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XTC666 장편소설 제2권 여인군상 지은이:문한솔 출판사:성인문 절반의 성공 01 선영이 누가가 잠든 침대 곁에서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느라 마치 이 나 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꿈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는 그 순간들은 더듬어 보았다. 꿈이었을까,아 니었을까, 아니면 무슨 가위라도 눌린 것일까. 침대 위를 돌아봤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잠든 그녀를 깨워, 아니이 누 나가 깨기를 기다린다고 해도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대해 질물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 한 일이었다. 만약 그게 꿈이라면, 상상 속에서 나만의 생각 속에서일어난 사건이였다면 어쩌란 말이 냐, 갓 잠이 깬 사람에게 '어제 당신과 정사를 나눈기억이 있는데,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인 가요? 아닌가요?' 이렇게 묻는다? 물론 여기 누운 성영이 누나에 대해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고,묘한 상상을 해온 것을 부 정하지는 않는다. 학생회실에서 춤쳐본 치마 속, 어제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끊임없이 마주친 낯뜨거운 상황들, 취한 눈으로 안겨오던 가슴살, 아니 그휠씬 전, 희창이에게 비리 이야기 를 듣던 떄부터..... 나도 모르는 새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비밀스런 속마음이었을 뿐, 모든 게 꿈속이었다고 백번을 확인한다손 쳐도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혼자 있을 때도 아닌, 바로 그 대상을 곁에 두고서 남부끄러 운 짓을 저질른 겻인데.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끔 안에서 나는 지난주 먼젓번 몽정속에서 본 환상 속 베 일에 가려졌던 여자의 몸이 틀림없이 여기 이 누나라고 여겼었다. 우윳빛 젖가슴, 순백색 크림 같은 살결, 그 포근함...... 아아, 아니다 아니야 이건 전부내 착각과 환상 속의 일이리라.같은 류의 몽정, 그것을 난 부 번이나 겪은 것이고, 은근히 호기심이 일었던 한여자 선배와 하룻밤을 지새운 탓에 -그래서 꿈에 내 의식이 지배하지 않는그 시간 속에서 내 멋대로함부로 상상한 것이다. 내 성적인 환상이 여인이 바로 선영이 누나, 이 누나라고. 현실적인 판단ㅇ르 하기로 했다. 술이 좀 취했었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애꿏으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느라여기서 쪼그리고 조느라 비몽사봉간이기도 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아침부터 예지의 몸서리쳐지는 첫경험 고백을 듣느라 잔뜩골치 가 아팠고, 희창이를 찾느라 헤맸고 예기치 못하게 선영이 누나까지 만나 가슴 아픈 추억담 과 함께 술까지 마셨으니...... 게다가 희창이는 황당하게도 나와 그녀를 한 방 안에 몰아넣고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긴가민가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정말로 누나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있었다 면, 그기억처럼 생생하고도 격렬한 정사를 치렀다면, 어찌 내가 단 한 번도 꺠어나지 않을 수 었었겠나. 그거야말로 중대하고도 엄청난 일인데 말이다. 반변 사소한 착각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앞뒤가 바뀐 팬티, 사실 겉과 속을 뒤집어 입는 실수도 흔한데, 앞뒤를 가리지 못했을 수도 있는 법, 그리고 방금 상기한 것과 같이 그 렇게 정신없는 와중이었다면 설사 하루종일 속옷만 만지작거렸더라도 알아차리지못한다는 것도 가능할 성싶었다. 어쨌든 선영이 누나에게 - 그녀로서는 결코 알지 못할-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은 매한가 지였다. 귀밑이 후끈거렸다. 아무리 가까운 선배누나이지만, 그런 그녀 곁에서 돗도 안 벗고 잠이 들었다가 그녀를 상대로 야릇한 꿈을 꾸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창피한 노 릇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내가 아직 거꾸로 입은 팬티를 고쳐 입지 않았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아직쌔근거리고 있는 그녀를 돌아 보았다. 난 분명히 약속했었다.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선영이 누나가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하 지 않겠다고. 침대 위에 누운 것ㅇㄴ 정사이 대생이 아니다. 비록 하룻밤,아니 MT 때의 하루를 더하 면 두 번째 밤을 함께 보냈지만 아직 그녀는 예쁘고 참한 학교 여자선배 중의 한 사람일 뿐 이다. 아직까지는 적어도 그래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굳게 믿었다. 난그 사실에 감사했다. "일어났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 세수를 곁들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선영이 누나는 그새 깨어 있었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까만 눈동자를 꺼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해?"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말문을 잃고 허둥댔다. "아, 그, 그냥......" 제기르 할 말 많을 것 같던 나는선영이 누나이 깨어난 얼굴에 그저 어금니만 깨물어야 했다. "지금 몇 시야?" 내가 시간을 말해주자, 두 발이 기지개를 켜는 듯 빼꼼이 내밀어졌다가 다시 감춰졌다. 귀 엽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난 일부러 어색한 헛기침 소리를 내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깼어? 잠은 좀 잤니?" "어......예. 누, 누나는요?" 그녀는 가만히 허리를 일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한 수화기 건너편. "여보세요, 여보세요?" "킥킥, 12십니다. 나가셔야죠"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그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 음 성의 주인공은 바로 희창이였다. "푸히히, 아직 안 나갔구만, 혹시나 했더니......왜, 모닝섹스라도 한 거냐?" 이 자식이!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야, 이......!" "에헤,에헤..... 조용조용. 아직 옆에 있는 거 아냐?" 나는 그 말에 뚝, 목소리를 낮취야 했다. 가뜩이나 얇은벽으로 둘러싸인 이곳, 행여 화장 실 안의 선영이 누가에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아냐. 새꺄! 누, 누난 나갔어!" "어, 정말?" "그, 그래. 아까 새벽에 나갔어." "으잉? 그럼 뭐야? 설마 아무 일 없이 보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어휴, 이런 뭣 같은 놈. 하지만이 판국에 녀석을 붙잡고 실랑이를벌일 여유가 없었다. 선영이 누나가 언제 화장실에서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 아무 일 없었어. 짜샤!" "진짜야? 내가 가르쳐준 비리는?" 그러나 희창이 녀석은 비리 운운하며 내 말을 못 믿는 눈치였다. "몰라. 야, 짜샤. 난 어떻게....!" "얌마, 근데 넌 왜 혼자 거기 있는 거야?" "나,나야...... 그냥 선영이 누나 혼자 간다기에 잠이나 더 자려고 그랬다. 왜? 방도 두 개나 잡았었는데 돈도 안 아깝냐, 너는?" 난 서둘러 둘러댔지만, 여전히 녀석은 선뜻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는 다급한 나를 붙 잡고 줄기차게 지껼였다. "어이그 이런 등신아. 넌 차려준 밥상도 마다 하냐?" "젠장, 나중에 얘기해. 그,그딴 얘기는." 언제 열릴지 모르는 화장실 문 때문에 나는 연방 등뒤를 흘끔거렸다. 최대한 태연한 목 소리를 내야 한다. "좋아, 너 이따가 뭐할 거냐?" "모,몰라. 이따가 봐서......" "이따가 봐서?" "그,그래. 이따 내가 전화 걸게, 방에 들어가면.....!" "알았어. 너 그럼 방에 들어가서......" 찰칵, 뚜 - 다음 찰나 난 후닥닥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문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선영이 누나가 방안으로 돌아오고 있 었다. "어,예, 예......" 재빨리 나는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어설픈 연기를 해보인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물 론 표시 안 나게 삐딱한 상태로. 누나는 말끔하게 옷을 입고, 옅게 화장까지 한 모습이었다. "무슨 전화야?" "아,아뇨. 바,방 비울 시간 됐다고......" 다행이었다. 식은땀이라도 날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믿는지 다시 얌전하게 침댓가 에 걸터앉았다. "넌 안 씻어도 돼?" "아, 저, 저는...... 아까 씻었어요. 그리고 뭐 상관없어요. 집이 바로 근천데요, 뭐."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빨리 이여관 에서 나가고 싶은 심정이 그것이다. 실제로 시계는 거의 12시를가르키고 있었고, 행여 궁금해지면희창이 녀석이 나를찾아 이 여관방이나 자취방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엄청 황당한 일이 벌 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후닥닥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런 사고를 피하려면 일분 일초라도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상책이었다. 그가 그런 엉뚱한 짓을 벌이고도 남을 놈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괘,괜찮아요?" "응, 뭐가?" "수, 술 마신 거요." "아......걱정 마, 괜찮아. 나 우너래, 술은 약해도 깨는 건 금방 꺠거든." "그,그럼 우리 이제 나가요." 그러면서 먼저 몸을 일으키는데,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영이 누나가 문득 불러 세 웠다. "저......창희야." 뜨끔, 멈춰선 나. "예?" "저......고마워." "고,고맙다뇨?" "있잖아 어제...... 그 일들." 잠시 어리둥절했던 나는,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트를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술 자리부터 얘기한 것들을 말하는 모양이리라. 그 헤어졌다는 선배 이야기, 아마도 그것을들 어줘서 고맙다는 것일 게다. 나는 쑥쓰러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거야 뭐...... 신경 쓰지 마세요. 후배인 저한테 그런 얘기까지 솔직하게 해준 누나가 전 더 고마운 걸." 후, 그녀의 작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 그리고? 또 뭐 할 얘기가 있는 걸까? "나......" 우두커니 선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선영이 누나는 혼자서 작게 고개를 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우리, 나가자." "그,그래요. 제가 버스 타는 곳까지 바래다줄게요." 뭔가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앞장을 섰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관 문을 나서기 전에 일단 바깥은 살폈다. 지난 밤수선을 피우던 여관 주인 아줌마가 현관 곁방에서 수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야 몰라도, 선영이 누나가 있지 않은가.나는 골목실 안에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녀를 인도했다. 다시 약간은 주저스러웠는지 내 팔을 꼭 붙들고 등 뒤에 숨듯 따라오는 그녀. 정말 간밤에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른 사람들마냥우리는 조심스럽게 골목 어귀를 빠져나와 걸음을 재촉했다. "희창이한테는 뭐라고 할거니?" 묵묵히 걷던 그녀가 물어왔다. 나는 애써 씨익, 웃는 표정을 지었다. "모, 모르겠어요...... 최대한 둘러대야죠."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어쨌든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어." "걱정 마세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큰길가로 나오자, 슬그머니 선영이 누나이 팔이 풀어졌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골목을빠 져나오는 동안 내내 내 팔짱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멋쩍어졌다.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단한 팔짱 하나에 아쉬운기분이 드는 것이 뭐랄 까, 마치 연인 사이에서 선후배 사이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하늘은 마냥 쾌청하기만 했다. "나...... 안 바래다줘도 되는데......" "괜찮아요. 전 자취방이 5분도 안 걸리는데요, 뭐." 솔직히, 어쩌면 그녀와 좀 더 있고 싶어서라는 것이 옳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이미 정류장 근체에 다다르고 있었다. "고마뭐." "에이,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가는 길목이에요, 자취방으로 -라는 말을 얼버무리고있는데, 아무래도 선영이 누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워. 그 말......해 줘서." 그 말? 무슨 말? 아까 하려다 만 얘기인가? "그런 건 창희 니가 처음인 것 간차." 처음 해준 얘기라...... 무슨 말 땜ㄴ에 그러지? 나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어어리둥절해 했다. "뭐, 뭘요?" "있잖아, 그렇게 얘기하준 거......" 영문을 몰라 반문하려는데, 꼬고 그럴 때면 벌어지는 머피의 법칙이 작용을 하고있었다. 아쉽게도 그 때따라 버스가 유난히 빨리 정류장에 도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정말 고마워. 나 갈게." 알 수 없는 그녀의 속삭임. 선영이 누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그렇게 그녀를 멍하니 보낸 후에, 터덜터덜 발걸음을 돌렸다. 03 나는 곧바로 자취방으로 돌아돠 맥없이 늘어졌다. 온몸에 피곤이 몰려왔다. 여관에서 잠 시 선잠을 자기는 했지만, 그런 육체적 피로와는 다른 무언가가 수마로 변해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꿈나라로 끌고 갔다. 그러다 오휴늦게서야 눈을 뜨게 됐는데, 순전히 배가 고파서 였다. 그러고 보니어젯밤부 터 술 이외에는 별반 먹은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선영이 누자, 그녀와좀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핑계가 있었던 셈인데, 그녀를 그냥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다. 대충 라면이라도 찾아 시장기를 속이려던 나는 이내 포기를 하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이 토요일 아닌가. 집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자취방에서의영양섭취보다 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훨씬 낫기 마련이었다. 오전의 그 버스정류장, 선영이 누나가 있던 곳.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앞에 잠시 멈추어 주 변을 돌아보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몇 시간이나 지났지 않은가. 피시그 멋쩍은 웃음을 흘리면 버스에 올랐다. 창 밖으로 주말 저녁을 맞아시내로 나온 많은 커플들이 눈에들어왔다. 그런데 선영이 누나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집에서 무슨 소리나 듣지 않았을까? 아까 헤어지기 전에 한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얘기해준 건...... 니가 처음인 것 같아......' 무슨 얘기일까. 내가 처음 해준 얘기라니.게다가 그녀는 그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도했 다. 글쎄다. 지난 밤부터의 대화들을 곰곰 되짚어 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쨌든 그거야 나중에 물어 봐도 되는 것이고......그보다 뭔가 가슴 한 구석에서 아련한 슬 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나는 선영이 누나의 비리라는 것을 확인한 터였다. 결국 완전히 사실도,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도 아닌 그녀의 비리. 적어도 그녀가 눈물까지보이며 내게 털오놓은 이야기는 그랬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비리 -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그 부끄러운 실 수 - 로 인해 그녀가 겪었을 가슴앓이, 그것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또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녀는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단지 그녀에게 아픈 상처가 남았다는것만으로 도 덩달아 내 기분은 착잡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영이 누나는 창 밖의 저런 커플들처럼 그 선배와 행복한 시간 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혼자서 힘겹게 실연의 아픔을 곱씹고 있다. 젠장,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쩔 것인가. 내가 선영이 누나의 남자친구나 애인 도 아닌 것을...... 일럴 때면 희창이 녀석이 부러웠다. 어느 한 곳에 빠지지 않고,또 고민하 지도 않을 녀석의 성격. 그 놈이라면 나처럼 심각하지 않을 텐데. 그래, 희창이 - 그제야 아침에 천연덕스럽게 여관방으로전화까지 걸어놀려댄 놈이 상기 되었다. 녀석에게 해야 할 얘기가 많았다. 일단은, 예지와의 오해부터 푸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 놈은 내가 이들에 걸쳐 두 여자와 동침한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난 예지에게 희창이가 오해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약속했었다. 정말 그것만큼은 해명을 해야 한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물리고 난 뒤에, 계속 녀석의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해 보았 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토요일 저녁에 집에 있을 놈이 아니다. 보영이랑 어디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아니 면 딴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리라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밤이 으슥해질 때까지도 녀석의 핸드폰은 도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다희창이의 집으로 한 번 더 다이얼을 돌렸다. 어차피 내일 학교에서 마주치겠지만, 왠지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어,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전화를 받은 것은 희창이의 어머니였다. "응, 창희구나. 잘 있었니?" "예, 덕분에...... 저, 희창이 좀......" "희창이? 너하고 같이 안 있니? 어제 니 자취방에서 자고 온다고 했는데?" 얼레, 이게 무슨 얘긴가? 녀석이 또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불알친구이다 보니 서로의 집에서 자고 간다면 더 이 상 의심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는 우리, 아마 어젯밤에도그렇게 핑계를 댄 모양이었다. 나는 희창이의 어머니가 의심을않도록 급하게 둘러대었다. "아, 예, 그,그게...... 아까 일찍 나갔는데 아직 도착 못했나 보네요. 잠깐 급하게 생각난 일 이 있어서 전화한 거예요." 서둘러 변명을 마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렇다면 어제 여관방으로 전화를 건것은...... 밤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단 얘기인가. 대체 어디로 새어버린 거지? 희창이의성격상, 술을 마시거나 놀기위해 외바긍ㄹ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여자와 같이 자기 위한 경우를 빼고 그렇다는 얘기이다. 그럼 어제도 누군 가와 같이 있었다는 말인데, 여관방에서 빠져나가 어디로 갔다는 얘기일까. 어렴풋이 짐작이 들었다. 그 늦은시각에 녀석이 갔을 곳은 한군데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04 아니나 다를까,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옥탑방 문 위에 붙여진 쪽지 하나를 발견했 다. - "야, 짱이야 나 왔다 간다. 집에 없냐?" -\어제인지 오늘인지 녀석이 오기는 왔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없으니 달랑 쪽지만 남기고 돌아간 것이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내 자취방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응, 나다. 이짱!" 희창이였다. 짜시그 이제 집에 들어가 어머님꼐 전갈을 받은것이리라. "너 언제 왔다 간 거냐? 어제 내 핑계 대고서 외막한 모양이던데?" "아, 그래. 오늘 아침에 너한테 전화 왔었다고 울 엄마가 그러시더라." 그럼 그렇제. 그런데 이 녀석 어제는 누구랑 같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녀석이 먼저선 수를 쳤다. "참, 창의 너 몸은 괜찮냐? 킥킥" "왜? 왜 웃어, 임마!" "푸하핫 안 웃게 생겼냐? 자취방에계집애 끌어들여 자놓고, 다음 날은또 선영 선배랑 있었는데 야, 너 정력 진짜 놓은 놈이다." 제길, 녀석은 아직 내가 예지와 같이 잔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야, 새꺄. 헛소리 좀 하지마. 난 너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깐!" "어에 진짜야?" 진짜 아무 일 없었따. 그게 맞는 말일까. 난 낯뜨거웠던 그 비몽사몽간의 일, 선영이 누나 옆에서 꾼 몽정을 떠올렸다. 그 너누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한 꿈. "저, 정말이라니까. 그, 그리고 예지랑 일은 아니라고 했잖아. 난 그 애 손끝 하나도 안 건 드렸다구!" 그것도- 사실일까. 사실이다. 슬쩍 내가 예지를 만지기는 했어도, 정말그 애와 정사를 벌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뭐라구? 야, 설마? 근데 그럼 왜 예지 걔가 니 방에서 홀딱 벗고 있었냐?" "그, 그건......"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따. 예지의 짝사랑 이야기, 그 당사자는 바로 수화기 건너편의희창 이가 아닌가. 어디서부터 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나는 수상하다는 투로 그가 추궁해댔다. "에헤 형님 앞에서 속이려 하다니." "아냐, 새꺄! 그런......어휴,어쨌든 전화로 길게 얘기할수 없으니까, 내일 학교에서 좀보 자. 긴 얘기니까, 만나서 말할게." "그래, 오케이. 안 그래도 너한테 비리 김상문을 좀 들어야 하니까. 낄낄, 어때? 내가 얘기 한 게 맞았지?" 으윽, 이 자식을 - 희창이는 자기와 내가한 여자의 부끄러운, 그러면서 동시에 가슴 아 픈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기껏해야 색다른 경험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됐어, 그, 그만해! 어쩄든 내일 1교시 수업 끝나고 나서......" "그려 그려. 나도 너한테 보고할 게 있으니까. 어이구, 허리야." 허리? 그렇다면 녀석. 어제 여자랑 있었다는 얘기? "야, 이짱 너 혹시?" "흐흠, 이제 아셨구만! 그래 짜샤, 나 어제밤 보영이하고 같이 지냈다." 이럴 수가, 드디어 보영이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로군. 은근슬쩍 목고엄으로 호기심이 올라왔다. "그, 그래서 성공한 거야?" "성공? 히히, 절만의 성공인 셈이지." 절만의 성공이라니, 이 녀석 보영이와 잔 거야, 아니야? "그래, 절만의 성공. 사전준비만 있었으면 완전히 성공했겠지만......" 사전준비라? 약간은 어리둥절해 있는데 희창이는 뭔가 아쉽다는 듯 전화기 건너편으로 푸 념 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후...... 뭐그런게 있어. 뭐 어쨌든 그 계집애도 멀지는 았았어. 그런 것 있잖아. 슬쩍 뺴는 여자 심리. 그래서 몸 달게 하자는 거겠지." "그게 무슨 얘기야. 확실하게 말해 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지 말구." 이젠 내가 거꾸로 재촉하는 입장이 됐다. 뭐랄까, 내 대신 녀석에게서라도 경험담을듣고 싶은 기분이랄까? "짜식, 어차피 그것도 긴 얘기야. 내일 학교에서 말해줄게." 05 또 한주가 시작됐다. 특히나 월요일은 고작 한 학기를 넘겼을뿐인 우리 신입생에게는 교양과목 다위가많은 날. 대개는 오전 수업이 많았고 그만큼또 오후에는 한가하기 마련인데, 일찍 나와야하는 탓에 희창이 같은 놈은 툭하면 지각을 일삼기 시운 요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교양과목이 많다 - 라는 것은 그맡큼선배 학번드고 마주칠 기회가 적다는 말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오전 중에 선영이누나과 마주칠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니, 일부 러 마주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들른 학회실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쎄다. 솔직히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일부너 마주치고싶은 것인지, 그레 아니면 약간 은 피하고 싶은 건지. 어쨌건 예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 적어도 나만큼은 그녀를만난다는 의미를 다르게 생각 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지난 주나 지지난 주만해도 그녀에게 동경이나 호기심 이상의 감 정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제는 분명히 남다른 생각으로 그녀를 떠올리게 되었다. 희창이 녀석처럼 한 번 데리고 잔 여자에게는호기심이 떨어진다 - 나는 그러지도 못했 지만 - 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난 그럴 만한 강심장이 못 된다. 굳이 얘기하자면 감정이 별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감정의 양은 전혀줄 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생각과 감정을 선영이 누나에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건 그녀를 떨올리는 그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했ㄷ. 호기심과 동경이 대상에서,또 는 단순히 희창이가 알려준 비리에서, 내생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것은 녀석정도는 알지 못할 수준이었고, 그저피상적인 육체관계에서 본다면 나나희창이놈이나 다를 바가 없겠지만, 나는 그녀와 무언가 ㅏ.한 단계 더 깊은 사이가 된 느낌이었다. 뭐랄까......비밀을 통한 인간의 이해? 아니면 이해르 ㄹ통한 비밀이 공유? 정말 그런것이 있다면, 나는 그 누나에게 그 말을 쓰고 싶었다. 그 하룻밤의 동침으로 나와 그녀는서로의 내면을 할 꺼풀 벗길 수 있었다고. 꼭 겉의 옷가지만이 - 정사를 위해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면의 옷가지였고, 난 선영이 누나와 나눈 그 새벽의 대화에서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구든 간에, 한 사람의 말 못할 이야기를 들어준 것,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난 아마도 오전 첫 수업 내내 이런 생각에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강의하는 교수님을 앞 에다 두고 난 머리 속으로 한참 딴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 그 넋나감은 당연히 희창이에 의해 깨졌다. 두 시간 연속 강의의수업이 반 이상이나 지나서야 강의실 맨 뒤편으로 엉거주춤 기어 들 어온 녀석. 그는 종소리가 나자마자 곧바로 내게 다가와 볼펜으로 어깨를 쿡쿡 쑤셔대고 있 었다. "어, 어..... 응?" "얌마, 뭐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어? 수업 끝났어, 쨔샤!" 내 표정이 꽤 심각했나 보다. 녀석은 그런 내 표정을 보며 피식 거렸다. "야, 너 오늘 나랑 할 얘기 있다며?" 맞다. 어제 전화통화르 ㄹ하며 오늘 얘기하자고 했던 건 나였지.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나서 강의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혹시나 예지가 있나 찾아 보는 것이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녀로서는 당연 신경 쓰일 일, 아니 어쩌면 그 순진한 성격에 나나 희창이와 마주치는 것도 쉽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사실 예지는 아까 수업시작전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그녀도 이 강의를 들을 텐데...... 오늘 학교에 안 온 것일까? 희창이가 답답하다는 듯 내 뒷덜미를 쑥 잡아 일으켰다. "나가자, 일단은." "으,응 그래." 그는 나르 끌고 가다시피 하여 건물 밖 벤치로 이끌었다.그와 내가 뭔가 심각한 얘기를 나눌 때면 찾는, 교정 한켠의 조용한 장소였다. "창의 너 왜 그래, 임마. 아까부터 정신나간 놈처럼? 강의실에선 누굴 찾길래 그렇게 두리 번거리구?" 예지, 그렇다. 어차피 녀석에게 예지 이야기르 들려주기로 했으니까. 그 애와의 오해를 풀 고, 또 예지의 속마음을 전하는 것, 그 모두가 내 몫이다. "아냐, 찾긴..... 참, 어기 앉을 거야?" "그래. 아니면 밖으로 나갈까?" 어쨌든 이 녀석과 심각한 대화를 하려면 좀 한산한 곳이좋겠지만, 나는 대신 되도록 지 나 다니는 학생들이 없는쪽 벤취를 탰했다. "아니, 관두자."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라." 녀석은 아직도 흥을 내지 않는 내 얼굴을 흘끗거리며, 재빨리 근처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두 개 뽑아왔다. "어이 장아, 너 왜 그리 심각해? 뭐냐, 선영 선배 일 때문에 그래?" 그 누나 얘기가 전부는 아니지만, 어쩄든 이 녀석에게 분명히해둬야 하는 건 그 얘기도 마찬가지다. "왜? 그 누나가 니 발목이라도 잡겠다던?" 희창이는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내게 물어왔다. 그러나 나 도 모르게 화보다는 씁쓰레한 웃음이 먼저 나왔다. 자식, 아직도 그 타령이군. "아냐, 그런 거." "그럼 뭔데? 말해 봐, 알 것 다 아는 사람끼린데." 알 것 다 안다? 일단 웃어는 보였지만 나는 당장 그 말에 열이 받았다. "이짱, 새꺄 너...... 그런 말 쓰지 마." 어럽쇼? 희창이는 내가 발끈하는 것이 의외인 눈치였다. 모르겠다. 남이 뭐라건, 나는 선영이 누나가 그렇게 그저 그런 여자, 비리를 갖고 있는 여 자,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임마, 갑자기 왜 그래? 짜식이...... 알았어, 안 쓰면 되잖아, 잘하면 한 대 맞겠구만." 녀석은 그런 나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투덜대가다,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우화핫, 짱이 너! 설마, 너......하핫!" 난데없이 녀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내가 얼빠진 모습으로 쳐다보았다.녀석 은 웃겨서 배꼽이 빠지겠다는 표정이었다. "너, 왜, 왜 웃는 거야?" "킬킬. 아이고, 알겠다. 알겠어. 너 그 선배, 그 선배한테......큭큭." "뭐, 내가 누나한테 뭘?" "우히히 얌마, 짱이 너......짜샤, 우리가 한두 해 친구냐? 척하면 딱이다!" 난 녀석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녀석은그 낄낄거림을 멈추지 않 았다. "뭐야, 짜식아. 사람 앞에 앉혀놓고......" "흐흐흐 새끼, 너 너......" 녀석의 이어진 말에 난 금방 귀밑이 달아올랐다. 욱, 하고 속에서 치민 것은 그다음이었 다. "너 선영이 선배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엉? 아,아냐! 임마!" 펄쩍 뛰었지만, 걱정 마라, 말 한 해도 다 안다 - 희창이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내가 왜 그 누나한테.....!" "어쭈, 그럼 너 왜 그렇게 발끈 성질을 내냐?" "그,그건....." 젠장. 말도 안 된다. 그럼 내가 선영이 누나를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 그런 건 절대 아냐! 하, 하지만......" 모르겠다. 이런 이상, 어쨌건 녀석에게 털어놓을 건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내가......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건 맞아.그렇지만, 그게 여자로서는 절대 아냐. 맞아, 나도 너추럼 그날 누나랑 같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난 비리에 대해서 다 른 걸 알아냈어. 니가 상상하는 것처럼, 선영이 누나랑 술김에 허튼 짓 한 건 아니라구!" 장황한 내 고백이 이어졌다. "난 니 얘기도 했구, 또 그 헤어졌다는 선배 얘기도 했더. 그러고 나서 난누나를 이해할 수 있었어. 적어도 난, 니가 그 누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해." 희창이는 더 이상 웃거나 하지 않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영이 누나...... 니 얘기대로 실수한 적도 있었대.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누나 말로는, 자기가 정말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니랬어. 오히려 내가 보기에 그 녀는 일종의 피해자였다구, 너도얘기 들었잖아? 사귀던 선배랑헤어졌다는...... 그게 바로 너 같은 오해에서 시작된 거였단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그 대목에서 나는 잠시 말을 끊고 녀석을 돌아보았다.다행이다. 희창이의 얼굴을 점점진 지하게 바뀌고 있었다. "난 그 누나 얘기를 믿어. 그래서 그렇게 얘기해줬단 말이야. 나는 남들이뭐라건 그생각 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겠다, 나는 지켜줄 수 있으니까. 이렇 게......" 칙, 담배불을 붙이며, 희창이가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라니까, 넌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 누나랑......" "잠깐!" 문득 녀석이 말을 잘랐다. "좋아, 짱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선배, 그럼 그 남자친구였다는 선배하고그런 일 때문에 헤어졌다는 거냐? 그날, 술 마실 때 울던 이유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이 그녀를 떠올릴 때 우울해지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럼 됐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나 같은의리파가 그런 여자의 슬픈이야기를 문제 삼는 건 그렇겠지" 쓰윽, 돌아보는 그의 표정에 미진한구석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동의를얻어내긴 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묻자. 그럼 넌 정말 그날 아무일 없었다는 거냐? 내가 말한 비리 중 또 하나 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야?" "응? 또 하나?" "내가 두 가지라고 했었잖아. 하나는 같이 자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또 하나는 같이 자 봐 야 알 수 있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말을 기억하기는했다. 누누이 들었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이 녀석이 정확히 무얼 얘기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희창이는 체념한 듯 멀리 꽁초를튀겨보냈다. "아니지, 관두자. 어차피 아무 일 없다고 했으니. 그래, 내가 미 말을 안 믿으면 누가 믿겠 냐." 무슨 얘긴지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는 정말고 상관없다는 듯 툴툴 털어버리는 분위기였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알겠다.니 뜻을 존중해줄게. 잘은 모르지만,니가 그 선배의 허물으 ㄹ덮어주굴 바란다는 건 알겠어." 이심전심일까, 역시 불알친구란 말은 이럴 때 써먹는 것 같다. "앞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도 어디 가서 소문내거나 하지 않을게. 물론 니가 정말 그 누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고해도......굳이 따지자면 내가 나 설 일도 아니잖아?" 희창이는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고맙다. 이해해줘서. 그리고 앞으로는 아니, 나도 더 이상 긴 얘기 않을게." "짜식, 고맙긴 걱정 마. 오히려 내가 미안히지. 암, 그런데......" 문득, 녀석은 의아한 어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만약니가 좋아하는게 선영선배가 아니라면, 누구야? 혹시김예 지?" 맞다. 한 문제가 더 남아 있었다. 아직 예지와의 사연을모르고 있는 녀석, 나는 내친 김 에 그 얘기까지 꺼내야 했다. 난 준비하듯 큰 숨을 쉬고 말했다. "후, 그것도 아냐. 그래, 마저 얘기할게.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 얘긴지도 모르지. 잘 들어. 예지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이짱 너야!" "뭐? 나?" 희창이 눈이 함지박만하게 휘둥그레졌다. 06 "얌마, 예지는 너랑 잤잖아?" 희창이는 아직도 내가 예자와 동침한것으로 알고 있었다. 화들짝놀라는녀석에게 나는 차근차근 얘기를 풀어주었다. "아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음...... 그래, 너 며칠 전에 교문 앞 동네 근처에서 보영이랑 차 안에 같이 있은 적 있었냐?" "보영이랑?" 녀석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야, 내가 뭐 보영이랑 한두 번 만났냐? 나도 알잖아. 걔네 자취방이 그쪽이란 거." "그래, 알아. 그게 아니고, 너......보영이랑 차 안에서 이상한 짓 한 적 없었냐?" 이상한 짓? 녀석은 잠시 멍해 있다가 조금 후에야 이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아냐 난 어제 처음 그 애랑 거기까지 가려고 했는데? 근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희창이는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어쨌든어제서야 비로소 보영이랑 정사를 가지려 했던 모양이다.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 같더니,그 정도면 나름대로 준수한 편이다. 이번엔 내게서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알아. 임마. 후훗, 내가 얘기한 건 꼭 '그짓'만이아니고 왜 있잖아.그 전 단계...... 그러니 까 패팅이나 애무." 그제서야 녀석의 얼굴에서 멍청해 보이던 것이 가셨지만, 아직 여전히 얼떨떨한 단계였다. "그, 그런 거야 물론...... 하지만 그게 예지랑 무슨 상관인데?" "사실은 말이야. 며칠 전에 예지가 나한테 물어 본 적이 있었어. 너 사귀는 여자 있냐고" "걔가? 나한테?" 의외이리라. "그래, 너 가끔 예지한테 잘해줬다면서? 술도사주고 관심 있는 척도 하고. 하기야나도 MT때부터 진작에 알아봤지만." "어, 그,그거야......" "물론 나야 말 안 해도 알지. 니가 원래 예쁘장한 계집애들한테는 목숨 걸고 잘해주는 걸. 근데 문제는, 예지 쪽에선 그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야. 희창이 니가 자기한테 호감 을 갖고 있다는 걸로....... 그래서 나한테 얘기하더라. 자기가 너랑 사귀어도 돼냐구" 허 참, 천하의 플레이보이를 자처하는 이짱 이 놈도 이렇게 당황해 할 때가 있다니.꼴각 거리며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옆에 앉은 내게도 들릴 정도였다. "그,그래서 넌 뭐라구 했는데?" "큭큭, 나야 당연히 너 사귀는 여자 없다고 해줬지." 녀석은 이제 복격적으로 몸이 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보영이랑 무슨......?" 나는 예지에게 전해 들은 그날 밤의 상황을 토씨 하나 뺴놓지 않고 희창이에게 해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너희 둘은 그 때 한창 만지고, 더듬고, 뭐 그러고 있던 거구." 녀석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래서 예지가 실망감에, 그날 엄청나게 술을 퍼마셨어. 날 불러서......어쨌든 나도 예지 한테 거짓말을 한 셈이 왰으니 말이야." 아하 - 희창이는 인상을 쓰는 와중에도 비로소 상황의 전모가 이해되는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다가 완전히 맛이 가서 나중에는 쓰러질 정도가 됐구, 그래서 내 자취방으로 데려다 재운 거야.그리고 일어나 아침에 옷 갈아입는 장면에서 니가 등장한 거구."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이 이제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그럼...... 정말로 나흰 아무 일 없던 거고, 내가 오해했단 거냐?" "오케이, 맞아" 완벽한 내 동의에, 희창이는 이번엔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연한기색까지 곁들이며 중얼거리는 폼이 꽤나 진지해 보였다. "예지가 설마...... 난 그냥 과안에서 심심풀이로..... 그래도 동기중엔 젤 귀엽게 보여서 그래던 건데." 하지만 금방 제 페이스를 찾는 놈.열심히 짱구를 굴렸던 모양인지, 재빨리 고개를돌린 녀석이 의문스럽게 물어왔다. "야, 창희야, 그럼...... 예지가 날 많이 좋아했단던?" "응, 그랬나 봐. 하지만 미안하다. 내가 일언지하에 포기하라고 설득시켰어." 이번엔 녀석의 표정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녀석의 머리 속에 서 벌어지고 있는 계산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서라, 꿈도 꾸지마. 예지랑 어째 보려는 건." 안 봐도 뻔하다. 오는 여자막지 말고, 가는여자 안 잡는게이 친구의 제일원칙인 터 - 학교 안에서는 예지, 바깥에서는 보영이, 아마도 그런 행복한 꿈을 꾸었으니라. 당장에 희창이가아쉽더라고, 이번 경우만큼은단호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예지의고백이었다. 다시금 그 얘기를 떠올리자니가슴 한 구석에서 찡한 느낌이 올라왔다. 그날 아침 예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울먹이던 그불행했던 기억, 어리 디 어린 그 중학생 시절에 스키장에서 당했다는 성폭행의 첫경험. 그런 아픈 상처를 지닌 예지가아닌가. 그런 아이에게 어찌 또다른상처를 입힌단 말인 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줘야 한다는의무감 같은 것이 들었다. "안 돼, 짜샤. 걔가 얼마나 순진한데, 괜히 너한테 상처받으면, 그 계집애 자살이라도 할지 몰라. 그리고......" 하지만 희창이 녀석은 지 좋다는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에 뾰루틍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왜? 뭐 걔만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그래. 그런......" 나는 입술을 꺠물어야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예지의 그 부끄러운 과거를 희창이 녀 석에게까지 설명할 플요는 없으리라. "어쨌든 그러지 마라. 이짱, 너한테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잖아." 녀석이 입맛을 다셔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내 표정에서 그런 의지를 감지했는지 쉽지는 않겠지만 이내 포기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좋아 창희 니가 그러라면...... 젠장, 그래도 듣고 보니 영 한심하네. 뭐야, 선영 선배도 안 된다, 예지도 안 된다. 그럼 난 뭐냐?' 툴툴거릴 만도 했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이면 몰라도, 나를 믿고 내게 비밀스런고백까지 한 두 여자가 아닌가. 그렇기에 그녀들을 지켜주는 것은 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니가 이해해라. 참, 너 보영이랑은 어떻게 된 거냐? 절반의 성공이라니? 절반만하다 말 았다...... 뭐 그런 얘기냐?" "보영이? 으응......"ㄱ 보영이 이야기가 나오자, 녀석은 짐짓 먼산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피식거리며 혼자 웃음을 지었다. "킥킥 그래, 보영이...... 푸히히, 왜, 궁금하냐?" 녀석이 버릇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나는은근히 부추겨 주었다. "그래, 얘기해 봐. 맞아, 사전준비? 너 어제그얘기 했잖아. 사전준비 어쩌고....... 무슨 말 이야? 준비작업이 불충분했어?" 정말로 사전준비가 왜 필요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나는 보며 희창이는 또 한 번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준비...... 어이구, 개가 다음부턴 아예 차안에 한 상자씩 사놓고 다니든가 해야지, 아님 그런 거 있는 호텔 방으로 골라 가든가." 한 상자? 호텔 방? 조금씩 궁금증이 일었다. "얌마,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뭘 한 상자씩 넣고 다닌다는 건데?" 진지하게 묻는 나를 보고서 녀석은 그제서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원래, 보영이 그 계집애현지처 만들려고, 꽤 정성을 들였잖냐. 진 짜로, 저번 주 그날 전까지는 패팅밖에 안 했었어. 그런데......" 자식, 어련했겠어. 나는 눈으로 녀석에게 다음 얘기를 재촉했다. "왜 금요일 밤에, 난 너랑 선영이 누나가 밤새 헉헉댈 거라고 생각했었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은근히 생각이 나서 미치겠더라구. 그래서 토요일 날 보영이 생각이 났던 거야. 내친김 에 멀뚱거리다가 차를 몰고 갔지. 걔네 가게로. 물론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그 단란주점 문 닫을 때까지 거기서 놀았어. 마침끝날 때인지라 한산해서 마담이니 아 가씨들한테 맥주 한 잔씩 사고 그 계집애 아르바이트 끝난 시간에 나와서는 드라이브를 갔 던 거야. 강변 쪽으로......" 뻔한 스토리다. 인적 드문 강변에 차 세워놓고 그걸 하려고 했다. 그얘기겠지. "원래는 어디 길가 러브호텔이라도 갈까 했었어.그런데 보영이 그 계집애. 너무늦었다 고, 아침에 들어가는 거 들키면 안 된다고 하더군. 그 소주방 하는 이모한테. 어쩌겠냐. 걔네 이모는 편의점 나가는 줄 안다는데." "우선 알았다고 하고선 뜸한 강변쪽으로 차를 뺐지. 거기서슬쩍 시도를 해봤거든. 캬. 걔도 상당히 대담하데. 차 안인데도 처음엔 순순히 응하더라구. 애초에 그날 슬쩍애무하다 가 윗도리 벗기는 데까진 좋았어. 근데 갑자기....." 갑자기 - 녀석이야말로 갑자기 말을 멈추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상투적 습관 같아, 나는 잠자코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적당한 시기에 말문을 열었다. "얼른 계속해 봐, 짜샤! 사람 궁금하게스리." "휴우, 그래 알았어. 하지만 반바지, 그 안쪽까지 막 손이 진출하려는 순간에......" 얼레, 웬일일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녀석의 담배연기 내뿜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그 순간에 걔가 갑자기 내 손목을 꽉 쥐는 거야. 그리고는 '잠깐만' 그러는 거 있지?" "왜?" "나도 똑같이 물어 봤었어. 왜 그러냐고. 황당하더구만. 글세 그러는 거 있지. '너, 그건 안 돼' 라구" "그건 안돼?" "그래. 그건 안 돼! 난 처음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해서 혹시라도 빨간 불이 켜진 날인 줄 알고 물어 봤지. 그렇지만 그건 아니라지고 하대. 그럼 왜 그러냐고 물었어. 하지만 무조건 거기까지는 싫다는거야. 죽어도!" 모를 일이다.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윗도리까지 벗어 던졌다면서, 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어. 난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구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했지. 그래서 천천히 공을 들였어. 다른 부분부터......알잖아, 가끔 여자애들,숩게 안 보이려고 남자들 몸 달게 하는 거. 그래도 내가 누구냐? 그런 거야 충분히 통달한 놈인데...... 사실 그럴 땐 되레 자기들이 몸 달게 하면 되는 거걸랑. 자기가 먼저 못 참도록......" "그렇게 한 이삼십 분을 허비했지. 키스에서시작해서 허벅지, 가슴까지....... 심지어 은근 슬쩍 손도 반바지 안으로 집어넣고, 난 알 수 있었어. 거부하는 척 하지만, 보영이걔, 흥분 했더라구. 숨소리도 그렇고, 내 손에서도 은근히 신호가 느껴졌고. 야. 그런데 막상 다시시 도하려니까......" 꿀꺽, 어느새 내 입에서 침이 말라갔다. 그만큼 녀석의 무용담이자 자기 자랑은흥미진진 하게 진해되고 있었ㄷ. 그러나 묘한 일이다. 희창이의 표정은 다른 떄와는 달리 여전히 뭔가 가 부족하다는 투였다. "으와, 미치겠더군. 이미 손까지 가있는데, 진짜로 안 되겠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그 계집 애, 분명 헐떡거리기 일보직전인데 말이야. 숫제 이젠 내가애원할 정돈데도, 절대 안 된다 구...... 솔직히 그 땐 앞 뒤 가릴 수준이 아니었는데." 그래선가. 녀석이 꽤 안타까워 보였다. "그러더니 나중엔 자기가 되레 미안하다고 얘기하더라. 자기 위험한 때라구.그렇기에 안 심이 안된다고." 위험한 떄 -내 의아함을 희창이가 선뜻 풀어주었다. "있잖아. 가임기간. 그래서 나한테 묻는 거였어. CD있냐고 말이지. 허 참, 그럴 줄 알았으 면 아예 약국을 전세 내서라도 준비해 둘 걸......" "CD? 그게 왜 필요해? 니 차에 CD플레이어 외제로 간 지 얼마 안 됐잖아?" 내가 얼마나 어이없는 질문을 했는지는 녀석의 한심해 하는 표정에서 금방 드러났다. "무식한 자식, 그게 그 CD야? 몰라서 물어?" 아차차, 그 순간에야 그게 단어의 약자인지 짐작이 갔다. Compact Disk. 그 약자가 아니었다. 한 상자. 알겠다. 어쨌든 희창이의 실패담인지 성공담인지 모를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근데 사내새끼가 무슨 그 따위 걸 미리 준비하고다니겠냐, 차 안엔 끽해야 방향제뿐인 데...... 어쨌든 물어 봤지. 그냥 적당한 순간에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도 있는데, 꼭 그게 있어 야만 하느냐. 그러나 역시 대답은 노였어. 자기도 그러고 싶지만, 불안하다나 어떻다나....." 순간적으로 녀석에게는 미안했지만 삐질삐질 웃음이 새어나왔다.그 동안 계속된 녀석의 자기 자랑에 신물이 나던 차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실패담이었던 것이다. 녀석이 나를쨰려 보아 차마 더 크게 웃을 수는 없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아...... 미안 미안. 그래서 그냥 포기해버렸다는 거야?" "그래. 결국은...... 뭐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마음이 싹 가시더라구. 게다가너도 알다시피 보영이 그 애, 최소한 지금까지 꼬셨던애들하고는 수준 자체가 틀리잖아. 내가 들인공도 만만치 않고...... 솔직히 그런 계집애, 그저 그렇게 하룻밤으로끝낼 사이가 되고 싶지 않으 니까. 뭐 굳이 고집한다면 다른방식도 있었겠지만, 그냥 약속만 받았어." "약속?" "응, 다음 번엔, 그 놈의 서전준비가 있건 없건, 그걸 허락해 주기로 말야." 비로소 녀석이 전화에 대고 '절반의 성공'이라고 한 의미가 이해가 되었다. 준비작업이 불 충분했다...... 희창이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인지는 몰라도,다음 번에는 스스로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받아냈다면, 말 그대로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그래서 그냥 왔지 뭐. 새벽까지 같이 있다가 너한테 가봤지만 집에 간 줄은 몰랐었지. 그 래서 아침까지 차 세워놓고 기다렸다가 보영이랑 밥 먹고 들어온 거야." 몰래바이트 여대생 다미 07 결국 희창이와 나의 진지한 얘기란 그것이 전부였다.녀석으로서는 몰랐던 예지의 짝 사랑. 선영이 누나에 대한 내 부탁, 그리고 어찌 보면 시시껄렁한 축에 속하는 희창이의절 반짜리 성공담. 나는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보영이에 대한 절반의 자랑만 아니라면 나머지 이야기들은 그다지 유쾌한 화제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혼자 재미 본 얘기에 열을 올리던 희창이가 그 런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불쑥 제안을 해왔다. "야, 짱이야. 오늘 기분이 좀 그렇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돌아다 봤다. "그래서 얘긴데 너 뭐, 정 그렇게 선영 선배나 예지 문제로 골치 아팠다면, 우리 기분전환 이나 하는 게 어때?" "그래서 뭘? 니가 내 앞에서 위문공연이라도 벌여주겠다는 거냐?" "흐흠, 그런 건 아니지만, 가만 있자...... 오늘 월요일 맞지?" 늘 그렇지만, 문득 녀석의 머리 속에서 또 하나의 건수가 계획되는 모양이다. 잠시 내얼 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은 딱, 손가락을 튕기고는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 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가 걸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통화가 됐는지 그가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응, 보영이구나. 지금 일어났어? 어, 여기? 차 안. 아냐. 학교야. 그래, 창희랑 같이 있어." 보영이였다.희창이는 지난 토요일 일 때문인지 한껏 정겨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계 를 보니 어느새 오후, 아마 단란주점에서 돌아온 보영이가 일어났을 시간대이리라. "몸은 좀 어때? 오늘 월요일이잖아. 가게 안 나가는날이라며. 그래서 생각난 건데, 오늘 그 여자애는 나와?" 그 여자애? "왜, 그 떄 얘기한 여자애 있지? 가게에 같이 있던...... 응, 이름이 다미였었나?"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녀석은 나를 보며 응큼하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창희랑 나도 오늘 별일 없으니까...... 그때 그랬잖아. 창희....... 무슨 얘긴지 알지? 그래 그래. 바로 그거. 뭐 월요일이 제일 한가하다고 한 거. 오늘이 녀석이 나 땜에 좀 기 분이 우울하거든. 내가 기분 좀 풀어줘야 돼.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창희한테 니가 직접 물 어 봐." 한참을 지들끼리 나 모르는 얘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내이름을 들먹였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불쑥 녀석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 왜?" "받아 봐. 보영이가 너한테 할 말 있대." 나한테? 엉거주춤 전화를 받으니 건너편에서는 까르륵, 뭐가 재미있는지 보영이의 웃음소 리가 들렸다. "후훗, 안녕. 창희야? 나 보영이야" "어...... 응, 안녕." 야릇한 기분이었다. 지금껏 이 여자애와 희창이가 벌인 차안 애정행각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곧바로 직접 목소리를 듣다니, 나 같으면 그날 서로 옥신각신하느라 어색할법도 할 텐데, 그녀의 말투는 태연자약 그 자체였다. 사실 따지자면 처음 소주방에서 만난 것을 빼고는 다시 마주친 적이 없는 보영이, 하지만 그녀는 마치 잘 아는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이 나를 대했다. "있잖아, 너 오늘 저녁에 무슨 약속 있니?" 약속? 희창이도 아니고 나한테 그걸 왜 묻나. "바쁘지 않으면, 이따 우리 가게 놀러 와. 내가 술 한잔 살게." "너희 가게...... 단란주점? 너, 너 오늘 아르바이트 아니야?" "응, 아니야. 나 월요일은 쉬거든. 원래 오늘이 가게도 제일 손님 없는 날이구말이야. 이 따가 와. 희창이랑 같이, 후훗," 보영이는 뭐가 즐거운지ㅡ 연신 웃어댔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저희끼리 낄낄거리다가이번 엔 난데없이 놀어오라니, 내 주제에 함부로 들락거릴 곳도 아니고, 또 그럴 배짱도 없느데.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더 많은 신경이 쓰였다.미쓱한 상상이머리 속에 맴돌 았던 것이다. 이 여자애, 바로 여기 이 희창이와 적나라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 애 아닌 가. 그녀는 희창이가 내게 그 모든 비밀스런 얘기들을 다 털어놓았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아니, 나도 보영이처럼 섹시한 아가씨와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언젠가소주방에서 본 보영이의 꽉 낀 청반바지가 떠올랐다. 거의 팬티에 가깝던 그 반바지, 그 아래로드러났 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의 경계를 이루던 살곡선. 얼떨떨하게 응응거리기만 하던 나는 희창이 녀석에게 곧바로 핸드폰을 건네야만 했다. "좋아, 우리 그럼 이따 갈게. 수업 마치고....... 응, 끊는다!" 녀석이 전화를 끊자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무슨 얘기야? 둘이서 무슨 작당을 하는 것 같은데." "후훗, 별 것 아냐. 그냥 놀러오라는 거지 뭐." "또 술 마시자고?" "에이, 어때. 안 그래도 토요일 일 때문에 이 계집애기분좀 맞춰줘야 해. 얘가 그 때 내 부탁 못 들어줘서 미안하다고 술 산다는 거야." "야, 근데 그럼 왜 나까지 부르는 거냐? 술을 사려면 너한테나 사주지?" "그러야 뭐 너랑 같이 있으니깐. 야야, 어쨌든 넌 그냥 내가 술 산다는 셈치고가서 얻어 먹기나 해. 내가 니 기분 풀어주는 거라 생각하고 말야." 그래도 여전히 의아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희창이는 몸을일으키며 내가 걱정할 바 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야, 가자! 오후수업 늦겠다." 오후수업이 끝나고, 희창이는 다짜고짜 나를 자기 차에 태웠다. "정말 가는 거야?" 기분전환이다 - 하는게 녀석의 이유였지만, 녀석은대답 대신 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글세 넌신경 안 써도 돼. 누가 아냐?다음 번엔 보영이 그 계집애, 나랑 같이자겠다고 했으니 혹시 오늘 그런 찬스가 생길줄도 모르는 거구. 그냥너랑 나랑 오랜만에 진지한 대 화를 나눴잖아. 그러니까 술이나 한잔 마시자는 거야." "짜식, 그런데 지금 니 표정은 그게 아닌 걸? 뭐야? 또 너 무슨 수작부리는 거지?" "임마, 쫀쫀하긴....... 가 보면 알아. 짜샤, 다 이 형님이 널 위해 마련하는 거니까." '널 위해 마련' 아무래도 수상쩍은뉘앙스다. 대충 뭔가 눈치라도채보려고 계속 녀석의 표정을 살폈지만, 녀석은 휘파람마저 불어대며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가 보면 다 알 거야." 그리고 채 몇 분도 달리지 않아 우리는, 시내로 접어드는 학교 근처의 번화가에 도착했다. "따라 와." 주차시키기가 바쁘게 희창이는 한 손에 차 키를 달랑거리며 앞장을 섰다. 그는 웬 오피스 텔처럼 생기느 중간 크기의 빌딩 지하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은 계단 입구부터 제법 그럴싸한 분위기를내고 있었는데 언뜻 뒤따르며 보니이런 류의 술집이면 으레 붙어있을 화려한 간판에, '단란주점- 오페라' 라고 적혀 있었다. 그랬 다. 보영이가 일한다는 자게가 이 곳인 모양이다. 지한층은 퍽 고급스럽게 생긴 이 단란주점 이 몽땅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규모나 빌딩가라는 위치로 보아 근처의 사무실이나 회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곳이 성싶 다. 그리고 근사한 장식이 된 큼지막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 희창이는, 금방 누군가에게 꾸 벅 인사를 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응, 우리 보영이 도련님이네?" 카운터 옆 바 스타일의 스탠드 의자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한가한 듯 담배를 손가락에 들고 있었다. "아, 예, 안녕하셨어요?" 녀석은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인 듯 알은체를 했다. "으응, 그래서 보영이 고 계집애가 쉬는날인데도 일찍부터 나와있는 거구나, 계집애...... 그 럼 우리 희창씨 온다고 미리 말을 하지." 대충 보기에, 한 서른 초반인 것 같았는데, 진한화장을 감안하면 사실을좀 더 나이를 먹었 을 것 같다. 최소한 아가씨로 불리지 않을 여자였다. 게다가 이런 데에 딱 어울릴야스러운 의상, 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보영이가 말한 '언니'이리라. 일전에말랬지 않은가. 이 언니를 따라여기까지 이사를 왔다고. 그렇다면 이 여자가 필경 이 술집의 얼굴마담이라는 얘기였다. "보영이 벌써 와있어요?" "으응, 그래. 그런데 오늘은 친구도같이 온 모양이네? 맞아? 이도련님. 희창이 도련님 친구지?" 도련님 어쩌구에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들었다. 그런데 그 마담이라는쪽이나를 은근한 시선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우리에게 보영이가 있다는 방을 가 르쳐 주었다. "보영이 룸에 있어. 거기 복도 돌아서 맨 끝방에." 각 방들은 호화스러운 유리벽과 칸막이로 나눠져 있었다. 척보기에는 무슨 노래방 같아 보이지만, 그 유리들은 전부 두껍고 고급스러운 커튼들로 가리워져있어 룸안이 보이지 않 았다. 워낙 이런 곳에 출입이 없던 나인지라,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시록 촌 놈 처음 서울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보영아, 나 왔어." "어머, 일찍 왔네." 제법 익숙하게 희창이가 들어선 룸 안에는 테이블위에 손가락을 펼쳐놓고 열심히매니큐 어를 칠하던 보영이가 반가운 척을 하고 있었다. 08 "어머, 누구야?' 녀석을 따라 엉거주춤들어서는 내앞에, 마찬가지로 손톱을 칠하고있던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으응, 왜 전에 봤잖아, 요 앞까지 나 태워다준......" "아아, 안녕하세요?" 보영이의 아르바이트를 위해 차로 바래다주고, 며칠 전에도 놀러 왔었다는 그를, 어느새 이 단란주넘 안의 얼굴들은 이미 한 두 번씩 마주친 모양이었다. 방 안의 또 한 아가씨는 이미 안면이 있는지 자기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여기 앉아, 잠깐만 기다려 봐." 보영이는 손에 칠한 매니큐어가 닿을까 봐 조심하며, 빼꼼히 룸의 문을 열고서 복도를 향 해 소리쳤다. "언니! 우리 이방에 있는다!" "아냐, 거기 있지 말구, 안데 7번방 가서 놀아. 이따가 손님 올지도 모르니까." 이제 겨우 예닐곱 시도 안 되었으니, 아직 손님이 뜸할 술집안. 그 언니란 사람의목소리 가 마주 대꾸를 했다. "좋아, 희창아, 우리 자리 옮기자." 스스럼없이 희창이의 팔을 끌어당기며, 보영이가 먼저 일어섰다. "다미야, 너 다 칠했어?" "그럼 너도 일루 와, 같이 놀게." "나?" 다미란 여자 - 보영이와 같이손톱을 칠하던 여자는 언뜻 보아우리 또래인 듯 했는데 다소 얼굴이 갸름하고,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보영이의 긴 생머리에 비해 짧은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그녀는 의외라는 듯 우리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야, 안 돼, 난 오늘 일하는 날이잖아." "으휴, 계집애. 누가 모르냐? 그래 봤자 뭐해. 오늘 월요일이라 끽해야 세 팀도 안 들어올 건데." "그래도...... 언니가 뭐라 그러지 않을까?" "됐네, 걱정마. 오늘 언니한테 내가 술 살거라구 했어. 여기 애들한테....... 그럼 됐잖아?" 내 생각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성싶은데, 보영이는개의치 않고 다소 망설이 는 다미란 여자애와 희창이의 팔짱을 양쪽에 끼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기사, 여기는 원래 돈내고 술을 마셔야 옆자리에 앉아주는ㅏ., 그런 곳 아닌가. 그녀는 익히 보았던 반바지 스타일 - 그물스타킹은 신지 않았다 - 이지만, 다미란 여자는 정장스타일에 상당히 짧은 치마를 입고있었다. 아마도 가게에 있을 때에입는 의상인 것 같은데, 보영이보다도 더 늘씬한 다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보영이는 7번 방인가 뭔가 하는, 더 깊슥한 안쪽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7번방은 그나마 유리벽도 없는 완전한 밀실의 룸이었다. 이 정도면 말로만 듣던 룸싸롱이 무색할 지경이다. "잠깐 기다려. 앉아,창희야" 넓은 룸의 테이블 한쪽 끝에서,가뜩이나 처음 와본 장소에 기가죽어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데그런 어색함을 풀어주려는 듯 보영이는 기실나를 두 번째 보는 것임에도불구하고 마치 오래 전에 알았던 사이처럼 대해주었다. "전에 보영이랑 여기 앞에서 봤었죠? 근데...... 벌써들 퇴근하신 거예요?" 다미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희창이가 보영이의 남자친구라는 걸 미리 아는지 호기심을 보 였다. 그러나 희창이는 호들갑스럽게 능청을 떨었다. "퇴근이라뇨,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우린 아직 학생인데!" "학생이요? 어디 다니는데요?" 학생이라고 무시하는 건지, 그녀는 짐짓 케묻기까지 했다. "혹시...... 여기 학교는 아니겠죠?" "아뇨, 맞아요. 우린 여기 경영학과 다녀요." "경영학과!" 모를 일이다. 다미란 여자는, 우리가 이곳 대학에 다닌다는말을 듣자, 흠칫 놀라는 기색 이였다. "왜요, 아는 사람 있으세요?" "아, 아니요." 글쎄다. 뭐 우리 과 교수님들이 온 적이라도 있나? 꼭 지금이 여자의 표정은 뭔가를 들 킨 사람 같다. 그 때였다. 보영이가 한 손에 안주접시를 들고 룸안으로 들어왔다. "짜잔, 너희 배고프지? 이거 특별안주다!" 아마 주방에 무슨 부탁이라도 했는지, 보통 안주접시보다 배는 큰 접시에 꽤 푸짐한 상차 림이 담겨져 있었다. 역시, 낭군인 희창이가 왔다고 서버스가 극진했다. "가서 맥주갖고 올게." 보영이는 오늘만큼은 노는 날이라 그런지, 신이 나 보였다. 그런데 술을 가지러일어나는 그녀의 손목을 다미가 갑자기 붙잡았다. "저기, 보,보영아. 나 저쪽...... 룸에 가 있을게." "어머, 왜? 안 돼! 오늘 내가 사는 거라니깐!" 다미란 아가씨, 그녀가 흘낏 우리의 눈치를 보았다. 자리를 피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그냥, 너희 아는 사람들끼리 놀아." "아냐, 계집애야! 너 오늘 소개팅 시켜주는 거란 말야!" 으잉? 소개팅? 잠깐, 희창이는 보영이가 있는데- 이게 무슨 얘기인가. 희창이가 아니면 남은 것 나 아닌가. 그럼 나를? 여기 단란주점에서?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09 그랬구나. 희창이와 보영이가 내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다미란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다소 얼떨떨했다. 아무리 소개팅이라도 술집여자를, 그것 도 그 여자가 일하는 그 술집에서 하라니. "어머, 야, 말도 안 돼!" 화들짝 놀라기는 내 파트너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다미란 이아기씨 역시 나처럼 남자를 소개하준다는 말을 지금 처음 듣는 모양이엇다. "뭐 어때? 너 남자친구 없다며?" 움찔, 다미란 여자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짓고 보영이를 쳐다보았다. 결국 아까 희창이가 핸드폰에 대고히히덕거리던 것이 종내 이계획이었다는 얘기였다. 내가 봐도 당돌한 그녀의 행동이랄 수밖에 없는데, 이번엔 희창이가 가세했다. "그래요, 꼭 소개팅이 아니어도 다미씨가면 여기 창희는 파트너가 없잖아요.우리 그냥 편하게 같이 어울리면 돼죠, 뭘." 자칫하면 어색한 분위기로 빠지려는 찰나, 보영이가 억지로 다미란 아가씨를 자리에 앉히 며 못을 박았다. "어유, 계집애...... 너 소개시켜 주려고 오늘 쉬는날인데 일부러 희창이랑 드라이브 약속 까지 깬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 있어, 응?" "야아, 그럼 미리 말을 하든가!" 난처한 듯, 다미는 계속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보영이는 아예 무시를 해버리고 술을가 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가뜩이나 익숙치 못한상황에 희창이에게 면박을 주 고 싶었지만, 나까지 끼여들면 분위기가 완전히 망쳐질까 봐 조용히 눌러 앉아 있어야 했다. 어쨌든 건수 만드는 데는 도사인희창이 녀석 - 갑작스런 소개팅이라니,일전 보영이와 잘되면 새끼를 쳐주겠다고 약속한 걸 기어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다미씨, 저희가 마음에 안 드세요? 이상하네, 우리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겼나. 섭섭해 서 열받네." 희창이가 짐짓, 그녀 쪽이 민망하도록 딴청을 부렸다. "아, 아뇨, 그, 그게 아니라 보영이가 갑자기 그래서." "자, 여기!" 그 때 마침 보영이가 양손에 맥주병을 서너 개씩 들고서 름으로 들어섰다. "자, 마시자!" "얌마, 김보영.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시켜 줘야지. 여기 두 사람." "아 참, 미안 미안, 깜빡하고 있었네. 그래, 여기는 다미야. 안다미. 나랑 같이저녁 때 파 트타임으로 여기서 아르바이트해." 안다미...... 그녀는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여긴 알지? 희창이, 그리고 여긴 희창이 친구창희. 내가 그랬었지, 우리 가게에 서 제일 괜찮은 사람 소개시켜 주겠다고." 어쩔 수 없이, 나도 어색한 미소를 띠며 소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하게, 그것 도 술자리에서 소개팅이라니, 나 참...... "아, 안녕하세요." "자자, 그럼 일단 술부터 마셔. 내가 인심 쓰는거니까!" 잔이 돌아가자, 보영이는 맞은편 희창이의 곁으로 쪼르르 달라붙어직접 술을 따라 주었 다. 다미는 내 쪽 소파에 안자아 있었으므로, 이 건 마치 정식으로 아가씨를 불러다 앉힌 모 습이다. 엉거주춤 의자 한 두 개 사이를 두고 있던 다미는 그제야 조금 다가앉으며 내 잔에술을 따랐다. "어때, 창희야? 다미 예쁘지? 걔, 되게 글래머다. 후훗." 아닌게 아니라, 적당히 풍만한 보영이의 몸애에 비해 이 다미란 아가씨는 한층 더 몸매의 굴곡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탓인지ㅡ각선미가 첫눈에 보아도 상 당했다. 난 그녀에게 잔을 받고 곧바로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죄, 죄송해요. 전 그냥 놀러오라는 줄만 알고...... 제도 다미씨 만날 줄은 몰았어요." "아, 아뇨. 괜찮아요. 저도 아깐 갑자기, 조금 당황해서......" 그녀도 그제야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흥, 계집야. 내숭은....... 자, 건배!" 분위기를 잡기 위해선지, 보영이는 모두에게 원샷을 제의했다. 나와 희창이가 잔을 비우고 내려놓는데, 문득 그녀는 다미를 향해 눈을 흘겨댔다. "뭐야, 다미 너...... 원샷이라니까!" "보영아 나...... 이따가 손님 올지도 모르잖아." 보영이가 반도 안 마신 그녀의 잔을 걸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야 야, 와봤자 월요일은 원래 다 놀잖아. 몰라서 그래?" 아마도 월요일이 이런 술집에서는 주중에 제일 한가한 날인가보다.그도 이해가 될 만한 노릇, 게다가 그녀들이 얘기하는 것으로 보건대 이곳에는 여기이 다미와 보영이를 제외하 고도 아가씨들이 여럿 더 있는 모양이어싸. 하기야, 들어오는 손님 수에 여자 수를 맞추려면 적어도 하룻 밤에 열댓 명의 아가씨들을 고정적으로 대기시켜 놓아야 되리라. 물론 그러니보영이가 스스럼없이 자기는 아르바이트 하는 거라고 말을 하겠지만. 그 때였다. 빼꼼이 룸의 문이 열리더니 아까 언니라던 마담이 살며시 들어왔다. "어머, 뭣들하고 있니? 언니 들어가도 돼?" "응, 이리 와 언니, 언니도 같이 맥주 한잔 해." 보영이와 이 언니라는 마담은, 듣던 대로 상당히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녀는 슬쩍, 보 영이 곁에 눌러앉았다. "손님 없지, 그치?" "원 애도, 알면서 왜 물어? 월요일엔 그래서 애들도 반만 나오라 그러는데." 그녀는 정말로 한가한 듯 담배를 칙, 물어 피우기 시작했다. "근데...... 우리 보영이 도련님은 알겠구. 여기 이 분은 누구야? 친구 사이 맞아요?"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마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보영이도 꽤 색기있는 얼굴이 분명하건만, 이 언니라는 여자는30대로 보이지 않는 미인 형에다가 훨씬 색스러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차이나 드레스처럼 긴치마의 옆선이 깊게 트여져, 전형적인 술집여자의 자태가 드러나 보였다. "맞아, 창희야, 인사해. 우리 사장언니!" "계집애도 사장은 무슨. 응, 난 최지숙이에요. 그냥 미세스 최라고 해요." 미세스 최? 그럼 결혼한 유부녀? "근데 뭐하고 있는 거야? 다미는 왜 그렇게 뾰구퉁하니?" 살짝 미소짓는 미세스 최, 눈꼬리가 말리는 것이 상당히 요염해 보였다. 보영이는 그 말을 가로채 자랑하듯 톡톡거렸다. "후훗, 언니, 오늘 다미 소개팅했다!" "야아, 보영아!" 소개팅이라는 말에, 다미는 당장보영이를 흘겨보며 책망의 눈짓을 보냈 다. "어머, 소개팅? 누구랑? 여기 이 도련님하구?" "응, 여기 희창이 친구야. 학교도 같이 다니구." "학생? 여기?" 내가 학생이라는 소개에, 미세스 최는 다시한 번 찬찬히 나를 훑어보았다. 마치색다른 구미가 당긴다는 분위기였다. "공부 잘라게 생기셨네? 다미는 좋겠다, 소개팅오 다하구." 놓치지 않고, 보영이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언니, 다미 봐라. 내가 첫잔만 원샷하라는데, 안 마시는 거 있죠? 계집애, 내숭 떨고 있어. 언니야, 오늘 손님도 없을 거니까, 다미도 좀 놀라구 해요. 술도 내가 사는 거잖아!" "그래? 그럼 그러렴. 어차피 딴 애들도 조금 있으면 나오는데. 박사장님, 그 사람만 안 오 면 되지 뭐." "어머, 어,언니!" 박사장? 그건 또 누구야? 그 말에 다미가 당황해 하는 기색을내비쳤고, 나까지 궁금한 표 정을 짓자 보영이가 재빨리 답해 주었다. "언니두참, 소개팅중이라니깐! 박사장 얘기는 왜 하우?으응, 창희야, 박사장이라구, 가끔 들리는 다미 단골 있어. 그 사람 얘기야." 정식 소개팅도 아니겠지만, 나는 왠지 옆의 다미에게 단골손님이 있다라는 얘기를 들으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꼭 남자친구있는 여자가 미팅을 나왔다고 할까. 그러자 그런 눈치를 챈 듯 미세스 최는 짐짓 자리를 피해 주었다. "호호. 괜히 언니가 어물쩍거리다간 소개팅 다 깨져버리겠네. 내가 실수한 건아니지? 다 미야, 너 안 부를 테니까 놀아. 보영이가 술값 낸다 그러잖니. 계집애두, 너만 없으면 언니가 이 창희도련님이랑 소개팅하겠다, 얘!" 은근슬쩍, 나를 부추겨주는 미세스 최. 그녀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치며 슬쩍 윙크까지 해 주고는 룸을 나갔다. "야, 들었지? 그러니까 다미야, 자, 원샷!" 아휴, 다미는 그제야 한숨을 폭 쉬며 맥주잔을 비웠다.보기보다 순진한 건가, 아니면 다 른 이유가 있는 건가. 그녀는 여전히 이 자리를 꺼리는 것 같았다. 그런 다미의 잔을 채워주 다 말고, 보영이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찰싹 치며 희창이를 돌아보았다. "야, 맞다! 우리 분위기 띄우게 게임하자!" "게임? 뭐?" "편 먹고 러브샷!" "러브샷? 그게 뭔데?" "그러니까 나랑 희창이 너랑하구, 창희랑 다미랑 둘씩 해서, 똑같이 마시는 거야!" 그녀의 말인즉슨, 원샷이 아니되 두 사람이 각자 자기가 마실만큼만 마시고, 그걸맞추어 봐서 둘의마신 양을 비교해 내기를 하자는 것이다. 맥주잔에 남은 술 높이가 같으면 이긴다 는 게 게임의 규칙이다. "그래서? 그거 해서 이기면?" "글세, 으응...... 뭐할까? 그래도 내기니까. 지는 쪽...... 지는 쪽은......" 보영이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의 얼굴을 휘 둘 러보았다. "그래, 생각났다!" 아뿔사, 그녀의 폭탄선언. "지는 쪽은...... 옷 하나씩 벗기! 어때?" 옷벗기 - 옷벗기 게임? 10 옷벗기 게임? 이제 겨우 다들 맥주 두어 잔도 안 마신 생황이었다. 고로 보영이가 벌써 술에 취해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자기 입으로 나의 소개팅운운해 놓고서는 갑지기 옷벗기 게임이라니,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야아, 너 미쳤어?" 보영이의 그 제안이 황당하기는 다미란 여자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뭐 어때? 재밌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무슨 룸살롱도 아니고...... 다미나 나나 어처구니가 없어 웃 어님기려는데, 이번엔 엉뚱하게도 희창이가 거들고 나섰다. "하핫, 그거 진짜 재미있을 거 같은데, 하자!" "야, 임마, 이짱!" 녀석은 아무래도 죽을맞추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내가 인상을 쓰는데도 호들갑스럽게 보 영이의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에이 왜, 짱이 너 자신 없냐?" 이제 경쟁심마저 부처기려 드는 희창이.나는 그제야 녀석이 장난이 아니란것을 알 수 있었다. "야, 그래도 어떻게 여기서......" "짜샤, 그럼 너희 두 사람이 분위기 좀 맞춰야 할 것 아냐. 소개팅 자리가이래서야 되겠 어?" 허 참, 녀석과 단둘이 있었다면 쥐어박기라도 하겠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다미쪽을 흘끔 거리며 점잖게 타이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야, 지금 만난 지 얼마나 됐다구......" "에헤, 그러니까 하자는 얘기 아냐. 분위기 띄우게.그리고 모처럼 보영이가 자기 가게까 지 오라고 해서 노는 건데, 보영이 성의도 생각해야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내 편이어야 할 다미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애초에 말도 안 된다 는 듯 어이없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어머, 창희 너 빼기야? 내가 여기 다미 소개시켜준 앞에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한술 더 떠 자존심까지 건드리는 보영이였다. 아무리 창졸간에 마련된 소개팅이라고는 하 나, 보영이마저 저러니 아무래도 내가 디미 앞에서 스타일 구겨질 판국이었다. "보영아, 자꾸 왜 그래!" 보다 못한 다미가 그런 그녀를 나무랐지만, 그녀 역시 내 앞에서 퍽 난처한 모양이었다. "그,그래도 아직 술도 많이 안 마셨는데......" 날을 잡아 한턱 쓴다는 보영이 기분을 안 맞춰줄 수도 없고...... 난처해진 내가 더듬더리자 보영이는 재빨리 손뼉을 치고 재잘거렸다. "좋아, 그럼 하는 거다! 자, 희창아!" 아직 우리가 동의한 것도 아닌데 - 더 이상 이의제기를 막으려는 듯 보영이는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얼른 잔을 들어올렸다. "오케이!" 희창이도 잽싼 동작으로 마주 잔을 들어 서로 쨍, 하고 잔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서로팔 을 걸어 얼굴을 마주 들여다보고는 그럴싸하게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야, 보영아! 이짱!" 그 때 보영이와 희창이가 서로 눈을 찡긋거리며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당시의 나는 모르 고 있었다. 그래서 다미와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둘의 러브샷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 었는데, 물론 이 첫잔은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그들의 술수였다. "캬아!" 동시에 탁, 잔을 내려놓는 두 사람. 테이블 위에 놓자마자 서로의 잔을 대 보았다. "얼레, 야 뭐야!" "어머나,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그들은잔을 보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투덜댔다. 가만 보니보영이는 들이켠 것이 삼분 의 일, 희창이는 남은 것이 삼분의 일이었다. "어유, 바보...... 술이라면 그저 좋아해요!" "뭐가? 너야말로 옷 벗으려고 작정했냐?" 둘은 키득거리며 잔 높이를 못 맞춘 것에 대해 서로를 타박해댔다. "어떡해, 우리 지면 다 희창이 너 때문이야." "가만 있어 봐, 혹시 알아? 자, 이제 너희 차례야." 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우리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우, 우리도 하라구?" 엉겁결에 나는 다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나 난감하긴 다미도 마찬가지,우리는 당혹한 눈초리로 서로 마주봐야만 했다. "좋아 좋아, 그럼 여기 남은 딱 여섯 병만 하자. 그럼 되지?" 여전히 망설이는 다미와 나에게 희창이는 타협안까지 제시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남자인 내가 먼저 잔을 들어야 했다. 이 정도 술이라면 댓 번 정도 돌 아갈 것 같으니까, 대충 반타작만 해도 윗도리나 끽해야 양말 선에서 끝날 것이라는 계산에 서였다. "어유, 계집애!" 그제야 다비도 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영이를 째려보고는 나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저들처럼 팔까지 걸고 마시기는 멋쩍은 일, 그렇기에 우리는 마치 어른 앞에 서 술을 마시듯 서로 고개를 돌리고 맥주를 들이켰다. "봐봐, 얼른!" 내려놓자마자 잽싸게 두 잔을 확인하는 보영이, 사실 다미와 나는 내심 자신이 없을 수밖 에 없었다. 서로 눈대중으로 맞췄어도 모자란 판국에 아예 고개를 돌리고 마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미와 내 잔은 예상을 뛰어넘어 채 5밀리정도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머머, 얘들 둘 천생연분이네?" 사실 우리 쪽이 더 잘 맞을 가능성이 희박했었다. 다만워낙 히창이와 보영이 쪽 차이가 컸던 탓이었다. 어쨌든 놀랐다는 듯이 우리 잔을 들여다보는보영이에 맞장구를 쳐대는 희 창이였다. "야아, 너...... 다미씨랑 안 보고 마셔도 이 정도야? 이거 우리가 졌잖아?" "우와, 이러면 큰일이네. 안 보고 마셔도 이런데 우린 뭐야!" 그들은 정말로 놀랐다는 표정으로 뻔한 수선을 피웠다. 솔직히 첫판을 이겼다는 생각보다 도, 왠지 모르게 다미와 내가 두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이 초판부터 진 셈이니, 우리로 하여금 쉽게 발을 빼지 못하도록 할 심산이지 않은 가? 더군다나 희창이가 벌떡 일어나 윗도리 재킷 단추까지 풀어헤치니 이제는 정말 꼼짝없 이 게임에 말려들고 만 형국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보영이가 그런 희창이의 팔을 잡아 앉혔다. "됐어, 잠깐 기다려 봐." 좌중의 시선이 모아지자, 보영이는 스스럼없이 또 한 번 놀랄말한 말을 꺼냈다. "내가 하자는 내기니까, 내가 먼저 벗을게!" 뭐라구? 보영이가 먼저? - 나와 다미가 놀랄 틈도 없이, 그녀는 팔을 올리더니 걸치고 있 던 스웨터를 끌어올렸다. "자, 다미야, 됐지?" 아마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다미를 게임에 끌어들이려는 속셈같은데,그러나 나는 그런 계산보다는 눈앞의 황당한 광경에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보영이는 스웨터 안에 달랑 브래지어 하나만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적당히 그을린 - 아 마 일부러 선탠이라도 한 모양 - 팽팽한 젖가슴이 까만 색 브래지어에 감싸인 채 드러났다. 훌륭한 젖가슴이었다. 그 크기에서가 아니라, 늘어지지 않고 위쪽으로 올라붙은 말 그대로 탱탱한 가슴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야!" 다미는 민망한 듯 보영이의 거칠 것 없는 행동을 책망했지만,나는 마치 조각상 같은 보 영이의 젖가슴에 속으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늘 씬한 그녀의 각선미에 어울리는, 한마디로 잘생긴 유방이었다. 그런데 희창이는 보영이가 자기 옆에서 훌렁 웃통을 벗는데도 키득거리며 즐러운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예 농담마저 던졌다. "얌마, 보영이 너 그럼 몇 개 안 남잖아." "뭐, 어때, 이번에 이기면 되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보영이는 다시 각자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보영이가 스웨터를벗 어 던진 순간부터 당황하기 시작한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머리 속으로 이리저리 셈을 해 보았다. 이제 다섯 병이 남았으니까......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잠깐, 아까 저 계집애 보 니까 스타킹도 안 신었던데...... 그렇다면 보영이는 반바지와 팬티, 그리고 저 브래지어밖에 없는 셈 아닌가? 마른침이 다 시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그녀의 유방이 맥주병을 기울이느라 브래지어와 함께 출렁거 리고 있었다. 꿀꺽꿀꺽, 어느새 그들은 둘째 잔을 내려놓았다. 다시 우리차례, 이제 다미와 나는 꼼짝 없이 이 옷벗기 게임에 말려든 상황이었고 이제 그들의 의도대로 재차 맥주를 기울일 수밖 에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은근히 불안한 눈초리로 서로를 곁눈질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어디 보자, 야아! 우리가 이겼다!" 도리 없는 일, 당연한 결과였다. 저들은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마시는 판국이기에최 소한 우리 쪽에서는 서로멀찌감치 눈치로라도 맞춰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쪽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랬다. 까뜩이나 다미와 멋쩍은 시선을 피하며 마신 데다가, 유리컵을 통해 보영이의유 방과 브래지어가 훔쳐 보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혀를 차며 윗도리 셔츠를벗기 위해 단추를 끄르고 있는데 보영이가 나를 제지하고 나섰다. "야, 뭐야? 내가 먼저 벗었잖아!" 아뿔싸,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다미를 향하고 있었다. 응당 내가 먼저 멋을 거라안 심하고 있었는지, 그 말에 다미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랬다. 즉 지금 자기가 먼저 벗었으니, 우리 쪽도 그녀가 먼저 벗어야 한다는게 보영이의 요구인 것이다. "야, 안돼, 보영아, 난......!" 다미는 다급히 반발했으나 그 항의가 통할 리 없었다. 어찌됐건 혼자 즐거운 것은 희창 이였다. "푸하핫! 그래 맞아, 우린 보영이부터 시작했잖아." "아, 아냐, 나, 나부터 할게." 그녀의 봉변을 막아주기 위해 끼여들었지만 의외로 보영이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안 돼. 다미 니가 벗어. 그럼 불공평하잖아. 게다가 희창이는 창희보다 하나더 입 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셔츠바람이었지만, 희창이는 티셔츠 위에도 헐렁한 재킷을 더 입고 있었다. "그러다 언니 오면 어쩌려고 그래. 혼난단 말이야!" "뭐 어떠니? 우리끼리 술값 내고 노는 건데. 다음엔 창희가 벗으면 되잖아." 난처해진 다미가 도움이라도 바라는 듯 내 쪽을 돌아보았지만 진퇴양난이기는 나 역시 마 찬가지였다. "얼른 벗어. 나도 벗었잖아, 계집애야. 어차피 그래 봤자똑같은데 뭘 그래?" 다미는 애꿎은 한숨만 내쉬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았어, 벗으면 되잖아!" 그녀는 부끄러운지 잠자코 등을 돌린 채 블라우스 단추를끌렀다. 나는 점점 어처구니없 어지는 상황에 몸 둘 바를 몰라 맞은 편 희창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희창이는 다미가 윗도리 벗는 광경을 흘끔거리며야릇한 미소를떠올리고 있었다. 얄밉다 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아니지만 뭐라고 핀잔할 수도 없었다. 자도 지금 보영이의 저 탄 탄한 유방과 마주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 흐뭇해하던 녀석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뭐지, 저 녀석, 꼭 여자 옷 벗 는 거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 처럼...... 다미가 블라우스에서 팔을 빼낸뒤 단발인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돌아앉았을 때에야, 나는 희창이가 그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슬쩍, 곁눈질에 들어온 다미의 유방은풍만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보영이도 가슴이 작은 편이 아니고,언뜻 보기에도 비슷한 키라지만 다미쪽이 더 마른 것 같은데 하얀 색 레이스가 수놓아진 브래지어에 담긴 그녀의젖가슴은 실로 34, 아니 35 는 족히 될 한 아름이었다. 11 나는 사실 처음에 상당히 의외였다. 아무리 술 마시며노는 자리라도 그렇지 자기 남 자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옷벗기게임을 하자고 설치는 보영이나,불가항력이라 해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웃통을 벗는 다미나, 모두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로만 들었을 뿐인 이런 게임이 그녀들,보영이와 다미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워낙 숙맥이라 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희창이 정도라면 몰라도, 그리고 물론 이 자리가그녀들 스스로 만든 자리이기는 하나,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쳐가가 나오는 술집에서 무슨 일들이벌어지는지, 또 그런 여자들이 어 떤 식으로 노는지 전혀 몰랐다. 어쨌든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피치 못하게 열심히 곁눈질을 했다. 보영이가 완벽 쪽에 가 까운 만든 듯한 가슴이라면, 다미는 정말 폭 안겨보고 싶은 풍만한 가슴이었다. 사진이나 영화상으로는 질리도록 보았지만, 실제 여자 가슴구경이라고는 손가락으로 세어 도 넘지 않을 나로서도 어느 정도 유방에 대한 기본 상식은 갖고 있었다. 즉 얼굴만큼 유방의 모양도 가지가지여서, 어떤 여자는 작아도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 만 어떤 여자는 커도 올라붙은 가슴을 하고 있다. 그리고다미는 그 빅사이즈에도 처진 모 습이 아닌 후자였다. 그녀의 젖가슴은 낮은 테이블 위로 거의 닿을락 말락할정도였다. 브래지어만 없다면 당 장이라도 쏟아질 것같았다. "어유, 뭐야 이게!" "핏, 억울하면 이기렴! 후훗" 얼떨떨했다. 더 당혹스러운 일은 그녀의 말투였다. 내가 그녀라면 아니 그냥 여자라도, 도 저히 목숨 걸고도 못 보일 모습을 하고 있는 다미가 그저 짜증이 난다는 투였으니......그리 고 보영이는 그런 그녀를 보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계집애, 맥주나 줘!" 다미는 자기가 블라우스를 벗게 된 것이 억울한 듯, 자기잔의 맥주를 마저 비우더니 컵 을 보영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보영이는 희창이의 팔을 끌어안고 들러붙으며 놀려댔다. "어머, 니 파트너한테 달라 그래, 큭큭, 우리 편 말고." 보영이가 그렇게 자신의 가슴을 녀석의 어깨 뒤로 숨기자, 그제야 민망한 듯 다미도 엉거 주춤 한쪽 팔로 자기의 앞가슴을 가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너 정말 그럴 거야? 두고 봐, 너." 그럴수록 나의 난처함은 계속되었다. 이 상황을 저들처럼 즐거워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멍청하게 그녀들의 어른거리는 젖가슴만 흘끗거릴 수도 없었다. "제, 제가 드릴게요......!" 얼결에, 맥주병을 든 나는 다미가 내미니 잔을 쫓아 따라주려 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도 잔을 돌린다는 것이 내가 따르고 있던 술줄기를 놓치고는 병과 잔을 부딪히게 하고 말았다. "어멋, 앗 차가워!" 엇, 하는 새에 기울이고 있던 맥주가그녀 쪽으로 튀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맥주 신세를 부러워하게 되었는데 - 그 맥주방울들은순식간에 그녀의 가슴 사이, 브래지어, 그 리고 무릎 위에 놓인 블라우스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아이 참, 어떡해! 이게 뭐예요!" "으아, 미, 미안해요!" 현란히 난무하는 속살들 탓일까, 훔쳐보느라 넋이 나간 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 고 말았다. 그 맥주는 다미의 젖가슴 계곡 사이로 정확히 날아가 방울방울 지으며 흘러나려 그녀의 브래지어를 적시고 있었다. 허둥지둥 손수건을 꺼낸 나는 당황한탓에 직접 그녀의 앞가슴을닦아주려 들이대었다. 그러나 다미의 손이 먼저 내 팔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어머나, 왜, 왜 이래요!" 아차차, 나는 엉큼한 실수를 연발하고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그렇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 맨가습에 손을 대려 하다니.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닦아 드리려고......" "됐어요!" 다미는 내가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쌀쌀맞게 대꾸하고는 팩 돌아앉아 탁자 위 의 냅킨으로 가슴을 훔쳐냈다. 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희창이와 보영이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즐거워 죽겠다는 듯 깔깔거리고 있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숨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게 뭐야...... 브래지어 다 젖었잖아." 따지고 보면 나만의 실수도 아니었다. 둘이 부딪힌 것 아닌가? 하지만 내 쪽이 더 미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사실 그와중에도 흐른 맥주를 닦고 있는 그녀의젖가슴, 그 깊은 계곡 사이에 넋이 나간 놈이 바로 나였으므로. "어머나, 어떡해, 갈아입을 블라우스도 없는데......" 블라우스까지 많이 젖은 모양이었다. 방법이 없기에 밖에서 가릴 것이라도 가져와야 했으 나, 그렇게 브래지어 차림으로는 나가기는커녕 문조차 열 수 없는 판국이었다. "여, 여기 이, 이거라도......" 눈치 빠른 희창이가 얼른 자기 재킷을 벗었다. 나는 그것을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건 네주었다. 잠시 나를 흘겨보며 망설이던 다미는 못 이기는 척 재킷을 받아들고는 어깨 위로 걸쳐 여 미며 룸을 나가버렸다. "호호홋, 진짜 재밌다! 창희 얼굴 빨개졌어!" "크히힉, 야 짱아, 넌 좋겠다? 다미씨 갈아입을 옷도 없다는데......?" 그 상황에서도 보영이와 희창이는 나르 ㄹ놀려댔다. 그 둘에게 욕이라도 해주려는데, 갑자 기 보영이가 웃음을 멈추더니 맞은편 내게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창희야, 어때? 다미 마음에 들어?" 어이구, 내가 언제 너한테 여자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한적 있냐? 지들끼리 새끼 쳐준다 며 끌고와 놓고는...... 이렇게 대꾸하려는데, 문득 보영이가 목소리를 낮추며 전혀 엉뚱한 말을 꺼냈다. "다미 진짜 가슴 크지? 내가 다 재보고 소개시켜주는 거다, 너." 뭐라구? 재보고 고르다니? 그러나 보영이는 답답하다는 듯 오히려 나를 구박했다. "왜, 너 가슴 큰 여자 좋아한다며? 희창이가 다 얘기해줬어!" 희창이 저 녀석 - 어이가 없어 보영이의 등 뒤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았 다. 녀석을 쉿, 하는 포즈로 손가락을 입에 대고 눈을 찡긋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지난주 소주방에서 가슴이 어쩌고 할 때, 그저 농담인줄 알았는데, 그게진담처럼 되어 있다니. 제길,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쟤 그래도 머리 나쁜 애 아냐.남들은 가슴 크면 머리 나쁘고 미련하다지만,쟨 학교도 다니는 걸." 순간적으로 입이 딱 벌어졌다. 학교? 학생? 잠깐, 다미가 학생이라고? 그럼 대학생? 나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일반적으로유방이 큰 여자를 섹시하 다며 좋아하지만, 여자들은 그 정반대라고 했었다. 즉 가슴이 크면 미련하거나 공부못하고 머리 나빠 보인다고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 같아도 만약아는 여자가 가슴이 커 보이며미련스럽고 둔해 보인다 할는지 몰라도....... 어떤가? 길을 가다가 착 달라붙은상의에 터질 듯한 젖가슴의 소유자를 발견하면, 남자건 여자건 반드시 한 번씩은 뒤돌아보지 않은가? "진짜? 어디 다니는데?" 하지만 거기까지는 몰랐었는지, 그녀가 학생이란 말에 당장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희창이 였다. "몰라, 죽어도 그 얘기는 안 하니까. 하지만 언젠가 술 취해서 그랬어, 돈 없어서 못 다닐 뻔하다가 다니게 됐다구."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까 우리가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다미가 자리를피 하려고 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난 그냥 언니랑 친해서 가끔 여기 아무 때나 나오는거지만, 다미 저 계집애는 진짜 아 르바이트야. 요일 정해놓고 꼬박꼬박 나오는 걸." 처음 듣는이야기였다. 낮생활과 밤생활이 다른 여자들이 있다지만,그렇게 말로만 듣던몰 래바이트 여대생을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였다. 그게 바로저 다미라...... 른근히 허리를 숙 이고 귀가 쫑긋해진 우리에게 주의까지 주는 보영이였다. "미세스 최 언니하고 나만 아는 얘기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그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다미가 들어섰다. "뭐야, 뭘 말하면 안 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재킷만을 걸친 채 자리에 앉는 다미는 보영이가 소곤댄 마 지막 말을 언뜻 들은 모양이다. "김보영, 너 내 얘기했지? 뭘 말하지 말란 거야?" 아차차, 엿들은 것일까. 다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아냐, 그냥......" 느닷없는 그녀의 출현에 보영이는 허겁지겁 말을 돌려야 했다. "너 혹시?" "아니냐, 계집애야. 그리너까...... 니 브래지어 얘기했어. 그래, 얘들이니 브래지어 예쁘다 길래 맞춘 거라구......" 맞춤속옷? 하기사 그럴 만도 했다. 다미 정도의 유방이라면 특별 사이즈가 필요할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어쩐지 아까 입고 있던 것이 레이스가 화려한 게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했었 다. 그래도 기껏 둘러댄 것이 다소 민망한 화제였기에 나는 다시 머쓱해졌다. "어머머, 내가 언제? 아냐, 아까 그건 맞춘 게 아니라 선물 받은 거라 그랬잖아." 자기 사금 얘기가 나오자, 다미도스스로 당혹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사실 하나가 새로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머, 다미 너 그럼 설마...... 그것만 입고 온 거야?" "그럼 어떡해? 브래지어랑 블라우스랑 둘 다 젖었는데"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흘낏 다미 쪽을 돌아본 나는 속으로기겁을 했다. 그녀는 희창이의 재킷을 어깨 위로 걸친 채 두 손으로 앞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안에는 그냥 적나라한 맨몸이라는 이야기?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희창이와 나. 그런시선을 느꼈는지, 다미는 행여 앞쪽이벌어질까 봐 단단히 재킷을 움켜쥐고 있었다. "진짜 그 얘기 한 거야? 내 속옷 이야기?" 그녀는 여전히 의아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듯 나와 희창이의얼굴을 확인했다. 할 수 없 이 시치미를 떼야 했다. "맞아요, 다미씨. 굉장히 멋있는 디자인이어서...... 그 브래지어 어디 있는 거예요? 나도 우 리 보영이 사주고 싶은데." 희창이의 능청에 피식, 다미는 웃음을 흘리며 뻐기는 듯 목소리를 튕겼다. "외제예요. 나도 잘 몰라요. 선물 받은 거니까!" 외제 속옷 선물? 그런 걸 누가 사주지? 백화점 가니까 기십만원 정도로 엄청 비싸던데 - 왠지 모르게 의문점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보영이의 얘기로는 돈 없어서 학 교도 못 다닐 뻔했다 하지 않았는가. "어유, 보영이 너 별 얘길 다하고...... 두고 봐, 계집애! 아까 그거나 다시 해!" 하지만 화제는 바뀌어 이제 다미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종내 이 게임에서 당한 것은 자기뿐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결국 그녀는 이겨서 앙갚음을 하겠다는 투였다. "그래, 어차피 다미 너희가 유리한 셈이니까!" 맞는 말이기는 했다. 다미가 브래지어를벗기는 했지만 대신 희창이가재킷을 벗었으니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걱정스러운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미가 보영이에게단단히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자, 우리가 먼저 마셔요!" 우려는 현실로 바뀌고 있었다. 시키지도않았는데 그녀는 자기 잔에 이젠네 병째 남은 맥주를 가득 붓더니 나에게 재촉까지 해대는 것이었다. 여섯 병으로 시작했으니 이제 이것으로 세 병이 남았다. 하는 수 없이 잔을 드는데,다미 는 이제 확연히 다른 자세를보여주었다. 조금 전만 해도 엉거주춤고개를 돌리던 그녀가 이번엔 열심히 내 쪽을 보며 러브샷의 눈대중을 맞추었다.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패자는 우리였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차피 볼 것 안 볼 것, 익히 다 아는 보영이와 희창이는 단지 맥주 양에만 신경을 쓰면되었지만, 내 눈길은 이 얼떨떨 한 상황에도 다미의 잔보다는 자꾸만 아래쪽으로 쏠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손은 맥주잔을 들고, 게다가 고개를젖히며 마셔야 하니,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없는 그녀의 재킷 앞자락...... 아무리 몸집작은 남자라도 여자보다는 어깨가넓고, 아무리 몸매 없는 여자라도 남자보다는 둔부가 크기 마련이다. 아무리 늘씬한 다미라할지라도, 헐렁한 남 자 재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또 워낙 터질듯한 유방의 소유자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한쪽 젖가슴이 재킷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깊은 계곡이 옷자락으로 절반쯤 가려진 것이 더욱 아슬아슬한 황홀경이었 다. 그러니 질 때마다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 나는 계속 미안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내 가 벗을 차례라는 건데...... 난 윗도리에 셔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어째야 하나? 아무리 남자라도 벌거숭이 몸을 드러내는 것은 쑥스러웠다. 그런데 순간 나 를 봉변에서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뜻밖에도 다미였다. "잠깐, 창희씨 벗지 말아요!" 12 "내가 대신에 밖에서 브래지어 벗었으니까, 창희씨는 한 번 안 벗어도 되지?" 허 참, 이 아가씨, 이제는 나와 한편이라는 동지의식마저 느끼는 모양이었다. "좋아. 하지만 다음은 그대로 다미씨 차례야, 알죠?" 원칙대로라면 내가 안 벗는 반면에 그녀가 재킷이라도 멋어야했다. 그러나 재미없을 내 맨살을 보기보다 그 쪽이 낫겠다는 듯,재빨리 결정을 내리는 희창이였다. 대신 그는다음 차례는 다미로 못을 박고 있었다. "흥, 걱정 마요! 자!" 맥주를 따르고, 다시 마시고......두병 남은 상황에서야 다미와 내가 이겼다. 질 수 없다는 듯 다미가 악착같이 내 잔과 맞춘 결과였다. 희창이 녀석은 결과에 승복한다는 듯 씩 웃으며 윗도리를 벗었다. 그러면 그렇지,녀석은 셔츠 안에 반팔 러닝 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걱정이었다. 어쨌든 이제 두 병 남은 셈, 일대일이라 하여도 어느 한 쪽이 하 나씩 더 벗어야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희창이는 다음 번 지는 경우엔 그녀 차례라고 벼르 고 있는데...... 하지만 드디어 이겨서 시원한지킥킥 소리내며 웃기까지 하는다미였으니, 그녀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이겼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 같았다.승부욕이 꽤 강한 여자라고나 할까? "자, 마셔!" 그는 따라 거꾸로 이제는 보영이가 진 것이 억울하다는 듯열을 내었다. 그런 둘을 희창 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며 나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녀석은 그런 심정인 모양이었다. 꿀꺽꿀꺽, 탁 - "얍, 야호!" 뜬금없이 다미는 소리까지 질러댔다. 이번에도 우리 쪽이 이긴 것이다. 메롱, 다미는 보영 이에게 혀까지 내밀어 보였다. "우리가 또 이겼지롱, 약오르지, 계집애야!" 하마터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걸치고 있는 옷을 하나하나 벗으며 남자 앞에서 나체를 드러내는 중인데, 그녀들은 그런 상황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다 미는 신이 나는지 주먹을 불끈 쥐는 시늉을 하고는 내게 손바닥까지 들이댔다. "어유, 창희씨 뭐하는 거야, 우리가 이겼잖아요! 자......" "아, 예, 예." 뭐가 그리 신나는 것일까. 하기야 나도 희창이 놈과 내기 당구 따위를 칠 때에는 거의 목 숨이라도 건 것처럼 굴지만...... 머뭇거리며 내가 손바닥을 펴자 다미는 찰싹, 경쾌하게 허공 에서 손을 마주쳤다. "어유, 그러니까 희창이 너 왜 그렇게 많이 마셔, 바보같이." "야, 김보영, 그게 니가 조금 마신 거지 어떻게 내가 많이 마신 거냐?" 보영이는 이제 잔뜩 약이 올라 희창이에게 짜증까지 부리고있었다. 그러나 다미는 아랑 곳없이 그런 그녀에게 연거푸 재촉을 해댔다. "푸훗, 얼른 벗어, 보영이 니 차례야!" "알았어, 계집애야!"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를 한 보영이는 허리를 굽히고 테이블 아래에서 뭔가를꾸무럭거리 고 있었다. 잠깐, 보영이 차례라 - 나는 찰나 어안이 벙벙해졌다. 핫팬츠와 브래지어뿐인 그 녀. 게다가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다리, 그런 지금 테이블 아래로 벗는 것은......! "자, 봐, 됐지?" 으힉, 실제로 보영이는 보라는 듯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빼내고는 벗겨낸 자신의 햇팬 츠를 들어올렸다. 사실이었다. 두꺼운 유리테이블을 통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까만 색 팬티로 감싸인하체 였다. 아찔한 광경이었다. 희창이는 뭐가그리 좋은지 키득거리며 테이블 아래로흘끔흘끔 그녀의 아래쪽을 내려다 그러면서도 보영이의 하체를 가려주려는 듯 슬그머니 그녀의허벅 지에 손을 올려 놓았다. 보영이의 탄탄한 각선미는 이미 핫팬츠를 통해 본 적이있었다. 하지만 하이레그 스타일 의 검은 색 팬티로, 거의 엉치께까지 드러난 그녀의 하반신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적나라한 광경이었다. 군살 없는 그녀의 쫙 빠진 몸매 - 하복부,허벅지, 종아리, 무릎 - 가 남김 없 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 라스트!" "좋았어, 이번엔 다미 너, 두고 봐!" 이제 남은 것은 단 한병의 맥주. 그래도 멈추지 않는 보영이와 다미였다. 처음에는 분위기 를 띄운다고 우리를 끌어들인아가씨들, 그러나 점점 묘한경쟁심으로 그녀들의 옷벗기기 경쟁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중간쯤까지 찬 각자의 맥주잔을 채우고 나니, 드디어 숨이 막히는 마지막 판이었다. 다미는 숫제 내 얼굴에 바싹 다가와 눈동자마저 맞추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최대한 상대 방의 잔을 살피며 술을 들이켜야 했다. 네 개의 잔들이 테이블 한가운데로 모였다.그러나 결국 확률의 법칙이 작용을 했고,채 몇 밀리 차이도 나지 않게 우리가 졌다. 금세 고소하게 바뀌는 보영이의 표정. "흥, 이번엔 우리가 이겼지? 짜잔!" "아유, 쫌만 더했으면 되는 건데......" 간발의 차로 진 것이 무척 아쉽다는 듯 다미는 안타까운 표정응 지어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차라리 잘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번에도 우리가 이겼다면 저 희창이 의 벌거벗은 꼴밖에 더 보았을 것인가. 아마 그런 생각은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보영이가 감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보면 몰라? 옷 벗잖아?" "야, 안다미, 그게 옷이니?" 무슨 얘기지? 돌아본 내 눈에 자기 미니스커트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은 다미가 보였다. "그건 스타킹이잖아, 계집애야!" "왜? 스타킹이 어때서? 아깐 양말도 된다고 했잖아!" "웃기지 마. 난 스타킹 없어서 반바지 멋었는데, 넌 겨우 그것만 벗고 끝내려구?" 보영이는 불공평하다고 다미에게 트집을 잡는 중이었다. "야, 그럼 누군 껴입고, 누군 없으니까 다 벗니? 치사하게......" 마지막 판이라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는 보영이. 그런 반격은예상 못했다는 듯 다미 도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야, 야, 안 돼, 난 밴드스타킹이란 말이야!" "그래도 안 돼. 봐, 나도 팬티밖에 안 입었잖아! 억울하면 그 희창이 재킷을 벗든가." 이럴 수가, 이게 무슨 얘기냐, 치마, 그녀의 미니 스커트를 벗으라는 얘기였다. 굳이말할 필요도 없이 함부로 상반신을 전라로 내보인다는 건 불가능한다미. 그렇다면 그녀도 팬티 차림이 된다는 건가? 맙소사, 한 자리에서 팬티만 입은여자를 두 명씩이나 앉혀놓는다?그도 아니면 최소한 지금 이 글래머 아가씨의 속살을 남김 없이 구경? 입안이 바싹 마르면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야아, 나, 나...... 안 된다 말이야!" "뭐가 안 돼, 계집애야. 봐, 나도 벗었잖아! 치사하게 나만 이러구 있으라구?" 원래 보영이는 기가 세게 생긱 편이었다. 오뚝한 콧날,선 굸은 입술, 또렷한 눈매...... 전 형적인 미인대회의 미인상이었지만, 너무 완벽새 오히려 뭔가 빠진듯한 느낌마저 주는 얼 굴이었다. 그런데 그 깎아 만든 듯한 얼굴의 날카로운 인상이 지금 그대로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토요일 희창이 차 안에서의 얘기를 들ㅇ느 이후로 그 고집이 결코 만만치 않음 을 느꼈는데,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보영아, 난 그냥 스타킹 벗을게......응?" "안 된다니까. 그럼 윗도리 벗어, 치마 대신에." 아무래도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무슨 돈 내고쇼를 구경하는 술집도 아니 고 순수하게 친구들 노는 분위기에서 너무 심하게 나오는 것 같았다. "보,보영아, 아까 나 땜에 다미씨 옷도 없는데......" 그러나 보영이는 여전히 생글거리면서도 단호한모습으 보였다. 차라리 곁에있는 내가 둘 사이에 싸움이라도 날까조마조마한 심정인데, 보영이는 마치장난치듯 내게 때꾸하고 있었다. "어유, 걱정 마, 창희야. 저 계집애 순 내숭이야, 내숭." 내숭이라니, 지금 다미는 진짜로 난처해 보이는데...... 맞은편의희창이를 보니 녀석도 지 난 주말 보영이의 완강함에 혀를 내둘렀던 탓에 떨떠름하게 웃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후훗, 야, 안다미, 얼른 벗어. 뭐야? 우리끼리 놀 때는 알아서 팬티까지 볏고 그러면서...... 너 소개팅 했다고 이러기야?" 응? 듣고 보니 민망한 말이었다. 자기들끼리술자리에서 이런 야한 게임을 한다는말은, 곧 가게에서 일할 때와 관련된, 그녀들이 퍽 이런 것에 익숙하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아이 참, 안 된단 말이야!" 궁지에 몰린 다미는 화 반 애원 반 보영이에게 매달렸다. "워가 안 돼? 다미 너 노팬티니?"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보영아 좀......" "그럼 뭐야? 말해 봐, 나는 벗었잖아, 근데 넌 뭐?" 다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희창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렇수록 집요한 보영 이였다. 그녀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자기가 먼저 내기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팬티 바람이 되었으니, 똑같이 해놓고 누구만 넘길 수는 없는 문제였다. 흘끗, 걱정되는 눈길로 다미 쪽을 보니, 잠시의 침묵 뒤에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지체 념을 하는 눈치였다. "알았어, 벗을게. 벗는다구."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등을 살짝 돌리고 미니스커트 옆구리의 지퍼를 내리는그녀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히고 치마를 조심스레 벗어 내렸다. "자, 됐지?" 다리를 스커트에서 빼내자, 그녀는 재킷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벗은 스커트를 옆자리 소파 로 던졌다. 다행히 그다지 보기 흉한 광경은 아니었다. 원체 헐렁한 남자 재킷이기에 옷자락은 그녀의 엉치께와 하복부를 엎고도 허벅지 위쪽 삼 분의 일께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다미로서는 단단히 옷깃을여미기만 하면 거의 미니 스커트에 가까운 효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희창이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기대에 못 미치는지 조금은 아쉬운표정으로 그녀 쪽을 훔 쳐보고 있었다. 나도 어니 정도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보영이는 이제 속이 후련한 모양 이었다. 결국 우리 눈요기를 위해서가아니라, 자기가 이겼다는 기분을 느끼고싶었음이리 라. "계집애 결국 그럴 거면서. 좋아 좋아, 자, 이제 더......" "양마, 김보영, 술 다 마셨다. 술 없어." 희창이는 이제 술이나 마셔야겠단 요량으로 화제를 바뀌 보영이에게 빈 술병을 흔들어 보 였다. "어머, 진짜네, 야! 우리 게임 계속할까?" 신이 나는지, 그녀는 우리를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젠 누구도 그에응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멍청히 서로의 얼굴말 돌아보자, 보영이는 재밌다는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알았어, 그만 해. 이젠 술이나 마시자, 후훗." "그럼 내가 시킬까?" 옷을 벗고 있는 아가씨들 둘을 대신해, 희창이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있는데 - 똑똑, 누가 문을 두드렸다. 13 "나 언니야, 들어가도 되니?" 미세스 최, 마담 언니였다. 순간 화들짝, 다미가 튀어오를 정도로 놀라 보영이를 쳐다보 았다. "뭐 어때, 우리 오늘 노는 거잖아...... 들어와요, 언니." 역시 보영이는 스스럼없는 말투였다. 비록 자기네 가게이긴 해도, 버젓이 자기가 계산하며 마시는 중이니 거리끼지 않는 그녀는 과연 마담과 보통 사이가아닌 것 같았다. 사실 그렇 게 따지고 보면 나와 희창이도 그녀가 술값을 치르는 것일뿐, 손님은 손님이니까 다미 같 은 아가씨가 나오는 것이 맞는 얘기다. "어머, 뭐하고들 있었어? 왜 이렇게 조용하게 놀아, 노래들도 안 부르고......나 앉아도 되 지?" 마담은 우리들 사이에 다소 간의 실랑이가 있었던 것을 벌써 감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 런데 놀라운 것은 그녀의 손에 양주 한병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어머, 언니 그러 뭐야?" "응, 써비스." "정말? 언니, 언니가 주는 거야?" 서비스? 저 비싼 양주 한 병을? "그래, 사실을 계산 된 거지만 어차피 팔아서 뭐하니?돈 많은 양반들이 따지도 않고 둔 건데. 그리고 우리 보영이랑 다미, 잘생긴 도련님들도 놀러왔잖아?" "우와, 언니 멋있어......!" 보영이는 곁에 앉은 미세스 최의 팔에 안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그런데 너희들 뭐야? 옷들은 왜 다 벗고 있어?" "으음....... 우리 옷벗기 게임 했거든. 그래서 술내기하려고 그랬는데, 후훗." 보영이는 서슴없이 우리가 벌인 게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떠벌렸는데,기가 찬 것은 최마 담이 그런 그녀들을 보고도 하등 놀라워하지 않는 점이었다. "그랬어? 어머머, 그럼 니들만 졌나 보구나? 도련님들은 웃통밖에 안 벗었네?어유, 가시 내들, 언니 부르지 그랬어! 그럼 우리 희창씨라 ㅇ여기 친구분 홀라당 멋게 만들 자신 있는 데......!" 최마듬은 아예 한술 더 떴다. 옷벗기 게임에 자신이 있다니, 하기야 척 보아 젊은보영이 나 다미에 비해 전혀 빠지지 않는 몸매겠지만...... 저런 노익은 몸매가 속옷만 입고서? "피스 언니는 안 붙여줘. 우린 파트너끼리 편먹고 했거든. 언니는 짜도 없잖아? 짝 데리고 오면 끼워주지롱......!" "어머나, 이 계집애 좀 봐......언니 올드 미스라고 놀리니? 짝없는년 서러워서 못 살겠 네." 그런가. 그럼 아직도 미혼이란 얘기인가? "에헤, 언니가 뭐가 짝이 없어? 그럼 우리 아저씨는 뭐야? 자꾸 그러면 진짜 언니 발가벗 겨 놓고 그 아저씨한테 일러 버린다!" "어머, 야, 보영아!" 보다 못한 다미가 보영이에게 핀잔을주었다. 아무래도 다미는마담이 합석한 것이 껄끄러 운 모양이었다. "일러라, 일러. 미세스라고 불리는 것도 서러운데......" 어저씨라...... 그럼 결혼도 안 했는데 미세스고, 아저씨란 남자는 뭐 기둥서방쯤 되는 건지, 역시 그런 궁금증에 대해선 참지 못하는 희창이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그럼 누님 정말로 결혼 안 하셨어요?" '그럼요, 희창이 도련님. 내 주제에 무슨...... 얼굴마담이라고 미세스라부르는 것뿐이에요. 가만있어 봐. 근데 왜요? 나 짝없으면 희창이 도련님이 데려가 주려고?" 그 말에 다들 크게 웃으며 이내 분위기가 풀어졌다. 희창이도 질세라 맞장구를 쳤다. "음, 그럴 수도 있죠. 당장 오늘밤에라도. 자, 우선 한잔 드세요." "좋아요, 아유 기뻐라. 그럼 사양않을게. 근데 오늘밤에? 빠르기도 하셔.그럼 보영이는 어쩌려구?" 마찬가지로 녹록치 않은 최마담의 답변. 역시, 이런 자기에 죽이 잘 맞는 건 희창이와보 영이, 마담 정도인 것 같았다. 보영이는그런 말을 듣고도 개의치 않고 히히덕거리기만했 다. "근데 내 정신 봐, 이쪽 학생은 술도 안 드렸네, 우리 공부 잘하게 생기신 도련님." 나? 나 말인가? 최마담은 엉겁결에든 내 잔에 색스러운 눈웃음을더해 양주를 따랐다. 그녀의 눈꼬리는 정말 기막히게 눈썹을 감추는데, 그 끼로따지면 보영이보다 더하면 더했 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다미의 얼굴이 그 중 가자 ㅇ순진한 축에 들 것 같았다. "이름이 뭐랬죠? 희창씨 친구고 그 쪽도 학생이랬죠?" "예, 예...... 희,희창이랑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구요...... 창희입니다. 지금은 저 친구랑 같 은 과 다니구요." "그래요? 응, 어쩐지......" "아무리 봐도 나는 이쪽 창희씨가 더 맘에 든다. 공부 잘하실 것 같아, 그쵸?" "어, 어, 아니 그냥......" 바싹,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쳐다보는 그녀의 그녀의 시선에 나는 괜스레 멋쩍어졌다. 그녀는 내가 당황해 함을 눈치챘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 걱정 말아요. 농담이니까. 내가 아무렴 다미도련님을 뺏으려구. 참, 왜 이렇게 술 들 안 마셔요? 써비스도 드렸는데, 응. 그러고 보니까 안주가 없구나. 가만 있어 봐. 내가 과 일이라도 깎아올까?" "오늘 되게 손님 없나 보다, 언니." "그래, 글세 말이야. 기다려요, 나 잠깐 주방에 다녀올 테니까......!" 보영이는 그 와중에도 직업의식이 발동했는지 술집 매상을 걱정하고 있었다. 최마담이 나 가자 희창이아 다미를 보며 다시 술을 권했다. "에이, 몰라. 우린 오늘 노는 날인데, 뭐!" "그래, 술이나 마시자, 자 창희야, 원샷!" 나와 다미는 얼결에 술잔을 들고서 목구멍으로 들이켜야 했다.예기치 못한 환대랄 수밖 에 없었다. 무슨 팁을 준 것도 아니고, 그나마 얻어먹기만 하는 처지에 직접 마담까지나서 서 양주까지 내다니. 보영이와 희창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며 희희낙락했다. 참넉살 좋은 커플이 아 닐 수 없다. 엊그제 녀석의 차 안에서 야릇한 일로 다투었다면서...... 그렇게 두어 순배가 더 돌고 있을 즈음, 방금 나간 최마담이 다시 룸의 문을 벌컥 열었다. "다미야, 잠깐만." 술이 쓴지 막 인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던 다미는, 갑작스런마담의 호출에 문득 놀란 눈 으로 돌아다보았다. "왜, 왜요. 언니?" "일른 이리 와 뫄, 잠깐!" 긴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최마담의 표정이심각해 보였다. 그런 다미에게 나를포함하여 보영이와 희창이,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안쪽에 있던 다미가 내 무릎과 테이블사이를 지나 막룸의 문께로 다가서려는데, 마담이 흘끗 복도 쪽을 돌아보더니 자기가 들어서며 그녀의 어깨를 세웠다. "이리 와 봐!" 최맏므은 다미의 어깨를 붙들고는 그녀의 굿가에 입을 댔다. 우슨 은밀한 얘기인지,귀엣 말을 하면서도 마담이 은근히 좌중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일까, 나는 짐짓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시선이 다미의 무릎께에서 멈췄다. 방금 설명했다시피, 막 일어선다미는 테이블을 빠져나오려다 말고나와 테이블 사이에 엉거주춤 끼인 채 서있는 자세였다. 그랬기에 나는, 차마 봐서는 안 될 광경을 목격한것이 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다리를 약간 벌리고 몸을 미세스 최 쪽으로 기울이느라 벌려진, 다미 가 입고 있던 희창이의 재킷 사이였던 것이다. 즉, 좀 전에 그렇게 감추느라 부여잡고여몄 던 옷깃, 그 사이가 노출되고 말았으니 - 그곳, 그녀의 하복부, 다미의가랑이 사이가 정면으 로 보였다. 바로 그토목 드러내지 않으려던 그녀의 비밀이. 안 입고 있었느냐? 천만의 말씀이다.오히려 목도된 것은 벗은 것보다 더 짜릿한 광경이었 다. 그녀의 팬티는 아마 그 최고급품이란 브래지어와 세트인 것 같았다. 전부가 화려한 레이 스로 치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자칫 잘못하면 그얇디얇은망사 속으로 거뭇한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들여다 보일 지경으로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비밀 14 다미는 희창이와 보영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선 자세, 그러니 앉아있는 내 편에서는 당연 히 그녀의 앞모습과 마주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심각한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최마 담과 뭐라 귓속말을 주고받는 중이었기에, 자신이 걸치고 있는옷자락이 벌겨진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 언니! 나 안 나갈 거야, 이러고서 어떻게 나가?" "알았어, 너 그러면 오늘 안 나온 걸로 해. 그렇게 얘기할 테니까, 알았지?" 멍청해진 내 머리 위에서 마담과 다미의 밀담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다미가 자기 자 리로 돌아오기 전에 다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녀가 앉는 모습을 희창이와 보영이의 시선이 쫓았다. 그들도영문을 몰라 궁금한 모양 이었다. "왜, 뭔데 그래, 언니?" "됐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최마듬은 은근히 걱정되는 얼굴으 ㄹ하며 룸의 문을 닫았다. 심상치 않은 예감, 아니나 다 를까 그녀가 나가자 다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상을 지었다. "아잉, 참, 어떡하지."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보영이였다. 그런다미를 눈썹을 찌푸린 채 쳐 다보던 그녀는 문득,이제 알았다 -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항, 알았다. 계집애도...... 박사장 왔구나? 그치?" 박사장? 아, 아까 그 다미의 단골이라던...... 맞다. '박사장만안 오면 다미가 여기서 놀아 도 된다' 라고 했던 최마담이었다. 그런데 그사람이 왔다는 게 뭐 그렇게 당황해 할일일 까. 단순히 단골 정도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보영이가 그 말을 꺼낸 것이 실수인 모양이었다. 다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야, 김보영!얘기하지 말란 말야!" 히스티리컬한 다미의 반응 - 무언지 몰라도 다른사람들 있는 앞에서 함부로 꺼낼 이야 기가 아니었나, 보영이 쪽도 실수라는 사실을 꺠닫는 듯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무안 한지 혀를 낼름 내밀며 나와 희창이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함부로 말해선 안 될 얘기인 것 같았다. "야, 미, 미안. 에이, 참, 난 입이 싸서 탈이라니까." "나쁜 계집애, 그런 얘기 다른 　람 ㅎ나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영문을 모를 일. 대체 박사장이 어떤 인물인데 다미와 보영이가 이렇게 쩔쩔매는것인가. 의아스럽기만 한 나는 희창이를 쳐다보았지만 녀석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지멀뚱거리는 눈빛을 지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얼레, 이게 진정 웬만한 일이 아니었나 보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다미, 자세히 보 니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무리 소개팅을 했어도 그렇지, 자기 단골 손님이 왔다는데 울기까지? 어이가 없어 보영이의 안색을 살피니 그녀는 모두 자기 잘못이라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았어, 울지 마, 계집애야! 내가 대신 가있어 줄게." 허참, 도무지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에 도저히 가밍 잡히지가 않 아싿. 비록 사소한 실랑이가 있기는 햇지만 분위기를 띄운다며야한 옷벗기 게임으로 히히 덕거리는 와중이었고, 마듬까지 등장하여 서비스까지 내놓는 화기애애한 술자리였는데 - 갑 자기 박사장이란 존재 하나로 졸지에 찬물이 끼얹어진 꼴이었다. 그 박사장이 대체 누구기에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희창이도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영이는 그런 우리 둘을 보더니 아무 말 하지 말라는 투로 손가락을 입술에 대보 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계집애야, 내가 가서 박사장하고 있을테니까, 넌 얼른 울음이나 그쳐.넌 오늘 안 나왔다고 할게. 그리고 그 사람 간 뒤에 얘기해주면 되잖아." 다른 사람이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난 보영이는 익숙한 동작으로 아까 벗어둔 핫팬츠 와 스웨터를 다시 껴입고는 대뜸 희창이의 손목까지 붙잡아 일으켰다. "희창아, 너 빠에서 언니하고 얘기하고 있어. 그 사람 다미 없으면 술 별로 안마시고 돌 아가걸랑. 나 금방 갔다 올게." 내가 왜? - 하고 희창이는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으나, 보영이는 얼른 내 쪽을 쳐다보고 는 짐짓 눈짓을 보내왔다. 보아하니 나와 다미둘만 있게 해주자, 뭐 그런 신호인 것같았 다. "창희야, 넌 여기서 기다려. 희창이랑 나갔다 올 테니." 떨떠름해 하는 희창이를 떠밀며 보영이는 내게 슬쩍 눈을찡긋했다. 아마 나더러 다미를 좀 달래주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나 알아야 달래줄 것 아닌가. 그래서 어쨌든 종내 룸 안에는 다미와 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어쩌라는 것인지, 난 멍하니 아직도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다미 쪽만 흘끔 거려야 했다. 뭐라 말할 건덕지도 없는 나는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 필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희미하게 다미의 훌쩍임만 듣고 있기를 몇 분 여. 그제야 얼굴을가다 듬는지 티슈를 뽑아 얼굴을 가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영이...... 나갔어요?" 엉겁결에 긴장한 내 대답 "어, 예......" 자기도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못내 미안했을까, 다미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사과를 했다. "미찬해요, 이런 모습 보여서." "아, 아뇨......괘, 괜찮아요." 젠장,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대 놓고 질물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야 하는 데...... 아이, 어떡해." 박사장이 뭐길래 이 아가씨가 이렇게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왠지 나마저 답답해 지는 느낌이었다. "저,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내가 뭐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후우, 대답 대신 들리는 건 그녀의 한숨소리였다. "말해 보세요, 혹시라도......" "아녜요. 창희씨는 모르시는 게 나아요." 작게 속삭이는 다미의 목소리. 내가 모르는 게 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보다...... 한 가지......" "예, 말씁하세요."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부슨 부탁인지 몰라도, 이 철벗는 상황을 피할수 있다면 나로서는 무엇이든 반겨 야 했다. "부탁이요? 해들릴 수 있으면, 해드릴게요." 그러나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고개를 젓는 그녀. "아니에요, 됐어요." 은근히 화까지 나려는 순간이다. 지금 장난치나? 그렇지만 어찌 이마당에 화를 낼 것인 가.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다시 한 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다미. 그녀는 이내결심한 듯 조용한 목소리롤 말했 다. "그럼...... 나 좀 잠깐만 안아줄래요?" 예에? - 나는 그녀의 부탁이란 것에 귀를 의심해야 했다. "나 좀 안아줘요, 꼬옥......" 눈이 휘둥그레져 그녀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흑흑거리다가 안아달라니? 당혹스런 그 요구 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데, 이미 그녀는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어깨에 기대오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요......" 이,이게 무슨 부탁이냐. 황당했다. 얼추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는 있었다. 어리둥절 했지만 이해할 만한 일. 전 후사정이야 몰라도, 잠시 누군가에게 다독거림을받고 싶은 순수한 듯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속옷바람으로 그것도 우리 둘을 뺴곤 아무도 없는 룸 안에서 그런 부탁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해서, 무엇보다 그녀가 바스트 35의 글래머라는 사실이 떠올라 아찔할 따람이 었다. 초근의 내 방에서 얼토당토않은계기로 예지를 훔쳐본 것이엊그제,, 그래도 그녀는 여기 다미에 비하면 작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응큼한 상상, 이런 여자를 안아보는 것도 일생에 드문 기회라 여겨질 정도였다.생각만으 로도 가슴이 두근 거릴 지경. "부탁해요......" 그녀는 목석처럼 멍청히 앉아 있는 네게 재촉까지 해대고 있었다.나는 얼른 그 말에 못 된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어댔다. 정신 차려라, 창희야 - 다미의 의도는 그것으로 충분 한 것이었다. 하기야 남자인 나도 힘들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으니까. 다소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술자리에서 가끔그런 경험도 있는지라 나는 꿀꺽,마른침을 한 번 ㅅ마킨 뒤에 점잖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이,이렇게요......?" 그녀의 고개가 내 어깨 안에서 가만히 끄덕여졌다. 야릇한 상상을 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는 애를 썼지만, 풍만한 감촉이 알게 모르게 품안 에 느껴졌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미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겪고있는 모양이었다. 내 어깨 위에 서 작게 내쉬는 그녀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왜, 왜 그러세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후우, 아니에요, 그냥...... 힘들어서 그래요." 힘들다? 뭐가 그리 힘들지?보영이의 말마따나 이런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 다니는 것이? 그럴수록밖에 와있다는 박사장이란 인물이 궁금해졌다. "미안해요, 그냥......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요." 더 이상 캐물어도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만 말을 엄추고 말았다. 둘 데가 없는 멍한 시선을 돌려 그녀의 표정이라도 살피려 눈길을 낮추어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래쪽으로 향한 내 눈길.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는 축, 숨을 들이마셔야 했 다. 뒤쪽으로 깊숙이 앉은 내게 몸 전체를 기대어 안기느라, 어느새 다미가 걸치고 있던 재킷 자락이 끌어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벌려진 옷자락 아래로뽀얀 젖무덤이 내비치고 있었 던 것이다. 게다가 그 아래쪽으로 그녀의 하복부와 사타구s 니 - 예의 그 팬티로 가려진 부 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광경은 아까 등지고 선 자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심지어 약간 벌려진 허벅지 상 이 그녀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천조각, 그 외제 속옷이라는 것까지휜히 들여다 보이는 중이었다. 귀밑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 내 귓가에 다미의젖은 못고히가 들려왔다. "박 사장님이 나 이 방에 있었던 것 알면, 나 정말 혼날 거예요." 그러나 혼나고 있는 것은 내 말초신경이었다. 머리 속은 온통 깡통 굴러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15 전체적으로 보아, 다미의 몸은 어니 정도 마른 편에 속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안겨있는 팔다리도 그렇게 통통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끔ㅅTV에서 보면 미스코리아난 슈퍼모 델 같은 늘씬한 아가씨들이 나오는데, 그런 여자들을 보면무언가 언밸런스한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즉 몸집은 킨데 -골반, 가슴 등의 골격 -팔다리는 지나치게 비쩍 마른 것이 조금은 이상해 보인다는 것이 내 느낌이었던 것이다. 바로 다미가 족므은 그런 스타일에 속했다. 두 다리,허벅지를 모으고 앉아도, 살이 찌지 않은 편이라 가뜩이나 다리가 긴 그런 체형에 나에게 안기느라 몸마저 기울여 살짝 허벅지 사이가 흐트러진 항황이었으니,, 아래를 내려다 보는 내 위치에서는 그녀의 하복부가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궁금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속옷, 저런 야한 속옷은누가 선물한 것일까? 왜 하필 저런 것을 입었을까? 아까 언뜻 들은 바로는 선물을 받은 거라 했다. 하지만내가 보기에도 -국산팬티가 나쁘 다는 얘기가 아니다. - 외제라는티가 날 정도로 야릇한디자인인데, 하물며 누가 함부로 그 비싼 것을 사줄 수 있단 말인가. 비싸고도 묘한 디자인의 팬티. 누가 선물을 한 것인지 의아해 졌다. 물론 이 여자애가자 기가 사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내가 여자라고 해도 저런스타일의 속옷은 고르기 힘들 것인데...... 나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도 물론 그렇지만, 자기가 입을 속옷을 고 르는데 기능성 - 편안함, 활동성, 착용감 -을 우선시하기 마련 아닌가. 이런 야릇한 생각에 어느새 내 아랫도리는 생리적 신호는 보내기 일보직전에 몰리고 있었 다. 이러다가 혹시라도 그녀에게 들킬지도 모르는 일, 나는 다미를 더 이상 안고 있기가거 북해졌다. "저...... 다미씨." 그런데도 다미는 한참 동안을 그렇게 내 품에 안겨있었다.처음에는 흐느끼는 것처럼 작 게 들썩이더니, 지금은 조용히 썌근거리고 있었다. 잠이라도 든 건가. 조용하게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다미씨......자요?" 정말 의문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박사장이란 작자가 누구며, 왜 그사람이 왔다는 사실에 이 아가씨는 눈물까지 보였던 것일까. 원래 이런 류의 술집이란, 꼭 단골아 가씨를 못 만났다고 하여 큰불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그 아가씨가 울기마저 한다는 경우는 평생 들은 적이 없었다.. "왜요?" 조그맣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거나 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예?아......!"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화들짝 놀라며 내 어꺠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머 미, 미안해요. 애들 올지도 모르는데......" 마치 지금껏 내 품에 안겼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처럼,다미는 민망한 투로 몸을 일 으켰다. 아마 그 때쯤에야 그녀도 자기 자세가 흐트러진 것을안 모양이었다. 아랫도리에 허전하 느낌이 전해졌는지, 그녀는 허리를 세우며 옷매무시를 다잡았다. 내 시야에서 그녀의 아슬아슬했던 모습들이다시 옷깃에 가려 사라지고있었다. 동시에 내 시선도 갈 곳을 잃고 허둥거렸다. 혹시라도 다미가 자기 아랫도리가 휜히 드러나 있었음 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서로 낯이 붉어질 일이었기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어 색한 상황에 괜한 헛기침만 새어나왔다. "미안해요. 창희씨가 편하게 해줘서 깜빡 정신을 놓고 있었어요." 계면쩍음을 피하기 위해, 엉겁결에 술잔을 들고 독한 양주를 삼키는 나. "제가......불편했죠?" "아, 아녜요. 그런 건......" 불편할 리가 있겠는가. 함지박만한 가슴에, 아래쪽으로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아찔한 광 경르 구경시켜준 그녀인제 - 다만 그런 느김이 잠시 주책없는 생각을 자극시키기는 했어도 말이다. "죄송해요, 처음 보는 사이에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시, 신경쓰지 마세요, 근데...... 다미씨, 박사장이란 분은 대체 누구예요?" 다소 오버한 질문이었을까. 그녀는 내얼굴을 돌아보았다. 괜스레 빤히 쳐다보는그녀의 시선에, 말한 내가 멋쩍었지만,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묻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니...... 난 왜 다미씨가 그렇게 피해야 하는지......" 다미는 고개를 돌리고 뭔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다른방에서 놀고 있었다 해도 그렇제, 그녀가 뭐 전속되어 그 사람에게만 술을 따라야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 나 그녀는 그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듯 나처럼 양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창희씨는 모르는 얘기예요, 안다고 해도...... 모르실 거예요." 정말 모를 일, 그녀의 얼굴표정으로 봐선 무슨 얘기인지 도저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피하느라고......" 뭔가 깉은 사연이 숨어있는 것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나오는이상 나도 조용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예, 얘기하시기 그러면 나중에 하세요. 저는 그저......" 내 진심이었는데, '나중에'란 단어에 씁쓰레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다미. "저...... 제가 창희씨에게 하나만 물어 볼게요 저에 대해서 보영이가 뭐라고 그러던가요?" "예? 뭘를요?" 답압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녀는 또 한 번의 긴 함숨을 내쉬었다. "보영이가 뭐라고 했는지, 창희씨나 희창씨한테......?" 순간,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까 나의 실수로 맥주에 젖은 브래지어를 벗느라 그녀가 잠시 룸 밖으로 나갔을 때에 보영이가 해준 말...... 학교에 다닌다는? 그러나 그건 절대로 아는 체하지 말라고 했었던 보영이다. "아뇨. 전 몰라요. 원래는 그냥 오늘 기분이 좀 그럴 일이 있어서 그냥 희창이가술 마시 러 가자고 한 것 뿐이에오. 여기서 다미씨 만나거나 할 줄은 몰랐어요. 예전에 보영이가절 누구 소개시켜 준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틀림없는 사실 그대로였지만, 다미는 왠지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돌아다 보고 있었다. "정말 제 얘기...... 전해 들은 것 없어요?"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걸까. 몰래바이트 이야기? 보영이는자기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고 했고 그 학교하는 것도 원래는 못 다닐 것을 다니는 거라고 했었는디. "예, 말했잖아요. 전 다미씨 얘기는 오늘 처음, 여기 와서야 들은 걸요." 뭐가 그리 비밀이 많은지...... 문득 다미는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집어들고는 담배를 하나 빼불었다. "저 담배 하나 필게요." 푸우...... 그녀의 입에서 길게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16 담배연기에 깊은 한숨을 섞어 내뿜고 있는 다미의모습은퍽이나 처연해 보였다. 그리 고 전혀 내 동갑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이런 곳에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나이에 어울 리지 않게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파릇파릇한 나이의 그녀가 저렇게 산전 수전 다 겪은 듯 심각해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흪어지는 담배연기를 보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다미는 내게 재차 물어왔다. "여기...... 경영학과 다닌다고 했지요?" "어......예." 문득, 아까 나와 희창이가 여기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그녀의 얼굴에 스치던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녀는 우리가 대학생이라는 것에 뭇근 반감이라도 있는 듯 합석을 꺼려했었다. "보영이나 희창씨가 저에 대해 무슨 얘기한 적 없다고 한 말...... 진짜죠?" 이상하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신경을쓰는 것일까. 나는 오늘 그녀를처음 본 것이고, 자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게다가 보영이는 몰라도 희창이라고 해봤자끽해야 서너 번 봤을 것 아닌가. 아예 처음부터 우리가 껄끄러운 이유라도 있나? "글쎄요, 뭣하면 희창이가 오거든 다시 물어보세오. 전 오늘 소개팅하고다미씨를 본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리한테 신경을씨시죠? 혹시...... 우리 과에 아시 는 분이라도 있어요? 아니면 누가 여기 술 마시러온 적이라도?" 대답 대신 그녀는 피식, 차갑게 웃어 보이며 담배를 껐다. "아녜요, 그럼......됐어요." 이 여자가 도대체 속고만 살아온 것인지. 여하간 박사장 얘기부터 시작하여 도통 의혹 덩 어리인 아가씨였다. 의아한 내 표정을 느꼈는지, 그녀는 화제를 돌리기로 한 모양이다. "창희씨는 집이 어디에요?" 우리 집? 집이야 원래...... "강북이에요. 여기서는 극과 극이죠.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야 하니까." "그래요? 그럼 안 되겠구나." "뭐가 안 돼요?" 다미는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훗,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예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뜻 모를 말이다. 집이 어디라는 게 무슨 관계, 아니 내가 남자란 사실이 집과 무슨 관계인 지.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계속 뜬금없는 말들을 던졌다. "제가 오늘 잘 곳이 없어서 그래요. 박사장님이 나없는 줄 알아버렸으니...... 이럴 땐 보 영이네 가면 되지만, 지금 그 계집애는 희창씨가 와있잖아요." 얼레, 내게 집이 어디내고 물은 목적이 그거란 말인가? 당올한 일이었다. 잘 곳이 없다니? 잠이야 자기 집에 들어가서 자면 되는 것. 이곳에서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까지 다닌다면 서.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창희씨는 남자니까 그럴 수도 없어요." 가만, 만약 내가 여자라면 정말하룻밤 재워달라고 할 것이었나.아니아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 박사장이란 작자가 나타났기에 자기가 술집에 안아논 척 숨었다는 그녀, 그것과 자기가 잠잘 곳과는 무슨 상관이기에 잠 잘 곳도 없다는 말인가? "저, 사실은...... 학교앞에서 혼자자취하는데요. 강북에는 부모님이계셔도 너무멀어 서......"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다미는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손데 든 술이 쏟 아질 정도로 홱, 고개를 돌리며 날 쳐다보았다. "정말요? 학교 찰에 살아요?" "예, 후문 근처에......" 그녀의 반응에 마주 놀란 내가 말을 더듬거리는데...... 의외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낭 패라는 말이 쓰여 있었따. 어머, 잘 됐어요, 그럼 부모님눈치 안 봐도 되니까 하루만 재워 주세요..... 가 아니라 안다미, 그녀의 눈은 아치 놀란 토끼눈처럼 휘둥그레지고 있었던것이 다. "몰라, 나 어떡해, 보영이 계집애, 나한테 미리 말을 해줘야지!" 갑자기 신경질을 부려대는 그녀. "어유, 나쁜 년!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욕까지 서슴지 않는 다미. 나는 순간적으로 뜨악해지고 말았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한 걸까,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보영이에게 상당히 화가 난 듯 자칫하면 뭐라도집어던질 기세였다. 그 때 때마침 룸의 문이 확 열렸다. 멋도 모르는 보영이와 희창이가 히히덕거리며 들어왔 다. "야, 안다미ㅃ 걱정 마, 박사장 그냥 갔어. 화는 좀 냈지만......" 보영이는 무슨 큰 문제라도 해결한 듯 호들갑을 떨었는데, 일순 눈치 빠른 희창이가 그녀 의 팔을 붙들었다. 다미가 그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기때문이 다. 우리의 썰렁한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챈 녀석이 내게 눈짓으로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까는 난리라도 난 것 같이 우울해 있던 다미, 하지만 지금은 벽을 보고 토라진모양새이니, 아치 그녀와 내가 싸우기라도 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황당한 것은 나도 피차일반 -나는 모르겠다는 의미로 떨떠름한 눈짓을 돌 려보냈다. "야아...... 다미야, 박사장 갔다니까." 영문을 모르는 보영이는, 엉거주춤 자기 자리에 앉으며 다미의 안색을 살폈으나 묵묵부담, 대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저...... 다미씨 왜 그래요? 창희가 뭐 잘못했어요?" 희창이가 나와 그녀 쪽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난 아냐,자식 아 - 이런 말이 튀어나오려는데 갑자기 다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벌써 2차 가자구? 야, 아직 술도 남았구, 언니가 안주도......" 예기치 못한 행동이었다. 놀란 보영이가 그녀를 올려다봤지만,다미는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나 갈거야!" "무슨 얘기야, 갑자기......? 너 화났니? 왜, 창의 앞에서 옷벗기 게임했다구?" 다미는 무운가 쏘아붙이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관두자,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쌀쌀맞은 눈초리로 대꾸를 대신하며 막무가내로 내 무릎을 밀치고 룸을 나서려 하 고 있었다. "나, 갈거야, 술 마시려면 너나 마서!" 나, 희창이, 보영이 모두 당황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를 허둥대며 뒤쫓는 보영이. "야, 안다미, 어디 가? 너 오는 잘 곳도 없잖아?" 멍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던 희창이가, 보영이와 다미의 목소리가 룸 복도로 사라지 자 당장 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야, 짱이, 너 저 계집애한테 실수한 거 있냐?" "아, 아냐, 임마!" 엉뚱한 오해는 내가 살 판, 난 그저 그녀에게 자취방이 근처라고 말한 것뿐 아닌가. "그럼 뭐야? 창희 니가 막 더듬다가 싸운 거야? 너 쟤 만졌니? 그리고 쟤가 잠잘 곳이 없 다니 너 저 여자애한테 같이 자자고 한 거야?" 어휴, 이 자식이...... 당혹스러웠다. 급진전된 상황에 얼이 빠졌던 나는 허둥대며 변명했다. "아냐, 새꺄. 다미씨가 잘 곳이 없다길래, 난 그저 내 방이......" 그 순간 룸의 문이 벌컥 열리며, 보영이의 다급한 얼굴이 쑥 들이밀어졌다. 17 "희창아, 너 차 몰고 왔니? 너 얼른 좀 나와 봐, 얼른!" 보영이의 호출에 녀석은 나를 야릇한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혹시 너 짱이...... 그래서 저 여자애 니 방에 재우려고 한 거냐?" "아니라니까, 그런 게......!" 그는내가 다미를 자취방으로 끌어들이려던 것으로 생각하는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 명할 새도 없이, 보영이는 연신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야, 얼른 나와보라니까!" "알았어, 알았다구. 하지만 어떻게 차를 몰아, 술 마셨는데......!" "어쨌든 좀 나와 봐, 빨리"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나서는 희창이. 나만 홀로 급박히돌아가는 상황에 얼떨떨한 표정 으로 룸에 남아 있어야 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날 다미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모르고 있었다. 멍청하게 홀로 뒤에 남겨진 나는 모든 상항이 떨떠름할 뿐, 도대체 안다미라는 아가씨가 무슨 일로 저렇게 말썽 을 일으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우리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꺼림칙한 표정이었닥,도중에는 박사장인지 뭔지 하 는 손님이 왔다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좀 전에는 보영이나희창이가 자기에 대해 호박씨라 도 깐 것처럼 의심을 해대고...... 끝내 내가 학교 앞 자취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저렇게 화마저 버럭 내며 나가버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남겨진 양주병은 채 삼,사분지 일도 비우지 않았으 니 그다지 술을 많이 마신 것오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예기치 않은 소개팅을 멋대로 시켜줬다고 해도 그렇지, 처음보는 남자 앞에서 - 그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에 종사한다는아가씨가 분위기를 맞춰주기는커녕저런 황당한 모습을 보이다니. 어쩌면 저런 여자애가 이 단란주점에서단골손님까지 있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을노릇이 다. 왜니 기분이 상한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혼자 양주를 한 잔 더 기울이고, 담배도꽁초까지 타 들어간 상황에서도 - 희창이도, 보 영이도, 그리고 그 다미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된 것일까. 토라져 나가버린 다 미를 위시해서 모두들 어디로 나가버렸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술친구도 없는데, 그렇다고 내 주제 에 무슨 여자도 나와줄 리 없는 이런 룸술집 안에서 혼자 궁상을 떨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희창이야 보영이가 있으니 그만이고, 나야 소개받았다는아가씨한테도 푸대접을 받은 셈이 니 더 늦기 전에 집에나 돌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룸을 나서기 전에 뭐 빠진 게 없나 테이블 주면을 둘러보았다. 나야 멀쩡했지만, 순간희 창이의 재킷이 떠올랐다. 아까 다미가 입고 있었는데...... 그 여자애가 어쨌더라. 그냥 그 상태로 룸 밖으로 나간 그 녀, 설마 그런 차림으로밖에 나갈 수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희창이 녀석이 따라 나갔으니 어련히 알아서 챙기랴. 막 문손잡이는 잡는 찰나,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여기 계셨네? 난 또 걔네들 쫓아간 줄 알고......" 최바담이었다. 그녀가 한 손에 희창이의 재킷을 든 채로 문가에 서 있었다. "아유, 계집애들! 내일 나오기만 해 봐, 그냥." 그녀 역시도 조금 전 룸 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고있는지, 벌여놓은 술판을 보며 혀를 찼다. "저...... 다들 어디로 간 거죠? 전부 밖으로 나갔나요?" 그 때까지도 상황파악이 안 된 나는 그녀에게 질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몰라요, 내가 오히려 학생에게 묻고 싶네요. 참 그러고 보니 창희씨라고했었지? 창희씨 만 남은 모양이네. 하기야 나도 원체 다미년 땜에 정신이 없어 놔서...... 모두 나갔어요." 젠장, 결국 나만 바보가 된 형국이었다. 스스로 한심해진 나는 짜증이 나 아랫입술을 깨물 었다. 그런 내 안색에, 최 마듬은 되레 미안한 듯 나긋한 목소리로 바꾸었다. "맞아, 오늘 다미하고 소개팅하는 거라고 했죠? 어머 어쩌나, 일이 이렇게 됐으니...... 기분 상했겠네요?" 당연하다. 내가 이 와중에 헤헤 웃기라도 하겠는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최마담은 정말로 안타까웠는지 얼른 테이블 위를 훑어보며 괜한 친절을 부렸다. "어머, 양주가 남았네...... 가만 있어 봐. 우리 도련님 기분 푸셔야 할 텐데...... 그러지 말고 이리 나와요, 여기 술병 들고서." 뭐하려는 걸까.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은근한 목소리를 내며 앞장을 섰다. "기분도 그럴 텐데, 우리끼리 한잔해요. 괜찮죠?" 엉거주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나를 돌아보며 최마담은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단란주점에는 룸들이 늘어선 복도 끝, 그러니까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큼지막하게 바를 차려놓고 술병을 진열해 놓은 카운터가 있었다. 아마 아가씨들이나 종업원이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을 안내하거나, 아니면혼자서 들어온 손님이 마듬이나아가씨와 나란히 앉아 수작을 거는 곳일 터 - 그녀는 그쪽의 한 의자에 희창이의 재킷을내려놓으며, 한 남자 종 업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얘, 미스터 박! 저기 안에 7번 룸 치워라. 그리고 아까 내가주방에 말한 과일 있지? 그 것 이리로 갖다 주고......!" 엉? 최마담은 내 의사도 묻지않고 아까 가져오겠다던 안주까지내오라는 것이다. 기실 그다지 술이 당기지 않았고, 그녀가 옷을 든 채로 그냥나서길래 따라 나온 것뿐인데 마담 은 자기가 알아서 척척 자리를 바련해 주는 중이었다. "여기 앉아요. 술값 같은 건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보영이가계산한다고 한 거구, 이건 다 내가 내는 거니깐." 그녀는 윙크까지 해대며 의자를 권했다. 어쩔까. 기분도 별론데,여기 이 공짜 술이나 마 셔 볼까? 어쨌든 나는 엉거주춤 엉덩이를 바 의자에 붙였다. "창희씨, 어때요, 내가 창희씨라고 불러도 좋죠?" "어...... 예, 그,그러세요." 그녀는 내 대담이 흔쾌하게 들리는지, 예의 그 색기 어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창희씨는 누님이라고 불러줘요. 여기계집애들은 다 언니라고 부르지만,창희씨는 남자니까 누님." 누님......? 역시 남자 상대에 도가 튼 그녀이기에, 마주 앉은 최마담은 일사천리로 말을 이 어 갔다. 그녀는 새 술잔에 술을 따라 건네며, 내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푸념을 시작했다. "아까 우리 창희씨 기분 별로 안좋았지, 다미 땜에...... 이해하세요. 나도애들 속썩이는 것에 아주 신물이 난다니까. 자 이거 한잔하고, 우리 애들 너무 욕하지 말아요." "예......예." 멍청히 잔을 받아든 나는 얼결에 양주를 삼켰다. 꼭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 아까룸에 서도 그랬지만, 여기 최마듬의 분위기는 왠지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한숨까지 쉬어가며 말을 이었다. "말도 말아요. 여기 나오는 애들, 속이 뭐 그리 복잡한지 오히려 사장인 내가 애들 뒤치다 꺼리 해가며 기분 맞춰줘야 한다니까요. 어휴, 못된 가시내들!" 이런, 도리어 내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하는 걸까?애꿎은 그녀의 신세 한탄이 계 속 됐다. "다마 그 계집애가 원래 좀 그래요. 보영이 년은 속이라도 조금 통하는 편인데, 걔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아마 이 자칭 누님, 최마담도 다미의 속사정에는 그리 정통한지 못한 편인 모양이었다. 나 는 이 시점에서 아까부터의 의문은 곱씹고 있었다. 만약 이 최마담이라면 조금은 알지도 모 른다. "저...... 그럼 아까 박사장님이 누구세요? 보영이 말로는 아까 그 분이 왔었다는데?" 조심스레 꺼낸 질문이지만, 의외로 그녀의 대담은 시워하게 나왔다. "맞아요, 박사장. 누구긴 누구겠수, 후훗, 다미년 이거지." 여자도 그런 표현을 쓰나? 마듬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한 쪽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란 듯이 까닥댔다. 무슨 뜻일까. 다미의 기둥서방? 아니지, 그녀가 박사장이란 작자의 첩? 세컨 드? 의아한 내 표정에, 최마담이 야릇한 눈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머, 근데 혹시 우리 창희 동생 다미한테 관심 있는 거야? 어머머 어쩌지. 그럼 내가 말 실수한 거네? 호호!" 재밌다는 듯, 그녀는 입술을 가리며 웃어댔다. 반면에 나는 뒤통수가 머쓱해졌다. "어, 아, 아니에요! 그, 그냥 저는......" "어머나, 아닌 것 같은데? 저것 봐, 얼굴 빨게지려고 그러네!" 허 참, 다미 탓이 아니라,이 최마담의 놀림에 오히려 내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 다시금 다미가 보인 속살 - 엄청난 젖가슴과, 언뜻언뜻 비친 거뭇한 그녀의 속옷 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누님...... 그, 그게 아니라 아까 다미씨가 굉장히 당황하길래 왜 그러나 싶어서......" 얼떨떨하게 얼버무리느라 나도 모르게 누님이란 호칭마저튀어나왔다. 하지만 머리 속에 선 내심 엉뚱한 상상이 스쳐가고 있었다. 지금 이 여자의 ㅁ라대로 그 박사장이란 작자가 다미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 혹시, 아 니 필경 그럴 테지만 - 그녀의 그 아슬아슬한 몸매를, 그 사람은다 경헌해 보았다는 얘기 아닌가. 후아...... 야릇한 흥분과, 질투가 동시에 피어오르며 꿀꺽,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결국 은 그렇고 그런 아가씨와 소개팅인지미팅인지를 한 셈인데, 묘한 감정이드는 것은 왜란 말인가?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최마담이 은근한 목소리와 시선을 내게 던지며 넌지시 물어 왔다. "어때, 창희씨? 다미 몸매 괜찮지? 호리호리한 다리에얼굴도 작고...... 그리고 그 계집애 가슴 되게 빵빵하잖아, 그치?" 얼레,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그녀는 바 너머 내 쪽으로 허리까지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 애가 우리 가게에서 아마 거기 사이즈는 제일 클걸? 나도 부러울 정도라니까. 으음..... 우리 창희 도련님, 솔직히 얘기해 봐요, 다미 한 번 안아보고 싶지? 얼마나 되는지." 술잔을 들다가, 하마터면 엎지를 뻔했다. 어떻게 그런 걸 대놓고 물어 볼 수가 있나? "안 그래?그러고 싶지 않겠어? 난 내가 남자라도 그럴 것 같은데. 말해 봐, 창희씨도 그 렇지?" 하도 당황하여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ㅏ 사실 그거야 사내놈이라면 다 같은 생각일거다. 다미 같은 몸매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걸 차마...... 그러나 최마담은 더욱 황당한 말을 꺼냈다. 나는 바로 그은근한 질문에 입이 딱 벌어지 고 말았다. "그러면 말이야, 동생...... 이 누님 몸매는 어떨 것 같아? 나도 다미만큼 될것 같아. 못될 것 같아?" 두 눈이 휘둥그레져 올려다보자, 촉촉이 젖어 보이는 그녀의 입술과 눈동자가 바로 코 앞 에 와 있었다. 입술의 침이 바싹 말라갔다. 18 "어떨 것 같아? 나, 그 정도는 안 돼 보여?" 황망한 질문만큼이나 내 대답과 시선도 갈 곳이 없어갈팡질팡거려야 했다. 다미야 지금 여기 없으니 그렇다 쳐도, 자기 몸매가 어떨 것 같냐구? 뭐 그럼 자기가 정말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얘기인가? "왜? 창희씨는 다미 가슴만 좋나 보지?" 그녀의 눈, 그 진한 화장의 속눈썹 긴 눈은 눈꼬리를 흘리며 내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 고 있었다. 최마담의 몸매가 한창 농익어 있음은, 아까 처음 이단란주점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거의 엉덩이께까지 깊이트인 롱드레스, 그 안으로 언뜻 보이는미끈한 허벅지와 종아리는, 분명 나이 어린 여자 애들의 그것과는 또다른 유혹적인 광경이었다. 보영이와 다미가 젊음을 앞세운 탄탄함이라면 그녀는 분명무르익을 대로 익은 - 뭐 낙 일은 무엇처럼 살이 올랐다거나 하는 말이 전혀아니다 - 풍만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진 대, 아마도 그런 분위기가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일까. "제, 제가 그런 걸 어, 어떻게......" 하다 못해 술잔이라도 들여다보자. 나는그런 생각으로 아래에 깔린양주잔으로 눈길을 숙여야 했다. 아차, 그러나 그건 또 하나의 실수였다. 그곳에는 또다른 아찔한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 었다. 바의 카운터, 그리고 그 위로 엉거주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최마담, 그러니 그 곳에 뭐 가 있겠는가? 그녀의 옷은 분명 하이넥, 목까지 올라온 길이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칼라가 아래쪽까지 트여 있었다. 족 그녀의 앞쪽 옷깃은 몸을 세우고 있는 동안은 여며져 드러나지 않아도,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허리를 굽히면 자연스럽게 그 앞이 벌려지는 디자인이었던 것 이다. 그 안에는 우윳빛 속살이 카운터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두 개의 넞무덤, 그것은 거의 절반 이상 들여다보여실로 깊숙한 계곡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만만치 않은 심연이었으니, 양손에 하나씩 쥐어도 다 들어오지 않을 크 기의 가슴이 바위에 걸쳐져 그림자를 드리우는 지경이었다. 그녀의 허연 속살은 확, 옷을 젖히면 금방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태세였다. "살짝 대답해 봐. 뭐 어때, 여긴 우리끼리만 있는데......" 분간이 서지 않았다. 은근함인지 노골적인지 모를 최마담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의 촉촉 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지금 술잔을 보는 것인지 그녀의 가슴 속을 보는 것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 누님...... 저, 전 잘 모, 모르겠는데요." 분위기에 눌려 거의 기어 들어가는 내 목소리로 - 순간 그녀의 상체가 다시 세워졌다. 동 시에 아찔한 치도 순식간에 사려져 비로소 내 눈은 자유로움을 찾을 수 있었다. "호호, 호호호!" 초마듬은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입술을 가리며 자지러질 듯 웃기 시작했다. "호홋, 창희 도련님 얼굴 좀 봐, 이젠 빨간 게 아니라 아예 하애졌어!" 내, 내가 그랬었나? 그녀는 숨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웃어앴다. 곤경에 빠져있던 내얼 굴이 그토록 재미있는지, 그녀는 한참 동안을 그렇게 깔깔거렸다. "어머 우리 창희씨 너무 순진하다. 진짜 순진해!" 어린애처럼 손뼉까지 치며 웃는 그녀 탓에, 난느 더욱 민망해져 낙자 밑에라도 숨고 실은 기분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눈물마터 찔끔거렸다. "후훗, 아이, 미안, 미안! 미안해요. 내가 우리 창희씨 너무 놀리나 봐......!" 허허, 나도 뭐라 대꾸할 수가 없어 멋쩍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뚝웃음 을 멈추더니 다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창희씨같이 젊은 남자하고 얘기하니까 참 좋다. 어때요, 여자한테 그런 질문 차음 받아보 는 거지? 큭큭......" 한동안 웃던 그녀는 그제야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으응, 사실 여기 우리 가게엔 창희 동생처럼 젊은애들은 잘 안오거든. 잘 해야30대? 월 급 정도 받는 걸로는 여기 아가씨들 팁 주기도 만만치 않으니깐." 그러나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흥, 그럼 뭘해...... 와도 젊은애들만 찾는 걸. 다미나 보영이같은쪽 빠진 년들 말이야...... 내가 룸에 들어가면 꼭 늙은이 옆자리만 남더라구, 한 사오십난 노인네들 있잖아." 오래간만에 얘기 상댈ㄹ 찾은 걸까, 마치 한탄 같은 최마담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어릴 때, 그러니까 ㅎ나 5,6년 전만 해도고생하는 보람이 있었어요, 그 때만 해도 나만 보고서 비행기 타고 날아오는 손님도 있었으니까, 정말이야. 그 덕택에 지금은이렇게 내 가게도 가졌지만......" "......" "하지만 지금은 후회가 돼...... 말이지, 그 때 좋은 남자 만나서 젊은 날도 보내구, 뭐 지금 애들 같이 말야. 근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모르겠어, 자수성가했다는소리 들으면 뭐해? 지 금 꼬이는 놈팽이들이 나 좋아서 오나, 다 내 돈 보고 오는 거지......" 모를 일이다. 그럴 생각도 없지만, 왠지 함부로 끼여들 엄두가 안 나는 최마담의 이야기였 다. 그래도 아까...... 언뜻 보영이는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 면 그 사람도 이 누님에게는 그저 그런 남자인가. 어쨌든 듣고 있자니 구구절절이 가슴이 아려왔다. 얼마 전중년 여자 탤런트가 공연했다 던 '늙은 창녀의......' 어쩌고 하던 연극이 떠올랐다. "이제 좀 편해지나 싶은데,그렇지도 않더라구. 아까 봐요,어린 계집애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걸. 웃기는 년들이야, 어디서 이상한 애인 만들어 놓고 찾아와 행패 부리게 만들지않 나, 어느 날은 불쑥 배가 남산만 해 갖고 나타나서는 애 떼겠다고 돈 달라지를 않나......" 물장사의 애환? 뭐 마담 정도라니 이해를 하겠는데...... 처음 듣는 얘기가 섞여 나오고있 었다. 임신중절하겠다고 오는 아가씨가 있다? 여기 종업원 중에? 혹시? 에이, 보영이나 다미는 아니겠지. 최마담은 우울한 기분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내가 처음 만난 도련님한테별 얘기를 다 했네. 그것도 내 얘기만. 아유, 재미 없었죠, 창희씨?" 최마듬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나는 내내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아, 아녜요, 누님......" 푸훗, 그녀는 다시 눈웃음을 찾고 내비워진 술잔에 정성스레 술을 따라주었다. 마치그 술잔에 모든 것을 털어 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였다. 카운터 곁 바깥에서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왁자하니,가게문이 열리며 한 떼의 양복쟁이가 들어왔다. 월요일이라 손님이 없다더니, 그내도 근처 회사사무 실에서 온 모양인지 서넛이 나타난 것이다. "어머, 어서 오세요! 얘, 미스터 박!" 손님이 들어오자, 최마담은 금세 그 색기 어린 눈웃음으로돌아가 직업적인 목소리를 내 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전에 불렀던 아가씨들 계세요? 처음 오시는 거예요? 예, 거기 1번 룸으 로 안내할게요." 그녀는 조금 전의 풀어짐과는 전혀 딴판인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지금 들어온 사내들은 전작이 있는모양이었다. 조용했던 가게 안이 바쁘게돌아가기에, 나는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짜 손님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쯤에서 자리 를 비켜줘야 하리라. "미스터 박, 가서 애들 불러 와, 아니, 대기실에 없을 거야. 안쪽 방에." 최마담이 경황없는 틈을 타, 난 희창이가 벗어놓은 옷가지를집어들며 슬그머니 몸을 일 으켰다. "저......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룸 안으로 아가씨들을 데려가는 최마담의 등 뒤에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까딱하다간 자취방 쪽으로 가는버스가 끊어지겠기에 나는 걸 음을 재촉했다. 19 밤이라서 그렇겠지만, 바깥 공기가 차가웠다. 건물 지하 주차장에 희창이의 차가있는 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키도 없고, 나도 술기운에 얼굴이 붉 어진 판에 몰고 갈 수도 없을 게다. 한길가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아까 최마담의 말을 떠올렸다. 행패 부리는 애 인을 두고, 임신까지 했다는 아가씨들...... 혹시 다미의 박사장이란 작자도 그런 꼴을 보였기 에 그런 것일까? 그래서 그 다미는 우리 룸에 숨어있어야 했던 걸까? 단순히 놀고 즐기는 곳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꽤 복잡하게돌아가기는 세상 어디든 매 양 같다는 마음이 들어 괜스레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늦은 시간이라휑하기만 한 정유장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조용했다. 저 휘황찬란한 내부에서는 어던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수 없지만.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던 나.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내 바로 앞에서 고급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멈춰섰다.그 리고 동시에 검게 썬팅을 한 차창이 내 쪽을 향해 열렸다. "창희씨, 창희 도련님!" 얼레, 그 차창 안에 나타난얼굴이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사람이었다. 최마담.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며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ㅏ "언제 나왔어? 난 가버린 줄 알았네, 자, 얼른 타요!" 무슨 얘긴가. 지금 나를 태워 주겠다고? 나는 예기치 못했더ㄴ당황이라 그녀의 차 곁에 서 머뭇거렸다. "뭘해요, 타라니까. 내가 데려다 줄게!" "어...... 저, 전 학교 앞인 걸요. 여기서 버스 타고 가도 되는데......" "에이, 그럼 오히려 더 잘됐네! 여긴 어차피 차가 와도 이삼십 분에 한 대잖아. 학교 앞까 지 5분이면 가는데?" 이 고급승용차는 아마도 최마담의 자가용인모양. 그러나 그건 둘째치고, 갑자기그녀가 왜 자기 차까지 끌고 날 불러 세우는 걸까. 어쨌든 오리 없이나는 그녀의 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공짜 술까지 얻어먹었는데,이런 밤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예의가 아닐지 몰랐다. "이 차 원래는 내가 잘 안 몰거든. 집에 들어갈 때 미스터 박이 운전하는 건데...... 그래도 난 술 별로 안 마셨으니까 괜찮겠지?" 경쾌하게 차를 출발시키며, 최마담이 곁눈질로 살짝 웃어 보였다. "후훗, 왜 그렇게 멍청히 서있었어?꼭 겁먹은 것처럼...... 내가창희씨 납치라도 할까봐 그래?" 내 표정이 그 정도로 머쓱해 보였나. 하지만 그렇긴 해도혼자 남은 내게 양주도 먹여주 고, 게다가 학교 앞까지 손수 바래다 주겠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최마담의과잉친절이 아닌가 싶다. 내가 뭐 수십, 수백 만원어치의 술을 마신 단골손님도 아니지 않은가. "아, 아뇨 전 그냥...... 혼자 가도 되구, 손님도 오신 것 같길래......" 푸훗, 그녀는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어차피 월요일이라구 했잖아. 아까 그 손님들도 아마 한두 시간도 안 놀다 갈걸? 내일 출근들도 해야 할 테니...... 그리고 원래 가게는 나 없어도 계집애들이 알아서 살림다 하는 건데 뭘." "그, 그래도 괜히 저 때문에......" 여전히 불편스러운 것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내얘기에 신경 쓰지 않고 화 제를 돌렸다. "그런 건 걱정 말아요.근데 말이야, 창희 동생.미안하지만 누님이 뭐하나 물어 봐도 돼? 개인적 질문인데." 뭘까? 떨떠름한 느낌이 들었ㄷ. 아까처럼 자기 몸매 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만 아니면 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다. 아까부터의 상황이 하도 얼떨떨했던 터라 왠지 긴장이되 었다. "무, 물어 보세요." 내 승낙에 그녀는 고맙다는 듯이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으응, 동생은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 형이나 누나 있어.....?" 왠 호구조사? 뭐 나한테 큰형이라도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그러는 건가. "저...... 형이 하나 있구요, 여동생이나 누나는 없는데......" 사실이다. 외아들 놈인 희창이와 달리 내게는 형이 한 분 있는데, 늦둥이 막내아들인 나랑 은 나이 차가 꽤 나서 형님은 벌써 서른 줄이었다. 게다가 이미 장가가서 분가까지 한 것은 물론이고. "어머, 그래/. 잘됐다!" 잘됐다니, 뭐가? 그 순간 차는 막 학교 부근에 다다르고 있었다. "창희씨 자취방은 어디야? 정문 쪽?" 최마담이 차를 돌리기 위해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후, 후문 쪽이요. 하지만 그냥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도......" 그러나 미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차를 돌려 후문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드는 최마담. "아냐, 가만 있어. 내가 집 앞까지 모셔다 줄게. 여기서 어느 쪽이야?" 왜 꼭 궃이 집 앞까지 간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까지 태워다 준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인데, 그녀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알아서 운전대를 돌렸다. 핸들을 꺾으며 그녀가 다시 자기 말을 계속했다. "난 말야, 창희씨. 가족이 아무도 없어. 형제도 없고, 우리 부모님은 20년 전에다들 돌아 가셨고. 모르지? 그녀는 묻지도 않은 자기 가족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외롭기도 하구 그래. 썰렁한 아파트에 혼자 돌아가려면......" "저, 그, 근데 잠깐만요. 저 여기서 내려야 되는데요." 나는 서둘러 최마담을 제지했다. 잠간 사이에, 이미 최마담의 자가용은 내 자취집 앞에 다 다랐던 것이다. "어머나, 벌써? 어디야, 동생 집은?" 그녀는 골목길에 차를 세운 채 차창 밖을 기웃거렸다. 내 방이 어디인지 확인이라도 해야 겠다는 듯. "저기...... 저 방인데요." "어머, 진짜야? 그럼 창희 동생 혼자 살아? 어디, 어딘데?" "앞에 왼쪽 집...... 맨 위 옥탑방이요." "그래...... 저 철대문 집?" 집요한 최마담의 질문에, 나는 무심코 자취방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그녀는 뭐 대단한거 라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코앞까지 오긴 했으나 나는 미처 그녀의 얘기가 끝난 것 같지 않아 엉거주춤 문고리를 붙잡고 앉아 있어야 했다. 문득 그녀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앞에 놓인 담배를 집어 물었다. 후우, 담배연기가 차 속으로 퍼지며 그녀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말야, 난 언젠가 영화를 보고막 운 적이 있었어. 왜국산 영화들 보면 있잖아, 누나가 물장사하면서 동생들 성공시키는 이야기. 아니면 몸팔아서 애인 성공시켜 놓고...... 나중에 성공한 그 남자한테 버림받는다든가...... 난 그런 영화를 보면 막 운다. 바보처럼......" "푸훗, 근데 말야. 그럴 때 내가왜 우는지 알아? 여주인공이 슬퍼서?아니, 난 그 영화 속에 나오는 그 여자가 너무 부러워서 울었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무슨 문학소녀라도 된 양 진지해져 있었다. 하지만 웬 영화 얘기? 그런 삼류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뻔한 스토리라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심ㅅ 미찮게 TV드라마에도 나오는 것 같던데...... 하지만그런 여자 주인공이 뭐가 부럽다는 걸 까, 이 여자는. "정말이야. 동생이 들으면 이상할지 몰라도 난 그게부러웠어. 그랬어, 나도 저렇게 열심 히 일해서 뒷바라지 시켜줄 진짜 동생이나 애인이라도 있음 얼마나 좋을까. 비록 이 누나는 고생해도 동생이나 애인 학교도 보내고, 취직도 시키고......하지만 아까 얘기했었지? 난 그 럴 만한 가족도 없고, 또 어렸을 땐 돈 버느라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봤고 말이야." 얼레, 보기보다는 상당히 센티멘털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다소 엉뚱한 이야기인 것 같 지만, 잘 들으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질지도 모를 얘기였다. 그렇기는 해도 웬 뜬금없는 이야기일까.그 때 그녀가 내 쪽을돌아보며 정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훗, 그래서 창희씨, 내가 갑자기 친한 척 해서 놀랬지? 나 그랬다, 창희 동생 처음 본 순 간, 꼭 그런 영화 속 동생을 만난 것 같았어. 내가 고생고생 해가며 키워준 친동생 같은, 그 런 느낌 말이야." 뭐라고요? 난 이번에야말로 어이가 없어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까 희창이 도련님도 있었지만...... 그 쪽은 너무 날라리 같은데, 우리 창희씨는 착해 보 이고, 또 순진하고 공부도 잘 할 것 같아. 내 말 맞지?" 하기사 희창이보단 성적이 낫기는 하지만, 여전히 난 그녀의 의중을알 수 없어 눈만 끔 벅였다. "있잖아, 창희 동생, 동생도 누나 없다고 했지? 그리고 나는 남동생이없고 말이야...... 창 희씨 형 있다구 했지? 형은 나이가 몇이야?" "어...... 조,조금 많은데요, 저랑 십 년 넘게......" "그래? 어머 그럼 뭐...... 나랑 비슷할 수도 있겠네. 그치?" "예? 예. 어,어쩌면......" 최마담은 그제야 뭔가 안심이 되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희창이 도련님, 보영이란테 푹 빠진 것 같아. 아니야?" "희,희창이요? 어......아마, 아마 그럴 거예요." 그녀의 이맛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무슨 의미일까? "내가 보기에도...... 그 친구는 우리 가게 숱하게 들락거릴것 같더라. 행색을 보니 꽤 있 는 집 아드님인 것 같고.그래서 얘긴데, 창희 동생도 같이놀러 오지 않겠어? 우리가게 에." 엉, 저요? 놀란 내 표정을 최마담이 한 발 앞서 무마시켜 주었다. "물론 다른 건 걱정하지 마. 정 그러면 혼자 놀러 와도 돼. 아무렴 내가 자취하는 학생 주 머니 속 모를까? 내 얘기는 그게 아니라...... 그냥 편하게 오라는 얘기야. 동생 술 마시고 싶 으면, 누나가 술 사는 셈치고서." "어때, 우리 정말 누나동생처럼...... 친하게지내는 거. 오늘 얘기해보니까, 난 창희씨가 진짜 편하게 생각되기에 하는 소린데." 나는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얼떨떨했다. 제안, 그래, 제안이라고 치자. 말하자면 파격적 인, 아니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뭐랄까, 이런 계통에있는 사람들의 화통함이라고 표현해 야 옳을까. 그래도 그렇지 대체 무슨 소리인가.겨우 오늘 처음 알게 된 찬참 동생뻘되는 남자에게 왜 이런 제안을? "그, 그게...... 저한테 갑자기 왜 그런......?" "후후, 나 놀리는 거 아냐. 왜, 기분 나빠? 가게에서 내가 순진한 동생 놀렸던 것 땜에?" "아, 아니요. 제 말은...... 절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게다가 전 오늘 처음 보셨잖아요. 희창 이면 몰라도......" 그런데 흠칫, 나는 한 번 더 소스라쳐야 했다. 은근슬쩍 그녀가 내 시트 등받이에 팔을 얹 고 몸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창희 동생...... 난 어떤 여자인 것 같아?" 어, 어떤 여자 같냐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그녀는 뜸을 들이며 뭔가 조심스레 접근 하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대답해 봐. 이 누님이 어떻게 보여?"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순간 또 한 번 가깝 게 다가오는 예의 그 색기 어린 최마담의 눈동자. 그에 따라 나는 주춤주춤 조수석 의자 안 으로 몸을 가라앉혀야 했다. "어, 무,무슨 뜻인지......" "그냥 느낌 있잖아. 여자로서라든가, 누님으로서 라든가......" "여, 여자로서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그녀는 대답을 갈구하듯 바싹 몸을 붙여왔다. "아 저, 저 그게...... 그러니까......" 난감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대답을 찾아 허둥대는 나. 그 때 였다. 나를 공궁에서 구해준 것은 차 내부가 아닌 바깥으로부터였다. 우리 등 뒤로 휘익, 헤드라 이트 불빛이 비쳐 왔던 것이다. 이 동제 사는 사람인지, 우리 차가 막고 선 골목길로차 한 대가 들어서며 빵빵 - 클랙슨을 누르고 있었다. "어머, 이런 골목에도 차가......" 기회였다 그녀가 비키기 위해 다시 시동을 거는 순간, 나는 차에서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저, 내,내릴게요!" 재빨리 문고리를 연 나는, 최바담이 말릴 틈도 없이 차 밖으로 도망치듯 내렸다. 이런상 황에선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연찮게도 차들은 두어 대가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별수없이 최마담은 차를 직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차창밖으로 고개를 빼며 급히 내 이름을 불러댔다. "창희씨, 아니, 창희 동생!" 엉겁결에 돌아보는 나에게, 그녀는 한껏 아야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늘 얘긴 다음에 해줘. 그리고우리 그러기로 하는 거다! 놀러와야 해, 가게로! 그럼 내가 술도 사주고, 용돈 떨어지면 용돈도 주고 그럴게. 알았지?" 확답을 기다리듯 그녀는 뒤쪽에서 울려대는 클랙슨 소리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 아니, 예, 예......" 그제서야 자칭 누나의 차는 부우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의 황당한 말에 벙찐 느낌이었다. 아니 술 사주는것도 그런데 용돈이라니? 도 무지 알 수 없는 얘기였다. 순간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차창 너머로 최마담이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박사장과의 결투 20 집에 돌아와 몸을 누이니, 피곤함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뭔가 주체할 수 없는상황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바로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지난주 선영이누나와의 얽힌 일들로 머리 속이 복잡했던 판국에, 난데없는 소개팅, 이어서 훔쳐 본 다미의 아찔한 젖가슴과사타구니 - 그런 등등이 드러누운 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최마담의 야릇한 눈웃음...... 그녀는 도대체 날 언제 봤다고 그렇게 구는 것 일까? 어쨌건 얼떨떨한 충격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런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칭에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다달느 후였다. 어젯밤에 별반 술을 마시지 않 은 것 같은데도 지끈지끈 골치가 아파 왔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빠질 수가 없으므로 일단 은 부랴부랴 몸을 씻고 학교로 향했다. 학생회식에 들를 겨를이 없으므로, 나는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약간 늦긴 했지만, 엉거 주춤 뒷문을 통해 들어간 나는 비어있는 뒷자리에 안자 멍청히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공부를 잘할 것 같다는 최마담의 말이생각나 피식, 헛웃음이 아왔다. 그녀의 넘쳐흐를 것 같던 젖가슴, 거기에 다미의 엉청난 가슴이 겹쳐지고 또 까무잡잡한 보영이의...... 그런 저런 잡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수업시간이 끝났다. 난 책을 덮으며 우르르 몰려나 가는 사람들 속에 우선 희창이가 있는지 살폈다. 아미를따라 나가느라 단란주점에서 헤어 진 이후의 일들도 궁금했고, 또한 어제 보영이네 가게에 놓고 나갔던 녀석의 재킷이 생각나 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 그 옷을 갖고 온다는 것을 깜빡했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이따가 내 자취방으로 찾으러 오라고 하면 되니까. 그렇게 강의실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나를쿡쿡 찔렀다. 희창이 자식, 이제 야 기어온 모양이군. 그런데 얼레, 등 뒤에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자그마한 몸집, 배시시 웃는 귀여운 얼굴, 내등을 찌르며 아는 체를 한 것은 다름아닌 예지였던 것이다. 예지, 김예지...... 지난주에 내 방에서 술 취해 자고 가다가 짝사랑하던 희창이와 맞닥뜨려 날 곤란하게 만들었던,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수업 들었어?" "어, 으응...... 아, 안녕, 예지야!" 나는 그날 아침 - 속옷차림으로 내 이불 속에서 첫경헌 고백을 하던 - 이후로 그녀를 며 칠간 못 보았음을 기억해냈다. 그게 지난주 목요일이었고, 금요일에는 선영이 누나를 만났으 며......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꽤 오랜만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도 그녀는 학교에 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점심 먹으러 안 갈 거야?" 내 품안에서 그토목 눈물을 쏙 빼놓고 갔으면서도, 애써 그러는지 예지는 날 보고도 그다 지 피하거나 멋쩍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작게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아닌게 아니라 지금 보니 그 작은 얼굴이 더 수척해 보였다. "어, 아니...... 머, 먹어야지......" "그럼 같이 가. 내가 살게. 너한테 미안한 일도 많으니까." 지난주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앞장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저기...... 그날, 나 땜에 고생했지?" "응? 어, 고샏은 뭐, 근데 너 어제 학교 안 왔었니? 못 본 것 같은데......" 햇살 따사로운 교정을 나서며, 예지는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한숨을 폭 쉬었다. "학교...... 아파서 못 왔어." 아파서 못 왔다...... 그래서 그 작은 얼굴이 더 반쪽이 된 건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그녀 는 아직도 우울한 인상이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먹을래?" "아냐, 난 그냥...... 너 좋은 거 먹어. 나야 뭐......" "그래, 그럼...... 김치볶음밥 먹으러 가자. 나 잘 가는 데로." 지난중에 날 애먹게 만든 것이 기껏 점심 한끼로 때워질 일은 아닐 성싶지만...... 무엇보다 자취방에서 아침 따위를 챙겨 먹을리 없는 나는 그저 배가 고플 뿐이었다. "저 참...... 지난주 금요일 날엔가 선영 언니 만났다며?" 엇, 이 애가 어떻게 그걸 알지? 나는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지난 월요일 날 학회실에서 선영이 누나와 단둘이 있었던 것도 이 여자애는 알고 있더니, 어떻게 그것까지? "어, 누, 누가 그래?" "으응, 누가 그날 너랑 선영이 언니랑 술집 골목 쪽으로 걸어 가는 거 봤대. 그래서......" 허 참, 정말 모를 일이다. 지난번하고 상황도 비슷하니,자기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또 누가 보았다? 이 아기씨가 내게 무슨 미행이라도 붙여놓았나. 아니, 그것보다 선영이 누나에 대한 걱정이 와락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선영이 누나에 대한 것을 잠시 잊은 것 같은데...... 설마 그녀와 내가 여관방까지 전전한 것을누군 가가 본 건 아닐까.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을 하며 예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녀는 그밖에 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그냥...... 그 누나 만나서 술 마셨어. 세상 사는 얘기랑 하구......" "그래? 그럼 다행이다. 모르겠어. 난 너랑 그 언니 사이가 신경 쓰이니까...... 그 애가 보면 안 좋아할 테니 말이야."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툭 던지는 예지의 그 말. 그렇지만나는 걷던 걸음을 딱 멈추어야 했다. '그 애'라니? 아하, 그렇지. 예지의 경우처럼, 우리 과 여자애 하나가 나를 짝사랑한다고 했었지. 그것도 예지랑 단짝이라고...... 갑자기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나를 좋아하며 지켜본다...... 왠지 내가 감시 받는 기분이었다.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나를 어디선가 지켜보고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좋은 느낌이 아니다. 혹시...... 지난 금요일 날의 목격자도 바로 그 애? "푸훗, 걱정 마. 오늘 그 계집애 학교 안 오는 날이야. 그리고 금용리 날 본 애도 그 애가 아니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선 나를 예지는 우습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꼭 놀림받는 것 같 았다. 학교를 오지 않는 날이라 - 그럼 일단 우리가 여학생들 중 화요일에 수업이 없는 계집 애란 얘긴가. "미안, 기분나쁘니?" 그제야 예지는 미안한 기분이 드는지 내 안색을 살폈다. 차라리 얘기를 말든지, 아님 가르 쳐 주든지. 화라도 내야 하나 망설여 졌다. "알았어, 하지만 그 친구가 너한테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짐짓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예지는 가볍게 내 팔짱을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투덜거리려 던 내가 도리어 머쓱해질 상황이었는데, 예지는 일부러 나를 돌아보며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 곁의 그녀가 문제가 아닌 상황이 벌어졌다. 어, 어, 저, 저건 - 멀찌감치서 막 교문을 들어서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누나, 선영이 누나였다! 그녀가 막 다가오고있었다. 주책맞게, 반가운 티를 얼굴에 내비 치려는데...... 어어, 그러나...... 누나는 내 곁을 살피고 있었다. 아뿔사, 예지. 얼토당토않은일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대화를 나누는 나와 예지를, 그녀가 목격했던 것이다. 내 얼굴은 환해지려는데 반해, 그녀의 놀란얼굴은 즉각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그 이유를 수초 후에나 파악할 수 있었다. 아차차, 지금 예지가 내 팔짱을 끼고 있잖아? 다음 순간 내 쪽을 행하던그녀의 발걸음이 멈춰 서더니, 싹,방향을 바꾸었다. 내 팔을 붙들고 진지한 모습으로 올려다보는 여자애, 그리고 그 곁에 멍청히 선 나. 그녀는 난처해질 상황을 피하려는 게 분명했다. 뭔가 오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누, 누나, 잠깐만요! "왜 그래, 창희야?" 당황한 내 표정을 알아차린 예지까지 내가 보는 방향으로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이미 선영 누라의 발길이 돌려졌기에, 그녀는 내가 누구를 보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젠장,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는 선영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뭔가 작은 실수를 저지른 느낌이 들었다. 21 상황을 알 턱 없는 예지는, 내가 화가 난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는 것 같았다. 날 짝 사랑한다는 자기 친구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미안, 미안해...... 우리 얼른 밥이나 먹자. 응?" 나는 예지에게 이끌려 교문 옆의 한분식집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어휴, 그게아닌 데......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애에게 그런 티를 낼수는 없었다. 여관방 사건 이후 처음 대하는 선영이 누나의 얼굴, 서둘러밥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 누나 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순진한 예지, 그녀는 나를 앉혀놓고 멍하니 한숨을 내쉬었다. 도리 없이 나는 건성 으로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척 해야 했다. "나 그 동안...... 많이 아팠어." "으응...... 그, 그래? 왜?" 뻔한 질문이었지만, 예지는 창 밖을 바라보며 쓸쓸히 혼자웃음을 지었다. "나...... 희창이 땜에...... 그 애...... 없던 감정으로 하기로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말고 다 른 여자애가 있는 것 같고, 또 그날 아침에 그런 모습 보인 것도 그러니까......" 내 방에서 속옷차림으로 옷을 갈아입다가 녀석에게 들킨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어차 피 희창이 놈 같은 바람둥이에게 어울리지 않을 착한 그녀이니,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 다. 아팠다는 거야, 그런 자기 마음을 정리하느라 고민했던 탓일 것이고.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내가 전에 약속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걱정 마, 예지야. 그 녀석 희창이한테......내가 다 얘기했어. 오해도 풀었구, 그날 우리 사이 아무 일 없었다고 말이야." 위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어제 희창이한테 선영이 누나와 이 여 자애 얘기를 전부 털어놓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은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상광없어. 이제는......" 그녀가 그 날 울면서 고백했던 이야기 - 중학교 시절의 성폭행 사건이 떠올랐다. 그런 고 백마저 겹치니, 내 가슴은 더욱더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나, 어차피 잊어버렸어. 희창이 얘기는......" 모두 포기했다는 예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우여곡절을 떠나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서 마 음을 접어야 한다는 사실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 날 고마웠어, 내 얘기도 들어주고, 또 재워도 주고...... 알지? 내그런 얘기 너 만이 알고 있다는 거......" 김치볶음밥을 사고, 분식집을 나서며 예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날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눈물 흘리던 기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냥 다시 한 번 그녀를 안 고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나란히 우울하게 학교로 돌아오는데, 이번엔 아까 학교 밖으로나갈 때와 정반대의 상황 이 벌어졌다. "차,창희야, 나, 나 먼저 갈게!" 누구를 보았음인지, 이번엔 예지가 황급히 내 곁을 피하느라 허둥댔다. 어, 야 김예지......! 왜 그리 화들짝 놀라 사라지는 거지? 그녀를 부르려는데,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창희, 짱이야! 어제 잘 들어갔냐?" 희창이, 녀석을 본 그녀가 서둘러 숨은 것이다. 22 희창이 녀석이 나를 보며 반갑게 다가섰다. "일찍 왔구나, 짱아." "어...... 그래, 임마." 비록 어제 그토록 나를 황당한사건으로 이끌었던 놈이지만, 차마 면상에두고 속 좁게 뭐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사실 나는 황급히 인파 속으로사라지는 예제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그런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내 어깨를 세게 툭 쳤다. "아까 누구냐? 니 옆에 있던 여자애." 녀석, 그새 본 모양이다. "뭐 그냥...... 아니야, 아무도," 대충 얼버무리려는데, 녀석이 내가 보던 쪽을 흘끗거렸다. "선영이 누나는 아닌 것 같은데...... 예지였냐?" 어휴, 눈치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녀석이군. 남녀 문제에 관한한거의 덩물적 본능이다. 언뜻 돌아 보니, 녀석이 예지가 사라진 쪽을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었다. "뭘 봐, 새꺄. 가자!'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내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내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어제는 어떻게 집에 갔냐...... 잘 - 최 마담의 차 얻어타고... 라는 말이튀어나올 뻔했지만, 함부로 그 말을 입밖에 내 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냥 너희들 갔길래 버스 타고... 참, 어제 걔들 어떻게 된거야? 다민가 하는 그 기집 애, 왜 그렇게 난리를 쳤다든...?" 그러자 짜증이 난다는 듯, 녀석은 한숨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몰라, 나도! 어휴, 보영이가 하도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엉겁결에 술도 마셨는데차까지 몰았잖아.가까운 곳이라 다행이었지, 시내나 다른 곳 가자고 했으면 큰 일날 뻔했지" "그래? 난 어제 거기 나오면서 혹시 니 차 있는지보려고 했었는데...... 맞아, 어제 니 옷 내 방에 있다." "알았어, 이따가 수업 끝나고 가지러 가면 되지 뭐" 그런데 갑자기, 희창이가 내 팔을 붙들었다. "어, 근데 임마, 너 어디로 가는 거야? 쫌 있으면 수업시간인데!" 아차, 선영이 누나 때문일까, 난 무의식적으로 학생회실로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쨌 든 그녀를 잠시라도 만나고픈 생각인데...... 시계를 보니 오후수업시간까지는 채 2, 3분도 남 아있지 않았다. 도리없이 나는 강의실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지만, 그녀는 지금 어디있을까 -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서인지 희창이와 남은 수업을 들으면서도 내 마음은 콩밭에 가있기에, 시간내내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여관방 사건 이후 처음 맞딱드린 오늘......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 떤 생각이 들까, 아니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옆자리에 앉은 희창이도 말이 없어진 내가의 아한 모양인지 중간중간 힐끔거렸지만, 나는 선영이 누나에 대한 생각들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었다. 어쨌든 수업이 끝나고 막 나가려는데, 희창이 놈이 후다닥 쫓아왔다. "얌마, 너 어디 가는 거야?" 학생회실에라도 들리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가면 누나가 있을지도 모르므로. "어, 짜식, 아까부터 왜 그래? 마치 넋나간 놈처럼" "아, 아냐. 아무 것도......" 건성으로 대답하며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오후가 되었으니 까딱하면 선영이 누나는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 이 생각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고있었다. 그나저나 그런 나 를 희창이 녀석은 뭣도 모르고 쫓아오고 있었다. 어휴, 저 녀석이 쫓아오면 골치 아픈데 -혹시라도 학회실에 누나가 있어서, 또 다시 어 색한 삼자대면이 이루어질까봐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녀석에게 옷을 돌 려주려 집에도 가야한다. "야, 이짱, 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 학생회실에 금방 갖다올께" "학회실? 같이 가, 임마" "아냐, 금방이라니까. 조금만 있어, 알았지!" 나는 거의 뛰다시피 녀석을 두고 그곳으로 향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녀석과 누나를 마주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기대는, 어차피 기대로 끝나고 말았으니, 벌컥, 열어젖힌 학생회실 안에는 아무 도 없었던 것이다. 텅빈 학회실 - 내 마음도 따라서 썰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터덜터덜, 하는 수 없이 돌아나오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온 학교를 뒤져서라도 그녀를 찾 아야겠는데... 바깥에는 희창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야, 나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갈 거다. 며칠 줄창 늦게 들어온다고, 부모님이 난리셔" 녀석은 벌써 자기 차를 끌어다가 나를 태우고 있었다. 시무룩한 내가 오르자, 그는 곧바로 내 자취방 후문 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23 "자, 여기 있다, 니 옷...!" "오케이, 땡큐!" 자취방에 들어선 나는 옷걸이에 걸어둔 옷을 희창이에게 던져주었다. "근데, 창희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조용한거냐? 말도 없이." 털썩, 내 책상의 의자에 주저앉은 녀석은 짐짓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 안색을살폈다.그러 나 난 잠자코 돌아서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냐, 신경쓰지 마." "새끼, 어울리지 않게 똥폼은...... 왜, 어제 우리끼리 나갔다고 열받은 거야?" 별반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녀석은 혼잣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휴, 말 마라... 나도 어제더럽게 고생했다. 다미랑 보영이랑, 간신히뒷자리에 태웠는 데, 얼마나 싸우던지, 원......"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맞아, 그 다미란 여자애, 뭣 때문에 어제 그렇게 술자리를 망친 거 지? "난 꼭 그 기집애들 둘이서, 머리끄덩이라도 붙잡고 싸울 줄 알았다니깐." 머리채까지 붙들고 싸울 뻔하다? 그렇다면일단 다미가 화난 것은 보영이가원인이라는 이야기인데...... 짐짓, 관심 없는 척 돌아서며 나는 넌지시 희창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냐? 다미란 애?" "어이그, 나도 몰라. 난 맨 처음에 창희 니가 실수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 야. 뭐야, 그...... 박사장이라는 사람 때문인 것도 같구, 모르긴 몰라도 어제 보영이가 잘못한 모양이야" 보영이의 잘못? 옷벗기 게임? 나 소개팅시킨 것? 어쨌든 희창이와 보영이가 꾸민 일이니, 여자애가 화낼만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신경질을 부리다니, 선뜻 이 해가 안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다미가 화를 낸 것은, 내가 학교 근처에 산다는 것 때문인데...... "그래서...... 어제 걔들은 어디로 간 거야?" 어제 얘기 듣기로는 다미 그 기집애 잘 곳이 없다고 했었다. "어디긴 어디야, 보영이 셋방이지. 젠장, 다미만 아니였으면 그냥, 확! 보영이 방에서 자는 거 였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기야 보영이 방이라면, 어쩌면 전에 그리도 필요했던 그 물건, CD 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그럼 저 희창이 녀석 소원성취했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어제의 그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박사장은 누구며, 왜 그 사람 때문에 다미가 잠잘곳이 없다고 했던 걸까? "그래서 보영이가 다미 싫다는 걸 억지로 끌어다가 방으로 들어갔구, 난 닭 쫓던 개 신세 됐지, 뭐......" 그럼 이 녀석은혼자 차랑남았다는 얘기, 그래도옷을 보니집에는 들어간것 같은 데......? "그래서 넌 뭐했냐...?" "나? 나야, 차에서 한숨 잤지. 어쩌겠냐,보영이 방에 둘이 들어갔는데. 갈 데도없잖아? 집까지 술 먹고 운전할 수도 없고... 한시간 자다가 술 깨고 집에 들어갔다. 새벽에" 그랬었군. 어쨌거나 황금같은 기회를 놓친 희창이, 녀석으로서는 절호의 찬스였을 텐데 아 쉬울 것이다. 그 때였다. 삐리릭, 삐릭 - 희창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예, 예, 알았어요, 일찍 들어갈께. 여기요? 창희네...... 아니, 학교에요." 아마도 녀석의 어머니가 건 모양이었다. 요 근래 며칠간 하루가 멀다하고 새벽 귀가에, 사 흘에 한번 꼴로 외박을 일삼았으니, 왕왕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집에서 호통을 치는 것이 분 명했다. "쳇, 뭘 그렇게 화내신담, 아직 초저녁인데......!" 야단 맞은 게 짜증난다는 듯, 희창이는 전화를 끊고서 내 방 구석 이불 위로 핸드폰을 팽 개쳤다. "짜식, 어머님이 화낼만도 하시지. 맨날 여관방 아니면 보영이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니, 내 가 너희 어머니래도 그러겠다" 워낙 자유분방, 제 멋대로인 놈이라, 그런 잔소리에도 입이 한자나 나와 툴툴거리고있었 다. 그런데 벌써 창 밖은 어두컴컴, 땅거미가 내려 앉을 준비를 한다. "어휴, 어쨌든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다. 울 엄마가 이랬다간 차키도 압수란다!" 몸을 일으키는 녀석을 배웅하려는데, 문득 생각이 난 듯 희창이가 키득거리며 돌아보았다. "야, 짱이야. 근데 너 그 다미란 기집애 어쩔 거냐? 어제 보니까 진짜몸매 빵빵한 게...... 죽이던데? 히힛" "됐어, 짜샤! 너야말로 나 괜히 끌어넣지 마. 얼른 집에나 가봐." 손짓으로 울룩불룩, 다미의 유방을 흉내내는 희창이 놈의 등을 떼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킥킥, 알았다. 나 갈께, 내일 보자!" 골목길에서 부웅, 그의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다미... 하지만 나는소개팅이건 뭐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다. 선영이 누나...... 그 누나 때문에 이런 죄스런 기 분이 드는 건가. 멍청히 창 밖을 바라보며,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려 했다. 그래도...... 오늘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집에 갔을까? 혹시 아직도 그 선배 때문에 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내 무리를 스쳐갔다. 한참을 그러다 보니 허망 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일단 샤워를 개운하게 한 뒤 밀린 책고 보고 컴퓨터 통신도 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방구 석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어, 내 전화기 소리는 아닌데 - 이불더미, 이불더미 속에서 울려오 는 소리였다. 아하 - 희창이 놈이, 옷만 챙기느라고아까 던져둔 핸드폰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멍청한 자식,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 잔소리 몇 마디에 핸드폰을 집어 던지더니... 이걸 받아, 말아? 하지만 전화벨 소리는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녀석 어머님이시겠지, 내가 갖고 있으니 까 놓고 갔다고 말씀드리고 내일 돌려주면 될 것이다. 나는 별 생각없이 수화기를 집어들었 다. "여보세요?" 얼레, 그러나 건너편의 목소리는 희창이 어머님의 것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목소 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희창이니? 나야! 얼른 가게로 좀 와줘, 얼른!" 이게 누구 음성이지? 보영이잖아? "어머나, 왜 이래요, 꺄악!"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채 내 목소리를 확인하기도도 전에 끊어지고 말았다. - 잠깐, 방 금 그건 비명소리인데! 24 난 갑자기 멍하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비명소리에 묻혀 거의 반강제로 전화 가 끊긴 게 분명했다. 보영이는 내가 희창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핸드폰을 든 손이떨리고 있었다. 다급한 목소리, 애타게희창이를 찾는 여자애...... 틀림없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럴 땐 어째야 하나? 나는 별 수 없이 재빨리 청바지에다리를 꿰찼다. 가만히 있을 수 는 없는 일, 그렇다고다시 전화를 걸어'난 희창이가 아니라창희야, 희창이는 집에갔 어'라고, 절박할지 모르는 보영이에게 말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글쎄, 의리인지 모르지만 일단 무슨 상황이길래 비명소리까지 튀어나왔는지, 직접가보고 확인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나는 옷을 입자마자총알같이 달려내려가 택시를 잡아탔다. 내 자취방에서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어제 일을 생각하면 얄궂은 보영이지만, 그래도 불알친구인 희창이가 목매 단 계집애, 녀석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이상은 나라도 가 봐야 했다. 잠시 후, 나는 잔돈도 챙길 생각을 않고 건물 지하 계단으로 엎어질 듯 뛰어 내려갔다. 그 런데 사건은 이미 그 지하 단란주점 문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이거 놔요! 왜 이래요!" "조용하고 따라 와, 이년아!" "사, 사장님, 고정하시고......!" 여러 목소리가 단란주점의 입구에서 한꺼번에 울렸다. 계단을 내려간 내 눈 앞에 그 목소 리들의 주인공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우선 보영이, 그녀는 한 깡마른 사내에게 팔목을 붙잡혀끌려나오며 새된 목소리로 악을 쓰고 있었고, 다음은 미스터 박이라던 어제 그 남자 종업원, 그는 그 행패부리는 사내의어 깨를 붙들고 말리고 있었으며... 마지막 그 사내, 보통 키의 말랐지만 억세 보이는 중년남자는, 미스터 박의 간곡한 만류에 도 불구하고 보영이를 거칠게 다루고 있었다. "어, 보영아! 무슨 일이야?" 무슨 상황인지 종잡을 수 없었으니, 나로서는 일단 보영이에게 물어 보는 게 순서였다. 순간, 그들의 움직임이 일거에 멈추며 내게로 세 쌍의 눈동자가 몰렸다. 사장님어쩌고의 치켜뜬 눈, 미스터 박의 얼떨떨한 눈, 보영이의 원군을 만난 듯한 반가운 눈. ""어머, 차, 창희야, 나좀......!" 그러나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보영이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그 중년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건 또 뭐야?" 그는 앞에 선 나를 같잖다는듯 훑어보면서 여전히 보영이의 팔은놓지 않았다. 와중에 보영이는 더욱 버둥거렸다. "이, 이것 좀 놔요! 차, 창희야......!"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되어 어리둥절한상탠데, 갑자기 그 사 장인가 뭔가 하는 남자가 잡고 있던 보영이의 팔목을 놓고 대뜸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창희? 오호라, 니가 그 놈이냐? 니가 다미년 꼬신 놈이지!" 얼레, 왠 다미 얘기? 순간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그 직후 벌어진 일은 나로서도 미처 예기 치 못한 황당한 경우였다. 퍽,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내 눈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동시에, 내 광대뼈와 왼쪽 뺨이 얼 얼해졌다. 비틀, 사내의 주먹에 간신히중심을 잡은 내 귓가에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박사장님, 왜 이래요!" 아쿠쿠, 불의의 일격에 정신이 없는 내 머리 속에 전광석화처럼떠오르는 게 한 가지 있 었다. 박사장! 그래, 어제 그 말썽 많던 박사장이란 작자가 저 사람이란 말인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려는데, 이번에는 또다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 다. "놔! 안놔, 이년아!" 미스터 박과 보영이에게 양쪽어깨를 잡혔던 박사장이란 사내는어떻게 팔을 빼냈는지, 말리는 보영이를 밀어붙이며 동시에 철썩, 그녀가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즉각, 내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내 가게 앞도 아니지만, 감히 여자 를 때리다니! 순간적으로 내 머리통 뚜껑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나도 주체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박사장이란 사내에게 날아간 내 어깨와 주먹. 난 원래 싸움을 잘하는 편이 못되는데,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편으로서 중고등학교 시 절 이후로는 누구와 주먹다짐을 벌인일이 결코 없었다. 대신 나는남자는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논리에 따라 남들에게 범생이란 평가는 받아왔어도 착실히 3년 여 간 합기도 도장을 다닌 경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앞뒤 가릴 계제가 못되었다. 후닥닥, 그리고 수초 후...... 그리 오래 걸 리지도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내 눈 앞에는 배와 가슴을 움켜쥔중년사내가 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 는 미스터 박이 놀란 눈으로 나와 그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몇 차롄가 반격이 있 었겠지만, 내겐 그 시절의 훈련 덕으로 재빨리 피할 정도의 기술이 있었다. "야, 괜찮아?" 후들거리는 내 팔을 붙든 것은, 어느새 정신을 차린 보영이였다. "어구구...... 저, 저 새끼가 사, 사람을 쳐...... 너, 넌 이제 죽었다..... 허억......" 난 도무지 경황이 없었던 터라, 박사장의 어디를 몇 대나더 때렸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 다. 어차피 그래봤자 이것은 상대가안되는 게임이었으리라. 아무리 쌈박질을 못해도이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이고, 상대는 깡마른 체구의 중년사내 아닌가? "어, 바, 박사장님, 괜찮으세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그를, 미스터 박이 엉거주춤 부축하여술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갔다. "어후, 저, 젊은 놈이 사람 치네...... 야, 미스터 박, 경찰 불러, 경찰! 아이구우......" 몸도 제대로 제대로 못 가누면서, 박사장이란 사내는 여전히 악다구니를 써댔다. 어휴, 저걸 그냥 - 쫓아 들어가한방 더 갈겨주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 문이 열린 새 들여다 보니, 접대부 아가씨들 몇몇이 겁먹은 눈으로 흘끗거리고 있었기 때문 이다. "창희야, 괜찮지?" 돌아보니, 아까 따귀를 맞은탓인지 립스틱과 화장이 부산스러워진보영이가 내 얼굴을 근심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으.....으응, 나, 난 괜찮아...... 너는?" 우선 나보다도 여자인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어휴, 안 되겠다. 일단 나가자." 내 팔짱을 끼며, 잠들 보기가 민망했는지 그녀는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다. 박사장은가게 안 어딘가에 드러누운 모양인지 더 이상 악쓰는 소리가 들려오진 않았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그,그래. 너야말로......" 아닌게 아니라, 맞았기 보단 흥분을 했던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얼빠진기분 에 계단에서 비척거리는 나를, 보영이가 안다시피 부축해 주었다. 하지만 멋쩍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슬쩍 그녀의 팔에서 어깨를 빼냈다. "그래도, 어디 얼굴 좀 봐, 어머!" "아냐, 괜찮다니까...... 어......" 보영이는 건물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 들여다보았다. 덕 분에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광대뼈가 쑤셨다. "뭐야, 여기 피나잖아!" 아까 박사장에게 맞은 게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긴장도안 하고 예고도 없이 날 라온 일격이라 그럴 테지만, 입 안을 더듬으니뺨 안쪽이 찝찔했다. 입 안도 약간 터진것 같았다. 그림 좋은데, 웬 술 취한 패거리가, 보영이의 그런 자세 - 내 얼굴을 감싸쥔 -를 보고 입 맞춤이라도 한다고 생각했는지 흘끔거리며 한마디씩 던졌다. "아이 참, 어쩌지...... 가만 좀 있어 봐." 난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보영이는 그런 주위 상황에는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무 슨 간호사라도 된 양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안 되겠다, 택시, 택시!" 어, 왜, 왜 그래...... 내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그녀는 택시를 세우고, 억지로 나를 그 안 으로 밀어 넣었다. "야, 어, 어디 가는 거야?" 그러나 보영이는 일방적으로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어휴, 가만있어. 지금 이 시간에 약국 문 연 곳도 없을 텐데....." 웬 약국? 그녀는 내 얼굴의 상처가 무슨 대단한 부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을 했다. 그 냥 이런 건 대충 물로 씻고 소독약이나 발라두면 되는 것 아닌가. "야, 기, 김보영, 너 가게 안 들어가도 돼?" "됐어, 아까 그 난리를 치고 어떻게 다시들어가니? 박사장도 안에 있는데...... 그리고 이 따 마담언니한테 전화하면 돼." 나는 당찬 그녀의 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아, 아까 나한테 맞은 사람이 어제 얘기한 박사장이냐?" "그래, 맞아, 다미...... 어휴, 그 개자식! 쌤통이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보영이는 내가 그 자를두들겨 준 것을 고소해 하고 있었다.그랬 군, 그 작자가 박사장이었군. "어제 다미 한참 찾아다닌 모양이야. 참, 근데 니가 왜 여기 온 거야? 난 희창이한테 전화 한 건데?" "아 그거..... 희창이가 내 자취방에 핸드폰을두고 갔어. 그래서 아까 내가 니전화 받은 거야." 응...... 보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저씨. 여기 세워주세요." 그녀가 택시를 세웠다.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야...... 의외로 우리가 내린곳은 학 교 앞 골목이었다. 엉겁결에 나는 그녀를 따라 택시에서 내렸다. "야, 어, 어디 가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대꾸도 없이 씩씩하게 동네 골목을 돌아 어느 집 대문어귀로 들어서고 있 었다. "응, 여기? 내 방이야. 내 셋방." 뭐야? 니 방? 아니 그럼 희창이가 얘기한, 보영이 자취방? "뭐해, 얼른 따라와. 안데 반창고랑 밴드 있으니깐!" 띠잉. 순간적으로 머리 속이 울렸다. 아니지금 나더러 이 늦은 시간에,여자 혼자 사는 방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야, 창희야! 뭐하고 있어? 얼른 들어와. 안에 아무도 없으니까,쉬었다가 가. 내가 약 발 라줄게." "어, 야......!" 무슨 얘기냐, 안에 아무도 없는 여자 방에서 쉬었다 가라니. 내 제일 친한 친구인희창이 도 그토록 들어가 보고 싶어 안달하던 그 방인데. "아이 참, 그러다 우리 이무가 본단말야. 바로 저 옆집인데, 소주방끝날 때 다 돼간다 구!" 접대부 아가씨의 꿈 25 엉겁결에, 나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방은 널따란 편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사는 여자 방을 구경해 본 셈이었지만, 그 런 대로 그녀는 소녀다운, 아니 여자다운 취향으로 꾸며놓고 있었다. 내 방과는 달리 반지하 층에 위치했지만, 창문에는 예쁘게 커튼도 달렸고, 구석의 커다란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어 디서 구했는지 모르나 인형들이 한아름이나 쌓여 있었다. 방 구석 벽에는 커다란 거울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보영이는 들어가자마자 그 거울 앞에 앉아 자기 얼굴을 들여다모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아까박사장에게 맞은 뺨에 상처라도 났는지 살피는 모양이었다. "어유, 이게 뭐야! 나쁜 자식......" 자기 얼굴을 비춰보고서야, 그녀는 자기가 얻어 맞았다는 사실에분노를 느끼는 것 같았 다. 신경질을 부리던 그녀는 눈물이라도 나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못된 기집애...... 괜히 나만 못살게 굴어" 다미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보기에도 아까 단란주점 앞에서 벌어진사건 은 순전히 다미에게 원인이 있는 것 같았으니...... 그녀나 나나 억울하게 행패를 당한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동안 흑흑거리다가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내쪽을 돌아보았다. 눈가가 반짝 였지만 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야, 뭐해? 그렇게 서서...... 좀 앉아." "어, 으응......" 나는 일단 들어왔으니, 방구석에라도 앉아야겠단 생각에 한쪽 벽에등을 기대고 털석 주 저앉았다. 화장을 지우려는지, 화장품들을 뒤적이던 보영이는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보더니 손길을 멈추고 말했다. "아냐, 그것보다 가서 세수라도 할래? 약 발라야하니까. 밖에 쪽문 있지? 거기가 화장실이 야." 나는 잠자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보영이가 이 방에서 하는 일이란 고작 씻고, 자는 일 밖에는없 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나마 자주 들어오는 일도 없든가.그런데도 예상 외로 그녀의 방, 그 리고 화장실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기야 그만큼 이 방에 잘 안들어온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어쨌든 나는 소매를걷어붙 이고 세면기의 수돗물을 틀었다. 아야야, 찬 물이 닿자 내 입가가 상당히 쓰라렸다.눈물마저 핑도는 느낌이었다. 상처 부 위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아프기는 꽤 아팠다. 멍청한 창희야 - 그렇게 멍하니 한 대 얻어 맞고 이렇게 상처까지 입다니. 나는 내가 괜히 한심스러워졌다. 왠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뭐라고, '다미를 꼬신 놈'이라고? 내가?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 빴다. 그런 욕을 한 박사장이란 작자건, 그런 오해를 받게 만든 다미나 괘씸하기는 짝이없 었다. 내가 지은 죄라고야 고작 그 여자애 가슴이랑... 그 거뭇거뭇한 팬티를 훔쳐본 것 밖에 없는데. 물론, 남의 여자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보영이의 방으로돌아오기 위해, 문고리를 확, 잡아당긴나는 - 무의식적으로 난 지금 여자 방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까먹고 있었다 - 일순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어, 미, 미안!" 아차, 방 한가운데에서는 보영 이가 속옷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것도 팬티만 입은 채 막 스타킹을 벗는 중이었다. 난 당황하여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하게 스타킹에서 발목을 빼내 고 실내복 반바지까지 걸쳐입고 있었다. "추워, 창희야. 문 닫어." 얼결에 놀란 나는 미처 방문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보영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브래지어 차림으로 내 눈 앞을 왔다갔다했다. "잠깐만 기다려. 나 씻고 올께." 허참......나의민망함데는게의치않고그녀는여전히옷가지를든채윗도리 는 입지 않고 방을 나갔다. 아무리 어제 옷벗기 게임 때 그녀의 속옷차림이 한 번 공개됐어 도 그렇지, 자기 방에서 거의 낳선 놈이나 마찬가지인 나를 앞에 두고 속옷바람으로 돌아다 니다니...... 나는 그녀의 당참에 혀를 내둘렀다. 쏴아, 물소리가 나고... 멍청히방구석에 쪼그린지 십여분 지나자,그녀는 완전히 화장을 지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 시원해. 자, 이리 와봐. 상처 좀 보게." 보영이는 구석의 서랍장에서 뭔가를 뒤적이더니, 연고와 일회용 밴드등을 들고 내 앞으 로 다가앉았다. "아, 아야!" "뭐야, 엄살은......" 그녀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쥔 채, 나름대로 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움직이지 마. 자, 이렇게......" 내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댄 채, 소독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주는 그녀. 훅, 싸한 향내가 코로 스며들었다. 비누냄새인지, 샴푸냄새인지... 하여간 향긋한 향기가 풍 겨왔다. 아아...... 이전까지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여자의 목욕 후 향기를 처음 맡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내음은 정말 신선함, 그자체였 다. 나는 살짝 눈을 떠 거의 십여센티도 아니게 마주한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화장 안한 보영이의 얼굴은 지금 처음보는 것이었다. 원래 미인형의 얼굴이라 그렇겠지만, 그녀의 맨 얼굴도 상큼해 보였다. 오똑한 콧날,짙은 눈, 도톰한 붉은 입술... 난 마치별천 지를 가까이한 기분이었고, 게다가그녀의 어깨까지 오던 머리카락은핀으로 고정돼 머리 위로 올려져 있으니, 정말 색다른 분위기였다. "뭘 봐, 가만 있으라니까......" 문득, 내 눈을 마주 본 그녀는 피식거리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멋쩍어진 나는 황급히눈 을 감는데...... 질끈 감은 두 눈 속으로 그녀의 조금 전 모습이 떠올랐다. 쪽 뻗은 그녀의 다리와몸매, 그 각선미를 감싸던스타킹, 그것을 속옷차림으로갈아입 던...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머리 속으로 당장 야릇한 상상이 떠올라 은근한 흥분을느끼고 있었다. "자, 됐어!" 톡톡, 반창고가 붙여진 내 뺨을 두들기며 보영이는 다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얼떨떨한기 분에 눈을 떠보니 그녀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휴우...... 난 마치 꿈에 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으, 응...... 고, 고마워!" 그런데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뼉을 치고 있었다. "참, 내 정신 좀 봐. 창희 넌 그래도 손님인데... 잠깐만, 너 커피라도 마실래?" 커피? 그녀는 내게 뭘 대접해야겠다는 투였다. "어, 아, 아냐! 나, 나 그냥 갈께." "아이, 안 돼. 그래도 오늘 나 구해준 건 너잖아. 그런데 여기까지 들어오라고해놓고, 그 냥 보내면 말이 되니?" 아니 난 그게 아닌데 - 하지만보영이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쪼르르, 방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미안, 여긴 커피 밖에 없어. 그래도 괜찮지?" 방밖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뜻밖의 대접에 황송해지는 나는, 뭐라 달리 할말 이 없었다. 26 "자, 여기!" 잠시 후 그녀는 조그만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덩그러니 놓인찻잔과...... 얼레, 웬 소주병? "응, 나 마시려구." 그런 의아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보영이는 자기 손으로 소주병을 돌려땄다. "생각해보니까, 열받잖아. 재수없게 따귀까지 맞고...... 어유, 기분 나빠!" 그럴 수도 있다. 아까 나도 상당히 황당하고 기분이 더러웠는데, 자기 친구 문제로 뺨까지 맞은 그녀는 분을 삭이기가 어려운 모양...... 꿀꺽꿀꺽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역시 보영이다웠다. 남자들도 여간해서는 저렇게 나 마시는데..... "칫, 못된 기집애! 지 서방 관리하나 못 하고 도대체 이게 뭐야?" 으잉? 서방? 지금 그녀의 말은 다미를 두고 하는 것 같은데, 서방을 관리한다? "지, 지금...... 다미 얘기하는 거야?" "그래. 다미 아니면 누구겠니?" 비로소 내내 풀리지 않던 의문이 실마리를 푸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보영이의 눈치 를 살피며 운을 떼었다. 도대체 안다미라는 여자애, 그녀의 정체는 뭔가? "그, 그럼 다미랑... 그 박사장이란 무슨 관계인데 그래?" 피식, 그러나 내 질문에 보영이는 한숨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어이구, 뭐긴 뭐야...... 그래, 어제 다미가 입고 있던팬티있지? 왜, 그 외제라는 거 말이 야." 그래 그 레이스로 된...... 그것과 세트인 팬티는 또 어떤가? 야릇하다 못해 거뭇거뭇한것 까지 비쳐 보이는...... "그거 박사장이 사준 거야. 그것도 외국 나가서 직접...... 뭐랬지? 프랑스제라던가?" 아하, 그런 것이었구나. 그렇게 속옷까지 사주고 또 입어주는사이, 비로소 나는 어제 미 세스 최가 다미가 박사장의 이거...... 라는 뜻으로 흔들어보인 새끼손가락이 기억났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보영이는 기분 나쁜 듯다시 한번 소주병을 들어 나 발을 불었다. "내가 그랬지? 다미 학교 다닌다구...... 그 기집애가 뭔 돈이 있길래 학교등록금을 냈겠? 걔네 집이 얼마나 별볼 일 없는데...... 아마 그 돈도, 다 그 사람이 대주는 걸꺼야." 어, 이건 처음 듣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그...... 그러니까 다미가 그......" "그래, 맞아. 박사장 세컨드지, 뭐. 그 박사장이란 자식, 돈이 꽤 많으가 봐. 그리고 공장이 라던가 무역회사던가...... 뭐 그러니까 그렇게 외국도 다녀오는 거겠지, 뭐!"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나였다. 무슨 이런 소설같은 스토리가? 나는 엄청난사 실에 침이 꿀떡 넘어갔다. "아, 아니...... 그, 그런데 왜 그렇게......" 가게까지 찾아와 난리냐, 따로 집 사주고 살림 시키면 됐지 - 란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보영이의 대답은 이미 내 상상을 앞서고 있었다. "오늘 왜 그렇게 난리를 쳤겠니, 그 작자가. 원래워낙 의처증이 심해. 자기가 나이 먹었 으니까 행여나 젊은 남자하고 눈 맞을까 봐 항상 안절부절 못하거든. 그러니 어제 박사장이 가게 왔을 때 다미가 나갈 수 있었겠니? 젊은애들하고 논 거탄로날 텐데. 그랬더니 그 인 간이 아파트로 다미르 찾아간 거고 결국 다미는 무단외박을 한 셈이 된 거니 뭐." 하도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에, 답답해져서 나도 모르게 보영이가 건넨 술병을 목구멍으로 들이밀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자기도 답답한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서 일부러 너 다미한테 소개시켜준 거야. 다미 그계집애 치여 사는 게 불쌍하기도 했지만, 박사장이 너무 밉더라고. 첩 거느리는 주제에 무슨 의처증. 어휴, 남자들은 다똑같 아. 마누라 몰래 바람들은 피면서, 또 그 바람 피는 여자는 못 잡아서 안달이구." 의처증이라... 그래서 다미가 어제 그렇게 겁을 먹은 거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도...... "근데 이 계집애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박사장 설치는 꼴 보니　 분명히 오늘도 집에 가 지 않은 것같은데...... 어쨌든창희 너한텐미안하게 됐다.괜히 싸움질까지하게 됐으 니......" 그래서 그 박사장은 내가 다미 꼬셔낸 젊은 놈팽인 줄 알고, 그렇게달려든 거구나 - 난 그제야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유, 생각할수록 열받네!" 보영이는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거푸찰랑거리는 소주병을 들러 목 구멍 안으로 부었다. 마땅한 안주거리도 없는데, 저러다 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 시 작했다. "나쁜 년, 지 서방 하나 구워삶지 못하고. 괜히 남들에게 피해주고 난리야."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다. 오늘 아까처럼 단란주점 앞에서 난 리가 벌어질 정도라면, 내가 최마담- 사장의 입장이라면 글세,어떻게 다미는 무사한 걸 까? 내가 마담이라면 당장 잘랐을 것을...... 나는 넌지시 지나가는 말투로 보영이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훗, 그게 사실은...... 언니가 여기 단란주점 차릴 때, 그 박사장한테 도움을 좀 받았나 봐. 급전도 융통해 주고, 가게 권리금도 내주고...... 그러니 어쩌겠니? 울며 겨자 먹기지...... 얘기 했잖아, 그 박사장 정말 의처증에 쫌팽이라고. 나 같으면딴 데로 빼낼텐데, 지 마누라한테 들킬까 봐 데려가지도 못하고 술집에 박아 놓은 거지 뭐." 으하 - 정말 다미란 여자애에게 이다지도 복잡한 사연이 있는줄은 몰랐다. 아무튼 대단 한 비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쪼그만 아파트는 하나 사준 모양이야. 며칠씩 박사장이 그리로 퇴근하는 것 같더 라구." 이제 자칭 누님, 최마담의 푸념이 떠올랐다. 나이 어린 여자애들 남자문제, 그 뒤치다꺼리 에 성가시다는 말이...... 그런데 방금 떠올린 최마담의 이야기를확인시키는 말이 보영이의 입에서튀어나왔는데 - 나는 그 지나가는 듯한 말에 완전히 경악하고 말았다. "병신 같은 년, 그러니까 임신했을 때 애 떼지말고 낳아서 확 휘어잡으라니까...... 안 그 래?" 으헥, 나는 당장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임신이라고......! 순간적으로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은 딱 벌어졌을 것이다 - 놀라 자빠지기 일보직전의 내 얼굴, 그제야 보영이는 자기의 실수를 꺠달은 모양이었다. "아이 참, 내가 별 얘기를 다하네. 맞아, 내가 너 다미랑 소개팅시켜 줬지...... 으이그, 나는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의 기절할 정도로 뛰는 심장은 어쩔수가 없었다. 아, 아니 그럼 - 이, 이 보영이 계집애가 나에게 애까지 딸릴 뻔한 여자애를 소개시켜 주려 했단 말인가? "뭐야, 뭘 그렇게 놀래? 원래 요새 계집애들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뭘...... 어쨌든 미안하다. 너한텐 비밀로 해야 될 일인데......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창희 너, 그 계집애 다시 볼일 없을 거니깐...... 가게도 한 일주일 안 나올 것 같더라." 역시 나는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그 상황들이 내겐 너무 황당하게 다가와싿. 박사장이 다 미를 임신시켰다는 것 - 낙태수술이라던가 하여튼 - 자체가 엄청 큰일일 성싶은데...... 그래 놓고도 다미는 괜찮았단 말인가? 입 안에 침이 바짝 말랐다. "그, 그래도 괘, 괜찮은 거야? 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몇 달 안 됐어. 한 두어 달? 그나마 다행이야, 몇 주 안 되서...... 내가알기론 수술 같은 것 없이 약 먹고 말았다던데......" "하, 하지만 보호자 같은 것 필요하지 않아?" 어이없어하는 내 질문에, 보영이는 으이그,이 멍청아! 하는 표정으로 내얼굴을 쳐다봤 다. "바보야, 언니 있잖아. 마담언니. 그리고 그런 데선 다 알아서 해 준다구, 웬 보호자? 후ㄱ 훗, 그래 봤자 다 한강에 배 지나간 자국인데....." 맙소사, 그럼 어제 최마담이 한 말은 전부가사실 아닌가! 한강에 배 지난 거라고? 나는 이런 문제를 마치 아무 것도아닌 일상사처럼 말하는 이 여자애의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내침 김에 다 털어놓겠다는 듯, 그녀는 말을 이었다. "원래, 박사장은 낳아달라고 사정사정 했나 봐. 집에 아들이없대나? 글세, 내 생각은 그 랬어...... 애 하나 낳아주고 밑천 챙겨서 그 귀찮은 인간 떼버리든가, 아니면 애도 있겠다, 본 부인 자리까지 꿰차든가...... 근데 그 다미 년이 그런 배짱까진 없었나 봐. 뭐 공부하고 학교 도 더 다니고 싶다나? 등신, 여자가 뭐 공부 잘한다고 밥 먹여주니?" 으와와...... 기실, 내가 놀라는 것은 다미의 그 비리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로이런 생각들 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자들, 즉 다미나 보영이 같은 아가씨들을 - 말로만 들어왔지 정 말로 이렇게 마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내 기막혀 하는 표정이 우스운지, 보영이는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왜, 놀랐어? 걱정 마. 방금 그 얘긴 농담이니까,후훗, 하여간 어제랑 오늘 미안하다. 또 고맙고...... 내가 그렇고 그런 여자애 소개시켜 줬다고 뭐라 그럴건 아니지? 난 그랬어, 창 희 넌 착하고 여자한테도 잘해줄 것 같으니까, 다미 그 계집애도 다른 쪽으로 눈 좀 돌리라 고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꼭 너한테 거짓말한 꼴이 됐네. 하지만 너 내 마음 알지?" 보영이의 속뜻이 어쨌는지야 몰라도, 앞 뒤 사정 다 듣고난 상태에서 내가 뭐라고 얘기 할 수 있겠는가? "너처럼 순진한 애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다고 다미 걔가 닳고닳은 까진 계집애는 아니 야. 원래 우리 가게 처음 나올 때도, 자기 집 사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돈 벌려고 그랬던 거 구...... 어쩌겠니, 겨우 고등학교나 나와서 일해 봐야 쥐꼬리만도 못한 돈보고 사는건데. 걔 도 알고 보면 착한 애야......그래도 지 낭군이라고 박사장한테 꺼뻑죽는 거 보면. 그리고 지금껏 딴 놈한테는 눈도 안 돌렸지, 아마......?" 모르겠다. 나로서는 주간지 기사 같은 이런 일들을 직접 대면하기는 청므인지라, 그녀들이 말 그대로 착한 것인지...... "그 계집애 돈 생가면 집에도 가끔 갖다주고 그러는모양이야, 어차피 자기 생활비 정도 는 그 작자한테서 나오니까." 내 상식과 이해력은, 이미 도를 넘어서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효녀? 열부? 소녀가장? 억 척스런 주경야독? 이 모든 단어들이 과연 다미에게 우울리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때였다. 문득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보영이가 갑자기 배시시 웃더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내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어, 어...... 마치 나를 덮칠 기세로 가까이 얼굴을 맞댄 그녀는, 손으로벽을 짚으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기, 근데 창희야...... 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뭐, 뭐야, 왜, 왜 그래 - 보영이는, 내이마께에 위치한 빨간 입술로 요염한 미소를 지었 다. 꿀꺽, 갑작스런 그녀의 돌출행동에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거의 입이라도 맞출 거리에서 그녀의 숨결이 코끝에 느껴졌다. 왜, 왜 이러는 거지? 나는 그녀가 하도 몸을 바싹 붙여오는 바람에 거의 벽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나...... 부탁이 있어, 너한테......" 향긋한 샴푸냄새...... 달착지근한 여자향기...... 도대체 무얼 요구하는 건지, 나는 정신이 아 뜩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이럴 땐 누,눈을감아야 하나? 서, 설마 키스하려는 것은아니겠 지, 나한테...... 27 "호호홋! 놀랐지? 그지? 너무나 당혹스러워 정신마저 혼미해져 있는데, 갑자기그녀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귓 가에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내음도 썰물처럼 내 얼굴에서 멀어져 갔다. "킥킥, 귀여워. 역시 남자들이란...... 푸훗, 자 이거!" 제, 젠장...... 보영이는 나를 놀린 것이다. 당황하여 얼굴까지 달아오른 것 같은데, 그런 나 를 보며 깔깔거리는 계집야. 어휴, 그럼 이렇게 단둘이 방 안에서 그런 포즈를 취하면정신 차릴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 그녀의 장난에 멋쩍기도하고 울화통도 치미는데, 보영이 가 내 코 앞에 뭔가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빈 소주병이었다. 얘기를 하며 홀짝거리더니 어니새 말끔히 비워진 것이다. "창희야, 우리 딱 한 병만 더 마시자, 응?" 아닌게 아니라, 화장기 없는 보영이의 뺨이 약간 불그스레해 지고 있었다. 안주도 없이 깡 소주를 들이켜더니 슬슬 발동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야, 기, 김보여...... 지금 시간이......"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아니 어제도 양주에 맥주까지 마셔놓고..... 역시이런 업종에 있는 아가씨들은 술이 센 걸까? "야아, 뭘...... 너 자취방 이 근처라며? 미안미안, 우리 딱 한 병, 아니,각자 딱 한 병씩만 마시자!" "얌마, 너 그, 그래도 어제도 마셔놓구......" "야, 창희야. 생각해 봐, 넌 열 안 받니? 너랑 나랑 별 상관도 없는 인간에게 따귀까지 맞 았는데...... 쌓이지도 않아?" 하기야, 아까 박사장인가 하는 인간에게 얻어맞은 것이 분명 기분은 상했다. 하지만그래 도 그렇지, 나는 술 따위로 화를 풀고 싶지는 않은데...... "나, 난 그래도 들어가야 돼. 내일 수업도 있는데......" "그래, 그러니까 한 병씩만 마시자구. 기분도 풀겸. 그럼 너, 거기까지 와서 별꼴다 보 구, 나도 구해주고, 그러고 나서 나 혼자 술 퍼마시게 할거야?"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여자애 혼자 텅빈 방에서 병나발을 불게 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었다. 혀를 차며, 나는 가게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 알았어...... 대신 딱 한 병 뿐이다!" 안 되겠군...... 저 보영이도 어제보니 황소고집이라서, 내가 사오지않으면 자기가 직접 갈지도 모른다. 희창이도 일찍 가고 없는데 녀석의 여자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니, 편치 않 은 느낌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방을 나서려고 문고리를 잡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확, 문이 열어 젖혀졌다. "어멋, 깜짝이야!" "어, 언니!" 뭐, 언니? 아니! 놀랍게도 방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최마담이 아닌가! "어머, 손님이 와있는 줄은 몰랐네. 근데 이게 누구야? 창희도련님 아냐?" "응, 들어와, 언니!" 순간적으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린 것 같았다. 내 느낌일까? 아무래도 최마듬이 질 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머, 나 들어가도 되는 거야? 흐흥, 내가 두 사람 오붓한 시간 방해하나 보네!" 최마담의 비꼬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괜스레 어정쩡해졌는데, 문가에 들어서다 말고 선 최마담은 나를 힐난하듯 째려보고 있었다. "호호 둘이서 뭐하고 계셨수? 어머 원래 보영이 도련님은 희창씨 아니었나?" 이게 무슨 말투인가. 내가 뭐 다른 여자와 불륜이라도 저지르고 있다는 듯한 비꼬는 투였 다. "아유, 참...... 언니도...... 얼른 들어오기나해. 창희는 그냥 놀러온거야. 내가 오라고 했 어." 그러나 최마담의 눈꼬리는 여전히 묘하게 나를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 내가 보기엔 아닌 것같은데...... 우리 보영이는 재주도좋아, 창희씨랑 희창씨랑 근사한 도련님을 둘씩이나 거느리고!" 하긴 보영이는 어제 자기들이 단란주점에서나간 수 나의 행적에 대해모를 것이다. 즉 여기 이 마담언니와 둘이서 술을 한 잔 더하고, 그녀가 나를 직접 차로 내 자취방까지 바래 다주었으며...... 그리고 차 안에서 내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래서인지 지금 최마담은 보영이 앞에서 나를 깍듯이'창희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약 단둘이 있다면 동생이라고 부르며 내게도 누님이라란 호칭을 강요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래 서 보영이는 이 자칭 나의 누님의 말 속에 은근한 가시 - 나만이 알아듣는 - 가 있음을 눈 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그..... 언니! 아니라니까. 아까 가게에서 있던 일 못 들었어?" "박사장 온 거......? 듣기야 들었지." "그럼 다 알면서 뭘, 농담 그만하고 앉아. 나 창희랑 둘이 소주 한잔하고 있었어." 역시 보영이는 지금 이 언니가 얘기하는 것을 단순한장난으로 알아듣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뭔가 가슴이 뜨끔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보여서는 안 될모습을 들킨 것처 럼. "예, 아, 앉으세요 저, 저는 지금 막......" 잘 됐다. 차라리 이 두 여자를 남겨놓고 자리를 피하는 것도 괜찮을 성 싶었다. 그런데, "응, 그래 언니, 쟤 지금 술 사러 가는 길이었어. 언니도 같이 마시자." 중간에 끼여든 보영이가 말을 가로채는 바람에 내 의도는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쩌 나, 이젠 두 여자와 한방에서 술을 마셔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의외로 최마담은 방에앉지 도 않고 돌아갈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아니야, 난 됐어. 둘이서 짝도 맞았는데 내가 왜 끼니? 주책맞게...... 둘이서 놀아, 언니는 갈 테니까." 얼레, 최맏므은전혀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난 그저 여기 보영이가붙 잡길래 있었던 것뿐인데...... 마치 삐지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어머, 그러려면 왜 왔어, 에이 가지 말고 여기 같이 있자니까! 오늘 나 기분 더러운데 언 니가 좀 풀어줘야 할 거 아냐." 그럼에도 최마듬은 야릇한 어투를 바꾸지 않았다. 중간에 끼인나는 말려야 한지 어째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이구, 됐네요. 청춘남녀끼리 있어. 다 늦은 밤에 노처녀가왜 끼니? 밤새 허벅지 찌를 일 있어? 너희 둘 자기에도 좁은 방인데......" 뭐, 뭐라구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둘이 자다니, 게다가 웬 허벅지? 허 참, 이 최마담 아무래도 보영이와 나 사이를 단단히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나, 언니도..... 그럼 왜 왔어?" "나야 뭐...... 아까 단란주점에서 사고가 있었다길래, 너 괜찮은가 보러온 거지." "어휴, 그럼 왜 그냥 가? 여기서 자고 가!" 맞다. 내가 오해를 받은 거야 둘째치고, 이 여자들은 박사장이나 다미 일로 할 얘기도제 법 많을 텐데...... 보영이는 이제 일어나기까지 해서 그녀를 만류했지만, 최마담은 한사코 돌 아가겠다고 했다. 참 애매한 입장이었다. 최마담을 붙잡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그냥 보내는 것이 나은지. "아냐, 오늘 얘기는 내일 하자. 어차피 바깥 골목에 차도 세워 놨어. 그러니까 두 사람 재 미있게 놀아. 괜히 나 땜에 분위기 깨지 말고." "아이 언니두!" 최마담이 하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지라, 나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이 없었다. 그녀 는 돌아서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입가가 작게 경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창희야. 너 그럼 언니랑 같이 술 사러 갔다오면 되겠다. 알지? 골목 큰길가에 편의 점 있는 거." "어......지, 지금!" "그래, 얼른 다녀와!" 28 이런...... 되도록 이면 여기 이 최마담이랑 ㅏ둘이 있어선안 될 것 같은데, 내막을 모 르는 보영이는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비록 길가까지 같이 나가는 것 뿐이라 해도, 왠지어 색할 것 같았다. 하지만 거의 떠밀리다시피 나온 나는 그녀와 나란히 골목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흘끗, 뒤를 돌아본 최마담은 골목길 어귀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를 다그쳤다. "창희씨, 언제 쟤 방에 온 거야?" 은근히 화난 음성이었다. "어......아, 아까 한두 시간 전에...... 단란주점에 있다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왠지 나는 죄진 사람첯럼 더듬거리기까지했다. 지, 지금 이 여자가 질투라도 하는 건가? "그럼 아까까지 아무 일 없던 거겠지......?" '아무 일' 없다니? 나는 갑자기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혔다. 아무리 혼자 사는 여자 방에 남 녀가 있었어도 그렇지, 내가 뭐 그 사이에 보영이와 정사를 나누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 아니에요. 저, 전 보영이가!" "됐어. 그럼 됐어." 나는 펄쩍 뛰었지만 최마담은 그런 나를 싸늘하게 지켜보더니 아무 말 없이 앞장 서 걷는 것이었다. 아니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아, 아니 그게 아니지, 내가 설령 그랬던들 자기가왜 나 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친 누님도 아니면서 말이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를 뒤꽁무니에 매단채, 그녀는 먼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오해를 받는, 아니 오해를 받을 필요나 이유도 전혀 없는 내게,이 여자는 왜 이러는 것일까. 그러 나 그녀는 여전히 쌀쌀맞은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뭐 마실거야? 소주?" 그러나 그녀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조그만 국산 양주 두 병을 샀다. "어, 저흰 그냥 소주로......" 소주 마실 건데요 - 라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차 가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가게를 나오며,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고으르렁거렸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사실, 어제 처음 대면한 사이에 너무하는 것 아닌가? 골목어귀의 자기 차로 돌아온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홱 돌아봤다. 그러나 아 까의 어이없음과는 달리 괜히 민망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자 여기 이것 가지고 가." 최마듬은 아까의 양주 두 병 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이건...... 창희씨 생각해서 산거야. 소주 마시면 아침에머리 아플 테니까...... 보영이만 사주는 거면 소주 샀겠지만." 내 생각을 해준다? 나는 또 한 번 그녀의 밑도 끝도없는 호의를 받고야 말았다. 그나저 나...... 그럼 나머지 한 병은? 그녀는 그 술을 자기 차 안에 던져 넣었다. "나도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자야겠어.오늘 일 때문에 나도 열받았으니까...... 참, 아까 미스터 박이 얘기하던데, 박가장 늘씬하게 두들겨 팼다면서?" 엉겁결에 양주병을 받아 쥔 나는 정말로 누나 앞에서 싸움질한 동생의 입장이 되고 말았 다. "죄, 죄송해요...... 먼저 맞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냥......" 후우, 멋쩍어 뒤통수를 긁적거리는데, 최마담이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냐, 괜찮아. 잘했어.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어디 몸 괜찮아? 그 반찬고는누가 붙여준 거야?" "어...... 예...... 이, 이건 그냥 제가......" 보영이가 붙여준 거예요 - 라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괜히 그런말을 꺼냈다가는 더한 오 해를 살 것 같았다. "어디 봐!" 아까 보영이처럼, 그녀도 내 얼굴을 살며시 붙잡고 걱정스런 눈초리로 살폈다. "괜찮은 것 같네. 다음부턴 그러지 마, 피해버려. 난 우리 창희씨 다치는 것 싫으니까." 정말 이러고 보니 이 여자가진짜 누님 같았다. 민망한 나는조금 전까지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보다는 그녀의 따스한손길에 감격할 정도였다. 내얼굴을 바라보는 그녀는 나를 들여보내기가 아쉬운 듯, 촉촉이 젖은 눈길이었다. "창희씨, 내가 부탁하나 할까?" 갑자기 최마담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은 듯 몸을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뭐...... 뭘요?" 심각한 그녀의 표정에 긴장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그러나 최마담은 퍽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창희씨, 그술만 마시고 집에 들어가. 알지? 절대로 보영이랑 같이 자지 마, 응?" 어어...... 난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보영이랑 자라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아, 아니 무, 무슨 이유로 이 최마담이...... "걔...... 내가 오래 전부터 데리고 있어서 잘 아는데아주 욕심이 많은 애야. 물론 창희씨 는 안 그럴 거라고 믿지만...... 하여간 딴 짓 하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 알았지?" 그런 말을 해놓고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그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내 엉덩이를 톡 치고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지금, 지금 이 누님이 내가 다른 여자랑 잘까 봐 걱정한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자기가 뭔데 나더러 누구랑 자라, 자리 말라 하는 것인가? 놀라 벌린 입 을 다물지 못한 채 나는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부르릉, 차에 시동을 걸면서도 그녀는 차창을 내리고 내게 당부를 했다. "보영이 같은 애는 젊으니까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아. 그러니까 창희씨는 절대로 걔 가 꼬셔도 넘어가면 안 돼." 나는 멍청하게 그녀가 사라진 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대체 보영이가 얼마나 헤픈 여 자이길래 저런 말까지 하는 걸까. 그리고 그녀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보고 보영이랑 자 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29 한동안 나는 그녀의 차가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며 멍하니서 있었다. 한 손에 양주병 을 쥐고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자기 남편이라도돼서 행여나 바람이라도 피울까 염려하는 말투 아닌가? 터덜터덜, 보영이의 방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얼떨떨한 혼란스러움을 떨칠 수가없었다. 최마담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꼭 지금 사내를 잡아먹는 마녀의 집이나 호랑이 굴로 들어가 는 것이 분명했다. 보영이가 어떻다고 그녀는 내게 경고 아닌 경고를 보내는 것일까. 마치 자기 자식을 사지 로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처럼...... 나는그렇게 어이없는 기분으로 보영이의 방으로돌아왔 다. "어, 웬 양주?" 철없게도, 보영이는 나보다 양주병을 더 반겼다. "어머, 니가 사온 거야?" "아,...... 아니 최마담이 사줬어. 소, 소주 마시면 내일 일어나서 머리 아프다고...... 이것 마 시라더라." 나는 왠지 어색함을 느끼며 겨우 대답했다. "웬일이야, 깍쟁이 마담언니가? 후후, 어쨌든 잘됐다!" 그나저나 큰일이었다. 소주도 부담스러웠는데, 아무리 작은 병이라도 그렇지 독한양주라 니? 게다가 어제도 나는 술을 마셨지 않은가. 나를 제외한 다미, 보영이, 그리고 희창이까지 세 사람은 대충 맥주선에서끝냈지만, 유독 나는최마담과 단둘이서 남은양주도 비웠는 데...... 그렇다면 이틀 연속,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보영이는 이미 방구석에서 과자 봉지까지 꺼내고 있었다. "야...... 너 이것 마셔도 괜찮겠어?" 겉으로는 그녀를 걱정하는 체 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걱정이었다. "뭐 어때, 가게 나가면 쌔고 쌘 게 이런 술인데...... 오늘 잠 자알 오겠다! 이 술 마시고 나 면......" 보영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투둑, 병마개를 돌려 땄다. "어떻게 할까? 잔 갖다 줘?" 응? 그럼 뭐야, 또 병나발이라도 불겠다고? 그러나 그녀 역시 병째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가서 컵을 찾아왔다. "그래, 아무래도 이건 병째 마시기 아깝지?" 휴우....... 그나마 잔술이라는 말이 반갑기는 한데...... "어, 이, 이건 뭐야?" 놀랍게도 보영이가 들고 온 것은 큼직한 맥주 잔이었다. 그녀는 내 앞에 글라스 컵 두 개 를 내려놓으며 어이없게도 배시시 웃었다. "으응,집에 소주잔 같은게 없거든. 뭘, 그냥 이걸로 조금씩 따라 마시면 되지. 자, 받아." 어어.......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녀는엉겁결에 든 내 잔에 콸콸3분의 2 이상을 따르고 있었다. "야, 그, 그만!" 그러나 사정 봐주지 않고 자기 잔에도 그만큼을 따르는 보영이. 오히려 그녀는 나에게 핀 잔조의 말을 건넸다. "어유, 뭐야, 남자애가 쫀쫀하긴...... 그냥 쭉 들이켜면 되잖아. 자, 건배!" 이것 참 - 나는 기가 막혀입을 벌렸다. 그나마 피하려고 했던 술,그것이 소주가 되고, 이젠 양주까지 오다니...... 그것도 맥주 컵으로! 그러나 보영이는 눈까지 찡긋거리면 글라스에담긴 양주를 반이상이나 목구멍으로넘겼 다. 아니 이게 무슨 맥주야? 나는 황당한 눈초리로 술을 들이켜는그녀와 내 손에 쥔 양주 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캬아...... 좋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과자봉지를 부스럭거려 안주까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어머, 뭘 그렇게 놀래? 푸훗, 야, 그런 데서 일하려면 보통 술실력으로 되는 줄 알아?" 그녀는 놀라는 내게, 술 실력까지 자랑하고 있었다. "으응, 난 말이지...... 술 마신 지 오래됐어. 중학교 때부터니까. 야, 근데 넌 안마실 거 야? 자, 다시 한 번 건배!" "야, 기, 김보영!"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너희 학교 교수님이 우리 술집에 놀러온 적 있었어. 아냐, 너희 학교인지 어딘지 는 모르지만, 그때 그교수라는 사람이 그러더라.'건배'의 '건'은,한자로 '마를 건'자라 구...... 그러니까 우리도 잔 말리기!" 푸하......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정말로 보영이는 자기 잔을비워냈다. 아이구 - 저 독한 양주를 단 두 모금에......? "뭐야, 너 안 마실 거야? 얼른, '건배'하라니까......!" 그녀는 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재촉을 해댔다. 아무래도 이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이렇게 마시다간 두어 잔이면 꺼꾸러질 텐데...... "나, 난...... 꺼, 꺾어 마실게." "어유...... 창희 보기보단 통이 작네. 아까 박사장 때려눕힐때는 화끈하더니." 그녀는 곱게 눈까지 흘겼다. 하지만 꿀떡꿀떡...... 목구멍으로넘어가는 독한 기운에 대꾸 는 꿈도 꾸지 못하는 나였다. 으하하 - 목구멍과 식도가 타는 느낌이었다. 머리 속에서 종이울리듯 그 반잔의 양주에 도 골이 띵했다. 첫잔이라 그런지 눈물까지 핑 도는 느낌. 그렇지만 보영이는 아랑곳하지 않 고 자기 잔에 다시 양주를 채워 넣었다. 너느새 양주병이 절반 가까이 비워지고 있었다. "좋아...... 아마 너보다는 내 술역사가오래됐을 테니까. 푸훗, 있잖니,난 정말로 열다섯 때부터 술 마셨어." 아까부터 대충, 아니 어제부터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 여자애는 술 마시면 할 얘기 못할 얘기 - 아까 다미의 임신 이야기처럼 - 가리지 않는, 말하자면 말이 많아지는 그런 술 버릇을 가진 것 같았다. 그녀는무릎을 감싸쥐고 앉아 그런 자기의버릇을 다시 드러내고 있었다. "후후...... 창희 너 알아? 내가 옛날에 그랬지? 나 원래 여기 살지 않았는데 언니따라 왔 다고." 언니...... 아, 최마담. 맞다. 지난 주든가 지지난 주든가, 희창이가 이계집애를 당구장에서 처음 보고 며칠만에 소주방에서 꼬시던 날 - 그 때 그랬었다. 자기는아는 언니 따라 여기 까지 온 것이라고. "나 사실은...... 가출했었어. 고 2때부터...... 그리고 솔직히 그 때부터술집도 나갔고. 그런 데 그 때 처음 만난 새끼마담 언니가 우리 사장언니야." 가출? 뭐 요새 미성년자 접대부들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우리 집...... 콩가루 집안이야. 그래서 두어 번 가출한 거구.하지만 그 때, 날 번번이 다 시 돌려보낸 게 언니였어." 그랬구나, 지금 보영이가 나랑 동갑이니까,이미 이, 삼년 전부터최마담은 이 여자애를 알고 있었구나. "마담 언니는...... 자기는 공부못한 게 한이라고, 그래도너는 고등학교는 꼭 나와라...... 그래서 날 다시 집으로 들여보냈지.결국 난 졸업장 받자마자 돈벌겠다고 언니한테로 온 거고. 물론 집에는 사촌이모 집에서 지낼 거라고 해놓고 말이야." 그런가. 최마담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 어제 신파조의 푸념을 늘어놓을 때는 뭐 그렇고 그 런 술집마담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제법 대견스러운(?) 면도있는 것 같았다. 가뜩이 나 미성년 접대부를 구하지 못해 안달인 요즘 세태 아닌가. 그런데도 가출한 여학생을 돌려 보낸다?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다. 그 동안에도 보영이는 틈틈이 술을 들이켰다. "야, 처, 천천히 마셔!" 내가 어쩌다가 보영이의 집안 얘기가지 듣게 되었는지...... 하지만 그보다는 계속 원샷으로 양주를 넘기는 보영이가 더 걱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단란주점에 나가는 거 집에서는 몰라, 이모도내가 그냥 편의점 같은 데에 서 일하는 걸로 알고...... 내가 술집에서 일하는 건 가게 여자애들하고 언니만 아는 거지." 그랴, 이 이야기는 언젠가 희창이한테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 가지걸리 는 게 있다. 가출했던 보영이를 집에 들여보낼 정도였으면 꽤 아끼는 사이라고 봐야 하는데, 욕심 많은 애니까 딴 짓하지 말고 집에 가라고? 말의 뉘앙스부터 엄청 차이가 있었다. 하여 간 알다가도 모를 게 여자 속이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보영이는 멍하니 술잔을 들고 혼잣말을 계속 이어갔다. "내 소원이 뭔지 알아? 언니한테, 그 단란주점 물려받는 거야. 열심히 해서 마담언니가 마 담자리 놓게 되면, 그 때 내가 마담하고 언니는 그냥 사장만하는 거야. 푸훗, 어때? 내 꿈 이......" 글세, 야무지다고 해야 할까. 하긴 보영이는 고집도 있고 또 워낙 당찬 아이니 허튼소리 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피식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양미간을 찌푸렸다. "X할, 근데 그 개 같은 인간이...... 나를 때려? 두고 보자!" 뭐, 뭐라고 X할?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의 욕지거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유, 열받아! 개자식, 안 그래? 너도 열받지?" 아까 그 박사장에게로 불동이 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예쁘장한 얼굴에서 그런 험한 말이 튀어나오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그런 데서 술 따른다고, 지 세컨드가 내 친구라고 나까지 함부로 해?" "야, 보, 보영아......"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나? 마담 하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지 - 뭐 이렇게 말해줘야 되는 건가...... 그런데 갑자기, 보영이는 내가 상상도 못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 코앞에서. "생각할수록 열불 나네, 어휴, 갑갑해!" 갑자기 그녀가 팔을 들오올리나 싶어니 - 눈 앞에 희끄무레한것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 는 엉겁결에 그 천 조각 같은것에 눈이 따라갔다. 으악, 나는 던져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보영이의 실내복윗 도리였다. 그렇다면! "야, 뭐해, 술 따라 줘!" 그녀는 내게 빈 글라스를 내밀었다. 세상에 - 내 뜨악한눈동자는 황당한 광경을 마주하 고 있었다. 술잔, 하얀 손마디, 뽀얀 팔뚝, 동그란 어깨....... 그리고 마지막으로 따라간 내 시선이 그곳 에 닿자마자 나는 엉겁결에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보영이는 정말로 윗도리를 훌렁 벗어 던진 것이다. 그녀의 상체는 전라였다. 속 안에 브래 지어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 시선이 멋모르고 닿은 곳 - 그곳에는 유두까지 거침 없이 드러난 그녀의 젖가슴이 있었다. "야, 여자 옷 벗은 것 처음 봐? 얼른 술 달라니까!" 그 황홀하게 풍만한 젖가슴을 출렁거리며, 그녀는 잔을 재촉했다. 야, 기, 김보영, 너 양주 두 잔을 맥주 컵으로 다원샷하더니 벌써 취했니? 벌려진 내 입에 서 이런 외침이 맴돌았다. 30 "야, 보, 보영아!" 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유, 애는...... 뭘, 열나니까 옷 벗은 건데!" 답답하다는 듯, 보영이는 내게서 술병을 빼앗아 자작으로 술을 따랐다. 나는 당황하여말 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까 신경질 나잖아, 내가 왜 그런 인간한테따귀를 맞아야 해? 내 서방도 아 닌데." 하여간 참으로 감정이 격한 여자애였다. 마담이 되겠다고 흐뭇한상상을 하던 것은 언제 고, 갑자기 단란주점 앞에서 행패를 당한 기억이 떠오르자 금방 기분이 상해 팍팍거리고 있 었다. "뭐야...... 내가 옷 벗은 게 이상해? 어휴, 나 원래그래. 갑갑한 건 못 참아. 게다가 누가 내 성질 건드리는 건 더 못 참구......!" 글쎄다. 사람이 신세한탄을 하는 스타일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제 최마담처럼술 한잔에 넋두리를 하는 타입도 있을 것이고, 언젠가 내 방에서울고 간 예지처럼 질질 짜는 스타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영이같이 히스테릭한 것은 처음보는 유형이었 다. 생각해 보면 이 여자애의 경우가 가장 솔직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난데없이 남자 앞에서 훌렁 벗어 던지다니...... "야아, 창희! 푸훗, 뭘 그렇게 얼이 빠져있어? 우린 친구 사인데...... 어제 너도 나 옷 벗은 거 다 봐놓구 뭘 그러니? 푸훗......" 코웃음까지 치며, 보영이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도 술 마시는 도중 에 옷벗기 게임을 하자고 우기더니, 오대체 이 계집애는 술만마시면 옷을 벗어 던지는 습 관이 있나 보다. "얌마, 그, 그래도...... 오, 옷 입어!" "뭐? 옷 입으라고? 야, 너까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거야?" 아이구...... 그녀는 이제 나한테까지 시비를 걸 태세다. 하기야 여기는 자기 방이고,옷 벗 는 것도 자기 마음이긴 하지만. "그, 그게 아니라......" "됐어, 아니면 술이나 마셔! 너도 그 인간에게 맞은 건 마찬가지니까......" 그녀는 시선을 두기 민망한 내 코앞에 자기 술잔을 들이밀었다. "자, 원샷이다!" 정말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엉겁결에 따라 든 내 잔에 세게 쨍, 술잔을부딪쳤는데...... 어 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문득 내시야에 그녀의 젖가슴이 출렁이는모습이 들어왔다. 꿀꺽, 내 목구멍에선 술보다 마른침이 먼저 삼켜지고 있었다. "야, 얼른 원샷이라니까!" "아, 알았어......" 하는 수 없이 나는 두 눈을 진끈 감고 다시 한 번 잔에 남은 술을 구멍으로 넘겼다. 싸하 게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퍼졌다. "자, 안주!" 친절하게도, 그녀는 과자를 집어 내게내밀고 있었다. 내가 손을뻗어 잡으려고 하는데, 그녀는 도리돌 고갯짓을 했다. "아냐, 그냥 먹어. 자, 아......" 뭐, 뭐야...... 나한테 안주까지 먹여주겠다고? 멋쩍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녀는끝까지 권했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점점 뻗치는 모양이었다. "야, 뭐 어때? 자 얼른......" 미치겠군...... 보영이는 마치 나를 자기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었다. 도리 없이 그녀가 집어 주는 과자를 받아먹게 되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과자보다 팔을 뻗느라 치켜올려진 그 녀의 겨드랑이 사이, 그 곳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젖무덤이었다. 정말...... 완벽한 크기의, 완벽하게 올라붙은 유방이었다. 꿈속에서 본 선영이누나의 아담 하고 포근한 젖가슴, 예지의 둥글고 풍만한 젖가슴,다미의 거대할 정도인 젖가슴 - 요 근 래에 내가 겪거나 훔쳐본 여러 앞가슴 중에 다른 것은 뺴고 그 탄탄함만 따진다면 여기이 보영이가 가장 근사하다고 해야겠다. 너무 크거나 반대로 너무 작지도않았다. 크기로 따지면 선영이누나와 다미의 중간쯤? 하지만 선탠을 한 듯 까무잡잡한 살결에 윤기가 흐를 정도로 탄력 있어 보이는 게 달랐다. 어휴, 이 계집애 희창이한테도 이랬을까? 맞다-희창이 녀석, 물론 아닐 리 없겠지만...... 저 여자애의 가슴 정도는 충분히 주물럭거렸겠지? 나는 독한 술 기운도 잊은 채 이런 야릇 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얼레, 이것도 다 마셔버렸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영이는 비워진 자기 잔과내 잔에 술을 부었다. 각자 잔에절반쯤 따르고 보니, 양주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어휴...... 한잔의 양주로도 속이 얼얼한데, 그녀는 뭔가 아직도 성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창희야, 우리 한잔 더 마실까?" "야, 미, 미쳤어? 지금 벌써 소주 한병에 양주까지 마시는 건데!" 정말 대단한 여자애였다. 지금 겉보기로는 이렇지만 혹시 이 여자애가 알딸딸하게 취한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아니, 분명 취했을 것이다. 원래 기분이 좋을 때 들어가는 술보다 지 금처럼 홧김에 들어가는 술이 더 일찍 취하는 법 아닌가. 그런데 보영이는 갑자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냐, 그래도...... 니가 잘 모르나본데, 나 같은 일 하는여자한테 이 정도는 기본이야, 좋아, 그럼 우리 이거 마시고 입가심으로 맥주 마시자." "야, 아, 안 돼! 나 지,집에 들어가야 돼!" 놀란 내가 펄쩍 뛰자, 그녀는 다소 망설여지는 듯 머뭇거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자기 잔 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집, 집이라...... 에이,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되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들어가 옷만 갈아 입고......" 쿵, 내 머리에 무슨 바위가 날아와서 부딪힌느낌이었다. 지, 지금 이, 이 계집애가뭐라 그런 거야! 자기 잔의 양주를 또 원샷으로 들이켜고도, 보영이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잖아, 너 내일 몇 시 수업인데?" "오, 오후......가 아, 아니라......" 내일은 수요일, 오전 수업이 없기는 한데 - 나는 멋모르고 내뱉은 말을 당장 후회했다. "후훗, 그럼 잘 됐네. 여기서 자고 늦게 꺠도 상관없잖아." 나는 당장 내 귀를 의심했다. 말도 안 된다. 술이야 더 마실 수 있어도, 지금 여기는 여자 혼자 사는 방 아닌가. 게다가 이 여자애는 내 둘도 없는 친구의 여자인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같이 자지 말아 달라는 최마담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희창이녀석 을 떠올리니 도저히 양심상 견딜 수 가 없었다. 보영이가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계집애라면 얼싸코나 나도 침을 흘렸을 테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었다. 여태껏 그녀의 페이스에 끌려 다 녔지만 이번만큼은 남자다운 단호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안 돼, 그만 마셔. 너 더 마시다가는 취하겠어." 한껏 위엄을 갖추려 가장한 목소리. 그러나 내 대꾸에 보영이의 눈섭이 묘하게 치켜졌다. "안 돼......?" "그래. 정 마시고 싶으면 내 술까지 마셔. 아니면 나 나간 후에, 너 혼자 사다 먹든가." 흐흥, 그녀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마시라면 못 마실까 봐?" 보영이는 냉큼, 얼추 절반쯤 담긴 내 잔을 들더니, 채 말릴 틈도 없이 곧바고 목구멍 속으 로 털어 넣었다. "어, 어, 야 김보영!" 아니 얘가 도대체 몇 잔을 마시는 거야...... 방금 전 따라놓은 막잔까지 다 마셨으니, 으앗, 지금 얘가 양주를 글라스로 네댓잔이나 마신 것 아냐, 그것도 계속 원샷으로! "크으...... 뭐? 니가 나 먹으라며? 왜, 아까워? 그럼 더 사다 마시자니까!" 아이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두 시간도 안 돼 혼자서 소주 한 병 병나발, 양주 거의 한 병 다...... 거기에 안주라고 놔둔 과자봉지에는 채 두어 번도 손을 안 댔는데. "후우...... 이번 술잔에는 보영이도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그렇지, 변변한안주 없이 계속 원샷으로 마시더니...... "야, 괘, 괜찮아?" 나는 겁이 더럭 났다. 경험에이하면, 아무리 장사라도, 아니술고래라도 저렇게 마시면 순간적으로 술기운이 확, 돌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푸훗, 괜찮아......? 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 고개를 숙인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임마 너 지금......!" 얼마나 마신 건지 알아 - 라고 야단을 치려는데, 그녀가 배시시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 를 들었다. "마실래, 안 마실래?" 뭐, 뭐라고? "마실 거야, 안 마실 거야?" 수, 술 더 마시자고? "아, 안 돼, 그, 그만!" "정말이지? 그럼 내가 가서 사온다!"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야, 어, 어디 가!" "왜, 술 더 마시려면 내가 나가서 사오라며!" 몸을 일으킨 보영이 - 얼레, 그런데 그녀는 옷걸이 대신 곧바로 문고리를 붙잡고 있었다. 으악, 이, 이 여자애가 정말로 취했나? 지금 윗도리도 걸치지 않았잖아! 반바지 하나만을 달랑 입은 채, 지금그녀는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화들짝 놀란나는 엉겁결에 그녀의 매끈한 맨종아리를 붙잡았다. "너, 너 돌았니? 옷도 안 입고 어디를 간다는 거야!" "놔, 이거! 무슨 상관이야? 마시려면 알아서 마시라면서!" 맙소사, 장난이 아니었다. 훤히 드러난 젖가슴을 덜렁이면서 보영이는 막무가내로다리를 빼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야, 야!" 혹시라도 밖에서 볼까 봐,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한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그녀의 다 리께를 안고 끌어당겼다. "놔, 안 놔? 넌 가려면 가. 난 술 더 마실 거란 말야!" 그러려면 옷이나 입고 나가든지 - 하지만 술 취한 이 여자애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녀는 내 손아귀에서 몸을 빼려 안간힘을 쓰면서 동시에 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미칠 노릇 이었다. 엉성한 자세로 한 손으로문을 막은 채 다른 손으로그녀를 제지하려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야, 자, 잠깐, 알았어, 이, 일단 좀 앉......" 앉아서 얘기하자. 정 그러면 내가 나가서 사올게, 하는 말을 하려는데...... 순간적으로 철커 덕, 옆구리가 시큰했다. 멋대로 힘을 쓰던 보영이의 무릎이 내 옆구리를 내지른 것이다. "윽, 이, 이 계집애가!" 이건 정말 무의식즉인 반사행동이다. 내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감아치기를 하듯 방구석으로 안아 던진 것이다. 다행이었 다. 아무리 보영이가 난리를 쳐도 남자인 내 힘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나마요행으 로 그녀는 방 안의 이불더미에 나가 떨어졌다. "어, 너, 너 나 밀었어!" 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나동그라진 보 영이가 스프링처럼 발딱 일어서더니 거세게 내게 달려들었다. 어, 어 - 미처 자세도 못 갖춘 나인지라 갑작스레 덤빈 그녀를 막지 못했다. "씨, 너 너......!" 쿵,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든 그녀의 두 팔을 붙든 것도 잠시, 그 당혹스런 태클에 나는 뒤 로 몸이 넘어가고 말았다. 물컹, 그 순간 보영이의젖가슴이 내 가슴팍에 거세세부딪쳐 왔다. 방바닥으로넘어진 나, 양손으로 붙든 그녀의 두 팔, 버둥대느라내 몸 위에서 출렁이며 마찰해오는 젖가슴 - 우린 그렇게 묘한 자세를 이룬 것이다. 졸지에, 나는 그녀를 품안에 안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두 맨유방이 리드미컬하게 내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연한 정사 31 "이, 씨...... 창희, 너!" 그녀는 내게 두 팔을 잡히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버둥거렸다. "야, 기, 김보영!" 나는 밑에 깔린 채로, 몸부림치는 그녀를 제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가하 도 격하게 몸을 흔들어대는 바람에 진땀이 날 정도였다. 그 때, 정말 땀이 났던 것일까. 내 손에서 그녀의 한쪽 팔목이 빠져나갔다. "야, 니가 뭔데 날 미는 거야!" 동시에, 보영이의 주먹이 세게 내 가슴을 몇 대 쳤다. 벌렁 자빠진 위치 탓일까. 남자처럼 정권이 아닌 손날 부분으로 맞는 것인데도 가슴팍이 얼얼했다. 아구구, 난 다시 그녀의 팔을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한쪽 손목을잡히고도 계속 내 어깨며 팔뚝을 때렸다. "얌마, 그, 그만해! 아, 아프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전혀 멈출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할 텐데, 지금 그녀와 나 사이는 거의 찰싹 달라붙다시피 하여...... 나는 엉겁결에 팔꿈치를 디밀어 그녀의주먹을 막으려 했다. 아차,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멈추어야 했다. 그녀의 몸을 떼내려던 손아귀에 - 아슬아슬한 부위, 그녀의 맨가슴이 닿았기 때문이다. 아찔한 순간, 손 안으로 가득 쥐어지는 보영이의 젖가슴. 매끄러운 그 탄력에 나는 후닥닥 손길을 거둬야 했다. 도대체...... 아까처럼 이 여자애를 밀치면 다치기라도 할 것같고, 또 밀어내려 해도 어디 에 손을 대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그렇다고 보영이를 이대로 둘 수도 없지 않은가? 사실, 그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내 얼굴을 할퀴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엉큼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가없었다. 아무래도 보영이는 술기운이 많이 올라온 것 같았고...... 그 방법이란 보영이를 통째로 안아버리는 것이다. 즉 마치 권투에서 클린치를 하듯이,거 리를 두지 않는 방법이다. 방바닥에 등을붙인 쪽이 나였으므로, 그녀의 매운 손길을피할 방도는 그것이 유일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의 몸 동작은 점점 더 야릇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를 밑에 깔고 누르는 자세로 시작된 몸싸움이, 그녀의 억지스런버둥거림으로 인해 이제는 완 전히 부등켜안은 자세가 되고 말았다. "야, 보, 보영아, 미, 미안해...... 아, 아깐 고의가 아니니까, 제, 제발 참아라, 응?" 얼싸안은 채, 무슨 말로든 그녀를 달래야 했다. "이 씨, 이 씨이......" 하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보영이는 여전히 씩씩대며내 어깨며 옆구리에 헛손 질을 해댔다. "미, 미안하다니까...... 그, 그만 하자, 응?" 내 설득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다소간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그런데 내 머리속에 조금 전까지 몰랐던 촉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차차......지, 지금 손이 어디에 가 있는거 지? 손바닥이 너무나 매끌거리는 감촉을 전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보영이의 등과 머리 결이었다. 그것도 가릴 것 하나 없는 맨살- 실제로 내 품 에 꽉, 가득 껴안느라 내 한쪽 손은 그녀의 허리께 등 한가운데에, 나머지 손은 좀더 위쪽 그녀의 목덜미를 머리카락과 함께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 그와 함께, 아마 열이 났었던탓이겠지만, 그녀의 몸뚱이 전체가 뜨겁게느껴지고 있었다. 따뜻했다. 아니 뜨끈했다. 마치 난로를 껴안고 있기라도 한 듯이. 다시 한 번, 내 가 스팍에 그녀의 젖가슴이 느껴졌다. 머리 속이 아뜩해지면 가슴에 뭔가가 맺힌 듯 울렁거렸다. "아, 알았어....... 이, 이제 놔줘......" 아뿔싸, 내,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어느새 그녀는 버둥거림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잠 깐 아찔한 생각을 하느라, 나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귀밑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어휴....... "어, 어...... 미, 미안!" 나는 얼른 그녀를 놓아주었다. 민망했다.어쨌든 그녀의 맨살을 느끼느라 잠시헛생각에 빠졌던 상황이었다. "후우......" 내 품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그녀는 내 옆에 돌아누우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그렇게내가 꼭 껴안았었나? 슬쩍 곁눈질을 해보니, 숨을 고르느라 보영이의가슴이 작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꿀꺽, 야릇했던 방금 전의 상황에 마른침이 삼켜졌다. "괘, 괜찮아? 그, 그러니까 술 그만 마셔. 너 벌써 취했단 말야." 그러나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여전히 쌔근거릴 뿐이었다. "보, 보영아......" 혹시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것일까. 나는은근히 겁이 났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또무슨 행동을 벌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행여 눈물이라도 터뜨리거나...... 술을 더 마시겠다고 고집 부리면 큰일인데...... "불 꺼줘, 눈 부셔." 의외였다. 벌러덩, 천장을 향해 누웠으니 형광등불빛이 눈에 부신 모양이었다. 부,불을 꺼달라고......? 다소 의아한 부탁이지만, 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했다. 채중, 벽을 더듬어 스 위치를 내리니 어둠과 동시에 창을 통해 달빛이 들어왔다. "야...... 너 괜찮은 거지? 술 더 안 마실 거지?" 제자리로 돌아온 나는, 슬쩍 그녀에게 다가앉으며 눈치를 살폈다. "몰라, 난 잘 거야!" 홱, 보영이가 등을 보이며 모로 돌아누웠다. 소동을 피워서 멋쩍어진 걸까. "저, 정말 잘 거지?" 묵묵부답, 대꾸가 없었다. 어쨌든 술타령을 않으니 다행이긴 한데...... 나는 어쩐담? 얘가 곱게 잔다손 쳐도, 그녀 말처럼 여기서 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이 좁거나 이 여자애가 싫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내가 아침에 몰래 빠져나간다 해도, 언젠가는 이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지 모른다. 희창이 - 나는녀석을 떠올렸다. 설사 지금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해도, 친구인 그에게 이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의리...... 하긴 그런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행여 녀석이좋다고 허락을 했다고 해도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머뭇거릴 계제가 아니다. 일단 결심한 나는 조영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슬그머니 나갈 생각이었다. 가만히일어나 서, 문고리를 살짝 비틀다가...... 나는문득 저 여자애가 아무 것도안 입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비록 불을 껐기에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달빛 에 비쳐 보영이의 상체가 허옇게 드러나 보였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불도 덮지 않고 있었다. 술도 많이 마셨는데, 저렇게 뒀다가는아침까 지 나자빠져 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이불이라도 씌워줘야지...... 나는 부스럭거리는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을 쓰며 방구석의 이불더미에서 담요 한 장을 빼냈다. 엉거주춤 담요를 들고 다가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살짝 그녀를내 려다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지만 그녀의 얼굴 윤곽이 뚜렷이 떠올랐다. 예뻤다. 오뚝한 콧 날, 짙은 눈썹, 도톰한입술 - 만약희창이와 아무 상관없는 계집애라면......아니지, 아니 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그 아래에는...... 모로 누운 탓에 한쪽으로 몰린 유방이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뿜듯 뽀얀 둥근 곡선이 또렷이 도드라져 보였다.다시금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아래...... 적갈색의 작지 않은 정점부분이 보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담요자락을 쥐고 가만히 아래쪽부터 이불을 덮어 나갔다. 그러나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의 목 부근까지 올린순간...... 화들짝 놀라 뒤로 나동그라 질 뻔 했다. 그, 그녀가 눈을 뜬 것이다. 순간적으로 관자놀이에까지 맥박이 느껴지도록 그 자리에얼 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직후, 나는 엄청난 일을 당했다. 순식간에 보영이의 두 팔이 담요 속에서 쑥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이 순식간에 엉거주춤하게 굽힌 상태로 있는 내 얼굴 위로 뻗어왔다. 엇,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쥐었다. "보, 보영아, 읍!" 내가 다가간 것일까, 그녀가 끌어당긴 것일까.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에맞닿았 다. 숨마저 멈춰버린 내 입술위로 그녀의입술이 다가왔는데 - 아,아야!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점했다는 느낌도 잠시, 즉각 나는 아랫입술의 고통에 눈물이 핑도는 것을 느껴야 했 다. 보영이가 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 것이다. 아파, 아프단 말이야! 난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쥐고 밀어내려 했다. 어, 어어...... 그런 데 그 동작이 잠시 유보되고 말았다.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 아랫입술을잘근거리며 깨물던 그녀의 이빨에 힘이 빠지고 대신, 으와와, 그녀의 입술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너, 뭐, 뭐하는 거야...... 보영이의 입숼이달착지근한 술냄새를 풍기며 거세게 내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32 좀 전엔 아랫입술의 아픔으로 눈물이 핑 도는가 싶었는데,이제는 머리 속이 핑핑 돌 고 있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일 벌어지고 있는것인가. 두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안 듯이거머쥔, 보영이는 내 입술을 열심히 빨아댔다. "아...... 맛있어!"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떼어진 입술 사이로 보영이는 조그만 탄성까지 흘렸다. "야, 읍......!" 곧 다시 입술이 덮쳐왔고, 나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미처 반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전혀 예기치 못한 부분이 내 입 안을 더듬어 왔던 것이다. 이럴 수가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혀였다. 보영이의혀가 억지로 내 입술 사이를 더듬 으며 들어섰다. 그제야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반사적ㅇ로 그녀의어깨 를 밀어냈다. 그러나 보영이는 끝내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양손으로 낸 얼굴을 끌어당기며 입술과 혀를 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못 볼 것을 봤을 때처럼, 고개를 톨고서야 그녀의 얼굴을 떼어낼 수 있었다. "후아, 너, 너 왜 그래!" 놀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보영이는 두 눈을 감은 채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막무가내로 입 술을 찾아댔다. 반강제로 그녀의 몸을 밀어내자 그녀는 살포시눈을 뜨고 콧소리로 물어왔 다. "왜....... 내가 싫어?" "무,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이, 이 계집애, 정말 취한 것 같다. "대답해 줘. 나 어때? 나 예쁘니, 안 예쁘니?" "기, 김보영, 너, 너 술 취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데없이 남자 입술을 도둑질한 것도 모자라, 이 무슨 실없는질문이 란 말이냐...... 하지만 그녀는 내 목덜미를 감은 손에 힘을 주며 재촉했다. "나 좀 똑바로 쳐다봐, 응? 왜, 나 같은 애는 예쁘지 않아?" 미쳤군, 미쳤어 - 얘가 무슨 공주병이라도 걸린 거 아냐? "너, 너...... 지, 지금 제, 제정신이야? 무슨 짓이야, 이게!" 하지만 보영이는 어둠 속에서도 내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눈을 맞춰왔다. "아니, 나 아직 멀쩡해. 정말이야. 난 술 안 취했어! 그러니까 대답해 줘, 나 어때? 마음에 안 들어?" 그녀는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이건 말이 안 된다. 대답할 일고의 가치도 없 다. 아니, 이 여자애는 지금 엄청 마셔댄 술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말해줘 ,얼른!" "야 보영이 취했어, 취했다구!그, 그러니까 일단 그냥 자 응? 나 강테니/가 ,내일 아침에 전 화할게." 억지로라도 그녀를 도로 누이려는데, 보영이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대댑해!"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몸을 빼내려는데도그녀는 여전히매달린 손에 힘을 조고있었다. 꼼짝달싹못하게된 나는 이제 자세가 바뀌어 엉거주춤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일 수밖에없었 고, 보영이 역시 나를 따라 거의 앉은 자세사 되었다. "대답하기 전엔 안 놔줄거애. 빨랑 나 예뻐?" 어휴.......돌아버리겠군!' "아 알았어 . 그래 너, 너 예뻐 . 너도그렇게 생각해, 됐지? 아무 생각 없었다. 어떻게 하든 이 난처한 상황에서 빨리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렇지만그 대답에 불꺼진 방 안인데도 보영이의 눈이 반짝였따. "정말이지?" "그, 그래. 정말이야. 넌 정말로 예뻐. 그러니 그, 그만 자라, 응? 나, 나이제 집에 갈게!" 그제야내 목돌미를 감은 보영ㅇ의 본이 풀리고 있었따. 휴, 다행이군. 엉섭셜에 그녀의 어깨를 붙든 내 손에도힘이 풀렦다. 마치 무슨 독거미에세 사로잡혔던 느씸,그런데 그것이 내의 방심이었다. 놓아줄 것 같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내어 깨를 거세세 밀어붙인 것이다. "어, 어,야!" 그러나 보영이의 동작은 신속, 정확, 그 자체였다.아까부터 몸싸움으로 기운이 빠진 탓일 까, 내 몸은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재빨리 자세를 역전시킨 그녀가 순식간에 내 허리를타 고 앉았다. "뭐,뭐하는 거야?" 어느새 보영이가 완벽하게 내 몸을 타 누른 자세가 되었다. 내 팔뚝마저 얼결에쪼그린 그녀의 다리 아래로 깔리고 말았다.그리고 연이은 그녀의 동 작에 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자세인가. 그것만으로도 황당한데- 그녀가두 손으로 매 팔을붙잡아 올료 바닥에 내리누르는 탓에, 내코앞으로 그녀의 신체부위중 한 곳이 저돌적으로 다가옸던 것이 다. 무의식적으로 화들짝,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불 꺼진 방안, 창틈으로 들어오는 휘미한 달빛에, 허옇게 반사되는 계곡이 아찔하게 딜이 밀어졌다.ㅏ 내 얼굴위로 밀어 붙이듯내려 온 그녀의 젖가슴이었다. "기, 김보영, 이, 이거 안놔!" 나는 다깁히 도리질을 치며 소리쳤다." 그래고 여전히히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싫어, 아직 가지마. 하나만 더 대답해." "야 이, 이거나 놓고 얘기해!" "인=안돼, 일어나고 싶으면 내가 묻는대로 대답해 봐!" "뭐, 뭘?" "나 좋아, 싫어?" 아아, 이 계집애는 정신이 나갔다. 맛이 간게 틀림없다.ㅏ "나 마음에 안 들어?" "임마, 그,그건 이렇게 물어 보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잖아. 그러니 비키라고.....란 말을하려는데, 그만 내 입이 얼어붙고말았다. 보영이가 허리를 숙이기 시작한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뺨 위 ,그곳에 양쪽으로눌려지 는 부드럽고 푹신한 그것! "어,어.....!" "말해봐, 나같은 타입 싫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이냐. 지금 내 입술은 자꾸만그녀의 풍만하 계곡 사이로 파 묻혀 가는데. "얼른 대답해 줘. 나 마음에 들지, 그렇지?" 이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억기로라도 힘을 쓰면 보영이쯤은 얼마든 당해내고 몸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맨가슴이 얼굴에 와 닿는 순간, 나는 그만 머리 속이아득해져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만 상태였다. "빨랑, 빨랑!" 으으으...... 그녀는 숫제 이제는 내 몸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대답을 재촉해댔다. 달리 택할 방도가 없었다. 동의의 표시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보영이는 물러섰다. "푸훗, 좋았어...... 이제 됐어!" 나는 완전히 얼이 빠진 느낌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득한 느낌이었다. 여자의 몸일 부가 이렇게 훌륭한 고문기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 그럼 이, 이제 비켜 줘...... 나, 난 가야 해!" 정신을 차리느라 숨을 헉헉거렸다. 이게무슨 꼴이란 말인가. 아까 술집에서는주먹까지 휘두른 놈이, 직므은 여자애 밑에 깔려서 꼼짝도 못하다니. 그런 나를 비웃는 듯 보영이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흥, 왜? 희창이 때문에?" 그 순간 확, 내 머리 속에 불이 밝혀졌다.희창이 - 녀석마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맞아,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이 여자애는 내 친구의 여자친구다. "다, 당장 비켜, 김보영! 난 집에 가야겠어!" 얼굴이 후끈거리며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친구의 여자방에서 대체 무슨 짓 을 하는 거냐...... 악을 쓰듯억지로 허리를 일으키려는데, 순간보영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싫어, 안 돼! 가지 마!" 멈칫 놀라는 틈을 타, 그녀의 몸뚱이가 더욱 거세게 내 허리를 깔아뭉갰다. "안돼, 가면 안돼! 희창이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난 지금 그 애랑 아무 상과없어!" 그녀의 화가 난 둣한 말이 계속 됐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고 가! 그 애는 신경 쓰지 마. 난 그애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니 라구......!" 그 당돌한 대답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 관계가 아니라구? "그래, 그 애랑 만나기는 해. 그렇지만 그 애가 좋아서는 아냐, 그리고 걔도 진짜로 날 좋 아해서 그러느 게 아니란 거 다 알아!" 얘, 애가 지금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바로며칠 전 토요일, 강변 차 안 에서 아무튼 진한 짓을 벌였다면서,그게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니?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도 알잖아, 희창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럴 수가! 기겁을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희창이의 속마음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는 것인가? 그 녀석이 자기의 외모와 몸매에 반해서, 또 그렇고 그런 일을 하니까, 쉽게얘 기해 섹스 파트너로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가지 마. 너는 남자 아니야? 나한테 그랬잖아. 내가 좋다고, 예쁘다고!" 아연실색할 일이었다. 예쁘다, 좋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사실 보영이의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말이 사실이지만, 그게지금 나와 무슨 상관인가. 희창 이와 나는 불알친구 사이란 말이다. "안 돼, 못 가게 할거야...... 여기서 나랑 같이 자!" 기절할 것 같았다. 최마담은 일찍 들어가라고 애원, 보영이는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한다? 33 안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왜 이 여자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너 미쳤니? 저리 비키란 말이야, 난 집에 가겠어!" 다시 한 번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보영이의 육탄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싫어, 안 돼, 가지 마!" 버둥거렸다. 허리를 틀고 최소한 몸이라도모로 세우려 한간힘을 쓰는데, 보영이는아예 온 체중을 실어 내 몸뚱이를 내리눌렀다. "야, 이...... 읍!" 으아아, 다시 그녀의 입술이 내 얼굴 위로 덮쳐왔다. 미, 미쳤어, 무슨 짓이야- 그러나 내 목소리는 입술이 막힌 탓에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보영이의 공격은 나를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따. 나는 팔을 빼내 그녀의 어깨를 붙 들었다. "이, 이러지 말란 말이야!" 기를 쓰고 그녀의 몸을 떼어냈다. 170이 넘는 늘씬한 그녀의 몸매는, 안 그래도탄탄함을 더해 무척이나 버거운 지경인지라 나는 일단 그녀의 허리를 세우고는 숨을 돌려야 했다. "그, 그만 둬. 기, 김보영, 너랑 나는......" 그 때였다. 힘을 쓰느라 인상을 찡그린 내 뺨 위로 방울방울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뭐, 뭐지? 이건...... 따뜻했다. 콘잔등 위로 똑똑 흘러내리는 따뜻한 액체...... 눈물! 틀림없이 내 몸 위의 보영이에게서였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 여자애가 갑 자기 코피를 흘릴 리도 없을 것, 눈물임이 분명했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 확인한 나는 당황하여 꼼짝을 할 수없었다. 내가 때리거나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이 계집애가 왜 이런지? 당혹한 눈을 들어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수그린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 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못 됐어, 남자들은...... 정말 못 됐어!" 그녀는 나의 몸에 올라탄 채 분을 삭이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조그맣게 혼잣말처럼 읊조리 고 있었다. "자기들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자기들이 그거 하고 싶을 때는강제로도 그러면 서......" 얼레, 난데없이 웬 남자들 얘기할까. "나 같은 여자는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그러고 싶을 때는 돈도 마음대로 쓰고...... 그런 데 왜 여자는 못 그러게 하는 거야?" 지, 지금 얘가 얘기하는 것은......? "대답해 봐. 왜 나는 남자랑 그러고 싶으면 안 되는 거야? 왜 여자는 남자한테 그런 얘기 하면 안 되는 거냐구!" 그녀의 얘기가 무슨 뜻인지 비로소 짐작이 간 나는 머리속으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그 녀는 문득 고개를 들고 내 시선을 피하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알아, 나 술 취했어. 그래, 그래서 누구랑 자고 싶어. 그게 뭐 잘못된 거야?남자들은 그 럴 때 창녀한테 가잖아. 술집에 가잖아...... 자기들이 그짓하고싶을 때는 나 같은 여자들한 테 돈까지 주면서, 그러면서 꼬시잖아. 그거 한 번 해 달라고 별짓 다하면서 왜?" 그녀의 엉덩이 밑에 깔린 채 나는입을 떡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나더러 어떤 대답을 하라는 것인가? 그제야 보영이의 눈가에 뭔가 반짝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말해 봐. 창희 너도 그렇지? 희창이도 똑같아. 내가 좋아서, 나랑 사귀고싶어서, 그래서 나한테 잘해주는 게 아냐. 그저 나랑 자고 싶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 내가 몸 주기를 원하니 까 그런 것 아냐? 나도 다 알아. 그래서 그 애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 싫었어."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희창이, 내가 이런 여자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아하기는 해.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렇 고 그런 년이라고 해도, 비록 돈 받고 몸을 판다 해도, 난 내가 필요로 할 때 걔를갖고 싶 어. 그 상대가 누구건, 난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원할 때 그러고 싶단 말이야. 두고 봐.그 애가 그걸 깨닫지 못하는 이상, 희창이는 나한테 헛물만 켤 테니깐!" 토요일, 녀석의 차 안에서...... 그 일을 얘기하는모양이었다. 그랬구나. 그날 보영이가 왜 그토록 결정적인 것을 거부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창희 너 아까 그랬지? 내가 좋다고, 예쁘다고 말이야. 그럼 사실대로 얘기해 봐. 나랑 자 고 싶지 않아? 희창이건 누구건 신경 쓰지 말고, 솔직한 니 마음을 말해 봐." 보영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눈초리를 나에게 돌렸다. 지금 그녀가 보이는 눈물은 슬픔이나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에 찬 눈물방울이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그냥 니 생각 그대로 대답해 보라구. 왜? 나는 부족해? 나 정도로는 그 짓 할 마음이 안 생기니? 니가 그랬어. 나 예쁘다고, 좋아한다고!" "그, 그건......!" 대꾸할 말이 없었다. 정말 이 여자애의 얘기대로내 심정을 말한다면, 그렇다 - 나도 이 런 늘씬하고 섹시한 계집애아 정사를나누고픈 욕구는 당연했다. 어느 누가마다하겠는가. 보영이 같은 몸매와 얼굴의 여자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경우가 틀렸다. 희창이와 보영이, 그들 둘이 좋아하건싫어 하건 어쨌든 그녀는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 점찍은 여자애.그리고 그러기 위해 공을 들였 으며, 내가 알기로는 아직 그 노력의 대가 - 그가 원하는 것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잖은가. 상황이 어찌 됐든 둘도 덦는친구가 그토록 원하는 여자를 가로챌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그들 사이의 문제이다. 생각을거듭해도, 나는 그와의 의리를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희창이는 어찌 생각할 것인가? 망설이는 내 표정을 보며, 보영이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을 했다. "아직도 희창이가 신경 쓰이니? 그럼 너도 독같아. 날 꼬셔서 데리고 자려는 희창이랑 똑 같은 거라구. 너도 결국은 여자를 한낱 잠자리 상대로만 생각하는 거야. 왜냐면 넌 니가원 하는 상대만을 찾지, 여자가 뭘 원하건 관심조차 없으니까. 안 그래? 너도 그렇게 여자를 꼬 실 거지? 니가 원할 때만, 니가 선택해서. 그렇지?" 이제 보영이의 얼굴엔 찬바람마저 도는 듯 했다. "흥, 정 그러면 걔 도와주지 그래? 나한테 부탁하라고,희창이랑 자달라고, 니 친구랑 섹 스해 달라고 나에게 애원하란 말이야." 이런...... 황당한 논리. 또한 궤변이었다. 그러나 경악스러울 정도로 놀라운것은 순식간에 쏟아진 그녀의 말들이었다. 지금 보영이의 생각에는 희창이는 그것만을 원하는 남자요, 또그러기 위해 별짓을 다하 는 인간이고, 나는 묵시적으로 그런 녀석에게 동조하는 같은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 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은 얘기였다. 사내들이 하는 만큼 자기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 그런데지금이 그렇다 - 확고 한 그녀의 주장인 것 같았다. "야, 기, 김보영, 니, 니 얘기는 말도 안 돼. 나, 난 지금 희창이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구!" "그럼 뭐야? 왜 내가 묻는 말에 대답 못하니? 말했지? 아무것도 상관하지 말고 니 속마음 을 알고 싶다구. 뭐니? 나 같은애는 잘난 너한테 부족한 거야? 더예쁘고 더 글래머여야 돼?" 황당했다.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된단 말인가? 내 본심대로 말을 해야 하나? 이제 보영이 는 더 이상 힘을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원하고 있다는 거구, 난 그걸 먼저 떳떳하게 밝혔어. 그럼 너도니 마음 을 얘기해 줘. 이젠 니 차례란 말이야!어서 말해 봐, 나 갖고 싶지 않니?나랑 자고 싶지 않아?" 어휴...... 깔린 몸뚱이만큼이나 궁지에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적어도 그녀가 힐난하는 부류의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지금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어, 어떻게 대답하란 말이야?" "얘기했잖아. 솔직한 니 마음을 얘기하라구." 할 수 없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정말 소, 솔직한 내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어휴......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 그래...... 나, 나도 너랑 자고 싶어. 가, 같이 자고 싶은 게 사실이야. 하, 하지만......" 엉겁결에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그래, 내 진짜 속마음은! "됐어...... 정말이지? 니 진심이지?" 갑자기 보영이의 손가락 하나가 내 입술을 눌렀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좋았어.. 그럼 니가 원하는 대로 해. 뭐라고 더 얘기할 필요없잖아?" "야 이, 임마, 그, 그래도 나는......!" 그럴 수 없어. 우리가 아무리 서로를 원해도...... 이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갑자기 말 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 말 하지 마!" 다시 보영이의 입술이 내 얼굴을 덮쳐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혀는이제 거칠 것 없이 내 입 속으로 들어왔다. 저항해야 했다. 저항하는 것이 옳았다.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쥐고 밀어내려 했 다. 그런데...... 정말, 긴 키스. 이렇게 능수능란한 입맞춤은 진정 처음이었다.그녀의 기교에 눌려 내 입술과 혀는 마음껏 농락당하고 있었다. 머리 속은 온통 가물가물해져 갔고, 거부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제발, 안 돼...... 우리는......!" 그것은 내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상상만의 외침이었다. 아까처럼, 맛있다는 듯보영이는 입술과 혀로 내 입 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으으.....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내 손은 나도 모르는새그녀의 두 뺨을 쥐고 있었 다. 한참동안, 아니 그렇게 느껴진 것뿐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와 나의 혀는 오랫동안 끈적한 시간을 보낸 뒤에야 풀어졌다. "후우, 보, 보영아......!" 안 돼. 우린 이래선 안 돼...... 아직도 내 의지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으나, 그게말로 되어 나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이건 내가 원한 거야. 희창이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 난 비밀 지킬 자신 있 어." 보영이로서는 마지막 다짐이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얼어붙은 내 입술은 아무 말도하 지 못한 채 애꿎은 그녀의 이름만 되뇌고 있었다. "기, 김보영......" "아까 얘기한 것처럼 난 상관없어. 아니, 너만 원하면 되는 거야. 우리 둘이 서로 원해. 그 럼 됐잖아?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지금 서로가 원하니까!" 까무러칠 노릇이었다. 도무지 내가 뭘 어째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때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아래쪽으로 점차 멀어져 갔다. "아......!" 이건 그녀가 아닌 내 입에서 튀어나온 탄성이었다. 그녀의손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린 것 도 잠시, 내 아랫도리로 시원한 느낌이 전해졌다. 찰칵, 그녀의 손이 내 허리띠 버클을 끌러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이르러서도 꼼짝할 수 없었다. 어느새, 보영이의 손이 내 하복부를 완전히 밖으로 드러내놓은 것이다. "그래, 나도 니가 이럴 줄 알았어......!" 이번엔 보영이의 탄성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고개가 살며시 아래쪽으로 숙여 졌다. 뭐, 뭐하려는 거지? 아, 안 돼! 그건 안 돼! 그녀가 취하는 동작의 의미를 알아챈 나는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그녀의 머리채를 붙들었다. "시, 싫어, 그, 그러지 마!" "싫어? 이렇게 안 해줘도 괜찮아?" 다행히 보영이는 이 상황에서만큼은 내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사실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 녀석은 허공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멍청하게도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하지 않을게!" 그녀의 고개가 다시 위로 돌아왔다. 안 된다. 이건 옳지 않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내 이 성은 저항하고 있었다. 바싹, 말라붙은 입술로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 의사를 물었다. "보...... 보영아...... 너, 너 정말 이러고 싶니?" "응, 난 그래!"ㅏ.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보영이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너도 날 원하고 있어. 넌 아니라고 하겠지만 니 몸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그러니 너도 원한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 줘. 알았지? 우린,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하면 돼." 나의 분신은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자꾸만 따로노는 머리통과 몸뚱이가 답답할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잠시 놓았다. 나는 안타까운 눈길로 그녀가 벌이는 행동을 지켜볼 뿐 이었다. "미안, 잠깐만!" 그 어두운 불빛 안에서도 실루엣이 잡혔다. 보영이는 손을 놓고 다음 작업을 진행하고 있 었다. 두 손으로 반바지를 쥔 그녀는 잠시 쪼그려 앉은 자세로 무릎을 세운 뒤 한꺼번에 손 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미끄러지듯 그녀의 헐렁한 실내복 반바지와 그 안의 마지막 보루 - 자그마한 팬티 - 가 순식간에 함께 내려졌다. 살며시,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한꺼번에 벗겨진 반바지와 팬티를 발목에서 빼냈다. 그리고 다시 아까의 자세로 돌아오자,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뽀얀 하복부가 떠올랐다. 34 창밖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보영이의몸이 허옇게 반사되고 있었 다. 아까부터 출렁이며 드러나 있던 그녀의 젖가슴,잘록한 허리, 매끈하 허벅지...... 그리고 그 정가운데에 검게 물든 수풀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보영아......!" 이젠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로 내 자신을 맡기는 이외에는,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보영이는 이제 차라리 차분해 보였다.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자신의 욕구를 밝히는 여 자, 남자와의 정사를 위해 스스로 옷을 벗는 여자......,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희창이나 다른 남자처럼, 가식 속에 욕구를 감추며 - 침대 위로 이끌기 - 속마음을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그것이 솔직한 일일지도 몰랐다. 두 눈이 감겼다. 모든 것을 멈추게하고 싶었다. 동작을 멈출 수없다면, 차라리 감정과 생각이라도 지우고 싶었다. 이 어둠처럼, 이 순간의 기억은 머리 속에서 까맣게지워버렸으 면 좋겠다. "아......" 다시 한 번 내 입에서 조그만 탄성이 터져나왔다. 보영이의 손이 내 아랫도리로 다가왔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흥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벌써부터 나의 그곳은 경련을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안의 혈관들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런 내 기둥의 용솟음을 관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자신도 시각적인 자극을 받 는지, 뜨거운 가쁜 숨결이 내 하복부에 느껴졌다. "그, 그만!" 펄쩍, 허리가 튀어올랐다. 나는 터져나올 듯한 욕구를 참아내느라 헉헉대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틀었다. "그, 그만해...... 모, 못 견디겠어......"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애원하고 있 었다. "멋있어, 창희야......" 걷잡지 못한 불길이었다. 어느새 내 팔과 손이 자유로워졌지만, 더 이상 그녀를제지한다 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잠깐이었던 그녀의 도발적 손길에, 나 또한 본능과 욕구에 충실해지 고 있었던 것이다. 헐떡거리며 내 하체 쪽을 내려다보았다. 보영이의 촉촉한 시선이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 고 있었다. "고마워!"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다음 동작이 차근차근 이어 졌다. 다시 그녀는 내 몸 위에 쪼그려 앉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웠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희창이가 지금 이 사건을 알게 된다면...... 아, 나는 정녕 어찌될 것인가. 그러나 보영이의 능숙한 동작은 그런 내 수치스러움을 완벽하게 없애주었다. 무릎을 들고, 쪼그린 자신의 허벅지 사이 아래로 한 손을 뻗어 다음 동작을 진행시키고 있는 그녀. "아!" 그녀의 탄성과 동시에, 드디어 삽입이 이루어졌다. 나는 사실 그녀가 이렇게 일찍 시도할 줄은 몰랐다. 어느새 그녀의 몸이 충분히 젖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의 손이 내 가슴팍을 짚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찡그린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기, 김보영......!" "가만히......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돼......" 그녀는 내 가슴을 짚은 채로 조금씩 둔부를 들썩였다.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엉덩 이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아, 보, 보영아......!" 뜨거운 그 무엇이 내 중심을 삼키고 있었다. 준비가 안되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 려 나였다. 결합이 이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행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쪼그려 앉은 그녀의 둥부 가 잔뜩 나의 아랫배를 밀어붙여 왔다. 문득,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내 손을 이끈 곳은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자 신의 젖가슴이었다. "거기, 거기......" 뜻 모를 그녀의 말, 이미 이성을 잃은 내 행동은그녀의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하고 있었 다. 나는 손바닥 안에 넘칠 듯한 젖무덤의 향연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마 그것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인가. 그녀는 내 몸을짚은 손에 힘을 주며 점점 하체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내 몸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소음도 더욱 도를 더하 며 울려 나왔다. 머리 속이 아득해지며, 마치 내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아, 정말......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어......!" 그녀는 이제 한껏 기교를 발휘해 갔다. 그녀의 둔부 사이에선 땀방울이 느껴졌다.그리고 이탈. 행여 나는 그렇게 될까 봐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내려 그녀를 붙들었다. 보영이 의 몸뚱이가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틈을 타 그녀의 상체가 숙여졌다.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있는 손바닥이 미끌거렸다. 눈을 떴다. 출렁이는 유두가 바로코앞 에서 빛나고 있었다. 직접 내 고개를 안아 올려 자기 계곡 사이에 밀착시키는 보영이. 그 때 였다. 패턴이 바뀌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동작이 아래위가 아닌 앞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머리 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실제였다. 달빛만으로도넉넉히 어 둠에 가려졌던 방 안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그녀의 젖가슴에서 입술을 떼냈다. 하얘진다. 밝아온다. 온 방 안디, 보영이 의 몸 전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시야 전체가. "나, 나 더, 더 이상......!" "안 돼, 아직은, 아직은......." 그러나 그녀의 말은 진심이 아니리라. 그녀의 허리가 갑자기활처럼 뒤로 젖혀지며 튀어 올랐다. "세게, 세게 쥐어! 더, 더 세게!" 그건 마지막 벽이 머리 속에서 허물어졌던 탓이다.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빛을 가리던 벽이 무너졌고, 보영이의 몸도 무너졌다. 우린 사정과 동시에 둘 다 오르가슴에 도달했다. 35 "하아, 하아......" 내 가슴팍 위로 젖가슴과 상체를 짓뭉개며, 보영이는 한참동안을널브러져 가쁜 숨을 몰 아쉬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숨고르기로 인해 작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도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넋이 나간 상태였다. 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을 질끈 감고 있자니 머리 속으로 걷잡을 수 없 는 회한이 몰려왔다. 내 친구의 여자, 그녀의 몸 속에 정녕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내 박약한 의지를 성토해 봤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차라리 절 망감이 엄습해 왔다. "나, 너무 좋아......!" 보영이는 내 어깨에 뺨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하긴 정말 격렬한 섹스였다. 하다 못해선 영이 누나와의 꿈속에서의 정사도 이렇게 격하지는 않았었다. 이런 것이 사디즘이나 마조히 즘의 감각일까. 비록 고통은 없었지만 거센 몸싸움과 실랑이가전희보다도 더 짜릿하게 서 로를 흥분시킬 줄은 몰랐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 나는 궁지에 몰렸었고, 불가항력적인 정사였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밀려드는 후회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 자신에게 변 명을 한다 해도, 나는 실로 어마어마한사건을 치른 것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피가나도록 깨물었다. "보, 보영아, 잠깐......!" 아직도 보영이의 하복부는 내 몸 위에 걸처져 있었다. 살짝 허리를 틀자, 그제서야 내의 도를 알아차렸는지 보영이가 자신의 둔부를 들어올려 주었다. "후우......" 어지러운 한숨이 내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창희야!" 내 몸 위에서 보영이의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너...... 후회하지 않는 거지? 그렇지......?" 아, 이 여자애는 그럼 내게서 무엇을 더 바란다는 말인가. "대답해 줘. 너 나랑...... 이런 거 후회하지 않지?" 제길,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후회한다고사실대로 말하면, 이 계집애가또 어떤 앙탈을 부릴지 모른다. 나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래, 고마워...... 그럼 하나만 더 말해 줘...... 나 예쁘다고, 좋았다구 말이야." 이런 사건을 벌여놓고도, 그녀는 하등거리낌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비로소 최마담이몇 시간 전 남겼던 경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보영이 같은 애는...... 젊으니까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아. 그러니까창희씨는 절대로 걔가 꼬셔도 넘어가면 안 돼......' 그녀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토록 내게 신신당부를 했던 것일까. 분 명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게 여튼 보영이의속성을 잘 알고 있는 최마담으로서 는 내가 일찍 돌아서지 않는다면 이런 의미 없는 정사에 빠져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럼 나는 무어냐. 알면서도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 마침내 묵시적으로 동조한 격이 되고 말았으니...... 아아, 현재로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 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내 몸과 정신은지쳐 있었다. "대답하기 싫어? 너는 좋지 않았어? 나랑 같이 잔 게 싫으니?" "아, 아냐...... 너, 넌 예쁘고, 나도...... 그래, 좋아...... 니가." 나의 의지는 다시 한 번 뜻 없는 말을 되뇌야 했다. "그, 그렇지만 김보영......" 그러나 그녀는 내 가슴팍 위에서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마. 방금 너도 좋았다고 했잖아...... 내가예뻐서 이러고 싶었 던 거라고...... 그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문득 내는 이 계집애에게 두려움이 느껴졌다. 자신의 욕심을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 는 여자,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비록 그것이 순간일지라도 반드시 이루고야마는 - 그런 걷잡을 수 없는 인간형 - 그런 모습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만약 이런 여자애가 지금처럼 하룻밤의 정사 정도가 아닌, 더 엄청나고 강렬한 욕구에 빠 져든다면 과연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다. "걱정하지 마. 희창이는 모르게 할거야.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리고 절대로 니가 걔한테 말하지 못할 거란 것도 알고...... 그냥 우린 서로가 원했더. 그리고 둘 다 동의했고.그럼 아 무 것도 신경 쓸 거 없잖아!" 독했다. 진짜로 이 아가씨는 이 비밀을 무덤 속까지 자기고 갈 것이다. 나는 그녀의말에 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몸서리를쳤다. 내가 말하지 못할 것이다.......치밀한 보영이는 그런 계산까지 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난 널 믿어. 너도 나를 믿지?" 제길, 이제 와서 도대체 무얼 확인한다는 것인가. "아, 알았어. 이, 이제 그만......"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꺼려졌다. 그런데 내가 허리를 일으키려 하자, 보영이는 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왜? 집에 갈 거야?" "응...... 으응." 무의식적인 대답이 흘러나오자, 보영이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끌어당겼다. "안 돼, 가지 마. 여기서 자. 날 놔두고 가지 말아."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그녀의 눈망울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진심인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랑 같이 자. 내가 재워줄게. 제발, 혼자 있는 건 싫어!" 숫제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아니 진짜 애원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갈등에 휩싸였다. 나를 원했던 여자애,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이건간에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고, 지금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촉촉한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중이 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온몸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힘겨움,실랑이, 그리고 이어진 섹스...... 육체 적 피로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모르겠다. 내 엉덩이는 다시 그녀의 방바닥에 무게중심이 낮춰지고 있었다. 배시시, 작게 웃음 짓는 보영이. "그래, 가지 마. 너무 늦었어...... 내가 자리 펴줄게." 정말로 그녀는 이불더미를 가져와 내 앞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전 라, 생각해 보면 너무나 부끄러울 그모습으로 정성스럽게 이불을 펴고 있었다. 얼이 빠져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내게 색다른 기분이 찾아들었다. 방금 전까지 내 몸 위에 서 그렇게 열정적인 몸놀림을 보인 이 여자애가, 지금은 나를 위해 그 숨길 것 없는 태고의 모습 그대로 쉴 곳을 마련하고 있다니. 그런 생각 때문인지 어둑어둑함 가운데서 하얗게 빛나는 보영이의 나신이 아름답다는생 각마저 들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만약에, 지금 이 계집애가 나의 여자친구고, 그래서 우리가 애정과 관심 이 담긴 정사를 나우었다면...... 분명 나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으리라. 또한 더없이 행복한 눈길을 주었으리라. "이리 와. 내가 옷 벗겨줄게......" 엉거주춤, 이부자리 위에 나를 앉힌 그녀는 손수 내 윗도리 단추를 풀어주었다. 너무나 자 연스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망설이며 아연 할 말을 잃었다. 보영이는 사랑스럽게도 내 양말고 바지까지직접 끌어내렸다. 그녀가 내게다시 입혀준 것은 오직 하나, 내 국부를 가리고 있는 팬티 한 장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내 옷가지들을 모아한구석에 가지런히 개켜두기까지 했다. 아아- 난느 아직껏 어느 여자에게서도 이런 최상의 서비스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내게 보인 모습 들은 정사 이전부터 내가 느끼던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여기 누워." 완벽하게 넋이 나간 나를, 마치 어린 아기 다루듯 하는 보영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나는 이부자리 위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보영이는 여전히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내 옆으로 파 고들었다. "창희야...... 나 너 베고 누워도 돼?" "아...... 응." 아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다소곳한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직므 그 녀가 무얼하든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살짝, 그녀의 고개가 내 팔뚝 위에 얹어졌고, 허벅지 가 가만히 내 다리 위에 걸쳐졌다. 꿀꺽, 마지막으로 마른침이 내 목구멍으로넘어갔다. 필경 이런 자세는 연인사이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 같이 있어줘서." 보영이가 작은 목소리로 감사 표시를 했다. "자, 잠깐...... 지, 지금 몇 시야?" 아무리 지금 편안한 모습 그대로라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으응, 한 두 시쯤. 왜, 학교 땜에......?" 두 시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어쨌든 늦게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희창이, 최마 담, 아무도 내가 보영이 방에서 잠든 줄은 모르고 있다. 그러니 훤한 대낮에 이 방에서 나가 는 것은 위험할 수밖에. 그래, 서너 시간 자고...... 이른 새벽에 나가야지. "걱정 마. 내가 깨워줄게." 그러나 더 이상 보영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나른함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께를 어루만지는것을 느끼며,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 다. 나는 내가 무얼했는지, 또 내일 아침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욕의 올가미 36삐리기, 삐리릭...... 삐리릭, 삐리리릭...... 꿈나라의 머리맡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삐리리릭...... 전화벨 소리다. 젠장,무시하고 싶은 소음인데, 전화기소리는 그치지 않고 집요하게 계속 됐다. 제길, 누구야, 이 새벽부터- 더듬더듬, 나는 머리맡을 더듬어 수화기 를 집어들었다. "여, 여보세요." 그러나 묵묵답답.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누구, 창희......?" 에이, 잘못 걸린 건 아닌 모양인데...... 여자 목소리다. 누구지? "예, 제가 창흰데요......" "창희......!" 찰카닥, 뚜 뚜 뚜...... 건너편의 목소리는 나를 확인하고는 갑자기 끊어졌다. 어...... 이게 누구 목소리더라?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뜨악하며 순식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맙소사! 여긴 내 방이 아니잖아! 아아, 나는 그제야 모든 상황이 파악이 됐다. 여긴 내 방이 아니다. 보영이 방이다. 그리고 내 전화기가 아니라 보영이 전화기였다. 그, 그럼...... 나는 경악했다! 목소리 -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최마담! 너무나 얼떨떨한 기분이다. 이, 이런 내가 무슨 짓을...... 내 손에서 수화기가바닥으로 미 끄러졌다. 완전히 잠이 달아났다. 화들짝 놀란 나는 낯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조그만탁상시계는 이미 9시를 한참이나 넘 게 가리키고 있었다. 젠장, 지난 밤 그녀와의 정사가 너무 거한 탓이었을까. 나는 이미 일어 나려 마음 먹었던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쳤던 것이다. 아아...... 그나저마 바, 방금 그 전화는...... 너무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말았다. 어젯밤 에 나를 붙잡고 거의 애원조로 부탁했었던 최마담인데, 그것을 정통으로 들키다니. 야, 이 바보 같은 창히야 - 아무리노곤한 잠자리였다 해도 그렇지, 자기가 어디서 잠들 었는지도 잊어먹는단 말이냐. 정말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참, 그런데...... 얘, 얘는 어디 갔지? 한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넋이 나가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았지만...... 얼레, 보영이 계집애가 보이지 않는다. 어저께 벗어 던진 옷들은 바닥에 그대로였다. 팬티...... 까지도. 나는 몸을 일으켜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내 옷들은 한 쪽에 가지런히 보영이가 챙겨둔 그대로였다. 그나저나 이 애는 어디로 간 걸까. 지금 시간이면 얘한테는 한밤중일 시간인데...... 대충 바지와 위도리를 꿴 후, 엉거주춤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쨌든 보영이를찾아봐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 밖으로 나서자, 후우...... 아직도 온몸이 뻐근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생각해보면 어 제처럼 격한 잠자리는 난생 처음인 것 같았다. 진짜로 꿈 한 번 꾸지 않고 곤히 잤으니까. 방문...... 그 때 옆의 조그만 쪽문이 눈에 들어왔다. 빼꼼이 열린 그 안에서 인기칙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영인가? "어, 엇!" "어유, 야, 뭐야......!" 아차차, 여긴 화장실이었지 - 멋모르고 문을 들이민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보영이. 그녀가 화장실에 있었다.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그것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 은 전라의 모습 그대로. 아쿠쿠, 민망한 광경을 목도한 나는 얼른 황급히 고개를 돌려야했 다. "어, 미, 미안......!" "바보, 노크도 할 줄 몰라? 문 닫아." 문도 안 닫고 일을 보던 건누군데...... 게다가 옷도 안 입고. 잠시후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왜, 급해서 그래? 푸훗." 이 엉뚱한 와중에도 하나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듯, 즐거운 듯한 음색이었다. "아, 아냐. 니, 니가 방 안에 없길래......" "기다려, 금방 나갈게. 참, 아까 전화벨 울린 것 같던데...... 니가 받았어?" 어휴, 뭐라고 대답하지? 최마담이라고..... 밝힐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도 내가 받았다고는. "으, 응...... 그, 근데 끄, 끊어졌어." "그래? 잘못 걸린 건가 보네." 쏴아아, 샤워기 물줄기 사이로 보영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하는 수 없이 방 안으로 돌아와야 했다. 젠장...... 어쨌든 최마듬에게 이 계집애 방에서 잤 다는 것을 들키고 말았으니, 이젠 어쩐담? 막막한 기분으로 담배를 물었다. 보영이는 아까의 전화도 내가 받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제길, 그게희 창이였다면 어쩔 뻔했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게 아니었다. 희창이, 녀석에게는 어떻든 저 보영이가 비밀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최마 담은 어쩔 것인다. 저 여자애는 지금마담이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또한 내가 얘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마담이 보영이에게 추궁한다면 어쩔 것 인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 때는 보영이가사실대로 말할지도 모른다 - 나와같이 잤노라 고, 그도 아주 격렬한 정사를 했노라고...... 으와, 미치겠군!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마담 에게도 비밀을 지켜 줘'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바싹바싹, 애꿎은 담배만 타 들어가고 있는데...... 벌컥, 방문이 열리며 보영이가 들어섰다. 처량한 시선으로 문득 그녀를 올려다본 나는그 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보영이는 수건 한 장을 달랑, 그것도 손에다 들고서는 송골송골물 방울을 묻힌 맨몸뚱이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훤히 햇살이 비치는 대낮, 아니 아침에 홀랑 발가벗은 채로,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태 연자약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치부의 조그맣고 수북한 까만 수풀까지, 그대로 내보이고있 었다. 꿀꺽,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제일 먼저마른침을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 어제는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환하게 드러난 그녀의 전라를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있었 다. 정말, 다시 보아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몸매였다. 쪽 뻗은다리, 군살 없는 허벅지, 늘씬 한 허리, 그리고 그 위에 출렁이는 봉긋한 유방...... 곱슬한 삼각지 계곡. 숫제 보영이는 내 쪽으로 돌아서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까지털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 임 - 그에 따라 유두를 중심으로 덜렁덜렁 흔들리는젖가슴. 푸아, 보는 것만으로도...... 아, 아냐,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야, 기, 김보영...... 오, 옷 좀 입어......!" 간신히 민망함을 되찾아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응 왜......? 여긴 방 안인데 뭘......" 피식, 웃음소리를 내는 보영이였다. "후훗, 으이그, 알았어. 어차피 볼 건 다 봐놓구, 핏." 볼 것 다 본 사이 -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드르륵, 그제야 조그만 옷장의 서 랍을 열고 팬티 따위를 끄집어냈다.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벽에 붙은 거울로 옷을 갈아입는 그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살며 시..... 밤새 내 아랫배 위에서 춤을 추던 그녀의 엉덩이, 그 위를 덮는 짙은색 팬티. "브, 브래지어는 안 해?" "싫어, 귀찮아...... 이따 가게 나갈 때나 하면 되지 뭐." 정말 천방지축, 거치적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가 보다. 자칫하면 노출증 걸린 여자애 로 오해받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팬티 위에 곧바로 헐렁한 박스 티와 반바지만을 덧입었다. 그리고는 어제 벗은 옷 들을 들고 나갔다. "참, 창희야. 너 아침 먹으러 갈래?" 으잉? 웬 아침밥? "나 있잖아, 밥은 이모네 가게 가서 먹거든...... 여기 집말고 소주방 가서 말야. 알지? 우리 이모 가게. 내가 원래 늦게 일어나니까,이따가 문 열 시간 되면 거기가서 해 먹을 거야. 너도 같이 갈래? 친구라고 하면 돼." 뭐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 이모한테 가서 밥을 얻어먹자고? 친구사이? 정사를 같이 나눈 친구? 37 그 때였다. 삐리릭, 삐리릭...... 다시 그녀 방의 전화가 울렸다. "잠깐, 내가 받을게." 콩콩콩, 보영이가 서둘러 달려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응, 그래 나야." 문득, 나를 돌아보며 그녀가 손가락을 입술에 댄다. 조용히 하라는 표시 - 어, 누구? 보영이가 소리나지 않게 입술로 얘기하고있었다. 맙소사! 나는 숨이 넘어갈것 같았다. 그녀의 입모양새를 보고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희, 창, 이' 으악, 기절할 노릇이다. 숨소리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 "웬일이야, 아직 열 시도 안 됐는데...... 응? 창희한테 핸드폰......?" 무슨 얘기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 내 방에놓고 간 핸드폰을 찾으러 온 다는 얘기...... 그렇다면! "응, 나도 알아. 어, 어떻게 아냐구? 응...... 어,어제 너한테 전화 거니까 걔, 창희가 받더 라구. 그래서...... 그래서 알았어." 맙소사, 행여 보영이가 말실수라도 할까 봐 엿듣는 내 가슴이 콩알만해졌다. "알았어. 그래 끊어. 이따 가게로 전화해." 드디어 전화를 끊자,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헤헤, 보영이는 그 와중에도 혀까 지 내밀어 보였다. "응, 희창이가 핸드폰 찾으러 일찍 나오는 길에, 집에서 전화한 거래." 그나저나 설마......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음, 근데 어쩔래? 나랑 같이 가서 밥 먹지 않을래?"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서둘러 내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 안 돼!" 무의식적으로 소리지르는 내 대답. 조금이라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녀석이 자기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데 한시간 남짓, 그전에 돌아가서 집에 있어야한다. 그나 나나 오늘은오후수 업뿐이란 걸 서로 알고 있다. 그러니... 집에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당장에 희창이가 내 외박 사실을 알아차릴것이 다. "지, 지금 나가야겠어. 희, 희창이가 온대잖아." 얼른 가있는다. 그리고는,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해야한다. 지금 현재는 어제 보영 이와 같이 잔 일로 인해 생긴, 녀석에 대한 죄책 감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꼬리부터 잡히지 말아야한다. "알았어. 그럼 같이 나가. 나도 이모네 집으로 가서 밥먹을래"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무심결에 보영이의 반지하 셋방을 나오던 나를, 그녀가 막았다. "잠깐만, 누가 볼지 모르니까...... 내가 저쪽 골목 가서 신호하면 그 때 나와." 두리번두리번, 골목길을 살핀 그녀는 쪼르르, 반대편 골목으로 달려가더니 내게손짓하고 있었다. 엉거주춤, 눈치를 살피며 빠져나오는 나. 골목길 모퉁이에서 보영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가게 가서 밥먹으면 좋을텐데......" "아, 아냐, 괘, 괜찮어...... 다음에 내가 근사하게 사줄께."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못내서운한 표정이다. 역시, 어떤사이건 하룻밤 살을 맞대면 이런 정이 드는 걸까. "그럼 먼저 가...... 난 저쪽으로 다시 들어가야지...... 그리고, 희창이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 도 돼. 내가 잘 둘러댈테니까." 어제 그토록 골치 아픈 사이였는데, 왠지 모르게 정말사이좋게 아침까지 먹고픈 기분이 다. 그러나 마음은 자꾸만 급해진다. "아, 알았어... 그럼 나 갈께" "참, 창희야!" 돌아서서 길가로 달려나가려는데, 보영이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우고 있었다. "어제...... 고마웠어, 같이 있어줘서...... 안녕!" 예쁘게 손까지 흔들어주는 그녀, 돌아서는 뒷모습. 왠지바라보는 내 시선이 안타까웠다. 고마워 - 그 말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둘러야 한다. 희창이보다 먼저 방에 가있어야하므로. 후다닥, 보영이가 사라진 골목을 뒤로 하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38 내 옥탑 자취방에 들어설 때쯤엔 숨이 턱 밑에 닿고 있었다. 우선, 나는 대문을 들어서 기 이전에 자취집 골목안부터 살폈다. 다행이다. 희창이의 차는 일단 보이지 않는다. 사실 녀석이 자기 집에서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는 편이었다. 만약 차를 몰지 않는다 면 그나마도 더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행여 녀석이어제 밤사이 내가 외박한 사실을 안다면, 당장에 곤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일 - 보영이와 그녀의 방에서 벌인 일, 그녀와의 동침 - 은 그 여자애 와 나만이 아는 것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그러나... 내가 희창이의 핸드폰으로 그녀의전화를 받은 일, 단란주점에서 박사장이란 작자와 벌인격투, 이런 것들을 숨길 수는 없는노릇이 다. 목격자도 있었고, 그렇게 대판 사고를 치루었으니 모를 사람도 알 일이었다. 어쩌면 그 가 게에서 빠져나와 단 둘이서 그 계집애가 사라지는 광경을 누군가 목격했을 수도 있는 일이 고, 벌써 그 술집 안에는 어제의 내 무용담이 파삭하게 소문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야 아니라도, 보영이를 만나는 동안 그곳에 뻔질나게 출입할 희창이기에, 어차피 다른 사람을 통해 알 것이다. 내가 숨겨야하는 사건은 바로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그녀의 자취방에 함께 있으 며 정사를 나누고, 그리고 아침에 돌아온 이 순간까지의 상황- 나중에 어찌될지 모른다하 여도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이 사실을 숨겨야만 한다. 희창이의 도착을 기다리며, 나는 머리 속에서 녀석에게 둘러댈말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 었다. 으음... 먼저 그 단란주점 앞에서 벌인 싸움은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지...... 그리고 나와서 는... 어휴, 뭐라고 얘기하지? 모르겠다. 그냥 보영이는 자기 집으로 가고, 나도 내 방으로 돌 아왔다고 해야할텐데.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랑 앞뒤 말을 맞춰보고 올 것을 - 하지만 아니, 그 보다는 더 근원적인 문제, 친구가 눈독들이는여자애와 함께 잤다는, 그 크나 큰죄책감의 회한이 곧 몰려왔다. 아아, 끝끝내 물리치고 나와야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아무리 섹시하고 또 먼저 유혹 했대도 그렇지, 본능적 욕구에 무너지고 말다니.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양심에 따르면 그래야옳겠지만, 정말 양심적이었다면 어제그런 정사도 벌이지 말아야했었다. 나는 그 정도의 강심장은 아니다. 물론 희창이가 보영이를쫓 아다니는 게 녀석 말대로 현지처 - 그렇고그런 섹스 파트너 - 를 만드려는,그저 응큼한 야욕의 발로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도 보영이를 섹스 파트너정도로서 대할 수 있다는 정당함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남자를 밝히는 여자애라고 해도, 또 애정 없는육체적 관계만을 목적으로 그녀를 원한다 하여도...... 그 당사자가 내 친구, 그것도 죽마고우인이상 절대로 합리화를 시킬 수 는 없었다. 답답했다. 정반대의 경우 희창이는 어쨌던가. 내가 선영이 누나와같이 잔 다음 날도, 그 는 내 의견을 존중해 더이상 누나에게 시선주는일까지도 자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러놓다니 -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 자신이 죄 스러웠다. 녀석 앞에서 고개를 들 수나 있을런지 걱정되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는 나인데, 예상보다 늦게 내 방문이 두드려지고 있었다. "야, 짱이, 아직 자냐?" 희창이였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야, 창희야!" "으... 응, 드, 들어와......!" 엉거주춤, 방구석에 구겨져 생각을 거듭하느라 쪼그렸던 몸을 폈다. "뭐야, 이불도 안 개놓고...... 지금이 몇신데." 멀끔하게, 녀석이 개운한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맞아, 여기 있었지......"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으며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기 핸드폰부터 챙기는 그. 이미 녀석의 전화기는 밧데리가 떨어져 꺼진 상태였다. "야 근데 너 어제나 가고난 뒤에, 어디나갔었냐? 내가 집에가서 전화했는데 안받더 라......?" 아마도 보영이네 술집으로 달려간 시간에 이곳으로 전화를 건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아직 내가 박사장과 맞딱드린 사건을 모르는 희창이 녀석이다. "응, 그, 그게 말야......!"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일단 보영이의셋방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일을 설명해주었 다. 핸드폰으로 보영이 전화를 받은 일, 단란주점으로 달려간일, 그리고 그 앞에서 박사장 이란 중년사내와 주먹다짐을 벌이기까지. 그러나 의외로 피식거리는 희창이 놈. "으이그, 그래서, 그래서 겨우 한방 먹었다구 반창고까지 붙인 거냐?" 반창고 - 맞다. 어제 보영이가 붙여준 반창고가 아직 한쪽뺨 가장자리에 너덜거리며 붙 어있었다. "참, 보영인 괜찮은 거냐? 그 새끼가 보영이까지 때렸단 말야?" 이럴 때면 순진한 건지, 희창이는 보영이가 따귀 맞는 장면에 흥분하고 있었다. "잘했어, 짱이야! 나같아도 여자를 때리는 놈은 가만 안두지...... 어쨌든 고맙다, 고마워!" 그는 자기대신 내가 그 박사장을 응징했다는 말에 감격한 듯 고마워하고 있었다. 제길...... 나는 그럴수록 점점 가슴 속이 찔리고있었다. 나한테 고맙다니 - 그이후의 일을 안다면 고맙기는 커녕 당장 죽일 놈 취급을 받아야 하는 놈인데. "짜식, 역시 넌 내 불알친구다. 친구의 여자까지 지켜주려 목숨을 걸다니, 킥킥."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마음 같아서는 엎드려 사과해도 모자를판국에 이 녀석에게 칭 찬을 듣다니...... "그래서?" 으잉, 그래서? "그래서 어쨌냐구. 그게 끝이야?" 뜨끔, 엉덩이가 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박사장을 두들겨놓고 난 뒤에 무슨 일이이어졌 냐는 희창이의 비수같은 질문이었다. 꿀꺽, 이 대목부터내 거짓말이 시작되어야했다. 어쩔 것인가 - 사실과 비밀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 마음이었다. "끝은 뭘...... 그, 그냥 그래놓고나왔지...... 보영이가 나오길래, 나,나도 그냥 같이 나왔 어......!" 그러나, 결국 비밀을 택하는 내 세치 혀. 정말 미안하다, 희창아. 원래는 그 이후에더 많 은 사건들이 엄청났지만... 지금 너에게는 숨길 수 밖에 도리가 없어. "그래? 에이, 나같으면 아예 찍소리 못하게 쫓아가서 콱 밟아놓는 건데." 다행히도 더 캐묻지 않아주는 그였다. 내 말을 그대로 믿는지, 침이나 바르고거짓말하란 속담이 있지만 아니라도 입안이 바짝 마르는 나였다.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어쩐지...... 그런 일이 있었구만...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야이 핸드폰으로도 전화가 안되길래, 놓고 간 게 아니라 길바닥에 흘렸는 줄알고 너한테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쨌 든 이모저모 신세진 셈이구나. 좋아, 나가자. 너 아침 안먹었지? 내가 사줄께." 어휴... 오늘따라 아침 챙겨주는 사람도 많군... 그러고보니배도 쪼르륵거린다. 어제 그렇 게 격렬한 정사를 치루고, 밤부터 아무 것도 못먹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보영이랑 같이 먹자. 아마 걔 자기 이모네 소주방에 있을 거야." 뭐라고? 나는 펄쩍 뛰었다. "아, 안돼! 아, 아니 나, 난 됐어!" "왜 임마, 배 안고파? 너 맨날 아침 사먹잖아?" 아이고, 배가 고프거나 말거나 보영이랑 같이먹는 것은 안된다. 그 계집애 랑헤어진지 불과 한시간도 안지났는데 - 다시 얼굴을 마주친다면 민망하고 어색해서 자살이라도 할 것 이다. "야, 어제 보영이도 얻어맞았다며, 가서 위로도 할겸, 불러내서 비싼 것 먹자. 내가 산다니 까!" "아, 아냐......! 너, 너희 둘이 먹어......!"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희창이. 지금 이 놈과 있는 것도 껄끄러운 마당에 보영이라니, 그런 낯뜨거운 삼자대면은 죽기보다도 못할 일이었다. "왜 그래, 짜샤. 그럼 우리 둘만 밥 먹으라구?" "그, 그게... 나, 나 지금 별로 몸이 안좋거든... 감기, 그래, 감기 기운이 있어, 그래서....." 결국 아프다는 핑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의심이라도하 면 안되는데, 젠장. "뭐야...... 어제 몇대 맞았다고 몸살이라도 난 거냐? 너 어제까지는 멀쩡했잖아?" 오늘따라 꼬치꼬치 따지는 희창이였지만, 나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소, 속도 안좋구...... 어, 어쨌든 밥은 나중에 사라. 오, 오늘은 말고......" 이래서 거짓말은 자꾸 커진다는 것일까. "정말이야......? 어디...... 짜식, 그렇게 보니까 좀 얼굴이 안돼 보이는데...... 눈이 퀭하니 시 뻘건 게......" 윽, 아직도 어제 보영이랑 그짓을 한여운이 얼굴에 씌여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가슴 속이 뜨끔했다. "새끼, 그러니까 밤에 잠좀 자라, 잠좀. 맨날 딸잡지 말고...... 크핫!" 흐휴, 어쨌든 녀석은 넘어가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농담까지 섞으며. "창희 너 그럼, 오늘 학교도 안나올 거냐?" "으, 응... 그, 그냥 집에서 쉴래......" 이렇게 된 이상 학교도 빠질수밖에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말하고 보니 정말로 정사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온몸이 노곤했다. "왠 일이냐, 범생이께서... 알았다. 그럼 쉬어. 참, 약이라도 사다주랴?" "아, 아냐...... 됐어. 대충 한숨 자면 낫겠지 뭐." 진짜로 아픈 척, 나는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어, 얼른 가봐." 엉거주춤, 그제서야 엉덩이를 일으키는 희창이였다. "쉬어라. 내가 이따가...... 수업 끝나고 들리든가, 아니면 전화할께." 정말로 걱정해주는지, 녀석은 돌아가면서도 짐짓 불안한 표정이었다. 휴우..... 그가 나가자 나는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아슬아슬한 기분이었 다. 어쩌지 - 틀림없이 희창이는 보영이를 찾으러 갔을 것이다.그 기집애가...... 잘 둘러대야 할 텐데. 말 실수라도 하는 날엔 큰 일이었다. 나중에 내 입으로 직접 녀석에게 밝힌다면 몰 라도, 그녀의 입을 통해 들통이 나는 날에는 정말 내 양심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제발, 부디 무사하기를. 아무 일 없기를. 어휴,애꿎은 한숨만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가장 친한 친구놈에게도 거짓말에, 비밀에..... 에라, 모르겠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불안할 따름인 머리 속이 너무 복잡했다.그렇다고 지금 걱정해서 어쩔 것인가. 차라리 그녀석을 따라나설 걸 그랬나 -그럼 대충 보영이랑 둘이서 합작으로 얼버무릴 수도 있는 건데. 자포자기하는 심정이다. 아우성치는 뱃속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잠이 몰려왔다. 그래,잠 이나 자자. 어차피 어제 보영이랑 생난리를 치루느라, 아직까지 찌뿌드드하니까. 온몸에 나른함이 몰려왔다. 39 삐리리릭... 삐리리릭... 얼추, 막 선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내방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괜찮다. 이건 내 방의 내 전화기다. 잠결에도 확인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여..... 여보세요." "어, 짱이야. 나다, 이짱" 어... 왠 일이지? 아직 수업 끝나려면 멀었는데...... 시계는채 오후 한두시도 안되고 있었 다. "어, 미안...... 잠깼냐?" "어, 응...... 왜?" 무슨 일이지? 돌아간지 얼마되지도 않고서. "응, 별 게 아니고...... 너 미세스 최 알지? 있잖아, 보영이네 가게 마담." 뭐라구? 최마담? 그 순간 낮잠이 확 깨고 있었다. "지금, 보영이 이모네에 있는데...... 그 여자가 보영이를 찾아왔거든, 그래서......" 순간적으로 경악하는 나였다. 아차차! 내가 놓친 계산이 하나 있었다. 미세스 최 - 그 누님. 그녀는 이미 희창이와도 익 숙한 사이다. 그리고, 아까 아침에 보영이 방에서 엉겁결에 받은 내 전화한통으로...... 최마 담은 내가 보영이와 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 혹시 - 그녀가 희창이에게 내가 보영이와 어제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설? 뜨악하 니 내 입이 벌어졌다. 머리 속이 아찔해졌다. 지, 지금 이 녀석이 뭐라고 했지? "그 언니라는 사람이 말야, 지금 여기 같이 있는데......" 으악, 같이 있어? 보영이랑, 너랑? 그런데 의외로 건너편 희창이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범했다. "뭐라드라...... 어저께 가게에서 그런 일, 미안하게 됐다구...... 너좀 바꿔 달라는데?" 미안하다? 어제 일이라면 박사장 사건?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그때문은 아닌 것 같았 다. 그럼 이것은 - 핑계였다. 그렇다. 나를 찾으려는. "야, 아, 안돼...! 나 없다고 해. 아니 나 아파서 전화 못받겠다고 그래.....!" 즉시,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는데......? "어, 뭐잠깐만......" 희창이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가 일순 바뀌었다. "호호, 안녕하세요, 창희 도련님......!" 누님, 미세스 최였다 - 미세스 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발끝부터 온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만 같았다. "몸이 안좋다면서요...... 어머 이를 어째, 어제 우리 가게에서 있었던 일때문이에요?" 한껏 가장한 목소리.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마치 마녀같은 이 목소리의 진위...... 그것 은 일부러 옆에 있는 희창이와 보영이에게 들리도록 거짓된 것이라는 걸. "아유, 미안해요. 괜히 다미 그 기집애가 말썽피우는 바람에, 창희씨가 괜히 뒤집어썼네 요. 어제 그런 봉변을 다 당하고." 으아, 이건 완벽한 위장전술이다. 어차피 그녀도 다 알고있었던 일 아닌가. 보영이 셋방 까지 따라와서, 내가 그 기집애와 단 둘이 방안에 있는 것까지 보고 가놓고는.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분명 나보다 지금 최마담의 곁에 있을 두 사람, 보영이와 희창이를 속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는 희창이에게 감추려는 의도다. 당연한 일이다. 이 누님은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나와 보영이가 방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냥 술만 마시라고, 그여자애랑 자지 말라고...... 그러나 지금, 그 여자애랑 내가 아침까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둘에 더해미세스 최, 이 여자까지 도합 세사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아는 것은 - 내가 보영이방에서 자고 나온 것을 총 세명이 안다는 것은 - 나와 이 마담누님뿐이었다. 즉 보영이는, 그녀가 아침에 전화를 했으며, 얼결에 내가 그 전화를 받았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잘못 걸린 전화라고 얘기해두었 으므로. 그러니 보영이는, 내가 그녀 방에서 자고 나왔다는 사실을, 바로 곁에 있을 최마담에게 들 켰다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아마 그 계집애로서는 그냥 적당히나 창희가 술을 마시다가 돌아갔다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고, 아니 어쩌면 희창이 앞에서는- 어제 자기 방 에서 나와 그녀, 그리고미세스 최가 맞딱드렸었다는 사실마저쉬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몸은? 어디 아프거나 덧나지는 않았수?" 그녀는 뭐라 대꾸할 말을 잃은 내게 계속해서 짐짓 가식적인 걱정을 보내주고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로 보니... 방금 생각처럼 일단은 이누님이 희창이에 게 촛점을 맞추 고 있다는 게 확실하다. 그녀는 내가 다쳤다는 사실도 어제 보영이네 방에서부터 알고 있으 면서, 우선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주려는 의도이다. 그래, 당연히 - 보영이는 마담언니에게 신호를 해두었겠지. 그녀 방에서 나와 단 둘이 술 마셨다는 걸 말하지 말아달라고...... 아아, 정말로 복잡한 상황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추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지금 보영이네 소주방이란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희창이, 녀석은 단지 어제 내가치룬 사고에 대해 최마담이 미안해하는줄만 알고 있을 것이다. 보영이, 갑작스런 미세스 최의 등장에 그녀가 가장 놀랐을 것이며, 당장 언니가 희창이 앞 에서 어제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발설할까 겁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아침까지 같이 잤 다는 사실을 최마담에게는 속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마담... 그녀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 주는 꼴이었다. 모른 척하고 있을 게다. 자기가 그 모든 정황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태연히 희창이 앞에서 감추고 거 짓행동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기가 막힐 정도로 꼬였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꿀꺽, 긴장된 마른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정말 아슬아슬한 내 입장이다. "저, 저는 괘, 괜찮아요...... 어, 어제 일 때문에 그러는 것 아녀요......!" 어떻든 벌어지는 상황이다. 달리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 난 혹시 우리 창희 도련님이심하게 다친 것 아닌가해서 걱정 했어요, 호호......" 미세스 최 누님의 웃음소리 - 이것은 어쩌면 어금니를 악문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럼... 집에서 푹 쉬도록 해요. 혹시 뭐 어디 더 아픈 곳 있으면,당장 연락해주고요. 어 쨌든 다미년 하나 땜에...... 창희씨에게 미안하기만 하네요." "예, 거,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 후, 바뀌는 목소리. "응, 짱이야, 난데, 괜찮냐?" 희창이.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 "으, 응......" "마담언니께서 상당히 걱정해주시네...... 야, 너 어제 일 장난이 아녔나본데?" "아, 아냐...... 그, 그냥...... 나, 잠...... 그래 잠이나 더 잘께." "그럴래? 알았어. 혹시 많이 아프면 전화해라. 감기약 사다줄께." 응, 그래, 끊는다 - 딸카닥. 어휴,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나는 한동안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복잡하게얽힌 사건과 사람들...... 머리 속으로 정리가 안된다. 그나저나... 미세스 최 누님은 왜 그곳까지 나타난 것일까. 내가 어떻다는 것은 다 알면서. 그 의문은 곧이어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삐리리릭... 얼떨떨한 기분으로 수화기를 드는데... "여보세요, 창희?" 으악! 또 한번 미세스 최였다. 갑작스런 그녀의 목소리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나 누님이야...... 지금 집에 있을 거지?" 왜, 왜 다시 전화를 한 거지? "걱정 마. 지금 내 차안이야. 옆에 아무도 없어. 보영이랑은 아직 거기 있구...... 나만 나왔 어. 어디, 집에 있을거야 동생?" 으화화 - 식은땀이 흐른다. 뭐라고 대답하란 말인가? "그럼 집에 있어. 내가 갈테니까. 그 때 옥탑방이라고 했었지? 곧 갈께......!" 뭐, 뭐라고요? 자, 잠깐만요 - 그러나 대꾸할 새도 없이 전화는 끊어지고 있었다. 후다닥, 나는 펄쩍 뛰며 일어나 앉았다. 무, 무슨 얘기야! 지금 이리로 온다고? 환장할 노 릇이다. 그녀가 왜 내 자취방에 온단 말인가? 나는 너무나 황당한 그녀의 통고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곳으로 찾아온다니, 왜? 40 갈팡질팡, 우왕좌왕, 안절부절못하는 나. 어쩌란 말인가 - 도망갈까, 말도 안되지, 어디로 튄단말인가. 보영이네 소주방에서 여기 까지는 느린 걸음으로도 10분 거리인데...... 아니지, 왜 도망쳐야해? 내가 왜...... 그래도 아 니다. 그렇다고 맞딱드려서 또 뭘 어쩐다? 정신차리자, 정신! 어찌 돌아가는 판국인지 몰라도. 지금, 지금 곧 미세스 최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내가 어디로 달아날수도 없다. 빨랑 상황정리를 해야했다. 그녀가 오면 뭐라고 말한담? 이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어제 밤사이 내가 보영이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추궁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그녀가 이리 로 오겠다는 가장 큰 목적일 것이다. 뭐라고 대답한다...... 일단 내가 아침까지 보영이 방에서 자고 나왔다는 것은 그 누님도 알 고 있는 꼼짝 못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강력히요구했었다 - 보영이 기집애와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자지 말라고. 내가 왜 그런 얘기를 들었어야하는지, 지금으로선 그런 이유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어 쨌든 신신당부를 한 미세스 최와의 약속을 깬 것은 내 쪽이니까...... 무조건 잡아떼자. 난 아무 일 없었던 것이다. 그냥 보영이 방에서 잠만 잤다고 하자. 아무 짓 안하고, 그냥 술 취해서 걔나 나나 쓰러져 잤다고 해버리자. 그래도 꼬치꼬치 따진다면, 나로서도 할 말은 있다. 결단코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도 그 럴 수는 있는 일 아닌가,내가 누구네 집에서 누구와 잤건,그건 내 자유다 - 표면상으로 그 누님이 내게 간섭할 일은 절대 아니다. 더더군다나 내가 보영이와 정사를 가졌건 아니건, 무슨 증거가 남는 것도 아니고... 최마담이 알아야할 문제는 전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불안한 결심을 하는 나인데... 골목길에서 자가용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 왔다. 미세스 최가 나타난 것이다. 또각또각, 계단을 올라오는 여자 구두굽 소리. "창희동생, 안에 있어?" 올 것이 왔다. 당당해지려 한껏 긴장하는 내 목소리. "어, 예...... 드, 들어오세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데... 방문이 슬며시 열리며 미세스 최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 긴장된 대면이지만, 그녀를 보고 나는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차분히 맵시낸 정장... 진하지 않은 화장...처음에 나는 그녀가 다른 사람인 줄로만알았 다. 그저 평범한 오피스걸이나, 아직 처녀티를 벗지 못한 새댁의 외출 - 뭐 그런 것을 떠올 리게 하는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치마가 다소 아슬아슬하게 짧다는 것만 빼놓으면, 그녀는 단란주점에서 본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 정도의 아가씨같은 늘씬한 모매를 자 랑하고 있었다. 야함이라든가, 색기와는 거리가 멀고 - 그저 그런, 흔히 시내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여자처럼 보이지 않나. 그리고, 그녀는 내 예상 - 독기가 서렸다던가, 화가 났을 거라는 - 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아휴, 이게 뭐야 창희...... 그래도 이 누난 손님인데......" 아차차, 그녀에게 대답할 말만 궁리하느라고전혀 방안에 신경을 쓰지 못했었던것이다. 아이고 참, 희창이나 친구가 아니지, 미세스 최는......! "혼자사는 남자들 별 수 없다니까... 옷도 어제 입은 그대로고......" 당장, 왠지 모르게 귀밑이 달아올랐다. 마치 지저분한 홀아비 방을 들킨 기분이다. 얼렐레 - 그리고 그녀는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리 비켜봐......!" 민망한 나를 제끼고, 들고 온 봉투 따위를 내려놓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방안을 정리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 어...... 내, 내버려 두세요! 제, 제가 할께요!" "됐어, 동생은 가만 있어. 이런 건 원래 여자가 하는 거야." 방구석으로 나를 몰아놓고, 그녀는 이불이며 내 옷가지들을 개키고 있었다. "어, 누, 누님 그건......!" 우수수, 방안에 쌓아놓은 옷더미에서 내 속옷 - 팬티따위가 방바닥으로 쏟아졌다. 아이고, 민망해라 - 아무리 빨아놓은 옷가지라고해도 그렇지, 내 런닝이나 팬티들이 누 나뻘 되는 여자의 발밑에 널린 것은 절대로 보기 좋은 꼴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옷더미를 챙기는 나. 하지만미세스 최는 남자속옷을 보고도그다지 놀라거나 멋쩍어하는 눈치가 ㅗ "어휴, 하, 하필이면 이게 왜......" 어이없어하는 나를 놔두고도 그녀는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을 뿐이다. "푸훗, 됐어. 뭐 어때...... 다 입는 옷인데. 내버려두고 동생은 가만 있어. 누나가 다 알아서 치울께." 엉거주춤, 방바닥에 쏟아진 속옷가지를 챙기는 나를 밀치며 누님은 손수 그것들을 개키기 시작했다. "창문이나 열고...... 걸레같은 것 있어? 아냐, 내가 할테니까, 창희는 잠깐 나가있어......!" 이건 또 뭐냐.옷장대신 쓰는 상자 속에다 내 속옷들을 집어 넣고 나서는 방구석의 걸레를 집어드는 그녀. 나는 갈수록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마담이오면 불어닥치리라예상했 던 폭풍우는 고사하고,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는 그녀에게 나는완전히 얼이 빠질 따름이었 다. "청소는 제가 할게여, 누,누님..........!" "괜찮아. 누나가 동생 방 치워주는 건데 뭘. 그냥 조금만 기다리고있어." 내가가 한사코 돕겠다 나서도, 그녀는 되레 그런 나를 말리며 척척 마치 자기 집인 양 내 방안을 정돈해가고 있었다.정말 여자라서 그럴까 처음들어선 내 자취방인데도최마담은 능 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 어유, 구석에 이 먼지 좀 봐. 안 되겠네. 우리 창희 방 자주 와서 청소 해줘야겠다!" 으잉? 자주 와서 청소를 해준다고요? 아닌게 아니라, 사실 일주일에 채 한번도 청소를 해본 일이없는 내 방에는 구석구석 먼 지가 한웅큼씩은 날리고 있었다. "어머머, 이 책상밑은 장난이 아니네......!" 방 한켠의 책상밑. 그녀는 의자를 밀어내고 그 아래까지엎드린 자세로 허리를 숙이고는 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 이, 이런......! 글쎄다. 청소하는 여자가 특히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나, 집안일하는 여자를 어머니 외에 제 대로 구경해본 적도 없는 나여서, 이런 광경을 처음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 지금 이 미세스 최 누님의 청소하는 포즈는 상당히 야릇한 체위였다. 가뜩이나 짧은 정장치마를 입고, 자기 옷매무새는 신경도 쓰지않으며 구석에 고개를 들 이미는 것까지는 좋은데... 바로 그 짧은 스커트가 문제였다. 그것이 상당히 꼭 끼이는스타 일인데다가... 저렇게 엎드려 마치 후배위같은 자세를 연출하고 있으니, 으아 - 그녀의 치마 단은 절반이상 끌어올려져 수그린 뒤쪽으로 아슬아슬하게,엉덩이에 간신히 걸린 상황이었 다. 그녀는 팬티스타킹을 신지 않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허벅지 위로 팽팽히 당겨진 치맛자락 아래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밴드부분. 참으로민망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책상 밑은 웬 먼지가 그리도 많은지, 최마담은 구석구석을 닦기 위해 이리저리 허리까지 틀어댔다. 그럴수록 그녀의 터질 듯한 엉덩이는 치마 속에서 씰룩였고, 그러니 당연히 그 안의 속옷 - 팬티 선이 그대로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아찔했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엉덩이 한가운데에 못박 힌 눈길을 함부로 치울 수가 없었다. "휴우 이제 좀 됐네!" 꿀꺽, 침을 삼키면서 그녀의 등 뒤만 멍청히 바라보며 섰는데, 문득 청소를 끝마쳤는지 최 마담이 드디어 허리를 일으켰다. 나는 화들짝 놀라, 딴 곳으로 눈길을 피했다. 채 일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 방은 완전히 일신이 되었다. 잘 개어진 이불더미.가 지런히 걸린 옷걸이, 반짝이는 방바닥...... 유일하게 지저분한것은 그 한가운데서 뒤통수만 긁고 선 나였다. 입이 떡 벌려질 판국, 그렇지만 그녀는그런 내가 안중에 없다는 듯, 더러 워진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방 쏴아, 수도꼭지가 틀어지고 곧이어 빨래하는 소리. 한층 더 당혹스러운 제안이 나온 것은 그 화장실 안에서였다. "창희 동생, 옷 빨 거 있어?" 오, 옷이요? "옷 빨 것 있으면 줘. 얼른!" 으아...... 지금 빨래까지 해주겠다는 얘기? "아, 아녀요, 어, 없어요!" 이게 무슨...... 마치 이것은 정말 친누나나, 아니 꼭 내 마누라같은 행동 아닌가. "어디 봐......" 하지만 최마담은 못미덥다는 듯 방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어 몸 둘 바를 모르는 나를 세워놓고 갑자기 그녀는 아래 위로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옷...... 어제 입고 있던 것 아냐? 양말도 안벗고......" 그녀는 대뜸 그것을 지목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아침에 보영이 방에서 돌아오자마자 푹 쓰러져 곯아떨어졌는데. 순간 미심쩍은 듯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옷들 벗어줘!" "예? 이, 이거요? 아뇨, 이 옷들은 아직 안 빨아도......" 황당한 그녀의 요구에 아연실색하고 있는데, 최마담은 알 수 없는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 였다. 그리고 한층 더 황당한 요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41 "겉옷이 그러면...... 속옷이라도 달라구. 설마...... 동생 지금 속옷도 안 갈아입겠다고 그 러는 건 아니지?" 기가 막혔다. 얼토당토않은 최마담의 말에 나는 아연 넋이 나가 눈만 끔벅거렸다. 물론 만약에, 정말 만약에, 여기최마담이 나의 친누님, 아니가까운 친척누나라 한다면 하등 이상한 요구는 아니리라. 그러나 지금 이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자 기가 왜 내 속옷 빨래를 해준단 말인가. 내가 어이없어 함을 알 텐데도 그녀는 당당하게 나를 다그쳐댔다. "빨랑 줘, 창희. 팬티 안 입었어? 벗으면 안 되게?" "아, 아니 저, 저......" 무어라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요구는그만큼이나 나를 당혹하게 만 드는 것이었다. "지, 지금요?" 끄덕끄덕,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기서요?" 끄덕끄덕, 또 한 번 말도 안 된다! 여기는 내 자취방 안이 아닌가.그럼 나더러 지금 자기 앞에서 바지를 벗 으란 얘기? "아, 아니...... 저, 누, 누님...... 왜 그러세요, 이, 이러시면 제가......" 항의해야 했다. 과잉친절도 유분수지, 도대체 최마담 그녀가 뭔데 내 방 청소에다, 하물며 내 팬티빨래까지 하겠다고 나서나. 하지만 나의 그런 반대의사는 그녀에 의해 간단히 제압 당하고 말았다. 최마담은 그런 내 가 짜증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 봐, 창희 동생. 난 자기한테한참 누님, 그것도 큰 누님뻘도더 되지 않아......? 왜 그래, 자꾸. 누나 앞에서 옷벗는 게 창피해?" 그녀의 막힘 없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몰라서 그러나 본데, 걱정하지 마. 나는 그 동안 볼 것 못 볼 것 다 봤으니까. 그러니 괜 한 실랑이 벌이지 말고, 얼른 벗어 달라구!" 어휴, 미칠 일이다. 아무리 어쩐다 해도 난 분명다리털 시커먼 사내놈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봤으니까 자기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아, 아무리 그래도 여, 여자 앞에서...... 그, 그럼 저 화,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별 수 없었다. 핑계라도 대고 슬쩍 화장실로 빠져나가려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최마 담이 갑자기 내 팔을 붙들었다. "아냐, 여기서 벗어. 어차피 화장실엔 내가 들어가야 되잖아?" "예에......?" "욕실에 가서 빨아야 할 것 아냐. 그러니 여기서 달라구. 좋아 정 그러면 돌아서 있을게." 으와, 정말 무지막지한 얘기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빛나며 묘한 비웃음이 일고 있었다. "왜? 창희는...... 내가 여자로 보이나 보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여자? "그렇잖아. 나는 누나동생 사이로 얘기하는 건데, 동생은 그렇지 않은가 보네?" 머리 속이 띵했다. 교묘한 논리였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완벽히 덫에 걸 린 것이다. 그녀는 이내 팔짱을 끼고는 돌아섰다. "안 볼 테니까. 양말하고 팬티만 건네줘." "누...... 누님."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나는 두 눈을질끈 감았다. 도리가 없었다.엉거주춤 바지를 벗고, 팬티를 새것으로 갈아입을 수밖에. 최마담은 등을 도리고 앉은 채 재촉을 해댔다. 그것도 놀 리는 말투로. "뭐 그렇게 오래 걸려? 속옷 하나 벗는데......" 애꿎은 한숨만 새어나왔다. 쑤욱, 항복의 백기처럼 내 팬티가 최마담의 어깨 너머로내밀 어졌다. 그나마 마지막 예의일까. 짐짓 최마담은 그 속옷을 방 안 구석구석에서 찾아낸 다른 빨랫 감들 - 청바지, 티셔츠 따위 - 과 함께 뭉쳐버렸다. 얼른 빨아버리기를. 이런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그빨래더미를 뭉 쳐놓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희동생!"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끔했다. "예......?" 최마담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다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이런 것 물을 만한 입장이 아니란건 알지만...... 그래도 하나만 물을게. 대답해 줄 수 있어?" 이상하게도 최마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 "무...... 무얼......" "어제...... 보영이랑 무슨 일 있었어?" 드디어......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아! 그녀의 공세가 시작되는 건가. "그 계집애랑 아무 일 없던 거지? 나랑 약속, 어기지 않았겠지?" 아아, 뭐라고 대답하지? 애초에 맘먹은 대로 딱 잡아 떼야 하나? 죄송해요. 실은 -이런 이실직고가 나와야 했는지도몰랐다. 그러나 내 혀는 나도 모르게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했다. "예, 어, 어제는...... 아무 일 없었어요. 그냥 두,둘이 취해서...... 그, 그래서 그만 깜빡 잠 이 든 게......" 후, 고개 너머로 이어지는 그녀의 한숨소리 "정말이야? 맹세할 수 있어?" 에라 모르겠다. 무조건 아무 일 없었다고 우기자. "예, 저, 정말로요. 우린 그냥 잤어요!" 순간,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본것 이다. "나...... 거짓말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창희는 그렇지 않기를 바래." 42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최마담은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우선...... 내가 들어가서 빨래하기 전데 좀 씻도록 해. 옷도 갈아입고 말이야." 우스운 일이지만, 어느새 내 방의 주인이 바뀐 것 같았다. 글세, 일종의 카리스마일까.최 마담이 상전 같았고, 나는 그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하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나는 찍 소리 못한 채 갈아입을 옷가지를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 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나는 후회를 거듭했다.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투덜거릴문제 도 아니었다. 하룻밤의 유혹, 저 보영이에게 붙들린 것이 바로 화근 아닌가. 젠장, 젠장......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그 때였다. 똑똑, 샤워기 물소리 속으로 작게 화장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 문 앞에 타월 가져다 놨어." 최마담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겁났다. 그냥 이쯤에서 최마담이 말없이 돌아가 주었으면 더 바 랄게 없겠지만, 전혀 그럴 리 없는 바깥동정이었다.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화장실 안에 숨어있을수는 없는 일. 샤워를끝마치 고 물을 잠그자 다시 한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희...... 아직 멀었어?" "아, 아니요! 금방 나갈게요!"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빼꼼이 문을 열어 보니 방문은 닫혀져 있다. 수건......그것은 곱게 접혀져 화장실 문 바로 앞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나는 재빨리 그것을 집어들고 문 을 닫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그녀가 갖다놓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도,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별로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며칠 전, 신세한탄까지 들려준 사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로 안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 렇게까지 지나친 행동을 보이나? 정말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쳐 방 청소에 빨래까지 해주겠다는 것부터 그러하고, 내가 날라리 계집애 랑 외박했을까 봐 안달이고. 설혹 우리가 친남매간이라 치자. 그렇다 해도 엄연히 스무 살이 넘은 다 큰 어른인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그녀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방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송아지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문을 열고 들여다본 방 안에는 적지 않이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내 고물 다리미를 꺼낸 든 최마담은 무릎까지 꿇은 자세로 빨아놓은 내 옷가지들을 다림질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방 가운데 조그만앉은뱅이 상 위에는...... 음료수 와 도시락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으응, 얼른 들어와서 이것 좀 먹어. 아직 점심, 아니 아침도 안 먹었지?" 얼렐레...... 그녀는 우두커니 선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가 정말 내 방 맞나. 말끔히 청소된 방안, 깔끔하게 정리된 옷걸이며 책상 - 꼭 누 님이 내 방에 놀러온 것이 아니라 내가 누님 방에 놀러온 꼴이었다. "앉아...... 아까 여기 올 때에, 동생이 아무 것도 안 먹었을 것같아 사왔어. 전자레인지라 도 있으면 데워줄 텐데...... 다 식었겠네. 다음에는, 내가 고기라도 사와서 구워줄게." 갈수록 황송한 말만 하고 있는 최마담. 이제 음식까지 해주겠다? "그, 그 옷들 안 다려도 되는데......" 미안하기 그지없는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며 헛기침을 해보지만, 최마담은 들은 척도 하 지 않았다. "어유, 뭘....... 지금 보니까 아예 다림질 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지?" 그...... 그러야 사실, 옷 빨기도 귀찮은데 무슨 다림질씩이나. 그렇기에 나는 주말마다 집으 로 어미니께 빨랫감 보따리를 안기기 일쑤다. 당연히 남방 같은종류는 그냥 툴툴 털어 입 고. "배 안 고파? 남자들 혼자 살면 배 많이 곯잖아...... 창희도 그렇지?" 물론 뱃속은 두말 할 필요 없이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술 빼고는 먹 은 게 없으니, 오후가 된 지금에 와서는 거의 뱃가죽이 등뼈에 붙을 지경이었다. "얼른 먹어. 넉넉하게 사왔으니까.미안해, 누나가 겨우 그런도시락 나부랭이나 먹이다 니....." 도시락 나부랭이?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도시락은 고급 일식집에서 사온 것 같았다. 정말 모를 일이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내게 잘해주는 것일까. 감격스러운 마음에 아까까지의 낯뜨거움은 어느새 저만큼 도망을 가버렸다. "아냐, 잠깐...... 먼저 빨래 좀 해야겠다!" 대충 두어 벌 옷가지를 다려놓은그녀는, 곱게 옷걸이에 그것들을 걸고내 속옷과 양말 등을 들고 일어섰다. "아, 아뇨, 그. 그것들은 제가......" "괜찮아. 하는 김에 다 해 버릴게. 동생은 얼른 이거나 먹어." 얼결에 따라 일어서려는 나를, 최마담은 손짓으로제지하며 빨랫감을 가지고 목욕탕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어이 내 팬티까지 빨고 갈 심산인가 보다.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기계적으로 밥 을 넘기며, 음료수를 따 목을 축이려는데, 무심히 방문 쪽을 쳐다본 내 눈에 뭔가가 잡혔다. 원래 내 방과 화장실 겸 욕실은 서로 마주보는 위치, 그녀가내 방문을 꽉 닫지 않고 나 간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 빼꼼이 열린 문틈 사이로, 건너편 화장실 안이 보이고 있었다. 채 한 평도 안 될 그 곳. 비좁은 그 안에서 그녀는 막 쪼그려 앉아 대야에 빨랫감을 주워 담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흔히 빨래 같은 잡일을 하는 경우에, 여자들은 대부 분 목욕탕이나 화장실의 문을 열어놓기 마련인데 - 실제로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다. 언젠가 그 이유를 물으니 '물소리 땜에 누가 들어오는 초인종 소리나 전화벨소리가 안들리잖니'라 고 하셨다 - 그런데 지금 최마담도 똑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말해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아 본의 아니게 그안이 전부 보였던 것이다. 그녀가 뭐 용변을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가 빨래하는 모습을 처 음 볼 리도 없는 것이다. 그냥 누님은 바닥에 놓인대야에 빨랫감을 넣고는 물을 퍼담는데 - 그것이 문제였다. 입고 있는 짧은 치마. 바닥에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는 그녀. 그런데 꼭 끼는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니...... 그러니 어쨌겠는가, 굳이 얘기 안 해도 그려지는 상황이다. 그녀는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 르는 채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광경에 당장 숨이 가빠옴이 느꼈 다. 내가 치마를 입고 있어도 당연했으리라. 최마담은스커트를 엉덩이께까지 끌어올려 그것 을 사타구니 사이로 쑤셔 넣고는 그대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허벅지 사이가 남김없이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적나라한 모습이었다.스타 킹도 허벅지 중간까지만 오는 밴드형에, 완전히 당겨 올려진치마 속...... 그 풍만한 육체가 바로 내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는 따로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단지콩닥이는 고동소리가 내 귓방망이 근처에 요랑하게 울렸고,마른침만이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시고있는 음료수의 맛도 제대로 모를 판국이었다. 그 때였다. 으악,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야릇한 경치에 넋이 나가있던 내 시 선과, 물끄러미 내 얼굴을 마주 쳐다본 그녀의 눈길이 정통으로 마주친 것이다. 화들짝, 후닥닥 눈을 돌렸다. 얼굴이 불에 데인 양 화끈거렸다. 아뿔싸, 그렇지만 정작 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건 그 직후였다. 최마담이 물기 묻은 손도 털지 않고 허리를 일으킨 것이다. 어쩌나,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차라리 행복한 상상이었다. 그녀가 불쑥 방안으로 건너오더니 새된 목소리 로 나를 질타했던 것이다. "창희! 내가 뭐랬지?" 예? 남세스러운 고개를 들자 최마담이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 다. "대답해! 방금 내가 뭐라고 그랬냐구!" "예? 무...... 무슨 얘기신지......" "왜 거짓말을 한 거야?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왜? 뭐라구? 보영이랑 아무 일 없었다구?" 으잉 -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초리로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찰싹, 얼얼한 통증 이 내 뺨에서 전해졌다. "보영이랑 술 취해서 그냥 잠만 자? 흥,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난 뺨 맞은 사실도 잊고 황당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 다. "누, 누님이.... 어, 어떻게 그걸......?" "야, 이 자식아! 이걸 봐. 이걸 보라구. 이러고도 거 짓말할 거야?" 최마담이 무언가를 내 코앞으로 다짜고짜내밀었다. 난 일순 그 희끄무레한 것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다름 아닌 그것은 바로......(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