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제1권 꿈속에서 지은이 : XTC666 ( 문한솔 ) 출판사 : 도서 출판 성인문 < 작가의 말 > 담론으로서의 성 - 재미있는 이야기 어떤 일의 시작이 늘 그렇겠지만, 스스로도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이 책의 시작은, 지금부터 1년전쯤의 이맘때 PC통신 성인정보에 우연히 몇 편의 글을 응모했던 일이 그 발단이었다. 그때의 신분은 9년째 학생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늦깍이 대학생이었다. 따라서 그 응모의 계기란 그저 순수한 아마츄어적 발상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신없이 원고를 맞춰대느라 헉헉거리는 사이, 이미 나는 정식계약 을 한 작가가 되어 있었고, 어느새 내 부끄러운 글들은 하루에만 수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너무나 놀라울 따름, 선뜻 내 자신조차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일까? 내 글이 그렇게 읽힌 것은. 단지 야해서? 그랬다. 지금 와서 얘기이지만, 원래의 내글은 훨씬 더 '야했다'. 지면으로 옮기는 이번 작업에 한 철 내내 고생을 할 정도로.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나는 그 이유를, 우리네 성문화의 현주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성에 관한 화제는 아예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 는 전통. 성 = 감추어야 할 것, 신성스러운 것, 해악. 미천한 내가, 함부로 어떤 문화의 건전성과 유해성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난 그럴 사람도 되지 못하고, 그 럴 만한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다만 내 믿음은, 충분히 성도 하나의 담론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이 시대 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나의 문화적 공간으로서, 그에 관하여는 막대한 정보의 총량도 성립될 수 있는 성문화. 담배가 백해무익하 다 해서, 담배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부끄럽고 천박하며 죄악시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듯, 성에 관해서도 마찬가 지의 이야기를 하기 바라면 안 되는 것일까? 성에는 의무와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대다수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응당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와 담론의 여지가 마땅히 보장되어야 당연하지 않을까? 성은 내밀하고 은밀한 세계에 있으나, 결코 추악하거나 더러운 것이 아니라는 믿음, 그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 까. 그래서 나는 내창작을 감히 문학이나 소설이라는 테두리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그럴 만한 권리와 책임을 누릴 만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상상 속의 이야기로 자리매김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포기를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두려웠던 것이다. 성게 대해 언급한 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다. 그래도 결국 나는 이렇게 오고 말았다. 여러 사람의 희생과 봉사의 덕이다. 위험을 감수하며 실천해준 준학이 형, 내 미진한 글들을 바로 잡느라 고생하신 석희 형, 내 시작을 마련해준 남희 누님, 못 생긴 내용을 멋진 표지로 감춴준 김종원님. 나는 그분들에게 진심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내내 속타했으면서도 긑까지 나를 믿어준 재영이 형, 부끄럽기 그지없는 책에 훌륭한 추천사를 내려주신 한만수 선생님, 그 분들께는 큰절을 올리고 싶다. 그렇지만 끝내 가장 큰 인사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한 분 한 분에게 돌려져야 하리라. 왜냐면, 날 이렇게 자라게 해준 분들은 다름 아닌 그런 대다수의 독자, 좀 더 개방되고 밝은 성담론을 갈망하는 말없는 다수의 대중 이 계셨기 때문이니까. 1998. 11. 어느날 XTC666 두 가지 비리 내가 온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안 건 바로그 때였다.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베일 같기도 하고 커튼 같기도 한 백색의 엷은 자락이 안개 걷히듯 살포시 걷힌 바로 그 때.응당 가려졌으리라 생각하고 있 던 몸뚱이에 차가운 이질감이 느껴졌고, 그제야 나는 아래쪽을쳐다보았다.거기엔 자연 그대로인 채 벌거벗은 육신만이 있었다.어나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좀 전에 눈앞을 스치고 갔던 순수의 백색 탓일까, 어떠한 부끄러 움도 어색함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러자 겹겹의 베일 너머에서 하얀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아니, 마치 너울처럼 베일 속에서 솟아났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예의 그 베일 같은 것으로 감싼 채 그 물체가 내게 다가왔다.벌거벗은 백색의 몸뚱 이였다.가슴 부분이 불룩한 것으로 봐서 분명 여자였다.그 나신, 그녀는 베일과 하나가 된것처럼 완벽한 조 화를 이루고 있었다.역광이라도 비친 듯 그녀의 몸매가 한눈에들어왔다.세상에 저처럼 아름다운 곡선이 또 있을까?초승달과 보름달이 합쳐지기라도 한 듯 유연하고 풍만한 곡선이 아스라히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그녀에게로 인지 그녀가 내게로 인지 모르게, 우리 둘의 나신은 가까이 다가섰다.조용히 어떤 움직임과 소리도 없이. 저 여자는...... 누구일까.믿을 수 없게도 나는 그 아름다운 몸매의 소유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당연히 그 벗은 몸만으로 누구인지를 알리는없기에, 난 필사적으로 시선을 맞추었다.한 걸음 한 걸음.간격이 좁혀지면 서 나는 이 흐릿한 영상을 꿰뚫어보기 위해 힘껏 눈에 힘을 주었다. 누구, 저 하얀 몸매의 주인공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지만 미처 그 얼굴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의 살포시 숙여진 고개는 어느새 내 얼굴 아래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그 순간 또 한 가닥의 미풍이 그녀와 나 의 얼굴 사이에 하얀 자락을 펼쳐 놓았던 것이다.다시 가려져버린그녀의 얼굴.마음 같아선 그 너울을 걷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이미 그러기엔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에...... 단지 아주 잠깐 볼 수 있었을 뿐 - 까만 색깔, 그 두 개의우물 같은, 수줍게 깔린 까만 눈썹과 그보다 더 새 까만 눈동자만이 샛별처럼 반짝이며 내 눈을들여다보고 있었다. 베일이 장막을 치듯 두 눈이 스르르 감겼고, 이내 내 얼굴은 알 수 없는힘에 이끌려 아래쪽으로 이동하고 있 었다.눈을 감았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스펀지 공처럼 부드러운질량감의 두 물체 사이로 내 얼굴은 파묻히 고 있었다. 그 느낌은 체온보다 더 따스했으며, 유년의 기억보다도 더 포근했다.내 머릿결을 헤치고, 그녀의 손가락이 지 그시 나를 안아 주었다.아무 말 없이 나는 그 탐스러운젖가슴에 얼굴을 부벼댈 따름이었다.내 콧등과 입술 을 가득 덮은, 작지도 않은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두 개의 곡선 속으로.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나는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멍하니 그녀의뽀얀 나신을 안은 채, 나는 무너지고 있었 다.아프지 않았다.오래오래 내 몸은 어디론가 쓰러지고 있었다.그 시간은 영원보다도 긴 것 같았다. 구름처럼 푹신한 물체 위에 내 등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안건 시간이 얼마가 지나서였는지알 수 없었다.그 녀는 여전히 내 몸 위에 있었고 - 침대, 그랬다.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푹신한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었다.살 짝 실눈을 떠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이제 내 얼굴 바로위에 있었다.보였다.그녀의 물기 어린 옅은 빨강의 입술, 그리고 이국적인 향기도 느껴졌다. 곶이어 촉촉한 그 무엇이 다가왔고,난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따뜻했다.매끄러운 액체에 휩싸인 채 다가온 그녀의 입술 안에서도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혀를 휘감아왔다. 진한 입안의 향연이 끝나자, 멀어진 입술새로 뽀얀 이를 드러내며 그녀가웃었다.그리고 뭔가를 말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잠시라도 막혔던 것은 입술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제 그녀의 백색 나신은 조금씩 내 몸 아래쪽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곧이어 내 아랫도 리에서부터 퍼져 나온 아련한 느낌이 온몸으로흘러갔다.느리게, 슬로우 모션처럼 그녀의몸이 내 몸 위에서 마찰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좀 전에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없었지만, 그 소리만큼은 또렷이 내 귓가에 낮은 톤으로 울리고 있었다. 리드미컬한 그 소리 - 너무나 황홀한 그 리듬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움직임, 내 몸위에서 흔들리는 그녀 의 몸짓을 따라 조그맣게 새어나오고 있었다.그녀와 나의 몸뚱이사이에서 울려퍼지는 그 연주, 파도 소리 같 은. 철썩.철썩.삐걱.삐걱...... 삐걱.삐걱.삐릭.삐리릭. 삐리리릭, 삐리리릭...... 방바닥에 놓인 고물 전화기는 마치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정적을 깨놓았다.아침밥 도 건너뛰고, 내 방의 유일한 매스미디어인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놓은 채 막 깊은 잠이 들 찰나였다. "에...... 여보세요." "얌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어? 한 시간 내내 계속 전화했는데 통화중이고......" 희창이 목소리였다.아까...... 새벽까지 PC통신을 했었고, 지금 선잠이 든 사이에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어, 미안.잠깐......" "야, 나 지금 갈 거야, 오후 수업이니까 짐에 있을 거지?" 덜컥, 녀석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전화를끊어버렸다.아마...... 차안에서 핸드폰으로 거는 것일 게다. 무슨 일이지.집에서 오는 모양인데 학교로 직행하지 않고 곧장 이 지저분한 내 자취방으로 오겠다니. 희창이, 내 초등, 중학교 동기 동창이자 우리 과에서 유일한 내 친구 녀석.그와 나는 신입생 환영회에서야 몇 년만에 해후를 했었다.같은 학번들의 이름도 잘 몰랐던나는, 모임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선배들에게 반강제로 끌려오는 녀석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그랬다.우린초등학교 시절엔 거의 불알친구나 마찬가지였 고, 중학교의 같은 반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희창이의 집은우리 집에서 불과 2-3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 에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중학교 졸업식 전날, 녀석은 아무런 사전 기별도 없이 정든 강북을 떠나 변두리로 이 사를 해버렸고 - 우리는 그 후 3, 4년간을 소식도 듣지 못한 채지내왔었다.그러니까 올 초의 그 신입생 환영 회 날까지. 그런데 - 잠시 생각을 더듬던 난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런,꿈이 생각나고 있었다. 제길, 한밤중도 아니고 새벽녘 개잠에 몽정을 하다니.팬티 속이 흥건히 젖어있었다.나이가몇인데 아직도 이 런 일을 겪는단 말인가.스스로를 면박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아침이니 샤워를 하라는 무슨계시 같 았다.민망한 흔적을 남긴 그 놈의 팬티를 화장실 구석에던져 넣고, 비좁은 공간에서 낡아빠진 샤워꼭지를 틀 었다. 차갑게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서 나는 조금 전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하얀 베일, 벌거벗은 채 다가 온 여자. 그리고 내 몸 위에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분명 기분 나쁜 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개운한 꿈 도 아니었다.누구였지? " 야, 문 열어, 짱이야!" 얼레, 전화를 끊은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그 놈이 자취방 문을 부서져라 두들겨대고 있었다.뭐 야? 집에서 온 것이 아니었나?엉거주춤,문을 열어주자 녀석이 툴툴거리며 들어섰다. 눈자위가 시커먼 것이 틀림없이 잠도 못 자고 외박을 한 몰골이다. "아쭈...... 이짱 너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 "야, 몰라몰라, 먼저 잠 좀 자자, 잠 좀." 옷을 벗자마자 내가 방금 일어나 꿍쳐놓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희창이.희창이,그리고 내 이름 창희. 그래서 우린 서로를 코흘리개 시절부터 짱이, 이짱이, 이렇게 불러왔었다. "뭐야 임마......!" "야아! 쫌 내비둬...... 일어나서 말해줄게." 당장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그와, 내가 다니는 우리 학교는시내를 벗어난 교외에 있었다.다른 곳도 비 슷하지만, 한적한 국도변 깊숙이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통학버스는 시내까지 하루수차례 왕복을 하고, 정문 앞 으로는 학생들을 따라 들어선 조그만 유흥가들이 소읍 마냥 상권을 형성하는, 그런 평범한대학교의 경영학과 - 사실, 원래대로라면 삼수를 해야 했는데, 어쩌다보니 공부에 취미를 잃어 곧 이곳에 정을 붙여버렸다. 당시 명문대를 노려볼 만한 상위권 성적이었던지라 좀 더 좋은 학교를 원했던 아버지였지만, 차라리 그런 부모 님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나는 과 수석 장학금을 헐어내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가후문 곁 이 허름한 자취방 이다.표면상의 이유는 강북 집에서 너무 멀다는 것이지만, 지친 것도 지친 것.어쩌다 보니 장학생이란 신분도 꽤 괜찮을 성싶은데다가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자유인이 되어누리게 된 생활과 친구들도 한 몫을 거들었 다.물론 그 안에는 여기 이 이짱 녀석의 존재가 톡톡히 제 몫을 한 셈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러그러한 연유로 희창이와 나는 금방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게 됐고, 내 방도이 놈에게만은 무료 여인숙이 된 지 오래다.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책상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자식,이미 익숙한 모습이었 다.엊저녁에도 또 어느 계집애랑 여관 침대위에서 뒹굴었을 게다.어번엔 어느 계집애일까...... 자식,재주도 좋아...... 그런데 아까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얼굴, 눈하고 입술은 틀림없이봤는데.뽀얀 몸을 지닌, 딱 알맞은 젖가 슴을 지닌, 하얀 얼굴에 반짝이던 눈동자......, 더듬어 보았다.어차피 떠오르는 여자 얼굴이 많지도 않으니, 잘만 생각하면 알아낼 만도 하다.분명 아는 얼굴이었으리라.자주는 아니지만, 꿈속에 모르는 이의 얼굴이 등장해서 이렇게 생생히 기억을 남겨놓을 리 없다. 하지만 떠오르지가 않는다.부분적으로 보았던 눈과 입술을 비롯한부위들이 전혀 합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현재 어떤 사람을 짝사랑하거나 해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인물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일까,다시 꿈을 꾸면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깜빡 모자란 잠을 채우려 책상에 엎 드려 졸았는지, 드르륵, 창문 여는 소리에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시계를 보니 벌써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 고, 희창이는 어느새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아그그...... 우후후...... 야, 짱, 담배 있냐?" "학교 안에...... 학교 안에 있어. 잠이야 뭐......"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여관방에서 뒹굴었겠지.그럴만한 놈이니까. 사 년 전 불현듯 헤어지던날, 희창이는 아무 말도하지 않은채 그냥 바지뒤춤에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일제 게임기였다.당시만 해도 전교에서 서너 명만 가질 수 있었던 그 귀한 물건을 이사가면 더 이상 필요 없다 는 이유로 녀석은 작별의 정표로 주었던 것이다.그리고 다음 날, 그의 집은 이사를 가버렸다. 난 그 때까지만 해도 녀석이 왜 그리 급히 서둘러야 했는지 얼떨떨할 뿐이었는데, 언뜻이나마 그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것은 며 칠 후 부모님 방에서 들려온 '부도'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였다.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우리의 별명, '짱'이란 단어처럼, 녀석의 성격과 개구쟁이기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 았다.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당시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도망치듯 떠나야했던 놈이 어느새 부잣집 아들로 변했다는 점으로, 그의 아버지는 재빨리 재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다시만난 얼마 후 그의 집에 놀러갔을 때 에도, 나는 양말바람으로 반가워하시던 희창이 어머님보다 소위 강남에서 내노라하는 백여 평 가깝다는 으리으리 한 빌라에 놀라워했다.게다가 입학 선물이라며 웬만한중형승용차 값과 맞먹는다는 스포츠카, 핸드폰...... 녀석 은 말로만 듣던 오렌지족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담배 연기를 내뿜다 말고, 희창이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흐흐흐,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넌 내가 외박을 했다는데 누구랑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뻔하지, 뭐.계집애랑 잤겠지." 실제로 나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일주일에도 수십 만원의 용돈을 끌어다 쓰는 그의주변에는 항상 여러 여자들이 득시글했고, 개중에는 속칭 그렇고 그런 - 나는 흔히 걸레라고 칭한다 - 계집애들이 있는 걸 알고 있으 니까. "어쭈, 진짜 안 궁금해?" 녀석은 시큰둥한 내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의미심장한 척 하고 있었다.하지만 난 애써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 았다.그래봤자, 이 녀석만 좋은 거 아닌가? 다리털 시커먼 놈치고 이런 자랑 싫어하는 놈 어디 있을까. "왜...... 숫처녀라도 건드린 거야?" "에헤, 요새 그런 천연기념물이 어딨어? 난 그런 순수를 가장한 멍청함에는 관심 없다." "그럼 나이트 가서 부킹 한 번에 홀인원이라도 했나 보구나.아니면......지난주에 헌팅했다는 그 날라리 재수 생 여자애들 꼬셨든지." 그는 손가락을 하나를 들어, 영화배우처럼 좌우로 까닥거려 보였다.뭘까.절대 여자 없이는외박을 하지 않 는 놈.그렇다고 어제 내가 모르는 술자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만약 술이 취해 차를 몰 수 없었다면 여관방 보다 이곳으로 기어 들어왔을 녀석이라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다. "큭큭...... 창희 니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을 걸?말이야, 이건...... 우리 과 내의 비리거든." 우리 과?은근히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다.나는 대번에 우리과에서 소위 뻔하고 뻔한 여자애들 이름을 몇 떠 올리며 희창이를 쳐다보았다.그렇지만 녀석은 그런 내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어림없다하는 표정으로 싱글 거리고 있었다.그렇지.'비리'라고 했었지.하긴 그런 계집애들이라면 비리랄 것도 없겠지. "생각해 봐, 웬만하지 않으면 나도 비리라고 할 턱이 없잖아." 비리라는 단어에 유달리 강조를 두는 녀석이었다.표정이 퍽 재미나다는 투다. "그게 말야...... 우리가 전혀 몰랐던 여자에 관한 얘기거든.절대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절대 그럴 리 없는?나도 모르게 녀석의 얘기에 빨려들고 있었다. "왜......? 누구 얘기하는 거야?" 하지만 대답 대신 녀석은 싱글거리기만 했다.내 궁금증은 그렇게 금세 간파당하고 말았다. "야야, 궁금하지? 궁금하면 뭐 좀 먹자.나 배고파.먹으면서 얘기해 줄게." 아닌게 아니라 시간이 거의 점심때에 가까워져 있었다.바닥에 라면봉지가 굴러다니는 것을 벌써 눈치챈 놈이 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현관으로 나가 버너 위에냄비를 올려놨다.녀석은 계속 뭐가 좋은지, 킥킥킥, 방구 석에서 혼자 키득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앉은뱅이 상위에 라면냄비를 올려놓자마자, 금방 후루룩거리기시작하는 녀석.은근히 참을성이 사라 진 나는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백기를 들어 보였다. "그래...... 누군데?" "짜식, 되게 급하네...... 이것 좀 먹자." 이게 사람 감질나게 만드네...... 내가 젓가락을 탁 놓으려하자꺼어억, 트림까지 해댄다.이어 냄비째 들고 국 물을 들이켜던 희창이는 마침내 지나가는 말투로 뭐라 중얼거렸다. "응?누구?" 재촉하는 내 말이 귀찮다는 듯, 라면 냄비도 내리지 않고 그는 다시 뇌까렸다. "선영...... 박선영." 순간 내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박선영?아니, 박선영!아니다,선영이 누나?내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본 녀석은 그런 내가 우스운 듯 고개를 숙이고 또 낄낄거리기시작했다.이게 무슨 소린가?선영이 누나라면, 재수까지 해서 우리보다 두 살이나 많은 선배인데...... "선영이 선배 말이야, 박선영 선배." 젓가락에 쥔 라면이 불어터지는 데도,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건 정말 비리라 할 만했다. "너, 너 그럼...... 선영이 누나, 아니 선배랑 같이 잤단 말이야?어제?" "그래, 임마.선영 선배, 흐흣, 그것뿐인 줄 알어?그 여자의 비리가......"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 그래서...... 얼른 얘기해 봐, 짜샤." "어쭈, 짜식 좀 전만 해도 샌님처럼 굴더니, 푸하하, 너도 별수 없구나." 그 누나가...... 그 누나가 이 녀석과?선영이 누나, 뽀얀 얼굴, 작지 않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수줍은 눈웃음이 매력적인 선배.결코 어느 한 곳 희창이가 상상하는 그렇고그런 면은 없는 여자였다.과 사람들 모 두의 누나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부담 없고, 항상 밝은 성격에 후배들 고민 따위도 잘 들어죽는 그런 타입의 여자. "비, 비리라니?" "비리?흠, 비리는 비리지...... 그것도 엄청난 비리 두 가지." "자세하게 말해 봐, 새꺄." 나는 안달이 나서, 희창이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학기마다 나오는 성적 장학금도 꼬박 꼬박 받을 정도로 열심히 생활하며,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든인기가 많았다 - 단 하난 술을 잘 못마시는 것만 뺀다면.그런데 이런 망나니 희창이와 같이 잠을 자고, 그것도 모자라 비리까지 드러냈다? "이짱 너 설마......" 인정하기 힘든 일이지만, 첫 번째 드는생각은 진짜 희창이가 선영이 누나와잤느냐 하는 것이었다.솔직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녀석과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그 모범생누나였다니, 무지막지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먹었냐, 그 말이군.얌마, 넌 그런 것만 떠오르냐?" 적반하장이었다.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또 평소 제놈 행동거지로 보아 충분히 그런 상상을 하게 해놓고도 말 이다. "그, 그럼 그 비리란 게 도대체 뭐야?" 난 어느새 젓가락까지 놓고 녀석에게 질문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흐흠, 그건...... 우선 대충 두 가지 얘기로 나눌 수 있어.첫째는 같이자보지 않아도 아는 것, 그리고 둘째는 같이 자본 남자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것." 같이 자본 놈만 알 수 있는 것?이건 또 무슨 얘긴가?내 호기심은 점점 증폭되어 입술이 마를 정도였고, 희 창이는 그런 나를 놀리듯 바라보았다. "뭐부터 얘기해 줄까?그냥 알 수 있는 비리?아님 같이 자고나면 알 수 있는 비리?" "야 너 그럼 정말...... 선영이 누나를......? 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실직고해 봐." 무엇보다 신경이 가는 건 그 누나의 비리가 아니었다.지금껏착하디 착하게만 알고 있던 선배, 그녀가 과연 이런 플레이보이 녀석과 놀아났단 말인가. "좋아.선영이 선배...... 술 못 마시는 것 너도 알지?" 맞는 얘기다.그녀는 내가 알기론 생맥주 500cc에도 얼굴이 발그스레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고, 1000cc를 넘는 경우에는 거의 치사랑이 되어 비틀거리니까.그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우리 과 전체가 아는 사실이었다.역시 그랬구나, 이 놈이 술을 먹인 거였어.있을 법한 일이다. "너, 그 누나한테 술 먹인 거지?그치?" "내가? 헤헤,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야.어제 같이 술을 마시긴 했어도, 내가 먹인 건 아냐.난 어제 맥주 한 잔도 채 못 마셨는 걸." "그럼 누가 먹인 거야?" "누가 먹이긴.오해하지 마.선영 선배, 그 여자가 직접 마신거니까." 직접 마셨다? 그럴 리가? "너 그 여자, 한동안 학교에서 안 보였던 건 알아?" 그런가...... 그런 것 같다.워낙 두문불출하는 이 녀석보다는 내가 더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학년이 다르 기는 하지만, 개강을 하고 요 근래 일주일 전후로 그녀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제 선배들이랑 당구 치고, 집에 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리더라고, 조교형이었어.난 웬일인가 했지.창희 너 처럼 모범생도 아니니 별반 날 찾을 일이 없는 형이잖아.그런데 가보니까 호프집에 두 사람이 있더라고.조교 형이랑 선영이 선배.근데 뭔지 몰라도 되게 심각한 얘길 했던 모양이야.나 오기 전에도 꽤 마신 모양인지 조 교형도 얼굴이 벌겋고...... 선영 선배도 내가 오고 나서만도 오백을 두 잔이나 더마시더라고.그것도 거의 원샷 으로 말이야." "조, 조교형이랑 그 누나만?" "그래.처음에 난 여기 잘못 온 거 아닌가 했어.조교형도 별 말 없고, 그저 가끔 말소리가 꼬인 선영 선배랑 뭐라고 얘기하는 것 같긴 하던데......그냥 앉아있는 게 뭐하니까 나한테도 술을 주기는 했지만,이거 뭐 왕따 당하는 것 같아서 영 내키지 않던 자리였거든." 슬슬 이야기의 초입에 들어서는 희창이 놈.다른 때라면 또 지 재미본 자랑이라고 타박을 할 텐데, 지금 나는 쫑긋하게 귀를 세우고 그의 입만 쳐다봤다. "그 때가 열 한 시가 다 돼가는 시간인데, 그러고 얼마 안 있으니 기어이 차 끊길 시간이 돼버렸지 않겠냐.그 때서야 조교형이 부탁하는 거야.내가 차가 있으니, 그리고 집도얼추 비슷한 방향이니까 선영 선배 좀 태워다 주라구.즉 이미 그 전에 선영 선배는 엄청 취해 있었던 거야.그러니까함부로 보낼 수가 없어서 날 부른 거 였지.택시비가 있기는 해도.그래...... 난 뭐 그리 큰일도 아니겠다 싶었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나 봐.생각해 봐. 내 앞에서만도 생맥주 천을 더 마셨는데, 그 시간까지 합치면 얼마겠어?" 그제서야 감이 잡히긴 했지만, 여전히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믿고 맡긴조교형이더라도, 어쩌면 고양 이에게 생선을 맡긴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달라, 호프집에서 계산 끝내고 나올때부터 선영이 선배,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구. 그러니 아무리 택시라도 집에 갈 수가 없잖아.난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간신히조교형이랑 부축해서 호프집 밖 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 형은 방향도 틀린 데다가, 내 차는 학교 안에 있으니 어쩌겠냐.일단 그 형은 막차 놓 치기 전에 잤지." "그, 그래서 임마, 그 누나 데리고 술 취한 김에...... 그게 비리란 거야?" "에헤, 그건 아니지.왜 그리 급하냐?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랍시고 날불렀는데, 내가 얼씨구나 그랬을 것 같냐?" 그럼 그 비리라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녀석이 이렇게까지이야기하는 걸로 봐선 계속 긴가민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차도 끊긴 시간에 술 취한 선배누나?그것도 외모로는 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게다가 단 둘이라면 나라도...... 거의 그려지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단 카페로 들어갔어.혀가 꼬여서 집이 어딘지 말도 잘 못하는데, 일단 커피 한 잔 마 시면 깰 거라구 생각했거든. 정말 엄청 마신 모양이야.한 이삼천 이상은 때렸나 보더라구.근데웃기게 된 게 뭐냐면...... 아주 점점 더 맛이 가는 것 아니겠냐.글세 카페 의자에서, 구두를 막 벗는거 있지.황당해서 누나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글세, 뭐라는 줄알아?큭큭, 자기는 집에서 신발 벗고잔다나?집에 왔으니까 신발 벗고 잘 거라구, 나중엔 안 벗겨지니까 나더러벗겨달래.푸하하, 그래놓고 구두를 벗더니 소파위에 쪼그리고 누워 그냥 자기 시작하는 거야.그것도...... 치마를 입은 주제에." 거기까지 말을 마친 희창이가 갑자기 나를 향해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짱이야.내가 지금 무슨 얘기하는지 알지?" "뭐, 뭐 말야, 비리 얘기하는 거 아냐?" "어유, 이런 범생이.하기야 그러니까 장학금 받고 학교 들어 왔겠지만.얌마, 상상해 봐라.미니스커트 입은 여자가 신발도 벗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소파에 널브러졌는데?" 뭔가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는 찰나, 희창이가 문득 눈을 찡긋거려 보이며 말을 끊었다. "야, 근데...... 마실 물 좀 없냐? 목마르잖아." 미치겠군, 별 걸 다 찾네.얼른 방구석에 있던 주전자를 흔들어 보았지만, 마침끓여놓은 물은 한방울도 없었 다. "야야, 형님 목말라...... 짱이야, 물 없으면 맥주 좀 사와라, 맥주." 이 대목에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데...... 거꾸로 내가 목마른 입장이 되고 만 것이다.투덜대며, 나는 구멍가게로 달려가 생수와,맥주 두어 병, 그리고 과자 한 봉지를 냉큼 사왔다. "카하, 역시 니가 내 맘을 아는구나.그래 어제도 술 한잔 제대로 못 마시고고생만 했는데, 이런 얘기 술 한 잔 없이 털어놀 순 없지." "닥치고, 빨랑 얘기나 계속해,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종이컵에 따른 맥주를 시원스레 들이켠 희창이는 과자를 씹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뭐가 보이겠어?난 몰랐었지.애초엔그냥 구두라도 주워주려고 밑을 본 건데, 허 참, 미치겠더라구.있잖 아, 무릎께에 찰랑거리는 그런 치마.다리도 제대로 모으지 않은 자세에 가뜩이나 당겨 올려져서......" 야, 무슨 색이든?하마터면 이렇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띠잉, 순간 머리 속을 바늘로 찔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희창이의 말대로라면 - 서둘러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 어쨌든 나도 다리털 시커먼 남자 아닌가. 그광경이 충분히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괜히 열이 오른 나는 맥주를 병째 나발 불며 쏘아붙였다. "뭐, 뭐야, 짜샤, 그게 비리야?안 입고 다니기라도 하데?" "에이, 그럴 리야 없지, 아무튼 기다려 봐, 계속할게." 입에 침이 마르는 듯한 얘기가 희창이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정말 아슬아슬한 광경이었어.조금만 숙이면 훤히 다 보일 것 같은 게...... 하지만 꾹참고 고개를 들었지.거 기 더 있을 수 가 없겠더라구.카페 주인 아줌마까지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야.하기사, 웬말만한 계집애가 뻗 어서 구두까지 벗고 소파 위에 드러누워 버렸으니...... 도저히안 되겠더군.그래서 일단 억지로 일으켜 세웠지. 하지만 걷지도 못하고, 신발도 안 신겠다는 거야.정말 난감하드만." 으으...... 모를 일이다.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점차 녀석의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나는 연거푸 술잔을 들어올 리고 있엇다.무언가 묘하고도 야릇한 기분이 생기는 것 같았다.꼭 질투 같은...... "해서 무조건 업었지.하 참, 쪽팔려서...... 어쨌든 그렇게 학교에 차 세워놓은 데까지 와서 우선 옆자리에 앉혔 지.그 때까지도 선영 선배, 정신을 못 차리더라.참 나 정말...... 그 누나 그정도만 아녔어도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 안 그러나디?" 나는 드디어 이야기의 핵심이 나올까 조바심을 내며, 재촉을 해댔다. "있잖아.데리고...... 여관에 갈 줄은 몰랐다구." 크윽, 난 맥주를 코로 쏟아낼 뻔했다.이 녀석이...... 진짜 선영이 누나와 잤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얼굴로 후끈한 기운이 뻗쳐 왔다.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얘기란 말인가.그러나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의기양양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희창이 놈.나는 사실 확인을 위해서라도 다그쳐 묻고 싶었지만, 차마 나까지 파렴치한으로 몰리는 것 같아 속으로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어쨌든 그 과정도 만만치가 않아.대충 집이 강남인 건 아니까 무작정 학교밖으로 차 몰고 나왔던 건데...... 그런데 갑자기 이 여자, 그냥 막 내리겠다는 거야. 난 오바이트라도 쏠리나 보다 하고 얼른 차를 세웠지.그리고 차 문 열구 일으켜 세워줬더니, 되려 토하지는 않고 찬바람에 그냥 픽 쓰러져 버리는 거야.완전히 뿅 가버리더 라구...... 놀래서 다시 앉히고 깨웠지만 도통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 뻗어버리데. 그전까지는 대충 말귀라도 알아 듣던 여자가 완전히 기절한 것 같더라.혹시라도 깨어날까 기다렸다가 다시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이젠 아예 반 응조차 없는 거야."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래서, 정신을 잃은 틈에 이 놈이 -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너......너 이짱, 솔직히 얘기해.너 그냥 흔들고 깨우기만 한거야?맞아?" "응? 그게 무슨 얘기냐?" "그러니까 선영이 누나가 잠든 틈에...... 너 딴 짓 한 거 아냐?" "딴 짓이라니?" "어...... 그...... 혹시 필요 없는 부분에 손이 갔다거나, 아니면......" 순간 푸하핫, 녀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냐, 임마?" 윽, 난 그 때서야 내가 너무 오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보기좋게 한방 먹은 셈이었다. "아, 아니면 됐구......" "짜식, 보기엔 순 샌님 같은 게...... 완전 응큼맨이구나." "됐어, 임마!니가 하도 비리 비리 하니까 그런 거지....... 하, 하던 얘기나 계속해." 희창이 녀석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아마 그의 눈에는 내가 거의 정신을 차리지못할 정도로 달아 올라 보였을 것이다. - 그러더니 문득 녀석은 내 눈앞에 종이컵을 흔들어 보였다. "뭐...... 거, 건배하자구?" "웃기고 있네, 건배는 무슨 건배야.술 떨어졌잖아." 으윽, 완전히 녀석의 꾀임에 빠져들고 있었다.수억 깨질 판국이지만, 알고 보면 연신 들이킨 건 내 쪽이었다. 희창이는 벽만 보고 멀뚱멀뚱 휘파람을 불어댔다. "저기...... 내 바지에 지갑 있다." "됐어...... 새꺄, 대신 비리 얘기 다 안 털어놓으면 죽어!" 이번엔 아예 안주 삼을 과자까지 해서,댓 병을 사왔다.언뜻 시계를 보니수업시간까지 채 십분도 안 남은 시간이었다. "야아, 우리 장학생이 웬일이야?너 오늘 수업 빠질 거냐?" "지금 수업이 문제야?아직 그 비리 얘긴 듣지도 못했는데!" "히힛, 너도 별수 없는 사내놈이구나.하기야, 이런 흥미진진한 얘기에 침 안 삼킬 놈 없겠지만.어디까지 얘 기했더라...... 그래, 솔직히 슬쩍 건드려 보기는 했어.그거야 어쩔 수가 없었다구.정말이야.그러니까 그게...... 처음엔 어깨만 붙들고 흔들다가 슬쩍 가슴께까지 손이 내려갔던 건데......" 역시 이 놈이!...... 내가 따라준 맥주로 목을 축이며, 희창이는말을 이어갔지만 반대로 나는 입안의 침이 말라 갔다.녀석의 행동에 분개해야 마땅한데도, 왠지 모르게 귀가 모아졌던 것이다. "흠...... 잡히기는 하는데, 보기보다는 작은 편이 아니데......그런데 으하하, 그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알아? 갑자!" "왜, 왜?혹시......?" 혹시 이 녀석, 손이 그...... 그 안까지?혹시 노브라? - 하지만 내용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였다. "갑자기 선영 선배가 내 손을 붙잡는 거야!" "헉, 드, 들킨 거야?" 일순 긴장하는데, 씨익 웃는 그의 표정. "어쭈...... 너 아주 단단히 흥분했구나?킥킥" 자식이 놀리고 있었다.하기야, 이런 대목에서 흥분하지 않을 놈이 어디 있겠는가? "야, 허, 헛소리 말고, 빨랑 얘기나 해 봐." "푸힛, 좋아.그 땐 나도 그런 줄 알았어.들킨 줄 알고 엄청 놀랐지,이거완전 개망신 당하는 거 아냐, 식 은땀이 다 흐르더라니까...... 그런데 그게 아녔어.그러니까......선영 선배가 내 손을 꽉 잡더니 자기가슴에 막 비벼대는 거야.당황해서 내가 손을 빼려는 데도, 막 뿌리치지 못하게 잡고서." 아연 얼이 빠지고 말았다.자기 몸을 더듬던 남자 손을 더 세게 붙든다? 그, 그 얌전한 선영이 누나가?그 해답은 희창이의 이어진 말에서 나오고 있었다. "탁 까놓고, 으아, 난 이게 웬 횡재냐 싶었지.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선영 선배는 그 순간 헛소리를 하고 있 었던 거야.음, 뭐라더라?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여하간에 '형, 가지 마요...... 형, 형' 이러는 거 아니겠냐?" "그...... 그게 무슨 얘기야?" "뭐냐면,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아마 애인 아닌가 싶은데......그래서 내가 나 아녜요, 이랬 는데도 '형, 같이 있어요...... 가지 마, 형' 계속 이러더라구." "누, 누구였어, 그 이름이?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에이, 그건 몰라.누굴 부른 것 같기는 하지만, 혀가 꼬인 상태에다가 정신을 잃고 지껄이는 혼잣소리라 정확 히는 못 들었어.그제야 그날 술 마신 것도 아마 그 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데.하여간 눈감고 내 팔 뚝에 매달려서 한참을 그러더라구." 그랬구나.난 그제야 대충 머리를 굴려 사건을 파악할 수 있었다.그랬구나,남자 문제 땜에.그래서 그 누 나가 그렇게 마신 거로구나.선영이 누나...... 실연이라도 당한 걸까. 나도 모르게 목이 타 어느새 병맥주를 목 구멍으로 들이붓고 있었다. "비리라는 게...... 그거야?" "에이, 당연히 아니지.선배누나가 애인 있다더라, 이게 뭐 그런 수준일 것 같아?더 들어 봐." "사실 그 직전까지 나라고 딴 마음이 왜 안 들었겠냐.하지만 그렇게'누구형' '누구형' 찾는 여자한테는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지더라구.세상에 애인 놓고도 뻔히 다른 놈한테 다리 벌리는 계집애들도 많다지만, 이건 경우가 틀리잖아?옆에 있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토록 애타게 누군가를 찾는데......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지.그 냥 얌전히 손을 빼고 학교 앞으로 차를 돌렸어.그냥 여관방에서 재우려고." 어쨌든 한 고비가 넘어가 다행이긴 하지만, 여관방......이 대목이 중요하다.그렇게까지 생각했더라도 얼마든 지 그곳에서 딴짓을 벌일 수도 잇는 놈이란 걸 아니까.머쓱하기는 했지만, 그 비리라는 걸 떠올리니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너 설마...... 그 안에서 너랑 무슨 비리를 저질렀다, 그런 얘기야?" "왜 궁금해?그래, 그건 맞는 얘기야.그 비리는, 하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안 거구......또 하나는 그 여자 재 울 때에 안 거니까." "그럼 너, 너 같이 잔 거 맞아?" "뭐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일단 옷은 벗겼으니까." "뭐, 뭐야?저, 전부?" 말 없이 맥주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이다. "야, 얌마! 너 안 그러려고 했다며!" 난 들고 있던 맥주병을 거꾸로 잡는 시늉을 해보였다.그는 킬킬거리며 짐짓 피하는 척 했다. "새끼, 급하기는...... '전부'가 뭔데?뭐, 속옷?내가 방금 속옷까지 벗겼다던?" "그, 그러면 뭐야?" "아이구, 말 마라.너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했겠다.글쎄다...... 그건 니 상상에맡겨두고, 야, 그럼 자러 들어 왔는데 겉옷은 벗겨줘야 할 것 아냐, 그것도 치마차림인데." "너 정말...... 딴 짓 안 한 거 맞아?" "왜? 무슨 색 입었는지 물어보려고 그러냐?" 으윽, 그건 모르겠다.차마 물을 수는 없었지만 뭔가 찔리는 듯한 이 지랄 같은 기분은 뭘까. "선영 선배는 여관에 뉘어 놓았는데도 계속 그 형만 찾고 있었어.나중에는 옆에서 보기가 더 안쓰럽더군.처 음엔 그냥 뉘어 놓고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그렇고, 나중에는 오기랄까 뭐 그런 게 생겨 서 말야.난데없이 고생한 게 억울하기도 하고, 그 시간에 차몰고집에 가기도 그렇고 해서 나도 대충 옆에 누 워서 잠을 청했지.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어.선영 선배는그 때까지 못 깨어나더라구. 그래 일단은 기다렸지. 사연이나 알고 싶어서 말야." 녀석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묘하게도 우울해지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일견 부러움과질투심이 생겨나기도 했 다.그 '형'이란 남자는 누굴까.'비리'라는 건, 그 사람의 존재와 관련이 있는 걸까?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 려들었다.그렇게 복잡해진 나에게, 녀석이 꽤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창희야.아까 내가 두 가지 비리라고 했었지?하나는 같이 자봐야 알 수 있고, 또 하나는 굳이 같이 자지 않 아도 알 수 있다고.좋아, 지금부터 내가 그 얘기를 해주마.사실 그 두 가지 얘기는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일 수 도 있어.같이 자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도 결국 그 아침에 알게 된 거니까.뭐랄까,조금은 황당한 얘기 야.나도 그걸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으니 말야." 드디어 그 비리란 게 나오는 순간인가 - 나는 다시금 긴장했다.제발, 그 누나와 이 희창이 녀석 사이에 불미 스러운 관계만 없었기를...... 그녀의 내숭이었는지 몰라도, 그렇게 착해 보이는 선영이누나에 대한 환상 아닌 기 대가 깨지는 것을 나는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잠이 깨서 한 30분 정도 있으려니, 선영 선배가 잠에서 깨더군.그런데일어나자마자 묻더라구.내 얼 굴을 보더니 '희창아, 여기가 어디니?' 라고, 그래서 내가 학교 앞 여관이예요, 했지. 그런데 별로 안 놀라는 거야. '그렇구나......' 하면서.그러다가 그제야 자기가 옷을 벗고 있다는 걸 알았나 봐.내가 다시 입혀 놓지는 않았잖 아.근데 그 선배,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희창이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는 척하더니, '어머, 내가 또 이랬네,난 몰라' 하며 얼굴을 가리더라구.야, 짱이야.이 게 무슨 뜻이겠니?" "무, 무슨 뜻이냐니?" "어이구.역시 범생인 니가 알 턱이없지.이번 얘기를 들으면 알 거야. 그 선배 다음 말이 뭔지 모르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 정말 어떡해, 이게 몇 번째야' 이 소리였어! 야, 진짜 벙찌데.너,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냐?" 알 듯 말 듯한 내 표정.그러나 그의 입에서 연이어 튀어나온 얘기에 나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등신아, 잘 생각해 봐.그게 뭐겠니?선영 선배, 어제처럼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란 얘기잖아.홀랑 벗은 상태에서, 그것도 여관방이란 말에 별반 쇼크도 먹지않고, 거기에 뭐?내가 또 이랬네?벌써이게 몇 번째? 뻔하잖아!그 여자, 그런 일에 익숙한 여자란 말이야.여관방에서 외박까지하고, 게다가 멀쩡한 내 얼굴을 보 고도 하나 꺼리지도 않다니...... 야, 너 같으면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있겠어?인사불성이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웬 사내놈 얼굴을 보고도?" 이, 이럴수가 - 지금껏 마신 맥주가 한꺼번에 깨는 느낌이었다.이 녀석 얘기대로라면 그녀는 그런 게, 남자랑 외박한 게 처음이 아니라는 얘기? "그래, 그 얘기야.내 경험으로 봐선, 진짜 한두 번이 아닐 거야.그 선배, 분명 그렇고 그런 여자가 틀림없어. 그게 바로 비리가 아니고 뭐겠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반박할 논리도 희박했지만, 우선 내 머리통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 다.선영이 누나가 설마...... 선영이 누나가 설마 그렇다니!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하기야 내게 그런 경험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렵다.애써 입맛을 다시며 부정의 논리를 편다 해도 말이 다. "그,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그 누나...... 그런 소문은 하,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짜랴, 그러니까 비리란 거지.개나 소나 다 알면 그게 어디 비리냐?하여튼 술만 좀 많이 마시면 그렇게 되 는게 틀림없어.그래서 일부러 술자리를 피하는 건지도 모르고. 누가 알아.다 아는 사실인데 우리만 몰랐던 건 지?" 너무 어이가 없어 멍청해질 지경이었다. 씁슬하기는 희창이도 마찬가지인지 담배를 물어길게 내뿜었다. 그 연기와 함께 이어진 희창이의 말은 이러했다.뭔가 좀 껄끄러워서 선영선배를 위로해주려 했으나 다행히 울지는 않더라.그래서 내친 김에 밤새도록 찾던 그 '형'에 대해 물어봤더니, 한참 만에야대답을 해줬는데, 어제 술 마 신 조교형과 동기인 선배라더라.지금은 졸업해서 직장 다니고있다는데, 분위기상 아무래도 선영 선배가 차인 것 같더라. "어쨌든, 그 얘기가 끝나자갑자기 후닥닥 나가겠다데.아직새벽인데 말이야. 그러면서 그러는 거야.제발 비밀을 지켜 달라, 자기랑 밤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나는 녀석의 파렴치함에 분노가 끓었다.그 약속은 몇 시간도 안 돼 깨진 셈이 아닌가.그러나 곧 참아야 했 다.그게 나였다면 어쨌을 것인가 - 에 생각이 미치니,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후, 그래도 그 선배 생각이 났나 보지?새까만 후배, 그것도 연하의 남자애랑 여관을 들락거린 셈이 됐으니 말이야. 그러니 그 선배한테도 차였을 거야.자세한 얘기는 피했지만, 방금 전 얘기처럼그 선배가 걸레라면 이 유는 뻔할 테니까.그래서 그냥 먼저 가라고 보내고,그 여관에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새우잠 자느라고잠이 모자랐거든." 녀석의 하룻밤의 얘기는 이렇게 끝나는 모양이다.창 밖은 어느새 뉘엿뉘엿 늦은 오후의햇살을 비추고 있었 다.그제야 희창이는 생각이 난 듯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예, 저예요 응, 어머니, 아버지는요?예...... 아, 창희 자취방이요, 어제도 여기 있었어요.예, 오늘까지만 자고 갈게요.내일 토요일인데 뭐." 내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늘 써먹는 레퍼토리.그의 부모님도 비교적 모범생 평가를 받아온 내 핑계를 대면 그 다지 의심 안 하시는 눈치였지만, 그러나 오늘은 왠지 녀석에게 한 마디 할 기분이 나지않았다.착잡했다.무 언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억지로 알게 된 느낌이었다. 맥주병들도 거의 비어가고 있었다.빈 병을 치우다가 불쑥 희창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야, 짱이야, 너도 해 봐.생각 없냐?" "응?뭘?" "그 여자, 선영이 선배.그냥 술만 먹이면 돼." "무슨 소리야?" "난 어쩔 수 없었지만, 넌 선영 선배랑 친하잖아.실험해 보라구.정 뭣하면 내가 술값도 댈 테니까, 응? 한번 꼬셔보란 말야.그여자 내가 보기엔 거쳐간 남자가 한두 사람이 아닐 것 같은데...... 특히넌 아직 그 방면에 샌 냄이잖아." "이, 이 자식이 미쳤냐!내가 너랑 똑같은 줄 알아?" 모를 일이다.화를 내며 버럭 소리는질렀지만 왠지 묘한 유혹이 생기고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 나랑 제법 가까운 편인 선영이 누나, 그녀와 나 사이에도 그런 기회가 올까?같이 잘 기회가...... 그런데 또 하나 걸리는 것 이 있었다. "야, 이짱.근데 하나가 빠졌잖아?" "어?뭐가?" "두 가지 비리라고 했잖아,짜식아, 하나는 같이 자지 않아도 아는 비리, 두 번째는 같이 자보면 아는 비리." "그런데......?" "방금 얘기한 건 다른 뒷조사로도 알 수 있는 건데, 같이 자봐야 아는 건 또 뭐야?그......" "아, 그거.푸힛, 짜샤, 방금 내가 뭐랬냐?그러니까 그 선배 따먹어 보라구.그리고 직접 알아내 봐, 별로 어 려운 일도 아니잖아?"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부추기는 희창이.끝내 가르쳐 주지 않을 모양인지 그는빙글거리는 웃음을 멈추 지 않고 있었다.뭘까, 선영이 누나와 '함께 자보면' 알 수 있다는 그 비리는 - 아니, 애초부터 이 녀석은 여태껏 말한 대로 그저 옷만 벗겨주고 곱게 잠든 걸까.그 선배란 사람은 누굴까?과연 정말 선영이 누나에게 그런 상 상도 못할 비리가 있어 그 선배인지 뭔지와도 사연이 얽히게 된 걸까? 수많은 의문부호가 연이어 꼬리를 물고 있었다.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녀에 대해서만큼은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이다.내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그녀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이유가. 훔쳐보기 그녀는 방문을 열려다가 거의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문가 바로 옆에 앉았던 나는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부축했 다. "어, 괘, 괜찮아요, 선배?" "으응 약간...... 약간 어지러워." 이해하기 힘들었다.처음 대학생이 되어, 아니 이런 MT도 처음이지만,도대체 이럴 바엔 그냥 학교 근처 술 집을 전세 내어 밤새 마시는 것과무엇이 틀리단 말인가.어설픈 게임을 하건조별 시간을 갖건, 이 민박집에 들어온 이래 행해진 모든 것은 술과 관련되어 있었다.벌칙도 술, 상품도 술. 선영이 누나, 그녀를 처음으로 가깝게 대한 것은과 총MT에서였다.학생회실 문 앞에 붙인조별 명단을 처 음 봤을 때까지도, 내가 그녀에 대해알고 있던 사실은 그녀의 이름과 얼굴분이었다.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그녀, 우리는 그렇게 한 조가 되었고 같은 조라는 이유로 식사며 오락시간이며 술자리까지계속 함께 하고 있었 다.조별행동 - 인원이 조금 많은편인 우리 과는 그렇게 술자리를 시작했고,둘러앉아 자연스레 시작된 것은 시끌벅적한 게임에 뒤따르는 술 먹이기였다. "밖에 나가시려구요?" 간신히 초점을 맞춘 시선으로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겨우 막걸리 서너 잔도 구경하지 못한 것 같은데, 선영이 누나는 벌써 비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주변을 둘러봤지만 왁자한 소음 만 들려올 뿐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난 그녀의 팔을 붙들어 팔짱을 끼고는 민박집 마당으로 나섰다.이른봄인지라 근처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뜻하게 이마에 다가왔다. "찬바람을 좀 쐬면 괜찮을 거예요." 강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녀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주춤거렸다. "미안 나 잠깐......" "조심하세요!" "아니, 나 괜찮아...... 잠깐만." 다리가 풀렸을 거라 생각해서, 계속 쥐고있던 팔을 놓지 않은 것은 내작은 실수였다.멋쩍어진 손에 힘을 풀자 선영이 누나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화장실 방향으로 향했다.그러나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채 그녀의 걸음 은 흐트러졌고, 나는 후닥닥 달려가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아, 나...... 괜찮은데......" "예, 알았어요.제가 같이 갈게요." 약간은 민망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따라, 결국 나는 페인트로 '화장실'이라 대충 그려진 민박집 구석 앞에서 기 다려야만 했다.이런 곳의 화장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으니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더군다나 남녀 구분도 잘 안 된 곳이라 행여 그녀가 토하거나 쓰러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정말 술이 약한 그녀였다. 밤이 깊어 민박 집 방안들은 한창 열이 오른 목소리만 들끓고 있을 뿐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나는 담배를 꺼 내 물었다. 짐작대로 선영이 누나는 한참이 지나 밖으로 나왔다. 언뜻별 다른 불상사가 있었나 살펴봤지만, 얼굴이 붉어 진 걸 빼고는 큰 탈이 없어 보였다.그래도 아직 취기가 가셨을 리는 만무했다. "후 미안......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저도 바람 좀 쐬고 싶었는데요 뭘, 도로...... 안에 들어가실 거예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만히 가로젓는 선영이 누나.덩달아 나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그녀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상황, 안에서 혹 우리를 찾을지도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시끌벅적한 그곳보다는 한적한강변이 마음 편할 성싶었다.그래서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했던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나란히 강가로 발을 옮기기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레 다시 선영이 누나의 팔을 붙들어 주어야 했다.아직 그녀의 다리에 힘이 없다는 것은 걸음걸이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변에 다다르자 맑은 공기가 얼굴 가득 다가왔다.등 뒤편으로 늘어선 민박집 불빛들이 희미하게 어른거렸지 만, 어두운 강변의 모래사장 위로는 별들이 펼쳐져 있었고강물은 발치께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초저녁에 피워 놓았던 모닥불 근처에는 아직도 주홍색 불씨가 반짝이며 살아 있었다.멀리 산 그림자를 보니 그런대로 기 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 앉으실래요?" 그녀가 힘들 것 같아, 우선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마침 모닥불을 피웠던 장소 근처에 커다란 나무둥치 같은 것이 가로 놓여있었는데, 그곳으로 데리고 자가 그녀는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래바닥을 다듬자 선영이 누나는 그곳에 가만히 엉덩이를 대고 쓰러져 있는 통나무에 등을 기댔다. "속 많이 안 좋으세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선영이 누나는 의외로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이기는 했지만, 뭔가 그 말 외엔 떠오르는 것이 없는 나는 멀거니 달빛을 반사하는 강쪽만 내려다보았다.미안했는지, 한동안 어색한 침 묵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대답을 했다. "미안해 들어가서 애들하고 놀아도 되는데......" "에이, 아녜요.거기...... 별로 우리 찾을 만한 사람도 없는 걸요." "그래도...... 신입생이 빠지면 별로 안 좋은데." 자기보다 내게 신경을 써주고 있는 선영이 누나.하지만 이런 장소에 여자 혼자 놔둘 내가 아니다. "왜요?저 여기 있으면 불편해요, 선영이 누나?" 아마 내 기억으론 그때 처음 그녀를 누나라고 호칭했던 것 같다.그녀는 다시 작게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 다. "아니 무서울 거야." 하핫,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따라서 웃음소리를 내는 그녀, "아, 바보 같아.그런 게임도 잘 못하구......" 그랬다.우리 조 뿐만이 아니라, 각 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아까만 해도 순발력 게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 다.처음에는 벌칙이란 게 구령에 맞춰 엎어놓고 꼬집거나 등판 두들기기가 고작이었지만,나중에는 벌주, 그러 니까 사발에 막걸리 같은 술을 듬뿍부어 원샷으로 마시기가 벌칙으로 통용되고있었으니...... 원래가 그렇지만, 그런 게임에는 늘 걸리는 사람이 따로 있기 마련.그래서 그녀는 서너 번을 연거푸 걸려야 했다. "에이, 술 때문에 그렇죠 뭐." "맞아, 나 ...... 술 참 못 마시거든.맥주건, 소주건......" 그런 것 같았다.그 정도 양이라면 다른 사람에겐 입가심 정도밖에 안 된다.멋쩍은 듯, 선영이 누나는 발 밑 의 모래를 신발 끝으로 가만히 다졌다.그 때 어디선가 휘익 휙,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마 우리 두 사람이 밀월 데이트라도 하는 것으로 보였을까? 그 덕분에 그녀와 나는 다시 어색한 분위기로 빠져들었다.난 짐짓 그 희롱하는 휘파람 소리를 찾아내기라도 할 양 휘휘 주변을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다. "창희냐?" 그런데 의외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두 개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희창이의 얼굴이 흐릿한 백열전구 가로등 아래에 드러난 것은 채 서너 걸음 밖에서였다. "뭐해?어......" 그는 가까이에서 선영이 누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거려 인사를 대신했다. "으...... 응, 그냥...... 너야말로 뭐하고 있냐, 밖에서?" 녀석의 등뒤로 따라오던 조그만 그림자가 몇 걸음 떨어져 멈추었다. "뭐 그냥, 바람 좀 쐬러 나왔지." 역시 뺀질거리는 데는 도가 튼 녀석이었다.MT를 와서까지다른 짓 하고 있으니 말이다.난 그의 등뒤에 선 그림자를 보며 눈짓으로 누군지를 물었다. "응, 예지." 그럼 그렇지.예지라....... 우리 신입생 동기 중에서가장 눈에 띄는 여자아이 중 하나였다.예쁘장한얼굴에 몸집이 자그마해서, 전체적인 인상이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애.짜식, 학기초부터 은근히 붙어다니더니 여기 와 서도 선배들의 눈을 피해 분위기를 잡는 모양이었다.희창이는 씨익 웃어 보이며 눈치를 주었다. 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우리가 뭐 녀석처럼몰래 기분을 내는 것도 아니니까.희창 이의 등뒤에서 나지막이 희창이를 부르는 예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눈을 찡끗거려 보이고, 선영이 누 나에게도 다시 고개를 꾸벅거려 보였다.하여간 예쁜 여자와 붙어있는 재주 하나는 부러운 놈이다. 민박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인데,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돌아보는 예지의 시선과 마주쳤다.내 게 들켰다고 생각해서였는지, 그 애는 멀어지며 선영이 누나와 나를 힐끔거렸다. "술이요...... 마시면 는데요." 다시 시작된 침묵이 싫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으응, 그런데 난 안 그래.후후......" 선영이 누나도 왠지 서먹했던 모양이다.그런데 그녀가 약간 몸을 떨었다. 난 입고 있던 긴 팔 남방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다리 쪽이 시렸는지, 그녀는 무릎을 감싸 안은 위로 그 옷을 덮었다. "고마워 안에 내 옷이 있는데...... 넌 안 추워?" "예.전 괜찮아요." 왠지 옷을 가지러 민박집으로 돌아가기가싫었다.입고 있는 것은반소매 티뿐이었지만, 그냥 견뎌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걔 이름이...... 너랑 비슷하지?" "예 희창이라고, 초등학교랑 중학교 동기동창이예요." "정말? 좋겠다.둘이 친하겠구나." "예.불알친구죠." 순간 머쓱해졌다.'불알'이란 말 때문에 다시 어색할 뻔했는데, 마침 그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생각난다.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엔가 있잖아.알퐁스 도데 소설." <별>일나 단편소설을 말하는 게다.당연히 기억하는 소설이다.그런데지금 이 자리에 그 소설이 떠오르다 니.나만의 착각인지 몰라도 묘하게 비슷한분위기였다.양치기 목동이 지체 높은아가씨와 단둘이서 나란히 하룻밤을 지새우는...... 깊은 산속, 그리고 밤하늘의 별. "여긴 참, 별들이 많네.집에서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문득 옆에서 쳐다보니 그녀의 긴 속눈썹이 머리 위 밤하늘 처럼 까맣게 느껴졌다.꼭, 밤하늘이 눈으로 이어진 것처럼. 어쩐 일인지 가슴 한 구석이 물컹거렸다.꽤 예쁘장한 선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해본 것은 처음이란걸 깨달았던 것이다.진짜 알퐁스도데의 그 <별>이란 소설같이......마냥 묘해진 기분이라 주머니 를 더듬어 구겨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올려다보니 진짜 수많은 별들이 우리 머리 위로 큰 원을 그리며 도 는 것 같았다. "정말 별들이......" 모르겠다.아무 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꺼낸 말 - 그러나 나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순간 내 한쪽 어깨에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던 것이다.돌아보니 그녀의 머리였다.저 밤하늘처럼 검은 머릿결이, 가만히 숙여 져 나에게 기대고 있었다.역시 그 술기운 탓인가 보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침이 새벽의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두어 시간후면 먼동이 틀 시간이었다.어느새 민박집 에서 들려오던 소음들도 차츰 잦아들어 우리 주변은 점점 어둠 속으로 파묻혀 가고있었다난 그녀를 깨워 민박 집으로 데려가야 할지 어째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이런 곳에서 잠들다니...... 하지만 이내그 생각을 접고 말았 다.도저히 조용히 들려오는 어깨 아래의 이 쌔근거림을 방해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자꾸 그녀의 맨등만이 신경 쓰였다. 다리쪽은 덮었다지만, 그녀의 어깨는 입고 있는옷 외에는 없었다. 또 잠시 동안 망설임이 찾아왔다. 이윽고 내 한쪽 팔이 뻗어졌다.그녀의 어깨뿐아니라 내 팔뚝도 따뜻해진 느낌이었다.그렇게 선영이 누나의 어깨를 안은 채, 난 한숨도 자지 않았다.그녀의 어깨를 안은 팔도 밤새 그대로 있었다. 하늘 가장자리가 보라 색으로 물들 때까지, 나는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진 그녀의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이것이 그 아름답던 봄녘 아침노을처럼, 선영이 누나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내 첫 번째 기억이다. "창희야!" 월요일 등교길의 학생회실 문 앞이었다. "안녕? 주말 잘 보냈어?" 아마, 누군가가 그 상황을 보았다면 내가상당히 당황해 하고 있음을 단번에 눈치챘을것이다.이 목소리 - 복도에서 나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였던 것이다.지난 금요일 희창이 녀석한테 선영이 누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정말 그녀가, 그렇고 그런 장소에서 그렇고 그런 밤을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닐까?그 누나가...... 아아, 정말 선영이 누나가 그랬단 말인가?그날 MT 이후 내게는 다감한 인상을 주었던 선영이 누나.그녀의 무릎 위 10센티 이상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그녀에게 그런 비리가 있다는 건 도 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잠들어 있는 녀석(희창이는 그날 내방에서자고 갔다)을 깨워 다그쳐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불안했기 때문이다.더 엄청난 '비리'라는 것과 맞닥뜨릴지도 모 른다는 불안함은 젖혀 두고서라도 - 희창이게게, 선영이 누나에 대한비리를 알아냈다는 이 놈에게, 뭔가 내 속 마음을 들킬 것 같은 불안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지금 온 거야?어디가? 학생회실?" "어...... 예, 예." 어리벙벙한 내 대답에 그녀는 정말 반갑다는 표정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수업 없어?잘 됐다.아까 가보니까 일찍이라 학회실에 아무도 없어서 심심했는데." 선영이 누나 - 바로 엊그제만 해도 희창이와하룻밤을 보냈다는 그녀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나를 보고 밝게 알은 체를 했다.그것도상큼한 목소리와 거기에 걸맞는 분위기로 말이다. 물론 그녀가 알 턱이야 없지만, 나는 당장에 깡그리 거부 할 수있을 것 같았다.이런 예쁘고 순수한 얼굴의선배에게 비리가 있다니, 이 누나가 잠자리를 같이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그건 정말 잘못 아는 것일 게다.이렇게 한껏 발랄한 표 정을 지을 수 있는 여자가 절대 그럴 리 없다. "뭘 그렇게 놀라니? 정신없어 보이네?" "아, 아니에요 그냥......" 그녀는 오늘도 짧은 캐쥬얼치마에 옅은 화장을 한 맵시있는 모습이었다.난 텅 빈 학생회실 구석 의자에 찌그 러지듯 앉아,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기위해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을한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짧은치마 아래로 매끄럽게 뻗은 허벅지와 종아리가 대번 눈 안에들어왔다.예쁘다.너무 마르지도 않고 적당 히 통통한 그녀의 몸매는, 역시 저런 차림이 가장 잘 어울려 보였다. "아, 이것 오늘까지 내는 거잖아?" 멍하니...... 가방조차 내려놓지 않고 있던 나는 그녀의 혼잣말에 화들짝 놀라시선을 거두었다.뚫어져라 그녀 의 다리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선영이 누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말고 내 쪽 건너편 의자를 찾아 앉더니뭔가를 꺼내서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아마도 무슨 과제물을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나는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만약에 정 말 만약에 희창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쩜 저렇게 태연할수 있을까?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얼굴을 찬찬히 살폈다.무슨 증거라도 찾아낼 듯이. 그 때 창밖에서 한줄기 바람이 들어와 학생회실 창가의 커튼을 흩날렸다.그런데 - 뭔가 떠오르는것이 있었 다.커튼, 하얀 커튼자락. 베일...... 아니겠지, 나는 그 커튼자락을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돼.나는 더욱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얼굴의 단편적인 부분만 보았을 뿐 아니냐. 설마...... 내가 몽정한 상대가 저 선영이 누나라고?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그건 금요일 아침의 일인걸.희창이의 야 릇한 얘기 탓에 그런 느낌이 드는 걸거야. 강하게 부정했다.거북한 기분이었다.꿈속의 성적대상과 마주해앉다니, 상상하기도 힘들다. 차라리 수업교 재라도 꺼내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성싶었다.그러지 않으면 자꾸 발가벗은 선영이 누나를 상상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정말 그랬다.지난 토요일 이래, 왠지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 탓일까, 무릎에 펼쳐놓았던 책이 순간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말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줍기 위해 밑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그리고 갑자기 -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빠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선영이 누나와 나 사이엔 커다란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아래는 운동장만큼이나 널찍하게 뚫려 있었다. 내가 숨이 막힌건, 다른 게 아니라그렇게 고개를 숙인 시야에 우연히 들어온한 광경 때문이었다.거기엔 한 여자의 다리가 있었던 것이다.짧은치마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은 선영이 누나의 다리 말이다. 서로 탁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각자가 허리 아래로는살필 수 없는 상황이었다.즉 내가 허리를 굽히면,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테이블에 가려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는말이다.하마터면 탁자 밑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그녀와 나 사이에아래쪽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일까,선영이 누나는 짧은치마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매끈한 스타킹이 감싸고 있는 쪽 뻗은 종아리, 그리고 무릎, 또 그 위로 이어진 풍만한...... 그 색다른 광경에 나 는 잠시 아찔하게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손만 뻗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거기에 한 여성의 치마 속 풍경이 바로 코앞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그것도 포개져 올린 발끝에 구두를 반쯤벗어 달랑 거리면서. 당황스러웠다.얼른 고개를 들어야 했지만 남자의 음흉한 심리 덕일까, 나는 수초 간을망설이고 있었다.연 방 목구멍으로는 마른침이 꼴깍거리는 데도, 섣불리 행동할 수가없었다.눈을 돌리기도 그렇다고 안 돌리기도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머리 속으로 복잡한 계산이 돌아갔다.이대로 후닥닥, 고개를 들면 누나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그렇 다고 눈이라도 감고 있어야 하나, 그럼 더 이상할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 했다.이렇게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어쩔것인가.소리 나지 않도록 심호흡을 해야했다. 고개를 들더라도 빨개진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노릇. 그런데 미처 예기치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건 선영이 누나의 치마 속이었다.테이블 위쪽으로 뭐라 혼 잣말이 들리더니, 이럴 수가......! 그녀가 꼰 다리를 풀어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말려 올라간 그 짧은치마 안, 허 연 다리 사이, 심연 - 아아, 그러나 그 때 고개를 들어야만 했었다.이렇게 비겁하게 그녀의 비밀스런 부분을 흠 치기나 하는 녀석이 아니란 걸, 나는 마땅히 증명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내가그원망스런 침묵의 순간에 머무르는 동안 결정적인 실수가벌어지고 말았으니, 작게 그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 것 같았고, 이어서 그녀의 고운 두손이 탁자 아래에 나타난 것이다. 곱게 무릎을 모으고, 치마를 끌어당겨 내린 그녀의 손.차분한 목소리로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저...... 창희야.......! 수정액 있니?" 그리고 쿠웅!급기야 학회실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나는 테이블 아래에 뒤통수를 부딪혀야 했다.거짓말이 아니라 그 회의용 탁자가 온통 들썩일 정도였다.어찌나 세게부딪쳤던지, 눈물마저 핑 도는 나의 시야에서 선 영이 누나의 뽀얀 무릎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어머머, 창희야, 괜찮아?" 창피함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저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갈 정도로 작은 미생물이 되어버렸으면 할 정도였다.그랬다, 그녀는 알아차렸으리라.그래서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건 것이고, 순간 의 기지였던 그녀의 목소리는 내게 내리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야야...... 아후......" 하지만 염치없게도, 나는 신음소리를 참을 수가없었다.모서리에 정통으로 부딪힌 것인지,뒤통수 한가운데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머리를 감싸쥐고 떼굴떼굴 구르기 직전, 그런데...... 간신히 허리를 펴고 욱신거리는 뒤통수에 손이 가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먼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아닌가. "어머, 어떡해, 혹이라도 나면......" 앉아있는 어깨 위로 들리는 선영이 누나의 목소리였다.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재빨리 내 곁으로 달 려와 마치 제 머리인 양 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많이 아파?왜 그렇게 놀래.난 그냥...... 수정액 있냐고 물어 본 건데, 푸훗." 선영이 누나는 아파하는 내 모습에 자기가 먼저 놀랐는지 진심어린 걱정을 해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 도 멍청한 내 행동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왠지 멋쩍어서 입술을깨물었다.예기치 못한 그녀의 행동이 내 민망 함을 희석시켜주기 위한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화장품 냄새일까, 향긋한 향기가 후끈거리는 아픔보다도 먼저 내 오감을 파고드는데 - 어라, 뭐하는 거예요, 누 나.그녀는 내 뒤통수를 붙들고 끌어안다시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후 괘, 괜찮아요......" "가만 있어 봐.너 모서리에 부딪힌 거 아냐?어디 봐, 피나나 봐줄게." 아이고, 아침에 머리를 깨끗이 감았기에 망정이지, 선영이 누나는내가 미안할 정도로 바싹 붙어서 내 머리통 을 안다시피 하고 있었다.뭐라고 그녀의 행동을 제지해야 할 것 같았다.죄를 지은 것은나였지, 그녀가 아니 지 않은가.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이렇게 말해주기 위해 슬쩍 고개를 빼고 돌리려던 찰나였다.그런데...... 이번에는 온 몸이 얼어붙어야 할 상황이 코앞에 맞닥뜨려졌다.또 한번 숨이 턱, 하고 막힐 뻔했다.내얼굴 앞에 바싹대어 진 것은, 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의 가슴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앞가슴이 얇은 옷자락으로 감싸인 채 내 얼굴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었다.거의 닿을락말락, 내가 코끝 만 찡그려도 닿을 거리였다.비록 직접 들이댄 것은 아니지만,난 충분히 그녀의 젖가슴에 안긴 것이나 다름없 이 느껴졌다.당혹스러워 엉겁결에 감은 눈 속에그려지는 모습.그것은 이런 향기였을까...... 아주 어릴적에, 어머니나 친누나의 가슴에서나 맡아보았을 냄새.성숙한 여자의 내음, 선영이 누나는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서 마치 젖먹이를 안은 듯한 포즈로 내 머리를 안고 있었다.나는 차 마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고개를움직이기는커녕 그녀의 젖가슴에 파묻혀 시선마저도 어디로갈지 몰라 헤매고 있었기에, 덩달아 말문도 막혀 버렸다. 이미 뒤통수의고통은 잊은 지 오래였다.아니, 졸지에 어질어질 한 혼수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떨궈진 내 시야엔, 좀전까지만 해도 그 속을 훤히 드러내주었던 누나의 감색 캐주얼 치맛자락이 하늘거 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뽀얀 무릎과 허벅지가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너무나 길게만 느껴 지는 순간,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다.깨고 싶지 않은 꿈. "으응, 겉보기로는 괜찮은 것 같다...... 그래도 많이 아프지?" 드디어 내 얼굴에서 멀어지는 선영 누나의 가슴, 붙잡아 끌어 안고 싶은 아쉬움이 먼저 닥쳤다. "후후, 그러니까 왜 그렇게 놀래, 졸기라도 했었니?" "예...... 아, 아니요.그, 그저 그냥......" 나는 귀밑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얼버무리는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느꼈던 나의흥분을 그대로 드 러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내게 본의 아닌 자극을 비치지 않는 그녀.결국 내 뒤통수가 희생되어 훔쳐보기 사건 의 어색함을 무마시켜준 셈이었다.그녀는 아직도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어주고 있었다. 물론, 아까의 민망 했던 일을 걸고 넘어갈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랐다, 얘.참, 수정액은 가지고 있니?" 있을 리가 없었다.교과서도 툭하면 빼먹고 오기 일쑤인데, 꼼꼼한 여학생들처럼 필통 따위를 챙길 리가 있겠 는가.어쨌든 나는 예의상으로라도, 또 후끈거리는 귀밑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가방을 열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 가 찾는 시늉을 했다. "어, 없는데요." "그래? 그럼 어떡하지?다음 시간인데......" 사다 드릴까요?매점은 건물 하나를 지나서야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또 내 미안함의 벌칙으로라도 당장 뛰어가 사다주고픈 심정이었다.그러나 그럴 수는없었으니, 채 그 말이 나오기도전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우르르 학회실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학회실은 금방 시끌벅적해졌다.멋쩍어져 외톨박이가 된내귓가에 선영이 누나와 다른 여학생들의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정액 있니?" "응, 여기." "다행이다, 여기 창희한테 없어서 걱정했는데." "왜?아까 그 여자애한테 빌리지 그랬어?" "응?누구?" "방금 전에 학회실 앞에 있던 여자애 말야, 셋이 같이 있던 거 아냐?" "아니, 여긴 창희랑 나밖에 없었는데?" "그래?아까 걔도 여기서 나오는 것 같던데...... 누구였더라?" "어쨌든 고마워, 이따가 줄게." 다행히도, 선영이 누나는 그들에게서 수정액을 구해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 어 내렸다.단 2,3분만 저 여학생들이 일찍 들이닥쳤더라면, 나는 그 황홀한 경험을 갖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아주 야릇한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었던 장면이었으니 말이다.그것은. 그러는 사이, 수업시간이 되었는지 그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썰물처럼 학회실을 빠져나갔다.하지 만 나는 덩그러니 혼자 학회실에 남아 한참 동안을 앉아 있었다. 나 역시 그 시간에 다른 수업이 있었지만, 왠 지 아직도 몽롱한 기분이 깨지 않는 것 같아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먹고 있었다. 그제야, 잠시 잊었던 뒤통수의 통증이 다시일어났다.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내머리 속에는 아픔 대신, 맞은편 의자 아래로 보이던 선영이 누나의 희끄무레한 영상이 각인이라도된 듯 맴돌고 있었다.또 하나, 향기 도 남아 있었다.바로 코앞으로 다가 왔던 그 젖가슴의 향기가. 멍해진 머리 속으로 지난 주 꿈속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가득히 파묻혔던 두개의 둥그런 젖무덤...... 혹 시...... 난 어렵사리 그 모습을 추측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내가 본 것은 선영이 누나의 맨가슴이 아니었다.몇 겹으로 가려졌을지도 모르는 옷 안이었다.무슨 디자이너도 아닌데, 그것으로 그녀의 모 습과 내 몽정 속의 기억을 매치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아아, 다시 한 번만 그 꿈속의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아니 직접 내 피부에 맞닿게 할 수 있다면 - 그런 불미스 러운 상상 속에 빠져 있다가, 나는 갑자기 무언가를 들킨 모양, 펄쩍 뛸 듯이 놀라고 말았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세게 쳤기 때문이다. "얌마!뭐하냐?수업 안 들어가?" 놀란 고개를 돌리니 바로 희창이 녀석이었다.어찌나 그 상상에푹 빠져 있었는지, 나는 녀석이 등뒤로 다가 올 때까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나는그제야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런, 이미수업이 시작된 지 십분 여가 지난 시각이었다. "응, 으응...... 너, 넌 왜?" "나야 차가 막혀서 늦었지.에이, 다음부턴 집에 두고 다니던가 해야지 갈수록 막혀서." 아마 강남 집에서 차를 몰고 온 것이리라.그렇지만 나는 또 뭔가.바로 후문 곁 자취방에서 이렇게 일찍 나 와 놓고도 첫수업부터 놓친 꼴이라니. "짱이, 너 왜 그래?아침부터 약 먹었냐?비실비실하기는." "나?응, 으응......" 제길, 내가 얼이 좀 빠지기는 했나 보다.순간 그에게 방금 전 야릇한 사건을 얘기해줄까 어쩔까 하다 꾹참고 말았다.가뜩이나 그저께 밤에도 한창 달아올라 나를 부추겼던 놈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해봤자 득이 될 건 없 을 것이다.그 얘기를 한다면 희창이는 나까지도 선영이 누나의 비리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다고 오해할 것이 틀 림없다.난 선영이 누나에 대해 이상한 시선을 가질 필요가 없다.아니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아직까 지는. 이 녀석이 본 것도 그랬을까.지난 주 카페에서 목격했다던 - 그렇다면 그와 나는 같은 여자의 치마속을 훔 쳐본 셈.그래도 좀 전의 사건은 나만의 경험으로 간직하려 마음먹었다.왠지 묘하게 입꼬리가 감춰졌다. "어쭈?뭐야, 뭔데 그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냐?" 그렇게 피식거리는 내가 은근히 우스워 보였는지, 희창이 녀석은 나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 아냐 그냥.우스운 얘기가 생각나서 그래." "짜식 싱겁긴 그렇다고 혼자서 그렇게 쪼개고 있냐?" 그래, 그건 나만의 비밀이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딴소리를 해 댔다. "아그그그...... 아침부터 몸이 찌뿌드드 하네." 희창이도 첫 시간부터 놓친 수업 따위는 안중에 없는 모양이었다.녀석도 나를 따라 허리를 펴고는 은근한 목 소리로 꼬드겼다. "야, 창희, 너 언제까지 공강시간이냐?" "짜샤, 월요일은 너랑 나랑 수업시간 똑같잖아." "아 참, 그렇지, 그럼 두 시간이나 수업이 없네?야, 뭐할까? 당구 치러 갈까?" 당구, 그래, 뭐 어차피 땡땡이치는 거야 마찬가진데...... "좋다, 그래, 오랜만에 당구나 한판 때릴까?" "일단 나가자, 이따 수업시간 맞춰서 오면 되지, 뭐." 그렇게 다시 가방을 집어들고, 희창이를 뒤따랐지만 여전히 아까의광경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여전히 입 가에 간지러운 웃음을 매달고 말이다.문득, 선영이 누나와 내가 단 둘이 술을 마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물스타킹의 여자 "얼렐레? 뭐야, 아무도 없네?" 첫 시간 수업도 빼먹고 당구장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는,의외로 당구장이 텅 비었음에 놀랐다.월요일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평소 같으면 빈자리 찾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찼을 당구장 안이 우리 둘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늘 보던 주인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 스위치도 누르지 않고 멋대로 공을 가져다 연습구를 치기 시작했는데도 10분 가까이 지나도록 아무도 우 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물론 당연히 나오기 마련인 음료수도 서비스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한참 후에야 뒤쪽 룸 안에서 누군가가나왔다.여자였다.그녀는 우리를 보더니곧장 다가왔다.또각또각,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 소리가 당구장 안에 울려 퍼졌다.그리고 그 여자는 말없이 우리의옆 테이블 위에 음료 수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야, 창희야, 저 계집애 좀 봐." 시간 버튼을 누르는 내 곁으로 다가온 희창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누구?" 사실 나는 방금 전 그 여자가음료수를 서빙할 때에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는데,녀석의 속삭임을 듣고서야 그녀 쪽을바라보았다.그리고 그제야 이유를 알 수있었다.건너편 당구대 위를 닦고 있는 여자, 그여자는 다소 희한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주인 대신 일을 봐주는 것일 터, 그러나 이런 대학교 근처의 당구장에서는보기 힘든 모습의 아가씨였 다.거의 엉덩이 직전까지 올라간 초미니스커트는 가죽인 듯 광택이났으며, 그 아래로 다리 선을 따라 레이스 가 수놓아진 짙은 색 그물스타킹이 쭉 뻗어 있었으니, 아마 이곳이 당구장 간판이없었다면 틀림없이 무슨 룸살 롱에나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전혀 당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그녀는 치마와 비슷한 색의 가죽재킷까지 입고서 우리 쪽으로 등을 돌린 채 허리를 숙이고 당구대를 닦고 있었다.하기야, 어떤호텔 당구장에 가보면 저런 여자들이 우르르 나와 초크도 칠해 주고 '사장님, 나이스큐!' 해주는 곳도 있다지만 여기는 분명 그럴 수준이 아닌데? "야아...... 죽이는데!" 감탄하는 녀석을 돌아보니, 희창이는 거의 넋이 나간 듯 그 여자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 계집애, 뭐하는 계집일까?" "뻔하지, 뭐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애겠지." "이런 데서 저런 애들이아르바이트를 한단 말이야?" 당구 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는 정신을 놓고 있었다.뻔하다.슬슬 녀석의 플레이보이 기질이 발동하는 것이리라. "야야, 침 닦아.당구 안 칠 거야?" "응?어, 어.그래, 너 먼저 쳐!" 당구대 정리가 끝났는지, 그여자가 다시 카운터 쪽으로돌아가고 나서야 녀석은자기 공을 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대방이 공을 치는 동안 카운터 쪽으로 눈길이 간간이돌아가는 건 녀석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그만큼 훤한 대낮에는 보기 힘든 차림과 외모의 아가씨였던것이다.어쨌든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키려 나는 차례마다 희창이 녀석의 등을 떠밀어야 했다. 나는 당구를 그다지 잘 치는 편이 아니었다.재수생 시절부터시작된 당구장 출입이었지만, 내 실력은 잘 늘 지 않아서 늘 희창이 쪽이 나보다는 100점 정도가앞서 있었다.그렇지만 녀석은 늘 나와 단둘이최하 게임비 정도만 내기를 하는 경우에도 꼭 50점만 올려놓으려 억지를 부렸다.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으레 서너 번에 한번 정도밖에 이길 수 없었는데, 오늘은시작부터 달랐다.은근슬쩍 그의 점수판에100점을 더해 놓았지만 녀석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아마도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점수판보단 그 여자가 굴러다니고 있는 탓이리라. 어쨌든 내기니까, 난 나름대로 게임에 열중했다.그런데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온 희창이 녀석이 팔꿈치를 세 게 건드렸다.그 바람에 하마터면 큐대를 놓칠 뻔했다. "뭐야, 새꺄, 내 차롄데!" 하지만 얼레, 그는 아랑곳없이 내 옆구리만 쿡쿡 찔러대는 게 아닌가.녀석의 얼굴을 돌아보니, 열심히 고갯짓 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나는 그제야 짐짓 그의 턱이 가리키는 쪽을 건너 보았다. 역시 그 아가씨.그런데 그녀는 지금 카운터 뒤에서 나와 옆 테이블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손톱손질을 하는 것인지, 작은 뭔가를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코앞에 손톱을 들이대고 열중하고 있었다.그런데 희창이가 가리킨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빼꼼이 녀석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그 아래쪽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그 아래쪽, 소파 속으로 푹 파묻힌 그녀의 다리였다.그 쭉 뻗은 다리는 높게 들어올려져 포개진 상태 였고, 당연히 소파의 엉덩이 부근 턱이 낮기에그녀의 꼬고 있는 다리는 짧은 가죽치마 아래로 허벅지가 거의 엉덩이 부근까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란 걸 인정해야 했다.그녀의 종아리로부터무릎, 허벅지에 이르는 각선미는 내가 20여 년 살아온 동안 보아온 중에서도 몇 번째 안에 들 만했다.당겨 올려진 미니스커트아래로 꽃무늬 레이스가 늘 씬하고 가지런한 다리를 지나 스커트 속 허벅지 안쪽으로 깊숙이 가라지고 있었다.그리고 그 앙증맞은레이스 가 이어진 그녀의 둔부 부근은, 한눈에도 그 여자가 상당히 글래머임을 드러내는 - 위쪽으로 갈수록 풍만한 곡선 이 그려지고 있었다.시선에 흡인력이 있다면, 아니 내눈이 엑스레이였다면, 나는 틀림없이그녀의 허벅지를 따 라 그 여자의 스커트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그 정도로, 그녀의 그물스타킹은 엄청난 섹시함을 과 시하고 있었다. "야아 생긴 것도 끼있어 보이는데......" 녀석의 혼잣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시선을 그 아가씨의 얼굴쪽으로 올릴 수 있었다.그 때까지도 그녀의 다리 를 감상하느라 미처 얼굴이 어떤지 볼 생각도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그런 짜릿한 복장에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메니큐어를칠하는데 열중하느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본바탕이 꽤 예쁜 얼굴이었다.눈꼬리가 약간올라가 보일정도로 진하게 화장을 하기는 했 으나 - 사실 나는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들을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다 - 그러나 그 진한 화장이 오히려 그 여자 의 색기 흐르는 외모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당구는 잠시 뒷전으로 접어둔 채, 그 아가씨를 구경하느라 한참을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결국 그녀는 몇 분 후 손톱화장이 끝나 다시안쪽 룸으로 들어가 버렸고, 희창이와 나는 잠시서로 아쉬움의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터무니없는 시간이 지나서야 한 게임을 끝마치게 되었다.어느새 점심때를훌쩍 넘긴 시 각, 시장기를 느낀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희창이에게 나가자며 그의팔을 끌었다.그런데 그런 나에게 문득 희 창이가 색다른 제의를 했다. "야, 짱이야, 우리 점심 여기서 시켜 먹자." "응?여기서?" "그래 임마, 내가 살게." 나로서는 별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왜냐면 방금 전 게임은 내가 이겼으므로 응당 게임비야 녀석이 물게 되어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점심까지 낸다니 한 게임을 더 쳐서 내가 진다 해도 종내는 내가 손해를 볼 것이 없는 셈 이니까. "그럼 니 맘대로 해." "뭐 먹을래?짜장면?" "그래, 곱배기 루." "오케이, 알았어, 잠깐!내가 시킬게." 카운터 쪽으로 가려는 나를, 굳이 제지하고 나서는 희창이를 보고서, 나는 녀석의 점심 제안에 다른 뜻이 있다 는 걸 알아차렸다.그 아가씨, 그녀가 있는 동안엔 계속 이곳에 눌러 있을 심산인 모양이다. 녀석이 카운터 쪽으로 달려가 그물스타킹의여자에게 무어라 얘기를 하자, 친절하게도 그녀는 자기가 직접 전 화를 들어 주문해 주었다.별로 반기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보기에 어쨌든 희창이 놈은 얼마라도 더 그 여 자를 가까이서 힐끔거리며 어찌 해보겠다는눈치가 역력했다.글쎄다, 하지만겨운 자장면이나 시켜 먹으면서 어떻게 건수를 올리겠다는 건지...... 잠시 후 중국집 철가방이 들어섰고, 배달원은 곧장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우리 당구대로와 자장면 두 그릇을 놓고 거스름돈을챙긴 뒤 돌아갔다. 녀석은 여전히 게임보다는 그 여자 쪽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내가 벌써 쿠션을 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채 네댓 개의 공도 치지못하고 있었으며 물론 배달된 자장면도 관심밖으로 밀려난 터라 비비지도 않고 겨운 두어 젓가락을 손댔을 뿐이었다.계속 그렇게 그가 공을 놓쳐주는 덕택에, 나만 연신 공을 치랴 허기를 채 우랴 분주히 당구대를 헤매고 다녔다.결국그 게임도 내가 이기고 말았다.그러나희창이는 불만 켜녕 아니 되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여전히 그 아가씨는 이번엔 카운터 뒤에서 화장품을 늘어놓고 얼굴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얼굴 익숙한 당구장 주인 아저시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그리고 아저씨가 나타나자마자 그 그물스타킹은 카 운터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챙겼다.아르바이트가 끝난 모양이었다.겨우 몇 마디나 나누었을까, 그녀는 금방 돌 아서서 당구장 문을 나서고 있었다. "창희야, 잠깐만 기다려." 희창이 녀석은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큐대를 팽개치고는 후닥닥 그녀를 뒤쫓아 달려나갔다.마치 먹이 를 쫓는 무엇처럼. 녀석은 5분 여가 훌쩍 지난 다음에야 돌아왔다.들어서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말 안 해도 도중에 놓쳤다는 것 을 직감할 수 있었다.큐대에 팔꿈치를 괴고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왜, 놓쳤냐?" "에이, 길 건너는 것까진 봤는데......" "그럼 그 근처 어디에 있겠지, 이런 곳까지택시타고 아르바이트하러 올 리는 없잖아?신경 끊고니 공이나 쳐.니 차례란 말야 내일 또 오면 될 것 아냐, 어차피 아르바이트하는 거면 계속 이시간대에 있을 텐데." 하지만 다 잡은 걸 놓쳤다는 듯 희창이는 아쉬운 얼굴이다. "야야, 재미없다.나가자!" 그물스타킹 아가씨가 사라지자, 졸지에 게임에 흥미가 떨어진 모양이었다.하기야어차피,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막 나가야 할 판이기는 했다. "짱이야, 부탁 좀 하자." 내가 미련 없이 큐대를 걸어놓고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문득 주위눈치를 살피더니 따라 들어 오는 희창이.그는 다짜고짜 내 손에 자기 지갑을 쥐어 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야, 있잖아......" "왜?" "계산하면서...... 아저씨한테 슬쩍 물어 봐.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애가 맞는지." "뭐?싫어, 임마, 니가 물어 봐, 새꺄." "에헤이, 그러지 말구...... 아까 그 계집애 나갈 때 내가 쫓아 가는 거주인 아저씨도 봤으니가 조금 그래서 그 래. 내가 점심도 샀잖냐.제발 니가 좀 물어 봐 주라, 응?" 녓거은 싫다는 나의 등을 억지로 떼밀고 있었다.못 말릴 놈이다.하는 수 없이 녀석의 지갑을 들고 돈을 꺼 내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어, 학생 오랜만에 왔네?" "아, 예 근데 저기요, 아까 그 여학생 누구예요, 아저씨?" "응?누구?아, 보영이!" "이름이...... 보영이예요?" "그래, 근데 그건 왜 물어?"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 아저씨, 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찾느라 허둥거렸다. "아, 아뇨 그게 저, 저랑 수업 같이 듣는 것 같아서......" "뭐, 보영이가?에이, 아냐, 보영이는 여기 학생이 아냐." 학생이 아니라고?하긴, 나도 그 정도로 야한 여학생은 학교 안에서본 적이 없다.하지만 등뒤에서 희창이 의 다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기에 별 수 없이 능청을 부리기로 했다. "어!이상하네 틀림없이 학교 안에서 봤는데." "에이, 아닐 거야 걔는 대학생 아니라니까.이 근처에서봤으면 몰라도...... 왜 맞은편 건물 지하에 소주방 있 지?그 집 아줌마 조칸가 그래.내가 잠깐 가게 좀 비워야 해서, 오늘만 부탁한 거야.가끔 내가 바쁘면 그 애 가 와서 가게 봐주지." "그래요?예, 고맙습니다.안녕히 계세요." 뜻밖의 수확이었다.그 그물스타킹이 이 근처에서 맴도는 계집애였다니. 어느새 당구장 문밖에서 담배를 빼 물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희창이 녀석은, 지갑은 돌려 받을 생각도 않고 그 여자 얘기부터 물었다. "야, 뭐래냐?" 나는 들은 그대로를 얘기해 주었다.희창이는 얘기를 듣고서 의미심방한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제 그 놈의 끼가 완전히 발동한 것이다 - 녀석의 표정을 읽으며 익숙한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좋았어, 소주방이라!" 다시 학교로 ㄷ로아오면서도 내내 희창이 녓거은 무슨작전구상을 하는 군대 지휘관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십중팔구 녀석의 마음은 이미 콩밭, 아니 그 그물스타킹이 있다는 소주방에 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야, 짱이야, 나 먼저 간다!" 두 시간 연강인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은 잽싸게가방을 챙기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나의 추측대로 였다.희창이는 그 소주방인가 뭔가로 직행을 할 것이 뻔하다.그리고 취소한 내일 아침이면 녀석은 그 보영이 라는 여자애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리라.사는 곳은 어디고, 하는 일은 무엇이며...... 만약 그도 아니라면 몸매 사 이즈가 어떻게 되는지.어쩌면 그날 중으로 너끈히 원샷플레이를 진행해서, '그 계집애 팬티 색깔이 어떻더라' 하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에 아마 그것까지는 힘들지 않을 성싶은데,옷차림으로 보아 호락호락한 여자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흔히들 겉모습이 야하면 행동거지도 그러리라는 생각을 하지만사실은 정반대일 가능성 이 높다 - 이건 내 경험이 아니라희창이가 가르쳐준 말이다 - 뭐 어찌 되었건,나랑은 별반 상과없는 일이다. 그건 그가 걱정할 일이고, 언제든 녀석의 주변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으며 또 그가한번 찍은 계집애들은 거의 모두 녀석에게 몸을 허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나는 그냥 시큰둥한 기분으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수업을 빠지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 달에 한두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는데, 지난주부터 오늘 오전 수업까지 연속으로 제꼈기에 다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고 있 었다. 그러나 웬 걸 정신 차린다더니 다음 날 아침 첫 수업부터 허둥지둥 학교로 달려온나란 놈.간신히 지각이야 면했지만, 달콤했던 늦잠 탓으로 강의실 뒤쪽 구석에 처박힐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나보다 늦은 사람도 있었다.그건 다름 아닌 희창이 - 그는 강의시간이 십여 분이나 지난 뒤에야 나타나 교수님께 멋쩍은 인사를 하 고는 용케 내 옆자리로 찾아 왔다.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앉길래, 마침 강의실 창 밖만 바라보던 난, 노트 구석에 볼펜으로 끼적거려 녀석에게 들이밀었다. '어제 그 소주방에 갔었냐?' '거어럼, 내가 누구냐?' '거기 있든?' '당근이지, 거기서 일한다.' 짜식, 역시 ㅂ려걸 다 알아냈군...... 나는 다시 노트 구석에 써 내려갔다. '어떻게 알어?' '사람 찾는 척 하고 들어가 봤지.거기서 써빙하더라.' 당구장 주인 아저씨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그렇다면 희창이 이 녀석은 이제 틀림없이 당구장 대신 그곳을 들 락거릴 것이다. '야, 너 오늘 수업 몇 시에 땡치냐?' 희창이 녀석이 다시 노트를 내게 디밀었다. '아따 전공 끝나고 5시' 'O.K!난4시니까 학회실로 와' 녀석의꿍꿍이속이 뭔지 짐작이 갔다.약간 망설이는 기분이들었지만, 일단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도 녀석의 계회에 동참을 하기로 할까나? 예정대로 수업이 끝나자 학생회실에서 희창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야, 가자!" 어디를 가자는 것인지 대충 알겠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하고 물었다. "어디?그 소주방?" "그래, 짜샤, 나 혼자 들어가서 술마시냐, 그럼?" "싫어, 새꺄. 너 재미보는 건데 내가 왜......" "아이고, 걱정마라, 새끼 쳐주면 될 것 아냐?" 막무가내로 팔뚝을 잡아끌며, 녀석은 나를 학회실 문밖으로 떠밀어댔다.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누군가 지원 사격, 아니 단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분위기 조성에 이롭다는 것을 체득했기에 십중팔구 나를 끼워넣기 일 쑤였다.물론 실제로 녀석이 몇 번 새끼를 쳐준 적도 있기는 했다. 아지만 그건 내게는 별로 유익한 관계가 아니었다.대부분의 경우녀석은 원 소개자, 즉 자기가 찍은 게집애 랑 먼저 끝장을 내버렸거나 - 그건 상대방여자애가 침대 위로 쉽게 올라오지 않았음을의미한다 - 아니면 난 손도 못 잡아봤는데 자기 혼자서 바지춤 끌어올리고 - 반드시 한 번 이상여관방에 들려 재미 봤음을 말한다 - 여자애를 차버렸던 것이다.어쨌든 두 경우 모두, 나로서는소개받은 여자와도 자연스럽게 어정쩡한 사이가 되 는 건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랬다.그렇고 그런 여자애들이란 단순히 놀고 즐기기만을 원했고,나는 그보다는 좀더 차분하고 진지한 사 람을 원했었다.그러니 희창이가 소개해주는 계집애들이란 끽해야 두어 번 만나고는 날 따돌리기 다반사일 수밖 에 없었다.언젠가 심지어는 속칭 그 새끼쳐준 여자, 즉 내 몫으로 소개받은 여자가 도리어 원래 녀석의 여자애 를 젖히고 희창이에게 들러붙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봤자 그도 대부분 같은 결과로 끝이 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때엔 녀석이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어차피 차인 건 나이기에 더 이상 뭐라 그럴 수도 없는 일 이었지만, 짐작컨대 그런 계집애들과도 잠자리는 가졌을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못해 따라나섰고, 반대로 앞장 선 희창이는신이 나는지 휘파람까지 불어댔다.그러나 녀 석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나에게 말을 건넸다. "참 아까, 학회실에 선영이 선배 들렀었는데, 안 좋은 얼굴로 약속 있다며 급하게 나가데." 희창이는 지난 주의 그 일이라도 떠올리는지 '큭큭' 웃고는 자랑이라도 하는 양 그 다음 얘기를 나에게 떠벌렸 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나가려는 선영 선배 잡고 언제 술 한잔 하자고 했더니, 얼굴 색 확 바뀌는 것 있지. '킥 킥' 재미있데, 앞으로 두고 봐.이제 선영 선배 나한테 꼽짝 못할 거야." "얌마, 너무 짓궂잖아." 사실, 말이야 그 정도로 했지만 녀석에게 울화가 치밀었다.순간의 실수로 사적인 비밀을 들키고, 어쩌면 본의 아니게 벗은 몸을 드러냈을지도 모르는 사내와의 대면,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선영이 누나가 안쓰러 워졌다.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녀석은 여전히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 소주방의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어둠침침한, 시내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소주 방 - 안주로는 과일부터 찌개종류까지, 술로는 양주부터 생맥주와 소주에걸쳐 없는 것 없이 다 나오는 그런 평 범한 곳처럼 보였다. 학교 앞 가게라 그런지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손님은 우 리가 전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희창이의 말대로 서빙도 어제 그 야스러운그물스타킹의 보영이라는여자 혼자뿐이었다. 우리 가 후미진 구석에 자리를 잡자 곧 그녀가 메뉴판을 들고다가왔는데, 한눈에도 어제 당구장에서 본 그 시큰둥한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보아하니 마수걸이인것이 분명했지만, 스스럼없이 작은 크기의양주 한 병과 과일 안주를 주문하는 희창이인데도 그 여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않았다. 앉자마자 담배를 피워 무는 나에게, 희창이 가 몸을 기울이더니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 저기 좀 봐."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주방 입구에 허리를 기댄 그여자가 보였다. 아마도 주방 안에 주인 아주머니가 있 는지 허리를 숙이고안쪽을 들여다보며 주문을 전하는 그녀는, 다소 어두운 실내인데도 어제처럼눈에 띄는 옷 차림을 하고 아찔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헐렁한 흰티에 짧은 반바지, 역시나 그물스타킹. 다만 오늘은 그 색이 어제와는 반대로 하얀 색의 촘촘한 것이었는데, 입고 있는 물 빠진 색 청반바지와 상당히 잘 어울려 도발적인 감각마저 던지고 있었으니 - 그 탄탄한 다리 뒤를 따라 발목부터 시작하여 종아리와 허벅지 한가운데를 지나, 양쪽 엉덩이를 가린 반바지 속으로 두개의 이음선이 쪽 뻗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죽이지? 햐.......!" 녀석의 감탄이 나올 만도 했다.그녀의 반바지는 간신히 엉덩이를가릴 크기로, 고개를 숙이고 비스듬히다 리를 교차시킨 그 자세에선 거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의 경계선 가까이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한 자태…… 나는 고등학생 시절 몰래 감추고 다녔던 외국 도색잡지의 사진을 떠올렸다.어떻게 저런 극심한 노 출의 여자가 대낮에 거리를 활보했을까.왠지 그녀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내가 머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짐짓 고개를 돌리니 먼저 잔과 양주를 가지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새를 놓칠 새라 녀석은 잔을 내려놓는 그녀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우리 기억나세요?" "예?"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 "어제 당구장에서......" "아, 짜장면 시켰던......!" 그제야 어제의 그 자장면으로 우리를 기억해내는모양이었다.하기야 어제 그 당구장엔 우리외에는 손님이 없었으니, 그새 기억을 못할 리 없었다.아무튼 이제 슬슬, 희창이의 특기인 딴죽걸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 여기서도 일하시나 봐요? 아르바이트?" "으응 아녜요, 여긴 우리 사촌이모가 하시는 데예요." 어제 봤었다는 이유 때문인지, 보영이란 이 아가씨는 제법 생글거리며 대꾸를 해주었다. "근데 당구 잘 치시나 봐요?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다 하시구." "훗, 아녜요, 전 포켓볼밖에 못 쳐요. 거긴 어쩌다 갈 뿐이에요, 아저씨랑 우리 이모가 잘 아시는 사이라...... 저, 잠깐만요." 이야기가 끊어졌다.주방 쪽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안주가 나온 모양이다. 그녀가 주방 쪽으로 돌아가자, 희창이는 재빨리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얘기가 잘 통할 거란암시였다.예상한 일이었 다.뺀질거리는 외모에 적지 않은 키,척 보기에도 비싼티가 물씬 풍기는옷하며...... 빠지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스포츠카의 키는 속칭 잘 나간다는 여자애들의 눈길을끌기에 충분했다.아니, 그런 여자애들은 이미 곁눈질로 다 관찰해 놓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녀석과 내가 서로 술을 따라주고 있는데 그녀가 큼지막한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안주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우리 학교 다니세요?" 뻔히 알면서도, 솜씨 좋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희창이.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전 학생 아녜요. 그냥 언니 따라......" "언니...... 있으세요?" "아, 친언니는...... 아니구요. 그냥 아는 언니." 그녀는 이제 숫제 바로 옆 테이블에살짝 엉덩이까지 걸치고 기대어 서서이야기를 받아주고 있었다. 그 때, 다른 한 팀의 손님이 우르르 소주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례할게요,어서 오세요,하며 그녀는 그들에게로 옮 겨갔다.희창이는 여전히 그녀 쪽을 흘끔거리며 내게 물었다. "어때, 넘어올 것 같지 않냐?" "됐어, 임마. 니가 언제 찍어서 실패한 적 있냐?" 사실이다. 언제 이 자식이 찍어 '자빠뜨리지 않은' 여자가있던가.그런데 다른 테이블 쪽의 주문이 길어지는 모양인지, 보영이란 여자애는 계속 주방과 다른 손님들 사이를분주히 오락가락하고 있었다.하여 한동안 희창 이와 나만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왜, 짜샤, 형님 잘 나가는 게 부럽냐?" "웃기지 마, 나도 내 거시기가 쓸쓸해서 그런다." 양주잔을 기울이며 무심코 넘기려 한 대꾸이자 음담패설, 그러나이게 의외의 화제로 넘어가 버렸다. 그가 재 빨리 맞받으며 은근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야, 그러니까 내가 좋은 코스 하나 가르쳐줬잖아!" "좋은 코스?" "그래, 새꺄. 박선영, 선영이 선배 말야." 짜식이 - 순간 기분이 상하는 나였다.좀 전에 선영이 누나를 놀렸다는 것까지합쳐서 말이다.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 괜히 내가그녀를 두둔하기라도 하면 녀석은 당장에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볼것만 같았다. 그저 나는 목소리를 깔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얌마, 이짱. 내가 너 같은 놈인 줄 알아?" "어쭈? 빼기는...... 그냥 술만 먹이면 돼. 자동이라니까. 생각해 봐.그 정도 예쁘장한 선배라면...... 참,같이 잤 을 남자가 한둘이 아니란게 흠이기는 하지만." 희창이는 아예 선영이 누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로 치부하고 있었다.물론 그렇다고 특별히 내가 반발해야 할 것도 아닌데, 나는 왠지 기분이 씁쓸해졌다.설사 정말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술 먹여 놓고 그렇게 맘대로 해치 울 생각을 한단 말인가.아무리 남들이 그랬다 하더라도 나까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만 해. 술이나 마셔. 하긴 아까 보니까, 그 선배 퍽 고민스런 얼굴이던데......" 찡그린 내 인상을 보자, 녀석도 입맛을 다시며 말을 감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테이블 위로 안주접시 하 나가 쑥 들이밀어졌다.올려다보니 바로 보영이란 그 계집애였다. "어, 이거 안 시켰는데요?" 피식, 당황해 하는 듯한 내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접시위 엔 오징어와 쥐포 등 씹을거리 몇 종류가 놓여져 있었다. "후훗, 걱정 말아요. 서비스니까." "야아 서비스가 이렇게 좋아요?" 희창이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끼여들며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으응, 이모한테 친구라고 했어요.친구들이면,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당돌한 그녀의 말에, 우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말 건네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다고친구라니.희창이 놈은 나를 건너다보며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녀석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본격적인 수작을 걸기 시작했 다. "이야, 이거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요, 어때요? 일 언제끝나요? 끝나면 여기서 같이 한잔 해요." 보영이, 이 여자애도 호응을 하고 있었다. "후후, 진짜요? 그럼 음...... 이따 일곱 시면 원래 아르바이트 학생이 오니까, 그 때 올게요." "예, 좋아요.얼마 안 남았네요.얼른 오세요." 희창이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졌다.오늘은 단지 탐색전으로 끝날 수도 있는데, 의외로 얘기가 술술 풀리고 있 는 것이다.나는 녀석의흐뭇한 표정을 보고는 제동 삼아 핀잔을 주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새꺄. 누가 아냐? 쟤도 딴 계집애들처럼 그렇고 그런 년일지." "야, 내가 언제 그런 것 신경 썼냐? 알게 뭐야, 나룻배든 거룻배든, 저런 계집애랑 잘 수만 있으면 돈 내고라도 하겠다." "어이구, 어련하겠냐. 니가." 채 이삼십 분도 못 되어,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남학생과여학생 둘이 들어왔다. 때마침 손님들도 두어 팀 이 추가되어 제법 분주해지는 소주방 안인데, 보영이 계집애는 그 학생들이 채 옷도 갈아입기전에 주방으로 쪼 르르 달려가 뭐라 얘기하고는 우리 쪽 테이블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아뇨, 천만의 말씀,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러나 두 명씩 앉는, 의자가총 네 개인 우리 테이블에서그녀는 기대 -희창이의 - 를 깨고 있었다. 자리 를 권한 것은 희창이 쪽인데 털썩, 양해도 없이 주저앉은 곳은 내 옆자리였던 것이다.마주한 눈썹을 잠깐 찡그 렸지만 곧 자신만만한표정으로 바뀌는 희창이. 오히려 거리낌없는 그녀의 행동에 놀란 것은 나였다. "근데, 무슨 과 다니세요?" "아, 예, 우리요...... 경영학과요." "어머, 멋있는 과네.몇 학년인데요?" "잠깐만요. 그보다 술이 없네? 저, 여기요!" 아까 선영이 누나 얘기가 길어지면서, 내가 연방 술을 들이킨 탓일까.어느새 작은 양주병은 밑바닥 가까이서 찰랑거리고 있었다.순간 술을 더 주문하려는 희창이를 그녀가 제지하고 나섰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가지고 나올게요." 그녀는 다시 주방 안으로 돌아가더니, 뜻밖에도 양주병 대신 맥주를 양손에 두어 병씩 들고 나왔다. "어? 웬 맥주......" "으응 미안해요, 저 이따가 아홉 시부터 다른 곳에아르바이트 하러 가야 되거든요. 진짜 제 아르바이트요. 그 래서 독한 술은 못 마셔요.대신에 이건 제가 낼게요." 다른 아르바이트? 밤 아홉 시에? 희창이와나는 서로 의아한 눈초리를 교환했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다시 내 옆에 앉은 그녀는 우리 얼굴을 살피고 서둘러 말했다. "별것 아녀요. 편의점에서 일해요. 아참! 그러고 보니 아직 우리 이름도 모르네요?" 그제야 희창이와 나는 얼떨떨한 분위기를 깼다.우리야 그녀의 이름을 알지만 그녀는 아직우리의 이름을 모 르고 있었던 것이다.재빨리 희창이가 우리 이름을 소개했다. "하핫, 미안해요. 저는 희창이고요. 이 친구는 창희예요." "그래요? 재미있네, 창희씨, 희창씨. 저는 보영이에요. 김보영." "보영씨요? 야, 이름 예쁘네요.그런데 나이가......?" "맞아. 저요, 전 스물 하나예요." 스물 한 살...... 만인지는 몰라도, 그렇담 우리와도 동갑인 셈.다행이었다.다소 화장을 진하게 한 탓인가, 보 기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희창이 녀석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야, 잘 됐네요.우리도 딱 스물 하난데....." "어머, 정말? 그럼 말 놓아도 되겠네, 그쵸?" "그래요? 그럼 그러지 뭐, 하핫." 녀석도 녀석이지만, 어느새 죽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그래서나는 이쯤에서 희창이와 보영이와의 관계를 띄 워주기 위해 되도록 말수를 줄이기 시작했다.그런 내 의도를녀석이 알아챘는지, 희창이 놈은 눈에 띄게 보영 이에게 은근한 관심표명을 보냈다. "그런데 보영이 너 아르바이트하는 곳, 멀어?" "응...... 아니, 그렇게 멀지는 않아." "멀면 말해. 내가 차로 데려다 줄게." "아냐, 됐어. 이 근처인 걸. 그리고 내가 안 오면 태워주러 차가 오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차가 온다? 묘한 이 말의 뉘앙스에 말없이술잔만 기울이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밤 아홉시에 나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차가 데리러 온다? 그 바람에 맥주가 조금 흐르고 말았다.들고 있던 잔을떨어뜨린 것은 아니었고, 그저 약간의 맥주거품이 테 이블 위를 타고 바짓가랑이 쪽으로 흘러내렸다.젠장, 하지만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한창얘기에 빠지기 시작 한 희창이나 보영이가 신경 쓸 정도의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기계적인 동작으로탁자 위에 있는 냅킨을 한 움큼 뽑아들었다.옷이 젖을까 봐 엉덩이를 빼고 털어야 할 부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수그렸던 것이다. 어...... 그런데 그 아래쪽에 미처 내가 살피지 못했던 광경이 있었다.바로 옆자리였으면서도 그 때까지 눈길이 가지 않았던 곳, 그것은 곁에 나란히 앉은 이 보영이라는여자애의 핫팬츠 아래로 보이는 허연 허벅지였다.가 뜩이나 짧은데다가 꼭 끼는 반바지는 그나마도 잔뜩 끌어 올려져 있었다.하여 터질 듯 풍만한 그녀의 하반신에 감기듯 달라붙어 있었으니, 거의 맨몸매나 다름없는 광경이 내 시야를 덮쳐왔다. 이건 반바지가 아니라 숫제 팬티군 -그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재빨리바짓자락을 닦아내려 했다.그건 우연히 보인 모습이었고, 키득거리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기는 싫었다.하지만 뭔가 내 눈동자는 의도했던 내 허 리 아래가 아니라 다른 허리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니, 견물생심이랄까 시선이 엉뚱한 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랬다.내 눈길은 보영이의 다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그리고 일부러는 아니었지만,그녀의 무릎 아래를 흘끔거리던 내 머리 속에는 당장 한가지 광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앉은 자세는 묘하게도, 내가 보았던어떤 익숙한 포즈와 똑같은 자세를취하고 있었던 것이다.포개 올려진 다리, 그 한쪽 발끝에 걸린 구두, 끈으로 발목부근을 채우게 되어있는 그것은 반쯤 벗겨져 까닥거리는 스 트랩힐이었다. 위에서 보느냐 아니면 앞에서 들여다보느냐, 단지 그 차이였다.보영이는 어제학생회실 탁자 밑 으로 몰래 훔쳐보던 선영이 누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다. 새삼 어제 오전의 그 아슬아슬했던 사건이 상기되며, 나는 어느새 보영이와선영이 누나의 각선미를 비교까지 하고 있었다.보영이의 다리에 어울리는 것은 한마디로 미끈하다는 단어였다.군살이 없고,그물스타킹이 던져 주는 야릇한 느낌 때문인지 보기에도 늘씬해 보였다.반면에선영이 누나 쪽은 통통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결코 그녀의 각선미가 예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뭐랄까, 굳이 말하자면 보영이는 잘 다듬어진편, 선영이 누나는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아마도 그것은 누나 쪽의 살결이 좀더 희고 뽀얀 까닭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지금 보영이의 자태는 우연이 아니더라도금방 사내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에는분명한 수준이었다. 키도 작은 편이 아니니 어디 가면모델이나 연예인쯤으로 착각을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만약에, 만약에 이런 쭉 뻗은 계집애를 데리고 거리를 활보한다면......? 역시 내가 희창이라 해도 이런 호기는 부릴 만한 것이다. 후, 하고 큰 숨을 들이마신 뒤 허리를 세웠다. 야릇한 생각 뒤라 그런지 갈증이 났고, 거푸 목구멍 속으로 술잔 을 비워야 했다.그런 동안에도 희창이와 보영이는 열심히 자기들 얘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드라이브? 좋아! 어디 갈까?" "응...... 난잘 몰라,하지만여기서 고속도로나가기는 쉬우니까 동해안으로 빠지는 것도......" "그래, 좋았어.그럼 보영이 니가 가고 싶은 곳 정해.그리고 쉬는 날하고. 뭐하면 아예 하루쯤 쉬든가.한 2 박 3일 여행도 괜찮구." "어머, 그래도 돼?" "그럼!나야 뭐, 하루 수업 빠지고 주말에 맞추면 되니까.너만 맞추면." "그래도...... 참, 근데 차 너희 아빠 꺼 아니지?" "푸하핫, 야. 날 뭘로 보고, 우리 집 차는 기사 따로 있어." "정말?" 잠깐 허튼 생각을 더듬었을 뿐이라 여겼는데, 역시 희창이는 희창이였다.엄청 빠른 진도였다.초대면에 드라 이브 가자는 약속까지 꺼내다니. "아 참, 까먹을 뻔했다. 야, 창희 파트너도 맞춰줘야지." "응, 그건 걱정 마, 나 아르바이트하는 데에 괜찮은 애들 많거든." "그래? 그럼 전부 너 같은 애들?" "왜, 너도 소개시켜 줄까?" 에이, 농담도 못하냐, 하하, 호호 - 어느 샌가 희창이 녀석이거는 농지거리에 눈을 흘길정도로 보영이는 친 숙한 티를 내고 있었다. "참, 창희 넌 어떤 스타일 좋아해?" 문득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기껏 둘이서 떠들다가 그제야 내 생각을한 모양이다.비록 말을 놓기로 했다지만, 보영이가 처음 내게 건네는 말이었다. "어..... 나?" "그럼 누가 있어? 말해 봐. 우리 가게에 예쁜 애들 많아. 웬만하면 니가 좋아하는 스타일 맞춰줄 수 있을 거 야."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음..... 창희는 말야. 알지, 왜......" 끼여드는 희창이, 쳐다보자 슬쩍 손짓을 멈추기는 했어도 나는 알 수 있었다.녀석의 두 손이 가슴 앞에서 유 방 모양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머, 정말이야? 호호호!" 그런 그의 손짓를 보고 보영이는 자지러질 듯 웃어댔다. 제길, 희창이 녀석에게 한마디하려다가 타이밍을 놓 치고 말았다. "후훗, 너 안 그래 보이는데 꽤 밝히나 보구나......? 겉보기엔 조용한 타입이 어울릴 것 같은데 웬 글래머?" 거기까지는 좋다. 헌데 뭐가 그리 우스운지 보영이는 내 무릎을치며 깔깔거렸다.아니 숫제 내 허벅지에 손 을 얹고 진지하게 질문을 퍼부었다. "정말이야? 그럼 그 중에서 어디?가슴?다리?" 얼굴이 달아올랐다.다리라.내게 바짝 붙인 그녀의 무릎이 거북살스럽기 그지없었다.방금 전그녀의 다리 를 보며 혼자 상상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머, 말해 봐. 내가 그런 애 소개시켜 준다니까." 희창이의 장난인데도 보영이는 집요하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난 어색한 웃음을지어 보이며 얼버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이야, 창희는 얼굴 안 봐. 오로지 몸매라니깐." 맞장구 치는 녀석과 또 한동안 호호거리는 보영이.왠지 무안을당하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잘 되어 가는 상 황에 내 쪽으로 분위기를 끌어오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이제 슬슬 내가 빠져도 될 성싶었다. "그, 글쎄...... 난 아무나 괜찮아.참, 희창아. 나 먼저 갈게." "어, 뭐야? 같이 있다 가, 임마." 당연히 녀석은 짐짓 놀란 듯 따라 몸을 일으키는 척한다. 당연히 이건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그때 보영이 가 화들짝 놀라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 벌써 아홉 시네?" 희창이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내가 적절치 못한 얘기를 꺼낸 걸까. "어떡하지? 나 늦었어. 얼른 가야 하는데." "그, 그래?뭐, 그럼 다같이 일어나자." 마지못해 자리가 파해졌다.괜한 방해를 한 것 같아 께름칙했다. 그러나 보영이가 늦었다고 더 호들갑을 떨 어주는 탓에, 희창이도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냐, 맥주값은 됐어." 보영이가 술값 계산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꽤 화통한, 희창이 식으로는 화끈한 여자애일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소주방에서 나오자 찬바람이 온몸에 감겨왔다.갑자기 나는 휭, 하며 머리에 취기가 오르는것을 느꼈다.하 기야 중간 크기의 양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 아마 난데없이 꺼낸 선영이 누나 얘기 탓에 내가 더 많이 마셨을 것이다 -거기에 보영이가 들고나온 맥주마저 서너 병을 거의혼자 마시다시피 했으니 알딸딸할 만도했다. 얼굴이 뜨끈하니 붉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소주방 건물 앞에서, 나는 보영이가 채 나오기도 전에 희창이에게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응, 맘대로 해." 자식, 지금 나에게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리라.어떡하든 보영이에게 단단히 길을 터놓아야 하는데, 아직껏 그 단계까지는 말을 꺼내지 못한 모양이다.그런 녀석을 세워놓고 나는 먼저 자취방이 있는후문 쪽으로 허위허위 발걸음을 옮겼다.사라지는게 녀석에겐 도움이 될 것이다. "야, 창희야!" 이삼십 미터쯤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희창이가 소리쳤다.돌아보자 보영이가 함께 서있었다. "이따 니 방에 갈지도 몰라. 문 잠그지 마!" "알았어, 임마!" 뻔하다.저 놈도 술을 마시기는 했으니 차를 몰지는 못할 테고, 오늘 밤 안으로 보영이를 여관방으로 끌고 들 어가지 못한다면야 녀석이 갈 곳이라고는 내 자취방밖에 없으니까.분위기상, 녀석이 오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더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술기운으로 흐릿한 시야에 그들 곁으로 자가용이멈춰서는 게 보였는 데, 보영이가 쪼르르 달려가 차창 안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그러자 자가용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떠난다.데 리러 온다던 그 차 같았다.그렇게 차를 보낸 두 사람이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조오케따......! 혼잣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아무리 닳고닳은 여자일지라도, 저런 늘씬한 계집애를 끼고 밤 거리를 노닌다는 건 어느 누가 보아도 부러움을 살 만한 일일 것이다.더군다나...... 침대 위까지 함께 간다면 금 상첨화겠지....... 테이블 아래로 내려다보이던 보영이의 허연 허벅지와 착 달라붙은 하이레그 청반바지가 떠올랐다.그 숫제 팬 티랄 수 있는 그것을 벗기고 - 제길,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취기탓인가, 한심한 생각만 하다니.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소외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부러움? 터덜터덜, 내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옮겨지고 있었다.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깊은 시간은 아 니었기에, 길거리의 불빛들로 별빛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그런 답답한 하늘처럼 내 마음도 은은한 울적함에 빠 진 것 같았다. 얼레, 내가 지금...... 그렇게 걷다가 고개를 드니 이미나는 자취방으로 가는 골목을 지나치고 있었다.어느새 학교 정문 쪽으로 오고 만 것이다.씁쓰레한 혼자 웃음을 지었다. 잡생각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내가 스스로 멋 쩍었다. 어쨌든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학교를 가로질러도 결과는 마찬가지로후문 쪽을 향한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 도 몰랐다.이미 학교 안은 어둑어둑 고요해서, 가끔 도서관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빼고는 호젓한 우수에 빠지기 안성맞춤이었다.집에 가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마땅히 할 일도 없고 허전함에 왠지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학생회실이 있는 건물 쪽을 향한 건 우연이었다.그저 아무도 없는 방향으로 걷고 싶었던 것일까?멍하니 그 곳을 향했던 것인데, 문득 건물 쪽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웬일인지 학생회실 창문 밖으로 희미한 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아마도 누가 불을 끄지 않고 나간 것 같았다. 하여 지나치려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불이나 꺼주고 가야겠군,정 뭐하면 학생회실에 두고 왔던 책이나 한두 권 꺼내가든가. 그런데 무심코 학회실 문을 열어본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응당 텅 비었으리라 생각했던그 안에 전혀 예 기치 못했던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선영이 누나였다.등을 돌린 채,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문소리에 나를 돌아보았다. "어, 누, 누나!" "아, 창, 창희구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불과 몇 시간 전 어딘가 약속이 있다며급히 나갔다던 그녀가 아니었나.그런데 이 시 간에 다시 학교에 돌아와 있다니, 그것도 아무도 없는학회실에 혼자서. 왠지 말하기가 거북했지만 난 희창이한 테 들은 얘기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희창이한테 들으니까 아까 약속 있으시다고......?" "으응...... 희창이 만났니...... 갔다 왔어." 그녀는 어제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어제내가 그랬듯 무언가 깊은 생각 속에 빠져있던모양이었다.역시 그녀의 얼굴에도 의외라는 표정이 쓰여 있었다. "어디 멀리 갖다 왔어요? 이 늦은 시간에......" "어. 잠깐 강남 쪽에......" "그럼 왜 다시 오셨어요? 누나 집 그쪽이잖아요." "응, 맞아 그냥...... 중요한 책 두고 온 것이 있어서......." 그러나 책을 찾으러 왔다는 그녀의 말이 둘러대는 것이라는 건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노트 한 권 손에 들린 게 없었을 뿐더러, 그렇다면 이 밤중에 여기 혼자 앉아있을이유는 더더욱 없지 않은가.눈치채지 못하게 그녀 의 얼굴을 살폈다.뭔가 심각한 표정이란 걸 느낄 수 있다.혹시 녀석이 아까 놀려준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것일까?아니면 전에 녀석이 귀띔해준 그 선배와의 관계? 조심스레 그녀를 떠보기로 했다.그렇지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성싶었다.가뜩이나 우울했던 기분이 그 녀의 침울한 얼굴로 인해 더욱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선영이 누나?" "내가? 아, 아냐!" 내 말에 애써 익숙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였지만, 전혀 밝아 보이지 않는건 왜일까. 분명 안 좋은 일이 있기는 있는 것 같다.선영이 누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은지,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창희 너는 웬일이니?희창이 만났다면서 여기는 혼자 무슨 일로 왔어?" "아, 그, 그거요...... 그건...... 그냥술 마시러 간 거였어요.여기는...... 저도 책 때문에......" "그래...... 참, 머린 괜찮아?" "머리요?하핫 괘, 괜찮죠, 뭐." 이번에는 내가 머쓱해졌다.어제 목격한 그녀의 치마 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다행히도 그녀는 가방을 챙기 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설 차비를 했다. "지금 나갈거니?" "예? 아, 예." "그래, 그럼 같이 나가자." 그녀는 나를 따라 학회실 문을 나섰다.타박타박 학생회실건물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공허하게 들렸다. 바깥으로 나와 다시 하늘을 쳐다보니 어두운 주변 탓에 하나 둘, 어렵사리 별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지난 학기 MT 장소에서 바라본 밤하늘이 떠올랐다. "저...... 선영이 누나, 왜 그렇게...... 혼자 있었어요......?"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응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냥 말꼬리를 흐리고 만다.그런 그녀에게 뭔가 더 캐묻기가그래서, 난 한참 동안을 나란히 말없이 걷기만 했다.일단 일차적 원인이희창이 탓은 아닌 것처럼보였지만 글쎄, 그럼 그졸업생이란 남자친구 때문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왠지 그녀와 함께 저녁의 캠퍼스를 걷는다는 것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고 있었다.이대로그녀를 보내는 것이 걸린다.뭐든 얘기를 꺼내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선뜻 머리에 떠오르는것도 없다.답답했다.교문은 점점 가 까워지고 있는데...... 그러다 엉겁결에 불쑥, 말을 꺼냈다. "저...... 누, 누나 술 한잔...... 술 한잔 하시지 않을래요?" "응?술......? 아......." 젠장, 난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도는 것일까.겨우 술이라니, 아까 마신술냄새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을 터...... 게다가 지금 이 시각에 말이다. "음...... 미안해, 다음에 마시자." 잠시 망설이는 듯한 그녀는 차분히 거절을했다.하지만 나는 계면쩍기 그지없었다. 희창이에게 이 누나와 술을 마시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속속들이들은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 대체무슨 의도란 말인가.녀석의 말처럼 누나의 비리와 치마 속을 알고 싶다는 얘기냐, 아니면 저 슬퍼 보이는 얼굴뒤의 이유를 알고 싶다는 말 이냐 - 나도 모르는 내 심정, 선영이 누나가 오해하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바래다 줘서 고마워, 창희야.그래...... 누나가 언제 술 사줄게." 어느새 교문 앞에 다다랐고, 곧바로 버스정류장이 있었다.그녀는 인사 대신살짝 웃어 보이고는 돌아서서 곧장 정류장 쪽을 향했다.한 번 더 불러세우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마 용기는 나지 않았고, 그렇게 우두 커니 멈춰 선 나의 등뒤로 버스가 막 지나치고 있었다. 가볍게 버스에 오르는 뒷모습, 그 매끈한 종아리 위로 선영이 누나의 치마가 위태롭게 찰랑거리고 있었다.나 는 순간 결심했다.언젠가는 저 누나와 술을 마시리라.마치 저 치마폭처럼 위태로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 어서라도, 반드시. 예지의 고백 집에 돌아와 몸을 뉘었다.잠은 오지 않았다.멍청히 천장만 쳐다보던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검은 시야 에 뭔가 처연해 보이던 선영이 누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무릎께에서 찰랑이던 그 청치마, 뽀얗게 뻗은 종아리 와 무릎, 흔들리던 치맛자락.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익다고 느꼈다.그랬다. 치마폭에대한 기억, 이번에는 하얀 양말과 까만에나멜 구두와 회색빛 교복 치마에 관한...... 그것은 선영이 누나의 그것이 아니었다.좀더 오래 전, 그러니까나도 그런 멀건 교복을 입었던 시절의 일이 었다. 그 치마의 주인공은 이제 제대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한 여학생이었고, 그 무대는희창이 녀석과 막 사춘기 를 겪던 무렵 그의 집과 한 여자 고등학교의 정문 앞이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기억 속의 희창이는 그날 따라 학교가파할 무렵부터 나를 한참 졸라댔다.무엇 때문 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나더러 자기 누나에게 함께 가자고 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녀석에게는 두 살 터울의 누나가 하나 있었다.지금은 어디해외로 유학을 갔다고 들었는데, 당시에 그 누나 는 서울 시내의 모 예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자기 누나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게희창이의 얘기였던 것 같은데, 하여간 녀석은그 일을 가지고 오후 내내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필사적인노력을 기울였다.한 달 내내 떡볶이사주기, 만화 값 대신 내주기 등등의, 별의별 조건들이 제시됐으나, 나는 한사코 거절을 했다. 물론 녀석의 제안을 거부했던 것은 그런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건당연한 일이었다.희창이 의 의도도 그렇고, 나의 마음내키지 않음도 그렇고, 사실 그 이유는 똑같은 것이었다. 수염이나 체모가 갓 돋아나던 그 시기, 어느누가 여자 학교 교문 앞에서 서성이고 싶겠는가?그것이 아무리 친누나라 하여도.더군다나 녀석 누나의 학교란 우리 동네도 아니었으니, 낯선 곳에서 그런 일을 겪으라는 것은 차라리 죽기보다 싫었던 우리였었다.하여 녀석은 나를 끌어들이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게다. 결국,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진지한 단어들이나와서야 뜻을 굽히게 된 것은내 쪽이었고, 우리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목적지에 당도했다.그리고 그 교문 근처의 골목 어귀에서 이삼십 분을 기다리자 곧 우르르 여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젠장, 나는 짐짓 뒤돌아 서서 딴청을 피워야만 했다.초등학교 졸업 이후, 한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희창이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면서도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자기 누나를찾아야 했으니까 말이 다. 등뒤로 수많은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잘재잘, 까르르. "에이 젠장 이 계집애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투덜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뒤 몇 분이 지나서였다. "야, 여기 서있으면 어떡해?" "그럼 어떡하냐, 계집애야.쪽팔려 죽겠는데." 드디어 들린 건 그의 누나 목소리였다.난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그런데...... 그 순간 딱, 턱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희창이의 누나 때문이 아니었다.그 누나는 녀석의집에서도 익히 마 주친 탓에 별반 신경 쓰일 것이 없었다.바로 그 옆에 있던 누군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지금껏 추억 속의 교복치마, 그 주인공이다. 예뻤다.고등학생으로는 제법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녀는,얇은 머리띠만을 두른 생머리를 바람에 날 리며 내 정면을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 친구들이야?" 그녀가 나를 보고서는 곁에 선 희창이의 누나에게 물었다.난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쳤어? 내 동생이야. 동생 친구랑." 녀석의 누나가 날 어떻게 얘기하건, 이미 내 귀는 꽉 막힌것 같았다.주변의 그 수백 명이나 되는 여학생의 재잘거리는 소음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난 즉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생각 같아서는 눈까지 감고 싶었다. "자, 이거......!" "어머, 엄마가 그건 안 줬어?" 뭐라뭐라, 희창이 남매가 얘기를 주고받는 중이었어도 보이는 건내 앞에 선 그의 누나 친구의 모습뿐이었다. 그것도 용기가 나지 않아 아래쪽만의. 맵시 있는 학생용 구두, 발목에 귀엽게 접힌 하얀 양말, 그리고 매끈한 종아리. 그 위에는 그녀들의 교복이었 던 회색 치마폭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치맛자락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빠져나갔지만 - 난 희창이가 세게 어깨를 칠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얌마, 뭐해?" "어, 어......!" 그가 햄버거를 사겠다고 했다.마침내 그 여학교의 교문 앞을벗어나는 것이다.녀석이 문득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까 그 계집애 이쁘지? 야, 내가 누나 친구만 아니면 그냥......." 역시 희창이는 그 때부터 플레이보이 기질이 있었던 것일까?여기까지 오는 것도 한참 창피스러워 하던 그는 어느새 다 잊은 듯 의기양양하게 떠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의 여름인가, 마침 희창이의 부모님이 며칠 간 집을 비웠던 때가 있었다. 녀석은 그럴 때면 늘 그랬듯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제안했고, 워낙 거리도 가깝고두 집안이 멀지 않은 사 이였기에 어렵지 않게 허락을 얻어 그의 집에서 마음놓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난 당시 녀석의 방안에서 한참 게임기 오락에 빠져 있었다. "야, 짱이야. 그 게임 끝나면 나 불러. 내 차례니까.나 누나 방에 가 있을게." 열중한 나는 화면에 신경쓰느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끄덕였다.그리고 나서도 한 십여분 이상을 그 렇게 있었던 것 같다. "젠장. 이번 판만 깨면 30만 점인데!" 게임 오버를 알리는 얄미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아쉬운 나는, 쳇쳇 거리며 일어나 그의 차례라는 걸 알리기 위해 녀석을 소리쳐 불렀다. "야, 이짱!" 대답이 없었다.그래서 나는 희창이의 방을 나와 이방 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자기 누나 방에 있 겠다는 녀석의 말이 떠올라, 그 방으로 향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분명 내가 녀석의 집에 왔을 때만 해도, 그 의 누나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무심코 희창이 누나의 방을 연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아마 지금 상기해 보면, 그녀들은 어디 옷 쇼핑을다녀온 모양이었다.정황이 딱 그랬다. 한 명은얼추 어깨 밖으로 상의를 막 벗어 올리던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막 교복 치마 속으로새로 샀을 바지를 껴입어보는 중이 었으니까. "엄마, 꺄악!" 터져 나온 비명소리.그 놀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얼굴이 가려지지 않은 쪽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그것 이 더욱 기막힌 일.그녀였다.그 때 그 교문 앞 늘씬한 치마의 주인공, 치마를 들쳐 올리던사람은 다름 아니 라 그녀였던 것이다. 놀라 휘둥그레진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엉거주춤 보이는 하얀 속살, 허벅지.그 깊숙한 속에 언뜻 내 비치는 것은 희끄무레한...... 나는 몇 초간 그런 상태로 있다가 황급히 문을 닫고 쿠당탕, 희창이의 방으로 달아났다. "야, 희창이 너! 노크하고 들어오랬잖아!" 내빼는 그 방문 뒤로 히스테리컬한 희창이 누나의 외침이 들려왔다.그나마 다행이었을까.그의 누나는 마침 윗도리에 눈이 가려졌기에 방문을 열었던 게 내가 아니라 희창이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도망쳐 들어온 희창이의 방안, 딱히 숨을 곳도 없는 그곳에서 내 머리 속은 돌이 굴러가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마치 사진이라도 찍은 듯 방금 전 장면이 생생하게 상기되었다.틀림없이 그녀였다.늘씬했던 교복치마와 종 아리, 그녀의 옷 갈아입는 장면을 훔쳐보고 말다니. 뽀얀 살결, 희끄무레했던 그 모습은, 태어나 처음 목격한 여성의 속옷이었던 것이다. 아아, 그러나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언제 당장 그녀들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이닥칠 줄모 르는 상황, 그리고 한참이 지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숨이 다 멎을 지경이었다. 정작 나타난 건 희창이였다.지은 죄로 인해 방구석에서 오들거리고 있는 나에게, 녀석은 뭐가 좋은지 싱글 거리면서 바지 뒤춤에서 뭔가를 꺼내 자랑스레 내밀었다. "야, 이것 봐라!" 내 떨리는 손바닥에 그가 쥐어준 것은, 그의 누나와 친구들의사진이었다.대번에 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 다. 쪽 뻗은 종아리의 주인공, 방금 전 그 생머리 만큼이나 까만 눈이 놀라고 있던 그 여자. 희창이는 의기양양하게 속삭였다. "이거 몰래 가져온 건데, 이 누나 괜찮지? 그런데 나는 이 끝에 있는 기집애 스타일이 더 맘에 든다. 한 90점?" 희창이 녀석이 침을 튀기며 그 사진 속 여러 여자들을 하나씩짚어 갔지만, 내겐 그 얼굴만 보였다.오직 그 녀의 얼굴만이 내 시야에 가득 차고 있었다. "야, 나 나간다!" 방 밖에서 그의 누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화들짝 사진을 감추고 방문을 여는 희창이.그의 어깨 너머 로 그의 누나와 그 친구 누나가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그 얌전한 교복치마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 나갈 거야. 쟤 바래다 주고 온다." "맘대로 하셔. 열쇠나 갖구 나가." 그 남매의 대화가 계속되는 와중에, 나는 슬그머니 그 사진을호주머니에 감추었다.안 그래도 할 수만 있다 면 슬쩍이라도 하고픈 생각이었다. 희창이는 누나들이 나간 것을 알자 그냥 오락기 앞으로 돌아왔다.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기회를 기다렸다. 녀석이 한창 게임에서 죽을 똥 살 똥 하는 순간이 되었다.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야, 이, 이짱...... 이거......" "응, 뭐?" 그의 오락기 화면에서는 최고기록을 깨느냐 마느냐하는 찰나였다. "이 사진 필요 없냐? 그럼 내, 내가......" "어? 응? 니 맘대로 해, 앗 죽었잖아!" 아니나 다를까, 건성인 그의 대답.그 순간이 그렇게 뿌듯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교복치마의 주인과 마주칠 기회는 그날 이후에도 한 번인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해 겨울, 아마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연말이었을 것이다.나와 희창이는 그날도 그의 집에서 어울려있었는 데, 그만 그날따라 사업을 하는 녀석의 집안이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그의 어머니가 우리가 있던 방안으로 고개를 들이미셨다. "얘, 희창아. 손님들 음식 좀 차리게 방좀 비워라." "옛, 뭐라고요?" "사람들 많은 것 안 보여? 가뜩이나 바쁜데, 너희들도 놀고 싶으면 누나 방에 가서 같이 놀아.네 누나도 친구 들 불렀으니까, 같이 있으면 되잖니?"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그의 누나도 집으로 친구들을 부른 모양이었다. 희창이는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손위인 누나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사실 우리는 그 전부터 눈치는 채 고 있었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문 밖으로 소곤거리며 웃는 소리,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처음엔 희창이나 나나 별로 관심없는 척 - 실제로 희창이는 별로 관심이 없는것 같았다 - 새로 산 게임기 에만 열중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게임기에도 싫증이 났고,아무래도 문 밖의 소리에 신경이 쓰이고 있 던 중이었다. 글쎄다.난 내심 그 상황이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다.여자들은 이런 날 뭐하면서 놀까? 어쨌든 우리는 못 이기는 척 그 방으로 가야 했다.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흠칫, 놀라운 인물과 맞닥뜨리고 말았으니 방안의 여자들 중 하나는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하얀 종아리와 교복 치마의 주인공. 얼결에 끼여든 희창이와 나는 그 속에서 그녀들의 분위기에 함께 휩쓸려야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거의 제정신 이 아니었다.혹시 그녀가 내 얼굴을, 지난 번 옷 갈아입던 장면을 들켰던 것이 나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녀 들은 모종의 파티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는데, 유독 나만이 그 이유로 해서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내게 알은 체를 하지 않는그녀.꼭 지난 번 사건이 아니라 해도 분명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냥 내내 새침떼기 같은 얼굴만 하고있었다. 우리는 아마 게임 같은 것을했던 것 같다.그리고어쩌다 그녀의 손끝에 내손가락이 닿은 것 같기도하 고...... 결론적으로, 그날 이후 나는 묘해진 나 자신을발견하게 되었다.책상서랍, 깊숙한 곳의 공책맨 뒷페이지에 감춰진 그 사진을 꺼내보는 일이 잦아졌던것이다.또한 길을 가다 낯익은회색 교복치마를 발견하면, 아련한 기대감 속에 모르는 척 뒤쫓아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것이 첫사랑에 관한 추억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짝사랑이자 첫사랑인 셈, 이를테면 나는 첫사랑의 대상으로 연상의 여자를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슴앓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새 학기가 되어 미처 깜박하고는 학교에 폐품을내느라 그녀의 사 진을 잃어버렸을 당시에, 나는 무척이나 속이 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렇게 회상인지 꿈인지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다.이미 해는중천에 떠 있었고, 난 첫 수업시간에 맞 추느라 서둘러야 했다. 전공 수업이 오늘의 시작이었다.어느과이든전공이란 참 따분한 수업을 모아놓은시간들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늘 그렇듯 빼먹기 쉬운 교양수업들이 전공보다 더 재미있는 이유는 무얼까.나는 금방 무료함에 빠 져들고 있었다. 특히나 이 날은 만만한 희창이와도 같은 과목이 별로 없어서 하루종일 얼굴을 마주치기도 힘드니, 더욱 강의시 간이 따분해졌다. 어젯밤 문을 잠그지 말라던 녀석은 끝내 오지 않았다. 어찌된 걸까.아르바이트 간다는 보영이 계집애를 결 국 원샷플레이로 해치운 것일까.여관방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 걸까. 오후가 될 때까지 희창이는 코빼기도 디밀지 않았다.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설사 어제 건수를 올리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며칠, 어쩌면 몇 주라도 보영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리라.그게 바로 전형적인 녀석의 여 자 꼬시는 스타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학생회실로 향해 보기로 했다. 몇 가지의 기대감 때문이었다.희창이의 일도 그렇고, 희박한 가능 성이겠으나 다른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 사실이었다. 별일도 없고 또 명확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니지만, 은근 히 떠오르는 건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였다.뭐가됐건 조만간 그녀와 자리를 만들 핑계는 만들어 놓은셈이 니, 말 그대로 희박한 가능성으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의외의 하루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르랴.메모, 뜻밖의 메모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회실 안의 한쪽 벽에는 커다란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다. 우리과 학생들끼리 서로 메모나약속 따위를 적 어놓고 공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제일 먼저 이 화이트보드를 돌아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학회실에 들어서자마자 거의 자동으로 그 쪽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 곳 한 귀퉁이에 큼지막하게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 창희야, 이 메모 보는 대로 와줘 - 아래에는 학교 앞의 한 카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얼레, 저...... 이거 누가 적어놓은 거예요?" 하지만 메모의 주인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하여 앉아있던 선배에게물어 봤지만,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돌 아왔다. "모르겠는데 좀전에 있었을 땐 못 봤는데?" "누구지? 이짱인가?" 그러나 유심히 보니, 희창이 글씨는 아니었다.또박또박 쓴 것이 아마도 여자 필체 같았다.누굴까?혹시? 여자라면 선영이 누나일 수도 있다.그녀가술 마시자던 어제의 약속을 기억하고서 남겨놓은것일지도 모른 다. 학생회실에 앉아있는 선배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 서둘러 나왔다.어차피 수업도 마쳤으니 별다른 일도 없 었고, 누가 써놓은 것인지 몰라도 어차피 그쪽에서 알아볼 터.거기에 선영이 누나일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예감 을 하고 나니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급해졌다. 야릇한 기대와 상상에 휘말려 나는 카페 문을 열어 젖혔다.선뜻 좌석의 얼굴들을 훑어보는데 - 그런 나의 시 야에 구석자리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들어왔다.하지만,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연 뜻밖의 인물이었 다. 예지. 김예지, 자그마한 몸매에 귀여운 얼굴. "안녕? 이제 본 거야, 그 메모?" "으응...... 웬, 웬일이야?" 예기치 못했음에 다소 당황하며 엉거주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확실히 의외의 일이었다.앳된 얼굴이 마 치 두어 살 어린 여동생처럼 보이는 그녀는, 희창이 쪽이 가깝지 나랑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여학생이었다. "다행이다. 안 오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꽤 오랫동안 있었던 모양인지, 예지가 시켜놓은 찻잔은 이미식어보였다.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길래 나 는 메뉴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커피 한잔을 시켰다. 재빨리 머리 속으로 이유를 더듬어 보았다.과일 따위에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내게공적인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난데없이 나를 찾은 이유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 무슨 일이야? 메모를 다 남기고? 이름이 없길래 난 다른 사람인 줄 알고......." 그런데 대답 대신 소리 없이 웃기만 하는 그녀. "후후, 이름은 일부러 안 적었어. 왜, 누구보고 싶은 사람 있어서 그래?" 모를 일이었다.솔직히 그렇기는 했지만, 그러는 이 여자 애는 뭣 때문에 자기란 것도 안 밝힌 걸까? "그, 그건 아니구 그냥 자취방에 들어가는 길에......." "벌써?아, 맞다. 너 하숙하지!" "아냐, 하숙은 아니고...... 그냥 자취야." "아 혼자 살면 좋겠다, 방은 커?" "에이 나 혼자 있는 건데 뭐......." "그래? 방에 뭐뭐 있어?" "그냥, 책상하고...... 컴퓨터하고...... 이불......" "한번 가보고 싶다 . 나도 따로 나와 살면 좋겠는데." 예지는 뜬금 없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도대체 뭘 말하려고 이러는 것인지 의아했다. 호구조사 따위를 하려 고 부른 것은 아니잖은가. "그런데...... 날 왜 찾은 거야?" 용건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지만 그녀는 다소 망설이는 기미를 내비쳤다. "응, 그, 그냥...... 너랑은 별로 얘기도 못해 보고 해서......." 나랑 얘기를 하고 싶다고? 그럴 리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인지라, 강의실과 학생회실을빼고 별반 볼일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늘 교양수업도 같이 듣는데,얘기를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학교 안에서도 가능한 일, 이렇게 따로 부를 필요까지는없을 텐데....... 아무래도 사적인 문제라는 느낌이 들었다.의아해하는 내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예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 다. "왜? 창희 너 지금 바빠?" "아, 아니, 별로 그렇진 않은데......" 예지는 여전히 뜸을 들이고 있었다.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쉽게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문제인 듯 싶었다. "그게...... 사실은...... 창희 너한테 물어 볼 게 있어서 그러거든." "나한테?뭔데?" "음, 먼저...... 너 오늘, 내가 이런 말 물어 봤다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해 줄래?" "응?무슨 얘긴데?어떤 얘긴지 알아야 약속을 하지." 어이가 없었다.사적인 얘기도 좋지만 지금껏 그다지 속 깊은 말을 꺼낼 정도도아니었던 사이에 막무가내로 웬 약속을 하란 것인가. "안 돼, 약속 먼저 해줘.알았지?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되거든!" 무얼 묻기 위해 이러는 것일까?점점 의구심만 더해져 답답한 나는, 일단 뭔지도 모르는약속을 해버려야 했 다. "그래, 알았어.좋아, 약속!"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다짐한 후에야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그녀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 예지라는 계집 애가 나한테 사랑고백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저...... 너...... 걔랑 친하지?" 친하다니, 누구랑? 예지는 앳된 얼굴만큼이나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있잖아...... 걔. 너랑 맨날 같이 다니는......." 맨날 같이 다니는? 뭐, 그 녀석? "그래, 희창이 희창이 말이야." 이 여자애가 왜 나한테 그 녀석 일을 물으려하는 건가, 그것도 따로 불러내어?나는 대번에 심상치 않은 분위 기를 느꼈다. "희창이...... 창희 너랑 많이 친하지?" 얼씨구, 예지는 아예 목소리마저 속삭이듯 내고 있었다.의아함이야 둘째치고, 덩달아 갑갑해지는 나였다. "그, 그거야 그렇긴 해도...... 이짱, 아니 희창이 뭘 물어 보려고?"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그리고 이제는 대학 동창, 부모님까지 서로 다 아는 둘도 없는 불알친구 희창이.그 놈에게 어느 누가 무엇을 물어도 현재로서는 나만큼 알 사람이 없지만, 그런 내게 뭘 알아내려는 것일까?그런데 예지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러는 의미는...... 지금 예지가 이렇게까지 몸을 꼬며 묻는다는 것은...... 설마?그런 어색한 침묵을 깨며, 예지 가 소곤거렸다. "사실 나 희창이...... 사귀고 싶거든......." 맙소사! 나는 순간적으로 듣는 귀를 의심했다.이 엄청 순진한 아가씨가 희창이를?순간적으로 머리를 한 대 쥐어 박히는 것 같았다.그만큼 이 상황은 놀라운 것이었다.그게 나랑은 직접적 관련은 없다 할 지라도, 이 귀 엽게만 보이는 예지가 플레이보이 희창이를 좋아한다니, 아니 굳이 얘기하자면 짝사랑한다니 - 녀석 엉덩이의 점 까지 속속들이 알 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당혹한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그녀는 아랫입술마저 깨물며 얼굴이 빨개졌다.사실, 이런고백을 다른 남자애 한테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그래도 너무나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 그래, 녀석...... 나랑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니까....... 하지만 그걸 왜 나한테?" 나는 먼저 침착해지려 애쓰며 운을 떼었다.막상 그 얘기를 듣자 나로서도 그 전후사정이 그녀 못지않게 궁 금해지고 있었으니, 자상히 묻는 말투에 예지는 다소 용기를 얻는 모양이었다. "알잖아, 학기초부터 희창이랑 나...... 친하게 지낸 거." 그렇다.지난 봄 MT갔을 무렵부터 학교 안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제법 많이 목격됐었다.물론 내 가 알기로 그들 둘이 학교 밖에서도 그렇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나와 붙어다니지 않으면 예지와 있던 그였다. "근데...... 걔가 계속 나한테 잘해줬거든.학교 안에서도 잘해주고 가끔 술자리에서도 챙겨주고.하지만 난 그 냥......" 뻔한 얘기였다.이 아이의 성격으로 보아그 동안 속으로 감정을 삭여온 것이분명했다.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인 것이리라.그러나 나는 희창이를 워낙 잘 알기에 아예 예지는 그 녀석타입이 아니라 단정을 짓 고는 별달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나 이제 정식으로 사귀어 보고 싶어. 그 애랑......." 아냐, 임마! 하마터면 이렇게 소리를 칠 뻔했다.너한테 관심 있어서그런 게 아냐, 걘 원래 예쁘장한 계집애 들한테는 다 그래준다구 -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그건 맞는 말이었다.녀석에게 예지는 단지 따분한 대학생활 중 발견한 귀여운 여학생일 뿐이었다.만약 그가 다른 감정을 지녔다면 당연히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 애에게 말하기 전에 창희 니가 가르쳐 줬으면 해. 희창이에 대해서......" 어휴, 그렇다구 넘어가다니, 그 녀석이 얼마나 쫓아다니는 여자가 많은 몸인데.아니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쫓 아다니는 계집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얘기를 듣고 나니 정말이지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무얼 가르쳐 달란 것인가.그녀의 본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요즘 걔...... 누구 다른 사람 좋아해?사귀는 사람 있어?솔직히 다른 애들이 희창이는 여자친구 있을 거라고 하 길래 난 믿지 않지만......." 아뿔싸, 이 여자애 역시 조금은 요란한 희창이의사생활 소문을 들었나.어째야 하나, 생각같아서는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하지만 나로서는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니, 아무리 사실이 그러하기 는 하더라도 등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도 아닌데둘도 없는 친구희창이에게 손해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 은가? "솔직하게 대답해 줘. 부탁이야. 넌 알잖아?" "어, 예, 예지야 그, 그게......" 애매한 상황이었다.분명 옳은 일이 아닐 테지만, 왠지 지금으로선 의리를 지키는 쪽이 내 양심과는 정반대를 향하고 있었다.예지의 시선이 기대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머뭇거리며 시선을 돌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일단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 아냐 희창이...... 그 얘기들 그냥, 소문이야.워낙 그렇잖아. 매너 좋고, 잘생겼고." 마음과는 다르게, 내 입에선 거짓말이 새어나오고 말았다.그 말에, 예지는 순간적으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 다보았다. 하지만 곧 금세 다시 어두워지는 표정. "그래도 희창이 따라다니는 애들 많지 않아? 희창이가 좋아하는 애는 없어도, 그 애를 좋아하는 애들은......" 속으로 혀가 차였다.야, 이짱, 너 얼굴 덕 단단히 보는구나.이렇게 귀여운 예지까지 그런 걱정을 하다니...... "으응, 그, 그렇지 않아.잘은 모르지만, 그 녀석 사귀는 여자 없는 것 같아.진짜로......" 어느 정도는 내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꼬셔서발가벗겨보려는 보영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제외하고는 '현 재' 녀석과 사귀는 여자는 없다.그리고 보영이나마도 엄밀히 따지면 '좋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성싶었다. 아니나 달라 그 말에 예지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고 있었다.안믿을 여자애가 어디 있겠는가.결국 가장 가 까운 불알친구가 보증을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 말, 정말이지?사실은 다른 여자애들이, 걔 여자관계가 복잡할 거라고 하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몰라 - 어처구니없는 예지의 순진함은 가히 측은할 정도였다. 예지가 그 녀석의 실 상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오직 여자하면 여관방 침대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녀석이란 것을 안다면, 어휴! 이제 한껏 밝아진 표정의 그녀는, 예의 오밀조밀 깜찍한 인상으로돌아와 있었다.그리고 그것만이 찰나의 거짓말에 가슴이 찔리는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런 건...... 아냐.더 묻고 싶은 거 있어?" 배시시 웃으며 예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젠장,저 정도로 귀여운 애가 내 여자친구라면.한편으로 희창이 녀석이 부러워지면서도 반대로 왠지 모를 질투심이 피어났다.씁쓸한 기분으로 나는 남아있던 식은 커피를 단숨 에 들이켜버렸다. 그렇다면 그다지 할말도 없고, 또 할 기분도 아닌지라 그냥몸을 일으키기로 했다.그런데 그런 나를 그녀가 다시 불러 앉혔다. "참, 창희야, 잠깐만! 희창이 얘긴 아니지만 하나 더 할 얘기가 있어." 나한테? 떨떠름한 나. 또 누구 뒷조사라도 해달라는 것일까? "이건 내가 물어 보려는 건 아니구, 너한테 누가 물어 봐 달라고 한건데......" 으잉? 예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엉뚱한 질문이었다. "창희 너...... 선영 선배랑 무슨 사이야?"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선영이 누나라니, 그걸 왜? 떼려던 엉덩이가 당장에 철썩 붙여졌다. "서, 선영이 누나랑 나?가, 갑자기 무슨 얘기야?" "아, 아니...... 누, 누가 물어 보라고 해서...... 선영이 언니랑 너랑......" 오히려 내 당황하는 모습이 역효과를 낸 걸까, 도리어 예지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이 건 또 무슨 얘기인가.누가 선영이 누나와 나의 관계를 오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누, 누가?나, 난 그 누나랑 아무 관계 없었어......!" 아무 관계 없었다?그럼 희창이는 관계가있다는 건가?아차차, 말 실수라는 것을금방 깨달았다.그러나 예지는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으응, 아냐...... 신경쓰지 마. 누가 너한테 관심 있나 보지 뭐." "관심 있다고?그럼 너한테 물어 봐 달라고 한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다는 말이야?" 나는 점점 황당해지고 있었다.이 아이의 말대로라면, 희창이와 예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누군가와 내가 그 렇단 말인 게 틀림없었다.누구지? 설마 선영이 누나가 물어 보라고 시킨 건 아닐 텐데? "마, 말해 봐!누구야, 누가 너한테 그 얘기 물어 보래?" 어느새 예지와 나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안 돼.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어.하지만, 너...... 그저께 아침에 학생회실에서선영이 언니랑 둘만 있지 않았 어?" 이럴 수가!그저께 학회실 탁자 밑으로 내가 그녀의 치마속 훔쳐보는 광경을 누가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아 니면 - 맞다.선영이 누나가 내 머리를 껴안고 있었을 때!무릎을 쳤다.당시 몰려든 여자 선배들이 누군가 학 회실에 한 명 더 같이 있었지 않냐고 했다.분명 그 광경이 - 내 짐작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예지는 아예 귀 엽게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희창이 너...... 선영 언니랑 포옹하고 있었다며?" "아, 아니야, 아니야!누, 누가 그래?누가 봤대?" 이마에 식은땀까지 흐를 지경이었다.하기사, 내가 봐도 그 때 선영선배와 나의포즈가 야릇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내가 이런 오해를 받다니. "아냐, 그 땐 누, 누나가 내 머리에 혹 났나 봐주려고...... 내가 머릴 부딪혀서......" 그러나 일언지하에 예지는 두서없는 내 말을 잘라내 버렸다. "알았어.걔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까.사실은, 너도 아는 내 친구이자 우리 동기 중에 하나야.그래서 이름은 말할 수 없고, 그 애가 널 좋아한대.근데 그날 우연히 그 모습을 봤나 봐.그래서......" 날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고?우리과 여자 동기 중에?그 아침에 우리가그러고 있는 걸 들켰다구?나는 당혹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니 말을 믿을게.대신 너도 오늘 내가 물어 본 것 비밀이다.희창이한테도." 나는 넋이라도 나가버린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예지가 생긋 웃으며 일어섰다. "걱정 마.난 좋은 소식이라고 말한 건데...... 자, 이제 나가자." 어이가 없는 노릇.그저 예지의 뒤를 쫓아 카페를 나서야 했다. 다음날 아침, 푸석푸석한 얼굴로 교문을 들어서고 있는데, 뒤쪽에서 요란하게 빵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 다.은색 스포츠카가 미끄러지듯 내 옆에 멈춰섰다. 누구의 차인지 익숙하다.차창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불쑥튀어나오는 희창이의 얼굴. "얌마, 짱이야!또 지각이냐?" "그래, 임마, 그런 넌?" 킥킥, 녀석이 키득거리더니 조수석 쪽으로 차를 댔다. "타라!" "뭐야, 수업 안 들어가?" "에헤, 일단 타 봐. 할 얘기가 있단 말야." 후우...... 한숨을 내쉬며 나는 차에 올랐다.부우웅, 차가 U턴을 했다. "얌마, 넌 무려 24시간 이상이나 형님 얼굴을 못 뵈었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됐어.뻔하지 뭐, 누구 뒤꽁무니 뻔질나게 쫓아다녔겠지." "하핫, 알긴 아는구나." 보영이 얘기를 하는 것이리라.그러고 보니 그저께 그 여자애의 아르바이트하는 데까지 쫓아간 뒷이야기가 궁 금하기도 했다. "얼레...... 근데 창희 너 얼굴이 왜 그래?" 당연히 어젯밤 잠을 설친 탓이다.어제예지를 만난 이후 두 가지 고민거리가생겼기 때문이다.과연 나를 좋아한다는 여자 동기가 누굴까?저녁에 주소록까지 뒤져가며 애써 찾아 봤지만 도대체 알 수가없었다.누군 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니 일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당혹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두 번째 고민은 바로 희 창이에 관한 것이었다.뭐라 귀띔을 해주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행여 희창이에게 환상을 품고 있을 예지가 걱정이 되기도 했으니, 결국 희창이의 여성편력이 문제였다. 친구이긴 하지 만, 녀석이 예지의 그런 마음을 알고서 다른 여자들처럼 '건드리고 차 버리는'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가장 좋은 방법은, 예지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보다 미리녀석에게 주의를 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예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차라리 오해를 살 행동도 하지 않는게 낫지 않은가.그리고 만약 얘기를 하더라도, 그렇게 굴지 못하도록 단단히 다짐을 받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 그러고 보니 고민거리가 총 세 가지다.선영이 누나.나를 좋아한다는 동기애나아니면 예지가 월요일날 학회실에서 있었던 일을 과장해서 소문이라도 내면......, 혹시 이미 소문이 난 게 아닐까?선영이누나, 안 그래도 힘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 일로 더 곤경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그냥, 몰라도 돼. 그럴 일이 좀 있어." "그으래? 그럼 안 되지, 이 이짱의 제일 가는 친구가!" 희창이는 교문 밖을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얌마, 어디로 가는 거야?" "왜, 괜찮잖아.어차피 오전수업 한두 시간만땡치면 오늘도 다 오훈데...... 니 똥씹은표정을 보니, 드라이브 좀 시켜주려고 그런다.그리고 나도 너에게 새로운 소식을 보고해줄 것도 있고." 새로운 소식?어제 일로 할 말이 태산 같은 것은 나인데, 녀석이 먼저 설쳐대고 있었다. 우리 학교가 좋은 점은, 바로 그거였다.시외의 변두리여서차만 있다면 한적한 국도나 한강변으로 빠지기에 딱 좋은 코스, 역시 지금도 차는 곧바로 교외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나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그냥, 이 길따라 쭉 가다가 적당한 데에서 차 돌리고 오면 돼지 뭐." 태연자약한 그의 대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당구장이나 오락실에서 시간 때 우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수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창밖으로 스쳐 가는 경치도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조용하게 할 얘기가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예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떻게든 순진한 여자애, 그것도 내내 대학생활을 같이 할 동기에게 이 녀석이 허튼 마음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아마 날라리라고는 꿈도 못 꿀 예지일 테니, 이렇게 된 바엔 미리 얘기를꺼내리라.어젯밤부터 오늘 녀석을 보기 전까지 죽 고민 하다가 방금 결심한 사항이었다. "그래, 성공한 거냐?" "응?뭘?" "시침 떼지 마.룰루랄라거리는 걸 보니, 보영이랑 잘된 모양인데?" "아, 그거...... 아냐, 아직.좀더 공을 들이기로 했다.현지처 만들어야 하니까." 현지처라니, 의아스레 돌아보는 나에게 녀석은 찡긋거렸다. "내가 아직 얘기 안 했지? 그 계집애 아르바이트하는 데 말야." 아르바이트 - 밤 아홉 시에 나간다는 편의점? "왜?무슨 아르바이튼데?" "으응, 단란주점!" "뭐?" "있잖아, 아가씨들 나오는 단란주점.시내쪽 방향으로 가면 그런 거 몇 군데 있잖냐......." 으응? 이게 무슨 얘긴가.단란주점? "왜, 아는 언니 따라 여기로 왔다고 했지? 그 언니라는 사람이 바로 그 계집애 가게 얼굴마담이더라구." 녀석 말대로 은근히 놀라운 소식이었다.그제야 그녀의 야스러운 복장이 상기되었다.그물스타킹, 초미니스커 트, 팬티 같은 핫팬츠. 하지만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는다.내가 듣기론 그 때 그 소주방이 자기 사촌이모가 하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사촌이모라면 친 엄마의 사촌이란 얘기, 아무리 그래도 조카를 술집에 내보낸단 말인가. "물론 편의점이란 건 걔네 이모한테 둘러대는 핑계지.그래서그러더라구.나중에 소주방에 놀러 와도 절대 그런 말하지 말라고." 그래도 그럴 리가다.그렇게 밤늦게 일나간다는것을 그 이모가 모른단 말인가?그런내 어이없는 표정을, 희창이는 흐뭇한 표정으로 풀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끝내주는 건...... 그 계집애 혼자 산다는 거 아니냐." "혼자? 그럼 걔네 이모집에서 같이 사는 게 아니구?" "그래 임마.갑갑하다고 이모네집 근처에 셋방 얻어서 나와산다더라.벌써 걔네 셋방이 어딘지도 골목까지 가봤는 걸." 어쩐지, 그래서 보영이 이모는 그 계집애가 밤마다 쏘다니는 것을 모르는 거구나...... 아무리 이모네집 근처라고 해도 그 이모네라는 데가 술집을 경영하고 있으니 자기 조카라 하여도 그다지 신경을 못 쓸것은 뻔한 것 아닌가. 희창이의 얘기에 따르면, 매일같이 데리러 오는 자가용은 편의점 사장이 데리러 오고, 또 데려다 주는 것으로 되 어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 차는 그 단란주점에서 오는, 이를테면 보도사무실 차량 같은 것이고. "흐흐흐 그러니 생각해 봐.딴 년들처럼 차 끊기기 전에 집에간다, 바래다 달라, 술 잘 마시고 그런 소리할 걱 정 없잖아." 요컨대 희창이의 얘기는, 그러니 얼마든지 맘놓고 외박할 수 있는 여자다 - 그런 말이었다. 현지처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크크크 그럼 짱이 너 편해지겠다, 짜샤." "편해진다고, 뭐가?" "푸히히, 앞으로 니 자취방에 안 가구 그 계집애 집에 가서 자면 되잖아." 녀석, 야무진 꿈이랄 수밖에 없었다.그래 놓고 뒷구멍으로는 다른 계집애들을 꼬시러 다닌다...... 정말로, 내가 편해질지도 모르는 노릇이다.아예 집에 전화를 안 해도 희창이 어머니는 으레 내 방에서자고 오는 걸로 생각 하실 정도였기에, 그간 몇 차례 애꿎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대신 내가 거짓말 해대느라 말이다. "그래서 어젠 만났어?" "응, 어젠 아예 오후에 걔네 가게 가서 하루종일 놀다 왔지.그게다 어디냐.원래대로면, 나도 돈 내고 보영이 만나러 가야 하는 건데...... 그 계집애, 마담이랑 보통 사이가아닌가 보더라.하기사 그러니까 집 나와서 그 언 니란 여자 쫓아 여기까지 온 거겠지만." 지금 녀석의 기분이 좋은 건 아마도 그 때문인가 싶다. 빵빵하고 늘씬한, 녀석의 플레이보이 기질에 딱 알맞 은 여자애를 터놓은 셈이니.흘끔 눈치를 보니 아예 뭔가 그전의 애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둘 다 딱 적성에 맞는 상대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 계집애랑 볼짱 다보면 어쩔 건데?" "짜샤, 아까 얘기했잖아, 이 동네에 현지처 만들어 놓는다고." "하지만 보영이도...... 그렇다면 돈 받고 외박 나가거나......그렇지 않을까?" "푸하하, 모르지.하지만 그건 아냐.걔네 이모가 밤엔 몰라도 아침엔 꼭 집에 있는지 확인한다더라.밥 같은 건, 이모네에서 얻어먹는대.그리고 그 마담인가 하는 언니가, 자기 보고 쫓아온 애라고뒤를 많이 봐주는 모양 이던데?" 그렇긴 해도 이해하기는 힘들다.내가 데리고 살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고 그런 여자애라면 - 영 별로 다.어쨌든 배짱 하나는 두둑한 놈임에 틀림없다.운전을 하면서도그런 이야기들이 신이 나는지, 녀석은 휘파 람을 불다가 나중에는 시끄러운 댄스뮤직까지쿵쾅거리며 틀어놓았다. 정말 기분이 꽤 삼삼한 모양이었다.하지만 녀석의 말을 듣고 있는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이 녀석은 이 런데...... 지금의 내 꼴이라니.왠지 부아가 치밀어, 불쑥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이짱, 나...... 선영이 누나, 그 누나랑 술 마시기로 했다." 끼이익,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리며, 차가 갓길에 멈춰섰다.급제동에 놀란 내가 돌아보자, 녀석은 믿지 못하겠 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야, 창희 너...... 드디어 결심했구나, 야아...... 짱이야!" 금방 삐질삐질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는 녀석은, 숫제 대견하다는 듯 내 어깨까지 두드려댔다.그 호들갑을 보 니 당장 후회가 됐다.내가 괜한 말을 했지...... "그래, 잘 생각했다.샌님 같던 범생이 니가, 드디어 오랜만에 재미 좀 보겠구만!좋아좋아, 원래 그런 여자 는, 다 뻔한 거야.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구, 누가 아냐? 너의 봉사 덕분에 맘잡고 그 선밴가 뭔가 하는 옛 사랑도 잊을지? 그래, 내가 도와주랴? 지원사격?술값? 말만 해라! 큭큭, 그래서 니가 아침부터 그렇게 고민스런 표정이었구만." 제길, 이럴 줄 알았다.녀석은 마치 자기덕분에 선영이 누나를 만나게 된 것처럼, 아니숫제 그녀야 언제든 건드릴 수 있는 여자인데 내가 망설였던 것처럼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야, 이짱, 내가 언제 그 누나랑 자겠다고 했어?" 분명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비록 여기 이 녀석이 알려준 비리라는것들로 인해 그녀에게 색다 른 시각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의 얘기 그대로그 누나가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요조숙녀가 아니라 해도,적어도 내겐 술자리를 같이 한다는게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걸 원한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친구를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딱히 뭐라 꼬집어서 얘기할 수는없지만, 그 비리라는 것들도 어쩌면 전부 오 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뭐야, 너? 그런 여자 정도는 성에 안 찬다는 거냐?" "후우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너도 보영이한테 공을들이 듯, 나도 무조건 술먹이고 나서 선영이누나를 데리고 잔다거나...... 그럴 수는 없다는 얘기야.그리고, 그 누나가니 얘기처럼 닳고 닳은 여자가 아닐 수도 있 잖아.자기가 알아서 술을 안 먹을 수도 있구!" 희창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임마, 너 솔직하게 얘기해 봐.그 선배처럼 괜찮은 외모에, 그 때나처럼 단둘이 여관방에 있게 된다 면, 그럴 때도 그 여자랑 아무 일 없을 수 있다는 말이야?" 갑자기 할말을 잃었다.보영이와 비교한 것이 애초에 무리였을까. "그, 그건 아니지만......" "야, 짱이 너 고자냐?내가 알기론 아닌데?" "알아, 나도 만약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야, 새꺄,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그 선영이라는 선배, 적당히 꼬시기만 하면 알 것 다 아는 여자라고.짜샤, 넌 이 형님의 숱한 경험에 의한 판단이 틀렸을 거란 얘기냐?" "그래 그래, 나도 알아.하지만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얘기잖아.게다가 그 누나가 설사 처녀가 아니라 해 도, 그게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해도 무방하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고......" "그럼 뭐가 문제냐, 짜샤.만약 아니더라도 그런 여자랑 같이자고싶지 않은 놈 있어? 너 그래? 그건 별개의 문제야, 임마.그리고 요즘 세상에 같이 자게 되면 남녀 사이가 되는 거지, 남녀 사이가 꼭 그런거야?" 젠장, 모르겠다.원래 이런 얘기를 할 의도는 아니었는지라 괜히 녀석에게 훈계조로 나간 것 같아 머쓱해졌는 데, 문득 그는 퍽 진지한 표정으로 양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혹시, 창희 너...... 그 선배에게 관심 있는 거냐?" "뭐? 아, 아냐 짜샤!" "근데 왜 그렇게 그 여자를 감싸고 도냐?" "그, 그건......"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그랬다.자꾸 부정하며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건 내 쪽이었다.따지고 보면 희창이의 입장에서는 무거운 이야기도 아닐 성싶은데, 그런 나를 오히려 의아하게 볼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스스로도 오해를 살 만한 일인 듯하여, 그 대목에서 차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꽤 벗어난 모양인지, 한적한 길가에 지나가는 차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난 그 누나 술 먹일 생각은 없어.그 누나가 마시겠다고 하기 전엔....... 그리고 그냥 지나간 말로 했던 것뿐이 야.언제 나중에 시간 나면 그러자고 했지, 딱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구." 따라나와 보닛 위에 올라앉은 희창이에게 등뒤로 건넨 말이었다.그런데 녀석은 한참 묵묵히있다가 무슨 대 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뇌까렸다. "알겠어, 좋아....... 선영 선배, 너하고 꼭 술 마시도록 해주지." "응......?" "아냐, 걱정 마. 이상한 짓 하지는 않을 테니." 뭘 어쩔 셈인지...... 묻고 싶었지만 단념했다.어차피 술을 마시기로한 건 선영이 누나와 나이다.녀석이 끼 여드는 것은 피해야 되리라. 그제야 드는 생각이 있었다.예지, 예지의 일이 떠올랐다. "야, 이짱 너......" "와, 짱이야, 저기 좀 봐. 멋있지?" 경치감상에 빠져 있던 녀석이 내 어깨를툭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막 얘기를 꺼내려다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저런 덴 죽이겠다, 너 아냐? 사면과 천장이 거울인 데도 있고, 물침대에......"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어야 했다.그것은 요즘 한창 유행이라는 국도변의 호화 러브호텔이었던 것이다. "캬, 여기 기억해둬야겠는걸. 저런 데서 보영이랑......" 후...... 하는 수 없었다.난 예지 얘기를꺼내려던 걸 접어야만 했다.지금 한창부풀어 있는 희창이에게 그 얘기란,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마음 같아서는 예지의 속마음을 전하고 행동을 조심하라 일러주고 싶건만, 그렇다면 이 녀석은 당장에 침을 흘리며 달려들 것이 뻔했다. 희창이를 비난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 녀석뿐 아니라 여자들 중에도 그런 애들이 있지 않은가.아니, 어쩌면 더한 계집애들도 나는 알고 있었다. 솔직한 얘기로 어쩔 때는 녀석에게 묘한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이를테면 뭐랄까, 다리털 난 사내들이라면 누 구든 이 놈 같은 상상을 아니 하랴.모두들 그렇게 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다만 그들은 능력이 안 되는 것이 고, 지금 그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첫경헙 학교로 돌아온 희창이와 나는오후의 나머지 수업을 별말 없이 보냈다.당연히 나는 착잡한여러 생각에 빠 져 있었고 희창이 녀석은 녀석대로 뭔가 골몰하는 눈치였다.그러나 그다지 심각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 그 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강의실을 빠져나가 버렸다.히죽거리며 손을 흔드는 꼴을 보아하니 어디로 갈지 는 뻔한 일이다.보영이, 그 계집애를 만나러 가는 길일 게다. 나는 별반 다른 일도 없었고, 또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자취방으로 돌아왔다.일단은 설친 어젯밤 잠을 자고도 싶었고, 또 학교 근처에서 서성거린다는 것이 꼭 그 누구 - 애써 부정하지만 - 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멋쩍었던 탓이다. 그래서 저녁도 건너뛴 채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혼자 주억거리는것도 내 성미에 맞지 않았고, 이것저것 생 각하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진 건 얼마가 지나서였는지 알수 없었다.잠결에 손을 뻗어 더듬더듬, 방바닥 을 뒤지면서도 나는 언뜻 창밖을 내다보았다.사위는 이미 짙게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삘삘거리는 고물 전 화기는 한참을 찾아서야 손에 잡혔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벨은 끊기지 않았다. "예...... 여...... 여보세요." "창희니? 나야......." 으응...... 누구지?여자 목소리였다. "누, 누구시죠?" "나...... 예지야." 어, 예지구나.그새 목소리를 까먹다니.다소 정신을 차리고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응, 근데 왜, 웬일이야?" 그런데 전화가 끊어진 것일까, 무슨 영문인지 건너편에서는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그쳐 부르려는데 거꾸로 이번에는 예지 쪽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건너왔다. "저...... 너...... 이리로 좀 올 수 있어?" "지금?어......" 선뜻 대답을 망설이며 시계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꽤 늦은 시간일 성싶은데,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 그 동안 예지는 다시 침묵 속에잠겨 있었다.일단 장소라도 물어 볼까하는데, 묘한 소리가 귓가에 전해져 왔다. "흑......" 무언지 이상한 신음 같은, 희미한 소리였다. "흐흑...... 흑." 순간 나는 잠이 일거에 확 깨는 것을 느꼈다.이 소리는...... "예, 예지야......! 왜 그래?" 하지만 예지는 계속 흐느낄 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야, 김예지, 무슨 일이야?" "이리 좀 와줘, 희창이, 희창이가......" 희창이라니?희창이가 예지를 만나기라도 했단 말인가?아니다, 난 아까 그녀 이야기를 분명한마디도 꺼내 지 않았었다.게다가 그 녀석은 분명 오후에 보영이를 만나러 가지 않았는가. "너 어디 있는 거야?내가 갈게!" 얘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장소를 확인하고는 후닥닥 튀어 일어나 옷을 입었다. 뭔지 몰라도 예삿 일이 아니라는 불길한 느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엉겨붙은 눈곱도 뗄 생각을 못한 채 서둘러 달려간 곳은 어제 그녀를 만났던 카페였다.그곳 2층 창가를 바라 보며, 예지는 혼자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무슨 일이야?" 가쁜 숨을 내쉬며 다가갔는데, 이런 - 울먹이며 날 올려다보는 예지의 얼굴은 이미 화장품이 범벅이 될 정도로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는게 아닌가. "너, 너 왔구나." "그래. 너 대체......" 자리에 앉으려다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탁자 위에는 맥주병이 하나, 둘...... 일곱, 여덟.여덟 병이나 놓여 져 있었던 것이다.그것도 거의 다 비워진 병들이. "앉아...... 희창아, 우리 술 마시자." 가관이었다.그녀는 진작에 혀가 꼬인 목소리였다. "아냐, 임마! 난 창희야, 창희!" "아, 그래...... 미안 미안해, 희창이, 아니 창희야." 이런 엉망으로 취한 모양이었다.테이블에 놓인 커다란 과일안주 접시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럼 이 술들을 전부다 이 여자애가 혼자 마셨다는 얘기 아닌가?더군다나 웨이터는 내 술잔과 함께 네댓 병이 나 되는 새 맥주병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계산서에 우물 정자를 하나 더 그려 넣는 웨이터.기가 막힌 나는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가 예지가 언제부터 술 을 먹었는지 물어 봤다.웨이터는 한 시간 반 정도밖에 안 됐다고 했다. 세상에, 그 짧은 시간에 맥주를 여덟 병이나 마셨다고?그것도 혼자서, 안주빨 하나도 없이? 그래서 난 일단 추가시킨 맥주를 취소시켰다.그러자 곧 작은 실랑이가 일어났다. "가져가지 말아요. 내가 다 마실 거란 말예요." "야, 너 왜 그래?술 많이 취했어, 너!" "싫어.나 안 취했어.그러니까 내버려 둬!" 그녀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렸다.결국 웨이터는 별 한심한 꼴 다 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빈 병만을 치워야 했는데, 이 소동으로 인해 나는 카페 안 이곳저곳에서 뒤통수로 꽂히는 눈초리들을 의식해야 했다. "예지야, 너 왜 그래?" 털썩, 예지의 옆에 주저앉으며 물었지만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인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 라 내 몫의 술잔을 채우고 벌컥거리며 들이켰다. "야, 도대체 무슨......" "창희 너...... 나한테 거짓말했어....... 거짓말!" 응?거짓말?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힐난하듯 바라보았다. "흑, 희창이보다도 니가 더 나빠." "무, 무슨 얘기야 내가 거짓말을 하다니?" "나 아까 봤어.희창이와 그 여자애!" 그 계집애?순간 나는 퍼뜩 머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여자애라면 - 보영이?설마! 예지가 보영이를 어떻 게 아는 거지? "그, 그게 무슨 얘기야?무슨 여자애?" "거짓말하지 마.내가 봤어.둘이...... 둘이 같이 있는 거." 믿을 수가 없었다.난 혀가 한참 꼬부라져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간신히 달래어 다그쳐 물어야 했다. 아뿔싸, 나는 기묘하달 수밖에 없는 우연의장난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어떻게 그런일이 생길 수 있을까? 사연인 즉, 대충 이랬다. 원래 예지는, 학교 정문 근처의 주택가에서 초등학생 공부를봐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아홉 시쯤 되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 나오다, 모퉁이에 세워진 스포츠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이 근 처가 워낙 인적이 드문 변두리 교외 동네이기는했지만, 왠지 익숙한 차라서 한 번 더유심히 살핀 그녀였다고 한다.그리고 - 그 누가 알았으랴. 익숙한 그 느낌이 정확했으니, 그건바로 희창이의 차.그만 무심코돌아본 그 안에서, 마침내 그녀는그들 둘, 보영이와 희창이를 발견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난 대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예지의 과외 아르바이트가 학교 근처라면, 틀림없이 아마도 그쯤 어딘가 가 보영이의 이모네 집과 그녀가 사는 셋방이 있는 동네였던 모양이다. "후 그뿐인지 알어?난 처음에 잘못 봤을 거라 생각했어.그런데......" 연신 맥주를 들이켜며, 간간이 눈물을 훔쳐내는 예지의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둘이...... 둘이 안고 있었어.그리고 더한 일까지......" 희창이와 보영이 정도라면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 어쩌면 그짓거리도...... 아아, 아까 낮에 희창이에게 귀띔이라 도 할 것을.아니 그랬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몰라...... 너희들이 너무 미워.희창이도, 너도......" 차라리 예지에게 말해주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그랬다.난 비로소 상황정리를 할 수 있었다.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그녀의 표현은 틀린게 아니었으니, 내가 어제 그녀에게 바로 이 카페에서 해준 말은 이렇게 만 하루도 못 되어 뒤집혀버린 셈이다. 연신 흐느끼는 예지, 이해할 수 있었다.자신에게 잘해주는 희창이에게이 착한 아가씨는 몇 달 동안 은근히 마음만 주다가 이제야 자신을 열어 보이려 마음먹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학교 밖에서늘씬한 여자와 함께 있는 그가 목격된 것이다.그것도...... 연인 사이라 해도 쉽지 않을 진한 애무를 나누는 장면과 함께. 내가 예지였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목을 놓고 울어버릴만 했으리라. 부주의한 녀석, 하필이면 그 때그런 곳에서...... 제일 먼저 희창이에게대한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하지만 그가 무슨 잘못이랴.나름대로 보영이에게 충실하고, 또 그런 예지의 마음은 꿈에도 몰랐던 녀석에게 뭐라 욕할 것도 없다. 종내 그것보다는 예지를 속인 셈이 된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우선일 수밖에없었다. 기껏 친구를 위한답시 고 생각 없이 말을 한 것이다. "말해줘.왜 그랬던 거야?넌 몰랐었어?아니지?넌 알고 있었지?희창이 걔가 다른 여자 만난다는 걸." 예지는 취해서 초점이 흐린 눈으로 마주 보며 물었다. "그, 그건......" 대답할 말이 없다.몰랐다고 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렇게 된 데는 내 본의 아닌 거 짓말의 책임이 크기에, 또 다른 거짓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넌 알고 있었을 거야.넌 나쁜애야.너도, 희창이도, 둘다!" 더한 욕을 먹어도 대꾸할 수 없는 나였다. 그 때였다. 예지가 비척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나, 나가려구?"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는 나를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제지했다.아마 화장실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너 괘, 괜찮겠어?도와줄까?" 엉겁결에 나온 말이지만, 뭘 어쩔 수도 없다.나는 화장실로 향하는 예지의 뒷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쫓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았으나 용케 카페 구석의 화장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술을 깨기 위해서라면 오바이트라도 하고 나오는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저 조그만여자애가 도합 열 병도 넘는 맥주를 혼자 들이켰다니, 쯧쯧. 답답한 마음에 혼자 연신 맥주잔만 기울였다.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는 내가한심스러워졌다.저 세심한 예지 성격으로 보아 나에게 희창이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데도 퍽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지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러던 중, 문득 그제야 이상 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얼추 십여 분은 된 것 같은데, 예지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설사 토하더라도 이 정도 시간이 걸릴 것같지는 않았다.계속 화장실 쪽을 살폈지만 그녀이후로는 들어간 사람도 없고 또 나온 사람도 없었다.왠지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혹시 쓰러지기라도? 그렇다고 불쑥 들어가 여자 칸을뒤질 수도 없는 노릇,일단 그녀의 가방을 뒤져술값 계산을 하기로 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가져온 돈도별로 없거니와 그렇게라도 해서 예지가 술을 더 마시겠다고 떼를 쓰는 걸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예지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슬슬 좌불안석이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가방을 들고 화장실 쪽으로 갔다. "예지야, 안에 있니?" 똑똑, 노크를 하고 기다려 봐도 대답이 없었다.혹시나 다른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어,누구 있느냐고 재차 확 인을 했지만 여전히 조용했다.그럴 리가?분명히 안으로 들어갔었고, 나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그렇다면 - 나는 다급히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어! 예, 예지야!" 아니나 다를까, 내 추측이 들어맞은 것이다.그녀는 입구 곁세면기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은 상황이 었다. "야, 김예지! 정신 차려 봐!" 이런 - 아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당황한 나는 재빨리 숨소리를 확인했다.다행히 병원 신세를 질 상태는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어깨를 흔들며 깨워도 반응조차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그렇게 억지로 퍼마시더니, 끝내는 필름이 끊긴것인지 기절한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 을 정도였다.어째야 하나, 우선 간신히 그녀의 자그마한 몸집을 일으켜 등에 업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밖으로 나와 계단에 그녀를 앉히고는 다시 한 번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그러나여전히 축 늘어져 꼼짝 을 하지 못했다.손목시계를 보니 거의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차가 끊길 시간, 하지만 버스 막차 시간을 계산할 계제도 못되었다.그나마 아까까진 혀 풀린 소리라도 내던 예지였는데, 지금은 가냘픈 숨소 리만 낼 뿐 이었다. 난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정신이 있을 때 집이 어딘지나물어 볼 것을, 이제는 택시를 탄다 해도 어 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다시 그녀를 등에 업었다.사실 이럴 때 내가 곧잘써먹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그건 다름 아 닌 희창이에게 전화 한 통을 때려주는 것.그러면 녀석은 불원천리하고 차를 몰고 달려와줘서그렇게 몇 번 그 의 집에서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건 운명의장난일는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지였으니 이번엔 아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자취방이 있는 후문 쪽으로 발걸음을돌려야 했다.뾰족한 방도가떠오르지 않는다.그렇다고 이 여자애를 낯선 여관방에 재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걸으면서도 어깨 너머로 계속 예지를 불러보았으나, 아예 작정한 듯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그녀를 업은 채 가까스로 내 자취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곧장 내 이불 위 에 뉘어졌다. "야, 예지야! 정신 좀 차려 봐!" 집에 전화를 걸어줄까? 하지만 단념해야 했다.오밤중에 사내에게서 데려가란 전화를, 그것도 그 남자의 자취 방에서 건다는 것은 아마 자살신고나 매한가지리라.급해진 마음에 뺨을 두들겨도 겨우 우웅거리는뜻 모를 소 리만 내뱉는 것이 고작인 예지는, 이미 완전히 감각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뭘 어째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별수 없이 나는한숨만 내쉬며 예지 곁에 쪼그려 앉았다.고개 를 들 힘조차 없는지 늘어진 그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옷을 다 입은 채 잠들었기에 나로서는이불이라도 덮어 주는 것이 최선일까 싶은데,그제서야 예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그리고 거기엔 좀전까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정황이 있었다. 아주 엉망이었다.예지는 꼭 끼는 청바지에 위에는 헐렁한 남방 차림을 하고있었는데, 어땠겠는가, 지저분한 화장실 바닥에서 한바탕 뒹굴었으니 흙탕과 얼룩이 바지고 윗도리고 할 것 없이 군데군데묻어 있었다.더군다 나 아래 위 전부 밝은 색 일색으로 입고 있어서 더 못 봐줄 지경이었다. 도저히 그 상태로 잠들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이 젖은 옷들로 인해 밤새 탈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야, 일어나 봐!김예지!" 재삼 깨워보아도 소용이 없었다.그렇다면 어쩌란 말이냐.다른 길이 없었다.행여 내이불마저 더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엄청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피치 못하는망설임, 그것은 아무리 황망한사건의 와중이었다 하여도 지금 옷을 벗겨줘야 하는 대상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이때까지, 아직 제대로 여자 옷 한 번 벗겨본 적 없는 나 -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어쩌랴.어쨌든 벗겨주기는 해야 할 텐데......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예지의 옷자락에 손 을 대었다.일단은 헐렁한 윗도리부터 벗겨 내기로 했다.다행이었다. 예지는 밑자락을 바지춤 속으로 집어넣지 는 않았고, 안에 얇은 속옷 - 뭐라더라, 슈미즈? - 까지 받쳐입고 있었다. 하나 하나, 조심스레 단추를 끌렀다.어깨를빼내고, 한쪽 팔씩 차례차례 뽑아냈다. 이제 살짝 그녀의 등을 받쳐 올리고 밑에 깔린 부분을 치우기만 하면 된다.그런데...... 그럴 줄 알고무심코 내려다본 아래에는 의외의 광경이 있었다. 어쨌든 수월하게 팔까지는 벗겼건만 그 안, 바로그놈의 속옷이, 그렇게 얇은 것인지는 미처몰랐었다.하얀 색 티슈 같은 그 천은, 그러니까 예지의 상체에 걸치고 있는 마지막 옷가지까지 본의 아니게 내비치고 있었던 것 이다. 마지막 옷가지, 그것도 물방울무늬가 선명한 브래지어.일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녀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왠지 가슴이 뜨끔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오늘 내 손으로 직접 여자의 속옷을 벗기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 민망한나로서는 부디 이러고 있는 장면 중에 예지가 깨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짐짓 고개를 돌려야 했다.그리고 그렇게대충 윗도리를 밀어놓고 나서야, 나는 다시 드러누운 예지 쪽을 흘끔거릴 수 있었다. 미치겠군 - 아마도 그 카페 화장실에서 내게 발견되기 전까지 예지는 내내 세면대를 부둥켜 안고 있었던 모양 이었다.무슨 얘긴고 하니 즉 그 속옷까지도 젖어있는 상태로서,워낙 얇아서인지 이대로 입고 자다간 정말 감 기라도 걸릴 정도로 흠뻑 젖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옷을 입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그렇다면 속 옷까지 벗겨줘야 한다는 얘긴가? 기가 찼다.이걸 벗긴다면, 이제 예지의 상반신에 남는 것이라고는 달랑 저 물방울무늬 브래지어밖에 없게 된 다. 여자 속옷은커녕 블라우스 단추 하나도 건드려본 일 없던 주제고 보니, 허리춤부터 그속옷을 벗겨 올리는 내 손끝은 부들부들 떨릴 수밖에 없었다.묘했다.전후사정상 분명이래야 하는 게 당연한데, 왜 이리 나는몹쓸 짓을 하는 놈처럼 가슴을 콩닥거리고 있는 것일까. 예지의 상태로 보아 좀처럼 깨지는 않으리라 믿고,나는 두 팔을 만세라도 부르는 것처럼 위로뻗게 해야 했 다.요행히 여자의 속옷은 그 끝자락이 길지 않고, 남자 것처럼 착 달라붙지 않는 것 같았다.하여 자기 속옷이 끌어 올려지는 동안에도 마치 인형처럼 미동도 않는 그녀가 차라리 고마울 정도였다. 여차저차, 예지의 머리 위로 그 얇은속옷이 빠져나왔다.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바지뿐이다. 그러나 나는 훅, 하고 큰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맹세코 나는 그녀의 바지를 살펴보려 했을 따름인데, 나도 모 르게 눈길을 그녀의 상체 쪽으로 보낸 순간, 비록 브래지어에가려져 있다고는 하나, 곧 비어져 나올 것처럼 풍 만한 우윳빛 젖가슴을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미처 몰랐었다.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 - 뭐랄까, 마치 숨겨둔 비경을 발견했다 고나 할까.나는 몸집이 작을수록 글래머와는 거리가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그렇게 그녀의뽀얀 살결은 티 하나 없이 봉긋한 가슴 선을 지나 완만한 하복부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순간 엄청난 상상을 하고 있었다.만약,만약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할까.그 래, 희창이라면 어쨌을까.여기 이 예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녀석이라면...... 아니야,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그랬다면 이미 능수능란하게 나머지 옷가지는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졌을 테고, 그 다음엔...... 상상만 해도 뻔하다. 귓가에 어지러이 심장소리가 쿵쾅거렸다.마치 내 이성과 본능의 마찰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래서 임마, 너 솔직하게 얘기해 봐. 그 선배처럼 괜찮은 외모에, 그 때 나처럼 단둘이 여관방에 있게 된다면, 그럴 때도 그 여자랑 아무일 없을 수 있다는 말이야?' 낮에 희창이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제와 오늘은 참으로 황당한 날이 아닐수 없었다.그런 녀석의 생각을 애써 부정했던 내가,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되다니. 혹시...... 살짝 만진다면, 예지가 잠을 깰까?아냐, 깨지 않을 거야.아아, 젠장.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살 짝 손만 대는 정도라면 -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아니, 나도 모르게 이미 내 손바닥은 그녀의 가슴 위를 향해 가고 있었다.따뜻한 온기가 아직 그녀의 젖 가슴에 닿지도 않았는데 손끝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비록 천조각이 그녀와 나 사이에가로놓여져 있는 전부이 기는 했지만, 난 실제 속살을 만지고 있는 것보다더 아찔함을 느끼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에도 그녀가 깰 것 같았다.그러나 귓가에는...... 변함없이 예지의 숨소리만이 쌔근거 린다.모를 것이다.그녀는 모를 것이다.지금, 살짝이라도 더 진행시킨다 해도- 예지의 브래지어 위에 놓인 손끝이 파리하게 저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으응...... 엄마......." 난 정말 그 순간 내가 까무러쳤다고 생각했다.후닥닥, 엄청나게 놀란 손을 등뒤로 감추며, 질끈 감은 눈도 모 자라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 안 돼. 내 손아귀 힘이 너무 세었던 거야.맞아, 여자는유방을 세게 쥐면 아프다던데 - 식은땀까지 흐르 고 있었다.누가 보았다면 우스울 모양새였다.타조들이 맹수에게 쫓길때 그 큰 몸뚱이는 내버려두고 고개만 모래 속에 파묻고 숨는다더니, 이렇게 여자애의 상체위에 타고 올라앉아 겨우 황급히 손만 숨길 줄이야. 어......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난 아직 그녀의 젖가슴을 쥐지도 않았었다.그럼 이건 -떨리는 눈꺼풀을 실 눈처럼 떠보았다.물론 그것은 예지의 잠꼬대였다.몸을 뒤척이고 있었던 것이다. 후유, 엉겁결에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원망스러웠다.나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그녀의 봉긋한 예쁜 가슴 을 탓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을 것인가.분명 못된 인간은 나였다.아무리 깨어지기일보직전일지라도, 예지가 좋 아하는 사람은 희창이였다.비록 내가 술을먹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불알친구와의 악연을 빌미로 술에 취한 것이다.그런데 그것을 기화로 삼다니, 오전에 뭐라고 호언했는지 나는 상기해야 했다. 이 상황에 예지를 어쩐다는 건, 그렇다면 술기운을 빌려 선영이 누나 같은 사람과도 얼마든지 위험한 짓을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 르단 말이냐.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아무리 단둘이 한이불 위에 있을지라도, 내손으로 이 여자애의옷을 벗기더라도, 나는 내 할 일만 해야 한다.딴 맘 먹으면 안 된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예지를 돌아보았다.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아랫도리, 청바지 차례. 사실 그녀의 바지 쪽이 더럽기는 더했다.나는 엉거주춤 그녀의 하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심스레 허리를 굽히고, 일단 버클을 끄르고 나니 남자와는 달리 왼쪽으로향한 청바지의 단추와 지퍼부분이 보였다. 하지만 난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고있었다.원래 여자들이란 남자보다도 훨씬 더꼭 끼는 바지를 입는 법, 예지의 잘록한 허리와 바지가 너무나 꼭 맞아서, 그녀의 맨살결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허리춤 사이로 손가 락 하나도 들이밀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치마를 입고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일인데, 이 타이트한 청바지의 단추를 끄른다는것은 곧 그녀의 하복부에 근접해서 더듬어야 한다는 얘기였다.당혹스러웠다.방금 전 내 시야를 어지럽힌 예지의 앞가슴은 이 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찰나에 까딱 잘못해서 이 여자애가 눈을 뜬다면 엄청 황당한 일이리라.상체는 브래지어만 남았고, 하체는 막 바지를 벗기기 일보직전 - 누가 보면 술 취한 아가씨 덮치려고 하는 짓거리라 해도 꼼짝없을 상황. 폭탄처리반에서 지뢰제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하복부에 고개를 숙이고 조금이라도 내 손과 그녀의 속살에 닿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그곳은 가장 은밀한 곳에서 채 몇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부근인 것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 온 신경을 집중하여 바지단추를 끄르자, 이마에 땀방울마저 맺힐 정도였다.조심스럽 게 예지의 나머지 지퍼를 끄르고 바지를 끌어내려 주었다.워낙 꽉 조이는 스타일의청바지여서 그녀의 둔부에 서 바지를 끌어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니,바지단추를 끄르는 것보다 이쪽이 사실 더 힘들었지만, 일단 골반을 벗어난 바지는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쉬이 벗겨지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때까지도 예지는 잠깐 눈썹을 찡그린 것 외에는 아무런 기별도 보이지않았다.슬그머니 눈 을 위로 치뜨니 바로 눈앞에 하얀 예지의 하복부와 그 매끄러운 정중앙의 우물, 배꼽이 보였다. 아아, 그러나 그것이 내 실수였다.그 순간에 나는 한 번 더 갈등에 빠지고 만것이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 을 내 방안, 바지단추까지 풀러도 정신못 차리는 여자애.그것도 무방비상태인반라로 내 눈앞에 누운...... 그 유혹은 아까보다도 배는 더 강했다.나는 부끄러운 속옷 차림의 예지를 앞에 두고 무한한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 었다.미칠 노릇이었다.한 세트임을 알 수 있는 앙증맞은 물방울무늬 팬티가 시야에 들어왔다.통통한 예지의 몸매에 잘 어울리는, 가장 비밀스러운 곳을 가린 그 귀여운 헝겊조각. 나는 다시 시험에 드는 것만같은 기분이었다.일촉즉발의 상황 - 그러나 그 때 나는 생각을 즉각멈추어야 했다.전혀 내 도덕심이나 이성의 노력과는 무관한 광경 하나가,내 안의 욕구를 한꺼번에 사라지게 했던 것이 다. 그것은 그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한기를 느꼈는지 그녀가뒤척이느라 우연히 드러낸 비밀이었다.아니 그 게 비밀이란 것도 그 즉시는 몰랐던 일로, 사실 난 그처음 보는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한 참 후에야 어 디선가 보았던 광고를 떠올렸던 것이다. 날개가 달린 - 그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나는 망치로 머리통을 맞은 느낌이 들었다.이건 실로 엄청난비밀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색다른 차원의 '비리'로서, 만약 이렇게 예지와밤을 보낼 기회가 없다면 제 아무리잘난 희창이라도 평생 알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여자의 비밀, 그랬다.예지가 여자라는 사실이 다시한 번 강 하게 내 머리 속에 주입되고 있었다.그리고 그 여자라는 단어는 내 흐트러질 뻔한모든 행동과 생각들을 일거 에 멈추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향기가 풍겼다.뭔가코끝에 진한 냄새를, 그제야 나는 느끼 고 있었다.기억을 더듬어, 그 향내를 떠올릴 수 있었다.성숙한 여자의 향기라 해야 할까.아이였을적 엄마나 사촌누나의 무릎에 안겼을 때 풍기던 그 희미한 살 냄새...... 누워있는 예지에게서 난 그것을 맡고 있었다. 난 그 즉시 어떤 꿈에서 깨어나는, 아니 거꾸로 꿈에 빠져드는것만 같았다.물론 다 자란 지금은 그것을 달 리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훌륭히 기억할 수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묘하게도 내 아슬아 슬했던 고민을 조용히 삭여주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 다음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마침내그녀의 바지를 벗겨내고서, 무슨 큰 역사라도 치른 것처럼 잠시 숨을 돌리며 난 다시 한번 찬찬히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이번엔 결코 다른뜻이 아니었 다.아까 혼자 쓰러졌을 때에, 혹시 상처라도 입었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숨소리만 내고 있는 예지의 얼굴이 왠지 귀엽게 보였다.비리까지는 아니겠지만, 본의가 아닐 그 광경 까지 보게 된 나는 멋쩍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고, 벗겨낸 옷가지들을 챙겨 들었다.지금 빨면, 대충 내일 낮이면 마르리라. 물빨래라도 해서 얼룩 정도는 지워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아직 내가 잘 시간은 아니었다. "꺄아아악!" 뭐야, 무슨 일이야!벌떡 허리를 세우던 나는 보기 좋게 앞이마를 의자 모서리에 부딪혔다. "어디야, 여기 어디야!" "아야야...... 아후......!" 엉겁결에 방바닥을 더듬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예지, 맞다, 예지 - "난 몰라, 창희, 창희 너 어떻게 한 거야!" 후닥닥, 게슴츠레한 시야를 맞추려 양미간을 찌푸리자 비로소 상황 판단이 됐다.맞다. 어제 옷가지 빨고 나서 양말만 벗고 예지 곁에서 새우잠을 잤었지...... "가, 가까이 오지 마!" 쿡쿡 쑤시는 앞이마를 문지르며 돌아본 나는,그제야 그녀의 비명소리에 대한 감을잡을 수 있었다.예지는 어느새 벽쪽으로 바싹 등을 붙이고는, 있는 이불 없는 이불 다 끌어안고서 몸을 가리기에 바빴다. "어 예, 예지야 그, 그게 아니라......" "아악!" 철썩, 정작 비명을 질러야 하는 건 나였다.멋도 모르고다가갔던 나는 순간적으로 한쪽 뺨을 얻어맞아야 했 다. "아후후, 야 너...... 그, 그게 아니라니깐!" 그 와중에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팬티와 브래지어만 남긴 채 홀딱 벗겨져 있 고, 곁에는 남자가 누워있다 -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젠장, 이건 무슨 영화장면 아닌가. "엄마, 나 어떡해...... 흑." 허 참, 예지마저도 이런 황당한 상황에 일조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울고 있으니 그러면 나는...... 이 장면에서 담배라도 빼어 물고 '괜찮아, 미안해, 실수였어, 내가 책임질게' 이래야 되는 건지.각본이라도 짜여져있던 것처럼 예지는 눈물까지 떨어뜨렸다. "아, 아냐, 예지야.내 말 좀 들어 봐." "싫어, 저리 가!오지 마!" 환장하겠군.분명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지만 이 여자애가 오해하고 있는 그런 일은 어제 분명 없었지 않았 나.그렇지만 내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이 아가씨는 자기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단말마적인 비명 을 질러대고 있었다. "얌마, 김예지!왜 그래?내게도 해명할 기회를 줘야지!" 그러나 예지는 이불에 고개를 파묻은 채 계속 흑흑거릴 뿐이다.제길, 뭐라고 얘기해야 한담. "몰라...... 엄마 흑." "야 임마 너 지금 뭘 오해하나 본데, 그게 아니라구.잘 들어.니 옷은...... 너 어제 화장실에서 쓰러졌길래 내 가 갖다가 빨았단 말이야." 모르겠다.어떻게든 할 얘기는 해야 했다.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오죽했으면 입술에침이 다 바짝바짝 마르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너 왜 우는지 몰라도 니가 울 만한 일은 없었어.정말이야.예지 너 어제 술마시고 쓰러진 것 기 억 안나?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너도 알잖아, 확인해 봐!" 다소 진정이 되는 것인지, 들썩거리던 예지의 어깨가멈추었다.글쎄,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하더라도 그걸 직접 확인할 수 있는건가?그리고 어제 알기로는 틀림없이......어쨌든 이불 속에서 확인을 했는지 어쩐지 몰라 도, 여전히 이불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그녀는낮게 울먹이는 목소리를 냈다. "흑...... 저, 정말이야?" "휴우 그렇다니까.걱정 마, 거짓말 아니라구.난 어제 그냥 니 옷만 벗겨주고 잤어. 기억나?너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 내가 업고 왔잖아.그래서 그 더러워진 옷들 빤 거란 말이야.봐, 저기 니 옷들 걸려있는 걸......" 그제야 예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있는 아직 덜 마른 자기의 청바지와 겉옷을 쳐다봤다. "그, 그럼 여, 여긴 어디야?" "내 방이야.내 자취방." 간신히 내 말을 알아듣는 눈치였다.그녀는 눈물 얼룩이그대로인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자기 얼굴이 엉망일 거란 짐작을 했는지 다시 고개를 이불 뒤로 숨겼다. "차, 창피해...... 보, 보지 마." "어이구, 그러니까 왜 그렇게 술을 퍼마셔? 어제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제야 그녀는 침착함을 찾는 모양이었다.상황이 그나마 정리가 되자, 나는 담배를 찾아피워 물었다.애꿎 은 이마와 뺨만 화끈거렸다. "미, 미안해.창희야 그럼 니가 내 옷들......" "그래.내가 다 벗겨줬어.하지만 다른 짓은 안 했어.맹세해." 다른 짓을 안 했다, 라는 말은 정확히 얘기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뭐 표시가 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난 몰라.그, 그래도...... 하잉, 내가 왜 그랬지." 다소 경계심이 풀어졌는지, 예지는 대충 눈가를문지르고 여전히 앞 가슴에 이불을 껴안은채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낯빛이 파래졌다.깜빡 잊고 있던 부분에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근데 나 어제 아무 일 없었지?너 그냥, 내 속옷만 본 거지?" 아차, 다른 것 - 그게 무얼 얘기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어제 발견한 그 모습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곤 란했다.자의건 타의건 시치미를 떼야 하나? "으, 응...... 다, 다른 거라니?" "너, 너 정말 다, 다른 건 못 본거지?그렇지?" "뭐...... 뭐 말이야?" "그냥 대답해 줘!제발, 저, 정말 너 다른 것 못 봤어?" 젠장, 그런 식으로 물으면 뭐라 대답하란 말인가.사실 몰랐을 수도 있는 일인데. "사실대로 말해줘, 응?너, 너 다른 건 모르는 거지, 응, 그렇지?" 다그치는 걸 보니 내가 상상하는 것을 묻는 게 틀림없었다.그러니까 지금 예지는소위 자신의 '그날'과 관련 된, '생리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느냐고 내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더 이상 둘러대기는 싫었다. 에라, 모르겠다. 보긴 봤으니까 사실대로 얘기하자. "저...... 그게...... 그러니까....... 뭔지는 알겠는데...... 알아.무슨 얘기하는 건지......." "엄마, 나 어떡해!"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여자들이 '마술'에 대해서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그 때 당시엔잘 모르고 있었 다.그 일은 자기 엄마한테도 말하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워한다는데,반나체를 보인 것도 모자라 별 상관도 없 는 남자애한테 자신의 엄청난 비밀까지도 들킨 셈이었으니, 여자로서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던 게다. "난 몰라, 죽어버릴래, 창피해!" 아차, 그 얘기는 하지 말 것을.울지는 않았지만, 예지는 아까보다도 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그러나 어쩌랴, 이미 다 드러난 일이었다. "죽고 싶어, 엄마." "예, 예지야...... 그, 그러지 마." 상황이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뭐, 뭐 어때.우리가 한두 살 난 어린애도 아닌데......" "아냐, 넌 몰라.나 이제 어떻게 살아 아앙." 약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난 어쩔 수 없이 예지를 달래줘야 했다.나는 어느새 조금 전만 해도 곁에 가기만 하면 혀 빼물고 자살이라도 할 것 같던 그녀와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다가앉아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만해, 예지야 어쩔 수 없던 거잖아.미안해.옷이 너무 젖어버려서 벗겨주다가...... 그리고 그건, 내가일부 러 본 게 아니었어.정말 미안해." 예지는 내가 자기와 같은 이불을 쓰고 곁에 붙어있는데도 미처 신경 쓸 겨를마저 없는 모양이었다.화장품 향 기인지 향수인지 모를 상큼한 냄새가 풍겨왔다.묘한 기분이었다.어젯밤의 야릇한 기분이 다시 피어나고 있었 다. "신경 쓰지 마.그건 너랑 나만 아는 거잖아.우리가 어린애도 아니구....."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했다.이 여자애가 부끄러워하는 만큼이나, 나도 이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어쨌든 한참을 그렇게 낙담하고 있던 예지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슬그머니 내 팔에서 자기 몸을 빼냈다. 그제야 자기가 속옷차림으로 앉아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나는 괜히 계면쩍은 생각이 들어헛기침을 하며 그 애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저기, 일단...... 세수라도 해.너 어제부터 너무 많이 울었어." 아까보다도 더 풀이 죽은 듯한 예지는, 의외로 그런 내 말에 고분고분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알았어......" 글쎄, 그런 비밀을 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예지는마치 내게 커다란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순 순히 내 말에 따르고 있었다.잠시 부은 얼굴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잠깐 고개 좀 돌려줘." "그, 그럴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데도 다시 한 번 다짐을 시킨다. "돌아보지 마.그리고...... 거기 내 가방 좀 줘." 등뒤로 가방을 내주자, 그녀는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찾더니 살그머니 일어났다. "저...... 화장실이 어디야?" "방문 앞, 왼쪽 문." 다행인 것은, 이 다세대 주택의 옥탑에는 내 방 하나만 있다는 사실이었다.즉 누군가 나를 일부러 찾지 않는 한 여기서는 주인집 아주머니나 다른 사람들을 만날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풀썩, 예지의 몸을가리고 있던 이불 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난 어제 빨아놓은 그녀의 옷가지들을 살펴보았다.탈수를 했건만, 만져보니 아직 두어 시간은 더 있어야 마를 것 같았다.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예지는 여기 있어야 된다는 얘긴데...... 고민스러운 내게 예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희야 여기 있는 것 써도 돼?" "어, 응.아마 대야 옆에 새 비누랑 칫솔이랑 있을 거야."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일이었다.사내녀석 혼자 사는 자취방, 뭐하나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을 리가 없을 터 인데 그런 지저분한 모습을 여자한테 보여야 하다니.이사올 때어머니가 다녀가신 것 빼고는, 처음 여자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아니, 여자와아침에 같이 일어난 것도 처음인지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 쪽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잠시 전해오더니, 얼마 후 노크소리가 울렸다. "나 예지야...... 들어갈게." 난 잠자코 다시 고개를 돌렸다.부스럭대는 소리가 나고 예지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돌아봐도 돼?" "응." 예지는 아까처럼 이불로 몸을 가린 채였지만, 언뜻 보니 눈은 약간 부었지만, 뽀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 "응...... 창희 너는?" 미안한 생각이 드는지, 그녀는 생기를 찾았음에도 조그만 목소리였다. "있잖아.옷 말야...... 아직 덜 말랐는데." "괜찮아.그것보다...... 지금 몇 시야?" 나는 그제야 탁상시계를 올려다보았다.이미 해가 중천에 뜬 늦은 아침이었다. "열 시가 넘었는 걸.너, 집에 연락 안 해도 괜찮아?" 예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폭, 쉬었다. "모르겠어.어차피 늦은 건데...... 이따 들어가서 혼나겠지, 뭐." 갑자기 내 잘못은 아니지만 예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틀림없이 집에 들어가면 무단외박으로 엄청 혼이 나리라.헌데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예지가 소곤거리듯 말을 했다. "집엔...... 어차피 기다릴 사람도 없어.사실은 나,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중학교 졸업반일때 두 분이 갈라 서셨어.그래서 지금은 새엄마랑 같이 살아." 이혼?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빤 외국 출장 중이셔.하기야 집에 계셔도 얼굴 보기 힘들지만.참, 그러고 보니...... 이 얘긴 우리 과 남자 애들 중에 너한테 처음하는 거구나.비밀이었는데......" 그랬다.내가 예지라도, 이런 얘기를 쉽게 할 수는없을 성싶었다.어쩌면 이런 것이 오히려 예지의속살을 훔쳐본 것보다도 더 비밀스러워야 했을 일아닐까.왠지 예지의 환경과 희창이에 대한짝사랑이 연관되어지고 있었다. "새 엄마, 그 여자는 아뭇소리 못해.난 우리 아빠 외동딸이니까." 그랬구나.모르고 있던 얘기였다.그 여자라.아무리 새엄마라지만 이런 표현을 쓰는 걸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다지 화목함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왜? 새 엄마한테선 동생들 없었어?" "응.아예 애를 못 낳는 여잔가 봐." 모를 일이다.꽤 조신한 여자애 같은데, 자기 가족얘기를 너무 함부로 하는 것 같았다. 별로유쾌한 화제가 아니여서 그런가? "저, 근데 예지야, 어제 일 얘긴데......" 갑자기 우울한 생각이 들어 나는 애써 웃음을지어 보였다.살짝 돌아보는 예지의 시선을 짐짓피하며 나는 어차피 마무리지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너...... 희창이랑은 어떻게 할거니?" 그러나 이 이야기가 그녀를 더 우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순식간에낯빛이 바뀌며, 한층 더 슬픈 표정이 되 었다. "희창이...... 모르겠어.단념해야 할까 봐." "말도 안 돼, 그 녀석......" 하지만 말문이 막혀버린다.아냐, 어제 니가 봤다는 계집애는 그저 닳고닳은 여자애일 뿐이야 - 이 말이 당 장에라도 튀어나오려 했지만, 어떻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란 말인가.보영이, 그 여자애보다여기 예지가 훨 씬 더 순수하고 착하다 하더라도, 섣불리 뭐라얘기하는 경우엔 더 큰 오해가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냐, 됐어.니 입장 이해해.나 같아도 그렇게 얘기했을 거야.희창이에 대해서...... 그리고 어제 걔랑 같이 있던 여자...... 나보다 훨씬 예쁘고 섹시하던 걸, 뭘." 이럴 수가.역시 착하디 착한 예지였다.그러나 무릎을 안고서 씁쓰레한 웃음으로 텅 빈 시선을 방바닥에 주 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가슴 한 귀퉁이가 찡해져 왔다. "괜찮아, 창희야.어차피 내가 희창이한테 먼저 사귀었음 좋겠다고 얘기한적도 없는 걸...... 그보다, 아...... 바 지라도 입어야겠다.대충 마른 것 같은데." 씁쓸한 기분에, 난 그녀가 옷 입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일어서 창가로 갔다. 뭔지 모를 응어리로, 말도 못 꺼낸 그 심정이 가슴에 와 닿는 것만 같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나로서는 저 순진한 아이가 고맙기 그지없을 따 름이었다. "잠깐만...... 돌아보지 마, 창희야......" 뒤에서 주섬주섬,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멋, 꺄악!" 이건 예지의 목소리였다.그리고, "야, 짱이야, 아직 자냐?" 예지의 비명과 동시에 들려온 것은 바로 희창이의 목소리였다.그리 고 방문이 확, 열어 젖혀진 것도 그 때였 다. 꺄악하는, 예지의 이 비명이 들렸을 때에 나는 칼 같은반사신경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그 상황은 이미 예지 가 돌아보지 말라고 한 말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는데, 하지만그 고개를 돌린 순간 다시 한 번 창희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내 자취 방의 방문이 너무나도 힘차게 열린 것이다. "야, 짱이, 앗!" 정말, 이 순간의 기억은, 만약 내 뇌의기능이 컴퓨터에 맞먹는다면당장 지워버리고픈 순간이었다. 그러나 거꾸로, 내 머리의 하드 드라이브에 영구저장이라도 된 듯, 이 상황은 너무나 또렷하게남았다.몇 초간이 수년 처럼 느껴지도록,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사진이라도 찍힌것처럼 꼼짝 않고 떠오르고 있었다. 당당하게 방문을 잡아당긴 한가운데에 버틴희창이는, 나와 예지만큼이나 기겁을하고 있었다.창가에 얼추 옷을 입고 서있는 나, 방 한 가운데에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막 한쪽 다리를 청바지에 걸쳐 넣고 있던 예지. 마주 보는 희창이 녀석과 나는 희한한 표정일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에 둘을 번갈아 쳐다 본 예지의 입에서 다 시 한 번 '꺄아악!' 하는 비명이울려 나왔다.그리고 그녀는 정말 재빨리,아니, 한쪽 발을 집어넣은 청바지에 걸려 넘어지듯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감추어 주었던 이불 속으로 허둥지둥 몸을 날렸다. 이 모두가 일어나는 데에는, 아마 채1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은수 시간보다도 긴 침묵의 순간이었다.그리고 이 황당 한 광경을 먼저 깨뜨린 것은 희창이의 당황한 목소리였다. "어, 저...... 미, 미안...... 나, 난 짱이가 학교에 안 와서...... 너 찾다가......" "엄마, 난 몰라!" 녀석은 그제야 자기가 아직도 방문을 활짝 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이불을뒤집어쓴 채 사시나 무 떨 듯 몸을 떨고 있는 예지를 확인한 희창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방문을 빼꼼이 닫아 주었다. "아...... 예, 예지야, 미안...... 바, 방해 안 할게." 방해 않는다? - 그가 방문을 닫고서야 잠깐 동안 멍청했던나는 희창이가 방금 닫은 방문으로 후닥닥 튀어나 갔다.안 된다!이 오해는 막아야 했다.누가 보아도 황당했을 모습 아닌가.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는 사내녀석, 그 등뒤에서 속옷차림인 채 막 옷을입는 여자애라니.다름 아닌 밤샘 정사 후의남녀, 그 아침장면 아닌가. "야, 야! 이짱!" 옥외 계단 중간께에서야, 나는 간신히 희창이의 어깨를 돌려세울 수 있었다. "얌마! 그, 그냥 가면 어떡해?"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녀석은 뜻밖에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푸히히...... 알아, 알아.새꺄.내가 언제 소문내든?" 소문, 소문이라고......? 희창이 놈의 오해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야, 이짱, 지, 지금 니가 본 건......" 입술이 타들어가듯 바싹거렸다.하지만 가쁜 목소리는 의지와 달리 허둥대기만 했다. "그, 그게 아냐! 어제 예, 예지가 술을 마시고서......" 그러나 희창이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방안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출 뿐이었다. "근데 야아! 창희 너 보기보다 능력 좋은데?" 젠장, 그게 아니야!하지만 무엇부터 설명을 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머리 속이 온통캄캄했다. 예지의 짝사랑, 술 마신 경위, 들켜버린 보영이, 업고 온 까닭 -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거지?그 런 내 모습을 보며, 녀석은 징그럽게 한쪽 눈마저 찡긋거렸다. "그래, 좋아 좋아.설명은 나중에 들을게.지금 나하고 그런얘기할 타이밍이 아닌 것 같다.신발이나 신어 임마!" 얼마나 당황했는지 맨발로 뛰쳐나온 것이다.그리고어느새 그런 나를 내버려둔 채 희창이는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임마, 이, 이짱!" 하지만 녀석은 돌아보며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제길, 지금 도대체 무슨 일 이 벌어진 거냐? "흑, 난 몰라, 이젠 다 끝이야.죽고 싶어, 흐흑....." 설상가상으로 터덜터덜 넋이 나가 돌아온 방안에서는, 예지가 이불을 낀 채 쪼그리고 앉아 다시 눈물독에 빠져 있었다. 아아 머리털 난 이래로, 이다지도 황당한 경우가 있었단 말인가.갑자기 찔끔거리고 있는 예지에게 화까지 치 밀어 올랐다.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저 여자애가 술 먹고 쓰러져 일어난 사고 아닌가. 그러나 이제 눈물샘마저 말라버릴 지경인 저 애한테 화를 내봤자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망할, 차라리 나 도 따라 같이 울고픈 심정이었다. "야, 기, 김예지, 그만 울어!" "몰라, 나 이제 어떡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희창이한테...... 흑 흑."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녀 곁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멍청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예지는 이불자락에 고개를파묻고 연신 훌쩍거릴 뿐 이었고, 나는 나대로 이 사건을 어찌 수습할 것인지 고민하며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얌마, 거, 걱정하지 마.바, 방금 다 설명해 줬어.그 녀석한테......" 그런 망연자실한 침묵을 깬 건 내 쪽이었다.난 어떻게든예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둘러대기로 했다. 속 으로는 환장한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일단거짓말이라도 해서 그녀의 절 망적인 생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울지 마, 예지야. 괜찮다구...... 그 녀석, 오해 안 한다니깐!" 그 짧은 순간에, 어찌 그 긴 얘기를 설명했을까.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정말 돌아버릴 일이었다.전혀 상상하지도,예측하지도 못한 일이었다.술기운에 정신을잃었던 예지, 온갖 뒤치다꺼리에 고생 아닌 고생을 했던 나.그 결과가 이런 허무하기 짝이 없는 황당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담뱃갑을 집어들었지만, 어느새 그것도 속을 드러내고있었다.젠장, 와작 담뱃갑을 구겨방구석으로 던지며 하는 수 없이 나는 방구석 재떨이를 찾아 장초를 골랐다. "제발 그만 좀 해.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희창이 문제는..... 내가 다 책임지고 풀어줄게." 진심이었다.이렇게 된 이상, 결국 이 꼬이디 꼬인 일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그 덕분인지 어느 정도 예지의 흐느낌도 잦아들어 갔다.그런데 잠시 조용하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나도 줘." "응?뭘......?" 고개를 들었으나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눈자위는 이미 빨갛게 짓물러 있었다. "그거...... 담배." "어, 이, 이건 꼬, 꽁촌데? 야, 너, 너 담배 안 피우잖아?" "괜찮아 그냥 줘...... 지금부터 피울래......" 충격이 적잖은 탓일까.예지는 당혹스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심지어고개까지 저어 보이며 내가 들고 있던 꽁초를 가리켰다.허 참,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는 손을 뻗어바닥에 던져진 라이터까 지 주워들어 보였다. 하긴, 지금 심정이 어떨꼬.차라리 담배라도피고 침착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에막 피우려던 장초를 잘 털어 건네주었다.남자들은 재미 삼아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여자는 힘겨울 때에 위안거리로 담배를 배운다더 니 그게 아마 이런 경우인가. 예지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순순히 그것을 입에 물었다.그나마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얼굴이그새 완전히 엉 망이 되었지만, 별반 개의치 않는지 그녀는 눈물 자국 그대로를 보이면서 스스로 불까지 붙였다. 아예 처음부터 속담배로 작정을 한 모양인지, 깊게 후욱, 연기를 빨아들였다. "야, 너...... 괘, 괜찮아? 역시나 금방 켁켁,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아마도 난생 처음 담배 연기를 들이마셔 보는 것일 텐데, 콜록 콜 록, 밭은기침을 짓는 그녀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그러나 괜찮다는 듯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지는 한참 동안 위로 퍼지는 연기를 눈물 젖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침묵의 시간이몇 분쯤 지난 뒤 그녀는 뜬금 없이 이런 말을 꺼내고 있었다. "창희야...... 너 모르지?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돌아보자 그녀는 조소를 띄우는 듯 입가에 샐쭉한 표정을 실었다. "나 있잖아...... 처녀가 아니야." 엉, 뭐라고?순식간에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졌다.그러나 내팽창된 신경과 동공에는 아랑곳없이 예 지의 잠긴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만 갔다. "난 처녀가 아니야...... 그래서 그래." 대체 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처녀가아니라니?이렇게 남자가 보기만 해도 기겁을하는 여자애, 그것도 이제 갓 만 스물을 넘기고도 앳되다 못하여 순진한 이 아가씨, 그런데 자기가 처녀가 아니라고? 아니아니 - 그 게 중요한 게 아니지.대체 그런 사실을 왜 이 황당한 순간, 또 나에게 밝히는 거야? "그래, 미안해....... 하지만, 나 이제 누구에게건 얘기하고 싶어. 그리고 이제 창희 넌 내가 감추고 있는 걸 다 아 니까 너한테는 숨길 것도 없어." 비밀이라면, 난 이 애의 벗은 몸과, '그날'에 대해서, 또 방금 전어처구니없는오해들을 공유하게 된 것밖에 없 는데 -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그런 것들이 그토록 큰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다만 예지의 눈가에선한 줄기 눈물선이 가만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냥...... 듣기만 해...... 듣기 싫으면, 안 들어도 좋지만...... 그렇다고 막지는 말아줘......" 또다른 당황스러움이 나를 긴장시켰다.훌쩍이는 콧소리가 섞인 그녀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꽤 잘했어.반에서도 2등 이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어서...... 선생님들도 그랬고, 우리 집에서도 그랬고...... 난 명문대 갈 거라고들 했어." 후우,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쉰 예지는, 이제는 숫제 자기가 직접 재떨이를 뒤져 꽁초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 때...... 사고가 생겼어.중 3때...... 아빠가 엄마랑 막 헤어지고 새엄마랑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 았을 때야."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사고라니, 부모님과 관련된 걸까? "아빠가 연합고사 치른 후에 스키캠프 보내준 적이 있어.성적 잘나왔다구...... 아마 날 어떻게든 달래주시려 고 그랬나 봐.막상 새살림 차린 아빠랑 새엄마가 그땐 정말 보기 싫었거든.난 차라리 잘 됐다고생각했어. 어차피 그 두 분하고 말도 잘 안 하려고 했으니까." "우린 콘도에 들어갔어.고등학생하고 합쳐서 사람이 꽤 많았지.처음엔 재미있었어.처음으로 남자애들이랑 도 어울리고, 캠프파이어도 하고......" 후우...... 여자가 독해지면 이럴 수 있는 걸까.예지는 연신 콜록거리면서도 꽁초로 줄곧 깊숙한 담배연기를 뱉 어내고 있었다.나는 어안이 벙벙한 입을 다문 채 듣기만 해야 했다. "그건, 그 일이 있던 건...... 마지막 날전날이었을 거야.자유시간이라고....... 저녁에는, 야간스키를 타고 싶은 사람만 따로 타라고 해서...... 다른 여자애들은 안 탄다고 했지만 난 혼자따라나갔거든.그때는...... 그런 사고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고, 스키장에서의 사고라.난 아직도 예지가 사고라고 말하는 것이 무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자애들은 주로 고등학생 오빠들이었어.그리고 그 오빠들중에 두 사람이 계속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높은 코스도 가르쳐주고, 넘어지면 일으켜도 주고 어쨌든 난 그 오빠들을 쫓아 다녔어.혼자있기는 그러니까.그런 데 마지막으로 타고서 돌아왔을 때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보이지 않았지.강사라는 대학생 오빠들도 들어가 버렸던 거야.너무 늦은 시간이라서.그래서 우린...... 우리끼리 스키를 돌려주러 보관실로 갔는데......" "보관실은...... 그냥 창고야.스키를 맡기고, 찾아 나오고...... 하지만 우리가 너무 늦었나봐.스키캠프도 마지막 날이라고 창고를 지키는 건 그냥 아르바이트대학생 혼자였는데, 그 대학생 오빠는 졸고있다가 우리가 학생인 걸 보고는 그냥 그 창고 안에 직접 넣고 나오라는 거야.난 그 안이 무서웠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오빠들이 랑 스키만 놓고 나오려고......" 예지는 갑자기 그 대목에서 눈물을 참는듯 눈을 꼭 감고 있었다.난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말을 멈춘 예지는 감싸쥔 무릎 위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잠시 흐느꼈다.그리고 몇 분이 지나서야 다시 갈라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고등학생 오빠들이....... 안에서 문을 잠그는 거였어.그리고는 밖에서 자고 있는 대학 생 오빠 모르게 날 창고 안으로 끌고 가서는......" 흑, 흐흑...... 다시 한 번 예지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나는, 그제야 언뜻 머리 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 다 - 설마, 설마 예지가 사고라는 것은? 불행하게도 내 예감은 정확했다.그녀가 스스로 처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과관련된 얘기였던 것 이다.아랫입술을 깨물며 울먹이는 예지가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오빠들은, 내 옷을 강제로 벗기고 한 명씩 번갈아서...... 날 목 졸라 죽여버리겠다고......" "그, 그만......! 예지야, 그만해!" 아아, 이럴 수가.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예지의어깨를 가득 끌어안아서라도 그 말을 멈추게 해야 했 다.무슨 이야기인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난, 살려 달라고 빌었어.그래서...... 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흑, 흐흑......" 내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이렇게 착하고 순진한 예지를 어떻게......그 어린 나이에, 그것도 번갈아 - 예지는 한참 동안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어뜨렸다.불쌍한 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진심으로, 예지를 안아주고 싶었다.아니, 그렇게 하라는 신의계시라도 있는 것만 같았다.난 그 애의 고개를 들고, 가슴에 꼭 끌어당겼다.이 자그마한 어깨를 으스러지게껴안고 다독거려 주는것만이,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울지 마, 예지야.더 말하지 마." 내 어깨 위에 놓여진 예지의 얼굴에서, 따뜻한 눈물 방울이 옷깃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기댄 채로 속삭임을 이어갔다. "나더러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내가 어디 사는 누군지 다 아니까,그럼 쫓아오겠다고, 끝까지 찾아올 거 라고...... 난 그 다음날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구,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 집에갈 때까지도 방에만 있어야 했 어.돌아오는 날, 그 오빠들을 다시 봤지만 그 사람들은 마치 날 처음 보는 애처럼......" "집에 와서도 난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어.새엄마한테는 더더욱....... 하지만 나,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가슴속이 더할 나위 없이 아련하게 아파 왔다.어느새 예지는 내 가슴 안에 폭 묻혀 벗은 어깨와 등으로 따스 한 체온을 전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도저히 그녀의 상처를 감싸 줄 수 없었다. "남자들, 남자들이 겁났어.학교 선생님들도, 아니 그게 아빠였어도 곁에 있는 것조차 너무 싫고 무서웠어.나 를, 나를 또 그렇게 만들까 봐......" "말할 수 없었어.그 어떤 남자건, 그런 나를 감추려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거야.몇 년 동안을, 그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지워버리려고.끔찍한 내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난......" 예지, 예지야...... 그 일을 아무한테도 밝히지 않고, 꽁꽁 자기 속에 감춰왔다니.그녀가 왜 그토록 희창이에 대 해 주저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대학생이 되서야 난 그 기억들을 잊을 수가있었는데...... 특히 희창이, 그 애가...... 그 때까지도,우리 아빠를 빼곤 아무도 내 곁에 가까이한 사람이 없었어.또 그렇게 잘해준 사람도...... 그래서 조금씩 그 애에게 내 모습을 보이려고......" 예지는 더 이상 흘릴 눈물마저 없는 듯했다.그저 가녀린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필요가 없었다.지금 이 여자애에겐오직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만이 필요한전부라고 느껴졌 다.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나는 그녀를 안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예지는, 우리 둘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 때까지, 살 그머니 내 품에서 봉긋한 젖가슴을 떼는 그녀가 아직 속옷차림이라는 걸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후...... 미, 미안해.불편하게 해서." "아냐, 괘, 괜찮아." 갑자기 예지의 풍만한 젖가슴을 안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새삼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 좀 봐.이런 차림으로......" 다시금 이불을 끌어당겨 앞을 가리는 그녀였다.그런 그녀의모습에, 난 왠지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서운해지 기까지 했다. "희창이는 내가 거부감을 갖지 않은 첫 남자애인 것 같아.그후로 처음...... 비록 이렇게 되긴 했지만......" 착잡했다.내가 여기 이 여자애를 위해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예지는이제 자신의 감추고픈 비밀을 전부 드러낸, 날개 꺾인 가녀린 아기새 같았다.지금은나만이 그녀를 품안에 지키고 있었다.물론 그게다른 사람이라면, 희창이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내 표정이 꽤나 침울한 모양이었다.도리어 그런 나를 보며,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이상하게 너에게 내 속마음을 다 보여준 셈이 됐구나.희창이 얘기부터...... 사실은 나, 그 때 이후로 다 짐한 게 있었어.뭔지 아니?" "다시는 남자에겐 내 몸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어.아무도 안 보여주고......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그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겠다고.그리고 그런 내 몸을 볼 수 있는 그 사람하고만 평생...... 그런 경험을 같이 하려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흔히들 처녀성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 의미를 두니까.그녀는 그 대신 자기가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에게만 자신을 허락하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근데...... 내 몸은 오늘 벌써 두 사람한테나 보이고 말았네.그렇다면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약속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안 남았구나. 내 자신을 주는 것." 예지의 그 말이 그처럼 서글프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럼...... 희창이랑 어떡할 거니?" 돌아가는 예지에게 마지막으로 물은 말이었다. "모르겠어.그 애가 오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게 풀린다 해도 아마 난 희창이하고는 다시친해지 기 힘들 것 같아."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저렇게 순수하고도 가녀린 아이를 놓친 희창이가 안된 것인지, 아니 면 또다른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희창이 녀석과이렇게 된 예지가 잘된 것인지.가슴 한구석이묵직하게 아플 뿐이었다.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예지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가 감춰질 수 는 없는 일이었다. 난, 예지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오후가 되도록, 덩그러니 방안에 남아 학교에 갈생각을 하지 않았다.방 안에 틀어박힌 채 내 머리속은 복잡한 감정에 휘말리고 있었다. 화가 났다.그것도 이유 없이,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예지에게 상처를 준 인간들이 미웠다.그녀의 부모가미웠다.알려고 해도 알지 못할 사람들이었지만,여린 한 소녀의 가슴에 지우지 못할 상처가 생긴것은 모두가 그들 탓이라 생각됐다.어제부터 흘린예지의 눈물에 대한 대가는 분명 그녀가 아니라 그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만 같았다. 그 증오와 적개심은, 이제 대상을 옮겨가고 있었다.그건 - 희창이였다.저런 가엾은 여자아이에게 실망을 안 겨준 녀석, 희창이.하지만 곧 씁쓰레한 자괴감이 들었다. 아니, 다 내 잘못이었다.내가 솔직했어야했던 것이다.순진한 예지를 어떻게든설득했어야 했다.아니면 최소한, 희창이의 근황에 대해 사실대로 말해줬어야 했다.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이젠 꽁초도 모자라 필터만 남은 재떨이를 뒤지다가,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희창이의 오해만큼은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앞으로 예지와희창이 사이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행여 그런 소문이 예지에게 나쁘게 작용하는 것을 막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녀석의 핸드폰 번호를 눌러 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길래 대충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책이나가방 따 위는 들지 않았다.어차피 오늘 하루 수업은 모두 건너뛴 셈이고, 이미 시계는 늦은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 되면 그를 직접 찾기라도 해야 했다. 제일 먼저 학생회실로 향했다.자주들르는 희창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면다른 사람에게서 녀석의 행선지를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침의 그 황당했던 삼자대면, 그 사건으로 인해 녀석은 엉뚱한오해 속에 빠져 있을 것이다.은근히 조급해 지는 내 마음, 한시라도 빨리 녀석을 찾아내 전말을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뿐이었다.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자칫하면 길이 어긋나거나 녀석이 벌써 학교를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 그렇게 서둘러 당도한 학생회실 안은 공교롭게도 텅 비어있었다.희창이는 커녕 아예 한사람도 보 이지 않았다.시간을 보았다.그제야 사람이 없을 법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마지막 수업시간이 한참일 무렵이 었던 것이다. '이 놈이 수업중이라 핸드폰을 꺼놨을까?' 어차피 서로 꿰고 있는 수업시간이기에, 어디쯤 있을지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차라리 강 의실 앞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워낙수업 빼먹기를 밥먹듯 하 는 놈 아닌가.강의실 앞에 죽치고 있다가 녀석이 이곳에들르거나 딴 곳으로 가버리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학회실에서 줄창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거듭하고 있는데, 순간 화이트 보드가 눈에 띄었다. - 나 학교 앞 단골호프집에 있다.짱이 - 나는 펜을 들어 단골 술집으로 오라는 메모를 남겼다.애초에 술을 마시자고 할 생각이기도 했고 어차피 마시 고 싶어지기도 할 것 같았다.어제와 오늘 있었던 예지와의 일, 맨정신에 할 얘기가 아니었다. 단골집이란 곳은 학교 앞 카페골목을 지나 끄트머리에 위치한 2층의 자그마한 맥주집이었다.희창이는 분위기 가 후졌다고 내켜하지 않았지만 나는 반대로 그런허름한 게 마음에 들어 종종 들르곤 하는장소였다.어차피 짱이라고 쓴 것을 알아볼 것은 녀석뿐이었다. 하기야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을 터였다.아무나 붙잡고 의논하고 싶을만큼 지금 내 머 리 속은 복잡했다.아니 어찌 보면 그게 더 나을것이다. 오히려 희창이에게는 모든 자초지종을 상세히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예지의 그 가슴 아픈 고백까지는 절대로 녀석에게말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계속 기분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누군가의 감추고픈 이야기를가슴 속에 간직한 다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것인지 예전엔 결코 몰랐다. 어쨌든 터덜터덜 학생회실을 나오다 우연히 공중전화박스에 시선이 멈추었다.학회실에 메모를남겨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통화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공중전화 박스는 한산한 편이어서, 난곧바로 전화 걸고 있는 사람 뒤에설 수 있었다.휘휘 주변을 둘러보며 새로 산 담뱃갑을 뜯어 입에 물었다.행여 희창이 녀석이 어슬렁거리며 지나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짜증나는 일이 생기고 있었다.언뜻 뒷모습을 보니여자인 것 같은데,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지 전 화기에 바짝 붙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개비를 다 태워 발로 비벼 끄는 동안에도그 통화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 상황은 내 두 번째 담배가 필터만 남을 동안에도 계속되고 있어, 아마 뒤에 누군가 더 있었다면 내가 다 미 안할 지경이었다.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 한참이 더 지나서야 안에 있던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오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젠장, 미안한 거나 아는지 - 찰나, 나는 곁을 스쳐가는 그녀 쪽으로 퍼뜩 고개를 돌려야 했다.얼레? "어!" 기대하지 못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였다. 첫 번째 비리 "서, 선영이 누나!" "어...... 차, 창희야!" 그 목소리에, 그녀도 나와 동시에 놀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미, 미안해.뒤에 있는 게 넌 줄 모르고......" 퍽 당황스런 모양이었다.마치 몰래 나쁜짓을 꾸미다가 들킨 사람처럼, 선영이누나는 이 뜻밖의 마주침에 얼굴까지 붉혔다.때마침 다른 사람이 전화 박스로 들어서길래, 나는 체념하며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섰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만큼 허둥대는 그녀의 표정이었다. "아, 아냐.아무 것도......" 내가 자신의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 생각한 것일까, 도리어 내 쪽이 더 무안할 정도였다. 그녀는 어색함을 피하 려는지 애써 화제를 바꾸었다. "차, 참, 창희 너 오늘 학교 안 나왔었니?" "저, 저요?왜, 왜요?" "아...... 그, 그냥. 니가 하루종일 안 보이길래......" 거꾸로 이번엔 내게 당혹스런 질문인데, 그녀는 얼버무리며 말끝을 흐렸다. "저...... 그, 그럼 난 갈게." 그게 더 견디기 어려운 어색함이었을까.그녀는 다급하게 뒤돌아 서며 엉겁결에 아무 말도꺼내지 못하는 나 에게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가안다는 게 의아했다.재빨리 고개를 들어 선영이 누나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어...... 누, 누나!" 눈에 띠는 긴 머리채. 그것을 쓸어 넘기며 뒤를 돌아보는 그녀. "저기, 같이 가요." 성큼성큼 그녀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었다.그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는 길이야?" "아, 아뇨.그냥...... 누나는요?" "나는...... 집에." "그럼...... 제,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뭔가 다른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나오지는 않았다. 어정쩡한 침묵.제발 무슨 말이든 먼저 걸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선영이 누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웬일인지 그녀의 어깨가 쓸쓸해 보이는 통에, 후아, 뭔가 답답해서 심호흡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왜 오늘 학교에 못 온 거야?" "어, 그, 그게......" 그런 내 간절함을 알아차린 듯 그녀가 말을 꺼낸 것은 교문께까지 와서였다.하지만 그걸 묻다니.선뜻 뭐 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 어...... 좀, 복잡한 일이 있었어요." 복잡한 일.맞는 말이긴 하다.지난 24시간, 아니 예지가 카페에서 희창이에 대한 짝사랑을 밝힌 이후로 사흘 간을 설명하자면, 차라리 소설 한 권을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대충 넘기려는 의도를 알아서일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대꾸하기 힘든 나는 또다시 침 묵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대신 괜한 한숨만이 연달아 비어져 나왔다. "무슨...... 약속 있어?" "야, 약속이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희창이를 만나려던 건 나 혼자만의 계획일뿐, 하지만 그녀는 내게서 대답이 없자 지 레 짐작하고 있었다. "약속 있으면 가도 돼.그런 모양인데 괜히 늦지 말고...... 난 먼저 갈게." 그러고 보니 거의 버스 정류장에 이른 것이었다.멍청해진 나는졸지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는 내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혼자서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망연자실,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선영이 누나는 그런 날 내버려두고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까지 돌리고 서있었다. 당장 머리 속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엊그제의 술 약속 - 저 누나가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아까부터 마음속에 짚이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오늘 내가 학교에 오지 않은걸 아는 그녀, 혹시 그래서 학교에서 날 유 심히 찾았던 거라면.천 분의 일, 만 분의 일이라도 혹시 그렇다면. 그렇다면 망설여서는 안 된다.이런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도 않을 것같은데...... 행여 시야에서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내 시선은 서둘러 그녀의 긴 머리채를 쫓았다. 그 순간 묘한 우연의 일치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그것은 내 결심을 굳히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선영이 누나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 그리고 그녀와 내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그랬다.이유야 모르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애처로운 빛을 띠고 있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술을 마시는 것이다.집에 간다는 걸 보면 따로 별다른 일이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물론 술을 먹여 데리고 자라던 희창이의 얘기는이미 안중에도 없었다.그녀도 그 선배 문제로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것 같으니까, 서로 얘기하고, 또 들어줄 수 있으리라.나만 왕창 마시자.실수만하지 않으면 될 일, 설사 희창이가 장담하는 비리가 진실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나는 어쨌든 미리 알고 있는 셈이니까. "선영이 누나!" 그녀에게 달려갔다.행여 버스가 오더라도 나만큼 빠르지는 않을속도로.거리가 좁혀질수록 마주보는 그녀 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는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찼다. "누나! 누나 허름한 술집도 좋아해요?" 어처구니없는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였다. 사실 다른 곳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그렇지만 내가 아는 분위기 좋은 곳이란 끽해야어제와 그제 예지를 만 난 카페, 그렇지만 어제 사건을 목격한 웨이터가 날 알아볼까 찜찜해서라도 그곳은 꺼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별반 이 단골집의 허름한 분위기에 신경 쓰지 않는것 같았다.오히려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적 이는 나에게 그녀는 가볍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약속 있는 거 아녔어?" "아, 아녜요.약속이 아니라...... 술이 마시고 싶어져서......." "그래?그럼 오는 동안 얘기하지.난 니가 그렇게 갑자기 뛰어오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후후." 시선을 맞추기 미안할 정도로 선영이 누나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다. "갑자기 술 마시고 싶은 건...... 어머, 그러고 보니 얼굴이 안돼 보인다.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창희야?" 어제부터의 고민 거리들이 아직도 얼굴에 쓰여 있는 모양이었다.나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 그냥...... 잠을 많이 자서요." "으응, 근데 이상해.꼭 고민 있는 사람 같아." "......" 마침 주인 아저씨가 주문을 받으러 다가와서 대화가 잠시 멈춘게 다행이었다.선영이 누나는 병맥주가 어떠냐 고 했고, 자신은 콜라를 마시겠다고 했다. 나야 반길 일이었다.그녀가 마신다고해도 말릴 판이었는데, 알아서술을 거절하니 다소 부담감이덜했다. 선영이 누나가 스스로 안 마신다면 희창이 녀석이 말한 비리 따위야 있을 리도 없지않은가.오늘 같은 기분에 선영이 누나에게마저 그런 고민 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큰 유리잔에 담겨온 콜라를 홀짝거리던 선영이누나는, 그래서 말없이 맥주 잔을 들이켜고있는 나에게 불쑥 곤란한 질문을 던져왔다. "근데...... 웬일이니? 나한테 술을 다 마시자고 하구." 켁켁...... 마시던 맥주가 목에 걸릴 뻔했다.갑자기 말문이 막혔던 탓이다.그런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선영이 누나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왜 그렇게 놀래?난 창희 니가, 입학한 이후로 처음 술 사달라고 하기에 물은 것뿐인데."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슬퍼 보이는 이유를 듣고 싶다?아니면 예지의 서글픈 고백을 하소연하겠다? 그러나 결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아까 학교 안에서마주쳤을 때만 해도 왠지 우울하게 보였던 그녀, 지 금은 그나마 내 엉뚱했던 행동 탓으로 약간은 기분이 풀어진 것같은데 그런 심각한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 았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애초에 그녀와 술을 마시자고하게된 발단은 희창이의 부추김 때문 아니었나. 선영이 누나와 술을 마시면, 그녀의 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누, 누나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모르겠다.어차피 궁금하게 여긴 것은 따로 있지 않은가. "응?나한테?뭘?" "저...... 누, 누나 남자친구 있어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이번엔 선영이 누나가 놀라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황당한 표정으로 휘둥그레졌다. "그...... 그건 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듯 그녀의 목소리는 대번에 가라앉았다. "누, 누나 남자친구가 누군지......." 그러나 아차,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되는 것을 - 마주 앉은 그녀의 귀밑이 붉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아니 제, 제 말은요, 누나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길래......"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잊고 있었다.나는 점점 더 당황스러워졌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저는 그 졸업했다는 남자 친구분, 회사 다닌다는 선배님이......" 그런데 이 얼떨결에 대답한 말이 더 치명적인 실수였다. "너, 너 그 얘기 누구한테 들은 거니?" 아니나 다를까, 선영이 누나가 즉각 반문했다.당장 낭패감이 밀려왔다.자연스럽게 나와도모자란 이야기를 밑도 끝도 없이 꺼낸 셈이었다. 아아...... 이런. 내가 그 얘길 들은 것은 분명히 희창이 한테서고, 또 희창이는그 말을 어디서들은 것인가.다 름 아닌 선후배간의 묘한 하룻밤이 있었던 여관방 안에서가 아닌가. 제길, 그 녀석한테서 들은 거라고 밝히면 - 뻔한 스토리이다.선영이 누나가 술 깬 아침에 얘기해줬다고 했으 니, 당연히 그녀는 그에게 그 말을 해줬다는 걸 기억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어떻게 되랴, 분명 선영이 누나는 당 장 내가 그녀와 희창이 사이에 있었던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내가 머리 속으로바쁘게 거짓말을 찾는 동안, 선영이 누나는 다 소 침착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너...... 내가 남자친구 있다고 누가 그랬어?"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그, 그래, 아무라도 팔자.일단 희창이 얘기를 들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 그, 그러니까 조, 조교 형이......" "조교 오빠?왜, 그 오빠가 뭐라고 그랬는데?" 너 같은 후배에게 그런 말을?선영이 누나는 의심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냥요.지나가는 말로 누나 남자친구가 자, 자기 동기라구......" 둘러대는 내 말투가 어색한 것 같아 나는 최대한 태연한척,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부어야 했다.차라리 병나 발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오빠가 별말을 다......" 후유...... 나는 가슴이라도 쓸어내리고 싶었다.천만다행으로 그녀의 양미간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부터 더욱 조심해야 했다.단순히 애인을 물어본것뿐인데도, 선영이 누나의 눈치가 심상치 않게 변하지 않는가?희창이 녀석의 말대로 그들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기도 그런 모습이 다소 지나쳤다 싶은지, 그녀는 짐짓 다시 얌전한 미소로 돌아와 반문했다. "그래...... 근데 왜?남자친구 없으면, 창희 니가 애인 되주려고?" 내가 선영이 누나의 애인?속을 떠보려는 그녀의 농담인지 알면서도, 솔직히 그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인 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마주보았다.크지 않은 눈이지만 속눈썹이 짙어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감춰 지는, 저 상큼하고 애교 있는 눈웃음. 거기에 뽀얗고 통통한살결, 제법 맵시 있는 몸매.게다가 차분한 성격까 지 - 도저히 희창이 녀석이 얘기하던 '그렇고 그런 여자'의이미지는 찾을 수가 없다.아니 믿어지지않을 뿐더러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온한 일일 성싶다. 아, 정말 저 누나가 내 여자친구라면 - 아마그렇게 언젠가처럼 누굴 슬프게 찾게 하는 일은 결코없을 것이 다.내 자존심, 그리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그런 생각들은 접어두어야한다.그건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니 까. "에이,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어쨌든 그녀의 비리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고싶지 않았다.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한 궁금증을그런 쪽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며칠 전에 누나랑 학생회실에서 저녁에 만났을때......" "언제? 아, 니가 교문 앞까지 같이 가준 날?" 그랬다. 그날 처음 선영이 누나가 쓸쓸해 보였고, 그래서 술을 마시자고 했었다.그 동안 기회를잡지 못했기 에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것이고. "예, 그날...... 누나 약속있어 나갔다가 들어왔다고 했었잖아요." "응, 맞아.그날 그랬어.근데 그걸 왜 묻는 거야?" "그 때 조교 형한테 누나 남자친구 얘길 들었던 게 기억나서...... 그래서그게 궁금했어요.그날...... 누나 남자 친구 만나고 온 거 아닌가하는......" 둘러대는 말이었지만, 선후배 관계에선 다소 당돌한 질문일 수도있었다.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 주었다. "그래, 그랬어.아니......" 역시, 내 예감이 맞았다. "사실은 그날만나지 못했어.그 사람이 너무 바쁘다고 해서......" 순간적으로 선영이 누나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지는 듯했다.어쩌면 바빠서 못 만났다는 건......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혹시 핑계?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 대목을 지나쳐야 했다. "근데 돌아왔을 때 누나가 너무 우울해 보였거든요.그래서......" 피식,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후훗, 너도 참...... 그래서 그 때 술 마시자 그랬구나?나 기분 안 좋으면 풀어 주려구."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나처럼 예쁜 선배가 우울해 하니까......" 곱게 흘겨보는 척하는 선영이 누나였다.좋은 현상이었다.그건 그녀가 그리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증 거였다. 나는 한 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조금씩이라도,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왜요, 그 선배님이랑 잘 안 되세요?" 그 말에 선영이 누나가 웃다 말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너무 민감한 것까지 함부로 물은 것일까. 뜻 모를 한숨이 그녀의 분홍빛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러나 절대 그냥인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이번에야말로 그녀의 분위기는 무거워져 잠자코 테이블 위로 시 선까지 떨어뜨린 채 잠시 말을 잊었다. "다 내 잘못이지, 뭐......" 지나가는 듯한 그 말을 놓칠 수 없었다.선영이 누나는 멍하니 한번 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 부끄러운 실수들 땜에......" 자기 잘못?다른 거야 몰라도 내가 보기엔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없이 헌신적일 것 같은 그녀의 성격이다.그 런 그녀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거나 하는 것은 쉽사리 이해하기가 힘들다.그런데 자신의잘못이라니. 그뿐이 아니다.실수, 실수들 때문에 - 이건 또 무슨 말인가.지금껏 선영이 누나를 안 이래로 그녀가 어디에 서 욕을 먹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단 하나 희창이가 떠들어대는 비리라는 것만빼고는 말이 다.하지만 부끄러운 실수? 그냥 실수가 아니라 분명 '부끄러운 실수'라고 말했다.머리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나였지만, 그 말에 당장 '비리'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다.그 실수라는것이, 그녀가 그 선 배와 껄끄럽게 된 것이 혹시...... 녀석이나 나보다도 훨씬 일찍 그녀를 알아왔을 그 남자선배, 그렇다면 그 사람이 모를 리도 없을 것이다. 에이, 아닐 거야.나는 머리를 도리질쳤다.저 예쁘고 깔끔한 누나가 어떻게그런 비리를.하지만내 그런 부정만큼이나, 짐작이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 나 좀 봐, 내가 후배한테 별 얘길 다했네.미안, 창희야.나 잠깐 화장실 좀......" 문득 복잡한 머리통을 들어 선영이 누나쪽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애써 웃어보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그 그늘 속에 뭔지 모를 슬픔이 가려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선영이 누나를 쫓아야 했다.주인 아저씨에게 위치를 묻더니내 곁을 지나쳐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의 어깨가, 아까 이 술집에 들어오기 전처럼 쓸쓸해 보인다고 느껴졌다. 어, 그런데 무심코 - 결단코 무심히 본 것이다 -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다소 엉뚱하고도 민망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 카페에 들어와 지금껏 앉아만 있었기에 처음 보게 되는 선영이 누나의 뒷모습, 좀더 정확히는 허리 아래의 뒤쪽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그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되살리게 만드는, 그런모습이 내비치고 있었다.학생회실 책상 밑으로 훔쳐본 그녀의 치마 속, 아슬아슬하게 내 코앞까지 다가왔던 젖가슴......, 그 순간 나는 그 전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빛 니트에, 베이지색 얇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녀.그 중에서도 그 미니 스커트의 한 부분, 바로 뒤 편 엉덩이 부근이 화근이었으니, 망측하게도 그만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 스커트자락이끼여 들어가 있었던 것이 다. 아마도 앉아있어서 그런 것일 테지만,선영이 누나 엉덩이의 쪽갈라진 부분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 틈새에 꼭 끼여진 부분 때문에, 그녀의 스커트는 팽팽히 당겨져 안에 입은 팬티 선까지 그대로 도드라져 보이 고 있었다.게다가 워낙 치마가 얇은 탓인지, 그녀의 풍만한 둔부가 출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보기에 따라 엄청나게 야릇한 상황을 연출하는 그 광경.나는나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묘한 착잡함 속에 빠져있던 나인데, 선영이 누나가 보여준 그 뒷모습은 일순 진지했던나의 생각과 분위 기들을 확 바꿔놓고 말았다. "미안해, 창희야, 오래 걸렸지?"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머리 속부터 저 아래까지 밀물치듯 몰려오는 감정에 숨이막힐 지경이었다.갑자기 예지와의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지난 밤 얼마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했던가.그 고생을 간신히 참았다고 느꼈는데 지금 여기, 또다른 유혹이 코앞에 있다니. 나는 타오르는 갈증을 삭이기 위해 연신 빈맥주잔을 채워야 했다.하지만 그런 내 혼란스러움을꿈에도 알 턱 없는 선영이 누나는, 도리어 침울한 분위기를 떨쳐버리듯 내게 밝은 목소리까지 내주고 있었다. "응, 왜 그러니?천천히 마셔!" 그러나 진짜 술을 퍼부어야 할 일이 닥친 건 그 직후였다.그건 선영이 누나와 나, 두 사람 모두 미처 계산하 지 못한 상황으로, 차분한 미소를 띄우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놀라움에 자그맣게 벌어질 만한 상황이었다.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갔다.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쫓아멋모르고 뒤를 돌아본 내 눈에도, 정말 예기치 못한 인물이 술집 문을 밀고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희창이 -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를?화이트보드, 맞다.그걸 안 지우고 왔구나! 맙소사, 애초에 선영 선배를 꼬드겨 보라고 부추긴 인물이 누구인가.희창이다.그리고 녀석이 그렇게 부추긴 이유는 무엇인가.바로 그녀에게 술을 먹이고같이 자보라는, 그 비리를 확인하라는,그런 것이었다.며칠 전 녀석은 그렇게 말했었다.자기가 술값을 대서라도 반드시 선영이 누나와 술을 마시게 해주겠다고. 그의 그런 목적이 이렇게 수월히 달성될 줄을 누가 알았단 말인가.아무리 야릇한상상에 빠져있던 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이술자리가 지금껏 내 의도대로 진지하게 꾸려져 왔 더라도, 이 대목에서 희창이가 낀다면 정말 예측 못할 분위기로 바뀔 것이다. "야아, 여기들 있었네." 술집 문을 열고 잠시 두리번거리고 섰던 희창이는 우리들이 눈에 띄자마자 곧장 알은체를하며 다가왔다.난 재빨리 선영이 누나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그녀 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난데없는 희창이의 등장에 퍽 난감 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바로 지난주에 이런 술자리 끝에서 녀석에게 못 보일 모습을 보였던 그녀였지 않 은가.그런데 다름 아닌 자신의 비리를 들켜버린 녀석한테, 이번 주엔 또다른 사내,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 사이 인 나와 술을 마시는 것이 목격되었으니...... "어, 어쩐 일이냐?"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반겨야 했다. "무슨 일이긴, 임마.학회실에 써...... 아, 아니, 그냥 이 근처 뒤지다가....... 참, 선배도 있었네요?" "으, 응...... 아, 안녕, 희창아."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애초에 선영이 누나가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녀석일 텐데. 그런대로 다행스러운 건, 화이트보드 얘기를 꺼내지 않은 점이었다.자칫 그 얘기를 꺼낸다면, 여기 선영이 누 나에게 꼼짝없이 계획된 술자리로 오해를 샀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녀석이 알아서 처신한 덕에, 누가 보아도 지금은 자연스러운 합석처럼 보였다.사실 학교 안에서 이런 식으로 휩쓸리는 술자리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맘만 먹으면 하루에도 이런 과내 술자리가 몇 군데는 될 것 이고...... 그냥 학교 앞 술집만 막무가내로 뒤져도 아는 얼굴 댓 명은 쉽게 찾아내어 어울릴 테니까. "야아 오늘은 무슨 술자리에요?내가 껴도 되는 건가?" 이미 허락도 없이 엉덩이를 비비며 자리에 앉은희창이는 괜한 인사치레를 해댔다.설마 안 된다고할 수는 없으리라는 걸 그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몇 초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선영이 누나가 예의상 답변을 했다. "차, 창희가...... 술을 사달라고 해서......" "그래요?짜식, 왜?뭐 고민이라도 있냐?" 고민이 왜 없겠는가, 당장 지금 이 상황에서 벌어질 일부터 고민인데. "아, 아냐...... 고민은 뭘...... 그, 그저 사는 얘기 좀 하자는 거지, 하하...... 원래 선영이 누나가 얘기 잘 들어주잖 아." 헛웃음을 지어 보이면서도, 나는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녀석은 그런 내 마음속을 아는지모르는 지, 열심히 분위기를 맞춰갔다. "맞아, 선영 선배가 원래 그런 고민 잘 들어주지.또 자기 경험 얘기도 많이 해주고 말야.그죠, 선배?" 자기 경험이라 - 분명 뼈가 있는말이었지만, 선영이 누나나 나나 뭔가 티를낼 수는 없었다.표면적으로는 분명, 나는 희창이와 누나 사이의 일을 전혀 모르는 것이고, 희창이도 내가 그 비리를 알고 있다 는 사실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그녀 역시 자기와 희창이 사이에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므로. 엄청 복잡한 상황이었다.서로가 서로의 아는 사실을, 각자의 생각속에 감추어 비밀로 삼아야 했다. 결국 현재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입장은 희창이 뿐이었다.그러니 이 술자리가그를 중심으로 흘러 가리란 것은 이미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잘 들어주기는...... 그, 그럼 창희야, 아까 하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어?무슨 얘기?내가 들으면 안 되는 둘 사이 비밀이라도 있어요?" 선영이 누나의 허점을 파고드는 곤란한질문이었다.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가나눈 얘기가 무엇인가. 바로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였다.그렇기에 그녀의 얼굴에 금방 난감한 표정이 드러났다. "아, 아냐, 비, 비밀이라니......" "아항, 알겠다.심각한 걸 보니 남녀문제 상담이구만.어, 근데 짱이 너 여자친구 없잖아?" 속내를 다 알면서도 짐짓 딴청을 부리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 여자문제는 내가 손바닥처럼 훤한데...... 그럼...... 선배 남자친구 얘긴가 보죠?" 푸우, 마시던 맥주가 코로 쏟아져 나올 뻔했다.희창이 녀석이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 내 얘기......? 벼, 별것 아니고, 그냥 창희가 무, 물어 봐서......" "아아, 그래요?그럼 어디 얘기해 보세요.저희가 후배기는 해도, 남자는 남자니까.원래 남자들 속마음은 남 자들이 더 잘 아는 거잖아요?" 아뿔싸, 넘겨짚은 희창이의 유도심문에 선영이 누나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마치 덫에 걸린 듯한그녀의 표 정이었다.얘기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희창이 녀석은 나도 말릴 수 없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었다. "맞아, 언젠가 그랬잖아요?선배, 남자친구 있으시다고...... 복학생이었고,졸업해서 취직까지 했다구." 스스럼없는 녀석의 말에 그녀보다 내가 더 뜨끔거려야 했다.침착하기 위해 태연히 미소까지 곁들이는 선영이 누나지만, 아마 속으로는 어금니를 깨물고 있으리라. "으, 응...... 저, 저번에 너한테는 얘기했었지." "됐네, 그럼.뭐 이제 서로 다 아는 거니까, 솔직히 털어놔 보세요, 우릴 후배로 생각지 마시구...... 예?" "시, 심각한 것 아니야.그, 그렇지 창희야?" 다급해진 그녀는 내게 도움을 청해 왔다. 내가 뭐라고든 대답해주면, 선영이 누나는이 난관을 어물쩍 넘길 수도 있으리라.그러나 불행히도, 희창이 녀석이 선수를 치고 나오는 바람에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에이, 그 때 누나가 그랬잖아요, 나한테.그 남자선배분이랑 잘 안 돼서 걱정이라구." "그, 그랬니, 내가?" 이런 - 녀석은 숫제 노골적으로 나왔다.분명, 그 얘기는 희창이가 그녀가 같이 잔 여관방에서 드러난 비밀이 니, 굳이 보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은 붉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 그러고 보니 선배 콜라 마셔요? 얼레, 맥주도 다 마셨네?안 되겠는걸.선영 선배, 제가 이후로는 다 부 담할 테니까, 한잔하면서 얘기하죠?" 생각해주는 척 술을 권하는 희창이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아, 아냐, 희창아, 나 원래 술 못 마시잖아." 그러나 그는 그런 그녀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한술 더 떠 먼저 치고 나갔다. "어, 뭘 그러세요?그 때 저랑은 마셔놓구.걱정 마세요, 제가 안 마시고 누나 바래다줄게요!" 가장 결정적인 말.자기와 있을 때는 마셨었다 - 어쩌랴.궁지에 몰린 선영이 누나는 이제 뭐라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 아냐...... 그, 그래도......" "으응, 괜찮아요, 그럼 누난 그 콜라랑 섞어 드세요.그럼 맛도 괜찮고,도수도 약하니까 금방 깬다구요, 아셨 죠?" 그는 교묘하게 그녀를 부추기고 있었다.강권보다도, 이런 거절할 수없는 유혹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마 련. 그뿐 아니라 지금 술을 권하는 것이 누구냐 - 바로 가장 최근,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약점을 잡은 희창이 녀석 아닌가.설사 선영이 누나가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라 해도, 그는 꼬리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풀죽은 목소리로 선영이 누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아, 알았어...... 그, 그럼 조금만 마실게." 결국은 술을 마시게 된 선영이 누나.나는 통제불능의 상태로 전개되는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어 느 쪽도 말릴 수가 없다 - 희창이는 지금 나를 위한답시고 하는 일이고, 선영이 누나는 그녀나름대로 따라야만 했다.마치, 이제는 달리는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탄 셈이다. 멋지게, 그녀에게 술을 먹게 만드는 녀석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선영이 누나에게 콜라랑 섞어 마시라고 하 더니, 희창이는 서슴없이 양주를 주문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이유, 내일 아침 술깨기는 양주가 더 좋다,어차피 콜라랑 섞어 마시려면 이게 더 낫지 않 느냐...... 등등을 갖다 붙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이건 어느여자에게건 술을 먹여 꼬시는 가장 쉬운 방법 중 의 하나라고 녀석이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음료수를 타면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한참은약해질 텐데 - 라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원래 탄산음료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위벽을 깎아 씻어내리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알코올은 훨씬 더 그만큼 빨리 흡수되어 취하게 된다.게다가 그 맛이달착지근해지기에 쉽게 목구멍 으로 넘어가는 부수 효과까지 있어서,맛있다고 벌컥벌컥 들이켜다가는 자리에서 일어날때쯤 한꺼번에 취기가 돌아버린다. 하여 나중에는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사람과 거의 비슷하게 마셔버리는 꼴이 된다.얼음 담긴 글라스 밑바닥에 찰랑거릴 정도만 양주를 붓고 그 위에 콜라를 가득 부어주니,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영이 누나는 벌써 눈 치에 적당히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봐요, 누나, 괜찮죠?" "으, 응......" 약간은 인상을 찌푸리며 술잔에 입가를 대본 선영이 누나도,어느 정도 동의하는 기색이었다.위기감에 뭐라 한마디 꺼내려는데, 희창이가 테이블 밑으로 은근히 내 구두를 질끈 밟았다. 잘 되어 가는데 방해하지 말란 뜻인 것 같았다. "아, 맞다!아까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그래, 누나 남자친구, 그선배님 얘기하고 있었죠?왜요? 아직도 그 형이랑 잘 안 돼요?" 그래도 가만있을 수 없기에 입을 떼려 했지만, 목소리를 높여 재빨리 화제를 바꾸는 녀석이다.더군다나 돌아 가는 형세가 안심이 되는 듯, 선영이 누나까지 머뭇거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 사실은 아직도 그래." "어유, 그럼 안 되는데.두 분이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부러 희창이는 호들갑을 떨었다.나는스트레이트 잔을 기울이면서도, 그페이스에 말려들어 이따금씩 콜라 탄 양주잔을 홀짝이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아, 아니야.싸운 게 아니고 그냥......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문제?무슨 문제요?누난 학점도 좋고, 전번 학기에 장학금도 받았잖아요?" 맞장구를 쳐주자, 난감한 표정의 선영이 누나는 넋두리처럼 대답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 오빠가...... 다른 사람한테 내 얘기를 듣고서......" "그래요? 뭐 누나가 잘못하신 거라도 있어요?다른 사람들이 뭐라 그랬길래......" 집요한 희창이의 질문은 계속 됐고, 선영이 누나는 그런대로 차분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아 슬아슬해서 지켜볼 수가 없었다.마침내 선영이 누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폭 내쉬며 괴로운 듯 시선을 내리깔 았다. "후 그, 그만 하자.그 얘기는......" 그 목소리가 안됐다 싶은지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그렇게 조용해진 가운데, 녀석은 몰 라도 나는 당장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갑자기 선영이 누나가 자기 잔을 들어 단숨에 원샷을 하는 게 아닌가.아무리 콜라를 탓다 해도, 저렇게 원샷 을 하다니.선영이 누나는 직접 양주병을 들어 잔을 채우기까지 했다.희창이도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의 잔에 콜라를 가득 부어주었다. "예, 알았어요. 누나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 뭐." "아냐, 어차피 이젠 지난 일인데...... 오늘...... 헤어지기로 했어." 뭐? 오늘? 순간적으로 난 띠잉,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심각했던 아까 그 공중전화, 날 보자 당황하던 그녀 의 모습, 쓸쓸하게만 느껴지던 그녀의 뒷모습 - 아아, 그럼 그것들이...... 비로소 모든 정황이 파악되었다.그래서 지금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그녀인 것이다. "미안, 잠깐만......"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 순간 내 가슴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분명히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일부러 웃음 짓는 그녀의 눈가, 그곳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려는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는 목소리를 낮춰 희창이에게 화를 냈다. "새꺄, 그런 말을 왜 해?저 누나 울고 있잖아!" "허 참, 뭐 내가 알았냐. 그런 일이 있는지......" 그도 다소 멋쩍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자꾸 저 누나 술 먹이지 마!" "얌마, 내가 언제?지금은 자기가 스스로 먹는 거잖아." "그래도 그렇지, 저 선배 취하면 어쩌려고 그래?" "하기야 지금 저러는 거 보니까 기분이 좀 그렇긴 하다.그래도 짜샤, 그런 넌 왜 저 여자랑 술 먹자구 한 건 데?" 즉각적인 녀석의 반격이 왔고, 오히려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은 내 쪽이었다. "야, 그, 그건......"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희창이에 대한 예지의고민과 오해를 털어놓고자 한 게목적 아닌가.하지만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그 원래의 목적을 희창이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예지가 널 짝사랑하고 있다, 오늘 아침 그 애가 벌거벗은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은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여기서 이런 장황한 고백을 전할 수야 없잖은가. 그러니 녀석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 누나와의 잠자리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지원사 격에 여념이 없는 녀석이다. "야, 짱이 너...... 척하면 딱이지, 그거 아니면 뭐하러 학회실에 그렇게 큼직하게 써놓은 거야?난 저 선배 있는 줄도 몰랐잖아." "야, 저, 저 누나는 여기 오는 길에......" 희창이를 말리려던 시도는 그 순간 본의 아니게 멈춰야만 했다.그사이 선영이 누나가우리 테이블로 돌아오 고 있었다.그녀를 먼저 발견한 그가 냉큼 옆구리를 찔렀다. "미안해, 얘들아 오래 걸렸지." 방금 눈물을 닦아서인지, 아니면 한잔 술에 벌써 취기가 오른것인지, 그녀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괜찮아요, 에에 나도 물빼러 가야겠다." 희창이는 자기도 화장실을 향해 일어서면서, 안 보이게 한 번 더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선영이 누나의 고개 너머로 쳐다보니, 녀석은 내쪽을 보며 눈을 찡긋해 보이고 있었다.아마도 '잘해 봐라, 자리 피해 주는 거니까'하 는 신호이리라.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것이냐.나는 녀석에게 잔뜩 인상을 써 보이며 망설이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저...... 누, 누나, 마시기 싫으면 그만 마셔요." "응, 아냐 괜찮아.사실은 나도 아까부터...... 좀 마시고 싶었어." 진심으로 하는 걱정이었지만, 참 대단한 자제력이었다.감정의 골이 깊어진 지 오래여서 일까, 새삼 그렇게 힘 겨운 와중에서도 나에게 웃어 보이던 그녀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차라리 잘됐다는 투로 싱긋 미소까지 지어 보이고 그녀는 연이어 글라스에 담긴 콜라 섞인 양주를 홀짝거렸다. 왠지 내 입술이 타들어 갔다.그녀는 새로 채워진잔도 금방 바닥까지 드러나도록 들이켰다.미치겠군.나는 말이라도 건네 술 마시는 속도를 늦춰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그럼 그 선배님이랑은 완전히 끝난 건가요?" 선영이 누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잔을 다 비우고는 씁쓸한 웃음을 비쳤다. "그래 끝났어." 다시 술병을 잡는 그녀.재빨리 난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야 했다. 이미 양주병 하나가 절반 넘어 비어갈 판 국이었다. "그, 그만 마셔요. 그러다 취한다니까요." "괜찮아.왜 그러니?난 아직 멀쩡한데." 막무가내인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희창이가 돌아왔다.나는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술병을 쥔 그녀의 손을 놓아야 했다. "희창아, 니가 좀 줄래?" 숫제 먼저 잔을 내밀었다.희창이 녀석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우며 대신 그녀의 잔 에 술을 따랐다. "예, 그럼 마셔요.하기사 기분도 그럴 땐, 술 한잔 마시고 잊는 거죠, 뭐." 답답한 노릇이었다.선영이 누나, 그녀는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저 녀석과의 여관방 사건을 잊은 것일까. 그 일로 인해 좀전까지도 난처한 경우를 당해놓고선...... 그러나 희창이의 계략은 이미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그는 가만히 내게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오늘은 뭐...... 여기 창희도 있잖아요.이 자식, 아무리 퍼마셔도 정신 하나는말짱한 놈이니까.그리고 걱정 마세요, 제가 차로 바래다드리죠." 녀석은 보란 듯이 자기 잔을 뒤집어 놓았다.그랬다.비교적 술자리 실수가 없는 타입인 나.그녀는 나를 믿 고 있는 것이었다.녀석과 단둘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누군가 더 같이 있어준다는 것이 은근히 그녀의 경계심을 늦춰주고 있었다. 그뿐인가.방금 전까지 아픈 기억을 떠올리느라 나 같아도 더욱술생각이 날 법도 하니, 결국 선영이 누나의 몰래 훔쳐낸 눈물을 기화로 이 술자리는 무르익어 갈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된 이상이미 분위기는 내 통제를 벗어나 희창이의 의도대로 흐르는 중이었다. 선영이 누나는 그 잔마저 원샷에 가깝게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좀전까지 서로 낯을 붉히는 사이였던 그들은 이제 진지한 대화와 시시껄렁한 농담까지 섞어 가며 분위기를 바꾸고 있었다.희창이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연신 화제를 틀어가며 이야 기를 이어댔으며, 가뜩이나 사람들을 잘 따르는 선영이 누나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물론 적당한 순간마다 자연스레 술잔을 권하는 것을 빼먹지않는 녀석이었다.석 잔, 넉 잔......선영이 누나의 얼굴은 점점 발그레해졌고, 이제 아예 그녀는 한쪽 손으로 희창이의 어깨를 가볍게 치기까지했다. "어머, 창희야 왜 그러니?누나 걱정 안 해줘도 돼.그 오빠, 난 다 정리했어." 그녀는 괜스레 심각한 티를 내보이는 내가 안쓰러운지,거꾸로 내기분을 풀어주겠다며 나서고 있었다. 괜스레 멋쩍어진 나는 술이나 비우기 위해 엉거주춤 잔을 들어올렸다. "아, 아녜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럼 원샷!" 이것 참.선영이 누나는 숫제 먼저 건배를 제의했다.기가 막힌 나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아니 그녀 가 더 못 마시게 하기 위해서라도 거푸 술잔을 비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큰일이었다.나야 아직까지 괜찮다지만, 그녀 혼자 마신 술만도 얼추 저 글라스 한 잔은 넘게 나올 것 같았다. 또한 이 정도 속도라면 저 큼지막한 양주병의 적잖은 몫을 그녀가 해치우게 될 상황이었다. "저...... 화장실 좀 갖다 올게요." 어쩔 수 없었다.이번엔 내가 소변이 마려운 척 자리에서 일어서며, 희창이에게 따라오라는 의미의 눈짓을 보 냈다. 맥주 1000CC만 마셔도 비틀거리는 선영이 누나 - 그녀의 남자친구 문제도 그렇고,그녀가 마시는 술문제도 그렇고, 어찌 보면 여기서 내가 뭘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는하나도 없었지만, 점점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은 내 양심이었다. 그런데...... 따라오라는 희창이 녀석은 의외로 난처한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얼레?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나는 모르는 척 곁눈질을 해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원래 우리는 선영이 누나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었고, 희창이가 끼여들면서나와 누나의 가운데 모서리 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위치해 있었다.그래서 그의 위치는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얼마든 그녀나 내 쪽으로 다가앉을 수 있었던 것인데, 그 균형이 묘하게 깨어진 상태였다. 즉 절반 이상이 녀석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선영이 누나였으니, 그저 그녀의 팔이 살짝 얹혀져 있을 뿐이라 생 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녀는 거의 상체를 희창이의 어깨에 매달리듯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희창이는 쉽사리 어깨를 치우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 보였다. 이런 망할, 술이 약한 그녀는 술기운도 빨리 찾아온 모양이었다.한눈에도 그녀의 몸이 처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 광경에 관자놀이에 뛰는 맥박이 느껴질 정도였다. 녀석도 아마 그런 내 인상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모양인지잠시 후에 다소 계면쩍은 표정으로 화장실로 따라 들어왔다.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문을 닫자마자, 나는 다짜고짜 녀석의 어깨를벽으로 밀어붙였다. "어? 왜, 왜 그래, 임마?" 비록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몰라서 물어, 새꺄?" "왜, 뭘?" 그걸 어찌 말로 하란 말인가.그런 나를 향해 녀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짱이야, 잘 들어. 지금 이 자리는 창희 너를 위한 거란 말이야.어쨌든 저여자랑 자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너라구.그 이후엔 니 맘대로 해.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알겠어?" 제기랄, 녀석은 내가 선영 누나에게 눈독들이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으로착각하고 있었다.어이가 없어 부르르 몸이 떨릴 정도였다. "헛소리하지 마, 짜식아! 누가 지금 그딴 얘기하는 줄 알아?더 이상 저 누나한테 술 먹이지 말란 얘기야!내 가 그랬지?난 그 비리란 건 믿지 않는다구.니가 뭘 듣고 보았건, 선영이 누나는 결코 그렇고 그런 여자가 아 닐 수도 있어.알겠어?" 그러나 내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희창이는 빙긋 조소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후후, 좋아 좋아, 넌 아직도 내 말을 못 믿나본데.글쎄, 내가 오늘 널 위해 총대 멘다고 했으니......하여간 난 의리는 지켜.어디 이번엔 니가 가서 확인해 봐라, 내가 지금껏 너에게 한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그 말에 내 양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런 내 팔을 밀쳐내며,희창이는 조용히 화장실의 문을 밀고 나갔 다. "잘 봐. 너도 알 거야!" 나는 재차 녀석을 다그치고 싶었으나, 때마침 다른 손님이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말문을닫았다. 녀석은 뒤돌아서며 다시 한 번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안다니, 뭘?더러운 기분에 허탈해지기까지 한 내가 테이블로 돌아왔을때엔, 다소 변동된 상황이 나를 기다 리고 있었다.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희창이 녀석이 내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고, 그가 앉았던 선영이누나 곁 의자는 이 번엔 나를 위해 공석이 되어 있었다. 선영이 누나는 이미 취했는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이미 그녀 앞에놓인 또 한잔의 술은 깨끗이 비워진 채였다. "선영 선배, 창희 왔어요." 희창이가 야릇하게 웃으며 말하자, 마치 기다린 듯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으응, 창희 왔구나, 얼른, 얼른 앉아." 더듬거리는 말투에서, 나는 그녀가 상당히 취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발그레 홍조를 띤 얼굴로 환하게 웃음마저 띠고 있었다.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의 옆에 앉자, 선영이 누나는 한 쪽 손을 뻗어 대 뜸 내 어깨에 얹었다. "미안, 창희야...... 니가 날 그렇게 걱정해주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 누나가......" 당혹스러웠다.어찌 반응해야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가만히 어깨를 빼내려했다. 그러나 나는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그녀의 고개가 살포시 내 팔뚝에기대왔던 것이다. 또한 그 와 동시에 내 얼굴에서 불과 몇 센티도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온 그녀의 입술이, 따뜻한 입김을 간질이며 속삭이고 있었다. "고마워, 창희야...... 걱정하지 마...... 나 괜찮아.이렇게 나한테......" 그 순간 분명히 느낄 수 있는감촉 - 그리고 그로 인해 나는 불과며칠 전 학생회실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 분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었다.봉긋한, 내 얼굴을 안아줄 듯 가득했던 그 느낌. 그건 선영이 누나의 젖가슴이었다.그 스펀지 같은 푹신함이 살그머니 내 팔뚝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취중이라지만 이 예쁘고 가슴 설레이게만드는 선영이 누나가 내 어깨에 기대어안기다니, 저절로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반면에 가슴은 터질듯 두근거리는 고동소리를 내고 있었다. 꿈결 같았다. 깨고 싶지 않는 꿈. "자, 자 창희야, 한잔 더!" 잠시나마 그 얼떨한 흥분에 휩싸인 나를 깨어나게 만든 건 희창이의 목소리였다.엉겁결에 감고 있던 눈을 뜨 자, 녀석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건배를 제의해 왔다. 아뿔싸 - 그 미소가 어떤 의미를 전하는지 상기하자 내 얼굴이 한꺼번에 확, 달아올랐다. "어머, 근데 나 잔이 비었어 창희야." 미처 마주 잔을 들기도 전에, 선영이 누나가 내코앞에 술잔을 들이댔다.나도 모를 기분이었다.그래선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어느새 양주병을 들어 선영이 누나의 글라스를 채우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서로의 잔을 채우고, 다시 잔을 부딪치려는 찰나.훅,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내 한쪽 허벅지 중간쯤에, 따뜻한 무언가가 가볍게 얹혀졌기 때문이다.이, 이건 - 나는 대번에 그것이 선영이 누나의 손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표정에 그런 당황스러움이 나타났을 것이다.잔을 때리며 마주보는 희창이의 입가가 묘하게 당겨 올려지 고 있었다.봐라, 내 말이 맞지?녀석의 표정이 꼭 그런 모양이었다. 당혹스런 내가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에는 또다른 촉촉이 젖은 눈길이 마주하고 있었 다. 그녀였다.여전히 나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리고 - 선영이 누나의 그 손 은 여전히 내 허벅지의 중간에 놓여져, 가볍게 쓰다듬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시던 술이 목구멍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듯한 기분에, 나는 금방 캑캑거려야 했다. "으응, 창희야, 괜찮아?" 다행히 그 바람에 그녀의 손길이 살짝 비켜나갔다. "괘, 괜찮아요, 누, 누나......" 내가 사레라도 들렸을까 신경 써주느라 선영이 누나는, 내 등 쪽으로 손을 옮겨 다독거려주었다. 간신히 그 덕분에 나는 진정시키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그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이 툭, 하고 테 이블 위로 떨어졌다.그녀의 잔에 남아있던 얼음과 술 등이, 와르르, 테이블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어머, 미안! 미안해, 창희야!" 그저 우연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아니 거의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라 보아도 옳았는데, 거의 그 떨어지는 것 과 같은 속도로 선영이 누나가 화들짝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움직인 방향, 바로 얼음과 술이 흘러내린 그 장소가 문제였으니 - 그녀의 손이 내가 말릴 어쩔 틈도없이, 내 바짓가랑이 사이를 털고 있는것이다.아예 허리까지 숙이고 두 손을 다 사용해서 그녀는 누가 보아도 민망할 동작으로 그 민감한 곳 부근을 닦아주고 있었다. "미안해, 창희야, 내가 왜 이러지?나 취했나 봐, 미안, 미안해......" 이미 취한 술기운에 과잉 친절을 보이는 선영이 누나,정상적이라면얼른 그녀의 행동을 막아야 했다.그러 나 그녀의 그 갑작스런 행동에 나는 입을 딱 벌린 채, 뭐라 말도 못하고 있었다.아니 민망한 시선조차 둘 데가 없어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정신없는 틈을 타, 몰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희창이였다. 녀석의 재미있 다는 표정이 내 당혹해 하는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젠장, 그제야 제정신이 든 나는 그녀의 고개를 들게 하려고 재빨리 어깨를 붙들었다. 그런데 더 야릇한 장면을 목격하는 나의 눈. 그건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선영이 누나의 치마였다.앉아서내 허리춤에 엉거주춤기울인 그녀의 자세는, 입고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지대한 효과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치맛자락이 당겨 올려져서 벌써 허벅지의 절반 이상이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하늘거리는 치마 속 다리는, 그것을 감싼 스타킹 - 팬티스타킹이 아니었다 - 의 밴드 부분까지 아찔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반쯤 끌어올려진 치마 아래로 벌려진 허벅지 사이, 그리고 내 바짓가랑이 사이를 더듬는 손길 그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어, 어...... 돼, 됐어요, 누나!"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그것이 고작이었다.난 허리를 빼 최대한 의자속으로 디밀며 그녀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미, 미안해....... 나 원래 이러지 않는데......" 아아, 도대체 이 누나는 정말 알면서 이러는 것일까?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구는 것일까?자세 가 원위치 되는 동안에도 그녀는 연신 사과의 말을 했지만, 후끈하게 얼굴이 달아오른 건 반대로 나였다. 선영이 누나, 그녀가 취했다는 것은 분명했다.더 이상 마신다면그녀나 나나 자제력을 잃는 것은 순간일 것 같았다.그녀는 술에 대해.나는 또다른 본능에 대해. 그렇지만 그녀는 다시금 술잔으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그녀는 초점 흐려진 눈으로 빈 잔을 채워줄 것을 요 구했다. "아, 안 돼요. 그, 그만 마셔요." "아냐...... 잠깐, 술 남은 것만......" "아뇨, 누, 누나...... 그만요, 예?" 몸이 무거워진 그녀의 한쪽 팔을 당겨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게 했지만, 선영이 누나는 막무가내였다. "왜 그래?나 아직은 괜찮단 말이야.술, 술도 남았잖아......" 그 때다.실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이지고 말았다.선영이 누나, 그녀는 희창이나 내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채워져 있던 내 술잔을 쥐고는 단숨에 비워버리는 게 아닌가. 이제껏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선영이 누나와 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희창이도 그 대목에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 같았다. 그건 양주만 가득찬 잔이었던 것이다. "누, 누나!" 그러나 단지 그녀는 약간 인상만을 찡그릴 뿐이었다.그리고는 목젖이 뜨끈한 느낌인지 한참 호흡을 가다듬더 니, 한술 더 떠 배시시한 웃음으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후...... 봐, 창희야, 나 괜찮지?괜찮지?괜찮잖아......" 벌써 혀가 꼬이는 목소리였다.미칠 노릇이었다.심지어는 희창이도 그녀가 좀 과했다 싶은지 눈살을 찌푸렸 다. "괜찮다니까...... 나, 취하면, 취하면 다 잊어버릴 거야.그 오빠도, 내 실수도, 모두다...... 그러니까, 창희야...... 우리 술 더 마시자, 응?"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도움을 청하는 표정으로 맞은편 희창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떡해야 할지 감이잡히질 않는데, 다만 녀석은뭔가 결정을 내린 듯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나는 다시금 표정으로 물었지만, 녀석은 잠자코 턱짓으로 술병을가리키더니 또 누나의 술잔을 가리킨다.뭐라 구?술을 더 주란 말이야? 놀란 눈으로 다그쳤는데도, 희창이 놈은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래, 알겠다.아예 술을 먹여 재우자는 거구나...... 맞다.희창이 때도 그랬다.그때야 녀석이 쫓아가 같이 여 관방에 있었기 때문이지, 선영이 누나를 혼자 재우면, 그리고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막으면, 다시는 그녀 가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 아닌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그리고그것이 할 수 있는 내 마지막 최선인 양듬뿍 콜라를 더 부었다. "고마워, 창희야, 우리 창희...... 정말 착해!" 내가 술을 따르자,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귀엽기까지한 행동이었는데, 문득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순간적으로 그녀가 몸을 기울이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내 코앞에 바싹 갖다대었던 것이다.그리고어쩔 줄 모 르는 나에게,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창희야, 나 밉지?그렇지?" 옅은 루즈가 칠해진 입술에서 술향기가 풍겨왔다.당황하여 얼굴돌릴 생각도 못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요..... 누, 누나......" "으응, 아닐 거야...... 난 알아.창희는 누나가 미울 거야!" 선영이 누나는 비음마저 섞고 있었다.너무나 가까운 거리기에, 그때까지도차마 둘 곳을 찾지 못하던 내 시 선이 촉촉한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의 자그마한 눈...... 물기를 글썽이며 반짝이고 있기에 나는 곧 말문이 막혀버렸다. "창희야...... 나 미워하지 마...... 나 싫어, 창희가 미워하면......"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희창이에 대해선 거의 잊어버린 눈치였다.나는 너무나 야릇해진 이 상황에놀라 멍청 히 희창이의 표정을 살폈지만, 녀석은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뭔가를 지시했다.이 정도라면 무언가 용납하는 행 동을 취하라는 표시 같았다. 내 품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작은 어깨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누나, 선영이 누나.나는 어쩔 수 없이 두 눈 을 질끈 감고서 팔을 둘러 그녀를 감싸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창희야...... 하지만, 하지만 나 미워하지 마...... 너마저 그러진 마......" "거, 걱정 말아요, 누나.내가 왜 누날 미워해요." 그러자 그녀의 더욱 놀라운 행동이 시작됐다.그녀의 한쪽 손이 가만히 내 품안으로 감춰지며 나의가슴팍을 가볍게 쓰다듬어 온 것이다. 어어 -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도 별반 놀라운 행동이 아니었다.정말내 심장이 멈출 정도로 당황한 것은, 그 녀의 자그마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창희야, 나...... 나 좀 꼭 안아줘...... 응?" 황당하여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그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동시에 선영이 누나는 내 어깻죽지에 연신 자신의 얼굴을 부벼대고 있었다. 도대체, 이 누나는 지금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아니면 그냥 술만 마시면 나오는 무의 식적인 것일까?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수없이 마른침을목구멍속으로 삼켜 야 했다. "나 안아줘...... 난 누가...... 누가 날 미워하는 게 싫어......" 그녀는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마치 춥기라도 한 듯 점점 내게 밀착했다. "창희, 착한 창희야...... 난 너무 슬퍼...... 제발...... 나를 싫어하면......" 아니에요.난 누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녜요 - 난감한 이 상황에, 희창이만 없었다면 난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그러나 그 말들은 혀끝에서 맴돌기만 하고 차마 입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싫어한다,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다. 도리 없는 일이었다.술기운일지는 몰라도,현재로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지금 내가 뭔가 그녀에게 친밀한 표현- 그것치고는 도를 지나친 것이지만 -을 보이지 않는다면...... 선영이 누나는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아니 미워하는 줄 알 것이다. 틀림없이 그녀는 그런 오해와 실망을 할 것 같 았다. 난 그녀가 원하는 마지막 행동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희창이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맙게도 마 치 아무 것도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점잖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나는 어색하게 남아있던 한쪽 팔로 선영이 누나의 마저 남은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누나......" 나는 이 가여운 여자를 위해, 잠시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쯤이라생각하기로 했다.내 가슴팍 위로 그녀의 봉 긋한 두 개의 언덕이 느껴질 때까지, 나는 으스러지게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따뜻했다.포근했다.어쩌면 위안을 얻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 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의 풍만한곳이 바로 내 품안에 있는 것이었다.부드럽고도풍만한 그 감촉...... 그것은 하늘색 니트와, 안에는 비록 얇은 천이지만 브래지어안에 감춰졌을 텐데도, 너무나 생생하게 촉감을 전 하고 있었다.그 모두를 느낌만으로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창희야......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선영이 누나는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내 품안의 영향력이었을 까.그녀의 애타던 목소리는 차츰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무언가, 남자의 손길에 닿아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안 도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희창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사라졌다. 아마도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생각 같아서는 녀석을 뒤쫓아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하고 싶었지만, 나의 자세 는 마치 매달린 그녀에게 꼭 붙들린 꼴이었다. 그 때 그녀가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고르게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 한숨을 쉬며 한쪽 손을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서 떼어내 술잔을 들고는 양주병에서 술을따랐다.그것이 마지 막 잔이 될 것 같은 양이었기에, 내가 마셔버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었으리라 짐작한 것은 내 착각이었다.그 때까지도 선영이 누나는 완전히의식을 놓지 않 은 모양이었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내 턱 아래에서 들려왔다. "나, 나...... 목말라......" "모, 목마르세요?그럼 물 드릴까요?" 내가 고개를 돌려 주인 아저씨를 부르려고 하는데, 그녀가 내 가슴팍에서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싫어...... 창희야, 술 줘......" 술을?이건 내가 마시려던 잔인데 - 그녀는 졸라대는 것처럼 도리질까지 쳤다.지금도 많이 취한 상태, 더군 다나 이번 잔도 콜라 따위를 탄 것이 아니었다.이걸 더 마시면 완전히 잠이 들까? 잠시 망설여졌다.어쩔 수 없이 내어깨에 고개를 기댄 그녀의 입가에 술잔을대주어야 했다.여전히 안긴 자세의 선영이 누나는 고개만을 조금 돌려 술잔을 입가에 대고 있었다.마치 내가 누나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듯한 포즈.꼴깍거리며, 양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그녀의 떨림이 그대로 내 가슴팍을 타고 전해져 왔다. "아아...... 기분 좋다...... 창희, 너랑 있으니까......" 그 때, 그녀가 입에 대었던 술잔을 내려놓는 찰나에 - 나는 내 가슴팍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펄쩍 뛸 정도로 소 스라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내 옷 위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손길이, 어느샌가그 안쪽...... 그러니까 셔츠 단추 가 벌려진 사이로 내 맨살을 더듬어 왔던 것이다. "창희 살결 너무 매끄럽다.느낌이 좋아......" 우와와, 나는 엄청난 그녀의 행동에 입이 딱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아무리 술기운이라고 해도 마치 치한 처럼 상대방을 더듬는 여자라니, 난 그런 여자는 술집여자를 빼놓고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내 셔츠단추까지 끄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용납할 수 가 없었다.이건 내가 농락당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나의 자존심도 참을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그, 그만해요, 누나!" 나는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벌떡,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일으켰다.내 셔츠 속 그녀의 손길도 금 방 갈 곳을 잃고 빠져 나왔다. 약간은 나도 내 행동에 놀란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우, 우리 나가요, 그, 그만 마셔요, 누나!" 의외의 내 행동에, 선영이 누나는 술취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창희야, 왜 그래...... 가지 마, 응?" "왜 그래?무슨 일이야?" 마침 다행이었다.자리를 비켜줬던 희창이가 막 돌아온 것이다. "희창아, 창희가, 창희가 날 미워하나 봐...... 날 두고 가려고해......" 선영이 누나 - 이 누나가 완전히 취했다는 건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나와 희창이에 게 번갈아 가며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초점없는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렸다. 무슨 상황인지 흘끗, 녀석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나, 난 그저, 이, 이제 나가자고......" 그녀가 난데없이 지나친 행동을 했기에 - 내 몸을 더듬었기에 - 그렇다고 설명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붉 어진 내 얼굴로 대충 짐작을 했는지, 희창이가 나 대신 선영이 누나의 팔을 붙들었다. "자, 선배, 우리 나가요. 예?" "싫어, 창희가 날 싫어한단 말이야...... 아직 술, 술......" 아직도 술을 찾는 선영이 누나.테이블 위의 술병은 바닥을 드러낸지 이미 오래 전, 다행이었다. "봐요...... 다 마셨잖아요, 그리고 창희는 누나 혼자 두고 가지 않아요.오늘 선배 곁에 계속 있어줄 거예요." 물론, 선영이 누나를 달래려고 한 말이겠지만,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녀석을 바 라보았다.무슨 얘기냐, 자기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한 녀석이? - 그러나 그는아무 말 없이 그런 내 표정을 무 시하며, 눈치채지 못하게 내 곁으로 다가와 슬그머니 돈을 쥐어줄 뿐이었다. 하기야 양주까지 마셔댄 술값은 그녀나 내가지불할 한도를 벗어난 상황이기는 했다.어쨌든기어이 녀석은 그녀와 내가 술을 마시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고 만 것이었다.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이에, 희창이가억지로 부축을 해줘서야 선영이누나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왜 그래, 나 안 취했어......" 횡설수설하는 선영이 누나를 그가 잠자코 데리고 나가는 동안 나는 계산을 마치고 술집 문을나섰다.그런 데 술집 문 밖에서가 더욱 가관이었다.비로소 탄산음료와 함께겁없이 마셔댄 위력이 나타나는 것일까.선영 이 누나는 계단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고, 그 몇 계단 아래쪽엔 희창이 녀석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 었다. 한쪽 손가락을 입에 대보였다.조용히 하라는 표시.드디어 그녀가 정신을 잃고 만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와 목소리를 낮추고 다그쳤다. "야, 이짱, 이제 어쩔 셈이야?" 희창이는 내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몰라서 묻냐?" 경악할 일이었다.녀석은 마치 이 모든일들을 전부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낄낄거리며 웃어댔다.그렇다면 설마 - 나는 녀석의 의도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너, 너 도대체!" 멱살이라도 쥐고 윽박을 지르려는데, 희창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턱으로 뭔가를가리켰다.아차차, 나는 그 순간 당황하여 입이 딱벌어졌다. 그가 가리킨 것은 계단에 앉아있는 선영이 누나였다.통로 벽에 고개를 기댄 채 선영이 누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곳에 또 하나의 아찔한 광경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은 그녀, 그녀의 치맛자락은 제멋대로 아래쪽을향해 벌려져 있었던 것이 다.게다가 나와 희창이의 위치가 계단 아래였으니, 그녀의 치마 속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아까 술집 안에서 잠깐 테이블 아래로 보인 스타킹은 물론, 그 허벅지 사이 아래로 자칫 잘못하면 은밀한 부위 까지 노출되기 직전이었다.그나마 다소 어두운 주변 불빛이그런 아슬아슬한 풍경을 가려줬기에 망정이지, 훤 한 대낮에 보았다면 입고 있는 팬티 색깔마저도 그대로 보였으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삼켜지는 것을 느꼈다.잠시 넋이 나간 듯 계단 위를 올려다보다가, 나는 민 망해져 희창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녀석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멀뚱거리고 있었다. 저 난처한 광경을 어떻게 처리하기는 해야겠는데, 그 모습이 하도 낯뜨거운지라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어, 어떡하지?" "그렇게 신나서 마시더라니...... 저번 주에 나랑 여관 들어갔을 때보다도 더 마신 것 같은데." 희창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계단을 올라가 선영이 누나를안아 세웠다.바깥 공기를쐬어서일까. 그녀는 거의 주체를 못하고 비틀거렸다.우리가 바로 앞에서 떠드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희창이는 그녀를 부축하고 계단을 내려오더니,어깨동무를 한 자세로 무작정앞장서 걷기 시작했다.선영이 누나의 발걸음이 위태롭게 갈지자로 흔들리고 있었다.용케 중심을 잡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멍청히 있을 거야?" 녀석의 핀잔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가방이며 소지품들을 챙길 생각을 했다. "야, 어, 어디 가는 거야?" "따라와, 짜샤" 힘이 남는지, 희창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선영이 누나를 부축한 채 걸어갔다.난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도리 없이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야만 했다. 씩씩하게 걷던 녀석이 문득 한 골목어귀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으응......" 그 때서야 잠깐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가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나는 화들짝 놀라 조마조마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무슨 처분이라도 기다리듯, 내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희창이는 멈춘 채로 고개를 돌려 선영이 누나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였다.목소리가 워낙 작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선영이 누나는 희창이의 귀엣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 를 젓기도 했다. 뭐지?둘이서 뭐라고 얘기하는 거야?하지만 떨떠름한 내 시야에 잡힌것은 선영이 누나가 풀어진눈길로 흘끗, 뒤에 선 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전부였다.마치 내가 거기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아예 녀석에게 어깨를 맡긴 선영이 누나가뭔가 동의를 했는지 - 씩, 희창이도 웃으며눈을 깜박거렸 다.동시에 입 모양으로 뭐라 신호를 보내왔다. 다시 발을 떼는 그들, 고개를 떨어뜨리고 거지 반 끌려가다시피 따르는 선영이 누나였다. "야, 이, 이짱!" 희창이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길 옆 골목길로 접어들었다.영문을 모르는 나는 우두커니 눈만 끔뻑이고 섰다 가 녀석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 때까지만도 그곳이 어떤 골목이란 것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다음 순간, 입이 떡벌어진 내 앞에 그 특유의 불빛이 펼쳐지고 있었다. 꿈속의 정사 막 희창이가 골목길을 돌아선 곳은, 다름아닌 술집 뒷골목의 여관거리였던 것이다. "야, 임마!" 기겁하는 나였다.하지만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이미 얘기가 다 된 듯 선영이 누나와 희창이는 정육점을 연상 케 하는 분홍색 불빛이 현란한 한 여관의 정문으로 들어서버렸다. 앞뒤 가릴 재간이 없었다.재빨리 난 그들을 말리기 위해서 후닥닥, 그 뒤를 쫓아 들어가야 했다. "어이, 학생, 우리는 혼숙 안 받아요." 그러나 다급하게 - 여관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잠이 덜 깬 인상의 주인 아줌마 였다. "예, 예?" 순간적으로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들은 이미복도 끝까지 가 있었다.소리쳐 그들을부르려고 했지만,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여관 주인 아주머니는 내 팔뚝을 붙잡고 가로막아섰다. "우린 혼숙 안 된다구.쉬려면 방 두 개 잡고, 한쪽에 가서 놀든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아주머니가 - 짜증나는 듯 손바닥을 내밀며 계산을 재촉하는 여 주인이었다. "학생 친구들 방이 102호고, 자 여기 103호." "그, 그게 아니라 전 도로......" "글쎄 안 돼.다 알면서 왜 그래?그래 놓고 나중에 우르르 몰려오면, 걸리는 건 우리란 말이야." 미칠 일이었다.앞선 사람은 들어가 버렸고, 어차피 돈은내가 갖고 있지 않은가.방을 두 개 잡느냐한 개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엉겁결에 돈을 건넨 나에게, 주인 아줌마가 코앞에 흔들며 건네준 것은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방 열쇠였다. 이미 진작에 문은 열려져 있었는지, 누나와 희창이는 복도에서사라지고 없었다.나는 황급히 선영이 누나와 희창이가 들어간 방을 향해 쫓아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들어선 방문 앞에서 딱멈춰야만 했다.어느새 그들이 들어간 방문은 굳게닫혀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여관방 앞에서 졸지에 모든 용기를 잃고 말았다. 쿵쿵쿵 - 방문을 두들겨야 했다.그래야 옳았다.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피운다고 뭐가 어찌 될 것 인가.그래, 침착하자.흥분할 필요는 없어.나는 혼자 방에 들어서면서,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했다. 비록 희창이와 선영이 누나가 같이 들어가기는 했으나, 설마 녀석이 허튼 수작을 부리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 다.그녀를 재우기 위해 들어갔을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일단 그 옆방으로 들어갔다.이상한 기분이었다.여관방을 전전해 본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렇 게 혼자 잠을 자기 위해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엉거주춤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시선마저 둘 곳이 없어 깨끗이 정리된 여관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모든 가지와 날개가 꺾인 기분이었다. 하도 경황없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파악마저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여기는 여관방이다.최대한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선영이 누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술을 마셨다.어 쩌면 그런 그녀를 이런 곳에 데리고 와 곱게재우는 것이나을지도 모르는 일.....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괘씸한 것은 희창이였다.이런 상황까지 몰고 온 것은 녀석이었다.비리니 뭐니, 선영이누나가 그렇고 그런 여자니 아니니, 그 따위 확인도 안 된 말을 앞세워 안 그래도 꼬인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나를 난감한 지 경으로 몰아세웠다. 초조해진 나는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그녀의 약점을 이용해 저 가녀린 선영이 누나를 또 한 번의 궁지 속 으로 몰아넣은 녀석에게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비참함인지 어처구니없음인지 어금니를 물며 화를 삭이고 있는 와중에, 내오관 중에 유일하게 작동하 는 부분이 있다는 걸 난 그제야 느끼고 있었다. 원래가 이런 변두리의 여관방은, 벽이 얇기 마련 - 그런 벽사이로, 저 멀리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것같이 야 릇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난 그 소리들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민망해져야 했다. 그건 정사의 부산물들이었는데, 교성, 신음소리,말소리...... 그런것들이 뒤섞여 여관방의옆층, 위층, 사방에서 희미하게 울려오고 있었다.한두 군데가 아니었다.이미 이 여관의 많은 방들이 손님들로 가득 찼을까, 그런 야 릇한 소음들은 벽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이곳저곳에서 전해져 왔다. 아는 사람은 안다. 포르노테이프처럼 연기도 아니고, 실제상황이 전해주는 적나라한 사운드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그런 남녀의 기성과교성 한가운데에서 덩그러니 앉아있는 나는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상상, 항상 그것이 문제였다. 순간 짚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그것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혹시 저 소리들 속에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 사람,그것도 바로 옆방에 있는 두 사람도? 아냐, 아닐 거 야. 아니어야 해.아아, 이 무슨 망측한 생각이냐, 창희야! 설사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내 자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웠다. 그 때,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세요!"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는데, 들려온 목소리는 아까의 여관주인이었다. "어이, 학생, 혼잔 것 같은데, 아가씨 들여보내 줘?" 환장할 기분이었다.아가씨라니...... 주인 아줌마는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하기 위해 들어온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 아녜요! 저, 저 필요 없어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도, 아주머니는 물러설 기색 없이 복도에서 맞고함을 질러댔다. "왜그래, 학생?보아하니 아까 그 아가씨, 그쪽 파트너는 아닌 것 같은데?" 기기 막힐 노릇이었다.어째서, 왜, 내가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가. 내가 다시 한마디 쏘아붙이려 하는데, 갑자기 철컥, 삐거덕,하며 방문이 열렸다.나는 다급히 앉아있던 침대 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예요!"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방 안에 들어서고 있는 것은 희창이였다. "나야, 새꺄.뭘 그렇게 놀래?" 순간적으로, 후우- 하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녀석은 멀쩡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푸훗, 왜, 나보다 아가씨가 낫냐?" 어이없는 희창이의 말에, 다소 계면쩍어졌지만, 금방 불 같은 적개심이 일어났다.이 자식 - 이자식이 날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이다.내가 흥분하고 있음을 알아챘는지, 희창이는 방바닥에 잠자코 주저 앉았다. "야 야, 그래 알아, 임마.무슨 말 할건지...... 그래, 미안하다.내가 맘대로 굴어서." 맘대로 굴었다고?나는 희창이의 턱이라도 한방 갈기고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참았다.그러나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칙, 담배를 피워 물었다.나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난 계속 들려오는 주위의 소음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저 신음소리들 중의 하나가 이 녀석과 선영이 누나의 것은 아니었을까?저 희미하게 헐떡이는 여자의교성들 중에 내가 선영이 누나의가쁜 신음소리를 들은 것은 아닐까? "너...... 너 어떻게 한 거야, 선영이 누나?" 그러나 대답 대신 희창이 놈이 들려주는 것은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뿐이었다. "캬아...... 걱정 마.난 아무 짓 안 했어." "아무 짓 안 했다구?" 재깍 튀어나오는 내 반응에 나도 놀랐다.내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니. "그래, 임마.침대에 뉘어준 것 빼고는...... 니가 신경 쓸 짓 아무것도 안 했다구." 정말일까?이 자식이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을까? "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확인해 봐.문 안 잠갔으니까." "저, 정말이지?" "어이구, 얌마, 시계를 봐라.여기 들어온 지 10분이나 됐냐?이젠 내 말도 못 믿냐?" 그건 그렇다.내가 이 녀석의 말을 못 믿을 이유는 없었다.최소한, 우리끼리는 여자를 두고거짓말 한 적은 없었다.희창이와 선영이 누나가 단둘이 있었다면 모르되, 차마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볼 수 없 었다. 그런데 이어진 희창이의 얘기는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다리고 있어.선영 선배가." "기, 기다리다니...... 뭘?아니, 누굴?" 귀찮은 듯, 시큰둥한 목소리의 희창이. "누군 누구야, 너지!" 띠잉,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충격이었다.나?이건 또 무슨 얘기냐? "푸훗, 놀라기는...... 저 여자도 알아.너 여기까지 온 거." 흘끔,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을 보며, 희창이는 쿡쿡거렸다. "아까 오면서 물어 봤어.혼자 집에 갈 수 있겠냐구.지금은 못 가겠다고 하길래,그럼 난 갈 거니까 어쩌겠 냐고 했지.그랬더니 묻더라.짱이 넌 어쩔 건가." 희창이는 벌렁,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래서 그랬어.창희는 집이 이 근처니까, 같이 있어줄 거라고 말이야.적당한곳에서 쉬었다가 술 깨고...... 너더러 바래다 달라고 그러라구.선영 선배도 동의했다.어쨌든 가 봐." 나는 황당한 녀석의 이야기에 머리 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도대체 이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 그럼 아까 길가에서 둘이 얘기한 것이 그것이란 말인가?지금껏 마신 술이,한꺼번에 깨는 느낌이 었다. "너, 넌 어쩌려구?" "나야 집에 가야지.두 사람 재미 보는데 방해할 일 있어?" 그런데 희창이가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조소를 띄웠다. "내가 비리가 두 가지라고 했지?" "비, 비리?" "내가 그랬잖아.저 여자에 대해서.하나는 굳이 같이 자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 두 번째는 같이 자고 나 면 알 수 있는 것, 이렇게 두 가지라고......" 그랬다.애초에 그가 떠든 비리라는 건 두 종류라고 했었다.그리고그 두 가지 비리를 확인해 보라고 나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 아닌가. "넌 아직도 못 믿고 있지?첫 번째 비리,저 선배가 그렇고 그런 여자일 거라는 얘기.좋아,그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가서 확인해 보면될 것 아냐.만약에창희 니 생각이 옳으면아무 일 없을 거고,내 생각이 옳으 면......" 그 대목에서 희창이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말할 듯이 뜸을 들였다. "희, 희창이 니 생각이 옳으면?" "넌 그 두 가지 비리가 무언지 알 수 있을 거야.틀림없이 내일쯤엔." 녀석은 묘한 시선으로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다.즉 이런말이었다.선영이 누나와 내가 행여 잠자리를 같이 한다면, 그녀의 두 가지 비리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는....... "가기 싫으면 가지 마.그건 니 자유니까.하지만 저렇게 정신없는 선영 선배를 이런 곳에 혼자 재워도 될까? 니가 같이 있어 줄 거라구 얘기해서 널 믿고 따라온 여자인데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희창이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혼자 돌아갈 모양이었다.뜻모를 묘한 웃음을 남기고 방문을 나서는 녀석을, 나는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 마지막 말에 이제 홀로 남은 나는 난감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혼자 잠든 방에 들어가야 하는가.희창이 녀석의 말대로 비리의 그녀와 함께 그것도 같은 여관방 안에 있으란 말인가. 선뜻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일이었다.아까부터 가뜩이나 야릇한기분에 휩싸인 나인데, 만약 조금이라도 선 영이 누나에게 그런 비리가 있다면...... 애써 부정해온 내가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비리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이녀석이 말하는 것이 과연 정말일까,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아까 선영이 누나는 가까이서 떠드는 우리 얘기도 듣지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그런 비몽사몽간 의 그녀가 나더러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는 것은 - 가장 나약해진 순간에 나를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 었다. 어쨌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단 한 가지다.희창이도 없는 마당에,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 다는 것. 그래, 가자.가 보자.꼭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술이 깼다면, 그냥 조용히 재워 주거나...... 원한다면 집에 데려다 주거나 하면 되지 뭐. 아마 희창이에 대한 자존심 문제였는지, 나는 그 순간 지금껏 머뭇거려온 용기가 전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똑똑, 선영이 누나가 있는 방문에 노크를 했다.조용하다.똑똑, 다시 한 번 예의상의 노크.그러나 방안에선 응답이 없었다. 잠이 든 걸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들고 온 열쇠를 사용해야 했다.방문이열렸는데도, 여전히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았다. 빼꼼히 열려진 방안, 그 안은 의외로 어둠침침한전등마저 꺼져 있었다.어째야 하지?등뒤로 문을잠그며,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나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아무래도 선영이 누나는 잠든 모양 - 그녀를 부르려다 망설이는데, 그럴 바엔 그냥그대로 옆방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막 뒤돌아서려는 그 때, 등뒤에서 선영이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싫어하지 말아...... 같이 있고 싶어......"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워하지 말아...... 나......" 그녀의 잦아들 듯 애처로운 목소리는...... 지금 이 방안에 들어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안단 말인가?이렇게 어 두운데? 마른침을 삼킨 나는 당장 불을 켜야겠다고 결심했다.그녀가부끄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과 감히 벽의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확 - 껌뻑이던 희미한 형광등이 켜지자,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침대 위 한가운데에 던져지듯 누워있는 선영이 누 나였다.흐트러지기는 했으나 입고 있던 옷가지 그대로였다. "아아응...... 가지 말아요...... 잘못했어......" 다행이었다.그녀는 잠든 상태였던 게 분명했다.잠꼬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형광등 불빛에눈이 부셨는 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낮게 웅얼거리고 있었다.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가까이 다가가 선영이 누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희창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그녀 의 겉모습은 멀쩡한 그대로였다.옷차림을 살펴도 누가 벗기려고 했다던가 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쓰러져 있는 그녀의 자세가 그리 볼썽사나울 뿐.어찌어찌 신발은 벗긴 모양이지만, 녀석이 그냥 던져놓 듯 막 뉘어 논 모양인지 스타킹 바람의 맨발 위에는 아무 것도 덮여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민망한 광경이었으니, 그 맨다리 위쪽으로 그녀의 베이지색 플레어 스커트가 뒤집히듯 끌어올려 져 있기에 무방비 상태의 하체가 적나라하게드러나 있었다.내가 그녀의 다리쪽에 서있었기 때문에, 선영이 누나의 알맞게 매끈한 다리가 쭉 펼쳐지듯 올려다 보였다. 뭐랄까, 결코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금세 눈을 돌리고 싶은 광경도 아니었다. 아니, 평상시의 나라면 침을 흘릴 그런 경치였다. 하지만 가까스로 자제심을 발휘한 나는, 어색한 동작으로 침대 위의이불을 들었다.비록 나 외에 볼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그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기에 허리 아래라도 감춰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불자락을 들고, 그녀의 발치께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만 한 가지 고민이생겼다.치마와 스타킹, 이걸 벗겨줘야 하나?고급인 것 같은데, 벌써 엄청 구겨져 있었다. 선영이 누나의 옷을 벗겨준다 -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스라이떨려왔다.문득, 어젯밤에 예지의 옷을 벗 겨주던 기억이 떠올랐다.기가 찰 노릇이었다.이틀 연속으로 이런 상황이 발생하다니. 그 순간 나는 결정을 내렸다. 입술을 질끈 물며, 곱게 그녀가 깨지 않도록,조심조심 발 아래부터 이불을 씌워 준 것이다.어제의 일이 그 이유였다.얼마나 예지의 속옷 앞에서 갈등했던가.이성과 본능의 사이에서그 속 살에 대한 욕심은 정말 참기 힘든 유혹이지 않았던가. 남들은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같은 갈등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다.행여 그녀의 옷을 벗기 다가 더 큰 불상사에 봉착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차피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몇 시간 후에갓 새벽이 되면 그녀를 깨울 생각이었으므로, 옷을 벗기고 재울 필요도 없었다. 대신에 위쪽까지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선영이 누나의 상체 위로 고개를 숙이던 나는,그녀의 잠든 얼굴을 가 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차분하고 고운 얼굴이었다.작지만 오똑한코, 감긴 눈의 속눈썹은 길었고, 살짝다문 입술은 핑크 빛으로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었다.아름답다. 나는 잠든 여자의 얼굴이 그렇게평화롭고 예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무언가 새로운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입맞춤은 어떨까 -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너무나 입맞추고싶은 선영이 누나의 얼굴이었다.굳이 저 조그만 입술이 아니더라도, 반듯한 그 이마에라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그녀의 몸 위에서 너무 오래 머무른 탓일까.벌떡, 잠든 줄로만 알았던 선영이 누나가 갑자기 허리를 일 으킨 것이다. 으악, 나는 기습적인 상황에 너무 놀라하마터면 그녀와 이마를 부딪힐 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고 잠들어 있던 그녀가 깨어날 줄을 그누가 상상했으랴.자칫 잘못했으면 비명을 지르며 침대위에서 굴러 떨어질 정도였다. 어쨌든 후닥닥, 재빨리 침대 위에서 내려와 방구석으로몸을 숨겼다.그렇다고 그녀가 못 볼리는 없겠지만, 나는 쥐구멍, 아니 창문이라도 열고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어멋, 꺄악, 누구야! 창희 너 뭐한 거야! - 이런 선영이 누나의 비명을 예상하며 방구석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는데...... 얼레, 의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조심스레 한쪽눈을 치켜 뜨고 침대 위의 선영이누나를 살피는데, 의외로 그녀는 그저 허리만을 일으켜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으응...... 여기가 어디지......?" 나는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인데,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제야 뭔가 생각이 난 듯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긴다.선영이 누나는 바로 내 곁을 지나 문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 어디 가요, 누나?막 이렇게 부르려는 찰나에, 끼익,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그것은 방문이 아 니라, 바로 옆에 달린 화장실 문소리였다. 휴우...... 가슴을 쓸어내렸다.난 몽유병 환자처럼 그녀가 밖으로 나갈까 봐 질겁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몽유병은 아니더라도,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진못한 것 같았다.제대로 술이 깬상태라면, 바로 앞의 나를 못 봤을 리가 없는데 마치 내가 투명인간으로 보이는 듯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때였다.화장실 안에서 들려오는 쿵, 하는 둔탁한 소리. 누군가가 미끄러지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 같았다. 그렇다면 - 아직 취한 상태의 그녀? "누, 누나, 선영이 누나!" 나는 반사적으로 화장실 문을 향해 몸을 날리자마자 문고리를 붙잡았다. 어, 이게 웬일. 난 문이 잠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아니었다.두 손에 가득 힘을 주어 밀었기에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어 젖혀지며 나는 쏟아지듯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누, 누나, 괜찮아요?" 너무나 놀랬기에, 나는 잽싸게 화장실 안의 정경부터 살폈다.그런데 선영이 누나는 대답 대신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시 일어났는지 어쨌는지, 그녀는 멍하니 좌변기 앞에 선 채 치맛자락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고서, 화장실 타 일 벽에 기대어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저 누나가 뭐하는 거지?뭔가 의도대로 안 되는 모양인지 계속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은, 한참이나 지나서 이 해되어 그제야 낯뜨거운 내 고개를 돌리게 했다. 다름 아니라 선영이 누나는, 소변을 보기 위해 치마를 걷어올리고 팬티를 끌어내리려는 중이었는데, 취기에 몸 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탓에 그 간단한 동작 - 끌어올리고, 안의 것을 내리는 - 채 못하여 허둥거리고있는 것 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야 하나?저러다가 잘못 넘어지기라도 하면?어쩔 줄 모르고 있는내게, 여전히 허리 를 굽히고 치마 속에 손을 넣은 채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아 나, 이것, 이것 벗어야 하는데...... 그, 금방......" 흐익, 이게 무슨 소린가 - 당혹스런 내가 흘끗 돌아보는데, 그녀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나, 나 좀 도와줘...... 얼른...... 아이......" 뭐라고요?여기서 나더러?나는 입이 떡 벌어져 턱이 바닥에 닿는 것 같았다.지금 자기 팬티를 벗겨달라 니, 이 누나가 과연 제정신인가? "나 못하겠어...... 나......" 가끔 막 똥오줌을 가리기 시작한 꼬마 조카들의 팬티를벗겨준 적은 있지만, 이런 황당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 큰 처녀,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은 위인 누나의 것을 말이다. 환장을 하고도 미칠 노릇, 하지만 선영이 누나는 진짜로 다급한지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까지 내고 있기에 나는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만 할 지경이었다.여긴 갈아입을 옷도 없는 곳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아야 했다.이건 마치, 내가 선영이 누나의 엉덩 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형국이었다. "가, 가만 서 계세요.넘어질지 모르니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녀의 치마 속으로 더듬더듬 양손을 집어 넣었다.내 손이 그녀의 치마 안에 들어서 자, 선영이 누나의 손은 팬티 밖으로 빠져나가 벽을 짚었다. "누, 누나...... 조심해요." 제일 먼저, 매끈거리는 스타킹으로 감싸진 선영이 누나의 양쪽 허벅지 감촉이 손등에 닿았다.두 손을 머뭇거 리며 더 위로 올렸다.이번엔 그녀의 매끈한 허벅지 살결이 느껴졌지만, 후우, 큰 숨을쉬며 손을 더 올려서 더 듬어야 했다.아직 그녀의 팬티라 여겨지는 부분은 내 손가락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팬티는 끝선의 라인부분이 꼬인 채로, 얼추그녀의 엉덩이 중간께에서내려지다 말고 걸려 있었다. 위치를 확인했으니 이젠 끌어내려야 했는데, 어림짐작으로 확인은 했지만 손가락을 안으로 집어넣어 벗겨내는 그 동작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게 할 정도로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풍만한 선영이 누나의 엉덩이 살을 더듬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확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었다.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속으로 하나 둘 셋, 박자까지 맞춰 가며 그 마지막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허벅지 중간도 못 내려왔는데, 또 한 번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으니 - 얼어붙은 내 손길이 너무 굳어있던 탓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 때까지 치마가 반쯤 끌어올려진 채로 바로 내 코 앞 - 진짜 코앞이었다 - 에 위치하고 있던 선영이 누나의 엉덩이, 아마도 벽을 짚고 있던 누나의 손이 미끄러졌는지,그 엉덩이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며 내 앞으로 쏟아 져 왔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나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뒤로 주저앉을 뻔했다. 팬티는 끌어내려져 있었고, 내 얼굴과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얇은 치마뿐, 그것만으로 가려진 부위가 정확히 내 얼굴 위로 덮어씌우듯 부딪쳐 왔다.아니 내 얼굴이 순간적으로 파묻혔다는 표현이 옳 을 것이다. 나도 그녀처럼 정신이 아뜩하여 휘청이는 기분이었다.그녀의 엉덩이사이에, 내가 얼굴을 들이민 것과 마찬 가지였다. 다행히도 금방 다시 중심을 잡은 선영이 누나는 다급한 듯 서둘러 좌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정말 급했던 모양이었다.민망한 소음이 등뒤로 들려오고 있었다.그 야릇한 소리에, 고개를돌린 채 정신이 나가 있던 나는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에서야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 그제껏 화장실 안에 있었다는 생각에, 나는 한꺼번에 얼굴이 화끈거려 허둥대며 밖으 로 나가려 했다. 서둘러 이 망측한 상황을 피해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선영이 누나의 난처한 요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 다. "잠깐...... 나 휴지 좀......" 허 참, 휴지는 그녀의 팔이 닿기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그 두루마리 화장지를 집어, 등뒤로 내밀었다. "이, 이제 됐죠?" "잠깐만...... 나 무서워...... 가지 마......" 정말 돌겠군.화장지를 끊는 소리가 나더니, 부스럭거리며마찰음이 적나라하게 들려오고는 변기의 물소리가 이어졌다. "입혀...... 드려요?" 변기의 덮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여전히 뒤돌아서서 고개 너머로 물었다. 제대로 벗지도 못하는 데 다시 입힐 것이 또 걱정이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비교적 말소리가 가라앉은 것으 로 보아 다소 정신이 들었는지 혼자서 해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나, 나 좀 도와줘......" 내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자, 짐작대로 선영이 누나는 다시 벽에 손을 짚고 일어서 있었다. "못 걸을 것 같아...... 아아......" 아마 아직도 걸음을 가누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별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붙들어주어야 했다. 침대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그녀는 몇 번씩이나위태롭게 비척거렸다.그런 모습을 보자니 내가옆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방금 전 화장실 안의 일들이야민망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라도 없었다면 아 마 더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했다.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도 그녀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털썩, 선영이 누나를 누이고 나니 등뒤로 식은땀까지 흐르는 것같았다.그러나 선영이 누나는 마치 진짜 몽 유병 환자처럼 어느새 잠이 들었다.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웃지도 못할 상황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이 누나는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연기를 한다 해도 이렇게 천연덕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희창이의 말대로, 술만 마시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 지 못하는 게 사실인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그녀를 그냥내버려 둘 수 도 없는 일.나는 그녀의 몸을 덮어주기 위해 침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이불자락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어깨 위까지 이불을 씌워주려던 내 눈에 희한한 광경이 들어오고 있었다.어린아이같이잔뜩 몸을 웅 크린 선영이 누나 -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라 그냥 덮어두려 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자세가 너무나 진지하고 심 각해 보였다.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서, 그 손바닥 안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어났다. 무심결에 이불자락을 놓고서 조심스레 그녀의 주먹에서 그 물체를 빼보았다. 무슨 종이, 아니 헝겊조각인데...... 그 순간 나는 잡아당기고 있던 그 물건을 당장 놓으며 기겁을 하고 말았다.그것은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가리고 있어야 할 천조각, 즉 팬티였던 것이다. 아까 왜 팬티를 도로 입혀 달라고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그냥 손쉬운 쪽을 택해 아예 벗어버렸 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누운 선영이 누나가 노팬티 차림이란 얘기?으힉, 그 민망한 상상에 숨도 크게 못 쉴 지경이었 다.후닥닥, 나는 그녀의 목까지 잔뜩 이불을 끌어올리고는 시선을 돌렸다.괜스레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보 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셈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 곁에 주저앉아버렸다.정말 요지경 속에빠진 느낌이었다.왜 내게 이다지도 황당한 일들이 생긴단 말이냐.우여 곡절 끝에 선배누나와 한 여관방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화장실에서 그녀의 팬티에 까지 손을 대게 되고, 이젠 그런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팬티로 자고 있다니. 차라리 이 방안에서 도망치는 것이 나을까. 만약 선영이 누나가 깨어나 무슨 일이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면, 뭐라 얘기해줘야 하는지 막막할 따름이었다.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이런 허름한여관방에 여자 혼 자 두고 나가는 것은 사내로서의 도리가 아니니 말이다. 홱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다가,나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팬티를 입혀줄 수도 없는 노릇. 침대 발치에 등을 기댔다.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지만, 결국은 나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그래. 마음을 굳혔다.몇 시간만 지나면 아주 늦은새벽은 아닐 터, 선영이 누나도 집에 들어가대충 변명을 할 수 있는 시간대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 안에 저 누나가 술이 깨기를 바라자.어차피 그러려고이곳에 들어선 거 아닌가.그리고 그녀를 데 려다주고 나 혼자 자취방까지 걸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자. 아직까지 불을 끄지 않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나는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켜 스위치를 내렸다.비록 몇 시간이라도 선영이 누나가 푹 자도록 해주고 싶었다. 여관방 창문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쏟아들어져 왔다. 누군가가 살며시, 내 어깨를 흔들었다.나는 그 바람에 몽롱한 고개를 들어야 했다.흐릿하게 올려다 본 눈길 에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무얼 하려는 것일까, 시야에 가득차듯 조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나는 무의식적 으로 눈을 감았다.입맞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것이리라 생각했다. 보드랍고 가볍고 촉촉한 무엇이 내 입술에 닿았다.아아, 이감촉!행복한느낌이었다.그 입술이 떼어질 때 까지, 나는 조심스레 감은 눈을 뜰 수 없었다.그 때, "창희야......" 그 여자의 목소리가 궛가에 아련히 들려왔다.나를 가만가만 부르고 있었다. "창희야...... 일어나 봐......" 이 목소리, 나지막한 이 목소리 - 으앗!나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세웠다.퍼뜩 감은 눈을 떴다.맙소사, 이 건 꿈이다.휘둥그레진 눈으로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그 여관방 안,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댄채 쪼그려 앉은 상태였다. 방안엔 아직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그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 그건선영이 누나였다.누나 의 얼굴이 마주보고 있었다. 황급히 나는 입술에 손을 대보았다.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누나가 내게입을 맞추 - 아니다.그 건 꿈이리라.하필이면 그런 꿈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꿈과 현실을 분간하느라 머리를 흔들어댔다. "여기 어디야?" 선영이 누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저...... 그, 그게."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는데, 그녀는 가볍게 한숨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알아...... 여관방이지?" "어...... 예, 예......"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혹시라도 아까 화장실처럼 이 누나가 비몽사몽간 에 깨어난 것이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한쪽 팔을 짚고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번엔 분명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희창이는...... 어디 갔어?" "희창이요?그, 그 녀석은...... 가, 갔어요." "그랬구나." 그녀는 알았다는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다행이었다.머리라도 아파서 잠을 깬 것인가.그런데 그 순간 난 후닥닥 정신이 들었다. 시간 - 난 재빨리 손목시계를 더듬어 찾았다.아뿔싸, 두어 시엔 깨어야 했을 것을, 바늘은 이미 새벽 다섯 시 에 가까워져 있었다.그러고 보니 창 밖 가로등 불빛이 약해진 것이, 벌써 신 새벽빛이 조금씩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누, 누나, 미안해요.더 일찍 깨워주려고 했는데......!" 다급해진 나는 서두르는 시늉을 해댔다. "어, 얼른 나가요!제가 택시로......" 하지만 잠시,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던 선영이 누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군가가 살며시, 내 어깨를 흔들었다.나는 그 바람에 몽롱한 고개를 들어야 했다.흐릿하게 올려다 본 눈길 에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무얼 하려는 것일까, 시야에 가득차듯 조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나는 무의식적 으로 눈을 감았다.입맞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것이리라 생각했다. 보드랍고, 가볍고 촉촉한 무엇이 내 입술에 닿았다.아아, 이 감촉!행복한 느낌이었다.그 입술이 떼어질 때 까지, 나는 조심스럽게 감은 눈을 뜰 수 없었다.그 때, "창희야......" 그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련히 들려왔다.나를 가만가만 부르고 있었다. "창희야...... 일어나 봐......" 이 목소리, 나지막한 이 목소리 - 으앗!나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세웠다.퍼뜩 감은 눈을 떴다.맙소사, 이 건 꿈이다.휘둥그레진 눈으로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그 여관방 안,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댄채 쪼그려 앉은 상태였다. 방안엔 아직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고있었다.그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 그건 선영이 누나였다.누나 의 얼굴이 마주보고 있었다. 제길, 아마도 졸았던 모양이다.그녀는 침대 위에서 허리를 일으키고 나르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급히 나는 입술에 손을 대보았다.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누나가 내게입을 맞추 - 아니다.그 건 꿈이리라. 하필이면 그런 꿈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꿈과 현실을 분간하느라 머리를 흔들어댔다. "여기 어디야?" 선영이 누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저...... 그, 그게"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는데, 그녀는 가볍게 한숨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알아...... 여관방이지?" "어...... 예, 예......"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혹시라도 아까 화장실처럼 이 누나가 비몽사몽간 에 깨어난 것이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한쪽 팔을 짚고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번엔 분명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희창이는..... 어디 갔어?" "희창이요?그, 그 녀석은...... 가, 갔어요." "그랬구나." 그녀는 알았다는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다행이었다.머리라도 아파서 잠을 깬 것인가.그런데 그 순간 난 후닥닥 정신이 들었다. 시간 - 난 재빨리 손목시계를 더듬어 찾았다.아뿔싸, 두어 시엔 깨어야 했을 것을, 바늘은 이미 새벽 다섯 시 에 가까워져 있었다.그러고 보니 창 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약해진 것이, 벌써 신 새벽빛이 조금씩 드는 모양이 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누, 누나, 미안해요.더 일찍 깨워주려고 했는데......!" 다급해진 나는 서두르는 시늉을 해댔다. "어, 얼른 나가요!제가 택시로......" 하지만 잠시,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던 선영이 누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됐어.아따가 아침에 들어가도 돼.그보다......" 그녀는 도리어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창희 너, 그렇게...... 거기서 내내 있었던 거야?" 순간적으로 나는 머쓱해졌다.그녀가 잠든 틈에 들어와 허락도 없이 곁에 있었던 셈 아닌가. "저...... 죄송해요, 그게......" 그렇지만 선영이 누나는 그것을 따지려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너 잠은...... 좀 잤어?" 잤느냐구? 그건 내가 누나한테 묻고 싶은 말인데, 반대로 그녀는 내가 침대 옆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던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니 편하게 있지않구.이리 와." "예?" "올라 와서 같이 누워...... 나 땜에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여기서 편하게 자." 으잉, 엉뚱한 그 제안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그녀는 농담이 아닌 듯,짐짓 몸을 움직여 내가 누울 자리까지 마련 해주며 다시 말했다. "조금 눈을 붙였다가 나가.나 지금 안 가도 돼." 예? 당혹스런 말이었다.자기 옆에 누워서 같이 자자니? "그, 그렇지만...... 누, 누나!" "난 이따 아침 돼서 나가도 돼.그게 나야.좀 더 자도 되는데...... 안 그러면 나 더 못 잘 것 같아." 얼떨떨한 노릇,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나는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침대맡에 걸터앉아야 했 다.왠지 모를 어색함이 밀려왔다. "괘, 괜찮아요?" "응, 뭐가?" "수, 술 마신거요......" "걱정 마.괜찮아.속은 얼얼하지만, 나 원래...... 술은 약해도 깨는 건 금방 깨니까." 선영이 누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이상했다.어색해야 할쪽은 응당 그녀, 헌데 그게 아니라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뭔가 망설이는 듯한 누나의 목소리. "잠깐만, 저기 창희야, 나......"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녀는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깐 고개 좀 돌리고 있어줄래?" "예?아......예."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뒤쪽에서 바스락거리며 이불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차,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팬티.그녀가 팬티를 벗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그럼 아마 지금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팬티를 입 는 중? 그렇다면- 순식간에, 나는 등줄기에 짜르르 전기로 충격을 받은 듯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이게 무슨 얘기인가.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선영이 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누, 누나!" 목구멍으로 꿀꺽, 마른침이 삼켜졌다. "어, 어제 나, 나랑 있었던 일, 기억나요?" 그랬다.그녀는 자기가 팬티를 벗고 있었다는 사실에 하나도 놀라지않고 있는 것이었다.기가 막힌 일이었 다.선영이 누나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선영이 누나!" 이럴 수가.잠시, 내 추궁에 흠칫거리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 그럼...... 화, 화장실 갔던 것도요?" "응." 그녀의 나지막한 대답이었다.모두 기억한다는 얼굴,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하, 하나만 더...... 누, 누나 팬티, 내, 내가 벗겨준 것도 알고 있어요?" "응." 완벽한 동의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환장하고,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다니.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녀가 몽유병 환자처럼 아무것도 모르리라 짐작했었지 않은가.나도 모르게 걸터앉았던 침대에 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쥐구멍이라도 찾고픈 심정이었다.안된다면 그냥 도망치듯 빠져나오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일까?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말도 안 된다.그렇지만 등뒤에서 들려오는 선영이 누나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여기 같이 있어, 창희야.나 혼자 있기 싫어." 기가 막혔다.지금 이 상태에 혼자 있기 싫다니...... 그럼 나와 같이 누워있자는 말인가? 아무리 후배라 해도 그렇지, 그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놓고? 선영이 누나가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미안해 기억은 나지만, 어쩔 수 없었어.제정신이 이니었거든.가지 마, 창희야." 아아, 차마 그녀 쪽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돌리고 방안을 서성거렸다.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놈의 비리란 것이 다시 생각났다.비리, 그래.비리...... 자꾸만 희창이의 얘기가 상기되고 있었다.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선영이 누나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희창이 녀석의 얘기에 따르면, 그녀는 술을 빌미로 그렇고, 그런 일에 익숙한 여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녀를 감싸기 위해 노력했다.그런데 어제와오늘 새벽에 걸친 이 사건들은 또 무어란 말인가. 자기 팬티까지 벗겨준 남자, 아무리 후배라고는 하지만 분명 다리털 시커먼 남자인데, 그것을 뻔히 기억난다고 하면서도 스스럼없이 같이 있겠다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어쩌면 이것이 가장 궁극적인, 그리고 희창이가 의도했던 바인 선영이 누나의 비리 에 관한 문제라 해도, 이제는 솔직히 물어야만 했다.아니, 먼저 털어놓고고백해야 했다.어째서 왜 - 희창이 가 술을 먹였으며, 그녀와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는지를. 마음이 약해질까 봐 걱정이 되면서도, 나는 선영이 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더 이상 어쩔수 없었다.모 든 의문점을 풀 작정이었다. "서, 선영이 누나, 저, 저는......" 저는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날믿고 있기 때문인가요?아님, 누나는정말 희창이 말대로 비리가 있나요? 그 자식이 그랬다구요.선영이 누나는 술만 먹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할 수 있는 여자라구요.그게 사실인가 요?혼자 있기 싫다면, 그 녀석의 말대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를 바라는 건가요 - 그러나 이 말들을 한 글자도 입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얼레, 돌아본 내 시야에는 어느새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내게서 등을 돌리고있는 그녀의 뒤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난 얼떨떨해지고 말았다.부끄러워서 자는 척이라도 하는 걸까. "누, 누나......" 하지만 그녀는 묵묵부답, 떨떠름해진 나는 허공을 보며 허탈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뭘어쩌란 말인지.방금 전만 해도 애원하듯 매달리던 선영이 누나였지 않은가?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그렇다.그녀의 비리가 무엇인가, 내게 왜 이러는 것인지....... 확인을해야 한다.멍 하니 이렇게 누워있게 할 수만은 없었다.나는 그녀에게 엉거주춤다가갔다.어깨라도 흔들어 그녀를 깨울 생 각이었다. "서, 선영이 누나 자요?잠 들었어요?"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진짜...... 다시 잠들었다? 그러나 선영이 누나는 결코 잠든 것이 아니었다.잠시 그녀는 조용히 있더니, 후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창...... 희야......." 다소 멍청해져, 나는 그녀의 등 뒤 침대가에 다시 걸터앉았다. "너, 희창이가...... 그 말 했니?" 희창이?녀석의 이름에 당장 긴장이 되는 나. "무, 무슨 말이요?" "너, 알고 있었어?" 주저하는 그녀의 목소리. "그 애랑 나랑...... 저번 주에 있었던 일." 나는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당혹해야했다.내가 꺼내려던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먼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같이 여관방에 들어갔었다는 거...... 알고 있었지, 그치?" 헉,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어찌 이런 이야기가 선영이 누나 입에서 먼저 나올 수가 있는가? "어, 아니 저, 저는 그저......" 순간적으로 입장이 바뀐 셈이다.나는 최대한 시치미를 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생각뿐, 도저히 발뺌 할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모기 만한 목소리로라도 시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요.예...... 그렇지만 그, 그건......" "후우 나, 그럴 줄 알았어.너흰 둘도 없는 친구사이니까......" 잠시 침묵.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야 했다. "나...... 짐작했어.어제 거기서 너희 얘기하는 것 보고...... 그것도 걔가 얘기해 준 거지?누나랑, 예전의 그 오 빠 얘기." 그녀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있었지만, 나는무의식중에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놀라운 일이었다. 선영이 누나는 그런 걸 다 알면서도 어태껏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그 때,그녀의 행동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 나는숨이 탁 막혀왔다.갑자기, 그녀가 마치 태클을 하듯나를 안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만 이러고 있어 줘.아아 나 너무 어지러워, 머리 아파." 그럴 만도 했다.술기운이 아니라도 그러리라.난 몸 둘 바를 몰랐다.희창이도 없으니, 그런 그녀에게 미안 해야 하는 건 나뿐이었다. "너무 힘들어.제발......" 아아, 어쩔 도리가 없었다.난 옷도 하나 벗지 못한 채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곁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가 눕자마자, 내 가슴과 어깨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선영이 누나의 따뜻한 입김으로 가슴팍이 후끈 달아올랐다. 엉겁결에 나는 팔베개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불을 끌어 그녀의 몸과 내 몸을 덮었다.최소한 이런 장면은 감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팔을 베고 누운 선영이 누나는 내 가슴께를 더듬었다.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너무 약하대.난 어쩔 수 없었을 뿐인데...... 그 오빠가 그 얘기를 들었어.난 해명했지만, 그 사람은 믿 지 않았어.내가 술 마시고 다른 남자랑......" 아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부끄러운 실수 - 그 이야기였다.자신의 그잘못 때문에 그 선배와 헤어지게 됐다는, 그 이야기. 선영이 누나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그 오빠는 졸업했지만...... 그래서 난 술을 안 마시려고 했던 거야.오해받는 게 싫었어.하지만 오빠는 점점 나를 의심만 하구...... 너무 힘들어서......" 내 어깻죽지에 따스한 감촉이 조그맣게 퍼져나갔다.아아, 아마도 그녀의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나 아무하고나 그러진 않았어.정말이야.이제 괜찮아.미안하다고, 내가 먼저 떠나겠다고 그랬어." 이제 충분했다.더 이상 물을 것도 없고, 또 물어서 득이 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오빠는...... 날 믿지 못하겠다구." 그녀는 작게 흐느끼는 듯했다.어제 오후부터의 일이 상기되었다.이미 술집에서도 눈물을 보였던 모습이 떠 올랐다.그랬던 것이다.그녀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던 것이다.그것도 자신의 비리로 인해 가장가까운 사람 에게 버림을 받는. 결국 선영이 누나의 비리 중 하나란, 반은 사실이고 반은 아닌 셈이었다.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술자리에서 의심한 바대로 술만마시면 자제하지 못했 던 것이 사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희창이의 말대로 그렇고 그런 행동을 일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저번 주랑 오늘마저도...... 그리고 너한테까지...... 창희야, 너도 나 의심하지, 희창이가 그런 얘기해서 그 렇지?" "아, 아녜요.전, 전 안 그래요!" 내 대답이 즉각적으로 터져나왔다.그녀 앞에서 어떻게 얘기 하란 말인가.안 되겠다.화제를 바꿔야 했다. "누, 누나...... 걱정하지 말아요.그만 얘기하고 주무세요." 잠시 눈물을 거두는지, 누나의 얼굴 위로 손이 갔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비로소 내게도 뭔가 얘기를 꺼 낼 용기가 생겼다.그녀는 더욱 더 내 품에 파묻히듯 얼굴을 비벼댔다. "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누나, 선영이 누나를 믿어요." 진심이었다.누나, 선영이 누나...... 그녀의 민망한 비리를 확인한 후에도 나는 그녀가 추하거나, 이상하게 여겨 지지 않았다.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순정을 지켰고, 또 충분한대가를 치렀다.그런 그녀에게, 난 왠지 전보다 더 큰 애착이 생기는 것 같았다. "절 믿으세요.전 다른 사람처럼 그러지 않을게요." 누운 채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전 지켜줄 수 있어요.누나가 원하지 않는 건, 절대 하지 않을게요.제가 지켜줄게요." 제풀에 지칠 때까지, 나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선영이 누나는 그러 는 동안에 내 품안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내 팔뚝근처에서 호흡에 따라 가 만히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자장가 같던 넋두리를 멈출 즈음엔,어느새 다시 잠들었는지 선영이 누나의 고른 숨소리만이 쌔근거리며 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담배를 집어 물었다.후우......여관방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 며, 나는 그간 누나와 누나의 비리들에 대해 알게 된 모든 과정들을 머리 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창안으로, 점점 희뿌연 빛이 들어왔다.마치 간유리에 비친 햇살처럼그 스며든 색깔은 방 안 모든 사물들을 베일에 둘러싸인 안개색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베일, 나는 떠올렸다.며칠 전 몽정에서의배경과 그것은 너무나 흡사했다.다만지금은 여관방, 내 곁에는 함께 이불을 쓴 선영이 누나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고요했다.문득 선영이 누나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보일 듯말 듯 한 웃음을 띄우고 있는 그녀.꼭 어린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따뜻한 미소였다. 사악, 허공을 가르며 그 얼굴이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잠시, 설레이듯 머무르다 그 입술은 다시 떼어졌다.그녀의 한쪽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그리고 내 뺨 위를 쓰다듬 었다.살포시 얹어진 그 손바닥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가볍게 그녀는 손바닥을 밀착시켰고, 곧이어 다시금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눈을 감았다.아니, 무의식적 으로 눈이 감겨졌다. 촉촉한 그 입술.이번엔 그 밀착의 강도가 조금 강했는데, 난 내 입술의 감촉으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선영 이 누나의 입술이 자그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아, 그랬다. 그 사이로 훨씬 더 강렬한 기운이 전해지고있었 다. 조심스레, 탐색하듯 더듬어 오던 그녀의 혀가 내 혀를 찾아 문질러 왔다.나는 자연스럽게 반응했다.내 혀가 그녀의 움직임에 마주하기 시작했다. 상큼했다.그녀의 혀는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더듬듯, 서로의혀가 얽혀들었 다. 할 수만 있다면, 난 벌어진 입술 새로 탄성을질렀을 것이다.선영이 누나도 그랬을 것이다.그녀의입술이 한껏 벌어져 머금고 있는 것을 보면. 긴 입맞춤이 끝나고 그녀의 그 따스한 입술이 멀어져 갔을때, 나는 아쉬웠다.나도 모르게 고개가 따라가려 는 것을, 그녀의 한쪽 손이 지긋이 내 어깨를 눌러 저지했다. 다시 몽롱해진 내 시야에 누나의 얼굴이 드러났다.그녀의 얼굴은수줍게 변해 있었다.발그레한 홍조가 그 녀의 뺨에 어른거리기에, 나는 새삼 방금 전 우리의 키스가 얼마나 근사했는가를짐작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녀가 살짝 몸을 틀었다.두 손을 움직여 뭔가 동작을 하고 있었다.허리 춤에서 - 어깨 위로. 그것으로 인해 완벽히 드러나고 있었다.그녀의 두 팔에따라, 잘록한 허리와, 우윳빛 뒷모습, 그리고 작지만 동그란 어깨가 떠올랐던 것이다.마침내 벗겨진 웃옷. 다음에는 이불 속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소리없이...... 선영이 누나는 이불 안으로 양손을 넣어 움직이는 중이었다.그리고 잠깐 후에, 주섬주섬 무언가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그녀의 손에 의해 침대 아래로 던져졌다.뭐지?고개를 돌려 확인하려 했지만,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눈길,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가 다시 등 뒤로 손을 뻗기 위해 몸을 뒤척였을 때 알게 되었다.살 짝 그녀의 허리 아래가 내비쳤던 것이다.그곳에는 이제 분홍색의 얇은 천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불 속에서 벗겨진 것은 그녀의 치마였다.그리고지금 선영이 누나는 자신의 상체 위에 마지막남은 것을 끄르려 하고 있었다.뒤쪽으로 돌려진 그녀의 손가락들은, 익숙한, 그러나 결코 천박하지않게 브래지어의 후크 를 끄르고 있었다. 막, 흘러내리듯 그녀의 브래지어 뒤쪽 끈이 풀어졌지만, 그녀는양쪽 팔을 오므려 그것이 떨어지지 않게 받쳤 다.수줍게 자기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길과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내가 그 어깨 끈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일까.이상한 일이다.난 그래주고 싶어 허리를 일으키려 했지만, 쉽 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등이 침대와 붙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럴 필요는 없었다.그녀가 스스로 그 브래지어 끈을 처리하고 있었다.이제 그 앞면도 들어 냈지만, 그녀는 쉽사리 가리고 있는 자신의 팔꿈치와 손바닥을 치우지 않았다. 선영이 누나, 그녀는 소중한 것을 감추기라도 한 자세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리고는 사랑스러운 시선으 로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분홍색 그 입술을 대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팔이 벌어져 내 어깨 위로 내려섰다. 아아, 비로소 나는 그토록 그리던 그녀의 두 유방을 볼 수 있었다.봉긋한, 그러면서도 결코 작지 않은 그녀의 두 계곡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출렁이고 있었다.드디어 드러난두 개의 젖가슴, 그녀의 실체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선영이 누나가 허리를 일으켰을 때, 그 부분을 움켜쥐고픈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졌다. 그러나 먼저, 그런 갈구를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그것을 직접 해주었다.나 대신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붙들어 자 신의 가슴 위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폭신한 그 감촉만으로도 나는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가득하게, 그녀의 그곳이 각기 내 한손에 가득 들어 와 쥐어졌다.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이전에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런 매끄로운살결의 감촉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허리를 세워 그녀의 젖가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내입안에 그녀의 훌륭한 젖무덤과, 그 산물인 포도 알 같은 유두를 머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누나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어느새 그 녀는, 내 하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리는 나를, 그녀는 가볍게 손으로 밀어 다시 뉘었다. 내가 아닌 그녀의 상체가 기울어져 내려왔다.더 위, 위쪽으로. 그 동작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겨졌다.더 없이 보드라운 우윳빛 살결이 내 안면에 지긋이 부딪혀왔다.마치 파묻히듯이. 그 순간 깨달았다.그래, 바로 이것이었다.얼마 전의 그 강렬했던 몽정, 그 베일 아래로 나를 받아들였던 그 황홀한 젖가슴. 정녕 - 그 주인공이, 무의식 속에서 꿈꿔온내 성적욕망의 대상이, 여기 이 선영이 누나였단말인가.희뿌연 안개 사이로 빛을 발했던 그 나신의 소유자가 바로 이 누나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누나, 선영이 누나......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막혀 있는 것이다.내 입 술도, 내 혀도.그 모든 기관들이 점령당해 있었다.그녀의 한없이 아찔한 두 원에 의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 같은 자세로, 한동안 그녀는 그런 동작을 반복했다.그리고마침내 그 회오리, 젖은 감촉들이 물러 갔을 때엔 그녀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다시 내 뺨 위를 감싸안았다. 선영이 누나는 시키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마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녀의 얼굴이 다가왔 고, 그래서 우리는 한 번 더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이번에는 처음부터 한껏 서로의 입술이 열린 상태였다. 그런데 보지 않아도 눈을 뜨지 않아도 보이고 있었다.그녀의 손들이, 아래쪽을, 내 허리춤을 더듬는 중이라는 것을. 뭐하려는 거예요, 누나...... 난 묻고 싶었지만, 혀가 따라주지 않았다.허리띠, 바지단추, 지퍼...... 그녀의 능숙한 손길에 따라, 내 하반신을 조이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하나 둘씩 그 빗장을 풀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지 않았다.침착하게도 그녀는, 이번엔 그것들을끌어내려 벗겨주고 있었다.이제 홀로 남게된 내 사각팬티 속은 이미 염치도 없이 불룩해져 있었다. 첫 번째, 그리고 가장 바깥에서 내 하반신 전체를 가리고 있었던 옷에서 해방이되었다.침대 아래로, 묵직했 던 내 혁대 버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선영이 누나의 손이 잠시 마지막 내 옷조각 위로 거슬러 올라왔다.내 달아오른 천 위로, 그녀의 손바닥 촉 감이 전해졌다.뜨거웠다.그녀는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다. 잠시 내 샅을 두 손으로 정성껏 보듬고있던 그녀는, 다시 다음 동작에 돌입했다.이미뜨거워진 내 그곳은, 그녀의 체온으로 인해 한층 더 달아오른 느낌이었다.그녀의 다음 동작은 뻔한 것이었다. 내 끝자락을 내리자마자, 이미 한참을 참고 있던 내 물건은 금세 튀어오르듯 빠져 나오고 있었다.마치 그 안 이 아주 좁았던 것 같다. 그런 내 하복부를 내려다 보면서도, 나는 하등부끄럽거나 하지 않았다.자랑스러운 기분이었다.그녀앞에 그런 것을 훌륭히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았다.선영이 누나는 마지막을 위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그리하여 마지막 헝겊이 내 몸을 떠났다.그녀 역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그저 그녀는 침착하게 내 남김없이 펼쳐진 곳을 정리해 줄 따 름이었다.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났다.난 결코 손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어느 틈엔가 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 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의 몸 아래쪽으로 그녀의 상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안돼요.무의식적으로 소리치려 했으나, 묘하게도 난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숙여진 그녀의 고개가 어느 부분에 다가가고 있는지 느끼고 있었지만, 난 막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아랫도리를 선영이 누나의 뜨거운 입김이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난 틀림없이 눈을 뜨지 않았건만, 모든 것이 보이고 있었다.선영이 누나는 서두르지 않고 남겨져 있던 마지막 보루를 직접 자기 손으로 발목 사이에서 빼내고 있었다. 여전히 내 하복부에 얼굴을 머무르며, 계속 이어지는 격한 흡착.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내 흐릿한 시야에 엎드린 그녀가 보였다.비스듬히 떠올라 있는 또 다른 풍만한 두 원 - 그 둔부는 손을 뻗으 면 얼마든 잡힐 거리에 가려진 것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견디기가 힘들었다.나도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그 때 잠시, 그녀의 머리가 멈추었다.조금 숨을 돌리는 것 일까. 아아, 신이시여...... 꿈 같은 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온몸에 걸친것이 고작 양쪽 허벅지까지 만끌어올려진 스타킹뿐이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스타킹만이 걸쳐진 허벅지가 내 상체 쪽으로 전진하여 올라 오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둔부도 따라오고 있었다.그녀의 허벅지가 양쪽으로 벌어졌다.내 얼굴 위에서. 그 위로 이어진 하얀 엉덩이. 그곳은 정말 완벽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난 내가 어느 곳을 마주하고 있는지 절대로 알 수 없었다.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정신적 끈,그것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에 몰렸기 때문에 나는 본능 적인 욕구를 채우려 들이마셨을 뿐이었다. 그 때였다.그제야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듯, 선영이 누나의 상체가 세워졌다.난 아쉬움에 그녀의 둔부를 붙 잡고 싶었지만, 어떤 동작도 취하지 못하고 단지 관찰자 이상은 될 수 없었다.행위자는 그녀의 등 뒤로 적나라 하게 드러난 은밀함과, 그리고 그녀의 두손이었다. 그녀의 엉덩이는 금세 멀어져, 저 멀리 아래쪽으로 사라져갔다.그리고 정확히 내 아랫배 위에서 멈추는 그것. 이제는 그녀의 손들이 일을 할 차례였다. 무언가 터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뭐라 소리라도 질러보려고 입을 움찔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무게중심이 내 다리에 얹혀지고 있었다.한쪽 손은 여전히내 귀두 부분을 만지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손은 그녀의 몸 - 나와 똑같은 부근 - 에 가있었다. 난 이 모든 것들을 단지 바라볼수밖에 없었다.아직도 내 손은 꼼짝할수가 없었는데, 반면에 그녀의 손은 이번엔 또다른 입속으로 뿌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무릎을 세운 채 버티고 있던 그녀의 허리아래 둔부가, 점점 가라앉듯이 내려갔다. 선영이 누나의 몸이 낮춰져...... 완벽한 결합. 그 입 속이 가마솥 같았다면, 지금 내 기둥이 삼켜지고 있는 곳은 차라리 연옥,불지옥 그 자체였다.그 뜨거 운 내부 속으로, 나의 물건은 하나의거리낌도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있었다. 서로의 핵심이 너무나 젖어 있었기에, 그 결합은 뜨거운 용광로를 휘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단 삽입이 끝나자, 마치 그 부분을마찰시켜 없애기라도 할 듯 선영이 누나의몸뚱이가 황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눈을 뜨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내 자유였다.고개를들어 아래쪽을 바라보자, 다만 곧추 세운 그 녀의 등이 점점 내 상체 쪽으로 젖혀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부분이 내 몸에 부대낄 때마다, 그녀는 거의 허리를완전히 활처럼 젖히고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그 녀의 입술이 잔뜩 벌어졌음까지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출렁거리는 둔부 위로 유일하게 곧추 선 부분이있었으니, 그것은 그녀의 등뼈였다.그녀의 등뼈만큼 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마치 세상의 중심에 꽂힌 것처럼 수직으로 왕복할 뿐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하지만 난 너무나 넋이 나가, 내 하복부에서 철썩이는소음도, 그녀의 좌우로 미 친 듯 흔들리는 고갯짓 사이마다 들리는 다급한 신음도, 그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또한 나는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의 몸 동작은 그렇게 치열했다. 그 두 부끄러운 부분이 만나고 있는 틈 사이에 성냥을 갖다댄다면, 나는 틀림없이불이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그만큼 나의 하복부와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선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누나, 나, 나, 지금! 그 순간, 갑자기 시작된 그 정사처럼, 내 끝마디도 그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찾아왔다.용암 속으로 또하나 의 용암이 씩씩하게 분출되었다.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그 격한 벌떡임에 맞추어, 그녀의 그곳도 격렬히 또 하나의 수축을 일으키고 있었다. 난 분명히 무슨 소리인가를 들었다.그것은예전에는 미처 들어보지 못한 여자의기성이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선영이 누나의 몸이 내 가슴 위로 무너졌다. 그 박동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우리는 둘다 넘어갈 듯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영원의 시 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그녀의 온몸이 전부 내게 실려있었지만결코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선영 이 누나의 몸과 내 몸이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는 숨을 쉴 때마다 함께 가슴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서로가 함께 몸 속에서 쏟아낸 것이 있어서 일까. 누나의 몸은 그만큼 가벼워져 있었다.그리고 우리둘은, 정말로 한몸이 된 듯, 그 직후 기억을 잃어버렸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한참 후에야 정신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이미 날이 밝아오는지, 아침 창가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온 몸이 땀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난 너무나 비현실적인, 아니 너무나 현실적인 그 감각들을 털어 버리려 이 마에 손을 짚었다.가쁜 숨, 이마에도 식은 땀이 배어 있었다. 이럴 수가, 정말 생생했는데 - 나는 분명 그것이현실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었다 - 내가 제일 먼저 취한행동 은, 후닥닥 내 옷가지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내 옷가지들은 그대로였다.많이 뒤척인 모양인지, 나는그제야 바지와 윗도리가 퍽 많이 헝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꿈, 그래.또 꿈이었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아찔했다. 선영이 누나는 어제 뉘어준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운채였다.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조용한 여관방 안으로 어제와 마찬가지로 쌔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제기랄,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이냐.누나 옆에서 그녀를 상대로 몽정을 하다니.어이가 없어 창피한 기 분도 못 느낄 지경이었다. 사고는 치지 않았다.그래, 그냥 꿈은 꿈일 뿐이야.나는 슬그머니 바지춤에 손을 넣어 보았다.역시 끈끈하 게 엉겨있다.우스웠다.그렇게 격렬하게 성행위를 했다면, 잠이 깨지않을 리가 있겠는가.그리고 내가 인사 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것도 아닌데.잠든 틈에 몽유병 환자도 아니고, 내가 모를 리 없잖은가. 그래도 나는, 혹시나 싶어 슬며시 그녀가 덮은쪽의 이불을 들춰보았다.그녀는 여전히 윗도리를입은 차림. 살짝 더 아래를 훔쳐보니, 구겨지기는 했지만 치마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후유.나는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사실 그 때까지도, 그 꿈이 너무나 진짜 같았기에, 반신반 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비몽사몽간에 꾼 몽정 한번 가지고 말이다. 이렇게 뒤척이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여고나 창문은 전전 더 희뿌연 밝기를 더하고 있었다.손목시계 를 들어 시간을 보았다.어느덧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오는 참이었다. 소변이 마려웠다.어제 마신 술이 이제야 방광으로 몰린 모양이었다.조심조심 다시 몸을일으켰다.혹시라 도 누나가 깬다면 왠지 어색한 기분이들 것이다.발끝걸음을 걸어, 나는방을 가로질러 마찬가지로 살금살금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물방울 소리가, 야릇한 상상을 떠올렸다.간밤에 누나의 팬티를 내려주고 지척에서 들을 수 있었던, 그녀의 물 소리가 상기되었기 때문이다.아마 가까이서 여자의 볼일 보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일 것이다.그리 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바로 그녀가 앉았던 그곳에 내 물줄기가 내 뿜어지고 있다.이 화장실 사건 하나를 갖고 도 그녀의 비리 하나를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야릇한 혼자 웃음을 지으며 바지를 끌어올렸다.그런데. 무심결에 허리띠를 고쳐 매려 내려다 본 순간,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언뜻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은 되지 않았다. 지퍼를 올리려던 나는 다시 한 번 확인을위해 바지춤을 끌러보았다. 얼레, 이상한데...... 으악!놀라 기절초풍할 광경이 거기에 있었다.팬티가, 내 사각팬티가, 뒤집혀 있는 것이었다. 선뜻한 차가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단순한 실수가 아니다.아침에 입고 나올 때 안과 겉을 뒤집어 입고 나오는 사태쯤이야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그러나 이건 그게 아니다. 내 팬티는, 완전히 거꾸로, 즉, 앞과 뒤가 바뀌어져 있는것이다.나는 너무 놀라 얼른 엉덩이 부근을 더듬어 보았다.사실이었다.구멍 - 남자라면 다들 아는 그 구멍이, 내 엉덩이 쪽에 가있는 것 아닌가! 이, 이건 말도 안 된다.어제만 해도 난 여러 번 화장실을들락거렸는데, 그 때는 분명 이렇지가 않았다.바 깥과 안이 바뀐 거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절대로 앞뒤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급히 머리 속으로 어제부터의 일을 몽땅 더듬어 보았다.집에서, 술집에서, 그리고 지금 선영이 누나와 들어온 이 여관방까지.그러나 전혀 아니었다.내가 바지를 벗어 팬티를 다시 입은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애 초에 잘 못 입은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난 맹세코 옷을 벗은 적이 없는데?그렇다면, 이게, 이게 무슨 조화?내가 왜 팬티를 반대로 입고 있 는 거지? 이 여관방에서 잠깐 잠든 사이를 빼놓고는 난분명히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한치도 거짓없는 사실이었 다.그것은, 그것은...... 여관방, 잠든 사이의 꿈.누나, 선영이 누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하마터면 타일 화장실 벽에 몸을 부딪칠 뻔했다.온몸이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 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분명 한 가지밖에 없다.내가 잠든 사이, 꿈꾼 사이, 그순간에 내가 팬티를 벗었다가 다 시 입었다 - 나는 뒤통수를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맙소사, 이제 상상해 낼 수 있는 상황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선영이 누나와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니란 말인가?정말로, 정말로 내가, 아니 꿈이라면 그녀가, 내 바지 와 속옷을 벗기고 그 맨살을 내게 비벼댔던 것이란 말인가?그리고 잠결에 다시 입은 거라고? 콰당탕, 나는 미처 바지춤도 치켜올리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뛰어나왔다.기겁해서 입이 딱벌어진 채 방안으 로 뛰어들었다.누나, 누나 어딨어?깨워야 해, 깨우자!누나한테 물어봐야 해. 당장 침대 맡으로 다가간 나는, 확 그녀를 흔들어 깨울 참이었다.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내가 모른다면 이 누 나는 알 것이다. 하지만 선영이 누나는 전혀 세상 모른 채 그대로였다.그지없이 평화로운 모습 그대로. 달려들다 말고 딱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 못하고 마는 나.그녀를 깨우려던 행동을 멈춰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쩌랴.곤히 자는 사람깨워놓고, 내가 당신과 그짓을 했수 안 했수,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아냐 아냐, 다시 생각해 보자.내가 혼동하는 것일 수도 있어.정말로 난 어제부터 팬티를거꾸로 입고 있던 것인데 무의식중이라 기억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난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아, 참으로 돌아버릴 노릇이었다.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나 스스로 바지와 팬티를 입었다 벗었다 할리는 없었다.두 전 세 전 꼼꼼히 시간들을 돌이 켜봐도 불확실한 것은 그 때뿐이었다. 무조건 부정만 하기에는 너무나 막연했다.침대에 허리를 기대고돌아보았다.여전히 선영이 누나는 내쪽으 로 등을 보인 채 엎드려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머리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차라리허탈했다.내가 무슨 정신병이라도 앓고 있단말이냐.꿈과 생시도 분간하지 못하다니...... 난 쪼그려 앉은 채로 두 손으로얼굴을 가렸다.내가 상상했던 그런 일들이 아니었으면. 제발, 제발. 누나, 내가 꿈을 꾼 건가요, 아니면 - < 2권에 계속 > XTC666의 작품관 -상자속에서 고정관념 깨트리기- 한만수(시인.소설가) 이 땅에는 오랫동안, 아니 글자 표현이 가능해질 시기부터 문학이란 울타리 안에서 존재하는 갖가지 장르의 글 들이 선대에서 후대로, 후대에서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틀린 것이 있다면조선시대의 경우는 그 이전의 시대보다 문학의 대중화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물론 그 시대는 양반과 서민이 라는 유교적인 발상에서 이루어진 금긋기는 있었지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으로 동일 선상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던 시대였다. 그러다 일제의 지배하로 들어서면서 글이 어느 특권 계층의 고유 권한이나상징물로서가 아니고, 민중 모두의 전유물이 되면서부터 '시인' 이라든지 '소설가' 라는 신종 직업이 탄생하였다. 물론 혹자들은 흰소리하지 말라고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당나라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름을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있었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고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들을 '시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문장가'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곧 뜻글자로서의 한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시묘하게 꿰뚫을 줄 아는 글자의 장인들인 셈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본격 '성문학'의태동을 앞두고, 그 깃발을 높이 세우려는 시점에서 ' 웬 보리 방귀 끼 는 소리' 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하지만 그렇지는 않다.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이 글을읽어본다 면, 왜 XTC666이라는 작가가 '캠퍼스 애정비사'라는 그렇고 그런 제목의 책을 내면서 숱한 날 고민을 하고 절망 을 한 끝에 두 눈 딱 감고 출판을 결심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원론으로 돌아가 보자.그대 문학의 태동은 이유야 어쨌든일제의 강점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그리고 우리 의 문화가 전통문화라면, 일본의 문화는 외세적 문화라 볼 수있다.만약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일본처럼 외 래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면 현재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국토는 두 배나 세 배 정도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전통을 고집한다는것은 좋은 일이다.하지만 맹목적으로외래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문화적 후퇴를 초래할 수 있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더욱이 일 본문화의 점진적인 개방이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문화적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대중문화를 우 리 환경에 맞게 적극 강화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환경에서는 근본을 찾을 수 없는'순수문학'이란 울타리 때문에 이 땅의 대중문화가 아직 도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바꾸어 말한다면 공산주위가 몰락하고,지구촌이 하나가 되어 공동 집단화되어 가 고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문학이 대중의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계층, 즉 글을쓰는 사람이나 글을 매개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집단의 도구화로 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얼마 전에 '아버지'란 소설이 역사이래 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큼 많은 독자를 활보했는데도 문학을 업으 로 하는 사람들은 그저 먼 산 바라보듯 했다.졸고 있는 사람도 '문학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데, 전문가인 그들은 그저 뒷짐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XTC666의 작품은 문학이 추구하는 어느 단편적인 부분에만치중하지 않는 전방위 문 학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욕망까지 섬세하게 파헤친 신세대 문학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XTC666의 '캠퍼스 애정비사'를 새로운 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굳이 예를 들지않아도 성을주제로 한몇몇의 작품들이이미 출간되었기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XTC666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기존의 작품들은 포르노를 포르노외적인 시선에서 그린 작품이 라면, XTC666의 작품은 인간 본능의 움직임대로 포르노를 육화시켜서 전혀 포르노 같지 않은 상황으로 몰고 갔 다는 새로움일 것이다. 어떤 것이 포르노고, 무엇이 예술이냐 하는 점은 굳이 이 장에서 따질 필요가 없다.괜히 머리만 아프고 결론 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혹자들은작품을 보고 성적인 감정을 느끼면포르노고, 그 반대면 예술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단순하다. 좀 더 집약적으로 언급하자면이성적으로 보면 포르노고,감정적으로 보면 예술작품이라고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설작품을 감정적으로 보면 모두 예술작품 아니냐고 반문할수도 있다.그러나 생각해 보자. 인간은 지극히 이성적인 동물인 것 같으면서 상당히 감정적인 동물이다.그리고 모든 문학 작품은이성의 흐름대로 진 행되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흐름, 나아가서는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문학이 지향하는 모토는 무엇인가?감정적으로 흘러가다가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지극히 이 성화된다는 것이다.예를 들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내면의 흐름은 섹스 외의것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캠퍼스 애정비사'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속의 개별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이 가지고 있 던 '캠퍼스'라는 이미지는 상아탑, 젊음, 진리, 정의 등이었지 절대로 사랑은 아니었다.하지만 XTC666은 기존의 관념에 사랑을 포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즉그는 캠퍼스가 주는 보편성 이미지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 이미지를 접목시켰다. 백 번 양보해서 '캠퍼스 애정비사'가 기존 문학보다 개별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은 문 학에서 섹스는 금기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XTC666과 같은 시각은화장실 휴지통에 버려두고 있었다 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캠퍼스 애정비사'가 가지고 있는 소설적인 구성이나 요소가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면 서도 쉽게 이 책에 빠져 들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보편성 속의 개별성이 특출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의 주인공 창희도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보편적인 인물로 서울 근교의 캠퍼스에 적을 둔 평범한 대학생이다.원래 모범생이었던 그는 삼수를 권하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집에서도 독립해 자 취를 하고 있는 학생이다.어릴 적 친구인 희창이 역시 별로 특출나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다.오렌지족이 결코 천연기념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극히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다.그렇다고 그들 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철학이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아니다.순전히 작가의 시선과 의식이 그들을 보편 화된 대학생에서 차별화된 대학생으로 만들었다. 좀 더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작가는 기존의 문학이 추구하는 학문과철학 그리고 과학이 주는 범주에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성적인 욕망까지 무리없이 차용했다.그러한 것이 곧 독자들이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문학의 개 방화라고 불 수도 있다.이러한 점에서 볼 때 XTC666이야말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분출해 버 린 거짓없는 작가이다. 그의 내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물론 엔젠가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은 있다.그때 느낀 첫인상은 겉 으로 풍기는 귀공자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주장을 토해내기 보다는타인의 주장을 경청하기 좋아하는 요즘 젊은이답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가지 단언할 수는 있다. 그는 분명히 좋은 소설가로 대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성문학'의 기수로 나설 수 있다는 용기도 용기지만, 내가 그를 높이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문학이라는 단단하고 캄캄한 상자 속에 살면서도 그는얼마든지 고정관념을 깨트릴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