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제3권 위험한 애정행각 지은이:XTC666 출판사:성인문 최마담의 속셈 부끄러운 얘기지만, 보영이와 벌였던 그 우연한 정사는 사실상 내게 거의 첫경험이나 마 찬가지였다. 첫경험이면 첫경험이지 '거의'가 붙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정확히 말해 그 날보영이와 겪은 일 이전에 이미 나는 동정을 버렸기 때문이다. 글쎄다.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보사부 총각과 법무부 총각을 구분한다고 하는데, 내가 얘기하 는 것은 딱히 그런 의미는 아니다. 뭐랄까, 좀 더 정상적인 상대방과의 정사? 그랬다. 순수하게 남녀 사이에 성행위를하는 것만이 숫총각이나 숫처녀를가르는 잣대가 된다면야-분명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현실적 기준에 찬성치 않는다-나는이미 성 경험이 있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며한 것은, 실제 그 경험도 며한 것으로, 그기회를 갖게 한 장본인에 있었다. 왜 냐면, 그런 계기를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희창이였으므로. 언젠가......녀석을 몇 년만에 과 동기로서 재회한 올 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넌 어떻게 지낸 거야?" 아직 새봄의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터라,꼬치집 소주잔에도 서리가 어리던 2차술자리,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모피재킷을 걸친 희창이는 한참 자기 아버지의 재기 소식을 전하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그냥......모범생이었지 뭐. 재수생활도 그저 그랬고." "짜식, 듣자니까 짱이 너 장학샹으로 들어왔다며? 학원도거기 어디냐? 그 일류종합반을 다녔고." "응......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나 같으면 그 성적에 다른 데 가거나, 아님 삼수를 했겠구만. 나 야 우리 엄마 성화로 과외 덕을 봤는데도 이 정돈데......" 어차피 그 때 상황은 다 결정된 후였다. 나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헤헤, 원래 중학교 때도 네가 나보다 성적이 좋았잖아. 그야말로 너하고 나하고는 정반대 로 살아온 거네." 언뜻, 술자리 중간중간 녀석의 말추로 난는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해보지못한 고등학교 시절의 미팅과 여자 이야기, 게다가 웬만한 유흥문화체험담은 도저히 내가 따라 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야, 그나저나 우리 나가자. 내가 3차 살게." "3차?" "그래. 이런 칙칙한 곳에서 맥주하고 소주는 지겹도록 먹었잖냐. 그러니 우리 술좀 깨야 되지 않겠어?" 술을 깬다. 난 그것이 무슨 노래방 같은 곳에 들어가스트레스를 풀자는 얘기인 줄 알았 다. "범생이로 살아온 짱이 너를 위해 이 엉아가 해줄일이 뭐 있겠냐. 이제 뿅가는해방감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줘야지!" 희창이는 다짜고짜 택시를 잡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난를 차안으로 미렁넣었다. "나이트나 가자. 물론 나이트 클럽 정도는 가본 적 있겠지?" "나이트......웅, 한 번. 학원 다닐 때 학원 동기들이랑." "그래? 어디?" 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한곳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녀석은 짐짓 코방귈를 뀌었다. "에이......그게 어디 나이트야. 애들 다니는 디스코텍이지.그건 나이트가 아니란다, 이 범 생아." 도착한 곳은 강남의 어느 일류호텔 앞이었다. 녀석은 오렌지족의 티를 내듯, 그곳의지하 입구에서 스스럼없이 단골 웨이터의 이름까지 불렀다. "어떠냐, 이게 진짜 나이트야!" 시끄러운 댄스뮤직 속에서 그가 소리를 쳤다. 나는 그 까닭을, 입구에 들어서자 한눈에 알 아볼 수 있었다. TV에서나 보았던 가수들이 출연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일전 내가 딱한 번 가봤던 곳과 는 전혀 딴판이었다. 시끄러운 음반 대신 생음악이 주였고, 호화로운 분위기에 걸맞게손님 들도 고급 옷감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웨이터들까지도. 하지만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는데., 진짜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 경이 그곳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짜샤, 저 아가씨들 옷 뚫어지겠다. 저 천쪼가리에 구멍나면뮈가 남겠냐? 얌마. 이런 데 서 너처럼 그러면 촌티 내는 거야 임마!" 후아. 그때서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중앙 홀보다 높이 설치도니 무대 위에서 느씬한 여자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 는데 비키니, 아니 거의 안 입은 꼴이나 마찬가지인 아슬아슬한 끈으로 만든 속옷류룰 걸치 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넋 나간 표정에, 희창이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더니, 테이블 위에놓인 양 초를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뭔가 웨이터와 쑥적이던 희창이. 그런데 내가 어색함을 깨기위해 나가서 몸이라도 흔들 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그 즈음에. 문득 나는 더욱어색한 상황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웨이터에게 이끌려 진한 화장을 한 아가씨 둘이 우리 테이블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을 향해 희창이가 일어나 인사를 하기에, 나는 엉겁결에 자리를 비켜줘여 했다. 난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아가씨들이 왜 우리와 합석을 하는것인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어리벙벙한 나를 위해 희창이 녀석이 부킹을 시켜준 것이라는 건 ,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그녀들은별 말이 없었다......는 건 내 옆에 앉은아가씨와 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였다. 우리는 함께 스테이지에 올라 춤을 추기도 했는데, 희창이는서슴없이 자기 몫의 여자에게 블루스를 청했고 그 여자 쪽도 순순히 응했다. 결론적으로 그 부킹은 깨졌다. 순전히 나 때문에. "어이구, 너 진짜 모범생이구나. 그렇게 순진한 척 앉아만 있으면 뭐해?나처럼 분위기도 맞추고 그래야 할 것 아냐? 젠장, 괜히 그 계집애들 안주값만 대줬잖아!" 나이트 클럽이란 곳에서 나오면서 희창이가 그렇게 투덜거렸다. 미안하기는 했지만,나로 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별로 자신 없는 일ㅈ이지만 그 때만해도 난생 처음 만난 여 자와 진하게 몸을 비비적대며 블루스를 춘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간만에 맘에 드는 여자애들을 꼬실 호기라 생각했던 걸까.희창이는 어쨌든 아쉬운지 나 를 한 번 더 꼬드겼다. "그래도 발바닥 비비고 나니까 술이깨는데......어떠냐, 기왕 이렇게 된거 우리 한잔 더 할까?" "한잔 더? 지금 열두 시도 넘었는데...... 술 마실 곳이나 있어?" 그러고 보니 포장마차 따위가 떠으르기는했다. 그러나 녀석은 다시한 번 gkata하다는 투로 웃으며 예의 그 찡긋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야야, 12시 넘었다고 술 마실 제가 없는 줄 아냐? 어휴 정말 천연기념물 티를 내는구만." 그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듯 앞장을 섰다. "천연기념물, 천연기념물이라......" 당시 희창이가 의도하는 바가 뭔지 알았다면, 난 틀림없이 녀석을 제지했을 것이다.그렇 짐나 불행히도 나는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나를 이끈 곳은 포장마차가 즐비한 거리였기에. 나는 그저 녀석의 뒤를 따랐을 뿐이었다. 그런데-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희창이는 그런길거리를 지나 뒷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그 제야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기겁을 했다. "이, 이짱, 여기는......!" 휘황찬란한 불빛, 네온사인이 아닌 그형광등 빛들은, 골목안을 불야성으로 밝히고있었 다. 당장에 여기저기서 우리를 향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우 와요, 학생들......!" 이런 건 가장 점잖은 축에 속했다. "오빠, 우리 가게 애들 다 새로 왔어! 아다라시도 있다고." 라든가, "어머, 힘들 좋게 생겼다. 홍콩 가고 싶지 않아?" 식의 육두문자가 사방에서 우리를 불러댔다.나는 놀란 눈으로 희창이에게물을 수밖에 없었다. "야, 이...... 이런데서 술을 팔아?" "후훗, 그럼. 당연하지. 넌 가만히 있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는 휘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 중 한곳의유리문-아예 거리로 향한 쪽 전체가 유리였지 만 -을 열고 익숙하게 들어섰다. "아줌마, 여기 몇 번째 집이죠?" 녀석은 아마 이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당장에 반색을 하는 한 아줌마 가 그에게 한껏 친절히 응대했다. "응? 우린 여덟 번째 집인데...... 왜? 단골 아가씨 있어?" "그래요? 난 또 두 번째 집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희창이가 다른 곳을 향할 리는 만무, 이미 그포주 아줌마에게 손목을 붙들린 그 는 잘해준다, 영계 넣어주마, 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엉겁결에 나도 따라서 들어설 수밖에. 우리는 곧장 2층의 한 널찍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석들이깔린 탁자가 있는 여염집 거 실 같은 곳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들 줘요!" 우리를 안내한 중년여자가 나가자, 나는 재빨리 희창이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희, 희창아. 수, 술값은?" 모름긴 몰라도 이런 곳이 만만치 않은 비용을 요구한다는 것쯤이야 상식으로 알고 있었는 데, 녀석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걱정 마. 까짓 엄마한테 옷 한 벌 샀다고하면 돼. 그리고 이 게 다 너 땜에그러는 거 야. 괜히 아까 그 계집애들이 아까웠다는 생각 들게 했으니깐." 그가 지갑 속에서 꺼내 흔든 것은 크레디트 카드였다.그런곳에서 카드로 요금을 결제한 다는 것조차 처음 알게 된사실이 었기에, 당혹하여 눈만 끔벅대다가그래도 노파심에 한 마디 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 순간 요염하게 디자인된 옷을 입은 아가씨 둘이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그녀들은 희창이와 내 곁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진이에요." "반갑습니다. 선이 인사드려요." 선이, 나중에 인사한 그녀가 내 파트너였다. 곧 맥주병들과 안주접시가 날라져 왔고-술을 팔기는 파는 것이다- 희창이가 카드를 건네주자 이어 능숙하게 여흥이 개시되었다. 그 뒤에 계속된 장면들은 너무나 어안이 벙벙해서였는지 잘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아가 며 노래를 부르다가, 무슨 가위바위보 같은걸로 술을 먹이기도 했고, 쇼를 보여라말아라 한참 낯 뜨거운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는 순간 순간 내 마음은 콩알만해지고 있었다. 선이라는 그 아가씨가 내게 은근히 몸 을 밀착시겨 왔던 것이다. 내 품안으로 파고들며 아양을 떨기도 하고, 허벅지를 바싹 붙이기 도 하던 그녀는, 급기야 내 손을 붙잡아 자기 몸 여기저기에 갖다대기까지 했던 것인데......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도사렸는데, 그녀가 내 손을 자신의 치마 속으로끌 어당겼던 것이다. 으악-진짜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얼굴이 홍당무인양 달아올랐다. 선 이란 아가씨는 치마 속에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입지 않았으니...... "어머나, 이 오빠 좀 봐! 호호홋!" 기절초풍 하는 내 모습에 그녀가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거기 날라리 오빠, 여기 우리 오빤 이런 데 처음이지? 그렇지?" 희창이가 그 바람에 더 크게 웃어젖혔다. "하핫, 이제 알았냐? 걔 숫총각이야, 숫총각......! 어때? 너 오늘 땡잡았지?" "어머머, 정말? 그럼 나 오늘 팁 안 받을래!" 하하하, 호호호......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히히덕거림이 한동안 계속되었지만,이미 넋이 나가버린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 다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나만이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이미 희창이는 그 다음 단계 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엉거주춤, 선이란 아가씨에 의해 마지못해 내 손이 그녀의가슴속에 들어가 있던지라 무 안해져서 민망한 시선을 돌렸으나 그 돌린 맞은편에 그보다 더 민망한 광경이 있었던 것이 다. 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처럼 아가씨의 가슴팍을 더듬는 정도라면 다행 이었다. 냅다 드러누워 버린 희창이의 바로 그 누운 자세가 가관이었으니...... 뭐라고 해냐 하나. 기실 남자가 여자 무릎에 눕는 것이야 흔한 일일 테지만, 나는녀석이 누운 바로 그 장소에 눈이 휘둥그래져야 했다-그런 모습도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었다고 해야할까? 하니 좀 더 정확히는 그가 베가 누운 것은 무릎이 아니었던 것이다. 희창이 녀석은 다름 아닌 자기 파트너의 치마 속을 베고 누운중, 그러니 나로서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진이라는 아가씨도 내 쪽과 마찬가지라면, 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으니 말이다. 분명 무릎이나 허벅지가 아닌 '치마속'을 베고 누운 자세라고했었다. 그러므로 녀석의 머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뻔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고개를 테이블 쪽이 아닌 그 진이라는 여자 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니...... "어머, 오빠 너무 짓궂다...... 아이, 간지럽다니까......!" "가만있어 봐. 누가 뭐 어쩐대? 그냥 보기만 할게. 응?" 더욱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행동뿐만이 아니었다.그런 망측한 짓을 당하고 있는 아가씨의 반응이 나란 놈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어머머, 그만 해...... 그만 들여다 봐! 아유 참......" 전혀 싫거나 부끄럽지 않다는 듯 그녀 쪽은 실없이 웃어대면서도 굳이 말리지는 않고 있 었다. 정말 누가 본다 해도 쑥스러울 것 없다는 사이처럼. 더군다나 내 옆에 앉은 아가씨는 그 모습에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호호, 웬만하면 보여 드리지 그래?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 볼건데 뭘......" 맞장구치는 그 말이 한 번 더 내 얼굴을 확 달아오르게 했다.그러자 점점 더 신이 나는 지 희창이는 짐짓 고개를 돌리며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뭐야? 자꾸 그럼 니 것도 볼 거야!" 머리 속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대체 무러 본다는 건가. "어머나, 오빠도. 자기 짝 것만 보면 됐지 왜 남의 걸 넘봐? 난 이따 이오빠한테만 보여 줄 거라고. 우리 딱지 떼는 오빠한테만. 그치, 오빠?" 아이고,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내 파트너니까 나만 본다고? "으응......근데 오빠 아무 말도 없네? 그럼 나 저 오빠에게 보여주라는 거야?" 황당한 노릇, 어리벙벙한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삐진 척내 얼굴을 돌아보며 묻는 선이 란 아가씨. 그녀는 갑자기 손을 붙잡아 다시금 자기의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치마 속으로 끌 어댔다. "우헤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니 것도 볼까나?" 희창이는 아예 그러겠다는 투로 몸을 일으켰다. 자칫하면 진짜로 그럴 것 같은 태세였다. 이마 위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질투라도 부려야 정상일까.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 곤란한 지경을 벗어나게 한 사람이있었으니, 그것은 희창이나 내 파트너가 아니었다. "후훗, 오빠들 그만해. 이제 우리 연애하러 가야지." 진이란 아가씨가 자기 사타구니에서 희창이의 얼굴이 치워진 것을 기화로 슬쩍 몸을 일으 켰던 것이다. 연애? 연애라니? 그 때만 해도 그 말의의미를 알지 못했던 나는 멍청히 그들의 얼굴만 쳐다봐야 했다. 의외로 희창이 녀석도 그녀들의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이라는 아가씨가 내 손을 붙잡아 이끌기에 나는 엉겁결에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물어야 했지만 왠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묻는다는 것이 좀 뭐한 분위기였다. "오빠 오늘이 정말 처음이라고 그랬지? 그럼 나만 따라 와. 내가 알아서 잘 해줄게." 그녀는 내게 찡긋 윙크마저 보냈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우리는 아래층 쪽문 뒤로 안내되었다. 그리도 '그곳'에 들어서게 된 나는 그제야 그 '연애' 가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조그만 다락방 같은 곳이었다. 끽해야 한두 평 남짓, 나는 그 방의 정경을살피고 서야 뜨악함을 느꼈다. 매트리스와 이불 한 채, 두툼한 베개 하나, 그리고 말 그대로 홍등인 붉은 전구 아래 구석 의 화장대, 그 골방에서 무슨 짓이 벌어질 것인가는, 굳이 설명 없이도 단박에 짐작했던것 이다. 아니나 달라 선이라는 아가씨는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치렁대던 드레스를 한번에 익숙 하게 훌렁 벗어 던졌다. "거기 누워. 오빠."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단숨에드러난 허연 나신, 나는 순식간에뜨악하여 입이 딱 벌어졌다. "참...... 오빠 숫총각이랬지? 그러면 그냥 누워만 있어." 그마저도 난 이행하지 못했다. 이미 그녀가 나를 앉히고는떠밀다시피 등을 대고 눕혔으 므로. 아아, 나는 아찔하여 눈을 질끈 감는 도리밖에 없었다. 먼발치에서 꿈결 같은 선이란 아가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거...... 원래는 안 해주는 거야. 다음에는 오빠가 알아서 해야 돼. 알았지?" 다음, 다음에...... 그 말이 내 창피스러움을 무마시켜 줄 리가 만무했다. "옷 다 벗으면 다른 남자들도브끄어워서 오래 못 견디더라. 하기야난 이게 더 편하지 만......"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 찰칵. 이어서 시원한 공기가 닿는 내 하반신. 연이어 그녀는차 근차근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내 상반신도 활짝 드러났다. 이럴 수가. 나는 그녀의 손에 의해 한 꺼풀 한 꺼풀씩 옷이 벗겨지는 중이었다. 아뜩했다. 그녀가 벌이는 행동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내심장 소리는 엄청난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지나 소년을 거치면서 그 동안 숱하게 꿈꿔 왔던여체에 대한 그 환상, 나는 지금 막 그 문턱의 직전에 몰리고 있었다. 뭐하려는 거예요, 하고 묻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입밖에 낸다는 것이 불필요했다. 그렇게 얼추 절반쯤 드러난 내 몸뚱이 위에서 그녀가 일사천리로 다음 동작을 실행하고 있 었던 것이다. 문득 얼굴가에 간지러움이 느껴졌기에 가늘게 실눈을떠보았다. 그랬더니 눈앞에 선이란 아가씨의 머리채가 보였다. 그러니까 내 가슴 위로. 환상에 대한 두려움 말고 다른 감각에 의해 내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내 가슴 복 판에 따갑게 느껴지는 숨결이 있었다. 축축하게, 부드러운 무엇이 내 몸 위를 훑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물기를 머 금은 부분이 내 몸 아래쪽으로 조금씩 움직여 내려가고 있었다. 어...... 엇.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란고작 그것이 전부였다. 그 마지막에는 분명느낌표가 붙었다. 동시에 내 몸 전체가 들썩였다. 그녀가 기습적으로 내 몸의 가장 중요한 곳을 가리고 있던 천조각을 그 입술의 동작과 마 찬가지로 날름 잡아 내렸던 것이다.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채를 잡을 뻔했다. 그 아가씨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가만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어린애처럼 나는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하체를 들어올려 줘야만했다. 그녀의 숨결이 마 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듯 아래쪽으로 조금씩 가까워졌던 것이다. 절대로...... 멈추지 않고. 마침내 그 짧고도 아찔한 봉사 이후에 그녀가 보여준몸짓들은 다분히 기계적이었다. 아 주 얇은 무언가가 정성스런 손놀림으로 씌워졌고, 내 허벅지 위로 맨살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가 두 손바닥으로 내 가슴팍을 짚었다. 까칠한 감촉이 내 하복부에전해졌다. 그리고 끈적이는 어딘가로 나를 안내했다. 그녀의 체중이 내 몸뚱이 위에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에 맞취 나에게도 흔들림 이 전해졌다. 해방감까지는 까마득하게만 생각되었던 나였으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그 안에서 선이란 그 여자와 나누었던 대화였기에 말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지나간 몇 분. 멈추기에 진작에늦어버린 몇 분 후에. "후후. 진짜 천연기념물인가 봐. 오빠 대체 지금 몇 살이야?" 그녀는 팬티를 들고 한쪽 발목씩차례로 집어넣으며 돌아보았다. 낯이뜨거워 고개조차 들기 힘들었던 나는 풀죽은 목소리로 기어 들어가듯 더듬거릴 따름이었다. "스, 스무 살......" "으응, 그럼 뭐 늦은 것도 아닌데? 난 스물셋인데." 스물셋이라니. 결국 누나뻘인 그녀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배시시 웃으며 농을 걸었다. "그나저나 내가 별명 하나 지어줄까?" "뭐, 뭐라고......?" "일분. 일분이라고 말야. 호호!" 제길,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던 나는 다시귀밑을 붉혀야 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건지 금방 알아들었던 것이다. "아...... 미안미안, 오빠. 장난이야. 처음엔 다들 그래."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을까, 거꾸로 스물세 살 아가씨선이는 나를 토닥거려 주기까지 했다. 나는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 서둘러 그 골방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안 돼. 아직은...... 아직 친구는 안 나왔을 거야. 아까 보니까 노는스타일이 베테랑인 것 같던데 뭘. 우리 원래 20분씩은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언니들한테 혼나니까." 무슨 이유로 혼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종내 나는좀 더 덜 수치스러운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 밖으로 나오자, 뜻밖에 희창이는 나보다 더 일찍 나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쭈? 너 아직까지 버틴 거야? 우와...... 너 혹시 옛날에 딱지 뗐던 거 아냐?" 희창이의 짐작이 틀렸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분명 첫경험을 치른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꼭 머리 속이 새하얘진 것같은 아무런 느낌이나 기억을 가질 수가 없었다. 과연 동정이란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숫총각을 만나고도, 자기 몸 을 팔고도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당당했던, 또 너무도 익숙했던 선이라는 여자 똫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정육점 불빛의 골목을 나서며 나는 덧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육점- 갈아있는 몸뚱이의 일부분이었던 곳이 진열되어 있는 장소.그 유명한 '리'란 단 어가 붙는 그곳은 정말 정육점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정육점의 몸뚱이 신세는 누구란 말인가. 유리창 안의아 가씨들일까? 왠지 그것이 밖에 있는 나라는 생각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다. 나는 그 기억을 동정과 연관시키지 않기로 했다. 실로우연찮은 기회에 경험한 곳이었지 만, 애꿏은 자존심으로 인해 그런 곳에 '첫경험'이란 단어를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좀 더 아찔한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다. 몇 푼의 돈으로 버릴 수 있는 것이아닌, 남 자 대 여자로서 확인 받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돈이나 폭력을 빌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어쩌면모든 남자들의 공통 희망사항일지 모르나, 나 또한 그것을 바랐다. '내가 원하는 상대방이 나를 원하는' - 그런 순수한 욕구 말이다. 그렇기에 내 머리 속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무슨 의미 같은것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보 영이와의 잠자리가 내게 진정한 첫경험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괴상한 인연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날의 일까지 포함해 어느 쪽이 첫 번째이건 두 번 다 희창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02 "거짓말하지 마. 나쁜 자식!" 최마담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노기까지 서려 있어서 처음에 나는 대제 무슨 일인지 갈피 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거짓말이란 필경 보영이와의 문제를 예기하는 것 같은데...... "속옷만 봐도 알 수 있어, 흥. 어제 진짜 둘이 마무 일 없어TEk고?"이게지금 무슨 얘 깅니가. 아니 속옷만 보고서?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걸 어떻게?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내 코앞에서 흔들어대는 헝겊조각에 양미간을 맞출 수 있었는데////// 으악, 내 휭둥그레진 눈을 못소리로 바꿔 표현하면 아마 그런 비명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방금 내가 건네준 물건, 속옷, 바로 내 팬티였다. 그녀는 '이것 봐, 이래도 시치미를 뗄 거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랬 다. 내가 졸도할 정도로 놀란 것은 그 팬티 자체가 아니라 정확히 말해 그 팬티의 일부분이 었다. 아아, 당장 나는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최마담이 아예그 민망한 부위를 뒤집어, 바싹 내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부정할 수 없는 그 결정적 증거.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익히 하는 바- 간간이 RNa자리 가 뒤숭숭할 때, 아침에 일어나 속옷을 살펴보면 늘 발견할 수 있었던 그 흔적들. 그 분비물 의 흔적을 대변하는 바를 최마담은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남세스러운모습을 들켰다는 것도 문제였으나, 그보다더 나를 치욕스럽게 만든 것은 그 앞에서 금방 밝혀지고 말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고개도 못들고 아랫입술만 아프게 깨물 수밖에. "이래도 아직 보영이와 아무 일 없었다고 잡아뗄 셈이야? 똑똑히 봐. 이게 뭔지는 동생이 더 잘 알 것 아냐?" 최마담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다그쳐댔다. "바보 같은 놈, 이게 뭐야? 금세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해?" 얻어맞은 뺨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실수, 정말 큰 실수였다.흔적 을 남긴 게 실수가 아니라, 몇분도 안 되어 탄로날 거짓말을 했다는것이 너무나 창피한 실수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털썩 내 앞에 주저앉았다. 꼭 실제로 나이 어린 동생의 불장난에 지 친 누나의 모습으로. "난, 난...... 창희 니가 이렇게 거짓말까지 할 줄은 몰랐어. 설마 했는데...... 이럴 줄은......" 분이 삭지 않는지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최마담은 고개를 돌려TEk. "죄, 죄송해요...... 그, 그게 사실은......" 나는 그저 뒷머리만 긁적거려댔다.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일단은 그녀를 속이려 들었다는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아까부터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생각- 왜 내가 지금 이런 일을 당해 야 하는 걸까? - 이 점차 증폭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 이렇게 당해야 하는 이유가하나도 없었다. 그저 술집 놀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여자 아닌가? 과잉친절을 보이다가 마치 친누나 아니면 애인이라도 된 듯이 보영이랑 자라 마라 하다가 이렇게 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다니...... 그런데 순간 가슴이 뜨끔해졌다. 얼레, 최마담의 한쪽으로 돌린 얼굴에 반짝 이슬이맺히 는 게 아닌가? "난 그게 더 싫어, 차라리 그 계집애랑...... 그래, 솔직하게 보영이 그 년이랑 잤다고 해도, 난 이 정도로 화나지는 않았을 거야." 당혹스러웠다. 거짓말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이 여자가 왜......? 나는 난감하여숨조차 쉴 수 없었다. "못된 년! 아니, 동생이 더 나빠!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그토록 부탁을 해는데." 최마담은 말을 끝내놓고는 날카롭게 나를 흘겨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누구야, 누가 그러자고 했어? 보영이야, 아님 창희 동생이야?" 급기야 비수 같은 그녀의 추궁이 시작되었고 나는 뭐라 말을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최 마담의 목소리는 추상과 같았다. "빨리 말해. 이번에도 거짓말할 거야?" "그, 그게 그만......" "그래서 어떡했어? 왜 뿌리치지 않은 거야? 어제 그 정도로 취했었어?" 나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분명 내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그러니까...... 술을 다 마시고 나서...... 보영이가 더 마시자고 하는 바람에......" "그래서? 그래서 술을 더 사간 거야? 안 취했었다며?" "아, 아뇨! 술은 더 안 사왔어요. 그런데 보, 보영이가...... 보영이가 그만취해서 막무가내 로 자기가 직접 술을 사오겠다는 통에 말리려고 들다가...... 그러다가......" "말렸는데, 말렸는데 뭘?" 어휴, 그걸 어떻게 일일이 설명한단 말인가. 차마, 보영이그 계집애가 웃통까지 벅고 설 쳐댔다...... 이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을보이자 그녀가 직접 사건 설명 을 해대기 시작했다. "보영이가 취해서 쓰러졌지? 그런 거지?" "어 예, 예 하도 완강하게 구는 바람에...... 그만 둘이 같이 넘어져서." 누님은 한심하다는 듯, 아니 아찔하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년이 먼저 그러자고 했지?" "예?" "보영이 말이야. 걔가 먼저 동생이랑 같이 자자고 한 거 아니냐고!" 나는 수치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고, 반면 최마담은 골치아프다는 듯 머리를 흔들 었따. "내가 그랬지? 그랬잖아, 이 바보야! 보영이. 자기 욕심이면 뭐든 할 거라고. 자기가 자고 싶은 남자한테는 먼저 꼬리치는 년이라고!"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그녀의말은 하나도 츨린 것이 없었다.그녀의 히스테리에 나는 그저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동생, 왜 이렇게 한심해? 여자애들이그럴 때면 먼저 취한 척하는거 몰라? 아니 진짜 취했어도 그래, 겨우 그 정도에 넘아갔단 말이야?" "저, 저는 아, 안 그러려고 했지만......" "안 그러긴 뭐가 안 그래. 분명히경고했었잖아. 그 계집애는 자기만 좋으면 이남자 저 남자 안 가리니까, 칭희 동생한테 넘어가지 말라고 내가 안 그랬어?" 최마담은 문득 말을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몰랐어, 겨우 그딴 보영이에게 넘어갈 줄은. 나, 아주 크게 실망했어. 동생이 그렇게 쉬운 남자라는 사실에...... 좋아. 그런 그렇다고 쳐. 왜 그랬어?" 왜 그랬느냐, 언뜻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흘끔거 렸다. 왜 보영이와 잤느냐는, 이유를 묻는 것일까......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내가 정녕 부끄러운 연유였다. "왜 거짓말을 했냔 말이야, 이 누님한테. 왜? 내가 같이 잤다고 하면 죽이기라도 할 것 같 았어?" 가라앉을 듯하던 그녀의 목소리 톤이 다시 높아지고 있었다.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도대체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거지? 대답해 봐. 보영이 방에서 자고 나왔다는 건, 아까 아침에 창희가그 방에서 전화 받은걸로 이미탄로난 거 아니야? 근데 왜 아까 전화로는 아무 일 없다고 시치미를 뗐지?" 그녀의 질문에 도리어 내가 더 당황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난 이해가 안 돼. 아니 그럴 배짱도 없는 거야? 나한테, 이 누님한테 왜 떳떳하지 못해?" 모르겠다. 미묘한 다그침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건 내가 한거짓말, 그것이 정녕 몸둘 바 를 모르게 하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03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 없어.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난 그 대닺을 들어야겠어." "어, 어제는......" 실수였어요- 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꼴깍거렸다. 딱 잡아떼지 못하는 내가 저주스러울 뿐, 변변한 대꾸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따름이었다. "잘못했어요. 제가...... 죄송합니다......" "그만. 그 얘기는 그만해. 그럴수록 난 더 화가 나.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아니, 후...... 내 가 왜 동생한테 죄송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어어...... 전후사정이 어떻게 됐건 나는 지금 꼼짝없이 큰죄를 지은 입장이 됐고, 그래서 사죄를 할 도리밖에 없었다. "자, 잘못했어요...... 저, 저는 누님이 화내실까 봐...... 하도 보영이렁같이 있지 말라고 신 신당부를 하시기에...... 제, 제발화내지 마세요. 이,이제 다시는...... 정말이에요.죄송합니 다......" "됐어. 나한테 그런 말하지 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모르겠다.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르는모든 말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달래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내 사과를 듣고도 묵묵부답 하다가, 문득 긴 탄식에 이어 가라앉은 목소리 로 넋두리를 해댔다. "동생, 동생은 몰라...... 아까 난 보영이만 있을 줄 알고 걔네 이모네소주방에 갔던 거야. 그냥 보영이한테 동생 전화번호만 알려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내가 얼마 나 놀랬는지 알아? 정말 기가 막혀서......" 아까 이 자취방에 들이닥치기 전의 설명이었다. "떡하니 희창이 도련님하고 같이 있더군. 그 간 큰 계집애가...... 후후,대단해. 창희, 아직 도 모르겠어? 보영이는 그런 계집애란 말이야. 아무리 요즘 여자애들, 그런 것에는 눈깜짝 도 안하는 게 기본이라지만...... 하지만 봐.동생이랑 같이 자놓고도 뻔뻔스럽게, 아침에또 다른 남자랑 히히덕대는 꼴이라니!" 희창이, 아직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그 이름만 듣고도 가슴 한쪽이 서늘 해지는 나를 두고 최마담은, 마치 자신이 요즘 세태의 대변자라도된 듯 개탄을 하고 있었 다. "안 그래도 보영이가 내게 당장 눈치를 주더군. 동생이어젯밤 자기 방에 있었던 사실을 내가 멋모르고 말할까 봐. 아마 그 계집애, 둘이 있었다는 것도 말하지않은 모양이던데...... 하기사 계집애, 걱정도 됐겠지." 후유, 그랬었나. 어쨌든 보영이가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니 다행이었따. "자기는 나한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걸...... 나도 모른 척 해줬으니까. 희창이 도련님 말 이야. 우리 자기랑 보영이 년이랑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꿈에도 모르고......!" 그녀는 어느새 내게 '자기'란 호칭을 붙이고 있었으나 난 무심결에 흘려듣고 있었다. 너무 나 자연스렁누 그녀의 훈계에 나 또한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이다.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이 최마담 누님에게 너무나 고마워해야 한 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해여 그 자리에서 그녀가무심코 나를 보영이 방에서 봤다느 얘기를 했다면 대체 나는무슨 꼴이 되었겠는가. 정말 그녀는사려 깊게 처신해준 것이다. "난 처음에 그저 술 먹다우연히 동생이 빠져나오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다 뭣도 모르고 내 전화를 받게 됐겠거니 하고...... 하지만 그 때 짐작했지. 보영이가 주는 눈치 를 보고 그래서 안 거야. 아, 이 계집애가 뭔가켕길 짓을 했구나...... 솔직히 말하면, 그 때 는 너무 화가 나서 희창이 도련님한테 다 말 해버릴까 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참았지. 맨 처 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까지도.그리고 동생이 아무 일 없었다길래끝까지 믿으려고 했었 고......" 어휴, 기어코 사건의 전모가 파헤쳐지고 있었고, 이제 나는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 렇다고 보영이나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니......, 어젯밤 일이 잘 됐건 못 됐건 간에 분명히 내게도 절반 아니 그 이상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녀의 침착함에 비해나는 얼마나 철없는 행동 을 했나. "후우...... 근데 이게 무슨 꼴인지......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거지?" 그녀는 멍한 시선을 피하며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얼른 가야겠어. 오늘 우리 가게 수금하는날이야. 자기 빨래...... 나 이것만얼른 끝내고 가볼게. 동생도 내가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지?" "아, 아녜요, 누님!" 내가 뭐라 말도 건네기 전에,최마담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보이며 힘없이 빨랫감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누, 누님......" 생각 같아서는 발목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몹쓸 놈인 나를놔두고 자신의 소임은 다하겠 다는 양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빨래를 시작하는 그녀. 멍하니 고개를 떨어뜨린 내 눈앞에 정말바빠선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 종내그녀가 집어가지 않은 내 팬티가 들어왔다. 멍하니 화장실에서 들려오는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애 꿎은 그 팬티를 벅벅 찢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아까처럼 욕실문을 열어놓았지 만, 이제 나는 감히 그쪽으로 눈길조차 보낼 수 없었다. 아니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 었다. 04 그 때 삐리리리, 어디선가 요란하에 벨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내방 전화기 소리가 아닌데...... 아! 나는 그것이 최마담의 핸드백 속에서 흘러나옴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어째야 하나. 욕실에 있는 그녀는 물소리에 가려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잔 뜩 의기소침한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그 벨소리는 멈추지 않고 연신 울려댔다. "누, 누님!" 나는 시선을 피하며 욕실 쪽으로 그녀를 불러다. "저, 전화 왔어요!" 한껏 목소리를 높여서야, 최마담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잠시 조용한 듯 하더니 그녀의망 설이는 듯한 대꾸가 들려왔다. "전화...... 대신 좀 받아. 나 지금 손이 젖었어. 누군지 물어보고, 그냥 나 없다고 해줘."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직 그녀의 화가 풀리지는 않았을 터,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의외로 건너편은 굵은 목소리의 남자였다. "어...... 제가 전화 잘못 걸었습니다. 최지숙씨 핸드폰 아닌가요?" "아, 아뇨. 마, 맞는데요. 최......" 굵직한 그 목소리에, 나는 멋모르고 최마담이라 부를 뻔한 호칭을 잽싸게 도로 삼켜야 했 다. "시, 실례지만 누구신지...... 지금 좀 바쁘셔서......" "그래요? 나 이대진이라고 합니다. 이대진." "예. 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저, 누님!" 나는 한 손으로 전화기를 가린 채 다시 그녀를 불렀다. "왜?" "저...... 나, 남자분이신데요!" "남자? 남자 누구?" 전화기 건너에서는 마땅찮은 듯헛기침 소리가 들렸고, 나는다시금 목청껏 이대진이란 이름을 전했다. "응? 이대진? 대진씨?" 그런데 얼레, 제법 중요한 사람인지 그녀는 그 이름을 듣고 후닥닥 손을 닦으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머, 미안해요. 대진씨!" 어, 나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내 짐작이 맞는가 최마담의응대가 다소 황급해 보였다. 게 다가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톤이었다. "아이...... 아녜요. 잠깐 일이 있어서...... 으응, 아니라니깐......" 아까 내게 으르렁거리던 목소리와는 딴판으로, 그녀는 정말로 전화를늦게 받은 게 미안 하기라도 한 듯 아예 콧소리로 대꾸를 했다. "아, 그래요? 호호, 잘됐네 그럼...... 응? 누구? 여기? 아......" 순간 그녀가 내 쪽을 흘낏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 여기...... 동생이야. 으응, 그러니까...... 사촌, 사촌이지 뭐......" 아마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 참...... 대진씨는 얘기를 해 줘도 잘 몰라.그런 게 있어요. 아이냐, 무슨 소리를...... 난 몰라. 호호, 그럼 좋게?" 한껏 다소곳해진 어투로 보아 퍽 가까운 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굴까? 일전 보영이와 다미가 얘기하던 그 '아저씨'란 인물인가? 아님녀 전에 자기 돈보고 쫓아 다니는 남자가있 다고 했는데, 그 인물일까? "알았어요, 있잖아. 여기서 말하기가 좀 그래. 미안해요,내가 가게 가서 다시 걸게. 알았 죠? 끊어요!" 뭔가 그녀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먼저 그 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으응, 우리 가게랑...... 거래하는 사장님이야. 나랑 친한." 글쎄다. 누가 물어 봤나...... 내가 뭐 궁금해 할 일은 아니지만, 그녀의행동거지는 충분히 호기심을 부치길 만한 그런 것이었따. 대체 누구기에 마투가 저리도 바뀐단 말인가? 이해하 기 힘든 게 여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마담은 그런 내 시선을 못 본 척하며 곧바로 화장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빨랫감을 가져다 내 방 이곳저곳에 걸어놓기 시작했다. 여하간에 그 통화로 정말 분주해진 모양인 듯, 그녀는 짐짓바쁜 척 굴며 능숙한 솜씨로 일을 마치고 서둘러 손을 털었다. "다 끝났으니 나 이제 가볼게. 나오지 않아도 돼. 나중에 또 들를테니깐...... 언젠지는 모 르겠지만." 그녀의 일방적인 말에도 나는 그저 예예거려야만 했다. 필경 그녀로서는 아직 분이 가시지 않았으리라. 자기가 데리고있는 여자애와 놀아난 사 내녀석. 거기에 한껏 잘해 주며 친밀감까지 가졌던그녀였으니...... 일종의 배신감에 휩싸였 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성싶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신을 챙겨 신다 말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늘 일은...... 아니야. 나중에 얘기하도록 해. 그렇지만......" 그저 황송할 따름인 내게 그녀는 마지막 말을 빼먹지 않았다. "거짓말...... 앞으로 내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 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함과 동시에 고맙다는 소리도 해야 옳을 것 같았지만 난 더 이상 뭐라 최마담에게 말 하지 못했다. 거짓말 - 그제야 나는내가 처한 이 상황을 재차실감하는 중이었던 까닭이 다. 엄청난 거짓말에 빠져든 것이다. 모두에게. 특히 희창이에게는......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아무래도 희창이였다. 옥탑방 계단을 내려가는 최마담의 구두굽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금세 우울함에 휩싸여야 했 다. 시작되는 오해 05 완전히 식어버린 도시락, 구겨진 속옷한 장. 한차례 최마담이란 폭풍이 지나간뒤의 방바닥에 놓인 그것들은 마치 뒤엉켜버린 내 머리 속같이 을씨년스러웠다. 최마담이란 뇌관 이 박혀버린 머리 속, 폭약은 당연히 보영이와 희창이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녀가 돌아간 뒤의 내 방 정경이었다.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 다고는 믿어지지 않게끔 말끔하게 정돈된 내 방안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따. 그렇게 계속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창밖에 어둠이 찾아올 무렵이었 다. 어떤 익숙한 소리가 내 초조함을 깨고 있었다. 내 방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던 것이다. "여...... 여보세요?" "어, 짱이 너 집에 있었구나." 마지못해 수화기를 집어든 나의 가슴속은 다시 덜컹거려야 했다. 바로 희창이였던 것이다. "으응...... 그, 그럼 어디 갔겠냐, 내가......" "니가 아까 몸이 안 좋다길래 집에라도 간 줄 알았지. 지금은 됀찮냐. 짜샤?" 맞다. 이 녀석은 내가 아픈 줄로만 알고 있다. "으......응. 덕분에...... 어, 어디냐?" "어디긴, 집이지." "그, 그래?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렇게 일찍 집에 들어갔어? 아직 초저녁인데......" "야, 말 마라. 근신 중이지 뭐. 물엄마가 아주 눈에 불을 켰다. 놀러만 다닌다고.참, 아 까...... 최마담이랑 무슨 얘기한 거야? 니가 꽤 쩔쩔매는 것 같던데." 덜컹거리던 가슴속이 이번엔 마구 두방망이질을 쳤다. 보영이......최마담 얘기는 그렇다 쳐 도 설마 그 계집애가 그 뒤에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너 설마...... 나한테 얘기 안한 거 있냐?" "아, 아냐, 임마!" 지나가는 말투 같지만 비수를 찌르는 듯한 녀석의 질문에 거의 발작적으로 대답이 튀어나 왔다. "정말이야? 난 혹시나 어제 그 박사장이란 놈하고의 일이 커지는 줄 알고 기분이찝찝하 더라구...... 어쨌든 그런 일 없는거지? 아까는 보영이가 더 놀라는것 같더라. 마담언니가 갑자기 니 얘기를 물으니까."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마 아까 보영이도 꽤 간담이 서늘해졌으리라. 아까 최 마담의 말처럼, 나와의 격렬한 정사 직후였기에 자기 방에서 내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탄 로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으랴. "아, 아냐. 거, 걱정 마. 그런 일 없었어. 그, 그냥 내가 많이 아픈 게 아닌가 해서...... 그래 서 최마담이 걱정해준 거였어. 아마 보영이도 그래서 그랬겠지, 뭐." "좋아...... 그럼 다행이고. 아, 참 까먹을 뻔했다!"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희창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그럴 때마다 괜스레 불안한 생 각이 들어 어금니를 깨물었다. "뭐, 뭘......?" "크흣, 있잖아, 아까 학교에서...... 예지 만났었다." 예지? 행여 이 녀석이 딴죽이라도 걸었단 말인가? "걱정 마, 예지한테 이상한 짓 한 거 아니니까. 하기야...... 좀 쭈뼛대기는 하더라. 이젠 나 한테 말 거는 것 자체가 어색한가봐."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어제 분식집에서 김치볶음밥을 사며- 생각하니 어제 일이다. 하 지만 그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로 인해 사흘은 지난것 같지만 - 그 귀여운 얼굴이 우울하 게 말하지 않았던가. 짝사랑했던 여기 이 희창이, 그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그리서마음, 아니 몸이 아파 학교헤도 며칠 나오지 못했다고 말이다. 예지의 심정이 다분히 이해가 갔다.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근데 왜...... 걔가 왜 널 찾냐?" 설마 마음 접었다는 이 놈에게 미련이 남아서는 아닐 텐데. "응, 그게 아니고 널 찾았어." "나, 나를......?" "그래.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던데...... 니가 안 보이니까 나한테 묻는것 같더라. 그 래서 오늘 너 학교 안 왔다고, 자취방에 있을 거라고 해줬어." 나는 혹시 예지와 무슨 얏곳을 해두었던가 곰곰이 생각을해보았다. 하지만 언뜻 떠오르 는 것이 없었다. 희창이는 때를 놓칠새라 농을 건넸다. "크크, 난 너 집에 있다고 강조해줬는 걸. 아까도사실 너한테 들를까 하다가, 일부러 안 갔다.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라고. 푸힛, 오늘 걔 너한테 안 갔었냐?" "아, 아냐 짜샤. 안 왔어." 둘이서 오붓한 시간이란 말에 부아가치민 내가 한마디 쏘아 붙이기도전에, 그는 계속 장난을 텨댔다. "어, 왜 안 갔을까? 집도 꽤 익숙할텐데? 누가 아냐, 그러다 내가 또 니방에 들이닥치 면, 이번엔 그 계집애 아주 홀딱 벗고 있을지?" 아쭈, 점점...... "닥쳐, 이짱. 그 때는 정말 아무 일없었다니까. 얌마, 걔가 좋아했던 건 내가아니라 너 야, 새꺄!" "클클클, 알아. 그냥 농담이다, 어쨌든......" 결국 희창이가 오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아까최마담과 나 사이에 오갔던 그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그가 한마디라도 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쨌든 예지가, 내일 너 좀 보자고 전해 달래." "내일?" "그래. 너한테 뭐 부탁할 게 있다나 봐." 예지의 부탁? 뭘까? 그러면서 희창이는 전화를 끊었다. 알았어, 잘 자라, 내일 보자...... 전화를 끊으며 나는 마 치 꽤 오랫동안 학교를 떠나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단란주점, 다미, 그리고 보영이와 최마담 등의 온갖 사건들로 인한 것이리라. 그러자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누구였겠는가. 그것이. 어제 예지와 점심 먹으로 갔을 때 본 여자, 그리고 내가 예지와 팔짱을 끼고 있는 장면을 보았기에 멀리서 외면한 그 여자. 선영이 누나였다. 만 하룻동안 그녀의 이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거의 한 주일이 다 지나도록,우 리는 지난 주말 아침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궁금했다. 예지의 부탁은 나중 문제였다. 어제 그 때, 왜예지와 같이 있는 나를 보고 그 렇게 피했던 것일까. 내게 고백 아닌 고백,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고서 그녀는 잘견디고 있는 걸까. 벌렁 드러누운 내 머리 속에서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일어났다. 내일쯤 그녀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06 "어쭈구리...... 어제는 아파서 꼼짝 못한다더니...... 일찍 나왔네." 비로소 정상적인 생활에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을 느끼며 학교에 들어섰는데, 아! 나에겐 아직도 첩첩산중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그 중 제일큰 사건이 바로 이것이었으니...... 희창 이 녀석. 자기가 찍어놓은 여자가 가장 친한 친구인 나와 같이 잤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할 그 라, 내게 황송하게도 반가운 아침인사를 건네왔다. "으, 응...... 너야말로 웬일이냐, 지각대장이......" 어제 대면했을 때는 워낙정신이 없었기에 대충 넘어갔지만,지금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어휴, a말 마라. 모침께서 정말 단단히 금족령을 내리셨다니까. 아침에도 꼬박꼬박 7시면 깨워. 이제는 수업에 지각하는 것도 안된다나......" 푸하- 녀석은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마 이 왕 날라리 놈에게 자기 어머님의 간섭은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을 터였다. "근데 짜이 너...... 진짜 다 나은 거냐? 어제 보니 완전히 맛이 갔더구만."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뜨끔거리는 속을 알래야 했다. 사실 내가 아프기나 했었나 뭐, 그것 은 순전히 보영이와 전날 밤 한바탕 몸싸움과 더불어 격렬하게 벌였던 그 정사의 후유증이 었을 뿐인데. 그러나 희창이는 진정으로 친구의 건강을염려해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 처럼 세상에 진정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그렇다면 ...... 만약 그렇다면 내 가 먼저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옳지 않을까? 차라리 희창이에게 먼저 솔직히털어놓고 사과를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다. 일단은 보영이와비밀을 지키기로 약속을 했기 에...... 떳떳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고 또 아무 거리낌없이 나와 정사를 벌였던 그녀였지 않은 가. 그녀는 얘기했었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희창이와 관련된 문제도 스스로 처리 하겠다고. 그런 착찹함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희창이는 그런내 안색을 살피고는 아직 도 내 몸 미진한 구석에 남아있다고 생각했는지 잠자코강의실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그의 말대로 아침 7시에 일어났다면, 녀석은 잠이 꽤 부족했으리라. 당연히 나는 오전 수업 내내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옆에 앉은 희창이 녀석에 대한 죄의식을 마음이 무거울 따름이었다. "야, 밥 먹으러 가자. 짱이야!" 오랜만에 일찍 출석한 수업이 못내 지루했던 듯, 교수님이 강의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희 창이가 책을 덮으며 내 어깨를 쳤다. "어...... 그, 그래." 아침을 챙기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글쎄다. 죄책감때문일까, 다소 주저하는 마음 이 들긴 했지만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야 했다. "점심...... 오늘은 내가 살게." "오잉? 짱이 니가 사준다고? 햐아 웬일이냐? 너 집에서 용돈 받은 거라도 남았냐?" 한숨이 흘러나왔다. 용돈 따위가 문제인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이렇게라도 해서 녀석 에게 죄책감을 덜 수 있다면 술, 아니 내 지갑을 통째로 주어도 부족할 일이었다. 짠돌이로 굴 생각은 없었지만, 그간 끽해야 학생식당 밥에 만족하느라 돈 쓰는 일이 적었 던 나였으니 이런 경우는 학교밖에 나가 뭔가 색다른 것을먹자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점심을 사준다는 제안에 녀석은 희희낙락일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짱이 돈 쓰는 걸 보겠구만. 좋아, 우리 어디서 탕수육에 빼갈이라도 빨아볼까?" 07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강의실을 나서려는 희창이. 그런데 문득 그는 발걸음을 멈 추고 뒤따르던 내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크흐, 안타깝도다. 빈대 붙으려 했더니. 얌마, 너 나중에 나한테 두끼 사는 걸호 해라!" "응? 무슨 얘기야?" 영문을 모르는 나는 난데없는 녀석의 투덜거림에 그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쪽을바라보았 다. 아...... 참 그렇지. 막 나서려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 앞 복도에 기대어 머뭇대고 있는 여학생, 바로 예지였다. 어제 희창이와의 통화를 상기했다. 오늘 나를 좀 만나자고 했었는데...... 무슨 부탁이 있다 던가? 그러나 예지는 내 곁에 선 희창이를 보자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모를 일이다. 너희 혹시 씨씨아냐?어쨌든 짱이 너 점심두끼 나한테 빚진 거다.알았 지?" 희창이는 짐짓 호쾌하게 내 엉덩이를 두들기며 조그맣게속삭였다. 그는 아마도 d라아서 자리를 비켜주려는 모양이었다. "어이구, 얼레꼴레리, 누군 좋겠네......잘해봐라!" 멋쩍어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이미 과 동기들과 어울리기 위해 재빨리 사라지는 녀석. "저...... 창희야." 그런 나를 향해 예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예지야!" 잘해봐라- 마지막 녀석의 인사가 왠지 비꼬는 것 같아 거슬리기는 해도, 어쨌든 희창이와 붙어있지 않게 돼서 다행이긴 하다. "나...... 땜에 방해된 거야?""어, 아, 아니야.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길이었어." 예지에겐 일부러 계면쩍은 웃음을 지어야 했다. 여전히 희창이에게 쑥쓰러워 하는 그녀의 순진함이 못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어제...... 나 찾았다면서?" "응." 잠시 우두커니 마주 섰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희창이가 그러던데 나한테 무슨 부탁 있다고, 뭐야?" "응, 그거...... 부탁이 아니고......" "잠깐, 우리 그럼 ...... 밥 먹으러 갈래?" "아니...... 저번에 니가 사줬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사줄게." "참...... 미안. 그러고 보니 너 아침도 안 먹었겠구나. 자취하니까." 사려 깊게도 내 입장을 고려해주며 예지는 잠자코 고개를끄덕였다. 나는 예지를 데리고 일단 학교 밖으로 나가 카페골목으로 향했다. "돈가스 같은 것도 괜잖지?" "응, 신경 쓰지 마. 난 아무 거나 잘 먹으니까." "그래, 그럼 여기 들어가자!" 조그만 카페 겸 경양식집, 학교 앞인지라 별다른 특별한 곳이 없으므로 나는 개중 그나마 깔끔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라 비교적 손님이 드문 카페 안, 나는조용한 자리를 잡기 위해 예지를 앞세워 창가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어머...... 안녕하세요. 언니." 문득 지나치다 말고 그녀는 한쪽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알은 체를 했다. "어...... 아, 안녕, 예지야......" 얼레, 무심결에 그 쪽 자리를 건너다본 나는 그 곳에서전혀 예기치 못한 인물을 발견하 고 말았다. 08 "아...... 안녕하세요." 놀란 심정으로, 나도 덩달아 인사를 건넸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부터 그녀를찾아보겠다고 궁리하고 있던 차인데,뜻밖에도 바로 이 경양식집 구석 창가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또 하나의 예상하지 못한 인물과 함께. 그녀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배정호,정호선배. 선영이 누나의 동기인 그 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크지 않은 보통 체격의 남자 선배로, 대부분 군 입대를 한 동기 선배 들과 달리 면제판정을 받았다던가 하여 학교 안에서 몇 없는 남자 선배들중의 한 사람이었 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 나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선배였지만, 어쨌든 그에게도 인사를 건 네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정호선배." 얼떨결에 건네는 인사, 하지만 그의 인상은 예상치 못한맞닥뜨림 때문인지 잔뜩 찌푸려 지고 있었다. 나 또한 꽤나당황스러웠는데, 그것은 선영이 누나나 정호선배도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졸지에 나와 예지가 후ㅐ방꾼이라도 된 것일까. "그, 그래. 오랜만이구나." 묘한 만남이었다. 이 선배가 왜 선영눈나랑 같이 있는 것지? 나는 은근슬쩍 두 사람의 분 위리를 살폈다. 그러나 짐짓 내 시선을 피하는 듯 선영이누나는 내 쪽이 아니라 예지에게 물어왔었다. "어, 어쩐 일들이야?" 이럴 수가. 순간 나는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선영누나는 벌써 두 번째 내 가 예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셈이 아닌가. 이럴 바엔 차라리 다른 장소로 피해주는 것이 낫겠다 싶은데. 그런 낌새를 알 리 없는 예 지가 무심결에 대답을 했다. "예, 창희랑 조용히 얘기할 것이 있어서요." 어휴, 김예지.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어쩌니. 그냥 밥 먹으러 왔다고 해도 어색한판국에, 둘이서 조용히 얘기를 하러 왔더나. 태연한 척, 선영이 누나는 그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뭔가 불길한예감이 들었다. 엊그제도 우연찮게 예지와 팔짱을 끼고 있던 나를 보고 멀찌감치 피했던 그녀 아닌 가. 혹 나와 예지를 심상치 않은 사이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 얘기해라!" 그런데 의외로, 나를 곤경에서 구해준 것은 정호선배의 툭 던지듯 하는 대꾸였다.분위기 를 보니 아마도 선영이 누나와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있었던 듯, 우리더러 자리를 비키 라는 신호같았다. "예, 예!" 하는 수 없이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예지를 따라 반대편 구석자리로 물러날 수밖에 없 었다. 마침 그들에게 등을 돌린 자리에 앉아주는 예지. 그래서그녀의 어깨 너머로 선영누나의 좌석이 본의 아니게 들어오고 있었다. 엇? 찰나 나는 속으로 뜨악하고 말았다.그들의 테이블에 채 점심때도 안된 이 시간에 큼지막한 맥주병 두어 개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웬 술? 안 되는데- 당장 나로서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없었다. 선영이 누나 자신 이 맥주 몇 병으로도 어떻게 되는지를 뻔히 아는데 서, 설마 저 누나가 또? "창희야, 너 뭐 먹을래?" 그런 내 불안감을 알 턱 없는 예지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내게 물었다. "으, 응...... 아, 아무 거나." "아무 거나 뭐? 아까 돈가스 먹자며?" "그, 그랬나? 그럼 그, 그걸로!" 아니야, 행여 선영이 누나가 술을 마시다디, 그것도 난데없는 정호선배와......나는 완전히 콩밭에 마음이 가고 있었다. "창희야, 왜 그래? 갑자기 넋 나간 사람처럼." "어, 내, 내가? 아, 아냐...... ! 아무 것도 아냐." 주문을 받으러 오는 사이에도, 열심히 곁눈질을 하고 있는나에게 예지가 핀잔조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예지도 뭔가 눈치를 챈 듯 혼잣말을 했다. "정호오빠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 그것도 선영언니랑." 순간적으로 나는 귀가 쫑긋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정호선배사 여기 있을 줄 몰랐다니?" 사실 정호선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선배가 왜 훤한 대낮부터 선영이 누나와 술을 마시 는 건가, 그것이 궁금했다. "으응, 실은 전에 저 오빠가...... 아 참, 아, 아니다. 넌 몰라도 돼." "몰라도 되다니, 뭐가?" 그러나 예지는 내 반문에 작게 이마를 찡그려 보이고는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아니야, 아무 것도...... 너랑은 상관엇는 이야기야." 이상했다. 아무래도 예지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다시 다그쳐 물으려는데, 때 마침 터져 나온 그녀의 예리한 질문에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 선영이 언니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신경 쓰여?"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예지는 다시 한 번 알쏭달쏭한 얘기를 던졌다. "그럼 신경 쓰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저 언니한테는......" "무, 무슨 뜻이야? 신경 쓰지 않는 게 좋다니?" "아니야, 너랑은 상관없다니깐. 어차피 창희너...... 선영언니랑 아무 관계아니라고 했잖 아!" 슬쩍 묘하다는 듯 눈까지 흘기는 예지. 그런 그녀 앞에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했다. 그랬다. 더 이상 궁금한 티를 냈다가는 이 여자애가 되레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09 "아, 아니 난...... 맞아, 너...... 너 　ㄴ테 할 얘기 있다면서? 그래, 그 얘기나 하자." 어쩔 수 없이 나는 화재를 돌렸다. "아, 그 얘기......" 어쨌든 그 직후에 나는 내심 안도할 수 있는 장면을목격했던 것이다. 예지의 어깨 너머 로 보이는 선영이 누나 앞에 웨이터가 주스잔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주스를 홀짝이는 누나. 그렇다면 필경 술을 마시는 것은 정호 선배 혼자인 듯했다. 어느새 우리 앞으로도 음식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간간이 선영이 누나 쪽을 흘끔거렸지만, 예지는 그런 나를 더 이상 책망하지 않았다. "으응, 부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창희 너한테 빚진것도 있고 해서." "응? 뭐?" 얘가 빚이 있다고 했나, 방금? "어머, 창희 너 내 얘기 안 듣는구나." 아차차, 실수. 아무래도 선영이 누나 테이블에 너무 신경을 썼나 보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비, 빚이라니......" "빚...... 어쨌든 너한테 신세진 것은 사실이잖아." "신세를 져?" "지난주에 말이야. 니 방에서 나 혼자 술 취해서너 고생시키고...... 난 그게 아직도 너무 미안하거든......" 아, 그 얘기를 하는 거군...... 예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계면쩍어졌다. 원래그렇게 되기까 지는 내 책임도 크지 않은가. 희창이에 대해서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고, 옷가지를벗겨준 답시고 부끄러운 비밀- 여자만이 간직한 모습- 마저 드러나게 한 게 나인데, 그게 신시라. "야, 시, 신세는 뭘......!" "아냐, 그렇지 않아. 내가 그렇게 엉망을 굴었는데도 탓 g나 번 안 하고......뒤치다꺼리까 지 해줬잖아." 역시 예지는 귀여운 얼굴만큼 마음 씀씀이도 고왔다. 나 같으면 그냥 그렇게 넘겼을 일인 데 말이다. "그래서 말야. 내가 너한테 뭔가 도움 줄 일이 없나 찾아보다가 하나 찾았걸랑." 도움 줄 일이라니? "있잖아, 창희 너...... 지금 자취하고있잖아. 그거 불편하지 않니?혼자 지내고, 밥 같은 거 챙겨 먹는데...... 음...... 용돈 같은 문제도 그렇고." "나? 그, 글세......" 용돈이야 늘 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왜 예지 이 녀석이 내 용돈문제까지 신경을 써주는 걸까. "그러니까...... 너 아르바이트 좀 하지 않을래?" "아르바이트?" "응. 다른게 아니고, 과외공부 가르치는 것 말야. 입주과외 자리가 하나 있어. 원래는 내게 들어온 거지만...... 너도 알잖아, 난 집에서 허락을안 해줄 게 뻔하니까. 별로 어려운것도 아니래. 초등학생이라던데......" 아하, 그녀의 말인즉슨 이런 것이었다. 자기가 나에게 어떻게든 보답할 방법을 찾던 중에, 때마침 자기가 지금 맡고 있는 가정집을 통해 또 하나의 의뢰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될 법도 했다. 워낙 차분하고 싹싹한 여학생이니, 당연히 성실하게 아이들을가르 쳤을 터. 하여 그 소문의 덕으로 이런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창희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먼 곳도 아니고, 너도용돈정도는 벌면서...... 수 업 후에 남는 시간 관리도 할 수 있잖아." 허 참...... 자기의 첫경험 고백, 그것도 불쌍한 성폭행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만 으로 예지는 내게 신뢰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입주과외를......?" 입주과외- 라 하면, 옛날 2, 30년쯤 전에고학하는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일이 라고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쉬게 얘기해과외공부 가르치기와 하숙생을 혼 합한 의미? 다시 말해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주인집 아이들 공부를 돌봐주는, 문자 그대로 진짜 가정 교사를 말하는 것. 그러니 당연히 여학생인 예지가 하기에는 다소 벅찬 일이기는 했다. 당연 히 멀쩡한 집을 놔두고 나가겠다는 꼴이니 안 봐도 그녀의 부모님이 반대할 것은 뻔했다. "학생은 여자애야. 초등학교 4학년이라던가...... 그런데 아빠가 집에 안 계신다나봐. 돌아 가신 건 아니고, 장기 해외파견 중이라 한 반년에 한 번 들어온다나......? 한 1, 2년정도 그 래야 한다고 하더라구." 근데 왜 하필이면 입주과외람. 요즘에도 그런 걸 원하는 집이 있다는 말인가. "그 애가 외동딸이라 엄청 귀여움만 받고 자란 모양이야. 그러니 남자선생님이면 좀 엄하 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은 거겠지. 게다가집에 걔네 엄마랑 여자 둘만 있으니까,든든하게 믿을 만한 남학생이 있으면 낫겠다고 해서......" 딴에는 그럴 법한 얘기였다. 다른 명문대생을 구하려고 해도그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 가, 아무래도 변두리인지라 그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집 근처인 우리 학교의 남학생, 그것도혼자 자취나 하숙을 하는 학생이라 면 오케이다.- 그렇다면 내가 딱 맞는 조건이기는 했다. "또 넌 장학생으로 들어왔으니까...... 오히려 그쪽 집에서 반기던 걸.내가 보기에도, 창희 너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잖아. 그래서 널 떠올린 거야." 예지는 거기에다 의미심장한 얘기를 빼먹지 않았다. "게다가 넘나큼은...... 내가 믿을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휴후...... 약간은 어리둥절했다. 따지고 보면 야릇한 사건들로 믿음을 얻은 셈이기에. "어떠니? 생각 있어?" "그게...... 음......" 모르겠다.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내 편에서야 먹고 자는 문제가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우선 집에다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고, 게다가전세 계약한 지가 아직 일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또 하나 일종의 하숙생으로 들어가야 한다는얘기가 되므로 뭔가 갑갑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생겼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제 제법 자취방 생활의 자유로움에 익숙 해졌으므로. 단순한 하숙이라면 몰라도, 입주과외라면 가르치는 학생의 부모- 아니이 경우엔 어머니 혼자라지만- 즉 주인집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당연할 터. 그럼 뭔가 좀 부자유스럽지 않 을까. "생각 있으면 이리로 전화해 봐. 주말쯤에 와줬으면 좋겠다니까, 그 땐 나도 같이 가줄게. 그래도 처음엔 서로 얘기를 해둬야하니...... 참, 여자애 이름은 현주야." 예지는 종이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내밀었다. -현주 어머니. 000 - 0000. "글쎄...... 고맙기는 한데......생각 좀 해봐야겠어. 예지야." "그렇겠지. 직접 얘기하고 나면 조건을 바꿀 수도 있을 테고...... 어쩼든 그쪽 현주 어머니 하고 얘기해 봐. 다음 주쯤 걸면 될 거야." 현주, 현주 엄마. 종이쪽지를 쥐고 멍하니 상면에 빠졌다. 흐흠...... 그 때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것이 내 시야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10 예지와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미처 살피지 못한 선영이 누나와 정호선배의 자리. 그들은 막 자리를 뜨려는 중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일어서는것은 누나 혼자만이다. 둘 이서 뭔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것같더니 그녀 홀로 떠나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내 쪽을 돌아보는 선영이 누나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 다. 어- 그러나 뭔가 다른, 어색한 눈길. 그녀는 아랫입술을 작게깨물고 있었다. 왜 그러지? 그녀는 뭔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닌가. "저 언니 나가네? 참, 우리도 나가자. 다 먹었잖아." 그런 내 시야를 쫓던 예지가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따라서 몸을 일으켰 다. "가자, 창희야." "어, 그, 그래!" 예지의 재촉에 따라 몸을 일으키며, 나는 슬쩍 정호선배혼자 남은 테이블ㅇ르 곁눈질해 보았다. 약간은 묘한 광경이었다. 그는 잔뜩 고개를 수그린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 하면서, 나는 방금 전 나간 선영이 누나의 묘한표정과 저 정호선배 쪽의 분위기 를 연계시키려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댔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뭘까. 누나의 그표정은...... 굳이 그런 의미로 해석할 일은아니었지 만, 내 짐작에 분명 그녀의 눈초리는 무슨 말 못 할 사연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호선배는 도대체 그녀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길개 저렇게 심각해져 있나. 어쨌든 서둘러 선영이 누나를 뒤쫓고싶은 마음이었다. 어제부터 궁금했던 참이니,지금 막 따라나가면 되리라. 예지를 먼저 내보내고 계산을 하기 위해 잠시 카운터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때까지도 일어설 생각을 않고 있는 정호선배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어이, 창희야." "어...... 예, 선배님." 그가 자기 쪽 테이블에서 몸을 돌린 채 나를 부르고 있었다. "너 지금 바쁘냐?" "예? 아, 아니......" 순간 나는 밖에 있을 선영이누나를 떠올렸다.서두르지 않으면 지난번처럼그녀를 놓칠 게 뻔했다. "아니...... 예. 저...... 다음 시간에 수업 있는데요." "그래?"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그는 마땅치 않다는 듯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침 시간은 수업시간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으니, 사실 나는 한 시간 후에나 수업이 있었지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 그러세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자기 술 상대를 해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설사 그렇다 해도 낮술을 할 생각은조금도 없는 나였지만. "아니다. 그럼 됐어. 나중에...... 나중에 보자." 나중에 보자? 모를 일이다. 정말 무슨 할얘기라도 있는 걸까. 어쨌든 나는 끄벅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벌써 귀중한 몇십 초가 흘렀다. 마음은급한데 그만 엉뚱한 데서 발목을 잡힌셈이었다. 경양식집 밖에서는 예지가 발끝으로 보도를 튕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계산 다 끝났어?" "응, 어, 어......" 건성으로 대꾸하며 내 눈길은 다급히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어깨 위로 찰랑이는 생머 리, 무릎께서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언젠가 내 마음을 흔들었던 그 익숙한 뒷모습을 찾기 위 해. 하지만 선영이 누나의 모습은 길가 양쪽 어디에도 보이지않았다. 심지어 길을 건넜을까 싶어 건너편 거리도 살폈으니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순식간에 허탈해진 내 기분을 결코 모를 예지는 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으, 응? 뭐라고?" "왜 이렇게 늦었냐고. 나 다음 시간에 강의 있어서 그래." "어...... 그, 그게......" 예지에게 선영이 누나의 행방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알량한 자존심에,가뜩이나 아까 경양식집 안에서도 추궁을 당하지않았는가. 안타깝지만 나는 입술을깨물며 예지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했다. "저, 정호선배가 갑자기 불러서......" "정호오빠가?" 눈썹을 찡그려 보이는 그녀. 예지는 은근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 오빠가 왜......?" "몰라. 무슨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굴던데......" "할 얘기? 그래서 뭐라 그랬어?" "그냥...... 바쁘다고 핑계를 댔지. 수업있다고." "그것 뿐이야?" "응." 사실 예지의 질문이 뭔가 수상쩎었음에도 그때 나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고있었던지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파심이기는 했지만 선영이 누나가 뒤쳐져 나타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예지와 같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어디선가 선영이 누나가 보고 있을 지도 모른 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학교에 당도했다. 잠깐의 그 어긋남이 유감 스러울 따름이었다. 포기의 한숨을 쉬며 재촉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수업...... 어디니?" "저쪽 건물. 창희 넌 수업 없어?" "응, 한 시간 뒤에 있어." 그래, 예지는 말없이 무표정하게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잖아, 어쨌든 거기 현주 어머니한테 전화나 해 봐.나, 김예지 학생 소개로 전화 드린 거라고 하면 돼." "그래, 알았어...... 나중에 전화할게. 어쨌든 고마워."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학생회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행여 선영이 누나가 학 회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이었다. 그런데 역시나였다. 오후 수업이 막 시작하려는시간이었으므로 제법 사람들로 북적거리 긴 했는데, 선영이 누나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터덜터덜, 건물 계단 쪽으로 향했다. 자판기 커피라도 한잔 뽑아들고 아쉬운 기 분을 달래야 했다. 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차라리 학회실에서 알 만한 선배를붙잡 고 강의시간이라도 물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11 자판기에서 종이컵을 막 뽑아들었을 때, 등뒤에서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그래 데이트는 잘한 거냐?" 희창이였다. 막 밥을 먹고 들어오는 모양인지 녀석이 호주머니에손을 찌러 넣고 실실거 리며 서 있었다. "으...... 응. 데이트는 무슨......" "밥은 먹었어?" "응. 예지랑...... 너는?" 괜스레 미안해진 나는 자판기에 동전을 몇 개 더 집어넣고 커피잔을 건넸다. "대충 때웠느니라...... 에게게, 겨우 커피 한 잔이야? 예지만 없었으면 탕수육 정도는 얻어 먹을 수 있었는데." "미안...... 어쩔 수 없었잖아. 예지는어저께부터 날 찾았었다니까. 대신저녁에 술이라도 한잔 살까?" 진심이었다. 술...... 술이라도 마시고 보영이와의 일을 고백하는 건 어떨까. 녀석에게 몇 대 맞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희창이 녀석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어머니에게 스포츠 카 키마저 뺏길 판국이라니 아마 며칠간은 말 그대로 조신하게 지내야 하리라. 그는 알면서 왜 묻느냐는 듯 처량한 모습으로 간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짱이 너처럼 학교 안에서 인기 관리 좀 해둘 걸 그랬어. 그럼 나도 점심은 여자애들이랑 먹을 수도 있는 건데 말야!" "무슨 말이야?" 녀석의 옆에 다가 앉으며 물었다. "생각해 봐. 일석이조 아냐. 님도 보고 뽕도 따고.지겨운 강의 시간 중에 그렇게만 하면 데이트에, 시간 때우기에......" 비아냥대는 듯한 그의 말투를 이해할수 있었다. 자신을 젖히고 예지와단둘이 나간 게 못내 서운했나 보다. "얌마,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그냥 얘기 좀 한 걸 가지고." "에구구, 어쨌든 예쁜 여자들혼자서만 독식하지 마라. 난아무 낙도 없게 만들어놓고 서......" 예쁜 여자들을 독식한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렇잖아. 나더러 선영선배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 그리고 예지도넘보지 말아라...... 이건 뭐 꼭 니가 내 시어머니 같잖아." 아무 낙도 없다는 건, 그 얘기였다. 선영이 누나와 예지...... 난 그의 투덜거림에 피식 웃어 보였다. "이짱, 그 사람들하고 내가 어떻게 그런 사이냐. 알잖아, 그런거 아니란 걸." "야야, 그걸 누가 알아. 오빠오빠가 아빠아빠가 되고, 아빠아빠가 아파아파되는 세상인데." 내가 얼굴을 찡그려 보이자, 희창이는 그제야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됐다, 됐어. 하여간 예지랑은 무슨 얘기한 거냐? 혹시......?" "혹시 뭐?" "크크, 아직도 이 희창이 오빠를 못 잊었다든가...... 그래서 다시 한 번다리를 놔달라. 뭐 그런 얘기 아녔어?" 음흉하게, 장난기 섞인 표정을 짓는 녀석에게 이참에 단단히 못을 박아두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웃기지 말아. 니가 무슨 왕자야? 그 얘긴 이미 다끝났다고 했잖아. 예지, 벌써 마음 다 정리했대. 오늘 얘긴 그게 아니고, 부탁이 있다길래 그 얘기 들은 거야." "그래? 쩝, 아깝구먼. 그새 나를 잊다니. 그럼 그 부탁이란 건 또 뭔데?" "그건...... 정확히 말하면 부탁이 아니지, 그런 일이라면오히려 내 쪽에서 부탁해도 모자 란 거니까." 나는 예지의 제안 그대로를 희창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른건몰라도 돈 얘기가 나오자 희창이는 귀가 솔깃한 얼굴이었다. "입주과외?" "응. 있잖아. 하숙생처럼 어느 집에 더부살이하면서...... 그 집 아이들 가르치고 돈도 좀 받 는." "그래? 근데 왜 그런 짭짭한 거리를 예지가 너한테 해주는 거냐?" "사실 그건 예지가......" 문득 그 대목에서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예지가 나를 위해 그런 호의를 보이는이유, 차마 녀석에게 그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지난주 여기 이 녀석이 불현듯 들이닥쳤던 그날, 절망감에 휩싸인 예지가 털어 놓은 이야기들- 수치스런 자신의 비밀, 불행했던 첫경험과 숫처녀가 아니란사실- 결국 그 런 부끄러움을 모두 받아준 덕택에 그녀가 나를 신뢰하게 되었고,그 보답이 이번 과외 아 르바이트가 마련된 계기 아닌가. "그게...... 자세한 얘기까지는 그렇고, 어쨌든 고민중이야." "고민? 나 같으면 얼씨구나 하겠다. 왜, 고등학생이라도 가르치라던?" "아니. 학생은 초등학생인데...... 그게 문제잖아, 입주과외.그 집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니 까." 그렇군 하는 표정으로 희창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너 같으면 쉽게 오케이 할 수 있겠어? 그래도 선생님 소리 듣는것에...... 일종의 하숙생이니." "음...... 듣고 보니 그렇네. 나같으면 못 견디겠는 걸.아무리 요즘 집에서 나오고싶지 만......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냐?만약 그러면, 내 아지트인 니자취방이 없어지는 셈이 네?" "생각 중이야. 아직 내 방 전세기간도 안 끝났잖아." 내 대답에 희창이는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비비적거릴 곳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제일 아쉬울 테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앉아 공강 시간을 때우는 동안, 그는 뭔가가 불현듯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잠깐, 그런데 말야. 짱이 너...... 그 다미란 여자애 기억나지?" 호들갑스런 목소리였다. 다미? 안다미? "응. 당연히 알지." "아니 아니, 그 계집에 생긴 것 말야." "그럼, 같이 술 마신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 아가씨, 머리가 짧았지? 얼굴 갸름하고." "응. 단발머리였어. 얼굴은 작은 편에. 근데 그건 왜 물어?" 희창이는 골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의혹에 찬 얼굴이었다. "그럼 맞는데...... 게다가 여기가 이렇게 대단했으니......" 그는 두 손으로 가슴께에 큰 반달 모습을 그려 보였다. "뭐야? 그런 글레머를 또 보기라도 했단 말이야?" 녀석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무슨 얘길까. "그렇지만 이상하단 말야."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아까 다른 애들이랑 밖에나가서 밥 먹고 들어오는데 길에 서 그 다미란 여자애를 본 것 같아서." "다미를? 정말?" "그래. 제법 가까이서 지나쳤걸랑. 그런데 얼굴이면 잘 몰라도, 유방 사이즈가 분명히......" "설마? 걔 맞아?" "바로 그게 이상하다는 얘기 아냐. 내가 보기엔 그 계집애 같은데, 날 전혀 못 알아보더란 말씀이야." "에이, 그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 가까이서 봤는데도 몰라 봤다면." "그럴까? 하기야 복장이 너무 틀리기는했어. 아니 뭐...... 그때는화장도 하고 그러기는 했지만. 너무 학생틱한 게." 학생? 난 그 순간 보영이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다미...... 몰래 학교도 다닌다고 했는데. "흐흠, 누구였을까? 어쨌든 궁금하네...... 그럼 이근처에도 그런 글레머가 있다는 얘기잖 아." 하여간 무슨 얘기이건 간에 비상하게 그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는 희창이였다. "에라, 관둬라. 만약 걔였다면 아는 척을 했겠지. 잘못 본 걸거야." 어느새 수업시간이 가까워졌기에 나는 녀석에게 혀를 쯧쯧 차며 몸을 일으켰다. 다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 만난 그 엉뚱한소개팅 자리부터 생난리를 치렀으니 필경 나 같으면 못 알아볼 리는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이 학교학생이란 말을 듣고부터 거북살스러워 하던 눈치에, 내가 학교 근처에 자취한다는 얘기에는 버럭 화까지 냈던 그녀. 왜였을까. 그러나 그다지 호기심이 가지는 않았다. 희창이얘기로는 길거리였다니, 뭐 지 나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다미- 난 그녀로 인해 박사장이 란 사내와 주먹다짐까지 했고, 또그 일로 인해 보영이와...... 그러니내 쪽에서 별반 좋은 기억을 가질 리도 만무했다. 강의실에 앉자마자 희창이는 내게 은근슬쩍 몸을 기울이며 소손거렸다. "참, 짱이야, 너 이번에도 나 도와줄 거지?" "뭘?" "짜식, 비싼 척 하기는, 벌써다다음 주면 시험기간이잖아, 중간고사.헤헤, 요번에도 잘 부탁한다. 나 지난 학기처럼 F가 세과목씩이나 뜨면 고란해져. 알지?" 뭔고 하니, 매번 시험 때마다 들러붙는 녀석의 타령이었다. "강의노트나 어디서 구해 줘. 복사는 내가 할게." "강의노트? 그런데 어쩌지, 나도 수업 많이 빠졌잖아?" "아차! 그럼 어쩌냐?" 그건 사실이었다. 이번 학기에도 장학금을받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무리그래도 어느 정도 성적은 나와야 하는 법,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너무 수업에 소홀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두어 번 술을 마셨던 것도 모자라 사흘에 한 번꼴로 강의를 빼먹은 날이 부지기 수, 실상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모님께 첫 번째 들은 경고가 바로 그것이었다. 혼자 산다 고 절대 흐트러진 생활을 하지 말 것-그러니 성적이 엉망으로 나온담녀 집에서 불호령을 듣기란 뻔한 일인데......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어떡해야 할까. 최소한 노트라도 복사해 두어야 어느 정도 안심이 될 성싶었다. 문제는 그 것이었다. 강의노트, 그것을 누구에게서 구하느냐. 웬만큼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 그런부탁을 하기는 자존심상하는 일.아예 희창이처럼 학점 짜는 데에 급급한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지난 학기까지 우등생 축에 속했던 내가 그런 부탁을 한다면 필경 경쟁의식 속에 있는 동기들은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게 뻔했다. 그런데 역시 희창이에게는 잔머리가 있었다. 그가 갑자기 내 무릎을 세게 쳤다. "맞아, 생각났다!" 어리둥절하게 돌아보는 내게 희창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예지, 예지가 있잖아!" "예지?" "그래 임마, 헤헤...... 걔한테 어떻게 안 될까?"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녀석의 표정에서 그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그만 얼떨떨해 졌다. "뭐야, 나더러?" "쨔샤, 그럼 누가 있어? 내가 부탁하리?" 하긴 요사이 꽤나 친해졌으니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어렵지는 않을 성싶었다. 뿐만아 니라 지난 소동의 와중엔 예지의 탓도 조금은 있지 않았나. "나...... 너만 믿는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다소 주저스러운 게 사실이었는데, 희창이는아예 결정이 났다는 투 로 내 어깨까지 두드려댔다. 그나저나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시험기간이라, 그렇다면 당장오늘부터 수업을 빠지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불가항력적...... 그것이 행여 선영이 누나를 찾는 것이라도. 정신없이 흘러간 며칠간의 일에 대해 적잖은 후회가 들었다. 예지와의 데이트 12 다음 날, 이번에는 내가 먼저 예지를 찾아야 했다. 위통수로 따라오는 희창이의 야릇한 시선을 무시하며 나는 오후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빠져 나가는 그녀를 뒤쫓아갔다. "예지, 예지야!" "어, 창희구나. 안녕?" "그래, 아, 안녕. 있지, 어...... 지금 시간 좀 있어?" "시간? 음...... 있어. 왜?" "잘됐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갸우뚱거리는 예지를 데리고 근처 매점으로 향했다.맨입으로 부탁하기는 아무래도 그렇 기에 음료수 하나라도 건네는 나에게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 다. "고마워, 근데 웬 음료수야?" "저...... 그게,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부탁? 무슨 부탁?" 머뭇거리며 강의노트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얘기를 듣고 살짝 웃음 을 지어 보였다. "후훗, 난 또 뭐라고. 왜? 수업 많이 빠졌어?" "으, 응...... 그게 뭐...... 어쩌다가." "흠...... 그런데 문제가 있는 걸." "왜? 곤란할 것 같아?" "아냐, 그런 건 아니고...... 너도 알잖아. 나도 너처럼 몇 번, 아파서 수업을 빼먹은 거." 아파서- 무슨 얘긴지 짐작이 되었다. 내 자취방에서 말못할 사건을치른 후 며칠간 학교 에 나오지 않았던 시간을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맞다. 다른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희창이에 대해 마음 고생하느라고 학교에 못 나왔었 지. 그 얘기를 들으니 못내 가슴 한 구석이 찡해져 왔다. "참 그렇구나...... 뭐 그럼...... 그냥니가 한 거라도 빌려 줘.아무리 그래도 니가 나보단 수업 덜 빠졌을 테니까!" 그런데 예지는 뭔가 골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그럼 말이야. 우리 이렇게 하자. 아직 시험 때까진 시간이 좀 남았잖아. 그러니까 내가...... 그 빠진 부분까지 보충해서 넘겨줄게." 그렇게까지? 뜻밖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마저 고려해 주는 예지. "어차피 나도 그 부분은 누구한테빌려야 하잖아...... 며칠 좀기다려 줘. 없는 부분까지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까." 고마워라. 정말 착하디 착한 그녀, 나는 넓죽 절이라도하고 싶다. 차분한 성격의 예지가 알아서 정리한 것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도 조건이 하나 있어." "응? 무슨 조건?" 배시시, 예지는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냥은 해주기 싫은 걸. 대신 너도 나한테 뭐 하나 들어 줘." "좋아, 까짓 것. 뭐든 얘기해 봐, 저녁 사줄까? 아님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뭐 어느 정도 보답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호쾌하게 대꾸했다. "약속하는 거야?" "그래. 말만 해. 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선 얼마든......" "그럼 말야, 나...... 영화 보여 줘." 영화? "이제 주말이잖아. 그러니까토요일에 나 영화보고싶어. 보고싶은 영화가 하나있어 든...... 누구 같이 보러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잘됐다!" 예지는 다소 어려운 영화제목을 대고 있었다. 생소한 유럽 영화인 것 같은데, 할리우드 액 션 영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리 구미가 당기는 것은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예매는 안 해도 될 거야. 조그만 극장에서 하니까." 친절하게 그녀는 영화관 위치까지 가르쳐 주었다. 뭐 대수랴. 하루 저녁 술값이나 영화 한 편이다. "오케이. 그럼 몇 시에 어디서 만날까?" "그냥...... 편하게 시내 쪽에서 보자. 그게 낫겠지?" 우리는 곧바로 강남의 영화 골목 중 한 곳으로 약속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노트 정리할 건 월요일쯤 주면 되겠지?" "그래, 고마워, 예지야." "괜찮아. 그 정도 갖고 뭐...... 창희 네 부탁이라면, 난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내 부탁이면 얼마든, 이란 단어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지의 그 마음씨가 감사할 따름 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가지 더 토를 달았다. "그렇지만...... 나중에 너만 보고 다른 사람한테는 보여주지마. 알았지?" "다른 사람......? 왜?" 희창이가 떠올랐다. 내게 정리할 것을넘겨준다면 그건 곧 희창이에게도빌려주는 것과 마찬가진데...... 어쩌면 예지는 그러리라는 걸 미리 눈치 채고 있는 걸까. 그러나 나의 반문에 이번엔 그녀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왜냐면 그런...... 난 너한테만...... 아, 아니, 그렇잖아. 내 것만 있는것도 아닌고, 나도 다 른 친구 것을 빌려서 주는 거잖아......" 그런가. 그렇다면 괜스레 희창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으리라. 자칫 그런 얘기로예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으나...... 뭐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정리를 해서라도 녀석에게 보 여주면 될 것이었다. 13 어쨌든 임무는 완수한 셈이었다. 한 번 더 감사하며 돌아서려는데, 예지가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 문득 과외 이야기를 꺼냈다. "맞다. 근데 창희 너, 현주네 집엔 전화했어?" "현주네? 아니...... 아직 안 했어. 좀 더 생각한 뒤에 하려고." "그래? 될 수 있으면 일찍 하는게 낫지 않을까? 정말 시험기간에는 바빠질지도모르잖 아." 흠, 그 얘기를 듣고 나니그러는 게 나을 성도 싶다.잠깐......월요일은 강의노트를 받고, 토요일이라? 예지와의 약속시간은 오후, 그렇다면 약간은 일이 꼬이는 게 된다. 원래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에는 부모님 댁에 다녀오는 걸 원칙으로 삼은 나 아닌가. 자취방 전세금 문제가 걸렸으므로 입주과외를 내 맘대로 결정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버지나 어머니와 상의를 해야 하는 건 당연, 그렇기에 기왕이면이번 주말 집에 들렀을 때 말씀을 드리리라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만 약속이 생긴 셈이니, 어쩌면 이번 주말에 집에 못 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르잖아. 니가 현주네 어머니하고 잘만 얘기하면입주과외가 아닌 다른 쪽으로 해결을 볼 수도 있고." 나랑 헤어지며 예지가 해준 충고였다. 그런 예지의 거듭된 제안 탓일까? 나는 그날 오후 일단 현주네 집에 전화를 해보기로 결 정했다. 입주라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하긴 얘기만 잘 된다면굳이 입주를 하지 않 아도 될것이라는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집에 경제적인 부담도덜어주고, 무엇보다 부모님 들한테 용돈이라도 벌어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현주 어머니라는 분과 얘기를 해본 다음 집의 허락을 맡아도늦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군 다나 입주가 아닌 쪽으로 해결을 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린 번호가 아니라면, 얘가 바로 현주라는 꼬마아 가씨인 듯. "어...... 거기 현주 학생네 집이죠?" "예, 전데요." 맞는 것 같았다. "응. 그러니...... 어머니 계시면 바꿔줄래?" "엄마요? 잠깐만요!" 쪼르르 ...... 엄마, 전화받아, 엄마 바꿔달래, 하는 목소리. "여보세요?" 잠시 후, 젊은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저, 안녕하세요. 저는 김예지 학생의 부탁을 받고......" "누구요? 아, 우리 현주 과외선생님!" 의외로 현주 어머니는 상당히 젊은 목소리였다. 초등학교3학년짜리 아이를 뒀다면 적어 도 30대 중반일 텐데, 목소리만으로는 겨우 20대쯤? "그러세요...... 제가 현주 엄마예요. 어머, 목소리가 꽤 굵으시네요." 그녀도 내 목소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기...... 근데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린 건 아닌가요?" "아녜요, 잘 하셨어요. 여자만 있는 집안에 무슨...... 그렇지 않아도연락이 없어 이쪽에서 연락처를 알압려는 중이었어요. 얘기는 들으셨죠? 그럼...... 혼자살고 있나요? 말소리를 들 으니 지방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원래 집은 시내 쪽입니다만, 멀기도 하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자취하 고 있습니다." "네에...... 호호. 그런데 목소리가 참 괜찮으시다. 우리 과외 선생님!" 그런가? 별반 까다로운 인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의호들갑 떠는 듯한 말투에 나는 왠지 떨떠름해졌다. "지금 어디 사시는거예요? 어머 참,내 정신좀 봐...... 성함도안 여쭤 봤네요,성함 이......?" "창희라고 합니다. 자취방은 저의 학교 후문 쪽이구요." "그래요, 창희 학생......그렇게 불러도괜찮죠? 우리집은 정문 앞에있어요. 약간먼 데......" 알고 보니 현주네 집은 거리상 다소 우리 학교에서 떨어져 있는,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였 다. 약간 멀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걸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희 집 얘기는 들으셨죠? 얘 아빠가외국을 들락거려서, 얘가 좀 버릇이 없거든요.뭐 아예 말귀를 못 알아듣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든든한 남자 선생님이 엄하게 좀 해주셨으면 해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있어야죠, 때마침 예지양인가하는 학생이 공부를잘 가르치는 걸로 소문이 났더라구요. 그 학생이 가르치는 아이가 우리 현주랑 같은 반 친구거 든요. 그래서 그 학생이 소개하는 남학생이라면 믿을 만할 것 같아서......" 정말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처음 전화를 걸었을 따름인데 그녀는마치 모든 것을 결정했 다는 듯 단정적으로 얘기를 했다. 난감했다. 나는 입주과외를 사양하려는 본론은 아직 꺼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별수 없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 근데요, 현주 어머님. 잠깐 드릴 말씀이......" "네? 어머 그래요, 말씀해 보세요." "저기...... 꼭 입주과외를 원하시나요?" "입주과외요? 왜요? 무슨 사정이 있으신가요?" 글쎄...... 뭐라고 얘기한다? 부자유스러워서 안 되겠다? "그게...... 따님도 계시고...... 현주 아버님도 안 계시다는데 남자인 제가......" 결국 내가 생각해낸 변명은 그것이었다. 사실그럴 as도 하다. 비록 나이 어린여자애와 엄마라고 해도 여자들만 있는 집에 시커먼 사내 녀석이 상주한다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은 가. 현주 어머니는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아...... 저희 모녀만 있는데 들어오시기가그렇다는 거군요. 괜찮아요, 오히려저의 집엔 너무 오랫동안 남자가 없어놔서, 일부러 누구 하숙생이라도 들일 참이었는 걸요?"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뭐지? 지금 이 아주머니는 과외선생이아니라 집안에 들일 남자 를 구하는 것인가? "그,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아유, 걱정 마세요. 정 그러시면 만나서 얘기해요. 집도 한 번 와보셔야 하구...... 정말 안 되실 사정이라면 그 때 의논해도 되지 않을까요?" 허 참. 급한 성격인지, 아니면 빨리 과외선생을 들이고 싶어 안달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때요? 토요일쯤에 오시겠어요?" 토요일? 그렇게 빨리? 어차피 예지와 선약이있으르모 안될일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서 둘 줄은 몰랐기에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토요일...... 토요일은 죄송한데요. 약속이 있어서......" "그래요? 그럼 어쩌나...... 일요일은 현주 데리고친정에 들르기로 했고, 월요일은 외출할 것 같은데...... 그럼 화요일은 괜찮죠?" "화요일은......어, 예." 일단 그녀가 불러주는 아파트 동과 호수룰 적고 난 뒤, 내 연락처도 가르쳐 주었다. "호호,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얼른 만나 뵙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시간은...... 아홉 시면 되겠어요?" "저녁 아홉 시요?" "네. 제가 보통 그 시간에 들어오거든요. 뭐 어디직장을 나가는 건 아닌데 좀 바쁘네요. 근데...... 토요일은 데이트 약속이신가 봐요?" 어디 돈벌이를 나가는 것도 아니라면서 상당히 늦은 시간에들어온다는 현주 엄마, 그녀 는 할 얘기를 마치자 서슴없이 내게 농까지 걸었왔다. "그렇죠? 목소리 들어보니 굉장히 잘 생기셨을 건 같아요. 그럼 여자친구많으시겠다. 놓 치기 아깝네......?" 전화를 끊기 직전, 현주 엄마가 건넨 말에 나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아이 공부 가르치는 것과 얼굴이 무슨 상관인지. 놓치기 싫다? 그럼 내 생김새가마음에 들면 입주과외가 아니라도좋다는 걸까. 그리도 웬 여자친구? 요새 과외 가르치려면 여자친구 문제도 밝혀야 하는 건가. 14 "안녕, 일찍 나왔네?" "어...... 그. 그래......"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야아...... 나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이십여 분 늦은 예지, 그런 건 문제가 아 니었다. 나는 그녀의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늘 헐렁한티 아니면 니트에 청바지 차림 의 예지에게 익숙했는데, 오늘의 예지는 달라도 한참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내 표정이 얼굴에 쓰여 있었는지 그녀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아이...... 뭘 그렇게 봐......" 그랬다. 하얀 색 셔츠에 하늘 색 치마, 무릎 위에 살짝 찰랑이는 폭 넓은 그스커트 아래 로 예쁘게 하얀 양말을 덧신은 에지는, 마치 알프스 소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깜찍해 보였 다. "우웃, 그렇구나...... 너 나 치마 입은거 별로 못 봤지? 나 사실은이렇게는 잘 안 입고 다니거든." 다시 한 번 상큼하게 미소 짓는 그녀. 나는 그제야은근히 설레이던 시선을 멋쩍게 돌릴 수 있었다. "별로지? 난 바지가 더 편한데......" "아, 아냐......!" 정말 예뻐- 란 말을 하려다 꿀꺽, 목구멍으로 삼켰다. 따지고 보면 예지의 두 번째 다른 모습을 발견한 셈이다.문자 그대로 학교 안에서 마주 치는 발랄한 여대생 예지, 오늘 산뜻한 나들이 차림의 예지ㅡ 그리고 딱한 번- 내 자취방 에서 야릇한 우여곡절 끝에 엿볼 수 있었던...... 예쁜 물방울무늬 속옷차림의 예지. "표...... 아직 안 샀지?" "으...... 응."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우리 그럼 다른 것 보러 가자!" "다른 것?" "응, 여기 근처에서 재미있는 연극을 하나 해. 그거 보러 가지않을래?" 연극? 내겐 다소 의아한 제안이었다. 연극이라고는 고작해야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이 전 부인 나였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돼. 괜찮아?" 엉겁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연극이면 어떻고 영화면 어떠랴. 예지의 참신한 모습 에 대한 감탄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예지는 나란히 걸으며 꽤나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어깨 위 머릿결과 함께,오후 햇살에 뒤쪽으로 드러난 뽀얀 종아리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 자그마한몸집이기에 나는 평소 그녀가 치마를입는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보아하니 아담한 뒷모습에도 충분한 맵시가 엿보였다. "여기야, 이 연극 들어본 적 있어?" 예지가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내심 당황한건 그게 아니였다. 연극 티켓 값이영화 티켓보다 비싸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다행히 주머니에 두 장의 티켓을 끊을 돈이 있었다. 표를 끊고 돌아온 나에게, 예지는그 런 눈　를 알고 있다는 듯 말을 건넸다. "음, 이것 보고 나와서, 우리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그건 내가 살게." 그녀의 사려 깊은 제안에, 나는 웃어주어야 했다. 귀여운자태만큼, 예지는 항상 남을 편 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연극은 잡지 평론에서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불행한 여자의 일생, 그것을중 년의 배우가 추억한다는 일종의 모노드라마였다. 그 때만 해도 조그만 소극장 안의 연극에 대해 잘모르고 있었는데, 상당히 인상이 좋았 다. 말 그대로 관객과 호흡한다는 게 뭔지, 나는 배우와 악수라도 할 정도로 가까운거리에 서 처음 그 기분을 겪어봤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의욕망에 짓밟히며 파란만장한 삶 의 무게를 지니고 살아온 한 여자, 그녀가 결국 그렇게죽어가며 딸에게 비애가 담긴 충고 를 남긴다는- 뭔가 아련한 생각을 던져주는 결말이었다. 창고 같은 그 극장 안에 다시 불이 켜지고, 모였던 관객들은 감동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자 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에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나가자, 예지야." 그런데 얼레, 뭔가 어설프게 얼굴을 돌리고 대꾸하는 예지. "으응...... 잠깐만 기다려 줘...... 나 화장실 좀 들렀다 갈께." 화장실?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눈가를 가리고 빠져나가는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나 는 상황 판단이 됐다. 하기야 남자인 나도 코끝이 찡한 판국이니, 여린 예지로서는 눈물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 었다. 여전히 눈가가 빨간 그녀에게 나는 극장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손 수건을 내밀었다. "으응...... 됐어." 피식, 들켰다는 걸 알자 예지는 부끄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저 연극...... 내가 봐도 뭉클하더라. 몰랐었어. 여자이기 때문에...... 저런 삶을 산다는 것." 예지는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저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는해...... 두려워. 나도 저렇게 내 운명 을 찾지 못하고 남들의 욕망에 따라 저렇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남들, 그건 남자란 의미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숙연해야했다. 불현듯 예지의그 끔찍했던 첫경험 고백이 떠올라서였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아마도 지금 예지는 바로 그런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으리라.새삼 몸서리가 쳐졌지만 그 녀는 애써 그런 기분을 떨치려는지 이내 밝은 목소리를 냈다. "우리...... 어디 갈까? 뭐 먹고 싶어?" 기분전환을 하려는 듯 살짝 내 팔뚝에 손을 걸치는 예지.오늘만큼은 나도 그런 것이 어 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냥 뭐...... 아무 거나." "그럼 좋아, 피자 먹을래? 나 배고파!" 그리 가리는 것 없는 나였기에,난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인근의널찍한 피자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익숙하게 주문을 마친 예지는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근데...... 창희 너 피자 안 좋아하는 거 아냐?" "아니, 사실 나야말로 피자 먹어본 지도 꽤 오래 됐는 걸...... 안 그래도 맨날 불어터진 라 면만 먹다가 기름기 있는 걸 먹는거라 내 바가 놀랄 것 같아." 배시시, 내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왜...... 자취하는 거라서 그래?" "응. 그런 것도 있고, 좀 그래. 아무래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귀찮은 게 많잖아. 후 후."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예지는 문득 그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구나, 그럼 차라리 어디 고기집이라도 갈 걸 그랬네......" "야, 무슨 고기 집이야. 늙은이처럼...... 괜찮다니까. 난 아무거나 잘 먹어. 걱정하지 마." "그래도......" 그녀는 짐짓 안쓰러운 표정이었으나, 주문한 피자가 금세 나왔다. 나는 예지의 그런걱정 을 덜어 주기 위해 피자를 성의껏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자취하면...... 많이 힘들어?" "글세...... 뭐 힘든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 아까 말했듯이 밥 먹는 게귀찮을 때도 있 지만, 난 그보다는 빨래하는 게 더 귀찮아." "어머, 빨래도 해?" 예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도 무심결에 튀어나온 내 대답. "당근이지. 너 몰라? 내가 니 옷들 빨아준 거......" 아차차, 찰나 예지와 나는 서로 어색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 그건 다시는 입밖에 낼 얘기가 아니었는데, 나의 실수였다. 나는 목이 메어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 저...... 그게, 그러니까 내 말은...... 그, 그래. 넌 왜 이렇게 안 먹니?나만 혼자 다 먹 고 있잖아!" 허둥지둥 말꼬리를 돌렸다. 괜스레 긁어 부스럼에 내 귀밑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하지만 도리어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렇게 얘기 안 해도 돼. 어차피 너한테는 숨길 것도 없는 걸 뭐......" 후우, 작은 한숨을 쉬며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희창이 얘기나...... 그런 건 이제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그 날 일도 분명 있었던 일이 기는 하잖아." 미안해, 란 말이 목구멍에 걸려있는데, 예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약간은...... 너에게 너무 많은 얘기를한 게 아닐까 하는생각도 했었어. 니가 남자라서 그렇단 얘기는 아니고...... 그냥 돌이키고 싶지 않은 일들이라서......" 그날의 고백, 그녀는 그것을 얘기하고 있었다.가슴 속 깊이 간직해두었던...... 불행한기 억. 역시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여자의 일생을 주제로 한 연극을 보면서 운 것은. "그렇지만, 나 지금은 기분이 좋아. 누구한테든 털어놓고 싶었던이야기들이었으니...... 그 리고 그걸 들어준 게 너처럼 내게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녀의 말에 나는 우울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예지도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어쨌든 고마워. 그런 얘기 듣고도 넌나를 변함없이 대해주는 것 같아. 아마나 같으면 한참 어려워했을 텐데."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그때서야 예지는 테이블 위 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벌써 다 먹은 거야?" "어...... 어라, 언제 이렇게 됐지?" 피자는 어느새 한두 조각도 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 겨우 한 조각밖에 안 먹었는데...... 이제 보니 너 순 먹보구나!" 비로소 예지가 귀엽게 눈을 흘겼다. 15 피자집에서 나온 나는 예지에게 집을 물었다. "응, 여기서 가까워. 좀 멀기는 한데, 걸어가도 돼." "그래? 그럼......" 잠시 망설이던 나는 어두워진 거리를 둘러보았다. 일곱 시가 갓 넘은 비교적 이른 시간이 었다. "걸어갈까? 내가 바래다줄게." "집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웃어주었다. 약간 서늘한 밤공기, 청명한 가을 날씨 탓에 천천 히 걷고 싶기도 했다. "배가 부르잖아...... 소화도 시킬 겸." 우리는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로등수은 불빛의 보도 위, 살짝 부는바람이 예지의 치맛자락을 나풀거려 그녀의 무릎을 보라색으로 비추었다. "근데 예지야." "창희야 나......"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동시에 얘기를 꺼낸 것이다. "너 먼저 얘기 해." "아니, 무슨 얘긴지 너 먼저 해." 서로 미소를 지으며 양보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별거 아니고...... 예지 너 그럼 앞으로 어쩔 건가 해서." "앞으로?" "왜 그런 얘기 있잖아. 누군가가 마음에서 빠져나가면, 꼭 그 만큼 마음속이 텅 빈다고...... 그래서 얘긴데, 누굴 다시 사귄다거나...... 정 아님 소개팅을 한다거나......" "아, 그거......" 예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너라면 어쩔 것 같아?" "나......?" 모르겠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흠...... 그런 생각은 안 해봤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런 거 있지? 별에 가는 우주선." "우주선?" "응. 우주선은 그렇대. 지상에서는 아무리 복잡하고완벽하게 계산을 해서 출발시키지만, 그래도 우주를 날아갈 때면 자꾸 틀려진다는 거야. 그래서 방향을 고치고, 또 고치고......" "근데 그게 이 얘기랑 무슨 상관이야?" "그럴 거야. 지난번 일 겪으면서, 그 생각이 들었어. 사람도 우주선처럼 나아갈 때마다 궤 도수정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잘못된, 또는 인연이 아닌 곳에서 뭔가 하나씩배워 가는 거지...... 그렇게 잃거나 깨달으면서, 마침내 자신의마지막 안착지에 도달하는 것이라 고 생각해." 안착지......? 그렇다면 이 경우엔 자신의 진짜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희창이 일은...... 소중하기는 하지만하나의 배울 점이 있었던것 같아. 진정 내 마음이 무얼 원했던 건지, 어떤 사람을 바랐던 건지......" 예지를 다시 돌아보았다. 한없이 착하고 여리게만 보았던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차 분하고 사려 깊은 마음씨를 지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으나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 는 줄은 몰랐다. "그래......" 말을 잃은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 연극을 보고난 후에 받은 감동과는 또다른 무언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그렇게 또 조용히 몇 블록을 걸었다. 이제 조금씩 조용한 주택가로 접어들고 있었 다. "맞아. 아까...... 예지 니가 하려던 이야기는 뭐였어?" "나? 응. 그 얘기는......" 잠시 말을 멈춘 그녀. "음...... 나야말로 별 것 아닌 걸......" "왜, 그래도 해 봐. 나만 물어봤잖아." "나중에 해도 되는데......" 그녀는 무언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폼이 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있잖아, 창희야...... 만약 내가 희창이랑 사귀었다면 넌 어떨 것 같아?" 내가 어떻다니......아, 내 생각에 자기와 희창이가 어울렸겠냐는 거로군. "솔직히 말해도 돼?" 솔직히, 라는 말에 예지의 눈동자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우선...... 어울리지 않은 것같아. 예지 너랑 희창이는......이렇게 말하면 조금 그렇기는 해도, 이제 와서 말이짐나...... 그렇잖아. 희창이는 내가 친구로서 보아도 다소 그런데, 넌 내 가 보기에도 착하고 차분하니까...... 내 생각엔 나중에 니가 좀 힘들어지거나,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 예지는 내 대답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언뜻 보니 눈가에 실망감이 어린 표정이었다. "그게...... 니 생각이야?"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렇게얘기하지 않았니- 란 질책을받을까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런 얘기를 묻다니, 예지 이 아이가 아직 희창이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걸 까. 차라리 말하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들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예지는 곧 빤히 내얼굴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나는그녀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럽 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해서...... 기분 나쁜 거야?"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모를 일이었다. 예지는 그저 씁쓸하게 혼자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은지라, 괜히 속이 켕긴 나는 울적한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 었다. "저기...... 예지야." "응?" 나는 주변을 휘 둘러 보았다. 하지만 어느덧 깊숙한골목길까지 들어온지라 주변에 카페 나 찻집 비슷한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 어디서 얘기 좀 더할래? 내가...... 맥주라도 한잔 살까?"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예지는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 무언가속 깊은 얘깃거리가 남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미안해. 다음에 사 줘. 지금 여기, 우리 집 앞 골목이야. 저기 보이지?저기가 우리 집이야." 그녀는 한 큼지막한 양옥집을 가리켰다. 역시 그녀의 말대로 제법 고급스러운 집이었다. "나 들어갈게. 오늘 데이트 고마웠어. 연극도 보여주고...... 또 얘기도 많이 해 줘서." 데이트라- 예지의 분위기 상 계속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묘했다. 그녀에게 아직 할 이야 기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엉겁결에 나는 돌아서는 예지를 붙잡지 못한 것이다. 그 때였다. 막 뜀박질해 달려가던 예지가 갑자기 돌아보며 말했다. "있잖아, 창희야. 너는...... 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아. 나도그렇고, 다른 사람에게 도 그렇고." 그녀가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가 자기 집 대문속으로 그 예쁜 치맛자락을 감추 고 있었다. "그, 그래...... 안녕." 어색하게 마주 손을 흔들고는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 예지의 그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또 누구에게 내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름. 예지만큼이나 자기의 비밀과 속마음을내게 의지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며 나는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함께별을 보았던 그 사 람. 그녀는 오늘 무얼 하고 있을까? 운명적 만남 16 나는 일요일에도 집에 가지 못했다. 집에 감녀 밀린 속옷빨래나 해올 요량이었는데, 토 요일은 예지를 만난 탓으로 그러지 못했고또한 일요일에 불쑥 나타나 빨랫감만어머니께 던져드린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일요일을 무료하게보낸 나는, 그날 밤부터자명종을 맞춰놓고 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로 한 것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어있었다. 우선 첫수업부터 늦지 않으려는 생 각이었고, 한편으로는 일단 아침에 먼저 학생회실에 들려보려는 의도였다. 시험이 다가오기에 그녀를 찾으려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은불가능하니, 대신 나는 언젠가 월요일 첫 시간 전에 선영이 누나를학회실에서 만났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던것이 다. 비록 야릇한 사건을 겪기는 했지만, 운만좋다면 그 때처럼 그녀와 마주칠 수있으리라. 아니, 꼭 그 시간이 아니더라도 될 수 있는 한수업 사이사이에 학생회실을 자주 기웃거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로 나는 아침에 학교에 오자마자 그곳으로 직행했다. 선영이 누나, 벌써 그녀를 본 지도 며칠이 지났다. 지난번 정호선배와 함께 있을 때 먼저 자리를 일어서며 돌아보던 그녀의 눈빛이 못내 마 음에 걸렸다. 그녀의 비리와 가슴 아픈 이야기들, 행여 그것과 그 날 그녀의 모습이매치되 는 것은 아닐까. 제발, 그런 일만은 다시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만 매번 내가 학생회실에 들를 때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다 른 사람들도 약속이나 한 듯 학생회실에 별로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늦은 오후가 됐고, 다소 기다림에 지친나는 이른 저녁이나 먹고 도 서관에라도 갈 요량으로 사물함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등 뒤 문가 쪽에서 똑똑, 정 중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기가...... 경영학과 학생회실 맞나요?" "어...... 그, 그런데요......" 여자 목소리. 그리고 학회실 안의 누군가가 놀란 듯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꾸를 했다. "저 그럼...... 희창이라고...... 어디서 만날 수 있지요?" 응, 희창이? 나는 그제야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머, 창희야......!" 흐익, 이럴 수가......! 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 보영아......!" 그랬다. 그녀는 보영이였다. 난 순간 왜 선배가 그녀에게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꽉 끼는 타이트 스커트, 한 뼘은 족히 넘을 하이힐-보영이가 바로 그런 늘씬한 자태로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몸매 자랑이라도 하는 듯. 순식간에 학회실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일제히 그녀와 나를 놀란 눈길로 번갈아 살피 고 있었다. "잘됐다, 너 만나서. 난 한참 헤메는 거 아닌가 했는데!" 나는 눈을 감고도 그 모든 야릇한 시선의 의미를 느낄 정도였다. 보영이가 유일하게 하는 체를 하는 내게, 모든 시선들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어...... 어쩐 일이야?" 아직도 그녀의 예고없는 출현에 어안이 벙벙한 나는 당황한 낯빛을 숨기지 못했다. "으응, 그냥...... 너희 얼굴이나 보려고." 빨리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학생회실 항 사람들의 누동자가이번에는 그녀의 몸매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길이는 별로 짧지 않았지만, 터질 듯한 그 미니스커트의 옆선은 쭈욱, 허벅지 위쪽으로 30센티는 찢어진 스타일- 어쨌든 재빨리 그녀를 이곳에서데리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 다.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허둥지둥 보영이의 팔뚝을 붙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이, 일단 나가자. 응?" "그래. 그런데 학생회실. 별 거 아니네...... 난 또 누구한테 물어봤더니 여기 이 큰 건물 안 에 있다고 해서 꽤 근사한 줄 알았는데." 대꾸도 않고 재빨리 나는 비교적 사람이 없는 건물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야,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어...... 아, 아까 학생회실은 별로라며. 그, 그래서...... 어디 앉을 만한 곳에 가려고......" 보영이는, 아마 우리 학교 안은 처음 들어와 보는 모양인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대낮에 야 한 옷차림의 늘씬한 미녀와 캠퍼스를 돌아다닌다...... 그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로서도 기분 째질일이었으나, 다름 아닌 보영이였기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방에서 몰래 잠자리를 함께 한것이 불과 일주일 전, 그 이후로음 그녀를 다시 본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제대로 옷을 입은' 보영이일 따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희 창이와의 문제다. 희창이를 찾아왔다는 그녀의 말, 그렇다면 자칫 내가 그렇게도 꺼리던그 해괴한 삼자대면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벤치에 앉히고 사방을 살폈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오기는, 걸어서 왔지. 얘기했잖아. 너희 얼굴 좀 보려고 왔다고." "야, 기, 김보영. 내 얘기는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왜 여기까지 나타난 것인가, 그걸 물으려는데 보영이가 문득 내 말을 끊었다. "어머나, 저기 매점이잖아? 창희야, 나 점심 안 먹었거든?" 어이없어 하는 내게 보영이가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나...... 우유 하나만 사다 주면 안 돼? 딸기 우유." 어휴, 절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나는 도리 없이 매점으로 달려가 우유와 음료수를 사왔 다. 생각 같아서는, 난 음료수가 아니라 술이라도 마시고 픈 지경이었다. "응, 고마워!" 보영이는 벤치에 앉아서도 예의 그 자세- 다리를 높이 꼬고 앉아 발끝을 까닥거리는- 로 그 우유에 빨대를 꽂아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학교로 온 거야? 희창이랑 전화 통화 못 했어?" "응. 그냥 한 번 와봤어. 너희 다니는 학교 구경도 하고 싶고...... 창희 니 얼굴도 본 지 오 래됐으니까, 오늘 월요일이잖아. 나 쉬는 날이니까 좀 전에 일어나서 온 거지 뭐!" 이건 또 무슨, 날 보고 싶어서? 나는 그녀가 남자였다면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도대체 악취미랄 수밖에 없는 보영이의 행동이었다. 학교로 찾아온다면 뻔히 나와 마주칠 공산이 크다는 걸 모를 리 없는 그녀, 고로 이 얘기는 일부러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 와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 그녀는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할 얘기를 꺼냈다. "아냐, 실은...... 아까 그 학생회실건물 앞에서 희창이한테 핸드폰으로전화했었어. 근데 걔...... 순 곡부도 안 하나 봐? 당구장이라던 걸?" 뭐라구!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럼 희창이가 곧 나타난다는 얘기 아니냐. 삼자대면. 한 여자얘에게 갖은 정성을 다 들이는 한 사내놈, 그리고 이미 그 여자와동침 한 사이인 그의 친구놈, 그리고 그 사실을 감추며 위험한 줄타기를 일삼는 이 여자...... 아뿔싸, 그러나 이미 자리를 피하기에는 한 발 늦었다.소스라친내가 빠질 새도 없이, 보 영이는 마시던 우유를 든 채 몸을 일으켜 다시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희창이, 학생회실로 온댔어. 오분 내로 온대." "야. 기, 김보영!" 막무가내인 그녀를 재빨리 쫓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를 확인하 자 당장에 도망치고픈 기분이 굴뚝같이 올라왔다. "야, 보영아!" 희창이였던 것이다. 낮부터 당구장으로 직행했다던 녀석이, 그새 달려왔는지 곧바로나타 난 것이다. "창희랑 같이 있었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난 학회실에 있다길래 그리로 갔었잖아." 아아,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 저, 그, 그게......" "응, 나 점심 안 먹었다고, 창희가 우유 사줬어." 다행스럽게 보영이가 내 대신 둘러대고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도옆에서 그렇다는 듯 억 지표정을 지어 보여야 했다. "어쭈, 짜식이 내 손님 접대도 해주네...... 그래,하여간 잘됐다. 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할 까 하던 참이었어. 보영이 너, 점심도 안 먹었다고 그랬지? 가자, 내가 저녁 사 줄게." "희창이 너 아직 안 먹었어?" "그럼, 니가 왔다는데 내가 왜 먹어. 나도 아직이야. 솔직히 아까 당구 저녁내기였지만, 곧 바로 나와 버렸지. 대신 게임비 내주고." 역시 호기스런 희창이였다. 내기라면 기를 쓰는 녀석이 보영이의 호출에 불원천리 달려온 것이다. 어쨌든 나야 한숨 돌릴 일. 그들 둘이 밥 먹으러 간다면, 학교 밖으로 나갈 것은 뻔 한 이치였으니 그 핑계로 사라지면 되는 것다. "참, 근데 창희야. 넌 밥 먹었어?" 얼레, 그런데 이건 또 뭔 소린가. 보영이는 애꿎은 나를 끌어 들이고 있었다. "아, 아니 나...... 난 안 먹어도 돼. 둘이서 가. 난 괜찮으니까." 나는 도무지 아슬아슬하여 어떻게든 그 자리를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번 에는 희창이마저 가세했다. "맞다, 짱이야. 너도 같이 가자.너 저번에도 아침 같이 먹자니까싫다고 했었지? 너 밥 안 먹은 거 다 알아. 일어나, 나가자!" "아, 아냐...... 내가 왜 끼여. 너, 너희들이나......"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궁색한 그변명은 통하지 못했다. 희창이는 대뜸내 팔뚝을 당겨 세우며, 반 강제로 나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야야, 사양하지 마, 이마. 저번에 못 얻어먹은 거 내라고는 안 할 테니깐. 그리고 오늘 학 교까지 와 준 보영이 정성이있지...... 자취생 팔자에 어디 밥얻어먹는 자리를 빼냐. 빼기 는." "그래, 창희야. 너한테 지난번 가게에서 신세진 것도 있는데...... 우리 같이 가." 아예 합동으로 나서는 그들, 나는 사색이 되어 끌려갈 판국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서관 에 가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진짜 다급한 일이 벌어진 건 그 직후였다. 17 보영이와 희창이의 뒤편에서- 학생회실 쪽에서 또한 명의 황당한 아가씨가 내 얼굴 을 보고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 "창희야!" 아아, 어찌 이리도 일이 꼬인단 말인가. "너 학생회실에 있다길레 겨우 찾아...... 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지였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놀란 "아......라는 탄성은 그와 동 시에 돌아다 본 보영이와 희창이의 시선 때문이었다. "예, 예지야......!" 허겁지겁 나는 그녀의 접근을 차단히기라도 할 것처럼 뛰어갔다. 예지의 휘둥그레진 눈동 자가 나, 희창이, 보영이를 차례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 저, 저...... 나, 나는......" 당황해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지가 얼굴을 돌리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본 듯 내 시선을 피하는 그녀. 나는 등뒤로 희창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당혹감을 덜어줄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 아냐...... 미안해. 너 바쁜가 보구나...... 있지.나 오늘 아르바이트 있거든, 그, 그러니 까 먼저 갈게." 어안이 벙벙한 내가 한마디 말도 꺼내기 전에, 예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예, 예지야. 잠깐만!" 불러 세울 새도 없었다. 아직 희창이만 봐도 주저하는 그녀였으니, 다정한 티를 내는 보영 이와 희창이의 모습을 보고 단박에 상황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난감해진 내가 다시 그들 쪽을 보자 희창이가 작게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야?" "응...... 그냥, 우리 과 애야!" 의아한 눈초리로 묻는 보영이에게, 녀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창희한테 반가운 척 하네? 너랑 사귀는 애야?" 그녀는 천진난만한 척 내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하며 야릇한 톤으로 말했다. "어휴, 아냐. 아니라고......!" 히스테리컬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나. 멀찌감치 보이는예지의 뒷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희창이는 학교를 나서며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팔등신 미녀와 함께 보란 듯 교정을 거닐고 있으니, 흘끗거리는 남들의 시선만으로도 그는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정말 이핼할 수 없는 보영이의 행동이었다. 아니 대체 나와 희창이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무얼 어쩌겠다는 걸까. 그녀는 공공연히 어깨를 안고 걷는 희창이에게 하등 거리낄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친구인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해놓고도 모자라 셋이서 같이 있자니...... 정말 최마담의 말대로 혀를 내 두를 노릇이었다. 앞장 선 그들에게 거의 완력으로 끌려가는 꼴이 된 나는 거의 사섹을 한 체 그들의뒤꽁 무니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저녁 대신 간만에맥주나 한잔하자는 보영이의 제안에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목이 탔다. 내 한심한 입장 마냥. "보영이 너...... 또 술 마셔도 돼?" 희창이는 술집에 앉아 짐짓 보영이에게 걱정을 보냈다. "그럼...... 뭐 그런 데 있다고 맨날 술만 마시니? 그리고 이렇게 마시는 거랑가게에서 마 시는 거랑 같냐? 나도 이런 데서 편하게 마실 날도 있어야지." 그곳에서 술을 마다하는 건 도리어 희창이었다. 한 번만 차를두고 오면 바로 그날로 키 를 압수당한다는 그는 초장에 한두 잔만 하고는 전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보영이는 그런 걱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단둘이술을 마시게 된 나에게 연 신 건배를 제의했다. 술맛이 쓸수밖에 없는 나는 두 사람의히히덕거림에 끼여들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어머, 근데...... 창희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너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라 도 있었어?" 젠장,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기가 막혔다. 보영이는분위기를 맞추자는 건지 희창이 모 르게 의미 있는 눈치까지 해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여자얘 궁금해지네? 희창아,그 여자애 창희가 좋아하는여자애 야?" "응? 누, 누구? 아까 학교에서 본 그 여자애?" 미치겠다. 이번에는 녀석이 테이블 아래로 은근히 내 발을 밟아왔다. 그의 대답이 더욱 걸 작이었다. "하하, 그게 말이야. 맞아, 씨씨야. 창희랑 씨씨......!" "씨씨?" "있잖아. 캠퍼스 커플......" "어머나, 진짜?" 허허, 나는 어이가 없어 혼자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말하기조차 싫은 나는 그저 씩 조소를 지었다. 그런 내게 보영이는 야릇한 눈초리를 보냈 다. "그래? 그럼 둘이 사귄단 얘기네?" "글쎄...... 뭐 모르지. 아마 이 녀석은분명히 아니라고 할거야. 나한테도 얘기안 해주거 든!" 병 주고, 약 주고...... 난 답답함에 혼자 술잔만 들이켰다. 보영이는 그 호기심을 멈추지 않 았다. "으응, 그래서 창희가 다미한테 눈길도 안 줬던 거구나...... 이제 보니 너 글래머보다 그렇 게 작고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하는 구나. 그래도뭐, 아까 그 여자애 아예 몸매가 없는건 아니던걸." 푸힛, 그 말에 희창이가 웃음소리를 냈다. "아마 맞을 거야 내가 보기에도......" "어, 희창이 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난 같은 여자로서 척보기에 그랬다는 건데. 너 설 마?" 이런 제길헐, 그들의 말투에 나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녀석은 지난번 훔쳐 본 예지의 벗은 장면을 얘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보영이는 또 뭐냐. 좋아한다, 안 한다- 관련도 없는 예지 이야기에 호들갑을 떨다니. 난 눈동자에 힘을 주어 희창이를쏘아보았다. 비록 이 자리가얼토당통않은 자리이기에 화를 내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대뜸 그도 내 차가운 눈초리를 의식하고 떨떠름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어...... 그 얘기는 그만 하자. 창희 화낼지도 몰라. 참, 그 다미란 여자애,요즘 어떻게 지 내?" "다미...... 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 계집애 그 날 이후로 가게 쉬고 있거든......" "그래? 왜?" "왜긴 왜야. 너도 알잖아. 그 박사장이란 인간 때문이지. 이번엔 정말로 애 하나 낳을......" "얼레, 그게 무슨 얘기야? 무슨 얘? 박사장, 그냥 단골손님 아니었어?" 순간, 나는 등뒤로 식은땀이 서리처럼흐르는 것을 느꼈다. 김보영,그녀가 말을 실수한 것이다. 알긴 뭘 하나, 다미가 박사장의 아기를 임신했었다는 얘기는분명 희창이가 아니라 내게 만 한 얘기 아닌가. 그리고 그걸 얘기 한 것은 언제 어디었나. 바로 그녀의 방에서 같이 잔 그날 들었지 않은가. "보영이 너 나한테 그 얘기한 적 없는데?" 당장 의아스런 희창이. 순식간에 보영이의 낯빛이 굳어졌다. 틀림없이 그녀로서도소스라 칠 일이 뻔했다. "그, 그랬나......?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박사장, 박사장 피해 다니느라 괜한 얘 하나만 고생한다는 얘기...... 그, 그거지...... 뭐." "으응, 난 또 뭐라고...... 그럼 그박사장이란 자식 정말 치사한 인간이구나.저번에 여기 창희에게도 행패부리더만......" 후아, 나와 보영이는 그제야 얼어붙었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희창이가 별달 리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영이가 더 큰실수를 범하지 않은 것에나 고마 워해야 했다. "저...... 나, 나 먼저 일어설게." 아슬아슬한 이 자리, 나는 가슴 졸이는 상황을 피하기위해서라도 그만 빠져나올 생각이 었다. 18 그런데 이번엔 보영이가 엉뚱한 일을 벌였다. 문득 내 안색을 살핀 보영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를 따라나선 것이다. "그래, 우리 그럼 같이 나가자." 같이 나가자고? 말리려고 하는데 뜻밖에 희창이도 그녀의 말에 동의를 했다. "그럴래? 차라리 그럴까? 나도 뭐 오늘 술도 더 못 마시니까......" 그도 내심 그 술자리가 따분했던 모양이었다. 녀석은 서슴없이계산서를 들고 몸을 일으 켰다. "야, 너희들은......" 더 있다가 나와도 되잖아, 란 말을 하려 했지만 희창이가 먼저 말을 막았다. "실은 나도 오늘 일찍 들어가야 돼. 집에 제사가 있거든. 그런데 아쉽다. 보영이가 학교까 지 놀러 왔는데......" 그 말에 보영이가 생긋 웃어주자, 녀석은 눈까지 찡긋해 보였다. 그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버린 나. 그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끌었 다. 눈치를 살피며 보영이가 불쑥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창희야, 너 약속없지?" "나......? 응, 왜?" "그럼 우리 이모네 가게 앞에서 기다려 줘. 희창이 가면 그리로 갈게. 알았지?"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가 너를 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꼭, 꼭이야!" 나는 뭔가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희창이가 때마침 밖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 이다. "후훗, 가자!" 보영이가 싹 표정을 바꾸고 재빨리 그의 팔짱을 끼었다. 그 약삭빠른 행동으로 나는 어안 이 벙벙했다. 할 얘기가 있다? 난 보영이의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녕, 내일 보자!" 그런 비밀약속을 알 턱 없는 희창이는 나오자마자 차를 세워둔 학교 쪽을 향해 보영이와 걷기 시작했다. "어...... 그, 그래......" 머뭇대며 대답하는 와중에도, 보영이는 한 번 더 내 눈을 응시하며 눈짓을 보냈다. 아까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듯 했다. 그나마 소주방의 위치는 그들이 사라진방향과 정반대였다. 어째야 할까, 망설이던나는 종내 학교 쪽에서 먼 그녀의 이모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만나지 않을 도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지난번엔 희창이의 핸드폰탓에 헐레벌떡 도망치느라 미처 자세한 얘기도 못했으니, 차 제에 오늘 같은 당혹그런 일을 벌인 보영이의 의도도 따져야 했고, 가능하면 이런 삼자대면 을 피하자는 요청도 해야만 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소주방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 지날까, 나는 근처 건물 옆에 몸을 숨기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그러 기를 10여분. 보영이가 소주방 안을 살피며 내게 다가왔다. "후훗, 미안. 스릴 만점인데...... 무슨 007미팅하는 것 같아!" 어처구니없는 지경인데도, 그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런 그녀를 화난 눈으로 응 시하며 용건부터 말했다. "왜...... 날 보자고 한 거야?" "어머, 너야말로 왜 그러니? 아까부터 썰렁하게, 열 받은 사람처럼...... 괜히 분위기 띄우려 다 섬뜩했잖아! 킥킥킥." 보영이의 웃음소리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할 얘기가 뭐야?" "야아, 창희 너 진짜 화난 거야?" 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내 죄를 탓할 수밖에. "나 정식으로 얘기하는 건데, 이제 희창이랑 너랑 동시에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아니, 그래서는 안 돼. 절대로." 내 으르렁거림이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그러나 보영이는 못 들은 척 쪼르르 달려와 내 팔을 덥석 붙들었다. "뭐, 뭐하는 거야, 김보영!" 무턱대고 그녀는 날 어디론가 이끌려 들었다. 황당한 내가 팔을 뿌리치려 하자,보영이는 콧소리를 섞으며 아야을 떨었다. "아이...... 이런 데서 얘기하자는 거야? 길거리에서?" 하기는 그랬다. 나는 화들짝 다시금 거리를 살폈다. "어디 들어가자. 조용한를 데로." "아, 알았어. 그러니까 이 팔 좀 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여전히 팔을 풀지 않은 그녀. 그녀는 선뜻 골목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얼빠진 내가 재차 묻자, 엄청난 대꾸가 돌아왔다. "응, 우리 집, 내 방!" "야 임마, 미, 미쳤어?" 확 그녀의 팔을 뿌리쳐야만 했다. 자기방이라니, 우리 둘이 정사를 나눈 그곳으로다시 가자는 말인가? "어때, 저번에도 왔었잖아. 시끄러운 카페 같은 데보단 거기가 더 낫지 않아?" 환장할 노릇이었다. 천연덕스러운 보영이의 말투를 보아하니 농담이 아니었다. 자신의방 에 함께 가자는 게 별 대수가 아니라는 듯했다. "시, 싫어.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 내 서슬 퍼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럼...... 그리로 가." "어디, 어디 말이야?" "니 자취방 있잖아. 니 방 구경 좀 시켜 줘." 맙소사,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자기 방이 싫다니까 이젠 내 방? "그렇잖아. 지난번에 너만 내 방 구경한 셈이니까, 오늘은 니방에......" "안 돼!" 내가 발작적으로 거부의사를 밝혔으나 보영이는 이제 조건까지 내세우고 있었다. "알았어. 대신에...... 그 때처럼 너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 정말이지 이 여자애의 마음속을 한 번 까뒤집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차라리 일종 의 협박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맹세해. 오늘 니 방에 가면, 정말 너 귀찮게 안 한다니까." "기, 김보영...... 너 도대체......" 제정신이니, 라고 묻는 게 옳을 성싶었다. 남들은 자기 방에 여자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이 라지만, 이건 거꾸로 자청해서 다리 털 시커먼 놈의 방으로 들어오겠다니 나 원 참...... "안 그래도 희창이는 나더러 쉬는 날마다 학교에 오라던데? 드라이브 시켜 주겠대." 훡, 돌아서서 가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어야하 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 얼른 가자!" 보영이는 이미 다 결정됐다는 듯 스스럼없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약속할 수 있는 거지?" "어유, 무슨 남자애가 그렇게 의심이 많냐. 나 몰라서 그래? 내가 한 번그러겠다고 하면 믿어도 돼. 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성격 아냐. 으스스한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추울 만도 하지, 치마라기보다 앞뒤를 가린 얇은 천같은 보영이의 스커트...... 어쨌든 마 침내 나는 자취방 현관 앞에서 재삼 다짐을 해야 했다. 양손에는 그녀의 재촉에 따라 골목어귀에서 사든 맥주병까지 들고서. "어머, 이게 니 방이야? 남자 방치곤 깔끔하네." 방안에 들어서며 보영이가 사뭇 감탄하는 투로 말했다. 기실깔끔하다는 건 지난주 자신 의 술집 언니- 최마담- 가 나타나 한바탕 법석을 떤 그녀로서는 알 리 없었다. "와...... 좋다. 난 반지하라 영 갑갑한데!" 보영이는 자기 방에나 들어온 것처럼 들어서자마자 척 외투까지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후유, 어찌 일이 이 지경까지 됐을까 싶은 나는 바닥에 턱썩 주저앉아 종이컵과 맥주병들 을 펼쳤다. 일분이라도 빨리 그녀가 나가 주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녀는 신기한 듯 여기저기 방안을 훑어보다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오케이, 남자만 사는 방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인 걸. 거기에다 술까지 마시다니!" "그만 좀 해. 빨리 이거나 받아." 그녀에게 술잔을 건넸다. 찰나 내 눈에 들어오는 민망한 광경하나. "야, 기, 김보영......!" 나는 그녀의 그 모습에 술을 따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19 기본적으로 여자가 방바닥에 앉을 때의 자세란 대충 몇 가지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특히나 치마를 입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살짝 무릎을꿇은 자세에서 비스듬히 종아리 를 비켜 앉거나, 정 아니면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를 쭉 뻗거나. 그런데 지금 보영이가 앉은 자세는 그런 자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속칭 가부좌,책상다리 - 바지를 입은 경우에 취하는 그런 자세로 철퍽 앉아있었다. 그건 그녀의 치마가 길게 옆으로 틔였기 때문에 가능한일이었다. 만약 통치마였다면 치 마를 걷어올리기 전에는 불가능했을터. 하지만 부주의한 것인지 일부러인지, 대뜸정면으로 마주앉은 보영이로 인해 내 눈이 갈 데를 못 찾고 허둥거려야만 했다. 치마 속 깊속한 경치가 보일락 말락했다. 아찔한 살색 그 심연이. "야...... 제, 제대로 좀 앉아. 그게 뭐야?" 난 시선을 돌린 채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응, 뭐? 아, 이거!" 하지만 보영이는 내 잔소리를 듣고도 피식,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별 것 아니라는 투였 다. "이게 더 편하잖아? 그럼 어쩌라고, 무릎이라도 꿇어? 불편하게스리." 원래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걸까,아니면 내게는 가릴 것없다는 자신감일까. 갈팡질팡, 민망할 따름이다. "푸훗, 뭘 그래...... 서로 더한 것도 다 본 사이에...... 알았어. 자, 이럼 되지?" 서로 더한 것도 다 본 사이...... 답답한 나는 한숨만 내쉬었다. 고작 그녀가 가린답시고 한 동작은, 방구석의 이불자락을 끌어와 덮은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입고 있는 그 치맛자락을 간 신히 끌어당겨 허벅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 방으로 가자고 했잖아. 그랬음 훨씬 더 편했을텐데...... 야, 술이나 줘." 그러나 만약 그녀 방으로 갔었다면 필경 더한 모습을 보고도 남았으리라. 다름 아닌 지난 번에도 내 앞에서 훌렁훌렁 노브라인 윗도리까지 벗어 던졌던 그녀가 아닌가. 나는 그녀에게 맥주를 부어주고 스스로가득 잔을 채워 목구멍으로들이부었다. 어느새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그런 식으로라도 식혀야 할 것만 같았다. 벌컥벌컥, 보영이도 나 못지 않게 술을 비우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후...... 그래서. 나랑 할 얘기가 뭐야?" "할 얘기...... 뻔한 거지 뭘." 그녀는 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무슨 얘긴데? 혹시...... 희창이 얘기하고 싶은 거야?" 둘 사이의 공통화제라면, 이 시점에선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쉽사리 끄집어내기는했으 나, 결코 쉽게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나는 못내 주저했다. 그녀가 어 떤 이야기를 입에 올릴지 모르므로. "희창이? 글쎄......?" 보영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 희창이가 한 얘기, 정말이야?" "무슨 얘기?" "아까 그 여자얘 말이야. 말하는 걸로 봐선, 너랑 무슨 사연이 있기는 있는 것 같던데?" "그, 그건......" 이 또한 섣불리 설명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율배반이란 말이 떠올랐다. 뭐라고 얘기하나. 희창이를 짝사랑하던 여자애라고? "너는 몰라도 되는 얘기야. 희창이 말처럼......" 그게 말할 수 있는 전부, 그러자 보영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단 말이지. 너랑 그 계집애랑......" "그것보다 니 얘기나 먼저 해. 앞으로 어쩔 셈이야?" "어쩌기는 뭘?" "니가 그랬잖아. 희창이에 대한 네 생각은 저번에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쳐. 하지만 나 는, 나는 그 날 너하고 있었던 일을......" 찰나, 보영이가 내 말을 가로챘다. "후회하는 거야?" "응?" "후회하냐구. 나하고 같이 자서." 젠장, 지난번 사건을 반추해봤다. 그 때도 이 여자애는 그렇게 물어 봤었다. 정사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순간에,그녀 는 내게 후회하지 말자고 다집했고...... 나는 당시 억지로라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었는데. "그런 거야? 후회한다고?" "아...... 아냐, 내 말은, 나는...... 견딜 수가 없다는 거야. 오늘만 해도 그래, 넌 내가 곤란해 하는 걸 알면서도 날 끌어들였잖아. 희창이, 그 녀석 얼굴 못 봤어? 내가 보기에 그건......" 그건- 난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이런 얘기까지 해야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보영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재차 추궁했다. 비꼬는 투의 그 목소리에 난 잠시 심호흡을 했 다. "계속해 봐. 그래서 그건......?" "너...... 아까 그랬었지? 여자가 한눈에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남자 에게도 남자가 봐서 알 수 있는 게있어. 내가 보기에, 희창이는 널 좋아해. 니생각처럼, 어 떤 대상으로서만 아니라......" 기왕에 눈 딱감고 시작한 얘기. 내가 퍽 진지한 자세로나오자 보영이는 자기 잔에 맥주 를 따르다 말고 무릎을 세워 감싸며 고쳐 앉았다. "틀림없어. 희창이는 널 그냥 그렇게만 보는 게 아닐 거야. 너도 그랬잖아, 그건 자연스러 운 거라고, 걔도 그렇단 말이야, 알겠어? 너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너를......" 그 대목에서 나는 다시 말을 멈추어야 했다. 보영이가 한발앞서 내 말을 이었기 때문이 다. "갖고 싶어한다. 이 말이지? 날 갖고 싶어서 좋아하는 척 구는 게 아니고,날 좋아하니까 갖고 싶어한다?" 그런 얘기가 되는 걸까. 후, 머리가 아파진 나는 큰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 때였 다. 이마를 괴고 쪼그려 앉은 내 눈에, 언뜻 비치는 은밀한 모습. 그것은 다시 마주앉은 보영이의 무릎 아래였다. 둔부를 방바닥에 붙이고 앉은 보영이.그 녀가 방금 전 무릎을 세우고자세를 바꾼 탓에 비스듬히 마주앉은 방향- 옆선이 틔여진 쪽- 그 아래로 치맛자락이 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스커트안이 다시금 훤히 드러나 있었다. 쭉 뻗은 종아리...... 그리고 탄탄한 허벅지 뒤편이 쪼그린 그대고 노출되었던 것이다. 아찔한 그 광경 너머로, 아련히 보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어떤데......?" 가물가물한 그 소리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 어떠냐니?" "훗, 난 희창이가 어떻든 상관없어. 좋아하면 좋아하래지." 난 고개를 들어올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가린 듯 잔을 들어올려 죽 들이켰다. "김보영, 어떻게 그런......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아까 그건 뭐야? 희창이한테 먼저팔짱 을 끼질 않나, 그 녀석이 거의 안다시피 해도 가만히 있고...... 그런 건 다 뭐냐고?" 농담이 아닌, 진짜 화가 났다.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 간에. 희창이는 내 친 구라는 생각이 앞섰다. 보영이는 정색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까무러칠 소리를, 혼잣말처럼 예사로 내뱉 었다. "그럼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잖아?" 해결책? 의아스런 내 표정이 되묻자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툭, 말을 던졌다. "그럼 되잖아? 너랑 나랑 사귀면......!" "뭐라고?" 당장, 나는 내 귀가 제대로 뚫린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사귀자고? 나와 보영이가! "뭐 별 것 있어? 요새 다들 그런 거지, 뭐..... 아무리 친구라도 하룻밤 같이자면 애인 되 는 거 아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머리속이 다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과연 이아가씨가 지금 제정신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건가. "우리...... 이미 알 것 다 아는 사이잖아? 한 번 사귀는 건 어떨까?" 이 아가씨가 아직 취하지는ㄴ 않았을 텐데 어찌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허허, 실없는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왜, 내 말이 장난 같니?" 그럼 장난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내 귀에는 그렇게밖에 들리지않는데...... 하지만 더욱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릇한 눈빛으로 변한 보영이, 그녀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 내게 바싹 다가오는 것이다. "대답해 봐. 너 나더러 예쁘다며. 내가 좋다며. 그런데 왜? 나랑 사귀는 건 싫어? 너도 나 랑 그냥 즐기기만 하고 끝내고 싶은 거야?" 흐익, 섬뜩해진 나는 도망치듯 자세를 뒤로 젖혀야 했다. 그런데 보영이는 그만큼다가오 고 있었다. "뭐, 뭐야!" 어느새 내 등은 비좁은 자취방의 벽에 닿고 말았다. 보영이는 한가운데 놓인 술병들을 피 해 점점 내게 다가왔다. 세상에, 그녀의 그 자태는 더 없이 자극적인 동작이었다. 늘씬한 여자가 엉덩이를쳐들고 씰룩이며...... 엉금엉금 네 발 짐승모양 깅어서 가까이 온다-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 아니 보 영이는 어슬렁거리는 암표범 그 자체였다. 아뜩해져서, 질끈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내 눈동자, 즉 본능은 미처 그런 결정을 내리 지 못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이런 말이 콩알만해진 가슴을 타고 맴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내 뱉지 못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는 도발적인 그 자세로 내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한 손으 로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올렸다. 어지러워진내 시선 너머로, 터질 듯한 그녀의둔부가 아스라이 보이고 있었다. 풍경화의, 머나먼 어떤 언덕처럼. "나...... 사실 오늘 희창이 보러온 거 아니었어. 널 만나고 싶어서였어. 정말이야." 유혹하는 그녀의 속삭임이 꿈결 같게만 느껴졌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아까도 가지 말라고 한 거고." "기. 김보영, 안 돼. 이, 이러지 마!" 뒤죽박죽이었다. 흔한 얘기로, 이건삼류 에로영화에서 여자쪽의대사였다. 이건 완전히 뭔가 거꾸로 된 것이다. "희창이...... 걱정하지 마. 너한테는 피해 없게 할 수 있으니깐. 그 애는 그냥 친구야. 그리 고 난 친한 친구라면 그런 스킨십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같이...... 자는 것만 아 니면." 정말 농담이 아니란 걸까. 종잡을 수없는 그녀의 말, 진심으로 나와 사귀기를원한다는 말인가? 희창이가 아닌 나와?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해 봐. 니 말 한마디면...... 나 당장 여기서 옷을 벗을 수 도 있어." 실제로 그녀는 천천히 가슴께의 블라우스단추 위로 손을 가져갔다. 풍만히드리워졌을, 그 유방을 가린 그 천 위로. "내가 그 증거를 보여줄까?" 보영이가 갑자기 네 발 짐승 체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난 너무나 머리 속이 아뜩해져 뭐라 대꾸할 수도 없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따. 잠시 그녀의 손이 자신의 가슴 앞섶에머물렀다 생각했었는데, 마치 원래부터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그 블라우스가 단번에 쭉, 밑부분까지 뜯어지듯 펼쳐졌던 것이다. 그 벌어진 사이로 단번에 보영이의 가득찬 두 원이 아래쪽을 브래지어로 가린 채 드러났 다. 뽀얀 반구 두 개가 또 다른 성분의 허연 반구 두 개에 절반씩 가려진 그 모습은. 일전에 내가 코앞에서 보았던 그 경치와 조금도 달라진 것 없는 탄탄한 살결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나로서는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를 도리밖에 없었다. 보영이는 다시 한번 무릎걸음으로 내 게 다가오며 뜻 모를 야릇한 미소를 지어댔다. "이래도 못 믿겠어?" 아뿔싸,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블라우스 틈으로 그녀의 젖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보영이는 한술 더 떠 자신의 브래지어 어깨끈과 함께 읫도리의 절반쯤도 어깨 위로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옷자락마저 슬그머니 허리께에서 끄집어냈다. 나는 벽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기라도 할 것 같이 물러서야 했다. "말해 봐. 나는 너한테 좋아하니까 사귀자고 하는 거라고. 그래서 지금 너한테그 증거를 보이고 싶은 거란 말야." 한껏 물기가 어려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차라리 냉소적이라해도 좋은 것 같았다.일방적 인 통고, 즉 나는 이만큼인데 너는 어쩌겠냐는. 육탄공세란 말이 떠올랐다.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정녕 내가 동의한다면...... 나는 고개를 흔들어댔따.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섬뜩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찌 될 것이 냐. 여기 보영이와 당장 정사라도 갖게 될까? 그것도 다른 장소도 아닌 내 자취방 안에서? 이제 그녀의 젖가슴은 매끄러운 어깻죽지와 더불어 내 코앞에서 불과 십여 센티도 떨어지 지 않은 거리까지 접근했다. 내가 재채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그녀의 두 계곡 사이에 파묻 힐 판국이었다. 보영이는 두 팔을 뻗어 내 등뒤의 벽을 짚었다. 날 밀어붙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니가 원하기만 하면 돼. 난 그러길 바라고." "이...... 이러지 마. 난, 나는......" 하지만 그 다음 말은 이을수가 없었다. 보영이가 다시금 자신의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우아하게 귀밑으로 쓸어 넘겨 보였는데, 가슴살이 훤히 드러난 상태에서의 그 동작은, 두 눈 을 질끈 감는 것도 모자라 이마저 악물게 할 정도로 자극적인 자태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아직도 부족한가 보지? 난 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파악이 가능했다. 그랬다.마치 스틸 영화의 한 장면 인 듯, 무릎걸음으로 일어선 보영이의 손이 느리게 자신의 허리춤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따. 어리...... 저 동작의 의미는...... 그랬다. 그녀는 스커트를 벅으려는 중이었다. "보, 보영아......!" 화들짝 놀란 나는,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켜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야 했다. "왜, 싫어?" 엉거주춤 멋모르고 달려들었던 나는 곧바로 몸을 후퇴시켜야했다. 무릎으로 일어선 보 영이를 앉은 내가 붙잡은 셈이니, 꼭 그녀의 둔부나 허리를얼까안은 꼴이 되고 말았던 것 이다. 그러나 보영이는 자신의 옆을 길게 트여진 그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는 동작은 멈추지 않 았다. 그녀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무릎을 벌리고 있었기에망정이지, 그녀의 둔부에 속옷 선을 내비치게 할 정도로 밀착된 그 치마는 금방이라도 주르륵, 밑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어쩌면 워낙 꼭 끼는 그것이었기에 이미 그 아슬아슬한 재봉선이 금방이라도투툭거리며 터져 그 하반신을 몽땅 드러낼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블라우스 자락은 밖으로 빼내진 상황 인지라 언뜻 드러나는 그 안의,희끄무레하게 짙은 색 스커트 색깔에대비되는 그 색상은 그녀의 하반신에 걸쳐져 있는 유일한 속옷임에 틀림없었다. 아까 훔쳐 본 치마 속에 속치마 따위는 보이지 않았으니,분명 그것은 그녀의 팬팅리 것 이다. 천천히, 그녀가 허리춤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장면이 보였다. 하체에 걸친 그 무엇을 벅어 내릴 때 누구나 취하는 동작, 이제 나로서는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그녀를 말리지 않는다면, 필경 대번에 그녀는 자신의 하복부 아래를 전라로 만들 게 분명 했다. "니가 그랬어. 너도 날 좋아한다고. 그리고 난 좋아하는사람과 이럴 수 있는 것, 하나도 거리끼지 않아!" 고개를 수그렸다. 동시에 두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춤에 블루스라도 치려는 양 세게 안았 다. 안 된다- 나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강제로 그녀의 엉덩이를 바닥 에 붙이도록 힘껏 주저 않혔다. "미안, 미안해!" 정말로 미안했다. 그 통에 보영이가 자칫 엉덩방아를 찌을 뻔한 까닭이었따. 그러나키득 키득 보영이가 야릇한 얼굴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역시...... 넌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뭐가 즐거운지, 정말로 고개까지 젖혀대며 깔깔댔다. 어리벙벙한 나. 행여 따귀라도 맞을 것을 각오한 행동이었는데, 보영이의 반응이 전혀엉 뚱했던 것이다. "참 창희 너는...... 너는...... 킥킥." 도리어 내가 떨떠름해졌다. 그 때였다. 이 복잡한 위기의 타개는 문밖에서 일어나고있었 다. 20 똑똑. 누군가가 내 자취방 현관을 두들기고 있었다. 자세히 귀기울이지 않으면들리지 도 않았을 그 소리에 후다닥,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 누구세요......!" 그 때 내 음성은 정말 히스테리컬하게 들렸으리라. 하지만 결단코 잘못 들은 게 아닌지라 난는 벌컥 방문을 열고 옥탑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 누구세요?" 재차 물었지만, 들려오는 건 다시 한 번 똑똑대는 노크소리뿐이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만약밖에 있는 것이 희창이라면, 그 결과는 상상 도 못할 끔찍한...... 나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방안의 보영이가 옷을 벗건말건, 지금 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심호흡을 했다. 안에 불이 훤히 켜져 있으니 아무도 없는 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그 렇다면 내 스스로 먼저 문을 열고 누구인지 확인하는 외엔 도리가 없었다. 제발...... 하나, 둘, 셋. 확, 쪽문을 당겨 열었다. 동시에, 어두컴컴한계단에서 놀라는 목소 리가 들려왔다. "어멋, 깜짝이야!" "어. 기, 김예지!" 이럴 수가, 문밖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예지였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그녀가 나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미, 미안해. 자고 있었어?" "아, 아니......" 나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얘가 왜 이 늦은 시간에나를 찾아왔단 말이냐. "있잖아. 아까...... 생각해보니 너한테노트 주려고 했었는데,오늘 주기로 하고 그만깜 빡......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거든. 그래서 지금 끝내고 가는 길에......" 착한 예지, 그녀는 내게 한 약속을뒤늦게 기억해내고는 몸소와준 것이다. 그 말과함께 그녀는 가방에거 두툼한 프린트물 한권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나는 인사도 못하고 건네 받았는데, 그 순간- 뒤쪽에서 들려오는 등줄기가 싸늘 해지는 목소리! "후훗, 그래서였군!" 으악, 섬뜩한 그 목소리에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보영이가 방문에 기대어 선 채 예지와 나를 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방금 전 흐트러지기 시작한 옷매무새 그대로. "어머!" 흠칫 놀란 것은 예지도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미, 미암해. 나, 난 손님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지만 당황한 그녀에게 대꾸한 것은 내가 아니라 보영이었다.어느새 껌을 씹으며 그 녀는, 듣기에도 야릇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아녜요. 난 지금 나가려던 참이예요. 들어오세요, 미리약속된 손님은 내가 아니라 그쪽 인 것 같은데." 기막힌 만남이다. 한 남자를 짝사랑했던 여자와, 그 사랑을 무너뜨린 직접적 원인을제공 한 여자, 그 둘이 나를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다니. "창희야, 나 갈게." 그러면서 하이힐을 신는 보영이.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내 앞을 무시하듯 지나쳐 갔다. "좀 비켜 줄래요?" 얼굴이 붉어진 예지는 당황하여 옥탑하여 옥탑 계단에서 물러났다. 또각또각, 내려가는 그 구두굽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허둥대며 보영이의 뒤를 쫓아 달려 내려갔다. "야, 기, 김보영!" "티 내지 마. 바보야!' 그녀가 대문 문가에서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물론, 위에 있는 예지에게 들리지 않도록. "큭큭, 역시 나는 니 타입이 아닌 가 봐. 너랑 저 여자애, 보통 사이가 아닌가 보지? 이런 시간에 불쑥 찾아올 정도라니." "야, 그, 그게 아니라......!" 그러나 보영이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약속한 건 지켜. 그러니까 희창이에대해선 내가 알아서 할게. 아까 방 에서 내가 얘기한 건,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였어. 하여튼올라가 봐. 질투 나는 걸? 오늘은 니 카트너가 내가 아니네?" 불량기 있게 껌 소리를 짝짝거리며 보영이가 속삭였다. "그래도 오늘 너를 보러 왔던 건 사실이야. 궁금했거든.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해 서...... 하지만 나도 뭐, 끈적거리면서 달라붙는 건 딱질색이야. 그런 인간은, 우리 가게 달 골 중에도 많으니깐...... 근데 넌 너무 어려워. 좀 더 쉬웠다면 정말 사귀었을지 모르지만. 그 나저나...... 아, 맞다." 마지막으로 잊을 뻔했다는 투로, 그녀가 뒤적뒤적 하더니 뭔가를 나에게 쑥 내밀었다. "이거 받아." "이, 이게 뭐야?" 보영이의 손에 들린 것은 하얀 봉투였다. "나도 몰라. 꽁꽁 붙여 놨던 걸...... 어제 마담 언니가 너 만나면 주라고 하더라. 아주 신신 당부를 하던데." 마담 언니? 최마담? 난 영문을 몰라 어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뻔하지, 뭐. 그 때 일 때문에 주는 걸 거야...... 후후!" 찡긋, 안 봐도 알겠다는 듯 윙크와 함께 보영이는 내손에 그 봉투를 쥐어주고는 돌아섰 다. 그녀의 말대로 봉투는 깔끔하게 봉해져 손댄흔적이 없었다. 무얼까. 그 때 일때문이라 니? 나는 서둘러 봉투를 찢어 안의 내용물을 살피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십만원짜리 수표 두 장이었다. "보, 보영......" 순식간에 입이 떡 벌어진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어 보영이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골목길을 빠져 나가버린 후였다. 나는 당혹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맙소사, 수표하니, 집에서 용돈받을 때도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액수였다. 그 때 일이란 그럼 무슨 치료비? 보상금? 내가 왜 이걸 받아야 하나. 최마담 그녀가 책임 질 일도 아니었는데. 게다가아무리 그렇다 해도 너무나 큰 금액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 다시 한 번 골목길을 둘러 보았으나 보영이가 보일 리는 만무했다. 멍하니 그 수표를 손에 쥔 채,한참을 서 있던 나는 끝끝내 돌려줄누군가를 발견할 수 없어 허탈하게 도로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와야 했다. 옥탑 자취방 문 앞에는 아직도 귀밑을 붉힌 예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땜에...... 방해된 거야?" "아, 아냐......" 장탄식만 흘러나올 뿐, 오늘따라 왜 이리 설명해야 할 일이 많은지. "저...... 자, 잠깐 들어올래?"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 약속을 지키려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녀에게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했다. 어수선한 방 안, 기껏해야 보영이와 마시던술이 어질러져 있을 테고, 뭐 이부자리같은 게 흐트러진 게 아닐까 슬그머니 겁이나기는 하는데...... 그런데 예지는 뜻밖의 말을꺼냈 다. "나...... 누군지 알아." "응? 누, 누구?" "방금 전 그 여자...... 나 그 날 봤었어. 그리고 단번에 알아차렸어. 그때...... 희창이 차안 에 있던......"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보영이를 알고 있다고?하기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분명 희창이와 보영이가 차안에서 야릇한행각을 벌이고 있던 걸 목격하고서......충격까지 받은 예지였으니까 말이다. "저 여자애 맞지? 희창이가 좋아하는 애." 어쨌든 당혹스런 일. 내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문득 쓸쓸해진 낯빛으로 고 개를 숙였다. "이름이...... 뭐야?" "보, 보영이야. 김...... 보영." "그렇구나, 이름도 외모처럼 예쁘네. 나보다 훨씬 나은 걸. 키도 크고, 몸매도 날씬하고...... 그 때도 언뜻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아, 아니야 김예지......" 우울한 예지의 이야기에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같았짐나 우물쭈물, 난감함만 곱씹어 야 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야, 니가 더 예뻐, 저 애 보다 니가 나아...... 이런 말 이라도 하는 게 옳을까. 사실보영이쪽이 색기나 섹시함으로는 앞설지몰라도 귀여움이나 아담함은 분명 예지가 가은데. 그녀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근데 왜 여기 있어? 난...... 희창이도 있는 줄 알고 놀랬어." 젠장, 나는 뒤통수만 긁적여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방도가없었따. 꼭 죄를 지은 기 분, 아니 원죄는 모조리 내게 뒤집어 씌어진 것 같았다. 예지는 그런 내 곤란한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나를 보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대답 안 해도 괜찮아.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뭐......" "아, 아니...... 아까 그 여자애가 온 건......" 대답하기 힘든 문제인지라 열심히 궁리를 해대는 내머리 속- 찰나 떠오르는 것이 있었 다. "참, 예, 예지야. 그...... 현주네 어머니한테 전화 드렸어. 내일...... 내일 방문하기로." "그래. 내일...... 어쩌지? 나 내일도 아르바이트 밀린 것 있는데......" "그, 그럼 어쩌지? 나...... 혼자 갈까?" "입주 문제는 얘기했어?" "응, 그건 그 날 만나서 하기로......" 나는 일부러 예지에게 웃는 낯으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혼자 가는 것이야 어 렵지 않을 터, 단지 지금으로선 조금이라도 그녀의 침울한 표정을 덜고 싶었다. "잘됐다. 그렇다면...... 그나저나 맞아, 이제 나도 가야했다. 너무 늦었어." "벌써? 그, 그래도...... 잠깐 들어와서......" 살레살레, 머리를 흔드는 그녀. "아니 어쨌든 미안해, 불쑥 찾아와서.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씁쓸한 표정으로, 예지는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저...... 예, 예지야!" "응?"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그...... 그게...... 노, 노트 고마워!" 달리 할말이 없었다. 붙잡을 수도 없었다.멍청히 호주머니 속에 수표를 쥔 나를남기고 예지는 가만히 웃어 보이며 돌아가버렸다. 입주과외 21 그 날 밤은 마치 폭풍우가 한 차례 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학 교로 찾아온 보영이, 죄책감을 씻어낼 길이 없는 희창이, 그리고 교묘하게 얽힌운명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예지...... 그 모두가 한꺼번에 밀물처럼 들이달쳤다가 썰물처럼와르 르 빠져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사람은 예지였따. 가뜩이나 순수한마음의 그녀가 행여 상처받지 않았을까, 그것이 가장 고민되는 바였다. 거기에 더불어 나는 밤새도록 수표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호의인지부담 인지 알 수 없는 최마담의 속셈, 그징표. 이걸 돌려주어야 할 것은 당연했따.게다가 보영이를 총해서 건넸다는 상황이문제였다. 그녀가 내게 직접 주었다면 틀림없이 거부당했으리란 건 뻔했으니,어쩌면 그녀는 그런 걸 계산에 두고서 보영이에게 시킨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돈을 돌려주렴녀 다시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얘기...... 보영이는...... 어찌 보면 어제 그녀를만난 것이 차라리 잘된일인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이기는 해도, 그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이어야 한다- 최소한 스스로의 다짐 만 지켜준다면, 희창이와 자기 사이에 나를 끌어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유혹한 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 직후에 한 말이진심인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일 단 보영이와 희창이 사이의 일은 그들만의 문제로 남겨진다는 얘기이기에 적어도당분간은 거기에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내 죄의식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뭐랄까, 미 봉책이랄까. 그 두 사람이 헤어져서 서로 다시 볼 일이 없기 전에는, 절대 풀릴 리없는 문 제였으니 말이다. 보영이의 그 아슬아슬했던 자태가 떠올랐다. 분명내가 속속들이 경험했떤 은밀함이었지 만, 나는 아직도 그녀의 깊은 비경을 절반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껍질 마냥, 한겹 한겹 벗겨내도 그 정점이 보이지 않는 베일에 둘어싸인 여자. 만약, 만약 그 순간에 내가 욕정을 이기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솔직히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는 걸 시인한다. 그래서, 그래서 그녀와 지난번처럼 다시 정사를 갖게 되었담녀어땠 을까. 그 현란했던 보영이의 몸짓을 다시 한 번 겪게 되고, 땀에 젖은 속살들을 마주하며 가 장 부끄러운 곳을 부끄러움 하나 없이 마주했더라면...... 정말 그녀가 나더러 진짜로사귀자 고 했을까? 이리저리 복잡한 생각 속에서 겨우 잠든 나는, 그 날 밤 기어코 악몽을 꾸고 말았다. 맹수가 나를 덮치는 꿈이었는데, 언뜻 보아하니 그 암표범이보영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 아. 쿨쿨, 얼마쯤 잤을까. 창밖이 한참어둑어둑한 것을 느끼고 나는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친 나는 겨우겨우 수업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곯아떨어 졌던 것이다. 그런데 아차. 약속시간이 거의 임박했다. 재빨리몸을 씻고서 옷을 입었다. 깨끗한옷들, 지난번 최마담이 빨아놓은 그 옷들 중에서 비교적 점잖은 것으로 골라서. 모녀만 단둘이 사는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은근히 꺼림칙하기에 나는 옷차림에 더 신 경이 쓰였다. 현주네가 산다는 아파트는 이른바 신도시 조성어쩌고 하며 새로이 조성된 이곳교외의 아파트 단지였따. 비교적 신형의 아파트. 내 자취방에서 한참을 걷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멀다고 생각되는 거리는 아니었따. 현주 어머니가 가르쳐 준 아파트 동...... 그 중간쯤 되는 호수에 내가 찾아 가는 목적지가 있었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고 나는 일부러 험험,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 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아 홉 시에서 한 십분여밖에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네, 누구세요?" 안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주 어머니인 듯. "아, 예, 안녕하세요. 저 창희라고...... 전화드렸던 현주 과외......" "어머, 예! 잠깐만요......!" 철커덕, 곧바로 열리는 현관문. "예, 들어오세요!" "아, 안녕하......" 세요- 란 인사와 동시에, 활짝 열린 아파트 문으로 들어서던나는 순식간에 눈동자가 왕 방울만해졌다. 내 맞은편, 그러니까 현관 안에 엄청 젊어 보이는 한 여자가 활짝 웃고 서있었는데,그녀 는...... 뭐라던가, 나이트 가운? 슈미즈? 여하여간 허벅지중간도 채 못 오는 얇은 옷,아니 속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길이는 미니스커트보다 짧았고 가슴은 레이스로 깊게 패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제가 현주 엄마예요." 그 젊은 여자가 나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순간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당황하 였다. 속옷, 아니 아무리 잘 봐 주어도 잠옷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속옷을 입고, 기껏해야20 대 중-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여자가 현주 엄마라니? 일전에 통화를 할 때에도그녀의 목소리가 유달리 젊었다는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내 산산을 뛰어 넘으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얼른 들어오세요, 얘, 현주야!" 현주 엄마는 내 얼떨떨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없이 돌아서며 안쪽을 향 해 자기 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주춤주춤 방안에서 나오는 여자아이. 그 아이를 본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어처구 니없음을 느꼈다. 초등학교 3학년이니 적어도 아홉 살, 많아야 열 살짜리아이인 그 현주라는 아이는 예쁘 장한 얼굴, 보통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로 끽해야 발육이 빠르다는 요새 아이일 뿐...... 그런 데 내 눈엔 아무리 보아도 자기 엄마와언니동생이라 해도 믿어줄 만큼 차이가 나질 않았 다. "이리 와, 인사 드려. 너 공부 가르쳐 주실 선생님 오셨다!" 뭔가 켕기는 표정으로 다가오던 현주라는 계집애는 나와 자기 엄마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 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뾰루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벌어지는 의외의 상황. "싫어, 나 과외 안 한다니깐!" 얼레, 현주는 갑자기 홱 등을돌리더니 쪼르르 다시 방안으로 도망쳐들어가는 게 아닌 가? "어머나, 쟤 좀 봐......! 얘, 강현주!" 난 아직도 멍청히 현관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있었따. 당장 현주 엄마가 난처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어머어머, 죄송해요...... 잠깐, 잠깐만 여기 앉아 계세요!" 그녀는 내게 거실의 소파를 권한 뒤 재빨리 방안으로 자기 딸을 쫓아 들어갔다. "얘, 현주야! 너 왜 그래?" 그리고 그 때서야 나는 현주 엄마가 맨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슬아슬한 옷자락 아래로 선뜻선뜻 드러나는 종아리와 발, 정말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었따. 아무리 집안이라도 그렇지, 나도 일종의 손님 아닌가. 슈미즈 바람에, 양말이나 슬리퍼도 신지 않은 애 엄마, 거기에 자기에게 공부 가르치러 온 선생님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꼬마애라? 뭔가 첫시작부터 떨떠름해졌짐나 그래도이대로 돌아설 수는 없는것, 어쨌든 엉거주춤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파트는 그런 대로 두 모녀가 살기에는 널찍해 보였고,비교적 깔끔한 새집처럼 느껴졌 다. "계집애야, 너 왜 그래? 엄마한테 혼나고 싶어!" 보아하니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쪽이 안방인 듯 싶은데, 허허, 자기 엄마의 역정을 맞받아 치는 꼬마 아가씨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엄만 뭐야, 여자 선생님 오실 거라고 했잖아!" 나는 그 새된 아이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해졌다. 여자 선생님?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럼 현주란저 아이는 남자 선생님을 원하는 게 아니 었단 말인가? 분명 난 남자고, 예지가 나더러 과외선생을부탁할 때에도 분명 남자를 원한 다고 얘기했었는데- 난데없는 여선생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찰나 더욱 황당한 현주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세, 그건 엄마가 안 된다고 했잖아. 너희 아빠도없는데, 집안에 남자 하나 없이 엄마 가 어떻게 살란 말이니?" 22 이건 또 무슨 얘기냐. "그럼 엄마만 좋잖아! 난 싫단 말이야. 남자 선생님!" "어머나, 얘가 정말로......!"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현주 어머니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너 정말 혼날래!" 다다다...... 한참을 쏘아붙이는 고음의 잔소리들. 마침내 야단치기를 다 끝낸 듯 약간은 흥분한 얼굴로 그녀가 거실로 돌아왔다. "어휴, 못된 계집애 엄마가 좋은건 다 싫대요!" 푸념하는 그녀- 엄마가 좋다? 나는 잇단 의문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따.나오던 현주 엄마 는 그제야 거실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싹 표정을 바꾸었다. "어머, 죄송해요. 참, 뭐 차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그녀는 금방 생글거리는 얼굴로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서둘러주방으로 향했다. 내 의사 는 묻지도 않고 예의 그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저희 집은 커피밖에 없어요. 그래도 괜찮죠?" "예...... 그, 그냥 아무거나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호들갑스러웠지만, 나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아유, 죄송해요. 애가 좀 버릇이 없죠? 아빠가 집안에 없다보니 그래요." 주방 건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변명이었다. 잠시 후, 쟁반에 찻잔 두 개를 들고 나타나는 현주 엄마. "커피 좀 드세요." 그녀가 내가 않은 소파 앞 테이블에 공손히 찻잔을 내려놓았는데,그때 나는 또 한 가지 민망한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녀가 입은 슈미즈 같은 그 옷-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그 실내복의 끈 하나가 아슬아슬 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어깨끈 두 개만 아래로 내려뜨리면 주르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질 게 뻔한 그런 디자인 의 옷이었던 것이다. 야릇하달 수밖에 없는 그 광경에 잠시내 시선은 갈곳을 잃고 그녀의 허연 어깨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철썩 맞은편 소파에 주저앉으며 무의식중에 그 어깨끈을 추슬 러 올리는 현주 어머니, 나는 나도 모르게 험험, 헛기침을 해댔다. "현주 땜에 많이 놀라셨죠? 우리 애가 좀 그래요. 아빠도 자주 집을 비우고...... 있어도 맨 날 오냐오냐해 주니까, 귀여움만 받아서 자기 멋대로인 데가 좀 있네요." "예에......" 뭐라고 혼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친 듯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하유, 누굴 닮아 저 모양인지......" 온잣말로 계속 투덜거리는 현주 엄마......문득 커피잔을 들고 다리까지꼬고 있었다. 그 바람에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허벅지, 그 살색이 어둡게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광경이 내 눈앞을 계속 아찔하게 만들었다. 허옇고 매끄러운 그 다리는, 깊숙하게 엉덩이를 들어 앉힌 그녀의 자세 탓에 실로 아슬아 슬한 진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지금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도 헷갈릴 지경이 되었다. "참, 창희 학생, 아니...... 내 정신 좀봐. 선생님이라고 해드려야지, 호호...... 어때요,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공부 가르치시기야 힘들지 않겠죠?" "아, 예...... 예." 갑자기 걸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비로소 그녀의 얼굴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따. 생글생글 만든 듯한 미소를 던지는 그녀의 얼굴은, 역시나 첫인상처럼 자세 히 보아도 이십대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반들반들한 얼굴에, 얇게 그린 눈썹. 적당히 살이 오른 인상의 현주 어머니는 속칭 얼굴값 할 타입의 샐쭉한 미모였다. "어머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차차, 나는 재차 민망해졌다. 하도 젊어 보이는지라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 다. "호호...... 제가 너무 젊어 보여서 그러시는 거죠?" "어...... 예. 사, 사실은......"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익숙하다는 듯이 먼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씀들 많이 하세요. 하기야 뭐, 틀린 말은 아니죠. 전 여고 졸업하자마자 시집왔거 든요." 엣,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우와, 그럼...... 현주가 10살이라고 해도 아직이십대 후반 남짓? 그 시점에서야 의문점 하나가 풀리는중이었다. 그렇다면 저 현주엄마는 최마담보다도 나이가 어린 셈이니, 어쨌든 궁금했던 것이 해결되니 다소 어색함도 풀린 듯 싶었다. "여기 벼로 멀지 않죠? 학교에서......" "아, 예...... 그, 그렇네요." 어쨌든 놀라울 따름인 내게 그녀는 그 말에도 생긋거리며 요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단 본혼으로 들어갔다. "저...... 그, 그런데요...... 현주 어머님." "네, 말씀하세요." 그제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로서는 반드시 사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전에 전화로도 말씀 드린 건데...... 입주...... 제가 여기 들어와서 사는 문제 말인데요......" 그렇다. 될 수 있다면 내 자유를 보장받고 싶었다. 지금 사는 자취방이 집에서 전세로해 준 것이니 분명 집에 의논 드리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게 저...... 꼭...... 여기 들어와서 지내야 될까요......?" "으응, 저번 그 얘기하시는 거구나...... 아유, 성급하시기는. 왜요, 곤란하실 것 같아요?" 글쎄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저...... 아까 들으니까 현주 얘기로는 여자 선생님을 원하다던데......" "아, 그거요...... 그래요, 원래 걔는 아직 어리니까 남자가 싫다나요? 후훗, 하지만 저는 그 게 좀 그렇더라구요...... 같은 여자끼리면 오히려 껄끄러울 것 같고...... 집에 남자가 없으니까 재미도 없구요." 푸힉, 나는 홀짝이던 커피를 코로 쏟을 뻔했다. 재미......? 재미라고 했나, 이 아주머니가? "그, 그럼...... 남학생을 원한 건...... 현주 어머님께서......?" "네, 그래요. 제가 일부러 아이한테는 말하지 않고 남자분을 부탁했던 거예요." 허 참, 굳이 남자 선생님을 원한 건 그녀란 얘기였다. 그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꼭 남학생을 들여야 하는 걸까? 아무리 학생이라도 다 큰어른, 내 생각에는 다리털 시커먼 남자가 더 불편할 성싶은데...... 그래서 뭐라 얘기를 하려는데 순간 그녀가 내 말을 가로챘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집안 구경도 안 시켜 드리고...... 호호, 이리 와 보세요." 현주 엄마가 몸을 일으켰다. "아까 그 방이 안방이고...... 저기가 현주 공부방...... 여기가 선생님이 계실 방이에요." 엉거주춤, 그녀를 뒤따라 일어선 나에게 그녀는 집안 구석구석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날 위해 마련했다는 방은 안방에서는 대각선 방향의 건넌방으로,언뜻 보니 안방 다음으 로 큰방인 듯 지금 나의 자취방보다 두 배 가까이 커 보였다. 게다가 방안에는 비교적 새 것으로 보이는 옷장과 책상까지 놓여 있어 꽤 괜찮아 보이기 는 했다. "여기가 화장실이거든요. 바로 옆이라서 편하시겠죠?" 다음으로 벌컥 그 방문 옆의 문을 열어보이는 현주 어머니, 그러나 아차, 나는 찰나못 볼 것을 보고 말았으니. 23 다름 아니라 화장실의 건조대, 그 위에 널린 옷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것이다. 형형색색의 옷가지- 그것들은 바로 여자의 속옷들이 아닌가. 브레지어, 팬티, 거들...... 울긋불긋한 각종 내의들이 주르르걸려 있었다. 처음에도 그 사 이즈나 형태로 보아 이 유부녀, 현주 엄마의 것들이 분명해 보였다. 어휴, 휘둥그레진 두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욕실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갔다. "선생님 방은 원래...... 우리 그이가 쓰던 곳이었어요." 소파 위에 걸터앉아 현주 어머니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은 동남아에 파견근무라서요, 아마 한 서너달 후에나 다시 들어올 거예요. 물론 완전 히 돌아오는건 1년도 더 남았구요." "예...... 그, 그렇군요." 갑작스런 유부녀 속옷 구경에 어느새 내 말투는 더듬거리고있었다. 그런데 현주 엄만의 말은 한층 더 야릇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한 석달 정도는...... 걱정 않고 지내셔도 돼요.남편은 그 전에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당장, 오늘부터 들어오셔도 돼요. 어차피 우리 그이는 이 일 모르거든요." 예에? 그럼 현주 아버님과 상의도 없이 저라는 남자를 집안에 들인다구요? 뜨악할 수밖에 없는데, 현주 엄마는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투였다.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외국 나가있는 사람이니까." 하기사 과외교사 하나 들이는 문제까지 상의하랴 싶짐나, 그래도 입주과외라면 직접 들어 와서 사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그녀는 소파에 다시 꼰다리를 까딱거리며 깊숙히 눌러 앉 을 뿐이었다. "그리고 현주 문제는 걱정 마세요. 애가 버릇이좀 없어서 그렇거든요...... 엄마가 시키는 건데 지가 뭘...... 참, 그 곤란하다는 문제나 얘기해 보세요!" 다시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가 자꾸 눈길을 어지럽히는 바람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 답을 주워 섬겼다. "아...... 저...... 그, 그러니까요, 꼭 제가 입주를 해야하는 것지......" "글쎄요, 저는 일단 그래요. 기왕에남자도 없는 집이고, 그이도없는 마당에 혼자서 뭘 하겠어요? 송금되는 돈에서 뭐 그리 불편한 것도없고...... 우리 현주랑 저랑 사는 데에별 재미가 있어야죠." 재미, 또 재미란 단어를 들먹거리는 현주 어머니. 그럼 도대체 재미를 위해 남자를 들이겠 다는 뜻인가. "그래서 그냥 남자분 계시면 집안도 좀 든든할 거고...... 저도 선생님 빨래나 밥상 차려 드 리면서 오손도손, 그게 낫지 않아요? 어차피 놀리는방도 그렇고...... 선생님도 용돈 버시구 요." 빨래까지 해주겠다? 하숙집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는데...... 게다가 오손도손? "하, 하지만 저는 원래 자취방도 있고...... 아직 학기 중이라서......그, 그 정도까지는 곳란 한데요." "호호, 자취방이 있으니까, 과외비 버는 게 더 낫다...... 이 말씀이신가 보네요?" "아, 아뇨...... 꼭 그런 것까지야......" 그러나 슬그머니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띠는 현주 엄마. "그건 그냥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 집에 들어오시는건 저를 위해 들어오시는 거라고...... 물론 현주 가르치는 비용은 따로 드릴게요. 다른 학생들 받으시는 정도로." 으와, 이건 정말 파격적인 조건이었다.과외비까지 지급한다니...... 이렇게 되면나로서는 밑질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방에 숙식은 물론 과외비까지. 원래 이 정 도엔 거의 과외비를 받지 않는 법,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오직 단 하나, 현주 엄마 자기를 위해 있어달라- 이 말이 걸리는 것만 빼고는. "혀, 현주 어머니...... 그렇지만 제게 그건 너무......!" 과분할 따름입니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깊숙히 눌러 앉은 그녀의엉덩이께가 들썩이며 건들대던 다리가 살짝 바꿔 꼬이고 있었다. 아찔하게, 언뜻 내비치는 그 허벅지 사이의 짙은 살그림자. 다시금 내 시야는 갈팡질팡 해 야 했다. "그, 그래도 저, 저로서는...... 아, 아무래도 여자분만 있는 집에 들어오는 게 왠지...... 들락 거리기도 불편하구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는 가슴이 콱 막힌 듯 서둘러 말을 내뱉았다. 그러나그녀는 그 의도를 의심할 정도로 집요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요, 가르치시는 날 아니면 열쇠도따로 드릴 테니까...... 저희식구 눈치 보지 말고 출입하세요." 미치겠군, 대체 자기 딸아이의 공부를 가르치기 위란 걸까, 아니면 자기 욕심에 저렇게 고 집을 피우는 걸까. 더군다나 생각 없는 저 옷차림이나 몸가짐도 그렇다. 어느 누가 이런분 위기에서 어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다 현주 엄마는 안 되겠는지 한 발자국 후퇴를 했다. "정 그러시면요, 이렇게 해요. 현주 공부 가르치시는 날만 와서주무시든가...... 아니면 주 말 같은 때 따로 날을 정하자구요." "무, 무슨 날을요......?" "여기 오셔서 지내시는 날 말예요!" 갈수록 입이 벌어질 판국이었다. 아니 세상에, 공부 가르치는 날이야 그렇다 쳐도...... 무적 정 날짜를 정해 들어와서 같이 지내달라? "아냐 아냐, 좋아요. 그럼 우선 현주 버릇들일 때까지...... 한 두 달만 일단 들어와 계세요. 그러다가 고것이 공부에 익숙해지면, 그 때부터는 날짜를 정해 오시구요." 정말 모를 일이었다. 이 현주 어머니는 왜 그리도 나를 붙잡아 두려는 걸까? 어쨌든 그녀는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그런 식으 로 결판이 날 모양이었다. "어때요, 그러면 괜찮으시겠지요?" 결국 일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딸아이가 과외선생인나에게 아빠 대신으로 엄 하게 버릇이 들 기간- 그 한 달간은 일단 이 아파트에서 먹고 자다가 그 단계가 지나면 이 후에 다시 계속 지낼지 어쩔지를 정하자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실상 나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제안한 얘기들을 주의깊게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런 뻔한 이유에서였다.비록 젊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원래애가 저 정도 컸으면 다리통이 무정도 굵기가 되거나...... 최소한 여기저기 주부의 흔적이드러나 는 무릎이어야 정상인데, 맞은편에 앉은슈미즈 바람의 현주 엄마 다리는처녀들 것 못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줄창 그 계란처럼 매끄러운 무릎 아래로 깊숙한 곡선을 언뜻 비치고 있는 그녀이 기에, 가뜩이나 의젓한 자세를 취하느라 등을 기대지 않고 소파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다 가앉은 나로서는 머리 속이 아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만 뻗으면 그녀의 무릎에 닿을 정도밖에 안 떨어진 거리- 거기 에 훤히 드러난 유부녀의 허벅지를 마주했는데, 어느 누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으랴. "어...... 예. 그, 그럼 그렇게......" 내 입에서는 간신히 그 정도의 말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아유, 잘 됐네요. 호호호...... 전 혹시나 이렇게 잘생기신 선생님을 놓치는 거 아닌가 했어 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현주 엄마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손뼉까지 쳐댔다. "언제 짐 옮기시겠어요? 일꾼들 필요하세요?" "아, 아뇨...... 어, 어차피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요 뭘......" 얼떨결에 한 달간 이 집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이렁게 되면난 되도록 빨리 현주를 길들 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계집아이가 공부버릇이 들면 곧바로 나오리라, 이것이 내심산이 었다. 그러니 짐이야, 간단히 옷이나 책......그 정도는 희창이에게 부탁해서녀석의 차로 한두 번 왕복하면 끝일 게다. "그럼 당장 이번 주에 오시겠어요?" "이, 이번 주요......? 이번 주는 좀 곤란한데......" "아이, 왜요?" 이번에는 교태 섞인 콧소리마저 섞였다. "시, 시험기간이거든요. 다음 주까지......" 다음 주에 온다는 말에 금방 아쉬운 표정으로 바뀌는 편주 엄마. 알다가도 모를 일, 왜 이 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하지만 현주 엄마는 재빨리 색기 어린 미소로 싹 바꾸었다. "호호, 그렇게 하세요. 그러면......" 하여간 얼추 얘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 주 주말에...... 주말쯤에 전화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몸을 일으키려던 나, 그런데...... 아쿠쿠. 무작정 일어서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허리를 황급히 구부려야만 했다. 아뿔싸. 24 "어머,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닙니다. 그, 그게......" 쫘악,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주 앉은현주 엄마의 야릇한 자세 덕에 바지앞섶이 불편했다는 것을, 나는 허리를 펴면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나마 앉아있던 탓에 미처 몰랐던 일이다. 저유부녀의 허벅지를 훔쳐보느라...... 가뜩이 나 남자는 흥분이 70퍼센트라는데 아찌 아니었겠나. 그것도 모르고 무심코 일어서려 했으니, 즉각 바지 속에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아이고, 둘러댈 답변을 찾느라 머리통을 마구 굴렸다. "다, 다리가 저려서요......" 창희 너 정신 나갔구나. 남편 있는 여자한테 어찌 그런 불순한 상상을 한단 말이냐.스스 로 생각하기에도 망측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기에 귀밑이 후끈 달아올랐다. "저런, 많이 아파요? 제가 다리 주물러 드릴까요?" 으악- 사실은 그게 아니었지만 진상을 모르는 현주엄마가 테이블 건너 내 쪽으로 다가 왔다. "아, 아네요. 괘. 괜찮아요!" 기겁을 하는데, 짐짓 그녀는 내 상체를 밀어 다시 의자에 앉히기까지 했다. "가만 계셔 보세요. 잠깐 주무르면 될 거예요." 졸도할 노릏이었다. 이 유부녀는 정말로 쪼그리고 앉은 채 무릎이며 종아리, 내 다리를 직 접 매만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어디에요? 허벅지? 종아리?" 그녀는 스스럼없이 내 다리통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제발! "여기요? 무릎 뒤......?" 현주 엄마는 필경 이런 쪽으로 경험이 있는게 분명했다. 그녀는 내 꾀병을 능숙한 솜씨로 다루고 있었다. 아뜩한 시선으로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후아, 천만 다행으로 바지 지퍼 부위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엉거주춤 소파 위에 주저앉은 내 다리 아래 바닥에 쪼그린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민망한 모습을 하고 있는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그녀의 어깨 위,정성껏 내 다리를 마사지하느라 잔뜩헐거워진 현주 엄마의 어깨끈이 다시 흘러내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양쪽 모두가 말이다. 그 뽀얗게 매끄러운 두 곡선이 내 시야에서 불과 몇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숨이 멎는 경치였다. 여자의 어깨가 그토록 도 발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머리털 나고서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 행동 을 제지해야 할 내 의무는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어때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 올려다보며 묻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나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아야만 했다. 이제는 아랫도 리가 불룩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으니 거의 무언가가 비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바짝 입이 마른 채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다리는 전혀 저리지 도 않았으므로. "어머, 아직도 쥐난 게 안 풀리시나 보네...... 말씀해 보세요. 정확히 어딘데요?" "아, 아니 그, 그게 저......" 그녀의 당혹스런 과잉친절에 나의 시선과 대답이 동시에 우왕좌왕 했다. 그 때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 것은. 민망한 고개를 들자마자 정통으로 마주친 눈동자, 격악- 그눈동자는 걱정스런 낯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현주 엄마의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마주친 그 시선은, 바로 현주 란 꼬마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마, 맙소사!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살짝 안방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보고 있었던것이 다. 방문 뒤에 몸을 숨기고서. 어, 어째야 하지? 그러나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이 무슨 해괴한 상황인가. "엄마, 뭐하는 거야?" 의외로 먼저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깨뜨린 것은 현주쪽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돌아보는 아이 엄마의 당당한 답변. "으응...... 선생님 다리가 아프셔서, 주물러 주는 거야." 세상에, 이 어이없는 장면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그녀는 그자세 그대로 몸을 돌려 아 이에게 민망할 것 하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수가. 비록 어린 아이였기에망정이지, 도대체 이게무슨 광경이냐. 낯선 외간남자를 자기 집 거실에 떡하니 앉혀 놓고,그 사내의 발 아래 앉아 열심히그를 위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라...... 조금이라도 머리가 큰, 그러니가 서너 살만 더 먹은 중학생만 되었어도 도저히 오해를 피 할 수 없는, 그런 남녀의 포즈였던 것이다. 난 이 묘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거의 심장박동마저 멈춘것 같았다. 아직 가르치기 도 시작하지 않은 저 여자아이에게 이런 낯부끄러운 장면을 첫인상으로 남겼으니 말이다. "아, 안녕...... 혀, 현주야!" 그 와중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넋 나간 말. 갸우뚱, 그러나 현주는 알 수 없다는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온몸에 소름까지돋고 있었다. "뭘해, 선생님이 인사하시잖아? 넌 인사 안 드려?" 내 그런 시뻘개진 얼궁을 돌아보며 현주 어머니는 피식 웃어보였다. 그 소기에 멋쩍은 듯 꾸벅, 아이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도로 쏙 방문 안으로 사라졌다. "저, 저, 괘, 괜찮습니다. 다 나았어요!" 아아, 얼마나 다행인가. 단 몇 초간의 낭패감이, 그 사이 몰릴대로 몰렸던 내 하복부의 기 운을 슬그머니 빼놓았던 것이다. 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몸을 일으켰다. "아유, 쥐가 단단히 났었나 봐요. 이 땀좀 봐!" 현주 엄마의 손길이 이번엔 내 이마께로 뻗쳐 왔다. 땀을 닦아주려는 듯, 하지만 나는그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 "아, 아네요. 가, 갑자기 현기증이......" "어머, 그러세요? 그럼 다른 곳도 좀 주물러 드릴까요?" 천만에요, 안 될 말이다. 새파랗게 질린 나는 안간힘을 다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돼, 됐어요...... 잠깐 그랬던 거죠, 뭐...... 하, 하......!" 내가 들어도 히스테리컬한 웃음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그제야 부시시...... 현주 엄마 가 따라 일어섰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여?" "그, 그럼요...... 이,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1초라도 빨리 이 집을 벗어 나가고픈 마음이 태산 같아 나는 인사를 서둘렀다. "현주야! 선생님 가신대!" 달아나는 것처럼 나는 그녀가 안방을 향해 아이를 부르는사이, 잽싸게 현관에서 신발까 지 챙겨 신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몸을 드러낸 현주는 자기 엄마의 슈미즈 폭을 붙들고 수줍은 듯 뒤로 숨 으며 방금 전 같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기어코 아이는 머리를 쥐어박혔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나는 그 계집아이의 인사도 받는둥 마는 둥이었다. "어, 그, 그래...... 아, 안녕." "짐 옮기기 전에 전화 주세요. 꼭요." 현주 엄마는, 그 야릇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현관 앞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건넸다. "아, 예, 그, 그러겠습니다.!" 마지막까지 그 색기 어린 웃음을 지어 보내는 유부녀. 나는 도망치다시피 그 아파트를 뛰 쳐나와 막힌 숨을 내쉬었다. 바깥에 나오자 휭, 스치는 바람에도 진땀이 말라 온몸이 떨렸다. 다리가 다 휘청거릴 정도 였다. 머리 속에서 조금 전의 정황들이 리바이벌되었다. 행여, 혹시, 설마 그녀가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내 바지춤이 겁 없이 불룩였던 사실을. 아, 안 돼! 대뜸 머리 속이 쭈뼛 섰다. 무, 무슨 상상을 하는 거냐,내가- 내가 가르칠 학 생의 엄마, 유부녀에게.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치려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25 시간은 그리 늦은 편이 아니었다. 잠시 얼이 빠졌던머리를 식히며 동네 어귀를 들어 선 때가 채 열한 시가 넘지 않은 시각이었다. 자취방으로 통한 골목길로 접어들자 좁은 골목길을빠딱하게 막고 중형 자가용 한대가 서있었다. 언뜻 보니 이 동네 차라고 하기엔 다소 고급인 차종, 내 입에서는 투덜거림이새 어나왔다. 담 한켠으로 몸을 붙이고 승용차 옆구리를 돌아 지나가야 했던 것이다. 타이어나 한 번 걷어차고 갈까 하는데, 퍼뜩 드는 생각이있었다. 잠깐, 이 차는? 아니나 다르랴. 그 생각과 동시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창희......?" 어...... 하고 돌아보는 내 눈에 골목 그늘안에서 나오는 낯익은 그림자. 이런, 내짐작이 맞았다. 최마담, 아니 그녀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걸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녀 가 살짝 눈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래 기다렸는데......" 마치 미리 약속된 시간에 늦었다는 투였다. "꽤 늦었네. 어디 누구 만나고서 들어오는 모양이지?" "아, 아니요......" 얼결에 나는 인사도 빼먹고 더듬거렸다. "어...... 어디 좀 들렀다 오느라고......" "어디?" 자기에게 보고라도 하라는 듯 최마담은 야릇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러니까...... 도서관에...... 시험기간이라...... 어, 어쩐일이세요? 이, 이 시간에......?" 둘러대는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은 '흐흥, 몰라서 물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웬일은...... 동생 보러 왔지. 방안에 없길래 늦는가 보다 하고 기다렸는데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랐는 걸?" 날 보러 왔다-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나 아까 아홉 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근데 도서관에 있다온 건 맞아?" 갈수록 묘해지는 그녀의 질문이었다. 무슨 의처증, 아니지 의부증 마누라가 남편을 추궁하 는 모습이다. 저번 내 거짓말의 파급효과라고 하기엔 지나친 인상이었다. "그, 그럼요." 그나저나 기다렸다는데...... 어째야 하나.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진작에 자취방으로 데리고 올라갈 일이지만, 선뜻 떠오르는 지난번의 기억 탓에 나는 차마 그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최마담은 그런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후후, 뭐하고 있어? 누님이 왔는데......아니야, 그래도 이 시간에 남자방에 들어가기는 너무 늦었지? 그럼......" 그녀는 차 문을 열더니 운전석에 올라탔다. "타......!" "예?" "아니, 어디 가자는 거 아냐. 어쩔 거야! 밖에 그렇게 서있을 거야?" 하기사- 그러나 나는 다소 멈칫거렸다. 집 앞에서 채 1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 행여 누군가가 지나다 보게 될까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얼른!" 어쩔수가 없었다. 최마담의 고집을 아는 나는 그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옆자리에 타야 했 다. 왜 그녀가 이 시간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의아해졌다. 아직도그 날의 분이 덜 풀린 걸까...... 참,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있었다. 봉투, 수표봉투. 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여 돈이 그대로 든 봉투를 꺼내들었다. "저, 누님...... 이, 이거......" 힐끗,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는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으응, 보영이한테 받았어?" "예...... 그, 근데 저는......" 돌려드린다는 의미로 나는 엉거주춤봉투를 그녀 쪽으로 내밀었으나,최마담은 그 손이 무색하게 본체 만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제게 왜 이런 걸......" 다시 한 번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끊었다. "왜? 그냥 넣어 둬." "저, 저는...... 시, 싫습니다. 제가 어째서 누님에게......" "그럴 줄 알았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전에 그랬잖아. 누나가 용돈 주겠다고." 용돈? 어이가 없었다. 분명 그녀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그렇다고 해도 유분수지 웬 수표인가. 대체 이 여자가 날 뭐로 보고...... "마, 말도 안 돼요. 이렇게 큰 돈을......" 누나가 용돈 주는 거야. 봉투 같은 데 챙긴 게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가게 와서 그런 사고를 다하고...... 그래, 약값이라고 생각해둬. 지난주에 다치긴 했잖아?" 다치다니, 그냥 한 대 맞은 것뿐인데- 그런 식이라면 치료비를 물어야 하는 건 그녀 쪽이 아니라 박사장이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그래도 이, 이건 너무 많아요!" "보영이나...... 다른 사람한테는 얼마라고 말하지 마. 그리고 오늘 나는......" 최마담은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난 그런 얘기하려고 온 게 아냐." 영문을 모르는 나에게 그녀는 이야기에 앞서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왔어. 사과하려고." 미안하다고? 사과? 그녀는 유감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물어도 모자랐을 말ㅇ르 스스로 자문자답하기 시작해다. "그 날...... 지난주 여기 왔던 날, 동생은 그렇게 생각했었지? '최마담, 니가 뭔데? 니가 뭔 데 그 계집애랑 잤다고 이러는 거야?' 라구...... 안 그래? 지금도 그런 생각하고 있지?" 얼레, 최마담은 새삼스럽게 지난번 사건- 내 방에 들이닥쳐 보영이와의 정사에 화를 내며 돌아갔던-을 꺼내고 있었다. 글쎄다.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이번에 그녀는 자조 섞인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나, 많이 되새겨 봤어. 그 날 일...... 우습잖아?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대체 창희한테 무 슨 존재이길래......"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그녀의 한탄에 나는 다시 당황스러워졌다.그런데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마담은 예기치 못한 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 그 손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내 뺨 위를 안타깝게 어루만졌다. 꼭 어린아이를 달래기나 하는 것처럼. "미안해. 내가 너무 심했지? 그래도 창희는 어른인데......꼭 애기 다루듯이...... 많이 아팠 지?" 따귀, 자기가 때렸던 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어어...... 자꾸만 움츠러드는 내 고개를, 그녀가 살며시 들었다. "너무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정말 미안했어." 이해하기 힘든 그녀였다. 난데없이 그 날의 뺨 얘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문득 그녀는손 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창희...... 내가 창희한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랬지?" 이건 또 뭔 얘기냐. "내가 동생 처음 만난 날...... 뭐라고 그랬었지?"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인 질문이기에 나는 꾸물꾸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빤히 바 라보는 눈초리에 내 목소리는 한층 더 기어 들어갔다. "그, 그러니까...... 누나처럼, 동생처럼...... 지냈으면 한다고......" "그래,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어. 그래서......창희더러 놀러오라고, 가깝게 지내자고...... 나 도 알아. 창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조금은 당황스러웠을 거야. 그렇지?"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모르겠어. 나는 창희 생각이 어떤지말야. 과연 얼마나 나를 누나처럼 생각하는지...... 그렇 지만......" 왠지 진지해지는 분위기가 다시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런데잠시 말을 멈춘 최마담 이 이번에는 아주 민감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아짐나 내가, 우리가...... 아무리 누나동생사이라 해도, 설사 친남매라해도........ 따지고 본다면 동생이 누구랑 같이 자건, 그게 이누나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그렇지? 내가 틀렸 어?" "아...... 아니요." 난감한 나는 그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도리밖에 없었다. "내 말,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하지만 내가 얘기하려는 건그게 아냐.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때 내가 화낸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는 거야. 그걸 동생이 알아주기 바라." 보영이와 잤다고 화낸 게 아니다? 그럼 뭔가? 어쨌든 내심 다행이다 싶은 얘기이기는 했 다. 나로 인해 애꿏은 보영이에게까지 불똥이 튈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창희의 자유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비록 가까이 는 있지 않더라도, 그건 내 말을 무시한 게 돼. 아니,결국 날 무시했다는 얘기잖아? 이 누 나를......" "누, 누님......!" 지나친 확대해석이었다. 뭔가 항의하려는데, 자칭 누님의 한탄은 한숨소리와 함께계속되 고 있었다. "후...... 모를 거야. 창희, 자기 입으로 누나동생 사이란 내가......그 동생에게 간곡히 부탁 했던 말까지 하찮게 여겨진 다는 게, 날 정말 부끄럽게 만든 거야...... 그 때." 어휴, 이것 참...... 한숨은 내가 쉬어야 할 판국이다. 내게 결코 그런 의도는 없었지 않나. "그리고 또 화가 난 건, 실망한 건...... 창희동생이...... 그렇게 함부로 이 여자 저 여자와 살을 섞을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어. 물론뭐라고 변명할 수는 있을거야. 동생도. 그렇지만 난 믿었어. 며칠 전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난 절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가...... 내가 그랬던 건가. 조목조목 조여드는 그녀의 이야기는 반박할여지가 없었다. 졸지에 지지리도 못난 인물이 되어 버린 나는 민망하여 갈수록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나...... 사실 그 전날부터 예상하기는 했었어. 동생이랑 그 계집애랑.어쩌면 그렇게 같이 잘 수도 있으리라고...... 아무리 내가 누나라도, 창희처럼 젊은 나이에는 그게 당연하리란 것, 익히 아니까!" 최마담은 그런 남자의 속성쯤이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아슬아슬한 부분까지도서슴없 이 주워 섬겼다. "후훗, 뻔하지 뭐...... 자기 또래가 그 시절에는 젤 왕성할 때야. 그런데보영이처럼 쭉 빠 진 것도 모자라 말 그대로 탱탱한 여자애가 덤비니...... 내가 남자라도 헤어나기힘들었을거 야. 그정도 계집애들 못 거느려서 환장하는 남자들이야 둘째치고......" 야릇한 뉘앙스였다. 난 경청하면서도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누님이 지금 보영이에 게 질투라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달라,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훗, 헛웃음을 지었다. "꼭 시셈하는 것 같지? 그렇지만 그런 건 아냐. 속질히 그애처럼 다시 스무 살 때로 돌 아가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굴지는 않을거야.왜냐면...... 왜냐면 내가 그랬거든." 어? 이건 생소한 이야기였다. 부럽기는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안타깝다? 그리고 지난 시절 자신을 닮았다? "알고 있어? 내가 그 계집애를 처음 만난건 열일곱인가 열여덟인가였어. 가출해서 다짜 고짜 나한테 직접 찾아왔었지. 무조건 술집에서 일하게 해달라는 그였어.요즘 여자애들...... 정말 독한 것 같아. 난 그 때 막 독립하기 직전 새끼마담이었는데...... 무조건 돌려보냈어. 걔 가 날 닮았다는 건 바로 그 점이었거든. 아예 이런 쪽에서 커보겠다는 생각. 아마 그 정도는 보영이가 얘기했겠지? 둘이 하룻밤 같이 지낼 정도였으니, 이런 얘기쯤은다......" 나는 또 한 번 속으로 뜨끔함을느꼈다. 맞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최마담은그 날 우리가 밤새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도 속속들이 아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하룻밤 같이 지 낸 사이라는, 그 은밀한 부분에서는 당장 귀밑이 붉어질 노릇이었다. "그래도 돌아왔어. 보영이는...... 나야 먹고살려고 시작한 건데 비해서,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라고. 하여간 그러니까 요즘 애들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니 자꾸 내 생각이 나는 거야. 그시기에 내가 얼마나 덧없이 이곳저곳에...... 아, 이런 얘기는 그만 하는 게 낫겠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잠시 숙연할 지경이었기에 지나치다 싶었던 걸까. "하지만, 동생이 나한테 거짓말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나. 지금도......" 나는 정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왜 있잖은가. 아주 어릴 적 한참 야단을 치시고매를 드시던 어머니가...... 그러고 나서는 못내 한숨을 쉬시며 다독거려 주시던 그런 상황, 멍든종아리에 그래도 자식이라며 옥도정 기 발라주시던 그런 것 말이다. "죄, 죄송해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엉덩이라도 다독거려줄 것 같은분위기였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 으로 눈만 끔벅거렸다. "정말 미안해. 어쨌든 실망감이랄까...... 게다가 그 상대가 내가 데리고 있는, 우리 가게 아 이라는 것이 더 싫었어. 창희, 자기가 날 누나로 여겨줬다면...... 그러고서 자기는이 누나한 테 놀러와서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을 거야? 그랬어. 나는, 이 누나는 동생한테 실망 했어." 그녀의 훈계, 물론 애초에는 여기 이 최마담에게 반감을가졌던 나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차분함에 압도되어 아무런 토도 달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 창희는 너무 착한 것같아......! 거짓말하는 게 당장 눈에 보였으니까.팬티 한 장 갖고도 쩔쩔매고...... 그러니 그런 여자애가 뭔들 못하겠어. 게다가 창희,자기처럼 한 창 나이 때하고......" 한창 나이라...... 뭔가 아찔한 느낌이 드는 대목이었다. 왠지 모르게 망설이는 투로 최마담 은 더욱 결정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26 "있잖아. 그 날 나...... 내가 빨래할 때 동생이 들여다봤다는 것도 알아.그 때...... 치마 가 좀 짧았지?" 흐익, 순간 좌석에서 화들짝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 그렇다면 그 날 내가 자기 허벅지 속을 훔쳐봤다는 것도 눈치챘단 말 아닌가, 이 누님 은- 아이고 나는 꿀꺽, 침을 목구멍으로 넘겨야 했다. 남자로서의 내 본능적 욕구를 들켰다 는 것은, 보영이와의 정사를 들킨 것보다 한층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어, 어떻게...... 그, 그 때는...... 죄, 죄송해요. 이,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허둥대며 둘러대는 나에 비해 최마담은 의연했다. 어찌할 바를모르는 나에게 그녀는 푸 훗,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다 안다고 했잖아.원래 동생 또래는 미니스커트입은 아가씨만 봐도 눈 돌아가는 나이라는 걸...... 그럴 땐 내가 정말 친누나였어도 창희는 그랬을 거야. 후 후...... 그래도 이 누님은 다행이네? 아직 창희처럼 젊은 남자가 치마 속도 들여다봐주고......! 내가 아직 처녀티가 나나보지?" 처녀티? 실제로도 미스라는 그녀지만, 어디 처녀티 정도뿐인가. 그 날 청소한답시고 내 앞 에 엎드려 씰룩이던 엉덩이만 봐도 아뜩할 지경의 몸매인데. 차마 이런 말까지 입밖에 낼수는 없지만, 어쨌든 30대라도 탱탱하기 이를 데 없는 몸매의 소유장니 최마담...... 그렇기에 당당하게단란주엄 마담자리를 지키는것이기는 하리라. 저 색기 어린 얼굴만 봐도 침이 골깍거릴 소지는 다분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렇지, 다분히 충격적인 발언이었다.다른 사람 같으면 최소한 남세스러워하거 나, 아니면 화를 내고 부족할 얘기를 선뜻 꺼내다니, 그 속셈을 알 턱 없는 나는그녀의 거 리낌없는 언사에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그렇기는 해도 그를 기화로 그녀와 나의 분위기는 약간씩풀려가고 있었다. 최마담은 시 선을 돌리며 마직막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하여간......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겠어. 동생이 다 알아서 하겠지만...... 부탁이야. 보영 이처럼 헤픈 여자애한테는 함부로 넘어가지 마. 아주 가끔남자손님 따라 외박 내보내봐서 알지만, 걔는 은근히 남자 밝히는 애야. 함부로 따라 나서는 일도 드물고. 그러니까 난 우리 창희가 그런 계집애한테 몸 주는 걸 참을 수 없어. 알았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낮은 어투, 하지만 퍽 무게가 실렸다는 걸 알 수 있는 그 녀의 다짐이었다. 나는 간신히 모기만한 목소리를 낼뿐이었다. "예...... 누님." 마침내 이런 식으로 한 여파가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창희......자기도 내게 뭐 부탁할 것 있으면언제든 얘기해. 알지? 우린...... 누나동 생 사이라는 걸." 실제로 최마담은 무어든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사실 이것이 그녀의 화끈한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나설 땐 나서더라도 한 번 터뜨리 고 나면 뒤끝 없이 끝내는, 그것이 이런 쪽 여자들의 기본인 것 같았다. "나한테...... 할 얘기 없어?" 다시 묻는 그녀. 처음에 가만히 고개를 저으려던 나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괜히 머뭇거려졌다. "기왕지사. 이제 우리 툭 터놓고 얘기해. 뭐든지." 최마담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그렇다면 말이다...... 과연 이말을...... 지금 물어도 되는 걸까? 도대체 이 누님은 왜 내게 이다지도 잘해주는 것인가.이제 겨우 몇 번 마주쳤 을 뿐인데, 처음 만난 날부터 누나동생 사이에...... 아까는 자기가 신경 쓸문제가 아니라면서 도, 왜 그렇게까지 보영이랑 자지 말라고 애원했던 것인가. 그 이유, 바로 그것이 그녀는 만난 순간부터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궁금증이었 다. 심지어 자기 치마 속까지 훔쳐본 나에게자신이 처녀티가 나느냐고 야릇한 농까지 거는 최마담, 대체 그녀가 내게 공공연히 이런 호감을 드러내는 까닭이 무어란 말이냐. 젠장, 마음 속으로 결심을 굳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 다. "저...... 근데요, 누님......" "응, 왜?" 최마담은 묘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용기를 내야 했다. 혹시...... 히건 정말 혹시나이다. 이 여자가 내게 흑심을 품은 것이라면? 그래서 나를 연하의 남자로서 유혹하려는 것. 그것이 목적이라면? 누가 알리오, 그녀는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것에 대해 마치 바람핀 남편에게 하는 것인 양 난리를 피웠는데. 더 이상 미를 수 없는 의혹이었다. 날 어찌 생각하길래 그녀가 이다지도 급속히 접근하는 것인지. "저...... 누, 누님, 그럼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응? 나한테?" "예...... 누님에게요." 뭘까. 라는 표정으로 최마담이 진지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오해는 마시고요...... 그냥 이건 제가 궁금해서......" "왜 그래?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지? 얘기해 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면목없는 짓을 하긴 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짚고 넘어 가야 했다. "후훗, 뭘 그렇게 어려워해? 편하게 물어봐. 난 누나잖아. 친누나처럼 그렇게 대해." 오히려 그녀 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해 왔다. 글쎄다. 친누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어찌 친누나라면 이런 일을 물어볼 수 있으랴.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두 눈을질끈 감고 마음먹은 질문을 하는 수밖에. "이,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구요, 저, 절대로요......" 입술이 탔다. 의아한 눈초리로 마주보는 그녀에게 벼르고 벼르던내 질문이 불쑥 튀어나 왔다. "호, 혹시오, 저, 저를 그러니까...... 남...... 남자로 보시나요?" "남자?" 저를 그냥 동생으로서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돈 많겠다. 외모받 쳐주겠다. 단 하나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만 뺀다면, 그러니 행여 젊고 튼튼한 사내를...... 내 머리 속에서는 그런 말들이 맴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었다.그제 야 내가 말한 '남자'의 의미를 알아차린 최마담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어색한 정적- 아차차, 실수를 했나 싶은데, 그녀가알 듯 말 듯한 조소를 띄우며 되물어 왔다. "그럼 창희, 창희는 어때? 동생 눈에는 내가 여자로 보여?" 만약 최마담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면 굉장히 망측하고도 버릇없는 의미가 되어버리는 것. 그만큼 최마담의 대답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예, 예?" 아마도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라는 식으로 항의라도 해야 하는 게 옳았으리라.그렇지만 눈까지 가늘게 뜨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막는 그녀의논리는, 일순 그런 나를 꼼 짝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누님은 지금 창희가 그 말을 왜 묻는지 알아. 그러니 내가 먼저 물을게. 그 날 내가 팬티 까지 빨아준다고 했었지? 그리고 화장실에 있을 때동생 내 치마 속을 흘끔거렸지? 그 때 어땠어? 이 누나가 여자로 보였어?" 으아, 이건 또 무슨 곤란한 물음인가. 내 의도를 안다? 전에 엎드려서 청소한답시고 내 앞 에 그득한 엉덩이를 들이밀었을 때,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앉은그녀의 다리 사이를 목격했 을 때...... 지금 그 얘기를 묻는 건가? 응당 그 때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했었다. 당연히 그런 의미에서는 여자, 그것도 상 당히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자로 본 게 사실이다.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잇는 거야? 난 내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을 깨달았 다. 분명히 여자, 성적인 의미의 여자로 봐 놓고서,어떻게 지금 그렇다고 솔직히 시인한다 는 말이냐. 나로서는 극구 '절대 그런 일 없다.'라고 부인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왜? 대답하기 곤란해? 우리 언젠가도 이런 얘기했던것 같은데...... 내가 물어봤잖아. 저 번에 내 차로 동생 처음 바래다주 날. 나...... 어떤 여자인 것 같냐고. 그 때도 창희는 대답하 지 않았었지, 아마?" 아뿔싸, 맞다. 그때도 최마담은 자기가 어떤 여자로 보이느냐며 날 퍽 곤란하게만들었었 다. "아, 아니 저, 저는......" 아연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나, 그러자 최마담은 나이게 걸맞지않게 배시시 웃어 보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돼.창희, 창희가 생각하는 그대로,나도 그렇다는 걸로. 음, 무슨 얘긴고 하니...... 동생이 날 여자로 본다면,나도 똑같이 동생을 남자로 보는 거야. 만약 동생이 그렇지 않다면, 나도 그만큼 그런 거고, 알겠어......?" 으잉, 뭐라고요? 내가 생각하는 만큼? 경악하여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최마담의 대답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분명긍 정도 부정도 않고 있으나, 이미 그녀를 성적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 그런 의미에서여자 로 여겼다는 사실은 이미 들킨 것과 진배없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럴 수가...... 그녀의 말은 완벽한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있었다. 즉 내가 그녀를 여자로 취급한다면, 자기도 그럴 것이란 의미, 그러나 반대로는 자기가나, 창희 동생을 남자로 생 각한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행여 내가 그녀를 여자로 여긴다고밝혀지는 겨우에는 그녀 역 시 충분히 나를 성적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뭐랄까, 듣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경도고 되지 만 또한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는 교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말 아닌가. "아, 아니 전 누, 누님이 저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허둥지둥, 뜨악한 나는 말꼬리를 돌려야 했다. 정말 본전도 못뽑을 질문을 한 게 되고말 았다. "제, 제게 너무 과분하게 잘해주시길래...... 그, 그래서 혹시나......" 당혹스러워 말까지 더듬으며 얼버무리려는 나를, 최마담은여전히 야릇한 표정으로 비웃 듯 바라보았다. "그래? 동생 얘기는...... 그렇담 아직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란 말이네?" 대답 대신 딸국질이라도 할 것만 같아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일조 의 함정이었으니-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음...... 그럼 간단하지 뭐. 우리 서로 더 잘 알게 되면 되잖아?" 예? 나는 그녀와 얼떨떨한 시선을 맞추었다. "동생 말은 그거 아냐?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친한 척 구니까...... 내 속셈이뭔지 모르겠 다는 거지? 그렇지? 그래 궁금하다는 거지?" 바싹, 혀가 얼어붙은 채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쳦다보며, 누님은 또 한 번일방적 인 통고를 했다. "그럼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말 아냐? 좋아, 우리 서로 기회를 만들면 되잖아. 요번 토요일 시간 있지? 아니, 토요일이아니라도 돼. 어쨌든 내가 나중에전화할 테니까, 우리 밖에서 만나. 여기 말고, 우리 단란주점도 말고, 어디 다른 곳에서......!" 이건 또 무슨 얘긴가. 나를 따로 만나겠다고? "그렇잖아? 서로 같이 있을수록 잘 알 수 있는 거잖아.그것도 장소 바꿔서 둘만 있는다 면 말야."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둘이 서로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니, 이웬 뜬금 없는 제안이냐. 최마담은 원래 내가 얘기하려던 의도와는 전혀다른 이야기로 몰아가고 있 었다. "그런 얘기 들은 적이 있어. 서로를 잘 알려면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보면 된다고. 우 리 그럼 그 때 알게 되겠지? 서로를 잘 알게 된다면...... 내가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때 알려준다고? 멍청히 있는 나에게, 야릇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는 최마담. 내 머리 속에서 폭발음이 거듭되고 있었다. 이 누님과 업촉할수록 가까워지기야 하겠지만, 난데없이 왜......그것도 다른 곳에서 둘이 만 만나자니. 무슨 친구 사이처럼 여행이라도 가자는 걸까. 아니아니 그보다.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자 기도 생각한다는 건 또 뭐냐. 익숙한 얘기였다. 예전에 미팅 따위에 나가 한참을 쫓아다니던여자들과 그런 대화를 나 눈 적이 있었다. '미안해. 난 널 남자로 생각하지 않아,너는 남자로 안 보여......' 그리고 그 때 그런 말은 서로가 연인 사이가 되기 위한 절차같은 것이었다. 즉, 상대방을 여자, 또는 남자로 본다는 것은 이성으로서, 성적인 의미로서 상대한다는 이야기임으로, 만약 그런 단계 에서 실패한다면 그건 십중팔구 그 여자들과 이별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얘기였다. 그럼 도대체 이 누님의 말은 무슨 뜻인가. 나를 서마 이성으로? 아니면 반대로, 니가 이성 으로 보면 나도 그럴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이성으로 보지 말아라- 이런 의미? 반댄가, 아닌가, 도무지 그녀의 의도를종잡을 수 없어 여전히벙벙한 상태인데, 그녀는 밖에서 만나자는 것을 아예 기정사실화 시키고 있었다. "잘됐다. 나도 사실...... 언제 동생에게 그런 얘기 꺼내고 싶었는데. 후후."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그녀가 흐믓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누, 누님...... 저, 저는......" 입술을 달싹이며 뭐든 얘기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 잠깐을 최마담은 내 말문을 막는데 활 용해 버렸다. "어머나,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어? 열두 시인데......" 시간, 이라는 말에 나는 멋모르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마치 나 때문에 늦었다는 투였다. "그, 그래도 저는 토요일에......" 그러나 교묘히 내 말을 가로채는 그녀. "아님 우리 어디 드라이브나 갈까. 조영한 곳으로?" 화들짝 놀랄 말이었다. 순간 진짜로 최마담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럼...... 내가 전화할게. 토요일 전에." 아아, 실로 능숙한 그녀의 화술이었다. 내가 어리버리하게 차에서 내리자 최마담은 마지막 으로 다정한 눈웃음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괜히 돈 아낀다고...... 그 돈 놔뒀다가 친구들하고 술 마시면 안 돼......! 그러 려면 누나 단란주점에 와, 얼마든누나가 대접해 줄 테니. 알았지?술값으로 쓰지 않기다. 약속!" 아차, 수표......! 내가 바지 주머니 속의 봉투를 다시 움켜잡는 사이 그녀는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당한 내 얼굴을 보고 그녀는 창 밖으로 살짝눈까지 깜빡이며 짐짓 엄한 표정 까지 지어 보였다. "밥 굶지 말라고 주는 거야. 혼자 지내면서 궁상떨지 말고. 그럼 갈게, 동생!" 미치겠다. 이제 수표를 돌려주기란 불가능한일이 되고 말았다. 최마담,그녀를 다시 볼 일이 앞으로 영원히 없다면 모르되, 내 자취방과 전화번호까지 알고 있는 그녀를 이제는 피 할 수도 없는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단란주점으로 찾아가 직접돌려줄 수도 없는 일. 그건호랑이 굴 속에 제바로 들어가는 격이니 오히려 그녀로서는 반길 일 아닌가. 삼각관계 27 최마담, 그녀가 토요일에 뭘어쩌겠다는 것인지 신경 쓸 새도없이 며칠간을 보내야 했다. 당장 다음 주면 시험이었던 까닭이다. 비록 예지에게서 몇몇전공과목에 대한 도움을 받 기는 했으나 그간 결석이 많았던 수업들은 착실히 출석도해야했고, 교양수업 따위는 대부 분 시험 직전에 요점이나 힌트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그리고 그런 수업시간들 이후에 는 난 은근히 죄책감이 드는 희창이를 위해서라도 도서관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주 후반부에도 나는 그런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강의가 끝나는 대로 도서관으 로 향하는. "어이, 이봐......!" 도서관 입구로 막 들어서려는 순가, 등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러 세웠다. "자네 일학년 맞지?" "어...... 예. 안녕하세요." 나를 부러 세운 사람은 교수님이었다. 우리 과 교수님, 비교적 젊은 나이의 교수중 한분 이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아마...... 내 가의 듣지 않나?" "예 맞습니다. .선생님 경영학 개론 듣습니다." "그렇지? 창희던가, 맞아. 그런데 자네 지금 바쁜가?" "지금요? 아, 아닙니다." "음...... 그럼 나 좀 잠깐 도와주게. 책을 몇권 옮겨야 하는데 말이야." 별반 교수님의 제안에 거부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나를 교정안 주차장으로 제리고 가 차 트렁크를 열어 보였다. "별로 일할 게 많지는 않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한 무더기의 책이 안에 들어 있었는데, 나는 함께 책들을 나눠 들고 그를 따라 건물 안으 로 들어갔다. "창희 너...... 1학기 때 장학금 받고 들어왔었지, 아마?" 젊은 축에 속하는 분이라 그런지 교수님은 스스럼없이 이름까지불러 주었다. 일면 그가 그 정도로 나에 관해 세세히 기억할 줄 몰랐던 나는 장학금 얘기에 잠시 머쓱해졌다. "예...... 그, 그냥 시험 잘 본 덕에......" "그래, 어때? 요새 공부는 할 만해? 이제 며칠 뒷면 중간고사 기간인데." "아...... 뭐 그, 그저......" 많지 않다던 일은 예상과는 틀렸다.아마도 교수님의 연구실을 옮기는 모양인지,안에는 조교형도 기다리고 있었지만 교수님과 도합 우리 세 명은 꼬박 한두 시간 이상 이리저리 짐 을 옮기고 나서야 대충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이제 대충 끝났군. 수고들했어. 참, 자네, 아까 학생들은 자리잡아 놓았 나?" 교수님이 조교형에게 물었다. "예, 교수님. 지금쯤 자리 잡아놓고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교수님과 조교형은 선약이 있는 것 같았다. 손을 털며 연구실일 나 서는데, 문득 교수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 보자. 창희...... 자네 별 일 없지?" "예? 예. 교수님." "좋아, 그럼 따라 와. 오늘 수고했으니 함께 가자고." 그는 기분이 좋은 듯 내게 기대치 않은 제안을 던지고 앞장을 섰다. 나는 여문을 몰라 뒤 따르는 조교형에게 넌지시 물어야 했다. "저...... 형,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응, 당연히 저녁 먹으러 가는 거지. 오늘 회식이 있어." 회식? "교수님이 우리들한테 한 턱 쓰시는 거야. 축하할 일이 있거든." 축하할 일이라. 조교형의 말을 들어보면 나와 그를 빼고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있 는 모양이었다. "뭐하니? 얼른 가자." "예, 예." 엉겁결에 나는 그들을 따라 나서야만 했다. 교수님은 우리를 앞세우고 학교 앞의 제법 큰 한식집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얼레, 적이 당황스러웠다. 미리 예약이 되어 있었는지 종업원이 안내한 한 방안에는우리 과 학생들 서너 명이 앉아 있다가 우르르 일어나 교수님께 인사를 했다. "어이구, 미안들하다...... 늦었지?" "아닙니다 교수님." "그래그래, 배고픈데 먼저 뭐든 시키지 그랬어. 어어...... 너희들 뭐해? 어서 앉으라고." 조교형과 나, 우리는 교수님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 나는엉거주춤 자리에 앉다가 의외의 사람이 곁에 앉아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교수님, 조교형, 맞은편 조교보 누나,그리고 말석의 내 곁에 자리를잡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선영이 누나였다. 28 "이 친구들 보게. 오늘 뭐 미팅들 하러 나왔어? 축하할 일도 있는데 이러고들 있을 거 야?" 나도 놀랐지만 선영누나도 마찬가지인지 동그래진 눈길이 되돌아왔다. 상석에 앉으신 교수님의 말은 털털한 인상다운 제안이었다. 이내자리에 앉은 우리들 앞 에는 푸짐한 고기상과 함께 소주 몇 병이 놓여졌던 것이다. "이런 날은 소주 한잔씩 해야 제격이지, 안 그래?" 그 말에 좌중은 한결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교수님은 일일이 술 한 잔씩을 따르다 자리가 먼 탓에 내게는 다른 사람에게 술병을 건넸다. "자, 어디 창희는...... 그렇지, 옆의 선영이, 니가 좀 따라주렴. 그래도 선배니까!" 엉,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선영이 누나가 술을 따라준다...... 이건정말 처음이었 다. 언젠가 그녀와 술을 마실 때에도 결코 나는 그녀에게 술을 받고자 한 적이 없었다. 멋쩍은 내가 자작이라도 할까 싶은데, 다른 사람도 아닌교수님의 말씀인지라 그녀는 살 며시 병을 들었다. 수줍게 내 잔에 따라지는 술. 선영이 누나처럼 참해 보인다. "건배들 하자고, 모두 한 잔씩들 해!"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술을마시면서도 슬쩍 선영이 누나를곁눈질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술 약한 그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머리 속에 뭔가를 상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나, 살짝 입술만 대더니 잔을 내려놓는 그녀. 그 행동이 왠지 내 마음을훈훈 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우리 선영이, 정말 고맙구나. 네 덕분에 선생님위신이 섰어! 이봐, 자네들, 오 늘 선영이한테 잘해줘야 해. 오늘 주인공은 선영이라. 다들 알고 있지?" "예, 그러면요!" 응? 뭔 얘기지? 나만 모르는 일인지 나머지 모인 이들은 그말에 화답하며 유쾌하게 웃음 을 지었다. "그래, 선영아, 여기 받아라." 교수님은 손수 잔을 들어 선영이 누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술을 받는 동안 슬그머 니 허리를 굽혀 맞은편 조교보 선배, 명희 누나- 선영이 누나의 동기-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명희선배, 무슨 얘기예요?" "응? 뭐가......?" "저...... 선영이 누나에게 축하한다는 일이......" "아, 그거. 왜 알지? 우리 과 학술교류. 그 미국에 있는 대학교랑 하는 거 말야. 이번에 교 수님이 그 프로젝트를 하셨는데...... 선영이가많이 도와드렸더. 웬만한 대학원생보다낫게. 그래서 그래." 그런 거구나. 나는 그제야 오늘 회식자리의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원생이 할 일 을 그녀가 해냈다...... 괜히 나까지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교수님이 주신 잔을 원샷으로 넘겨버린 누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잔을 놓고 있었다. 그녀의 비밀스런 면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신경이 쓰일일이었지만, 귀엽게 혀를 내밀며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는 누나의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술은 한 순배 더돌고 있었다. 겨우 한잔을 마셨을뿐인선영이 누나도 어느새 귀밑에 홍조를 띄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허, 그런데 정작 내가 차 떄문에술을 못 마시니 답답하구먼...... 아니지,그래도 나이 많은 내가 먼저 빠지는 게 좋겠지?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있는 게편할 테니......" 아직 차려진 음식이 절반도 비워지지 않았는데, 교수님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아쉬운우리 무리 중 몇 명이 붙들었으나 그는 손을 흔들며 제지했다. "됐네. 대신 자네들이나 즐겁게 놀아. 그 동안 고생해준 건 자네들이잖아. 자, 여기 계산은 걱정하지 말고, 어디, 2차들 가고 싶으면. 어이, 이것 받아." 교수님은 일어나면서 조교형에게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뭉치를 꺼내 주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살펴 들어가세요, 교수님!" 나는 그제야 자리가 다소 편해지기에 조금씩 대화에 끼여들수 있었다. 전부들 화기애애 한 얼굴이었다. 비로소 나는 조심스레 선영이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엉겁결에끼게 된 자리이기는 했어 도, 요 며칠간 그토록 찾아 다녔던 그녀를 드디어 가까이서마주하게 되니 우선 한껏 반가 움이 앞섰던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저...... 누나, 축하해요." "응? 으응...... 고마워."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얼마 전만 하더라도 더 없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선영이 누나, 그렇지만 그 간의 공백은 다시금 내게 서먹함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나로서는 이 어렵사리 이루어진 대화가 끊이지 않도록 무엇이든 화제로떠올려야 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창희 너는......?" 발그레한 미소로 답해주는 그녀. 나는 지난번 정호선배와 있던 자리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하고 있던 그녀를 떠올렸지만,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저야 뭐...... 그냥 학교랑 자취방만 왔다갔다...... 그랬어요." 나는 계면쩍어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실 그녀를 만나려고 돌아다녔다는말은 차마 할 수 없었으므로,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어도 선영이 누나는 가만히 웃어 주었다. "이번에...... 프로젝트 잘하셨다면서요?"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어까 그 정도로 칭찬 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겸손하게 얘기하는 선영이 누나, 나는 왜 그간 학교안에서 그녀와 마주치기 힘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조금씩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기에 이제 모인 사람들은 두엇씩 짝을 지어 이야기에 열중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눈치를 챘을때엔 묘하게도 선영이 누나와 나만이 남아있었다. 자꾸만 어색해진 나는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영이 누나도 그렇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가만히 시선을 내리며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할 말을 찾기 위해머리 속을 더듬었다. 우리를 빼고는사위가 조용했으므로 어느 정도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기억나는 게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일들- 예지와 팔짱을 낀 나를 보고 멀리 돌 아서던 그녀, 정호선배와 심각한 분위기 속에 있던 그녀. 문득 그것들이 궁금해졌다. 왜 그 때 선영이 누나는 그런 인상을 주었던 걸까. 그에덧붙 여...... 왜 선영이 누나는 나를 피하는 듯한 행동을 했던 걸까. 묻득 그것들이 궁금해졌다. 왜 그 때 선영이 누나는 그런 인상을 주었던 걸까. 그에덧붙 여...... 왜 선영이 누나는 나를 피하는 듯한 행동을 했던 걸까. 묻고 싶어졌다. 그 날,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가 내게 보였던 우울한 시선을 의미를. 나는 망설이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누, 누나......" 깨어진 침묵에 머뭇거리는 선영이 누나. "으응......" "있잖아요, 그 날...... 그 날......" 그 날......? 이란 말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는데, 그런 우리 사이를 흘끗 들여다 본 명희누나가 불쑥 끼여들었다. 난데 없이 나와 그녀 앞으로 술잔이 내밀어진 것이다. "얼레, 뭐하고 있어?술도 안 마시고......뭐 심각한 얘기하는거야? 후후, 둘이사귀나 봐?" "어머, 야......!" 물론 장난기 어린 말이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그 말에귀밑이 달아올랐다. 선영이 누나 도 머쓱했는지 손을 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술이나 마시라고. 자...... 이리 줘!" 명희누나는 내 잔을 빼앗다시피 가져가 술을 채워 건넸다. 그런데...... 그녀가 돌려준 것은 자기 잔이 아니라 술병이었다. 뭐지? 하고 마주보는 나. 명희누나는 대답 대신 턱짓을 했다. "선영이 잔 비었잖아. 선영이 따라 주라구." 그녀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아연 놀란 나는 선영이 누나를쳐다보았다. 그녀도 약간은 의 외라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해, 계집애야. 빨랑 잔 받지 않고서?" "아이 명희야, 나......" "어유, 걱정 마. 너 아까 교수님이 주신 것밖에는 안 마셨잖아. 괜찮아, 그 정도는."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명희누나를 보았다. 마치 그녀는 선영이누나가 술을 사양하는 이 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른...... 창희 팔 아프겠다." 그리고 나서 명희누나는 살짝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몸을 돌려 다른 쪽 사람들과 어울려 버렸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나만 얼떨떨해졌다. "어...... 누, 누나 마셔도 괜찮겠어요?" 잠깐 머뭇거리다가, 선영이 누나는 살며시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따르는 술을받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나는 주저하다가 결국 그녀의 잔에 소주를 절반 가량 채웠다. "저...... 이것만 드세요. 소주라 독하거든요." "그럴게...... 고마워." 나도 모르게 손이 가볍게 떨렸다. 새삼 그녀에게 술을 따라준다는 사실이 일견 가슴을 두 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명희누나가 싱긋 웃는 것 같았다. 선영이 누나는 여전히 이마를 예쁘게 찌푸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입안이 후끈거리 는지 빨개진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나는 그 모습에 배시시 미소가 배어 나왔다. 그 때였다. 좌중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등뒤를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시선을 따라 선영이 누나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내 뒤에 슬그머니나 타난 것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29 "어? 니가 웬일이냐?" 제일 먼저 그에게 아는 척을 한 사람은 조교형이었다. "아 예...... 저는...... 아까 들으니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길래 한 잔 하고 싶어서......" 누구도 예기치 않았던 그 사람은 바로 정호선배였다. "그래? 어쨌든 잘 왔다. 여기 앉아라, 아니지...... 얘들아, 우리 2차 갈까?" 교수님이 빠지셨기에 자리는 조교형이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의향을묻는 듯 우리 각자를 돌아보았다. 별반 상관없는 나 역시도 모인 이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시큰둥한 명희누나, 나머지 선배들, 거기에...... 찰나 나는 마지막으로 선영이누나를 보고 는 시선을 딱 멈춰야 했다. 그녀의 표정이 표가 날 정도로 구겨져 있던 것이다. 어디아프기라도 한 건가? 의아스런 내가 물으려 했지만 선영이 누나는 그런 나마저 애써 외면하려는 인상이었다. 표가 날 정도 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자, 그럼 나가자고. 어디 맥주나한잔씩 더 하든지...... 아니면 노래바에가든지. 정호야, 같이 가자......!"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도리가없는 내 귓가에 조교형의 목소리가들려왔다. 그와 함께 모두가 자리에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영이 누나는 갑자기 말을 잃은 듯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 다. "어디로 갈까? 얼른 정해 봐. 교수님이 금일봉도 하사하셨잖아?" 들뜬 분위기의 사람들이 음식점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데,선영이 누나가 조교형 곁 으로 다가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오빠, 전 이제 그만 가볼게요." "어? 선영이 니가? 왜?" "그, 그게...... 집에 일이 있어서......" "그래? 그래도 오늘 주인공인 넌데, 니가 빠지면......" "죄송해요. 저도 같이 있고는 싶지만......" 조교형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뜸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조금 전만 해도 다소 멋쩍어 하기는했어도 충분히 그들과 어울렸던 그녀아닌가. 방금 전과는 백팔십도 달라진 선영이 누나의 태도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재빨리 상황을 가늠했다. 어렵게 만난 선영이 누나, 아마도 그녀가 빠지 면 제일 아쉬울 것은 나이리라. 게다가 나를 제외하고는전부 선배들이기에 그렇지 않아도 어색했으니 지금 살짝 빠져나가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덩달아 나도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물러서려 했다. 그들도그러라는 듯 별반 반대하 지 않았다. 그러나, "어, 저, 저도......" 묘하게도 좌중을 피하려는 사람이 하나 더 나타났다. 막 선영이 누나의 뒤를 따르려던 내 가 돌아보니 그 사람은 어이없게도 정호선배였다. "저도 지금......" "뭐? 넌 방금 왔잖아?" "그, 그렇기는 한데요, 그래도 분위기 보니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가 어딘가를연신 흘끗거리고 있었다. 나와 선영이누나가 가려던 방향이었다. 그 바람에 서둘러 그녀를쫓으려다 순간적으로 발을 멈칫거리고있는데, 마침 구세주가 등장했다. "야 임마, 배정호. 가긴 어딜 가냐? 좀전에 와놓구선. 술 마시고 싶다며? 이리 와!" 난감한 얼굴인 정호선배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명희누나였다. 그녀는 절대 보낼 수 없다 는 듯 그의 팔짱까지 끌어당겼다. "그, 그게...... 난......"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멀리 하며, 나는 그 틈을 타 후닥닥 걸음을 빨리 했다. 어느새선영 이 누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채 일이십 초도 걸리지 않았을 터, 하지만 뛰어가기라도 했는지 도무지 그녀의 모습을 발 견할 수 없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어느덧 골목 어귀였기에나는 그녀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불현 듯 내 머리 속으로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달렸다. 잠시라도 더 지체하면 영영 그녀를 놓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멀리서 버스정류 장 팻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내 선택이 맞기를. 점점 그곳이 가까워져 왔다. 언젠가 안타깝게선영이 누나를 보내야 했던 그곳, 학교앞 버스 정류장. 아아, 이런 걸 운명이라 해야 할까. 천만다행이었다. 십여미터도 못 미쳐 익숙한 뒷모습 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사이 긴 생머리를 가벼게 묶어늘어뜨리기는 했어도 나는 그 모습 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찰랑이는 치맛자락, 가냘픈 어깨와 곱게 뻗은 다리의 주인공- 선영이 누나. 아뿔싸, 멀리서 버스 한 대가 굴러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소리를 쳐 그녀의 이름을부 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뜀박질을 하며. "누나! 선영이 누나!" 내 입가에 웃음이 번져 나왔다. 유달리 컸던 내 고함소리 탓일까, 선영이 누나의 몸이천 천히 돌아서고 있었다. "선영이 누나!" 희한하게도 우리는 동시에 눈길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약간은 그렇게 불쑥 나타난 내가 당혹스러운 듯, 선영이누나는 손바닥으로 놀란 입술을 가렸다. 주변 사람들이 돌아봐서인지 아니면 아까 그 술기운때문인지 그녀의 빨개진 얼굴 에 눈이 동그렇게 떠 있다. "차, 창희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최대한 계면쩍은 표정으로 첫마디를 꺼냈다. "지,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아, 아니...... 응," "집에 일 있으세요?" "응, 아, 아니......" 모를 일이었다. 집에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당황스러운 게 풀리지 않았는지그녀 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 아까는 왜 그렇게...... 바쁘신 거예요?" 후우, 멈줘 선 그녀는 선뜻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좌우로 가로 저었다. "아니...... 아니야. 술...... 술 더 마신다기에......" 그런 건가. 그럼 지금 시간이 있다는 얘기?나는 용기를 내야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이러 기회가 생길지 기약할 수 없으므로. "저...... 누, 누나." "으...... 응?" "있잖아요, 지금 안 바쁘시면...... 차 한 잔사주지 않으실래요? 아, 아니다. 제가...... 제가 차 한 잔 살게요." 뭔가를 해치우듯. 서둘러 말했다. "지, 지금......?" "예...... 예." 선영이 누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망설이는 모양, 나는 놓칠새라 후닥닥 토를 달았다. "그냥...... 하도 학교 안에서 안 보이시니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주춤주춤 내가 말을 꺼내는 데도 선영이 누나는 다른 쪽에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하게 건네는 내 넋두리에 그녀는 어렵사리 결정을 내렸다. "그, 그래. 오래 있을 수도 없지만......" 오래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못내 서운하게 들렸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잠깐이라 도 어디냐. 그간 의아스러웠던 몇 가지 일만 물어봐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그랬다. 술자리에서도 그랬지만 지난번 예지와팔짱을 낀 모습을 보고돌아서 피해가던 모습부터...... 정호선배와 함께 있을 때 언뜻 보이던 우울했던그 표정까지, 내게는 그 모든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선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저기, 저기로 갈까요?" 마침 우리가 발걸음을 세울 곳은 그녀를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창가를 연이은경양식집 앞이었다. 그러나 선영이 누나는 마치 무엇에라도 쫓기듯 주변을살피고는 고개를 세게 흔 들었다. "아, 아니...... 우리 다른 곳으로 가." 별반 반대할 필요가 없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앞장서서 길을 걷 다가 짐짓 허름해 보이는 지하 카페 한 군데를 택했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근사한 곳으로 가고픈 내 마음,그러나 그녀는 번잡한 곳을 피하고 픈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선영이 누나는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30 각자 차를 시킨 후에, 나는 한껏 서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동안...... 학교에선 교수님 일 땜에......?" 그 동안- 정확히 말하면 여관방 그녀 곁에서 잠들다 나온 날 이후. 선영이 누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고는조용하 게 대답했다. 사실 생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차분함이 물씬 풍겨 나왔다. 뭔가 가지런히 청추함. "으으, 학교, 학교에서는 요새 바빴어...... 그냥 내 일만 하고 곧바로......" 그랬구나. 나는 지난 궁금증부터 풀고 싶었다. "저기 왜...... 지난번에...... 왜 그렇게 가셨어요?" 지난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계면쩍어 하는 나를 마주 보았다. 실상 이건 아까 명희누나가 끼여들기 직전에 물으려던 말이었다. "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며칠 전에...... 교문 앞에서 예지랑 있을 때 누나를 봤는데......" 그 날 일부러 돌아서서 모른 체하고 가버리셨잖아요. 라고 물으려는데- 의외로 그보다 선 영이 누나의 대답ㄷ이 먼저 나왔다. "나, 난 잘 모르겠어. 언제......?" 얼레, 난 의아한 시선을 그녀에게 대답 삼아 돌렸따. 그새 잊어버리셨나? 나는 다시상기 시키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분식집 앞에서...... 그, 그게......" 어휴, 나는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관방에서 같이 자고 나온 다음 주 언제 쯤...... 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아냐. 이상한 걸. 나...... 너 본 적 없는데......" 허 참, 이상한 건 내가아니라 그녀 쪽이었다. 얼른 대답하는인상이, 뭔가 나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게다가 선영이 누나는 초조한 듯 연신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하기야 뭐...... 기억 못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냥 돌아선 것을 내가 잘못 봤거나. 어쨌든 벌써 수 주 전이니까. 나는 속으로 자문자답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녜요. 그럼...... 제가 잘못 봤겠죠." 끝내 나만 머쓱해졌다. 진짜 내가 잘못 본 걸까? 틀림없이내 기억으로는 눈까지 마주친 이 누나가 아는 체 하려다 말고 싹 돌아섰는데 말이다. 난 민망함을 피해 농담처럼 말을 이었다. "그럼. 그, 그 때는...... 무슨 얘기하신 거예요? 정호선배 만난날......" 그런데......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었나?일순 선영이 누나의 얼굴이 딱딱하 게 굳어버렸다. "그, 그걸 왜 묻니?" 그 말에 내가 도리어 당황해야 했다. 즉각적으로 되묻는 그녀의 음성에 날이 서있었다. "어, 저...... 그, 그게......" 원래는 그 날...... 그 곳을 나서며 나를 돌아보던그녀의 우울한 표정이 안쓰러웠다는, 그 얘기를 하려던 차였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얘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버 렸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나는 이것저것 변명을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벼, 별 게 아니라...... 그, 그랬거든요. 하도 정호선배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나중에 저 희도 나가려는데, 그 선배가 저를 붙잡고 같이 술 마시자고......" 대충 넘기려 하는데, 오히려 선영이 누나의 반듯한 이마는 더욱 찌푸려져 있었다. "정호가?" "예, 아니 그게 뭐...... 그냥 시간 있냐고 한 거지만, 꼭 술 마시자고 할 것 같았다는......" "그래서, 걔가 무슨 얘기했어?" 어, 선영이 누나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쪽이 아니었다. "얘기는...... 그냥 아무 얘기도 안 했는 걸요. 제가 수업 있다고 빠져나와서......" 쑥, 목구멍 속으로 대꾸를 삼켰다. 실은 그녀를 찾느라 재빨리 둘러대고 나오지 않았었나. "정말이야? 아무 얘기 안 했어?" "어...... 예......" "정말로?" 이상하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선영이 누나는 나를 다그쳐댔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가하는건가? 그런 내 어리둥절한표정에,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였다는 걸 깨닫는 듯했다. 얼른 난감한 시선을 피하는 그녀. 거꾸로 의아한 내가 물었다. "왜, 왜 그러세요......? 그 선배랑 무슨......?"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애써 그녀는 얼굴 색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뭔가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 었다. "그런데...... 누나 요새 무슨 힘든 일 있으세요?" 선영이 누나는 흠칫 놀란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힘든 일?" "음...... 누나 얼굴이 많이 야윈 것 같아요. 머리...... 머리를 묶어서 그런 건가?" "그, 그런 거 없어!"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매만졌다. 그로 인해 괜스레 내가 얼굴이붉어졌다. 빤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탓이었다. 뭔가가 자꾸 꼬이는 분위기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금할길없어 선영이 누나에게 다가 선 것인데, 반대로 우리 사이의 대화는 살얼음을 걷는 듯 엉뚱한 방향으로 번지고 있었다. 미안한 나는 헛기침만 해댔다. 영 어색함은 가시지 않고 있었지만, 선영이 누나는분위기 를 바꾸려는 듯 애써 얼굴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힘없이 보이는 그 미소. "미, 미안해...... 내가 요새 좀 피, 피곤해서 그런가 봐......" 분명 어딘가 침착하지 못한 구석이 엿보였지만나는 떨떠름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없었 다. 문득, 선영이 누나는 뭔가 떠올랐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참...... 차, 창희 넌...... 잘 되가니?" 잘 되간다? 시험준비? 학교생활? "예......? 뭐가요?" "잘 되가느냐고...... 그......" 의미파악이 안 되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머뭇거리는 인상이 역력했다. 어떤 질문인 지 선뜻 묻기에 망설이는 눈치였다. "있잖아, 그...... 니 동기 여자애." 동기 여자애- 마음 속에 덜컥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예지, 예지를 말하는 건가. "전에...... 그 경양식 집에서...... 너, 너랑 뭐 조용히 얘기할 게 있다던......" 금방 야릇한 느낌에 휩싸였다. 예지라니, 그녀와 내가 함께 있는 장면을 선영이 누나가 본 건 내 기억으로는 아무리 따져도 두어 번을넘지 않는데? 그리고 틀림없이 그 중 한번은 방금 그녀 입으로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 않은가, 헌데지금 내게 그애와 잘 되느냐고 묻다니? "예, 예지 말씀이세요?" 으응, 그녀는 그 이름을 대자 못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 그걸 어떻게......? 저하고 예지를 어떻게 아세요?" 아차차, 그 때서야 그녀도 자기 질문이 약간 오버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금방 곤란해 진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거야...... 그, 그 때 보니까 너희 두 사람...... 꽤 친한 사이로 보이길래......" "누가 그렇게 얘기하던가요? 예지랑 저랑......?" "아, 아냐. 그냥 내가 그렇다는 거야. 니가 그랬잖아. 좀 전에......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어라. 얼버무리는 그녀. 그렇다면 뭔가 오해를......? 가슴속에 큼지막한 돌이 굴러가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내가 설마 했던 그 생각, 즉 예지와 나 사이를 선영누나가 오해하고 있을지도모른다는 그것이 정말이라는 얘 기 아닌가. 어안이 벙벙한 나는 다짜고짜 해명부터 해야 했다.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그, 그런 건 아녜요! 예지랑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인 걸요. 가까운 친구!" 제법 높아진 내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만약 아무 관련 없는 제 3자가 들 었다면 거꾸로 허겁지겁 부정하는 소리로 들릴 정도로. 역시나 선영이 누나에게도 그렇게 들린 모양, 사뭇 놀란그녀의 눈길이 되돌아오고 있었 따. 나는 덧붙여 쓸데없는 추가 설명까지 곁들여댔다. "걔는 워, 원래 제가 아니라...... 다, 다른 친구를 좋아하다가, 그러다가 저한테......" 제길,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식의 해명이 외려 예지와 나 사이를 더 복잡한 관계로 설정하는 듯 보였던 것이다. "그래......? 그럼 내가...... 내가 잘못 안 거겠지." 그러나 선영이 누나의 말투는 약간 건성으로 들렸다. 그녀는 이제 내게 심각한 질문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도 하듯 조심스레 넘어가고 있었다. 어휴, 나는 입술이 바싹 타 찻잔을 들고 물 마시듯 벌컥거렸다. 그러 인해 우리는한동안 멍하니 찻잔만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분위기 바꿀 만한 말을 찾을 수없어 나는 열심히 머리 속을 굴렸다.한참을 더 궁리한 끝에야 가까스로, 생각나는 화두...... 될 수 있으면 이전처럼, 밤새워 솔직한 비밀을 털어놓았 던 그 여관방에서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대화가 그리웠다. "저...... 누, 누나." "으...... 응?" 선영이 누나가 짐짓 갑갑했던지, 내가 간신히 꺼내는 얘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그, 그래. 얘기해 봐." "음...... 그, 그게, 그러니까......" 나로서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질문,그건 다름 아닌 바로 그녀와함께 여관방에서 나온 날과 직결되는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모르겠다. 그 날의 부끄러운 얘기를, 어금니라도 악물어야 할까. "그 날, 그 날 기억하세요?" 그 날- 이란 단어에 그녀는 긴장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저...... 그...... 누나랑 같이 술 마시고......" 몰래 그녀의 얼굴 색을 살폈다. 그녀도 어느 날을 얘기하는지 깨닫고는 금방 귀밑을 붉혔 다. "그 날 뭐......?" 선영이 누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 무슨 얘기를......" "저기...... 그날......" 아무래도 민감한지라 머뭇거리는 내 말투.그러나 내가...... 그 날얘기를 꺼낸 것부터가 잘못일까? 그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커피잔을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꼭 쥐고 있었다. "그 날...... 아침에 일아났을 때 제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서, 선영이 누나......!" 선영이 누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걸 느낀 듯, 재빨리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아니야......! 얘, 얘기해." 하지만 이미 나는 다음 말을 몽땅 까먹고 말았다. 어지러운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선 영이 누나- 그 짧은 영점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뭔가 반짝이 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어, 얼른 얘기해......!"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것인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괸 손으로얼굴을 거렸다. 그녀의 재촉 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려던 질문을 띄엄띄엄 주워담을 수밖에 없었다. "주, 중요한 것 아닌데...... 그, 그 날 아침에 누나가...... 누나가 나더러 그렇게 말해줘서 고 맙다고 한, 그렇게 얘기해 준 것 내가 처음이라고 한...... 그 말이 궁금해서......" 그녀는 그 아침 내 곁을 떠나며 분명히 그런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고맙다고, 내 말 한마 디가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라고말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렇지만 나 는 그만 선영이 누나 쪽에서 들려온 어떤 소리에 혀가 얼어붙고 말았다. 후, 뜻 모를 한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마치 세상 시름을모두 아는 것 같은 소리, 그 럿은 바닥을 꺼지게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마치 졸지에 무슨 몹쓸 짓을 한 놈이 된 것 같았다. 당혹감에 나는 어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선영이 누나의 한숨소리가 한 번 더 새어나왔다. 그리고몇 초 후, 착 가라앉은 그 녀의 음성이 내게 반문을 해왔다. "그걸...... 알고 싶었던 거야?" 얼떨떨한 나는, 숨소리도 못 내고 그저 고개만 멍처하게 끄덕거렸다. "미안해, 그건...... 미안해." 갑자기, 선영이 누나가 벌떡 몸을일으켰다. 내 상상과는 달리,그녀의 눈가에는 별다른 이상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우리 다음에 이야기하지...... 나 너무 늦었어." 손목시계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으면서, 지친 듯한 표정의그녀는 피곤한 목소리만을 던 지고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의 달아나는 듯한 선영이 누나를 뒤쫓으려 했지 만- 나를 붙잡는 훼방꾼이 있었다. "이봐요, 학생!" 으아...... 찻값, 허겁지겁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뛰쳐나왔지만, 이미 한 발 늦은걸 확인할 따름이었다. 멀리 고개를 숙이고 뛰어가는 선영이 누나를 본 것 같지만,벌써 그 거리는 수십 미터나 멀어져 버렸다.30 각자 차를 시킨 후에, 나는 한껏 서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동안...... 학교에선 교수님 일 땜에......?" 그 동안- 정확히 말하면 여관방 그녀 곁에서 잠들다 나온 날 이후. 선영이 누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고는조용하 게 대답했다. 사실 생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차분함이 물씬 풍겨 나왔다. 뭔가 가지런히 청추함. "으으, 학교, 학교에서는 요새 바빴어...... 그냥 내 일만 하고 곧바로......" 그랬구나. 나는 지난 궁금증부터 풀고 싶었다. "저기 왜...... 지난번에...... 왜 그렇게 가셨어요?" 지난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계면쩍어 하는 나를 마주 보았다. 실상 이건 아까 명희누나가 끼여들기 직전에 물으려던 말이었다. "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며칠 전에...... 교문 앞에서 예지랑 있을 때 누나를 봤는데......" 그 날 일부러 돌아서서 모른 체하고 가버리셨잖아요. 라고 물으려는데- 의외로 그보다 선 영이 누나의 대답ㄷ이 먼저 나왔다. "나, 난 잘 모르겠어. 언제......?" 얼레, 난 의아한 시선을 그녀에게 대답 삼아 돌렸따. 그새 잊어버리셨나? 나는 다시상기 시키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분식집 앞에서...... 그, 그게......" 어휴, 나는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관방에서 같이 자고 나온 다음 주 언제 쯤...... 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아냐. 이상한 걸. 나...... 너 본 적 없는데......" 허 참, 이상한 건 내가아니라 그녀 쪽이었다. 얼른 대답하는인상이, 뭔가 나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게다가 선영이 누나는 초조한 듯 연신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하기야 뭐...... 기억 못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냥 돌아선 것을 내가 잘못 봤거나. 어쨌든 벌써 수 주 전이니까. 나는 속으로 자문자답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녜요. 그럼...... 제가 잘못 봤겠죠." 끝내 나만 머쓱해졌다. 진짜 내가 잘못 본 걸까? 틀림없이내 기억으로는 눈까지 마주친 이 누나가 아는 체 하려다 말고 싹 돌아섰는데 말이다. 난 민망함을 피해 농담처럼 말을 이었다. "그럼. 그, 그 때는...... 무슨 얘기하신 거예요? 정호선배 만난날......" 그런데......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었나?일순 선영이 누나의 얼굴이 딱딱하 게 굳어버렸다. "그, 그걸 왜 묻니?" 그 말에 내가 도리어 당황해야 했다. 즉각적으로 되묻는 그녀의 음성에 날이 서있었다. "어, 저...... 그, 그게......" 원래는 그 날...... 그 곳을 나서며 나를 돌아보던그녀의 우울한 표정이 안쓰러웠다는, 그 얘기를 하려던 차였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얘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버 렸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나는 이것저것 변명을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벼, 별 게 아니라...... 그, 그랬거든요. 하도 정호선배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나중에 저 희도 나가려는데, 그 선배가 저를 붙잡고 같이 술 마시자고......" 대충 넘기려 하는데, 오히려 선영이 누나의 반듯한 이마는 더욱 찌푸려져 있었다. "정호가?" "예, 아니 그게 뭐...... 그냥 시간 있냐고 한 거지만, 꼭 술 마시자고 할 것 같았다는......" "그래서, 걔가 무슨 얘기했어?" 어, 선영이 누나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쪽이 아니었다. "얘기는...... 그냥 아무 얘기도 안 했는 걸요. 제가 수업 있다고 빠져나와서......" 쑥, 목구멍 속으로 대꾸를 삼켰다. 실은 그녀를 찾느라 재빨리 둘러대고 나오지 않았었나. "정말이야? 아무 얘기 안 했어?" "어...... 예......" "정말로?" 이상하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선영이 누나는 나를 다그쳐댔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가하는건가? 그런 내 어리둥절한표정에,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였다는 걸 깨닫는 듯했다. 얼른 난감한 시선을 피하는 그녀. 거꾸로 의아한 내가 물었다. "왜, 왜 그러세요......? 그 선배랑 무슨......?"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애써 그녀는 얼굴 색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뭔가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 었다. "그런데...... 누나 요새 무슨 힘든 일 있으세요?" 선영이 누나는 흠칫 놀란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힘든 일?" "음...... 누나 얼굴이 많이 야윈 것 같아요. 머리...... 머리를 묶어서 그런 건가?" "그, 그런 거 없어!"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매만졌다. 그로 인해 괜스레 내가 얼굴이붉어졌다. 빤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탓이었다. 뭔가가 자꾸 꼬이는 분위기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금할길없어 선영이 누나에게 다가 선 것인데, 반대로 우리 사이의 대화는 살얼음을 걷는 듯 엉뚱한 방향으로 번지고 있었다. 미안한 나는 헛기침만 해댔다. 영 어색함은 가시지 않고 있었지만, 선영이 누나는분위기 를 바꾸려는 듯 애써 얼굴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힘없이 보이는 그 미소. "미, 미안해...... 내가 요새 좀 피, 피곤해서 그런가 봐......" 분명 어딘가 침착하지 못한 구석이 엿보였지만나는 떨떠름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없었 다. 문득, 선영이 누나는 뭔가 떠올랐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참...... 차, 창희 넌...... 잘 되가니?" 잘 되간다? 시험준비? 학교생활? "예......? 뭐가요?" "잘 되가느냐고...... 그......" 의미파악이 안 되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머뭇거리는 인상이 역력했다. 어떤 질문인 지 선뜻 묻기에 망설이는 눈치였다. "있잖아, 그...... 니 동기 여자애." 동기 여자애- 마음 속에 덜컥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예지, 예지를 말하는 건가. "전에...... 그 경양식 집에서...... 너, 너랑 뭐 조용히 얘기할 게 있다던......" 금방 야릇한 느낌에 휩싸였다. 예지라니, 그녀와 내가 함께 있는 장면을 선영이 누나가 본 건 내 기억으로는 아무리 따져도 두어 번을넘지 않는데? 그리고 틀림없이 그 중 한번은 방금 그녀 입으로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 않은가, 헌데지금 내게 그애와 잘 되느냐고 묻다니? "예, 예지 말씀이세요?" 으응, 그녀는 그 이름을 대자 못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 그걸 어떻게......? 저하고 예지를 어떻게 아세요?" 아차차, 그 때서야 그녀도 자기 질문이 약간 오버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금방 곤란해 진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거야...... 그, 그 때 보니까 너희 두 사람...... 꽤 친한 사이로 보이길래......" "누가 그렇게 얘기하던가요? 예지랑 저랑......?" "아, 아냐. 그냥 내가 그렇다는 거야. 니가 그랬잖아. 좀 전에......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어라. 얼버무리는 그녀. 그렇다면 뭔가 오해를......? 가슴속에 큼지막한 돌이 굴러가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내가 설마 했던 그 생각, 즉 예지와 나 사이를 선영누나가 오해하고 있을지도모른다는 그것이 정말이라는 얘 기 아닌가. 어안이 벙벙한 나는 다짜고짜 해명부터 해야 했다.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그, 그런 건 아녜요! 예지랑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인 걸요. 가까운 친구!" 제법 높아진 내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만약 아무 관련 없는 제 3자가 들 었다면 거꾸로 허겁지겁 부정하는 소리로 들릴 정도로. 역시나 선영이 누나에게도 그렇게 들린 모양, 사뭇 놀란그녀의 눈길이 되돌아오고 있었 따. 나는 덧붙여 쓸데없는 추가 설명까지 곁들여댔다. "걔는 워, 원래 제가 아니라...... 다, 다른 친구를 좋아하다가, 그러다가 저한테......" 제길,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식의 해명이 외려 예지와 나 사이를 더 복잡한 관계로 설정하는 듯 보였던 것이다. "그래......? 그럼 내가...... 내가 잘못 안 거겠지." 그러나 선영이 누나의 말투는 약간 건성으로 들렸다. 그녀는 이제 내게 심각한 질문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도 하듯 조심스레 넘어가고 있었다. 어휴, 나는 입술이 바싹 타 찻잔을 들고 물 마시듯 벌컥거렸다. 그러 인해 우리는한동안 멍하니 찻잔만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분위기 바꿀 만한 말을 찾을 수없어 나는 열심히 머리 속을 굴렸다.한참을 더 궁리한 끝에야 가까스로, 생각나는 화두...... 될 수 있으면 이전처럼, 밤새워 솔직한 비밀을 털어놓았 던 그 여관방에서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대화가 그리웠다. "저...... 누, 누나." "으...... 응?" 선영이 누나가 짐짓 갑갑했던지, 내가 간신히 꺼내는 얘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그, 그래. 얘기해 봐." "음...... 그, 그게, 그러니까......" 나로서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질문,그건 다름 아닌 바로 그녀와함께 여관방에서 나온 날과 직결되는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모르겠다. 그 날의 부끄러운 얘기를, 어금니라도 악물어야 할까. "그 날, 그 날 기억하세요?" 그 날- 이란 단어에 그녀는 긴장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저...... 그...... 누나랑 같이 술 마시고......" 몰래 그녀의 얼굴 색을 살폈다. 그녀도 어느 날을 얘기하는지 깨닫고는 금방 귀밑을 붉혔 다. "그 날 뭐......?" 선영이 누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 무슨 얘기를......" "저기...... 그날......" 아무래도 민감한지라 머뭇거리는 내 말투.그러나 내가...... 그 날얘기를 꺼낸 것부터가 잘못일까? 그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커피잔을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꼭 쥐고 있었다. "그 날...... 아침에 일아났을 때 제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서, 선영이 누나......!" 선영이 누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걸 느낀 듯, 재빨리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아니야......! 얘, 얘기해." 하지만 이미 나는 다음 말을 몽땅 까먹고 말았다. 어지러운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선 영이 누나- 그 짧은 영점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뭔가 반짝이 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어, 얼른 얘기해......!"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것인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괸 손으로얼굴을 거렸다. 그녀의 재촉 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려던 질문을 띄엄띄엄 주워담을 수밖에 없었다. "주, 중요한 것 아닌데...... 그, 그 날 아침에 누나가...... 누나가 나더러 그렇게 말해줘서 고 맙다고 한, 그렇게 얘기해 준 것 내가 처음이라고 한...... 그 말이 궁금해서......" 그녀는 그 아침 내 곁을 떠나며 분명히 그런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고맙다고, 내 말 한마 디가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라고말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렇지만 나 는 그만 선영이 누나 쪽에서 들려온 어떤 소리에 혀가 얼어붙고 말았다. 후, 뜻 모를 한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마치 세상 시름을모두 아는 것 같은 소리, 그 럿은 바닥을 꺼지게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마치 졸지에 무슨 몹쓸 짓을 한 놈이 된 것 같았다. 당혹감에 나는 어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선영이 누나의 한숨소리가 한 번 더 새어나왔다. 그리고몇 초 후, 착 가라앉은 그 녀의 음성이 내게 반문을 해왔다. "그걸...... 알고 싶었던 거야?" 얼떨떨한 나는, 숨소리도 못 내고 그저 고개만 멍처하게 끄덕거렸다. "미안해, 그건...... 미안해." 갑자기, 선영이 누나가 벌떡 몸을일으켰다. 내 상상과는 달리,그녀의 눈가에는 별다른 이상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우리 다음에 이야기하지...... 나 너무 늦었어." 손목시계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으면서, 지친 듯한 표정의그녀는 피곤한 목소리만을 던 지고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의 달아나는 듯한 선영이 누나를 뒤쫓으려 했지 만- 나를 붙잡는 훼방꾼이 있었다. "이봐요, 학생!" 으아...... 찻값, 허겁지겁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뛰쳐나왔지만, 이미 한 발 늦은걸 확인할 따름이었다. 멀리 고개를 숙이고 뛰어가는 선영이 누나를 본 것 같지만,벌써 그 거리는 수십 미터나 멀어져 버렸다. 도피행각 나는 넋이 나간 상태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 악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 이상한 그녀였다. 난 단지 애틋했던 몇몇 마음 속 이야기를 물으려 했던 것뿐인데, 이건 되레 더 많은 의문점만 고리를 문 형국이었다. 지금껏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따. 수척한 얼굴에, 뭔가에 쫓기는 듯 한 분위기, 게다가 마지막 질문에는 목소리까지 떨고 있던 그녀...... 허깨비를 본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밝고 예쁜 선영이누나가 아니라, 차분아고 남의 이야기에귀 기울이던 그녀가 아니라, 나치 잘못 알고 만난 생소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교수님과의 술자리에서만 해도 밝게 웃던 그녀였지 않은가. 피곤한 얼굴이나 그간 학교에 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자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가 문제였다.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피한 이유는 다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대체 내가 오늘 한 이야기 중에서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도망치게 한 걸까? 안타까웠다. 지난번 하룻밤을 함께 보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지켜주겠노라 약속했 었고...... 그녀도 다른 사람 아닌오직 나만은 믿겠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정말 가깝게 느껴졌던 선영이 누나인데. 지금은 정반대라니. 한 걸음이 아니라 아까 내가 쫓지 못했던 그 거리만큼이나 그녀가 멀 게 느껴지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였다. 언젠가...... 그녀가 처음 바래다주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였다. 언젠가...... 그녀를 처음 바래다주고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처럼. 그 날 그...... 아쉽게 찰랑이던 치마폭처럼 말이다. 오죽하면 자취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희창이에게라도 전화를 걸어볼까 해서전화기까지 집어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접어버렸다. 녀석이라고 그녀의 연락처를 할리 만무했다. 자칫하면 그는 또 다른 오해를 할지 모른다. 해답은 유일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이라도 당장 그녀를 다시 찾아나서야 하리라. 그런데- 막상 들렀던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삐리리릭, 삐리리릭, 요란하게 전화기가 울 렸다. "여보세요." 무의식적으로 수화기를 받아들었는데, 다음 순간 나는 부르르, 온몸이 긴장됨을 느껴야 했 다. 한껏 색기어린, 농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후훗, 창희...... 나야, 누나......!" 최마담, 최마담 누님이었다. "으응, 동생...... 나라니까, 누님이야." 사실 그녀의 전화에 그리 뜨끔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인데도,나는 일순 당황하여 말문이 막혀버렸다. 당장에 며칠 전의 일이 상기되었던 탓이다. '호, 혹시오, 저, 저를 남...... 남자로 보시나요?' '창희, 창희가 생각하는 그대로, 나도 그래. 동생이 날 여자로 본다면, 나도 똑같이 동생을 남자로 생각하는 거야. 알겠어......?'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즉 내가 자기를 여자로 생각하면 자신도 나를 남자로 여기 겠다...... 그러니 서로 남녀로 보자는 것인지 어쩌자는 것인지 모를 그 얘기가 내 귓가에한 꺼번에 되살아났다. "듣고 있어, 창희 동생?" "어...... 예, 예 누님......!" 나의 머뭇거리는 듯한 답변에, 그녀는 아양 섞인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호호, 왜 그렇게 얼이 빠진 목소리야? 벌써 자고 있었어?" "아, 아니요......" 시계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다. "여기 가게야. 이상하게 손님이 별로 없네...... 오늘 학교는 갔었어?" "오, 오늘요......? 예, 가, 갔었어요." 그런 걸 뭐하러 묻는지 모를 일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학교에서 뭐했어?" "그, 그냥 도서관 가서...... 일찍......" "그래? 낮에는 전화를 못했는데...... 틀림없겠지?" 이건 또 무슨 말이냐. 내가 뭐 다른 데서 딴 짓이라도 하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 그럼요!" 어쨌든 일단 이렇게 순종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것인가. 선영이 누나와 있었다 고 얘기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이 여자는 그녀의 존재도 모를 것이므로. "흠...... 좋아, 한 번 더 얘기하는 건데...... 이 여자 저 여자 아무나만나지 마. 특히...... 보 영이는 절대 안돼. 알지......?" 보영이. 그녀가 떠올린, 잊고픈 그 이름. 만약 보영이가내 방에 들락거렸다는 사실을 안 다면 그녀는 나를 붙잡아 경이라도 치리라. 최마담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희창이 도련님은 모르지? 동생이랑그 계집애랑 있었던 일말이야. 오늘도 그 친구, 보영이 데려다 준 모양이던데...... 아직 아무 일 없는 것 같아 보였어." 그녀는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지만, 나는 수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나의 원죄였다. 가장 가까운 불알친구가 노리는여자, 보영이 계집애와 하룻밤정사. 그것도 그 녀석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한 그녀의방에서 밤새도록 말이다. 그러니최마담은 완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뻔질나게 보영이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희창이인데, 최마담이 한 마디라도 뻥끗하는 날에 는...... 그런 내 모습을 보지않고도 짐작하는지, 최마담의 묘한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건너왔다. "호호, 걱정하지 마. 동생...... 아무렴 누나가 함부로 떠들고 다니겠어. 그런 얘기?" 어휴, 이건 차라리 협박이다. "근데...... 요새도 청소나 빨래 밀렸어, 창희?" 최마담은 스스럼없이 내 걱정을 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빨래해 준다는 미명 아래 벌어 졌던 야릇한 일들을 몸서리가 쳐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일...... 기억하고 있지? 설마 우리 약속 잊어버린 건 아닐 테니깐." 약속? 그렇지. 서로를 '잘 알기 위해' 둘이서 시간을 내자는 그 얘기? 아뿔싸. 그제야 내일 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째야 하나? 물론 잊지는 않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선뜻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머 뭇거리고 있는데, 당장 최마담의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약속했었잖아? 기억 안 나?" "예, 예...... 내일 저...... 근데......" "근데 뭘? 내일 무슨 일 있어?" 젠장, 거절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끌려 다녀야 하는 것인지. "미리 약속한 거잖아? 그런데 말야?" 금방 히스테리컬하게 바뀌려는 그녀- 도리 없는 일이었다. 사면초가가 된 내가 어떻게 그 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아, 아뇨...... 그, 그게 아니라지난번에도 그렇고...... 제가 너무 누님에게부담만 드리는 게 아닌지......" 기실 저번에 받은 수표도 아직 다 쓰지 않았다. 하지만그 정도에 넘어갈 최마담이 아니 다. "어유, 걱정하지 마.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이누님이 잘해주지 않은면 누가 잘해주겠 어?" 하등 거리낄 것 없다는 그녀의 말이었다. 나는 뭐라 달리 대꾸할 수도 없었다. 대체 이 누 님의 속셈은 무얼까.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내일 집에 있어. 오후에......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알았지?" "어...... 저, 바, 바쁘시다며...... 괜찮으시겠어요?" "후후, 창희도 참...... 왜 그래?오히려 부담은 동생이 갖는것같네? 그냥 편하게 입고서 기다려. 오후쯤 갈게." 어찌 부담이 안 간단 말인가. 그나저나 편하게 입으라니? "어머, 이제야 손님이 좀 오나 보네...... 그래, 동생. 그럼 내일 봐." "누, 누님......!" 미처 둘러댈 말도 찾지 못했는데, 최마담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수화기에서 마 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왁자한 소음과 어서 오세요, 하는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전부였 다. 후......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나는 방바닥이 꺼질 것 간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종내는 이렇게 되 것인가. 최마담, 그 누님과의 외출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 따. 이것이 화류계에 몸담은 30대 노처녀의 노련한 화술인가. 겨우 몇 마디의 말로 나를 옴쭉 달싹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혼란한 머리통을 감까 쥐며, 나는 벌렁 누운 채로한참 동안 생각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최마담, 그녀는 대체 뭘 어쩌겠다는 얘기인가. 밑도 끝도없는 말에, 언제는 정말 친누나 처럼 빨래에 속옷검사까지 해놓고, 다음 번엔꼭 의처증, 아니 의부증 걸린 애인처럼다른 여자와의 동침 사실까지 들먹이더니. 차라리 이랬으며 편할 노릇- '동생, 동생에게 관심 있어. 그러니 우리 가까이 지내자고' 라 든가...... '나는 동생이 없고,동생은 누나가 없으니까,우리 진짜 의남매처럼 지내'이라든 가...... 도무지 의중을 헤아리지 못할 그녀였다. 이렇게 되면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일, 내일이 오면 알 수 있으리라. 맞닥뜨리면 되는 것이다. 최마담 그녀의 말대로'단둘 이서 다른 장소에' 있게 된다면자연스럽게 드러날 일이다. 누님의속셈이 무엇인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이러는 것인지가. 나는 눈을 감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곱씹어 보았자 내 자신이 질질 끌려 다닐 뿐이다.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했다. 내일은 반드시, 그녀의 정체를 밝히고야 말겠다. 꼬, 내게 서 무얼 원하는 것인지 캐내고 말테다. 잠들기 전까지 나의 머리 속은 그런 생각들로 꽉 차 있었다. 32 쾌청한 날씨였다. 토요일 아치. 뭔가 긴장이 되었던 걸까. 나는 생각보다 일찍 잠을 깼 다. 그런 대로 괜찮은 컨디션. 일단은 이부자리를 개고, 대충 방 청소를 해두었다. 직접 이곳으로 찾아온다는 최마담이었 으니, 혹시라도 저번처럼 민망한 호들갑을 떨도록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빨래를 한다느니, 방 청소를 한다느니...... 자라 보고 놀란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것 이 이럴 때 어울리는 비유일까. 어쨌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심지어는 샤워를 하기 전에 빨랫감을 챙겨 주기까지 했다.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나는 행동을 서둘렀다. 최마담이 오기전에 빨리 학교에 가볼 생각이었다. 비록 수업은 없었지만 이곳저곳 찾아다니다 보면 아는 선배를 한 사람쯤 만날 수 있을 테 고, 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얼마든 선영이 누나의 동기와도 마주칠수 있으리라는 게 내 복 안이었다. 그랬다. 지난 몇 주간 선영이누나는 너무나 오리무중이었다. 희창이에게 비리이야기를 듣기 전만 하더라도 하루에 족히 한 두 번은 스쳐 지날수 있었던 그녀, 그런데 지금은 물 어물어 그녀를 찾아야 했다. 골치 아픈 머리속을 털 듯 나는 물기 젖은 머리에 수건을 문질러댔다. 그 무렵이었다. 미처 욕실문도 닫지 않은 그 때. 빵, 빠아앙,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바로 내 자취방 아래 골목에서 들려왔다. 누구야? 누군지 몰라도 아침부터 욕먹으려고 기를 쓰는군...... 내 혼잣말인데, 얼레,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기에 섞여 대번 내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창희, 창희 동생!" 으잉, 누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다급한 크랙슨 소리와 함께. 황급히 팬티바람으로 방문을 열고 내다본 나- 맙소사, 아래에서는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 어져 있었다. 직접 찾아오기로 한 최마담, 그녀가 맞기는 맞다.그러나 지금 몇 시인가. 겨우 일곱시, 오후에 오기로 한 게 아니었나? "창희, 얼른......!" 게다가 최마담은 뭐가 그리 급한지,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채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는 나에게 서둘러 내려오라는 손짓까지 해대고 있었다. "빨랑, 빨라앙!" 뭐, 뭐야?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자, 잠깐만요!" 엉겁결에 소리친 나는, 후다닥, 방안으로 돌아와 되는 대로 청바지에 다리를 꿰였다. 편한 옷차림-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밖의 차안에 있는 최마담의 표정은 마치 누군가가 숨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토끼눈이었던 것이다. 머리카락의 물기도 털어 내지 못한 채 나는 쿵쿵쿵, 골목으로 달려 내려갔다. 얼마나 서둘 렀는지 농구화의 끈도 제대로 묶지 못했다. "타!" 그런 날 본 체 만 체, 즉시 부르릉, 시동을 거는 그녀였다. "무, 무슨 일이세요?" 당황한 목소리로 물어도 그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그녀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백 미러, 사이드 미러, 이런 거울들만 유심히 살피는 그 몸짓은 마치 뭔가에 쫓 기는 표정 그대로였다. "엇......!" 확, 내 고개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밟아 골목길을 빠져 나오면서 도, 최마담은 연신 사방을 기욱거렸다. 재빨리 큰길가로 빠지는 그녀의 차...... 그리고 다음 순가 그녀의 입에서는 그운전솜씨보 다 한층 더 황당한 단어가 튀어 나왔다. "개새끼......!" 예에? 갑작스런 그 욕지거리에, 나는 입이 딱 벌어져 돌아보았따.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동 그랗게 뜨고 있는데도, 그녀는 한마디 응답도 없었다.다만 백 미러...... 사이드미러...... 그리 고 전후좌우, 연신 사방을 살필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앉힌 채, 차가 완전히 큰길가로 접어든 후에야 안도하는 듯한 최마담 의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어휴, 씨X 새끼들......" 으힉? 나는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옆자리의 내가 생각났다는 듯, 화들짝 그 녀가 돌아보았다. "어머, 어머. 미안해 동생. 동생한테 욕하는 거 아니야......!" 정말로 내가 안중에 없었던 것처럼 최마담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미안해. 많이 놀랐지? 내가 너무 급하게 굴어서......" 최마담이 내 얼굴을 쳐다보며 살짝 눈웃음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대경실색한 당혹감 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우리 창희 동생이 준비 안 하고 있었으면 어쩌나 걱정 했었는데 다행이다! 어머나, 근데 머리가 다 젖었네?" "어...... 예, 바, 방금 샤워했거든요......" 그 말에 흐믓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누님. "후후...... 그랬구나...... 응? 오늘은 운동화 신었네?" "아...... 이, 이건 어제 편하게 입으라고 하셔서......" 멍청하게 나온 대답이었지만, 흡족한 답변인 모양이었다. 기실 서두르느라 정신없던와중 의 산물이었는데 말이다. 그녀의 한쪽 손이 뻗어와 부드럽게내 뺨을 톡톡거리며 쓰다듬었 다. "아이, 착해. 우리 창희...... 청바지에 그렇게 입으니까 참 어려 보이네!" 마치 꼬마 아이를 다루는 듯한 최마담의 손길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의 행색을 관찰할 수 있었다. 별반 특이한 것은 없다. 다만 이번에는치 마가 아니라 팽팽하게 끼는 정장바지를 입었다는 것이 다를 뿐. "그런데 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엉겁결에 시작된 드라이브인지라, 나는 미처 어디가 어딘지도 구분을 못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여기는 분명 교외로 빠지는 국도변이기는 한데. "으응, 가보묜 알아. 어딘지......" 그녀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여자,최마 담. 그렇다고 국으로 눌러 앉아 있을 수없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그, 근데 왜 이리 일찍......?" "으응...... 그게 그렇게 됐어. 내가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거든. 원래는 오후쯤에 올 생각이 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야. 급한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저기...... 아, 아까는 왜 그렇게......" "으응? 아, 좀 전에......!"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는가. 이른 아침부터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굴고, 난데없는욕까지 퍼부어대다니. "후훗, 좀 귀찮은 일이 있어서 그래. 이따가 얘기해 줄게." 귀찮은 일? 연이은 의문에 나는그저 얼떨떨할 뿐이었지만, 최마담은도통 그 의아함을 풀어 주지않았다. 그렇게 한두 시간 남짓 달렸을까. "참, 그러고 보니 동생 아직 아침 안 먹었지? 가만있어 보자......" 내게 물어 놓고도 그녀는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휙, 방향을 틀었다. 금방 접어든 곳은, 국 도변의 한 식당이었다. "여기서 아침 먹자. 이곳 산채 비빔밥이 맛있거든." 어, 그럼 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리으 리한, 제법 호사스러운 '가든'이란 명칭이 붙은 야외 음식정이었던 것이다. 가끔 여행을 다닐 때에...... 지나치며 구경만 했던 길가의호화식당, 나는 누가 저런 곳에 들락거릴까 상상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직접 그런 곳에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채 오전 열 시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미 이 '가든'이란 곳에는 말쑥한 복장의 종업 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리자마자 안내되어진 테이블은 잔디 위에원두막처럼 꾸며 놓은 정자였다. 마치 정원 한가운데처럼 연못에, 운치 있는 나무들, 나는 왠지 기가 질려 묵묵히 자리에앉 았다. 메뉴판은 또 뭐냐. 비빔밥이라 적혀진 옆의 동그라미는 무려 네 개? "산채 비빔밥 둘 하고...... 창희, 술 한 잔 마실래? 여기 민속주." 술이요? 아직 훤한 대낮인데? 펄쩍 뛸 일이다. "아, 아뇨, 누님...... 아쿠." 순간 튀어나온 내 외침, 아야야...... 최마담의 발끝이 테이블밑으로 내 정강이를 세게 걷 어찼던 것이다. 물러가는 웨이터를 흘끗거리며,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물어뜯었다. "어유, 동생! 누가 있을 때는 누나 아니면 형수님이라고 해!" 째려보는 누님의 눈초리. "죄, 죄송해요, 누님...... 아니 누나......" 이것 참...... 그런데 슬쩍 허리를 기울이며 속삭이는 그녀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누님, 누님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봐. 무슨 불륜관계인지 안다고. 생가해 봐. 난아직 처 년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면 창희는 기분 좋겠어?" 부, 불륜? 나는 다시 한 번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훗, 알았지? 다음부턴 조심해!" 최마담은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다시 애교 섞인 미소를 띠며 마주 보았다. 이것 참, 하 기야 이 최마담이 분명 유부녀는 아니지만...... 33 어쨌든 과연 그녀의 말대로 그 '가든'의 비빔밥맛은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호화로운 기분에 주눅이 들었다는 점만 뺀다면. 느지막한 아침을 때우고 다시 차를 몰기 시작한 최마담. 그제야 나는 대충 그녀의 차가어 디로 향하는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 길가변 이정표는 우리는 제법 거리가 먼 지방 관광지로 향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 길은......?" "으응, 그래. 전에 와본 적 있어?" "아, 아니요......" 정말 의아스러웠다. 우리가 접어드는 곳은 이름만 척 대면누구나 떠올리는 한 온천도시 였기 때문이다. 온천...... 온천에서 뭘 하겠다는 거지? 그런데 그게 하니었나? 최마담의 차는 그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그녀는 한 참 더 차를 몰아 그 도시를 한참 벗어난 어느 교차로에서 차를 돌려 새 길을 타고 있었다. 새로 닦인 길인 듯 훤칠하게 정돈된 숲길이었다. 아마도 그길 끝에 목적지가 있는 모양 이었다. 마침내 숲길을 벗어났을 즈음 문득 널찍한 주차장 안으로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예상치 않게 달라진 주위 풍경에 어리둥절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 알자 나는 적이 당황해야 했다. 차가 선 곳은 커다란 관광호텔 앞이 아닌가.호텔......! 어이없는 그 장소에 내 눈은 금세 휘둥그레졌다. "어, 누, 누님...... 여, 여기는 왜......?" 그러나 그녀는 묘한 미소를 띄우며 안심하라는 듯 내 무릎을 두들겼다. "으응, 동생은 그저 가만있으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한다? 대체 뭘 알아서 한단 말이냐. 재빨리 도어맨이 달려왔다. 그가 문을열자마자 자연스럽게 자동차 키를 건넨최마담은, 내가 뭐라 붙잡을 새도 없이 그 화려한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얼이 빠졌으나, 도어맨은 성큼 내 조수석 차문까지 열어 주었기에 나 도 엉거주춤 그녀의 꽁무늬를 쫓아야 했다. 널찍한 로비 안에서는 깔끔한 차림의 종업원들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절도 있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사모님? 최마담은 익숙한 듯 카운터에서 척척, 뭔가를 주문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내 귓속을 파고드는 이야기. "욕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족실로 드릴까요?" 가족탕이라, 그건 또 뭔가? 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온천이니 목욕은 할 수 있다쳐 도...... 하필이면 웬 관광호텔?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슬쩍 나를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네, 가족탕으로 하나 줘요." "예,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리고 나서야 다가오는 최마담. "창희, 목욕할 거지?" "어...... 예. 예......" "그럼 자, 열쇠 받아." 온천이니 목욕은 당연한 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그녀는 열쇠 하나를 내밀 었다. "저기...... 저쪽으로 가면 안내해 줄 거야. 가서 목욕하면 돼." "누, 누님은요?" 여전히 뜻 모를 웃음만 흘린다. "응, 나도 해야지...... 먼저 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목욕이야 하겠지만...... 그녀의계획이란 결국 이것이었단 말인가. 이런 호화스런 곳은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 끽해야 동네 사우나가 전부였던지라 나는 떨 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향해 때마침 잘 차려 입은 종업원 하나가 걸어왔다. "이리로 오십시오, 사장님." 사장님? 여긴 모두가 사장님이고, 사모님인가. 주춤대며 그의 뒤를 따라간 곳은 터키탕이라는 푯말이 붙은곳이었다. 그리고 그 입구부 터는 정복을 입은 아가씨가 나를 조그만 방안으로 안내했다. 잠자코 뒤따라 들어가 보니, 얼레, 그 웨이트리스가 공손히 절을 하고는 등뒤에서 문을 닫 는 게 아닌가. 아하- 나는 그제야 들어선 장소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 안은 보통 동네 목욕탕의 축소판이었다. 라커와 옷장은개인용인지 서너 개만이 벽에 붙어 있었고, 그 안쪽에 화려하게 장식된 유리문을 열어 보니...... 그냥 목욕탕이었다. 동네 목욕탕의 3내지 4분지 1? 가운데에는 커다란 온탕- 온천이맞는지, 향기가 풍긴다- 이 있고, 사우나 시설이 조그맣게 보였으며, 덧붙여 큼직한샤워기 등등, 엄청 깨끗하고 고 급스러울 뿐이지, 그저 그런 곳이었다. 흠...... 온천욕이라, 여기서 목욕하라는 얘기군. 호사스러운 호텔이라 그렇기는 해도, 그렇다면 이 안에서는 별반 주눅 들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일단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번쩍번쩍한 호텔직원이면 어떻고, 사장님 사모 님이면 또 어떤가. 누가 옷 벗고 목욕 따위도 못하리요?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하는 것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서슴없이 옷을벗기 시작했다. 윗도리, 바지, 속옷까지도 벗어던졌다. 알몸이 도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 이런 곳을 혼자 쓰다니. 혼자 쓰기 미안할 크기였다. 한 십여 명은 들어와도 넉넉해 보였다. 널찍한 탕 안에는 향기와 함께 부글거리는 물방울이 올라오고있었다. 먼저 모락모락 김 이 피어나는 한 구석에서 몸을 닦은 나는 주저하지 않고 뜨거운 온탕에 몸을 푹 담구었다. 후끈하니 따스한 온천물의 온기가 내몸을 알싸하게 휘감았다. 허허, 어찌도니영문이건 간에 일단은 느긋하고 볼 일. 최마담 덕분에 이 호사를 누리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게 온천이구나. 그렇게 척 물속에 몸을 누인 나는 어린애처럼물장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때. 문득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했다. 무심결에 그쪽으로 돌아보니 유리문밖에 사람 그림자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어, 누구야? 도둑? 아니지, 고급호텔에 그런 게 있을 리 없고- 종업원 아가씬가? 흐익, 찰나 나는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저것은! 그랬다. 간유리처럼 희미하게 비치는출입문 너머로 너울거리는훤한 살색의 윤곽이 잡혔 는데, 다름 아니라 그 그림자의 자태는 한 올 한 올 옷을 벗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차차, 나는 그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잠깐, 아까밖에 뭐라고 써있었더라? 터키탕?터. 키. 탕!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터키탕, 아가씨가 알몸이 되어 몸을 씻겨 준다는 곳? 그 럼 저 사람은 여자? 서. 설마 누님이 날 이런 곳에? 기겁을 했다. 틀림없이 그 어른거림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유리문 문고리라도 붙 잡고 막아야 할 성싶었다. 아니 소리라도 질러 들어설 그나체의 여인을 제지해야 홇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한다는 말이냐. 그것도 가린 곳하나 없이 홀라당 벗고서...... 하지만 그 직후에 나는 또 한 번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살그머니 열린 욕실 문, 그 안으로 들어선 것은 분명 여자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연기처 럼 피어나는 수증기 속에 드러난 그 여자는...... 나는 정말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34 "어머, 왜 그렇게 놀래?" 최마담이었다. 최마담, 누님! 그녀가 탕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허연맨몸뚱이. 실오라기 하나, 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난 너무도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이게 어찌된 조화란말이냐. 희뿌연 수증기, 그 옅은 연무 속에 마치 선녀처럼 그녀의 완전한 나신이 서 있었다. 이 호사스런 온천탕에서 심장마비라도 걸릴 지경이었다. 이 무슨 황당한 경우일까. 차라리 터키탕이란 팻말처럼 아까 나를 안내했던 늘씬한웨이트리스 아가씨라고 들어오면 모를까, 저 누님이왜 여기에 들어오나. 후닥닥 뛰쳐나와 도망이라도 치고픈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건 애총 불가능한 일이기에 나 는 허리께까지 담갔던 욕탕 안으로 아예 목까지 푹 담가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잠수라도 하고 싶었따. 홀딱 벗고 있기는 나도 매한가지 아닌가. "어디, 물 따뜻해?" 그녀는 내가 들오와 있는 욕조 쪽으로 다가서기까지 했다. 그가린 것 하나 없는 몸매를 스스럼 없이 드러내며. 순식간에 나는 욕탕에 앉은 채 완벽한 차렷자세까지 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무릎을 딱 붙이고, 시선은 무조건 상위 15도전방 주시- 눈동자를 돌리기는커녕, 눈도 깜빡거리지 못할 판국이었다. 그녀 쪽으로 시선을 준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그러고도 허겁지겁 두 손을 다시 사이에 쑤셔 넣었다. 아무리 차 렷자세라 한들 이 맑디맑은 온천물로는 내 사타구니가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뜨거운 욕조 안에서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최마담은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물 속에 손까지 담그고 있었다. "어때, 물 좋지......? 안 그래?"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왜......? 괜찮지 않아?" "어...... 예. 예." 혓바닥엔 소름이 돋았는지 대답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좋다..... 먼저 샤워부터 해야지." 미칠 노릇이다. 누님은 아무 거리낄 게 없다는양 살랑살랑 탕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분이 좋다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렸고,이어 구석에 붙은 샤워기에서 물줄기 쏟아져 내리 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이 뜨거운 물 속에서 바싹 얼어붙어 있는데. 최마담은어찌 저리 태연자약할 수 있 을까? 그렇다고 이렇게 멍청한 자세로 타일벽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으니 나만 창졸간에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이 당호스런 상황을 정리하려 안간힘을 쓰는데, 이놈의 머리속 은 실없는 생각마저 동시에 진행을 시키고 있었다. 즉 자꾸 본능적인 호기심의 부름을받는 내 신체 일부, 그미동도 않는 눈길 저편에...... 누님의 모습이 주변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 보니 욕실 벽에는 큼직 한 거울까지 붙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고개에 살짝살짝 힘이 들어갔다. 안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만 눈동자가 돌아가고 있었다. 정녕 도망이라도 치려면 어찌 돌아가는 판국인지 봐야 알것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욕 조 턱에 숨기라도 하듯 나는 몸을 턱 밑까지 물속에 가라앉혔다. 여자의 목욕장면 구경이란 아주아주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갔던 기억을 빼놓고는 한 번도 없었으니, 굳이 변명하자면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였기에그 흘끗거리는 시선만큼은 멈출수 가 없었던 것이다. 선뜻 샤워기 아래의 최마담이 훔쳐 보였다. 그리고 실로나는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머리수건을 두른 그녀의 뽀얀 목덜미 아래로...... 훤히 시야에 들어오는 등 돌린 누님의 몸 뚱이, 무의식적으로 입이 벌어지는 경치였다. 최마담의 몸매는 내 예상 그대로였다. 단란주점에서, 내방에서, 가려진 옷가지 안으로도 충분히 짐작되었던 그녀의 무르익은 나체. 그것은 내 상상보다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하 지 않았다. 제 3의, 완벽한 관찰자의 시선으로도 정말 아름답다고 할 정도인 그녀의 몸은, 도무지삼 십대라고 볼 수 없었다. 뒷모습만으로도 그랬다. 웨이브진 머리결 밑으로 동그란 어깨선과 윤기가 흐르는 드의 곡 선은, 군살 없이 쭉 뻗은척추의 윤곽까지 일자로 드러내고 있었으며그 아래로 이어지는 허리선은 잘룩하다 못해 무슨 둔덕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어휴, 나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물 속의 손등이긴장으로 인해 떨려왔다. 저러다 누 님이 고개를 돌리는 날에는 어디 숨을 곳도없다는 사실에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느끼면서도 내 눈은오직 본능의 작용으로 다시 슬그머니 돌아가고 있었다. 서른 중반, 그 나이라면 어느 정도 처졌을-이라는 내 생각은, 또한 그녀의 허리께 아래 부터 와장창 무너지고 있었다. 글쎄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은 서양인에 비해 올라붙지 않은 히프선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최마담의 둔부는 정말 이십대의 그것 못지 않았다. 허연 두쪽의 원이 너무나 어울리게 가득했다. 복숭아, 분명 복숭아보다는 훨씬 풍만한그 녀의 곡선은 진짜 수밀도의 갈라진 틈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각선미는 또 어떤가. 젊은 아가씨조차 부러워할 듯 늘씬한 그 녀의 허벅지, 돌아선 그녀의 몸을받쳐 주는 탄탄한 그 자태는물기에 매끄럽게 반짝이며 탄탄한 종아리게 연결되고 있었다. 모르겠다. 어쩌면 저 몸매를 가꾸기 위해 얼마를 투자했던 간에, 난 동공이 최대한 확장될 정도로 그저 훔쳐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황홀한 그 모습. 이 순간의 나는 사춘기 시절여탕문을 기욱거리던 바로 그 시절 로 돌아간 듯했다. 그렇게 넋이 나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던 때였다. 우연히도 입탕 전의 몸씻기를 하던 누님 의 손에서 미끌,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각 또 한 번 나는 소리 없이 아찔한 탄성을 질러야 했다. 그녀가 흘린 게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로 그것으로 인한 그녀의 동작에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던 것이다. 손에서 놓친 비누, 그것을 줍기 위해 그녀가 허리를 살짝굽히는 순간 내 시선 정면으로 둔부가 들어온 것이다. 엄청난 장면이었다. 선 자세에서 허리만 굽힌 탓에 뒤쪽으로드러난 그녀의 엉덩이 사이 가 정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아까는 이 수증기가 왜 이리 옅나, 부디 좀 더 짙어서 아예 보이지 않았으면 - 하고 바라던 나였지만, 그 순간엔 당장 마음이 백팔십도 바뀌었다. 불과 삼사 미터도 안 떨어지 거리- 게다가 탕 안에 깊숙히 눌러 앉은 위치였으니, 정말로 이 김만 서리지 않았다면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었으리라. 행인지 불행인지, 비누가 계속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욕실 안 연무는 결코 그런 내 어처구니없는 이기심을 허락치않았다. 단지 파스텔 톤의, 아스라한 음영만이 있을 뿐...... 어쨌든 그런 어처구니없는 아쉬움울 달 래는 동안 최마담은 기어코 비누를 주워들은 모양이다. 곧바로 샤워기를 잠그는 소리에, 나는 허겁지겁 시선을 원위치 시켰다. 누님이 몸을돌리 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야, 그런 배짱과 용기가 있다면야 오죽 좋겠는감나은, 나는 재빨리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아무 것도 못 본 척, 가끔 동네 목욕탕에서 마주치는 어르신 들처럼, '어어으...... 허어......' 웅얼대는 바로 그런 상태로. 공자왈 맹자왈, 속으로 되뇌이고 있는데, 가슴이 퉁탕퉁탕 두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불끈 거리는 과자놀이의 맥박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어머, 창희...... 물이 뜨거워? 얼굴이 시뻘겋네......? 찬물 좀 틀까?" 귓가에 최마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뜨겁기는 뭐가 끄겁단 말인가. 딴 것으로 얼굴이달 아오른 것이지. "아, 아니오!" 애 갈라지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떨리고 있었고 꽉 감은 두 눈은 차마 뜰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아까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밖으로 나가수건이 라도 허리에 두르고 있을 것을. 그러나 이제 혀를 차 보았자 무슨 소용, 훔쳐보기에 정신이파려 미처 다음을 생각지 못 한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다음 순간 바짝 긴장을 했다. 가족탕이라던종업원의 말뜻을 이제야 깨달 은 것이다. 이 안은 분명 남녀 구분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랬듯 몸 씻기를 마친 저 누님도 벌거벗 은 몸 그대로 이 욕조 안에 들어올게 아닌가? 환장하겠다. 전라의 여자와 같은 욕조안에 있어야 하다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이제 그녀가 탕 안으로 들어오겠지- 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리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나, 몸이 잠기는 물결의 파동, 그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녀는 뭘하고 있는 걸까. 이마에 땀인지 물방울인지 자꾸 흘러내리는 통에눈을 감고 있기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사우나로 먼저 들어간 건가?아니면 이 욕조에는 들어오지않을 셈인가? 냉탕에 먼저? 그럴 리는 없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사라진 것에 궁금증을 느꼈다. 어쩌지, 어떡해야 하나. 바닥에 미끄러 져 넘어진 것도 아닐 테고. 슬쩍 볼까? 그래도 될까? 눈을 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래도 너무 조용한데. 그럼 잠깐만 떳다가...... 다시 감자. 종내 망설임 끝에 나는 감은 눈을 살며시 떠보기로 결시맿ㅆ따. 만약 여지가 생긴다면 내 게도 숨을 돌리고 정신을 가다듬을 여유가 생기니 말이다. 아주 살짝, 요만큼, 실눈만큼만...... 아이고.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리 속을 100톤쯤 나가는 쇠망치가 후 려친 느낌이었다. 그 실눈 바로 앞에, 욕조 가에 걸터앉은 최마담의 하반신이 들어왔던 것이다. 언제 들어섰 는지 그녀는 종아리만 물 속에 담그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탕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나는 머리통 절반쯤이 열려져 어디론가 휙 날악나 것만같았다. 서서히 하체부터 잠기기 시작하는 누님의 몸, 그곳은 코앞에서 채 일이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35 아아, 우째이런 일이. 사방 둘레가 족히 두 길은 되는데- 내 옆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 각선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맞은편인가. 결코 감은 실눈을 왕방울만하게 뜰 수도, 그렇다고 다시 감을 수도 없었다. 내가 훔쳐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걸까. 그녀는 마치자신의 몸매를 자랑이라도하듯내 정면에 몸을 담그고 있었따. 그것도 아주 천천히. 매끈한 종아리가 잠기고...... 달걀처럼 동그란 무릎이 잠기고...... 허연허벅지가 잠기고...... 그 다음엔? 물기로 촉촉한 그녀의 삼각주. 팔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서 훤히 드러난 그 뽀얀 아랫배의 살결 한가운데 중심부가 느리게, 아주 느리게...... 이어서 그녀의 커다란 두 반구, 젖가슴이 물 속으로 잠기는 순간, 더 이상 감내할자신이 없어진 나는 꼬르륵 눈꺼풀이 뒤집혀지기 일보직전에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초연하자. 이, 이건 꿈이다. 생시가 아니야. 여긴 지옥- 아니 오히려 천국인가? - 일 뿐이 다. 신이시여, 저를 부디 시험에 들지 말게...... 이제 머리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동생 왜 그래? 어디 아파......?" 최마담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이윽고 물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으...... 윽!" 나는 정말로 소스라친 신음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찰랑이는물소리와 함께 내 곁으로 다가온 최마담이 내 몸을 건드린 것이다. 물위로 드러난 내 어깨를. 펄쩍, 전기가 오른 듯 욕조 안에서 뛰어오른 나는 하마터면 벌거벗은 채로 뛰쳐나갈 뻔했 다. "어머, 까짝이야......!" 그 바람에 그녀가 더 놀랐나 보다. "왜 그래, 동생...... 어디 아파?" 대답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 그러나 놀ㄹ나 듯한 어투도 잠시, 최마담의손길이부 드럽게 내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새 바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물이 뜨거워서 그래......? 난 딱 좋은데......" 단지 가벼운 접촉일 뿐인데도 내 몸은마비라도 된 듯 꼼짝을 할 수없었다. 내 자세는 아직도 차렷자세였다. 딱 붙인 무릎, 꼿꼿한 허리, 단손 만큼은 사타구니를 가리느라 하복 부에 모아 쥔채로. 분명 물이 뜨거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흘리는 땀방울은 온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야? 말해, 온도 좀 낮출까?" "아, 아니요......!"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은 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그...... 그냥...... 가, 갑갑해서......" "어머, 뭘......? 여기 들어온 지 5분도 안 됐을 텐데. 남자가 뭘 그래? 원래온천욕은 15분 정도가 딱 좋은 거야." 아이고오, 그걸 누가 모르나요. "물도 별로 안 뜨겁다면서...... 왜 꼭 노인네처럼 그러고 있어? 눈 좀 떠 봐." 그럴까. 하기야 너무 오래 이러고 있어도 어색할 것 같다. 엉어주춤, 간신히 뜬 눈. 하지만 옆에 찰싹 달라붙은 최마담 쪽으로는 결코 눈을 돌리지 못했다. "어때? 여기가 훨씬 오붓하지? 사람 많은 곳보다는......아유, 우리나라는 왜 노천욕이 없 는지 모르겠어. 일본은 전부밖에 있던데." 노천욕이라, 들은 적이 있다. 그냥 연못처럼 온천수를 받아놓고 야외에만들어진...... 하지 만 거기도 남녀혼탕이라던데? "여, 여기는 원래...... 이, 이런 곳밖에 없나요?" 한 번 묻기라도 하자. 나는 그녀의 그 뜬금 없는말에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탓이라도 해 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면 그녀는 애초부터 이런 개별적인 곳에서 나와 함께 하려 했던 게 아닌가. "아냐...... 대중탕도 있어. 왜?" "그, 그럼 이, 이런 데는......" "응, 원래 이 호텔에서는 객실 손님에게 가족탕을 줘." 가족탕......! 그게 이런 곳이었구나. "몰랐어, 이런 곳? 식구들끼리 오붓하게 목욕하는 거지뭐...... 좋잖아......!" 그 말에 나는 또 아연실색했다. 식구? 내가 어째서 최마담과 가족이란 말인가. "그, 그래도 하필이면 왜...... 저, 저는 이런 곳에 올 줄은......" 어쨌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온천욕, 물론 좋다.그렇지만 왜 이런 은밀하고도 폐 쇄된 장소에 이 누님과 나, 단둘이 있어야 하나. "여, 여긴...... 혼탕인 줄 모, 몰랐는데......" 눈길가에 흘끗 쳐다보는 최마담의 시선을감지했다. 그녀는 계속 더듬거리는내 어눌한 말투를 조용히 듣고만 있는 주, 그런데 그 순갖 또 다시내 몸은 감전된 것처럼 짜릿 저려 왔다. 그녀의 팔이 부드럽게 내 등을어루만져 왔기 때문이었다. 마사지하듯천천히 전해지는 그녀의 손길, 이건 진짜 집안 식구나 할 행동이기에 내 속은 갈증이 나는 듯 울렁이기 시작 했다. 그녀가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나랑 목욕하는 게 싫어......?" 그 반문에는 당장 할 말이 없다. "아, 아니요...... 그, 그게 아니라, 왜...... 왜 꼭 이런 곳에서......" 목욕을 해야 하는 건가요라고 말하려는데, 문득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느긋하게 타일욕조에 몸을 기댄 채 묘한 말을 꺼냈다. "후...... 좋아, 창희. 창희한테 나는 뭐지?" 이건 또 무슨 질문일까, 난데없이 예의 그 이상야릇한 화제를 들이대다니. 의아한 내가 주 춤거리며 돌아봤지만 최마담은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말해 봐. 동생한테 나는 어떤 사람이야?" 나는 머리 속으로 피가 한 바퀴 돌아, 확 깨는느낌이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그 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잡히지가 않았다. 일단은 교과서적인 대답이 나왔다. "어...... 저...... 누, 누님이요......" 현재로서는 가장 모범적인 말. 그러자 피식,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훗, 그래...... 누님, 누님이겠지......" 최마담은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멈추었다. 그녀가 내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 는 것이따갑게 느껴졌다. 차마 그녀의시선을 마주 볼 엄두가 없는나는 허공으로 눈길을 두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기억나? 화요일 날, 차안에서 우리가 무슨 얘기했는지......?" 화요일? 기약도 없이 내 자취방 앞에서 늦은 시간까지 그녀가 기다리던 날? "동생이 물어 봤었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창희 동생에게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어찌 그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예 대놓고 질문했었다.최마담, 지금 내 바로 옆 그녀 가 내게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그 해답은 풀리지 않고 있 었다. "그 때 그랬었지? 이 누님이...... 창희를 남자로 보는 게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 지?" 뭐라 그랬더라? 내가 자기를 여자로 보면 자기도 나를 남자로 본다...... 뭐 이런 모호한 얘 기를 해서 날 엄청 난감하게 했었는데.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지, 다음에......?" 그 다음? "대답해 봐. 내가 어쩌자고 말했었지?" 엉뚱하게도 이 누님은 다그치기까지 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다, 다음에 따, 따로 만나서...... 서로를 잘 알면 될 거라고......" 맞다.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어느 정도는 묵시적으로 동의한 이야기. 따로 다른 곳 에서 각별히 만난다면 상대방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후후,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게 원하던 대답이었을까. 그제야 혼자웃음을 터뜨리며 물장구를 치듯 몸을 누이는 최마 담, 그런데 자칫 잘못 들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황당한 이야기사 그녀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 왔다.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이렇게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잖아?" 뭐, 뭐라고요? 맙소사. 그 말은 나를 기절초풍 시키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둘이서, 아무 것도 가린 것 없이 이렇게 있으니까...... 이것보다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방 법이 뭐가 있겠어?" 다시금 내 관자놀이에선 현관이 거꾸로서는 느낌이었다. 이, 이런말도 안 되는 억지- 발가벗었으니 상대방을 잘 알 수 있다? 그 때였다. 마치 이불 속에서 돌아눕듯, 최마담이 욕조 속에서 가로눕고 있었다. "어때......? 동생, 이제 이 누님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어?" 야릇한 속삭임에 뒤이어 나는 다시 한 번거의 물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욕조 안에서 허리를 화들짝 일으켜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 최마담의 손길이 갑자기 물밑 내허 벅지 위에 얹혀졌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허리 아래까지는 미처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거다. "후후...... 동생...... 얘기해 봐, 나...... 어때? 이제 내게 어떤 생각이 들지?" 순식간에 내 머리 속은 완전히하얘졌다. 이건 틀림없이 나를여자로 여기느냐, 아니냐, 그 질문이었다. 그렇게 몸을 빼냈는데도 계속해서 최마담의 손은 내 허벅지를쓰다듬고 있었다. 이제 숫 제 아래위로 문지르듯 움직여 왔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탕 안에서 몸을 돌려 앉아 거의내 몸에 밀착시키다시피 했다. 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팔꿈치께에 닿은 이 감촉은...... 보지 않아도알 수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두젖가슴. 그리고 동시에, 내 무릎께로 걸쳐지듯 다가온 것은...... 으아, 그녀의 허벅지였다. 최마담이 은근히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떨리는 내 하체, 조그만 움직였다가 는 정통으로 그녀의 하복부, 사타구니 사이에 접촉할 판국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의도 는 스스로 자신의 허벅지 사이를 밀착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에 몰려 빠져나갈 방법을 궁이해봤으나, 여전히진퇴양난이었다. 뛰쳐나간다면 내 벌거벗은 몸을 통째로이 누님 앞에 드러내게 될테고, 그렇다고 그녀의 손길을 제지할 수도 없으리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더 아찔해지는 머리 속. 그녀의 손이 내 가랑이 사이로 조금씩 접근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왜, 말하기 싫어......?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는데......" 여긴 우리 둘뿐이다...... 정녕 무억을대답하란 말인가요, 내가 보이고있는 반응은 고작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두방망이질 치고 있는 심장소리만이 유일했다. "저...... 저...... 이, 이러지...... 아, 아니...... 자, 잠깐만......" 간신히 목구멍을 뚫고 나오는 내 말은, 거의 혀가 굳은 채였다. "그냥 편하게 얘기해, 창희. 우린...... 누나동생 사이잖아." 말도 안 된다. 대체 뭐가 누나동생이란말이냐, 진짜 친누나라면 절대 이 나이에이렇게 함께 욕조 안에서 몸을 비비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젠 우리...... 숨길 것없잖아? 내가 알기론남자들은 같이 목욕하면 금방친해진다던 데......? "제, 제발...... 그, 그래도 누, 누님...... 이, 이러고 계시면......" "으응, 먼저 대답해 봐...... 난 창희 속마음을 알고 싶어. 어때? 이제 내가 무러로 보여? 여 자로 보여?" 급기야 그녀의 목소리엔 이제 비음마저 섞이고 있었다. 안된다. 정말 이래선 안 된다. 나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 어떤 말이건, 이 런 그녀의 행동 앞에선 대꾸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대답한다 하여도 그녀의 노골적 태도로 보아 이 은근한 수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결정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이 최마담에게 농락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있잖아, 나는...... 동생이......" 뭔가 그녀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나로서는더 들을 겨를이 없었다. 도저히 견딜수 없게 된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제 결심했다. 비록 그녀의 기분이 상할지라도, 이제 분명한태도를 보여야 했다. 내 반 응의 결행을. 어쩔 수 없이 나는 동시에 두 팔을 뻗었다. 한 손은 내 사타구니에 다다른 그녀의한 손, 다른 한 손은 내 얼굴까지 더듬어오려는그녀의 나머지 한 손...... 그렇게 한손...... 그렇게 최마담의 두 손목을 순간적으로 붙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될 수 있으며 부드럽게 밀어낸 채, 꼭 쥐었다. 붙잡은 손목을 놓지 는 않았다. 그러면 마치 밀쳐내 뿌리치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누, 누님, 저는......" 내 재빠른 행동에 이 누님의 눈동자가 휘동그레질 것은확실하리라. 어쨌든 나는 당신을 여자로 보지도 않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라는 말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그러니까 누, 누님을 여자로......" 황급히 말을 내뱉는 동시에, 드디에 나는 이 욕실 안에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그녀의 얼 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 이상했다. 그녀에겐 실망스러울지 모르는 얘기를 하려는 중인데, 최마담은 의외로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그녀의 눈동자는 내 눈을 보고있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거지? 내가 코앞에서 쳐다보는데...... 그녀는 다른 쪽, 욕조안의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입꼬리를 묘하 게 말아 올린 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길을 따라간 내 의아스런 시선. 다음순간 나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36 이런 제길! 졸지에 낯뜨거운 광경 하나가 최마담의 시야 끝에 펼쳐져있었다. 욕조 중간쯤에 계단처럼 튀어나온 턱, 거기레 엉덩이를 걸치고있던 차에 가뜩이나 무릎 을 세우고 꼿꼿한 자세로 앉은 내 허리는 채 수면 아래로 10여 센티도 못 되게잠겨있었던 것이다. 그 위치에서 무슨 일이일어났겠는가, 그것도 아까부터 최마담의아찔한 육탄공세를 온 몸뚱이로 겪고 있던 내가. 그녀의 팔을 잡느라, 필연적으로내가 사생결단으로 가리고 있던부분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뿔싸, 최마담이 목격한 것은 그것이었다. "어...... 어......" 무슨 정신병자 모양 헛소리만을 흘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너무나 창피하여 다시 그녀의 팔목을 놓고 하복부를 가릴 수도, 그렇다고 물 속에서 빼낸 몸을 다시 담글 수도 없었다. 몇 초쯤 흘렀을까. 짧은 촌각이 몇 시간보다도 더 길게 띠잉 머리 속을 울리고 있는데, 황 당한 내 코앞에서 그녀의 몸이 솟아 올랐다. 봉긋한 유방, 잘록한 허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끄러운 하복부까지...... 조금 전 들어설 때 와 반대의 순서로 그녀의 몸이 남김없이 드러나도록,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당혹스런 순간을 먼저 피해 준 것은 누님이었다. 아직도 멍청히 손목을 쥔 내 손아귀에서 가만히 빠져나가며 그녀는 한층 더 당혹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호호...... 아이, 귀여워. 우리 창희......!" 최마담은 거리낌없이 자신의 나신을 내보이면서도 정말로 귀엽다는 듯 웃어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비웃음처럼 들리는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할 수만 있다면 귀까지 틀어막고 싶었다. 실로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들어당혹감이 치욕스런 기분으로까지 치달았 다. 물결소리를 내며 욕소 밖으로 나간 최마담의 몸뚱이. 곧이어 쏴아아, 샤워기 소리에섞여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난 동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어." 더 이상 비웃는 투가 아이었다. 차라리 자신에 대한 자조가 섞인 듯했다. "당연히 어떻게 말할지, 뻔한 것 아냐? 역시...... 자기는 너무 착해!" 뻔하다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녀 쪽을 바라봤지만, 차마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녀 는 욕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천천히 목욕하고 나와." 그 말과 함께 유리문 밖에는 다시 옷가지를 걸치는 자태가 비쳤다. 귀엽다. 뭐가 귀엽다고 한 걸까. 허둥대는 내 모습이? 아니면 설마 내 아랫도리가? 나는 새삼 재사. 그녀가 틀림없이 바깥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냉탕으로 들어가 계 속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힐 수 있었다. 결국 한 십여 분도 더 늦게 그녀 뒤를 따라 욕실을 나섰다.없는 것이 없는 그곳은 드라 이기는 물론 내 방 로션보다 비싸 보이는 향수까지 갖춰져있었지만, 나는 누군가 다시 들 어오기라도 할까 봐 동작을 서둘렀다. 그런데 엉뚱한 문제가 옷장 안에서 발생했다. 라커를 열어 본 나는 일순 당황하고 있었으 니, 내 옷가지들, 심지어 양말까지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몽땅 사라진 게 아닌가. 그곳에는 대신 깨끗하게 포장도 뜯지 않은새 속옷과 고급스러운 가운만 덩그러니놓여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내 옷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무얼 어째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그 때바깥문이 똑똑똑, 두드려졌다. 문 밖에서 아까 맨 처음 입구에서 안내해 준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옷 다 입으셨습니까?" "어, 그, 근데요...... 제, 제 옷이 전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내 대답에 한껏 예의를 차린 여종업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손님 옷은 전부 클리닝 들어갔으니까, 나중에 룸으로 갖다 드리겠습니다.안의 슬리퍼랑 가운 이용하시면 됩니다." 룸? 클리닝? 그제야 나는 자초지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호텔시설을 처음 구 경하는 나로서는, 내 옷들이목욕하는 동안 자동적으로 수거되어세탁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얼떨떨한 나는 결국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질끈 가운을 동여매고 밖으로 나오자 예의 그 정복을 입은 아가씨가 공손히 나를 안내했다. 그 뒤를 따라간 곳은 무슨 식당처럼 생긴 널찍한 홀이었다.알고 보니 그곳은 실제로 식 당인데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그 안의몇몇 손님은 전부가 나처럼 가운에 슬리퍼 차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종업원은 어느 룸처럼 칸막이가 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곧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사라졌다. "이리 앉아." 호사스럽게 꾸며진 테이블에 최마담이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가운만을 걸친 그녀가 나 를 손짓해 불렀다. "여긴 한식인데...... 괜찮아?" 뭐라고 하겠는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희 것은 맥주 시켰어. 그게 낫지?"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말끔한 차림의웨이터가 음식을 날아오기 시작했는 데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럽고 정갈한 음식들이다. 그녀가 눈짓으로 내 앞에 놓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것 마셔 봐. 동생 마시라고 특별히 주문했어." 조그만 양주잔에 담긴 액체, 그녀가 가리킨 것은 그것이었다. "냄새가 좀 그렇지?" 과연 말대로 냄새가 무척 싸하니독특했다. 안의 맑은 것은 소중니듯했으나 마치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 잔 한가운데 조그만 청록색 액체가 퍼지고 있었다. "이, 이게 뭐데요?" "묻지 말고 일단 마셔. 마시고 난 후에 가르쳐 줄게." 그녀는 재촉하는 목소리로 강권하고 있었다. "글세, 우선 먹어 봐. 몸에 좋은 거야." "그, 그래도......" 몸에 좋은 거라, 물까? 미심쩍었짐나 일단 소주에 섞은 것이라니 못 먹을 것도 없었다. 대 체 뭔지 몰라도 일단 그냥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울컥, 하마터면 구토를 일으킬 뻔했다. 냄새도 소주고 맛도 소주인데 쓰기는소주 의 한 백 배 정도 쓴맛이었다. "크...... 이, 이게 대체 뭐예요......? 아후......" 그러나 누님은 지독하게 찡그린 내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응, 그거...... 약이야, 약." 약? "예? 무, 무슨 약이요?" "으응, 알잖아. 남자 몸에 좋은......" 남자 몸에 좋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아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몰라? 그거...... 비싼 거야. 아마 얼만지 들으면 동생은 까무러칠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최마담이 약이라고 한 그 액체는 별반 음식을 가리지 않는 나인 데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 남자들...... 정력에 말야."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물론 무어니 무어니, 남자 정력에 좋다는 약에 관한 속설은익히 들어봤지만, 대체 그런 걸 왜 내게 먹인단 말인가? 슬슬 불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족탕이랍시고 알몸으로 함께 목욕을 하자던 그녀, 거 기에다 이젠 정력제라니. 이건 뭔가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배고프지? 벌써 저녁시간이 다 됐는데......" 사실 배가 고플 때가 되기는 했다. 먼길을 오고 나서방금 목욕까지 한 상태였으므로 아 까 오전의 산채비빔밥은 이미 소화된지 오래였다. 나는 일단 옆의 맥주를 따라 목을 축였다. 뭐가 됐든 정신을 차려야 하니까. 나는 남자로, 아니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니 어쩌니- 아무리 그렇다해도 최소한 지금 그 녀는 나를 남자로, 여성인 자신에게는 반대인 성인 남성으로 대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그 속셈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한숨소리가 들렸다. 생각을 다잡느라 잠시 골몰했던 내가 고개를 들자 그전까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ㅇ느 최마담이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술은 맥주가 아니었다. 주전자에 들은 것을 보아하니당연 맥주보다는 독한 술일 터. 그런데도 그 주전자에서 거푸 술을 따라 잔을 비워내는 그녀였다. 이상한 일, 목욕할 때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며 웃음을 처뜨리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지 고 있었다. 나는 주억거리던 젓가락을 놓아야 했다. 왠지 그녀의 모습에 주눅이 드는 것같 았다. "저...... 누님은 뭐 안 드세요......?" "으응...... 아니, 동생 많이 먹어." 그러면서 그녀는 또 한 번 빈 잔을 내려놓고있었다. 이래가지고는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 없을 것이었다. 확언할 수는 없더라도 정작 아찔함은 이제부터인 것 같았다. 최마담의 말, 내가 뭐라 얘기 할 줄 알고 있었다...... 그 말이 곰곰 되씹혔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아까 제가 대답 안 해서 화 나셨어요?" 그녀가 씁쓰레한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 내가 왜 기분 나쁘지? 기분 나쁜 것은 창희 동생아닐까?" 마주 보는 그녀의 시선. 글쎄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그렇게 얘기한다면 그 당혹스 런 경우를 당했던 것은 분명 그녀가 아니라 나일 텐데,지금 보기에는 오히려 최마담의 눈 빛이 우울한 빛을 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까...... 나 때문에 기분 안 좋았지?" 무슨 말이냐. 아마도 목욕탕 안에서 벌어졌던 불의의 사고를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난처했던 것은 나였으니 내가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녀 의 표정은 그 앞에서 감히 그런 내색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랬을 거야. 굉장히......" 한번 더 작게 내쉬는 최마담의 한숨소리.그녀의 괴롭다는 듯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비워진 것을 알고 테이블 위의종을 흔들어 웨이터에게 새 술 한 주전자를 다시 청했다. "처, 천천히 드세요......!" 무슨 얘기를 하고픈 걸까. 어렴풋이 짐작이 갈 것 같았다. 어쨌건 나는 아까 욕탕안에서 최마담에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아무래도 지금 분위기상 그녀의 페이스에 계속 끌려 다닐 것같았다. "누, 누님...... 자꾸 독한 술만 드시지 말고 안주라도......" "아니!" 순간 내 얘기를 끊는 그녀. "내가...... 내가 나쁜 년이야, 못된 년!" 엉? 난데없이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게다가 눈가에 물기까지 머금고 있는 게 아닌가. "창희...... 동생이 보기에도 나 참 나쁜 년이지?" 어어...... 점점. "아까, 무슨 말 할 건지 다 알고 있었어. 말 안 해도 다......" 흐흥, 이제 그녀는 스스로 자신에게 코웃음마저 치고 있었다. "나...... 여자로 안 보이지? 그렇지? 알고 있어. 자기가 무슨 말할지......" 어이없을 뿐인 상황이기게 미처 깨닫지 못하는 나에 대한 호칭 '자기'. "그래, 당연해...... 이제 갓 스무 살 도련님한테 내가 무슨 여자로 보이겠어." 그녀는 스스로 자문자답했다. 대체 이건 무슨 얘기인지, 미처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않았 다. 아직 술기운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주전자 하나로 취기가 오를 리 는 없는 일, 그런데도 그녀는 자꾸만 자기를 비하하고 있었다. "누, 누님...... 저, 저는......" "아니, 내 얘기가 맞아. 난 다 늙고...... 추해 보일 거야." 애당초 내 말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그녀는 탄식만 거듭해댔다.어쩔 줄 몰라 나는 되 는 대로 말을 주어 섬기기 시작했다. "그, 그렇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 나는 그만 훅, 숨을 들이마셨다. 아까욕탕 안에서 몰래 훔쳐본 그녀의 뒷모습이떠오른 까닭이었다. 그 이십대 못지 않던우윷빛 몸매가- 그런데 다시 그녀의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바보, 마보 자식아!" "예?" "바보야, 자기는.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자기는 아직도 누님이야." 무슨 말인가 싶어 머쓱했던 나는 아차 싶었다. 그러나종횡무진 그녀에게서 다시 자탄의 소리가 이어졌다. "어쨌든 욕심 많은 년......그치? 나 말이야......열 살도 더어린 동생한테 추태나보이 고...... 나 정말 추해 보이지?" "아, 아네요...... 누, 누님은 느, 늙어 보이지 않아요. 정말요......!" 알수 없는 말이었다. 욕심, 정녕 뭐가 욕심이라는 건지. 다만 확실한 것은 작정이라도 한 듯 계속 술잔을 드는 그녀였기에 필경 곧 실제로 취기가 오를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후훗, 나 위로할 필요 없어.나...... 나를 알아. 내가 창희에게얼마나 기분 나쁜 존재인 지." "그, 글세 아니라니까요. 기분 나쁘다뇨, 제발 좀 천천히 드세요, 예?" "아냐, 난 늙었어...... 서른도 훨씬 넘어서 이젠 중반에 이른 노처녀라구." 또 한 번 기울어지는 술주전자. 그런 고로 나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어휴, 나는 재빨리 팔을 뻗어 연신 입가로 술잔을 가져가는 그녀의 손을붙잡았다. 이러 다가는 내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참, 아니라구요......! 누님 추하지 않아요, 오히려 어려 보이시는 걸요!" 억지로 잔을 내려놓게 했다. 어느 정도 그 말은 가실 이었다. 아까 벌거벗은 그녀의몸을 훔쳐봐서도 알지만 그녀의 몸매나 얼굴은 분명 30대 중반에 비추어탄탄할뿐더러 술집 얼 굴마담답게,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 아닌가. "하나도 안 추해요. 거기에다가 누님은 미인이시잖아요!" 성급하게 지껄인 내 말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최마담의 눈동자가 게슴츠레 반짝였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녜요, 누님...... 아니 누나야말로 아니라구요."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술을 눌렀다. "진짜......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어휴, 정말이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무슨 말이든 못하랴. 그러자 문득 낮게 깔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럼...... 창희, 창희는......" 그녀가 쓸쓸하게 술잔을 응시했다. 아직 나는 내가 꺼낸말이 실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그렇다면...... 동생은...... 내가 그런 여자로 보여?" 그런 여자라니? 최마담은 뭔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아주 작게 머뭇대는 목소리 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아직 늙어 보이지 않는다면...... 거렇다면 말이야......" 그녀의 속삭임, 잠시 뜸을 들인 누님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나를 그런 여자로 대할 수도 있겠어?" "그, 그런 여, 여자로 대하다니요......? 어떤 여자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쿵, 가슴이 내려 앉고 말았다. 누님의 끊어졌 던 이야기는 실로 엄청난 말이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여자 말이야...... 남자에게서의 여자.이런 곳에서 위층으로 올라가소 싶은...... 그런." 그런 여자- 위층, 룸. 여기는 호텔 안. 내 머리 속으로 겨우 몇 잔 마시지 않은 맥주의 취 기가 아찔하게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뻗쳐오는 마수 37 욕심많은 년, 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그 욕심, 누님의 욕심은 그것이었단 말인가. 흘려듣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저 단순히 자신을 여자로 보아 달라는 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갈 만도 하니, 순수한 남자 대 여자, 서로의 사이에 애정을 전제로 한 이야기라면 그 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여기 최마담은 뭐라고 했나. 내가 성적인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여자...... 즉 자신의 욕심이란 내게 '그런' 여자로 보이고 싶다는 말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가자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는나이 어린 나보다도 그녀가 훨씬 더 잘 알리라. 그렇다면 그건 보통의 정상적인상황하에서 여자로 느껴달라는 말과는 절대 같은 의미가 될 수 없었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어떤 표정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휘 둥그레진 눈은 물론이요, 할 수만 있다면 입도 떡하니 벌어져 있으리라. 그렇게 멍청히 마주 앉은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누님의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있 는데...... 먼저 얼굴을 돌린 것은 그녀의 쪽이었다. "훗...... 대답하지 않아도 돼!" 최마담은 다시 아까의 자조적인 목소리로 돌아갔다. "황당하지? 그렇지......? 불쑥...... 그냥 해 본 소리니까 신경쓰지 말아." 그녀는 술잔을 내리게 하려고 붙잡은 내 손을 뿌리치며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설사 그게 진담이라도...... 동생이...... 동생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 지금 내 앞에서." 어째서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지, 나로서는 도통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뜻을 간파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최마담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멍하니 자기 잔 위로 눈길을 던졌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충격이 가시지 않아 말을 멈췄을 뿐만 아니라 머리 회전도멈춘 지 오래인 나에게, 그녀 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왠지 슬픈 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선택권, 아니 자유가 없어...... 누구에겐가 잘해줄 수 있는 자유가." 후우, 또 한 번 누님의 한숨소리. "무슨 얘기냐면...... 나한테는 자유의사가 없었다고. 선택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었어." "서...... 선택이라뇨......?" "그렇잖아. 동생 나이 또래부터...... 난아무나, 내 손님이면, 그저잘해줄 수밖에 없었단 말이야.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 원하지 않는 가람들이 나를 택했을지라도 무조건잘해야 했지......" 잠시 그 선택이란 단어가 최마담 자신을 여자로 보아 달라는 말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 까 의아스러워 했지만 한탄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 느껴지는 최마담의 목소리인지라 나는 다시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사람한테 좋아서 그런 건 줄 알아? 아니야. 어쩔수 없었어. 내 직업이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했지, 죽으라고....... 그들이 뭐라고 하건, 웃어 주고...... 아양떨 고...... 때로는 비계살들한테 몸까지 주면서......" 그녀의 잔이 거푸 기울어졌다. "자기는 모를 거야. 나 원래 이 짓 처음 시작할 때 어쨌는지 알아? 무일푼?푸훗, 웃기고 있네. 빚만 2천이었어...... 내 몸뚱이에 붙은 빚만 2천......! 원할 자유가. 당연하지, 그런빚덩 이 주제에 내게 그런 여유가 어디 있겠어?" 뜨끔하면서도, 우와, 하는 느낌이었다. 2천은 보나마나 2천만원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나로 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였다. "물론 다 그랬다는 건 아냐. 내가...... 내가 먼저 좋아서 매달린 남자도있었고. 나 좋다고 들러붙은 남자도 있었고, 하지만 모두...... 도로아미타불이었어......결국 그 자식들이 바라는 것도 내 싸구려 웃음과, 싸구려 몸뿐이었으니......" 우수 정도가 아닌...... 비애가 섞인 최마담의 음성이었다.눈길을 돌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어린 것 같았다. "난 그래도 그 사람들 좋아했었어. 아니, 사랑했었어. 정도 줬다고...... 그런데 다 마찬가지 야. 그들이 원한건 하수구야. 하수구. 나라는 년에게 갈기고 도망가는......" 섬뜩한 표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말을 끊었다. "내가 지난번에 그랬지......? 동생 없어서, 가족 없어서...... 누구 하나골라서 잘해주고, 뒷 바라지하고 싶다고...... 기억해, 창희?" 그, 그랬었다. 그래서 날 동생 삼겠다고, 의남매처럼 지내자고...... 나는 엉겁결에 최마담에 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귀찮다는 투로 내뱉았다. "근데 그게 다 거짓말이야!" 예에......? "나 말이야, 자기가 보기에는 주책일지 모르지만...... 꿈이 있었어. 꿈...... 그게 뭔지 알아?" 모, 모르겠는데요- 이번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연애 한 번 하는 거였어. 연애...... 돈 많은 남자들, 내 얼굴 보고, 몸매보고 오는 그런 작 자들이 아니라...... 착하고, 순진하고...... 많이 배운남자한테, 바랄 것 하나 없이해주는 연 애......!" 난데없는 이야기에 더불어 어이없는 이야기였다.그리고 그녀는 그 대목에서소파 뒤로 깊숙이 물러나 앉았다. "돈만 있고 대가리는 텅텅 비어 무식하게 내 엉덩이나주무를 생각만 하는 인간들 말고, 근사한 대학생 있잖아......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나 못 배운 것 많이 가르쳐주고......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어도 돼, 그냥 그건 내가 해줄 수 있어...... 난, 그런 사람한테단 한 번이라 도 나를 바치는 게 소원이었어." 푸훗,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건 정말 꿈이었던 거야. 생각해 봐. 내가 그런 가난 한 남자를 만날수 있었겠 어? 바리바리 돈 싸든 부자들이나 나를 찾지...... 그런 데에 그 없는 사람들이 올 수있었겠 냐고. 착하고...... 순진하고...... 공부 잘 하고...... 돈 따위는 모르는 대학생...... 그런 사람을 만 나기가......" 나는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2천 만원이란 빚에서 출발하여...... 어땠는지는 몰라도 커다란 단란주점의 여사장까지 된 그녀. 그녀는 자기가누리지 못한 욕구와 신분에 대해 누군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날, 어느날 나는 뭔가 달라진 걸 알게 됐어. 그게 뭔지 알아?" "아, 아니요......" "내게 자유가 생겼더라고. 드디어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 원치 않는 몸뚱이 밑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사람 밑에서 행복을 느껴볼......"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가장 극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왠지 긴장이 되어 목구멍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후후, 그게 아니었어. 아니었던 거야. 이제 내가 연애 한 번 멋있게 하려는데...... 이제 비 로소 모든 꼴보기 싫은 사내들을 거부할 수 있게 됐는데...... 그만 내 나이는 어느새연애란 말은 어울리지 않게 추해졌더라는 얘기지. 거울 속엔 이십대의 화사한 얼굴이 없고,주름지 기 시작한 노처녀의 얼굴이 있었어. 누가 믿겠니? 서른도 더 된 여자가 연애는 무슨 연애!" 아아, 나는 왠지 가슴이 저려왔다. 비록 화류계에 몸담아 삼류의 삶을 지낸최마담이었으 나, 그 마음만큼은 그런 대로 장밋빛 환상을 간직했었고 또한 다른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그 소망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였다. 착하고, 순진한 정을 줄 남자. 아니 그녀가 정을 바칠 수 있는 남자. 못 배운 그녀보다 똑 똑하겠지만, 대신 돈 한 푼 없는 남자. 마치 영화 속 스토리 같아도 서글프기는 진배없었다. 그것이 전부 물거풍이라니...... 그런데- 어라, 잠깐! 순간 나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지, 지금 그녀의 소원이라는 남자, 영화나 소설 속주인공 이야기...... 맙소사, 설마? 가난 한 대학생, 그건......? 나는 뜨악해진 눈으로 최마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술에 젖은눈동자가 나를 마주 올려 다보았다. 이럴수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그녀의 소원이 나라는 것만은 말이다. 38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내 의문이 아니었다. 괴로운 표정을 짓던 최마담이 술주전자를 들어올려 흔들고 있었다. "응...... 술이 떨어졌네......?" 그새 또 하나의 술주전자가 비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병 더 청하려는 그녀를 서둘 러 제지했다. "누, 누나......! 제발 그만 드세요. 이, 이따가 돌아가야 하잖아요!" 그게 현실이었다. 세 주전잔지 네 주전잔지, 현재 취기로도 힘들다 싶은데 이러다가는오 늘은 운전을 못할 수도 있는 일. 이미 저녁 시간인데...... 그것과 아울러 그녀가 더 술기운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했으니, 그냥 돠두었다가는 내 섣 부른 의구심이 그 결과를 확인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조용해진 최마담-그녀가 언제 다시 조금 전처럼 황당한 이야기를 할지 모르기에 나로서는 그녀를 최대한 자제시켜야 한다 는 얘기였다. "지, 지금도 누나 약간취하신 것 같아요.그, 그러니까...... 술마시지 말고 좀쉬세요, 예?" 거의 필사적인 내 부탁이었다. 아니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그에 따라 간신히 그녀도 난 처했던 질물을 잠시 넘기고 있었다. "후...... 그래? 내가 취해 보여?" 흐흥, 코웃음을 치는 누님. "아니...... 취한 게 아니라 추해 보이는 거겠지. 그래, 추한 걸거야...... 좋아, 더 안 마실게." "그, 그런 게 아니라요......" 다시 자학적인 분위기로 돌아오는 그녀.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까. 그녀는 술을 포기한 채 몸을 일으켰다. 아뿔싸,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 누, 누나!" 일어서던 최마담의 몸이 갑자기 한쪽으로 쏠렸던 것이다. 후닥닥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비틀거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몸을 뻗어지탱했지만 이미 누님은 상당히 취한 모양, 그녀의 얼굴에서 진한 술냄새가 끼쳐왔다. 그러게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더니...... 어쩌랴, 이건 이미 내가 자초한 실수였다. "놔, 이거...... 나 괜찮아...... 술 안 취했어." 최마담은 억지로 내 팔을 뿌리쳤으나 아무리 보아도 장난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미칠 노릇이다. 이 일을 어쩐담? 다급해진 나는 일단 그 장소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최마담은 축 늘어 지기 시작했다. "나 안 취했다니까...... 걸을 수 있어......" 주절거리는 말 따위는 무시해 버려야 했다. 몸을 빼려는 그녀를 반강제로 얼싸 안다시피 어깨동무를 하고서,그 한식당 룸에서 데리 고 나왔다. 일단 어디서 바람이라도 쐬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이 목욕가운 차림으로 어 디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그 때였다. 마치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어다. 다름 아닌 아까 가족탕이란 곳부터 우 리를 안내하던 그 여종업원. 그녀가시키지도 않았는데 깍듯한 표정으로누님과 나에게로 다가왔다. "손님, 이쪽으로......" 막막한 순간에 그 아가씨는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다. "대답해 봐. 나...... 여자로 안 보이지? 그렇지? 추해 보이지?" 민망해 죽겠는데 내 팔에 매달려 혼잣말을 지껄이는 최마담.나는 그녀를 추스르느라 여 력이 없어 대꾸도 변변히 하지 못했다. 앞장 선 저 종업원이 듣는다면 이 일을 어찌 생각하 랴. 하지만 그 아가씨는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영문도 모르고뒤쫓은 내가 비틀거리는 최마담을 가까스로부축하여 도달한 곳은 한 엘리베이터 앞. 그 아가씨가 나를 보며 한껏 지어낸 미소로 돌아섰다. "사모님이랑 쉬실 곳은 5층. 505호실입니다." 뭐라고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누님과내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예정된 사실이었다는 것을- 종업원 아가씨는 손수 엘리베이터 안으로 따라 들어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입으셨던 옷들은 룸 안에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 나와 최마담이 지금 호텔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39 아래층에서 마신 술- 물론 나야 맥주를 마셨지만누님이 마신 술은 꽤 독한 술인 것 같았다. 어지간한 상태로 최마담의 발걸음은 내 어깨에 매달려 비척거렸다. 미치겠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그녀의 몸을추슬러야 하는 나는 도무지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불안한 마음을접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저국으로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도리가 없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호텔방에 들어가 누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그런 나와 누님을 안내한 여종업원은, 널찍한 복도를 지나 한 객실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녀가 등뒤에서 문을 닫아 주며 남긴 난감한 마지막 인사였다. 허 참, 도대체 지금 이 누님과 내게 무슨 좋은 시간이 되라는 말이냐. 생각 같아서는 그 아가씨에게자초지종을 설명해도 모자랄 것같은데, 엉뚱하게도 나는 직후 그런 쓸모 없는 생각을 곧 접고 있었다. 야아, 그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속으로 감 탄사를 연발하게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학교 앞 여관방이 전부인 나에게 그 곳은 정말 별천지나 다름이 없었던 까닭이 다. 휘늘어진 커튼이 달린 유리창, 그것은 차라리 유리벽이라 해야 할 정도로 널찍하게 방안 전체를 비추고 있었고...... 근사한 소파 곁에는 마치 조그만 바처럼 장식장과 테이블이놓여 있었으며...... 그리고 휘둥그레진 내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큼직한 침대였다. 나도 자취방이 아닌 원래 집에서는 침대 생활을 하기는하지만, 이렇게 호사스런 침대는 구경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간이벽 모퉁이 너머로 솜뭉치 같은 쿠션이며 침대보들이 푹신하게깔린 그 광경은, 마치 꼭 구름 속처럼 눕기만 해도 푹 파묻힐 것만 같아 보였다. 게다가 진짜로 그 옆벽의 옷장처 럼 생긴 공간 안에는 내가 입고 왔던 옷들이 걸려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 옥가지들은 정말 로 깨끗하게 세탁되어 다림질까지 거친 모양으로 멀끔했다. 그 호사스러움은 적이 놀랄 만했다. 물론 지금은 내 옆의사람 짐이 더 문제였기에 그런 감탄은 일단 접어두어야 했어도 말이다. 그녀를 끌고 들어오느라 어느새 나는 진땀이 날 정도였지만,최마담은 내 옆구리에 매달 려 숫제 눈까지 감고 있었다. "누, 누님......!" 혹시 잠이라도 들었을까 어깨를 흔들어 보니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응...... 으응......" "자, 잠깐 여기 좀 앉아 계세요." 벌써 눈동자가 풀린 그녀를 우선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아주맛이 간 상황은 아닌지 그 녀는 엉거주춤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흔들어댔다. "우리...... 방에 올라온 거니?" "그, 그게...... 예......" 한심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된 꼴이었다. 낯선 호화 호텔방 한복판에 최마담과 단둘이 있 게 되다니...... 다만 묘한 것은 그녀였다. 호텔방 안이기에 한숨 돌리는 것일까. 최마담은금 방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큰 숨을 내쉬었다. 다시 곯아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기에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고했다. "괘, 괜찮으신 거예요?여, 여기서 조금 주무시든가...... 쉬고 계세요. 저는...... 먼저 옷 좀 갈아입을게요." 하여간 이 놈의 목욕가운인지 뭔지, 편하라고 입는 것이겠지만나에게는 꼭 치마를 입혀 놓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지금 그녀와의 행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나 라도 움직이기 쉬운 옷차림을 갖춰야 유리할 성싶었던 것이다. 목욕가운 하나 달랑 걸친 채로 담든 그녀와 한 곳에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능하다 면 잠시 자리라도 피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옳으리라. 그런 연유로 제일 먼저 옷부터 갈아입으려는 나는 벽장안에서 옷가지들을 챙겨 들었다. 그러나 입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술 취한 누님이라고는 하지만, 가운 안에는 팬티 한 장만 달랑입었기에 그 앞에서 훌렁 벗기는 그런 노릇...... 널찍한 방안을둘러보던 나는 하는 수 없이 화장실처럼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욕실 문 앞에서 한 번더 흘끗거렸다. 그녀는 머리가 아파오는지인상을 찡그리고 앉아 있었다. 후...... 하지만 사실 머리가 아파야 하는 것은 나인지라,나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설레 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나 같은 놈을 이 호사스런 호텔까지 데 리고 온 이유가 무얼까. 이 욕실 안만 해도 그렇다. 태어나서 처음 구경하는 비데, 샹들리에 까지 달린 천장. 왜 이런 곳까지 나를 끌고 들어왔나. 아니 그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최마담, 저 여자의 속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늙 고 추해 보이지 않을까.- 그런 걱정은 서른을 훌쩍 넘긴노처녀라면 얼마든 푸념조로 늘어 놀 수 있는 거라 해도...... 그렇지 않다면 여자로 보아 달라니? 자기와 '자 달라는' 이야기도 아닐 텐데, 아니면 자기 딴에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단 순히 젊은 남자에게서 자기와 자고픈 마음이 드는지 안드는지, 자기에게 성적매력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 그런 확인? 심지어 목욕이라고 해도 그렇다. 내 앞에서 벌거벗은 몸을거리낌없이 내보이고도 눈 깜 짝 한 번 하지 않는다는것은, 기왕 가족탕이기에 그런 것인지아니라면 나를 유혹이라도 하려고 그런 것인지. 어쨌든 주섬주섬 옷가지를 껴입었다. 뭐가 되든, 제대로 입고만 있으면 대처할 수있겠다 는 생각에서였다. 정 안 되면 조금 쉬었다가라도 돌아가려는 계산으로 그렇게농구화까지 신고 나오는 나. 그런데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한 번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누, 누님!" 최마담,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글라스에 탄 양주를 홀짝거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소파앞 테이블에는 조그만 양주병이 있었고, 그 옆엔 얼음통까지 놓여 있었다. "왜, 웬 술이...... 어, 어디서 난 거예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술잔을 뺏으려는 나를 그녀가 손을 흔들어 제지시켰다. "몰랐어......? 원래 이런 데는 다 있는 것들이야......" 홀짝, 양주를 들이켜며 최마담은 그새 정신이 들었는지 취기 어린 헛웃음까지 지어보였다. "후후...... 그 안에 맥주도 있을 거야. 자기도 꺼내 마셔!" 어이가 없어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키는벽장 속을 열어 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그 안은 냉장고였다. 누님 말대로 맥주는 물론이요, 음료수며 주스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아연 망연자실해졌다. 심지어 그 안에는 장식용처럼 조그마한 양주병이 하나 더 들어있기 까지 했다. 차마 빼앗지는 못하겠고,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마주앉아 애원할 도리 밖에 없었다. "그, 그만 좀 드세요...... 예? 누님......!" 나는 호텔이란 곳에서 그런 것이 무료로 나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환장할 기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틀거릴 정도로 알딸딸하던 이 누님이 다시 술을 마시다니...... 젠장. 골치가 지끈거렸으나 그녀는 아랑곳없이 양주잔을 채워 눈앞에 흔들며 멍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그, 그것만 드시고요. 제발...... 이, 이러다간 우리 언제 돌아가요, 예?" "창희!" 순간 최마담이 내 말을 끊으며 초점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난...... 왜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고를 수 없는 거지?" 으응? "왜...... 내가 고른 남자는 날 싫어하고, 맨날 남이 나만 쫓아 다니는 걸까?" 아까 끝난 이야기를 불쑥 꺼내고 있는 그녀. 영문을 몰라동그래진 내 눈을 그녀가 무작 정 들여다봤다. "그 새끼도 그래...... 난 싫었는데, 자꾸 날 따라다녔어.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자 고, 살 섞고......" 그, 그 새끼? 욕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지 몰라도 뜬금없는 남자 얘기이기에 나는 문득 당 황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때. 순식간에 더욱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잔을 던지며, 순간적으로 무너지듯 내 앞에 다가서는 몸뚱이-나는 갑작스런 최마담의 그 행동에 기절초풍해야 했다. 애절한 눈빛의 최마담, 누님이 내가 앉은 소파 아래로 무릎을 꿇으며 매달려온 것이다. 어엇......! 펄쩍 뛰며 일어서려는 내바지 가랑이를 얼싸 안아붙드는 그녀, 그와 동시에 내 무릎 아래에서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동생! 부탁이야, 나 좀 사랑해 줘!" 40 으아아-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판국에 말문이 막혀 입만 떡 벌린 채 내려다보았지만, 누님은 아예 내 바지자락에 얼굴을 부벼대며 서글프게 안달하고 있었다. "동생, 몇 주 전 동생 보았을 때부터 생각했었어...... 동생 같은 남자,십년 전에만 만났다 면...... 아니 오년 전에만 만났다면......" 순간적으로 비애를 넘어 울먹이는 수준까지 다다른 그녀의 애원이었다. "그랬어, 자기...... 자기를 보는 순간, 그 때 그랬어...... 보영이나 다미처럼, 나도 저렇게 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면...... 동생같이 젊은 남자들과 사귈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데...... 돈이면 돈, 정이면 정...... 몸까지도 다 줄 수 있는데!" 생각할 수 있는 머리의 절반쯤이, 순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대체 이게 웬 황 당한 경우인가. 누님은 정말로 우는지 훌쩍이는 콧소리까지 섞고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였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 눈치는커녕 낌새도 못차렸던 나였다. "아아, 창희, 자기...... 부탁이야, 날 한 번만 안아줘, 사랑해줘.......! 딱, 딱 한번만!" 정말 순진하게도 그녀의 의남매 운운에 단순히 가족이 그리운 줄로만 믿었던 나. 이 경악 할 상황에 그저 넋이 나가 고개만 흔들어댔다. 아냐, 아니야 -지금 이 누님은 술이 취해 이러는 것이다. 술김에 겨워 횡설수설하는 것 임에 틀림없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누,누님......!"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계속 자신의 넋두리만을 잇고 있었다. "제발, 무슨 짓이든 다 할게...... 뭐든지 다 줄게...... 그냥, 그냥 날 한 번만......" 안 된다.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최마담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것을막하 야 했다. "누님, 누님 지금 취했어요!"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얼레, 그녀가 하도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내 무릎을 붙잡고늘어지는 통에 나는 도로 털 썩 소파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나, 나 창의가 시키는 대로 할게. 나, 술기운에이러는 것 아냐...... 난 취하지 않았단 말 이야." 문자 그대로 그녀에게 발목 잡힌 자세였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다가와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우째 이런 일이...... 그녀의 눈가에서는 정말로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게 아닌가. "나, 동생이 시키는 거면 뭐든지 할게, 응? 다 가져가,전부 다. 대신, 대신 꼭 한번만 안 아 줘, 응? 동생."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짐하는 그녀 -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앉은채로 내 고개가 설레설 레 저어졌다. 난 도저히 그녀의 이런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누, 누님 제발...... 이, 이러지 마세요,네?" 내 고개가 완강히 저어지고 있는 그 때였다. 갑자기 최마담이 내 바지 가랑이를 놓는가 싶었는데..... 나는 그만 입이 떡 벌어져야 했다. "좋아, 동생. 그럼!" "뭐, 뭐하시는 거예요!" "날 가져. 다 줄게...... 다 가져 줘, 자기!" 최마담, 그녀가 엉거주춤 무릎 꿇고 앉은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일어선 그녀가 자기 손으로 가운의 허리끈을 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그대로 열어 젖혀진 목욕가운-나는 그 안의 아찔한 광경에화들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으니...... 내 고갯짓을 거부의 의미로파악한 모양- 훌러덩 벗어던진가운 아래로 눈부시게 허연 그녀의 속살과 유방이 남김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랬다. 대담하게도 그녀는 그 안에 실오라 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맨몸 그대로였던 것이다. "오, 옷 입으세요!" 잽싸게 고개를 돌리며 버둥대는 내팔이 그녀의 가운자락을 붙잡으려들었다. 그렇지만 짐짓 그런 내 손을 뿌리치는 그녀. "싫어. 창희가 날 안아 줄 때까지, 난 이대로 있을 거야!" 최마담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는지 결연한표정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휙,뭔가가 내 눈앞을 스쳐 날아갔다. 천천히...... 그 날아간 무언가가 같이 따라간 내 시야에 잡혔다. 뭐, 뭐야? 나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기겁을 해야 했다. 목욕가운, 그것은 그녀가 입고 있던 가운이었던 것이다. 으힉? 엉겁결에 돌아본 순간,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경치가 있었다. "누, 누님!" 후닥닥 달려들어 내 몸으로 그녀를 안아야만 했다. 절대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던 까닭이다. 맙소사- 무의식적으로 내려다본 그 하복부 뽀얀 살 아래로, 거웃한 그녀의 중심부가 언뜻 그대로 보였던 것이다. 위쪽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아래쪽까지도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전라.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아무도 없는 방안이라지만, 발가벗고 내 앞에 선 그녀를 나는 옷 입 은 내 몸을 던져서라도 일단 가려야만 했다. "왜, 내가 추해? 그런 거야?" 안간힘을 써서 그녀를 붙드는데...... 역시 술 취한 힘인가, 그녀의 양탈은 보기보다 억세었 다. 최마담은 억지로 내 몸을 밀쳐내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말해 봐, 응? 동생이 보기에 내가 추해 보여?"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울부짖는 톤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사색이 되어 매달려야만 했다. "그, 그게 아니에요!" "그럼, 그럼 왜 날 못 가져? 이유가 뭐야?"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걸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어서 지금 그녀에게 이런 다그침을 당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 지금 아, 안고 있잖아요! 그,그래요, 누님, 누님 사랑해요. 추하지 않아요,예쁘다고 요. 됐죠, 예?" 그러나 그 말이 끊는 물에기름을 부은 격이 됐는지, 최마담이뒤로 나동그라질 정도로 내 가슴팍을 밀어붙였다. "야, 이 병신아! 누가 그렇게 안아 달랬어? 바보, 바보병신아!" 그,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찰나 그녀는 나에게매달리듯 힘을 가해왔다. 그에 따라 나는 주춤거리며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거꾸로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처럼 최마담은 아프게 내 어깨를 두들겨 댔다. 진퇴양난이었 다. 그녀를 안은 포즈를 그대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층 세게 당길 수도 없었다. 차츰차츰 몸에 힘이 빠지며 자꾸만 뒷걸음을 치다가 순간 아뜩한 느낌이 들었다.기우뚱, 그만 뒤로 고꾸라지듯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벌러덩. 어떤 물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금방 어딘가에 푹파묻히는 내 등. 역시 나 내 상상 그대로였다. 구름속에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은 바로 침대 모서리였다. 우스운 모습이었다. 엉겁결에 나와 누님은 나란히 침대 위로 엎어진 셈, 그런데 내 당혹감 도 잠깐, 크흐흐흑,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싫으면 싫다고 해. 흐흑, 내가 싫으면 싫다구!" 망연자실. 그때의 내 기분은 그 단어 외에는 설명할 것이 없었다. 으흑, 침대 시트에 파묻 혀서도 그녀의 울먹임은 더욱 크게 터져 나왔다. "동생, 동생이 그럴 줄은 몰랐어...... 누님인 나한테 이럴 줄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녀에게 이렇게 엄청난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가? 그 바람에 나는 침 대 위에서 그녀 몸 밑에 깔려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 못하고 있었다. "누, 누님...... 그렇지 않다니까요!" "흑...... 어쩌면 나한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녀는 얼굴을 내 가슴 위에 부벼대며 흐느낌만 더할 뿐이었다. 급하게 되었다.어떻게든 그녀를 달래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불행히도 뭐라고 그녀를 달래야 할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저는요...... 그, 그러니까...... 누, 누님을싫어하지는 않아요. 부, 분명히 좋아해요. 그, 그렇다고 누님은 절대 추하지도 않고요. 다만......" 다만, 다만. "하지만 저, 저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그래서......"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는 어찌 됐든 그녀의 오열을 막아야 했기에 어줍잖은 내 머리가 고 작 변명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누, 누님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잘, 잘해주시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어째야 될찌도 모르겠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런 것뿐이에요. 나, 난데없이 사랑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그러시는 바람에...... 전 여 자친구도 있는데......" 설마 애인이 있다는 말에도 내게 함부로 하지는 않으리라는내 심산이었다. 사랑하는 사 람이 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의 상식이야 통하지 않겠나 싶은데- 아아, 하지만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나는 최마담이 짐짓 조용해져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것이다. 흑흑거리던 소리가 뚝 그친 대신, 그녀의 엎드린 고개에서는 더 이상의 소음이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뭐야, 어설픈 내 달램이 먹혀 들어간 건가? 그제야 내 가슴께를 본 나는 대경실색하여 소 리를 버럭 질러야 했다. "누, 누님 뭐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내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니 좀 더정확히 얘기해 내 옷자락을 풀 어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경실색한 나는 그녀의 두 팔목을 쥐어 올렸다.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용수철처럼 내몸 이 튀어 오르는 동시에, 최마담의 몸을 내팽개치듯 밀쳐냈다. 영점 오초도 걸리지 않은 사이에 벌러진 행동이었다. 41 후아, 후아...... 나는 헐레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심호흡을 해댔다. 숨을 돌려야 했다. 너 무나 황당한 최마담이었다. 내가 분명 사랑하는 여자까지 있다며 둘러대는데도 서슴지 않는그녀. 마치 귀신에 흘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그것도 한참 동생뻘인나에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보영이 따 위는 유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녀가 정상적으로- 굳이 말해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술이 취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침대 위를 바라보았따. 스스로도 부끄러웠던 모양일까. 누님은 내가뿌 리친 그 자세로 그 넓은 침대 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미동도 않는 모습이었다. 추하기는 뭐가 추한가. 그건사실이었다. 그녀의 등뒤로 드러난 맨몸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쭉 뻗은 자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 곧게 뻗은 등...... 잘록한허리...... 그리고 내 시선이 오래도록모무르는 곳, 그것은 다름 아닌 누님의 솟아오른둔부였다. 돌아누운 자세나 마찬가지였기에, 푹신한그 침대 안에서도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는 두 개의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치켜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탐스럽기 그지없는 언덕이었다. 아까 목욕할 때도 훔쳐보기는 했지만, 가능만 하다 면 두 손으로 가득 쥐어보고픈 뽀얀살결이었다. 20대, 아니 10대의 엉덩이도 그만은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그냥 넘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으랴.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옷을 벗기고...... 그 다음, 그 다음엔?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저렇게 벌거벗은 뒷모습을 보니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 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어금니를 악 물고 이불자락을 쥐어 들었다. 최소한 이불이라도 덮어 주는 게 예의일 것만 같아서. "저...... 누님." 가만히 불러 보았으나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틀림없이 자기가거부당한 데 따른 수치심 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차라리 잘된 일일 성싶었다. 차라리 이대로 서너 시간 재워두면 그다 지 늦지 않게 새벽에나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이불이나 덮어 주자. 푹 주무시라고- 그렇게 그녀의 몸위로 허리를 굽히는데, 으악! 놀란 나는 비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창희! 아아, 창희!" 최마담, 그녀는 잠든 게 아니었던 것이다. 와락, 순식간에돌아누운 그녀가 재빨리 내 목 을 휘감고 매달렸던 것이다. "나 동생 애인 있어도 괜찮아......! 나 두 사람 사이 절대로 방해 안 해, 제발, 그러니까 날 한 번만 안아줘!" 엉거주춤 나는 다시금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정반대, 그러니까 그녀를 덮치듯 앞으로. "부탁이야, 날 사랑해 줘...... 자기 제발......" 그녀는 다짜고짜 내 목덜미와 뺨에 키스세례를 퍼부어댔다. 그녀는이제 눈물 섞인 호소 마저 해왔다. "그 다음에 나 모른 척해도 좋아, 매달리지도 않을게...... 흑." 거세게 내 목을 끌어안으며, 애걸하는 그녀의 흐느낌- 도저히 피할 수도, 뿌리칠 수도 없 었다. 난 그 때까지도 설마하고 있었다.술주정이라고, 취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하고있었 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분명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그녀는 내가 가까이 와서달래 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나에게 안기기 위해. "누, 누님...... 이, 이러시면......!" "딱 한 번만, 한 번만 사랑해 줘, 자기!" 어느새 내 몸은 온 무게로 끌어당기는 그녀 탓에 거의 그녀를 깔고 엎어진 상황이었다. "누, 누......" 아뿔싸, 그나마 저항하던 입술이 막혀왔다. 최마담의 입이마주 덤벼들었던 탓이다. 그녀 의 이름조차 부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니 아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스스럼없이 최마담의 입술 사이에서 미끌거리는 그 무엇이 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뜩한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혀였다. 그 혀가마치 뱀처럼 내 입속으로 휘 감겨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란 내 목소리는 생각 속에서만 울려댈 뿐이었다. 그녀의 기술이 얼마나 능란한지 금세 가물가물 어지러워지고 있었다.내 등을 가득 거세 게 거머쥔 그녀의 손길이 화급히 더듬어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그만요, 거기는- 최마담은 온몸의 유혹, 그것을 이용하려 들고 있었다. 두 손을 점점 아래쪽으로 향해 뻗쳐오는 그녀. 그 손바닥이 내 둔부를 격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그녀의 양쪽 허벅지 사이도 한껏 벌려지는 중이었다. 뱀, 보영이의 유혹이 암표범처럼 강렬한 것이었다면 최마담은 능숙한한 마리 뱀의 몸짓 이었다. 맹수가 사냥감을 가지고 놀 듯괴롭히다 서서히 죽기를 바라는 것에 반해,독사는 기회를 기다리다가 일순에 결정적인 치명타를 가한다. 바로 그녀가 그랬다. 내 허리가 그녀의 그런 테크닉에의해 조여지고 있었다. 나는 최후의저항으로 두 팔을 이요해 그녀의 상체를 떼어내려 시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덫에 걸리기라도 한 것 같이 그 녀의 벌거 벗은 하반신과 내 하체는 찰싹 밀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술 더 떠 캄캄한 어둠 속으로까지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하복부가 느리게, 하지만 결코 리듬을 놓치지 않고 내다리 사이로 마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또한 똑같은 행위가 내 상반신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녀의 입술, 혀, 얼굴 전체가 내 목이며 가슴 위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응, 동생......! 한 번만, 그럼 나 더 이상 자기 귀찮게 하지 않을게......" 귓가에 헐떡이는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목을 끌어안고서, 최마담은 애원의 목소리만 연거푸 되뇌고 있었다. "생각하 봐. 여긴 아무도 없어. 아까부터 그랬어...... 난 알아, 목욕할 때부터 동생이 날 갖 고 싶어했다는 걸. 그 때 자기가 날 가져 주기 원했어. 정말이야......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리라. 최마담의 애원이 아스라이 메아리쳤다. 아무도, 아무도모 르는 일로 시작하여,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일로 끝날 수 있다- 피할수 없는 유혹이나 마 찬가지였다. "아무한테도 소문 안 낼게. 동생 나 알잖아...... 나 보영이 일도 말하지 않았잖아." 파렴치한 요구. 그런데도 그것이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슬아슬,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내 앞섶으로 돌아오는데도 나는 이 야릇하기 짝이 없는 유혹에 더 이상 거부의사를 내보일 수 없었다. 난 그 손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누님의손가락들이 그토록 애타던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내 허리띠 위에 막 머물려 하고 있었다. 위기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지 몰라 망설여졌다. 눈딱 감고 그녀의 손에 맡기느냐, 마느냐. 그 절대절명의 순간, 갈수록 어두워지는 내 머리통 안에 불이밝혀진 것은 결코 내 내부 의 힘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지도 아니었다. 내 의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멀리 외부에서 찾아왔다. 우리 몸 바깥보다도 더 먼 외부. 딩동. 벨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딩동. 난 그것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뜨는 게 가능했다. 무슨소리지? 딩동, 곧이어 쿵쿵쿵, 절 대 예의 바른 노크소리가 아닌 그 소음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시야가 밝아지듯 모든 정황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란 토끼눈은 최마담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족이 가득한 신음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며 입술이 깨물리는 표정이었다. "누, 누구세요?" 밖이었다. 누군가가 우리 방문을 두들겨대고 있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서둘러 일어선 내 등뒤에서 얼른침대 시트 속으로 몸을 숨기는 누님의 자태가 보였다. "누구세요?" 내가 문 쪽으로 다가가며 재차 물었다. 그러자 비로소 응답이 들려왔는데...... 그것은 나를 실로 엄청 당혹하게 하는 대꾸였다. "에에...... 누님. 문 좀 열어 주시죠?" 엉? 그것은 낯선 사내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에이, 누님. 다 알고 왔습니다. 우리예요, 문 좀 열어 보세요!" 누님이라니?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최마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상황이 무지막지하게 꼬 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녀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내의 목소리들, 그 목소리에 그녀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