... 괜찮아." 잘됐다.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럴 때면 멋있게......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 다. 나는 조용히 내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괜찮은데...... 너는 춥지 않아?"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선영이 누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 다. 사실 강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뭐 어떠랴. 지금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 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이렇게 벅찬데. 나는 씩씩한 미소를 지으며 칙, 캔 맥주를 다 목을 축였다. 내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닌지라 선영 이 누나는 마치 큼직한 잠옷을 입은 듯 내 옷 속에 폭 파묻혔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좀 풀어진 것 같아 나는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근데요...... 누나, 이번 학기 휴학하셨다면서요?" "응, 그거...... 그렇게 됐어." "왜...... 갑자기 그러셨어요?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다행이었다. 누나는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건......" "그럼...... 왜요?" 후, 한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냥...... 힘들어서......" 힘들다고? 나는 왠지 그 말이 싸늘하게 들리기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씁 쓰레한 미소를 띄운 채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었다. 왜요, 말해 주세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더 이상은 거부하는 듯 했다. 화제를 바꾸는 게 나을까, 어쩔까 하고 있는데 이번엔 그녀가 거꾸로 내게 물어왔다. "그보다...... 그때...... 많이 놀랐지? 정호가 그런 말해서." 일주일 전 그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 아뇨...... 그보다는 누나가 더 걱정 됐어요. 저 때문에...... 괜히 오해받으시지 않았나 해서. 나는 일단 아닌 척 하기로 했다. "아니야...... 그건 내가 할 소리인 걸. 나 땜에 니가 오해받고." 강물을 향한 눈의 긴 속눈썹이 약간 떨리는 듯했다. 나 역시 그녀의 시선을 쫓아 강물에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저기, 이런 말...... 제가 물어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정호선배가 저 만났다는 건 어떻 게 아셨어요?" 그녀는 나의 물음에 한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창희야." "네?" "내가 정호랑 어떤 얘기했을 것 같아? 너 알아?" 다소 엉뚱한 되물음이었다. "어, 언제요?" "있잖아. 학교 앞에서...... 나하고 정호하고 낮에......" 아, 그날. 언젠가 정호선배와 있다가 마주친 그 경양식집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글쎄요." 의외의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선영이 누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후훗, 그때도 니가 물어봤잖아...... 커피숍에서." 맞아, 그랬었지...... 맞장구를 쳐야 할 것 같아 나도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제 생각인데." "응, 말해 봐." "음...... 제 짐작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호선배가 고백한 것 아녔어요? 누나 좋아한다 고요." 그녀는 대답 대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니 말이...... 맞아. 걔가 그랬어. 사귀고 싶다면서." 폭, 그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정호가...... 먼저 그러더라. 근데 나랑 창희 너 사이가 이상해 보인다고...... 우리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역시 그랬구나...... 예지에게 들은 바 있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당사자 입에서 다시 들으니 기분 이 조금 상했다. "그러면서...... 그랬어. 내가 창희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자기가 날...... 좋아한다고." 일단 선영이 누나의 얘기를 모두 들어보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이건 너무 조바심 나는 얘기였 다. 선영이 누나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고? 그럼 그때까지는 그 선배의 일방적인 의사표시였다는 게 아닌가. 꿀꺽,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 어갔다. 이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선영이 누나는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이걸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도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나는 가빠오는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놓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그래서...... 누나는 뭐라고......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아찔한 질문. 대번에 선영이 누나의 동그랗게 변한 눈이 내게 꽂혔다. 아연 긴장되는 찰나. "뭐......? 정호랑 사귀는 것에 대해서?" "아, 아니요...... 그 얘기말고...... 저요......!" 내가 어떻게 그런 과감성을 보일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너?" 눈이 동그래진 그녀는 이번엔 입도 다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입술이 도화선처럼 바싹 타 들 어갔다. 어휴, 어쩔 수 없다. 눈 딱 감고 묻는 수밖에. "저...... 저 좋아하냐는 그, 그 말요. 그러니까 누, 누나가 그 말에 정호선배한테 뭐라고 대답했는 지......" "......" 영원 같은 어색함이 그녀와 나 사이에 흘렀다. 그러나 의외로 선영이 누나 쪽이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린 그녀에게서 조그만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그건......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 아! 나는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내 뚫린 귓구멍이 제대로 박힌 것인지 떼내어 확인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으하하, 이게 무슨 얘기인가!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누나, 작고 예쁜 눈동자, 한없이 착한 미소의 그녀 가, 나에 대해서...... 머리통이 절반쯤 날아가, 아니 완전히 날아가 풍덩, 저 강물 속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26 혀며 입술이며 모든 게 한꺼번에 얼어버린 듯했다. 그때 선영이 누나의 목소리가 다시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냥...... 그때는 화가 났었을 뿐이야. 정호가 그랬어. 자기가 너랑 얘기해서 확인했다고...... 창 희 너는 나 안 좋아하니까. 걱정 말라고 그랬어." "아, 아니에요!" 내 외침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그건 결코, 절대로,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민감한 화제를 피하려는 듯, 그녀는 자기 말만 이어갔다. "모르겠어. 그냥 그랬던 건데...... 너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전화했던 거야." 아아, 이 누나가 혹시 그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미안해. 창희야...... 너한테 그런 소리나 듣게 하고...... 다 내 잘못이야." "자, 잠깐만요!" 그랬다. 그건 지금 내가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할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숨 가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목울대로 연신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니었다. 오해는 그게 아니었다. 정호선배가 나를, 선영이 누나를, 어떻게 오해하든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가장 기막힌 오해는 지금 선영이 누나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누, 누나...... 저는...... 저는......"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 정호선배가 그렇게 얘기한 건...... 제가 몰랐어 요. 저는 누나랑 그 선배가...... 정말 사귀는 줄 알고......" 내가 들어도 횡설수설, 하지만 다급했다. 어떻게든 이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제, 제발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 그 말 정말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무슨 말?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바, 방금 전 얘기 말예요. 그, 그러니까 정호선배가 누나더러 저를...... 저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재차 다그쳐서야 그녀는 내가 무얼 묻는지 깨닫는 것 같았다. 당황해 하는 그녀의 눈빛이 내 시 선과 똑바로 마주쳤다. "모르겠다고, 모르겠다고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 그건......" 선영이 누나는 대답하기 곤란한지 얼굴 가득 난처한 빛을 띄웠다. 물론 나도 그러리라는 걸 짐 작하긴 했지만 정녕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거...... 나도 좀 줘." 얼레, 선영이 누나가 말을 하려다 말고 내가 마시던 캔 맥주를 가리켰다. "이, 이거요?" 목이 타는 걸까? 내가 서둘러 새 캔을 따려는데 그녀가 가만히 내 손목을 붙들었다. "그냥...... 그걸로 줘. 어차피 많이 먹지도 않을 건데 뭐." "그, 그래도...... 이건 제가 마시던 건데......" 하지만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내가 쥐고 있던 맥주 캔을 받아들고는, 입술이 닿았던 부분도 닦 지도 않고 그대로 들이켰다. "후...... 시원해." 차분함을 잃지는 않았으나 이내 휴우...... 다시 선영이 누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쨌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으므로 나는 잠자코 그녀가 하는 대로 강물만 응시하 고 있었다. 그 새 강물에 빛 그림자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선영이 누나가 너무 조용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고개를 돌 렸는데, 이게 웬일! 선영이 누나의 눈가에 강물에 비친 불빛이 아닌 다른 것이 반짝이고 있는 게 아닌가. "누나......" 도대체 왜......? 잠자코 내 시선을 피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해...... 잠깐......" 고개를 돌린 채 딴 곳을 바라보는 누나.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나...... 모르겠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나도 모르겠어...... 아니, 좋아해도 그게 남자 로서인지 아닌지도......" 오, 신이시여.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마지막 궁금증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 그럼요. 정호선배는...... 정호선배는요?" 나는 그녀에게 세찬 질문공세를 폈다. 그러나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 다. "제, 제발 대답해 주세요. 정호선배에게는 뭐라고 하셨어요? 그 선배는......?" 그런데 그녀가 한 발 앞서서 내 말을 끊었다. "걔가, 정호가 그랬어...... 자기는 용서할 수 있다고...... 다 알고 있다고......" 예? 용서한다니......? 다 안다니......? 뭘 말이에요? 라고 물으려는데 그녀의 대답이 먼저 나왔다. "내 술버릇...... 비밀들...... 자기는 이해한다고. 정호, 자기만 받아주면 되는 거라고......" 이런,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새로 딴 맥주 캔이 손바닥 안에서 으그러졌다. 비리, 바로 그 얘기였던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가슴 아프게 상처 입은 그 은밀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정호선배가 알고 있다니...... "그렇게 얘기했어. 자기를 만나면 감출 수 있다면서...... 그렇게 나를 계속 쫓아다니는 거야. 정 호는......" 말도 안 된다. 그건 협박이다. 딴은 선영이 누나를 생각해줘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도저히 내 귀 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 애가 그렇게 얘기해 준 것, 그렇게까지...... 어쩌면 고마울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런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 부끄러웠어. 내 자신이......"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냈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기 않아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누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녀가 슬퍼하고 있다. 눈물 짓고 있다. 그 것만으로도 나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서 으스러지게, 으스러지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 울지 말아요. 누가 뭐래도 누난 지금 안 그렇잖아요." 그 순간, 틀림없이 그 순간,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호선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결 코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 모든 것을 겪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이해하는 사람- 그건 바로 나였다. 선영이 누나의 얼굴이 내 가슴에 밀착되었다. 따뜻했고......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은 우리, 나와 누나였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날 이해해 준다는 정호의 말, 난 이제 그런 것이 필요할지도 몰라...... 그래서, 그래서 대답을 못했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을 못했어." 그녀의 말이 낮게 계속 흘러나왔다. 막아야 했다. 무조건 그녀의 그런 말을 막아야만 했다. 그녀 나 나나 너무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그, 그만요! 듣기 싫어요!" 다음 순간, 나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로서도, 또 차마 나로 서도 상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건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내 대답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녀의 슬픈 목소리를 막은 것은 내 말도, 내 손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입술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턱을 들고, 나는 내 입술을 선영이 누나의 입술 위에 포갠 것이다. 아주 세게 말이다. 27 결국 그녀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머리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마치 무슨 확신처럼 들 려왔다. 말을 해야 한다. 말을- 내 목구멍으로 막 무슨 말이 튀어나오려 한다. 그게 어떤 말인지는 이미 생각할 기능이 마비된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단지 확실한 것은 내가 그 말을 아주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는 느낌뿐이었다. 처음에 내 어깨를 밀어내려던 그녀의 팔- 그러나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살짝...... 그녀의 손이 내 뺨에 얹어졌다. 한동안, 아니 그 몇 초간이 너무나 긴 여운처럼 느껴졌다. 내 얼굴을 감싸 쥐었던 그녀의 손바닥이 다시 가만히 내 어깨를 밀어냈다. "그, 그만, 창희야!" 엉겁결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를 막으려던 것뿐이었는 데...... 나의 얼굴이 후끈,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석진 어둠 속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선영이 누나의 얼굴도 붉어졌다는 것을. "미, 미안해요...... 누, 누나!" 상기된 얼굴을 보이기가 싫은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안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누, 누가 보면 어떡해......" 누나의 말에, 문득 얼굴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고수부지 계단의 맨 아래쪽에 앉아있으므로, 등뒤로 띄엄띄엄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와 비슷한 커플들이 거의 같은 자세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을 뿐이다. 언뜻 보기에도 그들은 아마 우리와 마찬가지의 행동- 어깨를 맞대고, 안다시피, 심지어 입맞춤 까지-을 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 사람들이 보잖아." "괜찮아요. 우리 쳐다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게다가 우리가 앉은 곳은, 가로등 불빛도 별로 미치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 속이었다. 그제서야 누나도 몰래 주위를 훔쳐보는 보양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안심이 되는지, 내가 슬그머 니 몸을 당기자 다시 내 어깨 위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어색한 침묵...... 나는 심한 갈증을 느껴 벌컥벌컥, 캔 맥주를 들이켰다. 고개를 드니 휘황한 강 건너 불빛으로 약해지기는 했어도 별들이 몇 개 눈에 띄었다. "서, 선영이 누나...... 그날...... 기억하세요? 지난 학기MT가서...... 제가 처음으로 누나와 단둘이 밤을 보냈던 그날?" 내 얼굴 아래쪽에서 조그맣게 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가 기억이 나요. 저요, 사실은...... 그날부터 누나...... 누나를......" 그러나 나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중간에 멈추었다. 좀더 내 자신이 투명해져야 할 것 같았기 때 문이다. "누, 누나...... 나 솔직히 얘기할게요. 그래요, 그냥 지금은...... 제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해주세요." 꿀꺽, 다시 한 번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넘었다. 당연했다. 내겐 가장 중요한 질문- 마지막 관문 이자 확인- 이 남아있었다. "누나, 누나도 날...... 날 남자로서 좋아하나요......? 꼭 듣고 싶어요. 그것만 대답해 주세요. 다른 건 상관없고, 모두 필요 없어요." 영원처럼 긴 시간...... 그리고...... 대답 대신 조그맣게, 아주 조그맣게 끄덕이는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느껴졌다. 나는 두 팔을 뻗어 으스러지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의 표현이 었다. "아!" 내가 너무 세게 껴안았을까, 그녀의 따스한 숨결이 내 가슴에 느껴졌다. "미, 미안해요...... 다, 답답해요?" 얼떨결에 그녀의 등을 감싸 쥐었던 손에 힘을 뺐는데, 의외로 누나가 작게 도리질을 쳤다. "아냐...... 괜찮아." 다시 한 번 그녀를 부둥켜안았는데, 그런데......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촉이 전해져왔 다. 얇은 니트만을 받쳐입은 푹신한 누나의 젖가슴, 그 부근이 무언가 색달랐다. 그런 내 느낌을 알아차렸을까. 선영이 누나가 부끄러운 듯 속삭였다. "저기...... 아까...... 집에 있느라고...... 그것 안 했어. 그래서......" 안 입고 나왔다? 그럼, 지금 그녀는 노브라? 나는 뜨악하며 허겁지겁 그녀를 떼냈다. 상상만으 로도 귀밑이 후끈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 멋쩍은 행동에 그만 그녀의 어깨에 걸려있던 내 재킷이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다시 걸쳐주 기 위해 재빨리 그녀의 등뒤로 손을 뻗어 집어들려 했다. "아니...... 나 여기......" 어...... 그러나 그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 팔꿈치를 유도했다. 내가 옷자락을 쥔 그대로, 그녀는 자신의 하반신 쪽으로 재킷을 이끌었던 것이다. 하긴 그럴 수 도 있었다. 스타킹도 신지 않고 얇은 면치마 한 장만 걸치고 경사진 강변 계단에 앉아있느라, 늘 어진 스커트 속으로 서늘한 공기가 닿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엉거주춤 그녀의 치마 위에 재킷을 덧씌워준 뒤,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선영이 누나의 두 손이, 내 팔목을 지그시 눌렀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 려 그 손을 안으로 감춰 주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난 띵,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내 손의 위치는 재킷과 그녀의 치마 사이- 손 등인지 손바닥인지 분간도 못할 감촉이 전해졌다. 푹신한 그 감촉, 그것은 부드럽게 면을 이루며 양쪽으로 나뉘어 뻗어 있었다. 바로 그녀의 두 허벅지였다. 얄팍한 천으로만 가리고 있는 그녀의 다리, 그리고 그 한복판 허벅지 사이. 그런데도 선영이 누 나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도리어 슬쩍 더 깊은 쪽으로 잡아끄는 것 같았다. 맙소사,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그곳이 어디인가. 아무리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말았다 해도 그렇지, 지금 내 손은 그녀의 하 체와 상반신이 만나 굴곡을 이루는 곳, 다시 말해 하복부 사타구니 바로 위에 놓여져 있는 셈이었 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체온으로 데워지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해 그곳이 데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당혹스런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누나에게 말을 할까 말까 하며, 입술을 들썩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 얼떨떨한 내가 잘못 들은 걸까. 틀림없이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 또 한 번. 분명 그건 내 옆의 그녀쪽에서 나온 소리 같았다. 내가 놀란 건 그 소리의 톤 때문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기 위한 무의식 적인 소리였을까. 아니면...... 서, 설마? 나는 기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칫 그것은 듣기에 따라 여성만이 가진 특유의 비음, 즉 신음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누나의 몸에서 뭔가 미세한 떨림마저 느껴지는 듯해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 다. "서, 선영이 누나!" 그때였다. 잠깐 사위가 고요해진 그 순간. 잔뜩 긴장한 그녀와 나의 귓가에 동시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가 우리 쪽이 아니란 건 확실했으나, 그것이 더 망측한 일이었다. 어디선가 묘한 소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자기 그러지 마...... 아이 싫어...... 어머, 손 빼...... 하는 여자의 콧소리와 함께, 뭐 어때...... 괜찮아...... 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지막한,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몰랐을지도 모를 소리였으나...... 불행히도 그것을 선영이 누나가 들은 것 같았다. 감고있던 그녀의 눈이 갑작스레 떠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무슨 상념에 바진 듯 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강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심코 지나쳤던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바로 지금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동작을 일시에 멈추 고 있었다. 으응 안 돼...... 그만해 거기는...... 잠깐, 잠깐만...... 다시 한 번 등뒤에서 민망한 소음이 들려왔 다. 그런 것들이 그녀를 자극했던 것일까. 마치 그 소리 통에 잠들었던 신경이 되살아났다는 듯, 선 영이 누나가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한 것이다. 화들짝,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서 내 손을 밀쳐내더니, 거의 동시에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미처 그 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둘러볼 새도 없이, 몸 을 세운 선영이 누나가 후다닥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누, 누나! 왜 그래요!" 내가 불러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꼭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가파른 강변의 층계를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28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누, 누나 기다려요!"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꾸 없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멍하니 앞으로만 걸음을 내달았다. "잠깐만요. 선영이 누나!" 내가 옆에서 잰걸음을 떼며 말을 거는데도 선영이 누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오직 아프게 깨물린 그녀의 아랫입술만이 희미한 불빛에 선홍색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도리 없이 나는 억지로 팔을 붙들어 그녀를 돌려 세워야만했다. "왜, 왜 그래요, 도대체?" 그녀는 숙인 고개를 들 생각도 않고 서둘러 뭐라고 대꾸했다. "예? 뭐라구요?" "우리......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졌다. "무, 무슨 얘기예요?" "이러면...... 안 돼. 안 된다고!" 그 말고 함께 그녀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황당한 노릇이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도 유분수 지,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한참 대꾸할 말을 찾던 나는 힘겹게 그녀를 다시 세우려 했다. 어느새 우리는 강변을 빠져나와 그녀의 아파트로 이어지는 거리까지 다다랐다. 이것 참,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냐. 내가 손을 뻗어 팔을 잡으려 하자 선영이 누나는 무슨 치한이라도 만난 듯 팔을 내저으며 뿌리쳤다. "누, 누나......" 그제서야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내가 다가가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니야, 난, 난 창희 널 좋아하지 않아. 아니 좋아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나 좋아한다는 말하지 마!" 나는 쇼킹한 그녀의 언사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아니 좀 전에는...... "왜, 왜죠......? 저...... 전 누나를 좋아해요. 누나나 선배가 아닌 여자로서요. 누, 누나도 좀 전에 그랬잖아요. 날 남자로 좋아한다고." "아니, 아니야. 난 이제 너 안 좋아해. 정말이야."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양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 서서 되는대 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거짓말한 거야. 난 니 맘 받아 줄 수 없어. 알겠니?" "뭐, 뭣 때문이에요? 정호선배...... 그 사람 때문인가요?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 니면...... 누나가 내게 털어놓은 비밀 때문인가요?" 그녀는 한차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애써 나를 외면하며 일방적으로 뇌까렸다. "우린 현실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왜요, 우리 나이요? 제가 어려서요? 그건 문제가 안 돼요. 전 그때 누나가 전화했을 때 알았어 요, 확신했다구요. 내가 누나를 생각한 것만큼 누나도 날 생각한다는 걸!" 거의 필사적인 설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잔뜩 양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냐...... 나는...... 나는 사실......"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지금까지 얘기한 것말고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걸까. 나는 그녀가 뭔 가 얘기하려다 말고 멈칫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그럼 됐어요. 저도 알아요, 아직 군대도 가지 않았고...... 졸업도 누나가 빨리 한다는 것 정도는요. 하지만 그럼 그러면 되잖아요, 그냥 편하게...... 누나처럼, 연인처럼, 그렇게 편하게 바라 보면 되잖아요. 우리 서로 준비가 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가장 나은 타협안일지도 몰랐다. 그저 그렇게 서로를 기다려 주다가, 만약 헤어지지 않고서- 우리가 서로에게 머무를 수 있는 그때가 되면, 그때 서로에게 다시 한 번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내 마지막 제의까지도 거부하는 선영이누나. 아니 아예 무시를 해버리는 것 같았 다. "아니, 넌 몰라서 그래. 니가 어른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야. 하여튼, 그건......" "누나!" 치미는 울분을 누를 수 없어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차가운 목소 리를 보탤 뿐이었다. "나 따라오지 마. 부탁이야, 여긴 우리 동네니까 아는 사람 만날 수도 있어!"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기실 우리는 거의 그녀의 아파트 단지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 줘. 앞으로도 여기 오지 마. 미안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싶어, 나......" 그렇게까지 말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더 이상 쫓아갈 수 없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얘기였기에 내 두 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선영이 누나는 등을 돌리자마자 곧장 아파트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여전히 한 손으로 얼굴을 가 린 채였다. 망연자실, 나는 악몽이라도 꾼 것 같았다. 불과 한 시간 전 만해도 그녀는 최소한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졸지에 몹쓸 놈이라도 마주했던 것처럼 돌 변한 그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안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나를 이렇게 버려두고서는 미안하다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까 우리는 고작 어떤 한 커플의 은밀한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들 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목소리들의 주인공은 분명 우리가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멍청히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온기가 아직 생생히 남아있는 그 안에, 내 품안 에...... 그녀가 있었다.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 순간은 너무나 행복했었다. 세상 전부와 선영이 누나 단 한 사람을 바꾸어도 모자라지 않을 것 같았다. 늘 내 마음속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차분한 눈웃음으로 항상 나를 들뜨게 했던 그녀. 간신히 손에 넣은 행운. 그러자 마치 픽 꺼지듯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도 자신을 찾지 말아 달라고, 부탁이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내가 어째서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행복으로 터질 것 같던 내 가슴이 이제는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오로지 고통만으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쿵, 나와 똑같이 선 옆 전봇대 기둥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지나가던 한 여자가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뜨뜻미지근한 핏방울이 내 주먹 위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상처와 아픔 29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빠개질 것 같은 머리통을 굴리고 나서야 현주네 과외방 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창 밖을 보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침대 아래를 보니 채 뚜껑도 따지 않은 소주병이 굴러다녔고, 그때서야 비로소 지난밤의 기억들 의 조각조각 떠올랐다. 제길, 필름이 끊겼던 모양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술을 마셨는지도 즉각 떠오르지 않았다. 맞다. 선영이 누나...... 누나 때문에 마셨지. 불투명했던 기억들이 점점 밝아지는 것에 비례해, 몸 안 어딘가 부위를 알 수 없는 곳에서 극심 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통을 빼고는 내 신체 어느 부분도 물리적으로 탈이 났거나 아프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나의 모든 오감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슴이 아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차라리 잠에서 깨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속이 저려왔다. 그럼에도 내 머리 속은 간밤의 일을 주르륵 펼쳐내고 있었다. 내 이성이 떠올리기 싫다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건만 무슨 프로그램이라도 입력된 듯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기억들. 아마 선영이 누나의 아파트 앞에서 물러난 뒤 어느 포장마차로 갔을 것이다. 거기에는 소주를 마셨고...... 어디론가 오래 전화를 걸어댄 것 같다. 그러다 버스를 타고 돌아와 다시 여기 현주네 집 근처에서 술을 마셨으며...... 다시 한동안 공중전화를 붙들고 있었는데. 제길헐, 희한하게도 어디 어디서 술을 마셨다는 기억은 있었으나, 중간 중간에 누구에게로 전화 를 걸었는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술, 전화, 술, 전화.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말이다. 후...... 나로서는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 기분이 나쁘면 술도 금방 취한다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곳에 와서도 술을 마시려 했단 말인가. 사온 술병을 보니 필경 그랬을 터. 그 렇다면 이만저만 실례가 아니었다. 어휴, 작심하고 들어온 과외집인데 이 무슨 망발인지. 겨우 닷새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여곡절이 많기도 했다. 이래 가지고 현주 어머니 얼굴을 어떻게 보나. 밖으로 나가 사과라도 드려야 할 성싶었다. 얼레, 그런데. 나는 그제야 내가 팬티 바람인 걸 알아차렸다. 심지어 양말도 두짝 모두 벗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옷 벗을 정신은 있었나 보다 하고 방바닥을 살펴보았으나, 얼레 예상과는 달 리 방바닥에 구겨져 있어야 할 내 옷가지들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놀란 눈을 들어 옷걸이를 바라보니 그곳에 멀끔히 걸린 내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기 다 걸어놨구나. 비로소 늘어진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잠깐- 순간 무언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벌떡, 침대 위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술 취해 들어온 놈이, 저리도 곱게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을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 설마? 그 상태에서 내가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어처구니 없게도 이불을 들치고 침대 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아닐거야. 아니겠지. 아니어야 해. 천만다행이었다. 침대 위에는 나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자고 갔거나 누워 있던 흔적이 없었 던 것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의심스러운 생각에 침대 밑까지 들여다보려던 나는,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스스로의 행동에 어 이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스타킹이나 내 것이 아닌 속옷이라도 나올까 봐 겁이났던 것인데...... 창희야, 대체 지금 너는 무슨 망측한 생각을 하는 거냐. 그냥 그랬던 거다. 알아서 옷 벗고, 알아서 기어 들어가 곯아떨어진 거다. 그때였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똑똑 하는 노크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창희 학생...... 일어났어요?" "어...... 예. 예!" "그럼 얼른 나와서 씻고 밥 먹어요. 내가 콩나물 국 끓여 놨으니." 콩나물국까지, 이것 참. 민망함이 더해질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현주 어머니가 부엌에서 상을 차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우선 그녀의 외모부터 조심스레 관찰해 보았다. 머리채라도 헝클어져 있지는 않을까, 옷매무새가 행여 흐트러져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예의 그 깔끔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에 약간은 안심이 되는지라 나는 우 선 죄송스러움에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리 와서 식사하세요!" "예...... 현주 어머님......" 나는 잔뜩 송구스러운 티를 내며 엉거주춤 식탁에 앉았다. 그녀의 얘기대로 탁자 위엔 김이 모 락모락 나는 콩나물국이 놓여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국을 떠 놓고 있는데, 현주 어머니가 의자를 당겨 슬그머니 맞은편 자리에 앉 았다. 내가 밥 먹는 걸 누가 구경한다 생각하니 목구멍이 깔깔해지는 판인데, 현주 어머니는 소리 죽 여 웃으며 상냥하게 말을 붙여왔다. "후훗, 어젠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죄, 죄송합니다. 호, 혹시 지난밤에 제가...... 현주나 아주머니께 시, 실수하지는 않았나요......?" 그저 배시시, 웃음만 지어 보이는 그녀. "으응...... 그렇진 않았어요. 그때 현주는 자고 있었으니깐." 그랬나.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저...... 그, 그런데......" 무의식중에 나오려던 말. 으이고, 나는 그것을 꾹 삼켜야 했다. 하마터면 '제 옷 현주 어머님이 벗겨 주셨나요.' 하고 물을 뻔했던 것이다. 그런 걸 물으려 하다 니, 아무래도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근데...... 웬 술이에요? 밖에서도 모자라 여기까지 사 가지고 오시고. 무슨 안 좋은 일이라고 있 으셨어요?" 그녀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친구랑 다퉜어요? 아니면 여자 친구? 호호, 알겠다. 여자 친구 문젠 것 같네.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고...... 혹시...... 실연당하셨구나? 그렇죠?" 속이 뜨끔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내 얼굴에 그렇게 써있나? 그렇지만 그게 실수였다. 현주 어머니가 한층 더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어머, 진짠가 보네? 안 그래도 엊그제 현주가 선생님한테 애인 있다고 떠들던데...... 어떻게 되 신 거예요? 정말 그 새 헤어지신 거예요?" 별 걸 다 묻고 있었다. 은근히 기분이 상한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어색한 헛웃음만 지어 보였다. "아, 아니요...... 그, 그냥...... 우연찮게 술 마시다가...... 자, 잠깐 오버하는 바람에......" "정말요? 아닌 것 같은데." "아, 아니긴요. 그, 그게 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서......" "흠......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주 어머니의 눈썹은 갸우뚱,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필경 내가 둘러댄 변명이 그다지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더 이상 식욕이 당기지 않아 대충 수저를 놓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어쩌면 실연당한 것보다, 실 연당한 마음을 들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난처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곧장 학교에 가는 편이 나을 것같아 몸을 일으키는데, 그런 내 등 뒤로 야릇한 뉘앙스를 풍기는 현주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근데 보기보다 선생님 꽤 무거운 편이던데요. 술 취하셔서 그런 건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제 말이에요. 얼마나 취하셨는지 방문도 못 찾으시길래, 제가 부축해 드렸는데...... 저희 남편 보다 몸무게가 더 나가시는 것 같더라구요." 그럼? 적이 당혹스러운 얘기였다. 내가 얼떨떨한 눈으로 돌아보자, 그녀는 한층 더 요상한 말을 흘렸다. "하기야 키고 크시고, 몸매도 듬직한 편이기는 하지만...... 호호, 그래도 나중에 결혼하시면 밤마 다 신부한테 무겁다는 소리 들을 것 같아요! 뭐 요즘은...... 애인 사이에도 얼마든 그런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밤에 무겁다고 한다? 이 아주머니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의 당혹스러움에는 아랑곳 없이 현주 어머니는 키득거리며 등을 돌려 세웠다. 뭐가 재미있는지, 그녀에게선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제발 방 문, 거기까지만 부축해 줬다는 그녀의 얘기가 맞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30 다 늦은 오후에 학교로 향하면서도, 학교에 가더라도 이제 무슨 낙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몇 주에 걸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선 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갖은 고생 끝에 겨우 만났지만 그나마도 이젠 끝이다. 몸서리를 치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던 그 녀의 야멸찬 모습이 떠올랐다. 아아,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선영이 누나. 정문 앞을 지나면서 나는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행여 발부리를 응시하며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곳에는 수다를 떨고 서있는 몇 명의 여자들만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속이 저리는 것을 느끼며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불과 단 하 루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 하루. 어제 이 시간에 이 곳을 떠날 때만 해도 내 가슴은 풍선처럼 마냥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은 완전히 바람 빠진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가득 차 한 순간에 뻥, 터진 것이 아니라 갈기 갈기 찢겨 버린 그런 것 말이다. 일없이 학생회실로 향했다. 고주망태가 된 지 하룻밤도 지나지 않았건만 내 몸은 또 다시 알코 올을 부르고 있었다. 내 위장이 아니라, 내 마음이, 머리 속이 원했다. 뇌로 차 있어야 할 머리 속,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 술병을 꽂아 신 경 세포 대신 술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끼이익, 힘없이 학회실 문을 열었다. "창희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사람, 예지만이 의자에 앉아있다가 나는 보고 벌떡 일어섰다. "너 괜찮아? 괜찮은 거야?" 괜찮냐고? 그게 무슨 소리지? "왜 이렇게 늦었어? 하루 종일 걱정했단 말야!" 얼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멍한 눈으로 예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얼굴 가 득 근심과 안도를 동시에 띄우고 있었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유, 참......!" 이상한 일이다. 평소에는 전혀 그러지 않던 그녀가 허리에 손까지 얹고 나를 책망하듯 나무라고 있었다. "어...... 예, 예지야. 무, 무슨 일 있어?" 내가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예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는 마주보았다. "어머머, 너......?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기억 안 나? 창희 너 어제 술 취해서 우리 집에 전 화 걸었잖아. 그것도 세 번씩이나!" "내, 내가......?" 아하, 그랬었구나. 여기저기 마구 전화를 건 거 같기는 한데 도통 기억이 안 나더라니. 나는 멋 쩍은 얼굴로 다시 되물었다. "나...... 어, 어제 전화에 대고 뭐라고 했니? 솔직히...... 필름 끊겨서......" 어휴, 예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라기는, 술 마시자고, 너 술 사달라구...... 횡설수설했지. 그런데 어떻게 해? 마지막 전화했던 게 밤 열한 시가 넘었을 때였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혀도 꼬여서...... 나 너 집에도 못 들어 가는 줄 알았어!" "그, 그랬었냐? 미,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맛만 쩍쩍 다셨다. 그런 내 모습에 예지도 따라서 피식 거렸다. "좋아, 너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나가자. 내가 해장국 사줄게." "으응, 아, 아냐...... 밥 먹었어. 그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어차피 술 마시고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은데, 그 렇다면 자초지종을 아는 예지가 적임자였다. "술, 술이나 마시자." "술?" 예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술이야, 어제 그렇게 마셔놓고!" "아냐, 그래도...... 술 좀 사줘. 어제 마신 술은 벌써 다 깼어." 그 말에 예지는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너 그러리라고 짐작했어" 우리는 곧바로 술집 골목의 민속주점으로 향했다. 예지는 연 이틀째라며 맥주를 마시라고 권했 지만, 한사코 내가 우겼다. 쓴 속을 달래는 데엔, 역시 쓴술이 최고였다. "어제...... 내가 또...... 뭐 다른 말하지는 않았어? 술 마시자는 얘기 빼고." 그녀가 동그래진 눈으로 내 표정을 살폈다.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는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하자 그녀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젓가락으로 안주접시를 뒤적이는 척 했다. "아니...... 다른 얘기도 하기는 했어." "무, 무슨 얘기......?" 내 물음에 웬일인지 예지의 낯빛이 우울하게 바뀌었다. "그 얘기...... 꼭 듣고 싶어?" "응, 어, 어쨌든 기억을 못하니까......" 선뜻 얘기하기가 곤란한지 그녀는 머뭇거렸다. "있잖아. 선영이 언니...... 그 언니 얘기." 아...... 결국 기어이 그랬었나 보다. "내가 뭐라 그러든?" "그냥...... 헤어졌다는 얘기였지, 뭐. 아니 따지고 보면......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정확히는 헤어 진 것도 아니지만." "그...... 얘기뿐이었어?" 예지는 기분 상한 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니, 전부 다 얘기했어. 정호 오빠 얘기랑...... 창희 니 얘기도 그랬어. 너 어제 그 언니 찾아갔 었다고. 그래서 너는 니 마음 다 고백했는데, 마지막에 선영 언니가 거절했다고 말이야." 젠장, 취중에 시시콜콜 다 얘기했던 모양이다.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은근히 얼굴이 붉어졌다. "니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그 언니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너는 선영이 언니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했어. 그리고 언니도 널 좋아한다고 했다는데...... 그런데 갑자기 언니가 d나 된다고 그랬다며......? 니가 좋지만 안 된다고." 나는 예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프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어제 선영이 누나 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지는 이제 묻지 않아도 저 스스로 말을 이어나갔다. "니가 화가 나서 붙잡고 왜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무조건 안 된다, 자기 찾아오지 말라, 연 락하지 마라...... 게다가 자기가 좋아했다는 마음도 없던 일로 하겠다...... 니가 한 얘기로는 그랬 어." 그저 소주잔을 들어올려 목구멍에 털어 넣을 뿐이었다. 빨리 머리 속을 술로 채우고 싶은데, 아 직 다 차려면 먼 것 같았다. "너 그건 기억하니?" 예지가 푸념 같던 이야기를 멈췄다. 그리고 잠자코 탁자 위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인 양 물었다. "뭐, 뭘?" "나한테...... 막 화냈던 거." "화, 화를 냈다고? 내가?" "그래. 무서울 정도로." 알 턱이 없었다. 내가 왜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 "정호 오빠랑 선영 언니 얘기...... 왜 일찍 안 해줬냐고. 니가 미리 알았으면 그 언니한테 먼저 고백했을 텐데, 내가 알면서도 숨겨서...... 정호 오빠가 선영 언니 상황 받아준다 그럴 수 있었던 거래. 내 얘기는 그랬어." 아뿔싸. 내가 그렇게까지 얘기했단 말인가. 분명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하며 화를 냈다는 것은 너무 심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돼서 어쩔 수 없이 선영 언니는 정호 오빠 마음 받아 들일지도 모른다고......" "미, 미안해. 그, 그런 뜻은 아닌데...... 사과할게." 이렇게 술자리까지 따라와서 나를 위로해주는 착하고 조용한 예지에게 내가 그랬다니. 정말 미 안했다. 예지는 그 대목에서 자신도 괴로웠는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아니야. 사과해야 하는 건 니가 아니라 도리어 내 쪽이지 뭘...... 솔직히 그 얘기 듣고 나서야 다시 곰곰이 되짚을 수 있었으니깐. 미안해. 그래도 정호 오빠보다는 창희 니가 나한텐 더 특별한 사람인데." 특별한 사람...... 이라는 말이 나를 찔끔거리게 했다. 그랬다. 제법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녀 스스로도 내가 자신의 아프고도 부끄러운 비밀, 첫 경험의 비밀을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라고 하지 않았었나. 졸지에 그런 예지를 매도한 것 같아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저, 정말 미안하다. 오해하지는 마...... 나는 그저 어제 술김에......" "으응...... 알아."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잘 몰랐었어. 선영이 언니에 대한 니 마음이 그 정도라는거...... 사실 어제 창희 니가 한 얘 기 대부분은, 그런 얘기보다는 그런 얘기였으니까!" "다, 다른 얘기......?" "그래. 내가 듣기엔 너에게 중요한 예기는 그런 세세한 얘기가 아니었던 것 같아. 나한테 화냈 거나, 정호 오빠랑 선영 언니랑 어쨌다거나...... 아니 심지어는 선영 언니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했 느냐 하는 것보다도 아마...... 창희 니가 그만큼 그 말을 참아왔다는 뜻이겠지. 말하고 싶었지만 아 주 오랫동안 말 못했던 그 얘기......" 내가 못했던 얘기라. 그게 뭘까? "그, 그게 뭐였는데?" 나는 다시 한 번 긴장이 되어, 쓴 소주를 단숨에 더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나 나의 그 질문에 예지는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떠듬떠듬, 이야기를 했다. "그건...... 니가 그 언니 사랑한다는 얘기였어. 정말로 사랑한다고...... 처음 같이 있었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어제 너는 계속 그 얘기를 했던 거야." 가뜩이나 어안이 벙벙한 터에, 이어지는 예지의 이야기는 아예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전화 걸었을 때에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했어. 마치 내가 선영이 언니라 는 듯이...... 나더러 선영이 누나라고 부르면서...... 그 언니에게 고백할 말을 나한테......" 으아, 술이 일시에 깨는 느낌이었다. 아찔했다. 그런데...... 나는 한층 당혹스러운 광경을 목격하 고 말았다. 눈동자가 반짝였던 것이다. 예지가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31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그런 고백을 여기 앉은 예지한테 했단 말인가?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몽땅 잃었다. 예지가 없는 말을 꾸미는 것은 아니리라. 그 러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착각인지 아닌지, 그것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도저 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술 주정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아! 앞에 있는 소주잔에라도 코를 박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예지의 태도가 너무 미심쩍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예지로서는 매우 기분 나쁜 일임에 틀림없겠지만, 그것이 눈물까지 흘려야 할 일인지 의아스러웠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완전히 술에 취한 상태였음을 모르지는 않았을터. 다시 말해 내가 술주정을 부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왜? 왜 눈물을 보이는 걸까. 혹시 내가 그보다 더 심한 말을 지껄였단 말인가? 예지도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재빨리 얼굴을 돌리고 내 시선을 피했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나는 말문이 막힌 채였고, 예지도 화가 났는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잠시 후 눈물기 어린 목소리가 고개 숙인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보......!" 예지였다. "바보야. 그 정도로 선영이 언니를 좋아했으면서...... 왜 얘기 안 했니? 처음부터 먼저 얘기했으 면 되잖아. 니가 그 언니 좋아 한다고, 내 마음 받아달라고! 그랬으면 나도, 나도 너한테......" 다시 그녀의 입술이 닫혔다. 애써 침착을 가장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니가, 니가 애초에 나에게 선영 언니 좋아한다고 했으면...... 내가 너를...... 너를......" 그러나 그 말마저 중간에 끊겼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 물 어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아마 '그런 줄 알았으면 창희 너한테 정호 오빠나 지현이 얘기를 숨기지 않고 했을 텐데'라고 얘기하려던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역시 예지는 정말 착한 아이였다. 이렇게까지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 에 있을까. 그런 면에서는 희창이보다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미, 미안하다. 예지야...... 다 내가 모자란 탓이야. 아니 정말 그런가 봐." 예지의 마음을 다독거리기 위해 나는 먼저 사과를 하기로 했다. "못나서 그래. 한참 부족하고...... 조금만 덜 부족한 놈이었어도 어제 그렇게......" 어제. 예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못난 모습 뵈지 않았을 텐데...... 맞아. 선영이 누나에게도...... 내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했다 면...... 어쩌면 달랐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니, 그 누나도 그렇게 봤을 거야. 내가 못 났다고......" 독백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으면서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쓴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 렇다. 비록 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내가 조금이라도 잘난 남자였다면...... 선영이 누나도 내 마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게 내 책임이었다.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지 마. 싫어...... 창희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 나는 알아.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곱게 눈을 내리깐 예지가 거꾸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격 려하는 분위기. 어쨌든 나는 다시 입을 닫고 술잔만 기울였다. 아무리 예지가 위로를 해준다 해도 아픈 마음을 달래는 것은 알코올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얘기해서...... 화났니?" 예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냐...... 얘기했잖아. 오히려 너한테 미안한 걸."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해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예지는 '미안 화장실 좀'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 다. 서둘러 눈가를 문질렀다. 꼭 눈물을 흘린 것처럼 말이다. 아니 정말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금니를 악물었지만 서글픈 한숨만 새어 나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평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술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창희야...... 천천히 마셔!" 나는 그제야 흘끗 탁자 위를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벌써 두 병째의 소주가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지에게 한두 잔 따라주었으니, 안주접시에 젓가락도 한 번 대지 않은 채 거의 두 병을 나 혼자 비워내는 중이었다. "그러다 너 어제처럼 취하면 어쩌려고 그래?" 손을 들어 술 한 병을 더 추가하는 나에게 예지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니야. 괜찮아...... 아직은." 맞는 말이었다. 속이 알싸해오기는 했지만 의외로 머리 속은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술잔 비우는 속도를 더 빨리 했다. 신경질이 났다. 왜 이다지도 안 취하는 걸까. 그때였다. "얌마, 짱! 너 여기 짱박혀 있으면 어떡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놈이 있었다. "어......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 "그야 누가 너 나가는 거 봤다고 하길래...... 어?" 반가운 인사도 잠시, 아차. 나는 누군가 싶어 뒤돌아보는 예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볼 수 있었다. 희창이, 희창이였던 것이다. "어...... 아, 안녕, 예지야!" "응...... 아, 안녕......" 희창이도 순간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남자인 녀석 쪽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바람에 예 지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를 해야 했다. "뭐해? 앉아!" 두 사람이 거북살스러울 거라는 건 익히 알지만, 짐짓 나는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예지가 의자 를 권했다. 예지가 다소 난처하더라도, 오늘만큼은 내 마음먹은 대로 할 작정이었다. "너...... 속은 괜찮은 거냐?" "으응? 어...... 그, 그럼 내가 어제 너한테도?" 얼렐레, 하는 표정으로 희창이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쳐다보았다. "짜식...... 그럴 것 같더라니. 그래, 새꺄. 너 어제 전화해서 별 얘기 다 했잖아. 했던 얘기 또 하 고, 했던 얘기 또 하고. 아주 지겨워서 죽는 줄 알았다!" 에구구, 도대체 내가 누구누구한테 그런 식으로 전화를 건 걸까. 이 녀석한테도 걸었다니 그야 말로 머쓱할 일이었다. "근데 그건 또 무슨 얘기야? 내가 차 끌고 나간다고 했더니 웬 강변 아파트촌? 혹시 거기가 선......" 그 대목에서 딱 말을 멈춘 희창이가 예지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녀가 있다는 것을 깜빡한 모양 이었다. 아니나 다르랴. 졸지에 끼여든 희창이로 인해 예지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번 보영이가 학교에 불쑥 찾아와서 마주 쳤을 때만 해도 예지가 얼마나 난 감해 했던가. 혼자만 간직했던 짝사랑,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늘씬하고 섹시한 보영이에게 뺏긴 남자, 희창이. 그렇게 무참히 깨지고 단념해야 했던 희창이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도 부담스 러울 텐데, 이렇게 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이 내성적인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일 게 분명 했다. 그나저나 희창이 입에서 강남의 아파트 얘기까지 나오다니 나로서는 적잖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 녀석도 어제 내가 선영이 누나를 찾아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안다는 얘기니말이 다. "저기...... 나......" 예지가 문득 가방을 챙겨들었다. 슬쩍 자리를 피하려는 모양이었다. "어...... 자, 잠깐만 예지야!" 나는 얼른 예지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야, 일어서지 마. 오늘...... 오늘 어차피 나 때문에 모인거잖아. 그럼 너도 있어. 가지 말 고...... 부탁이야. " 부탁이란 말에 놀란 예지가 눈을 깜박였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창이를 흘끔거리 며 정말로 그녀를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지금껏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좀더 일찍 알 수 있었다면, 먼 저 자신의 마음을 알렸더라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들 두 사람에게 엉뚱한 수작을 걸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슬픈 것은 나 하나만 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우연히 시작된 자리였지만 예지와 희창이, 이 두 친구들에게 나와 같은 오해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32 일종의 객기였다. 희창이야 몰라도 예지에게는 낯선 자리임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 나의 상태가 단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는 했다. 정말로 누 군가의 따스한 말 한 마디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은 아니었다. 원래 사람 사이, 특히 남녀의 사이란 그렇다. 서로 아무리 좋게 지냈다고 해도 한번 돌아서게 되면, 그저 뒷모습 잠깐 비춰지는 것도 극도로 꺼려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학교 안에서, 자신의 사랑이 꺾인 결정적 원인인 보영이와 함께 있는 희창이를 본 것도 모자라 그날 저녁 내 자취방에 서 보영이와 직접 마주치기가지 했던 예지이고 보니...... 더더욱 이 자리가 곤란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둘은 한사코 붙잡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학교 과 동기, 앞으로 졸 업하기 전까지 수년은 마주쳐야 할 사이 아닌가. 언제까지 그렇게 서먹한 관계로 지내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같이 있자. 너 어차피 내 얘기 들어주려고...... 그래서 온 것아냐. 그러니 좀더 있어 줘. 아직 일 곱시도 안 됐잖아." 으응, 알았어. 하는 표정으로 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간곡한 표정에 선뜻 뿌리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창희 너...... 짜식, 왜 그래. 난데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일 있는 거야?" 이런 내가 희창이로서도 의외였는지, 녀석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으응...... 아니야. 내가...... 어제 너한테는 전화해서 뭐라고 그랬냐?" 통화내용이 기억나지 않기는 이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 글쎄...... 그때가 거의 열두 시 다됐던 것 같은데...... 너 그 과외집 앞인 것 같았어. 그런 데 하도 횡설수설하길래 내가 가주랴 했더니...... 막 그 어디 아파트 앞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러더 라? 그러더니 갑자기 또 뭐......? 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다나? 하여간 어쩌라는 건지 우왕좌왕 하더라." "그...... 얘기밖에 안 했냐?" "응. 왜, 무슨 일이야?" 그래...... 열두 시 가까이였다면 현주네 아파트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 녀석에게 전화를 건 모양 이다. 어쨌든 희창이는 아직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것 같았다. 예지한테 그랬듯이 황당한 이야기를 털 어놓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고 손은 또 왜 그래? 어제 누구랑 치고 박기라고 했냐?" 희창이가 내 손을 가리켰다. 덕지덕지 피가 말라붙은 손등, 어제 애꿎은 전봇대를 후려친 결과 였다. 선영이 누나가 도망치듯 사라진 직후에. 제길,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는 새에 떫은 미소가 배어 나왔다. "뭐야, 너 웃는 거냐, 우는 거냐?" "어...... 아냐. 아니다." "이상한 놈일세...... 실성한 놈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인상으로, 희창이가 예지 쪽을 흘금거렸다. 그렇지만 예지는 잠자코 술잔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짐짓 헛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채워 흔들었다. "다...... 끝난 얘기다. 자, 술이나 마시자. 원샷!" "어쭈, 창희 너......" 그들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대뜸 술잔을 싹 비워버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맞춘 듯 휘둥그 레졌다. "야, 너 지금 몇 병째야. 그거?" "뭐 임마. 그딴 거 세고 먹냐.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희창이가 어이없어 하며 예지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거...... 세 병째야. 창희 지금...... 안주는 손도 안 댔어. 난 겨우 두 잔 마셨는데." 으잉, 희창이가 못마땅한 신음소리를 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빈 병을 머리 위로 쳐들었 다. "여기요,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이것으로 네 병째. "짜, 짱아. 너 왜 그래? 진짜 뭔 일 있는 거야?" "후...... 내가 그래 보여?" "그럼 안 그럴 거 같아? 깡소주 세 병에...... 얼굴은 시체처럼 헬쑥한 게......"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 누구 못지 않다는 걸 아는 녀석은 차마 말리지는 못하고 내게 책망만 해댔다. "몰라도 돼. 그냥 술 마시고 싶을 뿐이야. 뭐하냐, 너희...... 술이나 마시지 않고. 친구가 술 마시 자는데 상대도 안 할 거야?" 나의 급변한 태도 때문일까. 두 사람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기왕 이럴 바에는 혼 자라도 떠들어야겠다 싶어 나는 기분 나쁘다는 투로 그들에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좋아. 나도 이제 좀 솔직하게 얘기하자. 너희 둘!" 버럭, 큰 소리를 지르자 예지와 희창이가 동시에 움찍 고개를 들었다. "이제......그만 좀 하란 말야. 뭐 너희 둘 싸우기라도 했냐. 그냥 사람이 사람 좋아하고...... 그런 죄밖에 없잖아!" "무,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물어? 바로 너희 둘 얘기잖아. 예지, 이짱, 여기에 니들 둘 빼고 누가 있어?" 난데없는 나의 일갈에 '떨떠름한 두 사람. 나는 기왕 시작한 얘기니 속 시원히 털어 내겠다고 작정했다. "생각해 봐. 내가 각자 얘기 다 들었잖아. 한 사람은 한 사람 좋아했고,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 쫓아다니고. 결국 그거 아냐?" "차, 창희야!" 예지의 당황해 하는 소리가 곁에서 들려왔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꼭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모든 울분과 슬픔을 누군가에게 쏟아 붓고 싶었는지는 모를 일이었 다. "우선 예지, 너부터! 너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 그렇다면 왜 먼저 선영이 누나한테 고백하지 않았느냐고 그랬지? 그럼 넌 뭐야? 왜 그러지 않았어? 여기, 여기 이 녀석에게 왜 안 그랬느냐 고." 심지어 나는 희창이의 어깨를 세게 한 대 치기까지 했다. "나, 나?" 물론 희창이 녀석도 내 입을 통해 다 알고 있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이 순간에 그런 말이 튀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에 더 충격을 받을 사람은 희창이가 아니라 예지일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번 쏟아내기 시작한 말은 거침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잘 들어, 김예지. 나는 네 비밀 다 알잖아. 그 가슴 아픈 이야기들, 슬픈 경험...... 너도 인정할 거야. 그래. 니가 나를 진심으로 믿어준다는 것, 고마워. 정말 고맙게 생각해. 그렇지만 그게 전부 야? 왜 넌 떳떳하지 못하니? 평생 그런 것 감추고 살 거야? 아니야...... 그건 옳지 않아. 바보야, 그게 아무리 수치스럽고 싫은 기억이라 해도, 넌 언젠가는 그 짐을 덜어 버려야 돼. 스스로 털고, 먼저 다가서야 한다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벌어진 입을 다 물지 못하는 예지의 얼굴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벙벙하던 그녀가 내 충고 아닌 충고를 되짚어보려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후, 나는 숨을 가다듬고서 이번엔 희창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리고 희창이 너, 너도 똑같아. 뭐냐? 나처럼 여자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쪽저쪽 책임도 못 질 일을 만들어? 지난 학기 너 얼마나 예지한테 잘해줬어?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러니까 순진한 예지가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 내가 여자라도 그렇겠다. 제발 그러지 좀 마, 짜샤! 사람 마음은 장난이 아니잖아. 그래 놓고서 어떻게 금방 보영이 같은 계집애 한테......" 내 말투가 점점 오락가락하고 있음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보영이하고도 그래. 내가 보기에 너 계 좋아하는 거, 솔직히 사람이 좋아서, 남녀 사이로 좋아서가 아니야. 늘씬하고 잘 빠졌으니까...... 혼자 살고 그렇고 그런 여자애 같으니까, 꼬셔서 어 떻게 해보려고 그랬다며? 임마, 보영이가 그런 거 모를 줄 알아? 그러니까 보영이가 나한테......" 아차차. 찰나 나는 말을 뚝 끊어야 했다. 희창이의 휘둥그레진 눈초리 때문이 아니었다. 보영이는 나하고 잤어. 그때 니 속셈 다 안다 그랬단 말야, 그것도 아찔하게 둘이서 원초적 모 습을 하고 있던 그때-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어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사는 거냐. 누가 누구를 충고하고 있나. 녀석에게 죄 지은 놈은 바 로 나 아닌가. 예지도 있는 자리에서 정말 엄청난 실수를 할 뻔했다. 알코올기가 한꺼번에 얼굴로 몰려와 뜨거 워졌다. 나는 갑갑한 마음에 술잔을 채워 다급하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33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말이 헛나오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 얘기를 듣고도 희창이가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도 갑작스런 이야기라 둘 다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어...... 창희 너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야?" 희창이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와 예지를 쳐다보았다. 나는 행여 또 무슨 실수를 하 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어금니를 악물고 입술을 떼지 않았다. 녀석은 도리가 없는지 예지만 멀뚱히 쳐다봤다. 눈빛으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묻는 듯했지만, 예지는 그 자리에서 말해주기가 그런지 머뭇거리며 희창이의 시선을 피했다. "이따...... 이따가 얘기해 줄게." 그러자 희창이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북살스러운 나는 술잔을 들이켜는 것으로 그 눈 길을 가렸다. 정말로 화가 나고 있었다. 모든 것에 대해. 테이블 위의 흐릿한 백열전구를 올려다보며 딴청을 피웠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한 숨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속이 아련히 쓰려왔다. 위장이 있을 뱃속이 쓰린 것인지, 아니면 마음 이 들어있는 가슴속이 쓰린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머리 속마저 뒤엉키는 느낌에 나는 안주 접시를 뒤적거리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가자!" "응?" 마주 앉은 두 친구가 동시에 올려다보았다. "나가자고." "머, 어디 가려고?" 이번에도 동시에 묻는 그들. 나는 대꾸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이, 그런데 그 순간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쏠렸다. "어멋!" "야, 이, 임마!" 예지와 희창이의 입에서 연달아 외마디 소리가 터지더니, 곧이어 내 팔을 붙든 희창이 녀석이 내 등뒤를 향해 굽실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일어서려던 내가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다른 테이블에 부딪쳤던 것이다. 아마도 다른 손님들이 앉아있던 모양인 듯, 희창이가 헤헤거리며 대신 사과하고 있었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짐짓 무시해 버렸다. 욕이라도 한마디 들려오면 금 방 뒤돌아서 시비라도 붙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 한바탕 싸움박질이라도 하고 나면 가슴이 풀릴 것 같았다. 예지가 재빠르게 계산대로 달려가 술값을 치르는 게 보였다. "조심, 조심해. 창희 너 지금 취했다고, 알아?" 내 팔을 끌고 나오는 희창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냐, 짜샤. 나 안 취했어. 그냥 잠깐 어지러웠던 거야. 놔, 이거...... !" 술집 문을 나와 녀석의 팔을 뿌리쳤다. 아니다. 난 취한 게 아니었다. 서늘한 바깥바람을 쐬니 어느덧 다시 머리 속이 말짱해졌다. 나는 한껏 호기 있게 따라나온 예지에게 소리쳤다. "예지야. 2차 가자!" "2, 2차?" "그래, 2차. 2차는 내가 살게." 동그래진 눈으로 나와 희창이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녀. 무슨 도움이라도 청하는 눈빛이었으나 희창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나 아직 멀쩡하다니깐!" 나는 두 사람의 팔짱을 끼고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예지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창, 창희야...... 너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아...... 비틀거리잖아!" 어쨌든 두 사람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주나 더 마시자는 내 계획은 호프집으로 수정이 되었다. 털썩, 푹신한 호프집 의자에 나를 주저앉힌 희창이가 양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았다. 나는 녀석 을 안심시키기 위해 씩 웃어 주었다. 각자 오백을 시키는 그들. 그러나 나는 웨이터에게 1000cc를 주문했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드는 예지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나는 대뜸 내 앞으로 온 1000cc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비 워졌다. 잔을 내려놓자, 아스라한 시야 건너로 희창이와 예지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아 마 내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 충고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모습은 그런 대로 어울려 보였다. 순진한 예지, 까진 희 창이. 성격이야 안 맞을지 몰라도 쪽 빠진 인상의 그와 순진하게 생긴 예지의 조그마한 얼굴이 마 치 오누이같이 다정해 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호프잔을 뚫 어져라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황금색 맥주가 거울처럼 어느 얼굴 하나를 투영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눈동자는 웃을 때마다 긴 속눈썹에 가려져 까만 우물처럼 반짝인다. 뽀얀 뺨 너머로 하얀 손가락이 귀밑머리를 쓸어 넘긴다. 얇은 천으로 가려진 포근한 가슴이 내 얼굴을 가리듯 덮 어온다. 출렁이는 입체감이 실린 하반신이 하늘거리며 뒷모습을 보인다. 그때 탁자 건너편에서 작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그 환영의 주인공이. 선영선배가, 선영 언니가...... 선영, 선영이누나. 제길헐. 나는 남아있는 술잔을 들어 다 비워버렸다.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목구멍은 타들어가듯 갈증만 더해갔다. 두 번째 잔이 놓여졌다. 그것도 채 일 분도 안 되어 절반 이상이 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임마, 그만 마셔!" 희창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예지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흐흥거 리는 콧소리를 대답으로 돌려보냈다. "그래, 창희야 그럼 조금 천천히라도 마시든가...... " 도리질을 해 보였다. 괜찮아,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다시 묵묵히 초점 없는 시선을 테이블 위 로 내리 깔았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다. 맥주집 안 불빛같이 침침해졌다. 나는 그제야 이 허름한 호프집이 어떤 장소였는지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랬다. 벌써 까마득히 오래 전 기억 같았다. 고개를 들어 건너편 두 사람을 보았다. 맞다. 이 자리였다. 그때도 이랬었는데. 희창이와 나, 화장실 쪽이 보이던 이 자리. 오직 하나만이 틀리다. 단 한 사 람, 선영이 누나가 앉았던 자리에 지금은 예지가 앉아있을 뿐이다. 물끄러미 그녀의 자리를 응시했다. 뭔가 심각한 얘기가 오가는지 희창이가 그랬구나, 하는 인상 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시 둘째 잔을 비우는 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짜식!" 녀석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터를 괴고 말했다. "어쩐지...... 알겠다. 그렇다면...... " "알길 뭘 알아...... 넌 아무 것도 몰라 임마." 퉁명스레 대꾸하며 나는 새 잔을 들었다. "맘대로 생각해라...... 어쨌든, 그럼 내가 가만있을 수야 없지!" 희창이가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몰라도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이건 내 대사가 아니었다. 희창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무슨 얘기야? 하는 뜻으로 녀석을 쳐다봤으나 그는 짐짓 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설마 오늘도 그날처럼 황당한 일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무슨 일 이 있었던가. 이곳에서 술을 마셨던 그날에. 엉겁결에 여관방까지 함께 가게 되었던 선영이 누나와 나. 밤새도록 뜬눈으로 그녀의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었지. 마침내 술이 깨어 내게 눈물어린 자신의 비리를 털어놓던 그녀. 가슴 아픈 그 고백에 영원히 그녀를 지켜 주겠다던 내 약속. 그러자 이제는 전부 지나간 일이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 그 잊지 못할 하룻밤. 34 나는 희창이의 손길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건물 뒤 으슥한 장소로 들어갔다. 우욱, 속으로부터 참기 힘든 고통이 거슬러 올라왔다. 재빨리 쫓아온 희창이가 내 등을 펑펑 두 들겼다. 위액인지 술인지 구분할 수 없는 희멀건 액체가 내 입에서 역류해 나왔다. 눈동자라도 쏟아낼 것처럼 나는 한참 동안 허리를 구부리고 토악질을 계속했다. 빙빙 돌았다. 구석진 건물 벽이 내게 다가왔다가는 다시 멀어졌다. 오래된 영화 필름이 영사기 에 걸려 같은 영상만을 반복하듯 내 시야에는 온통 벽이 아래위로 흔들리는 광경만이 나타났다. "괜...... 찮은 거야?"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예지가 나와 나를 부축한 희창이에게 물었다. 나는 끄덕끄덕, 인상을 쓰고 고갯짓을 해댔지만, 그녀의 질문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내 어지 러운 머리속에는, 그 둘이 나누는 대화가 아득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듯 느껴졌다. "나도 모르겠어, 이 자식...... 그렇게 무식하게 퍼붓더니. 생각 같아서는 콱......! 어휴, 그렇다고 술 취한 놈을 두들겨 팰 수도 없고...... 미치겠군." "어떡해...... 창희 얘 집도 못 찾을 것 같아." "글세 말이야. 어쩐담. 참, 예지 너...... 그 현주네라든가...... 니가 소개시켜 준 곳 아냐? 전화번 호 있어? 아무래도 못 들어간다고 전화해 줘야 될 것 같은데." "아, 맞아!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예지는 자기 가방을 뒤적였고, 녀석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니가 거는 게 낫지 않을까?" "알았어. 이리 줘!"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김예지라고, 창희 소개시켜드렸던 학생인데요...... 아직도 가쁜 숨을 고르느라 허리를 굽히고 헐떡이는 내 귓가에, 그녀가 핸드폰에 대고 뭐라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뚝, 예지의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연이틀째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린 눈을 떴을 때 내 자취방도 아니고, 현주네 아파트도 아닌, 전혀 생소한 무늬의 벽지로 도배된 천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딜까. 이틀 연짱 과음으로 인해 천장이라도 온 게 아닐까. 온몸이 뻑적지근한 탓에 나는 그대로 누워 한참 더 두통을 다스려야 했다. 머리는 물론 허리까 지 아파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는...... 곰곰 생각하던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여관방이었다. 저가형TV, 싸구려 소파 하나, 아무 것도 없이 거울만 덜렁 놓인 화장대. 나는 깨 끗하기는 하나 허름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어제 그제 연속? 나는 후닥닥 몸을 돌려 언젠가처럼 침대 위를 살펴보았다. 스타킹, 여자 속옷, 흐트러진 침대보, 아니면 벗겨진 내 옷이라도...... 그러나 천만다행이었다. 그 런 아찔한 물건이나 정황은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물며 내 옷차림도 어제 걸친 그대 로였다. 양말 한 짝도 벗은 바가 없었다. 휴, 한숨소리와 함께 헛웃음소리를 흘렸다. 혼자 있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보았다면 허둥대고 있 을 내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어제도 오늘도, 아니 그제도 어제도. 설마 그럴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지인데. 그것도 실컷 선영이 누나에 대한 사랑타령을 들은 그녀인데 말이다.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희창이라도 그런 예지와 나를 지난번 선영이 누나 때처럼 한 방에 넣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만들 재주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예지는 어제 술도 거의 안 마셨으니 까. 속쓰림에 신물이 올라왔다. 나는 아픈 속을 달래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얼추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라도 해야 술이 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예지는 어떻게 됐을는지. 맥주집에서 나온 것이 꽤 늦은 시간이었을 텐데, 걱정과 함 께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대충 바지가랑이에 발목을 쑤셔 넣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세요?" 허겁지겁 바지를 올리고 웃옷에 팔을 꿰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들린 목소리는...... "으응...... 나 예지야. 들어가도 돼?" 으힉, 어, 어떻게 예지가 이 곳에? 호, 혹시 이곳에서 자고 나갔다는 얘기? "문 좀 열어 줘. 창희야!" 그녀의 재촉에 문고리를 따주면서, 나는 일단 그녀의 행색부터 관찰했다. 청바지. 어제와 같은 청바지이기는 해도 색깔이 다르다. 윗도리는 어제 본 꼭 끼는 니트가 아니 라 재킷이다. 그렇다면? "안녕...... 잘 잤어?" "어...... 응, 으응." "어머, 방금 전에 깬 모양이구나?" 틀림없이 그녀의 옷매무새는 예지가 이곳에 있지 않았다는걸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문 제가 아니다. 분명 술 먹고 곯아떨어진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은 희창이였을 텐데, 그 녀석이 찾아온다면 모를까, 어떻게 예지가 등장한단 말인가. 예지는 내 의아스러움을 알아차렸는지 먼저 해명에 나섰다. "아침에 학교에 와서 물어봤더니...... 희창이가 너 여기 있을 거라로 가르쳐 줬어. 그래서 온 거 야." "그, 그래?" "너 어제 들쳐업고...... 희창이가 재운다고 데리고 갔는데, 나 더러 별로 좋을 것 없다고 여기까 지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더라. 기억 나니?" "응, 아, 아니...... 너, 너는?" "나? 나야...... 희창이가 바래다 줬어. 자기 차로 우리 집 앞까지." 그렇구나. 나는 그제야 잃었던 기억을 살릴 수 있었다. 어쨌든 기특한 일이다. 희창이 놈이 예지 를 데려다 주고, 심지어 이런 곳까지는 안 좋다며 데려오지 않았다니. "자...... 이거." 그렇게 엉거주춤 서있는데, 예지가 등뒤에서 뭔가를 한 보따리 내밀었다. 보온병과, 이온 음료수? "아침에 술 깨면...... 목마르잖아. 갈증나고. 그리고 그건 수프야 내가 끓여 왔어." 수프라고? 받아들면서도 은근히 당혹스러워졌다. "먹고 나가. 지금 현주네 돌아간다고 해도...... 거기에서 죽 같은 거 달랠 수는 없잖아. 너 이틀 동안 술만 마신 거 그 아주머니도 다 알 텐데...... 티 내고 들어가지 말고." 이것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너무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그 렇지, 내 속 걱정도 모자라 여자의 몸으로 여관방까지 찾아올 용기를 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정성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 예지야...... !"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예지의 착한 심성을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우리가 방 가운데에 그냥 서 있는 것을 깨닫고 예지에게 자리를 권했다. "미, 미안...... 이, 일단 여기라도 좀 앉아." 사양 않는 예지. 우리는 다소 어색하게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고, 고마워...... 정말." 이온 음료수를 마시고 나자 예지가 손수 보온병에서 수프를 따라 건네주었다. "그, 그저께도 미안한 일만 했는데...... 어, 어제까지...... 미안해...... " 할 수만 있다면 엎드려 사죄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미안하다...... 너한테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러나 내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예지는 배시시 웃어 보이고는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 다. "아니야, 창희야. 솔직히 어제 나도...... 너한테서 느낀 것 많아. 특히 니 충고 덕분에...... " 내 충고?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예지는 그저 뜻 모를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있잖아. 창희 니가 막 화내면서 내게 해준 얘기...... " 어제 뭔 얘기를 했더라...... 그러다가 뭔가 잊었다는 듯 예지가 말꼬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참, 어제 그 집에는 내가 전화해 놨어. 너 못 들어간다고. 가서 죄송하다고 말 씀 드려." 그 집이라. 현주네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걱정스러웠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몇 번째 외박인지. 내가 현주네 아주머니였다면 당장 쫓아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별반 그렇지는 않을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왜일까. 왠지 몰라도 현주 어머니는 내게 죽이라도 끓여 줄 것만 같았다. 밝혀지는 진실 35 그 후 약 1-2주 동안은, 나는 학교와 과외방만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며 지냈다. 그리고 술도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도 없었다. 비록 현주 어머니한테 이틀간의 폭주에 대한 별다른 책망은 없었지만, 스스로 자중해야 마땅했다.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딱히 마음의 정리를 위한 노력은 아니었지만, 나는 현주와 현주네 아파트 에 정을 붙여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쉬운 영어책 한 권까지 사다놓고 이틀 한번씩 숙제검사와 함께 현주를 가르치기 로 했다. 물론 처음에 아이는 뾰로통했지만, 곧 내 단호함을 엿보았는지 곧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다만 난감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공부가 끝날 때마다 이어지는 이 꼬마 아가씨의 곤란한 질문들이었다. 요즘 세대들은 갈수록 조숙해진다더니 현주를 통해서 나는 그것을 여실히 깨닫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자기 어머니를 쏙 빼닮은 녀석이었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던 그 이름을, 잊어 버리지도 않고 줄창 들먹이며 시시콜콜 캐물어댔다. 어떻게 만나셨어요, 선생님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시나요, 나이 차이는 얼마인가요, 그전에 다른 여자 친구는 안 사귀어 보셨어요...... 등등, 날마다 새로운 질문을 생각해내느라 공부나 제대로 하 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얼추 쓴웃음으로 넘겼으나, 자꾸만 호기심을 더해 가는 통에 나중에는 식은땀마저 흘리며 내가 왜 그녀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던가,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결코 아이의 질문이 당돌했던 탓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내가 잊고자 했던 그 이름이 자꾸 떠 올랐기 때문이다. 잊어야 하는 이름, 내가 아니더라도 그 쪽에서 잊어주기를 원하는 이름. 박선영. 게다가 언젠가는 현주의 입에서 뽀뽀는 해보셨어요, 포옹은요, 손잡는 건요, 하는 질문까지 나와 나를 한참 곤혹스럽게 만든 적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야단을 쳐야 했다. 그리고 난 유독 그때만큼은 화를 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이가 하기엔 민망한 질문이어서? 아니리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나는 당시 엉겁결에 저질렀던, 그러나 꿈결 같았던, 그 강변의 아름답던 저녁 풍경을 떠올렸으리라. 그리고 그 아픈 가슴을 참지 못하고 대신 애한테 화를 냈을 것이다. 나는 날이 갈수록 그녀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되어 가는 나 자신을 느꼈다. 실제로 나는 그녀와의 이별 이후 며칠에 한 번꼴로 악몽을 꾸었는데, 그 꿈은 대체로 이전에 내 가, 꾸던 꿈과 아주 흡사했다. 베일이 보이고...... 벌거벗은 몸뚱이로 그 하늘거리는 천자락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면, 언제나 그 랬듯 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그녀가. 그러나 그 베일이 벗겨지고, 옛날처럼 나를 살며시 안아주고 애무하던 그녀의 예전의 그녀가 아 니었다. 그녀는 내게 애원했다. 난 네가 싫어, 우리는 안 돼, 이제 나를 찾지 마- 늘 그게 끝이었 다. 그때마다 나는 헛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고, 그 꿈이 흐릿해질 때까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 으키지도 못했다. 황홀한 몽정은커녕 잠을 깬다는 것, 꿈을 깬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고통이었던 것이다. 비단 밤만이 아니었다. 낮에도 나는 그 몽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주 잠깐 단 몇 분이라 도 멍하게 나 자신을 버려 두면, 어김없이 그녀 생각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스스로 무척 밉기도 했지만, 머리를 흔들어대며 그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숱한 노력 도 했지만, 항상 꼭 그만큼의 그리움이 몰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아파트 옥상에라도 올라 고래고래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희창이나 예지와 지냈다. 그렇지만 셋이서 한꺼번에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 고, 그나마도 희창이는 뭐가 그리 바쁜지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보영이와 열심히 놀러 다니는 것 같았는데...... 나는 행여 보영이가 나와의 비밀 정사를 털어놓 은 게 아닐까 가끔씩 두려웠지만, 다행이랄까 좀처럼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술이라도 한 잔 할래, 보영이네 가게에 놀러가지 않을래, 가끔 녀석이 꼬드겼지만, 나는 애써 웃 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또 당분간은 보영이와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최마담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거처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 을 것이다. 희창이에게 다른 사람이나 특히 보영이에게 일절 알리지 말라고 했으니, 아마 그녀로 서도 나를 찾을 방도가 없으리라. 집에도 다녀왔다. 자세한 말씀은 안 드렸지만 일단 과외공부를 가르치게 됐다는 점과, 그간 그 런 연유로 연락이 뜸했다는 점을 설명 드렸다. 어머니는 안도하시면서도 그 집에서 밥은 해주느냐, 걱정부터 꺼내셨다. 반면 아버지는 앞으로 용돈 부담은 안 드리겠다는 나의 말에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셨다. 예상한 대로 나를 대견히 여기신다는 듯으로 받아들여도 될 법했다. 나머지 시간은 주로 예지와 같이 보냈다. 뭐 따로 데이트를 하거나 만났다는 건 아니다. 그저 희창이와 밥을 먹지 않으면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었고, 당구장에 죽치지 않을 때면 공강시간은 그녀와 때웠다는 얘기다. 예지는 나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드문드문 만날 때마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주로 내 얘기를 들을 뿐, 정호선배나, 지현이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공주병이 있는 지현이, 솔직히 선영이 누나도 떠나간 마당에 그녀가 한번 만나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지워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구미가 당기지도 않거니와..... 예지가 먼저 얘기를 꺼 내지도 않는데 내가 먼저 그런다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또 하나의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 고사가 끝나고, 한 20일쯤 지났을 때였다. 36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강의실 안은 무척이나 썰렁했다. 나는 책상 위에 교재를 늘어놓은 채 멍하니 오후의 느린 햇살이 쏟아지는 창밖을 발보고 있었 다. 햇빛은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낙엽처럼 노란빛이었다. 마치 한 차례의 소동이 가라앉은 듯 주변이 조용해졌고, 그것은 한바탕 폭풍우를 겪은 뒤 고요 해진 내 마음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털썩 옆자리에 앉는 것을 느끼고서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짜식, 똥폼 잡고 있네." 희창이였다. 수업시간 내내 보이지 않더니, 어딘가에 다녀온 모양인 듯 바깥 공기가 묻어 나왔 다. "으응...... 그냥. 또 땡땡이냐?" "후후, 당연하지. 왜, 출석 불렀냐?" "아니, 넌 참 운도 좋다. 이런 날만 골라서 내빼고." 녀석도 나를 따라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지겨운 듯 기지개를 켰다. 그제야 나는 그날 을 포함해 한 이틀 정도 그를 학교 안에서 제대로 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래간만에 맥주라도 한잔 마실까 하고 있는데, 희창이 쪽에서 먼저 불쑥 얘기를 꺼냈 다. "어때? 이제 마음의 정리는 다 끝난 거야?" 글쎄, 마음의 정리라. "으응...... 그냥 그래." "내가 내 개똥철학 하나 말해주랴?" 내가 돌아보자 그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 너를 위로하려는 건 아니고, 너도 알다시피...... 원숭이도 나무에서 추락사하듯 이 천하의 형 님에게도 차인 경험이 있었잖니. 그래서 얘긴데 왜 그런 거 있잖냐. 한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어 오면, 그 사람을 위해 마음 한 구석을 비워야 하는거. 그리고 비운만큼 상대방 마음이 채워지는 거고." 흐흠, 녀석은 제법 헛기침가지 곁들였다. "내가 너만큼은 아닐지라도...... 알 만큼은 안다는 얘기지. 그런데...... 짱이야. 생각해 봐. 그러다 가 무슨 이유로 그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간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될 것 같냐?" 나는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간단하지. 순식간에 텅 비어버리는 거 아니겠어? 자기가 주었던 딱 그 정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비워 놨던 마음 속 그 부분이...... 어느날 갑자기 휙, 사라지는 거잖아. 구멍이 뻥 뚫리듯이. 그렇지?"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인지라 나는 수긍이 간다는 표시로 눈을 끔뻑했다. 희창이가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다니, 희한한 노릇이다. "그럼 그 마음에 상처가 난 사람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그렇게 되면...... 사 람 마음이란 다 똑같은 것 같아. 하다 못해 이빨 하나를 뽑아도 그 빈자리가 허전한데, 이 만한 가슴 속 구멍이면 어떻겠어? 아주 미치는 거야. 그게 바로...... 가슴앓이라는 거고, 실연당한 고통 이겠지. 어마어마한 고통. 안 그래?" 글쎄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걸 까.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거기에 내가 발견한 진리가 하나 있어. 대단한 발견! 그게 뭔지 알아?" 심각한 얼굴로 그는 잠깐 말까지 끊었다. 진짜로 연설이라도 하듯이. "그건 사람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바로 사람으로 치유를 해야 한다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사람으로 생긴 상처를 사람으로 치료한다. 얼른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도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왜. 이해가 안 되냐? 쉽게 말해 그렇게 허전한 마음 속 상처를 채울 수 있는 건, 바로 그 마음 이란 것뿐이라는 얘기야. 아직도 모르겠어? 좋아. 내가 얘기하는 건 이거야. 창희 너 지금 어때?" "어떠냐니. 뭐가?" "니 마음 속 말야. 까놓고 얘기해 봐." 내 마음이라...... "아직 이만하게 구멍나 있지, 그지?" "어...... 그, 그렇다고 할 수도......" "에이, 그렇잖아. 솔직히 인정하라니깐!" "그, 그래. 사실은...... 그, 그럴 거야." "오케이, 바로 그거 아냐. 내 얘기는 그러니까...... 이제 너도 그 마음을 채우라는 거야. 그 텅 빈 마음을." 텅 빈 마음을 채운다...... 희창이는 비로소 신이 나는지 침까지 튀겨가며 떠들었다. "알아, 이짱. 니 얘기는...... 알겠어. 그렇지만...... 그 마음을 뭘로, 아니 무슨 마음으로 채운다는 얘기야? "어휴, 이 멍청한 놈! 너.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봐. 예스 아니면 노로. 자, 너 그 뻥 뚫린 마 음 채우고 싶어, 안 채우고 싶어? 아니아니...... 너 그 마음 채울래, 안 채울래?" "내, 내 마음을?" "에헤,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라니깐 그러네. 어떡할 거야? 그냥 그렇게 평생 구멍난 채로 살 거야? 아니야?" 녀석이 하고 닦달을 해대기에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채울래, 안 채울래?" "채, 채우고 싶어...... 그, 그렇기는 하지만......" "알았어. 그렇다면!" 비로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녀석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내 책이며 가방을 후닥닥 챙기고는, 얼레, 내 어깨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어디 가는 거야?" 그렇지만 녀석은 무작정 나를 잡고 강의실을 나섰다. 황당해진 나는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녀 석은 막무가내로 내 등을 떠밀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가보면 안 테니까." "얌마, 그, 그래도 어디 가는 건지는 알아야 가지?" "으이그, 진짜 말도 많네. 내가 방금 그랬잖아. 마음은 마음으로 채워야 한다고." "누,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내 얘기는 그게 아니라,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며, 또 그 얘기하고 는 무슨 상관이냐고?" 순간, 희창이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뭐긴 뭐야. 니 마음 채워주러 가는 길이다. 왜?" 뭐라고? 내 마음을 채워 줘? 그러잖아도 얼떨떨한 판인데 희창이는 그런 내게 더욱 황당한 얘 기를 했다. "사람 마음이 비워지면, 그 마음을 다른 마음으로 채우면되는 거야. 한 사람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메우는 거지. 그게 사함으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법 아냐. 새꺄!" 으잉, 나는 그제야 녀석의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마음으로 채운다- 그렇다면...... 뭐냐? 나, 나더러 다른 마음, 아니 다른 사람을 나라는 얘기? 결국 녀석은 지금 나에게 누군가 마음 줄 상대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발상인 것이다. 나는 어처 구니가 없어 다급히 녀석의 팔뚝을 붙들었지만, 거꾸로 내 팔을 붙잡은 그는 나를 계속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 임마, 싫어......! 나, 난 아직 새로운 사람 만날 생각 없다고!" 그러나 녀석은 그런 나를 흘끗거리기만 할 뿐,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휴, 누가 너더러 새로운 인물 만나래? 걱정마. 무슨 소개팅 시켜 주는 거 아니니까. 하여튼 따라와 봐. 너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그건 또 무슨 얘기야? 내가 막 되물으려는데, 교정의 건물 하나를 막 돌아선 순간 희창이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 했다. "자, 준비됐지?" "어...... 여, 여기는......?" 그랬다. 의외의 장소였다. 말 그대로 소개팅은 아닌 모양, 그랬다면 학교 앞 카페나 커피숍으로 끌고 가는 게 당연할 텐데. 분명 이곳은 학교 안이었다. 그것도 녀석과 나, 우리 경영학과가 있는 곳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사범대학 건물이었다. 교내에서는 그런 대로 예쁜 여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37 카페도 아니고, 학교 안이라니, 누굴 만나기로 했단 말인가? 그나저나 나는 은근히 계면쩍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과 쪽이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 대 일 비율이라면 이 근처는 정반대로 여자들이 이 대 일, 아니 삼 대 일는 되는 곳이었 다. 당연히 여학생이 많은 가정교육과, 유아교육과, 음악교욱과, 게다가 바로 붙어있는 건물이 미대 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지나 다니는 사람은 거의가 여자였다. 까르르, 옹기종기 건물 주변에 둘러선 여학생 무리에서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아주 오래 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찰랑이는 교복치마와 쪽 뻗은 종아리 끝 하얀 양말, 첫사랑. 그때도 여기 이 희창이 녀석과 같이 있었는데, 이 녀석 누나 학교 앞에서. 그런데...... 건물 모퉁이에 나를 세운 희창이는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며 다짐을 주었다. "준비해 둬. 잠깐만 기다려 봐." 기다리라는 말은 알겠다. 그런데 준비해 두라는 말은 무슨 얘길까. 나타날 아가씨를 위해 뭐 옷 매무새나 다듬고 머리에 힘이라도 주라는 걸까.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담배만 빼어 물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 같은 눈을 하고 지나가는 여학생을 특히나 건물 안에서 나오는 여학생들을 빠짐 없이 하나 하나 훑고 있었다. "이, 임마. 너 헌팅이라도 할 생각이면...... 관 둬, 나 화낼 거다!" 내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희창이는 그런 내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휴...... 그런 거 아니라 그랬잖아. 그냥 조용히 보고만 있어. 이상하네...... 지금 시간이면 나올 때가 됐는데?" 녀석이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하기야 내가 아는 여자애라고 했으니 헌팅이나 부킹 따위를 하려 는 건 아니리라. 그렇지만 그게 더 모를 이야기였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곳 사범대나 미대 근처에 아 는 사람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 붙들어 매고, 이따가 놀라지나 마라. 너한테도 아주 반가운 사람일 테니." 반가운 사람이라고? 갈수록 의아심만 더해갔다. 혹시 선영이 누나나 지현이가 여기에 있다는 소 린가? 물론 절대 그럴 리는 없다. 그때였다. 한마디 예고도 없이 희창이가 내 등을 확 돌려세웠다. 마 치 누구에게 들킬까 봐 숨기라도 하는 동작이었다. "뭐, 뭐야?" 놀란 내가 묻는데도 녀석은 내 어깨동무를 하고는 짐짓 뒤쪽만 살폈다. 쉿, 소리를 내지 말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모를 몇 초가 지나간 후에야 희창이는 몸을 돌리고 나를 다시 어디론가 이끌었다. "지, 지금은 또 어디 가는 건데?" 그러나 그는 뚫어져라 앞쪽을 응시하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도대체 녀석이 누구를 발견했기 에 이러는 것인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우리 앞쪽에는 이제 수업을 막 끝낸 한 무리의 학생들이 수십여 명 떼를 지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 앞의 학생들은 점점 그 인원수가 줄어들었다.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다음 수 업이 있는지 다른 건물도 향하는 몇 명, 도서관으로 향하는 몇 명...... 그렇게 그 한 떼의 여학생들 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거의 교문 근처까지 다다랐고, 우리 눈앞의 여학생들은 그에 따라 한두 명씩 띄엄 띄엄 갈라져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비로소 나도 희창이가 누구를 뒤쫓는 것인가 눈치챌 수 있었다. 한 명의 여학생. 혼자 따로 걷고 있는 한 여학생- 틀림없이 녀석의 목표물은 그것이었다. 그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오 미터, 사 미터...... 점차 간격이 좁혀지면서 내 눈에도 그 목표물의 뒷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으응? 그랬다. 그 여학생의 모습은 희창이의 말대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다. 어깨 위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 치마를 입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쭉 뻗은 다리임을 알 수 있었 고, 그리고 저 큰 키. 저 모습은? 마침내 교문 앞, 주변 십여 미터 내에는 우리들만 존재하게 되었다. 희창이, 나, 그녀. 드디어 희 창이가 불쑥 튀어나가며 그녀, 아니 그 여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38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기절초풍해서 졸도라도 할 것 같았다. "다미, 다미씨!" 맙소사. 다미라니. "다미씨!" 연이어 부르는 소리에 그 호리호리한, 가슴만은 전혀 그렇지 않은 그 여학생이 천천히 뒤를 돌 아봤다. 아아, 우리 세 사람 중 싱긋 웃고 있는 희창이만 빼고 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미였다. 정말, 진짜, 다미였다. 보름 전 나를 그토록 황당하게 해놓고, 스스럼없이 멍자국이 선 명한 몸매를 드러내놓고...... 마술처럼 사라졌던 안다미. 그녀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녀와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있을 수 있 나. "안녕, 안녕하세요......!" 오로지 희창이만 정상적인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녀석이 태연한 얼굴로 다미에게 다가섰다. 키 득거리는 웃음을 감추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참, 창희 알죠? 그 때 왜, 소개팅한......" 희차이 녀석은 짐짓 우연을 가장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어디 가시는 모양이죠?" 부둘부들, 다미의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혀가 얼어붙었는지 아무 대꾸 도 하지 못했다. "아니다. 맞아...... 지금 바쁘세요? 잘됐다. 마침 창희랑 저도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요. 어때요? 오래간만인데 우리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희창이는 상투적으로 다미에게 수작을 걸어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아야야, 아후."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냐. 희창이가 한쪽 뺨을 감싸쥐고 있었고, 다미는 부들거리는 손 을 아직 내리지 못한 채였다. 엉거주춤 다가선 희창이 녀석, 그가 다미에게 정통으로 뺨을 맞은 모양이었다. "다, 다미야!"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녀석에게서가 아니었다. 내 입에서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 다. 아주 짧은 몇 초, 다미는 파리해진 낯빛을 감추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다가 홱, 그녀 가 돌아섰다. 언젠가처럼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채 두어 걸음도 못 가 나에 게 어깨를 붙들렸던 것이다. "야, 아, 안다미"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지난번 같은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때 다미가 달아나야 했던 이유는, 아니 그녀와 내가 함께 달아났던 이유는, 우리가 아닌 박사 장이란 존재 때문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미가 희창이와 나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그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돌려세우고 두 손을 붙들어야 했다. 팔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 여차하면 내 게도 따귀를 날릴 것 같았다. "왜, 왜 그래?" 내가 다급하게 물었으나, 그녀는 하다 못 해 놔, 놔 줘요. 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 다, 다미......" 그렇지만 말을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 나는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다미의 눈이 아예 묘 사가 불가능한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슬픈 눈동자였다. 눈물을 머금지는 않았어도 말못할 서글픔과 회환, 그런 것들이 깊이 박혀 있었다. 사람이 진실로 슬플 때는 눈물마저 안 난다더니, 바로 그녀가 그랬다. 절망, 마치 모 든 것이 끝나 버려 마지막 희망까지도 잃은...... 체념이 눈빛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언의 몸짓으로 인해, 나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은 듯 서있을 따름이었다. 난처했다. 황당했다. 알 수 없는 그 눈동자의 의미에 대해.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잠시 뒤 다미의 눈동자가 슬픔에서 공포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 다. 그리고 내 어깨에 뭔가가 턱 얹혔다. "놔." 그와 함께 간단명료한 말이 들려왔다. 누구지? 희창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자인 다미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계집애한테 손 떼라니까." 걸쭉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엇, 나는 놀란 음성을 얼른 삼켜야 했다. 얼굴 모를 한 사내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리고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아무렇게나 세워 둔 차안에서 나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놓으란 얘기 안 들리냐?" 순간 그 사내가 손이 억세게 내 어깨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다미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뭐, 뭡니까?" 당황한 내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너야말로 뭐하는 새끼야?"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동시에 잔뜩 불량기 어린 목소리 하나가 추가됐다. "뭐야, 왜 그래?" 그제야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의 인상들 이 보통이 아니었다. 껄렁한 얼굴, 척 보기에도 나보다 네댓 살 위로 보이는 그 두 사람은 양아치 같은 양복에 무스 를 잔뜩 발라 머리를 온통 올백으로 넘기고 있었다. 한눈에도 험악한 자들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체 이 작자들은 뭐하는 사내들인가. 내 가 다미와 실랑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그녀를 구해주려고? 아무리 그래도 이상했다. 유흥가나 시내도 아닌 전혀 깡패들이 나타날 장소가 아닌 학교 정문 앞, 그런데 불현 듯 나타난 이들의 정체라니. 그런데. "아, 아저씨. 가요. 갈게요......!" 얼레, 이건 또 무슨 소리냐. 고개를 돌리자 다미가 내 어깨를 붙든 사내의 어깨를 잡고 애원하 는 목소리로 만류했다. "갈 거예요, 지금, 지금 가려고 그랬다구요. 그러니까 이 사람 놔주세요, 예?" 그 말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내들과 다미는 아는 사이? 그런데 앞 뒤 사정을 따져보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뭐하는 작자들인데 내 앞에서 이렇게 다미가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하나. 나도 모르게 결기를 세우고 말았다. "뭐, 뭐요? 이 손 치워요!" 하지만 사내의 팔을 뿌리치려는 내 시도는 중간에서 막히고 말았다. "억!" 능숙한 솜씨로 그의 팔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물 흐르듯 재빠른 동작이었다. "잠깐, 잠깐만...... 이 새끼, 혹시 니가 창희란 새끼냐?" 어라, 이 사람이 어떻게 내 이름을? 그러자 그가 아하, 알겠다...... 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흘금거 렸다. 아무래도 학교 앞이 라는 걸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내 귓가에 기분 나쁜 음성이 들려왔다. "너...... 오늘 잘 만났다." 그의 고갯짓에 나머지 한 사내가 움직였다. 내 멱살을 쥔 자의 어깨 너머로, 다른 사내 하나가 다미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차 쪽으로 끌고 가는 게 보였다. 아! 차, 그때서야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맞다. 저 차는......! 얼마 전어 다미와 숨가쁘게 도망쳐 야 했던 현주네 아파트 앞, 그 곳에서 본 바로 그 자가용이었다. 설마 그럼 이 모든 일리 박사장과 관련된 이야기! 제길헐, 나는 대번에 관자놀이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이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눈물을 흩뿌리며 달아나던 다미, 공포에 떨던 그녀의 눈동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참혹한 상처 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내 머리 속에서 한바탕 소용돌이를 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라고 가슴속으로 외치고 있는데, 그 순간 이 복잡 미묘한 상황이 느닷없이 역전되고 있었다. "꺄아악!" 머리채를 붙들린 다미의 입에서, 아뜩한 비명이 들리나 싶었는데...... 어떤 그림자 하나가 그쪽을 덮치고 있었다. 뻥, 내지르는 발길질 하나.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 둘. "야, 뛰어!" 희창이였다. 녀석의 뛰어 차기 한 방에 다미를 억지로 차에 태우려던 사내가 배를 붙잡고 차 보 닛 위로 엎어졌다. 그 불의의 기습에 뜨악한 내 편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기회였다. 그의 턱에 내 주먹이 번개처럼 작렬했다. 내 멱살을 쥔 건너로 정확히 적중하는 휘어치기, 그게 세 번째였다. 비틀, 사내가 나뒹굴었다.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나는 다미에게 달려갔다. 벌써 희창이는 재빨리 튀어 달아나고 있었다. 눈가가 젖은 다미를 추스려줄 여유도 없었다. 엉거주춤 무릎을 쪼그린 그녀의 손목을 꽉 쥐어 일으킴과 동시에, 후닥닥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우리가 누구에게서 달아나는지를 몰랐지만 이번은 그 대상이 확실했다. 험악한 인상, 내 목덜미를 잡던 그 손길로 보아 그들은 분명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었다.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내 발걸음 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채 이삼 십 미터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등뒤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야, 너 거기 안 서!" 어디로 도망치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그저 앞장 선 희창이만 바라보며, 다미와 나는 숨가쁘 게 달렸다. 급박히 울리는 구둣발 소리는 꽤 오래 우리 뒤를 따라왔다. 야 이 새꺄, 죽고 싶어, 욕지거리가 바로 귀밑에서 들리는 것 같아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손을 잡고 있는 다 미가 뛰는지 걷는지도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역시 희창이에게는 잔머리가 있었다. 우리는 학교 정문 바로 옆 골목으로 뛰고 있었는데, 녀석 은 그들의 차가 생각났는지 좁디좁은 쪽으로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냈다. 그리고 급기야 한 모퉁이 를 더 돌자 그는 딱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먼저 지나치게 했다. 조그만 리어카 한 대가 골목어귀 바로 앞에 기대어져 있는 곳이었다. "빨랑 가!" 그것을 바로 모서리 부근에 쓰러뜨리고는, 한걸음에 뛰어넘는 희창이. 몇 초 뒤에 우당탕, 어이쿠, 하는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멋모르고 막 골목을 돌아든 녀석들 이 보기 좋게 걸려 넘어졌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쪽으로!- 어느새 우리를 따라잡은 희창이가 외쳤다. 39 희창이는 한 뒷골목의 건물 출입구에서 내 팔을 붙들었다. 어두컴컴한,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 인 듯했다. 역시 쫓아오는 사내들보 다 학교 근처 지리에 익숙한 우리 쪽이 유리한 추격전이었다. 게다가 모퉁이의 함정에 걸려든 놈 들에게서는 이제 더 이상의 위협소리마저도 들려오지 않았다. 후아 후아, 녀석은 벽에 기댄 채 바깥쪽을 살피며 가쁘게 숨을 볼아 쉬었다. 나는 그제야 그곳 에 몸을 숨기고 아직도 후들거리는 손을 놓지 않는 다미를 돌아 볼 수 있었다. "아아!" 무너지듯 그녀가 비틀거렸다. "어, 다, 다미씨!" 자칫 기절이라도 할까 봐 얼른 그녀의 겨드랑이를 안아 세웠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털썩, 바 닥에 주저앉았다. "괘, 괜찮아?" 헉헉거리기는 마찬가지였어도 나보다는 그녀가 더 안쓰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근심스럽게 물 었지만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젖은 머리칼을 넘기는 다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는 아 무 말도 하지 못했다. 쪼그려 앉은 다미를 토닥거리는 내 곁으로, 희창이는 다가와 가쁜 숨을 골라 쉬었다. "푸...... 야, 근데 왜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 거지? 아까 그 자식들은 뭐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미가 해야만 했다. 그러나 찡그린 얼굴로 뭐라 대꾸가 없는 그녀. 말 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도 그에게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어 보여야 했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긴 자초지종, 희창이에게 쉽사리 설명해 줄 방도가 없는 까닭이었다. 현주네로 짐을 옮긴 바로 그날 저녁 아파트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일, 아까 그 차를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나야 했던 다미, 도망쳐 들어갔던 내 자취방,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그녀의 비밀스러운 상처들...... 한꺼번에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것도 그저 그녀를 보고 반가운 티를 내 려 했을 뿐인 그에게는. 하지만 의아스럽기는 나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정체 모를 사내들이 누구인가는 그에 비하면 둘째 문제, 우선 다미를 학교 안에서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보영이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상기되었다. 그때 보영이가 뭐라고 했던가. 가슴 큰 여자가 멍청하다고들 하지만 다미는 아니다, 몰래바이트 로 단란주점에 나오기는 하지만 저래 봬도 학교까지 다닌다더라, 그것도 박 사장의 돈으로. 맙소사. 그렇다면? 찰나 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비로소 그간 다미의 묘연하던 행동의 앞뒤가 들어맞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느 학교 학생이라는 말에 펄쩍 뛰었던 그녀, 더군다나 내가 학교 앞에서 자취한다는 말에는 무슨 크나큰 비밀이라도 들켰다는 듯 화까지 버럭 내던 그녀. 그랬다. 그랬던 것이다. 이 몰래바이트 여대생이 다니는 학교란 다름 아닌 우리 학교였던 것이 고, 더군다나 박사장이 마련해주고 바람을 피우러 들락거렸던 그 아파트는 바로 인근이었던 것이 니- 그러니 그녀가 왜 그렇게 자기 신분을 우리에게 숨기려 들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가 해도 그처럼 행동했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목구멍으로 아찔한 마른 침이 꿀꺽 삼켜졌다. 무릎이라도 쳐야 할까. "그나저나 생긴 걸 보니 너랑 나랑 맞장 떠도 위험하겠던데...... 어떻게 된거야? 우리한테 시비 나 걸 정도로 시시한 놈들은 아니더구만...... 도 다미씨랑은 안면이 있는 사이인 것 같던데?" 희창이는 나와 다미에게 연달아 궁금증을 토로해댔다. 하도 갑작스레 벌어진 사건이라 영문을 모르는 희창이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으리라. 하지만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눈앞에 놓인 의혹부터 해결해야 했다. "다, 다미씨. 조금 전 그 친구들...... 저번에 다미씨가 피해다니던 그 사람들아니야?"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나는 희창이 녀석을 대신해 다미의 앞에 마주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그녀는 생각하기도 싫은 것처럼 질끈 감은 두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 좀 해봐. 언뜻 보니까 그 사람들이 탔던 차...... 저번에 다미씨랑 내가 아파트 앞에서 본 그 차 맞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다미는 마침내 고통스럽게 고개를 끄덕 였다. "응? 무슨 얘기야. 저번이라니? 그럼 두 사람 전에도 만난 적있어?" 희창이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불쑥 끼여들었으나, 나는 일단 녀석을 무시하며 그녀에게 재 삼 확인을 했다. "그렇다면...... 박사장이 보낸 놈들이야?" "뭐, 박사장? 박사장이라...... 언젠가 창희 널아 치고박고 했다는 그 사람? 이건 또 뭔 얘기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 원......" 나는 녀석에게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흑, 작게 울먹이는 소리가 다미의 숙여진 고개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아프게 깨물린 아랫입술 옆 뺨으로 가느다란 눈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몰라...... 이젠 다 끝이야......" 이 황당한 상황에 녀석과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다, 다미씨......" 다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처연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어깨 를 끌어 당겨 가슴팍에 안고 희창이에게는 손가락을 입에 대보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 어떻게 안 거죠? 어떻게 아셨어요......? 거기 있는 줄......" 후우, 그야말로 내가 대답할 것이 아니기에 나는 희창이를 돌아 보았다. 머쓱해진 그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고의는 아니었어요. 실은 저번에 잠깐...... 다미씨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날 모른 척하길래......" 그때...... 맞다. 언젠가 녀석이 다미 비슷한 글래머의 여학생을 봤다고 하더니. 그럼 그게 진자 다미였구나. "며칠 학교 안을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거죠. 가정학과 학생 중에 다미씨가 있다는 걸......" 딴은 그게 그렇게 된 이야기였다. 다미가 몰래바이트로 단란주점에 나간다는 걸 알고 있던 희창 이는, 그저 그녀는 찾아내고서 또 하나의 짖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나, 나 이제 어떡해요...... 그래서 보영이, 보영이한테까지 비밀로 했던 건데......" 가엽게 흐느끼는 다미를 보며, 희창이와 나는 머쓱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로서는 가장 부끄럽고 감추고픈 비밀을 공개당한 셈 아닌가. 그런데 일은 이렇게 무지막지 하게 꼬이게 되었다. 그것도 신성한 학교 앞에서 난투극가지 벌어져. "미안해요, 다미씨. 일부러 놀래키려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한테도 설명 좀 해 줘요.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내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그 대답은 다미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게 나을 성싶지 만, 지금 이 길거리 건물 안에 숨어 그 장황한 이야기를 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짱, 그 얘기는 이따가...... 내가 따로 설명해 줄게. 지금은 그것보다......" 희창이에게 고개짓을 했다. 바깥 동정을 좀 살펴달라는 뜻이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희창이는 고개를 흔들며 돌아왔다. 아마 뒤쫓던 사내들도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제 어쩔거예요...... 나 그냥...... 그냥 그 아저씨들 따라가야 했는데...... 그래야 했는데......" "아, 안 돼. 그건!" 모르겠다. 우리로 인해 분명 이 아가씨가 극도로 곤란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 그러 나 나는 양심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 어디에 숨어 있어야 해요. 박사장님 화 풀리실 때까지...... 아니면...... 나...... 나......또." 울먹임에, 다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알았어. 내가,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 다미씨!" 나로서는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리에겐 이 모든 당혹스런 사건을 정리할 의무 가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애써 상황정리를 해야 했다. 지난번 그토록 몸서리가지 쳐대던 다미,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박사장의 졸개들 코앞에서 우리와 도망쳤다....... 나는 그녀의 등에 난 그 멍자국들 이 떠올라 머리카락이 쭈뼛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고로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 우리 세 사람은 일종의 공동 운명체가 된 것이었다. 그 시시콜 콜한 원인이 어찌 되었건간에,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는, 아니 희창이와 내 입장에서는 그녀를 보 호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아직도 전후사정을 알지 못해 인상만 찌푸리고 있는 희창이를 잡아 끌고 건 물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무엇을 감추랴. 흘긋 다미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쪼그리고 앉아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잘 들어. 이짱......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왜 내가 현주네 집으로 이사했던 날......"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희창이에게 지지난 주에 있었던 일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40 "뭐야?" 내 설명을 듣는 희창이의 눈이 잔뜩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 박사장이란 놈이...... 진짜 다미 기둥서방이라고?" "그래, 하짐나 그것뿐이 아니야." 여차저차, 나는 내 자취방에서 몰래 훔쳐본 다미의 멍자국가지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희창이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낙나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그렇다면 니 얘기는?"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 그 나쁜놈!" 녀석은 울분이 터지는지, 주먹까지 쥐고 부들거렸다. "이제...... 어쩌지? 그러니 다미 쟤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얌마,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안 되지!" "그럼 어쩌나...... 오늘밤이라도 숨겨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 그래도 아무 데나 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까 그 새끼들 낌새 보니깐 아무래도 이 근방은 다 뒤지고 다닐 것 같던데...... 참, 보영이네는 어떨까?" 그 말에 나는 그만 뜨끔하고 말았다. 보영이네 셋방? 내가 보영이와 몰래 정사를 가졌던 그 장 소? 더군다나 희창이 이 녀석은 한 번도 못 들어가 안달인 그곳? 하지만 다행히 그가 먼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건 안 되겠다. 보영인 지금 가게에 나가 있을 테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보영이네 가게로 찾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내가 박사장이라 해도 그 단란주점부터 뒤지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이니 말이다. "지금은 별 수 없다.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하자. 우선 내가 학교에 가서 차 끌고 나올게. 그리 고...... 차안에서 기다리자고. 그게 어디 잘못 들어갔다가 들키는 것보단 나을 거야. 그러다가...... 보영이 집에 들어올 시간 돼서 찾아가면 되잖아. 아님 전화로 미리 얘기를 해둬도 되도." "하지만...... 그 자식들 다시 만나면 어쩌지?" "에이, 걱정 마. 나 혼자 갔다오는 건데 뭐. 오히려 다미랑 너까지 있으면 그게 더 골치 아플 거 야." 그럴까. 아무래도 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일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을 보내고 나서 나는 건물 계단 뒤에 숨은 다미에게 돌아왔다. 보아 하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그녀는 울음기를 삭이고 있었다. "바, 밖에...... 그 사람들 없어요?" "어, 안심해도 돼. 조금만 기다리면 희창이가 차 끌고 올 거야." "으응...... 차안에서 기다리다가 이따 밤에 보영이네 방에 가서 숨으면......" "아, 안 돼요!" 다미의 입에서 즉각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안 된다니...... 왜?" "보, 보영이네는...... 모, 못 가요. 가면 안 돼요." 왜 그럴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다미는 재빠르게 말했다. "그, 그렇게 되면 보영이도 위혐해져요." "위험해? 어째서?" 다미는 왠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뭔가 또 다른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솔직하게 얘기해 봐. 이렇게까지 됐는데 또 뭘 감추니?" "가, 감추는 게 아니에요. 사, 사실은 저...... 저 지난주까지 보영이 방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 데......" 다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박사장님이 거기까지 찾아 와서...... 강제로 끌고 갔었어요." "보영이네 셋방에? 어떻게 거길 알아?" "그건 저도 몰라요. 어쨌든 그러니까 거기 가도 저 쫓아올 거예요. 아니, 그 사람 그때도 보영이 한테 한번만 더 숨겨 주면 저처럼...... 저한테 하는 것처럼 한다고 그랬어요." 으잉,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다미한테 하는 것처럼 한다? "그, 그게 무슨 얘기야?" 다미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척이나 대답하기 곤란한 표정이었다. 답답한 나는 다시금 그녀를 다그쳤다. "말해 줘. 보영이도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얘기야?" 그때였다. 섬뜩한 느낌 하나가 서릿발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혹시? 다미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다시 눈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대답을 재촉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그제야 다미도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을 했다. "보, 보영이도...... 때릴 거라구요...... 흐흑......" 정말 머리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물론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지만 일단 확인을 하고 보니 눈 에서 불이 났다. 그녀의 어깨를 안은 내 손마저 부르르 떨려왔다. 과연 그랬던 것이다. 다미의 등에 난 상처, 그 렇다면 그건 박사장의 매질로 인해 그렇게 됐다는 얘기 아닌가. "개자식!"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변태자식, 손찌검 정도도 아니고 고의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밀려왔다. 그가 옆에 있다면 반쯤 죽도록 패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순간적인 감정일 따름, 지금 시점에선 박사장이란 작자가 어떤 인간이냐는 것을 빨리 파악해야 했다. 나는 냉철해져야 했다. 다미의 말 그대로 보영이, 보영이가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박 사장 하나라면 모르겠지만, 아까의 사내들은 격이 틀렸다. 만약 그 사내들이 보영이네 방에 진을 치고 있다면...... 그 뒤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초라도 빨리 이 사실을 희창이와 보영이에게 알려야 했다. "아, 알았어. 다미야, 일단 우리 여기서 나가자." 나는 우선 그녀를 달랬다. 아무래도 다미가 정신을 차려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 힘을 내. 너도 보영이가 다치는 건 원하지 않잖아? 그렇지? 그러면 얼른 그 애한 테 알려야 된다고." 그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는지 다미가 내 어깨에 기대로 있던 머리를 힘 없이 끄덕였다. 하긴 친구가 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는데,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으랴. 나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다미의 어깨를 안 듯이 하며 골목길로 나섰다. 그리고 이쪽저쪽 주 변을 살폈다. 행여 그 사내들과 다시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 다. 건물 앞쪽으로 나오니 공중전화가 보였다. 나는 다미를 잠시 곁에 세우고 화급히 희창이의 핸 드폰 번호를 눌렀다. 녀석이 핸드폰을 갖고 있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이짱!" "응, 나 방금 차에 탔어. 아직 거기 있는 거지? 쫌만 더 기 다려라. 십초 내로 갈 테니." "그래.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더 큰일이 생겼어." "아냐, 아니야. 보영이, 보영이가 위험할지도 몰라." "보영이? 왜?" "다미가 그러는데, 박사장이 보영이 셋방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대.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 그 사 람들 보영이 찾아갔을 수도 있다고!" "엉? 진짜야?" "그럼 농담인 줄 알아? 그러니까 보영이네 간다는 건 어림도 없겠어!" "미치겠군. 이거 일이 상당히 복잡해지네...... 지금쯤 보영이네 가게로 몰려가기라도 한다면...... 빨랑 알려줘야 되겠는 걸." "맞아. 오늘은 보영이도 어디 피해 있으라고 해야 돼." "좋아. 지금 보영이한테 전화 걸고 가봐야겠다. 아니아니, 그보다...... 그럼 어쩌지, 너희 두 사람 은?" 희창이의 질문에 나도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 글쎄...... 어, 어떻게 하지?" "야, 별 수 없다. 지난번처럼 니 자취방 신세 좀 져라. 아니면 둘이 여관방에라도 들어가든가." 여관방? 나는 그 말에 뜨끔하여 옆에 선 다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겁에 질린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자취방이건 여관방이건 간에, 그렇다면 종내 오늘 반 그녀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 아닌 가. "어떡할 거야?" 어휴, 나는 갑자기 막막해졌다. 이걸 어쩐담. "그,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우, 우선 너나 얼른 보영이한테 가봐. 어디 들어가는대로 전화할 테니깐. 핸드폰 켜놓고." 오케이,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희창이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로소 저번에야 불발로 그치기는 했어도, 이제 이것으로 두 번째 다미와 단둘이 반을 지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아무리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 와중이라고 해도, 꼼짝없이 저 글래머 아가씨와 하룻 밤을 보내야 한다니, 나는 이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도대체 판단이 서지 않았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