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창작 텍스트로 뽑은 96 우리 시대의 화제 소설 전4권 중 제4권 지은이: 박상륭 외 펴낸곳: 평민사 [ 구부러진 길 저쪽 * 오정희 47 년 서울 출생. 서라벌예대 졸업. 68 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완구점 여인" 당선 소설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장편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꽁트집 "술꾼의 아내". 창작선집 "옛우물" 등 출간 이상문학상(79), 동인문학상(82) 수상 양배추의 시든 겉이파리들을 떼어내다가 인자는 문득 손을 멈추고 그것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노랗게 속살을 보이는 양배추는 무엇인가 숨긴 듯, 터지지 못한 함성처럼 단단히 뭉치고 고인 듯이 보였다. 양배추를 손질할 때면 언제나 아주 오래 전 처음 보았던 양배추밭의 인상이 겹쳐 떠오르곤 했다. 채 날 밝기 전 서울에서 떠나는 첫차를 타고 원천에 오는 동안 검푸른 새벽 어스름이 걷히고 줄곧 따라오던 강의 윤곽이 비로소 드러났다. 뿌옇게 햇발이 비쳐들고 있어 흰 안개 속에 숨은 것이 산과 들과 마을들만이 아닌, 강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종착역을 앞두고 서서히 속력을 줄이던 기차 차창을 통해 인자는 철도 연변을 따라 끝없이 넓은 양배추밭을 보았다. 넓은 벌에 탁한 녹빛의 무리가 정연하게 줄지어 생뚱스럽게 둥글둥글 솟아 있었다. 그것은 산 채로 몸만 매장된 사람의, 지상에 남겨진 머리처럼 둥글고 단단하게 보였다. 해 뜨는 아침의 예배 의식 혹은 제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넓은 밭에서 둔탁하고 불투명한 녹빛의 이랑을 따라 한 사내가 양배추를 베고 있었다. 허리를 굽힌 사내는 낫날을 밑동에 넣어 탁탁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양배추들은 잘려진 목처럼 그의 발밑에서 둥그렇게 나동그라졌다. 그의 아낙인 듯한 여자가 뒤따르며 그것을 손수레에 주워담고 둥그렇게 솟아 있던 이랑은 그들의 발길이 지나감에 따라 밋밋하게 베어졌다. 엷어져가는 안개 저쪽에, 뿌옇게 고깔 모양으로 솟은 산과, 산자락을 타고 단정하고 다소곳이 펼쳐진 도시의 잠을 깨우는 듯한 낮게 뜬 헬리콥터의 위협적인 엔진음을 들었다. 그것을 끝없이 넓게 본 것은 낯선 풍광, 막막하기만한 인자 자신의 마음 탓이었던가. 원천은 근교에 그토록 넓은 경작지를 거느릴 만큼 크거나 넉넉한 도시가 아니었다. 드넓은 개활지라니, 그것은 젊은 날 인자의 순진한 눈의 착각이었다. 물과 산으로 막힌 이 도시에 '끝없이 넓은 개활지'란 없었다. 인자는 양배추를 도마에 올려놓고 칼을 대어 정확히 수직으로 절반을 갈랐다. 겹겹이 물결치듯 복잡하게 주름진 켜는 생각에 잠긴 듯 묵연하다. 양배추는 싱싱하지 않았다. 인자는 시든 잎을 한 겹 더 벗겨내었다. 한꺼풀의 껍질 안에서 이목구비가 뭉개져 사라진 얼굴처럼 똑같은 속껍질이 드러났다. 아무리 벗겨보아도 끝내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일견 무의미하게 그려진 섬유질의 무늬 외에는 아무런 알맹이를 찾을 수 없다. 살아간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난해함과 엄청난 단순함. 인생을 잠겨진 비밀 서랍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삶에는 비밀이 있다고, 숨겨진 질서가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옛날 원천행 기차를 타게 한 것도 그러한 믿음이 아니었는지. 잘린 양배추에 잔 칼질을 하자 무딘 칼날 아래 흙과 태양과 뿌리의 기억들, 추억과 욕망의 입자들은 날카롭고 섬세한 떨림으로 잘려지고 은밀한 놀람으로 부서졌다. 어제 썼어야 했을 양배추는 시들었다. 인자는 다 썬 양배추를 찬물에 담갔다. 시든 양배추 조각들은 곧 물기를 머금어 일시적이고 기만적인 소생으로 빳빳이 싱싱하게 살아나리라. 어제 인자는 식당문을 닫고 계친구 몇몇과 어울려 단풍놀이를 갔다. 그녀가 겨울 양식을 모으는 다람쥐를 좇고 도토리를 줍던, 해 있을 동안 양배추는 천천히 시들어갔다. 어딘가 젖은 나무 향기처럼 향긋하고 싸아한 냄새가 풍긴다. 두리번거리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선반 위에 그대로 놓여 있는 신문지 꾸러미를 꺼내 펼쳤다. 어제 싸둔 그대로 굵고 탐스러운 송이버섯이었다. 하룻밤 사이 싱싱한 흰빛이 죽었지만 제 몸을 말리는 향기는 더욱 강렬했다. 물크러지듯 단풍이 붉고 화려했지만 가을산이란 어딘가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어수선하게 마련이었다. 마른 솔잎이 수북히 쌓인 나무 밑동에서 인자가 송이버섯을 발견했을 때, 당신 외로운 사정을 알고 산신님이 주신 건가봐, 같이 갔던 바느질집 성호 엄마가 부러워하며 킬킬거렸고 그게 꼭 뭐 같지? 좋기도 해라, 과부인 수경 엄마가 놀려대었다. 은영이가 오면 구워 먹이리라 생각했지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문득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가 훌쩍 가버리는 그 애가 아닌가. 인자는 한숨을 쉬며 그것을 다시 싸서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 속에 넣었다. 술을 담가볼 생각이었다. 학교 운동장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인자는 반사적으로 창쪽으로 눈을 돌렸다. "모든 동작은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취할 수 있도록 숙달한다." "과감하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공격한다." 군복을 입고 단 위에 선 교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단 아래 정렬한 학생들의 복창이 이어졌다. 과감하고 신속하고 정확하게^5,5,5^. 거의 매일 하루에도 네댓 차례씩 듣게 되는, 쉿소리가 섞인 교관의 목소리는 친숙하다. 뿐인가. 간혹 섞이는 콧소리, 상습적으로 내뱉는 욕설의 모멸적인 말투도 익숙했다. "앞으로, 뒤로, 좌로, 2보 앞으로, 방향 전화, 찔러, 길게 찔러." 숨가쁜 지시에 동작이 다급해지고 길게 내민 막대총들이 종횡무진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안개로 시야는 부옇지만 주방 창을 통해, 담 하나 격해 내려다보이는 고등학교 운동장의 정경은 잡힐 듯 가깝게 환히 눈에 들어왔다. 고장난 시계탑과 태극기가 힘없이 늘어진 국기 게양대, 직육면체를 포개 얹은 듯한 멋없이 번듯한 시멘트 구조물. 하나의 거푸집으로 찍어낸 규격품처럼 학교의 모양은 언제 어느 곳이나 똑같았다. 인자가 오래 전 다녔던 학교와 똑같았다. 운동장 건너 이층 건물 교사의 어디에선가 합창 소리도 들려왔다. 인자도 아는 "산타루치아"였다. 이즈음 늘 그 노래를 들었다. 내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아(산타루치아) 인자는 흥얼흥얼 콧소리를 내다가 점차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아마 중학교 졸업반 때로 기억되는, 그 노래를 배우던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앞으로 내닫고 팔을 뻗으며 야앗야앗 짧고 날카로운 함성을 내지르는, 얼룩무늬 교련복들의 숨 가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넓은 운동장은 연병장을 방불케 한다. 흘긋 벽시계를 바라본 인자의 마음이 조금 바빠졌다. 어느새 열 한시 반이었다. 조금 후, 점심 시간이면 인근 국민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열두 시까지는 양념거리를 다 준비하고 오뎅국물도 만들어 놓아야 했다. 요즘 아이들은 도무지 배고픈 것을 참거나 기다릴 줄을 모른다. 다 안개 탓이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더 극성을 부리는 안개 탓에 안개가 걷히고 해가 퍼지는 대낮까지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너, 왼쪽에서 둘째줄 다섯 번째 서 있는 새끼 나와. 바로 면전에서 퍼붓는 듯한, 교관의 격앙된 목소리에 인자는 다시 창으로 눈길을 돌린다. 한 학생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갔다. "이 새끼 룰라춤을 추고 있나? 지렁이 댄스를 추고 있나?" 와와와와 웃음이 터졌다. 변성기를 벗어난 사내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과장되고 음험하게 퍼지다가 교관의 손짓에 갑작스럽게 그쳤다. 교관은 불려 나온 아이를 단 위로 끌어올렸다. "차려총, 앞으로, 뒤로, 좌로, 우로." 교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아이의 동작은 어설프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좌제쳐, 우베어, 때려, 돌려쳐." 교관의 지시가 빨라질수록 아이는 어쩔 줄을 모른다. 달구어진 철판 위의 개구리처럼 혼란스럽게 팔다리를 내두르며 푸드덕거린다. "이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어떻게 국가의 간성이 되겠는냐? 정신 자세가 문제야. 빨갱이들이 쳐들어오면 어서 죽여줍쇼 하고 그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갈 놈이구나. 지금도 휴전선 저쪽, 동서 일백 오십오 마일 전방에서는 빨갱이들이 눈깔을 시퍼렇게 뜨고 호시탐탐^5,5,5^." 인자는 커다란 냄비에 물을 채우고 멸치를 한줌 넣었다. 간장을 붓고 화학조미료 봉지를 털어 넣고 국자로 휘저어 맛을 보았다. 멸치보다 더 멸치맛을 내는 화학조미료 덕에 맛이 한결 진해졌다. 찰칵 총 모양의 라이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파란 불꽃이 길게 뻗자 화덕의 가스 밸브를 열어 불을 붙였다. 거리 쪽에서 둔중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지난 여름부터 들리는 굴착기 소리였다. 시끄러운 소리를 조금이라도 막아볼 요량으로 인자는 길 쪽으로 난 출입문을 닫았다. 요즘에는 거의 매일 하루종일 진동음이 달구질하듯 울려 퍼져나가 도시 전체를 미진처럼 흔들었다. 지하 상가를 짓기 위해 중앙통의 대로를 파헤치는 것이다. 땅 밑에 분수가 솟는 광장과, 거울과 유리로 단장한 점포들이 들어서서 시민들의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휴식과 편의 공간이 되리라고 했다. 그리고 말해지지 않는 중대한 묵시적 합의, 비상시의 대피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작은 도시에 굳이 지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필요성에 의아했을 것이다. 여름이면 짙은 그늘로 터널을 만들던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베어져 가지와 중동이 잘린 동체만 남아 이 도시에는 그림자가 없다. 길들은 광장과 로터리를 중심으로 십자형으로 넓고 길게 파헤쳐졌다. 속살을 드러내어 파헤쳐진 땅 속에서 오래 전에 매설된 파이프와 선들이 얽히고 설킨 모양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묻어 버리고 잊었던 낡은 파이프와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모양을 들여다보며 짐짓 그래야 할 것처럼 아하, 자신들도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할 탄식을 내뱉곤 했다. 물이 쉿쉿 끓기 시작하고 다시 간을 보았다. 간장을 넣자 물은 불시에 위협적인 거품으로 넘칠 듯 끓어올랐다. 가스불을 작게 줄이며 인자는 무연히 눈길을 창으로 돌렸다. 어느새 수업이 끝났는가 운동장은 텅 비었는데 교관은 여전히 단위에 꼿꼿이 서 있다. 수업이 끝나도 풀려나지 못한 소년은 운동장 가생이를 따라 달리고 있다. 몇 바퀴인가를 돌자 교관이 호루라기를 불고 아이는 달리기를 멈추고 교관과 마주섰다. 교관이 날카로운 손동작으로 시범을 해보였다. 아이의 동작은 여전히 자신없고 어설펐다. 교관의 신경질적인 손짓에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토끼뜀을 뛴다. 아이의 모습이 이켠으로 가까워질 때면 고통으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이를 악문 얼굴이 보인다. 텅 빈 운동장에는 그들 둘뿐이다. 무심히 멀리서 보면 그들은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풍경에 고통은 깃들여 있지 않다. 아이는 달린다. 교관은 노련한 조련사처럼 맵시 있게 지휘봉을 흔들고 호루라기를 불어 지시하고 거기에 따라 소년은 조련중인 말처럼 뛰다가 걷다가 주저앉아 토끼뜀을 뛴다. 아이는 무릎을 굽히고 팔을 뻗어 총검술을 해보인다. 교관은 단에서 내려섰다. 자신이 표정이 되어 팔을 벌리고 가슴을 한껏 내밀고 아이 앞에 버티고 서서 아이에게 채근한다. 머뭇거리는 아이에게 호령한다. "찔러, 이 새끼야. 겁내지 말고 내뻗으라니깐. 정확히 심장을 맞춰." 인자는 교관의 지시에 맞춰 움찔움찔 발을 옮기고 팔을 쭉 뻗어본다. "찔러, 찔러, 이 머저리야, 돌대가리야. 각도를 맞추라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 거야." 아이는 울 듯한 얼굴이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자는 팔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떠 창 밖 저편의 교관을 응시하며 휙 내뻗는다. 내뻗는 총검이 교관의 거친 손아귀에 나꿔채어지고 아이는 다시 운동장을 따라 뛴다. 교관은 막대좌표처럼 운동장 가운데 서 있다. 그애는 운다. 그애는 뛴다. 부유스름하게, 끈질기게 떠돌던 안개는 완전히 걷히고 정오의 햇빛에 그애의 발밑에 짧은 그림자로 뭉개지며 달음질친다. 인자의 눈길이 아이를 따라 달린다. 덩달아 숨이 가빠진다. 가까이 다가오면 울음을 참 듯 이를 악문, 절망적인 자포자기에 자기를 내던진 듯한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 인자는 아하,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뛰고 있는 것이 소년이 아닌 자기 자신인 것만 같다. 소년은 빨리, 실수 없이 교관을 만족시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이 지루하고 외로운 제식 훈련에서 풀려날 수가 없는 것일까. 얼룩덜룩한 교련복 안의 터질 듯한 숨참이, 원망이, 분노와 고독, 꺾어질 듯 휘청거리는 다리의 피로와 무용한 푸들거림이 안간힘으로 다가와 인자는 허둥거린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선다. 펄럭이며 들어서는 자줏빛 풍덩한 긴 치맛자락을 보는 순간 인자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귀머거리다. 그녀는 인자의 식당 한 집 건너 승리전자오락실의 주인이다. 귀머거리여서 말이 어눌하고 좀체 말을 하지 않는다.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야 성급하게 내지르는 소리는 아아, 어어, 으으 따위 어눌하고 단순하다. 그녀의 유일한 주장, 감정의 표현은 물 끼얹기이다. 흘레붙은 개나 싸움하는 개를 떼어놓을 때 하는 방법인 물 끼얹기는 인근에 소문난 것이어서 그녀의 집 앞은 항상 질척이거나 반들반들 얼어 있다. 시주를 청하며 목탁을 두드리는 중에게도, 전도 나온 여자들에게도, 어깨띠를 두르고 나온 청소년 선도 어머니 회원들에게도 그녀는 물을 끼얹는다. 그네들이 노상 입에 달고 있는 '청소년 비행의 온상'이라거나 '탈선의 지름길' 운운은 귀머거리의 강철처럼 완강한 귓바퀴에서 공허하게 스러진다. 언제나 아이들로 바글대고 요란하게 삑삑대는 전자오락기의 소음 속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철벽같은 귀 때문일 것이다. 귀머거리는 그녀를 둘러싼,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침묵의 세계에서 안전하다. 귀머거리가 인자의 식당, 아름스낵으로 오는 것은 연탄집게를 빌리기 위해서이다. 하루에 네댓 차례 그녀는 연탄집게를 빌리거나 되돌려주기 위해 말없이 인자의 가게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연탄 집게가 몇 푼이나 한다구. 대놓고 면박을 준 적이 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인자는 귀머거리가 올 시간을 짐작해서 때맞춰 연탄을 가는 일에 익숙하다. 연탄집게 사는 돈을 아낄 만큼 인색해서라기 보다 인자의 식당에서 쓰는 연탄집게의 앙칼지고 단단하게 맞물리는 힘에 대한 외곬의 집착이려니 짐작되어서였다. 말상으로 길다란 그녀의 얼굴은 대개의 경우 경계심으로 뻣뻣하게 긴장되어 있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눈은 항상 의심으로 번쩍인다. 머리가 세고 체수가 작은 그녀의 남편은 하루종일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 껌과 사탕, 끈적이는 아이스크림, 빙과의 물이 얼룩진 바닥을 물에 적신 막대걸레로 문지른다. 그녀는 하루종일 의심쩍게 번쩍이는 눈으로, 아이들이 만능키로 동전을 털어내는지 가짜 주화를 쓰는지 일부러 오락 기계를 망가뜨리지나 않는지 감시한다. 귀머거리는 연탄 바께스 안에 들어 있는 연탄집게를 집어든다. 열린 문으로 휘익 바람이 들어온다. 인자는 연탄집게를 가지고 나가려는 귀머거리에게 큰소리로 밖에 바람이 많이 부느냐고 묻는다. 귀머거리가 유심히 인자를 바라본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것에 실소하면서도 인자는 어찌할 수 없는 충동으로, 이미 쏟기 시작한 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말을 쏟아 놓는다. 연탄집게를 하나 사라고, 그까짓 게 몇 푼이나 하느냐고, 일일이 빌리고 돌려주는 수고값보다는 쌀 거라고^5,5,5^. 귀머거리는 여전히 수상쩍게 바라본다. 인자는, 정히 그 연탄집게가 맘에 들거나 돈이 없다면 아^36^예 가지라고, 자신이 하나 사면 된다고 귀머거리가 들고 있는 연탄집게를 가리키며 말한다. 점점 빠르고 높아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제어할 수 없는 말의 충동에 놀라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다. 인자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귀머거리는 성난 표정으로 휙 돌아서 나가버린다. 귀머거리에게는 사람들의 말이란, 물고기의 뻐끔대는 입질 이상의 아닐 것이다. 귀머거리는 이즘 들어 더욱 성정이 사나워졌다. 때 없이 아내로부터 물벼락을 맞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녀의 남편이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는 듯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면구스런 낯을 짓는 것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한 떼의 사내아이들이 몰려 들어왔다. 국민학교 아이들이다. 가방을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뺨이 붉은 것이, 바람 속을 달려온 듯하다. "야, 늬들 먹고 싶은 거 뭐든지 다 시켜." 한 아이가 호기롭게 큰소리로 말하자 아이들은 벽의 차림표를 보며 떡볶이 쫄면 라면 김밥 등을 불러댄다. "반장턱이냐, 생일턱이냐, 백점턱이냐." 인자는 아이들 앞에 물건을 놓아주며 물었다. "내가 반장이 됐걸랑요, 얘들은 선거 참모^36^예요." "너 정말 화장실 수세식으로 고치게 할 수 있어?" "미국 국민학교하고 자매 결연해서 우리들 미국에 보내줄 수 있어? 공약한 거 다 지킬 수 있냐구?" "한번 믿어주세요지 뭘. 공약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냐? 우선 먹고 보자. 먹고 싶은 거 얼마든지 다 시켜." 볼이 둥글고 퉁퉁한 사내아이가 으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떡볶이는 맵지 않게 해주세요." "얌마, 떡볶이가 맵지 않으면 무슨 맛에 먹냐. 난 맵지 않으면 속이 느글거리더라." 아이들은 와글와글 떠들어대었다. 그래라, 그래라 대답하면서도 인자는 평소 손짐작대로 고추장과 설탕 소금 따위를 넣는다. 그애들이 특별히 맵거나 덜 매운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공연히 까탈스러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싶은 것이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었다. 음식을 탁자에 늘어놓고 인자는 그 아이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눈이 동그랗고 입술이 계집애처럼 붉고 선명한 한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몇 학년이냐, 5 학년 강명현이에요, 대답하던 아이는 집이 어디냐, 아버지는 뭘 하시냐는 물음에 빤히 인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왜요? 당돌하게 물었다. 떠들어대던 아이들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인자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는 수상쩍게 저희들끼리 눈짓을 했다. 인자는 자신의 물음이 아이들에게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했음을 알아채었다. 경계해야 할 어떤 존재. 이 아줌마 수상해. 혹시 유괴범이 아닐까? 아이들의 눈에 수군수군 떠오르는 표정을 읽으면서도 인자는 자꾸 말을 건네었다. 토요일이라 일찍 끝났구나. 학원에도 다니니? 엄마가 기다리실 텐데 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거라^5,5,5^. 잠시 입을 다물었던 아이들은 인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한층 더 떠들었다. 그애들은 인자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들어올 때처럼 우르르 몰려나간 뒤 아이들이 앉았던 자리에 흰 마스크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인자는 조금 때가 타고 얼룩이 묻어 있는 그것을 들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안개가 짙어지는 계절이면 엄마들은 등교길의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씌운다. 인자 자신도 그랬다. 요새 애들은 정신도 없다거나 제 물건 하나 챙길 줄을 모른다거나 따위 소리내어 말하고는 그것을 주방 싱크대 서랍에 넣었다. 아마 찾으러 올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느날 쓰레기통에 버려지리라는 것을, 그것을 버리기 전 잠깐 망설여지는 마음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자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며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운동장은 이제 텅 비었다. 안개는 걷히고 햇빛이 가득했다. 간간 들리던 수업 종료의 벨소리도 음악실의 합창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골대에 모여 있었다. 스탠드에서는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달력을 보며 인자는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벽에 붙은 차림표를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김밥, 라면, 쫄면, 떡볶이^5,5,5^ 인자는 자신의 행동의 무의미함에 문득 놀란다. 뚝 끊긴 듯한 갑작스런 정적이 감지되었다. 거리 쪽의 굴착기 소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들려 오지 않았다. 인부들의 점심 시간인 모양이었다. 네 개의 탁자와 안쪽으로 난 살림방, 비죽 열린 문으로 엿보이는 이불과 화장대 따위, 허리께쯤에서 잘리게끔 칸막이 된 주방과 연탄 난로, 수증기와 기름기로 진득진득 더께가 앉은 환풍기, 갈라진 벽지 대신 붙인 백두산 천지의 달력 사진, 개업식 때 딸의 친구가 들고 온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장식패 따위를 낯설게 천천히 둘러보았다. 뭔가 해야 할 일을 잊고 있는 듯한 조바심과 안타까움 답답함이 몸을 옥죄어오는 듯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찬밥을 비비다가 개수대에 고추장이 발려져 놓여진 그릇을 보고는 조금 전에 점심을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잇몸이 근지럽고 텁텁해서 인자는 이를 닦았다. 해가 지고 있다. 짧은 늦가을볕이 창가에 머물고 있다. 오늘 역시 기억되지 않을 많은 날들 중의 하루로 지나갈 것이다. 삼십 분 후에 떠나는 원천행 열차는 표가 없었다. 한 시간 반 후에 떠나는 다음 열차도 입석표뿐이었다. 창구 앞의 '매진' 팻말을 보는 순간 분명치 않은 안도감과 함께 문득 집으로 간다는 일이 부질없이 생각되기도 하여 은영은 순간 돌아가버릴까 망설였다. 나섰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기숙사의 방에 짐을 풀면 끊어진 실을 잇듯, 접어둔 책의 페이지를 다시 펼쳐 이어 읽듯 몇 시간의 외출의 흔적은 없어지리라. 이런 계절에 더욱이 주말에 대책 없이 나섰을 때는 내심 이런 경우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원천은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뿐더러 강을 끼고 가는 중간중간 풍광이 그럴듯한 곳이 위락지로 개발되는 바람에 주말이면 언제나 행락객들로 붐비게 마련이었다. 물과 숲이 있는 곳이면 서양 동화 속의 성을 흉내낸 모텔과 전원 가옥풍의 음식점들이 들어차 국도변의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고 있었다. 은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마음이 뭔가 확실해지는 느낌이면서, 그렇다고 안도감이라고도 낭패감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설명되어지지 않는 감정에 짜증스러웠다. 어느 막다른 곳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마음이 밖으로 자신을 내몰았지만 가고자 하는 곳이 딱히 원천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충동이었지만 애초의 마음이라면 아주 낯선 곳, 땅 끝까지 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뒤에 늘어선 사람들의 말없는 채근과 짜증기에 밀리듯 창구에 돈을 들이 민 다음 열차표를 받았다. 대합실은 끊임없이 닿고 떠나는, 떠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마당처럼 혼잡하고 어수선했다. 은영은 시간을 보낼 일을 난감해 하며 역 광장으로 걸어나왔다. 광장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때묻은 듯 구중구중 지저분한 회색과 청색의 비둘기들이 구구대며 날아 앉고 날아오르곤 했다. 지는 해가 새들의 깃털에 얹혀 단단한 금속성의 광채로 튀었다. 은영은 광장의 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의 위치를 가늠했다. 해는 벌써 많이 기울었다. 이즈음 같은 철에는 해가 빨리 진다. 기차에 오를 즈음에는 어둠발이 서릴 것이고 원천에 닿을 때는 아마 깊은 밤이리라. 점심을 거른 속이 쓰라렸다. 은영은 역 주변 대형 백화점 일층의 간이 스낵집으로 갔다. 주말의 역 부근은 어디나 혼잡스럽다. 여행을 떠나는지 가방을 꾸려든 젊은 남녀들과 낚시꾼 차림의 사내들로 채워져 빈자리는 출입문 쪽 한 자리뿐이었다. 은영이 햄버거와 커피를 얹은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앉자 감자 튀김을 먹고 있던 맞은편 자리의 여자가 잠깐 눈길을 들어 바라보았다. 쌍꺼풀 수술을 한 지가 오래지 않은지 눈두덩이 벌겋게 붓고 칼자국이 선명했다. 흰 레이스로 목 둘레를 장식한 분홍빛 블라우스의, 조금 철이 늦다 싶은 차림에 양갈래로 성글게 땋은 머리칼이 가슴팍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린 아이 같은 차림이었고 엷게 화장이 되어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둔해 보이는 목덜미나 눈빛, 입가의 어디랄 것도 없이 만만치 않은 나이가 들어 있었다. 빵은 식고 고기는 딱딱하고 질겼다. 뭔가 빠져 있다. 은영은 한입 베어먹은 햄버거를 손에 들고 내용물을 찬찬히 살폈다. "여기 햄버거는 엉터리^36^예요. 겨자를 안 넣어요. 은영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그 여자가 말했다. 그녀 말대로 정말 겨자가 빠진 햄버거는 맛은 닝닝했다. "여행을 가시나 보죠?" 그 여자의 물음에 은영은 여자의 눈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리라. 청바지와 캐주얼한 윗도리, 가짜 루이뷔통 상표의 여행용 가방. "실직을 해서 집으로 가는 거^36^예요." 은영이 다소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 속에 깃들인 위선, 이중 심리를 스스로 읽었다. 다만 재미로 일할 뿐이라는, 직업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보이고 싶어하는, 또한 실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짐짓 부려보는 여유, 그러면서 무언가 흉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겨울, 땀 흘린 뒤에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가식 없는 농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쾌적한 표정도 짓고 있으리라. 엄밀히 말해 실직은 아니었다. 클럽 하우스 사무실에서는 생리 휴가거나 몸이 아픈 것이려니 생각할 것이다. 명희가 또 적당히 결근의 이유를 만들어 둘러대 줄 것이다. 이즈음에는 늘 졸렸다. 아무데서나 졸았다. 카드를 타고 필드에 나가면서도 졸았다. '미스 가, 어젯밤엔 뭘 했지?' 남자들은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묻기도 했다. 얼굴이 까칠해졌다고, 종합 비타민을 먹으라고 명희는 말했다. '가을을 타는 거야. 봄을 타면 입맛이 없어지지만 가을을 탄다는 건 외롭다는 뜻이야. 종합비타민보다 애인을 만드는 게 약이야'라고도 말했다. 오늘 아침 좀체 일어나지 못하는 은영에게 화장을 하고 나가던 명희는 좀더 자라고, 사무실에는 적당히 말하겠노라고 했다. 하얗게 칠해진 가면 같은 얼굴에 눈이 빠끔했다. 볕이 너무 강해서 한 주발은 뒤집어써야지 자칫하면 깜둥이가 되어버려. 두텁게 바른 자외선 차단 크림 밖으로 웃음이 빡빡하게 번졌다. 창으로 흰 바지와 붉은 재킷의 제복을 입고 챙이 커다란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명희의 늘씬한 모습이 기숙사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누워 아침나절 내내 출근을 하지 않고 빈둥대다가 짐을 꾸렸다. "집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잠깐 아득한 눈빛이 되어 내뱉는 여자의 말이 은영에게는, 그 여자 자신은 집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도 할 것이다. 전화로 미리 내방의 의사와 목적을 밝히지 않고 무작정 아무 때나 들이닥칠 수 있는 것이 한 군데쯤 있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리라. 감자 튀김을 하나씩 집어 천천히 씹는 여자의 눈길이 광장으로 옮겨지자 은영은 이제 마음놓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누렇게 윤기 없이 부스스한 갈색 염색의 머리털, 루즈를 지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오물거리는 분홍빛의 입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디론가 데려가 줄 기차를 기다린다는 따위 뚜렷한 목적으로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여자를 밖으로 끌어낸 것은 무엇일까. 눈이, 비가, 바람이, 햇빛이^5,5,5^. 지난 가을 서울에 와서 처음 백화점 포장부에서 일을 할 때, 은영도 그랬었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창고에서 포장일을 하노라면 하루종일 거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때가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아무런 목적 없이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노선을 바꿔가며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다. 돌아와서는 죽은 듯 쓰러져서 잠이 들곤 했다. 어떤 목마름, 세상 속에 속해 있지 못하다는 외로움, 사람들과 몸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상적 삶에의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영은 자신이 기숙사의 방에 남기고 온 것들을 생각했다. 머리빗, 스타킹, 머리카락, 보이지 않게 떨어져내리던 살비듬, 침대에 남아 있을 체취^5,5,5^. 그 여자는 인구탑의 숫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수시로 바뀌는 인구탑의 숫자와 교통 사고 소식은 이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어가고 세상 곳곳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전언처럼 경고처럼 보였다. 그 여자의 눈길은 이제 인구탑을 지나 비둘기떼가 내려앉는 역 과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무리와 비둘기, 시계탑. 광장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두 달이나 석 달에 한 차례씩 원천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나오는 이 광장에는 은영이 기억하는 한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바람이 불었다. 그 여자에게는 밀폐된 공간의 공기 같은 농밀한 어떤 냄새가 있다. 은영은 그녀에게서 영화나 소설 속에서 더 친근한 부류의 여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두운 신비로 은밀히 강렬하게 매혹시키던. 자신이 아직 맛보지 못한 독산 술과 같은, 그것의 취기와도 같은. 그 여자의 눈에는 은영이 아직 알지 못하는 방이 있다. 어둡고, 따뜻하고 축축한. 쉬지 않고 숫자가 바뀌는 인구탑 아래 바람 속에 한 남자가 지나간다. 두어 걸음 옮겨놓다가 발을 들어 밑창을 들여다보고는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은영의 눈길이 잠깐 그에게 멎었던 것은, 조금 난처하고 불편해 보이는 그의 걸음걸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영의 시선은 곧 그를 건너 무연히 비둘기떼를 좇고 청년의 모습은 광장을 채운 무리 속에 섞여 사라졌다. 결국 되돌아온 것이다. 허둥대다가 지하도 층계에서 고꾸라져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구두 앞창이 딱 벌어져버렸다. 현우는 밑창이 벌어진 구두를 손질하기 위해 역 광장의 간이 수선소에 들어갔다. 철제 의자에 앉아 구두를 벗어 주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눈이 닿는 곳에 쪽거울이 붙어 있었다. 버릇처럼 쪽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꽤 괜찮은 용모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쓸어본다. 이렇게 우묵하고 그늘이 짙은 눈과 뚜렷한 윤곽을 가진 개성적인 얼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성격 배우나 액션물에도 로맨스물에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눈빛 연기도 알몸 연기도 끝내주게 할 수 있다.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것에도 자신이 있다. 무르익은 복숭아의 얇은 껍질을 흠없이 벗기듯 섬세하게 부드럽게 뜨겁게. 어떤 배역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 한 방에 스러져 카메라에 얼굴 한번 비쳐지는 일 없이 싱겁게 사라지는 엑스트라 아닌 진짜 주연 배우. 자신은 일류 스타가 되어도 엑스트라부터 시작한 연기 인생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고아로 자라 대배우로 성공한 인간 장현우의 일생도. 현우는 조그만 거울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쳐보며 수염을 길러볼까 생각해본다. 구레나룻부터 턱밑까지 수염을 기른다면 조금 빠진다 싶은 턱도 가려져 한결 노숙해 보이고 어쩌면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우는 입고 있는, 적당히 후줄근하고 때묻은 사파리를 내려다보았다. 나쁘지 않은 차림이었다. 캡을 사서 쓴다면 또 엽총을 갖춘다면 밀림의 사냥꾼으로 야성적인 멋을 흠씬 풍길 것이다. 게다가 굵은 테의 안경까지 쓴다면 아무도 장현우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길러 변장한 도망자가 혈안이 되어 그를 쫓고 있는 형사의 등을 치며 담뱃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하고 묻는 장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다가 재빨리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재수가 없었다. 자기처럼 불운한 인간도 드물 것이다. 뭔가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려고 하면 꼭 장애물이 나타난다. 오늘 아침 역 뒤켠의 한 방에서 잠을 깬 그는 밖에 나오는 길로 신문을 사서 보았다. 사회면을 샅샅이 살펴보다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랫단에 조그맣게 '신원 미상의 변사체 발견' 기사를 보았던 것이다. 둔기로 뒷머리를 맞아 절명한 사십대의 사내로 지갑 등 소지품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강도를 당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씌어 있었다. 결국^5,5,5^ 언제나 자기 앞에 예비되고 예정되어 있던 것과 맞닥뜨렸다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느낌에 아뜩해지는 눈을 비비고 다시 기사를 읽고는 석연치 않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변사체가 발견된 곳은 영등포 당산동 철교 부근이었다. 자신은 어제 분명 석촌호수에 있었다. 주정뱅이를 때려눕힌 곳은 그곳이었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사건일 것이라고 불안하게 안도하면서도 현우는 석촌호수로 갔다. 포장마차촌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군데군데 토한 자국들과 쓰레기들만이, 지난밤의 흔적들을 보이고 있었다. 과부네 쌍과부네 돼지네 꽃띠네 해뜨는 집 달맞이꽃^5,5,5^. 그 남자를 구겨 박았던 장소에는 아무도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현우는 작은 핏자국, 머리카락 따위 단서를 찾는 노련한 형사의 매서운 눈길을 지어보이며 주변을 살폈다. 땅에서 주운, 짓이겨진 담배꽁초를 눈 가까이 들고 요리조리 살피기도 했다. 그곳을 떠나기 전 사파리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짐짓 망연하고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 여유를 보이고, 사건을 해결하고 난 콜롬보 형사가 짓는 그 씁쓸한 환멸의 표정까지 지어보인 것은 어젯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신문 기사에 나지 않았다는 믿을 수 없는 안도감, 혹은 불안감 때문에 비롯된 짓이었을 것이다. 술이 깬 주정뱅이는 뒷머리의 대단찮은 타박상에 엄살을 떨며 돌아갔을 게 뻔하니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거나 경찰이 범인을 잡기 위해 비밀 수사를 벌이며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주정뱅이의 뒷머리를 쳤을 때 마치 물큰한 두부를 치는 것 같았다. 뒷주머니에 비죽 나온 지갑을 보지 않았다면 그것을 잡아 빼어 열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맹세코 강도를 하기 위한 짓은 아니었다. 그저 술자리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시비였을 뿐이다. 그러나 얼결에 그의 술잔을 엎은 따위의 하찮은 실수에 그 작자가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따위 욕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욱이 현우는 몹시 피곤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그날의 함성"을 찍느라 하루종일 '대한 독립 만세' 한마디를 외치며 말 탄 일본 순사의 칼을 맞고 죽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쉴새없이 죽고 죽으며 현우는 이를 갈았다. 주정뱅이가 비틀대며 나갈 때 현우는 따라나가 뒤에서 머리를 쳤다. 단 한 주먹에 그는 맥없이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현우는 지갑을 열고 현금만을 빼내었다.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신용카드와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따위가 든 갈피를 건성으로 뒤져보는데 조그만 붉은 헝겊주머니가 보였다. 그 안에는 붉은 물감으로 이상한 새모양의 그림과 글씨가 적힌 종이가 조그맣게 접혀 들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나 아내가 이런 따위 횡액을 막아 달라고 넣어주었을 부적이라는 것쯤은 현우도 알았다. 께름칙해서 현우는 지갑째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현우는 주간지를 펴들었다. 구두를 고치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닳아버린 굽과 벌어진 밑창을 손질하며 현우와 엇비슷한 아이일 수선공 청년은 딱한 얼굴로 했다. "지금도 이런 걸 신나, 내다 버리고 새걸로 개비하세요." 그는 남루하고 늙은 두꺼비 같은 몰골인 구두의 닳아진 뒷굽을 사정없이 뜯어내었다. 구두창에 본드를 발라 꾹 누르며 잘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을 다투어야 할 일은 없었다. 현우는 철제 접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느긋이 앉아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자를 집어 들었다. 앞뒤 겉장이 다 떨어져 나가고 군데군데 찢기기도 한 주간지였다. '뒷굽도 갈까요? 다 닳았는데요'하는 수선공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펄럭펄럭 책장을 넘기던 현우의 눈이 한군데서 멎었다. 잃어버린 외아들(은식: 당시 6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십 년간을 한결같이 집을 지키고 있는 김필구 씨(65세)와 이매득 씨(50세)의 사연. 저물 때까지 동네 아이들과 집 부근 타작마당에서 놀던 아들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안개가 무섭게 끼었던 날로 기억한다. 저녁을 지어놓고 아들을 부르러 나가 삼동네를 헤맸지만 아들은 없었다. 떠돌이 장사꾼에게 유괴당했으리라는 생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들 부부는 그 후 사철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처럼 해질녘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올린다고 한다. 아랫동네 등 인근 마을은 수몰지가 되어 주민들이 외지로 이주해갔지만 이들은 살던 곳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붕이 새고 울타리가 썩어갔지만 그날 그대로의 모습을 무엇 하나 고친 것이 없다. 아들이 잃어버린 집의 기억을 되찾아 돌아와주기를 바라는 염원인 것이다. 집 앞의 팽나무는 크게 자랐다. 나무가 집을 가릴까보아, 그래서 아들의 기억이 혼란해질까봐 자라는 대로 윗가지를 잘라주어 팽나무는 옆으로 퍼졌다. 기형적으로 변형된 이 나무가 부부의 애절한 기다림, 기억 속의 풍경이 언제고 반드시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리라는 믿음을 말해주고 있다. 원천에서 이기주 기자 그리고는 나지막한 산이 뒤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의 집 앞에 넓게 땅으로 눕다시피 한 나무, 집 앞에 서 있는 늙은 부부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현우는 읽고 또 읽었다. 어쩐지 그 집이 낯이 익었다. 시름없이 서 있는 늙은 부부의 얼굴도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앞뒤를 보아도 무슨 주간지인지 언제 적 것인지 알려주는 부분은 없었다. 현우는 그 페이지를 찢어 네 절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고친 구두를 신고 일어났다.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은식아, 부르던 목소리도. 이제껏 현우라는 이름은 허깨비 같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누군가 슬며시 손을 잡아 끌던 기억도 떠올랐다. 하긴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레미콘 기술자로 베트남에 갔다가 베트남 패망 후 남아메리카에 건너가 파인애플 농장주로 크게 성장했다는 사람의 얼굴을 티브이에서 보았을 때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보육원에 있을 때 그의 별명은 '콩'이었다. 베트콩 같다는 뜻이었다. 어딘가 베트남인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거울 앞에 서서 검은 얼굴과 강파르고 높은 광대뼈를 유심히 보기도 했었다. 베트남 여인과 한국인 기술자 사이에 태어난 라이따이한. 그러나 자신이 어떤 경로로 한국에 떨어지고 아비는 남미로 건너갔는지 갓난아이인 자신을 안고 망망대해를 떠돌던 보트 피플인 베트남 여인은 어디로 갔는지, 이야기를 만들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인생은 항상 그래왔다. 어딘가에서 연결핀이 빠지고 그때부터 줄 끊긴 구슬 목걸이처럼 깨진 사발 조각처럼 마구 흩어져버렸다. 신문을 발견한 것이 어떤 운명적인 필연성으로 여겨졌다. 떨어진 구두 밑창도 예사롭지 않았다. 언제나 중대하고 결정적인 일은 예기치 않은 사소한 것이 빌미가 되는 법이다. 그는 오징어배를 탈까, 탄광의 광부가 될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이 세상에 싫증이 나고 언제 어디서나 부딪치는 누렇고 밋밋한 얼굴들에게, 언제나 수상쩍고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했다. 그는 탄광의 광부가 되어 땅 끝까지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촬영장에서 만난, 평생 영화판만 따라다니며 살았다는 중년 사내에게서 강원도 골짜기 탄광촌의 폐광에 들어가 버섯이나 길러볼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현우는 폐광이라는 말에 매혹되었다. 산에서 산적처럼 홀로 살 수도 있으리라. 땅 속에서 곰처럼 길고 깊은 단 겨울잠을 잘 수도 있으리라. 버려진 굴에서, 눈 어두운 사람들이 놓쳐버린 금맥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신문 쪽지를 보는 동안 끝간 데 모르게 펼쳐지는 공상과 계획들은 사라졌다. 대신 자신의 모든 생이 이 신문 쪽지를 향해서 움직여온 듯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오, 내 인생은 얼마나 이상한가. 원천이라니. 망망대해에서 거센 파도와 싸우는 모습과 땅 속에서 누렇게 번쩍이는 금맥, 산적의 고독한 은둔 생활은 이미 그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팽나무가 누워 자라는 그리운 고향집과 오로지 그만을 향한 늙은 부모의 기다림만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뛰다시피 역사를 향해 걸었다. 원천, 그가 기억하는 한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지명이었다. 그러나 몇 번 입으로 뇌어보는 동안 그것은 그가 떠났던, 갇혔던 아득한 안개 속에서 홀연히 솟아올랐다. 그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감춰지고 묻혀졌던 시간들이 생생히 살아나 그를 인도하리라. 현우는 단단히 붙은 구두창을 확인하듯 힘차게 걸음을 내닫으며 인구탑을 올려다보았다. 비둘기 똥으로 지저분하게 얼룩진 인구탑은 오늘 아침과 다름없이 움직이며 숫자를 바꾸고 있었다. 4, 5, 9, 7^5,5,5^. 기차 안은 붐비었다. 통로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은영은 짐을 선반에 올리고 승강구로 나왔다. 일교차가 심한 계절이었다. 저물면서 기온이 내려가 바람이 차가워졌다. 승강구에는 일찌감치 사람들을 피해나온 젊은 남녀가 승강구의 문을 닫고 발판을 내려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신문지를 깔고 꼭 붙어 앉아 남자는 바바리 코트를 벗어 자신과 여자의 몸을 덮었다. 은영은 그들에서 조금 떨어져 반대편 문이 열린 승강구 쪽에 섰다. 열린 승강구의 계단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걸친 청년이 은영을 흘긋 쳐다보았다. 열에 뜬 듯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낡은 녹색 사파리가 눈에 익은 듯도 싶었다. 은영은 핸드백을 앞으로 모아쥐고 승강장의 벽에 기대섰다. 기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끔 객차의 연결 부분이 불안하게 덜컹거리며 차체를 흔들었다. 바퀴가 레일 위로 구르면서 내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발바닥으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에 잘디잔 자장을 일으키고 은영은, 공상 속에서 수십 번 해보았던,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거나 손가락 하나의 가볍게 미는 힘에 의해 떨어지거나 자신이 팔을 뻗어 누군가를 그렇게 밀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무런 감정을 수반하지 않고 떠올랐다. 기차를 타면 늘 그랬다. 달리는 열차의 속도가 주는 비현실감 때문일까.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바바리 코트를 덮고 있는 남녀의, 손 닿지 않는 곳의 가려움증처럼 작고 안타까운 움직임이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은영은 애써 고개를 바깥으로 돌렸다. 청년도 그쪽을 보고 있었던 듯 은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픈 사람 같아. 은영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공연한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거의 잘생긴 편인 그를 보는 순간 어떤 감정이 엄습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은영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낯선 남자 앞에 서 있다는 긴장감뿐인지도 몰랐다. 무얼 하는 사람일까. 똑같은 탐색이 자기를 보는 청년의 마음 지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승강구 천장에 흐린 불이 들어왔다. 바람은 차고 축축했다. 강이 가까운 것이다. 이미 퍽 어두워져서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희끄무레한 색채뿐 강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물비린내가 공기 속에 섞여 맡아졌다. 아무 말 없이 서로간의 마음에 스쳐간 서로에 대한 느낌과 생각들이 물비린내 속에 섞여들었다. 밤기차를 타면 왠지 국경을 넘어간다는 공상에 빠지게 된다. 국경, 국경 수비대, 얼어붙은 국경에서 제 땅을 지키는 힘세고 사나운 사내. 아름다운 처자를 남겨두고 북방에 수자리를 살러 갔던 사내들, 먼 아버지의 아버지의^5,5,5^. 은영은 어둠이 짙어지는 밖을 본다. 산모롱이, 기차가 구부러져가는 곳에 문득 나타난 불빛은 곧 까무룩히 멀어지고 한층 더 깊은 어둠이 고인다. 어둠 저편은 숲이리라. 그 숲에 이르기 전의 푸른 잔디와 빈 의자. 어제, 골프장에서 은영은 구릉을 넘어갔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골프장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겹쳐 있다. 그가 등의 땀을 닦아 달라고 말했다. '아연 7번을 줘'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투로, 예사롭게. 그렇지만 그녀 외에는 곁의 사람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모욕감을 느꼈던가. 그는 캐디들의 제복을 입고 명찰을 다는 이유를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체한다. '미스 가. 몇 살이지? 스물? 스물 하나? 아침풀 같은 나이야. 여자들이 나이 먹고 늙는 것은 안타까워. 예쁜 여자는 남자들에게 주는 조물주의 축복이거든.' 땀을 닦아주는 대신 은영은 그의 등 뒤에서 소리없이 비켜나 구릉으로 걸어갔다. 너무 깨끗하고 고요해서 액자 속의 풍경화 같았고 은영은 길을 벗어나 그림 속으로 들어가듯 그곳으로 걸어들어갔다. 공이 날아가 숨던 숲이 있는 곳까지. 언젠가 한번 조금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황금빛 잔디의 완만한 경사면이 만나는 곳에 사람의 자취는 없는데 웬일로 하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은 끝없는 잠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햇빛과 한없는 적요로움이 이승의 광경 같지 않았다. 문득 그 흰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본 것도 같았었다. 하얀 의자는 그녀가 와 앉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은영은 군데군데 라카 칠이 벗겨진 의자의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고 앉았다. 저편 구릉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조금씩 솟아오르다가 차츰 낮아지며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사막의 부드럽고 고운 모래 속으로 묻혀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몽롱한 가수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졸음에 못 이겨 의자에서 스르르 내려와 잔디에 몸을 뉘였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눕기를 원해왔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흙내와 풀냄새, 제초제의 냄새가 섞여 풍겼다. 햇빛 속에 자신의 손이 팔이 다리가 이윽고 몸 전체가 하얗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잠이 들었던가. 은영을 발견한 명희는 은영이 발가벗고 누워 있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시체 같았다고도 말했다. 은영은 물론 윗도리의 목단추 하나도 끄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은영은 자신에게 발가벗고 눕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사람들과 좀더 부드럽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해. 명희는 충고했다. 부드러운 관계. 기숙사의 룸메이트인 명희는 부드러움으로 제 인생을 다시금 새롭게, 원하는 형태로 빚을 수 있다고 믿고 노력했다. 그애에게 인생은 딱딱하고 틀을 가진 고형의 것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다르게 빚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말, 웃음, 손길, 좋은 식사와 잠자리. 명희는 쉬는 날에는 애인을 만나러 나가 밖에서 밤을 지내고 은영이 알지 못하는 향기로움을 가지고 들어왔다. 빈 방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거나 책을 보다가 은영은 문득 지금 명희는 남자랑 침대 속에 있겠구나,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구나 생각하곤 했다. 그애가 남자와 함께 호텔 방에 드나드는 것을 영화나 소설 속에서의 장면처럼 그려보기도 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 샤워를 할 때면 은영의 등에 비누질을 해주며 너는 살결이 실크 같아. 남자들이 환장을 할 몸이야, 라고도 말했다. 은영은 자신의 몸이 단지 먹고 배설하고 움직이고 아픔과 추위에 반응하는 것만이 아닌, 누군가의 욕망과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또한 스스로에게 발견되어지며 감춰진 기쁨과 슬픔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놀랍게 들었다. 누군가 가볍게 손등을 치는 느낌에 은영은 눈을 떴다. 승강 계단에 선 청년이 길게 팔을 뻗쳐 핸드백을 내밀었다. 깜박 졸다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은영이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등을 꼿꼿이 폈다. 기차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쇳내 나는 공기가 휙 끼쳐들었다. 청년의 눈길은 은영을 지나 반대편 승강구의 남녀를 향하고 있었다. 숱 많고 긴 머리가 온통 가린 여자의 얼굴은 남자의 가슴팍에 묻혀 있고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바바리 코트 속의 꿈틀댐은 더욱 집요하고 안타깝고 절박해졌다. 은영은 어느 순간 청년의 손길이 바바리 코트를 휙 걷어 젖히리라는 아슬아슬함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청년은 천천히 그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여자들의 나이는 짐작할 수 없다. 현우는 등을 꼿꼿이 펴고 서 있는 여자를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중키의 여자는 평범한 생김새이지만 나쁘지 않다. 원천까지 가는 동안 말동무가 되어도 좋으리라. 어쩌면 이 여자와 함께 부모가 기다리는 집으로 갈 수도 있으리라. 영화에서처럼. 이 여자와 무언가 새로운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현우는 그 여자에게 자신이 이십 년을 한결같이 자기를 기다려 온 부모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특별한 날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현우는 어젯밤 역 뒤켠의 여자를 샀다. 그 여자의 기억은 방을 나서면서, 눈등에 쌍꺼풀 수술의 칼자국이 깊었다는 것밖에는 남지 않았다. 돈으로 산 여자들은 늘 그랬다. 거품 같았다. 아직 연탄 갈 때는 안 되었지만 인자는 식당을 나왔다. 연탄집게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전자오락실의 전자음이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이 뿜어대는 냄새와 삑삑대는 소리들을 헤치고 안에 들어갔다. 어지러운 빛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한 대의 오락기에 서너 병의 조무래기들이 매달려 한숨과 함성을 질러대기도 했다. 인자는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운동장에서 울며 뛰던 소년이었다. 그는 쉴 짬 없이 레버를 작동시키며 정신없이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원망도 분노도 적의도 없는 오직 오락에 빠진 얼굴이었다. 귀머거리도, 그녀의 남편도 보이지 않았다. 인자는 오락실 안쪽 부엌과 살림방이 있는 비닐 휘장을 들치고 들어갔다. 작은 찬장과 살림 집기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부엌에서도 연탄집게는 보이지 않았다. 방 앞에 여러 켤레의 신이 놓여 있었다. 닫힌 방 문 안에서 뜸뜸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방문을 열었다. 환기 안 된 방의 퀴퀴하고 비릿한 냄새와 함께 방 안 가득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기척도 모른 채 둥그렇게 모여 앉은 늙은이들의 불콰한 얼굴들이 한곳을 향해 있었다. 인자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여자들이 뒤엉킨 티브이 화면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인자는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은 몸뚱이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귀머거리의 남편이 수문장처럼 문 바로 안쪽에 앉아 있다고 손을 내젓고 문을 닫으려 애썼다. 어쩔 줄 모르는 늙은이들의 민망하고 면구스러워하는 추한 얼굴들을 외면하며 인자는 얼른 문을 닫고 돌아섰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귀머거리가 돈을 받고 뒷방에서 학생이나 늙은이들에게 음란 비디오를 보여준다는, 늙은이들이 대낮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승리오락실의 뒷방에서 어기적거리며 나온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인자는 달아오른 얼굴로 오락실을 나왔다. 철물점에서 연탄집게를 샀다. 쓰던 것처럼 끝이 날렵하고 암팡지게 단단한 것은 없었다. 조임새가 헐겁고 쇠가 약해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더 물건을 대강 만든다. 돌아오는 길에 인자는 슈퍼에서 소주도 두 명 샀다. 연탄을 갈고 송이버섯을 아구리가 넒은 병에 넣고 소주를 부었다. 시들어가는 송이에 소주가 스며 금세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인근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은 토요일 저녁에는 거의 손님이 없게 마련이었다. 일찍 문을 닫을 요량을 음식거리들을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고 인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더웠다. 몸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땀이 났다. 간단없이 열이 훅 얼굴로 몰리며 땀이 솟곤 했다. 스웨터를 벗고 러닝 셔츠 바람으로 된숨을 몰아쉬다가 불거진 젖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각각 젖가슴을 쥐어보았다. 한손 가득 뿌듯하게 잡혔다. 문득 어제 낯에 산에서 본 단풍의 선연한 붉은빛이 꿈이었나 싶었다. 귀머거리의 집 뒷방에서 얼결에 보았던 티브이 화면은 벌거벗은 모습들이 겹쳐 떠올랐다. 잇몸에 조그만 벌레들이 기어가는 것처럼 근지러웠다. 잇몸뿐이 아닌, 몸 안의 어디랄 것도 없이 깜짝 놀란 작은 벌레들이 핏줄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조바심나고 근지러웠다. 뭔가 한없이 안타깝고 서러운 느낌들이 빈 부대처럼 텅 빈 몸을 채웠다. 입을 한껏 벌리고 입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이든 쉬지 않고 말하고 싶었다. 인자는 전화기를 끌어당겨 번호판을 눌렀다.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청춘인 그애는 바쁜 일도 재미있는 일도 많을 것이다. 전문학교를 나오고 집에서 놀던 그애는 지난 해 가을 일자리를 얻어 서울로 떠났다. 친구의 소개로 백화점에서 일한다더니 얼마 전 직장을 골프장으로 옮겼다고 했다. 간간 전화를 해올 뿐 집에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와도 하루 낮밤을 잠으로 채우다 가곤 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도 사흘을 견디지 못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차츰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안달을 했다. 몇 개의 광장과 환상도로,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옭아맬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딸도 그랬다. 진절머리나요. 집을 떠날 즈음의 딸이 노상 입에 달던 말이었다. 인자는 성호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용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고 이미 송이술을 담가놓은 터이지만 인자는 성호엄마에게 송이버섯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사뭇 의논성스럽게 물었다. 여럿이 어울린 말소리, 웃음소리가 송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인자도 아는 계꾼들이 모여 고스톱을 치고 만두국을 시켜먹을 거라고 했다. '당신 차례야, 전화 대강하고 빨리 쳐.' 채근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송이를 어떻게 하느냐구? 끌어안고 자면 되지 뭘." 성호 엄마가 깔깔 웃었다. 인자는 이런 유의 농담에 익숙하지 못하다. 빨리 전화를 끊고 싶어 하는 성호 엄마와 몇 마디 시답잖은 얘기를 늘어놓고는 아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추룸히 앉았다가 굴러다니는 찜질방 광고지를 보고는 그곳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경통이 심한 사람인데 재래식 한증막보다 정말 효과가 좋은지 요금은 얼마인지 등등 시시콜콜히 물었다. 건강 식품 대리점 모집 광고지를 보고 그곳에 전화를 걸어 전혀 그럴 계획도 흥미도 없으면서 대리점의 조건과 전망 따위를 물어보았다. 장롱 속 깊숙이 넣어둔 저금 통장을 꺼내보고 딸과 자신의 앞으로 둔 보험 증서도 꺼내보았다. 주방으로 나와 창밖을 내다본다. 어느새 짙어진 어스름 속에 희끄무레 떠 보이는 운동장 쪽에서 타닥타닥 뛰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더 검은 형체의 움직임, 빨갛게 달아오르고 이를 악문 얼굴도 환영처럼 보이다 사라졌다. 3 호차 중간 통로 왼편의 좌석에는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와 중년의 여자, 맞은편에는 좀더 늙수구레한 한복 차림의 여자와 넥타이를 단정히 맨 양복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여자들 사이에 끼어 앉은 것이 불편한지 줄곧 신문을 펴들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자가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우유병을 물리는 모양이 인형놀이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가 깜짝 놀라게 젊은 탓일 것이다. 좁은 어깨 아래 볼록하게 솟은 젖어미 가슴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여자의, 지푸라기처럼 지치고 고단해 보이는 행색과 어린 나이의 애잔함에 묻어 있는 신산스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를 보는지 시선을 잡을 수 없는 몽롱한 눈빛이라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때문인가, 마주 앉은, 가지색 치마에 미색 저고리를 받친 한복차림의 늙은 여자나 통로 쪽의, 어딘가 감때 사나운 인상의 중년 여자의 눈길이 시종 아기 엄마의 손끝을 따라다닌다. "아이구, 애젊어라. 애기가 애기를 낳았네. 고추구랴. 첫아들 낳기가 정승하기보다도 어렵다는데^5,5,5^ 친정 가는 길이우?" 기저귀 갈아 채우는 것을 지켜보던 늙은 여자가 말했다. "원천 사세요?" 젊은 여자가 문득 눈시울을 좁히며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렇다우. 서울서 잔치 보고 가는 길이라우." "그럼 혹시 박한수라고 아세요? 한 십 년 전까지 원천에 살았다는데 지금 스물 네 살이에요. 그 사람 부모님은 아직 원천에 사실 거라는데요." "어느 동네에 살았답디까? 하긴 동네를 안다 해도 이웃이나 친척이 아니면 알 수 없지. 난 그런 이름 기억에 없수. 혹시 그 사람 부모님 함자를 알고 계시우?" "아무것도 몰라요. 그 사람 고향이 원천이라는 것밖에는. 열네 살에 돈을 훔쳐 무작정 서울에 올라온 뒤로 고향에 가본 적이 없대요. 부모님은 아직 원천에 계실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박한수가 애기 아빠^36^예요. 지난 여름에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애가 딸리니 전처럼 직장 생활도 할 수 없구요. 그래서 그 사람 부모님이라도 찾아가 당분간 맡겨볼까 하고 얘기 데리고 나섰지요. 어쨌든 그 집 핏줄이잖아요. 이제 젖도 떼었으니 누가 길러도 기를 수 있겠지요." 그 여자의 말은 마치 연습이라는 해두었던 것처럼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신문에 얼굴을 박고 있던 남자가 퍼뜩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구먼. 이름 석 자만 갖고서야 한양에서 이 서방 찾기지. 주소지의 동사무소를 찾아가봐요." 늙은 여자가 쯧쯧 혀를 찼다. 아기가 깨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약한 소리로 울었다. 여자가 우유를 사서 빈 우유병에 넣어 물리자 아이는 이내 울음을 그쳤다. 여자의 눈길이 줄곧 아기를 향해 있었다. 눈은 빡빡하게 메말라 박제된 짐승을 연상시켰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가면과도 같은 무표정이었다. "사정이 딱하게 되었구랴. 그래도 살아가자면 산 사람들끼리는 언제 어디서건 만나게 되어 있다우.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젊은 혈기에 뛰쳐나갔겠지만 이렇게 멀쩡한 처자가 있는데 곧 돌아올 거유." "왜, 왜 그랬을까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무력하게 뇌이는 여자의 말이었다. 여자는 아이의 입에서 우유병을 떼어내었다. 반 병 남짓 먹고 난 아이는 순순히 고무꼭지를 내놓았다. 배가 부른 아이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사방을 두릿두릿 살피는데 여자는 등받이에 등을 묻고 눈을 감았다. 측은해 하는 눈길로 바라보던 늙은 여자가 아이를 살그머니 빼내는데도 조금 눈꺼풀을 드는 시늉만 했을 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다리를 뻗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늙은 여자는 아기 엄마에게 위로 삼아 아기 아빠가 돌아올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 자신은 전혀 믿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아기가 제 앞에 놓인 미래의 나날들에 대해 전혀 방비 없이 단지 무구하게 벙긋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기를 참 좋아하시나봐요." 젊은 여자는 불쑥 말을 건넸다. 언제부터인가 아기를 안고 어르는 늙은 여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들었던 빛이 없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건조한 눈빛이었다. "신통하게 낯을 안 가리네. 애기 엄마도 하도 곤히 자길래 내가 잠깐 안아봤다우." "아무것도 모르고 푹 잤어요. 이즈음에 이렇게 달게 자보기는 처음이에요. 눈을 떠서는 여기가 어딘지 내가 어디를 뭣하러 가는지도 깜빡 잊어버렸지 뭐^36^예요. 아줌마가 안고 있는 애기를 보고도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니까요." 여자가 돌연 높고 날카로운 소리로 웃었다. 기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짧고 돌연한, 느닷없는 웃음 소리에 놀라 늙은 여자가 얼른 아기를 그녀에게 건넸다. 스피커에서 다음 정차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종착역과의 중간 지점으로 일 분간 정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에 잠깐 귀를 기울이던 젊은 여자가 아기를 받아 안으려던 손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화장실엘 다녀올게요." 늙은 여자가 선선히 아기를 다시 자기 무릎에 눕혔다. 잠시 정차했던 기차가 출발하여 한참이 지난 후에도 아기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늦는다는 생각이 든 것은 순하게 누워 있던 아이가 보채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열차는 종착역을 한 정거장 남기고 있었다. 배가 고픈가 아니면 기저귀가 젖었는가 싶어 늙은 여자는 먹다 남긴 젖병을 물리고 아랫도리를 헤쳐보았다. 기저귀가 펑 젖어 있었다. "늬 에미가 필시 변소간에 빠졌는갑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냐?" 비닐 가방에서 새 기저귀를 꺼내 구시렁대며 갈아 채우는데 앞에 앉았던 중년 여자가 선하품 끝에 괸 눈물을 찍어대며 음산하고 나직막하게 내뱉었다. "큰 짐을 맡았구랴. 더 시간 끌 것 없이 역무원을 불러요. 애 엄마는 진작 기차에서 내렸을 것이오. 도망가도 벌써 백 리는 넘게 갔을 걸. 난 한눈에 척 알아봤지. 왠지 수상쩍더라구. 틀림없이 논다니야. 짐승만도 못해. 짐승도 제 새끼는 안 버린다구." 화들짝 놀란 늙은 여자는 벌떡 일어나 아기를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알지 못할 공포에 기차 안이 조용해졌다. 몸에 닿던 사람의 체온을 잃어 허전했던 탓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에의 필사적인 항거일까. 갑자기 아기가 불에 덴 듯 맹렬히 울기 시작했다. 늙은 여자는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선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감히 손을 내뻗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귀를 찢는 울음을 토하느라 목젖이 들여다 보이도록 한껏 열린 입을, 그 바닥 모를 심연을 망연히 응시하였다. 종착역인 원천에 닿을 때까지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무도 아기에게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불려온 젊은 역무원은 수십 년래의 낡고 더러운 초록빛 빌로드 의자에 홀로 눕혀져 악을 쓰며 우는, 유실물이나 분실물 중 어느 품목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아기를 난감하고 망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기차가 종착역에 닿아 완전히 정차하자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고함으로, 비명으로 칭얼거림으로 흐느낌으로 밤 내내 이어질 울음 소리가 그들을 막연한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게 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흩어져 갔다. 버려진 아이는 이 도시의 어디선가 자라게 되리라. 누군가, 무엇인가가 거두리라. 바람에 불려 흩어진 풀씨가 그 떨어진 곳에서 싹을 틔우듯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종으로, 미래라는 이름으로,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자라나리라. 원천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사람들은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역사는 금세 텅 비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무작정 역사를 빠져나온 현우는 돌연 투명하고 질긴 막처럼 앞을 막아서는 낯섦이라는 느낌에 예기치 않은 낭패감을 맛보았다. 현우는 역 대합실로 되돌아가 역무원에게 물었다. "수몰지로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 역무원은 다소 이해가 안 간다는 낯을 지었다. "수몰지라면 물에 잠긴 곳인데 물 속에 들어가려는 건 아닐 테고^5,5,5^."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있다는데요." 현우가 안주머니에서 신문지 쪽지를 내보이자 비로서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댐 안쪽 골짜기 같은데^5,5,5^ 굽이굽이 골짜기도 여럿이에요. 서너 집 모여 사는 동네도 있고 리 단위의 큰 동네도 있어요. 사진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쪽 동네인 것 같은데요. 일단 댐으로 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지금은 배가 다 끊겼을 거요. 댐으로 가는 버스도 없구요." 밤공기 탓만은 아니게 싸아한 냉기가 느껴지고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감기인가. 원천으로 오는 동안 내내 승강구에서 밤바람을 맞은 탓인지도 몰랐다. 현우는 역 앞의 약국으로 들어갔다. 물 건너 산골 오지에는 약국이 있을 리 없으리라 생각하여 아^36^예 닷새치의 감기약을 지으며 약사에게 또다시 신문지를 내보였다. 젊은 여약사는 산이야 어디나 매양 같은 거고 나무 모양이 특이하네요 하며 가볍게 웃었다. 결국 알아낸 것은 이 밤 안으로는 그곳에 갈 수 없으리라는 것뿐이었다. 현우는 애써 낯익히듯 거리의 입간판을 꼼꼼히 읽고 상점들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불빛이 모여 있는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거리는 가까스로 인도만 남긴 채 온통 파헤쳐져 있고 굴착기와 포크레인이 밤빛에 괴물처럼 흉측하게 서 있었다. 이곳은 어딘가 대도시를 조그맣게 축소해 놓은 앙증맞은 모형물 같았다. 불빛 밝은 거리는 금세 끝나고 침침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어두운 길들이 갈라져 뻗어간 어귀, 포장마차의 솥 안에 수북이 쌓인 붉은 게가 더운 김을 올리며 삶아지고 있었다. 흰 종이꽃을 단 패랭이를 쓰고 흰옷의 농악놀이 차림에 붉고 푸른 띠를 허리와 어깨에 걸쳐 맨 사람들이 둘러앉아 말없이 게를 먹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쓸쓸하고 기이해 보였다. 자꾸 자신이 현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어제 이맘때 그는 석촌호수에서 주정뱅이의 머리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금은 낯선 고장의 어두운 거리에 어두커니 서 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물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곳, 이십 년째 그를 기다리며 굴뚝에 연기를 피워올리는 부모가 있다는 곳과의 거리는 얼마나 아득한 것일까. 밤공기는 별반 차가운 것 같지 않은데 자꾸 살 속으로 한기가 들었다. 현우는 옷깃을 한껏 올리고 목을 움츠렸다. 밤에 잠을 깨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옆자리에 누워 있는 은영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비쳤다.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가슴이 후두둑 뛰었다. 밤에 잠을 깨는 일은 드물었다. 꿈조차 꾸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불을 켜고 딸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잘록한 허리와 둥그런 엉덩이의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딸은 아직 자신의 몸의 싱그러움과 갈망을, 몸이 꾸는 꿈과 갈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인자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밤 연락도 없이 불쑥 집으로 돌아온 딸은 저녁도 뜨는 둥 마는 둥 별반 말도 없이 이내 잠이 들었다. 무엇이 그렇게 그애를 고단하게 했는지 인자는 물어보지 못했다. 기껏 '건강은 괜찮냐, 밥은 잘 먹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딸이 자라감에 따라 인자는 그애에 대해 형태와 부피와 존재는 확실히 있으나 손잡이를 찾을 수 없는 혹은 문고리를 찾을 수 없는 문을 볼 때와 같은 무력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애가 어릴 때 인자는 그애와 함께 우주의 한 별로부터 날아와 지구에 불시착하는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 없이 외롭게 자라던 소년과의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외계인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고 죽은 꽃을 피어나게 한다는 그 영화를 보고 난 은영은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혹은 아버지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나 보았다. 그날 밤, 말라죽어 버린 치자꽃 화분을 방에 들여놓고 밤새 들여다보았다. 인자는 그것이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이는 곧 죽은 꽃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불멸의 아버지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딸은 이 도시에서 도망쳤다. 아니 어미인 인자에게서 도망쳤다. 인자는 그애를 가졌을 때 자신이 배고 있는 것이 한갓 거품이거나 도롱뇽의 알이거나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동물 혹은 커다란 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임산부들이 갖는 일반적인 공포감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거품을 낳은 상상 임산부나 개울에서 멱감은 여자가 물 속의 뱀알이 몸 속으로 들어가 뱀을 낳았다거나 늙도 젊도 못한 중년의 과부가 사람 몸에 개 대가리를 한 괴물을 낳았다거나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란 그애는 두 개씩의 팔다리와 정상적인 외모와 기관을 가진 사람의 자식으로 온전히 태어났다. 온 힘으로 밀어내자 아이는 시위를 떠나 화살처럼 세상 속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녀 자신 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안개 낀 아침 가방을 메고 구구단이나 연대기를 외우며 학교에서 가던 모습.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부루퉁한 낯으로 집을 나서던 것^5,5,5^ 딸이 아직 자신의 모습에 무관심하고 무지했을 때 아직 생의 공포에 노출되지 않았던 때. 뜨거운 여름 햇빛 아래 두 팔을 들고 땀을 철철 흘리며 서 있던,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듯 하던 그 고독한 모습. 아무리 캐물어도 딸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말하지 않았었다. 가슴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던 사춘기의 딸과 함께 밤길을 걸을 대 그애는 둥그렇게 솟아오른 만월의 달을 보며 아앗, 징그러워 하며 진저리를 치고 앙가슴을 싸안았다. 제 안에서 싹터오는 것,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항거의 몸짓이었을까. 방바닥이 뜨겁게 달고 있었다. 불이 완전히 사위기 직전의 마지막 열기였다. 인자는 연탄을 갈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 아궁이 속에서 연탄 화덕을 끌어내어 하얗게 사위며 새파란 불꽃이 이글대는 연탄을 집어 올렸다. 연탄집게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새 연탄집게는 맞무는 힘이 약해서 위태로웠다. 내일은 귀머거리에게서 헌것을 다시 찾아와야겠다. 인자는 빨갛게 달아오른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사라지게 하지만 불의 기억은 따뜻하다. 겨울 찬바람 속을 걸어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찬바람에 놀란 살갗에 온통 두드러기가 돋았다. 저녁밥을 짓고 있던 어머니는 인자를 불붙는 아궁이 앞에 앉히고 옷을 벗겨 넓적넓적하게 번져가는 두드러기에 소금을 문질러 주었다. 덜 마른 장작에서 송진이 흘러내려 불땀을 돋구자 불길이 기세 좋게 타올랐다. 말없이 불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얼굴도 덩달아 붉게 일렁였다. 빨갛고 영롱하던 잉걸이 낮게낮게 빛을 사위며 흰 재로 조용히 무너져내릴 때쯤이면 사납게 퍼지던 두드러기도 가라앉고 혼곤한 잠이 찾아오게 마련이어서 따뜻하고 눋내 나는 엄마의 치마폭에 머리를 묻고 잠들곤 했다. 인자는 불씨가 아직 남아 있는 연탄재를 들고 밖으로 나가 골목의 쓰레기통 옆에 놓았다. 고요하다. 안개가 짙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가, 아직 살아 있는 불씨를 죽일 것이다. 인자는 잠시 서서 안개 속에 뿌옇게 자취를 감추는 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새벽 두 시가 되어가는 이제까지 귀머거리는 잠자리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리오락실 닫힌 셔터 밑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인자는 잠깐 무언가 들려올 소리를 가려내려는 듯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귀머거리가 가게문을 닫고도 늦도록 귀신처럼 혼자 앉아 오락기에서 빼낸 주화들로 탑을 쌓다가 허물고 또 탑을 쌓으며 찌그럭댄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른 아침의 얕은 잠을 깨운 것은 경찰차 소리 때문이었다. 살인 사건이었다. 출입 금지 푯말이 서 있고 셔터가 울려진 셔터 안으로 아직 불이 창백하게 켜진 안이 들여다 보였다. 귀머거리와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 그들이 죽어 있던 자리에는 마지막 형체의 윤곽대로 흰 스프레이의 선이 그어졌다.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며 눈을 감는 시늉을 했지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목을 빼어 안을 살폈다. 시멘트 바닥으로부터 길 앞까지 흘러나온 피를 보고는 사람의 몸에 그토록 많은 피가 있다는 데 새삼 놀랐다. 살인사건을 처음 발견한 것은 우유 배달부였다. 셔터 밑으로 물 흐른 얼룩이 있어 생각 없이 밟았노라고, 그런데 발바닥의 느낌이 수상쩍었다고, 몇 발짝 옮겨놓다가 마른 땅에 찍힌, 찐득한 신발 자국을 손가락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고,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피'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딸은 늦도록 잠을 잤다. 밥상을 앞에다 놓고도 졸았다. 살인 사건이 났다고, 귀머거리가 죽었다고 인자가 황황히 더듬대며 말해도 아, 잠깐 놀라는 시늉을 했을 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친구들도 만나는 게 어떠냐고 하자 딸은 말없이 부스스 웃었다. 인자는 그러나 딸을 무언가 자꾸 살피는 마음이 되어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가벼운 기분으로 어미를 보고서 원천으로 온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딸은 아침을 먹고는 목욕바구니를 끼고 집을 나갔다. 목욕탕에서 나온 은영은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태어나고 자란 이 작은 도시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익숙하여 눈을 감고도 몇 갈래의 큰길과 뒷길, 골목들을 찾아갈 수 있었다. 도심지는 번화해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큰길만 벗어나면 옛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터였다. 미군 부대에는 옛날처럼 똑같은 자세로 위병들이 놋쇠 병정처럼 부동의 자세로 서 있고 '미군 당국은 만행을 사과하라' '당신들은 점령군이 아니다' 따위의 항의가 담벽에 붉은 스프레이로 씌어져 있었다. 여고 시절, 명문화되지 않은 묵시적 규율 중의 하나가 미군 부대 앞을 가지 말 것, 이었다. 졸업 직후 미군 병사와 결혼해서 미국에 간 동창도 있었다. 졸업식장에서 이미 그녀는 약혼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배는 납작했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도 파다했었다. 어릴 때 은영에게 이 도시란 학교와 동무들과 시장, 자동차가 다니는 길, 몇몇의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장 넒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성장하여 키 높이가 커짐에 따라 조금씩 높아지는 언덕에 오르듯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듯 자신이 자란, 물과 안개에 갇혀 고립된 도시를 보았다. 도시는 저 자신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이들은 이 도시를, 그 권태와 나른함과 고독을 견디지 못해 국경을 넘듯 깊은 밤 기차를 타고 달아나거나, 철길을 베고 눕거나 엷고 어색한 화장을 하고 미군 부대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일요일인 탓에 거리는 비교적 한적했지만 어딘가 들뜨고 몹시 어수선하다는 느낌이었다. 지하 공사의 소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지나치게 높거나 낮았고 표정과 태도에는 불안과 조심성의 기미가 과장되게 어려 있었다. 은영이 들어간 찻집의 커다란 수족관에서는 비단잉어들이 서로 머리를 박거나 공연히 무엇에 놀란 듯 물을 뒤집으며 밑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흥분해서 그러는 거^36^예요. 아무튼 심상치 않은 일이에요. 원천이란 데가 워낙 조용하고 사람들이 순해서 옛날부터 범죄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끔찍한 일이 생기다니^5,5,5^ 앞으로는 또 얼마나 흉악한 일들이 일어나려는지^5,5,5^." 지하도를 파는 공사의 소음이 연일 도시를 흔들어 물고기들이 혹시 지진으로 감지하고 불안해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은영의 말에 찻집 주인 여자가 단정적으로 한 말이었다. 은영이 머리핀을 사기 위해 들어간 문방구에서도 그랬다.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간다는 딸에게 그애의 엄마는 '저물기 전에 일찍일찍 다녀라. 외진 곳에 혼자 다니지 마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흉악한 세상이구나'라고 신경질적인 우려와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무슨 일'이라면 강간과 죽음일 것이다. 여자들의 원초적 공포. 딸아이가 어릴 때는 강간을 당할까봐, 커서는 자발적으로 몸을 내어주게 될까봐 걱정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플라스틱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어린 아들에게 그애의 아버지는 칼을 빼앗아 부러뜨리고 따귀를 때렸다. 커서 뭐가 되려고 이따위 흉기를 갖고 노는 거냐. 누구나 어디에서나 지난밤과 새벽 사이에 일어났으리라고 추정되는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은영은 길을 지나면서 공사장의 인부들이 잘려진 나무 아래 함부로 팽개치듯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자는 모습을 보았다. 신장리, 신장리. 현우는 혹시 시킨 것을 잊어버릴까봐 걱정하며 심부름을 가는 아이들처럼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그 지명이 주는 울림이나 느낌이 조그만 실마리가 되어 떠올릴 기억을 기대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의 응답이 들려오는가 하면 전혀 생소하기도 했다. 친숙한 쪽과 생소한 것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침을 뱉어서 틔는 방향으로 발길을 잡던 때처럼^5,5,5^ 현우는 언제나 자신을 도박대 위에 올려놓았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집으로 들어가고 뒷면이 나오면 안 들어가기.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그것이 날아가는 쪽으로 자신의 발길을 옮겨놓기. 언제나 아주 하찮은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보는, 종이접기나 동전 던지기 따위로 자신의 모든 운을 걸어보는 습성.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방향을 트는 운명에서 그에게 허락된 선택이란 그 정도뿐이 아니었던가. 어젯밤 여관으로 찾아들어 으레 그래야 할 것처럼 신문지 쪽지를 보였을 때 신문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 여관 주인은 말했었다. '여기가 신장리 같아, 산세가 꼭 그래. 예전에 낚시를 많이 다녔지.' 그때부터 신장리란 지명은 움직일 수 없이 현우의 뇌리에 붙박혔다. 어젯밤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기억나지 않는 어수선한 꿈에 밤새 시달린 듯도 했다. 약을 먹었어도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찌뿌드드한 증상은 낫지 않고 심해지는 것 같았다. 현우는 여관방에서 티브이를 틀었다. 이른 아침. 티브이 뉴스 시간으로, 살인 사건의 보도가 있었다. 전자오락실의 주인 부부가 살해되었다. 그들은 각각 의자에 묶인 채 끝이 날카로운 쇠붙이로 추정되는 흉기로 정확히 심장을 찔려 절명했다. 범행에 쓰인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범행 시간은 자정에서 새벽 두 시 사이로, 적어도 두 명 이상의 범인에 의해 저질러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우는 어젯밤 자정부터 두 시 사이에 무엇을 했던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행적을 떠올려보았다. 자정이 되기 전에 여관엘 들어왔고 그것은 주인이 증명할 것이었다. 신장리로 가려면 댐에 가서 배를 타야 했다. 느지막이 여관을 나왔다. 신문을 사서 보았다. 서울에서의 변사체 발견 소식은 없었다. 조그만 상채기 정도였는지도 몰라. 그는 형편없이 취해 있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것일 게다.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지갑을 발견했다는 기사도 없었다. 실책이다, 라고 현우는 생각했다. 지갑을 현장 가까운 곳에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더 멀리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곳에 버렸어야 했다. 현우는 돈을 꺼내 판판히 펴서 세어 보았다. 주정뱅이가 무엇인가의 대가로 받았을 돈이라는 것이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현우는 택시를 잡아 탔다. 댐까지 가는 중에도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그 살인 사건 뉴스가 나왔다. (범행 수법이 잔인한 것으로 보아 면식범의 원한에 의한 범행으로 추정됩니다.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단서를 못 잡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 부부가, 특히 청각 장애자인 부인이 대단히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검찰과 경찰은 인근 불량배와 전과자를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이는 한편 범인의 도주로를 막기 위해 이 도시로 통하는 육로와 수로를 차단하고 검문 검색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독 안에 든 쥐지요. 여긴 지형이 오목하고 암되서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요. 나가는 길이 하나뿐이거든. 왜놈들이 성을 쌓고 뭐 해자라든가, 물을 삥 둘러버리지 않아요? 물로 싸인 것이 똑 그 모양이라, 나가기도 들어오기도 쉽잖고." 암되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운전사는 덧붙였다. "난 잘 모르지만 풍수쟁이들 말로는 왜 여자들 자궁 모양이라나, 개울에 묻는 어항 같다고도 하고^5,5,5^ 그래서 겉보기에 이렇게 이쁘고 단정하고 아기자기하다고 하지만 또 은근짜 계집처럼 여간 암암하고 습한 게 아니라^5,5,5^." 머리털이 희끗희끗한 늙은 운전사가 후사경으로 현우를 보며 말했다. 배터 가까이 이르자 경찰차와 두어 명의 경찰들이 보였다. 두려움이 현우를 사로잡았다. 검문을 당하다 보면 지난밤 석촌호수에서의 일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수배중으로 쫓기고 있다거나 공연히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있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행여 운전사의 눈에 허둥대는 기색을 들킬까보아 현우는 아무렇게나 마주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가리키며 무슨 산인가를 물었다. "장군봉이지요. 거기 올라가면 원천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지요. 꼭대기에 굴이 있어요. 옛날에 큰 난리가 있었을 때 장군봉이 사흘 밤낮 진통을 겪었대요.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산사태가 나고 천지벽력으로 법석을 떨더니 사흘 만에 용마가 먼저 뛰쳐나와 날아올랐는데 뒤따라 나와야 할 장군은 나오지 못하고 큰 울음소리만 내고 있더랍니다. 이 산이 큰 장수를 배고 있다는 것을 안 오랑캐인가 왜놈인가가 쇠말뚝을 박아 혈을 질러버린 것이지요. 장군이 나오지를 못하자 용마는 한번 크게 내딛고는 힘을 잃어 떨어져 죽어버리고 말았다나요. 나라에 큰 난리가 있을 때마다 뛰쳐나오지 못하는 장군이 원통하게 울부짖는 소리로 온 산이 울린다고 하지만 뭐 어디에나 있는 전설이지요." 현우는 배 시간이 멀었다는 핑계로 배터 못 미처에서 택시를 내려 등산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굴은 굴이랄 수도 없는 조그만 구멍이었다. 안은 거의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한두 사람 웅크리고 들어앉을 만한 넓이인데 자세히 보면 불을 피운 흔적이며 찌그러진 음료수 캔, 담배 꽁초 따위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마침 퍼지기 시작한 햇살이 한 줌 밝게 고여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현우는 허리를 굽히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사의 말이 맞았다. 택시를 타고 구불구불 올라온 길이며 배터의 풍경, 더 멀리 아득하게 물에 에워싸인 원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자신이 동글 속에서 살았다던 수만 년 전의 원시인이거나 적의 내습을 살피는 정찰병과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햇빛은 따뜻하고 가끔씩 갈나무 잎들이 바스랑대며 떨어지는 소리뿐 조용했다. 현우는 햇빛이 쬐는 쪽에 얼굴을 두고 비스듬히 누웠다. 둥지 속에 든 듯 아늑하고 편안한 잠이 쏟아졌다. 엄마는 하루종일 흥분 상태다. 그릇들을 닦고 새삼스레 식당 바닥에 물청소를 하는 모습은 거세고 씩씩해서 투쟁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수없이 들락거리며 승리오락실 쪽을 살피기도 했다. 식당문은 아^36^예 닫았다. 손님이 없는 일요일인 탓도 있다. 은영은 엄마의 흥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얘야, 글쎄 그 귀머거리가 왜 왜 그랬을까? 목욕을 다녀온 은영에게 벌써 몇 차례나 한 말이다. 은영은 손톱 발톱을 깎고 길게 늘어진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렸다. 바깥의 공사장 소리, 드라이어 소리, 종잡을 수 없는 소리, 소리들. 머리 손질을 마친 은영이 또다시 길게 누워버리자 엄마는 손재봉 틀질을 시작했다. 은영이 집에서 편안하게 입을 스커트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지만 마음 속의 무엇인가를 억누르기 위해 부러 벌이는 일 같았다. 달달달달 귓바퀴에 와닿는 재봉틀 소리가 잠을 밀어내고 은영은 반쯤 뜬 눈으로 비스듬히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머리는 일 센티 가량 뿌리 쪽으로 하얗다. 가리마골을 따라 하얀 가루를 뿌렸거나 무언가 묻어 있는 것 같다. 염색할 때가 지난 것이다. 엄마가 염색을 시작한 것은 벌써 여러 해 되었다. 희어지는 엄마의 머리를 보면 엄마의 인생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실감되었다. 엄마의 인생이 그렇게 지나갔다. 재봉틀의 달달달달 울리는 소리에 따라 무겁게 늘어진 젖가슴과 불룩하게 겹쳐진 배가 흔들렸다. 엄마는 늙고 뚱뚱하고 추해졌다. 엄마는 자신의 추함을 즐기는 것 같고 그 끔찍한 추함 때문에 순교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엔가 희생당한, 제물로 바쳐진. 재봉질을 하는 엄마, 은영에게는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재봉틀을 돌리는 모습은 전생의 습관처럼 여겨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입으로 훅 불어올리고 간간 눈을 비비고 싶을 탁 채어 송곳니로 끊는^5,5,5^ 만일 은영이 이후 엄마를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래 가장 선명히 이 순간이 이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오래된, 어린 날의 사진 속에서 대개의 경우 엄마와 은영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엄마는 옷 만드는 솜씨가 좋았다. 아무도 손수 옷을 해 입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엄마는 재봉틀을 돌려 옷을 만들었다. 줄무늬, 꽃무늬, 체크 무늬. 지나치게 어른스럽거나 어린애 같은 색깔 무늬 모양. 사진관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소풍길에서^5,5,5^ 때로 웃고 찡그리고 못마땅해서 부루퉁한 표정으로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엄마는 젊고 은영은 어렸다. 머리 모양도 비슷해서 몸집이 큰 엄마 옆의 은영은 커다란 옷에 덧달린 주머니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얘 없인 못 살아, 혹은 이 세상에 우리 둘뿐이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줄무늬의 두 마리의 다람쥐, 혹은 두 마리의 여덟 점박이 무당벌레. 그러나 은영은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같은 옷을 입기를 거부했다. 같은 색, 같은 무늬, 같은 모양의 옷들은 어딘가 죄와 감금의 냄새를 풍긴다. 자신은 엄마의 환상의 산물이다. 아니면 돌연 꽃을 꺾는 행위처럼 충동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은영은 자신이 만들어졌을 좁은 자취방이나 실먼지 있는 다락방, 누추한 뒷거리의 여관, 혹은 휴일의 유원지 으슥한 숲을 떠올린다. 나이든 여공의 들꽃처럼 가난하고 불확실하고 불안한 사랑.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눈먼 욕정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처럼 정자와 난자는 만났다. 그것이 근원이고 시초였다. 진실은 아름답지 않다. 때로 이사이에 낀 음식물의 찌끼처럼 불편하고 불쾌하고 구두 밑에 달라붙은 껌처럼 난처하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환상이 괴물을 낳았다. 엄마는 사생아인 딸에게 자신의 성을 주기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성이? 미스 가? 희성이군. 사람들은 으레 말한다. 은영은 아버지라 불릴 사람을 상상할 근거가 없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어느날엔가는 비와 구름 천둥번개를 거느리고 홀연 나타나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엄마와 닮은 부분을 지워버리면 남는 부분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언젠가 책을 읽고 있는 은영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엄마의 눈에는 그녀는 엄마가 그 자리에는 없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는 아마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선망과 동경과 그리움의 눈빛이었다. 놀라움,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듯한 눈초리. 엄마는 전설이나 얘기책 속의 사람들에 대한 것처럼 아버지, 아니 은영을 태어나게 한 사람에 대한 암시를 자신도 모르게 흘린다. 아니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 이상은 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얘야, 나는 비로소 내게도 정당한 권리, 싸워야 할 큰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해줬지) 만삭의 처녀, 엄마는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사내를 찾아 그의 고향인 원천으로 왔다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엄마와 자신은 어느 부분 닮고 어느 부분 닮지 않았다.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엄마와 자신은 닮았다. 잠을 깨고도 현우는 굴 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한동안 밖을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깊고 단잠을 잔 것 같았는데 땅의 습기로 몸이 무겁고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댐의 너른 물 위로 엇갈려 오가는 배들이 멀리 보였다. 서너 시간은 잔 것 같았다. 한낮이 이울고 있었다. 배터에는 아침나절과 마찬가지로 경찰차와 어슬렁거리는 경찰들이 보였다. 몹시 배가 고팠다. 신장리로 들어가는 배를 탈 것인가 어쩔 것인가 아직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현우는 굴에서 나와 오줌을 누고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면 돌파를 하는 거지 뭘. 주정뱅이는 그저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야. 사람이 죽었다면 신문에 나지 않을 리가 없어.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지. 중얼거리며 아직도 물큰하게 만져지던 무엇이 묻어 있는 듯한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눈길을 계속 배터의 경찰에게 주고 있던 탓에 발이 휘청 헛놓였던가, 작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는 통에 손바닥이 조금 찢겨 피가 나고 구두창이 다시 벌어졌다. 상처를 입힌 것은 조그맣게 돌출된 나무 뿌리에 지나지 않았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 유심히 그것을 보았다. 인생에 있어서도 정작 넘어뜨리는 것은 크고 우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우는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오늘 신장리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또 여관잠을 자야 할 것이었다. 그 작자의 지갑에 돈이 더 있었을지도 몰랐다.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던져버리다니 경솔한 짓이었다. 현우는 배터를 피해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조그만 나무 뿌리게 걸려 넘어졌던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은 조짐으로 께름칙했던 것이다. 해가 이울고 있었다. 어제 이맘때 자신은 청량리역에서 구두를 고치고 있었다. 그 사이의 간극이 엄청나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정말 재수에 옴붙었다. 하필 이럴 때 살인 사건이 난단 말인가. 일이 순조롭게 되자면 지금쯤 그는 팽나무가 있는 부모의 집에서 눈물 어린 재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구두 앞창이 떨어진 것이 여간 성가시고 불편하지 않았다. 어제 역의 수선소에서 밑창을 붙여준 수선쟁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구둣방을 찾아 두리번대던 그는 '손들엇'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네댓 살쯤 된 사내아이가 그를 향해 총을 겨누다가 그의 놀람에 오히려 놀라 전주 뒤로 몸을 숨기며 '피융' 총 쏘는 시늉을 했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해보았지. 아얏, 으윽. 짐짓 장난스럽게 가슴을 싸쥐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면서 현우는 정말 심장을 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실제로 비틀대었는지 아이가 겁먹은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와 '아저씨, 정말 아파? 가짜총이란 말야'하고 말했다. "이리 온." 현우가 가슴을 싸쥔 채 찡그린 얼굴을 풀며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걱정이 되는지 현우의 가슴팍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상하게 낯을 가리지 않는 아이였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듯 눈이 둥글고 순했다. 자신은 이런 때가 한번도 없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억울함이 치받쳤다. "집이 어디냐." "조오기, 놀이터 뒤 이층집이야. 우리 아빠 차 아주 커. 우리 아빠는 사장님이야." 누군가, 낯선 곳에서 손을 탁 놓아 버린다면 이층집도 자동차도 사장님도 다 없어지는 거지, 현우의 입이 비웃음으로 비뚤어졌다. 퍼뜩 한 생각이 섬광처럼 차갑게 그의 뇌리를 가로질렀다. "넌 아주 착하고 귀여운 애구나. 아저씨가 뭘 사줄까? 갖고 싶은 게 뭐지?" "지게차, 레카차, 봉고차, 소방차^5,5,5^." "넌 차를 아주 좋아하는구나." 현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문방구를 겸한 장난감 가게였다. 아이가 원하는 지게차와 소방차를 사주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아이는 현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이는 영리했다.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사장집의 외아들이라^5,5,5^ 햄버거 집에서도 아이는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았다. 약간의 도움을 받자는 것뿐이지.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부자들도 나눌 줄을 알아야지. 머리가 점점 심하게 아파왔다. 점심을 거른 터라 배가 고팠지만 입이 써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약을 한 봉지 털어넣고 콜라를 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아이가 사뭇 걱정되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현우의 가슴팍을 만지고 이마를 만졌다. "아저씨, 많이 아파? 땀이 많이 났어. 내가 총을 쏴서 그런가봐. 그건 가짜총이야. 걱정할 게 없어." 아이의 앙증맞게 작은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이의 손이 닿은 곳에 잠시 통증이 멎는 듯도 싶었다. 현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이 아이와, 아니 이 아이에게 하려는 짓이 얼마나 황당한 짓인가 문득 깨달아졌다. 모두 빌어먹을 두통 탓이다. 망치로 두들겨 깨는 듯한 아픔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약사들이라는 게 돈 벌 생각만 하지, 돌팔이들. 내겐 센 약이 잘 듣는데 갓난애 감기약을 지어준 거야. 현우는 한 모금 남은 콜라와 함께 약을 한 봉지 더 털어 넣었다. 햄버거집에서 나온 현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아이가 가리키는 대로 이층집 앞에 데려다 주고 발길을 돌렸다. 아이의 손을 놓은 손이 허전했다. 무언가 잊고 잃은 것 같은 허전함과 외로움이 가슴을 후볐다. 머리를 흔들면서, 벌어진 구두창에 신경을 쓰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 '그'는 외롭다, 라고 중얼거려 보았다. 자신이 없고 불안할 때, 부당한 멸시를 받거나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질 때,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때 늘 써보던 방법 중의 하나, 어린 날 번개치는 무서운 밤에 잠을 깼을 때도, 발가벗겨 문 밖으로 쫓겨났을 때도, '그애는 번개를 무서워한다'거나 '그애는 발가벗겨 쫓겨났다'라고 말해 보면 한결 무섬증도 부끄러움도 덜해졌다. 머리가 좀더 커서 뒷골목에서 무수한 구둣발 아래 개처럼 피 흘리며 몰매를 맞을 때도 그랬다. 그러면 괜찮았다. 견딜만 했다. ^5,5,5^ 그는 부모를 만나러 간다. 그의 부모는 이십 년 동안이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그는 세상을 떠돌며 온갖 고생과 수모를 겪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5,5,5^현우는 퍼뜩 전기에 닿은 듯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5,5,5^ 오랜 세월이 흘러 집 떠난 아들은 남루한 행색으로 돌아와 동네 어귀의 언덕에서 옛집을, 하냥 기다리며 눈물짓는, 늙어버린 어머니를 보다가 발길을 돌려버리는 장면이 환히 떠올랐던 것이다. 어스름 속에 피어올라 낮게낮게 깔리는 저녁 연기. 어두워지는 것이,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워 한없이 한없이 몰려다니며 노는 시골 아이들, 그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것이 언젠가 오래 전에 본 영화였음을 깨달았다. 늙은 팽나무가 누워서 자라는 그 집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황당하고 근거 없는 것일까. 은식이란 누구인가. 나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이렇게 헤매고 다니는 나는 누구인가.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보던 딸이 염색을 해주겠다고 했다. 염색약을 중화제와 섞어 풀고 식당의 의자에 나와 앉았다. 딸은 잔 빗으로 조금씩 머리골을 갈라가며 꼼꼼이 약을 발랐다. 딸의 손길은 곰살궂고 부드러워 인자는 그만 졸음이 올 것만 같았다. 딸은 별일 없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인자는 곁에서 움직이는 딸의 납작한 배에서 느껴지는 작고 조용한 숨소리에, 어제 딸이 돌아와서부터 오늘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하고 미심쩍어하던 것이 공연한 신경과민처럼 여겨졌다. 염색이 끝나자 딸은 인자의 머리를 빤빤히 빗어 넘기고 비닐로 야무지게 싸주었다. "이제 한 시간 후에 감으면 돼요. 내가 감겨드릴게. 십 년은 젊어 보일 거야. 엄마도 이젠 멋 좀 부리세요." 옷에 염색약이 묻었다고 입고 있던 원피스를 훌떡 벗는 딸의 몸에 걸친 검정색 팬티와 브래지어를 보면서 인자는 그에 목에 걸려 있던 한마디를 뱉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전에는 아무리 어미 앞이라도 훌떡 옷을 벗는 일은 없었다. 젖가슴이 생기면서부터는 어미와 목욕을 다니려 하지 않았었다. "제발 속옷은 흰 걸로 입어라. 처녀애가 원^5,5,5^ 거리 여자들처럼^5,5,5^." 딸이 벗은 채로 입을 삐뚜름히 하고 웃었다. "엄마는 내가 남자랑 잘까봐 그것만이 걱정이지? 할 수만 있다면 엄마는 내게 정조대를 채울 거야." 인자는 검정 속옷 때문에 더욱 희고 지나치게 부드러워 보이는 딸의 몸을 바라보았다. 검정 속옷은 음탕해 보인다. 인자에게 뭔가 위협적이다. 그것은 딸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속옷의 색깔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뜻일 게다. 인자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어버린 삶에 자신을 던져버릴 수도 있고 한 남자가 그녀에게 그러했듯 딸의 몸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예쁜색 속옷을 입으면 기분이 달라져요. 엄마도 여자면서 그걸 몰라요? 나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로 매일 팬티를 갈아입을 수도 있어요. 그럴 거^36^예요." 딸이 당돌하고 건방지게 인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얗고 미끈한 몸을 뽐내듯 허리에 손을 얹고 인자를 마주보던 딸은 부아가 치미는지 수돗물을 틀어 들통 하나 가득 물을 받아 가스불에 얹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인자는 티브이를 틀었다. 식당 벽 높이 달아 놓은 티브이 화면이 잘 보이는 자리에 의자를 옮겨 놓고 앉았다. 나는 열받았다구요. 도둑질을 하러 간 게 아니에요. 나는 가방을 달라고 했어요. 저녁에 거기서 오락을 하고 가방을 놓고 나왔거든요. 좀 늦게 갔는데 셔터가 내려져 있었어요. 문을 두들기니까 아저씨가 열어줬어요. 아줌마는 오락기에서 동전을 꺼내 쌓아놓고 있었구요. 가방을 가지로 왔다고 해도 막 의심하고 도둑놈 취급을 하는 거^36^예요. 물을 끼얹더라구요. 되게 약이 올랐어요. 화가 나서 묶어버렸어요. 나는 하루종일 열받았거든요. 검정 테이프로 눈을 가린 소년은 말했다. 기분이 나쁘다고 단지 열받는다고 마구 살인을 하는 세태에 대해 개탄하는 멘트가 있었다. 안경을 쓰고 길쯤한 얼굴. 둥글고 파마머리, 몸서리친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떠는 여자. 공포에 질린 얼굴, 걱정하는 얼굴들이 몇 마디 낮고 높고 떨리고 가라앉고 느린 목소리들과 함께 화면에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화면이 바뀌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끔 화면을 흐린 모습과 변질된 목소리가 나왔다. 웬지 수상했어요. 여자애를 데리고 은목걸이를 사러 왔는데 동전을 수두룩히 내놓더라구요. 금은방 주인이라는 사내는 촉각과 후각이 발달한 민완형사나 탐정처럼 으시대며 말했다. 그냥 척 보는 순간 이 녀석이 다하는 생각이 드는 거^36^예요. 소년은 이 도시를 떠나려 했다고 말했지만 보도자는 소년이 범행 다음날인 오늘 태연히 도서관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범행을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만 하루 동안의 행적이 그림으로 그려 보여졌다. 소년은 범행 후 집에 들어와 몸을 씻고 잠을 자고 일요일인 오늘 아침에 엎드려 잠을 잤다고 도서관에서 만난 그애의 친구가 말했다. 여자 친구에게 은목걸이를 사주기 위해 범행을 했는가, 유흥비 마련을 위해 강도를 했느냐고 묻자 소년은 돈을 별로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동전들이 주체스러웠다고만 말했다. 화면에 비스듬히 옆모양을 비치는 소년의 얼굴을 본 인자가 아니, 쟤가 누구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귀머거리를 죽인 범인이잖아요?' 딸이 의아해서 인자를 돌아보았다.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에 흰색 잠바를 입고 옆얼굴을 보이고 있는 범인은 어제 아침나절 내내 교관의 호루라기에 맞춰 운동장을 뛰던 엊저녁 승리오락실에서 보았던 소년이었다. 인자가 하루종일 수없이 보았던, 소년이 수없이 시도해 보았던 찔러총의 자세. 소년은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운 대로, 정확히 각도를 맞추기에 애쓰면서. 무릎을 꿇고 표적을 향해 겨루었을 것이다. 소년이 흉기로 사용했다는 연탄집게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년은 그것을 버린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열받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도자는 범인이 불량배도 전과자도 아닌 내성적이고 착실한 학생이었다는 데 그리고 태연히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냈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하루종일 살인 사건 얘기 뿐이야, 지금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데 저런 보도나 내보내고^5,5,5^ 엄마는 끔찍하지도 않아요?" 은영이 리모콘의 스위치를 누르자 인자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서 켜지 못하겠니?" 은영의 눈이 얼어붙은 듯 커다래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십 년을 넘겨 보아왔던 얼굴의 낯섦에 소스라쳤다. 꼭꼭 싼 비닐 때문에 둥근런 공처럼 번들거리는 머리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흐린 불빛 아래 이목구비의 윤곽이 밋밋하게 지워지고 뭉개진 얼굴과 목덜미에 비닐 밑으로, 검고 찐득한 염색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피처럼 보였다. 엄마는 약이 흐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가 보았다. 은영은 그것을 닦아줄 염을 못 내고 질린 표정으로 리모콘의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화면이 살아나고 두 눈을 테이프로 가린 소년은 여전히 비스듬히 옆얼굴을 보이며, 그들이 고통을 느낄 사이 없이 죽었을 거라고 말하고 자신이 사형을 당할 것인가, 사형을 당하게 되면 장기를 기증하겠노라고 말했다. 검찰은 범인이 약물 복용 여부와 정신 감정을 의뢰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우란 열 살 때 그를 입양한 양부모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들은 그 이태 전에 교통 사고로 열 살 된 외아들을 잃었다. 양부모는 회한과 자책으로 다시 한번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원했다. 그는 죽은 아이의 옷을 입고 죽은 아이의 침대에서 자고 그애의 책가방을 메고 옷을 입고 그애의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영재라는 이름을 버리고 얻은 현우가 죽은 아이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양모의 친척 중의 어느 할머니가 뭔가 두려워하는 눈길로 그를 보며 '빙에가 씌었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것을 기억했다. 간혹 양모는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왜 그러니? 너 왜 그러니가 아니었다. 그는 그 미묘한 말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상습적인 거짓말과 좀도둑질에 질린 양부모는 일 년 만에 그를 문어발 자르듯 잘랐다. 그는 일찍부터 싹수 노란 떡잎이고 불에 던져질 가라지였다. 열한 살에 파양이 되어 보육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자신도 모를 이끌림으로 그 집에 가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타고 있는 제 또래의 열 살 짜리 사내애, 그리고 안에서 '현우야'라고 그애를 부르는 양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기억했다. 자신은 이제껏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게 어떤 잔인한 심술궂은 힘에 떠밀려왔다.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의 보육원, 입양과 파양은 그의 선택도 의지도 아니었다. 현우는 파헤져진 지하를 우두커니 본다. 복공판 아래 불빛 속에서 수상한 두런거림이 들린다.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가 제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흔들리는 하늘을 이고 있는 것처럼 어지럽고 머리는 한없이 팽창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열 때문에 눈알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에서도 단내가 훅훅 뿜어졌다. 배가 고팠다. 현우는 그것이 허기인지 외로움인지 알 수 없었다. 약간의 먹을 것과 침구를 가지고 장군봉에 들어가 살 수도 있으리라. 이 세상이라면 사람들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오징어배를 타거나 폐광에 들어가겠다.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떠나자. 필요한 돈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 뭔가 속았다는 분노가 강하게 치솟았다. 삶의 비루함이 보잘 것 없음이 가슴을 후볐다.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셔터를 내린 가게들, 학교 건물, 군부대, 위병들이 있는 곳을 돌아 비켜 걸었다. 편의점의 환한 불 밝힌 실내를 들여다보며 주머니 속의 돈을 헤아렸다. 주머니에는 몇 개의 주화만이 남아 있었다. 당장 한 끼 밥과 잠자리가 아쉬운 처지에 어린 아이에게 비싼 차를 사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던 호기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웠다. 자신의 어설픈 감상과 비겁함에 화가 치밀었다. 거리 모퉁이에서 현우는 붉은 게가 삶아지고 있는 포장마차를 보고 이상한 착란감을 맛보았다. 말없이 게를 뜯어먹던 흰 종이 패랭이의 사람들은 환영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하루종일, 아니 어젯밤부터 이때까지 맴돌아 결국 같은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아픈 자신의 몸을 저주하고 낫지 않는 약을 지어 준 돌팔이 약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회전목마처럼 도시 멈출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이 결국 같은 곳을 맴돌게 하는 정체 불명의 이 도시를 저주했다. 물을 좀 얻을 수 있다면 한 봉지 남은 약을 마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를 떠나 바다나 탄광으로 갈 차비 정도만 구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구두는 그예 아주 밑창이 달아나버렸다. 맨발로 땅을 딛는 느낌에 자꾸 발가락이 움츠러들고 절뚝거려졌다. 발 밑에 무언가 아주 기분 나쁜 물큰함이 밟혀 현우는 진저리를 치고 물러섰다. 난데없이 엊그젯밤 주정뱅이 사내의 뒤통수에서 만져지던 뜨뜻한 물큰함이 생생히 손 안에 감득되었던 것이다. 꼬리가 엄청나게 긴 죽은 쥐였다. 허리를 굽혀 내려다보다가 현우는 밑창이 나간 구두를 벗어 그것을 쓸어 함께 파헤쳐진 땅 속으로 쓸어 넣었다. 아스팔트가 뜯긴 바로 밑, 얼기설기 얽힌 녹슨 선들 사이에 무엇인가 길쯤한 것이 보였다. 현우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손을 뻗쳐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연탄집게였다. 큰길에서 벗어나 학교담을 따라 걷던 현우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의자에 앉은 뚱뚱한 중년 여자와 젊은 여자가 있다. 머리를 비닐로 꼭 동여맨 중년 여자의 얼굴은 머리로부터 이마로 뺨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어 현우는 섬뜩 놀란다. 검정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왔다갔다하는 젊은 여자는 이켠에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티브이가 틀어져 있다 뭔가 편안치 않고 긴장된 분위기였다. 티브이 소리는 들리지 않고 화면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이 목이 말랐다. 무엇보다 약을 먹어야 했다. 현우는 유리에 바짝 얼굴을 대고 창문을 두드렸다. "엄마는 내가 수녀처럼 살기를 원하는 거야? 역시 집엘 오는 게 아니었어. 여긴 숨이 막혀. 나는 내일 첫차로 떠날 거야." "얘야, 인생이란 한번 발을 잘 못 내디디면 그대로 수렁인 거야. 넌 사내랑 도망치려는 거지? 어떤 사내가 순진한 널 꼬였겠지. 사랑한다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너랑 둘이서 모두가 행복하고 정의롭게 사는 좋은 세상을 이루자고^5,5,5^." 인자는 이제 줄줄이 염색약이 피 흐르는 얼굴을 딸에게 향한 채 인생이 자신에게 준 실망과 환멸과 슬픔을 말하고자 목 질린 소리로 외쳤다. 티브이 소리와 인자의 외침에 섞여 무슨 소리인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인자와 은영은 각기 격앙된 목소리로 다투던 것을 멈추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들려 왔다. 인자가 눈짓으로 만류했으나 은영이 문가로 갔다. 잠긴 문에 귀를 대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시의 끝 어디에선가 길고 긴 흐느낌, 비명이 들려왔다. 멀리서부터 도시를 관통하는 길고긴 신음, 외침 소리, 한밤중 입을 틀어막고 벽을 치며 내지르는 비통한 울음을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들었다. 밤마다 아니 그들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들려올, 듣게 될 그 울음에 전율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살인자를 낳은 배를 저주하는 비통한 어미의 울음에 잠시 멈칫하던 문 두드리는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이젠 사뭇 주먹으로 쾅쾅 치는 소리였다. 소리의 향방을 좇아 불안하게 움직이던 인자의 눈길이 주방의 창문으로 향하는 순간, 인자는 유리창에 납작하게 짓눌려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얼음에 갇힌 물고기의 몸부림 같은 숨막힐 듯한 가위눌림을 보았다. 문득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몸 일으키는 형체 없는 괴물, 이 도시, 갇힌 물의 꿈을 보았다. 어디선가 강물이 범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거대한 댐으로 물을 가둔 이 도시에 넘쳐 흐를 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에 갇힌 꿈이 있을 분. 아버지, 물 밑에 눈 뜨고 누운 죄 많은 아버지의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서 무성히 자라는 물풀들이 있을 뿐. [ 밍크코트가 된 고래 * 윤영수 52 년 서울 출생 90 년 "현대문학" 여름 호에 단편 "생태관찰"로 등단 창작집 "사랑하라, 희망없이" 중편 "백화점 풍경3", "벌판에 선 여자", "해묵은 포도주", "알몸과 누드" 발표 "여보, 또 떨어져요." 아내가 어깨를 치는 바람에 김현중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열고 팔을 뻗쳤다. 유리창문 두 짝 중에 바깥 창틀이 고무 패킹만 덜렁대는 채로 한 치는 되게 벌어져 있었다. 그는 급히 손날로 알루미늄 창틀을 박기 시작했다. 창틀이 제대로 끼워진 것을 확인하고 그는 창문을 닫았다. 버스는 계속 덜컹거렸다. 비포장 도로치고도 노면 상태가 엉망이었다. "너, 그 자리에 앉기 잘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좌석에 앉은 최태현이 입을 열었다. "계속 두드려라. 정비공으로 나서라." 더 이상은 말들이 없었다. 최의 앞자리에 앉은 홍지훈이 또 한마디 끼여들 만한데 반응이 없었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헐거워진 창틀은 10분에 한 번씩은 다시 박아주어야 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 하던 다른 이들도 같은 일이 계속되니 시큰둥해졌다. 버스 뒤쪽의 일행들은 창 밖의 들과 농장에 시선을 박든가, 아니면 아^36^예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본의 아닌 일로 다른 이를 계속 수고롭게 한다는 사실도 따지자면 기분 좋을 것은 없었다. "우리 다른 자리로 옮겨요." 아내가 말했다. "옮기기는? 틀이 빠지면 버스 유리창이 깨질 텐데." "제가 하겠습니다." 김 앞에 다가선 사람은 앞자리에 앉았던 가이드 장이었다. 연변 조선족인 장씨는 올해 스물 여덟로, 성격이 서글서글한 젊은이였다. "됐어, 됐어요. 내가 할게." 김이 손을 내저으며 마다했다. "저 친구한테 그냥 맡겨요. 책임감 하면 김현중 아닌가." 자는 줄 알았던 홍이 웃지도 않고 한마디 거들었다. 김이 피식 웃었다. 셋이 만나기만 하면 으레 들먹이는 것이 '김현중의 책임감'이었다. 어젯밤 연길의 양고깃집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등사기를 왜 학교로 가져가냐. 아^36^예 경찰서에 갖다주지. 그들이 대학을 다니던 때는 학생시위가 빈발하던 시기였다. 3월에 시작되는 1 학기는 영락없이 4월 중순이면 끝이 났고, 9월에 시작되는 2 학기는 10월 중순이면 수업이 되지 않았다. 4월과 10월이 지나고 나면 대학 앞 다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친구 중의 누가 경찰에 넘겨지고, 누가 군대에 강제 징집 당했는지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군부독재 타도, 유신 반대, 교련 반대, 국가보위특별법 반대, 이 없으면 잇몸이었다. 일을 맡았던 친구가 감옥에 들어가고 징집 당하고 숨어 다니고 제적되면 또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이 하던 일을 대행했다. 영웅은 없었다. 대부분 조금씩 일을 거들고, 또 조금씩 억울하다 싶게 처벌을 받았다. 고문당하고 쫓기고 전과자가 되기를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처벌을 받는 순간에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순수한 양심의 친구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때 셋에게 맡겨진 일은, 유인물 인쇄건이었다. 장소는 최태현의 자취방. 볼펜으로 급히 옮겨쓴 '전국 대학생들에게 드리는 글' 원고를 등사기에 옮기고, 그것으로 밤새 등사기를 밀어 세 군데 단과대학 대표에게 다음날 아침 일찍 건네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가까스로 일을 끝냈다. 아침 일곱 시, 그들은 유인물 뭉치를 들고 자취방을 나섰다. 잉크로 뒤범벅된 등사기와 롤러는 비닐봉지에 넣어 김현중이 맡았다. 그가 학교 학생회실에 다시 가져다놓기로 되어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다가 심 형사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홍지훈이었다. 고동색 가죽 잠바를 입은 심 형사가 웬 아주머니에게 길을 묻고 있는 중이었다. 학교에 상주하는 사복형사였다. 학생회 간부들과 가끔 술도 나누어 서로 안면이 있었다. 그들은 잽싸게 몸을 숨겼다. 골목길을 몇 번 굽이돌아 무사히 버스를 탔다. 차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은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전국대학생협의회'라는 모호한 단체의 간부로 그들은 너무 쉽게 검거되었다. 오후 두 시께, 학생회실에 들른 심 형사와 등사기를 손에 든 김현중이 정면으로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심사로 등사기를 가져갔냐? 일 터진 것 뻔히 알고서. 자기 책임은 완수해야지. 갖다놓기로 했잖아. 어쨌거나 그들은 일찍 잡힌 덕에 얻어맞기도 많이 했다. 막판에는 그 사건의 주동자로 셋 다 제적을 당했다. 그들은 주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의 주모자 발표는 항상 가변적이었다. 먼저 잡힌 순서대로 주모자 리스트가 짜여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40여 병의 학우들과 함께 군에 입대했다. 1 년 반이 지나, 군 복무 중간에 그들이 복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복학 후 그들은 이미 '운동권'으로서 확고한 일원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그러했다. 스스로 '운동권'이라고 강변할 정도로 강성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운동권'이 아니라고 거부할 정도로 약골도 아니었다. 4 년을 통틀어 제대로 수업받은 날이 몇 달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학생활에 대해 감사했다. 말 그대로 '운동'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이, 스스로 보아도 대견할 정도로 떳떳하고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사회로 진출한 그들이 서로 특별히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은 마흔이 넘어, 그러니까 지난 90 년 가을 홍지훈의 부친상을 당하고서였다. 신문 부고를 보고 병원 영안실로 찾아온 제적 동기생이 예닐곱 되었다. 이제 우리도 얼굴 좀 보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들은 허심탄회하게 소주잔을 기울였다. 백두산 천지라도 한번 같이 가자. 이왕이면 광복 50주년, 1995 년 8월 15일에. 농담같이 벌인 이야기가 실제로 구체화된 데에는 중국의 개방화 정책으로 비자 발급이 간편해졌다는 점과, 북경 직항노선이 생겨 여비가 싸졌다는 점들이 한몫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복 50주년, 1995 년 8월 15일이라는 시한의 부담이 그들로 하여금 이번 일을 마냥 미룰 수 없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얘기를 나누던 일곱 명이 모두 가는 것으로 일이 엉구어졌다. 그러다가 정작 날이 다가오자 하나둘씩 사정이 생겼다. 결국 '광복 50주년 기념 백두산 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은 최, 홍, 김의 세 가족이었다. 그들이 다른 친구들보다 중국 관광을 즐길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더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멋모르고 해내었던 '난동 행위', 당시의 박대통령이 그렇게 규정했다. 밤새워 등사기를 밀었던 그 추억이 그들 사이에 남다른 유대감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틀림없었다. 서점을 경영하는 김현중은 중학교 임시교사인 아내와 함께 왔고, 올 봄에 은행 지점장으로 승진한 홍지훈도 부부가 나란히 왔다. 사업을 하는 최는 아내 대신 중학교 1학년 짜리 아들이 동행했다. 최의 아내는 자동차 보험회사 소장이었다. 수속까지 마쳐놓고는 회사에 일이 생겨 참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최는 부랴부랴 아들의 여권 수속을 밟았다. 이미 치른 아내 몫의 여행경비를 되돌려 받을 수도 없으니 아들이라도 대신 데려가는 게 방법이었다. 김의 아내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 세서 머리가 지끈거려요." 아내는 두어 자리 뒤쪽의 빈 자리에 가 앉았다. 김은 그대로 창문을 지키기로 했다. 머리가 지끈대기는 김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연변에 도착하여 우리말로 쓰인 간판을 보고, 공연스레 반갑고 애틋한 감상에 빠져 야시장을 헤매었다.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소줏잔을 기울이다가 연길에서 나고 자랐다는 장이 소개한 양고깃집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 아침에는 여섯 시에 호텔을 떠났다. 말이 호텔이지, 시설이 엉망이었다. 샤워는커녕 목욕탕 변기에서조차 물이 나오지 않았고, 객실의 카펫과 이불에서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염소 표백내가 심하게 났다. "현중아, 빨리!" 언제 보았는지 홍이 소리질렀다. 김이 지체없이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틀이 겨우 자리를 잡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틀이 완전히 떨어져나갈 뻔했다. "안되겠어, 장형. 차가 서면 저 창문도 나뭇가지로 버팅기는 수밖에." 홍이 장에게 말했다. 제일 처음 말썽을 부린 창틀은 버스 뒤쪽의 유리창이었다. 비포장 도로로 들어와서 몇 분 되지 않아 알루미늄 창틀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뒤쪽에 몰려 앉았던 아이들이었다. 결국 차를 세우고 운전기사가 나뭇가지를 구해와 바깥쪽으로 버팀목을 대어버렸다. 버스 안에는 이들 일행 여섯 말고도 또 한 팀이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함께 떠나, 버스에서는 항상 뒤쪽으로 자리잡은 그들은 두 가족, 여덟 명이었다. 여자들끼리 친자매간이라니 남자들끼리는 동서요, 아이들 넷은 이종간이었다. 여자아이가 셋에 중학교 2학년 짜리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요행히 그 아이가 최의 아들 상우와 동무가 되었다. 다행이었다. 신난다고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어른들 틈에 혼자 끼는 것이 여간 따분한 일이 아닐 터였다. "연길 버스가 다 이렇습니다. 이렇게 타고 가면 공짜 안마를 일곱 시간씩 받으실 수 있습니다." 가이드 장은 농담이 서툴렀다. 애써서 한 농담이 꽤 진담처럼 들리는 친구였다. 버스가 심하게 덜덜대는 것쯤이야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차체가 워낙 녹이 슬고 낡아서 굴러가는 것만 해도 기특한 지경이었다. 차를 수입할 때부터 중고를 들여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긴, 이 길에다가는 어떤 버스를 가져다놓아도 며칠 못 가니." 최가 중얼거였다. 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버스 뒤쪽을 돌아보았다. 아들이 한창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가위! 기합을 넣는 상우의 목소리가 갈라져 아이들이 배를 쥐며 깔깔대었다. 상우는 한창 변성기였다. 그가 듣기에도 우스웠다. 그는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논, 들, 쓰러져가는 초가집, 외양간. 그는 심호흡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얼른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중고자동차 판매업, 아니면 자동차 정비업. 최는 이번 친구들과의 5박6일 여행이 끝나면 아들만 서울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서안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자동차 수입으로 웬만치 기반을 잡은 학교 동기가 있었다. 서울에서 중고차를 들여와 넘기는 사업이 중국에서 꽤 재미를 본다고 했다. 사업을 바꾸는 것은 모험이지만 또 새로운 전기일 수도 있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 회색 장막처럼 두껍게 드리워졌다. 구름들은 어느새 여름 뭉게구름이 되어 하늘가로 내려앉는 중이었다. "가봐." 홍지훈이 옆에 앉은 아내를 팔꿈치로 쳤다. 김의 아내가 따로 앉았으니, 곁에 가서 말동무라도 해주라는 말이었다. 홍의 아내가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남편의 배려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똑똑한 놈들이야. 그렇게 살 놈들이 아닌데^5,5,5^ 어째 그리들 안 풀리는지 말야. 남편은 대학 동기들 중에서도 특히 이 친구들만 만나면 무엇을 못해줘서 속을 태웠다.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친구들의 눈치를 보곤 했다. "버스도 오래 타니까 지겹네요." 홍의 아내가 환히 웃었다. 김의 아내가 안쪽으로 들어앉으며 그녀를 반겼다. "아침에 눈 떴을 때에는, 천지고 뭐고 끝이구나 생각했더니." 새벽 다섯 시, 연길의 호텔에서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글쎄 말예요. 운이 좋은 사람만 본다잖아요. 천지의 물을." "홍 지점장님네는 운이 좋으시니까." "김 사장님네가 어때서요?" 홍의 아내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김의 아내가 말없이 웃었다. 그들은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김현중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남자 쪽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무자식이 상팔자랍니다. 건성으로 하는 위로말도 자꾸 할 수는 없었다. 홍의 아내는, 김의 아내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매번 망설여지곤 했다. 어제는 딸아이의 가정과 실습 숙제에 대해 열심히 묻다가, 그 또한 자식자랑 같아서 슬그머니 말문을 닫고 말았다. 김의 아내는 가정과 임시교사였다. 산가중인 여교사 대신 1 년 동안 학교 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올 11월이면 근무도 끝인데, 1년만 더 해도 좋겠다고 했다. 남편이 독서회활동을 계속하잖아요. 그 경비도 여간 아녜요. 게다가 김은 최근 들어 위장이 좋지 않다고 했다. 홍의 아내는 김의 아내가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말이 좋아 사장이지, 동네 어귀의 작은 서점을 경영하는 일이고 보니 아내로서 이래저래 속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저기, 해바라기밭 좀 봐요." 홍의 아내가 손으로 언덕바지를 가리켰다. "예쁘네. 무슨 영화장면 같아요." "그러게요. 그게 소련영화였죠?" 그들은 잠깐 감탄했다. 만주의 들판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흡사했다. 논, 밭, 풀, 비탈에 선 전나무, 상수리나무들, 어디를 보나 우리나라 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해바라기밭을 발견한 것은 수확이었다. 밭 가득히 들어찬 크고 노란 꽃덩어리가 명랑하고 씩씩해 보였다. 장이 버스의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지금 지나는 곳은 안도입니다. 조선족이 30 프로 정도 살고 있습니다. 안도는 안도현의 중심 시가지입니다. 백두산 가는 길은 이 안도를 거쳐 가는 길과 용정을 거쳐 가는 길, 두 길이 있습니다. 용정 쪽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끊겼습니다. 나흘 전에 오신 손님들은 이 안도 길도 가지 못했습니다. 백두산 구경을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운이 좋으십니다. 이 길은 또 워낙 먼지가 많아서 버스가 달리면 길이 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아침까지 비가 왔기 때문에 먼지가 없습니다. 경치를 잘 볼 수 있습니다." 홍이 김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도대체 딴 나라 같지가 않아. 똑같잖아, 우리 시골하고? 한 20년 전. 원두막 있고, 초가집 있고, 외양간, 돼지우리. 사람들 입은 옷이나 생김새나. 지금도 깡촌이면 이렇지 않을까?" 어젯밤 야시장에서 본 냉차장수, 큼직한 좌판을 앞에 놓은 담배장수 역시 1, 20년전 우리나라 시골 장터에서 흔히 만나던 바로 그 얼굴들이었다. "그래 말야. 한 20 년, 타임머신을 타고 뒤로 돌아간 기분이야." 김이 끄덕였다.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사치스럽게' 해외관광을 떠나온 그들의 심사를 다소나마 편케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여건 좋은 다른 나라고 여행을 간 것보다, 교통이나 숙박시설 등의 미비로 고생한다는 사실 역시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현중아, 빨리!" 통로 맞은편에 앉은 최가 또 더럭 소리질렀다. 김이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창문틀을 박기 시작했다. "어어! 스톱, 스톱!" 손날의 각도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틀이 순식간에 떨어져나갔다. 고무 패킹에 대롱대롱 매달린 알루미늄 새시 막대기가 버스 몸통을 마구 두드려대었다. 버스가 섰다. 장이 뛰어 내려갔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는 거지." 최가 일어나 버스 출입구로 나아갔다. 아른 이들도 기지개를 켜며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길섶으로 돌아서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아무래도 복잡했다. 찻길에서 안 보이는 자리를 잡느라 애를 썼다. 공기가 맑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용봉 호텔은 이름만큼 황당하였다. 허허벌판. 허술한 삼층 목조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건물 앞마당에는 대형관광버스들이 북적였다. 상인들의 가세도 만만치 않았다. 영지버섯, 수삼, 머리통만한 참외를 손에 들고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불러대었다. 식당에 들어서서도 분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 넓지 않은 홀에 관광객들이 들어차 시장판을 방불케 했다. 안내된 방에는 그래도 여남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두 개의 원형식탁에는 두부, 김치, 고사리나물 따위의 접시가 이미 놓여 있었다. 그들 일행이 식탁에 둘러앉자 음식에 앉았던 파리떼가 일어섰다. 상우가 파리떼를 보고 징징대었다. "괜찮아 임마, 파리가 먹은들 얼마나 먹겠냐?" 말은 그렇게 했어도 최 역시 입맛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물이 도는 김치, 접시 가장자리에 묻은 양념들, 얼핏 보아도 손님들을 치른 음식이 분명했다. 스무 살 안팎의 여종업원이 나눔접시들을 포개어 가지고 들어왔다. 물기가 번들대는 접시가 화투짝이라도 되는 양 그들 앞에 험하게 돌려졌다. "아가씨, 화났어요?" 김이 물었다. 여종업원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여기가 다 이렇습니다." 장이 말했다. "아빠, 배 아파요." 상우가 최를 보며 찡그렸다. 아들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최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사내녀석이 비위가 좋아야지. 먹어!" 상우가 배가 아픈 이유는 딴 데 있었다. 화장실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가기는 갔었다. 용봉 호텔에 도착하여 아이는 화장실부터 찾았으나 질겁을 했다. 변소라고, 칸막이도 없이 구멍만 뻥뻥 뚫린 곳에 여기저기 어른들이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중이었다. 얼른 뒤돌아 나와버렸다. "상우야, 이 속엣것은 괜찮다. 먹어." 홍의 아내가 김치 한쪽을 집어주었다. 상우는 최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최는 보란 듯이 밥을 떠넣었다. 그는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는 중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사업을 닦는다면 무엇보다 먼저 이들의 기호와 습성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막바로 봉제품을 수출하는 중소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8년 후 바로 그 봉제공장을 인수했다. 나름대로 피와 땀을 쏟은 결과였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봉제인형, 장난감 수출이 사양길이었다. 그는 피혁의류에 다시 손을 대었다. 1, 2 년 정신없이 뛰다가 겨우 숨을 돌리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염색 기술자들이 말썽이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또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자신이 악덕 자본주가 아닌데도 그들은 항상 자신이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수가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둥둥 떠다녔다. 그렇다고 딱히 더 나은 직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팔방으로 뛰어 기술자를 구하다보면 몇 달 전에 일하던 친구가 다시 오기도 했다. 기술자가 자주 바뀌니 제품이 고르지 않았다. 클레임에 한번 걸릴 때마다 타격이 대단했다. 그는 사업을 정리했다. 부도가 나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활동적인 그의 아내가 그나마 보험회사를 다녀서 생활비를 메워주었기 망정이지, 사업이란 게 정말 펴기는 너무 어렵고 접기는 너무 간단했다. "하긴 너는 음식 까탈은 없으니^5,5,5^ 조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길게 생각해라." 홍은 아무래도 최의 사업이 걱정이었다, 연길의 양고깃집에서 그의 사업계획을 들었지만, 세상에 돈 버는 일이 그리 쉽고 만만하겠는가. "괜찮다. 이것저것 신경쓰다 보면 오래 못 산다. 삼풍백화점에서 살아난 아이들 말야, 그, 단순해서 그렇다. 누군가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잖아? 의심을 전혀 안한 거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최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안되지. 아무리 성격이 느긋하다고 하더라도 말야. 우선 믿지를 못하거든. 이 나라 구조체계가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잘 알잖아. 마음만 급해서 허둥지둥 법석만 떨리라는 사실 말야.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게 병이고." "그래두 임마, 너 무조건 밀어붙이다가는 크게 당한다." 홍이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웬일로 최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너무 훈계조였나, 홍은 가슴이 뜨끔했다. 가만히 있자니 또 무엇했다. "하기야,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내, 요새 마누라 따라 교회간다. 희망 잡으러." 홍의 아내가 자랑스레 고개를 끄떡였다. 최가 낄낄거렸다. "죄 많은 어린 양 한 마리 회개했군." 홍이 얘기를 계속했다. "우리 목사님 말씀이 그럴 듯하다. 인간은 위로 먹고 아래로 싼다. 위아래가 때에 맞춰 열려야 한다는 거지. 간단해, 받아들이려면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 안 그러면 썩는다. 죽는다는 거야. 새 것이 들어오면 헌 것이 자동으로 나간다. 그러니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을 수 없는 거지. 인생이란 게 결국 과정이라 그 말이지.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우리 보고 깡통, 깡통 하더니 그 말이 진리야. 현중아, 너도 교회 좀 나가라. 회개하고 새 생명 찾아라." 홍이 김을 향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김은 젓가락으로 생선을 끼적이는 중이었다. "이게 뭐냐, 무슨 생선이냐. 질기기만 하고 별 맛이 없네." "상어, 고래고기 그런 거 아닐까." "아무리." 김의 아내가 생선을 헤치며 웃었다. "한국에서는 고래고기 먹습니까?" 장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5,5,5^ 먹지. 먹을 걸? 난 못 먹어봤지만." "여기 중국에선 밍크가 고래고기를 먹습니다." "밍크? 밍크코트? 밍크?" "그렇습니다." 장은 좀체로 웃을 줄 모르는 친구였다. 검은 안경테에 짧은 머리가 언뜻 모면 학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요새 밍크코트를 많이 수출합니다. 밍크가 고래고기를 굉장히 좋아한답니다." "고래가 밍크에게 먹여? ^5,5,5^ 재미있구먼." "그렇습니다." 장이 대답했다. 홍이 중얼거렸다. "중국도 하는 수 없구먼. 여자들 사치품, 밍크코트 만들어 팔려고 안간힘을 쓰니. 죽의 장막, 잠자는 사자, 모택동의 중국이 말야." "먹고사는 게 보통 일이냐? 12억이 넘는 인구 굶겨 죽일 수는 없고. 정치도 결국 살림이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음식들을 끼적거렸다. 이윽고 김이 말을 이었다. "진화론 책을 보니까 말야, 물 속에서 살던 동물이 뭍으로 올라왔다는 거야. 물이 빠진 뒤에 남은 물고기가 뭍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서서히 변해갔다는 거지. 사자, 말, 소, 돼지, 낙타, 고양이, 개, 모두가 바다에 대응동물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그거라는 거야. 그런데 고래는 말야, 왜 거꾸로 땅에서 바다로 들어갔을까. 난 그게 이상해. 고래는 포유동물 아니야?" "고래가 혼자 바다로 갔어?" "쟤는 책 안 팔고 자기가 다 읽는다. 쟤네 서점 책 사지 마라. 완전 헌 책이다." 홍이 낄낄거렸다. 최가 장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현중아, 고래가 바다로 들어간 이유를 알겠냐? 밍크가 무서웠던 거다." 홍과 최가 한바탕 웃었다. 김도 따라 웃었다. 장은 웃지 않았다. "중국에는 고래가 그냥 땅에 있어야 맞습니다. 중국에는 원래 밍크가 없었으니까요. 수입했습니다." 장의 고지식함에 최가 계속 농담조로 대응했다. "옛날에는 밍크가 있었다니까? 밍크가 고래를 막 쫓아다니니까 고래가 무서워서 바다로 뛰어들구, 결국 고래가 없어지니까 밍크도 딴 나라로 갔지. 고래 잡으러. 고래 잡으러." "그랬습니까. 언제요." "옛날에. 장형 나기 일 년 전에." 그들이 상을 두드리며 웃어대었다. 이번에는 장도 조금 웃었다. 여자들이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웬, 산에 와서 고래타령이에요." "글쎄요. 고래를 잡으려면 동해바다로 가셔야지. 노래도 몰라요?" "이 친구가 애국가를 헛갈렸어요.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니까, 그게 같은 건 줄 알고." 그들이 한바탕 웃었다. 장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웃지 않았다. "인절미 먹어라, 이건 깨끗하다." 김의 아내가 상우를 불렀으나 아이는 어느새 방 밖으로 내빼는 중이었다. 최가 하릴없이 홍에게 물었다. "지훈아, 너희 그 목사님 말로 하자면 이게 어떻게 되냐, 밍크가 먹은 걸 자꾸 싸고 고래고기만 내내 먹으면 고래 되냐?" "그런^5,5,5^ 셈인가." 홍이 크게 웃었다. 최가 말을 이었다. "말도 안된다. 그럼 사람고기 먹은 지존파는 왜 사람이 아니냐." 장이 눈을 껌벅였다.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쇠고기를 먹는다고 소가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사람은 그냥 사람이지요." "그러네, 장군 말이 맞아. 역시 장군이야." 홍이 웃었다. 최가 홍에게 말했다. "너는 멍하니까 멍군이냐? 왜 갑자기 교회는 나가냐." 장이 안경테를 바짝 올리며 물었다. "한국에 멍씨도 있습니까?" "여기 있잖아." 그들이 마구 웃었다. 장이 또 눈을 껌벅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몰라. 그냥 웃어." 그들은 배를 쥐고 웃어젖혔다.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장도 조금 웃었다. 날씨는 일단 걱정을 덜었다. 흰 구름들은 지평선으로 내려앉고 8월의 여름햇빛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여자 아이들 셋은 버스 뒤쪽에서 노래를 흥얼거렸고, 사내아이 둘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붙어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홍의 아내와 김의 아내는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버스는 논과 밭, 마을을 벗어나 이제 숲으로 들어섰다. 수십 미터 높이로 쭉쭉 뻗은 나무들이 양쪽으로 한없이 이어졌다. 삼단 머리에 가리마를 타듯, 버스는 숲 가운데로 난 곧은 길을 마구 달려댔다. "세상에, 저렇게 빽빽해요. 속이 안 들여다뵈네. 그래도 아름드리 나무는 없지요?" "그러게요. 삐죽하게 키만 크네요. 햇빛 싸움이겠지요, 죽지 않으려면 아둥바둥 키라도 크는 수밖에." "참, 끝도 없다. 저 나무들이 무슨 나무^36^예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귓결에 듣는 사내들 셋도 느긋이 바깥 경치에 눈을 주고 있다. 홍과 김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았고 최는 김의 앞좌석에 자리잡았다. 창틀 걱정은 더 이상 안해도 되었다. 용봉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운전기사가 제법 굵은 나뭇가지로 버팀목을 대어버렸다. "짐승들이 살까? 백두산 호랑이도 만주에는 아직 있다잖아." 홍이 김에게 물었다. 장이 다가와 홍의 앞자리에 앉았다. 장도 따분한 모양이었다. "여기 만주 원시림이 요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자동차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관광객이 많이 오면서 길을 놓았는데, 나무들이 괜히 죽는다고 합니다 죽을 정도는 아닌데 그냥 죽는다고 합니다." "신경성이구만." 홍이 웃었다. 김도 최도 따라 웃었다. "왜 웃어요?" 홍의 아내가 뒤돌아보았다. 홍이 대꾸했다. "신경질 부리면 빨리 죽는대." 최가 담배를 꺼내어 돌렸다. 장이 사양했다. 담배를 안 피우면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요, 최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마디 했다. 김이 한참 있다가 입을 떼었다. "우리가 성질이 급한 건 사실이야. 지표면이 식고, 거대한 대양이 대지를 덮고, 지각이 접히고, 산맥이 솟는 일들을, 우리는 가끔 우리가 살아온 몇십 년 정도의 변화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말야^5,5,5^ 그게 우리의 한계일지 몰라. 인간에겐 수명이 있으니까. 하루살이가 그 머리로 생각해봤자 며칠이 한계인 것처럼. 말이야 몇천 년, 몇만 년, 몇억 년 해도 그게 얼마나 긴지 실상은 모르는 거지. 기껏해야 우리 머릿속에는 우리가 태어나기전 1, 2백 년, 우리가 죽고 난 후 1, 2백년 정도의 시간감각이 고작이란 말이야. 1, 2백 년 정의 시대와, 화산이 터져 거대한 호수를 만들던 수억 년 전의 시대를 거기서 거기고 혼동한단 말이야. 더더욱이 그런 느낌을 부채질하는 것이 과학이지. 컴퓨터 그래픽 따위. 그저 몇 초, 땅이 솟고, 주름이 잡히고, 바다가 생기고, 생물이 진화하는 것이. 새싹이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원숭이는 진화하여 사람이 되고^5,5,5^ 우리가 갓난아기에서 적어도 외양적으로 어른이 되어 성장을 멈출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신비를, 그런 가능성을, 자신도 모르게 확실히 믿어. 스스로 변하는 것을 실감하니까. 적어도 우리가 무언가를 바꾸어놓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확신도 가지게 되고. 젊은 사람들이 용감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날 신체적인 성장이 멈춘단 말야. 그때부터 늙는 거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거지만. 성장이 정지되면, 정지가 퇴락으로 확실히 변질되면 조바심을 내게 된단 말이야. 불안한 거지. 변치 않는 시간성, 수천 수만 년의 시간성을 보기는 보되, 결국 인간은 몇십 년의 세월로 끝이 나니까." "^5,5,5^ 그래, 독서회 일은 잘 되가냐." "그럭저럭. 항상 내가 배운다." "넌 참 기특하다. 지치지도 않고." 홍이 중얼거렸다. 김은 차장 밖의 숲을 내다보았다. 서점을 경영한 지 햇수로 10 년, 그가 서른 일곱이 되던 해부터였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꽤 꿈이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제학 석사 학위를 따고, 연구소에 나가고, 학생운동으로 투옥된 친구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덕분에 두어 차례 경찰에 잡혀가 얻어맞고, 야학 교장 선생이 되고. 독서회는 야학에서 만난 청소년들을 위해 그가 만든 모임이었다. 마친 서점을 열면서, 늦은 밤시간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좋은 책을 읽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함께 야식을 들면서 살아가는 얘기를 하다보면 닫혔던 그들의 가슴이 조금씩 틔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새는 독서회가 전 같지 않았다. 열 명이 넘게 찾아오던 녀석들이 이제는 서너 명이 고작이었다. 밤 열 시쯤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바로 서점 앞 큰길에서 부릉대는 오토바이들이 주 원인이었다, 경찰의 단속도 한계가 있었다. 단속기간 며칠 지나면 어느새 몰려와 또 다시 부릉대곤 했다. 그 중에서도 T의 영향이 컸다. 성질이 급하기는 하지만 꽤 명랑하여 독서회에서도 친구를 잘 웃기곤 하던 T가 폭주 족이 된 사실에 대해 그는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T는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염색한 머리에, 걸쳐 입은 잠바를 보니 배달 일로 집안을 돕겠다는 것보다는 제 직성이 풀리도록 마구 속력을 내는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애쓰시는 건 알겠는데요, 그러니까 더 부담이 되어서요. 다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길 빌겠습니다. 인사를 멀쩡히 한 후 굉음을 내며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최가 입을 떼었다. "역사를 봐도^5,5,5^ 젊은이들은 항상 급했고 늙은이들은 머뭇거렸지. 젊은이들의 행동이 결국 시대를 이끄는 건 사실이다." 홍이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그, 김승명이 말야, 국회의원 된 녀석. 걔가 대학 때 툭하면 그랬었잖아. 이 나라에 사십대 이상은 다 죽어야 한다고. 그래야 개혁이 된다고. 어느새 우리가 사십대다." "우리만 사십대냐? 승명이 그놈도 사십대다." 최가 심통스럽게 말했다. 늙은이 티를 내자는 것은 아니었다. 김이나 홍 중 누가 껄껄대며 웃을 줄 알았다. 다른 이가 웃을 줄 알고 자신은 안 웃었는데 결국 아무도 웃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분위기 어색해지는 건 간단했다. 장이 슬그머니 일어나 버스 앞쪽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최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창밖의 원시림에 눈을 돌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줄기. 최는 햇빛 줄기가 화살표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화살표가 없어진 세상. 아무도 그에게 어느 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주지 않는 나이. 당신은 왜 거기 서 있는가, 왜 움직이지 않는가, 그를 향한 힐문만 따가운 나이. 그는 광장의 끝에 서 있다. 바위, 숲, 허허벌판,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그놈의 화살표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풍향계처럼, 어렸을 때 코를 훌쩍대며 둘러앉았던 뽑기 아저씨의 뺑뺑이처럼. 저렇게, 숲속에서 내리꽂히는 햇살처럼 땅으로 꽂히기도 하고, 맙소사, 어떤 때는 비수처럼 그 자신의 심장을 겨누기도 한다. 아버지가 뭘 해놓으셨어요? 농사를 지어 자식의 학비를 대는 일로 보람을 삼으셨던 아버지 가뭄든 논바닥처럼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에 대고 자신이 당차게 내뱉었던 말. 아빠가 뭘 해놓으셨는데요? 상우도 미구에 자신에게 눈을 치뜨고 달려들 것이다. 상우는 아무리 봐도 자신과 너무 닮았다. 자신과 똑같이 하관이 빠른 데다가 덧니에 곱슬머리까지 빼다 박았다. 씨는 못 속인다. 최는 민망하여 웃는다. 오후 세 시 반. 그들은 지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백두산 기슭부터 가파른 산마루까지는 지프를 타야 한다고 했다. 10km, 지프를 타고 10여 분. 8인승 지프가 꽤 여러 대였다. 그러나 지프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수백 명이었다. 예닐곱 명씩 태워가는 지프의 순번 속도로 보자면 그들은 결국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저기. 저쪽에 구름이 오고 있잖아요. 빨리 올라가야 할 텐데." 김의 아내가 동동거리며 발을 굴렀다. 이왕 백두산에 올랐으니 천지를 보아야 제격일 것이었다. 백두산 정상의 기후가 고르지 않은 관계로 천지는 여간해서 보기 힘들다고들 했다. 관광객들 거개가 다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태반이 시골 노인네들이었다. 지프가 앞에 설 때마다 모른 척 올라탔다가는, 지청구를 먹고 끌어내려지는 이들이 또한 그들이었다. 순서가 있었다. 초소에서 입장표를 받은 차례대로 타야 했다. 내 돈 내가 쓰는디 자식이 뭐라겄소. 죽고 나면 돈이 남지, 사람 남는 게 아니구만이라. 자식한테야 줘도 욕먹고 안 줘도 욕먹고. 백두산 구경은 해야제, 월매나 살겄다고. 자식 말이 그치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 노인들은 자식 눈치가 꽤 보이는 모양이었다. 홍이 다시 입을 떼었다. "너무 똑같단 말이야. 우리나란지, 외국인지. 사람들 생김새도 구별이 안 가잖아^5,5,5^ 하기야 겨우 한시간 거리이니 말야." 시골 노인네들의 단체 행락을 보면서 우리의 경제가 이렇게 소비 중심으로 흘러도 좋은가, 홍은 자신도 모르게 곱씹었다. 우리마저, 의식이 있다는 우리마저 이래도 좋은가 하는 떳떳지 못한 감정이 깔리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책임감' 친구들과의 해외관광 여행. 금전적인 여유는 그래도 자신이 나은 편이니 자신도 모르게 친구들을 부추긴 점이 있지 않았나. 홍의 불편한 심사를 꿰뚫듯 김이 말했다. "잘 왔지, 뭐. 민족의 영산^5,5,5^ 광복 50주년 아닌가." 홍은 양팔을 휘두르며 몇 번 심호흡을 했다. 백두산 공기였다. 경세제민이라 경제과를 간다고 꿈을 품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왜곡된 경제구조가 벼랑에 선 것처럼 절박해 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 그는 한 은행의 지점장이다. 새벽마다 교통전쟁을 실감하며 출근하여, 본점 지시사항 시달, 결재, 예금 유치, 대출 면담^5,5,5^ 무슨 일이 터지는 건 아닌가, 시간시간 마음을 죄곤 한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는 신입사원들을 보면서 그는 많은 생각을 한다. 그들만 할 때의 자신 역시 얼마나 건방지고 경솔했던가, 또한 얼마나 활기차고 당당했던가. 그리고 또 생각한다. 자신의 눈에 윗사람이 얼마나 고지식하고 겁이 많고 소심하게 비쳤던가. 그는 찬찬히 산비탈에 꽂힌 나무들을 바라본다. 10 미터는 되게 자란 어미나무, 그리고 큰 나무 사이에 촘촘히 자라는 어린 나무들. 햇빛을 가리는 어미나무는 어느새 상늙은이다. 새파란 작은 나무들의 아우성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숲은 누가 이루는가. 비바람, 천둥을 견뎌온 어미나무의 덩치, 수많은 홍수와 가뭄을 견뎌낼 때마다 마디가 불거진, 거칠고 흉한 뿌리. 머지않은 시기에 그 역시 물러나게 될 것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서고 나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무거운 책임의 시절이 그리울 것이었다. 드디어 그들 차례가 왔다. 일제 도요따 지프. 산언덕 굽이를 따라 놓인 콘크리트 포장도로는 경사가 무척 심했다. 지프차가 아니고는 엄두를 못 낸다는 말이 맞았다. 삼십대 안팎의 중국인 운전사가 마구 액셀을 밟아대었다. 난폭 운전이 가히 수준급이었다. 김의 아내가 불안한 어조로 장에게 말했다. "좀^5,5,5^ 천천히 가자고 말해보세요." "괜찮습니다. 이 사람들 운전 잘합니다." 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5,5,5^." 김의 아내가 뒤쪽에 앉은 최를 돌아보았다. 남편보다는 아무래도 최가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점에서도 가끔 최는 무어라 중국인들에게 말을 건네곤 했었다. 최가 피식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게 글쎄, 빨리 하라는 말은 '콰이콰이'인데 천천히가 뭔지^5,5,5^ 나는 성질 급한 중국사람은 처음 보았거든요." 다들 웃어대었다. 상우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헤이, 슬로울리!" 다들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아버지보다 네가 백 번 낫다." 홍이 얼른 상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사가 무어라 지껄였다. 말을 못 알아 듣겠다는 얘긴지, 이 정도 속력은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바깥 경치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나무들의 키가 점점 줄어들어 어느새 비탈에 납작하게 엎드려 버렸다. 지프 앞유리는 온통 하늘이었다. 경비행기라도 타고 푸른 하늘로 직접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산마루 언덕에서 차가 섰다. 바람이 심했다. 그들은 점퍼 깃을 올렸다. "오늘 날씨가 춥습니다. 오늘 새벽에 비가 와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장은 어느새 큼직한 겨울 윈드 재킷을 입고 있었다. 주위는 황량했다.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었다. 연녹색의 풀더미가 뚝뚝 떨어져 눈에 띄는 정도였다. 산 머리에, 먼저 올라간 관광객들이 까마득히 보였다. 저 위가 바로 천지, 백두산 산정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산비탈을 타기 시작했다. 흙이 부슬부슬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장이 잊었다는 듯 손나팔을 하고 소리질렀다. "14번입니다, 14번! 30분 후에 여기서 14번 차를 타야 합니다. "뭐야^5,5,5^ 백두산 보려고 며칠이 걸렸는데 30분, 겨우 30분이란 말이야?" 시간은 연장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이 천지를 구경하는 30분 동안, 지프는 한 탕을 더 뛰는 모양이었다. 다른 관광객들을 태우고 다시 올라오는 시작이 30분 후이니 시간을 맞춰 움직여주지 않으면 앞 뒤 여러 팀이 낭패를 보는 판이었다. "어머나!" 홍의 아내가 발이 미끄러지며 홍을 잡았다. 홍이 겨우 아내를 부축했다. "역시 아이들이 힘이 좋구만." 상우는 팽이같이 그들을 앞질러 벌써 산꼭대기에 닿는 참이었다. 백두산 정상. 바람이 대단했다. 바람의 방향이 일정치 않았다. 등을 떠다밀듯 몸이 앞으로 쏠리는가 하면 어느새 정면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나자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5,5,5^ 저만치 밑에 새파란 물이 고여 있었다. 천지였다. 이야아아. 감탄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사진, 사진! 사람들이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대었다. 김도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혼자 찍고, 아내와 찍고. 30분, 단 30분. 그는 괜히 섭섭하여 점퍼 안 주머니를 더듬었다. 물론 태극기는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그는 태극기를 꺼내 보았다. 국경일이 되면 집 골목에 내거는 때묻은 태극기. 결국 안 가지고 왔다. 괜히 아내의 눈치가 보였다. 1995 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유관순의 태극기, 안중근의 총알. 교과서에서 보고 익힌 백두산 천지가 바로 저 밑에 있었다. 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 모래사장 있는 데가 북한입니다." 아아, 누군가가 짤막하게 탄성을 내었다. "저기서 물놀이하면 되겠네." "안됩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섭씨 5 도, 10 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 절대로 갈 수 없는 곳. 그들에게는 북한 역시 교과서 안에만 존재해왔다. 무기를 들고 발을 맞춰 행렬하는 붉은 군단, 독재자의 전쟁야욕. 북한이 눈앞에 있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홍수와 콜레라로 고통받는 우리 핏줄. "자, 이쪽으로 서세요. 단체사진을 찍겠습니다." 여섯 명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얼른얼른 자세를 잡았다. 장이 카메라를 잡았다. "웃어요, 김치^5,5,5^" 애국가, 만세 삼창, 묵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소리 맞춰 '김치^5,5,5^'만 했다. 장이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질렀다. "자, 사진 다 찍었으면 내려가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지프를 탔다. 하늘을 보고 용을 쓰던 지프는 이번에는 고꾸라지듯 땅을 잦아들었다. 나란히 앉은 여자들 둘이 들떠서 떠들어대었다. "홍 지점장님네가 운이 좋아서, 덕분에 천지를 보았어요." "우리가 무슨 운이 좋아요? 김 사장님네 덕분이요." 그 놈의 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최 사장님 덕분인가? 아니야, 상우가 운이 좋았나 보다. 하늘도 천진한 아이들을 좋아한다더라. 자기 아내가 말을 하는 틈을 타서 홍이 얼른 입을 떼었다. 남의 아내까지 끼였으니 정식으로 면박을 주기도 뭣 했다. "조용히 좀 해봐.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와서 그렇게 말이 많아." 덕분에 1분쯤 지프 안이 조용했다. 부슬부슬한 흙더미와 풀포기가 어느새 앉은뱅이 관목으로 바뀌고,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나무들이 부쩍부쩍 키가 자랐다. 홍의 아내가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아이구, 조용히 하라니까 또 금방 말을 듣네. 코미디야."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같이 웃었다. "생큐, 유 아 베스트 드라이버" 상우가 운전기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알아듣는지 어쩐지 기사도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큰길가에 대기하고 있던 여행사 버스에 그들은 다시 올랐다. 버스 뒷좌석의 다른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탄 지프가 아직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섯 시 반이었다. 산골이라 그런지 날이 벌써 저물기 시작했다. 김은 아무 말없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옆에 앉았던 아내가 슬그머니 팔을 끼었다. "왜^5,5,5^ 태극기라도 한번 흔들지 않구요." "^5,5,5^ 태극기는 무슨." 김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독서회를 어떻게든 계속해 나가야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마도 독서회를 그만둘 생각이, 자신 안에 조금씩 자라고 있던 모양이었다. 홍도 그의 아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애국가라도 누가 부를 줄 알았더니." 아내의 말에 홍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천지를 모독하는 것 같더라구. 북한, 남한, 독립만세, 그런 것들이." 그는 까닭없이 가슴이 미어져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 말대로 기성 세대는 입을 다무는 것이 옳을지 몰랐다. 어미나무로서 묵묵히, 자신이 맡을 일에 전념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애국일 것이다. 날이 저물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상우가 아버지 곁으로 와서 앉았다. "아빠. 천지 색깔이^5,5,5^ 진짜 새파래요." "글쎄 말야^5,5,5^ 천연색 사진이 유치하다 싶었더니 꼭 그러네." "그리고 참 크고^5,5,5^ 그릇에 담아 놓은 젤리 같아요." 상우가 말을 하다 말고 크게 하품을 했다. 산정의 센 바람에 휘둘리고, 아이가 노곤한지 눈을 감았다. 조금씩 벌어지는 아들의 입을 그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이의 입아귀에 염증이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땅 위에서 살던 큰 동물의 영원.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이 용을 만들어냈듯이, 바다에서 마음껏 활개치며 헤엄을 치고 싶던 마음이 고래로 화했을까. 결국 고래들은 바다에 안주했다. 진화인지 퇴화인지 모를 상태로. 그들 자신은 더 이상 변할 수 없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조그만 새끼 고래, 이세, 삼세,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화되어갈, 내가 아니지만 나라고 할 수 있는 먼 훗날의 분신. 우리의 삶이, 지난 세월에 대한 모호한 기억의 연속이라는 말을 누가 했더라, 최는 어둠이 깃드는 산그늘로 고개를 돌렸다.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 이동하 42 년 경북 경산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건국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66 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전쟁과 다람쥐" 당선. 67 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인동", 현대문학 장편공모에 "우울한 귀향" 각각 당선. 단편집 "모래, "바람의 집", "저문 골짜기", "폭력연구", "밝고 따뜻한 날," "사막도" 장편 소설 "우울한 귀향", "도시의 늪", "냉혹한 혀" 등 출간 한국소설문학상(77), 한국창작문학상(78), 한국문학작가상(83) 현대문학상(86), 오영수문학상(93) 등 수상 사내녀석 하나가 슬그머니 들어섰다. 낯익은 얼굴이 아니다. 아마도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타과생이거니 어림하며 나 교수는 웬 녀석이냐는 투의 눈길을 보냈다. "^5,5,5^?" 그러나 녀석은 대꾸가 없었다. 나 교수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입을 꾸욱 다문 채 연구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흡사 동네 구멍가게에라도 들어선 듯한 태도였다. 요녀석 봐라? 나 교수는 두 눈을 허옇게 치떴다. 어딘가 좀 맹랑한 데가 있다고 느껴진 탓이다. 하지만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요즘 애들 중에는 더러, 객쩍은 짓거리를 불쑥불쑥 해 보이는 녀석들이 없이 않았던 것이다. 녀석은 덩치가 보통 이상이었다. 특히 상체가 우람한데다 목이 굵고 짧았다. 그러나, 옆댕이를 허옇게 치올려 깎은 머리통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어서 몹시 아둔하고 억센 인상을 주었다. "뭐냐, 자넨?" 나 교수가 물었다. 으레 그랬듯이 꽤나 퉁명스런 어투다. "왜 왔어?" "^5,5,5^" "뭣 하러 왔냐구?" "^5,5,5^"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대꾸가 없다. 단지 나 교수의 얼굴만 무심한 눈길로 돌아다 보았을 따름이다. 텅 빈 눈이었다. 그리고, 몹시 지쳐 있는 눈이기도 하였다. 그는 나 교수가 앉아 있는 책상 옆을 지나 맞은편 창가로 다가갔다.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다. 형광빛이 번들거리는 검은 잠바 등판에 수레바퀴만한 마크가 찍혀 있다. 언뜻 보아 미국 어느 대학의 것이다. 창밖은 햇빛이 맑다. 늦가을 햇살이 한 뼘쯤 기어든 창가에 낡은 소파가 마주보고 놓여 있다. 그중 한 쪽을 차지하고 그는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로 두 발을 올려놓았다. 청바지 차림에, 요즘 애들이 흔히 신고 다니는, 검고 투박한 운동화다. 어디를 얼마나 헤매고 다닌 것인지, 그 두 짝의 운동화가 온통 흙투성이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느닷없이 당하는 봉변인 것만은 분명한데, 이참에서 발끈 화를 터뜨려야 할지 아니면 그냥 웃고 넘어가야 할지, 나 교수로서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요즘 애들의 버릇없음이라고 해도 이건 확실히 도가 넘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슬며시 부아가 끓어올랐다. "이봐! 자네 말이야, 도대체 뭐하는 작잔가?" 담배를 찾아 무는 나 교수의 손끝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지금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인가?" 자제에도 불구하고 언성이 높아졌다. 녀석은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갈피를 못 잡는 표정이기도 하였다. 그는 뒤로 젖혔던 머리를 엉거주춤 쳐들고서 뜨악한 얼굴로 나 교수 쪽을 바라보았다. 공허한 눈빛이었다. "나 말입니까?" 비로소 입을 열었다. 꽉 잠긴 음성이다. "그럼, 자네 말고 누가 또 있나?" 나 교수의 냉랭한 반문이다. 더 혼란스러운 얼굴로 녀석은 등 뒤를 돌아보기까지 하였다. 벽을 메운 책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자 그의 눈길은 다시 나 교수에로 향하였다. 역시 텅 빈 눈이었다. 거기, 피곤과 졸음기 같은 것이 는적는적 묻어났다. "무슨 과인가?" "무슨 과요?" "우리 학생 아닌가?" "우리 학생이요?" 나 교수는 마침내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이거 뭐하는 수작이야! 자네 말이야,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야 뭐야?" "농담요?"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닌데요^5,5,5^ 전혀^5,5,5^." "그럼 뭐야?" 나 교수가 빽 소리쳤다. "뭣 땜에 나를 찾아왔는지, 용건을 말해얄거 아니야?" "용건요?" 그가 되묻고 나서 어눌지게 답변하였다. "그런 거 없어요^5,5,5^ 그냥 들어왔을 뿐입니다. 좀 피곤하고, 그래서^5,5,5^." "그냥 들어와? 이 친구, 사람 웃기구 있네!" 나 교수가 다그쳤다. "이거 보라구! 자네 말이야, 좀도둑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하릴없이 왜 남의 방을 드나드나?"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몹시 짜증스럽다는 투로, 머리를 다시 뒤로 벌렁 젖힌 채 아^36^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태도임이 분명하였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두 다리를 길게 내뻗고 아주 축 늘어져버렸다. 나 교수는 발끈하여 일어섰다. 그러나 금방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피가 머리꼭지로 확 몰리면서 눈앞이 노래진 때문이었다. 혈압 강하제를 복용하기 시작한 게 지난 학기 초부터의 일이다. 이러다간 기어이 쓰러지는 꼴을 당하지 아마, 하는 위기의식이 설핏 머리를 스쳤다. 나 교수는 입을 다문 채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끓어오르는 화증을 꾹꾹 눌렀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나 교수는 곤혹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 맹랑한 녀석이 그새 잠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녀석은 흡사 부려놓은 짐짝처럼 퍼질러 앉은 채로 숫제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반쯤 열린 입술이 미련스럽게 두터웠다. 그리고 본즉 상체 못지 않게 살이 떵떵 오른 얼굴이다. 하지만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정물처럼 탁한 어둠이 그 얼굴을 온통 뒤발질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개떡같은 일이 있나! 환갑이 머지않은, 나 교수의 풀기 없는 얼굴이 그만 씁쓸해졌다. 무참한 기분이다. 담배 한 대를 다시 꺼내 문다. 손끝이 스스로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다. 엎어두었던 강의노트를 펼쳐 든다. 하지만 단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그렇지! 나 교수는 돋보기를 낀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머리 속으로 시야가 온통 아득한 가운데 명료한 것이라곤 오직 녀석의 코고는 소리뿐이다. 그랬다. 그것은 잠에 깊이 중독된, 커다란 짐승을 연상시키는 소리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연구실로 되돌아왔을 때도 녀석은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탁한 잠의 수렁 속으로 더 깊이 침몰해 있었다. 녀석은 아마도 한 달 또는 그 이상으로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그랬다면 그 사정은 무엇일까? 하필이면 내 연구실를 잠자리로 선택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난감한 심정으로 나 교수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들을 하며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내처 버려둘 것인지 아니면 두들겨 깨워서 내쫓아버릴 것인지가 역시 가늠되지 않았다. 식당 밥은 늘 그랬듯이 맛이 없었다. 성의도 솜씨도, 게다가 선택의 여지조차도 없는 그 식사는 나 교수를 매번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시 땡 치기가 무섭게 달려가 줄을 서는 까닭인즉 식후에 탐할 즐거움 때문이었다. 햇볕 바른 창가에서 잠시 빠져들 수 있는 낮잠이 그것이었다. 이삼십 분이면 족하다.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듯 잠 속으로 혼곤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깨어날 때면 세상이 한결 맑고 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 교수에게 그것은 일과중 거의 유일한 낙이었으므로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참으로 엉뚱한 녀석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서 늘어지게 잠들어 있지 않은가! 나 교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녀석을 마주보고 앉았다. 햇살이 오전보다 한결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설까. 잠든 녀석의 낯짝이 박제된 짐승의 그것처럼 건조하게 느껴졌다. 짙은 눈썹 아래 두텁게 쌍꺼풀진 눈두덩이 수술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헤벌어진 입 속이 지저분하게 들여다보였다. 하나도 온전치 못한 이빨들이 그의 무절제한 성장과정과 이후의 방종한 삶을 어림하게 하였다. 갑자기 그가 심하게 헐떡거리기 시작하였다. 심장의 중심부에 있는 수레바퀴 중 몇 개가 톱날을 벗어나 제멋대로 겉도는 것 같았다. 여전히 잠에 짓눌린 채로 그는 고통스럽게 사지를 뒤틀며 거친 숨결을 한참 토해내더니 비명인지 욕설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하였고, 이어 몸서리치게 이빨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도 녀석은 깨어나지 않았다. 죽은 듯 한동안씩 가라앉아 있다가는 다시 비슷한 짓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씌워서라도 녀석을 냉큼 깨워놓고 싶은 욕지기를, 나 교수는 지그시 참아냈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과천 대공원에서 본 오랑우탄이 그것이다. 암수 두 마리의 그 유인원은 아프리카관의 한 철책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두 마리 중 유독 덩치가 큰 쪽이 몹시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고 요란한 괴성을 내지르면서, 마치 프로 레슬러처럼, 털북숭이의 그 우람한 몸뚱이를 차단 벽에다 텅텅 부딪치곤 하였다. 그 흉포한 야성이 순식간에 구경꾼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나 교수는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 교수는 그날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었다. 그 두 마리의 오랑우탄은 매번 얌전히 우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특유의, 아주 우울한 낯짝을 하고서 말이다. 커다란 넝마뭉치 같은 몸뚱어리 속에 저 엄청난 흉포성이 감추어져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구경꾼들이 더러 녀석들을 충동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사가 도통 시들하다는 듯이 아주 어둡고 우울한 눈길만 멍청하게 보내올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 맹랑한 인간 속에도 그 흉포한 짐승이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나 교수는 생각하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잔뜩 화가 난 짐승이 지금 그의 잠 속을 뛰쳐나오려고 맹렬히 으르렁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로 하여금 갑자기 된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게 하고, 고통으로 사지를 꼬게 만들며, 속 깊은 울음을 토하게 하고, 또 끔찍스럽게 이빨을 갈아붙이게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그의 잠은 이미 안식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의식을 잃은 채 당하는 가혹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이봐요, 이봐!" 나 교수는 그의 팔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그만 깨어나라구! 여기가 여관방은 아니잖나 말이야. 안 그래?" 두 어깨를 잡아쥐고 한참을 거칠게 흔들어대자 녀석의 두 눈이 비로소 반쯤 열렸다. 초점이 풀어진, 탁하게 충혈된 눈이었다. 거의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텅 빈 짐승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나 교수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잠이 깼으면 냉큼 일어나라구, 이 한심한 친구야!" 나 교수는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생각보다 유순하게 그가 일어섰다. 관절들이 죄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처럼 둔중한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동작은 거기서 굳어버렸다. "자리를 비워 달라는 얘기야, 내 말은!" 나 교수가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넋이 빠진 탓일까, 그 커다란 덩치가 맥없이 밀려났다. "이제부터는 내가 잠을 좀 자야겠어^5,5,5^."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나 교수는 그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자넨 그만 가보라고^5,5,5^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듯 싶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나?" 장승처럼 우뚝 서서 나 교수를 내려다볼 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별다른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상대하지 말기로 작정하고 나서 나 교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때를 놓친 탓에 눈알이 뻑뻑하고 머리 속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그가 슬그머니 사라져주리라고 기대하였다. 녀석의 머리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계는 어차피 해독 불능이고 예측 불능이어서 그 이상의 기대란 도시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였다. 보다 절박한 문제는 잠을 자는 일이었다. 오랜 습관에도 불구하고 이 날만은 나 교수로서는 잠에 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당연한 노릇이다. 바로 코앞에다 녀석을 세워두고서 어찌 쉬 잠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한참을 장승처럼 서 있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방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잠에 취한 듯 아둔한 걸음걸이였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조용하였다. 울부짖지도 이빨을 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교수는 흡사 오랑우탄의 우리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다! 우리 밖으로 뛰쳐나온 그 짐승이 우울한 낯짝을 하고 연구실로 기어든 기분이기도 하였다. 설핏 잠에 빠졌던가 보다. 우리 안의, 아니 우리 밖의 수많은 오랑우탄들 속에서 헤매다가 나 교수는 문득 눈을 떴다. 마주치는 시선이 있었다. 녀석의 것이다! 그는 나 교수의 책상을 차지하고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앉은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아주 거칠고 메마른 눈빛이었다. 나 교수는 왠지 쇠꼬챙이에 찔린 듯 뜨끔한 통증이 가슴에 와 박힘을 느꼈다. "자네 게서 뭐하는 건가?" 벌떡 일어서며 나 교수가 물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꺼졌다. 그는 다시 텅 빈 초점 없는 시선을 느릿느릿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책상 위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나 교수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뭐하는 짓거리야 이게?" 그가 쥐고 있던 빨간 사인펜을 나 교수가 거칠게 낚아챘다. 그러나 강의 노트는 이미 붉은 낙서로 어지러웠다. 그것만이 아니다. 책상 위에는 노트에서 뜯어낸 낱장들이 구겨진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이었다. 나 교수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녀석의 얼굴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그러고는 전신을 후들후들 떨면서 소리쳤다. "나가! 나가, 임마! 당장 꺼지지 못해?" 녀석은 얻어맞은 뺨을 쓸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두터운 입술에 오히려 웃음기 같은 것을 잠시 내비쳤다. 그는 다시 창가의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유서를 써보고 싶었습니다^5,5,5^." 탁한 목소리로, 그러나 태연스럽게 그가 말하였다. "그런데^5,5,5^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그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나서 씨익 웃기까지 하였다. "난 그래요. 늘 그랬단 말입니다. 읽고 쓰고^5,5,5^ 그런 것과는 영 맞지 않는단 말입니다^5,5,5^ 참 한심한 얘기 아닙니까?" 나 교수는 대거리할 기분이 아니었다. 송수화기를 집어들며 녀석을 향해 선언하였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어. 어쩔 테야?"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러자 서서히 그 아둔한 표정이 지워지면서 전혀 다른 감정의 동요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띵띵하게 살오른 뺨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 교수 앞으로 다가오더니 송수화기를 앗아 제자리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창가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유서를 쓰려니까 정작 쓸 말도 없더라구요. 그것두 참 웃기는 거 아닙니까?" 나 교수는 다시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정말 사람을 부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도움을 청할 것인가가 얼른 짚이지 않았다. 학생과? 막 숫자판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털북숭이의 투박한 손이 그것을 사정없이 낚아채 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화기가 박살이 났다. "신고하면 죽일 거야! 누구든 죽여버릴 거란 말이야!" 주먹으로 계속 전화기를 내리치며 그가 소리질렀다. "나두, 안다구, 알아! 그러니까 날 좀 내버려두란 말이오! 제발 그냥 좀 놔두란 말이오! 그러면 알아서 할 거라구!" 털북숭이의 주먹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눈빛의 광기를 띠고 번들거렸다. 그는 돌아서더니 그 주먹으로 벽을 쳤다. 책장 없이 쌓아두었던 책들이 무너져내렸다. 그것들 중 몇 권을 집어 팽개쳤다. 그러고도 미진한 듯 바닥으로 쏟아진 책들을 운동화발로 마구 짓이겨댔다. 그런 다음, 창가의 그 자리에다 우람한 몸을 내던지더니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고통스럽게 울기 시작하였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 교수는 온전히 넋이 빠진 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전혀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스무 해가 넘는 훈장 이력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너무나 돌발적이고 또 너무나 기이한 행태였다. 한 아둔한 인간의 파탄을 목격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아니, 우리 안의 한 마리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는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철저한 무력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번갈아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다. 망연자실한 채 나 교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머리꼭지가 맹렬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오후 강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나 교수는, 혈압 강하제를 삼키고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중 내내 머리가 휘둘렸다. 게다가 강의 노트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가슴은 예의 충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말하자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최악의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나 교수의 강의는 시종 횡설수설이었고, 학생들은 드러내놓고 잡담을 벌였다. 그랬거나 말거나! 강의시간 내내 나 교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문제의 인물이었다. 조교가 연구실 문을 두들길 때까지도 녀석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정신을 챙기고 본즉 5교시가 시작되고도 이십 분 가까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알았어. 곧 간다고 전해." 나 교수는 문전에서 조교를 황망히 돌려 세운 다음, 난감한 심정으로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징징거리던 울음을 그쳤다. 나 교수를 쳐다보는 눈이 큰 짐승의 그것처럼 순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탁함을 걸러냈는지도 모른다고 나 교수는 생각하였다. 모호한 슬픔, 갈등, 그리고 약간의 불안기 같은 것을 그 눈은 담고 있었다. 나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서투성이의 강의 노트를 챙겨들고 조용히 연구실을 나섰을 따름이었다. 그가 지금도 내 방에 남아 있을까? 나 교수로서는 그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그밖의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녀석이 연구실을 온통 분탕질한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좀도둑처럼 무엇을 집어간다고 한들 개의치 않았다. 굳이 챙겨야 할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훼손된 강의 노트처럼 언젠가는 버려져야 할 것들로 연구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도 깨달아졌다. 문제는 그 별종 같은 녀석이다. 그를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안에서 점점 강하게 차오름을 나 교수는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실은 비어 있었다. 서둘러 강의를 끝내고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온 나 교수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창가의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보자 그렇게 허망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 방 안은 어질러진 그대로일 뿐, 어디에서도 녀석의 모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쩌면 우리를 뛰쳐나왔던 그 짐승은 스스로 제 우리를 되찾아갔는지도 모른다고 나 교수는 생각하였다. 해가 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 나 교수는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었다. 간신히 가방을 챙겨들고 연구실을 나서자 돌연 가슴이 미어지게 뜨거워지면서 뒷덜미가 뻣뻣해졌다. 상처 입은 짐승이 따로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오늘, 다시는 치유할 길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본부건물 앞에는 퇴근버스가 노선별로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차 안에 올라앉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나 교수는 무리 속으로 천천히 헤치고 들어갔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소리들을 비로소 귀담아들었다. "경찰에는 연락했대? 벌써 한 시간이나 됐다며?" "우리 애래?" "어머머, 재봐! 뛰어내릴 작정인가 봐!"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한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나 교수는 비로소 눈치챘다. 그러자 심장이 써늘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젖히고 본부건물 옥상을 쳐다보았다. 거기, 녀석이 분명하였다! 오층건물 옥상 난간을 걸타고 그가 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바깥쪽으로 내려뜨린 채 작정만 하며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보다 더 쉽게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자세였다. 일몰의 스산한 하늘이 배경을 이루면서 이상한 허무감을 느끼게 하였다. "왜 저런대? 어쩌라는 거야?" "누가 올라갔나?" "괜히 저러는 거라구. 내버려두면 제발로 벌벌 기어서 내려올 놈이야!" 나 교수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본부건물 현관으로 들어서자 마음이 급해졌다. 책가방을 아무데나 팽개친 다음 층계를 한꺼번에 두세 개씩 건너뛰며 오층까지 숨차게 올라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구 앞에 한 학생과의 젊은 직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나 교수를 가로막았다. "누구든 접근만 하면 뛰어내리겠답니다. 절대로 공갈이 아니랍니다. 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애야. 아는 애라구!" 나 교수는 상대를 밀쳐내고 밖으로 나섰다. 옥상은 생각보다 좁고 불결하였다. 불과 십여 미터 저쪽에 사내의 등판이 보였다. 허리 높이로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 난간 위에 난짝 올라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접근하면 뛰어내린다! 등판에 붉은 글씨다. 그러나 나 교수는 주저하지 않고 저벅저벅 다가갔다. 확신이 있었다. 녀석이 결코 뛰어내리지 않으리라는 확신.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면서도 의심의 여지없이 확고하였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뛰어내릴 가능성이란 차라리 자신이 뛰어내릴 개연성보다 훨씬 떨어진다고, 나 교수는 철저히 확신하고 있었다. "자네 여기서 뭐하는 건가?" 대여섯 걸음 사이를 두고 나 교수가 말을 던졌다. 그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다! 전혀 낯선 얼굴이 무섭게 나 교수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본즉 체구도 왜소하였다. 하지만 나 교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분노처럼 이글거리는 절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이 금세 공허하게 비어버리는 것을 나 교수는 느낄 수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긴장 때문에 퍼렇게 구겨져버린, 일상의 저 우울한 낯짝뿐이었다. 나 교수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어스름 속에 저 아랫동네 광경이 잘 내려다보였다. 노선별로 줄줄이 늘어선 버스들, 책가방이며 핸드백들을 하나씩 꿰차고 위쪽을 열심히 올려다보고 있는 많은 얼굴들, 그 옆의 텅 빈 농구장 등^5,5,5^ 그것은 마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우스운 꼴로 납작하게 짜부라져 버린 풍경 같았다. 저쪽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숲을 헤치고 때마침 경광등을 매단 경찰차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춥구먼! 이제 그만 내려가지 그래?" 무심히 내뱉은 다음 나 교수는 돌아섰다. [ 귀로 * 이혜경 60 년 충남 보령 출생 82 년 "세계의 문학"에 중편 발표 95 년 장편소설 "길 위의 집"으로 '오늘의 작가상' 수상 "저거야, 저 솜털 뭉치 같은 거!" 짧은 외침 따라 인선의 눈길이 진경의 손끝을 이어갔을 때, 곧 던져질 세상을 향해 팽팽한 장력으로 긴장한 민들레 둥근 갓털은 이미 저만큼 물러난 뒤였다. 여전한 속도로 달리는 찻 속의 인선에게 보이는 건 그저, 포장도로 길어깨의 뭉개진 초록 덤불일 터였다. 벌써 여러 번째 허탕을 치면서도, 길섶 풀더미에 노랗게 박인 민들레꽃이나 꽃진 뒤의 갓털을 가리키는 일을 되풀이하는 심사, 이 이면에 놓인 어지러운 실꾸리를 보며 진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민들레꽃 따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걸까.' 민들레를 알려주는 일에 집착하는 속마음을 감추려는 노력은 그러나, 저를 들여다 보는 자신의 시선만을 한결 생경하게 노출시킬 뿐이다. 그런데, 언니는 왜 느닷없는 호기심을 보이는 걸까. "진경아, 너 민들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 양동이에서 프리지어 다발을 꺼낸 사내가 셀로판지를 두르려는 참이었다. 셀로판지에 갇힌 꽃줄기가 느닷없이 생생해지는 것을 눈으로 좇던 인선이, 시선을 사내의 손길에 고정시킨 채 물어왔다. 민들레를 모른다구? 의아함보다 먼저, 진경의 속에서 노랫가락이 솟아올랐다. 민들레, 민들레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5,5,5^. 노래는 끓는 죽처럼, 불쑥불쑥 뇌주름 갈피를 떠들며 솟구쳐 올랐다. 진경은 입을 열어 죽 냄비를 불 위에서 내려놓았다. 솟구치던 노래가 사그라들었다. "그럼, 요즘 지천으로 피어 있잖아?" 진경이 겉날리듯 대답한 건, 사내의 작업을 이쯤에서 저지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사내가 빈손으로 허방을 짚었다 찾던 것이 자리에 없어서 잠깐 망연해진 모습이었다. "그래? 다들 알로 있었구나^5,5,5^." 혼자말 같은 인선의 말 안쪽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중층의 울림이 부딪쳐와 진경은 인선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손을 바라보는 인선의 시선은 여전히 내부를 향해 열려 있었다. "산에 가다 보면 얼마든지 피어 있을 거야. 이따 알려줄게." 산소에 가시남유? 사내의 개입에 진경이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냉연한 금속성을 빛내면서 은박지는 꽃다발 밑둥을 단단히 틀어쥐었고, 청하지 않은 사내의 호의가 턱없이 두꺼운 검정 리본으로 몸통을 죄고 있었다. 수예품과 공예품, 꽃 등속을 파는 수예점 사내는, 이 거리에 오래 살았던 인선을 기억에서 지워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함석 차양 때문에 어둑신한 가게 안에서 사내가 내다보는, 상점마다 켜놓은 불빛이 겹치고 밀려 역시 침침한 길로, 젊은 여자들은 화사하고 부박한 표정으로 지나다녔으리라, 더러 한줌의 화사함이 그리워, 생에 첩첩이 질른 빗장을 열듯 한 다발의 꽃을 사기도 했을 여자들, 그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꽃 양동이 곁, 골판지를 가득 채운 인조 카네이션이 며칠 뒤를 기다리는 서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버이날, 겨우내 묵혔던 옷을 거풍하듯 환기된 관습에 따라, 저 꽃들은 앞섶에 위태롭게 매달리리라. 빨간빛 카네이션은 살아 계신 표라지, 하얀빛 카네이션은 돌아가신 표라지. 애상이 살얼음처럼 깔린 가락이, 접히고 접힌 뇌주름을 펴며 부풀었다. 공놀이에 쓰이던 노래는 이내, 가볍게 쳐들린 가랑이 사이로 넘나들던 공의 경쾌한 탄성을 일깨웠다. 오래 갖고 놀아 삭거나 추위로 탄성이 줄어든 공은, 아랫목에 묻어두거나 불에 쬐면 기지개를 켜며 부푼다. 그러나, 급조된 열기에 안간힘으로 깨어났던 허황한 탄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얼마 안 가, 공은 전보다 더 심하게 쭈그러들고, 하수구 근처에서 굴러다니거나 마루 밑에서 잡동사니들과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잊혀지게 마련이었다. 그 마루 앞마당에서 아이들은 새 공의 탄성을 즐기고, 어느 날인가, 공놀이를 마감한다. 둔하게 흘러가는 망각의 강, 하구의 퇴사에서 예쁜 돌을 줍듯, 진경은 상자 곁의 양동이에서 생생하게 물오른 분홍 카네이션을 한 송이 골랐다. 양철로 지붕을 한 시장의 음습함을 벗어나자, 양명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아스팔트 위에서 부서지는 빛의 파편, 그 사금파리들을 쓸어모으며 비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써럭써럭, 아침해가 새 날빛을 퍼뜨리기 전, 자매의 어머니가 집 앞 길을 쓰는 소리다. 어제의 흙먼지를 쓸어모으는 일로 하루를 여는 어머니는 아직 곱다. 이제 비질을 하기엔 힘이 모자라는 어머니가 새벽 산책을 한다. 어린아이처럼 지칫거리는 걸음으로, 또 한 밤을 보내고 새 날을 맞았다는 흐릿한 안도와 지루함이 깃들인 눈으로 이슬 맺힌 풀을 살핀다. 어느 날부턴가, 더는 길 위로 나올 수 없는 어머니를 뵈러 자식들이 느릿느릿 그 길을 걷는다. 어느 늦가을 밤, 감청색 하늘이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총총히 박힌 별 아래 다다른 집, 활짝 열린 대문간에 매달린 귤빛 조등이, 연탄을 쌓아 놓고 불붙인 마당의 불더미가, 피하고 싶어했던 두려움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불더미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그 주위에 선 사람들을 얼룩처럼 문댄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느닷없는 열망에 붙박인다. "그런데^5,5,5^, 어디부터 가야 하지?" 솔기 튿어지듯 떠밀려 광장에 섰을 때, 인선은 열차 속의 혼잡에서 채 풀려나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5월, 연휴 첫날의 열차 안은 체온으로 혼탁해진 공기가 가차없이 숨을 막았고, 아기들은 자지러지듯 울어댔다. 인선은 우는 아기를 어쩌지 못해 땀으로 뒤범벅이 된 맞은편 자리 여자를 구슬러 아기의 겉옷을 벗겼다. 첫아기인가,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아기 엄마의 손끝에 실린 미심쩍음을 묵살하며, 하얀 레이스가 발목을 감싼 양말까지 벗기는 인선의 능숙한 손끝을, 진경은 조금 신기해 하며 바라보았다. 젖은 기저귀를 수습하고, 달아오른 발에 신문지를 접어 살랑살랑 바람을 보내자, 아기는 늘킨 울음끝을 잦히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물 속에 떨군 물감 덩어리에서 물감이 풀려나듯 산발적이고 밑질긴 울음 소리는 객실 곳곳에서 이어져, 마침내 물감이 잔뜩 묻은 붓을 여러 번 빤 듯한 혼탁함으로 더위를 가중시켰다. 눈을 돌리면, 밀폐된 창 밖에는 물오른 초록이 한유로웠다. 땅 속 깊이 움츠렸다가 피어난 숨기운이 산발한 채 떠다니는 초록빛 들판에 눈을 쉬면서도, 진경은 마음 한 자락이 못에 걸려 당겨지는 듯 석연치 않았다. 그게, 갇힌 데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음을, 역 광장의 니은자로 펼쳐진 길이 깨닫게 했다. "집으로 먼저 가는 게 낫지 않아?" 진경은 곧게 난 길을 보며 말하였다. 눈앞으로 곧게 난 길은 자매가 살던 집으로, 그 길과 광장에서 맞닿아 니은자로 펼쳐진 길은 아버지가 옮겨간 냇둑가의 여인숙으로 각각 향했다. 어른을 먼저 뵈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오랜 세월 기억이 집적된 집으로 향하는 마음을 능가하진 못했다.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못 이겨 낡고 뒤틀어진 마루, 그 마루를 구르며 자란 아이들은 집을 떠나 어른이 되고, 어느 날인가, 걸음발 타는 아이들을 데려와 마당에 풀어 놓는다. 아이들이 넘어질까봐 뒤쫓는 할머니의 노동을 유희로 여겨 지레 자지러지며 증산하는 꼬마들의 웃음소리. 기억은 흰 모래로, 햇살 되받아 치는 길에 널린다. 그 모래가 쓸리는 곳으로 자매는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었어, 고모." 대문 열리는 소리에 달려나온 조카애가 양팔로 진경과 인선을 부둥켰다. 큰애가 두 고모를 차지해 버려서, 달리는 기세를 저지 당한 작은 애는 뒤에 서서 눈만 반짝였다. 진경은 큰애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뽑아 작은애를 향해 벌렸다. 빗장뼈가 새처럼 두드러지는 가슴으로, 작은애는 폭 감겨오며 고개를 묻고 물었다. 고모, 몇 밤 자고 갈 거야? 어렸을 적, 친척들이 오면 똑같이 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진경은 내일, 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짐을 염두에 두는 연습을, 아이들은 언제부터 하게 되는지. 어머니가 누워 있던 동안 늘 커튼이 드리워져 어둑하던 방 안은, 이제 하늘하늘한 망사 커튼만 쳐져, 빛살들이 거침없이 산란했다. 벽에는 아이들이 종이 접기로 만든 공작물과 그림이 올망졸망 붙어 햇살을 되비쳤다. 소풍이라도 갔는가. 풀섶에 앉아 모자 차양 아래 한 움큼 웃음을 끼뜨리는 사진 속 두 아이가, 육신이 썩는 침중한 냄새가 떠돌던 방 안으로 바람 타고 넘실거리는 라일락 향기가, 한 세대는 갔다고 읊조리는 마음을 아물렸다. 진경은 너른 창가에 붙어 뜰을 내다보았다. 나뭇잎과 바람이 공모해,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마당에 펼치고 있었다. 우리도 온 가족이 모여 가족 사진 좀 찍어보자꾸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장성한 자식들이 생나무 울타리가 되고 그 뿌리인 어버이는 한가운데 앉아 햇순 같은 손주를 무릎에 올려놓은, 맨 앞줄에 선 아이들은 더러 몸을 뒤틀기도 하는 화락한 정경. 그러나 끝내 가족 사진을 남기지 못한 채, 어머니는 이승을 떴다. 자매가 탄 차는 자운영 꽃덤불이 점증하는 논길로 접어들었다. 길에서 피어오른 먼지를 다시 길 위로 끼얹으며, 차는 고갯길을 올랐다. 어느 해인가, 선거통에 졸속으로 포장하다 만 시멘트 도로가 오십여 미터쯤 이어진 뒤, 툭, 하강이라는 단어를 실감시키며 차는 다시 비포장도로로 내려섰다. "저기^36^예요. 저 저수지 입구에서 세워주세요." 저수지와 논이, 논 저편 산자락에 나무를 쳐낸 묫자리가 보이는 지점에서 차는 멈췄다. 그리움의 원근법으로 확 다가드는 봉분을 바라보던 인선이, 선뜻, 긴장으로 단단해진 목소리를 내었다. "저게 뭐지?" 봉분 옆, 은빛 치맛자락 같은 것이, 서슬 꺾인 빛을 되받아 치며 움찔거리고 있었다. 온통 초록의 더미에서 무언가, 너울거렸다. "뭐, 비닐 조각이나 그런 게 나무에 걸렸겠지." 진경은 애써 심상하게 말하였다. 하지만, 육신이 죽은 뒤에도 다함없이 떠도는 영혼, 이런 상식에 길든 마음은 이미 뒤슬러진 뒤였다. 형상이 분명하지 않은 채 움찔거리는 빛무리^5,5,5^. 손차양을 만들어 그쪽을 바라보는 인선의 이마에 그늘이 졌다. "아무것도 아닐 거야. 가서 보면 되지, 뭐." 저만큼 멀어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며, 자매는 둔덕을 내려 저수지를 끼고 돌았다. 하오의 빛이 저수지의 잔 물결에서 퉁겨가고 떨어지고, 다시 첨탑처럼 퉁겨났다. 쟁강쟁강, 자디잔 금속성의 울림이 물표면에서 튀어 올랐다. "비가 많이 오긴 왔나봐. 이 저수지에 물이 다 차다니^5,5,5^." 배산임수. 임수의 구실을 다하기엔 늘 미심쩍은 수량이던 저수지가 그들먹하게 차오른 걸 보면서, 인선의 목소리도 불안을 눅이고 그득해졌다. 유독 비가 잦은 봄날이었다. 질척질척, 겨울끝 마무리며 언 땅 푼 다기엔 지나치다 싶은 비가, 꼬리를 을씨년스럽게 매달고 있는 겨울을 지워냈다. 오랜 잠수 끝에 숨 고르는 모양으로 잠깐 햇살이 비치기도 했지만, 구름은 이내 그 햇살을 지우고, 비로 흔적까지 뭉개버렸다. 겨울 끝무렵, 진경은 탈없이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이제 비로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가. 아무런 방비도 마련하지 않은 속수무책으로 진경이 지칫거릴 때, 의식의 나침반, 그 자침이 가장 간절한 떨림으로 가리키는 곳은 방금 떠나온 그 자리, 일상의 잡답이 쌓이고 쌓여 안락하게 먼저 피워 올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자리에서의 영속에 대한 두려움, 어서 바닥에 이르러야 한다는 조급함은 차지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바닥일까, 온몸 감아드는 해감내는 바닥의 징조일까. 서서히 떠올라 기진한 몸을 쨍쨍한 볕에 말리고, 그 볕에 단단히 여문 씨방 하나 들고 나가 세상에 발 내릴 수 있을까. 궁그는 봄 내내, 빗소리가 북향 방 창문의 창호지를 눅진하게 적셨다. 어쩌다 나가 보는 골목은 빗줄기에 갇혀 있었다. 그 골목을 헤집으며 이따금 행상이 핸드 마이크로 소리쳤다. 사과 사세요, 당근 감자 무 있어요. 그 소리는, 빗줄기로 가로막은 문을 열기엔 너무 무력했다. 그리고, 잠긴 목을 푸는 짧은 헛기침 소리, 발성자의 뜻과 무관하게 확성기를 타고 누출돼 버린, 곤핍한 내장 안벽을 타고 울리는 소리^5,5,5^. 삶의 고단함을 어루만지는 어떤 문장이, 저 헛기침 소리의 울림을 담을 수 있으랴. 잠긴 목을 풀듯 더듬거리며, 세상 속 사람들을 그려나가던 진경은 자괴심으로 다시 손놓았다. 무엇일까, 무엇이 내 목을 막고 있는 걸까. 쓰다 만 종이들, 쓰려던 메모들을 덮을 때마다, 목줄띠가 당기는 듯했다. 되새김으로 삭은 진득한 침을 입가에 매단 소가 걸을 때마다, 놀란 흙이 뭉글뭉글 진저리치며 깨어났다. 이태 전 가을 어느 날, 동네 피해 에돌아야 했던 상엿길, 그루터기만 남은 논바닥에 툭툭 떨어져 내리던 노란 국화 송이의 기억을 지우며, 자매는 산 어귀로 들어섰다. 상여가 지난 길을 내느라 급히 베어냈던 나무 밑둥의, 습기로 꺼멓게 잠식당한 단면들이 진경의 눈에 박혔다. 나이테를 가린 습기와 이끼가, 진경이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시간을 한순간에 보여주었다. 겨울 지나고도 선연히 붉은 청미래덩굴 열매들은, 눈과 바람, 적요로운 겨울을 훌쩍 건너뛴 것처럼 보이지만, 곧 새 잎 돋고 꽃 피면, 지난 해의 열매는 잊히고 말 것이다. 도대체, 한 사람이 한 사람과 만나 살아온 50여 년, 그 자리가 비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이 들어설 수 있는 거라면, 그 50 년은 무어란 말인가? 고희를 앞두고 홀로 된 아버지의 적적함이 덜어질 수 있도록 새어머니를 모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친지의 말에, 대뜸 거부 반응을 보이던 형제들의 얼굴엔 이런 항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살면 얼마나 더 사신다고, 그냥 계시다 가셔야 어머니 보기도 떳떳하실 텐데^5,5,5^. 난데없는 도의심까지 들먹여졌다. 하지만, 자매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엄마라도, 혼자 집에 웅크리고 계시는 것보다는 곁에 누가 있어 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야, 결혼한 인선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간 이를 못 잊어 수절하는 이들의, 풀 잘 먹인 모시의 감촉처럼 서늘한 외로움은 안타깝기만 아름답지. 하지만, 그게 아름답다고 해서, 보는 이들을 위해 사람을 수절시킨다는 건 잔인한 일이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못 다한 아쉬움이, 살아 계신 아버지가 빈 새벽을 맞은 담보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는 게 진경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당신이 원하시는 바에야. 어머니가 누워 지낸 삼 년 동안, 그토록 극진하게 어머니를 간병하던 아버지는, 1 년 만에 상청이 치워지고 난 뒤, 친지의 제의를 수락할 뜻을 슬몃 비쳤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 바닥에서, 어떤 형제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혼자 보낼 두려움을 보아 안타까워했고, 어떤 형제는 욕망을 보아서 노추를 느끼는 듯했고, 어떤 형제는 실제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풀어나가려 했다. 집으로 모실 것인가 따로 살림을 차려 드릴 것인가, 따로 나가 사실 경우 생활 대책은 어떻게 세워야 하나,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면 그분 뒤는 누가 돌봐 드리나, 그분이 돌아가시면 선산에 모셔야 하나^5,5,5^. 이야기가 공전을 거듭하고, 아버지는 집안 어른의 주선으로, 혼자 살면서 음식점 일을 한다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식구끼리 상견례를 치르고, 아버지는 아주머니가 사는 집으로 옮겨가는 걸로, 말막음을 했다. 읍내에서 조금 벗어난 냇둑 곁, 철교가 보이는 허름한 이층집이었다. 여인숙이던 집을 개조해, 전세나 월세로 여러 가구가 세들어 살게 만든 집이었다. 연노랑 페인트 덧칠은 그 한 겹 아래의 망월 여인숙이라는 글자를 깨끗이 지워내지 못했다. 1층과 2층을 합치면 방이 꽤 되었다. 방 두 개를 터서 살림방을 만들고, 거기에 잇닿은 방 하나를 부엌으로 개조한 구조. 사람 키에 꼭 맞춰 지은 정사각형의 방 두개를 터서 만든 방은 볼품없이 길쭉했다. 그나마, 2층이어서 창 너머로 내와 철교가 보인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사진 보여줄까유?" 과일을 깎다 말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새어머니는 말하였다. 조금 무안해하며, 하지만 무언가 자랑하고 싶은 천진한 얼굴, 눈가에 웃음이 상글거렸다. 순하게 쌍꺼풀진 눈매, 갸름하고 선량한 얼굴. 상견례를 치르는 자리에서 식구들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새어머니의 모습이 닮았다는 데 놀랐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이이는, 꼭 어린애같이^5,5,5^." 아버지가 쑥스러워하며 말했으나, 사진은 이미 문갑 서랍에서 삐죽 고개를 내미는 참이었다. 바닷가인가, 절벽의 정자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갈매기가 날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정경, 몸에 붙는 낡은 옷 같은 편안함이, 함께 오랜 세월을 머리에 이고 살아온 늙은 부부의 정통적인 구도, 억제된 친숙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진경은 좀 늦게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비운 집에 간직된 사진첩에 이런 사진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각기 가지고 있을, 오랜 세월 달리 살아오며 축적된 시간이 기계의 눈에 포획되지 않았다는 데에 쓸쓸한 안도감을 느끼며 진경은 말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사진으로 뵈니까, 두 분이 더 어울려 보이는데요?" "그래유? 가만 있자, 거기가^5,5,5^." 사진을 받아 들고, 새어머니는 문갑 서랍에서 돋보기부터 찾아 썼다. 사진을 쥔 손에서 얼굴을 멀리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말했다. 가만 있자, 여기가 그러니까^5,5,5^. 잘 어울린다는 말이 그리도 기뻤는지, 가느스름한 눈가에 웃음이 실리는 새어머니의 천진한 얼굴 뒤, 빨간 비닐 끈으로 매단 빨랫줄에 걸린 내의가 진경의 눈에 들어왔다. 그 남루함에 싸아해지는 목을, 진경은 경계했다. 늘그막에 만나 두 분은 잘 어울려 보인다. 무엇보다도, 한세월 다 넘기고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은 이들을 결속시킨 무덤덤한 친밀감이 있다. 그 이상 무얼 바라랴. 한번도 남의 호적에 자기를 얹어 보지 못한 새어머니의 꿈은, 그저 머리 얹어 달라는 거였다. 아버지가 새어머니네로 옮겨온 마음 한가운데, 홀홀단신으로 떠돈 사람에 대한 안쓰러움이 작용했을 거라고, 진경은 추측했다. 칠순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정정했고, 오랜 세월 가장으로 지녀온 위엄은 한 지어미의 지아비 노릇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절에서 혼례식을 마친 뒤, 아버지는 자매에게 말했다. 내가 죽더라도 늬들은 저이에게 잘해야 한다. 저이가 어렸을 적에 살던 집 앞에 기생학교가 있었더니라. 늘 담장 너머로 장고 두드리는 소리는 흘러나오고, 노랫가락도 흘러나오고^5,5,5^. 그때 기생들이 좀 화려했냐? 지분 냄새 풍기는 기생들의 비단 치마에 홀려서,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 보고 싶어서, 저이도 기생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나왔다더라. 하지만, 기생은 아무나 되나. 술집이며 음식점으로 전전하다가 처자 있는 한 남자 만나 그늘에서 살기도 했다더라. 언제던가, 단봇짐 싸들고 두근거리며 걸어나오던 처녀의 분홍 뺨은 간데없고, 새어머니가 꿈꾸던 기생들의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는 칼이 되어, 늘그막의 신혼 여행 사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새어머니의 눈가에 물결치는 고운 주름을 남겼다. "여기가, 그러니까 의상대인가베^5,5,5^. 맞쥬?" 새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새어머니의 반색이 무람없었는지, 아버지가 그런 것 같구먼, 짧게 답하더니 진경에게 말을 돌렸다 건 웬 가락지냐? "그냥, 손이 허전해서 사봤어요." 진경은 손을 펼쳐 아버지의 눈앞에 내보였다. 만만치 않은 중량감으로 묵중히 빛나는 반지는 어느새, 검지에서 무명지로 건너가 있었다. 박쥐 문양이 음각된, 닷 돈은 실히 될 쌍가락지였다. 무게와 이물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손가락은 반지를 밀어내었고, 반지는 자주, 검지에서 무명지로, 무명지에서 중지로 떠돌아다녔다. "백통이냐?" "은이라던데요." "오래된 것 같다. 어디서 난 게냐?" "제가 산 거^36^예요. 요샌 새 것도 이렇게 옛날 것처럼 나오는 게 있어요." 진경이 산 거라는 바람에, 아버지의 얼굴에 미지근하게 실망이 스쳐 지났다. 늘 수은알처럼 오롯이, 어디서 멸하는지 모르는 바람처럼 허랑한 딸의 손을 보며, 아버지는 안착의 징표를 기대했던 것일까. "난 또^5,5,5^ 전에 집에 그보다 더 굵다란 백통 가락지가 있었는데, 다 어디로 없어졌는지." 그것들을 먼지와 함께 흘려보내는 건 세월일까. 둔중하게 그리고 가차없이 갈리는 시간의 맷돌, 윗돌 구멍에 들었다 하면 무엇이든 남아나지 않는다. 잠결에 환청을 듣게 하던 그리움도, 육신을 벗어난 다음에도 이어질 것 같던 간절함도, 그 기억을 소장한 사람과 더불어 맷돌 틈바구니에서 타르르, 갈린다. 그러나 또한, 온전한 소멸이라는 게 있을까. 신석기 시대의 토기를 보고 촉발되었던, 미농지처럼 여릿한 감상. 그 날 오전, 진경이 들른 중앙박물관은 한산했다. 처음 들른 선사 실의 한 진열장 앞에서 진경은 걸음을 멈췄다. 청진에서 출토된 사발 모양의 토기 변죽엔, 세 줄의 손톱 무늬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부동항,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짐승 가죽을 몸에 두른 아낙이 흙타래를 매만지고 쌓아올린 다음, 바닷바람에 목덜미 간질이며, 꾸덕꾸덕 마른 사발을 손톱으로 꼭꼭 여며 무늬를 이었으리라. 그 아스라한 세월의 파도 소리, 지구의 들숨과 날숨에 따라 증산하며 합쳐지던 물의 기억들이 중첩되어 혈관 속으로 쏠려 들어오고, 혈관 속의 피가 온통 그 토기 안으로 쏠려 들어가듯 치밀던 뭉클함. 그러나 그 감상이, 선사실 안에 실물 절반 크기의 모형으로 재현된 그 시대 생활상에서 촉발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진경은 또한 알고 있었다.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가. 넌 좋은 세상이 오면 죽창감이야. 날로 높아지는 목소리의 이물스러움을 끝내 제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입 안 가득 유리조각을 문 듯한 서걱거림으로 진경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며칠 전부터 진경의 옆자리를 지키던 선배는 농성장 바깥까지 따라나오며 그렇게 말했다. 내 생각이 죽창감이라면, 어쩌겠어요, 죽창이나 내 몫으로 해야지. 젊음으로, 세상에 대한 겁 없음으로 턱없이 오만하던 그때, 진경의 속에서 죽순처럼 그런 말이 솟아올랐다. 그 말 대신, 진경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미안해요, 형. 하지만 난 아닌 것 같아요. 가야겠어요. 열정이 결여된 거뭇한 목숨. 그럼에도 세상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진경은 싸울 수 없었다. 최루가스 자욱한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대면서도, 끝내 돌을 들지 못했다. 아직도 덜 아프기 때문이라고, 세상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럴 수 있을까. 다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정말 돌을 들 수 있을까. 세상을 위해 돌을 든 적 없으므로, 이 세상 어떤 것도 네 몫이 아니라며, 뾰족뾰족 안에서 돋는 죽순. 일상에 젖어, 이대로 한세상 흘려보내도 좋으리라 싶을 때다. 속에서 돋아난 죽순은 점점 자라 대숲을 이뤄 수런거리며 잠을 빼앗더니, 제 줄기를 잘 버려 죽창이 되었다.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오래 입어 물감이 다 날아간 옷에 남은 무늬처럼 흐릿해진,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조차 한참 생각해야 하는 질문을 옆구리에 끼고 진경은 이십대를 걸어나왔다. "엄마, 저 왔어요." 인선은 잔디가 파랗게 살아난 봉분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산 속이라서 많이 기운 볕이 잔디 끝을 훑었다. 묫자리는 주변의 나무들에 둘러싸여, 바람이 한번 걸러져 온화했다. 낮은 목소리로 봉분을 다독이던 인선은, 비닐 봉지에 담아온 플라스틱 접시를 꺼내 과일과 떡을 진설했다. "우리 엄만, 이제 더 급하실 거야." 진경은 담배에 불을 붙여 봉분 앞턱에 꽂았다. 타는 가슴처럼, 연기가 하늘로 머리를 풀었다. 절을 하고 난 뒤, 자매는 봉분 주위에 섞인 잡풀을 뽑았다. 주변의 나무에 걸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이 살갗에 스쳤다. 하얀 제비꽃 한 포기가 진경의 눈길을 끌었다. 흰젖제비꽃이지, 아마^5,5,5.^ 깨닫고 보니, 망자가 벗어놓은 육신의 가슴께로 어림되는 부분에피어 있었다. 어머니^5,5,5^. 어머니가 자리 보전하고 누운 삼 년 동안, 자매는 한밤중이나 새벽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번엔 아주 가시는 게로구나. 욱죄는 가슴으로 몇 번인가 귀향하곤 했다. 그렇게 내려가면, 막 고비 넘긴 어머니는 짚검불 사윈 재처럼 누워 있다가 딸들을 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정작 돌아가시던 날, 진경은 임종은커녕 동생 잃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난히 맑고 예뻤던, 친구의 동생을 진경도 잘 알고 있었다. 재주도 많고 욕심도 많아, 그리 넉넉지 못한 형편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던 친구 동생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해 놓고 수영하다가 익사했다. 신혼이었다. 이상하더라, 걔가 고집스럽긴 해도 그렇게 막무가내인 애는 아니었는데, 유학도 그렇고 온 집안 반대하는 결혼도 그렇고,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더라, 집안 형편 알면서도 제 욕심 먼저 챙기고,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나중엔 나도 미운 마음이 들더라, 그러더니^5,5,5^. 나직하게 말하면서도 눈가가 빨개지는 친구 앞에서, 진경은 생각했다. 걘 저 살 거 다 당겨 살았구나. 술기를 털어내며 집에 와보니, 어머니의 부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와 봐, 진경아!" 인선의 탄성이 진경의 사념을 잘라내었다. 진경은 봉분을 빙 돌아 인선에게 다가갔다. 아, 억제된 탄성이 가슴을 후렸다. "2월에 왔을 때 사다 꽂은 거야. 엄마가 잘 보시라고 머리맡에 꽂아 두었는데^5,5,5^" 그것은 절화의 지든 가지, 인선이 꽃집에서 사다 꽂아 놓았다는 노란 대국의 가지였다. 시들며 썩어버린 꽃이 지루한 미련처럼 매달린 가지. 썩어버린 밑부분에서 삐죽 돋아난 새 잎사귀였다. 잘린 지 오래된 줄기, 물관부에 남아 있던 실낱 같은 숨자락이, 꽃샘바람과 비 잦은 봄날을 견뎌 뿌리 내리고 새순을 틔우다니. 하기야, 4천 년을 늪 속에 파묻힌 채 묵묵히 견뎌온 연꽃 씨앗도 있다. 신석기 시대의 카누에서 발견된 연꽃 씨앗은, 단단한 껍질 속에 웅크려 있다가 4천 년 뒤 빛에 노출되었고, 그 씨앗을 심자 싹을 틔우고 순연한 꽃을 피웠다. 나미브 사막의 사막만년청이란 풀은 첫 꽃을 피우기까지 25 년이 걸린다. 단 두 장의 잎뿐인 이 풀은, 천년에 이르는 생애 동안, 해안에서 불어오는 수증기를 흡입하기 위해 제 잎을 갈기갈기 찢으며 연명한다. 뿐이랴, 큰 비가 내리기까지 25 년에서 1천 년 동안, 건조한 사막의 흙 속에서 견디는 새우알도 있다. 오랜만의 큰 비가 내려 웅덩이가 생기면, 그 물이 증산하기까지 며칠 동안에 새우알은 재빨리 부화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위해 잉태한다. 수정란은 다시 흙 속에 파묻혀 비를 기다린다. 몇 십 년, 어쩌면 몇 백년을. 잡다한 지식들로 범벅이 된 머리를 이끌고 진경은 다시 한번 박물관으로 갔다. 토기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저걸 만든 아낙이, 자기가 손톱으로 무늬를 놓은 그릇이 천 몇 년 뒤까지 남아서, 천 몇 년 뒤,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지아비와 아이에게 먹일 무엇을 담아두기 위해 그릇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흙을 파서 빚고, 일상의 밋밋함에 무늬를 놓듯 손톱으로 꾹꾹 눌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릇이 이토록 오래 남아, 이 그릇을 보고 싶은 마음만으로 여기까지 오게 하다니,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선사시대 아낙의 손톱이 한 일 같은 걸, 말로써 해낼 수 있을까. 박물관에서 나오는 길에, 진경은 무겁기가 족쇄와 같은 반지를 마련했다. 새도 짐승도 아닌 박쥐가, 복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에 힘입어, 구름 문양 위에 얹혀 있었다. 서양에서는 마녀나 악마의 상징으로, 동양에서는 오목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박쥐. 거꾸로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승에 복무해야 하리라. 너무 오랜 생명을 흘려 보냈다는 자책으로 반지의 박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인선이었다. 너, 바쁜 일 없으면 엄마 산소에 같이 가지 않을래? 어버이날도 멀지 않고 하니. 풀을 한 움큼 쥔 진경은, 아직도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인선에게 다가갔다. "뭐 해, 그렇게^5,5,5^." 말하다 말고, 진경은 멈칫 섰다. 인선의 빨갛게 번진 눈가, 커다란 눈알에 번실거리는 물기를 보았던 것이다. 동네에 상여가 지나가면, 질펀한 상여소리에 글썽이는 자매를 보던 어머니는 그랬다. 그 눈물 뒀다가 나 죽으면 흘리렴.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 목숨 하나 감당 못해 떠돌던 회한으로 말라붙은 진경의 누선을 자극한 것은 어머니의 그 말이었다. 그 눈물 뒀다가^5,5,5^. "다시 애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 그악스러운 아카시아 때문에 빨갛게 죽어가는 노간주나무에 눈을 준 채, 인선이 중얼거렸다. 아기라니? 진경은 눈을 크게 떴다. 진경의 시선을 의식한 인선은 애기였대, 툭, 내던지듯 말하였다. 결혼한 지 6 년 만에 들어섰다가, 알지 못하는 새에 멸해 버린 아기 이야기였다. 자궁이 성숙하지 못했어요. 몸만 어른이지, 자궁은 아기 자궁만 해요. 불임 클리닉의 의사는 인선에게 그렇게 말했다. 흰 자위가 유난히 깨끗하다 못해 파란 인선의 눈도, 나이답지 않게 아기 같은 인선의 얼굴도, 거기서 연유한다고 의사는 덧붙였었다. 그런데. "원래 생리가 규칙적이지 않았잖아. 그냥 거르는 줄 알았지. 그래도 그렇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니^5,5,5^." 자신의 몸을 빌려 태어나려다, 그 몸의 부실함 때문에 돌아가 버린 아이에 대한 죄의식인지, 인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느닷없다 싶던 성묘는 그래서였나? 돌아간 아이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끌었을까. '여자들이 남자보다 많이 우는 건, 몸 안에 빈 곳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아이가 들어선 동안만 채워지고 공동으로 남은 그곳, 슬픔이 그 공간을 공명해서 더 슬픈 걸 거야." 인선의 곁에서 묵묵히, 묘지 아래 비스듬한 경사면을 바라보는 진경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처음 실패하면 어렵다던데, 라는 염려와, 그나마 아기가 생겼다는 건 자궁이 성숙한 거 아니겠냐는 낙관적인 마음, 들쭉날쭉하는 마음으로, 진경은 묘지 아래 비스듬한 사면에 눈을 주었다. 아이는 또, 세상의 어디에 실망해서 오다 말고 돌아간 것일까. 어려서 아이를 잃은 부모를, 윤회설은 그렇게 다독였다. 영화를 보로 갔다가 재미없으면 도중에 나오듯, 아이도 이 세상에 실망해서 다시 돌아간 거라고. 구천을 떠돌다, 다시 다른 세상에 몸 받아 나올 거라고. 어디서 날아온 솔씨인가, 아기 솔이 몇 그루, 머리카락이 뻗친 아이처럼 삐죽삐죽 돋아나 있다. 밤을 예고하느라 낮아진 산그늘에 잠긴 머리로, 아이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민틋한 가슴을 무릎에 기댄 채, 인선은 아직도 국화순에 눈을 주고 있다. 진경은, 죽어버린 꽃술을 늘어뜨리고 있는 국홧대 윗부분을 꺾어냈다. 이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다. 열정이 결여된 생처럼 거뭇한 꽃술은, 해가 기울려는 순간의 불투명한 서먹함이 깔리는 시계를 이끌고 저만큼 떨어졌다. "이만 내려가자, 언니." 진경은 느릿느릿 일어나며, 니코틴을 품은 재로, 주동이 두 번 부러진 채 사윈 담배를 뽑아내었다. 인선이 그릇을 거두는 사이, 진경은 꽃다발에서 은박지와 셀로판지를 벗겨내고, 꽃을 봉분 언저리에 흩뜨렸다. 카네이션과 프리지어의 길쭘한 몸체를 안개꽃이 가렸다. 썩지 않은 채 달빛 받아 망인을 놀라게 할 은박지와 셀로판지, 지난번에 형제들이 놓고 간, 햇살 되비쳐 자매를 놀라게 했던 스티로폴 판지를 들고 진경은 일어섰다. 국화순과 봉분을 눈으로 어루만진 인선이 돌아섰다.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어유." 조카들이 잡는 바람에 점심을 먹고 왔다는 말에, 새어머니는 여러 번 다짐을 두었다. "이렇게 따님들 오시니까, 영감님 신색이 훤해지신 것 같네유. 안 그러면 혼자 앉아 막대기나 깎고 청승이실 텐디^5,5,5^." "참, 늬들, 내가 만든 지팡이 좀 볼래?" 아버지는 장롱 문을 열고, 말갛게 육탈한 뼈처럼 희고 순결하게 다듬은 나무 토막 다섯 개를 꺼냈다. "이게 바로 청려장이란다. 왜, 옛 시조에도 있잖으냐? 청려장 헛더 짚고 합강정에 올라가니 동천명월에 물소리뿐이로다^5,5,5^ 하는 것 말이다. 그 청려장이 바로 이거란다. 지난 가을, 냇둑을 정리한다고 뽑아내 버린 걸 주워다 다듬었다. 더 늙어 허리가 꼬부라지면, 이거나 짚고 손주들 만나러 다녀야지." 명아줏대의 곁가지를 다 떼어내고 껍질을 벗기면, 비스듬히 휘어진 뿌리 부분이 손잡이 구실을 하는 청려장이 된다. 가지를 떼어내 옹이진 데를 불로 지지고 옻칠한 다음 바닥에 알루미늄 버선을 신기면, 삼장법사 지팡이 못지 않은 지팡이가 된다. 설명과 더불어 지팡이가 건네졌다. 가벼우나 만만치 않은 견고함이 손에 짚였다. 한해살이 풀인 명아주는 지하 5 미터까지 내려가 10 년을 기다린 뒤에야 싹이 튼댔지. 어디서 읽었더라. 기억을 더듬는 진경의 머릿속, 썩고썩어 말갛게 육탈한 뼈가 청려장에 겹쳐졌다. 차란차란, 뱀을 경계해 회초리로 풀숲을 헤치며 인선이 앞장섰다. 착상을 지탱하지 못하는 미성숙의 자궁을 감싼 몸이, 해질 무렵 그림자처럼 허전했다. 저 안에 새 생명이 깃들이기를, 뒤따르는 진경은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산을 다 내려와, 산 어귀의 공한지에 이르렀을 때, 진경은 앞서가던 인선을 불렀다. "여기야, 여기 있어." 산 아래, 어디서 왔는지 모를 민들레가 어스름 속에 노란 꽃잎을 묻고 하늘거렸다. 어디? 앞서 가던 인선은 되돌아왔다. 평생 단 한번만 명령할 수 있는 임금이 있었다. 그 임금은 제 운명을 그렇게 결정한 별에 불만을 느껴왔다. 그러다 외쳤다. 내 운명의 별들아, 모두 하늘에서 떨어져 꽃이 되어 피어나거라. 내가 너희들을 밟아주리라. 별들은 우수수 쏟아져 내려 민들레로 피어났고, 평생 한번뿐인 명령을 그렇게 써 버린 임금은 양치기가 되어 민들레 위로 양떼를 몰고 다녔다지. 인선이 보고 싶었던 민들레는, 그런 이야기를 간직한 민들레가 아닐 것이다. 아주 연약한 홀씨로 번져, 제아무리 거친 땅에서도 꽃을 피워내고야 마는 민들레일 것이다. 별 새로울 것도 없는 민들레 앞에 쪼그리고 앉은 인선 곁에서, 진경이 보는 민들레는 말한다. 어떤 사람은 제게 주어진 생을, 그런 명령을 내리는 걸로 탕진해 버린다고. "많이 보았었는데, 내가 이름을 몰랐구나. 이거, 우리 아파트 잔디밭에도 많이 피었던데^5,5,5^. 이게 민들레였다구?" 인선은 쪼그렸던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이제 어서 가자. 그런데, 차가 있으려나?" "가끔 버스가 다닌다니까. 어쩌면 빈 택시도 있을 테고^5,5,5^." 인선은 휘적휘적 앞서고, 진경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5,5,5^,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땅을 향하여 휘어진 허리에 한 손을 얹고 진경의 곁에 붙어선다. 지난날에 검질기게 발목 붙들려 앞을 보지 못한^5,5,5^. 세월이 흐를수록 굴지성은 더 깊어지는가. 꺾일 듯 위태로운 윗몸을, 손때로 옻칠이 거의 벗어진 청려장에 의지했다. 딸깍딸깍, 땅에 닿을 때마다, 지팡이는 가지가 매달렸던 자리의 통증이 새삼스러워진다. 산기운이 엷어지면, 농수로로 쓰이는 도랑이 나타난다. 써레질이 한창인 다랑이, 곧 갈아엎어져 새순 키우는 거름이 될 그루터기 사이로, 다리도 나오지 않은 올챙이들이 바삐 몸을 흔들며 물의 부력을 즐긴다. 진경의 무명지에서 빠져나온 반지가 도랑에 가라앉는다. 그것도 모르고 걷던 진경은, 방금 내려온 산과 마주 보이는 산이 시작되려는 다랑이에서 발을 멈춘다. 황토가 드러난 길섶에 내던져져 겨우내 썩은 짚단에, 난데없이 피어난 각시붓꽃이 눈을 끝 것이다. 인선이 저만큼 가물가물 앞서가는 것도 모르고, 진경은 유난히 건 곳 좋아하는 각시붓꽃에 마음 팔려 붙박인다. 이파리도 없이 함초롬한 꽃 한 송이, 도드라지는 보라빛 꽃잎의 매몰찬 단정함에 흘려 있는 진경의 등 뒤, 저수지 물너울을 타고 보랏빛 저녁이 시름없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