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책을 펴내며 오늘날 우리 소설문단의 혼란상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사실 우리 소설문단의 현실은 따끔한 질책을 받아 마땅할 정도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른바 상업주의와 결탁한 품격 미달의 장편소설들이 독서계를 풍 미하고 있고, 단편 분량의 소재나 내용을 가지고 억지로 길게 늘여 쓴 듯한 중편소설들이 양산되고 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예술작품의 수 준에 이르지 못한 이러한 저질 장편소설과 중편소설의 범람으로 인해 작품의 구조적 완결성과 예술적 품격을 생명으로 하는 단편소설은 턱없이 위축되고 있 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평론가들은 그들대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 의 심정은 마치 환자의 몸에 퍼진 심각한 질병의 원인을 진단해 놓고도 그 처 방을 몰라 허둥대는 의사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 소설을 애호하는 독자들 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비유하자면 환자의 가족과도 같은 그들은, 어느 것이 제대로 된 소설인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 찾듯 문단의 거품현상에만 현혹되어 휩쓸리기 십상이다. 우리 소설의 문단의 이같은 혼란상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은 물론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지한 자성의 시간이다. 작가, 출판 종사자, 평론가, 독자 모두가 오늘의 혼란상과 관련해서 스스로의 문제점을 돌 아보고 그것을 풀어나가려는 진지한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현대문학사에서는 장편소설과는 달리 그 자체만으로도 상품가치가 적어 대개의 출판사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중, 단편소설로만 구성된 소설선집을 엮어 우리 소설을 아끼는 독자들에게 헌정하고자 한다. 이는 1955년 창간시절부터 오늘날까지 38년 동안 '현대문학을 통해 한국문단과 고락을 함께 해 온 현대문학사 나름의 자성의 소산이자, 오늘 날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한 작은 노력의 표현이다. 이 기획을 시류에 따른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연차 사업으로 계속 진행시켜 나아가려는 것도 바 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수록 된 작품들은 1992년 9월부터 1993년 8월까지 28종의 문예지를 통해 발표된 550 여 편의 중, 단편소설과 2권의 신작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엄정하고도 세심한 선정과정을 거쳐 뽑은 것이다. 작품선정은 현재 여러 문지 의 월평을 담당하고 있는 현장비평가 다섯 분에게 의뢰했다. 이는 우리 소설 문단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형상화작업의 생생한 현장성을 적극 수용하기 위한 배려였다. 따라서 여기 수록된 13편의 단편소설과 2편의 중편소설은 1993 년의 우리 소설문단이 이룩한 문화적 성과의 높이와 넓이를 한눈에 보여줄 것이 다. 이 책의 기획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익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말 그대로 '좋은 소설'을 뽑아주신 김윤식, 정현기, 전영태, 정과리, 신덕룡, 다섯 분의 선정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 해를 거듭하며 계속될 이 '현 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과 냉정한 비판을 바라면서, 이제 그 첫단추를 조심스럽게 끼운다. 1993년 10월 (주)현 대문학 편집부 무엇을 할 것인가 공지영-1963년 서울 출생. 1988년 '창작과 비평'(가을호)에 중편 '동는 새벽'을 발표하여 등단.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 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해설-김윤식 제목이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없을까. 유명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우 리 운동의 긴급한 문제들에서'(1902)에서 따온 것.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라 고 쓰고 나자 불안스러워졌다.'라고 레닌은 적었다. 바람직한 사회개혁을 위해 목숨을 건 혁명운동이란, 오직 이성의 힘에 의거해야 하는 법. '공상에서 과학으 로'라는 유명한 명제가 이 사실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렇지만 레닌은, 주위 의 많은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닌은, 주위의 많은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꾸기'를 주장해 마지않았 는데, 왜냐면 꿈꾸기란 꿈과 현실 사이의 차이랄까 연관을 문제삼게끔 유도할 수가 있겠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물론 공씨의 이 작품을 읽기 위해 레닌의 명제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곧 이 작품은 이른바 후일담문학 범주에 드는 것. 따라서 후일담문학이라 규되 는 일반적 성격부터 문제삼는 일이 먼저 요망된다. 후일담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우리 최근세사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신세대가 있었 다.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으로 갔다. 광주세대가 있었다. 그때엔 더 많은 젊은이들이 기름병 을 들고 거리를 뛰었다. 뿐만 아니라 몸에 불을 붙여 스스로 불타는 기둥이 기 도 했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대들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아주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구소 련이 무너지는 소리와 모양에서 그들의 신념은 흔들렸고, 망설임이 그들 주변 에 알게 모르게 에워싸지 않았겠는가.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이를 두고 후일담문학이라 부를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후담 문학 범주에 든다해도 공씨 특유의 개성은 따로 있는 법. 주인공 정화의 섬세한 내면이야말로 작가 공씨의 몫이 아닐까. 옛 애인 김식 이 불구의 처녀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들은 정화가 심란해졌음이란 무엇일까, 새 방향을 찾고자 하되 방향성이 안 떠올라 심란해진 것일까, 여성 특유의 질 투에서인가.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가. 그 어느 것도 정답 일 수 없다. 또 그 셋을 모아도 정답일 수 없을 터이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 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라는 예감이 오히려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의 대 비점은 비록 뚜렷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혼동해서는 안 되는 법. '겨울'이 뜻는 의미가 돋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걷다보니 저녁이었다. 고궁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고 혜동 로터리 쪽으로는 차들만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가 지는 무렵이면 늘 그랬듯이 사물들의 윤곽이 뚜렷했다. 몇백년 전 쌓았을 고궁의 돌담 언저리, 이끼 낀 기 와의 까실까실한 결들까지 선명했다. 문득 눈을 들었다. 희끄무레한 저녁 하늘 사이로 앙상한 나뭇가지가 파들거리며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때는 무성히 이 파리가 피어났었고 또 한때는 푸드득거리며 커다란 이파리를 떨구던 나무들었 다. 하지만 이제는 미세한 바람결에도 몸서리를 치면서 그저 파들거릴 뿐이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까 오후에 선배의 출판사에 들른 이후로 나는 계속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모든 약속들을 스스로 취소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는 길 잃은 사람처럼 이 저녁 거리가 낯설었다. 늘 걷던 길의 버스 정류장 팻말 까지 그랬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다시 그의 생각이 났다. 그가 결혼을 한다고 아까 출판사에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나는 계획했던 저녁의 일정들을 혼자서 취소버 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확히 말해서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 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지금 이 시간, 아마도 김 교수의 출판 기념회에 참 석해 있을 것이다. 별로 동의하지도 않는 그의 논문에 입에 발린 치하를 보내 고 사람들을 만나고 뷔페를 먹고 어쩌면 쓸데없는 농담들을 지껄이면서 거품도 싱싱한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가, 결, 혼, 을 한다. 이제 나는 아무도 건너지 않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차들이 늘어선 길 건편 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스물이 좀 넘었을까, 시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골라 잡은 것 같은 허름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그 여자도 길 건너편에 서 내 쪽에 있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몹시 불안해 보 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갑자기 지금 나와 마주보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혹시나 환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을 고 있는 여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발머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골라 잡은 파카와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저 길거리에서 서 있던 스물 몇살의 여자, 지금 저 여자처럼 신호등을 바라보면서 파란불이 들어와 주기를 기다리 고 있던 여자...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내 곁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 리고 그 여자와 나... 차들이 밀려 있는 한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그 여자와 나만이 이 세상에 남았다. 그리고 이윽고는 그 여자도 지워져 버리고 기억속의 여자만 남아 거기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달력들이 거꾸로 팔락거 리기 시작했고 1986년 겨울이 되었다. 그때 여자는 몹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온몸이 딸꾹질을 하 듯 몇분 간격으로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 쪽으로 향해 갔다. 이윽고 어떤 초라한 다방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 여자는 멈추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다방으로 들 어갔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그 여자의 낡은 운동화가 닿을 때마다 삐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혹시 불길의 징조는 아닐까, 그 여 자는 그 계단 중간에 서서 잠시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여자는 조심스레 다방문을 밀쳤다. 그때, 1986년 겨울의 어느 날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 다 방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나서 그 여자는 주머니를뒤 적거렸다. 간절하게 담배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의 주머니 속 에서는 토큰 몇개만 가련하게 짤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들어섰다. 불안하게 출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여자의 굴 에 왈칵 화색이 번졌다. 그는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 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반코트를 보자 그 여자는 설풋 고개를 숙여 버렸다. 이제 와서 그의 반코트를 보면서 눈물이 고여 버린 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때문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앞자리로 와 서 앉았다. 천천히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 탓이었을까 그의 눈은 괴로워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여자처럼 그의 눈동자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생 각을 하자마자 여자는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 다. 그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낡은 탁자로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뚝, 뚝 피를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여자는 설풋 웃었다. 마지 막이라는 생각도 금기라는 생각도 그 여자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이라도 좋았던 것이다. 그가 여기 있고 나는 또 여기 있고... 아직 우리는 함께다. 미소 짓는 그 여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엔 술이 과했던 것 같구나... 우리 둘 다..." 설풋 미소짓고 있던 여자 의 윗입술이 얇게 뒤틀렸고 이어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술 때문이라고 그가 입 을 열었을 때 알아차려야 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지 막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차피 모든 선을 넘어 버렸다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지금은 아침 세미나 간 이었다. 말도 없이 빠져나온 그와 그 여자를 모두들 찾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눈 초리들, 쏟아져 내릴 그 비판들... 가뜩이나 그 여자는 지금 사람들의 따가운 눈 초리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제게로 달려들어 그 여자를 상 처 입힐 그 모든 말들을 다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 는 생각보다 더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난 목숨 을 걸 수도 있어요." 술 때문이라고 말한 그와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말한 그 여 자의 눈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부딪쳤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했으 나 바람 빠진 것처럼 웃어 버렸다. 대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집을 뛰쳐나와 노 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여자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이해해 달 라고 말하며 시선을 떨구었었다. 남자 앞에서 여자는 아직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 때문이었다는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하자 여자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 다. "...형은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그가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다. 그 여자에게 한 대를 내밀다. 담배를 받아들면서 그 여자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그와 그녀에 게 돌연히 찾아왔던 밤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밤이 돌연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1983년의 어느 가을날, 낙엽이 지는 교정의 뒷숲에서 여학생들이 우수수 우수수 강간을 당하고 다음날 벌어진 시 위... 여학생들의 치마를 발겨놓고 유유히 사라졌던 사복 경찰들의 이야기가흉 흉하게 떠돌던 가을이었다.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는 도서관 유리창에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물론 그는 끌려갔다. 그리고 너 편 건물에서 유인물을 뿌리던 여자 선배가 사복 경찰들에게 쫓겨 건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학생 회관 뒤편에 숨어서 그 광경들을 바라보면서 엉켜쥔 주 먹으로 눈물을 틀어막고 서 있던 그 여자는 일년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온 겉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자는 살아 있 었고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갈 길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수천 명의 살아있는 젊은이들이 택했던 감옥의 길을 그 여자도 가고 싶어했었다. 왜냐하면 감옥 에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롭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유는 단지 그것이었다. 그 여자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머리털이 나고 나서그 렇게 혹독한 공부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게 궁핍한 것도 처음이었다. 하루 분 의 아주 작은 식량이 정해지고 하루 분의 엄청난 양의 학습 분량이 정해지고 피워도 될 은하수 담배 갯수가 정해졌다. 그 여자는 학습에 몰두했다. 그것은 힘겨웠지만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질이 간편한 머리와 허름한 옷, 식물 성분의 식사, 공동의 용돈... 닥쳐올 나날들에 대한 체 적인 불안... 실제로,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끌려간 동료들도 많았다. 여자는 제 선택에 대해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된다는 일은 혹 은 민중이 된다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미 물질이 주는 쾌락을 맛본 여자에게 그랬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는 생각과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뒤죽박죽인 채, 실마리를 풀 수 없는 혼을 혼자서만 싸안고 그해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그녀들에게 왔다. 그는 그녀들을 지도하고 있던 선배 가 끌려간 이후로 그녀들에게 왔던 거였다. 물론 그도 수배중이었다. 그 역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후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를 기억했다. 끌려가던 그가 외치던 마지막 소리, 어쩌면 신파적인 대사처럼 보이기도 하는 말, 산자여 따르라,라는 소리가 젊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수 밖에 없었던 그 가을날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김정석이라고 합니다." 그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이름은 가명이 었다. 그 여자도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공 부를 하는 짬짬이 휴식 시간이 되면 그는 낡은 기타를 퉁겼다. 공부에 지친 그 녀들이 그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부 르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 여자는 문득 도서관에 매달려 있던 삼 년 전의 그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때 그는 분명 저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외쳤을 때, 외치 면서 끌려갔을 때 그 여자는 그가 그렇게 고운 저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몰 랐었다. 부드럽게 마치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그의 낮은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는 왠지 가슴이 아팠다. 그가 그저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 남아 있었면 아마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사담이 허용되는 시간이면 가만히 그에게 이 야기를 걸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와 낮은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저음을 동시에 가진 그라면 그 여 자의 고민을 안아 줄 것만 같았다. 이해하고 독려하고 그러고 나서 강철처럼그 여자를 단련시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누군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에게 금물이었지만 그가 없을 때 호심 이 많은 여학생 하나가 그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 3학년 때 시위말야, 그때 도서관 4층에서 짭새들 피하다가 떨어진 언니 있잖아. 그 언니랑 결혼한대... 그 언닌 그때 떨어진 상처 때문에 지금 하반신 마비가 되는 데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는 줄 아니?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감옥에서 서 로 편지를 몰래 교환하면서 연인으로 사귀기 시작했대... 멋지지 않니?" 그리고 며칠 후 그가 왔을 때 그는 새로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선명한 춧 빛의 손뜨개 스웨터였다. 휠체어에 앉아서 저 스웨터를 뜨개질했을 여자의 손 가락이 떠올랐다. 둥글게 감은 배추색 털실이 풀려 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뜨개질이라면 그녀도 자신이 있었다. 후드가 달린 멋진 가디간을 동생 들에게 떠 입힌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지금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 었다.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슬플 수도 있다는 걸 그 여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 다. 깨달으면서 그 여자는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자 그 여자는 그제서야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 여자는 아득바득 그 절망 감과 질투심의 정체와 싸웠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온 것은 결코 1 그런 식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뛰쳐나오면서 아버지에게 뺨은 맞으면서도 당당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손을 담그고 걸레를 빨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그 여자는 생각을 잊기 위해 쏴아, 수도를 틀었 다. 하지만 수도 꼭지에서 쏟아지는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 는 감정의 격류였다. 호기심이 많은 여학생이 다시 말했다. "얼마나 지독한 형인 줄 아니? 그 언니가 몸이 아파 누워 있어도 후배들과의 약속 시간이 되면 일어나 나오는 형이야... 저렇게 늘 웃고만 있어도 강철 같은 형이야... 그야로 정석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 모두 정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정석이 아니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든..." 그랬다. 그는 절대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권위를 보이지도 않다. 말씨는 언제나 한 옥타브 낮은 '라'음이었다. 아주 강조를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도 '시'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물론 아주 높은 음까지 올라가는 노래를 부를 때 는 제외였지만 말이다. 만일 그녀들이 하고자 열망했던 그 일에 정답이 있다 면 그건 바로 그였다. 경제학, 철학에서부터 역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영어, 독 어에서 일본어, 스페인 어까지... 그는 그녀들을 주눅들게도 했고 운동에 대한 열망에 눈 뜨게도 했다. 그는 빛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아니 적어도 아득바득 제 감정과싸 우느라 자꾸 그늘 속으로 숨고 싶었던 그 여자에게는... 그 여자는 감히 그가 그 여자만을 향해서 특별한 미소를 지어 주기를 바란적 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그는 그 여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런 일 때문 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세미나가 벌어지던 날 밤... 그는 드디어 잠깐 쓰 러져 버렸다. 지독한 감기였다. 그녀들이 감히 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찡그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별 것 아니 라는 말이었다. 그는 누운 채로 그녀들의 세미나를 들었다. 세미나가 제대로 행 될 리가 없었다. 그 여자는 아까부터 그가 쓰러질 때부터 마음이 뒤숭숭거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발제도 건성으로 했고 그리고 내내 그의 창백한 얼굴만 훔쳐보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누군가가 새벽 거리고 그의 약을 사 러 뛰어나갔다. 그 여자는 그때 식사 당번이었다. 그 여자는 어제 장을 본 여학 생들이 사다 놓은 대파의 흰 뿌리를 잘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물을 한 컵 냄 비에 넣고 그것을 끓였다. 어렸을 때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가 끓여주던 파뿌리 생각이 났 었던 거였다. 새벽 거리고 약을 사러 갔던 여학생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제그 를 도와 줄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파뿌리 삶은 물을 내밀었다. 이제사 무언가 줄 수도 있다는 생에 그 여자는 들떠 있었다. 더구나 그 여자의 얼굴을 잠깐 동안이었지만 물끄러 미 바라보고 나서 그는 그 여자에게 아주 특별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던 것 이다. 그 미소가 하도 눈이 부셔서 그 여자는 그 방안에 있던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파뿌리 물을 다 마시고 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주시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꾸만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그가 내미는 빈 대접을 받아들고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에게 쏟아졌던 여학생들의 시선은 분명 의혹이었 다. 그 여자는 그때 그 조직 내에서 심하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고 비판하고 있던 중이었다. 얼마 전 한 여학생이 앓아 누웠을 때 그 여자는 한밤중에 약을 사러 나가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분명 부에 항상 있었던 파뿌리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 여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부엌으로 다른 여학생이 들어섰다. 모임 에 서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 여자를 바라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정석이 형은 곧 나을 거야... 난 다만 네가 동지애를 다른 여 자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면 해." 그 여자는 그러자 떨리는 입술을 펴고 그것이 동지애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여자도 그리고 나머지 그녀들도 그것이 동지애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그 모임 내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심한 차별이라고 했지만 그건 차 별이라기보다 격리였다. 예를 들어 다른 동료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부터 책을 전달받기 위해 몇 명이 외출을 해야 할 때도 그녀는 제외되었다. 왜냐 하면 그 책을 중간에서 해 주는 일을 그가 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방이라는 공간 에서 여섯 명이 모두 모여 있는 시간이 아니면 그 여자는 그를 볼 수 없게 배 려되었다. 가끔씩 상상력이 뛰어나다거나 발제를 요령있게 한다고 그 여자를 칭찬하던 그의 입도 다물어졌다. 그 여자는 그 좁디좁은 비밀방에서 여섯 명의 여학생들이 누워서 잠이 들 때 혼자서 벽을 보고 깨어 있었다. 그러면 그 여는 또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내가 이러는 걸까? 곧 현장에 투입될 상황에서 이 런 감정으로 인해 동지들에게 누를 끼쳐도 되는 걸까? 모두들 사랑조차 버리 고 이 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모두들 보고 싶은 사람까지 보지 못하고 어떻 게든지 역사를 올바르게 책임져 보자고 눈물을 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여자는 그 생각만으로 그녀들의 따돌림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음 번엔 다른 동료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 여자는 손수 장을 보아다가 파뿌리를 끓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같은 방에 살던 동료들이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여자는 그날 밤 혼자서 또 생각했다. 아아, 나는 혹시 위선자가 아닐 까... 그리고 몇달이 흘렀다. 그 여자에 대한 조직의 엄격한 배려도 조금씩 누 그러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해서는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가 끔씩 눈길이 부딪혔을 때, 아주 짧은 시간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 을 때 그 여자는 그의 눈길이 특별하다는 걸 느꼈다. 사랑을 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 짧고도 긴 시간... 그 여자는 이제 그런 사실들이 두려워지기 시 작했다. 이제 곧 노동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더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여자는 또 생각했다. 그건 정말일까, 눈동자끼리 허공에서 얽혔을 때, 그의 동공이 검고 크게 확대되어 오는 듯한 그 느낌... 그걸 확인해 보고 싶 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가 제일 애를 먹고 있는 자본론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인가 그는 기쁜 듯이 그녀들을 찾 아왔다. 돈이 생겼고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달 동안 채소와 싸구려 어묵으로 연명하던 그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 가 날라져 왔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낡은 기타를 꺼내들었고 그리고 토론이 아 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놀기로 작정한 날이었으므로 모두들 유쾌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접에 따른 소주잔을 여섯 명의 그녀들에게 골고루 돌렸고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각자들의 고민에 고루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별로 말이 없던 사람들이었데 그날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들도 꺼냈고 힘든 생활과 긴장에 지쳐 있던 그녀들 을 흐드러지게 웃게도 만들었다. 그 여자도 오랜만에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 리고 행복했다.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고 우리는 기필코 역사를 바꿀 수 있고 그리고 여기 빛나는 나날을 모범적으로 사 는 그가 있다. 밤이 깊어지고 하나, 둘 술에 약한 그녀들이 작은 마루에서 방 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밤 세시가 넘었을까 작은 마루에는 그와 그 여자만 남아 있었다. 문득 그 여자는 그걸 깨달았다. 그와 그 여자의 눈이 오래도록 허 공에서 만났다. 그 여자도 그도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 가 물었다. "내일 종로에서 후배를 만날 일이 있는데 나가지 못할 것 같거든... 대신 나가서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좀 전해 주겠니?"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눈이 환희에 빛났다. 그 여자는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시내 구경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의 말은 그러니까 이제 그 여자의 유예 기간이 끝났다는 이 되는 거였다. 그는 찬찬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다방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약도를 확인하느라 그에게 다가앉은 그 여자의 숙인 머리가 그의 앞이마에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과 맞닿았다. "가면 아마도 이런 전화가 올 거야." 다음 말을 듣기 위해 그 여자가 착한 학생처럼 그를 응시했다. 그때 그가왈 칵 손을 뻗어 그 여자의 팔을 당겼다. 아니, 어쩌면 그 여자가 먼저 그의 품으 로 안겨 버렸는지도 모른다. 엉거주춤 포옹을 한 채로 그 여자는 생각했었다. 내가 결국 저지르고 마는구나... 그 여자는 남자의 배춧빛 스웨터에 그저 고개 를 묻고, 그 스웨터를 뚫고 나오는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 자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느낀 것은 단순한 환희는 아니었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짜 주었다는 그 배춧빛 스웨터에 얼굴을 묻은 채로 생각했다. 래 도 되는 걸까... 그가 그녀를 천천히 떼어 내고 두 손으로 그 여자의 얼굴을 감 싸안은 채 그 여자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잘못했어요. 사실은... 형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다시 그 여자를 안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이 세었다. 그가 말다. "다 알고 있었어..." 그 여자가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비볐다. 배춧 빛 스웨터,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여자... 그러나 그도 그 여자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여자는 그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 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 여자를 떼어 내고, 이번에는 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가만히 집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 여자가 그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그 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이러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자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저 사람들 있는 데서 말구... 그냥 뵙고 싶어요. 내일 열시 요 앞 다방 에서..." 그 여자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의 입술만 욱신거리며 씹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를 남겨 두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불 꺼진 방에서는, 그녀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가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는 아무 말없이 이불을 덮고 예의 그랬듯 벽을 보고 누웠다. 긴 한숨소리가 나이 많은 여자의 입에 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탁자 위로 커피가 날라져 왔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어젯밤엔 술이 과한 것 같다. 우리 둘 다..."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그는 설핏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자의 입술이 얇 게 뒤틀렸고 이어 일그러졌다. 그가 담배를 내밀었다. 그 여자는 그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무슨 말이든지 하려무나." 그가 말했다. 여전히 그는 그 여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자석에 끌리듯 다시 눈이 마주쳤 다. 그 여자는 피를 뚝, 뚝 흘리는 듯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그가 담뱃 불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담뱃불을 순순히 받았다. "형,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마치 그가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갔던 그 몇해 전의 가을처 럼 주먹으로 입술 을 틀어막고 그를 바라보았다.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 무늬 반코트 속으로 배춧빛 스웨터가 보 였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고 그녀는 그와 동시에 시위를 하다가 하반 신 불구가 되었다... 둘은 감옥에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동지로서의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서 뜨개질을 한다... 뜨개질이라면 그 여자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여자는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가 없다... 그러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번에는 그 여자의 머릿속으로 명확히 떠올랐다. 그저 이렇게 마주앉아 있어서 좋은 게 아니고 정말 마지막 이라는 단어... 그가 떠나든 그 여자가 떠나든 조그만 주먹을 입에서 떼어 내었다. 마지막으로 그 눈 빛의 의미를, 그가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커다랗게 확대되어 오는 동공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 던 것이었다. "형,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단지 정말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고 나면 더 떼쓰지 않을게 요." "...김, 정, 석."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는 끝내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콧날이 왈칵 시큰해졌 고 그리고 서러운 눈물이 맺혔다.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겠니? 나는 그저 네가 알던 김정석이라는 사람이야... 우리가 각자의 장 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아마 다시 이런 자리에서 만날 일은 없게 되겠지... 그래도 열심히 살면 우린 만나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그 여자가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상투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저 난 이름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동지로서의 이름 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여자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의 눈에 확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하지 만 그는 그 여자에 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마치 입술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진실을 그녀에 게 전달해 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의 눈길은 집요해 보였다. 그 여자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로 말할 수 없 는 어떤 진실들을, 해면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다방을 나왔다. 그는 그 여자를 돌아보지 않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다시 마 지막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굳어진 입술로 그를 불렀다. 몇발자국 걷던 그가 그 여자를 돌아보 았다. 그들은 그렇게 몇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오늘 시내에 있는 다방에 가서 형이 나오시지 못한다고 전하겠어요." 어젯밤 그 포옹의 전조가 되었던 그 약속을 생각하며 그 여자가 말했다. 그 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부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가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들어가 봐. 모두 기다릴 거다... 다들 힘들잖니!" 그가 다시 말을 떼었다. 여자는 그를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끝끝내 고집하던 정석이라는 이름... 그는 돌아보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달음질치더니 그 버스에 올라 탔다. 버스의 배기 가스가 하얗게 뿜어나오던 겨울날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를 본 것은 그것 이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그녀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말도 없이 사라졌 다가 다시 돌아온 그 여자를 차가운 눈초리로 맞았다. 그 여자 역시 냉랭한 눈초리로 그들과 마주 앉았다. 무거운 침 묵이 그 방을 감쌌다. "너무 철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성마르던 여자 하나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더 대꾸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아침 이 지나갔다. 며칠 수 그녀들을 지도해 줄 새 선배가 왔다. 새 선배는 김정석이라는 사람 이 사정상 그녀들을 더 지도해 줄 수 없게 되었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책을 폈다. 그녀들은 일제히 그 여자에게 시선 을 던졌다. 그 여자는 눈을 책에 고정시킨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름 같은 건 순순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았다. 다 시 그에게 안기지 도 않을 것이고 겁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아침에 사 라지는 일도 없을 텐데... 그녀는 그 과정을 이수한 후 노동현장으로 배치되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리하여 그녀들이 제 각기 다른 곳으로 떠나가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 여자는 후배들이 모여 있는 방 으로 다른 방으로 가야 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거기서 공부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느 날 저녁거리를 사러 간다고 그 방을 빠져나와 다시는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돌아온 탕자처럼 집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며칠 후 혼자서 강릉 이모 집으로 갔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거닐다가 밤이면 돌아와 잠을 잤다. 겨울 바다에서조차 사람들은 모 두 짝지어 있었다. 둘 혹은 셋... 혹은 여섯. 어느 날 바닷가를 지치도록 걷던 여자는 털썩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누구하 고라도 이야기를 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 말 그럴 수도 있 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 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 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 웠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었나?" 어떤 남자가 그 여자 곁으로 다가왔다. 묻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대학 원생이며 서울에서 바람을 쐬러 혼자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를 했다. 다만 그가 그 여자가 다니던 대학원 이름만 대 지 않았다면 그 여자도 대충 그렇게 믿어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은 바닷가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회를 샀고 그 여자는 소주를 마셨다. 그가 머뭇거리며 여관 으로 그 여자의 손을 잡아 끌었을 때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따라나 섰다. 하지만 그가 불도 끄지 않고 그 여자의 몸을 끌어당겼을 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그 여자는 불현듯 배추색 스웨터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당황한 남자가 다시 그 여자를 끌어당겼지만 여자는 벗었던 코트를 입었다. 가짜 대학 원생이 그녀의 뺨 을 연거푸 후려쳤다. 부풀어오른 뺨을 잠깐 매만지다가 그녀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아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따라온 거예요. 하지만 갑 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려면 당신하고 하룻밤 자는 것쯤 정말 아무 일도 아니겠 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가고 싶어요. 절 보내 주세요." 가짜 대학원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욕설을 퍼 부었다. 밤 바닷가로 뛰쳐나온 그녀는 그때까지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던 목도리를 꼭 꼭 여미며 이모집 을 향해 걸었다. 흰이빨을 드러낸 파도소리만 그녀의 귀에 철썩였다. 그 여자는 흘러내리는 눈물 을 닦아 내면서 걸었다. "스물네 살짜리 여자가 스물다섯 살짜리 남자를 사랑했어. 그뿐이었어. 그게 죄야? 공부방에 여 학생들과 같이 앉아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것도 죈가? 남루 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 말고 예쁜 치마를 입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그도 아니면 수배자들 과 나란히 앉아서 혹시라도 끌려갈까 봐, 끌려가서 성고문이라도 당하게 될까 봐 벌벌 떨었어. 그 것도 비겁한 건가? 대체 그게 무슨 큰 죄인 거지? ...아니야, 그도 아니면 이름 한번 가르쳐 달라고 말했어. 가명 말 고 진짜 이름... 사실은 당신이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가던 그날부터 벌써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다.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대들어야 했었다. 그 리고는 얼굴을 바 꾸고, 희극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얼굴을 바꾸어서 그 여자와 자고 싶 어하던 가짜 대학원생에게 말해야 했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것들도 있어. 니 눈에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무 모한 결벽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의 무기야. 그것마저 없다면 돈도 없고 힘도 없고 핍박당하는 우리가, 거대한 뿌리를 가진 이 역사의 왜곡에 대항해서 대체 무얼 가지고 싸 우겠니? 사랑마저도 버리고 가야 할 길이 있다는데 누가, 누가 감히 그를 나무랄 수 있겠니?" 그 여자는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집으로 돌아와 대학원에 다시 등록을 했다. 그리고 1987년 그 여자는 수배자 해제 명단에서 그의 본명을 읽었다. 그 여 자는 그 여자가 감 옥보다도 괴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원에 다니면서 교수집에 세배도 가고 논문도 쓰면서 석 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는 동안 동구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 리고 그리고 그 여 자가 한때 몸담았던 조직의 그 사람들이 모두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리고 또 한 겨울이 지나자 소련 연방이 해체를 선언했고 그가 폐결핵 2기가 되어서 고향으로 내려 갔다는 소식을 들 었다. 그런 소식을 전해준 것은 감옥에서 나온 그의 후배였다. 후배는 그 여자 의 동네에 우유 대 리점을 열고 있었다. 딱히 대학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그 여자는 가 끔 후배의 우유대리 점으로 가서 남산만큼 배가 부른 후배의 부인과 우유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들 을 하곤 했었다. 어 느 날인가 후배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혹시 정석이 형이라고 불리던 사람을 아세요?" 우유를 마시던 그 여자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삼키려던 우유가 하얗게 엉 긴 채로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후배가 다시 물었다. "87년인가 수배 해제되고 나서 그 형이 여기 놀러 왔었어요. 그때 정화 씨를 요 앞길에서 봤다 고 하더군요. 내가 우스갯소리로 동네 처녀라고, 자주 놀러온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 그 형 이 우리집에 자주 왔었고... 가만, 그러고 보니 희안하게도 정화 씨랑은 마주친 적이 없네. 한번은 마누라랑 나랑 둘이서 영화 구경을 갔다가 술도 한잔 먹고 새벽에야 돌아왔는 데... 셔터가 내려진 우리 대리점 앞에 그 형이 앉아 있겠죠? 술이 잔뜩 취해서 하는 말이, 발이 가 길래 그냥 종로에 서부터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안됐어요, 폐결핵이라는데... 조직은 다 깨지고... 술 먹고 다니지 말 라고 내가 그렇게 충고를 해도 안 들어요... 그형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사 촌형님이 골프 용 구점을 차렸다는데 거기서 일을 도와줄 건가 봐요.... 원래 집도 가난하고... 이 번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나 봐요." 우유 대리점을 경영하던 후배는 말을 하다 말고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 형... 참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 게 무사하군요." 그 여자는 한번도 골프 용구점에 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일 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가용을 탄 사람들이 와서 달걀만한 골프공을 고 르고 골프대를 만져 보고... 그럴 때 그가 지을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닫혀진 셔터 앞에서, 새벽도 아 직 먼 어느 캄캄한 밤중에, 닫혀진 셔터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였을까. 그 여자는, 아무렇게나 골라 입은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은 그 여자 는 아직도 길 건너 편에서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다시 머릿속의 달력이 펄럭이며 1992년이 가고 있음을 알려 주었고 그러자 밀려 있는 자동차들의 매캐한 배기 내음과 거리의 성 마른 소음이 들려 왔다. 나는 그 여자가 아직도 서 있는 길 건너편의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 다. 내가 잠깐 회상 속에서 떠올렸던 그 시절의 그 여자는 설사 시간이 좀 걸린다 하더라도, 아무 리 이 겨울의 어스 름 속에 떨면서 서 있는다 해도 곧 파란 신호등이 들어올 거라고, 그래서 모든 차들을 멈추게 하 고 길 건너편에서 이쪽 편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만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어쩌 면 영영 파란 불은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 자리에 그대로 언제 까지나 서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길을 건너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방향도 없는 길이었다. 나뭇가지들이 그 봄날과 여름날의 무성한 이파리들을 떨구고 그저 파들거리며 서 있었다. 봄날이 오면 그 나무에 다시 잎이 돋을지 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봄이 올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 다. 나는 원시인들처 럼 혼돈에 빠져 있었다. 밤이 오면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했다. 그 밤도 지나고 나면, 밤을 견디어 낸 자들에게는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가, 결, 혼, 을, 한, 다. 사복 경찰들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지구의 중력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던 그녀하고... 날개도 없이 추락을 택했던 그녀하고, 그리하여 그날 이후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지 못했던 그녀하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하고 있을까. "자식... 참 좋은 녀석이었는데, 결핵 고치기는 했는지... 하기는 서로 나이가 꽉 차기도 했지... 그 자식 87년인가 수배 해제되기 전에 헤어진다 어쩐다 소란을 피우더니 결국 결혼을 하는구만... 어때? ...정화 너도 물론 올 거지? 그나저나 넌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야." 그의 결혼 소식을 전해 준 선배는 사람들을 향해 떠들다가 나를 향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금박도 선연한 그의 명함에는 재벌 기업의 기획실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나도 곧 전임 자리 를 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방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나는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문을 썼고 그것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예 정이었다. 우리들은 별로 놀라운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 출판사에 모인 옛시절의 동지들은 서로 쑥스러운 얼굴로 명함을 건네고 그리고 공룡이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맘모스들이 커다란 소리로 쓰러져 얼음 속에 갇혔대... 글쎄 몇만 년이 지났 는데도 하나도 상 한 데가 없대잖아... 파랗게 얼어서... 그 둥그렇고 날카롭던 상아도, 허공을 향 해 치켜뜬 눈매도 모두 다 그대로라는 거야... 얼어붙어 있는 붉은 피까지... 밀매꾼들이 그 맘모스 를 발견해서는 상 아만 가져다가 판다는 거야... 그게 돈이 되니까... 그리하여 맘모스들의 치켜뜬 눈동자하고 얼어붙 은 붉은 피만 영원히 지하에 갇히는 거지... 돈이 되는 상아만 빼고..." 13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출옥한 선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하 웃 었다. 웃다가 그는 후배들보다 먼저 일어섰다. 우리들보다 십몇년 전부터 반독재 운동을 해 온 그 는 후배들과의 자 리를 이제 거북해 하곤 했다. 한번은 가려는 그 선배를 붙잡았더니 그가 쑥스 러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선배인데 니들한테 맛있는 거 사줄 돈도 없고... 미안하구나..." 사라져 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등은 벌 써 굽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1986년의 그 다방을 찾았다. 창경원을 지나 돌담이 끝 난 곳에서 스무 발 자국쯤 더 걸어가면 작은 골목에 있던 다방. 그 다방은 이제 노래방이 되어 있 었고 보랏빛과 노 란빛의 네온 사인이 간판 주위에서 천박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다방이 간판으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 런 일들이야 흔해 서 더이상 상처가 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네온 사인 같은 종류가 아닌 빛을 기 억하고 있었다. 그 빛은 페결핵에 걸리고, 골프 용구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 빛을 위해 뜨개질을 하 던 여자는 아직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남자는 우유대리점을 차리고, 화려한 민주 투사였던 노선배 는 다만 저녁을 사줄 돈이 없어서 후배에게 굽은 등을 보이며 사라져 가고... 우리들은 모여 앉아 금박 글씨가 선연한 명함을 건네며,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치켜뜬 맘모스의 눈매 가 보였다. 한때는 따뜻했으나 이제는 얼어붙어 버린 붉은 피가 보이고, 그러자 또 누군가가 말하 는 소리가 들려 오 는 듯했다.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나는 어두워져 가는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구효서- 1958년 경기 강화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 마디' 당선. 소설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장편소설 '늪을 건너 는 법', '슬픈 바다', '전장의 겨울',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 해설-김윤식 이른바 소설가소설의 한 유형에 속하는 작품. 작가 구효서는 90년대에 들어 와 전업작가로 나선 하창수, 박상우 등과 함께 유능한 신인층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거니와, 이 들이 쓰는 작품 유 형으로 뚜렷한 것이 바로 소설가소설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이런저 런 몸부림을 치는 상태를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창작 방법론을 일삼기, 그것은 과연 어떤 문학적 의의가 있는 것일 까. 이런 물음은 우리의 순문학이라는 것의 성격에 대한 물음에로 내닿게 된다. 작품쓰기란 궁극 적으로는, 자기 삶의 실천이라는 사상 위에 순문학의 뿌리가 내려 있었던 것이 다. 소설이 남의 얘 기를 재미있게 또는 그럴 법하게 늘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물이라면 굳이 소설가소설 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순문학의 뿌리인 소설쓰기, 곧 자기 삶의 실 천이라면 그는 필시 다음 두 가지방식을 택하게 마련이리라. 허구적인 인생을 내세워 자기 삶의 실천의 도구로 삼기가 그 하나. 대부분의 위대한 소설들이 이런 범주에 들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가 소설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소설가소설 범주라 부른다. 곧 작가가 자기의 개인적 삶을 개발새발 그려내는 것이 아 니라, 오직 그의 삶이 소설쓰기만으로 얼마나 관철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기가 그 것. 단편(문단문학)에서는 이러한 소설가소설이 빈번히 씌어질 수 밖에 없는데, 묘사를 떠날 수 없 음에 이 사정이 관여되어 있다. 자기의 기억을 떠나면 묘사란 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묘사 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이란, 한가지 사건, 정황에 대한 강렬성으로 드러나거니 와, 이 작품의 경우 그것은 '깡통따개'의 이미지다. 소설가 '나'와 소설쓰기 위해 어떤 절간을 찾았 다는 것, 거기서 이 런저런 사물이나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오직 소설쓰기의 가능성찾기에 대한 필 사적 노력의 다른 표현이다. '나'에 있어 가장 절박한 것, 다시 말해 '나'의 소설쓰기에 있어 가 장 소설스런 계기란 한 송이 꽃을 담을 깡통이었다. 지금 그 깡통 따개가 없어, 꽃꽂이의 불가능함이 드러나지 않겠는 가. 깡통따개가 있어야 꽃병이 가능해지는가, 깡통따개가 아니라 그 대용품이어 도 상관없는가. 작 가 구씨는 깡통따개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그러한 벗어나기의 발견이야 말로 소설쓰기의 가 능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아직도 다만 징후로 남아있 을 뿐인데, 왜냐면 작품을 통한 삶의 실천이란 그 자체가 낚시를 삼킨 아이의 처지에 다름 아닌 까 닭이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모자를 벗을 기회가 오면 벗어야 하기 때문에 모자를 쓴다' 토마스만을 읽 다가 밑줄을 친다. '이봐, 다이너. 넌 남자와 관계할 때 음낭이 밖에 있는 건지 스틱과 함께 질 안으로 들어가는 건 지 아니?' 캐리 피셔를 읽다가 밑줄을 친다. 읽던 책 여기저기에, 검거나 혹은 푸른 밑줄을 그으며 여름(1992년)을 맞았다. '맥아더가 나더러 항복하라고 요구했다던데, 우리에겐 그런 습관이 없다구' 김일성. '난 여느 사람 처럼 모든 것을 내 무지 탓으로 얼버무렸다. 그 시절에는 무지라는 것이 유행이었다.' 귄터 그라스 등등. 무언가를 하염없이 읽었나 보다. 2백 개도 넘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데 난 아직 그 부분을 다 시 읽지 않았다. 다시 읽다니. 아마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설쓰기란 결국,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거나 진 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둘 중 하나다. 소설을 위해 궁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메모 를 하는 따위가 다 그렇다. 그렇다, 고 생각했다. 그 여름, 포도와 참외 같은 걸 먹으며 나는 우주를 떠올렸다. 포도씨 하나엔 포도나무 한 그루 가 들어 있다. 내가 먹은 포도씨가 땅에 떨어져 한 그루의 포도나무를 싹 틔운 다면, 그 나무엔 적 어도 수십 송이의 포도가 열릴 것이고, 수십 송이의 포도에서는 수백 혹은 수 천개의 포도씨가 생 기겠지. 그것들이 또 싹을 틔우고 틔우고 틔운다면? 황홀한 기하 급수다. 포도알 하나 먹은 내 배 가 갑자기 우주만해졌다. 전업 초기에 나는 전업이라는 걸 다음과 같이 생각했었다. 전업이란, 월요일 저녁에 입은 잠옷 바지를 다음주 월요일 저녁까지 줄창 입고 있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그런데 전업 2년차였던 지 난 여름, 나는 우주만해진 배를 안고 자주 광화문과 종로엘 나다녔다. 오늘은 어 떤 하찮은 얘기들 이 진지하게 출판됐으며, 누구의 진지한 얘기가 하찮게 출판됐는가 보려고. 광화 문 교보문고는 작 가의 한숨들로 가득한 곳이다. 종로를 찾았던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밥을 먹으러 갔던 것 같은데 꼭 그 런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일행이 있을 때는 그곳으로 밥 먹으러 가지 않는다. 종로 3가역에서 5가역 쪽으로 백 걸음 정도 걸어가면 세운 상가가 나온다. 상가 밑을 오른쪽으 로 꺾어돌면 조명 기구, 각종 전선, 공구, 피혁 따위를 파는 벌집 같은 가게들 이 보이고, 그 사이 로 아주 좁고 더러운 골목이 구멍처럼 뚫려 있다. 그곳이 내가 혼자일 경우 찾 는 식당 골목이다. 청국장이 아닌 다른 음식도 팔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청국장 을 먹으러 그곳엘 갔다. 담장 벽돌 하나하나에도 청국장 냄새가 깊숙이 배어 있는, 그런 곳이다. 장군 의 아들이 '꼬붕'을 데리고 오가던 거리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아무 말없이, 어 깨를 꺾고, 끈적거 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청국장 백반 한 그릇을 비웠다. 여덟 개의 커다 란 쟁반을 머리 위 에 포개얹고 배달 나가는 아주머니는, 볼 때마다 불가사의다. 내가 밥을 사먹고 나오는 모양은, 대낮 사창가 골목을 빠져나온 신사처럼 은 밀하고 잽싸다. 큰 길로 나와서는 공연히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못 봤지?라는 식이다. 식당 안은 너무도 어수선하고 불결하다. 죽은 파리들을 다닥다닥 달고 있는 끈끈이가 무려 여 섯 개. 물컵에는 세제 거품이 묻어 있기 일쑤고, 벽에 붙어 털털거리는 선풍기엔 먼지와 기름때가 켜켜로 쌓여 있다. 문득문득, 이곳이 어떤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세워 놓은 난민 보호소 야외세트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난 그런 곳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사람이 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입가를 쓱쓱 문지르며 큰 길가로 나와선, 두리번거리고, 아닌보살 하는 거겠지. 그런데도 나는 혼자일 때 면 그곳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가서는 늘, 허겁지겁 먹고, 빠져나와 시치미를 뗀다. 알 수 없는 일 이다. 청국장집에서 나와 종묘 주차장 쪽으로 큰길을 건너야 집까지 오는 1호선을 탈 수 있다. 자주 걷는 길인데도 걸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놀란다. 종삼약국과 롯데리아 사 이에 새점 치는 노 파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있을 것이다. "새점 치세요." 라고 말한 뒤, 노파는 2, 3초 후에 똑같 은 말을 똑같은 억양으로 반복한다. 그 "새점 치세요." 란 말의 억양과 음색이 나를 놀라 멈추게 한다. 소름이 끼 치니까 자연 모골 도 송연해진다. 나는 몇번이나 길바닥에 털퍽 주저앉고 싶었다. 그다지 크지도 않고 괴상하지도 않지만, 무의식 어딘가를 맹렬하게 강타하는 소리.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반응을 살핀 적도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었지만 노파의 억양에 흠칫 놀라는 축도 없지 않았다. 저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 려나. 노파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조금 전에 더럽고 어두운 골목 식당에서 청국장 을 먹었다는 사실 을 들켜 버린 것 같아진다. 새점 치라는 말이 "다 알고 있어, 임마."라고 하는 것 같다. 청국장 맛과 냄새, 식당 분위기, 그리고 노파의 음성은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버린 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코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그러면서도 혼자일 경우 나는 어느 틈에 종로를 찾는 다. 새점 치는 노파 앞을 지나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1호선을 탈 수 있는데, 나 는 마치 깜박 잊었 다는 듯 번번이 그녀 앞을 통과한다. 엉뚱하고 하찮은 상상력이 내 뱃속에서 우주만큼 자라는 날 이면 말이다. 한 해에 단편을(그럴 수는 없겠지만 하여튼) 한 열 편 정도 쓴다고 하자. 문예 지에 연재도 한다 고 하자. 이만하면 작가로선 대성공이다. 아내는 그러나 용납하지 않는다. 원고 료로 따져 보자. 가 장 많이 주는 계간지 원고료로 계산해도 다 합해 8백만원이다. 일년 열두 달 을 8백만원 가지고 살 수 있어? 나는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아내는 애 둘 데리고 살 수 없다고 한 다. 나는 살 수 있 다고 한다. 청국장처럼. 그러면 아내는 말한다. 당신 일년에 단편 몇편 발표해? 지금까지 연재라 는 걸 한 번이나 해 봤어? 나는 자꾸 헛배가 불러서 종로 3가를 찾다가, 이 도시를 떠나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내 육신 이, 거대해진 복부 한켠에 붙어 있는 작은 부속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아 주 떠나는 게 아니 라 한 보름 정도. 난 아주 떠나게 생겨먹질 않았다. 길면 한 스무 날 정도. 청 국장집 같은 데서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새점 치는 노파 목소리에 몇날 며칠 갇혀 살아 보고 싶 었다. 그러면 배가 좀 꺼지려나. "잘 팔리는 소설 한번 구상해 보려고. 잘 팔리는 소설 말야." 아내에겐 거짓말을 치고 짐을 쌌다. 현관을 나서는데 아내가 말했다. "생리가 없어요." 잠시 멈추었다가 나는 말없이 돌아서 도망쳤다. 라훌라. 그렇게 해서 그 마을에 도착했다. 언젠가, '문예중앙' 봄호였던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가 다다른 곳은 반야심경이 무언지도 모르는 칠십 노파가 주지로 있는 작 은 암자였다. 대전 시 판암동을 지나 세천고개를 넘어 옥천 쪽으로 쌩쌩 달리다 보면 대청호반이 눈 밑으로 들어온 다. 그녀는 그곳에서 호박잎에 팥밥을 싸 먹으며 하루에 귀신 두서넛을 저승으 로 쫓아 보내는 일 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고 일어나 대청호 수면 위의 물안개를 굽어보다 아침 을 먹었고, 일을 벌 린 채 수면을 바라보다 점심을 먹었고, 놀을 반사하는 수면을 또 바라보다 저 녁을 먹고 잤다. 감 나무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원래는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저 아래로 굽어보던 암자였다. 그러던 암자가 지금은 마을 한가운 데 있다. 암자가 마을로 내려온 게 아니라, 마을이 암자 곁으로 온 것이다. 대 청댐이 생기면서 마 을은 수몰됐고, 사람들만 빠져나와 암자 곁에다 새 마을을 건설했다. 20여 호의, 작은. 마을 한가운데로 2차선 아스팔트가 놓여 있다. 20분에 한 대꼴로 자동차가 전속력을 내며 지나 가고, 그러고 나면 금방 적막에 싸여 자동차가 지나갔는지 말았는지 개들도 알 지 못한다. 그곳에서 나는 똑같은 메뉴의 아침, 점심, 저녁을 먹었다. 피마자 이파리를 삶아 된장에 무친 것, 썬 오이를 삶아 된장에 무친 것, 된장에 무친 도라지, 된장국, 된장에 무친 시금치, 된장에 꽂 아 두었던 깻잎과 고추 등등을 먹었다. 몇날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것들이 왜 한결같이 된장에 버무러져 있었던 걸까를 알지 못했다. "왜 그렇죠?" 부엌에서 일하는 잔귀먹은 늙은 보살에게 물었다. 몇번을 거푸 소리쳐 묻다가 공연히 물었다고 후회했다. "왜? 맛이 없어?" 맛이 없긴. 맛은 아주 좋았다. 그냥 물어 보는 거라고 했다. 외치다가 지친 나는 말의 반을 제 스처로 했다. "주지 스님이 좋아하셔." 나는 그 암자를 떠나올 때까지 엄청난 양의 된장을 먹은 셈이다.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있어 간 게 아니니까 할 일이 없었던 건 당연했다. 툇마루에 나앉아 반쯤 익은 석류를 바라보는 일. 빗물 고인 돌절구를 들여다보며 장구벌레 수를 헤아리는 일. 그놈 은 어떤 때는 열두 마리도 됐다가 열세 마리도 되곤 했다. 금방 고개를 빼 낸 호반가의 은빛 갈대꽃을 멀리 바라보다가, 화장실 문 앞 까지 놓여진 검은 편마암의 개수를 셌다. 시골에서도 모두 보일러를 설치하니까 구들장으로 쓰던 편마암도 이젠 다 소용없구나. 이런 사소한 깨달음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가 묵고 있는 방 앞에서 대가리가 솜사탕만한 맨드라미와, 싸리나무, 과꽃, 채송화, 고염나무, 대추나무, 돈부, 나팔꽃, 분꽃, 호박덩굴, 벽오동, 배롱나무, 감나무, 토란, 들깨, 열무 들이 있었다. 8월 땡볕에 타고 있는 그놈들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눈이 멀어 버릴 정도였 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한 후배가 찾아와서 체질론을 늘어놓고 돌아 갔다. 필요에 의해 소설의 색깔을 자유 자재로 선택해 쓸 순 없는 것이다, 결국 제 체질대로 쓰는 수밖에 없다, 라고 그는 말했다. 이제 대학 3학년인 주제에 지나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나는 아무 말없이 대청호 수면을 바라보았다. 장난감 같은 낚시 감시선이 시동을 끈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어떤 날은 소설가 윤형이 다녀갔다. 여동생 결혼 때문에 내려왔다며 그는 맥 주 여덟 병과 오징 어, 김, 해바라기씨를 사 왔다. 물가에 앉아, 뜨거운 햇빛 소나기에 머리통이 후 끈거릴 때마다 우 리는 한잔씩 마셨다. 전업을 꿈꾸고 있는(그게 꿈일 수 있을까) 그는 나만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고 했다.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물빛에 넋을 놓는 일이 전부였다. 등과 가슴이 코스모스 꽃술처럼 샛노란 노랑저고리벌이 서까래에 파 놓은 자기 집을 찾는 걸 두 시간 넘게 바 라보았다. 방 천장 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죽은 그리마를 기겁을 해 창 밖으로 버렸다. 신방돌이 나 그 옆 콘크리트 동발에 떨어졌겠지. 다리를 꼬고 누워 생각하다가 나는 아침마다 대빗자루로 그곳을 깨끗이 쓸던 늙은 보살을 떠올리곤 미안해졌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다 버려야겠다 싶어 일 어나 창 밖으로 내 다보았는데, 죽은 그리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밖으로 나가 샅샅이 뒤졌으나(어 차피 할 일이 없었 으므로) 그리마는 간데없었다. 그리마의 행방을 안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개미가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또 몇날이 지난 뒤에야 나는 부엌의 늙은 보살 말고 두 사람의 암자 일꾼을 알았다. 한 사람은 총무 주임이라 불리는 서른두셋 먹은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운전도 하고 집도 고치는 마흔 가까이 된 불목하니였다. 청년은 뫄한머루라는 격투기 수련을 통해 도에 이른다는 독특한 종교를 갖고 있었는데, 밤마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동방불패' '용문객잔' 주인공들처럼 공중을 휙휙 날았 다. 대학에서 법학을 했고, 고시 준비를 하러 암자에 들렀다가 아주 눌러앉아 버렸다고 했다. 불목하 니 사내는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접근해 무슨 얘긴가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노파 주지가 틈을 주 지 않았다. 작은 암 자였으나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은 것 같았다. 방에 누웠거나 툇마루에 나앉아 있기만 하는 내가 딱해 보였던지, 불목하니 사내는 어느 날 내 게 산책로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방에 누웠거나 툇마루에 걸터앉는 일이 결코 심심하지도 무료 하지도 않았으므로, 산책로를 알고 난 뒤로도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20분에 겨우 한 대씩 지나가는 텅 빈 도로를 맘껏 지그재그로 걸었던 것도 심심하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차가 지나다니는 아스팔트를, 이쪽 가장 자리에서 저쪽 가 장자리로 천천히 s자를 그으며 왔다갔다 하는 게 썩 재미있었다. 산꽃들이 피어 있는 곳을 따라 처음으로 들어갔던 산길도 불목하니 사내가 가 르쳐 준 산책로는 아니었다. 그가 일러준 산책로를 비로소 찾게 된 건 그 마을의 뒷산에 상상 외 로 많은 꽃들이 피 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였다. 그런 야산에는 으레 많은 야생화가 피어 있 는 법이다. 그러나 그러려니 생각만 하는 것하고, 실제로 그렇게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을 별 준비 없이 목격하는 것 사이엔 판이한 느낌의 차이가 있다. 나는 자주 꽃을 찾아 암자를 나섰다. 산을 헤집고 다녔다. 불 목하니 사내가 가르쳐 준 산책길은 그 중에서도 감탄을 자아낼 만한 코스였다. 하루는 그 꽃들을 꺾어다 삭막한 방에 꽂아 놓고 싶어졌다. 내가 쓰던 방엔 요와 이불이 각 한 채씩 있었고, 전에 사용하던 사람이 걸어 놨을 법한 달력이 4월까지 넘겨져 있 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앉은뱅이책상과 그 위에 놓인 내 숄더백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방안에서 나는 향기라곤 내가 가져온 존슨즈 베이비 로션 냄새뿐이었다. 산 이나 들에 가서 사 과나 오이 따위를 무심코 깨물다 그 향기에 깜짝 놀라듯, 나는 존슨즈 베이비 로션의 그 돌올한 냄새에 흥분마저 됐었다. 꽃을 꽂아 보겠다는 생각도 아마 그런 데서 나왔을 것 이다. 꽃을 꽂아 둘 기명 같은 게 얼핏 떠오르지 않아 그만둘까 하다가, 마을 앞 길가에 널려 있던 음료수 깡통들을 떠올리고 그거면 되겠다 싶어 수퍼 같은 데서 주는 비닐봉지 를 주워 들고 밖으 로 나갔다. 나는 70개의 깡통을 모으는 데 하루를 할애했다. 그까짓 것 70분 정도면 충분 했지만, 하루를 할 애했다. 물이나 흙에 반 이상 잠겨 있거나, 조금이라도 우그러져 있거나, 오래 돼서 프린팅 상태 가 바랬거나, 안에서 오물이나 개미 따위가 나오거나 하면 줍지 않았다. 그런 것 까지 다 줍는다면 40분도 안 돼서 일이 끝날 것 같았으므로. 한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한 손엔 기다란 막대를 쥐고 수풀이나 고 랑을 천천히 뒤지며 어슬렁어슬렁 하루를 보낸 날, 내 배는 많이 꺼져 있었다. 이튿날 수돗가에서 깡통을 씻다가 나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 다. 요즈음 깡통은 모두 손가락으로 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에는 일원짜리 동전만한 구멍만 나 있다는 것, 그 대로는 꽃을 꽂을 수가 없었다. 깡통따개로 도려내지 않으면 깡통 하나에 기껏 해야 한두 송이 꽂 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깡통따개찾기 순례가 시작됐다. 그것은 순례일 수밖에 없었다. "깡통따개 있어요?" 깡통 따는 흉내를 커다랗게 해 보이며 늙은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은 고개를 흔들었다. "거 왜 통조림 딸 때 쓰는 거 있잖아요?" "예서 비린 거 먹을 일 없잖여." 부엌 살림 도맡아하는 보살이 없다면 없는 거였다. 깡통따개 하나 빌리기 위 해 저 아래 가게까 지 가기가 싫었다. 빌려 달라면 안 빌려 줄 수 없겠지만, 낯간지럽게 고걸 어떻 게 빌려 달라고 하 나? 그냥 하나 달라고 하지. 아냐, 사겠다고 하면 되겠다. 떳떳하잖아. 그러나 가게에도 깡통따개가 없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만 같아 나는 잠시 멍해졌다. "요샌 죄 원터치 캔이라..." 혹시 누구네 집엔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가겟집 주인은 직무유기성 발언을 했 다. 있어두 병따개 겉은 디 붙어 있을 뀨, 어쩌구 하면서. 방안에 꽃을 들여 놓겠다는 계획이 하루만에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암자 에도 없고, 마을의 유일한 잡화점에도 없는 깡통따개. 곱게 몸을 씻고 나를 기다리던 수돗가의 70개 깡통들이 뭔가를 포기한 듯한 내 표정을 보자 갑 자기 칭얼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마을로 나가 고샅을 배회했다. 외 지의 낯선 사람이 부엌 같은 데로 느닷없이 들이닥쳐 깡통따개를 내놓으란다면 놀라자빠지지 않을 사람 없겠지. 난 고샅을 배회하다 아낙서껀을 만나게 되면 아주 예의바르고 조심스럽게 말 할 작정이었다. 실 제로 그렇게 했다. "저어, 깡통따개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열이면 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곁이 지나도록 내가 만난 아낙들의 반응을 종합해 보건대, 그녀들의 고개 가로저음은 깡통따 개가 없다는 뜻과 거리가 있었다. 그녀들은 나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일단 고 개를 가로저었던 것 뿐이다. 멀쩡하게 생긴 사내가 수상히 배회하다 어깨를 굽신거리며 다가와선 뜬금없이 묻는다는 게 깡통따개 있느냐는 것인즉, 나 같아도 고개부터 젓고 볼 일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어서 난 오후까지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 한테 물었다. 어떤 아낙은 내가 정신이 황폐해져 암자에 요양 온 사람으로 알았고, 황폐해진 데엔 분명 깡통따개에 얽힌 기막힌 사연 같은 게 있을 거라고 믿는 눈치를 보였다. 자꾸 드라마틱해 지는 것 같아서, 그 러지 말고 솔직히 있으면 있다고 말하고 거 좀 빌려 주슈! 라고 뻔뻔스럽게 대 들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말 없어서 고개를 흔들든, 있으면서도 다른 이유 때문에 고개를 흔 들든, 고개를 흔드 는 한 깡통따개를 빌릴 순 없는 일이었다. 다섯 시간을 어슬렁거린 끝에 절망 적인 기분이 되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이 마을엔 깡통따개라곤 아예 씨가 말랐어. 참 별난 마을 도 다 있구나. 오기 같은 게 생겨서 나는 한 개의 깡통따개를 위해 대전까지 나가기로 했 다. 대전까지 가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 몰라 다음날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고 길에 나가 섰다. 한 시간 이십 분이 넘 게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승객보다 많은 농산물 꾸러미가 버스 안에 가득했다. 대전역 앞 시장에서도 깡통따개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네번째 들른 식료 품점에서 간신히 하 나 얻을 수 있었다. 나온 김에 질레트 면도날을 샀고, 대중탕에 들러 목욕을 한 뒤, 홍명상가 옆에 서 좋아하는 알감 자도 몇개 사먹었다. 암자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기울어 있었다. 깡통따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수돗가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70개의 깡통 중에 거의 모 든 깡통이 모조리 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솜씨도 좋게 내 대신 그 일을 해 놓았던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수돗가에 멍청히 서 있자니 불목하니 사내 가 나타났다. "아저씨가 한 거 맞죠?" 대답은 않고 사내는 그냥 씨익 웃었다. "어떻게 땄죠? 깡통따개도 없이." "별것도 아닌데..." 사내는 한쪽의 녹슨 호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호미를 집어, 남아 있던 몇 개의 깡통마저 순식간에 따 버렸다. 호미의 날끝을 구멍에 넣은 뒤 깡통을 한 번 두 번 세 번 돌 리니까 끝이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깡통을 땄던 건 아닐까 착각될 만큼 신기한 재주였다. 세 개를 따는데 15초 이상 걸리지 않았다. "깡통따개론 음료수 깡통이 잘 안 따질 거예요." 사내가 말했다. 설마 그럴까 싶어 나는 대전 시내에서 얻어 온 깡통따개로 따 봤다. 역시 그의 말이 맞았다. 맥주 깡통, 캔 커피, 콜라 사이다 과일 넥타 깡통 따위는 깡통따개 로 따지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그랬다. "손재주가 참 좋으시군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걸 재주랄 것까진 없죠 뭐. 재주라면 사실 따로 있긴 있는데..." 그는 의례적인 겸손 같은 건 떨지 않았다. 그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뢰를 갖 게 했다. "그게 뭡니까?" 거듭 감탄할 준비를 하고 내가 물었다. "탈출이에요." "탈출? 탈출이라..."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과 발을 묶고 관에 넣은 뒤 못질을 하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도 탈출해 살아나는 거..." 아, 그런 거. 영화에서 본 것 같아요." "공인중개사, 세무사, 변호사, 의사, 판사, 검사, 노무사, 평가사, 해결사, 그리고 탈출사." "그렇군요. 탈출사." 그는 어깨를 으쓱 폈고, 나는 갑작스럽게 궁금한 게 많아졌다. "정말로 묶이고 못박히고 바닷물에 던져지고 그랬어요?" "해 보진 않았지만 못할 것두 아니죠. 그러려면 돈 있는 사람이 계획도 멋지 게 짝 테레비에다 광고 같은 것도 팡팡 때리고 그래야는데 그게 여의치가 않아서..." "그럼 아직 한 번도 그런 일을 직접 해 보신 적은 없는 겁니까?" "그렇진 않죠.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근 20년간 서커스에서 날리는 탈 출사였소." "그렇군요. 아, 탈출사." "그냥 탈출사가 아니라 늘 날리는 탈출사였다니깐요. 인기 한번 끝내줬죠." 그는 가늘게 실눈을 떴다. "네에, 날리는 탈출사." "근데 선생은 뭘 하는 분이오?" 그가 내게 물었고,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대답해버리 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이름을 물어 왔다. 나는 점점 낭패스러워졌다.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이거 미안해요. 그쪽으론 워낙 몰라서." 뒤통수를 긁으며 그가 말했다. "어차피 선생도 세상에다 멋진 것 하나 터뜨리긴 터뜨리셔야겠네. 우리 같은 사람도 척 들으면 알게시리." "그, 그래야겠죠. 허허..." 내 목구멍에서 제멋대로 웃음이 기어나왔다. "저어, 선생. 내가 왜 이곳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아시오? 여ㄱ는 사람들은 내 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요. 사실은 여기 숨어서 전혀 새로운 탈출 비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거 든요. 이것만 완성 되면 난 당장에 스타가 된다 이겁니다. 테레비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아녜요. 세 계 순회공연 같은 걸 하게 될 거예요. 저 혹시 카퍼필드라고 아세요..." 그가 무슨 은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쏟아놓으려는 데 늙은 보살이 허둥지 둥 달려와 그에게 손짓을 했다. 여기서 또 뭔 설레발이냐, 주지 스님이 급히 찾는다, 그런 뜻의 시 늉이었다. 탈출사는 군기 충천한 병사인 양 총알처럼 법당 쪽으로 튀어갔다. 그가 돌연 히 사라지고 난 수 돗가의 공백감을 추스리지 못해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깡통을 한아름 안고 방안으로 들 어갔다. 앉은뱅이책상이 놓인 밑변을 제외한 다른 세변에 각각 20개의 깡통을 ㄷ자 형으로 배열 했다. 나머지 열 개는 창틀에 올려놓고 물을 길어다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방 안은 깡통만으로도 화려했다. 다음날 아침을 일찌거니 먹고 숲으로 들어갔다. 깡통을 꽃으로 다 채우려면 한 번 나들이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최소한 여섯 번을 생각했다. 그 마을에 도착해서 처 음으로 바쁜 하루 가 될 것 같았다. 꽃을 꺾으면서야 나는 비로소 가을이 와 있음을 알았다. 여러 꽃들을 그냥 눈으로 보고 말았을 때는 그것들이 그저 꽃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꽃을 꺾자니 꽃 하나하나의 인 상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황색 두화의 감국을 꺾으면서, 이런 벌써 가을이잖아, 하고 중얼거렸 다. 구절초며 떡숙이며 개망초 따위는 내가 아는 이름들이었다. 개보리뱅이, 가 새풀, 벋음씀바귀도 그랬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꽃들이 훨씬 많았다. 꽃향기에 취해, 바짓가 랑이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꽃대가리를 꺾었다. 두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방으로 돌아 와 덜어 놓고 다시 숲으로 달려갔다. 몇번을 오갔는지 모른다. 작은 방이 꽃무더기로 쌓여 가는 걸 보면서 신명을 냈다. 오늘밤은 저 꽃들 을 발치에 두고 잘 수 있겠구나. 동화 같잖느냔 말이다. 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이 와 사위가 검게 지워지면서 내 방은 수없이 작은 꽃잎들이 뿜어내는 빛들로 푸르게 어 른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그 한가운데 길게 눕고 싶었다. 방안 가득한 이 꽃 향 기에 난 어쩌면 질 식해 죽을지도 몰라. 백합향에 취해 죽은 사람이 있었다잖아. 문을 조금만 열어 놓을까 어쩔까 망 설이다가, 죽을 맘도 없었으면서 나는 창문을 꼭꼭 닫았다. 그리고 누워서, 까 닭없이 흐르는 눈물 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침에 사내가 나를 깨웠다. "코가 노랗게 됐어요 선생." 열 시간 동안의, 꿈도 없는 깨끗한 잠이었다. 나는 수돗가로 나가 거울을 보 았다. 두 개의 콧구 멍이 망초꽃으로 막혀 있는 것처럼 샛노랬다. "어서 아침 드시고 오세요.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안 먹겠어요. 무 같은 거 있으면 한 개 먹고 싶네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가 먹고 싶었다. 내가 세수를 하는 동안 탈출사 사 내는 부엌으로 가 머리통만한 무를 가져왔다. 수돗물이 갑자기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커다란 무 하나를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걸로 날 묶어 봐요." 다 먹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내게 흰 노끈을 내밀었다. 그 리곤 자신은 의자 위에 가 앉았다.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나는 그를 묶었다. 무를 먹듯, 아주 천천히 정성스럽게 그를 묶었다. 노 끈의 길이는 7미터쯤 됐다. 발목과 손목을 묶고 장딴지와 팔과 가슴과 어깨를 의자와 함께 묶었 다. 묶으면서, 이런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 묶을 동안 그는 꼭꼭 묶어요, 하고 세 번이나 거듭 주문했다. 그 소리를 들 으면서 나는 조금 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마술을 하거나 묘기를 보리는 사람들은 늘 무대 위에 있었으며, 그들을 보조 하는 사람들 역시 무대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몸을 묶고 상자에 가두는 사람들도 공연이 끝나면 묘기를 부린 사람 에게 던져진 동전들을 분배받는다는 사실. 그러니까 묶거나 못질하는 데에 속 임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관객들을 실감나게 하기 위해 관객 중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그 일을 대 신 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작위를 가장한 작위일 뿐이다. 그와 나 사이 엔 그런 밀약이 없 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내가 흥분한 까닭이었다. "잘 묶었어요?" 그가 물었고, 그렇다, 고 내가 대답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뜬 눈에선 빛이 났다. 마당 안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 을 그가 가르며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순식간이었다. 내가 묶었던 노끈은 뱀의 허물처럼 풀어져 그의 발치에 쌓여 있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별난 아침이다, 라고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놀랐죠?" "정말 그래요."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속임수예요." "내가 묶었는데도요." "물론이에요. 선생은 나를 풍선에 묶은 것과 같아요. 결박에서 풀려나려면 풍 선을 터뜨리면 돼 죠." "풍선이 아니라 의자에 묶었어요." 밀하고 나서야 나는 의자를 봤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의자는 간이 회의장 같은 데서 많이 쓰 는, 접는 의자였던 것이다. 접혀지면 용적이 적어진다. 이런 것 나도 할 수 있 겠다 싶었다. 그가 또 씨익 웃었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숱한 탈출을 선보였죠. 오토바이에 묶여서도 탈출했고, 뒤주 안에서도 뛰 어나왔어요. 더블백 속에 갇혔다가도 2초만에 나오고, 그랜드 피아노를 상처 하 나 입히지 않고 관 통하기도 했다니까요. 문을 열지 않고 자동차에서 빠져나왔고, 쌀가마니 속에서 도 탈출했어요. 수 갑이 채워진 채 캐비넷에 갇혔다가 2초만에 관중석에서 뛰어나오기도 했죠. 제 인기라는 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가는 곳마다 아가씨들이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단장이 못 만나게 했죠. 여자한테 한번 빠지면 돈벌이고 인기고 다 끝장이라는 거예요. 서커스가 호황이었을 때, 아 그땐 정말 끝내 줬는데..." 탈출사는 하던 말끝을 사리고 갑자기 풀이 죽었다. 저쪽에서 늙은 주지 스님 이 딱하다는 듯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아 개수작 말고 법왕이 밥이나 갖다 줘!" 주지 스님이 말했다. 법왕이는 암자에서 기르는 비루먹은 강아지 이름이었다. 그 뒤로도 탈출사는 내게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만 번번이 보살이나 주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삼 일에 한 번씩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잘되가요?라고 아내가 물었고, 응 그럭저럭,이라고 내가 대답했다. 남편과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 지겨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아파트에 사는 주 부들이 신기해 했 다. 자기들은 일요일 하루 같이 있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하루 이틀도 아 니고 어떻게 사느냐 고. 그러나 아내는 하나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어쩌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 게 되면 아내는 나 없는 집이 적적해서 이웃으로 놀러간단다. 애 둘을 데리고. 나는 아내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거나 재떨이를 가져오라거나 신문을 가져오라 지 않는다. 이불을 깔아 달라거나 개라거나 하지 않는다. 입었던 옷과 양말 따위를 아무곳에 벗어 놓지 않는다. 동사 무소에 가서 등초본을 떼 오라든가 은행에 가 전화 요금을 내라지 않는다. 옥 수수 샐러드를 만들 어 달라거나 커피를 끓여 달라지 않는다. 그 모든 걸 내가 한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건 전화다. 내가 전화라는 걸 처음 사용한 건 중학교 3 학년 땐가 그랬다. 상경하기 전까지 나는 전화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무소식에 익 숙하고 편하다. 너 무 빠르고 많은 정보가 주위에서 왕왕거리면 어디 적막한 곳으로 대뜸 도망치고 싶어진다. 나는 궁금한 걸 참는데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 거의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면 아내는 말한다. 잘 되가요? 나는 대답한다. 응, 그럭저럭. 어떤 건데? 아내가 다시 묻는다. 나는 대 답한다.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해서, 점심때 생선초밥을 먹고, 저녁에 한 여자를 강간한 뒤, 집에 와 자살하는 얘기야." 탈출사 사내는 어느 날 기이하게 생긴 의복 하날 가져와 나에게 내밀며 무슨 소용에 닿는 물건 인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가르쳐 주겠 다며 그는 그걸 내 게 입혔다. 이상한 옷이었다. 팔과 소매가 없는 갑옷 같은 건데 꼼짝할 수가 없 었다. "그게 바로 구속복이라는 거에요." 그가 웃었다. "아, 난폭한 죄수한테 입히는 거? 근데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요?" "단원이었을 때 쓰던 거죠. 어때요, 그 상태에서 그걸 벗어 버릴 수 있겠어 요?" "설마요. 모르긴 몰라도 이건 꽤 과학적으로 고안된 족쇄 같은데." "과학적이란 말이 맞아요. 그걸 내게 입혀 보세요." 그는 자기 몸을 내게 맡겼다. 나는 구속복을 그의 상체에 씌우고 꼼꼼하게 끈을 당겼다. 다 됐 느냐고 그가 물었고, 그렇다고 내가 대답했다.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윗몸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구속복을 벗어 팽 개쳤다. 그가 탈출 사라는 게 실감났다. "이건 속임수가 아네요. 일종의 숙련이랄 수 있는데, 야구의 체인지 오브 페 이스 같은 거죠. 고 정 관념의 허를 찌르는 거예요. 도저히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면 정말 할 수 없 는 거죠. 할 수 있 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사람의 어깨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용적이 있어요. 그 용적을 줄이고 빠져나오 는 거죠." "절대적이라면서요?" "절대적이라는 게 바로 고정 관념이에요." "그럼 어떻게요?" "어깨를 탈골시키는 겁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아프지 않아요?" "물론 아프죠. 죽을 것처럼. 하지만 숙달되면 견딜 만해져요." "아하." 그는 구속복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뒤 손바닥만하게 접었다. "서커스에서 했던 일은 모두 어둔 조명에서만 가능했었어요. 그것도 보조의 도움이 필요했죠. 하지만 탈골 아이디어 같은 게 있으면 굳이 어둘 필요도 없고 보조도 필요 없겠 죠." "그렇겠군요." 나는 내 어깨를 만졌다. "내가 이곳에서 연구하는 건 바로 그런 거예요. 무대를 실제 구조물로 대체하 는 겁니다. 백화점 지하실 같은 데서 탈출하거나, 경찰서 유치장, 전속력으로 달리는 화물열차에서 멋지게 빠져나오 는 거죠. 사전 준비 장치 없이." 그는 혀로 자신의 입술을 자주 핥으며 말했다. 머잖아 그런 일들에 성공할 것이라고 나는 믿었 다. "자 이리 와 봐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이 기거하는 방 앞으로 데리고 갔다. 손의 촉감에서 나는 곧 신기할 일 이 또 벌어질 거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활짝 열고 내부를 확인시켰다. 얇은 이불 한 채와 낡은 책장이 하나 있었 다. 벽에 걸린 몇벌의 바지, 등산모, 붉은색 티셔츠가 보였다. 작은 창문이 북쪽 으로 나 있었다. 그는 내게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내가 연구한 것 중 하나를 선생께 특 별히 선보이는 것 이다, 아직 발표할 시기가 아니니 행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당신만 믿겠 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방문을 밖에서 꼭 잠가요. 뒷창문도 단단히 잠가요." 방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 그가 내게 말했다. 다 잠근 뒤 다 잠갔다는 표시로 툇마루를 두 번 탕탕 치라고 했다. 그런 뒤 곧장 방문을 열어 보라고 했다. 자신은 연기처럼 사라져 있을 거라 고 했다. 나는 방문 고리를 채우고, 고리가 빠져나오지 않게 막대기를 질렀다. 그리고 는 곧장 뒤뜰로 돌 아가 창문을 잠갔다. 다시 마당으로 쏜살같이 돌아와 툇마루를 탕탕 치고, 문 을 열었다.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신발을 벗고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락이나 벽장 같은 건 없었다. 장 판에도 이상 없었 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 졌는지 알 수 없었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나는 툇마루에 앉아 호반을 바라보았다. 창틀에 꽂아 놓은 산꽃들이 어 제보다 훨씬 꽃잎을 크게 틔웠다. 그를 기다리다 말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벽에 걸려 있는 달 력을 내려 8월까지 넘기고 다시 걸어 놓았다. 내가 떠난 뒤 이 방에 또 누군가 가 와서 이 달력을 넘겨 놓겠지. 오래도록 사람이 들지 않는다면 아마 겨울까지도 8월인 채로 걸려 있을지 몰라. 꽃 향기 가득한 방 한가운데 누웠다가 나는 점심 공양을 하러 법당 쪽으로 올라갔다. 탈출사 사내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주지 스님의 긴 지천을 듣고 있었다. "이놈아 내가 니 가랑이를 붙들고 잡든? 떠날 테면 떠나. 제발 그래 줘. 허구 헌날 시키는 일은 안 허고 잘나빠진 마술이나 부리겠다고? 예라 이놈아 정신차려. 지난번처럼 한번 쫓겨나 볼텨? 탈출? 웃기지 마라. 네 놈이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고 도심정사 아궁이 앞이지 무슨 중뿔 날 일 있다고 까불어. 내 뭐랬어. 신도들 산신 기도 온다고 식전에 뒷 산 석불 앞에다 정한수 떠 다 놓으라고 했지? 그런데 객실 손님 앞에서 아침부터 무슨 짓 한겨? 너 재주부 리는 거 신기허게 볼 사람 하나도 없어. 지난번에 아주 쫓아내 버리는 건데 내가 정말이지 후회막 급이댜. 이번이 마 지막 경고야. 만약 한 번 더 허라는 일 안 허고 딴 수작 부렸다가는 끝장인 줄 알어. 제 입 하나 추스릴 줄도 모르는 주제에 곡기 챙겨 주는 것만도 천행인 줄 알아야지. 은혜 를 알아야 한단 말 야 이놈아..." 여러 번 반복된 나머지 이제는 가락가지 붙을 그런 나무람이었다. 꾸중만 들 려 온 게 아니었고, 아주 규칙적으로 가볍게 매질하는 소리도 들려 왔다. 소리로 듣건대 스님은 탈 출사 사내의 잔등 을 효자손 같은 걸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사내의 음성은 한마디 도 흘러 나오지 않 았다. 그는 이미 그런 매질에 이력이 난 것 같았다. "국으로 가만히나 있으믄 밥이라도 얻어묵지. 저러다 쬐껴나문 이뻐해 주는 사 람 있을깨비." 부엌의 늙은 보살이 쟁그랍다는 듯 이따금씩 킥킥거리고 웃었다. 된장 일색의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다 나는 작은 pvc파이프 조각을 주웠 다. 뒷산 기도장까 지 물을 끌어올리는 공사를 하다 도중에 그만둔 모양이었다. 암자 주위에는 그 런 게 많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부삽과 연탄집게와 깡통따개를 가지고 오후 내내 단소를 만들었다. 부삽 모서리에 여러 번 문질러 기장을 자르고, 그 한 끝을 연탄집게에 문질 러 소리날을 만들었 다. 구멍 다섯 개를 못으로 비벼 뚫고, 거친 부분은 깡통따개날로 다듬어 마무 리를 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부삽에 문지르거나 소리날을 만들거나 구멍을 뚫는 데 적어도 각 각 사오백 번의 힘 든 왕복 마찰을 일으켜야 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지루함이 즐거웠다. 해가 지고 마을이 청색 이내로 뒤덮였을 때 나는 상령산 1장을 불었다. 음 이 맞지 않아 다시 구멍을 뚫고, 잘못된 구멍들은 티슈를 구겨 막았다. 참으로 너절하고 볼품없는 단소였다. 나는 상 령산 1장만 반복해 불었다. 거기가지밖에 가락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불고 불고 또 불었다. 그러다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낮에 작은애가 낚시를 삼켰어요." 아내는 울먹였다. "방해될가 봐 당신한테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하두 무서워서..." 무슨 말인가. 낚시를 삼키다니. 낚시를 인간이 삼키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잖 은가. 나도 경황이 없었다. 아내는 잠시 후 진정하고 말했다. 둥근 자석이 달린 플라스틱 장난감 릴낚시 (참, 그런게 베란다 에 있었지)를 삼켜서 기도가 막히고, 울며불며 등을 두드리고, 아이의 얼굴은 청 동색으로 죽어 가 고, 옆집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헤집어도 소용없고... 나중 에 아이가 기력을 다해 피와 함께 토해내긴 토해냈는데 오래도록 숨을 못 쉬고 발버둥쳤던 나머니 탈진해 쓰러졌다 고 했다. "지금은?" 내가 물었고, "자요." 한숨을 쉬며 아내가 대답했다. "아직 거기 더 있어야 해요?" "내일 갈게." 썩 가고 싶진 않았지만 내 입에선 그런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 언제 부터 썩 내키지 않 는 일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던가. "당신은 좀 어때?" "뭐가요?" 아내는 알아듣지 못했다. 생리 말야. 아내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 다. 수화기를 내려 놓으려 하자 말했다. "아직이에요." 꽃밭이 되어 버린 방안에 누워 나는 오래도록 청동빛으로 굳어 가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되풀이되풀이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 조금 놓여날 수 있었다. 완전히 도망가려 고 푸르게 빛나는 꽃잎들을 보며 '메밀꽃 필 무렵'과 '형설지공'을 생각했다. 정말로 반딧불과 눈 뭉치에 글이 보였을 까. 보였겠지. 요즘처럼 깨알만한 글씨가 아니었을 테니까. 적어도 100급 활자 정도는 됐을 테니 까. 그러다가 아내의 아직이에요, 란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라훌라. 다음날 아침을 먹은 뒤 나는 숄더백에 이것저것 주워 넣었다. 존슨즈 베이비 로션, 질레트 면도 기, 양말 소형 녹음기, 칫솔, 수건 등등. 집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제 신만 신으면 곧장 갈 수 있다. 갈 곳이 어디든, 이렇듯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산뜻했다. 그런 경우는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았다. 산뜻함을 좀더 오 래 즐기려고 나는 툇마루에 앉아, 도합 72시간 정도는 바라봤을 대청 호반을 또 바라봤다. "가시려구요?" 탈출사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더 계시잖구." 그의 말이 의례적인 걸로 들리지 않았다. 난 말없이 일어나 법당으로 향했다. 가겠노라,고 스님 께 고했다. 그렇게 시주를 많이 하고 벌써 가면 어떡하느냐고 스님이 펄쩍 뛰 었다. 돈 생각은 말 고 언제든 내려와 쉬다가라고 당부했다. 나는 밥값에도 못 미치는 돈을 냈을 뿐 이었다. 한길로 내려온 나는 탈출사 사내와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차 시간표' 가 마을 공동 창고 벽에 붙어 있었으나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고 그가 말했다. "아, 이거 섭섭해서 어쩌나."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저 말이죠. 곧 훌륭한 탈출사로 이름을 얻게 될 테니까 그때 한번 만나자구 요. 혹시 볼펜 같은 거 있어요?" 나는 윗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게 내 사인이에요. 사람들이 못 만나게 하면 이걸 내미세요." 그는 자신만만했다. 곧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나는 말했다. 40분 가량을 그와 더 서성인 끝에 나는 버스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자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 던 그가 몇걸음 뛰어오며 절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잘 가요! 라고, 절규 하다시피 그는 외 쳤다. 혈육의 가슴 저리는 이별 장면을 흘러간 영화에선 종종 그렇게 처리한다. 기이한 이별이군,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버스가 달리는 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개의 흰 선과 한 개의 노란 선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붉은빛 섞인 초가을 양광 아래 키 작은 코스모스들이 힘에 겨운 듯 봉오리들을 가누고 있었다. 물가의 은빛 갈대꽃이 바람에 쓸려 한쪽 방향으로만 누었다 일어서고 누웠다 일어섰다. 하품을 해서 맑아진 눈으로 나는 하늘을 보고 호수를 보고 길 위의 노란 중앙선 을 바라보았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나무를 스치고 개울을 건넜다. 많은 산을 넘고 들 판을 지났다. 농촌 아낙과 중절모를 쓴 노인들이 바깥 풍경에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버스 통 로에는 들깻단 묶 음과 어느 농기계의 내연기관인지가 뒹굴었다. 주유소도 지나고, 몇몇개의 초소 도 지났다. 한 시 간은 충분히 넘게 달렸을 것이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산봉우리 들을 유심히 보고, 시냇물의 흐름과 길의 높낮이도 살폈다. 손차양을 만들어 해 를 보고 내 그림자 의 길이와 방향을 가늠했다. 그리고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길 위에서 십여 분을 흘려보낸 뒤 나는 저만치 서 있는 공중전화로 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집에 있었 다. 나는 수화기에 입을 대고 말했다. "어떡하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 김소진- 1963년 강원 철원 출생. 1991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단편 ' 쥐잡기'당선. 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 해설-김윤식 한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한 길이 여러 가지 있겠으나, 그중의 하나로 작가 의 체질이랄까 전기 적 사실을 들 수 있겠다. '보봐리부인은 나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있거니와, 작품이란 많건 적건 알게 모르게 작가의 이러한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작가 김씨의 출발점이 '쥐잡기'(1990)이며, 이 작품의 경향성에 일단 시선을 던져둘 필요가 있다. 단지 처녀작이라는 점 에서 그럴 뿐 아니라 아직 신인급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처녀작은 다 음 두 가지 점으로 그 특징이 요약되는 바, 분단문제가 그 하나라면 민중의식이 그 다른 하나이다. 분단문제란 이데 올로기를 그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남성적이랄까 권위주의적 발상, 곧 힘의 과제로 정립 됨이 보통이다. '아비는 종이었다'라든가 '아비는 이데올로기였다'라고 말해짐 에서도 이 사정이 암 시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 김소진에 있어 분단과제는 여성화라든가 반권위주의 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비로 표상되는 이데올로기란 현실적 삶에서 지극히 무력했음이 그 증 거이다. 이에 맞서 그것과 균형감각을 유지시킨 것이 민중의식으로서의 어미상이다. 이 작가에 있 어 어미상이란 민 중적 풍요로움과 그 풍요로움 속에 솟아오르는 생명감각으로 활성화된다. 문장 력의 역동성이 함 경도 사투리의 억셈에 연결되어, 연약한 아비상을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제1차원적 바탕 위에서, 아들로서의 작가세대의 이런저런 삶의 방식들 이 펼쳐지는데, 그 러한 단계의 머리에 오는 작품의 하나가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이다. 결여된 아 비와, 왕성한 생명 력을 지닌 어미의 형상이 이 작품에서는 '나'와 송일륙의 관계로 대응되고 있 다. 송일륙이란 이름 의 한 밑바닥 출신의 여자가 있다. 얼마를 받으며, 어떻게 스스로를 헤쳐왔으 며, 여인으로서의 그 녀가 어째서 백화점의 절도범으로 변했는가를 문제삼는 방식이란, 이데올로기 에 맞서는 민중의식 으로서의 어미상으로 요약된다. 적어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창작집)의 연장 선상에 송일륙이 놓 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 김씨의 시선이 송일륙 위에 따뜻하게 던져져 있음이 이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작중 화자인 황인숙(나)은 물론 송일륙을 그녀가 빠진 시 궁창에서 꺼내주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노력조차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는 곳에 이 작품의 강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매우 날쌘 움직임, 그러니까 문체의 빠른 속도감도 이 작가 특 유의 패기라 할 만 하다.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 어느 책을 뒤적거리다 알게 된 거지만 의학 용어 가운데 윈도우 피어리드라 는 게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잠복 기간 정도로 번역됨 직한데, 병원체가 몸 안으로 들어와도 곧 바로 발병하지 않 고 잠잠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야 그 증상이 드러날 때까지의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책은 우리의 정신도 육체와 같아서 어떤 충격이나 정신적 외상이 가해지면 그것이 무의식 속 에 남아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 심각한 정신적 불안정이나 퇴행 현상 을 가져올 수 있다 고 설명해 주었다. 이쯤에서 털어놔야겠는데 난 대식증에 걸려 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분명 하지가 않다. 240리 터의 대형 용량을 자랑하는 아이보리 빛 냉장고는 나에게 어느덧 절망의 상자 로 변해 있었다. 각 종 아이스크림, 초콜릿, 케이크, 과일 등으로 가득 채워진 냉장고라 할지라도 갈고리처럼 뻗치는 나의 식욕의 공세 앞에서는 채 이틀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식증이란. 병치고는 참으로 사치스런 병이기도 하다. 그것은 옛날 몰락한 로 마 귀족들이 말기 적 현상으로 유행시켰던 것인데 아무것이나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곧바로 토 해 버리는 증상이 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외국에서는 얼마전 'cnn방송' 사장인 테드 터 너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던 제인 폰다, 호주의 유명한 팝 가수 엘튼 존, 미국 정상의 코미디언 조안 리버스조차, 그리 고 심지어는 영국 찰스 왕세자와 결정적인 불화를 빚고 있는 다이애나 왕세자 비도 그 증세로 고 생을, 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남편 용빈은 나의 대식증을 아이를 갖기 못하는 데서 오는 욕구 불만의 소산 으로 보는 모양이 었다. 우리는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물론 하자는 남편에 게 있는 것으로 판 명됐다. 그는 정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무정자증 환자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이 란 뻔하지 않겠는 가. 우선 아이를 데려다 입양시켜 키우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고, 다음으로는 남 편이 적극 권장하 는 것이기도 한데 인공 수정을 하는 방법이 있다. 남의 씨를 빌려다 심는 것이 다. 나도 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는 쪽이었다. 우리 부부의 상담을 받아 준 의사는 정자를 제공하는 사람의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의사의 양심을 걸고 맹세코 그 질을 보장한다고 말했 다. 젊고 깨끗하고 두뇌 명석한 의과 대학생의 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는 거였 다. 암만 결혼 생활 5년째에 접어든 아낙이지만 그 말을 듣는 내 뺨 위에는 발그스레한 홍조가 맺 히지 않을 수 없었 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나의 대식증이 고쳐질 수 있을까. 꺼림칙함은 고스 란히 내 몫으로 남 아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나는 어느 조간 신문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서 눈 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다. '서울 용산 경찰서는 5일 마음이 변한 미군 애인을 찾아가 면도칼을 휘둘러 전치 4주의 상처를 입힌 송일륙(여, 25, 의정부시 가능동 74-8)씨에 대해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 한 법률 위반 혐의 로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송씨는 지난 3일 오후 6시 10분쯤 평 소 결혼을 약속하 고 내연의 관계를 맺어 오던 커크스(24) 일병이 최근 변심해 자신을 잘 만나 주지 않자 용산 미 8군 정문에서 퇴근하던 커크스 일병을 붙들고 말다툼을 벌이던 중 홧김에 갖고 간 면도칼로 얼굴 을 두 차례 그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속된 치정에 얽힌 기사는 보통 사회면에 제일 후미진 구석배기의 ' 휴지통'란이나 '색연 필'또는 '이삭' 가십난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일 것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저 절로 쓴 웃음을 짓 고 세상 돌아가는 꼴에 혀끝이나 한번 가볍게 차고 넘어가도록 의도적으로 배려 한 내용이 태반임 은 물론이다. 그러나 송일륙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닿으면서부터 내 눈빛은 초점을 잃고 일렁거리기 시작했 다. 희한하기도 하여라! 세상일이라는 건 이처럼 서로 복잡다단한 톱니바퀴 모양 맞물려 끊임없이 돌고 도는구나.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혹은 멀어졌다, 어떨 땐 우 연히 아무것도 모 르는 사이에 그냥 스쳐 가기도 하면서. 나는 5년 전 어느 가을의 풍경이 이상스럽게도 나의 뇌리에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풍경은 마치 해마다 가을이면 되풀이돼 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랬다. 그 거리의 가을밤 이후로 내게 다시는 맑고 투명한 가을일랑 오지 않았 다. 한 번 썩어 문 드러진 가을은 때때로 뒷골목의 뜬소문처럼 떠돌다 흔적 없이 사라질 뿐 내 앞 에서 소생할 줄을 몰랐다. 그런 건가. 내 일생 일대의 마지막 가을이 단 한 번의 부활도 없이 정 녕 그렇게 지나가 버려도 된단 말인가. 그리고 5년 전의 그 거리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 던 것일까. "그런데 옛날 시골 어른들 이름짓는 내력이 듣고 보면 참 생뚱맞다구요. 우리 마을 읍내의 5일 장이 매월 끝수가 1일과 6일에 서는 1, 6장이 있었죠. 울 엄니가 무녀리 새끼 하 나는 빼고 읍내장 에 눈만 간신히 뜬 강아지를 한 양푼 담고 팔러 갔다가 해산기가 돌았대요. 그 자리에서 비닐 자 락을 얼기설기 두르고 주변 장돌뱅이들의 투박한 해산 구완으로 몸을 풀었다 해서 내 이름이 그 렇게 심란하게 붙었대죠, 아마.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열다섯에 상경했 으니 벌써 서울물 이 6년째네요. 우선은 배가 고파 올라왔어요. 그리구 어쩌다 한 번 가는 학교도 정나미가 떨어졌 구요. 끝도 없이 밀려오는 가난한 농사일이 지긋지긋했어요. 첨에 서울로 공장 다니러 간다고 했 을 땐 공중으로 붕붕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어요. 시골에서두 테레비는 다들 보 거든요. 커다란 건 물에서 때깔 고운 가운을 척 입구요. 하얀 머릿수건 동여매고 열지어 앉아 일 하는 장면을 보고는 얼마나 가슴이 설레였다구요. 조심, 조심 중에 사람 조심이 젤이여 하는 엄니의 목소리는 시커먼 기차바퀴 소리에 파묻히구... 처음 들어간 청계천에 있는 평화시장 시다 시절은 지금 생각해 봐두 너무 끔찍해요. 그 비좁고 어둠침침한 다락방, 귀가 멍멍한 미싱소리, 왜냐하면 바로 머리 위에서 모터가 돌아가니까요. 켜켜이 쌓이는 그 먼지투성이를 안 마실래야 안 마실 수 없는... 정말 끔찍 해요. 사람이 그런 데서 버텨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에요." 굳이 용산경찰서의 유치장을 찾아가 기사 속의 송일륙이 바로 그 송일륙인지 확인할 수고를 들 일 필요조차 없다. 단 두 줄짜리 기사였지만 난 벌써 그 속에서 양공주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말투나 두툼한 화장기에 덮인 때이른 잔주름마저 미루어 짐작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자 연스런 연상작용이었다. 그해 가을 나는 명동 입구에 있는 어느 재벌 소유의 백화점 3층 백장미 홀 숙녀의류매장에 우 두커니 서 있지 않았던가. 이미 점찍어 둔 가을옷이 있었기에 조금만 마음을 다잡아먹고 그 앞으 로 왜죽왜죽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옷 한 벌에 자그마치 10만원짜리 자기앞 수표 다섯 장이 오 락가락하는데다 직장 생활 시작한 지 8년이 다된 끝에 처음으로 그렇듯 비싼 옷 을 거머쥐는 순간 이었지만 별 망설임은 없었을 터이다. "울 엄니는 야한 옷일수록 더 맘에 들어할지도 모르지. 워낙 입때껏 허상에 만 매달려 살아온 양반이니. 아버지라는 허상의 ... 그리고 어엿한 에미 노릇이라는 허상의. 그래 도 한복이 꽤나 잘 어울렸던 분이셔. 국민학교 땐가... 수업을 받다가 문득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 는데 한복 저고리 고름 휘날리며 송탄 어머니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는 게 보이겠지. 물론 환영 이었지. 길러 준 어 머니에겐 죄만스런 얘기겠지만 핏줄이 당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엊그제 내게 전화를 했더라고. 인숙 씨를 한 번 당신에게 데리고 와보래. 후훗. 시어미 구실이 좀 하고 싶었나 보지? 지레 걱정 마. 같잖은 위세부터 차리고 들려는 그런 소갈머리 없는 분은 애시당초 아니니 깐." 용빈은 수표가 든 봉투를 불쑥 디밀며 지나칠 만큼 노골적으로 까발렸다. "넣어 둬. 내 성의니깐. 이번 주말에는 송탄에 계신 울 어머니를 찾아가 봬야 하고, 또 가을 문 턱도 되고 했으니 인숙 씨 옷이라도 한 벌 근사하게 빼다 입으라고." 그를 낳아 준 어머니는 작은집 댁이었다. 용빈이 평소 자기 집안의 복잡한 갈래에 대해선 별로 귀띔해 주지 않아 그 내막을 잘 알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송탄에 산다는 그의 생모가 왠지 숭글 숭글한 성품의 소유자일 것 같은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그러나 낳아 준 어머 니든 길러 준 어머 니든 시어머니 깜냥을 치르려 들 양반을 둘씩이나 찾아 본다는 건 썩 내키는 일 일 수가 없었다. "용빈 씨, 그렇게 생색을 낼 것까지는 없잖아요? 세상 어느 여자가..." "인숙 씨가 송탄에 가는 일을 탐탁찮게 여기는 심정은 알아. 하지만 이건 어 쩔 수 없어도 한 번은 거쳐야 할 거래인걸. 물론 뒷거래긴 하지만. 이런 거래는 말 나온 김에 싸 늘하게 후딱 해치 우는 게 좋단 말이야, 난... 어디 놀러 가는 셈치라고 제발." 한 번쯤 매몰차게 퇴박을 놓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 속에서 불뚝하기도 했지 만 왠지 곧추세웠 던 목덜미로부터 스르륵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지금의 남편 용빈과는 사 내 결혼을 한, 같은 은행 동료네 집들이 갔다가 첫 대면을 했다. 그는 신랑 쪽 친구들에 섞여 왔었 다. 그에게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난 한참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곱슬머리에 땅딸한 체격을 두 르고 있던 한 사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은행 본사의 환 딜러였고 지금도 역시 그 일을 하 고 있다. 하루 종일 런던이나 홍콩 그리고 동경 외환시장과 연결된 팩스나 컴 퓨터 단말기 앞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솎아내다가 순간적인 판단으로 외환의 매도나 매입 의 규모와 시기를 찍어내 은행의 환시세 차익을 극대화시키는 게 그의 임무였다. "왜, 텔레비전 광고 중에 순간의 선택이 어쩌구 하는 선전이 있잖아? 우리네 딜러들이 꼭 그런 피 말리는 순간순간의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경우라구. 하루살이 삶이긴 해 도 화끈한 면은 있 어. 이때다 싶으면 물불 안 가리고 과부집 장리변을 내서라도 꼬나박으려 달겨 들다가도 이크 빠 진다 싶으면 시앗 본 부처처럼 뒤도 안 보고 돌아서야 해. 내 돈 가지고 하는 짓도 아닌데..." "꼭 도박하시는 분 같아요." "도박이라고? 그거야 말로 예술이 아니던가. 도박은 거래의 최고 경지며 꽃이 자, 벌거벗은 목마 른 영혼 그 자체라는 걸 몰라서 물어? 난 도박 예찬론자는 아니긴 하지만..." 매장 앞에는 한 여자가 집요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점찍어 둔 옷을 걸친 마네킹 앞에서. 그 때문인지 나는 선뜻 매장 안으로 진입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하릴없이 서서 내가 점찍어 둔 옷을 걸치고 있는 마네킹을 다시 한 번 뚫어져라 쳐다보 다 돌아섰다. 퍼러 죽죽한 싸구려 티셔츠를 걸치고 물이 많이 빠져 허벅지께가 희끄무레하고 무릎 이 풍덩 빠진 청바 지에다가 물보라를 뒤집어썼는지 아니면 식은땀을 흘렸는지 목덜미까지 치렁 치렁한 단발머리가 호졸근히 젖어 있었다. 인물값을 살뜰하게 치르게 생긴 콧날이 금세라도 아무 한테나 건방을 떨 듯 유난히 되똑했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녀와의 풋낯쯤은 익히고 이름 석 자도 넌지시 듣고 있는 사이였다. 그녀는 은행 지점이 세 든 대풍 빌딩의 3, 4층에서 잭보이라는 브랜드로 자체 상 품을 만들어 백화점으로 납품하는 중견 봉제업체에 다녔다. 그래서 이따금 분 식집을 겸하고 있는 잉꼬상회나 복도 같은 데서 오가다 흘낏 눈길이 마주치곤 했다. 파란 머리수건 을 야무지게 간동 그린 그녀의 얼굴은 내게 지금껏 바래지지 않는 뚜렷한 이미지를 새겨 놓고 있 었다. 물론 그녀의 이미지에는 왠지 위험한 낙인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그때가 언 제던가... 그때는 봄 비가 위험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촉촉한 봄비에 몸을 적시며 허공 에 뜬 철제 비상계 단에 죽 앉아 있었다. 몸피에 비해 품이 터무니없이 부푼 샛노란 점퍼가 얼른 눈에 띄었다. 이마 에 하얀 글씨로 '단결'이라는 글씨가 쓰인 빨간 머리띠를 동여맨 그녀는 한 손 으론 아슬하게 난간 을 붙들고 다른 한 주먹으론 허공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왜 단 발머리만을 고집하 는 것일까. 그 노래는 곡조와는 상관없이 '로렐라이 언덕'처럼 구슬프게만 들 렸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 라느냐... 아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5천원 일당 쟁취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살아보자- 아! 살아보자!" 우산을 쥔 손목에서 맥이 풀렸다. 위험하다. 왠지 그런 생각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솜털이 보 송보송한 햇병아리가 개구쟁이 손아귀에 떠밀려 까마득한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하는 장면이 끈끈한 예감처럼 떠올랐다. 그런데... 노란 꽃 한 송이가 회양목이 담뿍담뿍 멍 울져 오른 화단 위 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아는 우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제 계단 위의 사 람들이 일제히 일 어나 마치 나를 향해 외치듯 짐승소리 같은 괴성을 우우우- 지르며 난간에 매 달렸다. 아찔한 현 기증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가복음 제5장 30절)' 나는 며칠 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내 이 대목을 되풀이해 읊조리며 속 으로 햐냥 울었다. 예수가 골수에 병이 든 사람들한테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것만으로도 완쾌의 이 적을 베푸는 대목 이었는데 내게는 왠지 자꾸만 노란 점퍼의 추락장면이 떠오르는 거였다. 누가 내 옷에 손을... '여자의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다.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의 자기 발견 꽁 메 르 꼴' 매장에 내걸린 판촉 현수막에는 갖가지 유혹적인 문구가 붉은 혓바닥을 날름 거리고 있었다. "한 번 살펴보세요. 디자인도 독특하고 특별 서비스도 마련돼 있으니 기회가 그만이에요." 판매원 아가씨가 눈웃음을 치며 다가서고 있다. 나는 얼른 스스로 알아서 둘 러보겠다는 뜻으로 가벼운 목례를 해 보이고는 옷걸이들 사이로 들어섰다. 옆에서는 중씰해 뵈는 퍼머 머리가 마네 킹이 맵시나게 빼입은 옷의 소맷부리에 손끝을 걸고 피륙을 감촉하는지 가볍게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너무 젊은 애들 옷이 아닐까? 늙은 사람이 괜히..." "어머머 참, 사모님도. 이제 갓 사십을 넘기신 듯 보이는데 이런 옷이 어디 가 어때서요? 마담 사이즈로도 다 준비가 돼 있어요. 젊게 입으면 그만큼 젊어지는 거지 뭘 그러세 요. 보아하니 아직 허리도 살아 있는 듯 한데요. 제가 이래봬도 턱없이 권하진 않아요." 허리가 살아 있다는 아가씨의 말에 급소를 찔린 듯 구슬가방을 주물럭거리는 여인의 손아귀에 서 힘이 솔솔 풀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모님께서 물건 고르시는 안목이 역시 보통으로 세련된 게 아니십니다. 이 꽁메르꼴로 말씀 드리자면..." 옆에서는 거의 흥정이 무르익어 가는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양쪽으로 둘씩이 나 달라붙어 마네 킹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퍼머 머리가 굳이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싸 달라고 막무가내로 고집했던 것이다. 나는 옷이 벗겨지는 마네킹을 바라보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네킹의 몸뚱아리는 겉보기보담 더럽고 흉칙했다. 등짝에는 반품 어쩌구 하는 서툰 낙 서가 시커멓게 휘갈 겨져 있는가 하면 또 배꼽 아래께는 섬뜩하게 패인 흉터가 들쑤시고 지나갔다. "미친 년." 누군가 귀를 간지르는 것 같아 돌아다보니 단발머리가 내 옆에 바짝 달라붙었 다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성마른 표정으로 콧구멍을 발씬거리는 그녀의 입 근처에선 단내가 훅 풍겨 왔다. "옷을, 옷을 벗기지마. 제발, 그런 식으로 빼앗진 마." 나는 갑자기 숨이 턱에 차올라 자신도 모르게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백주에 벌어진 무지막지한 테러 현장이라도 목격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인숙, 이건 네 옷이 아냐. 틀림없어. 이건 내가 한 번 입다 버린 옷인데 그 아줌마가 가져갔 어. 너희 엄마가 우리 병원에서 빨래하는 그 뚱뗑이 아줌마가 맞지, 그렇지? 맞 지? 이 단추를 보 면 단박에 알 수 있어. 너는 지금 내가 입다 만 옷을 입었어. 그러니 까불지 마. 후후." 그 애 이름은... 그래 건희, 건희다. 3학년 5반 부반장. 나는 머릿속에서 고무공처럼 튀어나온 한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러 자 그 이름에 매달 려 고구마 줄기인 양 줄줄이 딸려나오는 기억의 덩어리들 때문에 양미간을 살 포시 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 엄마는 밖에서 남의 집 헌 뜯게옷을 줄기차게 꿍쳐 가지고 들어왔 다. 진절머리가 나도 록. 내가 몸에 걸치고 있는 헝겊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남의 것 일색이었다. 심 지어는 내의류마저 엄마는 병원에서 가져온 헌 시트 자투리를 이어 만든 걸 억지로 입히곤 했다. "이건 원장 선생님 따님이 몇번 안 입고도 버리게 된 건데 봐라, 기지가 얼 마나 쫀쫀하니. 한 번도 안 빤 진솔 옷이나 진배없다. 아유, 그 의사 선생님은 남자시면서도 어쩜 그리 맘 씀씀이가 알뜰허냐 응?" 그런 옷가지라는 게 펼쳐 보면 한 벌 한 벌이 그녀 집안 형편으로는 꿈 속에 서라도 새것 장만 이란 언감생심이었다. 색상이나 재단, 피륙 등 어느 면을 살펴봐도 일류 수준급 의 옷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러나 뜯게옷은 역시 뜯게옷일 따름이었다. 입는 당사자인 나에게는 거의 눈치채이지 않는 흠 결이 반드시 한두 군데 있게 마련이어서 곧 주위의 따가운 눈에 띄어 버리곤 했다. 등단추 중 한 두 개의 모양새가 조금 틀리다든지, 치마 말기에 올챙이 눈알만한 불구멍이 뚫 렸다든지, 겨드랑이 께 솔기가 보일락말락 미어졌다든지, 허리띠 매는 자리는 있는데 정작 허리띠 는 없다든지, 새 옷 이 아닌 바에야 웬만한 옷이라면 흔히 있음 직한 흠집들이 유독 그녀의 몸에 걸 쳐진 옷들에는 결 정적 낙인으로 환하게 찍혔다. "쟨 남이 입다 준 옷도 참 자랑스럽게 입구 다닌다구.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 등뒤에서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들이 팥죽처럼 끓었다. 그 순간부 터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더 이상 나긋나긋한 옷이 아니라 풀기가 죽은 채, 성충이 된 나방이 찢고 나온 번데기 허물 처럼 한갓 추레하고 누추한 껍데기로 전락했다. 자연스럽게 걸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몸은 균형 을 잃고 갸우뚱거렸다. 건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는 어린 맘에도 주위 의 헐뜯음이 사실 은 부러움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뜯게 옷을 아예 벗어 버 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완전무결한 옷이 걸릴까 기대하며 엄마가 챙겨 오는 옷보따 리 속으로 매번 희번덕거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박아 넣곤 했다. 그때 제일 두려웠던 것은 누군가 이것은 내가 입던 옷이야 하며 나서는 경 우였다. 그 상황이 실제로 닥쳐왔을 땐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새 학기 환경미화 심사가 1주 일 앞으로 다가오 자 그날 그날 청소를 책임진 줄반장은 꼭 담임선생의 점검을 받고 합격 지시가 있어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겨우 줄반장인 주제에 누굴 보고 이래라저래라 명령이니?" "청소만큼은 줄반장이 책임지게 돼 있어. 왜 그래? 청소가 하기 싫으면 그냥 집에 가도 좋아. 하지만 청소하는 데 훼방이나 놓지 말아 줘, 흥. 꼴에." "니 눈엔 내 꼴이 어디가 어때서?" 악에 받쳐 이를 앙다물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건희는 도끼눈을 위아래로 부라 리며 내 몸뚱아리 에 찬물을 끼얹듯 훑어보았다. 세일러복처럼 그녀의 어깨를 덮은 옷깃의 가장 자리께에 영롱하게 수놓아진 구슬 레이스가 무지개빛으로 헐떡거렸다. 더이상 암말 못하고 눈초리만 사납게 말아올리며 쏘아보던 건희의 눈에서 옳 거니 하는 광선이 한 줄기 새나왔다. 입가에는 야멸찬 비웃음이 흘렀다. 그 애는 혀끝이 녹아날 듯 부드러운 말로 어른처럼 속삭였다. "너희 엄마, 우리 병원에서 빨래하는 그 뚱뗑이 아줌마 맞지? 그렇지?" 그때 오금이 졸아붙던 느낌이란! 눈앞에는 온통 그 애의 하얀 레이스 뿐이었 다. 수치심과 뒤범 벅된 형언할 수 없는 노여움이 화톳불처럼 피어 올랐다. 동시에 내부로부터 뭔 가가 와르르 무너 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이 나쁜 계집애야. 천벌을 받을 거야." 정신없이 달겨든 나는 건희의 레이스부터 북 잡아뜯었다. 그 소리는 나중에 용빈을 따라다니며 맛들인 볼링에서 스트라이크를 칠 때 오금에 착 달라붙던 쾌감처럼 무척이나 짜릿했으리라. 살짝 건들기만 하면 언제든지 밑바닥에서 솟구칠 태세가 돼 있는 비커 속의 앙금 덩 어리인 양 지금도 기억의 한켠에 사뿐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으아악!" 갑자기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 속을 단칼에 휘저었다. 나는 무의식적 으로 소리가 난 쪽 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백화점 경비원이 급한 발걸음 으로 달려오고 남자 판매원은 평소에 훈련이라도 미리 해둔 양 소리가 울린 곳에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는 사람들 무 리를 듬성듬성 에워싸듯 하며 몰려들었다. "별일 아니니깐 손님들을 안정시키고 소리난 곳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잘 살 피라구!" 중간관리자쯤 되는 듯한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지시했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당겨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 구경했다. 챙이 넓은 귀부 인풍 모자를 머리 위에 곱게 모셔다 둔 젊은 여자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불에 덴 듯 호 들갑스럽게 공중에 털며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귀부인 모자의 허리께로 눈길을 주다 말고 나는 급히 벌어진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말았다. 그 여자의 허리께에 거진 한 뼘들이로 찢긴 칼자국에선 붉은 자 국이 널름 비치는 거였다. 그러나 들여다보니 다행히 핏자국은 아니었다. 몸에 착 달라붙게 입은 붉은 색깔의 정장이 그런 착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소매치긴가?" "아녀, 자긴 요즘 신문도 안 읽고 다녀? 신문에 난 또 그 일인가베. 예쁘게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자만 골라 면도칼로 그어댄다는 가학성 변태말이야. 조것 봐. 아니나다를까 또 빨간 색깔인데." "정말 그러네. 어머 무시라. 시상에 무법천지랑께." "아, 이 훤한 곳에서 말이야 여봐란 듯 이런 일이 연쇄적으로 벌어지니 정말 얄궂대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어디 하룬들 맘놓고 살겠어, 이거. 벌써 네번째라고. 굼 벵이 같은 경찰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세금으로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 처먹으면서." 잠복 근무중이었다는 사복 경찰 두엇이 진둥한둥 뛰어와 합세했다. "어떻게 된 거요!" "소리가 나자마자 우리가 주위를 에워쌌으니 암만 빠른 놈이라고 해도 미처 몸을 빼긴 어려웠 을 텐데요. 수상한 동작을 한 사람도 없었다니까요. 있다면 바로 이 속에 있어야 하는데." "목격자 없나, 목격자?" "글쎄,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 "옌장,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목격자가 없단 말인가? 우선 바닥부텀 샅샅이 훑 으라고. 범인이 현 장에 범행 도구를 흘리고 갔을 수도 있는 법이니깐." 웅성웅성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졸지에 구경거리의 대상이 된 귀부 인 모자 근처의 사 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고, 경찰은 경찰대로 무슨 일부터 처리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밀려 시적시적 스쳐가려는데 그 무리 안에 갇혀 있 던 여자 하나가 겅중거리며 뛰쳐나와 팔짱을 끼며 반색을 했다. "어, 언니.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단 말이야, 응." 어. 누구더라. 바로 그 단발머리였다. 어째서 이 아가씨가 나를 언니라 부르 며 다랑귀를 뛸 듯 반갑게 달라붙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겁도 났지만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 국 으로 가만히 참으며 장단을 맞춰 주기 시작했다. "어머 얘, 너야말로 어디 있었니? 한참 찾았어. 내가 있잖아, 너한테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스 카프 봐 뒀는데 이리 와 봐. 네게는 역시 물방울 패턴을 이용한 무늬에다 연한 베이지 색상을 깐 게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 게다가 마침 세일 기간이니 오죽 잘됐니." 나는 주위 사람들의 이목은 아랑곳없다는 듯 일부러 넌덕스런 태를 내며 그 단발머리의 팔짱을 세게 잡아끌었다. 잠깐 흐릿한 눈빛을 띠던 그녀도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겼다. "아유, 언니도 웬 백화점에서 그런 것을 산다고 그래요? 그냥 시장 같은 데서 아무것이나 골라 도 될 텐데." "그래도 네 스물세번째 귀빠진 날을 이렇게라도 축하해주고 싶은 이 언니 심 정을 알아나 줘라, 얘." "차암. 언니는..." 나는 단발머리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면서 천천히 사람들 틈새를 헤치고 나왔다. 내 손아귀 안에 잡힌 그녀의 손바닥에서 미세하게 번지는 불규칙한 파동이 느껴졌다. 앞 만 보고 걸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행연습 한 번 없이 그렇게 실감나는 연기를 펼친 자신 을 새삼 돌아다보 는 중이었다. 내게도 이런 다부진 구석이 있었던가. "저 좀 보고 가세요, 언니" "그래요? 그럼, 나 좀 따라올래요?" 나는 그녀에게 짧게 끊어 던졌다. 간판을 보니 커피 전문점 아네모네라고 씌 어 있었다. 단발머 리는 코뚜레가 처음 뚫려 이제 막 사람 손에 고삐가 넘어간 부룩송아지처럼 고 개를 삐딱하게 외 로 꼬며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성큼성큼 따라 들어왔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커피를 큼큼거리며 마시다 말고 난 손가락 끝을 세웠 다. "솔직히 좀 말해 줘요!" 평소에 블랙커피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커피의 강렬한 색깔이 그것을 마시는 사 람의 인상을 좀더 강인하게 보이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쓴 커피 맛만큼이나 아릿한 오기 같은 게 불쑥 솟구쳤다. 내가 반 잔쯤 비웠을 때 무조건 들떼놓고 이렇게 떠보았다. "왜지?" 하는 말이 목젖까지 달라붙었지만 대신 입 안으로 쓴 커피물을 흘려 넣었다. 적당히 그녀를 외 면하고 싶었다. 요즘 신문 사회면 구석배기에는 너댓새들이로 젊은 여인들을 면도칼로 습격하 는 괴한에 대힌 1 단짜리 기사들이 모습을 비치고 있었다. '또 밤길에 20대 여인 습격, 금품을 턴 흔적은 없어. 여자의 화장품 냄새 풍 겨, 남장한 여자로 추정되기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단발머리는 이마를 탁자 위로 쑤셔박듯 기울여 뭔가를 입 안에서 뱉어 냈 다. 처음에 씹다 만 껌인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동강이가 난 면도칼이었다. "놀랐죠? 엉겁결에 입 안에다 집어넣었어요. 혀라는 게 생각보다 감각이 예민 하고 몰캉해서 그 런지 뜻밖에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언니 이름은... 인숙이죠? 맞죠? 난 일륙이라고 해 요. 송일륙." "알고 있어요." "아 예, 정말 고마웠어요. 말은 놓으셔도 돼요. 그게 나두 편하니깐." "난 생각만 해도 어째 몸이 떨리고 무서워지는데..." "히힝,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진 않아요. 그러고 나면 저도 제 행동에 깜짝 깜짝 놀라긴 하지만..." "...?" "근데, 인숙 언니는 우리 명자 언니를 무척이나 빼닮았군요." "명자 언니가 누구죠?" "가엾은 언니죠. 나도 그 언니의 운명이 되고 말 거예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시집간 지 1년도 못 돼서 반벙어리가 되어 버린 언니가 있어요. 6개월만 공장에 더 다니 면 시집갈 한 밑천 뽑는다고 부득부득 내 말을 도통 안 들었어요. 식은땀까지 질질 흘리면서도 그 환장할 납땜 인두 를 그예 손에서 못 놓더니만 시집가서부터 큰 탈이 난 언니가 있어요. 아이를 못 낳으니깐 길거 리로 쫓겨나 헤맨 거예요. 그 언니하고는 구로공단 닭장집에서 처음 만나서 입 때껏 같이 살다가 그 언니가 시집이랍시고 가는 바람에 헤어졌죠. 자기 이름이 좋다며 내 이름 가지고 얼마나 놀렸 는지 몰라요. 여자 팔자의 반은 이름에서 나온다면서 말예요... 멋도 모르고 생 고생을 한 거죠. 지 금 다니고 있는 데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에요. 파업 한 번 제대로 못했 지만... 제가 층계에 서 떨어져 팔에 깁스하고 다닌 거 보셨겠죠? 그나마 그렇게 한바탕하고 났더 니 일당도 5백원씩 오르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회사에서 갑자기 잔업 대신 '교양 강좌'인지 뭔 지를 토요일이면 마 련해 주더군요. 마침 이번 주 토요일은 회사 설립 기념일 행사가 겹쳐서 며칠 앞당겨져 오늘 강 좌가 열렸어요. 초청강사로 그 무슨 여성단체의 총무라는 안경잡이 여자가 나 와서 자발머리없이 떠들더군요. 강연 제목이 아마 '숙녀의 에티켓'이었죠? 오 예, 마이 에티켓!? 언니 저 참 주책이 죠? 그렇죠?" "어머, 보기보담 말 잘하는 데 뭐. 계속해 줘. 난 아주 재밌어." "그래요? 그렇잖아도 요새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칠 참이었는데... 회사 밖으로 타박타박 나오다 생각해 보니 참 얼빠진 년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지 뭐예요. 높으신 분들께 찻 잔을 갖다 드릴 땐 뒷걸음으로 나오는 거라는 둥. 세상에, 이 회사에 그 짓하러 나오는 년들이 도대 체 몇이나 된다구 그 따위 돼먹지 않은 소리를 주워섬기는지. 가만히 듣는 척하고 있자니 얼매나 눈꼴이 시고 부아 가 끓는지 속이 다 미식거리더라구요. 아마 우리 노동자가 회사에 나와서는 그 런 따분한 짓이나 하다가 집에 가는 줄로 착각했나 봐요. 또 윗사람한테는 까딱 인사를 하지 말 고 두손을 공손히 내리고 깍듯이 허리 인사를 하라니, 하느님 맙소사. 존경받을 짓을 해야 깎는지 보태는지 하는 인 사가 나올 것 아니겠어요? 걸핏하면 폭언에다 추잡한 손찌검까지 일삼으려 들 고 필경은 보리 뜯 어먹은 소 몰아치듯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치들에게 무슨 열고가 나서 없는 신 경통까지 도지라고 허리를 푹푹 꺾겠어요. 그리고 제발 펑퍼짐한 청바지에 싸구려 운동화 신고 공 순이 티나게 쿵덕 쿵덕 뛰어다니지 좀 말라니, 내 참 기가 막혀서. 생각 같아서는 화장품을 떡반죽 처럼 처말라 번주 그레한 얼굴을 독오른 손톱으로 확 그어 버리고 싶었지만. 누군 운동화보다 구 두가 좋은 줄 모르 고 예쁜 정장 차림에 새침데기처럼 또박또박 걷고 싶지 않남? 쥐꼬리만한 봉급 타서 이것 해 입 고 저것 신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대관절 뭘 먹고 살란 말이야, 고향의 부모님 은 또 먼산바라기 만 하라구? 또 뛰긴 우리가 뭐 선불맞은 멧돼지라서 뛰나. 1분 1초라도 일직 집에 가 쉬려다 보 면 자연 걸음이 빨라지는 거죠, 힝. 언니는 혹시 몇기쯤 되세요?" "몇기? 공채 7기지." "후후. 가을옷을 사려는 언니 옆을 지나는데 돈 냄새가 물씬 달겨드는 게 좋 더라구요. 우린 그 런 후각은 거의 동물적으로 발달돼 있어요. 그런데 내가 말하는 기는..." "기는?" "글쎄 제가 폐병 3기에 접어들었다는 거지 뭐예요. 이 젊은 청춘을 소리 없이 야금야금 갉아먹 는 몹쓸 병균이 제 몸속에서 우글거린대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세상은 나날이 무서운 속 도로 번창해 가는데 이대로 정녕 내 인생의 막이 내린다는 말이에요? 믿을 수 도, 믿고 싶지도 않 아요." "요즘이야, 의술이 잘 발달했으니깐 요양만 잘하면 될 텐데 뭘 그래." "그 젊은 의사랑 똑같이 얘기하는군요." 일륙은 질기디질긴 한숨을 빼물었다. "그런데, 언니 정말이지 약이 갈수록 독해지는 것 같아요. 약봉지엔 순 기분 나쁜 하얀 알약투 성이고요. 요즘에는 약발도 잘 안 받는 것 같아요. 언니 진해거담제가 뭔지 아 세요. 기침병에 잘 듣는 약인데, 그게 그렇게 끝내 준대요. 처음엔 다섯 알만 먹어도 하늘이 돈짝 만한 게 세상 시름 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훌훌 다 잊는대요. 내 주변에는 몸은 멀쩡하면서도 그 걸 일부러 사먹는 애들도 꽤 돼요. 값도 싸고 동네 약방에서 눈 한 번 찡긋하고 하얀 약 주세요 하면 쉽게 구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건 환각제랑 마찬가지인데 설마..." "아,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그게 아닌데. 안 되겠어요. 화제를 딴 데로 돌려야지. 언닌 스 카프 한 장이 얼만지 잘 알죠?" "글쎄, 실크류라면 요즘 못 줘도 한 2,3만원은..." "예. 실크류 말예요. 야들야들 따스한 봄바람처럼 목에 착착 감겨드는 그 실크 류가 보니깐 제가 맘속으로 생각한 액수의 한 다섯 곱절 정도는 되더라구요. 20프로 할인이라고 쓴 바로 아래에 3 만2천원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 앞에서는 스카프 메이크업 쇼가 한창인 걸 언 니도 보셨겠죠? 그 렇죠, 아주 좋습니다. 가을엔 뭐니뭐니 해도 실크류가 돋보이지요. 올 가을 유 행으로는 스카프의 매듭에 포커스가 주어지지 않을까 예상돼요. 자 보세요. 요렇게 뒤로 한 번 돌 리고... 이쪽 깃을 잡고 다시 한 번, 이때 너무 좁게 매시면 뽕이 움츠러들어 멋이 떨어지겠죠? 자, 그러면 아무나 한 분... 이제 그만 돌아가 볼까 하는 시큰둥한 생각이 들었는데 낯익은 레테르 가 시속 100킬로미 터로 눈에 확 달라붙지 뭐예요. 우리 회사에서 납품하는 꽁메르꼴 말이에요. 제 이 투박한 손이 언니의 맘을 사로잡았던 꽁메르꼴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죠? 근데 그런 데서 그것과 맞닥뜨리니 일할 땐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거완 달리 느낌이 이상하대요. 왜 시집가면 친정 동네 거렁뱅이도 반갑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쨌든 주눅들어 움츠러진 어깨를 툭툭 털어 낼 수 있었어요. 아무렴요. 누구의 손길을 거쳐간 건데요." 일륙은 너무 숨을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느라 숨이 가빴는지 밭은 기침을 서 너 번 토하며 냅킨 을 입가로 가져가 틀어막았다. 나는 냅킨에 분홍 빛이 슬쩍 비치는 걸 애써 놓 치지 않았다. "...가을에 만나는 뜨거운 감성, 절제된 이성을 위한 판타스틱 패션 꽁 메 르 꼴 새로운 나를 찾 는 야성의 숨결 당신의 액센트는 원색적인 보디라인 마드모아젤을 위한 네오 클래식패션의 선언 꽁 메 르 꼴. 아, 언니 그게 가을옷이래요. 물론 어느 한구석은 제 손을 거쳐 나갔겠지만 저한테 야 그게 가을옷인지 겨울옷인지 도통 안중에나 있었겠어요? 허구한 날 소맷부리 만 만지작거린 것 도 그런 무감각의 한 이유가 될 지도 모르죠. 내 손을 거쳐간 옷들이 이렇게 황홀한 자태를 뽐내 며 일류 백화점 마네킹에 보무도 당당히 걸려 있을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했겠 어요? 거기에 쏟아 지는 온갖 찬사들. 액센트 칼라, 부드러운 플레어의 실루엣, 곱고 가는 웨이트 라인, 클래식한 튤 립 라인의 스커트. 생소한 외국말 범벅이라 무슨 소린지 감은 잘 안 잡히지만 막연히 그럴듯하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역시 20프로 할인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다행히도 아니에요. 어련하려 구요. 제가 뼈빠지게 만든 옷이 기껏 할인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제값 톡톡히 다 쳐서 받아야 돼 요. 자, 보세요. 어? 그런데... 이게 아닌데... 아뿔싸,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가격표에는 467,400 이라고 씌어 있었어요. 뒷덜미를 덮여 온 어지럼증 때문에 무릎이 푹 꺾이려 했 어요. 눈탱이가 알 싸하도록 비비고 또다시 비비고 쳐다보아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러자 뜬금없이 저번 달 봉급 명세가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당으로 계산한 기본급 27일 128,600, 연장 근로수당 54시간 45,900, 야간근로수당 16시간 14,400, 휴일근로수당 16시간 16,600, 월차수당 1일 4,800, 주휴수당 4일 19,200, 생리수당 1일 4,800. 일당 4,800원에다 하루 평균 10.2시간씩 일을 했 을 때, 그것도 저번달같이 아무 탈없이 꼬박 일한 '아주 운 좋은 달'에 받는 봉 급액인데 여기에서 갑근세, 방위세, 의료보험료 등 각종 세금을 쳐내고 나면 실수령액은 22만원이 채 되지 않았는데. 아아 언니, 현실은 정말 꿈보다 더 터무니가 없었어요. 가슴을 쥐어짜며 한숨을 쉬어 봐도 숨죽여 울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걸요. 날 미치도록 우울하게 만든 건 바로 그 숫 자들이었어요. 가격 표에 씌어 있던 숫자를 가만히 따져 보니 내 봉급액의 에누리없는 갑절이었거 든요. 그 환장할 일 치가 속에서 뭔가를 뭉클거리게 한 거라구요. 그렇지만 않았어도 난, 난... 입때 껏 이런 생각을 갖 고 있었어요. 그래도 이 세상은 몇가지 조건만 좀 나아지면 저에게 행복을 줄 만한 그런 곳이라 고 말이에요. 아침에 한 30분쯤만 여유가 있으면 위산이 넘쳐나 쓰린 속에 허 겁지겁 새벽밥을 퍼 넣지 않아도 되구요. 그리고 일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테레비 선전에 나오는 톱스타 안성기처 럼 산뜻하게 하루를 뒤돌아보는 맥스웰 커피 한 잔 정도 타먹고 즐기면서 에프 엠 음악을 들을 만 한 여유가 되구요. 하다못해 주말 하루 정도는 눈이 맞은 씨억씨억한 수컷이 생겨서 변두리 재개 봉관이라도 들러 눈물이나 한소끔 쨀끔 뽑아내는 고무신 부대가 된다 한들 알 량하나마 제 몫의 행복은 챙겨지는 게 아니겠느냐, 뭐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건 어느 누가 들어도 억지는 아니잖아 요. 오히려 한심한 인생이라고 봐야지요. 큰손은 그만두고서라도 작은손 사이에 서도 몇백억이 오 가는 허무한 세상에 살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물방울 다이아, 이태리제 가구, 콘 도, 천문학적 부동 산 투기, 34조원의 예산, 사슴피 농장, 남북관계, 고위층, 대권정국 등등이 제 조 그만 행복의 울타 리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엿장수 가위질 따라 정해지는 추석 떡값의 끝수가 차라리 더 큰 관심을 끄는 절실하고도 현실적인 문제였어요. 언니,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 게 살아 봤자 진짜 아무 소용이 없나 봐요. 이게 무슨 황당한 뒤바뀜이에요? 제가 만든 옷 앞에 서 저는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으니 말예요. 제가 꼬박 두 달 60일 동안 유령이 되어 떠돌며 입 지도 먹지도 않고 한뎃잠을 잔다고 쳐도, 그리고 고향에서 제가 부쳐 준 돈으로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해서 고스란히 월급 봉투를 차곡차곡 모은다 해도 그 가을옷 한 벌 사입기에는 어 림도 없단 말이죠? 그게 정말이죠? 그럼 전 분명히 가짜예요. 이 세상도 순 가짜예요. 모두모두 가짜예요! 씨이..." "..." "아이 참, 내가 쓸데없이 너무 흥분했나 봐요. 이해하세요, 언니. 오랜만에 제 말을 진득하게 받 아 주는 상대를 만나니깐 그저 굶주린 듯이 말을 한꺼번에..." "무슨..." "모르긴 몰라도 저게 아마 비발디의 '사계'맞죠? 그 정돈 저도 빠삭해요. 아 까 매장에서도 저게 흘러나왔잖아요. 저도 그만한 눈썰미는 있다구요. 눈 덮인 계곡의 얼음장 밑에 서 개골창 흐르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걸 보니 저건 제4번 겨울이 틀림없을 거예요. 딴따따라라- 랄라- 딴따..." 아네모네의 공간을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율동미 있게 흐르고 있었다. "백장미 홀에선 유행가가 흘러나왔는데... 그대는 뭔가 다르네요.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젠 숙 녀, 숙녀라고 얘기해요 하면서 제 등을 은근히 밀어 제칠 땐 죽고 싶었어요. 감 히 그 가을옷을 손 수 짜낸 나를 밀치다니. 그런데 그 옷솔기를 어떻게 한땀 한땀 떠 가는지도 모 르는 사람들은 한 껏 부푼 지갑을 주물럭거리며 너무도 당당히 그 옷의 품위를 매입해서, 저의 눈물과 한숨과 애원 까지 매수해서 고상하게 소비하려고 폼을 잡는 거예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퍼뜩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 몫의 행복을...! 그 빼앗긴 행복을 도로 차지할 수만 있다면... 갈 기갈기 찢어발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보같이럼..." 일륙은 어깨를 가늘게 떨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 다. 나는 그녀 옆으 로 다가가 앉아 부드럽게 어깻죽지를 감싸 안으며 딴에는 훈훈한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으나 입 안에서만 어설픈 단어가 돼 맴돌 뿐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언니, 오죽하면 제가 마네킹이 되고 싶다는 맘까지 먹었겠어요? 어떻게 매장 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다만 매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가느다란 욕망이 회 충처럼 꿈틀거리는 걸 느꼈어요. 어떤 식욕 같기도 하고 의미한 요의 같기도 한 뭉글뭉글한 정체 불명의 덩어리를. 그 덩어리는 곧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면서 탐스럽게 조각이 났어요. 전 너무 눈이 부셔 뜰 수 조차 없어요. 그 조각은 하나하나가 알약, 예 바로 그 진해 거담제로 변해 내 정수리 위로 소리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알약이 다 쓰고 빈 곽으로 깨끗이 부셔 둔 제 콜드크림통에 머나 먼 행복처럼 소담스레 고봉으로 한 가득 쌓이는 거예요. 언니, 부디 얌통머리 없는 날 용서하세 요. 그런 진해 거담제라도 먹지 않으면 이 고통스런 현실을 1분 1초라도 견뎌 낼 줄 아세요. 저처 럼 물러터진 계집아이가? 그런 건 아예 바라지도 마세요." "아무도 자기를 비난하지 않아. 아니 비난할 수조차 없어." "난 자수할래요." "자수?" "그래요. 자수. 아아, 그건 길거리에 세워진 표어처럼 편하고 자유롭고 아름다 운 걸 거예요." "왜?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제발 자수 같은 건 하지 마. 꿈도 꾸지 말라구!" "언니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아요. 괜히 절 동정하지는 마세요. 떳떳한 죄과를 치 르고 싶을 뿐이에요." "자수는 안 돼. 자기의 자수를 받을 자격이 우리 사회에 있을 것 같아? 어림 도 없는 생각 말라 고. 널 동정하는 게 진짜 아니야." 나는 자수라는 말에 왠지 발정난 암코양이처럼 포달을 떨어댔다. 담임 선생은 그때 건희를 할퀸 나를 계도하는 뜻에서 걔네집에 1주일 한 번 씩 네 번을 찾아가 사과하라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증으로 건희 어머니의 서명을 받아 오라고 다그 쳤다. 나는 물론 꼬박 네 번을 그 넓적한 정원석이 징검다리처럼 깔린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매번 갈 때마다 건희 엄마는 현관에 서서 날 아주 반 가이 맞아 주었다. 그리고는 첫날은 과일을 깎아 주면 얘기를 사근사근 붙여 왔고(물론 내게서 사모님은 한마디의 말도 듣질 못했다) 두번째날은 음악을 틀어 주며 소파에서 고양이처럼 졸게 만 들었고, 그리고 셋 째날은 으늑한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집 구경을 시켜 주며 어디서 금방 캐다 심 은 듯이 푸석푸석 하고 생소한 외국 꽃을 가리키며 꽃 이름을 일러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나는 결코 그 집에서 풀죽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사실 난 잘못한 게 없었으니깐 맹랑한 아이라는 타박을 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 다. 그때의 그 자존 심이 지금껏 나를 버팅겨 주는 어떤 힘이 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나는 끝내 가을옷을 살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용빈은 내가 옷 장만을 하지 않았다며 송탄 행을 1주일 뒤로 미루자 몹시 역정을 냈다. "인숙 씨가 지금 사람을 얕보는 거야 뭐야? 우리 송탄 엄니가 그렇고 그런 여 자라서 얼굴 디밀 기가 그렇게도 낯이 깎이는 일이라 그건가?" "그게 아녜요, 용빈 씨. 화를 내더라도 어찌된 연유인지 알아나 보고 그러세 요." "그래, 도대체 그 찜 쪄 먹을 연유라는 게 뭐야?" "가을옷을 혼자 가서 덜렁 사는 여자가 어딨어요. 그것도 결혼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는데. 남 들은 되다 애인들 팔짱을 끼고 와서 흥흥 콧소리를 내면서 사는데, 그것 자체 가 이미 훌륭한 사 랑의 구매 과정이더라구요. 알겠어요? 그냥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사랑을 사는 거 있죠? 용빈 씬 맹문도 모르고설랑, 멋대가리도 하나 없이..." "클클클, 그만해 둬.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따가 저녁에 당장 만나자구." 가을옷이 곱다시 포장된 쇼핑백을 들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명동을 둘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 고 다닐 때였다. 그는 저녁을 간단히 때우자고 채근했다. 나는 이렇게 바깥에 함께 쇼핑 나오는 것도 드문 일일 텐데 저녁은 정식으로 근사하게 먹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러자 용빈은 그러면 자 신이 호텔에서 뷔페로 한턱 내겠다고 흰소리를 쳤다. 내 손가락을 움켜쥔 그의 손은 달아서 뜨끈 뜨끈했다. 그는 아마 지금 날 몹시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의류매장 갱의실 에서 가을옷을 입 고 주름문을 밀치고 나온 날 바라볼 때부터 그의 눈초리에 열기가 퍼담겨 있음 을 눈치챘다. 내 발걸음은 자꾸만 아네모네로 향하고 있었다. 그쪽은 또한 호텔이 있는 큰 길로 난 방향이기 도 했다. 용빈은 끊임없이 내 귓불에 대고 속삭인다기보다는 뜨거운 입김을 쏘 아댔다. "어때... 응?" 나는 고개를 돌리며 슬쩍 웃다 말았다. 아네모네 앞을 지날 때였다. 맞은켠 옷가게의 진열창에 는 움직이는 인간 마네킹이 패션 쇼를 하는지 사람들이 우죽우죽 모여 서 있 었다. 언뜻 그중의 한 사람의 옆모습이 눈에 빨려들어왔다. 바로 송일륙이었다. 나는 입맛을 쩍 다 시는 용빈의 손아 귀에서 손을 풀어 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륙의 뒤로 엇비스듬히 다가갔다. 그 녀는 진열창 안에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잰 체하며 서 있는 마네킹의 가을옷에 완전히 도취 된 표정을 짓고 서 있느라 내가 다가서는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조명 탓인지 그녀의 두 뺨은 잘 익은 수밀도처럼 발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 다. 아, 나는 속으로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느닷없이 갈증이 느껴졌다. 일륙은 거의 황홀경의 체험을 하고 있는 듯 사 팔뜨기처럼 눈을 모들 뜬 채로 진열창 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놀랄 만한 집 중력이 그녀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만일, 인류가 아담과 이브처럼 새로운 종자로 역사를 시작한다면 지금 이런 상태의 일륙이가 간택되어 마땅하다는 턱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꼼 짝 않고 서 있던 사 람 마네킹이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둘러선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끈끈히 진 열창 안으로 쏠렸 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몸 한구석 어딘가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몸을 살짝 비트는 시늉을 했다. 그녀와의 눈맞춤을 당장 실현해야 한다. 나는 일륙의 손을 붙들고 아는 체를 하려고 했다. 그녀의 손을 더듬기 위해 눈길을 아래로 깔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녀의 손은 바로 옆의 어느 아가씨의 백 속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 했다. 그건 소매치 기들이나 하는 짓임이 분명했다. 나는 머릿속이 팽그르르 달아올랐다. 반질반질 한 손지갑을 꺼내 들고 나오는 일륙의 손을 제지하려는 순간 목덜미에 뭔가가 서늘하게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 는 이상하게도 목뼈 부근이 뻐근해지는 쾌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쾌감. 돌아다보니 옆에 있으려니 했던 용빈은 흥미를 잃었는지 길 건너편에서 담배 를 피우며 초조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길거리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용빈이 있던 자리에 는 웬 남상지른 모 습의 꺽실꺽실한 아가씨가 납작한 맹꽁이모자를 쓴 채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의 오무려 붙인 손샅에서는 반 동강이가 난 예의 그 면도날이 흘낏 광선을 되쏘곤 사라졌다. 순간 내 몸은 납덩 이처럼 굳어졌다. "가만있지 않으면 곱상한 얼굴에 사정 없이 줄 가부러잉." 그는 바람잡이였다. 그럼 일륙은...? 갈 데 없는 소매치기였단 말인가! 나는 겁 도 없이 맹꽁이모 자를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그 사이에 끌려 나온 지갑은 일륙의 손을 거쳐 맹 꽁이모자의 점퍼 호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 정말 이래선 안 돼. 그때 일륙이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구멍 속으 로 기어들려는 그녀의 이름을 떠밀어 냈다. "일 륙 아..." 그녀는 정말 아네모네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내게 자신의 살아온 내 력을 털어놓으며 눈 물짓던 틀림없는 일륙이었다. "일륙아, 나 모르겠니?' "어머, 이 아가씨가 왜 이래? 내 이름은 현정이에요. 사람 잘못 보고선." 그녀는 내가 내민 손에 벌레라도 묻은 양 휙 뿌리치고는 맹꽁이모자와 팔짱 을 끼며 빠른 속도 로 길거리 인파 속에 묻혀 갔다. "언니, 난 자수할래요." "자수?"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이로 얼어붙어 몸서리를 쳐댔다. 그때 용빈이 지싯지싯 다가와 내 어깨를 톡 건드리지 않았다면 난 하냥 그렇게 몸을 뻣뻣이 굳힌 채 서 있었을지도 몰랐 다. "아직도 볼거리가 남은겨? 저건 유치한 쇼야. 한두 번 본 게 아닐 텐데 새삼 스레 뭘... 얼른 가 자고." 나는 그가 팔짱을 끼는 대로 허물어지듯 몸을 맡겼다. 갑자기 속에서 허발이 라도 난 듯 허기가 솟구쳤다. 뷔페의 음식을 모두 다, 아니 이 세상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시 내 귓볼에 뜨거운 입김이 달라붙었다. "어때... 응?"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녹아 버린 듯한 뇌수가, 고드 름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 소리처럼 명징한 발라드 풍의 랩소디에 맞춰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랩소디를 반 박자 늦게 따라가며 멍한 표정으로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욱, 시 장하다! 사하라 박상우- 1948년 경기 광주 출생.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 편 '스러지지 않는 빛' 당선.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장편소설 '지구인의 늦은 하오', '시인 마태오',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 해설-전영태 시대를 혼돈의 연속으로 세상을 무질서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비관주의자는 시 대가 바뀌고 세상 이 개혁된다고 해도, 그의 세계관을 고치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여전히 세상을 암울한 눈으로 조망할 따름이다. 박상우 의 '사하라'에는 개 인사적 궤적은 다르지만 비관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되는 남녀가 등장한다. 이 작품의 은애와 정훈은 이 사회의 밑바닥에 은신하면서 살아가는 룸펜 같 은 존재이다. 스스 로 기생충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되는 이 두 인물은 7년 동안 소 식을 모르고 살다 가 종로통에서 우연히 만나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7년 전 화류시라는 고 장에서 은애는 언니 가 경영하는 카페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살았고, '나' 정훈은 누나네집에서 더부 살이를 했었는데, 7 년이 지난 오늘에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넘기는 그들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 았다. 은애는 동생 의 집에서 기생하고 있고, 나는 번역일 따위를 하면서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형편이다. 이 두 인물이 서로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고 애정을 느끼고 있음은 물론이 다. 그래서 육체적 관계를 가지기도 하지만 결코 결합할 수 없는 관계임을 자각하고 서로를 멀리 하게 된다. 이 소설 에 나오는 포르투갈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암울한 '파도'의 멜로디에 어울리 는 슬픈 사랑 이야 기가 처연하게 전개된다. 80년대의 군사독재정부치하에서 문민정부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들에게 아무 의 미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 그들이 만난 카페에 들려오는 최류탄 터지는 소리로 상징되고 있다. 그 들이 느끼는 막막함과 우울감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 니다. 타인에 의해 서 또는 시대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자신에 의해서 상처받은 이들은 생존을 지속 하는 한 비관주의 적인 인식에 매달릴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허무주의는 이들 두 인물의 경우처럼 원인을 제대로 규명 할 수 없는 복잡한 비관주의의 적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작가는 등장인물이 느끼는 세상에 대 한 공허한 감정을 그대로 살려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작가는 이렇게 묻 고 있다. 사하라 나는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오직 나의 혼돈만을 알 뿐 나는 망상에 망상을 거듭하며 세월을 보냈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고 세상이 바뀌는 걸 보았다 또 세상엔 아랑곳없는 연인들의 키스 소리를 들었다 또 혁명을 위해 살고 혁명을 위해 죽는 것을 그리고 총알을 맞고 너무나 짧은 길의 마지막에 다다른 자들 곁에서 그들의 두 눈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후안 헬만 '눈'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부터 은애는 한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저 녁 일곱시경, 도심 한복판에서 아주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된 뒤부터 시작된 그 녀의 줄담배는 밤 아홉시경,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뒷골목의 비좁고 협소한 카페 공간으로 최루 탄 터지는 소리가 밀려들 때까지 줄기차게 계속됐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최루 탄 쏘아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뒤부터 갑작스럽게 끽연을 중단해 버렸다. 끽연 대신 낮은 조도 의 갓등 밑에 쪼그 리고 앉아 가볍게 다리를 떨거나,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 다보거나, 아주 가 끔 나와 눈을 맞추거나,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떨구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문득 생각난 것처럼 탁 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리거나 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에돌기 위 해 의도적으로 그 러는 것일까. "문민정부 잘한다고 남들 다 박수치는데... 어째서 학생들만 저렇게 난리를 친 담." 스탠드 바 안쪽에 서 있던 주인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갖가지 술병이 진열된 그 녀 등 뒤쪽의 장식 선반과 바 위의 허공에 매달린 작고 앙증맞은 조명등, 그리 고 두꺼운 몸피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주인 여자의 검은 드레스가 얼핏 보기에 전위예술 무대의 의도적인 불균형 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을 터인데, 어째서 두 시간이 지나고 나 서야 비로소 그것 이 감득되는 것일까. '틈'이라는 상호가 맘에 든다고, 저곳으로 들어가자고 은애가 말했을 때, 애 초부터 의도한 장소 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번역 원고 를 들고 갈 때마다, '낙원 출판사'의 변사장이 차를 사거나 술을 사곤 하는 '장밋빛 인생'이라는 레 스토랑을 염두에 두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이어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에서 술만 취하 면 졸부 근성을 드러내는 인간, 변 사장과 마주치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 낮, 단성사 앞에서 은애를 만나 기 직전에 헤어졌 는데 또다시 그와 마주친다? 그래서 나는 나무로 된 출입문을 열고 슬그머니 안쪽을 들여다보았 다. 놀라울 정도로 협소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 생게망게하게 시 야로 밀려 들었다. 2미터 정도의 스탠드 바와 두 개의 탁자가 놓인 앙증맞은 공 간. 괜찮겠냐는 표 정으로 은애를 돌아보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엔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어요. "술 안 마셔요?" 담배 대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성냥개비 하나를 끼우고, 그 끝에다 맥주를 찍어 탁자 위에다 무엇인지도 모를 글씨를 끝없이 써대고 있던 은애가 문득 고개를 들고 나를 건너다보았 다. 부질없는 열정이 말끔히 씻겨나간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측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른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7 년이라는 세월이 흘 렀고, 그 사이에 그녀는 서른하나가 '되어 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를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 세월의 행간에 옹이처럼 박혔을 애환을 나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다른 한 편으로는 뭔가가 잘못된 것 같고, 꼬인 것 같고, 겹질려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지 않 을 수 없었다. 따 사로운 햇살이 지천으로 깔리는 봄날, 주체할 수 없는 젊은 날의 열정으로 시 대를 향해 화염병 몇 개 날렸다는 죄, 그것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이 이렇게 황락해져가도 괜찮은 것인가. "옛날처럼... 그렇게 못 마셔. 왠지 감흥이 없고 마시면 자꾸 비감스러워져. 술에 대한 불감증 같은 게 생겼나 봐." 7년 전, 자신의 언니가 경영하던 '노아의 방주'라는 카페에서 거의 매일 폭음 을 일삼던 나를 기 억하며 건넨 질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그 자기 방기의 시간 속에서 사지를 뒤틀며 정신없이 술을 퍼마시던 인물이 누구였던가. 황량했던 시대를 피해 가며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파괴하던 인물- 그는 내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또하 나의 나였다. 누나 네가 있는 화류시로 내려가 하릴없이 기생하던 7년 전 그때, 그리하여 '노아의 방주'는 악마 숭배 자들의 지하 소굴처럼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느끼게 했었다. 자포자 기가 극에 달했던 그때,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 악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바로 거기 서 나는 또하나의 악마 숭배자였던 은애를 만나지 않았던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노래 아직도 좋아해요?" 우스운 질문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끄러미 나를 쳐다 보았다. 허전한 공 동이 느껴지는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다서 헝클어진 머릿결이 조성해 내는 묘 한 분위기가, 바라 보는 그 순간 이미 과거로 환원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독스럽게도 조명이 낮 고 음습했던 지하 카페, '노아의 방주'에서 오직 침묵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 같던 그 시절- 그때 은 애는 스물여섯이었고 나는 스물여덟이었었다. 대학 4학년 때 제적을 당한 운동 권 출신의 그녀가, 그때 '노아의 방주'에서 나를 위해 자주 들려준 그 노래가 무엇이었던가. "말디카오?" 시대를 의식적으로 피해 가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시대 때문에 나 자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 는 걸 깨닫게 될 때까지 나는 그 노래를 꽤나 좋아했었다. 지칠 대로 지치고, 망 가질 대로 망가진 뒤에야 비로소 그 오장 육부를 쥐어짜는 듯한 노래의 마성에서 미련 없이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이 다. "어느 날인가... 정훈 씨가 '노아의 방주'로 올 때 그 테이프를 사 가지고 왔 어요.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실 때마다 이 노래를 들 려주세요. 그럼 매 상이 많이 올라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그걸 건네줬어요. 하지만 모 르고 있었죠? 정훈 씨가 테이프를 사다 주기 훨씬 전부터... 나도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는 거."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검지의 첫번째 마디를 술잔에다 담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꺼내 다시 탁자 위에다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나가 버린 시간들, 그 스러 져 버린 청춘을 흔 적을 소리 없이 되새김질하는 것 같았다. "그 노래가 악마 숭배자들의 주제가였나?"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워 버렸 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7년 전 그때, 그 출구 없던 시절의 어둠이 불현 듯 되살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말리아 로 드리게스의 노래를 동일하게 좋아했을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녀를,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 것 은 결코 아니었다. 정서적인 동병상련은 있었을망정, 그것을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몰고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 대 나는 분명히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운동권 학생으로 시위 주동자가 되고, 남학생들과 어울려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그것으로 제적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에는 더욱 그랬다. 시대 적인 문제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시대적인 문제 때문 에 병들어 가는 이 율배반적인 고등 실업자의 심리를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그 견딜 수 없는 자 기 모순의 간극으로 나는 끊임없이 술을 퍼부어댔고, 종내에는 악마가 되고 싶 다는 생각을 하며 때마다 진저리를 쳐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와 내가 아말리아 로 드리게스의 노래를 끝없이 되풀이해 들으며 정서적인 동병상련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닮아 있고 나머지는 닮은 구석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얘기... 기억나요?" 나를 건너다보며 그녀는 자신이 손을 담갔던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잠시 동작을 멈추 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 다 별 볼일 없고... 둘 다 기생하는 인생이라고 말했던 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독하고 역한 싸구려 럼주에 취한 채 나는 그런 말을 입 에 담았을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분위기로 남겨지는 기억이 있지 않은가. 시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이 뚜렷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내 처지에 대한 비관으로 그런 분위기가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 되었으리라.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도무지 세상살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시대적인 문 제라거나 먹고 사는 일 따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방을 싸들고 누나네가 있 는 화류시로 내려 와 기생살이를 시작한 나. 그리고 제적을 당한 뒤, 집안 식구들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다 언니의 카페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역시 화류시로 내려가 기생살이를 시작한 은 애. 그녀와 나는 그 때 이미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어 시대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그런데 서 오는 정서적인 동병상련이 그녀와 나를 이상한 끈으로 옭아매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대적인 상처가 있건 없건, 그 시대 속에 동일하게 던져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지 그것 하 나만으로도 묵계적 인 동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요. 그때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나는 내 자신의 인 생이 정말 별 볼일 없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정훈 씨 앞에서는 부정했었지만... 나 를 지탱하고 있던 내면의 힘이 부질없는 오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거예요. 불 길한 예감이 들었던 건데... 지난 7년 동안 그 모든 건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 어요. 보이지 않게 거세당하고 있다는 느낌... 쓸모없어져서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 그 런 느낌에 끊임없 이 시달려 온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걸 느낌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어요. 왜냐하 면... 그 모든 게 사 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아주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몽롱한 눈빛 속으 로 조명등 위쪽의 어둠이 소리 없이 배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 리가 다시 들렸다. 그녀의 눈빛으로 배어들던 어둠이 경직되고, 느슨하던 실내의 분위기에 갑작스 럽게 냉기가 감도 는 것 같았다.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주인 여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출입문 쪽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몽롱하고 또한 체념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 립무원의 자기 처 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 근 세 시간 가까이, 은애와 나 이 외에 어느 누구도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없었다. "우리 위스키 마실래요?" 잠시 경직된 눈빛으로 빈 맥주병을 들여다보고 있던 은애가, 갇힌 곳에서 가 까스로 출구를 발 견해 낸 사람처럼 다소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위스키?" 당황한 표정으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변 사장에게 번역 원고를 넘 기기 위해 지난밤을 꼬박 새운 처지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상당히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저런 눈빛을, 적어도 7년 전의 그녀는 단 한 번도 드러 내 보인 적이 없지 않은가. "답답해요, 그리고... 취하고 싶어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성냥개비를 끼우고, 그것으로 탁자 위에다 별 모양을 그 려대며 그녀는 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다시 한 번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 시 한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서 시위가 진행 되는지는 알 수 없 어도, 들려 오는 것은 오직 다발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는 소리뿐이었다. 시위대 의 구호 제창이라 거나 일진일퇴를 거듭할 때 터져 오르는 함성 따위가 전혀 들려 오질 않았던 것 이다. "축제의 밤에 터져 오르는 폭죽소리 같지 않아?" 날라져 온 위스키를 먼저 권하며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소리가 기억을 자극하고, 기억이 상처를 건드리고, 상처가 다시 현실을 잠식해 가는 시간... 나는 그녀가 그런 시 간을 보내고 있다 고 생각했다. 위무하는 마음처럼, 진한 다갈색의 액체가 부드럽게 그녀의 잔으로 흘러내리고 있었 다. "밤하늘... 형형색색... 화려함... 축제의 절정... 아름다움 연인들... 폭죽은 그런 걸 생각나게 해요. 하지만 그런 화려함은 슬픈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요. 무엇과 대비된다는 게 얼마나 끔찍스 런 일인 줄 아세요? 대비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난 아니에요. 그렇 게 될까 봐... 자꾸 숨고 싶으니까요." 잔을 든 채, 모노 드라마를 연기하는 연극 배우처럼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 고 나서 거의 단숨 에, 그녀는 위스키잔을 비워 버렸다. "7년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많이 나약해졌 군." 혼자말처럼, 그녀의 잔에다 다시 술을 따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녁 일곱시경, 종로 3 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되새기며 꺼낸 말이었다. 청바지 위에 헐렁한 남방 하나를 걸친 모습, 그리고 다소 수척해 보이는 얼굴 이외에 그녀는 7년 전의 분위기를 그대 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눈에 는 그렇게 보였었 다. 하지만 그 황당무계한 우연 앞에서 내가 무엇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었으 랴. 그 기막힌 우연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기는 그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기억이 현실 속으 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예기치 못한 정황 때문에 그녀와 나 는 한동안 제정신 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아주 오래 전에 바닥으로 내려앉았어요. 그냥 그 상태로 어쩔 수 없으니 까 견디는 거예요. 검불처럼, 때로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 몸뚱어리가 수백 년 된 고사목 같다 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실이 괴로우면 감정이 과장될 때가 많은 건지... 빵 만들 때 넣는 이스 트 알죠? 그것처럼 감정을 제멋대로 부풀린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쿡 하고 소 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아주 잠시 이마를 짚은 뒤에, 그녀는 무엇인가가 스러질 때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부 질없는 열정이 말 끔히 씻겨 나간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측은해 보이는 얼굴. "언니는 어떻게 됐어?" 대화를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녀의 언니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7년 전처럼 아직 도 '노아의 방주'를 경영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언니요?" 화류시에 머물던 4개월 동안, 그렇게 자주 술을 마시러 갔으면서도 떠나올 때는 온다간다 말 한마디하지 않고 떠나간 인사가 느닷없이 언니에 관한 얘기는 왜 꺼내는가, 그 런 의미로 그녀는 되묻는 것 같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곳을 떠날 때 인 사라도 하고 왔어 야 하는 건데..." 작고 앙증맞은 위스키잔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하지 만 그 직후에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르랴. "나한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언니한테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애한테는 미안한 감정이 아니고...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 애. 아주 복잡미묘 하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도 나는 그런 나의 감정을 은애가 이해했을 거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어찌 이해의 문제일 수 있으랴만, 그때 그곳을 떠나던 당시의 내 감 정은 정말 복잡미 묘했었다. 은애에 대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은애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충동적 인 울화 같은 것... 그런 걸 당시의 내가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었으랴. 때로는 연민의 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살해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동반자살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던 그것... 그것 이 시대에 대한 거친 욕지기였다는 걸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몇년의 세 월이 더 지나고 난 뒤였다. 불어터진 짬뽕 곱배기 같은 시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병들어 가 던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감정 체계를 당시의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었 겠는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녜요. 투정을 부리는 건 더욱 아니고... 그냥 한번 그래 본 것뿐이에 요, 우리 언니... 지난 7년 동안 참 파란만장했어요." "일억이나 벌었다구?" "무슨 말이죠?" "파란 게 만장이면 일억 아냐?" "그런 농지거리는 여전하시군요. 정훈 씨가 그곳을 떠난 이듬해에 '노아의 방 주'는 문을 닫았어 요.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해서 그만 둔 건데... 그 직후에 옷 장사를 시작 했어요. 브랜드 재 고품을 넘겨받아 파격 세일을 하는 장사였는데... 별로였어요. 그 직후에 나도 그 곳을 떠나서 자세 한 내막은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내가 떠난 뒤에 그걸 정리하고 호프집을 시 작했어요. 악착같이 돈 될 만한 유행 사업은 다 따라 한 건데... 지금은 뭘 하는지 알아요?" 술잔을 들어올리며, 정말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 다. "24시간 편의점?" "노래방." 짧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 고 양미간을 찌푸 리며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찍했다. "언제 한번 노래부르러 가야겠군."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술만 취하면 마이크를 손 에 잡고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변 사장의 모습을 잠시 생각했다. 돈, 술, 여자... 그리고 장밋빛 인 생. "정훈 씨 누나네는 뭘 해요? 그때 매형이 화류시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고 했 었죠?" 내 차례라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손에 대지 않던 담배를 꺼내 다시 입에 물었다.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 것일까. "7년 전 얘기지. 지금은 부동산 중개인 노릇을 하고 있어. 누나는 제과점을 하 는데..." 아, 더이상 그런 얘기를 입에 담아 무엇하겠느냐는 표정으로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은애의 언니가 겪었을 변신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누나네가 치렀을 그것의 본질이 조 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재밌군요. 지난 7년 동안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변신을 거듭했는데... 그런 데 어째서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까요?" "변신이 아니고... 돈을 좇아가는 풍조겠지. 그리고 그게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사람들 은 생각하니까... 그런 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아니 라고 해도... 우리 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많이 변했을 거야." "변한 게 아니고 병든 거겠죠." 물끄러미 탁자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힘없는 독백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글쎄... 내가 은애에게 지난 7년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은 것처럼, 은애도 또한 그런 것에 관해 구체적으로 내게 묻지 않았었잖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토록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도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 지 않고 있었다. 7 년 전 그때, 그녀가 자신의 운동경력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내가 시대의 염 증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던 것처럼, 그녀와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에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도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몽몽한 상태를 전혀 불편해 하지 않고 있 는 것이었다. "웃기는 얘기로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 위에다 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망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동작을 멈추고 있다가,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난 것처럼 그녀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 려 할 때의 결의 같 은 게 그녀의 양미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가 마악 입을 열려 할 때, 그때 또다시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느닷없이 실내로 밀려들 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 만 따다다닥, 따닥, 따다다닥, 딱, 따다다다닥, 따악, 따다닥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꼬리를 물자 그녀 는 기어이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그리고 영원히 그럴 것처럼 그녀는 그때부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난밤의 불면으로 두 눈이 간잔지런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재떨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담배 연기를 주시했다. 곧게 솟아오르다 휘청, 다시 한 번 솟 아오르다 휘청, 그 러면서 그것은 빛살이 스러지는 허공을 향해 빠르게 흩어져 갔다. 그 과정을 주시하는 동안 나의 뇌리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흩어지고 있었고,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따닥, 따닥, 딱, 따다다닥, 따닥, 따다다닥, 딱... 따사로운 봄날, 머리에 붉은 끈 을 동여매고 파출 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던 운동권 여학생. 남편도 없는데 돈이라도 많이 벌어 야지 별 수 있겠느 냐며 손님의 멱살을 쥐어 흔들던 술집 여주인. '노아의 방주', 그 침침한 어둠 속에 앉아 꽃다운 청춘을 어둠으로 물들이던 대학 제적생. 술이 취할수록 정신이 더욱 명징해진 다고 독을 써대던 대졸 실업자. 돈에 침 뱉을 놈 없다고, 돈을 모르는 놈은 인간도 아니라고 때마 다 핏대를 올리던 공인중개사. 사지 멀쩡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놈이 어째서 허구한 날 술이나 퍼 마시고 돌아치느냐 고 소리치던 제과점 주인 여자. 돈만 있으면 장밋빛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때마 다 침을 튀기던 출 판사 사장... 따닥, 따닥, 따다닥, 따다다닥, 딱... 혼재된 시간의 광장으로 기나긴 대열이 지 나가고 있었다. 운 동권 여학생,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대학 제적생, 대졸 실업자,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이 대동 단결을 한 것처럼 한동아리가 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7년 전에도 7년 후에도, 7년보다 더 오래전에도 7년보다 더 오 랜 후에도, 그런 대 열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이어지고 있고, 또한 이어 져 갈 것 같았다. 모든 시대가 새로운 시대였던 것처럼, 그리하여 모든 시대가 새로운 시대가 아 닐 수도 있으리라 는 자각 속에서 분열이 눈을 뜨는 시간. 과연 우리는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뜸해진 뒤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재떨이 위에 올려놓았던 담배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저 홀 로 연기를 피워올 리던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잠시 그녀는 그것에다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피 워 주는 사람이 없어도, 저 홀로 타올라 재가 되어 버린 그것에서 일종의 상징 을 읽고 있는 것일 까.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에요. 처음부터 모든 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고... 알 수 없는 어떤 힘 이 내 자신을 고통의 한가운데로 자꾸만 떠밀고 있는 것 같애요. 늘 떠밀리지 않으려고 버둥거리 면서도... 이런 순간이 오면 도무지 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겠어요." 왼손을 들어올려 턱을 괴고, 아주 몽롱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 다.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7년 전의 나를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주 가끔 난 그런 생각을 하곤 해. 나이에 비해 내가 너무 많은 시대를 살 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너무 일찍 늙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야. 길 을 걸을 때, 지나가 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떤 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그래서 난 곧잘 혼 돈을 일으키곤 해.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와 있거나, 과거에서 미래로 잘못 와 있는 것 같다는 생 각... 내가 뜬 구름 을 밟고 다니는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거야. 그런 게 안타까워서 걸음 을 멈추고 한동안 씩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떻게든 현실감을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잘 되지 않 는 거야. 현실에 던져져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 "도태되었다는 데서 오는 괴리감인가요?" "시대를 통해 제대로 진화된 사람들도 나는 별로 본 적이 없어. 그냥 누적된 시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다소 기형이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나의 얘기를 듣고 나서,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눈빛으로 은애는 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정리한 표정으로 이윽고 그녀는 고 개를 들고 입을 열 기 시작했다. "7년 전과 똑같이... 난 여전히 기생충처럼 살고 있어요. 내가 지금 어디서 어 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죠?" "묻지 않았잖아?" 사실이었다.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들던 저녁 일곱시경의 종로 통, 그 붐비는 인파 속에서 서로를 발견해 낸 뒤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신상에 관해 구체적 으로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은 그녀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종로통으로 몰려드는지에 관 심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지난 7년 세월을 에돌아 종로통에까지 이르게 된 세 세한 내력 따위를 그녀와 나는 전혀 입에 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른세 살과 서른한 살이 되어 재회한 직후, 서로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주고받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무엇이었던 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그저 그렇게 지냈다. 결혼은 했느냐?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 작이었던 것이다. "난 지금... 안양에 있는 동생집에 얹혀살고 있어요. 동생네 부부가 지하상가에 서 가방장사를 하 고 있는데... 일년 반째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얹혀살고 있는 거예요. 옛날에 언니네 집에 얹혀 살 때부터... 그때부터 시작된 기생살이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숙주 를 괴롭히며 숙주 보다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기생충 알아요?"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녀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얘 기를 듣고 난 뒤에 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또다시 따다다닥, 따닥, 딱, 따다 다다다다닥, 딱 하 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 버렸다. 하지만 얼마 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귀 를 틀어막는 일은 되풀이하지 않았다. 독이 오른 것처럼, 들어올린 술잔을 재빨 리 비우고 나서 그 녀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근데 동생네 부부가.." 그때 다시 몇발,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 을 열기 시작했다. "동생네 부부가 다음달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대요." 따다닥, 딱, 따다다닥! "숙주가 떠난다니까..." 따닥, 딱, 따다닥, 딱! "..." 따다다닥, 다닥, 따다닥, 딱! "기생충이 섭섭한 거 있죠?" 따닥! "내가 걱정할까 봐 수속을 밟으면서도 얘길 하지 않고 있다가..." 따다닥, 딱! "...며칠 전에 ...며칠 전에 갑작스럽게 얘길 꺼내는 거예요." 따다다다닥, 따다닥, 따다다다닥, 딱, 따다닥! "새로운 숙주를 찾아 보라고..." 따다닥, 따다다닥! "새로운 숙주를... 숙주를 찾아 보라고..."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 게, 잠시 뒤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7년 세월의 인내가 한꺼 번에 허물어져 내리는 게 아니라, 소리와 눈물과 몸짓이 한데 어우러지며 기묘 한 욕망의 그늘이 조성되는 것 같았다. 빛과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질탕한 교접을 시작하고, 그녀 를 에워싸고 있던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해체의 신음소리가 밀려나오고, 오랫동안 경직되어 있던 기류들이 뒤틀리고, 퍼덕이고. 뒤채이고, 움찔거리며, 드디어는 절정을 향해 광적인 일진일퇴를 되 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닥, 따다닥, 딱, 따다다다닥... 따닥... 딱... 딱... 따악... 딱...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의자의 등받이에다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난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낸 탓인가, 의식이 수천 수만 개의 미립자로 잘게 부서 지고 내 몸 전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층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기생충이라는 말... 그리고 기생살 이라는 말이 한겨울의 눈꽃송이처럼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눈 꽃송이처럼, 눈꽃송 이처럼... 하지만 끝내 꽃송이가 되지 못한 저 여자가 누구인가. 삭풍에 떠밀리 며 황량한 겨울 벌 판을 가로질러가는 여자의 어깨 위로 끊임없이 눈꽃송이가 내려앉고 있었다. 눈꽃송이가 아니라 기생충이라는 말... 기생살이라는 말이 내려앉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걸 한번 써보란 말야. 이제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초장 분위기가 쇄신 국면이니 '소 설 사육신' 같은 걸 쓰면 정말 불티나게 팔릴 거라구. 아직 팔뚝에 힘 있을 때 한탕 해야지, 언제 까지 그렇게 번역이나 하면서 낑낑거릴 거야. 소설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구? 그런 역사물은 차라리 등단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유리해. 자네 같은 사람이 제격 이라구. 원하면 몇 백 땡겨 줄 테니까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 기분도 그렇잖은데 우리 '장밋빛 인 생'에 가서 술 한 잔할까? 기똥찬 영계왔다고 오늘 마담이 전화했었어. 가서 재미 좀 보고 들어 가라구. 젠장, 언제 나 똑같은 말이지만, 돈 있으면 장밋빛 인생이고 돈 없으면 개밥에 도토리 되 는 게 세상이야. 제 발 정신 좀 차리고 잘 생각해 보라구. 밀리언 셀러, '소설 사육신!' 알았지? 한탕 하는 거야, 응?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곱씹으며 유월의 저녁거리를 힘없이 걸어가는 기생충이 보였다. 쓰레기보다 못한 명상 서적을 번역해서 독자들의 어리석음을 파먹는 기 생충. 그리고 역사 소설을 써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생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 기생충. 그것을 거부할 만한 마음 의 경계를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기생충... 그가 종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 디선가 자신의 이 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기생충이라는 생각 한 가지에 골몰한 탓에 그는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 세 번, 동일한 이름을 부르는 소 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는 넋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잠시 사 방을 두리번거렸다. 과거에서 미래로, 혹은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떨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한 여자가 나타났다. 눈꽃송이처럼, 눈꽃송이처럼... 하지만 끝내 꽃송이가 되지 못한 여자. 또다른 기생충 한 마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훈 씨 맞죠?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모습 보이게 될까 봐 무척 신경을 썼는 데... 정말 미안해요." 눈을 감은 채 나는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멎었다는 것. 정확하게 언 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뚝,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그 소리가 멎어 버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해? 그런 말에 내가 알레르기 증세를 나타낸다는 거 잊 었나?"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눈두덩이 붉 게 물든 그녀의 얼 굴을 건너다보며 별뜻 없이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심이에요." 짧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빈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앞 으로 내밀며 한잔 따라 달라는 시늉을 했다. "술이 많이 늘었군." 잔에다 술을 따르며 나는 그녀의 얼굴, 그 발그레하게 상기되었으면서도 물 기가 채 가시지 않 은 듯한 안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함초롬히 젖은 듯한 그 얼굴이 아주 오래 된 어쩐 기억, 뚜 렷하게 떠올릴 수 없는 어떤 분위기를 자극하는 것 같아서였다. 무슨 그리움인 가... 순간적으로 당 황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잔에 술이 차기도 전에 술병이 바닥났고, 그것 때 문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 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행운인가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 것을 반쯤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바라고 있는 게 어떤 종류의 행운인지 는 알 수 없지만... 모르니까 그런 데 대한 기대감이 더욱 간절해질 때가 있어요. 나약해질 때가 아니고 현실에 대해 독기가 생겨날 때... 이상하게도 그럴 때 그런 기대감이 생겨나는 거예요. 참 우 습죠?" 반쯤 남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걸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 가?" 내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 하고 있는지를 정말 모른다는 듯이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나를 건너다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술잔을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그녀와 내가 마주앉은 공간 이 조금씩 넓이를 더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다시 말해 지루함이 느껴질 때까지 그 녀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행운도 아니고 기대감도 아니고...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소망 한 가지가 있어요. 밥을 먹다 가 문득, 길을 걷다가 문득...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문득... 그렇게 문득 문득 가슴을 파고 드는 소망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내가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던 건... 그건 도 피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소망이 값싸게 치부당 하는 걸 좋아할 사 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내 소망은 자꾸만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들어 가고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 던 마지막 술잔, 그 곳에 남겨져 있던 반쯤의 술을 마저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아주 멀어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곳으 로 영원히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죽음에 대한 열망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도피도 아 니에요. 그냥 떠나 고 싶다는... 그런 소망일 뿐이에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말을 중단하고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겠냐는 그녀 의 물음에 나는 긍 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극, 북극, 아프리카... 처음엔 그런 곳을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런 공간을 정신적으로 거치 고 난 뒤에 난 마지막 목적지를 정했어요. 현실에서 밀려드는 열독이 온몸으로 퍼져나갈 때... 그 럴 때마다 난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치도록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 려요. 태양이 이글 거리고, 한낮 내내 불기둥 같은 복사열이 피어오르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겠어 요?" 묵묵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하라..."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곳이 바로 사하라예요."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낸 지명을 듣고 나서 나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하라를 꿈꾸고 있다는 게 소망과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심리적인 상태가 사하라에 이 르러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막히게 여겨진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 로 다른 상태로 7 년을 살아왔는데, 그런데도 그녀와 나의 의식이 동일한 지점에 이르러 있다는 게 어찌 기막히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사하라... 눈을 감은 채,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사막을 나는 되새겨 보았다. 그 녀에게 초극의 공 간이 되어 버린 사하라와 나의 그것은 물론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 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그녀와 나는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사하라... 아랍 어로 '황야'라는 뜻을 지닌 세계 최대의 사막. 한 때는 비가 내리고, 강이 흐르고, 초목이 무성했던 땅.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접근이 어려우며, 격변하는 극한의 기후로 인해 말라 비틀어져 가는 땅. 높은 모래 언덕과 물 한 방울 없는 광대한 지역, 그리고 점 점이 작은 암염의 언덕들이 펼쳐져 있고 북아프리카의 거의 전역을 차지하고 있는 땅. 목마름과 피로에 지쳐 죽은 낙타의 해골이 놓여 있고,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고 모래에 침식되어 사라져 버리는 땅, 죽어가 는 땅, 사하라.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수첩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었지 만, 그곳에 무수하게 적혀 있는 사막에 관한 자료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아 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사막으로 가 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사막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하라에 이르고 난 뒤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는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이상 의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가끔씩 자세를 고쳐앉으며 또다 시 시간을 에돌기 시작한 것이다.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 지만, 당연한 결과 처럼 그것을 새로운 출구로 삼으며 기분을 회복하기엔 그녀와 내가 너무 노회 해져 있었다. 지난 몇시간 동안, 그 지리멸렬했던 7년 세월을 다시 한 번 살아 버린 게 아닌가. 그 리고 높은 모래 언 덕들과 물 한 방울없는 광대한 지역,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버리는 사하라에 그녀와 나의 의식 은 이르러 있는 게 아닌가. 은애와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 유월 의 깊은 밤, 축제의 폭죽이 자취를 감춘 그 시각에 밖으로 나섰을 때, 그녀와 나 는 느닷없이 밀려 드는 최루 가스 때문에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단박에 눈물과 콧물부터 쥐어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침을 연발하며 무너지듯 내 팔을 잡았고, 나는 주머니에서 손 수건을 꺼내 재빨 리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대로가 아니라 인적이 끊어 진 골목 안쪽으로 총총히 걸어들어갔다.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것이 시 야를 어지럽혔지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또한 결정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서기 직전까지 은근히 고심하던 문제, 예컨대 이제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 야 할 것인가에 대 한 해답이 명쾌하게 내려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에 응답이라도 하듯 때맞추어 시야로 밀려든 구원의 빛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빛에 인도되 어 어둠 속에서도 용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침대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실내로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나의 품에서 벗어났다. 상황을 핑계삼아 내가 그녀를 감싸안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난 뒤부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망사로 된 커튼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창 쪽으로 나는 앉 아 있었고, 그녀는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고 몇번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 려 작위적으로 느 껴질 것 같아서 이내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적연한 가운데, 그녀와 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와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격리감이 느 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그 런 곳으로 그녀와 내가 시공을 넘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주변의 사물이 모두 해체되고 오직 그녀와 나의 존재감만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가슴이 답답해 져 올 때, 그때 등 을 보이고 앉아 있던 그녀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있잖아요..."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몹시 피 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세우며 다 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샤워하고 올게요."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곧바로 침대 위로 올 라가 누웠다. 사정 한파, 부정, 비리, 뇌물 수수 따위의 말들이 튀어나오며 텔레비전의 화면이 빠르 게 바뀌고 있었다. 마감 뉴스인가... 천근 만근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 대학생 격렬 시위, 쇠파이프, 전경 무장해제, 진압장비 소각 따위의 말들이 빠르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눈을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 았다. 시위진압대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고 쇠 파이프를 휘둘러대는 학생들이 보이고, 도망가는 학 생들을 쫓아가는 전 경들이 보이고, 무장해제당한 전경들을 에워싼 학생들이 보이고, 소각되는 시위 진압 장비들이 보 이고...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고 바람 한 점 없는 열사의 한가운데 서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은애와 내가 보였다. 경사진 모래의 능선을 넘어가기 위해 끝없이 걸음을 옮겨 놓지만, 아무리 허 우적거려 보아도 여전히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모의 사막. 손을 뻗어 아 무리 휘저어보아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와 나의 몸은 소리 없 이 모래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그녀의 이 름을 부르며 서로의 손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와 나의 몸은 더욱 빠르게 모래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그런 일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된 것일까. 이윽고 모래 위 에 얼굴만 드러낸 그녀와 내가 보이고, 보행에 아무런 장애감도 느끼지 않고 유유히 그곳을 지나 쳐 가는 일단의 무 리가 보였다.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교사, 공인중개 사, 제과점 주인... 그들이었다. 그들이 대열을 이루며 빠르게 모래의 능선을 넘어간 뒤에, 곧이어 그 능선을 넘어 여 러 마리의 전갈들이 떼를 지어 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띤 갈색의 등이 햇빛에 번쩍거 리고, 그 두흉부와 복부가 느닷없이 부풀어오르고, 입 가까이에 달라붙은 거대한 집게가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을 출 때...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와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를 분명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고 모래에 침식되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리 는 땅... 사하라에서 그녀와 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잠에서 깨어난 뒤에 나는 정신없이 사방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막, 태양, 모래의 능선,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 전갈 따위들이 너 무나도 생생하게 눈앞을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튼, 텔레비 전, 침대, 주전자 따 위를 식별하고 난 뒤에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고 나 서 고개를 돌려 옆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내 옆자리에서 은애가 단정한 모습으로 잠을 이루 고 있었다. 의식이 비로소 현실감을 회복하는 걸 느끼며 나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 다. 그녀를 만난 이 후에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던 평안이 그 얼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아주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 왔다. 그리고 침대 옆에서 서서 다시 한동안 은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몇시간 전, 그녀의 함초 롬히 젖은 것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느꼈던 알 수 없는 그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 을 수 있을 것 같 았다. 7년 전 그때, 꼭 한 번 그녀와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상처 속에서 도 꽃이 필 수 있 을 거라는 말을 나누며 오래오래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던 밤... 그날밤 나는 그녀의 젖은 얼굴이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그리움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런 기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 우리... 우리 있잖아요... 라고 꺼냈다가 이내 거두어 버린 그녀 의 말이 무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무엇을 말 하기 위해 그녀는 그토록 머뭇거렸던 것일까. 희미한 조명등 속에서 흰빛을 발하며 단아하게 떠 오르는 그녀의 얼굴 을 내려다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저려 오는 것 같아 아주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리 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어떤 구원의 메시지도 나에게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주 조용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침이 오면 또다시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는 눈물짓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지난 7년 세월의 기억으로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치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그러 다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또다시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버리는 땅, 사하라를 꿈꾸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어 째서 내가 그녀를 불모의 사막에 버려두고 혼자 떠났는지, 어째서 7년 만의 해후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 는지... 그것을 깨달으며 지금 이 순간의 내 심정을 조용히 되새기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어둠이 빼곡 들어찬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온 뒤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구원 의 빛처럼 그녀와 나를 인도하던 네온사인, 그것이 여전히 허공에서 빛을 발하 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것은 구원의 이미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는 외딴 세상 한가운데 세워진 생경스런 이정표처럼 보였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아주 잠시 멈추게 하는 이정표... 그것이 사막의 밤하늘에 떠오른 쓸쓸한 이정표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이정표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빌며 총총히 걸음을 옮 겨 놓기 시작했다. 새벽이 시작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광상 서정인- 1936년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사상계'에 단편 '후송'을 발 표하여 등단. 한국문 학작가상(1976) 수상, 장편 '달궁'으로 월탄문학상(1984) 수상, 한국일보 창작문 학상(1986) 수상. 소 설집 '강' '가위' '철쭉제', 장편소설 '달궁' '봄꽃 가을 열매' 해설-정과리 '철쭉제'에서부터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서정인의 문체 실험 은 소설사적 사건에 값한다. 그의 '문체학'의 주 장치는 서술의 전 음역에서 폭넓게 작동하고 있는 특이한 이음법이다. '말꼬리 잇기'라고 이름붙힐 수 있을 법한 그 특이한 이음법은, 하나의 단언을 던지고는 그것을 배반하는 단언을 뒤잇게 하는 기본 형식을 연속적인 사슬로 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때 이 단언들의 사슬은 상반된 두 견해의 대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 단언 에 대한 비틀기, 가 지치기, 꺾꽂이 등 종잡을 수 없는 변이로 나타나는데, 그 말잇기가 담론 단위 가 아니라 문장 단 위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비밀이 놓여 있다. 언어학적 관점에서는 문장은 최후 의 언어 집합체이지 만, 서술학의 관점에서는 문장은 최초의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무한한 이야기 나무들로 자랄 수 있는 불확정의 씨앗이다. 그 최초의 씨앗이 간단없이 비틀리고 가지를 쳐서 엉 뚱한 또하나의 씨 앗으로 변형되어 버린다. 그러니, 이야기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잡설로 무성 해진다. 그의 소설 은 요설일까? 그러나, 실제로 그 말꼬리 잇기는 일관된 하나의 주제에 의해 섬 세하게 맥락을 이 루어 이야기의 한 단락을 직조해내면서, 다른 단락과 유사 인접의 연관을 맺 어서 더 큰 주제의 맥락을 이룬다. 그렇다면, 일관된 주제를 뒤죽박죽으로 흩어놓는 말꼬리 잇기의 효과란 도대체 무 엇이겠는가?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삶의 다양성을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편협한 사유이며, 그 이 데올로기적 양태로서의 중심 신화이다. 말꼬리 잇기는 범주들의 변이를 통해 우리의 삶 구석구석 에 침투한 중심 신화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항목들의 다양성을 제시해 중심(이라고 착각 되는 것) 외에 얼마나 다른 것들이 풍요롭게 살아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중 심을 비틀어 주변 으로 일탈하고 주변들의 우화를 거쳐 다시 중심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드러나 면서, 주변 중심을 부재시키고 삶이란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 관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환기시 키고 있다. 모든 것 들은 서로 다르게, 그러나 하나로 유장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그의 문체학의 또하나 의 특성인 판소리체의 광범위한 활용과 맞닿고 있다. 그 판소리체는 환경학적 으로는 칸칸이 구획 된 도시에 대해 첩첩이 이어진 산을 제시하는 것이며, 윤리학적으로는 부황한 세태 좇기에 대항 해 주변머리 있는 올곧은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고,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의 비 좁은 세계를 뚫고 집단 무의식의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궤도에 놓인다. 그러니, 그의 야심에 놀라 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문화의 대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안 꿈 꾸기가 주변중심주 의라는 역설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겠는가? 놀랍게도 작가는, 부단히 대안의 세 계 자체를 객관성 의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의 문체학의 세번째 특징이 되는 인칭의 독특한 사용은 바로 그 자 기 객관화의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광상 전세방 "계약 안 하시겠어요? 방 없어요. 이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앞으로 날이 풀리고 이사철 되 면 값 또 올라요." "그래, 고생했지? 왼종일 근무허고 피곤헌디 방 둘러보니라고 욕봤어. 방 알아 보기가 보통 고생 인가. 내가 한번 봤으면 쓰겠는디, 서울 한 행비가 어디 쉬워야 말이지. 하루 품을 버리는 것은 좋은디, 다음날까지 여독이 안 풀려서 이틀, 사흘을 날리거든." "오늘 계약금 건네기로 했거든요. 하루 이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할 수야 있겠 지만, 이것 놓치면 한, 두 달 또 고생해야 돼요. 앞으로 갈수록 방 구하는 사람들은 많아져서 더 힘들어요. 지하철 역에서 십 분도 안 걸려요. 시장 가깝고요. 이 정도 교통이면 지금도 비싸지 않 아요." "계약금은 백만원이면 될까? 안 되겄지? 일할은 줘야지? 등기부 열람은 안 해도 정말 괜찮겄 어? 전세권 근저당 설정허는 디도 돈 들겄지? 거기 관할법원이 어딘가? 남부지 청인가? 등기소가 따로 있어?" "그런 건 중개인이 알아서 해요. 그래서 다 허가받고 간판 내걸고 영업하지 요." "참, 복덕방 구문도 챙겨야지? 얼마나 달라고 헐까? 꽤 되겄지?" "중개료는 내무부 고시로 요율이 정해져 있어서 뻔해요." "뻔해? 사람 봐감서 더 받고 덜 받고 안 허고? 전국적으로 같을까? 여기서는 삼천만원에 십오 만원이라는 것 같어." "서울은 지방보다 요율이 쫌 높을지 모르지요." "지방이라니, 어느 지방? 서울은 지방 아니야? 서울, 경기지방, 가금 흐리고 한때 비. 서울시청 은 지방관서고 서울시장은 지방장관이야. 도지사나 평야 마찬가지. 인구가 많다 고 특별자를 붙여 줬을 뿐이야." "여전하시군요. 서울공화국에 사시면서 힘 안 들어요?" "시외 통화가 길어졌어. 내가 가 보든지 돈을 보내든지 허지. 고생했어." "올라오면 전화해요." "올라오다니, 서울이 산꼭대기여?" 그는 전화를 끊었다. "어디 등산 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정씨가 시비조로 물었다. "먼 산? 등산? 누가?" "가까운 디 산 놔두고 왜 먼 디 산 가요? 여기는 산도 없소? 산도 사람겉 이 서울 산만 산이 요?" "산이 없다니, 누가 그래? 조선팔도에서 국립공원을 넷씩이나 끼고 있는 디가 여그 말고 또 어 딨어? 국립 말고는 또 산 없어? 국립산들 유명해서 모른 사람 없을 테니 누가 굳이 나선다면 쓸 디없는 군소리라, 국립 아닌 명산들을 어디 한번 외 보는디, 장서 장계 장안산은 능선에서 아득하 게, 남쪽으로 바라보면 천왕부터 반야까지, 지리산맥 연봉들이 한눈으로 들어오 고, 덕소골로 흐른 물이 방화 반앙 절경되니, 팔성암에 논개사당 팔공산이 우뚝하다. 민주지산 삼도 봉은 전북땅이 경 북 충북, 삼북도를 만났구나. 진안 방곡 운장산은 험허기도 하려니와, 한쪽에는 대불이요 딴쪽에 는 은천이라, 산협호수 대아 물은 맑고 곱고 깊고 길다. 키만 크면 제일이냐 표 고 일천 밑으로도, 돌올하고 영검헌 산 높은 산들 못지않다. 완주 운주 대둔산은 사철 전국 관광 지요, 말ㅈ 같은 마 이산은 숫바우에 암바우라, 백일 정성 불임치료 열흘 치성 득남인디, 요즘 것들 물색없다 탑사 경 내 물론이요, 영산 일대 어디서나 자리잡고 고성방가, 술 마시고 춤을 추니 유 흥지가 따로 없다. 만덕산에 청량산은 전주 동쪽 명산이라, 톱날 같은 꼭대기가 동녘으로 기울으 면, 월상 위로 곰티 재가 구절양장 굽어 있고, 남녘으로 내려오면 의암 마치 다 지나서, 신리 남관 훤히 남도 삼백 리 길 뚫려 있고, 송광 위봉 청량산은 야트막한 산중턱에, 찌그러진 절간이며 꼭 대기에 빈 절터가, 한갓지고 조용허고, 굽어도는 골짜기에, 두릅나무 새순들이 술안주로 일품이라. 임실 순창 회문산 은 호남벌의 험산이니, 왕년 난리 한창일 쩍 산사람들 의지였고, 익산 미륵 김 제 모악 정읍 두승 전주 고덕, 하나같이 평지 돌산 갈재 노령 줄기로다." "반야심경 외우시요? 부처님전 공을 들여, 쌩돈 염출헐 량이면 없는 살림 옹 색헌디, 그것 아니 좋으리요 하루죙일 염불해도, 군소리를 안 허리다 치던 탁 어찌했소?" "허허 벌판 솟은 산은 낮은 산도 험준허다, 산악지대 고산준령 시작부터 높았 구나." "불전공양 맨입으로 소원성취될 량이면, 심봉사가 불쌍헌 딸 물구신 밥 던졌 겄소? 신식으로 새 벽 기도 예수님전 빌어 보소." "얕은 데서 시작헌 산 키 작다고 시퍼 마라, 원근 기운 모았으니 높은 데에 산 들겉이, 오르기도 험커니와 정기 또한 빼어났다." "예배당은 연보전에 잠자리채 없을라고. 돈 마련도 안 해놓고 셋방부터 부탁 했소? 집 볼라고 다니기가 이녘 일도 귀찮거늘, 바쁜 시간 틈을 내서 애쓴 보람 헛것이요?" "누가 몰라, 고생헌 줄? 돈 없다고 방 못 얻냐?" "이 냥반이 돈 몇푼에 넋을 놓고 실성했나, 돈 없으면 말아야지 빈손으로 집을 얻소?" "빈 주먹은 무엇이고 쥔 주먹은 무엇인고? 필요헐 때 살아라고 집도 있고 방 도 있지." "인자 본께 숭악허요 당신 속셈 으뭉허요. 강도 심보 따로 없고 동냥 치가 씨 가 없소." "인민들은 마음대로 평양 가서 못 사는디, 국민들은 언제든지 서울 가서 살 수 있다. 자유주의 국가라고 민주시민 권리 좋다, 남도여창 빈민굴도 거주이전 자유로다." "누구 언제 남도했소? 빈민굴 속 판자벽이 비바람을 막아 줬소? 이만허면 양 반이요." "임자 말이 장히 옳다, 있는 놈들 웃겼지만, 우리 살림 이만허면 중상류는 안 되겄냐." "부자들을 웃길라요 있는 집을 씀씀이며, 꾸며 놓고 사는 것을 듣도 보도 못허 겄소?" "우리보다 더 못사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 졸부놈들 잘사는 것 아예 쳐다보도 마라." "숫자 많은 개미 떼만 당신 눈에 들어오고, 별천지에 사는 인생 다른 인종 안 보이요?" "이 정도로 사는 것도 이미 도둑 충분허이." 자폐증 왜 안 나가냐고요? 자동차 운전수가 그를 치여 죽일라고 헌단 말이요. 자동 차 전용도로도 아니 고, 차도 인도 구분된 길도 아니고, 동네 가운데 골목에서 차를 시속 육십 킬로 로 몰면 살인 예비 음모 아니요? 사람이 오는디 비키거나 멈추거나 속력을 늦출 생각은 않고 비 키라고 빵빵거리면 이건 살인미수 아니요? 대형 승합차가 골목을 꽉 막고 달라들면 피할 데가 없 어요. 종점이 돼서 승합이 주택가에까지 끼대들어오요. 그도 가야헐 것 아니요? 차만 바쁘요? 사 람 팔꿈치 옆을 지 날 때에는 안 닿더라도 천천히 가야지요. 걸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겄소? 한 번은 문짝을 발 로 차 버렸소. 운전수는 물론이고 승객들도 흥분해서, 저것 가만 놔두면 안 돼, 맛을 보여 줘야 돼, 하고 삿대질들을 했소. 그는 운전수한테 끌려서, 아니, 그가 운전수를 끌고 파출소로 갔소. 둘 다 의기양양해서 파출소로 들어갔단 말이요. 그들의 말을 듣고 난 파출소장은, 파출소에는 딴 직 원들은 다 나가고 없고 소장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디, 운전수를 내보내 고 그한테 한바탕 훈시를 했소. 아니, 여보시오, 그같이 하자면 세상에 힘센 소가 왕 하겠소. 힘없 는 사람 어디 살겠 소? 그는 그의 직업허고 나이를 묻고 그를 방면했소. 훈계를 듣는 동안 챙피허 고 겁이 나서 맞고 소에 운전수만 내보낸 것도 운전수가 그것 보란 듯이 그보다 먼저 건방지게 그 를 째려보고 파출 소를 나간 것도 아무렇지 않더니, 무사히 파출소를 빠져나오자 다시 심통이 터 졌소. 경찰이 시민 의 불편을 외면하다니. 아니, 불편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모른 체하다니. 경찰 은 업자 편이었소. 회사 차한테는 교통도 딱지를 안 뗀다요. 사장이 철따라 공적으로 조직적으로 요로에 손을 쓰기 때문이요. 고속승합은 고속도로의 무법자고 시외직행은 국도의 난폭자요. 그것 들은 기분 나쁘면 작은 승용차들 정도는 추월허면서 길어깨 쪽으로 밀어붙여 버리요. 발로 찰 수 도 없고, 쫓아가서 잡을 수도 없고, 방법은 하나, 우선 치미는 분노 누르고, 회사 이름 기억했다 가, 언제고 그 회사 차 탈 날이 없겄소? 예리한 스위스제 주머니칼로, 칼이 없을 때는 손톱으로 할퀴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요. 목욕탕은 왜 목욕합니다 두 쪽 간판을 길거리에 내다세우요? 길 이 목욕탕 땅이요? 푸줏간도 내다세우요. 음식점도 금일 개업을 내다세우요. 어떤 경양식 집은 음식 식단을 내다세우 요. 다방도 내다세우고 학원도 접수중을 내다세우요. 좁은 인도는 걸어갈 틈이 없소. 자동차까지 기어올라와서 주차를 허요. 신고헐라고 파출소에 갔더니, 아니, 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보았더니, 거기도 사람 다니는 길 위에 두 쪽 간판이 세워져 있었소. 더 컸소. 무슨 뭐 길 가에 침 뱉지 말고 휴지 버리지 말고 꽁초 던지지 말고 열 잘 스고, 뭐 그런 주의였을 것이요. 그 대로 안 허면 벌금 이 몇만원이라는 협박이었을 것이요. 아니, 길을 제도적으로 항구적으로 무단 점 용허고도 아무 탈 이 없는디, 담배꽁초며 가래춤이 땅을 차지허면 얼마나 차지헌다고 돈을 무요? 쪽간판 발로 찼다 가, 아니, 그것에 발길이 채였다가, 그것 안 건들고 길을 갈 수 있간디요? 파 출소까지는 안 끌려 갔는디, 주인헌테 혼이 났소. 포장마차는 또 어찌요? 영세민이요? 생활보호 대 상자요? 자가용 타 고 와서 영업허요. 고난도 가족 몰고 와서 뒷문 열고 해물감 꺼내요. 어두워지 면 와사등 키고 남 의 눈치 봐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포장자락 펄럭이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밀고 다녀요? 아 예 포도 위에다 천막 끝을 세면못으로 쳐서 넉넉허게 고정허고, 인근 관아나 민가에서 십 미터고 이십 미터고 줄을 끌어다 전기를 키고, 해도 아직 덜 빠진 벌건 대낮에 진설 을 허요. 실뱀 겉은 굵은 피복선이 길게 길 위를 구불구불 가로지르고 땅바닥에 찰삭 달라붙어서 뽁뽁 기요. 그것은 밟으면 발바닥 밑에서 꿈틀거리요. 그것에 발부리가 걸려서 넘어질 염려는 없지 만, 해거름에 그것 이 한쪽 구석에서 틀고 있던 또아리를 풀고 슬슬 기어나올 때는 더러 지나는 사람 발목에 감기 요. 행인은 징그러워서 발길을 힘차게 내뻗었소. 전깃줄을 끌어 내고 있던 중년 사내가 용수철에 튕긴 것처럼 벌떡 일어서서 그 행인한테 달라들었소. 그가 거칠게 항의하지 않 았더라면 그는 아 마 그 도로무단 점용자한테 멱살을 잡혔을 것이요. 가볍게 튼튼한 야구방맹이 를 휘두르고 다니든 지 수첩하고 필기루를 끌적거리고 다니든지 해야지 무서워서 어디 길을 걸어다 닐 수 있소? 승용 차고 영업차고 짐차고 간에 불법 쌍경적 좀 안 달았으면 좋겄소. 사람 정기나 요. 간 떨어진단 말 이요. 합법 경적도 경적 금지구역에서는 불법이요. 비키라니, 누구보고? 지가 비켜가면 안 돼요? 비킬 수 없으면 천천히 가고, 천천히도 안 돼면 서야지. 또 경적은 긴급 수단이 지 초인종이 아니 요. 왜 집 앞에서 빵빵거려요? 그는 자동차란 자동차는 모두 다 와작와작 씹어 먹었으면 시원허겄 소. 그 같은 사람은 경찰서나 군부대나 수용소나 감옥소에 갇혀 있는 것이 속 편했소. 그는 자유 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소. 왜 싸우냐? 왜 나가서 시비냐? 왜 밖에서 박치기 아니면 집 안에서 두문불출이냐? 나가고 사이 좋을 수 없냐? 둘 다 헐 수 없냐?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안 되냐? 비우에 안 맞더라도 참고, 참을 수 없으면 못 본 체하고, 못 본 체헐 수 없으면 밖에 나가들 마라 고 안 허시요? 그것이 그의 해결이요. 나갔다 허면 참을 수 없소. 참을라면 안 나가요. 안 나가는 탓허지 마요. 차이는 참고 못 참고요. 참으면 나가고 못 참으면 안 나가요. 똑 같은 것을 누구는 참고 누구는 못 참냐? 참는다고 자랑 말고 못 참는다고 숭보지 마요. 감수성 차 이요. 눈ㅂ기 문제 요. 없으면 몰라도 있는디 왜 못 보요? 못 보는 것이 잘못이지 보는 것이 잘 못이요? 있는 것이 죄지 있는 것 보는 것이 죄요? 뭐요? 국가 민족이요? 하, 그는 그 한몸 주체허 기도 벅차요. 사회 허고 인류는 좀 기다리라고 헙시다. 예? 용서요? 관대요? 동료 인간에 대한 연 민이요? 눈ㅂ기 그의 아우는 그헌테 없는 것을 다 가졌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하지만 그 의 경우 그 반대였 다. 그가 보통이라면 그의 아우는 수재였고, 그가 수재라면 그의 아우는 천재였 다. 그는 반 수석 은 여러 번 했지만, 학년 전체 수석은 한 번도 못했다. 그의 동생은 전체 수석 을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영리헌디 게을렀거나 노력은 허는디 두뇌가 둔했다. 그의 동 생은 머리고 뛰어 나고 공부탐도 많았다. 대학은 그런 사람이 가야 했다. 그의 집 형편은 그가 대 학에 진학을 헐 무 렵에도 됫박쌀을 팔아 먹을 만큼 어려웠지만 그때는 양친이 구존했다. 성준이 가 고등학교를 졸업 했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대부분 의 부모들과 마찬가 지로 자식 교육열이 대단해서 소 팔고 논밭 팔고 팔 것이 없으면 빚을 내어 자식들을 가르쳤다. 당신은 변변히 입을 옷 한 벌이 없었다. 그가 대학 삼학년 때던가, 그는 아버지 와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성년식이었다. 아이에서 어른으 로, 종속에서 독립으로, 순진에서 경험으로, 무지에서 지식으로의 통과제식이었 다. 그것은 껍질깨 기였고, 하극상이었고, 반란이었다. 그것의 괴로움은 그에게 지금껏 남아 있었 다. 그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이제 옛날의 그의 나이가 된 그 자신의 자식들에게서 돌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그날도 그는 항시 그러시는 것처럼 늦게 들 어오셔서 아랫목에 묻어 둔 상밥 차려 내온 저녁상을 받으셨다. 그의 반주는 성호가 기억할 수 있 는 아득한 옛날부 터 대두병 소주에 위장 보호를 위해서 잘게 저민 생강 조각들을 병바닥에 소복 이 쌓이도록 가미 한 것이었다. 아래채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 편의와 영광의 삶이냐 원칙 과 고난의 삶이냐 로 며칠째 고민하고 있던 성호가 불려갔을 때는 복지께 뚜껑에 찰찰 넘쳤을 술 이 반 너머 줄어든 다음이었다. 그의 부친은 밥그릇 뚜껑에다 술을 잡수셨다. 그는 놋그릇 뚜껑을 열고 거기에 서린 김 물방울들을 쏟았고, 성호의 어머니가 술을 따랐을 것이다. 성호는 상머리에 앉은 어머니 옆에 아버지를 마주 대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섣달 그믐께 기왓가루로 닦은 유기 밥그릇 뚜껑은 검 붉게 변색되었고 알알이 밥알자국이 나 있었다. 그 그릇은 그에 낯익었다. 그의 아버지가 안 잡숫 거나 덜 잡수면 그 그릇의 밥은 그들 차지였다. "편히 앉아라." 그의 아버지가 잔을 쭉 비웠다. 마른 그의 어머니가, 아이고, 저 냥반 빈속에 저렇게 깡술만 마 시면 어찐다냐, 하는 얼굴로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 다. 그에게 자식들 은 안주였다. 그들은 그의 밥상머리에서 꿇어앉아 그의 훈계를 듣는 것에 길이 들었고 그는 그것 이 큰 낙이었다. 그들은 붙잡힌 시간이 길면 긴 대로 풀려 나와 자유의 몸들 이 되었을 때, 서로 마주보고 씩,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짧으면 짧은 대로 뜻밖의 행운에 은밀 한 미소를 나눴다. 그날 밤 그의 부친은 오래간만에 행복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앞에는 몇달 만에 서울 유학에 서 방학을 만나 귀성한 아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가 지금 몇학년이냐? 삼학 년, 그래 삼학년이지. 벌써 삼 년이 흘렀냐? 세월 참 빠르다. 쏜살같고, 전광 같 고, 석화 같다. 인 자 일년이 남았다. 그렇냐? 그럴 학교에 넣어 놓고 사 년 저쪽이 얼마나 가마 득했었냐. 그 동안 고생을 더한 것도 아니다. 살림에 주름살이 더 진 것도 아니다. 묵은 살림에 무 엇 좀 들고났다고 무슨 흔적이 나겄냐? 그가 대학 졸업허는 것만 자산으로 굳었다. 꼭 공짜 같다. 무엇 같다면 그것은 비싼 무엇이 아니었다. 아버지한테도 아들한테도 그것은 거저가 아니라 비 싼 경험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몇 대학 보내기에 남은 땅뙈기 다 팔고, 집기 둥만 덜렁 남았는 디. 여기저기 빚 얻는 것도 한두 번이고, 친구도 있을 때고 비슷헐 때 친구지, 좁은 바닥에서 안 면이나 옛정이 언제까지 보증이 될 수 없었다. 일년 전이던가, 그가 삼학년이 되었을 때 그의 아 버지는 그를 데리고 양복점으로 갔다. '양복 만들기 삼십 년'이 되는 그의 아버 지의 친구가 경영 하는 가게였다. 그는 그의 옷이 외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눈치챘던가, 그 의 아버지가 가게 주인의 대화에서? 그 외상이 오래간 것도 그는 그때 잘 몰랐다. 그때 그의 아 버지는 엉덩이를 기 운 바지를 입고 살았다. 고생은 아들도 했다. 처음 형제가 방을 얻어 자취를 했는데, 월말이 되면 더 러 돈이 떨어졌다. 고지식하고 주변머리 없는 그는 밥을 굶고 학교를 갔다. 그에게는 밀가루 음식 한 끼, 제과점 풀 떡 몇개 살 돈 변통할 재간도 없었다. 차라리 큰돈 같으면 빌려달라는 입이 더 쉽게 떨어졌다. 고 픈 배를 참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창피하지는 않았다. 시 계가 전당포로 가 고 사전이 헌책방으로 갔다. 그때 그들은 단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몰랐다. "남은 일년은 집에서 다녀라."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예? 집에섭니까?" "등록만 허고 와 있다가 시험 때만 얼렁 댕겨오니라. 어디 강사 자리 없는가 모르겄다." 졸업장 그때는 그런 때였다. 아니, 그런 때가 막 끝나는 때였다. 그런 때가 한창일 때는 정작 사람들이 그런 때의 성질을 잘 모르다가, 끝날 무렵에 오히려 소문이 퍼져서 더 악명이 높았다. 재학중에 강사 하는 것은 보통이고, 더 형편이 어렵거나 재주가 좋은 사람은 아예 졸업 장을 돈 주고 샀다. 그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도 그럴 생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휴학을 하고 한 일년 어디 강사 자리 구해서 등록금을 장만할 작정이었다. 집안 형편을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한 해가 그의 집한테는 당나귀의 허리를 부러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 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돈벌이 궁리를 하던 그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말씀하 신 한 교육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사촌인가 뭔가 되는 사람으 로, 그의 어머니한 테는 임의롭고 가까웠지만 그한테는 사돈의 팔촌쯤 되는 멀고 어려운 처지일 뿐 아니라 전혀 안 면이 없었다. 그 사람은 군산의 한 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그를 찾아갔다. 그 것은 무모하고 당 돌했지만 그는 그것을 몰랐다. 생전 처음 서울서 군산까지 시외직행을 타고 하 루 종일 달렸고 시 변두리에 있는 학교를 물어서 물어서 찾았다. 그가 학교에 닿았을 때는 땅거미 가 졌다. 교장은 학 교에 붙어 있는 학교 관사에 있었다. 그가 그의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신원을 밝히자 그는 반색했 다. 그가 용건을 꺼냈다. 그는 머리가 훌렁 벗어진 신수가 훤한 초로의 신사였 다. "삼 년 수료라고? 우선 졸업부터 하게. 여긴 초등교사 배출허는 교원 양성 전 문기관일세. 졸업 을 하고 자격증을 딴 사람도 초임으로 발령받기가 힘든 곳이네. 형편이 어렵고 고생이 되더라도 하던 학업을 중단하지 말고 끝을 내게.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일세. 공부에도 때가 있어. 젊어서 면학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어려워. 요즘 같은 어지러운 세상에 편케 대학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작게도 기대하지 않았고, 교장의 말은 모두 옳았 지만,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낭패감을 느꼈다. 몰래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어서 오게. 잘 왔네. 마침 그 과목 담당교사가 유골세. 내일부터라도 출근할 수 있겠나?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그 자신의 저돌적인 어리석음의 확인인지도 몰랐다. 그는 날이 저물었지만 집주인이 간곡 하게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고 되짚어 나왔다. "차라리 학교를 쉬겠습니다." "뭐라그냐? 학교를 쉬다니, 졸업 안 헐래?" "공부도 안 허고 졸업허면 뭘 허겄습니까? 그런 졸업은 안 헐랍니다." "책 가지고 여그 와서 공부허면 안 되냐? 김또또네 두째도 지난 학기 내내 집에 와 있었다. 월 암 선생 자제도 그랬다더라." "마지막 남은 한 해를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졸업 안 허겄습니다." "뭣이 어째?" 마침내 그의 아버지의 분통이 터졌다. 그는 술이 남은 놋쇠 밥그릇 뚜껑으로 상바닥을 내리쳤 다. 술이 튀었다. 그의 어머니가 애원하면서 그의 아버지한테 매달렸다. "뭣이라고? 학교를 안 다녀? 졸업을 안 해? 하, 이, 이것이 삼 년 동안 대학 갈친 끄트머리냐? 사람들이 충고하더라. 자식 갈쳐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절대 무리허지 마라고, 나중 후회헌다고. 나는 반대했다. 이것이 그 끝장이냐? 대학 문 앞에도 안 가 봤으면 야, 야. 큰일 나겄다. 많이 배우 면 뭣 허거이냐, 인간이 돼야지? 사람 못된 것 갈쳐 봐야 말짱 헛일이다. 인간 다운 인간될라고, 사람 노릇 헐라고, 학교도 가고 공부도 헌다. 사람될라고, 사람." 그가 뭐라고 입을 들석거릴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를 방 밖으로 밀어 냈다. 그의 아버지 는 계속해서 노호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 다. 더구나 그에게 그렇게 격분하신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그에게 꾸중을 들은 적도 별로 없었 다. 아들은 착실했 고 아버지는 과묵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불만이 있었다면 그가 공부를 잘해서 였다. 공부만 잘허 면 뭣 허기이냐? 인간이 인간답지 못허면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는 후 미진 거름자리 뒤 컹컴한 곳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소리 죽여 울었다. 공부만 잘허면 뭣허냐는 공부만 허면 뭣허 냐고, 공부만 허면 뭣허냐는 공부만 허고 딴 것을 못허면 공부도 못헌다였다. 그는 사실 공부를 잘허지 못했다. 잘헐라고 애를 썼다. 그는 아마 공부를 잘허면 딴 것도 잘헌다 고 믿었다. 딴 것도 잘허지 못헌다면, 공부 잘허는 것이 딴 것 잘허는 것보다 더 중요했고, 적어도 딴 것 잘허는 것 만큼은 귀중했고, 딴 것 잘허는 것에 상관없이 가치가 있었다. 공부 잘허는 것 은 모든 가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고, 가장 가치가 있지 않다면 딴 일들 못지 않게 가치가 있었 고, 딴 일들만큼 가치가 있지 않다면 적어도 딴 일들과는 관계없이 가치가 있 었고, 딴 일들을 못 해도 공부만 잘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얼마든지 훌륭했다. 그가 이룰라 고 애쓰는 것의 완 성이 그것만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니,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멀리서 가마득 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그는 처량허게도 겹으로 가치가 없었다. 그가 얻을라고 허는 것은 못 얻 어도 바보였고 얻어 도 바보였다. 얻으면 더 바보였다. 가치가 없는 것을 얻는 것은 못 얻는 것보다 더 미련했다. 멍청이가 될 염려는 없었다. 그는 그가 이룩하려는 것이 결코 이룩될 수 없 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못 이룬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좋았다. 이룰 수 없는 것이라 하더 라도 못 이룬 것은 못 이룬 것이다. 이뤄도 미욱허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행동을 비 난할 수는 있어도 뜻은 욕할 수는 없었다. 행동은 그것의 성질상 불완전했지만 뜻은 완전했다. 온 전한 것은 아무리 사소하고 유치하고 비근하고 초라해도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을 달리는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없는 풀 한 포기, 그늘에 핀 꽃 한 송이, 발길에 채 이는 돌멩이 하나 를 봐라. 그것들은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는 그를 위한 그의 아버지의 노고와 그에 대한 기대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고, 저버린 적은 더구나 없었다. 적어도 없다고 생각했다. 편법으로 졸업장을 따는 것보다는 원칙 대로 졸업을 하는 것은 그의 욕심이기 전에 그의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의 부친은 모로 가도 어 디만 가면 그만이라 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졸업장만 손에 쥐면 된다고 생각헐 만큼 대학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 지 않았다. 하도 어려운 시절이라서, 조금 부족하더라도 끝을 맺는 것이 좌절 하여 중동무이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혼란한 세태를 정직하게 살면서 그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 다. 학비를 더이상 어떻게 마련하느냐. 그의 아버지는 지쳤다. 결국 돈문제였다. 돈이라면 그도 나 름대로 연구가 있었다. 돈 때문에 그가 그의 아버지한테 대들고 대항하고 반대 한 것이 아니었다. 등록금 해 달라고 아들이 아버지한테 깡놓은 것이 아니었다. 화산은 돈 때문에 폭발했지만, 그나 그의 아버지가 화가 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배신감 때문이었다. 허탈함 때문이었다. 아버지 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이회전 없었던 것을 놓고, 적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부자가 터뜨린 갈등은 아들이 거름자리 에 가서 남몰래 흘린 눈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입영 통지서가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의가 적절치 못했다. 군입대는 그의 대학 사년차를 위한 계획들 중 마지막 제 3제안이었다. 첫째 는 물론 학업을 순조롭게 계속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휴학하고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고, 그 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때 세번째가 입영이었다. 그는 신문에서 우연히 육군간부 후보생 모집광고 를 보고, 아차, 이것이구나, 했다. 그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것은 그때까 지는 전혀 남의 일 이거나 딴 세상일이었다. 그는 곧장 서류를 갖추어 응시했다. 자격은 고졸이었 다. 뭐, 간부보? 친 구들은 웃었지만 그는 웃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 었다. 그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그는 면접 전날 술을 마시고 학교 앞 다방에서 방뇨하다가 휴가 나온 육군 사병과 쌈을 벌여 눈텡이가 퍼렇게 부었다. 흉조였다. 그는 안대를 매고 면접 장소에 나갔다. 시험관 준 장이 왜 눈이 그러냐고 물었다. 그는 다래끼가 났다고 둘러댔다. 시험관이 안대 를 벗어 보라고 했 다. 그는 그렇게 했다. 장군은 부스럼과 타박상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세번째 단계는 신원 조회였다. 신원 조사는 하사가 나왔다. 진술서를 여러 통들 써주고 본적지에 와서 기다 리기 여러 날들 만 에 형사 같은 청년이 하나 그를 찾아왔다. 그는 특무대에서 왔다고 그의 신분 을 밝혔다. 그가 덜 덜 떨자 하사가 왜 그렇게 떠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군인은 그가 특무대원이 무서워서 떠는 줄 알았다. 장교 될 사람이 하사가 무서워서 떨겄냐. 3차 최종시험이라 긴장이 돼서 조금 흔들렸는갑 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처음 흥분이 가시고 그가 침착을 되찾자, 이번에는 그 가 떨지 않는 것이 군인헌테는 야속했다. 미리 장교 기분 내냐. 아직 민간인 신분이었다. 장교가 될라면 먼저 사병이 되어야 했다. 민간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 한번 가 봐라. 훈 병헌테 하사는 가물 가물 높아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논산 개판을 졸업하고 상무대 강훈 련을 살아남고 임관 이 되어 군인이 될 때쯤이면 그는 군복 벗고 민간인이 되어 서울거리를 활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역시 잠자코 있었다. 그가 군인이 되고 그 앞에 앉아 있는 특무대원이 민 간인이 되다니, 그 것은 뽕밭이 바다가 되는 것만큼이나 가마득했다. 하사는 차 한잔과 담배 한 갑 을 대접받고 갔다. 상전벽해는 십년이 아니라 넉달이었다. 두엄더미 뒤에 숨어서 운 사건이 있은 지 며칠 뒤, 군대에서 최종통지서가 왔다. 입영 일시와 집결지가 적혀 있었다. 집결지는 용산역이었고 날짜는 일주일쯤 여유가 있었다. 그는 마음이 착잡 했다. 지원을 했을 때는 군대에 가려고 했지만 막상 입대가 눈앞의 현실로 발 등에 떨어지자 그만 두고 떠나야 할 생활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다. 어쨌든 군대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패배냐, 포기냐, 연기냐, 성장이냐, 의무냐 애국이냐. 무슨, 나라 사랑까지는. 법을 지키 고 기피자가 안 되 는 것은 시민의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아니, 최대한이 못 될 것은 또 뭐냐? 젊 음을 삼 년씩이나 바치는 것이 애국 아니면 무엇이 그것이냐? 치부? 명성? 그는 그날 밤 친구들 둘과 술을 마셨다. 구멍가겐가 그들 중 하나의 집인가에서 그들은 소주 대두병 하나를 비웠다. 말 하자면 그의 무운 장구를 비는 모임이었다. 셋 중에서 하나는 술을 못했고, 나머지 둘 중에서는 그가 더 술꾼이었 다. 그는 적어도 반 병을 마셨다. 그때 그들이 기고만장해서 무엇을 떠들었는지 그의 기억에 없었 다. 그가 누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술을 마셨는지도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그들은 통금고동이 분 뒤 에야 헤어졌다. 그가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비틀거리고 있을 때 누가 그의 얼굴에 손전등을 확 비쳤다. 경찰이었다. 그가 휘청거리는 두 다리들을 가누면서 누구 냐고 소리쳤다. 순 사가 그를 부축해 주면서 약주가 과허시니 어서 집으로 들어가시라고 했다. 그 는 취중에도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간다고 고함을 질렀다. 관헌이 가실 때 가시더라도 조용히 가시라고 그를 타이르고 그가 안 넘어질 만헐 때 얼른 그를 놓고 잽싸게 달아났다. 그는 역시 술 취헌 가 운데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사내가 사라진 쪽을 향해서 허, 하고 탄식을 뱉 은 다음 그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튿날,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그날, 남국민학교에서 장정 들 입영 소집이 있 었다. 아침에 잠을 깬 그는 술이 하나도 안 깼다. 간밤에는 너무 취해서 아마 의식 을 잃고 조용했었 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두 다리들이 휘청거리고, 온몸에서 술내가 풀풀 나고, 얼굴이 얼얼 하게 달아오르고 화끈거렸다. 그는 자제력도 사고력도 없고, 염치도 이성도 없 었다. 찔찔 짜는 감 상과 본능적인 이기주의가 있을 뿐이었다. 둘이 야합을 하자 백치 같은 유치함 과 선불맞은 짐승 같은 포악함이 상승 작용을 했다. 그는 난폭하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마 보통 으로 문을 열었지 만 중심을 잃은 그의 몸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창호지 바른 조선문짝 이 떨어져 나갈 듯 이 소리를 내고 열렸다. 그 벼락소리에 놀란 것은 그 자신이었다. 해가 중천에 솟은 벌건 대낮이 었지만 그의 방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방귀소리에 놀란 토끼처럼 잠 덜 깬 두 눈들을 멀뚱거 리면서 그가 빈 뜰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도 그것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 었다. 귀가 어두운 지 말이 서툰지, 취헌 소리에 미친 소리가 겹쳤으니 비명인지 발악인지 포학인 지 넋두린지 모를 만도 했다. 금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친척 아주머니와 동네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무슨 일인 가 싶어 기웃거렸고, 잠시 뒤 그의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고무신 한 짝을 질질 끌면서 나타났다. 그는 구경꾼들이 생겼다고 기승을 부리지도 않았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기 세가 수그러들지도 않았다. 그가 벌여 놓은 굿판에 그 자신이 말려들어갔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어 서 뭐가 제대로 보 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런당가. 니가 시방 왜 이러냐, 아이. 니 술 취했 냐? 그는 취중에도 마지막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더이상 나무라지도 화내지 도 않고 안채로 들 어가셨다. 그는 정신이 들었다. 너무 취해서 주어도 동사도 찾지 못하고 감탄사 같은 낱말들만 내 뱉던 그의 고함이 조리를 갖추었다. 그 다시는 집에 안 올라요. 다시는 안 올라 요. 그는 며칠 뒤 입대하기 위해서 서울로 갔다. 그는 아마 그의 어머니와 아버 지에게 술이 깬 다 음에 그의 행악을 빌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용서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다들 가는 곳에 남 안 가는 데에라도 가는 것처럼 요란하게 군대에 갔다. 새야 새야 신경숙-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중편 ' 겨울 우화'가 당선 되어 등단. 1993년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로 제26회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수 상. 소설집 '겨울 우 화' '풍금이 있던 자리' 해설- 전영태 '삼국유사' 권4에는 신비의 인물 사복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면서부터 불구인 사복은 당대의 명 승 원효대사보다 법력이 높았고 어머니가 죽자 장사를 지내면서 같이 무덤 속으 로 들어갔는데 그 속이 환상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신경숙의 '새야 새야'의 이야기 모티프와 사복 의 그것에 공통되 는 점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복을 연상하는 것은 현실 과 환상의 구조가 교묘하게 착종되어 있고, 자신이 애착을 느끼는 여인을 따라 흙 속으로 같이 들어가 묻힌 남자의 이야기가 사복의 모티프와 교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삼국유사'를 연상할 정도로 현실 속의 환상 같은 이야기 를 전개하고 있다. 바람난 아내를 잊지 못하고 죽어간 큰놈, 미친 여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작은놈, 이러한 존재들은 영원 속에 각인된 원형적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나누는 대화나 이들이 벌 이는 행동은 그들 이 비록 세속 속의 인간이기는 하나, 범상한 인간의 그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다. 또한 이 작품의 묘사나 서술도 소설의 상궤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문명의 폐해에 찌들지 않는 태초와 같은 세 상의 원초적 인간 관계를 보듬고 있다. 아무런 슬픔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세계에도 엄청난 아픔 을 강요하는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말을 못 듣고 살아야 하는 육체적 불구의 아 픔보다는 자신을 배 반한 여인이 던진 쓰라림에 못 견뎌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심적 고통의 근원 을 포착하려고 한 다. 시대착오적 발상과 동화적 표현으로 오해하기 쉬운 이 작품은 뜻밖에도 오 늘의 인간상을 반 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유려하게 어떤 때는 간신히 문맥을 통하는 아슬아슬한 문장으 로 표현된 이 소설 의 문체는 시대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소설의 분위기와 걸맞게 어울린 다. 시적인 정감을 담고 있으면서도 산문의 정확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체의 가 능성을 통해 90년대 소설을 이끌어나갈 정예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새야 새야 -눈이 녹고 봄이 와서, 새 햇살을 받으며 그 마을의 신작로를 지르고 비탈을 건너고 능선을 지 나던 한 거렁뱅이 여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골짜구니로 내려갔다. 여인은 잘잘 거리는 개울물 소 리를 들으며 버려진 삽을 집어 한나절 땅을 팠다. 구덩이에 여자와 남자의 얼 음이 덜 풀린 몸을 옮기고는 그때껏 열려 있는 사체의 검은 동공을 손바닥으로 쓸어 닫아 주었다. 비린내를 내며 썩 어 가는 개의 피묻은 뜬눈도 감겨 주곤 거렁뱅이 여인은 가던 길을 찬찬히 갔 다.- '쉿, 조조, 용히 해.' 작은놈은 턱턱턱, 우물, 벽, 돌, 그루터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간다. 오래 전에 물이 말라 버린 우물은 세 발만 짚으면 바닥이다. 그 바닥에 낮부터 내려쌓인 눈을 융단처럼 깔고 앉아 여자는 졸고 있다. 배가 고파서 정신이 들 때까지 여자는 그러고 졸 것이다. 안채의 나 씨는 여자가 이 우 물 속으로 기어드는 걸 가장 싫어했다. 해괴한. 나씨는 작은놈이 우물 속에서 졸고 있는 여자를 업고 나올 때마다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고 마루 끝에서 발을 굴렀다. 작은놈은 여자를 먼저 우물 밖으로 밀어내 놓고 기어나온다. 비척대는 여자 를 부축하여 걷게 하고 자루를 든다. 기미가 이상한지 마루 밑에서 푸른 눈을 번득이고 있던 개 가 빠르게 기어나와 작은놈과 여자의 그림자를 밟는다. '새야. 날아가지 마. 누, 눈아 잠시 멎어 봐. 다, 달아 너도 구름 속에 들어가 있어. 나, 나는 돌 아갈 거야. 짖지 말아. 부르지 말아. 모, 모두들 자, 잠시만 숨을 죽여 줘. 눈뜨 지 말아 줘. 내, 내 가 어디로 가는지 보지 말아 줘. 나, 난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 바, 발짝까 지 채, 챙겨 가고 싶어.' 눈 쌓인 마당은 겨울이다. 저만큼 까치밥이 말라비틀어진 감나무가 시커멓게 비쳤고 생각난 듯 간간이 송이져 내리는 눈이 검은 얼룩으로 그림자 진다. 졸음에 겨운 여자는 순하게 손 한쪽을 잡히고도 윗몸을 작은놈에게 기웃했다. 작은놈은 여자를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자 루로 걸음을 막는 개를 밀어 낸다. 개의 푸른 눈빛이 불안스러이 허둥거린다. 카앙, 개는 작은놈에게 엉겨붙는 다. 졸음이 깨인 여 자가 깜짝 놀란다. 숨겨 주세요. 여자는 철로에서 작은놈에게 업혀 올 때나 지금이나 그 말밖에 할 줄을 몰랐 다. 그 말마저 끊 은 지 며칠이어서 작은놈은 와중에도 여자에게 상대할 일이 생긴 게 반갑다. '쉿, 조용히 하라니까.' 여자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는 작은놈을 향해 헤싯 웃었다. 작은놈은 개 를 더 밀어 내고 자 루를 다시 추스린다. 밀려난다 싶었던가? 작은놈이 여자를 이끌고 몇발짝 떼었 을 때 엉겨붙음을 그만둔 듯 싶었던 개가 사납게 달려와 자루를 물어뜯는다. 작은놈도 질세라 개 를 걷어찬다. 개의 이빨에 뜯긴 자루 속에서 삽날이 눈빛에 번득인다. 함께 갈 수 없어. 작은놈이 돌아서자 개는 잠 시 멈칫하더니 이번엔 작은놈의 정강이를 문다. 개의 잇새에 끼인 정강일 빼 내려고 다리를 이리 저리 휘저을 적마다 사금파리 같은 개의 이빨이 느껴 온다. 꽉 깨물면 작은놈 의 정강이엔 그 이 빨이 박히리라.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개의 잇새에서 정강이를 빼낸 작은놈은 여자를 부축해 뛴 다. 다급해진 개가 재빨리 따라와 엉겁결에 작은놈의 정강이를 카앙 깨물었다 간 제풀에 놀라 얼 른 뱉어 낸다. 피가 바지를 적신다. 놀라 꼬리를 엉덩이에 갖다붙인 개의 이빨도 빨갛다. 다행히 안채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작은놈은 비척거리며 여자를 다시 이끈다. 앞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듯 싶 었던 개도 지지 않 고 비틀거리며 작은놈을 따라온다. 작은놈이 뒤돌아보면 집 쪽으로 물러서는 듯하다가 작은놈이 앞을 보면 얼른 사이를 좁혀 온다. 작은놈은 자루를 내려놓고 여자를 그 위에 앉게 해 놓고 개를 향해 홱 내닫는다. 개는 귀를 쭈뼛 세우고 뒤돌아 도망친다. 눈 위에 개의 발자 국이 어지러이 찍 힌다. 작은놈은 얼른 돌아와 여자를 부축하고 걷는다. 저도 멈추고 작은놈이 어버거리며 쫓으면 조금 뒤로 물러서기를 하며 사이를 좁혀 온다. 작은놈이 폭폭했다. 소리를 지를 기회가 단 한 번 이라도 있다면 지금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고샅을 돌아 신작로로 나왔을 때 작은놈은 신작로 가상의 큰놈 집을 건너다 본다. 불탄 자리가 구덩이처럼 시커먼데 그 위로 눈은 종잇장처럼 가벼이 쌓인다. '눈은 어떤 소리를 내지?' '차가운 소리.' 밤하늘의 구름은 얼어붙었는데 달빛은 담장에서 은근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 세상의 공기 속에 섞어 놓을 수 있다면... 눈과 달빛과 바람에 휘감긴 큰놈 집을 건너 다보는 작은놈의 눈 에 큰놈의 휑뎅그런 눈이 잠겨온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마음자리 마디마디에 접붙여져 질푸르게 옹이진 그 말을... 작은놈은 여자와 자루를 추스린다. 그 말을 세상에 주고 갈 수 있다면... 작은놈 은 슬몃 뒤돌아본다. 개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작은놈을 지켜보고 있 다. 그렇다면 그 집 의 한시절에게 주고 가고 싶다. 어머니와 큰놈과 셋이서 살던 그 시절에게로. 그땐 웅덩이같이 아늑했던 집이었다. 그들이 집 안팎의 허공에 대고 그린 손 짓 말 그림은 거미 줄처럼 포개져 떠다녔다. 소리가 없어 달팽이 집같이 조용했지만 저 집에 셋이 살 땐 그들은 서 로 시끄러워서 눈을 감곤 했었다. 문이 닫히거나 밥수저를 들었다 놓거나 하 는 소리조차 안 날 때가 그들에겐 가장 시끄러운 때였다. 방안에서 그들 셋이 시끄럽게 떠드는 줄 도 모르고 마을 아 이들은 그 집에 기어들어 감을 따 가고 자두를 따 갔다. 아무려나, 그들은 개 의치 않았다. 그땐 모시천 같은 햇빛도 끌어당겨 덮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 작은놈에게 외로움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나씨나 글을 가르쳐 주면서부터 생 겼다. 어머니는 글 을 몰랐고 큰놈은 글을 깨치려 들질 않았다. 어머니가 늘 회초릴 들지 않았다 면 큰놈은 읽으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ㄱ, ㄴ, ㄷ, ㄹ, ㅁ, ㅂ... 아, 야, 어, 오. ...나씨가 그린 글씨들은 미로였다. 어머 니와 큰놈과 셋이 서 허공에 그린 손짓처럼 투명하질 않았다. ㄱ과 ㅏ를 합치면 가이면서 ㅜ랑 섞 이면 구라니. 저희 들끼리만 미로인 게 아니라 셋의 마음을 어지럽고 갈래지게 했다. 그들이 바 람 속에 햇살 속에 그렸던 손 그림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섞갈림이 ㄱ과 ㄴ사이엔 있었다. 셋 사 이에 틈은 그로부터 생겼다. 어머니에게, 큰놈에게 ㄱ과 ㄴ사이의 것들을 일러줄 수 없게 되고부터 작은놈은 외로웠 다. 손 그림만으론 무엇인가가 그립고 모자라고 허방을 딛는 듯 아슬아슬하기 조차 했다. 그것이 더 깊어지는 줄 알면서도 작은놈은 열심히 했다. 큰놈이 쓰는 걸 하지 않으려 해 어머니가 슬퍼 했으므로. 어머니가 덜 슬퍼한다면 그것으로 되었기에. 결국 ㄱ과 ㄴ은 똑같았 던 그들 셋 사이에 틈을 만들어 놓았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큰놈은 읽을 줄만 아는 사람이 되었고 작은놈은 쓰고 읽는 사람이 되었다. 오로지 그것 하나를 남겨 주려고 살아왔던 것마냥 작은놈이 쓰고 읽는 걸 예사로 하게 되자 어머닌 자리에 누웠다. 작은놈에게 네모난 수 첩에 볼펜을 달아서 호주머니에 넣어 주며 어머니가 그린 마지막 손 그림은 너는 이것을 가졌으니 슬퍼하지 말고 미 래를 가져라, 였다. 어머니는 알았을까. 큰놈이 쓰기가 고통이었던 건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였다는 걸. 당장에 니은에 아를 보태면 나가 된다는 나씨의 글 가르치는 소리마저 들을 수가 없었 으니. 어느 날 큰 놈은 작은놈에게 노래책을 들이밀었다. 노래책 밑줄 그어진 노랫말엔 동백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던 동백꽃 말이에요.' 큰놈이 밑줄 그어 온 곳은 뚝뚝, 이었다. 이게 무어지? 작은놈은 땅바닥에 막대기로 글씨를 썼다. '꽃이 떨어지는 소리.' 소리? '움직이는 것들에게선 소리가 나.' 어떻게 알어? '귀에 들리는 거야.' 들린다구? 큰놈은 적막한 제 귀를 쓸쓸히 만져 보았다. 큰놈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움직 이는 기러기를 보 았고 저 새는 무슨 소리를 내는가, 물었다. 작은놈은 또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포르르, 라고 썼다 가 작은놈은 휘저어 내렸다. 그런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큰놈이 포르르, 를 느끼겠는가. 작은놈 은 기러기 날아가는 소리를 땅바닥에 적었다. '그리운 소리.' 이후 큰놈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작은놈이 써 주는 대로 읽었다. 큰놈은 움직이는 것만 보 면 물었다. 물은? '헤어지는 소리.' 뱀은? '눈이 감기는 소리.' 때까치는? '대문 여는 소리.' 바람은? '잠 깨우는 소리.' 큰놈이 가고 작은놈은 잠을 보챘다. 자신이 써 주었으나 큰놈의 적막한 귓속 에 갇혀만 있던 소 리 소리들이 작은놈의 잠 속으로 밀려들어와 소용돌이치며 떠돌다가 식은땀으로 밀려나왔다. 작은놈은 여자를 안으로 싸안는다. 소리를 이기게 해 준 건 여자였다. 여자를 업어 온 후 작은놈은 잠을 깨도 선 뜩하지 않았다. 잠 자는 여자의 마른 손가락에 손깍질 낄 땐 쿵쿵, 소리가 났는데 그것이 여자에 게서 나는 것인지 자신에게서 나는 것인지 가만 숨 죽여 가려내다 보면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여 자가 어디서 왔는 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헤아리는 일은 어머니가 말한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가늠 해 보는 일만큼이 나 시리고 자욱한데도 가슴이 저렸다. 그 저림은 작은놈의 몸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까지 쏙 빼내 갔다. 그럴 적이면 작은놈의 귀에 그토록 넘치던 소리가 끊겼고 적막 속 에서 아련히 무엇인 가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여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지. 어느 틈으로든 들 어가 숨어야 하기 에, 우물도 굴도 들여다보이기에 작은놈에게 그 손짓은 반가움이었다. 작은놈은 걸음을 재촉한다. 새벽이 되기 전까진 거기엘 가야 한다. 동이 트면 안 될 것이다. 미래. 어머니가 말한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작은놈은 두엄을 내다가 나락을 베다가 자주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햇빛이 가물거리는 끝에 걸려 있는 것 일까? 여름 밤하늘 의 은하 같은 것? 오는 것인지? 찾아가야 하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어머 니는 글씨를 쓰고 읽을 줄 알게 되었으니 미래를 가져라, 했지만 그럴 줄 알게 되고부터 작은놈 의 마음은 투명이 걷히고 시리고 자욱하기만 했다. 그 마음이 작은놈으로 하여금 큰놈이 가져온 노래책 뒤에 수없이 적힌 주소 의 한 이름에게 작 은놈은 글씨를 써서 보내 보았다. 미래란 그런 것이려니. 저 먼 곳을 곳을 그리 워해 보는 것이려 니. 우체부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와 코밑에 들이댔다. 이 작은놈? 작은놈은 편지를 가만 뜯어보았다. ...수없이 받은 많은 편지 중에서 댁의 편지가 제일 마음을 끌었어요. 정말 이름이 작은놈이세 요? 저를 놀리려는 게지요? 어쨌든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돋 보이게 하려고 이름 을 더 근사하게 지어 쓰는데 댁은 그 반대니까 진짜일 거예요. 다음 편지 땐 꼭 이름을 밝혀 주 세요. 네?... 나씨가 맨처음 가르쳐 준 글씨는 '이 작은놈'이었다. 나씨는 그게 너의 이름이 라 하였다. 그런데 진짜 이름이라니? 미래와의 편지 왕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사랑. 그 말을 처음 편지에서 읽었다. 미래는 그 말과 함께 사진을 넣어 왔다. '이렇게 멀리서 더이상 아파하고 싶지만은 않아요. 그쪽 얼굴도 모르고 희망 을 갖는 게 두려워 요. 사랑해요. 지금까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걷고만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부턴 그쪽을 향해 걸을래요.' 미래는 정말 걸어서 왔다. 사진 속의 큰얼굴과는 달리 키가 도토리만한 여자 였다. 와서는 작은 놈을 보고는 설핏 고갤 돌렸다. 어마, 웃겨. 미래는 작은놈을 보고 길을 잘못 왔다는 표정을 감추 려하지도 않았다. 잠잘 때마다 별들에게도 산들바람에게도 단꿈 꾸라고 속삭 인다는 도토리만한 미래는 가만 대문을 밀고는 빠끔이 얼굴을 들이밀던 거와는 달리 콰당거리며 가 버렸다. 미래는 그저 맥을 놓고 따라가 보는 작은놈을 돌아다도 안 보고 다리를 건너 멀어지곤 다시 편지를 보내 오지 않았다. 작은놈도 이후 다신 글씨 따윈 쓰지 않았다. 아아- 소릴 질렀는데 혀 밑에서 헛바람만 말려나올 때면 작은놈은 마을 외각 을 걸었다. 걸으면 서 들었다. 바람소리를 물소리를 기차가 지나가고 새들이 날개치는 소리를. 그러 면 시리고 자욱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들어서 속을 채우면 말을 못 해 공허한 자리가 메워질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밭에 씨감자를 묻고 있는데 저쪽 고랑에 먼저 심 어 놓은 것에서 호 로로, 소리가 났다. 가만 땅의 어둠에 귀를 대 보니 감자에 붙어 있는 씨눈이 눈뜨는 소리였다. 씨눈은 캄캄한 데서 호로로호로로 눈을 떴다. 거길 가면 어머니도 그렇게 눈을 떠 줄 것이었다. 호로로호로로. 작은놈이 다시는 안 쓰리라던 글씨를 다시 쓰게 된 건 큰놈 때문이었다. 이 름도 없이 큰놈 작 은놈이라 불리는 형제를 일을 부리며 가까이 두고 살았던 나씨는 더는 참을 수 없다며 큰놈의 아 내가 그 사내와 함께 자고 있는 역전 앞 여관에 김씨, 최씨와 함께 들이친 후 돈뭉칠 가지고 왔 다. 나씨는 손과 발로 열심히 큰놈을 설득했다. 집으로 들어올 여자가 아니라네. 거저 맥없이 삐길 수는 없잖여. 이리 헐 수 밖에 없었어. 이걸 루다 논을 사드라고. 잘 갖구 있어. 내 알아봐 사 줄 테니께. 나씨는 큰놈 마음이 어쩐지 몰랐다. 아니 알 수가 없기도 했다. 큰놈은 돈뭉 칠 앞에 놓고 이틀 을 앉아만 있었다. 작은놈은 가끔 먹을 걸 가지고 가서 방에 들이밀었다. 큰놈은 멀거니 바라다만 볼 뿐 아무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삶은 고구마, 감 따위가 들이미는 대로 쌓 였다. 이대루 죽을 쳐! 작은놈은 버럭 성을 냈지만 마음이 시렸다. 사흘째 되는 밤에야 큰놈은 휘청 이며 작은놈을 찾 아왔다. 그들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한바탕 허공을 휘저었다. 글씨를 써 주어. 누구한티? 니 형수한테. 인제는 안 온대잖여. 와, 한 번은 와. 벽장 속에 가방이 있거던. 뭐라 써? 큰놈은 속주머니에서 두툼한 책을 내밀었다. 큰형이 펼쳐 놓은 쪽에 붉은 줄 이 그어져 있었다. 작은놈은 밑줄 쳐진 데를 읽어 보았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작은놈은 슬픈 생각이란 말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큰놈은 접어 놓은 다른 쪽을 폈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큰놈이 그 문장들을 모아서 그대로 써 달라기에 작은놈은 공허히 고갤 저으 며 화가 난 듯 손 그림을 그렸다. 글씨는 다신 안 쓰기루 한 거 알잖여. 다시 쓰기루 하면 안 되나? 그걸루 형수를 붙잡진 못한단 말이네. 아름다이 보내 줄 순 있지. 작은놈은 큰놈의 검은 동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름다이? 글씨가 그런 일 을? 그럴 수 있으 리란 생각을 작은놈은 한 번도 생각을 안 했다. 작은놈은 그제서야 큰놈이 밑 줄 그어 온 문장을 모아 보았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 금가는 힘을 가졌 으면 한다.' 작은놈이 엎드려 큰놈이 밑줄 그어 놓은 문장을 이어서 옮겨 적었을 때 큰놈 은 작은놈의 어깨 를 두드렸다. 이걸 갖고 떠나라고도 써 주어. 큰놈이 꺼내 놓은 건 나씨가 놓고 간 돈뭉치였다. 이건 형 거라고 했잖여. 작은놈은 글씨를 쓰던 걸 멈추고 또 한바탕 허공을 휘저으며 대들었다. 큰 놈도 막무가내였다. 작은놈은 나씨에게 들은 대로 형수는 형에게 이제 오지 않으니 돈을 형수에게 줘서는 안 된다 했 고, 큰놈은 그 사내에게서 받아낸 돈을 자기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이라 했다. 우리들 중 그 돈을 갖기에 알맞은 이는 그래도 형수라 했다. 작은놈은 형수는 나쁘다, 돌아오지 않는다만 저어댔다. 그러다가 손짓이 물끄럼해져 버렸다. 그래두 내 맴을 모르겄니. 가슴을 탕탕탕, 치는 큰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 계속 치면 구멍이 뚫려 도 뚫릴 것이었다. 작은놈은 그처럼 창백하고 그처럼 노염을 탄 큰놈을 못 보았다. 슬픈 생각이란 저런 것일까. 누군들 내곁에 있고 싶으니까. 니 형수도 그것뿐이야. 기찰 타구 먼 데로 가라 구 그리 써 주어. 작은놈은 할 수 없이 덧붙였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 금가는 힘을 가졌 으면 한다. 이 돈으로 기차를 타고 먼 데로 가라.' 그러고도 큰놈은 뭔가 부족한지 작은놈을 쳐다보았다. 더는 안 쓰리라, 했지만 버티고 앉아 있는 큰놈에게 또 밀려서는 작은놈은 삐뚤삐뚤 그리구 행 복하여라,를 말미에 써넣었다. 그제야 큰놈은 작은놈이 차려 준 밥을 떠먹었다. 밥을 먹고 비척비 척 걸어가는 큰놈을 따라가니 큰놈은 벽장문을 열고 형수가 챙겨 놓은 가방을 열고 편지와 돈뭉 칠 집어넣었다. 가방 뚜껑을 닫으려던 큰놈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형수가 자 주 입던 긴 치마를 꺼내서는 오래 들고 서 있었다. 작은놈은 마을의 끝진 데로 돌아선다. 더는 개를 쫓지 않는다. 지금 개에게 그러듯 언젠가 큰놈이 자신을 그리 내몰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작은놈은 어린 시 절 그 웅덩이 같은 집에서 큰놈과만 있을 때 또래들이 입술을 둥글게 네모지게 모으거나 흐트러 뜨려 말이라는 걸 한다는 걸 몰랐었다. 빠끔히 대문을 밀고 길을 내다보니 또 래들의 입은 나팔꽃 같이 열려지고 닫혀졌다. 그때마다 음악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작은놈은 입을 벌리고 아, 해 보 았다. 이게 뭐야? 누구에게나 나는 음악소리가 자신에게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작은놈은 휘둥그래 져 사방을 둘러보았다.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었다. 큰놈은 아예 사람들 입이 나팔꽃처럼 열려지 고 닫혀질 땐 음악소리가 난다는 것마저 몰랐다. 그걸 알고 작은놈은 큰놈 옆 에만 붙어 있었다. 또래들 중 그들 둘, 그들 둘의 입 속에서만 공허히 바람이 새나왔기에. 우리 둘 만 같은 거야. 작 은놈은 큰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예 큰놈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면 못떼어 놓 을 것이기에. 그때 큰놈은 어딜 가려던 것이었을까? 한사코 작은놈을 떼내려 했다. 한사코 그랬기에 작은놈도 한사코 떨어질 수 가 없었다. 혼자 어 딜 가려기에. 지금도 그때 큰놈이 어딜 가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작은놈은 오로 지 큰놈을 못 가게 하거나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일곱 살 때였는지 그보다 조금 더 지났었는지. 계절은 봄이었을까? 큰놈이 한사코 떼어놓으려던 길이 새파랗게 되살아난다. 산길에 마저 쑥이 돋아서는 곁을 지나면 냄새가 쌉싸롬했고 이른 산벚꽃은 나비같이 희게희게 피었는데 그 속을 뚫고 가며 큰놈은 뒤따르는 작은놈을 내몰고 내몰다간 나중엔 산벚꽃가지를 꺾어서는 사정 없이 작은놈의 등 을 후리곤 내뺐다. 아파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울면 눈앞이 흐릿해져 큰놈을 놓칠까 봐 안 울고 뒤쫓았다. 큰놈이 돌아보면 나무 뒤로 숨고 바위 뒤에 숨으며. 능선을 지나 큰 봉에 올랐을 때야 큰놈은 뒤따르는 작은놈을 본척만척했다. 너른 벌이 다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앉았을 때는 벚꽃가 지에 얻어맞은 작은놈의 등에 밴 피를 제 셔츠를 찢어 닦아 주었다. 자꾸만 올라가면 하늘에 닿을까 싶어서. 너른 벌을 내다보며 큰놈이 그린 손 그림은 공허했다. 가도가도 안 닿으면 저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지. 큰놈이 가리키는 저 아래는 가파른 벼랑이어서 작은놈은 큰놈 바짝 다가 앉았 었다. 형이 가면 나도 가지. 사방은 금세 눈보라였다. 작은놈과 여자는 그 속을 걷는다. 길인지 밭인지 논 두렁인지 도통 가늠이 안 되는 비탈진 데로 방향을 튼다. 눈 속에 바람이 더 섞 인다. 저만큼 눈보라 속을 개가 처 연히 뒤따른다. 큰놈의 말대로 형수는 한 번 왔다. 봄 밤길을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옷에 가 득 봄밤 냄새를 묻히고서 나씨의 뒤채로 작은놈을 찾아왔다. 형수는 노랑 빨강 이 섞인 스웨터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 온 듯 돌돌 말려진 종이를 꺼냈다. 말려 진 속에서 연필이 툭 떨어졌다. 형수는 새초롬히 앉아 연필을 집고는 무릎을 책 받침삼아 뭐라 써서 작은놈에게 내밀었다. '큰집에 가서 마루 벽장문을 열어 보아요. 거기 가방 두 개가 있을 거여요. 것 좀 갖다 주어요.' 작은놈은 형수가 쓴 글씨를 대번 잘게잘게 찢어서 형수의 무릎께로 날려버렸 다. 형수는 작은놈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형수의 손톱엔 노랑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간혹 마을 여자들의 손톱에서 빨간색은 봤어도 노란색은 첨이었 다. 작은놈은 달력을 떼 와 그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다시는 안 쓰리라던 글씨 였다. '왜 날 보고 그러라는 거지요?' 형수는 손톱의 노랑색만 자꾸 뜯어냈다. '나는 여기 살 수 없어요. 형도 날 받아 주지 않을 거야요.' 작은놈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 형수도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다. 절대로 여 기선 살지 않는다고 큰놈의 얼굴은 꼴도 보기 싫다고 어디어디 멀리멀리로 갈 거라고. 그 사내하고 함께 갈 거냐니까 형수는 잠깐 고갤 숙이더니 다시 쳐들고 는 자기는 아무하고도 함께 살지 않는다고 그저 멀리 갈 거라고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했다. 작은놈은 나씨가 놓고 간 돈뭉칠 앞에 두고 깊은 구멍처럼 앉아 만 있던 큰놈의 마음을 어떻게든 형수에게 전해 보려고 성을 내다가 순해지다가 허공을 휘젓다간 꾹꾹 눌려 글씨를 썼다. '어디루 간다는 거죠?' 형수는 다시 샐쭉해지며 짜증난 듯 연필을 휘둘렀다. '몰라요.' 새벽이 되어서야 작은놈은 형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차 피 그럴 거면 큰놈에게 가지 않고 자기에게 와준 게 다행이었다. 형수는 이미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큰놈 집엔 불이 켜져 있었다. 형수가 나간 뒤로 큰놈은 늘 불을 켜 놓았었다. 큰놈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은 올 것이라는 형수가 밤에 올 거라는 걸. 큰 놈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니 살금댈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방을 꺼내 기 위해 마루 벽장문을 여는 데 조심하느라 십여 분이 걸렸다. 행여 큰놈이 알 까 싶어서였지만 두번째 가방이 손에서 미끄러져 철버덕 소리가 났어도 큰놈은 내다보지 않았다. 그 밤으로 형수를 떠나 보내고 나서야 작은놈은 큰놈의 적막이 시려웠다. 어 떻게 해도 큰놈의 귓속엔 까마귀색만 쌓여 있는 거였다. 콩이 싹트는 소리, 바람 소리, 개울물소리, 씨감자 눈뜨는 소리, 칡뿌리가 나무뿌리를 휘감는 소리, 그것 들이 큰놈에게 무슨 소용이 닿는담. 슬픈 생각은 불을 켜 놓게 하는 것인가. 왔 다가는 줄도 모를 거면서 뭣 때문에 불을 켜 놓았는구? 형수가 가방을 몰래 꺼 내는 데 편하도록? 작은놈은 눈앞이 자욱했다. 형수가 들고 갔을 그 가방 안엔 나씨가 그 사내에게서 받아 낸 돈뭉치와 작은 놈이 써 준 그 편지가 들어 있을 것이었다. '살아가는 게 슬픈 생각이 든다. 앞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어려워 도 당신이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이 돈으로 기차를 타고 먼 데로 가라. 그리구 행복하여라.' 형수가 다녀간 뒤 여름 내내 잠잠하던 큰놈은 잘 마른 참깨들이 저절로 토톡, 터지던 밤에 형수와 살던 집에 불을 질렀다. 불타는 큰놈 집은 가을밤의 불꽃놀 이 같았다. 불을 끄려고 덤비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놈은 식칼을 들이밀었다. 칼 보다도 큰놈의 눈에서 튀는 시퍼런 것이 무서워 나씨조차도 가까이 가질 못했 다. 가을밤에 큰놈 집은 활활 잘도 탔다. 늦도록 경운기로 나씨 집 먼 논의 지푸 라기를 실어나르느라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작은놈이 깨어났을 땐 집이 반이나 탄 뒤였다. 붉은 불길로 뛰어 들어 큰놈 집 빨랫줄을 받쳐 놓았던 장대 간두를 마구 휘둘러 큰놈을 쓰러뜨렸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작은놈은 나씨와 함께 마 당 오동나무에 큰놈을 묶었다. 어찌나 힘껏 몸을 뒤채는지 꼭대기의 오동이 후 드득 떨어졌다. 큰놈은 오동을 맞으며 자기가 지른 붉은 불에 찬물을 퍼붓는 사 람들을 시퍼렇게 쏘아보았다. 작은놈은 뛰쳐나가 큰놈도 정신을 잃었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냥 붉게 타고 재가 되도록 놓아 두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큰놈 마음이 풀렸을래나, 그랬으면 큰놈이 철길을 베고 자지 않았을래나. 기차는 잠든 큰놈 머리통 위를 지나가 버렸다. 기차가 멎었을 땐 피비린내만 사방에 퍼졌을 뿐 큰놈의 머리통은 보이지 않았다. 튕겨나간 사지도 냄새가 나는 쪽을 찾아 헤 매여서 맞추어야 했다. '기차는 무슨 소리를 내지?' '과거로부터 도망치려는 소리.' 큰놈은 형수보고 멀리 가라 해 놓고선 정작은 자신이 더 멀리 도망쳤다. 비탈을 넘어서니 하늘과 능선이 온통 눈이다. 달빛이다. 쌓인 눈 속에 무릎이 빠진다. 개가 물어뜯은 자리 엉긴 피가 눈 속에 풍덩거리자 쓰라리다. 숨겨 주세요. 이런 폭설은 처음인지 얌전하던 여자가 고함을 지른다. 여자에겐 모든 표현이 다 숨겨 주세요, 이다. 숨겨 주세요. 숨겨 주세요. 작은놈이 내쫓지 않자 개는 이제 맘놓고 바로 뒤를 따라온다. 눈이 깊어 때로 개는 배로 눈을 밀고 있는 것 같다. 고함을 지르던 여자가 눈길에 무너진다. 작은놈에게 매달려 오던 거였는데도 못 견디겠는 모양이다. 견디는 게 무언지 여자가 알기나 할까? 그걸 눈꼽만큼이 라도 여자가 안다면 나씨가 한사코 여자를 내쫓으려고만 하진 않았을 거였다. 여자는 추운지 무너져서도 몸을 오그린다. 여자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한 건 저 녁으로 밥을 밥통째 갖다 놓고 정신없이 먹어서다. 여자는 늘 그런다. 넋을 놓고 앉아 있는다. 아니면 헤싯거리고 웃는다. 밥통을 숨겨 놓으면 생고구마를 여섯 개 일곱 개씩 베어 먹는다. 그도 아니면 잠을 잔다. 이것밖에 여자는 다른 걸 할 줄 모른다. 큰놈의 사지를 모아 뗏장을 씌우고 나니 가을이 끝났다. 벌판은 비었고 하늘도 휑뎅그랬다. 얼마간 작은놈은 큰놈 집을 쳐다볼 수 없 었다. 덩그랗게 남아 있는 큰놈의 흔적과 맞닥뜨리지 않아도 방문을 열고 큰놈 이 들어설 것만 같고 고샅을 돌아서면 큰놈의 뒤테가 잡힐 것만 같았다. 작은놈 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괴로웠다. 가을에 못 떨어 진 감잎이 밤바람에 날려도 큰놈인가 싶어 문고리에 손이 갔으니. 문고리에서 손을 떼면 큰놈이 형수에게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또록또록 생각났다(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작은놈이 큰놈을 조금 잊을 수 있었던 것도, 큰놈 집을 가만히나마 쳐다볼 수 있게 된 것도 여자를 만나서였다. 첫 벌 두 벌도 지나 세 벌째로 열린 손톱만한 풋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채 눈서릴 맞은 고춧대를 뽑아 놓고 돌아서던 길이었다. 그냥 산길을 타고 마을로 내려가도 되는 걸 작은놈은 부러 엉거주춤 허리까지 접으며 철길을 탔다. 어린 시절 큰놈과 작은놈에게 금하는 게 없었던 어머니는 철길만은 금하였다. 유순하 던 어머니가 성을 내며 한사코 가지 말라 하였기에 그들은 틈만 나면 거길 갔었 다. 거기 무엇이 있기에? 큰놈과 작은놈은 철길 옆 둑길에 저희 둘만이 들어갈 수 있게 굴을 팠다. 거 기에 배를 대고 엎드려 철길을 내다보았다. 그리고서 그들은 기다렸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여기 가는 걸 금하는지 알 수 있게 되기를.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걸 멀리 이쪽이거나 저쪽 굽이진 곳에서 수없이 많은 창문을 단 기차가 튀어나와 그들 앞으로 폭음을 내지르며 지나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나마 큰놈 은 그 소릴 듣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저 길다란 것이 미끄럼을 타듯 장난같이 눈앞을 스쳐가는 것으로만, 그런 것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은 그 굴속을 들여다보는 어머니 눈과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시퍼렇게 돌아서며 대나무 가지를 꺾었다. 어머닌 얼굴을 만져 주고 옷을 치켜 주고 손톱을 깎아 주던 그 손으로 그들 종아리에 피멍을 냈다. 깊은 밤에야 성이 풀린 어머닌 데운 물에 수건을 담갔다 짜내 큰놈과 작은놈의 종아 리에 맺힌 핏자국을 가만가만 눌러 주며 그들에게 이야기 하나를 허공에 그렸 다. ...옛날에 어린애 둘과 아낙이 딸린 말도 못하고 귀먹은 사람이 있었더란다. 혼 자 힘으룬 못 살겠어서 걸어걸어 형을 찾아 이 마을로 왔더란다. 형이 문을 안 열어 주어서 문밖에 서 있다가 네 사람은 마을 기찻길로 갔어 모두들 철도 침목 을 베고 안쪽으로 누웠니라.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기로 했더니라. 참말루 저만 큼서 기차가 오는데 아낙은 그만 무서웠구마. 어린애 둘만 끌어안고 뛰쳐나와 버렸더란다. 거긴 가지 마러. 언제든 혼자 죽은 그 사람이 끌어당길 테니... 작은놈은 상처가 아물 때쯤 말 못하고 귀먹은 사람이 등장하는 어머니 얘기를 잊어버렸다. 더는 철길 옆에 파 놓은 굴 속에 들어가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놈은 잊은 게 아니었을까? 정말로 어머니 얘기 속의 말 못하고 귀먹은 사람이 끌어당기는지 알아보고 싶어 철도를 베고 누워 있었을까? 그러다가 잠이 라도 든 겐가? 큰놈에게 뗏장을 씌우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놈은 그들이 어린 시절 파놓았던 그 굴이 남아 있나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굴은 그대로 있을 뿐 아니라 밑바닥에 짚과 옷가지가 깔려 있었다. 어린애 둘이 겨우 배를 대고 엎드릴 수 있었을 뿐 이었는데 작은놈이 성큼 들어서고도 헐렁했다. 그즈음에 새로 깊게 팠다는 걸 작은놈은 금방 알았다. 침침하던 굴 안이 환해졌을 때 작은놈은 바닥에 깔려 있 는 게 형수의 긴치마라는 것도 알았다. 큰놈이 혼자 여기에? 굴 안에 갇힌 바람 은 단 한 번 빠져나와 본 적이 없는 듯 우렁우렁 시커먼 소리를 냈다. 그 소린 작은놈이 철로에 귀를 대고 들어보던 소리와도 같았다. 작은놈은 왜 어머니가 여기에 오는 걸 금했는가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산길을 안 타고 철길을 탄 작은놈 뒤를 여자는 졸졸 따랐다. 처음에 작은놈은 저짝 동네에서 마을을 지나가는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여자에게 길을 내줄 양 으로 작은놈이 둑길로 올라섰는데 여자도 작은놈이 하는 대로 둑길로 올라서더 니 작은놈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그 속까지 종종 따라 들어왔다. 여자의 눈은 초 점이 없었고 곁에 작은놈이 있는지 아는지도 의문이었다. 그저 무슨 아른거림을 따라온 듯 가벼이 따라와서는 헤싯 웃었다. 숨겨 주세요. 여자는 종알거리더니 작은놈 옆에 앉았다간 곧 잠이 들었다. 기차가 세 번이 나 지나가도 여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옷을 너무 적게 입고 있어서 작은 놈은 바닥에 깔린 형수의 긴치마를 걷어 여자에게 덮어주었다. 그래도 추운지 여자는 덜덜거리면서도 잠에서는 깨어나질 않았다. 굴 밖이 어두워질 무렵 작은 놈은 여자를 등에 업고 큰놈이 철로를 베고 잠든 곳을 지나왔다. 깜짝 놀란 나씨가 여자를 받아 방에 뉘었다. 누군데? 작은놈이야말로 여자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여자에 대해 나씨가 이것저것 물 었지만 작은놈은 도리질밖에 할 게 없었다. 여자에 관해 나씨보다 더 아는 게 없었으므로. 아삭아삭 소리에 밤중에 눈을 떠 보니 여자는 윗목 고구마광에서 고구마를 꺼 내 흙째로 베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작은놈은 일어나서 칼을 가져와 고구마를 깎아 주었다. 여자의 먹는 탐은 끝이 없었다. 한 개를 들고 먹고 있으면서도 작 은놈이 다시 한 개를 깎아 놓으면 다른 손으로 집어들었다. 먹는 속도보다 깎는 속도가 더 느릴 지경으로. 여자의 식탐이 그리 지독하지만 않았어도 나씨 가족 눈 밖에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못 견뎌한 건 나씨보다도 나씨의 아내였다. 여자는 어느 때고 배 가 고프면 뒤꼍의 작은놈 방을 빠져나가 안채를 온통 휘젓고 다녔다. 밥 소쿠리 가 떨어지고 국솥이 열리고 무광이 헤쳐졌다. 그러다가 나씨의 손에 이끌려 작 은놈 방에 가두어졌다. 어쩔려? 나씨는 작은놈에게 혼자 몸도 건사하기 번잡하면서 사소한 일거리도 거들어야 하는 여잘 어쩔 참이냐고, 밥이라도 지어 줄 수 있는 여잘 여기저기 알아볼 테 니 여잘 내보내라, 하다가도 고갤 떨구곤 한다. 큰놈 생각이 났던 거였다. 어디 선가 형수를 데려와 큰놈과 살게 해 준 것도 나씨였지만 형수가 큰놈에게 다시 는 못 돌아오게 한 것도 나씨였다. 사람을 서넛이나 데리고 가 형수를 사납게 드러내 놓았으니 형수로서도 이 마을 쪽에 대고는 머리도 빗고 싶지 않을 것이 었다. 집으로 돌아올 여자가 아니라서였다지만 나씨가 그 사내에게서 돈을 받아 오자 큰놈은 기다림을 끝냈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큰놈은 얼마든지 형수를 기다 렸을 것이다. 그것이 턱없는 헛것이어도 그 기다림은 살아가는 그루터기가 돼 주었을 것이다. 그 사내로부터 돈만 받다오지 않았더라면 큰놈은 형수를 기다리 느라 철길을 베고 잠을 자는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은 점점 더 깊어진다. 오른쪽 다리를 꺼내면 왼쪽이 푹 빠지고 왼쪽을 꺼내 면 오른쪽이 빠진다. 원근에 보이는 잡목들은 눈에 묻혀 자그마해져 있고 솔잎 들이 사릉사릉 떨어댄다. 작은놈은 그저 길을 잃지 않기만을 바랐다. 눈만 쌓여 있지 않다면 거길 찾아가는 길이야 우습지만은 이 눈이 길을 하얗게 덮고 있어 두어 발만 잘못 들면 산너머 마을이 나올지도 모른다. 길을 잃어 새벽이 되면 문을 열리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숨겨 주세요. 여자는 기진해 또 한 번 무너진다. 밤바람이나 눈이나 달빛도 여자의 졸음을 어쩌지 못한다. 눈길에 무너진 채 거기서 그대로 졸 생각인지 잠잠하다. 작은놈 은 자루를 내려놓고 여자를 업는다. 함께 걷느니 이러는 게 빠를 것이었다. 공만 하게 커진 여자의 배가 등뒤에서 뭉클했으나 여자는 등에 진 무 몇다발 무게일 뿐이다. 외려 본능적으로 작은놈의 목을 휘감은 여자의 팔이 숨을 죄는 게 힘들 다. 여자가 애를 가졌을 거란 생각은 작은놈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처음엔 도도록했던 여자의 배가 업어 온 지 두 달도 안 되어 터무니없이 커졌다고만 생 각했다. 여자가 입고 있던 스웨터 단추가 불러 오는 배 때문에 저절로 끌러질 때는 장난스런 기분이기까지 했다. 누군가 여자의 배에 날마다 바람을 집어넣는 것만 같아서. 그게 바람을 불어넣는 장난이 아니고 여자가 진짜 아이를 뱃속에 넣고 있다고 해서 그저 여자와 살고 싶은 작은놈 마음이 달라질 건 없었다. 하 지만 나씨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잖아도 어찌해서든 여자를 작은놈에게서 떼 어놓으려던 참에 여자의 불러 오는 배는 맞춤한 구실이었다. 나씨는 작은놈을 방앗간에 보내 놓고는 여자를 철길에 데려다 놓고 혼자 돌아 와 버렸다. 방앗간에서 돌아와 여자를 찾아 헤메는 작은놈을 본척만척하다가 밤 이 되어서야 눈이 빨개져 마당을 나뒹구는 작은놈에게 말했다. 거기서 만났다 하니 가던 길 가라고 데리다 준 걸 가지고 왜 이려? 여자를 찾아 낸 건 철길이 아니라 우물 속이었다. 어느 틈에 여자는 돌아와 우물 속에 들어가 있었다. 물이 말라 들여다보지도 않은 우물이었는데 나씨의 큰애가 우물 속에 자꾸만 돌을 던지기에 가 보니 그 속에 여자가 웅크리고 있었 다. 나씨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고 작은놈은 반가워서 우물을 타고 내려가 여자를 업어 내왔다. 아이가 던진 돌이 여자의 치마에 수북했다. 여자는 몇번 더 내쫓겼으나 용케도 다시 돌아와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 있곤 했다. 여자가 우물 속에서 졸 때는 그 무엇도 여자를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우 물 속에선 밥이나 무, 생고구마 같은 건 여자는 알지도 못하는 이 같았다. 드러 나는 것이 여자를 미치게 한 것이었을까? 우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여자는 넋 이 나간 표정도 헤싯거리며 웃는 표정도 아니었다. 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기 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같이 부드러웠다. 그냥 거기 우물 속에 이불을 깔아 주고 싶을 만큼. 내쫓아도 여자가 용케도 찾아오는 만큼 나씨도 다른 생각이 났는지 시내에 자 주 나갔다. 내보고 박절하달지 모르지만 정신이 지대로 박히길 했나? 꺼덕하면 을씨년스 럽게 우물 속에 기들어가질 않나? 미친 앤 그런다 하구 배는 점점 불러 오는디 어린앨 어쩔 참? 시립병원으로 보낼 기여. 애라두 낳게 하구 그담 일은 생각해 보는겨. 나씨의 말을 여자가 알아들었는가? 여자는 나씨의 병원으로 보내겠다는 언질 이 있고부터는 아예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 살았다. 나씨는 혀를 끌끌 차며 해 괴해도 별 해괴한 일이 다 있다 했지만 여자는 애도 우물 속에서 낳고 살기도 거기서 살았으면 좋겠는가 보았다. 작은놈 보기엔 그렇게만 해 주면 여자는 행 복할 것도 같았다. 작은놈은 능선을 지나 골짜구니로 내려간다. 눈보라는 더 세진다. 여기저기서 쌓인 눈의 무게에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그럴 적마다 잠자코 뒤따라오던 개가 카앙 짖어댄다. 꿩 한 마리가 퍼더덕 날아가는 소리 사이로 산 아래 굽진 모롱이를 돌아오는 밤기차 소리가 우렁우렁 섞인다. 작은놈은 귀를 세운다. 잠잠하던 철로 속의 바람들이 팩팩거리다 소용돌이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를 만나지 않았던들 작은놈도 큰놈처럼 그 굴에 다시 드나들기 시작했을 것 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정말로 어머니 옛날 이야기 속의 혼자 죽은 그 사 람이 자신을 끌어당기는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철로 침목을 베고 누워 있으려 했 을 것이었다. 저만치 개울물소리가 난다. 작은놈은 눈보라 속에서 희뜩 웃는다. 이제 다 온 것이다. 거기엔 개울이 흘렀다. 용케도 얼지 않고 지금 쌓인 눈 밑에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큰놈과 작은놈은 그 개울물에 서로를 밀어 넣다가 둘 다 빠지곤 했었다. 골짜구니엔 오래 된 소나무들이 가지를 눈 위에 질질 끌고 있다. 능선을 넘어 서인지 야트막하고 넓다. 펑퍼짐한 골짜구니는 느닷없는 틈입자들에 의해 소란 해진다. 50년은 됨 직한 참나무 구멍에서 잣새인지 진박새인지 오목눈이인지 날 개 달린 것이 퍼르르 날아간다. 오소리인지 산토끼인지 분간이 안 가는 다리가 짧은 짐승 한 마리도 비명을 지르며 내달린다. 작은놈은 개울물소리를 조금 더 따라간다.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나무들의 형상이 밀가루를 반죽해 빚어 세워 놓은 이상 한 짐승들 같았다. 땅에 스미거나 하늘로 치솟으려다 무엇에 붙잡힌 듯 엉거주 춤 있었다. 그 형상들 사이로 어머니의 무덤이 낯선 눈어림으로 들어왔다. 늘 파 란 풀이 살랑대는 모습이었지 이토록 눈에 쌓일 때 와 보긴 처음이다. 손에서 자루가 먼저 떨어진다. 저절로 목을 감고 있던 여자의 팔이 스르륵 풀 린다. 조심스러이 여자를 내려놓는다. 그 새에 잠이 든 겐가. 여자는 가벼이 눈 위에 무너지며 몸만 조금 오그린다. 눈 속을 푹푹거리며 걸을 땐 땀이 솟아 이마며 등허리가 척척했는데 쉬고 있 으니 순식간에 몸이 차가워진다. 그러기는 여자도 마찬가진지 더 동그랗게 몸을 오그린다. 작은놈은 손짓으로 개를 부른다. 저만큼 떨어져 앉아 물끄러미 이쪽을 보며 있던 개는 두 발을 맞부딪히며 옴싯거리고만 있다. 어떻게든 저를 내쫓으 려던 작은놈이 정다이 불러주는 게 믿기지 않은 모양으로. 골짜구니 어디선가 둥치 큰 나뭇가지가 짜작 꺾어진다. 그제서야 개는 조심스러이 작은놈께로 온다. 작은놈은 여자의 손을 모아 개의 털 속에 파묻어 준다. 그들은 그렇게 조금 쉰다. 척척했던 땀이 다 식고 손이 곱아 올 무렵 작은놈은 자루끈을 풀고 삽을 꺼냈 다. 눈빛에 달빛에 삽날이 번뜩인다. 어딜 그렇게 헤매고 다녔던 것인지. 삽질 소리가 황량함과 적요함을 철겅철겅 울린다. 막상 작은놈은 두려움에 얼 마간 숨을 죽인다. 저기로 가려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실망일 것인지 기쁨일 것인지. 식었던 몸에 삽질이 다시 땀을 돋게 한다. 얼마 지나 작은놈은 삽을 눈 위에 던지고 차가워지는 여자를 끌어안고 무덤을 두드리고 있다. '어머니.' '...' '어머니, 열어 주세요.' '...' '작은놈이에요. 사, 삼켜 주세요.' 조금, 조금 무덤의 아가리가 벌어진다. 널빤지가 짜개지는 소리가 나고 앙상히 마른 두 손이 삐그덕거리며 기어나온다. 그리도 내리던 눈이 멎는다. 바람이 잠 잠하다. 달이 얼어붙은 구름 뒤로 스민다. 꿩인지 오소리인지 날개 달리고 다리 달린 것들이 눈을 감는다. 개의 눈에만 퍼런 번개가 친다. 개는 뒷걸음질치다 다 가서다 비명을 지르다 나뒹군다. 캉, 카앙. 안타까운 퍼런 눈은 피범벅이다. 그들 의 몸은 이미 안에 들어와 있다.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아늑한 웅덩이다. 어딜 그렇게 헤매고 다녔던 것인지.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 윤대녕-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 당선.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어머니와 숲'이 당선되어 등단. 주요 작품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카메라 옵스큐라', '은어', '말발굽 소리를 듣 는다' 외. 해설- 전영태 최근에 발표되는 소설에는 영화나 음악, 미술, 사진, 건축 등의 다른 예술장르 에 관계된 모티프들이 소설의 장식적 요소처럼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자칫 현학 의 과시로 오해될 이러한 모티프들이 자주 나타나는 까닭은 통합예술을 지향하 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고, 소설이라는 문자 예술의 표현 수단만으로 전 달할 수 없는 표현의 영역이 급격하게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윤대녕의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에도 이런 표현이 중요한 기능을 발휘 한다. 카페에서 러시아의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의 얼굴은 장 자끄 베닉스의 영화 '베티블루 37도 2'의 여주인공 '베아트리스 달' 의 모습을 닮아 있고, 그 옆의 전업작가는 '욕조'라는 소설을 쓴 장 필립 뚜생의 큰 키와 대머리를 닮아 있다. 카페의 창 밖 풍경은 미국의 사진 작가 스티글리 츠가 1893년에 촬영한 '5번가의 겨울'을 연상케 한다. 전함 '포템킨'이 옥호인 카 페 안에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가 마란쯔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정경이 한국의 카페에 흘러 넘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국제적인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난 국제적인 인물들인 사진작가 인 '나'와 방송국 스크립터 베티, 전업작가 뚜생이 의견을 모아 찾아나선 곳은 미아리 점쟁이촌이었고, 그중에서도, '국화정사숙녀점성가'라는 곳이었다. 그곳에 서 점쟁이는 베티에게 악운을 악담처럼 퍼붓고 뚜생에게는 코미디의 대사 같은 말을 되뇌인다. 울적해져서 그곳을 나온 그들이 찾아갈 곳은 술집뿐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예술과 운명을 대조시키면서 음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실 패한 예술가 지망생들의 허망한 일상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구혼을 청하는 베티를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안타까움 이 소설의 결말에 쓰다만 시처럼 제시된다. 이 작 품의 마지막 단어인 '미혹', 작 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이 시대 예술가들이 처한 '시대의 미혹'을 형상화한다.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 1 이연주의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며칠째 읽고 있습니다. 이 시집처 럼 내 존재도 사위어 가고 있습니다. 알콜의 과다한 섭취는 생리적인 의미이든 그것이 또다시 불러오는 반향의 의미이든간에 존재의 '썩음'을 용납하지 않는군 요. 그러나 '썩음' 혹은 '사위어 감'의 궁극은 한 곳을 향해 열려 있는 게 아닐까 요. 이를테면 열반이나 해탈 따위들 말예요. 한때는 스물아홉 살 된(아니, 이제는 서른 살 된) 여자의 노련함으로 아무 곳에도 발 담그지 않고 늘 적당한 중량을 지탱하면서 내면에의 투시를 놓치지 않는 투명한 속을 가진 여자가 되고 싶었습 니다. 말하자면 저는 아주 장기가 튼튼한 아마추어로 남아 있고 싶었습니다. 아 직도 늦지 않았다고 대꾸하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이제는 너무 닳아 버린 느낌 입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빠져든 연애에서 저는 다시금 예의 그 쓴 맛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연애는 피 맛 같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연주가 목매 죽었단 소릴 듣고 며칠 동안 구역질을 해대느라 잠까지 설쳤습니다. 존재감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은 바다와 같은 것이라죠? 오늘 아침엔 불현듯 자고 일어난 피부에서 마른 버짐이 피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아 오래오래 맛사지 크림을 유령처럼 쳐바 르고 문질러 주었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살이 조금씩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전 해져 와 급기야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지만요. 나는 내가 왜 추해지는 걸 보고 싶어하는 걸까요. 세종 형도 그렇게 생각하죠? 저 늙은 애는 더 외로워 져야겠다고요. 사람들은 잔인해요. 토요일에 만나 술이나 한잔해요. 오랜 세월 마셔댄 술 탓인지 마침내 장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요. 아침마다 변기에 주저앉 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귀처럼 소리를 질러대곤 합니다. 하지만 마셔야 속이 좀 편해져요. 그럼... 어제 이런 내용의 봉함엽서를 내게 보내 온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벽에 걸 려 있는 에이젠슈타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장 자끄 베닉스의 영화 '베티블루 37도 2'의 여주인공 베아트리스 달의 얼굴을 훔친 듯 닮아 있다. 그리 고 그 영화를 아마 열 번쯤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스물 여덟 살까지 시를 쓰다 지금은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고 있다. 그 옆에는 서른 네 살의 전업 작가 '뚜 생'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는 군에서 얻은 허릿병으 로 줄기차게 고생을 하고 있다. 그는 '욕조'라는 소설을 쓴 프랑스의 소설가 장 필립 뚜생의 큰 키와 대머리를 닮았으며 그의 문체에 대해 늘 침이 마르도록 떠 들어대곤 한다. 나는 그들과 마주앉아 무채색으로 흐려 있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서른세 살의, 역시 장기가 좋지 않은 나는 늘상 양쪽 주머니에 백원짜리 동전 한 주먹씩 넣고 다닌다. 물건을 살 땐 언제나 지폐를 사용하고, 거스름돈으 로 받은 동전을 옷이 축 늘어지도록 넣고 다니는 것이다. 술값이 없을 때 그들 은 으레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나 나를 세종이라 부르는 그들은 백원짜리 동 전에 양각된 인물이 세종대왕이 아니란 걸 모르고 있다. 밖엔 겨울비가 주름져 내리고 있다. 희뿌연 창문 속으로, 미국의 사진 작가 스 티글리츠가 1893년 2월 22일에 촬영한 '5번가의 겨울'을 연상케하는 거리가 내다 보인다. 카페 앞에는 푸른 스타킹을 신은 여자 하나가 까만 우산을 들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벌써 삼십 분 이상을. 우리는 푸른 스타킹의 여자가 기 다리는 남자가 오기 전까지, 어디로 자리를 옮길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다. 우리 가 앉아 있는 자리는 선실 바닥처럼 춥고 눅눅한 습기가 배어 있다. 우리는 오 후반 수업을 빼먹은 국민학생들 같다. 혹은 썰물진 바닷가 모래언덕에 우두커니 서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외지인들 같다. 토요일 오후 세시. 충무로. 카페. 전함 포템킨.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 가 질 좋은 마란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2 불어터진 자장면을 먹었을 때처럼 더부룩한 기분으로 맞이한 1993년 벽두부터 우리가 만났던 것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제나저제나 시답잖 은 궁리에 빠져 눈이 벌개져 있던 베티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믿는 내게 엽서 를 보내 온 것이 그날 모임을 갖게 된 동기였다. 그닥 내키진 않았으나 오후 내 내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미뤄 두고 있던 세면을 하고 아직 덜 마른 양말을 신은 채 밖으로 나왔다. 뚜생의 전화를 받은 것은 외출하기 한 시간 전 쯤이었다. "세종? 나요. 잡지사에 원고 마감하러 나왔다가 그냥 전화해 봤어요. 날씨도 그렇잖은데 술이나 한잔할까 싶어서요. 지난 연말에도 못 봤잖아요." 그의 목소리는 우물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 같았다. 뚜생과 베티는 전에 나와 서너 번 자리를 함께한 일이 있었으므로 서먹할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뚜생에게 합석하자고 말했다. 밖엔 이틀째 눈 아닌 비가 내리고 있다. 영화 를 보고 나왔을 때처럼 나는 문 앞에서 잠시 허둥거렸다. 정작 그렇게 만나긴 했으나 딱히 나눌 만한 얘기란 없었다. 이미 선거가 끝나 차기 대통령이 결정된 마당이었으며, 황영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휴 거의 파문도, 국내 경제가 십이 년 만에 최저 성장을 기록한 것도, 역사적인 한 중 수교가 이뤄진 것도, 김대중씨가 정계에서 은퇴했다는 것도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며, 또한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하고 유고 내전이 최 악인 인권 분쟁으로 번지고 소말리아에선 삼십만 명이 굶어 죽고 la 흑인 폭동 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일본 자위대가 해외 파병을 결정한 일조차도 역시 우리에겐 아무런 화제거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마지막 한 장 남 았던 지난해의 달력을 뜯어내 버리기가 무섭게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완료되었거나 확정된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여력이 우리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은 뻘밭 같은 날들이 우리 앞에 음험하게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세종 형, 우리 어디 교외로 나갔다 올까요?" 이미 식어 버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베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외 어디? 이 구질구질한 날씨에. 차 가진 사람도 없잖아." "그럼 한강에 가서 유람선이라도 탈까?" "우리가 무슨 시골에서 올라온 노인네야. 촌스럽게시리. 꼼지락거리지 않고 할 만한 일 좀 없냐? 우린 벌써 63빌딩의 반을 더 올라온 나이들 아니냐." "그럼 술이나 처먹든지!" 베티가 느닷없이 얼굴을 붉히며 가래침을 내뱉듯이 쏘아붙였다. "글쎄, 술을 먹긴 좀 이르지 않아요? 얼굴이 빨개서 대낮에 돌아다니면 흉해 보이더라구요." 분위기가 좀 사나워지는 듯하자 뚜생이 점잖게 끼여들었다. 푸른 스타킹의 여 자는 연신 손목시게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도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이 하고 싶은 일이 우리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관에 가는 것도, 연극을 보러 가는 것도 이십대에 무던히 해 본 일이어서 이젠 궁상맞고 식상한 일쯤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서른 살이 훌쩍 넘다 보면 모 든 일에 지치고 흥미를 잃게 마련이다. 겉으론 좀 무디고 태연해지는 대신 안으 론 불안이 가중되고 으레 사는 일과 관계된 뼈다귀 같은 일들만 남게 되는 법이 다. 그러다 보면 뚜생처럼 몸이 배배 틀어지며 대머리가 벗겨지고 얼굴은 흙빛 으로 변해 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희망의 밥그릇은 비워진 지 오래고 혁명을 꿈꾸기에는 벌써 나약해져 있는 나이들인 것이다.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나이를 더 먹어 버리는 것일게다. 끔찍한 발상이긴 하지만 불혹, 그쯤 되면 두 손 들고 깨끗이 항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왜 정초부터 그렇게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일은 무슨 일요, 그냥 먹고 사는 일이 고달퍼서 그렇지." 푸른 스타킹의 여자는 스물두엇쯤 돼 보이는 앳된 모습이다. 무언가를 기다리 더라도 아직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있을 나이다. 하늘색 스카프에 검은 코트를 입고 있다. 어째서 이런 날씨에 길에서 약속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암만해도 오늘 뚜생은 여느 날보다 더욱 불안해 보인다. 작년 여름에 불과 서 너달치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받고 잡지사를 그만둔 후, 그는 손끝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대고 있으나 생활은 조금도 개선될 기 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허리 때문에 한 시간 이상은 의자에 앉아 있 지도 못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업작가에겐 쓰는 것이 곧 생존이다. 한데 전업 후 사 개월 간격으로 낸 두 권의 장편 소설이 생활에 그닥 보탬이 되어 주질 못 했다. 날이 갈수록 뚜생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집 근처 앞에다 분식집이라도 하나 차릴까 해요. 이제 처자식 얼굴을 보면 공 포스러워져요." 아내와 두 딸은, 매일같이 두 평 남짓한 서재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만 음 울하게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다. 분위기는 자연 침울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에 빠져 딱 세 개비가 남은 담배를 하나씩 피워 물었다. 그 때, 건널목을 가로질러 카키색 바바리를 입은 청년이 감색 우산을 받쳐들고 '전 함 포템킨'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왔어, 라고 베티가 낮은 목소 리고 말했고 우리는 가벼운 절망감에 빠져 서로의 얼굴을 화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본 다음 엉거주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없이 졸고 있다 종점까지 와 버린 버스에서 내리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때 베티가 그냥 생각 없이 해 보는 소리인 것이 분명한 어조로, 우리 점이나 보러 갈까요? 라고 말했고 뚜생 과 나는 뭐라고?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밖으로 나왔다. 카키색 바바리 와 푸른 스타킹은 감색 우산을 쓰고 명보극장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거리는 화장기가 잘 받지 않는 서른 살 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3 점이란, 미망에 빠지기 쉬운 오십대의 아녀자들이나 보러 다니는 그런 것쯤으 로 알고 있던 우리에게 베티의 제안은 좀 당혹스런 것이었다. 간혹 결혼을 앞둔 남녀들이 재미삼아 탑골 공원 옆이나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낄낄거리며 점 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재미일 뿐이라고 보아 넘 긴 터였다. 도대체 경직된 얼굴로 점집을 찾아가는 젊은 놈은 푼수쯤으로 경멸 받아 마땅하다고 누구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제 인생을 남에게 숨김없이 터 놓고 묻기까지에는 많은 절망의 나이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우선 수 치심부터 없애 버려야 한다. 좋게 말하면 삶에 대해 보다 겸허해져야 하고 나쁘 게 말하면 완전히 탈진하거나 몰락한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암암한 표 정으로 비 내리는 거리에 나부끼듯 서서 누군가가 먼저 '동의'해 주기만을 기다 리고 있었다. 표류하듯 매일경제신문사 앞까지 왔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중 나이가 많은 뚜생이었다. "뭐 재미삼아서 한번 가 봅시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그런 것도 무시 못 하겠더라구요. 예정된 대로 살아지는 경우란 없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뭔가 불 가시적인 힘이 사는 일에 깊숙이 개입돼 있잖냐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뭐 정말 팔자라는 게 있다면 미리 알아두는 것도 괜찮잖아요? 나도 다시 직장을 가져야 할지 원..." "그래, 그냥 한번 가 봐요. 나 노처녀 신세 언제 면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구요. 남의 말 듣는대서 나쁠 것 없잖아요? 어디 우리보다 못난 사람들만 점집 드나드 는 것도 아니더라. 한다 하는 고관대작들 정치인들도 용하다는 점집은 다 찾아 다닌다고 하잖아요. 세종 형도 점 한번 봐야 하는 거 아냐? 언제까지 혼자 살려 고 해." "닥쳐! 여자만 보면 이제 신물이 다 넘어온다. 위화감 때문에... 둘이 살면서 혼자 아닌 척하는 것도 고역이야." "위화감?" 뚜생이 내 말을 되받으며 닭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동차 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제각기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더 이상 실갱이를 할 사이도 없이 우리는 성신여대입구역까지 가는 전동차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우산 끝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로 전동차 바닥은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눈앞에 붙어 있는 화장품 광고의 모델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베 티가 귀엣말로, 저거 세종 형이 찍은 거 아녜요? 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창 밖을 스쳐가는 지하의 어두운 콘크리트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너무 오래 자본주의의 얼굴만 찍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동차에서 내려 지하의 매캐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파충류처럼 어기적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베티가 앞장섰고 뚜생과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고명중상고'라고 씌어 있는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새 비는 좀 꺼끔해 있었으나 미아리 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안개가 잔뜩 낀 늪지대처럼 흐려 있었 다. 먼빛으로 고가 도로에 반쯤 가려진 돈암동 산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목탄화 가 비에 젖고 있어, 하고 하고 베티가 목이 잠긴 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그렇게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눈물의 미아리 고갠가?" 뚜생은 자못 비감한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길 건너 돈암극장에 서는 '여배우 임마뉴엘'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으며 그 앞에선 교회 합창대 사람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빗속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뚜생이 영 화 선전용 간판을 쳐다보며, 미아리답군, 미아리다워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이어 내가, 어디로 가지? 하며 주춤주춤 빗속으로 나가려는데 베티가 마뜩찮은 소리로 내 뒤를 잡아 끌었다. "여기가 거긴가? 너무 삭막하고 지저분하지 않아요?" 고가의 콘크리트 회벽에선 먹물 같은 빗물이 토악질을 하듯 울컥울컥 흘러내 리고 있었으며 점집이 늘어서 있는 그 좁은 길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마을처럼 괴기스런 빛으로 하나같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뭐, 이런 덴 줄 몰랐어?" 내가 먼저 빗속으로 걸어나가자 뚜생과 베티도 마지못한 얼굴로 우산을 좍 펴 들었다. 아닌게아니라 점집들이 늘어서 있는 고가 밑은 허름한 창가를 연상시켰 다. 페인트 껍질이 불쑥불쑥 일어나 있는 녹슨 함석 간판엔 사주, 관상, 수상, 신 수, 이사, 해몽, 재수, 궁합, 작명, 택일이란 말들이 흘림체로 씌어져 있었으며 예 상외로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별반 눈에 띄질 않았다. "여기 오니까 몸서리가 쳐져요. 내가 스물세 살 때 생각이 나요, 갑자기." "스물 세 살? 왜지?" 베티가 축축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뚜생이 심문관의 말투를 흉내 내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냥, 그때 나는 첫사랑의 남자와 이런 데서 일금 오천원짜리 사랑을 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먼지가 하얗게 쌓인 방에서 부적을 써 주듯 그에게 처 녀를 줬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예요." "왠지 서글퍼지는군.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야." 뚜생이 정말 서글픈 어조로 그렇게 되받았다. "...그러게. 나도 처음은 이런 음습하고 축축하고 더러운 곳에서였어. 내 동정은 어여쁜 사랑에게 기쁘게 바쳐지는 것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한 게 못내 쓰라려. 그땐 왜 그걸 버리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굳이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지." "어른이 아니라 사막이 되지. 세종, 그것도 하나의 목숨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 요?" 마구 헤쳐진 꽃밭을 들여다보는 얼굴로 뚜생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러나 이 미 죽어 버린 목숨인 것이다. 우리는 왼쪽 아리랑 고개로 빠지는 골목길의 입구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서로 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기 예언의 집 백장미 어때요?" 뚜생이 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마디했고 베티와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막힌 물꼬를 트는 일에 익숙한 뚜생도 그리 담담한 얼굴은 아니 었다. "그럼 그 옆에 바로니아 여성침술원에서 침이나 한 대씩 맞을까? 허리도 아픈 데 잘됐네." "...조금 더 올라가 봐요. 미아리라 그런가요? 왜 여자가 하는 점집 뿐이죠?" 우리는 '흑진주여자운명감정소'를 지나 '상록수 여자철학관'을 지나 '홍일점여학 사역학점술원'을 지나 '성심여자거북철학원'을 지나 '확실한 희망의 메아리'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목련여자예언의집'을 지나 '천도화여자점성가'를 지나 '백암', '송학', '대산' 운명철학관을 지나 오른쪽 성산 여자중학교와 성산 포교원으로 빠 지는 고가 굴다리 밑에까지 와서 다시 발을 멈췄다. 우리는 마치 난생 처음 여 관방을 찾아가는 한 쌍의 연인들 같았다. 그것도 대낮에 말이다. 그러니 아무데 서나 '목숨'을 버리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미아리 고개의 중턱까지 와 있었다. "구두가 새나? 양말이 다 젖었네." 뚜생이 대머리에 묻은 물기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우리 고갯마루까지 계속 올라가 봐요. 혹시 알아요? 좀 깔끔한 데가 있을 지." 베티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고 갯마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거세게 불어댔다. 우리 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다시 '체내림- 신경성위장병'을 지나 '동심초여학사 철학원'을 지나 '이화여성점성가'를 지나 '개나리', '봉선화' 운명철학원을 지나 '지 리산처녀도사'를 지나 '가야산신도사'를 지나 육교 밑에 있는 '안도현운명철학관' 앞까지 와서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는 추위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저마다 곤혹 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이른바 미아리 점집의 군락지역을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점집 얘기를 꺼낸 베티였다. 하지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만회라 도 하려는 듯 부러 농을 했다. "안도현은 이리에 사는 시인 아녜요? 언제 올라와서 개업했지?" "객쩍은 소리 작작하고 좀더 찾아보자구, 어디 그럴싸한 데 없나? 이런 데서 우리의 장래를 논할 수야 없지 않은가?" "무슨 장래를 논해요 논하긴. 그냥 재미삼아 보자는 거였지." "재미? 이러다 독감이라도 걸리면 점쟁이가 약이라도 한 첩 지어 준다든?" 자칫 말다툼으로 변할 것 같은 험상궂은 분위기가 감돌자 뚜생이 얼른 끼여들 었다. "이러지 말고 아무데나 그냥 들어가요. 나도 발이 시려 더는 못 참겠어요." 우리는 조금 참혹한 기분에 빠져 붉은 벽돌 집들이 겹겹이 들어차 있는 돈암 동 산동네의 잔뜩 흐려 있는 풍경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기슭엔 '벧엘교회'라는 큼지막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그 옆으로 부처님상이 분명한 조형물이 하얗게 치솟아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쫓기다 쫓기다 못해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최후의 마을인 것처럼 생각됐다. 마치 소도 같은 곳 말이다. 우리는 바람에 맥없이 나부 끼며 저마다 말문을 닫고 우리가 철벅거리며 걸어 올라온 길을 힐끗 돌아다보았 다. "비감하군 비감해. 여기 모든 게 우리의 나이를 닮아 있어. 쓰다 버린 소설을 닮아 있어... 자, 이럴 게 아니라 길음동 쪽으로 내려가 봅시다." 우리는 다시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언덕길을 줄지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축대 로 만든 담벼락엔 사납게 찢긴 영화 포스터들이 몇겹으로 붙어 있었고 소변 금 지를 뜻하는 가위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생선 궤짝과, 옷걸이, 라면 박스, 냉 장고 따위들이 비를 맞고 길모퉁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베티는 파출소 앞을 지나며 푸른 비닐우산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여기는 연말연시도 명절도 공휴일도 없는 동네가 분명해요. 오늘이 도대체 며 칠이죠?" 베티가 잠이 오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 참는 목소리로 나를 보고 물었으나 뚜 생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신년이 되고 여러 날이 지났을 뿐인 것이다. 4 '국화정사숙녀점성가' 우리는 낡은 기와집의 담벽에 걸려 있는 노란 간판을 올 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 집은 가파른 축대 위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었다. "국화정사? 거 이름 한번 야릇하네. 우리가 지금가지 여기를 찾아다닌 것 같 은 기분마저 드네. 안 그래요? 우리 여기로 갑시다." 뚜생이 어딘가 모르게 농기가 섞인 말투로 그렇게 말했고 베티와 나 또한 더 이상 점집을 골라다닐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뚜생의 뒤를 따라 경사가 급한 계단 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잠시 후 우리는 가로 다섯 뼘쯤 되는 나무 대문 앞에 서 발을 멈췄다. 대문 앞엔 문패 두 배 크기의 판자가 걸려 있었다. '국화정사숙 녀점성가.' 아, 저 정사였구만... 하며 뚜생이 먼저 마당으로 들어섰다. 베티와 나도 기웃 기웃 뚜생의 뒤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닌게아니라 검게 얼어붙어 있는 국화 화분 몇개가 마당가에 놓여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국화 향기가 풍겨 와 우 리는 코를 킁킁거리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처마 밑에 말라죽은 국화들이 한 움 큼씩 묶여 나란히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어둡고 이상한 집이에요..." 베티가 내 팔을 가만히 붙들며 소근거렸다. 마당 위에 걸려 있는 주황색 빨랫 줄에서 빗방울이 뚝뚝 듣고 있었다. 하늘색 플라스틱 차양이 마당을 반쯤 가리 고 있어 집 안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황홀히 고적한 집이었다. 도르래가 달린 유리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웬 노란 한복을 입은 여자가 갸웃이 문을 열고 이쪽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입을 벌려 우리에게 무어라 말 하는 것 같았으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 들어오라는 말이었 을 게다. 우리는 문을 드르륵 열고 초칠을 해 반들거리는 마루를 통해 노란 한 복의 여자가 앉아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천장이 낮고 바닥엔 전기요가 깔려 있었으나 윗풍 때문인지 추웠다. 한 쪽 구석에 공단이불이 단정하게 개켜져 있었으며 검은 옻칠을 한 책상 위엔 양 은 주전자와 물컵, 그리고 양초 두 자루와 향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으 레 점집이라고 생각하는 만큼의 음습하고 괴기스런 방은 아니었다. 춥지? 앉어, 하고 노란 한복은 대뜸 반말을 하며 전기요의 스위치를 조절했다. 우리는 앉은 뱅이책상 앞에 어색하게 쭈그리고 앉았다. "점 보러 왔어? 젊은 것들이 원... 아무튼 잘 왔어." 노란 한복이 무표정한 얼굴을 가만히 들이대며 우리를 쏘아보았다. 매끈한 이 마에 날렵한 눈썹, 그리고 쌍커풀 진 두 눈 사이로 가는 코가 오뚝 솟아 있었다. 잘 조화를 이룬 얼굴이었다. 마치 이조 시대의 국화를 잘 치는 기방 처녀를 떠 올리게 했다. 그러나 눈가에는 잔주름이 선명했고 얼굴엔 범접 못한 예의 무당 기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그녀는 주전자의 보 리차를 따라 주며 밭은기침을 해댔다. "어디 누구부터 보까... 너 용띠 처녀, 공망에 팔풍일이 끼었구만. 쯧쯧 작년에 도 남자 하나 잡아먹지 않았어? 그래, 너부텀 보자! 사내들은 저 방에 가서 기다 리고 있어." 희뜩, 베티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뚜생과 나는 엉거주춤 도로 자리에 서 일어났다. 뚜생은 방바닥에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뒤꿈치를 들고 어기적거 리며 노란 한복이 가리킨 방으로 앞질러 들어갔다. 그 방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 방엔 전기장판마저 없었다. 꾀죄죄한 담요가 한 장 깔려 있을 뿐이었다. "아, 이상하게 수감된 느낌이 드네. 그치 않아요?" "글쎄요. 좀 꺼림칙하긴 하네요." 뚜생과 나는 좁은 방 한가운데 서서 그 누추한 방을 둘러보았다. "꼭 대학 다닐 때 내 자취방 같네. 여기 무슨 공부방 같지 않아요?" 뚜생이 쌩뚱한 표정을 지으며 벽에 걸린 판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뚜생의 말 대로 그 방은 정말 가난한 학생의 자취방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싸구려 철제 책상 위에 빨간 금성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와 먹다 남은 이홉짜리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으며, 해태 제과에서 제작한 캘린더가 비뚜름하게 책상 옆에 붙어 있었다. 또한 청바지 등속의 캐주얼한 옷들이 걸려 있었으며 창문 옆에 놓 인 검은 책꽂이엔 책들이 빽빽히 꽂혀 있었다. 뚜생은 병마개를 따고 소주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다시 책상 위에 살그머니 내려놓았다. "소주 맛도 자취할 때 바로 그 맛이야.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인가? 요즘 대학 생들 그런 거 많이 하잖아요? ...되레 잘됐네. 그러나저러나 한참을 걸었더니 허 리가 아프네, 좀 누워 있어야겠네." 뚜생은 부상을 당한 병사처럼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담요 위에 길게 누워버렸 다. 웬 책이 이렇게 많아? 하고 뚜생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낮은 소리로 책 제목 들을 읽어나갔다. "관상대전, 팔자대전, 개운의신비, 십간십이지인생비범, 수상대전, 격암유록, 천 부경, 계의신결? 명리요강, 명학신해, 사주추명학, 단이대전? 명학정해, 어? 베트 남 현대사! 야 이런 걸 다 읽었단 말이야?" 문 하나 사이, 부러 엿들을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옆방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이쪽 방까지 환하게 들려 왔다. 물론 신경을 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겠지만 말 이다. "자기가 태어난 시를 몰라? 점을 보러 왔다면서?" 돌연, 베티를 나무라는 노란 한복의 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취조하듯 다 그치는 것 아닌가. 정말 대학생이라면 말이다. 이어 사이를 두고 있다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 나 태어난 시가 언제야? ...아, 그냥 빨리... 그래, 점 보러 왔어... 시외 전 환데 빨리... 낮 열두시? ...밤이라고? ...알았어, 끊어... 알았어, 내일 전화할게." "노동기본권연구, 황토, 레닌주의연구, 불교문학서설, 러시아반종파투쟁, 법화 경, 화엄경, 마르크스주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기가 막히네. 기가 막 혀! 핵전쟁과 인류, 새벽노래, 금단의 땅, 새로운 사회학 강의, 카프문학연구, 해 방신학, 이 여자가 그런데... 노동법해설, 창작과비평, 사회학의 과제, 유럽의 봉건 제도, 마르크스전기, 철학사강의, 아메리카 요람, 막심 고리끼 전기, ...미치겠구만 이거. 점쟁이가 아니라 이건 도사구만 도사. 그치 않아요. 세종?" "...글쎄요, 점쟁이나 도사나 같은 거 아녜요?" "그런가? 아무튼 이 여자 이거 문화부에 상신해야 되겠네. 인간문화재로 말이 야." 뚜생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무얼 하는지 옆방에서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취조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윽고. "사주엔 운명의 네 기둥을 연주 월주 일주 시주가 있지.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그걸 분명히 기억해 둬야 해. 사주는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피나 는 노력을 하면 어지간히 피해갈 수는 있는 것이니까. 아가씨는 우선 연주에 편 관성이 있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런 경우의 여자는 결혼에는 이르지 못할 사 랑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야. 설사 기혼녀가 되더라도 남편 이외의 남자와 깊 은 관계를 가질 확률이 아주 많아. 게다가 비인에 도화살까지 껴 있어." "...그럼 어떡하면 되죠?" 베티는 지금 떨고 있다. "일지가 편인성인 남자를 만나야 해. 이런 경우를 소길궁합이라고 하지. 이런 남자는 우유부단하고 게으르긴 하지만 늘 받들어 주기만 하여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있어. 쥐띠 음력 가을생을 만나면 임자라고 생각해. 이 남자가 바로 아가씨의 살을 눌러 줄 사람이야. 그 남자가 아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서서히 남편을 망쳐 놓게 될 팔자야." "! ...실은 작년 겨울에 헤어진 남자가 있어요. 그 남자도 쥐띤데 다시 만날 수 는 없을까요?" "생년월일 대봐." 베티는 여전히 떨고 있다. 그녀는 너무 쉽게 자백하고 있다. 또 시간이 꽤 걸 린다. "그 남자와 다시 만나길 바래? 이혼, 별거, 살아서 이별, 죽어서 이별 이런 악 운 중의 하난데도 다시 만나길 바래?" 그 다음 베티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병신 같긴.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해 보겠어?" 다시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저 여자 지독하군, 지독해. 저러단 베티 다 죽이겠어. 쯧쯧." 뚜생은 팔꿈치를 괴고 누워 깡소주를 마시고 있다. 그는 웬지 태연한 얼굴이 다. "그 남자의 속옷을 구해 부적을 써서 암자에 가서 태우는 거야. 그 연기가 하 늘로 올라가 천신에게 신고를 하면 차후 둘은 싫어도 부부가 되게 마련이지. 하 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되겠어?" "그런 방법밖에 없나요?" 베티는 지금 애원하고 있다. 차라리 형을 받고 말리라. 산다는 일은 어차피 금 기의 위반이다. "잊어, 인연이 아니니까 잊으라고! 회자정리, 가는 사람 잡을 수 없는 법 아닌 가." 회자정리라면,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이자필반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가씬 일간이 임, 계의 계질을 타고 났으니 수성 관련 질병, 즉 방광 염, 신부전, 치질, 성병, 자궁암, 냉증 등 하반신의 질병을 조심해. 주로 파란 색 알약을 먹고 옷도 지금 입은 붉은 색 계통은 네 몸의 기운을 해치니 흰색이나 노란 색을 입도록 해. 그리고 여자가 술자리를 자꾸 만들지 마. 내 말 듣지 않으 면 나중에 정육점을 하며 업살을 풀고 살 팔자니 명심하라구, 알았어?" 베티는 말이 없다. 남자 속옷에다, 하반신 질병에다, 정육점이라니! 얼마 후 눈이 붉게 충혈된 베티가 고문을 당한 듯한 모습으로 들어오고 뚜생 이 불콰한 얼굴에 비죽비죽 웃음을 흘리며 취조실로 들어갔다. "나쁜 년! 그래, 그 정도밖에 못 봐? 지가 뭐라구." 이렇게 씨부렁거리며 베티는 스타킹이 흘러내린 것도 모르는지 두 다리를 쭉 뻗고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뜯어 코를 푼 다음 냉큼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두 눈이 퀭하니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내내 거친 숨소리를 뱉어 내며 몹쓸 년! 하구 자꾸 되뇌었다. "세종 형, 나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찌감치 정육점을 차리든지 해야지 뭐." "다 들었어?" "...듣긴 뭘 들어. 네 관상을 보면 그렇게 써 있는데." 그녀는 숄더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꼭꼭 찍어 낸다. 비에 젖은 머리칼 이 마르면서 부드럽게 풀어지고 있다. 속눈썹이 형광빛에 파랗게 떨고 있다. 마 치... 달밤 같다. 언제 보아도 차갑고 고혹적인 모습, 비록 나이를 먹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엔 결코 지울 수 없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다. 손을 대면 그대로 타서 없어져 버릴, 백조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은 그걸 모른다. 한때 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걸 모른다. 그녀는 혼자인 듯 창 밖을 내다보 고 있다. "결혼하고 집도 있지?" "그렇네요." "자식도 있지?" "그렇네요." "부모님은 살아 계시지?" "정정하시죠." "그럼 뭐 때문에 점은 보러 왔어?" "...글쎄요, 뭐 침을 하루에 여덟 개씩 꽂아도 허릿병이 낫질 않는데 웬일인가 싶어서." 나는 무슨 코미디 방송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베티는 듣고 있지 않다. 그녀는 아까부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무슨 심상찮은 말을 하려 할 때 그녀는 저렇듯 감당할 수 없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곤 한다. 거역할 수 없는 투명한 눈빛이다. 이럴 때면 그녀와 나 사이에 가로 놓인 이 거리가 너무 힘겹 고 생소하게 느껴진다. 나는 긴장하고 있다. 왜 백조가 이 여자의 알몸을 뜻한다 는 걸까. 비에 젖은 하양. 그녀의 자줏빛 실크 스카프가 방심한 채 풀려 있고 하 얀 목덜미가 처녀처럼 드러나 보인다. 그녀는 좀체 몸을 추스르지 않는다. 숨이 나 쉬고 있는 걸까. 오래 전에 그녀와 묵호 바다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세차게 퍼붓던 비. 빗속의 염탐. 공복과 취기. 축축한 여관방. 그러나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밤새 지워지지 않았다. 둘 다 사랑에 가난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여자는 하나의 쓰라린 조국, 이라고. 벌써 십년이 넘게 그녀를 만나 오고 있다. 불가해한 일이다. 각기 다른 사랑을 하고 마침내 그 사랑이 끝나기만 하면 어김 없이 서로를 찾아 돌아온다. 사랑에 서툰 자 되어.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연다. 메마른 입술에서 번져나오는 저 소리의 소문. 나는 잔뜩 긴장하여 몸을 곧추세운다. "정섭 씨." 그녀가 나를 정섭 씨, 라고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팔자에도 없는 나는 그 녀의 '형'으로 살아온 것이다. "교활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 내가 정섭 씨 사랑한 거 알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안다. 어디선가 국화 향기 가 난다. "정섭 씨, 나하고 재혼해." 재혼...? 아득히 시간이 거꾸로 쏟아져내린다. 그래, 그 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고 지금은 여자 없이 사는 일에 오 래 익숙해져 있다. 만 레이 같은 비범한 사진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 이스크림, 샴푸, 속옷 광고 나부랭이나 찍어대고 있다. 그만 둘 수 없는 처지다. 이혼할 때 나는 알몸이 되었고 지금은 빚까지 지고 있다. 너무 늦은 것이다. 팔 자다. 나는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에도 이미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옆방에서 하는 말소리가 들려 오지 않는다. 뚜생은 이렇듯 오래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남들은 지금 무얼 하며 살고 있는 중일까. 정섭씨, 하고 그녀는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 고개를 꺾어 버리고 만 다. 운다. 손수건만한 창문 속으로, 추억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5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캄캄한 어둠이 먹물져 내리고 있었다. 점 집을 나와 우리는 눈이 내리고 있는 거리에서 어둔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벌써 여덟시가 다 돼 있었다. 우리는 성신여대입구역보다 길음역 쪽에 가까이 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족히 십 분은 걸어야 할 거리였다. "전철역 근처에서 술이나 한잔씩 하고 가죠." 베티를 이대로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도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으 나 우리는 천천히 미아리 고개를 내려가고 있었다. 베티는 정릉과 종암동으로 갈라지는 다리까지 올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는 길음역을 좀 지나쳐 삼부아파트 건너편, 병원과 철물점과 찻집과 전자제품 대리점과 학원과 서점 같은 것들이 들어차 있는 건물들 속에서 갈 만한 술집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눈발이 금세 굵어져 있었다. "아까 그 점집 여자 뭐하는 여자죠?" 가로등 불빛 속으로 쏟아져내리는 눈발을 훔쳐보며 내가 뚜생에게 물었다. "그 여자요? 지금은 그냥 점 보는 여자예요. 하지만 좀 역사적인 과거를 가진 여잡디다. 왠지 비감해지더라구요." "나쁜 년!" 베티가 잊고 있었던 듯 예의 그 거친 말로 내뱉었다. 그 말은 어쩐지 나를 겨 냥해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뚜생은 고즈넉한 얼굴로 거리에 몰아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대학에서 불교문학을 전공했대요. 팔칠년에 시위를 주동하다 쫓겨 산에 들어 가 살았는데 그때 거기서 스님한테 사주 보는 법을 배웠다죠." "누가요?" "국화 얘기예요." "국화 좋아하시네." 베티가 다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뚜생의 말을 가로챘다. "...무슨 무술 영화 같네요. 그래서요? 그렇다고 점쟁이가 됐어요?" "나이는 서른하나.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대요. 애인도 구학련 소속 지하운동 권였답디다. 팔육년에 검거돼 재작년에 출감하고 나서 이틀 만에 교통사고로 죽 었대요. 하필이면 새벽 두 시에 국화를 만나러 오다 그렇게 됐답니다. 국화가 남 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시간에 와 달라고 했다는 거죠. 자기도 모르겠대요. 무엇 에 홀렸는지 자다 일어나 그냥 전화를 해서 와 달라고 했답니다. 나중에 궁합을 보니 그 남자를 잡아먹을 사주였대요... 미혹에 빠진 거죠." "그래서 점집을 해요?" "세상에 보시공양하는 마음으로 산답니다.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면 미욱해지 게 마련인가 봅니다. 저는 비구니가 되어야 할 사주 팔자래요. 속세에서 그렇게 보시하며 업살을 풀어 낸 다음엔 다시 운동을 하겠답니다... 왠지 속이 거북해요. 그 여자 얼굴을 보고 있으니 누군가 그 여자의 피를 다 빨아먹은 것처럼 보여 요. 아무튼 그 여잔 지금 점쟁이일 뿐이에요. 미혹에 빠진 중생일 따름예요." "사주 팔자라는 게 있긴 있는 모양이죠?" "있으나마나, 그렇다고 사는 게 뭐 달라집니까? 어쨌든 살아야 하는 거죠. 다 만 저의 경우엔 분식집이 하나의 미혹을 뜻한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는 미아시장 근처의 허름한 생맥주집에서 골뱅이 무침과 감자 튀김 한 접 시를 시켜 놓고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셔댔다. 술집은 춥고 어둡고 습기가 차 있 었으며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냄새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다. 비틀즈와 에 릭 클랩튼과 실비 바르땅과 샤데이와 핑크 프로이드와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이 없었다면 앉아 있기 힘든 술집이었다. 나는 동숭동에 있는 '베티 블루'라는 술집 을 떠올렸고, 잊고 있었던 듯 곁에 앉아 있는 베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머리칼을 제멋대로 풀어헤친 채 소리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앉은 키 가 조금씩 작아져 갔다. 그녀의 풀린 어깨가 내 어깨로 무너져 올 때마다 나는 화다닥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외틀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나는 베티가 술에 취해, 개새끼 지가 뭔데... 병신 같은 게... 영수증과 마침표만 있으면 다야...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십년을 만나 온 지금 나는 베티를 생각하며 자주 근친상간이란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근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일까. 뚜생은 파스텔톤으로 내려 앉고있는 거리를 초점 없는 눈으로 묵연히 내다보 고 있었다. 그 언젠가, 우리 청춘의 날들에 '목숨'을 버리러 왔던 색동의 거리를. 하지만 '목숨' 없이도 이념 없이도 사랑과 희망이 없이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 고 있는 것이다. 아득해라, 마지막 하나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6 보다 추운 쪽으로 돌아눕고 싶소, 베티. 이 어둡고 적막한 겨울의 한가운데, 우리 밤으로 온 길은 너무도 멀었소. 아무도 없었소, 아무도. 나는 얼마나 완강 히 희망을 꿈꿔 왔는지. 흰 쌀밥 같은 사랑과 시대를 꿈꿔 왔는지. 그리하여 나 는 차라리 절망을 획책하며 살았소. 가시관을 쓰고 살아야 하는 핏덩이 같은 우 리의 삶! 그때, 우리 기댐은 정녕 어여쁠 수 있는 것일까. 기대지 않고 살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마지막 남은 네가 내게서 멀어지기 전에, 저 박명에 떠는 새벽 숲의 안개가 걷히기 전에 나는 곱다랗게 눈을 뜨고 일어나, 온몸의 비늘을 털고 일어나 네게서 살아야지, 살아야겠다... 온몸에 가득히 술기운이 퍼져 이런 계면조의 방백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추웠다. 스피커에서는 낮게낮게 정태춘의 '북한강에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에 남은 것을 우리 둘뿐인 듯했 다. "그만 가요, 세종." 뚜생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베티는 곁에 없었다. 짐작 이 갔지만 확인하는 심정으로 나는 뚜생에게 물었다. "몰라요. 아까 화장실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갔나 봐요. 많이 취했더라구요." 우리는 술값을 지불하고 하얗게 변해 버린 거리로 나왔다. 눈이 퍼붓는 거리 는 소리마저 조용히 죽어 있었다. 먼 곳 이불 속에 누워 여자와 아이를 낳고 싶 은 밤이었다. 뚜생과 나는 곱사등을 하고 길음역까지 걸어가 전동차를 탔다.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고 우리 또한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2호선으로 갈라지는 동대 문운동장역에 와서 뚜생과 나는 헤어졌다. 그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 나는 뜬금 없이 그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뚜생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 니 빙긋 웃으며, 그래요 잘가요 하고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갔다. 7 나는 삐걱거리는 쇠침대 위에 누워 전화를 건다. 아득히 이어지는 발신음. 받지 않는다. 다시 건다. 받지 않는다. 창 밖에 가득히 내리는 눈. 자정. 베티, 그녀는 지금 춥겠다. 다시, 걸려다, 만다. 스텐드의 불을 끈다. 미혹. 여우 사냥 윤후명- 1946년 강원 강릉 출생.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녹원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수상. 소설집 '돈황의 사랑', '부활하는 새', '원숭이는 없다'. 장편소설 '약속 없는 세대', '별까지 우리가', '협궤열차'. 시집 '명궁', '홀로 등불을 상처 위 에 켜다'. 해설-정현기 세계가 넓고 아름답다 해도 그 앞에 선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 '나'는 내가 짊어진 여러 가지 마음의 덫이 있고 숙제가 있다. 그렇게 '나'는 고통과 슬픔을 지닌 또하나의 세계이다. 나라고 하는 세계가 어둠일 때 밖 세계가 밝음일 수 있고 밖 세계가 어둠과 막힘일 때 '나'는 같은 어둠일 수도 밝음일 수도 있다. 윤후명의 중편소설 '여우 사냥'은 '돈황의 사랑' 이후 그가 끊임없이 탐색해 온 세계와 나의 밝은 화해 혹은 유예된 시간 안에서의 정결한 사랑 이루기 모티프 를 절묘한 기법으로 꾸며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은 세계에서 같은 길을 헤쳐 나 가고 있는' 존재인 주인공 나의 자아를 포함한 친구 그와의 동배 인식은 우리 시대가 달음박질치고 있는 숙명적 발걸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나와 그는 모두 여자 문제에 실패한 친구. '갱생회 회원'으로 한 짝이며, 꿈처럼 달콤 한 논리와 주장으로 분식되었던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타락한 자본주의 변 방국가 한국의 인민들을 받아들이는 러시아로 변해 어쩌면 타락한 한국과 실패 한 소련이 또 한 짝으로 두 나라가 갱생의 두 짝 발걸음을 뗀 형국이 아닌가. '어떻게든 삶을 되찾아야' 하는 여우사냥꾼 일행은 광활한 숲, 눈 덮인 대지를 달리며 여우를 좇고 있다. 여우란 무엇인가? 러시아 인들에겐 공산사회의 붕괴 후 생존을 위한 수렵행위의 한 목표이고 거기 껴붙어 달리는 두 한국인 사내에 겐 되찾아 회복해야 할 삶의 어떤 목표이다. 그것은 둘 다 실패한 여자와의 사 랑일 수도 있고, 자아와 맞서고 있는 또 한 자아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단절을 제거할 새로운 전망일 수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우리에겐 시커먼 어둠의 세계로 맞서 있던 적성국가 소련이 러시아로 변하여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여 우터를 내달리듯(?) 분단의 설움을 달래려고 러시아로 내달린 두 사내의 러시아 인들과의 만남은 우리 민족의 미래 운명에 관한 상징적인 뜻이 담겨 있어 보인 다. 서술 속에서 풍기는 상당한 활력과 생동감이 이 작품을 아주 아름답게 가꾸 고 있다. 눈 덮인 숲길을 힘껏 내달리게 하는 마음의 숨통, 그걸 이 '여우 사냥' 은 열리게 하고 있다. 여우 사냥 조계사 앞 길모퉁이를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러시아 문자에 나는 발걸음을 멈 추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러시아문자에 상당한 조예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미리 밝혀 두기로 한다. 즉 지난 겨울에 두 달 가량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겨우겨우 알파벳 정도만 더듬거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다. 러시아 문자라고는 해도, 정확하게는 키릴 문자에서 온 것으로, 가령 중앙 아시아 쪽에서는 오래 전부터 쓰여지던 아랍 문자를 소련 시대에 러시아 문자로 바꾸면서 그곳의 독특한 토착어를 효율적으로 표기하기 위해 본디 없는 알파벳 까지 만든 경우도 있는 까닭에, 나로서는 여간 헷갈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가 게 진열창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러시아 문자를 보는 순간 마치 신기한 무엇이 라도 발견한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그것은 내가 서울 의 길거리에서 처음 본 러시아 문자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자 가 무슨 특별한 내용이라도 담고 있는 것이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 것은 한 화가의 이름을 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 폭의 그림을 구상과 추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리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그 나이 지긋한 화가의 이름을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이름 표기에서 러시아를 떠올렸다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하지 그 밖의 것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얼마 전에 그 화가가 러시아 모스 크바의 푸슈킨 기념 미술관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불과 2년 전에 저 북방 나라 의 정체가 변하고 그 사이에 세월은 변해서, 우리와는 도무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조차 없으리라 했던 저들과의 교류가 여기까지 이르렀나 하는 감회가 새삼 스러웠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내 생각은 러시아의 공간 속으로 달려가서, 푸슈 킨 기념 미술관을 먼저 떠올리고 곧 뒤이어 빨간 갈리나 열매가 익어 가는 숲속 을 지나고 있는 나를 그려 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화가의 개인전 포 스터이고 또 러시아 민속 공예품의 그림에 너무도 흔히 그려지는 것이 갈리나 나무와 그 빨간 열매에서 일어난 연상 작용만은 아니다. 나는 지난 겨울에 모스 크바에서 푸슈킨 기념 미술관을 보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친구를 만나 우 리는 함께 얼어붙은 북쪽 호숫가로 갔었던 것이다. 그 호숫가의 숲속에도 갈리 나의 빨간 열매는 나뭇잎이 떨어진 벗은 나뭇가지에 송알송알 매달려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나무였으나 친구는 사전에 까마귀밥나무라고 되 어 있더라고 가르쳐 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아이비가 우리말로는 담쟁이덩굴로 된다 하더라도 서양의 아이비가 우리의 담쟁이덩굴은 결코 아니듯 이 러시아의 갈리나도 우리의 까마귀밥나무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러시아에서 욜카라고 하는 전나무는 우리의 전나무와 같고 사스나라고 하는 소 나무는 우리의 소나무와 같고, 베료자라고 하는 자작나무는 우리의 자작나무와 같았다. 그렇지만 까마귀밥나무에는 까마귀가 들어 있는데, 그곳 까마귀가 우리 의 까마귀보다 훨씬 크고 어딘가 더 의뭉스러워서 갈리나를 우리의 까마귀밥나 무로 부를 수가 없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야 아무려면 무슨 상관인가.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와 내가 상트 페테르부르 크에서 만났으며, 예기치도 않게 그곳에서 몇백 리나 먼 북쪽의 호숫가까지 갔 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돌이 켜보니 그와의 그 겨울 만남이 마치 우리들 삶의 갈리나 열매처럼 어떠한 혹한 에도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넌 여전히 원예반 학생이구나. 식물에 대해 그렇게... 러시아 숲은 확실히 굉 장해... 화가들이 그린 자작나무숲도 좋은데..." 좋은데 어떻다는 것일까. 나는 지굴리 승용차의 핸들을 잡고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를 곁눈질했었다. 그리고 나를 고등학교 시절 원예반원이었다고 해서 지 금도 여전히 원예반원이라고 한다면 그는 무엇일까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 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여전히 혁명을 신봉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가 그렇게는 묻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또 학과는 다르더라도 대학에 들어간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꽤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세월을 알아 왔었다. 하지만 그와 나는 대학 시절부터 벌써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점에서 고등학교의 동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 에도 어울리지 못했을 사람들이었다. 때론 함께 술 마시고 밤을 지샌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회의 개혁을 내게 역설했고, 그의 뜻에 전폭 적으로 따르지 않는 나를 안타까워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른바 투쟁의 현장 에 직접 몸 던져 싸우지 못하는 나약한 자기 자신의 태도를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는 이상주의자라고 명명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바로 그 다음날로 북쪽 호숫가를 향하여 가게 된 것이 다행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이야기만으로 시간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형식적이고 변죽만 울리는 이야기만으로는 서 로가 괴로울 뿐이었을 것이다. 프리발치스카야 호텔에서 그에게 전화하고, 로비 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것이 걱정이 있었다. 차라리 만나지도 말고 내 일정 대로 떠나가고 말았을 것을, 하는 후회조차 일었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그렇지, 우선 푸슈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다. 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집착을 보였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이 제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계제도 아닐 듯했다. 그가 이태 전에 서울을 떠날 때도 그것은 개방이 시작되었을 뿐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은 나라였 다. 그 나라에 갈 길이 빠꼼히 열렸다는 것을 알자 그는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며 마침내 러시아어 연수를 명분으로 서울을 떠났던 것이 다. 그가 배우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어학이 아니었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했으 나, 언제부터인가 별거에 들어간 부부 생활이 그를 떠나가게 한 것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던 나이 사십을 훨씬 넘어서도 그가 새로운 세계를 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상주의자가 틀림없었다. 호텔 뒤로 보이는 저 바다는 발틱 해일까. 핀란드 만일까, 하고 나는 눈이 오 락가락하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푸슈킨이라는 한 시인을 생각하 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왜 그 시인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는 지 모르겠지만, 여행자 일행이 버스를 타고 핀란드로 떠나기 위해 사라져 가고 부터 나는 그런 대안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상트 페테르 부르크의 겨울 날씨는 거의 매일 하루 종일 잔뜩 찌푸려 있고 눈이 오락가락한 다. 그 눈 속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엉뚱하게도 모스크바에서의 푸슈킨 기 념 미술관으로부터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그 위치가 정확하 게 모스크바의 어디쯤인지를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노천 수영장이 있는 부근이었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미 술관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장 앞을 지나가는 인투리스트 버스 안에서 안내자는 밤에 그 수영장에 오면 좋은 구경을 많이 할 거라며 싱겁을 떨었었다. 그러나 좋은 구경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었다. 그야 수영장에서 좋은 구경거리라면 사람의 벗은 몸이 아니겠는가만. 그러자 곧 푸슈킨 미술관 앞이었 다. 푸슈킨이라는 시인의 이름이 러시아에서는 얼마나 큰 이름인지는 그 나라에 가 본 사람만이 안다. 나 역시 러시아 땅을 밟기 이전에는 푸슈킨을 '삶이 그대 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와 '대위의 딸'이라는 소설로서만 그럭저럭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시내버스에 차장 아가씨들이 있어서 요금을 받던 시 절에, 버스 안 문짝 위에는 어김없이 그 시가 손바닥 반만한 거울과 함께 나란 히 붙어 있었다. 그 무렵, 늘 만원버스에 올라탈 때마다 그 시가 적힌 종이쪽지 가 바로 코앞에 들이밀듯이 있는 것이어서,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그 시를 욀 수가 있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워지느니. 그 시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가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어도, 웬일인지 지금은 잘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세월은 그만 큼 좋아졌고, 따라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었음을 방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어린 나이에도 이 시가 시로서 별 묘미가 없 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무엇일까, 시란 감미롭고 애절한 '노래'여야 하지 않을까 여기고 있었던 듯싶다. 다시 부연하면 그것은 내가 시란 언어 미학이 무엇보다 도 돋보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럼 이 시가 언어 미학의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 즉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어눌하 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러시아 에서 가서 듣고 본 결과,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가장 위대한 시성 의 위치에까지 올라 있는 사람이었고, 그 시는 번역해서는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운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 말했던 대로 역시 번역은 반역인가 하고 참담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좋다. 나는 지금 푸슈킨의 시를 더이상 이야기할 실력이 없는 것과 아 울러 다행히 그럴 마음도 없다. 다만 한국의 한 화가가 푸슈킨 기념 미술관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내가 그전에 그곳에 가서 보았던 여러 그림들이 선명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곳 에는 어느 미술관이나 마찬가지로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지 않 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 쪽의 것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로서, 2, 3층 전시실에는 대충 꼽아도 들라크루아나 밀레, 모네를 비롯하여 푸생, 쿠르베, 코로, 피사로, 르 느와르, 드가, 고흐, 고갱, 세잔, 루소, 시냑, 드니, 뭉크, 위트릴로, 동겐, 루오 등 등에 피카소도 있었다. 거기서 나는 비로소 루소의 '시인과 뮤즈'를 보았고, 고흐 의 '오베르 풍경'을 보았고,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보았다. 러시아에서는 식당이나 극장이나 미술관이나 한겨울이든 언제든 입구 가까운 방에서 외투를 벗어 맡기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것이 귀찮아서 나는 그만 하마터면 그 미술관의 관람을 놓일 뻔하기도 했었 다. 그 숱한 명소들도 어차피 다 둘러보지 못하는 판국에 미술관마다 일일이 들 를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었다. 아니, 실상 솔직히 말해 미술관이란 예전부터 내게는 들르게 되면 마지못해 들르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러시아에서 는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만을 수 박 겉핥기로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것도 속일 수 없는 일이다. 푸슈킨이 시인인데 그 이름이 붙은 미술관이 뭐 그리 대단하랴 하는 선입관도 충분히 작 용했었다. 그런 곳을 구경하려고 옷과 가방과 모자를 모두 맡기고 들어가야 한 다는 것이 싫었었다. 나는 그때 싸구려 모자까지 사 쓰고 있었다. 북극의 겨울에 는 모자가 필수였다. 그런데 몇 가지 일정이 어긋나면서 그 미술관이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소련 이 무너지고 나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그 사회는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역력했다. 그래서인지 몇군데 방문을 하려 하면 한두 군데는 까 닭 모르게 문이 닫혀 있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부득이 행선지를 그때 그때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오후, 나는 그 미술관 앞에 내려놓아졌고, 느닷없이 많은 프랑스 화가들 앞으로 안내되기에 이르렀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미술관에는 유명한 옛 조각품 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실은 이것들은 미술 교육을 위해 새로 만들어 놓은 복제 품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림들은 모두 '진짜'라고 그는 덧붙였다. 북한에서 꽤 오랫동안 무슨 공부인가를 했다는 그 러시아 인 안내자가 '진짜'라 고 우리말을 하는 것에 어떤 함정이 있었는지 모른다. 정확하게 말해서 다른 것 이 '가짜'라는 데 더욱 함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비너스며 다비드며 1, 2 층의 '가짜'들을 건성으로 지나쳐 곧장 3층으로 뛰어올라가다시피 하여 그 '진짜' 들 앞에 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생에 처음으로 위대한 '진짜'들을 보고 있다는 감동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으니, 이는 나 자신도 믿지 못할 강렬한 충격 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명작이라는 그림 앞에서도 내가 그토록 감동에 사로잡히기는 처음이었다. 그 많은 그림들이 하나같이 살아 움직이는 주체로서 내게로 다가와 나름대로의 진실을 속속들이 전달해 주고 있 지 않은가. 화폭에 그려진 집들과 나무들과 사람들과 짐승들이 너무도 생생한 현실인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상징으로 그린 대상이라 할지 라도 그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고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를테면, 루소의 '재규어의 공격을 받는 말'에서처럼 괴기스러운 잎사귀 나 나무줄기들이 뻗어 있는 숲조차 가장 현실적인 숲으로 다가왔다는 뜻이 된 다. 그런 점에서 그림을 직접 제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간단히 설명 하면, 그림의 중앙에는 옆으로 앞발을 든 말이 갈기를 날리며 머리를 앞으로 향 해 있고 그 목덜미 아래로 재규어가 거꾸로 달려들어 붙어 있다. 재규어의 오른 쪽 앞발은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 말의 검은 눈과 코가 당황하고 도 슬픈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역시 화가의 특징을 잘 나 타내는 것은 초록색의 길고 삐죽한 잎사귀들의 괴기함이다. 고생대나 중생대의 무슨 식물들같은 이 잎사귀들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이 보이며 그 숲 사이 에 원색적으로 빨갛고 노랗고 흰 꽃들이 강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굳이 이 렇게 돼먹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기괴한, 비현실적 숲조차 마치 이 세 상 현실의 숲처럼 내게 다가왔다고 풀이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여기서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이라는 것을 붙잡고 이따위 설명을 늘어놓는 것일까. 여기에는 위에 든 화가들의 개개의 작품을 떠 나서 한마디로 미술에의 눈뜸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무엇보다도 크게 도사리 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누가 그것을 유도하지도 않았고 나 또한 의도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갑작스럽고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 에 감히 돈오라는 낱말 갖다 붙여도 좋다고 이제 말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 앞에 서면 왠지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곤 했었다. 그래서 머쓱해져서는, 그림이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이 우선이다 라는 말을 배경으로 '흠, 제법 그럴듯하군'하는 표정을 짓곤 했던 것이다. 무엇이 든 모르면서 짐짓 안다는 몸짓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비참하고 구역질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자기 자신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 해서, 미술에의 눈뜸이라거나 돈오라거나 하고 설 명을 늘어놓는다 해서, 내가 그 세계를 속속들이 알았다고 하는 것은 아님은 물 론이다. 그것은 그런 내가 스스로 대견하고 가상하여 스스로 끌어다붙인 표현이 라는 편이 오히려 솔직하다. 그러므로 그림의 세계가 확고하게 있음을 인정하는 선에서 여전히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나를 이끌고 그 미술관을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푸슈킨 기념 미술관이었다. 이야기를 다시 푸슈킨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미술관 안에 어떠한 그림이 있든, 그것이 실제고 '가짜'든 '진짜'든, 또 내가 어떠한 충격을 받았든, 애 초부터 그것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경험 때문에 푸슈킨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서 나는 그 뒤 며칠 동안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푸슈킨의 박물관이 나 기념관을 돌아보는 데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좀더 정확하게 밝히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단체 여행자 일행이 서울로 되돌아갈 때 거기서 떨어져 나와 드디어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여행사 사람에게 푸슈킨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는 대로 다 보자고 귀찮도록 졸라댔던 것이다. 여행사에서 임의로 모아 온 여 행자들이 눈총이 때로 곱지는 못했으나, 그들은 푸슈킨이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와 레닌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는 내 설명에 마지못해 못 들은 척하고 따라 주었었다. 하기는 그들은 러시아를 한번 둘러본다는 게 중요 할 뿐 무엇을 꼭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 그들도 푸슈킨이 귀족으로서 시인이며, 또 이름난 바람둥이였다는 둥, 여기저기서 종합 해 얻어듣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푸슈킨 기념 미술관은 나로 하여금 푸슈킨의 세계로 인도한 첫 관문이 었던 셈이다. 그 푸슈킨 기념 미술관이 서울의 조계사 앞 길모퉁이를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러시아 문자를 보고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고 나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분명히 '먼저'라고 밝힌 것이다. 그러니까 그 밝힘에는 '먼저'와 대응되는 '나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여기서 '먼저'와 '나중'은 거의 시차가 없었다고 해도 좋다. 푸슈킨 기념 미술관과 북쪽의 호숫가는 그렇게 동시에 내 게 다시금 환기되었던 것이다. 그가 이태 전에 러시아로 훌쩍 떠나 버린 것도 몇몇 친구들 사이에서는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 내가 러시아로 그 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왕래가 무척 빈번해진 최근에 와서는 이런 느낌은 그야말로 촌티가 난다고도 말해질 수 있 다. 그러나 갓 수교를 한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직은 그곳은 미지의 나라였다. 우 리에게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가 말이다. 지금껏 우리는 남북으로 나라가 갈려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으며, 예전에 북쪽의 후견자 노릇을 하던 그 붉은 소련을 위해 외치던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 말 '우라'가 나이든 사람들의 귀에는 아직도 쟁쟁하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말이다. "우라, 레닌! 우라, 스탈린!" 불과 네댓 살의 나이에 6 25전쟁을 겪어야 했던 내게도 붉은 군대의 만행은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 집이나 들이닥쳐서는 밥을 요강에 퍼담다 먹 는가 하면 물건을 빼앗고 여자들을 겁탈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빵을 글쎄 흘 레바리라고 한단다. 어머니는 몇번이나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짐승들이 교미 를 일컫는 낱말인 흘레와 연관짓는 말이었다. 먹는 빵을 흘레브라고 하는 판이 니 그들이 흘레붙기를 얼마나 밝히겠느냐는 암시가 그 말에는 깃들어 있었다. 러시아에 가서 상점에 줄을 서서 빵을 사려고 했을 때 예전에 어머니로부터 들 은 흘레바리라는 말이 자꾸만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나는 애써 참아야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그는 빵을 흘레브라고 하니까 흘레바리라고 해도 아주 먼 발음 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기네들도 골치 아프다고 머리를 흔드는 그 문법의 어 렵기 짝이 없는 격변화를 염두에 둔다면 흘레브든 흘레바리든 문제가 차라리 안 되었다. 요컨대 문제는 빵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공산주의는 이데올로 기가 무엇이냐는 데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러시아가 우리에게 무엇이었느냐 하는 물음만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내가 지금 거론할 문제는 아님을 나는 안다. 나는 대한민국의 군정이 드디어 종식되려고 할 무렵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다가오고 있던 어느 초겨울날, 서울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고, 공부를 하겠다고 미리 그곳에 와 서 머물러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을 뿐인 것이었다.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 부르크에서 내가 푸슈킨의 자취를 찾아다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 런 중에 나는 부지런히 이름난 묘지들도 둘러보아야 했으며 또 서민 생활의 이 모저모도 살펴야 했다. 그 여행은 일종의 수학 여행과도 같았다. 꼭 10년 전에 외국에 난생 처음 나갔다 돌아오던 때는 비행기가 소련의 영공 을 통과하지 못하는 관계로 알래스카를 거쳐 이른바 로미오 20항로를 날아왔었 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에도 길이 있고, 그 항로에 로미오 20이라는 고유 명칭이 붙여져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그 항로로 돌아온 지 불과 일주일 뒤 에 역시 그 항로로 오던 비행기가 끔찍한 사고를 당한 일이 있고서였다. 사고 비행기는 어찌된 셈인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민간 비 행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만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모네론이라는 섬 부근 바다에 격추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썩했으나 내내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 비행기는 내가 타고 온 비행기와 불과 일주일 상관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항 로를 날아오던 같은 항공사의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 비행기일지도 몰랐다. 나는 공연히 운명이라는 낱말을 머릿속에 굴려 보며 어줍잖게 심각한 척하곤 했 었다. 어림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던 데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과연 세월은 바뀌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비행 기는 비록 중국이나 북한을 지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시베리아 동토 지대를 지나고 우랄 산맥을 넘어서 북유럽 평원을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림 들을 보았고, 푸슈킨을 다시 알았다. 그런데 프리발치스카야 호텔의 로비에 모습 을 나타낸 그는 나와 악수를 나누고 나서 느닷없이 내게 내일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여우 사냥을 가기로 돼서 말야."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우, 여우라니?" 나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서 마주보며 웃었다. 아마 나도 그처럼 이빨을 드 러냈을 것이다. 물로 그 조금 전에 전화를 통해 서로 간단한 안부를 묻기는 했 어도 만나자마자의 그의 입에서 나온 '여우'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우'는 순식간에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여우를 잡으러 가자고... 주차장지기가 날짜를 정했어. 벌써 며칠 전부터 나왔 던 얘긴데... 그게 내일이 됐어. 아무튼 나 있는 데로 가자." 그가 호텔 앞 경사진 시멘트 앞장서 걸어 내려와서 작은 승용차 앞에 이르기 까지 나는 주차장지기가 누구를 말하는지,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러시아에서 승용차를 굴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 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차에 올라타고 나서 그가 처음 설명한 것이 그 문제였다. 러시아에서는 승용차를 한 번 사면 20년이고 30년이고 굴리는데 인플레가 어찌 나 심한지 차는 고물이 돼도 값은 더 오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차를 가지고 편리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손해를 안 보니 일석이조가 아니냐는 지론이었다. 그 말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 도 그가 이런 말을 예사로 하고 있는 것에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인플레를 이용해서 편리를 도모하고 손해를 안 보겠다는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과연 그란 말인가? 돈도 못 버는 나약한 봉급쟁이로서의 한 자 본주의자인 내게 혁명을 이야기하여, 자본이 자본을 낳은 자본주의의 못된 속성 을 매도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지난 60년대의 어느 날, 이규호 선생이 비 밀스럽게 나누어 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독일어 원본을 그에게 갖다 준 것도 나였는데, 그때 철학과도 4년 반이나 되어서야 겨우 이걸 읽으라고 나누어 주더냐고 비웃던 그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의 부부 관계가 아마도 경제 문제 로 비롯하여 삐걱거리기 시작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중간에 섰던 나에게 '쁘띠 브르주아'끼리 잘들 해 보라고 막말을 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 말이다. 그는 가 져온 몇푼 돈이 떨어지면 나중에 그 차를 팔아서 얼마 더 견딜 수 있겠다고까지 덧붙였다. "차를 주차장에 안 갖다 놓으면 밤중에 바퀴도 빼 가. 유리를 깨고 차 안을 뒤 지기도 하거든. 그래서 주차비가 들어도 갖다 놓지." 그 주차장을 지키는 경비원 중에 볼로자라는 퇴역 군인이 있어서 그로부터 여 우 사냥을 제의받았다고 그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거기까지의 이야기 중에서 내 가 못 알아들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차를 사서 몰고 다니는데 그 차를 놔 두는 주차장의 볼로자라는 사내가 내일 여우 사냥을 가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여우 사냥은... 많이 가는 건가?"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여우 사냥 그 자체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다가 그와 내가 그곳에서 만나서 진정 나누어야 할 첫 대화가 그것이어야 하는지 못 내 얼떨떨하기만 한 것이었다. "많이들 간다고 해. 난 이번이 처음이지만." "어디로 가는데?" "그렇게 멀진 않다는데... 어때? 같이 가는 거지? 며칠 여유는 있다고 했지?" "여유야 있지." 서울을 떠나올 때부터 그런 시간적인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며칠을 보낸다는 일정은 다른 여행자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몇시간 전부터 내게는 적용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는 돈이 허락하는 한 내가 정하기에 달려 있었다. 러시 아 당국에서 내게 발급한 비자는 우선 2개월 동안의 체재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 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우 사냥을 위한 여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었다. 하지만 이 마당에 그를 따라나서지 못할 까닭 또한 없는 것이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페테르부르크는 북위 60도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이 다. 이것은 겨울에는 태양이 뜨는 시간이 몹시 짧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대 신 여름에는 거의 하루 종일 해가 뜨는 백야가 계속된다. 프리발치스카야 호텔 에서 만난 우리는 먼저 주유소에 들렀고, 몇군데 가게에 들러 보드카와 말보로 담배와 쇠고기와 야채를 샀다. 그는 나를 위해 자취방에서 안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 벌써 네바 강 위로 짧은 겨울 햇빛은 스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유빙 조각들이 떠서 하류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왜 도착 하자마자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그 동안 볼 만한 곳은 다 보았느냐고 물 었다. 나는 몇개의 궁전과 몇개의 박물관을 헤아렸다. 그중에는 물론 푸슈킨 기 념 미술관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꼭 말해야 할 곳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차에 서 내려 말리 프로스펙트 한 모퉁이에 있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나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식 찌개를 끓이겠다고 가스렌지에 성냥불을 긋는 것을 보며 나는 먼저 보드카 병마개를 열었다. 그 보드카는 라스푸틴이라 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괴승의 이름을 상표로 프랑스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 면서도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은 그 한 곳의 장소를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께 저녁, 여행자 몇명은 즉흥적으로 핀란드 국경 쪽으로 택시를 몰아 갔 었다. 근교의 숲과 호수를 보자는 것이었는데 안내자가 느닷없이 레닌의 은신처 를 가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곳은 눈이 뒤덮인 숲과 호수가 있 는 곳이라고 했다. 마침 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이 처음으로 아무런 기념 행사 없이 지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우리는 레닌에 대해 뭔가 호기심과 부담감을 여전히 씻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니, 우리라고 하는 표현 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아니라면 나 혼자라고 하면 틀림이 없 을 것이다. 레닌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혁명을 지휘하 고 있었다면 그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오랫동안 외국을 전전하며 황제에 대항했 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혁명에 승세를 잡아 필란드역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여 기까지의 과정도 복잡하기 그지없으며, 그 뒤의 과정도 그전에 못지않게 복잡하 게 전개되었다. 아마도 혁명 세력 사이의 알력으로 숨막히는 투쟁이 벌어졌을 무렵 그곳에 은신처를 마련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었다. 그 근교의 땅은 표트르 대제가 핀란드로부터 빼앗은 땅으로, 어딘지 모르게 핀란드의 색채가 짙다고 했다. 이를테면 네바 강의 네바부터가 핀란드 어로 새 롭다는 말이었다. 눈은 줄기차게 쏟아지며 차창 밖을 흐려 놓았고 오른쪽으로 서행해 가는 열차가 숲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높은 전나무들의 우듬지에서 하늘 은 경계 없이 뿌옇게 사라지고 있었다. 열차 건널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자 칙칙한 숲속길이 뻗어 나갔다. 그 숲속에 버섯이 잘 자라서 다른 계절에는 그걸 따러들 나온다고 안내자는 말했으나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에는 이상하 고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들끓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날은 어느덧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 왼쪽 길로 접어들자 앞에 단층 건물이 모 습을 드러냈다. 괴괴한 어둠에 휩싸여 있는 집은 한눈에 보아도 폐가처럼 버려 져 있었다. 앞의 작은 광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방문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지키는 사람조차 없이 버려져 있는 어둠의 집이었다. 나는 왠지 어리둥절하고 씁쓸한 느낌에 사로잡혀 이곳저곳 기웃거리 다가 앞쪽 계단에서 독사진 한 장을 부탁해 찍고는 뒤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흔적조차도 엿볼 수 없는 혁명 유적지는 서글프기조차 한 곳이었다. 도 대체 무엇이 역사의 실체란 말인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밖에 역사의 실체는 허 상이란 말인가. 과연 그렇게밖에 아닐 것인가 하고 내 관념 앞에 나는 허둥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레닌의 후계자들은 무엇때문에 극동의 작은 나라에까지 엄청난 비극을 강요했단 말인가. 그곳에서 더 나아가 숲속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서 나는 시종일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은 까닭은 사실 단순한 데 있 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았던 세계가 그토록 참담하게 부서져 있는 것을 내가 새 삼스럽게 환기시킬 필요는 없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우정이 라고 굳이 말할 수 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나는 그를 만나 것이 잘한 일인 지 어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독한 보드카만 연신 들이켰다. 그 와 나눌 대화는 얼마든지 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난 순간부터 내 마 음이 열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중에 푸슈킨에 대한 평가를 그를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던 것이 그날 저녁의 수확이라면 수 확이었다. 다른 이야기에는 그 역시 어딘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나 푸슈킨에 대해서만은 얼마쯤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 '청동의 기사'라는 시를 몇 줄 해석해 주는 친절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내일 아침에는 일찍 서둘러야 된 다고 말하고는 "며칠 여유는 있다고 했지?" 하고 다시 물었다. 그를 만나면 첫날 밤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 같이 여겨졌었다. 그러나 어 찌된 셈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튿날 여우 사냥을 가기로 했다는 것이 그렇 게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핑계는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 지나 핑계일 뿐인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다음날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도 밤새 워 무슨 이야기인가로 날을 밝히지 않았던가 말이다. 언젠가는 그 무렵 서로가 쫓아다니던 여자애들의 이야기로도 그 밤은 새워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세계 의 몰락을 놓고서도 여우 사냥 때문에 일찌감치 잠을 청하게 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나중에 여자 문제에 실패자라는 공통분모를 갖게 된 것 이 그 여자애들 때문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 여자애들의 문제는 한동안 우리의 운명에 어떤 예언처럼 작용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간단한 실연이 우리의 우정을 묶어 주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 친구였던 것처럼 그 여자애 들도 서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그때 서로를 갱생회 회원이라고 불렀 다. 그리하여 이튿날 우리는 북쪽의 호숫가로 떠난 것이었다. 일행은 우리 둘과 주차장지기 볼로자와 그 친구 유라였다. 북쪽의 호숫가라고 단숨에 말하고는 있 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볼로자는 여 우 사냥의 목적지가 근교 어디라고만 말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도 얕잡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를 빠져 나오기 전에 볼로자가 휘발유통을 하나 더 준비해야 된다고 했을 때부터 '근교'라는 말의 뜻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었 다.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 하나의 속담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것은 '러시아에서는 알콜 40도짜리 술은 술이 아니며 400킬로미터 거리는 거리가 아 니다'라는 속담인 것이다. "모스크바까지도 가 보긴 했는데 기름을 저렇게 또 싣자는 걸 보니 여간 거리 가 아니겠는걸." 친구도 그제서야 안색이 달라졌다. 러시아에는 도시 바깥에는 주유소가 없어 서 멀리 여행하자면 휘발유를 그렇게 싣고 간다는 것이었다. "위험하진 않을까?" 나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이렇게 물은 것은 눈길을 달려가는 그 자체보다도 실은 여러 가지 포괄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러시아에 발을 딛고 나서 곳곳 에서 듣는 것이 그곳 상황의 불안에 대해서였다. 여행자들, 특히 한국 여행자들 이 처하는 위험은 강조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갖가지 불상사들이 보도되었다. 한국 여행자들은 달러를 많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리고 여행자로서 지켜야 할 점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곳은 남의 나라였다. 문화와 관습이 다른 것이었다. 특히 집시 들은 어디서나 어려운 상대로 이름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여행자 일행이 집 시들한테 둘러싸여서 봉변을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여우 사냥 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 비록 집시들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이국인이었다. 볼로자 와 유라는 모두 퇴역 장교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예전에 한반도에 와서 '흘레 바리'를 퍼뜨린 그 군대를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들은 엽총을 한 자 루씩 절거덕거리며 들고 있지 않은가. "믿어 보는 거지, 뭐." 하기야 우리는 이미 떠나온 것이었다. 나 또한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려운 상 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은 운명이다.'하고 의외로 쉽게 체념하는 동시에 그만큼 의 오기로 무장하는 버릇을 키워 왔음을 상기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떠나온 것이었다. 이런 비장한 심정은 이제 우스꽝스럽게 들릴 테지만 그때로서는 너무 도 절박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 러시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자리잡고 있 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려운 경제 사정도 충분한 정황 설명을 뒷받침 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 나라에서도 나는 서울 뒷골목에서 깡패들에게 위협받고 주머니를 털린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볼로자는 길안내로 운전석 옆에 앉히고 나와 유라를 뒷좌석에 앉힌 채 자동차 는 북쪽으로 달려갔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2차대전 때 이른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으로 알려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을 지나고 있다고 볼로자가 말 하는 것을 친구가 내내 옮겨 주었다. 눈이 또 뿌리기 시작해서 시야가 흐려 있 었다. 높은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그 뒤의 풍경을 하늘까지 가로막고 있었 다. 눈발 속에서는 그 나무들도 아득한 방책 같기만 했다. 그곳에서 독일군을 맞 아 싸우던 양쪽 병사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고 했다. 그런 말끝에 나는 담배 를 꺼내 볼로자와 유라에게 권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담배를 너무 부족하게 가 지고 왔음을 깨달았다. 담배가 골초인 나는 거기에는 꽤나 신경을 쓰는 편이건 만, 그때까지 벌써 다른 두 사람에게 몇대씩을 권했는지 몰랐다. 그들도 나 못지 않은 골초였고, 내가 권할 때마다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동차가 유럽 최대의 호수인 라드가 호수 옆을 지날 때쯤은 눈발이 더욱 거 세어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친구는 그날 기온이 영하 23도를 기록했다고 말 했었다. 길은 얼어서 미끄럽기 짝이 없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 길을 작은 승용차로 달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는 겪어 본 사람만 이 알 것이다. 그 실상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즉 눈길은 자동차 바퀴로 자 국이 나게 되어 있는데 가는 차와 오는 차가 그 좁은 길에 바퀴자국을 세 줄로 밖에 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는 차와 오는 차가 마주쳐 비켜갈 때 는 가운데는 한 줄밖에 없는 바퀴자국을 간신히 스치다시피 달려가야 한다는 것 이다. 그런데도 그 눈길에서 차들은 마주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간다. 다 른 차가 앞에서 달려올 때마다 친구는 진땀이 바짝바짝 난다고 했다. 게다가 러 시아에서는 웬일로 체인을 감은 차를 거의 보기 힘들다. 우리의 작은 승용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태에서 라드가 호수를 지나고 머지않아 볼로프 강을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들었다. 더욱 오지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티흐빈까지 가면 무슨 휴게소라도 나올까?"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시계는 벌써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애 초부터 그토록 무모한 여행길은 없었음이 점점 여실하게 드러났다. "휴게실? 러시아에서는 아무리 달려도 그런 건 없는데." 친구도 여간 난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러시아의 광활한 벌판길을 가면서 우 리 식의 휴게소 같은 게 어딘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어림없는 오산이었 다. 그곳에는 작은 상자집 가게인 키오스크 하나 없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전국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토종닭집 같은 곳을 떠올리고 있었던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고소를 짓씹어야 했다. 목적지가 근교라는데 그만 모든 일은 뒤 틀려 버린 것이었다.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끼니도 안 찾아 먹나?" 나는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흔히 그래. 아무튼 어디 가서 오줌이나 누도록 하지." 그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가 볼로자에게 몇마디 말을 던졌고, 얼마쯤 지나자 볼로자가 '준'이라고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앞쪽의 숲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친구의 이름의 가운데 글자는 '중'이었으나, 러 시아 어 발음으로는 받침 ㅇ을 말할 수가 없으므로 '준'이 된 것이었다. 상트 페 테르부르크의 상트도 실은 산크트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전나무와 소나무가 울 창하게 우거진 그 숲가에 거친 나무토막으로 만들어 놓은 나무의자가 있었다. 몇시간을 줄기차게 달리면서도 길가에 그런 곳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볼로 자가 미리 그 장소를 머리에 그려 놓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무 의자라고는 해도 그것은 지나치게 약식이어서 굳이 거기까지 와서 머물 까닭은 없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에서 내린 볼로자는 익숙하게 그 나무의자로 가방을 들고 다가가서 거기에 무언가 꺼내 놓았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종이로 싼 흑빵 한 뭉텅이였다. "어, 흘레바리." 나는 저절로 그렇게 말이 나왔다. 친구가 그 말을 자세히 알아들었다고는 믿 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 말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약간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께는 꽤 두툼해도 길 이가 한 뼘쯤 되어 보이는 그 빵은 넷이서 먹기에는 한눈에도 부족한 것이었다. 그 빵을 꺼내 놓은 볼로자는 가방에서 다시 칼을 꺼내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조각씩 우리에게 권했다. 딱딱한 빵이었을 뿐 발라 먹을 것이라곤 아예 없었 다. 그 나무의자는 그러니까 나무식탁이 되는 셈이었다. 눈발은 많이 드문드문해 져 희끗희끗 흩날렸다. 저녁 숲가에 서서 우리 네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그 딱 딱한 빵을 씹었다. 아무리 경제 상태가 어렵다고는 해도 그렇게 멀리 와서 딱딱 한 맨빵만을 씹고 있다는 것은 그네들의 습속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전 나무와 소나무의 가지에서 눈덩이들이 후르르 후르르 떨어져 내렸다. 지나가는 차량도 한 대 보이지 않고 다만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지 멀리 멀리 뻗어 있을 뿐이었다. 지도에 의하면 티흐빈을 지나 피칼례보를 향 한 길목 어디였다. 날은 그새 어둑어둑해지고 흰 눈이 내비치는 검은 숲 한쪽으 로 갈리나의 빨간 열매들이 마치 흰 토끼의 빨간 눈빛처럼 익어 있었다. 딱딱하 고 약간 시큼한 흑빵도 자꾸만 씹어 감에 따라 들큰한 맛을 내고, 나는 내 생애 에 그런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믿을 수 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저 전쟁의 참화 밑에서 밀기울로 만든 개떡도 먹고 술지게미도 먹으며 연명한 적은 있지만 그토록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한 끼의 식사를 한 것은 내 생애 처음이 었다. 게다가 해가 기울면서 날씨가 다시 추워지는지 빵을 씹고 있는 위 아래 잇마디가 따그락거리며 부딪치기도 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행복했 다. 친구는 벌써 200킬로미터를 족히 달려왔다고 했는데도 눈치를 보면 갈 길은 아직 먼 듯 했다. '행복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통 속의 차거운 물 한 모금으로 식사를 끝냈 다. 그리고 우리는 담배 한 개비씩을 피워 물고 각기 적당한 자리에 뒤돌아서서 오줌을 누고는 차에 올랐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 여행은 너무나 무모한 것이었 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생각은 차츰 공포로 변해 다가왔다. 좀전의 행복감은 금방 어디로 사라지고 피곤이 밀려오며 숲속으로는 이탄냄새처럼 어둠이 내려 덮이고 있었다. 저쪽 러시아 동토지대의 이탄 속에 죽어 묻혀 있는 아득한 세월 속의 매머드가 어디선가 다시 살아나 움직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트 페테르부 르크의 동물 박물관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새들과 곤충들과 파충류들, 그리 고 공룡의 뼈들과 함께 많은 매머드의 유해들이 생시의 그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시베리아의 만년빙 속에 묻혀 옛 화석동물은 죽어서도 썩지 않고 그 모 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긴 털이 나 있고 크고 굽은 엄 니가 뻗어 있는 이 코끼리의 선조가 발견되어 처음 전시되었을 때 구경하러 온 황후는 그 냄새 때문에 손수건으로 코를 싸맸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우를 얼마나 잡으려고 이렇게 먼 길을 가는가 짜증이 난 것은 오래 전부터 였다. 하지만 그 짜증이 곧 어떤 의혹으로 바뀌곤 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 었다. 이들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 새삼스럽게 솟는 의구심을 잠재우는데는 상당 한 인내가 요구되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의 남자들은 직장일 말고 또 무슨 돈벌이라도 해야 하고 여우 사냥은 꽤 괜찮은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한술 더 뜨듯 볼로자는 곰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그야말로 횡재를 한다 고 덧붙였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밤길을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아득 한 일이었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차체가 미끈하더니 앞쪽으로 흙언덕이 다가오 고 곧이어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모든 것은 어둠속에 멎 어 버렸다. 아찔하여 나는 머리를 들었다.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얼떨떨한 모 습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언뜻 보아 다행이라 싶었다. 우리는 주섬주섬 밖 으로 나가 차체로부터 돌아보았다. 라이터 불빛으로 비춰 보니 앞의 범퍼 부분 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망가져 있었다. 얼음길에 미끄러져 차가 거의 한바퀴 가 량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짱한 것과 함께 그만해도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만약 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면 꼼짝없이 얼어 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역시 주차장지기인 볼로자가 함께했길래 그의 솜씨를 빌린 결과 차는 앞이 잔뜩 우그러진 꼴이나마 용케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이렇 게 하여 다시 차를 몰고 가는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는가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 아도 좋을 것이다. 그로부터도 목적지까지는 몇시간이나 더 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그나마 포장된 길을 벗어나 울퉁불퉁한 길로 접어들어 달리 게 되었을 때는 드디어 올 데까지 왔다는 마지막 느낌이었다. 친구도 말 그대로 죽을 맛인 모양이었다. 사위는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오지, 오지, 하지만 이런 데도 있어. 이거야 원." 그 길에서는 그는 아예 얼마나 더 남았느냐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러 시아 어로 '앞으로'라는 뜻이 되는 말이 '쁘랴마'라는 것을 안 것은 그 울퉁불퉁 한 길을 가는 동안이었다. 그것은 볼로자의 입에 아예 붙어 있는 말이었다. 샛길 로 접어들었으니 곧 어딘가 마을이 나타나야만 할 텐데 도무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목이 마르고 속도 쓰렸다. 그렇게 얼마를 또 갔을까. 그제서야 마침내 볼로자가 차를 멈추도록 했다. 그 러나 그곳이 마을이라는 느낌은 어디서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차의 엔진소리를 들었는지 앞쪽에서 빠꼼히 불빛이 비치고 사람소리가 들려 왔다. 드디어 목적지 에 이르렀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 왔다. 오기는 왔는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남아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내가 어찌하여 그런 곳까지 오게 되 었는지 한심한 지경이었다. 그것은 마을이 아니라 외딴집 한 채였다. 두 사내가 어둠 속의 집에서 등불을 들고 나오고 커다란 개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집에서 나온 사내 중 하나는 눈에 띄는 텁석부리였다. 러시아 사내들은 서로 아는 체를 하고는 그 집으로 우리는 안내해 들였다. 그것은 굵직굵직한 통 나무로만 지은 집이었다. 먼저 나무 층계를 올라가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 는 집 안 구조는 방 하나에 식탁이며 페치카며 침대가 다 놓여 있는 것이었고, 그런 방이 또하나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었다. "백년 전에 농노들이 살던 집이라는데." 친구가 볼로자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나는 그 말에 방안 구석구석을 비로소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지금 저 제정 러시아의 농노의 집에까지 와 있는 것이 었다. 혁명이 일어나고 7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창문 옆에 걸어 놓은 램프는 내가 어릴 적 그 안에 짚수세미를 넣어 등피를 닦던 그 남포와 같은 것으로, 거기서 비쳐 나오는 흐린 불빛은 방 안을 간신히 비춰 주고 있었다. 전기나 가스가 흔한 나라에도 그런 생활을 하는 곳이 있었다. 얼핏 보아 식탁이며 페치카며 침대가 다 놓여 있는 방이라고 했지 만 그냥 그렇게 말해서는 피상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낡고 때에 찌들었고, 무엇보다도 방안 전체에는 고약하게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동물 박물관에서 맡던 그런 냄새였다. 온통 모든 것 이 나무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페치카만은 흙으로 부뚜막처럼 만들어졌고 쇠 뚜껑이 덮여 있으며 흙굴뚝이 천정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페치카 덕분에 통나무집 안은 그 추위에도 온기가 훈훈하게 감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 페치카 옆에는 그 방안 풍경 중에 가장 가지런하게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고, 그 앞으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도 있었다. 장작은 자작나무라고 했다. 그리고 벽에는 여러 가지 연장들이며 옷가지들이 제멋대로 걸려 있었다. 내가 방안을 곁눈질로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 페치카 앞에서는 늦은 저녁식사 가 재빨리 준비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는 텁석부리의 집주인이 먼저 바께쓰 같은 양철통에 감자와 쇠고기 통조림을 섞어 넣고 삶다가는 이름 모를 들풀을 말린 향료를 집어 넣고 얼마동안 더 삶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요리 는 장만되었다. 그리고 예의 흑빵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집 안의 나무 바 닥문을 들어올리고는 그 안에서 몇가지 병조림들을 꺼내 놓았다. 오이와 버섯 토마토에 설탕과 식초와 향료를 넣어 절인 것이었다. 생선 통조림이 오르고 이 어서 보드카 병마개가 열렸다. 그것은 훌륭한 식사였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시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을 그때까지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었던 그 의구심과 연관된 것이다. 실제로 나 는 여전히 그들에게 완벽한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이들이...'하는 그 마음은 어쩌면 인류 공동으로 이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이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와 함께이고 또 처음에 운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멀리 오지로 와 버렸다는 두려움 이 쉽사리 가라앉지를 않는 것이었다. "감자 요리에다 넣은 풀이 크롭체카라는 거래. 니가 아까 흥미를 보이는 거 같 아서 물어 봤어. 맛이 독특하군." "크롭체카, 크롭체카." 나는 되받아 익혔다. 아닌게아니라 그랬다. 나는 그의 말대로 원예반원으로서 거기에 흥미를 가졌 었고, 잎사귀와 줄기와 꽃이 그대로 붙은 그 마른 쑥부쟁이 같은 풀을 넣은 감 자 요리는 놀랍게도 향기로웠다. 그가 내 마음을 읽고 무엇인가 마음을 안정시 키려고 모처럼 말을 건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그도 러시아 사람들의 대화 에는 잘 끼여들지 않고 주로 경청하는 입장인 걸 보면 얼마쯤은 경계심을 늦추 지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작나무 장작이 탁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붙들 고 있는 페치카 위에서는 쇠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쉭쉭 들려 왔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감자를 화제에 올 리고 웃던 일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어릴 적 그릇에 든 팍팍한 감자가 먹기 싫 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밥알만 고르던 일은 이른바 감자바위로서의 공통된 경험이었다. 말이 밥그릇이지 주먹만한 감자가 두알쯤 들어가 앉으면 그것은 감 자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때 우리 고향에 만약 크롭체카 같은 향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 저녁을 먹으며 옛 생각에 젖었다. 어쨌든 어려운 전 화의 시절을 우리 식구는 감자와 옥수수에 의지해 살아 넘겼다. 한 번은 공습을 피해 변두리 마을로 갔다가 무슨 보따리를 안고 죽어 있는 남자를 보았는데 그 보따리 속에 감자가 삐죽히 들어 있는 게 보여서 염치불구하고 그걸 가져와서 한동안 신세를 진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보따리의 감자가 유난히 알이 잔 것을 보면 그 남자도 아직 캘 때가 되지 않은 다른 집 밭의 것을 살짝 캐 가 던 것이었을 게라고 우리 식구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기억도 새로웠 다. 보드카가 한 순배씩 돌고 나자 식탁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갑자기 활기를 띠 어 갔다. 러시아 사람들이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하여 옆의 친구들에게 곁눈질을 했더니 본디 이들은 밥 먹으면서도 논쟁하듯 토 론을 하는 통에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 서 나는 그들이 혹시나, '우라, 레닌!'같은 말이라도 외치지나 않을까 은근히 마 음을 졸였음을 고백한다. 그 이념의 세계가 무너진 지는 그때 겨우 1년도 되지 않았고, 아직도 그 추종 세력은 데모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었다. 이들 가운데 그 런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우 회적인 표현이라는 데서 나는 잠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이미 충분 히 말했거니와 내 친구가 앉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나를 비웃으며 한국을 떠났었다. 비록 전과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단연코 그 이념의 신 봉자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북쪽 통나무집을 향해 오는 동안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 던 의구심의 바탕에는 그 이념의 세계라는 것도 자리잡고 있었음이 유추된다. 숨길 수 없이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상 중에는 내가 이역 만리까지 찾아온 친구가 어김없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얼 마든지 가능한 일이어서, 그것을 꼭집어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를 향한 내 우정이 그토록 처절하지 못하다는 반증 또한 되 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런데도 나는 아침부터의 그 의구심이 친구 문제와도 결부되었다고 말하지 않으 면 안 된다. 비극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따위 말을 결코 그에게 직접 꺼내지는 않겠다고 속으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 점은, 레닌의 은신처에 갔다온 일을 말하지 않는 것에서도 이미 밝혀졌을 줄 믿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그곳에서 그들과 술잔을 맞부딪치지 않고 있었던 것도 거기서 연유된 몸조 심이었다. 독주를 마시다 보면 어느 결에 자제심이 무너질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나도 나지만 그들이 나로 인하여 부추김을 받아 어떤 감당 못할 사태를 일으킬 위험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한창 대화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 사람들이 어느 틈에 제각기 단도 한 자루씩을 뽑아들고 서로에게 자랑을 하게 된 데 이르러서 나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료가 든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있다니? 보드카 탓이 아닐까? 나는 놀라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혹시 어 떤 위협의 조짐은 아닐까? 그것은 여전히 말끔히 가셔 버리지 못한 의구심과 경 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행동거지에서 어떤 악의를 발견할 수는 없 었다. 그들은 액면 그대로 자기 자신의 칼을 상대방에게 자랑하고 있을 뿐으로 보였다. 특히 통나무집 텁석부리 주인은 자기의 칼을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한 다고 했다. 흑단같이 검은 손잡이에 예리한 칼날이었다. 그 칼이 품평회에서는 으뜸의 것으로 자타에 의해 공인되는 것이었다. 사냥감의 껍질을 벗길 칼들인 모양이었다. 으뜸의 것이라고 하는 칼은 그것의 만듦새를 위주로 말하는 것이지 흐린 램프 불빛에 모두가 예리한 날을 빛내고 있었다. 저 우즈베크 사람들이 호 전적으로 차고 다니는 단검과 같은 칼도 있었다. 옛 티무르 제국의 영화를 자랑 하는 그들은 오늘날에도 흔히 단검을 차고 다니며 서투르면 상대방에게 들이댄 다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 쪽을 거쳐올 때 길거리의 상점에서 나도 그 칼을 하 나 기념으로 샀다. 황금빛 칼집과 손잡이에 보석처럼 빨갛고 파란 유리알이 장 식으로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친구의 집에 놓아 둔 가방 속 에 있었다. 아니, 무슨 소리인가? 그것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할 까닭이라 도 있단 말인가? 가지고 있다 한들 어쩌겠단 말인가? 나는 잠깐 동안이나마 어 이없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 간 내가 가엾기조차 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벌어 진다면 그저 꼼짝없이 당할 뿐인 것이다. 그 무렵 모스크바의 한국인 사회에서 는 별스런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이를 오가는 야간 열차에서 누군가 돈을 빼앗기고 칼에 맞아 열차 밖으로 던져져 끔찍한 시 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것 이 터무니없는 낭설로 밝혀지긴 했어도, 무시무시한 풍문이 선량한 사람들의 마 음에 드리워 놓은 검은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저 4공화국 시 절 사회를 풍미하던 것은 흔히 '유비 통신'이라고 불리던 유언비어였다. 그 아래 사람들은 잔뜩 움츠러들었었다. 그것은 실제의 사실보다도 더 우리를 괴롭혔었 다. 친구끼리 만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나서 "저 박통이 말야. 색골 중의 색 골이래..."라고 소근거리던 지난 시절은 그래도 좋았었다. 유언비어의 검은 그림 자에 눌리자 우리는 입을 닫았다. 밤새 8시간 동안 어둠 속을 달리는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침대 열차는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든 칸칸마다 위험하고 수상한 어둠만을 싣고 달리는 듯했 다. 우리 여행자 일행이 탄 열차에는 문을 똑똑 두드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동 포라는 사내가 들어와 품속에서 은밀하게 웅담과 사향을 꺼내 놓고 시베리아에 서 가져온 거라고 사지 않겠느냐고 하기도 했었는데, 거기에도 그런 그림자는 깃들어 있었다. 통나무집의 램프 불빛은 열차 안의 흐린 전등 불빛을 연상시켰다. 사내들의 칼 이야기는 내 감정과는 아랑곳없이 길게 계속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긴 장과 조바심은 도를 더해 갔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뜻하지 않았더라도 술 취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경험칙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소리 없이 식탁 주위를 맴돌던 고양이도 언제부터인가 가르릉가르릉 목젖 소리를 내고 있었다. 페치카의 자작나무는 더이상 탁탁 타오르는 소리를 내지 않고 쇠주전자의 물끓는 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흐린 불빛에 비치는 사 내들의 얼굴은 상당히 불콰해져 있었다. 피곤이 엄습해 온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 가서 좀 쉬겠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통나무집 어 느 구석에 마땅히 쉴 만한 공간도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는 도리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무엇인가 조언을 구할 계제도 아니었다. 친구도 그저 그들이 하는 대로 별 말도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 는 것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리라고 여겨졌다. 우리 둘은 영락없이 퇴역 소련군의 포로인 셈이었다. 저러다가 느닷없이 '우라!'를 외 치며 달려들어 각을 뜰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은근히 고개를 들곤 했다. 무너진 허상의 이데올로기도 그 검은 그림자가 아직 이토록 공포를 던지고 있는가, 나 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또한 달래야 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것을 창조한 사람만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창조자의 삶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도 없고 또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이 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데올로기의 계시를 받았다 해도 그것은 예수의 것일 뿐 이며, 가섭이 부처의 이데올로기의 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해도 그것은 부처 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레닌의 이데올로기와 스탈린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것이 다. 그러므로 모든 이데올로기는 하나이면서 무수하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비 극인 것이다. 비극? 포로로서 잡혀 있다는 느낌이 갑작스럽게 빙글빙글 돌다가 비극이라는 말에 이르러 나는 퍼뜩 정신을 되돌렸다. 그리고 진정한 비극이란 이 세상의 소멸이 아닐까 아득한 생각에 젖었다. 모든 이데올로기와 같은 우리 도 결국은 소멸하고 말며, 이 지구도 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별의 생성 과 소멸을 천체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을 볼 때의 느낌이었다. 이에 이르러 무엇 을 말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방 한구석에서 철커덕하고 쇳소리 가 났다. 조심스럽게 반잔만 받아 마신 보드카에 내 긴장된 생각은 러시아 북쪽의 외딴 통나무 집의 흐린 불빛처럼 먼 은하계의 어떤 흐린 별빛까지 가버렸던 것일까. 그러다가 그 철커덕 소리가 나를 퍼뜩 현실로 되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볼로자 가 한쪽에 떨어져 앉아 엽총을 만지고 있었다. 그 엽총은 본디 기름기가 반들반 들한 가죽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는데, 아침에 차를 타고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 아 우리들에게 슬쩍 열어 보여 준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가죽주머니 속에서 나 온 엽총은 총신과 개머리판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금 볼로자는 그것을 서로 맞추고 있는 중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그 엽총의 철커덕 소리에 맞추듯 철렁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행동 중에도 나는 신중해야 한다 고 나를 타일렀다. 그의 마음이 아직은 확고하지 않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돌발적인 행동이 그의 망설이는 마음을 격발시키는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나는 그의 눈에 안 띄게끔 몸을 일으켜 페치카 옆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 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신통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리고 그가 전혀 선량한 마음뿐인 사람으로 내일의 여우 사냥의 꿈에 부풀어 마 치 소풍 전날 륙색을 만지작거리던 어린 날이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엽총을 만 지작거리고 있다 해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페치카가 꽤 괜찮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 자신이 우습고 연민스 러웠다. 일상에서도 나는 짐짓 그런 연기를 하고는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감에 또다른 자기 변명을 하느라 진저리를 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엄청난 위난이 닥쳤던 현실 앞에서 나는 이런 일을 겪는다는 사실이 왠지 서먹서먹하고 내 일이 아닌 것 같아 실실 웃음을 던져야 했던 적도 있었음을 기억했다. 왜 하 필 나란 말인가, 하고 어디론가 꽁무니를 빼려던 심사가 거기에는 있었다. 형장 으로 끌려가는 사람도 그러리라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내가 공연히 기가 찬 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꽤나 심각하고 절박했다. 그들이 누구이며, 거기가 어디 인가 말이다. 단체 여행중에도 함부로 호텔 밖에 나가 얼쩡거리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주의를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것은 호텔 밖이라는 정도가 아 니라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산골의, 농노의 외딴 통나무 집안이었다. 친구의 무 신경에는 부아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빵조각을 생선 통조림 국물에 적셔 고양이에게 던져 주거나 보드카를 홀짝거리거나, 그들의 칼자루를 감상하기까지 했다. 일부러 그 멀리까지 가서 그와의 괴리감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내가 한 심스러웠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내 말에 그는 이상을 꿈 꾸는 자마니 세상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내게 얼마나 회떠운 경 멸의 눈길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래, 그 이상이 겨우 농노의 통나무 집에 갇힌 신세가 되는 것이었더냐고 나는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빌어먹을 놈의 여우 사냥, 아니, 그러고 보니 여우란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램프 불빛은 더욱 멀어졌다. 한옆에 헝겊조각의 가리개로 가려 놓은 곳이 침상이었고 거기에 퀴퀴한 냄새는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통나무 집에 오랜 세월 살다가 죽어간 여러 농노들의 땀과 피와 눈물이 한데 섞여 풍기는 처절한 냄새였겠지만 그때는 음산한 살의의 냄새라고 느끼며 내 몸은 잔뜩 움츠러들기만 했었다. 우정이라는 것도 그 냄새 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겹고 슬펐다. 그때였다. 벽 쪽을 무십코 바라보던 내가 구석 선반 위에 놓인 몇권의 책을 발견한 것은 그때 였다. 처음에는 그 외딴 통나무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만이 뜻밖으로 받아들 여져서 내 눈은 크게 떠졌다. 더군다나 그것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농노의 집이 었다. 나는 맨 위에 놓인 책의 제목을 읽으려고 내 나쁜 시력에 힘을 모았다. 무 슨 책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여행을 떠나기 전 겨우 읽기만을 몇번 해 본 러시 아 어 알파벳 실력에 그 동안의 경험이 합쳐졌어도 그 글자는 여전히 낯설었다. 누구의 우스개에 의하면 처음에 외국에서 러시아에 알파벳을 가져다 쓰기 시작 한 사람이 지독히 머리가 나빠서 그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자 한 자 또박또박 더듬어 읽었다. 트... 락... 토... 르... 트락토르. 트락토르가 영어로 트 랙터인 것을 우리 나라 신문의 북한소식을 보면서 알았던 것이다. 책을 발견했 기에 그토록 열심히 들여다 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희망 때문일 것이었다. 그 러나 적어도 그때 트락토르는 내 희망이 아니었다. 나는 맥이 빠졌다. 그런 책이 있는 걸 보면 그 텁석부리 사내는 트락토르를 몰고 농사를 짓거나 그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힘없이 그 밑의 책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푸... 슈... 킨... 푸슈킨이라...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순간 머릿속을 섬광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푸슈킨. 그것은 저 시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푸, 슈, 킨, 푸, 슈, 킨, 푸, 슈, 킨... 나는 몇번 그 글자를 잃고 나서 책을 뽑아 들었다. 표지를 들여다보았으나 역 시 푸슈킨이라는 이름밖에는 다른 것들은 뜻을 읽어 낼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 의 어떤 글자들은 우리가 배운 세계의 글자에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배운 외국 글자와 모양이 같더라도 소리가 다른 것들도 여럿 있는 것이었다. 어 쨌든 그것은 저 푸슈킨의 시집이었다. 거친 숲에서 잡아 왔을 짐승의 뿔로 칼을 만들고, 감자 농사를 지으며 사는 그 텁석부리, 이제야 밝히지만 지금 엽총을 만 지고 있는 볼로자보다 더 수상쩍게 여겨지던 저 텁석부리가 자작나무를 넣은 페 치카 옆에서 흐린 등불을 벗삼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푸슈킨의 시집이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이렇게,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르렀다. 나는 푸슈킨의 시집을 전날 처음 친구의 집에서 본 이래 다시 그 시골 농노의 집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 을 보게 되자마자 내 마음은 즉시 어떤 다른 상황으로 급회전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 마음의 불안은 그야말로 눈 녹듯이 녹아 사라졌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페치카와 램프의 그을음에 찌든 벽 구석 선반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시집이 내 마음을 그 렇게 평온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 시집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집이었다. 거기에 푸슈 킨의 이름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감자 농사를 짓든 양귀비 농사를 짓든 밤이면 외롭게 고양이를 벗삼아 시집을 읽고 있는 사내가 흉악한 강도 따위로 돌변할 수는 없다는 믿음이 나를 지배하 기 시작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나는 그 이름을 외며 시집을 들고 친구에게 가서 내밀었다. 볼로자는 아직도 엽총을 만지고 있었고 유라와 사내와 또 한 사내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사 람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들은 차를 마시며 잼을 조금씩 떠 먹거나 잼이 없으면 설탕이라도 조금씩 떠 먹는 것이다. 그리고 차를 몇잔이고 거푸 따라 마신다. 방안 풍경과 분위기는 아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 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었다. "이런 게 여기 다 있어." 나는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나는 그 러시아 사내들을 의심했었고, 어느 의미 로는 얕잡아 보기도 했었다. 그것이 한 권의 시집으로 불식되다니, 놀라운 일이 었다. "푸슈킨이로군." 친구가 말했다. 그 말에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는 수긍의 뜻이 깃들어 있 었다. 그런 다음 그는 "이 사람들은 이렇다니까. 푸슈킨을 안 읽는 사람이 없으 니." 하고 덧붙였다. 유라가 "푸슈킨, 푸슈킨." 하면서 나를 향해서 당신도 그 시 인을 아느냐는 투로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대응할만한 러시아 말을 알 재간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좋다라는 뜻의 "하라쇼."라는 말만으로 대꾸하는 수밖에 없 었다. 모스크바의 푸슈킨 기념 미술관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그곳의 많은 그림들 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처럼 되살아났다. 그 생명력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당시 보다 더욱 큰 감동으로 내게 전해져 왔다. 나뭇잎들, 풀잎들, 꽃들, 사람들, 짐승 들과 하물며 햇빛과 그 아래 산과 강과 집들까지도 살아 있는 생명의 풍경으로 서 내 앞에 전개되었다. 그 속을 매머드와 곰과 여우들이 뛰어다니며 대자연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욜카, 사스나, 베료자의 가지들이 눈을 털며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하나의 시를 창조하고 있었다. 크롭체카의 향기 속에 빨간 갈리나 열매는 나날이 영롱하게 여물어 가고 있었다. 내가 그 시집을 꺼내 봄으로 해서 그 방안에서는 때아닌 푸슈킨 이야기가 만 발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알 수 없어도 그 시집을 뒤적이며 하는 대화였기 때문 에 나는 나대로 시정에 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인의 시는 그러나 번역으 로는 도저히 맛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을 유라가 전했고 친구가 내게 통 역해 들려 주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그 시집이 나로 하여금 해방시켜 준 그 마음이야말로 그 원시의 위대함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 다. 하지만 기껏해야 '하라쇼'에 '매우'라는 뜻의 '오첸'을 붙여 대꾸하는 내가 오 히려 안타까울 뿐이었다. "오첸 하라쇼." 이로써 내 의구심은 완전시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에 모스크바의 미술관에서 부터 비롯되어 북쪽 오지의 옛 농노의 통나무 집에서 만난 시집에 이어지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음을 뜻깊게 기억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그는 어머니가 아프리카 한니발 장군의 가계를 이은 사람이라는 특수한 혈통 을 가졌었다. 러시아 대귀족이었던 그는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는 정신으로 유배 를 당하기도 한 시인이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작품을 써서 러시아 문학의 시조 로 추앙받는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둘러싼 모함으로 마침내 결투를 하게 되어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볼로자도 끼여들어 이야기는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오로지 나만이 국외자 였다. 그렇더라도 그날 밤 나는 그 시인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느낌을 가지고 그들 옆에 앉아 있었다. 그날 밤 나를 안정시켜 준 것만으로도 그 시인은 위대했다. 위대한 시인은 그 이름만으로도 뭇 영혼을 구제한다. 어릴 적 그 시인의 시를 붙여 놓고 있는 차 창 누나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느낌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이윽고 러시아 사내들이 식탁 앞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걸어가고 그 방은 우리 둘만의 것이 되었다. 옆방으로 걸어가기 전에 텁석부리 사내가 간이침대 위에 슬리핑 백을 펼쳐 놓고 그 안에 제법 하얗게 빨아 놓은 시트를 넣어 주었다. 그 러나 그 하얀 시크는 정말로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슬리핑 백이라고 말한 그것은 실로 백년 전부터 빨래 한번 안 하고 사용하던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때에 찌들고 냄새에 찌든 것이었다. 애초에 짐승 가죽 빛깔이었다고 보 여지는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넝마조각보다도 지저분했고 냄새가 지독했다. 나 중에 본 바로는 아침에 세수조차 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나는 몇번의 구역질을 참으며 스웨터와 바지를 입은 채 그 안에 들어가 누워야만 했다. "저 개 이름이 아무르라는군. 아무르, 사랑이라고 말야." "아무르, 사랑?" "응." 바깥에 오줌을 누러 갔다 온 친구가 후후 얕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램프 의 등피 위를 훅 불어 불을 껐다. 창문으로 바깥의 눈빛이 양광처럼 비쳐 들어 오고 있었다. 한밤은 틀림없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슬리핑 백 속에 몸을 눕혔다. "여기서 자란 말이지? 정말 지독하군. 그런데 감자 요린 독특해.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감자 요리가 좋아. 큰 찜통에 감자 한 켜 놓고 파 한 켜 놓고 고기 한 켜 놓고 또 감자 한 켜, 무슨 야채 한 켜, 고기 한 켜... 이렇게 쌓듯이 놓고 푹 찌는 거야. 그럼 국물도 저절로 생겨. 정말 먹을 만해." 그가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나는 프랑스 말로 사랑을 아무르라고 하지 않느 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감자 요리 이야기가 어쩐지 감자 요리 이야 기 그 자체로 들리지 않고 먼 옛날 추억 속의 고백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나 를 만나서 이렇게 외딴 통나무 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지금 그도 여러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다.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까지 맺은 지금... 레닌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지금... 그러나 나는 이에 알맞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공부는 잘돼 가?" 나는 엉겁결에 물었다. 그런 말은 묻고 싶지 않았다. 그쪽에서 응당 물어 올 말인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대답하리라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한국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군사 독재가 어 떻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 늘어 놓아야만 하건만 단 한마디도 하 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정 다행이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공부라... 그런 건 묻지 말자. 내가 뭐 이 나이에 공부하러 여기 왔나." 그는 문득 말을 끊고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것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무엇인 가 더 할말이 있는 듯한데 담배 연기를 뿜는 소리만 길게 들려 왔다. 나는 그럼 뭐하러 왔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물음은 내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 를 않았다.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한 처지에 있는지 그의 담배 연기 뿜는 소리가 다 말해 주는 듯 싶었다. 그는 우리 나라에 있을 때부터 행동과 실천에 는 도무지 젬병인 사내였다. 대학 때야 몇번 이른바 가투에 나선 적이 있기는 했지만 졸업하고서부터는 이론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회가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무엇보다도 괴로워했던 그였다. 나는 그가 현실적으로 어떠한 노선에도 가담할 수 없는 이상주의자임에 가슴 아파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 이상주의란 무엇이었을까? 허생의 무인도 나라와 홍길동의 율 도국이나 토마스 모어이 유토피아 섬도 그에게는 가당찮은 것이었다. 그가 꿈꾼 것은 진정한 사회주의 이상향이라는 것뿐, 나는 그와 더이상의 대화를 진척시키 지 못하고 오랜 세월 건성으로 친구라고 지내 왔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고 있는 대로 그가 단순히 마르크시즘을 공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이 세상에 그런 것을 공부할 나라가 있을까? 그러나 그가 적 어도 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되었다. "여우는 언제 잡으러 가나?" 나는 궁여지책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묻고 싶은 말은 달리 여럿 있었으나 그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미리 알고 있었었다. 서울에 두고 온 그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가 먼저 꺼내 주 어야 할 문제였다. 아내 문제라면 나 역시 실패자로서, 우리가 이십 몇년이 지나 서도 여전히 '갱생회' 회원이 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고약한 우연 의 일치였다. "내일 아침에 일찍 간대. 러시아 남자들 큰일이야. 소련이 무너진 뒤 군인들이 다 돌아와서 말야, 할 일들이 없는걸. 아프가니스탄이다 어디다 해서 돌아들 오 니까 여기 일자린 없지. 마누라들은 들볶지."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혼란기니까 그렇겠지." 나는 그를 만나서부터 무엇보다 언제쯤 공부를 끝낼 것이며 우리 나라에는 언 제 돌아가겠느냐를 묻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 물음은 입 속에 뱅뱅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어련히 안 오랴 하는 추측은 그에 관한 한 부질없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의 월급이 우리 돈 1만원도 안 되던 것이 었다. 나는 공연히 몸을 뒤척거렸다. "모를 일이야." 그는 다시 담배 연기를 후욱 내뿜었다. 페치카의 자작나무 장작도 불이 사위 어 가는지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끔 들려 오는 것은 고 양이가 가르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그것 만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난 인연은 다 끝나야 하는 것인가 나는 또다른 의 구심에 사로잡혔다. "피곤하니 그만 자자. 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그러지." 나 스스로 대화를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모를 일이야.' 하고 어둠 속에서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커다란 변화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를 추 궁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뭐라고 하든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 하는 한도 안에서의 친구였다. 담배를 비벼 끄고 가르릉거리는 고양이 소리를 듣고 있는 잠깐 사이에 그는 벌써 잠든 숨소리를 냈다. 다음날 아침은 보기 드물게 맑은 하늘이 있었다. 아침이라고는 해도 어느덧 시계는 10시를 넘어 있었다. 무슨 새인가 한 마리 창문에 와서 날개를 부딪고 있는 소리에 나는 눈을 뜨고는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다. 친구는 물론 다른 사람 들도 모두들 일어나 제각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외딴집 옆에 다 른 집이 두 채나 더 있는것을 보았으나 그 집들은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으로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집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이 바로 호수였다. 볼로자 와 텁석부리가 눈길을 헤치며 호수 옆에 서 있었다. 곧 볼로자는 호수 위로 걸 어가 얼음구멍을 뚫었고 텁석부리는 물을 길었다. 집 앞에서 볼 때는 그리 큰 것 같지 않던 호수는 끝간 데 없이 멀리 뻗어 있었다. 호숫가를 뒤덮고 있는 숲 은 역사 이래로 그랬던 듯이 여겨졌다. 눈은 얼어붙은 호수 위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침엽수림 사이사이로 잔뜩 마른 잎사귀를 달고 있는 갈잎나무가 황갈색 으로 불타오르듯 솟아 있었다. 아침 식사 역시 지난 저녁과 같이 감자 요리였다. 크롭체카의 향긋한 냄새가 통나무 집의 퀴퀴한 냄새를 몰아내고 코끝을 자극하면 식사 준비는 다 된 것이 었다. 우리는 똑같은 요리, 즉 감자와 빵에 버섯과 오이와 토마토 절임을 곁들여 식사를 끝냈다. "이걸 입고 장화를 신으래." 친구의 말과 함께 유라가 내내 점퍼와 장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곳 추위가 엔 간하기에 내가 걸치고 있는 점퍼도 두둑한 것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털 달린 점퍼는 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두껍고 무거운 것이었다. 거기에다 안감을 넣은 방한 장화는 무릎까지 올라왔다. 모자는 여분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쓰고 간 그대로 털실모자를 써야 했다. 눈 속을 헤매 다니자면 그렇게 감싸지 않고는 안 된다고, 유라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나는 전날 푸슈킨을 보기 전까지 가졌던 감정 때문에 러시아 사내들을 마음놓고 쳐다보기가 뭐하기는 했다. 그러 나 이제 우리는 누구의 표현대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통나무 집을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여우를 잡기 위해서. 그곳 도시의 백화점에는 아닌게아니라 여우 모피가 많았다. 러시아에서는 겨 울이면 온몸을 모피로 감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시 여자들에게 모피는 절대적인 것이다. 곰털, 밍크털, 수달털, 여우털, 양털, 토끼털 등 갖가지 모피들 이 진열대에 쌓인다. 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건만 양털이나 토끼털 말고 비싼 것은 쉽사리 사지는 못한다. 모피를 파는 상점을 비롯하여 비싼 물건을 파는 상 점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들여 보내지도 않고 차례대로 한 사람씩 들여보내 구경 시킨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여우털을 통째 두른 마나님을 흔히 볼 수 있었 었다. 그 시절 여우털 목도리는 어느 만큼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우는 교활하 고 간사한 짐승으로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짐승인데 여인네들의 목도 리로 애용된 것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우리말에서 여우란 교활하고 변 덕이 심한 여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여쁜 여자로 둔갑한 수 많은 구미호들, 무덤에 구멍을 파고 드나들며 해골 바가지를 달그락거리는 여우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 탓에 나는 예전에 한복으로 단장한 여자를 보면 혹시 치 맛자락 밑으로 여우 꼬리가 드러나지 않나 무의식중에 흘낏 보곤 했던 것도 사 실이었다. 이것 또한 허황한 옛 이야기의 쓰잘데없는 그림자가 끼치고 있는 해 독이었다. 그런데도 예전에 여자들은 여우 목도리를 줄기차게 선호했었다. 나중 에 좀더 나이가 들어 야릇한 글들을 읽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궁중의 여자들이 나 하다하는 여염의 아낙들이 남편 바람나는 걸 방지한다고 암여우의 그것을 차 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행 야간열차에서 팔러 다니던 사 향노루의 배꼽이라면 또 몰라도 암여우의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는 아직 까지는 내게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나아가 여우 목도리와 여우 그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도 여겨진다. 단지 여우 목도리가 족제비 목도리보다는 좀더 모양 이 나고 따뜻한 때문에 선호했으리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우 목도리 에서 옛 여자들의 암여우의 그것을 차는 행위를 엿보곤 한다. 암여우의 그것을 차면 남자들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통나무 집을 나섰다. 텁석부리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볼로자 와 유라가, 그 뒤를 한 사람의 러시아 사내가 섰다. 다시 그 뒤를 친구가 서고 맨 뒤가 나였다. 러시아 사내들은 모두 엽총을 한 자루씩 메고 칼도 옆구리에 여며 찼다. 친구와 나만이 장갑 낀 맨손이었다. 셰퍼드 종의 사냥개 아무르는 일 행의 앞뒤를 맴돌며 겅중거렸다. 좀전에 텁석부리가 물을 긷던 호숫가가 아닌, 작은 잡목들이 엉겨 있는 눈길을 더음어 가자 곧 버려진 우물이 나타나고 거기 서부터 호수는 오른쪽을 향하여 까마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우무이라고 해서 우리 식의 것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 매달려 있는 것이 끈이 아니라 사람 키 서너 길쯤의 기다란 막대기로 되어 있으며 그 위의 버팀목 또한 굵은 나무로 커다란 시소처럼 되어 있어서, 나무 막대기를 위로 올 리면 무게 중심 뒤쪽의 나무 무게로 한결 쉽게 두레박이 올라오게 되어 있는 것 이다. 그 우물을 지나 우리는 호수의 얼음 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말했듯이 날씨는 보기 드물게 좋았다. 그렇다고 햇빛이 마냥 내리비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늘 머리 위까지 무겁게 내려와 있는 듯하던 낮은 하늘은 멀리 높아 져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의 천고의 숲속에는 어김없이 갈리나의 빨간 열매가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도시 근교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까마귀가 그곳에 는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았다. 갈리나가 러시아의 까마귀밥나무라는 것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잘 확인한 바 있었다. 어느 수도원 뜰에 들어섰을 때 까마귀 들이 그 나무에 까맣게 달라붙어 열매를 쪼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까 마귀들은 우리 나라의 까마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바로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그 광경은 괴기스럽기조차 했다. "갈 때는 프랑스로 해서 간다고 했나?" 호수 위의 눈을 밟으며 그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밝혔던가, 기억이 되지 않았다. 아마 한국을 떠나 오기 전에 나와 통화하면서 계획을 밝혔 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르포르타주를 쓰는 일을 맡았었고 그 일의 목적지를 프랑스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 자세히 밝히기는 싫었었다. 너는 여전히 우스운 일만 맡아 가지고 살아가는구나. 그가 비웃을 게 뻔했다. 그때까 지 나를 먹여 살려온 것은 회사들의 사보와 꼴 사나운 잡지에서 맡아 온 일들이 주종이기는 했다. "응. 프랑스로 해서 선거가 끝나면 돌아가려고." 나는 얼버무렸다. "왜?" 프랑스로 가는 게 '왜'인지 선거가 끝나면 가겠다는 게 '왜'인지 모를 질문이었 다. "사람들에게 신물이 나. 아무튼 누군가 되겠지." 나는 편한 대로 대답했다. 떠나올 때 대통령 선거유세는 두 김씨에 정씨까지 끼여들어 온통 아우성이던 생각이 났다. 30년에 걸친 군부의 통치가 드디어 끝 난다고들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유신 시절에 걸친 병역 문제로 여간 고생을 겪은 게 아니었다. 나는 오랜 세월을 술 속에 숨어 지냈다. 어떤 사랑이 나를 붙 잡고 있었다고 표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진실한 이유는 내 탓이었을 것이 다. '탓이었을 것이다'가 아니라 내 탓이었다. 나는 항상 개인이 함몰되는 사회에 견디기 힘든 공포감과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조립 기계에서 하나의 나 사가 아니라 그 기계 전체여야 했다. 이런 뜻에서 보면 나라는 인간은 사회 구 성원으로서는 완전한 실격자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회 계약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불행한 객체로서 술병 속에 갇혀 있었다. 견자나 각자가 아 니고서는 그런 삶은 표본실의 변이종 견본일 뿐이었다. 남의 사정이야 어찌 됐 든 친구는 그때 내게 나야말로 이놈의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거 라며 은밀하게 눈빛을 빛냈었다. 무서운 논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였다. 그 황당무계한 추론 앞에서 나는 괴로운 술잔만 들이켰다. 세 월은 흘렀고 문제는 해소되었어도 그 망령의 그림자는 나를 끈질기게 술병 속에 가두어 두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도 예의 그 그림자 같은 족속이었 다. 그리하여 나는 러시아로 떠나가기 불과 얼마 전에 스스로 병원으로 들어가 서 새로운 삶을 획책했던 것이다. 그 떠남은 그 일련의 획책의 마무리 단계로 마련된 것이었다. 어떻게든 삶을 되찾아야 했다. 사냥꾼 일행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가 더 물어 와야 하는데 갑 자기 말문을 닫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마도 더 많은 질문들이 들어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지레짐작이 나를 붙 잡아 매어, 내 머리는 어지럽기만 했다. 너는 아직도 공산주의를 떠받드느냐 하 면 그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한국에 있을 때도 그는 그런 질문에는 정색을 하고 공박했었다. 그가 믿는 것은 차라리 무슨무슨 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삶이 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연관짓는 선에서 멈출 뿐 어찌할 수 없었던 도저한 사상이었다. 그것을 젖혀 두고라도 여러 질문이 있었다. 앞으 로의 계획은? 그리고 가정은? 그렇지만 이 모두 내가 섣불리 어찌할 문제는 아 니라는 사실이 내 입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 문제도 그가 열쇠를 가 지고 있는 것이었다. 호수는 길이로 길게 뻗어 있었고 우리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10월부터 줄기차게 눈이 내린 깜냥으로는 쌓여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 은 편이었다. 그곳도 어쩌다 포근한 날씨가 있고 그럴라 치면 속의 눈이 질퍽해 지면서 녹았다가 밤에 얼음으로 변해 버리는 모양이었다. 얼음이 꺼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게 볼로자는 그 위로 커다란 탱크도 지날 수 있다고 안심시켜 주었 다. 모두들 무장을 했는데 한국 사람 둘이 무엇 때문에 맨손으로 그 뒤를 따르 고 있는지 우습기도 했다. 아침에 감자를 먹으며 들은 바로는 여우 사냥에는 사 냥개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고 했다. 엽총은 오히려 보조 수단이거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우를 잡아 오는 것은 사냥개라고 했다. 영 국에서의 여우 사냥을 영화에서 몇번인가 보았던 기억이 났다. 거기서는 말을 탄 일단의 사냥꾼들이 여러 마리의 사냥개와 함께 달려나가는 것으로 여우 사냥 은 시작되고 있었다. 말 탄 사람은 여우를 쫓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로 미루어 그날의 여우 사냥은 엽총을 메었든 안 메었든 사람들은 여우를 쫓아 궁지로 몰 아넣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고 결정적인 것은 '아무르'에게 맡기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우리 일행이 일렬 종대로 걸어가는 모습은 사냥꾼이라기 보다는 군인을 연상시켰다. 예전 어느 날 시냇가 둔덕에 엎드려 숨죽이고 보았 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10여 명의 인민군들이 그렇게 일렬 종대로 야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와 먹을 것을 거두어 가기 위해 내려오는 것 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얼마 전까지도 적군이었던 이들과 함께 줄을 지어 호 수를 건너가고 있지 않은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두 퇴역 적군 볼로자와 유라의 털모자는 앞 이마에 별표가 붙어 있는 군모였다. 전날 품 었던 의구심은 푸슈킨에 의해 그렇게 해소되었어도 그들과 일행이 되어 호수를 건너 러시아의 숲속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상한 경험 앞에 나는 긴장됨을 어쩔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 멀리 전개되고 있는 호수의 희디흰 눈밭이 호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숲을 환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앞의 숲 뒤쪽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그곳은 희미한 하늘빛이 내려와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었다. 사냥개 아무르는 혼 자서 멀리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곤 하기를 되풀이했다. 사막의 모래를 밟으 며 갈 때와 마찬가지로 눈 속을 걸을 때는 앞사람이 밟은 자국을 따라 밟으며 가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호수를 건너 대안의 숲가에 이르 렀다. 지형상으로 북유럽 일대에 우리는 호수를 건너 대안의 숲가에 이르렀다. 지형상으로 북유럽 일대는 늪이나 호수가 많은 소택지대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어딘가 음산하다. 청명한 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시의 느낌이 짙어, 말하자면 괴괴한 청명함으로 어딘가 음산하다. 몇몇 사냥꾼들이 들락거렸는지는 알 수 없 으나 그 숲은 사람 발자국이 별로 닿지 않은 태고의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나 무 아래로는 마른 풀덤불들이 우거졌고 어쩌다 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나랑ㅆ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물 박물관의 그 많은 새들, 곤충들, 파충류들이 실제로 살 고 있는 숲속 같았다. "자야츠!" 작은 둔덕을 넘어 덤불을 헤치고 나아갔을 때 문득 보로자가 손으로 가리켰 다. "자야츠, 여우래. 저게 여우 발자국인가 봐." 친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작은 공터의 눈 위로 개발자국과 똑같은 발자국 이 나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긴장한 것은 나뿐이 었는지,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는 듯 좀전과 다름없이 숲속의 눈길을 헤쳐 가고 있었다. 어디엔가 여우의 소굴이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거기 까지 무작정 간다는 것처럼 보였다. 호수에서와는 달리 내가 행렬의 맨 뒤라는 사실이 슬슬 켕기는 느낌이었다. 러시아 숲속에 떼지어 다니는 늑대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재규어가 사는 지역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디선가 재규어가 뛰쳐나와 내 목덜미를 물어 뜯는 얼토당토 않은 광경도 그려졌다. 그리고 그 숲속에 요정 들 뿐만 아니라 마녀들도 살고 있다고 옛날 이야기는 전하고 있었다. 여름이 오 면 저 호수에는 큰 고니들이 날아와 '백조의 호수'가 되며, 이 숲에는 어떤 마술 의 힘이 깃들어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있게 되리라. 나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상상으로 내 머리를 채우려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 럴수록 내 마음 한구석은 마치 빗장을 지른 듯 막혀 있었다. 내게는 분명히 무 엇인가 할말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마음을 열어 놓을 겨를이 없다는 것이 나 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서로 마음을 열어 놓는가? 이 문제에는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벽을 그도 내게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것이었 다. 이 벽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이에 퇴적물처럼 쌓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허물려면 아예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새로 맺어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것이 내가 러시아로 향할 때부터 내 가슴을 짓눌러 온 빗장이었다. 우리는 다시 숲을 지나고 작은 구릉을 넘기 시작했다. 구릉이라고 해봤자 눈 덮인 흙더미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러시아는 아시아 쪽과 유럽 쪽 을 갈라 놓는 우랄 산맥을 빼고는 한마디로 대평원의 땅이어서 산이란 아예 없 다시피 하다.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곳인 참새 언덕은 과거에는 레닌언덕으로 불렸던 곳인데 기껏해야 미아리 고개 높이보다 낮을 것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제일 높다는 곳은 한강에서 바라보는 강둑 높이 정도인 것이다. 그 숲 속은 그래도 호숫가라서 약간의 기복이 있는 모양이었다. 숲은 점점 깊어지는데 행군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그 러시아식이 라는 게 적용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까부터 발이 시려 오는 게 걱정스러웠다. 장화를 신은 발의 보온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부끄럽 지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무려 네 켤레의 양말을 겹쳐 신고 있었다. 그래도 이 미 시려 오는 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 켤레도 아니고 무려 네 켤레였는데 도 말이다. 그러자 우리 두 한국인은 러시아 병사들에 이끌려 머나먼 극지로 유 형을 떠나는 신세라는 생각도 들었다. 구릉을 넘으니 그곳은 침엽수들보다 자작 나무가 자욱하게 우거져 있었다. 중국에서 자작나무는 평지에 곧게 자란 것을 백화나무라 하고 높은 산에 구불구불 자란 것을 악화나무라 하여 구분하지만 그 곳에서는 어린 나무는 베료시카, 큰 나무는 베료자일 뿐이다. 줄기의 흰 껍질이 눈에 반사되어 더욱 희게 비쳤다. 그러나 높았던 하늘은 그때부터 다시 낮아지 며 세상은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어느 어두운 숲이었었다. 더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시내고 가서 저 녁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우리는 합의했었다. 내가 그녀와 함께 그 숲으로 간 것 은 두번째였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먹고 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고, 나에게 혼자 사는 게 어떠냐고 물었었다. 그야 뭐 라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것 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하는 내 대답이었다. 그 뜻은 끓여 먹기 간단하고 돈이 안 든다는 두 가지를 아울러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 이르러 나는 그녀에게 우리 함께 살면 어떨까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 다. 결코 지나가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밖에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도 저녁 내내 숲가를 빙빙 돌았고 그런 만큼 실상 그것은 용의주도한 제안이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처음 만났던 것은 누구보다도 나였다. 어떤 모임의 선배로서 1년에 한 번 여는 정기 총회에 참석했다가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너무나 오래 전 일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그 녀의 주변을 맴돌고만 있었다는 생각이 드렁ㅆ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상수리나 무 아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시치미를 뗀다는 것은 그녀도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녀가 그때까지 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고 했다. 어둠 아래서 혹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우려가 있다는 듯 나는 그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누 구의 땀인지 몰라도 우 손은 땀이 배어 미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 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상수리나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숲을 빠져나와 아랫동네의 식당을 찾아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말을 잘못 했다가는 상수리나무에 사랑의 박동소리로 새겨 둔 소 중한 기억이 흐려지리라. 그런데 식당에서 순두부와 된장찌개를 시켜 놓고 먹으 려 했을 때 문득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는 보았다. 왜? 하 고 나는 물어 보아야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나도 가슴이 터질 듯 북받치며 눈에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동정했던 것일 까? 동정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바로 지금 러시아의 숲속에서 내 앞을 걸어가고 있는 친구의 아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와 그녀가 별거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나는 내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알량한 우정 때문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결말도 짓지 않고 다시 러시아로 떠나갔던 것이다. 내가 그녀와 어떤 관 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우선 그와 그녀의 관계부터 정리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는 할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려고 그를 찾아 만난 것은 맹세코 아니었다. 그것은 변함없이 그의 독자적인 몫이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그를 만나고 있단 말인가? 나는 그의 발자국이 놓 였던 자리를 되밟으며 숲속의 눈길을 가고 있다. 그러다 나는 그와 내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질 수 있는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것을 그 전에는 왜 몰랐을까 싶었다. 그것은 무엇이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같은 세계에서 같은 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지금 여우 사냥에 우연히 같이 좇아가는데 불과하지 않느냐고 윽박질러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러시아의 숲에서 하나의 생각에 도달했음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나의 생각, 그것이 어떠한 계기로 내게 깨달음처럼 찾아들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내가 그것을 위해 마치 참선을 하듯 면벽 궁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의 화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내가 특별한 제스처를 쓰려 한 것도 아니었다. 그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은 오랜 세월 우리 사이에 증명되었던 것이다. 나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했었고, 아무 말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지나 가는 길이므로 오랜 친구를 만나 본다는 거기에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그 누구라도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제발 개입시키지 말기를 바란다. 그 상 수리나무 밑의 일은 우리의 미지수의 시간, 유예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 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일이라기보다는 그 상수리나무의 일이라고 하 는 편이 옳다. 유예된 삶 속의 이야기는 당연히 유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 랑이란 유예의 시간 속에서만 스스로의 얼굴을 본다. 거울에 비친 그 얼굴이 희 미해지면서 마침내 지워져 버리면 그 사랑은 헛된 것이었음이 스스로 밝혀진다. 하나의 생각, 그것이 비록 미숙한 것일지라도 나는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러시아 숲속에 가서 사냥꾼이 되기까지의 역정, 우리의 역정에 별다른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길과 숲들과 감자 요리와 푸슈킨이 있었다. 농노들의 생 활과 고양이의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그리고 내 발에 신겨진 네 켤레의 양말. 그리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내가 어떠한 경로를 밟아 무엇을 찾아 헤 매어 가든, 찾아 헤매는 그 몸부림만은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스 꽝스러운 타협이라고 매도하지는 말기 바란다. 즉 그가 이상을 찾기 위해 허위 적거리는 것이나 내가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 허위적거리는 것이나 결국은 삶의 유예를 담보로 하지 않았으면 성립될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이었다. 그것은 엄청 난 담보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사랑의 얼굴을 보고자 한 것이었 다. 그리하여 나에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떠남은 그 마무리 확인을 의미하는 것이어ㅆ.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결코 지워져 버리지 않는 그 어떤 얼굴을 보고 자 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크롭체카의 향내가 풍겨 오고 있었다. 우리는 경사진 공토 한 귀퉁 이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러시아의 서북 평원은 저지의 소택지가 많다. 그리고 숲이 우거졌는데 그 사이사이로 풀들만 우거진 땅이 숨어 있다. 하 늘은 이제 곧 눈이라도 흩뿌릴 듯 낮아 있었다. 경사진 공터라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시 낮은 구릉이 저쪽으로 이어졌다. 어느 미술관이었던가, 포프코프라 는 화가가 그린 푸슈킨의 모습 몇 점이 있었다. 그는 어떤 집의 현관에서 바깥 의 전원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뒷모습일 뿐 향기로운 전원 풍경이 현관 을 통해 나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그림은 그의 옆으로 누운 얼 굴이 꽃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배경이 바로 저 앞에 펼쳐져 있다 는 환상에 빠졌다. 크롭체카의 향내도 그냥 숲속의 냄새일지 몰랐다. 유예된 시 간 속에 나는, 우리는 어떤 환상의 숲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자야츠!"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소리친 사람이 볼로자였는지 유 라였는지 텁석부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또 그것은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 와 함께 아무르가 뛰는 것을 보았다. 탕! 그리고 그와 함께 엽총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함께'라고 나는 쓰고 있다.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야츠!'라는 소리가 들린 것과 아무르가 뛴 것과 '탕!' 엽총소리가 들린 것은 그러니까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이었다. 나는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이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 서 '그와 함께'라는 말을 나는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소리들과 함께 아 무르가 뛰자 느닷없이 내 앞의 친구가 따라서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 그랬는 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야츠! 여우다!" 그가 뛰쳐나가면서 지른 소리였다. 그를 만나서 온 오랜 세월 동안 그가 그처 럼 맹렬하게 뛰쳐나가서 돌진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 이든 말이다. 그가 왜 뛰쳐나가는지는 몰라도 좋았다. 다만 나는 그가 그렇게 뛰 쳐나가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사냥꾼들은 벌써 여기저기로 흩어졌 으며 저기 구릉 쪽으로 아무르가 눈 속을 크게 뛰어 오르면서 달려가고 그 뒤로 그가 뒤뚱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것이 순간 적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뒤이은 내 행동은 내가 주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가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뒤이은 내 행동은 내가 주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가 필사적 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 나 또한 그를 뒤따라 앞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나는 네 켤레의 양말을 신고도 시린 발로 눈 속의 대지를 힘차게 딛 고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롭체카의 향내는 더욱 짙어지고 나무들의 잎사귀는 하나하나 미술관의 그림처럼 살아 움직이기 시작햇다. 눈이 덮인 땅도 살아 있 는 대지였다. 지난해에 마른 풀잎들도 살아서 숨쉬며 향내를 뿜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하얀 눈에 덮이고, 모든 의혹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되 었다. 나는 그가 새로운 삶을 향해 그렇게 내닫고 있다고 여겨졌다. 유예되었던 시간은 끝났다고 누군가 소리치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것은 그의 이상이 참다 운 이상으로 현실 속에 구현됨을 꿈꾸는 소리였으며, 나의 현실이 참다운 현실 로서 이상 속에 구현됨을 꿈꾸는 소리였다. "조심해!"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그림 속의 모든 사물들이 살아서 움직였듯이 모든 무 생물과 생물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나 소리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 해서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가며 한 뜀 차례마다 '조심해!'를 가슴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너, 욜카여, 사스나여, 베료자여, 러시아의 숲이여, 크롭체카의 향내여, 갈리나 의 열매여, 그림 속에 갇혀 있는 옛 풍물들이여, 사람들이여. 유예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사연들이여. 너 러시아의 자야츠여, 한국의 여우여. 나는 외쳤다. "조심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헤치고 달려나갔다. 침엽수의 바늘잎들이 커다란 노처럼 하늘의 배를 젓고, 시가 꽃잎처럼 흩뿌려지며 향내가 대기에 가득찼다. 나뭇가지가 팔을 벌려 우리를 받아들이는 곳에 대자연은 춤추고, 모든 삶은 호 수의 거울 속에 새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됨을 노래하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너, 숲이여, 강물이여, 호수여. 엽총을 들고 칼을 찬 사냥꾼이여, 통나무 집이 여, 흐린 램프여, 땅속의 매머드여, 땅 위의 짐승들이여, 하늘의 새들이여, 호수 속의 물고기들이여, 러시아의 아무르여, 한국의 사랑이여. 달려가는 내 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치고 있었다. 눈발이 한 꽃잎 두 꽃잎 흩날리고 있었다. 형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이선- 1953년 전북 전주 출생. 1987년 '소설문학' 제 24회 신인상에 단 편 '승자를 위하여'가 당선되어 등단. 1990년 장편 '기억의 장례'로 제1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장편소설 '기억의 장례', '행촌아파트', '배꽃' 해설-정과리 이선의 '형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며'는 가족 문제와 전쟁을 특이하게 결합시키 고 있는 소설이다. 어머니가 죽자 한 가정이 파산한다. 가난 때문에 모든 가족이 서로서로를 미워한다. 그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둘째아들이 고생을 떠맡는다. 급 기야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그곳에서 고엽제로 인한 병을 얻어 귀국한다. 그리고 그 병이 악화되어 죽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개의 전쟁을 병치시키고 있다. 하나는 가족들간의 전 쟁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전쟁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이 두 전쟁이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다. 그는 어느 전쟁이든 똑같은 악덕에 뒷받 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병치를 사용한다. 그 똑같은 악덕은 위선 이다. 형이 벌어올 돈에 갈증난 돈생은 전장의 형에게 "나라를 위해 머나먼 타국 땅까지 싸우러 가신 형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형은 우리 집안의 기둥 이에요."라고 편지를 쓰고, 그 형에게 몹쓸 병을 심어 준 고엽제는 '성능 좋은 모 기약'으로 선전된다. 그 위선의 끝은 자멸이라고 작가는 선언적인 어조로 말한 다. 자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둔 상처가 있다면, 마음속에 두지 '말고' 차라리 느끼는 고통보다 몇배 더 부풀려 엄살을 부려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 이 가슴속에 감추어진 상처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위선을 벗어나는 길은 서로의 상처를 교환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자신의 숨은 욕망을 솔직히 까발릴 때에만 타인의 감추어진 욕망을 열 수 있고 그와 동 등한 자격으로 만날 수 있다. 대화 형식은 그 상처드러내기-욕망열기의 언어적 실현이다. 두 개의 전쟁에 의해 희생된 아들의 아들과 그의 막내외삼촌 사이의 대화. 그러니까, 그 대화는 상처가 토로되는 장소이자 동시에 고해의 자리이며, 또한 이해의 자리이다. 형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아니 그게 뭐냐? 이 시간에 웬 사진첩을 보라고 꺼내 놓는 거냐? 아버지 앨범이에요. 큰아버지께서 깊이 잠드실 때까지 기다리시려면 너무 무 료하실 것 같아서요. 제삿상에서 물린 음식이 그대로 있는데 술 한 잔 드시지도 못하고 그냥 앉아 계시기 뵙기 민망하구요. 큰아버지는 다시 술 드시면 안 된다, 그러니 이렇게 방문 앞에서 지키고 앉아 있는 것 아니냐. 아버지 기일에 큰아버지께서 오신 게 몇년 만인가요? 그래 쉬운 걸음은 아니시지. 마음으로야 매일같이 너를 보러 오시고 싶겠지만, 집에 계시는 날보다 병원에 들어가 계시는 날이 더 많은 양반 아니냐. 그나마 이제는 병원을 들락거리시는 일도 없으실 게다. 또다시 술을 드시게 되면 돌아 가실 테니까. 어디 보자 기왕 꺼내 놓은 것이니 좀 들여다보자. 그러고 보니 사 진첩을 들여다본 적도 꽤 오래 되었구나. 그런데 이 사진은 어디서 빠져나온 거 냐? 앨범을 새로 바꿔야겠어요. 꺼내 보는 일이 드문데도 오래 되다 보니까 접착 부분이 떨어져 버려요. 이 사진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 그냥 갈피에 끼워 둔 거예요. 워낙 흐릿하기도 했지만 전보다 더 바랜 것 같네요. 이 사진 기억나세 요? 정말 꽤 빛 바랜 사진이구나. 네 아버지는 분명한데... 이제 겨우 마흔을 넘어 서서 이 지경이니, 원. 아버지는 마흔도 못 넘기셨는걸요. 작은아버지는 오래 사셔야 합니다. 큰아버 지도 오래 사시면 좋겠지만...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처음부터 천천히 들여다보자. 그러다 보면 이 사진이 들어앉을 자리를 찾겠 지. 뭘 보고 웃는 게냐? 아, 그 사진. 흐흐흐... 왜 백일기념 사진은 벌거벗고 찍지요? 그래서 아무나 벌거벗은 백일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지. 제 고모들은 이 런 사진이 없잖니.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딸들을 열심히 챙기셨지. 예브게 옷을 입히고, 길게 머리를 길러서 아침마다 곱게 땋아 주시고. 덕분에 네 고모들 콧대 가 높아졌다만. 세 분 모두 너무나 귀여워요. 천진난만한 이 표정들을 좀 보세요. 운명이 아직 본색을 드러내기 전이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차례차례 발가벗고 사진관을 들락거릴 때가 우리 아버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게다. 피난 내려오시면서 하나씩 잃어 결국에는 혼자가 되어 버린 아버지에게 가족이라는 의미는 아주 특별했지. 아이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피난 길에 죽어 간 식구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고 말씀하셨지. 봐라, 이 집이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이다. 나중에는 남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 주어야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 지방 도시에서는 이런 양옥을 짓고 사는 사람은 드물었단다. 아버지는 땅을 조금 사게 되자 새로 철공소를 짓기도 전에 이 집부터 지으셨어. 나중에 같은 마당 안에 철공소를 짓 게 되자 틈만 나면 집에 들어오셔서 우리들을 하나씩 끌어안으셨지. 그래서 어 머니는 깡깡거리는 소리가 시들해지면 잽싸게 우리들을 단속하셨지. 그 집 마당에서 찍은 건가요?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네요. 사진은 항상 할아 버지가 찍으셨나 봐요. 아버지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부리나케 사진기를 들이 대셨지. 그게 행복이셨으니까. 아무것도 예감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어. 봐라, 훈 아, 우리 어머니는 좀 미묘하게 웃고 계시잖니? 정말 그러시네요. 눈은 찡그리고, 입은 웃고... 작은고모가 영락없이 닮으셨군 요. 갸름한 얼굴이며,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까지. 하지만 할머니는 어딘지 흐르는 물 같아요. 작은고모처럼 이목구비가 야무지게 뭉쳐 있질 않아요. 햇볕이 꽤 눈 부셨나요? 우리 어머니는 항상 두통이 있었어. 결국 그래서 돌아가셨지만. 항상 눈은 찡 그리고, 입은 웃으셨지. 아주 묘한 표정이야. 그 미묘한 표정 때문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는 참 매력적으로 보였지. 어머 니는 선이 가늘고 섬세한 외모처럼 마음도 그랬는데, 배불리 먹기 위해서만도 하루가 모자랐던 그 시대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지. 마당에 손바닥만한 빈 구석이 있어도 반찬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뭐든지 심어서 식구들 입에 풀칠 해야 할 그 시절에, 우리 어머니는 마당 가득 꽃밭을 만드셨으니까. 시장까지는 꽤 멀어서, 여름이면 부엌일 하는 아줌마하고 매일이다시피 머리에 잔뜩 푸성 귀를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마당에는 파 한 뿌리 심어 놓지 않으셨다니까. 그래서 어머니는 두통을 견디느라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계시면 우리는 그 것마저도 어머니데게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쯤으로 생각했단다. 그러나 그 육십 년대가 어떤 시절이더냐. 몸빼 차림이며 재건복이 당연한 시절에, 한여름에도 살 짝 소매를 걷어 올린 고운 한복 차림이던 어머니를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한순 간 낯설고 생소한 느낌을 받곤 했었지. 그래서 우리에게 더 오래오래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지 모르지. 우린 나중에 말이다, 어머니의 뇌 속에서 자라고 있던 혹 이 없었더라면 어머니도 마당 가득히 온갖 반찬거리를 심으셨을 거라고 말했지.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굉장히 아끼셨나 봐요. 두 분이 찍은 사진을 보면 할아 버지의 시선은 정면에 있지 않은 게 대부분이에요. 할머니 쪽으로 살짝 굽었어 요. 자, 보세요. 그렇죠?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셨지. 하지만 피붙이 하나 없는 세상과 홀로 맞서 싸워야 했던 아버지에게는 더 강하고 선이 굵은 여자가 필요했을 거 야.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토록 약하기만한 어머니를 보호함으로써 아무에 게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당신을, 그 두려움을 보상받으려 하셨던 것 같다. 아버 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으니까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 닐 거야.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것을 야멸차게 빼앗아 가셨 단다. 남겨 두신 것은 도저히 깎아 내릴 수 없는 빚더미와 호강스럽게만 길러진, 제 손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다섯 남매뿐이었으니까. 완전히 망해 버렸군요. 그래서 그곳을 떠나오셨군요. 그야말로 야반 도주를 했지.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쳤으니까. 그런데 넌 여태껏 몰랐었니? 아버지께서는 통 옛날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더군요. 그래도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결혼하고 이 사진들을 보게 된 후였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 죠. 아, 여기 이 잘생긴 고등학생이 큰아버지죠? 아버지랑 작은아버지가 옆에 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몰라봤을 겁니다. 이 사진으로는 지금의 큰아버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이제는 잠이 드셨을까? 정말 다시 술을 드시면 안 되는데... 우리 모두 옛날에 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이렇게 된 지금에는 우리가 도 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네 큰아버지시다. 하기는 당신 자신도 용납하지 않 지. 그런데 사진이 이게 전부야? 에. 그래도 저렇게나마 한 권을 채워 보려고 꽤나 여백을 많이 남겼지요. 여기 결혼사진부터 정리해 놓은 앨범에도 아버지 사진은 그리 많지 않아요. 아버지와 제가 같이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니깐요. 보세요, 이 앨범은 그래도 어머니가 분 명하게 기억하시니까 차례가 조금도 틀리지 않아요. 그런 것 같구나. 저 사진첩보다 훨씬 정리가 잘되어 있다. 이 사진에는 다섯 남매가 다 모이셨네요. 결혼식인데 다 모일 수밖에. 당연하잖니. 한꺼번에 다 만나시는 일이 드물잖아요. 출가외인이 둘이나 있는데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사진이 더 있는 것 아니냐? 전에 내가 보았던 사진들이 많이 빠진 것 같구나. 네 어머님께 서 따로 간수해 두신 게 아니냐?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왠지 사진이 많이 없어졌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어머니도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빤한 집 안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이것뿐이었어요. 어머니는 누구나 그런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더 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살다 보면 결코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면서요. 깨끗이 지 워 버리고 싶은 때가요. 그러니까 네 아버지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고 믿으셨구나. 아닌가요? 그래서 따로 간수한 사진이 있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넌 어떻게 생각하니? 어머니 말씀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도 어느 땐 자고 나면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니깐 요. 이 앨범을 보세요, 어느 날 문득 가위로 싹둑 잘라 내 버리듯이 서울로 올라 온 뒤부터의 사진이 없어요. 여기에서 아버지는 시치미를 뚝 떼고 고등학생에서 느닷없이 신랑이 되셨다니깐요. 그렇기는 하다만... 아니야, 지금 얼른 생각나는 사진이 있는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왜 있잖니, 야자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말이다. 저기 벽에 걸려 있잖아요. 어머니께서 액자에 걸어 두신 게 벌써 언젠데요. 마음이 가까우면 눈이 멀어지지 않는 법인데, 그저 네게 면목없는 일 뿐이로 구나. 저 사진은 볼 때마다 배경 색깔이 너무 어둡고 진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 화가 잘못되어서 저렇게 검푸르게 된 것일까? 그 때문에 네 아버지 표정이 너무 딱딱하게 보이잖니. 그 배경색 때문에 남국의 특유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보다는 저 사진을 보면 아버지가 참 낯설게 보여요. 저렇게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상병이 아버지라니요. 그렇겠구나. 네가 본 아버지는 언제나 편찮은 모습이었을 테니까. 저기에 다녀오신 뒤부터 편찮으셨나요? 딱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워낙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좀 하셨으니까. 하 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이 죽고 사는 전쟁터에 다녀오셨는데 그 후유증이 왜 없었겠냐. 게다가 기후도 맞지 않는 곳이었으니... 아무튼 그때 사진이 더 있 을 게다. 이 사진은 아직도 생각나지 않으세요? 이 사진은 애당초 흐릿하기도 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여름날인지, 아버지가 앉아 계시는 마루에는 부채가 있 어요. 러닝 셔츠에 여름 파자마 같은 걸 입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아버지가 맥 없이 앉아 계세요. 워낙 흐릿해서인지... 어쨌든 내 생각에는 사진 묶음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 의도적인 공백기가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그러면 작은아버지는 그때 사진을 가지고 계신가요? 큰아버지도요? 고모들도요? 아버지만 잃어버리신 건가요? 글쎄다. 사진첩이 있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니까. 얘, 훈아, 이제 그만 자자. 우리 둘 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될 사람들이잖니. 공연히 우리 때문에 네 어머님도 안 주무시고 계실라. 큰아버지도 이젠 깊이 잠드신 것 같으니 문지기 노릇 그만해도 되겠다. 저는 옛날 이야기를 마저 다 듣고 싶어요. 서울로 올라온 뒤에 어떻게 되었나 요? 많이 고생했지. 남들 하는 만큼은.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우리가 하 나씩 결혼을 했고,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지. 그만 자 자. 나는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라서 하룻밤도 새우지를 못한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무래도 네가 오늘 단단히 나를 곤경에 빠뜨릴 작정이구나. 하지만 나는 무 척 피곤하다. 그만 났으면 좋겠구나.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지 않겠니.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나요? 뭐라고? 왜 돌아가셨는지 네가 모른단 말이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아니란 말이냐? 폐암으로 입원하셨다고 내게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니? 정말 그렇게밖에 모르시나요? 아니면 뭘 알고 있어야 하는 거냐? 그러고 보니, 너... 사진첩을 꺼낼 때부터 단단히 작정을 한 게 있구나. 하지만 나는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당시 우리는 그 이상 더 자세히 알 만큼 서로 잦 은 왕래가 없었어. 지금도 그러시죠. 이상하게 생각될 만큼 서로 마주보고 앉으시는 일이 없죠. 서로 돌봐주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다음에서야 가능한 거 야. 그래서 우리 형이 폐암이 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변명이랄 수도 없지 만. 정말 나는 네게 면목이 없구나. 갑자기 그렇게 되신 건 아니었잖아요. 아버지는 밖에 나가시는 날보다 방안에 종일 누워 계시는 날이 많았어요. 어느 땐 신장염이었고, 어느 땐 간장병이라고 했어요. 감기가 들면 쉽게 나가는 법이 없었죠. 걸핏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돌 아 어머니는 쑥물을 삶아대고 미나리를 짓이기시느라 손이 온통 새파랗게 물들 었지요. 워낙 오래 앓으셨고, 제대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서 매일 밥 보다 독한 약을 더 많이 드셨으니 신장이라고 성했을 것이며, 간장이라고 견디 어 낼 재간이 있었겠냐. 그러니 걸핏하면 두드러기가 돋았지. 네 아버지는 어릴 적에도 살성이 약해서 모기 물린 자리가 곧잘 종기가 되었고, 조금만 비린 생선 을 먹어도 온몸이 좁쌀 같은 돌기고 뒤덮였지. 결국 오랜 투약이 저항력을 약화 시킨 거야. 네가 그걸 모르지 않을텐데 느닷없이 왜... 정말 그렇게 돌아가신 건가요? 그뿐인가요? 그만두지 못하겠니? 모르시는 척하시는 건 아닌가요? 네가 도대체 무슨 작정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숙질간에 고약한 지경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자자. 작은아버지, 저 이제 곧 결혼할 겁니다. 좀 빠르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어릴 때부터 빨리 자라서 빨리 결혼하고 빨리 아이들을 많이 낳고 싶었어요. 우왕좌왕하는 말버릇은 언제 생긴 거냐? 정말예요. 그래서 온 집안에 아이들이 뛰어다니게 하고 싶었어요. 어릴 적에는 그렇게 해서 내가 같이 뛰어놀 수 있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아 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빨리 아이를 많이 낳아서 아버지 제삿날을 정신없게 만 들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아직 드시지도 않은 약과를 날름 집어먹는 놈, 펼쳐 놓은 상 위에 올라가 씨름을 하는 놈, 채반에 호박전을 올려놓기가 무섭게 입 속으로 집어넣는 놈, 그래서 어머니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라고 야단을 치실 겁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먹음직스럽게 차려 놓은 제삿상을 힘자랑 한답시 고 홀랑 뒤집어 엎는 녀석도 있겠지요. 어쩌면 하늘 문이 열리도록 제대로 상을 차릴 수가 없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언짢은 얼굴로 상 앞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 께 제가 잘못을 빌 겁니다. 그리고 고약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손자녀석들을 그 앞에 무릎 꿇리고 통통한 두 팔을 번쩍 치켜올리게 할 겁니다. 아버지가 그만 내리라고 하실 때까지요. 작은 아버지, 전 사루빨리 그러고 싶었어요. 이제 곧 결혼을 한다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냐. 하지만 네 아버지가 손 자들을 벌 세우게 하시지는 않을 거다. 할아버지 이마에서 태권도 시범을 한다 고 해도... 그래, 맘에 둔 아가씨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문제가 되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허어, 참. 네가 기어코 민망한 지경을 당할 셈이냐? 아버지께서 모기약 이야기를 안 하시던가요? 왜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거냐? 느닷없이 모기약이라니? 아버지가 월남에서 돌아오신 뒤에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셨나요? 별로 들은 이야기가 없어. 도대체 네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 구나. 원하는 대답은 없어요. 다만 솔직하게, 하나도 숨김없이 말씀해 주시면 돼요. 작은아버지가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요. 아버지가 월남에 다녀오신 뒤에 어떠셨는지. 네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더냐? 성남에서 살 때였답니다. 개천에서 날아든 모기 때문에 갓난 제 몸뚱어리 곳 곳에 빨갛게 부풀어오른 것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안타까워하시면서 그러시더랍 니다. 양키 놈들, 신통찮은 그 전쟁에서 모기약 하나는 신통했지... 어머니가 기 억하시기로는, 아버지께거 그곳 이야기를 하신 건 그뿐이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것도 있다. 아무리 궁색하게 살아도 비싼 화장지 를 챙겨 쓰는 작은누나를 내가 흉보니가 형이 빙그레웃으면서 그러더구나. 월남 에서 좋은 일하고 온 게 딱 두 가지 있는데, 그곳에서 사귄 아가씨에게 팬티를 꼭 입고 다니게 하고 대변을 본 뒤에 꼭 휴지를 사용하게 한 일이라더구나. 내 가 들은 이야기도 그뿐이었다. 그래서 물어 보시지도 않으셨나요? 모두 제 밥벌이를 하느라 얼굴 맞대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지. 아무리 그래도, 궁금하시지도 않으셨단 말인가요? 아버지가 어디를 다녀오셨 던가요? 그렇게도 먹고 사는 일이 중요했었나요? 이 사진을 봐라. 우리 가족들이 마당의 꽃밭에 모여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말 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숟가락 하나 맘대로 건질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앉 았지. 하지만 매일 온 집안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채권자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 에 심장이 오그라붙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우리 남매는 전과 달라진 것이 뭔지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큰누나는 여전히 부엌아줌마에게 반찬 투정을 부렸고, 작 은형은 사람들을 왜 쫓아내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짜증을 냈고, 작은누나는 꽃 밭이 엉망이 되어 간다며 물뿌리개를 들고 종일 마당에 서 있었지. 서울에서 대 학을 다니던 큰형은 고장난 전축을 고치지 못해 안달이었지. 전 아버지가 그 곳에서 돌아오신 뒤에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고 싶어요. 서울에 와서 아버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닥치는 대로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셨단다. 큰형은 입대해 버렸고, 큰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들어가겠다며 학교를 다녔지. 물 한 컵도 제 손으로 따라 마셔 본 적이 없었던 작은누나가 학교를 일단 쉬고 살림을 맡을 수밖에 없었지. 나는 다시 중학교에 들어갔고,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보지도 못하고 작은형이 아 버지를 따라나섰지. 그러니 이 사진은 자리를 잘못 찾은 거지. 머리 깎은 모습이 그래서, 서울 올라오기 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와 형이 처음으로 완성시킨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신 게지. 엄 격히 말하면 골재를 등에 지고 오르내린 몫뿐이지만. 아무튼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활을 하게되었는데도 우리는 불행을 실감하지 못했어. 누나들은 말이다, 좁고 옹색한 셋방에서도 꼭 분홍빛 레이스가 달린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제대로 불행을 실감한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지. 우리는 달 라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예전의 생활을 포기해 버린, 그렇게 살았던 적 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아버지를 미워했단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느 날,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시더구나. 큰형이 휴가를 끝내고 들어가기 전날이었어. 아 버지는 우리를 가리키면서, 이게 내 새끼들이야, 하셨지. 그 말에 우리는 얼마나 놀랐는지 넌 상상할 수 없을 거다. 어떻게 말씀하셔야 하는 건데요? 여보, 인사해요. 우리 애들입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인사해라. 새어머님이 되실 분이시란다. 그러니 무척 놀라셨겠네요. 다음이 더 걸작이었지. 아무리 알량한 집구석이래도 여편네는 있어야 해, 하면 서 그 여자 엉덩이를 툭 치시더구나. 새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데요? 공사판을 따라다니면서 밥을 파는 여자였으니까 그때 우리집 형편과 아버지에 게는 썩 잘 어울리는 여자였지. 그래서 새할머니를 인정해 드렸나요? 새할머니를 인정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어.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우리에게 내 보일 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제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달았단 다. 사실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지 몰랐던 것은 아니야. 너무 나 무서워서 뒷걸음치며 달아날 생각만 했던 거지. 그런데 도저히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여자를 본 순간 우리는 이제 더 달아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 르렀다는 걸 알게 된 거다. 큰형은 말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고, 작은형은 벽에 걸린 어머니 사진을 뚫어지라고 쳐다보았고, 큰누나는 그 여자를 눈으로 삼켜 버릴 듯이 쏘아보았고, 작은누나는 울면서 내 손을 꼭 잡더구나. 그 소름 끼치는 서늘한 감촉이라니. 나는 그저 무섭기만 했지. 아버지가 곧바로 형들의 짐을 누 나들과 내가 자는 좁은 방으로 밀어 냈는데, 우리가 어깨를 부딪히며 앉아 있는 방에서도 나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떠나고, 아버지가 갑자기 떠나듯이 어느 날엔가 모두 다 갑자기 떠나 버릴 것 같았거든. 큰형은 제대를 하고 돌아오자 우리를 내보내 달라고 아버지에게 말했지. 그리고 어떤 도움도 사양하겠다고 덧붙였지.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말도 하시지 않고 선선히 그러라고 하시더구나. 하루에도 몇번씩 끌어안아 주셨다면서요. 그런데 그렇데 달라지시던가요? 그래서 나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야 했다고 누나들에게 속삭였 지. 아버지는 꽃밭 있는 집을 우리 기억 속에서 없애 버릴 생각이셨던 거야. 그 런 아버지를 우리는 끔찍하게 미워했지. 아무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셨나요? 그래. 그리고 아버지와 헤어지고 나서 우리는 둘로 갈라졌단다. 큰형과 작은누 나는 전과 같아지기 위해서, 작은형과 큰누나는 전과 달라지기 위해서. 작은아버지는 어느 쪽이셨나요? 난 그때 겨우 열네 살이었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고, 어느 편에 달라붙어 도 다 잃어버릴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지. 큰형과 작은누나는 언젠가 꼭 옛날처럼 살게 될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옛날 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나를 윽박질렀지. 그러면 자긍ㄴ형과 큰누나가 코웃음 을 치며 정신차리라고 악을 썼지. 까칠까칠하고 누르스름한 두루마리 휴지 한 통 때문에도 얼마나 심각하게 싸웠는지 아니? 작은형과 큰누나는 시멘트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는 봉지를 일일이 다 펴서, 일정한 크기로 자른 뒤에 철사줄에 꿰어 놓고 한 장씩 손바닥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 썼지. 그러면 큰형과 작 은누나는 보란 듯이 휴지를 손에 둘둘 말았어. 그렇게 매일 싸웠단다. 나만 무서 웠던 게 아닌 거야. 모두 사는 게 너무 무서워서, 무서움을 잊어버리려고 얼른 손에 잡히는 대로 칼을 주워 들고 손쉬운 대로 눈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겨눈 거란다. 작은 아버지는 끝내 중립국이셨나요? 처음에는 큰형 쪽에 붙을 생각이었다. 어머니처럼 예쁘고 고운 형수가 전처럼 맛깔스러운 반찬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거든. 작은형은 새어머니 같은 여자를 데리고 살 것 같았지. 그런데 작은 형은 매일 나가서 돈을 버는데, 큰형은 매일같이 양복을 빼입고 나가는데고 언제나 빈손이더라구. 그래서 나는 차라리 전처럼 살게 되지 않는다 해도 내가 학비를 걱정하지 않 고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다면, 그리고 대학교를 다니게만 해 준다면 그까짓 옛날쯤이야 아무한테고 팔아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런데 작 은형이 월남에 간 거야. 나는 잽싸게 작은형에게 달라붙었어. 아무래도 작은형이 훨씬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게 된 테니까. 난 열심히 형에게 편지를 썼지. 차 마 돈을 많이 벌어 와서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은 쓰지 못했지 만, 그런 눈치를 챌 수 있도록 치밀한 계산을 하며 문장을 만들었지. 아버지가 거길 가시는 데 반대한 사람은 없었나요? 꼭 가셔야 했나요. 아무도 몰랐으니까 말릴 수도 없었지. 형이 그곳에 도착했다는 사실만 간단히 적어 보낸 편지를 받고서야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나요? 이상한 눈치도 못 챘었나요? 한 집에 살면서, 형제들이면서, 설사 말하지 않는다고 알 수 없는 건가요? 목숨을 담보로 내 놓고 돈을 벌러 가는 사람이 그렇게 태연했던가요? 넌 마치 우리가 눈치를 챘으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아닌가요? 말했잖니.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 우리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다고 모르진 않았을 거예요.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면서요. 싸우다 보면, 어느 땐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하게 되 지요. 게다가 어느 편도 힘들지 않은 쪽은 없었고, 어느 편도 맘먹은 대로 되지 는 않았을 테니까 점점 더 사납게 으르렁거렸겠지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겠지요.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구요. 마치 네가 지켜보고 서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작은아버지 말씀을 재미있게 들은 덕분이지요. 그렇다면 마저 들어라. 그러자 큰형이 소리쳤지. 그렇게 큰소리만 치지 말고 그럼 너도 월남이나 가 보지 그래. 정말 그랬었군요. 그날은 정말 치열했지. 어머니 제삿날이었으니까.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단다. 그런데 첫해에 우리는 어머니 제삿날을 깜 박 잊어버린 거야. 밤늦게 돌아온 우리는 아버지가 굳게 잠긴 방문 앞에 세워 놓고 가신 정종병을 보고서야 알았어. 우리가 빼앗아 왔는데도 아버지는 어머니 를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있었고, 우리는 빼앗아 온 어머니는 아무렇게나 내팽 개쳤던 거야. 그래서 싸우기 시작했으니 못할 말이 없었지. 모두 부끄러움을 잊 어버리려고 죽어라고 덤벼들었으니까. 형들은 미친듯이 주먹을 휘둘러댔고, 누나 들은 머리채를 잡아 흔들면서 울부짖었으니까. 나도 싸움을 말리다가 형편없이 얻어 맞았는데도, 어떻게든 더 얻어맞으려고 기를 쓰고 형들이며 누나들에게 덤 벼들었다. 세상에... 그래. 네 말대로 우리는 형이 그곳에 가리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단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너무나 무서워서 차마 형에게 확인해 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면서도, 그렇게라도 해서 우리 중에 누군가 빨리 이 끔찍한 지경에서 우리를 구해내 주기를 바랐지. 실제로 살아서 돌아만 온다면 결코 밑지는 장사 가 아니었지. 어차피 형은 군대를 가야만 했고, 거길 가면 삼십 배나 많은 월급 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형도 우리가 눈치채고 있는 걸 알았을 거야. 그리고 간 다는 말을 해도 우리가 말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도 차마 확인 하지 못한 건, 우리를 미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게다. 형은 우리가 절대로 안 된다고 말려 주기를 바랐을 테니까. 어쩌면 형은 배가 떠나는 순간까 지도 우리를 기다렸을 거야. 가면 안 된다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나는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아니? 나라를 위해 머나먼 타국땅까지 싸우러 가신 형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형은 우리 집안의 기둥이에요. 흐흐흐... 형이 벌고 있는 돈을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아첨을 한 거지. 한 번도 답장을 해 주지 않으셨나요? 한 번도...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아첨을 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형이 어떻게 답장을 할 수가 있었겠니?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 텐데... 그땐 나도 답장이 없는 형을 무척 원망했었다만 이제는 오히려 답장을 해 주지 않은 형이 눈물겹도록 고마울 뿐이다. 아,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편지를 세번재 받은 다음에서야 처음으로 답장을 했었구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데도 바로 답장이 없으셨어요? 아버지는 형이 떠난 걸 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우리에게 예 전의 모습을 보여 주시더구나. 사실, 나는 형이 돌아오도록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했지. 그래야 아버지의 고통이 더욱더 커질 테니까. 그만큼 아버지를 미워했었단다. 아버지는 형 대신, 바로 이 사진. 형이 고등학교를 들어간 기쁨으 로 손수 찍어 주신 이 사진을 하염없이 쓰다듬으시면서 어린애처럼 소리내어 우 시더라. 그러면서 여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라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는 데... 우리는 그제사 우리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깨달았어. 아버지는 형이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실망한 나 머지 형을 데리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셨거든. 나는 형에게 잘 있다는, 그리고 꼭 살아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써 달라고 간절히 말했지. 급기야 큰형도, 누나들도 편지를 보냈어. 아버지에게 살아온다는 믿음을 드리라고 말야. 그러나 형이 심각한 사태를 알고 편지를 보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사죄하고 계셨지. 편지가 한 번 오고가는 데 괘 오래 걸렸으니까. 모두 아버지를 원망하셨겠군요. 그래서 아버지 기일이 쓸쓸했군요. 네 아버지를 원망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그저 너무 엄청난 결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지. 그래고 형이 살아 돌아왔단다. 형은 갈 때처럼 올 때에도 아무 말없이 돌아왔어. 우리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지. 고작 누나들이 돌아서서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다시 싸우지는 않으셨겠네요. 한 번 더 싸우긴 했지. 형이 자기가 벌어 온 돈으로 자그마한 산을 사서 아버 지와 어머니를 함게 모시자고 했거든. 형 혼자 우리를 상대했고, 옛날에 비하면 시시한 싸움이었지. 형의 돈이니까 형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국 그 산은 형이 편히 누워 쉴 집이 되어 버렸지. 돌아오신 위에 이상한 증세를 보이시지는 않았나요? 두 분을 산에 모시고 나더니 형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어. 늘 아픈 사람처럼, 쉽사리 감기에 걸리고, 고열에 시달리고... 우리는 형이 오랜 긴장에서 풀려나느라 그런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사람은 산다는 핑계로 얼마 나 무서워지는 줄 아니?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되어 가니 종일 맥없이 방안에서 뒹굴기만 하는 형이 말할 수 없이 짜증스러워진 거야. 기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피했지. 안전핀이 뽑힌 폭탄 을 각자 가슴속에 하나씩 품은 거야. 그러니 어떻게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겠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 가슴속의 폭탄만으로도 아슬아슬한 곡예인데 말이다. 그 래서 우리는 서로 빨리 집을 나가려고 애를 썼단다. 그러면서도 교활하게 우리 는 하루 종일 주워 자기만 하는 형이 지긋지긋하다는 핑계를 내세웠지. 맨 먼저 큰누나가 봉곳해진 배를 감추고 빠져나갔어. 그리고 큰형이 어느 날, 내가 상상 했던 것과 정반대로 새어머니 같은 여자를 데리고 살림을 차리더구나. 작은누난 용케 더 버텼지. 어떻게든 형을 먼저 내보내려고 애를 쓰더구나. 어떻게든... 가 만있자, 훈아, 아까 그 사진 말이다. 이제사 생각이 난다. 그래, 이 빛 바랜 사진 말이다. 작은누나가 형을 연애하게 해 주겠다며 친구한테 보일 사진을 찍는다고 별렀었지. 이 장면이 선하게 기억 난다. 그래, 큰형이 어디에선가 중고 사진기를 사 들고 왔지. 그래서 큰누나가 작은형의 머리를 예쁘게 잘라주겠다며 미장원을 비우고 달려왔어. 그러면서도 우린 왠지 서먹서먹하고 쑥스러워서 형을 깨워 놓 고도 딴청을 부리기만 했지. 그래도 작은누나가 제일 용감했어. 형이 미간을 찌 푸리며 완강하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도 넉살좋게 웃어가면서 사진기를 들이대더구나. 우린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 개를 제대로 돌리지도 못하고 두 사람을 훔쳐보았지. 그런데 분명히 웃고 있었 는데 말이다. 문득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겠니. 누가 봤을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그날이야. 바로 그날. 우리가 어설프게나마 솔직해 보려고 애썼던 날 이야. 그런데 형이 이 사진을 가지고 있었구나. 제일 형편없이 나와서 작은누나 가 빼내 버린 걸 형이 슬그머니 가져간 거야. 얘, 훈아, 형이 왜 그랬는지 알겠 니? 모르겠어요. 작은아버지, 제가 알고 싶은 건 거기에 돌아오신 뒤 어떤 증세를 보이셨냐는 거예요. 그런데 왜 자꾸만 다른 이야기로 돌리시나요? 얘, 훈아, 네 아버지는, 형은 그날 우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알았던 거야. 작은아버지, 저는 정글의 나뭇잎들이 깡그리 삼켜 버렸다는 모기약이 내 몸 어느 구석인가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 그런 기사를 다 찾아 읽어 보았어요. 책도, 자료도, 열심히 찾아 읽어 보았어요. 제가 듣고 싶은 건 바로 그런 이야기라구요. 네 아버지의 몸에 검붉은 반점이 나타나지 않았었냐고? 팔다리가 마비되지는 않았었냐고? 뼈나 관절이 썩지는 않았었냐고? 아시고 계셨군요. 그래. 나도 네가 찾아서 읽어 본 만큼은 읽어 봤으니까. 왜요? 작은아버지께 전염되었을까봐서요? 아니면 보상금을 탈 수 있을까봐서 요? 유전될 염려는 없으니까 보상금 쪽이 정답이겠군요. 아직 어느 집도 그 옛 날만큼 형편이 좋은 건 아니니깐요. 네가 올해 스물여섯이 되었지? 또 말씀을 돌리시는군요. 봐라, 스물여섯 살이던 네 아버지의 모습을. 이 흐릿한 사진 속의 아버지와 너 를 비교해 봐라. 너는 얼마나 건강하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니? 나도 너처럼 성능 좋은 모기약에 관한 기사를 꼼꼼히 찾아 읽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되기 않기를 바랐고, 나는 차라리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고 바랐지. 차라 리 그랬다면 우리가 형에게 느꼈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보상금 때문이었냐고? 그래, 보상금을 탈 수만 있다면 그 동 안 돌보지 못한 너희집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을 테니 전혀 계산해 보지 않았 다고 할 수는 없지. 아무튼 나는 형이 다녔던 병원을 일일이 다 찾아다녔고 군 기록도 찾아보았다. 다행인, 불행인지 형의 사인은 단순히 폐암이었을 뿐이더구 나.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서야 제게 차마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단다. 정말인가요? 작은아버지 말씀을 믿어도 되나요? 단순히 그뿐이었나요? 나는 지금도 내가 형에게 썼던 그 편지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너를 보면 그 편지의 구절들이 떠올라서, 형의 제삿날이 가까워져 오면 도저히 참석할 수 없는 핑계가 생기기만을 바라지.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바보들이냐. 얼마나 서로 용서받고 싶어하는지를 알면서도,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고도, 형을 그렇게 죽 게 만들고도, 이제는 큰형마저도 죽게 될 텐데도, 아직도 서로 마주앉는 일조차 두려워하니 말이다. 큰아버지는 다시 술을 드시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를 바랄 뿐이지.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어디 큰형뿐이 냐. 큰형은 술을 먹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고, 누나들과 나는 그렇지 못한 것뿐이 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어느 날 밤에는 온몸이 가려워서 잠 을 자지 못하기도 했어요. 의사는 아무 의상이 없다고 말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 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전 두려워요.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그리고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 야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란다. 암, 결코 아무런 증세도 보여 주 지 않지. 그러다가 스스로 자멸할 뿐이지. 그러나 네 마음 속에 감추어 둔 상처 가 있다면 너무 오래 참지 말거라. 차라리 네가 느끼는 고통보다 몇배 더 부풀 려 엄살을 부려라. 그래야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감추어진 상처를 볼 수가 있지. 자, 훈아, 이 빛 바랜 사진은 이제 제자리에 넣어 두어라. 이 한 장이면 네 아버 지 사진첩이 비어 있는 부분을 충분히 메울 수 있지 않겠니? 먼길 이순원- 1957년 강원 강릉 출생. 1988년 '문학사상' 신춘문예에 단편 '낮 달' 당선. 소설집 '그 여름의 꽃게', '얼굴'. 장편소설 '우리들의 석기시대', '압구정 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해설-정현기 현실원리는 언제나 실제적인 물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양심원리는 그와 반대로 정신적 영적 토대 위에서 현실원리가 작용하려는 상태를 넘어선다. 사람은 늘 탐욕의 등밀이 때문에 현실원리에 따른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자 리잡고 있는 양심원리를 따라 웬만한 사람이면, 자기가 대신한 히생자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갖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순원의 단편 '먼 길'은 바로 인간의 이런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한 가족이 6 25 전쟁 당시 북쪽으로 밀리는 인민군들의 짐을 지고 따라나서도록 강요받는다. 젊은 자식들을 둔 부모 마음은 순간적으로 누가 그 짐을 떠맡는 것 이 가정이익에 보탬이 될까를 판단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어떤 결정을 하 든 그 결정에 의해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고통을 피할 길은 없다. 드디어 형 대신 동생이 짐을 지고 간 후 소식은 끊겼고 분단상태로 세월이 지난 다음날에 살아 남은 이들의 마음의 짐과 괴책감은 이어서 내린다. 이 죄책감은 직접 전해 받거나 당사자 아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업슨ㄴ 마음가짐이다. 산업화, 도시화된 현대인들, 그리고 과거보다는 미래 쪽에만 관심 갖도록 교육바당ㅆ으며 그런 양 심원리에보다는 현실원리에 충실하도록 교육받은 세대 사람들에게 한 가족간에 혹은 민족간에 그처럼 얽힌 원리들의 무딪침은 먼 남의 일처럼 느껴지도록 순치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이처럼 숨겨진 차원의 사는 일을 얽힘과 가족사를 들추어냄으로써 우 리가 살면서 정해놓은 사안의 중요성 문제를 심중히 다시 검토할 것을 요구한 다. 어쩌면 한국인 가족들 모두는 그런 숨겨진 원리충돌에 의한 죄의식과 그것 을 억눌러 스스로 살아 남았음을 위로하려는 비양심적 마음가짐을 숨겨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런 인간의 비정한 타성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인간의 인간됨에 관한, 양심원리에 입각한 도리세우기를 꾀하고 있다. 작가가 정신주의 를 추구하는 한 명증한 실례가 될 터이다. 먼길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다 돼 가고 있었다. 내가 먼저 여보세요, 하고, 저쪽에서 다시 여보세요, 할 때 나는 그것이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무엇엔가 쫓기듯 몹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과 거의 동시에 얼마 전 아버지가 원주 기독병원에 열흘 가까이 입원해 계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밤늦게 걸려오는 전화라 까닭없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더구나 강릉에서 걸려 오는 어머니의 전화거나 형님의 전화일 경우 저쪽에서 여보세요, 하는 순간 무언가 가슴까지 다 서늘해지고 마는 것이 었다. "자는 걸 깨웠디나?" 순간 어떤 안도감처럼 아버지의 일 때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정 맞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랬다면 어머니는 자는 걸 깨웠디나? 하고 물을 하이 도 없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할 말부터 먼저 했을 것이다. 또 그런 일이 아니라 면 자정 다 된 시간에 전화를 하고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뇨. 막 누우려던 참이었어요." "느 놀랜다구 밤 늦구러는 전화를 안 한다는 기 안 할 수 있어야재." "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읍에 아재가 죽었어야." "읍에 아재요?" "그래. 기한이 어머이 말이다." "지금 어디 있는데요?" 나는 그 아재가 죽었다는 소리를 방금 듣고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안부를 묻듯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재를 아는 사람 누구에게 전화를 해도 모두 첫마디에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왜 죽었 는지보다 그 동안 어디 있었는지가 더 궁금한 사람이 바로 읍에 아재였다. "맹간 전에 숨을 놨는기. 올라믄 진즉에 오던지 하지, 나간 정신에 그래두 숨 떨굴 때하구 자린 알구 왔는지 어쨌는지, 무슨 팔자가 거지구 그런 상거지가 없 이 해 가지구 온 걸 받아 눕혔더니만, 고만에 하루를 못 넹기구성 그래 가고 마 는구마..." "그 동안 어디 있었대요?" "모르제 그거사. 다 죽게 돼 와 노니 지 할 얘기는 어떻게 뚬벅뚬벅 해두 거 대해선 입두 쩍 안 하니 묻길 하나 뭘 하나 그럴 분수도 아니었구. 그래다 저렇 게 덜컥 숨부터 떨궈놓는기..." "기한이 형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요?" "알믄사 거부텀 기별하제. 그래서 둘째한테 기별하구성 시방 니한테 기별하는 기다. 낼 모레가 장산디 어예 올 수 있겄나? 아버지는 둘째만 내려오믄 된다구 하지만서두 그래두 그게 어디 그라야제. 남들이 와 봐도 그렇지. 느 형제들이 곁 에 같이 서 있는 기 나머 눈에 보기에두 날 거구." "그래야지요. 일이 좀 있어 내일 일찍은 못 떠나더라도 저녁 땐 닿도록 할게 요. 그런데,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느 아버지야 늘 고만고만하지야. 병원에선 아무 탈이 없다구 해두 당신이 아 프다니 그기 탈인 거지 뭐 다른 기 탈이긋나." "날씨가 추워서 더하실 거예요. 얘기를 들으니 살구씨 기름이 좋다던데..." "것두 누가 얘기해줘 안 해본 기 아이다. 다 해본 거지. 금, 그만 들어가구 자 거라. 둘째는 시방 준비해 새벽에라도 닿는다는데, 니는 늦게라두 어떻게 좀 짬 을 내구." "막내한텐 제가 전화를 할게요." "그래라. 괜히 집에서 전화를 해 놀래라다나... 사람이 무슨 팔자를 타고나 어 째 죽는 것두 꼭 그래 죽는지. 생전 좋은 시절 한번 구경두 못하구성... 어여 자 거라." 그리고 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의 일이 아닌 게 다행스러운 한편 그게 읍에 아재의 세상 떠난 소식이 었다는 것이 바람처럼 못내 가슴 한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어린 시절에 본 읍에 아재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끊을 수 없는 끈처럼 떨 어지지 않았다. 전화를 하자 동생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재가 어디 있었느냐고 묻고, 아 버지는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을 무렵 기한이 형 얘기를 물은 것도 나와 똑같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읍에 아재의 죽음에 대해선 둘째 형님이 제일 생각이 많을 것이었다. 어쩌면 자다 일어나 형수님도 함께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 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쪽 애들은 한 이틀쯤 스스로 챙겨 먹고 학교 다닐 나이 들이 되었다. "시골에 누가 돌아가신 모양이지요?" 동생과 통화를 끝내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물었다. "아마 당신은 모를 거야. 읍에 작은댁 아재라고..." "우리가 작은댁이 어디 있어요? 아버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모른다는 거지. 본 적도 없을 테니." "누군데 그래요? 형제가 다 내려가야 한다는 걸 보니 먼 친척 같지는 않은 데..." "그 동안 살기를 멀리 살아서 그렇지 다지면 가깝고말구지. 우리한테 당숙모 되시는 분인데." "몰라요, 난 그런거. 당고모니 당숙모니 하고 촌수 따지는 것도 골치 아프고." "그럼, 당신 지난 여름 작은할아버지 산소 이장한 건 알지? 그때 왜 방학이라 애들 데리고 다 내려갔다 왔잖아." "알죠, 그거야. 이다음 아버님 돌아가시면 둘째아주버님이 그분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할아버지 아니에요?" "바로 그 할아버지의 며느린데, 더 쉽게 설명하자면 아버님한테 사촌 재수씨가 되는 거구." "그럼 뭐 멀진 않아도 아주 가깝지도 않네. 난 또 형제들이 다 내려가야 한다 길래 엄청 가까운 친척인 줄 알았더니." "이런 사람하고는. 그보다 더 가까우면 바로 아버지 형젠데, 아버지한테 형제 가 없으니 다른 집 사촌들보다 더 가깝다는 거지. 당신이야 아버지 형제가 많으 니 당숙이 뭔지 가까운지도 모르고 살지만..." "그래, 내일 갈 거예요?" "갔다와야지. 형님은 형수님까지 데리고 지금 떠난다는데." "일할 거 많다면서요." "많으니 어떡해? 그래도 갔다올 덴 갔다와야지. 애들이 크다면 당신도 가야 할 자리를 혼자 가는 건데."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한 것인데, 먼저 형님 댁에는 형수님까지 내려갈 거라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아내도 더이상 가라 마라 없이 순순히 물러서는 것 같았다. "그럼 얼른 누우세요. 내일 또 운전해 내려가자면..." "일찍 올라온다 해도 모레 저녁 때쯤이나 올라오게 될 거야. 베개 이리 주고." "그나저나 지금 내려가자면 둘째형님 힘드시겠다. 아주버님이야 아버님이 정한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무슨 옛날 얘기 속에 나오는 것처럼 죽기 하루 전 읍에 아재가 이십 년 가까이 전에 떠났던 집을 찾아왔다는 것도 그랬고, 지난 여름 작은할아버지의 산소 이장 때 아버지가 작은형에게 했 던 말도 그랬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앞일에 대한 이런저런 요량과 준비가 생기 는 건지 그 두 가지의 일이 마치 한일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이 해 가지구 온 걸 받아 눕혔더니만, 하던 어머니의 말이 영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안 자고 그래요?" "그 아재 말이야." "자꾸 생각하지 말고 그만 자라니까요. 내일 가야 한다면서 어떻게 하려고..." "당신 말이야, 당신 같으면 열여덟 살 때 시집을 가 아들 하나 낳고 난 다음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행방 불명되었다면, 아니지, 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으면 십중팔구 죽은 거나 다름없겠지. 그런데도 그 아들 하나 바라보고 평생을 혼자 살 수 있겠냐고?" "묻는 것도 꼭... 누구 귀신 만들 일 있어요?" "그렇다고 개가를 말릴 시부모가 있는 것도, 팔아먹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 데 말이지." "그 아재라는 분이 그랬어요?" "그래. 그러다 나중엔 그렇게 쳐다보고 살던 아들 때문에 정신까지 이상해지시 고." "그런데, 아들이 있다면서 왜 둘째아주버님이 그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또 지금 한밤중에 내려가고 그래요?" "그거야 있어도 그럴 만하니 그러지.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아버님이 그 할 아버지나 아재에 대해 마음속으로 어떤 빚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결혼한 지 십 년이 다 되는데도 강릉 일은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머 니가 오셔서 하는 얘기를 들어 봐도 별일도 아닌 일에 이 사람 저 사람 얽혀 복 잡하기만 하고." "시골 집안일이라는 게 어느 집이나 다 그렇지." "그만 얘기하고 자요. 나도 잘 테니까." 아내는 한 손으로 베개를 쓸어안은 채 비스듬히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그 러나 나로서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건 이따금 돌아오는 제사 때마다 어김없이 시골 큰집에 와선 자루 짧은 부엌 수 수비를 들고 나와 있는 대로 허리를 굽혀 앞마당을 쓸고 있는 젊은 읍에 아재의 야무지고도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또 그 그림은 어느 결에 마당 앞자리에 내다 깐 멍석 위에 행주치마를 두르고 앉아 잿가루(옛날 기왓가루)를 묻힌 짚으 로 놋제기들을 닦으며 제사 뒷설거지를 하는 모습으로 바뀌곤 했다. 그때 어머 니는 시골에 살면서도 파마를 하거나 고대머리를 했는데, 읍에 아재는 강릉 시 내에 살면서도 늘 할머니들처럼 쪽진 머리를 한 다음 비녀를 꽂았다. 언젠가 두 분 중 한 분은 벽에 붙인 거울 앞에서, 또 한 분은 조각거울을 문 지방에 비스듬히 세워 놓고 앉아 머리를 손질하다가 아재의 쪽진 머리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제사를 지낸 날 아침, 어머 니는 시장으로 쌀을 내러가기 위해 머리를 다듬고, 읍에 아재는 다시 아재가 일 하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머리를 다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머리 묶을 짧은 고무줄을 입에 물고 쓰다듬듯 두 손을 올려 빗질을 하는 아재에게 먼저 어 머니가 말했다. "이봐 동서, 자네두 인자 그만 머리를 바꾸지 그러는가. 감느라구 더디구 말리 느라구 더디구 묶어 쪽찌느라구 신경 쓰구 하지 말구." "지는 괜찮아요. 늘 이래 놔 이게 편키두 하구요." "그래두 짧은 기 편할 낀데. 어디 출입할 일 있으믄 자른 머리를 뒀다 얹거나 고대를 해 부풀리믄 되구. 나(나이)도 젊은 사람이 남 보기두 그게 나을 끼구." "아이구 형님두, 서방 잡은 년이 눌 보라구 머릴 손질해 뭘 하게요. 당장 큰사 랑 (큰)아버니 보셔두 그렇지." "아버니가 왜? 나두 언제부텀 이렇구러 했는데." "어디 형님하구 지하구 같애야지요. 형님이야 서방님 계시니 괜찮아두 지야 그 랬다간 큰댁 대문에 발그림자두 못 비치게 하실 낀데." "아무렴 그러시기꺼정 할라구." "형님은 모르셔요. 기한이만 해두 지 에미 입성이 조그만 달라져두 눈을 치뜨 구 내리뜨구 하는기." 늘 그렇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읍에 아재의 모습은 제삿날 아침이거나 전날 의 야무지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또 내 기억으로 우리는 읍에 아재가 집에 온 것만 보고도 오늘 밤 제사구나 알 정도로 한 번도 제삿날을 빼놓은 적이 없었 다. 기한이 형은 안 올 때가 있어도 아재는 한 번도 명절이나 제삿날을 어기지 않았다. 어쩌다 무슨 일로 제사에 들지 않은 날 읍에 아재가 다니러 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런 출입은 일년 가도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정도였는데, 그건 아재가 기한이 형과 함께 살며 일하는 곳에서 제사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 면 쉽게 몸을 뺄 수 없다는 얘기디기도 하다. 뒤늦게 깨달은 일이지만 강릉 시 내에서도 제일 큰 여관에서 식모살이를 한다는 게 이만저만 해야 할 일이 많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간 읍에 아이는 무얼 하나 하는 걸 봐두 야무지구 알뜰하기가 여간 아니 다. 세월만 망한 것 안 만났어두 알토란처럼 살림 일궈 살 애를 그 망할 눔의 세월이 그 난리를 쳐놨으니..." 읍에 아재가 다녀간 다음이면 할아버지도 꼭 그 소리를 했다. 삼십 년 안팎 전, 아들과 함께 먹고 살 자리를 찾아 여관에서 식모를 살며 이일 저일 바쁜 중 에도 아재는 서른 개도 넘는 객실에서 나오는 담배꽁초를 죄 모아 제사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곤 했다. 처음엔 늘 그 꽁초 포대를 기한이 형이 사랑에 들고 와 내놓고 해 다들 기한이 형을 칭찬하곤 했는데, 그것도 다 아재가 어른 들 앞에 기한이 형의 낯을 내주기 위해 일부러 갖다 드리는 일만 따로 시켰던 것이었다. 우리가 알기로 기한이 형은 아무리 시간이 나더라도 누굴 위해 곰살 궂게 그걸 모을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어른들 앞에 아재가 신경 썼던 건 기한 이 형과 동갑인 작은형이었다. 생일은 기한이 형이 다섯 달인가 여섯 달인가 빨 라도 공부와 행실은 늘 작은형이 저만시 앞섰다고 했다. 형과 기한이 형이 한 학교를 다니던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읍에 아재 는 바로 뒷집에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때의 일은 희 미하게라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기한이 형의 가장 먼 모습은 반듯하게 중학생 모자를 쓴 채 제삿상 앞에 절을 올리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떠오르는, 그 모자를 부러워하던 작은형의 모습으로 비루어 그때 기한이 형은 중학생이었던 게 아니라 멋으로 중학생 모자를 쓰고 다니는 국민학교 6학년생쯤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 형제가 그 아재를 읍에 아재라고 부른 것도 아마 그 아재가 시내 여관으 로 식모살이를 하러 들어간 다음부터의 일일 것이다. 강릉이 읍에서 시로 바뀐 지 오래 된 다음의 일인데도 어른들은 시라고 부르지 않고 여전히 읍이라고 불 렀다. 읍에 갔더니, 읍에는, 읍에 누가 그러는데, 읍에 사람들은... 어머니는 우리 가 살던 면이 그 시의 일부로 편입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시내 번화가 쪽을 읍이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 우리도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강릉 시내 지명이 '읍' 이라는 말인 줄 알고 썼다. 또 이웃 아이들에 대해 읍에 가까운 친척이 한다는 것에 어떤 긍지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더구나 우리는 읍에 아재의 집인 줄 알고 있었다. 형들은 몰라도 나와 동생은 그랬다. 언제 봐도 읍에 아재는 단정했 고, 기한이 형은 멋쟁이였다. 그런 읍에 아재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흑흑 소 리내 울던 때가 있었다. 그때 큰형은 대학시험을 몇달 앞둔 고등학교 졸업반이 었고, 작은형과 기한이 형은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는데, 무슨 제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며칠째 읍에 아재가 해 떨어진 다음 저녁 늦게 집에 와선 어른들과 된 다, 안 된다, 애원하듯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우리가 일어난 아침이면 옛날 이 야기 속의 우렁이처럼 다시 읍으로 돌아가 모습을 감추곤 했다. "글쎄, 그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기 보담두 어느 쪽이든 느들이 의논해서 정 해라. 나야 느들 의논 나는 대로 도장을 찍든 말든 할 것이니." 그건 어느 날 한밤중, 뒤가 무거워 일어나 들은 할아버지의 소리였다. "(큰)아버니 계시구 서방님 계시지만, 지두 그 냥반 살아 있다구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니요, 벌써 저 세상 사람 되구 말었겄지요. 살았다믄 돌아와두 벌써 돌아왔을 기구, 그 해 져울에 나가서 햇수루다 십육 년이 지난 안죽꺼정두 소식 이 없는 걸루다 봐선 어쩌다 목숨이 붙어 있다구 해두 그건 삼팔선 너메 목숨이 지 이녁 목숨은 아니겄지요. 그렇지만 암만 그렇다구 해두 지 눈으루다 주근ㄴ 걸 봤나, 죽은 걸 본 것두 아닌 냥반을 으떻구러 죽었다구 사망 신고를 낸대요. 지는 못해요. 아버니하구 서방님 말씸 다 따라두 그것만은 지 손으루다 못해요. 지는 그런 신고 안 해요. 할 수 없어요." 그때 이미 아재는 울고 있었다. "아주머이요, 대구 그렇게 안 된다구 할 기만 아이라 어디 내 말 좀 들어보우, 아주머이가 그 해 동생이 집을 나간 다음에도 지금꺼정 혼자 사는 기 누구 때문 이우? 첨이사 동생 돌아올 날 기다리느라 그랬다지만 그것두 한두 해지, 나중엔 기한이 때문에 그런 거 아니우? 내 얘긴 그 일두 아주머이 말대로 십육 년이나 지났으니 인자는 기한이 앞날을 생각하자는 거지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는 아주머이도 잘 알잖수. 여게 아버지가 간 것두 아니구 삼촌이 그때 의용군으 로 간 집 아 하나가 지난번에 경찰 시험을 봤는데 어떻게 된 줄이나 아우? 남 잘 때 안 자구 공부해 기껏 시험에 오르구 나니 나중에 신원조산가 뭔가 나와 그게 그만 사단이 돼 죽두 밥두 안 된 거 왜 모루. 그깟 순경 하나 뽑는 시험에 두 그 낭개를 치는데, 이다음 기한이가 공부를 해 판검사 시험이라두 친다믄 그 때는 으떻구러 하겠수? 옛날에는 양반 상놈 갈라서 상놈 자식들은 암만 재주가 있어두 과거시험을 못 보게 했지만, 시방은 그 양반 상놈을 난리통의 일루다 갈 라 그런 집 아들 출세를 막는다는 걸 왜 모루? 막말루 해서 우리 아들들은 한 치 건너구 기한이는 바루 한 치 아니우? 또 아주머이 하는 기 기한이 하나 잘되 는 거 보구성 사는 기구." "그래두 서방님 난 못해요. 내 손으로 으떻구러 죽는 걸 본 것두 아닌 사람 을... 그때 그 냥반 떠나던 해, 멀쩡히 누워 있는 사람을 큰어머니 편찮던데 큰댁 에 좀 가 데다 보라구 등을 떠밀었던 것두 내가 그 냥반 잡아먹을라구 그랜 기 아닌가 싶어 얼굴을 들지 못하구 사는데, 거다 인자 당신은 이 세상 사람 아니 다 하는 신고꺼정 으떻구러 지 손으로 낸대요." "알아요. 나두 아주머이 마음 다 안다구요. 그렇지만 설령 동생이 어딘가 살아 있다구 해두 인자는 동생보다 기한이를 더 생각해야지 않겄수. 다른 건 다 그만 두구 기한이 앞날만 생각해 보라구요. 갸가 공부를 해서 이다음 뭘 하재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걸 생각해 보라구요. 판검사 시험을 봐 그 시험에 올랐는데, 나 라에서 뒤로 신원조사를 나왔다구 생각해 봐요. 호적엔 시험에 오른 이기한이 아버지가 살아 있는 걸루 되어 있는데, 실지룬 이기한이 아버지가 없다, 그럼 이 기한이 아버지는 어디에 있나, 또 조사를 하니 일사 후퇴 바로 다음 이쪽에서 다시 치구 올라 갈 때 북쪽 군대 짐을 져주러 끌려가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 다, 이렇게 되믄 앞날이 구만리 같은 갸 인생은 거기서 그냥 끝나구 만다 이 말 이우. 더구나 지금 호적에 동생은 바루 여기 이 집 주소에 살아 있는 걸루다 돼 있어 놔 선거 때믄 선거하라구 통지 나오구, 뭐 하면 뭐 하라구 나오구, 이러다 간 언젠가는 동생이 여기 없는 걸 면사무소에서 먼저 알구 행방 불명으로 정리 를 해버린다 이 말이우. 지금 이것두 내가 먼저 이렇게 하자구 생각해 낸 기 아 니우. 지금 동네 이장하는 이가 나라에서 곧 그런 사람들의 호적을 다시 정리할 모양이니 동생 얘기를 하며 그 전에 먼저 손을 쓰라구 일러줘서 내가 아주머이 보고 이젠 돌아오지 않을 사람보다 기한이 앞날을 생각하자구 하는 얘기란 말이 우." 나는 더이상 무거워진 뒤를 참지 못해 막 깨어나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잠결인 듯 눈을 비비며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야가 들은 게 아니야? 하고 놀란 얼굴을 하고, 읍에 아재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앉아 눈물을 훔쳐냈다. "왜 안 자구 일어났나?" 어머니가 책망하듯 말했다. "똥이 마려워서..." "달르(닭) 삼신이 들었나? 나이두 그만한 게 제적잖게 밤똥을 누게. 이리 온 나. 에미가 데려다 줄 테니." 어머니는 바깥 변소까지 어릴 때에도 한번 해 주지 않던 밤똥 동무를 해 주었 다. "아끄매 금방 일어나던 참이었나?" "어." "아버지하구 읍에 아재하구 무슨 얘기하는 거 들었디나?" "몰라. 무슨 얘길 했는데?" "아이다. 아무 얘기두. 나는 니가 벌써 일어나 밍기적거리고 있었나 해서... 인 자는 그거 달그새기 주고 밤똥 누지 마라."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리 기한이 형을 팔아도 그건 기한이 형을 위해서가 아니 라 큰형이나 작은형의 앞날을 위해서 꾸미는 일일 것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기 한이 형은 오르고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이다음 과연 그런 시험을 볼 재목조차 될지 의심스러웠다. 지난 겨울, 아직 중학교 졸업식도 치르지 않은 기한이 형 주 머니 속엔 한 갑에 60원 하는 신탄진 담배와 아무 데나 대고 긋기만 하면 불이 켜지는 딱성냥개비가 들어 있었다. 결국 그날, 읍에 아재는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 었는데도 시내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부엌일을 하는 아재의 눈 이 벌에라도 쏘인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 아침 밥상을 물 릴 즈음, 동네 이장이 와 무슨 서류를 펼쳐 놓고 거기에 읍에 아재와 할아버지 와 아버지의 도장을 차례로 찍고, 그 마지막에 자신의 도장을 찍어 면사무소로 가져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아버지는 그 일 이후 이장에게 양복 한 벌을 지 어주고, 또 기한이 형의 그 해 남은 월사금을 모두 내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후에도 기한이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읍에 아재는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한결같이 쪽진 머리를 하고 집에 오곤 했다. 그러나 기한이 형은 올 때보다 올 때보다 안 올 때가 훨씬 더 많았고, 그때마다 읍에 아재는 같이 가자니 갸가 공부 때문에 못 온다구 그러잖우, 하고 기한이 형의 편역을 들었다. 아마 그때까지, 아니 이후에도 나는 읍에 아재가 양장을 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쩌다 여관으로 심부름을 갔을 때, 아재는 남색 몸빼에 회색 스웨터를 걸치고 있곤 했는데, 내 눈엠 그것만으로도 다른 모습으로 보일 만큼 아재는 늘 한복을 입고 출입하곤 했다. 그렇게 늘 야무지고 단정해 보이던 아재가 오락가락 정신을 놓기 시작한 건 기한이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였다. 그해 작은형은 서울대학교에 들 어가고, 기한이 형은 그 해 처음으로 실시된 예비고사에조차 떨어져 대학 문턱 은 고사하고 시험조차 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기한이는 왜 안 오구?" 제사 때 누가 그렇데 묻기라두 하면 아재는, "갸, 지금 학교 댕기잖우."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곤 했다. "기한이가 학교를 들어갔단 말이제? 어느 학교에 들어갔는데?" "갸, 지난봄에 서울대학에 시험 봐 올랐잖우. 그래서 며칠 전에두 돈 부치라구 편지가 왔는기." 그때 기한이 형은 서울에 올라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에도 기 한이 형은 예비고사에서 떨어지고, 아재는 누가 묻기 전에 먼저 우리 기한이 지 금 서울대학에 다니잖우, 말했다. 그러다 누군가 기한이가 무슨 서울대학에 다 녀, 서울대학은 이 집 기진이가 다니지, 하면 왜요, 우리 기한이두 올해 기진이 가 다니는 그 학교에 들어갔는데 안죽 모루? 했다. 사람들은 아재가 안 보는 곳 에서 기한이가 대학에 한이 진 게 아니라 어머이가 한이 진 거라고 수군거렸다. 후에 아재의 입에선 서울대학 외에도 고레대학과 연새대학이 연달아 나왔고, 이 제 곧 기한이 형이 고등고시 시험을 봐 판검사가 될 거라고 했다. 어쨌거나 아 재가 십년도 넘게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 모은 돈을 기한이 형이 죄 바닥내고 말았다는 소문이 돈 건 아재의 그런 증세가 깊을 대로 깊고, 삼수 끝에도 예비 고사에 오르지 못한 기한이 형이 입대를 위해 다시 강릉으로 내려왔을 무렵이었 다. 그리고 거의 같은 무렵 작은형은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적잖이 아버지가 걱 정하던 신원조사도 무사히 끝났다. 아버지의 말로는 읍에 방첩대에서 면소에도 나오고 동네에도 나와 그 조사를 해 갔다고 했다. "흥, 기진이가 누구 덕에 고등고시 시험을 보고, 누구 덕에 뒤탈 없이 시장이 되고 군수가 돼 나갈 건지 알기나 하우? 지도 나랏법을 어긴 죄가 있어 놔 그 얘길 짚이 못해서 그렇제, 그때 지가 기한이 아버지만 생각하구 큰댁 서방님 말 하는 거 안 된다구 뻗댔더라믄 시장 군수가 다 무어냐, 기진이는 그런 시험 근 처두 못 갈 아였다는 거 아니우, 지말은." "동서, 무슨 소리래 그게? 사람들 많은 데서." "왜요, 사람 많으믄 할 얘기두 못하구 사우, 형님은. 인자 말이 났으니 하는 얘 기지만서두, 지 말은 큰댁하구 우리하군 이상하다 이 말이지요. 전에 용강정에 점을 보러 갔는데, 지가 기한이 아버지 사주하구 기한이 사주를 대니 거게 구신 도가 그러데요. 이 아버지는 곁에 다른 사람 때문에 명 재촉하러 나갈 사주고, 아는 또 곁에 다른 자손 때문에 앞날이 막혔다구 하구. 듣구보니 틀린 얘기가 아니잖우? 그해 져울에 아 아버지가 끌려간 것두 보믄 그 구신도가 하는 말 그 른 것두 없구요." 사람들은 대놓고 이제 읍에 아재가 완전히 실성을 한 것이라고 했다. 기한이 형이 잘됐으면 아무 일 없을 것인데, 한 쳐다보고 사는 자식이 남 하는 값을 못 하니 에미가 저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횡설수설 끝에도 읍에 아재는 다시 서 울대학과 판검사 시험을 말하고 큰댁 기진이가 암만 앞에서 막고 널뛰어도 기한 이가 이제 군대만 마치고 오면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당숙의 호적 정리로 기한이 형에게 온 유일한 신분상의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군대를 현역으로 입대했다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때 그걸 그냥 두어 뒤늦게 행 불 처리되었다면, 기한이 형은 입영 면제를 받아 다시 한 번 예비고사를 쳤거나 많이 짊어져야 특례 보충역 근무를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기한이 형 은 군대에 간 지 육 개월 만에 부선망독자로 의가사 제대해 오히려 한 해 일찍 군에 간 큰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읍에 아재는 십년 도 넘게 일하던 여관에서 나와 시내 변두리로 따로 방 한 칸을 얻어 들고 한복 바느질을 시작했다. 뒤늦게 어머니가 그 여관을 찾아갔을 때 주인 여자는 암만 오래도록 같이 살 아도 그렇지 메개 장사도 장산데 손님 비위 맞추며 장사하는 집에 정신나간 사 람을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냐고 하더라고 했다. 주인 여자의 말대로라면 아재 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손님방에나 뭐 필요한 것 없냐며 들어가선 아들이 서울 대학을 다니다 지금 군에 가 있으며, 제대를 해 나오면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 판검사 자리 하나를 마련해 주도록 되어 있노라고 식은소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손님들도 처음엔 대단한 아주머니구나 하다가도 한 번 들 어왔던 방에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하면 나중엔 실성끼가 있어 그러는 걸 알 고 다른 데로 방을 옮기겠다며 내실로 항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날 묵는 손(님)들이 그런다믄 자기두 십년 옛정으루다 이핼 하겠대요. 그런데 이건 하루 묵고 떠날 손들이 그런 항의를 해댈 정도니 내보낸 자기를 야 뱍타구만 말구 그걸 장사하는 사람이 누가 감당해 내겟냐구 그러더라구요. 그리 구 전에는 그러지 않다가 식은소리를 하면서부텀은 주인 여자한테 대구두 그렇 구러 큰집 숭을 본다데요. 당신 숭두 보구 내 숭두 보구 아덜들 숭두 보구..." 그건 기한이 형 때문에 생기기 시작한 아재의 실성끼가 조금씩 깊어져 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었다. "그래두 여잔 무던하데요. 내보내민서두 방두 여자가 얻어 주구, 재봉두 여자 가 사 주구, 일감두 반은 여자가 끌어대 주는 모양이구요. 그 장사야 손으루 하 는 장사지 입으루다 하는 장사가 아닐 끼다믄서..." "일감은 많대?" "가 데다보잖았으니 그거야 알 재간 없지만, 솜시루만 따진다믄야 읍 바닥 다 뒤져 내두 그 손끝 따라갈 솜씨두 흔치는 않을 끼구만요. 전에 지 일신에 걸친 입성두 다 지가 지어 입구, 일하던 여관에 방방이 해 단 커탱두 다 지가 감만 끊어 해 달은 거니까." "아주머이두 아주머이지만 지금이라두 기한이부텀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할 긴 데. 언제꺼정 즈 어머이 속끓이고 살 것두 아니구..." "그러니 하는 말 아니우. 즈 어머니한테는 지 혼자지만 지는 지 혼자가 아인데 나(나이) 스물스이 먹구두 그 경중을 모르구 하니..." 그러나 그런 어른들의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기한이 형은 다시 서울로 올라 갔다. 뒤늦게라도 마음을 다잡고 시험 준비를 하거나 일자리 찾아 올라간 것도 아닌 모양으로, 어머니가 몇가지 일감을 가지고 갔을 때 한바탕 북새를 떨고 난 다음, 있는 돈 없는 돈 죄 긁어 가지고 가 방에 남은 거라곤 아재의 부서진 재 봉틀 하나뿐이더라고 했다. 떠나는 것은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우리 식구가 들은 기한이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재는 병세가 급격히 깊어져 바느질 일감마저 손을 놓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읍'의 이곳 저곳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느 땐 큰집이라고 들어와 예의 그 서울 대학과 판검사 타령으로 한겨울을 나기도 했지만, 또 어느 땐 일년이 다 가도록 발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기도 했다. 아마 그 무렵쯤부터 나는 아재의 소문을 어 디서 무얼 한다는 식으로 더러 떠도는 말로 듣기는 했어도, 실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거나 얼굴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더구나 그때 나는 대처에 나와 학교를 다니고 있어, 그렇게 듣는 소문이라는 것도 방학 때 오다가다 한마디씩 어머니가 하는 것을 얻어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람처럼 집을 나간 기한이 형 은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느는 서울에 살믄서 기한이 소식 못 듣나?" "서울이 어디 강릉 같아야지요." "하기사 질가서 더러 마주치구 지낸대두 눈여게 안 봄 그기 기한인지 누군지 두 모르구 말 끼구마." "아재는요?" "모르지야. 어(디)서 뭘 하구 사는지두. 이태 전인가 삼 년 전인가 사천 친정 에 와 있는 걸 누가 봤다는 소릴 듣군 말았는기." "안됐어요. 아재나 형이나..." "그러게 말이다. 그때 한 이태 지둘러(기다려) 봐서 간 사람 안 오믄 나(이) 젊을 때 어데 다른 데 팔자를 고치구 말지 그깟 자식한테 무슨 뉘를 볼 기 있다 구 그래 키워 놔 가지구... 기한이 그것두그런 즈 어머이 성깔 빼놔노니 간 지가 언젠데 돌아오지두 않는 기구." "한 오륙 년 됐나요? 기한이 형 집 나간 게." "아매 그렇게 됐을 기다. 그렇지만 갸 어떻구러든지 즈 어머이 소식 듣구는 있 을 기다. 그러잖음 사람이 독하잖아 세상 없어두 그렇제, 그래두 질 낳은 어머인 데 와두 벌써 왔을 낀데 즈 어머이 정신 놓구 산다는 소릴 들이니 더구나 오구 싶지 않은 거 아니겄나. 그러니 어머이는 어머이대루 더 정신 빼구 살구, 자식은 자식대루 더 오구 싶잖은 기구. 거다 여편이래두 얻었대봐라. 그런 즈 어머이를 여편한테 보이구 싶겄나 말이제." 그러나 언젠가, 그것도 아주 썩 수, 기한이 형이 아무도 몰래 내려와 본적까지 서울로 옮겨 갔더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쯤 읍에 아재는 아주 '읍'을 떠난 모양 으로 어디서 무얼 해 어떻게 먹고 사는지조차 모르게 떠도는 소문마저 싹 끊기 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식구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읍에 아재와 기한이 형을 잊었다. 아버지가 다시 기한이 형을 찾기 시작한 건 작은할아버지의 산소 이장 문제가 나오던 지난해 가을부터의 일이었다. 해방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 집에 산이 있 어도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고(왜정 땐 법으로 그걸 막았다고 했다) 읍으로 나 가는 입목의 공동산에 묘를 썼는데, 그 공동산에 새로 학교 터가 들어선다고 했 다. 나도 지난봄 아버지 생신 때 내려가 그 분 묘 이장 공고를 보았다. "느는 몇년을 서울에 살민서두 기한이 하날 못 찾나?" "억지로 찾으려면 찾겠지만, 찾는다고 해서 기한이 형한테 나아질 게 있는가도 생각해야지요." 아버지의 말에 작은형이 대답했다. "찾으믄 찾는 거지 나아지구 말구는 또 뭐냐?" "오히려 그렇게 찾았다가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 다시 숨어 들게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죠. 제 발로 오기 전엔 그냥 좀더 두고 보지요." "그럼 느는 느 형제가 그렇게 집을 나가도 안 찾나?" "..." "말이 육촌이구 재종형제지 느한테 기한이는 형제가 다름없다. 아버지하구 기 한이 아버지가 큰 걸 봐두 그렇구..." 그러면서 아버지는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난리 때의 일을 이야기했 다. "느들 다 크믄 할라구 참았던 얘기가 있는데, 기한이 아버지 말이다. 느 작은 할아버니하구 작은할머이가 해방 전에 세상 뜬 건 다 아는 얘기구, 그래노니 어 릴 적부터 우리집에서 나하구 같이 컸다. 내가 두 살 맏인데, 그래서 장개두 내 가 먼저 들구 이태 있다 기한이 아버지두 장개 들여 느 할아버니가 집 뒤에, 지 금은 그냥 밭이지만 거게 오막 하나 지어 살림을 냈더란다. 난리가 터진 건 내가 큰아 닐 낳구 이태 있다간데, 기한이 아버지가 기한이를 낳은 게 바로 난리 터지던 해 가슬이구 내가 둘째 닐 낳은 게 져울난리(일사후 퇴) 무렵께니라. 그때 둘째 닐 낳구 삼칠일두 안 지낸 저녁인데, 인민군이 치구 내려왔다가 다시 쫓여 북으루다 가믄서 우리집으로 들어왔더라. 들어와선 대뜨 번에 하는 말이 즈가 후퇴를 하믄서 가져가야 할 짐이 있는데, 그 짐을 날더러 사금령꺼정 져달라더구나. 그러니 느 할머이가 그 얘기를 듣군 아 낳은 지 삼칠 일두 안 지났는데 안 된다구 뻐팅기구 인민군들은 시간이 없다구 총으루다 내 등을 찌르미 재촉하구 하는데, 그때 기한이 아버지가 저 앞에, 그때는 대문을 사 립으로 해 달았는데 그걸 삐죽 열구 들어와 뜨락 앞까지 와 섰다가 안에서 가 자, 못 보낸다 하구성 이상한 소리가 나니 겁이 덜컥 나 다리 사립을 열구 나가 려는 참인 걸 느 할머이가 붙잡았더라. 그때 사립 앞에 바지랑대를 기대 놨는데 그만 기한이 아버지가 급히 돌아서느라구 아매 그걸 건드린 모양이라. 그러니 느 할머이가 안에 있으믄서두 그게 기한이 아버진지 으떻구러 알구 작은아나, 작은아 니 일루 좀 들어온나, 하구 붙잡은 거제. 기한이 어머이두 그때 인민군들 이 기한이 아버지가 방에 들어와 있을 걸 끌구 간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때 일이 그랬니라. 뒤의 얘기는 뭐 더할 것두 없구 말이제. 인민군들이 끌기두 했지 만 느 할머이가 손으루 다 찍어 주진 않았대두 둘 중 누굴 데리구 갈지 지목해 밀었던 것두 컸구. 그러니 나는 그렇구러 떠나믄 돌아오기 십잖다는 걸 알믄서 두 또 그게 같이 크던 동생이니 내가 갔다오마구 말하구 싶은데, 그기 속에 마 음뿐이지 입 밖으루다 그 말을 내지 못했다. 그만에 목이 콱 쟁겨 기한이 아버 지더러 잘 댕겨오라구 말두 못하구 그냥 손짓으루만 그렇구러 했는데, 그걸 기 한이 아버지는 어서 떠나라는 말루다 들었는지두 모르구. 그러니 살믄서 그기 얼매나 큰 죄겄나. 기한이 아버지한텐 말할 것두 없구 느 작은할아버니나 작은할머이에 대해서두 그렇구, 기한이 어머니나 기한이한테두 그렇구... 거다 기한이두 해당 안 되는 건 아이다만 느 앞날 생각해 기한이 아버 지 호적을 정리한 것두 내가 앞장서서 한 일인데, 기한이가 반듯하게 커서 잘됐 다믄 몰라두 것두 느만 위한 일이 돼 버린 것 같구 말이제..." 자리에 누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난 여름 작은할아버지의 산소를 이장 하고 난 다음부터 아버지가 병원에 출입하게 된 것도 그 일과 한 끈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그 동안 아버지와 작은형 사이엔 몇번 얘기가 있었던 듯, 작은할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하던 날에도 작은형은 이미 이틀전에 집에 내려 가 있었고, 다음날 막내와 내가 내려갔을 땐 기한이 형이 해야 할 몫을 작은형 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소 이장을 끝내고 내려오던 길로 아버지가 우리들에 게 말했다. "느 느이 중 어느 한 자식 나한테는 귀하지 않은 기 없다. 둘재는 먼저 알구 있다만 느들두 알아야 하는 일이겠기에 하는 얘긴데, 안죽 깊은 얘기가 오간 건 아이다만 이번 가슬에 문중에서 다시 족보를 정리하는 모ㅇ이더라. 그래서 느들 다하구 의논해야 할 일이나 우선 둘째하구만 얘기를 했는데, 아침에 느 당숙 족 보를 옳게 좀 정리하는 얘기를 할라구 했다. 다른 얘기가 아이라 느 알다시피 기한이 갸가 언제 올 줄도 모르는 일이구, 그렇다구 아주 안 오믄 이담에 애비 죽은 다음 오늘 이장한 작은할아버니 산소 를 절할 사람도 없이 손 끊기게 내버려 둘 수두 없는 일이구. 그래서 내 둘째보 구 얘기했다. 이담에 내 간 담에도 기한이가 안 돌아오믄 니가 이 산소를 맡으 라구. 무슨 얘기냐믄 내 생각 같아선 이참에 문중의 족보를 정리할 때 기한이는 기한이대루 지금 있는 대루 두믄서 둘째를 작은집에 양재(양자)루 하나 더 올리 구 싶은데, 거야 뭐 기한이갸 영 안 온다믄 둘째가 당숙 아들루다 대를 이으믄 되구, 나중에 기한이가 온다 해두 느 당숙한테 아들이 둘이 있어 나쁘라는 것두 없구 해서 그렇구러 했음 하고 생각했었는데, 둘째 얘긴 그렇구러 알구 작은할 아버니 제사를 모시되 족보에꺼정 양재를 올리는 건 기한이를 좀더 지두린다(기 다린다)는 생각에서두 다음 번 정리 때꺼정 좀더 두고 보자구 하니, 것두 얘기가 된다 싶어 일단은 그렇구러 하기루 했다. 낸들 느들 중 어느 하나 같은 핏줄의 자손이구 조상이든 다른 집에 양재를 넣 구 싶겠냐만, 그래두 생각을 해 보니 간다믄 둘째가 가는 기 제일 낫지 싶어 그 런 말을 했더니라. 니가 공직으루 나갈 수 있었던 것두 우선 니가 잘해서 된 일 이겄지만, 지금은 더서 뭘 하구 사는지두 모른다만 그때 느 당숙모 덕이 적달 수두 없는 일이구. 니가 이제 더 올라가믄 예전 정승 판서나듯 장관이 될지 그 보다 더 윗자리가 될지 누가 알겄나. 나두 그런 아들을 족보 속에 천대 만대 내 밑으루다 두고 싶구. 하지만 이젠 느들두 알다시피 우리 집안 내력이라는 게 내 가 느 당숙 간 길 가구 느 당숙이 지금 내처럼 여러 자식 거느리구 살지두 모를 게 서로 운명을 바꾼 일두 있구, 또 그러믄 셋째하구 끝에아는 세상 구경두 못 하구 또 먼저 난 느 둘두 느들이 지금 기한이처럼 되구 기한이가 지금 느들처럼 이래 형제가 둘러앉아 내 후사 걱정하구 느들 걱정하구 있을지두 모르구 말이 제." 그 일이 있고 나서 아버니는 바로 병원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썩 나중에야 알았다. 까닭 없이 자꾸 목이 잠기듯 답답하기도 하고 따끔거리기 도 한다는 것이었는데, 담배를 끊은 것도 작은할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하고 나서 바로였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추석 때 함께 모시고 사는 큰형님을 빼 곤 명절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저마다 이런저런 선물들과 함께 담배 한두 포씩 을 꺼내 놓았다. "참 느들은 모르지. 이제 아버님 담배 안 태우셔." 그 말을 하면서도 형님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왜요?" 하고 막내가 물었고 형님은, "뭐 벌써 끊으셨는데, 내가 느들한테 얘기를 안 해 놓으니..." 하면서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한쪽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자 막내가 물어선 안 될 것을 물은 것처럼 잠시 어쩔 줄을 몰라했고, 나도 까닭 없이 죄송스러워 져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은 아버지가 건강을 생각해 담배를 끊은 것이 아니라 더이상 담배를 피워선 안 될 만큼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심한 건 아니구... 그래두 느들이 하 온 건데 이건 저기 얹어 둬라. 내 나 중에라도 다시 찾을 날이 있을지 아나." 그러면서 아버지는 지난 여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다. "나두 왜 그런지 모르겠구만은 어떤 때는 조금만 찬물을 먹어두 콱 쟁기는 것 같기두 하구 그랴." 나중에 큰형님한테 들은 얘기로는 작은할아버지의 산소 이장을 끝내고 우리가 서울로 올라간 다음날, 아버지는 몸살이 난 거 같은 기 어째 말하기두 힘드게시 리 목이 쟁기네, 하시더니 그때부터 담배를 찾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느한테는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라니 못했던 거고. 모시고 살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맏이라는 자리가 그래. 부모님 어디 편찮으셔도 그걸 동생들한테 일일이 얘기하기가 어려워. 어른 보시기에도 그렇고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맏이 짐 벗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그래서 접장을 해도 전근을 안 다니는 사립학교 접장을 하고 있는 거고." "그래도 그렇지요. 아버님 일인데 알릴 얘기는 알려 줘야지요." "시내 이비인후과에선 별 증상이 없다지만, 그래도 종합 진찰을 받아 봐야 되 지 않나 싶어 이번 명절 끝나면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갈 생각이다." 그 후 아버지는 두 군데 종합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먼저 다니던 이비인후 과와 마찬가지로 처음 종합 검진을 받은 강릉 병원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자꾸 목이 잠기는 것 같다고 해 큰형님은 다시 아버지를 원주의 큰 병원으로 모셨다. 거기서도 기관지가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오히려 염려해야 할 쪽은 목이 아니라 위장이라고 했다. 진찰 기간을 포 함해 아버지는 열흘 가까이 병원에 계셨다. "아프지두 않은 배는 왜 자꾸 탈하누? 시방두 목이 쟁겨 물을 넴기기가 고약 하달수록." 내가 병원에 갔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큰 형 님의 전화를 받고 적이 놓였던 마음이 아버지의 그 소리를 듣자 다시 불안해지 기 시작했다. "인후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의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계속해 목이 잠기듯 아프다고 말 했고, 어머니는 하다하다 안 되자 양약이 아니라 한방으로 다스려야 할 병인 모 양이라고 했다. 한밤중에 걸려 온 전화가 늘 불안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이유없이 아버지는 목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아버지의 그 목병은 어쩌면 사십여 년 전 겨울, 그 목 잠김의 재발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리고 또 어쩌면 먼 길, 나간 정신에도 본능처럼 돌아와 누워야 할 자리를 알고 돌아와 숨을 거둔 아재의 마 음속 화해로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아버지가 다시 지난 추석 때 선반 위에 올려 둔 담배를 꺼내 태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것은 기한이 형까지 그렇게 마음속의 용서로 돌아와야 비로소 나은 목 잠김인지도 몰랐다. 바깥은 아직도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나는 그 새벽 속에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수상은 죽지 않는다 이승우-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 소설 집 '일식에 대하여', '세상밖으로'.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 '가시나무 그늘', '생의 이면' 해설-정현기 집단이기주의의 정점에 있는 막된 권력자를 독재자라 무를 때 그는 다분히 자 기환상에 도취한 정신질환자이기 쉽다. 우리는 5 16군사쿠데타 이후 근 30여 년 간 세 명의 군출신 독재자의 전형적인 질환의 그늘 밑에서 그 전염성 질환이 가 하는 아픔을 겪어왔다.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어리석은 독선을 겹쳐 저질러 왔다. 그것은 그들의 통치를 받는 대중들만의 불행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커다 란 불행이기도 하다. 이승우의 단편 '수상은 죽지 않는다'는 그가 이제까지 추구해 온 소설문법의 동일한 선상에 놓이느 독재권력자의 비정한 음모와 책략에 관한 소설적 탐구서 이다. 그는 장편 '가시나무 그늘', '중편 '동굴'에서도 독재권력이 지닌 천박한 부 패와 폭력을 치열하게 형상화한 바 있다. 작가 이승우는 어째서 그처럼 독재권 력의 폭력성과 부패한 타성에 대해 몰두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가 독재 자체 가 지독한 질병이며 그것의 참혹한 전염성을 꿰뚫어 보기 때문일 터이다. 독재 자는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그는 또한 그것은 혼자 수행하지 않는다. 독재자는 그에게 빌붙어 권력의 진국을 빠는 재미에 빠 진 많은 새끼 독재자들을 낳고 그들의 폭력을 견디는 사람들 쪽에서는 그들을 멸시하며 두려워하는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때에 따라 그것을 집단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집단이기주의자들이 그들만의 천국으로 만들어 세상을 온통 두려 움과 고통의 암흑으로 만든다. '수상은 죽지 않는다'의 주인공은 작가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자기의 상상력을 발휘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당시대의 어둠 원인을 밝히려는 사람들이다. '수상은 죽지 않는다'의 표제가 암시하는 독재자 수상의 냉혹성은 이 작품의 끝 을 장식하는 작가 속뜻의 정점이다. 자기 정체를 밝히려는 어떤 시도로 분쇄하 고 마는 냉혹함이 독재자의 일반적 속성임을 이 작품은 절묘한 담화전개로 진단 하고 있다. 90년대에 그 숨겨진 내용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서 여유 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수상은 죽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충격적인 뉴스를 옮겼다. 그가 죽었 다는 소문이 맨 먼저 퍼진 곳은 이번에도 주식 시장이었다. 이번에도, 라고 말한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벌써 몇차 례나 죽음을 선고받았다 다시 살아나곤 했다. 이른 아침에 증권가에 떠돈 소문 에 의하면, 그는 바로 하루 전인 3월 12일 밤 11시 35분에 자신의 침실에서 잠 을 자던 중 조용히 숨을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인은 위암. 그가 오랫동안 암 과 투병해 왔다는 설명이 덧붙어졌다. 소문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그가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할 때 그 옆에는 부인과 두 아들과 세 명의 주치의와 두 명의 비서가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그는 눈을 감기 직 전까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었다고 한다. 착공을 막 시작한 국토 종단 수로 공 사와 계획 단계에 있는 해저 공원 건설에 대한 미련과 강한 집착을 피력하였으 며, 지도자를 잃은 민심의 동요와 유리를 몹시 걱정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문인 지 숨을 거두고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동양의 어떤 영웅적인 장 수를 모방하여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메세지를 유언으로 남겼다 는 이야기도 끼여들었다. 오후가 되면서 다른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같았다. 다른 것은 그 죽음의 형태였다. 새로운 소문에 의하면, 그는 위암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죽음은 그렇게 평온하고 조용한 죽음이 아니었다. 영웅의 최후가 항용 그러한 것처럼 그의 마지막 역시 비극적이었다. 소문은 이랬다. 측 근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저녁 만찬 중에 갑자기 총을 빼든 그의 경호 책임자에 의해 세 발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해저 공원에 대한 의견을 나누던 도중 시종 공박을 당하던 경호원이 우발적으로 총을 빼들었다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단순한 우발 사고가 아니라 쿠데타 세력 에 의한 치밀한 작전이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소문은 발 없는 바람처럼 빠르고 변덕스러웠다. 3월 14일 밤이 될 때까지 사 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된 그의 신상에 대한 뉴스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 다. 비행기 추락 사고도 있었고, 자동차 전복 사고도 있었다. 다분히 악의에 찬 비난일 테지만 그 떠도는 말들 가운데는 이름을 대면 삼척 동자라도 알 만한 유 명한 여배우와 동침하던 중 복상사했다는 것도 있었다. 소문의 세부적인 내용은 약간씩 달랐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데에는 이의 가 없었다. 그가 죽었다.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그의 죽음을 화제에 올렸다. 말 은 더 많은 말을 낳고 더 새로운 말을 낳았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 "그가 죽었다며?"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 상 대방이 "그러게. 하도 여러 번이라 믿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어." 하고 받는다. 처음에 말을 꺼낸 사람이 정색을 하고 이번에는 진짜라고 주장한다. "내가 그쪽 정보에 밝은 소식통으로부터 들었는데, 이번에는 진짜라는구먼. 위 암이었대. 벌써 오랫동안 암과 씨름하느라 고생깨나 했다는 거야. 하긴 위암이 걸릴 만도 하지 뭐. 그 양반이 집어삼킨 게..." "쉿! 이 사람아. 아무리 그렇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전에도 시나리오는 그럴사 했잖아?" "믿을 만한 소식통이야." "그러고 보니... 그래서 그 양반이 그렇게 통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구먼." "맞아.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암에 걸린 후부터 수상이 공식 행사에 모습 을 드러내지 않은 거라는 거야." 그 '믿을만한 소식통'의 정체는 물어지지도 않고 대답되지도 않는다. 그런 식 으로 그 정체 불명의 '믿을 만한 소식통'은 여러 사람에 의해 공유된다. 앞의 대 화에서 반신반의하던 쪽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정색을 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믿을 만한 소식통'을 판다. 그 소식통은 하나 둘이 아니다. 여러 개의 '믿 을 만한 소식통'이 여러 개의 각기 다른 '믿을 만한 소식'을 유포한다. 그러나 그 것들끼리의 맞부딪침은 긴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위암설과 쿠데 타설이 맞부딪쳤다고 하자. 둘 중 어느 하나는 틀려야 한다. 그것이 이치이다. 두 사람의 정보 가운데 한 사람의 정보는 그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구태여 둘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정보는 그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구태여 둘 가 운데 어느 하나의 진위나 정부를 가리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들은 단지 서로 의 정보량을 느려 줄 뿐이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어느 한쪽의 주장으로 소문의 가닥이 잡혀 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상이한 여러 주장 들이 거의 똑같은 비중으로 증폭되어 가는 이상한 형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리하여 그는 3년간의 투병 끝에 병사하기도 하고, 지방 순회 도중 비행기 사고 를 당하기도 하고, 미모의 젊은 여배우의 배 위에서 복상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런 식의 과정을 통해 말들은 자꾸만 번식했다. 그리하여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소문들이 일치하게 주장하는 한 가지 사실은 그의 죽음이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관공서와 언론 기관에 사실을 확인하려는 질문들이 폭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하달받은 지침이 없다는 것, 그러므로 뭐라고 말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천편일률적인 대답이었다. 그 대답은 언뜻 들 으면 소문의 내용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별로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조차도 이런 소문이 나돌 때마다 그런 식의 대답이 되 풀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3월 14일 오후, 그러니까 맨 처 음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주식 시장에 퍼진 지 약 30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이 나라에서 가장 넓은 136공원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 집회가 열렸다. 주최한 단체만도 30여 개에 달하고, 참석한 인원은, 그들의 발표에 의하면, 300만 명이 넘었다. 그 숫자는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수도권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는 규 모였다(언젠가 한 신문이 그 공원에 산술적으로 동원 가능한 사람의 수를 산출 하여 보도한 적이 있었다. 한 정치 집회의 참석 인파를 두고 주최측과 상대방측 이 소비적인 격론을 벌일 때의 일이었는데, 그 보도에 의하면 송곳 하나 세울 여분의 땅도 남기지 않고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을 때 136공원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136만 명이었다. 그때부터 이 공원을 136공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대로 300만 명이 모이려면 그만한 면적의 공원이 하나 더 있어야 했 다. 그러나 그 숫자의 허점을 심각하게 지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300만 명이란 굉장히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로 막연히 인식될 뿐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턴지 정치적 성격의 집회에 대해 꼼 꼼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했던, 무슨 애국이니 민족이니 하 는 이름을 노골적으로 앞세운 단체들이 그렇게나 많은 것도 따져 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관변 단체들이 총집합한 그 행사의 주제는 한마디로 '수상은 죽어서도 안 되고, 죽을 수도 없 다'는 것이었다. 시중에 유포된 소문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나선 그 집회의 분위 기는 몹시 호전적이었고 열정적이어서 설령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다시 살려 내 려는 것 같았고, 또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 때문에 더욱 증폭된 그에 대한 지지 열기는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말릴 것 같았다. 그 들은 그를 불사신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 을 것 같은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또한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사람들 은 소문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열광적인 집회를 경험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정말로 죽었을까. 그의 존재야말로 가장 큰 미스테리였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에 전국민 의 '열화와 같은'지지와 환영을 받으며 임기 4년의 수상이 되었다. 처음 4년 동 안 그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결과 형성된 경제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좌절감의 수렁에서 국민들을 건져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민들은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믿고 따랐다. 그는 너그러웠으나 과감했으며 신중하면서도 추 진력이 있었다. 4년 후에 국민은 그를 다시 수상으로 뽑았다. 세계의 언론들은 그의 치적과 영광스러운 재집권의 경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최대이ㅡ 호의를 가지고 보도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어느 외국 통신사의 다음과 같은 전문이었 다. 'r국 현수상 재당선. 야당도 그의 재집권을 지지' 그리고 그는 한 번 더 수상 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다시는 그를 수상으로 뽑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는 그런 권한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세번째로 수상으로 뽑힌 지 두 해가 지났을 무렵에 나라 안이 한바탕 시끄럽게 요동친 적이 있었 다. 일단의 정치적 야망을 가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 터 9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상을 지지하는 군인 들에 의해 반란군들이 곧 진압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일을 벌인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 한때 수상이 반란긔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나중에 오보임이 밝혀졌다(굳이 따지자면, 그것이 그의 죽음과 관련된 첫번째 소문이었던 셈이다). 그 일이 있고 난 직후 '국가 비상사태에 효 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나라의 중요한 틀과 체제를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그 가운데 수상직의 종신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들은 그이 이제까지의 인품에 비추어 그와 같은 조치를 파격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워낙 그에 대한 신뢰의 도가 두터웠기 때문에 별 이견을 내지 않고 추인해 주었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수상 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갑자기 비등하기 시작했고, 그 주장에 사람들은 대부분 암묵적으로 동의를 보내고 있었던 터였다. 그 방법이 굳이 수상직의 종신제일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의견은 많은 사람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의심하기에는 수상에 대한 국민들 의 기대와 믿음이 너무 컸으며, 총을 가진 집단에 의해 도발된 최근의 반란에 대한 공포가 또 그만큼 컸다. 수상은 그때부터 나라의 살림을 꾸려 가는 데 있어 이제까지와는 눈에 띄게 다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는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강해졌으며, 가령 법은 운용 하는 경우에 있어서 놀라울 만큼 융통성이 없어졌다. 국민들과의 사이에 거리를 만든 것도 그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처음 수상이 되었을 때무터 계속해 오던 국민들과의 대화 시간을 비효율적이며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없애 버렸다. 불순 세력으로부터의 신변 보호라는 구실도 덧붙여졌다. 군인들의 실패 한 쿠데타가 그렇게 엄청난 충격과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이해는 하면서도 대부 분의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아쉬워했다. 언론 매체에서도 그는 통 얼굴을 드러 내지 않았으며 어쩌다 모습을 보이더라도 딱딱하게 담화문이나 낭독하고는 그만 이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친근하지 않았고 너그럽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져 버린 그의 얼굴은 그의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강력한 통치술이 그런 것처럼 매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수상을 모욕했거나 현재의 통치 구조를 바꾸려 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사람들에 대한 잦은 소문이 나라 안을 흉흉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변화는 급격했고, 대중들은 그 변화를 재빨리 수용했다. 수상의 사진은 마을마다 걸려 있었지만, 정작 그의 살아 있는 얼굴은 아무데서 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 없는 수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은 그 무렵부터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터져나와 나라 안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그는 수없이 많이 죽었다. 그것은 소박하게 생각해서 수상의 얼굴을 보 ㄹ수 없게 된 사실과 연관이 아주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주기적으로 유포되는 배경에는 죽 사람들의 집단적인 원망이 숨어 있 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수상은 더이상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 는 예전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때마다 수상은 언론 매체를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증거해 보이곤 했다. 그는 수없이 많이 죽어갔지만 한 번도 죽지 않았 다. 그는 불사조였다. 이번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 얼굴을 드러냈다. 3월 15일 저녁 8시였다. 처음 소문이 퍼진 시점부터 계산해서 정확히 60시간 만의 일이었다. 그는 '대국민 특 별 담화문'이라는 것을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읽어 나갔다. 그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에 주름이 제법 깊게 패이긴 했지만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다. 패기 넘 치는 목소리와 몸에 밴 절도 있는 자세가 그의 건강에 대한 의혹을 일축하게 했 다. 적어도 암을 상대로 몇년째 투병하고 있거나 여자의 배 위에서 숨이 끊어질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항간에 떠돌고 있는, 본인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풍문으 로 인해 다시금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몹시 송구스럽습니다. 자세한 진상을 조사한 결과 당국은 정국의 혼란을 획책하려는 반국가 집단의 조직적인 음모가 작용하고 있다는 매우 우려할 만한 사실을 밝혀 내었습니다. 이 불순 조 직에 대한 수사가 이미 착수되었으므로 수일내로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 입니다. 본인은 이 혼란을 수습하고 흩어졌던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전력 해 줄 것을 국민 여러분께 호소하는 바입니다... 들끓던 소문은 일시에 잠들었다.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후 문제의 불순 조직을 결성한 사람들이 적발되었다. 대학 교수가 한 명, 정치인이 세 명, 그리고 군인도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 정부의 전 복을 기도하기 위해 적성국과 접촉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특별재판위원 회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이었다. 수상은 죽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잦은 오보는 역설적으로 그런 식의 이 상한 믿음을 창출해 내는 데 기여했다. 소설가 k.m.s.는 3월 15일 밤 참으로 우연히 텔레비전에 나온 수상의 연설 장 면을 녹화했다. 그날 저녁에 그는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북극의 생 태계 대한 다큐멘터리를 볼 에정이었다. 사전에 예고된 바에 의하면 그 프로는 십 몇주년의 방송국 개국을 기념하는 대작으로 그의 기대를 자아내기에 족했다. 방송 시간은 저녁 7시 40분으로 잡혀 있었다. 그론데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이 다 되어서 집 박으로 나갈 일이 생겼다. 6시쯤에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전호 를 건 사람은 여자였는데, 그는 그 여자의 저녁 데이트 요청을 묵살할 스가 없 었다. 그녀는 그의 비밀스런 애인이었고, 고급 공무원인 그 여자의 남편이 출장 을 갔기 때문에 그날 밤이 빈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를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k.m.s는 녹화를 예약해 두고 집을 나왔다. 그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은 이튿날, 그러니까 3월 16일 아침 8시 30 분쯤이었다. 물론 혼자였다. 그 시간에 그의 애인 또한 자신의 집으로 혼자 들어 갔다. 그는 따뜻한 물을 틀어 목욕을 하고 ㅎ차를 끓여 마셨다. 그의 집 현관에 는 두 장의 신문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중 한장은 목욕탕에서 읽었고, 다른 한 장은 식탁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읽었다. 두 장의 신문은 다루고 있는 기사가 비 슷비슷해서 두번째 신문은 거의 읽을 거리가 없었다.그런데도 그는 비교적 꼼꼼 하게 그것들을 읽었다. 1면에는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수상의 전신 사진이 큼지 막하게 실려 있었다. 두 신문에 실린 사진이 똑같았다. 테이블에 앉아 원고를 읽 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등위에는 바다를 뚫고 떠오르는 붉은 해의 사진이 확 대되어 걸려 있었다. 뽑혀 나온 기사의 제목까지도 한 신문은 '수상 각하, 재국 민 특별 담화 발표'였고 다른 신문은 '수상 각하의 대국민 특별 담화 발표'였다.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건성으로 읽어 치우고 문화면을 뒤적거 렸다. 그러나 거기에도 별로 그의 눈길을 끌 만한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 수 권의 베스트셀러를 써낸 여자 소설가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지만, 그는 보지 않았다. 그는 베스트셀러를 양산해 내는 작가들의 대중적인 감각에 대해 턱없이 오만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잘 읽히는 소설을 써 낼 능력 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그들을 상업주의에 투항한 매 문꾼이라고 비난했다. 그 따위 소설이야 마음만 먹으면 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 다는 식의 오만한 자신감을 은근히 내비치곤 했지만, 그러나 그는 똑똑히 인깃 하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쓸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 그는 내놓고 밝히지 않았지만 , 대중적인 감각이 중요한 능력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주어여 있지 않다는 것도. 그석은 그의 오래 된 콤플렉스였다.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그는 자신에 게 결여뒤어 있는 그 대중적인 감각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 악의 적인 공격을 일삼았다. 혼자 의인인 양하는 그의 문학적 허세는 그러나 그다지 치밀하지 못해서 다른 문학인 들에게 쉽게 들켰고, 그래서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까지 했다. 그가 그날 신문을 보면서 가장 신경을 집중해서 오래 들여다본 것은 백화점 세일 광고와 개봉중인 영화 광고였다. 그는 한 메모지에 ' yq백화점 세일. 19일 까지. 소형 녹음기 60% 할인 '이라고 쓰고, 다른 메모지에는 '아무도 그녀에게 전화를 않는다. rt극장- 11:00, 13:00, 16;00, 18:30, 21:00. 밤의 낙화. df극장 - 11 시, 13시, 15시, 17시, 19시, 21시.'이라고 썼다. 그는 라디오도 들을 수 있고 카세 트테이프도 들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 부터 하고 있었다. 영화 프로를 메모한 것은 조금 전에 여자와 헤어질 때 했던 약속 이 생각나서였다. 그는 주말에 애인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 영화 프로를 자신이 골라서 연락을 해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북극의 생태계'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마침 심심하던차에 할 일이 떠올라 주 어서 다행이라는 듯한 태도로 먹떡 일어나 비디오 앞으로 다가갔다. 테이프를 앞으로 되감고 티 브이를 켜고 비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어깨까지 빠지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담궜 다. 오렌지 주스를 선전하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그는 리모콘을 눌러 테이프 를 빨리 돌아가게 했다. 음성이 소거된 상태로 그림이 빠르게 넘어갔다. 여성 화장품 광고가 나오 고 7차 방어전을 갖는 복싱 챔피언의 경기를 예고하는 방송이 이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뉴스가 나왔다. 시간표대로 라면 '북극의 생태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예정에도 없는 뉴스 프 로라니. 그가 기억 하는 한 뉴스는 '북극의 생태계'가 끝난 다음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자기가 예 약 녹화를 할 때 혹시 시간을 잘못 지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 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화면의 맨 아랫단으로 일 단의 글자들이 띠 를 이루어 지나가는 것을 그는 보았다. 글자들은 화면의 오른쪽에서 나타나서 왼쪽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는 그 글자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리모콘을 움직여 화면을 앞으로 돌렸다. 글씨들의 띠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점에 맞춰 재생 버튼을 눌렀다. ...7시 40분에 방송될 예정이던 창사 15주년 특집 대작 '북극의 생태계'는 수상 각하의 특별 담 화 생중계 관계로 늦어집니다. 수상 각하의 특별담화는 8시에 있을 예정입니다. '북극의 생태계'는 특별 담화가 끝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의 방송 순서 8시 특 별 방송 '수상 각하 의 특별 담화' 8시 30분 창사 15주년 특집 대작 '북극의 생태계' 9시 50분 미 니시리즈 '남자의 사랑' 10시 50분 시민 광장 '해저 공원 건설- 이렇게 생각한다' 11시 40분 '프 로농구 하일라이 트' 12시 30분 뉴스 많은 시청 바랍니다... 제기랄 그는 욕설을 만들었다. 수상의 특별 담화 따위는 흥미도 없었다. k. m. s는 수 상이 죽었거나 다 시 살아났거나 별 상관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수상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그의 불 감증은 의식적인 구석이 없지 않았다. 희망 없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그는 그 런 식으로 드러냈 다. 그것은 그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시위 방법이었다. 수상의 죽음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그는 꼼짝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수상의 죽음을 부정하는 소위 300반의 인파가 공원에 모여 열기를 내뿜고 있는 뉴스 화면을 보면서 그는 코방귀를 끼었다. 무 슨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그 소문의 허울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 다. 수상이 죽었다 고 호들갑을 떨 때도, 죽은 것이 아니라 버젓이 살아 있다고 흥분을 할 때도 그 는 놀라지 않았다. 수상이 특별 담화를 하던 지난 밤은 호텔 방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를 끌어안고 보냈다. 그는 그 런 인간이었다. 거기다가 수상의 특별 담화라고 하는 것의 내용을 별 감동 없이 신문에서 대 충 읽은 직후였다. 별다른 흥미가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다시 리모콘을 쥐고 테이프를 빨리 돌렸다. 목소리를 빼앗긴 아나운서가 입만 경망스럽게 빠끔거리기를 계속했다. 그 장면은 물을 잃 어버린 붕어가 가 쁘게 호흡을 몰아쉬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뉴스는 오래 진행되지 않았다. 뉴스가 끝나자 냉장고와 자동차와 원목 가구와 두통약과 냉동 피자를 선전하는 다섯 개의 상품 광고와 교통 질서를 강조 하는 한 개의 공익 광고가 나가고 아까 보았던 권투 시합 중계가 다시 나타났 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빠르게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러고 난 후 다시 다섯 개의 광고가 나왔다. 이번에는 맥주와 면도기와 커피와 캐주얼 슈즈와 자 동카메라 제품들이 었다. 이어서 특별 방송이 시작되었다. 수상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갑 자기, 자기도 의식 하지 못하는 새에 리모콘을 눌렀다. 화면이 정상 속도를 회복하면서 소리를 되 찾았다. 그는 자신 이 무슨 생각으로 리모콘을 작동했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무의지적인 화면 응시가 그를 좀 지 겹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별 생각없이 손가락이 움직였다는 핑계는 그러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이유는 화면에 나타난 인물이 수상 '각하'라는 데 있었지 않았을까. k. m. s가 아 무리 관심 없는 척하고 무시하고자 해도, 그는 이 나라의 수상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생사 문제 를 빈번하게 국민 들의 화제거리로 제공하는, 그럴 정도로 자신의 얼굴을 잘 나타내 보이지 않는 수수께기 같은 인 물이었다.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 정도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만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보일 뿐 이었다. 그의 맨얼굴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없는 거의 모든 국민들 사이에서 그 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직접 보고 그의 음성을 직접 들어 보자는 호기 심 같은 것이 발동한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가 k. m. s 라고 그런 정도 의 호기심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는 수상의 연설 내용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내용이 익히 알 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담화문 류의 진부한 정치적 연설을 듣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가 퍼뜩 상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심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공개되고 있는 한 나라의 강력한 통치자의 면모를 관찰하고 싶었던 것 같 다. 그것은 어쩌면 문학적인 호기심의 일종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소리를 아주 작게 만들었다. 카메라는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상이 담화를 발표하는 10여분 동안 카메라의 앵글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수상의 전신 모습이 화면의 한가운데 잡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프로그램의 현란한 화면 구성과 비교할 때 몹시 진 부하고 구태의연하고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검은 양 복을 입고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목소리에 확신이 차 있고 자세 또한 절도가 있 었다. 그런데도 양복 색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원고를 읽느라고 가끔 고개를 숙이곤 해서였는지도 몰라도 어쩐지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고 있는 것 같다는 느 낌을 주었다. 자신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돌연 연상되 어 그는 피식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잠깐 스쳐간 것에 불과했다. k. m. s의 의식 속으로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스며들어와 또아리를 틀고 주저앉은 뜻밖의, 또렷한 인상 한 가지는 왠지 그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충분히 연 습을 하고 무대에 나온 성실한 연기자의 대하와 동작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다는 뜻이다. 가령 그는, '강력한 힘의 집중이 없으면 호시탐탐 혼란과 파괴를 획책하 는 불순 집단의 책동을 효율적으로 제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 여러분은 명 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불끈 주먹을 쥔 오른쪽 손을 눈높이로 끌 어올려 정면을 향해 쭉 뻗고서 한동안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 았는데, 예컨대 그런 장면들이 연기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했던 게 아 닌가 싶다. 하긴 그런 장면들은 집권 초기부터 그가 자주 보여온, 그래서 사람들 에게 매우 친숙한 제스처 가운데 하나이긴 했다. 그의 그런 몸짓은 강력한 의지 와 확신을 읽게 했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한없는 기대와 믿음을 보냈었다. 국민들의 커다란 기대와 믿음음 그의 그처럼 확신에 찬 몸짓을 통해 드러난 그 의 강력한 의지와 신념을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k. m. s는 어째서 그 익숙한 몸 짓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의 상상력의 경계 없는 자유로움 을 끌어대면 어떨까. 거기다가 k. m. s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덧붙인다면? 누가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상상력에 빗장을 치고 울타리를 두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작가의 상상력임에랴. k. m. s는 눈으로는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면서 기묘한 허구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머릿속의 상상의 공간은 언제나 현실의 공 간보다 넓고 광활하다. 이 소설가의 경우는 두말할 것이 없다. 현실의 이면에 대 한 그의 관심은 매우 집요해서 자주 시도 때도 없이 백일몽의 환각 속으로 그를 이끌어들이곤 했다. 그런 점을 들어 그가 작가라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데 그런 해석이 아주 터무니없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소설가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k. m. s의 경우에는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소설의 거의 전부가 그와 같은 백일몽의 산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소설 세계에 대해 환각적 리얼리즘이라든지 비현 실적인 진지성의 탐구 등등의 관용구들이 따라 붙는 점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찌하다 보니 그의 창작의 비밀을 누설하고 말았는데, 내친김에 더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메모지가 있다. 손바닥 두 개를 겹쳐붙 인 크기만한 그 작은 종이조각들은 그의 책상 위에도 굴러다니고, 그의 호주머 니에도 들어 있고, 그의 수첩 사이나 그가 일고 있는 책갈피에도 어깁없이 끼여 있다. 그가 백일몽에 빠져들면 그 메모지에는 글자들이 적힌다. 때로는 의식적이 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도 또렷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데 적히는 글자들 이다. 그리고 후자 쪽이 훨씬 그럴듯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의 방에 들어가면 온갖 내용의 기발하고 놀라운 환각의 언어들이 꿈틀거리는 종이조각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 방에는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다. 그는 별로 까 다로운 성격은 아니지만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는 것은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 다. 말하자면 그처럼 많은 메모지들이 그의 창작의 밑그림인 셈이다. 그는 틈만 나면 그 종이조각들을 만지작거리고 뒤적거린다. 그 과정에서 물건이 될 만한 종이조각이 뽑혀져나온다. 그러면 그는 그 종이조각을 들고 워드프로세서 앞으 로 다가간다. 그때로부터 실제로 작품이 되어 나오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 리지 않는다. k. m. s의 소설들이 하나같이 현실을 교묘하게 비틀거나 현실 밖의 세게에 집 착하고 있는 것은 그가 소섶의 골격을 백일몽으로부터 얻어 오기 때문이다. 말 하자면 그의 소설을 쓰는 것은 그의 의식이 아니라 그의 무의식인 것이다. 무의 식의 자유분방함과 기묘함과 파렴치함이 그의 소설에 자유분방함과 기묘함과 파 렴치함을 만든다. 직접 고백하지는 않지만, 그는 백일몽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없 으면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다. 그런 뜻에서 불행한 작가이고, 그런 뜻에서 행복한 작가이다. 그가 백일몽에서 깨어났을 때 텔레비전 화면은 '북극의 생태계'를 방영하고 있 었다. 그는 텔레비전 ㅗ하면은 그대로 둔 채 메모지에 적힌 글자들을 읽었다. 그 의 손이 쓴 글자들은 그 순간까지 한 번도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 는 내용이었기 때문에(적어도 그가 의식은 하지 못하고 있던 내용이었기 때문 에) 그는 그 글자들을 해독하면서 몹시 놀랐다. 수상은 미심쩍은 존재를 의심하라. 그가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 그의 연기는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연기는 그 것이 곧 완벽한 가공임을 더불어 증거한다. 연기를 하는 자는 자신의 정체를 발 현한다. 연극 속의 햄릿은 햄릿을 연기하는 아무개라는 이름의 직업적인 연기자 이다. 그를, 수상을 연기하는 직업적인 훌륭한 연기자라고 가정해보자. 그는 수 상이 아니다. 수상은 어디 있을까. 추측 1. 수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 경우 그는 죽지도 않는 다. 그의 존재는 전국민의 총화를 위해 고안된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다. 그는 처 름부터 실재하지 않는 허깨비였다. 그가 과거에 비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 이미지의 영향력이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고, 또 그 이미지를 조장 할 필요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원래대로 사라질 것이다. 추측 2. 수상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를테면 죽었다. 이 경우 그의 죽음은 타살 쪽이 합 당하다. 그의 죽음은 그를 죽인 세력에 의해 교묘한 방법으로 은폐되어 왔다. 그 들은 그는 제거했지만, 그의 이미지까지 제거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묘안을 짜냈다. 그들에 의해 수상역을 맡은 배우가 만들어졌다. 배우는 얼굴을 고치고 오랜 수련을 거쳐 몸매와 말투와 제 스처까지 모방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수상의 대역을 한다. 두 개의 추측 중 어느 쪽이든 확실한 하나. 수상은 부재중이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아직은 어떤 이유에서든 사실대고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부재 사 실이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는 그의 부재가 이제 까지 공개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공개되지 않는 것은 공개되지 않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 그것은 공개하지 않은 특정한 인물이나 세력이 공개 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공개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공개할 권 한도 가지고 있다. k. m. s는 자기가 써 놓은 글자들에 충격을 받고 백일몽 밖으로 빠져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메모지에 적 힌 내용을 몇번이나 읽어 보았다. 그는 자꾸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굉장하다. 이건 대단히 흥미있는 추측이다, 라고 그는 되풀이 말했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북극의 생태계'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는 정신 을 수습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벽에다 두어 차례 머리를 세게 찧은 후 비디오 테이프를 거꾸로 돌렸다. 그는 수상이 연설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 각을 하고 보아서 그런지 수상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굳어져 갔다. 그의 상상력은 한쪽 방향을 향해 치달았다. 숙련된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는 느낌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막연했다. 무언지 잘은 모르지만 어쩐지 수상 하다는 정도였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테이프를 연속으로 세 번 보고 나서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렸다. 그는 서둘러 옷을 찾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 길로 그는 시립 도서관을 찾아갔다. 도서관은 시의 외곽에 있었다. 도서관 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꼬박 여덟 시간 동안 그는 묵은 신문들과 잡지들과 화보 들과 정부가 간행한 정책 홍보물 등을 뒤졌다. 도서관에 있는 동안 꼭 두 번 자 리를 떴는데, 한 번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햄버거와 커피로 오랫동안 비어 있는 위장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그의 그러한 돌연한 열심에 대해서인데, 그것은 그가 무언가 소설 작품이 될 것 같은 예감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추측을 하는 것은 물론 자유지만 온당한 일은 아니다. 작품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면 그는 언제나 만 사를 제쳐 놓고 일에 매달리는 버릇이 있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고 잠도 별 로 자지 않고 심지어는 잘 먹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한꺼변에 몰아붙여 일을 끝내고 나서는 또 빈둥거리며 소일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에게 다른 의 도나 동기 -예컨대 정치적인- 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무엇 에 홀린 것처럼 열심을 냈는데, 그의 그런 태도는 작품을 만들어 낼 때가 아니 고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굉장히 뜨겁고 활 발한 무엇인가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 내부의 활력에 압도당해 그는 일에 몰두했다. 도서관의 문이 닫힐 때 그는 양손 가득 채 읽지 못한 자료들을 복사해서 들고 나왔다. 그는 밤새 그 복사물들을 찬찬히 읽고 살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줄을 긋고 다른 곳에 옮겨 적기도 했다. 해가 뜨기 직전에야 소파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던 그는 전화 벨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그는 전화를 받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다 도 로 내려놓았다. 잠시 후에 전화 벨이 다시 울렸다. 그는 한없이 귀찮아하며 수화 기를 들어서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꾸불꾸불한 선에 매달려 수화기가 공중에 서 대롱거렸다. 전화기 속에서 누군가 모기 소리를 냈다. 그는 그것을 내버려둔 채 눈도 뜨지 않고 비틀거리며 안방으로 걸어가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는 잠을 잤다. 그의 잠 속으로 수상이 걸어들어왔다. 수상은 늙고 힘이 없어 보였는데,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목에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에 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것은 누군가 그의 혀를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상은 입을 벌리고 있는데, 어떤 크고 검은 손이 수상의 입 속으로 들어가 혀 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은 수상의 손이었다. 수상의 혀를 붙잡고 있는 크고 검은 소느이 주인인 수상은 젊고 힘이 넘쳐 보였다. 젊은 수상과 늙은 수 상이 따로 보이다가 겹쳐 보이다가 했다. 같은 사람인가 하면 다른 사람이고, 다 른 사람인가 하면 같은 사람이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그 어느 순간 갑자 기 수상의 얼굴 가죽이 벗겨져 나갔다. 그러자 썩은 나무등걸처럼 툭 쓰러졌는 데, 순식간에 그 얼굴이 흉칙하고 까맣게 변해 버렸다. 누군가 그의 집 초인종을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을 때 그는 보기 흉하게 부패 한 수상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연설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연설의 내 용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 다. 쨍그랑거리는 쇳소리처럼 들렸다. 미처 잠의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그는 순간적으로 요란하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를 수상의 연설 소리로 착각하 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악몽이란 말인가. 초인종 소리에 이 어 들리는 사람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문 밖에서는 누군가 악을 쓰고 있었는데, 어딘가 장난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빨 리 문 열어. 이 친구야. 안에 있는지 다 알고 있다고. 안 열면 부술 거야." 라고 외치고 있었다. 누군지 알 만했다. 그는 그 목소리에 까닭 없이 고마움을 느꼈 다. 찾아온 사람은 그가 출판 계약을 맺고 있는 출판사의 편집자이기도 한 그의 친구 l. p. y였다. 그는 오늘 아침 k. m. s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4일 전에 그는 k. m. s가 지난 달에 넘긴 장편 소설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다고 전화를 걸었었 다. k. m. s는 3월 17일에 오전 출판사로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바로 오늘이었 다. 편집자 사무실에서 소설가를 기다리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가 들러올려졌다 도로 내려지는 걸 보고 그가 집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 몇차례 더 전화를 넣어 본 l. p. y는 망설이지 않고 직접 집 으로 쳐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로서는 더 미룰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편집자인 그는 소설가가 써 온 원고에서 심각한 오류를 몇가지 발견했는데, 작 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설득을 시켜서 고쳐 쓰도록 만들어야 했다. 출판 날짜를 미리 예정해 놓고 있는 터라 시일이 촉박했다. 어이없게도 k. m. s는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친구는 오해했지만, 그가 일부러 편집자를 만 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수상의 신상에 대한 그의 과도한 관심 때문이랄 수 있었다. 그는 한군데 정신을 쏟으면 다른 것에는 백지 가 되는 위인이었다. l. p. y는 뜻밖으로 강경하게 소설가의 무성의와 불성실을 탓하고 나섰다. 그와 같은 태도의 이면에는 이제부터 전개될 그의 원고와 관련된 논쟁에서 다소나마 우월한 위치를 선점해 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소설가들의 타고난 막무가내 의 고집과 자기가 쓴 원고에 대해 도에 지나친 애정과 싸우며 편집자의 객관적 인 의견을 반영시키는 일은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작품 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책의 판매까지를 고려해야 하는 편집자의 입장에 대해 작 가들은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다. 상대가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친구라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경우,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 에 할 수 있는 한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편집자의 그와 같은 계산된 질책이 k. m. s로 하 여금 전날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변명삼아 이야기하도록 시킨 셈이다. 편집자 가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구상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을지 모 른다. 그는 자신이 수상의 연설을 녹화하게 된 사연부터 시작했는데, 한번 이야 기를 꺼내자 도저히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의 내부에는 그 자신도 통 제하기 힘든 역동적인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편집자는 이전에 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왔다가 엉뚱하게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야 했다. k. m. s는 자신의 소설 제목이 '수상에 대한 추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수상에 대한 추측은, '수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시작한다. 한 나라를 통치 하는 수상이 가짜라는 것.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그 럴 수 있는가. 국민들이 속아 왔다면 속여 온 세력이 있을 텐데, 그 또는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그렇게 교묘하게 오랜 세월 동안 전국민을 상대로 속임수를 쓸 수 있었는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그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혹시 수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등의 문제를 거론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l. p. y에게 k. m. s는 수상의 사진이 실린 여러 장의 신문 을 내보였다. 연설을 하고 있는 수상의 사진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았다. 다섯 개의 지난 3월 16일 아침 신문들이었다. k. m. s는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친구는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문사들이 자료를 받았겠지, 하고 그는 말했다. 소설가는 친구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소설가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심각하게 말했다. "바로 그 점이야. 기자가 가서 찍은 것이 아니라 수상실로부터 보내져 온 것을 받은 거야. 다시 말하면, 이 기사를 쓴 기자들도 수상을 보지는 않았다는 거지." 편집자는 조금씩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설가의 상상력에 전적으 로 신뢰를 보내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설을 쓰나? 하고 물었고, 소설가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소설을 구상하 고 있는 거야. l. p. y는 수상이 신문에만 난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방송까지 했 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소설가는, 그 질문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직 확인은 해 보지 않았지만, 이라는 전제를 달고 나서, 세 개의 방송사 것이 똑같 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신은 그러리라고 확신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그 연설 테이프 또한 모처로부터 방송국으로 보내진 것임을 뜻한다고 말 했다. 경직되고 구태의연한 카메라가 그 첫번째 혐의점이며, 10분의 연설 도중 단 한 번도 수상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은 것이 두번째 혐의점이라고 덧붙였 다. 편집자는 더욱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건 소설이 아닌데... 하고 말 했다. 소설가는 두 손을 크게 흔들어 그 의견에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천만에, 이건 내 소설이고 소설일 뿐이야." 소설가는 다른 자료를 꺼내었다. 역시 수상의 사진이 박힌 세 장의 신문이었 다. 그것들은 3월 16일 신문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소설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 들었다. "믿기 어렵게도 아니야. 이것들은 작년 5월 23일 신문이야. 어떻게 생각해?" l. p. y는 이미 소설가에게 말려들었다. 그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렇다면 무슨 뜻이야? 하고 진지하게 접근해 왔다. 소설가의 대꾸는 뜻밖으로 무덤덤했 다. 시문사에서 똑같은 자료 사진을 사용한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수상실에서 그 사진만 쓰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는 것 이었다. 그는 공연히 흥분하지 말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흉칙한 모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 잔뜩 겁을 주고는 이내 탈을 벗어 보이며 무서워 떠는 사람의 약한 담력을 놀리는 격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거야. 알아?" k. m. s는 그 밖에도 몇개의 자료르,ㄹ 더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는 수상의 성장 과정을 수록한 '미래를 향해 뛰어라'라는 제목의, 9년 전에 발행된 책이 있 었는데, 소설가는 '수상의 아버지'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을 가리켰다. 6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소설가는 그 인물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 리고 최근의 신문에 난 수상의 사진을 가리켰다. 수상은 대머리가 아니었다. "대머리는 유전이야." 소설가는 그렇게 말하고 곧 덧붙였다. "물론 가발을 쓸 수 있지.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연막을 치는 소설가의 종잡을 길 없는 화술이 l. p. y를 혼돈 속으로 몰고 갔다. 예컨대 한 외국 잡지의 최근호 기사에 대한 k. m. s의 뜬구름 잡는 식의 코멘트도 마찬가지 경우랄 수 있었다. 그 잡지는 '10년 동안 외국 나들이를 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 원수'라고 수상을 소개하고 있었다. 국가 원수가 외국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것이 허물이 될 가닭은 없다 고 소설가는 천명했다. 더구나 국내로 찾아온 외국의 원수와 서너 차례의 정상 회담을 가진 바 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의심하는 시선으로부터 비껴날 수 있 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기사 역시 자신의 소설 창작에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l. p. y는 종내에는 k. m. s가 정말 로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소설 구상에 빗대어 치명적으로 위험 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 빠져 버렸다. 편집자는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k. m. s가 몇가지 미진한 자 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가야 한다고 일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안이 벙 벙한 채로 다음 약속 날짜를 건성으로 다짐받고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상 k. m. s는 더이상의 자료 같은ㄴ 것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제까지 모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다음부터는 상상력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 부터 자료에 의존할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 로 그의 소설은 백일몽의 산물이었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을 비 틀고 있다고 알려진 그의 소설 세계의 비밀은 백일몽에 있었다. 그렇다면 도서 관을 쫓아다니고 밤을 새고 한 그의 열심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간단한 답 이 준비되어 있다. 그 또한 그의 백일몽의 한 부분이다. 그는 백일몽 속에서 움 직인 것이다. k. m. s는 '그가 죽었다'고 썼다. 잠시 쉬었다가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충격 적인 뉴스를 옮겼다'고 이어서 썼다. 그가 죽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충격적인 뉴스를 옮겼다. 그가 죽었 다는 소문이 맨 먼저 퍼진 곳은 이번에도 주식 시장이었다. 이번에도, 라고 말한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벌써 몇차 례나 죽음을 선고받았다 다시 살아나곤 했다. 이른 아침에 증권가에 떠돈 소문 에 의하면, 그는 바로 하루 전인 3월 12일 밤 11시 35분에 자신의 침실에서 잠 을 자던 중 조용히 숨을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인은 위암. 그가 오랫동안 암 과 투병해 왔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소문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그가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할 때 그 옆에는 부인과 두 아들과 세 명의 주치의와 두 명의 비서가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k. m. s는 전문 연기자를 등장시켰다. 그가 언제 누구의 눈에 들어 어떤 경로 를 통해 수상을 연기하는 모조품이 되어 살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었다. 그는 수상을 많이 닮은 편이었던가? 소설가는 그럴 필요가 없 다고 썼다. 그는 배우로 성공해 보겠다는 야망만 분별 없이 큰 무명 연기자였다. 아직 자신의 고유한 캐릭터를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기회도 갖지 못 한 상태였다. 그는 아직 큰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 본 경력이 없는 연기 자였다. 따라서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호구를 해결 하기 위해 밤이면 술을 파는 클럽에 가서 재롱을 부리곤 했는데, 그곳에서 그가 한 것은 유명 배우나 코미디언들의 흉내를 내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놀라 운 모방술에 박수를 보내었다. 사람들은, 똑같애, 똑같애, 하고 외치며 박장대소 를 하곤 했다. 그가 그였다. 얼굴과 체형은 6개월간의 길고 집중적인 수술 끝에 고쳐졌고, 음성과 몸짓은 그의 탁월한 모방술에 의해 똑같이 수상으로 살기 시 작했다. 그는 때때로 진정한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혼란에 빠져들곤 했다. 그 는 자주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곤 했다. 그의 삶은 곧 연기였고, 그의 연기는 곧 그의 삶이었다. 언제부터 수상의 모조품이 등장했는가. 그리고 그 배경은 무엇인가. k. m. s는 수상 집권 10년 째 되는 해에 권부 내에서 일어난 권력 다툼의 구도를 설정했 다. 그것은 2인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었다. 수상은 2년 후 자신의 임기가 끝나 는 대로 그만 수상 자리에서 물러날 뜻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비추었다. 한 사 람이 너무 오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또 자신은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학을 다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수상 자리를 이어 받으려는 측근들 간의 눈에 보이는 암투가 급기야 피를 부르는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k. m. s는 그 싸움에서 승리한 세력에 의해 강권 통치가 비롯되었으며, 수상의 대 국민 영향력을 고려한 새로운 통치 세력에 의해 대역 수상이 필요하 게 되었다는 식의 줄거리를 짰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당분간 수상의 이 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국민들이 공 개된 자리에서 수상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상이 죽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돈 것도 그 여파였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수상의 이미지는 놀랍게 변질되었다. 그는 더 이상 지도력과 인품을 갖춘 경륜 가가 아니었다. 그는 철권 통치를 하는 살벌한 독재자였다. 앞의 이미지가 효율 적인 통치를 위해 필요했던 것처럼 후자의 이미지도 필요했다. 그와 같은 수상 의 이미지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던 세력들은 인원을 동원하여 수상의 죽 음이 사실이 아니며 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식의 여론을 조장해 냈다. 그들은 한 결같이 말했다. 수상은 죽지 않는다. k. m. s가 고민한 부분 역시 수상의 신상과 관련된 대목이었다. 수상은 어디 있는가. 그는 죽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살아 있는가. 죽는 것도 가능하고 살아 있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충격 적일까.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죽음을 설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그대로 살려 두었다가 다른 카드로 활용하는 쪽이 훨씬 충격적일 것 같다는 생 각도 들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마무리도 달라질 수 있었다. 단순한 마무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무리를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작품이 드러내는 주제나 메시지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k. m. s는 책상 앞을 물러나와 방안을 오가며 두 가지 가능성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어느 한쪽 으로도 마음이 쉽게 기울지 않았다. 그 어느 순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버릇대로 그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초인 종이야 울리건 말건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초인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쪽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초인종을 주르다 지친 상대가 교묘한 방법으 로 문을 따고 들어오는 것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넥타이까지 맨 두 명의 젊은 남자와 그보다는 조금 나이들어 보이는 마찬가지로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그의 서재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주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문을 따고 들어왔다며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했다. k. m. s는 당연히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 이 들어 보이는 쪽 남자가 의자에 몸을 던지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바람 이 쌩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당신은 질문은 하지 못합니다. 대답만 해야 합니다." k. m. s는 어이가 없다는 표시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는 건 자유입니다. 단 질문은 하지 못합니다. 질문은 우리가 합니다." 웃지도 않고 예의 남자가 다시 그렇게 말했다. 그 사이에 다른 두 명의 젊은 남자들은 서재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책상 위에 있는 그의 원고들과 도 서관에서 복사해 온 자료들과 책들을 찾아냈다. k. m. s는 뭘 하는 것이냐고 따 졌다. 의자에 앉은 남자가 질문은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싸늘한 목소리로 상기 시켰다. 두 명의 젊은 남자는 이번에는 거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지 한 시간 반 만에 그의 집은 쓰레기장처럼 변해 버렸다. 그 들은 소설가의 방에서 찾아낸 세 묶음의 물건들을 대기시켜 두었던 차에 실었 다. 그리고 소설가도 같이 태웠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k. m. s는 이틀 동안 갇혀 있었다. 한 웅큼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고, 빵조각 하나 들여보내지지 않았 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의 요지는 그가 확보한 수상에 대한 정보의 출처와 사용 목적과 용도에 대한 것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그를 적성국과 내통하고 있는 정보원쯤으로 몰아붙였다. k. m. s는 한결같이 자 신이 소설을 쓰고 있었을 뿐임을 강변했다. 질문하는 자는 코방귀도 뀌지 않았 다. 그들은 그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가 읽은 책의 내용, 그가 쓴 책들과 그 의 소설 세계에 대한 정보를 놀랍게 정확하게 확보하고 있었다. 모든 점에 있어 서 그들은 소설가에 대해 본인보다 더 정확하고 치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혐의를 그에게 씌우려 한단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만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 석해야 하는가. k. m. s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그의 항변은 그들의 귀에 가 닿지 않았다. 머지않아 깨달았지만 그들은 듣고 싶은 것 만 들으려 했다. 취조가 시작된 지 26시간이 지났을 때, 질문하는 사람은 출판사 편집자인 그 의 친구 l. p. y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 주었다. l. p. y의 목소리는 무엇 때문인 지 몹시 떨고 있었다. 탈진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서 소설가는 심하게 긁힌 상처를 읽었다. ...k. m. s는 어느 날 제게 우리 수상이 가짜라고 말했습니다. 연기자라고요. 진 짜 수상은 벌서 죽었을 거라고요.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몇개는 보여 주었지만, 더 많은 것은 공개하지 않았습 니다. 나는, 그를 좋은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정만이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일 때문에 가끔 만나긴 했지만 그와 가까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8시간 후, 그러니까 취조가 시작된 지 34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다 른 녹음 테이프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그의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애인의 목소 리였다. 그녀는 무안하게도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고 있었 다.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리고 해 놓고는, 정말 이러기에요? 이러면 나 정말 외 로워지고 슬퍼지는 거 몰라. 어디 있어, 도대체? 전화도 안 받고. 내일 오후에 시간을 낼 수 있어. 우리집 스컹크가 출장을 간다고. 거기로 나와. 4시까지 알았 지? 보고 싶어 죽겠어. 전화 안 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들은 전화 내용을 듣고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녀 의 정체를 모질게 다그쳤다. 스컹크가 누구냐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그 것은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는 물색없이 픽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더 웃지 못했다. 그들은 호되게 다그친 끝에 소설 가로부터 그녀가 말한 '거기'가 hbn 호텔 1405호라는 걸 알아냈다. 이튿날 저녁 6시 30분에 소설가 k. m. s는 애인의 녹음 테이프를 들었다. 그녀 의 목소리를 약간 들떠 있고 조금 허둥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당 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머, 그랬군요. 나는 정말 몰랐어요. 그래서 그 자가 내게 접근했군요. 어쩐 지 좀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녜, 냄새가 좀 나더라고요. 우리 남편이 정보를 관리하는 공무원인 줄 알고 내게 접근했겠네요. 그럴 수가... 하지만, 오해는 마 세요.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도 끈질기게 접근해서 오늘 따끔하게 야단을 쳐 주려고 만나겠다고 한 거라구요. 정말이라구요. 세상에. 그 런 멀쩡한 놈이... 취조를 하는 사람이 그 테이프를 들려 주는 순간, k. m. s는 돌연 기묘한 환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더듬어 볼펜을 찾아들었다. 그의 백 일몽은 환경과 처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는 백일몽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본다. 원탁이 보인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다. 그중 절반은 군복을 입고 있다.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절을 받은 사람은 의 자 깊숙이 몸을 잠그고 앉아 있다. 그 사람의 손가락이 원탁 위에서 까딱거린다. 수상이다. 이내 일어선 사람이 보고를 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적성국과의 접촉이나 불순 세력과의 연계 조짐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그는 말을 시작했다. 단지 비현실세계를 천착하는 한 소설가가 공상 속에 서 우연히 만들어 낸 작품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위험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습 니다. 뜻밖으로 정교하고 치밀하긴 하지만, 다른 의도나 배후는 없는 것으로 판 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소홀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라 고 사료됩니다. 만일 그 작자의 구상이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적지 않은 파 문이 야기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자를 세상과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고자 합니다. 그 자는 적성국의 정보원으로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암약하여 불순한 여론을 선동하려 했다는 혐의를 쓰게 될 것입니다. 작가가 이제까지 발 표한 창작물들 가운데서 추려 낸 몇개의 문장이 국민을 미혹시키려 한 증거로 제시될 것입니다. 수상이 나지막한 소리로, 여전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그런 문장을 찾을 수 있소? 내 말은 모든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가 말 이요. 보고자는 큰소리로 적도 있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정도는 식은죽 먹기 보다 더 쉽습니다. 그는 보고를 계속했다. 동조 세력으로 출판사의 편집자와 그 자의 내연의 처가 함께 처형될 것입니다. 수상이 다시, 보고자를 쳐다보지도 않 은 채 말했다. 그 자의 내연의 처라는 여자는 그대의 부인이지 않소? 보고자가 고개를 번쩍 쳐들어 큰소리로 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수상이 괜찮소? 하고 물었다. 그가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수상이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를 멈췄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보고자를 향해 차갑게 한마디 뱉었다. 그 대도 그 명단에 포함시켜 같이 처벌하시오. 희의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찬물 을 끼얹은 것 같은 숨찬 고요가 원탁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상은 회의장을 떠났다... 취조관은 k. m. s의 뺨을 두 차례 세게 쳤다. 백일몽에서 깨어나기에 족한 고 통이 뺨을 얼얼하게 했다. 그는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조사는 끝났소. 당신은 당신의 탁월한 상상력을 원망하도록 하시도. 때때로 탁월한 것들은 단지 그 탁 월성 때문에 희생되기도 하는 것이오. 그 탁월함의 내용이야 다르지만, 적지 않 은 사람들이 이미 그런 희생을 받아 왔소. 그는 건장한 체격의 두 명의 젊은이 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끌려갔다. 취조관은 k. m. s가 백일몽 속에서 끄적거 려 놓은 글을 읽었다. 수상은 연기자가 아니다. 그는 한때 연기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는 연기자에서 수상이 되었다. 수상은 죽지 않는다... 취조관이 그 종이를 일고 있을 때 그의 코앞에서 전화기가 울었다. 그는 전화 기를 들고 전화기를 향해 거수 경례를 했다. 넷. 방금 보냈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놈입니다. 그렇습니다. 알았습니다. 곧 처 형하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씨앗의 사랑 임철우- 1954년 전남 완도 출생.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개도둑' 당선. 1984년 소설집 '아버지의 땅'으로 한국일부 창작문학상 수상, 1988년 중편 '붉은 방'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 '아버지의 땅', '그리운 남쪽', '달빛 밟기'. 장편소설 '붉은 산 흰새' 해설-신덕룡 임철우의 '포도씨앗의 사랑'은 유년시절의 사랑읽기를 재미있게 형상화한 작품 이다. 유년의 화자가 사랑의 절대성 앞에서 혼란을 겪는 모습이 두 남녀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 사랑의 절대성의 양상은 극단적인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하나는 사랑의 놀라운 힘, 즉 경이감이고, 다른 하나는 비 극성이다. 우선, 사랑의 놀라운 힘에 대한 기억을 보자. 부모의 눈을 피해 두 남녀가 화 자가 사는 동네로 들어와 살게 된다.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이 두 남녀의 출현 은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특히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화자는 친구들과 함께 두 남녀의 행동을 엿본다. 두 남녀가 마중낮아 포도를 먹으며, 서로의 얼굴에 포도씨앗을 뱉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를 바라본 화자는 이 행위가 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는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만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과 행복에 넘친 표정만이 부각되어 올 뿐 이다. 또하나의 기억은 두 남녀의 행복한 동거생활이 깨어지고 난 뒤의 비극성 이다. 여자는 일년 후 정신이상자가 되어 이 마을에 돌아온다. 이 여인에게서는 과거의 행복했던 모습은 커녕 볼품없고 더러운 걸레뭉치와 같은 모습이 보일 뿐 이다. 여인의 불행에 대한 안타까움이 어린 화자에게 일어난다. 그러나 어린 화 자는 불행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사랑은 아주 하찮게 보이는 일도 놀라운 기쁨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과 사랑 의 상실이 그토록 처참한 비극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사이의 거리는 어린 화자에게 있어 놀라운 체험이 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거리는 어린 화자가 어 머니의 얼굴에 포도씨앗을 뱉어보는 엉뚱함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작품 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어린 화자에 의해 전개되지만 서술 내용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성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성인이라면 이미 사랑 의 힘이 지닌 절대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성인의 화자는 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어린 시절 도저히 풀리지 않 던 사랑의 힘에 대한 의문과 갈등은 곧 성장의 한 부분을 차지했고, 이는 현재 의 삶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씨앗의 사랑 그 젊은 남녀가 우리 동네에 맨 처음 나타났던 때의 일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 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조무래기들이 동네 앞 작은 방죽에서 물 위 에 떠 있는 어떤 갓난아이의 시체를 발견했던 바로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언제나처럼 마을 공터로 모여들었다. 벌써 몇이 먼저 나와서 축구공 을 차고 있는 참이었으므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축구 시합에 끼여들었다. 그 공의 주인은 뒷집 원이 녀석이었다. 백마 부대로 월남에 간 녀석의 큰형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선물로 사 주었다는 그 공을 원이가 가슴에 껴안고 자랑스 레 맨 처음 눈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들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하나같이 가난한 부모를 둔 우리 동네아이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고작해야 빈 깡통 아니면 헌 밧줄을 주워 모아 얼기설기 엮고 뭉쳐서 만든 가짜공이나 차곤 했던 터였다. 그러므로 공을, 더더구나 선수들이나 치는 진짜 가죽공을 구경하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예 가슴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그 공 덕분에 원이는 갑자기 우리 조무래기들 사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힘을 가진 아이가 되어 있었다. 늘상 콧구멍에 누런 콧덩이나 달고 다니던 녀석이 꼴 사납게도 여간 으스대는 게 아니었지만, 그런 녀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우리 는 어쩔 수 없이 저마다 눈치를 보며 알랑방귀를 뀌어 주어야만 했다. 원이네 큰형이 월남으로 떠난 것이 반년 전쯤이었으므로, 축구공도 그 사이 바람이 많이 빠져 발끝에서 퍽 퍽 하는 맥빠진 소리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 공은 소중하고 귀한 보물인 셈이었다. 초여름으로 성큼 들어선 한낮, 따가운 햇볕은 너나없이 민숭하게 밀어 넘긴 우리들의 까까머리를 불에 달군 냄비 꼬락서니로 만들었지만, 우리들은 온통 진 흙과 땀에 짓이겨진 모습으로 저마아 혓바닥을 내밀고 헐떡거리며 정신없이 이 리저리 뛰고 달리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야아! 느그들아! 애기가 죽었다이. 애기 송장이 물에 떠 있단 말야!" 느닷없이 어디선가 그런 다급한 외침이 우리들을 불러세웠다. 무슨 소린가 싶어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니, 한 녀석이 논둑길을 달려 오고 있 었다. 구멍가겟집 아들 길용이었다. "누가 죽었다고야?" 달려온 길용이를 빙 둘러싸고 우리는 물었다. 녀석은 더위 먹은 똥개처럼 혓 바닥을 빼어물고 헐떡이며 더듬거리는 것이엇다. "개, 개구리를 잡을라고 바, 방죽에 갔는디, 가, 갓난애기가 주, 죽어가꼬 무, 물에 떠 있단 마, 말이야..." "뭐, 갓난애기가? 이 자식, 너 또 거짓뿌렁하는 것이제?" "아아녀! 진짜랑게, 다른 아그들이랑 다 보았단 말이야!" 녀석은 눈을 뚱그렇게 치뜬 채 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과연 녀석이 가 리키는 방죽의 나지막한 둑 위엔 조무래기들 서넛이 모여서 뭐라고 소리를 지르 고 있는 참이었다. "가 보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아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논둑을 질러 들 판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방죽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말이 방죽이지, 고작 둠벙 이라고 해야 좋을 만큼 작았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철도 건널목이 있었고, 그 건널목을 건너 신작로에 이르기 전에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 들녘을 한참 가 로질러 가면, 논 가운데 있는 그 방죽에 닿을 수 있었다. 방죽은 시커멓고 더럽기 그지없었다.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더러 미역을 감는 아이들도 있었고 낚시꾼들이 찾아오기도 했었다지만, 이젠 그 썩어 가는 물에 손을 담그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죽이 죽어 버린 데에는 시가지 외곽을 돌아나오는 물줄기가 썩어서 악취 풍 기는 하수구로 변해 버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만치 들판 맞은편 산기슭 아래에 자리잡은 거대한 교도소 농장 때문이라고들 했다. 붉은 벽돌로 엄청나게 높이 쌓아올린 그 큰 농장에서는 거름을 만들기 위해 온갖 인분이며 썩은 쓰레기들을 줄기차게 차로 실어나르곤 했는데, 그기서 흘러 나온 더러운 똥물이 그 방죽으로 모여들어 고이는 탓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던 것 이다. 방죽이 가까워 오자 벌써부터 예의 그 고약한 악취가 우리들의 콧구멍을 들쑤 시기 시작하고 있었다. 들판을 한달음에 질러 온 우리들은 둑길을 넘어 물 쪽으 로 내려갔다. 먼저 와 있던 국민학교 이삼학년짜리 꼬마들을 밀어내고 가까이 다가간 우리들은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아이구메, 저기 있다야!" "맞다! 갓난애기여!" 아이들은 놀라움에 소리쳤다. 순간 까닭 모를 두려움과 섬뜩함으로 우리는 컥 숨이 막혔다. 몇놈은 슬금슬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무슨 작은 생선기거나 아니면 고양이 새끼의 시체인 줄로 만 알았다.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작고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 나 자세히 보니 그건 신기하리만큼 인형의 모양을 닮아 있었다. 우리들의 팔둑보다도 더 작은 크기의 갓난아이는 두 팔을 양옆으로 활짝 편 채 하늘을 향하고 누워 떠 있었다. 그것의 몸뚱이를 떠받치기라도 하듯, 파란색 비닐우산의 비닐 껍데기가 물 위에 넓게 펴진 채 함께 떠 있엇다. 아마 누군가 가 그 비닐 껍데기에 싸서 거기에 버린 모양이었다. "저것이 애기란 말이여, 참말로?" "맞어야, 갓난애기랑게. 봐라, 주먹을 꼭 쥐고 있다야." "죽었으까?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이." "으마, 그런디 저 배꼽 조까 봐라이. 무신 줄 같은 것이 딜룽딜룽하고 있지야. 안 그래?" "참말로 그러네. 배꼽에 뭣이 붙어 있다야." 정말 그러고 보니, 그것의 배꼽엔 무엇인가 기다란 끈 같은 것이 늘어붙어 물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탯줄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해 대었다. 하 지만 누구도 섣불리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어떤 공포가 우리들의 목덜미를 뒤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들은 한동안 얼굴을 찡그린 채 그것을 재려다보며 서 있었다. 머리 가죽 을 벗겨 내기라도 할 듯 쨍쨍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 밑바닥조차 보이지 않도록 시커멓게 썩어 가는 더러운 방죽의 수면 위에 고요히 떠 있는 그 작고 이상한 사람 모양의 살덩이 하나...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고도 섬뜩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검은 물 위에 둥그렇게 펼쳐져 있는 파란 비닐 보자기의 색깔은 어 쩌면 그리도 선연한 파란빛이었을까. 그 둥글게 활짝 펼쳐진 비닐 보자기 한가 운데에 둥실 떠 있는 그 작은 물체는 마치도 허연 연꽃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것 이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숨을 헐떡이며, 하나같이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그것 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속이 토할 듯 메스꺼워 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현듯 콧구멍을 터뜨릴 듯한 지독한 악취를 우리는 비로소 감지해 냈 다. 물론 그 참을 수 없는 냄새는 코에 익은 방죽의 악취였지만, 이날따라 그 고 약한 냄새가 그 어느 날보다도 가장 고약하고 불쾌하게만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 이다. 그 젊은 남녀가 나타났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까르르르 터뜨리는 여자의 맑은 웃음소리에 우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죽 둑 아래로 난 작은 논둑길을 따라 저만치서 젊은 남자가 여자와 나란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앳된 티의, 갓스무살이 될까말까한 나이였다. 여자는 한 손에 분홍색 파라솔을 펴들었고 다른 산 손에는 두툼한 여 행 가방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 곁의 남자는 등에 꽤 큼직한 이불 보따리를 들쳐메고 낑낑대는 시늉이었다. 둘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어디서 오는 사람들일까. 하지만 우리 동네를 찾아오는 길이 분명했다. 근방엔 다른 마을이 없었고, 둑 아래의그 논둑길은 신 작로에 꺾어져 우리 마을로 들어오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힘들어. 자기 무겁지 않어?" "괜찮아, 이까짓 것 정도쯤이야 문제 없다고." "그짓말, 저 땀좀 봐라아. 우리 여기서 쪼끔만 쉬었다 가아 응?" "그러까?" 두 남녀는 저만치 둑 아래 풀밭에서 멈추더니, 들고 있던 가방과 짐을 내려놓 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시종 깔깔거리며 웃어대었다. 그 들은 아직 우리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남자가 여자를 덥석 껴안는 시늉을 하자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달 아나려고 몸을 바둥거리기도 했다. "야아, 저거 봐라. 저 사람들, 연애헌다이. 히히힛" 그걸 내려다보고 있던 우리들 중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제서야 그들 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 너희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청년이 엉거주춤 일어나 소리를 질렀을 때, 누군가가 대답했다. "아저씨, 갓난애기가 죽었어라우. 여그 방죽 속에 빠져 있당게요." "뭐여?" 청년과 여자는 무슨 소리가 싶은 듯, 벌떡 일어나 둑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우리들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주춤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아이그머니나앗? 세상에..." 순간 여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여자가 털석 엉덩방아를 찧으 며 주저앉는 순간 남자가 재발리 부축했다. "이게 뭐냐? 누가 이, 이랬어?" 청년의 얼굴도 여자의 그것처럼 대번에 허옇게 질려 있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우리도 몰라라우. 와서 본 게, 이것이 있드랑게요." "이 녀석들, 당장 돌아가지 못해? 이게 무슨 구경거린 줄 알아!" 돌연 청년이 꽥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의아해 하면서도 슬슬 뒷걸음질을 치 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얼굴을 돌리고 주저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허억,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 세상에... 누가 저런 끔찍한 짓을... 어흐흑." 여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둑 위로 비칠비칠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등을 껴안듯 부축하고 청년이 따라가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달래는 시늉을 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끝애 여자는 둑길 위에서 주자앉자마자 손으로 입을 툴어막으며 욱, 욱 하고 토해 내는 것 같았다. 청년이 부지런히 여자의 등을 쓸어 주기도 하 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아 내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구경했다. "아니, 이놈의 자식들이! 당장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이놈들을 그냥!" 그러다가 청년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향해 쫓아오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놀 라 우르르 둑길을 뛰어내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쳇, 지까짓 것이 뭣이간디 저런다냐? 다시 가서 애기 좀 보자이." "야아, 그냥 돌아가자이. 더러운 것을 뭣헐라고 또 본다고 그래." "이런 겁쟁이. 얌마, 그것이 뭐가 더럽고 무섭다고 그러냐?" 이만치 논둑길까지 밀려나와 우리는 잠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녀석이 말했다. "안 돼. 그러다가 너, 벌 받는다. 밤중에 귀신이 나와가꼬 너를 잡아가불면 어 쩔래?" "무슨 귀신?" "갓난 애기 귀신 말여. 아까 그 애기가 너한테 복수를 할지도 몰라." "맞아 맞어. 애기 귀신은 응애 응애 하고 울음소리를 낸단다." 그 말에 우리는 덜컥 겁이 나서 서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하나같이 잔뜩 두 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다. 순간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동네를 향해 도망치기 시 작했다. 귀신이다. 애기 귀신이다. 숨이 넘어가도록 우리는 미친 듯 뛰었다. 금방 이라도 누군가가 뒤에서 목덜미를 홱 낚아챌 것만 같아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 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마을 앞 공터에 다다랐을 때에야 우리는 혓바닥을 빼어물고서 뒤를 돌 아다보았다. 그 두 남녀는 보따리를 끌고서 저만치 논둑길을 걸어오고 있는 참 이었다. 그날, 우리 동네는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소문을 들은 동네 어른들 몇이 뒤늦 게 방죽으로 몰려갔고, 얼마 후 시내 파출소에서 순경들이 나와 무슨 조사를 한 다고 웅성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갓난아이를 거기에 버리고 간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끝내 밝 혀지지 않고 말았다. 아마 어떤 몹쓸 여자가 무슨 사연 때문에 산 채로 그 아이 를 방죽에 버려 두고 도망갔을 게 틀림 없다고,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 었을 뿐이다. 순경들이 그 죽은 아이를 비닐부대에 담아 가져갔다는 소문이 있 었고, 얼마 후 그 불쾌하고도 끔찍한 사건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져 갔 다. 사실 그 무렵엔 그런 비슷한 일들이 결코 드문 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것이 바로 그 두 남녀가 우리 동네에 처음 나타났던 날의 일이었다. 원이네 집 행랑채에 그 두 젊은 남녀가 새로 이사를 왔다는 소문이 동네 안에 좍 퍼졌다. 사람 사는 동네에서 사람이 들고 나는 일쯤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일 터였지만, 우리 동네에서만은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 동네는 행정 구역상으로야 엄연한 시내였으나, 시 변두리에서도 한참이 나 벗어난 농촌이었다. 시내버스 종점에서도 한참이나 벗어나, 비만 오면 발목가 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길을 십여 분 넘게 걸어들어와야만 하는 터였다. 그런 탓인지. 백이삼십 호 남짓한 동네에서 이사를 가고 오는 경우가 드물었 고, 때문에 원이네 집에 새로 왔다는 그 젊은 남녀가 동네 아주머니들의 입살에 오르내리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아니, 그러믄 그 사람들이 친남매지간이 아니란 말여?" "남매는 무신? 척하면 그 눈치 몰라서 그러는가." "글씨, 첨엔 나도 오빠 동생쯤이나 되는갑다 생각했등마는, 원이네엄마 말로는 암만해도 눈치가 수상하드래여." "어떻게?" "그 가시나가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기는 허는디, 친오빠는 분명히 아닌 모양이 여. 헌데, 대낮에도 둘이서 뭐가 그리 오지고 좋은지 방안에 꼭 틀어백혀가꼬 히 히덕거리며 장난질이나 하면서, 좀체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는구먼. 아침에도 해가 방문까장 들이비치도록 일어나는 기척이 없다가는 열시나 되어서야 그 가 시나가 부엌에서 밥을 짓곤 하는 기척이래여." "허긴. 그러고 보니 남자도 어디 직장 같은 델 나다니는 눈치도 아닌듯 하등마 는." "직장이란. 그 청년, 인자 고등학교나 갓 졸업했을 나이 같던디?" "어저께도 즈이들 둘이서 나란히 붙어가꼬 시내로 한들한들 나가는 걸 내가 봤었어. 그런데 그 둘이가 설마...?" "뻔하지 뭐어. 고것들, 암만해도 둘이서 눈이 맞어가꼬, 부모 몰래 집에서 밤봇 짐 싸가지고 도망나와 살림 차린 것이 틀림없당게." "맞어. 들여 놓은 이삿짐 보면 모르겄등가? 이불짐하고, 겨우 끼니 끓여 먹을 솥단지, 그릇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잖어?" "에이, 설마 아무려믄 그렇기야 할까. 둘 다 이제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 이들 같아 뵈든디..." "으마마, 무슨 쏘리당까? 그 나이면 무슨 짓을 못할까. 우리 친정엄니는 열일 곱 살에 우리 큰오빨 낳았다우." "만일에 그게 사실이라믄 이거 쿤제 아닌갑네? 따져 보면 그 둘 다 우리 딸 아들 같은 나이인디, 아무리 남지라지만 모르는 척 그냥 두고 볼 수도 없고, 또 우리 동네 아그들헌테도 교육상 해로운 일인 것이야 뻔하않은갑네." "여하간에, 요새 젊은것들 하는 짓거리들을 보믄 참 간뎅이도 크단 말야. 머리 에 피도 덜 마른 나이에 저런 꼴로 여기까장 도망쳐 숨어 있는 줄을 알믄 부모 들 눈이 벌렁 뒤집혀 버릴 것이구만. 어이구 쯔쯧." "그나저나 맨날 둘이서 시내로 나가 쏘다니다가 밤늦게서야 돌아오곤 하는 모 양이든디,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서 나올꼬?" "보나마나 뻔하지 뭐. 시골에서 즈이 부모가 뼈 빠지게 벌어 놓은 돈 아니믄 뭣이겄나? 야반 도주하면서 빈손으로 나오는 거 봤능가?" "세상에, 원. 말세일세 그랴. 쯔쯔쯔."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우물가에서건 빨래터에서건 서로 만나기만 하면 원이네 집의 그 젊은 남녀 얘기로 숙덕거리는 거였다.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로서야, 밤봇짐이니 야반 도주니 하는 따위의 정확한 의 미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른들의 표정이나 눈치로 보아 그들 남녀가 뭔가 남 모르게 대단히 좋지 못한 짓을 저질렀음에 틀림 없을 거라고 막연히 추 측할 뿐이었다. "밤봇짐? 그건 보따리를 쌌다는 뜻이란 말여. 도둑질 말이여." "그래. 그 사람들이 도둑질을 해 가꼬 우리 동네로 숨어 들어온 것이 틀림없당 게." "으마아. 도대체 뭘 도둑질을 해 가꼬 왔으까?" "금덩어리 같은 거 아니까? 아니, 이따만큼한 돈뭉치를 그 가방에 숨겨 가꼬 왔는지 모른다." "그라믄 어째서 순경들이 안 잡아가고 있다냐?" "글씨... 어, 맞다. 증거가 없응께 그럴지도 몰라." 그런 어느 날, 우리는 고샅에 모여 딱지치기를 하거나 구슬을 굴리며 서로 고 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 두 사람이 처음 나타나던 날을 우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참말 그랬는지도 모르잖은가. 여자가 들고 있던 그 허름한 가방 속 아니면 청년이 들 쳐멘 커다란 이불보퉁이 속 어딘가에 어쩌면 묵직한 돈뭉치라든가 금덩어리가 숨겨져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우리는 별안간 무슨 굉장한 비밀을 알아 낸 탐정들처럼 가 슴이 벌렁벌렁 뛰어오르고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슬치기하던 손을 털고 일어났다. 그 리고 그 두 사람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해서 원이네 집을 향해 한꺼번에 몰려가 고 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도 늘상 말씀하시지 않던가. 이웃에 낯선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유심히 동태를 살펴 두었다가 경찰서에 재빨리 신고해야 한다고 말이 다. 우리는 원이네 집 골목 어귀에서 한동안 마른침을 꿀껄꿀껄 삼켰다. 손바닥에 진땀이 돋아났다. 거기서부터는 들키지 않도록 몸을 숨겨야 한다고 한 아이가 말했으므로, 우리는 마치 반공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일렬 종대로 쭈그려앉아 오리걸음으로 조심조심 다가가기 시작했다. 원이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까지 다가가서 개구멍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지 만, 집은 비어 있는 것처럼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원이네 식구들이야 들일을 나갔겠지만, 행랑채 방에 세 들어 있는 그 수상한 남녀는 분명 집에 남아 있노 라고 원이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반쯤 열려 있는 낡은 행량채의 세살무늬 문짝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방안 역시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틈에 도망쳐 부렀능갑다야." "그래, 간첩들은 눈치가 귀신같이 빠르다더라." "보물 보따리를 갖고 달아났을까?" "아직 어딘가 숨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마루 밑이나 아궁이 속 같은 데다가." "무전기랑 함께 마루 밑에 흙을 파고 묻었을 것이여." 내가 말했다. 그것은 얼마 전 학교에서 단체 관람했던 반공 영화 속의 간첩들 이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저마다 가슴을 콩닥거리며 살피던 우리들은 용기를 내어 행랑채 가까 이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 행랑채는 작년까지만 해도 원이네 큰누님이 쓰던 방이었다. 지난해 가을, 시집가기 얼마 전에 원이네 큰누님 영단이는 온 동네 지붕이 들썩거리도록 한바 탕 여러 날을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었었다. 혼수감 변변찮게 해 주었다고 식구들과 다투던 끝에, 아예 마당 한가운데 털 버덕 주저앉아서 엉엉 대성 통곡을 터뜨리기도 하고, 끝내는 떠다 놓은 옷감 뭉 텅이를 제 집 변소 똥구덩이에 한꺼번에 쏟아부어 버리는 바람에 원이네 아버님 남씨한테 북어꼴이 되도록 눅신하게 두들겨맞아야 했다. 그 덕분에 온 동네 사 람들이 다 몰려와서 한바탕 눈요기를 했다. 원이네 큰누님은 시집가던 날에도 엉엉 울었다. 대절한 택시에 신랑과 나란히 앉아 충청도 어디라는 시댁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랬다. 그 우는 까닭이 혼수감 에 대한 불만 탓이라는 둥 혹은 부모 곁을 떠나는 순간이 되자 비로소 철이 들 어서 서러움이 북받친 때문일 거라는 둥, 어른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던 것 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립문을 소리도 안 나게 열고서 원이네 집 마당 안으로 잠 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까르르르... 터뜨리는 여자의 행복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분명 집 뒤란 쪽이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발소리를 죽여 가며 집 모퉁이를 살금살금 돌아나갔다. 모퉁이 기둥에 몸을 바싹 붙이고 고개를 살며시 빼내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수 상한 그 두 남녀의 모습을 발견해 내었다. 원이네 집 뒤란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 아래로 드 리워진 서늘한 그늘 밑에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둘은 지금 바로 그 평 상 위에 나란히 붙어앉아 도란거리며 무엇인가 맛나게 먹고 있는 참이었다. 그것은 대광주리에 담긴 포도였다. 여자는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원 포도송이를 한 손에 들고 있었는데, 이따금 한 알씩 따서는 청년의 입에 넣어 주곤 하는 참이었다. 그때마다 청년은 붕어처럼 입을 삐죽히 내밀어 그것을 받아먹곤 했다. 우리들 눈에는 그 모습이 바보스러워 보이는데도, 그것이 뭐가 그리 재미있고 신이 나 는지 두 사람은 연신 까르르르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아주 수상한 짓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자 쪽이 먼저였다. 포도 알을 따서 우물거리던 그녀는 돌연 입 안에 담긴 포도씨앗들을 푸풋, 소리를 내며 청년의 얼굴에 대고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청년 역시 그 짓을 똑같이 여자에게 되풀이했다. 서로 번갈아 가며 상대편의 얼굴에 퉤퉤 포도씨를 내뱉기도 하고, 그걸 피하는 시늉을 하면 서 그들은 좋아라고 마구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어리둥절해졌다. 전혀 싱겁기 짝이 없을 것만 같은 그 이상한 놀이가 저토록 재미있고 즐거운 것일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은근히 부러워 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들 두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유쾌하고 행복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보물 보따리며 비밀 무전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넋을 놓고 그들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그 포도송이는 입 안에 신 침을 가득 고이게 만들었고, 우리는 그들처럼 한입 가득히 씨앗을 물었 다가 누군가의 얼굴에 뱉어 주고 싶다는 야릇한 충동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무심코 퉤 하고 땅바닥에 침을 뱉고 말았다. "어, 누구여!" 바로 그때 청년이 고개를 돌리고 우리를 발견했다. 순간 우리들은 화들짝 정 신이 들자마자 "어마 뜨거라." 하고 정신없이 원이네 집 대문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탐정놀이는 끝장이 나 버리고 말았던 것 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조무래기들은 다시금 또다른 놀이를 찾아 열중했다. 여름 내내 뙤약볕을 맞으며 공차기를 하고, 개구리며 뱀을 잡는답시고 막대기 를 찾아 들고 온 들녘을 들쑤시며 다니다가 지치면 우리는 산너머 강가를 찾아 가 오후 내내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유난히도 무덥고 햇볕이 따갑던 그해 여름도 다 지나고 다시 가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우리 동네의 가을은 언제나 약속처럼 뒷산 등성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지막 한 산등성이의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의 이파리가 차츰 엷은 갈색으로 물들어가 기 시작하는구나 싶으면, 어느새 가을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산기슭 밭고랑마 다 수숫대와 조 이파리마다 울긋불긋 물감을 드리우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동네 앞뒤편 들녘 벼이삭의 묵직한 대궁이들을 온통 눈부신 황금빛 물결로 터질 듯 출렁이게 만들곤 하는 것이었다. 가을은 그다지 별다른 일이라곤 없이 평온하고 무덤덤하게 우리 동네의 지붕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동안 은심이네 할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꽃상 여를 타고 마을 뒤편 공동 묘지에 묻혔고, 나하고 늘상 다투기만 했던 내 짝 병 갑이가 시내로 이사를 갔으며, 어머니는 썩어 버린 내 왼쪽 어금니를 실로 빼어 서 까치밥으로 지붕에 던져 올렸다. 원이네 집 행랑채의 두 남녀의 동태 역시 별달리 수상한 점이 없어 보였다. 아니, 한 가지 있긴 있었다. 그 여자의 배가 조금씩 불러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변함 없이 행복하고 즐거워만 보였다. 늘상 집 안에만 틀어 박혀 있던 청년도 조금씩 동네 바깥 나들이를 하기 시작하는 눈치더니, 추수 때 가 되면서부터는 주인집인 원이네 집 가을걷이를 무척 열심히 도와주기도 했다. 우리집 벼베기 날에는 하루 종일 우리 식구들과 함께 들녘에서 일을 도와주기 도 했고, 동네에서 공동 작업으로 시내 정미소에 가마니를 내어 가는 날 하마터 면 마차바퀴에 발을 깔릴 뻔한 일도 있었다. 그 덕분에 청년은 동네 사람들과 부쩍 친해진 눈치였다. 보기보다는 싹싹하고 일도 잘하는 좋은 청년이라고 어른들은 대견해 하는 것 같았다. 여자 역시 부쩍 불러 오기 시작하는 배를 뒤뚱거리며 빨래터에 나와 스스럼없이 던지는 아낙네 들의 걸찍한 농지거리에 발갛게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수줍게 웃 는 그녀의 분홍색 잇몸과 가지런한 치아가 나는 좋았다.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렸다. 그 사이 여자의 배는 눈에 띄게 부풀어가고 있었 고, 우리는 이따금 그녀의 배가 과연 얼마만큼 더 부풀어오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저 백속에 애기가 들어 있단 말여? 애기를 무얼 먹고 살지?" "짜아식들, 콩알만한 놈들이 뭘 모른당게. 얌마. 공기바람 먹고 살지, 뭘 먹고 살아?" "공기바람을?" 중학교 졸업반인 원이네 작은형의 말에 우리는 눈을 똥그랗게 치뜨고 물었다. 이제는 완전히 다 낡아빠져 버린 원이의 축구공에 바람을 넣기 위해 원이네 집 마당에 갔을 때였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 펌프를 꺼내 와서 바늘을 축구 공에 질러넣고 푹 푹 펌프질을 하던 원이네 형은 혼자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래 임마. 용식이형이 밤마다 색시 뱃속에다가 푹푹 바람을 넣어 주니까 저 렇게 색시 배가 부풀어오르는 것이란 말여. 짜아식들, 좆도 모르는 것들이 탱자 탱자허고 있냐. 이히히힛." 원이네 형은 저만치 마당 끝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그 여자 쪽으로 흘금거리 며 혼자 킬킬 웃었다. 용식이형이란 바로 그 청년의 이름이었다. "와아, 참말?" 거짓말 같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용식이 청년이 여자를 방바닥에 눕혀 놓고 원이네 집 자전거 펌프 를 꺼내 와서 열심히 푹푹 소리가 나도록 펌프질을 하는 꿈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아쉬운 설날이 지나긴 했지만, 며칠 후엔 다시금 대보름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저녁 나절, 느닷없이 우리 동네엔 웬 낯선 사람 들 대여섯 명이 출현햇다. 그리고 그들은 다짜고자 원이네 집 행랑채를 향해 돌 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이내 여러 사람이 한데 엉켜 싸우는 듯한, 굉장히 소란한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그쪽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할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꽁무니를 쫓아 내가 그 집 골목으로 달려갔을 때, 서너 명의 낯선 아낙네들이 마침 그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질질 끌고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이년! 쥑일 년아! 네 까짓 천한 년이 감히 우리 김씨 가문 삼대 독자 외아들 을 흘려 가꼬 신세를 망쳐 놓을라고 그래앳!" "이년을 쥑여뿌러야 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용식이헌테 꼬리를 쳐서, 논 닷 마지기 판 돈을 싸그리 훔쳐 가꼬 야반 도주한 년, 이 여우 같은 도둑녀언!" "오냐, 이 도둑년 잘 만났다이. 네년 잡을라고. 내가 농사까장 작파하고 일년 내내 남한 천지를 들쑤시고 댕겼다. 당장 감옥소에 끌려 들어가서 콩밥을 묵게 해 줄 텐게. 어디 맛 조까 봐란 말여!" 여자들은 분에 겨워 씩씩거리며,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고샅을 나서며 고래고 래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반쯤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하고 비 켜서서 구경만 했다. 여자는 말없이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까치집처럼 엉망으로 쥐어뜯긴 머리채 를 하고 맨발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도움을 청하는 듯한 슬픈 눈으로 그녀는 연 신 원이네 집 쪽을 돌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또다 른 두 명의 중년 남자에게 둘러싸인 용식이 청년은 행랑채 마루 한가운데 맥없 이 주저앉은 채 멀거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낯선 침입자들은 그녀들이 타고 왔던 시발 택시에 여자를 짐보따리 마냥 함부로 쑤셔넣자마자 부르릉 소리를 남기고 시내 쪽을 향해 사라져 버리고 말았 다. 잠시 후, 이번에는 용식이 청년이 두 사내의 뒤를 따라 마을을 떠났다. 철도 건널목을 넘어 신작로를 따라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벅터벅 멀어져 가고 있는 그 의 뒷모습이 마치 끌려가는 한 마리 황구처럼 보였다. "오메, 내 진즉부터 이런 사단이 벌어질 줄 뻔히 알았당게!" "아까 용식이 청년을 끌고가든 그 어른이 바로 즈이 아부지라여." "미치고 환장허게도 생겼제 그랴. 영광읍에서 정미소까장 갖고 있는 천석꾼 땅 부자라는디, 애지중지허는 삼대독자 외아들이 천한 소작인 딸년하고 배가 맞아 가꼬 도망질을 쳤으니 오죽했겄능가. 아이고, 그 젊은 가시나가 눈웃음 살살 침 서 아양질 떨어대는 걸 보니께, 열 번 그러고도 남겄드랑게." "어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구마는. 즈이들끼리 서로 좋아서 배맞은 걸 어 떡허란 말이여. 소작 부치고 사는 사람은 워디 사람이 아닌갑네." "그나저나 젊은 색시가 불쌍해서 어쩐다요? 저렇게 오뉴월 수박통맨 키로 만 삭으로 배까장 잔뜩 불러 가꼬..." "아무리 저래 봐야 부모들도 이런 판국에 뭐 어쩌기사 할랍디여. 쥑이지도 살 리지도 못허고. 이왕지사 그리 된 거, 헐 수 없이 둘이 짝지워 가꼬 살게 해 줘 야겄제라우." "아이구, 그러기는 풀시 틀렸겄등마는. 아까 그 용식이 어미라는 여자, 보통이 아니겄어. 너 죽고 나 죽자고 시퍼렇게 두 눈에 불킴서 개 잡디끼 질질 끌고 가 는 거 안 봤능가." "허어 참, 동네가 시끄러울랑게 별 고약한 일이 다 생기는구마이. 오메, 이 잡 녀르 아새끼들아, 너까짓 것들이 뭣을 안다고 몰려나와 이 지랄들이여. 빨랑 집 으로 안 기어들어갈라냐앗!" 우리들은 비로소 그 낯선 사람들이 바로 용식이 청년의 부모와 친척이라는 사 실을 알았다. 그리고 용식이 청년과 그 여자가 둘이 '배가 맞아서' 부모 몰래 고 향을 뛰쳐나와 우리 동네에서 '동거 생활'이라고 하는, 뭔가 아주 큰 죄를 범한 때문에 끌려가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소동이 벌어진 후, 그들은 다시는 우리 동네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 안 되 는 그 젊은 남녀의 살림살이는 그대로 남겨진 채로였다. 얼마 있다가 그 살림살 이는 모두 원이네 엄마의 차지가 되었는데, 그걸 두고 아낙네들은 방세가지 몇 달분을 미리 챙겨받은 주제에 염치도 없이 뻔뻔하다는 둥 배짱 한번 두둑하다는 둥, 한동안 입을 삐죽거리는 눈치였다. 그날 이후, 차츰 그 두 사람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갔다. 이따금 어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필시 부모가 두 사람을 도리 없이 짝지워 주어서, 부부로 살고 있을 거라 는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해 겨울은 춥고 길었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려서 우리는 방학 내내 눈밭 에서 강아지들처럼 뒹굴기도 하고, 얼어붙은 방죽으로 나가서 지겹도록 썰매를 지치기도 하면서 보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나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생이 되었고, 원이네 집 행랑채엔 새로운 사람들이 셋바을 얻어 들었다. 원이가 그토록 애지 중지하던 축구공은 마침내 찢어져 버렸지만, 우리들은 그다지 애석해 하지도 않 았다. 원이도 나도 이젠 중학생이었고, 예전처럼 공차기를 하기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여름이 찾아왔고, 기다리던 방학이 막 며칠째로 접어들던 어느 날이었 다. 장마가 시작되려는 듯, 먹장구름이 새까맣게 하늘을 덮어 누르기 시작하고 있는 오후, 그 돌연한 소문은 내 귀에까지 들려 왔다. "너 그 소문 들었냐? 용식이네 색시가 나타났다더라." "참말로? 언제?" "아까 점심 나절에 원이네 집으로 들어갔단다. 그런디, 미친년이 되가꼬 왔다 더라." 옆집 길용이의 말에 나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소문은 온 동네에 쫙 깔려 있었 다. 원이네 집 마당으로 들어서니, 벌써 한 떼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웬 여자 하나를 빙 에워싸고 있는 ㅍ참이었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지푸라기 같았다. 광대 뼈가 불거진 뺨은 파리하다 못해 상여에 꽂는 흰 종이꽃처럼 말라붙어 있었고, 두 눈은 구멍처럼 커다랗게 열린 채 허공의 어느 자리인가를 맥없이 떠돌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런 텅 빈 눈을 하고, 그녀는 토방 끝에 오도카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치렁하던 머리채는 아무렇게나 중동에서부터 싹뚝 잘린 몽당빗자루 꼴이었고, 언제부터 입었는지 때 아닌 겨울 털스웨터와 두터운 바지, 그리고 슬 리퍼 밖으로 드러난 두 발은 때와 부스럼 피딱지로 새까맣게 도배질되어 있었 다. "세상에나, 이 불쌍한 인생을 어째사 쓸꼬이. 그리도 곱고 희뿌옇든 얼굴이 이 지경이 되 부렀구마이. 쯔쯔즈." "어쩌다가 이리 되어 버렸을꼬. 이 꼴을 하고 어디를 헤매고 다니다가 여기까 장 다시 흘러들어왔으까이." 원이네 엄마가 혓바닥을 연신 찼고, 우리 어머니는 치맛자락에 콧물을 찍어 내고 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고개를 디밀었다. 울컥 구역질이 치밀 것만 같았 다. 여자의 몸뚱이는 차라리 하나의 걸레뭉치였다. 한여름 쓰레기통에서 풍겨나 는 쉬어빠진 듯한 고약한 아구치가 그 걸레뭉치에서 풍기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여자가 그 여자란 말인가. 분홍빛 파라솔 을 들고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그 여자. 원이네 집 뒤란에서 용식이 청년과 다정하게 앉아 포도를 먹으며 행복해 하던 그 여자가...? 그러나 그 볼품없고 더럽기 그지없는 걸레뭉치는 분명히 그녀였다. 불과 일년 사이에 그 여자에겐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늙고 추해 보였다. "이봐, 용식이 청년은 어뜨케 되었는가? 그 사람은 어디다가 놔 두고 이리 떠 돌아댕기는 거여. 응?" "집은 없능가? 아, 이러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녀. 세상에 무슨 대답을 해야 짐작이라도 허재. 말까지 잊어버렸으까?" "어따, 정신이 총찮은 주제에 물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랍디여. 보나마나 그 간 내력을 뻔히 알고도 남겄구마는. 그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 즈이 아들만 감 싸고 어거지로 떼어놓고설랑 이 가련한 인생만 내쫓아 버린 것이 틀림없당게. 안 그러고서야 생판 썽썽하던 젊은것이 이 모양 이 꼴로 실성해서 떠돌아댕기고 있겄소?" "어메어메. 그리도 잔인하고 매몰찬 인간들도 있을꼬. 천벌을 받아도 싸지, 싸. 불쌍해라. 쯔쯔쯔." "그나저나 용케도 어찌 알고 여기까장 찾아들 생각을 다 했으까이. 실성한 주 제에 옛날 생각이 나서 찾아왔는 모양이시 그랴." 그렇게 동네 아낙네들이 주고받으며, 이말 저말 물어 보아도 그녀는 다만 멀 거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 표정도 기미도 보이지 않는 얼굴 로 그녀는 그 텅 빈 두 눈만 멀거니 풀처헤쳐 둔 채였다. "가만, 애기를 낳았을 것인디? 이거 봐, 애기는 어디 있능가. 애기 말여, 애기." 원이네 엄마가 그제서야 생각이 낫 듯, 여자의 앙상한 어깻죽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그렇게 큰소리로 물었다. 돌연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은 바 로 그 순간이었다. "애기... 내 애기. 우리 애기..." 여자는 갑자기 주문을 외듯 더러움 입술로 뇌까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두 팔을 마구 허우적거리며 애타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내 애기. 우리 애기. 못 봤능가라우. 예에? 우리 애기, 우리 이쁜 애기 말이어 라구. 아아, 우리 애기..." 여자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이리저리 매달리는 시늉을 하자, 사람들은 갑 자기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으마마, 왜 저런다냐. 실성기가 도진 모양이여!" "누가 좀 잡아 봐. 왜 저런다냐." 물러서는 사람들을 휙 둘러보더니, 여자는 와락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황황히 길을 터 주었다. 여자가 내 앞을 지나쳤을 때, 고약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아가, 내 아가야. 우리 애기. 내 이쁜 애기야..." 노래를 부르듯 소리를 지르며, 그녀는 더러운 옷보퉁이를 가슴에 껴안은 채 어느새 고샅을 저만치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걸레뭉치 같은 여 자를 불러세우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내 고샅 어귀로 몰려나갔다. 여자는 공터를 지나 마을 초입의 철도 건널목을 넘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더니, 문득 신작로를 벗어나 논둑길로 접어 들었다. 그녀의 걸음은 위태로웠다. 몇번이나 논둑에서 미끄러져 물고랑 속으로 나뒹굴면서도, 그녀는 다시 일어나 방죽을 향해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방죽 둑 위로 올라서는 게 보였다. 행여나 그대로 방죽 속으로 뛰어드는 걸 아닐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여자는 둑 위에 슬그머니 주 저앉더니, 아까처럼 두 무릎을 세우고 오도카니 앉아서 방죽 저편 어딘가를 바 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빗방울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순식간에 굵어진 빗방울이 새까맣게 시야를 가리며 퍼부어 내리고 있었다. 벌써 사람들은 다투어 저마다 집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뚫 고 어머니를 따라 집을 향해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반 시간쯤 후, 나는 헌 비닐 우산을 찾아들고 혼자 공터로 나왔다. 그 여자의 일이 궁금했다. 비는 갈수록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굉장한 비였다. 저만치 들판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아직도 방죽 둑 길 위의 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참이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혼자서 자 리를 지키고 있는 여자의 등 모습은 부스럼딱지처럼 자그맣게 오므라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날이 벌써 어두워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장대 같은 비는 끝없이 쏟아지는데 도,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받쳐든 채 그 자리에 서서 방죽 쪽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맨 몸으로 고 스란히 두들겨 맞으며 여자는 무엇을 저렇듯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 까... "이 녀석아,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여. 저녁상 들여놓았는디." 고샅 어귀에서 나를 찾아나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등을 돌려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목 어귀를 접어들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 아다보았다. 이미 어둠은 비와 함께 들녘 까무룩히 덮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둠 속 저편으로 방죽의 거뭇한 둑과 그 둑 위에 묻은 한 점 자그마한 얼룩 같은 것이 아스라하니 눈에 잡힐 듯하더니, 이내 아주 까맣게 묻혀 버리고 말았 을 때 나는 돌아섰다. 그날 밤새 내내 비는 억수같이 퍼부었고, 라디오에선 호남지방 일대에 호우주 의보가 내려졌음을 알렸다. 그 밤, 나는 어지러운 꿈속에서 그 여자를 보았다. 방죽가에 홀로 서 있는 그 여자는 화사한 분홍빛 파라솔을 들고 있었다. 여름 한낮의 쨍쨍한 햇볕이 터질 듯 쏟아져 내리는데, 수면 위로 무엇인가 얼핏 동두렷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 다. 그것은 파란 연꼿의 이파리였다. 여자가 파라솔을 든 채 방죽으로 천천히 걸 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까르르르르, 행복에 찬 여자의 기쁜 웃음소리가 맑게 수면 위로 흩어졌다. 이윽고 여자는 그 커다란 연꽃 이파리를 손으로 잡더니, 그 넓은 이파리 위로 훌쩍 올라앉는 거였다. 까르르르.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분홍빛 파라솔을 태운 그 파란 이파리는 천천히 떠서 흘 러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스라하니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비가 그친 방죽으로 나가 보았지만 그 여자의 흔적은 어디 서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그 불행한 여자는 다시는 영영 우리 동네를 찾아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해마다 여름이면 이따금 나는 그 여자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원이네 집 뒤란 평상에 앉아 포도씨를 가득 입에 물고 용식이 청년의 얼굴에 퉤퉤 뿜어 내면서 까르르르 터뜨리곤 하던 그 여자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이상 한 놀이를 되풀이하는 순간에 그들의 얼굴에 떠오르던 한없이 행복해 하던 표정 이 내겐 무엇보다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 그들에겐 그 이상한 놀이가 그토록 재 미있었던 것일까... 아마 바로 그해 늦은 여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에 어머니가 모처럼 시내에서 포도를 사서 들고 오셨다. 끝물에 나온 포도여서 알갱이도 성기고 볼품이 없었지만, 맛은 좋았다. 마침 나 혼자 집 을 보고 있던 참이어서,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서 그걸 먹었다. 그런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용식이 청년과 그 여자의 행복한 놀이가 퍼뜩 떠올 랐던 것이다. 나도 포도알을 여러 개 입 안에 털어넣고 우물거리다가, 갑자기 마 주앉은 어머니의 얼굴을 겨누고 힘차게 내뱉었다. 퉤! 포도씨는 너무나 정확하게도 어머니의 콧잔등과 뺨에 명중해 주었고, 나는 아주 행복해 하는 웃음을 막 까르르르 하고 터뜨려 볼 찰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철썩 하고 어머니의 큼직한 손바닥이 태 볼따구니를 세차게 후려쳤던 것이다. "이 자식이 뜬금없이 미쳤능갑다! 어디서 배운 못 된 버르장머리여! 더럽구마 는." 번쩍, 불똥이 튀어나간 듯 화끈거리는 볼따구니를 감싸쥔 채 나는 어머니의 성난 얼굴을 멍하니 건너다보다가, 엉거주춤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마을 앞 공 터에 이르러 나는 방죽 쪽을 바라보며 우울해졌다. 아아,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 고 즐거운 놀이인 줄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가졌다는 사실이 나는 슬 펐다. 반성문을 쓰는 시간 최시한- 1952년 충남 보령 출생. 1982년 '우리 세대의 문학1'에 단편 '낙 타의 겨울'을 발표하여 등단. 소설집 '낙타의 겨울'. 소설연구서 '가정소설연구' 해설- 신덕룡 최시한의 '반성문을 쓰는 시간'은 '구름 그림자',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과 더불 어 일종의 연작 형식을 띠고 있는 소설이다. 이 모두는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교 육현장을 해석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반성문을 쓰는 시간'은 학생들의 순수한 행위가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왜곡된 교육현실 앞에 훼손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훼손됨은 당사자가 납득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난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친구 몇몇이서 외딴집에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 고 또 한판의 뜻있는 놀이판을 벌이려 했다. 어느 누구에게 폐를 끼친 일도, 학 생의 신분에 어긋나는 것도 아님에도 이들의 모임과 행위를 바라보는 사회나 학 교 선생님의 시각은 단순하지 않다. 또한 이들의 행위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렸 음에도 학교에서 원치 않는 사건을 반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들에게 정학처분 이 내려진다. 반성을 하라고는 했지만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이들이 당면한 현실이다. 자신의 잘못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반성 요구 - 이는 고등학생의 시선에 비친 우리의 교육현장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말하기의 방식이다. 우선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존의 소설문법에서 벗어난 일기문의 형식을 들 수 있다. 마치 남의 일기를 훔쳐보면서 갖는 호기심과 일기의 주인공에 대한 친근감, 어린 화자의 안타까운 현실일기에서 갖게 되는 우려의 감정이 동시에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단순한 교육현장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의 의미를 인식해가는 화자의 고뇌와 그 속에 교육현실의 왜곡된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하나는 제한된 시선으로 현실을 읽어가는 점을 들 수 있 다. 즉 작가의 개입이 배제된 상태에서 독자의 적극적인 독서를 통한 현실읽기 를 유도한다. 철저히 고등학생의 시선 속에 서술되고 있기에 독자의 개입이 쉬 워지고,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통제의 문제점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소설형식이 아닌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 드러내기를 하고 있다는 점 에서 이 작품은 주목할 만하다. 반성문을 쓰는 시간 10월 1일 이번 일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염려를 끼쳤다. 나는 지금 반성한다. 먼저 선생님들께 죄송하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하나씩 불러다 자초 지종을 묻고 꾸짖으시느라, 그리고 서류를 꾸며 교무 회의에 제출하고 사태를 설명하시느라 공부도 못하는 우리들 때문에 아주 초췌해 지셨다. 학생주임 선생 님도 수고를 많이 하셨다. 학부형들과 몇차례씩 면담을 하시고, 여러 곳을 드나 들며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막으시기에 바빴다. 회의를 거듭하며 마땅한 해결 책을 찾기에 괴로우셨을 교감, 교장 선생님께도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경찰에서 먼저 알고 의심을 품었으니 상부에서 어떻게 여길지 걱 정이라고 하셨다는데, 그 고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 분위기가 쑥밭이 되는 바람에 공부에 지장을 받은, 이번 일에 관련되지 않 은 여러 급우들한테도 아주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들 가운데 몇 은 우리 일을 조금 눈치채고 있었는데, 걔들은 바로 그 눈치챈 것 때문에 더 불안하고 혼란스 러웠을 것이다(그런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처음 밝히는 것이다. 이해 해 주실 줄로 믿는다). 내가 사고를 저지른 데다 주동자로까지 지목되는 바람에 제일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가장 마음 아픈 게 누나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나를 아주 키우다 시피 한 누나다. 누나는 맹장 수술을 받으면서도 열었던 가게를 나 때문에 이틀 씩이나 닫았다. 그리고 하교와 경찰서를 뛰어다니며 사정하고 다른 애들의 부모 님께(그분들이 모든 잘못을 나한테 덮어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나를 좀 좋게 보이려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도록 돌아다녔다. 아무 죄도 없으면서 자 형 또한 양복을 차려 입고 아버지 격으로 불려 다니며 사과하고 부탁하기에 바 빴다. 이제까지 나는 누나와 자형한테 얹혀 살면서도 그들을 무시해 왔다고 하 는 게 옳은데, 이런 나쁜 일을 계기로 그들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으니 참 묘한 일이다. 묘하기도 하지만,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모든 일이 다 내 탓이다. 다른 애들은 모두 나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나보다 벌이 가볍기는 하지만, 그 동안 학교와 집에서 겪은 고통은 나나 다름없 을 터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지도실에 줄지어 무릎을 꿇고 있었던 때나 잘못했 으니 오직 선처를 바란다는 글을 쓰라고 담임 선생님이 어두워 가는 교실에 우 리만 남겨 놓으셨을 때, 무어라 사과의 말 같은 것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고 그럴 마음조차 먹은 적이 없었다. 무척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겠 으나, 설마 일이 이렇게 되고 엄한 처벌까지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 이다. 차라리 누군가 나를 원망이라도 했으면 빈말로라도 사과를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누구도 그러질 않았으니 참 좋은 친구들이다. 아니 그렇다기보 다, 아마 걔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거나 나처럼 잘못을 늦게 깨달아서 미처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든 여러 모로 미안하다. 물론 애초에 는 짐작도 못했던 일이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할말이 없다. 담임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결과가 문제지 동기나 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시 등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번 기회에 나 자신과 그 밖의 것들을 찬찬 히 돌이켜보아 다시는 이런 일이 나지 않도록 해야겠다. 10월 2일 곰곰 돌이켜보니, 나는 정말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게 사태를 더욱 악화시 켰다. 알아야 할 걸 모르는 것도 큰 잘못이다. 그 노인이 그런 사람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낡기는 했어도 그렇게 크고 멋진 집에 노인 혼자 사는 게 좀 이상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과거가 있으리라고 는 정말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줄 알았다면 그 집이 아주 달라 보였을 거 고, 거기에 저녁마다 모이지도 않았을 거다. 암만 몰랐다고 이야기해도 믿어 주 지 않아 괴로웠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소 믿어 준 것 같아 다행스럽다. 두 사람 이상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자주 모이면 정해진 틀의 서류에 적어서나 아니면 말로라도 선생님께 알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일이 나고서야 알았다. 그 런 규정이 어느 법률에 있는지 경찰서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생활기록부라는 게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었다. 누 나를 포함한 다른 학부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둘까지 처벌 자체보다 거기 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걸 더 심각한 일로 여겼다. 학부형들은 어떻게든 그것 만은 면하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그래서 '처벌은 하되 이번만은 생활기록부 에 적지 않겠으니 각별히 유념하라'는 최종 결정에 모두가 무척 감사하고 있다). 그렇게 여러 날 저녁 붙어 지냈으면서도 다른 애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아 주 많았다. 나하고는 이야기를 잘 하는 광식이가 집에서는 식구들과 거의 주고 받지 않는다는 걸 이번 일 때문에 알게 되었다. 게다가 걔가 학원에 간다면서 거기에 왔고 저금했던 걸 쓴다던 돈이 학원비인 줄 몰랐다. 준태에 관해서도 그 렇다. 걔의 음반과 소형 전축, 녹음기 따위는 옆집 아저씨의 것을 허락도 없이 가져온 것이었다. 성규, 현석이, 순모에 대해서도 몰랐던 점이 많다. 특히 성규에 대해 놀랐다. 일이 벌어지자 성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성규네 집에서는 아무도 학교에 와 보지 않았다. 광식이는 걔 말대로 '식구들이 너무 공부하라고 쪼아대기만 해서' 그랬고, 준태는 그토록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그것들을 살 만 한 돈이 없어 그랬으며, 성규는 전에도 한 번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어서 그랬 다고는 해도, 그런 잘못을 범할 계기를 만든 사람인 셈이니까, 나는 알고 있어야 했다. 알아야 할 걸 몰랐다면 응당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몰랐던 게 어디 그뿐인가.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쩔쩔매면서 사택 어찌 돼 가는지조차 제대로 파악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왜들 그렇게 야단인지,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도대 체가 그 많은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들이 왜 그렇게 상대방을 만족시키지 못하 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누나 말마따나 '음악병, 문학병이 겹쳐 꿈속을 헤엄 치면서 세상이 온통 제 맘 같은 줄만 여겨 온 녀석'이 바로 나였던 성싶다. 정 말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은 죄다. 지금 생각났는데, 이렇게 쓰면 반성문이 되는 건지도 나는 잘 모르고 있다. 틀 에 좀 어긋나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10월 3일 집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가면 사람마다 이상스레 쳐다보면서 대낮에 학교엔 안 가고 무얼 하느냐고 물을 것 같았다. 이게 다 '무기 정학' 속에 들어 있는 벌이라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도 벌의 하나라고 여겨야 할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뜨거운 데다 귓속에서 컵 같은 게 바닥에 떨어지며 깨지는 듯한 소리가 자꾸 나는 바람 에 도무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 것도. 오후 내내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기만 하였다. 거리는 활기찼다. 내가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던 무수한 날들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미 죽어 버린 사람들이 살았을 적에도 그랬던 것처럼. 또 하루를 결석했지만, 여전히 나한테 결석은 결석이 아니다. 나는 출석과 결 석, 우등생과 열등생, 백점과 빵점이 모여 사는 나라의 경계선밖에 있다. 나는 '무기'로 그 밖에 놓여 있다. 지난 일을 반성할 때는 반성한다 치더라도, 지금 여기가 어디며 내가 누구인지, 이제부터는 무얼 어째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막 막하게. 이게 다 '무기 정학'이란 말의 뜻이다. 나는 그 뜻을 온몸으로 배우고 있다. 오늘은 이 반성문 공책 한 쪽을 다 채우지 못한다. 더 반성할 기력이 없다. 10월 4일 누나가 약을 지어다 떠맡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먹고 누워 있었다. 이불 속 에서 뒤척이다보니 생각이 자꾸 한 가지 기억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모든 게 그 비 내리는 일요일 저녁에 그 집에 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중심가의 공연장이나 전람회장을 기웃거리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종일 이책 저책 뒤적거렸다. 저녁 나절이 되니까 지루하기도 하고 하 루를 너무 헛되이 보낸 것 같기도 해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나는 노상 다니는 길을 일부러 피하며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큰길을 건너서 다시 골목으로 헤 집고 다녔다.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픈 느낌, 그러지 못해 좀 서글픈 것 같은 심 정이 가슴속에 고이고 있었다. 우산 밑으로 파고드는 빗발에 옷이 후줄근하게 젖었을 무렵, 나는 근처가 한눈에 내려다뵈는 어느 고개에 서 있었다. 해거름인 데다 비가 와서 사방이 우중충했다. 그런데 건너편 등성이의 한 곳 이 내 시선을 끌었다. 거기에는 제법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 었다. 꽃 한 그루 심을 자리도 없게 다닥다닥 엉겨붙기만 한 집들 사이에 그렇 게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진 곳이 있는 게 무척 기이했다. 게다가 나무들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그 집의 모양새가 아주 특이했다. 나는 야릇하게 가슴이 두근 거림을 느끼면서 옷이 다 젖은 것도 아랑곳 않고 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거기로 들어가는 문은 막다른 곳에 있었다. 나무 조각을 덧붙여서 간신히 내 려앉는 걸 면한 상태였는데 슬쩍 밀자 소리 없이 여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 처럼 뜰은 잡초투성이였다. 비에 젖어 먹빛 일색인 아름드리 나무들이 드문드문 거대한 기둥처럼 서 있었다. 워낙 고목이어서 줄기가 뒤틀리고 썩은 것도 있었 지만 올려다보면 모두 높직이 솟아올라 무성한 잎사귀로 어두워 가는 회색빛 하 늘을 떠받들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옛날의 어느 곳, 출입이 금지된 성스러운 장소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잡초 사이로 희미 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질퍽거리고 침침한 나무들 밑을 몇차례 지나자 희뿌연 건물이 저만치 보였다. 그 건물은 정말 서양의 무슨 고대 신전처럼 돌로 만든 네 개의 두리 기둥이 입구를 떠받치고 있었다. 낡고 군데군데 부서지긴 했어도 처마라든가 모서리 따 위가 섬세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고 모든 문이 홍예문이었다. 그것은 그저 밥 먹고 자기 위해서만 지은 집들하고는 달랐다. 나는 옷이 젖어 추운데다가 흥분 까지 되어 진저리를 치면서 무슨 덩굴 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된 현관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문은 뜻밖에도 잠겨 있지 않았다. 마루가 깔리 널따란 공간으로 들 어섰다. 천정이 아주 높았다. 창으로 흘러든 희미한 빛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활 처럼 구부러진 계단의 난간 기둥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 무엇이 감겨 있었다. 나는 도둑처럼 눈을 사려뜨며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 감겨 있는 건, 커다란 한 마리 용이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그래, 모든 게 그 집에 간 데서 시작되었음을 말 하려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하지만 거기 간 일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 다. 문제는 그 집에서 놀이판을 벌였다는 점이다. 아니, 계획한 놀이판을 벌이지 는 못했으니까, 여러 날의 준비 끝에 놀이판을 벌이려 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 것도 아니고, 학생주임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위험한 데서 놀자판을 준비 하며 놀았다'는 그 점이다. 나는 왜 그렇게 그곳이 좋았던지 모르겠다. 어른과 선생님들께(경찰서까지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알리지 않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알리지 말자는 약속이 있어서 더욱 즐겁게, 왜 저녁마다 거기를 드나들며 그런 일을 계 획했었는지 모르겠다. 잘 봐줄 테니 염려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면서, 형사는 거듭 물었다. 하필이면 그런 낡은 후미진 데서 모였느냐, 너희들 조직에 뭔가 감출 게 있거나 누군가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정해 준 거 아니냐... 모르는 걸 잘 아는 듯이, 그렇지 않 은 것을 그런 듯이 말한다고 해서 반성을 더 잘 하는 건 아닐 터이다. 내가 왜 그곳이 그렇게 좋았는지, 다른 애들도 처음 거기에 데리고 갔을 때 왜 하나같이 멋지다고 했었는지, 나는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역시 모르겠다. 조직이라니, 우 리는 조직 같은 걸 꾸민 적 없고, 다들 그저 장소가 좋고 친구들이 좋아서 모이 곤 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라고 해도, 형사는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했다. 그런 건 이유가 못 돼. 딴 이유가 있을 거야. 한 달 이상 저녁마다 모였고 그런 수상 한 짓 까지 하려고 했으면서 그 이유를 모른다니, 자기가 한 행동을 자기가 모 르면 누가 알지? 나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어쩌면 있지도 않을 이유를 댈 수는 없다. 다 른 애들 가운데 누군가는 거기 사는 노인이 좋아서였다고 대답해 버린 모양이지 만(그래서 일이 더 꼬였다. 왜 좋았느냐, 그 노인이 했던 말들을 각자 종이에 적 어라, 내용이 서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전부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그건 그리 중요한 이유가 못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침을 하는 그 노인을 좀 꺼림칙하고 이상하게 여겼고 어찌 보면 조금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까 닭은 잘 모르겠지만, 노인보다는 그가 사는 집이 좋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오늘은 이미 몇번이나 했던 얘기를 되풀이한 셈인데, 무얼 회피하거나 변명하 려는 뜻은 없다. 나로서는 너무도 엉뚱한 말들에 휩싸여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댔 었기 때문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돌이켜봐 보다 사실에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이다. 열이 올라서 볼펜을 잡은 손이 떨리더라도, 그저 생각만 하기보 다 이렇게 쓰다보면 더 분명해지고 정리가 되니까. 10월 5일 오늘도 몸이 아팠다. 그러나 약을 먹지는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침에 광식이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광식이 어머니가 그렇게 귀부인 같은 분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그렇다고 특별히 달리 생각한 적도 없지만) 무 척 당황스러웠다. 부랴부랴 꾀죄죄한 베개를 감추고 이불을 개면서 들어오시라 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글로 쓸 때는 제법 주워섬기면서 입으로 말할 때는 그런 경우에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 움츠러들곤 하는지 모르겠다). 광 식이 어머니는 그냥 있으라면서 내 이마를 짚어 보시며 열이 많다고 걱정하셨 다. 그리고 방안을 둘러보고는 음악을 좋아한다던데 책도 많이 읽는 모양이라고 하셨다. 나는 도무지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서,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스럽다고 간 신히 말했다. '아니다. 너희 잘못이 아니다. 네 잘못도 아니고.' 그런 말은 이번 일이 나고는 처음 들었다. 나는 왜 그러시는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저런 어머니가 계신데 광식이는 왜 그렇게 집에 들어가기를 싫 어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식이와 어떻게 해야만 대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걔는 식 구들한테 점점 더 굳게 마음을 닫고 있어. 너하고는 잘 통하나 보던데, 혹시 걔 가 여길 오면 좀 잘 이야기해 주렴. 걔 아버지와 내 잘못이 크다. 우리도 이젠 그걸 알고 있어. 형들은 잘 따라 주었기 때문에 걔도 그럴 줄 알았는데, 여행 한 번 허락 안 해 줬으니... 광식이는 광식인데 말이다... 부탁한다. 너는 텔레비전만 보는 애들하고는 다른 것 같다. 광식이랑 다른 애들이 왜 너를 따랐는지 알 것 같구나. 네가 좀 도와주렴.' 그런 말씀을 하실수록 나는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광식이 어머니가 가신 뒤에 나는 문득 공연장에 거저 들어가려고 입구에서 서 성이곤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기다리는 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 같은 애에 게 표를 주어 버리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런 행운, 남의 불행을 틈탄 그런 행 운을 잡기 위하여 나는 이미 공연이 시작된 시각에, 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음악에 귀를 모은 채 서성이곤 했다. 아주 초라하면서도 순진한 모습이 되려고 한껏 애를 쓰면서. 그런 내 모습이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광식이 어머니나 아버지의 표를 가지고 그 거목들에 둘러싸인 집에 저녁 마다 입장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 광식이 어머니가 가시고 혼자 남은 방에서, 나는 광식이 몫의 표를 들고 걔네 집에 입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이라도 약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다. 아니 더욱 먹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나의 책임이고, 어찌해야 제대로 반성을 하는 게 될까? 10월 6일 살인자가 되고 싶어 살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살을 하기 위해 살아온 자살자가 없듯이. 나 역시 처벌을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불행한 결과들이 생겨나는 것일까?-나는 자꾸 따지게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한 자리에서 맴돌며. 가난뱅이인 사람, 시험에 떨어진 사람,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한 사람, 키가 작거나 얼굴이 못생긴 사람... 그들 모두가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되지 않 는다. 그런데 원치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된 데에는 무엇인가 원인이 있을 것 이다. 하나 또는 여럿의, 자기 힘으로 어째 볼 수 없거나 있는, 불행을 가져온 그 어떤 원인이. 나는 지금 불행하다.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벌을 받은 까닭은 해 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다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정해져 있는 것은, 순모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아직 어려서 보호 받아야 하니까'이고, 취조 형사의 말로는 '질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불행은 키 가 작거나 얼굴이 못생긴 경우처럼 그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듯하다. 우리들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있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는데도(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어라고 했길래 경찰이 거기까지 왔었는지를 여태 모르고 있다), 아 직까지 내가 '보호'라든가 '질서' 같은 말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좀처럼 인정하 려 들지 않는 것일까? 오늘 읽은 '바비도'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일부러 죽음을 선택했다. 살 수 있 었는데도 화형이라는 벌을 택했다. 자기의 양심을 지키겠다는 뚜렷한 이유에서. 그래서 그의 행동은 힘이 있었고 그의 불행은 아름답고 장엄하였다. 그 사람한 테 벌은 벌이 아니고 불행도 이미 불행이 아니다 .그 집에 사는 노인은 어떤가? 그분 역시 자기의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사는 것 같았다. 아름답고 장엄 하다고는 못해도 또 그분에게 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런 과거가 있다는 걸 몰 랐던 때에는, 내가 보기에 그분은 불행하지 않았고 무슨 벌 같은 걸 받으며 사 는 이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입만 열면 어떤 일과 사람에 대해 차 갑게 비난을 해대며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분은 일부러 불행을 선택한 걸까, 어쩌다 불행해진 걸까? 아니 그분이 정말 불행을 느끼며 살지 않는다면, 나름대로의 행복을 선택한 셈일까? 도대체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는 게 오리무중이다. 일부러 선택을 했느냐 어 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도. 그러고 보면, 원인이라는것도 그렇다. 키 가 작거나 얼굴이 못생긴 결과를 놓고 부모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 때문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따지면 따질수록 자신이 낯설고 세상이 낯설어진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반성 이라면, 반성은 사람의 생각을 분열시키고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 같다. 10월 7일 판단이 자꾸 빗나간다.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된다. 정말 반성할 일이다. 오늘 누나하고의 다툼도 그렇다. 나는 누나가 요새 나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 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뒤로, 전과는 달리 아주 부드럽게 나왔으니까. 하 지만 나는 틀렸다. 사실을 알았으면 그만일 텐데 싸움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누나가 항상 열한시경이면 내 방을 순찰하곤 한다. 하루쯤 빼먹지도 않고, 가 게 문을 닫는 게 그때여서 시간도 전이나 다름없었지만, 정학을 당한 뒤로 누나 는 좀 변한 것 같았다. 소설책 나부랭이는 그만 좀 읽어라, 대학엔 어떻게 들어 가려고 밤낮 그렇게 뭘 끄적거리기만 하냐, 음악을 들으면서 무슨 공부가 되느 냐 등등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슬슬 눈치까지 보았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누나는 가만가만 계단을 올라와 조심스레 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먹을 게 가득 한 쟁반을 먼저 들여놓은 다음, 아무렇지도 않으려고 애쓰는 이상한 음성으로 오늘은 뭘 하고 지냈느냐고 물었다. 나는 누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집에서 공부 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누나는 무슨 공부를 했느냐, 공부가 잘되더냐,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지 않더냐 등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적당히 대꾸를 했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누나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누나는 한참 쏘아보더니 말했다. 너는 거짓말이 아주 몸에 밴 모양이로 구나. 도서관에 다닌다면서 나 몰래 엉뚱한 짓을 하다가 된통 혼이 나고 있으면 서도 정신을 못 차리니 사람되기는 그른 것 같다. 누나는 어느새 때군때군한 본 래 자기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란 다른 게 아니고, 오늘 오후에 광식이가 와서 둘이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나가 두어 시간 쏘다녔는데 그걸 말하지 않은 것이다. 누나는 쏘아 댔다. '너희들끼리 다시는 절대로 몰려다니지 말라고 한 선생님 말씀을 벌써 잊었 니? 게다가 광식이 걔는 머리를 박박 깎았더라며? 너도 곧 깎겠구나? 이왕 반항 을 하겠으면 아예 학교를 그만두지 그러니?' 누나가 쓸데없는 걱정을 할까 봐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거짓말 운운하며 심한 말을 하는 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내뱉았다. '감시꾼들을 많이도 두었군. 옆집에도 누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지? 아니, 머리도 마음대로 못 깎나? 머리를 깎으면 꼭 반항하는 거고? 반성하는 뜻에서 깎았다면 어쩔 거야? 다른 사람을 무조건 그렇게 보지 말라구. 광식이는 마귀도 아니고 깡패도 아니야.' '너 말솜씨 좋은 건 이번 참에 아주 잘 알았으니까 얘기를 딴 데로 돌리지 마. 내 말은, 몰려다니지 말라고 했으면 무조건 그걸 지키란 말야. 혐의 입을 짓 은 아예 하지를 말라 이거야. 나나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지, 정말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니니? 그런데 너, 쓰라는 반성문 은 꼬박꼬박 쓰고 있겠지?' '몰려다닌다고 그러는데, 우린 몰려다닌 적 없어. 그냥 함께 다녔을 뿐이지. 세상을 모른다는 말도 우스워. 세상이 그렇게 무서워? 무섭기만 한 게 세상이면, 구태여 알려고 애 쓸 필요가 어디 있담.' 누나가 나를 두려워했던 적은 없다. 누나는 단지 순찰과 감시의방법을 조금 바꿨던 것뿐이다. 나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방식으로. 그건 아마도 내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를까봐 그랬을 거다. 그러니까 누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지은 죄 와 지을지도 모르는 죄들을 두려워하고 염려한 셈이다(하지만 누나가 오로지 죄 때문에 전전긍긍한다고, 죄가 두려워 아예 그에 조종당하다시피 행동한다고 말 하는 건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러면 누나는 자기가 두려워하는 그 막강한 죄로 부터 나를 지키려다가 실패한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마니까). 어쨌든 어제 오 늘에 시작된 게 아닌 누나의 순찰과 감시에는 죄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그림 자가 아니라면 거기에는 죄의 끈 같은 게 한 가닥 연결되어 있다. 누나의 눈에 는 부모 없이 키운 동생에 대한 사랑만 보일 것이다. 허나 내 눈에는 그 그림자, 거기에 비끄러매인 죄의 끈이 보인다. 무죄의 땅은 유죄의 땅 옆에 붙어 있는 모양이다. 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땅 에 서 있게 되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데도 그 경계선이 제멋대로 자기를 타고넘 어 움직여 버릴 수도 있다. 저 땅의 물로 이 땅의 농사를 짓기도 하고, 이 땅의 돈으로 저 땅의 열매를 사기도 한다. 그러므로 두 땅의 경계선은 없는 거나 마 찬가지다... 과연 그럴까? 이게 바로 이상한 사람이 돼 가는 증상은 아닐까? 오늘은 누나의 두려움만 더욱 키워 주는 행동을 했다. 자꾸 반성거리를 늘려 가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반성하는 게 못 되고, 반성문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불안하다. 불안하다는 말이라도 이렇게 여기 적어 놓아야 마음이 좀 가 라앉을 것 같다. 10월 8일 이틀만 더 있었으면, 우리가 여러 날 준비하며 기다린 밤이 왔을 것이다. 그 밤은 보통 밤과는 아주 다른, 그리고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지새는 밤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벌이고 싶었던 것은 '축제'였다. 하지만 다른 애들은 그 말을 낯설어하 였다. 그래서 낙착을 본 말이 '놀이판'이었다. 축제든 놀이판이든 '놀자판'이든 간에 계획을 세우고 준비만 했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까닭에 그 말들 사 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말이 더 적절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말이야 어떻 든지, 우리들이 의견을 섞어 계획한 그것, 아니 적어도 내가 꿈꾼 그것이 무엇이 었나를 지금이라도 낱낱이 살펴야겠다. 왜냐 하면 그게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소홀히 넘어갔기 때문이다(이건 나나 다른 애들 잘못이 아닌 성싶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은 하기에도 바빴으니까). 그날 밤, 예정대로 우리는 그 집에서 한숨도 자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이 제법 조용해지는 열시가 되면, 먼저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한 시간쯤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는 동안은 물론이고 날이 밝을 때까지 모두가 정해진 시간을 빼놓 고는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미리 짝지워진 사람과 둘씩 어두운 뜰로 나가서 두 시간쯤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상대방에 대해, 혹은 상대방과 함께 하려고 생각해 두었던 얘기를 무엇이든 솔직하게 주고받는다. 그 러고 나서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노인의 말씀을 듣는다(학교와 경찰서에서 우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듯이, 그 순서는 노인이 요구해서 경찰서에서 우리 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듯이, 그 순서는 노인이 요구해서 들어간 게 아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는데다 우리 때문에 어차피 그날 밤은 주무시기가 어 려울 터이기에, 아니 무어보다도 수염이 마구 자란 그분의 얼굴과 번쩍이는 눈 빛, 그리고 거리낌없는 독설이 그 밤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성싶어 우리가 졸라 서 넣은 순서다). 이미 다 말하고 또 써서 냈듯이, 우리가 처음부터 여섯 명이었던 건 아니다. 내가 그런 집이 있다는 걸 처음 말한 것은 광식이와 성규한테다. 놀이판 얘기는 우리 셋이 그 집에 모이곤 한 지 두 주일 쯤 지나서 나왔다. 내가 그것을 처음 제안했을 때는 명상의 시간이나 만남의 시간은 없었다. 중심은 음악과 춤이었다. 준태, 현석이, 순모 그 세 사람도 그걸 좋아했기 때문에 끼워 넣었다. 다른 순서 는 나중에 덧붙은 일종의 준비 혹은 단련 과정이었다.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한, 어쩌면, 더욱 깨끗하고 경건해지기 위한. 노인의 연설이 끝난 뒤, 모두가 잠에 취한 그 시간에 우리는 드디어 딴 사람 이 되었을 것이다. 준태가 편집한 녹음 테이프에서 연달아 흘러나오는 음악. 우 리는 아무 말없이 각자 내키는 대로 끊임없이 노래하고, 춤추고, 음악에 취한다. 날이 샐 때까지는 아무도 잠을 자거나 그 집에서 나갈 수 없다. 땀이 나고 배가 고파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열정 소나타, 해뜨는 집, 세노야, 봄비, 월광, 재 즈, 헤비 메탈... 곡들을 모아다 고르고, 조명 기구들을 설치하고, 소리와 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종이나 천으로 봉하던 시간들,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비밀로 하고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저금통을 털던 그 당시에 우리들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현석이는 야구나 태권도 같은 것에 빠지거나 여자애 꽁무니 를 따라 다니는 애들을 비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음악과 춤 은 제일 오래된 예술이야. 저번에 음악회 표를 주시려고 음악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 들은 예긴데, 원시인들은 춤과 음악으로 영혼을 불러 냈다는 거야. 나는 그걸 좋아한다면서 한 번도 마음놓고 깊이 빠져 본 적이 없어. 그게 어떻 게 좋은 건지 온몸으로 체험해 본 사람 있니?... 그러나, 경찰서와 학교에서 거듭 거듭 아주 작은 것까지 남김없이 말하고 적던 그때, 그 계획은 얼마나 우스꽝스 럽고 초라했던가. 축제라니, 그건 먹고 마시는 거 아니냐고 비웃었을 때, 수치심 에 떨며 마음껏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반성: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돌이켜 살핌. 10월 9일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다. 한낮의 햇살이 따가워서인지 자꾸 현기증이 났다. 아 무런 목표도 없이 걸었는데 한참 가다 보니 의식적으로 그 집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 집에서 멀어지는 걸 목표로 걸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단 그랬다 는 생각이 들자 그 집과 거기 사는 노인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얼마를 가니 허름한 공장 건물들 너머에 강이 보이고 거기로 흘러드는 널따란 개천이 앞을 가로막았다. 악치가 코를 찔렀다. 나는 쓰레기가 널려 있는 둑을 따 라 걷다가 물가로 내려갔다. 그 집과 노인은 계속 따라왔다. 나는 거품이 둥둥 떠 있는 검붉은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위로 갈수록 물은 더 더러웠고 악취도 심해졌다. 구부러지는 곳에서 갑자기 개천이 네모진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커다란 하수구였다. 나는 더 앞으로 갈 수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컴컴한 굴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거기에는 노인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몽땅 사기꾼들이야. 하도 거짓말을 하다 보니 인제는 진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 허깨비들이라구. 말이야 번드르르하지. 하지만 속셈은 딴 데 있다구. 쿨룩쿨룩. 너희들, 너희들은 아직 모른다. 행세깨나 한다는 녀석들의 똥구멍이 얼마나 구린지 모를 거야. 허나 나처럼 오래 살다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돼. 그 러니까 알려고 애쓰지 말고 더군다나 닮으려고는 아예 하지 마라. 아니 너희들 이 그러려고 한다는 게 아니라, 녀석들한테 속거나 겁을 먹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버리기 땜에 하는 소리다. 심약한 자들은 항용 녀석들이 가진 무기 앞에서 벌벌 떨다가는 갑자기 미친 듯이 자기도 그걸 가지려고 들거든. 나도 다 겪어 봐서 하는 소리다. 쿨룩쿨룩. 세상에는 말이야, 어떤 자들이 제일 많은지 아느냐? 바로 그 사기꾼 녀석들의 무기를 그게 흉기인 줄도 모르고 제 것인 양 휘두르는 멍텅구리들이지. 그게 바로 닮는 건데, 한 번 닮아 버리면 좀 처럼 벗 어나기 힘들어. 너희들도 그러기 쉬우니까 조심해라. 뭐라더라, 그래, 그게 몽유 병 같은 거니까 말야... 그 커다란 하수구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아 다리에 힘을 주면서, 나는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바닥에 쓰러졌 을 때, 요란하게 무엇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거나 받아라, 이 새대가리들아! 여기가 어딘데 너희들 마음대로 들어와 애들을 못살게 구는 거야? 경찰이라구? 여긴 경찰하고 사돈 맺은 사람 아무도 없으니 까, 걔들을 도둑놈 취급하지 말고 어서 냉큼 꺼져 버려! 10월 10일 내가 죄인이 된 것은, 교무실을 나와 교문으로 향하던 길 거기서였다. 무기 정 학을 알리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말을 들은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애들이 팔을 늘어뜨린 채 책가방을 챙기러 교실로 갈 때 나만은 그냥 밖으로 나 왔다. 그리고 교문이 바라보이는 하아얀 시멘트 길, 수업중이라 텅 빈 그 길에서 나는 죄인이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 나는 무슨 졸가리진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무어랄까, 실 이 툭 끊어진 연, 혹은 길바닥에 구르는 휴지 조각이나 철사 도막이 돼 버린 느 낌, 감당키 어려운 허전함, 어쩌면 그냥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릴 듯한 무력감 같 은 것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교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 모두는 갑자기 격렬한 미움이 되고 수치심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니 전혀 상상도 못 해 본 그런 상태였다. 나는 '죄와 벌'을 밤새워 읽은 적이 있지만, 그 소설의 주인공이 죄를 느꼈을 적의 심정과 그때의 내 심정이 비슷한지 어쩐지 지금도 잘 가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학생주임 선생님은 말했다. 너희는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마땅히 '벌' 을 받아야 한다고. 벌은 죄의 대가이다. 그러니까 잘못은 곧 죄이다. 나는 죄 때 문에 그런 것이다. 죄 때문에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교실을 나서야 했고, 그 텅 빈 길에서 실신하여 주저앉아 버릴 뻔한 것이다. 온통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나 화단 가득 숨막히게 빨간 깨꽃들이 아니고, 그때 그곳에서나 하나만이 죄 때 문에. 학생주임 선생님은 계속 말했다. 지금 곧 돌아가 집에서 공부하며 반성해라. 지도실에 나와 있게 할 수도 있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일기장용 공책을 한 권씩 마련해서 오늘부터 거기에 일기를 쓰듯 반성문을 써라. 명심해라. 하루에 공책 한 쪽 이상을 반드시 반성하는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 그때 광식이가 말했다. 오해는 다 풀렸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토록 꾸지람을 듣고서도 그런 말을 하느냐?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킨 잘못이 있다고 결정이 났다. 내가 금세 반성을 하 라고 했는데, 첫마디가 겨우 그거냐? 도대체 반성이 뭔지도 모르고 있어. 너희들 은 이 참에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나는 그날 그 교정길에서부터 죄인이 되었다. 그 이전의 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죄인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죄는 예전부터,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그 대가를 치르는 법과 용서받는 법 까지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아니 우리들은 미처 그걸 알지 못했었다. 어느 시간에 우리들이 그 집으로 발을 옮기던 어름의 어느 순간인가에, 그 죄와 법은 철컥, 차꼬처럼 우리의 발목에 채워졌다. 우리한테는 잘못이 없다는 항의에 대해 학생주임 선생님(어쩌면 그분이 이 반 성문을 읽으실지도 모르겠다)께서는 이렇게 대답한 셈이다. 항의를 하는 행동 자 체가 반성할 줄 모른다는 증거이다. 그 항의 행동까지가 반성의 대상에 포함된 다... 그러면, 그분이 바라는 반성이란 입은 꽉 다물고 오로지 뉘우치기만 하는 것이다. 여러 선생님께, 그분들 모두가 참석한 회의의 결정에, 그 결정을 떠받치 는 학칙 몇조에, 경찰서에서 온 공문에, 학생의 도리와 분수라는 것에, 집회 신 고 규정에... 오직 따르고 복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는, 그것들 에 따르지 않을 때 짓는 것이다. 그런 게 죄라고? 이렇게 나를 옥죄고 있는 죄 가 바로 불복종의 결과란 말인가?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저 누나한테 도서관 간다고 거짓말하면서 축제를 준비했을 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죄될일이고 그 경계선은 어디며, 누가 그것을 결정했나? 그건 반성 안 하나? 내 발목에 죄의 차꼬를 채우는 행동 자체는, 누가 언제 반성하는가? 그건 반성의 대상이 아니고, 무슨 죄이든 찾아내 뉘우치며 가라앉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태풍이나 지진 같 은 것인가? 내가 해야 한다는 반성이 단지 복종일 뿐이라면, 그것처럼 쉬운 게 없다. 아니 그것처럼 어려운 게 없다. 날마다 같은 말을 공책 한 바닥씩 되풀이해야 하니까. 10월 11일 ...등교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임을 양지하시고 반성 문 작성에 협조하시어, 유감스럽게도 다시 일벌백계 차원의 처벌 대상이 되지 않도록... 양지하시고, 협조하시어, 되지 않도록. 반성문 법. 생활기록부 또는 생활감시부. 너는 이렇게, 아니 너도 이렇게 살아 라 법. 당신, 나를 째려보는 당신. 10월 15일 나는 반성한다. 사라져 버렸던 성규가 며칠 전에 나타났다. 광식이와 준태를 불러내어 함께 몰려다녔다. 그 동안 성규가 지낸 곳은 어느 변두리 술집의 주방 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거기서 일하며 지냈다고 했다. 걔가 술을 내놓아서 같이 마시며 그야말로 놀자판을 벌였다. 나도 제법 취했는데,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 다(우리가 축제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려 했다는 얘기는 전혀 사실 무근이다. 우리는 그 집에서 그러지도 않았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나는 또 반성한다. 어제 그 집에 갔었다. 어느새 누렇게 죽어가는 풀 위로 낙 엽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잎이 떨어져 늙은 가지가 드러난 고목들이 을씨 년스러웠다. 낮이어서 그런지, 그 집은 너무 낡고 구저분해 보였다. 우리가 창에 쳐놓았던 천의 무늬가 참혹하도록 얼룩덜룩했다. 노인은 만나지 못했다. 이층의 구석방에 가보니 냄비 속의 먹다 남은 밥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거기에 가지 말았어야 한다. 가지 마라고 한 걸 어겨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무언가 잃어버린 성싶기 때문이다. 광식이에 관해서는 별로 반성할 게 없다. 걔 어머니의 부탁도 있고 해서, 나는 달래기도 하고 설득도 해보았다. 하지만 광식이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형제들까 지도 남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이 다 있어 좋겠다는 내 말에, 저는 오히려 자유로운 네가 부럽다고 했다. 더 이상 당하지 않으려면 아예 학교를 그만두는 게 좋다는 성규의 말에 맞장구를 치길래 그건 자살 같은 거라고 했더니, 정학을 당하더니 아주 겁보가 돼 버렸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자 질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지만, 오히려 걔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므로 적어둔 다). 오늘 어떤 선생님(성함은 밝히지 않는다)께서 찾아오셨다. 그분은 우리 민요가 실린 테이프를 선물로 주시면서 안색이 좋지 않은데 이런 기회에 음악회랑 전람 회나 실컷 다니지 무얼 하고 지냈느냐며 너털 웃음을 웃으셨다 나도 따라서 웃 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 중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우리의 처벌은 교무 회의에 서 결정된 게 아니었다. 교무 회의는 열리지도 않았다. 10월 17일 결과도 중요하지만, 동기나 과정도 중요하다. 모든 잘못이 다 죄는 아니다. 우리 일에 '주동자'는 없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일보다 없는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반성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다. 당신이 누 군지도 모르고, 이 글을 읽어 '당신'이 될 사람이 정말 있기는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쓰지 않겠다. 다른 애들이 쓰지 않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쓰고 있는 한 당신한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당신이 요구한다면 나는 제출할 것이다. 지금까지 쓴 이것을. 워싱톤 광장 최윤-1953년 서울출생. 1989년 계간 '문학과 사회'에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발표하여 등단.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제23회 동인문학상 수상. 소설집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장편소설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해설-정과리 잊혀진 사실을 찾아가기는 최윤 소설의 특징적 주제이다. 등단 작품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부터 '회색 눈사람'을 거쳐 오늘 소개되는 '워싱톤 광장'에 이르기 까지 작가는 지속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첫경험의 표정 으로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고 있다. 잊혀진 사실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찾아간다기보다는 되살려낸다. 왜냐면, 그에게 잊혀진 과거는 망 각의 강을 건너지도 않았고, 역사의 시간대 저쪽에 요지부동으로 놓였 있는 고 고학적 과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돌이켜 떠올리는 그것은 명백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어서, 언제나 현재를 향해 엄습한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그것 들은 시커먼 안경을 쓴 것처럼 흐릿하게 지워져버려서, 결코 또렷한 모습을 보 여주지 않는다. 혹은 거꾸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현재는 그의 과거를 은밀히 불 러오고는 동시에 그것을 외면한다. 추억하면서 동시에 잊는다. 왜? 기억해야 하지만 기억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 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나는 알게 모 르게 관련되어 있었지만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못했다). 그것이 부끄러움과 두려 움을 동시에 유발한다. 나의 기억은 그 두 감정의 복합체이다. 그 심리적 표리는 그러나 완강히 등을 돌리고 있어서 결코 화해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내가 진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을 낳지만, 그러나 '기억의 무서운 물살'에 빠져들기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나는 과거를 불러놓고 돌아선다. 그러나 불려온 과거가 왜 가만있겠는가? 현재에 대한 과거의 복수가 어느새 진행되어 돌아서는 그의 뒤를 잡아채는 것이다. 그 복수는 뭉클한 애정의 복수이다. '믿을 수 없게' 도래한 과거는 그에게 사건을 제시하면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에워 싸고 흐르는 그때 그곳에서의 나의 삶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까? 그때 그곳에 무 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순간의 사건이 아니 라, 덩굴 같은 삶의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삶의 내력이 펼쳐질수록 그리움이 라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롭게 새록새록 피어나온다. 피어나면서 부끄러움 과 두려움 둘레에 끈끈이 처럼 엉겨붙는다. 화해할 수는 없더라도 결코 헤어지 지 못하도록. 그는 지금 이곳에서 그때 그곳의 삶을 되살 수밖에 없다. 현재는 무한히 멀어지고 과거가 무한한 미래로 펼쳐진다. 최윤의 소설에서 문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거를 되살려내는, 혹은 과거가 되살아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체 스스로가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그 리움이 한데 엉긴 무엇이다. 그것은 과거를 향해 난 통로, 아니 거꾸로 돌려진 영사기처럼, 뒷걸음질치면서 사라지는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가 지워지는 자리에 는 백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엉킨 느낌이 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그리움 이 엉켜 칙칙하고 풍요로운! 워싱톤 광장 어느 날 아침, 머릿속 가득히 한 곡의 이중창이 채워져 있었다. 머릿속 작은 우주뿐 아니라 방안 가득히, 도시 가득히, 그리고 저 먼 우주까지 가득히. 그것 은 여느 상쾌한 이른 아침 휘파람 곡으로 되어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작은 행 복의 표식 같은 것은 아니었다. 때가 지나가 버린 유행가 가락이며, 음악이라기 보다는 부르짖음에 가까운 그런 이중창, 변성기를 멀리 둔 여리고 쉰 두 개의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이 이중창은... 유년의 스산한 교실에서, 당장이라도 중요 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던 지방 소도시의 적막한 뒷골목에서, 복개천 근처에 버 려진 시멘트 토관 속에서, 폐허가 된 한 빈집 속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이 이 괴상한 이중창으로 가득 차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아득한 느낌과 함께 이 노래의 언저리가 잠시 부상했다가 사라지지만 일상은 그 것을 쫓아갈 수 있는 여유를 한 번도 내게 동의해 주지 않았다. 그것을 다행한 일이었던가. 모르겠다. 한 번은 면도를 하던 중에 그 노래가, 늘 그렇듯이 가벼 운 통증과 함께 습격하듯이 덮친 적이 있었다. 면도기가 턱에 생채기를 내었기 때문에 그 노랫가락이 떠올랐던 것인지, 떠오른 그 곡조 때문에 면도기가 미끄 러졌던 것인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의 내 얼굴의 표 정. 어떤 방법으로도 위로되지 않겠다는 완강한 슬픔의 표정 그것이었다. 위로되 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것인지, 일부러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즐거운 일들을 상 상해 보아도 그 굳은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피식 웃 을 수 있었다. 마치 내 삶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닌 어떤 것처럼, 나의 느낌은 그 저 방전해 두면 언젠가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전지처럼 소홀히 할 수 있는 그런 무의미한 것인 듯이 빨리 변덕스러운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럴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이유를 찾곤 했다. 곧 결단이 날 것같이 삐걱거리는 인간 관계나 혹은 중요한 공연을 앞에 두었다든지, 혹은 전 망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같이, 약간의 시간과 정신을 할애해서 추리해 보면 스 스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가짜 이유들 말이다. 그날 아침에는 나는 그런 이유조 차 찾아 내지 못했다. 기계적인 집중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정기 연주회를 위한 연습이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게 그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날, 도심의 한 지하철 역 의 오렌지색 때 낀 의자에 앉아, 밀려드는 승객의 부산스러움에 꼬았던 다리를 풀고, 보던 신문을 접고, 그날은 왜 그랬는지 슬그머니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포기하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단 일어 서고 나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일어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내 주변에는 여전히 무관하고 발악적인 군중이 있 을 뿐이었는데. 나는 몽유병자가 흔히 그러듯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가 걸어 내려온 층계를 다시 올라갔다. 내 옆구리에는 지루하게 구겨진 석간 신문이 매 달려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무슨 중요한 물건이나 되는 양 팔꿈치로 힘주어 누 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그 거대한 대양에서 내가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부 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예정 없이 지하의 아구리에서 지상으로 뚫린 출구를 향해 어렵게 밀려 가고 있었다. 그때, 바로 나는 그 여인을 보았던 것이다. 여인은 지하철 입구 뒤쪽의 희부연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한 채, 층계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치 하늘을 화면으로 하는 불행한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그날 저녁에 본 여인의 모습은 나 의 걸음을 단번에 멈추게 했다 .나는 층계 밑에 서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저녁 의 역광 속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러 나...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나의 눈은 정확히 그 여인의 얼굴의 특징들을 알 아보았다. 갸름한 윤곽과 두터운 입술, 오만하게 들어올려진 각진 턱과 중간에서 흐려지는 코의 선들을. 그러나 이렇게 여인의 얼굴을 뜯어보면서 확인한 것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조합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 얼굴에 내가 오래 전에 알고 있었던 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때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던가. 층계 한중간에 서 있는 나를 지푸라기처럼 내던진 채, 때로는 옆구리를 쥐어 박으며, 때로는 불평의 말을 중얼거리며 무수한 행인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기억의 무서운 물살에 나를 홀로 던져 놓고,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여인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길이 없는 그 소녀의 얼굴을. 뒤늦게 나는 갑자기 나를 침범한 두려움으로 황망해진 걸음을 층계 쪽으로 몇 번 옮겼을 뿐이었다. 좀전에는 그토록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여인이었는데, 내 가 다시 바라보았을 때, 여인은 모아 세운 무릎 위에 두팔을 두르고 고개를 파 묻고 있었다. 여인은 벌써 오래 전부터, 어쩌면 내가 그 모습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서 잠이 들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낡은 캐시미론이 비어 져 나오는 점퍼에 깊숙히 묻힌 그 얼굴을 내가 정말로 보았던 것일까? 바로 조 금 전까지 여인은 피로로 움푹들어간 큰 눈으로 나를 마주보고 있었고 그 시선 속에서 그녀를 알아본 나의 느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마저 도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적막 수 천리를 가로지르는 막막한 저속으로 나는 얼굴을 파묻은 여인 앞으로 올라갔다. 누런 종이 상자 귀퉁이에는 아무렇게나 그려진 글씨들에 뒤섞여 동전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여인의 앞에 놓인 그 진부하고 상투적인 구걸의 구절을 읽 을 수가 없었다. 그 여인이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몇음절의 구걸의 문장으로 요약되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왜 그 어색하게 그어진 글자들은 나의 흐려진 시선 속에서 활짝 벌린 입의 미 소로 보였을까? 앞니가 한두 개 빠지고 때로는 아주 희극적일 수 있는 그런 얼 굴. 아니면... 여자가 글자 대신에 여남은 개의 미소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그 리고 그것은 곧바로 구체적인 어떤 목소리로 변했다. 무언가 곡조를 읊고 있는 목소리,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목소리, 그러나 벌써 오래 전부터 잊혀진 목 소리. 그러나 나는 여자 위로 몸을 숙여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름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나의 변모된 얼굴 을 알아보는 대신, 기계적이 되어 버렸을 구걸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 두려워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이 여인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연습이 끝난 후 나는 단원 일행들과 헤어져 시내 쪽으로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전날 걸인 여인을 목격한 지하철역 쪽으로 되돌 아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가 지하도의 층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 날에 내가 지하철을 타려던 시간과 비슷한 시간이었다. 나는 지하도 옆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서 일간지 몇장을 건성으로 고르면서 입 안에서 나오려는 질문을 애써 감금하였다. '혹시 어제 저녁 저쪽 지하도 층계에 앉아 구걸하던 여자를 기억합니까?' 나는 공연히 지하도의 여러 입구 주위를 머뭇거리다가 다시 처음에 자리로 돌 아왔다. 그리고는 지하도 입구에서 멀지 않은 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그 곳에 들어온 것처럼, 나는 초조한 기색을 보이면 서 다방 안을 휘둘러 보았다. 나는 방금 비워진 창문 옆의 테이블로 가 앉았다. 밖에 지나가는 행인들은 모두 나처럼 간밤에 불면에 시달렸던 것인지 피곤한 얼 굴로 채색 유리 저편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분주한 거리의 수없이 반복되는 풍 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유리벽처럼 매끈하게 평면적이며, 그 선처럼 단조로 운 풍경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의 풍경이기도 한 그 매끈한 표면의 풍경 속에 누군가가, 어제 본 그 여인이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나기를 확신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야에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발걸음을 시선으로 뒤쫓으면서. 가끔 거리가 아주 짧은 순간 행인 하나 없이 비기도 했다. 왁자지껄한 어떤 모임의 한 순간에 갑자기 이상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정적의 순간이 침범하듯이. 갑자기 거리에서 행인이 사라질 때면 지하철 입구가 비교적 훤하게 틔어 보였 다. 입구에서 서너 층계 내려간 곳에... 지금은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 짧은 정적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행인들의 무리가 거품을 만들며 거리와 층계를 메우 고... 방과후면 아직은 지펴지지 않은 난로 주변에 몰려선 아이들을 관객으로 삼 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얼마 전에 이사온 그 아이가 산동네의 어딘가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와 살고 있다는 것뿐이 었다. 이상하게 말이 없고 여리고 수줍어 보였지만 꼭 아무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것처럼 무심하면서도 경계의 눈초리에 과장된 악의가 배어 있던 가난한 몰골 의 여자아이. 바로 그 아이는, 무릎을 기운 바지를 숨기려 하지도 않고 한 다리 를 걸상에 걸치고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멋진 가수의 흉내를 내면 서 아이들을 상대로 돈을 벌고 있었다. 기타가 없이도, 목소리가 청승스러워도 방과후의 이 공연에는 관객이 많았다. 때로는 상상 속의 기타를 가까이 껴안았 다가, 때로는 팔을 뻗어 밀어냈다가 하면서, 정말 무대에 익숙한 인기 가수처럼, 아이는 반달처럼 큰 눈을 반쯤 슬프게 감고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저 넓은 광장 한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만나보고 싶네. '워싱톤 광장'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를 여자애가 부를 때면 왜 기타가 있어야 하고, 어떤 구절에 이르러서 왜 여자애는 꼭 눈을 감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아이가 노래를 마치면 둘러서 있는 다른 아이들은 돈 이 될 만한 물건이나 동전, 혹은 드물기는 해도 가끔 땟국에 전 소액의 지폐 같 은 것을 여자아이 앞에 놓인 빈 구두상자에 던져 넣었다. 그러나 서너 곡의 노 래를 끝내고 나면, 아이는 상자 뚜껑을 닫아 옆구리에 끼고는, 그 새침하고도 차 갑도록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는 어느 누구에게 인사도 눈짓도 없이 교실을 나가 곤 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 이 방과후의 난로 주변 의 원은 지칠 줄 모르고 그려졌다. 음악 시간에는 선생님의 풍금에 맞추어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향기로운 월계꽃'을 따라 부르는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어두 운 목소리의 '워싱톤 광장'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그 여자애가 있었는지 없었 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방과후면 어김없이 무릎을 덧댄 녹색 빛 바랜 군청 색 바지를 입고 아이는 나타났다. 무엇에 끌려 나는 어느 날 은행나무가 있는 집 동네를 훨씬 벗어나 뒷산 언덕 의 가시철망 너머로 사라지는 여자애를 뒤쫓아갔던 것일까? 내가 뒤따라오는 것 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자애는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고, 쫓아오지 말라 거나 혹은 좋다거나 하는 어떤 가부의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 때마 다 여자아이가 내 쪽으로 자주 시선을 주었다고 느낀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조만간에 여자애 편에서 어떤 겁나는 반격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고 있는 사람처 럼 나는 짐짓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여자애를 뒤쫓아갔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여자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산동네에는 집도 드물었고 가을의 하늘색은 내 기억 속에서는 보라색이었다. 여자애는 야산 중턱에 있는 한 버려진 것 같은 채마밭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 다.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채마밭 저편으로는 움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천막 이 둘러쳐진 판자집 한 채가 놓여 있었다. 카키색 비닐 천막의 한 자락이 언덕 을 오를수록 심해진 바람에 가끔 펄럭거렸다. 한참을 여자아이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서 있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려 나를 원망 가득한 시선 으로 바라보았다. '애들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서움보다 강한 어떤 것이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여자애는 천막을 쳐들고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정적이었다. 천막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채마밭 주변에는 이미 다 시든 칸나 꽃나무가 일렬로 서 있었다. 꽃이 떨어진 칸나 꽃대는 하늘처럼 짙은 보라 색 화육을 위협적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추억의 그 언저리의 삶은 왜 이리 징그러운 영상으로 들어차 있었던 것인지. 나는 갑자기 선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다방 안의 사람들 과 실내의 음악을 뚫고 밖에서 울려 오는 사이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 나 이 다방에 들어온 이래 내 귓속을 맴돌고 있는 것은 전날 저녁부터 머릿속을 한 순간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중창의 음색이었다. 내가 멍하니 한눈을 팔고 있 던 4 이, 전날 그 여인이 앉아 있던 지하도의 층계참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노파 가 보자기를 앞에 펼쳐 놓고 허름한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고 있었다. 분명 플 라스틱 머리빗이나 귀이개, 솔, 수세미 같은 잡화를 벌여 놓았을 노파의 허술한 보자기를 기웃거리기에 행인들의 걸음은 너무 빨랐고 가끔 나이든 부인들이 그 앞에 멈추었어도 몇마디의 말을 주고받는 것 외에 물건을 집어드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노파 근처에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귀마개를 한 어린 소년 하나가 맴 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귀마개가 아니라 가는 끈이 연결된 워크맨 같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년의 몸 짓은 어디서 많이 본, 유행하는 춤 같기도 하다. 학교가 파하고 나면 나는 거의 매일 여자애의 뒤를 쫓아갔다. 여자애는 늘 야 산의 천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때로 아이는 시장 쪽으로 갔다. 특히 방과후 아 이들에게서 거두어들인 것이 없을 때 아이의 걸음이 시장을 향한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의 관찰로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서 여자애는 시장바닥에 푸성귀나 배추단을 놓고 파는 그녀의 어머니를 도와 가까운 거리에 배달을 하기 도, 어머니를 대신해 어른들과 배추값 흥정을 하기도 했다. 시장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의 아버지가 하고 있는, 잘 닦여진 커다란 진열창이 달려 있 는 양복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엄숙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진열창 너머로 밖 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 띌까 두려워 여자애가 시장에 가는 날은 일찍 집으 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숨듯이 뒤꼍으로 갔다. 그 즈음 막 금술 장식 을 주렁주렁 단 가지를 펼쳐 늦가을 하늘을 더욱 푸르게 쓸고 있던 은행나무옆 에 앉아, 나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청승스럽게 '워싱톤 광장'이라는 제목의 그 유행가 가락을 여덟 살 생일 선물로 받은 하모니카로 연습했다. 나의 그 공 들인 연습이 언젠가 소녀 앞에서 빛을 발 할 수 있기를 갈망하면서, 마치 내 장 래의 희망이 하모니카 주자라도 되는 것처럼 혼신을 다해 나는 여자애가 우리들 앞에서 유행가 가락들을 익혔다. 그 일을 생각할 때면 가끔 하모니카에 비벼 얼얼해진 입술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 오기도 했다. 그런 몰입은 삶에 자주 일어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 아, 나는 진정, 소녀가 부르는 노래를 반주하는 하모니카 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나는 실제로 거기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력을 다해 앞으로, 앞으로 뛰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뒤를 돌아 달려온 거리를 보면 제자리걸음에 방불한 헛된 달음질. 확신 없는 후원자들의 동정과 허영심으 로 운영되는 이름없는 작은 교향악단의 제 2 플롯 주자가 하모니카 부는 소년보 다 더 나을 것이 무엇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내 앞자리에는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한 여자가 앉아 있지 만 나는 언제 그녀가 내게 허락을 구했는지, 내가 동의의 표시를 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아마도 약속 시간에 나타날 누군가를 시선으로 찾고 있는 여자 는 외투를 벗어 무릎 위에 가지런히 접어 놓고 가끔 앞에 앉은 나의 얼굴에도 시선을 주었다. 끊임없이 불안정한 눈동자를 움직이면서 다방 안을 휘둘러보는 여자의 시선에서 나는 찾을 대상이 불확실한 사람이 내보이는 부산한 공허를 보 았고, 눈 주위의 검은 화장으로 그것은 더욱 깊어 보였다. 서로 마주치기를 피하 던 여자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어느 순간 부딪쳤다. 나도 여자도 어색하게, 서로 에게 미안한 표정을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창 밖에는 점 점 더 많은 노점상들이 불을 밝히고 늘어섰다. 잠시 거리가 비면서 지하철 입구 가 드러나 보이는 순간은 점점 더 드물어졌다. 그래도 행인들의 바쁜 걸음 사이 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노파의 모습이 가끔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노파의 옆에 도 무언가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행인들에게 물건을 들어 보이는 한 젊은 남자 가 자리를 잡았다. 걸인 여인이 나타나기에는 이제는 정말로 늦은 시간이었다. 앞에 앉은 여자는 희고 가느다란 팔목을 드러내며 천천히 주문한 차를 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실내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내가 아주 오래 전부 터 조금씩 익히게 된 그러한 공허의 표정.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 집 안이 완전히 비어 있던 날, 나는 하모니카를 들 고 단숨에 뒷산 언덕을 뛰어올라 천막 집 앞에 섰다. 방망이처럼 뛰는 가슴을 부여쥐고 나는 여자애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다. 큰소리? 내가 고함이라고 생 각한 나의 목소리는 필경 제대로 목구멍을 넘어나오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천막 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미동도 없었다. 빽빽한 칸나 꽃밭에서 지 한 마리가 후다닥 튀어나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을 뿐이었다. 나 는 더 크게, 여러 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모르스 부호로 구조 타전을 치는 난파선의 선원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그리고 아이가 나왔고... 아이의 표정이 어 떠했는지, 우리가 어떤 말을 나누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얼마간의 시간 을 밖에서 마주보며 서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삭제된 채, 나는 믿을 수 없게도, 그토록 멀기만 하던 천막의 저편, 어두운 방안에 들어가 앉아 있었 다. 캄캄하기만 하던 시래에 나의 시선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창문없는 그 방의 세부가 드러나 보일 때, 나는 더 이상 뒷걸음질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보고 말았다. 그들. 그들은 동네 사람들의 소문에서처럼 둘이 아니었다. 셋이었다. 여자아이 와 그녀의 엄마라는, 가끔씩 시장에서 본 푸성귀장수 여인, 그리고 방바닥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마르고 볼이 쑥 들어간 얼굴이 수염에 뒤덮인 남자. 여자애 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여인은 내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바닥에 놓 인 쟁반을 한 옆으로 옮겨 놓고 있었다. 그들은 때늦게 점심을 먹고 있던 중이 었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누운 채였고 나는 어쩌면 그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되어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남자가 눈을 뜨고 여자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나의 속마음을 읽으려 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길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아니 는 변해 있었다. 아주 온순학 연약한 아홉 살의 소녀로 변신한 아이는 누운 아 버지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살거렸다. 아마 나를 소개하는 모양이었다. 푸성귀 장수 여인이 미쳤다는 동네 사람이 말이 얼마나 거짓이었던가를 나는 천막 속의 어둠에 익숙해지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필경 그런 소문을 만들게 했을 여인의 차 림새는 방 속의 더할 수 없는 불행한 풍경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여인은 겁먹 은 시선으로,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애원을 담은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남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앞에도 수저와 밥 공기와 국그 릇이 놓여졌을 때, 여인의 얼굴은 따뜻한 온기로 덥혀져 있었다. 나는 내 일생에 가장 맛나는 배추국을 그날, 그 오후, 천막 안에서, 맛보았다. 내가 그날 나누어 먹은 배추국밥이 그들과 내가 나눈 무언의 계약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물론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왜 나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했을까? 왜 모르는 내게 점심 을 권했을까? 그들은 왜 나를 믿었을까? 앞에 앉은 여자는 왜 자꾸 내게 미소를 보내는가? 이번에 나는 되돌려 보내 줄 미소가 없었다. 나는 입만 벌리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아 다니는 이중창의 음 색이 그대로 재생되어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입을 꼭 다물고 앉아 있었다. 이제는 기다림이 안정을 되찾은 듯, 혹은 어느 정도 기다림을 포기한 듯, 귀걸이 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간헐적으로, 재빨리 나를 바라보곤 하면서 나와 시 선이 마주칠 때는 자연스럽게 작은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그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안간힘을 쓰며 굳은 표정으로 함구하고 있는 나의 표정을 거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미한 미소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나와 여자애가 부르던 이중창은 감히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불안정한 행복이었다. 나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거의 매일 여자애와 산동네와 시멘트 토관과 저문 날의 빈터와 이웃 동네의 폐가를 쏘다녔다. 그러나 두 번 다시 나 는 아이네가 사는 천막집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밀회를 하는 부정한 관계 의 연인처럼 나도 여자애도 멀리멀리 우리가 살던 소도시의 모르는 동네를 찾아 다녔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고 아이는 쉰 목소리로 유행가를 부르거나, 대부분 우리는 둘 다 목에 핏줄을 세우면서 악을 써대면서 퇴폐적인 유행가를 매일매일 익혔다. 그래도 다음날 수업이 끝난 시간이면 그애는 어김없이 노래를 부르러 교실에 나타났다. 나는 겹으로 만들어진 아이 주변의 원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운동장 구석에서 발부리가 얼얼하도록 공을 차거나 건물 벽에 대고 돌을 던졌 다. 나는 할 수만 있었다면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다 주면서라도 아이가 다시 는 나의 존재에 신경도 쓰지 않는 오만하고 차가운 자세로 노래를 부르러 나타 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망가진 장난감에 흥미를 가지기에는 우리는 이미 서서히 아이들의 세계를 떠나고 있었 고, 엄마의 손지갑이나 누나의 저금통에서 동전이나 작은 지폐를 꺼내는 것도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우리가 동네를 돌아 흐르는 개천 의 상류로 올라갔을 때, 그 근처에 줄지어 포개져 있는 커다란 시멘트 토관들이 있었다. 우리는 빛이 조금밖에 새지 않는 토관들이 만드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 어갔다. 거기서 나는 여자애에게 나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던 하모니카를 주었 다. 여자애가 다시는 교실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기구의 표시였다. 바로 그 날 어쩌면 우리는 그 토관 속에서 번개보다도 짧은 시간 동안 설익고 외로운 우 리의 살을 맞대오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나의 환 상이 만들어 낸 허구적인 기억일 수도 있다. 무엇이 나에게 가르쳤던 것인지 나는 아직도 답변할 수 없다. 어두운 천막집 안에 누워 있던 남자에 대해 물어서도 안 되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여자 애와 놀기 위해서는 집과 동네를 버려야 하며 사람들이 볼 때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눈길을 피해야 하는 것을. 삶이 시작되기도 전의 그 원시적인 시기에 나는 그 엄청난 금기의 지식을 터득했던 것이다. 지하도 층계의 저 노파와 나사 이에 놓인 이 흑갈색 유리벽처럼, 산 동네를 가기 위해서는 생채기가 날 것을 무릅쓰면서 들어올려야 했던 철망의 존재였던가? 아니면 천막집의 어두운 실내 에서 감지된 어떤 무엇이, 또는 시장 거리의 어른들이 푸성귀장수 여인에게 보 인 어떤 몸짓들이 은연중 나에게 어떤 위험의 신호를 보냈던 것일까? 노파가 벌여 놓은 물건들을 거두면 나도 일어나리라.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거 리의 행인들은 아직 너무 많았다. 내일이라면 여인은 저 자리에 모습을 나타낼 까? 아니면 모래에? 그 여인이 오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그 여인 또한 나를 알아보았기 때문일까?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소녀가 그때보다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그것도 우리들이 만난 장소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서 울의 한복판에 나타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마치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과 불 행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정비례해서 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리 오래, 힘겹게 뛰어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많은 삶이 있지 않은가? 조금씩 나는 전날 내 가 본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대와 추정을 그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일어 나야 되는데, 내게는 꼭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실내는 더욱 북적거리고 언제부터인가 소란스럽게 바뀌어 버린 음악이 수많은 연인들의 속살거림을 지워 버렸다. 서서히 밖의 불빛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유리 벽 위로 다방의 실내가, 내 얼굴의 흐릿한 윤곽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빈 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여자의 옆모습도 같이. 어쩌면 그 사이에 여러 빈 자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금의 나처럼, 어떤 불가항력에 밀려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이렇게 함께 앉아 있었을까? 오래 된 것 같지만 그저 한 시간을 넘기지 않은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추억 의 속도는 시계의 속도보다 빠르니까. 이유도 없이 나는 언덕 오르는 일을 멈추었다. 여자애와 소도시의 생소한 동 네를 누비고 노래부르며 다니는 일을 멈추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곳에 가는 것을 금지시킨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더 이상 '워싱톤 광장'을 흥얼거리지 않았고 방과후에 여자애가 교실 뒷문으로부터 나타나는 시각을 기다리지도 않았 다. 나는 예전대로 말없고 수줍음 많은 은행나무집의 아들로 되돌아갔다. 소녀에 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찌감치 시합을 포기해 버린 사람의 비굴함으로, 시장 이나 학교 길에서 여자애와 맞부딪칠 때, 나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비밀을 혼자 간직해야 하는 사람이 겪는 열병을 나는 앓고 있었다. 소녀를 자주 만나면 꼭 천막 안에서 내가 본 것들에 대해, 그 안에 누워 있던 퀭한 눈의 남자에 대해, 내가 맛본 배추국에 대해, 여자애와 몰 래 가 본 거리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애에 대해 집안 식구들이나 혹은 동네 아이들에게 목청 높여 마를 해 버릴 것만 같아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여자 애에게서 멀리 도주했다. 어느 날 소란스럽게 동네 사람들이 집 앞의 길로 몰려들었다. 시장 입구에까 지 줄지어 몰려 선 사람들은 언덕을 내려오는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집 앞으 로 두 명의 경찰에게 양팔을 결박당한 채로 일행의 선두에 서서 걸어내려오고 있던 사람은, 바로 천막 안에 누워 있던 그 남자였다. 그 남자는 창백했는데, 이 남자는 아픈 기색이 없었다. 그 남자의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 남 자의 얼굴은 깔끔하게 면도가 되어 있었다. 천막집 속의 남자는 속옷차림으로 누워 있었는데, 이 남자는 낡았지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분명히 여자애의 아버지였다. 그 뒤로... 푸성귀장수 여인이 울면서 뒤따랐고, 그 뒤로 몇걸음 떨어져 아이가 한눈이라도 팔 듯이 방심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또 한 명의 경관이 대열의 끝을 장식했다. 참 이상한 침묵의 대열이었다. 영원히 지 연될 것만 같던 침묵이었다. 푸성귀장수 여인과는 달리 여자애는 고개를 숙이지 도 않았고 오만하고도 당당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었다. 그 들의 놀라는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그들의 속살거림을 비웃듯이. 그러나 단 한 시선, 몰려든 사람들을 뚫고 그들의 대열에 가까이 다가간 나의 시선만은 극구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 그애의 시선이 옮겨 올 때, 입 가에 지펴지는 노오란 조소는 내가 마지막으로 본 소녀의 표정이 되었다. 그 순 간 나는 그들의 행렬이 그렇게 내게서 멀어져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막연히 느 끼고 있었다. '너는 알지? 나는 아니야.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여자애에게 달려가 이렇게 해명하고 외쳤어야 했는데, 나의 두 발은 그 자리 에 얼어붙어 버렸다. 무슨 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를 누가 물었다면, 그 또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등에 대고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들이 웅얼거림이 되어 귓바퀴를 허하게 돌아다녔다. 살인자래. 그럴 리가. 역적이라지. 역적은 지금 세상에... 그게 아니라 신고가 들어왔는데, 간첩이었대요. 아니 툭하면 그 얘기네. 그게 아냐. 큰일을 벌이다가 실패해 일년여를 깜쪽같이 숨어 있었다는 것 아냐. 그런데 어떻게 알아내고 잡 아가지? 하도 이상해 누군가가 신고했대. 해명할 기회를 박탈당한 오해는 나의 유년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주인을 잃은 이 그림자는 삶의 피곤한 모퉁이에서 얼굴을 내밀며 끊임없이 내게 빚쟁이 처럼 무언가를 요구해 왔다. 머릿속에 현기증나는 공동을 만들어 울려퍼지는 이 중창으로 생생한 자신의 존재를 요구하며.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 그림자의 주인인 내 유년의 소녀에게 그림자를 돌려 주지 못했다... 여자애의 식구가 동네 를 떠난 후, 순식간에 퇴락한 천막집의 낡은 판자 더미에서 내가 구해 낸 하모 니카를 그녀에게 되돌려줄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은 채로 우리 식구도 그 도 시를 떠났다. 그 시절 나는 그애와 결혼하는 꿈을 여러 번 꾸면서 그때마다 나 는 내가 빨리 어른이 되기만을 갈구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애를 다시 찾으리 라. 그리고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기필코 해 주리라. 내가 어른이 되면 그애와 같이 슬프고 각질화된 모든 얼굴에 웃음을 되돌려 주리라. 내가 어른이 되면... 그러나 나는 평범하고 전망 없는 한 2류 악단의 연주자가 되었을 뿐이었다. 아 직까지 그 기회가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빈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일어설 채비를 했다.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마지막으로 다방의 벽에 걸린 시간과 손목의 시계를 비교하는 듯했다. 벗어놓았던 외투를 집어들고 여자 는 천천히 일어섰다. 여자는 더 이상 실내를 둘러보지 않았다. 출구 쪽으로 걸어 가던 여자가 한 순간 멈추어섰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잊었다는 듯이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서서,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문 뒤로 사라져 버렸다. 오랫동 안 속내 얘기를 나눈 여자 친구를 돌려보내듯이 나 또한 손을 약간 들어 여자의 인사에 대답했다. 다방이 문을 닫는 시간에 나는 밖으로 나왔다. 도시 한복판 번화한 거리의 빛 무덤을 피해 나는 오래오래 걸었다.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는 상기 쪽으로, 포장 마차들이 늘어서 있는 뒷골목으로, 도시의 뒷길을 돌아다녔다. 어디론가 다 시 가야 하는데, 저 바쁘고 확신에 찬 귀가객들의 발걸음에 뒤섞여, 나도 서둘러 아무 노선의 기차칸 안으로 늦기 전에 뛰어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점점 그들에 게서 멀어지고만 있었다. 눈 하창수-1960년 경북 포항 출생. 19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청산유감'이 당선되어 등단. 1991년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로 제24회 한 국일보 창작문학상 수상. 소설집 '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 장편소설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차와 동정' '젊은 날은 없다'. 해설-신덕룡 하창수의 '눈'은 광주항쟁의 후유증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광주항쟁이 일 어난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의 비극적 체험으로 인한 상처가 치 유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난다. 정신적인 상처는 사건이나 사실 속에 내포된 진 실이 밝혀지고 또 그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 러나 '눈'이란 작품은 아직까지도 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현실이 곧 우리의 현 재임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5월 아침 어느 한순간에 폭력적인 세계가 지닌 잔혹함의 모습을 본 다. 카메라의 눈 속에 포착된 세계의 진실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더욱이 어느 시기에 자신이 보았던 세계의 진실마저도 폭압 적 상황에서 스스로 부정해야 했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십년이란 세월 이 흘렀어도 말할 수도 없고, 그것을 들어줄 사람도 없는 상황은 그 상처를 더 욱 깊게 만든다. 그 상처는 하나의 뚜렷한 영상으로 언제든 불쑥불쑥 현실 속에 끼여든다. 이런 고통 속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방식대로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눈'만 살아 있다면 자신이 바라보 는 세계의 진실이 전달될 수 있으리란 믿음에서다. 광장이나 허위가 없는, 시간 의 흐름과 관계없이 언제나 현재화되는 세계의 진실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그의 작업은 허망한 몸부림에 그치고 만다. 언어의 힘을 빌린 진실 드러내기, 즉 영상으로 각인된 세계를 언어로 풀어 내는 행위 역시 좌절된다. 소설가 역시 남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도 없 거니와 우리의 삶은 그 아픔 자체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다. 사각의 틀 속에 갇혀진 과거의 상흔, 즉 설명되거나 왜곡되기 이전의 진실 그 자체를 시각화시키는 행위는 우리의 삶이 맹인의 그것이나 다름없음에 대한 강 조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한 개인의 피해의식에 초점이 맞춰 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이해와 화해의 통로를 닫아버린 세계가 개인의 상처에 또 다시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살아 있는 '눈'을 향한 소망이 절실 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눈 그날, 새벽에서 아침까지 나는 줄곧 창가에 앉아 있었다. 5월이었다. 간혹 흐 린 날씨가 끼여 있기는 했지만 5월은 언제나처럼 맑은 햇볕 속에 놓여 있었다. 그날이 며칠이었는지는, '나는' 기억할 수 없다. 어쩌면 내 '눈'은 기억하고 있 는지도 모른다. '나'보다는 내 '눈'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제 기억이란, 날짜가 되었건 어떤 사건 이 되었건 그저 그러한 것들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 기억이란 것이 무엇을, 혹은 어떤 사태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오고, 그래서 어떤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리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세월이 벌써 십년 이상이 흘러가 버 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기억 따위의 하찮고, 볼품없고, 무기력한, 그리고 유용성이라고는 전혀 없 는, 그런 하나의 관념에 기대어야 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만 얘기합시다. 뭔가를 들춘다는 건, 어쨌든 먼지 같은 게 잔뜩 일어 나기 때문에 여간 불쾌한 게 아니라구요. 가만두었다가 젖은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내면 되는 거라구요.' '지금 자꾸 얘기한다는 건, 그럼 그걸 들쑤셔서 가만있는 먼지를 일으키는 거 란 말씀입니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듣자 하니까 참 불쾌하네요. 그래, 잠자코 있다가 마음씨 좋은 누군가가 젖은 걸레로 슬쩍 닦아 내면 만사 끝난다 이거죠. 그게 그렇게도 간단한 일인가요?' '일이 심각할수록, 그리고 어렵고 힘들수록 단순하고 간단한 대책을 찾아뵈야 하는 게, 그게 요령이라구요. 꼭 어렵고 힘든 방법만이 묘책은 아니다 이 말입니 다.' '글쎄, 그게...' 십년이 넘은 시간을 확인하는 건, 술자리에서 이런 식의 말시비가 벌어지기 시작하고, 어느덧 거기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은 사람 두엇이 슬그머니 자리에 서 일어서는 걸 망연히 지켜보고 있을 때 더 분명해진다. 나는 결코 일어서는 그 사람들의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양복저고리를 잡아끌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이 술값을 치르기 위해 뒷주머니의 지갑을 꺼내는 것을 보며, 이쯤에서 나 도 그만 일어서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욕심이 지나차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난들 왜 그걸 모르겠는가. 이깟 놈의 세상, 함부로 살아가는 데는 커트라인도 없는 후레자식 같은 세상... 취기를 빙자 하여 시월대다 보면 적당히 세월도 가고, 세월이 가다 보면 얼마쯤은 반편이 되 어 있을 것이고, 그런 터득이야말로 이 세상의 약아빠지고 덧없이 매몰차다는 성품을 또한 깊이 이해하는 지름길일 터이니... 아, 십년이란 그렇다면 얼마나 돼 먹지 않게 허망한 시간의 영속적인 흐림인가! 그런데, 아니 그런데 세월이란 걸 맞고 보내는 것도 욕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문 닫을 시간이에요. 그만 우리도 일어납시다.' 나는 담배에 불을 당기며 그렇게 말한다. 짙은 갈색의 맥주잔 속으로 날벌레 한 마리쯤 떨어진다면, 나 자신에게조차 너무도 쉽게 묵살되어 버릴 그 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처음부터 차곡차곡 다시 술판을 시작해도 아무 소리 않고 버티 어 낼 수 있다는 듯이, 혹은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담배나 뻑뻑 빨고 있을 것이 다. 애꿎은 날벌레의 익사체를 술 취한 손가락으로 건져내면서. 그런 시간 속에 서 감지해야 하는 그 십년이라는 세월은, 그래서 힘이 없고 볼품이 없으며 눈곱 만한 유용성도 끝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이미 십년도 넘게 지나 버린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오래 된 사진이나 일기장을 들추는 기분으로 그날을 되새기곤 한다. 다 시 말하지만, 이미 이런 종류의 기억의 반추는 더없이 고적한 일이다. 거기에는 반짝이는 그리움이라든가, 혹은 가라앉기는 했지만 어딘가 가슴을 울렁이게 하 는 간절함 따위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나의 이런 되새김질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파삭하게 마 른 모래바람뿐이다. 귓가에다 대고 종이를 비벼댈 때 들을 수 있는 과장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 를 나는 그 모래바람 속에서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날에 미리, 모조리,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새벽이 오는 것을 보며, 나 는 중얼거렸다. '더 밝아지면,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은 껍데기를 벗기면 거침없이 드러나는 희디흰 과육처럼 나타날 것이다. 과육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그때, 나는 썰물처럼 골목을 빠져나가는 회색의 새벽빛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느린 듯했지만 어떤 것도 제지할 수 없는 완강한 물러섬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육중한 발이 드러누운 내 가슴을 천천히 짓누르는 것같은 답답함이었다. 두꺼움 검정빛 모직 커튼 사이로 나는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아침의 빛 속에서 내가 '모든 것'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누군가가 나의 움직임을 너무도 확연하게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은 나를 긴장 시켰다. 나는 우선 망원 렌즈를 끼운 카메라의 셔터를 가볍게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가 빠르게 내 귓속으로 빨려들어왔다. 4미터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치고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토록 그곳 이 선명했던 것은, 아마도 그 세상이라는 곳에 그날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고 있지 않았 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선 내가 카메라로 찍은 것은 텅 빈 세상의 모습이었다. 인간이 사라져 버린 도시의 골목 안, 아니 처음부터 인간이라고는 살지 않은 곳 같은 유령의 놀이터- 그랬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필름에 담아 두려고 생각했던가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효과적인 상징을 제공할 터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이 괜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카메라를 창문틀 위에다 올려놓고 오른쪽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두 눈의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곤 가볍게 하품을 했다. 이내 눈물이 고여 왔으므로 이번엔 왼쪽 손의 손등으 로 눈을 몇번 문질렀다. 굳게 닫힌 창문과 창문을 온통 가리고 있는 검정빛의 두꺼운 모직 커튼, 그리고 '나'라는 사물이, 조그마한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는 액자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묵직한 주먹으로 쥐어박혔을 때처럼 뺨이 얼얼했다.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무 감각해진 얼굴을 만지기 위해 내 두 손이 얼굴 쪽으로 옮겨지던 순간과 거의 동시였다. 그 소리 는 마치 내 몸의 어딘가가 완전히 부서지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둔중했다. 나는 얼굴로 향하여 지던 손을 재빨리 커튼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아니, 나의 '눈'이 그것을 포착했다. 5월이었다. 햇볕이 무척이나 따스해 보이던 날이었다. 봄이 오면서 새로 칠한 듯한 어느 단층집의 초록색 지붕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날이 며칠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을 나의 '눈'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앞에서도 말했던 것을 다시 되풀이하여 말한다는 것은 어쩌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같은 세상에,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는 얘기를, 그것도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확증하지도 못하는 따위의 일을, 두 번씩 세 번씩 되풀이하여 들려 주는 것을 꾹 참고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 서 나는 이제 그날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설사 내 '눈'이 그걸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나 스스로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그날에 대하여, 나는 잊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이제 잊어버렸다. 십년이 아니라, 십년의 십년이 지나가더라도... 결국 기억하는 일만큼이나 무기력하다는 것을 누누히 증명시킬 뿐인, 그런 시간의 지나감... 하지만 나는, 그날, 새벽과 아침이 고요히 지나가던 그 시간에 그것을 '보았다', 라고 말해야 한 다. 왜냐하면 그날 그 시각에 그것을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최후의 증인인 바로 나의 '눈'이, 다름아닌 눈에 대한 사전의 설명과 전혀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내가 늘어놓을 몇개의 이야기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눈'은 보통의 눈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감각 기관임에 틀림이 없고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 며, 따라서 나는 '보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십년이나 지난 어느 해의 5월, 햇살이 밝았던 그날, 새벽과 아침이 바뀌어지던 그 시간에, 나의 이층집 창문을 가리고 있던 두꺼운 검정빛 모직 커튼 사이로 '그것을 보았다.' 조롱 속의 행 복한 새들은 아직 아침의 노래를 부르기 전이었고, 밤새 어둠을 이불처럼 덮고 떨었던 사람들은 또다시 대낮의 공포 속으로 맨몸으로 걸어가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대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는 집의 대문은 바람에 흔들려 삐걱거렸고, 누구에겐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 시켜 주기 위해 마당은 언제나 바싹 말라 있어야만 했다. 더러는 나처럼, 두꺼운 검정빛 커튼 뒤 에 낡은 정물화의 소재처럼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몇번이나 한 얘기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제 나는 '눈'에 대하여 말해야만 한다. 눈의 고달픈 증언... 혹은, 오랜 기다림에 대하여. 지난 여섯 해 동안 나는, 한국의 헐리우드라고 일컬어지는 충무로의 드세고 삭막한, 그리고 매 우 비천한 품성들 속에서 살아왔다. 그 속으로 맨처음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그저 단순 한 하나의 부속품이면 족하겠다, 라는 심정이었다. 오랜 시간 만져 온 카메라를 가지고, 일테면 스틸 사진 같은 걸 찍는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혹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보조쯤으로라도, 기꺼 이 만족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당시의, 그러니까 더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야만 했던 그때의 내가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의 거의 대부분은 기다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영화를 만드는 곳이라야 했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대답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얘기를 대답 대신 들려 주고 싶다. 우선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을 한 사람은 나의 친구였다. 그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냐?" 친구는 내 말을 꽤 많이 듣고 난 뒤에 그렇게 물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줄곧 같은 반에서 지냈기 때문에 거의 한집안의 식구 와 다름이 없었던 그 친구는 묻고 나서도 한참을 대답 없이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는 내 몸 위로 길고 막막한 한숨을 흘려 놓았다. 그 한숨소리는 나를 너무도 편안하게 했다. 잘못을 저질러 아버 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때, 가끔씩 흘러내리던 그런 한숨소리는 나로 하여금 당신을 얼 마나 소중하게 느끼도록 했던가. 누군가가 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 로는 그런 한숨소리만큼 분명한 것이 또 없을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나는 바 로 내 친구의 한숨소리를 통해 무한한 애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을 다 듣고 난 내 친구는, 내 귓전에서 그 애정어린 한숨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실망스럽게도 나를 병자로 몰 아대었다. "그렇다면 취직보다는 병원이 우선이잖아. 그렇게 해 가지고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니?" 친구의 말소리는 내가 입고 있던 검정물 먹인 품이 넓은 군용 잠바 속으로 죄다 들어와서는 마 구 돌아다녔다. 나는 공상 영화의 주인공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그의 말소리들을 밖으로 끄집어내 기 위해 몸을 비틀고 손을 집어 넣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내 어깨를 아주 세차게 내려쳤다. 나는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내 입 안으로 무언가가 꽉 들어차는 것 같아 나는 자꾸만 볼을 불룩 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나는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웩웩거리는 내 모 습을 우리가 앉아 있는 건너편 벽에 매달린 거울을 통해 나는 훤하게 볼 수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방의 한쪽 벽에 붙어 있던 거울의 '눈'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 몰골을 망연히 구경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아니면 이대로 나를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듯 일 어서서 내 겨드랑이에 팔을 찔러 넣었다. 나는 그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순순히 일어섰다. 마치 '그때' 내가 보았던 '그들'처럼. "내 말을 들어."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누군가가 입을 벌렸다면, 그는 틀림없이 입이 찢어졌을지도 몰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태는 예감하는 데는, 사실 인간 만큼 정확하고 빠른 동물도 없을 것이다. 본능과 경험의 절묘한 결합! 나는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 다. 아니, 반항이란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설픈 반항이란 게 얼마나 위험스런 것인가를 나는 이미 '보아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 이번엔 그가 나의 말을 묵살했다. 그는 나의 겨드랑이에 완강한 힘으로 팔을 끼워넣은 다음 내 몸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움직여 갔다. 그는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고, 거기서 오천원짜리 한 장을 뽑아 던지듯 계산대 위에 놓았다. 그리곤 계산대의 아가씨가 거스름돈을 미처 건네주기도 전에 그는 나를 끌다시피 해서 다방을 빠져 나왔다. 그와 함께 간 곳은 충무로의 그 다방에서 채 오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병원이었다. 나 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바닥이 유난히 깨끗한 그 병원에서 만난 매우 착하게 생긴 간호사와 그에 못잖게 유순해 보이는 인상의 의사, 그리고 나를 진찰한 그 진료실 창문에 드리워져 있던 온화한 오렌지 빛깔의 커튼 이외의 것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렴풋하게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그 러니까 나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던 친구를 향해 그 착하게 생긴 간호사 가 "나가 계시죠."라고 말했을 때, 내 친구는 "괜찮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때 내가 있는 그곳이 고향의 어떤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만약 그곳이 고향의 어떤 곳이었다면 친구와 간호사가 나눈 두 마디의 대화에 대하여도 아주 다른 감정을 가졌을 것이 분 명했다. 일테면 "나가 계시죠."라는 간호사의 말은 "나가 있어, 새캬!"라고 들렸을 테니까 분명히 나는 아주 심각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괜찮습니다."라는 친구의 말은 "..." 그저 하나의 침묵의 부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마치 어떤 상황이, 혹은 사물이, 그림 액자와 같은 틀 속에 갇혀 버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 경우, 틀 속에 갇혀 버린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 만 들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더이상 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만이 유일한 통로의 구실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사각의 틀 속에는 소리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처럼, 그 리고 필름처럼 따라서 '눈'만이 들어 줄 수 있는 그 세계에는 오직 카메라의 셔터, 혹은 렌즈와 줌, 조리개와 인공 조명, 자동노출 시스템 같은 것들만이 재구실을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 람들은 그것을 거짓의 세계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눈을 가짜의 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내가 고향을 떠나 와 영화사에서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셔터의 세계.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만 포착되는 세 계. '눈'으로서의 기억을 훨씬 강렬하고, 기록적으로 다루어 내는 세계. 소리가 죽어 버린 그 단순 한 세계... 사각의 틀은 여기에 존재한다. '너 이 새캬, 죽고 싶지 않음 입 꾹 닥치고 엎드려 있어! 넌 한 놈쯤 죽여 버린다고 꿈쩍한 세 상이 아니야. 야, 거기! 계속 그런 식으로 웅얼거리면 혀를 뽑아 버릴 거야!' 나는 친구가 데리고 간 그 조그마한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주사는 커녕, 처방전 한 장 받지 않 고 나왔다. 의사는 그 착하게 생긴 간호사에게 손에 들고 있던 베이지색 체크리스트를 건네주면 서 내게 온화한 미소까지 보내 주었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병원을 나왔다. "너, 의사가 내게 한 말 들었지?" "..." 친구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복잡한 충무로 시가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꽃 가게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수한 국화 다발뿐이었다. 문득 나는 국화가 가을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내 눈 속으로 무심히 들어온 그 노랗고 하얀, 혹은 연자주색의 수많은 국화송이들을 보면서 몸을 약간 떨었다. 그리곤 이내 나 는 친구에게, 의사가 내게 한 말을 요약해서 들려 주었다. "우린 거짓말에 대해서는 어떤 처방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내 말을 듣고 난 뒤 그렇게 말했었다. 그 의사의 말은, 내가 이런 식의 진료를 받을 필 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임을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뒤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는 친구를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도 의사의 말을 듣고 나와 꼭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자꾸만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왜 그런 모습 을 하고 있는지, 그것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세 사람, 즉 나와 의사와 나의 친 구의 심정을 모두 읽을 수 있었고 그들이 취하는 태도들이 무슨 연유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지, 죄다 알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의사는 내가 말한 여러 가지 증상들을 단순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듯해. 넌 내가 그 의사 앞 에서도 네게 보여 주었던 것 같은 행동을 당연히 보여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물론 그랬 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처방이 내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 아. 왜냐 하면..." 의사의 말을 비교적 간략하게 설명하고 난 나는 이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친구에게 들려 주기 시작했다. 즉 보여 준다는 건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잘 보여 줘도 보는 사람이 제대로 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눈이다. 정확한 눈, 이 건 간혹 보는 이의 의지나 훌륭한 식별가로서의 능력이라고 바꾸어 말하여지기도 하거니와, 예를 들면 아무리 좋은 영화를 보여 주어도 그게 왜 좋은지를 맨 먼저 관찰자의 '눈'이 발견해 내지 못 하면 그뿐 아닌가, 운운. 내가 내 생각을 매우 객관적인 어투로 설명하는 동안 친구는 내가 아까 가을을 물씬 느꼈던 그 꽃가게 앞의 무수한 국화들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그리곤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다시 국화꽃에게로 시선을 던지곤 좀더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 간 이후에는 별로 잘 기억하지도 못할 그런 말들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나는 더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넌 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나의 그 마지막 말이 그에게 상당한 신뢰를 주었던 모양이었다. 금방 반응이 왔다. "너 지금 눈이라고 말했니?" 나는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동안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내가 아까 병원을 나서며 가을을 발견하였 을 때의 그 눈과 매우 닮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을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나의 '눈'이 다른 어떤 이의 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에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럼 좋아, 내가 촬영 쪽을 한번 알아보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정확히 육 년 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한국의 헐리우드라고 하는 충무로의 괜찮 은 영화사에서 촬영기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었지만 내 친구는 보기보 다는 꽤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관계로 나는 수습 과정을 별달리 오래 거치지 않고 촬영 기사로 자리잡을 수가 있었다. "눈이 살아 있군." 내가 찍은 영화의 시사회가 끝나고 나면 거의 대부분, 우리 나라에서 꽤 대접을 받고 있는 50 대의 한 영화평론가에게서 나는 그런 말을 듣곤 했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그 '눈'이라는 것이, 그저 영화 속의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뭔가를 자꾸만 보여 주려고 애 쓰는 그 불타는 혹은 욕망에 가득찬 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 이란 결국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중년의 영화인에게 내 눈을 크게 떠 보여 줌으로써 그의 찬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 곤 했었다. 그런 일들이 삭막하고 드세고 비천한 품성들 속에서 나를 견디게 한 유일한 위안이었 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눈'에 집착할 수 있게 만든 충분한 이유이기도 했다. '농부가 언덕 위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 농부는 자꾸만 달겨드는 말벌을 쫓기 위해 미친 듯이 휘젓기 시작한다. 농부의 요란한 몸짓이 계속되는 동안 그 배경을 이루는 아래쪽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탄 우편배달부가 평화롭게 지나간다. 잠시 후, 화면의 앞쪽에 있는 농부는 전처럼 차분 히 일을 하고 뒤쪽에 자전거를 타고 가던 우편배달부가 손을 내젓기 시작한다. 말벌의 공격으로 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요란한 몸짓이다... 그러나 화면의 어디에서도 말벌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은 말벌을 본다. 농부와 우편배달부의 몸을 쏘기 위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 는 그들의 요란한 움직임을... -자끄 따띠, '축제일', 1947년 작 일부' 나는 두 해 전, 매우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은 적이 있다. 연예부 기자들이 잘 쓰는 투로 관객 동원에는 완전히 참패한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내가 가진 여러 가지 핸디캡에 도 불구하고 수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직 삼십대의 초반이라는 것, 어딘가 불란서 쪽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앵글을 고집한다는 것, 심지어 새벽이나 밤의 효과를 내기 위해 필터를 끼우는 대 신 새벽이나 밤 촬영을 무식하게 고집한다는 것들이 그랬다. 그런 사실들은 나로 하여금 욕망의 냄새를 피우게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역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던 모양이었 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내가 왜 앙각과 부감을 빈번히 사용하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 이다. 물론 나는 많은 영화들에서 불란서의 흉내를 내곤 했다. 발레리나를 꽃처럼 보이게 하기 위 해 무용수를 얇은 유리판 위에 올려놓고 수직으로 촬영한 르네 끌레르를 어설프게 모방한 적도 있었다. 자끄 페데, 그리스 티앙-자끄, 끌로드 오땅-라라, 로베르 앙리코... 그들은 하나같이 불란 서 출신이었다. 나는 물론 한때 그들이 만든 영화를 열심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모방 하기 위해 내 온 정력을 바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들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부정 할 마음 역시 전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내 '눈'을 만든 것이다. 뷰파인더 깊숙이 들 이밀어진, 비로소 세계를 향해 유일하게 열려진 나의 '눈'을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잘 쓰는 투로 말해, 이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의 골자도 아니다. 나는 지금 어줍잖게 촬영상의 수상자가 되었던 바로 그날에 일어났던 매우 사적인 사건 하나를 얘기하려고 한다. 나는 좀더 차분해졌으면 좋겠다. 연기를 하든 촬영을 하던 우선 차분해져야 한다. 과장된 몸짓, 혹은 왜곡된 영상은 쉽게 탄로가 난다. 그 본질은 무엇인가를 포장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까발겨져 버린 볼품없는 싸구려 몸뚱이에 불과한 것이다. 얘기를 하는 데도 마찬가 지일 것이다. 아무튼 성대한 시상식이 끝나고 그 시상식 만큼이나 거창한 파티가 뒤이어 열렸는데 나는 수상 자의 한 사람으로 당연히 거기에 참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침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중년의 영화평론가 선생은 그날따라 지방에 내려가고 참석하 지 않았으므로 나는 적이 의기소침해 있었다. 사실 촬영상이란 굉장히 초라한 상일 수도 있었다. 영화제 시상식에서 그 시상의 순번이 앞쪽으로 매겨지면 질수록 초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촬영상이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 실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로 영국 아카데미에서 촬영상을 받은 사람이 오스왈드 모리스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몇몇 사람은 그 영화의 감독이 마틴 리트 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무엇보다도 아주 많은 주연을 맡았던 리처드 버튼을 잊지 않을 것이 다. '장거리 달리기 선수의 고독'이라는 영화를 월터 레설리가 찍었고 그가 역시 저 유명한 영화 '꿀맛'을 촬영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별 소용이 없다. 볼프강 수쉬츠키의 박력 넘친 앵글이 '율리시 즈'를 남겼고 프레디 프랜시스의 감미로운 앵글이 '아들과 연인'을 남겼고, 폴 비슨의 가벼운 앵글 이 '선생님에게 사랑을'을 남겼고, 데스몬드 디킨슨의 중후한 앵글이 '햄릿'을 남겼다는 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이 아니라 머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렌 스 영의 살인 명령을 즐거워하고, 에이젠슈타인의 놀라운 혁명성에 혀를 내두른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쓸쓸함에 눈물짓고, 신상옥의 교활한 끈적함에 남자들은 아랫도리에 힘을 가한다. 조지 스 티븐스와 '젊은이의 양지', 안소니 아스퀴드와 '피그말리온', 빅토르 시외스트롬과 '주홍글씨'는 언 제나 동격이다. 아무래도 과분한 찬사다. 지나친 우상화의 놀음이다. '눈'이 존재하지 않는 머리는 이미 얼굴이 아니다. 그러나 '눈'은 언제나 두번째이거나 세번째, 네번재... 로 밀려 나간다. 시상식장의 파티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혼자 파티장의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 었다. 벌써 여러 잔재 마신 맥주 탓으로 결막이 욱씬거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먹음 직해 보이는 앵두 모양의 빨간 젤리가 얹힌 애플파이가 내 눈에 띄었다. 뷔페 상 위에는 수많은 먹을거리들이 널려 있었는데도 유독 그게 눈에 띈 것이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왼쪽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찍으려는 대상을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려는 행위와 같았다. 나는 줌렌즈 를 끌어당기듯 서서히 내 오른쪽 안구 속으로 그 애플파이를 빨아들였다. 젤리의 붉은 빛이 점점 퍼져 가고 있었다. 황혼처럼. 그러자 앵두 모양의 빨간 젤리가 갈색의 파이 몸뚱이 위를 가볍게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파이 위에 얹힌 그 빨간 젤리에만 온통 안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마치 그 힘에 이끌린 듯 둥글고 빨간 조그마한 젤리가 쏜살같 이 내 눈알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미처 눈을 감거나 얼굴을 돌릴 여유도 없었다. 결국 맹렬한 속력으로 돌진하던 그 젤리는 내 눈을 세차게 때렸다. '으악!'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음습했다. 내가 극심한 통증을 느낀 것과 거의 동시에, 내 손에 들려 있던 맥주잔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 져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어깨와 등 쪽에 짜릿한 아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깨진 유리조각에 찔린 것 같았다. 곧이어 나의 몽롱한 시야에 사 람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잡히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얘기를 거는 것 같았지만 내게는 웅성거리는 소름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드러누운 내 시야에 양각으로 잡힌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정렬해 놓은 총과 같았다. "휴식하는 총 같군." 그때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강렬하게 그 장면을 찍고 싶었다. 정상적인 눈의 위치에서 는 도무지 포착되지 않을 그런 장면이었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수직으로 세워진 '휴식의 총 들'쪽에서 또다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전히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의식 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니면 그것이 의식의 점차적인 회복인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때 내 눈 가까이로 얼굴 하나가 갑작스레 다가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니,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다. "날 병원에 데리고 가지 마." 아마도 그런 말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쓰러진 눈 위로 다가온 그가 내 친구인 줄 알았 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내 친구가 아니었으므로 그가 내 말을 정확 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나의 의견에 따라 주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알았소, 병원에 갈 필요가 없죠, 아무렴." 나는 그가, 내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가 간질병인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입 안에다 친절하게도 자신의 손수건을 둥글게 말아 집어넣어 주었는데, 그건 내가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혀를 깨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빗나가긴 했지만 아무튼 그의 친절함에 감복하여 그가 하는 대로 그의 향수 냄새가 진해서 약간은 역겨운 손수건을 오랜 시간 동안 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음우우응... 우우으응우응우우우응우으..." 그는 손수건으로 틀어막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내 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 여 주었다. 그리곤 나를 살며시 일으켜 세우고는 파티장의 가장자리에 마련되어 있던 간이의자로 날 부축해 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 의식이 그 이후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뒤였다. 그가 내 입에다 손수건을 찔러넣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 그 우물거리는 말은 이런 거였다. 내가 왜 굳이 이 말을 여기에 해석해 놓으려고 하는가 하면, 그게 바로 '눈'에 대한 나의 앞으로 의 모호할지도 모르는 진술을 많은 부분 변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입 안에서 사라져 버린 그 말은 이랬다. "총알이었어요... 내 눈에 박힌 그 총알말이에요..." '지난번 u동 주공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시체와 책가방이 발견되었다고 증언을 하셨는데, 선생님 께서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하시면서 목격하신 겁니까?... 저는 당시 u동 주공아파트 신축 현장에 서 작업을 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h건설 소속 인부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을 하 고 있던 현장은 그 당시 버스 종점의 우측 야산이었습니다. 산을 깎아 내는 작업을 시작하자 시 체와 책가방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장 소장은 부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다른 곳으 로 이동시켰습니다. 그 뒤 청소차와 포크레인이 와서 흙을 퍼내고 시체들을 옮겨 갔습니다. 세 트 럭 정도 된 걸로 기억합니다... -1985년 6월 20일에 있은 이 아무개 씨의 진술, 일부' '오래 들여다보아야 그것이 무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의 흑백 사진 한 장이 있다. 여자인 듯 보 이는 흙바닥에 모로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양손은 마치 피멍이 든 오른손을 왼손이 감싸 쥐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죽은 것 같다. 그녀의 앞과 뒤에 역시 두 개의 비슷한 모양을 한 사람 둘이 쓰러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건 마치 구겨진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둔 것처럼 보인다. 자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찍어 놓은 흑백 사진이 워낙 명암 대비가 뚜렷해서 언뜻 보아서는 무 언지 잘 알 수가 없다.(죽음은, 사실 사진만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다. 시체가 아니라 잠을 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쩌면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신문의 활자인 듯 보이는 자잘 한 글씨들 옆에 굵은 독일어 단어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띈다(나는 급히 독일어 사전을 찾는다. 영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직감적으로 나는 그것이 독일어 단어일 것 이라고 생각했다). blutiger... (나는 그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확인하고, 예감처럼 그 사진이 시체 를 찍은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 혹은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봄날이었는데, 날씨는 별로 좋지 않았다. 텔레비전 기상 예보는 언제나 중국에서 건너온 모래바 람 이야기로 시작되던 때였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길을 걸어가거나, 결막에 이상이 생긴 사 람들은 아예 색안경을 끼고 다녔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버스는 좀체로 오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는 데 지쳐 무악재를 걸어서 넘기로 작정했었다. 걸어가다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면 홍제 쪽에서 불어오는 노란 모래 가루들이 추적자처럼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타야 할 번 호의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왠지 슬펐다. 차 안은 텅 비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먼지가 잔뜩 낀 버스의 유리창은 문지르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까끌거 렸다. 기억 속처럼. "요즘은 어때?" "뭐가?" "몸 말야. 네 몸." "내 몸이 어땠는데?" "그래 그래, 알겠다... 그건 그렇고, 너 송 선생이라고 기억하니? 지난 겨울에 셋이서 만났었지." "기억해. 얼굴이 유난히 하얗던 그 소설가?" "용케 기억하는구나. 그 사람이 널 좀 봤으면 하던데." "무슨 일로?" "너도 봤는지 모르겠다만 송 선생이 k신문에 연재소설을 하나 싣고 있는데 요즘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영화 촬영기사야. 그쪽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가 봐. 나한테 전화해서 널 꼭 좀 봤으면 하고 말하시더라." "..." "본 적 있어? 그 연재?" "내가 가야 하니?" "그러면 좋지." "어디로 가면 되지?" "그분 작업실이 마포 쪽에 있어. 한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인데, 버스 한 번만 타 면..." 봄이었지만 가을에나 만날 수 있는 노랗게 타들어간 낙엽들이 보도 블럭 위를 굴러다녔다. 나 는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보도 블럭 위의 흙들이 노랬다. 나는 서늘한 땀방울 하나가 등줄 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늦은 가을에 무악재를 버스로 넘으면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났어요." 나는 내가 찍은 어떤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던 여배우의 말을 기억하며 고개를 들곤 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 순간이면 언제나 늦은 가을의 무악재를 버스를 타고 넘는 자신 을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늦은 가을에 수없이 버스를 타고 무악재를 넘어 보았지만 눈물을 흘려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 말을 듣고 난 뒤부터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신에서 단 한 번도 엔지를 낸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믿었다. 무악재를 내려오면서 일자로 쭉 뻗어 있는 도로 위의 수없이 많은 자동차들을 보았다. 그 한가 운데의 허리를 자르며 고가도로가 가로질러 있었다. 그 옆구리에 똥색으로 바랜 독립문이 초라하 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짙은 고동색 조끼 파카를 걸친 늙은 청소원 한 사람이 긴 플라스틱 빗자루로 길가의 먼지와 쓰레기를 쓸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연신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담벽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이 무악재를 거슬러 다 올라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가 사라지는 쪽에서 끊임없이 차들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람은 노란 먼지들을 덮어써야만 했다. 내 입 안으로 모래 가루들이 잔뜩 들 어차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 안에다 바람을 넣었다.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내 두 볼이 금세 불룩해졌다. 구역질이 솟았다. 나는 담벽에 이마를 기댔다. 나는 오래도록 그렇게 서 있었다. "이보, 젊은이. 어디 아프오?"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개새끼, 엄살 떨지 마!'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수없이 밀려드는 차들만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 이었다. 아까 보았던 청소원의 짙은 고동색 조끼 파카가 막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혹은 거대한 태풍에 의해 뒤집어지는 엄청난 크기 의 배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강렬한 힘에 떠밀린 듯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리 곤 쏜살같이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내 앞에서 수십 대의 차들이 미친 듯 브 레이크를 밟아대었다. 어디선가 거친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죽고 싶어, 이 개새끼야!" 지난 봄의 어느 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소리 없이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예감하는 일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무 언가가 사람일 경우에는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예감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다 가가고 있는 사람조차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어둠 속이든 아니면 충분히 밝은 곳이든 농밀한 접근의 분위기 속에 휩싸인 채 점점 몸이 굳어 가는 사람과 그것을 은밀하게 지켜보면서 소리를 죽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숨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사람- 그들은 이미 하나의 음모에 어쩔 수 없이 가담된 공범인 것이다. 그런 공범 의식을 감지해 낼 수 있기까지는 물론 그들이 여간 예민 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설사 그런 예민함을 지니지 못한다 하더라도, 썩 기분 좋을 것 없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떨쳐 내기 힘들 듯싶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는 축이건 혹은 그에게로 은밀히 다가가는 축에 끼이건 두 경우 모두 지독스럽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왜 이런, 거의 독단적일 정도로 매우 사적인 느낌에 대해 장황히 설명을 하는가 하면, 바 로 송 선생이라는 40대 중반의 소설가를 찾아갈 때마다 바로 그 같은 느낌을 받아 왔기 때문이 다. 물론 그가 내게로 다가 오는 것을 예감하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다가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요컨대 나는, 한강이, 특히 그 폐허가 된 조그마한 밤섬이 잘 내려다보이는 그의 오 피스텔로 찾아갈 때마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 적어도 기분이 좋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국 에서 불어온다는 기분 나쁜 노란 모래바람을 헤치며 무악재를 넘어 마포까지 걸어서 찾아갔던 초 행길은 말할 것도 없고, 밤을 새워 가며 술을 마실 정도로 친숙해진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그럴 찾아갈 때만큼은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기분이 좋질 않았다. 그러나 그런 좋지 않은 느낌들이 나의 발길을 막은 건 아니었다. 육중하고 세련된 모양의 엘리 베이터 안에 들어갔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안온함이었다. 복도의 대리석이 주는 질감 들이나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수많은 굳게 닫힌 문들, 그리고 언제나 어두운 그 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복도의 창문이 가져다 주는 묘한 적막감들은 분명히 편안함이였다. 어떤 때에는 모든 질병과 공포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평화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곳은 무균실이었다. 그곳에는 인큐베이터의 무한한 안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 나는 오랫동안 그 복도에 서 있거나, 복도의 창문을 통해 번잡한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있기도 했다. 그럴 때의 도회는 더 없이 넓고 깊었다. 그리고 한없이 고요했다. 내가 아마도 그것을 깊다고 느낀 것은 그런 왜곡된 고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덧없이 희망하곤 했다. 이 잘 차단된 질 좋은 새시처럼 나 자신도 모든 세상의 것들로부터 차단할 수 있는 새시를 만들어 단 수는 없을까 하고. 어쨌든 내가 서 있던 오피스텔의 복도의 평화를 지독스럽게도 달콤하였다. 달콤하다 못해 나로 하여금 어떤 성욕까지도 느껴지게 했다. 정말 언젠가 나는 그 자리에서 수음이라도 하고 싶었던 적이 있 었다. 이런 경우, 어떤 이는 강렬하게 추락하고 싶은 감정이 솟아오르기도 하겠구나, 그래서 고층 건물로부터 떨어져 자살하는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만약 그런 식의 평화에 대한 나의 덧없는 인식이 없었다면, 나는 결국 그럴 찾아가는 일을 중 간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로 은밀히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로 숨죽이며 다가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기분 나쁨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굳이 싫거나 좋거나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내가 참을 수 없어 고향을 떠났듯이, 그에게로 향하여 지는 나의 발길을 언제든 끊어 버리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나는 그의 방 앞에 서 있었고, 조용하게 문들 두드린다. 그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그는 문을 잠그는 법이 없었다. 외로운 사람이구나, 하고 내가 생각한 것은 두어 번 그의 오피 스텔을 방문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것이었다. '들어오세요.'라든가 '누구십니까?'라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녜.'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마치 문을 잠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노크 소리에 대해 이렇다 하게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의 몇번은 노크를 하 는 내가 오히려 당황했었다. 그렇다고 '왜 문을 잠그지 않느냐?'라든가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하고 물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가 무척 게으른 사람이거나, 무척 외로운 사람이든가, 둘 중 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게으른 사람을 택하기보다는 외로운 사람 쪽을 택 했다. 나는 문을 두드리는 일이 매우 형식적인 절차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가 원하 는 바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계속 그렇게 했다. 그러나 곧이어, '뭘 하고 계십니까?'라는 약간은 겸연쩍은 듯 물어 줌으로써 그에게 내 행동이 매우 형식적이며 또한 나이든 사람에게 취할 수 있는 예의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오피스텔에 드나드는 하나의 절차로, 문을 두드리고 난 뒤에는 으레 뭘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 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그런 형식과 예의는 받을 필요가 있다. 적어도 내가 찾아가고 있는 40대 중반의 중견 소설가인 송 선생같이 별로 흐트러짐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깨끗한 독신의 남 자에게는 더욱. "아, 예... 어서 오세요." 이 말은 아주 나중에야 나오게 되는 그의 매우 형식적이며 예의바른 대응이다. 이제 이 두 개의, 우리가 귀가 아니라 '눈'으로도 들을 수 있는, 아니 '눈'으로 들어야 훨씬 강렬 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대화를 사각의 틀 속에 가두어 보자. '뭘 하고 계십니까? 아, 예... 어서 오세요.' 나는 정확히 네번째 그의 오피스텔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나의 이같은 생각을 말한 적이 있었 다. 그때는 이미 무더운 여름이었고, 그의 오피스텔에는 상당히 인상적인 냉방 시설이 되어 있어 서 더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저는 이 두 개의 다이얼로그를,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척 형식적이고 예의발라 보이는 이 대화가 미치도록 무슨 냄새를 풍기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냄새요?" "일테면, 매우 추상적인 어떤 암시라고나 할까요. 마치 달리는 자동차의 앞유리를 클로즈업으로 여러 번 보여 줌으로써 은연중 관객들에게 사고를 예감시킨다거나, 뭐 그런 영화적 수법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런 매우 추상적인 암시 말이죠." "무슨 암시요? 무슨 추상적인 암시요?" "선생님과 저와의 관계라고나 할까요?" "음... 무슨 관계요?" "매우 형식적이고 예의바른 관계라고나 할까요." 거기까지 내가 말했을 때, 그는 한동안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불쑥 이런 말을 했 다. "가끔 이런 식의 대화를 옮겨 놓은 소설을 봅니다. 대개는 별로 문학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경 우이지요. 원고지 매수를 늘려 한푼이라도 원고료를 더 받아 내기 위한 어떤 장치일 수도 있지요.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고, 트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치든 트릭이든, 그건 별로 효과가 없 는 것 같아요. 나는 신문 연재소설을 많이 썼는데, 그러다 보니 처음엔 본의 아니게 그런 식으로 많이 써먹었고, 나중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차츰 나는 이런 식의 원고지 매수 늘리 기에 대한 어떤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즉 리얼리즘이란 걸 거기 다 붙들어 앉힌 겁니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빈번히 하는 일이 똥누고 밥 먹는 것인데, 그 걸 아무런 의미 부여 없이 그대로 옮겨 놓으면 소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걸 리얼리즘이란 그 럴듯한 수식어 아래 놓아 두면 아무런 갈등도 하자도 없어요. 물론 작가 자신에게는 말이죠." 거기까지 그가 말했을 때, 이번엔 내가 한동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 이자 별로 기분이 달가워 보이지 않는 인상이 되면서 한마디 툭 뱉었다. "그게 뭐 그리 심각한 일입니까?" 그에게서는 무언가 가벼운 것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잠그지 않는다든가 방문객의 노크 소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가벼움이었다. 그런 것들이 가벼움 이 아니라 아까 말한 것처럼 외로움으로 인한 일종의 형식적인 예의라면, 내가 그에게서 느낀 가 벼움은 일종의 삶에 대한 방관이었다. 나는 그것이 오랫동안 신문 연재소설을 써 온 그의 이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멋대로 생각 해 버렸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사실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질 않은가? 삶에 대한 여간한 방임의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함부로 말하여지지 못한 그런 발언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나는 그에게서 그런 가벼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아무렇게나 대하게 만들 정도의 하찮은 가벼움은 아니었다. 그의 가벼움은, 말하자면 세속의 잣대로 잴 수 있는 무거움이나 가벼움이 아닌, 어느 정도 신산한 삶의 터널 속을 통과하여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치 허무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 면, 너무도 관념으로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비현실적이라는 질책만으로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 는 완고함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 자체를 한 번도 가볍게 본 적은 없었다. 헐렁한 그의 옷차림이나, 언제 그랬냐 싶게 이내 날아가 버리는 증류 작용의 강한 웃음, 혹은 굳게 닫힌 책상 위의 워드프로세서 덮개에 붙여진 '침묵의 소리'라는 팝송 가사를 써 놓은 종이 같은 것들에 서도 마찬가지의 가벼움을 느꼈다. 일테면, 만약 어떤 고등학생의 책상 위에서 그런 팝송 가사를 적어 놓은 종이쪽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내가 느끼는 가벼움의 정도나 빛깔이 전혀 달랐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하여튼 가벼운 것을 보면, 혹은 느끼면 그 즉시로 나의 마음은 가라앉는다. 마치 긴 시간의 정 사보다는 단 이삼 분에 끝나 버리는 수음이 훨씬 덜 부담스러운 것처럼. "뭡니까, 그거?"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책상에서 두어 발짝 떨어져 있는, 초겨울의 추위를 달래기에는 너무도 과 분하게 타오르고 있는 꽤 값나가 보이는 가습장치가 달린 전기 히터 옆으로 엉거주춤 다가가며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언뜻 보아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흑백 사진이었다. 아래쪽에 사진의 설명인 듯 보이는 한 줄의 글씨가 씌어져 있는 손바닥 크기만한 그 사진은 간딘 스키의 날카로운 각으로 이루어진 추상화를 흑백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로 몸을 약간 기울였다. "뭡니까, 그거. 손에 든 거." 다시 한 번 내가 처음과 똑같이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마치 감출 필요가 조금도 없어졌는데 도 상대방에게 들켜 버린 것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듯한, 말하자면 갓 사춘기로 접어든 소녀들이 나 할 법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손을 품안으로 말아넣고 있었다. 나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내 눈앞으로 어떤 불란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1940년대의 불란서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의 심리를 나타내기 위 해 곧잘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곤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즉 상대방이 이미 어떤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감추고, 이미 눈치를 챈 상대방은 또 그를 외면하고... 그리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혹은 전혀 엉뚱한 대화들을 몇마디 나누고 나서는 슬그머니 그 사실을 털 어놓게 되는, 지금은 매우 상투적이 되어 버린 그 심리적 수법! 대개의 사춘기 소녀들이 그렇듯. "이거... 책에서 오려 낸 겁니다." 그는 예정된 절차처럼 내 눈앞으로 슬그머니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밀었다. "로베르트 비네라는 오스트리아 감독이 만든 '칼리가리 박사의 옷장'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도. 지금부터 7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 나를 충격하고 있어요." '지붕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각을 가진 세트 위에 축 늘어진 여인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검 은 실루엣의 남자, 굴뚝을 표현하고 있는 다섯 개의 치솟은 가느다란 나무막대. 선명하게 대비된 흑과 백. 늘어뜨려진, 땀에 젖은 듯한 여인의 머리카락. 더이상 발디딜 수 없는 곳에 멈추어진 두 사람. 검은 바탕에 모자이크처럼 새겨진 열 개의 하얀 창문. 굴뚝과 남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 여주기 위해 밝혀놓은 흰빛의 배경... 너무 위험스럽고, 절박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사진과 같은 영상에 의한 기록은 고집스럽게 당대를 보여줌으로써 전혀 새로운 시간 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어쩌면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발언인 것 같아요. 이래서 아마도 인류의 마 지막 세대를 영상의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죠. 이렇게 한 장의 사진이 70년 뒤의 인간 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영상이 문자보다는 훨씬 더 강렬하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 닐지 몰라요." 나는 그의 70년이라는 말을 주의깊게 들으며,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 전의 일을 생각했다. 어떤 것은 70년을 견뎌 70년 뒤의 인간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그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시간의 것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그것- 나는 극심한 배반감 같은 걸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그의 손에서 넘겨받은 스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별다른 느낌을 들게 하지는 않았다.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위해 영화에서도 연극의 경우와 같이 양식화된 세트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한 예라고 사진의 설명이 씌어 있었다. 내게도 그뿐이었다. "무슨 느낌이 없어요?" 그는 내 표정을 유심히 읽으며 물었다. "별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다소 실망한 듯한 허전한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지고 있 었다. "아,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내가 입을 떼자, 그는 무척 내 말에 기대를 가지는 듯 신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기록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체험으로부터가 아니라 어떤 장치를 통해 타인의 체험을 자신에게로 끌어온다는 것 말이죠. 그것이 강한 시대를, 아까 선생님의 표현 대로 말하자면 인류의 마지막 세대라는 그 영상의 세대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컨대 체험의 폭이 현저하게 좁아진 시대일수록 훨씬 더 충격적이고 말초적인 장치 들을 용의 주도하게 만들어 내는 거죠. 여기에 문자의 기록이란 영상 앞에서는 너무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즉 온갖 체험의 장치들을 현란하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쉽고 간편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인가, 뭐 그런 거죠. 제 설명이 너무 장황하죠?" 그는 내 말이 끝나자 무심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내 말에 다소 실망한 듯했다. 나 는 그에게 사진을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얼른 책상 서랍에다 밀어넣고는 손을 툭툭 털었다. 그 의 손목에 매달린 얇은 금줄의 시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네시를 가리키고 있는 그의 노란 시계 속의 시침과 분침이 그 흔들림으로 인해 해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걸 왜 책에서 떼냈습니까?" 내가 묻자 그는 고개만 틀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급작스럽게 돌린 탓인지 그의 눈동자가 출렁거리는 듯했다. "소설에 써 먹을려구요. 당신 말대로 타인의 체험을 용의주도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장치죠." 그는 빠르게 대답했다.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의 결막에서 막 붉은 실핏줄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데는 약 2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잘 만들어진 도자기에 가느다란 균열이 일어난 것 같았다. "아, 그 촬영 기사 얘기 말이죠?" 내가 약간 과장되게 몸을 우쭐하며 말하자 그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치 꼴보기 싫다 는 듯. "그런데 금방 사라질 것 같던 그 촬영 기사가 왜 그렇게 오래 가는 겁니까. 별로 재미있는 인 물 같지도 않던데 말입니다." 나는 순전히 짐작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고, 단지 그가 내게 해 주는 얘기들을 통해서 촬영 기사란 인물이 그의 연재 소설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전기 히터 위에서 폭폭 솟아오르는 수증기에다 손바닥을 대었다. 그것이 뜨거운 김인지 아니면 차가운 김인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미지근했다. 그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 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빠르게 그의 작업실 안을 훑 어대었다. "일종의 장치죠."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내 말에 대해 그가 대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의 작업실 한 귀퉁이에 놓인 이상하게 생긴 빨간 꽃의 꽃잎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다가 마침내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이었다. 나 는 그와 나 사이에 침묵이 존재하는 동안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 다. 만약 그와 내가 어떤 것이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면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영 원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우연히 그 이상하게 생긴 빨간 꽃잎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만을 나중에 보게 되었다면,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떨어졌다는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 도 없는, 혹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감응을 내가 일으켜 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만약 그랬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보아서 안다는 것은 너 무도 중요하다.'라고 나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 촬영 기사가 소설에서 빨리 사라지면 안 되겠느냐고 은근한 압력을 받고 있지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소리가 내 귀를 휙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 귓속으로 들어 와 공명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마치 바람처럼 스쳐가 버린 것에 대해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의 말소리는 나의 청각이 반응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의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확실히 모순이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왜 아직 그 촬영기사를 선생님의 소설 속에다 가두어 두고 있습니까?" 나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진 빨간 꽃잎에서 그의 얼굴로 옮겼다.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두어 둔다구요? 하하, 그거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그럼 가두어두는 게 아닙니까?" "당신은 영화배우를 영화 속에다 가두어 둡니까?" "어떤 경우에는요." "어떤 경우에요?" "꼭 필요할 때, 가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말입니다." "그게 언제인데요?" "글쎄요... 대답하기 곤란하군요." "하하하! 가두어 둔다? 하하하하!" 그는 호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한동안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런데 한 참 뒤 나도 모르게 내 입꼬리가 한족으로 찍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의 그런 모양을 보고 는, 막 그치려던 웃음을 다시 웃어대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따라 웃었다. 한참 동안 그와 나는 그런 식으로 웃었다. 그는 바퀴가 달린 안락의자를 책상에서 뒤로 빼 내면서 허리를 꺾어 가며 마구 웃어대었다. 그의 웃음은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웃음의 단락이 지워져 있었고, 한 단 락이 끝나면 또다른 형태의 웃음이 이어지곤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시간이 갈수록 화가 났다. 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기 시작한 붉은 기운이 혈관을 타고 얼굴쪽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 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입 닥쳐!'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 냈다. 신나게 달려오든 자동차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 았을 때 일어나는 끼익, 하는 날카로운 정지음이 들려 왔다.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이 내 소설 속의 모델이야." 그는 일그러뜨린 얼굴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만들어 내는 표정 하나하나가 내 소설 속에 그대로 박히지. 왜 아직 촬영 기사를 연재 소설에 가두어 두느냐고? 난 아직 당신을 관찰할 필요가 있고, 충분히 울궈먹지 못했거든. 당신의 표현은 적절했어. 가두어 둘 필요가 있을 때 가두어 둔다는 그 표현, 멋져!" 나는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그의 작업실 한 귀퉁이에 떨어진 빨간 꽃잎 쪽으 로 되돌아가 허리를 숙이고 그 꽃잎을 주워들었다. 그 동안에도 그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벌써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인간이라 면 어떤 소설가든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걸 알았지. 난 당신의 미망이 무엇인지, 그 늪으로부터 왜 빠져나오지 못하는지, 십년의 세월 동안 오히려 증폭되고 과 장되어 버린 그 호된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더 당신을 괴롭힐 것인지, 그런 것들 모두 재미나. 너 무 재미있어. 특히 그 애플파이 사건은 너무도 많은 걸 함축하고 있거든." 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왠지 그래야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상하게 생긴 빨간 꽃잎을 손에 든 채로 그의 말이 끝나 기를 기다렸다. "당신이 찍은 영화를 몇편 보았지. 다른 영화들과는 무척이나 다르더군. 당신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불란서 영화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당신이 찍은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전혀 다른 게 하나 있더군. 그걸 발견하고서 나는 내 연재소설에서 오랫동안 그 촬영 기사란 인물이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예감할 수 있었어." 나는 그의 말이 몹시 지루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작업실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말한 나의 영화와 다른 영화들이 꼭 하나 다른 게 있다는 그걸 듣고 싶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몹시 지루한 것이었다. "난 그 촬영 기사를 주인공으로 뒤바꾸어 놓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어. 물론 그렇게 된다면 지 금의 독자들은 신문을 더이상 읽지 않을 수도 있지. 우선 그 인물은 지독스럽게 재미없는 사람이 니까. 하지만 난 이제 지쳤어. 이렇게 재미난 인물을 왜 소설에만 끌어들이면 재미가 없어지는지, 그걸 캐내고 싶단 말이지. 당신은 나에게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 주었어. 전혀 새로운!... 하하하 하!" 나는 그가, 내가 무척이나 듣고 싶어하는 그것을 들려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내가 알고 싶어하는 그 이유란 것을 듣기도 전에 나는 빨간 꽃잎을 든 손을 그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입을 떼! 진술을 하란 말야!' 그는 마술에 거린 것처럼 다시 입을 떼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공포가 점령하고 있었다. 돌연 한 변화였다. 그는 전기 히터의 숫자를 높였다. 전기 히터에서는 기계가 서로 부딪쳐 일어나는 소 리가 들려 왔다. 김은 더욱 강력하게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떨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란 사람이 소설이 아닌 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워지지 않아. 난 끊임없이 인물을 만들어 내고 그들에게 새로운 성격을 씌워 왔지만, 단 한 번도 이 현실에 그런 사람이 존 재한다고 믿어 본 적이 없어. 그건 언제나 작가의 이상이거나 대리인이었을 뿐이지. 하지만 난 당 신을 만나고 나서 내가 한 작업들이 너무도 무기력하다는 걸 알아 버렸어. 당신이 하는 말, 하나 하나의 움직임이 나로 하여금 기록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었던 거야. 이제 난 완전히 당신 에게 빠져 버렸어..." 그는 그 뒤로도 무언가 더 말했었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별로 기억해 두 고 싶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잊어버렸다. 결국 내가 듣고 싶어했던, 다른 영화들과 내 영화가 구별되는 그 하나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는 매우 탈진한 듯 안락의자의 등받이 뒤로 고개를 푹 꺾어 버렸다. 나는 그의 앞으로 내밀어진 빨간 꽃잎을 든 내 손에 오피스텔 창문을 통해 들어온 황혼빛이 내려앉는 걸 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전기 히터는 지나치게 열을 받아 몸체 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그의 작업실을 나가기 위해 문 쪽으로 몸을 돌렸 다. 그때 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다시 오는 거지...?" 나는 문을 나서기 전에 손에 든 빨간 꽃잎을 문가에 놓인 우산꽂이 속에다 집어넣었다. 하늘하 늘 떨어지고 있는 저 꽃잎은 말라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안마 시술소에 가 본 적이 있소?" 그의 손이 책상 서랍을 닫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 영화 스틸 한 장이 그 서랍 속에 들어갔었 다는 걸 기억했다. 나는 느닷없이 그가 안마 시술소를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좀 멍 청해졌다. 그 말은 마치 창녀집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오는 것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했 고, 그런 것에 대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게 좋은지 몰랐다. 일테면 누군가가 나더러 창녀집 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두어 번 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가 본 적이 있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상황을 봐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 좋은 일인지 잘 알 수가 없는 것과 비슷했다. 반대로 그런 경험이 없는 경우에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 이다. 그런 데는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게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적당히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꾸며서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그건 정 말 곤란한 일일 것이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물어 왔다. "왜, 내 질문이 곤혹스럽소?" 나는 입꼬리를 찍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적당히 내 미소를 해석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 는 마음에서. 그런데 그는 나의 어줍잖은 미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다시 물었다. "가 본 적이 있소?" 그렇게 물어 왔기 때문에 이젠 어쩌는 수가 없었다. 솔직히 대답하는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오늘은 거기 가서 몸이나 풉시다. 어떻소?" 그의 말은 너무도 단순했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십시다, 라든가 심심한데 기원에 가서 바 둑이나 한판 둘까요, 따위의 가벼운 제의였다. 그것은 안마 시술소라는 말을 창녀집과 다르지 않 게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일종의 충격이었다. 안마 시술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곳의 여 자 종업원들 중 상당수가 성병 보유자이거나 그곳이 점점 퇴폐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몇 몇 신문 보도를 통해 접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것은 내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잘 알고 있는 듯 여기게 하였다. 그래서 그가, 그것도 40대 중반의 중견 소설가인 송 선생 같은 분이, 설 사 독신이기는 했어도, 그런 곳으로 가 보자는 제의를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놀 라웠던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내가 보아 온 그는, 그런 제의를 쉽게 할 만큼 퇴폐적이기도 육욕적 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금욕의 아름다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터득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 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독신 생활은 가톨릭 신부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내 눈 에는 비쳤었다. 그런데, 그가 내게 창녀집으로 가서 가볍게 몸이나 풀지 않겠느냐,라는 제의와 조 금도 달리 느껴지지 않는 제의를 해 온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밤의 카우보이'라는 미국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 중에서도, 존 보이트가 돈이 궁해 어느 늙은 여인의 정부 노릇을 할까말까 고심하는 장면과 그의 친구인 더스틴 호프만 이 역시 돈이 궁해 가짜 맹인으로 분장해 호텔 여자 투숙객의 몸을 주물러 주며 비참해 하는 장 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앙각으로 찍힌 흑백 사진 같은 뉴욕 거리의 검은 마천루들, 공상 과학 영 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 안에서 촌뜨기 카우보이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남색 청년, 가스가 끊 긴 더러운 아파트... 그런 장면들이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못한 침대 시트 위에서 끊임없이 일어 나는 하얀 먼지가루처럼 떠올라 왔다. 그 먼지가루들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의 양이 많아질수록 더욱 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왜곡된 앙각의 화면, 그 거짓 같은 인간의 내면, 예술 의 세계... "그럽시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럼 안마 시술소로 갑시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빠르게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끊임없이 살피고 있는 그의 날카로운 눈과 그 흰 결막에 막 생기기 시작 하는 빨간 실핏줄 한가닥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오." 그는 휘파람처럼 말을 뱉으며 책상 서랍을 열어 열쇠 뭉치를 꺼냈다. 그와 나는 함께 그의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가 모는 깨끗한 남색 프라이드에 가볍게 타고서 복잡한 시내를 아무런 느낌 없이 구경 하며 지나갔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가 틀어 놓은 방송에서는, 연신 오늘 첫눈이 내릴는지도 모르겠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서둘러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것이 라는 다소 호들갑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잔뜩 찌푸린 회색의 하늘빛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차에 타고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그가 입을 뗀 것은, 막 희뿌연 작은 가루들이 차의 앞유리에 서너 개씩 달라붙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과연 첫눈이 내릴 모양이었다. "무척 조용하고 깨끗한 집이죠." 나는 잠자코 있었다. 담배라도 한 대쯤 피우고 싶었다. 차가 시청 앞을 지날 때, 나는 덕수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투깃을 세운 남녀가 두어 쌍 담벽을 따라 걷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 두 어 쌍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 사람씩이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애인들에게 전화를 걸었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곤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부끄러웠다. "가 보면 여느 시술소와는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될 거요. 아차! 아직 시술소에 가 보지 못했다고 그랬죠?" 나는 앞유리에 달라붙기 시작한 흰 눈가루를 헤아리고 있었다. 아직 그것들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드문드문 내리고 있었다. 차는 국립 박물관 앞을 돌아 안국동 쪽으로 달려갔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진짜 맹인들이 안마를 하는 곳이죠. 안마 시술소에 관한 자격증들을 정 식으로 갖춘 곳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거긴 시술소가 밀집되어 있는곳이 아니라 주택 지역에 있죠." 더이상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절 왜 거기에 데리고 가려는 겁니까?" 처음부터 그게 궁금했었다. "데리고 간다고 그랬소?" "예." "물론 데리고 가는 거죠. 하지만 내가 미리 의향을 물었지요. 그렇지 않소?" "그럼 다시 묻지요." "어디 물어 보시오." "우린 지금 왜 거기에 가는 겁니까?" "왜, 기분이 좋지 않소?" "조금은... 그래요. 마치..." 나는, 마치 창녀집으로 가는 것같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군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치 뭐요?" "아닙니다. 그저, 별로 기분이 좋질 않군요." "왜 기분이 좋질 않소? 단순히 몸을 풀기 위해 목욕탕 정도 가는 걸로 생각할 수는 없소?" "그렇게 잘 안 되는군요." 나는 착잡하게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그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눈발이 제법 옹골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혜화동을 지나 차들로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눈이 내리기 시작한 탓 인 것 같았다. 차는 완연히 속력을 줄이며 천천히 도로를 빠져나갔다. 틀어 놓은 라디오는, 서울 시내 어디가 막히고, 막힐 것이고, 뚫리고, 뚫릴 것인지, 아주 상세히 말해 주고 있었다. 앞유리의 윈도우 브러시는 일정하게 눈발을 닦아 내었다. 유리를 닦을 때마다 삐익삐익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 힘겨운 소리와는 달리 유리는 말끔하게 닦여지곤 했다. 나는 더이상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차 안은 몹시 더웠다. 그는 갈색의 골덴 남방을 팔뚝까지 걷어올리고 있어서 그런지 덥지 않은 듯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외투를 고집스럽게 입고 있었다. '윗도리 벗어, 빨리! 새캬, 벗으라구!' "이것도 소설 쓰는 데 필요한 겁니까?"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차문에 붙은 포켓에서 걸레를 꺼내 앞유 리를 닦았다. 내 목소리는 이내 차 안의 열기 속으로 녹아 내렸다. 하얀 눈가루들이 아름답게 떨 어지고 있었다. 그는 왼쪽의 방향 전환등을 켜고는 빠르게 앞차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노련한 솜씨였다. 반대편 차선을 달리는 동안 차의 속력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깎지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차가 제대로 차선을 찾아들면서 속력이 줄었다. 눈이 내리면서 녹은 도로가 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윈도우 브러시는 열심히 유리를 닦아 내었다. 그럴 때마다 여전히 삐익삐 익거리는 소리는 일정하게 들려 왔다. "촬영 기사가 안마 시술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마 그 문장은 이렇게 시작될 겁니다. 이럴 땐 아주 담백한 문장이 좋아요. 그래야 독자들은 그 뒤에 일어날 사건에 부담 없이 빨려들 수 있으 니까." 그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만들어 내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눈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그 시술소에는 맹인들이, 진짜 눈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만이 있다... 다음 문장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어때요?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는 외워 둔 대사를 단순히 읊조리듯 말했다. 차는 눈발을 헤치며 고가도로를 지나갔다. 한참 뒤에 더러운 천변 하나가 나타났다. 도로는 비 교적 한산했다. 차는 물기를 머금어 시커멓게 변한 도로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다시 한참을 달려 나갔을 때, 꽤 넓은 다리가 나타났고, 그 너머로 수없이 들어찬 하얀 고층아파트들이 보였다. "이제 다 왔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옆눈으로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소리 없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면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로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기분이 좋질 않았다. "아, 참. 지금 가는 그곳, 이름이 좋아요. 계림... 계수나무 계, 수풀 림. 어때요? 운치 있잖아?" 그의 목소리에 까닭 모를 흥분이 일고 있었다. 눈발은 조금씩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는 지난 늦은 가을 이후로 몇번 무악재를 걸어서 넘었다. "늦은 가을에 버스를 타고 무악재를 넘으면 왠지 눈물이 났어요."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간혹 그 말을 해 주었던 여배우를 생각했다. 그 여자의 생각이 왜 났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생각이란 꼭 무슨 일어날 이유가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건 아니 니까. 하여튼 그 여자의 그 말이 생각날 때엔, 별달리 갈 곳도 없으면서 집을 나와 무악재를 걸어 서 넘곤 했었다. 그 무악재를 걸어서 넘는 동안 나는 지극히 많은 생각들을 했다. 특히 '그' 5월의 일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생각나곤 했다. 내가 무악재를 걸어서 넘으려고 생각하는 때는 공교롭게 도 오후였다. 그래서 처음 그곳을 걸어서 넘었던, 중국의 노란 먼지바람이 일던 그 봄의 무악재를 긴 플라스틱 빗자루로 쓸고 지나가던 청소원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노인은 여전히 고동색 조끼 파카를 옷 위에다 걸치고 있었다. 차들은 여전히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늦은 가을이 가고 겨 울이 찾아와 빈번하게 눈을 뿌렸지만 청소원 노인의 고동색 조끼 파카가 그대로였듯 도로의 차들 도 여전히 빼곡하게 밀리고 있었다. 그런 무악재를 지나는 동안 나는 단 한 사람의 행인도 만나 지 못했다. 내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 노인과 차뿐이었다. 왠일인지 무악재에 서 있는 나무들은 언제나 늦은 가을처럼 무성한 낙엽들만을 뿌리고 있었다. 눈이 내릴 때에도 낙엽은 수북히 떨어 지고 있거나, 이미 떨어져 보도 블럭 위를 구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왠지 나는 그것이 무척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너 요즘 어딜 그렇게 다니냐?" "으응... 나?" "그래, 너." "어딜 좀 다니지." "글쎄, 어딜 다니냐고? 충무로엔 얼씬도 안 한다던데." "그래, 맞아. 난 거기에 안 가." "너 지난번 상 받고 값 올리려고 그런다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 이 바닥에서 한번 눈 밖에 나면 골치 아픈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 알어." "알면서 그래? 그건 그렇고 어딜 그렇게 뻔질나게 다니는 거냐?" "으응... 그저, 다녀." "참 답답하긴... 전화만 아니면 한 대 쥐어박을까 보다." "화내지 마." "송 선생 오피스텔 다니는 거냐? 그 사람 아주 널 고용한 거 아냐? 요즘 그 사람 연재 보면 촬 영 기사라는 인물을 갖고 놀더구만. 세상을 아예 그 인물이 조종하는 대로 맡겨 놓더군." "난, 그거 안 봐. 안 봐서 몰라." "언제 한번 나와. 미국 로케이션만으로 영화 하나 만들려고 생각하는 감독이 있는데, 그치가 너 좀 만났으면 하더라." "안 돼, 너도 알듯이 나 이 땅 벗어날 수 없잖아." "아, 참... 그렇지..." 나는 늦은 가을에 무악재를 버스로 넘으면 눈물이 난다던 그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영 화관으로 가곤 했다. 그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가는 날에는 언제나 걸어서 무악재를 넘었 다. 그 여자가 출연하는 영화는 대부분 조잡한 성애물이었으므로 영화를 보는 동안 그다지 신경 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클로즈업이 지나치게 많은 영화들은 벗은 배우들의 살의 색깔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조명이 너무 밝을 때의 살의 색깔은 하얗다 못해 푸르렀다. 서대문 쪽에 있는 어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같은 영화인데도 살의 빛깔이 지나치게 똥색을 띄고 있기도 했다.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어떤 때는 교성이 아우성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나와 버렸다. 나는 그 여배우의 눈을 보고 싶었다. 늦은 가을... 버스를 타고 무악재를 넘는 그녀의 '눈'을...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나는 벌써 십년 동안 제대로 된 '눈'을 보지 못했으므로. 폭설이 내리는 날 나는 '계림'을 찾았다. 첫눈이 내리던 날 송 선생과 함께 온 이후로 꼭 세번째였다. 나는 오전에 집을 나와서 청량리 의 어떤 극장 앞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은 뒤 영화 한 편을 보고 택시를 탔었다. 애초에 나는 청 량리역 부근에서 미술사를 하는 지인 한 사람을 찾아보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가게에 없 었다. 임시로 가게를 봐 주는 사람에게서 그가 극장으로 포스터를 얻으러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주변의 극장 여러 군데에 영화 간판을 그려 주는 일도 겸하고 있었다. 그에게 간판을 맡기 는 극장이 무려 열한 군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 만한 곳이 별반 없는 그의 그림 이었지만 극장 간판을 그려주고 벌어들이는 그의 수입이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언젠 가 나는 그와 술을 한잔 마시면서 궁금한 걸 물어 본 적이 있었다. "형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더군요. 우선은 그 색감인데 말이죠." "그렇죠?" 그는 내 말에 조금도 화를 내는 기색 없이 빙그레 웃으며 오히려 내게 수긍하는 뜻으로 되물었 다. "어디서 배운 겁니까?" 나는 다소 완곡하게 물었다. 하마터면 그의 일그러진 한쪽 눈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하고 물 을 뻔했다. 그의 오른쪽 눈은 마치 화상을 입은 듯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배우긴요... 사실은 전 색약입니다." "색약이라구요? 색약이 뭡니까?" "색맹보다는 좀 덜한, 말하자면 색을 구별하는 데 좀 약하다 이 말씀이죠." 그럴 듯한 얘기였다. 그가 그린 극장 간판들은 원래 포스터들보다 훨씬 밝거나 어두웠다. 햇볕 아래서 보는 것처럼 지나치게 밝든가, 아니면 달빛 아래 보는 것처럼 지나치게 어두워 보이는 게 그의 그림의 특징이었다. 아마도 그런 색다름이 극장 주인들로 하여금 그에게 계속 간판을 맡기 게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또다른 하나의 '눈'을 발견한 셈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의 이야기를 송 선생에게 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송 선생의 소설에 그의 얘기가 실렸다. 물론 나는 송 선생에게서 그의 얘기를 소설에 써 먹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소설에는 촬영 기사의 친구인 어떤 화가로 그가 바뀌 어 있었다.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송 선생에게 말하지 않은 그에 관한 어떤 일 하나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랬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었다. "소피 마르소 있잖아요. 그 여자를 그릴 때가 난 제일 좋아요. 첫사랑의 여자를 생각나게 한단 말이죠. 헌데 이쪽 동네 극장에서 하는 영화란 게 맨탕 훌렁 벗고 설치는 거라 그야말로 첫사랑 같이 아쉽더라구요." 그의 가게 한쪽 벽에 고이 붙여져 있는 백치 같은 그 불란서 여배우의 사진은 그의 마음을 충 분히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건 지독스럽게 가벼운 연정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그를 찾아 간 내가, 셔터가 반쯤 내려진 그의 가게 안에서 그 백치 같은 불란서 여배우의 사진을 바라보며 수음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우연히 보았을 때,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었다. 돌아오던 버스의 어두운 차창에는 그의 일그러진 한쪽 눈이 오래도록 매달려 있었다. 그에게 그의 말처럼 첫사랑이 있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일그러진 한쪽 눈을 가지고 과연 그런 사랑을 앞으로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그것 역시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도 역시 중요한 것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런 것 하나쯤을 그 소리 없는 사각의 틀 속에 가두어 두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개새기! 눈을 뽑아 버리겠어! 아니면 태워 버릴까! 너 임마, 미술 전공이라구? 그럼 손모가 지를 분질러 줄까! 한번만 더 도망을 쳐 봐, 그냥 쏴 버 릴 테 니 까!' "민소영 씨 나왔습니까?" 나는 유리문으로 막아 놓은 안마 시술소 입구에 얼굴을 디밀며 물었다. 출입문 밖에는 강렬한 초록색의 불빛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네온 사인이었다. 유리문 안의 주인 여자는 앞에 놓인 전화 교환대처럼 생긴 버튼이 많이 달린 박스 속의 스위치 하나를 딸각, 하고 올렸다. 먼 곳에서 다소 긴 부저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그 소리와 여자 주인의 스위치 올리는 것이 어떤 관련이 있는 거 라고 생각했다. "이백구 호로 가 계세요. 소영이 금방 갈 거예요." 여자는 친절하게 내게 말했다. 나는 고무나무로 가득 채워진 입구를 빙 돌아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계단은 언제나처럼 어두웠다. 이층으로 꺾이는 곳에 못 보던 거울 하나가 걸 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울의 아래쪽에는 하얀 페인트 글씨가 길게 적혀 있었다. 제16회 q맹아 학교 동창회 일동. 나는 불쑥 웃음이 솟아났다. 그건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닌가. 맹아학교 동창들 의 거울이라... 그러다가 나는 이내 웃음을 멈추었다. 그건 섬뜩한 일이었다. 그건 분명 거짓일 것 이라는, 아니면 적어도 그건 맹인들을 우롱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이 안마 시술소 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걸어두기 위한 거라면, 무엇 때문에 이런 치졸한 위장을 해야만 했을 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이내 내게서 부정당했다.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 는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층의 오른쪽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우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몇조각의 눈발과 함께 방 안으로 뛰쳐들고 있었다. 천변의 어두워진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이 하얀 눈발들을 가르며 주 욱주욱 그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내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 아 맞은편 벽에 걸린 커다란 포스터와 노란 수술이 달린 침대 커버와 빨간 바둑판 무늬의 벽지를 천천히 둘러보고 확인했다. 얼마 있지 않아 조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렸고, 내가 들어오시죠, 라고 말하자 민소영이 들어왔 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입을 눈부시게 하얀 나이트 가운과 역시 내가 마실 몇개의 드링크, 그리 고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송 선생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많은 놀라운 것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바로 그 꽃이었다. 그 꽃이 특별한 종류의 것이라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느 꽃집에서 아무 때나 쉽게 살 수 있는 흔한 빨간 장미였다. 하지만 그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여 자였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맹인이었다는 사실과 겹쳐지면서 그 꽃은 내게 어떤 아득함 같은 것 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미 말한 바 대로 나는 지금 세번째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세 번 다 똑같이 놀라고 있는 셈이었다. 역시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빨간 장미 한 송이였다. "민소영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과 그녀의 손에 들린 그 장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접니다." 내가 말하자 그녀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 "그랬군요. 편안히 앉으세요, 여기." 나는 그녀를 위해 소파의 한쪽을 비웠다. 그녀는 마치 눈앞을 훤히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사뿐 히 걸어서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가운과 드링크를 받아 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 고 장미는 가운 위에 비스듬히 뉘어 놓았다. 눈부시게 흰 나이트 가운 위에 길게 누운 장미는 무 척 선정적이었다. "약속을 지켰군요, 선생님." 민소영이 예의 그 가벼운 미소를 얼굴에 띠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내 쪽에서 정확히 90도의 각도를 유지한 채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맞은편 벽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어떻게 알았어요?" "일기 예보를 들으면 금방 알 수가 있죠." "아..." 두번째 들렀을 때 나는 눈이 내리는 날 다시 방문하겠다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녀는 나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안마는 받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는 얇은 가운의 앞부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내게서 직각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가 눈을 몇번 껌벅거렸다. "전, 처음부터 여기에 안마를 받으러 왔던 게 아니었어요." "그럼 무엇 때문이었어요?" "뭐랄까... 그저 누굴 따라온 거죠." "송 선생님을 말이죠?" "민소영 씬 송 선생님을 잘 아시나요?" 그녀는 내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몇번 안마를 해드린 적이 있었어요. 수고비도 많이 주시고, 여기선 아주 인기가 많은 분 이시죠." 나는 송 선생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 냈다. "제가 처음 여기 온 이후로 송 선생도 오셨던가요?" "두어 번 오셨을 거예요." 나는 갑자기 불쾌한 감정이 솟구치는 걸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런 나의 감정을 추스려 주는 듯 그녀가 불쑥 말했다. "눈이 많이 왔나요?" "아주 많이." 나는 다시 그녀에게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내게 하나의 경이였다. 눈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경이로울 수 있는 존재였다. 더구나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아 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지 않아요?" "보지 못한다구요? 제가요?" "그럼 볼 수 있나요?" "..." 민소영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 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과 내 눈 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는 섬뜩했다. 뭐랄까, 그것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 해 느끼는 섬뜩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 은, 곱게 빗은 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목덜미로부터 손 한 뼘 정도 위에 붙여진 아름다운 액 세서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눈부시었고, 과분해 보였지만, 어쨌든 아무런 소용이 없 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그녀에게서 눈이란,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 치 장을 위해 두르고 붙여대는 액세서리의 의미와는 매우 달랐다. "선생님께서 두 번째 여기를 다녀가신 후에 송 선생님이 들르셔서 제게 묻더군요." "무얼?" "선생님이 안마를 받으셨냐구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제가 뭐라고 말했겠어요? 한번 맞혀 보세요." 민소영은 다시 고개를 맞은편 벽 쪽으로 돌렸다. 나는 소파 깊숙이 묻었던 허리를 빼내어 몸을 뻣뻣하게 세웠다. "지금은 내기 같은 걸 하고 싶지 않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민소영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일종의 비웃음이라고 나 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비단 눈이 내리는 날 다시 오겠다고 한 지난번의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알고 싶었던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송 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이제 막 그런 얘기를 꺼내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제의한 넘겨짚기 따위에 관심을 쏟을 의향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이런 다소 성급한 반응을 보인 데 대해 비웃는다 해도 화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다 리기로 했다.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니 민소영이란 여자가 송 선생의 계락 에 대해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때까지. 커튼이 젖혀진 창문으로 거센 눈발이 날아와 부딪치는 소리가 안온하게 들려왔다.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민소영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송 선생이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나는 다소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그 비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눈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웃음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을 것 없었다. "선생님한테서 직접 듣고 싶어요." "좋아요, 말 못한 이유도 없지. 다만,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소영의 그 액세서리가 달린 하얀 얼굴이 내 쪽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맞은편 벽을 향해.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 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도 없는 사람에게서 눈을 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비 겁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민소영이란 맹인 여자의 눈이 그 어떤 정 상적인 사람의 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농염하기까지 하다는 어떤 기미를 내가 눈치챈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아니 그녀의 그 눈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손 에 들려 있던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내게 가져다 준 충격은 비할 바도 안 되는 어떤 충격을 내가 받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분명 살아 있는 자의, 단지 시각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 아닌, 살아서 퍼득거리는 눈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내가 그 녀에게서 안마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눈빛을 내가 보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눈'이었 다. 한 곳을 향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맹렬히 안력을 집중시키는 집요한 눈! 그런 눈을 가진 여 자에게, 설사 그녀가 안마 시술이라는 것에 대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내 몸을 맡겨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난 영화를 찍는 사람이오. 영화 촬영 기사라고 부르지." 나는 다소 힘없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게 뭔지?"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녀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더이상 그녀의 얼굴에서, 아니 그 빛나는 눈동자에서 내 시선을 벗어나게 두지 않았다. 나는 자세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싶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맹인이 아니라는 것, 그 리고 그녀는 충분히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마치 주술처럼 나는 그 사실을 마음에 찔러넣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 자는 너무도 정상적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맹인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기 위해 지나치게 내가 신경 을 쓴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눈동자는 다른 정상적 인 사람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이 민소영이란 여자는 맹인인가, 하는. "당신의 눈은 아름답군요, 무척이나."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제게 더 많은 봉사료를 주더군요. 처음엔 검은 안경을 썼지만, 차츰 안경을 쓰지 않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눈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죠. 더구나 이 눈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사람들의 몸을 주물러 주고 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아예 안경을 던져 버렸죠." "하지만 당신의 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과는 다를 겁니다." 그녀는 몇번 눈을 껌벅거렸다. 껌벅거릴 때마다 그녀의 눈꺼풀 속에 잠겼다가 나타나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어떤 훌륭한 보석보다 훨씬 빛났다. "물론 전 선생님이 제 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영화를 찍는 사람이기도 하구요."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겠소?" "물론이죠." "어떻게? 내가 무슨 일을 하는데?"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과 나무, 혹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하늘 눈보라... 그런걸 찍는 사람이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살아 움직이는 그대로 찍는 사람... 아닌가요?"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민소영의 말은 너무도 섬뜩한 것이었다.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저런 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자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니... 나 는 천천히 두 손을 그녀의 얼굴로 뻗었다.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살갗은 부드러웠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만 일어서야 한다는, 뭔 가 강력한 제지의 손길을 느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이 분명했지만, 마치 누군가가 이런 나를 훔쳐보고 있다가 불쑥 내민 듯한, 그런 강력한 제지의 손길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그것 을 뿌리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내가 놓여 있었다. "눈이 내리면 다시 오겠소."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일종의 허망한 약속이었다. 일테면 빌미 같은 것이었다. 깨뜨린다 해도 누굴 질책할 수 없는 약속, 그건 이미 약속이 아니었다. 하지 만 나는 그런 빌미라도 남겨두지 않고서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나를 훔쳐 보고 있는 거라면 더욱, 그리고 훔쳐보는 눈이 다름 아닌 송 선생의 탐색의 눈이라 할지라도 어 쩔 수 없었다. "그때는 선생님의 눈을 얘기해 주세요. 그러면 전 선생님께 안마를 해 드리겠어요. 전, 눈보다 훨씬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는 걸 선생님께 알게 해 주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당신의 눈이 아름답소... 어쩌면 그건 눈이 아닌지도 모르지... 아니, 그건 분명하오. 나 는 당신의 눈만을 찍어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소. 제목을 '눈'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소..." 커튼이 젖혀진 창문으로 초록빛 네온 사인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인간의 얼굴에서 눈을 빼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극도의 후각과 극도의 청각, 극도의 촉 각만으로 살아가는 어떤 동물을 상정한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런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상상은, 나아가 더없이 비극적인 상상을 하는 나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일까? 맹인을 생각한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시각의 세계를 전혀 시각으로 감지하지 못하 는, 극도의 후각과 극도의 청각, 극도의 촉각만으로 감지할 수밖에 없는 이 맹인의 모습이란- 그 것을 몇사람, 단지 앞을 보지 못하는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이런 맹인이라 면, 과연 우리들의 세계란 무엇일까? 점자조차 존재할 수 없는, 기억도, 관념도, 모양과 선도 이미 보이지 않음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세계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계림'을 세번째 다녀온 지 보름 정도 지난 어느 날 거리에서 신문을 샀다. 가판대에는 십여 개의 신문과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가판대에 비스듬히 꽂힌 k신문 을 골랐다. 그 신문에 송 선생의 연재소설이 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문을 골라 신문값으로 백 오십원을 지불하였을 때만 해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신문이 우리나라에서 발행 부수가 제 일 많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내 손이 그걸 골라잡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반으로 접힌 그 신문 을 펼쳐 제 1면의 아래쪽에 다소 굵은 테두리 속에 담겨진 사고가 눈에 띄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 소 그 사실을 기억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작가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동안 12면에 연재되고 있던 송 아무개씨의 소설 '검은 5월'은 중 도에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독자 제위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시의에 적절하지도 못한 소재를 택한 송 작가의 잘못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을 미리 간파하지 못한 채 벌써 1년 반동안 연재를 계 속해 온 저희 신문사의 과오를 심각히 반성하는 바입니다. 그 동안 독자 제위께서 전화로, 혹은 서신으로 질책하고 나무랐던 것을 흔연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점도 지면을 빌려 사과를 드리는 바 입니다. 이에 각성하는 의미로, 신년을 맞이하여 인기 작가 최 아무개씨의 흥미진진한 추리성 강 한 소설 '사랑을 버린 여자'를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삽화를 담당해 주실 화가는, 지난 20여 년 간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만을 꾸준히 그려 오신 박 아무개 화백이 되겠습니다...' 나는 신문을 펼쳐든 채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회색의 하늘은 지상으로 내려앉을 듯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곧 눈발이 비칠 것 같았다. 나는 길 건너편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우선 전화라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송 선생에게였다. 통화는 할 수 없었다. 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걸라는 안내만이 수화기속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집어탔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려는 생각도 했지만, 우선 송 선 생의 작업실이 있는 마포의 오피스텔로 가 보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 다. 오피스텔로 송 선생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이미 그의 방은 어떤 사무실로 바뀌어 있었다. 나 는 오피스텔 로비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 선생?" "그래, 그분이 연재를 그만두셨다고 신문에서 봤어. 어떻게 된 거지?" "넌 그 동안 만나지 못했었니?" "응, 난 죽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벌써 오래 전이야. 연재를 더이상 못하겠다고 그러셨던 게." "왜?" "역부족이었지 뭐." "역부족? 그게 무슨 소리야?" "어쩌면 너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 때문이라구?" "하지만 신경쓸 건 없어."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없니?" "나도 자세한 건 알 수 없지.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했을 뿐이니까." "송 선생은 지금 어디 계시니?" "그건 몰라. 난 오피스텔에서 나오셨다는 것조차 몰랐어."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다는 건 뭐야?" "몇주일 전에 우연히 만났었는데 그러시더라. 더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말야. 그래 내가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흘러가는 말처럼, 눈이 잘 안 보인다고만 하시더라구." "눈?" "그래, 눈. 허허... 그 나이에 벌써 노안이 드셨나? 하지만 안경을 끼면 되잖아. 그러고 보면 그 분이 말한 눈이란 게 단순히 시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란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도무지 짐 작할 수있어야지." "그것뿐이야?" "그리고..." "그리고 뭐?" "밑도끝도없이...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데..." "뭘?" "자네가 찍은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다시 보면 눈이 밝아질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친구와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오피스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집어 탔다. 그리곤 곧장 k신문 사로 갔다. 그날부터 사흘 동안 나는, 일년 반 동안 신문에 연재된 송 선생의 소설을 k신문사의 자료실에 서 구해 읽었다. '검은 5월'... 짐작한 대로 그 5월은, 1980년의 5월이었다. 지난 봄부터, 그러니까 친구의 소개로 내가 송 선생과 만났던 그즈음부터, 그의 소설에는 촬영 기사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소설의 전개로 보아, 그 촬영 기사란 인물의 등장은 전혀 앞뒤 가 맞지 않았다. 단지 그해의 5월을 기억하고 그 기억들로부터 도망치고, 끊임없이 괴로워한, 그 러나 그 기억과 기억으로부터 도망질과 끊임없는 괴로움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포장된 흔적으로 잠아 있을 뿐이었다. 그 촬영 기사라는 인물은 마치 끊임없이 흉몽을 따라다니는 몽마처럼 그의 소설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촬영 기사라는 인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고 그 인물과 얽히고 설키는 온갖 사건과 살마리들로 그의 연재소설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촬영 기사 라는 인물이 안마 시술소를 찾아 가고, 안마 시술소의 여자 종업원과 나누는 얘기들이 아주 상세 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와 민소영이라는 맹인 여자 사이에 일어났던 일과 전혀 일 치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설 속 의 촬영 기사와 안마 시술소의 그 여자가 세번째 만나 나누는 대화들을 끝으로 송 선생의 연재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신문사 자료실에서 소설을 읽으며 보낸 지난 사흘 동안 내 서른 다섯 해의 생애를 모조리 살아 버린 것 같은, 아주 핵심적으로 살아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삶이 너무 도 단순하고 짧다는 데서 오는 허탈만을 내게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욕이었다. 다른 이의 삶에 관여하는 태도에 대한 모욕이었고, 무엇보다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지독스런 모욕이었다. 끊임없이 사각의 틀 속에 삶을 집어넣었던 나 자신에 대한 모 욕이었다. 사각의 틀 속의 고요함-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된, 오직 '눈'만으로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세계에 나를 가두어 두었다는 데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랜 습관처럼 k신문사의 정문을 나와 커피숍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다시 사각의 틀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있었다. 그것은, 그 행동의 주체는 결코 내가 아니었다. 나의 오랜 습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침묵하는 것은, 그리고 내 '눈'을 위해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송 선생이 나를 위해 기록한, 아니 무엇보다 송 선생 자신을 위해 송 선생이 느끼 고 괴로워하고 살고 싶었던 그해 5월의 창가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새벽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새벽이 가면 다시 아침이었다. 아침은, 적어 도 그날의 아침은 밤의 공포보다 훨씬 크고 아득한 것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도회의 곳곳에 번쩍 이던 불빛과 총소리를 기억했다.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더 큰 두려움이 있으리라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은 골목으로부터 우르르 몰려나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증폭되기 시작했다. 나는 두꺼운 검정 모직 커튼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누군가가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달아는 사람의 그림자를 좇으며 몇명의 그림자가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무의식적으로 눌러지고 있었다. 찰칵, 찰칵... 내 귀에는 어느새 그 소리만이 들려 왔을 뿐이었다. 그 소리들은 점점 더 커져갔다. 거친 그림자의 움직임이 앞선 그림자를 덮치고 누르는 것을, 뒤이어 무언가가 번쩍이고, 소리없이 무너지는 그림자를, 나 는, 아니 내 '눈'은 기억하기 시작했다. 아침이었다. 어두움이 물러나가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것 은 더이상 물리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의 아침이었다. 내 '눈'만이 기억할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암흑... 그날 나는 내 일기장에다 썼다. 단 한 줄로. '검은 5월'이라고.' 커피를 마시며 나는 사각의 틀 하나를 만들고, 지워 냈다. 커피숍의 두꺼운 갈색 창 너머로 신 문사의 위풍당당한 건물이 바라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사각의 틀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 역시 송 선생의 소설 속에 이미 하나의 틀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여전히 소리 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각만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암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서른세 장의 사진을 뽑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심했다. 결국 나는 신문사로 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k신문사를 택했다. 그것이 가장 믿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체국을 다녀온 뒤 줄곧 창가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 내가, 아니, 내 '눈'이 기억하고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골목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에 대한 아무런 검증도,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내가 찍은 사진들 앞에 가 앉아 있었다. 그곳은 무서웠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눈앞 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졌다.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다. 알겠죠? 나는 그 친절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송 선생이 전화를 주셨더라. 네 안부를 묻더군. 그리고 네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주 소를 가르쳐 달라고 하시더라." "어디 계신다고 하더냐?" "건 몰라. 말씀하지 않더군. 어때, 요즘?" "늘 그래." "다시 일해야지." "일?" "해야지. 넌 누구보다 눈이 밝으니까." "눈?" "그래, 눈." "모르겠어... 송 선생을 만나고 싶어." "만나서 뭘 하려고?" "참 이상하지. 난 그분한테 많은 것을 털어놓지 못했거든. 그런데도 그 분은 많은 것을 썼어. 내 얘기를. 기분 나쁠 정도로. 그런데 막상 그분이 사라지고 나니까 내가 막막해." "송 선생 만나면 털어놓을 게 그렇게도 많아?"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막막해." "..." "뭐랄까... 이제 내 지난날은 모조리 없어지게 되었구나, 하는 막막함이랄까... 더 막막한 건, 앞 으로의 삶도 그럴지 모른다는 것이야." "그래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냐?" "일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그럴까...?" "모르겠어. 그저 두려워... 고작 십년인데... 어떤 이들은 너무도 생생해서 잊혀지기에는 너무 짧 은 시간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굳이 잊을 필요도 없는 시간들이 지." "송 선생이 그러더군. 두 개의 눈을 가지기에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고." "두 개의 눈?" "그래. 그게 뭘까?" "..."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무악재를 넘고 있었다. 나는 서대문의 어떤 극장에서 내가 아는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청량리로 와 미술사를 하는 지인과 점심을 먹었다. 그의 일그러진 눈과 도로를 질펀하게 덮고 있는 눈발을 한참 동안 번갈아 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계림'으로 갔다. 초록빛 네온 사인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무나무도 여전했다. 나는 입구의 유리문 안으로 들 여다보며 물었다. "민소영 씨 있습니까?" 유리문 안의 여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되물었다. "소영이?" "녜." "걘 이제 여기 나오지 않아요." "왜요?" "걘 무자격자였거든요." 여자의 말이 무척 낯설었다. 특히 그 무자격자라는 말이 이물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무슨 얘기죠?" "아시다시피 여긴 맹인들만 종업원으로 일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요?" "헌데 소용이 그앤 멀쩡한 아이였다 이 말이죠." 그뿐이었다. 나는 안마 시술소를 빠져나왔다. 어둠이 눈발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좀은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작품을 선정하고 나서 현대문학사로부터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설선집의 수록작품을 선정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은 지난 7월 중순 무렵이었고, 우리가 처음으로 모인 것은 지난 8월 9일이었다. 출판사측 의 기획 의도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작품선정의 기준과 작품 편수였다. 현대문학사측에서 제시한 선정 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가 작품성이었고, 그 다음이 문학 적 새로움의 성취 여부였다. 어찌 보면 '작품성'이란 용어만큼 모호하고 불명료한 것은 없지만, 그 것은 실제로 작품을 일고 고르는 실제 작업에서는 언제나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이어서 용어 자체의 모호함은 문제삼을 것이 못 되었다. '문학적 새로움의 성취 여부'에 대해서는 현대문학사측의 보충설명이 있었는데, 여기서 '새로움'은 내용과 형식면에서의 새로운 소설적 시 도를 의미하였다. 그 다음, 선정할 작품 편수가 문제였는데, 이번 선정은 문학상 수상작을 뽑는 경우처럼 한 작품 을 뽑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현대문학사측의 제안은, 이번 기획이 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가운데서 우리 소설문단의 문학적 성과를 대표하는 '좋은 소설'을 선정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것이니만큼 단행본 한 권 분량으로 꾸밀 수 있는 정도의 편수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사정상 충분히 납득할 만한 제안이었으므로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였 다. 이렇게 하여 구체적인 선정 작업에 들어간 우리는 현대문학사측에서 제공한 기초 자료와 선정 기준을 근거로 하여 우선 19편의 단편소설과 5편의 중편소설을 선정 후보작으로 정하였다. 이들 작품의 제목과 작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가나다 순) 공지영- '무엇을 할 것인가' ('문예중앙' 1993년 봄) 구효서-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작가세계' 1993년 가을) 김국태- '4 19앓이' ('문학사상' 1993년 4월) 김남일- '세상의 어떤 아침' ('문예중앙' 1993년 봄) 김소진- '가을옷을 위한 랩소디' ('문예사조' 1993년 4월) 김은숙- '갇힌 자의 순례' ('노둣돌' 1993년 봄) 마희정- '분류표' ('문학정신' 1993년 1.2월 합병호) 박상우- '사하라' ('문학사상' 1993년 7월) 서정인- '광상' ('현대문학' 1993년 8월) 신경숙- '새야 새야' ('문예중앙' 1993년 봄) 심 산- '돼지 보기' ('샘이 깊은 물' 1993년 4월) 유순하- '희망의 나라로' ('계간문예' 1993년 봄) 윤대녕-'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 ('문학정신' 1993년 3월) 윤후명- '여우 사냥' ('상상 1993년 가을, 창간호) 이 선- '형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문예중앙' 1993년 봄) 이순원- '먼 길' ('한국문학' 1993년 1, 2월 합병호) 이승우- '수상은 죽지 않는다' ('문예중앙' 1993년 여름) 이향란- '마타모로스에서 온 편지' (소설집 '포도씨앗의 사랑') 임철우- '포도씨앗의 사랑' (소설집 '포도씨앗의 사랑') 정 찬- '종이 날개' ('민족과 문학' 1993년 1, 2, 3월 합병호) 최시한- '반성문을 쓰는 시간' ('문학과 사회' 1992년 겨울) 최 윤- '워싱톤 광장' ('민족과 문학' 1993년 1, 2, 3월 합병호) 최인석- '황도' ('한국문학' 1993년 1, 2월 합병호) 하창수- '눈' ('계간문예' 1993년 봄) (소설집 '포도씨앗의 사랑'은 '광주, 전남 소설문학회'가 펴낸 2권의 신작소설집 가운데 하나이 다.) 이상 24편의 작품들은 그것이 발표되었을 당시 우리들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겼던 것들로 현대 문학사측에서 제시한 선정의 기준에도 잘 부합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억과 인상만 으로는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선정 작업이 어렵다고 판단한 우리는 한 달 여의 기간을 두고 그 작 품들을 다시 곰곰히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선정 후보작을 놓고 재검토에 들어간 지 25일(9월 3일) 만에 우리는 다시 모였다. 모두들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끝낸 상 태였으므로 우리는 곧 작품선정을 위한 투표로 들어갔다. 투표는 우리 다섯 사람이 각각 10편씩 을 선정하여 이를 합산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결과 4표 이상을 얻은 작품이 2편, 3표를 얻은 작품이 5편, 그리고 2표와 1표를 얻은 작품이 각각 11편과 6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 결과로는 문제가 있었다. 3표 이상을 얻은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자니 일반적인 책 한 권 분량이 안 되었고, 그렇다고 2표 이상을 얻은 작품까지고 확 대하자니 지나치게 넘쳤다. 이 문제를 놓고 한동안 상의한 끝에 우리는 재투표를 하기로 결정하 였다. 이번에는 선정위원 개인별 작품선정 수를 10편에서 15편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다시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이번에는 5표를 얻은 작품이 3편, 4표를 얻은 작품이 8편, 3표를 얻은 작품이 5편, 2표 이하를 얻은 작품이 8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문제가 발생했는데, 4표 이상을 얻은 작품을 대상 으로 하자니 부족했고, 3표 이상을 얻은 작품으로 하자니 넘쳤다. 이 문제는 다시 재투표를 실시 한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그래서 문제의 3표 를 얻은 작품들에서 해결점을 찾기로 하였다. 몇가지 의견이 제시되어 검토되는 가운데 한 가지 그럴듯한 의견이 나왔는데, 그것은 그 작품들을 놓고 1차 투표 때 가장 적은 수의 득표를 한 작 품을 순서대로 제외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그 의견은 우리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으로 다가왔다. 1 차 투표 때의 자료를 검토한 결과, 5편 가운데 4편은 모두 1차 투표때 2표 이상을 얻었음에 비해 나머지 작품은 단지 1표만을 얻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그 작품을 제외하고 난 13편의 단편과 2 편의 중편이 바로 '93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의 수록작품으로 선정되게 된 것이 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앞에 실린 해설은 해설자의 개인적인 관점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독자들 은 우리가 특별히 그 작품을 선정하게 된 합의의 선정 이유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 다면 굳이 그 작품들이 선정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정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임했다. 그것은 현 대문학사의 이 기획에는 오늘날 우리 소설문단의 혼란상과 관련된 진지한 반성과 그것을 극복해 보려는 그들 나름의 적극적인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진지한 의도에서 시도된 이 기획이 앞으로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과 호응에 힘입어 우리 소설문학의 질적 성숙에 유익한 밑거 름이 되기를 우리 선정위원들은 진심으로 바란다.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좋은 소설선집을 기획해준 현대문학사에 이 자리를 빌려 고 마움을 전하며, '올해의 좋은 소설'로 선정된 작품의 작가들에게 진심어린 축하와 성원을 보낸다. 1993년 10월 선정위원 김윤식, 정현기, 전영태, 정과리, 신덕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