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책을 펴내며 오늘날 우리 소설문단의 혼란상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사실 우리 소설문단의 현실은 따끔한 질책을 받아 마땅할 정도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른바 상업주의와 결탁한 품격 미달의 장편소설들이 독서계를 풍 미하고 있고, 단편 분량의 소재나 내용을 가지고 억지로 길게 늘여 쓴 듯한 중편소설들이 양산되고 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예술작품의 수 준에 이르지 못한 이러한 저질 장편소설과 중편소설의 범람으로 인해 작품의 구조적 완결성과 예술적 품격을 생명으로 하는 단편소설은 턱없이 위축되고 있 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평론가들은 그들대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 의 심정은 마치 환자의 몸에 퍼진 심각한 질병의 원인을 진단해 놓고도 그 처 방을 몰라 허둥대는 의사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 소설을 애호하는 독자들 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비유하자면 환자의 가족과도 같은 그들은, 어느 것이 제대로 된 소설인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 찾듯 문단의 거품현상에만 현혹되어 휩쓸리기 십상이다. 우리 소설의 문단의 이같은 혼란상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은 물론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지한 자성의 시간이다. 작가, 출판 종사자, 평론가, 독자 모두가 오늘의 혼란상과 관련해서 스스로의 문제점을 돌 아보고 그것을 풀어나가려는 진지한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현대문학사에서는 장편소설과는 달리 그 자체만으로도 상품가치가 적어 대개의 출판사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중, 단편소설로만 구성된 소설선집을 엮어 우리 소설을 아끼는 독자들에게 헌정하고자 한다. 이는 1955년 창간시절부터 오늘날까지 38년 동안 '현대문학을 통해 한국문단과 고락을 함께 해 온 현대문학사 나름의 자성의 소산이자, 오늘 날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한 작은 노력의 표현이다. 이 기획을 시류에 따른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연차 사업으로 계속 진행시켜 나아가려는 것도 바 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수록 된 작품들은 1992년 9월부터 1993년 8월까지 28종의 문예지를 통해 발표된 550 여 편의 중, 단편소설과 2권의 신작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엄정하고도 세심한 선정과정을 거쳐 뽑은 것이다. 작품선정은 현재 여러 문지 의 월평을 담당하고 있는 현장비평가 다섯 분에게 의뢰했다. 이는 우리 소설 문단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형상화작업의 생생한 현장성을 적극 수용하기 위한 배려였다. 따라서 여기 수록된 13편의 단편소설과 2편의 중편소설은 1993 년의 우리 소설문단이 이룩한 문화적 성과의 높이와 넓이를 한눈에 보여줄 것이 다. 이 책의 기획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익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말 그대로 '좋은 소설'을 뽑아주신 김윤식, 정현기, 전영태, 정과리, 신덕룡, 다섯 분의 선정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 해를 거듭하며 계속될 이 '현 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과 냉정한 비판을 바라면서, 이제 그 첫단추를 조심스럽게 끼운다. 1993년 10월 (주)현 대문학 편집부 무엇을 할 것인가 공지영-1963년 서울 출생. 1988년 '창작과 비평'(가을호)에 중편 '동는 새벽'을 발표하여 등단.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 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해설-김윤식 제목이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없을까. 유명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우 리 운동의 긴급한 문제들에서'(1902)에서 따온 것.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라 고 쓰고 나자 불안스러워졌다.'라고 레닌은 적었다. 바람직한 사회개혁을 위해 목숨을 건 혁명운동이란, 오직 이성의 힘에 의거해야 하는 법. '공상에서 과학으 로'라는 유명한 명제가 이 사실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렇지만 레닌은, 주위 의 많은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닌은, 주위의 많은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꾸기'를 주장해 마지않았 는데, 왜냐면 꿈꾸기란 꿈과 현실 사이의 차이랄까 연관을 문제삼게끔 유도할 수가 있겠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물론 공씨의 이 작품을 읽기 위해 레닌의 명제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곧 이 작품은 이른바 후일담문학 범주에 드는 것. 따라서 후일담문학이라 규되 는 일반적 성격부터 문제삼는 일이 먼저 요망된다. 후일담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우리 최근세사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신세대가 있었 다.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으로 갔다. 광주세대가 있었다. 그때엔 더 많은 젊은이들이 기름병 을 들고 거리를 뛰었다. 뿐만 아니라 몸에 불을 붙여 스스로 불타는 기둥이 기 도 했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대들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아주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구소 련이 무너지는 소리와 모양에서 그들의 신념은 흔들렸고, 망설임이 그들 주변 에 알게 모르게 에워싸지 않았겠는가.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이를 두고 후일담문학이라 부를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후담 문학 범주에 든다해도 공씨 특유의 개성은 따로 있는 법. 주인공 정화의 섬세한 내면이야말로 작가 공씨의 몫이 아닐까. 옛 애인 김식 이 불구의 처녀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들은 정화가 심란해졌음이란 무엇일까, 새 방향을 찾고자 하되 방향성이 안 떠올라 심란해진 것일까, 여성 특유의 질 투에서인가.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가. 그 어느 것도 정답 일 수 없다. 또 그 셋을 모아도 정답일 수 없을 터이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 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라는 예감이 오히려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의 대 비점은 비록 뚜렷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혼동해서는 안 되는 법. '겨울'이 뜻는 의미가 돋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걷다보니 저녁이었다. 고궁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고 혜동 로터리 쪽으로는 차들만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가 지는 무렵이면 늘 그랬듯이 사물들의 윤곽이 뚜렷했다. 몇백년 전 쌓았을 고궁의 돌담 언저리, 이끼 낀 기 와의 까실까실한 결들까지 선명했다. 문득 눈을 들었다. 희끄무레한 저녁 하늘 사이로 앙상한 나뭇가지가 파들거리며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때는 무성히 이 파리가 피어났었고 또 한때는 푸드득거리며 커다란 이파리를 떨구던 나무들었 다. 하지만 이제는 미세한 바람결에도 몸서리를 치면서 그저 파들거릴 뿐이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까 오후에 선배의 출판사에 들른 이후로 나는 계속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모든 약속들을 스스로 취소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는 길 잃은 사람처럼 이 저녁 거리가 낯설었다. 늘 걷던 길의 버스 정류장 팻말 까지 그랬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다시 그의 생각이 났다. 그가 결혼을 한다고 아까 출판사에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나는 계획했던 저녁의 일정들을 혼자서 취소버 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확히 말해서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 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지금 이 시간, 아마도 김 교수의 출판 기념회에 참 석해 있을 것이다. 별로 동의하지도 않는 그의 논문에 입에 발린 치하를 보내 고 사람들을 만나고 뷔페를 먹고 어쩌면 쓸데없는 농담들을 지껄이면서 거품도 싱싱한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가, 결, 혼, 을 한다. 이제 나는 아무도 건너지 않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차들이 늘어선 길 건편 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스물이 좀 넘었을까, 시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골라 잡은 것 같은 허름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그 여자도 길 건너편에 서 내 쪽에 있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몹시 불안해 보 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갑자기 지금 나와 마주보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혹시나 환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을 고 있는 여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발머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골라 잡은 파카와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저 길거리에서 서 있던 스물 몇살의 여자, 지금 저 여자처럼 신호등을 바라보면서 파란불이 들어와 주기를 기다리 고 있던 여자...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내 곁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 리고 그 여자와 나... 차들이 밀려 있는 한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그 여자와 나만이 이 세상에 남았다. 그리고 이윽고는 그 여자도 지워져 버리고 기억속의 여자만 남아 거기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달력들이 거꾸로 팔락거 리기 시작했고 1986년 겨울이 되었다. 그때 여자는 몹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온몸이 딸꾹질을 하 듯 몇분 간격으로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 쪽으로 향해 갔다. 이윽고 어떤 초라한 다방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 여자는 멈추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다방으로 들 어갔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그 여자의 낡은 운동화가 닿을 때마다 삐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혹시 불길의 징조는 아닐까, 그 여 자는 그 계단 중간에 서서 잠시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여자는 조심스레 다방문을 밀쳤다. 그때, 1986년 겨울의 어느 날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 다 방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나서 그 여자는 주머니를뒤 적거렸다. 간절하게 담배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의 주머니 속 에서는 토큰 몇개만 가련하게 짤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들어섰다. 불안하게 출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여자의 굴 에 왈칵 화색이 번졌다. 그는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 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반코트를 보자 그 여자는 설풋 고개를 숙여 버렸다. 이제 와서 그의 반코트를 보면서 눈물이 고여 버린 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때문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앞자리로 와 서 앉았다. 천천히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 탓이었을까 그의 눈은 괴로워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여자처럼 그의 눈동자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생 각을 하자마자 여자는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 다. 그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낡은 탁자로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뚝, 뚝 피를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여자는 설풋 웃었다. 마지 막이라는 생각도 금기라는 생각도 그 여자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이라도 좋았던 것이다. 그가 여기 있고 나는 또 여기 있고... 아직 우리는 함께다. 미소 짓는 그 여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엔 술이 과했던 것 같구나... 우리 둘 다..." 설풋 미소짓고 있던 여자 의 윗입술이 얇게 뒤틀렸고 이어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술 때문이라고 그가 입 을 열었을 때 알아차려야 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지 막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차피 모든 선을 넘어 버렸다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지금은 아침 세미나 간 이었다. 말도 없이 빠져나온 그와 그 여자를 모두들 찾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눈 초리들, 쏟아져 내릴 그 비판들... 가뜩이나 그 여자는 지금 사람들의 따가운 눈 초리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제게로 달려들어 그 여자를 상 처 입힐 그 모든 말들을 다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 는 생각보다 더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난 목숨 을 걸 수도 있어요." 술 때문이라고 말한 그와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말한 그 여 자의 눈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부딪쳤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했으 나 바람 빠진 것처럼 웃어 버렸다. 대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집을 뛰쳐나와 노 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여자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이해해 달 라고 말하며 시선을 떨구었었다. 남자 앞에서 여자는 아직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 때문이었다는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하자 여자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 다. "...형은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그가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다. 그 여자에게 한 대를 내밀다. 담배를 받아들면서 그 여자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그와 그녀에 게 돌연히 찾아왔던 밤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밤이 돌연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1983년의 어느 가을날, 낙엽이 지는 교정의 뒷숲에서 여학생들이 우수수 우수수 강간을 당하고 다음날 벌어진 시 위... 여학생들의 치마를 발겨놓고 유유히 사라졌던 사복 경찰들의 이야기가흉 흉하게 떠돌던 가을이었다.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는 도서관 유리창에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물론 그는 끌려갔다. 그리고 너 편 건물에서 유인물을 뿌리던 여자 선배가 사복 경찰들에게 쫓겨 건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학생 회관 뒤편에 숨어서 그 광경들을 바라보면서 엉켜쥔 주 먹으로 눈물을 틀어막고 서 있던 그 여자는 일년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온 겉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자는 살아 있 었고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갈 길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수천 명의 살아있는 젊은이들이 택했던 감옥의 길을 그 여자도 가고 싶어했었다. 왜냐하면 감옥 에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롭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유는 단지 그것이었다. 그 여자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머리털이 나고 나서그 렇게 혹독한 공부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게 궁핍한 것도 처음이었다. 하루 분 의 아주 작은 식량이 정해지고 하루 분의 엄청난 양의 학습 분량이 정해지고 피워도 될 은하수 담배 갯수가 정해졌다. 그 여자는 학습에 몰두했다. 그것은 힘겨웠지만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질이 간편한 머리와 허름한 옷, 식물 성분의 식사, 공동의 용돈... 닥쳐올 나날들에 대한 체 적인 불안... 실제로,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끌려간 동료들도 많았다. 여자는 제 선택에 대해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된다는 일은 혹 은 민중이 된다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미 물질이 주는 쾌락을 맛본 여자에게 그랬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는 생각과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뒤죽박죽인 채, 실마리를 풀 수 없는 혼을 혼자서만 싸안고 그해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그녀들에게 왔다. 그는 그녀들을 지도하고 있던 선배 가 끌려간 이후로 그녀들에게 왔던 거였다. 물론 그도 수배중이었다. 그 역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후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를 기억했다. 끌려가던 그가 외치던 마지막 소리, 어쩌면 신파적인 대사처럼 보이기도 하는 말, 산자여 따르라,라는 소리가 젊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수 밖에 없었던 그 가을날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김정석이라고 합니다." 그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이름은 가명이 었다. 그 여자도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공 부를 하는 짬짬이 휴식 시간이 되면 그는 낡은 기타를 퉁겼다. 공부에 지친 그 녀들이 그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부 르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 여자는 문득 도서관에 매달려 있던 삼 년 전의 그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때 그는 분명 저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외쳤을 때, 외치 면서 끌려갔을 때 그 여자는 그가 그렇게 고운 저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몰 랐었다. 부드럽게 마치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그의 낮은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는 왠지 가슴이 아팠다. 그가 그저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 남아 있었면 아마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사담이 허용되는 시간이면 가만히 그에게 이 야기를 걸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와 낮은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저음을 동시에 가진 그라면 그 여 자의 고민을 안아 줄 것만 같았다. 이해하고 독려하고 그러고 나서 강철처럼그 여자를 단련시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누군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에게 금물이었지만 그가 없을 때 호심 이 많은 여학생 하나가 그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 3학년 때 시위말야, 그때 도서관 4층에서 짭새들 피하다가 떨어진 언니 있잖아. 그 언니랑 결혼한대... 그 언닌 그때 떨어진 상처 때문에 지금 하반신 마비가 되는 데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는 줄 아니?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감옥에서 서 로 편지를 몰래 교환하면서 연인으로 사귀기 시작했대... 멋지지 않니?" 그리고 며칠 후 그가 왔을 때 그는 새로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선명한 춧 빛의 손뜨개 스웨터였다. 휠체어에 앉아서 저 스웨터를 뜨개질했을 여자의 손 가락이 떠올랐다. 둥글게 감은 배추색 털실이 풀려 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뜨개질이라면 그녀도 자신이 있었다. 후드가 달린 멋진 가디간을 동생 들에게 떠 입힌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지금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 었다.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슬플 수도 있다는 걸 그 여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 다. 깨달으면서 그 여자는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자 그 여자는 그제서야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 여자는 아득바득 그 절망 감과 질투심의 정체와 싸웠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온 것은 결코 1 그런 식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뛰쳐나오면서 아버지에게 뺨은 맞으면서도 당당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손을 담그고 걸레를 빨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그 여자는 생각을 잊기 위해 쏴아, 수도를 틀었 다. 하지만 수도 꼭지에서 쏟아지는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 는 감정의 격류였다. 호기심이 많은 여학생이 다시 말했다. "얼마나 지독한 형인 줄 아니? 그 언니가 몸이 아파 누워 있어도 후배들과의 약속 시간이 되면 일어나 나오는 형이야... 저렇게 늘 웃고만 있어도 강철 같은 형이야... 그야로 정석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 모두 정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정석이 아니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든..." 그랬다. 그는 절대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권위를 보이지도 않다. 말씨는 언제나 한 옥타브 낮은 '라'음이었다. 아주 강조를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도 '시'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물론 아주 높은 음까지 올라가는 노래를 부를 때 는 제외였지만 말이다. 만일 그녀들이 하고자 열망했던 그 일에 정답이 있다 면 그건 바로 그였다. 경제학, 철학에서부터 역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영어, 독 어에서 일본어, 스페인 어까지... 그는 그녀들을 주눅들게도 했고 운동에 대한 열망에 눈 뜨게도 했다. 그는 빛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아니 적어도 아득바득 제 감정과싸 우느라 자꾸 그늘 속으로 숨고 싶었던 그 여자에게는... 그 여자는 감히 그가 그 여자만을 향해서 특별한 미소를 지어 주기를 바란적 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그는 그 여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런 일 때문 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세미나가 벌어지던 날 밤... 그는 드디어 잠깐 쓰 러져 버렸다. 지독한 감기였다. 그녀들이 감히 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찡그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별 것 아니 라는 말이었다. 그는 누운 채로 그녀들의 세미나를 들었다. 세미나가 제대로 행 될 리가 없었다. 그 여자는 아까부터 그가 쓰러질 때부터 마음이 뒤숭숭거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발제도 건성으로 했고 그리고 내내 그의 창백한 얼굴만 훔쳐보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누군가가 새벽 거리고 그의 약을 사 러 뛰어나갔다. 그 여자는 그때 식사 당번이었다. 그 여자는 어제 장을 본 여학 생들이 사다 놓은 대파의 흰 뿌리를 잘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물을 한 컵 냄 비에 넣고 그것을 끓였다. 어렸을 때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가 끓여주던 파뿌리 생각이 났 었던 거였다. 새벽 거리고 약을 사러 갔던 여학생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제그 를 도와 줄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파뿌리 삶은 물을 내밀었다. 이제사 무언가 줄 수도 있다는 생에 그 여자는 들떠 있었다. 더구나 그 여자의 얼굴을 잠깐 동안이었지만 물끄러 미 바라보고 나서 그는 그 여자에게 아주 특별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던 것 이다. 그 미소가 하도 눈이 부셔서 그 여자는 그 방안에 있던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파뿌리 물을 다 마시고 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주시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꾸만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그가 내미는 빈 대접을 받아들고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에게 쏟아졌던 여학생들의 시선은 분명 의혹이었 다. 그 여자는 그때 그 조직 내에서 심하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고 비판하고 있던 중이었다. 얼마 전 한 여학생이 앓아 누웠을 때 그 여자는 한밤중에 약을 사러 나가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분명 부에 항상 있었던 파뿌리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 여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부엌으로 다른 여학생이 들어섰다. 모임 에 서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 여자를 바라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정석이 형은 곧 나을 거야... 난 다만 네가 동지애를 다른 여 자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면 해." 그 여자는 그러자 떨리는 입술을 펴고 그것이 동지애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여자도 그리고 나머지 그녀들도 그것이 동지애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그 모임 내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심한 차별이라고 했지만 그건 차 별이라기보다 격리였다. 예를 들어 다른 동료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부터 책을 전달받기 위해 몇 명이 외출을 해야 할 때도 그녀는 제외되었다. 왜냐 하면 그 책을 중간에서 해 주는 일을 그가 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방이라는 공간 에서 여섯 명이 모두 모여 있는 시간이 아니면 그 여자는 그를 볼 수 없게 배 려되었다. 가끔씩 상상력이 뛰어나다거나 발제를 요령있게 한다고 그 여자를 칭찬하던 그의 입도 다물어졌다. 그 여자는 그 좁디좁은 비밀방에서 여섯 명의 여학생들이 누워서 잠이 들 때 혼자서 벽을 보고 깨어 있었다. 그러면 그 여는 또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내가 이러는 걸까? 곧 현장에 투입될 상황에서 이 런 감정으로 인해 동지들에게 누를 끼쳐도 되는 걸까? 모두들 사랑조차 버리 고 이 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모두들 보고 싶은 사람까지 보지 못하고 어떻 게든지 역사를 올바르게 책임져 보자고 눈물을 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여자는 그 생각만으로 그녀들의 따돌림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음 번엔 다른 동료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 여자는 손수 장을 보아다가 파뿌리를 끓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같은 방에 살던 동료들이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여자는 그날 밤 혼자서 또 생각했다. 아아, 나는 혹시 위선자가 아닐 까... 그리고 몇달이 흘렀다. 그 여자에 대한 조직의 엄격한 배려도 조금씩 누 그러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해서는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가 끔씩 눈길이 부딪혔을 때, 아주 짧은 시간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 을 때 그 여자는 그의 눈길이 특별하다는 걸 느꼈다. 사랑을 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 짧고도 긴 시간... 그 여자는 이제 그런 사실들이 두려워지기 시 작했다. 이제 곧 노동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더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여자는 또 생각했다. 그건 정말일까, 눈동자끼리 허공에서 얽혔을 때, 그의 동공이 검고 크게 확대되어 오는 듯한 그 느낌... 그걸 확인해 보고 싶 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가 제일 애를 먹고 있는 자본론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인가 그는 기쁜 듯이 그녀들을 찾 아왔다. 돈이 생겼고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달 동안 채소와 싸구려 어묵으로 연명하던 그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 가 날라져 왔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낡은 기타를 꺼내들었고 그리고 토론이 아 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놀기로 작정한 날이었으므로 모두들 유쾌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접에 따른 소주잔을 여섯 명의 그녀들에게 골고루 돌렸고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각자들의 고민에 고루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별로 말이 없던 사람들이었데 그날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들도 꺼냈고 힘든 생활과 긴장에 지쳐 있던 그녀들 을 흐드러지게 웃게도 만들었다. 그 여자도 오랜만에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 리고 행복했다.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고 우리는 기필코 역사를 바꿀 수 있고 그리고 여기 빛나는 나날을 모범적으로 사 는 그가 있다. 밤이 깊어지고 하나, 둘 술에 약한 그녀들이 작은 마루에서 방 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밤 세시가 넘었을까 작은 마루에는 그와 그 여자만 남아 있었다. 문득 그 여자는 그걸 깨달았다. 그와 그 여자의 눈이 오래도록 허 공에서 만났다. 그 여자도 그도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 가 물었다. "내일 종로에서 후배를 만날 일이 있는데 나가지 못할 것 같거든... 대신 나가서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좀 전해 주겠니?"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눈이 환희에 빛났다. 그 여자는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시내 구경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의 말은 그러니까 이제 그 여자의 유예 기간이 끝났다는 이 되는 거였다. 그는 찬찬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다방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약도를 확인하느라 그에게 다가앉은 그 여자의 숙인 머리가 그의 앞이마에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과 맞닿았다. "가면 아마도 이런 전화가 올 거야." 다음 말을 듣기 위해 그 여자가 착한 학생처럼 그를 응시했다. 그때 그가왈 칵 손을 뻗어 그 여자의 팔을 당겼다. 아니, 어쩌면 그 여자가 먼저 그의 품으 로 안겨 버렸는지도 모른다. 엉거주춤 포옹을 한 채로 그 여자는 생각했었다. 내가 결국 저지르고 마는구나... 그 여자는 남자의 배춧빛 스웨터에 그저 고개 를 묻고, 그 스웨터를 뚫고 나오는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 자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느낀 것은 단순한 환희는 아니었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짜 주었다는 그 배춧빛 스웨터에 얼굴을 묻은 채로 생각했다. 래 도 되는 걸까... 그가 그녀를 천천히 떼어 내고 두 손으로 그 여자의 얼굴을 감 싸안은 채 그 여자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잘못했어요. 사실은... 형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다시 그 여자를 안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이 세었다. 그가 말다. "다 알고 있었어..." 그 여자가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비볐다. 배춧 빛 스웨터,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여자... 그러나 그도 그 여자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여자는 그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 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 여자를 떼어 내고, 이번에는 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가만히 집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 여자가 그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그 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이러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자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저 사람들 있는 데서 말구... 그냥 뵙고 싶어요. 내일 열시 요 앞 다방 에서..." 그 여자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의 입술만 욱신거리며 씹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를 남겨 두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불 꺼진 방에서는, 그녀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가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는 아무 말없이 이불을 덮고 예의 그랬듯 벽을 보고 누웠다. 긴 한숨소리가 나이 많은 여자의 입에 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탁자 위로 커피가 날라져 왔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어젯밤엔 술이 과한 것 같다. 우리 둘 다..."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그는 설핏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자의 입술이 얇 게 뒤틀렸고 이어 일그러졌다. 그가 담배를 내밀었다. 그 여자는 그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무슨 말이든지 하려무나." 그가 말했다. 여전히 그는 그 여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자석에 끌리듯 다시 눈이 마주쳤 다. 그 여자는 피를 뚝, 뚝 흘리는 듯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그가 담뱃 불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담뱃불을 순순히 받았다. "형,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마치 그가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갔던 그 몇해 전의 가을처 럼 주먹으로 입술 을 틀어막고 그를 바라보았다.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 무늬 반코트 속으로 배춧빛 스웨터가 보 였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고 그녀는 그와 동시에 시위를 하다가 하반 신 불구가 되었다... 둘은 감옥에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동지로서의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서 뜨개질을 한다... 뜨개질이라면 그 여자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여자는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가 없다... 그러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번에는 그 여자의 머릿속으로 명확히 떠올랐다. 그저 이렇게 마주앉아 있어서 좋은 게 아니고 정말 마지막 이라는 단어... 그가 떠나든 그 여자가 떠나든 조그만 주먹을 입에서 떼어 내었다. 마지막으로 그 눈 빛의 의미를, 그가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커다랗게 확대되어 오는 동공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 던 것이었다. "형,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단지 정말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고 나면 더 떼쓰지 않을게 요." "...김, 정, 석."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는 끝내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콧날이 왈칵 시큰해졌 고 그리고 서러운 눈물이 맺혔다.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겠니? 나는 그저 네가 알던 김정석이라는 사람이야... 우리가 각자의 장 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아마 다시 이런 자리에서 만날 일은 없게 되겠지... 그래도 열심히 살면 우린 만나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그 여자가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상투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저 난 이름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동지로서의 이름 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여자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의 눈에 확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하지 만 그는 그 여자에 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마치 입술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진실을 그녀에 게 전달해 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의 눈길은 집요해 보였다. 그 여자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로 말할 수 없 는 어떤 진실들을, 해면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다방을 나왔다. 그는 그 여자를 돌아보지 않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다시 마 지막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굳어진 입술로 그를 불렀다. 몇발자국 걷던 그가 그 여자를 돌아보 았다. 그들은 그렇게 몇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오늘 시내에 있는 다방에 가서 형이 나오시지 못한다고 전하겠어요." 어젯밤 그 포옹의 전조가 되었던 그 약속을 생각하며 그 여자가 말했다. 그 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부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가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들어가 봐. 모두 기다릴 거다... 다들 힘들잖니!" 그가 다시 말을 떼었다. 여자는 그를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끝끝내 고집하던 정석이라는 이름... 그는 돌아보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달음질치더니 그 버스에 올라 탔다. 버스의 배기 가스가 하얗게 뿜어나오던 겨울날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를 본 것은 그것 이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그녀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말도 없이 사라졌 다가 다시 돌아온 그 여자를 차가운 눈초리로 맞았다. 그 여자 역시 냉랭한 눈초리로 그들과 마주 앉았다. 무거운 침 묵이 그 방을 감쌌다. "너무 철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성마르던 여자 하나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더 대꾸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아침 이 지나갔다. 며칠 수 그녀들을 지도해 줄 새 선배가 왔다. 새 선배는 김정석이라는 사람 이 사정상 그녀들을 더 지도해 줄 수 없게 되었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책을 폈다. 그녀들은 일제히 그 여자에게 시선 을 던졌다. 그 여자는 눈을 책에 고정시킨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름 같은 건 순순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았다. 다 시 그에게 안기지 도 않을 것이고 겁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아침에 사 라지는 일도 없을 텐데... 그녀는 그 과정을 이수한 후 노동현장으로 배치되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리하여 그녀들이 제 각기 다른 곳으로 떠나가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 여자는 후배들이 모여 있는 방 으로 다른 방으로 가야 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거기서 공부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느 날 저녁거리를 사러 간다고 그 방을 빠져나와 다시는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돌아온 탕자처럼 집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며칠 후 혼자서 강릉 이모 집으로 갔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거닐다가 밤이면 돌아와 잠을 잤다. 겨울 바다에서조차 사람들은 모 두 짝지어 있었다. 둘 혹은 셋... 혹은 여섯. 어느 날 바닷가를 지치도록 걷던 여자는 털썩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누구하 고라도 이야기를 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 말 그럴 수도 있 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 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 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 웠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었나?" 어떤 남자가 그 여자 곁으로 다가왔다. 묻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대학 원생이며 서울에서 바람을 쐬러 혼자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를 했다. 다만 그가 그 여자가 다니던 대학원 이름만 대 지 않았다면 그 여자도 대충 그렇게 믿어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은 바닷가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회를 샀고 그 여자는 소주를 마셨다. 그가 머뭇거리며 여관 으로 그 여자의 손을 잡아 끌었을 때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따라나 섰다. 하지만 그가 불도 끄지 않고 그 여자의 몸을 끌어당겼을 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그 여자는 불현듯 배추색 스웨터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당황한 남자가 다시 그 여자를 끌어당겼지만 여자는 벗었던 코트를 입었다. 가짜 대학 원생이 그녀의 뺨 을 연거푸 후려쳤다. 부풀어오른 뺨을 잠깐 매만지다가 그녀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아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따라온 거예요. 하지만 갑 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려면 당신하고 하룻밤 자는 것쯤 정말 아무 일도 아니겠 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가고 싶어요. 절 보내 주세요." 가짜 대학원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욕설을 퍼 부었다. 밤 바닷가로 뛰쳐나온 그녀는 그때까지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던 목도리를 꼭 꼭 여미며 이모집 을 향해 걸었다. 흰이빨을 드러낸 파도소리만 그녀의 귀에 철썩였다. 그 여자는 흘러내리는 눈물 을 닦아 내면서 걸었다. "스물네 살짜리 여자가 스물다섯 살짜리 남자를 사랑했어. 그뿐이었어. 그게 죄야? 공부방에 여 학생들과 같이 앉아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것도 죈가? 남루 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 말고 예쁜 치마를 입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그도 아니면 수배자들 과 나란히 앉아서 혹시라도 끌려갈까 봐, 끌려가서 성고문이라도 당하게 될까 봐 벌벌 떨었어. 그 것도 비겁한 건가? 대체 그게 무슨 큰 죄인 거지? ...아니야, 그도 아니면 이름 한번 가르쳐 달라고 말했어. 가명 말 고 진짜 이름... 사실은 당신이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가던 그날부터 벌써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다.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대들어야 했었다. 그 리고는 얼굴을 바 꾸고, 희극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얼굴을 바꾸어서 그 여자와 자고 싶 어하던 가짜 대학원생에게 말해야 했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것들도 있어. 니 눈에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무 모한 결벽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의 무기야. 그것마저 없다면 돈도 없고 힘도 없고 핍박당하는 우리가, 거대한 뿌리를 가진 이 역사의 왜곡에 대항해서 대체 무얼 가지고 싸 우겠니? 사랑마저도 버리고 가야 할 길이 있다는데 누가, 누가 감히 그를 나무랄 수 있겠니?" 그 여자는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집으로 돌아와 대학원에 다시 등록을 했다. 그리고 1987년 그 여자는 수배자 해제 명단에서 그의 본명을 읽었다. 그 여 자는 그 여자가 감 옥보다도 괴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원에 다니면서 교수집에 세배도 가고 논문도 쓰면서 석 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는 동안 동구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 리고 그리고 그 여 자가 한때 몸담았던 조직의 그 사람들이 모두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리고 또 한 겨울이 지나자 소련 연방이 해체를 선언했고 그가 폐결핵 2기가 되어서 고향으로 내려 갔다는 소식을 들 었다. 그런 소식을 전해준 것은 감옥에서 나온 그의 후배였다. 후배는 그 여자 의 동네에 우유 대 리점을 열고 있었다. 딱히 대학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그 여자는 가 끔 후배의 우유대리 점으로 가서 남산만큼 배가 부른 후배의 부인과 우유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들 을 하곤 했었다. 어 느 날인가 후배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혹시 정석이 형이라고 불리던 사람을 아세요?" 우유를 마시던 그 여자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삼키려던 우유가 하얗게 엉 긴 채로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후배가 다시 물었다. "87년인가 수배 해제되고 나서 그 형이 여기 놀러 왔었어요. 그때 정화 씨를 요 앞길에서 봤다 고 하더군요. 내가 우스갯소리로 동네 처녀라고, 자주 놀러온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 그 형 이 우리집에 자주 왔었고... 가만, 그러고 보니 희안하게도 정화 씨랑은 마주친 적이 없네. 한번은 마누라랑 나랑 둘이서 영화 구경을 갔다가 술도 한잔 먹고 새벽에야 돌아왔는 데... 셔터가 내려진 우리 대리점 앞에 그 형이 앉아 있겠죠? 술이 잔뜩 취해서 하는 말이, 발이 가 길래 그냥 종로에 서부터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안됐어요, 폐결핵이라는데... 조직은 다 깨지고... 술 먹고 다니지 말 라고 내가 그렇게 충고를 해도 안 들어요... 그형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사 촌형님이 골프 용 구점을 차렸다는데 거기서 일을 도와줄 건가 봐요.... 원래 집도 가난하고... 이 번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나 봐요." 우유 대리점을 경영하던 후배는 말을 하다 말고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 형... 참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 게 무사하군요." 그 여자는 한번도 골프 용구점에 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일 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가용을 탄 사람들이 와서 달걀만한 골프공을 고 르고 골프대를 만져 보고... 그럴 때 그가 지을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닫혀진 셔터 앞에서, 새벽도 아 직 먼 어느 캄캄한 밤중에, 닫혀진 셔터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였을까. 그 여자는, 아무렇게나 골라 입은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은 그 여자 는 아직도 길 건너 편에서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다시 머릿속의 달력이 펄럭이며 1992년이 가고 있음을 알려 주었고 그러자 밀려 있는 자동차들의 매캐한 배기 내음과 거리의 성 마른 소음이 들려 왔다. 나는 그 여자가 아직도 서 있는 길 건너편의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 다. 내가 잠깐 회상 속에서 떠올렸던 그 시절의 그 여자는 설사 시간이 좀 걸린다 하더라도, 아무 리 이 겨울의 어스 름 속에 떨면서 서 있는다 해도 곧 파란 신호등이 들어올 거라고, 그래서 모든 차들을 멈추게 하 고 길 건너편에서 이쪽 편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만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어쩌 면 영영 파란 불은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 자리에 그대로 언제 까지나 서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길을 건너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방향도 없는 길이었다. 나뭇가지들이 그 봄날과 여름날의 무성한 이파리들을 떨구고 그저 파들거리며 서 있었다. 봄날이 오면 그 나무에 다시 잎이 돋을지 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봄이 올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 다. 나는 원시인들처 럼 혼돈에 빠져 있었다. 밤이 오면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했다. 그 밤도 지나고 나면, 밤을 견디어 낸 자들에게는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가, 결, 혼, 을, 한, 다. 사복 경찰들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지구의 중력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던 그녀하고... 날개도 없이 추락을 택했던 그녀하고, 그리하여 그날 이후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지 못했던 그녀하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하고 있을까. "자식... 참 좋은 녀석이었는데, 결핵 고치기는 했는지... 하기는 서로 나이가 꽉 차기도 했지... 그 자식 87년인가 수배 해제되기 전에 헤어진다 어쩐다 소란을 피우더니 결국 결혼을 하는구만... 어때? ...정화 너도 물론 올 거지? 그나저나 넌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야." 그의 결혼 소식을 전해 준 선배는 사람들을 향해 떠들다가 나를 향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금박도 선연한 그의 명함에는 재벌 기업의 기획실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나도 곧 전임 자리 를 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방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나는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문을 썼고 그것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예 정이었다. 우리들은 별로 놀라운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 출판사에 모인 옛시절의 동지들은 서로 쑥스러운 얼굴로 명함을 건네고 그리고 공룡이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맘모스들이 커다란 소리로 쓰러져 얼음 속에 갇혔대... 글쎄 몇만 년이 지났 는데도 하나도 상 한 데가 없대잖아... 파랗게 얼어서... 그 둥그렇고 날카롭던 상아도, 허공을 향 해 치켜뜬 눈매도 모두 다 그대로라는 거야... 얼어붙어 있는 붉은 피까지... 밀매꾼들이 그 맘모스 를 발견해서는 상 아만 가져다가 판다는 거야... 그게 돈이 되니까... 그리하여 맘모스들의 치켜뜬 눈동자하고 얼어붙 은 붉은 피만 영원히 지하에 갇히는 거지... 돈이 되는 상아만 빼고..." 13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출옥한 선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하 웃 었다. 웃다가 그는 후배들보다 먼저 일어섰다. 우리들보다 십몇년 전부터 반독재 운동을 해 온 그 는 후배들과의 자 리를 이제 거북해 하곤 했다. 한번은 가려는 그 선배를 붙잡았더니 그가 쑥스 러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선배인데 니들한테 맛있는 거 사줄 돈도 없고... 미안하구나..." 사라져 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등은 벌 써 굽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1986년의 그 다방을 찾았다. 창경원을 지나 돌담이 끝 난 곳에서 스무 발 자국쯤 더 걸어가면 작은 골목에 있던 다방. 그 다방은 이제 노래방이 되어 있 었고 보랏빛과 노 란빛의 네온 사인이 간판 주위에서 천박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다방이 간판으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 런 일들이야 흔해 서 더이상 상처가 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네온 사인 같은 종류가 아닌 빛을 기 억하고 있었다. 그 빛은 페결핵에 걸리고, 골프 용구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 빛을 위해 뜨개질을 하 던 여자는 아직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남자는 우유대리점을 차리고, 화려한 민주 투사였던 노선배 는 다만 저녁을 사줄 돈이 없어서 후배에게 굽은 등을 보이며 사라져 가고... 우리들은 모여 앉아 금박 글씨가 선연한 명함을 건네며,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치켜뜬 맘모스의 눈매 가 보였다. 한때는 따뜻했으나 이제는 얼어붙어 버린 붉은 피가 보이고, 그러자 또 누군가가 말하 는 소리가 들려 오 는 듯했다.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나는 어두워져 가는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구효서- 1958년 경기 강화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 마디' 당선. 소설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장편소설 '늪을 건너 는 법', '슬픈 바다', '전장의 겨울',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 해설-김윤식 이른바 소설가소설의 한 유형에 속하는 작품. 작가 구효서는 90년대에 들어 와 전업작가로 나선 하창수, 박상우 등과 함께 유능한 신인층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거니와, 이 들이 쓰는 작품 유 형으로 뚜렷한 것이 바로 소설가소설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이런저 런 몸부림을 치는 상태를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창작 방법론을 일삼기, 그것은 과연 어떤 문학적 의의가 있는 것일 까. 이런 물음은 우리의 순문학이라는 것의 성격에 대한 물음에로 내닿게 된다. 작품쓰기란 궁극 적으로는, 자기 삶의 실천이라는 사상 위에 순문학의 뿌리가 내려 있었던 것이 다. 소설이 남의 얘 기를 재미있게 또는 그럴 법하게 늘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물이라면 굳이 소설가소설 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순문학의 뿌리인 소설쓰기, 곧 자기 삶의 실 천이라면 그는 필시 다음 두 가지방식을 택하게 마련이리라. 허구적인 인생을 내세워 자기 삶의 실천의 도구로 삼기가 그 하나. 대부분의 위대한 소설들이 이런 범주에 들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가 소설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소설가소설 범주라 부른다. 곧 작가가 자기의 개인적 삶을 개발새발 그려내는 것이 아 니라, 오직 그의 삶이 소설쓰기만으로 얼마나 관철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기가 그 것. 단편(문단문학)에서는 이러한 소설가소설이 빈번히 씌어질 수 밖에 없는데, 묘사를 떠날 수 없 음에 이 사정이 관여되어 있다. 자기의 기억을 떠나면 묘사란 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묘사 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이란, 한가지 사건, 정황에 대한 강렬성으로 드러나거니 와, 이 작품의 경우 그것은 '깡통따개'의 이미지다. 소설가 '나'와 소설쓰기 위해 어떤 절간을 찾았 다는 것, 거기서 이 런저런 사물이나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오직 소설쓰기의 가능성찾기에 대한 필 사적 노력의 다른 표현이다. '나'에 있어 가장 절박한 것, 다시 말해 '나'의 소설쓰기에 있어 가 장 소설스런 계기란 한 송이 꽃을 담을 깡통이었다. 지금 그 깡통 따개가 없어, 꽃꽂이의 불가능함이 드러나지 않겠는 가. 깡통따개가 있어야 꽃병이 가능해지는가, 깡통따개가 아니라 그 대용품이어 도 상관없는가. 작 가 구씨는 깡통따개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그러한 벗어나기의 발견이야 말로 소설쓰기의 가 능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아직도 다만 징후로 남아있 을 뿐인데, 왜냐면 작품을 통한 삶의 실천이란 그 자체가 낚시를 삼킨 아이의 처지에 다름 아닌 까 닭이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모자를 벗을 기회가 오면 벗어야 하기 때문에 모자를 쓴다' 토마스만을 읽 다가 밑줄을 친다. '이봐, 다이너. 넌 남자와 관계할 때 음낭이 밖에 있는 건지 스틱과 함께 질 안으로 들어가는 건 지 아니?' 캐리 피셔를 읽다가 밑줄을 친다. 읽던 책 여기저기에, 검거나 혹은 푸른 밑줄을 그으며 여름(1992년)을 맞았다. '맥아더가 나더러 항복하라고 요구했다던데, 우리에겐 그런 습관이 없다구' 김일성. '난 여느 사람 처럼 모든 것을 내 무지 탓으로 얼버무렸다. 그 시절에는 무지라는 것이 유행이었다.' 귄터 그라스 등등. 무언가를 하염없이 읽었나 보다. 2백 개도 넘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데 난 아직 그 부분을 다 시 읽지 않았다. 다시 읽다니. 아마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설쓰기란 결국,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거나 진 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둘 중 하나다. 소설을 위해 궁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메모 를 하는 따위가 다 그렇다. 그렇다, 고 생각했다. 그 여름, 포도와 참외 같은 걸 먹으며 나는 우주를 떠올렸다. 포도씨 하나엔 포도나무 한 그루 가 들어 있다. 내가 먹은 포도씨가 땅에 떨어져 한 그루의 포도나무를 싹 틔운 다면, 그 나무엔 적 어도 수십 송이의 포도가 열릴 것이고, 수십 송이의 포도에서는 수백 혹은 수 천개의 포도씨가 생 기겠지. 그것들이 또 싹을 틔우고 틔우고 틔운다면? 황홀한 기하 급수다. 포도알 하나 먹은 내 배 가 갑자기 우주만해졌다. 전업 초기에 나는 전업이라는 걸 다음과 같이 생각했었다. 전업이란, 월요일 저녁에 입은 잠옷 바지를 다음주 월요일 저녁까지 줄창 입고 있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그런데 전업 2년차였던 지 난 여름, 나는 우주만해진 배를 안고 자주 광화문과 종로엘 나다녔다. 오늘은 어 떤 하찮은 얘기들 이 진지하게 출판됐으며, 누구의 진지한 얘기가 하찮게 출판됐는가 보려고. 광화 문 교보문고는 작 가의 한숨들로 가득한 곳이다. 종로를 찾았던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밥을 먹으러 갔던 것 같은데 꼭 그 런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일행이 있을 때는 그곳으로 밥 먹으러 가지 않는다. 종로 3가역에서 5가역 쪽으로 백 걸음 정도 걸어가면 세운 상가가 나온다. 상가 밑을 오른쪽으 로 꺾어돌면 조명 기구, 각종 전선, 공구, 피혁 따위를 파는 벌집 같은 가게들 이 보이고, 그 사이 로 아주 좁고 더러운 골목이 구멍처럼 뚫려 있다. 그곳이 내가 혼자일 경우 찾 는 식당 골목이다. 청국장이 아닌 다른 음식도 팔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청국장 을 먹으러 그곳엘 갔다. 담장 벽돌 하나하나에도 청국장 냄새가 깊숙이 배어 있는, 그런 곳이다. 장군 의 아들이 '꼬붕'을 데리고 오가던 거리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아무 말없이, 어 깨를 꺾고, 끈적거 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청국장 백반 한 그릇을 비웠다. 여덟 개의 커다 란 쟁반을 머리 위 에 포개얹고 배달 나가는 아주머니는, 볼 때마다 불가사의다. 내가 밥을 사먹고 나오는 모양은, 대낮 사창가 골목을 빠져나온 신사처럼 은 밀하고 잽싸다. 큰 길로 나와서는 공연히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못 봤지?라는 식이다. 식당 안은 너무도 어수선하고 불결하다. 죽은 파리들을 다닥다닥 달고 있는 끈끈이가 무려 여 섯 개. 물컵에는 세제 거품이 묻어 있기 일쑤고, 벽에 붙어 털털거리는 선풍기엔 먼지와 기름때가 켜켜로 쌓여 있다. 문득문득, 이곳이 어떤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세워 놓은 난민 보호소 야외세트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난 그런 곳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사람이 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입가를 쓱쓱 문지르며 큰 길가로 나와선, 두리번거리고, 아닌보살 하는 거겠지. 그런데도 나는 혼자일 때 면 그곳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가서는 늘, 허겁지겁 먹고, 빠져나와 시치미를 뗀다. 알 수 없는 일 이다. 청국장집에서 나와 종묘 주차장 쪽으로 큰길을 건너야 집까지 오는 1호선을 탈 수 있다. 자주 걷는 길인데도 걸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놀란다. 종삼약국과 롯데리아 사 이에 새점 치는 노 파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있을 것이다. "새점 치세요." 라고 말한 뒤, 노파는 2, 3초 후에 똑같 은 말을 똑같은 억양으로 반복한다. 그 "새점 치세요." 란 말의 억양과 음색이 나를 놀라 멈추게 한다. 소름이 끼 치니까 자연 모골 도 송연해진다. 나는 몇번이나 길바닥에 털퍽 주저앉고 싶었다. 그다지 크지도 않고 괴상하지도 않지만, 무의식 어딘가를 맹렬하게 강타하는 소리.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반응을 살핀 적도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었지만 노파의 억양에 흠칫 놀라는 축도 없지 않았다. 저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 려나. 노파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조금 전에 더럽고 어두운 골목 식당에서 청국장 을 먹었다는 사실 을 들켜 버린 것 같아진다. 새점 치라는 말이 "다 알고 있어, 임마."라고 하는 것 같다. 청국장 맛과 냄새, 식당 분위기, 그리고 노파의 음성은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버린 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코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그러면서도 혼자일 경우 나는 어느 틈에 종로를 찾는 다. 새점 치는 노파 앞을 지나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1호선을 탈 수 있는데, 나 는 마치 깜박 잊었 다는 듯 번번이 그녀 앞을 통과한다. 엉뚱하고 하찮은 상상력이 내 뱃속에서 우주만큼 자라는 날 이면 말이다. 한 해에 단편을(그럴 수는 없겠지만 하여튼) 한 열 편 정도 쓴다고 하자. 문예 지에 연재도 한다 고 하자. 이만하면 작가로선 대성공이다. 아내는 그러나 용납하지 않는다. 원고 료로 따져 보자. 가 장 많이 주는 계간지 원고료로 계산해도 다 합해 8백만원이다. 일년 열두 달 을 8백만원 가지고 살 수 있어? 나는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아내는 애 둘 데리고 살 수 없다고 한 다. 나는 살 수 있 다고 한다. 청국장처럼. 그러면 아내는 말한다. 당신 일년에 단편 몇편 발표해? 지금까지 연재라 는 걸 한 번이나 해 봤어? 나는 자꾸 헛배가 불러서 종로 3가를 찾다가, 이 도시를 떠나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내 육신 이, 거대해진 복부 한켠에 붙어 있는 작은 부속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아 주 떠나는 게 아니 라 한 보름 정도. 난 아주 떠나게 생겨먹질 않았다. 길면 한 스무 날 정도. 청 국장집 같은 데서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새점 치는 노파 목소리에 몇날 며칠 갇혀 살아 보고 싶 었다. 그러면 배가 좀 꺼지려나. "잘 팔리는 소설 한번 구상해 보려고. 잘 팔리는 소설 말야." 아내에겐 거짓말을 치고 짐을 쌌다. 현관을 나서는데 아내가 말했다. "생리가 없어요." 잠시 멈추었다가 나는 말없이 돌아서 도망쳤다. 라훌라. 그렇게 해서 그 마을에 도착했다. 언젠가, '문예중앙' 봄호였던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가 다다른 곳은 반야심경이 무언지도 모르는 칠십 노파가 주지로 있는 작 은 암자였다. 대전 시 판암동을 지나 세천고개를 넘어 옥천 쪽으로 쌩쌩 달리다 보면 대청호반이 눈 밑으로 들어온 다. 그녀는 그곳에서 호박잎에 팥밥을 싸 먹으며 하루에 귀신 두서넛을 저승으 로 쫓아 보내는 일 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고 일어나 대청호 수면 위의 물안개를 굽어보다 아침 을 먹었고, 일을 벌 린 채 수면을 바라보다 점심을 먹었고, 놀을 반사하는 수면을 또 바라보다 저 녁을 먹고 잤다. 감 나무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원래는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저 아래로 굽어보던 암자였다. 그러던 암자가 지금은 마을 한가운 데 있다. 암자가 마을로 내려온 게 아니라, 마을이 암자 곁으로 온 것이다. 대 청댐이 생기면서 마 을은 수몰됐고, 사람들만 빠져나와 암자 곁에다 새 마을을 건설했다. 20여 호의, 작은. 마을 한가운데로 2차선 아스팔트가 놓여 있다. 20분에 한 대꼴로 자동차가 전속력을 내며 지나 가고, 그러고 나면 금방 적막에 싸여 자동차가 지나갔는지 말았는지 개들도 알 지 못한다. 그곳에서 나는 똑같은 메뉴의 아침, 점심, 저녁을 먹었다. 피마자 이파리를 삶아 된장에 무친 것, 썬 오이를 삶아 된장에 무친 것, 된장에 무친 도라지, 된장국, 된장에 무친 시금치, 된장에 꽂 아 두었던 깻잎과 고추 등등을 먹었다. 몇날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것들이 왜 한결같이 된장에 버무러져 있었던 걸까를 알지 못했다. "왜 그렇죠?" 부엌에서 일하는 잔귀먹은 늙은 보살에게 물었다. 몇번을 거푸 소리쳐 묻다가 공연히 물었다고 후회했다. "왜? 맛이 없어?" 맛이 없긴. 맛은 아주 좋았다. 그냥 물어 보는 거라고 했다. 외치다가 지친 나는 말의 반을 제 스처로 했다. "주지 스님이 좋아하셔." 나는 그 암자를 떠나올 때까지 엄청난 양의 된장을 먹은 셈이다.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있어 간 게 아니니까 할 일이 없었던 건 당연했다. 툇마루에 나앉아 반쯤 익은 석류를 바라보는 일. 빗물 고인 돌절구를 들여다보며 장구벌레 수를 헤아리는 일. 그놈 은 어떤 때는 열두 마리도 됐다가 열세 마리도 되곤 했다. 금방 고개를 빼 낸 호반가의 은빛 갈대꽃을 멀리 바라보다가, 화장실 문 앞 까지 놓여진 검은 편마암의 개수를 셌다. 시골에서도 모두 보일러를 설치하니까 구들장으로 쓰던 편마암도 이젠 다 소용없구나. 이런 사소한 깨달음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가 묵고 있는 방 앞에서 대가리가 솜사탕만한 맨드라미와, 싸리나무, 과꽃, 채송화, 고염나무, 대추나무, 돈부, 나팔꽃, 분꽃, 호박덩굴, 벽오동, 배롱나무, 감나무, 토란, 들깨, 열무 들이 있었다. 8월 땡볕에 타고 있는 그놈들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눈이 멀어 버릴 정도였 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한 후배가 찾아와서 체질론을 늘어놓고 돌아 갔다. 필요에 의해 소설의 색깔을 자유 자재로 선택해 쓸 순 없는 것이다, 결국 제 체질대로 쓰는 수밖에 없다, 라고 그는 말했다. 이제 대학 3학년인 주제에 지나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나는 아무 말없이 대청호 수면을 바라보았다. 장난감 같은 낚시 감시선이 시동을 끈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어떤 날은 소설가 윤형이 다녀갔다. 여동생 결혼 때문에 내려왔다며 그는 맥 주 여덟 병과 오징 어, 김, 해바라기씨를 사 왔다. 물가에 앉아, 뜨거운 햇빛 소나기에 머리통이 후 끈거릴 때마다 우 리는 한잔씩 마셨다. 전업을 꿈꾸고 있는(그게 꿈일 수 있을까) 그는 나만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고 했다.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물빛에 넋을 놓는 일이 전부였다. 등과 가슴이 코스모스 꽃술처럼 샛노란 노랑저고리벌이 서까래에 파 놓은 자기 집을 찾는 걸 두 시간 넘게 바 라보았다. 방 천장 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죽은 그리마를 기겁을 해 창 밖으로 버렸다. 신방돌이 나 그 옆 콘크리트 동발에 떨어졌겠지. 다리를 꼬고 누워 생각하다가 나는 아침마다 대빗자루로 그곳을 깨끗이 쓸던 늙은 보살을 떠올리곤 미안해졌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다 버려야겠다 싶어 일 어나 창 밖으로 내 다보았는데, 죽은 그리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밖으로 나가 샅샅이 뒤졌으나(어 차피 할 일이 없었 으므로) 그리마는 간데없었다. 그리마의 행방을 안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개미가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또 몇날이 지난 뒤에야 나는 부엌의 늙은 보살 말고 두 사람의 암자 일꾼을 알았다. 한 사람은 총무 주임이라 불리는 서른두셋 먹은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운전도 하고 집도 고치는 마흔 가까이 된 불목하니였다. 청년은 뫄한머루라는 격투기 수련을 통해 도에 이른다는 독특한 종교를 갖고 있었는데, 밤마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동방불패' '용문객잔' 주인공들처럼 공중을 휙휙 날았 다. 대학에서 법학을 했고, 고시 준비를 하러 암자에 들렀다가 아주 눌러앉아 버렸다고 했다. 불목하 니 사내는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접근해 무슨 얘긴가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노파 주지가 틈을 주 지 않았다. 작은 암 자였으나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은 것 같았다. 방에 누웠거나 툇마루에 나앉아 있기만 하는 내가 딱해 보였던지, 불목하니 사내는 어느 날 내 게 산책로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방에 누웠거나 툇마루에 걸터앉는 일이 결코 심심하지도 무료 하지도 않았으므로, 산책로를 알고 난 뒤로도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20분에 겨우 한 대씩 지나가는 텅 빈 도로를 맘껏 지그재그로 걸었던 것도 심심하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차가 지나다니는 아스팔트를, 이쪽 가장 자리에서 저쪽 가 장자리로 천천히 s자를 그으며 왔다갔다 하는 게 썩 재미있었다. 산꽃들이 피어 있는 곳을 따라 처음으로 들어갔던 산길도 불목하니 사내가 가 르쳐 준 산책로는 아니었다. 그가 일러준 산책로를 비로소 찾게 된 건 그 마을의 뒷산에 상상 외 로 많은 꽃들이 피 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였다. 그런 야산에는 으레 많은 야생화가 피어 있 는 법이다. 그러나 그러려니 생각만 하는 것하고, 실제로 그렇게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을 별 준비 없이 목격하는 것 사이엔 판이한 느낌의 차이가 있다. 나는 자주 꽃을 찾아 암자를 나섰다. 산을 헤집고 다녔다. 불 목하니 사내가 가르쳐 준 산책길은 그 중에서도 감탄을 자아낼 만한 코스였다. 하루는 그 꽃들을 꺾어다 삭막한 방에 꽂아 놓고 싶어졌다. 내가 쓰던 방엔 요와 이불이 각 한 채씩 있었고, 전에 사용하던 사람이 걸어 놨을 법한 달력이 4월까지 넘겨져 있 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앉은뱅이책상과 그 위에 놓인 내 숄더백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방안에서 나는 향기라곤 내가 가져온 존슨즈 베이비 로션 냄새뿐이었다. 산 이나 들에 가서 사 과나 오이 따위를 무심코 깨물다 그 향기에 깜짝 놀라듯, 나는 존슨즈 베이비 로션의 그 돌올한 냄새에 흥분마저 됐었다. 꽃을 꽂아 보겠다는 생각도 아마 그런 데서 나왔을 것 이다. 꽃을 꽂아 둘 기명 같은 게 얼핏 떠오르지 않아 그만둘까 하다가, 마을 앞 길가에 널려 있던 음료수 깡통들을 떠올리고 그거면 되겠다 싶어 수퍼 같은 데서 주는 비닐봉지 를 주워 들고 밖으 로 나갔다. 나는 70개의 깡통을 모으는 데 하루를 할애했다. 그까짓 것 70분 정도면 충분 했지만, 하루를 할 애했다. 물이나 흙에 반 이상 잠겨 있거나, 조금이라도 우그러져 있거나, 오래 돼서 프린팅 상태 가 바랬거나, 안에서 오물이나 개미 따위가 나오거나 하면 줍지 않았다. 그런 것 까지 다 줍는다면 40분도 안 돼서 일이 끝날 것 같았으므로. 한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한 손엔 기다란 막대를 쥐고 수풀이나 고 랑을 천천히 뒤지며 어슬렁어슬렁 하루를 보낸 날, 내 배는 많이 꺼져 있었다. 이튿날 수돗가에서 깡통을 씻다가 나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 다. 요즈음 깡통은 모두 손가락으로 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에는 일원짜리 동전만한 구멍만 나 있다는 것, 그 대로는 꽃을 꽂을 수가 없었다. 깡통따개로 도려내지 않으면 깡통 하나에 기껏 해야 한두 송이 꽂 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깡통따개찾기 순례가 시작됐다. 그것은 순례일 수밖에 없었다. "깡통따개 있어요?" 깡통 따는 흉내를 커다랗게 해 보이며 늙은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은 고개를 흔들었다. "거 왜 통조림 딸 때 쓰는 거 있잖아요?" "예서 비린 거 먹을 일 없잖여." 부엌 살림 도맡아하는 보살이 없다면 없는 거였다. 깡통따개 하나 빌리기 위 해 저 아래 가게까 지 가기가 싫었다. 빌려 달라면 안 빌려 줄 수 없겠지만, 낯간지럽게 고걸 어떻 게 빌려 달라고 하 나? 그냥 하나 달라고 하지. 아냐, 사겠다고 하면 되겠다. 떳떳하잖아. 그러나 가게에도 깡통따개가 없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만 같아 나는 잠시 멍해졌다. "요샌 죄 원터치 캔이라..." 혹시 누구네 집엔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가겟집 주인은 직무유기성 발언을 했 다. 있어두 병따개 겉은 디 붙어 있을 뀨, 어쩌구 하면서. 방안에 꽃을 들여 놓겠다는 계획이 하루만에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암자 에도 없고, 마을의 유일한 잡화점에도 없는 깡통따개. 곱게 몸을 씻고 나를 기다리던 수돗가의 70개 깡통들이 뭔가를 포기한 듯한 내 표정을 보자 갑 자기 칭얼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마을로 나가 고샅을 배회했다. 외 지의 낯선 사람이 부엌 같은 데로 느닷없이 들이닥쳐 깡통따개를 내놓으란다면 놀라자빠지지 않을 사람 없겠지. 난 고샅을 배회하다 아낙서껀을 만나게 되면 아주 예의바르고 조심스럽게 말 할 작정이었다. 실 제로 그렇게 했다. "저어, 깡통따개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열이면 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곁이 지나도록 내가 만난 아낙들의 반응을 종합해 보건대, 그녀들의 고개 가로저음은 깡통따 개가 없다는 뜻과 거리가 있었다. 그녀들은 나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일단 고 개를 가로저었던 것 뿐이다. 멀쩡하게 생긴 사내가 수상히 배회하다 어깨를 굽신거리며 다가와선 뜬금없이 묻는다는 게 깡통따개 있느냐는 것인즉, 나 같아도 고개부터 젓고 볼 일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어서 난 오후까지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 한테 물었다. 어떤 아낙은 내가 정신이 황폐해져 암자에 요양 온 사람으로 알았고, 황폐해진 데엔 분명 깡통따개에 얽힌 기막힌 사연 같은 게 있을 거라고 믿는 눈치를 보였다. 자꾸 드라마틱해 지는 것 같아서, 그 러지 말고 솔직히 있으면 있다고 말하고 거 좀 빌려 주슈! 라고 뻔뻔스럽게 대 들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말 없어서 고개를 흔들든, 있으면서도 다른 이유 때문에 고개를 흔 들든, 고개를 흔드 는 한 깡통따개를 빌릴 순 없는 일이었다. 다섯 시간을 어슬렁거린 끝에 절망 적인 기분이 되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이 마을엔 깡통따개라곤 아예 씨가 말랐어. 참 별난 마을 도 다 있구나. 오기 같은 게 생겨서 나는 한 개의 깡통따개를 위해 대전까지 나가기로 했 다. 대전까지 가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 몰라 다음날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고 길에 나가 섰다. 한 시간 이십 분이 넘 게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승객보다 많은 농산물 꾸러미가 버스 안에 가득했다. 대전역 앞 시장에서도 깡통따개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네번째 들른 식료 품점에서 간신히 하 나 얻을 수 있었다. 나온 김에 질레트 면도날을 샀고, 대중탕에 들러 목욕을 한 뒤, 홍명상가 옆에 서 좋아하는 알감 자도 몇개 사먹었다. 암자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기울어 있었다. 깡통따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수돗가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70개의 깡통 중에 거의 모 든 깡통이 모조리 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솜씨도 좋게 내 대신 그 일을 해 놓았던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수돗가에 멍청히 서 있자니 불목하니 사내 가 나타났다. "아저씨가 한 거 맞죠?" 대답은 않고 사내는 그냥 씨익 웃었다. "어떻게 땄죠? 깡통따개도 없이." "별것도 아닌데..." 사내는 한쪽의 녹슨 호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호미를 집어, 남아 있던 몇 개의 깡통마저 순식간에 따 버렸다. 호미의 날끝을 구멍에 넣은 뒤 깡통을 한 번 두 번 세 번 돌 리니까 끝이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깡통을 땄던 건 아닐까 착각될 만큼 신기한 재주였다. 세 개를 따는데 15초 이상 걸리지 않았다. "깡통따개론 음료수 깡통이 잘 안 따질 거예요." 사내가 말했다. 설마 그럴까 싶어 나는 대전 시내에서 얻어 온 깡통따개로 따 봤다. 역시 그의 말이 맞았다. 맥주 깡통, 캔 커피, 콜라 사이다 과일 넥타 깡통 따위는 깡통따개 로 따지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그랬다. "손재주가 참 좋으시군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걸 재주랄 것까진 없죠 뭐. 재주라면 사실 따로 있긴 있는데..." 그는 의례적인 겸손 같은 건 떨지 않았다. 그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뢰를 갖 게 했다. "그게 뭡니까?" 거듭 감탄할 준비를 하고 내가 물었다. "탈출이에요." "탈출? 탈출이라..."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과 발을 묶고 관에 넣은 뒤 못질을 하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도 탈출해 살아나는 거..." 아, 그런 거. 영화에서 본 것 같아요." "공인중개사, 세무사, 변호사, 의사, 판사, 검사, 노무사, 평가사, 해결사, 그리고 탈출사." "그렇군요. 탈출사." 그는 어깨를 으쓱 폈고, 나는 갑작스럽게 궁금한 게 많아졌다. "정말로 묶이고 못박히고 바닷물에 던져지고 그랬어요?" "해 보진 않았지만 못할 것두 아니죠. 그러려면 돈 있는 사람이 계획도 멋지 게 짝 테레비에다 광고 같은 것도 팡팡 때리고 그래야는데 그게 여의치가 않아서..." "그럼 아직 한 번도 그런 일을 직접 해 보신 적은 없는 겁니까?" "그렇진 않죠.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근 20년간 서커스에서 날리는 탈 출사였소." "그렇군요. 아, 탈출사." "그냥 탈출사가 아니라 늘 날리는 탈출사였다니깐요. 인기 한번 끝내줬죠." 그는 가늘게 실눈을 떴다. "네에, 날리는 탈출사." "근데 선생은 뭘 하는 분이오?" 그가 내게 물었고,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대답해버리 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이름을 물어 왔다. 나는 점점 낭패스러워졌다.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이거 미안해요. 그쪽으론 워낙 몰라서." 뒤통수를 긁으며 그가 말했다. "어차피 선생도 세상에다 멋진 것 하나 터뜨리긴 터뜨리셔야겠네. 우리 같은 사람도 척 들으면 알게시리." "그, 그래야겠죠. 허허..." 내 목구멍에서 제멋대로 웃음이 기어나왔다. "저어, 선생. 내가 왜 이곳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아시오? 여ㄱ는 사람들은 내 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요. 사실은 여기 숨어서 전혀 새로운 탈출 비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거 든요. 이것만 완성 되면 난 당장에 스타가 된다 이겁니다. 테레비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아녜요. 세 계 순회공연 같은 걸 하게 될 거예요. 저 혹시 카퍼필드라고 아세요..." 그가 무슨 은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쏟아놓으려는 데 늙은 보살이 허둥지 둥 달려와 그에게 손짓을 했다. 여기서 또 뭔 설레발이냐, 주지 스님이 급히 찾는다, 그런 뜻의 시 늉이었다. 탈출사는 군기 충천한 병사인 양 총알처럼 법당 쪽으로 튀어갔다. 그가 돌연 히 사라지고 난 수 돗가의 공백감을 추스리지 못해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깡통을 한아름 안고 방안으로 들 어갔다. 앉은뱅이책상이 놓인 밑변을 제외한 다른 세변에 각각 20개의 깡통을 ㄷ자 형으로 배열 했다. 나머지 열 개는 창틀에 올려놓고 물을 길어다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방 안은 깡통만으로도 화려했다. 다음날 아침을 일찌거니 먹고 숲으로 들어갔다. 깡통을 꽃으로 다 채우려면 한 번 나들이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최소한 여섯 번을 생각했다. 그 마을에 도착해서 처 음으로 바쁜 하루 가 될 것 같았다. 꽃을 꺾으면서야 나는 비로소 가을이 와 있음을 알았다. 여러 꽃들을 그냥 눈으로 보고 말았을 때는 그것들이 그저 꽃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꽃을 꺾자니 꽃 하나하나의 인 상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황색 두화의 감국을 꺾으면서, 이런 벌써 가을이잖아, 하고 중얼거렸 다. 구절초며 떡숙이며 개망초 따위는 내가 아는 이름들이었다. 개보리뱅이, 가 새풀, 벋음씀바귀도 그랬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꽃들이 훨씬 많았다. 꽃향기에 취해, 바짓가 랑이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꽃대가리를 꺾었다. 두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방으로 돌아 와 덜어 놓고 다시 숲으로 달려갔다. 몇번을 오갔는지 모른다. 작은 방이 꽃무더기로 쌓여 가는 걸 보면서 신명을 냈다. 오늘밤은 저 꽃들 을 발치에 두고 잘 수 있겠구나. 동화 같잖느냔 말이다. 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이 와 사위가 검게 지워지면서 내 방은 수없이 작은 꽃잎들이 뿜어내는 빛들로 푸르게 어 른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그 한가운데 길게 눕고 싶었다. 방안 가득한 이 꽃 향 기에 난 어쩌면 질 식해 죽을지도 몰라. 백합향에 취해 죽은 사람이 있었다잖아. 문을 조금만 열어 놓을까 어쩔까 망 설이다가, 죽을 맘도 없었으면서 나는 창문을 꼭꼭 닫았다. 그리고 누워서, 까 닭없이 흐르는 눈물 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침에 사내가 나를 깨웠다. "코가 노랗게 됐어요 선생." 열 시간 동안의, 꿈도 없는 깨끗한 잠이었다. 나는 수돗가로 나가 거울을 보 았다. 두 개의 콧구 멍이 망초꽃으로 막혀 있는 것처럼 샛노랬다. "어서 아침 드시고 오세요.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안 먹겠어요. 무 같은 거 있으면 한 개 먹고 싶네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가 먹고 싶었다. 내가 세수를 하는 동안 탈출사 사 내는 부엌으로 가 머리통만한 무를 가져왔다. 수돗물이 갑자기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커다란 무 하나를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걸로 날 묶어 봐요." 다 먹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내게 흰 노끈을 내밀었다. 그 리곤 자신은 의자 위에 가 앉았다.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나는 그를 묶었다. 무를 먹듯, 아주 천천히 정성스럽게 그를 묶었다. 노 끈의 길이는 7미터쯤 됐다. 발목과 손목을 묶고 장딴지와 팔과 가슴과 어깨를 의자와 함께 묶었 다. 묶으면서, 이런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 묶을 동안 그는 꼭꼭 묶어요, 하고 세 번이나 거듭 주문했다. 그 소리를 들 으면서 나는 조금 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마술을 하거나 묘기를 보리는 사람들은 늘 무대 위에 있었으며, 그들을 보조 하는 사람들 역시 무대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몸을 묶고 상자에 가두는 사람들도 공연이 끝나면 묘기를 부린 사람 에게 던져진 동전들을 분배받는다는 사실. 그러니까 묶거나 못질하는 데에 속 임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관객들을 실감나게 하기 위해 관객 중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그 일을 대 신 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작위를 가장한 작위일 뿐이다. 그와 나 사이 엔 그런 밀약이 없 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내가 흥분한 까닭이었다. "잘 묶었어요?" 그가 물었고, 그렇다, 고 내가 대답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뜬 눈에선 빛이 났다. 마당 안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 을 그가 가르며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순식간이었다. 내가 묶었던 노끈은 뱀의 허물처럼 풀어져 그의 발치에 쌓여 있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별난 아침이다, 라고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놀랐죠?" "정말 그래요."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속임수예요." "내가 묶었는데도요." "물론이에요. 선생은 나를 풍선에 묶은 것과 같아요. 결박에서 풀려나려면 풍 선을 터뜨리면 돼 죠." "풍선이 아니라 의자에 묶었어요." 밀하고 나서야 나는 의자를 봤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의자는 간이 회의장 같은 데서 많이 쓰 는, 접는 의자였던 것이다. 접혀지면 용적이 적어진다. 이런 것 나도 할 수 있 겠다 싶었다. 그가 또 씨익 웃었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숱한 탈출을 선보였죠. 오토바이에 묶여서도 탈출했고, 뒤주 안에서도 뛰 어나왔어요. 더블백 속에 갇혔다가도 2초만에 나오고, 그랜드 피아노를 상처 하 나 입히지 않고 관 통하기도 했다니까요. 문을 열지 않고 자동차에서 빠져나왔고, 쌀가마니 속에서 도 탈출했어요. 수 갑이 채워진 채 캐비넷에 갇혔다가 2초만에 관중석에서 뛰어나오기도 했죠. 제 인기라는 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가는 곳마다 아가씨들이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단장이 못 만나게 했죠. 여자한테 한번 빠지면 돈벌이고 인기고 다 끝장이라는 거예요. 서커스가 호황이었을 때, 아 그땐 정말 끝내 줬는데..." 탈출사는 하던 말끝을 사리고 갑자기 풀이 죽었다. 저쪽에서 늙은 주지 스님 이 딱하다는 듯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아 개수작 말고 법왕이 밥이나 갖다 줘!" 주지 스님이 말했다. 법왕이는 암자에서 기르는 비루먹은 강아지 이름이었다. 그 뒤로도 탈출사는 내게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만 번번이 보살이나 주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삼 일에 한 번씩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잘되가요?라고 아내가 물었고, 응 그럭저럭,이라고 내가 대답했다. 남편과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 지겨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아파트에 사는 주 부들이 신기해 했 다. 자기들은 일요일 하루 같이 있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하루 이틀도 아 니고 어떻게 사느냐 고. 그러나 아내는 하나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어쩌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 게 되면 아내는 나 없는 집이 적적해서 이웃으로 놀러간단다. 애 둘을 데리고. 나는 아내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거나 재떨이를 가져오라거나 신문을 가져오라 지 않는다. 이불을 깔아 달라거나 개라거나 하지 않는다. 입었던 옷과 양말 따위를 아무곳에 벗어 놓지 않는다. 동사 무소에 가서 등초본을 떼 오라든가 은행에 가 전화 요금을 내라지 않는다. 옥 수수 샐러드를 만들 어 달라거나 커피를 끓여 달라지 않는다. 그 모든 걸 내가 한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건 전화다. 내가 전화라는 걸 처음 사용한 건 중학교 3 학년 땐가 그랬다. 상경하기 전까지 나는 전화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무소식에 익 숙하고 편하다. 너 무 빠르고 많은 정보가 주위에서 왕왕거리면 어디 적막한 곳으로 대뜸 도망치고 싶어진다. 나는 궁금한 걸 참는데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 거의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면 아내는 말한다. 잘 되가요? 나는 대답한다. 응, 그럭저럭. 어떤 건데? 아내가 다시 묻는다. 나는 대 답한다.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해서, 점심때 생선초밥을 먹고, 저녁에 한 여자를 강간한 뒤, 집에 와 자살하는 얘기야." 탈출사 사내는 어느 날 기이하게 생긴 의복 하날 가져와 나에게 내밀며 무슨 소용에 닿는 물건 인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가르쳐 주겠 다며 그는 그걸 내 게 입혔다. 이상한 옷이었다. 팔과 소매가 없는 갑옷 같은 건데 꼼짝할 수가 없 었다. "그게 바로 구속복이라는 거에요." 그가 웃었다. "아, 난폭한 죄수한테 입히는 거? 근데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요?" "단원이었을 때 쓰던 거죠. 어때요, 그 상태에서 그걸 벗어 버릴 수 있겠어 요?" "설마요. 모르긴 몰라도 이건 꽤 과학적으로 고안된 족쇄 같은데." "과학적이란 말이 맞아요. 그걸 내게 입혀 보세요." 그는 자기 몸을 내게 맡겼다. 나는 구속복을 그의 상체에 씌우고 꼼꼼하게 끈을 당겼다. 다 됐 느냐고 그가 물었고, 그렇다고 내가 대답했다.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윗몸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구속복을 벗어 팽 개쳤다. 그가 탈출 사라는 게 실감났다. "이건 속임수가 아네요. 일종의 숙련이랄 수 있는데, 야구의 체인지 오브 페 이스 같은 거죠. 고 정 관념의 허를 찌르는 거예요. 도저히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면 정말 할 수 없 는 거죠. 할 수 있 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사람의 어깨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용적이 있어요. 그 용적을 줄이고 빠져나오 는 거죠." "절대적이라면서요?" "절대적이라는 게 바로 고정 관념이에요." "그럼 어떻게요?" "어깨를 탈골시키는 겁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아프지 않아요?" "물론 아프죠. 죽을 것처럼. 하지만 숙달되면 견딜 만해져요." "아하." 그는 구속복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뒤 손바닥만하게 접었다. "서커스에서 했던 일은 모두 어둔 조명에서만 가능했었어요. 그것도 보조의 도움이 필요했죠. 하지만 탈골 아이디어 같은 게 있으면 굳이 어둘 필요도 없고 보조도 필요 없겠 죠." "그렇겠군요." 나는 내 어깨를 만졌다. "내가 이곳에서 연구하는 건 바로 그런 거예요. 무대를 실제 구조물로 대체하 는 겁니다. 백화점 지하실 같은 데서 탈출하거나, 경찰서 유치장, 전속력으로 달리는 화물열차에서 멋지게 빠져나오 는 거죠. 사전 준비 장치 없이." 그는 혀로 자신의 입술을 자주 핥으며 말했다. 머잖아 그런 일들에 성공할 것이라고 나는 믿었 다. "자 이리 와 봐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이 기거하는 방 앞으로 데리고 갔다. 손의 촉감에서 나는 곧 신기할 일 이 또 벌어질 거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활짝 열고 내부를 확인시켰다. 얇은 이불 한 채와 낡은 책장이 하나 있었 다. 벽에 걸린 몇벌의 바지, 등산모, 붉은색 티셔츠가 보였다. 작은 창문이 북쪽 으로 나 있었다. 그는 내게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내가 연구한 것 중 하나를 선생께 특 별히 선보이는 것 이다, 아직 발표할 시기가 아니니 행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당신만 믿겠 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방문을 밖에서 꼭 잠가요. 뒷창문도 단단히 잠가요." 방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 그가 내게 말했다. 다 잠근 뒤 다 잠갔다는 표시로 툇마루를 두 번 탕탕 치라고 했다. 그런 뒤 곧장 방문을 열어 보라고 했다. 자신은 연기처럼 사라져 있을 거라 고 했다. 나는 방문 고리를 채우고, 고리가 빠져나오지 않게 막대기를 질렀다. 그리고 는 곧장 뒤뜰로 돌 아가 창문을 잠갔다. 다시 마당으로 쏜살같이 돌아와 툇마루를 탕탕 치고, 문 을 열었다.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신발을 벗고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락이나 벽장 같은 건 없었다. 장 판에도 이상 없었 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 졌는지 알 수 없었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나는 툇마루에 앉아 호반을 바라보았다. 창틀에 꽂아 놓은 산꽃들이 어 제보다 훨씬 꽃잎을 크게 틔웠다. 그를 기다리다 말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벽에 걸려 있는 달 력을 내려 8월까지 넘기고 다시 걸어 놓았다. 내가 떠난 뒤 이 방에 또 누군가 가 와서 이 달력을 넘겨 놓겠지. 오래도록 사람이 들지 않는다면 아마 겨울까지도 8월인 채로 걸려 있을지 몰라. 꽃 향기 가득한 방 한가운데 누웠다가 나는 점심 공양을 하러 법당 쪽으로 올라갔다. 탈출사 사내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주지 스님의 긴 지천을 듣고 있었다. "이놈아 내가 니 가랑이를 붙들고 잡든? 떠날 테면 떠나. 제발 그래 줘. 허구 헌날 시키는 일은 안 허고 잘나빠진 마술이나 부리겠다고? 예라 이놈아 정신차려. 지난번처럼 한번 쫓겨나 볼텨? 탈출? 웃기지 마라. 네 놈이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고 도심정사 아궁이 앞이지 무슨 중뿔 날 일 있다고 까불어. 내 뭐랬어. 신도들 산신 기도 온다고 식전에 뒷 산 석불 앞에다 정한수 떠 다 놓으라고 했지? 그런데 객실 손님 앞에서 아침부터 무슨 짓 한겨? 너 재주부 리는 거 신기허게 볼 사람 하나도 없어. 지난번에 아주 쫓아내 버리는 건데 내가 정말이지 후회막 급이댜. 이번이 마 지막 경고야. 만약 한 번 더 허라는 일 안 허고 딴 수작 부렸다가는 끝장인 줄 알어. 제 입 하나 추스릴 줄도 모르는 주제에 곡기 챙겨 주는 것만도 천행인 줄 알아야지. 은혜 를 알아야 한단 말 야 이놈아..." 여러 번 반복된 나머지 이제는 가락가지 붙을 그런 나무람이었다. 꾸중만 들 려 온 게 아니었고, 아주 규칙적으로 가볍게 매질하는 소리도 들려 왔다. 소리로 듣건대 스님은 탈 출사 사내의 잔등 을 효자손 같은 걸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사내의 음성은 한마디 도 흘러 나오지 않 았다. 그는 이미 그런 매질에 이력이 난 것 같았다. "국으로 가만히나 있으믄 밥이라도 얻어묵지. 저러다 쬐껴나문 이뻐해 주는 사 람 있을깨비." 부엌의 늙은 보살이 쟁그랍다는 듯 이따금씩 킥킥거리고 웃었다. 된장 일색의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다 나는 작은 pvc파이프 조각을 주웠 다. 뒷산 기도장까 지 물을 끌어올리는 공사를 하다 도중에 그만둔 모양이었다. 암자 주위에는 그 런 게 많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부삽과 연탄집게와 깡통따개를 가지고 오후 내내 단소를 만들었다. 부삽 모서리에 여러 번 문질러 기장을 자르고, 그 한 끝을 연탄집게에 문질 러 소리날을 만들었 다. 구멍 다섯 개를 못으로 비벼 뚫고, 거친 부분은 깡통따개날로 다듬어 마무 리를 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부삽에 문지르거나 소리날을 만들거나 구멍을 뚫는 데 적어도 각 각 사오백 번의 힘 든 왕복 마찰을 일으켜야 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지루함이 즐거웠다. 해가 지고 마을이 청색 이내로 뒤덮였을 때 나는 상령산 1장을 불었다. 음 이 맞지 않아 다시 구멍을 뚫고, 잘못된 구멍들은 티슈를 구겨 막았다. 참으로 너절하고 볼품없는 단소였다. 나는 상 령산 1장만 반복해 불었다. 거기가지밖에 가락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불고 불고 또 불었다. 그러다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낮에 작은애가 낚시를 삼켰어요." 아내는 울먹였다. "방해될가 봐 당신한테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하두 무서워서..." 무슨 말인가. 낚시를 삼키다니. 낚시를 인간이 삼키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잖 은가. 나도 경황이 없었다. 아내는 잠시 후 진정하고 말했다. 둥근 자석이 달린 플라스틱 장난감 릴낚시 (참, 그런게 베란다 에 있었지)를 삼켜서 기도가 막히고, 울며불며 등을 두드리고, 아이의 얼굴은 청 동색으로 죽어 가 고, 옆집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헤집어도 소용없고... 나중 에 아이가 기력을 다해 피와 함께 토해내긴 토해냈는데 오래도록 숨을 못 쉬고 발버둥쳤던 나머니 탈진해 쓰러졌다 고 했다. "지금은?" 내가 물었고, "자요." 한숨을 쉬며 아내가 대답했다. "아직 거기 더 있어야 해요?" "내일 갈게." 썩 가고 싶진 않았지만 내 입에선 그런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 언제 부터 썩 내키지 않 는 일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던가. "당신은 좀 어때?" "뭐가요?" 아내는 알아듣지 못했다. 생리 말야. 아내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 다. 수화기를 내려 놓으려 하자 말했다. "아직이에요." 꽃밭이 되어 버린 방안에 누워 나는 오래도록 청동빛으로 굳어 가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되풀이되풀이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 조금 놓여날 수 있었다. 완전히 도망가려 고 푸르게 빛나는 꽃잎들을 보며 '메밀꽃 필 무렵'과 '형설지공'을 생각했다. 정말로 반딧불과 눈 뭉치에 글이 보였을 까. 보였겠지. 요즘처럼 깨알만한 글씨가 아니었을 테니까. 적어도 100급 활자 정도는 됐을 테니 까. 그러다가 아내의 아직이에요, 란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라훌라. 다음날 아침을 먹은 뒤 나는 숄더백에 이것저것 주워 넣었다. 존슨즈 베이비 로션, 질레트 면도 기, 양말 소형 녹음기, 칫솔, 수건 등등. 집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제 신만 신으면 곧장 갈 수 있다. 갈 곳이 어디든, 이렇듯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산뜻했다. 그런 경우는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았다. 산뜻함을 좀더 오 래 즐기려고 나는 툇마루에 앉아, 도합 72시간 정도는 바라봤을 대청 호반을 또 바라봤다. "가시려구요?" 탈출사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더 계시잖구." 그의 말이 의례적인 걸로 들리지 않았다. 난 말없이 일어나 법당으로 향했다. 가겠노라,고 스님 께 고했다. 그렇게 시주를 많이 하고 벌써 가면 어떡하느냐고 스님이 펄쩍 뛰 었다. 돈 생각은 말 고 언제든 내려와 쉬다가라고 당부했다. 나는 밥값에도 못 미치는 돈을 냈을 뿐 이었다. 한길로 내려온 나는 탈출사 사내와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차 시간표' 가 마을 공동 창고 벽에 붙어 있었으나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고 그가 말했다. "아, 이거 섭섭해서 어쩌나."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저 말이죠. 곧 훌륭한 탈출사로 이름을 얻게 될 테니까 그때 한번 만나자구 요. 혹시 볼펜 같은 거 있어요?" 나는 윗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게 내 사인이에요. 사람들이 못 만나게 하면 이걸 내미세요." 그는 자신만만했다. 곧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나는 말했다. 40분 가량을 그와 더 서성인 끝에 나는 버스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자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 던 그가 몇걸음 뛰어오며 절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잘 가요! 라고, 절규 하다시피 그는 외 쳤다. 혈육의 가슴 저리는 이별 장면을 흘러간 영화에선 종종 그렇게 처리한다. 기이한 이별이군,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버스가 달리는 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개의 흰 선과 한 개의 노란 선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붉은빛 섞인 초가을 양광 아래 키 작은 코스모스들이 힘에 겨운 듯 봉오리들을 가누고 있었다. 물가의 은빛 갈대꽃이 바람에 쓸려 한쪽 방향으로만 누었다 일어서고 누웠다 일어섰다. 하품을 해서 맑아진 눈으로 나는 하늘을 보고 호수를 보고 길 위의 노란 중앙선 을 바라보았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나무를 스치고 개울을 건넜다. 많은 산을 넘고 들 판을 지났다. 농촌 아낙과 중절모를 쓴 노인들이 바깥 풍경에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버스 통 로에는 들깻단 묶 음과 어느 농기계의 내연기관인지가 뒹굴었다. 주유소도 지나고, 몇몇개의 초소 도 지났다. 한 시 간은 충분히 넘게 달렸을 것이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산봉우리 들을 유심히 보고, 시냇물의 흐름과 길의 높낮이도 살폈다. 손차양을 만들어 해 를 보고 내 그림자 의 길이와 방향을 가늠했다. 그리고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길 위에서 십여 분을 흘려보낸 뒤 나는 저만치 서 있는 공중전화로 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집에 있었 다. 나는 수화기에 입을 대고 말했다. "어떡하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 김소진- 1963년 강원 철원 출생. 1991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단편 ' 쥐잡기'당선. 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 해설-김윤식 한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한 길이 여러 가지 있겠으나, 그중의 하나로 작가 의 체질이랄까 전기 적 사실을 들 수 있겠다. '보봐리부인은 나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있거니와, 작품이란 많건 적건 알게 모르게 작가의 이러한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작가 김씨의 출발점이 '쥐잡기'(1990)이며, 이 작품의 경향성에 일단 시선을 던져둘 필요가 있다. 단지 처녀작이라는 점 에서 그럴 뿐 아니라 아직 신인급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처녀작은 다 음 두 가지 점으로 그 특징이 요약되는 바, 분단문제가 그 하나라면 민중의식이 그 다른 하나이다. 분단문제란 이데 올로기를 그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남성적이랄까 권위주의적 발상, 곧 힘의 과제로 정립 됨이 보통이다. '아비는 종이었다'라든가 '아비는 이데올로기였다'라고 말해짐 에서도 이 사정이 암 시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 김소진에 있어 분단과제는 여성화라든가 반권위주의 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비로 표상되는 이데올로기란 현실적 삶에서 지극히 무력했음이 그 증 거이다. 이에 맞서 그것과 균형감각을 유지시킨 것이 민중의식으로서의 어미상이다. 이 작가에 있 어 어미상이란 민 중적 풍요로움과 그 풍요로움 속에 솟아오르는 생명감각으로 활성화된다. 문장 력의 역동성이 함 경도 사투리의 억셈에 연결되어, 연약한 아비상을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제1차원적 바탕 위에서, 아들로서의 작가세대의 이런저런 삶의 방식들 이 펼쳐지는데, 그 러한 단계의 머리에 오는 작품의 하나가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이다. 결여된 아 비와, 왕성한 생명 력을 지닌 어미의 형상이 이 작품에서는 '나'와 송일륙의 관계로 대응되고 있 다. 송일륙이란 이름 의 한 밑바닥 출신의 여자가 있다. 얼마를 받으며, 어떻게 스스로를 헤쳐왔으 며, 여인으로서의 그 녀가 어째서 백화점의 절도범으로 변했는가를 문제삼는 방식이란, 이데올로기 에 맞서는 민중의식 으로서의 어미상으로 요약된다. 적어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창작집)의 연장 선상에 송일륙이 놓 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 김씨의 시선이 송일륙 위에 따뜻하게 던져져 있음이 이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작중 화자인 황인숙(나)은 물론 송일륙을 그녀가 빠진 시 궁창에서 꺼내주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노력조차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는 곳에 이 작품의 강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매우 날쌘 움직임, 그러니까 문체의 빠른 속도감도 이 작가 특 유의 패기라 할 만 하다.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 어느 책을 뒤적거리다 알게 된 거지만 의학 용어 가운데 윈도우 피어리드라 는 게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잠복 기간 정도로 번역됨 직한데, 병원체가 몸 안으로 들어와도 곧 바로 발병하지 않 고 잠잠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야 그 증상이 드러날 때까지의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책은 우리의 정신도 육체와 같아서 어떤 충격이나 정신적 외상이 가해지면 그것이 무의식 속 에 남아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 심각한 정신적 불안정이나 퇴행 현상 을 가져올 수 있다 고 설명해 주었다. 이쯤에서 털어놔야겠는데 난 대식증에 걸려 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분명 하지가 않다. 240리 터의 대형 용량을 자랑하는 아이보리 빛 냉장고는 나에게 어느덧 절망의 상자 로 변해 있었다. 각 종 아이스크림, 초콜릿, 케이크, 과일 등으로 가득 채워진 냉장고라 할지라도 갈고리처럼 뻗치는 나의 식욕의 공세 앞에서는 채 이틀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식증이란. 병치고는 참으로 사치스런 병이기도 하다. 그것은 옛날 몰락한 로 마 귀족들이 말기 적 현상으로 유행시켰던 것인데 아무것이나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곧바로 토 해 버리는 증상이 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외국에서는 얼마전 'cnn방송' 사장인 테드 터 너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던 제인 폰다, 호주의 유명한 팝 가수 엘튼 존, 미국 정상의 코미디언 조안 리버스조차, 그리 고 심지어는 영국 찰스 왕세자와 결정적인 불화를 빚고 있는 다이애나 왕세자 비도 그 증세로 고 생을, 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남편 용빈은 나의 대식증을 아이를 갖기 못하는 데서 오는 욕구 불만의 소산 으로 보는 모양이 었다. 우리는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물론 하자는 남편에 게 있는 것으로 판 명됐다. 그는 정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무정자증 환자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이 란 뻔하지 않겠는 가. 우선 아이를 데려다 입양시켜 키우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고, 다음으로는 남 편이 적극 권장하 는 것이기도 한데 인공 수정을 하는 방법이 있다. 남의 씨를 빌려다 심는 것이 다. 나도 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는 쪽이었다. 우리 부부의 상담을 받아 준 의사는 정자를 제공하는 사람의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의사의 양심을 걸고 맹세코 그 질을 보장한다고 말했 다. 젊고 깨끗하고 두뇌 명석한 의과 대학생의 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는 거였 다. 암만 결혼 생활 5년째에 접어든 아낙이지만 그 말을 듣는 내 뺨 위에는 발그스레한 홍조가 맺 히지 않을 수 없었 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나의 대식증이 고쳐질 수 있을까. 꺼림칙함은 고스 란히 내 몫으로 남 아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나는 어느 조간 신문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서 눈 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다. '서울 용산 경찰서는 5일 마음이 변한 미군 애인을 찾아가 면도칼을 휘둘러 전치 4주의 상처를 입힌 송일륙(여, 25, 의정부시 가능동 74-8)씨에 대해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 한 법률 위반 혐의 로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송씨는 지난 3일 오후 6시 10분쯤 평 소 결혼을 약속하 고 내연의 관계를 맺어 오던 커크스(24) 일병이 최근 변심해 자신을 잘 만나 주지 않자 용산 미 8군 정문에서 퇴근하던 커크스 일병을 붙들고 말다툼을 벌이던 중 홧김에 갖고 간 면도칼로 얼굴 을 두 차례 그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속된 치정에 얽힌 기사는 보통 사회면에 제일 후미진 구석배기의 ' 휴지통'란이나 '색연 필'또는 '이삭' 가십난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일 것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저 절로 쓴 웃음을 짓 고 세상 돌아가는 꼴에 혀끝이나 한번 가볍게 차고 넘어가도록 의도적으로 배려 한 내용이 태반임 은 물론이다. 그러나 송일륙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닿으면서부터 내 눈빛은 초점을 잃고 일렁거리기 시작했 다. 희한하기도 하여라! 세상일이라는 건 이처럼 서로 복잡다단한 톱니바퀴 모양 맞물려 끊임없이 돌고 도는구나.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혹은 멀어졌다, 어떨 땐 우 연히 아무것도 모 르는 사이에 그냥 스쳐 가기도 하면서. 나는 5년 전 어느 가을의 풍경이 이상스럽게도 나의 뇌리에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풍경은 마치 해마다 가을이면 되풀이돼 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랬다. 그 거리의 가을밤 이후로 내게 다시는 맑고 투명한 가을일랑 오지 않았 다. 한 번 썩어 문 드러진 가을은 때때로 뒷골목의 뜬소문처럼 떠돌다 흔적 없이 사라질 뿐 내 앞 에서 소생할 줄을 몰랐다. 그런 건가. 내 일생 일대의 마지막 가을이 단 한 번의 부활도 없이 정 녕 그렇게 지나가 버려도 된단 말인가. 그리고 5년 전의 그 거리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 던 것일까. "그런데 옛날 시골 어른들 이름짓는 내력이 듣고 보면 참 생뚱맞다구요. 우리 마을 읍내의 5일 장이 매월 끝수가 1일과 6일에 서는 1, 6장이 있었죠. 울 엄니가 무녀리 새끼 하 나는 빼고 읍내장 에 눈만 간신히 뜬 강아지를 한 양푼 담고 팔러 갔다가 해산기가 돌았대요. 그 자리에서 비닐 자 락을 얼기설기 두르고 주변 장돌뱅이들의 투박한 해산 구완으로 몸을 풀었다 해서 내 이름이 그 렇게 심란하게 붙었대죠, 아마.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열다섯에 상경했 으니 벌써 서울물 이 6년째네요. 우선은 배가 고파 올라왔어요. 그리구 어쩌다 한 번 가는 학교도 정나미가 떨어졌 구요. 끝도 없이 밀려오는 가난한 농사일이 지긋지긋했어요. 첨에 서울로 공장 다니러 간다고 했 을 땐 공중으로 붕붕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어요. 시골에서두 테레비는 다들 보 거든요. 커다란 건 물에서 때깔 고운 가운을 척 입구요. 하얀 머릿수건 동여매고 열지어 앉아 일 하는 장면을 보고는 얼마나 가슴이 설레였다구요. 조심, 조심 중에 사람 조심이 젤이여 하는 엄니의 목소리는 시커먼 기차바퀴 소리에 파묻히구... 처음 들어간 청계천에 있는 평화시장 시다 시절은 지금 생각해 봐두 너무 끔찍해요. 그 비좁고 어둠침침한 다락방, 귀가 멍멍한 미싱소리, 왜냐하면 바로 머리 위에서 모터가 돌아가니까요. 켜켜이 쌓이는 그 먼지투성이를 안 마실래야 안 마실 수 없는... 정말 끔찍 해요. 사람이 그런 데서 버텨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에요." 굳이 용산경찰서의 유치장을 찾아가 기사 속의 송일륙이 바로 그 송일륙인지 확인할 수고를 들 일 필요조차 없다. 단 두 줄짜리 기사였지만 난 벌써 그 속에서 양공주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말투나 두툼한 화장기에 덮인 때이른 잔주름마저 미루어 짐작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자 연스런 연상작용이었다. 그해 가을 나는 명동 입구에 있는 어느 재벌 소유의 백화점 3층 백장미 홀 숙녀의류매장에 우 두커니 서 있지 않았던가. 이미 점찍어 둔 가을옷이 있었기에 조금만 마음을 다잡아먹고 그 앞으 로 왜죽왜죽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옷 한 벌에 자그마치 10만원짜리 자기앞 수표 다섯 장이 오 락가락하는데다 직장 생활 시작한 지 8년이 다된 끝에 처음으로 그렇듯 비싼 옷 을 거머쥐는 순간 이었지만 별 망설임은 없었을 터이다. "울 엄니는 야한 옷일수록 더 맘에 들어할지도 모르지. 워낙 입때껏 허상에 만 매달려 살아온 양반이니. 아버지라는 허상의 ... 그리고 어엿한 에미 노릇이라는 허상의. 그래 도 한복이 꽤나 잘 어울렸던 분이셔. 국민학교 땐가... 수업을 받다가 문득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 는데 한복 저고리 고름 휘날리며 송탄 어머니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는 게 보이겠지. 물론 환영 이었지. 길러 준 어 머니에겐 죄만스런 얘기겠지만 핏줄이 당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엊그제 내게 전화를 했더라고. 인숙 씨를 한 번 당신에게 데리고 와보래. 후훗. 시어미 구실이 좀 하고 싶었나 보지? 지레 걱정 마. 같잖은 위세부터 차리고 들려는 그런 소갈머리 없는 분은 애시당초 아니니 깐." 용빈은 수표가 든 봉투를 불쑥 디밀며 지나칠 만큼 노골적으로 까발렸다. "넣어 둬. 내 성의니깐. 이번 주말에는 송탄에 계신 울 어머니를 찾아가 봬야 하고, 또 가을 문 턱도 되고 했으니 인숙 씨 옷이라도 한 벌 근사하게 빼다 입으라고." 그를 낳아 준 어머니는 작은집 댁이었다. 용빈이 평소 자기 집안의 복잡한 갈래에 대해선 별로 귀띔해 주지 않아 그 내막을 잘 알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송탄에 산다는 그의 생모가 왠지 숭글 숭글한 성품의 소유자일 것 같은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그러나 낳아 준 어머 니든 길러 준 어머 니든 시어머니 깜냥을 치르려 들 양반을 둘씩이나 찾아 본다는 건 썩 내키는 일 일 수가 없었다. "용빈 씨, 그렇게 생색을 낼 것까지는 없잖아요? 세상 어느 여자가..." "인숙 씨가 송탄에 가는 일을 탐탁찮게 여기는 심정은 알아. 하지만 이건 어 쩔 수 없어도 한 번은 거쳐야 할 거래인걸. 물론 뒷거래긴 하지만. 이런 거래는 말 나온 김에 싸 늘하게 후딱 해치 우는 게 좋단 말이야, 난... 어디 놀러 가는 셈치라고 제발." 한 번쯤 매몰차게 퇴박을 놓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 속에서 불뚝하기도 했지 만 왠지 곧추세웠 던 목덜미로부터 스르륵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지금의 남편 용빈과는 사 내 결혼을 한, 같은 은행 동료네 집들이 갔다가 첫 대면을 했다. 그는 신랑 쪽 친구들에 섞여 왔었 다. 그에게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난 한참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곱슬머리에 땅딸한 체격을 두 르고 있던 한 사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은행 본사의 환 딜러였고 지금도 역시 그 일을 하 고 있다. 하루 종일 런던이나 홍콩 그리고 동경 외환시장과 연결된 팩스나 컴 퓨터 단말기 앞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솎아내다가 순간적인 판단으로 외환의 매도나 매입 의 규모와 시기를 찍어내 은행의 환시세 차익을 극대화시키는 게 그의 임무였다. "왜, 텔레비전 광고 중에 순간의 선택이 어쩌구 하는 선전이 있잖아? 우리네 딜러들이 꼭 그런 피 말리는 순간순간의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경우라구. 하루살이 삶이긴 해 도 화끈한 면은 있 어. 이때다 싶으면 물불 안 가리고 과부집 장리변을 내서라도 꼬나박으려 달겨 들다가도 이크 빠 진다 싶으면 시앗 본 부처처럼 뒤도 안 보고 돌아서야 해. 내 돈 가지고 하는 짓도 아닌데..." "꼭 도박하시는 분 같아요." "도박이라고? 그거야 말로 예술이 아니던가. 도박은 거래의 최고 경지며 꽃이 자, 벌거벗은 목마 른 영혼 그 자체라는 걸 몰라서 물어? 난 도박 예찬론자는 아니긴 하지만..." 매장 앞에는 한 여자가 집요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점찍어 둔 옷을 걸친 마네킹 앞에서. 그 때문인지 나는 선뜻 매장 안으로 진입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하릴없이 서서 내가 점찍어 둔 옷을 걸치고 있는 마네킹을 다시 한 번 뚫어져라 쳐다보 다 돌아섰다. 퍼러 죽죽한 싸구려 티셔츠를 걸치고 물이 많이 빠져 허벅지께가 희끄무레하고 무릎 이 풍덩 빠진 청바 지에다가 물보라를 뒤집어썼는지 아니면 식은땀을 흘렸는지 목덜미까지 치렁 치렁한 단발머리가 호졸근히 젖어 있었다. 인물값을 살뜰하게 치르게 생긴 콧날이 금세라도 아무 한테나 건방을 떨 듯 유난히 되똑했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녀와의 풋낯쯤은 익히고 이름 석 자도 넌지시 듣고 있는 사이였다. 그녀는 은행 지점이 세 든 대풍 빌딩의 3, 4층에서 잭보이라는 브랜드로 자체 상 품을 만들어 백화점으로 납품하는 중견 봉제업체에 다녔다. 그래서 이따금 분 식집을 겸하고 있는 잉꼬상회나 복도 같은 데서 오가다 흘낏 눈길이 마주치곤 했다. 파란 머리수건 을 야무지게 간동 그린 그녀의 얼굴은 내게 지금껏 바래지지 않는 뚜렷한 이미지를 새겨 놓고 있 었다. 물론 그녀의 이미지에는 왠지 위험한 낙인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그때가 언 제던가... 그때는 봄 비가 위험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촉촉한 봄비에 몸을 적시며 허공 에 뜬 철제 비상계 단에 죽 앉아 있었다. 몸피에 비해 품이 터무니없이 부푼 샛노란 점퍼가 얼른 눈에 띄었다. 이마 에 하얀 글씨로 '단결'이라는 글씨가 쓰인 빨간 머리띠를 동여맨 그녀는 한 손 으론 아슬하게 난간 을 붙들고 다른 한 주먹으론 허공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왜 단 발머리만을 고집하 는 것일까. 그 노래는 곡조와는 상관없이 '로렐라이 언덕'처럼 구슬프게만 들 렸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 라느냐... 아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5천원 일당 쟁취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살아보자- 아! 살아보자!" 우산을 쥔 손목에서 맥이 풀렸다. 위험하다. 왠지 그런 생각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솜털이 보 송보송한 햇병아리가 개구쟁이 손아귀에 떠밀려 까마득한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하는 장면이 끈끈한 예감처럼 떠올랐다. 그런데... 노란 꽃 한 송이가 회양목이 담뿍담뿍 멍 울져 오른 화단 위 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아는 우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제 계단 위의 사 람들이 일제히 일 어나 마치 나를 향해 외치듯 짐승소리 같은 괴성을 우우우- 지르며 난간에 매 달렸다. 아찔한 현 기증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가복음 제5장 30절)' 나는 며칠 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내 이 대목을 되풀이해 읊조리며 속 으로 햐냥 울었다. 예수가 골수에 병이 든 사람들한테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것만으로도 완쾌의 이 적을 베푸는 대목 이었는데 내게는 왠지 자꾸만 노란 점퍼의 추락장면이 떠오르는 거였다. 누가 내 옷에 손을... '여자의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다.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의 자기 발견 꽁 메 르 꼴' 매장에 내걸린 판촉 현수막에는 갖가지 유혹적인 문구가 붉은 혓바닥을 날름 거리고 있었다. "한 번 살펴보세요. 디자인도 독특하고 특별 서비스도 마련돼 있으니 기회가 그만이에요." 판매원 아가씨가 눈웃음을 치며 다가서고 있다. 나는 얼른 스스로 알아서 둘 러보겠다는 뜻으로 가벼운 목례를 해 보이고는 옷걸이들 사이로 들어섰다. 옆에서는 중씰해 뵈는 퍼머 머리가 마네 킹이 맵시나게 빼입은 옷의 소맷부리에 손끝을 걸고 피륙을 감촉하는지 가볍게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너무 젊은 애들 옷이 아닐까? 늙은 사람이 괜히..." "어머머 참, 사모님도. 이제 갓 사십을 넘기신 듯 보이는데 이런 옷이 어디 가 어때서요? 마담 사이즈로도 다 준비가 돼 있어요. 젊게 입으면 그만큼 젊어지는 거지 뭘 그러세 요. 보아하니 아직 허리도 살아 있는 듯 한데요. 제가 이래봬도 턱없이 권하진 않아요." 허리가 살아 있다는 아가씨의 말에 급소를 찔린 듯 구슬가방을 주물럭거리는 여인의 손아귀에 서 힘이 솔솔 풀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모님께서 물건 고르시는 안목이 역시 보통으로 세련된 게 아니십니다. 이 꽁메르꼴로 말씀 드리자면..." 옆에서는 거의 흥정이 무르익어 가는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양쪽으로 둘씩이 나 달라붙어 마네 킹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퍼머 머리가 굳이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싸 달라고 막무가내로 고집했던 것이다. 나는 옷이 벗겨지는 마네킹을 바라보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네킹의 몸뚱아리는 겉보기보담 더럽고 흉칙했다. 등짝에는 반품 어쩌구 하는 서툰 낙 서가 시커멓게 휘갈 겨져 있는가 하면 또 배꼽 아래께는 섬뜩하게 패인 흉터가 들쑤시고 지나갔다. "미친 년." 누군가 귀를 간지르는 것 같아 돌아다보니 단발머리가 내 옆에 바짝 달라붙었 다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성마른 표정으로 콧구멍을 발씬거리는 그녀의 입 근처에선 단내가 훅 풍겨 왔다. "옷을, 옷을 벗기지마. 제발, 그런 식으로 빼앗진 마." 나는 갑자기 숨이 턱에 차올라 자신도 모르게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백주에 벌어진 무지막지한 테러 현장이라도 목격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인숙, 이건 네 옷이 아냐. 틀림없어. 이건 내가 한 번 입다 버린 옷인데 그 아줌마가 가져갔 어. 너희 엄마가 우리 병원에서 빨래하는 그 뚱뗑이 아줌마가 맞지, 그렇지? 맞 지? 이 단추를 보 면 단박에 알 수 있어. 너는 지금 내가 입다 만 옷을 입었어. 그러니 까불지 마. 후후." 그 애 이름은... 그래 건희, 건희다. 3학년 5반 부반장. 나는 머릿속에서 고무공처럼 튀어나온 한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러 자 그 이름에 매달 려 고구마 줄기인 양 줄줄이 딸려나오는 기억의 덩어리들 때문에 양미간을 살 포시 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 엄마는 밖에서 남의 집 헌 뜯게옷을 줄기차게 꿍쳐 가지고 들어왔 다. 진절머리가 나도 록. 내가 몸에 걸치고 있는 헝겊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남의 것 일색이었다. 심 지어는 내의류마저 엄마는 병원에서 가져온 헌 시트 자투리를 이어 만든 걸 억지로 입히곤 했다. "이건 원장 선생님 따님이 몇번 안 입고도 버리게 된 건데 봐라, 기지가 얼 마나 쫀쫀하니. 한 번도 안 빤 진솔 옷이나 진배없다. 아유, 그 의사 선생님은 남자시면서도 어쩜 그리 맘 씀씀이가 알뜰허냐 응?" 그런 옷가지라는 게 펼쳐 보면 한 벌 한 벌이 그녀 집안 형편으로는 꿈 속에 서라도 새것 장만 이란 언감생심이었다. 색상이나 재단, 피륙 등 어느 면을 살펴봐도 일류 수준급 의 옷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러나 뜯게옷은 역시 뜯게옷일 따름이었다. 입는 당사자인 나에게는 거의 눈치채이지 않는 흠 결이 반드시 한두 군데 있게 마련이어서 곧 주위의 따가운 눈에 띄어 버리곤 했다. 등단추 중 한 두 개의 모양새가 조금 틀리다든지, 치마 말기에 올챙이 눈알만한 불구멍이 뚫 렸다든지, 겨드랑이 께 솔기가 보일락말락 미어졌다든지, 허리띠 매는 자리는 있는데 정작 허리띠 는 없다든지, 새 옷 이 아닌 바에야 웬만한 옷이라면 흔히 있음 직한 흠집들이 유독 그녀의 몸에 걸 쳐진 옷들에는 결 정적 낙인으로 환하게 찍혔다. "쟨 남이 입다 준 옷도 참 자랑스럽게 입구 다닌다구.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 등뒤에서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들이 팥죽처럼 끓었다. 그 순간부 터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더 이상 나긋나긋한 옷이 아니라 풀기가 죽은 채, 성충이 된 나방이 찢고 나온 번데기 허물 처럼 한갓 추레하고 누추한 껍데기로 전락했다. 자연스럽게 걸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몸은 균형 을 잃고 갸우뚱거렸다. 건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는 어린 맘에도 주위 의 헐뜯음이 사실 은 부러움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뜯게 옷을 아예 벗어 버 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완전무결한 옷이 걸릴까 기대하며 엄마가 챙겨 오는 옷보따 리 속으로 매번 희번덕거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박아 넣곤 했다. 그때 제일 두려웠던 것은 누군가 이것은 내가 입던 옷이야 하며 나서는 경 우였다. 그 상황이 실제로 닥쳐왔을 땐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새 학기 환경미화 심사가 1주 일 앞으로 다가오 자 그날 그날 청소를 책임진 줄반장은 꼭 담임선생의 점검을 받고 합격 지시가 있어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겨우 줄반장인 주제에 누굴 보고 이래라저래라 명령이니?" "청소만큼은 줄반장이 책임지게 돼 있어. 왜 그래? 청소가 하기 싫으면 그냥 집에 가도 좋아. 하지만 청소하는 데 훼방이나 놓지 말아 줘, 흥. 꼴에." "니 눈엔 내 꼴이 어디가 어때서?" 악에 받쳐 이를 앙다물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건희는 도끼눈을 위아래로 부라 리며 내 몸뚱아리 에 찬물을 끼얹듯 훑어보았다. 세일러복처럼 그녀의 어깨를 덮은 옷깃의 가장 자리께에 영롱하게 수놓아진 구슬 레이스가 무지개빛으로 헐떡거렸다. 더이상 암말 못하고 눈초리만 사납게 말아올리며 쏘아보던 건희의 눈에서 옳 거니 하는 광선이 한 줄기 새나왔다. 입가에는 야멸찬 비웃음이 흘렀다. 그 애는 혀끝이 녹아날 듯 부드러운 말로 어른처럼 속삭였다. "너희 엄마, 우리 병원에서 빨래하는 그 뚱뗑이 아줌마 맞지? 그렇지?" 그때 오금이 졸아붙던 느낌이란! 눈앞에는 온통 그 애의 하얀 레이스 뿐이었 다. 수치심과 뒤범 벅된 형언할 수 없는 노여움이 화톳불처럼 피어 올랐다. 동시에 내부로부터 뭔 가가 와르르 무너 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이 나쁜 계집애야. 천벌을 받을 거야." 정신없이 달겨든 나는 건희의 레이스부터 북 잡아뜯었다. 그 소리는 나중에 용빈을 따라다니며 맛들인 볼링에서 스트라이크를 칠 때 오금에 착 달라붙던 쾌감처럼 무척이나 짜릿했으리라. 살짝 건들기만 하면 언제든지 밑바닥에서 솟구칠 태세가 돼 있는 비커 속의 앙금 덩 어리인 양 지금도 기억의 한켠에 사뿐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으아악!" 갑자기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 속을 단칼에 휘저었다. 나는 무의식적 으로 소리가 난 쪽 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백화점 경비원이 급한 발걸음 으로 달려오고 남자 판매원은 평소에 훈련이라도 미리 해둔 양 소리가 울린 곳에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는 사람들 무 리를 듬성듬성 에워싸듯 하며 몰려들었다. "별일 아니니깐 손님들을 안정시키고 소리난 곳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잘 살 피라구!" 중간관리자쯤 되는 듯한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지시했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당겨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 구경했다. 챙이 넓은 귀부 인풍 모자를 머리 위에 곱게 모셔다 둔 젊은 여자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불에 덴 듯 호 들갑스럽게 공중에 털며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귀부인 모자의 허리께로 눈길을 주다 말고 나는 급히 벌어진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말았다. 그 여자의 허리께에 거진 한 뼘들이로 찢긴 칼자국에선 붉은 자 국이 널름 비치는 거였다. 그러나 들여다보니 다행히 핏자국은 아니었다. 몸에 착 달라붙게 입은 붉은 색깔의 정장이 그런 착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소매치긴가?" "아녀, 자긴 요즘 신문도 안 읽고 다녀? 신문에 난 또 그 일인가베. 예쁘게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자만 골라 면도칼로 그어댄다는 가학성 변태말이야. 조것 봐. 아니나다를까 또 빨간 색깔인데." "정말 그러네. 어머 무시라. 시상에 무법천지랑께." "아, 이 훤한 곳에서 말이야 여봐란 듯 이런 일이 연쇄적으로 벌어지니 정말 얄궂대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어디 하룬들 맘놓고 살겠어, 이거. 벌써 네번째라고. 굼 벵이 같은 경찰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세금으로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 처먹으면서." 잠복 근무중이었다는 사복 경찰 두엇이 진둥한둥 뛰어와 합세했다. "어떻게 된 거요!" "소리가 나자마자 우리가 주위를 에워쌌으니 암만 빠른 놈이라고 해도 미처 몸을 빼긴 어려웠 을 텐데요. 수상한 동작을 한 사람도 없었다니까요. 있다면 바로 이 속에 있어야 하는데." "목격자 없나, 목격자?" "글쎄,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 "옌장,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목격자가 없단 말인가? 우선 바닥부텀 샅샅이 훑 으라고. 범인이 현 장에 범행 도구를 흘리고 갔을 수도 있는 법이니깐." 웅성웅성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졸지에 구경거리의 대상이 된 귀부 인 모자 근처의 사 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고, 경찰은 경찰대로 무슨 일부터 처리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밀려 시적시적 스쳐가려는데 그 무리 안에 갇혀 있 던 여자 하나가 겅중거리며 뛰쳐나와 팔짱을 끼며 반색을 했다. "어, 언니.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단 말이야, 응." 어. 누구더라. 바로 그 단발머리였다. 어째서 이 아가씨가 나를 언니라 부르 며 다랑귀를 뛸 듯 반갑게 달라붙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겁도 났지만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 국 으로 가만히 참으며 장단을 맞춰 주기 시작했다. "어머 얘, 너야말로 어디 있었니? 한참 찾았어. 내가 있잖아, 너한테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스 카프 봐 뒀는데 이리 와 봐. 네게는 역시 물방울 패턴을 이용한 무늬에다 연한 베이지 색상을 깐 게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 게다가 마침 세일 기간이니 오죽 잘됐니." 나는 주위 사람들의 이목은 아랑곳없다는 듯 일부러 넌덕스런 태를 내며 그 단발머리의 팔짱을 세게 잡아끌었다. 잠깐 흐릿한 눈빛을 띠던 그녀도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겼다. "아유, 언니도 웬 백화점에서 그런 것을 산다고 그래요? 그냥 시장 같은 데서 아무것이나 골라 도 될 텐데." "그래도 네 스물세번째 귀빠진 날을 이렇게라도 축하해주고 싶은 이 언니 심 정을 알아나 줘라, 얘." "차암. 언니는..." 나는 단발머리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면서 천천히 사람들 틈새를 헤치고 나왔다. 내 손아귀 안에 잡힌 그녀의 손바닥에서 미세하게 번지는 불규칙한 파동이 느껴졌다. 앞 만 보고 걸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행연습 한 번 없이 그렇게 실감나는 연기를 펼친 자신 을 새삼 돌아다보 는 중이었다. 내게도 이런 다부진 구석이 있었던가. "저 좀 보고 가세요, 언니" "그래요? 그럼, 나 좀 따라올래요?" 나는 그녀에게 짧게 끊어 던졌다. 간판을 보니 커피 전문점 아네모네라고 씌 어 있었다. 단발머 리는 코뚜레가 처음 뚫려 이제 막 사람 손에 고삐가 넘어간 부룩송아지처럼 고 개를 삐딱하게 외 로 꼬며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성큼성큼 따라 들어왔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커피를 큼큼거리며 마시다 말고 난 손가락 끝을 세웠 다. "솔직히 좀 말해 줘요!" 평소에 블랙커피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커피의 강렬한 색깔이 그것을 마시는 사 람의 인상을 좀더 강인하게 보이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쓴 커피 맛만큼이나 아릿한 오기 같은 게 불쑥 솟구쳤다. 내가 반 잔쯤 비웠을 때 무조건 들떼놓고 이렇게 떠보았다. "왜지?" 하는 말이 목젖까지 달라붙었지만 대신 입 안으로 쓴 커피물을 흘려 넣었다. 적당히 그녀를 외 면하고 싶었다. 요즘 신문 사회면 구석배기에는 너댓새들이로 젊은 여인들을 면도칼로 습격하 는 괴한에 대힌 1 단짜리 기사들이 모습을 비치고 있었다. '또 밤길에 20대 여인 습격, 금품을 턴 흔적은 없어. 여자의 화장품 냄새 풍 겨, 남장한 여자로 추정되기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단발머리는 이마를 탁자 위로 쑤셔박듯 기울여 뭔가를 입 안에서 뱉어 냈 다. 처음에 씹다 만 껌인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동강이가 난 면도칼이었다. "놀랐죠? 엉겁결에 입 안에다 집어넣었어요. 혀라는 게 생각보다 감각이 예민 하고 몰캉해서 그 런지 뜻밖에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언니 이름은... 인숙이죠? 맞죠? 난 일륙이라고 해 요. 송일륙." "알고 있어요." "아 예, 정말 고마웠어요. 말은 놓으셔도 돼요. 그게 나두 편하니깐." "난 생각만 해도 어째 몸이 떨리고 무서워지는데..." "히힝,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진 않아요. 그러고 나면 저도 제 행동에 깜짝 깜짝 놀라긴 하지만..." "...?" "근데, 인숙 언니는 우리 명자 언니를 무척이나 빼닮았군요." "명자 언니가 누구죠?" "가엾은 언니죠. 나도 그 언니의 운명이 되고 말 거예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시집간 지 1년도 못 돼서 반벙어리가 되어 버린 언니가 있어요. 6개월만 공장에 더 다니 면 시집갈 한 밑천 뽑는다고 부득부득 내 말을 도통 안 들었어요. 식은땀까지 질질 흘리면서도 그 환장할 납땜 인두 를 그예 손에서 못 놓더니만 시집가서부터 큰 탈이 난 언니가 있어요. 아이를 못 낳으니깐 길거 리로 쫓겨나 헤맨 거예요. 그 언니하고는 구로공단 닭장집에서 처음 만나서 입 때껏 같이 살다가 그 언니가 시집이랍시고 가는 바람에 헤어졌죠. 자기 이름이 좋다며 내 이름 가지고 얼마나 놀렸 는지 몰라요. 여자 팔자의 반은 이름에서 나온다면서 말예요... 멋도 모르고 생 고생을 한 거죠. 지 금 다니고 있는 데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에요. 파업 한 번 제대로 못했 지만... 제가 층계에 서 떨어져 팔에 깁스하고 다닌 거 보셨겠죠? 그나마 그렇게 한바탕하고 났더 니 일당도 5백원씩 오르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회사에서 갑자기 잔업 대신 '교양 강좌'인지 뭔 지를 토요일이면 마 련해 주더군요. 마침 이번 주 토요일은 회사 설립 기념일 행사가 겹쳐서 며칠 앞당겨져 오늘 강 좌가 열렸어요. 초청강사로 그 무슨 여성단체의 총무라는 안경잡이 여자가 나 와서 자발머리없이 떠들더군요. 강연 제목이 아마 '숙녀의 에티켓'이었죠? 오 예, 마이 에티켓!? 언니 저 참 주책이 죠? 그렇죠?" "어머, 보기보담 말 잘하는 데 뭐. 계속해 줘. 난 아주 재밌어." "그래요? 그렇잖아도 요새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칠 참이었는데... 회사 밖으로 타박타박 나오다 생각해 보니 참 얼빠진 년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지 뭐예요. 높으신 분들께 찻 잔을 갖다 드릴 땐 뒷걸음으로 나오는 거라는 둥. 세상에, 이 회사에 그 짓하러 나오는 년들이 도대 체 몇이나 된다구 그 따위 돼먹지 않은 소리를 주워섬기는지. 가만히 듣는 척하고 있자니 얼매나 눈꼴이 시고 부아 가 끓는지 속이 다 미식거리더라구요. 아마 우리 노동자가 회사에 나와서는 그 런 따분한 짓이나 하다가 집에 가는 줄로 착각했나 봐요. 또 윗사람한테는 까딱 인사를 하지 말 고 두손을 공손히 내리고 깍듯이 허리 인사를 하라니, 하느님 맙소사. 존경받을 짓을 해야 깎는지 보태는지 하는 인 사가 나올 것 아니겠어요? 걸핏하면 폭언에다 추잡한 손찌검까지 일삼으려 들 고 필경은 보리 뜯 어먹은 소 몰아치듯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치들에게 무슨 열고가 나서 없는 신 경통까지 도지라고 허리를 푹푹 꺾겠어요. 그리고 제발 펑퍼짐한 청바지에 싸구려 운동화 신고 공 순이 티나게 쿵덕 쿵덕 뛰어다니지 좀 말라니, 내 참 기가 막혀서. 생각 같아서는 화장품을 떡반죽 처럼 처말라 번주 그레한 얼굴을 독오른 손톱으로 확 그어 버리고 싶었지만. 누군 운동화보다 구 두가 좋은 줄 모르 고 예쁜 정장 차림에 새침데기처럼 또박또박 걷고 싶지 않남? 쥐꼬리만한 봉급 타서 이것 해 입 고 저것 신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대관절 뭘 먹고 살란 말이야, 고향의 부모님 은 또 먼산바라기 만 하라구? 또 뛰긴 우리가 뭐 선불맞은 멧돼지라서 뛰나. 1분 1초라도 일직 집에 가 쉬려다 보 면 자연 걸음이 빨라지는 거죠, 힝. 언니는 혹시 몇기쯤 되세요?" "몇기? 공채 7기지." "후후. 가을옷을 사려는 언니 옆을 지나는데 돈 냄새가 물씬 달겨드는 게 좋 더라구요. 우린 그 런 후각은 거의 동물적으로 발달돼 있어요. 그런데 내가 말하는 기는..." "기는?" "글쎄 제가 폐병 3기에 접어들었다는 거지 뭐예요. 이 젊은 청춘을 소리 없이 야금야금 갉아먹 는 몹쓸 병균이 제 몸속에서 우글거린대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세상은 나날이 무서운 속 도로 번창해 가는데 이대로 정녕 내 인생의 막이 내린다는 말이에요? 믿을 수 도, 믿고 싶지도 않 아요." "요즘이야, 의술이 잘 발달했으니깐 요양만 잘하면 될 텐데 뭘 그래." "그 젊은 의사랑 똑같이 얘기하는군요." 일륙은 질기디질긴 한숨을 빼물었다. "그런데, 언니 정말이지 약이 갈수록 독해지는 것 같아요. 약봉지엔 순 기분 나쁜 하얀 알약투 성이고요. 요즘에는 약발도 잘 안 받는 것 같아요. 언니 진해거담제가 뭔지 아 세요. 기침병에 잘 듣는 약인데, 그게 그렇게 끝내 준대요. 처음엔 다섯 알만 먹어도 하늘이 돈짝 만한 게 세상 시름 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훌훌 다 잊는대요. 내 주변에는 몸은 멀쩡하면서도 그 걸 일부러 사먹는 애들도 꽤 돼요. 값도 싸고 동네 약방에서 눈 한 번 찡긋하고 하얀 약 주세요 하면 쉽게 구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건 환각제랑 마찬가지인데 설마..." "아,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그게 아닌데. 안 되겠어요. 화제를 딴 데로 돌려야지. 언닌 스 카프 한 장이 얼만지 잘 알죠?" "글쎄, 실크류라면 요즘 못 줘도 한 2,3만원은..." "예. 실크류 말예요. 야들야들 따스한 봄바람처럼 목에 착착 감겨드는 그 실크 류가 보니깐 제가 맘속으로 생각한 액수의 한 다섯 곱절 정도는 되더라구요. 20프로 할인이라고 쓴 바로 아래에 3 만2천원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 앞에서는 스카프 메이크업 쇼가 한창인 걸 언 니도 보셨겠죠? 그 렇죠, 아주 좋습니다. 가을엔 뭐니뭐니 해도 실크류가 돋보이지요. 올 가을 유 행으로는 스카프의 매듭에 포커스가 주어지지 않을까 예상돼요. 자 보세요. 요렇게 뒤로 한 번 돌 리고... 이쪽 깃을 잡고 다시 한 번, 이때 너무 좁게 매시면 뽕이 움츠러들어 멋이 떨어지겠죠? 자, 그러면 아무나 한 분... 이제 그만 돌아가 볼까 하는 시큰둥한 생각이 들었는데 낯익은 레테르 가 시속 100킬로미 터로 눈에 확 달라붙지 뭐예요. 우리 회사에서 납품하는 꽁메르꼴 말이에요. 제 이 투박한 손이 언니의 맘을 사로잡았던 꽁메르꼴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죠? 근데 그런 데서 그것과 맞닥뜨리니 일할 땐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거완 달리 느낌이 이상하대요. 왜 시집가면 친정 동네 거렁뱅이도 반갑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쨌든 주눅들어 움츠러진 어깨를 툭툭 털어 낼 수 있었어요. 아무렴요. 누구의 손길을 거쳐간 건데요." 일륙은 너무 숨을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느라 숨이 가빴는지 밭은 기침을 서 너 번 토하며 냅킨 을 입가로 가져가 틀어막았다. 나는 냅킨에 분홍 빛이 슬쩍 비치는 걸 애써 놓 치지 않았다. "...가을에 만나는 뜨거운 감성, 절제된 이성을 위한 판타스틱 패션 꽁 메 르 꼴 새로운 나를 찾 는 야성의 숨결 당신의 액센트는 원색적인 보디라인 마드모아젤을 위한 네오 클래식패션의 선언 꽁 메 르 꼴. 아, 언니 그게 가을옷이래요. 물론 어느 한구석은 제 손을 거쳐 나갔겠지만 저한테 야 그게 가을옷인지 겨울옷인지 도통 안중에나 있었겠어요? 허구한 날 소맷부리 만 만지작거린 것 도 그런 무감각의 한 이유가 될 지도 모르죠. 내 손을 거쳐간 옷들이 이렇게 황홀한 자태를 뽐내 며 일류 백화점 마네킹에 보무도 당당히 걸려 있을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했겠 어요? 거기에 쏟아 지는 온갖 찬사들. 액센트 칼라, 부드러운 플레어의 실루엣, 곱고 가는 웨이트 라인, 클래식한 튤 립 라인의 스커트. 생소한 외국말 범벅이라 무슨 소린지 감은 잘 안 잡히지만 막연히 그럴듯하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역시 20프로 할인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다행히도 아니에요. 어련하려 구요. 제가 뼈빠지게 만든 옷이 기껏 할인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제값 톡톡히 다 쳐서 받아야 돼 요. 자, 보세요. 어? 그런데... 이게 아닌데... 아뿔싸,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가격표에는 467,400 이라고 씌어 있었어요. 뒷덜미를 덮여 온 어지럼증 때문에 무릎이 푹 꺾이려 했 어요. 눈탱이가 알 싸하도록 비비고 또다시 비비고 쳐다보아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러자 뜬금없이 저번 달 봉급 명세가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당으로 계산한 기본급 27일 128,600, 연장 근로수당 54시간 45,900, 야간근로수당 16시간 14,400, 휴일근로수당 16시간 16,600, 월차수당 1일 4,800, 주휴수당 4일 19,200, 생리수당 1일 4,800. 일당 4,800원에다 하루 평균 10.2시간씩 일을 했 을 때, 그것도 저번달같이 아무 탈없이 꼬박 일한 '아주 운 좋은 달'에 받는 봉 급액인데 여기에서 갑근세, 방위세, 의료보험료 등 각종 세금을 쳐내고 나면 실수령액은 22만원이 채 되지 않았는데. 아아 언니, 현실은 정말 꿈보다 더 터무니가 없었어요. 가슴을 쥐어짜며 한숨을 쉬어 봐도 숨죽여 울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걸요. 날 미치도록 우울하게 만든 건 바로 그 숫 자들이었어요. 가격 표에 씌어 있던 숫자를 가만히 따져 보니 내 봉급액의 에누리없는 갑절이었거 든요. 그 환장할 일 치가 속에서 뭔가를 뭉클거리게 한 거라구요. 그렇지만 않았어도 난, 난... 입때 껏 이런 생각을 갖 고 있었어요. 그래도 이 세상은 몇가지 조건만 좀 나아지면 저에게 행복을 줄 만한 그런 곳이라 고 말이에요. 아침에 한 30분쯤만 여유가 있으면 위산이 넘쳐나 쓰린 속에 허 겁지겁 새벽밥을 퍼 넣지 않아도 되구요. 그리고 일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테레비 선전에 나오는 톱스타 안성기처 럼 산뜻하게 하루를 뒤돌아보는 맥스웰 커피 한 잔 정도 타먹고 즐기면서 에프 엠 음악을 들을 만 한 여유가 되구요. 하다못해 주말 하루 정도는 눈이 맞은 씨억씨억한 수컷이 생겨서 변두리 재개 봉관이라도 들러 눈물이나 한소끔 쨀끔 뽑아내는 고무신 부대가 된다 한들 알 량하나마 제 몫의 행복은 챙겨지는 게 아니겠느냐, 뭐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건 어느 누가 들어도 억지는 아니잖아 요. 오히려 한심한 인생이라고 봐야지요. 큰손은 그만두고서라도 작은손 사이에 서도 몇백억이 오 가는 허무한 세상에 살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물방울 다이아, 이태리제 가구, 콘 도, 천문학적 부동 산 투기, 34조원의 예산, 사슴피 농장, 남북관계, 고위층, 대권정국 등등이 제 조 그만 행복의 울타 리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엿장수 가위질 따라 정해지는 추석 떡값의 끝수가 차라리 더 큰 관심을 끄는 절실하고도 현실적인 문제였어요. 언니,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 게 살아 봤자 진짜 아무 소용이 없나 봐요. 이게 무슨 황당한 뒤바뀜이에요? 제가 만든 옷 앞에 서 저는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으니 말예요. 제가 꼬박 두 달 60일 동안 유령이 되어 떠돌며 입 지도 먹지도 않고 한뎃잠을 잔다고 쳐도, 그리고 고향에서 제가 부쳐 준 돈으로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해서 고스란히 월급 봉투를 차곡차곡 모은다 해도 그 가을옷 한 벌 사입기에는 어 림도 없단 말이죠? 그게 정말이죠? 그럼 전 분명히 가짜예요. 이 세상도 순 가짜예요. 모두모두 가짜예요! 씨이..." "..." "아이 참, 내가 쓸데없이 너무 흥분했나 봐요. 이해하세요, 언니. 오랜만에 제 말을 진득하게 받 아 주는 상대를 만나니깐 그저 굶주린 듯이 말을 한꺼번에..." "무슨..." "모르긴 몰라도 저게 아마 비발디의 '사계'맞죠? 그 정돈 저도 빠삭해요. 아 까 매장에서도 저게 흘러나왔잖아요. 저도 그만한 눈썰미는 있다구요. 눈 덮인 계곡의 얼음장 밑에 서 개골창 흐르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걸 보니 저건 제4번 겨울이 틀림없을 거예요. 딴따따라라- 랄라- 딴따..." 아네모네의 공간을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율동미 있게 흐르고 있었다. "백장미 홀에선 유행가가 흘러나왔는데... 그대는 뭔가 다르네요.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젠 숙 녀, 숙녀라고 얘기해요 하면서 제 등을 은근히 밀어 제칠 땐 죽고 싶었어요. 감 히 그 가을옷을 손 수 짜낸 나를 밀치다니. 그런데 그 옷솔기를 어떻게 한땀 한땀 떠 가는지도 모 르는 사람들은 한 껏 부푼 지갑을 주물럭거리며 너무도 당당히 그 옷의 품위를 매입해서, 저의 눈물과 한숨과 애원 까지 매수해서 고상하게 소비하려고 폼을 잡는 거예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퍼뜩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 몫의 행복을...! 그 빼앗긴 행복을 도로 차지할 수만 있다면... 갈 기갈기 찢어발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보같이럼..." 일륙은 어깨를 가늘게 떨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 다. 나는 그녀 옆으 로 다가가 앉아 부드럽게 어깻죽지를 감싸 안으며 딴에는 훈훈한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으나 입 안에서만 어설픈 단어가 돼 맴돌 뿐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언니, 오죽하면 제가 마네킹이 되고 싶다는 맘까지 먹었겠어요? 어떻게 매장 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다만 매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가느다란 욕망이 회 충처럼 꿈틀거리는 걸 느꼈어요. 어떤 식욕 같기도 하고 의미한 요의 같기도 한 뭉글뭉글한 정체 불명의 덩어리를. 그 덩어리는 곧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면서 탐스럽게 조각이 났어요. 전 너무 눈이 부셔 뜰 수 조차 없어요. 그 조각은 하나하나가 알약, 예 바로 그 진해 거담제로 변해 내 정수리 위로 소리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알약이 다 쓰고 빈 곽으로 깨끗이 부셔 둔 제 콜드크림통에 머나 먼 행복처럼 소담스레 고봉으로 한 가득 쌓이는 거예요. 언니, 부디 얌통머리 없는 날 용서하세 요. 그런 진해 거담제라도 먹지 않으면 이 고통스런 현실을 1분 1초라도 견뎌 낼 줄 아세요. 저처 럼 물러터진 계집아이가? 그런 건 아예 바라지도 마세요." "아무도 자기를 비난하지 않아. 아니 비난할 수조차 없어." "난 자수할래요." "자수?" "그래요. 자수. 아아, 그건 길거리에 세워진 표어처럼 편하고 자유롭고 아름다 운 걸 거예요." "왜?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제발 자수 같은 건 하지 마. 꿈도 꾸지 말라구!" "언니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아요. 괜히 절 동정하지는 마세요. 떳떳한 죄과를 치 르고 싶을 뿐이에요." "자수는 안 돼. 자기의 자수를 받을 자격이 우리 사회에 있을 것 같아? 어림 도 없는 생각 말라 고. 널 동정하는 게 진짜 아니야." 나는 자수라는 말에 왠지 발정난 암코양이처럼 포달을 떨어댔다. 담임 선생은 그때 건희를 할퀸 나를 계도하는 뜻에서 걔네집에 1주일 한 번 씩 네 번을 찾아가 사과하라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증으로 건희 어머니의 서명을 받아 오라고 다그 쳤다. 나는 물론 꼬박 네 번을 그 넓적한 정원석이 징검다리처럼 깔린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매번 갈 때마다 건희 엄마는 현관에 서서 날 아주 반 가이 맞아 주었다. 그리고는 첫날은 과일을 깎아 주면 얘기를 사근사근 붙여 왔고(물론 내게서 사모님은 한마디의 말도 듣질 못했다) 두번째날은 음악을 틀어 주며 소파에서 고양이처럼 졸게 만 들었고, 그리고 셋 째날은 으늑한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집 구경을 시켜 주며 어디서 금방 캐다 심 은 듯이 푸석푸석 하고 생소한 외국 꽃을 가리키며 꽃 이름을 일러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나는 결코 그 집에서 풀죽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사실 난 잘못한 게 없었으니깐 맹랑한 아이라는 타박을 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 다. 그때의 그 자존 심이 지금껏 나를 버팅겨 주는 어떤 힘이 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나는 끝내 가을옷을 살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용빈은 내가 옷 장만을 하지 않았다며 송탄 행을 1주일 뒤로 미루자 몹시 역정을 냈다. "인숙 씨가 지금 사람을 얕보는 거야 뭐야? 우리 송탄 엄니가 그렇고 그런 여 자라서 얼굴 디밀 기가 그렇게도 낯이 깎이는 일이라 그건가?" "그게 아녜요, 용빈 씨. 화를 내더라도 어찌된 연유인지 알아나 보고 그러세 요." "그래, 도대체 그 찜 쪄 먹을 연유라는 게 뭐야?" "가을옷을 혼자 가서 덜렁 사는 여자가 어딨어요. 그것도 결혼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는데. 남 들은 되다 애인들 팔짱을 끼고 와서 흥흥 콧소리를 내면서 사는데, 그것 자체 가 이미 훌륭한 사 랑의 구매 과정이더라구요. 알겠어요? 그냥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사랑을 사는 거 있죠? 용빈 씬 맹문도 모르고설랑, 멋대가리도 하나 없이..." "클클클, 그만해 둬.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따가 저녁에 당장 만나자구." 가을옷이 곱다시 포장된 쇼핑백을 들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명동을 둘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 고 다닐 때였다. 그는 저녁을 간단히 때우자고 채근했다. 나는 이렇게 바깥에 함께 쇼핑 나오는 것도 드문 일일 텐데 저녁은 정식으로 근사하게 먹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러자 용빈은 그러면 자 신이 호텔에서 뷔페로 한턱 내겠다고 흰소리를 쳤다. 내 손가락을 움켜쥔 그의 손은 달아서 뜨끈 뜨끈했다. 그는 아마 지금 날 몹시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의류매장 갱의실 에서 가을옷을 입 고 주름문을 밀치고 나온 날 바라볼 때부터 그의 눈초리에 열기가 퍼담겨 있음 을 눈치챘다. 내 발걸음은 자꾸만 아네모네로 향하고 있었다. 그쪽은 또한 호텔이 있는 큰 길로 난 방향이기 도 했다. 용빈은 끊임없이 내 귓불에 대고 속삭인다기보다는 뜨거운 입김을 쏘 아댔다. "어때... 응?" 나는 고개를 돌리며 슬쩍 웃다 말았다. 아네모네 앞을 지날 때였다. 맞은켠 옷가게의 진열창에 는 움직이는 인간 마네킹이 패션 쇼를 하는지 사람들이 우죽우죽 모여 서 있 었다. 언뜻 그중의 한 사람의 옆모습이 눈에 빨려들어왔다. 바로 송일륙이었다. 나는 입맛을 쩍 다 시는 용빈의 손아 귀에서 손을 풀어 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륙의 뒤로 엇비스듬히 다가갔다. 그 녀는 진열창 안에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잰 체하며 서 있는 마네킹의 가을옷에 완전히 도취 된 표정을 짓고 서 있느라 내가 다가서는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조명 탓인지 그녀의 두 뺨은 잘 익은 수밀도처럼 발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 다. 아, 나는 속으로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느닷없이 갈증이 느껴졌다. 일륙은 거의 황홀경의 체험을 하고 있는 듯 사 팔뜨기처럼 눈을 모들 뜬 채로 진열창 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놀랄 만한 집 중력이 그녀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만일, 인류가 아담과 이브처럼 새로운 종자로 역사를 시작한다면 지금 이런 상태의 일륙이가 간택되어 마땅하다는 턱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꼼 짝 않고 서 있던 사 람 마네킹이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둘러선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끈끈히 진 열창 안으로 쏠렸 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몸 한구석 어딘가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몸을 살짝 비트는 시늉을 했다. 그녀와의 눈맞춤을 당장 실현해야 한다. 나는 일륙의 손을 붙들고 아는 체를 하려고 했다. 그녀의 손을 더듬기 위해 눈길을 아래로 깔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녀의 손은 바로 옆의 어느 아가씨의 백 속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 했다. 그건 소매치 기들이나 하는 짓임이 분명했다. 나는 머릿속이 팽그르르 달아올랐다. 반질반질 한 손지갑을 꺼내 들고 나오는 일륙의 손을 제지하려는 순간 목덜미에 뭔가가 서늘하게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 는 이상하게도 목뼈 부근이 뻐근해지는 쾌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쾌감. 돌아다보니 옆에 있으려니 했던 용빈은 흥미를 잃었는지 길 건너편에서 담배 를 피우며 초조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길거리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용빈이 있던 자리에 는 웬 남상지른 모 습의 꺽실꺽실한 아가씨가 납작한 맹꽁이모자를 쓴 채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의 오무려 붙인 손샅에서는 반 동강이가 난 예의 그 면도날이 흘낏 광선을 되쏘곤 사라졌다. 순간 내 몸은 납덩 이처럼 굳어졌다. "가만있지 않으면 곱상한 얼굴에 사정 없이 줄 가부러잉." 그는 바람잡이였다. 그럼 일륙은...? 갈 데 없는 소매치기였단 말인가! 나는 겁 도 없이 맹꽁이모 자를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그 사이에 끌려 나온 지갑은 일륙의 손을 거쳐 맹 꽁이모자의 점퍼 호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 정말 이래선 안 돼. 그때 일륙이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구멍 속으 로 기어들려는 그녀의 이름을 떠밀어 냈다. "일 륙 아..." 그녀는 정말 아네모네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내게 자신의 살아온 내 력을 털어놓으며 눈 물짓던 틀림없는 일륙이었다. "일륙아, 나 모르겠니?' "어머, 이 아가씨가 왜 이래? 내 이름은 현정이에요. 사람 잘못 보고선." 그녀는 내가 내민 손에 벌레라도 묻은 양 휙 뿌리치고는 맹꽁이모자와 팔짱 을 끼며 빠른 속도 로 길거리 인파 속에 묻혀 갔다. "언니, 난 자수할래요." "자수?"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이로 얼어붙어 몸서리를 쳐댔다. 그때 용빈이 지싯지싯 다가와 내 어깨를 톡 건드리지 않았다면 난 하냥 그렇게 몸을 뻣뻣이 굳힌 채 서 있었을지도 몰랐 다. "아직도 볼거리가 남은겨? 저건 유치한 쇼야. 한두 번 본 게 아닐 텐데 새삼 스레 뭘... 얼른 가 자고." 나는 그가 팔짱을 끼는 대로 허물어지듯 몸을 맡겼다. 갑자기 속에서 허발이 라도 난 듯 허기가 솟구쳤다. 뷔페의 음식을 모두 다, 아니 이 세상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시 내 귓볼에 뜨거운 입김이 달라붙었다. "어때... 응?"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녹아 버린 듯한 뇌수가, 고드 름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 소리처럼 명징한 발라드 풍의 랩소디에 맞춰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랩소디를 반 박자 늦게 따라가며 멍한 표정으로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욱, 시 장하다! 사하라 박상우- 1948년 경기 광주 출생.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 편 '스러지지 않는 빛' 당선.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장편소설 '지구인의 늦은 하오', '시인 마태오',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 해설-전영태 시대를 혼돈의 연속으로 세상을 무질서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비관주의자는 시 대가 바뀌고 세상 이 개혁된다고 해도, 그의 세계관을 고치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여전히 세상을 암울한 눈으로 조망할 따름이다. 박상우 의 '사하라'에는 개 인사적 궤적은 다르지만 비관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되는 남녀가 등장한다. 이 작품의 은애와 정훈은 이 사회의 밑바닥에 은신하면서 살아가는 룸펜 같 은 존재이다. 스스 로 기생충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되는 이 두 인물은 7년 동안 소 식을 모르고 살다 가 종로통에서 우연히 만나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7년 전 화류시라는 고 장에서 은애는 언니 가 경영하는 카페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살았고, '나' 정훈은 누나네집에서 더부 살이를 했었는데, 7 년이 지난 오늘에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넘기는 그들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 았다. 은애는 동생 의 집에서 기생하고 있고, 나는 번역일 따위를 하면서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형편이다. 이 두 인물이 서로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고 애정을 느끼고 있음은 물론이 다. 그래서 육체적 관계를 가지기도 하지만 결코 결합할 수 없는 관계임을 자각하고 서로를 멀리 하게 된다. 이 소설 에 나오는 포르투갈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암울한 '파도'의 멜로디에 어울리 는 슬픈 사랑 이야 기가 처연하게 전개된다. 80년대의 군사독재정부치하에서 문민정부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들에게 아무 의 미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 그들이 만난 카페에 들려오는 최류탄 터지는 소리로 상징되고 있다. 그 들이 느끼는 막막함과 우울감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 니다. 타인에 의해 서 또는 시대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자신에 의해서 상처받은 이들은 생존을 지속 하는 한 비관주의 적인 인식에 매달릴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허무주의는 이들 두 인물의 경우처럼 원인을 제대로 규명 할 수 없는 복잡한 비관주의의 적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작가는 등장인물이 느끼는 세상에 대 한 공허한 감정을 그대로 살려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작가는 이렇게 묻 고 있다. 사하라 나는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오직 나의 혼돈만을 알 뿐 나는 망상에 망상을 거듭하며 세월을 보냈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고 세상이 바뀌는 걸 보았다 또 세상엔 아랑곳없는 연인들의 키스 소리를 들었다 또 혁명을 위해 살고 혁명을 위해 죽는 것을 그리고 총알을 맞고 너무나 짧은 길의 마지막에 다다른 자들 곁에서 그들의 두 눈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후안 헬만 '눈'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부터 은애는 한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저 녁 일곱시경, 도심 한복판에서 아주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된 뒤부터 시작된 그 녀의 줄담배는 밤 아홉시경,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뒷골목의 비좁고 협소한 카페 공간으로 최루 탄 터지는 소리가 밀려들 때까지 줄기차게 계속됐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최루 탄 쏘아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뒤부터 갑작스럽게 끽연을 중단해 버렸다. 끽연 대신 낮은 조도 의 갓등 밑에 쪼그 리고 앉아 가볍게 다리를 떨거나,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 다보거나, 아주 가 끔 나와 눈을 맞추거나,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떨구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문득 생각난 것처럼 탁 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리거나 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에돌기 위 해 의도적으로 그 러는 것일까. "문민정부 잘한다고 남들 다 박수치는데... 어째서 학생들만 저렇게 난리를 친 담." 스탠드 바 안쪽에 서 있던 주인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갖가지 술병이 진열된 그 녀 등 뒤쪽의 장식 선반과 바 위의 허공에 매달린 작고 앙증맞은 조명등, 그리 고 두꺼운 몸피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주인 여자의 검은 드레스가 얼핏 보기에 전위예술 무대의 의도적인 불균형 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을 터인데, 어째서 두 시간이 지나고 나 서야 비로소 그것 이 감득되는 것일까. '틈'이라는 상호가 맘에 든다고, 저곳으로 들어가자고 은애가 말했을 때, 애 초부터 의도한 장소 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번역 원고 를 들고 갈 때마다, '낙원 출판사'의 변사장이 차를 사거나 술을 사곤 하는 '장밋빛 인생'이라는 레 스토랑을 염두에 두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이어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에서 술만 취하 면 졸부 근성을 드러내는 인간, 변 사장과 마주치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 낮, 단성사 앞에서 은애를 만나 기 직전에 헤어졌 는데 또다시 그와 마주친다? 그래서 나는 나무로 된 출입문을 열고 슬그머니 안쪽을 들여다보았 다. 놀라울 정도로 협소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 생게망게하게 시 야로 밀려 들었다. 2미터 정도의 스탠드 바와 두 개의 탁자가 놓인 앙증맞은 공 간. 괜찮겠냐는 표 정으로 은애를 돌아보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엔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어요. "술 안 마셔요?" 담배 대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성냥개비 하나를 끼우고, 그 끝에다 맥주를 찍어 탁자 위에다 무엇인지도 모를 글씨를 끝없이 써대고 있던 은애가 문득 고개를 들고 나를 건너다보았 다. 부질없는 열정이 말끔히 씻겨나간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측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른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7 년이라는 세월이 흘 렀고, 그 사이에 그녀는 서른하나가 '되어 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를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 세월의 행간에 옹이처럼 박혔을 애환을 나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다른 한 편으로는 뭔가가 잘못된 것 같고, 꼬인 것 같고, 겹질려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지 않 을 수 없었다. 따 사로운 햇살이 지천으로 깔리는 봄날, 주체할 수 없는 젊은 날의 열정으로 시 대를 향해 화염병 몇 개 날렸다는 죄, 그것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이 이렇게 황락해져가도 괜찮은 것인가. "옛날처럼... 그렇게 못 마셔. 왠지 감흥이 없고 마시면 자꾸 비감스러워져. 술에 대한 불감증 같은 게 생겼나 봐." 7년 전, 자신의 언니가 경영하던 '노아의 방주'라는 카페에서 거의 매일 폭음 을 일삼던 나를 기 억하며 건넨 질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그 자기 방기의 시간 속에서 사지를 뒤틀며 정신없이 술을 퍼마시던 인물이 누구였던가. 황량했던 시대를 피해 가며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파괴하던 인물- 그는 내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또하 나의 나였다. 누나 네가 있는 화류시로 내려가 하릴없이 기생하던 7년 전 그때, 그리하여 '노아의 방주'는 악마 숭배 자들의 지하 소굴처럼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느끼게 했었다. 자포자 기가 극에 달했던 그때,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 악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바로 거기 서 나는 또하나의 악마 숭배자였던 은애를 만나지 않았던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노래 아직도 좋아해요?" 우스운 질문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끄러미 나를 쳐다 보았다. 허전한 공 동이 느껴지는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다서 헝클어진 머릿결이 조성해 내는 묘 한 분위기가, 바라 보는 그 순간 이미 과거로 환원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독스럽게도 조명이 낮 고 음습했던 지하 카페, '노아의 방주'에서 오직 침묵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 같던 그 시절- 그때 은 애는 스물여섯이었고 나는 스물여덟이었었다. 대학 4학년 때 제적을 당한 운동 권 출신의 그녀가, 그때 '노아의 방주'에서 나를 위해 자주 들려준 그 노래가 무엇이었던가. "말디카오?" 시대를 의식적으로 피해 가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시대 때문에 나 자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 는 걸 깨닫게 될 때까지 나는 그 노래를 꽤나 좋아했었다. 지칠 대로 지치고, 망 가질 대로 망가진 뒤에야 비로소 그 오장 육부를 쥐어짜는 듯한 노래의 마성에서 미련 없이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이 다. "어느 날인가... 정훈 씨가 '노아의 방주'로 올 때 그 테이프를 사 가지고 왔 어요.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실 때마다 이 노래를 들 려주세요. 그럼 매 상이 많이 올라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그걸 건네줬어요. 하지만 모 르고 있었죠? 정훈 씨가 테이프를 사다 주기 훨씬 전부터... 나도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는 거."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검지의 첫번째 마디를 술잔에다 담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꺼내 다시 탁자 위에다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나가 버린 시간들, 그 스러 져 버린 청춘을 흔 적을 소리 없이 되새김질하는 것 같았다. "그 노래가 악마 숭배자들의 주제가였나?"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워 버렸 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7년 전 그때, 그 출구 없던 시절의 어둠이 불현 듯 되살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말리아 로 드리게스의 노래를 동일하게 좋아했을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녀를,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 것 은 결코 아니었다. 정서적인 동병상련은 있었을망정, 그것을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몰고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 대 나는 분명히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운동권 학생으로 시위 주동자가 되고, 남학생들과 어울려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그것으로 제적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에는 더욱 그랬다. 시대 적인 문제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시대적인 문제 때문 에 병들어 가는 이 율배반적인 고등 실업자의 심리를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그 견딜 수 없는 자 기 모순의 간극으로 나는 끊임없이 술을 퍼부어댔고, 종내에는 악마가 되고 싶 다는 생각을 하며 때마다 진저리를 쳐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와 내가 아말리아 로 드리게스의 노래를 끝없이 되풀이해 들으며 정서적인 동병상련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닮아 있고 나머지는 닮은 구석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얘기... 기억나요?" 나를 건너다보며 그녀는 자신이 손을 담갔던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잠시 동작을 멈추 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 다 별 볼일 없고... 둘 다 기생하는 인생이라고 말했던 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독하고 역한 싸구려 럼주에 취한 채 나는 그런 말을 입 에 담았을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분위기로 남겨지는 기억이 있지 않은가. 시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이 뚜렷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내 처지에 대한 비관으로 그런 분위기가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 되었으리라.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도무지 세상살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시대적인 문 제라거나 먹고 사는 일 따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방을 싸들고 누나네가 있 는 화류시로 내려 와 기생살이를 시작한 나. 그리고 제적을 당한 뒤, 집안 식구들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다 언니의 카페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역시 화류시로 내려가 기생살이를 시작한 은 애. 그녀와 나는 그 때 이미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어 시대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그런데 서 오는 정서적인 동병상련이 그녀와 나를 이상한 끈으로 옭아매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대적인 상처가 있건 없건, 그 시대 속에 동일하게 던져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지 그것 하 나만으로도 묵계적 인 동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요. 그때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나는 내 자신의 인 생이 정말 별 볼일 없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정훈 씨 앞에서는 부정했었지만... 나 를 지탱하고 있던 내면의 힘이 부질없는 오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거예요. 불 길한 예감이 들었던 건데... 지난 7년 동안 그 모든 건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 어요. 보이지 않게 거세당하고 있다는 느낌... 쓸모없어져서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 그 런 느낌에 끊임없 이 시달려 온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걸 느낌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어요. 왜냐하 면... 그 모든 게 사 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아주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몽롱한 눈빛 속으 로 조명등 위쪽의 어둠이 소리 없이 배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 리가 다시 들렸다. 그녀의 눈빛으로 배어들던 어둠이 경직되고, 느슨하던 실내의 분위기에 갑작스 럽게 냉기가 감도 는 것 같았다.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주인 여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출입문 쪽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몽롱하고 또한 체념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 립무원의 자기 처 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 근 세 시간 가까이, 은애와 나 이 외에 어느 누구도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없었다. "우리 위스키 마실래요?" 잠시 경직된 눈빛으로 빈 맥주병을 들여다보고 있던 은애가, 갇힌 곳에서 가 까스로 출구를 발 견해 낸 사람처럼 다소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위스키?" 당황한 표정으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변 사장에게 번역 원고를 넘 기기 위해 지난밤을 꼬박 새운 처지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상당히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저런 눈빛을, 적어도 7년 전의 그녀는 단 한 번도 드러 내 보인 적이 없지 않은가. "답답해요, 그리고... 취하고 싶어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성냥개비를 끼우고, 그것으로 탁자 위에다 별 모양을 그 려대며 그녀는 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다시 한 번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 시 한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서 시위가 진행 되는지는 알 수 없 어도, 들려 오는 것은 오직 다발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는 소리뿐이었다. 시위대 의 구호 제창이라 거나 일진일퇴를 거듭할 때 터져 오르는 함성 따위가 전혀 들려 오질 않았던 것 이다. "축제의 밤에 터져 오르는 폭죽소리 같지 않아?" 날라져 온 위스키를 먼저 권하며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소리가 기억을 자극하고, 기억이 상처를 건드리고, 상처가 다시 현실을 잠식해 가는 시간... 나는 그녀가 그런 시 간을 보내고 있다 고 생각했다. 위무하는 마음처럼, 진한 다갈색의 액체가 부드럽게 그녀의 잔으로 흘러내리고 있었 다. "밤하늘... 형형색색... 화려함... 축제의 절정... 아름다움 연인들... 폭죽은 그런 걸 생각나게 해요. 하지만 그런 화려함은 슬픈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요. 무엇과 대비된다는 게 얼마나 끔찍스 런 일인 줄 아세요? 대비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난 아니에요. 그렇 게 될까 봐... 자꾸 숨고 싶으니까요." 잔을 든 채, 모노 드라마를 연기하는 연극 배우처럼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 고 나서 거의 단숨 에, 그녀는 위스키잔을 비워 버렸다. "7년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많이 나약해졌 군." 혼자말처럼, 그녀의 잔에다 다시 술을 따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녁 일곱시경, 종로 3 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되새기며 꺼낸 말이었다. 청바지 위에 헐렁한 남방 하나를 걸친 모습, 그리고 다소 수척해 보이는 얼굴 이외에 그녀는 7년 전의 분위기를 그대 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눈에 는 그렇게 보였었 다. 하지만 그 황당무계한 우연 앞에서 내가 무엇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었으 랴. 그 기막힌 우연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기는 그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기억이 현실 속으 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예기치 못한 정황 때문에 그녀와 나 는 한동안 제정신 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아주 오래 전에 바닥으로 내려앉았어요. 그냥 그 상태로 어쩔 수 없으니 까 견디는 거예요. 검불처럼, 때로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 몸뚱어리가 수백 년 된 고사목 같다 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실이 괴로우면 감정이 과장될 때가 많은 건지... 빵 만들 때 넣는 이스 트 알죠? 그것처럼 감정을 제멋대로 부풀린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쿡 하고 소 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아주 잠시 이마를 짚은 뒤에, 그녀는 무엇인가가 스러질 때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부 질없는 열정이 말 끔히 씻겨 나간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측은해 보이는 얼굴. "언니는 어떻게 됐어?" 대화를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녀의 언니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7년 전처럼 아직 도 '노아의 방주'를 경영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언니요?" 화류시에 머물던 4개월 동안, 그렇게 자주 술을 마시러 갔으면서도 떠나올 때는 온다간다 말 한마디하지 않고 떠나간 인사가 느닷없이 언니에 관한 얘기는 왜 꺼내는가, 그 런 의미로 그녀는 되묻는 것 같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곳을 떠날 때 인 사라도 하고 왔어 야 하는 건데..." 작고 앙증맞은 위스키잔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하지 만 그 직후에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르랴. "나한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언니한테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애한테는 미안한 감정이 아니고...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 애. 아주 복잡미묘 하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도 나는 그런 나의 감정을 은애가 이해했을 거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어찌 이해의 문제일 수 있으랴만, 그때 그곳을 떠나던 당시의 내 감 정은 정말 복잡미 묘했었다. 은애에 대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은애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충동적 인 울화 같은 것... 그런 걸 당시의 내가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었으랴. 때로는 연민의 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살해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동반자살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던 그것... 그것 이 시대에 대한 거친 욕지기였다는 걸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몇년의 세 월이 더 지나고 난 뒤였다. 불어터진 짬뽕 곱배기 같은 시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병들어 가 던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감정 체계를 당시의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었 겠는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녜요. 투정을 부리는 건 더욱 아니고... 그냥 한번 그래 본 것뿐이에 요, 우리 언니... 지난 7년 동안 참 파란만장했어요." "일억이나 벌었다구?" "무슨 말이죠?" "파란 게 만장이면 일억 아냐?" "그런 농지거리는 여전하시군요. 정훈 씨가 그곳을 떠난 이듬해에 '노아의 방 주'는 문을 닫았어 요.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해서 그만 둔 건데... 그 직후에 옷 장사를 시작 했어요. 브랜드 재 고품을 넘겨받아 파격 세일을 하는 장사였는데... 별로였어요. 그 직후에 나도 그 곳을 떠나서 자세 한 내막은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내가 떠난 뒤에 그걸 정리하고 호프집을 시 작했어요. 악착같이 돈 될 만한 유행 사업은 다 따라 한 건데... 지금은 뭘 하는지 알아요?" 술잔을 들어올리며, 정말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 다. "24시간 편의점?" "노래방." 짧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 고 양미간을 찌푸 리며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찍했다. "언제 한번 노래부르러 가야겠군."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술만 취하면 마이크를 손 에 잡고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변 사장의 모습을 잠시 생각했다. 돈, 술, 여자... 그리고 장밋빛 인 생. "정훈 씨 누나네는 뭘 해요? 그때 매형이 화류시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고 했 었죠?" 내 차례라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손에 대지 않던 담배를 꺼내 다시 입에 물었다.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 것일까. "7년 전 얘기지. 지금은 부동산 중개인 노릇을 하고 있어. 누나는 제과점을 하 는데..." 아, 더이상 그런 얘기를 입에 담아 무엇하겠느냐는 표정으로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은애의 언니가 겪었을 변신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누나네가 치렀을 그것의 본질이 조 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재밌군요. 지난 7년 동안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변신을 거듭했는데... 그런 데 어째서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까요?" "변신이 아니고... 돈을 좇아가는 풍조겠지. 그리고 그게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사람들 은 생각하니까... 그런 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아니 라고 해도... 우리 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많이 변했을 거야." "변한 게 아니고 병든 거겠죠." 물끄러미 탁자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힘없는 독백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글쎄... 내가 은애에게 지난 7년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은 것처럼, 은애도 또한 그런 것에 관해 구체적으로 내게 묻지 않았었잖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토록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도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 지 않고 있었다. 7 년 전 그때, 그녀가 자신의 운동경력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내가 시대의 염 증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던 것처럼, 그녀와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에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도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몽몽한 상태를 전혀 불편해 하지 않고 있 는 것이었다. "웃기는 얘기로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 위에다 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망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동작을 멈추고 있다가,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난 것처럼 그녀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 려 할 때의 결의 같 은 게 그녀의 양미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가 마악 입을 열려 할 때, 그때 또다시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느닷없이 실내로 밀려들 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 만 따다다닥, 따닥, 따다다닥, 딱, 따다다다닥, 따악, 따다닥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꼬리를 물자 그녀 는 기어이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그리고 영원히 그럴 것처럼 그녀는 그때부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난밤의 불면으로 두 눈이 간잔지런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재떨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담배 연기를 주시했다. 곧게 솟아오르다 휘청, 다시 한 번 솟 아오르다 휘청, 그 러면서 그것은 빛살이 스러지는 허공을 향해 빠르게 흩어져 갔다. 그 과정을 주시하는 동안 나의 뇌리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흩어지고 있었고,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따닥, 따닥, 딱, 따다다닥, 따닥, 따다다닥, 딱... 따사로운 봄날, 머리에 붉은 끈 을 동여매고 파출 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던 운동권 여학생. 남편도 없는데 돈이라도 많이 벌어 야지 별 수 있겠느 냐며 손님의 멱살을 쥐어 흔들던 술집 여주인. '노아의 방주', 그 침침한 어둠 속에 앉아 꽃다운 청춘을 어둠으로 물들이던 대학 제적생. 술이 취할수록 정신이 더욱 명징해진 다고 독을 써대던 대졸 실업자. 돈에 침 뱉을 놈 없다고, 돈을 모르는 놈은 인간도 아니라고 때마 다 핏대를 올리던 공인중개사. 사지 멀쩡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놈이 어째서 허구한 날 술이나 퍼 마시고 돌아치느냐 고 소리치던 제과점 주인 여자. 돈만 있으면 장밋빛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때마 다 침을 튀기던 출 판사 사장... 따닥, 따닥, 따다닥, 따다다닥, 딱... 혼재된 시간의 광장으로 기나긴 대열이 지 나가고 있었다. 운 동권 여학생,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대학 제적생, 대졸 실업자,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이 대동 단결을 한 것처럼 한동아리가 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7년 전에도 7년 후에도, 7년보다 더 오래전에도 7년보다 더 오 랜 후에도, 그런 대 열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이어지고 있고, 또한 이어 져 갈 것 같았다. 모든 시대가 새로운 시대였던 것처럼, 그리하여 모든 시대가 새로운 시대가 아 닐 수도 있으리라 는 자각 속에서 분열이 눈을 뜨는 시간. 과연 우리는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뜸해진 뒤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재떨이 위에 올려놓았던 담배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저 홀 로 연기를 피워올 리던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잠시 그녀는 그것에다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피 워 주는 사람이 없어도, 저 홀로 타올라 재가 되어 버린 그것에서 일종의 상징 을 읽고 있는 것일 까.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에요. 처음부터 모든 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고... 알 수 없는 어떤 힘 이 내 자신을 고통의 한가운데로 자꾸만 떠밀고 있는 것 같애요. 늘 떠밀리지 않으려고 버둥거리 면서도... 이런 순간이 오면 도무지 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겠어요." 왼손을 들어올려 턱을 괴고, 아주 몽롱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 다.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7년 전의 나를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주 가끔 난 그런 생각을 하곤 해. 나이에 비해 내가 너무 많은 시대를 살 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너무 일찍 늙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야. 길 을 걸을 때, 지나가 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떤 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그래서 난 곧잘 혼 돈을 일으키곤 해.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와 있거나, 과거에서 미래로 잘못 와 있는 것 같다는 생 각... 내가 뜬 구름 을 밟고 다니는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거야. 그런 게 안타까워서 걸음 을 멈추고 한동안 씩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떻게든 현실감을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잘 되지 않 는 거야. 현실에 던져져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 "도태되었다는 데서 오는 괴리감인가요?" "시대를 통해 제대로 진화된 사람들도 나는 별로 본 적이 없어. 그냥 누적된 시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다소 기형이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나의 얘기를 듣고 나서,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눈빛으로 은애는 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정리한 표정으로 이윽고 그녀는 고 개를 들고 입을 열 기 시작했다. "7년 전과 똑같이... 난 여전히 기생충처럼 살고 있어요. 내가 지금 어디서 어 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죠?" "묻지 않았잖아?" 사실이었다.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들던 저녁 일곱시경의 종로 통, 그 붐비는 인파 속에서 서로를 발견해 낸 뒤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신상에 관해 구체적 으로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은 그녀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종로통으로 몰려드는지에 관 심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지난 7년 세월을 에돌아 종로통에까지 이르게 된 세 세한 내력 따위를 그녀와 나는 전혀 입에 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른세 살과 서른한 살이 되어 재회한 직후, 서로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주고받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무엇이었던 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그저 그렇게 지냈다. 결혼은 했느냐?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 작이었던 것이다. "난 지금... 안양에 있는 동생집에 얹혀살고 있어요. 동생네 부부가 지하상가에 서 가방장사를 하 고 있는데... 일년 반째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얹혀살고 있는 거예요. 옛날에 언니네 집에 얹혀 살 때부터... 그때부터 시작된 기생살이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숙주 를 괴롭히며 숙주 보다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기생충 알아요?"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녀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얘 기를 듣고 난 뒤에 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또다시 따다다닥, 따닥, 딱, 따다 다다다다닥, 딱 하 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 버렸다. 하지만 얼마 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귀 를 틀어막는 일은 되풀이하지 않았다. 독이 오른 것처럼, 들어올린 술잔을 재빨 리 비우고 나서 그 녀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근데 동생네 부부가.." 그때 다시 몇발,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 을 열기 시작했다. "동생네 부부가 다음달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대요." 따다닥, 딱, 따다다닥! "숙주가 떠난다니까..." 따닥, 딱, 따다닥, 딱! "..." 따다다닥, 다닥, 따다닥, 딱! "기생충이 섭섭한 거 있죠?" 따닥! "내가 걱정할까 봐 수속을 밟으면서도 얘길 하지 않고 있다가..." 따다닥, 딱! "...며칠 전에 ...며칠 전에 갑작스럽게 얘길 꺼내는 거예요." 따다다다닥, 따다닥, 따다다다닥, 딱, 따다닥! "새로운 숙주를 찾아 보라고..." 따다닥, 따다다닥! "새로운 숙주를... 숙주를 찾아 보라고..."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 게, 잠시 뒤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7년 세월의 인내가 한꺼 번에 허물어져 내리는 게 아니라, 소리와 눈물과 몸짓이 한데 어우러지며 기묘 한 욕망의 그늘이 조성되는 것 같았다. 빛과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질탕한 교접을 시작하고, 그녀 를 에워싸고 있던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해체의 신음소리가 밀려나오고, 오랫동안 경직되어 있던 기류들이 뒤틀리고, 퍼덕이고. 뒤채이고, 움찔거리며, 드디어는 절정을 향해 광적인 일진일퇴를 되 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닥, 따다닥, 딱, 따다다다닥... 따닥... 딱... 딱... 따악... 딱...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의자의 등받이에다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난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낸 탓인가, 의식이 수천 수만 개의 미립자로 잘게 부서 지고 내 몸 전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층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기생충이라는 말... 그리고 기생살 이라는 말이 한겨울의 눈꽃송이처럼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눈 꽃송이처럼, 눈꽃송 이처럼... 하지만 끝내 꽃송이가 되지 못한 저 여자가 누구인가. 삭풍에 떠밀리 며 황량한 겨울 벌 판을 가로질러가는 여자의 어깨 위로 끊임없이 눈꽃송이가 내려앉고 있었다. 눈꽃송이가 아니라 기생충이라는 말... 기생살이라는 말이 내려앉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걸 한번 써보란 말야. 이제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초장 분위기가 쇄신 국면이니 '소 설 사육신' 같은 걸 쓰면 정말 불티나게 팔릴 거라구. 아직 팔뚝에 힘 있을 때 한탕 해야지, 언제 까지 그렇게 번역이나 하면서 낑낑거릴 거야. 소설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구? 그런 역사물은 차라리 등단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유리해. 자네 같은 사람이 제격 이라구. 원하면 몇 백 땡겨 줄 테니까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 기분도 그렇잖은데 우리 '장밋빛 인 생'에 가서 술 한 잔할까? 기똥찬 영계왔다고 오늘 마담이 전화했었어. 가서 재미 좀 보고 들어 가라구. 젠장, 언제 나 똑같은 말이지만, 돈 있으면 장밋빛 인생이고 돈 없으면 개밥에 도토리 되 는 게 세상이야. 제 발 정신 좀 차리고 잘 생각해 보라구. 밀리언 셀러, '소설 사육신!' 알았지? 한탕 하는 거야, 응?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곱씹으며 유월의 저녁거리를 힘없이 걸어가는 기생충이 보였다. 쓰레기보다 못한 명상 서적을 번역해서 독자들의 어리석음을 파먹는 기 생충. 그리고 역사 소설을 써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생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 기생충. 그것을 거부할 만한 마음 의 경계를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기생충... 그가 종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 디선가 자신의 이 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기생충이라는 생각 한 가지에 골몰한 탓에 그는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 세 번, 동일한 이름을 부르는 소 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는 넋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잠시 사 방을 두리번거렸다. 과거에서 미래로, 혹은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떨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한 여자가 나타났다. 눈꽃송이처럼, 눈꽃송이처럼... 하지만 끝내 꽃송이가 되지 못한 여자. 또다른 기생충 한 마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훈 씨 맞죠?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모습 보이게 될까 봐 무척 신경을 썼는 데... 정말 미안해요." 눈을 감은 채 나는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멎었다는 것. 정확하게 언 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뚝,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그 소리가 멎어 버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해? 그런 말에 내가 알레르기 증세를 나타낸다는 거 잊 었나?"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눈두덩이 붉 게 물든 그녀의 얼 굴을 건너다보며 별뜻 없이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심이에요." 짧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빈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앞 으로 내밀며 한잔 따라 달라는 시늉을 했다. "술이 많이 늘었군." 잔에다 술을 따르며 나는 그녀의 얼굴, 그 발그레하게 상기되었으면서도 물 기가 채 가시지 않 은 듯한 안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함초롬히 젖은 듯한 그 얼굴이 아주 오래 된 어쩐 기억, 뚜 렷하게 떠올릴 수 없는 어떤 분위기를 자극하는 것 같아서였다. 무슨 그리움인 가... 순간적으로 당 황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잔에 술이 차기도 전에 술병이 바닥났고, 그것 때 문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 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행운인가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 것을 반쯤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바라고 있는 게 어떤 종류의 행운인지 는 알 수 없지만... 모르니까 그런 데 대한 기대감이 더욱 간절해질 때가 있어요. 나약해질 때가 아니고 현실에 대해 독기가 생겨날 때... 이상하게도 그럴 때 그런 기대감이 생겨나는 거예요. 참 우 습죠?" 반쯤 남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걸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 가?" 내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 하고 있는지를 정말 모른다는 듯이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나를 건너다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술잔을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그녀와 내가 마주앉은 공간 이 조금씩 넓이를 더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다시 말해 지루함이 느껴질 때까지 그 녀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행운도 아니고 기대감도 아니고...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소망 한 가지가 있어요. 밥을 먹다 가 문득, 길을 걷다가 문득...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문득... 그렇게 문득 문득 가슴을 파고 드는 소망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내가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던 건... 그건 도 피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소망이 값싸게 치부당 하는 걸 좋아할 사 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내 소망은 자꾸만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들어 가고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 던 마지막 술잔, 그 곳에 남겨져 있던 반쯤의 술을 마저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아주 멀어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곳으 로 영원히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죽음에 대한 열망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도피도 아 니에요. 그냥 떠나 고 싶다는... 그런 소망일 뿐이에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말을 중단하고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겠냐는 그녀 의 물음에 나는 긍 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극, 북극, 아프리카... 처음엔 그런 곳을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런 공간을 정신적으로 거치 고 난 뒤에 난 마지막 목적지를 정했어요. 현실에서 밀려드는 열독이 온몸으로 퍼져나갈 때... 그 럴 때마다 난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치도록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 려요. 태양이 이글 거리고, 한낮 내내 불기둥 같은 복사열이 피어오르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겠어 요?" 묵묵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하라..."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곳이 바로 사하라예요."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낸 지명을 듣고 나서 나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하라를 꿈꾸고 있다는 게 소망과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심리적인 상태가 사하라에 이 르러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막히게 여겨진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 로 다른 상태로 7 년을 살아왔는데, 그런데도 그녀와 나의 의식이 동일한 지점에 이르러 있다는 게 어찌 기막히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사하라... 눈을 감은 채,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사막을 나는 되새겨 보았다. 그 녀에게 초극의 공 간이 되어 버린 사하라와 나의 그것은 물론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 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그녀와 나는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사하라... 아랍 어로 '황야'라는 뜻을 지닌 세계 최대의 사막. 한 때는 비가 내리고, 강이 흐르고, 초목이 무성했던 땅.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접근이 어려우며, 격변하는 극한의 기후로 인해 말라 비틀어져 가는 땅. 높은 모래 언덕과 물 한 방울 없는 광대한 지역, 그리고 점 점이 작은 암염의 언덕들이 펼쳐져 있고 북아프리카의 거의 전역을 차지하고 있는 땅. 목마름과 피로에 지쳐 죽은 낙타의 해골이 놓여 있고,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고 모래에 침식되어 사라져 버리는 땅, 죽어가 는 땅, 사하라.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수첩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었지 만, 그곳에 무수하게 적혀 있는 사막에 관한 자료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아 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사막으로 가 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사막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하라에 이르고 난 뒤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는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이상 의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가끔씩 자세를 고쳐앉으며 또다 시 시간을 에돌기 시작한 것이다.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 지만, 당연한 결과 처럼 그것을 새로운 출구로 삼으며 기분을 회복하기엔 그녀와 내가 너무 노회 해져 있었다. 지난 몇시간 동안, 그 지리멸렬했던 7년 세월을 다시 한 번 살아 버린 게 아닌가. 그 리고 높은 모래 언 덕들과 물 한 방울없는 광대한 지역,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버리는 사하라에 그녀와 나의 의식 은 이르러 있는 게 아닌가. 은애와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 유월 의 깊은 밤, 축제의 폭죽이 자취를 감춘 그 시각에 밖으로 나섰을 때, 그녀와 나 는 느닷없이 밀려 드는 최루 가스 때문에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단박에 눈물과 콧물부터 쥐어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침을 연발하며 무너지듯 내 팔을 잡았고, 나는 주머니에서 손 수건을 꺼내 재빨 리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대로가 아니라 인적이 끊어 진 골목 안쪽으로 총총히 걸어들어갔다.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것이 시 야를 어지럽혔지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또한 결정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서기 직전까지 은근히 고심하던 문제, 예컨대 이제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 야 할 것인가에 대 한 해답이 명쾌하게 내려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에 응답이라도 하듯 때맞추어 시야로 밀려든 구원의 빛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빛에 인도되 어 어둠 속에서도 용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침대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실내로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나의 품에서 벗어났다. 상황을 핑계삼아 내가 그녀를 감싸안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난 뒤부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망사로 된 커튼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창 쪽으로 나는 앉 아 있었고, 그녀는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고 몇번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 려 작위적으로 느 껴질 것 같아서 이내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적연한 가운데, 그녀와 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와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격리감이 느 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그 런 곳으로 그녀와 내가 시공을 넘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주변의 사물이 모두 해체되고 오직 그녀와 나의 존재감만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가슴이 답답해 져 올 때, 그때 등 을 보이고 앉아 있던 그녀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있잖아요..."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몹시 피 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세우며 다 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샤워하고 올게요."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곧바로 침대 위로 올 라가 누웠다. 사정 한파, 부정, 비리, 뇌물 수수 따위의 말들이 튀어나오며 텔레비전의 화면이 빠르 게 바뀌고 있었다. 마감 뉴스인가... 천근 만근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 대학생 격렬 시위, 쇠파이프, 전경 무장해제, 진압장비 소각 따위의 말들이 빠르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눈을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 았다. 시위진압대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고 쇠 파이프를 휘둘러대는 학생들이 보이고, 도망가는 학 생들을 쫓아가는 전 경들이 보이고, 무장해제당한 전경들을 에워싼 학생들이 보이고, 소각되는 시위 진압 장비들이 보 이고...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고 바람 한 점 없는 열사의 한가운데 서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은애와 내가 보였다. 경사진 모래의 능선을 넘어가기 위해 끝없이 걸음을 옮겨 놓지만, 아무리 허 우적거려 보아도 여전히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모의 사막. 손을 뻗어 아 무리 휘저어보아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와 나의 몸은 소리 없 이 모래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그녀의 이 름을 부르며 서로의 손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와 나의 몸은 더욱 빠르게 모래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그런 일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된 것일까. 이윽고 모래 위 에 얼굴만 드러낸 그녀와 내가 보이고, 보행에 아무런 장애감도 느끼지 않고 유유히 그곳을 지나 쳐 가는 일단의 무 리가 보였다.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교사, 공인중개 사, 제과점 주인... 그들이었다. 그들이 대열을 이루며 빠르게 모래의 능선을 넘어간 뒤에, 곧이어 그 능선을 넘어 여 러 마리의 전갈들이 떼를 지어 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띤 갈색의 등이 햇빛에 번쩍거 리고, 그 두흉부와 복부가 느닷없이 부풀어오르고, 입 가까이에 달라붙은 거대한 집게가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을 출 때...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와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를 분명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고 모래에 침식되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리 는 땅... 사하라에서 그녀와 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잠에서 깨어난 뒤에 나는 정신없이 사방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막, 태양, 모래의 능선,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 전갈 따위들이 너 무나도 생생하게 눈앞을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튼, 텔레비 전, 침대, 주전자 따 위를 식별하고 난 뒤에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고 나 서 고개를 돌려 옆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내 옆자리에서 은애가 단정한 모습으로 잠을 이루 고 있었다. 의식이 비로소 현실감을 회복하는 걸 느끼며 나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 다. 그녀를 만난 이 후에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던 평안이 그 얼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아주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 왔다. 그리고 침대 옆에서 서서 다시 한동안 은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몇시간 전, 그녀의 함초 롬히 젖은 것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느꼈던 알 수 없는 그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 을 수 있을 것 같 았다. 7년 전 그때, 꼭 한 번 그녀와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상처 속에서 도 꽃이 필 수 있 을 거라는 말을 나누며 오래오래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던 밤... 그날밤 나는 그녀의 젖은 얼굴이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그리움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런 기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 우리... 우리 있잖아요... 라고 꺼냈다가 이내 거두어 버린 그녀 의 말이 무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무엇을 말 하기 위해 그녀는 그토록 머뭇거렸던 것일까. 희미한 조명등 속에서 흰빛을 발하며 단아하게 떠 오르는 그녀의 얼굴 을 내려다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저려 오는 것 같아 아주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리 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어떤 구원의 메시지도 나에게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주 조용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침이 오면 또다시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는 눈물짓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지난 7년 세월의 기억으로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치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그러 다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또다시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버리는 땅, 사하라를 꿈꾸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어 째서 내가 그녀를 불모의 사막에 버려두고 혼자 떠났는지, 어째서 7년 만의 해후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 는지... 그것을 깨달으며 지금 이 순간의 내 심정을 조용히 되새기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어둠이 빼곡 들어찬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온 뒤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구원 의 빛처럼 그녀와 나를 인도하던 네온사인, 그것이 여전히 허공에서 빛을 발하 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것은 구원의 이미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는 외딴 세상 한가운데 세워진 생경스런 이정표처럼 보였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아주 잠시 멈추게 하는 이정표... 그것이 사막의 밤하늘에 떠오른 쓸쓸한 이정표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이정표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빌며 총총히 걸음을 옮 겨 놓기 시작했다. 새벽이 시작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광상 서정인- 1936년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사상계'에 단편 '후송'을 발 표하여 등단. 한국문 학작가상(1976) 수상, 장편 '달궁'으로 월탄문학상(1984) 수상, 한국일보 창작문 학상(1986) 수상. 소 설집 '강' '가위' '철쭉제', 장편소설 '달궁' '봄꽃 가을 열매' 해설-정과리 '철쭉제'에서부터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서정인의 문체 실험 은 소설사적 사건에 값한다. 그의 '문체학'의 주 장치는 서술의 전 음역에서 폭넓게 작동하고 있는 특이한 이음법이다. '말꼬리 잇기'라고 이름붙힐 수 있을 법한 그 특이한 이음법은, 하나의 단언을 던지고는 그것을 배반하는 단언을 뒤잇게 하는 기본 형식을 연속적인 사슬로 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때 이 단언들의 사슬은 상반된 두 견해의 대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 단언 에 대한 비틀기, 가 지치기, 꺾꽂이 등 종잡을 수 없는 변이로 나타나는데, 그 말잇기가 담론 단위 가 아니라 문장 단 위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비밀이 놓여 있다. 언어학적 관점에서는 문장은 최후 의 언어 집합체이지 만, 서술학의 관점에서는 문장은 최초의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무한한 이야기 나무들로 자랄 수 있는 불확정의 씨앗이다. 그 최초의 씨앗이 간단없이 비틀리고 가지를 쳐서 엉 뚱한 또하나의 씨 앗으로 변형되어 버린다. 그러니, 이야기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잡설로 무성 해진다. 그의 소설 은 요설일까? 그러나, 실제로 그 말꼬리 잇기는 일관된 하나의 주제에 의해 섬 세하게 맥락을 이 루어 이야기의 한 단락을 직조해내면서, 다른 단락과 유사 인접의 연관을 맺 어서 더 큰 주제의 맥락을 이룬다. 그렇다면, 일관된 주제를 뒤죽박죽으로 흩어놓는 말꼬리 잇기의 효과란 도대체 무 엇이겠는가?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삶의 다양성을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편협한 사유이며, 그 이 데올로기적 양태로서의 중심 신화이다. 말꼬리 잇기는 범주들의 변이를 통해 우리의 삶 구석구석 에 침투한 중심 신화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항목들의 다양성을 제시해 중심(이라고 착각 되는 것) 외에 얼마나 다른 것들이 풍요롭게 살아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중 심을 비틀어 주변 으로 일탈하고 주변들의 우화를 거쳐 다시 중심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드러나 면서, 주변 중심을 부재시키고 삶이란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 관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환기시 키고 있다. 모든 것 들은 서로 다르게, 그러나 하나로 유장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그의 문체학의 또하나 의 특성인 판소리체의 광범위한 활용과 맞닿고 있다. 그 판소리체는 환경학적 으로는 칸칸이 구획 된 도시에 대해 첩첩이 이어진 산을 제시하는 것이며, 윤리학적으로는 부황한 세태 좇기에 대항 해 주변머리 있는 올곧은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고,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의 비 좁은 세계를 뚫고 집단 무의식의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궤도에 놓인다. 그러니, 그의 야심에 놀라 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문화의 대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안 꿈 꾸기가 주변중심주 의라는 역설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겠는가? 놀랍게도 작가는, 부단히 대안의 세 계 자체를 객관성 의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의 문체학의 세번째 특징이 되는 인칭의 독특한 사용은 바로 그 자 기 객관화의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광상 전세방 "계약 안 하시겠어요? 방 없어요. 이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앞으로 날이 풀리고 이사철 되 면 값 또 올라요." "그래, 고생했지? 왼종일 근무허고 피곤헌디 방 둘러보니라고 욕봤어. 방 알아 보기가 보통 고생 인가. 내가 한번 봤으면 쓰겠는디, 서울 한 행비가 어디 쉬워야 말이지. 하루 품을 버리는 것은 좋은디, 다음날까지 여독이 안 풀려서 이틀, 사흘을 날리거든." "오늘 계약금 건네기로 했거든요. 하루 이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할 수야 있겠 지만, 이것 놓치면 한, 두 달 또 고생해야 돼요. 앞으로 갈수록 방 구하는 사람들은 많아져서 더 힘들어요. 지하철 역에서 십 분도 안 걸려요. 시장 가깝고요. 이 정도 교통이면 지금도 비싸지 않 아요." "계약금은 백만원이면 될까? 안 되겄지? 일할은 줘야지? 등기부 열람은 안 해도 정말 괜찮겄 어? 전세권 근저당 설정허는 디도 돈 들겄지? 거기 관할법원이 어딘가? 남부지 청인가? 등기소가 따로 있어?" "그런 건 중개인이 알아서 해요. 그래서 다 허가받고 간판 내걸고 영업하지 요." "참, 복덕방 구문도 챙겨야지? 얼마나 달라고 헐까? 꽤 되겄지?" "중개료는 내무부 고시로 요율이 정해져 있어서 뻔해요." "뻔해? 사람 봐감서 더 받고 덜 받고 안 허고? 전국적으로 같을까? 여기서는 삼천만원에 십오 만원이라는 것 같어." "서울은 지방보다 요율이 쫌 높을지 모르지요." "지방이라니, 어느 지방? 서울은 지방 아니야? 서울, 경기지방, 가금 흐리고 한때 비. 서울시청 은 지방관서고 서울시장은 지방장관이야. 도지사나 평야 마찬가지. 인구가 많다 고 특별자를 붙여 줬을 뿐이야." "여전하시군요. 서울공화국에 사시면서 힘 안 들어요?" "시외 통화가 길어졌어. 내가 가 보든지 돈을 보내든지 허지. 고생했어." "올라오면 전화해요." "올라오다니, 서울이 산꼭대기여?" 그는 전화를 끊었다. "어디 등산 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정씨가 시비조로 물었다. "먼 산? 등산? 누가?" "가까운 디 산 놔두고 왜 먼 디 산 가요? 여기는 산도 없소? 산도 사람겉 이 서울 산만 산이 요?" "산이 없다니, 누가 그래? 조선팔도에서 국립공원을 넷씩이나 끼고 있는 디가 여그 말고 또 어 딨어? 국립 말고는 또 산 없어? 국립산들 유명해서 모른 사람 없을 테니 누가 굳이 나선다면 쓸 디없는 군소리라, 국립 아닌 명산들을 어디 한번 외 보는디, 장서 장계 장안산은 능선에서 아득하 게, 남쪽으로 바라보면 천왕부터 반야까지, 지리산맥 연봉들이 한눈으로 들어오 고, 덕소골로 흐른 물이 방화 반앙 절경되니, 팔성암에 논개사당 팔공산이 우뚝하다. 민주지산 삼도 봉은 전북땅이 경 북 충북, 삼북도를 만났구나. 진안 방곡 운장산은 험허기도 하려니와, 한쪽에는 대불이요 딴쪽에 는 은천이라, 산협호수 대아 물은 맑고 곱고 깊고 길다. 키만 크면 제일이냐 표 고 일천 밑으로도, 돌올하고 영검헌 산 높은 산들 못지않다. 완주 운주 대둔산은 사철 전국 관광 지요, 말ㅈ 같은 마 이산은 숫바우에 암바우라, 백일 정성 불임치료 열흘 치성 득남인디, 요즘 것들 물색없다 탑사 경 내 물론이요, 영산 일대 어디서나 자리잡고 고성방가, 술 마시고 춤을 추니 유 흥지가 따로 없다. 만덕산에 청량산은 전주 동쪽 명산이라, 톱날 같은 꼭대기가 동녘으로 기울으 면, 월상 위로 곰티 재가 구절양장 굽어 있고, 남녘으로 내려오면 의암 마치 다 지나서, 신리 남관 훤히 남도 삼백 리 길 뚫려 있고, 송광 위봉 청량산은 야트막한 산중턱에, 찌그러진 절간이며 꼭 대기에 빈 절터가, 한갓지고 조용허고, 굽어도는 골짜기에, 두릅나무 새순들이 술안주로 일품이라. 임실 순창 회문산 은 호남벌의 험산이니, 왕년 난리 한창일 쩍 산사람들 의지였고, 익산 미륵 김 제 모악 정읍 두승 전주 고덕, 하나같이 평지 돌산 갈재 노령 줄기로다." "반야심경 외우시요? 부처님전 공을 들여, 쌩돈 염출헐 량이면 없는 살림 옹 색헌디, 그것 아니 좋으리요 하루죙일 염불해도, 군소리를 안 허리다 치던 탁 어찌했소?" "허허 벌판 솟은 산은 낮은 산도 험준허다, 산악지대 고산준령 시작부터 높았 구나." "불전공양 맨입으로 소원성취될 량이면, 심봉사가 불쌍헌 딸 물구신 밥 던졌 겄소? 신식으로 새 벽 기도 예수님전 빌어 보소." "얕은 데서 시작헌 산 키 작다고 시퍼 마라, 원근 기운 모았으니 높은 데에 산 들겉이, 오르기도 험커니와 정기 또한 빼어났다." "예배당은 연보전에 잠자리채 없을라고. 돈 마련도 안 해놓고 셋방부터 부탁 했소? 집 볼라고 다니기가 이녘 일도 귀찮거늘, 바쁜 시간 틈을 내서 애쓴 보람 헛것이요?" "누가 몰라, 고생헌 줄? 돈 없다고 방 못 얻냐?" "이 냥반이 돈 몇푼에 넋을 놓고 실성했나, 돈 없으면 말아야지 빈손으로 집을 얻소?" "빈 주먹은 무엇이고 쥔 주먹은 무엇인고? 필요헐 때 살아라고 집도 있고 방 도 있지." "인자 본께 숭악허요 당신 속셈 으뭉허요. 강도 심보 따로 없고 동냥 치가 씨 가 없소." "인민들은 마음대로 평양 가서 못 사는디, 국민들은 언제든지 서울 가서 살 수 있다. 자유주의 국가라고 민주시민 권리 좋다, 남도여창 빈민굴도 거주이전 자유로다." "누구 언제 남도했소? 빈민굴 속 판자벽이 비바람을 막아 줬소? 이만허면 양 반이요." "임자 말이 장히 옳다, 있는 놈들 웃겼지만, 우리 살림 이만허면 중상류는 안 되겄냐." "부자들을 웃길라요 있는 집을 씀씀이며, 꾸며 놓고 사는 것을 듣도 보도 못허 겄소?" "우리보다 더 못사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 졸부놈들 잘사는 것 아예 쳐다보도 마라." "숫자 많은 개미 떼만 당신 눈에 들어오고, 별천지에 사는 인생 다른 인종 안 보이요?" "이 정도로 사는 것도 이미 도둑 충분허이." 자폐증 왜 안 나가냐고요? 자동차 운전수가 그를 치여 죽일라고 헌단 말이요. 자동 차 전용도로도 아니 고, 차도 인도 구분된 길도 아니고, 동네 가운데 골목에서 차를 시속 육십 킬로 로 몰면 살인 예비 음모 아니요? 사람이 오는디 비키거나 멈추거나 속력을 늦출 생각은 않고 비 키라고 빵빵거리면 이건 살인미수 아니요? 대형 승합차가 골목을 꽉 막고 달라들면 피할 데가 없 어요. 종점이 돼서 승합이 주택가에까지 끼대들어오요. 그도 가야헐 것 아니요? 차만 바쁘요? 사 람 팔꿈치 옆을 지 날 때에는 안 닿더라도 천천히 가야지요. 걸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겄소? 한 번은 문짝을 발 로 차 버렸소. 운전수는 물론이고 승객들도 흥분해서, 저것 가만 놔두면 안 돼, 맛을 보여 줘야 돼, 하고 삿대질들을 했소. 그는 운전수한테 끌려서, 아니, 그가 운전수를 끌고 파출소로 갔소. 둘 다 의기양양해서 파출소로 들어갔단 말이요. 그들의 말을 듣고 난 파출소장은, 파출소에는 딴 직 원들은 다 나가고 없고 소장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디, 운전수를 내보내 고 그한테 한바탕 훈시를 했소. 아니, 여보시오, 그같이 하자면 세상에 힘센 소가 왕 하겠소. 힘없 는 사람 어디 살겠 소? 그는 그의 직업허고 나이를 묻고 그를 방면했소. 훈계를 듣는 동안 챙피허 고 겁이 나서 맞고 소에 운전수만 내보낸 것도 운전수가 그것 보란 듯이 그보다 먼저 건방지게 그 를 째려보고 파출 소를 나간 것도 아무렇지 않더니, 무사히 파출소를 빠져나오자 다시 심통이 터 졌소. 경찰이 시민 의 불편을 외면하다니. 아니, 불편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모른 체하다니. 경찰 은 업자 편이었소. 회사 차한테는 교통도 딱지를 안 뗀다요. 사장이 철따라 공적으로 조직적으로 요로에 손을 쓰기 때문이요. 고속승합은 고속도로의 무법자고 시외직행은 국도의 난폭자요. 그것 들은 기분 나쁘면 작은 승용차들 정도는 추월허면서 길어깨 쪽으로 밀어붙여 버리요. 발로 찰 수 도 없고, 쫓아가서 잡을 수도 없고, 방법은 하나, 우선 치미는 분노 누르고, 회사 이름 기억했다 가, 언제고 그 회사 차 탈 날이 없겄소? 예리한 스위스제 주머니칼로, 칼이 없을 때는 손톱으로 할퀴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요. 목욕탕은 왜 목욕합니다 두 쪽 간판을 길거리에 내다세우요? 길 이 목욕탕 땅이요? 푸줏간도 내다세우요. 음식점도 금일 개업을 내다세우요. 어떤 경양식 집은 음식 식단을 내다세우 요. 다방도 내다세우고 학원도 접수중을 내다세우요. 좁은 인도는 걸어갈 틈이 없소. 자동차까지 기어올라와서 주차를 허요. 신고헐라고 파출소에 갔더니, 아니, 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보았더니, 거기도 사람 다니는 길 위에 두 쪽 간판이 세워져 있었소. 더 컸소. 무슨 뭐 길 가에 침 뱉지 말고 휴지 버리지 말고 꽁초 던지지 말고 열 잘 스고, 뭐 그런 주의였을 것이요. 그 대로 안 허면 벌금 이 몇만원이라는 협박이었을 것이요. 아니, 길을 제도적으로 항구적으로 무단 점 용허고도 아무 탈 이 없는디, 담배꽁초며 가래춤이 땅을 차지허면 얼마나 차지헌다고 돈을 무요? 쪽간판 발로 찼다 가, 아니, 그것에 발길이 채였다가, 그것 안 건들고 길을 갈 수 있간디요? 파 출소까지는 안 끌려 갔는디, 주인헌테 혼이 났소. 포장마차는 또 어찌요? 영세민이요? 생활보호 대 상자요? 자가용 타 고 와서 영업허요. 고난도 가족 몰고 와서 뒷문 열고 해물감 꺼내요. 어두워지 면 와사등 키고 남 의 눈치 봐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포장자락 펄럭이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밀고 다녀요? 아 예 포도 위에다 천막 끝을 세면못으로 쳐서 넉넉허게 고정허고, 인근 관아나 민가에서 십 미터고 이십 미터고 줄을 끌어다 전기를 키고, 해도 아직 덜 빠진 벌건 대낮에 진설 을 허요. 실뱀 겉은 굵은 피복선이 길게 길 위를 구불구불 가로지르고 땅바닥에 찰삭 달라붙어서 뽁뽁 기요. 그것은 밟으면 발바닥 밑에서 꿈틀거리요. 그것에 발부리가 걸려서 넘어질 염려는 없지 만, 해거름에 그것 이 한쪽 구석에서 틀고 있던 또아리를 풀고 슬슬 기어나올 때는 더러 지나는 사람 발목에 감기 요. 행인은 징그러워서 발길을 힘차게 내뻗었소. 전깃줄을 끌어 내고 있던 중년 사내가 용수철에 튕긴 것처럼 벌떡 일어서서 그 행인한테 달라들었소. 그가 거칠게 항의하지 않 았더라면 그는 아 마 그 도로무단 점용자한테 멱살을 잡혔을 것이요. 가볍게 튼튼한 야구방맹이 를 휘두르고 다니든 지 수첩하고 필기루를 끌적거리고 다니든지 해야지 무서워서 어디 길을 걸어다 닐 수 있소? 승용 차고 영업차고 짐차고 간에 불법 쌍경적 좀 안 달았으면 좋겄소. 사람 정기나 요. 간 떨어진단 말 이요. 합법 경적도 경적 금지구역에서는 불법이요. 비키라니, 누구보고? 지가 비켜가면 안 돼요? 비킬 수 없으면 천천히 가고, 천천히도 안 돼면 서야지. 또 경적은 긴급 수단이 지 초인종이 아니 요. 왜 집 앞에서 빵빵거려요? 그는 자동차란 자동차는 모두 다 와작와작 씹어 먹었으면 시원허겄 소. 그 같은 사람은 경찰서나 군부대나 수용소나 감옥소에 갇혀 있는 것이 속 편했소. 그는 자유 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소. 왜 싸우냐? 왜 나가서 시비냐? 왜 밖에서 박치기 아니면 집 안에서 두문불출이냐? 나가고 사이 좋을 수 없냐? 둘 다 헐 수 없냐?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안 되냐? 비우에 안 맞더라도 참고, 참을 수 없으면 못 본 체하고, 못 본 체헐 수 없으면 밖에 나가들 마라 고 안 허시요? 그것이 그의 해결이요. 나갔다 허면 참을 수 없소. 참을라면 안 나가요. 안 나가는 탓허지 마요. 차이는 참고 못 참고요. 참으면 나가고 못 참으면 안 나가요. 똑 같은 것을 누구는 참고 누구는 못 참냐? 참는다고 자랑 말고 못 참는다고 숭보지 마요. 감수성 차 이요. 눈ㅂ기 문제 요. 없으면 몰라도 있는디 왜 못 보요? 못 보는 것이 잘못이지 보는 것이 잘 못이요? 있는 것이 죄지 있는 것 보는 것이 죄요? 뭐요? 국가 민족이요? 하, 그는 그 한몸 주체허 기도 벅차요. 사회 허고 인류는 좀 기다리라고 헙시다. 예? 용서요? 관대요? 동료 인간에 대한 연 민이요? 눈ㅂ기 그의 아우는 그헌테 없는 것을 다 가졌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하지만 그 의 경우 그 반대였 다. 그가 보통이라면 그의 아우는 수재였고, 그가 수재라면 그의 아우는 천재였 다. 그는 반 수석 은 여러 번 했지만, 학년 전체 수석은 한 번도 못했다. 그의 동생은 전체 수석 을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영리헌디 게을렀거나 노력은 허는디 두뇌가 둔했다. 그의 동 생은 머리고 뛰어 나고 공부탐도 많았다. 대학은 그런 사람이 가야 했다. 그의 집 형편은 그가 대 학에 진학을 헐 무 렵에도 됫박쌀을 팔아 먹을 만큼 어려웠지만 그때는 양친이 구존했다. 성준이 가 고등학교를 졸업 했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대부분 의 부모들과 마찬가 지로 자식 교육열이 대단해서 소 팔고 논밭 팔고 팔 것이 없으면 빚을 내어 자식들을 가르쳤다. 당신은 변변히 입을 옷 한 벌이 없었다. 그가 대학 삼학년 때던가, 그는 아버지 와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성년식이었다. 아이에서 어른으 로, 종속에서 독립으로, 순진에서 경험으로, 무지에서 지식으로의 통과제식이었 다. 그것은 껍질깨 기였고, 하극상이었고, 반란이었다. 그것의 괴로움은 그에게 지금껏 남아 있었 다. 그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이제 옛날의 그의 나이가 된 그 자신의 자식들에게서 돌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그날도 그는 항시 그러시는 것처럼 늦게 들 어오셔서 아랫목에 묻어 둔 상밥 차려 내온 저녁상을 받으셨다. 그의 반주는 성호가 기억할 수 있 는 아득한 옛날부 터 대두병 소주에 위장 보호를 위해서 잘게 저민 생강 조각들을 병바닥에 소복 이 쌓이도록 가미 한 것이었다. 아래채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 편의와 영광의 삶이냐 원칙 과 고난의 삶이냐 로 며칠째 고민하고 있던 성호가 불려갔을 때는 복지께 뚜껑에 찰찰 넘쳤을 술 이 반 너머 줄어든 다음이었다. 그의 부친은 밥그릇 뚜껑에다 술을 잡수셨다. 그는 놋그릇 뚜껑을 열고 거기에 서린 김 물방울들을 쏟았고, 성호의 어머니가 술을 따랐을 것이다. 성호는 상머리에 앉은 어머니 옆에 아버지를 마주 대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섣달 그믐께 기왓가루로 닦은 유기 밥그릇 뚜껑은 검 붉게 변색되었고 알알이 밥알자국이 나 있었다. 그 그릇은 그에 낯익었다. 그의 아버지가 안 잡숫 거나 덜 잡수면 그 그릇의 밥은 그들 차지였다. "편히 앉아라." 그의 아버지가 잔을 쭉 비웠다. 마른 그의 어머니가, 아이고, 저 냥반 빈속에 저렇게 깡술만 마 시면 어찐다냐, 하는 얼굴로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 다. 그에게 자식들 은 안주였다. 그들은 그의 밥상머리에서 꿇어앉아 그의 훈계를 듣는 것에 길이 들었고 그는 그것 이 큰 낙이었다. 그들은 붙잡힌 시간이 길면 긴 대로 풀려 나와 자유의 몸들 이 되었을 때, 서로 마주보고 씩,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짧으면 짧은 대로 뜻밖의 행운에 은밀 한 미소를 나눴다. 그날 밤 그의 부친은 오래간만에 행복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앞에는 몇달 만에 서울 유학에 서 방학을 만나 귀성한 아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가 지금 몇학년이냐? 삼학 년, 그래 삼학년이지. 벌써 삼 년이 흘렀냐? 세월 참 빠르다. 쏜살같고, 전광 같 고, 석화 같다. 인 자 일년이 남았다. 그렇냐? 그럴 학교에 넣어 놓고 사 년 저쪽이 얼마나 가마 득했었냐. 그 동안 고생을 더한 것도 아니다. 살림에 주름살이 더 진 것도 아니다. 묵은 살림에 무 엇 좀 들고났다고 무슨 흔적이 나겄냐? 그가 대학 졸업허는 것만 자산으로 굳었다. 꼭 공짜 같다. 무엇 같다면 그것은 비싼 무엇이 아니었다. 아버지한테도 아들한테도 그것은 거저가 아니라 비 싼 경험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몇 대학 보내기에 남은 땅뙈기 다 팔고, 집기 둥만 덜렁 남았는 디. 여기저기 빚 얻는 것도 한두 번이고, 친구도 있을 때고 비슷헐 때 친구지, 좁은 바닥에서 안 면이나 옛정이 언제까지 보증이 될 수 없었다. 일년 전이던가, 그가 삼학년이 되었을 때 그의 아 버지는 그를 데리고 양복점으로 갔다. '양복 만들기 삼십 년'이 되는 그의 아버 지의 친구가 경영 하는 가게였다. 그는 그의 옷이 외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눈치챘던가, 그 의 아버지가 가게 주인의 대화에서? 그 외상이 오래간 것도 그는 그때 잘 몰랐다. 그때 그의 아 버지는 엉덩이를 기 운 바지를 입고 살았다. 고생은 아들도 했다. 처음 형제가 방을 얻어 자취를 했는데, 월말이 되면 더 러 돈이 떨어졌다. 고지식하고 주변머리 없는 그는 밥을 굶고 학교를 갔다. 그에게는 밀가루 음식 한 끼, 제과점 풀 떡 몇개 살 돈 변통할 재간도 없었다. 차라리 큰돈 같으면 빌려달라는 입이 더 쉽게 떨어졌다. 고 픈 배를 참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창피하지는 않았다. 시 계가 전당포로 가 고 사전이 헌책방으로 갔다. 그때 그들은 단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몰랐다. "남은 일년은 집에서 다녀라."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예? 집에섭니까?" "등록만 허고 와 있다가 시험 때만 얼렁 댕겨오니라. 어디 강사 자리 없는가 모르겄다." 졸업장 그때는 그런 때였다. 아니, 그런 때가 막 끝나는 때였다. 그런 때가 한창일 때는 정작 사람들이 그런 때의 성질을 잘 모르다가, 끝날 무렵에 오히려 소문이 퍼져서 더 악명이 높았다. 재학중에 강사 하는 것은 보통이고, 더 형편이 어렵거나 재주가 좋은 사람은 아예 졸업 장을 돈 주고 샀다. 그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도 그럴 생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휴학을 하고 한 일년 어디 강사 자리 구해서 등록금을 장만할 작정이었다. 집안 형편을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한 해가 그의 집한테는 당나귀의 허리를 부러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 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돈벌이 궁리를 하던 그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말씀하 신 한 교육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사촌인가 뭔가 되는 사람으 로, 그의 어머니한 테는 임의롭고 가까웠지만 그한테는 사돈의 팔촌쯤 되는 멀고 어려운 처지일 뿐 아니라 전혀 안 면이 없었다. 그 사람은 군산의 한 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그를 찾아갔다. 그 것은 무모하고 당 돌했지만 그는 그것을 몰랐다. 생전 처음 서울서 군산까지 시외직행을 타고 하 루 종일 달렸고 시 변두리에 있는 학교를 물어서 물어서 찾았다. 그가 학교에 닿았을 때는 땅거미 가 졌다. 교장은 학 교에 붙어 있는 학교 관사에 있었다. 그가 그의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신원을 밝히자 그는 반색했 다. 그가 용건을 꺼냈다. 그는 머리가 훌렁 벗어진 신수가 훤한 초로의 신사였 다. "삼 년 수료라고? 우선 졸업부터 하게. 여긴 초등교사 배출허는 교원 양성 전 문기관일세. 졸업 을 하고 자격증을 딴 사람도 초임으로 발령받기가 힘든 곳이네. 형편이 어렵고 고생이 되더라도 하던 학업을 중단하지 말고 끝을 내게.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일세. 공부에도 때가 있어. 젊어서 면학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어려워. 요즘 같은 어지러운 세상에 편케 대학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작게도 기대하지 않았고, 교장의 말은 모두 옳았 지만,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낭패감을 느꼈다. 몰래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어서 오게. 잘 왔네. 마침 그 과목 담당교사가 유골세. 내일부터라도 출근할 수 있겠나?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그 자신의 저돌적인 어리석음의 확인인지도 몰랐다. 그는 날이 저물었지만 집주인이 간곡 하게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고 되짚어 나왔다. "차라리 학교를 쉬겠습니다." "뭐라그냐? 학교를 쉬다니, 졸업 안 헐래?" "공부도 안 허고 졸업허면 뭘 허겄습니까? 그런 졸업은 안 헐랍니다." "책 가지고 여그 와서 공부허면 안 되냐? 김또또네 두째도 지난 학기 내내 집에 와 있었다. 월 암 선생 자제도 그랬다더라." "마지막 남은 한 해를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졸업 안 허겄습니다." "뭣이 어째?" 마침내 그의 아버지의 분통이 터졌다. 그는 술이 남은 놋쇠 밥그릇 뚜껑으로 상바닥을 내리쳤 다. 술이 튀었다. 그의 어머니가 애원하면서 그의 아버지한테 매달렸다. "뭣이라고? 학교를 안 다녀? 졸업을 안 해? 하, 이, 이것이 삼 년 동안 대학 갈친 끄트머리냐? 사람들이 충고하더라. 자식 갈쳐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절대 무리허지 마라고, 나중 후회헌다고. 나는 반대했다. 이것이 그 끝장이냐? 대학 문 앞에도 안 가 봤으면 야, 야. 큰일 나겄다. 많이 배우 면 뭣 허거이냐, 인간이 돼야지? 사람 못된 것 갈쳐 봐야 말짱 헛일이다. 인간 다운 인간될라고, 사람 노릇 헐라고, 학교도 가고 공부도 헌다. 사람될라고, 사람." 그가 뭐라고 입을 들석거릴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를 방 밖으로 밀어 냈다. 그의 아버지 는 계속해서 노호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 다. 더구나 그에게 그렇게 격분하신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그에게 꾸중을 들은 적도 별로 없었 다. 아들은 착실했 고 아버지는 과묵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불만이 있었다면 그가 공부를 잘해서 였다. 공부만 잘허 면 뭣 허기이냐? 인간이 인간답지 못허면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는 후 미진 거름자리 뒤 컹컴한 곳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소리 죽여 울었다. 공부만 잘허면 뭣허냐는 공부만 허면 뭣허 냐고, 공부만 허면 뭣허냐는 공부만 허고 딴 것을 못허면 공부도 못헌다였다. 그는 사실 공부를 잘허지 못했다. 잘헐라고 애를 썼다. 그는 아마 공부를 잘허면 딴 것도 잘헌다 고 믿었다. 딴 것도 잘허지 못헌다면, 공부 잘허는 것이 딴 것 잘허는 것보다 더 중요했고, 적어도 딴 것 잘허는 것 만큼은 귀중했고, 딴 것 잘허는 것에 상관없이 가치가 있었다. 공부 잘허는 것 은 모든 가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고, 가장 가치가 있지 않다면 딴 일들 못지 않게 가치가 있었 고, 딴 일들만큼 가치가 있지 않다면 적어도 딴 일들과는 관계없이 가치가 있 었고, 딴 일들을 못 해도 공부만 잘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얼마든지 훌륭했다. 그가 이룰라 고 애쓰는 것의 완 성이 그것만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니,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멀리서 가마득 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그는 처량허게도 겹으로 가치가 없었다. 그가 얻을라고 허는 것은 못 얻 어도 바보였고 얻어 도 바보였다. 얻으면 더 바보였다. 가치가 없는 것을 얻는 것은 못 얻는 것보다 더 미련했다. 멍청이가 될 염려는 없었다. 그는 그가 이룩하려는 것이 결코 이룩될 수 없 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못 이룬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좋았다. 이룰 수 없는 것이라 하더 라도 못 이룬 것은 못 이룬 것이다. 이뤄도 미욱허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행동을 비 난할 수는 있어도 뜻은 욕할 수는 없었다. 행동은 그것의 성질상 불완전했지만 뜻은 완전했다. 온 전한 것은 아무리 사소하고 유치하고 비근하고 초라해도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을 달리는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없는 풀 한 포기, 그늘에 핀 꽃 한 송이, 발길에 채 이는 돌멩이 하나 를 봐라. 그것들은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는 그를 위한 그의 아버지의 노고와 그에 대한 기대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고, 저버린 적은 더구나 없었다. 적어도 없다고 생각했다. 편법으로 졸업장을 따는 것보다는 원칙 대로 졸업을 하는 것은 그의 욕심이기 전에 그의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의 부친은 모로 가도 어 디만 가면 그만이라 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졸업장만 손에 쥐면 된다고 생각헐 만큼 대학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 지 않았다. 하도 어려운 시절이라서, 조금 부족하더라도 끝을 맺는 것이 좌절 하여 중동무이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혼란한 세태를 정직하게 살면서 그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 다. 학비를 더이상 어떻게 마련하느냐. 그의 아버지는 지쳤다. 결국 돈문제였다. 돈이라면 그도 나 름대로 연구가 있었다. 돈 때문에 그가 그의 아버지한테 대들고 대항하고 반대 한 것이 아니었다. 등록금 해 달라고 아들이 아버지한테 깡놓은 것이 아니었다. 화산은 돈 때문에 폭발했지만, 그나 그의 아버지가 화가 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배신감 때문이었다. 허탈함 때문이었다. 아버지 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이회전 없었던 것을 놓고, 적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부자가 터뜨린 갈등은 아들이 거름자리 에 가서 남몰래 흘린 눈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입영 통지서가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의가 적절치 못했다. 군입대는 그의 대학 사년차를 위한 계획들 중 마지막 제 3제안이었다. 첫째 는 물론 학업을 순조롭게 계속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휴학하고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고, 그 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때 세번째가 입영이었다. 그는 신문에서 우연히 육군간부 후보생 모집광고 를 보고, 아차, 이것이구나, 했다. 그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것은 그때까 지는 전혀 남의 일 이거나 딴 세상일이었다. 그는 곧장 서류를 갖추어 응시했다. 자격은 고졸이었 다. 뭐, 간부보? 친 구들은 웃었지만 그는 웃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 었다. 그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그는 면접 전날 술을 마시고 학교 앞 다방에서 방뇨하다가 휴가 나온 육군 사병과 쌈을 벌여 눈텡이가 퍼렇게 부었다. 흉조였다. 그는 안대를 매고 면접 장소에 나갔다. 시험관 준 장이 왜 눈이 그러냐고 물었다. 그는 다래끼가 났다고 둘러댔다. 시험관이 안대 를 벗어 보라고 했 다. 그는 그렇게 했다. 장군은 부스럼과 타박상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세번째 단계는 신원 조회였다. 신원 조사는 하사가 나왔다. 진술서를 여러 통들 써주고 본적지에 와서 기다 리기 여러 날들 만 에 형사 같은 청년이 하나 그를 찾아왔다. 그는 특무대에서 왔다고 그의 신분 을 밝혔다. 그가 덜 덜 떨자 하사가 왜 그렇게 떠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군인은 그가 특무대원이 무서워서 떠는 줄 알았다. 장교 될 사람이 하사가 무서워서 떨겄냐. 3차 최종시험이라 긴장이 돼서 조금 흔들렸는갑 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처음 흥분이 가시고 그가 침착을 되찾자, 이번에는 그 가 떨지 않는 것이 군인헌테는 야속했다. 미리 장교 기분 내냐. 아직 민간인 신분이었다. 장교가 될라면 먼저 사병이 되어야 했다. 민간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 한번 가 봐라. 훈 병헌테 하사는 가물 가물 높아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논산 개판을 졸업하고 상무대 강훈 련을 살아남고 임관 이 되어 군인이 될 때쯤이면 그는 군복 벗고 민간인이 되어 서울거리를 활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역시 잠자코 있었다. 그가 군인이 되고 그 앞에 앉아 있는 특무대원이 민 간인이 되다니, 그 것은 뽕밭이 바다가 되는 것만큼이나 가마득했다. 하사는 차 한잔과 담배 한 갑 을 대접받고 갔다. 상전벽해는 십년이 아니라 넉달이었다. 두엄더미 뒤에 숨어서 운 사건이 있은 지 며칠 뒤, 군대에서 최종통지서가 왔다. 입영 일시와 집결지가 적혀 있었다. 집결지는 용산역이었고 날짜는 일주일쯤 여유가 있었다. 그는 마음이 착잡 했다. 지원을 했을 때는 군대에 가려고 했지만 막상 입대가 눈앞의 현실로 발 등에 떨어지자 그만 두고 떠나야 할 생활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다. 어쨌든 군대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패배냐, 포기냐, 연기냐, 성장이냐, 의무냐 애국이냐. 무슨, 나라 사랑까지는. 법을 지키 고 기피자가 안 되 는 것은 시민의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아니, 최대한이 못 될 것은 또 뭐냐? 젊 음을 삼 년씩이나 바치는 것이 애국 아니면 무엇이 그것이냐? 치부? 명성? 그는 그날 밤 친구들 둘과 술을 마셨다. 구멍가겐가 그들 중 하나의 집인가에서 그들은 소주 대두병 하나를 비웠다. 말 하자면 그의 무운 장구를 비는 모임이었다. 셋 중에서 하나는 술을 못했고, 나머지 둘 중에서는 그가 더 술꾼이었 다. 그는 적어도 반 병을 마셨다. 그때 그들이 기고만장해서 무엇을 떠들었는지 그의 기억에 없었 다. 그가 누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술을 마셨는지도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그들은 통금고동이 분 뒤 에야 헤어졌다. 그가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비틀거리고 있을 때 누가 그의 얼굴에 손전등을 확 비쳤다. 경찰이었다. 그가 휘청거리는 두 다리들을 가누면서 누구 냐고 소리쳤다. 순 사가 그를 부축해 주면서 약주가 과허시니 어서 집으로 들어가시라고 했다. 그 는 취중에도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간다고 고함을 질렀다. 관헌이 가실 때 가시더라도 조용히 가시라고 그를 타이르고 그가 안 넘어질 만헐 때 얼른 그를 놓고 잽싸게 달아났다. 그는 역시 술 취헌 가 운데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사내가 사라진 쪽을 향해서 허, 하고 탄식을 뱉 은 다음 그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튿날,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그날, 남국민학교에서 장정 들 입영 소집이 있 었다. 아침에 잠을 깬 그는 술이 하나도 안 깼다. 간밤에는 너무 취해서 아마 의식 을 잃고 조용했었 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두 다리들이 휘청거리고, 온몸에서 술내가 풀풀 나고, 얼굴이 얼얼 하게 달아오르고 화끈거렸다. 그는 자제력도 사고력도 없고, 염치도 이성도 없 었다. 찔찔 짜는 감 상과 본능적인 이기주의가 있을 뿐이었다. 둘이 야합을 하자 백치 같은 유치함 과 선불맞은 짐승 같은 포악함이 상승 작용을 했다. 그는 난폭하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마 보통 으로 문을 열었지 만 중심을 잃은 그의 몸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창호지 바른 조선문짝 이 떨어져 나갈 듯 이 소리를 내고 열렸다. 그 벼락소리에 놀란 것은 그 자신이었다. 해가 중천에 솟은 벌건 대낮이 었지만 그의 방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방귀소리에 놀란 토끼처럼 잠 덜 깬 두 눈들을 멀뚱거 리면서 그가 빈 뜰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도 그것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 었다. 귀가 어두운 지 말이 서툰지, 취헌 소리에 미친 소리가 겹쳤으니 비명인지 발악인지 포학인 지 넋두린지 모를 만도 했다. 금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친척 아주머니와 동네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무슨 일인 가 싶어 기웃거렸고, 잠시 뒤 그의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고무신 한 짝을 질질 끌면서 나타났다. 그는 구경꾼들이 생겼다고 기승을 부리지도 않았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기 세가 수그러들지도 않았다. 그가 벌여 놓은 굿판에 그 자신이 말려들어갔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어 서 뭐가 제대로 보 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런당가. 니가 시방 왜 이러냐, 아이. 니 술 취했 냐? 그는 취중에도 마지막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더이상 나무라지도 화내지 도 않고 안채로 들 어가셨다. 그는 정신이 들었다. 너무 취해서 주어도 동사도 찾지 못하고 감탄사 같은 낱말들만 내 뱉던 그의 고함이 조리를 갖추었다. 그 다시는 집에 안 올라요. 다시는 안 올라 요. 그는 며칠 뒤 입대하기 위해서 서울로 갔다. 그는 아마 그의 어머니와 아버 지에게 술이 깬 다 음에 그의 행악을 빌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용서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다들 가는 곳에 남 안 가는 데에라도 가는 것처럼 요란하게 군대에 갔다. 새야 새야 신경숙-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중편 ' 겨울 우화'가 당선 되어 등단. 1993년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로 제26회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수 상. 소설집 '겨울 우 화' '풍금이 있던 자리' 해설- 전영태 '삼국유사' 권4에는 신비의 인물 사복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면서부터 불구인 사복은 당대의 명 승 원효대사보다 법력이 높았고 어머니가 죽자 장사를 지내면서 같이 무덤 속으 로 들어갔는데 그 속이 환상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신경숙의 '새야 새야'의 이야기 모티프와 사복 의 그것에 공통되 는 점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복을 연상하는 것은 현실 과 환상의 구조가 교묘하게 착종되어 있고, 자신이 애착을 느끼는 여인을 따라 흙 속으로 같이 들어가 묻힌 남자의 이야기가 사복의 모티프와 교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삼국유사'를 연상할 정도로 현실 속의 환상 같은 이야기 를 전개하고 있다. 바람난 아내를 잊지 못하고 죽어간 큰놈, 미친 여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작은놈, 이러한 존재들은 영원 속에 각인된 원형적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나누는 대화나 이들이 벌 이는 행동은 그들 이 비록 세속 속의 인간이기는 하나, 범상한 인간의 그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다. 또한 이 작품의 묘사나 서술도 소설의 상궤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문명의 폐해에 찌들지 않는 태초와 같은 세 상의 원초적 인간 관계를 보듬고 있다. 아무런 슬픔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세계에도 엄청난 아픔 을 강요하는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말을 못 듣고 살아야 하는 육체적 불구의 아 픔보다는 자신을 배 반한 여인이 던진 쓰라림에 못 견뎌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심적 고통의 근원 을 포착하려고 한 다. 시대착오적 발상과 동화적 표현으로 오해하기 쉬운 이 작품은 뜻밖에도 오 늘의 인간상을 반 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유려하게 어떤 때는 간신히 문맥을 통하는 아슬아슬한 문장으 로 표현된 이 소설 의 문체는 시대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소설의 분위기와 걸맞게 어울린 다. 시적인 정감을 담고 있으면서도 산문의 정확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체의 가 능성을 통해 90년대 소설을 이끌어나갈 정예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새야 새야 -눈이 녹고 봄이 와서, 새 햇살을 받으며 그 마을의 신작로를 지르고 비탈을 건너고 능선을 지 나던 한 거렁뱅이 여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골짜구니로 내려갔다. 여인은 잘잘 거리는 개울물 소 리를 들으며 버려진 삽을 집어 한나절 땅을 팠다. 구덩이에 여자와 남자의 얼 음이 덜 풀린 몸을 옮기고는 그때껏 열려 있는 사체의 검은 동공을 손바닥으로 쓸어 닫아 주었다. 비린내를 내며 썩 어 가는 개의 피묻은 뜬눈도 감겨 주곤 거렁뱅이 여인은 가던 길을 찬찬히 갔 다.- '쉿, 조조, 용히 해.' 작은놈은 턱턱턱, 우물, 벽, 돌, 그루터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간다. 오래 전에 물이 말라 버린 우물은 세 발만 짚으면 바닥이다. 그 바닥에 낮부터 내려쌓인 눈을 융단처럼 깔고 앉아 여자는 졸고 있다. 배가 고파서 정신이 들 때까지 여자는 그러고 졸 것이다. 안채의 나 씨는 여자가 이 우 물 속으로 기어드는 걸 가장 싫어했다. 해괴한. 나씨는 작은놈이 우물 속에서 졸고 있는 여자를 업고 나올 때마다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고 마루 끝에서 발을 굴렀다. 작은놈은 여자를 먼저 우물 밖으로 밀어내 놓고 기어나온다. 비척대는 여자 를 부축하여 걷게 하고 자루를 든다. 기미가 이상한지 마루 밑에서 푸른 눈을 번득이고 있던 개 가 빠르게 기어나와 작은놈과 여자의 그림자를 밟는다. '새야. 날아가지 마. 누, 눈아 잠시 멎어 봐. 다, 달아 너도 구름 속에 들어가 있어. 나, 나는 돌 아갈 거야. 짖지 말아. 부르지 말아. 모, 모두들 자, 잠시만 숨을 죽여 줘. 눈뜨 지 말아 줘. 내, 내 가 어디로 가는지 보지 말아 줘. 나, 난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 바, 발짝까 지 채, 챙겨 가고 싶어.' 눈 쌓인 마당은 겨울이다. 저만큼 까치밥이 말라비틀어진 감나무가 시커멓게 비쳤고 생각난 듯 간간이 송이져 내리는 눈이 검은 얼룩으로 그림자 진다. 졸음에 겨운 여자는 순하게 손 한쪽을 잡히고도 윗몸을 작은놈에게 기웃했다. 작은놈은 여자를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자 루로 걸음을 막는 개를 밀어 낸다. 개의 푸른 눈빛이 불안스러이 허둥거린다. 카앙, 개는 작은놈에게 엉겨붙는 다. 졸음이 깨인 여 자가 깜짝 놀란다. 숨겨 주세요. 여자는 철로에서 작은놈에게 업혀 올 때나 지금이나 그 말밖에 할 줄을 몰랐 다. 그 말마저 끊 은 지 며칠이어서 작은놈은 와중에도 여자에게 상대할 일이 생긴 게 반갑다. '쉿, 조용히 하라니까.' 여자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는 작은놈을 향해 헤싯 웃었다. 작은놈은 개 를 더 밀어 내고 자 루를 다시 추스린다. 밀려난다 싶었던가? 작은놈이 여자를 이끌고 몇발짝 떼었 을 때 엉겨붙음을 그만둔 듯 싶었던 개가 사납게 달려와 자루를 물어뜯는다. 작은놈도 질세라 개 를 걷어찬다. 개의 이빨에 뜯긴 자루 속에서 삽날이 눈빛에 번득인다. 함께 갈 수 없어. 작은놈이 돌아서자 개는 잠 시 멈칫하더니 이번엔 작은놈의 정강이를 문다. 개의 잇새에 끼인 정강일 빼 내려고 다리를 이리 저리 휘저을 적마다 사금파리 같은 개의 이빨이 느껴 온다. 꽉 깨물면 작은놈 의 정강이엔 그 이 빨이 박히리라.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개의 잇새에서 정강이를 빼낸 작은놈은 여자를 부축해 뛴 다. 다급해진 개가 재빨리 따라와 엉겁결에 작은놈의 정강이를 카앙 깨물었다 간 제풀에 놀라 얼 른 뱉어 낸다. 피가 바지를 적신다. 놀라 꼬리를 엉덩이에 갖다붙인 개의 이빨도 빨갛다. 다행히 안채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작은놈은 비척거리며 여자를 다시 이끈다. 앞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듯 싶 었던 개도 지지 않 고 비틀거리며 작은놈을 따라온다. 작은놈이 뒤돌아보면 집 쪽으로 물러서는 듯하다가 작은놈이 앞을 보면 얼른 사이를 좁혀 온다. 작은놈은 자루를 내려놓고 여자를 그 위에 앉게 해 놓고 개를 향해 홱 내닫는다. 개는 귀를 쭈뼛 세우고 뒤돌아 도망친다. 눈 위에 개의 발자 국이 어지러이 찍 힌다. 작은놈은 얼른 돌아와 여자를 부축하고 걷는다. 저도 멈추고 작은놈이 어버거리며 쫓으면 조금 뒤로 물러서기를 하며 사이를 좁혀 온다. 작은놈이 폭폭했다. 소리를 지를 기회가 단 한 번 이라도 있다면 지금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고샅을 돌아 신작로로 나왔을 때 작은놈은 신작로 가상의 큰놈 집을 건너다 본다. 불탄 자리가 구덩이처럼 시커먼데 그 위로 눈은 종잇장처럼 가벼이 쌓인다. '눈은 어떤 소리를 내지?' '차가운 소리.' 밤하늘의 구름은 얼어붙었는데 달빛은 담장에서 은근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 세상의 공기 속에 섞어 놓을 수 있다면... 눈과 달빛과 바람에 휘감긴 큰놈 집을 건너 다보는 작은놈의 눈 에 큰놈의 휑뎅그런 눈이 잠겨온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마음자리 마디마디에 접붙여져 질푸르게 옹이진 그 말을... 작은놈은 여자와 자루를 추스린다. 그 말을 세상에 주고 갈 수 있다면... 작은놈 은 슬몃 뒤돌아본다. 개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작은놈을 지켜보고 있 다. 그렇다면 그 집 의 한시절에게 주고 가고 싶다. 어머니와 큰놈과 셋이서 살던 그 시절에게로. 그땐 웅덩이같이 아늑했던 집이었다. 그들이 집 안팎의 허공에 대고 그린 손 짓 말 그림은 거미 줄처럼 포개져 떠다녔다. 소리가 없어 달팽이 집같이 조용했지만 저 집에 셋이 살 땐 그들은 서 로 시끄러워서 눈을 감곤 했었다. 문이 닫히거나 밥수저를 들었다 놓거나 하 는 소리조차 안 날 때가 그들에겐 가장 시끄러운 때였다. 방안에서 그들 셋이 시끄럽게 떠드는 줄 도 모르고 마을 아 이들은 그 집에 기어들어 감을 따 가고 자두를 따 갔다. 아무려나, 그들은 개 의치 않았다. 그땐 모시천 같은 햇빛도 끌어당겨 덮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 작은놈에게 외로움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나씨나 글을 가르쳐 주면서부터 생 겼다. 어머니는 글 을 몰랐고 큰놈은 글을 깨치려 들질 않았다. 어머니가 늘 회초릴 들지 않았다 면 큰놈은 읽으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ㄱ, ㄴ, ㄷ, ㄹ, ㅁ, ㅂ... 아, 야, 어, 오. ...나씨가 그린 글씨들은 미로였다. 어머 니와 큰놈과 셋이 서 허공에 그린 손짓처럼 투명하질 않았다. ㄱ과 ㅏ를 합치면 가이면서 ㅜ랑 섞 이면 구라니. 저희 들끼리만 미로인 게 아니라 셋의 마음을 어지럽고 갈래지게 했다. 그들이 바 람 속에 햇살 속에 그렸던 손 그림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섞갈림이 ㄱ과 ㄴ사이엔 있었다. 셋 사 이에 틈은 그로부터 생겼다. 어머니에게, 큰놈에게 ㄱ과 ㄴ사이의 것들을 일러줄 수 없게 되고부터 작은놈은 외로웠 다. 손 그림만으론 무엇인가가 그립고 모자라고 허방을 딛는 듯 아슬아슬하기 조차 했다. 그것이 더 깊어지는 줄 알면서도 작은놈은 열심히 했다. 큰놈이 쓰는 걸 하지 않으려 해 어머니가 슬퍼 했으므로. 어머니가 덜 슬퍼한다면 그것으로 되었기에. 결국 ㄱ과 ㄴ은 똑같았 던 그들 셋 사이에 틈을 만들어 놓았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큰놈은 읽을 줄만 아는 사람이 되었고 작은놈은 쓰고 읽는 사람이 되었다. 오로지 그것 하나를 남겨 주려고 살아왔던 것마냥 작은놈이 쓰고 읽는 걸 예사로 하게 되자 어머닌 자리에 누웠다. 작은놈에게 네모난 수 첩에 볼펜을 달아서 호주머니에 넣어 주며 어머니가 그린 마지막 손 그림은 너는 이것을 가졌으니 슬퍼하지 말고 미 래를 가져라, 였다. 어머니는 알았을까. 큰놈이 쓰기가 고통이었던 건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였다는 걸. 당장에 니은에 아를 보태면 나가 된다는 나씨의 글 가르치는 소리마저 들을 수가 없었 으니. 어느 날 큰 놈은 작은놈에게 노래책을 들이밀었다. 노래책 밑줄 그어진 노랫말엔 동백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던 동백꽃 말이에요.' 큰놈이 밑줄 그어 온 곳은 뚝뚝, 이었다. 이게 무어지? 작은놈은 땅바닥에 막대기로 글씨를 썼다. '꽃이 떨어지는 소리.' 소리? '움직이는 것들에게선 소리가 나.' 어떻게 알어? '귀에 들리는 거야.' 들린다구? 큰놈은 적막한 제 귀를 쓸쓸히 만져 보았다. 큰놈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움직 이는 기러기를 보 았고 저 새는 무슨 소리를 내는가, 물었다. 작은놈은 또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포르르, 라고 썼다 가 작은놈은 휘저어 내렸다. 그런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큰놈이 포르르, 를 느끼겠는가. 작은놈 은 기러기 날아가는 소리를 땅바닥에 적었다. '그리운 소리.' 이후 큰놈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작은놈이 써 주는 대로 읽었다. 큰놈은 움직이는 것만 보 면 물었다. 물은? '헤어지는 소리.' 뱀은? '눈이 감기는 소리.' 때까치는? '대문 여는 소리.' 바람은? '잠 깨우는 소리.' 큰놈이 가고 작은놈은 잠을 보챘다. 자신이 써 주었으나 큰놈의 적막한 귓속 에 갇혀만 있던 소 리 소리들이 작은놈의 잠 속으로 밀려들어와 소용돌이치며 떠돌다가 식은땀으로 밀려나왔다. 작은놈은 여자를 안으로 싸안는다. 소리를 이기게 해 준 건 여자였다. 여자를 업어 온 후 작은놈은 잠을 깨도 선 뜩하지 않았다. 잠 자는 여자의 마른 손가락에 손깍질 낄 땐 쿵쿵, 소리가 났는데 그것이 여자에 게서 나는 것인지 자신에게서 나는 것인지 가만 숨 죽여 가려내다 보면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여 자가 어디서 왔는 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헤아리는 일은 어머니가 말한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가늠 해 보는 일만큼이 나 시리고 자욱한데도 가슴이 저렸다. 그 저림은 작은놈의 몸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까지 쏙 빼내 갔다. 그럴 적이면 작은놈의 귀에 그토록 넘치던 소리가 끊겼고 적막 속 에서 아련히 무엇인 가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여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지. 어느 틈으로든 들 어가 숨어야 하기 에, 우물도 굴도 들여다보이기에 작은놈에게 그 손짓은 반가움이었다. 작은놈은 걸음을 재촉한다. 새벽이 되기 전까진 거기엘 가야 한다. 동이 트면 안 될 것이다. 미래. 어머니가 말한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작은놈은 두엄을 내다가 나락을 베다가 자주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햇빛이 가물거리는 끝에 걸려 있는 것 일까? 여름 밤하늘 의 은하 같은 것? 오는 것인지? 찾아가야 하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어머 니는 글씨를 쓰고 읽을 줄 알게 되었으니 미래를 가져라, 했지만 그럴 줄 알게 되고부터 작은놈 의 마음은 투명이 걷히고 시리고 자욱하기만 했다. 그 마음이 작은놈으로 하여금 큰놈이 가져온 노래책 뒤에 수없이 적힌 주소 의 한 이름에게 작 은놈은 글씨를 써서 보내 보았다. 미래란 그런 것이려니. 저 먼 곳을 곳을 그리 워해 보는 것이려 니. 우체부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와 코밑에 들이댔다. 이 작은놈? 작은놈은 편지를 가만 뜯어보았다. ...수없이 받은 많은 편지 중에서 댁의 편지가 제일 마음을 끌었어요. 정말 이름이 작은놈이세 요? 저를 놀리려는 게지요? 어쨌든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돋 보이게 하려고 이름 을 더 근사하게 지어 쓰는데 댁은 그 반대니까 진짜일 거예요. 다음 편지 땐 꼭 이름을 밝혀 주 세요. 네?... 나씨가 맨처음 가르쳐 준 글씨는 '이 작은놈'이었다. 나씨는 그게 너의 이름이 라 하였다. 그런데 진짜 이름이라니? 미래와의 편지 왕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사랑. 그 말을 처음 편지에서 읽었다. 미래는 그 말과 함께 사진을 넣어 왔다. '이렇게 멀리서 더이상 아파하고 싶지만은 않아요. 그쪽 얼굴도 모르고 희망 을 갖는 게 두려워 요. 사랑해요. 지금까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걷고만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부턴 그쪽을 향해 걸을래요.' 미래는 정말 걸어서 왔다. 사진 속의 큰얼굴과는 달리 키가 도토리만한 여자 였다. 와서는 작은 놈을 보고는 설핏 고갤 돌렸다. 어마, 웃겨. 미래는 작은놈을 보고 길을 잘못 왔다는 표정을 감추 려하지도 않았다. 잠잘 때마다 별들에게도 산들바람에게도 단꿈 꾸라고 속삭 인다는 도토리만한 미래는 가만 대문을 밀고는 빠끔이 얼굴을 들이밀던 거와는 달리 콰당거리며 가 버렸다. 미래는 그저 맥을 놓고 따라가 보는 작은놈을 돌아다도 안 보고 다리를 건너 멀어지곤 다시 편지를 보내 오지 않았다. 작은놈도 이후 다신 글씨 따윈 쓰지 않았다. 아아- 소릴 질렀는데 혀 밑에서 헛바람만 말려나올 때면 작은놈은 마을 외각 을 걸었다. 걸으면 서 들었다. 바람소리를 물소리를 기차가 지나가고 새들이 날개치는 소리를. 그러 면 시리고 자욱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들어서 속을 채우면 말을 못 해 공허한 자리가 메워질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밭에 씨감자를 묻고 있는데 저쪽 고랑에 먼저 심 어 놓은 것에서 호 로로, 소리가 났다. 가만 땅의 어둠에 귀를 대 보니 감자에 붙어 있는 씨눈이 눈뜨는 소리였다. 씨눈은 캄캄한 데서 호로로호로로 눈을 떴다. 거길 가면 어머니도 그렇게 눈을 떠 줄 것이었다. 호로로호로로. 작은놈이 다시는 안 쓰리라던 글씨를 다시 쓰게 된 건 큰놈 때문이었다. 이 름도 없이 큰놈 작 은놈이라 불리는 형제를 일을 부리며 가까이 두고 살았던 나씨는 더는 참을 수 없다며 큰놈의 아 내가 그 사내와 함께 자고 있는 역전 앞 여관에 김씨, 최씨와 함께 들이친 후 돈뭉칠 가지고 왔 다. 나씨는 손과 발로 열심히 큰놈을 설득했다. 집으로 들어올 여자가 아니라네. 거저 맥없이 삐길 수는 없잖여. 이리 헐 수 밖에 없었어. 이걸 루다 논을 사드라고. 잘 갖구 있어. 내 알아봐 사 줄 테니께. 나씨는 큰놈 마음이 어쩐지 몰랐다. 아니 알 수가 없기도 했다. 큰놈은 돈뭉 칠 앞에 놓고 이틀 을 앉아만 있었다. 작은놈은 가끔 먹을 걸 가지고 가서 방에 들이밀었다. 큰놈은 멀거니 바라다만 볼 뿐 아무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삶은 고구마, 감 따위가 들이미는 대로 쌓 였다. 이대루 죽을 쳐! 작은놈은 버럭 성을 냈지만 마음이 시렸다. 사흘째 되는 밤에야 큰놈은 휘청 이며 작은놈을 찾 아왔다. 그들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한바탕 허공을 휘저었다. 글씨를 써 주어. 누구한티? 니 형수한테. 인제는 안 온대잖여. 와, 한 번은 와. 벽장 속에 가방이 있거던. 뭐라 써? 큰놈은 속주머니에서 두툼한 책을 내밀었다. 큰형이 펼쳐 놓은 쪽에 붉은 줄 이 그어져 있었다. 작은놈은 밑줄 쳐진 데를 읽어 보았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작은놈은 슬픈 생각이란 말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큰놈은 접어 놓은 다른 쪽을 폈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큰놈이 그 문장들을 모아서 그대로 써 달라기에 작은놈은 공허히 고갤 저으 며 화가 난 듯 손 그림을 그렸다. 글씨는 다신 안 쓰기루 한 거 알잖여. 다시 쓰기루 하면 안 되나? 그걸루 형수를 붙잡진 못한단 말이네. 아름다이 보내 줄 순 있지. 작은놈은 큰놈의 검은 동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름다이? 글씨가 그런 일 을? 그럴 수 있으 리란 생각을 작은놈은 한 번도 생각을 안 했다. 작은놈은 그제서야 큰놈이 밑 줄 그어 온 문장을 모아 보았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 금가는 힘을 가졌 으면 한다.' 작은놈이 엎드려 큰놈이 밑줄 그어 놓은 문장을 이어서 옮겨 적었을 때 큰놈 은 작은놈의 어깨 를 두드렸다. 이걸 갖고 떠나라고도 써 주어. 큰놈이 꺼내 놓은 건 나씨가 놓고 간 돈뭉치였다. 이건 형 거라고 했잖여. 작은놈은 글씨를 쓰던 걸 멈추고 또 한바탕 허공을 휘저으며 대들었다. 큰 놈도 막무가내였다. 작은놈은 나씨에게 들은 대로 형수는 형에게 이제 오지 않으니 돈을 형수에게 줘서는 안 된다 했 고, 큰놈은 그 사내에게서 받아낸 돈을 자기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이라 했다. 우리들 중 그 돈을 갖기에 알맞은 이는 그래도 형수라 했다. 작은놈은 형수는 나쁘다, 돌아오지 않는다만 저어댔다. 그러다가 손짓이 물끄럼해져 버렸다. 그래두 내 맴을 모르겄니. 가슴을 탕탕탕, 치는 큰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 계속 치면 구멍이 뚫려 도 뚫릴 것이었다. 작은놈은 그처럼 창백하고 그처럼 노염을 탄 큰놈을 못 보았다. 슬픈 생각이란 저런 것일까. 누군들 내곁에 있고 싶으니까. 니 형수도 그것뿐이야. 기찰 타구 먼 데로 가라 구 그리 써 주어. 작은놈은 할 수 없이 덧붙였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 금가는 힘을 가졌 으면 한다. 이 돈으로 기차를 타고 먼 데로 가라.' 그러고도 큰놈은 뭔가 부족한지 작은놈을 쳐다보았다. 더는 안 쓰리라, 했지만 버티고 앉아 있는 큰놈에게 또 밀려서는 작은놈은 삐뚤삐뚤 그리구 행 복하여라,를 말미에 써넣었다. 그제야 큰놈은 작은놈이 차려 준 밥을 떠먹었다. 밥을 먹고 비척비 척 걸어가는 큰놈을 따라가니 큰놈은 벽장문을 열고 형수가 챙겨 놓은 가방을 열고 편지와 돈뭉 칠 집어넣었다. 가방 뚜껑을 닫으려던 큰놈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형수가 자 주 입던 긴 치마를 꺼내서는 오래 들고 서 있었다. 작은놈은 마을의 끝진 데로 돌아선다. 더는 개를 쫓지 않는다. 지금 개에게 그러듯 언젠가 큰놈이 자신을 그리 내몰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작은놈은 어린 시 절 그 웅덩이 같은 집에서 큰놈과만 있을 때 또래들이 입술을 둥글게 네모지게 모으거나 흐트러 뜨려 말이라는 걸 한다는 걸 몰랐었다. 빠끔히 대문을 밀고 길을 내다보니 또 래들의 입은 나팔꽃 같이 열려지고 닫혀졌다. 그때마다 음악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작은놈은 입을 벌리고 아, 해 보 았다. 이게 뭐야? 누구에게나 나는 음악소리가 자신에게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작은놈은 휘둥그래 져 사방을 둘러보았다.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었다. 큰놈은 아예 사람들 입이 나팔꽃처럼 열려지 고 닫혀질 땐 음악소리가 난다는 것마저 몰랐다. 그걸 알고 작은놈은 큰놈 옆 에만 붙어 있었다. 또래들 중 그들 둘, 그들 둘의 입 속에서만 공허히 바람이 새나왔기에. 우리 둘 만 같은 거야. 작 은놈은 큰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예 큰놈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면 못떼어 놓 을 것이기에. 그때 큰놈은 어딜 가려던 것이었을까? 한사코 작은놈을 떼내려 했다. 한사코 그랬기에 작은놈도 한사코 떨어질 수 가 없었다. 혼자 어 딜 가려기에. 지금도 그때 큰놈이 어딜 가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작은놈은 오로 지 큰놈을 못 가게 하거나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일곱 살 때였는지 그보다 조금 더 지났었는지. 계절은 봄이었을까? 큰놈이 한사코 떼어놓으려던 길이 새파랗게 되살아난다. 산길에 마저 쑥이 돋아서는 곁을 지나면 냄새가 쌉싸롬했고 이른 산벚꽃은 나비같이 희게희게 피었는데 그 속을 뚫고 가며 큰놈은 뒤따르는 작은놈을 내몰고 내몰다간 나중엔 산벚꽃가지를 꺾어서는 사정 없이 작은놈의 등 을 후리곤 내뺐다. 아파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울면 눈앞이 흐릿해져 큰놈을 놓칠까 봐 안 울고 뒤쫓았다. 큰놈이 돌아보면 나무 뒤로 숨고 바위 뒤에 숨으며. 능선을 지나 큰 봉에 올랐을 때야 큰놈은 뒤따르는 작은놈을 본척만척했다. 너른 벌이 다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앉았을 때는 벚꽃가 지에 얻어맞은 작은놈의 등에 밴 피를 제 셔츠를 찢어 닦아 주었다. 자꾸만 올라가면 하늘에 닿을까 싶어서. 너른 벌을 내다보며 큰놈이 그린 손 그림은 공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