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창작 텍스트로 뽑은 96 우리 시대의 화제 소설 전4권 중 제3권 지은이: 박상륭 외 펴낸곳: 평민사 [ 그림자 당신 * 서하진 60 년 경북 영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94 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단편소설 "그림자외출", "그림자거리", "그림자여행", "제부도", "푸른 폭포 너머로", "조매제", "추일서정" 등 발표 그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는 막 머리 손질을 마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룰빗에 끼인 머리카락을 일일이 뽑아내고, 그것들을 꼭꼭 뭉쳐 쓰레기통에 넣는다. 탁탁 빗끼리 마주 턴다, 그 다음엔^5,5,5^. 그렇지, 치이익 헤어스프레이를 뿌리고 빳빳하게 고정된 머리를 두 손으로 툭툭 쳐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다^5,5,5^. 아내는 그 모든 일을 각본대로 따르는 배우처럼 차례로, 정확히 해치웠다. 머리 손질에 대한 아내의 별스러운 정성을 익히 알면서도 나는 볼 때마다 그것이 신기했다. 저녁이면 풀어내려 감을 머리를 매번 저렇게 말아올리다니^5,5,5^. 하기는 애를 낳으러 병원에 가기 전, 십 분 간격으로 밀려오는 진통에 몸을 뒤틀면서도 젖어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여자가 아내였다.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거울을 비춰보던 아내의 눈이 거울 속에서 얼핏 내 눈과 부딪혔다. 아내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언제 깼어요? 언제부터 나 쳐다보고 있었어요?" 돌아앉으며 아내가 추궁하듯 물었기 때문에 나는 공연히 무안해 하며 변명을 했다. "지금 막 깼어. 당신 멋있는데. 어디 좋은 데 가나부지?" "지연이 수영장 가려고요. 오늘 수요일 아녜요." 싱겁기는. 하면서 아내는 여늬 때처럼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차려 주었고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려 설거지까지 깨끗이 마쳤다. 씽크대 위에 헹구어진 그릇들을 일일이 마른 행주로 닦는 아내를 보며 나는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재떨이는 밖에 내놓으세요." 접시는 접시끼리 주발은 또 그것끼리 나란히 쌓은 그릇을 찬장 안에 집어넣으며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그릇 하나도 씽크대 위에 나와 있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또한 재가 담긴 재떨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해서 내가 담배 한 대를 피울 때마다 냉큼 재떨이를 비워놓곤 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줄줄이 피워대는 담배냄새가 가셔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아내도 모르지 않을 테지만 자신의 유별난 청결벽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담배냄새가 배이지 않도록 하느라 아내는 수시로 벽을 닦아내기도 했다. 꼭 짜낸 물걸레로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세제를 사용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온 거실과 서재의 벽을 닦았다. 그 무자비한 걸레질을 벽지가 배겨내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는데 아내의 말로는 실크 벽지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지난 달에는 어디서 알아냈는지 집 안의 묵은 때와 먼지, 냄새 따위를 모두 없애준다는 무슨 소독(아내는 소독과는 다르다고 했지만) 회사에서 사람을 불러 하루종일 이불과 커튼까지 털어내는 소동을 벌였다. 덕분에 집 안은 항상 잡지에 나와도 좋을 만큼 깨끗했고 늘 은은한 방향제 냄새가 감돌았다. 신기한 것은 아내가 한 번도 담배를 끊으라거나 베란다에 나가서 피우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다른 경우에도 아내가 잔소리를 한다든지 바가지를 긁는 일은 드물었지만. 별다른 대책도 없이 전업을 선언하고 다니던 고등학교에 사표를 냈을 때도 아내는 불평 한 마디 없었다. 작가라는 직업이 교사보다는 훨씬 현대적이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늦게 일어난 내 잠자리를 정돈하고 창을 활짝 열어 젖히던 아내가 어머, 비가 오네요, 했다. 때를 짐작하기 어렵게 침침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띄엄띄엄 떨어지고 있었다. 맞은편 아파트의 벽을 타고 빗물이 흘러들었다. 벽이 얼룩지면서 다용도실 쪽의 집기들이 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베란다에서 건너편 아파트를 볼 때마다 잘 차려 입은 여자의 등 뒤에 단추가 떨어진 것을 본 듯 계면쩍어지는 것은 내가 볼 수 없는 그 앞쪽의 베란다는 예쁘게 치장되어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파트들이 나란히 남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므로 뒤쪽의 다용도실에 온갖 허접쓰레기들이 쌓인 것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우리 집 베란다에도 작은 단지들이 놓여 있고 아내가 계절마다 바꿔놓는 조화들로 알락달락했지만 뒤쪽 다용도실은 각종 세제, 안 쓰는 플라스틱통, 여름에만 소용되는 아이스박스들이 주렁주렁 널린 빨래 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여자 하나가 유리문을 닫다가 아내와 손인사를 주고받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저 여자는 겨울인데도 나시에 반바지야." 여자가 흘낏 눈을 흘기며 창을 닫았다. "누구, 아는 사람이야?" 내가 그렇게 물은 것은 아내가 평소 남의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어서였다. 아래 윗집 무남하게 드나드는 여늬 아파트 주부들과 달리 아내는 이웃 여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뜻밖에도 아내는 입을 삐죽해 보이며 말했다. "당신도 생각 있수? 동네 남자들이 저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더라구요. 온몸으로 색기를 흘리고 다닌다고 소문이 났어요. 지연이랑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왜 있잖아요. 문선이라고, 엊그제 우리 집에 놀러왔었는데 당신은 없었나보군요. 그 애 엄마^36^예요." 빠르게 말은 쏟아놓는 아내에게서 언뜻 비쳐나오는 적의에 나는 저으기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참 사람도, 남의 애 엄마를 그렇게 말할 게 뭐야. 그 남편이 들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못마땅한 말투로 나무라는 내게 아내는 그러게요, 그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지. 하고는 더 말없이 딸아이를 부르며 나갈 채비를 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던 아이는 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야 전자 오락기의 스위치를 끄고 일어났다. "아빠, 다람이하고 집 잘 보세요." 아이가 운동화를 신고서 손을 흔들었다. 다람이는 아이가 기르는 다람쥐 이름이었다. 혼자 있을 때면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와 똑같아지는 기분이라고 언젠가 내가 말한 이후로 아이는 늘 그렇게 인사를 했다. 아내와 아이가 나가고 난 집은 갑자기 어둑신하게 느껴졌다. 썰렁한 기운에 추리닝이라도 덧입을까 하다가 그냥 런닝바람으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마감 날짜가 며칠 남지 않은 연재물을 마쳐야 했지만 왠지 책상 앞에 앉기가 귀찮았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기간이 길어진 것은 내 소실이 인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몇 번인가 연재를 건너뛴 탓이었다. 내가 몸이 아파서 한 번, 무슨 기획이 있어 기사가 넘친다고 한 번, 그리고 지난 달에는 유명한 누구의 중편 전재에 밀려서 두 달을 거퍼 뛴 셈이 되었다. 연재물이란 '연재'에 생명이 있는 것인데 이처럼 간헐적으로 게재를 하다 보니 당연히 호흡이 끊어지고 전편의 분위기를 따라잡기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화가 나서 편집자에게 연재를 중단하겠다고 해버릴까 생각했지만 아직 중견축에 끼지 못한 내게 쉬이 이런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어서 참고 말았다. 처음 전업을 결심했을 때의 요량으로는 하루 한 편이라도 써낼 것 같았고 사실 매일 오십여 장은 쓸 수 있었다. 팔리지는 않았지만 장편 두 권을 낸 것이나 그럭저럭 작품집 두어 권 분량의 소설을 써낸 것은 전업 이전에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 년 안에 열 권을 내겠다고 작정한 애초의 결심이 큰 무리도 아닐 듯싶었다. 문제는 글을 쓰지 않는 동안의 무료함, 아니 그것보다는 매인 데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허망함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라는 데 있었다. 매일 규칙적으로 열한 시에 일어나 서너 시까지 일하고 다시 저녁 여덟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일하는 생활, 남들이 쉴 때 일하고 남들이 열심히 일할 때 잠자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내 몸은 오랜 올빼미 생활에 익숙해 있고 체질적으로 잠이 많지 않아 신체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잠자는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를 아내는 출타중이라고 따돌렸고 작업 중에는 내 스스로 전화로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아 받지 않았으므로 나를 찾는 전화는 점차 드물어지고 이제는 사정을 아는 몇몇 글쟁이들 외에는 아무도 내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내가 열쇠 있는 곳을 일러주고 나갈 때마다 나는 스스로 마치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된 듯한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이따금 초인종을 울리는 것은 가스 검침원이나 적십자회비를 받으러 온 반장, 아이의 영어회화를 권하는 테이프 장사, 아이의 학습지 선생, 아이를 찾는 어린 꼬마들 뿐이었다. 내가 문을 열며 그들은 하나같이 의아해 하다가 조금 미안쩍은 눈빛 속에 안됐군. 젊은 남자가. 하는 표정을 감추고 돌아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 층짜리 아파트의 오 층까지 올라오면 대개 조금쯤 숨을 몰아쉬기 마련인데 문 앞에서 숨을 고르던 사람도 내가 문을 열면 금세 헉헉대던 표정을 감추고 얌전히 용건을 말하고는 쏜살같이 계단을 되짚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각 동마다 경비원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따금 나가는 오후의 산책길에도 그 가엾어 하는 시선을 받아내야 할 게 아닌가. 내 스스로 느끼는 것보다 타인에게 강요받은 무기력이 훨씬 더 위압적이라는 것을 그즈음 나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자유가, 그 의미가 폄하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꾸물꾸물 밀려올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악착같이 자판기를 두드리는 것뿐이었다. 꽁초 하나가 오그라진 채 담겨 있는 재떨이와 라이터를 찾아들고 와서야 나는 담배갑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일을 하려면 담배가 있어야 했다.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한 대의 담배를 물고 퇴고하는 것이 내 오랜 버릇이었다. 비어 있는 담배갑이 공연히 나를 초조하게 만들어서 나는 여기저기 피다만 담배가 남아 있을 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거실 장식장의 서랍을 모두 빼보고 안방 경대와 옷장의 호주머니를 남김없이 뒤져도 담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당장에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절박감에 사로잡혀 내 손은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쑤셔 넣은 잠바를 꿰어 입고 현관을 막 나설 때 기다렸다는 듯이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의 손잡이를 비틀어 열려던 참이었으므로 누구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문 바깥쪽에서 서 있던 여자가 흠칫 뒤로 물러서며 어머! 짧은 비명 소리를 냈다. 여자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막 나가려던 참이어서. 그런데 무슨 일로?" 빨리 여자를 보내고 담배를 사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말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머뭇거리며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연이 엄마는 안 계시지요? 저어, 지연이 친구 엄만데요. 며칠 전에 우리 딸애가 놀러왔다가 뭘 두고 갔는데 찾아와야 한다고 하두 졸라서요." 그제서야 나는 여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까 아내와 손인사를 하던 건너편 아파트의 여자였다. 약간 겁먹은 듯한 눈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만드는 음영 속에 빛나고 있었다. 말갈기를 연상케 하는 여자의 검은 머리에 물방울이 몇 개 매달려 있었다. "들어가서 찾아보면 안될까요? 잠깐이면 되는데^5,5,5^" 여자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바람에 나는 얼떨결에 비껴서면서 여자를 들어오게 했다. 여자는 맨발에 꿰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재빨리 아이의 방 안으로 사라졌다. 마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듯 익숙한 여자의 발걸음 뒤로 엷은 물무늬가 남아 있었다. 반바지에 헐렁한 스웨터를 걸쳐 입은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내의 말을 떠올렸다. 온 동네에 소문났다고? 하기는 아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그런 소릴 들은 만도 하다 싶었다. 아무리 아이가 조르기로서니^5,5,5^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길들이려 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있는 대로 이런저런 학원엘 보낼 뿐. 그런 면에서 아내는 달랐다. 아내는 결코 아이에게 과분한 선물을 사주지 않았다. 유치원에 보내고 수영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피아노나 그 흔한 영어회화 따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제 엄마의 말을 늘 고분고분 잘 따랐다. 다람쥐를 키우겠다고 고집 피운 것이 유일한 일로 기억될 만큼 아이는 무얼 조르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 내가 아이의 인형이라도 사들고 올라치면 아내는 질 겁을 하며 감추어 두었다가 꼭 의미를 붙여서 아이에게 주곤 했다. 생일이라든가 방학하는 날. 크리스마스. 추석. 아이가 수영에서 한 등급 올라갔을 때. 선물을 받아들 때마다 아이가 보이던 표정을 생각하며 나는 망연히 밖을 내다보았다. 아이는 제 엄마나 내가 기대한 만큼, 꼭 그만큼의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선물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거나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거나 하지 않는 아이가 늘 내게는 오히려 못마땅했다. 그럴 때의 아이는 아내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빗줄기가 더 거세지는 기색도 없이 그저 그렇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엎드려 있는 주차장의 차들이 비에 젖어 한층 선명한 빛으로 다가왔다. 젖어 번들거리는 아스팔트 위에 이른 가로등 불빛이 희부옇게 빛났다. 왼편 상가의 약국 한 옆에서 비를 맞고 있는 담배 자판기를 내려다보다가 잊고 있던 담배 생각에 갑작스레 초조함을 느끼며 나는 여자가 들어간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열린 문으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침대 밑을 살피는지 여자는 선머슴애가 절을 하듯 엎드려 있었다. 말처럼 높다랗게 치켜든 엉덩이를 이리저리 돌리며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는 희한한 자세의 여자를 나는 심술궂게 바라보았다. 반바지 위로 드러난 엉덩이의 굴곡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다가왔다. 삼각의 팬티선이 내비치는 짧은 바지 아래로 희게 뻗은 다리가 보였다. 구부린 무릎을 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발목. 동그란 발꿈치와 주름이 진 선연한 분홍빛 발바닥.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여자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머, 죄송해요. 여기 밑에 들어간 것 같은데 손이 닿질 않아서^5,5,5^" 엎드려 있어 피가 몰린 탓인지 여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 제가 한 번 볼까요?"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아 나는 공연히 흠흠 헛기침을 했다. 여자가 머뭇거리며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긴 손가락마다 가는 반지들이 끼어 있었다. 여자의 그 손을 보는 순간 찌릿한 느낌이 가슴 가운데서 빠르게 몸 아래쪽으로 퍼져 나갔다. 침대 옆 방바닥으로 몸을 구부린 내 눈에 빨갛게 칠한 여자의 발가락들이 보였다. 여자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엎드리던 내 손에 여자의 발이 닿은 것은 우연이었던가, 움칠 뒷걸음치던 여자가 침대모서리에 발이 닿으면서 그대로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여자가 발딱 몸을 일으킨 것과 내가 여자의 발목을 잡은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여자는 발목을 잡힌 채 꼼짝 않고 앉아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은 겁에 질린 듯 했지만 묘한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어서 조마조마하던 내 마음에 확 불을 당기는 것이었다. 나는 여자의 다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떨림이 손바닥에 전해져 왔다. 내 손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자 여자가 흐윽, 억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여자를 쓰러뜨렸다. 내 머리 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쌕쌕거리는 여자의 숨소리와 그 더워지는 숨결, 그리고 홈통을 타고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까칠한 감촉의 스웨터를 잡아챘을 때, 여자의 날카로운 손톱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강제로 여자의 두 팔을 비틀어 잡아 스웨터를 벗기고 얇은 면셔츠를 밀어올리자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이 하얗게 드러났다. 여자가 길게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이미 제어할 수 없는 광포함에 휩싸여 더욱 거칠게 여자의 바지를 벗기고 작은 팬티를 끌어내렸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사납게 저항하던 여자는 완전한 알몸이 되자 이상하게도 조용해져서 누운 채로 가만히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하나씩 내 옷을 벗겨내는 것이었다. 여자의 손 끝이 닿을 때마다 내 몸은 구석구석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 손이, 내 팔이, 다리가 마치 하나씩 따로인 생명체인 양 저마다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여자의 벗은 몸이 하얗게 떠있는 듯 보이고 긴 머리카락은 함부로 흐트러져 여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또렷이 반짝이는 두 눈. 검은 눈동자로 빨려들 듯이 나는 여자의 깊은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나를 몰아넣었다. 여자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침대에 누운 채로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여자의 긴 머리카락 하나를 장난스레 잡아당기며 나는 한동안 나른한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투둑투둑. 빗물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탈. 꿈꾸듯 일어난 여자와의 일이 내게 가없는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던 것일까. 어느 결에 나는 비내리는 바다, 사람 없는 섬에 홀로 누운 사람과도 같은 허허로운 감정에 빠져 있었다. 온몸의 실핏줄 하나하나까지 스르르 풀려 나가는 느낌. 손바닥을 오무려보아도 전혀 악력이 느껴지지 않는 무중력의 공간에 둥 떠있는 기분^5,5,5^ 벽지의 무늬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내게로 다가오고 그 무늬들 틈새로 불쑥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5,5,5^ 아아, 이 한없는 무력감. 막 잠에 빠지려는 찰나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창을 넘어 들어왔다. 맨몸에 닿아오는 차가운 기운. 오스스 소름이 돋는 팔을 감싸며 나는 무엇에 찔린 듯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물론 아내밖에 모르는 착실한 남편은 아니었다. 아내를 알기 전에도 그랬지만 아내와의 결혼생활 중에도 이런저런 여자들을 만나고 가끔은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술김에 여자를 산 것은 점잖은 경우에 속했다.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여자와 며칠을 같이 다니기도 했고, 친하게 지내던 여류시인과 몇 차례 호텔을 들락거리기도 했으며 까닭없이 우울한 날이면 불러낼 수 있는 여자의 전화번호도 몇 개인가 가지고 있었으며 또^5,5,5^ 그러나 그 모든 경우는 아내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내는 내 바람기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지나치지 않으면, 예컨대 가정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묵인해주는 편이었다. 다른 여자와 자면서도 나는 그다지 아내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대개 기꺼이 내게 응해 왔으며 또 미련없이 내게서 떠나갔다. 그것은 그러므로 아내에게나 내게나 아무런 상관없는 만남일 수 있었다. 그런데^5,5,5^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람을 피면서도 내게 한 가닥 자긍심으로 남는 사실이 있다면 여자와 자기 위한 목적으로 여자에게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한 여자와만 성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미임을 부정하는 것. 마찬가지로 다른 여자와의 정사가 그 여자나 나를 묶어 둘 수 없다는 것, 그런 제약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5,5,5^. 딸아이의 친구엄마를 딸의 방 침대에서 강제로 범하다니^5,5,5^.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몸을 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안 가득히 들어찬 비릿한 냄새. 창을 열어 젖히자 바람과 함께 빗방울들이 들이쳤다. 그날 그 사건을 우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던 내게 그 여자의 방문은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꼭 일주일 후 여자는 아내가 없는 사이 나를 찾아왔다. 문을 열고 여자의 긴 다리와 야릇하게 빛나는 눈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또 미친 격정에 휘말리고 있음을 알았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선 내 팔 밑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왔다. 틀어 올린 머리에 드러난 여자의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 가운데 까만 점이 도드라져 있었다. 딸려 올라가듯 내 손이 그 점을 어루만지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했고, 여자가 간지럼을 타듯 가볍게 몸을 떨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상하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어요. 오고 싶어서 그냥^5,5,5^ 왔어요." 긴장으로 들뜬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귀를, 목덜미를, 가슴을 스믈스믈 간지럽혔다. 여자의 입을 따라 움직이는 턱과 이어지는 목선. 그리고 그 아래의 깊은 계곡을 내려다 보는 내 앞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돼! 돼. 안돼, 안된다니까. 안되긴 뭐가 안돼. 대체 안될 게 뭐 있어? 어쨌든 이번엔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여길 또 온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은근히 수컷으로서의 자부심이라 할, 다소 유치한 감정이 느껴져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나를 올려다보던 여자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지나갔다. "비웃으시는군요, 가겠어요." 돌아서는 여자의 어깨를 움켜잡았지만 여자는 완강한 몸짓으로 내 팔을 밀어냈다. 그때 여자를 가게 했어야 했다.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여자를 막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얹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지 말아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스르르 힘이 빠져나간 여자의 손이 맥없이 툭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느라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여자의 어깨를 나는 가만히 감싸안았다. 여자는 뒤로 무너지듯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자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내달아오는 입술이 가 닿은 여자의 감은 눈꺼풀도 바르르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여자는 그렇게 수요일마다 내게 왔다. 매번 짧은 반바지와 얇다란 면셔츠를 입고서. 스웨터나 때로 긴 바바리를 걸치긴 했지만 언제나 맨발이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차갑게 언 발가락을 내 가슴에 문지르며 그 시린 감촉에 내가 깜짝깜짝 소스라치는 것을 보고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발이 따뜻해질 쯤이면 여자는 살며시 일어나 옷을 입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여자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이야기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쁘게 옷을 벗고 화난 사람들처럼 거칠게 서로를 탐할 뿐이었다. 여자가 머무는 시간은 고작 삼십 분을 넘지 않았고 아이의 수영시간은 두 시간이었으므로 아내가 돌아올 염려는 없었지만 여자는 쫓기듯 서둘러 나갔고 나도 여자를 붙잡지 않았다. 여자가 가고 나면 나는 흐트러진 침대를 정돈하고 무슨 흔적이 남아있지 않나 꼼꼼히 살피곤 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나 곱슬거리는 짧은 치모를 발견하는 날이면 혹시 남아있는 것이 없는지 이불을 털어내고 방바닥을 촘촘히 쓸어보아야 했다. 깔끔한 아내가 쓰레기통에서라도 긴 머리카락을 보게 될까봐 그것들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면서 나는 아내를 속이는 야릇한 흥분과 언젠가는 발각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어제 오후였다. 수요일. 샤워를 하고 머리를 털면서 시계를 보았다. 여늬 때와 달리 아내는 두 시가 다돼 가는데도 외출준비를 하지 않은 아이와 전자오락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신, 오늘은 수영 안 가나? 늦겠는데 그래." 초조해진 내가 조바심을 감추고 아이의 방으로 다가갔을 때 아내는 온몸이 움찔움찔할 정도로 힘주어 오락기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펑크 머리를 한 근육질의 여자가 우람한 금발 남자에게 발길질을 해대는 화면에서는 아잇아잇, 기합소리가 흘러나왔고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톡톡 버튼을 누르는 아내의 손가락들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 손등에 불거진 푸르스름한 핏줄이 내다보였다. 옆에 앉은 아이도 제 엄마처럼 하얗게 긴장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고 있을 뿐 내가 다가가는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아내의 어깨를 툭 치며 나는 다시 물었다. "여보, 지금 몇 신지나 알고^5,5,5^." "가만 있어 보세요. 이제 막 끝나가는데 말 시키지 말고."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연신 손을 놀리면서 아내가 말했다. 이따금 아내가 아이의 방에서 전자오락을 하는 것은 알았지만 저처럼 몰두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내는 신들린 사람처럼 화면을 노려보며 잠시도 쉬지 않고 네 개의 버튼을 번갈아 눌러댔다. 아내의 이마에 끈끈한 땀이 배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조바심도 잊고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아내는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체질이어서 어지간한 더위에도 말간 얼굴이었고 격렬한 정사 후에도 맨숭맨숭한 몸으로 일어나곤 했다. 내 가슴엔 흥건한 땀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어쩜, 세상에 하면서 자신의 마른 몸을 만져보는 것이었다. 땀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얼굴빛까지 붉게 상기된 채로 아내는 한참을 더 화면에 열중했다. 한 남자가 쓰러지면 또 다른 건장한 남자가 나타나 여자를 공격해오고 그 남자를 무찌르고 나면 서너 명 무리 지은 남자들이 여자를 둘러싸기를 계속하는데 여자는 맨주먹과 발길질만으로 남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남자들은 갑자기 문 뒤에서 나오기도 하고 맨홀 뚜껑을 열고 나타나기도 했으며 저마다 칼이나 쌍절봉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아내의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주인고 여자를 당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과 화면을 번갈아 보는 내게 까닭모를 불안감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아내가 혹시^5,5,5^ 마침내 마지막 악당을 물리쳤는지 빵빠레가 울리고, 축하합니다. 춘리, 일 단계가 끝났습니다. 영어로 된 자막이 빠르게 화면에 나타났다. "야! 엄마 대단하다. 다 해치웠어." 아이가 소리쳤다. 그제서야 아내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뭐라고 했어요? 미안해요. 정신이 팔려서^5,5,5^." 아내의 열에 들뜬 듯한 얼굴을 보며 내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초인종소리가 났다. 여자가 온 모양이니 낭패였다. 진작 담배 피러 나가는 척하면서 밖에서 여자를 기다려 일러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나는 짐짓 태연히 물었다. "누가 오기로 했나?" "아뇨. 오늘은 내가 집에 없는 날이잖아요. 당신 손님 아녜요?" 현관 쪽으로 나가면서 아내가 말했다. "내가 언제 집에 사람 부르는 거 봤어? 늘 밖에서 만나지." 내 마지막 말은 덜컥 열리는 쇠문 소리에 묻히고 아내가 문을 밀자 여자의 맨발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비실비실 걸음을 옮겨 현관에서는 보이지 않는 소파 쪽으로 몸을 숨겼다. 웬일이에요? 하는 아내의 목소리, 어머, 마침 집에 있었네요. 여자의 목소리. 네에. 오늘은 수영장 개관일이라서 쉰대요. 아내. 혹시나 하고 들러봤더니 잘됐네요, 딴 게 아니구요. 여자의 말에 이어 좀 들어오세요, 밖에서 그러지 말구. 하는 아내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손을 떨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무리 여자가 들어오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자꾸 뒷덜미를 누가 잡아채기라도 하듯 고개가 현관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났다. 문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는 것이 거북했던지 아내는 아^36^예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수런수런하는 기척뿐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듯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초조할 때 으레히 하는 버릇대로 필터를 잘근잘근 씹는 바람에 연기가 시원스레 빨아지지 않았다. 반쯤 타들어간 담배의 남은 부분에 꺼멓게 연기자국이 나 있었다. 아직 타지 않았어도 곧 타들어갈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 검은 부분을 보면서 나는 아내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두 달이 넘었으니 그 사이 내가 모르는 흔적들을 찾았을 것 같았다. 아니면 이웃의 누군가 아내에게 말했을지도. 지연 엄마, 요즘 문선 엄마랑 친하게 지내나봐? 그 집에 문선 엄마가 자주 가더라. 지연 아빠는 여전히 집에서 글 쓰시죠? 그나저나 참 용해요. 우린 일요일 하루만 남자가 집에 있어도 불편하고 귀찮은데^5,5,5^ 그런 말을 듣는 아내의 굳은 얼굴이 눈에 선해서 나는 끄응 신음을 하며 눈을 감았다. 아내는 이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여자는 가버린 모양이었다. "영어회화를 안 한댔더니 이번엔 미술이야." 뭐 애 잡을 일 있나 하고 덧붙이며 아내는 다시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 기합소리. 딩디딩 하는 배경음악이 들려왔다. 바야흐로 여전사 춘리의 이 단계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수한 남자들이 나가 떨어지는 모습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순간순간 푸르게 번득이며 방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아내는 아무 눈치도 못 챈 것일까. 여자는 이제 오지 않겠지. 또 다른 핑계를 대고 벨을 누르지는 않을까. 들어와서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힐끔힐끔 나를 곁눈질하지 않을까. 언젠가 아내와 함께 보았던 영화의 여자처럼 질기게 따라붙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의 여자가 남자의 집에 몰래 들어와서는 아이가 기르는 토끼를 끓는 냄비 속에 잡아 넣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쩌면 여자가 딸아이의 다람쥐를 잡아 죽이고 죽은 다람쥐를 아이의 방 앞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어 나는 으스스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버릇처럼 뭉지근해오는 아랫도리를 스스로도 한심해 하면서 나는 또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나는 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게임에 빠져 있는 아내는 어딜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와 아파트의 현관에 서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술을 한 잔 하자고 누굴 불러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차갑게 입술에 와닿는 공기를 느끼며 나는 망연히 위를 올려다 보았다. 낮은 아파트의 옥상 위로 흐릿한 회색의 하늘이 짓누르듯 깔려 있었다. 하늘빛이 끝나는 곳에 이어진 아파트의 옥상. 그 아래의 창가에서 그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려 얼굴을 휘덮을 때마다 여자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오후의 비스듬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지만 여자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먼 눈빛이 내 얼굴을 찌르는 듯해서 나는 자꾸만 눈을 깜박였다. 내가 눈을 감았다 뜬 어느 한순간 여자는 사라지고 빈 창에는 엷은 커튼이 일렁대고 있었다. 바람이 커튼 자락을 휘감아 돌아서 그것은 마치 하얀 치마자락처럼 창 밖으로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며 거침없이 나부꼈다. 퍼드득퍼드득. 거대한 새의 날개짓처럼 바람차는 소리를 내는 그 커튼 자락이 통째로 떨어져 나와 나를 뒤덮고 말 것 같았다. 온 사방이 흰 커튼으로 둘러싸인 듯 하얗게 보이고 나는 어쩐 일인지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공포, 백색의 공포 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손이 불쑥 커튼을 말아 쥐고 창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닫힌 창을 한참 올려다보려니 눈이 시려지고 진물이 나듯 눈물이 고였다. 눈을 문지르면서 나는 길 건너의 생맥주 간판을 향해 걸어갔다. 동굴처럼 컴컴한 생맥주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나는 아내와 여자를 번갈아 생각했다. 여자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벗은 발만 떠오를 뿐 여자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내는^5,5,5^. 나는 거듭 술을 청해 마시고 빠른 속도로 취해갔다. 나 혼자 앉아 술을 마시던 가게 안이 저녁 손님들로 소란스러워질 때쯤 내 머리 속도 그렇게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옆자리의 여자들이 모두 아내와 건너편 아파트의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봐, 나 좀 보라구, 우리 얘기 좀 할까. 몇 번이고 여자들을 향해 말을 던질 것만 같은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길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문을 여는 아내에게 미안해, 여보. 미안해를 연발하면서 나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잠이 깬 것은 누군가 나를 더듬는 손길이 느껴진 탓이었다. 눈을 뜨자 내 옆에 턱을 괴고 앉아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아내는 꼼짝도 않고 나를 보았는데 그 눈빛이 문득 섬찟해서 나는 아내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당신, 여태 안 자고 있었어? 몇 시나 됐어?" 대답없이 아내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그 손을 잡아 감싸자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내 옷의 단추를 벗기고 바지고리를 풀었다. "우리 사모님이 오늘은 웬일이야?" 슬그머니 장난을 걸어보았지만 아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먼저 서둘러야 서서히 달아오르던 평소와 달리 아내는 사뭇 급하게 내게 안겨들었다. 내 몸의 반응이 느린 것이 안타까운지 아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목에 감은 팔에 한껏 힘을 주었다. 낮에 여자의 방문에 자극을 받은 것인가. 불안감과 술기운이 겹쳐와서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내의 안타까움이 손에 잡힐 듯 절실하게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점점 내게서는 힘이 빠져 나갔다. 투정하는 아이처럼 매달리던 아내가 길게 한숨 섞인 신음소리를 내며 내게서 떨어지고 이어 달그락거리는 문소리가 난 듯했다. 그때서야 아내도 나도 아이의 방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살금살금 다가가 문을 열었을 때 아이는 눈을 꼭 감고 얕은 숨을 쉬고 있었다. 이 녀석이 안 자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걱정하는 내게 아내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뭐 그랬을라구요 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자는 동안 내내 아내가 게임 속의 춘리처럼 남자들을 쓰러뜨리는 꿈을 꾸었다. 나는 문 뒤에 숨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내는 나를 그냥 지나쳐 갔고 아내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아내의 기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내는 앞을 막아서는 남자들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공중을 휙 날아올라 뒷발질을 했다. 그러는 아내의 얼굴에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아내는 벌거벗고 있었고 아내 앞의 사내들도 모두 거대한 남근을 드러낸 벌거숭이였다. 아내가 젖가슴을 출렁거리며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남자들은 뿌연 정액을 쏟으며 쓰러져 갔다. 길바닥에 흥건한 정액을 밟으며 비칠거리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 남자들을 쓰러뜨리며 나아가는 아내를 향해 내가 다시 고함을 질렀을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그 얼굴은^5,5,5^ 낮에 찾아왔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여자가, 아니 아내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나타난 한 남자가 그녀를 쓰러뜨렸다. 심한 갈증을 느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건넛방에서 아잇! 아잇! 하는 기합소리가 꿈 속처럼 들려올 뿐 집 안은 조용했다. 개운치 않은 몸을 일으키고 냉장고의 물을 병째로 들이켰다. 두통이 가라앉는 대신 아랫배에 묵지근한 통증이 자리잡았다.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쫓기듯 서두르던 지난 밤 아내의 행동과 꿈이 어우러지면서 나는 아내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내는 필경 그 여자와의 일을 눈치챘으리라. 그러고도 유난스런 결벽성 때문에 내게 대놓고 따지지 못하고 그런 식의 몸짓으로 무언의 항변을 한 것이리라.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아내가 문득 서럽게 느껴졌던 것도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내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현듯 나는 아내가 마음 상하더라도 사실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와의 일은 우발적이었으며 이제는 다 지나간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깨끗이 내 잘못을 인정하고 아내의 이해를 구해야지. 아내는 물론 상심하고 노여워하겠지만 늘 그랬듯이 나를 용서해 줄 것이다. 열흘간의 외출금지나 한 달쯤의 외부 통신두절, 혹은 한 보름간은 없는 사람처럼 취급당하기^5,5,5^ 그런 벌이 따르겠지만 의심을 받았을 때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좋다는 것을 나는 팔 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조바심치며 오락기의 단추를 누르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자 가슴 깊숙이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나는 아내를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화면에서 뿜어나오는 푸른 빛만이 번득이고 그 빛 안에 오롯이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아이의 조그만 등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아이의 눈. 그 눈이 담고 있는 적의가 한동안 나를 막막하게 했다. 쉼없이 움직이는 손가락들과 붙박힌 듯 고정된 눈동자. 화면의 악당들은 아이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닌, 그 눈이 뿜어내는 광기와도 같은 적의 때문에 희득희득 넘어져가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아내의 환영이 떠올라오고 금발의 여자를, 그 끊임없는 사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글부글 염증이 끓어올랐다. 아이와 함께 있으려니 했던 아내의 모습은 집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불러도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는 어딜 가셨지?" 아이는 대답 대신 네? 하고 소리를 질러 되물었다. 갑작스런 짜증을 못 이기며 나는 거칠게 오락기의 코드를 뽑았다. 정전이라도 된 듯 팟 소리를 내며 화면이 꺼지고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빠. 지금 겨우 일탄 깰 참이었는데." 놀이를 방해받은 아이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엄마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잖아. 아빠 말에 대답을 해야지." "몰라. 엄마가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줬단 말야." 누그러지는 빛이 없이 잔뜩 볼이 부은 아니는 어서 게임기를 되살리고 싶은 마음뿐인 듯했다. 아이의 얼굴에 남아있는 미진함을 알면서도 나는 다시 아이를 게임의 화면 앞에 앉혀놓을 수는 없었다. 폭력과 적의와 금속음이 이 작은 몸에 가져다주는 잔인한 쾌감을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문득 아이와 같이 놀아준 것이 오래 전이었다는 생각에 아이에게도 미안함을 느끼며 나는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지연아. 오늘은 아빠랑 놀러 갈까?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아빠는 일해야 되지 않는냐고 하면서도 아이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아이와 함께 어디를 갈 것인지 의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을 때까지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차를 가져갔다면 택시를 타야할 텐데^5,5,5^ 아내는 어딜 간 것일까. 스산한 바람이 부는 밖을 보며 나는 아이의 목도리를 여며 주었다. "눈이 올 것 같다, 지연아. 모자도 찾아오너라." 제 방으로 모자를 가지러 간 아이가 한참 후 나를 불렀다. "아빠아. 못 찾겠어요. 좀 도와주세요." 아이의 소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방안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이 함부로 내팽개쳐져 있었고 아이가 들어가 있는 벽장 안에도 온통 인형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곰인형. 기린. 알 록달록한 옷을 입은 호랑이. 하얀 천사인형. 태엽을 감아주면 고개를 외로 꼬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어린 소년. 젖병을 입에 문 갓난아기. 기다란 귀를 늘어뜨린 토끼. 살아있는 듯한 강아지. 회색빛의 물개. 검은 얼굴에 삼색 테이프를 붙인 인디언 여자 아이. 바보처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고릴라. 앙증맞은 미소를 띤 목이 긴 공룡. 노란 부리를 내밀고 있는 오리. 가는 다리를 절름거리며 일어설 듯한 아기 사슴^5,5,5^ 인형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이렇게도 많았던가. 그것은 작은 왕국과도 같았다. 찬란한 황금 왕관을 쓴 육감적인 금발 머리 인형이 그 한가운데 여왕처럼 놓여 있었다. 도대체 아내는 언제, 왜 이 많은 인형을 아이에게 사주었단 말인가. 낑낑대며 벽장 안을 뒤지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나는 할 말을 잊고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빠. 모자 없으면 안 갈 꺼야?" 히힝 콧소리를 내며 아이가 내 목에 얼굴을 부볐을 때야 나는 정신이 들어 아이에게 물었다. "너, 이 인형들이 모두 웬 거냐? 엄마가 사주셨니?" "아니, 엄마가 사준 게 아니구." 아이는 자꾸만 내 목을 파고들며 귓볼을 간지럽혔다. "그럼 누가 사 주었니?" 누군가 알 수 없는 힘으로 목을 조여오는 느낌에 나는 아이의 얼굴을 돌려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 속에 검은 내가 있었다. 그 눈 속의 빛. 그 빛은 지난 밤 나를 들여다보던 아내에게서, 또 나를 찾아왔던 여자에게서 내가 보아냈던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아이가 내 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엄마랑 아빠랑 안고 있는 거 봤단 말야, 이렇게." 아이가 내 목을 돌려 안으며 지그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쳐와서 나는 왁살스레 아이의 팔을 뜯어내고 아이를 내려놓았다. "지연아. 착하지. 딴소리 하지 말고. 저 인형들은 누가 사 주었니?" 아이는 입을 비죽거리며 나를 밀어냈다. 누군가 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아이에게 인형을 하나씩 안겨주고는 아이를 어딘가로 데려가서^5,5,5^. 엘리베이터에서, 빛바랜 인조잔디가 깔린 옥상에서, 안 쓰는 가구들이 들어찬 지하실에서, 붕대가 칭칭 감긴 듯 한 관들이 지나가는 천정 아래의 보일러실에서^5,5,5^. 얘야, 아저씨가 좋은 것 가르쳐 줄께, 착하지이^5,5,5^. 아이를 잡고 가는 검은 그림자를 떠올렸을 때 나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이의 연약한 팔을 잡아 흔들며 나는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인형을 사 줬느냔 말야,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해?" 내 손을 집어 뜯으며 벗어나려 애쓰던 아이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더 힘주어 아이를 잡고서 다그쳤다. "누구야, 누가 그랬어, 엄마도 알고 있니?" 아이는 더욱 소리 높여 구슬피 울어댈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조그만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놓아주고 바닥에 널부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5,5,5^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애를 어떤 짐승 같은 놈이^5,5,5^ 이 애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나 있을까^5,5,5^. 도대체 아내는 무얼 하고 있었다 말인가. 아내에 대한 맹렬한 적의가 끓어올라 숨을 헐떡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울음이 잦아진 듯 흐드득 흐느끼는 목소리로 아이가 천천히 말했다. "엄마가 말하지 말랬단 말야^5,5,5^. 흐흑^5,5,5^ 그 인형 사준 거랑 상관없다고^5,5,5^ 흐윽, 엄마가 그랬단 말야. 내가 예뻐서 주는 거니까^5,5,5^, 흐응^5,5,5^ 아빠한테 말하면 안된다고^5,5,5^ 아빠가 알며, 화낸다고^5,5,5^ 말하지 말랬단 말야^5,5,5^. 엄마가^5,5,5^ 말하지 말랬단 말야^5,5,5^." 인형을 꼭 끌어안고 흐느끼며 띄엄띄엄 말을 잇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방바닥이 휭 도는 듯 어지러웠다. 아내가^5,5,5^ 남자를^5,5,5^ 그럴 리가. 늘 아이를 데리고 외출했었는데^5,5,5^. 아이를 옆에 두고 남자를 만났단 말인가. 내가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걸 눈치 챌 때면 심상하게 웃고 말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셔츠에 배인 화장품 자국을 애써 털어내는 내게, 그냥 주세요. 그런다고 모를 줄 알아요? 하며 세탁기에 집어넣던 아내의 그 웃음은, 그러니까^5,5,5^. 아이는 이제 내가 소리친 것도 잊은 듯 곰인형을 다정하게 쓸어 내리며 혼자말을 이어나갔다. "곰돌아. 엄마가 나 심심할까봐 널 사다 주셨지. 자아, 우리 옆방에서 조용히 놀자. 착하지이. 우리 가족들 많지. 여기 애기 곰돌이, 언니도 여기 있네에. 호랑이 친구가 놀러왔어요. 코끼리 아저씨도 같이 놀고 싶대요. 원숭이도 심심하고^5,5,5^." 아이는 제 주위의 인형들을 하나씩 끌어 모으며 인형 속에 파묻힌 채 점점 놀이에 빠져들었다.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인형들을 내려다보았다. 하나, 둘^5,5,5^ 다섯, 여섯 일곱^5,5,5^ 아홉, 열^5,5,5^ 마흔까지 세어도 인형은 남아 있었다. 아내는 얼마나 오래 전부터, 얼마나 자주 아이에게 인형을 사주면서 남자를 만났던 것일까. 아이가 말을 하기 전부터였을까.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엘 다니게 된 후였을까. 자신도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면서 젖은 흔적을 보이며 돌아온 것이 언제였던가. 지난 밤 그렇게 달아오르던 아내의 몸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자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 시작된 웃음은 내 뱃속을 훑어내는 통증이 올 때까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웃음 속에 남자를 끌어안은 아내의 모습이, 여자를 쓰러뜨리는 내가 차례로 지나갔다. 아내가 안고 있는 남자, 내가 끌어안은 여자들이 서로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소리가 없었고 아내도 나도, 여자들도 남자들도 얼굴이 없었다. 얼굴 없는 내가 나를 웃었다. 웃고 있는 나를 인형에 둘러싸인 아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곰들과 호랑이와 기린과 원숭이와 코끼리와 물개와 천사와 인디언 여자 아이가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온 방 안에 인형들과 내가 뱉아낸 웃음이 가득 차고 마침내 아이도 기쁜 듯 방긋 웃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웃음이 그쳤을 때,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 곰 이야기 * 양귀자 55 년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78 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다시 시작하는 아침" 당선 창작집 "귀머거리새"(85), "원미동 사람들"(87), "슬픔도 힘이 된다"(95) 장편소설 "희망(상, 하"(90),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92), "천년의 사랑"(95) 인물소설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89),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93) 장편동화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94) 문학선집 "천마총 가는 길"(95) "원미동 사람들"로 유주현문학상 수상(87) 중편 "숨은 꽃"으로 제16 회 이상문학상 수상(92)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며 항상 신웅에게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빌거늘, 한 번은 신웅이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기하기 스무 하루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5,5,5^. (삼국유사) 대문들은 틈 하나 없이 잘 닫혀져 있고, 길다란 붉은 담장은 실금 한 줄 없이 튼튼한데, 거기에 투명하게 맑은 봄볕조차 푸져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기분 좋은 홍조를 내비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그 어여쁨을 누리는 이는 없다. 골목은 사람 자취라곤 일부러 씻어낸 듯 말끔하고 정적만이 가득했다. 아까운 봄볕은 홀로 낭비되고 있었다. 이제 막 보고 나온 집의 외양을 찬찬히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 있으나 정작 그가 눈에 담고 있던 것은 그 깨끗한 봄볕과 넉넉한 정적이었다. 그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집이야 주인이 되면 취향대로 고쳐가며 살 수 있을 테니 별 문제가 없지만 골목을 장식하고 있는 깨끗한 햇볕과 넉넉한 정적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므로 중요했다. 좋은 집을 구한다는 일은 말하자면 집 바깥의 품위까지도 선택하는 것이었다. 비좁아터진 골목에 와글대는 꼬마와 아낙네들, 그리고 온갖 살림살이 냄새가 악취로 변해 햇볕까지 중독시키는 동네와는 질적으로 다른 품위가 이곳에는 있었다. 그녀가 그나 어떤 식으로 집을 보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이 골목에 관한 자신의 정서를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혹시 설명한다 해도 전혀 다르게 했을 것이다. 햇볕이 낭비되고 있다, 라는 느낌을 꼭 그녀와 공유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칫 위험하기만 할뿐이므로. 그녀 또한 자신의 마음속을 바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그가 먼저 무슨 말을 하길 기다렸다. 그녀와 살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점일지도 몰랐다. 결혼 초 그는 가끔씩 자신이 해야 할 말의 범위를 얼른 정하지 못해 곤혹스럽곤 했다. 범위를 모를 때는 무한대로 가는 게 가장 무난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기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무한대로 갔다. "괜찮구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의 반응을 궁금해 하던 부동산 남자가 반색을 하며 이제 막 보고 온 집의 보충설명을 시작했다. "앞산 뒷산 다 훤히 보이겠다, 전망으로 치면 이 동네에서 최고 자립니다. 대지가 이백 평인 게 좀 작다 싶으시겠지만, 보셔서 아시다시피 집이야 순 수입 자재만 대서 썼으니 어지간한 호화 빌라들은 명함도 못 내밀지요. 마침 강남 집이 준공돼서 그리로 빨리 들어가야 할 형편이니까 가격도 다소 융통성이 있을 겁니다. 장담은 못하지만, 한 장 밑으로도 분질러볼 수 있어요." 한 장이라면, 10억이었다. 놀랄 금액은 아니었다. 집이 크면 더 올라갔고 좀 아담하다 싶으면 한 장 이쪽 저쪽인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어제는 다른 부동산 사람을 데리고 이 근처 몇 집을 둘러보았었다. 어제는 가랑비가 내렸었는데도 저택들을 담고 있는 우중풍경이 그를 압도했었다. 깨끗한 것은 비에 젖어도 깨끗했다. "오늘 볼 집이 서너 개 더 있다면서요. 다음 집으로 가세요."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있는 그를 조심스레 살피던 그녀가 얼른 부동산 남자의 말을 자르고 자동차를 세워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동산 남자가 성급하게 굴었던 것이다. 아직은 가격을 말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겨우 한 집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느라 굳어 있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문대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의 집 순례에도 그가 할 말의 범위는 "괜찮군"이 전부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입을 벌리면 집에 관한 수많은 상념들, 그의 온 생애가 다 묻어 있는 그 복잡한 상념의 가닥들이 새 나올 것 같았다. 사소한 것은 일부러 들켜주지만, 그러나 정말 간절한 것은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법이었다. 그에게 집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만큼 간절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두 사람이 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아파트는 결혼 전 그녀가 혼자 살고 있던 집이었다. 아내와 장모가 그리고 두 딸까지 모두 다섯 식구가 살던 그의 아파트보다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는 정확히 두 배가 넓었다. 결혼한 후 그녀는 자신이 살던 집에 그가 들어온 형식인 것을 언제나 미안하게 여겼다. 그럴 때도 그가 하는 말은 똑같았다. 괜찮아. 그 말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화가의 작업실이 아파트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어색하니까 넓고 환한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녀가 여러 차례 물어왔을 때도 그는 무덤덤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괜찮아. 집문제만이 아니라도 그의 "괜찮군" 혹은 "괜찮아"라는 대답은 두 사람의 일상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유보의 뜻에 숨어서 한 번 더 스스로를 정리해봐야 할 만큼 그에게는 그녀와의 생활이 생각보다 낯설고 힘들었다. 자신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한다는 것에 대해 그 스스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였겠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괜찮아, 를 경우에 따라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이 보였다. 어느 때는 긍정으로, 어느 때는 부정으로 그녀에게 해석되어지는 자신의 괜찮아, 가 그의 새 생활에 기여한 공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만약 괜찮아, 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갈팡질팡했을 것이고, 예민한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마음을 들켜버렸을 것이고, 그리하여 다시 예전처럼 뒤죽박죽이 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 다음의 행로는 불을 보듯이 뻔했다. 그는 새롭게 살 수도 있었을 생의 마지막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고 본래의 그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그가 그토록이나 벗어버리고 싶어했던, 불과 열 달 전까지만 해도 둘러쓰고 있었던 저 무겁고 낡은 삶의 외투를 다시 돌려 받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열 달 전 그날,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요하게 말했었다.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그 순간 그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쳐버릴 뻔했었다. 다행히 그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별다른 이탈 없이 순탄하게 제 궤도를 밟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연애가 그에게 짧은 한 순간 대단히 수상쩍은 것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뺨언저리로는 가을 찬바람 같은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었다. 난 너랑 결혼하지 않아. 그날 그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저는 결혼하면 좋겠어요. 그녀는 다시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식의 어긋난 대화는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굳어진 방식이었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내쳤고 그녀는 그런 남자를 늘 다소곳하게 받아주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만 새로 선보이는 연애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여자를 만나도 그렇게 했다. 세 번의 결혼도 모두 그런 궤도를 밟아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네번째 여자마저도 몇 달의 만남 끝에 결혼하자는 것이었다. 앞의 세 여자들이야 운명적으로 얽힐 만 했다고 쳐도 그녀까지 순순히 이렇게 나올 줄은 정작 그조차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세번째 결혼마저 실패로 돌아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사실 자신의 연애방식 따윈 일찌감치 잊어버리기로 작정한 터였다. 네번째 결혼이라니, 그것은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그는 여자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던 행복한 동반자는 술 이외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안간힘을 모두 포기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안락한 시궁창에서 마음대로 뒹굴다가 죽으리라, 그렇게 앞으로의 삶과 죽음의 시간표를 만들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시간표가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마음 속에 아무 소망도 없었다. 그때 네번째 여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색으로 말하는 작가전"이 열렸던 한 화랑에서 화랑의 여주인이 고객이라고 그녀를 소개시켰을 때도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도 만취였다. 그림을 사준다면 몇 달간 술값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었다. 살 능력이 있으시냐고 실눈을 뜨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다. 그때 여주인이 말했다. 김 선생님, 이분이 누군지 아세요? 평화그룹 아시죠? 평화, 윤 회장님 막내 따님이세요. 전시회가 끝나던 날, 그는 화랑의 여주인한테 꽤 많은 그림값을 받았다. 재작년 첫 전시회 때 친구들이 우정으로 사주었던 몇 개의 소품들을 빼고 나면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본 것이었다. 전시회에 모두 열두 명의 작품이 걸렸었지만 팔린 것은 세 점, 그중 에서도 매긴 값대로 그림을 산 사람은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림값도 흥정하는 법인데 당신 너무 비싸게 샀다고 되려 큰소리를 쳤다. 그때도 물론 술에 취해 있었지만, 술이 아니더라도 그럴 말버릇은 그가 흔히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취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재벌의 딸이 아니라 해도 그녀는 충분히 그의 마음을 끌 만한 여자였다. 지난 날의 연애방식 따윈 깡그리 잊어버리기로 다짐한 것은 사살이었지만 버릇이란 속담에도 있듯이 여든 살까지 잔존하는 법이었다. 그 전화를 시작으로 그들은 띄엄띄엄 만났다. 주로 그가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방만하게 고집을 부렸고 그녀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마포 뒷골목 돼지갈비집으로, 불광동 감자탕집으로, 종로의 싸구려 대폿집으로 순순히 나타나 주었다. 그녀가 아니고 다른 여자였다면 굳이 그런 장소만을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에 앉아 있어도 온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여자였다. 술이라면 사흘 밤낮을 식음 전폐하고 마실 수 있는 그였으나 아무리 취했어도 그녀가 재벌의 막내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네번째 결혼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어쩌면 그 사실이 잊혀지지 않아서였는지 몰랐다. 뭘 어떻게 해보리라는 야심은 분명히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재벌의 딸이라는 고운 여자를 앞에 앉혀 놓고 지저분한 술집에서 거리낌없이 술주정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은 매혹이었다. 그는 단지 매혹을 물리칠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결국 그것이 통상적인 그의 연애방식과 닮아버렸다 해도 진정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혹을 위해서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거의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셔대곤 했었다. 그래야 매혹의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탁자를 쓸어안고 넘어지기, 술집 주인이 나가라고 소리지를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기, 전봇대를 부여잡고 토악질하기, 길바닥에 드러누워 고래고래 노래부르기, 그만 좀 따라다니라고 여자 쫓아내기, 이런 것들이 매번 고정적으로, 조금씩 난폭함의 수위를 높여가며 되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쩔쩔매며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려는 남자를 가까운 호텔이나 여관으로 데려가 눕히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낯선 여관방에서 눈을 뜰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어젯밤의 광란으로 끝이 나겠지. 그랬으면 좋겠군. 이젠 정말이지 매혹도 성가셔. 어차피 매혹일 뿐인데.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끝이기는커녕 그녀는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서른 다섯이 되도록 혼자 살아왔던 재벌의 고집 센 막내딸이, 세 번씩이나 결혼한 가난한 화가한테, 그것도 마흔 세 살의 지독한 술주정뱅이에게 결혼하겠다고 자신이 먼저 말했던 것이었다. 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매혹이었지만, 그때부터는 공포였다. 그는 문득 여태까지의 만남이 자신의 의도였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던 그는 그날 일찍 그녀와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그녀에게 던진, 난 너랑은 결혼 안해, 라는 마지막 말은 오랜 습관이 빚어낸 의미없는 그물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를 낚기 위해서 지난날 그는 얼마나 많은 반어법을 구사했던가.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을 벌기 위해 우선은 익숙한 방식을 구사했을 뿐이었다. 부동산 남자가 데리고 간 다음 집은 그 동네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거의 숲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넓은 정원 속에 동그랗게 들어앉은 집은 첫눈에도 아주 특별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조각가래요. 설계도 직접 했고 지을 때 자재 하나까지 일일이 간섭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예술적 감각이 있어요." 예술적 감각이라는 말에 그는 새삼스레 부동산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사무실 이름을 무슨 무슨 부동산 프라자, 로 붙이고 있는 그 또한 현대적 감각이 넘칠 법한 젊은 사람이었다. 자동차를 주차시키느라 조금 늦게 다가온 그녀한테 남자는 다시 한 번 조각가 운운하며 집을 설명했다. 산에 박혀 있던 큰 바위 밑의 약수터까지 고스란히 정원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과 본채 뒤로 조각가가 기거하며 작업을 했다는 사랑채가 별도 건물로 지어져 있어서 단층건물이라 해도 결코 실내평수는 좁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그녀에게만 덧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 남자 역시 일찌감치 돈을 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녀한테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반듯한 자세, 겁내지 않는 눈길, 단정하게 앞으로 모은 두 손. 거기에다 출신성분을 나타내는 몇 가지 고전적인 특징까지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맑고 하얀 피부, 여릿여릿한 몸매, 가늘고 긴 손가락 등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금은 남루한 중년사내의 행색에서 거의 벗어나 상당히 여유롭게 보이긴 하지만 그녀에 비하면 그는 아직도 저 술구덩이 속에 빠져 패악을 일삼던 과거의 체취를 온전히 다 씻어냈달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출신성분을 개의치 않게 되는 때에 이르면 체취 또한 변하리라는 것을. 출신성분을 나타내는 요즘의 징표야말로 얼마나 다양하고 독창적인가. 머지않아 사람들은 그가 보여주는 징표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 해도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우니까. 조각가의 집은 그러나 빈 집이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대문이야 훌쩍 뛰어넘으면 그만일 만큼 아주 낮았지만 저만큼 보이는 안채의 현관문에 사람 기척이 나지 않는데야 무작정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낮은 대문과 낮은 울타리는 넓은 정원 여기저기 놓여 있는 주인의 조각작품들을 감상하라는 배려인 듯했다. 조각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혹시 했는데 조각을 보니 틀림없었다. 그는 부동산 남자의 소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집주인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 집은 들어가볼 필요도 없었다. 대학선배이기도 한 조각가는 강물이 흐르고 앞동산 뒷동산이 다 울울창창한 시골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조각가의 꿈을 훼방하는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조각가는 다만 돈을 쏟아 부을 멋진 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울 복판에 잘 지었다고 소문난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자연이 모자라다고 엄살인 선배를 향해 그는 접시를 던진 적이 있었다. 작년인가, 무슨 시상식의 뒷풀이 자리에서였다. 세번째 아내가 축농증 수술을 받던 날이었고, 그 수술비도 아내의 봉급에서 충당했으므로 몹시 괴롭던 날이었다. 그날 음식을 뒤집어쓰고 너무나 황당해 말을 잃은 조각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랬던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 집흥정을 하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조각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시소의 양 날개가 공중에 비슷한 각도로 떠있을 때만 진심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포즈였다. 이해였는지 오해였는지 영원히 판독되지 않는 삶의 포즈. 어쨌든 이 집을 사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는 그녀를 돌아보며 예의 한마디를 던졌다. 괜찮군. 다른 땐 바로바로 해석하더니 이번의 괜찮군, 은 모호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업실이 별채 건물로 딸려 있는 예술가의 집이므로 사게 되면 괜찮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예술가의 집이란 이런 것 이상이어야 하니까 그저 괜찮은 정도임을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녀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전혀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밖의 다른 일이 전부 그녀 주장대로 처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은근하고 다소곳하게, 얼마라도 기다리면서 결국은 그로 하여금 그리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만만찮음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다음에 한 번 더 볼까요, 아니면^5,5,5^." "아니, 괜찮아. 그럴 필요 없다구." 그는 먼저 자동차 쪽으로 가면서 의사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혹시 라도 선배 조각가의 귀에 자신이 집을 보기 위해 다녀갔다는 소리가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였다. 머지않아 이런 식의 주눅 든 생각에서도 벗어나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자국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말은 누구한테도 해본 적이 없으나, 그녀한테서 결혼 제의를 받고 돌아오면서 그가 내내 떠올리고 있던 생각은 어려서부터 무수히 많이 들었던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였다. 연달아 과거에 낙방하는 통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 한 선비가 마지막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내 목을 매 죽기로 결심을 하였다는, 그러나 아리따운 처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재산도 얻었는데 알고 보니 그 처녀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천 년을 기다려온 지네였다는,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고 있는 그 오래된 옛날 이야기가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 이야기에 매달리는지 생각해보았다. 동시에 네 번째의 결혼을 선택하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네 번씩이나 하게 되면 무엇이 결혼에 합당한 사랑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법이었다. 결혼이라는 당위를 놓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 사랑은 충분하지 않은가 짐작할 뿐이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랬듯이 사랑은 저 혼자 눈덩이처럼 구르며 부피를 늘려갈 것이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놓아두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그가 더 많은 시간을 바쳤던 화두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아직도 생의 욕망이 남아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세번째의 결혼이 별거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음을 시인했었다. 실제로 그는 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술이 불러온 수전증으로 붓을 들기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게다가 착한 여자들을 세 번씩이나 지옥으로 밀어붙인 그의 혼인 경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 증거들은 그가 보아도 확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의 상처들을 응급치료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조차 전혀 없는 빈털털이였으므로. 그래서 그는 아내나 친구들을 졸라 얻어먹는 소주 몇 잔이 자신의 인생과 대체되는 것을 속수무책인 상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욕망을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간단했다. 꿈을 꾸지 않으면 되었다. 내일에 대한 꿈을 꾸지 않으면 굳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유화물감과 붓들을, 그리고 엉망으로 구겨진 지나온 인생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욕망을 버리고 술만 구하면 되는 간단한 그 삶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네번째의 결혼이 이 나쁘지 않은 삶보다 무엇이 더 나을 것인지를 계산해야만 했고, 새삼스럽게 절벽을 기어 올라, 상처에 옥도정기를 바르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표정을 바꾼 다음, 의미있는 무엇을 해보겠다고 덤빌 욕망이 그에게 남아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것을 알아내는 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닷새 동안 그는 밥 대신 소주를 마셔가면서 '지금의 나'를 부수고 '내가 아닌 나'로 다시 설 수 있을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이번에 시작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전제만 없었더라도 닷새의 시간은 덜 치열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그에겐 물러날 자리가 단 한 치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을 듯이 생각하다가 방바닥에 푹 쓰러져 잠이 들면 하루가 갔다. 눈이 뜨이면 다시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 소주로 밥을 삼고, 소주로 정신의 길을 개척해가며 또 곰곰히 생각을 계속했다. 그렇게 닷새를 지내고 그는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생의 밑바닥을 뒹굴며 벌레처럼 살기로 작정했을 때 삶의 이야기들은 다 지워버렸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다 지운 것이 아니었다. 천 년 묵은 지네의 옛 이야기는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왜 그것을 남겨 두었을까. 아니, 왜 그것은 홀로 남아 있었을까. 닷새 동안 머리 속을 윙윙거리던 말벌레 같던 생각들은 일시에 그 질문 하나로 귀속되었다. 그는 차근차근, 그리고 정직하게 이제는 하나가 된 질문을 응시했다. 나는 벌레처럼 살고 싶지 않았으며, 내일을 위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도 않았으며, 흰 눈처럼 순수하게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벌레였고 꿈은 악몽이었으며, 배척 당하는 까마귀였다. 그러므로 내 속에 홀로 남겨진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는 말하자면 주술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서는 그거에의 모방을 향한 욕망이 있었다. 감염 당하고 싶다, 라고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이 비명이 어디 나만의 것이었던가.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가 수 천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비명이 얼마나 길게, 얼마나 많이 내질러졌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히 인류사적인 욕망이 아니던가.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므로, 네 번째 결혼이라는 제의를 통과해서 '다른 나로 변하고 싶다'라는 비명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운명은 내게 놀랍게도 썩은 동앗줄이 아닌 튼튼한 동앗줄을 내려 보내주고 싶어하는 것이다^5,5,5^. 생각은 끝났다. 그는 후둘거리는 몸을 일으킨 다음 냉장고를 뒤져 요기부터 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소주로 헹궈낸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그는 뾰죽해진 얼굴을 부비다가 다시 거울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꼬리에 말간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가 기척도 없이 울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많이 울지는 않았다. 그가 거울에서 시선을 떼버림과 동시에 눈물도 그쳤다. 그는 알고 있었다. 거울 속으로 들여다 본 아까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본 자신의 과거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볼 때, 그때 그는 이제까지의 그가 아닐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나가 되기 위해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세 번째 아내를 만나는 일이었다. 별거 다음은 이혼이라는 것은 아내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세 번째 아내한테서만 자식 생산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처음의 둘은 자식을 낳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후다닥 깨져버렸다. 깊이 들어가면 좀더 근본적인 이유도 나올 터이지만, 세 번의 이혼은 모두 그의 무능과 세상과의 불협화음에 원인이 있었다. 아내들은 운좋게도 모두 착하고 성실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악하고 불성실했던 쪽은 아니었다. 그는 어쨌건 알고 있는 방식대로는 최선을 다했었다. 잘못이 있다면 꼬일 대로 꼬여서 도저히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게스리 헝클어져 버린 운명에 있었을 터이지만 그런 소리는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그는 원래 하나마나한 불평을 늘어놓는 대산 자진해서 최악으로 달려가버리는 스타일이었다. 세번째 아내는 묵묵히 이혼 수속에 동의했다. 그는 네번째 결혼을 할 것이며 아이들 양육비는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네번째 결혼이라는 말에 세번째 아내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여자가 차린 밥상을 뒤엎은 것이 얼마며 이 여자의 얼굴과 팔을 후려친 것은 또 몇 번이었는지를. 세번째 아내는 여학교 선생님이었다. 숱 많은 눈썹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던 섬세한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풀로 붙인 듯 눈썹은 굳어 있고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 동안 꿈을 버리고 살아온 쪽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아내 쪽이었을 것이었다. 장모는 딸 대신 그의 아이들을 키워주기 위해 함께 살았었다. 아내를 때리면 아내 대신 장모가 달라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이 후레아들놈아, 니 놈이 우리 딸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려어^5,5,5^. 아무것도 해준 게 없고 앞으로도 해줄 가망이 없어 아내를 때리는 것임을 어떻게 노인이 알 수 있으랴. 이혼하면서도 아내에게 줄 아무 것도 없는 그였다. 아파트가 있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아내 몫이었다. 그 아파트의 벽돌 하나도 그의 노동으로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는 다만 두 딸과 걸레처럼 너절너절한 과거만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이혼하는 태도였다. 그는 세 번의 이혼 모두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떨구지 않고 처리한 셈이었다. 결혼생활을 더 계속해주는 일이 미안한 일임을 그도, 아내들도 다 알고 있었다. 부동산 남자가 데리고 간 다음 집도 빈 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부동산 남자가 열쇠꾸러미를 뒤져 대문을 직접 열었고 현관문 앞에서도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 해서 문을 열었다. 집 주인이 외국인 부부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들은 지금 본국에 일이 생겨 이 나라를 떠나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외국인 부부는 돌아오더라도 아파트를 얻어 나갈 것이고 그 사이 가능한 한 빨리 집을 팔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집주인의 생각이라고 했다. "집 안에 수영장이 있거든요. 이렇게 큰 집은 매물로 나오는 일도 드물지만 나와도 잘 안 팔립니다. 전엔 수영장이 있다면 굉장한 집으로 쳤지요. 요샌 안 그래요. 헬스클럽 회원권이 그런 따윈 다 해결해 주니까요. 사람들이 어떤 집을 원하는지 요샌 저도 모르겠어요. 하도 변화무쌍해서요. 정 안 팔리면 주인이 다시 들어온답니다. 주인은 양재동 빌라에 살고 있거든요. 단독두택에 살다보면 신경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저 아래도 평당 천만 원을 부르는 빌라를 분양하고 있습니다만, 가보실 테면 안내하겠습니다. 꼭 주택일 필요가 없다면 빌라도 한 번 고려해보십시오." 빈 집이어서 부동산 남자의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는 남자를 뒤로 떼어놓고 먼저 집 안을 휘둘러 보았다. 대지 자체가 비탈이 져 있던 탓인지 앞에서는 이층이었는데 들어와 보니 삼층인 구조였다. 온 집을 유리로 지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거실이건 방이건 한쪽 벽은 모두 대형 페어글라스였다. 커튼을 젖히고 들어 앉아 있으면 집인지 산 속인지 모를 만한 풍경은 대단했으므로 그는 뒤에 그녀의 시선이 있다는 것도 깜박 잊고 오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떤 값을 부르든 창이 담고 있는 전망의 가치로서는 결코 과할 게 없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전망을 위해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만한 금액을 기꺼이 지불하는 부류도 있는 법이었다. 집을 구하면서 수돗물이 잘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확인하고, 앞집 감나무 그늘이 안방 창문을 가리는지도 점검해야 하고, 비가 오면 하수구가 잘 막히는 집인지도 탐색해야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었다. 세번째 결혼 중에 그는 처음으로 아파트 분양이라는 것을 경험했었다. 물론 처음부터 아내의 이름으로 부금을 부었고 아내의 이름으로 분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때부터 그와 함께 산다는 전제까지 포기하고 아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는 법적으로 집을 소유할 만한 소득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정상적인 월급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놀고먹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안 팔리는 화가였지만 무명화가가 할 수 있는 온갖 아르바이트는 다 섭렵했다. 그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세상에 완벽하게 놀고 먹는 사람은 없다^5,5,5^. 마침내 새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그는 스물 다섯 평이라는 공간이 그처럼 알뜰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랐다. 도대체 어디 한 군데 빈틈이라곤 없었다. 그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수없이 고민했던 면의 분할이란 것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는 집의 내부 공간만 보았었다. 앞 동에 가리워져서 오후 두 시가 넘어야 기갈 난 햇볕이 한 줌 들어온다는 것도 흠으로 보이지 않았다. 거실이며 방마다 제 규격대로의 반듯반듯한 창문이 달린 것만도 신통했다. 손바닥만한 창도 낼 수 없어서 사면이 벽인 방을 그는 수없이 경험했었다. 한 군데씩 잊지 않고 뚫어 놓은 것만도 참 대견했다. 그 창이 어떤 풍경을 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평생 거론하지 않을 줄 알았었다. 그것에 앙탈을 부릴 생각도 없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 또한 가끔씩은 제대로 누리며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지은 지 꽤 오래 됐나 보죠?" 그녀가 부동산 남자한테 묻고 있었다. "글쎄요, 십 년 이쪽 저쪽일 거^36^예요." "아녜요. 그 이상이에요. 통유리 스타일도 구식이고, 벽이며 마루 자재도 한물 간 것들이에요. 정작 살면 불편할 게 많을 것 같으네요. 개조공사비가 신축비만큼 들겠어요." 단호한 말도 그녀는 조용조용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단호하게 들렸다. 부동산 남자가 뭐라 대꾸할 말을 찾는 동안 이번엔 그에게 물었다. "십 년 지났으니 건물값은 요구 못할 거^36^예요. 땅값만으로 살 수 있어요. 마음에 드세요?" 그가 넓은 창들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음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이 집을 살 수도 있다고. 어제나 오늘 본 집들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좋고 낮음이야 있었지만 기본적인 하자 사항들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주인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느냐의 차이뿐이었으므로 애시당초 이만한 저택을 상대로 취향을 기르지 못한 그한테는 아무것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란 그녀한테 아무것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결혼하면서 그는 새로운 자기를 주체적으로 연기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과거와의 결별이 쉽지 않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 속에 자기를 집어 넣어야 하는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매순간마다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위치 이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역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썩 괜찮은 것은 아니고^5,5,5^." 그녀는 깊은 시선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냥 돌아섰다. 시선이 깊어졌다는 것은 마음 속 생각이 무겁다는 의미일 터였다. 겉으로야 화가가 구상하는 집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니까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전부 알지 못해서 불편할 일은 없었다. 지금처럼 혼탁한 시대에서는 맑은 시냇물처럼 환히 속을 보여주며 흘러가는 마음이야말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일그러져 버린다. 그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었다. 껍질은 깨부숴야 할 폐기품이 아니라 때때로 기어들어가 마음을 숨겨야 하는 피난처인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야말로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만이 아니고 그녀의 가족들도 제각각 마음 속에 훌륭한 동굴 하나씩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할 것임은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장인을 비롯한 처가식구들과 대면하던 날 그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냉대를 기대했었다. 그것은 이 결혼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기에 눈곱만큼도 억하심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종 어리둥절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정중한 대접이었다. 무든 식구가 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랬다. 식탁에서의 대화는 화기애애했고 늙은 회장의 미소는 자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두 사람의 결혼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지나가던 과객이 무심코 들려 식사 한 끼를 대접받는다면 그랬을까, 그녀조차도 자신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다는 투였다. 너무나 완벽한 분위기였으므로 그는 처가집에 대해 갖고 있던 경계심을 스르르 풀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식은 어디 깊은 산 양지바른 곳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치뤘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은 결혼식에 처가 식구들이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결혼식은 그의 별 볼 일 없는 친구들만 참석한 가운데 강원도에 살고 있는 선배화가의 시골 뜨락에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요란한 친구들의 세련되지 못한 결혼축하 풍경만 넘치게 제공했을 뿐 한없이 초라한 결혼식을 치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더 기쁘다고 했다. 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에 대한 슬픔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없는 표정이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설날에도 그녀는 혼자 친정에 갔다. 같이 가자는 말 대신 그녀는 말했다. "잠시 집에 다녀올 게요." 말대로 잠시 다녀오기는 했다. 그러나 왜 혼자 세배를 가야하는지에 대해선 그 후에도 한 마디 설명이 없었다. 그녀는 때때로 친정에 갔지만 그때마다 잠시 다녀올 게요, 로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더 이상 알리고 싶지 않다면 그도 더 알고 싶어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도 그녀처럼 했다. 사실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의 부피만 대보자면야 그를 당할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그들은 공유할 것이 전혀 없는 과거보다 현재를 더 많이 이야기하기로 약속한 셈이었다. 그것은 몹시 현명한 처사였다. 시시콜콜히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니까 우선 불필요한 오해가 사라졌다. 매끄러웠다. 뜻하지 않게 허방을 만나 나뒹구는 일도 없게 되었다. 진실을 다 보이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충고도 없다는 것을 그는 그녀를 통해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 배운 삶의 기교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내부는 순탄했지만, 정작 바깥은 그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몇몇 잡지나 신문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화가였던 그를 잡지나 신문이 취재하고 싶어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림으로가 아니라 네번째 결혼으로 그는 갑자기 유행해지고 말았다. 소외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는 놀라운 세상의 반응이었다. 소문도 많았다. 그가 마침내 네번째 결혼까지 실패하고 말았다는 내용까지 유포되고서야 겨우 가라앉은 소문들은 대개 악의적이었다. 처음에 그는 떠도는 소문 속에서 사람들의 악의만 읽었으므로 조금 불쾌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을 수긍했다. 술주정뱅이 폐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유복한 예술가의 모습을 탈바꿈한 그의 변신은 고여 있는 그들 일상에 저질러진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불현듯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실재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얻고자 애쓰는지. 얼마나 많은 꿈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현실에의 탈출에 바쳐지는지. 희망도 없이 눈 뜨는 아침, 문득문득 솟구치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외로운 질문들, 질주하는 현실의 속도감을 이길 수 없어 아뜩해지던 삶의 빈혈. 그랬다. 그들 모두 진실로 새롭게 살 수 있는 피가, 신선한 피가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현실은 악성빈혈이었고 사람들은 수혈을 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모두 더 이상 세상과 적대관계에 있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돌연 세상과 화해했음을 선언했다. 그들 모두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변신에 그가 운좋게 성공했다. 사람들은 아연했다. 하필이면 그가, 하는 기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무력한 스스로를 혐오하는 대신 그를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형식은 타자에의 비난이지만, 내용은 자기에게로 가는 혐오라고 그는 이해했다. 그랬으므로 사람들의 온갖 소문에 대해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전의 그처럼 무명화가이고, 예전의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친구였다. 한 시절, 그들 두 사람은 혈육처럼 가까이 맺어져 있었다. 똑같이 나누어 가진 불행은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게 하기 족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사람들'과 그 친구는 다르다고 믿었으므로 전화가 몹시 반가왔다. "왜 연락도 안 해?" 하고 타박하던 친구가 이어서 "너 진짜 또 파토낸 것 아냐?" 라고 소문의 내용을 옮겨 주었어도 그는 허허 웃었다. 그는 유일한 친구였다. 말 속에 함정을 파놓을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친구와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은 뒤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 나갈 일이 생겼어." 그녀는 어딜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입고 나갈 옷과 갈색의 순모 베레모를 내놓았다. 그 모자는 그녀가 사다준 여러 개의 모자 가운데 가장 수수해서 그녀와 다닐 때는 늘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냥 보기 좋아서 샀다지만 단순히 심심해서 모자를 샀을 그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모자를 씌우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을 그는 받아들였다. 다른 약속이었다면 모자를 쓸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봤겠지만 친구를 만나는 자리였으므로 그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국전 심사위원같구나." 베레모를 본 친구의 반응은 생각대로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차 한 잔씩을 마시고 곧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저녁부터 먹자고 했으나 친구는 바로 술집으로 갈 것을 고집했다. 그렇다면 좋은 안주와 향기로운 술을 친구에게 사주고 싶었던 그였다. 그러나 친구는 "안 먹던 것 먹으면 목구멍에 가시 박힌다"면서 예전에 그들이 잘 갔던 종로 뒷골목의 단골 대폿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살찐 쥐들이 어슬렁거리고 질척질척한 바닥이 바지가랑이를 적시는 뒷골목을 걸어가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더 나은 데서 먹을 수도 있는 것을 굳이 거절하는 친구가 예전의 친구 같지 않아서였다. 예전엔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왕창 마셔대곤 하지 않았던가. 돈이 좀 있으면 좋은 술집으로, 돈이 없으면 병소주만 마셔도 되는 집으로 스스럼없이 몰려가곤 했었는데 친구는 새삼스럽게 구는 것이었다. "그림은 잘 돼가냐?" 서로의 잔을 가득 채운 다음 친구가 물었다. 네번째 결혼 후 외출을 삼가며 집에서 작업만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지금은 손연습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친구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친구라면 그가 지금 손연습 중이라는 것쯤이야 짐작할 만한 위인이었다. "빠이프?" 그가 파이프를 꺼내 엽초를 꾹꾹 채워 넣는 것을 보고 친구가 물었다. "응. 들여마시질 않으니까 이게 나을 것 같아서." 그는 간단히 대답하고 성냥불을 그어 오래오래 파이프에 불을 댕겼다. 친구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채웠다. 그가 얼른 술병을 잡았으나 이미 잔은 채워진 뒤였다. "지난 달 김가 전시회 오픈 때 가봤더니 네 이야기들 많이 하더라. 너도 없고 해서 바로 오려다가 김가 말버릇이 하도 고약해서 술 먹고 깽판 좀 쳤지. 나뭇가지 붙이고, 쉿조각 매달아 놓고 쓱 내걸면, 그게 작품이 되냐? 그게 또 명작이라고 신문마다 좍 깔렸더라. 눈 먼 세상^5,5,5^." 친구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것은 친구의 버릇이었다. 못마땅한 일이 생기거나 기분이 더러우면 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친구의 헝클어진 머리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썰렁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도 그랬을지 몰랐다. 그들은 늘 그렇게 살았다. 자신이 어긋나버리는 까닭은 자기에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남한테 있다고 불평하며 사는 데 익숙했었다. 세상은 자꾸 변하는데 웅덩이처럼 고여 부패해가고 있는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기 두려웠던 시간들이었다. 비굴한 태도였지만, 그때는 비굴해지지 않으려고 더 비난과 불평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시는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고 그는 홀로 중얼거렸다. "자, 마셔라. 네가 없으니 어디 술맛이 나야 말이지. 오늘은 한 번 실컷 마셔 보자." 친구는 자신의 잔을 그에게 주려다가 멈칫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이내 잔을 거두어 제 앞에다 놓고 철철 넘치게 술을 부었다. 그의 잔은 아직 반도 비워지지 않은 채였다. 첫잔인데 그랬다. 그는 친구와 소주 두 잔 이상은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결혼하면서 유일하게 내세운 다짐이 술에 관한 것이었다. 망가진 몸이 회복된 후에 반주 정도로 마시는 것은 좋으나 당분간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흔쾌히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그는 금주의 결심부터 단단히 세우고 네번째 결혼에 이른 사람이었다. 술이 희석시킨 흐리멍텅한 정신 말고 부릅뜬 눈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술이라면 남들이 평생 마셔도 다 마시지 못할 만큼 실컷 마셨다. 더 이상 술에 미련은 없었다. 이제는 술 다음의 무엇을 정복할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술만큼은 친구에게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심을 정직하게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라면 그의 진심을 이해해 줄 것이었다. "그래, 네 번씩 이혼할 수는 없지." 역시 친구는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친구의 잔이 빌 때마다 충실하게 잔을 채워주는 것으로 자신의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의아해졌다. 순순히? 과연 친구는 순순히 그의 말을 이해해 준 것일까. 저렇게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우는 친구의 마음은 지금 어떤 무늬일까 그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러나 친구는 한 번도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친구는 단지 술을 너무 빨리 마시고 있었으며, 안주와 새 술을 청하는 태도가 이유없이 거칠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친구를 살폈다. "박가가 뉴욕 간다는 소식 들었니? 스폰서가 생겼대. 기집애처럼 하얗게 생긴 얼굴로 누굴 하나 잡은 거지. 그런 짓을 해서라도 꼭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건지 정말 헷갈리대. 다들 썩었어. 악취가 나." 친구는 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친구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드런 놈들" 하고 후렴구를 토해냈다. 말이 과격해지는 것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는 표시였다. 이제부턴 과격한 언행의 수위를 높였으면 높였지 결코 자제는 하지 않을 시간의 시작이었다. 친구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사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친구와 쌍동이처럼 말하고 행동했었다. 지금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해도 분명 그 또한 타락한 욕망을 숨긴 채 무의미한 비판만을 일삼던 나날 속에 던져져 있었다. 일상의 무가치한 반복을 견딘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는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아^36^예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 친구를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병신들." 일본 초대전에 작품을 낸다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는 그렇게 씹어 뱉듯이 말했다. "막노동을 해서도 먹고 살 수는 있어! 자존심을 팔지는 않을 거야." 그림을 집어치우겠다고 소리치면서 친구는 입귀를 실룩이며 차라리 막노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친구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어느 순간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언제까지 이해를 요구하며 살 것인가. 저런 어깃장, 저런 억지의 뿌리에 자기도 기생해서 살았다는 것을 떠올리자 울적해지고 말았다. 그는 친구의 잔에 술 부어주는 것도 잊고 파이프 연기만 울컥울컥 토해냈다. 그때였다. "에이, 그놈의 빠이프!" 그렇게 부르짖는가 했더니 갑자기 친구는 그의 입에서 파이프를 확 뽑아내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도록 모욕을 느꼈다. 그러나 친구는 자신이 더 화를 내며 의자가 나동그라지도록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란다. 술맛이 안 나." 그는 정말 비틀거리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모욕감을 추스릴 새도 없이 따라나가 지갑을 꺼냈다. "치워, 임마. 술값은 내가 낸다. 나도 돈 있어." 그는 친구가 주머니를 뒤지는 사이 술값을 치뤘다. 그런 그를 친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눈빛에서 무섭도록 뜨거운 증오를 보았다. 차마 친구의 비틀거리는 등에 손을 얹을 수도 없을 만큼 맹렬한 증오였다. "개새끼." 친구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종로 뒷골목 어둠 속으로 비척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서 있다가 친구와는 반대방향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택한 쪽은 불빛 환한 명랑한 거리였다. 그것을 그는 가장 오랜 친구 한 사람을 잃었다. 몹시 울적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친구는 언제부터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을까. 그는 친구가 어디서부터 삐그러졌는지 생각해 보았다. 베레모? 파이프? 술? 아니면 자신의 과묵함?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다 그는 홀연 깨달았다. 하나가 아니라 그 전부였다. 친구는 처음부터 이를 악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베레모를 안 썼더라도, 파이프를 안 피웠더라도, 거침없이 술을 마셔주었더라도 친구는 역시 그에게 '개새끼'라는 욕설을 안겨주고 떠났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울적한 마음을 거두어 버렸다. 그는 변신함과 동시에 이미 지난 관계들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뜨겁게 살아보기 위해선 우선 차갑게 식히기부터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음 집으로 가기 전에 부동산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부동산 프라자입니다. 네 시에 가뵙기로 했는데 지금 가면 세시 사십 분이 될 것 같아서 양해 전화 드리는 겁니다. 괜찮겠지요? 어르신 안 들어오신 것 확실하죠? 네 그럼 곧장 가겠습니다." 부동산 남자는 시계를 보며 그녀를 재촉했다. "큰길 건너편입니다. 절대 집구경 안 시켜주시는 댁인데 아침에 전화드리니까 오후에 어르신이 병원에 가신다고 안주인이 허락을 해주셨어요. 보지면 아시겠지만 그 집은 사실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귀한 집이에요." 값을 매길 수 없는 집은 가보니 몇백 년은 실히 묵었을 고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의 구별이 엄격하고, 정원과 후원의 모양까지도 전통양식대로 생략없이 꾸며 놓아서 위세 당당한 양반가문의 가풍과 근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이었다. 부동산 남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은 경북 어디에 있던 오백 년 묵은 고가를 고스란히 옮긴 것이라고 했다. 수령이 몇백 년씩인 정원의 나무들까지 다 옮겨오는 데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었고 해체시킨 고가를 다시 복원시키는 데 또 그 이상의 노력과 돈이 들었다고 했다. "문화재급이에요. 보세요. 나무들 옹이자욱하며 저 대들보까지 요새 지은 한옥하곤 댈 바가 아니지요." 부동산 남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채의 길다란 난간에 일일이 새겨진 화려한 수련무늬에 이미 질려 있던 그였다. 전 같으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렸을 그였다. 지금이라고 그 마음이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어이 누려야겠다는 부자들의 고집은 여전히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늘하게 가슴을 가로지르는 서까래와 절묘하게 곡선을 이루며 떨어지는 지붕의 선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스물 다섯 평 아파트를 꿈으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과 수백 년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을 꿈으로 삼는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건널 수 없는 강이라 해도 강은 거기 엄연히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집을 내놓았을까요?" 단아하게 꾸며 놓은 앞뜰의 연못과 후원의 그윽한 동산까지 꼼꼼하게 둘러보고 나온 그녀가 물었다. 아른아른 사람 그림자가 비치는 노오란 장판을 손을 쓸어보기도 하고, 안방의 오동나무 삼층장과 나무 침상이 어느 장인의 솜씨인지 그것까지 다 물어보던 그녀였다. 여간해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로서는 대단한 관심이었다. 그는 건널 수 없는 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이미 강을 건너버린 모양이었다. "어르신은 병환 중이구요. 자식들은 모두 미국에서 박사 따고 교수로 있는데 자식들이 어르신을 미국으로 모시려고 그래요. 그쪽에서 치료를 받으면 희망이 있다는 거지요. 처음에는 펄펄 뛰던 어르신도 이 집을 자기처럼 아끼고 간수할 사람이 나선다면 고려해보겠다고 한 발 양보했지요. 어르신은 사실 개인한테 팔기보다 시에서 문화재급으로 이 집을 인수해주길 원하시지요. 그만큼 이 집에 애착을 갖고 있으신 분이에요." 그런 다음 부동산 남자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인 어르신이 왕년에 세도가였어요. 장관을 두 번씩이나 지낸 분이고 장관직 물러난 다음에는 굵직굵직한 국영기업체 회장으로만 돌아다니신 분이라니까요." 남자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서 늙은 세도가의 이름을 말했다. 물론 그도 적잖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녀한테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친숙한 이름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최 회장님^5,5,5^."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면서 그는 문득 불안했다. 최 회장 집을 보고 나온 후 그녀는 아직 그한테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어떤 집이건 일단은 그의 반응부터 기다리던 그녀였다. 지금 그녀의 마음이 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어느 순간 강렬하게 그녀의 실체를 만지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는 참았다. 그가 알 수 없는 어떤 먼 곳, 그녀는 너무 멀리 있다. 그는 아마 영원히 그녀한테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들은 부동산 프라자로 돌아왔다. 남자는 여직원에게 맛있는 커피를 석 잔 부탁하고서 두툼한 노트를 가져왔다. "아마 이 근처의 적당한 매물들은 거의 다 본 셈일 겁니다. 조급히 생각 마시고 천천히 결정하세요. 일이억짜리 집이야 후다닥 사고 팔지만 이런 집들은 저도 절대 재촉하지 않아요. 제가 일해보니까 이 동네 집들은 돈이 있다고 아무한테나 팔리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집의 운명이 있다고 할까요. 가만히 놓아두고 있으면 생각도 못한 곳에서 임자가 나타나요. 그래서 전 집주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집이 더디 팔리는 것은 어딘가에 살고 있을 미래의 집임자한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그런 거라구요." 집의 운명.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커피잔을 감싸쥔 채 그를 바라보았다. 집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을 떠올리고 있을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담담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담담한 눈빛이, 잔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행동이 부러웠다. 그가 도달해야 할 먼 곳은 아마 저 담담한, 저 잔잔함일 것이었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서 전혀 다른 나로의 변신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을 것이었다. "최 회장님 댁은 어떻습니까?" 부동산 남자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 그녀는 잠시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 주목시키는 힘이 그녀의 태도에는 있었다. "사실은, 제 부모님이 평소에 최 회장님 댁에 관심이 많으셔서 여쭈어볼까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최 회장님 댁에 혹시 변동이 생기면 제게 전화를 해주세요." 부동산 남자의 두툼한 노트에 전화번호를 적고 난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저희가 그 집에 들어가 살 수도 있을 거^36^예요.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전 그럼 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곳엔 집의 숨결이 있더군요." "그럼요, 그럼요. 진짜배기 집이지요. 누구라도 한 번쯤은 살고 싶은 집이 바로 그 집입니다." 부동산 남자는 열심히 그녀의 말을 지지했다. 남자는 이제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정체를. 부동산 중개가 직업인 사람의 직감이 맡아내는 그녀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 그러면 부동산 남자가 추정하는 자신의 정체는 또 어떤 것인가. 그는 차가 떠날 때까지 유리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들을 배웅하는 부동산 남자의 아무 그늘 없는 활달한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그는 그 그늘 없음이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부러웠다. "내일 다른 동네로 가볼까요?" 능숙한 운전 솜씨로 차선을 바꾸면서 그녀가 물었다. 그는 대답할 시간을 벌기 위해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차 창문들을 활짝 열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녀의 옆모습을 그는 한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저만큼 앞에서 붉은 신호가 들어오고 그녀는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당신 혹시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 알아?" 그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문득 그렇게 말해 버렸다. 운전대에 얹혀 있는 흰 손, 바람에 나부끼는 싱싱한 머리칼,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 부드럽고 둥근 어깨, 그리고 이 편안한 자동차. 그런 것들이 아마도 그런 말을 하게 시켰을 것이었다. "그건 왜 물으세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스위치를 눌러 창문을 닫았다. 일시에 소음이 사라지고 고요가 가득 넘쳐왔다. 그는 이제 파이프도 꺼버렸다. 연기가 고요를 흐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을 마친 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 천 년 묵은 지네가 아닌가 해서." "그래요?" 그뿐 그녀는 한동안 운전에만 열중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전 내내 당신이 지네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천 년 동안 사람이 되기 위해 기다린 지네 말예요." 내가? 내가 지네라고? 천 년 묵은 지네에게 단지 선택 당했을 뿐인 비참했던 선비가 합당하면 합당했지 지네라고? 그는 허허, 웃으려다가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가끔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녀도 이 삶의 제비뽑기로 얻어진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네가 기다려야 했던 천 년 이란 기간은 어쩌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첨단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멸망이 이야기되고, 어제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연결한 끈이 사라져 버린 아슬아슬한 오늘이야말로 천 년을 다 채운 최후의 때가 아닐까. 그는 더욱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녀한테 동지애를 느낄 수 있을까^5,5,5^. 자동차는 이윽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직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향해 그녀가 아까의 물음을 다시 던졌다. "내일 바쁘세요? 이쪽이 마음에 안 들면 강남도 있으니까요. 괜찮은 집은 오히려 그쪽이 더 많을 거^36^예요." 이제는 정녕 그가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괜찮군, 같은 애매모호한 서성거림 말고 중심이 깃들어 있는 말, 그런 말을 그는 찾아내야만 했다. 그 말이 가슴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었을까, 그는 한동안 두 손으로 가슴을 문대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좁은 자리에 간신히 주차를 끝냈고, 자동차의 시동을 껐다. 그리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 그는 온 정신을 다해 또박또박 가슴의 말을 꺼냈다. "아니. 다른 데는 필요없어. 집을 새로 짓겠어. 내일 그 동네 다시 가서 집 지을 땅을 알아보는 거야." 그는 자신의 말에 마침표를 찍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 열목어 우는 소리 * 양문길 41 년 경북 경주 출생. 중앙대 예술대 졸업 60 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이류항" 입선 66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부두주변" 당선 창작집 "풍화", "보호받는 풍경", "한웅큼의 빛" 수필집 "생각의 수레바퀴는 구른다" 출간 BRACHYMYSTAX LENOK. 연어과의 민물고기. 조사된 개체 수는 174 마리. 몸길이가 300mm 안팎인 것도 있고 때로는 1m가 넘는 것도 발견된다. 몸의 바탕색은 노란 갈색, 자주색의 작은 얼룩무늬가 등 쪽에 많다. 물이 맑고 오염되지 않은 찬물에 살되 BOD 9PPM이 넘어야 한다. 강원도, 충북, 경북 등에 분포했었지만 지금은 강원도 일부 지역에만 남아 있다. 설악산과 오대산 지역에 살고 있는 열목어는 국립공원법에 따라 보호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73 호, 74 호. 눈에 열이 많아서 찬 곳을 찾아가 눈을 식힌다 하여 이 이름이 붙여졌다. 최기철, "우리 민물고기 백가지" (현암사), 1994, pp.488--491 1 어째 느낌이 심상치 않다 싶었다. 어제 마신 술 탓이려니 했는데, 기실은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순전히 하루의 운수 소관으로밖에 돌릴 수 없는 일들이 그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칫솔질을 끝내고 그는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얼굴에 비누칠을 한 다음 평상시와 다름없이 면도를 해나갔다. 거의 습관적으로 얼굴 면도를 하는데 한순간 느낌이 좀 이상했다. 뭔가가 휙 하고 입술 부근을 예리하게 긋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뿔싸 했는데, 다음 순간 윗입술에서 피가 솟고 있었다. 면도기에 베인 것이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었다. 면도를 할 때마다 극히 용의주도하게 긴장하는 그의 동작은 몸에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이날 아침, 그는 어딘가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안전면도기로 얼굴을 베는 일 따위는 결코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면도기에 입술을 베인 이 첫 신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덮쳐오는 기묘한 일들을 스스로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새빨간 피가 입술 주위로 번져나갔으므로 그는 그 부위를 물로 씻어냈다. 면도를 대충 끝낸 다음 휴지조각으로 입술에 상처부위를 한참 누르고 있자 피가 멎었다. 아침부터 피를 보다니, 뭔가 불길한 하루가 시작되려나보다 싶은 마음이 얼핏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서 털어냈다. 그럴 수도 있지. 면도를 하다가 부주의 탓으로 얼굴 한 부분을 얼마든지 베일 수도 있는 거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일은 잊어버렸다. 그는 습관대로 아내가 차려주는 빵 한 조각에 계란 프라이, 우유 한 컵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는 빠른 동작으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다음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문득 한마디했다. "입술에 그게 뭐^36^예요? 코미디언처럼^5,5,5^." "코미디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내를 향해 반문했다. 아내가 출근시간 전에 느닷없이 그에게 말을 붙인 것부터가 뜻밖이었으므로 그는 더욱이나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아내의 이같은 말붙임조차도 그날 아침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위로 손을 가져갔다. 휴지조각이 만져졌다. 피를 멈추게 하려고 붙여놓은 것이 그대로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떼내자 입술 부근이 따끈거렸다. 피는 멎어 있었다. "면도하다가 베인 것뿐이야^5,5,5^." 그는 아내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런 일이 없었잖아요?" 아내가 말했을 때, 그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일이 없었던가. 그는 한 번도 면도하다가 베인 적이 없었는가.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음 순간 그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5,5,5^."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아내가 덧붙여 말했으므로 그는 마치 한 방 맞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오늘 아침, 당신 어딘가 좀 이상해요. 전에 같지 않다구요." "뭐가 전에 같지 않아?" 그는 순간적으로 쏘아붙이듯 아내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이 말이 예상찮은 날카로움이 실려 있어서인지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뱉은 말은 마치 스스로 무엇인가를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불현듯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으로 끝내고 싶었다. 아내로부터 벗어나서 빨리 일터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직장의 일터야말로 모든 것을 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그가 말했다. "갔다올게." 그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내의 대답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다녀오세요." 평상시와 다름없는 아내의 목소리였다. 집을 나선 그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검은색 손가방이 그의 팔에 착 달라붙은 채, 출근하는 한 사람의 샐러리맨의 모습으로는,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그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아침 면도에서 입술만 베이지 않았다면 그날 아침은 늘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출근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마저 느끼면서. 그의 완벽한 출근은 그러나 집을 나서서 몇 발자국도 가지 않아 그만 완강한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가 늘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는 그날 따라 이상하게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꽁무니에 다가서며 낯모르는 앞사람에게 사정을 물었다. "아니, 이상한데^5,5,5^ 왜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죠?" 앞사람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누가 알겠수? 버스가 고장났대요. 저기, 한 대가 그냥 서 있잖아요. 빌어먹을^5,5,5^." 오, 빌어먹을.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제서야 그는 이해가 갔다. 타고 온 버스가 하필 여기서 고장이 나고 만 것이었다. 이쯤 되면 만원 버스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정해놓은 이치였다. 그는 막막해졌다.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사람들 틈에 끼여 부대껴야 하는 것이었다. 젠장, 꼴 좋다. 하루의 시작치고는 정말이지 재수 옴붙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줄의 끝에 가서 기다렸다. 그의 뒤로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마침내 버스가 왔으나 이미 타고 있는 사람들 속에 줄을 섰던 사람들이 밀려들어가면서 벌써부터 승객들의 불평소리, 아우성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대에 이미 버스에 올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버스 승강구에 오르지 않으면 지각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차츰 조바심이 났다. 버스가 사람들로 꽉 차서 그가 타지 못한 채 그냥 가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더 큰 낭패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의 버스에 꼭 승차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출근시간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그의 앞쪽에서 사람들이 영 줄어들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앞의 사람들을 밀어붙여서라도 자신이 버스 속에 타고 싶은 심정이 되어 적이 놀랐다. 그의 조바심은 마치 급상승하는 온도계처럼 빠른 속도로 치달아 올라가고 있었다. 버스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찬 것 같았다. 그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버스 안은 초만원이었다. 그런데 그의 앞쪽으로는 버스를 타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더이상 버스 안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는다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고 있는데 과연 버스의 승하차 입구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바로 그가 기다리며 서 있는 앞쪽으로 서너 사람을 남겨놓고서였다. 버스에 매달린 사람들이 할 수 없이 내려서고 있었다. 버스 출입구의 문이 완전히 닫히고 차는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낭패는 지금 그의 눈앞에서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제 틀림없는 지각이었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그리고 그것을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서 전동차로 갈아타기까지, 그의 출근시간은 한치의 여유도 없이 빠듯한 것이었다. 그로서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택시라도 잡을 양으로 서 있던 줄에서 빠져나왔다. 택시들은 이따금 지나가고 있었으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우왕좌왕하면서, 그는 그때 비로소 자가용을 마련하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친구 녀석이 장기할부로 차 한 대 사라는 것을 그는 단칼에 거절하고 만 것이었다. 출퇴근만 하려구 자가용을 소유하는 건 죄악이다, 죄악^5,5,5^ ! 그는 그렇게 호기있게 쏘아붙이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 꼴이라니, 앞을 못 봐도 한참 볼 줄을 모르는 그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는 다만 깊은 자책감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예측부지를 자책만 하고 있기에는 눈앞의 사정이 너무나 각박해서 그는 계속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택시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한참 뒤에 다른 한 대의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짐짝처럼 그 버스 안에 처넣어졌다. 몸을 실은 것이 아니라 온몸이 구겨진 채 마구 처박혔다고 하는 편이 거의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짐짝보다 더 형편없이 버스에 실려져서는 목적지까지 간신히 올 수가 있었다. 그가 내린 곳은 지하철역 부근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지하철역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지하철역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는 자신의 몰골을 스스로 느꼈을 때, 그는 드디어 진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출근을 하기 위해 아침부터 이렇게 진땀을 흘리는 일을 겪는 것은 직장생활을 하고는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전에도 이런 일이 더러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지하철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갔다. 그러면서 주머니 안에서 지하철 회수권을 꺼내 한 손에 뽑아드는 동작이 한꺼번에 진행되고 있었다. 한발자국이라도 더 빨리 출입문 개폐기를 통과해야만 운 좋게 들어오고 있는 전동차와 마주칠 수가 있고, 그걸 집어타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계산이 자신의 머릿속에 맴돌면서부터 그의 민첩성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두 가지 동작을 거의 한꺼번에 취하고 있었다. 개폐기에 회수권을 넣은 것과 동시에 허벅지로 출입구의 봉을 밀었다. 그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개폐기는 그의 통과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같은 순간에 기계에서는 삐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었다. 그가 투입한 회수권은 기계의 반대쪽에 튕겨져 나와 있었다. 그것을 뽑아 들고 그는 다시 한번 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경보음이 울렸고, 개폐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때 지하철 역무원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이 바쁜 그가 먼저 들고 있던 회수권을 내밀며 말했다. "이게 왜 이렇죠? 아직 요금이 남아 있는데 말이죠?" 지하철 역무원은 잠자코 회수권을 받아든 다음 투입기에 밀어 넣고 있었다. 여전히 삐 소리를 낼 뿐 개폐기는 열리지 않았다. 역무원이 회수권을 건네주면서, 한 손을 타넘어가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역무원이 시키는 대로 두 손을 개폐기를 집고는 훌쩍 뛰어넘었다. 가방이 그의 옆구리에 걸려서 철썩하는 소리를 냈다. 지하철역에서 출입구의 개폐기가 작동되지 않는 바람에 그는 또 시간을 그만큼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출근시간에서 출발이 10분 늦으면 결과는 30분이 더 늦게 되는 법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내려가서는 플랫폼에 막 들어서는데 바로 눈앞에서 그가 타고 가야 할 전동차의 문이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우라질! 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도 철저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날은 드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울화통이 터지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전동차가 들어올 때까지 그는 기다릴 수밖에 다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연결 고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는 교묘하게도 언제나 그 연결고리의 바깥부분에 자리잡고 있어서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기회라는 것은 다만 타이밍일 뿐이라는 생각을 늘 해오고 있는데 그는 지금 그 타이밍을 매양 놓치고 있는 중이었다. 타이밍을 못 맞추니까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회를 놓치고 있다면 만사가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에게는 지금, 사사건건 되는 일이 없는 그런 하루가 시작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다음에 오는 전동차를 타고 그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렸다. 그는 출입구에서 다시 한번 개폐기를 뛰어넘어야 했다. 계단을 올라와서 10분 가량 걸은 다음 그는 회사에 도착했다. 사무실 입구에서 자신의 ID카드를 꺼내 체크기에 밀어 넣었을 때, 그 시간은 아홉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이미 10분 지각이었다. 자신의 자리로 가면서 그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땡빚을 내서라도 자가용을 구입하고 말리라, 조만간. 운전면허증은 옛날에 따놓았으니 시내 연수만 좀 받으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의 단기목표 제일 앞에다가 그는 잊어버리지 않게 그것을 뚜렷이 부각시켜놓을 작정이었다. 시내의 교통이 엉망으로 막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곧이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려고 하는지 그는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2 그날 아침에 10분을 지각한 문 대리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면서 제 시간에 출근을 해서 업무를 시작하고 있는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저 친구 지각했군, 이런 표정으로 모두들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문 대리는 자리에 앉아서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회사에 입사한 순서대로 일렬횡대의 줄을 지어 자리를 배치하고 있는 사무실 레이아웃으로 말미암아 맨 앞줄에 신입사원들이, 그 다음 1, 2 년차 사원, 그 뒷줄에 3, 4 년차 사원, 그리고 이어서 계장 라인, 대리 라인, 과장 라인, 차, 부장 라인식으로 단계를 지어 줄을 맞춘 채 앞을 보고 앉아 있는 형태여서, 자신의 아래쪽 라인은 뒤꼭지만 보여 그런대로 편안할 수 있는데 뒤쪽 라인에 있는 과장과 부장의 시선이 자꾸만 목덜미에 따갑게 꽂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직위가 높은 사람이 그 아랫사람들의 뒤꼭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해 놓고 있는 이 사무실 풍경이 대단히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회사에 입사하자마자부터였는데, 지각을 한 오늘, 그것이 새삼 뼈저리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계급적 신분이 철저히 존중되면서 상급자가 하급자를 은연중에 감시, 감독하게 되어 있는 회사의 자리 배치 모양과 시스템이 때로는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답답할 때가 많았다. 조직이 이렇게 경화되어 있어서는 경쟁력이 살아날 수 없을 터인데도 보수적인 기업이념으로 뭉쳐져 있는 회사의 분위기가 바뀌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조만간 어려울 것 같았다. 조직이란 톱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바라기는 틀린 것 같았다. 회사의 연륜이 길수록 굳어져 있는 덩어리는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문 대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회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비상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그는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회사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것이 회사를 향해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그의 메시지였다. 대다수의 사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데도, 회사는 아주 태연히, 사원들의 그와 같은 불평과 불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전혀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사원들의 불평과 불만이 증대될수록 회사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한 기묘한 형국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사원들의 불만이 증대될수록 회사는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결국 회사의 개혁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었다. 자신의 책상에 앉은 문 대리는 어제 퇴근하면서 덮어두었던 비망록과 업무 스케줄을 펼쳤다. 오늘 해야 할 업무들, 이 달 안에 완성해야 할 목표들을 체크해 나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장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날카로운 음향으로 뒤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문 대리, 나 좀 봅시다."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십중팔구는 아마도 그의 지각에 대해 따질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짐작했다. "칼"과장이라는 별명답게 개발과를 맡고 있는 과장은 작은 일 하나에도 빈틈이 없기로 명성이 나 있었다. 누구든 지각을 하게 되면 과장의 어김없는 일침이 사정없이 가해지게 마련이었다. 이번에는 여지없이 그가 걸린 것이었다. 벌써부터 잔뜩 주눅이 든 채 그는 과장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과장은 결재판에 끼여 있는 품의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상 앞쪽으로 다가서 있는 문 대리를 알은 체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품의서를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시간이 문 대리로서는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불안과 초조가 서서히 부풀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야말로 두려움의 무게를 더해주는 것이었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과장의 짤막한 물음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이거, 문 대리가 기안했소?" 과장이 들고 있는 품의서의 제목을 보기 위해 그가 몸을 숙였다. 그 품의서는 그의 지시로 자신의 팀에 들어온 신입사원이 작성하고 그가 수정, 검토하여 결재를 올린 것이었다. 자신의 작성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예, 저희가 했습니다^5,5,5^." 그는 명료하게 말했다. "저희라니? 저희가 누구요?" "제가 기본안을 짜고 실무적인 작성은 신입사원이 했습니다." "문 대리가 검토를 했소, 안했소?" "검토를 했습니다." "이 숫자, 맞는 거요?" 그러면서 과장은 결재판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품의서의 한가운데에 숫자가 나열되어 있고 그 오른쪽으로 합계가 나와 있었다. 그 합계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계산기로 두드려보지 않았었다. 신입사원의 덧셈을 믿고 그냥 넘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넘긴 것이므로 최종 책임은 그에게 있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겠는가. 설령 틀렸다고 하더라도 맞다고 우길 수밖에. "숫자, 틀림없는데요^5,5,5^." 그의 목소리는 어쩐 일인지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과장의 높은 음성이 터져나왔다. "이봐, 문 대리. 산수공부 다시 해야겠어. 이 합계가 안 맞잖아! 이래가지고 무슨 기안을 한다고 그래, 응. 초보적인 덧셈조차 틀려서야 어떻게 믿고 일을 시킬 수가 있겠어? 이 서류 그대로 상부에 올렸더라면 어떻게 됐겠어?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 숫자야말로 생명이야, 생명! 숫자가 틀린 품의서는 걸레조각에 불과하다구, 알겠어요?" 과장은 마치 속사포처럼 퍼붓다가 문 대리가 들고 있던 결재판을 휙 나꿔챘다. 그 서슬에 품의서가 결재판에서 삐죽이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것을 그대로 책상 위에 냅다 팽개치면서 과장은 사무실이 떠나가라고 악을 써댔다. 그 순간에 결재판에서 삐져나온 품의서는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문 대리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대리라는 사람이 말야, 품의서 숫자 하나도 챙기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이래가지고 대리 노릇 할 수 있겠어? 당신 말이야,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도대체 몇 년이나 됐어?" "^5,5,5^" 문 대리는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말 안 들려요? 입사 몇 년이냐고 묻고 있잖아?" "^5,5,5^" 침묵 속에서 문 대리는 심한 모욕감으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사표를 써버릴까부다. 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다, 그만두면 될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다소 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술술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은 희한하게도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변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다시는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5,5,5^" "^5,5,5^" 이번에는 과장 쪽에서 침묵을 지켰다. 눈을 크게 뜬 과장의 얼굴이 다소 누그러지면서 좀전까지와는 다른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문 대리. 대리면 간부사원이요. 간부는 회사의 허리올시다. 간부사원이 쫀쫀하게 챙기지 않으면 회사는 어려워집니다. 이건 내가 문 대리를 아끼기 때문에 하는 말이요. 내 말 고깝게 듣지 말고 확실하게 일하는 습관을 몸에 붙이도록 해요, 알겠소? 문 대리에게 관심이 없다면 이 숫자 그냥 고쳐서 위로 올리면 그만이라고^5,5,5^ 내가 문 대리에게 한 말은 애정과 관심의 결과요. 이걸 알아야 해요. 명심하세요. 품의서 정정해서 결재 돌려요^5,5,5^" 그것을 끝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품의서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이상한 모욕감이 뱃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굴욕적인 모욕감. 그것을 견디고 참아야 하는 이 자리. 사표를 집어던지고 뛰쳐나와버리면 그만인데도 그럴 수가 없는 이 참담함. 인간적인 모멸감을 끝까지 견뎌내야 하는 비애, 환멸, 고통^5,5,5^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근을 계속해야 하는 조직 속의 숙명. 조직의 톱니바퀴 속에서 일어나는 이 혹독한 시련들^5,5,5^ 사무실의 모든 사원들이 그 자신과 과장 사이에서 벌어진 이 한바탕의 해프닝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문 대리는 오전 내내 속이 편치 않았다. 출발이 좋지 않더니 드디어 한 단계씩 깨지기 시작하는구나. 문 대리는 불편한 속으로 그런 생각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 3 오전의 일로 해서 속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문 대리로서는 점심시간이 됐는데도 영 밥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문 대리 팀의 사원들이 이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사원 중의 하나가 대표로 나서서 문 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 식사하러 가시죠." "싫다, 고맙지만^5,5,5^." 문 대리는 사원을 바라보며 뜻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원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안 가시면 저희도 굶겠습니다." "웃기지 마라^5,5,5^ 너희들끼리 다녀와라." 문 대리는 단호했다. 앞장을 선 사원들도 단호했다. "굶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5,5,5^." "이런 젠장^5,5,5^ 좋다, 가자. 대신 내가 산다." "암튼 가시죠^5,5,5^." 이렇게 하여 그는 사원을 따라나섰다. 따라나섰다기보다 오전의 일로 하여 점심까지 먹지 못했다는 졸장부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 스스로 걸어나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그가 점심까지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전의 소문은 더욱 흥미진진하게 꼬리가 달려서 사무실에 파다하게 퍼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싫었다. 그런 소문을 차단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보란듯이 점심을 먹어치우는 길밖에 없었다. 더구나 팀의 사원들이 저희들끼리 대리를 위한답시고 앞장을 서는 그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사원들과 함께 음식점에 들어섰을 때까지 그는 밥맛이 있을까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럿이 음식을 시키고 더불어 함께 숟가락을 떠서 음식물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다시피 하자 어느새 밥맛이 살아났다. 참으로 간사한 것이 인간이다 싶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도 밥맛이 싹 가셨는데도 금방 돌아서자 언젠가 싶게 식욕이 솟는 것이었다. 그는 여느 때나 다름없게 점심식사를 했다.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 고마워 그가 계산을 하려 했으나 어느새 사원 하나가 잽싸게 계산을 치른 뒤였다. 과연 엑스세대 녀석, 동작 한번 빠르구나 싶어, 한편 대견하고 한편 씁쓰레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음식점에서 빠져나와 길거리의 건널목을 지나면 회사의 빌딩 앞이었다. 그는 길가에 임시로 벌여놓은 노점들을 기웃거리다가 사원들과 떨어져서 걸어갔다. 때마침 건널목의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져서 앞서간 사원들이 길을 건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미 늦었다 싶었다. 다음 신호등이 켜질 때 건너갈 양으로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점심을 해결하고 나온 샐러리맨들로 인도는 북적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쪽을 가로막고 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제지였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었다. 두 사람이었다. 한쪽은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홀더가 갈려 있는 바인더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비켜가려고 한쪽 켠으로 물러섰다. 두 경찰관이 동시에 그의 앞쪽을 냉큼 가로막았다. 이어서 한 경찰관이 차렷 자세를 하며 그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죄송하지만,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마치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의 절도로 가득 찬 억양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나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거수경례를 붙인 경찰관이 처음과 똑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새파란 젊은이였다. 얼핏, 그 경찰관의 동작과 어조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우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큰길에서, 그것도 유독 다른 사람은 내버려두고 그를 붙잡고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취지가 대단히 유감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부아가 터져나오려 했다.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뭣 땜에 그러는 겁니까? 왜 신분증을 보자는 겁니까?" 젊은 경찰관은 이번에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소 위압적인 어투로 부르짖고 있었다. "풍속사범 특별단속기간입니다. 검문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기 이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내가 범법자처럼 보인다 이겁니까?" 눈을 부릅뜨고 대들면서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다른 경찰관이 점잖게 거들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파출소까지 가셔야 합니다." "협박하는 거요?" 그는 부아가 끓어올랐다.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그가 말한 것이었다. "공무집행중입니다." "이런 젠장, 이 멀쩡한 대명천지에 서울서도 한 중심가인 이곳 종로 바닥에서 선량한 시민의 신분증을 검사하는 일이 무슨 공무집행이오? 이건 말이 문민시대지 5, 6공하고 바뀐 게 하나도 없잖아! 길가는 사람 붙잡고 가방 뒤지고, 신분증 조사하고^5,5,5^ 이런 게 무슨 세계화고 선진화란 말이오? 안 그렇소? 내 말 틀렸소?"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처음의 그 새파란 경찰관이 똑같은 억양으로 그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완강한 요구였다. 아니, 거의 강압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죄가 없으면 얼마든지 신분증을 내보여보라는 명령^5,5,5^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이 진풍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외면해야겠다는 심정인지 재빨리 현장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알았수다, 알았어. 제기랄^5,5,5^" 중얼거리며 더이상 버티는 것이 소용없는 짓임을 느낀 문 대리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으려 손을 넣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갑이 만져지지 않았다. 어, 이것 봐라, 그는 순간적으로 낭패감에 빠졌다.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떻게 됐단 말인가. 그때서야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양복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그만 지갑을 챙기지 않은 것이었다. 깜박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입술을 베이는 바람에 그만 허둥지둥하고 만 탓이었다. 그는 앞쪽에 버티고 서 있는 두 경찰관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우선 두 경찰관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공손히 말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침에 양복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그만 지갑을 깜빡하고 말았군요. 어떡하죠, 이거^5,5,5^?" "다른 신분증이라도 내놓으셔야죠." 핸드폰을 든 경찰이 그를 향해 이제는 타이르듯 말하고 있었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신용카드가 모두 그 지갑 안에 들어 있어서^5,5,5^ 명함은 안 될까요? 나, 요 앞 빌딩에 있는 회사원인데^5,5,5^" 그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명함을 꺼냈다. 엉거주춤 그 명함을 내밀어 보였다. 경찰은 명함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인더를 들고 있던 새파랗게 젊은 경찰관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주민등록번호를 대쇼, 이름하고 주소도^5,5,5^"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떠올리려고 하는데 영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는 더욱 황망한 태도로 우왕좌왕했다. 경찰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 주민등록번호도 모르쇼?" "예, 예 번호가^5,5,5^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서, 잠깐만요^5,5,5^" 그는 한참만에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간신히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딱하다는 듯이 두 경찰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댔다. 바인더를 들고 있던 경찰관이 그것을 받아 적고 있었다. 그의 이름과 주소도 기록했다. 핸드폰을 든 경찰관이 어딘가에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 번호 좀 조회해주세요. 이름 문경호. 주소 서울특별시^5,5,5^ 이상 유무 체크해주시고, 수배 유무도^5,5,5^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두 경찰관 앞에 서서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가슴을 조이면서 그는 망연히 기다렸다. 그 시간이 그렇게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다. 망신살이 뻗쳐도 아주 단단히 뻗친 날이었다. 길거리에서 중인환시리에, 그는 곧 자신에게 떨어질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새로운 형태의 재판이었다. 문득 경찰관이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소리가 났다. 핸드폰을 귀에다 바싹 대고 응답을 듣고 있었다. 찍찍거리는 소리가 주위에서도 들릴 정도였는데 경찰관은 용하게도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핸드폰을 끄면서 경찰이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가셔도 되겠습니다." 그의 앞에서 두 경찰관이 그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장소로부터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등줄기로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 4 매사가 하도 이상하게 꼬이니까 그는 이제 더럭 겁이 났다. 오늘 일진이 대단히 나쁜 날이므로 오후 시간부터는 가급적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꼼짝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바로 앞쪽에 있는 사원이 돌아보며 말했다. "문 대리님, 전화 왔습니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자주 만나는 자동차회사의 친구였다. 부근에 왔는데 차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얼핏 아침 출근시간의 곤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옳거니, 녀석을 만나서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는 앞쪽의 사원에게 잠깐 찻집에 갔다오겠노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자동차회사의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시간이 대략 3, 40분쯤 걸렸을까,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담당 이사가 찾았다는 것이었다. 자리에 돌아오는 대로 이사실로 즉시 오라는 전갈이었다. 무슨 일일까, 임원이 직접 그를 찾다니,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메모를 할 필기 도구를 챙겨 가지고 그는 부랴부랴 이사실로 향했다. 그는 노크를 한 다음 이사실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사는 대단히 편안한 자세로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대뜸 쏘아붙이듯 말했다. "자넨 자리를 자주 비우는가?" "아, 아닙니다^5,5,5^ 대체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잠시 친구가 와서^5,5,5^." "내가 자네를 찾은 게 1시간은 된 것 같네. 직장인이란 말씀이야, 사적인 일로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면 회사생활하기 어렵네. 고단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모름지기 끈기가 있어야 하네^5,5,5^ 자리를 자주 뜨지 않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는데 그로서는 담당 임원에게 찍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과장 진급일자가 다가오는데, 이것 또 물 건너갔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담당 임원이 밀어주지 않으면 과장 진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더구나 임원과 독대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데 모처럼 찾아온 기회마저 악운으로 날려보낸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속절없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는 맥이 쭉 빠졌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이사는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놓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뒤이어 이사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자네 별명이 물대리라면서? 그게 사실인가?" 다음 순간, 그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이사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을까. 일개 대리의 별명을 말이다. 당사자인 그 자신이 가장 싫어하고 있는 그 별명을 말이다. 입사 동기들이 그를 놀리기 위해 짐짓 붙여놓은 그 별명을 말이다. 이젠 상황이 마침내 회복 불능의 사태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는 몸둘 바를 몰랐다. 하루의 일진이 드디어 최악의 상태로까지 치닫기 시작한 것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이제 더 나빠질래야 나빠질 것도 없을 것이었다. 답답한 가운데서도 그런 마음이 드니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속마음이 한결 느긋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그의 입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사님, 그 별명이 글쎄, 제가 물고기를 좋아해서 붙여진 것 같습니다만^5,5,5^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알고 있네. 문 대리가 물대리로 불릴 수도 있지 뭐.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신경쓰지 말게^5,5,5^." 이사의 그 말은 뉘앙스가 좀 달랐다. 어딘가 그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사실로 호출을 당해온 지금, 반드시 나쁜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씩 감지되는 것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물대리라는 별명은 입사 동기 중에서 그와 가장 친한 녀석이 덜컥 붙여놓고 말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새삼 괘씸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그 친한 친구에게 기회만 있으면 우리 민물고기 이야기를 침을 튀기며 열심히 들려주곤 했었는데, 녀석은 그때 그의 말을 잠자코 다 듣고 난 다음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너 물대리 해라!' 그래서 그는 물대리가 되었고, 이 별명은 순식간에 회사 안으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 민물고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훤하다는 사실 또한 파다하게 번져 나갔다. 우리 나라 고유의 민물고기에 관한 한 그는 통달해 있다고 다소 과장되게 선전이 된 것이었다. 기실, 그는 물고기 기르는 일에 취미가 있어서 오래 전부터 집에다 수족관을 만들어놓고 주로 우리 민물고기를 구해다가 기르고 있었던 것인데, 그러는 중에 우리 물고기 살리기 동호회에까지 가입하여 이제는 적극적으로 물고기 보존에 앞장을 서게 된 것이었다. 환경파괴가 극심해지면서 우리의 민물고기들은 지금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는 멸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었다. 물고기를 살리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살리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네 말이야,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어." 한참 뜸을 들이고 있다가 느닷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사의 부탁이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적극적으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또렷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말씀만 하시죠^5,5,5^." "말이야, 내 막내아들이 지금 중학생인데, 이 녀석이 물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글쎄 당장 수족관을 만들어달라는 거야. 물고기를 기르겠다는 거지^5,5,5^" "그거 아주 좋군요. 그 친구, 아니 아드님께서 대단히 기특하군요^5,5,5^"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사의 말을 가로채기까지 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시간을 좀 내서 녀석에게 코치를 좀 해줘야겠단 말씀이야. 어때,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 "아, 아무렴요, 내고 말고요. 물고기 기르는 일이라면 내 일같이 봐 드릴 수 있죠. 좋구말구요, 이사님. 동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요^5,5,5^" 그는 진심이었다. 자라나는 우리의 어린이들이 자연 사랑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그는 미상불 열망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들어가서 막내녀석과 협의한 다음 자네에게 연락하겠네. 그때 일정을 잡음세. 괜찮겠지, 문 대리^5,5,5^ 아니, 물대리?" 웬일인지 이사가 마지막에 부른 호칭이 별안간 마음에 쏙 들어와서 그는 뜻밖이었다. 물고기를 사랑하는 대리, 물대리라고 한다면, 까짓것, 얼마든지 좋은 것이었다. 이사의 그 부름도 의도적인 친밀감의 표시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친밀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윗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솔직히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사실의 방문을 나서면서 그는 지금부터 이사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하루의 불행을 말끔히 씻어내주는 듯한 이 따사로움에 그는 그만 눈물겹기까지 한 마음이 되었다. 온종일 기묘한 불행에 시달려온 그의 하루가 한꺼번에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말로 그가 노닐 수 있는 맑은 물에 뛰어들기나 한 듯, 그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찬란한 비늘을 반짝이며 투명한 생기를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5 이사의 방을 나온 뒤, 퇴근시간인 오후 여섯 시까지 그는 실로 조마조마한 마음속에 앉아 있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마음으로 그는 자리를 지켰다. 다행히도, 아니 그가 조심을 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별일 없이 퇴근시간을 맞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어, 이 악운투성이인 하루를 마감할 양으로 사원들을 부추겼다. 그가 살 테니(이를 위해 그는 가불까지 했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간단히 걸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아침에 과장으로부터 사정없이 깨진 것을 알고 있는 사원들은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다. 회사 부근에 있는 단골 소주집으로 그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일과시간중에 있었던 회사일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는 사원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한잔을 걸쳤다. 사원들은 팀장인 문 대리를 위로하느라고 그의 기분을 한껏 맞춰주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한참 뒤에야 눈치챘다. 그는 사원들에게 일일이 소주 한잔씩을 직접 돌리면서 호기있게 덧붙였다. "야, 이 친구들아. 이사가 나를 불러서 뭐라고 그랬는지 아냐? 뭐라고 그랬을 것 같애? 자리를 비웠다고 야단을 쳤을 것 같애? 천만에^5,5,5^ 날 보고 이랬어. 물대리,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이랬다구^5,5,5^ 알겠어?" 그의 이 말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이사실에 불려가서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높은 사람이 직접 찾는다는 것은 대개가 느낌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랬는데 자리를 비운 것까지 알고 있는 이사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우선 의외였다. 게다가 이사가 문 대리에게 무엇인가를 부탁까지 했다니, 이건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사원들의 생각 속에는 이쯤 되면 이번 정기 승진에서 문 대리는 과장 진급을 예약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데까지 예측이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아침에는 과장으로부터 형편없이 깨진 사람답지 않게 삼겹살에 소주를 사겠다고 나서는 것부터가 이미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사원들은 이사가 문 대리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사가 대리에게 뭔가를 부탁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축배를 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사원 중의 한 사람이 건배를 제의했다. 모두들 따라서 잔을 높이 들었다. 별안간 사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물대리님을 위하여!"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술기운이 오히려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술자리에서보다 더 취기가 올랐다. 아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았다. "당신 괜찮으세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의 어디에, 예사롭지 않은 기미가 있었는지 아내는 자꾸만 다그치는 것이었다. "걱정 말아. 아무 일도 없었어. 아니, 아니 무슨 일이 있었지^5,5,5^" "무슨 일인데요?" 아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섰다. "별일 없었다니까^5,5,5^ 아니, 아니 근사한 하루였어. 정말이지 끝내 주는 하루였다고. 심지어는 이사님이 내게 부탁까지 했단 말씀이야. 기가 막힌 하루였지^5,5,5^." "여보, 당신 정말 괜찮겠어요?" 아내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걱정 말아.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5,5,5^ 사원들과 한잔 했을 뿐이야. 단합대회를 한 거지. 잘 될 거야.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구^5,5,5^" 그는 저녁을 먹지도 않은 채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새벽 무렵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목이 너무 말랐다. 주방으로 나와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갈증이 조금 가셨다. 그는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본 다음에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상한 소리에 다시 잠에서 깼다. 아니, 잠 속에서 그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이었다. 그의 눈앞에 놀랍게도 열목어 한 마리가 나타난 것이었다. 제법 큰 놈이었다. 온몸에 자주 갈색의 작은 반점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씬한 몸매였다. 맑은 물이 아니면 살지 않는 이 희귀한 민물고기는 특별히 그가 좋아하는 놈이기도 했다. 이렇게 잘생긴 열목어를 너무도 생생하게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는 놀라웠다. 도대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다음 순간 열목어의 커다란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열목어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문득 그 열목어는 자기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열목어였고, 열목어가 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는 이제 열목어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 열목어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울음 섞인 소리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5,5,5^." 그 소리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위급한 상황이 열목어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위기에 빠진 열목어가 구원의 목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열목어가 그인지 그가 열목어의 꿈을 꾸고 있는지 확실하지가 않은 것이었다. 분명한 점은 열목어의 절규가 너무도 긴박한 음조를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면서 열목어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 다음 순간, 속수무책인 그가 바로 열목어인 것같이 느껴져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때 잠에서 깬 것이었다. 다시 목이 말랐다. 아내가 놀라서 따라 일어났다. "당신 괜찮아요? 잠꼬대를 하고 있었는데^5,5,5^." "내가 잠꼬대를 했다고?" "그럼요, 방금은^5,5,5^." "살려달라구요^5,5,5^." "뭐라고?" 그는 적이 놀랐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은 것은 열목어가 된 그였던 것이다. "별거 아냐. 열목어 꿈을 꿨어. 살려달라고 울고 있었거든^5,5,5^." 아내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걱정 마. 목이 마른데, 나 냉수 한 컵 갖다줘요^5,5,5^." 그는 아내를 안심시켰다. 물을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살려달라는 열목어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목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느낌이 들자, 그는 더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창가로 새벽의 부윰한 밝음이 어려오고 있었다. 어려오는 새벽빛 저 너머로 한 마리의 열목어가 혼탁한 물 속으로 힘겹게 헤엄을 치며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는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