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 목 : 묘왕동주 백성을 잃은 왕(王) 묘왕동주 제2회 하이텔 무림동 무협공모전 대상 수상작가, 이재일! PC통신 연재물 <쟁선계(爭先界)>는 이미 무협 마니아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묘왕동주(苗王東走)>는 그가 강호(江湖)에 던지는 진정한 출 사표(出師表)가 될 것이다! 나직한 속삭임들이 귓전에 들려 왔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였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형제들의 목소리였고, 오누이들의 목소리였다. 단탈은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뒤에는 많은 그리운 얼굴들이 그를 향해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단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타루가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그에게는, 그리운 얼굴들을 마주할 자 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 드리우고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목소리들도 사라 졌다. 단탈은 비로소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가족을 찾으러 갈 시간이 된 것이다. -본문 중에서-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추천의 글 묘왕동주 추천의 글 - 난감한 일 이재일은 여러 가지로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친구다. 사람이 나빠서는 아니고, 그와 내가 만나는 상황이 매번 묘해서 그 런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안 것은 습작을 할 때였다.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르는, 그러니 남남은 아니고 그냥 남이기만 한 그런 때였지만. 무협지를 써보겠다고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긁적거리고 있을 때, 내 원고를 봐주고 있던 이경면 선배가 '보고 배우라'며 어떤 원고 를 보여 준 것이다. HITEL에 연재되던 글인데 제목은 '쟁선계(爭先 界)'였다. 물론 무척 잘 쓴 글이었고, 난 아마추어보다 못하구나,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가 죽었었다. 그를 두 번째 만난 것은 95년의 무협공모전 심사 때였다. 과분하게 도 난 그때 심사위원 자격이었기 때문에 여러 원고들을 봐야 했다. 그 중 한 원고의 제목이 '칠석야(七夕夜)'였다. 원래 그런 원고는 보낸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지만, 나는 누가 썼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쟁선계'의 그 친구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쓴 어떤 글보다 잘 쓴 그 글을 심사해야 하고, 점수를 매 겨야 하는 난처한 처지에 빠졌던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한번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한때는 그의 글을 보고 배웠고, 또 한때는 본의 아니게 그의 글을 평가하게 되더니, 이젠 추천까지 해야 하는 셈이다. 그의 글을 계속 읽어 왔고, '혹시나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기분으로 이런저런 얘기도 하긴 했지만 과연 내가 추천까지 할 자격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추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최고의 추 천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은', 그리고 '이 글은'이라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내가 자격 이 없다고 해도 자신있게 추천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추천의 글을 쓴다. 내가 추천한 것이 오히려 누가 되 지나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左 栢 드림.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序章 조우(遭遇) 묘왕동주 序章 조우(遭遇) 1 뜨끔! 짜릿한 통증이 종아리 아래쪽으로부터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종아리를 내려다보았다.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종아리에는 한 가닥 알 록달록한 실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알록달록한 실의 윗부분을 낚아챘다. 씨이잇-! 아가리를 쩍 벌리며 독 오른 소리를 내뱉는 알록달록한 실의 정체 는, 한 마리 뱀이었다. 길이가 한 자를 넘지 않는 이 뱀의 독은 커다 란 물소도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도, 당황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엄지손가락으 로 독사의 머리를 세게 눌렀다. 퍽! 독사의 머리는 푸르스름한 체액을 뿜어 내며 힘없이 으스러졌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도집에서 꺼냈다.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는지, 요사스러운 푸른빛이 도신(刀身)을 타 고 일렁거리는 단도였다. 그는 단도를 으스러진 독사의 목덜미 부분에 갖다 댔다. 단도는 무서울 정도로 예리했다. 단도가 지나가자 독사의 몸은 횡으 로 길게 갈라져 내려갔다. 그는 단도의 끝으로 독사의 뱃속을 헤집었다. 이윽고 그는 손톱 정 도의 크기인 거무죽죽한 쓸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쓸개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 맛은 지독할 정도로 고약했지 만,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쓸개를 씹었다. 침과 섞여 걸쭉해진 쓸개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즈음, 그는 진흙 을 한 움큼 집어 종아리에 난 상처에 대고 문질렀다. 그의 해독법(解 毒法)은 언제나 이렇게 간단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울창한 수림 위로 날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을을 떠난 지 어느덧 이틀째... 하지만 밀림은 끝없이 길었고, 오란산(烏丹山)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과 맞닿는 곳에 도도한 여왕처럼 앉아 있는 오란산, 그 어 딘가에 그를 기다리고 있을 '흑왕(黑王)'을 찾기 위해서였다. 2 만약 인간이 야망에 의해 성장하는 동물이라면, 장옥평(莊玉平)은 어린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스물셋이라는 나이와 소싯적부터 부지런히 단련한 내외공(內外功)은 그를 누구 못지않은 무인(武人)으로 만들어 주었고, 전(前) 한림학사 (翰林學士) 채주공(蔡柱恭)을 사사(師事)한 학문은 역사와 도리를 알 고 있는 유자(儒者)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야망이 없었다. 야망이라는 것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달을 무렵, 그는 이미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아닌 그의 가문(家門)이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장옥평은 눈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집채만한 검은 덩어리를 바라 보며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행동인가를 해야만 했지만 불행히도 그의 몸 상 태는 최악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었다. 캬우우-! 밀림을 쩌렁 울리는 포효(咆哮)와 동시에 검은 덩어리가 눈앞으로 확 밀려왔다. 쩍 벌어진 시뻘건 아가리가 칠흑같이 새까만 동체와 극 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흑표(黑豹)였다. 장옥평은 왼손을 쭉 내밀었다. 펑! 아무리 기력이 소진했다고 한들, 그의 장력(掌力)에는 천근 암석도 능히 으스러뜨릴 수 있는 강맹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표범의 기세는 장력에 정통으로 격중되고도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 다. "헉!" 장옥평은 다급한 비명과 함께 몸을 굴렸다. 표범의 앞발이 공기를 갈랐다. 찌이익! 장옥평의 왼쪽 가슴에 세 가닥 긴 혈선이 새겨졌다. 쇠스랑처럼 큼 직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순식간에 훑고 지나간 것이다. 몸을 땅바닥으 로 내굴린 동작이 조금이라도 늦었던들, 그의 머리통은 표범의 발톱 아래 수박처럼 부서졌을 것이다. 장옥평은 땅바닥을 한번 구른 뒤 신형을 바로잡았다. "으으..." 오른쪽 어깨가 흥건히 젖어 왔다. 애써 살피지 않아도 핏물 때문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응급처치한 자상(刺傷), 그것이 흙바 닥에 짓눌리며 다시 갈라진 것이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을 난자한 표범은, 무희(舞姬)와도 같 이 우아하게 땅위에 내려앉았다. 오백 근도 넘어 보이는 육중한 몸이 내려앉았건만 바스락거리는 소 리 하나 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두려움에 앞서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크르르-! 표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신의 공격을 피해 낸 인간에 대해 신 기함이라도 느끼는 듯, 비취같이 새파란 눈알이 가늘게 접혔다. 표범은 장옥평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다가 어느 순간, 표범의 몸이 동그랗게 오므라들었다. 크왕-! 두 번째 도약. 처음보다 배는 빠른 속도였다. "이익!" 장옥평은 이를 악물며 최후의 기력까지 끌어올렸다. 팔꿈치 어림까 지 말려 올라간 소매가 끌어올린 진기(眞氣)를 감당하지 못하고 공처 럼 부풀어올랐다. "하앗!" 장옥평의 왼손이 쏘아 오는 표범을 향해 휘둘러졌다. 신공(神功)을 운용한 탓인지, 아까와는 달리 손바닥 위로 은은한 금빛이 어려 있었 다. 우직! 비록 평소의 절반도 안 되는 위력이었지만, 금철장(金鐵掌)은 단금 절옥(斷金切玉)의 무서운 장공(掌功)이었다. 그것에 적중되었으니, 아 무리 표범의 뼈대가 굵다 한들 무사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커엉-! 표범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장옥평은 한 덩어리의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거슬러 올 라오는 것을 느꼈다. "우웩!" 장옥평은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검붉은 핏물을 토하기 시작했 다. 엄중한 내상을 입고, 또 이처럼 진기가 고갈된 채로 금철장을 전 개한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쿨룩, 쿨룩!" 장옥평은 내장을 쏟아 낼 듯 기침을 하며 주저앉았다. '짐승 하나를 죽이는 데 이렇게 힘이 들 정도라니...' 이제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과도한 출혈로 눈앞 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물거리는 시야 속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는 표범을 발견했 을 때, 그의 뇌리는 절망으로 꽉 메워지고 말았다. 캬우우-! 표범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을 향해 증오에 찬 괴성을 내질렀 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시뻘건 눈알만 보아도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무서운 위세였다. "흐, 흐허허!" 장옥평은 이런 와중에서도 자신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까짓 것 죽어 주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발악하듯 살아온 두 달이었다. 매형(妹兄)이 웃으며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박았을 때, 그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야차(夜叉)와 같은 몰골로 그를 구해 냈을 때조차, 그는 눈앞의 상황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걸레처럼 사지가 찢겨진 누님의 시신이 편액에 걸려 있었다. 기재(奇才)로 알려진 형님의 수급을 들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 그리고 어머님의 심장에 날아와 꽂힌 화살... 어머니는 조부의 신물 하나를 자신에게 건네 주며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피 묻은 손. 사방에서 솟구치는 시뻘건 화염. 사패(四覇)의 하나로 이름을 떨치던 그의 가문이 어찌 이리 허무하 게 무너진다는 말인가? 강호에 용명(勇名)을 드날리던 용 같고 범 같 은 가신(家臣)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드디어 자신의 두 다리로 뛰기 시작했다. 아니, 두 다리가 부 족할 때에는 두 손마저 사용해 기기 시작했다. 살아야만 했다. 살아서 가족의 복수를 해야만 했다. 아니, 최소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라도 알아야만 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두 달 동안 만여 리를 달려 묘강(苗疆)의 이 오 지(奧地)까지 오게끔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너무나도 지쳤다. 그래, 까짓 것! 복수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랴! 가문을 박살낸 원흉 이 누구인지,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으 랴! 잠시 후면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텐데... 그는 쉬고 싶었다. 지친 육신을 편안하게 눕히고 싶었다. 캬웅-! 표범이 장옥평을 향해 세 번째 도약을 했을 때, 장옥평은 아련한 무 의식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1 장 추격(追擊) 묘왕동주 1 권 一章 추격(追擊) 1 장옥평은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를 악물어도 저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 로, 머리의 통증은 참기 어려웠다. 이윽고 경물(景物)의 윤곽이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시야로 들어오는 무성한 수림들... 하늘은 수림이 만들어 낸 성근 그물 밖에 펼쳐져 있었다. 붉은 노을 이 물들어 가는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찌익-! 문득, 길게 이어지는 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장옥평의 귓가에 울 렸다. "...?" 장옥평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보았다. "으윽!" 온몸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들이 일제히 존재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리고, 악문 어금니 사이로 이를 가는 듯한 신 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장옥평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주변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찌익-! 간헐적으로 들리는 저 기분 나쁜 소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 다. 장옥평은 소리가 울린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 장옥평은 자신으로부터 일 장쯤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사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내는 상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장옥평은 처음에는 그가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장옥평이 아닌 누구라도 그 렇게 여겼을 것이 분명했다. 그 까닭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내의 피부가 색칠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적갈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내의 등판에 새겨진 선(線)들 때문이었다. 새하얀 뱀처럼 사내의 등판을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있는 무수히 많 은 선들... 그것은 다름 아닌 흉터였다. 헝겊 조각을 실과 바늘로 기워 만든 인 형처럼, 사내의 등은 꿰맨 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옥평은 한동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저런 흉터를 지닌 사 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 사람의 육체에 저렇게 많은 흉터가 새겨질 수 있다는 것부터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문득, 사내의 등판에 새겨진 흉터가 일제히 꿈틀거렸다. 근육이 힘 차게 움직이니, 그 거죽에 새겨진 흉터 또한 힘차게 움직였던 것이다. 찌익-! 다시 한번 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장옥평은 사내가 무슨 작업인가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내의 등 너머로 보이는 검은 덩어리... 장옥평은 그것이 검은 표범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문득, 그는 표범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 시에 혼절하기 직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캬웅-! 자신을 향해 시뻘건 아가리를 드러낸 채 도약하던 검은 표범... 하지만 그 표범은 이제 다시는 시뻘건 아가리를 벌려 포효할 수도,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도약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내의 움직임에 따라 가죽이 벗겨지면서도,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것 하나만으 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옥평은 사내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줬음을 알아차렸다. "저..." 장옥평은 이런 경우 뭐라고 얘기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타인 의 도움을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라던 구명(救命)에 대한 감사의 뜻 을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 귀하께서 그 짐승을 죽였소이까?" 흉터의 율동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그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우선 눈에 띈 것은 굵은 눈썹이었다. 장옥평은 하늘에 맹세코 그보 다 굵은 눈썹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굵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과 약간 낮은 코, 두터운 입술... 사내는 전체적으로 단단한 인상을 주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짙은 구레나룻과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인지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 려웠지만,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로부터 아직 삼십을 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장옥평은 사내가 한족(漢族)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툭! 사내는 장옥평의 발치에 무엇인가를 던졌다. 장옥평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물체. 그것은 다름 아닌 짐승의 간 (肝)이었다. 그 간의 임자는 아마도 가죽이 벗겨지고 있는 저 검은 표 범임이 분명했다. "먹게." 사내는 분명히 "먹게"라고 말했다. 장옥평은 그의 말을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한어(漢語)를 사용한 것이다. "한어를 할 줄 아시오?" 사실 장옥평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아니까 했을 것이 아닌가? "조금 아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표범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표범 가죽을 벗기는 사내의 손놀림은 매우 숙달된 것이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표범은, 장옥평이 간을 절반도 먹어치우기 전에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볼품없는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가죽을 편평히 펼쳐 땅바닥 한쪽에 널어 놓은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체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람한 가슴과 맹수 의 그것과도 같은 다리 근육, 그리고 전신에 빽빽하게 새겨진 흉터는 그의 키를 실제보다 커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사내는 천천히 장옥평을 향해 걸어왔다. "아픈가?" 사내는 장옥평의 왼쪽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표범의 앞 발에 긁힌 세 가닥의 긴 혈선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장옥평은 고통을 내색할 수 없었다. 물론 근육의 결까지 드 러날 정도로 깊이 파인 상처가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벗은 상체를 본 순간, 장옥평은 아프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 다. 사내의 가슴에도 세 가닥의 혈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 래 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하얀 흉터와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 리고 그것은 장옥평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매우 비슷해 보였다. 결론은 간단했다. 사내 또한 장옥평과 마찬가지로 검은 표범에게 당했던 것이다. 사내는 장옥평의 눈이 그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에 머물자 빙긋 웃으 며 말했다. "흑왕의 발톱에 걸리고도 이 정도로 끝났으니, 우리 둘 다 운이 좋 다고 말할 수 있겠지." "흑왕?" 사내는 턱짓으로 가죽이 벗겨진 표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을 왕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어떤 짐승을 왕이라 부를 수 있을 까?" 사내는 한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었다. 거의 완벽한 북경관어(北京官語). 억양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 만을 제외한다면, 황사(皇師:북경)에서 자란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 다. "한데, 놈의 갈비뼈는 자네가 박살냈나?" 사내가 물었다. 아마도 금철장에 격중된 표범의 갈비뼈 중 몇 개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장옥평은 힘없이 웃으며 왼쪽 주먹을 들어올려 보였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 사내는 웃었다. 문득, 장옥평은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사내의 웃음은 단단한 인상 과 달리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보기보다 편한 성격인 것 같 았다. 그러다가 사내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놈을 죽이는 데 자네 또한 한몫을 거든 셈이군." 그게 중요한가? 장옥평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사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놈을 우리가 나눠 가져야 한다는 말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놈의 가죽과 발톱이 반드시 필요하다네. 그걸 찾느라고 닷새를 헤매고 다녔어. 그리고 아무래도 놈의 숨통을 끊은 것은 나니까, 그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내는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처럼, 은근하고 조심스러운 목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장옥평은 혼미스러운 와중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찌나 혼이 났는지 이제는 검은 색깔만 봐도 신물이 넘어 올 것 같은 그였다. 가 죽이고 발톱이고 간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리고 거들기는 무엇을 거들었다는 말인가? 사내가 아니었던들 자 신의 몸뚱이는 지금쯤 표범의 뱃속에서 신나게 녹고 있을 것이 분명한 데... "당신이 다 가지시오." 사내의 얼굴이 확 풀어졌다. "정말인가?" 장옥평은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 고맙네! 자네는 마음씨 좋은 동업자로군! 내가 큰 신세를 진 셈이 되었어!" 사내는 장옥평의 오른손을 잡고 상하로 흔들어댔다. "아으...!" 어깨가 흔들리며 부젓가락으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다시 엄습했다. 장옥평은 사내를 향해 웃어 보이려 애썼지만, 비단 거울이 없더라도 그 웃음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 사내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장옥평은 그런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가 무엇을 하려 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른 가지들을 한곳에 수북이 쌓아 두고 두 개의 화석(火石) 을 꺼내어 불을 붙이려는 사내를 본 순간, 장옥평은 더 이상 입을 다 물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사내는 이 자리에서 가죽에 연기를 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안 돼! 불을 피우면 나를 찾는 무리들이 몰려들 것이오!" 사내는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도망 중인가?" 장옥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은 무서운 자들이오. 저 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 도로..." 사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사내가 물 었다. "그들이 얼마나 떨어져 있지?" 장옥평은 마지막으로 추적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빼낸 것이 사흘 전이었음을 상기하였다. 물살을 거슬러 달아났기 때문에 흔적을 지울 수는 있었지만, 지난 두 달 간 그들이 보여 준 신비한 능력으로 미루 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따라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잘 모르지만... 모닥불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거리에는 있을 거요." 장옥평이 대답했다. "알았네." 사내는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같이 마음 착한 동업자를 나쁜놈들에게 잡혀 가게 할 수는 없 지." 사내는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습기가 많고 그늘진 곳이었다. 자연히 땅거죽은 매우 무른 편일 테 고, 손으로 파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 다고 해도 사내가 땅을 파나가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인간이 단지 두 손만을 사용해 이렇게 쉽게 땅을 팔 수 있다는 사실은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삽시간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이어 사내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땅을 손바닥으로 쓸기도 하고, 때로는 돌을 옮기기도 하며, 때로는 나 뭇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영문을 모르는 장옥평은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사내가 이상한 행동을 멈춘 것은 반 시진이 훨씬 지난 뒤였다. 사내는 장옥평에게 다가왔다. "내가 놈들을 따돌려 주지." 사내는 장옥평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슨...?" 찌익- 장옥평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소맷자락이 길게 찢겨졌다. "미안." 사내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소맷자락을 흙바 닥에 몇 번 문지른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1 장 1 절 그 옛날 묘왕동주 1 권 2 昔日長城戰 咸言意氣高 黃塵足今古 白骨亂蓬蒿 그 옛날 장성(長城)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의기(意氣) 높다 모두들 얘기했었지. 하지만 남겨지는 것 예나 지금이나 누런 먼지뿐, 무수한 백골만이 잡초 속을 나뒹구네. 약간 쉰 듯하면서도 낭랑한 노랫소리가 노을이 가득한 하늘 아래로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백의를 입은 청년이었다. 높다란 바위 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는 청년은, 스스로 만들어 낸 아치(雅致)에 도취된 듯 다리까지 건들거리고 있었다. 청년은 매우 잘생긴 사람이었다. 우뚝한 콧날과 넓적한 귓불에는 남 성적인 매력이 담겨 있었고, 잘 다듬어진 눈썹은 깨끗한 이마와 어울 려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 너무나 반짝여서 호기심 많은 처녀의 그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눈동 자는, 그의 감성이 얼마나 섬세하고도 풍부한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랫소리가 뚝 끊어졌다. 청년은 별빛 같은 시선을 들어 붉은 기운이 한껏 번져 있는 서쪽 하 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이미 절반 이상이나 산너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슬슬 불러 볼까?" 혼자말을 중얼거린 청년은 목에 걸고 있던 작은 호각을 입에 물었 다. 삐이익-! 호각 소리가 노을을 찢을 듯이 날카롭게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밀림 여기저기에서 몇 개의 움직임들이 생겨났다. 움직 임들은 은밀하게, 하지만 매우 빠르게 청년이 앉아 있는 바위를 향해 몰려들었다. 휘휙! 나직한 파공성과 함께 바위 앞에 내려선 그림자의 수는 모두 열, 하 나같이 회색 장포를 입은 장한들이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조금 전까지 의 그림 같은 아치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감도는 것이라고는 다만 단 단한 질감의 살기뿐... "찾았나?"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청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반경 백 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열 명 중 선두에 서 있던 산발한 장한, 남력(南靂)이 대답했다. 늘 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였다.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리카락 사이로 번쩍이는 눈빛과 뾰족한 턱선 밖에 없었다. "그래?"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권태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열 명의 장한 중 뒷전에 서 있던 땅딸막한 사내, 악패(岳狽)는 분명 히 청년의 얼굴에 떠오른 권태로운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추격이 어려울 것 같습..."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맺을 수 없었다. 쫙! 악패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어느새인가 그의 앞에 내려선 청년이 세차게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천하의 조추림(曹秋林)이 이 더러운 오랑캐의 땅까지 왔는데, 아무 런 수확 없이 돌아가자는 말이냐?" 청년 조추림의 두 눈에서는 사람의 뼛골을 얼려 버릴 듯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핏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패는 정신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부르짖듯이 외쳤다. "흥!" 하지만 청년 조추림은 그 자리에서 끝장을 내버리려는 듯 오른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윽!" 악패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그러나 그가 염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흣, 후후..." 대신 난데없는 웃음 소리가 악패의 얼굴 앞에서 들려 왔다. 악패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후후... 으하하하!" 조추림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이제는 아예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고 있었다. 한참을 웃던 조추림은 치켜 올렸던 오른손을 스르르 떨 구었다. "그만두지, 그만둬... 내가 자네를 탓해 무엇 하겠나?" 조추림은 사랑스러운 연인을 애무하듯 핏물이 맺힌 악패의 입술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어느새인가 그의 얼굴에는 봄날 햇살처럼 따사로 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런, 쯧쯧! 아프겠군." 악패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 가는 조추림의 눈빛이 조금씩 우울해 졌다. 마치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 러다가 갑자기 그의 동공이 조그맣게 오므라들었다. 그리고 작게 벌어 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악패는 다시금 얼굴을 찔러 오는 차가운 기운에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예! 예!" 악패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흐... 흐흐..." 조추림은 다시 한번 키득거린 뒤 바위 위로 몸을 날렸다. "들어라!" 조추림이 낭랑한 목소리로 장한들을 향해 소리쳤다. "놈은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위중한 부상을 입었다! 놈이 아무 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 밀림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조추림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장한들을 훑어보았 다. "놈을 찾아야 한다! 나는 사부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다!" "복명(服命)!" 장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때 문득,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깔리는 음산한 목소리가 있었다. "조(曹) 공자..." 말라붙은 진흙처럼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괴이한 목 소리... 조추림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서 있던 바위 뒤에 솟아 있는 한 그루 야자수 위, 야자 열매보 다는 조금 큰 그림자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어디 더러운 오랑캐의 말을 들어 보시겠소?" 야자수에 야자 열매처럼 매달려 있던 그림자의 정체는 살갗이 시커 멓고 얼굴에 온통 주름이 뒤덮인 노인이었다. 얼굴 아래로 축 늘어진 머리카락은 여러 개의 매듭으로 땋아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중원인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조추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색한 듯 웃었다. "호(胡) 노인께서는 별소리까지 다 들으셨구려." "흐흐..." 노인은 몸을 뒤집어 야자수를 얽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허공을 한 바퀴 맴돌아 가볍게 바위 위에 내려앉는 노인의 동작은, 한 마리 원숭 이처럼 민첩했다. "그렇게 크게 소리치는 데야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들을 수 있지요." 조추림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기분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시길! 별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 다." 천천히 고개를 든 조추림의 얼굴 위에는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미소 가 떠올라 있었다. '이 자식을...' 노인은 눈앞에서 빙글거리고 있는 젊은 녀석을 단번에 때려 죽이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하고도 멀쩡하게 미친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때에는 한없이 자비롭고, 어떤 때에는 한없이 잔인하다. 어떤 때에는 너무도 친절하고, 어떤 때에는 너무도 비정하다. 용감하면서도 비굴하고, 예의바르면서도 무례하며, 낙천적이면서도 비관적이고, 유 쾌하면서도 우울하다. 사람이면 한 가지조차 제대로 가지기 어려운 이런 극단적인 성격을 이자는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강 제일의 부족인 을온족(乙溫族)의 이인자(二 人者)인 호륵마(胡勒瑪)는 청년을 향해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이 제 갓 약관을 넘긴 새파란 애송이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두려 워하는 것은 청년의 등뒤에 도사리고 있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세 력이었다. 호륵마는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나무 위에서 살펴보노라니 재미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재미있는 것이라니요?" 조추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쪽으로 삼십 리쯤 떨어진 밀림 속에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 던데..." "연기?"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조추림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퍽, 꺼져 버렸 다. 어느새인가 호륵마가 매달려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다. 그 경묘(輕妙)한 경신술 앞에서는 그를 못마땅해 하던 호륵마 역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 위에 오른 조추림은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십오 년 가까이 수련한 훌륭한 내공이 그의 시력을 매의 그것처럼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비록 시력이 뛰어나지 않았 다 한들, 밀림 건너편에서 피어오르는 한 가닥 연기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흐음..." 조추림의 입가에 사과 조각 같은 상큼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나무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남쪽이다! 가자!" 그는 밀림 한쪽을 가리키며 나직하게 명령했다. "복명!" 그와 동시에 열 명의 회포 장한이 조추림이 가리키는 밀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 노인께서도 가시죠." 조추림은 허리를 굽히며 손바닥을 펼쳐 남쪽을 가리켰다. 소(蘇)· 항(杭)의 고급 청루(靑樓)에서나 만날 법한 풍류공자(風流公子)의 그 것처럼, 우아하고도 정중한 몸짓이었다. 호륵마는 눈살을 찌푸린 뒤, 회포 장한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호륵마가 사라진 뒤, 조추림은 또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을 피운다... 좀 이상하잖아? 그답지 않은 일이군." 나직한 혼자말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또한 몸을 날렸 다. * * *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1 장 1 절 - 1 묘왕동주 1 권 삼십 리는 그리 먼 거리라 할 수 없었지만, 길이 없는 밀림을 헤치 고 가는 삼십 리는 실제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조추림 일행이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던 모닥불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소비되었다. 기괴한 모양으로 널려진 몇 개의 바위들과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 (巨木)들이 만들어 낸 공터 한복판에는, 문제의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 다. 그리고 모닥불 앞에는 묘족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구릿빛으로 번들거리는 피부와 전신에 빽빽하게 새겨진 상처, 그리 고 터무니없이 두꺼운 눈썹과 맨발... 조추림은 실망했다. 그가 원하던 장면은 이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 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묘족 사내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허깨비처럼 나타나자 경계의 눈빛을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조추림은 곁에 서 있던 호륵마에게 눈짓을 보냈다. "누구냐고 물어 봐 주시죠." 호륵마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묘어(苗語)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사내는 호륵마의 얼굴을 바라본 뒤 억양이 억센 묘어로 대답했다. "보다시피..." 사내는 손을 펼쳐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호륵마는 사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모닥불 옆으로 죽 펼쳐 놓은 검은 가죽이 눈에 들어왔다. 대가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이 장이 넘는 거대한 표범의 가죽이었다. 호륵마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어렸다. 그는 저 표범이 이 일대에 서 얼마나 유명한 놈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사냥한 짐승인가?" 사내는 고개를 끄떡였다. "오란산의 흑왕을 네가 잡았다고?" 호륵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다니까!"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뭐라는 겁니까?" 조추림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호륵마는 사내를 가리 키며 한어로 설명했다. "이자는 사냥꾼이라오. 아마도 이곳에서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말리 고 있었던 것 같구려." 조추림은 호륵마가 가리키는 사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멋진 몸이군!' 감탄부터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묘족 사내의 몸뚱이는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오직 동작에 필요 한 근육으로만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이라면, 그리고 남 자라면 누구나 저런 몸뚱이를 지니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노력으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 바로 저런 몸뚱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땅바닥에 펼쳐 있는 표범의 가죽... 그것은 조추림이 보기에도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조추림은 등뒤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놈의 흔적을 찾아봐라!" "예!" 조추림의 뒤에 서 있던 열 명의 장한들이 공터의 사방으로 흩어졌 다. 묘족 사내는 그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그는 단지 표범 가죽 앞에 서 두 다리를 벌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조추림은 사내의 그 완강한 자세로부터,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가죽만은 지킬 결심을 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는 사내의 마음을 이 해할 수 있었다. 사냥꾼이라면 누구나가 이런 짐승을 잡고 싶어할 것이다. 이런 짐승 을 잡았다는 것은 평생에 다시없는 영광이 될 것이며, 죽기 전까지 두 고두고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짐승의 가죽은 소장인(所藏人)에게까지도 무한한 기쁨 을 가져다 줄 것이다. 제아무리 세도 높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 할 지라도 이런 짐승의 가죽만은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조추림은 갑자기 가죽에 대한 탐심(貪心)이 생겼 다. 도망친 녀석의 수급과 함께 이 어마어마하게 멋진 가죽을 사부에 게 진상(進上)하고 싶어진 것이다. "가죽을 제게 팔 의향이 없는지 물어 봐 주시겠소?" 호륵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방정맞은 놈은 또 무슨 생각을 한 걸까? 하지만 조추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속에서 한 덩이의 금을 꺼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소만..." 묘족 사내는 조추림의 말을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카앗-!" 사내는 갑자기 날카로운 경고성을 지르며 엉덩이께에 차고 있던 두 툼한 칼을 뽑아 들었다. "어?" 조추림의 멋들어진 눈초리에 희미한 살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쯧쯧!" 사내와 조추림을 번갈아 바라보던 호륵마가 나직이 혀를 찼다. "묘족 중 대부분은 우리 부족과는 달리 철저하게 자급자족으로 생활 을 꾸려 나간다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그 모든 것을 부락 안에서 해결하지. 저들에게 있어서 황금이란 무거운 돌덩이에 불과할 뿐! 많 이 배우신 공자가 이들의 생활을 이해해 주시오." 호륵마까지 자신을 저지하자 조추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어나기 시작한 불꽃에 기름이 끼얹어진 격이랄까? 조추림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오른손은 검을 차고 있는 허 리춤으로 다가가 있었다. 저 미개한 원숭이 녀석을 단숨에 베어 버리 고 표범의 가죽을 취하려 마음먹은 것이다. 묘족 사내 또한 조추림의 내심을 읽었는지 눈빛을 야수같이 형형이 빛내며 칼을 얼굴 앞으로 치켜 들었다. 하지만 조추림의 걸음은 한 발짝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걸음 을 멈춘 것은 칼을 빼어 들고 있는 사내의 단호한 태도 때문도 아니었 고, 호륵마의 군자연(君子然)하는 참견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개를 치켜 드는 그의 변 덕 때문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한 일이군!' 조추림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람이 있으면 문화가 있고, 문화 가 있으면 풍습이 있는 법이다. 비록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국부(局 部)를 가린 짐승 가죽밖에 없는 미개한 오랑캐였지만 그에게도 나름대 로의 문화와 풍습이 있을 것이다. 살아 가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자신처럼 학식있고 고상한 사람이 그들의 생활을 너그럽게 이해해 준다면, 이 또한 모든 이의 칭송을 들을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게다 가 이자는 제 몸집보다 몇 배나 큰 표범을 죽인, 보기 드문 '용사'가 아닌가! 조추림은 자신의 자비심에 대해 푸근한 도취감에 빠져 들어 버렸다. "용사에게는 용사에 걸맞은 대접이 필요한 법이지요. 소생이 잠시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어느새인가 조추림의 얼굴에는 아까의 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만 떠올라 있는 것은 보살 같은 대인대용(大仁大容)의 후덕한 미소 뿐... 그는 꺼내 들었던 금덩이를 품속에 집어넣으려다가, 생각이 바뀐 듯 그것을 사내의 발 아래에 던졌다. "용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전해 주시오. 비록 그에게는 쓸모 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호륵마는 고개를 끄떡인 뒤 묘족 사내에게 조추림의 뜻을 전했다. 묘족 사내는 여전히 안색을 굳힌 채 금덩이와 조추림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어서..." 조추림은 더욱 친근하게 웃으며 금덩이를 가리켰다. 묘족 사내의 굳은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고맙소!" 짤막하게 묘어로 인사한 사내는 칼을 거둔 뒤 금덩이를 집어 들었 다. 흩어졌던 열 명의 회포 장한들이 다시 모였다. 그 중 등에 팔방추(八方鎚)를 메고 있던 콧날이 비틀어진 장한이 무 엇인가를 조추림에게 내밀었다. "서쪽으로 삼십 장쯤 떨어진 곳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조추림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비록 더러워져 누렇게 변했지만, 예전 에는 질 좋은 비단의 일부였음이 분명한 한 조각의 천이었다. 조추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추적하는 자가 바로 이 비단의 임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추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는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조추림은 묘족 사내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한족을 보지 못했나?" 호륵마가 통역했고, 묘족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무슨 수상한 흔적을 본 적은 없는가?" 조추림의 이어진 물음에, 묘족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얼굴이 치켜 들어졌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소!" 묘족 사내는 공터 한편에 밀어 둔 가죽이 벗겨진 표범의 고깃덩어리 로 다가갔다. 고깃덩어리의 배는 쩍, 갈라져 있었다. "이것을 보시오." 사내는 갈라진 배를 양쪽으로 젖혀 뒤집었다. 우두둑- 근육이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중인들의 귓전에 울렸다. '대단한 힘!' 조추림은 묘족 사내에 대해 또 한번 감탄했다. 내공이 없는 사람이 날짐승의 살덩이와 근육을 저렇게 찢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이다. 피비린내가 확 풍기며 표범은 내장을 쏟아 냈다. 사내는 활짝 드러 난 표범의 내부 한 부분을 가리켰다. "내가 한 일이 아니오." 호륵마는 사내의 말을 통역했다. 조추림은 표범의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 표범의 갈비뼈 중 넉 대가 부러져 있었다. 물론 죽은 짐승의 뼈가 부러져 있는 것이야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 었다. 하지만 문제는 부러진 뼈의 상태였다. 뼈가 부러진 부위는 거대 한 맷돌에 갈리기라도 한 듯, 갓난아기 손톱보다도 더 작은 무수히 많 은 조각들로 으스러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무인들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이었다. 조추림의 안색이 굳어졌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 곁에서 바라보던 호륵마가 나직이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조추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죽을 쳐서 내부를 진동시키는 내가중수법이 아니고서야, 한 뼘이 넘는 표범의 가슴 근육을 격(隔)하고 궁촉(宮燭)만큼이나 굵은 갈비뼈 를 이 모양으로 만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놈, 장옥평의 짓이군. 검패(劍覇)의 독문장법인 금철장이었을 까...?" 조추림은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추격하고 있는 옷 조각의 주인인 장옥평은 이 검은 표범의 습격을 받았다. 그때 장옥평은 금철장과 같은 내가수법을 사용해서 이 표범을 힘겹게 물리친 뒤, 다시 달아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이곳 에 묘족 사내가 나타나 상처 입은 표범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채만한 표범을 무공도 모르는 야만족 사냥꾼이 죽인 사실도 어느 정도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서쪽이라고?" 조추림이 옷자락을 가져온 장한에게 물었다. "예!" 장한은 고개를 끄떡였다. 조추림은 고개를 돌려 가죽 앞에 버티고 선 묘족 사내를 바라보았 다. 독수리 같은 눈초리가 사내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마치 마음 밑바닥까지도 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추림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냈 다. 조추림은 살짝 입술 꼬리를 비틀었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회 포 장한들을 바라보았다. "가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조추림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휘휙! 뒤이어 회포 장한들이 사라졌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호륵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묘족 사내를 향해 말했다. "자네는 내 맘에 꼭 드는군.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동쪽 평 원 을온족의 호 노인을 찾아오게나." 그리고 호륵마의 신형도 사라졌다. 그들이 간 방향은 옷자락이 걸려 있던 서쪽... 묘족 사내는 오랫동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했더니 동쪽 계곡의 까마귀 영감이었군. 듣던 대로 정정한 데?"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는 땅에 널려 있던 표범 가죽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1 장 2 절 숲은 수많은.... 묘왕동주 1 권 3 숲은 수많은 생명의 결집체이다. 숲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준다. 때로는 휴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를 주기도 하며, 때로는 살아 가는 데 필요한 많은 자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숲이 인간의 친구인 것은 아니다. 숲은 때로는 어떠한 원수보다 철저하게 인간을 배척하기도 한다. * * * 밀림의 서쪽은 숲이 인간을 배척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추림의 일행이 밀림을 빠져 나온 것은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세 시진 동안 숲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 일행을 괴롭혔다. 조추림의 직속 수하인 열 명의 회포 장한, 십살(十殺) 중 한 명인 곽극달(郭克達)이 이름도 알 수 없는 독충(毒蟲)에 물려 죽을 뻔했고, 조추림 또한 하마터면 장기( 氣)에 얼굴을 쏘여 옥 같은 피부를 버릴 뻔했다. 만약 호륵마의 노련한 경험과 신속한 처방이 없었다면, 그들의 피해 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서쪽 밀림 어느 곳에도 그들이 뒤쫓는 장옥평의 흔적은 보이 지 않았다. 아니, 인간의 발길이 닿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끝없을 것만 같던 밀림이 드디어 끝났다. 그리고 밀림이 끝나는 바 로 그곳에서 조추림은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조추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절벽. 끝이 보이지도 않을 아득한 높이, 수직이 넘는 위협적인 각도로 세 워진 절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는 독장(毒 )이 안개처럼 자욱이 깔린 낭떠러 지... 조추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호 노인!" 나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호륵마는 그 안에서 점점이 묻어 나오고 있는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눈.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악마의 눈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는 두 눈이 자신의 얼굴에 고정된 순간, 호륵마는 자신도 모르게 어 깨를 가볍게 떨었다. "당신이라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겠소?" 호륵마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험지(險地)를 통과한다는 것은 묘강의 살인적인 풍토에 익숙해 져 있는 호륵마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묘강에 처음 으로 발을 딛은 한인이, 그것도 몸을 가누기 힘든 위중한 부상을 입은 자가 이런 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가 이 밀림을 뚫고 나왔다는 가정부터 되짚고 넘어갈 필요 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조추림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독백은 반복과 동시에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급기야 그가 마지막으 로 외친 '어디서부터'는 야수의 괴성처럼 찢어지는 목소리가 되어 밤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놈!" 조추림의 고개가 그들이 지나온 밀림을 향해 홱 돌아갔다. "그 개 같은 오랑캐 녀석이 뭔가 수상했어!" 자존심이 강한 호륵마였지만 이번에는 '개 같은 오랑캐'라는 말을 듣고도 뭐라고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지금 조추림이 뿜어 내는 기세는 그만큼 흉폭하고 맹렬한 것이었다. "돌아간다! 놈을 찾는다!" 으드득- 조추림은 이를 갈며 말했다. 이 순간 그의 전신은 가늘게 떨리고 있 었다. 총명하기로 이름난 자신이 걸친 것이라고는 속옷밖에 없는 미개 한 오랑캐 놈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가자!" 그는 방금 전 빠져 나왔던 밀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남아 있던 십살과 호륵마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무리한 강행군으로 그들의 심신은 물먹은 솜처럼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광증(狂症)이 도진 조추림이 무슨 발작을 할 지 몰랐다. 그들은 괴수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지긋지긋한 밀림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밀림을 지나올 때에는 세 시진이 소비되었지만, 돌아갈 때에는 그 절반의 시간밖에 소비되지 않았다. 한번 지나온 길이라서 익숙해졌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런 종 류의 밀림이란 한두 번 지나치는 것만으로 익숙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 었다. 그들이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선 두에 선 조추림이 살 맞은 맹수처럼 무서운 기세로 달려갔기 때문이 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의 뒤를 헐떡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십살과 앞서거니뒤서거니 어울려 하나의 검은 바위를 돌아가는 순 간, 호륵마는 자신이 드디어 그 사냥꾼을 만났던 곳에 돌아왔음을 깨 달았다. 공터는 희미한 새벽 달빛 아래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앞서 달려 갔던 조추림은 공터의 한가운데 석상처럼 서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와 조금 숙인 고개... 조추림은 어딘지 모르게 낙백(落魄)한 몰골이었다. 호륵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조추림의 발 아래에 이르 렀을 때, 가느다란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까 검은 표범의 가죽이 펼쳐져 있던 땅바닥... 그곳에는 사람 하나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파여 있었다. '그렇다면...?' 저 안에는 누가 들어 있었을까? 순간, 호륵마는 현기증을 느꼈다. "흐흐..." 조추림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흐흐... 으하하하!" 밤 공기를 사납게 뒤흔드는 광소(狂笑)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으하하... 하... 아아아악-!" 광소는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조추 림의 쌍수(雙手)가 패여진 구멍을 향해 미친 듯이 휘둘러졌다. 꽝! 꽈꽝! 동작만큼이나 폭급한 장력이 땅바닥을 마구 후려쳤다. 흙가루와 돌 덩이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조추림이 발작과 같은 행동을 멈춘 것은 무려 삼십 장(掌)이 넘는 장력을 땅바닥에다가 후려친 뒤였다. 구멍 주변의 땅은 이미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있었다. "헉, 헉!" 조추림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 아갔다. "호, 호 노인!" 달빛 아래 보이는 조추림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가에 맺혀 반짝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눈물 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호륵마는 움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난 말이야... 흐흐... 정말 감격했어! 감격했다고!" 조추림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자그마치 두 달, 육십 일 동 안이야! 그 육십 일 동안 만 리가 넘는 길을 쫓아온 놈이라고! 그런 놈이 열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저 구멍 속에 숨어 있었어! 그런데 그 것도 모르고, 한밤중에 저 구질구질한 숲속에서 미친 지랄을 떨고 다 니다니! 내가! 이 조추림이! 으하하-!" 조추림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저... 조 공자!" 호륵마는 조추림에게 다가가 그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홱! 조추림은 소리날 정도로 세차게 호륵마의 손을 뿌리쳤다. "이 손 치우지 못해!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야! 나 못지않게 바보 였다고... 뭐? 그들의 생활을 이해해 달라고? 으하하하-! 웃기고 있 군!" 호륵마의 귀 밑이 확 달아 올랐다. 그가 몸담고 있는 을온족은 그 부족원의 수가 일천이 넘고 전사의 수가 이백에 육박하는, 묘강 제일을 다툴 수 있는 대부족이었다. 그곳 에서 오로(烏老) 호륵마는 족장인 차가하(且加河)보다도 훨씬 더 무서 운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보 았던가? "조 공자! 보자보자 하니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호륵마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조추림을 향해 외쳤다. 이 순간, 그의 자그마한 체구는 한껏 눌러 놓은 용수철처럼 도발적으로 보였다. "어? 지금 내게 덤비겠다는 건가?" 조추림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돌연, 그의 허리춤으로부터 싸늘한 한광(寒光)이 폭출되었다. 차고 있던 장검을 빼어 든 것이다. "늙은이라고 한걸음 양보해 주었더니... 감히, 감히 내게 덤비려고 해?" 조추림의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젊은 녀석이 정말 무례하구나! 먼 길을 고생하며 온 것을 생각해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게 날뛰는구 나!" 호륵마의 두 눈에서도 시퍼런 광망(光芒)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역시 천천히 쌍수를 치켜 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두 분께서는 진정하시지요. 두 분 모두 한집안 식구가 아닙니까?" 십살의 우두머리인 귀면도(鬼面刀) 남력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남력! 네가 나를 막는 거냐?" 조추림이 검을 들어 남력을 똑바로 겨눴다. 검끝이 부르르 떨리며 검신(劍身) 전체가 신비스러운 백광(白光)에 휩싸였다. "속하가 어찌 감히!" 머리카락에 가려진 남력의 표정은 누구도 읽을 수 없었다. 단지 담 담한 목소리로 미루어 그는 조추림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분께서 다투실 때가 아닌 듯해서 드리는 말씀입 니다. 게다가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남력은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사내였 다. 이런 사람일수록,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큰 효력이 있는 법이다. "으음..." 조추림은 한동안 남력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검을 거뒀다. 검신에 어 렸던 백광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흠! 으흠!" 호륵마 역시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잔뜩 끌어올렸던 진기를 풀었다.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호륵마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시다!" 조추림은 호륵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어디로 가자는 말이냐?' 라고 묻고 있었다. "동쪽으로 갑시다. 놈이 서쪽으로 우리를 유인했으니, 동쪽으로 갈 확률이 높지 않겠소? 그리고 그쪽은 우리 부족이 있으니, 만약 흔적을 찾지 못하더라도 무슨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낼 수도 있겠지." 조추림은 한동안 묵묵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떡였다. "좋소! 호 노인의 뜻대로 합시다." 조추림 또한 어느 정도 평정을 회복한 것 같았다. 그들은 호륵마를 선두로 동쪽으로 사라졌다. * * * 조추림의 일행이 공터를 떠나간 뒤 일 각쯤 지난 뒤... 공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들썩거 렸다. 푸우- 흙이 갈라지고 수풀이 헤쳐지며 시커먼 그림자가 땅속으로부터 튀어 나왔다. 온통 시커먼 흙투성이였지만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검은 표범 흑왕을 죽인 묘족 사냥꾼이었다. "퉤!" 사내는 입에 물고 있던 굵은 대롱을 뱉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침을 뱉어 입 안에서 지금거리던 흙 알갱이들을 모두 씻어 냈다. 사내는 자신이 엎드려 있던 땅을 헤쳤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장옥평이었다. 그의 입 에도 굵은 대롱이 하나 물려져 있었다. 사내는 장옥평의 몸 아래에서 시커먼 덩어리를 끄집어 냈다. 그가 사냥했던 검은 표범의 가죽이었다. 사내는 우선 가죽을 꼼꼼히 말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법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졸라 말아도 가죽의 부피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칡넝쿨을 이용해 몇 번이고 가죽을 졸라 묶었다. 다섯 번 만에 표범 가죽은 사내의 몸집과 별차이가 없을 정도로 줄 어들었다. 사내는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어 그는 장옥평 을 들어 등에 업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칡넝쿨을 이용해 장옥평이 떨 어지지 않게 잘 묶은 뒤, 묶어 놓은 표범 가죽을 들어 머리에 이었다. 사내는 구릉을 주르르 달려 내려왔다. 이것저것 거추장스러운 짐이 많은 몸이었지만, 그의 동작은 노루처럼 경쾌하기만 했다. 공터에 내려선 사내는 사방을 살펴본 뒤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조추림이 그토록이나 이를 갈던 서쪽 밀림 쪽이 었다. '귀신의 숲'이라 불리는 오란산의 서쪽 밀림, 그리고 '하늘의 끝'이 라 불리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이곳들은 조추림에게 있어서와는 달리, 그에게 있어서는 동네 뒷산 처럼 친숙하게 여겨지는 사냥터였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2 장 아합족(阿合族) 묘왕동주 1 권 二章 아합족(阿合族) 1 장옥평은 자신이 죽어 지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화차(火 叉)를 든 귀신들이 육신을 난자하는 초열지옥(超熱地獄)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몸은 불덩이같이 뜨거운데, 머릿속은 벌통이라도 하나 들어 있는 것 처럼 웅웅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큼직한 눈망 울이었다. 백옥처럼 새하얀 흰자위와 그 한가운데 모든 것을 빨아들일 늪처럼 깊고 끈적하게 자리잡은 눈동자... 이어 얼굴의 윤곽선이 서서히 분명해졌다. 갈색 피부와 약간 넓은 콧방울, 새까만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 기이 한 깃털 장식... 여인이었다. 하지만 생소한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여인이었으니 장옥평이 생소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단지 처음 봤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질적인 무엇 인가가 있었다. 장옥평은 곧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인은 자신이 이십삼 년 간 보아 온 중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 디...?" 말라붙은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아, 한마디 말을 내뱉기가 장성(長 城)을 쌓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여인은 눈치가 빠른 것 같았다. 그녀는 흠뻑 젖은 천으로 그의 입가 를 닦아 주었다. "여기가 어디요?" 물기로 입술을 적신 장옥평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에 방긋 웃었다. 새하얀 이빨이 반짝일 때 장옥평은 눈이 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시야로부터 스르르 떠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시야에는 그녀 대신에 방사형(放射形)으로 짜여진 목 재가 들어왔다. 어떤 목조 가옥의 천장이었다.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잡하고도 원시적인 가옥... 장옥평은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목옥(木屋)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으음..."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장옥평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몸은 의외로 편안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몸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정신을 잃기 전까지 그토록이나 절절히 통증을 호소하던 자상들은 대부분 치료된 듯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지독했 던 상처들이었는데 말이다. 도대체 며칠이나 이렇게 누워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여기는 어디일까? "괜찮나?" 문득 들려 온 굵은 목소리가 장옥평의 상념을 멈추게 만들었다. 장옥평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들 어왔다. 여자는 방금 전까지 그를 내려다보던 매혹적인 이족(異族) 여 인이었다. 그리고 남자 또한 중원인이 아니었다.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장옥평의 미간이 좁아졌다. 굵은 눈썹과 흑백이 분명한 부리부리한 눈동자, 여유있는 미소... 장옥평은 뒤죽박죽이 된 기억의 한구석으로부터 남자의 존재를 끄집 어 낼 수 있었다. 검은 표범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바로 그 묘족 사 내였다. "잠꾸러기 같으니라고! 꼬박 엿새를 자고 깨는군. 그 동안 이 아이 가 자네를 돌보느라 수고했지." 묘족 사내는 방실거리며 장옥평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옥평은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동작처럼 어 렵게 느껴졌다. "여기는 어디요?" 장옥평은 사내에게 물었다. "우리 마을이지." "당신의 마을?" "우리는 이곳을 '슬픈 바람의 골짜기'라고 부른다네." "슬픈 바람의 골짜기...?"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이었다. 하지만 장옥평은 그 지명에 대해 더 이 상의 의구심을 느끼지 않았다. 사내가 묘인인 만큼 이곳은 묘인이 사 는 부락일 것이고, 그 이름은 어차피 생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약을 갈아 붙일 때가 되었네." 사내는 여인에게 장옥평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몇 마디를 지시했 다. 여인은 고개를 끄떡인 뒤 목옥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나무 로 만든 그릇 두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가장 심하더군. 근육은 물론이거니와 힘줄도 제법 손상된 것 같아." 사내는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장옥평의 어깨에 감긴 천을 풀 었다. 그 말을 들은 장옥평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고약(膏藥) 아래로 한 뼘 가까이 꿰맨 상처가 있 었다. 근육이나 힘줄이 상했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오른 손잡이였다.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로 단순 한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장옥평의 염려를 눈치챘는지 사내는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너무 염려하지는 말게. 나는 몇 년 전 자네보다 몇 배 더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지.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멀쩡하잖아? 사람의 몸뚱 이란 생각보다 튼튼한 거라네." 장옥평은 사내의 말을 믿었다. 사내의 전신에 새겨진 흉터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조금 쓰라릴 거야." 사내는 하나의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고약을 세 손가락으로 퍼서 장 옥평의 환부(患部)에 바르기 시작했다. 고약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약효는 무척이나 빠른 것 같았다. '으윽!' 화끈거리는 느낌이 상처 틈새를 비집고 피부 속으로 파고들자, 장옥 평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걸 마시게. 힘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사내는 또 하나의 그릇을 장옥평에게 내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검은 액체가 그릇 속에 절반쯤 담겨져 있었다. 장옥평의 인상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액체로부터 풍기는 냄새가 너 무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인상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액체를 마셨 다. "크으-" 맛 또한 냄새에 못지않게 지독했다. 장옥평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호호호!" 인상을 쓰는 그의 모습이 우스웠던 것일까? 사내의 옆에 있던 여인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왼손 집게손가락을 곧게 펴 장옥평의 얼굴을 향해 내밀었다. "...?" 여인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장옥평은 흠칫 놀라며 상체 를 뒤로 뺐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스스로 생각해도 형편없을 정도로 느렸다. 피하 려 생각한 순간,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그의 입술에 닿아 있었던 것이 다. 장옥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초생달처럼 둥글게 휘어진 채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손 가락을 가볍게 휘돌려 장옥평의 입가를 문질렀다. 장옥평의 입가에 남 아 있던 약 찌꺼기가 그녀의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그녀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갓난아이처럼 그것을 빨았다. 그녀가 보여 준 일련의 동작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고, 또 유혹적이 었다. "도대체...?" 장옥평은 귀신에게 홀린 듯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하하, 자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이 아이의 이름은 마나(麻那) 라네. 잘 해보게. 하하!" 무엇을 잘 해보라는 얘기일까? 사내는 껄껄거리며 웃고 있었다. "단탈!" "단탈 타루가!" 목옥 밖으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원, 보채기는..." 사내는 문 쪽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수루와 곤작이 완성된 모양이야. 흑왕을 잡는 데 자네도 한몫을 거 들었으니, 함께 나가세." 장옥평은 어리둥절했다. "수루와 곤작이 뭐죠?" "보면 알 걸세." 사내는 장옥평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나라 불린 여인에게 뭐라 고 말했다. 마나는 고개를 끄떡인 뒤 장옥평을 끌어안듯이 부축했다. 말랑말랑한 여체가 가슴에 바짝 밀착되어 오자 장옥평은 마음이 싱 숭생숭해지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본 마나는 손을 내밀어 장옥평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식의 짓궂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완전히 노리개로 아는군.' 장옥평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이 되어버렸 다. "자, 나가세!" 사내는 어느새 목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 * 하늘에는 남부의 뜨거운 햇살이 점점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아래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목옥을 둘러싼 채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하 나같이 팔다리를 드러낸 조잡한 가죽옷을 입은 묘족이라는 점이었다. "단탈!" "단탈 타루가!" 사내는 사람들 한가운데로 나아가 오른손을 치켜 들었다. "와-!" "타루가-!"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고조되었다. 인파가 갈라지며 두 사람이 무엇인가를 들고 사내에게로 다가왔다. 그 광경을 바라본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 람이 떠받들고 있는 물건은 다름 아닌 자신을 공격했던 검은 표범의 가죽이었던 것이다. 사내는 표범의 가죽을 오른손으로 받아 든 뒤 사람들을 향해 큰 소 리로 외쳤다. "타루가 수루!"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일제히 손을 흔들며 소리치기 시 작했다. "타루가 수루!" "단탈 타루가 수루!" 사내는 왼손을 크게 휘두르며 다시 한번 외쳤다. "타루가 수루!" 사람들은 또 한번 환호했다. "와아-!" 사내는 표범의 가죽을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표범의 가죽은 이미 사람의 손을 거친 듯, 그가 뒤집어쓰기에 딱 알맞게 다듬어져 있었다. 표범의 대가리는 그의 이마 위에 날카로운 이빨을 빛내며 걸리고, 가죽의 어깨 부위는 그의 어깨에 걸렸다. 문득, 장옥평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놀랄 만치 표 범 가죽과 잘 어울렸다. 표범 가죽을 뒤집어쓰는 순간, 사내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강함이었고, 엄격함이었고, 인자함이었다. 그것은 '아버지' 의 기운이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사그라지자, 인파가 갈라지며 또 한 명의 사람이 사내에게로 걸어나왔다. 가무잡잡하게 탄 피부와 허연 머리카락이 좋 은 대비를 이루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회색 곰의 가죽을 머리 위에 쓰고 있었던 것이 다. 표범 가죽을 쓴 사내와 곰 가죽을 쓴 노인. 장옥평은 그들을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한 사람 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때 노인이 미소 지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단탈!" 사내는 껄껄 웃으며 노인을 끌어안았다. "가리아 타루가!"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2 장 - 1 묘왕동주 1 권 이어, 노인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사내의 목에 걸어 주었 다. 노인은 사내를 가리키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타루가 곤작!" 사람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열광하기 시작했다. "타루가 곤작!" "단탈 타루가 곤작!" 노인은 왼손을 떨치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타루가 곤작!" "와아-!" 다시 한번 열광의 물결이 지나갔다. 장옥평은 사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짐승의 힘줄로 보이는 붉은 줄, 그것에 꿰어진 십여 개의 새끼손가 락만한 하얀 조각들... 장옥평은 이내 그 조각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의 검은 표범 의 발톱이었다. 장옥평은 그제야 사내가 왜 가죽과 발톱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내는 표범 가죽옷과 표범 발톱 목걸이를 걸친 채 장옥평을 돌아보 았다. "이름이 뭔가?" 아까 집 안에서 들었던 것과 다름없는 밝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표 범 가죽과 목걸이 때문이었을까? 장옥평은 그 안에서 한 줄기 기이한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장, 장옥평이라 하오." 장옥평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사내는 껄껄거리며 웃다가 장옥평을 끌어안았다. "자네의 도움이 컸네." "도움은 무슨..." 장옥평은 민망함을 느꼈다. 생명의 구함을 받은 것은 자신인데, 사 내는 되려 자꾸 그에게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옥평은 이어 사내에게 물었다. "그것이 수루와 곤작이오?" "맞았네." 사내는 목걸이를 툭 치며 대답했다. 발톱들이 흔들려 부딪칠 때마다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 려 나왔다. "타루가가 입는 옷이 수루고, 타루가가 거는 목걸이가 곤작이지." 장옥평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타루가'라는 건 뭐요?" 사내는 곁에 서 있는 노인을 힐끔 바라본 뒤 대답했다. "타루가는 우리 아합족(阿合族) 말로 '왕'이라는 뜻이야. 저 노인이 타루가였지." 였지...? 장옥평은 사내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단탈'은?"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아직 몰랐나?" "...?" "단탈(但脫)은 내 이름이야. 왕이라 불리는 짐승을 잡아왔으니, 이 제부터는 내가 타루가라네." 사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2 한 자루 붓이 백지 위를 은어처럼 매끄럽게 부영(浮泳)하고 있었다. 붓은 힘차게 뻗고, 교묘히 돌며, 섬세히 멎었다. 붓 끝과 종이가 만날 때마다 눈이 만들어지고, 코가 만들어지고, 입 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붓이 종이로부터 떨어졌을 때, 하나의 영상이 백지 위에 구 체화되어 있었다. "세필(細筆)을!" 조추림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손을 불쑥 내밀 었다. 그 옆에 앉아 있다가 조추림에게 가느다란 붓 한 자루를 건네는 사 람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얼굴 앞으로 드리운 남력이었다. 그가 건 넨 붓은 탄력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필봉(筆鋒)을 지닌, 왕희지(王羲 之)가 저 유명한 난정서(蘭亭 )를 썼다고 하는 서수세필(鼠鬚細筆:쥐 수염으로 만든 가는 붓)이었다. "눈썹이 중요해, 눈썹이... 태어나서 그런 눈썹은 처음 보았거든." 조추림은 붓을 받아 정성 들여 눈썹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수세필이 수십 차례 종이 위를 내리찍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일 각여... 드디어 조추림이 떠올리던 영상이 하나의 완전한 형상을 갖춰 종이 위에 완성되었다. "흐흠!" 조추림은 다시 한번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림을 쳐들어 무 료하게 앉아 있던 호륵마에게 보였다. "어떻소? 비슷한 것 같소?" 호륵마는 감정사(鑑定士)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보았다. 그는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똑같소! 똑같아!" "그래요?" 조추림은 그림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림을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보기를 얼마나 했을까? 난초처럼 잘 빠진 조추림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것을 본 호륵마의 마음 한구석이 쿵,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아니야... 턱 선이 이것보다는 조금 더 각졌어..." 혼자말을 중얼거리던 조추림은 그림을 와락 구겨 한쪽 구석에다가 팽개쳐 버렸다. '젠장!' 호륵마는 한숨을 쉬며 조추림이 그림을 팽개친 곳을 바라보았다. 수북이 쌓여 있는 종이 더미들... 저 미친놈은 이틀 동안 꼼짝도 안 하고 저짓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이를!" 조추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력은 한 장의 새하얀 종이를 그 의 앞에 깔아 놓았다. '그 주인에 그 종이라더니...' 호륵마는 혀를 찼다. 저 귀신 상판을 한 녀석은 이틀 동안 한마디 불평도 없이 미친놈을 시중들고 있었던 것이다. * * * "아!" 눈빛이 날카로운 말라깽이가 탄성을 내뱉었다. 조추림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말라깽이를 바라보았다. 말라깽이는 얼굴을 그림 앞으로 바짝 가져다 대며 뭐라고 더듬거렸다. 조추림은 고개를 돌려 호륵마를 바라보았다. 호륵마는 말라깽이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 고 조추림에게 말했다. "지난 겨울에 사냥을 하다가 이자를 본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요?" "동북쪽, '슬픈 바람의 골짜기'에 살 거라고 하는데..." 조추림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슬픈 바람의 골짜기?" 물론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이었다. 그는 짜증이 났다. 이 버러지처럼 미개한 족속들은 지명(地名) 하나를 짓는 것도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바람이 슬프다느니, 숲이 울부짖는다느니... 신발을 신은 놈이 열 중에서 둘도 안 되는 주제에, 제깟 것들이 무 슨 고상한 시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조추림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라도 한번 기분이 상하면, 여간해서는 평소의 맑은 정신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것을 잘 아는 남력은 조추림을 대신해 호륵마에게 물었다. "글쎄... 그쪽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말꼬리를 흐리던 호륵마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묘어로 뭐라고 물 었다. 대전이라 부를 수 있는 목조 건물 안에 모인 사람의 수는 이십여 명... 을온족 중에서도 묘강의 지리와 풍속에 정통한 마당발들이었다. 호륵마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지껄이기 시작했 다. 잠시 후, 호륵마는 남력을 돌아보았다. "수렵으로 근근히 살아 가는 아합족이 머문다고 하는군." "아합족?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그럴 걸세. 백 명이 간신히 넘는 소부족이니까... 그런 부족은 이 묘강 땅에 백 개도 더 된다네." 남력은 고개를 끄떡인 뒤 조추림을 바라보았다. 조추림은 스스로 만든 감정의 세계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 는 것 같았다. 남력은 조추림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래?" 조추림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입가에 하얀 미소가 천천히 맺혔 다. 그는 호륵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소?" 호륵마는 고개를 끄떡였다. 장옥평이란 자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자가 있을 만한 곳으로 조추림을 안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 다. "그리고 앞으로 '슬픈 바람의 골짜기'라는 조잡스러운 이름은 잊어 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오." "...?" 호륵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추림을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지어 본 것인데... 어떻소? '죽음의 골짜기'라는 이름 이?" 조추림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명구(名句)라도 떠올린 문사(文士)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 * * 밤.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얼기설기 세워진 채, 공터 중앙에서 활활 타오 르고 있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모닥불들이 어미를 둘러싼 새끼들처럼 큰 모닥불을 중심으로 피워져 있었다. '그것 참!' 눈앞에서 밝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장옥평은 옆구리에 매 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마나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나의 손장난은 집요했다. 사람들이 훤히 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의 몸뚱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은 때로는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때로는 연인을 애무하듯 자극적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스물세 살의 뜨거운 피를 가진 장옥평으로서는 견디기 어려 운 일이었다. "이봐요, 좀 떨어지라고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장옥평은 다시 한번 마 나에게 사정했다. 마나는 흑백이 분명한 눈으로 장옥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새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정도 얘기했으면 대충 무 슨 뜻인지 알아들을 법도 했건만, 그녀는 손장난을 그만두려 하지 않 았다. 그녀는 오히려 손을 길게 뻗어 그의 허벅지 깊숙한 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정말 환장하겠군!" 그녀의 손이 점점 은밀한 곳으로 거슬러 올라오자, 장옥평은 기겁을 하며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이미 불룩하게 일어서 버린 그의 젊음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호호!" 마나는 짤랑거리듯 웃으면서 장옥평의 내민 손가락에 자신의 그것을 얽어 넣었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은 낮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하하! 자네도 좋으면서 뭘 그러나?" 이때 껄껄거리는 웃음 소리와 함께 단탈이 장옥평에게로 다가왔다. 장옥평은 기회는 바로 이때다 싶어, 마나의 손가락을 뿌리치며 일어섰 다. "단탈! 당신의 누이에게 뭐라고 얘기 좀 해주시오!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장옥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오늘은 아합족의 축제인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술과 음 식을 마련한 채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시끌벅적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흥겨움은 낮에 완성된 타루가의 수루, 곤작과 무관 하지 않을 것이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2 장 - 2 묘왕동주 1 권 "사람들이 보는 게 뭐가 어때서? 게다가 마나는 깨끗한 아이야. 이 제껏 지금과 같은 행동을 취한 적이 열 번도 안 될걸?" "열... 번?" 장옥평은 새삼 이들의 성관념(性觀念)이 얼마나 개방적인가를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이들은 한족과는 달리 모든 것이 모계(母系) 중심으로 돌아 가는 사회였다. 아합족에게 있어서 여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정숙함 이나 조신함 같은 윤리 의식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여인이 지녀야 하 는 덕목은 보다 많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튼튼한 자궁과 골반이었 다. 아이가 자라기 부적합한 기후와 환경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한 여인이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처녀성(處女性)이니 정절(貞節)이니 따위 의 말들은 이들에게 있어서 다른 세계의 이야기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 린 것이다. "마나가 왜 그렇게 애를 쓰고 자네를 치료했는지는, 아마 오늘밤에 알 수 있을 걸세." 놀리는 듯한 단탈의 말에, 아직도 동정(童貞)을 유지하고 있던 장옥 평은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녀가 왔군!" 단탈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녀라니요?" 단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기이한 열기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중앙에 마련된 모닥불... 일렁이는 불꽃의 그림자를 밟으며 사람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 냈다. 기이한 문양이 수놓아진 도포 같은 하얀 옷을 걸치고 붉은 줄을 허 리에 감고 나타난 사람은 여인, 그것도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늘쪽같이 오뚝한 콧날과 호수 같은 눈동자가 윤기나는 갈색 피부 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인... 이마에 매단 동전만한 붉은 보석이 그녀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 주고 있었다. 여인이 사람들을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 리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사뿐거리는 여인의 걸음이 단탈의 앞에 와서 멈췄을 때, 단 탈 또한 사람들과 같이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나라아합!" 단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탈!" 여인은 손을 내밀어 숙여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탈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횃불처럼 타오르는 단탈의 눈동 자와 별처럼 영롱한 여인의 눈동자... 이어 그들은 몇 마디의 짧고도 속삭이는 듯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 다. 묘어를 모르는 장옥평으로서는 그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이전부 터 무척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를 핥아먹 을 듯한 끈적이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단탈이 장옥평을 가리키며 여인에게 무어라 말했다. 장옥평 은 단탈이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옥평이라 하오!" 장옥평은 두 손을 모아 정중히 포권했다. 여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이름은 나라아합이라고 하네." "예?" "나(羅), 라(羅), 아(阿), 합(合)!" 단탈은 한 자씩 끊어 말했다. "아합은 '어머니'라는 뜻이지. 하지만 타루가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 에 그녀는 아직 아합이 될 수 없었어. 오늘밤 그녀는 드디어 진정한 아합이 된다네." 장옥평은 단탈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단탈은 쑥스러 운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여인은 단탈에게 무어라 물었다. 약간 쉰 듯하지만 달콤한 목소리였 다. 단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여인은 놀란 듯한 눈초리로 장옥평을 바라보더니 근처에 서 있던 중년인에게 몇 마디 지시하는 투로 말했다. 지시를 받은 중년인은 앞에 놓인 자그마한 술단지를 집어 들고 냉큼 달려왔다. "허! 나라아합이 자네를 직접 영접한다고 하는군!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아마도 자네가 나를 도와 흑왕을 잡았다는 말에 감격한 모양이야." 단탈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라아합은 술단지를 들어 장옥평 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영접?" 장옥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내밀어 술단지를 받으려 했 다. 그러자 나라아합은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술단지를 자 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옆에 있던 단탈이 웃으면서 장옥평에게 말했다. "아, 손을 써서는 안 되네. 손님은 가만히 선 채로 술을 마셔야 하 는 거야. 원래는 마을 입구에서 해야 하는 의식인데, 자네는 내게 업 혀 들어왔으니 할 수 없었지. 참! 그리고 한 가지 귀띔해 줄 것이 있 네. 술을 많이 마시면 많이 마실수록 자네는 환영받을 수 있을 거야." 장옥평은 별수없이 나라아합이 단지를 기울이는 대로 목구멍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나 같은 환자에게 술을 먹이다니!' 의학적인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같으면 그 같은 환자에게 절 대로 술을 권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기 는 사람이라면 이런 몸으로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이 묘족들은 의학적인 지식은 손톱만치도 없는 사람일 테고, 장옥평은 제 몸을 개천 바닥의 자갈 정도로 여기는 사람 일 것이다. 벌컥! 벌컥! 오기란 때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만들어 준다. 장옥평은 본디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그는 묘족들에게 얕잡아 보이 기 싫다는 오기만으로 한 말에 가까운 술을 모두 마실 수 있었다. 다 행스러운 점은 술맛이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이다. "와-!" 단지가 거의 수직으로 세워지자 사람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들 의 환호는 나라아합이 빈 단지를 장옥평의 붉어진 얼굴로부터 떼어 낼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짝짝! 단탈은 박수를 치며 장옥평에게 말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자네와 술을 마시려면 목숨을 내놓아야겠 군!" 장옥평은 단탈을 향해 씨익 웃었다. "기분이... 괜찮은데..." "기분이 괜찮다고?" 단탈은 하늘을 보고 껄껄 웃다가 장옥평의 등을 탁 후려쳤다. "역시 멋진 친구야!" 하지만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앞으로 쓰러지는 장옥평의 모습은 그다 지 멋져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장옥평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뇌수가 골 밖으로 드 러난 것 같이 지독한 느낌이었다. 깨어날 때마다 이렇게 머리가 아플 바에야 차라리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간지러운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어...?' 장옥평은 눈을 떴다. 눈앞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장옥평은 손을 내밀어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비단실처럼 가늘고 도 매끄러운 것이 손가락 사이에 걸렸다. 그는 그 감촉이 마치 머리카 락 같다고 생각했다. 후욱- 한 줄기 따스한 바람이 그의 젖꼭지를 간질였다. 장옥평은 손을 더 아래로 내려보았다. 따스하고도 말랑말랑한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는 곧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살결이었다. "마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이름 하나... 가슴을 간질이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리고 시냇물 소리 같은 키 득거림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들어서, 이제는 그 미묘한 가락까지 도 외울 수 있는 웃음 소리였다. "마, 마나! 이러면..." 하지만 장옥평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입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손가락 때문이었다. 손가락은 우선 그의 이빨과 잇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혓바닥 윗 부분을 긁었으며, 입천장 깊숙한 여린 살결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 어..."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축축해진 손가락이 그의 입 속을 나와, 턱과 가슴과 배를 따라 조금 씩 내려갔다. 드디어 그녀의 손가락이 배꼽을 지나 그 아래로 내려갔을 때, 장옥 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둠 속의 여체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3 아합족의 아침 식사는 중원과는 달리 간단한 것이었다. 물고기를 불에 직접 구운 것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둥글둥글한 과일 몇 개가 전부인 간단한 아침을 앞에 두고, 장옥평은 어깨 상처의 통증 을 참기 위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어야만 했다. 지난밤 마나와 벌인 격렬한 정사(情事)는 고약의 힘으로 간신히 붙어 있던 상처를 다시 벌 려 놓았던 것이다. '나도 미친놈이지.' 한 가닥 고소(苦笑)가 장옥평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생전 처음 발 담근 여체가 아무리 꿀처럼 달콤하다고 한들, 이런 몸 을 가지고 동이 틀 무렵까지 거푸 탐닉한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 이었다. 문득, 가시가 발라진 생선의 살점이 장옥평의 입가로 다가왔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허연 생선의 살점, 그것을 쥐고 있는 길고도 가무잡잡한 손가락... 고개를 돌린 장옥평의 시선에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 는 마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나는 제 몫의 생선까지도 장옥평의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 지난 밤, 자신을 위해 여러 차례 몸을 내던진 정인(情人)에게 몸보신이라도 시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 보니, 자네도 여간이 아니야. 마나가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 군."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단탈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장옥평을 바 라보며 말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나라아합의 투명한 아름다움이 안개 처럼 신비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장옥평은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단탈은 그와 마나가 지난밤 무슨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별말씀을 다하는구려." 장옥평은 단탈을 바라보며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좋은 밤이었어!" 단탈은 나라아합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 또한 인생에 있어서 무척이나 뜻깊은 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어제와는 다른 행복과 만족감이 미소 짓는 그들의 얼굴 위에 아지랑이처럼 어려 있었다. 장옥평은 문득 어젯밤 단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합은 '어머니'라는 뜻이지... 오늘밤 그녀는 드디어 진정한 아합 이 된다네. 장옥평은 그제야 그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타루가가 탄생해야만 아합이 될 수 있다. 묘녀(苗女) 들에게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굴레일 수밖에 없는 처녀성을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난밤 이루어졌을 것이다. 장옥평은 싱글거리고 있는 단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정사에 관해서 서로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아침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 것을 보면, 단탈이라는 사내는 어지간히도 기휘 (忌諱)하는 것이 없는 호방한 성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장옥평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어색하게 헛 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네." 식사가 끝난 뒤, 단탈이 장옥평에게 말했다. "그들이 왜 자네를 쫓나?" 장옥평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장검에 가슴이 뚫린 아버지, 화살에 산적처럼 꽂힌 어머니, 난자된 누님, 형의 수급... 잊을 수 없는 그 지옥도(地獄圖)가 정초에 터뜨리 는 제구폭죽(除舊爆竹:묵은해를 보내는 의미로 정월 초하루에 쏘는 폭 죽)처럼 그의 눈앞에서 명멸했다. 장옥평의 눈초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들은... 내 가족을 죽였소." 장옥평이 밀랍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연 것은, 단탈의 물음이 있은 뒤 반 각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내 누님을 죽이 고, 내 형님을 죽였소." 단탈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전쟁이 벌어진 모양이군." 아합족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곧 부족이었다. 부족이 모두 살해당하 는 경우는 오직 하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전쟁... 그렇소, 전쟁이오." 장옥평은 우울한 얼굴로 뇌까렸다. "자네는 자네의 가족을 되찾아야만 하겠군!" "...?"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3 장 산독자(山毒子) 묘왕동주 1 권 第三章 산독자(山毒子) 1 단탈의 차림은 장옥평이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간편했 다. 흑왕의 가죽으로 만든 수루를 걸치지 않아서, 옷이라고는 아랫도 리만 간신히 가린 갈색 가죽옷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니고 있는 물건은 많았다. 허리에는 두 개의 도와 불룩한 가죽주머니 몇 개, 어깨에는 물소의 뿔로 만든 각궁(角弓) 하나와 화살이 몇 개 들어 있는 전통(箭筒), 그 리고 목 위에서 짤그락거리는 흑왕의 이빨로 만든 곤작... 단탈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을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즐길 때에는 그저 호인(好人)처럼만 보이던 그였다. 하지만 이런 차림새로 밀림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는 노련한 사냥꾼으로 변해 버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숲의 소리 를 듣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의 냄새를 맡는 야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자연과 싸워 자연이 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단탈을 가리키 는 말일 것이다. "단탈!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계곡을 떠나 밀림으로 들어온 지 반 시진이나 되었을까? 장옥평은 마음속으로 계속 꺼림칙하게 여기던 것을 입 밖에 꺼내고 야 말았다. "처음 보는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이유가 뭐죠?" 단탈은 걸음을 멈추고 장옥평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흑왕을 함께 사냥한 동지가 아닌가?" 장옥평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점에 대해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움을 받은 것은 나이지 당신이 아니오! 그리고 단지 그 이유 하나뿐 이라면, 이렇게까지 애를 써줄 필요가 없잖소? 내가 알기로는 당신들 묘족과 우리 한족은..." 장옥평은 말꼬리를 흐렸다. 한족은 예로부터 이족(異族)들을 '오랑 캐'라 통칭하며 혐오해 왔다. 한족이 이족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이족 또한 한족을 싫어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단탈의 눈빛이 조금 묘해졌다. "다른 이유라... 내게 다른 이유가 있다면, 자네는 그것을 듣고 싶 은가?" 장옥평은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 그러면 말해 주지!" 단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과거 한족에게 목숨 빚을 한번 진 적이 있다네. 자네도 그런 모양이지만 나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지. 그래서 그에게 물었네. 어떻게 하면 그 빚에 보답할 수 있냐고..." "그래서... 그가 한족에게 잘해 주라고 그럽디까?" 장옥평은 자신이 왜 이렇게 삐딱하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옥평은 단탈의 강인함과 소탈함을 좋아했다. 더구나 단탈은 그에 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단탈을 대할 때마다 자신이 점점 어린아이가 되는 듯한 기분 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단탈이 그를 어린아이 취급을 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조그맣게 위축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단탈 앞에서는 영영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는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단탈에게 반항적으로 나오게끔 만드는 이유 인지도 몰랐다. 단탈은 장옥평의 말투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은 없었어. 그는 단지 내게 동쪽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더 군. 동쪽에 가서 한 가지 일을 해달라고..." "동쪽? 중원(中原) 말이오?" "그래, 자네가 살던 중원! 하지만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 었어. 나는 타루가가 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아합을 지켜야만 했거 든." 단탈은 목에 걸고 있던 곤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장옥평은 비로소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이 바로 '그'인가요?" "맞았네." "혹시... 당신은 '그'가 부탁한 일을 내게 대신 시키려는 건가요?" "자네는 어차피 동쪽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큰 상관은 없잖아? 그리 고 그는 자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거야. 그에게는 다 죽어 가는 사람 도 살려 내는 신비한 힘이 있거든." 단탈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 * * 밀림을 헤쳐 나가는 단탈의 걸음은 조금 기이했다. 한 방향으로 똑 바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걸음을 디딜 때마 다 조금씩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본 장옥평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탈의 발이 딛는 곳은 반드시 평평하고 단단한 흙이었다. 그의 눈 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그의 발이었다. 스윽- 발가락 끝이 지면에 닿는 순간, 단탈의 발바닥은 그 움직임이 미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가장 단단한 땅을 향해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장옥평은 단탈의 걸음을 한참 동안이나 관찰한 뒤에야 그 미묘한 움 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머릿속으로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매걸 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걷는다면, 아마 머리가 깨지든지 미쳐 버릴 것이다. 단탈의 두 발은 마치 그로부터 독립된 생명체처럼, 저절로 반응해서 가장 안전한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규칙적인 움직 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진 속도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장옥평으로서는 단탈을 따라잡기가 무 척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어느덧 밀림의 한 부분이 끝나 있었다. 단탈은 그곳에 석상처럼 우 뚝 서 있었다. 장옥평은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그의 곁에 다가섰다. 피를 머금은 듯한 칙칙한 검붉은 색이 이채로운 거대한 나무 한 그 루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교미하는 뱀처럼 엉켜 늘어진 덩굴 군데군데는 허옇게 말라붙어 있 고 잎사귀마저 누렇게 퇴색한 나무는, 어림잡아도 수령(樹齡)이 이삼 백 년은 되었을 고목이었다. "...?" 나무를 바라보던 장옥평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지면으로부터 여 섯 자쯤 떨어진 부분에 울고 있는 듯한 사람의 얼굴이 있는 것을 발견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나무의 껍질 속에 파묻어 그대로 나무와 한몸 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 듯한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은 나무껍질에 불과했 다. 눈과 입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옹이였고, 콧날처럼 튀어나온 부 분은 가지가 나오려다 만 목피 덩어리였고, 눈물처럼 보이는 것은 옹 이로부터 흘러내린 수액(樹液)이 말라붙은 자국이었다. 따로따로였다면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을 평범한 것들... 하지만 그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우는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 듯한 기 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부족을 지켜 주는 할머니 나무라네." "할머니 나무?" 단탈은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가져다 대며 허리를 살짝 굽 혔다. 지난밤, 부족 사람들이 나라아합에게 표하던 것과 같은 예법이 었다. 이윽고 단탈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할머니는 언제나 슬퍼하고 있지." 어딘지 우울함이 배어 있는 듯한 목소리로 단탈이 말했다. 장옥평은 단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왜 슬퍼하지요?" 단탈은 고개를 들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 굽은 가지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죽기 때문이야." 단탈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장옥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나무의 가지들을 바라보던 단탈은 쳐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아이들은 셋 중 하나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해. 굶어서 죽고, 병들 어 죽고, 그냥 죽은 채로 태어나기도 하고... 가리아 타루가가 젊었을 때만 해도 부족 수가 지금의 세 배는 되었다고 하는데... 계속 줄고 있어. 그 모든 것이 아이들이 죽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의 조상이신 할머니는 이렇게 슬퍼하고 있어." 장옥평은 덩달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묘강, 그 중에서도 아합족이 거주하는 서쪽 끝의 하늘과 땅은 너무 나도 잔인하고 척박했다. 살이 익어 버릴 듯한 더위와 뼈까지 얼려 버릴 듯한 추위, 주야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맹수와 독물(毒物), 때만 되면 그들의 터전을 휩쓸고 지나가는 폭우... 그런 자연 앞에서 인간의 힘이란 너무도 미약했다. 아합족에게는 농경을 할 수 있는 지식도, 그리고 도구도 없었다. 그 들은 병을 적절히 치료할 수 있는 의술도, 그리고 약품도 없었다. 하지만 아합족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가치가 오직 생존 (生存)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과 맞서 싸워 왔다. 굶주림에 맞서 짐승을 잡았 고, 목마름에 맞서 우물을 팠다. 맹수에 맞서 용맹스러운 사냥꾼을 길 러 냈고, 독물에 맞서 독특한 약물을 제조했다. 자연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자연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것들을 뺏어 왔다. 아귀처럼 악착같이...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써도, 아이들은 자꾸만 죽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옥평은 단탈에게 있어서 부족의 생존이 얼마나 지고무상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골짜기의 바람도 슬퍼하는 거군요." 장옥평은 '슬픈 바람의 골짜기'라는 우울한 이름의 유래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탈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장옥평의 어깨를 툭 쳤 다. "어서 가세! 이러다가는 오늘 안에 그를 만날 수 없겠어." 단탈은 울적함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활짝 웃었다. * * * 계곡은 신비스러워 보였다. 검게 번들거리는 암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곡구(谷口)에서부터 은 은하게 감돌고 있는 분홍빛 안개 때문이었을까? 안개 속을 걸으며, 장옥평은 아까부터 머릿속을 잠식해 오던 현기증 이 점점 더 심해짐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럴까?' 어깨와 가슴의 상처는 이상이 없는데... 내상이 다시 도지기라도 한 것일까? 다리 하나를 들어올리는 것이 천근처럼 무겁게 여겨졌다. 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내상이 도진 것이라면 의당 기혈이 뒤 틀리고 단전이 쑤셔야 하는데, 그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졸 음이 쏟아질 때처럼 나른하기만 했다. 새하얀 흉터들이 새겨진 단탈의 등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자 신의 걸음이 더뎌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력이 흐릿해지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분홍빛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혹시... 독(毒)?' 장옥평은 문득, 자신이 중독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어떤 독에 중 독되었을 경우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어디에선가 들어 본 기 억이 있었다. 하지만 장옥평은 이내 그 사실을 부정했다. 만일 독기운 때문이라 면, 내공이라고는 한번도 접해 보지 못했을 단탈이 무슨 재주로 저리 도 늠름히 걸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단... 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장옥평은 죽을힘을 다하여 단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안타까울 정도로 미약했다. 어느 순간, 땅바닥이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 * * 장옥평은 얼굴을 찌푸리며 깨어났다. 그가 얼굴을 찌푸린 까닭은 입 안을 감돌고 있는 지독히 쓴맛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은 곰의 쓸개였다. 그는 어린 시 절 그것을 딱 한번 먹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곰 쓸개보 다 더 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확신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아무리 침을 삼켜도 사라지지 않는 이 맛은 곰 쓸개 따위는 비교조 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썼다. 참으려고 그토록이나 애를 썼지만, 오장 을 뒤집으며 치고 올라오는 활화산 같은 구토는 그의 힘으로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장옥평은 지금까지 혼절해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욱, 우웩-!" 그는 토했다. 입 안과 목구멍, 위 속에 있는 모든 쓴맛을 몰아 낼 작정인 것처럼 무작정 토했다. 멀건 물밖에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을 때까지 토했다. 얼마나 토했을까? 장옥평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입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토사물을 손으로 훔쳐 내며 고개를 들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시퍼런 귀화(鬼火) 한 쌍이 둥둥 떠 있었다. "...!" 장옥평은 흠칫 놀랐으나, 이내 그것이 사람의 안광임을 알 수 있었 다. "누구요?" 장옥평은 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은 너 무나도 짙었다. "너는 검패 장일기(莊一麒)와 무슨 관계냐?"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3 장 - 1 묘왕동주 1 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너 무나 음산했다. 어둠이 목소리를 낸다면 아마도 이러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검패 장일기! 장옥평은 깜짝 놀랐다. 그 이름은 팔 년 전 타계한 그의 조부를 가 리키는 말이었다. 툭!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날아와 그의 앞에 떨어졌다. 장옥평은 바닥 을 더듬어 보았다. 사각형의 차가운 물건이 그의 손에 잡혔다. "검패의 후예냐?" 목소리에는 어떤 억양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묻는 것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장옥평은 손에 쥔 물체를 품속에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괴인이 던진 물체는, 장일기가 강호를 종횡하며 신물로 여기고 그 아들 장낙웅이 가법(家法)의 영부(令符)로 삼았던, 산동검가(山東劍 家) 장씨가문(莊氏家門)의 영패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 달 전 화살에 가슴을 뚫린 어머니가 쓰러지며 그에게 건넨, 한 맺힌 물건이기도 했 다. 아마도 그가 혼절해 있던 사이에 어둠 속 목소리의 임자가 떼어낸 모양이었다. "그 물건이 이렇게 굴러다니는 것을 보니, 검패는 이미 죽었나보 군." 어둠 속의 괴인은 여전히 억양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 에 그토록 섬뜩하게 번뜩이던 한 쌍의 귀화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마도 괴인이 눈을 감은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드디 어 장옥평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만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는 지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등뒤에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 이었다. 장옥평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갑자기 다가온 불빛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일어났나?" 횃불을 들고 온 사람은 단탈이었다. "단탈?" 장옥평은 와락 반가운 마음이 일어났다. "이제는 좋아 보이는데?" 단탈은 싱긋 웃으며 들고 온 것을 바닥에 우르르 쏟아 놓았다. 그것 에 횃불을 대고 잠시 뒤적거리자, 바닥으로부터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 기 시작했다. 그가 가져 온 것은 다름 아닌 마른 나뭇가지들이었다. 탁, 탁- 마른 가지가 타 붙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서서히 밀려갔다. 장옥평 은 그제야 자신이 동굴 안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천장까지의 높이가 삼 장이 넘는 거대한 동굴... 바닥까지 늘어진 종유석들은, 동굴이 무척이나 오래 전에 생성된 것 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약(藥) 노인(老人)! 우리는 당신처럼 어둠에 익숙하지 못하니, 이 해하시구려!" 단탈은 모닥불을 키우며 말했다. "네놈이 언제는 내 허락을 받고 무슨 짓을 했더냐?" 예의 무감동한 목소리는 어느새 동굴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고 있 었다. 목소리의 임자는 불빛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섭섭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스스럼없는 말투로 미루어 단탈은 그 목소리에 무척이나 익숙해 있 는 것처럼 보였다. 불길이 어느 정도 살아나자 단탈은 장옥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로 몸이 약하군. 사내가 그깟 안개 하나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서야 어디에 쓰겠나?" 장옥평은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때 동굴 깊숙한 곳으로부터 음산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그깟 안개라고?"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말투. "흐흐... 흐하하하! 도화장독(桃花 毒)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녀 석은 천하에서 네놈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장옥평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도화장독!" 천하에 존재하는 독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지 독하기로 따진다면 부독(腐毒)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생명체가 죽어 부패한 것에서 발생하는 독을 총칭하는 부독은, 그 원형(原形)이 동물이냐 식물이냐에 따라 부시독(腐屍毒)과 장독( 毒) 으로 나뉜다. 그 중 장독은 색깔이 아름다울수록 무서운 독성을 띠게 되는데, 분 홍빛 영롱한 도화장독은 장독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수 있는 지독한 놈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그 안개가...?" 장옥평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안개가 도화장독이라면, 자신은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말 인가? 그리고 단탈은? 그는 손톱만큼도 중독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데? "자네는 약 노인께 감사해야 하네. 그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곤란했 을 거야." 단탈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던 동굴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흐흐... 내 반혼환(返魂丸)이 없었다면, 곤란한 정도로 끝났을까?" 동굴 안쪽의 괴인의 말투는 점차 작아져 갔다. 마지막 말은 알아듣 기 힘들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이 순간, 장옥평은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 다. '약(藥)'이라는 성(姓)과 반혼환! 그 두 가지가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강호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독공 고수의 이름... "서, 설마 산독자(山毒子) 약흠(藥欽)?" 장옥평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2 여름 밀림은 새벽녘이 되어도 조금도 서늘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 다. 조추림은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한 가닥 기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축축한 진흙 냄새처럼 후각의 한쪽 구석을 가볍게 긁어대는 혼탁한 냄새였다. 조추림의 코가 실룩거리는 것을 본 호륵마가 말했다. "비 냄새요." "비 냄새?" "그렇소. 매년 이맘때면 묘강에서는 큰비가 온다오. 그리고 비가 오 기 전에는 언제나 이런 냄새가 나지요." 조추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는 특별히 비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과거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던 동정호(洞庭湖)의 우경(雨景)은 얼마나 서정적이고도 환상적이었던가! 투명한 비단 휘장처럼 살짝 내비치는 빗물의 장막 너머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 있는 망망하고도 고요한 호수... 하지만 여기는 악양도 아니었고 운치있는 곳도 아니었다. 이런 더러 운 밀림에서, 그것도 우산도 없이 비를 맞는 것은 고상하지 못한 일이 었다. "서두릅시다, 호 노인!" 조추림은 호륵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달리던 신형을 더 욱 빨리 했다. 그는 쥐새끼 같은 놈들을 어서 처치하고, 이 지저분한 땅을 한시 바 삐 떠나고 싶었다. * * * 괴인의 기괴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온 것은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 였다. "이봐..." 나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신경을 긁는 듯한 기이한 힘은,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붙이고 있던 장옥평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동굴 안은 다시 어둠 속으로 파묻혀 있 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몇 조각 불씨만이 모닥불 주위를 간신히 비 춰 줄 뿐이었다. 장옥평은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불씨가 만들어 낸 뿌옇고 둥근 빛의 영역 속에 서 있는 두 개의 발목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발목 아래뿐이었다. 그 윗부분은 암흑 속으로 녹아 들 어가 버린 듯, 동굴 속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는 어둠과 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장옥평은 한 줄기 구역질나는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부터 계속 맡아 왔던 냄새였으니까. 하지만 어젯밤과는 달리 냄새는 무척이나 선명했다. 잠시 코를 쫑긋거리던 장옥평은 그 냄새의 발원이 덩그렇게 서 있는 발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흐흐, 이 냄새가 견디기 힘든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이 냄새 속에 서 십 년을 살았지." 발목이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불씨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종아리에 이어 허벅지, 그리고 볼품없는 성기를 출렁거리고 있 는 하복부가 차례대로 드러났다. 장옥평의 눈이 점점 커졌다. 희미한 불빛 속으로 점차 드러나는 것은, 비록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밀랍으로 사람을 만든 뒤, 뜨거운 태양 아래 놔두면 저런 몰 골이 되지 않을까? 녹아 붙은 살덩어리가 밀가루 반죽처럼 이리저리 엉겨 있는 모습은 괴기로움을 뛰어넘어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앙상한 상체 위로 얼굴이 드러났을 때. "으으..."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흐... 으하하!" 불빛 속에 드러난 괴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녹아 내린 살갗을 실 룩거리며 웃고 있었다. 털이라고는 한 가닥도 찾아볼 수 없는 맨송맨 송한 대머리를 흔들어 가며 웃고 있었다. 입술 중간 부분이 달라붙어 제대로 벌려지지도 않는 입으로 웃고 있었다. "장난이 심하시오, 약 노인!" 어느새 깨었는지, 단탈이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괴인을 향해 말했 다. 그는 주위에 쌓아 둔 나뭇가지를 불씨만 남은 모닥불 속에 집어넣 었다. "장일기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담량이 형편없군!" 괴인은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는 모 닥불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백아(白兒)는 배가 불렀나 보구려." 단탈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독담(毒潭)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까?" 괴인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백아? 이곳에 괴인말고 또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일까? 단탈과 괴인은 장옥 평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괴인은 벌린 무릎을 세운 채 두 다리를 벌리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산독자 약 선배십니까?" 장옥평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괴인에게 물어 보았다. 괴인은 고개를 돌려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얼굴 윗부분, 눈이라 짐 작할 수 있는 두 개의 구멍으로부터 뇌전 같은 빛이 뿜어 나왔다. 장옥평은 눈알이 타 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시 선을 돌리지 않고 괴인의 안광을 받아 냈다. 괴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묘하게 변했다. 그것도 잠시뿐, 그의 눈 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내가 약흠이다. 너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느냐?" 장옥평은 고개를 끄떡였다. 산독자 약흠. 백년 동안 무공이 가장 고강하다는 열한 명의 초강고수, 신주십일존 (神州十一尊) 중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무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공스러운 독공(毒功)이었 다. 일반적으로 독암기나 독물을 이용하는 여타의 독술과는 달리 체내 에 응축시킨 독기(毒氣)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그의 독공은, 고금 사 상 유래가 없다는 독인(毒人)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왜...?" 장옥평은 뒷말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약흠은 그가 무엇을 물으려 했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산독자 약흠이 왜 이런 오지에, 왜 이런 비참한 몰골로 틀어박혀 있냐는 말이지?" 장옥평은 고개를 끄떡였다. "흐흐... 이거 후배에게 자꾸 안 좋은 구경을 시켜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약흠은 앉은 자리에서 빙글 몸을 돌려 장옥평을 향해 등을 보여주었 다. 그리고 그 등을 보았을 때. "으헉!"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천하에 이런 괴기스러운 광경이 또 있을까? 산독자의 벌거벗은 등판에는 척추가 없었다. 하지만 척추를 대신하 는 무엇인가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뱀. 그것은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새하얀 한 마리의 백사(白蛇)였다. 백사는 산독자와 한몸이었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머리는 산독자의 목덜미 바로 아랫부분에 튀 어나와 있었고, 뾰족한 꼬리는 산독자의 미골(尾骨) 바로 윗부분에 튀 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몸뚱이는 마치 안락한 집에라도 들어 있는 듯 산독자의 등줄기 속에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씨잇-!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3 장 - 2 묘왕동주 1 권 뱀은 모닥불을 향해 매서운 혓소리를 토해 냈다. 그것을 보면 산독 자가 불빛을 싫어하는 까닭도 이 뱀 때문인 것 같았다. "오, 얘야! 미안하다, 미안해!" 산독자는 어느새인가 돌아앉아 있었다. 그는 장옥평을 보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백아라고 하지. 보다시피 나는 등뼈 대신 저놈이 몸을 지탱해 주는 신세야. 저놈이 없으면 나는 단 한 순간도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저 놈은 이 동굴 안에 있는 독담을 떠나면 살 수가 없으니, 별수없이 나 도 이 속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장옥평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방금 본 괴사(怪事)에 대한 의구심은 생기지 않았다. 살 아 있는 뱀이 어떻게 척추를 대신할 수 있으며, 또 사람이 그것을 버 팀삼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살아 있는 뱀을 등줄기에 집어넣어 그것과 한몸이 되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그러한 삶을 감내할 수 있을까? 저런 몰골로라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삶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집 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누군가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심 때문일까? 원한이나 복수심은 장옥평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라면 과연 그것 들을 위해 이런 몰골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약흠이 입을 열었다. "너에 관한 이야기는 단탈에게 대충 들었다."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장옥평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는 복수를 원하겠지?" "물론입니다!" 장옥평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힘이 필요할 텐데... 그래서 너는 이 약흠을 사부로 모시기를 원하 느냐?" 장옥평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대답했다. "예!" 약흠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너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 "너의 내공 기초는 훌륭한 편이지. 그래서 안 돼." 장옥평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약흠을 바라보았다. "정순(精純)함을 토대로 하는 검패의 정종내공심법(正宗內功心法)은 내가 수련한 독공과 너무나도 이질적이지. 한 사람의 몸으로는 두 가 지를 동시에 익힐 수 없다." "그렇다면 가문의 내공을 버리겠습니다!" 장옥평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흐흐..." 약흠은 괴소를 흘리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공을 버리는 것이 무슨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구나!" "하지만..." "시끄럽다! 단전을 뒤집는 것이, 땅을 갈아 씨앗을 새로 심는 것과 같은 줄 아느냐? 너는 다시는 주먹 한번 휘두를 수 없는 폐인이 될 수 도 있어." 장옥평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단탈이 불쑥 끼여들었다. "그러면 그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단 말이오?" 약흠은 기괴한 얼굴을 돌려 단탈을 정시했다. "한 가지가 있지. 내 제자가 되지 않고도, 이 아이가 강해질 수 있 는 방법이..." "그것이 뭐요?" "중원에 가서 한 가지 일을 해다오. 네가 나의 그 요구를 들어준다 면 말해 주마." 단탈의 굵은 눈썹이 한두 차례 꿈틀거렸다. "정말 질긴 노인네로군!" 그는 차갑게 내뱉고는 벌떡 일어서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흐흐... 여전히 뻣뻣한 놈이야." 약흠은 단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 만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단탈과의 이런 실랑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녹아붙은 얼굴 근육이 귀 쪽으 로 몰리는 것은, 보기에는 흉했지만 분명히 웃음이었다. 약흠은 이윽고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가 내 제자가 될 수 없는 더 큰 이유가 있다." "그게... 뭡니까?" 약흠은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동굴 밖을 가리켰다. "내 제자는 오 년 전부터 오직 하나, 저놈뿐이거든."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4 장 가리아(可利阿) 묘왕동주 1 권 第四章 가리아(可利阿) 1 우르릉-! 먼 하늘로부터 은은한 우레 소리가 울려 오고 있었다. 비록 이제는 단탈에게 물려줬지만 며칠 전까지는 아합족의 타루가였 던 가리아(可利阿)는, 점점 짙어지는 비 냄새에 얼굴을 실룩거렸다. "얼빠진 단탈 녀석! 이 바쁜 때에 도대체 어디로 꺼져 버린 거야?" 매년 그래 왔듯 곧 묘강 전역에 걸쳐 지루한 우기(雨期)가 시작될 것이다. 길게는 한 달 가까이 퍼붓는 폭우는 묘족들에게 있어서 참으 로 견디기 힘든 재해였다. 비록 아합족이 살고 있는 슬픈 바람의 골짜기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지만,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비 앞에서 약간의 고저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둑을 쌓을 수 있는 토목지술(土木之術)은 묘족 어느 부족 에게도 없었다. 범람하는 하천과 그 지류는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죽기 싫으면 피해야 했다. 그래서 아합족은 우기 때마다 임시로 거처할 수 있는 제이의 보금자 리를 계곡 위쪽에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우기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 면 망설임없이 짐을 꾸려 그리로 피신했던 것이다. 가리아가 지금 단탈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단탈의 무책임함 때문 이었다. 단탈은 이제 작년의 단탈이 아니었다. 부족의 생사를 책임져 야 하는 타루가인 것이다. 타루가가 되어 처음 맞이하는 부족의 중대한 기로에서 마을을 비우 다니! 가리아로서는, 단탈이 돌아오면 단단히 혼내 줘야겠다고 벼를 법도 한 일이었다. 우르릉-! 비 냄새와 함께 우레 소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들에게 밀어닥친 사신(死神)은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예 고도 없었다. * * * 두 놈째의 목을 날려 버린 직후였다. 놈의 잘린 목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핏물이 가리아의 시야를 순간적 으로 가려 버렸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씨잇- "으윽!" 섬뜩한 음향이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 가리아는 쥐고 있던 칼 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근육의 절반이 잘려 나간 어깨로는 스무 근이 넘는 거도(巨刀)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리아는 결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어깨를 벤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월도(半月刀)를 휘둘러 가리아의 어깨에 큼직한 상처를 새겨놓은 사내는, 상대가 병기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상황이라면, 그에게 남겨진 것은 한 가지일 뿐 이었다. 투지를 상실한 상대의 목을 몸통으로부터 떼어 주는 일. 그것은 그 리 어려운 일이 아닐 뿐더러, 약간 느슨해진 긴장으로도 가능한 일이 었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반쯤 잘린 노인이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머리를 내민 채 달려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 어?" 그는 결국 노인의 머리통에 아래턱을 강타당하고 말았다. 으직! 얼마나 세게 들이받았던지, 가리아의 머리와 사내의 입 언저리에서 동시에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는 머리가 깨진 것이고, 하나는 턱 에서부터 인중까지가 으스러진 것이다. 아찔한 고통이 두 사람 모두의 뇌리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근성은 육십 년이란 긴 세월을 밀림의 야수들과 뒹굴어 온 가리아가 더 지독했다. 가리아는 충격으로 젖혀졌던 허리를 재빨리 펴며 사내의 면상을 다 시 한번 들이받았다. 꽝! "끄억-!" 사내는 콧날이 움푹 꺼지고 두 눈알이 툭 튀어나온 채 절명하고 말 았다. "헉, 헉!" 가리아는 왼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거도를 집어 들며 가쁜 숨을 가다 듬었다. 오른팔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뒤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를 괴롭히는 것은 고통이 아닌 의문이었다. 방금 그가 머리뼈를 박살낸 사내는 서쪽 평원에 있는 대부족, 을온 족의 전사였다. 을온족의 전사는 알아보기 쉬웠다. 그들은 전사가 되 는 의식(儀式)으로 왼쪽 귓불에 두 개의 구멍을 뚫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왜 을온족의 전사가 아무런 원한도 없는 아합족을 습격한다는 말인 가? "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가리아의 뒷전에서 울려 퍼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가리아는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뚱뚱한 노파 하나가 가슴에 한 자루 길쭉한 창을 꽂은 채 쓰러지고 있었다. "비하아합(毘河阿合)-!" 가리아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 소리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육중한 몸을 대지에 눕히는 노파... 그녀는 삼십 년이 넘는 긴 세월을 가리아와 동고동락한 전대 아합이 었던 것이다. 회색 장포를 입은 작달막한 사내가 그녀의 가슴에서 창을 뽑았다. 뻥 뚫린 상처로부터 뜨거운 피분수가 솟구쳐 나왔다. "으아아-!" 가리아는 괴성을 지르며 작달막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십살의 하나인 팔귀창(八鬼槍) 악패는 약간의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 었다. 물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권태로운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방적인 도살은 권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들어와 등에 메고 있던 여덟 자루의 장창(長槍), 잔혼팔귀창 (殘魂八鬼槍)으로 죽인 사람은 모두 아홉... 거의 대부분이 여자와 아 이들이었다. 저항조차 변변히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단지 창을 찌르고 뽑는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었다. 방금 뚱보 노파를 죽일 때처럼... "으아아-!" 그때 갑자기 왼쪽으로부터 괴성이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울린 바 람을 가르는 소리... 악패는 깜짝 놀라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잔뜩 방심하고 있던 터라 노도처럼 엄습해 온 사나운 기세로부터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 다. 슈욱-! "으윽!" 악패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 냈다. 오른손이 불속으로 들어간 듯 화끈거렸다. 그는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창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은 창과 함께 비스듬히 잘려 있었다. 엄지와 인지는 이미 흔적 을 찾아볼 수도 없고, 나머지 세 손가락 역시 모두 조금씩 그 끝 부분 이 잘려진 상태... 피가 콸콸 솟구치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오른팔을 타고 밀려왔다. 휘이익-! 매서운 칼바람이 다시 한번 악패를 향해 떨어졌다. 그는 몸을 날려 칼을 피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후드득 잘려 나갔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주먹을 절반 가까이 앗아간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족 노인. 넉 자가 넘는 대도(大刀)를 한 팔로 휘두르고 있는 사람은, 곰의 가 죽을 머리에 뒤집어쓴 단단한 체구의 묘족 노인이었다. 악패의 눈에서 시퍼런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이... 이 찢어 죽일 영감쟁이가!" 그의 왼손이 등뒤의 창 한 자루를 움켜잡았다. * * * 네 명째의 사내가 마나의 배 위에 올라탔다. 마나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코와 입으로는 검게 죽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헉! 헉!" 그녀의 배 위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사내는 을온족 전사였다. 그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묘족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당연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부족 사이의 전쟁이 끝나고 승패가 결정되면, 패한 부족의 남자나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여인들, 특히 젊은 여인들은 승리 한 부족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전쟁이었다. "허억!" 단말마(斷末魔) 같은 신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내는 이윽고 마나의 배 위에 축 늘어졌다. 흑백이 분명하던 마나의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 잿빛으로 물든 채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 하지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섯 번째 사내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마나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그는 앞선 사내가 사정을 하는 순간, 마나 의 몸이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떨린 것을 보았다. 여자의 나긋나긋한 몸뚱이는 보기보다 질긴 것이어서, 사내 몇에게 강간당한 정도로는 쉽 게 죽지 않는다. "흐흐-!" 사내는 입가에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치켜 올렸던 허리를 힘차 게 내리꽂으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나의 억센 손이 그의 목덜미 를 낚아챈 것이다. "끄윽-!" 목덜미를 움켜쥔 손의 힘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사내는 몸뚱이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허공으로 들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귓가로 나직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려 왔다. "쯧쯧..." 목덜미를 조여 오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사내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얼굴 전면으로 치 렁치렁 드리워진 사내 하나가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력은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던 녀석을 죽여 버릴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남력은 이내 생각을 바꿨다. 하는 짓이 구역질나기는 했지 만, 어쨌거나 동료였다. 남력은 동료를 죽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남력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벌거벗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간헐적 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여인은 이미 생명의 기운이 절반쯤 떠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을온족 사내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죽이려면 그냥 죽여... 이렇게 말이야." 남력은 안령도(雁翎刀)를 쭉 내밀었다. 안령도는 빠르고 부드럽게 마나의 심장에 꽂혔다. 마나의 가녀린 목덜미가 잠깐 동안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곧 잠잠 해졌다. * * * 공손인(公孫寅)은 자신의 애병인 식혈면륜(食血緬輪)을 꺼낼 필요조 차 느끼지 않았다. 이런 버러지 같은 오랑캐들을 해치우는 데에는 땅 바닥에서 주워 든 나뭇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공손인의 손에 쥐어진 나뭇가지는 이미 평범한 나뭇가지가 아니었 다. 휘익-! 하나의 파공성은 하나의 머리통과 교환되었다. 튀는 핏물, 흐르는 뇌수... 나뭇가지로 일곱 개째의 머리통을 부순 공손인은 한 가지 의혹을 느 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손인을 향해 달려드는 아합족 사내들 은 결사적이었다. 이토록 실력이 차이 나는 것을 직접 보고도 말이다. 왜일까? 공손인의 머릿속에 두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하나는 애당초 이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 정이었다. 하지만 공손인은 그것을 이내 부정했다. 한두 명이면 모르 겠지만 이렇게 집단적으로 두려움을 상실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 다면 결론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가정에 의해 유추되었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에, 이들이 목숨을 던져 가면서까지 악착같이 지 켜야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열두 개째의 머리통이 부서지며, 그 머리통을 달고 있던 사내는 허 술하게 지어진 목옥의 문에 기댄 채 스르르 허물어졌다. 공손인은 시체가 기대어진 목옥의 문을 열었다. "아!" 공손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열두 개의 생명이 그토록 악착같이 지키려 했던 존재가 그 안에 있 었다. * * *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던져진 듯 손톱만한 물 방울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더니, 그것은 이내 하늘과 땅을 잇는 굵은 백선(白線)의 군(群)으로 변해 갔다. 쏴아아-! 빗방울은 흉폭한 정복자들처럼 사나운 기세로 대지를 유린해 갔다. 조추림은 쏟아지는 빗물을 피해 작은 목옥 안에 들어 있었다. 목옥은 허름하게 지어진 것이어서 천장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물 방울까지 막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추림은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았다. 등뒤에서 큼직한 파초 잎을 두 장이나 겹쳐 들고 서 있는 충 직한 수하, 마중산(馬重山) 덕분이었다. "시작해 볼까요, 호 노인?" 조추림은 턱을 조금 치켜 든 오만한 자세로 유일한 통역사인 호륵마 를 바라보았다. 호륵마는 내심 조추림의 수하로 전락해 버린 듯한 불쾌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별수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끌고 와라!" 조추림의 명령이 덜어지기가 무섭게, 십살의 일원인 청갑혈수(靑甲 血手) 이잔(易孱)이 묘족 세 명을 끌고 왔다. 삼십이 넘어 보이는 사내와 비슷한 나이의 여인, 그리고 아직 걷지 도 못하는 아기... 모두 아합족이었다. 사내와 여인은 여기저기가 깨어지고 찢어져,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조추림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자! 이자는 어디에 있느냐?"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4 장 - 1 묘왕동주 1 권 펼친 종이 위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미법산수(米法山水)에 일가를 이루고 있는 조추림의 솜씨는 인물화 에 있어서도 놀라운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끌려온 사람들은 그것이 단탈의 얼굴임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내와 여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 렸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이잔!" 조추림은 그들의 뒷전에 서 있던 이잔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잔의 길쭉한 입가에 잔인한 살소(殺笑)가 맺혔다. 퍽! 사내의 뒤통수에 이잔의 오른손이 틀어박혔다. 그가 끼고 있던 강철 장갑, 청갑수(靑甲手)에 달려 있는 두 치가 넘는 강철손톱이 사내의 앞이마를 뚫고 나왔다. "으, 으어어..." 벙어리의 그것과 같은 안타까운 비명이 사내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쩍! 이잔이 손가락을 벌리자 사내의 머리통은 가벼운 소리와 함께 산산 이 부서졌다. "꺄아악-!" 사내의 머리가 수박처럼 으스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여인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시끄럽군, 시끄러워! 저 입 좀 틀어막아!" 조추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잔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이 여인의 배에 꽂혔다. 여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내공을 끌어올리지는 않아서인지, 내장이 파열된 것 같지는 않 았다. "이자는 어디 있나?" 호륵마의 통역이 엎어진 여인의 뒤통수 위로 다시 한번 잔인하게 던 져졌다. 여인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와 두려움, 원한 으로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꼬옥 깨물려 있었다. "아기를!" 조추림의 말에 이잔이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의 오른손에 끼워진 시퍼런 청갑수가 아기의 코앞에 디밀어졌다. "안 돼!" 여인은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그녀는 뒤이어 호륵마를 향해 소리쳤 다. "단탈은 여기 없다!" 호륵마의 눈이 반짝였다. "이자의 이름이 단탈인가?" "그렇다!" 호륵마는 그녀의 말을 조추림에게 전해 주었다. "단탈? 단탈이라..." 조추림은 단탈의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았다. 과연 몽매무지(夢寐 無知)한 야만인의 이름다웠다. "그의 행적을 물어봐 주시오." 조추림의 요구에 호륵마는 다시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여인은 단탈의 행적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며칠 전 한인(漢 人) 한 사람과 함께 부족을 떠났다는 사실밖에는... "이런, 이런!" 조추림은 낭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말하는 한인이 누구인 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정말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친구들이 아닌가?" 안타까워하는 조추림의 시선이 여인에게, 그리고 이잔에게 얹혀졌 다. 여인은 나이답지 않게 팽팽한 살결을 지니고 있었고, 이잔은 동료 들로부터 색정광(色情狂)이라 놀림당할 정도로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 었다. 조추림은 수하를 위해 적당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베풀 줄 아는 자상한 상관이었다. "이잔, 자네가 처리하게." 길게 찢어진 이잔의 눈 속으로 붉은 기운이 번뜩거렸다. "감사합니다!" 이잔은 발악하는 여인을 때려 쓰러뜨린 뒤, 어깨에 들쳐 메고 목옥 을 나섰다.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하게 때렸지만, 이잔은 상관하지 않았다. 강간이 먼저든 살해가 먼저든, 이잔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 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추림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기를 안아 올렸다. "쯧쯧, 불쌍한 것..." 조추림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아비와 어미를 동시에 해치워 버린 원흉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측은함이 배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호륵마는 잘 알고 있었다. 조추림이란 위인은 저런 얼굴을 하면서도 벌레 죽이듯 아기를 죽여 버릴 수 있는 놈이었다. 악패의 시신이 목인걸(木仁傑)에게 들려져 목옥으로 들어온 것은 그 로부터 일 다경(茶頃)쯤 지난 뒤였다. 조추림은 여전히 아버지 같은 얼굴로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는 그 일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악패의 시신이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 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인가 목옥으로 들어온 남력이 조추림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악패가 죽었습니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품안의 아기를 흔들던 조추림의 동작이 우뚝 멎 었다. "뭐라고?" "악패가 죽었습니다." 남력은 같은 음색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조추림은 그제야 눈앞에 놓여진 악패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악패의 시신은 처참했다. 오른손 손가락 몇 개와 왼쪽 팔뚝이 없었다. 그것 외에도 얼굴 여기 저기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악패의 목숨을 앗아간 치명상은 어깻죽지로부터 배꼽 까지 길게 베어진 자상이었을 것이다. 조추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처 자국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악패를 죽인 자가 상승(上 乘) 무공을 익힌 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가 그를 죽였나?" 조추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떤 늙은이였습니다." 십살 중 가장 젊은 독사편(毒蛇鞭) 목인걸이 대답했다. "늙은이? 무공도 모르는 묘족 늙은이가 악패를 죽였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조추림의 목소리가 사납게 커짐에 따라 목인걸의 목소리는 기어 들 어갈 듯 작아졌다. "그래, 그 늙은이는?" "속하가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계곡으로 몸을 던진 후였습니다. 계 곡 밑의 물살이 워낙 드세서 그의 종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인걸은 대답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악패를 죽인 늙은이의 몰골이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늙은이의 몸에는 세 개의 창이 박혀 있었고, 그 중 하나는 옆구리를 뚫고 등 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늙은이는 죽지 않았을 뿐더러 바람처럼 빨리 움직였다. 인간의 몸뚱이를 지니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 동료가 눈앞에서 쓰러졌는데, 너는 그 복수를 하기는커녕 시 체나 수습해서 돌아왔다는 말이지?" 조추림의 눈빛이 환한 불빛에 반사되기라도 한 듯이 번들거리기 시 작했다. 목인걸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최선을 다했느냐 다하지 않았느냐는, 조추림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항 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일로 인해 조추림이 화가 났느냐 나지 않았느냐였다. 예상대로 조추림은 화가 났다. 그리고 목인걸은 악패가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한 대가로 그 화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응애, 응개애애-!" 갑자기 아기가 자지러지듯 울기 시작했다. 아기의 왼팔 상박 부분을 감싸 안고 있던 조추림의 손에 힘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으드득! 닭뼈를 씹을 때 울릴 법한 경미하고도 탄력적인 파괴음이 아기의 팔 로부터 울려 나왔다. '빌어먹을...!' 어쩌면 사지 중 하나는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목인걸의 마음을 공포로 물들게 만들었다. 아기의 생명과 목인걸의 사지를 온전케 해준 사람은, 십살 중 두 번 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쌍륜철수(雙輪鐵手) 공손인이었다. 목옥의 문이 열리고 공손인이 들어섰을 때, 목옥 안의 분위기는 심 상치 않았다. 숨넘어갈 듯이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 소리와 조추림이 뿜어 내는 살 기는, 타 들어가는 폭탄의 심지처럼 목옥의 분위기를 급박한 위기감 속으로 몰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공손인에게 손목이 잡힌 한 사람이 목옥 안으로 끌려 들어왔 을 때, 그러한 살풍경은 한 순간에 변해 버렸다. 여인. 공손인이 끌고 들어온 사람은 여인이었다. 귀면도 남력은 여인을 보고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정력(定力)이 약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빗물에 젖은 채 나타난 여인은 그의 정력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 니었다. 천하의 어떤 남자라도 이 여인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 분 명했다. "호오!" 나직한 탄성이 남력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남력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탄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저런 여인이 있다니..." 조추림은 어느새인가 살기를 거둔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악패의 참 혹한 시신도 이제는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지 않는 것 같았 다. 여인은 조추림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팔목을 움켜잡고 있는 공손인이 조추림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 다. 공손인의 얼굴에는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대감이 떠올 라 있었다. "가인(佳人)의 팔을 그렇듯 거칠게 잡고 있다니... 공손인, 자네는 풍류(風流)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군." "죄송합니다!" 공손인은 조추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의 팔목을 놓았다. 여인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떨고 있지는 않았다. 그 녀는 자신의 동족을 몰살시킨 악귀(惡鬼) 같은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응애! 응애애-!" 조추림이 이미 힘을 거둔 뒤였지만, 여린 팔뼈가 산산이 으스러진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아기를 보았다. 그녀의 눈 속으로 눈물 같은 흔 들림이 스쳐 지나갔다. 여인은 조추림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조추림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안고 있던 아기를 여인에 게 건네었다. "응애, 응애... 으응..." 신기한 일이었다. 여인이 아기의 다친 팔을 가볍게 어루만지자 아기의 입에서 울음 소 리가 잦아들었다. 마치 여인의 손바닥으로부터 신비스러운 힘이 흘러 나와 아기의 으스러진 뼈를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추림은 곁에 서 있던 호륵마를 돌아보았다. "호 노인, 이 미녀분께 방명(芳名)을 여쭤 봐 주시지 않으시겠소?" 호륵마는 여인에게 몇 마디를 건넸다. 여인은 차분한 눈빛으로 조추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나라아합." 조용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였다. 2 단탈은 동굴 입구에 기대어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 우기는 예년에 비해 열흘 가량 일찍 시작되었다. 단탈의 마음은 꺼림칙했다. 타루가로서 사람들을 고지대로 대피시켜 야 하는 임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기왕 장옥평을 도와 주기 로 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잔소리깨나 듣겠군.' 문득, 주름살이 가득한 가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과거에는 잔소리보다는 주먹이 앞서던 가리아였다. 가리아의 주먹에 한 방 맞으면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주먹은 어 린 표범 정도에게는 두 방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신화적인 흉기였으니 까. 단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기야 그 굉장한 힘을 가장 많이 맛본 사람이 단탈이었으니, 가리아의 주먹을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가리아는 그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지 않 았다. 그게 언제부터더라...? 단탈은 뿌연 우막 위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片鱗)들을 끼워 맞추 려 애썼다. 그의 시야 속으로 거짓말처럼 가리아의 신형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피투성이 몸뚱어리. 피투성이 몸뚱어리 위에 꽂혀 건들거리는 세 자루의 창. 혼이 나간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가리아의 상태는 살아 있 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위중해 보였다. "가리아!"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4 장 - 2 묘왕동주 1 권 단탈은 깜짝 놀라며 동굴에서 달려나왔다. 가리아의 고개가 들려졌다. 그는 그제야 단탈을 발견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 탈..." 피에 얼룩진 늙수그레한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마 치 절망의 나락 속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리고 가리아는 허물어지듯 흙탕물 속으로 쓰러졌다. * * * "이런 시체에게 내 반혼환을 쓰라고?" 약흠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단탈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체가 아니오!" 단탈은 약흠을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이 순간, 그의 커다란 눈은 핏물을 쏟아 낼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상처 입은 야수와 같은 눈빛에 약흠은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반혼환은 이제 다섯 알밖에..." "줄 거요, 안 줄 거요?" 단탈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준다! 주면 되잖아?" 약흠은 헛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는 독술의 고수요, 무학의 대종사(大宗師)였다. 독담에서 축 적된 그의 독공은 과거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 그가 단탈을 해치우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허물없이 지낸 단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반혼환을 내놓지 않으면, 단탈은 주저없이 그에게 덤볐 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단탈이라는 인간이었다. 가리아는 단탈의 말과는 달리 시체였다. 심장이 멈춰진 사람은 대개 의 경우 시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의 심장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루 사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이다. 하지만 반혼환의 약효는 과연 신묘했다. "끄으으..." 가리아의 입에서 가래 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약흠 이 반혼환을 먹이고 일 각 가까이 추궁과혈(推宮過血)의 수법으로 혈 맥을 주무른 뒤의 일이었다. "가리아!" 단탈은 가리아의 몸을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안 돼!" 약흠의 뒤틀어진 팔이 단탈을 가로막았다. "아까 말했지만 이자는 시체나 마찬가지야! 그의 영혼은 지금 약력 을 빌어 잠시 지상에 머물고 있을 뿐이지. 자네가 조금만 충격을 준다 면 그대로 죽어 버려!" 단탈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본디 씨앗의 구분이 없는 아합족에서는, 중원과 달리 피를 나눈 아 버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내는 모든 아이의 아버지였고, 모든 아이는 모든 사내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가리아와 단탈의 관계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단탈이 그것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그의 등판에 첫 번째 상처가 새 겨진 해였다. 굶주린 늑대는 어린 단탈의 야들야들한 등살 위에 세 치가 넘는 긴 고랑을 새겨 놓았다. 기절했던 단탈이 깨어났을 때, 회색곰 가죽을 머리에 쓴 가리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탈은 찢긴 등이 너무나 아팠다. 그는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가리아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타루가의 아들은 눈물 따위를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뒤에 위대한 어머니 비하아합(毘河阿合)으로부터 가리아가 이틀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을 간호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단 탈은 깨달았다. 가리아는 단탈에게 있어서 '특별한' 아버지였고, 단탈은 가리아에게 있어서 '특별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단... 탈, 단탈?" 깨어난 가리아는 단탈을 찾고 있었다. 그의 눈은 떠져 있었다. 하지 만 이미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가리아..." 단탈은 가리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들, 그들이 가족들을 죽였어! 모두 죽였어!" 가리아는 단탈의 손을 힘껏 움켜쥐며 말했다. 단탈은 눈을 꽉 감았다. 가리아가 이런 몰골로 이곳에 나타난 이상 마을에 무슨 변고가 일어났음은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누구요?" "그들은..." 가리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들은 을온족, 을온족이었네. 을온족과 그 개 같은 한인들이었 어!" 단탈은 잠시 멍해졌다. 을온족, 그리고 한인...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을온족의 까마귀 노인, 그리고 백양나무처럼 새하얀 얼굴을 지닌 청 년... 단탈은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장옥평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합은?" 단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비하아합은 죽었네. 헉, 헉! 나라아합은 모르겠어..." 가리아는 헐떡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리고 자네도 이제는 타루가가 아니야! 아합을 지키지 못한 타루가는 더 이상 타루가가 아니야!" 가리아는 절규했다. 이미 기능을 잃은 그의 눈에서는 피도 아니고 눈물도 아닌 걸쭉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나라아합은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그녀는 젊고 아름다 우니까 놈들이 살려 뒀을지도 몰라! 단탈! 그녀를 찾아야 해! 너는 다 시 타루가가 되어야 해!" 단탈은 감았던 눈을 떴다. 단탈의 얼굴을 바라본 장옥평은 깜짝 놀랐다. 단탈의 눈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단순히 충혈된 것만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아 마도 눈알 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버린 것 같았다. "그녀를 찾겠소! 살아 있다면 그녀를 되찾겠소!" 단탈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그래..." 하지만 가리아는 웃었다. 그가 아는 한, 단탈은 맹세를 어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라아합이 살아만 있다면 단탈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 를 되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아합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가족이 잘된다면, 가리아는 언제 어느 때고 웃을 수 있었다. "으... 그리고..." 가리아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검게 물들어 갔다. "놈들을 내가, 이 가리아가 죽이도록... 해... 주게..." 그 말을 끝으로 가리아의 몸이 뻣뻣해졌다. 반혼환의 약력을 빌려 붙어 있던 그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떠나간 것이다. "가리아..." 단탈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타루가의 아들은 눈물 따위를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 단탈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시뻘건 두 눈만 제외한다면... 약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묘어를 약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단탈의 부족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장옥평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묘어를 전혀 몰랐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탈의 부족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차갑게 변해 가는 가리아의 시신. 피를 뿜을 듯 시뻘겋게 변해 버린 단탈의 두 눈. 다른 설명이 필요없었던 것이다. "잠깐 마을에 다녀오겠소." 단탈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이어 단탈은 동굴 구석에 풀어 두었던 무기를 챙겨 동굴 입구를 향 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장옥평과 약흠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리아의 시신을 그대로 놔두시오." 동굴 바닥에 누운 가리아의 시신은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동굴 밖에는 싸늘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쏴아아-!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5 장 우중전(雨中戰) 묘왕동주 1 권 第五章 우중전(雨中戰) 1 쏴아아-! 비는 장독이 가득했던 독곡(毒谷)에도, 밀림에도, 그리고 이제는 '죽음의 골짜기'가 되어 버린 '슬픈 바람의 골짜기'에도 쏟아지고 있 었다. 묘족들에게는 들보를 올리고 지붕을 세워 기와를 얹을 수 있는 토목 지술이 없었다. 자연 그들의 가옥은 큰비를 막기에는 적절하지 못했 다. 사실 이런 것들은 한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묘족의 토목술이 어떠하든, 그것은 묘족의 문제였다. 하지만 어떤 한인이 있 어, 억수 같은 비가 오는 날 묘족이 지은 목옥 안에서 비를 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의 공손인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후드득! 공손인의 목덜미에 굵은 물방울 몇 개가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 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머물러 있는 목옥의 천장은, 이미 천장이라 부를 수 없었다. 여기저기가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 이제 빗물을 제대로 막을 수 있는 부분은 겨우 그가 앉아 있는 의자를 주위로 반경 서너 자 정도뿐이었 다. 그리고 그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손인은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자네가 이곳을 지켜 줘야겠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놈들이 돌아 올지도 모르니 말이야. 부드러운 목소리... "제기랄!" 공손인은 욕설을 내뱉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조추림은 을온족으로 돌아갔다. 조추림은 사흘 전 을온족을 출발할 때, 장옥평과 아합족 사냥꾼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묘 녀(苗女)를 만난 순간, 그의 굳은 다짐은 촛농처럼 말랑말랑해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장옥평과 아합족 사냥꾼에 관한 일 따위는 머릿속에서 깡그 리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래서 조추림은 돌아갔다. 그 묘녀를 여왕처럼 모신 채 로... '하기야...' 공손인은 조추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여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미녀를 만나 보았고, 많은 재녀도 만나 보았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런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미모도 미모이거니와, 그 주위를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신비스러움 이라니!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그녀 앞에서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로부터 창조되는 신비스러운 세계 속으로 푸욱 빠져 들 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게 뭐냔 말이다!" 공손인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추림은 호륵마와 남력 등을 대동한 채 돌아갔다. 이곳에 남겨진 사람의 수는 모두 열셋, 십살 중 그를 포함한 네 명 과 을온족 전사 중 아합족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아홉 명이었다. 그 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올지도 모르는 두 녀석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공손인의 일그러진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하기야 공손인의 신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순간, 억수 같은 비를 그대로 맞으며 마을 곳곳에 매복해 있어야만 하니까... * * * 뿌득! 한 명의 목뼈가 돌아갔다. "허억!" 동료의 얼굴이 본래 향했던 방향과 정반대로 돌아가 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을온족의 전사는 짧은 비명과 함께 쥐고 있던 장창을 앞으로 쭉 내질렀다. 하지만 동료의 목숨을 앗아 간 자의 행동은 무섭게 빨랐다. 그 자는 허깨비처럼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어린아이의 팔목을 비틀듯 목뼈 하나를 가볍게 돌려 버린 뒤, 그 시신을 앞으로 내던진 채 몸을 넙죽 엎드렸다. 장창은 생명이 이미 떠난 동료의 어깨에 박혀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쇠뭉치 같은 발이 창을 쥐고 있던 을온족 전사의 목덜 미에 날아와 꽂혔다. 사내가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단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땅을 버틴 채 몸을 뒤집으며 날린 발길질은 소퇴(掃腿)와 도, 지당퇴(地 腿)와도 달랐다. 그것은 밀림 속에서 단탈 스스로가 습득한 여러 생존 방법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중원의 여느 퇴법(腿法)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 지지 않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끄르르..." 쓰러진 사내의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빗소리가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 이런 소리는 가급적 안 나는 편이 좋았다. 단탈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어 그의 목에 쑤셔 박았다. 푸들거리던 사내의 경련이 사그라졌다. 확인과도 같은 나직한 목소리가 단탈의 두툼한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둘!" * * * 계곡 옆의 수풀 속에서 두 명의 을온족 전사와 웅크리고 있던 전곡 (全穀)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절벽 아래... 수위(水位)가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한 시진쯤 전에 보았을 때에는 계곡 가장자리로부터 이 장 정도 여유가 있던 수위는, 일 각 전에 보 았을 때 대여섯 자 아래까지 차 올라왔던 것이다. 이런 산악 지대에서는 물이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산이 많기 로 유명한 유주(幽州) 출신인 전곡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곡은 더 이상 마음속의 불안을 참지 못하고 웅크린 곳으로부터 기 어나왔다. 그는 계곡 쪽으로 다가갔다. 수위를 확인한 뒤 공손인에게 철수를 건의할 생각에서였다. 물은 그가 염려했던 높이까지 차 올라와 있었다. 땅과 물 사이 비탈 을 뒤덮고 있던 덩굴이 발 밑에 둥둥 떠 있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전곡은 돌아서서 공손인이 있는 목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오래가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만...!'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뭘까?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친 듯한 껄끄러운 이 기분은? 전곡의 머릿속에 방금 전 살펴보았던 계곡의 광경이 선명히 떠올랐 다. 그물과 같이 물위에 펼쳐져 있던 덩굴! 비탈에 뿌리내린 덩굴이 왜 그런 모습으로 떠 있었을까? 물살에 휩 쓸려 뿌리의 일부가 뽑힌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 그런 덩굴의 뿌리는 깊고도 튼 튼했다. 주변의 흙덩이가 파헤쳐지는 한이 있어도 앙상한 덩굴들은 본 체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던 것이다. 전곡의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인지와 중지가 소매에 차고 있던 한 뼘 길이의 수리검(袖裏劍) 에 걸렸다. 그가 수백, 수천 번도 더 반복했던 동작이다. 그리고 그 동작은 섬광비검(閃光飛劍)이라는 외호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매끄 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전곡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콰직! 길쭉하고도 날카로운 무엇이 왼쪽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가 오른쪽 귀 뒤로 튀어나왔다. 머리를 무엇인가가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히는 기분과 비슷했다. 그것은 전곡이 마지막으로 느낀 기분이기도 했다. 놈이 웅크리고 있던 곳으로부터 두 명이 더 튀어나왔다. 소매가 없 는 가죽옷 차림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보아하니 을온족 놈들 같았다. 단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계곡 아랫부분을 따라 이곳으로 접근한 그가, 파헤친 덩굴을 붙잡고 물속에 몸을 숨긴 것은 반 각 전의 일... 그는 수풀 속에 여러 명이 숨어 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핑! 핑! 빗소리 속으로 시윗소리가 녹아 들어갔다. 날짐승을 이십여 년 동안 사냥했던 단탈에게 있어서, 스무 걸음 밖 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코끼리만한 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묘인은 제각기 하나씩의 화살을 가슴에 꽂은 채 쓰러졌다. 심장이 제자리에 달려 있는 놈들이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잔 인할 정도로 정확한 궁술이었다. 단탈은 그제야 덩굴을 얽고 있던 두 다리를 풀었다. "다섯!" * * * 사아(沙阿)는 한 마리 작은 도마뱀처럼 수풀 속의 진흙탕에 배를 깔 고 엎드려 있었다. 필요한 근육만 붙어 있는 비쩍 마른 그의 몸뚱어리 는 이 순간, 한껏 당겨진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매복 이틀째... 그는 이 매복이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계곡 물이 불어나는 속도는 그만큼 급박했다. 잘해야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 아침? 그것이 매복의 시간적 한계였다. 사아는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한족 사내 하나와 묘족 사내 하나. 사아는 그들 중 한족 사내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 고 권장(拳掌)을 수련하는 무공 따위는 이런 밀림 속에서는 별반 도움 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묘족이었다. 단탈이라고 했던가? 사아는 과거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기억 때문에 사아는 조추 림이 그린 단탈의 초상화를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고, 또 아합족을 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단탈이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사아가 기억하는 한 단탈은 가장 유능하고도 가장 무서운 사냥꾼이 었다. 비록 그를 만난 것은 단 한번뿐이었지만, 그의 인상은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지난 겨울, 사아는 단탈이 늑대 여섯 마리를 사냥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늑대는 하나같이 교활했고 또 흉폭했지만, 단탈은 두 배는 더 교활 했고 두 배는 더 흉폭했다. 결국 단탈은 언덕 하나를 지나기도 전에 놈들을 여섯 장의 늑대 가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때 사아의 눈에 비친 단탈은 가장 은밀한 밀림처럼 소리없는 자이 며, 가장 사나운 밀림처럼 위험한 자였다. 사아는 지금 그런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틀을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으면서도 사아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시야가 점점 나빠졌다. 사아가 엎드려 있는 수풀 속은, 처음 위치를 선정한 어제만 하더라도 마을 중앙으로 통하는 길목이 한눈에 보였던 훌륭한 은닉처였다. 문제는 지겹게 쏟아지는 비에 있었다. 비는 수풀과 마을 사이에 위 치한 작은 비탈로 하여금 끊임없이 흙모래를 토하게 만들고 있었다. 비탈에서 밀려 내려온 퇴적물들이 점차 쌓이다 보니, 이제는 그토록 좋던 시야를 절반 이상이나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흙모래는 점점 더 많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급기야 사아는 쌓여 진 흙더미 외에 다른 것을 보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는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곳에 계속 은신하고 있든지, 아 니면 좀더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기든지... 한동안 고민하던 사아는 후자를 택했다. 그것과 함께 그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수풀 속에는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 도마뱀처럼 흙탕물 속을 기어 수풀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물 체를 보며 단탈은 차갑게 웃었다. 단탈은 지금 수풀의 위쪽 비탈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경사면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퇴적물의 양을 늘린 것은 바로 단탈의 작품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여 주변의 흙들을 밀어 보냈 던 것이다. 그리고 단탈의 이런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아래쪽에 숨어 있던 매 복자가 드디어 몸을 나타내고 있었다. 물론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놈이 사냥에 대해 일가견 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 목 좋은 곳에 매복해 있었다는 한 가지 사 실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탈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밀림이라고는 단지 나뭇가지와 수풀의 집합체라고만 알고 있는 멍청한 한족들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단탈은 자신이 있었다. 매복자는 이미 놈이 아니었다. 단탈이었다. "여섯!" * * * 단탈이 마을 안으로 들어와 확인한 아합족의 시신의 수는 이미 삼십 을 넘어서고 있었다. 모두 낯익은 얼굴들,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얼굴들이었다. 빗속에서 퉁퉁 불어터진 하나 하나의 얼굴들을 확인할 때마다 단탈 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단탈은 지금 목옥의 천장을 헤치고 있었다. 넓적한 잎들을 치우고 길쭉한 버팀대를 벌리는 그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은 마나의 집이었다. 모두가 가족인 아합족 안에서도, 세상의 어떤 친형제보다도 더 단탈을 믿고 따르던 마나의 집이었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 하지만 열려진 천장으로 목옥 안의 광경이 드러났을 때, 단탈은 자 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목옥의 바닥에 흥건히 차 오른 흙탕물, 그 안에 반쯤 잠긴 여인의 시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옆으로 돌린 얼굴 반쪽을 물속에 처박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의 시 신... 그 옆에는 새빨간 천으로 만들어진 옷 한 벌이 흙탕물에 둥둥 떠 있었다. 단탈은 목옥의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소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뛰 어내림과 동시에 몸을 낮췄기 때문에, 낮게 튀어오른 흙탕물이 그의 얼굴을 더럽혔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단탈은 여인의 시신을 뒤집었다. 물속에 너무도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탓에 얼굴의 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탈은 그 시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 을 확인하는 데에는 반드시 얼굴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단탈은 물위에 떠있는 분홍색 옷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 옷을 너무 나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년 전 북쪽에서 내려온 중원인 장사 꾼으로부터 그가 직접 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건네 받은 마나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단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린 듯, 그의 얼굴 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끄으으으-" 참으려고 그토록이나 애를 썼건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악 문 이 빨 사이를 비집고 처절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득,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탈은 구부렸던 몸을 번개처럼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광인의 그 것처럼 기괴한 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을온족 사내가 들어왔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 기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것 같았다. 끼이익-! 문이 서서히 닫혔다. 문 뒤에 숨어 있던 단탈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 났다. 하지만 을온족 사내들은 뒤에 서 있는 사신(死神)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구멍이 뚫린 천장을 향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단탈의 칼이 소리 없이 치켜 올려졌다. "여덟!" * * *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5 장 - 1 묘왕동주 1 권 이잔은 바위 밑에서 걸어나오며 바지춤을 여미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눈이 하얗게 뒤집어진 묘족 소녀가 하체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나이는 열서넛이나 됐을까? 그녀의 목에는 퍼런 손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이잔은 최후의 사정과 함께 그녀의 목을 잔인하게 졸라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죽었다. 어쩌면 목을 졸리기 이전에 이미 죽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흐흐흐..." 이잔은 음충맞은 흉소를 흘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이번 여행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중원 에서는 아무리 잔폭(殘暴)한 그라 할지라도 변태적인 모습까지 드러내 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그는 정복자였고, 피정복자의 생사여탈은 그 의 수중에 있었다. 이 마을에 와서 그가 범한 뒤 죽인 여인의 수만 해 도 열 명이 넘었다. 굳이 마을에 잔류하겠노라 자원한 것도, 평생 몇 번 없을 유린의 쾌락을 마음껏 누려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묘녀들! 묘녀들을 생각하면 그는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 다. 묘녀들은 중원의 여인들보다 훨씬 탄력이 있었다. 열서너 살짜리 소녀마저도 능히 사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발달된 육체를 가지고 있었 던 것이다. "쩝! 아쉽군!" 이잔은 소녀의 시체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그가 남겨 둔 마지막 아합족 여인이었다. 이제는 색욕(色慾)을 풀고 싶어도 풀 곳이 없었다. 바야흐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마을 어귀에 이른 이잔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몸을 감추고 숨어 있어야만 하는 두 명의 묘인들이 가래나무 덩굴 아래에서 몸을 버젓이 드러낸 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동료들은 빗 속에서 고생을 하는데 팔자 좋게 비를 가리고 있는 작태라니! 이잔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이 자식들이...!" 놈들을 어떻게 닥달할까를 궁리하면서, 그는 나무를 돌아 그들 앞에 섰다. 순간,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두 명의 묘인들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은 앞으로 꺾여져 있었다. 그 목덜미를 횡단하고 있는 붉은 혈선(血線)...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선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리라. 차가 운 공포감 속에서도 이잔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기다렸던 적이 온 것이다! 이잔은 주위를 향해 뭐라고 경고의 외침을 지르려 했다. "적...!" 하지만 그의 외침은 숨넘어가는 가는 비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끄, 끄윽-!" 가래나무 위로부터 내려온 한 가닥 억센 올가미가 그의 목을 휘감았 기 때문이다. 이잔은 반사적으로 왼손으로 올가미를 움켜쥐며, 오른손 을 위로 내질렀다. 찌익-! 청갑수에 달려 있는 두 치 길이의 날카로운 강조(鋼爪) 끝에 무엇인 가가 찢겨 나갔다. 하지만 그 경미한 느낌은 이잔으로 하여금 반격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차가운 것이 오른손 손목 부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른팔 전체를 얼음물 속에 담근 듯한 섬뜩한 전율이 이잔의 신경을 타고 치 달려 내려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을 죄어 오는 올가미의 힘은 너무도 무 시무시한 것이었다. "아홉!" * * * 손오(孫鰲)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쏟아지는 빗소리는 청각의 많은 부분을 앗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민한 귀는 비명 소리, 그것도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비명 소 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李) 아우...?' 빗물 속으로 먹혀 버린 가느다란 비명 소리는 형제처럼 지내 왔던 이잔의 것 같았다. 손오는 목책(木柵)에 기대 놓았던 팔방추(八方錐) 를 움켜쥐었다. 몸을 낮춰 비명 소리가 울린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손오의 눈이 부릅떠졌다. 허공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는 희끄무레한 물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잔이었다. 손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끄으, 끅!" 이잔은 단말마(斷末魔) 같은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이미 틀린 것 같았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이잔의 발 아래 떨어진 시뻘건 물체. 그것은 핏물이 솟구치는 사람의 손목이었다. 이잔이 평소 자랑해 마지않던 청 갑수를 매단 채로... 손오는 죽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릴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라[鰲]라는 이름답게 치사할 정도로 신중한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손오는 기척을 죽이고 나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무와의 거리가 가까워 져 갔다. 그리고 손오가 나무로부터 삼 장쯤 떨어진 수풀까지 이르렀을 때, 뻣뻣하게 굳어진 이잔의 몸뚱이가 풀썩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삼 장(丈). 손오의 능력이라면 단 한번의 도약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거 리였다. 팔방추가 수직으로 번쩍 들려졌다. "차아아-압!" 단탈은 좌하방으로부터 기합 소리가 먼저 밀려왔는지, 아니면 파공 성인지 먼저 밀려왔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콰직! 단칼이 매달려 있던 굵은 나뭇가지는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 버렸 다. "엇?" 버팀대를 잃은 단탈은 땅으로 떨어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뭇가지가 부러지기 직전, 땅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부웅! 땅위에서 몸을 바로 세우는 단탈을 향해 묵직한 발길질이 날아들었 다.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있던 단탈은 그것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단탈은 두 팔뚝을 십 자로 교차시켜 얼굴을 보호했다. 퍽! 몸이 뒤로 쭉 밀려갔다. 조금 전 강철 손톱에 찢긴 가슴팍의 상처로 부터 핏물이 확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단탈에게는 고통에 굴복할 수 없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다리에 힘을 줘 뒤로 밀려나던 몸뚱이를 한껏 버팀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개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뱀처럼 낮고도 빠 른 도약이었다. 손오는 발길질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발길질에는 막강한 역도(力道)가 실려져 있었다. 근육이나 뼈대 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한들, 내공의 수련이 없이는 그런 역도를 감당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일이 손오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뒤로 밀려나던 묘족 사내의 몸뚱이가 갑자기 그의 면전으로 불쑥 확대되어 왔던 것이다. 마치 오래 전부터 달려오기라도 한 듯, 후퇴와 전진이 교차되는 동작 은 매끄럽기 짝이 없었다. 달려드는 묘족 사내의 오른손에서 새하얀 광채가 번뜩였다. 푹-! 손오의 아랫배에 날카로운 물체가 쑤셔 박혔다. 손오의 동공이 확대 되며 목덜미에 굵은 힘줄이 불끈 일어섰다. "으윽!" 손오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문파 안에서도 정예로 이름 높은 십살의 일원이었다. 이대로 허망하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익!" 손오는 이를 악물고 최후의 힘을 짜내 들고 있던 팔방추로 묘족 사 내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팔십 근짜리 팔방추가 바람을 가르며 소름 끼치는 파공성을 만들었 다. 이런 류의 중병(重兵)은 비록 정민(精敏)하게 사용하기는 어려웠 지만, 일단 격중되면 무서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묘족 사내는 황급히 허리를 틀어 머리에서 떨어지는 팔방추를 피하 려 했다. 하지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휘둘러진 공격을 무사히 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으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왼쪽 어깨가 움푹 꺼져 들어갔다. 손오는 뱃속에 작은 지옥이라도 만들어진 듯한 고통 속에서도 참을 수 없는 의문을 느꼈다. 방금 전 휘두른 팔방추의 경우, 천근 거암이라도 으스러뜨릴 수 있 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자는 겨우 어깨뼈가 조금 내려앉 은 것으로 그친 것 같지 않은가! 설마 이자는 호신공(護身功)이라도 익히고 있다는 말인가? 손오의 의아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랫배에 꽂혀 있던 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뱃가죽을 길게 찢으며 솟 구쳐 올라왔기 때문이다. 찌이이-! 손오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비수의 움직임이 심장의 아랫부분에 이르렀을 때, 손오는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손오의 장대한 몸집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쿵. 덩치 큰 한족의 몸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단탈의 얼굴은 그자의 복부에서 뿜어 나온 핏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 다. 단탈은 왼손을 들어 얼굴을 훔치려 했다. 하지만 왼손은 그의 뜻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깨뼈가 크게 상한 것 같았다. 단탈은 고개를 들었다. 서른 걸음쯤 떨어진 목책(木柵) 뒤에서 두 명의 을온족 전사들이 뛰어나왔다. "훗!" 단탈은 차갑게 웃었다. 제법 교활한 놈들일 것이다. 상대가 부상을 입은 것을 확인한 뒤에 몸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단탈은 비수를 허리춤에 꽂고 날이 두터운 칼을 뽑아 들었다. "열둘인가?" 2 단탈이 칼을 휘두르는 방법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단탈은 어깨나 팔뚝보다는 손목의 회전에 보다 비중을 두어 칼을 휘 두르고 있었다. 손목의 힘만으로 긴 칼을 휘두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니었을 뿐만 아니라, 도법을 처음 수련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금기 (禁忌)와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단탈은 그것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 었다. 휭-! 단탈은 허리를 재빨리 숙였다. 그의 얼굴을 노리고 휘둘러진 쇠침이 박힌 곤봉은, 머리 위 한 뼘 정도 떨어진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단탈은 허리를 펴는 탄력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쳤다. 그의 칼이 아 래로부터 위로, 길쭉하면서도 빠른 사선(斜線)을 그렸다. "끼엑-!" 얼굴의 반 쪽이 날아간 을온족 전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 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소리를 토해 내며 허물어졌다. 그것이 공손인이 장내에 도착했을 때 목격한 광경이었다. * * * 공손인은 바닥을 살펴보았다. 네 구의 참혹한 시신이 빗물 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십 년이 넘도록 동고동락해 온 이잔과 손오의 시신도 섞여 있었다. 공손인의 눈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검붉은 살광이 떠오르기 시작했 다. "이놈... 네가 감히 내 아우들을..." 단탈은 천천히 몸을 돌려 공손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이미 여러 개의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중 왼쪽 어 깨의 것을 포함한 몇 개는 운신에 큰 지장을 줄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 다. 하지만 그의 두 다리는 여전히 굳건했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타오 르고 있었다. 공손인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단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비록 피와 흙탕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조추림이 그린 초상화와 일치 하는 얼굴이었다. "네가 단탈이냐?" 단탈은 고개를 끄떡였다. 공손인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단탈이라는 자는 마치 한어 를 알아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단탈의 두툼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을 때, 공손인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라아합은 어디 있지?" 또렷한 한어였다. 나라아합? 공손인은 자신이 찾아 낸 미녀가 그런 이상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음 을 기억해 냈다. "그 계집은 호강하러 갔지. 흐흐..." 공손인은 소매 속에서 두 개의 손바닥만한 원반을 꺼내 들었다. 차 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신경 위로 오래된 연인처럼 휘감겨져 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단탈이 웃었다. 왜 웃었을까? 비웃는 것일까? 아니면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 일까? 하지만 단탈의 웃음은 그런 종류의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순수한 의 미가 담겨 있었다. 그의 웃음은 마음에서 우러난 기쁨이 담긴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곳이... 어디지?"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5 장 - 2 묘왕동주 1 권 단탈이 이렇게 물었을 때, 공손인은 단탈의 웃음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놈은 여자가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기분이 공손인의 마음을 채워 왔다. 그 기분 은 이내 지독한 살심으로 바뀌었다. "너는 알 필요 없다!" 공손인의 양손이 기쾌(奇快)하게 교차되었다. 그 순간, 두 줄기 백선(白線)이 단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휴르릉-! 잔가지가 바람에 떨리는 소리와 함께, 우막(雨幕)이 쩍 갈라졌다. 두 개의 원반이 일으키는 무서운 회전력이 그 주위의 빗방울들을 튕겨 버리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이미 전의를 상실할 정도의 기 세... 하지만 단탈은 칼에 힘을 주어 백선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까깡-! 새파란 불꽃이 튕기며, 단탈의 손목이 부르르 떨렸다. 손가락이 남 의 것처럼 감각이 없어짐과 동시에,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려 있을 때 처럼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뭔가 한수가 있는 놈이군!" 공손인은 애병인 식혈면륜(食血緬輪)을 회수하며 안색을 굳혔다. 그 의 면륜은 종잇장처럼 얇았지만, 투박한 칼 따위는 단숨에 토막내 버 릴 수 있는 신기(神器)였다. 하지만 단탈의 칼은 멀쩡했다. 무슨 조화일까? 설마 저 미개한 오랑캐가 내공을 익혀, 본신 진기를 병기에 주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금 것은 맛보기에 불과하지!"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 이를 가는 혼자말을 내뱉으며, 공손인 은 다시 한번 수중의 면륜을 전면으로 뿌렸다. 단탈은 이미 첫 번째 충돌 때 상대의 병기를 정면으로 받는 것이 위 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탈은 감춰진 힘을 끌어올려 병기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 년 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뒤부터의 일이었다. 그때 그를 구해 준 사람은 독곡(毒谷)에 사는 약 노인이었다. 당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그에게 약 노인은 반강제적으로 기이한 약을 계속 먹였고, 부상에서 완쾌된 이후 그는 이상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단탈은 아직 그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기껏해야 아까 정도뿐... 쐐애액-! 두 줄기의 백선은 앞서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단 탈은 몸을 앞으로 내던져, 날아드는 두 줄기의 백선을 피했다. 문제는 거리였다. 조그만 원반을 던져대는 한인과의 거리는 큰 걸음으로 열, 아니면 그보다 한둘 더... 물론 그의 칼은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칼이 닿을 수 있 는 두세 걸음 안으로 줄이기 전에는 절대로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 다. 단탈은 머리 위로 원반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자 벌떡 일어서서 공손 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서너 걸음이나 채 내디뎠을까? 단탈은 얼굴을 굳히며 개구리처럼 바닥에 넙죽 엎드릴 수밖에 없었 다. 후방으로부터 쏘아오는 싸늘한 살기를 느낀 것이다. 파팍! 그의 등덜미로 두 줄기의 혈선이 길게 새겨지며 선연한 핏물이 튀어 올랐다. 공손인은 되돌아온 면륜을 가볍게 받으며 미소 지었다. 회선비(回旋 飛)의 수법은 언제나 그를 만족시켜 주었다. 갈라진 단탈의 뒷등에서는 붉은 피가 뭉클거리며 솟아나오고 있었 다. 치명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두 팔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등 근육의 일부를 상한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단탈의 몸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공손인은 마 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단탈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다리의 힘만으로는 버 거웠는지 칼을 흙바닥에 꽂아 넣으면서도, 그의 몸은 조금씩 들려지고 있었다. 문득, 단탈의 고개가 들려졌다. 두 개의 시선이 이 장 정도의 허공 을 격하고 얽혀들었다. 그 순간, 공손인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단탈의 눈빛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죽엇!" 공손인은 마음속의 꺼림칙함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거칠게 외치 며 쌍류관천(雙流串天)의 수법으로 단탈을 향해 면륜을 날렸다. 서로 좌우로 교차하며 좁은 공간을 난자해 가는 두 장의 식혈면 륜... 그것은 그가 수련한 비륜십팔법(飛輪十八法) 중 가장 무서운 초식이 었다. 파악-! 순간, 공손인의 눈앞으로 흙보라가 확 끼얹어졌다. "억?"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물과 자욱한 흙보라는 공손인의 시야를 일순간 에 앗아가 버렸다. 공손인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숙달된 무인이었다. 그는 재빨리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왼쪽 상단으로부터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공손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오랑캐 놈이 딴에는 머리를 쓴 모 양이었지만, 그의 영민한 귀를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차압!" 공손인은 전공력을 쌍수에 끌어올려 바람 소리가 울리는 쪽을 후려 쳤다. 그의 별호 중 '쌍륜'은 두 장의 식혈면륜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철 수'은 쌍수에 수련한 철사장(鐵沙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설령 놈의 몸뚱이가 무쇠로 만들어졌다 한들, 극한까지 끌어올린 철 사장의 공력 앞에서는 두부처럼 으스러져 버릴 것이다. 깡! 자욱이 뿌려졌던 흙탕물 사이로 잘디잘게 부서진 쇳조각이 비산했 다. '쇠?' 공손인의 눈이 커졌다. 놈의 몸뚱이가 정말로 무쇠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의 철사장이 때린 것은 놈의 몸뚱이가 아니었다. 쾅! 아랫배에 쇠뭉치 같은 발이 발목까지 꽂혔다. 내장의 위치를 한순간 에 바꿔 버릴 듯한 위력적인 발길질이었다. 공손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가 고통을 느낀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빡! 바위처럼 억센 주먹이 공손인의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을 강타했다. "크억!" 공손인은 코와 입으로 피거품을 토해 냈다. 오른쪽 반면(半面)이 납 작하게 으스러지며 한쪽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뒤이어 또 한번의 무시무시한 발길질이 공손인의 목덜미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끄으으-!" 공손인은 오른쪽 눈알을 대롱대롱 매단 채 서서히 뒤로 넘어져갔다. 마지막 발차기가 목뼈 뒷부분을 산산이 으스러뜨린 순간, 공손인의 생명은 이미 육신으로부터 떠난 뒤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 소리는, 조각난 목뼈에 의해 찢긴 피부 사이로 바람이 새어나온 것에 불과했다. 공손인의 시야를 가린 것은 흙탕물이었고, 그 흙탕물을 뿌린 것은 단탈이 땅속에 박아 넣고 있던 칼이었다. 단탈은 칼을 주걱처럼 사용해 흙탕물을 흩뿌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몸을 날린 단탈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코앞까지 육 박한 상대의 병기를 왼쪽 어깨로 받아 내는 일이었다. 만약 그가 몸을 멈췄으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상대와 거리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어깨뼈가 부러진 왼팔은 어차피 사용할 수 없는 '물건'에 불 과했다. 적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까짓 '물건'쯤은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원반이 왼팔에 박히는 순간, 단탈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 를 공손인이 서 있던 곳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 자신은 몸을 낮춘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러한 단탈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단탈의 예상대로 공손인은 그가 던진 칼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단탈의 발과 주먹은 공손인의 급소를 여지없이 후려칠 수 있었던 것이다. * * * "흐으...!" 단탈은 너무나 극심한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 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을에 남아 있던 졸개 십여 명을 해치운 것에 불과했다. 겨우 그 정도로 비명 따위를 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쪽 무릎이 풀썩, 꺾이는 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 다. 이 순간, 그리 크지 않은 그의 몸뚱이는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 다. 쏟아지는 빗물이 몸에 묻은 피를 계속 씻어 내고 있었지만, 붉은 핏물은 온몸의 상처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단탈은 왼쪽 어깨에 박혀 있는 두 장의 얄팍한 원반을 잡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이 약 노인이 말하던 무공이라는 것인가...?' 그의 오른손 손목은 팅팅 부어 올라 있었다. 손목뼈가 탈구(脫臼)되 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공손인의 얼굴을 때릴 때 되돌아온 거센 반탄 력이 그의 손목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졸개들이 이럴진대, 그 우두머리는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단탈은 아찔한 절망감을 느꼈다. 최소한 밀림 속에서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믿어 온 그의 자부심이 한 순간에 허물어 졌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그는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싸워야만 했다. 그것은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라아합! 그녀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녀를 되찾지 못하는 한, 그는 타루가가 될 수 없었고, 아합족은 영원히 되살아날 수 없었다. 단탈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 속에 있는 수백 개의 뼈, 수백 개의 혈관이 일제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걸음, 또 한걸음... 을온족으로 가려는 것일까?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로는 붉은 핏물이 그림자처럼 길 게 드리워져 있었다. 점점 의식이 멀어져 갔다. 문득,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 같았 다. 단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려 애썼다. 어? 낯익은... 얼굴인데...? 그 생각을 끝으로 단탈의 몸은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3 장옥평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놀랐다. 한 가지는 산독자 약흠이 지닌 의술이었다. 약흠이 독술만큼이나 고명한 의술이 있다는 사실은, 직접 보지 않고 서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강호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 려진 성심자(聖心子) 이세명(李世明)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다른 한 가지는 단탈의 몸이었다. 우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 이었다. 그가 단탈을 발견했을 때, 단탈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피를 흘린 뒤였다. 게다가 온몸에 빽빽하게 새겨진 상처라니!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자상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그는 단탈을 업고 약흠의 은거지로 오면서도, 가망이 없을 것이라는 비관에 사로잡 혀 있었다. 하지만 단탈의 회복 속도는 거짓말처럼 빨랐다. 장옥평이 놀란 두 가지 사실들...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졌을 때 더욱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냈다. 시 체나 다름없던 단탈이 사흘 만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 * * "깨어나는 모양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으흠! 반혼환을 두 알씩이나 처먹인 효과가 이제야 나타나는 모양 이군." 까마귀가 깍깍거리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지만, 그 또한 역시 귀에 익었다. "단탈, 단탈! 정신이 드시오?" 단탈은 눈을 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야가 밝아져 왔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약흠과 장옥평이었다. "단탈! 좀 어떻소?" 장옥평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단탈은 입을 벌려 뭐라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뻣뻣한 혀는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거라."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5 장 - 3 묘왕동주 1 권 약흠이 말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로부터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내 기가 불가능했지만, 단탈은 눈빛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말라붙은 입가가 쓰 려 왔다. "내 동굴이다!" 단탈은 눈을 돌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신은 사흘 동안 기절해 있었소! 부상이 얼마나 심했던지, 나는 당신이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소!" 돌연, 단탈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사흘 동안 기절해 있던 사람의 것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사흘? 사흘이라고?" 단탈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옆에 있던 장옥평이 기겁을 하며 말리려 했지만, 단탈은 장옥평의 손을 뿌리쳤다. "으윽!" 칼로 전신을 난자하는 듯한 통증이 단탈의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자네가 나를 이리로 데려왔나?" 단탈은 장옥평을 향해 물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따라갔더니, 당신이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었 소!" 장옥평이 대답했다. "마을에 들어가 보았나?" 단탈의 물음에 장옥평은 고개를 끄떡였다. "혹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나?" 장옥평은 아무 말도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다. 장옥평이 마을을 살펴보았을 때, 마을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없이 많은 아합족의 시신들이 흙탕물 속에 버려져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아합족이 이런 혈 사(血事)를 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시신을 거두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시신은 너무나 많았고 단 탈의 상세는 너무나 지독했다. 결국 장옥평은 시신을 거두는 것을 포 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점점 불고 있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시신들 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단탈을 업고 돌아올 때 그의 집안에 걸려 있던 흑왕의 가죽수루를 잊지 않은 것은, 장옥평 스스로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장옥평의 무언(無言)의 대답을 단탈은 즉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미 짐작하고, 또 자신의 눈으로도 어느 정도 확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은 부족 에 대한 그의 집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단탈은 눈을 감았다. 다 죽었다. 아합족은 모두 죽었다.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나라아합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합족이 죽어 버린 것이다. 단탈은 천천히 몸을 뉘였다. 비는 이틀을 더 쏟아졌다. 그 동안 단탈은 단 한번도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 * *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장옥평은 도화장독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계곡을 빠져나가 고 있었다. 계곡을 완전히 빠져 나왔을 때, 장옥평은 몸을 돌려 계곡 안을 바라 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차 오른 도화장독이 분홍빛으로 영롱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비 때문에 며칠 동안 모습을 볼 수 없던 장독은, 오랜만에 권 좌를 되찾은 군주(君主)처럼 도도한 위세를 한층 자랑하고 있었다. 문득, 어젯밤에 들었던 강퍅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삼 년을 약속해라! 약흠은 그에게도, 그리고 단탈에게도 삼 년 간 오직 수련만을 할 것 을 요구했다. 삼 년이면 그들의 원한으로는 참기 어려운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장옥평과 단탈은 삼 년을 약속했다. 두 명 모두 뼈저리게 느꼈던 무력감을, 삼 년이라는 시간과 맞바꾸 기로 결심한 것이다. 장옥평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이제 중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석오랑(石五浪)을 찾아가라. 약흠은 그렇게 말했다. 석오랑만이 약흠의 친구 무숙자(無宿子)의 거처를 알고 있다고 했다. 검법만으로 논한다면 신주십일존의 수좌인 무왕(武王)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는 무숙자 석삼도(石三島). 장옥평은 그의 검을 배우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힘만이 목적을 달성시켜 줄 수 있었다. 그리고 힘만이 무력감을 앗 아갈 수 있었다. 단탈은 약흠으로부터, 그리고 장옥평은 무숙자로부터 힘을 얻어내야 만 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구도 힘을 얻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가정이었다. 하지만 장옥평은 믿고 있었다. 삼 년 뒤 어느 날. 그들이 긴 동면(冬眠)에서 깨어날 그날의 이야기를...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6 장 삼년(三年) 묘왕동주 1 권 第六章 삼년(三年) 1 살갗 위에는 예전보다 두 배나 많은 상흔(傷痕)이 새겨져 있었다. 핏물 속에는 예전보다 두 배나 많은 독혈(毒血)이 흐르고 있었다. 삼 년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는 단탈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약흠은 삼 년 내내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인내력을 단탈 에게 요구했다. 그 동안 단탈이 겪었던 육체적인 고통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단탈은 그것을 묵묵히 견뎌 냈다. 그것은 그의 인내력이 남 다르기 때문도, 그의 체력이 강인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억누르는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을 능가했기 때문 이었다. 단탈은 지금 한 그루의 거대한 고목 앞에 서 있었다. 고목의 어느 부분에는 우는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와 있었다. 눈과 입은 옹이였고, 콧날은 가지가 나오려다 만 목피 덩어리, 그리 고 눈물은 옹이로부터 흘러내린 수액(樹液)이 말라붙은 자국이었다. 모든 것은 삼 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단탈의 눈에 비친 그것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여전히 조상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삼 년 전처럼 울고 있었다. 어쩌면 더 구슬프게 울고 있는 지도 몰랐다. 단탈은 그 울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발길 을 쉽사리 돌릴 수 없었다. 저녁이 되자 그림자 하나가 나무 위에 길게 드리웠다. 그의 그림자 였다. 하지만 그만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수많은 생명과 수많은 염원이 배 어 있는 그림자였다. -단탈! -단탈 타루가! 나직한 속삭임들이 귓전에 들려 왔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였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형제들 의 목소리였고, 오누이들의 목소리였다. 단탈은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뒤에는 많은 그리운 얼굴들이 그를 향해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단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타루가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그에게는, 그리운 얼굴들을 마주할 자 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밤이 드리우고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목소리들도 사라 졌다. 단탈은 비로소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가족을 찾으러 갈 시간이 된 것이다. 2 남창성(南昌城). 파양호( 陽湖)의 절경이 멋들어진 강서성(江西省)의 성도(成都)였 다. 남창성 북쪽에 자리잡은 고운원(孤雲院)으로부터는 하루 종일 아름 다운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고운원은 남창성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강소(江蘇) 전체를 통틀어서도 짝을 찾을 수 없다는 고운선생(孤雲先生) 허윤(許潤)이 세운 악원(樂院)이었던 것이다. 생황(笙簧), 호금(胡琴), 비파(琵琶)... 각종 악기의 영롱한 음악은 담 밑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앞머리가 막 이마를 덮었을 때 꽃 꺾어 문 앞에서 소꿉놀이 했었죠. 당신이 죽마(竹馬) 타고 오시니 우리는 난간을 맴돌며 청매(靑梅)를 희롱했어요. 妾髮初覆額 折花門前劇 郞騎竹馬來 繞牀弄靑梅 구슬픈 선율의 '장간행(長干行)'이 연못 위로 물결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정자 위의 두 사람, 청년은 비파를 연주하고 여인은 눈을 지그시 감 은 채 청년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당비파(唐琵琶)의 사현(四弦) 위를 움직이는 청년의 손가락들은 희고도 깨끗했다. 때로는 밖으로 내타고 때로는 안으로 디려타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물고기의 유영(遊泳)처럼 유연하고도 민첩했다. 팔월, 나비들 날아와 뜨락에서 쌍쌍이 노니네. 바라보면 마음 아파 수심에 고운 얼굴 늙어만 갑니다. 八月蝴蝶來 雙飛西園草 感此傷妾心 坐愁紅顔老 연주가 절정에 이르자 두 사람 또한 몰아지경(沒我之境)으로 들어섰 다. 청년은 비파와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비파 소리에 맞춰 가늘게 몸을 떨었고, 여인은 곡조가 속삭이는 가슴 아픈 사랑에 자신 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까지도 비파 선율이 만들어 낸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때든 삼파(三巴)로 오실 때에는 집으로 미리 연락해 주세요. 마중길 어찌 멀다 하리오. 곧바로 장풍사(長風沙)로 달려가지요. 早晩下三巴 預將書報家 相迎不道遠 直至長風沙 곧바로 장풍사로 달려가지요... 장간(長干) 여인의 애달픈 바램과 함께 연주가 끝났다. 연주의 여백 과 같은 정적이 연못 위로 내려앉았다. 잠시 후 감겼던 여인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그녀의 눈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 하나가 볼을 타고 또르르 내려갔다. 그녀는 황급히 소맷 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조 공자의 운지술(運指術)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는군요. 비파를 이십 년이나 가르쳤지만, 공자처럼 배움이 빠른 분은 처음이에요." 고운원의 다섯 악선생(樂先生) 중 하나인 조비향(曹飛香)은 감탄스 러운 눈초리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누님과 비교한다면, 제 누추한 솜씨야 명월 앞 의 반딧불이지요." 청년은 비파를 정자 바닥에 내려놓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의를 정갈하게 차려 입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특이한 점은 청년의 눈이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천하에서 이토록 영롱한 눈빛을 지닌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쯧쯧! 조 공자께서는 겸손하신 건지, 아니면 광오한 건지 모르겠군 요. 저야 비파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지만, 조 공자는 비파를 배운 지 여섯 달밖에 안 되잖아요? 저와 비교하시면 곤란하지요." 조비향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가요? 하하!" 청년은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매력 적이었다. 조비향은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가슴이 울 렁거림을 느꼈다. '조카뻘 되는 사람에게 이 무슨 추태람!' 그녀는 내심을 숨기기라도 하듯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여튼 저는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군요. 다음에 오실 때에는 허 대선생(許大先生)께 직접 배우도록 하세요." 허대선생이라면 이 고운원의 주인인 허윤을 가리키는 것이다. 허윤은 명성만큼이나 고고한 사람이었다. 허윤에게 직접 배울 수 있 는 기회란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손(王孫) 이라 해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평생 다섯 선생의 문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비파를 잡은 지 두 달만에 허윤을 사사할 수 있 게 된 청년, 조추림의 재질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추림은 이러한 기회를 외면했다. "저는 비파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없는 몸입니다. 누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 정도에서 배움을 그치고 싶군요." 조비향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하기야... 공자 같은 분들께는 음률이란 하나의 잡기(雜技)에 불과 할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조금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조추림의 신분에 대해서 는 알지 못했지만, 차림이나 기파(氣波)로 미루어 지체 높은 신분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의 가르침에 감사 드립니다." 조추림은 정중히 포권함으로써 누님처럼 대했던 비파 선생께 수업이 끝났음을 고했다. 그의 귓전에 작은 전음(傳音)이 들려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육공자(六公子)의 거처를 찾았습니다. 조추림의 얼굴 위를 감돌던 온화로움이 단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 다. * *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바위로만 이루어 진 황량한 계곡... 조추림이 두 명을 대동하고 계곡 입구에 몸을 드러낸 것은 태양이 중천에 뜬 시각이었다. "여섯째가 있다는 곳이 여기인가?" 조추림은 살풍경한 계곡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조추림의 등뒤에서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사내는 치렁치렁한 머리카 락과 창백한 턱선을 지닌 조추림의 심복, 남력이었다. "이런 곳에 숨어 있다니...! 과연 여섯째다운 멋대가리없는 안목이 야. 쯧쯧! 미리 얘기라도 해주었다면 쓸 만한 곳을 소개해 줄 수 있었 을 것을..." 조추림은 혀를 차다가 문득 생각난 듯 남력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동풍일기(東風一奇)가 있다고?" "예!" "동풍일기, 동풍일기라... 귀찮은 늙은이지. 종남파(終南派) 출신이 라고 했나?" "종남산(終南山)에서 살기는 했지만, 종남파 출신은 아닙니다." 남력의 지적에 조추림은 자존심이 상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내 풀어졌다. "좋아! 종남파건 아니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염라전(閻羅 殿) 명부(名簿)에 그런 것쯤은 정확히 기재되어 있을 테니까! 자, 가 세!" 조추림은 계곡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동풍일기 복양소(福陽素)는 지난 두 달 간 해온 일이 자신의 쟁쟁한 명성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근 한 갑자 동안 섬서(陝西) 땅을 휩쓸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새까 만 후배 세 놈과 함께 이름없는 황량한 계곡에 처박혀, 스물이 갓 넘 은 애송이의 호법(護法)이나 서주고 있다니! 그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달아오른 얼굴이 터져 버릴 때까 지 놀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곳의 위치가 비밀 로 되어 있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복 노선배님! 아우가 산아래 마을에서 오리를 구워 왔는데 좀 드셔 보시지요." 복양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서 굽실거리고 있는 사내를 바라 보았다. 험상궂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간사스러운 미소는, 두 달이 지 난 지금도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겨웠다. "괜찮네! 나는 소식(素食)하는 체질이라... 내게 신경 쓰지 말고 자 네들이나 마음껏 먹게!" 복양소가 손을 내 휘둘렀다. 그의 앞에서 알짱거리던 편삼방(鞭三 幇)의 첫째 묵룡편(墨龍鞭) 막동(幕棟)은, 그제서야 아우 심자기(沈字 機)가 구해온 오리고기로 시선을 돌렸다. "헤헤! 그럼..." 막동은 김이 모락거리는 오리 다리를 뜯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자 편삼방의 둘째 심자기와 막내 홍선녀(洪仙女)도 오리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이제 며칠 남았지?" 복양소가 묻자, 입 안 가득 고기를 우적거리던 막동이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닷새 뒤가 출관(出關) 예정일입니다." "닷새라... 어서 닷새가 지나갔으면 좋겠군!" 이것은 복양소뿐만 아니라 계곡을 지키는 네 사람 모두의 공통된 바 램이었다. 계곡 안에는 그들이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 름은 천매운(千梅雲), 당금 강호에서 가장 강력한 방파의 여섯 번째 공자이기도 했다. 두 달 전, 천매운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무시무시한 장공(掌功) 요결이 적혀 있는 비급을 얻었던 것이다. 천매운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 듯한 기쁨을 느꼈다. 본디 천매운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속한 방파의 일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그를 제외하고 세 명이 더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세 명의 경쟁자를 물리쳐야만 하는 것이다. 한데 이들 세 명의 경쟁자들은 그에게 있어서 사형과 사저(師姐)였 고, 그보다 훨씬 더 강한 무공과 훨씬 더 강한 수하들이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나중에 출발한 자가 앞서가는 자들을 젖히기 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천매운의 앞에 패도적이기로 고금을 통틀어 손꼽힌다는 희대의 마학(魔學), 쌍각마령수(雙角魔靈手)가 수록된 비급이 나타난 것은 하 늘의 도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의 경쟁자들은 그가 쌍각마령수를 수련하 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절대자인 그의 사부는 사형제들 간의 암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의 사부는 가장 강하고 가장 독한 한 사람이 남겨질 때까 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도록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여섯 사형제 중에서 셋째와 다섯째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천매운이 이 볼 것 없는 황량한 계곡 안 에 두 달씩이나 웅크린 채 비밀스럽게 쌍각마령수를 수련하는 까닭도 바로 그것에 있었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6 장 - 1 묘왕동주 1 권 오리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던 편삼방의 막내 봉왕편(蜂王鞭) 홍선녀 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일에 불과하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은반지 가 서서히 검게 변색되어 가는 것은 절대로 평범한 일일 수 없었다. "독! 고기에 독이 들어 있어요!" 그녀는 뾰족한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오리고기를 집어던졌다. "뭣이?" 그와 동시에 막동과 심자기, 그리고 복양소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 섰다. 하지만 그 중 막동과 심자기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 편삼방은 독이 발라진 음식을 태연스럽게 먹 을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었다. 음식을 사올 때에는 언제나 은 막대를 사용해 독의 유무를 확인해 왔던 것이다. "둘째!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막동이 의혹에 물든 시선을 심자기에게 던졌다. 하지만 어리둥절하기는 심자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온 것은 평범한 음식점에서 만들어진 평범한 구운 오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가 그 자리에서 은막대를 문질렀을 때, 은막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 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일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때 바위 뒤편으로부터 낭랑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오(吳) 노인의 용독술은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 막동을 비롯한 편삼방의 안색이 급변했다. "조 공자!" 산보라도 나온 듯 뒷짐을 진 채 유유히 나타난 사람은 그들 방파의 둘째 공자인 조추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 오는 듣기 거 북한 목소리... "혈감(血甘)이란 독은 무형산(無形散)과 만나야만 독성을 발휘하지 요. 이 간단한 성질만 안다면, 이 정도의 용독술이야 어린아이 장난 같은 재주에 불과하지요." 조추림의 뒤에 등장한 사람은 구부러진 등을 가진 노인이었다. 하나 뿐인 눈에 청광(靑光)을 번뜩이는 노인에게서는 개구리나 두꺼비처럼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느낌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혈감과 무형산이라는 이름을 듣자 편삼방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두 가지 독이 과거 민산산맥(岷山山脈)을 주름잡던 어떤 노독물(老 毒物)의 이름을 연상케 해주었다. 일 각 이내로 해약을 얻지 못하는 한, 그들은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등 굽은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 복양소가 창노한 목소리로 외 쳤다. "민산독마(岷山毒魔) 오살량(吳煞亮)! 아직까지도 이런 비겁한 술수 로 먹고 사느냐?" 오살량의 외눈에 차가운 빛이 번뜩거렸다. "호오! 뉘신가 했더니, 동풍일기 복 대협이셨구려! 천하에 이름 높 은 명숙(名宿)께서 이런 궁벽한 곳에 어쩐 일이신지...?" 복양소는 비아냥거리는 오살량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조추림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소협께서는 천 공자의 둘째 사형인 십전옥룡(十全玉龍) 조추림, 조 공자이신 것 같은데... 이 늙은 눈이 맞소이까?" 조추림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어김없소이다." 천하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고개를 끄떡일 만한 정중함이요, 공손함 이었다. 하지만 조추림의 성격에 관해 익히 들은 바 있는 복양소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한 가족에게 독을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좋은 뜻이 있지는 않을 터!" 복양소는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원반을 꺼내 들었다. 테두리를 따 라 예리한 날이 서 있는 이 병기는, 만월륜(滿月輪)이라는 이름이 붙 은 복양소의 독문병기였다. "소협께서는 천 공자의 연공(練功)을 방해할 의도임이 분명하겠지 요?" 채앵-! 만월륜이 가볍게 떨리자 맑고도 높은 금속성이 계곡을 타고 울려 퍼 졌다. "대충 비슷합니다." 조추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복양소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러면 격식 따위는 필요없겠군! 노부는 천 공자를 주인으로 삼기 로 작정한 몸! 주인에게 해를 끼치려면 내 시체를 밟기 전에는 어림없 을 것이오!" 쩌렁쩌렁한 노성과 함께 정오의 태양이 만월륜의 시퍼런 날 위에서 새하얗게 부서졌다. 가히 위진강호(威震江湖) 한 갑자의 노영웅다운 풍모였다. 하지만 조추림은 복양소의 풍모에 조금도 감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뒷전에 시립해 있던 남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뭐랬나? 귀찮은 늙은이라고 그랬잖아?" 남력은 묵묵히 고개를 끄떡이더니,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소름 끼치는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내 이름은 남력이다." 간단한 소개였다. 하지만 복건제일도(福建第一刀)라 알려진 귀면도 남력을 소개하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느새인가 그의 손에는 끝 부분이 갈라진 안령도(雁翎刀)가 들려 있었다. "자! 그러면 이 몸은 아우를 만나러 가겠네." 남력이 복양소를 가로막자, 조추림은 한가로운 신색으로 계곡 안쪽 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림없을 것이라고 했다!" 복양소는 얼굴 가득 노기를 띠며 만월륜을 움켜쥐고 조추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어 걸음이나 내디뎠을까? 복양소의 양손이 힘차게 휘둘러지는 순간, 거대한 원반은 죽음의 수 레바퀴처럼 땅바닥 위에 긴 고랑을 만들며 조추림을 향해 굴러갔다. 까가각-! 만월륜이 구르는 궤도 안에서 수많은 돌멩이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튀어 올랐다. 실로 가슴 떨리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조추림은 재미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 흉폭한 기세나 가공한 살기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호리호리한 몸이 만월륜에 의해 두 조각으로 갈라지려는 순 간... 이 장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날아든 남력의 안령도가 그것을 용납하 지 않았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만월륜이 튕겨져 나갔다. "헛!" 복양소는 만월륜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자 황급히 팔을 휘감았다. 술 취한 것처럼 땅위를 맴돌던 만월륜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기라 도 한 듯, 허공을 쭉 가로질러 그의 손 안으로 돌아왔다. 만월륜과 그 의 팔목 사이에는 가느다란 은사(銀絲)가 달려 있어 수발(收發)을 자 유롭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방해하는 거냐, 남력?" 복양소는 몸을 돌리며 짓씹듯이 말했다.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남력의 음산한 얼굴이 있었 다. 어느새 회수했는지, 그의 손에는 시퍼런 도기를 점점이 뿌려대는 안령도가 다시금 쥐어져 있었다. 갈채가 절로 나올 법한 고도의 비도술(飛刀術)을 발휘한 뒤이건만, 안령도를 들어 중단을 겨누는 그의 자세는 여전히 물 흐르듯 고요하기 만 했다. "복양소! 네 상대는 나다." 남력은 자세만큼이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여섯째! 내가 왔네!" 가객(歌客)의 그것처럼 풍부한 성량의 외침이 동굴 벽을 두드리며 울려 들어갔다. 조추림은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동굴 안으로부터 돌아 나오는 것은 웅웅거리는 메아리뿐이었다. "나는 두 달 간 자네가 보고 싶어 그렇게 애가 탔건만, 자네는 이 둘째형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지?" 조추림은 신기한 모험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동굴 내부를 두리번거렸 다. 동굴 안의 풍치(風致)는 계곡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흔한 종유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동굴이었다. "너무 어둡군! 자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불 좀 켜도 되겠지?" 빛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곳까지 이르자, 조추림은 들고 있던 화섭자에 불을 당겼다. 불빛은 물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어둠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때, 동굴 깊숙한 곳에서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목소리가 울려 왔다. "오셨소?" 조추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 거기 있었나?" "이 바쁜 시국(時局)에, 무슨 바람이 불어 못난 아우를 찾아 이 외 진 곳까지 오셨소?" 조추림은 동굴 바닥으로부터 튀어나온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자네가 폐관에 들었다길래, 혹시 도와 줄 것이라도 있나 해서 왔다 네." 그러자 동굴 안쪽으로부터 쇠붙이로 유리판을 긁는 듯한 비틀어진 웃음 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큭, 키키킥!" 웃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조롱이 섞인 목소리가 울려 왔다. "왜? 나도 셋째 형님이나 다섯째 형님처럼 만들고 싶으시오?" 조추림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식의 표정을 짓더니, 나직이 한 숨을 쉬었다. "그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걸세." "뭐가 잘못 안 거란 말이오! 셋째 형님을 암살한 것도, 그리고 다섯 째 형님을 독살한 것도 모두 당신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분노에 찬 목소리가 동굴 안의 공기를 탁하게 뒤흔들었다. "쯧쯧! 셋째를 죽인 것은 내가 맞다네. 암살이라... 하기야 암살이 라면 암살일 수 있겠지. 하지만 자네도 알겠지만, 내게는 정면으로 승 부해도 셋째를 죽일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어. 내가 그를 암습한 것은, 단지 사형제 사이에 검을 겨누고 마주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야." 조추림은 자식의 그릇된 점을 훈도하는 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말하 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째에게 독을 쓴 것은 내가 아니라 넷째라네. 그녀의 독 술은 감탄스러울 정도지. 하지만 그녀와 다섯째가 그렇고 그런 관계였 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없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자네도 생각해 보게. 다섯째가 익힌 청양진기(淸陽眞氣)는 넷째의 옥녀공(玉女功)과 극성(剋性)이잖아? 그녀는 다섯째가 제일 껄끄러웠던 게지." 그의 말이 너무나 의외였던 듯, 동굴 안쪽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말 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얼굴을 보이려는가?" 조추림은 바위에 대고 있던 엉덩이를 슬쩍 떼었다. 그의 말처럼 누 군가가 동굴 안쪽으로부터 걸어나오고 있었다. 중키에 약간 갸름한 얼굴을 가진 앳되어 보이는 청년... 바로 조추림의 사제인 천매운이었다. 그는 본디 붉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오랜 동굴 생활 탓인지 옷은 너덜너덜하게 해어져 있었다. 특히 옷의 팔 부위는 흔적조차 찾을 수 도 없어서, 새하얀 팔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먹는 것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게로군." 조추림은 화섭자의 불빛 아래 드러난 천매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천매운은 눈빛을 빛내며 조추림을 바라보았다. "육 년 전, 처음 사문에 들어왔을 때,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셨 소." 천매운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틈을 보이면 죽을 것이다..." 조추림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 또한 과거에 들은 적이 있는 말이 었다. "내 종적을 어찌 알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사형에게 틈 을 보인 셈이니 죽어도 할말이 없게 되었구려." 목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낮아졌다. 그에 따라 넋두리 같은 우울함은 점점 더 짙게 배어나왔다. "하지만..." 기이한 여운과 함께 천매운은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손을 본 조추림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천매운의 두 손에 는 하나같이 중지(中指)가 없었던 것이다. "손이 왜 그렇게 되었나?"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6 장 - 2 묘왕동주 1 권 조추림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천매운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내가 익히고 있는 장공이 쌍각마령수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래! 어디서 들은 것 같군." 조추림은 쌍각마령수라는 말이 지니는 무게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쌍각(雙角)... 어울리는 말 아니오?" 천매운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중지가 없이 양쪽으로 손가락이 두 개씩 모여 있는 그의 손은, 두 개의 뿔을 지닌 마귀의 얼굴처럼 보였다. "이 마공은 수련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중지 속을 흐르는 혈관이 말라붙게 된다오. 중지는 그 생명을 잃고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떨어 지게 되지요. 그리고 운공이 극성(極成)에 이르면..." 천매운의 얼굴에 한 줄기 비웃음이 새겨졌다. "중지가 이처럼 완전히 없어지게... 되오!" 말과 동시에 그의 쌍수가 쭉 내밀어졌다. 그의 손바닥 위로 섬뜩한 혈광(血光)이 번뜩이는 순간, 조추림은 동 굴 바닥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려야만 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맹 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쿠웅! 조추림이 서 있던 단단한 동굴 바닥이 한 자가 넘게 움푹 파였다. "오호! 이제 보니, 자네는 이미 그 무공을 완성했군! 이거 축하해야 할 일인데?" 뒤로 비스듬히 날아가던 조추림은 동굴 벽의 한 부분을 찍고 허공을 두 번 맴돌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미 쌍각마령수의 무서운 위 력을 눈으로 목격한 뒤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종류의 당혹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축하는 백 년쯤 뒤에 사형을 찾아 지옥에 갔을 때에나 받기로 하겠 소!" 천매운은 차갑게 내뱉으며 조추림에게 바싹 달라붙어 팔 장(掌)을 연속해서 쳐냈다. 파파파-! 이미 화섭자의 불꽃이 꺼져 버린 것은 오래, 그 대신 눈부신 혈광이 두 개의 손바닥과 조추림 사이의 공간을 빽빽하게 엮어 나갔다. 쿠쿵! 쾅! 동굴 바닥이 파이고 동굴 벽이 쪼개져 튀어올랐다. "좋아! 아주 좋아!" 조추림은 자욱한 파편들 사이로 이리저리 몸을 날리면서도,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나 봅시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마공 탓인지 천매운의 앳된 얼굴 위로 검붉은 살 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려 땅을 디딤 과 동시에 중지가 없는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았다. 쌍각마령수로 펼치는 패도적인 장법, 쌍귀수혼장(雙鬼搜魂掌)의 기 수식이었다. "끼이아아-!" 귀신의 울부짖음처럼 소름 끼치는 기합이 길게 이어지며 천매운의 쌍장이 활짝 뒤집혔다. 휘우우웅-! 광풍성(狂風聲) 같은 파공성과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에서 수십 개의 귀면(鬼面)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난데없이 귀신이 나타났을 리가 없었다. 그 귀면들이 천매운의 손바닥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추림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은은하게 뿜어 내는 혈광과 중지가 없는 으스스한 형상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야 할 마음이 생기는군!" 조추림의 신형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는 어둠 속을 비행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귀면들을 하나하나 피해 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 가기 시작했다. 좌우로, 혹은 전후로 유령같이 흐느적거리는 그의 몸놀림은, 맥없이 주변만을 스치고 지나가는 귀면의 잔광(殘光) 속에서 신비스러움을 더 해 갔다. "약수영(弱水泳)?" 어둠 속에서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알아보는가? 제법인데!" 조추림은 활짝 웃으며 신형을 길쭉하게 앞으로 내뽑았다. 그와 동시 에, 그의 우수가 허리춤으로 다가갔다. "차앗!" 조추림의 허리춤에서 한 가닥 백광이 폭출했다. 백광은 이제 막 뿜 어져 나오는 귀면의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가르고 지나갔다. "억? 검강진기(劍 眞氣)까지?" 장력의 중심이 허망하게 갈라지자 어둠 속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나왔다. "자네의 역할은 여기까지야!" 조추림의 몸이 어둠 속으로 스르르 녹아 들어갔다. 어느 한 순간, 백광이 환상처럼 어둠을 갈랐다. 그리고 화려한 폭발 과 함께 사라졌다. "이, 이게... 어떻게...?" 천매운은 불신의 빛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 았다. 거기에는 새하얀 광채를 토해 내는 검 한 자루가 깊숙이 꽂혀져 있었다.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하얀 손 하나. 그 뒤쪽에 머물러 있는 하얀 미소 한 조각... 그리고 검신에 일렁이던 빛이 서서히 사라짐에 따라 동굴 안의 공간 은 암흑 속으로 서서히 묻혀 갔다. "자네의 역할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퇴장하는 것이야. 배우 가 극본을 무시하면 쓰겠나?" 조추림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천매운은 그의 말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사형이 무왕(武王)의 약수영과 검강진기를...? 사 부께선 제자 중 누구에게도 무왕의 무학을 전수하지 않았다고 하던 데...?" 천매운은 아직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사제! 자네는 아는 것이 너무 없어. 아마도 어리기 때문이겠 지."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천매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이 그 자리에서 가볍게 회전한 것이다. 내부가 산산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이 천매운의 몸을 부들부들 떨 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천매운은 양손 중지가 있던 부분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쭉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쌍각마령수의 마공이 산산이 깨어지며, 중지의 혈관이 다시금 살아 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명은 중지의 혈관과 정반대의 궤도를 치달려 갔다. "끄으으-!" 조추림이 천매운의 가슴에서 검을 뽑을 때, 천매운의 입에서 흘러나 온 신음 소리였다. 지탱할 것을 잃은 천매운의 몸뚱이가 천천히 뒤로 넘어질 때, 조추 림은 친구에게 인사를 던지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자네의 말이 맞기는 맞아. 사부께선 제자들 중 누구에게도 무 왕의 유학(遺學)을 전하지 않으셨지. 제자들 중 누구에게도 말이야." 쿵-! 천매운의 몸뚱이가 돌바닥 위에 길게 누웠다. 그 위에 조추림의 목소리가 얹혀졌다. "하지만, 만일 제자가 아닌 다른 누구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나?" 그 말을 끝으로 조추림은 싱긋 웃었다. '다른 누구'라는 말을 할 때 그의 기분은 너무나도 좋았다. 마치 가까운 사람을 완벽하게 속였을 때처럼... 동굴 밖의 상황도 대충 정리되어 있었다. 한 갑자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강호를 질타했던 기병(奇兵) 만 월륜은 멀찌감치 떨어진 바위에 꽂혀 있었고, 만월륜의 주인 동풍일기 복양소는 가슴과 허벅지가 쩍 갈라진 채 바닥에 벌레처럼 쓰러져 있었 다. 복양소의 노구(老軀)가 쓰러진 주위의 흙은, 그가 흘린 핏물로 흥건 하게 젖어 있었다. 대지는 탐욕스러운 혓바닥을 내밀어 그의 핏물과 동시에 그의 영혼 까지 빨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남력은 그로부터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회색 장포의 왼쪽 옆구리 부분을 붉게 물들이 고 있는 혈흔만 없었던들, 방금 전의 치열했던 결투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끝났나?" 동굴에서 나온 조추림이 물었다. "예!" 남력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조추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에 중독되어 시커멓게 변색된 세 명 의 조무래기들에게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다. 민산독마의 독술은 확 인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믿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힘을 썼더니 조금 출출한데..." 조추림은 맑은 목소리로 말하며, 계곡의 어느 한쪽을 바라보았다. 우연인지, 남력의 시선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산 아랫마을에서 팔던 오리고기가 먹을 만한 것 같더 군. 어때? 자네도 생각이 있나?" 조추림은 시선을 남력에게 돌렸다. 그의 눈은 둥글게 접힌 채 의미 있는 웃음을 담고 있었다. 남력의 허리가 조금 더 숙여졌다. "속하도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잘 됐군." 조추림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계곡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의 뒤를 남력과 민산독마가 따랐다. * * * 그들이 떠나간 계곡. 조추림과 남력이 바라보고 있던 계곡 위쪽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불 쑥 드러났다. 검은 장포를 입은 두 명의 노인이었다. 그들의 생김새는 기괴했다. 한 사람은 이마에 '자(刺)'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코가 베어져 있었다. 그것은 하나같이 중죄인들만이 받는 표지였다. 그들은 혹시 과거에 역모라도 꾀했던 것일까? "역시 옥주(屋主)님의 예상대로야! 옥주님께서는 육 공자를 죽일 가 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이 공자라고 정확하게 예견하셨잖아?" 코가 없는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대공자가 이 공자에게 정보를 흘리지 않았던들, 이 공자가 이 계곡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이마에 문신을 새긴 노인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면, 계곡 입구에까지 이 공자를 미행한 사공녀(四公 女) 또한 보통이 아니지. 만약 이 공자의 무공이 약해서 육 공자에게 상처라도 입었더라면, 그 또한 이 계곡을 살아서 나가지는 못할 걸?" 두 노인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이마에 문신이 새겨진 노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과연 그들 셋 중 누가 후계자가 될까?" 코가 없는 노인은 한참 동안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오늘의 일로 미루어 이 공자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 "왜?" "그는 대공자가 정보를 흘린 것도, 그리고 사공녀가 자신을 미행한 것도 모두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들어와 육 공자를 죽인 걸 보면, 이미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대공자를 당할 수 있을까? 대공자의 무공과 심계는 옥주께서도 인정하는 경지에 올라 있는데?" 두 노인은 괴상한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그러다가 길 게 한숨을 쉬었다. 이마에 문신을 새긴 노인이 코가 없는 노인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 다. "우리가 여기서 궁리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가세! 옥주께 오 늘 일을 보고 드려야지." "하긴... 그래! 가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6 장 1 절 삼 년 전의..... 묘왕동주 1 권 3 삼 년 전의 그날은, 계절이 가을을 향해 꺾어지기 위해 서 있던 작 은 모퉁이 위에 존재해 있었다. 산 아래로 단풍을 잉태하려는 수목들은 막바지 푸름의 정점(頂點)을 뿜어대고 있었고, 소로(小路)를 따라 길게 늘어선 들꽃 사이로는 꽁지 가 붉은 잠자리들이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그날 노인은 한 그루 오래된 잣나무 아래 앉은 채 유현(幽玄)함이 담긴 눈으로 장옥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옥평은 한 장의 편지를 노인에게 건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노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묘강에서 남령을 넘 어 수천 리 길을 그 노인을 만나기 위해 왔던 것이다. 잣나무 아래 앉아 있던 노인, 무숙자(無宿子) 석삼도(石三島)는 밑 도 끝도 없는 한마디를 꺼냈다. -눈을 감고 검을 보아라. 그리고 두 자루의 검을 건네 주며 덧붙였다. -검이 보이기 전에는 검을 뽑지 말아라. 장옥평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눈을 감 고 검을 보려고 했다. 물론 검이 보일 리가 없었다. 화려한 수확의 계절이 끝날 때까지 쌍검은 단 한번도 뽑히지 않았 다. 만약 장옥평에게 남다른 참을성이 없었다면, 그는 일찌감치 포기 하고 석삼도의 곁을 떠났을 것이다. 눈을 감고 검을 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니 최소한 어떤 경지 와 연결되는지 그가 처음으로 이해한 것은, 그해 초겨울이었다. 석삼도는 여느 때처럼 잣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차가워진 바람이 잣나무의 잎을 떨구고 있었다. 그때 장옥평은 보았다. 떨어지던 나뭇잎들이 석삼도의 앞에서 우뚝 멈춰 버린 것을... 처음에는 자신을 포함한 세계가 일시에 정지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 는 의심이 들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의심 했다. 그것이 헛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은 나뭇잎들이 작은 움직임을 보이 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나뭇잎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떤 것은 위로, 어떤 것은 아래로... 모두 제각기 느릿한 움직임을 보이며 노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발경(發勁)이었을까? 내공이 절정에 오른 사람들이 경(勁)을 내뿜어 외물(外物)을 조종한 다는 이야기를 장옥평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그것도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말라붙은 나뭇잎을 역도(力道)로써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석삼도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것은 작은 재주에 불과하다. 눈을 감아라. 그리고 검을 보아라. 눈을 감고 검을 보는 것과 방금 일어났던 나뭇잎의 환상적인 움직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장옥평은 그날부터 초옥 안에서 눈을 감고 검을 보는 것을 시작했 다. 날이 갈수록 그는 조금씩 수척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씩 석삼도의 그것을 닮아 갔다. 눈이 왔다. 얼음이 녹았다. 그리고 파란 잎이 돋아났다. 이것이 두 번 더 반복되었다. * * * 초옥(草屋) 안은 어두웠다. 자시(子時)가 넘은 시각에 불을 켜지 않았으니, 초옥 안이 어두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옥평은 그 어둠 속에서 앉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두 눈은 반개(半開)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 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한치 앞조차 볼 수 없는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어둠 때문이었다면 그는 암흑이라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 지만 반쯤 뜨여진 그의 망막에는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았다. 그가 직시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완전한 '무(無)'였다.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그의 앞에는 두 자루의 검이 놓여져 있 었다. 한 자루는 길고 한 자루는 짧은, 두 자루의 검... 그것들은 검집 속에 들어 있었다. 장옥평은 그것들의 날이 어떻게 생겼는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 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산에서 두 번째의 겨울을 보내던 어느 날 깨달은 것이었 다. 그는 이제 검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빛이 하나 있었다. 달무리에 가려진 별빛처럼 은은하고도 흐릿한 빛이었다. 그 빛은 열 려진 창문을 통해 초옥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여름밤, 중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반딧불이었다. 반딧불이 지나가는 곳에는 세계가 만들어졌다. 따스한 빛이 감도는 너무나도 작은 세계였다. 장옥평의 눈이 천천히 감겨졌다. 눈이 감겨짐에 따라 심안(心眼) 속에 있는 '무(無)'의 공간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두 자루의 검. '무'의 공간 속으로 두 자루의 검이 서서히 떠올랐다. 한 자루는 짧 고 한 자루는 길었다. 그리고 그 검자루들은 투명한 손에 쥐어져 있었 다. 장옥평은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손의 주인은 장옥평 의 '마음'이었다. 두 자루의 검이 완전히 들려졌을 때, '무'의 공간 속에 또 하나의 물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체는 아주 작은 구슬처럼 보였다. 두 자루의 검 중 장검(長劍)이 구체(球體)를 겨누었다. 반딧불은 파르르 떨었다. 거미줄에 걸린 듯, 허공의 한 점에 못 박 혀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반딧불은 자유로워야 했다. 그것은 열흘도 살지 못하는 짧은 생명 대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었다. 자유롭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미 반딧불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형의 힘은 너무도 끈끈했다. 반딧불의 미약한 저항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심안의 공간, 장검이 움직였다. 장검은 부드럽게 위로 들려졌다가 짧은 직선을 그리며 비스듬히 떨 어졌다. 반딧불이 비스듬히 떨어졌다. 심안의 공간, 단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검은 작은 원을 그리고 구체의 주위를 맴돌았다. 반딧불이 맴돌았다. 심안의 공간, 장검과 단검이 교차되었다. 용의 울음 소리 같은 검명(劍鳴)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쌍검은 못 속을 노니는 두 마리의 용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운 율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딧불은 신명난 무희(舞姬)처럼 어둠 속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초옥 안이 밝아졌다. 반딧불의 비행은 너무나도 빨랐고, 그 잔상(殘 像)이 중첩되어 어둠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반딧불은 본디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날 수 없었다. 얇은 각질(角質) 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이런 속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딧불은 멀쩡했다.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힘이 반딧불의 주 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심안의 공간, 구체와 쌍검이 어느 순간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삼각형 을 이룬 채 정지했다. 반딧불이 정지했다. 그 정지에 놀란 듯, 뿜어대던 빛마저 사라졌다. 초옥 전체가 멈춰 있었다.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존재하 는 것이라고는 어둠과 정적뿐인 멈춰진 우주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심안의 공간, 구체가 서서히 사라졌다. 쌍검도 서서히 사라졌다. 공 간 전체가 흐릿해졌다. 똑! 턱에 맺혀 있던 땀방울 하나가 초옥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초옥 안에 정지되었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장옥평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옥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 어둠 속을 반딧불 하나가 날고 있었다. 반딧불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날고 있었다. 그 비행은 무척 아름다웠다. 자유란 그토록 아름다 운 것인지도 몰랐다. 장옥평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땀투성이가 된 얼굴과는 달리,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삼 년 동안 그토록 고심하며 매달렸지만, 좀처럼 그 내부를 보여 주 려 하지 않던 '비검(非劍)'의 견고한 벽... 오늘에야 비로소 그 일부를 허물 수 있었던 것이다. * * * 석삼도는 어떠한 지붕 아래에서도 잠을 자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숙자라는 별호가 붙었는지도 몰랐다. 장옥평이 보아 온 바에 의하면 이곳에서 석삼도의 잠자리는 그가 하 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한 그루의 푸른 잣나무 아래였다. 오늘도 석삼도는 잣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초옥을 나선 장옥평은 석삼도의 앞에 공손히 섰다. 노인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보았느냐?" 장옥평이 대답했다. "예!" 그의 목소리는 기이한 열기로 떨리고 있었다. 새로운 경지가 안겨 준 환희 때문이었을까... 석삼도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가느다란 눈이었다. 하지만 세상 누구의 눈보다도 풍부한 것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무엇을 보았느냐?" "마음속의 검을 보았습니다." 석삼도는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쉬었다. "검으로써 이미 경지에 오른 뒤에도, 마음속의 검을 만드는 데 팔 년이 넘게 걸렸지. 하지만 너는 아무런 기초도 없는 상태에서 삼 년이 걸렸구나. 과연 장일기의 손자요, 장낙웅의 아들이야." 노인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사부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장옥평이 겸손한 성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석삼도가 지 금 올라 있는 경지는, 장옥평으로서는 감히 엿볼 수도 없을 만치 지고 한 것이었다. "이제는 검을 쥐어도 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명 심해라. 단지 마음속의 검이 실제의 손 안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석삼도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장옥평은 잠시 당황에 빠졌다. 검을 쥐고 나서는, 어떻게 휘두르라 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이내 그 말뜻을 깨달았다. 무슨 검법이면 어떠랴? 본디 석삼도가 전수해준 '비검(非劍)'은 이름 그대로 검이 아니었 다. 검이 아닌 이상 정형화된 검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형(形)을 초 월한 깨달음 속에서 마음의 검이 움직이고, 마음의 검에 따라 손의 검 이 움직일 따름이다. 마음의 검으로 베는 모든 것은 손 안의 검으로도 벨 수 있는 것이 다. 장옥평은 노인의 곁을 떠나 초옥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문득,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히 떠 있었다. 멀리 초생달이 보였다. 초생달은 장옥평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었다. 칠월 초였다. 문득, 삼 년 전 이맘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곳에는 다시 우 기(雨期)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탈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삼 년 전의 빗소리가 은은히 귓가를 맴돌았다. 쏴아아-!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7 장 은온족(乙溫族) 묘왕동주 1 권 第七章 은온족(乙溫族) 1 쏴아아-! 늦여름 묘강을 지나가는 우기는 올해도 변함없이 막강한 위세를 떨 치고 있었다. 을온족의 전사 의식을 달포 전에 통과한 납랄세(納剌歲)는 자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납랄세의 나이 이제 갓 열여덟...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그의 귓불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슨 고리를 달까?' 그것이 지금 납랄세가 지니고 있는 최대의 고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금으로 만든 고리를 달고 싶었다. 누렇게 빛나는 금 고리는 무게 또한 묵직할 것이다. 그것을 귀에 걸고 있으면 하시라도 자신이 전사임을 잊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금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오는 한족들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인데, 콧대 높은 한족들이 그와 같은 햇병아리 전사를 제대로 상대해 줄 리가 없 었다. 그래서 납랄세의 고민은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깊은 상념은 간혹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해준다. 홀린 듯 정신없이 걷던 어느 순간, 납랄세는 자신이 마을로부터 꽤 나 먼 거리까지 왔음을 깨달았다. 어느덧 마을을 둘러싼 작은 밀림이 끝나고, 뾰족한 암석들로 뒤덮인 나지막한 구릉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납랄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큰비가 오는 날 이런 곳을 나다니는 것은, 그의 일천(日淺)한 경험 으로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빗물은 암석 위에 얇은 수막(水幕)을 만들었다. 석회질이 녹아 들어 간 수막은 맨발로도 딛기 힘들 정도로 미끈거렸고, 뾰족한 암석 위에 서 미끄러지는 것은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납랄세는 몸을 돌려 마을로 돌아가려고 했다. "...?" 그러다가 문득, 납랄세는 숨을 죽였다. 구릉 저편에서 빠르게 움직 이는 어떤 물체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납랄세는 재빨리 가장 가까운 바위 뒤로 몸을 감췄다. 짐승 같았다. 제법 큰 몸집임에도 불구하고 표홀히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짐승 중에서도 표범 같았다. 납랄세의 눈빛이 번뜩였다. 한인들이 표범의 가죽을 유난히도 좋아 한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표범 사냥에 참가할 정 도로 유능한 사냥꾼이 아니었고, 설혹 참가한다고 해도 가죽이 그의 몫으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지의 신이 내려 준 기 회였다. '잘하면...' 잘하면, 금고리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 다. 납랄세는 어깨에 걸고 있던 활을 풀렀다. 전사가 된 후부터 의식적 으로 활과 단창을 지니고 다녀, 나이든 전사들로부터 겉멋만 잔뜩 든 놈이라는 핀잔을 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이것 보라지! 결국 쓸모가 있잖아?' 납랄세는 신중한 동작으로 시윗줄에 화살을 걸었다. 을온족이 사용하는 화살은 살촉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평범한 촉으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유(毒油)를 바른 촉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독유는 늪지대에만 서식하는 붉은 개구리의 피 부에서 나오는 독을 기름에 갠 것인데, 본디 사냥에는 이것을 사용하 지 않았다. 이것으로 사냥했을 경우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랄세는 망설임없이 독을 바른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가 가죽 이외에는 마음에 두는 것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활 솜씨는 표범과 같은 맹수를 일발에 죽일 정도로 정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납랄세는 바위 위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움직이기만 해봐라!' 만약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쏴버릴 생각인 것이다. 드디어 스무 걸음쯤 떨어진 바위 뒤에서 거무스름한 물체가 움직이 는 것이 보였다. 피잉!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 활이 날카로운 시윗소리와 함께 튕겨졌다. "맞았다!" 납랄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화살이 쏘아진 순간, 검은 물체의 움직임이 정지한 것이다. 납랄세는 바위 뒤로부터 달려나와 검은 물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 했다. 이제 그도 금으로 만든 귀걸이를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었다. 검은 표범의 가죽을 머리 위부터 뒤집어쓴 남자였다. "괜찮은 솜씨인데?" 표범 가죽을 쓴 사내는 천천히 납랄세에게 다가왔다. "사냥을 하는 중인가?" 사내가 납랄세에게 물었다. 사내의 얼굴 상반부는 표범의 대가리 가죽에 덮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있을 위치에 자리잡은 두 개의 푸른 인광(燐光) 은, 납랄세의 몸뚱이를 꼼짝 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 납랄세는 자신도 모르게 존대말을 써버렸다. "잘 보고 쏴야지." 사내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안에는 납랄세의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예? 예! 죄송합니다!" 납랄세는 화살을 받아 들며 사내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사내가 무슨 재주로 날아오는 화살을 잡았을까?'라는 의문은 생기 지 않았다. 사람을 죽일 뻔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순진한 마음을 옥죄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를 보니 을온족인 것 같군." 사내는 손가락으로 납랄세의 귀를 가리켰다. 이 말 한마디에 사그라 졌던 납랄세의 자부심이 되살아났다. "예! 저는 을온족의 전사입니다!" "그래?" 사내는 나직이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배어 있는 웃음이었 다. "어린 나이인데 대단하군."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연 우막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하 늘을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전사라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걸어야지?" 납랄세는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는... 너는 나보다 낫구나." 탄식 같은 목소리... "예?" 무슨 소리일까? 납랄세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사내를 볼 수 없었다. 사내가 등장한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눈길을 뗀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사내는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퍽! 신이 납랄세에게 부여한 시간은 가벼운 격타음과 함께 영원히 정지 되었다. 단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잔인한 손이었다. 아직 소년 티도 벗지 못한 어린아이의 목뼈를 부 러뜨린 살인자의 손이었다. 살려 둘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사는 가족과 함께 죽어야만 했다. 목숨을 버려야 할 때 목 숨을 버리지 못한 전사는 이미 전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단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단탈은 고개를 들었다. 빗물 너머로 작은 밀림이, 그리고 그 너머로 을온족의 마을이 보였다. 삼 년 전 북쪽 골짜기 한구석에서 옹기종기 살아가던 아합족과는 비 교할 수조차 없이 큰 마을이었다. 단탈의 눈빛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2 -놈들을 내가, 이 가리아가 죽이도록 해주게. 가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죽었다. 단탈은 그 말을 지켜야만 했다. * * * 촤악! 대감도(大 刀)를 휘두르며 단탈에게 달려들던 사내는 대감도와 함 께 두 토막이 되어 버렸다. 사람과 병기를 한 순간에 잘라 버린 것은 도배(刀背)가 둥그스름한 한 자루의 칼이었다. 그 칼은 음산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거무튀튀 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은 쓰러졌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보라는 단탈의 전면 에 자욱이 남아 있었다. 파팍! 그 피보라를 꿰뚫고 두 자루의 병기가 쏘아져 들어왔다. 시퍼런 예 기를 뿌리는 장창과 쇠스랑같이 구부러진 삼지차(三枝叉)였다. 대개 이런 종류의 장병(長兵)은 검이나 도에게 있어서 상극(相剋)이 라 할 수 있었다. 두 배가 넘는 길이 차란, 실전에서 쉽사리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탈은 단병(短兵)으로 장병을 제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거리를 자신에게 이롭게 조절하는 것이었다. 단탈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자루의 병기가 단탈의 몸을 산적처럼 꿰려는 순간,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했다. "엇?" "억?" 장창과 삼지차를 찔러 오던 두 사내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그들에게 등을 돌린 자세가 되어 버린 단탈은, 반 바퀴 몸을 돌리는 그 가벼운 동작만으로 이미 두 자루 병기를 봉쇄해 버린 것이 다. 장창은 단탈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삼지차는 단탈의 왼쪽 겨드랑이 에 끼워진 채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탈의 몸이 새처럼 훌쩍 솟구쳤다. 씻-! 단탈이 거꾸로 재주를 넘으며 두 사내의 머리 위를 넘어갈 때, 두 사내는 휘파람 소리 같은 파공성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뼈까지 잘라진 그들의 목은 앞쪽 거죽에만 의지한 채로 서서 히 앞으로 꺾여졌다. 두 명의 목을 동시에 베어 버린 단탈은 땅으로 내려서는 순간에도 결코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엉거주춤 움츠린 자세 그대로 땅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으며 오 른쪽 다리를 크게 휘둘렀다. 그의 오른쪽 다리가 그리는 원 안에는 또 다른 을온족 전사의 다리가 들어 있었다. 빠직! "아악!" 종아리뼈가 으스러진 을온족 전사는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의 가슴으로 한 줄기 묵선(墨線)이 날아들었다. 단탈은 왼팔로 땅을 짚으며 튕기듯 몸을 세웠다. 반 시진이 넘는 시 간을 악귀처럼 싸운 그였지만, 그의 몸놀림은 여전히 경쾌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단탈은 앞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을온족 전사들이 십여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병기를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단탈의 뒤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었다. 단탈은 뒤를 돌아보았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시신들이 빗물 속에서 뒹굴고 있었 다. 한 사람에게 한 칼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벤 자의 생명 이 끊어졌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없었다. 거죽만 살짝 베어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단탈이 쥐고 있는 칼, '가리아'였기 때문이다. * * * 약흠의 제자가 된 단탈이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가리아의 시체에 칼을 대는 끔찍한 일이었다. 단탈은 가리아의 오른쪽 다리를 잘라 살을 발라 냈다. 가리아의 넓적다리뼈는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옹 골찼다. 단탈은 그 점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뼈가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가리아는 많은 수의 적들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뼈가 아무리 단단하다 한들 무쇠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단단 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단탈은 가리아의 뼈에 독기를 불어넣기로 결심했다. 뼈의 주성분은 석회질이었다. 섣불리 독액을 부었다가는 흔적도 없 이 녹아 버릴지도 몰랐다. 뼈가 독에 대한 내성(耐性)을 지니도록 만 드는 연구가 필요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은 독술의 대가인 약흠이었다. 약흠은 면역에 대한 보편적인 방식을 이용했다. 뼈에 독액을 바르 되, 효력이 미약한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로 효력이 강한 것으로 옮아 갔던 것이다. 독균(毒菌)의 즙에서부터 시작해서 독담의 극독까지, 가리아의 뼈가 검은 윤기가 번들거리는 희대의 마병(魔兵)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꼬 박 일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죽어 버리는 무서운 독물(毒物)... 단탈은 그것을 숫돌에 갈아 날을 세웠다. 독기를 품어 어떠한 강철 보다도 단단해진 뼈 위에 날을 세우는 것은 어렵고도 지루한 일이었지 만, 단탈은 묵묵히 그것을 해냈다. 마도(魔刀) '가리아'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 * *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7 장 - 1 묘왕동주 1 권 "꺼억!" 단탈은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는 칠척거한을 힐끔 바 라보았다. 이미 베어 버린 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이례 적인 일이었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그자가 걸고 있던 목걸이였다. 아마도 그자는 제법 이름난 용사였을 것이다. 목걸이에 달려 있는 여러 종류의 이빨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늑대의 이빨도 있었 고, 곰의 이빨도 있었으며, 표범의 이빨도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얻어 냈다면, 그자는 용사의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을 것이 다. 하지만 마도 가리아에 의해 아랫배가 갈라진 이상, 이제는 아무도 그의 자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단탈은 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우측으로 쏘아져 갔다. 자자우(刺刺于)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내를 바라보 고 있었다. 한때는 부족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용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 지만, 세월의 발톱은 그 또한 예외없이 할퀴고 지나가, 이제는 얼굴 가득 검버섯이 뒤덮인 늙은이로 전락해 버린 그였다. 그런 자자우를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낮잠에서 깨운 것은, 집 밖 에서 울리는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였다. 자자우는 벽에 걸어 둔 박도(朴刀)를 움켜쥐고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왔다. 문밖에는 끔찍한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지옥도는 어처구니없게도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 지고 있었다. 바로 그자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쓴 악귀(惡鬼) 같은 그자가, 지금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손에 박도가 들려진 것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자자우는 눈을 꽉 감 아 버렸다. 늙은이가 쥐고 있던 박도는 늙은 몸이 길게 갈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늙은이의 몸에서 뿜어지는 핏물은 젊은이의 그것과는 비 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데 그 핏물을 뒤집어쓰는 순간,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등판을 후 벼 파왔다. "으음!" 단탈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고통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연이어 날아드는 매서 운 살기들 때문이었다. 단탈은 가리아를 움켜쥔 채 앞으로 몸을 굴렸다. 파파팍-!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에 넉 대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단탈은 몸을 바로 세움과 동시에 왼손을 등뒤로 돌려 꽂혀 있는 화 살을 잡아 뽑았다. 독수(毒水)에 단련된 그의 살갗을 뚫을 정도라면 예사 힘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힘으로도 팽팽히 당겨진 밧줄처럼 탄력 있게 꼬인 근육마저 헤집을 수는 없었다.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독의 유무 따위는 애당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천하에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독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단탈은 왼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빠직. 화살은 수수깡처럼 힘없이 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구부러졌던 단탈 의 두 다리가 힘차게 펼쳐졌다. * * *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이 말라붙은 몸뚱이가 되어서도, 약흠은 웃으 면서 말했다. -이제 너는 독인(毒人)이 되었다. 단탈은 독인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생물들은 근처에만 와도 쓰러지는 도화장독 안을, 마치 아침 안개 속을 거닐 듯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었다. 집채만한 맹수들 도 견디지 못하는, 심지어 같은 독물의 족속들까지도 견디지 못하는 홍린사(紅鱗蛇)의 독조차 그를 어쩌지 못했다. 단탈은 천하의 모든 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리고 약흠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네가 지닌 힘을 쓸 수만 있다면,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마도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리 라. 하지만 단탈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운명이 그에게 부여해 준 것이라면, 언젠가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지붕 위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의 궁수들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표범 가죽을 쓴 사내는 분명히 화살에 맞았다. 상처가 깊든, 얕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쏜 화살의 살촉에는 독이 발 라져 있었고, 그 독은 곰이라도 한 방에 쓰러뜨릴 정도로 지독한 것이 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쓰러지기는커녕 자신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 려오는 것이 아닌가! "쏴, 쏴랏!" 그들 중 먼저 정신을 차린 살하(薩賀)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머지 네 명은 그제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쉬쉬쉿-! 다섯 대의 화살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발사되었다. 그들은 모두 을온족에서 손꼽히는 궁수(弓手)들이어서, 다섯 대의 화살은 한치의 어김도 없이 목표물을 향해 쏘아져 갔다. 몸통을 노리고 쏘아진 두 대의 화살은 사내가 휘두른 검은 칼에 의 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체를 노리고 쏘아진 두 대의 화살은 사내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 는 순간,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사내가 몸을 솟구친 덕분에, 몸통을 노리고 쏘아진 마지막 화살은 사내의 왼쪽 허벅지에 정확하게 박혔다. 아니, 박힌 것처럼 보 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화살은 궤도를 바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 그 화살을 쏜 당사자인 살하의 입에서 탄성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기이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표범 가죽을 쓴 사내는 허공에서 오른발을 가볍게 휘저어 발바닥으 로 화살의 옆면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직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의 측면을 발로 찬다는 것은 살하로서는 상 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너무나 쉽게, 너무나 자 연스럽게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살하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못하고 있을 때, 사내는 어느새 궁 수들이 서 있는 지붕 위로 올라서 있었다. 단 한번의 도약으로 십여 걸음을 날아와 사람 키의 두 배가 되는 곳에 올라선 것이다. 스윽- 표범의 대가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표범 이빨 아래의 그늘진 곳에 자리한 섬뜩한 한광(寒光)이 궁수들의 얼굴 하나하나의 위로 스쳐 지 나갔다. 각진 턱선과 두툼한 입술은 사람의 것임이 분명할진대, 차갑 게 떠오른 미소는 마치 먹음직한 사냥감을 눈앞에 둔 표범의 그것같이 느껴졌다. "으으..." 놈과는 맞설 수 없다!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궁수들은 지붕이 끝나는 곳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거무튀튀한 빛깔이 감도는 괴상한 칼은 아무도 용서하려 하 지 않았다. 치이익-! 쏟아지는 빗물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튕겨져 사방으 로 비산했다. 한 줄기 검은 폭풍이 지붕 위에 휘몰아쳤다. 을온족의 족장 차가하(且加河)는 뜨겁게 달궈진 철판 위에라도 서 있는 것처럼 비대한 넓적다리 뒷살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꿀 같은 애첩의 사타구니 아래에서 이제 막 기어나온 그에게, 지금 눈앞에 펼 쳐진 광경은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잔인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시체의 산이요, 피의 강이었다. 방금 받은 보고에 의하면 백 명도 넘는 전사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퍼붓는 비만 제외한다면 여느 날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날이었 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차가하는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경악 때문에 부릅떠진 눈으 로 지붕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늘 을온족에서 벌어진 모든 비일상적인 사건을 만들어 낸 주범임에 분명한 한 사내가 빠르고 날렵한 몸놀림으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끄아악!" 지붕 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을온족 궁수가 땅으로 떨어졌다. 최후의 순간까지 몸을 비틀어 사내의 칼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까? 그의 몸에는 왼쪽 어깻죽지부터 명치까지, 그리고 명치에서 다시 왼 쪽 옆구리까지, 쐐기 모양으로 꺾어진 기이한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쐐기 모양의 상처는 사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퍽 소 리와 함께 벌어져 버렸다. 벌어진 상처를 통해 심장이며 허파, 내장들이 줄줄이 달려나오는 광 경은 끔찍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던 차가하는 끔찍함에 앞서 기이함 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인체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비현실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잔인한 놈이군!" 등뒤에서 들려 온 나직한 중얼거림에 차가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뒤에는 어느새 다가왔는지 세 명의 한인(漢人)들이 서 있었다. 차가하의 동그란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저놈을, 저놈을 죽여 주시오!" 차가하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지붕 위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는 한어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을온족 중 하나였다. 평소 한인 을 대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묘어를 사용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워낙 다급했던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한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한인은 이남일녀(二男一女)였다. 그 중에서 타는 듯한 붉은 옷의 여 인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매(小妹)가 저 야만인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오라버니들께서는 보고만 계셔요." 쌍비연자(雙匕燕子) 교옥(喬玉)은 다른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땅을 박찼다. 허공에서 한바퀴 재주를 넘으며 곧장 지붕 위로 날아가는 그녀의 신법은 제비[燕子]라는 별호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것이었다. 파파-! 두 자루의 비수는 어느것이 먼저였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재빠 르게 교차되며 단탈의 머리 위로 퍼부어졌다. 단탈은 허리를 뒤로 눕히며 가리아를 휘둘러 비수가 만든 장막 한가 운데를 베어 갔다. 까깡-! "핫?"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위로 튕겨져 나갔다. 가리아에 담긴 막강한 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인이 쥐고 있는 두 자루의 비수는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 다. 바위조차 쪼개 버리는 가리아의 강함을 견뎌 냈으니 말이다. 여인은 허공에서 재차 몸을 뒤집으며 단탈의 앞에 내려섰다. 지붕 위로 뾰족 튀어나온 나무 기둥 위에 한쪽 발만을 얹은 채 꼿꼿이 서 있는 그녀는 한 폭의 그림처럼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눈자위 밑에 얼룩진 표독스러운 살기만 제외한다면 예쁘다고 할 수 있 는 얼굴이었다. 단탈은 가리아를 천천히 내렸다. 비록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 는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는 아니었다. 단탈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것은 나와 을온족 사이의 문제이다. 을온족이 아닌 자는 빠져 라." 그의 입에서 나온 한어가 너무 유창했기 때문인지, 여인의 눈이 커 다랗게 뜨여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금방 본래의 살기를 되찾아 갔 다. "을온족의 적은 곧 나의 적! 더 이상은 문답무용(問答無用)!" 여인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빠른 경신술과 진퇴가 자유로 운 비수를 사용해 승부를 낼 생각인 것 같았다. "적이란 말이지?" 나직이 뇌까리는 단탈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적이라면 죽여야 할 너무나 분명한 이유였고, 이유가 생긴 이상 상 대가 여인이라 해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단탈은 오른손 손목을 천천히 돌렸다. 무릎 언저리를 맴돌던 가리아 의 끝이 손목의 회전에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가리아는 자전(自轉)과 동시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단탈의 머리 위 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커다란 원 안으로 칙칙한 빛깔의 도기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 * * 약흠이 지닌 가장 무서운 무공은, 강호에 잘 알려진 것처럼 독공이 었다. 하지만 단탈은 약흠의 장기인 독공을 모두 터득할 수 없었다. 진기의 운용에 서투른 그로서는 체내에 축적된 막강한 독공력을 외부 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약흠은 한 가지 도법을 가르쳐 주었다. 장한도법(長恨 刀法)이라는 이름의,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은 무서운 도법이었다. 장한도법의 원형(原形)은 어떤 검법이라고 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 를 할 때마다 약흠의 두 눈에서는 원한에 맺힌 광망이 서리서리 뿜어 나왔다. 아마도 장한도법에 얽힌 비화(秘話)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탈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검법은 음양(陰陽)과 강유(剛柔)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광명정대 한 절기라고 했다. 하지만 장한도법은 오직 살기와 패도만으로 점철된 도법이었다. 약흠은 묘강의 독담 속에서 십 년 간 처절한 한을 곱씹으 며, 밝음의 극단을 어둠의 극단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단탈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삼 년 동안 수련한 뒤 그가 얻을 힘 이었다. 만약 그가 그토록 애써서 수련했는데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힘을 얻을 수 없다면? 단탈은 그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 다면 단탈은 삼 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약흠을 가장 먼저 죽여 버렸 을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단탈은 장한도법을 익힐 수 있었다. 비록 다섯 수법 중 마 지막 두 수법은 아직까지도 자신있게 사용할 수 없었지만, 앞의 세 수 법의 위력은 단탈로 하여금 삼 년의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약흠은 이렇게 말했다. 천하에서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익힐 수 없는 도법이라고... 장한도법이 하나의 무공으로서 햇빛을 볼 수 있을 가능성을 일 할도 기대하지 않았던 약흠이기에,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단탈이 지니고 있는 자질을 믿고 있던 약흠이기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7 장 - 2 묘왕동주 1 권 일체의 자비심을 배제한 철저한 살인 도법인 장한도법은 이러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안은 채,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 * * 교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서 몸을 거꾸로 뒤집어 사내의 뇌문(腦門)을 노려 간 자신의 공격이, 어느 한 순간 거대한 철벽에 막 혀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끼이익-! 상대의 칼과는 부딪치지도 않았건만, 수중의 두 자루 비수는 날카로 운 비명을 지르며 불똥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비수를 쥔 두 팔이 따로따로 비틀 어지는 것을 느꼈다. 왼팔은 위쪽으로, 오른팔은 아래쪽으로. 그것들 은 제각기 검은 칼이 만들어 낸 거대한 원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교연의 눈이 부릅떠졌다. 허망하게 벌어진 두 팔 사이를 악마의 이 빨 같은 검은 칼이 곧장 베어 왔기 때문이다. "꺄아악-!" 격중당하기도 전에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아마도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리라. 사내의 수법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 휘두른 한 칼로 교연 의 앞가슴 절반을 베어 버린 것이 분명했건만, 연이어 허공을 가른 두 번의 칼질로 이미 생명이 끊어진 그녀의 좌우 양팔마저 무참히 잘라 버린 것이다. "안 돼!" "교매(喬妹)!" 회하삼살(淮河三煞) 중 첫째 윤철양(尹鐵陽)과 둘째 궁낙(宮洛)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이 지붕 위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 황이었다. 세 토막이 되어 버린 교연의 시신은 도기에 휘말려 붉은 핏물을 꼬 리처럼 매단 채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이 새끼! 죽인다!" 덩치가 큰 만큼 성격 또한 열화 같은 혈당랑(血螳螂) 궁낙의 눈에 시뻘건 혈광이 차 올랐다. 위로 한껏 들려졌던 그의 양손이 힘차게 떨 어졌다. 촤아악-! 핏물과 빗물과 공간을 동시에 두 동강으로 베어 가는 병기는, 궁낙 의 독문병기로 사마귀의 앞발처럼 생긴 길쭉한 대겸(大鎌)이었다. "하아앗!" 청수한 인상을 지닌 장혼검(葬魂劍) 윤철양의 얼굴에도 평소와는 달 리 살기가 충만해 있었다. 허공의 어느 부분에 이른 그의 몸이 수평 방향으로 쭉 이동했다. 휘리릿-! 넉 자가 넘는 낭창낭창한 연검(軟劍)은, 반경 반 장의 공간을 시퍼 런 검영(劍影)으로 꽉 채우며 밀려나갔다. 콰앙! 몇 개의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허술한 지붕이 대겸과 연검, 두 자루의 병기가 만들어 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났다. 마치 포탄에라도 맞은 듯, 잘라진 나무 조각과 잎사귀들이 하늘을 향해 날 아올랐다. "...?" "...?"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의혹의 빛이 어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지만, 그 중에는 그들이 기대한 광경이 빠져 있었 다. 친누이처럼 지냈던 교연을 잔인하게 죽인 자, 회를 떠도 시원찮을 그 오랑캐 녀석이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광경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우우웅-! 의혹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머리 위를 짓눌러 오는 기분 나쁜 파공 성이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위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검은 박쥐... 그들은 동시에 그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그것이 박쥐가 아니라 그들이 찾던 사내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박쥐 라고 생각했던 까닭은 사내의 머리 위로 검은 날개처럼 쫙 펼쳐진 표 범 가죽 때문이었다. 사내의 손이 움직였다. 거대한 둥근 원이 그들의 머리 위에 만들어졌다. 네 개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 * * 단탈의 몸을 노리고 짓쳐 들어온 두 자루의 병기는 일견 동시에 들 이닥친 것 같지만, 그들 사이에는 눈 한번 깜짝거릴 정도의 시차가 있 었다. 우선 단탈은 지붕을 딛고 있던 두 다리를 짧고 빠르게 후방으로 교 차함으로써,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린 대겸의 공격권으로부터 벗어 났다. 그리고 교차된 두 다리가 쭉 펴지는 순간, 단탈의 몸은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정면으로부터 찔러 들어온 독사의 대가리 같은 연검의 공격 을 피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린 그의 동작은 두 사람의 눈을 속일 정도로 신속한 것이었다. 대겸에 의해 박살난 지붕의 파편들이 그것을 더욱 손쉽게 해줬는지도 몰랐다. 허공으로 떠오른 나무 조각 하나를 두 발바닥으로 번갈아 찍으며 몸 을 거꾸로 뒤집는 것 따위는 생각이 필요없는 행동이었다. 필요한 상 황에서 필요한 만큼 움직여 주는 것이 그의 발이요, 몸이었으니까. 그의 종적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한족들의 모습이 단탈의 머리로부터 이 장쯤 아래에 있었다. 가리아가 다시 한번 원을 그렸다. 시커멓게 일어나는 도기의 원 속으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네 개의 눈동자가 갇혔다.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경악과 공포, 그리고 절 망... 하지만 원 안에 갇힌 이상, 모든 것은 단탈의 뜻대로였다. 취잇-! "으아악!" 가리아가 두 사람의 얼굴 한가운데를 횡으로 길게 베고 지나갈 때, 두 사람의 입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으로부터 반 뼘 아래에 독기에 녹아 붙은 시커먼 고랑이 파여졌다. 두개골이 콧날을 중심으로 횡으로 쩍 갈라지며, 뭉개진 살점과 부서진 뼈 조각이 칼의 궤적에 따라 튀어나갔다. 하지만 가리아의 살기는 그칠 줄 몰랐다. 씻! 씻! 두 번째 칼이 왼쪽의 호리호리한 자의 가슴을 길게 갈라 버리고, 세 번째 칼이 오른쪽의 덩치 큰 자의 어깻죽지를 몸통으로부터 분리했을 때에는, 아무런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생명이 끊어진 자는 비명을 지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도기로 만들어진 공간 안에서 순식간에 세 번을 베어 버리는 잔인한 수법. 이것이 장한도법의 첫 번째 초식인 '흑월삼륙(黑月三戮)'이었다. * * * 회하(淮河) 일대에서 십여 년 동안이나 저승 사자와 같은 공포의 대 상으로 군림했던 회하삼살은, 을온족의 오랜 맹우(盟友)인 중원의 어 느 문파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본래 을온족과 중원의 맹우 사이에는 정기적인 물물교환이 있었다. 을온족은 그들에게 묘강에서만 찾을 수 있는 많은 약초와 독물들을 제 공했고, 그들은 쇠로 만든 무기를 을온족에게 보내 주었던 것이다. 당금 중원을 통치하는 명나라 조정에서는 묘족들에게 쇠붙이를 제공 하는 것을 국법으로 엄히 금하고 있었다. 이러한 '금철(禁鐵)의 법'은 쇠로 만든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쇠그릇이나 무쇠솥과 같은 품목에까지 도 미치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관의 눈을 속이고 병장기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실력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보름 전, 마차 한 대 분의 병장 기를 가지고 을온족에 도착한 회하삼살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을온족의 족장 차가하가 그들 회하삼살의 능력 을 신뢰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이나 믿었던 한인들의 혈육이 허공으로부터 후드득 떨어질 때 까지만 해도, 차가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그의 앞에 내려섰을 때에 는 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식의, 자신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은 생명을 보전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차가하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그런데 육십 년이 넘게 묵은 비대한 살덩이가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살고 싶은 마음은 상체가 더 절실했을까? 하체가 채 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체만이 젊은이처럼 빠른 속도로 돌아간 것을 보면 그런 생 각도 할 법했다. 그 덕분에 차가하는 삐끗한 허리를 움켜쥐며 흙탕물 속에 나뒹굴어 야만 했다. 표범 가죽의 사내가 차가하를 향해 걸어왔다. "으으..." 차가하는 살집 좋은 엉덩이를 움직여 조금이라도 사내로부터 멀어지 기 위해 버둥거렸다. 사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표범 이빨 아래 차가운 보석처럼 자리 잡은 두 눈이 차가하의 얼굴, 그 중에서도 두 귀에 날아와 꽂혔다. 차가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귀를 만졌다. 짤그락! 작은 조약돌이 개울물에 휩쓸려 굴러가는 듯한 영롱한 소리가 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을 따라 울려 나왔다. 차가하는 그제야 자신의 두 귓불에는 화려한 귀걸이가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평범한 부족원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거창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사치스럽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귀 걸이는 을온족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사들의 왕'을 상징하는 신물이 었기 때문이다. "을온족의 왕인가?" 사내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그렇소!" 혼백의 어느 부분이 이 지독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지는, 입을 벌려 말하는 차가하로서도 궁금한 일이었다. "나는 아합족의 타루가, 삼 년 전의 빚을 갚으러 왔다." 아합족의 타루가? 삼 년 전의 빚? 차가하는 사내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에게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하늘을 향해 천천히 치켜 올려지는 저 소름 끼치는 검은 칼이 그것 을 대변하고 있었다. 쉬익! 검은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차가하의 둥근 머리통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 그를 지배하 던 공포감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의 몸통을 지배 하고 있었나 보다. 잘린 목으로부터 검붉은 핏물을 뿜어대던 그의 몸 통이 땅위로 눕혀진 것은, 한참 동안을 경련에 떤 뒤였으니까 말이다. * * * 을온족의 왕에게 통보를 한 일은 잘한 일이었다. 비록 혼자서 치른 일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부족 사이의 전쟁이었고, 전쟁에서 있어서 상대편 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필요했다. 단탈은 칼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빗물 속에 누워 있는 무수 한 시신들이 그의 망막을 아프게 찔러 왔다. 핏물이 땅으로 스며들 듯, 묘강 동부 지역의 패자(覇者)였던 을온족 은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앞에는 낯익은 노인 하나가 눈을 부릅뜬 채 서 있었 다. 단탈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3 호륵마는 머리가 좋고 철저했으며 강했다. 최소한 묘강에서는, '오 로(烏老) 호륵마'는 공포를 주는 존재이지 공포를 느끼는 존재가 아니 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대용사(五大勇士)는 물론이거니와 중원에서 온 세 고수가 돼지 새끼처럼 도륙당하고, 족장 차가하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을 보았을 때, 호륵마는 자신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 다. 사내 하나. 상대는 사내 하나뿐이었다. 호륵마는 부릅뜬 눈으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사신(死神)처럼 서 있 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뒤집어쓴 검은 표범의 가죽과 전신을 휘감고 있는 새하얀 흉터들...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리고 그러한 익숙함은 잠들어 있던 호륵마의 뇌리 저편의 기억을 조금씩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삼 년 전의 어느 날... 호륵마는 오란산의 주인인 검은 표범, 흑왕을 사냥한 사냥꾼을 만났 다. 그때 사냥꾼은 호륵마와 중원에서 온 을온족의 손님인 조추림을 속 이고, 그들이 쫓던 사람을 빼돌렸다. 그 보복은 사냥꾼의 부족인 아합족으로 돌아갔다. 물론 호륵마의 입 장에서 본다면 썩 마음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을온족과 아합족 사이에 는 아무런 원한이나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기억할 만한 점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일이었 다. 그 사냥꾼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합족에 남겨 둔 열세 명의 소식이 끊어졌던 것이다. 보름 뒤, 다시 그 마을을 찾아갔을 때, 마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 지 않았다. 불어난 계곡 물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호륵마의 마음 한구석에는 꺼림칙한 불안감이 독버섯같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그 사냥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동족들이 흘린 피 를 밟고 차갑게 웃으며... * * * "날 알아보겠는가?" 검은 표범의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호륵마는 자욱한 공포 속에서도 삼 년 전에 들었던 사내의 이름을 기 억해 낼 수 있었다. "단, 단탈?" 사내는 고개를 끄떡였다. "기억하는군. 그러면 그때 내게 한 말도 기억하나?" "...?" "아마 이렇게 말했지?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동쪽 평원 을온족 의 호 노인을 찾아오라고..." 사내는 씨익 웃었다. 머릿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오싹한 웃음이었 다. "당신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왔지." 사내는 들고 있던 칙칙한 빛깔의 병기를 치켜 들었다. 그의 몸으로 부터 소용돌이 같은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호륵마는 사내의 기세에 밀려 주춤주춤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랑하던 흑오장법(黑烏掌法)이나 척혈조공(剔血爪功) 따위는 일초 반식조차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었다. "묻는 말에 대답해 준다면, 네 목숨 하나로 을온족과의 모든 것을 마무리 짓겠어. 하지만...!" 어느 순간, 사내의 눈은 얼음 조각같이 비정한 투명함을 띠기 시작 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씨를 말려 주지. 너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 야." 사내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졌다. 목소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살기는 점점 증폭되었다. 호륵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자라면 능히 그렇게 할 것이다. 여자도, 아이들까지도... 호륵마의 주름진 턱살이 실룩거렸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 나뿐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뭔가?"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8 장 형산(衡山) 묘왕동주 1 권 第八章 형산(衡山) 1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엽강(葉康)의 사정은 그리 좋다고 볼 수 없었 다. * * * 엽강에게는 뒷마당에 파묻어 둔 술보다도 오래 묵은 여섯 명의 친구 들이 있었다. 엽강을 포함한 그들 일곱에게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마누라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호주가(好酒家)들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술만큼이나 동정호(洞庭湖)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갓 삼십을 넘긴 악양현령(岳陽縣領)의 서자(庶子)도 있 었고, 환갑을 바라보는 신선술(神仙術)에 빠진 도사도 있었다. 출신과 나이는 모두 달랐지만 호반(湖畔)을 바라보며 키워 온 그들 의 친교는, 모든 장벽을 초월할 정도로 깊고 그윽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형제들보다 더 우애 있는 이들 일곱 사내들을 일 러 호상칠우(湖上七友)라고 불렀다. 그런데 칠월이 지나가는 어느 날부터, 그들은 더 이상 '칠우(七友)' 라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 일곱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던 상음(湘陰)의 유생(儒生) 공유단(孔裕端)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 다. 이제는 육우(六友)가 된 호상칠우는 슬픔에 빠졌다. 공유단은 그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석 잔의 술이 들 어가면 한 편의 시가 흘러나올 만큼 운치를 아는 시객(詩客)이었고, 술값이 떨어지면 즉석에서 노래를 팔아 술값을 모을 수 있는 가객(歌 客)이었으며, 또 유생의 신분으로 노래를 파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호걸이었다. 만약 공유단의 사인(死因)이 괴질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적 인 것이었다면, 이들 육우의 슬픔은 단지 슬픔만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공유단은 살해된 것이었고, 이들의 슬픔은 자연 분노로 바뀌 었다. 분노의 대상은 공유단의 딸을 탐하다가 일이 뜻대로 안 풀리자 그의 가족을 몽땅 몰살시킨 마영달(馬榮達)이라는 더러운 놈과, 그가 수괴 중 하나로 있는 동정호의 수적채(水賊寨)인 군산삼왕채(群山三王寨)로 돌아갔다. 공유단의 무덤에 술을 뿌리며 육우는 다짐했다. -이 술이 땅으로 스며들기 전, 원수의 심장과 간으로 친구의 원혼 (寃魂)을 달래리라!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이마에 흰 두건을 동여맨 육우는 악양 현령으로부터 빌린 관병 백 명과 함께 마영달의 본거지인 인왕채(人王 寨)로 쳐들어갔다. 피 튀기는 전투는 팔월의 첫 아침과 함께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육우와 관병들은 파죽(破竹)의 기세로 수적들을 무찌를 수 있었다. 수적의 숫자는 이백이 넘었다. 그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수에 지 리(地利)도 얻지 못했지만, 그 정도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한 사람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엽강. 팔방검객(八方劍客)이라는 이름으로 호남(湖南)을 떵떵거리는 엽강 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팔방검법은 일검으로 여덟 방위를 동시에 점한다는 변화막측한 절기였다. 그의 검이 움직이는 곳에는 피 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고, 그의 걸음이 지나는 곳에는 수적들의 시 신이 동산처럼 쌓였다. 하지만 군산삼왕채의 다른 두 두령이 원군을 이끌고 인왕채에 당도 하는 순간, 모든 전세는 역전되었다. 다섯 배가 넘는 수적(數的) 차이 를 극복하는 것은 엽강과 같은 절정검객의 힘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군산삼왕채의 대두목인 동정천왕(洞庭龍王) 교해(喬海)의 무 공은, 엽강과 비교해도 그다지 손색이 없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교해 와 두 명의 소두령이 달려들자 피로에 지친 엽강의 팔다리는 그 힘을 점차로 잃어 갔고, 팔방을 떨친다는 그의 검도 그 현란함을 점차로 잃 어 갔다. 시간이 갈수록 토벌군의 수는 줄어 갔다. 태양이 중천을 넘어갈 즈음, 급기야 엽강을 포함한 십여 명을 제외 한 모든 토벌군이 목숨을 잃은 가슴 아픈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엽강은 검을 땅바닥에 꽂고 하늘을 향해 탄식했다. 그가 엽강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 그의 행색은 실로 기괴했다. 산봉우리처럼 가운데가 불룩 솟구친 죽립(竹笠). 소매가 넓은 치렁치렁한 옷. 표사( 士)들이 신는 것같이 생긴 각반에 보기 힘든 방식으로 꼬아 만든 집신... 그런데 그의 행동은 더욱 기괴했다. 죽립 괴인은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등뒤에 메 고 있던 검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엽강 등을 포위하고 있던 수적들을 베어 가기 시작했다. 퍼퍽! 빡! 검으로 베는데 엉뚱하게도 몽둥이로 패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엽강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괴인의 검은 중원에서 말하는 검과는 다르게 생긴 것이었다. 폭이 좁은 점은 검과 같았지만, 도(刀) 처럼 한쪽에만 날이 서 있었다. 괴인이 그것을 뒤집어 잡고 날이 없는 부분으로만 후려치니, 약간 폭이 좁기는 해도 몽둥이와 다를 바가 없 었던 것이다. 날을 뒤로 감춰 휘두르는 것은, 정상적으로 휘두르는 것에 비해 공 기의 저항을 많이 받는다. 즉, 검의 커다란 묘용(妙用) 중 하나인 '쾌 (快)'의 부분에서 큰 약점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괴인의 검은 그러한 약점을 극복할 정도로 훌륭했다. 삽시에 이십여 명의 수적들이 깨진 머리와 부러진 팔다리를 부둥켜 안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괴인의 검법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세 명의 수적 두령들과의 대결에서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화창(梨花槍). 반월도(半月刀). 분수아미자(分水蛾眉刺). 장(長)·중(中)·단(短)의 세 가지 기병(奇兵)을 사용해 구성한 삼 재진(三才陣)은, 그들 세 두령의 무공이 그들의 악명만큼이나 쓸 만하 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들에 둘러싸인 괴인의 검법은 삼재진 따위로 상대할 수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좌활승천(左滑昇天)! 괴인은 빠른 걸음으로 왼발을 앞으로 미끄러뜨렸다. 검이 천공을 향 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빠각! 이화창이 두 토막으로 갈라졌다. 한 줄기 혈선이 교해의 턱 중앙에 서 미간까지 일직선으로 치달려 갔다. 금계독립(金鷄獨立)! 괴인은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을 펄럭이며 왼발을 축으로 반 바퀴 몸 을 돌렸다. 검이 그의 어깨 위를 가볍게 맴돌며 아래로 떨어졌다. 쉬익! 내밀어진 반월도가 부르르 떨렸다. 포옥(包玉)이 쩍 벌어진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우보안자(右步雁子)! 괴인은 여섯 자의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무릎 어림까지 떨어져 있던 검이 전방으로 힘차게 내밀어졌다. 뎅그렁! 분수아미자가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영달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하얗게 눈을 뒤집었다. 동정호를 주름잡던 세 두목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에는 세 호흡 외에 는 필요하지 않았다. 괴인은 천천히 검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두령을 잃은 나머지 수적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죽립 사이로 괴 인의 서늘한 눈빛을 대하자 그들은 오줌을 찔끔거릴 정도로 공포에 떨 었다. "으아악!" 가장 뒤쪽에 있던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악!" "사람 살려!" 괴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백여 명의 수적들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일 각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다친 팔뚝에서 검붉은 핏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엽강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깊숙이 허리를 굽혀 괴인의 구명지은(救命之恩)에 사 례했다. "대협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괴인은 쓰고 있던 죽립을 천천히 벗었다. 정수리 한가운데 틀어 올 린 뾰족한 상투를 제외한다면, 별로 특이한 점을 찾기 힘든 평범한 인 상의 사내였다. 이십대 후반? 아니면 삼십대 초반? 초생달처럼 둥근 눈썹과 커다란 귓불이 느긋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괴인은 엽강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땅에 닿을 정도로 굽어지는 그 의 허리는 엽강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어 괴인의 단정한 입술이 벌어졌을 때, 그의 당혹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안녕하십니까!" 이 무슨 정중하고도 엉뚱한 인사란 말인가? 괴인은 계속 말했다. "소생의 이름은 박한(朴翰)이라고 합니다. 소생은 해동(海東) 출신 입니다. 그리고 소생은 한어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한어로 '한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박한이라는 이상한 이 름의 사내... 하지만 그가 등에 메고 있던 보퉁이로부터 몇 가지 물건을 꺼냈을 때, 엽강은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보퉁이로부터 나온 물건은 붓과 종이, 그리고 마개가 달린 큼직한 통이었다. 통 속에는 아마도 먹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지(紙), 필(筆), 묵(墨). 이들 세 가지 물건이 합쳐지면 한 가지 일이 가능해진다. 다름 아닌 필담(筆談)이다. 어쩌면 박한이라는 사내가 알고 있는 한어는 -`물론 간신히 암기해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앞선 두 마디가 전부일지도 몰랐다. 박한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붓에다 먹물을 듬뿍 찍더니 종 이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엽강과 그 일행들도 박한의 주위에 쪼그리 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에서 몇 사람이 쪼그려 앉아 벌이는 필담은 희극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귀하들 중에서 팔방검객 엽(葉) 대인(大人)이라는 분이 계시는지 요?> 박한의 필체는 매우 단정하고 부드러웠다. 빠른 검과 보기 좋은 글씨는 여간해서는 어울리는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박한이라는 사내를 통해 그 두 가지가 구현되자, 사람들에게 는 마치 그가 글씨를 못 쓰는 것이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연하 게 받아들여졌다. 엽강은 붓을 받아 '팔방검객'이라는 글자에 권점(圈點)한 뒤, 자신 을 가리켰다. 박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명성처럼 헌앙한 기품이시군요. 소생은 해동 땅 송도(松都) 출신으 로 자(字)는 소우(素宇), 호는 벽계(碧溪)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인을 뵙게 되니, 이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엽강은 이런 종류의 격식을 차린 인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 이렇게 나오는 데야 별도리가 없었다. <소생은 선창(宣昌) 출신으로 자는 양휘(陽輝), 호는 팔방자(八方 子)라 합니다. 팔방검객이란 말은 강호의 친구들이 붙여 준 이름이지 요. 박 공(朴公)께서 소생들의 목숨을 이처럼 구해 주시니, 어떻게 감 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박한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개의치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붓을 잡았다. <소생은 엽 대인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불원천리(不遠千 里)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엽강이 붓을 잡았다. <무엇입니까? 은공(恩公)께서는 지체없이 하교(下敎)해 주시지요.> 박한은 '하교'라는 말을 가리키며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하느냐는 식의 표정을 지은 뒤,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혹시 고렴(高廉)이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엽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누구인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때 옆에서 필담을 지켜보던 육우 중 하나가 거들었다. "고렴이라면... 낙양성(洛陽城) 관림(關林)의 늑대, 흑면랑(黑面狼) 의 이름 아닌가?" "아하!" 엽강은 무릎을 쳤다. 흑면랑이면 낙양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검 객이었다. 폭급한 성격 때문에 사귀기를 꺼려 서로 왕래는 없었지만, 그의 검이 빠르고도 무섭다는 사실만은 엽강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 었던 것이다. 엽강은 붓을 쥐었다. <이름은 들어 보았습니다.> 박한은 밝은 웃음을 띠며 글을 썼다. <소생은 여섯 달 전 해동으로부터 건너와, 지금까지 열두 분께 가르 침을 받았습니다.> 가르침? 엽강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르침'이라는 말 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검객이었다. 검객이 사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받은 분이 고 대인인데, 그분이 엽 대인을 소 개해 주셨습니다.> 엽강의 얼굴이 갑자기 난처해졌다. 알고 보니 이자는 얼마 전 고렴과의 비무(比武)에서 승리했고, 고렴 이 자신의 이름을 불어, 자신과 싸우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닌가! 박한의 붓은 엽강의 난색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인께서 가르침을 주실 시간과 날짜를 정하신다면, 소생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박한은 엽강에게 붓을 내밀었다. 엽강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엽 모(葉某)는 박 공께 가르침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부족 함을 인정하겠습니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8 장 - 1 묘왕동주 1 권 만약 엽강이 다른 곳에서 박한을 만났다면, 박한이 제아무리 천하무 적의 검객이라 한들 이렇게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명예를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엽강은 지금 이 순간, 박한과 싸우겠다는 생각을 품을 수가 없었다. 우선 그는 박한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동정삼왕이 펼치는 삼재진을 절대로 꺾을 수 없 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한은 세 번 검을 휘둘러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 빠 르고 정확한 손속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설령 적수가 된다 한들, 엽강은 생명의 은인에게 검을 겨룰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명예 이전의 '도리(道理)'였다. 박한은 눈썹을 역 팔 자로 비튼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외길을 따라 가던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서 여러 갈래의 길이 나왔을 때 떠올리는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한 박한의 표정을 바라보며 엽강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느꼈 다. 이 사람 좋아 보이는 해동인은 무엇 때문에 이국 땅인 중원에 들어 와 이런 비무 행각을 벌이는 것일까? 단순한 명예 때문에? 아니면 자신이 수련한 해동의 검법에 대한 자 부심 때문에? 그런 것에 인생을 걸기에는 박한이 풍기는 분위기는 너무도 여유롭 고 또 유쾌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르침을 받을 만한 분을 소개해 주십시오.> 박한의 표정은 어느덧 절실해져 있었다. 엽강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명사(名師) 밑에서 검을 익힌 뛰어난 검객이었다. 하지만 명리 (名利)를 초개처럼 여기고 은일(隱逸)을 즐기는 성품 탓에, 강호의 일 에는 앞장서 나서기를 꺼려 했다. 자연히 그가 알고 있는 검객, 그것 도 박한과 같은 고수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줄 절정검객의 이름이 쉽게 떠오를 턱이 없었다. 그러나 궁즉통(窮卽通)이라고, 한참을 고민하니 떠오르는 과거의 장 면이 하나 있었다. -검이라고? 허허! 내가 장담하건대, 검이라면 천하에서 우리 셋째 형님 앞에서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네! 몇 년 전인가, 지금 형산파(衡山派)의 장로로 있는 동문사형(同門師 兄)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비록 취중이라고는 해도, 그 사형 은 결코 허언(虛言)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엽강은 더 이상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가리키는 셋째 형님 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성(姓)이 '석(石)'이었으니, 그 셋째 형님의 성 역시 '석'이라는 것 정도가 엽강이 알고 있는 전부 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산(衡山) 자개봉(紫蓋峰)에 자리잡고 있는 형산파의 석오랑(石五 浪)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의 삼형(三兄) 되시는 석삼야 (石三爺)라면 은공께서 원하시는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엽강의 글을 읽던 박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몇 번이나 머리를 숙여 사의(謝意)를 표한 뒤, 엽강이 쓴 종이를 정성스럽게 접 어 소매 속에 갈무리했다. 이제 필담은 끝났다. 박한은 만족한 표정으로 붓과 먹물통을 보퉁이 속에 챙겨 넣었다. 모든 정리를 마치자, 박한은 자리에서 일어서 엽강 등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감사드립니다!" 싹싹한 인사말이었다. 엽강은 비로소 박한이 아는 한어가 하나 더 있음을 깨달았다. 2 남악(南岳) 형산. 험준함이야 중원 북쪽의 대악(大嶽)들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풍 치의 단아함으로 많은 묵객(墨客)들에게 사랑받는 명산이었다. 장사(長沙)에서 형양(衡陽)까지 그 봉우리의 수만 해도 일흔둘. 그 중 축융(祝融)·자개(紫蓋)·천주(天柱)·연화(蓮花), 네 개의 우뚝한 봉우리를 가리켜 사주봉(四主峰)이라 칭했다. 동정호에서 상강(湘江)을 따라 내려가는 삼백 리 길... 박한은 형산파가 있다는 자개봉의 위치를 알아 내기 위해 몇 명에게 길을 물었는지 몰랐다. 그들 대부분의 반응은 하나같았다. 글을 힐끔 읽어 본 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뭐라고 쏘아대는 것... 박한은 비록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별로 달 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는 있었다. 그래도 박한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감사드립니다. 사실 그따위 인간들에게 감사는 무슨 얼어 죽을 감사였을까? 그래도 박한은 예국(禮國)이라 불리는 해동 출신이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고 국의 높은 명성을 먹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인사조차도 받는 둥 마는 둥 휘적휘적 떠나가 버렸다. '땅덩어리는 넓지만, 마음들은 참으로 좁아 터졌구나!' 박한은 대국(大國)에 어울리지 않는 인심의 각박함을 크게 탄식했 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면 자개봉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는 몇 번 의 수모를 더 겪어야만 했고, 마침내 자개봉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 다. 불행히도 그의 수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 * 이제는 더 들어갈 길이 없었다. 박한은 눈앞을 가로막은 빽빽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뿌드득 이를 갈 았다. '어디 또 만나기만 해봐라!' 지금 그가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는 대상은 자개봉 아래 선석평(仙席坪)에서 만난 깜찍하게 생긴 소녀였다. 나이는 열대여섯 살 정도나 됐을까? 양쪽으로 땋은 갈래 머리를 귀엽게 드리우고 있던 소녀는 얼굴만큼 이나 깜직한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다. -북쪽 능선을 타고 한 시진쯤 올라가시면 형산파가 나올 거예요. 박한은 무인답지 않게 사람을 잘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감 사드립니다!'라는 인사를 두 번씩이나 반복해 소녀에게 사의를 표한 뒤, 자개봉의 북쪽 능선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한 시진이 아니라 세 시진이 넘도록 올랐건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수림과 암석들뿐이었다. 게다가 뭔 놈의 산이 이리도 산짐승이 많은지... 그를 식사감으로 알고 달려들던 늑대 두 마리와 귀찮도록 따라붙던 원숭이 몇 마리를 쫓아 버린 뒤, 박한은 산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씻 은 듯이 사라졌다. '내려가서 다시 시작해 볼까?' 차라리 그 편이 더 빠를지도 몰랐다.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그랬다. 살다 보면 돌아가는 것이 더 빠른 법도 왕왕 있었다. 박한은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 올라온 기억을 더듬어 가며 산을 되 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불행이 불행인 것은 의외성 때문도 있겠지만 연속성 때문인 탓도 있 다. 본디 이렇게 험한 산을 사전에 아무런 지식이나 정보도 없이 오르는 것은 위험한 경우와 맞닥뜨리기 십상이었다. 낭떠러지에서 실족할 수 도 있었고, 굶주린 맹수를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중 가장 위험한 일은 길을 잃어버리는 것 이었다. 박한은 마침내 그 일을 당하고 말았다. * * * 아우우-! 산속에서의 밤은 평지보다 빨리 찾아온다. 박한은 멀리서 울려 오는 늑대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주먹밥을 넉 넉하게 준비해 오지 않은 자신의 느슨한 준비성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찬 큼직한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한 줌 정도의 소금이 들어 있었다.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국경을 넘어올 때, 아내는 소금이 한 말이나 들어 있는 묵직한 주머 니를 그에게 건넸다. 중국에서 소금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박한은 지난 육 개월 간 거친 음식이나마 싱겁게 먹는 것만 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허기졌을 때, 소금이라도 찍어 먹 으면 한결 견디기 쉬웠다. 그는 손가락에 묻은 소금을 핥았다. 짭짤한 맛이 입 안을 감돌자, 아내의 정성이 새삼스럽게 고마웠다. 하지만 주린 창자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이 슬퍼지는 마음만은 소금의 짭짤함으로도, 아내의 정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스락! 박한의 몸이 우뚝 멈췄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무슨 기척을 들은 것이다. 그는 죽립을 살짝 들추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박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맹금(猛禽)처럼 날카로운 그의 안력은 풀 숲 아래로 움직이는 두 개의 붉은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눈빛 임을 깨달은 그는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풀숲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길쭉한 두 개의 물건이 빠꼼 드러났다. 잿빛 털로 뒤덮인 한 쌍의 귀... 날카롭게 변했던 박한의 눈빛이 스르르 풀어졌다. 저렇게 생긴 귀를 가지고 있는 동물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그 동물은 비록 인간과 친 숙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게 위험이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허허!" 박한은 새빨간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한 마리 토끼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토끼는 큼직한 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여웠다. 큰 귀를 쫑긋거리 며 박한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와락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이리 온!" 박한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 까딱거렸다. 하지만 토끼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뿐, 좀처럼 그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허허, 그놈 참! 이리 오래도?" 박한은 주변에 있는 풀을 한 포기 뽑아서 흔들어 보였다. "자, 맛있는 풀이다. 이리 온!" 그의 마음은 순수했다. 어떤 못된 자들처럼 토끼를 유인해 잡아먹는다든가 하는 불순한 생 각은 조금도 품고 있지 않았다. 오직 귀여운 마음에서 한번 끌어안아 주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등뒤로 숨겨져 있던 그의 왼손은 마음과 무 관하게 날카로운 돌멩이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정말로 마음만은 토끼 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토끼는 깡충거리며 두어 차례 뛰어 다가왔다. 이제 토끼와 그의 거리는 여섯 자 정도? 박한의 입가에 천진스러운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토끼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저만치 날 아가 버렸다. 그것은 토끼라는 짐승으로서는 도저히 보여 줄 수 없는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뭐, 뭐냐?" 박한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풀 포 기를 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은 어느새 등뒤에 멘 검자루에 닿아 있었 다. 부스럭! 장막이 갈라지듯 풀숲의 어느 한 부분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나왔 다. 박한의 눈이 더욱 커졌다. 어둠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온 듯, 수풀 속에서 불쑥 등장한 사람은 괴이한 복장의 사내였다. 피풍(披風)처럼 뒤집어쓴,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시커먼 짐승 가 죽. 가슴 위에서 쉴새없이 짤그락대는 이상한 목걸이. 가슴과 다리를 대충 가리고 있는 넝마 같은 옷. 그리고 시커먼 맨발... 박한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중국으로 들어오기 전, 그곳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으니, 박한이 반 년이 넘 는 동안 육천 리에 달하는 길을 지나며 수없이 많은 기인이사(奇人異 士)들을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지금 등장한 사내처럼 이상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단탈은 열 발자국쯤 앞에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는 사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동쪽에는 정말 별놈도 다 있군.' 저자는 마치 피부를 공기 중에 드러낼까 겁내하는 사람 같았다. 그 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더운 날씨에 치렁치렁한 천 나부랭이로 온몸을 친친 감고 다닐 까닭이 없질 않는가! 하지만 단탈은 생각이 더 이상 사내에게 가는 것을 중단시켰다. 그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일은 그가 방금 사냥을 했다는 점 이고, 사냥에 성공했으니 오늘밤은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커봤자 얼마나 크고, 높아 봤자 얼마나 높으랴, 라는 심정으로 불쑥 자개봉을 올라와 버린 것이 벌써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에게 물어 보기라도 할 것을...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는 길을 잃어버렸고, 어 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숲속을 이틀째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묘강의 노련한 사냥꾼도 중원의 초행 산길에서는 별로 나을 것이 없었던 모양 이다. 단탈은 사냥감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궁술만은 묘강에서건 중원에서건 정확했다. 토끼는 한 대의 호 시(蒿矢)에 가슴이 뚫린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가늘고 약한 호시를 쓴 이유는 간단했다. 대시(大矢)에 꿰여 곤죽이 되어 버린 토끼는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남에게 속아서, 한 사람은 남에게 묻지 않아서 헤매게 된 자개봉의 숲속. 그들은 서로의 차림새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며 만났다. 구슬픈 벌레 울음 소리에 실린 채 밤은 더욱더 깊어만 가고 있었다. * * *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8 장 - 2 묘왕동주 1 권 단탈은 요리 솜씨가 매우 좋았다. 그것은 며칠씩이나 사냥감을 쫓아 밀림을 헤매며, 혼자의 힘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전 력(前歷)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불에 고기를 그냥 구워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 지만, 단탈은 그것을 능숙하게 해내었다. 내장을 발라내고 모닥불에 구운 토끼고기는 반나절 동안이나 굶주려 있었던 단탈의 입 안에서 살살 녹고 있었다. 그리고 그 토끼 고기는 박한의 눈 안에서도 살살 녹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여운 토끼를 무자비하게 쏴 죽인 괴인의 잔인함 과, 자신의 식사감을 빼앗아 간 괴인의 파렴치함에 분노를 느끼던 박 한이었다. 하지만 그 토끼가 기름이 잘잘 흐르는 고깃덩어리로 바뀌고, 또 그 것을 괴인이 너무나도 맛있게 먹기 시작하자 그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위장은 소금 몇 알로 밤을 지새우기에 너무도 크 고 건강하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박한은 주춤거리며 단탈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단탈은 먹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박한을 바라보았다. '음!' 박한은 찔끔 놀랐다. 그는 일어서 있었고 단탈은 앉아 있었다. 단탈이 고개를 돌리자 본 의 아니게 단탈의 정면을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정면에서 내려다본 단탈은, 그 빌어먹을 표범 가죽 덕분에 완벽한 한 마리의 검 은 표범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인사였다. "소생의 이름은 박한(朴翰)이라고 합니다. 소생은 해동(海東) 출신 입니다. 그리고 소생은 한어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단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박한은 이름 같은데, 해동이라는 것은 뭘까? 그리고 이자는 도대체 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일까? 단탈은 의문에 사로잡힌 채 박한에게 반문했다. "그래서?" 물론 말을 통해 할 수 있는 박한의 의사 소통 능력은 이미 바닥난 후였다. 박한은 언제나처럼 보퉁이로부터 필구(筆具)들을 꺼내기 시작 했다. "응?" 붓, 먹물통, 종이... 그 모든 것들이 단탈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쳤다. 박한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궁벽한 산중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도 기이한 인 연이라 생각합니다.> 박한은 알겠냐는 듯이 단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탈은 박한의 행 동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족하(足下)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어찌 되시는지요?> 박한은 붓을 단탈에게 내밀었다. 단탈은 붓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박한을 흉내 내어 종이 위에 몇 차례 그어 보았다. 붓에는 먹물이 찍혀 있었으니, 붓이 움직이는 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탈에게 있어서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었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것 봐라?' 약흠이 붓을 놀리는 것을 한두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해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단탈의 얼굴에 신기함이 담겨졌다. 한편, 단탈의 붓놀림을 바라보던 박한의 인상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 다. 도무지 단탈이 무슨 서체(書體)를 구사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 문이다. 둥글게 휘어 갈라지는 것은 초서(草書) 같기도 했으며, 딱딱하게 조 각나는 것은 갑골문(甲骨文) 같기도 했다. '큰일이군. 갑골문이라면 본 적도 없는데...' 하지만 박한은 곧 그런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 탈이 붓을 들어 냄새를 맡기 시작했을 때였다. 박한은 붓을 빼앗아 글을 썼다. <혹시 글자를 모르십니까?> 그것은 박한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글자를 모를 수도 있는 사람에게 '혹시 글자를 모르십니까?'라고 글 자로 묻다니! 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박한은 자신이 쓴 글을 가리키며 단탈 을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가 또 왜 이러지?" 그 얼굴이 재미있어서 단탈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이 웃어 버렸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박한은 자신의 짐작이 어김없이 들어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오직 한자(漢字)만 쓸 줄 아는 해동인과 오직 한어(漢語)만 할 줄 아는 묘인이 만난 것이다. 단탈은 이제 그림 그리기에 재미를 잃은 듯, 박한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토끼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굵은 입술에 검댕이 가득 묻어 갈 무렵, 고기는 뒷다리 하나와 엉덩 이 부분만 남고 모두 단탈의 뱃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박한은 마음이 바싹 타들어 갔다. 본래 필담은 수단에 불과했고, 정 말로 중요한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수단을 가지고 얼쩡거리는 사이, 목적이 눈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저..." 박한은 단탈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단탈의 고개가 다시 그를 향했다. "저는 무척 배가 고픕니다." 해동어(海東語)였지만 말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감정을 전달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니, 최소한 손해는 없을 것 같았다. 박한은 자신의 배와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단탈이 쥐고 있던 토끼고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처량한 눈빛을 필사적 으로 연출했다. 다행히도 단탈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고, 박한의 연기 또한 제법 실감나는 것이었다. 단탈은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토끼고기를 박한에게 건넸다. "배가 고픈 게로군." 박한은 눈물이 나올 듯이 기뻤다. 더 이상 굶주리지 않게 된 것도 기뻤지만, 단탈과 의사 소통이 된 것도 기뻤다. "허!" 하지만 의사 소통에 대한 절실함을 그리 느끼지 않았던 단탈은, 그 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이까짓 고기 몇 점에 이토록 감동한다고 생 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 배가 무척 고팠군!" 단탈은 활과 화살을 들고 일어섰다. 사냥이야 그에게 있어서 가벼운 운동에 불과했다. 단탈은 눈앞의 불쌍한 친구를 위해 밤잠이 없는 짐승들을 몇 마리 잡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 * * "우아아아-!" 단탈은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뽑아 든 가리아가 그의 손에서 요기 스러운 묵광(墨光)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의 눈은 괴성의 근원지를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아아아-!" 괴성을 지른 사람은 박한이었다. 박한은 갈라진 봉우리 사이로 떠오 른 태양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힘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아아-!" 단탈은 가리아를 거두고 기이한 얼굴로 박한을 바라보았다. 박한은 목을 한두 번 좌우로 으쓱거린 뒤 천천히 돌아섰다. 아침 해 를 역광으로 받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어젯밤과는 다른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오! 깨셨군요!" 박한은 일어선 단탈을 바라보고 허리를 숙였다. 비록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아침 인사라는 것 쯤은 단탈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단탈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 다. "그런데 아침부터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인가?" 단탈이 말하자, 박한이 빙긋 웃으며 그 뒤를 이었다. "정말 좋은 날씨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상대방의 마음을 눈 속에 서 읽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곧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눈빛과 표정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기란, 대부분의 경우 가망없는 일이었던 것이 다. '그만두자!'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길을 찾아야 하는데...' 역시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봉우리의 남쪽을 바라보던 박한의 눈이 빛났다. 가늘 게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 다면 저것은 밥짓는 연기가 분명했다.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그곳에 인가(人家)가 있다는 이야 기와 일맥상통했다. "저기를 보시오!" 박한은 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단탈은 박한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력은 박한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그 역시 하얀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 다. '어쩌면 저곳이 형산파일지도 모르겠구나!' 이 또한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행장을 추슬렀다. 만약 저곳이 그들이 찾던 형산파가 맞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석오랑!' 두 사람은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3 대제자 곡풍(曲豊)이 가져 온 배첩(拜帖)을 받아 든 석오랑의 얼굴 이 기이하게 변했다. <해동검사 박한 외(外) 일 인(人)> 해동이라면 인삼으로 유명한 나라 정도로만 여기고 있던 석오랑으로 서는 낮도깨비 같은 배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외 일 인'이라니? 세상에 어떤 몰상식한 녀석이 이따위로 배첩을 쓴다는 말인가? 석오랑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긴 자들인가?" 곡풍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본디 과묵한 성품이었다. 과 묵하다는 것은 달변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배첩을 전한 두 사람의 인상 착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달변도 보통 달변 가 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을 머뭇거리던 곡풍은 결국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자들입니다." 석오랑은 올 성근 볼품없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해동이 수천 리나 떨어진 먼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국의 사람으로 서 그처럼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매정하게 문전 박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시고 와라." 석오랑은 그들을 만나 볼 것을 결심했다. * * * 칭찬도 거듭 들으면 욕이 된다고 했다. 자고로 칭찬을 싫어하는 사 람은 없는 법이다. 칭찬이 그럴진대, 칭찬이 아닌 말을 거듭 듣는 기 분은 어떻겠는가? 석오랑은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날 아침 몸소 체험하고 있었 다. <석삼야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뾰족 상투가 이렇게 썼다. "석삼도(石三島) 노인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오." 표범 대가리가 이렇게 말했다. 석오랑은 화를 낼 수도 없었고, 웃을 수도 없었다. 이 괴상하게 생긴 두 놈은 자신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 르고 있는 것 같으니 화를 낼 수 없는 것이고, 이러기를 벌써 반 시진 째이니 웃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기묘한 삼 인 회담에는 뭔가 새로운 전기(轉機)가 필요했다. "자네들 두 사람은 왜 우리 형님을 뵈려 하는가?" 석오랑은 표범 대가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 뒤, 같은 내용의 글을 뾰 족 상투가 내민 종이 위에 썼다. 말로 할 때에는 '두 사람'이라는 말 에 힘을 주었고, 글로 쓸 때에는 '두 사람'이라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러한 강조의 효과는 단박에 드러났다. 뾰족 상투와 표범 대가리는 돌연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제야 자신들이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자개봉에 올랐음을 깨달은 모 양이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표범 대가리가 입을 열었다. "그의 제자를 만나려 하오." 석오랑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가 아는 한 셋째 형님의 제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제자란 삼 년 전 이맘때에 편지 한 장을 들고 찾아와 형님의 거처를 묻던 곱 살하게 생긴 청년, 장옥평이었다. "옥평을 아는가?" 석오랑은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친구요."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8 장 - 3 묘왕동주 1 권 표범 대가리는 차고 있던 주머니 속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내 보였 다. 석오랑은 그 편지를 받아 읽어 보았다. 삼 년 전에 장옥평이 가져 온 편지와 같은 사람이 쓴 글이었다. 석오랑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셋째 형님의 옛 친 구였다. 이자에게는 셋째 형님을 만날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자는 그렇다고치고...' 석오랑은 뾰족 상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은 뾰족 상투 역시 소매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어 그 앞에 내놓았다. 그 종이에 쓰여진 글을 읽던 석오랑은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하나 는 그 필치가 낯익은 것이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 내용이 자신과 형님을 소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정호의 엽강, 엽 대인께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뾰족 상투는 빙긋 웃으며 석오랑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석오랑은 그제야 고개를 끄떡였다. 엽강이라면 그의 동문사제였고, 사람을 소개할 만한 자격이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 석오랑은 고민에 빠졌다. 그의 셋째 형님은 세속의 모든 일을 달관하며 살아 가는 은자(隱者) 였고, 그는 형님의 그런 마음을 존경해 남들 앞에서 형님의 존재에 관 해 거의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형님에 관한 이야기는 형산파 문도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형님에게 이런 괴상한 인간들 을 보낸다는 것은 어쩐지 꺼림칙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이들은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의 소 개로 온 사람들이었다. 자신에게는 이들을 돌려 보낼 만한 명분이 없 었다. "좋아! 형님을 만나게 해주지." 말로 한번 한 것을 글로 다시 쓰는 것이나, 글로 한번 쓴 것을 말로 다시 하는 것이나 귀찮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딸아이가 그곳으로 안내해 줄 거야." 석오랑은 이제야 끝났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배석해 있던 대제자 곡풍을 향해 말했다. "용아(茸兒)를 데려와라!" * * * 박한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노기를 묵묵히 삭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랄랄라 라-, 흐흥!" 박한의 앞에서 팔짝대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소녀는 놀랍게도 그 와는 구면(舊面)인 사이였다. 중국에서의 사귐이 빈약한 그에게 있어서 구면과 만난다는 것은 결 코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났다. 그녀 덕분에 생고생을 한 숲속에서의 하룻밤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 문이다. -북쪽 능선을 타고 한 시진쯤 올라가시면 형산파가 나올 거예요. 바로 그 소녀였다. 귀여운 보조개 하며 머리에 매단 주화(珠花) 장 식까지, 바로 그 소녀였다. 하지만 석오랑의 거처에서 박한을 발견한 그녀는 조금도 그런 내색 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박한과 단탈 두 사람 앞에 서서 깡충거 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야 저 깜직한 거짓말쟁이를 잡아다가 볼기라도 두어 대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박한은 너무나 예의바른 군 자였고, 소인배나 여인과 시비(是非)하는 것은 <논어(論語)>에 적힌 군자가 피해야 할 유명한 몸가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한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말 한마디 못하고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끓어오르는 그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 준 사람은 군자의 '군' 자도 아닐 뿐더러, <논어>의 '논' 자도 접해 보지 않은 야만인 단탈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표범 가죽을 쓴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을 때, 석소용(石小茸)은 콧노래로 자신이 가장 즐기는 백마랑(白馬郞)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표범 가죽을 쓴 사내를 힐끔 바라보았다. 노래 가 지닌 아치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몰골의 사내였다. '흥 깨진다. 조용히 해라.' 그녀는 단탈인가 하는 이상한 이름의 사내에게 눈살을 찌푸려 보임 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흥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이 정도의 의사 표현이라면, 적어도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걸음을 계속 옮기며, 끊어졌던 콧노래를 이어나가 기 시작했다. "흐흐흥, 흐흥-!"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즐거웠다. 본디 조용한 산중은 어린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 때야 마음놓고 뛰놀 수 있는 산속도 그런대로 쓸 만한 터전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이 들고 심장보다 더 큰 감성을 가슴 속에 간직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그녀는 자신의 일생이 이런 한일(閑 日) 속에서 덧없이 사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허전한 방심(芳心)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술을 부렸고, 모든 사람을 골탕먹이기 시작했던 것 이다. 그렇게 소녀를 보낸 그녀의 나이도 이제 어느덧 방년(芳年)... 급기야 그녀는 아비인 석오랑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지독한 말괄량 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가 자개봉 아래에 사는 마을 사람들로부 터 소요매(小妖魅)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그녀에게도 백마를 탄 낭군이 등장했다. 호호 백발 할아버지 같은 큰아버지의 제자로 입문한 미장부가 바로 그였다. 그의 품격있는 기우(氣宇)는 촌스러운 사형제(師兄弟)들과는 차원이 틀렸다. 장옥평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그는 매사에 조용했고, 품행이 고귀 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구석마저 지니고 있었다. 겨우 세 번 만난 것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가녀린 마음이 그에게 흠뻑 빠져 버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괴상한 두 청년이 형산파를 찾아왔고, 그녀는 그들을 큰아버지께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미 산 아래에서 자신에게 한번 골탕먹은 적이 있 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형산파의 장 로 석오랑의 이름은 그녀의 악의에 찬 장난을 합리화시키기에 부족함 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한군데에 가 있었다. 꿈에라도 그리던 낭군님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만나면 이 분홍빛 마음을 꼭 고백해야지!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갈 판국인데, 이처럼 당당하게 찾아가게 되니 어찌 아니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으랴! 콧노래가 저절로 흥얼흥얼 튀어나오는 것도 그런 즐거움 때문이었 다. 하지만 그녀의 즐거움은 갈래 머리 한 가닥을 잡아채는 한 줄기 억 센 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꺄악!" 형산파의 세 장로 중 가장 세도 높다는 천애검선(天涯劍仙) 석오랑, 그가 나이 사십에 얻은 늦둥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그런 그녀 가 어디서 이런 무지막지한 경우를 당해 본 일이 있던가?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고개를 돌려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이 염병할 후레자식이... 악!" 부처도 돌아앉는다는 그녀의 욕설은 자개봉 일대에서 정평이 난 것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욕설의 절반을 고스란히 목구멍 안으로 삼켜야 만 했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힘이 더한층 강해졌기 때문이다. "계집애가 입이 그게 뭐냐?" 단탈이라는 녀석은 여자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는 놈 같았다. 그 렇지 않고서야 자신같이 예쁘고 깜찍한 소녀를 어찌 이리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머리카락이 모두 붉게 변해 버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녀는 오른손을 슬금슬금 허리춤으로 돌려 패검(佩劍)의 손잡이를 움켜쥐었 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단탈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아, 아파요!"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는 힘이 조금 느슨해진 것 같았다. 그 틈을 놓칠 소요매가 아니었다. "이얍!" 그녀는 벼락같이 허리를 뒤집으며 패검으로 단탈의 어깨를 찔렀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한두 군데는 분명한 칼집을 내어 소요매 석소용의 무서움을 똑똑히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진짜 철부지로군!" 그녀의 오른손목을 단탈의 두툼한 갈색 손이 덥석 움켜잡아 버렸다. 너무나 간단한 동작이어서, 마치 두 사람이 사전에 각본을 짠 상태에 서 찌르고 막은 것처럼 보였다. "아-!" 그녀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순결한 소녀의 손목을 징그럽게 생긴 야만인에게 잡힌 것이 부끄러 워서였을까? 하지만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른 이유는 손목 이 끊어질 듯한 지독한 고통 때문이었다. "벌이야." 손아귀의 힘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아악-!" 뎅그렁! 패검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땅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비틀며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주저앉고 있었다. 아팠다. 너무나 아팠다. '이러다가 손목 없는 병신이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떠오를 정도로 아팠다. 얼마나 그런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을까? 손목을 죄어 오던 힘이 조금씩 약해졌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단탈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아우-, 아-!" 몸이 자유로워지자 석소용은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부둥켜잡고 뱅뱅 맴돌았다. 그녀의 손목은 검게 죽어 있었다. 아마도 혈관 몇 개가 막혀 제 기 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손목이 정상을 되찾기까지 적어도 며칠은 고생해야 될 것이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단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석소용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단탈을 바라보았다. 단탈의 눈동자는 돌 조각 두 개를 박은 것처럼 차갑고 딱딱해 보였 다. 이자는 여자를 아끼고 보호하는 남자의 미덕 따위에는 전혀 관심 이 없는 놈임에 분명했다. 만약 이번에도 대답을 안 한다면 그녀의 손 은 그녀의 손목으로부터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석소용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나절, 반나절만 더 가면 돼요! 이 봉우리 뒤편에 있는 우, 운문 곡(雲門谷)이 큰아버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는 석소용의 눈에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죽립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가 그리 고소한지, 죽립 아래로 보 이는 입가에는 하얀 이빨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새끼들...! 나중에 두고 보자.' 석소용은 이를 뽀드득 갈았다. 4 장옥평은 검을 쥐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석 자 길이의 장검, 왼손에는 한 자 두 치 길이의 단 검... 그가 쌍검을 쥐고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그의 수련은 사실 수련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흥이 나면 마음이 이는 대로 휘두르고, 흥이 다하면 마음에 따라 검을 거두어 버리는 것을 수 련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이미 '비검(非劍)'의 경지에 들어선 이 상,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진검(眞劍)과의 친화(親和)였다. 검과 친해지 는 방법 중에서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자, 친구들! 슬슬 시작해 볼까?' 장옥평은 쌍검을 향해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검자루를 통해 흘러 들 어오는 쌍검의 반응은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만들어 주었다. 오른발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바닥으로부터 거의 떨어지지 않은 채 살며시 내딛는 걸음은 지극히 평범한 궁보(弓步)였다. 이어 왼발이 둥글게 휘어 끌리며 오른발의 옆 부분을 스치고 왼쪽으 로 흘러갔다. 그와 동시에 쌍검이 서서히 들려졌다. 장검은 위쪽으로 움직이며 둥근 반원을 그리고, 단검은 겨드랑이 안 쪽으로 끌려오며 얇은 각(角)의 사선을 그렸다. 그리고 시작되는 팔십이 초 장쾌한 검무(劍舞)는 가전(家傳)의 백화 검법(百華劍法)이었다. ━━━━━━━━━━━━━━━━━━━━━━━━━━━━━━━ TO BE CONTINUE.... <<무림 YAG 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1 권 8 장 - 4 묘왕동주 1 권 백화검법은 산동장가(山東莊家)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전해지던 것 을 희대의 검객이었던 검패 장일기가 완성한 검법이었다. 검의 삼대 요소라 할 수 있는 역(力)·쾌(快)·변(變)의 세 가지가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어우러진 백화검법의 중용지도(中庸之道)... 강호의 명숙들은 이를 가리켜 '대인(大人)의 검법'이라는 칭송을 아끼 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장옥평이 수련하는 백화검법의 투로(套路)는 장일기가 완성한 그것과는 두 가지 점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첫째, 그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다. 물론 얼마나 많은 검수들이 쾌속의 극한에 도달하기 위해 청춘을 불 살랐던가! 빠름이라는 것은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 있어서 그토록 매력 이 있는 덕목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지와 음지가 있는 법이었다. 맹목적인 빠름 속에는 충분한 변화를 실을 수가 없었다. 한 호흡 안 에 생사가 결정되는 일 대 일의 대결에서라면 논외겠지만, 다수를 상 대하여 검법을 전개할 때 직선적인 빠름만으로 전체를 상대한다는 것 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장일기는 그것을 경계하며 초식이 연결되는 부분마다 충분한 호흡을 안배하였으니, 이것이 백화검법이 '대인의 검'이라는 칭송을 듣게끔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장옥평의 손에 의해 전개되는 백화검법은 무섭도록 빨 랐다. 그의 검은 검신(劍身)은커녕 잔영(殘影)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 도의 빠른 속도로 공간을 헤집고 있었다. 그는 마치 조부가 세운 검론 (劍論)을 깡그리 뒤집어엎으려는 것 같았다. 둘째, 그는 쌍검을 쥐고 있었다. 아마 장일기가 이 광경을 보았으면 경악으로 눈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쌍검을 사용하는 것은 정종검법(正宗劍法)을 수련하는 검수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일이었다. 한 자루의 검, 한 점의 검봉(劍鋒)에 모든 영혼을 거는 것이 바로 검수들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힘과 정신이 두 갈래로 분산될 위험 요소가 너무도 많았다. 정신 통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검 도에 있어서, 스스로 그런 위험을 품고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 다. 그래서 장옥평이 두 자루의 검으로 빠르게 펼쳐 내는 백화검법은 엄 밀한 의미에서 '백화검법'이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장옥평은 개의치 않았다. 그 스스로부터 백화검법이라는 완 성된 형(形)에 추호도 얽매일 생각이 없었다. 형이란 무의미한 것이었 다. 필요하면 언제든 형의 굴레를 던지고 새로운 형을 창조하는 것이 그가 삼 년 간 수련한 비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백화검법이라는 어떤 틀을 빌리고 있는 까 닭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검법이 바 로 백화검법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두 자루의 검이 부르르 떨렸다. 살심이 치밀었음인가? 장옥평의 두 눈이 얼음 조각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마음속에 떠오른 살기를 굳이 억제하려 하지 않았다. 살기는 온순한 성품의 그 를 강하게 만드는 추진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허공의 한 점이 가늘게 떨렸다. 먹물이 번져 가듯 그곳에는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웃 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던 그날처럼 웃고 있었다. '매용소(梅龍沼)...' 장옥평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쌍검이 얼굴을 꿰뚫어 버렸다.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 또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래에 떠오른 형님의 잘린 수급은 웃음의 아 름다움을 요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도연향(陶淵香)...' 쌍검이 다시 한번 얼굴을 꿰뚫어 버렸다. 환상 속의 얼굴들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데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분명하지 않았다. 미지의 흉 수... 매용소와 도연향을 조종하여 자신의 가문을 파괴한 얼굴 없는 원흉! 장옥평의 살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차아압!" 장옥평은 허공으로 몸을 띄워 두 자루의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파아아-!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나뭇잎들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검광의 폭죽들이 그 사이를 난비(亂飛)했다. 장옥평은 그러한 혼돈의 공간 안에서 한 가닥 자신감을 얻을 수 있 었다. 보이지 않는 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검이 아닌 검으로서 모든 것을 베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 감... 장옥평은 천천히 땅위에 내려섰다. 그의 눈빛은 어느덧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살기도 사라지고 흥도 사라졌다. 마음속의 검 또한 이제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나직이 미소 지었다. 두 자루의 검이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된 이상, 그 의 수련은 이미 원하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담 담했다. "후우!" 한숨과도 비슷한 긴 호흡이 장옥평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때에는 벌거벗고 계곡 물에 뛰어 드는 것처럼 좋은 일이 없었다. 장옥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몸이 우뚝 멈춰 졌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계곡 입구 쪽이었다. 장옥평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계곡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세 사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셋...?' 장옥평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들은 기척은 한 사람의 것뿐이었 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사람의 능력은 자신의 청각을 가릴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청각은 날갯짓없이 활강하는 날짐 승의 기척까지도 정확하게 잡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저토록 당당히 걸어오면서 기척을 감추다니?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발견한 장옥평의 눈이 커졌다. 검은 표범 가죽... 그것은 아합족의 족장 타루가가 입는 명예스러운 옷, '수루'였다. 그와 동시에 장옥평의 눈에는 표범 가죽 아래로 하얗게 반짝이는 무 엇인가가 들어왔다. 아마도 타루가가 목에 거는 목걸이, '곤작'이리 라. 천하에서 수루와 곤작을 걸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삼 년 전의 영상들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기억의 장막을 찢고 솟구쳐 올라왔다. 장옥평의 눈빛이 스르르 풀어졌다. "단탈..." 그의 입술 틈새를 비집고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 제1부 상권 끝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9 장 운문곡(雲門谷) 묘왕동주 제 9 장 운문곡(雲門谷) 1 <을온족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알려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재미있군." 마린(馬璘)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편지를 팔랑거리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이 총사(李總師)! 무미은호(無尾隱狐)라는 자에 대해서 아는 거라도 있나? 명호(名號)로 미루어 제법 영리한 놈 같은데?" 마린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색으로 물들인 뻣뻣한 마의(麻衣)를 입은 초로인(初老人)이 서 있었다. 초로인의 오른쪽 다리는 다른 사람 들과 달랐다. 그 무릎 아래 부분, 길쭉한 강철봉이 다리를 대신하고 있 었던 것이다. 의족(義足)의 초로인... 그가 입을 열자, 끝이 기이하게 갈라지는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목소리였다. "명호보다 두 배는 더 교활한 놈입니다." "흐음..." 마린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며 호화스런 태사의(太師椅) 속으로 몸 을 한껏 묻었다. 마린의 체구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가 앉아 있던 태사의 또한 평범한 크기가 아니었다. 태사의 뒷전에 서 있던 의족의 초로인, 이교(李校)는 더 이상 마린의 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제법 흐르도록 마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교 또한 태사의 뒤에 우뚝 선 채 석상(石像)이라도 되어 버린 것 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태사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마린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딘지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할말이 있으니 나와라? 어때? 재미있는 놈 아닌가?" 마린의 말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질문 비슷하게 얼버무리는 와 중에, 하고 싶은 말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마린을 상관으로 섬긴 지 사 년째 접어든 이교는 이제 말투만 들어 도 마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 감히 우리와?" "예." "을온족이 몰락한 것이 그렇게 가치있는 것일까?" 이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을온족에 관한 정보는 분명히 가치, 그것도 아주 미묘한 가치가 있 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가치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하지만 이교가 그것을 입 밖에 꺼낼 필요는 없었다. 가치가 있고 없 고는 결국 마린이 판단할 문제였다. "하기야 대공자와 이공자, 그리고 사공녀 모두 을온족의 일에 신경 을 곤두세우고 있기는 하지. 옥주(屋主)의 지시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 야." 마린은 태사의로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어떤 결론을 내 린 모양이었다. "교활한 녀석은 질색이지만..." 마린은 이교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 팔랑거리는 종이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이교의 망막에 맺혔다. "교활한 녀석 하나쯤은 거느리고 있어도 괜찮겠지?" "하면, 속하가?" 이교는 편지를 받으며 물었다. "수고해 줘야겠어.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가줘야 놈도 허튼수작 부 릴 궁리를 못할 것 아닌가?" 마린은 미안한 표정으로 이교의 어깨를 두드렸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9 장 - 1 묘왕동주 2 삼 년. 어떤 이에게는 억겁(億劫)처럼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수유 (須臾)처럼 느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단탈에게 있어서, 그리고 장옥평에게 있어서 지난 삼 년은 어떤 느 낌이었을까? 너무나도 할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저 바 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으아앙!" 이때 갑자기 석소용이 울부짖으며 장옥평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어린아이라 부를 수 없는 그녀를 품에 안은 장옥평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요, 용매(茸妹)! 왜 그래?" 하지만 석소용은 아무런 대답 없이 장옥평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섧디섧게 울기만 했다. 장옥평의 준수한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용매, 말을 해야지! 왜 그래? 형산파(衡山派)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 어?" 이때 석소용의 고개가 발딱 치켜 들어졌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장옥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소매의 원한을 풀어 주세요!" "뭐?" 장옥평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정말로 형산파에 무슨 일이 생긴 것 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석소용의 외침은 너무도 의외 로운 것이었다. "저 더러운 야만인이 소매를 욕보였어요!" 석소용은 이를 뽀드득 갈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 에는 시커먼 표범 가죽을 머리 뒤로 죽 늘어뜨린 단탈의 괴상한 모습 이 있었다. '단탈이?' 장옥평은 잠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픽, 웃고 말았다. 이 말 썽꾸러기 아가씨가 사람 골탕먹이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이야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장옥평은 짐짓 안색을 굳히며 단탈을 향해 외쳤다. "감히 우리 아가씨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창-! 준엄한 호통이 끝남과 동시에 장옥평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쌍검이 맑은 검명(劍鳴)을 토하며 뽑혔다. "무기를 뽑아라!" 장옥평은 쌍검 중 장검으로 단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단탈은 그런 장옥평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또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두툼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흰 이가 보였다. "좋았어!" 단탈은 허벅지에 묶은 도집에서 거무튀튀한 빛깔이 흐르는 기형도 (奇形刀) 가리아를 꺼내 들었다. 대치한 쌍검과 가리아 사이에는 바람만 불어도 깨질 것 같은 아슬아 슬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됐어!' 석소용은 장옥평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큰아버지 석삼도는 고금을 통틀어서도 능히 손꼽힐 만한 검 사(劍師)요, 달인(達人)이었다. 그런 석삼도의 진전을 이어받았으니, 장 옥평이 곰처럼 힘만 센 야만인 하나를 어육(魚肉)으로 만들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앗!" 석소용의 마음에 꼭 드는 멋진 기합 소리와 함께 장옥평의 쌍검이 허공을 갈랐다. 박한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두 사람의 나이는 결코 자신보다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 만 그들의 무공은 자신이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올라 있었 다. 곱살하게 생긴 청년이야 이곳에 은거하고 있다는 석삼야와 무슨 상 관이 있을 테니, 나이를 초월한 검도의 달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동행했던 단탈이 예상을 훨씬 웃도는 고절한 도법을 지니고 있음에는, 어지간히 굵은 신경을 지닌 박한조차도 놀라움을 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이한 점이 있었다.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병기를 휘두르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에 게서는 단 한 점의 살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한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저들은 도대체 왜 싸우고 있는 것일까? * * * 까깍-! 단탈의 도와 장옥평의 쌍검이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세 자루의 병기는 기묘한 각도를 이루며 서로 맞물렸다. 그것은 그들 이 이미 이십 합을 넘게 겨룬 뒤였다. 병기를 가운데 둔 채,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장옥평이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약 노인이 당신을 제자로 삼은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나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소. 오늘 당신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구려." 단탈 또한 웃으며 대꾸했다. "자네는 안 보는 사이에 살쾡이처럼 날래졌군. 빠르기로 말한다면 도저히 자네를 당해 낼 수 없겠는데?" 장옥평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힘도 제법 붙었다오. 어디 한번 보시겠소?" 돌연 단탈이 쥐고 있던 가리아가 심하게 떨렸다. 장옥평의 쌍검을 통해서 각기 다른 두 종류의 힘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것... 봐라?' 단탈의 목덜미에 굵은 힘줄이 불거나왔다. 가리아를 통해 전달되어 오는 두 종류의 힘은, 하나씩 떼어 놓고 본 다면 단탈이 버티기 힘들 정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두 가지의 힘이 어우러지자 상황은 일변(一變)했다. 두 힘은 서로 상쇄되기도 하고 증폭되기도 하며, 불규칙적인 압력을 단탈에게 가해 왔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압력은 병기 운용의 세기(細技)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 은 단탈로서는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장한도법이라면...' 단탈은 문득 장한도법을 떠올렸다. 장한도법은 단탈이 수련한 공부(功夫)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하지만... 단탈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장옥평에게 장한도법을 사용할 수는 없 었던 것이다. 장한도법의 살기는 일단 발출되면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가 령 장한도법의 첫 번째 수법인 흑월삼륙(黑月三戮)의 경우, 상대가 이 미 목숨이 끊어진 시체라 해도 세 번의 칼질을 한 후라야만 살기가 회 수되는 악랄한 초식이었다. 한번 발출한 살기를 거두는 것도 내력이 화경(化境)에 이르기 전에 는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도법의 공력이 살기를 따라 움직이는 까닭에 섣불리 살기를 거두었다가는 시전자가 위중한 내상을 입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수법이 그럴진대, 나머지 네 초식의 잔인함이야 논할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장한도법을 어찌 장옥평에게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단탈을 핍박해 오던 힘은 더욱 드세졌다. 단탈 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까지 몰리게 되었 다. 단탈은 잠시 망설이다가 버티던 힘을 회수해 버렸다. "그만 하세! 도저히 못 당하겠군!" 단탈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 순간, 단탈은 가리아를 통 해 전달되어 오던 힘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공격하 는 공부(功夫)도 놀라웠지만, 쏘아 보내던 공력을 이처럼 깔끔하게 거 두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단탈은 감탄한 눈으로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장옥평은 비스듬히 교차시켰던 쌍검을 거두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콧방울 위에는 두어 방울의 땀이 맺혀 있었다. "단탈! 괜찮소?" 단탈은 크게 한번 숨을 내쉬어 보았다. 내식(內息)에는 아무런 이상 이 없었다. "괜찮네!" 단탈은 가리아를 도집에 꽂으며 말했다. "삼 년은 자네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었군." 장옥평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이 방금 벌인 것은 싸움이 아니라는 것쯤은 장옥평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싸움이었다면 단탈은 '그만 하세' 따위의 말을 하 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탈을 이겼다는 치기 (稚氣)스러운 즐거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한바탕 힘을 쏟아 내고 나니 아까의 서먹 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왜일까? 삼 년이라는 세월이 그들 두 사람 모두를 무인으로 바꿔 놓 았기 때문일까? 장옥평의 얼굴이 기이한 격동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단탈!" 단탈 역시 두 팔을 벌렸다. "옥평!" 두 사람은 서로의 몸뚱이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석소용은 입을 딱 벌렸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9 장 - 2 묘왕동주 * * * 석삼도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눈을 감고 지냈다. 그것은 석삼도가 잠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면 시간으로 말하자 면 오히려 범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그였다. 그런 그가 눈을 감고 보내는 시간이 그토록 많은 까닭은 단 한 가지 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해 별다른 가치 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석삼도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한 그루의 창연(蒼然)한 잣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의 두 눈 또한 언제나처럼 살짝 감겨 있었다. 석삼도는 눈을 감고서도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지의 양분을 빨아 올리고 있는 초목들의 힘찬 성장을 느낄 수 있 었고, 계절의 자유를 만끽하는 나비들의 환희에 찬 비행을 느낄 수 있 었고, 잣나무 가지를 간질이는 공기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느낄 수 있 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뜬 것보다 더 분명히 느낄 수 있다면, 굳이 눈을 뜨고 세계를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석삼도는 그의 세계 속으로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느꼈다. 달려오고 있는 한 사람. 석삼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가녀린 호흡이, 기억 속에 또렷이 간직되어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해준 것 이다. 한 해에 한두 번 보기도 힘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질녀(姪女) 석소용 이었다. 그런데... 학의 깃털처럼 새하얀 석삼도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석소용에 이어 다른 몇 명이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는 셋이었다. 하나는 그의 제자인 장옥평, 그리고 다른 둘 은 처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둘이 은연중에 드러내는 기운 은 석삼도처럼 경험이 풍부한 노기인(老奇人)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 들 정도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들의 기운을 충분히 감상할 만한 여유를 석삼도에게서 빼앗아간 사람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질녀 석소용이었다. "큰아버지-!" 그것에서부터 시작된 석소용의 울음 섞인 하소연은 장장 일 각 동안 이나 계속되었다. 거짓말은 반복될수록 커지는 법이어서, 그녀가 증언하는 단탈과 박 한은 어느새 천하에 다시없을 색한(色漢)과 마두(魔頭)로 변해 있었다. "흑흑... 그러니까 꼭 좀 혼내 주세요!"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이 되어 버린 석소용은, 조그만 손가락으로 단탈과 박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구한 넋두리를 끝마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원독에 찬 시선을 두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배신자 장옥평이 이루지 못한 복수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능력을 지닌 큰아버지가 해줄 것임을 확신하면서... 영원히 들려지지 않을 것 같던 석삼도의 주름진 눈까풀이 서서히 올 라갔다. 제일 좌측에 서 있는 미공자는 삼 년 동안 함께 지냈던 장옥평이었 다. 그리고... 석삼도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장옥평의 옆에 서 있는 두 청년 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참으로 기이한 몰골의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석삼도는 그들의 차림새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평정심(平靜心)을 자극하는 두 청년의 기도였다. 하나는 강물같이 고요히 흐르는 유유(悠悠)한 기도였고, 다른 하나는 활화산처 럼 거칠게 뿜어 나오는 패도적인 기도였다. '흐음!' 석삼도는 문득, 흥미를 느꼈다. 이미 외물(外物)의 굴레로부터 벗어 나, 무하유(無何有)에 이른 그였다. 진세(塵世)에 흥미를 유발하는 무 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석삼도는 이 흥미있는 신진(新進)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 었다. 노인이 눈을 뜨자, 박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개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 노인이 바로 석삼도였다. 속진(俗塵) 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노인이 석삼도가 아니라면, 천하의 그 누가 석삼도이겠는가! 경외의 염(念)이 박한의 가슴을 가득 채워 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마음과 조금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의 이름은 박한이라고 합니다. 소생은 해동 출신 입...!" 박한의 정중한 인사말은 전방으로부터 밀려든 한 줄기 무형지력(無 形之力)에 눌려 끝을 맺을 수 없었다. 박한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석삼도는 잣나무 아래 앉은 채 박한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와 석삼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강철벽처럼 무지막지하게 밀어닥쳐 오는 이 힘은 대체 무엇 이란 말인가! 박한은 단전에 내력을 끌어올려 밀려오는 힘에 저항했다. 그가 수련한 해동의 단술(丹術)은 중원인들이 말하는 내공과는 약간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힘을 끌어올려 외부로 발출하는 묘용은 떨어지지만,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힘에 대한 저항력은 우수했다. 그것 은 수련의 가장 큰 가치를 심신수양(心身修養)에 두는 해동인들의 순 수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박한의 몸이 앞뒤로 가늘게 흔들렸다. 이것은 외력에 의한 것이 아 닌, 박한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힘이 거셀 때에는 몸을 젖혀 흘려 버리고 힘이 약할 때에는 몸을 당겨 갈라 버리는 것이다. 과연 밀려들던 힘은 박한의 탄력적인 저항에 부딪혀 기세가 한풀 꺾 였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타!" 백발백염(白髮白髥)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강렬한 기합이었다. 그 순간, 이제껏 넓은 부위를 압박해 오던 힘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예기로 응축되며 박한의 가슴을 향해 찔러 갔다. 펑! 박한의 몸이 활처럼 뒤로 젖혀졌다. 이것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외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으윽!' 명치에서부터 치밀어올라오는 통증은 호흡까지도 곤란하게 만들 정 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박한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우우웅- 기운이 다시 한번 밀려왔다. 아까의 것보다도 조금 더 빠르고 날카 로운 기운이었다. 박한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저 노인은 아마도 자신을 물러서게 만들 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럴 수야 없지!' 박한은 왼발을 반 자쯤 앞으로 디뎠다. 호보(虎步)도 궁보(弓步)도 아닌, 어정쩡한 발놀림이었다. 그러자 그의 상반신이 자연스럽게 반 바 퀴 회전했다. 석삼도가 쏘아 보낸 기운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박한의 명치 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실로 놀라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박한은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반 자 앞으로 보냈던 왼발을 처음의 자리로 잡아당기며, 오른발을 부 드럽게 전방으로 미끄러뜨렸다. 비록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 효과는 컸다. 박한은 상대가 노리던 과녁 자체를 옆으로 틀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시기 또한 적절한 것이었으니, 석삼도가 박한의 자세가 바뀐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박한은 예기를 뒤로 흘려 보내고 처음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석삼도는 잣나무 아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박한 또한 처음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그대로여서, 잠시 전에 일어났던 일은 마치 한바탕 꿈같이 여겨질 정도였다. 석삼도는 빙긋 웃었다. 해동이라고 했던가?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해동을 '군자국(君子國)'이라 명명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온화하고 고결하며 남들과 다투기를 즐기지 않지 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처럼 남에게 굴하려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오 늘 직접 손을 나눠 보니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함에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되 결코 굴복하려 하지 않는 군자의 격(格)을 박한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어디 다음에는...?' 다음 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청년이었다. 석삼도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청년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유유(悠悠)로운 시선이 청년의 얼굴 위에 머물렀을 때,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표범의 주둥이 부분에 가리워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던 단탈의 얼굴 이 경직되었다. 조금 전 박한을 압박하던 철벽 같은 힘이 이번에는 그 를 향해 밀려왔기 때문이다. 박한이 왜 인상을 박박 쓰고 흐느적거렸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단탈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막상 그 힘이 자신에게 겨누어지자, 단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앞서 분노부터 치밀어올랐다. 웃기는 늙은이 아닌가? 도대체 자기를 언제 봤다고, 대뜸 이렇게 위 압적으로 나온다는 말인가! "에익!" 단탈은 오른손을 들어 밀려오는 힘의 한복판에다가 일권(一拳)을 내 질렀다. 물론 약흠으로부터 제대로 주먹 쓰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그 래도 삼 년 동안의 수련 이후 웬만한 나무 정도는 쉽게 박살낼 수 있 는 그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무지막지한 경기가 그의 정권으로부터 뿜어 나왔 다. 쿵! 두 사람 사이에서 묵직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엇?" 석삼도의 몸이 앉은 자세 그대로 크게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오른 손을 흔들어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있던 석소용을 보호해야만 했다. 물론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청년이 이처럼 정면으로 반격해 올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청년이 발출한 권 력(拳力)에 담긴 힘은 석삼도의 자세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석삼도의 얼굴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아까의 해동 검사와는 너무나도 틀린 반응이 아닌가! 젊은 녀석이 이렇게 뻣뻣하다니! "타!" 주름진 입술 사이에서 웅혼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치이이-! 공기가 압축되는 소리는 마치 뜨거운 쇠붙이 위에 물을 쏟았을 때 들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응축된 예기가 삼 장의 거리를 격하여 청년의 명치를 찔러 갔다. 노 기 때문인지 해동 검사에게 보낸 것보다 좀더 위력적인 힘이었다. "으윽!" 단탈의 굵은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석삼도가 쏘아 보낸 기세가 어김없이 그의 명치에 격중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명치 끝이 서늘해지더니, 갑자기 불덩어리 같은 것이 혈관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버티려 애를 썼지만 그의 몸뚱이는 조금씩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질까 보냐!' 단탈은 오기가 솟았다. 단탈은 자신의 몸이 외압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은 곡구(谷口)에서 장옥평과 대치했을 때와는 다른 경 우였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고, 장옥평은 그의 친구였다. 하지만 석삼도는? 석삼도는 단탈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흠의 친구? 장옥평의 스승? 그런 복잡한 관계들은 단탈에게 있어서 아무런 가치를 지닐 수 없었 다. 그래서 단탈은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고, 모든 진기를 끌어올려 석 삼도의 예기를 버텨 내려고 했다. 흙바닥이 두부처럼 꺼지며 두 다리가 발목까지 파묻혔다. 석삼도가 쏘아 보낸 힘은 그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었다. 으드득! 뼈마디란 뼈마디는 비명을 질렀고, 근육이란 근육은 터질 듯이 불거 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퍽! 작은 폭발음이 단탈의 머릿속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 단탈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무엇인가 찝찔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단탈은 이내 벌어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렸던 소리 는 그의 콧속 혈관이 터지는 소리였고, 찝찔한 맛은 흘러내린 코피가 입술 사이로 스며들어 느껴진 맛이었다. 한번 시작된 코피는 샘물처럼 콧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뭉클거리 며 덩어리째 뿜어져 나오는 코피의 기세는, 마치 단탈의 코에 동맥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거셌다. 하지만 단탈은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뜬 채 조금도 뒤로 물러서려 하 지 않았다. 머리에 뒤집어쓴 표범 가죽과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두 눈, 그리 고 얼굴 아래 부분을 온통 적시고 있는 시뻘건 핏물...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흉신악살(兇神惡煞)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허! 이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석삼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탈이 설 마 저토록 무모하게 자신의 무형검기(無形劍氣)를 버텨 내리라고는 상 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지나쳤군.'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9 장 - 3 묘왕동주 석삼도는 내보내던 기세를 급히 거둬들였다. 기세가 사라졌다. 이것은 단탈의 몸이 자유스럽게 된 것을 의미했다. 자유를 되찾은 단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흙 속에 깊이 파묻혀 들어 갔던 자신의 두 다리를 뽑아 내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허 벅지에 묶어 두었던 가리아를 빼 드는 것이었다. 단탈은 석삼도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코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풀잎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단, 단탈!" 아마도 석삼도와 단탈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가장 당황한 사 람은 바로 장옥평이었을 것이다. 그는 크게 놀라며 단탈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단탈의 직선적인 성격 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대로 단탈을 내버려 두었을 경우 어 떠한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비키게!" 단탈은 장옥평의 어깨를 밀치며 짧게 말했다. "장 오라버니, 비켜 나세요! 아무래도 저놈은 큰아버님의 검 맛을 봐 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요!" 장옥평의 등뒤로부터 석소용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단탈의 눈빛이 더 사나워졌다. "비키게!" 단탈은 다시 한번 장옥평에게 말했다. "단탈! 저분께서는 제 스승이시오!" 장옥평은 비킬 수 없었다. 그는 결사적인 심정으로 단탈을 가로막았 다. 하지만 등뒤로부터 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장옥평은 더 이 상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옥평, 비키게나!" "사, 사부님!" "어허, 비켜나래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장옥평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장옥평이 비키자, 단탈과 석삼도의 시선이 아무 장애물 없이 허공에 서 얽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제 채 열 걸음도 되지 않았다. 단탈은 가리아를 들어 석삼도에게 겨누었다. "사과하시오!" 장옥평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는 단탈뿐만 아니라 석삼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석삼도는 고고하기로 말하자면 천년백학 (千年白鶴)보다 더했고, 자존심이 강하기로 말하자면 십팔 세 처녀보다 도 더했다. 그런 석삼도가 강호초출의 오랑캐 청년에게 사과한다는 것 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왕왕 기대하지 않은 일도 보게 된다. "내가 잘못했네. 늙은이의 비례(非禮)를 용서하시게." 석삼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장옥평과 석소용의 입은 딱 벌어졌고, 불을 뿜을 듯한 단탈의 눈빛 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단탈은 왼손을 들어 인중(人中) 부근에 엉겨 있던 핏덩어리를 훔쳐 냈다. "옥평의 낯을 보아 참겠소." 단탈은 석삼도를 향해 겨누었던 가리아를 천천히 거두며 말했다. 석삼도는 단탈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길을 단탈의 발 아래로 옮겼다. 피. 단탈이 걸어온 길에는 그가 흘린 코피가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석 삼도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피가 묻은 풀잎이 누런 연기를 피워 올리며 검게 타 들어가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석삼도는 다시 단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늙은이가 말년에 거둔 제자 덕을 톡톡히 보는군. 고맙네." 주름진 입가가 허물어지며 옅은 미소가 만들어졌다. 3 아직 저녁 때가 되지 않아서인지, 형산이 멀지 않은 쌍봉(雙峰)의 산 인루(山人樓)는 한산한 편이었다. 대나무를 운치있게 묶어서 만든 탁자 의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유시(酉時)나 지났을까? 산인루의 주인 허씨(許氏)는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길어진 햇살을 받으며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조용했다. 손님이라고는 주루 구석진 곳, 유일하게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뿐이었다. 허씨를 향해 등을 돌리고 앉은 청색 문사건(文士巾)을 쓴 사람, 그 맞은편에서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눈매가 날카로운 삼십대 호한... 그들이 처음 주루에 들어섰을 때, 허씨는 끈덕지게 달라붙던 오후의 나른함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강호인이었다. 생쥐가 기어가기만 해도 비명을 질러대던 주루의 낡은 바닥이었지 만, 그들의 발 아래에서는 절에 간 새색시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 다. 그것 하나만 보아도 그들이 강호인, 그것도 고도의 수련을 쌓은 무 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허씨는 강호인을 손님으로 받고도 졸음을 느낄 정도로 굵은 신경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중원에 무수하게 깔린 주루의 주인과 하등 다 를 바가 없는, 소심하고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지금, 허씨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강호인들이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 이었다. 천하의 강호인들이 모두 저들과 같다면, 이런 술장사도 할 만 할 텐 데...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허씨는 오수의 나른함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뇌가오웅(雷家五雄)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허씨는 오수(午睡)의 나른함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촤르륵! 요란한 주렴(珠簾) 소리에 허씨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졸음 기가 남은 그의 시야에 흐릿하게 담겨진 것은 다섯 명의 살기 등등한 장한들의 모습이었다. '흐억!' 끔벅거리던 허씨의 눈이 왕방울처럼 휘둥그래진 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장한들의 머리에 두른 녹색 두건, 그 한가운데 선명하게 쓰 여진 글자를 발견한 것이다. <뇌(雷)> 그것은 형양(衡陽)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어떤 가문을 상징하는 글자였다. 그 가문은 역사가 이백 년에 가깝고 가족들의 수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다고 했다. 물론 그 가문의 가족이라 하여 이유없이 겁부터 집어먹을 필요는 없 었다. 하지만 적어도 허씨처럼 술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 은 관원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다섯 장한들은 번뜩이는 눈으로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다. 주루 안에는 그들이 찾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 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낯짝의 주인 놈을 제외한다면... 다섯 장한 중 구레나룻이 무성한 사내 하나가 회계대 앞으로 다가왔 다. "이곳을 잠시 빌린다!" 텅! 회계대 위에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졌다. 허씨는 쭈뼛거리며 회계대를 내려다보았다. 회계대 위에 놓인 물건은 작은 말굽 모양으로 생긴 은덩이였다. 닷 냥쯤이나 나갈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형양뇌가(衡陽雷家)의 식구들이 빌리겠다고 한 이상, 이곳은 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씨는 비록 무림인이 아니었지만, 술장사 이십 년 동안 단련한 눈 치만은 여느 무림인에 못지않았다. 그는 은덩이를 챙기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내실로 뛰어 들어갔다. 허씨가 사라지자 산인루 안은 음산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전운리(田運利)! 감히 호남 땅을 밟다니... 더 이상 살기가 싫어진 거냐?" 구레나룻이 무성한 장한, 뇌가오웅(雷家五雄) 중 대형인 뇌호(雷虎) 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루 구석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청색 문사건을 쓴 사내가 천천히 돌아앉았다. 세 가닥 잘 손질된 수염이 가느다란 눈매와 어울려 현기 를 자아내는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뇌가의 자제들이신가?" 그는 뇌가오웅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침착한 목소리와 입가에 맺힌 엷은 미소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천(四川)에서 숙부님께 한 짓을 기억하겠지?" 뇌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전운리라 불린 청색 문사건의 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의 숙부?" "이 년 전, 더러운 술수로 천마표국(天馬 局)의 표물을 강탈한 일을 잊었는가!" 전운리는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이 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운리는 머리가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이 년 전의 일은 물론 이거니와 이십 년 전의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전운리는 이 년 전 사천 민강(岷江)의 수적(水賊) 두령으로 있으며 천마표국의 표물을 강탈한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천마표국의 대표두(大 頭)이자 형양뇌가주의 동생인 뇌만 균(雷萬均)의 두 다리를 자른 일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뇌호의 뒤에 서 있던 뇌가오웅의 셋째 뇌경(雷慶)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 가법(家法)은 단순하다! 숙부께서 다리 둘을 잃으셨으니 너희 들은 다리 넷으로 보상하면 된다!" 그 말을 들은 전운리는 뒷전에 앉아 있던 눈매가 날카로운 장한을 바라보았다. "다리 넷이면 내 것과 자네 것 모두 다 써야겠군." 눈매가 날카로운 장한, 유적(劉籍)은 고개를 끄떡이며 대꾸했다. "우리는 이제 앉은뱅이가 되겠군요." 전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뇌가오웅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에게는 자네들의 가법이 있듯이 민강에는 민강의 법이 있다 네. 천마표국은 그 법을 어겼기 때문에 우리가 징계한 것이지, 자네들 가문과는 아무 감정이 없었네. 각자가 한번씩 법을 어긴 셈이니 이쯤 에서 은원을 매듭 짓지 않으시겠는가?" 마치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뇌가오웅은 한 줄기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 오 형제는 용자(勇者)가 득실거린다는 뇌가에서도 누구 못지않 게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무공으로 논한다 해도 개개인이 숙부 뇌만균 에 비해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 뇌가오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전운리는 과거 민강을 주름잡던 전운리가 아니었다. 지금의 전운리는 아미파(峨嵋派)에 의해 수채가 토멸(討滅)당한 뒤, 몇 몇 심복들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객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일까? "문답무용(問答無用)! 병기를 뽑아라!" 뇌호가 거칠게 소리쳤다. 어느새 뽑아 든 것일까? 뇌호의 수중에는 날의 길이가 넉 자가 넘는 기형장검(奇形長劍)이 쥐여져 있었다. 차창-! 뇌호가 병기를 뽑자, 네 명의 아우들도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 다. 하지만 전운리는 그들의 병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고개 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깔리기 시작한 땅거미... 이미 유시가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술시(戌時)라... 시간이 된 건가?" 전운리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시간이 되었다." 한 줄기 목소리. 강철처럼 단단하고 가을바람처럼 무심한 목소리는 뇌가오웅의 뒷전 에서 울려 온 것이었다. "헉!"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9 장 - 4 묘왕동주 뇌가오웅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주루에 들어왔는지, 그들로부터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억지로 잡아맨 듯한 뻣뻣한 머리카락에 홀쭉하게 야윈 얼굴, 허옇게 빛 바랜 마의,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강철봉... 첫인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산(辛酸)을 빠짐없이 겪어 본 듯한 초라한 행색의 초로인이었다. 하지만 그를 유심히 바라 보노라면, 그 초라함 속에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수천 번의 망치질을 거쳐 비로소 강 함을 얻은 쇠붙이 같은 느낌... 전운리의 두 눈에 한 가닥 기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독각(獨脚) 초로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본 것이다. 거물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거물이었다. 전운리의 눈가에 회심의 빛이 어렸다. 그런 거물이 이 자리에 나왔 다는 사실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었다. 독각 초로인은 감정없는 눈길로 뇌가오웅을 응시하고 있었다. 중병 을 앓고 난 사람처럼 푸석하게 갈라진 입술이 열린 것은 한참만의 일 이었다. "가라." 만약 뇌가오웅이 눈앞의 독각 초로인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가 한 '가라'는 말이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독각 초로인에 게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불행히도 뇌가오웅의 식견은 전운리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없었다. "이..." 성질이 급한 막내 뇌정(雷靖)은 대뜸 눈알을 부라리며 한 발짝 앞으 로 나섰다. 그의 양손에는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한 시뻘건 도끼가 들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뇌호가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한 것이다. 뇌호는 검을 쥔 채로 손을 모아 독각 초로인에게 포권했다. "우리는 형양뇌가의 다섯 형제들이오. 귀하는 이름과 명호를 밝혀 주시오." 정중하지만 단호한 요구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독각 초로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가지 못한다." 그 말에 침착한 뇌호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검으로 전운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자는 우리와 묵은 빚이 있소! 그것을 해결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 날 수 없소!" "그래?" 독각 초로인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마치 뇌가오웅의 심정을 모두 이 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표정 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이제 아무도 갈 수 없다." 촤악! 순간, 주루 입구에 드리워진 주렴이 주루 안을 향해 젖혀졌다. 그 기 세가 얼마나 맹렬했던지 주렴은 가닥가닥 끊어져 주루 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따따딱-! 구슬들이 주루 바닥에 뿌려지며 울리는 콩 볶는 듯한 요란한 소리. 주루 입구와 뇌가오웅 사이에는 독각 초로인이 서 있었다. 그래서 뇌가오웅은 무엇이 들어왔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단지 소리만 들 을 수 있을 뿐이었다. 팍! 파팍! 뇌가오웅은 독각 초로인의 등뒤로부터 섬뜩한 파괴음이 다가오는 것 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독각 초로인의 등뒤에서 파편들이 튀어오 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인(聖人)의 몸에서 피어나는 후광처럼 독각 초로인으로부터 사방 을 향해 뿜어져 나가는 파편의 원형(原形)은 대나무였다. 주루의 탁자 와 의자를 구성하고 있던 바로 그 대나무였다. 소리와 파편만이 존재하는 파괴의 행진. 뇌가오웅이 그 실체를 목격한 것은, 그것과 독각 초로인이 동일 선 상에 겹쳐진 순간의 일이었다. 검은 구름이었다. 사람의 몸집만한 크기의 검은 구름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구름처럼 둥실 떠서 독각 초로인의 머리 위를 넘어 오고 있었다. "죽여라." 검은 구름이 머리 위를 넘어갈 때, 독각 초로인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다섯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판결문치고는 너무도 짧고 무심한 말이었다. 콰직! 가장 좌측에 서 있던 뇌가오웅의 넷째 뇌강(雷康)의 머리가 잘 익은 홍시처럼 으깨졌다. 머리가 으깨지는 순간에도 들고 있던 귀두도(鬼頭刀)로 검은 구름을 후려친 것은 무인으로서의 본능이었으리라.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귀두도는 바다에 빠져 버린 듯 흔적도 없 이 사라져 버렸다. "넷째야!" 눈앞에서 아우의 머리가 박살나는 것을 본 형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뇌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악!" 뇌강의 옆에 서 있던 둘째 뇌후(雷厚)의 머리에 귀두도가 손잡이까 지 박혔다. 뇌강의 손에서 사라진 바로 그 귀두도였다. "이익!" 뇌호과 뇌경이 검은 구름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기형장검 끝에서 일어나는 매서운 검기와 일륜권(日輪圈)의 사나운 회전력이 검은 구름 을 휘말아 갔다. 검은 구름의 형체가 주루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변했다. 마치 알 려지지 않은 태고의 마물(魔物)처럼 쭈욱 옆으로 늘어나 버린 것이다. 패앵! 기형장검과 일륜권이 늘어난 검은 구름의 한쪽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뇌호와 뇌경이 황급히 병기를 회수할 때, 그들의 귓전에 처참한 비명이 실렸다. "으악! 살려 줘!" 뇌호와 뇌경은 비명이 울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들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뇌가오웅의 막내 뇌정의 두 다리는 주루 바닥으로부터 반 자쯤 떨어 진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들은 갓 잡아올린 잉어처럼 퍼덕거리고 있었다. 두 다리와 다리가 달려 있는 골반 부위, 그리고 그 바로 위의 허리. 그것이 뇌호와 뇌경이 볼 수 있는 막내의 전부였다. 뇌정의 상체는 검 은 구름 속에 잠겨 있었다. 유령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은 구름 은 흉폭한 맹수처럼 뇌강의 상체를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뿌드득! 찌익! 뿌득! 검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름 끼치는 저 소리! "에... 끽! 으흐..." 이제 뇌정의 비명은 처음과 달랐다. 그것은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간 지럼을 당하는 갓난아이의 웃음 소리처럼 들렸다. 버둥거리는 다리 아 래로 떨어지는 시뻘건 덩어리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그러했다. 풀썩! 뇌강의 몸이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상체가 갈가리 뜯긴 채 하체만이 되찾은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광경을 바라본 뇌호와 뇌경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피와 살덩이가 난무하는 근원적인 공포 앞에서는 혈육간의 애정 따위는 떠 올릴 수도 없었다. 독사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 그들 앞으로 검은 구 름이 밀려왔다. 검은 구름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두 손... 으드득! 두 사람의 시야에 언뜻 전운리의 얼굴이 들어왔다. 등뒤에 있는 전 운리의 얼굴이 왜 보였을까? 전운리는 길바닥에 넘어진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와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두려움 때문에 하얗게 질려 버린 표정 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뭐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뼈가 부러져 뒤로 돌아간 목으로는 어떤 소리도 외칠 수 없었다. "가라." 독각 초로인의 입에서 예의 짧고 무심한 말이 흘러나왔다. 쿵! 목뼈가 돌아간 뇌호와 뇌경, 두 사람의 시신이 주루 바닥으로 떨어 졌다. 그리고 검은 구름은 천천히 물러갔다. 널브러진 시신들을 지나, 독각 초로인의 머리를 넘어, 박살난 탁자와 의자의 잔해를 지나, 이제는 주렴이 사라진 주루의 입구 너머로... 검은 구름이 사라진 뒤, 전운리는 안개처럼 주루 안에 차오는 피비 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주렴이 젖혀진 뒤 다시 사라지기까지, 검은 구름이 주루 안에 머문 시간은 얼마였을까? 그것은 촌각(寸刻) 같기도 했고, 또 억겁(億劫)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전운리에게 그것을 되새겨 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철컥! 철컥! 강철봉이 핏물이 흥건한 주루 바닥을 찍는 소리가 전운리를 상념으 로부터 깨어나게 만들었다. 어느새 독각 초로인은 전운리의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미은호(無尾隱弧) 전운리인가?" 철옥(鐵屋)의 호남지부(湖南支部) 총사인 철각사(鐵脚邪) 이교의 말 투는 언제나 이처럼 간결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10 장 곡중야(谷中夜) 묘왕동주 제 10 장 곡중야(谷中夜) 1 선밥과 몇 가지 나물. 단탈이 운문곡에서 맞이한 첫 번째 식사였다. 입에 맞고 안 맞고는 이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약흠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독기운이 가득한 계곡에서 보낸 삼 년. 맛있는 음식이 가져다 주는 쾌락에 관한 기억을 송두리째 지워 버리 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제 단탈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소화시킬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물체 들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식사가 끝나자 단탈은 여태껏 뒤집어쓰고 있던 수루를 벗어젖혔다. "아휴!" 석소용은 코를 움켜쥐고 물러앉았다. 견디기 힘든 악취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찾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었다. 때투성이 짐승 가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단탈의 이마, 그 위를 온통 뒤덮고 있는 콩알만한 땀띠들은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도 선명한 광경 이었다. 더구나 그 중 몇 개는 짐승 가죽의 까칠한 재질 때문인지, 이미 터 져 허연 진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단탈! 머리가 그게 뭐요?" 장옥평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단탈은 머리통을 두어 번 문 지른 뒤 씨익 웃었다. "날씨가 더워서..." 사실 단탈의 살갗은 무척이나 단단한 편이었다. 밀림 속에서 사냥으로 잔뼈가 굳은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약흠 의 무공을 익히며 독기운에 대한 내성(耐性)이 생긴 탓이다. 하지만 그런 피부도 땀띠 앞에서는 별수없었던 모양이다. 석소용은 더 이상 악취를 견딜 수 없었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탈을 향해 외쳤다. "흥! 정말 야만인들은 어쩔 수가 없어! 더러워서 같이 있을 수가 있 어야지?" 그녀는 누가 잡을세라 휑하니 초옥을 나가 버렸다. 단탈과 장옥평은 멀뚱해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장옥평이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해하시오, 곱게만 자란 탓에..." 단탈은 피식 웃었다. 이해한들 어떻고 이해하지 않은들 어떠랴? 그 의 이해 유무(有無)가 석소용을 변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 면 어차피 마찬가지가 아닌가! "차라리 잘됐군.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네." 단탈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 * * 박한에게 있어서 벽곡(酸穀)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세 상 사람이 아닌 그의 스승, 절심거사(絶心居士)의 고상한 식성 덕분이 었다. 물론 벽곡을 하던 스승과는 달리 그는 익힌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 지만, 혼자 먹을 밥을 끼니마다 차리는 것은 예사 부지런으로는 어림 없는 일... 결국 그 또한 사 년에 가까운 세월을 스승과 함께 벽곡으로 때운 것 이다. 그래서 석삼도가 한 움큼의 벽곡을 내밀었을 때, 인상을 쓰며 장옥 평이 기다리는 초옥으로 가버린 단탈과는 달리 박한은 웃는 낯으로 그 것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석삼도의 벽곡은 절심거사의 그것과는 자못 달랐다. 절심거 사의 입은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솔잎 열댓 개에 잣이나 밤, 대 추가 주류를 이루는 과식(菓食)이었다. 반면 석삼도의 입은 마치 송충 이의 그것처럼 오직 솔잎만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중국 솔잎은 나긋나긋한 조선 솔잎에 비해 왜 그리 깔깔한 지... 억지로 씹어 삼킨 지 두 시진이 넘었지만, 소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먹어치운 것 같은 비릿한 느낌은 여간해서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박한은 석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앉은 지 벌써 두 시 진. 석삼도는 눈을 감은 채, 등뒤에 우뚝 서 있는 잣나무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박한은 귀를 기울였다. 여름밤이 만들어 내는 모든 소리가 노숙한 도둑처럼 귓바퀴를 타고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접시 같은 눈을 부릅뜨고 있을 부엉이의 날갯짓 소리부터 풀숲 아래에서 때 이르게 고치를 벗고 나온 풀벌레의 울음 소리까지. 그런데 눈앞에 있는 석삼도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호흡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박한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정말로 놀라운 노인이었다. 설혹 석삼도 가 그 자리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한다고 해도,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박한은 아까 낮에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석삼도를 향해 선 자신, 그런 자신을 향해 밀려오던 둔중한 힘, 그리고 그 힘이 변해 형성된 날카로운 예기... 아마도 직접 겪지 않았던들, 박한은 이 고요한 노인으로부터 그런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질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검기(劍氣)였을까?' 박한은 이제껏 많은 검기를 봐왔고, 겪어 왔다. 그 중에는 도살장 개 백정에게서나 풍길 법한 천박한 검기도 있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린 눈을 돌리게끔 만드는 잘 다듬어진 검기도 있었다. 만약 열 사람이 있어 그 모두 검을 쥐고 검기를 뿜어 낼 수 있다면, 그 열 개의 검기는 모두 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기는 수련자의 성정(性情)에 따라, 혹은 수련한 검법에 따라 각기 다 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것을 과연 검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까와 같은 검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여태껏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석삼도의 수중에는 검은커녕 나뭇가지조차 들려 있지 않았다. 검 없이 검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더구나 발출 후 시전자의 의지 에 따라 그 형태를 자유롭게 바꾸다니! 박한은 다시 지난 여섯 달의 수행을 떠올렸다. 괴나리봇짐 하나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용만(龍灣:신의주) 나루를 건너 형산에 이르기까지,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모두 한 지방을 대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검객 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 앞에서 열 합을 버티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 다. 그만큼 해동제일검(海東第一劍) 절심거사를 사사한 그의 검은 빠르 고 정확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비무는 거듭되었고, 박한은 계속 이겼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석삼도를 만난 지금, 박한은 육 개월 동안 키워 온 자신감이 송두리 째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키워 온 것이 자신감이 아닌 헛된 자만심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순간, 박한은 검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석삼도는 그의 눈과 입으로 품평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늘은 끝이 없지만 그 하늘 밖에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또 다른 하늘이 있다고 했다. 박한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때 석삼도가 눈을 떴다. 박한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일까? 석삼도는 한동안 박한을 응시하다가 앙상한 손가락을 내밀어 흙바닥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인데 손님께선 자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소?> 박한 또한 글로써 대답했다. <천외천(天外天)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대답이 의외로웠던 듯 석삼도는 한동안 박한을 바라보다가 가볍 게 웃었다. <늙은 껍질을 너무 높이 보시는구려.> 박한은 황급히 썼다. <청컨대, 미천한 후학이 선장(仙長)의 세계를 감히 엿보고자 하니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석삼도는 또 한번 웃었다. 허연 수염에 가려져 확실히 볼 수는 없었 지만, 떼를 쓰고 있는 어린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그것과 비슷 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손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박한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에 있느냐니? 설마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것일까? 그러다가 박한은 보이지 않는 송곳에 관통당하기라도 한 듯,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언제였을까... 이와 똑같은 물음을 받았던 때는...? * * * "이놈!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바위 저편에서 울리는 사부 절심거사의 일갈(一喝)도 굶주린 창자의 아우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무문관(無門關)...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꿈은 검법을 수련해 조선 팔도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었다. 요상한 선술(仙術)을 배워 돌팔이 도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신령스러운 밭이라는 단전을 일군답시고 뙤약볕 아래 좌공(坐功)을 수련하는 것도 참았다. 정신을 하나로 만든답시고 비수 같은 겨울 폭 포를 맞는 것까지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몸도 제대로 뒤척일 수 없는 좁은 바위굴에 가둬 둔 채 열흘 동안 벽곡 한줌도 안 먹이고 굶 기는 데에는 아예 질려 버렸다. 휘두르면 검법이요 베면 이기는 건데, 뭐가 얼어죽을 신염인용(信廉 仁勇)이고 뭐가 뒈져 버릴 심검일체(心劍一體)란 말이냐! 그는 꿈지럭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을 막고 있는 것이 황소만한 바위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른 어깨를 바위에 바싹 붙였다. 그리고 비스듬히 구부린 무 릎을 힘차게 펴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용을 쓰기 시작했다. "으아아-!" 바위가 들썩거리며, 빛의 편린이 암흑만이 존재하던 좁은 공간에 피 어올랐다. 바위 너머로 당황한 사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놈! 너 지금 뭘 하려는 거냐?" 빛은 양귀비꽃처럼 달콤했다. 그는 그 달콤함이 주는 황홀한 유혹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힘을 주어 바위를 밀었다. 뭔가 거치적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늙어 죽지도 않는 귀신이 밖에서 바위 를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이익-!" 그는 목덜미 핏줄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었다. 전 신의 뼈마디가 으드득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목청이 찢어져라 괴성을 질렀다. "끄아아-!" 순간, 그의 눈앞에서 빛의 폭죽이 터졌다. 우르릉-! 열흘 동안 그의 육신을 속박하던 바위가 밀려 자빠지며 사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늙고 병든 몸으로, 장사 소리를 듣는 그의 힘을 버틴 것 자체가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 다. 갑작스레 빛 속으로 달려나간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작정 앞으로 내달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뒹굴었지만, 그는 달음박질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조금만 멈칫거리면, 사부가 그의 뒷덜 미를 잡고 그 무시무시한 죽장(竹杖)을 휘둘러 종아리를 분질러 버릴 것만 같았다. 호흡이 가빠 더 이상은 한걸음도 달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의 시 력은 주위의 경물을 조금씩이나마 분간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되었 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처음 보는 숲과 계곡이 그의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사부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배움은 지옥 같던 이 년만으로 충분 했다. 이제는 날개를 활짝 펼 때가 온 것이다. 자유다! 이제는 자유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10 장 - 1 묘왕동주 * * * 제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자의 자유라... 박한의 입가에 자조가 맺혔다. 지금 또한 그랬다. 선불 맞은 멧돼지 처럼 바위를 밀어 넘기고 산 아래로 달려갔던 오 년 전과 무엇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석삼도는 물끄러미 박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아감에 조급한 사람 일수록 돌아봄이 필요한 법이고, 고뇌가 깊을수록 성찰도 커지기 마련 이다. 이러한 지혜를 알고 있는 그는 다른 사람의 상념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박한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달이 중천에 올랐을 무렵이었 다. <저는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고 있습니다.> 석삼도는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아까 가르침을 달라고 하셨소?> 석삼도는 박한의 표정을 또 한번 살핀 뒤 계속 손가락을 놀려 나갔 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자신을 제외한 그 누가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박한은 석삼도의 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남이 가르 쳐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부인 절심거사가 그를 열흘 동안이나 굶 기며 암흑뿐인 바위굴 속에 처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그 글을 끝으로 석삼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착하고도 사려 깊은 이 젊은 구도자에게, 홀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 * * 손톱 밑에 고인 끈끈한 수액(樹液)이 말라 가는 기분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석소용은 나무 껍질을 찧는 손길을 멈추지 않 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따위 기분쯤은 수백 번이고 참아낼 수 있 었다. 석소용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는 천년 전의 사람도 사용했을 법한 원 시적인 것이었다. 편평한 돌, 어른 주먹만한 둥근 돌멩이, 그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조 잡스러운 대접... 편평한 돌을 받침대삼아 비스듬히 기울여 놓고 둥근 돌멩이로 나무 껍질을 내리치면, 껍질은 둔탁한 신음과 함께 허연 수액을 찔끔찔끔 토해 놓고, 수액은 받침대의 경사를 따라 흘러 아래쪽에 대놓은 나무 대접에 고였다. 평소 '노동'이라는 이름을 지닌 어떠한 일도 하기 싫어하는 그녀였 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불편한 도구들을 사용해 복수를 획책하는 것 을 보면, 남에게 당하고는 못 사는 그녀의 성질이 얼마나 집요한 것인 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질과 숙련도는 무관한 것이었다. "악!" 석소용은 왼손 인지(人指)로부터 솟구치는 섬뜩한 통증에 뾰족한 비 명을 토해 냈다. 얼른 손가락을 들어 바라보니 끝 부분이 검게 죽어 있었다. 돌멩이에 정통으로 찍힌 것이다. "제기랄! 모두 그 새끼 때문이야!" 아마도 석소용의 입이 이토록 험한 것을 알았다면, 그 아버지 석오 랑은 딸을 둘 낳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손가락을 잡고 맴돌던 석소용은 뽀드득, 소리나게 이를 간 뒤 다시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모두 닳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은 반드시 마쳐야만 했다. 수액이 대접을 반쯤 채웠을 무렵, 석소용은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닥나무는 종이의 원료로 쓰일 정도로 질기고 뻑뻑했다. 그 껍질을 빻는 일이란 자연 쉬울 리가 없었으니, 그녀는 반 대접의 수액을 얻기 위해 한 시진 가까이 돌멩이질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대접은 반이 찼다. 그녀의 계획이 반쯤 이루어졌다는 얘기 였다. 석소용은 받침대 옆을 보았다. 널려 있는 닥나무 껍질들의 잔해 속 에 둥글둥글한 열매들이 보였다. 열매들이 어찌나 잘 익었는지, 바라보 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독한 냄새가 마음에 걸렸지만, 닥나무 수액이 지닌 독특한 향이라 면 그것을 충분히 감춰 줄 수 있을 것이다. 석소용은 그 중 큼직한 놈을 하나 들어 받침대 위에 놓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매끄러운 외피(外皮)가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단탈... 이라고 했지? 어디 고생 좀 해봐라!' 하얀 미소와 함께 오른손에 들려진 돌멩이가 열매를 향해 힘차게 내 리꽂혔다. "흥!" 희뿌연 액체가 담긴 대접을 들고 잣나무 부근을 지나가던 석소용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앉아 있는 박한을 발견하곤 코웃음을 쳤다. 큰아버지 흉내를 내고 있는 괴상한 상투의 오랑캐의 작태가 가소로웠 기 때문이다. '자식! 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석소용은 단탈과 장옥평이 있는 초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2 -조추림? -그래, 자네 부족에 있던 미녀를 데려간 자의 이름이 바로 조추림이 지. -지금 어디에 있지? -그것까지는 모르네. 하지만 중원에 있는 '철옥(鐵屋)'이라는 문파에 가면 그에 관해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철옥 주인의 둘째 제자거든...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초여름의 어느 날, 호륵마는 이 말을 끝으로 두 눈을 굳게 감았다. 더 이상은 할말이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단탈은 주저하지 않고 수중의 가리아를 내리쳤고, 호륵마는 목덜미 가 길게 베어진 채 진창 속으로 엎어졌다. 그것으로써 그날 을온족에 서 벌어졌던 살겁(殺劫)은 마무리되었다. 과연 호륵마는 한푼도 숨김없이 그가 아는 모두를 털어 놓았던 것일 까? 단탈은 그런 의심 따위는 품지 않았다. 그 순간 호륵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을온족의 멸망을 막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 단 호륵마뿐이 아니었다. 묘족이라면 누구나가 그랬을 것이다. 모든 것 을 털어 놓으면 부족의 명줄을 유지시켜 주겠다는 단탈의 약속은 호륵 마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테고, 단탈이 아는 한 그런 중대한 희망을 걸고 무슨 수작을 부릴 만큼 무모한 위인은 묘족 중에 없었다. 그날, 단탈은 자욱한 우막(雨幕) 너머로 길게 이어진 동쪽 길을 따라 기약없는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조추림, 그리고 철옥. 이 두 단어는 백성 없는 왕 단탈의 외로운 중원행(中原行)에 유일한 단서요, 이정표였다. * * * "내 가족을 죽인 자들도, 그리고 자네의 가족을 죽인 자들도... 모두 가 철옥이었어!" 단탈의 말은 선고(宣告)와도 같았다. 적어도 장옥평에게는 그렇게 들 렸다. 그것도 아주 곤혹스러운 선고... "철옥..."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장옥평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의 세력이 보통이 아님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설마 철옥일 줄이야!' 장옥평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자네, 철옥에 대해 아는 것이라도 있나?" 단탈의 물음에 장옥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옥이라면 아마 천하에서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세력일 것이오. 음... 혹시 무왕(武王) 관산정(關山頂)이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소?" "관산정?" 단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장옥평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 를 흔들었다. "역시 들어 본 적이 없는 모양이구려. 만약에 당신이 한족(漢族)이었 다면... 필시 바보 소리를 들었을 것이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가?" "유명? 물론이지요! 그는 무척 유명한 사람이었소." 단 한번이라도 검을 쥐어 본 자라면,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스스로 를 무인이라고 생각해 본 자라면, 관산정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명나라 초엽의 관계(官界)를 지배한 것이 홍무(洪武)·영락(永樂), 두 패왕(覇王)에 의한 철혈정치(鐵血政治)였다면, 그 당시 강호를 지배 한 것은 관산정을 맹주로 한 무림맹(武林盟)에 의한 덕치(德治)라고 할 수 있었다. 무왕(武王) 관산정. 원대(元代) 지정(至正) 3년(1343) 하북(河北) 진황도(秦皇島) 근교 평 범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 스물 여섯의 늦은 나이에 강호초출. 그로부 터 팔 년이 지난 뒤, 그의 앞에는 무왕이라는 칭호가 자연스럽게 따라 다니게 되었다. 천하는 넓고도 넓어 용호(龍虎) 같은 기인이사(奇人異士)의 수는 모 래알처럼 많다고 하지만, 그의 앞을 차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존재 하지 않았다. 혹자는 그를 일러 무왕이라고 했고, 혹자는 그를 일러 고 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고 했다. 연왕(燕王)이 금릉(金陵)을 치고 조카 혜제(惠帝)로부터 황위를 빼앗 았을 때, 숙청의 피바람은 강호에도 예외없이 불어닥쳤다. 그것은 세상 이 바뀔 때마다 항시 일어나는 통과의례였다. 강호인들, 특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세상과 줄이 닿아 있 던 사람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눈먼 칼날은 언제나 그들의 목 위에 있었고, 잔인한 귀들은 언제나 그들의 입 옆에 있었다. 공포 시대. 오죽했으면 잘려진 인두(人頭)를 오이에 비교해, 과만초(瓜蔓抄:넝쿨 을 잡아당겨 오이를 뽑음)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이때 지리멸렬하던 강호의 힘을 하나로 모은 사람이 바로 관산정이 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무림첩(武林帖)을 발송하였다. 관부의 탄 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강호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관산정의 이러한 시도는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강호 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빛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문 대파의 제자도, 녹 림(綠林)의 살인대도(殺人大盜)도, 강호의 물과 밥을 먹은 자들은 백 도·흑도의 구분없이 관산정의 일성(一聲)에 일제히 호응했다. 영락 1년(1403)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 신양(信陽) 북쪽 영원 평(寧原坪)에 모인 군웅들의 수는 삼만 명이 넘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강호인들이 한곳에 모인 적은 그날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없었다. 일백 마리의 소와 일백 마리의 말과 일백 마리의 양을 제물삼아 하 늘에 결맹(結盟)을 고한 뒤, 강남의 세 마인(魔人)과 강북의 네 패웅 (覇雄)이 강호를 대표하는 영수로 선출되었고, 그들 일곱 영수는 자신 들의 윗자리에 관산정을 올려놓았다. 사상 초유의 무림맹(武林盟)은 이 렇게 건설되었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위에는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나른 한 평화가 얹혀져 있었다. "대단한 인물이었군, 관산정이란 사람..."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단탈의 꿈은 타루가가 되어 아합족을 잘 이끌 어 나가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일백 남짓한 소부족. 하지만 그러한 소부족을 영도하는 일 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강호라는 거대한 사회 전체를 이십여 년 동안 별다른 잡음 없이 영도했다면, 진정으로 감탄할 만한 사람이리라. 장옥평은 단탈의 그런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을 계속했다. "그렇소!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가 너 무나 대단했다는 점에 있었소. 그가 죽은 뒤 그 이름을 대신할 존재가 없었던 거지요."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10 장 - 2 묘왕동주 천하를 뒤덮던 명성도, 만인이 앙모하던 덕망도, 그리고 인간의 한계 를 뛰어넘었다던 무공도, 무엇 하나 영원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관산 정에게 부여한 모든 덕목은, 하늘이 그의 생명을 거두는 순간 그 시한 (時限)을 맞이한 것이다. 한 세계를 지배해 오던 강력한 법칙이 무너졌을 때, 그 세계는 걷잡 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 들기 마련이다. 영락 말년(1424). 관산정이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대상(大 喪)도 끝나기 전인 이듬해 봄, 관산정의 유일한 후계자인 관명(關明)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첫 번째 혼돈이었다. 선덕(宣德) 1년(1426). 무림맹의 일곱 영수, 강남 삼마(三魔)와 강북 사패(四覇) 사이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주공산(無主空 山), 후계자가 없는 거대한 조직이 되어 버린 무림맹이었다. 그들의 눈 에 비친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먹이였을 테니, 어쩌면 이미 예정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두 번째 혼돈이었다. 선덕 3년(1428). 명분없이 흘러가던 무림맹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두 개의 세력으로 갈라졌다. 삼마가 이끄는 남마련(南魔聯)과 사패가 이끄 는 북정회(北正會). 이들은 강호를 남북으로 이분하여 사사건건 대립하 기 시작했다. 그것이 세 번째 혼돈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혼돈 뒤에는 거대한 혈우성풍(血雨腥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덕 3년부터 선덕 7년까지 5년 동안, 천하 강호를 피로 물들 인 남북대전(南北大戰)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강호의 분쟁에 전쟁이니 대전이니 하는 말 을 붙인다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강호인들끼리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분쟁에 불과했다. 그들이 제아무리 신기막측한 재주를 지 니고 있다 한들, 국가라는 거대한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이상 관 (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대규모 전투를 벌일 수는 없는 것 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쟁은 분쟁의 정도를 넘어 전쟁이 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치열했고, 또 그 규모 또한 컸다. 선덕 연간 (年間)에 벌어진 남북대전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루한 소모전... 정사대전(正邪對戰)의 양상은 5년을 이어졌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서 는 남마련과 북정회 모두 지니고 있던 힘을 탕진하고 폭양(曝陽) 아래 의 가축처럼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철옥이었다. "그렇다면 철옥이 그 전쟁을 종식시켰다는 말인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그들에게는 삼마와 사패를 모두 감당할 만 한 힘은 없었지만, 대치 국면을 흔들 수 있는 힘은 있었으니까... 그리 고 그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소. 일방적 으로 남마련만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오." 많은 사람들은 철옥과 북정회가 손을 잡은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모 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저울의 한쪽 끝에 묵직한 저울추가 올려졌다는 사실 이다. 저울의 팔은 급속도로 기울어 갔다. 결국 남마련은 일패도지(一敗塗 地)했고, 강호는 오랜 피비린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승리자의 대열에 동참한 철옥에게는 큼직한 논공행상(論功行 賞)이 준비되어 있었다. 남마련의 영역이었던 강남, 그 풍요로운 땅덩 어리가 그들의 관할 아래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철옥은... 바로 그런 곳이오." 장옥평의 목소리는 어딘지 맥이 풀린 것처럼 들렸다. 단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네, 두렵나?" 장옥평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그렇소." 단탈은 씨익 웃었다. 장옥평은 삼 년 전에도 저런 식이었다. 약간은 신중하고, 약간은 소 심한 성격. 혹독한 수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지만, 천성(天性)이란 여간해서 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족을 되찾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단탈의 물음에 장옥평은 고개를 들었다. 단탈은 과거에도 저런 이야기를 했다. 가족을 되찾는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정말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조 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이오!" 장옥평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단탈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 다. "그 결심만 갖고 있다면 됐어! 백 명이면 백 번 싸우면 되고, 만 명 이면 만 번 싸우면 그만이지." 어처구니없는 계산법이었지만, 장옥평으로 하여금 웃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하하! 틀렸소, 단탈! 우린 둘이니 그 절반씩만 싸워도 될 거요!" "그런가? 하하!" 단탈과 장옥평은 마주보며 웃었다. 웃는 모습으로만 본다면 이미 철 옥 따위는 그들의 발 아래 풍비박산나 버린 것 같았다. 이때 문이 열리고 석소용이 초옥 안으로 들어왔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들 있죠?" 석소용의 손에는 큼직한 나무 대접이 들려 있었다. "용매, 이제껏 어디 있었어?" 장옥평이 물었지만, 석소용은 대답하지 않고 단탈에게 다가갔다. 단탈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석소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발라요!" 석소용은 들고 있던 대접을 단탈에게 내밀었다. "머리통이 그 꼴인 게 보기 안 돼 짜 왔어요!" "머리... 통?" 단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도돌 도돌 짚이는 기분 나쁜 돌기들, 땀띠였다. "닥나무를 짠 거예요. 땀띠에 좋으니까 굳기 전에 어서 발라요." 석소용은 쌀쌀한, 하지만 약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용, 용매..." 장옥평은 감격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의 사매는 소요매(小妖魅)라 는 악명과는 달리 땀띠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탈은 장옥평처럼 감격해 하지 않았다. "됐어, 견딜 만해." 단탈이 거절하자 민망해진 것은 오히려 장옥평이었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단탈을 책망했다. "단탈, 닥나무를 빻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오? 저 손을 보시오!" 장옥평이 가리킨 석소용의 손가락은 검붉은 피멍이 맺혀 있었다. "연약한 손이 저 꼴이 되면서까지 마련해 온 것인데, 그렇게 매몰차 게 거절할 수 있소?" 장옥평의 책망이 준열했던 탓인지, 아니면 석소용의 손가락이 애처 로워 보인 탓인지, 단탈은 아무런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석소용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맺혔다. "제가 발라 드리죠." 석소용은 단탈의 손에서 대접을 빼앗아, 제 손으로 걸쭉한 즙을 퍼 다가 단탈의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단탈의 머리통은 다른 사람들보다 큰 편이었다. 하지만 석소용이 짜 온 닥나무 즙은 그 큰 머리통에 온통 처바르고 남을 정도로 많았다. 손바닥으로 진흙을 때릴 때 울릴 법한 철썩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초 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단탈의 굵은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약 바르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단탈은 두 눈을 굳게 감아 버렸다. 그의 거무틱틱한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장옥평은 그것을 쑥스러 움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일 아침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석소용은 두어 번 손을 떨쳐 엉겨 붙어 있던 걸쭉한 액체를 털어 내 며 말했다. 듣고 있는 것일까? 단탈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3 탁자 한복판에는 하나의 두루마리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전운리는 한껏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서너 차례 옆으로 흔들었 다. 오랜 시간 동안 굳어 있던 관절이 부딪치며 두둑, 하는 마찰음이 울려 나왔다. 전운리는 두루마리를 정성껏 말아 탁자 한켠으로 밀어 놓았다. 그곳 에는 그것과 같은 모양의 두루마리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모두 열여섯 권, 형산의 중요 봉우리들의 산세(山勢)가 상세히 그려진 두루 마리들이었다. "유적(劉籍)입니다." 방문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오게." 전운리가 대답하자, 방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 매가 인상적인 삼십대 장한, 유적이었다. "어찌 되었나?" "과연 그녀는 장사(長沙)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전운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집한 정보가 사실 과 일치했을 때 무한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서찰을 전달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겠지?" "예! 분부대로 어김없이 거행했습니다!" 유적은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고했네. 난 자네에게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어." 전운리는 유적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일이 출정이라던데... 소생이 배행(陪行)할까요?" 유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운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는 따로 수고해 줄 일이 있어." 유적은 의문을 품은 눈으로 전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형산에 도착하면, 그녀를 내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게. 아 마도 그곳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을 테니까..." 전운리는 수하가 아닌 친구를 대하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내장이라도 뒤집어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하지만 전운리는 유적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유적을 장사로 보내 가면서까지, 전운리가 진정으로 만나고자 한 사 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보다 좀더 큰 권한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대사형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제 10 장 - 3 묘왕동주 * * * 퐁! 어둠이 짙게 깔린 개울물 위에 작은 동심원(同心圓)들이 번져 나갔 다. "뭘 하나?" 등뒤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함께 번(番)을 서는 동료의 것이었다. 그 것을 잘 알고 있는 철옥 호남지부 소속 철한대(鐵漢隊)의 일원인 귀무 심(貴霧深)은 별로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별거 아닐세. 던진 돌멩이가 개울에 빠진 모양이야." "그래? 하긴, 좀이 쑤시긴 나도 마찬가질세! 내일 출정할 사람들에게 보초를 세우다니, 번 짜는 놈들 머릿속에는 똥만 잔뜩 차 있는 모양이 야!" 귀무심과 같은 계급인 동개복(童開福)은 구시렁거리며 주위의 돌멩 이 하나를 집어 개울을 향해 던졌다. 퐁! 조금 전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파장이 개울물 위에 잠시 동안 머물 다가 사라졌다. "제길! 이놈들은 왜 이리 극성이람!" 동개복은 목덜미를 제 손바닥으로 철썩, 때리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숲속, 그것도 물가이니 만큼 모기들이 유달리 많았던 탓이다. 개울물은 그러한 인간들에게는 전혀 관심없다는 듯 밤 속을 유유히 흘러만 갔다. 귀무심은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개울물을 바라보았다. 개울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은 새끼손가락 정도 크기의 원통 이었다. 원통의 재질은 무쇠였지만, 무슨 조화인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한동안 개울물을 따라 흘러가던 원통은 갑자기 빛을 내뿜기 시작했 다. 그리 밝지 않은 빛이었지만,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 속에서는 누 구의 눈에도 쉽게 뜨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눈이 사람보다 몇 배 더 발달했다는 조류임에랴.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원통을 향해 활강을 시작한 것은, 부드럽게 휘어진 큼직한 주둥이와 알록달록한 깃털을 지닌,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모양의 새였다. 수면을 차고 솟구쳐 오르는 갈고리 같은 새의 발톱에는 어느새 빛을 토해 내는 원통이 걸려 있었다. 휘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새는 개울물 위를 한 바퀴 맴돈 뒤 휘파람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 해 날아갔다. 새가 내린 곳은 양젖처럼 뽀얀 윤기가 감도는 손목. 그 손목만큼이 나 뽀얀 손가락이 새의 발톱에서 원통을 빼냈다. 원통의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저간소맥(猪間燒麥:말아 서 만든 과자)처럼 돌돌 말린 종이였다. <명일(明日) 아침, 철한대(鐵漢隊)·화룡대(火龍隊) 외 일반무사 다 수, 호남지부 출발. 총지휘 이교. 목적지 형산파. -야앵무(夜鸚鵡) 일호(一號).> "철한대와 화룡대가 함께? 거기에다가 이교까지?" 손목의 임자는 화려한 채의(彩衣)를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적힌 내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종이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종이를 보낸 사람이 결코 잘못된 정보를 전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종이를 입 속에 집어넣었다. "형산파... 그곳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종이를 우물거리며 혼자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술은, 피를 머금 은 듯한 붉은색이었다. * * * 콰아아-! 높이가 삼 장도 채 안 되는 폭포였지만 물소리만은 제법 장했다. 떨어지는 물줄기로부터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 약한 경사를 이 루며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는 석삼도가 앉아 있었다. 폭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이기에 물방울이 튈 법도 했지 만, 묘한 경사 탓인지 바위 위에는 물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석삼도가 안 것은 십 년도 훨씬 더 이전의 일, 그는 가 끔 잣나무 아래를 떠나 이곳에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석삼도는 눈을 떴다. 그가 감지할 수 있는 세계 속으로 누군가가 들 어온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시 그자였다. 석삼도는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속세에서 그의 유일무이한 친구였던 약흠, 그의 제자라는 묘족 사내... 그자의 기질은 정말로 특이했다. 수풀 속에 숨어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흉폭함, 똬리를 틀며 독아(毒牙)를 드러내는 독사의 위험함... 하지만 어떠한 맹수도, 또 어떠한 독사도 그자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 지는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화끈거리는 머리를 물속에 담그려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단탈은 짜릿한 느낌이 척추를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냥꾼이 었다. 사냥꾼은 관찰자이지 관찰의 대상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생각에 앞서 몸뚱이가 움직였다. '엇?' 석삼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바라보고 있던 단탈이 허깨비 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그 부근을 둘러보았다. 단 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석삼도는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단탈이 어느 곳으로 몸을 감췄든, 그곳이 그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은 이상 그는 단탈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비록 형체는 감출 수 있지만, 기질만은 감출 수 없다. 그가 단탈을 놓친 것은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시각만으로 찾으려 했기 때문 이다. 실책을 깨닫자 마음이 다시 명경(明鏡)처럼 가라앉았다. 석삼도는 폭 포 옆 바위 뒤에 도사리고 있는 '기질'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날세, 나오게나." 석삼도는 그쪽을 향해 말했다. 잠시 후 바위 옆으로 단탈의 모습이 나타났다. "몰래 볼 생각은 없었네." 단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지만 말고 이리로 올라오게. 가끔 쉬러 오는 곳인데, 관망(觀望)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네." 물끄러미 석삼도를 올려다보던 단탈은 훌쩍 몸을 날렸다. 물가의 이 끼 낀 바위들을 두어 번 디디며 석삼도가 앉은 곳까지 올라오는 단탈 의 몸놀림은, 중원에서 일컫는 소위 신법(身法)과는 다른 부류의 것이 었다. 정해진 틀이 없는 몸놀림... 감각과 신경이 잘 발달된 동물의 몸 놀림이었다. "약 형은 어떻게 지내는가?" 여명으로 점점 분명해지는 산줄기를 바라보던 석삼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단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대답을 기다리던 석삼도가 다시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할 정도인가?" 단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가?" 단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아닐 거요." '아마도'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그가 약흠의 곁을 떠날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석삼도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에게선 과거 약 형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기운이 느껴지네. 자 네는 그가 지니고 있던 진력(眞力)을 물려받았나?" "그렇소." 단탈의 대답은 짤막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놀라운 것이 었다. 자신의 내공을 남에게 전해 준다는 기사(奇事)에 대해서는 석삼도 또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개정대법(開頂大法)이라 통칭되는 이런 수법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훨씬 높았다. 게다가 성공한다 고 한들 체외로부터 유입된 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스스로 내공을 단련하는 것만큼의 수련이 필요했다. 그런데 내공도 아닌 독공을 남에게 전달해 주다니! 그것도 면역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접하기만 해도 중독되어 죽어버릴 산독자 약흠의 독공을! "자네는 약 형에게 큰 빚을 졌군." 석삼도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공이 사라진 약흠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탈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나는 그와 거래를 한 것뿐이오." "거래?" "그렇소. 그는 내게 한 가지 일을 해달라고 제안했소." 나직했지만 당당한 목소리였다. 석삼도는 문득 약흠이 한 제안에 대 해 호기심을 느꼈다. "그의 제안이 뭔가?" "한 사람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소." 단탈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가?" "이세명(李世明)!" 석삼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 순간뿐이었다. "역시... 그였나?" 이번에는 단탈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에 대해 알고 있소?" "약 형이 그에 대해 뭐라 말하던가?" 석삼도는 오히려 단탈에게 반문했다. "별얘기 없었소. 단지 약 노인과 함께 삼자(三子)의 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삼자라... 참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군." 석삼도의 목소리는 왠지 아련하게 들렸다. "나와 약 형, 그리고 이세명... 강호인들은 우리 셋을 일러 삼자라 불 렀지." 일왕삼자삼마사패(一王三子三魔四覇)로 대변되는 신주십일존(神州十 一尊). 그 중 삼자는 어느 문파에도 적(籍)을 두지 않고 강호를 떠돌며 나 름대로의 도(道)를 좇던 기인들이었다. 검에 모든 것을 바친 무숙자 석삼도. 독에 모든 것을 바친 산독자 약흠. 그리고 의술을 통한 구제(救濟)에 모든 것을 바친 성심자(聖心子) 이세명. 그들은 신주십일존의 나머지 여덟 명과는 달리 세속의 명리에 초탈 했다.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권력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도를 완성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세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췄 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 모두 자신의 도를 위해 세상을 버린 것이라 고. "그런데 거기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네. 물론 나는 십여 년 전 강호 생활을 청산하고 이 운문곡으로 들어왔지.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달랐어. 마지막으로 만난 날 약 형이 말하더군. 이세명과 함께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을 해보겠노라고. 그게 끝이었어. 들리는 말에 의 하면 약 형도, 그리고 이세명도 그날 이후 종적을 감췄다고 하더군." 석삼도로서는 참으로 긴 이야기였다. 은거를 시작한 이후, 이처럼 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약 형이 이세명을 죽여 달라고 했다니... 내 걱정이 맞았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던 게야." 석삼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단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곤란하군." "...?" "이세명을 죽이는 일 말이오. 어디 있는지 알아야 죽일 게 아니오?" 석삼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저 친구는 마치 이세명 죽이는 일이 감 꼭지 따는 것처럼 쉬운 줄 알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능력으로 본다면 삼자라는 이름이 삼마와 사패보다 윗자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나 있는 것일까? "옥평과 함께 하게, 무슨 일이든..." 이것이 그가 단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였다. 장옥평에게는 나이답지 않은 인내심이 있었다. 무슨 일이든 단탈과 장옥평이 함께한다면, 그들의 성취로 미루어 큰 낭패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 옥평을 데리고 당장 하산해도 좋소?" 단탈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석삼도는 그 안쪽에 배인 조급 함을 읽을 수 있었다. 석삼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만 더 묵을 수는 없겠나?" 단탈은 석삼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묻고 있었다. "늙은이의 부탁이라 여기고 들어 주길 바라네." 단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바위 아 래로 뛰어내렸다. "자네, 지금 어딜 가나?" 설마 이대로 떠나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단탈이 벌인 행동은 석삼도에게 있어서 전혀 의외로운 것이 었다. 푸우! 단탈은 한참 동안 물속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빼내며 크게 숨을 내 쉬었다. 지금까지 석삼도와 멀쩡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 덕분이었다. 단탈은 손을 내밀어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지 독한 냄새와 쓰라린 기분만은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조그만 계집애가 발라 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그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분명 했다. 마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녀석이 그런 간교한 수작을 부리다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단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단탈은 고개를 들었다. 푸른빛이 짙어 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석삼도의 얼굴이 있었다. 석삼도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더 묵으라는 것일까? 문득, 단탈은 저녁 나절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박한을 떠올렸다. 혹시 석삼도의 제의는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 면, 그 또한 함께 다니라는 뜻일까? 생각에 잠겨 있던 단탈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깊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야 석삼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다 치더라도, 장옥평만은 하늘 같은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리고 단탈의 중원행에 있어서 장옥평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한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장옥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좋소!" 단탈은 바위 위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 * * 석소용이 가져 온 뿌연 액체의 성분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단탈은 궁금했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공자가 말한 군자의 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 던 것일까? 조그만 계집애와 다퉈 득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 을 수 있었던 단탈이었다. 마치 정으로 새겨 놓은 것처럼 머리 거죽과 머릿속에 끈덕지게 늘어 붙어 있던 그 빌어먹을 냄새, 단탈은 다음날 아침 반찬으로 나온 나물 볶음으로부터 맡을 수 있었다. "용매! 나물에 마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거 아냐?" 빈 그릇을 가지러 온 석소용에게 장옥평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건 넨 투정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1 장 철한대(鐵漢隊) 묘왕동주 2 권 十一章 철한대(鐵漢隊) 1 머리에는 검은 윤기가 흐르는 철모. 어깨 위에는 목까지 가려 주는 견갑(肩甲). 가슴과 배, 등, 양쪽 옆구리에는 각각 독립된 채 움직이는 다섯 개의 철판. 왼팔 하박(下膊)에는 능형(菱形:마름모)의 철순(鐵盾). 오른손에는 일 장 길이의 장창(長槍). 이것이 철옥이 자랑하는 강철 부대, 철한대(鐵漢隊)의 복장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소(蘇) 장문인께서 협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을 맺고 있는 사내가 전운리임을 소경춘(蘇慶春)이 안 것은, 호법 육열(陸熱)의 귀띔 때문이었다. '제기랄...' 형산파의 제칠대 장문인 소경춘은 내심 이를 갈았다. 무미은호 전운리라면 그 또한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난 탓에 꼬리가 달리지 않았지만[無尾], 꼬리가 달린 어떤 여우보다도 몇 배는 더 교활하다는 놈이 바로 전운리였다. "허허! 아무래도 전 대협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듯하군요. 전 대협께서 말씀하신 그런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는, 저로서는 금시초문입니다." 대협이라니! 교활한 정보상인(情報商人)에다가, 더러운 수적 두목으로 소문난 전운리가 대협이라니! 하지만 소경춘은 분명 대협이라고 말했다. 물론 소경춘은 한 문파를 이끌고 나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가 전운리에게 예도(禮度)를 갖춘 까닭은 그 이유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운리의 뒤쪽, 사람 키를 훨씬 넘는 장창을 들고 도열해 있는 시커먼 철갑인들... 그들이 철한대라는 것쯤은 강남에 사는 사람이라면 굳이 강호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홉 명이 모여 한 조(組)를 이루고, 아홉 조가 모여 한 대(隊)를 이룬다. 그들 팔십일 명이 나서면 웬만한 방파 하나는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신화적인 전투 부대가 바로 철한대였다. 그런 그들의 위용(威容)은 <예기(禮記)> 못지않게 뛰어난 예법 스승이 될 수 있었으니, 지금 소경춘이 그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렇군요. 하지만..." 전운리는 말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길쭉한 눈이 소경춘 뒤에 서 있는 형산파 문도들의 얼굴 위를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저분들께서는 혹시 그자에 대해 아실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이렇게 장문인의 협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대체 어떻게 협조하라는 말씀인지...?" 전운리는 빙긋 웃었다. "형산파의 전(全)문도를 이 자리에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소경춘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전문도...?" "그렇습니다." "지금 제게 명령하시는 겁니까?" 모멸감을 느낀 탓인지 소경춘의 어조는 아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명령이라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어디까지나 협조의 차원에서..."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던 전운리는 하던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전운리! 감히 누구 앞에서 혓바닥 장난을 하고 있는 거냐!" 소경춘의 옆에 서 있던 육열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성격은 이름만큼이나 화급한 편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터뜨리고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사리를 따지지 않는 주먹, 불산권(不算拳)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한번 눈에서 불똥이 튀면 철한대가 아니라 철한대 할아버지가 와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육열이었다. 전운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대화 도중에 끼여드는 것은 매우! 매우 안 좋은 습관이오."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다. 드디어 육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건방진 새끼!" 육열은 앞으로 내달으며 오른주먹을 힘차게 내질렀다. 형산파가 자랑하는 개산권(開山拳)이 세찬 권풍을 동반한 채 전운리의 면문을 향해 밀려나갔다. 육열의 주먹과 전운리와의 사이는 일 장 남짓. 비록 개산권의 장점이 쾌속함보다는 묵직함에 있다고 하지만, 일 장이라면 그런 것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육열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육열의 믿음은 전운리의 머리 위로 검은 덩어리 하나가 솟구쳐 오른 순간, 무참히 허물어졌다. "물-러-가-라-"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공간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음절이 분명치 않은 목소리... 그와 함께 검은 덩어리는 육열과 전운리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펑! "어억?" 육열의 권력(拳力)이 검은 덩어리를 후려친 것과, 육열의 몸이 뒤로 튕겨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육열은 서너 걸음이나 물러선 후에야 간신히 신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어깨뼈가 어긋나 버렸는지 오른팔을 한 치도 치켜 들 수 없었다. 설사 소경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이렇게 쉽게 격퇴시키지는 못할 텐데... 육열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튕겨 낸 존재를 바라보았다.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검은 덩어리...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분명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로부터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어떠한 느낌도 풍기지 않았다. 순간 육열은 '그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얼굴도 없다. 이름도 없다.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몽땅 거세된 채 오직 살인만을 위해 사육된다는 철옥 호남지부의 세 마리 악마, 삼풍(三風). 그 중 하나인 흑풍(黑風)이 바로 '그것'이었다. 육열은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수고를 끼쳤구려." 전운리는 검은 덩어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검은 덩어리는 가볍게 흔들거린 뒤, 전운리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요?" 전운리의 온화한 얼굴이 다시 소경춘을 향했다. "문도들만 소집해 주신다면 별일없이 넘어갈 것을, 헛된 자존심으로 문제를 확대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신호라도 있었던 것일까? 쿵! 팔십일 명의 철한대는 일제히 한걸음을 내디디며, 장창으로 전면을 겨누었다. 철한대에다가 흑풍까지... 이 정도면 군소 방파에 불과한 형산파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소경춘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2 십여 년이나 본거지로 삼았던 민강에서 달아날 때, 전운리는 기필코 힘을 얻어 아미파의 기둥 뿌리 하나 남겨 놓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미파를 어쩔 수 있는 힘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아미파의 뒤에는 거대한 힘이 버티고 있었다. 강북사패(江北四覇)의 하나인 하북(河北) 거상련(車商聯), 그 총 수이자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인 황금왕(黃金王)이 사천의 상권 확장을 위해 후원하고 있는 곳이 바로 아미파였다. 일개 수적(水賊)이, 그것도 패군지장(敗軍之將)이 어찌 상대할 수 있을까? 만약 전운리가 정말로 '일개 수적'에 불과했다면, 그의 울분은 단순한 울분으로만 끝나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운리에게는 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보통(情報通)으로서, 정보거래상들의 결사(結社)인 황서계(黃書契)에서도 수완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드디어 그는 복수를 위해 정보통으로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운리는 당금 천하에서 아미파를 상대할 수 있는 세력에 관해 검토해 보았다. 이것은 꼭 그 같은 정보통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관부의 힘을 등에 업지 않은 이상, 강호에서 아미파를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이란 몇 군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운리는 그들 중 강북사패들을 제외시켰다. 그들은 과거 북정회라는 이름 아래 황금왕과 한 전선(戰線)에 선 경력이 있던 맹우들. 비록 영원한 우방이 없는 곳이 강호라지만, 아직까지는 동맹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그들 사이에는 단 한차례의 분쟁도 없었던 것이다. 남은 세력은 단 한곳뿐, 강남을 지배하는 철옥이었다. 이제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철옥의 힘을 얻느냐에 있었다. 그 방법을 고심하느라 밤잠을 설치던 전운리는 어느 날, 새로운 정보 하나를 입수하게 되었다. 묘강의 거대 부족인 을온족의 멸망이 바로 그것이었다. 을온족! 전운리는 자신의 머리를 떼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왜 삼 년 전 산동장가에서 벌어진 일을 잊고 있었던가? 사위와 며느리에 의해 자행된 처참한 골육상쟁(骨肉相爭)... 그때 장씨의 적통(嫡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공자 장옥평이 달아난 곳이 바로 묘강이었고, 을온족은 겉으로는 잘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철옥에게 개처럼 꼬리를 흔들던 놈들이었다. 그리고 장씨세가의 사위와 며느리는 바로 철옥의 사람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1 장 - 1 묘왕동주 2 권 드디어 전운리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전운리는 즉시 묘강으로 갔다. 을온족은 처참하게 박살나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아이들. 그들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검은 표범의 악마가 휩쓸고 지나갔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전운리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을온족의 멸망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한 늙은 전사를 찾아 낸 것이다. 그로부터 얻어 낸 정보는 믿기 힘든 것이었다. -한 사람, 단 한 사람이었소! 검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쓴 자였는데, 그는 여자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갔소. 단 한 사람이, 묘강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족인 을온족을 멸망시켰다고? 설마 신주십일존(神州十一尊) 중 하나라도 왔던 것일까? 하지만 전운리는 그 말을 믿었다. 그가 조사한 모든 정황이 그 말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말한 대가로 늙은 전사에게 돌아간 것은 차가운 한 자루의 비수였다. 전운리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정보를 독점할 필요가 있었다. 이어 그는 검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쓰고 동쪽으로 떠난 자의 종적을 수소문했다. 녹림(綠林)에서 전운리의 지명도는 그런대로 쓸 만한 것이어서, 오래지 않아 그 자가 남령(南嶺) 타호관(打虎關)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전운리는 심복들과 함께 그자를 추격했다. 그 와중에서 전운리는 그자가 형산파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남은 것은 이 정보를 잘 포장해서 철옥으로 선물하는 일뿐이었다. 철옥은 답례를 잊지 않았다. 전운리는 철옥 호남지부의 참모(參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만족할 수 없었지만... * * * '검은 표범 가죽'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순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옆에 서 있던 노인의 눈치를 살피고 입을 다무는 광경을 전운리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자, 소생이 말한 자를 보신 분이 계시면, 주저치 말고 일러 주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전운리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런 종류의 일이란 어차피 피를 보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는 법이라는 것을 전운리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으십니까?" 역시 조용했다. 전운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부득불 귀파(貴派)에 실례를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군요." 이어 전운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누군가에게 전음(傳音)을 보낸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전음을 보냈는지는 금방 밝혀졌다. 흐으으- 전운리가 쓰고 있던 유생건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형산파 문도들을 향해 몰아쳐 가는 흑색의 돌풍. 펑! 퍼펑! 이 돌연한 사태에 놀란 형산파 문도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둔탁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엇인가를 향해 엉겁결에 손을 내민 문도들이, 그 무엇인가로부터 쏟아져 나온 거센 힘에 의해 격퇴되는 소리였다. 이어 한 사람의 몸이 번쩍 들려 전운리를 향해 날아갔다. 아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던 청년이었다. "이놈!" 돌연 한 소리의 창노한 호통이 터졌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진 날카로운 금속성. 깍! 까가각-! 중인들은 귀청을 송곳으로 후벼파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소리의 진원지로부터 황급히 물러섰다. '낭패로다!' 석오랑은 어느새 자신의 애병인 천애검(天涯劍)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검은 덩어리는 흑풍이었고, 방금 전 흑풍에 의해 던져진 사람은 그의 제자인 곡풍(曲豊)이었다. 너무도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제자를 적도들의 손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자-가- 맞-소-?" 흑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웅웅거리는 목소리. "맞습니다." 전운리의 대답은 무척이나 짤막했다. 하지만 그 짤막한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풍의 불분명한 형체는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석오랑을 향해 날아들었다. "갈!" 석오랑은 하방으로 늘어뜨렸던 검을 비틀어 허공을 향해 비스듬히 올려 쳤다. 깡! 다시 한번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흑풍과 석오랑은 똑같이 한걸음씩 물러섰다. "호오! 연세답지 않은 대단한 신위(神威)시오!" 비아냥거림 같은 전운리의 탄성을 들으며, 석오랑은 천애검을 들어 흑풍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왼발을 가볍게 들어 오른쪽 무릎 뒤편에 가져다대는 자세는, 그가 평생토록 수련한 천애십팔검(天涯十八劍)의 기수식이었다. 눈과 검극(劍極)이 일직선 위에 놓이며,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도 투명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흐으으- 흑풍의 주위를 감돌던 검은 구름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멈추시오! 이게 무슨 짓들이오!" 이때 형산파 장문인인 소경춘이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석 장로! 어서 검을 거두시오!" 곡풍이 전운리에게 넘어간 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소경춘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은 표범 가죽을 걸친 자를 곡풍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곡풍과 석오랑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오랑으로서는 낭패감을 감출 수 없었다. 흐으으- 흑풍 주변의 검은 구름이 다시 한번 출렁거렸다. "늙-은-이-, 제-법-이-다-" 음산하게 깔리는 기이한 여운을 남기며 흑풍은 스르르 뒤로 미끄러졌다. "아무렴요, 쓸데없는 싸움이란 서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지요." 전운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손에는 축 늘어진 곡풍이 잡혀 있었다. "그 아이는 석 장로에게는 소중한 제자라오. 석 장로가 성급하게 발검(拔劍)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니, 전 대협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소경춘은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거듭 조아리고 있었다. 전운리는 황감(惶感)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귀파의 제자분께 이런 무례를 범하는 소생을 용서하십시오. 제자분께서 소생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해 주시기만 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마음 푹 놓으시길." 전운리의 사과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한참 동안 전운리를 노려보던 석오랑은 일단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 * * 곡풍은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쿨룩! 쿨룩! 정신을 차린 뒤 곡풍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려 가슴에 가득 차 있던 탁한 기운을 뱉어 내는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쭉하게 매달린 침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곡풍이 정신을 잃은 것은 쇠망치처럼 묵직한 무엇인가가 가슴을 후려쳤을 때였다. 침 속에 들어 있는 붉은 덩어리로 미루어, 아마도 그때 받은 충격으로 기혈이 뒤엉킨 모양이었다. "정신이 드시오?" 머리 위에서 들린 은근한 목소리에 곡풍은 고개를 들었다. 기침 때문에 눈물이 맺힌 망막 속으로 전운리의 보기 좋은 미소가 들어왔다. 그 순간, 곡풍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 이 환단을 드시오. 내상을 치유하는 데 효험이 있는 약이외다." 전운리의 손바닥 위에는 손톱만한 붉은 환단이 놓여 있었다. 곡풍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부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철석같이 믿던 사부는 소경춘에게 가려진 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허어, 양약(良藥)이라는데 뭘 망설이시오?" 다시 들려 온 전운리의 목소리에 곡풍은 화들짝 놀랐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환단을 받아 입에 넣었다. 환단은 금세 녹아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자, 이제 소생이 한 가지 묻겠소. 아무쪼록 소협께서 거짓없이 답변해 주실 것이라 믿고 싶구려." "무, 무엇을...?" "아까 소생이 말했던 그 괴인 말이오. 소협께서는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지요?" 곡풍은 아까 접했던 사부 석오랑의 매서운 눈초리를 떠올렸다. 그의 사부는 그가 대답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사부에 대한 공경심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저, 저는 대협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전운리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렇소? 소협의 대답이 사실이길 바라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1 장 - 2 묘왕동주 2 권 무슨 뜻일까? 곡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운리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뱃속으로부터 솟구치는 극렬한 통증! 바늘을 쌈지째 먹기 전에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아픔... "으아악-!" 곡풍은 배를 움켜쥐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어? 왜 그러시오?" 전운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곡풍을 내려다보았다. "소협께서는 혹시 뭔가를 숨기시는 게 아니오? 정심단(正心丹)은 복용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독약으로 변한다고 하던데..." 대답할 겨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악-! 으- 으아아-!" 곡풍은 스스로 담력이 있다고 믿어 오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당하는 무시무시한 고통 앞에는, 그의 담력 따위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쯧쯧!" 전운리는 혀를 차며 곡풍의 혈도 몇 군데를 짚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멎었다. "폐혈법(閉穴法)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정심단은 소협의 오장(五臟)을 녹일 때까지 독을 우려 낼 거요." 곡풍은 겁먹은 눈초리로 다시 사부를 찾았다. 하지만 사부는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마치 제자가 당하는 고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그래도 곡풍은 사부를 배신할 수 없었다. "난, 난 몰라! 모른단 말이야!" 곡풍의 발악적인 외침에, 전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악-!" 혈도가 풀어지며 다시 시작된 고통. 곡풍은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땅바닥 위에서 버둥거리며, 제 손으로 배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옷이 찢어지고, 드러나는 맨살갗, 그 위로 손톱이 지나갈 때마다 맺혀지는 선연한 핏방울... "악랄한 놈들!" 석오랑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쩌렁쩌렁한 노갈과 함께 땅을 박차는 순간, 그의 노구(老軀)는 소경춘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어 전운리를 향해 쏘아가고 있었다. 후르릉-! 전운리의 뒤쪽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던 흑풍이 또 한번 그 공포스러운 형체를 드러냈다. 이번에는 조금 전 가리지 못했던 승부를 결판내려는 듯, 흑풍은 지독한 살기를 뿜어 내며 허공에 떠 있는 석오랑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석오랑의 목표는 흑풍이 아니었다. 그는 흑풍이 등장할 것을 예상한 듯, 소경춘의 머리 위를 타넘기가 무섭게 천근추(千斤墜)의 공력을 일으켜 땅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일순 상대를 잃어버린 흑풍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을 때에는, 석오랑은 바닥을 구르듯이 몸을 날리며 그의 아래를 통과하고 있었다. "갈- 수- 없-다-!" 맹수의 울부짖음과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석오랑의 등뒤로 시커먼 장력이 퍼부어졌다. 석오랑은 앞으로 내닫는 몸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허리만을 틀어 밀려오는 장력을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펑! 시커먼 장력과 석오랑의 좌장이 얽히는 순간, 그의 몸은 달려가는 방향으로 더욱 빨리 밀려나갔다. 그의 시선 속에 전운리와 곡풍의 모습이 담겼다. 새파란 섬광이 그의 허리춤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허억!" 자개봉을 오른 이래, 처음으로 전운리의 얼굴에서 느긋한 신색이 사라졌다. 눈을 찌를 듯이 날아드는 예리한 검기 앞에서도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운리는 체면이고 뭐고 돌볼 겨를 없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싸-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짙푸른 헝겊 조각이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전운리가 쓰고 있던 유생건의 일부분이 석오랑의 검에 의해 잘려나간 것이다. 석오랑에게 있어서 전운리를 베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고통에 빠진 제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는 백로횡강(白鷺橫江)의 일검으로 전운리를 물러나게 만든 뒤, 급히 손을 내밀어 곡풍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생-쥐- 같-은- 늙-은-이-!" 꽈릉- 곡풍이 버둥거리던 땅이 거무죽죽한 속살을 드러내며 뒤집어졌다. 분노한 흑풍의 장력에 격중된 것이다. 곡풍을 집어 든 석오랑의 손길이 조금만 늦었던들, 곡풍은 땅거 죽처럼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유령처럼 허공에 뜬 채 퍼부어지는 흑풍의 공세는 소나기처럼 쉴새없었다. 석오랑은 곡풍을 등뒤로 돌린 채 수중의 천애검을 요란하게 떨쳤다. 검끝으로부터 잠사(蠶絲)처럼 뽑혀 나오는 희뿌연 기운... 도교팔선(道敎八仙)의 하나인 한상자(韓湘子)가 검을 떨치면 귀신도 접근할 수 없었다고 했던가! 천애십팔검 중 엄밀함을 장점으로 삼는 상자종횡(湘子縱橫)의 검세가 흑풍의 공세에 정면으로 마주쳐 갔다. 까가가-! 소름 끼치는 또 한번의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하나는 땅위에서, 다른 하나는 허공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석오랑의 넓은 소맷자락이 공처럼 부풀어오르고, 흑풍의 검은 구름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음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으-와-아-아-" 고막을 찢는 듯한 굉량한 고함 소리와 함께 흑풍을 감싸고 있던 검은 구름이 갑절의 크기로 불어났다. '이게... 무슨...?' 석오랑은 눈을 부릅떴다. 검신(劍身)을 통해 거세무비한 암경(暗勁)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석오랑이 육십 평생 겪어 온 일반적인 내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차갑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다. 단지 사이(邪異)로울 뿐이었다. '마기(魔氣)!' 마기란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석오랑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앗!" 석오랑은 검을 힘차게 내리그어 몸을 침범하는 끈끈한 기운을 잘라 버리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뒤로 날아갔다.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곡풍의 뒷덜미가 쥐여 있었다. 하지만 석오랑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관천(貫天)-!" 우렁찬 호령과 함께 세 자루의 창이 허공에 떠오른 석오랑에게 꿰어 왔다. "헉!" 석오랑은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세 자루의 창은 그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허공의 한 점에서 부딪친 뒤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세 개의 창극(槍極)이 한 점에서 부딪칠 수 있다는 것은 창을 다루는 세 사람의 호흡이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대변해주는 증거였다. "참인(斬人)-!" 다른 세 자루의 창이 땅위로 떨어져 내리는 석오랑을 후려쳤다. 그것들은 앞서의 창과는 달리, 반달 모양의 날이 부착돼 베는 기능이 강화된 기형창(奇形槍)이었다. 석오랑은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수법으로 천애검을 마구 휘둘렀다. 비록 팔방풍우는 좋은 수비식이었지만, 지금처럼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그 진가를 십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의 수중에는 기식이 엄엄한 곡풍이 들려 있지 않은가? 석오랑의 왼쪽 옆구리가 쩍 갈라졌다. 얼음이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섬뜩한 통증을 느끼며, 석오랑은 한쪽 무릎을 풀썩 꿇고 말았다. 치차(齒車)처럼 맞물린 창들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열지(裂地)-!" 다시 세 자루의 창이 눈먼 봉사의 지팡이질처럼 지면을 찔러 왔다. 창이 한번 꽂힐 때마다 어린아이 팔뚝만한 구멍이 뻥뻥 뚫렸다. 석오랑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석오랑을 구해 준 것은 그가 혐오해 마지않던 '여우'였다. "그만!" 그 한마디에 장창의 공격이 우뚝 멈췄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박제같이 굳어 버린 세상을 다시 움직인 것은 어디선가 들려 온 선명한 박수 소리였다. 짝짝짝! 봄바람에 얼음이 녹듯, 세상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도, 공기도...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박수 소리가 울린 곳으로 모아졌다. "형산파에는 장문인을 능가하는 검선생(劍先生)이 한 분 있다더니, 귀공께서 바로 그 석오랑, 석 노야(石老爺)이시군요." 어느새인가 전운리는 아까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으음..." 석오랑은 무겁게 신음했다. 곁에 누운 곡풍은 이미 눈을 까뒤집고 혼절해 있었다. 그리고 번쩍 들려진 채 그들을 노리는 아홉 개의 장창... 석오랑은 형산파 문도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소경춘을 위시한 모든 문도들은 사색이 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사문의 어른이 이런 꼴을 당해도 나설 수 없는 문도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1 장 - 3 묘왕동주 2 권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전운리의 말처럼 형산파 전체를 통틀어 석오랑을 능가할 고수는 없었다. 그런 석오랑조차 흑풍 하나, 그리고 철한대 한 조를 감당할 수 없었으니, 허약한 다른 문도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 석오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운리... 네가 이겼다." 움켜쥐고 있던 천애검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3 아침 햇살은 너무나도 맑아 금방이라도 옥경(玉磬)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만 같았다. 아침 햇살을 비스듬히 받으며 석삼도는 잣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단탈이 나흘 동안 보아 온 석삼도는 어디서나 흔히 눈에 띄는 돌멩이 같은 존재였다. 나무 아래 앉아 있어도 어울렸고, 바위 위에 앉아 있어도 어울렸다. 밤이면 밤의 일부가 되었고 아침이면 아침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이 석삼도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석삼도에게는 다른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어려 있었다. 엷은 빛무리 같은 것이 주변을 아련하게 감싸고 있었고, 살갗은 유난히도 투명해 보였다. '햇살 때문이겠지.' 단탈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그런 정도로 넘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넷... 다섯...' 단탈은 숫자를 세고 있었다. 장옥평이 석삼도에게 올리고 있는 절의 횟수였다. 장옥평은 아래 위로 백색 무복을 정갈히 차려 입고 허리에는 두 자루 검을 찬 채 천천히 절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두른 짙은 남색의 영웅건(英雄巾), 그 한복판에 달린 구슬 장식이 햇살 아래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섯, 일곱... 흐흠! 도대체 뭐 하는 짓일까?' 단탈의 눈에 장옥평이 석삼도에게 올리는 절이 신기하게 비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기야 단탈이 살던 아합족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죄를 지은 사람은 부족 사람들과 타루가 앞에 끌려나와 저런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래 지은 죄가 탄로났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힘든 법이니까.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합족의 남자라면 아합을 제외한 어떤 성인 여자와도 동침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둘 이상의 남자들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 선택권은 여자에게 돌아갔지만, 간혹 여자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 유일한 해결법은 결투였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겨루는 이 결투가 끝나면, 진 사람은 이긴 사람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 겨룰 때까지 그 여자에 대한 권리를 그 남자에게 넘긴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단탈이 보기에는 장옥평은 석삼도에게 지은 죄가 없었다. 설마 여자를 두고 다퉜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장옥평의 저런 행위는 무슨 의미일까? 절은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이어졌다. 단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곁눈질로 단탈을 지켜보던 석소용이 이죽거렸다. "흥! 오랑캐 따위가 중화(中華)의 높은 예법에 대해 이해할 리가 없지." 오랑캐라... 저 계집애의 말은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가슴은 누가 눌러 놓은 것처럼 납작하고 엉덩이는 허리에 달린 것처럼 바싹 올라붙어 애도 제대로 못 나을 것 같이 생긴 주제에, 말끝마다 '중화'고 말끝마다 '오랑캐'였다. 나흘 전의 단탈이었다면, 그 말투가 괘씸해서라도 한 대 올려붙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독사에게 물렸다가 살아난 사람은, 다시 그 독사에게 물릴 때 처음보다 덜 고생하는 법이다. 계집애의 저런 버릇없는 말투도 여러 번 대하다 보니, 이제는 귀에 못이라도 박혔는지 제법 견딜 만했다. 다음 석삼도 앞에 나선 사람은 박한이었다. 박한은 쓰고 있던 뾰족한 죽립을 벗어 옆에다 내려놓은 뒤 천천히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절은 한번만으로 끝이었다. 단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한은 중원보다도 더 동쪽에 있는 해동이란 곳에서 왔다고 하던데, 그곳의 예법은 중원의 예법보다 아홉 배는 간단한 모양이었다. 박한... 사실 쓸 만한 것이라고는 탁 트이고 수려한 경치밖에 없는 이 운문곡에서, 단탈이 나흘씩이나 머문 것은 모두 박한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 번의 낮과 네 번의 밤. 장옥평이야 삼 년을 함께 지냈던 사부와 헤어지기 위한 의미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탈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 지상(至上)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나라아합과 함께 슬픈 바람의 계곡으로 돌아가 무너진 아합족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나라아합을 찾는 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그에게 있어서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 단탈이 나흘이란 시간을 박한을 위해 흔쾌히 투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까닭은 단탈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 한 가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은 있었다. 그와 박한 모두 이 땅에서는 이방인(異邦人)일 수밖에 없고, 이방인이 고향을 떠난 것에는 그만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단탈 자신만 하더라도 묘강을 떠나 중원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설령 목숨을 잃는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탈은 천천히 죽립을 쓰고 있는 박한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혹시 박한에게도 자신처럼 절박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비록 그 이유가 다른 종류의 것이더라도 말이다. 절박한 마음은 절박한 마음끼리 통하는 법... 단탈과 박한은 저마다의 절박함을 공유(共有)하고, 그것을 함께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박한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석삼도의 앞에서 물러 나왔다. 다음 차례는 자연스럽게 단탈에게 돌아왔다. 물론 단탈은 절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석삼도에게 죄를 짓지도 않았고, 또 싸워서 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단탈은 절 대신에 석삼도를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이것이 이런 종류의 이별에 대한 그의 예법이었다. 석삼도는 세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받았다. 제자인 장옥평에게는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심득(心得)의 일부를 나눠 준 박한에게는 단배(單拜)를, 그리고 그가 보아 왔던 사람들 중 가장 괴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단탈에게는 흰 이빨이 언뜻 드러나는 웃음을... 저마다 이유가 있는 인사였고, 저마다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그래서 석삼도는 유쾌해졌다. "잘 가시게." 석삼도는 진세(盡世)에서의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조용히, 그리고 짤막하게 마무리했다. * * * 아침 식사로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솔잎 한줌을 일 각 가까이 우물거린 박한을 제외한다면... 내리막길은 점점 험해지고 있었다. 완만하던 능선이 가팔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 한 달 간 날씨가 가물었던 탓인지, 자칫 푸석한 흙을 디뎠다가는 허방을 디딘 것처럼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어맛!" 길을 잘 안다고 해서 진두(陳頭)에서 일행을 안내하던 석소용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용매!" 뒤에 있던 장옥평이 황급히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석소용은 눈앞의 비탈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장옥평은 단탈을 돌아보았다. "단탈, 당신이 좀 수고해 주셔야겠소!" 장옥평은 삼 년 전 묘강에서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합족이 살던 슬픈 바람의 골짜기에서 약흠이 있던 독곡(毒谷)으로 갈 때, 단탈이 보여 준 기이한 걸음걸이... 아마도 천하 모든 사람이 넘어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단탈만은 콧노래를 부르며 유유히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알았네." 단탈은 푹 눌러썼던 수루를 약간 들추며 앞으로 나섰다. 단탈이 앞장서자 산을 내려가는 것이 한결 쉬워졌다. 단탈은 결코 꺼지기 쉬운 흙을 밟지 않았다. 그가 딛는 땅은 코끼리가 디뎌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게다가 그렇게 나아가는 와중에서도, 모난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발가락으로 걷어 내는 솜씨라니! 뒤따르던 사람들은 단탈의 맨발이 디딘 곳만을 따라 디디면 만사형통이었다.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하던 단탈이 걸음을 멈춘 것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고 다시 완만한 경사의 수풀이 시작된 곳에서의 일이었다. 수루의 그늘 아래 가려진 단탈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자신의 걸음이 왜 그곳에서 멈췄는지 생각해 보았다. 앞쪽에 보이는 숲.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 이상했다. 단탈의 본능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단탈은 자신의 본능이 왜 그런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지 알아차렸다. 앞쪽의 숲은 너무도 조용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하나 울려 나오지 않았다. 새가 없고 벌레가 없는 숲이란 없을 텐데... 문득, 단탈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조용한 숲은 위험하다. 단탈이 표범 사냥에 처음 참가했을 때, 당시 타루가였던 가리아가 한 말이었다. 새가 울고 벌레가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울지 않을 때에는, 그들로 하여금 울지 못하게끔 하는 무엇인가가 숲속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래서 그 존재가 발하는 살기가 새와 벌레의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앞쪽의 숲속에는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다. 뭘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표범처럼 위험한 존재라는 것 외에는... "단탈? 왜 그러시오?" 장옥평이 물었지만, 단탈은 대답 대신 허리를 엉거주춤 숙였다. 그의 오른손은 허벅지에 묶어 둔 가리아의 손잡이를 향하고 있었다. 단탈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해 생각했다. 왼쪽은 돌 반 바위 반의 황무지였고, 오른쪽은 산자락을 끼고 돌며 형성된 잡목림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1 장 - 4 묘왕동주 2 권 두 방향의 공통점은 무엇인가가 숨어 있기에는 은폐물들의 높이가 지나치게 낮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쪽은...? 하지만 단탈은 곧 뒤쪽에 대해서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가 지나온 길에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면, 그는 좀더 빨리 이런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앞쪽의 숲뿐이었다. 그 점이 단탈을 조금 안심시켰다. 포위된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한바탕 싸워야 할지도 몰라." 시선을 앞쪽의 숲에 여전히 고정시킨 채, 단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 * "알아챈 것일까요?" 전운리는 십리경(十里鏡)으로부터 눈을 떼며 말했다. 먼 거리를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물건은, 과거 서쪽으로부터 온 대상(隊商)에게서 은자 이십 냥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구입한 신통한 이기(利器)였다. 전운리의 곁에 서 있던 이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림 속의 매복은 전운리의 지휘 아래 설치한 것으로서, 그가 직접 확인해 본 바 믿을 만한 것이었다. 눈으로 보아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매복. 매복자들이 살기마저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초일류의 자객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거의 완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매복. 그런데 목표물들은 매복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매복의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오십 걸음도 더 떨어진 거리였다. 그렇다면 저자들 중 누군가는 그 정도의 거리 밖에서 풍기는 살기를 읽어 낼 능력이 있다는 얘기였다. 더 이상 머뭇거리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신호!" 이교는 짤막하게 지시했다. 전운리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아직은 신호를 보낼 때가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 모시게 된 상관의 지시에 토를 달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전운리는 들고 있는 수호포(手號砲)에 불을 당겼다. * * * 타앙-! 호포(號砲)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단탈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리고 움츠렸던 어깨를 다시 폈을 때, 그는 앞쪽의 풍경이 일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림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윗부분이 둥그스름한 검은 모자에, 기이하게 생긴 검은 갑주를 걸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나타남과 동시에 수림을 헤치며 단탈의 일행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의 한쪽 끝을 서늘하게 만드는 둔중한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일선(一線)에 아홉 명. 그리고 그들 뒤쪽에는 같은 수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과연 저런 식으로 몇 겹이나 서 있는 것일까? 그들의 전진은 멧돼지나 곰과도 흡사했다. 자잘한 관목 따위는 반항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여지없이 짓뭉개졌다. 조금 나무다워 보이는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창을 한번 내지르면 밑동의 절반이 뜯겨져 나갔다. 그 다음에 어깨로 밀면 나무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쓰러진 나무들은 그들의 발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거창(擧槍)-!" 일선으로부터 아홉 자루의 장창이 번쩍 치켜 올려졌다. 누구의 구령이었을까? 아마도 일선에 서 있던 아홉 명 중 누군가가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복장이 하나처럼 똑같은 탓에 누구의 외침 소리인지 분간해 낼 수 없었다. "전자(前刺)-!" 아홉 자루의 장창이 전면을 향해 쭉 내밀어졌다. 어느덧 중천까지 떠 있는 밝디밝은 태양빛. 이슬을 먹어 독을 만드는 뱀처럼, 그 밝디밝은 태양 빛을 받아 거무스름하게 번들거리는 아홉 개의 투구, 그리고 아홉 개의 창날... 이때, 단탈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장옥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철한대... 놈들은 철옥에서 왔소!"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2 장 혈로(血路) (一) 묘왕동주 2 권 十二章 혈로(血路) (一) 1 길은 그리 좁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철갑을 두른 아홉 명이 일렬로 늘어서 있으니, 마치 거대한 철벽이 길을 꽉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그 철벽에는 거대한 괴수의 발톱 같은 아홉 개의 장창이 달려 있었으니... "진격(進擊)-!" 구호와 동시에 일선에 서 있던 철한대 아홉 명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단탈! 물러나시오!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안 되오!" 장옥평은 곁에 있던 석소용의 팔목을 움켜쥐며 단탈을 향해 외쳤다. 철한대는 무적의 부대였다. 그것은 과거 철옥과 남마련 사이의 전투를 통해 여러 차례 입증된 사실이었다. 특히 아홉 명이 일 개 조를 이루어 일직선으로 질주해 나가는 그들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소용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장옥평은 지리(地利)가 있는 지형으로 몸을 피하는 것만이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단탈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놈들인지 인사나 해볼까?" 단탈은 오히려 밀려오는 아홉 자루의 장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단탈!" 장옥평은 다시 한번 외쳤다. 하지만 단탈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 호남지부 산하 철한대 제일조(第一組) 조장(組長)인 군천월(君泉月)은 어이가 없었다. 놈이었다. 총사가 말한 검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쓴 바로 그 괴인이었다. 총사는 그에 관해 거론하며 반드시 생포해야만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괴인이 도(刀)도 아니고 검(劍)도 아닌 거무튀튀한 괴이한 병기를 뽑아 들고 자신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군천월이 입대(入隊)한 이래, 아직까지 진격하고 있는 철한대를 향해 저토록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놈은 없었다. 미치지 않았거나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급소는 피하도록!" 군천월은 조원들을 향해 짧게 지시했다. 일렬로 죽 늘어선 아홉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장병(長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하나의 목표물을 동시에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단탈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그 중 중앙에 있는 다섯 자루의 창이었다. 단탈은 달리는 도중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젖히며 가리아를 크게 휘둘렀다. 다섯 자루의 장창 모두를 단번에 베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깡! 하지만 가리아는 단 한 자루의 장창조차 자르지 못했다. 반 치 깊이로 창날에 박힌 것이 전부였다. "엇?" 단탈의 몸이 멈칫거린 찰나의 순간, 나머지 네 자루의 장창이 단탈을 찔러 왔다. 전면의 공기가 찢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파르륵거렸다. 단탈은 안색을 굳히고 가리아를 세차게 밀어붙였다. 파파팍-! 가리아가 박혀 있던 장창이 크게 돌아가며 그를 찔러 오던 네 자루 장창을 휩쓸어 버렸다. 장창이 찔러 오던 기세를 감안한다면 실로 대단한 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장창이 이루고 있던 진세(陣勢) 중앙 부분이 잠시 흐트러졌다. 단탈의 가리아가 그 허점을 비집었다. 아까의 실패를 생각해서인지 훨씬 짧고 정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가리아는 또 한번 완강한 저항을 받아야만 했다. 누군가가 내민 방패에 막힌 것이다. "으으..." 대형 정중앙에 서 있던 군천월은 팔뚝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괴인이 내지른 시커먼 병기를 왼팔 하박에 부착시킨 방패로 막은 것까지는 좋았다. 철한대의 조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밤낮으로 수련했던 방패를 쓰는 여덟 가지 방법, 철순팔법(鐵盾八法)이 그의 목숨을 지켜 준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무슨 무지막지한 힘이란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뼈가 어떻게 된 것만은 분명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조가 이루고 있던 구창횡소진(九槍橫掃陣)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조장을 구하기 위해 두 명의 조원이 괴인을 가로막았다. 가리아를 손에 쥔 뒤 지금껏, 베고자 해서 베지 못한 것은 없던 단탈이었다. 그런 가리아가 연속해서 가로막힌 것은, 그로 하여금 현실이 어떤지를 인식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두 자루의 장창이 날아들었다. '정면으로 상대하기 곤란하다는 옥평의 말이 옳았군!' 철한대는 을온족의 전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병(精兵)이었다. 병기의 유리함을 십분 살리고 있는 그들의 능력은 단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일단 결심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 어깨를 노리고 찔러 온 두 자루의 장창은 고마운 존재였다. 단탈은 가리아를 들어 두 자루의 창을 동시에 막았다. 도를 비틀어 두툼한 도면(刀面)으로 막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깡-! 장창이 찔러 오던 힘이 고스란히 가리아로 전달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힘을 추진력삼아 단탈은 뒤로 몸을 날렸다. 허를 찔린 철한대원들의 당황한 얼굴을 남겨 둔 채로... * * * "어서 갑시다!" 단탈이 다가오자 장옥평이 다급히 외쳤다. 그의 표정에는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느냐?'라는 책망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 무서운 표정 짓지 말게. 놈들과 첫 대면인데, 무작정 꽁무니부터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리막길을 되올라 달리면서 단탈이 말했다. 개 한번 차보려다가 되려 물려 버린 개구쟁이의 변명과도 같은 그 말이 장옥평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장옥평을 더욱 짜증나게 만드는 일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자(前刺)-!" 달려가던 단탈 일행의 좌우에서 동시에 동일한 구령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길 양편에서 불쑥 솟아나는 장창들... 단탈과 제일조가 격돌한 사이, 제이조와 제삼조가 길 양쪽을 따라 달려 어느새 그들을 앞질러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단탈과 격돌했던 제일조 역시 다시 진형(陣形)을 추슬러 그들을 추격해 오고 있었으니, 그들은 세 조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 되어 버렸다. "분조(分組) 진격-!" 세 조에서 세 명씩, 도합 아홉 개의 창이 단탈 일행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은 열여덟 명은 전자의 진형을 취한 채 그들의 후위를 받치고 있었다. 최초의 공격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지구전을 벌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아홉 자루의 장창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러기에 어서 물러서야 한다고 했잖소!" 장옥평은 쌍검을 뽑아 찔러오는 장창을 후려치며 외쳤다. 박한 역시 해동검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장창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알았네, 알았어! 다음부터는 자네의 말을 듣기로 하지!" 아마도 그들 중 단탈이 가장 바쁘지 않았을까? 가리아를 풍차처럼 돌리며 장창들을 물리치는 한편, 입으로는 장옥평을 달래고, 눈으로는 석소용의 상태까지 살펴야 했으니 말이다. 가련하게도 석소용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이 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단탈은 그녀를 향해 등을 돌렸다. "업혀!" 석소용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단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상이 되었다. 때가 타 윤기마저 흐르는 더러운 표범 가죽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 업히라니! 석소용은 죽으면 죽었지 그 일만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팔자 좋은 생각이었다. 죽는 것보다는 더러운 가죽에 매달리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었다. 씨잇-! "꺄악!" 석소용은 장창 한 자루가 소름 끼치는 파공성과 함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 자신이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단탈의 등이 어른거렸다. 그 위에 드리운 표범 가죽은 석소용에게 있어서 더 이상 더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표범 가죽 위로 몸을 던졌다. 석소용의 무게가 어깨 위로 느껴지자 단탈은 씨익 웃었다. "죽기 싫으면 떨어지지 마라." 그 말과 동시에 단탈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까악-!" 급작스러운 움직임 탓이었는지 석소용은 눈을 꼭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두 자루의 창이 단탈을 노리고 찔러 왔지만, 단탈은 가리아를 아래로 휘둘러 그들을 간단히 밀쳐 버렸다. 그 반동을 이용해 한 바퀴 재주를 넘으니, 그의 몸은 이미 장창의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단탈은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한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급경사의 비탈면 아래 우거진 나지막한 잡목림 쪽이었다. 그러면서 단탈은 외쳤다. "옥평! 나를 따라와!"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2 장 - 1 묘왕동주 2 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심정 때문이었을까? 혼을 쑥 빼놓을 정도로 퍼붓는 장창의 공세 속에서도, 단탈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장옥평의 고막을 울렸다. 장옥평은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잡목림 쪽에 서 있는 철한대를 향해 부딪쳐 가는 단탈의 모습과 그의 등뒤에 봇짐처럼 달려 있는 석소용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장옥평은 단탈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있었다. 철한대가 걸치고 있는 철갑과 병기는 모두 곤오철(昆吾鐵)로 만들었다고 했다. <열자(列子)>에서도 말했듯이, 곤오철은 단단하기로 천하에서 손꼽히는 귀물(貴物)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곤오철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바로 다른 철의 갑절에 가까운 무게였다. 장옥평은 쌍검을 비스듬히 휘둘러 허공에 '팔(八)' 자를 만들었다. 스으- 두 방향으로 발생한 부드러운 검기가 그를 찔러 오던 세 자루 장창을 헛되이 비껴나게 만들었다. 장옥평은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헤집어 창진(槍陣)으로부터 굴러 나왔다. 파파파- 땅 위를 구르는 장옥평을 향해 우박처럼 꽂히는 창들... 하지만 장옥평은 어느새 창권(槍圈)으로부터 벗어나 잡목림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느낌은 말이 따로 필요없는 모양이었다. 단탈의 말을 분명 못 알아들었을 박한이겠지만, 그 또한 어느새인가 장창의 숲으로부터 벗어나 장옥평을 뒤쫓고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둘러싸여 있었지.' 박한은 달리면서 생각했다. 절심거사를 밀치고 무문관으로부터 달아난 뒤, 그는 예상대로 '팔도 제일의 검객'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었다. 여진족(女眞族)과의 분란이 끊이지 않던 북변(北邊)의 회령(會寧), 그 살벌한 대지에서 펼쳐진 수없는 전투 속에서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였다. 그런 그에게 절심거사의 본국검(本國劍)이 이어졌으니, 그가 '팔도 제일의 검객'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것은 결코 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팔도 제일의 검객'이 조선의 왕도(王都) 한성(漢城)에서 한 일은 뜨내기 한량(閑良)들도 경멸해 마지않던 자객 노릇이었다. 물론 최고의 가격이었다. 당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수 있는 권신(勸臣)의 후원도 있었다. 먹을 것을 원하면 미주가효(美酒佳酵)가 저녁 밥상에 올라왔고, 여자를 원하면 경국(傾國)의 미녀가 금침(衾枕) 속으로 들어왔다. 절심거사로부터 달아난 다음부터, 박한의 앞에는 쾌락의 천국이 펼쳐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리 허전했을까? 심장을 다른 곳에 두고 다니는 사람처럼... 쾌락의 천국은 이 년을 넘기지 못했다. 운명은 그를 위해 화려한 파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원자의 정적(政敵)을 베기 위해 그 집에 잠입했던 날, '팔도 제일의 검객'에게 달려들던 수많은 군사들... 죽이고 또 죽이고, 달아나다가 돌아서서 죽이고. 하룻밤 사이 서른이 넘는 목숨을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만든 뒤, 탈진한 상태로 논두렁에 누워 바라본 아침 햇살은 왜 그리도 눈부시던지. 그때 박한은 깨달았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검은, 검 중에서도 가장 천박한 하중하검(下中下劍)이었다. 그런 검은 결국 검을 쥔 자의 마음마저도 죽이게 된다. 또한 박한은 깨달았다. 사라진 자신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날 아침, 박한은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그날, 박한을 향해 찔러 오던 군사들의 창들... 비록 지금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장창들은 그날의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시무시했지만, 박한으로 하여금 그날의 우울한 기억을 떠올리게끔 만들어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박한이 단탈을 따라 달린 것은 장옥평과 같은 생각에서였다. 갑주의 무게는 상체에 집중되는 까닭에, 갑주를 걸친 사람의 무게 중심의 위치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은 법이다. 무게 중심이 높으면 평형 감각이 떨어진다. 그리고 비탈에서의 운신이 평지에서의 그것보다 고도의 평형 감각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 정도의 판단은 수많은 전투를 거친 박한에게 있어서 이미 상식이 되어 있었다. "...!"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박한은 달리기를 멈췄다. 앞서 달리던 장옥평이 땅위의 어느 한곳에 못박히기라도 한 듯 우뚝 서버렸기 때문이다. '왜...?' 박한은 장옥평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난데없이 피어오른 검은 살기의 돌풍을 발견한 것이다. * * * 단탈의 경지는 장옥평·석삼도와의 겨룸을 통해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었다. 비록 아직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살기를 좀더 미묘한 부분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탈이 현재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공이 바로 장한도법임을 감안한다면, 살기에 대한 조절 여부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잡목림이 가까워졌다. 잡목림을 가로막고 있던 여섯 명이 단탈을 향해 일제히 장창을 내질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단탈에 대한 공격은 항상 급소를 피하고 있었다. 창을 놀리는 솜씨로 판단하건대 그것은 우연이나 실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무슨 이유가 있든, 단탈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설령 그들이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리고 찔렀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테니까. 죽인다! 단탈의 눈에서 새파란 불똥이 튀어올랐다. 냄새나는 짐승 가죽이 세상에 다시없는 연인인 양 죽을 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던 석소용은, 어느 순간 머리 끝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뭐야? 이 느낌은...?' 밤길을 홀로 가다가 인영(人影)처럼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보았을 때 느끼는 것과 동질(同質)의, 하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렬한 기분이었다. 석소용은 그 느낌에 놀라 하마터면 잡고 있던 단탈의 목을 놓칠 뻔했다.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빨이 딱딱, 소리내며 부딪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석소용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녀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단탈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우웅-! 석소용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단탈의 등으로부터 기이한 진동이 전달되어 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거대한 검은 공 속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석소용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여섯 자루의 장창이 부르르 떨렸다. 정면에서 발생한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그것들을 한 순간에 휘감아 버린 것이다. 마차 바퀴에 깔린 돌멩이가 그 힘에 휩쓸려 허공으로 튕겨 오르듯, 장창은 주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끼아아아-! 비명 같은 금속성... 그것은 불파(不破)의 단단함을 자랑하던 곤오철이, 극강의 힘 앞에서 잘려지며 내뱉은 단말마(斷末魔)였다. 그와 동시에 단탈의 정면에 서 있던 철한대원 세 명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견갑에 부착되었던 목 보호대의 파편이 머리통을 뒤따라 후드득 튀어올랐다. 이어 단탈의 우전방에 있던 철한대원의 투구 꼭대기에 시커먼 번개가 떨어졌다. 빠악! 칙칙한 도기를 동반한 살기의 결정체, 가리아는 투구와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단숨에 갈라 버렸다. 사람을 정수리부터 갈라 나가던 가리아는 가슴에 대어진 철갑에 의해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가리아는 가슴에 대어진 철갑과 등에 대어진 철갑, 그리고 복부에 대어진 철갑마저 순식간에 훑고 지나가 버렸다. 단탈이 무릎을 구부리며 착지한 것과 처음 칼질에 당한 세 구의 시신이 넘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방금 칼질에 당한 철한대원의 몸은 서서히 두 쪽으로 잘려지고 있었다. 가리아의 광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단 전개하면 도중에 거둘 수 없는 것이 바로 장한도법, 그 첫 번째 수법인 흑월삼륙은 아직도 한번의 칼질을 더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구부렸던 단탈의 무릎이 쭉 펴지며, 가리아의 검은 이빨이 좌전방에 있던 철한대원을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 빡! 그 철한대원이 철순으로 가리아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가장 나중에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가리아는 두꺼운 철순마저 자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자른 것과 엇비슷했다. 철순은 가리아에 담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절반으로 꺾였다. 으직! 철순이 묶여 있던 왼팔 팔꿈치가 부러지며, 뼈 조각이 의복을 뚫고 삐져 나왔다. 가리아에 담긴 힘은 그 부러진 팔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철한대원이 착용한 가슴 철갑과 등 철갑 사이, 동작성을 좋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손바닥만한 공간에, 부러진 왼쪽 팔꿈치가 틀어박혔다. "컥!" 철한대원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 나왔다. 부러진 왼쪽 팔꿈치 뼈가 늑골을 으스러뜨리며 심장에 꽂혀 버린 것이다. 그래도 가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이백 근이 넘는 철한대원 하나를 붕 띄워, 허공 저 멀리로 던져 버릴 때까지...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2 장 - 2 묘왕동주 2 권 창을 찔렀던 여섯 명의 철한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털썩! 내지른 것도 아니고 잡아당긴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로 쥐고 있던 장창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중풍 환자의 그것과 같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기에는, 곤오철로 만든 장창은 너무나도 무거운 물건이었다. 짐승 가죽을 쓴 괴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허억!" 그 순간, 망막이 아리도록 사납게 찔러 오는 새파란 섬광을 어찌 사람의 눈빛이라 할 수 있을까? 무사로서의 자존심? 무적의 부대 철한대의 명성? 그런 것 따위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런 그를 향해 짐승 가죽을 쓴 괴인이 싱긋 웃었다. 방금 전 느꼈던 무서운 기운은 어디로 간 것일까? 기이하게도 맑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짐승 가죽을 쓴 괴인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잡목림을 훌쩍 뛰어넘어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 괴인의 등뒤에는, 분홍빛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봇짐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 * "사람도 아니군." 비탈을 오르고 있는 괴인의 무위(武威)에 대한 이교의 촌평(寸評)이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쇠처럼 딱딱했다. 하지만 전운리는 이교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도 아니라는 생각은 전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곤오철의 단단함에 대해서는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터... 그러한 곤오철을 수수깡처럼 베고 있는 괴인의 무공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과거, 삼마(三魔)의 일 인이자 강호제일도(江湖第一刀)라 불리던 도무비(刀無比)가 살아 있다 한들, 저런 엄청난 신위(神威)를 보일 수 있었을까? 저 멀리 비탈 위에서의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 * * 가파른 비탈을 달려 오르던 장옥평은 발꿈치 뒤에 무엇인가가 날아와 꽂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자루 장창이 그의 발 아래 꽂힌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제 보니 철한대는 운신이 거북한 비탈을 오르는 대신 투창(投槍)으로 그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장옥평은 자신을 바싹 뒤따르던 박한의 등을 향해 한 자루 장창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박...!" 하지만 장옥평의 경고는 필요치 않았다. 박한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이미 몸을 빙글 돌리고 있었다. 검을 쭉 내밀어 날아오던 장창과 수평이 되게 만들고, 창날이 검끝에 실리는 순간, 손목을 꺾어 장창을 허공으로 툭, 쳐올리는 묘기란! 박한의 검법은 실로 교묘했다. 장창에 실린 맹렬한 기세를 손목을 꺾는 가벼운 동작만으로 간단히 해소시켜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그런 그의 수법은 장옥평이 익힌 비검(非劍)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박한의 재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허공으로 튕겨진 장창은 어느새인가 박한의 왼손에 잡혀 있었다. 철한대의 투창 공격은 이제 본격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비탈 아래로부터 새까맣게 날아오는 장창들... 박한은 왼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장창을 크게 휘돌렸다. 부우웅, 바람 소리가 일며 박한의 손에 들린 장창이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일기 시작하는 엄밀한 창영(槍影)... 마치 직경이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방패가 박한의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따다닥-! 날아오던 장창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철한대에게는 장창이 한 자루씩밖에 없었으니, 그들의 투창 공격이 한없이 이어질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창이 날아오지 않자, 박한은 수중의 장창을 내던지고 비탈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람도 대단하군!' 그 광경을 끝까지 목격한 장옥평은, 자신을 지나쳐 올라가는 해동에서 온 검객을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 * * 괴인의 일행은 이미 비탈 위에 올라서 있었고, 더 이상 철한대로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상황이 일단락된 것이다. 잘못이 뭘까? 전운리는 십리경을 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계획은, 괴인의 일행이 매복의 중심부로 들어오지 않은 순간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우거진 수림 속에서 세 조의 철한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 둔 뒤였고, 지리와 병기의 이점을 살려 기습했다면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모든 상황이 끝나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수림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비탈에서 철한대의 몸놀림이 둔하다는 약점을 이용, 저렇게 유유히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수의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놈들을 너무나도 몰랐어.' 여자는 그렇다 치고, 세 명 모두에게 분조(分組) 포위한 철한대를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전운리의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더구나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괴인! 그자가 을온족을 단신으로 괴멸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전운리였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저 정도 능력의 소유자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으음..." 어쩌면 지난 이틀 동안의 매복이 공염불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전운리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때, 옆에 있던 이교가 중얼거렸다. "그였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점으로 사라져 가는 괴인의 일행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교의 얼굴을 쳐다보던 전운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놀랍게도 이교의 입가에 붙어 있는 것은 웃음이었다. 이교는 평소에도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안 좋은 상황이라면 웃을 턱이 없었다. "저 한인(漢人)이 누군 줄 아나?" 한인? 한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백의를 입고 남색 영웅건을 두른 청년과 갈래머리를 하고 있던 어린 소녀 하나... "쌍검을 쓰던 자 말입니까?" 전운리의 반문에, 이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속하는 잘..." 전운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교의 입가에 붙어 있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몰라도 상관없는 일... 모두 죽이기만 하면 된다." 전운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괴인을 반드시 생포하라던 처음의 명령이 바뀐 것이다. 이교와 같은 사람이 한번 내린 명령을 번복하기란 예사 계기로는 어림없는 일이라는 것을 전운리는 잘 알고 있었다. 전운리의 머릿속이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괴인을 왜 생포해야만 했을까? 괴인으로부터 알아 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죽여도 된다는 얘기는? 그로부터 알아 낼 것이 없어졌다는 뜻이겠지. 대체 왜...? 해답은 간단했다. 괴인으로부터 알아 낼 것을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인으로부터 알아 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운리의 눈 속 깊은 곳에서 혜지의 섬광이 번뜩였다. 쌍검을 쓰던 한인! 이교는 괴인의 입을 통해 그의 행방을 알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인의 정체는? 전운리의 입술 끝이 보일 듯 말 듯 말려 올라갔다. 이교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 드디어 안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확인했다는 표현이 더 올바를지도 모른다. 전운리는 처음 을온족의 정보를 들고 올 때부터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놈들이 갈 길은 이미 파악해 두었겠지?" 이교가 물었다. 전운리는 단탈 일행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지난 이틀 동안 부근의 지리에 대해 샅샅이 조사한 바 있는 그였다. 산을 내려갈 만한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저 방향이라면 오직 한 길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잔잔하지만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전운리는 대답했다. 2 아마 한 시진은 족히 달렸을 것이다. "후, 후우!" 단탈은 걸음을 멈추고 가슴 가득 차 있는 탁한 숨을 내뱉었다. 경사의 변화가 극심한 길이었다. 그런 길을 어찌나 급히 달렸는지,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목젖 밑은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렸다. 단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장옥평과 박한이 서 있었다. 그의 눈에 잠시 이채(異彩)가 담겼다. 두 사람의 호흡은 그에 비해 훨씬 더 고요했기 때문이다. "헉, 헉! 잘 뛰는데...?" 단탈은 밭은 숨을 토해 내는 와중에서도 털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갑갑함만은 참을 수 없었던지 쓰고 있던 수루를 머리 뒤로 홱 젖혔다. "나도 산속을 뛰는 건 제법 하는 편이지만, 자네들에겐 못 당하겠군." 단탈은 손부채를 활랑거리며 말했다. "단탈, 혹시 경공(輕功)을 쓸 줄 모르나요?" 장옥평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2 장 - 3 묘왕동주 2 권 물론 선두에서 없는 길을 만들어 온 단탈의 경우, 그와 박한보다 갑절은 더 힘이 들었을 것이다. 등뒤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석소용 또한 보통 짐이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까 철한대를 베어 넘기던 엄청난 도법을 감안한다면, 저렇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경공? 약 노인이 말하던 신법(身法) 말이군." "그렇소." 단탈은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사실 단탈에게는 신법을 배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삼 년이란 시간은 장한도법의 다섯 가지 수법과 약흠의 독공을 익히는 데에만도 부족했다. 장한도법이야 이제는 꽤 완숙해져서 잘 하면 네 번째 수법인 구천망혼(九泉亡魂)까지도 전개할 수 있겠지만, 약흠이 자랑하는 독공은 체내에서만 꿈틀거릴 뿐 외적(外的)으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운기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단탈이었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성취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신법을 배울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었다. 하기야 척추에 뱀을 박아 넣고 살던 약흠이었으니, 신법에 대해 제대로 가르칠 재주도 없었을 것이다. "참! 이 아이는 왜 이리 조용하지?" 단탈은 문득,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석소용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는 목 앞으로 둘러져 있는 석소용의 팔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석소용은 두 팔이 어찌나 꽉 맞잡혀 있는지, 보통 노력으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탈은 별수없이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힘주어 풀어 내야만 했다. 단탈의 목에서 손이 풀리자 석소용은 풀썩 떨어졌고, 그런 그녀를 장옥평이 받아 안았다. 석소용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용매...! 용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용매! 정신차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돌아왔다. "괜찮아?" 눈을 뜬 석소용이 가장 먼저 대한 것은 걱정을 가득 담은 잘생긴 눈, 장옥평의 눈이었다. 석소용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추위? 이 무더운 여름날에? 석소용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팔꿈치 윗부분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왜 그래? 다쳤어?" 그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장옥평이 황급히 석소용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맨 살갗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 석소용은 부끄러운 한편 속이 상했다. 장옥평은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을 하나의 '여자'로 대한다면 저런 행동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석소용의 팔꿈치 윗부분의 살갗은 거무죽죽한 피멍이 남아 있었다. 거기를 건드렸으니 아픔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석소용은 자신의 팔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의식을 잃기 전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업히라고 말하며 냄새나는 등을 들이밀던 자... '설마 저 자식이...?' 석소용은 도끼눈을 치켜 뜨고 단탈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장옥평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용매, 용매의 손자국 같은데?" 석소용은 다시 한번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장옥평의 말대로 피멍은 손자국이었다. 그것도 단탈의 것일 리가 없는 조그맣고 앙증맞은 손자국...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석소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탈은 석소용에 대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녀가 의식을 잃은 것은 흑월삼륙의 살기 때문이었다. 정면에서 살기를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정면이었다면 그녀 같은 조그만 계집애는 살기로 인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 피멍... 석소용은 의식을 잃은 와중에서도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은 머릿속에 남아, 제 팔에 피멍을 남기도록 단탈의 목에 매달렸던 것이다. 살아남는 일은 소중한 것이었다. 죽어야 할 곳이 아니라면 절대로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득, 단탈은 고약한 철부지로만 여기던 석소용에게도 괜찮은 구석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석소용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죠?"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체내에 침범한 장한도법의 한독(寒毒) 때문일 것이다. "하도 정신없이 뛰어와서 잘 모르겠는데?" 장옥평이 대답했다. "얼마나 달려왔죠?" "한 시진쯤?" "그런데 그 망할 새끼들이 왜 우리한테 덤빈 거죠?" 아마 박한도 한어를 말할 줄 안다면 그녀와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처럼 걸쭉한 육두문자(肉頭文字)야 쓰지 않겠지만. "글, 글쎄?" 물론 모를 리는 없겠지만, 장옥평은 자신이 아는 바를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아듣게 설명하려면 날 새도록 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개자식들!" 석소용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욕설을 퍼부은 뒤, 장옥평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석소용은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형을 살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봉우리 남쪽 능선까지 온 것 같아요." "그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 이 부근의 지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석소용인 바에야, 산을 빠져 나가는 길에 대한 결정권을 그녀에게 주는 것이 가장 나았다. 장옥평의 물음에 석소용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희대암(戱臺岩) 쪽으로 해서 내려가도록 해요.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이니 아마 안전할 거예요." 말과 동시에 석소용은 앞장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기증이 나는지 몇 걸음 채 떼어 놓지도 못하고 심하게 휘청거렸다. 장옥평이 급히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용매, 괜찮아?" "예... 조금 어지러워서요." 석소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옥평은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내게 업혀." 지금 이 순간, 장옥평의 마음은 '나로 인해 나이 어린 소녀가 이런 고생을 하다니!'라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그녀의 얼굴에 맺힌 기이한 미소를 볼 수 없었다. * * * "여길 내려가야 한다고?" 장옥평은 난처한 얼굴로 등뒤에 업혀 있던 석소용에게 물었다. "예, 맞아요." 고개를 끄떡이는 석소용의 얼굴도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장옥평에게 찰싹 붙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도끼로 친 듯한 낭떠러지를 보니, 그런 행복감은 허공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아니면 벌써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버렸던지... 물론 그녀는 이곳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념과 현실 사이에는 길고 짧은 괴리(乖離)가 존재하는 법이다. 물론 그 괴리라는 것이 언제나 이 낭떠러지처럼 엄청난 거리일 리야 없겠지만... '여기를 어떻게 내려가?' 그녀는 애당초 이 길을 택한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이 방면에 있어서 전문가는 가장 험하게 자란 단탈이었을 것이다. 그는 낭떠러지 끝 부분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숲과 허연 바위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얼마나 될까...?' 본디 이런 거리는 눈으로 가늠하기 힘든 법이었다. 이런 경우 단탈에게는 그만의 측정 방법이 있었다. 단탈은 큼직한 돌을 들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넷, 다섯, 여섯...' 단탈이 '여덟'까지 세었을 때 아래로부터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단탈은 주변의 흙을 세게 밟아 보았다. 쉽게 허물어질 지질(地質) 같지는 않았다. 바위와 나무 뿌리도 많았다. 그렇다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단탈 혼자뿐이라면 맨손으로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 혼자뿐이라면 말이다. "줄이 필요해." 단탈은 지나 온 숲을 향해 되돌아가며 말했다. 다행히도 밧줄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질긴 넝쿨을 모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넝쿨을 잇는 일은 단탈 혼자서 했다. 넝쿨을 이용한 올가미 사냥은 그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된 나이보다도 훨씬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일이었다. 달려 있는 잎들을 떼어 버리고, 넝쿨의 끝에 칼집을 내 두 가닥으로 만든 뒤 다른 넝쿨을 얽어 묶는 속도는, 가히 달인(達人)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이렇게 만들어진 넝쿨밧줄이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졌다. "길이가 조금 짧지 않소?" 장옥평의 말에 단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정도는 뛰어내려도 돼." 이때 파랗게 질려 있던 석소용이 소리쳤다. "난, 난 못해요!" 단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이런 데를 한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어요." "잘 됐군, 앞으로는 내려가 본 적이 있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단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 하지만..."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2 장 - 4 묘왕동주 2 권 석소용은 울상이 되어 믿어 마지않는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믿는 장옥평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더구나 낭떠러지를 내려가 본 경험이 없기는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때 묵묵히 서 있던 박한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낭떠러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박한이 넝쿨밧줄을 타는 모습을 바라보던 단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석소용의 고개를 눌러 아래를 내려다보게 만들었다. "보고 배워." 머리를 눌린 석소용은 물론 화가 났다. 하지만 단탈의 말대로 지금은 밧줄 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누가 도와 줄 수 없다면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절벽을 내려가야 했다. 어쨌거나 살고는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박한의 몸놀림은 석소용에게 있어서도 감탄의 대상이 될 만했다. 단순하고도 빠른 움직임... 넝쿨을 쥔 손과 암벽을 딛는 발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체중을 최대한 분산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잘 봤지? 자, 왼손은 이렇게 넝쿨을 말아서 쥐고... 그래 그렇게! 오른손으로 그 아래쪽을 잡는 거야. 그래서 왼손으로 슬슬 풀어 주고, 오른손을 버티며 아래로 내려가는 거지." 단탈은 두 초보자를 위해 넝쿨을 쥐는 시범까지 보여 주었다. "발은 어디다 쓰죠?" 석소용이 묻자 단탈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내려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돼." 단탈의 말이 옳았다. 석소용은 발을 움직이기 위해 애써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었다. 발은 따로 머리가 달려 있는 것처럼 스스로, 하지만 제법 효과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석소용의 위치는 장옥평과 단탈의 가운데... 그녀의 머리 위 다섯 자쯤 되는 곳에는 단탈의 시커먼 맨발이 있었다. '그래도 예쁜 것은 볼 줄 알아서... 꽤나 신경을 쓰던데?' 스스로 가장 나중에 내려가겠다고 결정한 단탈은, 퉁명스런 말투와는 달리 제법 괜찮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은 그녀의 허리에 따로 묶인 한 가닥 넝쿨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단탈은 만약을 대비해 그녀와 자신을 따로 묶은 것이다. 그리고 단탈의 시커먼 맨발이 별로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를 바라보는 석소용의 시각 또한 조금은 변한 모양이었다. 석소용은 곁눈질로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아찔한 높이였다. 이미 바닥에 내려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박한의 모습이 조그만 벌레만하게 보였다. 이때 갑자기 위쪽으로부터 자갈과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멋!" 석소용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위로부터 떨어진 뭔가가 그녀의 어깨를 콱 짓눌러 왔다. 석소용은 그 무게에 눌려 하마터면 밧줄을 쥔 손을 놓칠 뻔했다.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쥐어 그 무게를 간신히 버텨 낸 석소용은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털이 숭숭 돋은 울퉁불퉁한 근육... 바로 단탈의 다리였다. "이거 안 치워?" 석소용은 빽, 소리를 질렀다. 잘난 척은 혼자 다 해놓고서, 미끄러지는 꼴이라니! 자칫하면 꼼짝없이 자기까지 떨어질 뻔하지 않았던가! 머리 위에서 단탈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안..." 다리는 곧 올라갔다. 석소용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아끼고 아끼던 분홍빛 배자(褙子:소매 없는 겉옷) 위에 선명하게 찍힌 시커먼 발자국을 본 것이다. '제기랄... 개고기는 별수없이 개고기야!' 다시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한 석소용은, 방금 전 잠시나마 단탈에게 호감을 지녔던 것을 후회하면서 온 천하의 오랑캐 모두를 향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 * * "별거 아니네?" 석소용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는 것과 동시에, 아까 낭떠러지 위에서 징징거렸던 일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당신 말이야! 흥, 밧줄 하나도 제대로 못 타는 주제에... 다음부터는 내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라고!" 석소용은 단탈을 향해 으르렁거렸고, 엉거주춤 서 있던 단탈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험한 길은 없어요. 저만 따라오세요." 그녀가 일행을 앞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 가시오, 단탈?" 단탈이 우두커니 서 있자, 장옥평이 물었다. "먼저 가게. 금방 따라갈 테니." 단탈의 대꾸였다. 장옥평이 떠나자 단탈은 엉거주춤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살펴보았다. 종아리 부분에 붉은 덩어리가 하나 달라붙어 있었다. 꼬리까지의 길이가 한 뼘쯤 되는 전갈... 단탈은 전갈을 떼어 냈다. 종아리 깊숙이 박혀 있던 독침이 빠지며 검붉은 핏물이 한 방울 맺혔다. 강철 같은 그의 피부를 뚫고 독침을 박아 넣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전갈이 예사 독물(毒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전갈은 이미 죽어 있었다. 단탈의 피는 어떤 전갈의 독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인 독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일날 뻔했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등골이 서늘한 일이었다. 단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갈이 그를 쏜 것은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그때 절벽 틈 새로부터 기어나와 석소용에게 쏜살같이 달려들던 전갈을 그가 발견하지 못했던들, 그리고 밧줄을 놓고 급히 떨어져 내려가 그것을 다리로 막아 내지 못했던들, 석소용은 지금쯤 저승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잘난 체하지 말라고?' 단탈은 내심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3 장 혈로(血路) (二) 묘왕동주 2 권 十三章 혈로(血路) (二) 1 그 골짜기에는 유난히도 흰 바위가 많았다. 그래서 골짜기의 이름도 백석학(白石壑)이었다. 골짜기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물소리가 까마득한 골짜기 위에서도 탕탕히 들릴 정도니, 아마 급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급류 위에는 다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장정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날 수 있을 정도의 너비에, 길이는 삼십 장쯤? 쇠사슬 세 개를 걸어 그 위에 널판을 올려놓고,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밧줄이 난간을 대신하는 삭교(索橋)였다. "이것이 백석교(白石橋)인가?" 이교는 난간 대용으로 쓰이는 밧줄을 몇 차례 흔들어 보며 물었다. "예." 뒤에 시립(侍立)하고 서 있던 전운리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흠! 교군(橋軍)들은?" "속하가 처리했습니다." "처리?" "예, 입을 다물 수 있을 만큼 돈 냄새를 맡게 해주었지요." 이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官)의 토목대장(土木臺帳)에 기재된 모든 다리에는, 그 다리를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교군이 상근(常勤)하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라도 관부와의 마찰은 피하는 것이 좋았고, 전운리는 그런 방면에 있어서 탁월한 재질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로 오는 것은 확실한가?" "놈들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을 모두 확인해 보았습니다. 놈들은 반드시 희대암을 통해 내려가려 할 겁니다." "희대암을 지났다고 반드시 이리로 올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속하가 화룡대장(火龍隊長)과 함께 약간의 재주를 부려 놓았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전운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붙어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이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밀하기로 이름난 전운리가 장담하는 일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교는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지루했던 하루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 대장(易隊長)!"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서 붉은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이교의 앞에 내려섰다. 몸뚱이에는 붉은 비늘이 촘촘히 박혀 있는 가죽옷, 얼굴에는 용(龍)의 가면, 가슴 한복판에는 큼직하게 쓰여진 '화(火)'라는 글자가 유달리 눈에 띄는 괴인이었다. "놈들이 희대암을 통과하면, 곧바로 이리로 몰아 오도록." "복명!" 나타난 용면괴인(龍面怪人), 철옥 호남지부 소속 화룡대(火龍隊) 대장 이희안(易稀顔)은 허리를 깊이 굽혔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교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섣부른 싸움은 피할 것! 그 대신 모든 화기(火器)의 사용을 허락한다." 용면(龍面)의 눈구멍 사이로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모든 화기...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붉은 그림자는 허깨비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라 삭교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교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시커먼 철갑을 두른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 작다고 할 수 없는 이교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장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 곤오철로 만들어진 철가면의 눈구멍으로부터는 이글거리는 안광이 활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괴 대장( 隊長)!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진 않겠지?" 이교의 말에 철갑거한(鐵鉀巨漢), 철한대의 대장 괴악( 岳)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낮에 벌어진 전투에서 철한대 삼개조가 범한 실패가,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놈들을 반드시 해치우겠습니다!" 괴악의 두툼한 입술이 우물거릴 때마다 쇠맷돌을 돌리는 듯한 으스스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됐어!" 이교는 다시 몸을 돌렸다. 골짜기 사이에서 건들거리는 백석교와, 그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팔십일 명의 철한인(鐵漢人). 스물일곱 명의 화룡인(火龍人). 그 정도면 철옥의 네 개 지부 중 가장 강력하다 알려진 호남지부의 총 전력(戰力) 중 삼분지 일이 투입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막강한 전력을 투입하여 애송이 넷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상부의 문책 이전에 이교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결판을 낸다!' 이교는 느긋하게 웃었다. * * * 희대(戱臺)는 말 그대로 연극을 공연하는 대(臺)이다. 웬만큼 번화한 성시(城市)라면 희대 한둘쯤은 기본으로 상설(常設)되어 있어, 공연이 있는 날이면 인근 부락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곤 한다. 희대암(戱臺岩)은 이름 그대로 희대처럼 생긴 편평넙적한 바위였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무척이나 빼어난 것이어서, 뒤쪽으로는 전포(戰布)의 바람막이처럼 웅장한 느낌을 주는 산자락이 가로막고 있고, 앞쪽으로는 아득한 상고(上古) 시대, 불의 신 축융(祝融)이 단로(丹爐)를 달구었다는 연단림(煉丹林)이 전설처럼 길게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단탈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위 경물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희대암 위 한복판에는 그들의 신경을 온통 빼앗아 버릴 무엇인가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곡 사형(曲師兄)!" 석소용은 토끼처럼 앞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희대암 위 한복판에 사지를 쫙 벌린 채 널브러져 있는 물건은, 그녀의 부친 석오랑이 친아들처럼 아끼던 대제자 곡풍이었다. 곡풍은 예사롭지 않은 상태였다. 비단 예사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척 심각한 상태였다. 그것은 그가 누워 있는 희대암 위를 질펀하게 적시고 있는 핏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핏물은 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몽둥이만한 쇠못이 박힌 두 손과 두 발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풍은 악동의 장난에 희생된 개구리처럼 사지를 쫙 벌린 채, 바위 위에 못박혀 있었던 것이다. "아악-!" 그 처참한 몰골을 확인한 석소용은 어쩔 줄 모르고 비명부터 질렀다. 이때 감겼던 곡풍의 두 눈이 힘겹게 떠졌다. "사, 사매..." 목을 돌리는 것조차도 버거웠던 것일까? 곡풍은 눈동자만을 돌려 석소용에게 시선을 맞춘 채, 쉰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사, 사부께서는 저, 저 너머에..." 그러한 지경으로도 제 몸보다는 사부인 석오랑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곡풍은 눈짓으로 어떤 곳을 가리켰다. 아름답게 펼쳐진 연단림 쪽이었다. 스스스- 무슨 소리지? 문득, 박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단탈과 장옥평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도 그와 동질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귀를 간지럽히는 기이한 소리를, 두 사람 또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소리... 그가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불길함과 위험함의 냄새를 풍기는 소리였다. 곡풍의 메마른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그, 그리고... 사매! 어서, 어서 가... 내 밑... 에는... 컥! 쿨룩!" 곡풍은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토해 낸 핏물을 고스란히 얼굴 위에 덮어쓰는 참혹스런 광경... "사형!" 석소용은 황급히 곡풍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때, 등뒤에서 뻗어 온 길쭉한 팔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박한의 팔이었다. "이거 놔!" 석소용은 어깨를 세차게 흔들며 박한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박한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덥썩 들어 허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신호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와 동시에 단탈과 장옥평 또한 박한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놔! 이 새끼야!" 석소용은 박한의 가슴과 얼굴을 마구 주먹으로 치며, 발악을 했다. 하지만 박한은 오직 달리기만 했다. 그리고 희대암 끝에 당도했을 때, 박한은 석소용을 안은 채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다. "놓으란 말..." 꽈앙-! 석소용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희대암 위에서 울린 천둥 같은 폭음이 그녀의 뒷말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폭음, 그리고 화염... 꽈앙! 꽈릉-! 폭음이 봉우리와 골짜기에 부딪쳐 되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지옥 같은 화염이 희대암 위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잔인한..."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3 장 - 1 묘왕동주 2 권 바위 밑에 바싹 붙은 채 머리 위로 난비(亂飛)하는 불꽃들을 보면서, 장옥평은 턱 근육이 뻑뻑해지도록 이를 갈았다. "뭐였지?" 단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옥평에게 물었다. "화약(火藥)을 쓴 거요. 놈들은 곡 형(曲兄)의 몸 아래 화약을 감춰 두고 있었소." "화약?" "그렇소. 아까 들린 이상한 소리는 그 도화선(導火線)이 타들어가던 소리였소." "도화선? 그게 도대체 뭐야?" 장옥평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화약이니, 도화선이니 하는 것에 대해 단탈이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 놓을 여유가 없었다. "아빠! 사형은 아빠 얘기를 했어요! 아빠가 저 숲속에 있대요!" 석소용이 외쳤다. 곡풍의 참혹스런 모습과 폭발... 그것은 열여섯 살짜리 소녀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충격이었겠지만, 석소용은 어느 정도의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부가 숲 너머에 있다는 곡풍의 말 때문이었다. 곡풍이 그런 꼴을 당했다면, 석오랑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석소용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안위는, 천하의 어떤 일보다도 중대한 일이었다. "비열한 놈들...!" 장옥평이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연단림 속으로 뛰어들 태세였다. 그런데 그의 소매를 잡는 손이 있었다. 박한이었다. '왜...?' 장옥평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박한은 흙바닥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심지도 저절로 타지 않습니다. 적들은 이미 우리가 올 시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장옥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한의 말이 옳았다. 심지는 저절로 타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장옥평 일행의 동향을 감시하다가, 도화선의 길이를 감안하여 적당한 시간에 폭발하게끔 손을 썼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곡풍의 말은? 물론 거짓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적들이 원하지 않았다면 곡풍은 장옥평 일행에게 말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곡풍은 결국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즉, 적들은 장옥평 일행이 연단림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연단림은 이미 사지(死地)인 것이다. 이때 작고 어여쁜 가죽신 하나가 박한이 써놓은 글을 박박 문질러 지워 버렸다. 석소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박한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이 망할 새끼야!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우리 아빠가 저 너머에 있단 말이야! 우리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니가 책임질래?" 예쁜 두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와중에서도, 입으로 내뱉는 표독스러운 욕설이라니! 장옥평은 당황하기도 했고, 또 박한에게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석소용으로서는 저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옥평은 단탈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단탈은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가야지." 물론 석오랑은 그와 무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장옥평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갈 수밖에 없다면, 고민 따위는 시간 낭비였다. 2 낙일(落日)... 서편 산봉우리에 붉은 기운이 짙어 가고 있었다. 무척이나 서정적이고, 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연단림 한귀퉁이에서 갑작스레 시작된 붉은 기운은 서정적이지도, 또 아름답지도 않았다. 후두둑- 연단림에 둥지를 튼 새들이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붉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삭교 너머의 숲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화광(火光)은 이미 상황이 시작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은 전운리의 계산대로였고, 또한 이교가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잔주름이 많은 이교의 얼굴에는 엷은 곤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앞에 홀연 나타난 한 명의 여인 때문이었다. "내 부탁을 들어 주겠지, 이 총사?" 여인의 입술은 고왔다. 그 고운 입술이 나풀거리자, 입술과 비교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교는 스스로 세운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원칙에 의하면 '예'라고 대답할 때와 '아니오'라고 대답할 때는 절대 공존(共存)할 수 없었다. 그것은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리 고운 입술과 아무리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안 됩니다." 이교의 무미건조한 거절은, 고운 입술과 고운 목소리의 소유자 도연향(陶淵香)에게는 항명(抗命)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니, 그녀의 도도한 자존심으로 미루어, 그것은 항명의 도를 넘어 모멸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했지?" 반문하는 도연향의 목소리에는 아까의 나긋나긋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얼굴을 찡그릴 때에도 아름다워야만 미녀라면, 도연향은 미녀임에 분명했다. "이교! 내가 누구냐?" 도연향의 목소리는 서릿발 같았다. "사공녀(四公女)이십니다." 이교의 어투는 여전히 일정했다. "그래? 그럼 너는 누구냐?" "호남지부 총사입니다." 도연향의 눈가에 득의의 빛이 어렸다. "나는 옥주(屋主)이신 사부님의 제자요, 너는 일개 지부(支部)의 총사에 불과하다! 그러면 누가 위이지?" "물론 사공녀이십니다." 이교의 거침없는 대답이 신경에 거슬렸음인가? 도연향은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내 명을 거역하는 거냐?" "실제 상황에 임하면 오직 직속 상관의 명에만 복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도연향의 눈썹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때 도연향의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자위가 움푹 꺼진 깡마른 얼굴, 걸치고 있는 헐렁한 흑삼(黑衫)의 무게조차도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이교, 더 이상 숨쉬기가 귀찮아진 모양이군." 음산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구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교의 담담한 시선이 흑삼노인에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시선만큼 담담할 수 없었다. 그 노인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곤란한 늙은이를 끌고 왔군.' 옥주의 제자들에게는 각자 소유하는 친위대가 있었고, 그 친위대의 우두머리는 그 명성이 강호를 위진(威震)하는 절정고수였으니, 대공자의 밑에는 검귀(劍鬼)라 불렸던 늙은이가 있고, 이공자의 밑에는 복건제일도 남력이 있으며, 사공녀의 밑에는 남해(南海)의 살인귀가 있다. 지금 등장한 흑삼노인 공야무루(公冶無淚)가 바로 남해의 살인귀였다. 하지만 공야무루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이교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공야무루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후계자의 친위대는 정식 직책이 아닌 별정직(別定職)이었다. 별정직은 작전에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제게 명령을 내리시려면, 호남지부장의 직인(職印)이 찍힌 문서를 가져 오셔야 합니다." 이교는 도연향을 향해 통보하듯 말한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은 너희들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이..." 도연향은 느긋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성격은 오히려 성마른 편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하고도 참는다면 이미 도연향이 아닌 것이다. 도연향은 바들바들 떨다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네 목을 들고 가, 호남지부장(湖南支部長) 마린의 죄를 물으리라!" 그 앙칼진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야무루의 앙상한 노구(老軀)가 이교를 향해 날아들었다. 쑤아아-! 공야무루의 흑삼 소맷자락이 크게 펄럭이자, 성난 파도와도 같은 맹렬한 기운이 일어났다. * * * 단탈에게 있어서 불이란 모닥불을 피우거나 고기를 익힐 때 사용하는, 자연의 수많은 선물 중 하나였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묘족에게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그런 불이, 자연의 선물인 불이 마치 생명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데에는, 무쇠처럼 단단한 심장을 지닌 단탈이라 해도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꽈릉-! 좌측으로 일 장쯤 떨어진 숲에서 간을 철렁거리게 만드는 폭음과 함께 불길이 또 한번 솟구쳐 올랐다. 이미 몇 번째 폭발인지 셀 수도 없었다. 우박처럼 떨어지는 불똥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장옥평이 외쳤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3 장 - 2 묘왕동주 2 권 "단탈! 놈들은 우리를 통구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오!" 장옥평이 외치는 사이에도 두 번의 폭발이 계속되었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외치지 않으면 말을 알아듣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단탈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그들 일행이 들어온 길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노련한 사냥개가 저럴까? 불길은 그들의 뒤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통구이가 되지 않으려면 마냥 앞으로만 달릴 수밖에... '하루 종일 이꼴이군.' 단탈은 곁에 있던 석소용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혼이 빠져 버렸기 때문일까? 다행히도 석소용은 발작하지 않았다. 단탈을 비롯한 장옥평, 박한은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삐이익! 삐이익! 삑! 두 번은 길게, 한번은 짧게...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폭음을 뚫고 단탈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 * * "조심... 아! 조심하라니까!" 이희안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염마수( 摩繡)의 네 귀퉁이를 잡고 있는 화룡인들은 입 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염마수는 길이 삼 장에 너비 이 장의 거대한 그물이었다. 자체만으로는 지독히 질기고 내화성(耐火性)이 강한 그물에 불과한 염마수... 하지만 이희안이 긴장하고 화룡인들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진정한 까닭은, 그물코마다 매달려 있는 어린애 주먹만한 백색의 구체(球體)에 있었다. 그 구체는 순간적인 발화력(發火力)에 관한 한 천하에서 당할 것이 없다는 기물(奇物), 벽력구(霹靂球)였기 때문이다. 비록 화룡인들의 복장이 제아무리 뛰어난 방화복(防火服)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화룡인들이 수련한 무공이 제아무리 양강내공(陽剛內功)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벽력구의 마화(魔火) 속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러한 벽력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염마수에다가 작은 충격에도 쉽게 터지는 감도 높은 뇌홍(雷汞:뇌산수은)을 장치하고 있었으니, 천하의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멀리서 호각 소리가 울려 왔다. 두 번은 길게, 한번은 짧게... 이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각 신호는 사냥감이 연단림의 중심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숲 초입에 매복한 화룡일호(火龍一號)는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숲 한복판에 매복한 화룡이호(火龍二號)가 암기(暗器)들을 이용, 사냥감을 이리로 몰아 올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사냥감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겠지... 이희안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맺혔다. 어쩌면 백석교까지 이르기도 전에 화룡대만으로 사냥감을 노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것도 총사의 지시대로 매복과 화기만 사용해서! "자, 이제 위장을 시작한다." 이희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화룡인들은 활짝 펼쳐진 염마수 위에 조심스럽게 흙을 덮기 시작했다. * * * 꽝-! 반 냥도 안 나갈 소맷자락과 백 근에 달하는 염왕도(閻王刀)가 부딪치자 어이없게도 폭음이 울려 나왔다. 공야무루는 한 발짝 물러서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거한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거한은 말 그대로 철탑 같았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철갑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공야무루를 흥미롭게 만든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느낌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한은 그의 오십 년 수련이 담긴 장력을 받아 내고도 두 다리로 꿋꿋이 버티고 서 있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흥미를 끈 것이다. "흥! 철한대의 다섯 대장 중 호남지부의 괴악이 소문난 걸물(傑物)이라더니,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잘난 신위(神威)를 감상하게 되었군!" 도연향의 냉랭한 코웃음 소리를 듣고서야, 공야무루는 자신을 막아선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괴악이라는 이름은 노부도 들은 적이 있다만, 그렇다고 노부를 가로막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공야무루의 듣기 좋은 목소리는 어느새인가 짙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염왕도를 앞으로 겨눈 채 이교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괴악은 태산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두툼한 입술 사이로 엷게 내비치는 붉은빛으로 미루어 조금 전 수합(手合)에서 손해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그의 기세는 여전히 위맹했다. 공야무루의 음산한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스르르 이동했다. 한줌의 진기만으로도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다닐 수 있다는 부신수영(浮身隨影)의 신법... 바로 다음 순간, 공야무루의 몸은 훌쩍 허공으로 솟구쳐 괴악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 갔다. "하압!" 굳게 다물린 괴악의 입술이 벌어지며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기합이 터져 나왔다. 부우웅-! 염왕도는 어두워 가는 하늘을 찢을 듯이 솟구쳤다가 땅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이 장에 달하는 염왕도의 낙하 궤도 속에는 공야무루의 호리호리한 몸뚱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공야무루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끌끌... 곰 같은 놈!" 공야무루는 합장(合掌)하듯 쌍수를 모았다가 가볍게 뒤집었다. 휴릉- 순간, 한 줄기 봄바람 같은 음유진기(陰柔眞氣)가 일어나 염왕도와 맞부딪쳤다. 공야무루가 자랑하는 경령장(輕靈掌)이었다. 경령장의 묘용은 작은 힘으로 큰 힘을 흔드는 데 있었다. 경령장의 음유진기가 염왕도의 측면을 부드럽게 감싸자, 염왕도는 괴악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엉뚱한 허공을 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염왕도가 지나간 자리로 뼈다귀만 남은 것 같은 늙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꽝! 괴악은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쭉 밀려나갔다. "크윽!" 괴악이 신형을 바로 세운 것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교의 바로 앞까지 밀려난 뒤였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것은 공야무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곤오철로 만든 철갑을 겁없이 육장(肉掌)으로 후려친 죄과였다. 공야무루는 왼손목을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망할 놈의 쇳덩이!" 공야무루를 더욱 화나게 만든 것은, 그의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괴악이 여전히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가 화낼 일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공야무루의 눈이 뒤집어졌다. 괴악이란 놈은, 입으로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마치 자신을 처리하지 못한 것을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이교에게 사죄하고 있지 않는가? "이놈이!" 공야무루의 몸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솟구쳤다. 덩치만 믿고 까부는 어린 놈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요량에서였다. "너무 설치는군..." 이교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희고 검은 두 개의 덩어리가 둥실 떠올라 공야무루를 향해 날아들었다. 빠박! 빡! 허공에서 둔탁한 격타음이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억?' 희고 검은 두 개의 덩어리와 부딪쳤을 때, 공야무루는 기이한 반탄력이 온몸을 뒤흔드는 것을 느끼고 헛바람을 삼켰다. 흰 덩어리로부터 튕겨 나온 힘은 끈끈했고, 검은 덩어리로부터 튕겨 나온 힘은 사나웠다. 각각의 힘을 놓고 볼 때 상대하기 곤란하다 할 수 없겠지만, 그 합력을 감당할 능력은 공야무루에게 없었다. "제기랄!" 공야무루는 반탄력에 몸을 내맡긴 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스으으- 이 장 가까이 날아가 몸을 세운 공야무루의 앞에, 희고 검은 두 개의 덩어리가 그 모호한 형체를 드러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기 힘든 사이로운 기운이 풍기는 모습들이었다. "정말 이러긴가? 삼풍(三風)까지 부려 가면서 내게 덤비겠다는 건가?" 이 순간, 도연향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이교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전 공야무루를 공격한 것은 흑풍(黑風)과 백풍(白風). 대법에 의해 사육되어, 오로지 사육자인 이교의 명령만을 따른다는 세 명의 괴인, 삼풍 중 두 명이었다. 싸움에 있어서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이교와 맞먹는다 하며, 그 중 두 명이 합공한다면 네 명의 이교라 해도 당해 낼 수 없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 바로 삼풍이었다. 도연향의 물음에 이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연향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이끌고 온 사람은 공야무루를 위시해 다섯 명에 불과했다. 이교가 직위를 무시한 채 그녀에게 대항한다면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장옥평을 내게 넘겨 달라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인가?" 도연향의 목소리는 어느덧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삼 년 전, 옥주께서 내리신 명을 사공녀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교의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도연향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 * *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권 13 장 - 3 묘왕동주 2 권 장옥평은 도연향의 시동생이었다. 지금은 장옥평도, 그리고 그녀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삼 년 전에는 분명히 그랬다. 사패(四覇)와 삼마(三魔)가 굶주린 들개들처럼 제 창자를 쏟아내며 싸우던 남북대전이 끝난 칠 년 전, 그녀의 사부인 철옥주(鐵屋主) 철면신(鐵面神)은 대사형과 그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강북사패의 하나인 산동 장가의 가족으로 들어가 그 가문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외인(外人)인 그들 두 사람이 장씨가문의 가족이 되는 길은 그 가문의 사람과 혼인(婚姻)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남자인 대사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처녀지신(處女之身)인 그녀로서는 쉽게 행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하지만 사부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대사형은 장씨가문의 큰딸과, 그리고 그녀는 장씨가문의 큰아들과 혼인하였다. 물론 치밀한 계략과 안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갈수록 대사형과 그녀의 마음속에는 공통된 의문이 자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하필이면 왜? 사부는 왜 장씨가문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멸망시키려면 풀 한 포기 남겨 두지 않고 깨끗이 짓밟아 버릴 것이지, 왜 가신(家臣)들을 남겨 두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장씨가문은 지금도 사패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대사형과 그녀는 사부의 명령 중 일부를 어겼다. 장씨가문의 둘째 아들인 장옥평을 일부러 놓아 줬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판단하기에는, 장옥평은 유약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일단 놓아 준 뒤 사부의 관심이 흐려졌을 때 다시 생포해도 상관없는 별볼일없는 자인 것이다. 추후 장옥평을 은밀히 생포한 뒤 사부와 장씨가문 사이의 일에 관해 조사한다... 이것이 대사형과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그런데 장옥평에 대한 사부의 집착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사부는 유달리 총애하던 둘째 제자 조추림을 머나먼 묘강으로 파견해 가면서까지 장옥평의 척살을 단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장옥평은 실종되었다. 조추림은 장옥평의 수급 대신 묘녀(苗女) 하나를 꿰차고 돌아왔고, 사부는 -대사형과 그녀로서는 너무나 불만스럽게도- 그런 조추림의 작태를 관대히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삼 년이 흘렀다. 장옥평이 지닌 가치는 망각이라는 괴물에게 먹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런데 며칠 전, 묘강에서 벌어졌던 일에 관해 정보를 주겠다는 괴서찰(怪書札)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로서는 찜찜했던 삼 년 전의 일을 매듭 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사(長沙)에서 대사형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젖혀 둔 채 신발이 닳도록 달려온 것이다. * * * "그를 살려 주겠다는 건 아니야. 과거의 정리(情理)를 생각해 내 손으로 처치하고 싶은 것뿐이지." 도연향의 변명은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하게 들렸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냉혹한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과거의 정리 운운(云云)하다니!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없습니다." 이교는 도연향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도연향의 시선에 언뜻 담긴 이교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빛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이쯤되면 의기양양한 기색이나, 조롱의 기색 정도는 보일 법한데도 말이다. 도연향은 이교라는 사내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3 오늘 하루, 내 다리로 서 있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종일토록 세 남자에 의해 짐짝 취급을 당했던 석소용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팔자 좋은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불길 속을 헤매는 처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일행을 위협한 것은 불길만이 아니었다. 어떤 곳에서는 강전(鋼箭)이 쏟아져 나왔고, 어떤 곳에서는 암기(暗器)가 튀어나왔다. 그런 치밀한 공격 속에서 석소용이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탈의 두 다리에 박혀 있는 물건들이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수전(袖箭) 세 대, 쇠털 같은 금침(金針) 두 대, 콩알만한 성형자(星形子) 두 대... 어깨 위에 얹힌 석소용의 안위에 신경을 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루처럼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원래 튼튼한 몸뚱이요, 원래 잘 뛰는 다리임이 분명했다. 석소용은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불길이 그녀 일행을 쫓아오고 있었다. 채 스무 걸음이나 떨어졌을까?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불이기에 저토록 몰상식하게 놀고 있단 말인가! 문득, 단탈의 뒤를 바짝 따라 달리는 장옥평과 박한의 굳은 안색이 석소용의 시선에 들어왔다. 한결같이 낭패한 기색... "헉, 헉! 아직 멀었나?" 단탈이 헐떡거리며 석소용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석소용의 기억에 의하면, 연단림은 이제 곧 끝난다. 그러면 드디어 백석학, 그곳에는 물이 있다. 지긋지긋한 불길과도 이제 잠시 후면 이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빠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석소용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 * * 이희안은 끈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용면(龍面)의 눈구멍 사이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불길에 쫓겨 달려오는 네 사람... 이희안의 눈에 비친 그들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함정으로 들어오는 미련한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십 장... 칠 장... 오 장... 이희안은 거리를 쟀다. 그리고 사냥감이 점찍은 장소를 지나는 순간, 그는 수중의 끈을 낚아챘다. 버텨 놓은 걸쇠가 벗겨지고, 한껏 휘어져 있던 두 개의 철봉이 팡, 소리와 함께 세차게 튕겨 올랐다. 두 개의 철봉에는 염마수의 두 귀퉁이가 묶여 있었다. * * * 화락! 길바닥이 벌떡 일어나 덮쳐 왔다. 단탈을 비롯해 일행 중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높이 삼 장에 달하는 거대한 장막이 나타나 덮쳐 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탈은 범인(凡人)과 다른 점이 있었다. 적어도 그의 육체는 그랬다. 머리가 위기를 느끼기도 전, 몸뚱이가 먼저 움직였다. 내디딘 오른발이 발목 부위까지 흙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달려오던 탄성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와 동시에, 단탈은 몸을 빙글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덮쳐 오는 장막으로부터 몸을 빼내는 일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런!' 아직도 달려오던 힘을 거두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장옥평과 박한을 발견한 순간, 단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빠져 나갈 길을 동료들에게 가로막힌 셈이었다. 다른 방도? 그런 것을 떠올릴 여유는 처음부터 없었다. 일행의 머리 위에 드리운 장막의 그림자... 단탈은 오른손을 돌려 어깨 위에 올려진 석소용의 허리띠를 움켜잡았다. 길바닥이 일어서 덮쳐 온 것은, 단탈뿐만 아니라 장옥평에게 있어서도 금시초문(今始初聞)의 기사(奇事)가 아닐 수 없었다. 실전의 경험이 풍부한 박한도 그 점에 있어서는 장옥평과 마찬가지였다. 그들 두 사람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거대한 장막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버텨 앞으로 달리던 몸을 멈추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당했다!' 장옥평과 박한, 두 사람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까악!" 이때, 돌연 두 사람을 향해 분홍빛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림자가 내지른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듣는 순간, 두 사람은 그것이 석소용임을 알 수 있었다. 단탈이 짊어지고 있던 석소용이 갑자기 왜 자신들에게 날아왔을까? 그 영문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손을 내밀어 석소용을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석소용을 받는 순간, 그 가녀린 몸뚱이를 통해 전달된 엄청난 역도(力道)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만약 그 힘을 해소하지 못하고 버틴다면, 내공이 빈약한 석소용은 내장이 진탕되는 큰 부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 힘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버텨 저항하는 대신, 그 힘 위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몸은 석소용의 상체와 하체를 받아 안은 채 뒤로 쭉 밀려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 멀어지는 단탈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단탈의 머리 위를 덮어 가는 거대한 장막. 흙덩이가 떨어지며 드러난 거대한 그물.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덩어리들... '염마수( 摩繡)!' 장옥평이 그 저주받은 이름을 떠올린 것은, 그물에 매달린 구체들이 눈알을 후비는 듯한 섬광을 토해 내며 일제히 점화된 순간이었다. 영혼까지 하얗게 탈색(脫色)될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4 장 혈로(血路) (三) 묘왕동주 1 부 2 권 十四章 혈로(血路) (三) 1 신시(申時). 아름답던 노을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사위(四圍)는 혼탁한 밤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전운리는 곁에 선 이교의 신색을 살펴보았다. 이교는 석상이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저러기를 벌써 반 시진째... 참으로 강철 같은 사내였다. 전운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기 중인 호남지부의 병력들로부터 십 장쯤 떨어진 곳, 밤바람에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며 서 있는 도연향이 눈에 들어왔다. 도연향을 이리로 오게끔 만든 서찰을 보낸 사람으로서, 전운리는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교가 그녀를 이토록 푸대접할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일... 철각사 이교가 강단 있는 사내임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 전운리의 입술 끝이 보일 듯 말 듯 비틀어졌다. 이때, 삭교 너머의 연단림 풍경이 갑자기 변했다. 새하얀 섬광이 어둠을 뚫고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오른 것이다. 마치 대지가 하늘을 향해 뇌전(雷電)을 토해 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전운리가 엉겁결에 손을 들어 눈을 가릴 때, 폭음이 울렸다. 꽈르릉-! 딛고 있던 벼랑의 지반(地盤)까지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폭음... 섬광과 폭음 사이의 시차를 감안한다면, 폭발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교!" 가시 돋힌 질타(叱咤)와 함께, 전운리는 한 줄기 가슴 저린 향기를 맡았다. 장미향(薔薇香) 같기도 하고 울금향(鬱金香) 같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도연향의 하늘하늘한 교구(嬌軀)가 이교 앞에 나타나 있었다. "네가 감히 염마수를 쓰다니! 염마수는 총단(總檀)의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는 금병(禁兵)임을 모르지 않을 테지?" 도연향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염마수라고...?' 전운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염마수는 비연리(費延里)가 자랑하는 두 가지 기물(奇物) 중 하나였다. 비연리는 강호에 이화신마(離火神魔)라는 별호로 알려진 자였다. 아니, 단순히 '알려진 자'에서 끝나지 않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자'였다.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비연리는 불에 관한 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한 자였다. 그래서 그가 이끌던 이화산장(離火山莊)은 한때 강남을 석권하던 세 문파 중 하나로 당당히 꼽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화산장은 멸망했다. 바로 철옥에 의해! 그런데 염마수가 다시 등장했다. 비연리가 아니면 누구도 제작할 수 없다는 염마수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화산장의 멸망에는 전운리가 모르는 비밀이 감춰져 있었던 것일까? "책임은 제가 집니다." 이교의 어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어떻게 질 테냐?" 도연향이 비웃듯이 물었다. 기회를 잡은 그녀로서는 어떻게든 이교를 꺾어 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이교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건 형당(刑堂)의 소관입니다." 네가 알 바도, 상관할 바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교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채색 시선을 받은 전운리는 잠시 빠져 들었던 상념의 늪에서 황급히 사고의 발을 빼냈다. 그런 그에게 시선만큼이나 색깔없는 이교의 목소리가 얹혔다. "나타날 때가 되었다. 준비하도록!" * * * 염마는 염부주(炎浮州)를 관장한다는 화신(火神)의 이름이다. 그 염마가 놓은 수(繡)는 생전에 범한 죄의 시간만큼 사자(死者)의 육신을 불태운다고 한다. '한 놈은 죽었다!' 염마수에 달린 마흔여덟 개의 벽력구(霹靂球)가 섬광을 내뿜는 순간, 이희안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물론 염마수를 사용하고도 단 한 놈밖에 잡지 못했다는 것은 불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 이미 지나간 일... 화룡대의 임무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희안은 목에 걸린 호각을 입에 물었다. 삑! 삑! 짧게 두 번... 연단림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희안에 의해 연출된 한 편의 '몰이극', 그 지루했던 막을 내리는 신호였다. * * * 폭발의 전달 속도가 소리의 전달 속도보다 빠를 경우 일어나는 현상을 폭굉(爆轟)이라 한다. 그런 폭굉을 두 번 경험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왜냐하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육신이란 단 한번의 폭굉도 제대로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옥평은 그 무시무시한 폭굉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이 초절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폭발 당시 폭발의 진원지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 할지라도 그 힘에 순행(順行)하고 거스르지 않는다면, 큰 피해를 보지 않는다. 장옥평이 바로 그 법칙의 덕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날아온 석소용을 받아 안았기 때문이다. 장옥평은 품안의 석소용을 내려다보았다. 갈래머리가 풀어져 온통 산발한 석소용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장옥평은 황급히 그녀의 코에 뺨을 대어 보았다. 다행히 규칙적인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움 때문에 잠시 혼절한 모양이었다. 옆에 서 있는 박한도 멀쩡한 것 같았다. 장옥평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석소용을 집어던져 세 사람의 생명을 구한 단탈은 어찌되었을까? 장옥평은 염마수가 삼킨 곳을 바라보았다. 섬광과 열기가 아직도 뿜어 나오는 그곳에는 반경 일 장이 넘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모든 것을 휘감아 한 순간에 태워 버린다는 귀신들린 그물, 염마수! 그 속에서 살아남을 생명체는 없었다. "단탈..." 장옥평의 입에서 비통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잔인한 상황은 그런 비통을 느낄 여유마저도 앗아가고 있었다. 쐐쇄쇄`-`!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든 것은 엄지손가락만큼이나 굵은 노전(弩箭)들이었다. 신체 중 어느 곳에라도 적중되면, 꽂히는 정도가 아니라 사발만한 구멍이 뚫릴 무지막지한 물건들... 석소용을 안은 탓에 검을 쓸 수 없는 장옥평은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려 쏟아지는 노전의 우박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노전의 일부를 박한이 떨궈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전들은 한 방향에서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장옥평으로 하여금 달리던 길로 계속 나아가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숲의 입구에서부터 쫓아오던 불길은 어느덧 턱밑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곳에 그대로 있다가는 노전에 꿰여 산적이 되거나, 불길에 휩싸여 통구이가 될 판국이었다. 장옥평은 단탈 쪽을 바라보았다. "이익!" 분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이런 식으로 도망다니는 것이 분했다.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동료를 잃은 것이 분했다. 너무나도 분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옥평은 이를 악물고 연단림의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2 뜨거웠다. 유황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뜨거웠다. 그 뜨거움 속에서, 격류에 휩쓸린 쪽배처럼 무의식의 공간을 부영(浮泳)하던 단탈의 영혼이 다시 육신으로 돌아왔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단탈은 꼼짝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야수와도 같은 활력을 공급해주던 모든 체내기관(體內器官)들이 일시에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문득,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호(三號)는 몇 명을 데리고 이곳에 남아 정리하라." "예!"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밖의 인원은 놈들을 추격한다. 놈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잊지 말도록, 알았나?" "예!" "그럼 출발한다!" 단탈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끈질기게 단탈의 일행을 괴롭혀 온 놈들이었다.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놈들... 단탈은 허벅지에 묶어 둔 가리아를 향해 팔을 뻗쳤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팔은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힘을 주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가슴으로 치달려 올라왔다. 몸뚱이 구석구석을 누비는 혈관 속에 핏물 대신 불덩이가 치달리는 것 같았다. 그 고통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단탈은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그의 영혼이었다. 으아아`-`! 그와 동시에 핏물이 일제히 아우성쳤다. 그 아우성은 지독한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용광로(鎔鑛爐) 속에서, 단탈은 의식 저편에 감추어진 어떤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이 고통! 피와 영혼과 몸뚱이가 제각각 미쳐 날뛰는 듯한 극렬한 고통! 과거, 단탈은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그때가...?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쾅! 몸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거세게 폭발했다. 그것은 그의 몸 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독기가, 극성(剋性)인 불[火]의 자극을 받아 깨어나는 외침이었다. 염마수의 그물은 여러 겹으로 꼰 사슴의 힘줄에 내화성(耐火性)이 강한 교금(膠金)을 도료로 입혀 만든 것이었다. 질기디질긴 사슴의 힘줄을 가공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교금을 구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하나의 화룡대에 배당된 염마수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진귀한 보급품의 회수에 이희안이 신경을 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화룡삼호(火龍三號) 균방(均尨)은 네 명의 화룡인과 함께 움푹 파인 구덩이로 다가갔다. 구덩이 안에는 둥글게 말린 염마수가 있었고, 그 밑에는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크으..." 균방은 복면의 코 부분을 문질렀다. 짐승의 털을 태우는 노릿한 냄새가 후각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더럽게도 죽었군." 균방이 손짓하자 네 명의 화룡인이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빨리 정리하자."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4 장 - 1 묘왕동주 1 부 2 권 균방이 재촉하자, 네 명의 화룡인이 염마수의 네 귀퉁이를 잡고 힘껏 뒤집었다. 둥글게 말렸던 염마수가 쭉 펼쳐지며, 그 탄력에 의해 시커먼 덩어리가 튕겨 나왔다. 균방은 시커먼 덩어리를 향해 걸어갔다. 시커먼 덩어리는 땅바닥을 구르는 동안 웅크렸던 모습이 펴져, 제법 사람다운 형태가 되어 있었다. 물론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은 전부 재가 되어 버렸고 피부는 먹칠을 한 듯 새카맣게 변색했지만, 적어도 머리통이 어디쯤에 달려 있는지는 분간이 되었다. 시신을 수습할 필요는 없겠지만, 머리통은 잘라 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뭘로 자르나...? 목을 자를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균방의 눈이 번쩍 빛났다. 놈의 곁에 떨어져 있던 거무튀튀한 칼 한 자루를 발견한 것이다. 균방은 음충스럽게 웃으며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단탈의 다리에 박혀 있던 이물질(異物質)들이 서서히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수전 세 대, 금침 두 대, 성형자 두 대... 그것들은 본래 모양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옻칠이라도 한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 * * 이세명에게 배신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진 약흠에게는, 유폐(幽閉)와 다름없는 독곡(毒谷)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참하게 전락해 버린 그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그를 따르는 두 마리 영물(靈物)이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백아(白兒)와 묵룡(墨龍). 이들 두 짐승은 말이 좋아서 영물이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사신(死神)과 마찬가지인 독물(毒物)들이었다. 백아는 뱀 중의 왕이라는 백왕사(白王蛇)요, 묵룡은 품고 있는 독기 때문에 용(龍)이 되지 못한 삼목독각망(三目獨角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약흠에게 대상사(大喪事)가 생겼다. 아들처럼 여기던 두 영물 중 하나인 삼목독각망이 죽은 것이다. 그것도 천수(天壽)를 다해 곱게 죽지도 못하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가뜩이나 흰자가 많은 약흠은 눈이 완전히 하얗게 뒤집혔다. 삼목독각망을 죽인 놈은 삼목독각망의 시체 곁에 넝마처럼 자빠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독인(毒人)이라는 약흠조차도 어느 정도는 꺼리던 것이 삼목독각망의 독기였으니, 여타의 인간, 하물며 야만인 나부랭이가 견뎌 낼 턱이 없었다. 그런데 놈은 죽지 않았다. 체내에 침범한 독은 차치하고서라도, 온전한 부위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외상(外傷)만으로도 열두 번은 더 죽었을 텐데도, 놈은 살아 있었다. 그것은 삼목독각망의 독혈(毒血)을 마셨다 해도, 또 그 내단(內丹)을 먹었다 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삼목독각망의 피와 내단은 약이 아니었다. 자체가 이미 독, 그것도 범인이라면 만질 수도 없는 지독한 독이었다. 놈이 독에 대한 유별난 내성(耐性)을 지니지 않고서는, 그 독중지보(毒中至寶)들을 먹고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일까? 약흠은 놈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놈을 치료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치료에 몇 날 며칠이 걸렸는지 약흠이 기억하지 못할 때쯤, 쇠심줄처럼 질긴 명을 타고난 것이 분명한 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처럼 몸 곳곳에 꿰맨 자국을 매단 채로... 보물처럼 여기던 반혼환(返魂丸)과 백일독단(百日毒丹)을 아낌없이 처먹이고, 간단한 권각술과 한어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약흠은 스스로 돌아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놈에게 정(情)이 붙어 버린 것이다! 놈의 재질은 놀라웠다. 동물적인 반사신경은 약흠과 같이 견식 넓은 노강호(老江湖)로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약흠을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독기운에 대한 친화력(親和力)이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은 처음부터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별종(別種)이었다. 그런 놈에게 삼목독각망의 피와 내단, 그리고 약흠이 아끼는 영단이 더해졌으니, 그 성취는 산독자라 불리던 약흠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놈이 완치되어 독곡을 나가던 날, 약흠은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했다. 놈을 자신을 능가하는 사상 최강의 독인(毒人)으로 만들어, 놈으로 하여금 이세명을 죽이게 해 자신의 원한을 풀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팔 년 뒤... 비록 지니고 있는 힘을 뜻대로 쓸 수는 없었지만, 놈은 약흠을 능가하는 독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약흠은 생명이 빠져 나가는 입술을 힘겹게 들어 놈을 향해 말할 수 있었다. -`이제 너는 독인(毒人)이 되었다. * * * 균방의 눈은 복면의 눈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졌다. 시커먼 손 하나가 스윽 다가와 그의 팔목을 덥석 움켜쥔 것이다. 흑옥(黑玉)처럼 검게 번들거리는 손... 균방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목, 팔뚝, 어깨... 모든 것이 검었다. 그리고 시선이 검게 번들거리는 하나의 얼굴에 고정되었을 때, 균방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 할지라도 거미나 당나귀처럼 흉측한 곤충이 몸에 닿으면 섬뜩한 기분을 느낀다. 균방이 느낀 기분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쁜 예감은 거의 대부분 들어맞는다. "어어...?" 녹는다. 빙갑어(氷甲魚)의 비늘에 역청(瀝靑)까지 입힌 화룡수갑(火龍手匣)이 촛농처럼 녹고 있었다. 구멍이 뚫린 화룡수갑 사이로 맨 살갗이 드러난 것도 잠시뿐. 살갗 또한 삽시에 녹아 버리고 허연 뼈가 드러났다. "으아악`-`!" 고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경악? 공포? 균방이 비명을 지를 때에는, 시커먼 손에 잡힌 그의 팔목은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진 뒤였다. 균방의 비명 소리는 염마수를 회수하던 네 화룡인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균방을 바라본 화룡인들은 일순, 의아함을 느꼈다. 실성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제 팔을 움켜쥐고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한 자리를 뱅뱅 맴돌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때, 균방의 옆에서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뚱이 전체가 칠흑처럼 새카만 괴인이었다. 괴인의 오른손에는 그 피부색만큼이나 검은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 대신 이글거리고 있는 두 개의 녹화(綠火)... 괴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녹화가 화룡인들을 향해졌을 때... "허억!" 화룡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찬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 *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언제 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덜컥거리며 흔들리는 밤하늘,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 '어...?' 잠시 의혹을 느끼던 석소용은, 이내 어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시야의 가장자리에, 흘린 땀으로 범벅이 된 장옥평의 지친 얼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장옥평은 석소용을 품에 안은 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찌나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지, 그녀가 의식을 되찾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석소용은 실눈을 뜨고 장옥평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장옥평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멋져 보였다. 특히 그 얼굴을 구성하는 섬세한 선들은 어떤 여인이라 할지라도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석소용이 장옥평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를 마칠 무렵, 갑자기 흔들거리던 밤하늘이 정지했다. 귓전을 스치던 바람 소리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헉, 헉!" 장옥평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칠 대로 지친 와중에서도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호기심을 느낀 석소용은 장옥평에게 들킬세라 살짝 고개를 돌려 앞쪽을 살펴보았다. 숲은 끝나 있었다. 반가운 일이었다. 이십 장쯤 떨어진 곳에 백석교가 있었다. 역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력은 어둠을 뚫고 주위 경물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고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주위 경물을 살필 수 있었던 것은 한 무리 횃불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백석교 건너에 무리 지어 있는 횃불들은 장대 하나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장대 위에 달린 물체를 석소용에게 보여 주기 위하려는 것 같았다. 석소용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장대 위로 향했다. 그리고 포점(敍店: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장대 꼭대기에 매달린 물체를 본 순간, 석소용의 입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후방에서 끊임없이 날아오던 노전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쳤다. 박한은 중단(中段)에 겨누던 해동검을 하단(下段)으로 늘어뜨리며 거칠어진 호흡을 조절했다. 그의 해동검은 여기저기 날이 빠져 있었다. 하기야 맹렬한 기세로 날아온 노전 수십 개를 떨궜으니, 검신(劍身)이 온전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박한은 후방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삿갓과 도포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데다가 불에 타기까지 했으니 넝마나 다름이 없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후방의 숲을 노려보는 박한의 마음은 명경(明鏡)처럼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싸움이 아니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이 자신이 아님은 처음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된 이상, 누구도 손님임을 주장할 수 없음은 오랜 실전 경험을 통해 몸소 습득한 사실... 싸움에 임하는 모든 이들은 싸움이 시작된 순간,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주체(主體)'였다. 이러다가 목숨이라도 잃으면? 물론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다. 사부의 유명(遺命)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쉬울 것이고,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두번 다시 못 보는 것도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박한은 자조(自嘲)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압록(鴨綠)의 거센 물결을 넘으며 다짐했던 많은 목표들... 하나같이 결국 신외지사(身外之事)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절심거사가 말하고 석삼도가 말한 '서 있는 곳'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그 깨달음의 치졸함에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모든 이들이 저마다 바라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면 그곳은 이미 인간세(人間世)가 아닐 것이다. 산다는 것은 지족(知足)의 법칙을 깨달아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때, 등뒤에서 석소용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박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장옥평이 발견하고, 석소용이 발견한 장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장대 위에 매달려 축 늘어진 사람을 발견한 순간, 박한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석삼도가 있는 곳을 알려 주던 형산파의 장로 석오랑이었다. 석오랑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물빛 도포도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꼭 감긴 눈, 새하얀 안색은 어딘지 불길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그때 다리 앞쪽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시커먼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철갑과 철순, 그리고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박한으로서는 초면(初面)이라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문득, 박한은 그들 일행이 지나온 숲 쪽으로부터도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노전이 날아오던 숲 쪽, 노전 대신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붉은 복면에 붉은 비늘옷을 입은 괴인들... 일행은 백석교를 눈앞에 두고 앞뒤로 포위된 것이다. * * * "효과가 있군."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4 장 - 2 묘왕동주 1 부 2 권 이교의 입에서 혼자말이 흘러나왔다. 놈들을 묶어 두는 최후의 패(牌)로 석오랑의 몸뚱이를 이용하자는 전운리의 제안은 이교의 마음에 딱 드는 것이었다. '강(强)함'을 구성하는 미덕(美德)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억세고, 빠르며, 무자비하고, 치밀하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어우러질 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강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신호!" 이교의 명이 떨어지자, 전운리의 손에 쥔 수호포(手號砲)가 불을 뿜었다. 펑! 유성 같은 불똥 하나가 밤하늘에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놈들을 포위한 다리 저편의 철한대와 화룡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3 도연향은 백석교로부터 삼십 장쯤 떨어진 바위 그늘 아래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다리 건너편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이라고 해봐야 이교 주위에 있는 횃불 십여 개가 전부였으니, 다리 건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감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조명이었다. 하지만 십 성(十成)에 이른 옥녀공(玉女功)은 그녀로 하여금 어둠의 장애를 뛰어넘게 해주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호오!" 문득, 아름다운 입술이 벌어지며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 것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도연향의 곁에 시립(侍立)했던 공야무루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연향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하던가요?" "...?" "저 사람이 바로 장옥평이지요." 공야무루는 도연향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철한대의 무지막지한 장창에 둘러싸인 채 정신없이 쌍검을 휘두르고 있는 백의청년의 모습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가문의 후광(後光)만을 먹고 사는 철부지 어린애로 여겼거늘..." 장옥평은 상처 입은 야수처럼 무섭게 싸우고 있었다. 그를 공격하는 것은 서른 여섯 명의 철한인들... 그들은 아홉 명씩 네 개 조(組)로 나눠 번갈아 가며 장옥평을 향해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서른여섯 명의 철한인이라면 강호의 웬만한 방회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장옥평을 쉽사리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간혹 반격하는 장옥평의 쌍검 아래 쓰러지는 철한인의 수는 벌써 열 명이 넘고 있었다. '백화검법일까?' 장옥평이 휘두르던 쌍검의 투로(套路)를 유심히 관찰하던 도연향은, 그가 전개하는 검법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 시아버지 장낙웅과 남편 장대평의 손에 의해 전개되던 백화검법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옥평의 백화검법에는 딱히 꼬집어 말하기 힘든 이질적인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점이 지금 철한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때, 공야무루가 중얼거렸다. "괴악까지... 곧 끝나겠군요." 공야무루의 말처럼 후방에서 철한인들을 지휘하던 괴악이 장옥평의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아까 공야무루와의 일전을 통해 큰 손해를 입었던 괴악이었지만, 염왕도를 비껴 들고 앞으로 나서는 그의 자세는 여전히 당당하고 위맹했다. 그러고 보면 '철한(鐵漢)'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장옥평은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은 남색 영웅건을 축축하게 적신 것도 부족해 그의 눈가를 쓰라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살기 등등하던 철한인들이 좌우로 쫙 갈라서며, 태산 같은 덩치를 지닌 철갑거한이 장옥평의 앞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꿀꺽! 장옥평은 마른침을 삼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린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내 이름은 괴악이다! 네 목을 취하겠다!" 큰 종을 울리는 듯한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일 장이 넘는 거대한 염왕도가 장옥평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허억!' 장옥평은 쌍검을 머리 위로 교차하며 염왕도를 막아 냈다. 째애앵`-`! 쌍검이 부러질 듯 휘어지며 두 무릎이 부르르 떨렸다. 장옥평으로서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파팍! 힘에 밀려 주춤거리는 사이, 두 자루 장창이 장옥평의 양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그의 옆에서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철한인들의 것이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다가는 옆구리에 큼직한 구멍이 뚫릴 것이 뻔했다. 장옥평은 두 걸음 물러서며 왼손을 옆구리 아래로 번갈아 휘둘렀다. 그와 함께 왼손에 들린 단검이 현란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휘리릭!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양 옆구리부터 엄밀한 검막(劍幕)이 일어나며, 두 자루의 장창은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빈틈!' 장옥평의 눈이 빛났다. 장창들이 서로 뒤엉킨 사이로 실낱 같은 틈새를 발견한 것이다. "하압!" 맑은 기합과 함께, 뒤로 물러섰던 장옥평의 두 다리가 짧게 교차했다. 장창을 채 회수하지 못한 두 명의 철한인과의 거리가 삽시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장옥평은 오른손을 흔들었다. 오른손에 들린 장검이 두 차례의 짧고 빠른 직선운동을 만들어 냈다. 철한대가 걸친 철갑의 단단함에 관해서는 익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장옥평... 그의 장검이 노리고 있던 부위는 철갑으로 보호받지 못한 가랑이 사이였다. 슥`-`, 스윽`-` 장검은 음탕한 여인의 손길처럼 두 철한인의 가랑이 사이로 스며 들어갔고, 물뱀처럼 영활하게 다시 빠져 나왔다. "흐윽!" 장창을 찔렀던 철한인 둘이 허벅지 안쪽에서 피를 뿜으며 주저앉았다. 장검의 양날에 의해 허벅지 안쪽의 광근(廣筋)이 절단된 것이다. 광근은 하체에 힘을 주는 데 필수적인 근육이었으니,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철한인 둘이 불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장옥평은 잠시 숨을 돌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런 부류의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부상을 입은 철한인은 다른 철한인들의 공격을 가로막는 효과적인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 있었다. "멍청한 놈들!" 부웅`-`! 백 근짜리 염왕도가 힘차게 휘둘러지며 쓰러진 두 명의 철한인을 후려쳤다. "끄아악!" 천근 거암이라 할지라도 가루로 만들 무서운 기세가 실린 염왕도는, 두 명의 철한인을 사오 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장옥평은 잠시 멍해졌다. 세상에 제 수하들을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패 죽이는 대장(隊長)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천하에 다시없을 그 비정한 대장이 염왕도를 허공에서 한바퀴 빙글 돌린 뒤, 장옥평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기 때문이다. "쳇!" 이런 부류의 인간과는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장옥평은 허리를 젖혀 염왕도를 얼굴 앞으로 흘려 보낸 뒤, 다시 세 걸음을 물러섰다. 턱! 하지만 장옥평은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등뒤로 느껴지는 석소용의 숨결... 장옥평은 슬쩍 눈길을 돌려 등뒤의 사정을 살폈다. 연단림 쪽에서 나타난 붉은 복면인들을 상대하던 박한도, 어느덧 석소용의 앞까지 밀려나 있었다. 박한의 사정은 장옥평에 비해 조금도 나아 보이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도포 아래로 내비치는 무수한 혈흔들... '이렇게 끝나는가...?' 장옥평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세상의 누구도 들어 본 적이 없을 무시무시한 괴성(怪聲)이 울려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 우워어어`-`! 매용소(梅龍沼)는 하늘을 보았다. 언제나 여유롭던 그의 표정은 이 순간, 조금 굳어 있었다. 무슨 소리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도 저런 소리를 지를 수 없을 것이다. 지옥문이라도 열린 것일까? 그래서 야차(夜叉)라도 출몰한 것일까? 어쨌거나 다행스러운 점은 있었다. 저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마도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용소는 신형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췄던 열일곱 개의 '그림자들'이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4 먹물에 담갔다가 빼낸 사람처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괴인이 박한을 공격하던 화룡인들의 후미를 덮친 것은, 모든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괴성이 울린 직후였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상황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검은 폭풍이요, 파괴의 신이었다. 시커먼 괴인이 움직이는 곳에는 성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최초의 제물은 대열의 뒤쪽에서 대기 중이던 네 명의 화룡인들이었다. 괴인의 손에 들린 거무튀튀한 칼이 장난처럼 휘둘러진 순간, 한 줄기 시커먼 기운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으아악`-`!" 검은 기운을 쏘인 화룡인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이희안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장난 같은 괴인의 칼질에 나가떨어진 네 명의 수하들... 일견하기에도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인간이라면 머리가 사라지고 가슴이 뭉개지는 꼴이 되고서도 목숨이 붙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리와 가슴이 파괴된 형상은 실로 기괴했다. 부서지거나 갈라진 것이 아닌, 통째로 '용해(溶解)'되어 버린 것이다. 삽시에 네 개의 생명을 염라전에 등록시킨 괴인은 그 흉폭한 기세를 멈추지 않고 곧장 화룡인들이 몰려 있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후우욱`-` 시커먼 기운이 뿜어 나오는 것은 비단 괴상하게 생긴 칼뿐만이 아니었다. 손짓을 한번 할 때에도, 발짓을 한번 할 때에도 시커먼 기운이 뭉클거리며 일어났다. 괴인이 움직이는 모든 동작마다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지독한 흑무(黑霧)가 따라다녔다. 마치 괴인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도 되는 양... 화룡인들은 저마다 입고 있던 비늘옷의 빛깔보다도 훨씬 짙붉은 선혈을 뿌리며 날아갔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무자비한 도살극이었다. 어느 누구도 질주하는 마차바퀴처럼 맹렬하게 돌아가는 그 도살극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끄아악!" "케엑!"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4 장 - 3 묘왕동주 1 부 2 권 집단처럼 픽픽 나가떨어지는 화룡인들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무기들이 있었다. 손목에 끼워진 날카로운 용조(龍爪)가 있었고, 기관으로 발사되는 수전(袖箭)이 있었고, 화진(火陣)을 펼칠 때 사용하는 화탄(火彈)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훌륭한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했다. 뱀을 눈앞에 둔 개구리처럼, 가공스러운 괴인의 기세에 눌려 속절없이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다. "...!" 이희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장내에 자신의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수하들은 두 명뿐이었다. 괴인이 이십여 명의 화룡인들을 도륙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큰 숨 몇 번 내쉴 정도? 하지만 괴인의 살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살아남은 두 명의 수하 중 한 명의 머리가 괴인의 주먹 아래에서 두부처럼 으스러지는 것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으스러진 화룡인의 머리통은 곧장 시커먼 연기를 피우며 녹아 버렸다.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괴인의 살인 방식에는 예외가 없었다. "멈, 멈춰!"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희안은 괴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괴인의 검은 몸뚱이가 최후의 생존자인 화룡일호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갈 때였다. 화룡일호는 그 서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희안의 수하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그는 과연 다른 화룡인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어서, 괴인의 칼이 휘둘러지기 전에 다급히 몸을 굴려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났다. 그 반응이 의외인 듯, 괴인의 몸이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괴인은 기괴한 각도로 허리를 뒤틀며 화룡일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그러한 순간적인 방향 전환은 마치 쥐를 쫓는 노련한 고양이의 움직임과 같았다. "헉!" 화룡일호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올 즈음, 괴인에게 접근한 이희안이 크게 호통을 치며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이놈!" 용조에 달려 있는 세 치 길이의 날카로운 강조(鋼爪)가 괴인의 옆구리를 후벼팠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이 순간, 화룡일호를 향하던 공격을 멈추고 강조에 대한 방어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날카로운 강조가 옆구리에 꽂힌다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인은 강조 따위는 아예 무시해 버린 듯, 화룡일호를 공격하던 손길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왼손을 뻗어 화룡일호의 어깨를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을 비스듬히 휘둘러 목덜미를 후려치는 수법은, 마치 도망가는 아이를 붙잡아 볼기짝을 올려붙이는 것처럼 지극히 단순하고도 무지막지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룡일호는 괴인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땅위를 치달리는 검은 번개처럼, 괴인의 손속은 신속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스읏`-` 거무튀튀한 칼은 추호의 사정도 없이 화룡일호의 목덜미를 긋고 지나갔다. 칼에 실린 억센 힘은 살갗과 근육, 뼈를 한 순간에 갈라 버렸다. 칼에서 뿜어진 지독한 흑무는 이미 잘려진 살갗과 근육, 뼈를 한 순간에 녹여 버렸다. 녹기 시작한 화룡일호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것과, 이희안의 용조가 괴인의 옆구리를 후빈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끼이이`-`! "엇?" 이빨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마찰음... 이희안은 깜짝 놀랐다. 마치 단단한 강철판을 찔렀을 때처럼, 강조의 끝이 괴인의 살갗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희대의 파괴자는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상하다는 듯 한번 갸웃거린 괴인의 고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잃어버린 화룡일호의 몸통으로부터 멍청한 표정으로 강조를 내밀고 있던 이희안에게로... '흐윽!' 눈알을 태워 버릴 듯한 괴인의 녹색 안광을 정면에서 마주 대한 이희안은 한 줄기 얼음장 같은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꼬리뼈 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달아나야만 한다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무인로서의 자존심이 이희안의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충돌했다. 이희안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택했다. "하압!" 꺼림칙한 마음속의 공포를 밀어 내기라도 하듯, 이희안은 힘찬 기합을 토해 내며 좌장을 휘둘렀다. 그의 필생 공력이 담긴 양강장력(陽剛掌力)이 손바닥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이 이루어진 탓인지, 괴인은 이희안의 장력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퍽! 장력은 괴인의 얼굴에 격중되었다. 괴인의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쩔컥, 소리와 함께 뒤로 젖혀졌다. '됐다!' 이희안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가 방금 전개한 공력은 양강장력으로는 천하에서 가장 무섭다는 이화신마의 대양수(大陽手)였다. 십이 성(十二成) 공력으로 발출한 그 무시무시한 장력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맞은 자가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지금 이희안의 눈앞에 있는 괴인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턱밑을 활짝 드러낼 정도로 젖혀진 괴인의 얼굴이 스윽,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어...?' 한 자 두께의 청석(靑石)을 관통할 수 있는 장력이 갑자기 솜방망이처럼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괴인은 조금도 충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백치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이희안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문득, 이희안은 한 쌍의 녹색의 횃불이 눈앞으로 쭉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희안은, 한 줄기 열기가 가슴 한복판을 지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청춘을 바쳐 숭배한 화염과는 어딘지 다른, 혼탁하면서도 파괴적인 열기였다. 이희안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괴인의 손바닥이 아교로 붙인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혼백을 쥐어짜는 듯한 지독한 고통! "으어어...!" 그 고통 속에서 이희안은 한 줄기 맵싸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용면(龍面)의 딱딱한 껍질을 비집고 스며 들어오는 구역질나는 냄새... 그것은 노린내였다. 그리고 그 노린내가 자신의 가슴이 녹아 들어가며 풍기는 냄새임을 알아차린 순간, 이희안의 눈가는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안 돼! 안 돼`-`!" 이미 이희안은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하며 두 손을 깍지껴 괴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초식도 무엇도 아닌 단순한 발악이었지만, 공포심이 근육과 혈관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힘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일까? 이희안의 쌍수에 담긴 힘은 코끼리라도 단번에 때려 죽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꽝! 괴인의 목이 아래로 푹 꺾였다. 이번에는 제법 충격이 있었던지, 서서히 들려지는 괴인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희안이 쥐어 짜낸 최후의 일격은 솟구치기 시작한 괴인의 마성(魔性)에 던져진 불쏘시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르르`-`!" 괴인의 입에서 맹수의 으르렁거림과 같은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올 때, 이희안의 눈은 화등잔처럼 휘둥그래졌다. 가슴살을 녹여버리고 체내로 파고든 괴인의 손이 늑골들을 거칠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산 채로 갈비뼈가 뜯기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희안의 입은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지만, 비명 소리는 찢어진 허파 사이로 이미 새어나간 뒤였다. 그리고 과거 이화산장의 십대고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던 잔염객(殘炎客) 이희안은 다시는 기어 올라올 수 없는 죽음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털썩! 괴인은 힘없이 허물어지는 이희안의 몸뚱이에 이미 관심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이희안의 시신을 외면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움은 괴인에 의한 도살극이 시작된 순간부터 멈춰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분할된 것처럼, 장옥평 일행은 철옥의 무리들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싸우고자 하는 투지는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토록 치열한 기세로 달려들던 괴악조차 염왕도를 늘어뜨린 채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이들의 경우는 논할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괴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피부가 조금 밝은 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누구지, 저들은...? 시야에 담기는 경물의 윤곽이 조금씩 분명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으윽...! 머리가 아팠다. 수백 개의 송곳이 일제히 골을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참기 힘든 지독한 고통 속에서 단탈은 서서히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밤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커다란 그물에 갇힌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것이, 단탈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혈관 속을 들끓던 뜨거운 기운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이곳은 어디일까? 문득,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박한, 그 뒤에 석소용, 그리고 장옥평...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들 저러고 있지? 단탈은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동료들을 부르려 했다. "허억!" 하지만 단탈은 걸음을 옮겨 놓기도 전에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장을 에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단전으로부터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불덩어리를 삼킨 듯한 아까의 통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번에 밀려온 통증은 얼음으로 만든 칼이 전신을 난자하는 듯한 섬뜩한 차가움을 품고 있었다. 입 안에 뜨거운 것이 가득 고였다. 걸쭉하고도 비릿한 느낌으로 미루어 피임이 분명했다. 단탈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동료들의 얼굴이 가물거렸다. 광풍 속의 촛불처럼 명멸(明滅)을 반복하는 시야... 촛불이 꺼지듯, 단탈의 의식이 다시 사라졌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4 장 - 3 묘왕동주 1 부 2 권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단탈은 꿈속에라도 다시 들을까 두려운 한 줄기 괴성을 들을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괴성은 자신의 몸 속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었다. * * * 우우우`-`! 괴인은 입에서 피분수를 뿜어 내면서도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무시무시한 괴성을 토해 내고 있었다. 박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괴인의 정체는 단탈이었다. 비록 피부는 칠흑같이 검게 변색했고, 음부(陰部)의 체모(體毛)까지도 한 올도 남지 않았으며, 걸치고 있던 표범 가죽과 목걸이도 깡그리 잃어버린 뒤였지만, 수중에 쥐고 있는 괴상한 칼 하나만으로도 그가 단탈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단탈은 정상이 아닌, 절반쯤은 미친 상태였다. 하기야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아무리 단탈이라고 해도 방금 전과 같은 처절한 살육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탈의 몸이 박한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턱선을 따라 주르르 흐르고 있는 검붉은 선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탈의 몸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피부는 맨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검게 물들어 갔고, 잠시 맑은 빛을 띠던 안광 또한 사기(邪氣)가 감도는 녹색 광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박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와 단탈 사이에 존재하던 이십여 명의 붉은 복면인들은 이미 깨끗이 전멸된 상태... 결국 그는 단탈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박한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탈을 벨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탈에게 죽어 줄 수도 없었다. 박한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해동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봉(劍鋒)을 끌어올려 코끝과 수평이 되도록 만든 박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단탈의 신색을 관찰했다. 만약 단탈이 광증(狂症)이 도져 자신에게 덤빈다면 승산은 희박했다. 방금 전 보여 준 무위(武威)로 미루어, 지금의 단탈은 말 그대로 무적(無敵)이었다. 가까이 접근하기만 해도 죽어 나자빠지는 그런 가공할 무공 앞에서는, 아무리 날래고 정확한 박한의 검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먹혀 들어갈 리가 없을 것이다. 단탈은 어느새 박한으로부터 삼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때 작은 인영 하나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박한과 단탈 사이를 막아섰다. 그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박한은 황급히 검을 거두었다. 한껏 당겨진 활처럼 팽팽하게 응축된 검기를 견디기에는, 그 인영은 너무나도 어리고 가냘펐던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서도 난데없이 뛰어든 존재에 당황했음인가? 단탈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서던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난데없이 끼여든 존재, 석소용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멈춰요!" 석소용은 뾰족한 목소리로 단탈을 향해 외쳤다. 단탈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단탈의 몸이 가까워지자,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나신(裸身)의 구석구석이 석소용의 눈에 활짝 들어왔다. 비록 기괴한 몰골이었지만 달릴 것은 다 달린 단탈이었으니, 보일 것은 다 보이는 셈이다. 침상 아래 감춰 두고 몰래 숨어서 보던 춘화(春畵)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탄력있는 남성(男性)을 목격한 석소용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단탈은 계속 다가왔다. "단탈! 멈추란 말이에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석소용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발악하듯 외쳤다. 단탈의 걸음이 다시 우뚝 멎었다. "우리 아빠 알잖아요? 저기 매달린 게 우리 아빠예요!" 두 눈을 감고도 석오랑이 매달려 있는 백석교 건너편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것은 신통한 일이었다. "단탈! 제발 우리 아빠를 구해 줘요! 그러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단탈! 제발...!" 북받쳐 오른 감정 때문에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 지금의 단탈이라면 아버지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석소용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단탈! 제발...!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여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라아합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마나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단탈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기야 정신이 없을 때라 해도 시각 자체가 마비된 것은 아니었으니, 눈으로 보는 영상이 의식 위에 펼쳐졌다는 표현이 적합하리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라아합도, 마나도 아니었다. 단탈의 눈앞에는 이미 엉망이 된 분홍빛 배자를 얼추 걸친 산발한 소녀가 서 있었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본 후에야, 단탈은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버릇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데다가, 잘난 체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계집애였다. "너... 로구나..." 단탈의 입술이 벌어지며 한마디 토막난 말이 힘겹게 굴러 나왔다. "단탈! 정신이 들어요?" 어둠 속에서 광명이라도 만난 것일까? 석소용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쁨은 한 순간에 불과했다. "으으윽!" 단탈은 또다시 엄습한 한기(寒氣)에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의식은 바람난 마누라처럼 그의 육신으로부터 다시금 떠나려 하고 있었다. 단탈은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써야만 했다. 자칫하면 친구들을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단탈로 하여금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시켜 준 사람은 장내에 있던 사람 중 가장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괴악이었다. 상황을 관망하던 괴악은 단탈이 정신차리는 기색을 보이자 사그라졌던 투쟁 본능을 곧장 불러일으켰다. 너무나 좋은 목표가 괴악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쌍검을 늘어뜨린 채 그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던 장옥평이었다. "차아압!" 괴악은 비껴 든 염왕도를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수법으로 힘차게 휘둘렀다. 휘이익`-`!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장옥평의 귀청에 울렸을 때에는, 일백 근의 염왕도는 이미 그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사실 이 순간, 장옥평은 괴악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단탈이 살아 돌아왔다! 기쁨? 놀라움? 그런 감정들이 이성에 달라붙어 장옥평의 사고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만약 장옥평이 삼 년 동안 수련해 온 것이 '검법'이었다면, 그는 괴악의 일격 아래 허리가 양단(兩斷)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장옥평이 익힌 것은 '검법'이 아닌 '비검'이었다. 염왕도의 파공성을 들은 것과 단검을 쥔 왼팔이 뒤로 꺾어져 비스듬히 옆구리를 방어한 것 사이에는, 찰나라고 부를 만한 시간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을 외물이 아닌 내면(內面)의 지기(知己)로 삼는 비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염왕도에 실린 힘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빠깡! 장옥평의 단검은 염왕도에 밀려 둥글게 휘어졌다 싶은 순간, 높디높은 쇳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나 버렸다. 단검이 염왕도를 버티는 촌각 사이, 장옥평이 몸을 허공에 띄워 가볍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왼팔과 옆구리 부근은 단검의 파편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염왕도의 시퍼런 칼날에 몸을 상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괴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먹은 놈이 어찌 이다지도 질기단 말인가! 괴악은 이 기회에 질긴 놈을 아예 요절내 버릴 작정을 했다. 허공을 미끄러지는 장옥평을 향해 세차게 뻗어 나간 그의 주먹에는 그러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후우웅`-`! 자욱한 흙먼지를 동반한 권풍(拳風)이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로 장옥평의 등판을 향해 밀려갔다. 장옥평의 자세는 장검을 휘둘러 괴악의 권풍을 해소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했다. 그로서는 호신진기(護身眞氣)를 운용해 권풍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쾅! "우욱!" 덩치만큼이나 무지막지한 권력(拳力)이었다. 장옥평은 일시에 호신진기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장이 넘게 허공을 날아간 장옥평이 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단탈의 발 앞이었다. "오라버니!" 곁에 있던 석소용이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놀라며 장옥평을 부축했다. 척추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장옥평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위중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단탈은 창백한 장옥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석소용보다 훨씬 낯익은 얼굴이었다. 삼 년 동안 하나뿐인 동지라고 생각해 왔던 얼굴이기도 했다. 그 얼굴에 달린 입술이 달싹거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이오, 단탈..." 뭐가 다행이란 말일까?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옥... 평...!" 단탈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눈썹이 홀랑 타 무척이나 볼품없이 변해 버린 눈가였지만, 그곳에 떠오른 감정의 빛은 명백한 분노였다. "끄으으..." 단탈의 몸뚱이가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부르르 진동했다. 격해진 감정이 피의 순환을 빠르게 만들자,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한기의 발작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이제는 최소한 적이 누구인지는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우우`-`! 맹수의 포효(咆哮)와도 같은 굉량한 외침과 함께, 단탈의 몸뚱이는 장옥평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철한대를 향해 쇄도해 갔다. * * * "그 녀석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교의 물음에 전운리는 공손히 대답했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 녀석'이란 짐승 가죽을 쓰고 다니던 묘인(苗人)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비록 몰골이 많이 변하고 또 낮에는 볼 수 없었던 굉장한 독공까지 쓰고 있었지만, 모든 정황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기라도 한 것일까?" 이교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주화입마... 그럴지도 모르겠군.' 전운리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 * * 울컥! 가리아를 휘둘러 일곱 명째의 철한인을 저 세상으로 보낸 뒤, 단탈은 한 사발이 넘는 피를 토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4 장 - 4 묘왕동주 1 부 2 권 단탈의 몸은 이교의 추측처럼 심각한 상태였다. 깨어난 독공을 다스릴 시기를 놓친 탓에, 독공에 자극된 선천적인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미친 말처럼 혈맥 속을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흑무도 눈에 띌 만큼 엷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단탈 스스로는 그런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기야 눈치챘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없었다. 사방에서 발악하듯 찔러 들어오는 철한대의 장창군(群)은 단탈로 하여금 제 몸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대로 놔두면 안 돼..." 장옥평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한의 시선이 장옥평에게 향했다. "박 공... 단탈을, 단탈을 도와야 하오." 장옥평은 손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켰다. 박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옥평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철한대에게 둘러싸인 채 한 마리 악귀(惡鬼)처럼 싸우고 있는 단탈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박한은 볼 수 있었다. 단탈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점점이 뿌려지는 핏방울을... 그것은 철한대의 것이 아닌, 단탈의 코와 입에서 뿜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박한은 장옥평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깨달음과 동작은 동시였다. 박한은 해동검을 꼬나쥔 채 단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쩌억! 열세 명째 철한인의 투구가 가리아의 거센 힘 아래에서 두 토막났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단탈의 왼쪽 어깨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 전신을 보호해 주던 독공진력(毒功眞力)이 아니었던들, 꼼짝없이 어깨가 관통당할 뻔한 그런 상처였다. "크윽!" 정신이 혼미스럽다고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탈은 피를 질질 흘리는 와중에 크게 휘청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괴악의 염왕도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뻑! 단탈은 가까스로 가리아를 들어 염왕도를 막을 수 있었다. 그 엄청난 힘에 한쪽 무릎이 풀썩 꺾였다. "죽엇!" 괴악은 다시 한번 염왕도를 내리찍었다. 베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후려쳐서 땅속으로 박아 버리려는 듯한 패도적인 일격이었다. 콰앙`-`! 염왕도가 자루까지 땅속으로 박히며, 부서진 흙덩이가 눈앞을 가릴 정도로 튀어올랐다. 하지만 단탈의 몸뚱이는 이미 염왕도의 칼날 아래를 벗어나 뒤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탈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엇?' 단탈을 잡아 장옥평이 있는 쪽으로 집어던진 뒤 그 대신 철한인들을 가로막은 박한은, 문득 왼손의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어찌 된 일인지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차`-`!" 박한은 눈앞에 버티고 선 염왕도를 든 거한을 향해 폭풍 같은 팔 검을 전개했다. 검을 내지를 때마다 응축된 검기가 검봉을 통해 폭출되며 치이익,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나왔다. "엇?" 박한의 돌연한 공격은 철갑거한을 당황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거한은 급히 염왕도를 휘둘러 찔러 오는 검봉을 후려쳐 막았지만, 팔 검을 모두 막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빠바박! 염왕도 밑을 통과한 삼 검이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거한의 몸통 위에 적중되었다. 비록 거한이 걸치고 있던 철갑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검봉에 실린 검기는 제법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과연, 거한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박한은 이때를 놓치치 않고 얼른 한걸음 물러선 뒤,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 손바닥이 시커멓게 변색해 있었다. 단지 단탈의 피부를 만졌을 뿐인데, 어느새 중독된 것이다. 박한은 황급히 팔꿈치와 어깨의 혈도를 봉쇄했다.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중독의 확산을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 박한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적의 숫자는 거한을 포함해 열 명 남짓... 하지만 다리 건너편에는 몇 명이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이 더 이상 싸울 능력이 없다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한뿐이었다. 그것도 오른팔 하나로... * * * "지금 밀어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교 또한 전운리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교는 전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백석교 이편에 대기하고 있던 철한대 세 조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운리는 웃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하루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작전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5 장 마맥회(魔脈會) 묘왕동주 1 부 2 권 十五章 마맥회(魔脈會) 1 기적은 밤 급류의 굉음을 뚫고 울린 낭랑한 노랫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허이야`-` 어허이야`-` 마음은 뿌리요 몸뚱이는 나무니, 뿌리 셋이 얽혀 큰 나무 이루었네. 어허이야`-` 어허이야`-`` 노랫소리가 들려 온 것은 진격하던 철한대의 선두를 맡은 제오조(第五組) 조장 여탁(呂卓)이 위태로워 보이는 백석교 앞에 도착한 것과 동시였다. 노랫소리는 계곡 밑을 세차게 흐르는 급류, 그 상류 쪽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여탁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암흑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 하나... 여탁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비록 어둠이 내린 뒤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십 장 위인 계곡 위에서도 들을 수 있는 요란한 물소리만으로도 계곡 아래를 흐르는 급류가 얼마나 거센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불빛이라니? 어느 미친놈이 저 위에 배를 띄웠단 말인가? 여탁은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지금 해야 할 더 큰 일이 있었다. "앞 사람과의 간격은 세 걸음! 이 열(二列)로 다리를 건넌다!" 철한대 세 조면 모두 스물일곱 명이었다. 너비가 여덟 자에 불과한 쇠사슬 다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형(隊形)을 성글고 길게 만들어야만 했다. 철한대는 잘 훈련된 정예. 여탁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형은 완성되었고, 곧장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 온 것은, 선두의 여탁이 백석교의 중간을 지날 때였다. 어허이야`-` 어허이야`-` 뿌리 하나가 썩어 더러운 물이 스미니, 큰 나무도 썩어 드디어 넘어졌다네. 어허이야`-` 어허이야`-` 여탁은 힐끗 고개를 돌려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불과했지만, 불빛은 무척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문득, 여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불빛을 보았을 때,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을까? 사십 장? 오십 장? 아니, 오히려 더 멀었음이 분명했다. 그런 먼 거리인데도, 더구나 물소리가 요란한 와중에서도 그토록 생생하게 들렸다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내공은 범상한 것일 리가 없었다. 이때, '어허이야'로 길게 이어지던 후렴구가 뚝 멎었다. 곧바로 울리는 웅혼한 외침... -`향저구(香雎鳩)와 애비익(哀比翼)이 왔다`-`! 야앵무(夜鸚鵡)는 준비가 되었느냐...`?" 쾅`-`! 그 외침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듯, 여탁의 전면에서 굉량한 폭음이 터졌다. "어억!" 여탁은 깜짝 놀라며 손에 잡히는 밧줄 난간을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백석교는 멀쩡했다. 다리가 공격당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었다. 괴악이 여탁의 동료들과 함께 사냥감들을 공격하던 다리 건너편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자욱한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연막탄(煙幕彈)? 그 순간, 연기만큼이나 자욱한 불안감이 여탁의 마음속 한구석으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서둘러!" 여탁은 뒤쪽의 수하들에게 외치는 동시에, 스스로도 다리 끝을 향해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그리고 그를 따라 달리던 스물여섯 명의 철한인들도, 영원히 다리 끝에 당도할 수 없었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으아아아`-`!" 여탁과 스물여섯 명의 철한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추락(墜落)의 느낌... 그것은 날짐승이 아닌 존재들에게는 이질적인 느낌일 수밖에 없다. * * * "뭐, 뭐냐?"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확 피어오르자, 괴악은 당황하고 말았다. 피아(被我)간의 구별은 물론이거니와 방향 감각조차도 일시에 상실해 버릴 정도로 농밀(濃密)한 연기였다. "어떤 놈이 잔재주를 부리느냐?" 괴악은 솥뚜껑 같은 왼손을 번쩍 쳐들어 주위를 향해 마구 벽공장을 퍼부었다. 후릉! 슁! 주위의 연기들이 위력적인 장력에 휘말려 이리저리 밀려갔다. 물론 장내를 꽉 채운 연기를 일시에 날려 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장력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시야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했다. "...!" 괴악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리저리 밀리는 연기들 사이로 쏜살같이 움직이는 인영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유심히 바라보니 수하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이... 귀무심(貴霧深)이라고 했던가? 사조(四組)에 속한 대원으로서, 과묵하고 재주가 있어 눈여겨 보던 자였다. 그런데 귀무심이 움직이는 방향은 백석교 쪽이었다. 그가 왜 백석교 쪽으로 간단 말인가? 적어도 괴악이 생각하기에는 그럴 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밀려온 연기가 괴악의 눈앞을 잠시 동안 가렸다. 괴악은 신경질적으로 왼손을 휘저었다. 연기가 걷혔다. 그 순간, 괴악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백석교 앞에 서 있는 귀무심, 그 오른손 안에서 귀기로운 광채를 뿌리고 있는 단도 한 자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도 단금절옥(斷金切玉)의 귀물(貴物)이었다. 귀무심은 그 단도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오른손을 번쩍 치켜 들고 있었다. 그리고 단도 아래에는 백석교의 밧줄이 있었다. 다리를 끊으려 한다! 사고(思考)는 괴악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치달렸다. 그리고 치달리던 사고가 백석교 위에 올라서 있는 수하들에 이르렀을 때, 괴악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버리고 말았다. "안 돼`-`!" 하지만 떨어져 내리는 귀무심의 오른손은 너무도 무정했다. 밧줄이 끊어졌다. 다리가 뒤집어 졌다. "으아아아`-`!" 수하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한 자루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괴악의 머릿속을 여지없이 관통해 버렸다. 그는 일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산산조각난 사고는 '분노'라는 이름의 접착제에 의해 다시 붙었다. "개새끼!" 괴악의 거구가 귀무심을 향해 쏘아 갔다. * * * 연막탄이 처음 터졌을 때, 박한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동료들의 안위였다. 장옥평은 싸울 수 없었고, 단탈은 싸워서는 안 됐다. 두 개의 큼직한 혹덩어리가 되어 버린 동료들... 거기에다가 영원한 혹덩어리 석소용까지 붙어 있었으니, 박한이 중독된 팔을 가지고도 동료들부터 생각한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이때 자욱한 연기를 뚫고 화려한 그림자 하나가 일행의 곁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뛰어난 청각을 자랑하는 박한조차도 눈으로 보고서야 그 출현을 느낄 수 있을 만치, 그림자의 몸놀림은 빠르고 절묘했다. 박한은 반사적으로 그림자를 향해 해동검을 겨누었다. 순간, 박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의 망막 위에 담긴 그림자의 신색이 너무도 의외로웠기 때문이다. 몸에 착 달라붙는 화려한 채의(彩衣),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붉은 가죽 장화, 그리고 처연함을 느낄 정도로 새하얀 얼굴 한복판에 자리한 새빨간 입술... 이때, 그 새빨간 입술이 벌어지며 낮고도 빠른 몇 마디 한어가 튀어나왔다. 물론 박한으로서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귀하들 중에 혹시 장옥평 공자란 분이 계신가요?" 계곡에 사는 괴물을 총칭, 용망상(龍罔象)이라 한다. 하지만 허깨비처럼 나타난 채의여인은 용망상치고는 너무 예뻤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장옥평은, 채의여인이 자신을 거명(擧名)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소생이 장 모(莊某)이오만..." 채의여인의 길쭉한 눈이 반짝 빛났다. "우리의 예상이 맞았군요!" 무슨 예상이 맞았다는 말일까?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장옥평이 어리둥절해 할 때, 채의여인이 장옥평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자, 현훈탄(眩暈彈)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요!" 어, 하는 사이에 장옥평은 채의여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로 미루어, 지금 모든 이의 시야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연기가 바로 현훈탄이란 기병(奇兵)에 의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현훈탄을 던진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뾰족한 노갈이 채의여인의 행동을 제지했다. "안 돼요!" 장옥평은 고개를 돌렸다. 석소용이었다. "아빠가 아직 저기 있는데, 그냥 갈 순 없어요!" 장옥평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석소용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석오랑은 그에게 있어서 사숙(師叔)이나 마찬가지... 위기에 처한 사숙을 보고서도 꼬리를 만다면, 그것이 곧 패륜아(悖倫兒)요, 비겁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각박했다. 지금 이 순간, 용기란 죽음에 이르는 만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장옥평은 잘 알고 있었다. 장옥평의 갈등을 눈치챘던 것일까? 채의여인의 서늘한 시선이 석소용에게로 향했다. "아가씨가 석오랑 노웅(老雄)의 따님이시군요." 석소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채의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녀로서는 아버지를 놔둔 채 도망가자고 보채는 채의여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다. 채의여인은 그런 석소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호오!" 마치 석소용이 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투의 한숨이었다. 하지만 채의여인의 행동은 그런 한숨과 너무나 딴판이었다. 꼿꼿이 세운 오른손 중지를 번개같이 뻗어 석소용의 혈도 몇 군데를 짚어 버린 것이다. 석소용의 눈이 동그랗게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그녀의 눈은 스르르 감겨 버렸다. 수혈(睡穴)을 짚인 것이다. 실로 신속하고도 효과가 빠른 점혈공부(點穴功夫)였다. 이어 채의여인은 허물어지려는 석소용의 자그마한 몸을 답삭 받아 안았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본 장옥평은 채의여인의 고명한 지법(指法)에 대해 순수하게 감탄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때, 채의여인이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서 피해야 해요...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5 장 - 1 묘왕동주 1 부 2 권 장옥평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석오랑을 적의 수중에 놔둔 채 그냥 달아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채의여인의 말에, 장옥평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석 노웅은 이미 죽었어요. 자신이 인질로 쓰일 것을 안 순간, 심맥(心脈)을 끊어 자결하셨죠." 무후(武侯)는 자신의 시신을 이용, 위장(魏將) 중달(仲達)을 격퇴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신도 강력한 무기요, 훌륭한 작전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고사(故事)이다. 하지만 이것은 경우가 달랐다. 장옥평은 고인(故人)의 시신으로써 자신들의 발목을 묶은 철옥의 잔인함에 대해 치를 떨었다. "자, 저를 따라오세요!" 채의여인은 석소용을 안은 채 몸을 돌렸다. "단탈, 움직일 수 있겠소?" 장옥평은 흙 위에 비스듬히 누워 헐떡거리는 단탈을 향해 물었다. "그럭저럭..." 단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광증은 끓어오르던 독기가 소진(消盡)된 후,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장옥평은 절벽가로 다가가는 채의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장옥평은 여인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다리가 끊어지자 절벽의 양쪽은 완전히 다른 구역, 다른 세계가 되어 버렸다. 삼십 장이란 아무리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 할지라도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였다. 이교는 절벽 끝에 바짝 다가선 채, 저편 절벽 위에서 아직도 뭉클거리는 짙은 연막을 노려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때, 계곡 아래에서 예의 웅혼한 외침이 다시 한번 울렸다. -`야앵무는 준비가 되었느냐`-`? 야앵무! 그리고 아까 들었던 향저구와 애비익! 이교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앵무(鸚鵡)와 저구(雎鳩), 그리고 비익(比翼)은 모두 날짐승들의 이름이었다. 가히 철면(鐵面)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교의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지게 만든 것은 물론 날짐승들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별호로 삼는 인간들이었다. 문득, 저편 절벽가에 몇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장옥평 일행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들 일행은 한 사람 늘어 있었다. 화려한 채의를 입은 늘씬한 여인... 여인은 안고 있던 소녀를 장옥평에게 건넨 뒤, 품속에서 길쭉한 원통을 꺼냈다. 그리고 원통을 계곡 아래로 던졌다. 계곡 아래로 떨어지던 원통은 어느 순간, 번쩍이는 섬광으로 화(化)했다. 계곡 아래 웅크리고 있던 어둠을 일시에 몰아내 버릴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었다. 이교는 그제서야 계곡 아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척의 배가 이교가 서 있는 절벽 아래 정박해 있었다. 선수(船首)에서 선미(船尾)까지 길이가 오 장 남짓한 주가(舟 :쾌속선)였다. 갑판 위에는 이남일녀... 그리고 선수에 꽂혀 휘날리는 커다란 깃발을 본 순간, 이교의 입술 사이에서는 짓씹는 듯한 혼자말이 흘러나왔다. "마맥회(魔脈會)..." * * * 봉황(鳳凰)이 그려진 깃발 아래 서 있던 향저구(香雎鳩) 구양일산(歐陽一山)은 머리 위에 터진 섬광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약속했던 신호였다. 야앵무는 늦지 않았던 것이다. 구양일산의 늙수그레한 시선이 주가의 난간 부근에 서 있던 일남일녀(一男一女)에게로 향했다. 사십을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그들 일남일녀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자는 왼쪽 팔이, 여자는 오른쪽 팔이 몸통에 달려 있지 않은 외팔이였던 것이다. 구양일산의 시선을 받은 사내, 좌훈(左勳)은 고개를 끄떡인 뒤 오른팔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의 오른팔에는 보통의 것들에 비해 두 배는 더 커다란 강궁(强弓)이 들려 있었다. 왼팔이 없는데 어떻게 활을 쏘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좌훈의 왼팔 역(役)을 해줄 사람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오른팔이 없는 여인, 진연(眞娟)은 난간에 기대 놓은, 다섯 자가 넘는 강전(鋼箭)을 들어 좌훈이 들고 있던 활의 시윗줄에 걸었다. 좌훈과 진연의 눈이 마주쳤다. 보일 듯 말 듯한 웃음. 그리고 강전이 발사되었다. 씨이잉`-`! 강전은 세 겹으로 꼰 삼줄을 꼬리처럼 매단 채 맹렬한 비행을 시작했다. * * * 곤오철로 만든 방패가 없었다면, 귀무심은 이미 오래 전에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쾅! 염왕도가 또 한번 철순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귀무심의 몸뚱이도 염왕도가 튕겨 나간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으..." 귀무심의 입가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철순이 달린 왼팔은 하박 부분은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 모르긴 몰라도 뼈 또한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괴악은 귀무심보다 상수(上手)였다. 거기에다가 두 사람의 싸움을 목격한 철한인들이 귀무심의 주위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귀무심은 악착같이 저항했다. 그는 어떻게든 반 각(半刻)의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이`-`얍`-`!" 귀무심은 오른손으로 움켜쥔 장창을 수레바퀴처럼 내돌리며 괴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철옥에 위장가입(僞裝加入)하기 이전부터, 창술에 일가견이 있던 그였다. 그러한 그의 창술은 장창을 병기로 삼는 철한대에 소속된 뒤 더욱 발전하였으니, 그의 능력은 이미 조장들보다도 윗전에 올라 있었다.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요란스러운 창영(槍影)이 염왕도의 진로를 가로막자, 괴악은 한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한걸음의 후퇴가 괴악의 포악함을 더욱 부채질한 것일까? "이 쥐새끼 같은 놈!" 괴악은 호통을 지르며 염왕도를 광풍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권(刀圈) 안에 갇힌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염왕도칠십이초(閻王刀七十二招) 중에서도 절초라 할 수 있는 구풍난비(九風亂飛)의 수법이었다. 콰콰콰`-`! 귀무심은 필사적으로 손발을 놀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구풍난비의 무서운 기세를 막아 내기에는, 왼팔에 달린 방패는 너무나도 작은 것이었다. 왼팔이 팔꿈치 어림부터 잘려 날아갔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염왕도의 시퍼런 칼날은 귀무심의 몸통 여기저기를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있었다. "크으윽!" 괴악의 엄청난 힘은 인간의 골육(骨肉)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곤오철로 만들어진 철갑은 멀쩡했지만, 갑주 아래의 살갗과 뼈는 엉망진창이 된 뒤였다. 귀무심은 문어처럼 흐느적거렸다. 온몸의 뼈가 산산이 으스러진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귀무심은 만족할 수 있었다. 이미 그에게 맡겨진 '반 각'의 임무는 완수한 뒤였다. 그리고 회(會)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맹목적인 것이었다. "마봉황(魔鳳凰)님께... 충성을..." 하지만 귀무심은 그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것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큼직한 호를 그리며 날아온 염왕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굴이 수평으로 쩍, 갈라진 채 널브러진 귀무심을 향해, 괴악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 개새끼..." 괴악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는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귀무심은 수하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간 더러운 배반자였다. "죽어라! 죽어!" 괴악은 염왕도를 휘둘러 이미 생명이 떠난 귀무심의 시신을 후려패기 시작했다. 쾅! 우직! 철갑이 듣기 거북한 비명을 지르며 우그러들 때마다, 철갑의 연결 부위로 살덩이도 아니고 핏덩이도 아닌 죽같이 걸쭉한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괴악의 이런 참혹한 보복은 무려 백여 번의 칼질이 지난 뒤에야 그쳤다. 연막은 어느덧 걷힌 뒤였다. 괴악은 씨근덕거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토막처럼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수하들의 시신... 하지만 사냥감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사냥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 * * 이교는 멍청히 서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섬광이 피어오른 것을 볼 수 있었고, 배 위에서 외팔이 두 명이 강전을 쏜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 강전이 장옥평 일행의 발 아래 절벽에 깊숙이 꽂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에 꿰인 동전들처럼, 장옥평 일행이 하나씩 배 위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이교는 딛고 있던 절벽을 박차고 투신(投身)하고 싶은 충동을 참기 위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어야만 했다. "호오! 일이 뜻대로 안된 모양이지?" 조소(嘲笑)를 머금은 목소리... 이교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교, 이제 작전은 끝났다!" 목소리는 어느새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이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도연향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그의 눈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작전은... 끝났지요." 이교는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도연향이 한 말을 되뇌어 보았다. "작전은 성공했느냐?" "실패했소이다." 이교는 도연향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본디 그는 도연향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교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여긴 도연향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패의 대가를 어떻게 치를 것이냐?" 도연향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 평소의 이교였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형당(刑堂)의 소관입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교는 여전한 표정과 여전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금 당장 치르겠소." 이 대답은, 그러한 이교의 심리가 투영된 것이리라. 이교는 대답과 동시에 오른팔을 도연향을 향해 쭉 내밀었다. "자르시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5 장 - 2 묘왕동주 1 부 2 권 도연향의 눈가에 놀라움의 빛이 잠시 어렸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조롱의 빛으로 바뀌었다. "네 팔 하나가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교는 왼팔마저 앞으로 내밀었다. "합당하다 여길 때까지 자르시오." 이교는 마치 남의 팔을 떼가라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좋... 다..." 도연향의 얼굴 위로 한 겹 살얼음이 내렸다. 그녀는 근처에 있던 무사가 차고 있던 거치도(鋸齒刀)를 뽑아 들었다. "내 사부님을 대신해 너의 죄를 징계하리라!" 도연향은 거치도를 번쩍 치켜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칼을 내리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너그럽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교의 두 팔뿐 아니라 두 다리, 그리고 목까지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독랄했다. 머리 위로 높이 들린 그녀의 칼이 멈춘 것은, 등뒤에서 들려 온 한 줄기 온화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만둬라, 사매."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허리에 고풍(古風)스러운 검을 차고 자주색 무복을 단정하게 걸친 미장부가 서 있었다. 이교의 곁에 서 있던 전운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사람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매용소!' 전운리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혔다. 2 봉황 깃발을 펄럭이는 주가(舟 )는 급류를 헤치며 계곡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물결이 말할 수 없이 거세고, 곳곳에 튀어나온 바위들이 많아 배가 다니기 힘든 길이었지만, 주가의 움직임은 고요한 호상(湖上)을 노니는 것처럼 유유하기만 했다. "이공자(二公子)! 무사하셔서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벌써 일 각째였다. 주가의 갑판 위에 내려선 순간부터 꼬박 일 각 동안, 장옥평은 깨진 종소리처럼 고막을 아프게 후벼 파는 듣기 거북한 목소리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징징 울리는 고막과는 달리 장옥평의 마음은 너무나도 기뻤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에게 있어서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육(陸) 아저씨! 많이 늙으셨군요..." 장옥평은 연거푸 '다행입니다!'를 외쳐대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망막에는 뿌연 물안개가 어려 있었다. 산동장가의 오대가신(五大家臣) 중 한 사람인 침염선생(針髥先生) 육염명(陸廉明)... 검패 장일기가 장씨세가의 가주였던 때부터 철담장부(鐵膽丈夫)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던 노웅(老雄)이었다. 그런 육염명이 고희를 넘긴 지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으니, 그에게 침염선생이라는 별명을 안겨 준 밤송이 수염은 비 맞은 개꼬리처럼 축 늘어졌고, 그가 자랑하던 숱 많던 머리카락은 비루먹은 말갈기처럼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그러니 장옥평이 그에게 새삼스럽게 늙었다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장옥평의 눈에 비친 육염명은 삼 년 전과는 자못 달랐다.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정말 폭삭 늙어 버린 쪼그랑 할아범처럼 보이는 것이다. 눈에 띄게 늙어 버린 친인(親人)을 보는 것은 장옥평 아닌 누구에게라도 서글픈 일이었다. "육(陸) 아저씨! 그런데 여기 웬일이세요?" 반가운 마음이 서서히 사그라지자, 그때서야 비로소 궁금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육염명(陸廉明)은 도대체 어떻게 이 배에 타고 있는 것일까? 육염명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있다가, 장옥평의 물음을 듣고는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노신(老臣)은 세가(世家)의 일로 구양노물(歐陽老物)을 만나러 강남에 왔었지요. 그런데 며칠 전 구양노물이, 자신만 따라오면 공자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믿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와봤는데... 과연 공자가, 공자가... 으허헝!" 껄껄거릴 때는 언제고, 육염명은 말끝을 어물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본디 급한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이처럼 어린애같이 굴지는 않았다. 삼 년 전 실종되었던 장옥평이 버젓이 살아 있어 눈앞에 나타난 사실이, 그의 노안(老眼)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짜내게 만든 것이다.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육염명의 말 중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지금 '세가'라고 하셨어요?" 육염명은 장옥평의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눈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예! '세가'라고 했죠!" "세가라니... 무슨 세가요?" 육염명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이 되었다가, 목소리를 높여 반문했다. "세가라면 공자와 노신이 몸담고 있던 장씨세가지, 또 무슨 세가가 있겠습니까? 그새 살던 집마저 잊어버리셨소이까?" 그 말에 장옥평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장옥평의 가문은 삼 년 전에 멸망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때, 장옥평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배꼽 어림까지 드리운 하얀 수염과 흑일색(黑一色)의 장포(長袍)가 좋은 대비를 이루는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흑포노인(黑袍老人)은 장옥평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색을 보니 내상이 중한 듯한데... 이것을 복용하시오." 내밀어진 흑포노인의 손바닥 위에는 살구씨만한 붉은 환약(丸藥)이 한 알 놓여 있었다. "...?" 장옥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흑포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육염명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이 늙은이가 아까 노신이 말한 구양노물, 십지관홍(十指貫虹) 구양일산이지요. 아마 공자께서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거외다." 십지관홍 구양일산! 장옥평의 눈이 커졌다. '열 손가락으로 무지개를 꿰뚫는다'은 십지관홍은, 과거 남마련을 대표하는 칠 인의 고수, 칠사(七師) 중에서도 당당히 제일석(第一席)를 차지했던 한 사람의 절정무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육족풍(六足風)과 도무비(刀無比), 그리고 이화신마(離火神魔)로 이루어진 삼마를 제외하면, 남마련 내에서 십지관홍을 능가하는 무인은 없다. 이것이 당시 세평(世評)이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지금 장옥평의 앞에 서 있는 노인이 얼마나 거물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옥평은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지금 구양일산과 육염명은 매우 친근해 보였다. 과거 남북대전 당시, 각각 북정회와 남마련의 간부들로서 원수처럼 대치했던 두 사람인데? 구양일산은 장옥평이 선뜻 약을 받으려 하지 않자,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했다. "시기를 놓치면 손상된 진원(眞元)을 회복하기 어려울 테니, 어서 복용토록 하시오." "흠, 흠! 구전옥령단(九轉玉靈丹)이 뭐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몸에 나쁜 물건은 아니니, 공자께선 받도록 하시지요." 곁에 있던 육염명이 구양일산을 거들었다. 장옥평은 그제서야 환약을 받아 입 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육염명의 말과는 달리, 구전옥령단이라 하면 도가(道家)에서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여기는 진귀한 요상약이었다. 그런 귀한 약을 받으면서도 거드름을 부리는 것을 잊지 않는 육양명이었으니, 구양일산이 고소(苦笑)를 흘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구전옥령단의 효능은 명성만큼이나 뛰어난 것이었다. 일단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장옥평은 금방 뱃속이 뜨듯해지고 단전으로 진기가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옥평은 모든 의문을 접어 둔 채, 그 자리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그는 가전(家傳)의 내공심법인 백화심공(百華心功)을 운용, 약력(藥力)에 자극받아 요동치는 진기를 경맥(經脈) 구석구석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손발이 따듯해지며 들떴던 기혈(氣血)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몰아(沒我)의 경지가 가져다 주는 감미로움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사로웠다. * * * 갈대로 엮은 선실 문이 열리고 채의를 입은 여인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장옥평이 대주천(大週天)을 끝내고 막 눈을 뜰 무렵이었다. "아버지! 그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해요!" 채의여인은 구양일산을 향해 '아버지'라 불렀다. 장옥평은 그 말에서 그녀와 구양일산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장옥평은 문득, 아까 절벽 위에서 그녀가 보여 준 고명한 지공(指功)을 떠올렸다. 아마도 구양일산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리라. "관홍지(貫虹指)를 사용했느냐?" 관홍지라면 구양일산이 자랑하는 지공(指功)이었다. "예!" "점혈에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니냐?" 구양일산이 다시 묻자, 채의여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점혈에는 실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의 몸 속을 흐르는 기운은 제 공력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어요." 그제서야 장옥평은 채의여인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란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독공을 몸 안에 지닌 단탈이었다. "허어! 네 관홍지 공부(功夫)로도 통제할 수 없는 기운이 있단 말이냐?" 구양일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더니 선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장옥평과 육염명, 그리고 채의여인이 급히 따라갔다. 선실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다. 큰 배가 아니었으니 넓은 선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선실 한쪽 구석의 침상에는 소녀가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뾰족한 상투가 이색적인 청년이 앉아 있었다. 뾰족 상투의 청년은 왼팔을 큰 물통에 담그고 있었다. 그 물통 안에는 몇 가지 약초를 으깨 즉석에서 만든 해독수(解毒水)가 담겨 있었다. 해독수의 색깔이 검게 변한 것으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지독한 독에 중독되어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실 한가운데, 수건으로 아랫도리만 가린 채 시체처럼 누워 있는 괴인이 있었다. 괴인은 이미 의식이 없었다. 밧줄을 타고 갑판에 내려선 직후,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구양일산은 손을 내밀어 괴인의 맥을 짚으려 했다. 그러자 그의 딸인 구양지(歐陽芝)가 급히 소리쳤다. "그의 살갗엔 괴이한 독기운이 감돌고 있어요. 이 장갑을 끼세요." 구양지는 피독유(避毒油)가 발린 가죽장갑을 구양일산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구양일산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구양일산은 스스럼없이 괴인의 손목을 잡았다. 웬만한 독이라면 심후한 내공으로 막아 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응?" 진맥(診脈)으로 괴인의 몸 상태를 살피던 구양일산의 이마에 갑자기 굵은 고랑이 파였다. 경륜(經綸)으로 말하자면 누구에게라도 뒤지고 싶지 않은 구양일산이었다. 하지만 괴인의 몸 속을 꿈틀거리며 돌아다니는 기운은 그런 그의 자부심을 무참히 뭉개 버릴 정도로 생소한 것이었다. "이 사람의 증상이 어땠소?"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5 장 - 3 묘왕동주 1 부 2 권 구양일산은 그의 등뒤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괴인을 바라보고 있던 장옥평에게 물었다. "한 시진 가까이 독(毒)을 뿜어 냈지요. 그것도 접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녹아 버리는 지독한 독을요..." "독?" 체외로 발출할 정도로 많은 독을 체내에 품을 수 있다면, 이미 대단한 독공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녹이는 독이라니? 천하에 그런 독공이 존재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장옥평의 말은 그러한 구양일산의 의문을 단번에 해소시켜 주었다. "그는 산독자의 진전을 이었습니다." "산독자? 산독자 약흠 말이오?" "예." 구양일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독자 약흠의 진전을 이었다면 그런 가공한 독공을 익혔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독에 관한 한은 고금을 통틀어 맞수가 없다는 사람이 바로 약흠이니까... "참, 그리고 착란(錯亂) 증세가 있었습니다. 토혈(吐血)도 있었고요." 착란과 토혈! 장옥평의 말에 구양일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착란은 화독(火毒)이 뇌문(腦門)을 침범했음을 뜻하니 입마(入魔)의 증상이요, 토혈은 정경(正經)과 기경(奇經)이 정상이 아님을 뜻하니 주화(走火)의 증상이었다. "일단 독기를 제압해야겠소!" 구양일산은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치켜 들었다. 부챗살처럼 쫙 벌어진 그의 열 손가락에 은은한 홍광(紅光)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한 갑자가 넘게 수련한 관홍지의 공력을 운기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구양일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와 동시에 치켜 들린 그의 두 손이 빠른 속도로 괴인의 전신을 누비기 시작했다. 마치 고깃덩어리를 몽둥이로 패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괴인의 몸뚱이가 금방이라도 침상에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파바바`-`! 팔꿈치 안쪽의 소해(少海), 손목 관절 옆의 신문(神門) 등, 수소음경(手少陰經)에 해당하는 혈도가 움푹움푹 파여 들어갔다. 독기운이 심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으음!' 점혈이 진행됨에 따라 구양일산의 얼굴에 굵은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혈도를 찍을 때마다 손가락 끝을 통해 되돌아오는 괴이한 반탄력(反彈力)이 그의 내공을 흔들고 있었다. 구양지가 치료를 포기한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였을 것이다. 구양일산은 공력을 한층 더 높였다. 그의 손가락에 어리던 홍광이 피를 뿜을 듯이 짙은 색으로 변하며, 혈맥(血脈)을 따라 거미줄 같은 금이 손등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홍지가 극성에 달하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하압`-`!" 정순한 내공이 실린 기합과 함께, 구양일산이 입고 있던 장포의 소맷자락이 둥글게 부풀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구양일산의 열 손가락이 섬전처럼 괴인의 몸뚱이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이제는 아예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가히 질풍신뢰(疾風訊雷)라고 할 수 있는 빠르기였다. 세찬 기운은 봉쇄하고 약한 흐름은 풀어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양일산은 괴인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반탄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모아진 좌우의 인지(人指)가 괴인의 거궐혈(巨闕穴)을 똑바로 찔렀을 때... "우웩`-`!" 괴인의 입에서 한 줄기 시커먼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대맥(大脈)에 잔뜩 응어리져 있던 악혈(惡血)이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구양일산은 가볍게 허리를 젖혀 그것을 피했다. 치이이`-` 핏물에 적중된 선실의 천장이 진저리를 치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구양일산은, '사람을 녹였다'라는 장옥평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후우!" 구양일산은 손을 거두며 천천히 숨을 토해 냈다. 그의 전신은 세상에 다시없을 악전고투(惡戰苦鬪)를 치른 사람처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공력의 손실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긴 셈이오. 하지만 노부도 앞일은 장담할 수 없구려. 회복 여하는 오직 그에게 달린 셈이니까." 구양일산의 설명에 장옥평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감사는...!" 구양일산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깊이 숙이는 장옥평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침투시킨 지 이 년이 넘는 간자(間者)를 희생해 가며 장옥평 일행을 구해 준 것도, 그리고 반나절은 운기해야 할 정도로 내공을 써가면서 얼굴도 모르는 괴인을 치료해 준 것도,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자께서는 이곳에서 육 선생(陸先生)과 회포를 풀며 쉬도록 하시오. 잠시 후면 급류도 끝날 테니, 배의 흔들림도 곧 가라앉을 거요." 그 말을 끝으로, 구양일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3 자시(子時)가 될 즈음, 장옥평 일행을 태운 주가는 계곡 사이를 흐르던 급류를 완전히 통과했다. 묘시(卯時) 초(初), 주가는 연수(涓水)의 짙푸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아침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단탈과 석소용이 깨어난 것은 중화(中火)를 먹을 무렵이었다. 석오랑의 부음(訃音)을 전해 들은 석소용은 혼백이 달아난 사람처럼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윽고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구양지는 이렇게 말했다. "석 노야가 그런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형산파의 소경춘을 탓할 수도 없어요. 형산파가 석 노야를 보호하려 했다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물론 형산파 또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요." 구양지의 설명을 들은 석소용은 더욱더 서럽게 울었다. 누구를 원망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꺽꺽 통곡할 뿐이었다. 어린 소녀의 울음은 무쇠 같은 심장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고 보기 어려운 법이니, 하물며 다정다감한 장옥평이야 오죽하겠는가! 장옥평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단탈은 깨어나자마자 그럭저럭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구양일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그의 예상으로는, 단탈은 적어도 사흘 뒤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고, 또 보름은 정양(靜養)해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옥평은 그런 단탈을 보며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단탈의 기적 같은 회복력에 대해서 삼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장옥평이 아는 한, 단탈은 가히 천하무쌍의 명줄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대머리에 민둥 눈썹이 되어 버린 단탈의 몰골은 못생긴 파계승을 연상케 했다. 본디 그리 고운 인상이라 할 수 없던 그였으니, 이제는 마음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하는 것으로 오줌을 지릴 정도로 험상궂은 상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단탈은 중병(重病)을 앓다 일어난 사람처럼 기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상세는 사람들이 염려한 것처럼 위중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중화로 준비한 말린 밥과 육포를 다른 사람보다 배는 더 먹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고, 갑판 난간에 기대어 강바람까지 쐬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단탈의 옆쪽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장옥평은, 밤새 알아 낸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선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은 마맥회(魔脈會)라는 단체에 속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맥회의 전신(前身)은 철옥에 의해 멸망당한 삼마(三魔)의 연합 단체, 남마련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리고 마맥회는 현재 철옥이 지배하고 있는 강남 땅에서, 과거 남마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단탈은 그 일에 대해 별다른 흥미도, 또 의문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너무 세..." 아마도 철옥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장옥평은 또 산동장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의 가문인 산동장가가 아직 건재(健在)하고 있다는 사실과, 얼굴도 한번 본 적이 없지만 그에게 백부(伯父)가 되는 사람이 임시가주(臨時家主) 직(職)을 맡아, 지난 삼 년 동안 그의 종적을 수소문해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처음 육염명에게 전해 들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장옥평으로 하여금 한숨의 잠도 못 이루게 만든 가슴 설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장옥평이 그 이야기를 마치자, 단탈이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가족을 찾은 건가?" 단탈이 언제나 하는 말이었다. 장옥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단탈이 말한 '가족을 되찾는 것'이 단순히 가문이 일어서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이에 대한 슬픔과 한(恨)은, 산 사람에게 언제나 무거운 짐으로 남는다. 그것을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리 자손이 번성하고 아무리 가문이 흥한다 하더라도, 결코 가족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옥평은 많은 사람들을 단탈에게 소개했다. 구양일산과 구양지 부녀, 애비익이라 불리는 좌훈과 진연 부부 등 마맥회 사람들과 육염명이 반가운 표정으로 단탈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단탈은 계속 우울해 보였다. 사람들이 선실로 들어간 뒤, 장옥평은 단탈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단탈이 대답했다. "나는 정말로 타루가가 될 자격이 없어. 나라아합을 잃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수루와 곤작까지 잃어버리다니... 가리아가 이 사실을 알면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걸세." 단탈은 염마수 아래에서 불타 버린 수루와 곤작을 아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수루와 곤작이 빠진 단탈은, 볏 없는 수탉처럼 볼품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장옥평은 자신이 이마에 두르고 있던 짙은 남색 영웅건을 끌러 단탈의 이마에 매어 주었다. 물론 원숭이가 관(冠)을 쓴 것처럼 어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탈은 조금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멋으로 두르는 게 영웅건이라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두른 사람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박한의 왼팔을 마비시켰던 독기운이 모두 빠져 나간 것은 중화로 먹은 음식이 거의 소화되었을 신시(申時) 무렵이었다. 박한은 지독한 혈전(血戰)을 치른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차분하고, 여전히 온화해 보였다. 박한은 배에 탄 사람 중 철옥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루 내내 끈질기게 공격하던 놈들이 누구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박한은 결코 먼저 물어 보려 하지 않았다. 장옥평은 필담을 통해 몇 가지 이야기를 박한에게 했다. 어제 공격한 무리들이 철옥이라는 것, 철옥은 그와 단탈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석오랑은 이미 죽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박한에게 피해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것, 등등... 필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박한의 온화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썼다. <누를 끼쳤다는 말씀은 당치도 않지요. 수행(修行)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석 노야(石老爺)의 일에는 저도 큰 책임을 느낍니다. 장 공(莊公)께서 짐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앞으로도 계속 동행하며 비명(非命)에 가신 석 노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싶군요.> 장옥평은 감격했다. 정말로 예의바르고, 정말로 착한 사람이 아닌가! 해동군자(海東君子)라는 말에 한치의 어김도 없는 사람이었다. 장옥평으로서는 오직 고마울 따름이었다. 단탈과 박한 사이도 하루 전과는 달리 많이 친숙해진 것 같았다. 물론 하루 사이 단탈이 한문을 배웠을 리도 없고 박한이 한어를 배웠을 리도 없으니, 가시적(可視的)으로 두 사람의 교통(交通)에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치열했던 전투는 끈끈한 동지애를 잉태하는 법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단탈과 박한, 두 사람의 눈빛은 어느덧 친우(親友)의 그것처럼 따스한 정이 감돌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5 장 - 4 묘왕동주 1 부 2 권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었다. 유시(酉時) 말(末), 장옥평이 탄 주가는 하섭주(下 洲)의 하상(河上) 어시장(魚市場)을 지났다. 수많은 고깃배들이 강물 위에 장사진(長蛇陳)을 친 채, 저마다 싱싱한 어물(魚物)을 파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경 몇 리에 달하는 그 어시장을 지나자, 주가는 연수의 원류(源流)인 상강(湘江) 어귀에 들어서게 되었다. 자정을 넘어서 축시(丑時), 사람들은 드디어 배에서 내렸다.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아무도 타지 않은 텅 빈 주가는 상강 물결을 따라 흘려 보냈다. 강기슭에는 네 대의 튼튼한 태평차(太平車)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옥평은 챙이 넓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마부들이 모두 마맥회의 회인임을 알 수 있었다. 구양일산을 향해 깊이 구부러지는 그들의 허리가 그것을 말해 주었다. 마차는 하루 내내 달렸다. 마차의 양쪽 창문은 두터운 나무판으로 가려 있어, 장옥평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도 외인(外人)인 장옥평 일행이 회(會)의 본거지를 아는 것을 꺼린 탓이리라. 그날 자시 무렵, 드디어 마차가 멈췄다. 장옥평 일행은 지끈거리는 머리와 메스꺼운 배를 움켜쥔 채 마차에서 내렸다. 그곳은 이름 모를 거대한 장원이었다. * * * 같은 외인의 신분이었지만, 장옥평과 육염명에게는 나머지 세 사람과는 다른 극진한 대접이 베풀어졌다. 침실의 배정만 해도 그랬다. 장옥평과 육염명은 아름다운 욕실이 딸린 호화로운 전각 한 채가 통째로 주어졌지만, 단탈과 박한 그리고 석소용에게는 두 개의 평범한 객방이 전부였다. 그것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복도에 감시자까지 세워 가면서... 딸깍. 박한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찬이 부실해서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진수성찬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전채(前菜)까지 갖춘 제대로 된 식사였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을 받아야만 할 정도로, 지난 하루 동안의 먹거리는 부실한 것이었다. 하기야 하루 내내 흔들리는 마차 속에 있었으니, 실(實)하다 한들 남김없이 게워 내고 말았으리라. 어쨌거나 박한의 튼튼한 위장은 지금 이 순간, 굶주림을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한은 더 이상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옆 자리를 힐끗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석소용의 처연한 모습이 그의 망막을 아프게 찔러 왔다. '쯧, 쯧...' 박한은 섧디섧게 우는 사람을 밥상 앞에 앉혀 두고도 젓가락을 늠름하게 놀릴 만큼 잔인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젓가락을 쥐고 있지 않기는 단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탈이 젓가락을 쥐지 않은 것은 박한과 다른 이유에서였다. 젓가락이란 말조차 모르고 있는 그였으니, 그 사용법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단탈은 하늘이 인간에게 베풀어 준 가장 훌륭한 젓가락을, 그것도 좌우 두 짝이나 열심히 놀리며 접시들을 비워 나갔다. 마치 생전 음식 구경이라고는 한번도 못해 본 사람 같았다. 단탈은 찻잔에 담긴 식은 말리화차(茉莉花茶)를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끝마쳤다. 단탈은 석소용을 바라보았다. 석소용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참 질기게도 운다. 언제쯤 그칠 거냐?" 석소용은 고개를 홱 치켜 들고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단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입술을 일그러뜨리더니, 천장을 뒤흔드는 요란한 곡성(哭聲)을 터뜨렸다. "으아앙! 아빠`-`!" 단탈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우는 아이를 상대하는 것처럼 난감한 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석소용은 한참을 울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상이 와락 엎어졌다. "모두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왔기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어! 너희들만 오지 않았다면...!" 눌물을 주르륵 흘리며 씩씩거리던 석소용은 방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린 음식들 위에 몸뚱이를 내던지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음식 찌꺼기가 얼굴과 옷을 더럽히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쩝!' 단탈과 박한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하는 일이었다. 발광하며 우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석소용이 울음을 그친 것은 천붕(天崩)의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쳤기 때문이리라. "석 노인의 일에 관해서라면 뭐라고 할말이 없군. 일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단탈은 가뿐 숨을 쌕쌕 내쉬는 석소용을 향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소용은 그런 단탈에게 잔뜩 쉬고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놈이 그렇게 꾸역꾸역 잘 처먹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니?" 단탈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단탈의 사고는 언제나 직선적이었다. 만약 석오랑이 자신 때문에 죽은 거라면, 아합족은 장옥평 때문에 멸망한 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니었다. 단탈의 사고법(思考法)에는 그런 식의 책임 전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장옥평에게 악의가 없었던 이상, 장옥평은 아합족의 멸망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자신과 석오랑의 죽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으음..." 단탈은 무거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돌봐 줄 사람 하나 없어진 불쌍한 석소용의 신세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단탈과 석소용은 공통된 슬픔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철옥에 의해 가족을 잃었듯, 석소용 또한 철옥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좋아! 복수해 주지!" 단탈의 단호한 말에 석소용의 충혈된 눈이 반짝 빛났다. "복수를... 해준다고?" "그래!" 한참 동안 단탈의 얼굴을 노려보던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 정말... 이에요?" 단탈은 픽, 웃었다. 슬그머니 바뀐 말투로 미루어 단탈과 박한에 대한 원망이 말처럼 골수(骨髓)에 사무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놈들은 너뿐 아니라 내 원수이기도 해. 내가 원수를 갚으면 너도 자연히 원수를 갚게 되는 셈이니, 우리는 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 석소용은 입술을 꼬옥 깨물다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꼭 지켜야 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그래! 우선 좀 먹어라. 원수를 갚는 것도 보지 못하고 굶어 죽으면 큰일 아니냐?" 단탈의 말에, 석소용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사흘 동안 곡기(穀氣) 구경이라고는 못해 본 위장이 갑자기 날뛰기라도 한 것일까? 석소용은 바닥을 뒹구는 음식 중 깨끗한 놈을 골라 손으로 주워먹기 시작했다. 비록 물기가 그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아까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바로 그거야!" 단탈은 싱긋 웃으며 석소용의 뒤통수를 툭 때렸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6 장 마봉황(魔鳳凰) 묘왕동주 1 부 2 권 十六章 마봉황(魔鳳凰) 1 금빛 깃털을 지닌 매, 금응(金鷹)은 매 사냥을 하는 사람이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영물(靈物)이었다. 그날, 산동(山東)의 어느 누각으로 날아든 새가 바로 그 희귀하다는 금응이었다. 할비(割鼻)는 손가락을 익숙하게 놀려 금응의 발목에 묶인 작은 전통(傳筒)을 풀었다. 전통을 열자 곱게 말린 전서(傳書)가 한 장 나왔다. 할비는 전서를 펴보았다. 전서는 괴상한 기호(記號)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호의 이름은 천과문(天 文)이었다. 본디 대내(大內)의 환관(宦官)들이 비밀서신을 교환할 때 사용하던 문자로 과두문( �뗙�)을 응용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천하에서 이 기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열을 넘지 않는다 하는데, 할비는 별 어려움없이 전서를 해독할 수 있었다. 전서를 해독해 나가던 할비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어렸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할비는 거듭 전서를 읽어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한 뒤,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워 가볍게 비볐다. 푸스스`-` 전서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할비는 날리는 종이 가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책장을 넘기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고고해 보였다. 책 속에 담긴 선인(先人)의 지혜를 음미하기라도 하듯, 책을 읽어 내려가는 노인의 고개는 간간이 끄덕여졌다. 그때마다 운치 있게 흔들리는 탐스러운 수염. 문득,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오랜 독서에 눈이 침침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노인은 책을 덮어 서탁(書卓) 위에 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밖은 밤이었다. 하늘에는 소즐(梳櫛:빗) 같은 달이 정겹게 걸려 있었고, 잘 손질된 정원에는 철 이른 풀벌레 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더웠던 계절의 끝이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리라. "왔나?" 문득, 노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읏`-` 연못가 매화나무 밑의 어둠이 소리없이 허물어지며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만들어졌다. 어둠처럼 새까만 흑의를 입은 사람이었다. 나타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남들은 다 달린 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노인이 말하자 무비괴인(無鼻怪人)은 엎드린 채로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어깨와 등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무비괴인의 구부린 몸은 그 자세 그대로 창가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실로 괴이한 몸놀림이었다. "장옥평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무비괴인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이렇게 나타날 줄 알았지. 어디서 나타났다던가?" "형산이라고 합니다." "형산이라..." 노인의 두 눈에 유현한 빛이 감돌았다. "형산이라면 그가 은거해 있는 곳인데... 우연이었을까?" 혼자말이었지만, 무비괴인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라시면, 혹시 무숙자 석삼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노인은 놀랐다는 표정으로 무비괴인을 바라보았다. "호오! 할비, 자네는 이제 강호의 일도 제법 환하게 통달했나 본데?" 노인은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무비괴인, 할비가 아닌 다른 수하들이 노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노인은 분명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노인의 신분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수하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지고(至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할비라는 자는 노인의 수하였지만 다른 수하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장옥평이 석삼도를 만난 것 같은가?" 할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장옥평이 실종된 곳은 묘강입니다. 형산에 나타난 것은 아마 우연일 겁니다." "그럴까?" 노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할비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디 얘기나 계속해 보게." "예! 호남지부의 이교가 장옥평을 거의 잡을 뻔했지만, 결국 놓쳤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는 대공자와 사공녀도 함께 있었고요." "첫째와 넷째가?" 언제나 부드러울 것만 같던 노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에 불과했다. 노인은 금세 얼굴을 풀며, 껄껄 웃었다. "허허! 내가 옥(屋)을 오랫동안 비웠더니, 아이들이 일거리가 없어 무료(無聊)했던 모양이군." 할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자와 사공녀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무료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벌려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그의 주인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교가 갔는데도 놓쳤다고? 흐음, 물고기도 물에 빠져 죽는 경우가 있다더니..." 노인은 이교를 그 상관인 마린보다도 신임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할비도 마찬가지였다. "염가(廉哥) 계집이 끼여든 모양입니다." "마봉황 말인가?" "예!" 노인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눈치가 빠른 아이야! 호랑이가 토끼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은 셈이군." 하지만 토끼에게 한 방 먹은 호랑이치고는 너무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리고... 공사(工事)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자액(刺額)의 말로는 팔월까지는 완전히 끝낼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가 곧 그리고 갈 걸세. 자액에게 전갈하도록 하게."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깊이 숙여진 할비의 머리를 보며,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자네들은 언제 보아도 믿을 수 있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황공합니다." 할비는 머리를 조아렸다. "곧 시비가 차를 가지고 올 시간이니, 자네는 이제 그만 가서 쉬게나." "예!"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비의 몸은 무릎을 꿇은 채 뒤로 쭉 물러갔다. 그리고 처음 나타났던 매화나무 아래에 도착한 순간, 서서히 어둠으로 동화(同化)되어 갔다. 등장과 마찬가지로 소리없는 퇴장이었다. 할비가 사라진 뒤로도 제법 오랫동안, 노인은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 * * "차(茶)를 가져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노인이 말하자, 방문이 열렸다. 취의(翠衣)를 입은 소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소녀가 찻잔을 서탁에 놓자, 노인은 읽던 책으로부터 눈길을 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흐음, 오늘은 다향(茶香)이 유난히도 좋구나! 향편(香片)은 향편인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이라도 있느냐?" 노인의 물음에 취의소녀는 방긋 웃었다. "오늘 낮 다점(茶店)에서 산 건데, 다점의 주인이 무이산(武夷山)에서 직접 가지고 왔다고 했지요. 찻잎이 훨씬 깨끗하고 가지런한 게, 맛도 훨씬 좋을 거예요." 취의소녀는 다향이 좋은 것이 마치 제 공(功)이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앞으로 한동안은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다니... 그것 참 즐거운 일이구나!" 노인은 정말로 즐거웠다. 취의소녀는 주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할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노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족처럼 느껴지는 주인! 바로 그것이 노인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2 스르릉`-` 창밖으로 스며나오는 비파 소리는 꽃뱀처럼 화사한 몸뚱이를 비틀며 밤의 어둠을 애무하고 있었다. 벽면과 기둥을 화려한 장식과 고풍스런 그림으로 꾸며 놓은 방안. 한쪽 구석에는 바닥까지 백사(百紗) 휘장을 드리운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앉아 있었다. 도포와 흡사해 보이는 하얀 옷에 허리에 묶은 붉은 비단 줄, 이마 한가운데 달려 있는 붉은 보석... 꿈결처럼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품안에서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너 살쯤 되었을까? 비록 질 좋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에 두터운 입술이 중원의 아이들과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아이였다. 두둥, 스르릉`-` 여인의 귓가에는 감미로운 비파 소리가 계속 스며들고 있었다. 비파를 연주하는 사내는 그녀가 걸터앉은 침상으로부터 일 장쯤 떨어진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주는 사내가 앞에 앉아 있다면 고개를 들어 그윽한 눈길이라도 한번 줄 법도 한데, 여인은 고개를 들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비파 연주가 끝났다. 여인은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서는 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발소리... 이어 여인의 시선 속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신 한 쌍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깨 위로 느껴지는 사내의 손길. 여인은 품안의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으응..." 아이는 몇 번 투정을 부리다가 눈을 떴다. 아이의 두 눈에는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몽롱함이 담겨 있었다. 여인은 아이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아이는 여인과 여인의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번갈아 바라본 뒤, 여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은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나무 토막처럼 축 늘어진 왼팔 때문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6 장 - 1 묘왕동주 1 부 2 권 아이가 나가자, 사내는 침상가에 달린 금빛 줄을 당겼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깨끗한 마의를 입은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마치 바닥에 흘린 무엇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마의사내는 종종걸음으로 침상으로부터 다섯 자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일부처럼 변해 버린 마의사내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 한 조각 아픔이 맺혔다. 문득, 여인은 자신의 몸이 일으켜 세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연히 그녀를 일으켜 세운 사내와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는 기이한 빛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열정이었고, 그것은 욕망이었다. 사내는 여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깨지기 쉬운 얼음 조각품(彫刻品)을 다루듯, 사내의 손길은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웠다. 여인은 눈을 감았다. * * * 누우(累尤)는 침상으로부터 다섯 자쯤 떨어진 곳에 마련된 그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자리는 딱딱한 바닥이었다. 하지만 삼 년 가까이 그 딱딱한 바닥에 길들여진 누우에게 있어서는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자리였다. 누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귀는 침상 위에서 들려 오는 단 하나의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활짝 열려 있었다. "허억, 헉!" 사내의 신음이 점차 고조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목이라도 졸리는 사람처럼, 사내의 호흡은 점차 검붉은 탁성(濁聲)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여인의 신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보다 훨씬 청각이 발달한 누우는 사내의 거센 호흡 사이로 가늘게 들리는 여인의 숨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누우가 겪은 바로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사흘에 한번 꼴로 이루어지는 정사(情事), 그것에 임하는 사내와 여인의 태도는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대비되었다. "허억, 헉! 사, 사랑하오! 사랑하오!" 문득, 사내가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열정에 달뜬 목소리를 토해 냈다. 누우는 기다렸다는 듯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사내의 말을 반복했다. "사랑하오! 사랑하오!" 사내의 말과 누우의 말은 같은 뜻을 담고 있었지만, 다르게 들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의 말은 한어였으며, 누우의 말은 묘어였기 때문이다. "오, 오! 당신은, 당신은...! 오! 정말 당신은!" 사내는 절정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뜻을 짐작하기 어렵게 토막난 단어들이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누우는 그런 뜻 없는 단어들조차 빠짐없이 묘어로 통역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은!" 이러한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묘어는 한어에 비해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 거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우는 그런 난도(難度) 높은 통역을 별 어려움없이 해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삼 년씩이나 반복한다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절정(絶頂)... 철썩, 철썩! 땀에 젖은 살갗들이 달라붙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음탕한 반향(反響)을 품은 철썩거림이 누우의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으허억!" 사내의 입에서 끈끈하면서도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침상 위는 금방 조용해졌다. 드디어 정사가 끝난 것이다. * * * "헉, 헉..." 조추림은 나라아합의 가슴 둔덕에 깊숙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구슬 같은 땀방울로 뒤덮여 있었다. 어떤 사내라도 반 시진에 가까운 정사 후라면 이처럼 땀으로 목욕을 하게 될 것이다. 조추림은 나라아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라아합은 꿈조차 없는 깊은 잠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반 시진 동안 정사를 벌인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고요한 기색이었다. "한동안 먼 곳으로 떠나오." 조추림은 나라아합의 긴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쓸며 말했다. "한동안 먼 곳으로 떠나오." 침상 아래 무릎 꿇은 누우가 조추림의 말을 묘어로 옮겼다. 나라아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소." 역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라아합은 눈조차 뜨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추림은 화를 내지 않았다. 나라아합과의 대화는 이것이 정형(定形)이었다. 그녀는 지난 삼 년 간 절대로 조추림과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 그녀의 몸을 가진 삼 년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라아합이 조추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거부라든가 저항과 같은 능동적인 표현은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인형 같았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나 취할 수 있는 여인. 하지만 몸이 뜨겁게 달구어져도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여인... 만약 그녀가 나라아합이 아닌 다른 여인이었다면, 조추림은 아무런 매력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굳이 이유로 들 필요도 없었다. 어떤 남자라도 그런 여인에게는 곧 실증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여인은 바로 나라아합이었다. 그래서 조추림은 그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조추림은 몸을 일으켜 나라아합을 바라보았다. 나라아합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도 고운, 하지만 아무런 표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사랑하오, 나라아합!" 조추림은 천천히 나라아합에게 입을 맞췄다. 누우는 조추림이 나가는 소리가 들린 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만들 만큼 흉칙한 것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눈 대신 검게 타 붙은 화상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눈이 없으니 앞이 보일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누우는 장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삼 년 전의 누우는 장님이 아니었다. 그의 시력은 동쪽 평원 위를 날아다니는 독수리처럼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를 장님으로 만든 사람은 그의 주인인 조추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누우는 한 올의 수염도 없었다. 하지만 삼 년 전의 그는 남들이 탐내는 수염이 있었다. 입을 맞춰 주는 여인들마다 자지러지게 만들 수 있는 북실북실한 거친 턱수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턱수염이 없었다. 삼 년 전 음경(陰勁)과 고환(睾丸)을 잘린 뒤, 그의 수염도 한 올씩 한 올씩 빠져 버린 것이다. 그를 고자(鼓子)로 만든 사람 역시 그의 주인인 조추림이었다. 누우의 존재 가치는 조추림과 나라아합이 정사를 할 때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물론 언제나 입을 여는 쪽은 조추림이었지만`-` 를 통역해 주는 통역자였다. 조추림은 자신이 하는 무슨 말이든 나라아합이 알아듣기를 바랬다. 그것은 정사를 벌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추림은 정사를 벌일 때 눈이 달린 사람, 그것도 정상적인 생식 능력을 지닌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을 참아 낼 정도로 굵은 신경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래서 을온족의 전사였던 누우는 장님에 고자라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끄으으`-`" 누우의 입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도 낮고 너무도 비통해, 듣는 이의 마음을 에일 것만 같은 울음 소리였다. 정사가 끝나고 조추림이 방을 나가면, 누우는 언제나 이렇게 울었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비참한 사내의 울음이었다. 문득, 누우는 자신의 머리를 누군가가 포근하게 안아 주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어머니의 내음이었다. 삼 년 만에 조추림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어를 익힌 영민한 머리를 지니고 있지만, 오직 누우의 생명을 붙여 주기 위해 단 한 마디의 한어도 입 밖에 내뱉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여인이었다. "나라아합!" 누우는 울부짖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3 선덕(宣德) 3년에서 7년까지 5년 동안 강호에 몰아쳤던 남북대전의 피바람. 세간(世間)에 알려진 것처럼, 그 종지부를 찍은 자는 남마련을 멸망시킨 철옥이었다. 하지만 남마련의 멸망에는 드러나지 않은 비사(秘史)가 하나 있었다. * * * 장옥평은 눈을 떴다. 밝았다. 그리고 푹신했다. "으음..." 장옥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산처럼 부풀어오른 베개의 금수(錦繡)가, 초점이 분명하지 않은 망막에 어른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장옥평은 몸을 일으켰다. 몸뚱이 전체가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비단 침상... 그는 문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어젯밤 자시 무렵에 도착한 거대한 장원, 그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채의 전각이었다. 어젯밤 장옥평은 야식조차 마다하고 침상 위에 쓰러질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장옥평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배와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잠자리를 가린 탓은 아니었다. 물론 난초처럼 까다로웠던 산동장가 둘째 공자라면 분명히 그랬겠지만, 환경은 인간을 변하게 만드는 법이다. 지금의 장옥평은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졸리면 자버리는, 그런 강한 신경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장옥평이 그 동안 잠을 못 이룬 것은 모두 기쁨 때문이었다. 마음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을 만치 커다란 기쁨이 사흘 동안의 잠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몰락한 것으로만 여겼던 가문이 그대로 건재해 있다!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만 여겼던 그에게 백부가 있다! 장옥평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힘'을 얻은 것이다. 엄청난 힘을! "기침(起寢)하셨는지요." 난데없이 들려 온 나직한 목소리는 날카로운 침이 되어 장옥평의 몽롱한 머릿속을 여지없이 찔러 버렸다. "...!" 화들짝 놀란 장옥평은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바라보았다. 화조(花鳥)가 수놓인 휘장 옆, 백색 비단치마가 정갈해 보이는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장옥평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고 갸름한 얼굴은 초면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내, 장옥평은 그녀가 사흘 간 동행한 구양지임을 알아차렸다. 화려한 채의와 붉은 장화가 새하얀 비단치마로 바뀐 것에 불과한데, 구양지가 풍기는 인상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 버렸다. 수하를 희생하면서까지 작전을 강행하던 강인한 여인이 갑자기 요조숙녀(窈窕淑女)로 바뀐 것이다. '그것 참!' 장옥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가 원래 저런지, 아니면 구양지가 특별한지는 알 수 없었다.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문 밖에서 여러 번 불렀는데도 계속 주무셨던 것을 보면..." 과연 요조숙녀답게 구양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장옥평을 외면한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소?" 장옥평이 묻자, 구양지는 계속 그를 외면한 채로 대답했다. "동료분들은 이미 점심까지 마치셨지요."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6 장 - 2 묘왕동주 1 부 2 권 점심이라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잔 모양이다. 장옥평은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회주(會主)께서 뵙기를 청하세요.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시는데...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장옥평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마맥회의 회주에 대해서는 이미 구양일산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봉황(魔鳳凰). 삼마(三魔) 중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육족풍(六足風) 염자량(廉子良)의 손녀라고 했다. 결혼도 안 한 처녀의 몸으로 마맥회를 조직, 강호 최강을 자랑하는 철옥에게 당차게 저항하고 있는 여장부라고 했다. 장옥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賓] 된 자로서 주인께 드리는 인사가 없어 송구스럽던 차였소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장옥평은 침상 위에 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 우선 의복을..." 구양지는 얼굴을 붉히며 더욱 고개를 꼬아 장옥평을 외면했다. 그 말에 장옥평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엇?" 장옥평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바지 하나만을 걸친 뻔뻔스런 모습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면 아까 구양지가 얌전을 부린 것도 꼭 그녀가 요조숙녀 티를 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 * 구양지의 안내를 받아 긴 복도를 걷던 장옥평은, 사창(紗窓) 너머로 들려 오는 한 줄기 노랫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어허이야`-` 어허이야`-` 마음은 뿌리요, 몸뚱이는 나무니, 뿌리 셋이 얽혀 큰 나무 이루었네. 어허이야`-` 어허이야`-` 어허이야`-` 어허이야`-` 뿌리 하나가 썩어 더러운 물이 스미니, 큰 나무도 썩어 드디어 넘어졌다네. 어허이야`-` 어허이야`-` 귀에 익은 가락, 귀에 익은 가사였다. 백석학의 전투... 그 악몽 같던 밤, 구원의 시작을 알리던 노랫소리였다. 장옥평은 사창의 성근 사붙이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넓은 연무장(練武場)이 펼쳐 있었고, 사오십 명의 사내들이 웃통을 벗어부친 채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구릿빛으로 번들거리는 살갗 위에 맺힌 구슬땀... 아마도 무공을 수련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허이야`-` 어허이야`-` 세상이 몰라줘도, 세상이 몰라줘도, 큰 나무 다시 세우려는 사람 있으니. 어허이야`-` 어허이야`-` 사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어허이야`-`'를 선창(先唱)하면 다른 사람들이 뒤를 따라하는 식으로, 노래는 진행되고 있었다. 선창하는 사내 역시 웃통을 벗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사내의 왼팔이었다. 사내의 왼팔은 어깨 어림에서 잘려 나가 길이가 한 뼘도 채 안 되는 뭉툭한 살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장옥평은 사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잘려 나간 사내의 왼팔을 알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좌훈이었고, 사내의 왼팔은 강남제일쾌수(江南第一快手)였다. 그 두 가지가 하나였을 때, 강남제일쾌수 좌훈은 남마련의 칠사(七師) 중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절정의 무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좌훈은 왼팔이 없었다. 강남제일쾌수가 좌훈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남마련도 없어졌다. 칠사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그의 왼팔과 더불어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허이야`-` 어허이야`-` 임이여 알아주소서, 임이여 알아주소서. 우리가 흘린 땀, 우리가 흘린 피를. 어허이야`-` 어허이야`-` 마지막 후렴을 부를 때에는, 모든 사내들은 일어서 오른손을 휘두르며 목청이 터지게 악을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은 채 오직 노래 속에 몰입한 열정적인 분위기였다. 현실의 고난을 노래에 실어 잊어 보려는 흥겨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장옥평은 그 안에 담긴 비장함과 숙연함을 읽을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났다. "자, 모두 잘 쉬었나?" 좌훈이 사내들을 둘러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예-!" 한 목소리의 대답. 좌훈은 싱긋 웃더니 연목(練木:연무에 사용되는 단련용 목재)에 걸어 둔 쌍절철곤(雙節鐵棍)을 집어 들었다.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오후 훈련이 끝나면 내가 한잔씩 돌릴 테니, 모두 기쁘게 땀을 흘리자!" 좌훈의 외침을 신호로 연무장은 사내들의 힘찬 기합으로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회주가 본 회의 머리라면, 좌(左) 오라버니는 본 회의 심장이지요." 등뒤에서 들린 구양지의 목소리가 장옥평의 마음을 연무장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장옥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왼팔을 자른 자가 누구요?" 구양지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친구죠." "...!" 그녀의 대답을 들은 장옥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배반당했다면, 남에게 소문내고 다닐 정도로 즐거운 과거지사(過去之事)가 아니었다. 장옥평은 다시 고개를 돌려 사창 밖을 내다보았다. 수하들과 어울려 쌍절철곤을 휘두르며 뛰어다니는 좌훈의 모습이 있었다. 스스로의 말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그의 왼팔은 더 이상 강남제일쾌수가 아닐지라도, 그는 아직 '좌훈'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어울린 이상, 마맥회라는 단체의 저력은 대단한 것임에 분명했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구양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완곡하지만 '빨리 가자'는 독촉이었다. 장옥평은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겼다. * * * 식탁은 여덟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팔선원탁(八仙圓卓)이었다. 하지만 식탁에 앉은 사람은 장옥평과 마봉황, 두 사람뿐이었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지만, 그릇을 치우고 접시를 나르는 시비(侍婢)들이었다. 처음 방안에 들어서 나눈 인사 외에는, 마봉황은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장옥평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령 새로운 요리가 접시에 담겨 나왔을 때, 그녀는 시식(試食) 후 "드시지요"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말'이 아니라 '예의'였다. 벙어리가 아닌 이상, 그녀가 아닌 누구라 할지라도 식사에 초대한 주인이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대건(大件:연회요리의 중심이 되는 음식)으로 나온 것은 제비 둥지를 살짝 데친 뒤 육수(肉水)를 부어 국을 만든 일품관연(一品官燕)과, 구운 오리를 파, 된장과 함께 밀전병에 싸 먹는 괘로전압(掛爐全鴨)이었다. "드시지요." 마봉황은 요리 접시가 나올 때마다 하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하지만 장옥평은 선뜻 요리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그저 요리가 담긴 큼직한 접시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마봉황이 처음으로 '예의'가 아닌 '말'을 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인가 보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하지만 삼 년 전이라면 어땠을까? 두 가지 모두 장옥평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특히 일품관연의 경우는 너무 좋아한 나머지, 천리가 멀다 않고 제비 둥지 요리로 이름난 북경제일루(北京第一樓)의 문턱을 해마다 두 번씩 꼬박꼬박 넘던 그였다. 어릴 때에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라서는 형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장옥평은 고개를 들었다. 마봉황이 크고 맑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품관연과 괘로전압이 비록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고급요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공교로운 일이었다. "소생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옥평의 반문에, 마봉황의 맑은 눈 속에 작은 파랑(波浪)이 일었다. 하지만 그 파랑은 곧 가라앉았다. "저는 배가 부른데... 장 공자께서는 어떠신가요?" 식욕이 없던 것은 장옥평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물과 풀뿌리로 끼니를 때우던 운문곡에서의 생활 탓이다. 장옥평은 젓가락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짝! 짝! 마봉황은 손뼉을 두 번 쳤다. 시비들이 다가와 식탁을 치우고 차를 내왔다. 어색한 침묵이 탁자 위에 맴돌았다. 찻잔을 말끔히 비울 때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이러한 침묵을 깬 사람은 장옥평이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감사드립니다." 마봉황은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무척이나 부드럽다고 생각하며, 장옥평은 또 말했다. "이리로 오는 도중 수하분들이 연무(練武)하는 광경을 보았지요. 하나같이 열혈장부(熱血丈夫)이신 것 같더군요. 특히 그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소생의 가슴도 덩달아 뜨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장옥평의 칭찬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노래? 아! '성수가(聖樹歌)'을 들으신 게로군요.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다들 그 노래를 부르더군요." 성스러운 나무? 장옥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무'니 '뿌리'니 하는 단어들이 여러 번 나왔던 것 같았다. "노랫말을 듣자 하니 무슨 감춰진 뜻이 있는 듯한데... 혹시 소생이 알 수 있겠습니까?" 장옥평이 묻자 마봉황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제가 괜한 질문을 드렸나 보군요." 그것을 지켜보던 장옥평이 미안한 투로 말하자, 마봉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직까지 외인들은 알지 못하는 부끄러운 과거라서 잠시 망설였던 거예요. 하지만 장 공자께서는 아셔도 무방할 것 같군요." 뭔가 의미를 품은 말이었다. 하지만 마봉황은 그것에 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야앵무의 보고에 의하면 장 공자께서는 화룡인들의 공격도 받았다던데...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옥평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단탈을 덮어 버렸던 염마수! 그것은 삼마의 일 인인 이화신마의 물건이었다. 당시 장옥평은 숨막힐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 물건이 나타난 사실에 의문을 느꼈었다. 마봉황은 장옥평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에 또 한번 질문했다. "뿌리 셋이 얽혀 큰 나무를 이루었는데, 뿌리 하나가 썩어 큰 나무가 쓰러졌다... 생각나는 게 없으신가요?" 순간, 장옥평의 눈이 커졌다. 뿌리 셋이 삼마를 가리키고, 큰 나무가 남마련을 가리킨다면... 삼마 중 누군가가 나머지 둘을 배반하기라도 했다는 말일까? 이러한 장옥평의 의문은 이어지는 마봉황의 설명으로 곧바로 해소되었다. "남마련을 배반하여 결국 무너뜨리고, 또 철옥에 들어가 화룡인들을 키운 자가 바로 비연리... 이화산장의 장주이기도 한 그를 사람들은 이화신마라 부르지요." 장옥평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마련이 그토록 어이없이 철옥에 의해 허물어진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1 부 2 권 16 장 - 3 묘왕동주 1 부 2 권 비록 이화신마의 이름이 육족풍이나 도무비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보이는 칼날보다는 보이지 않는 화살이 더 무서운 법이다. 거기에다가 철옥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남마련이 종이호랑이처럼 넘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화신마는 지금 철옥에 있겠군요?" 마봉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철옥 총단의 편제는 선부(仙府)와 마부(魔府)로 구성되는데, 이화신마는 그 중 마부의 부주(府主)이지요." "그러면 선부의 부주는?" "건양우사(乾陽羽士)라면 아시겠어요?" "건양우사...?" 장옥평은 어리둥절해졌다. 건양우사라면 명문 중의 명문이라 할 수 있는 무당파(武當派) 출신이었다. 무당파 전대 장문인인 옥양진인(玉陽眞人)의 사제로서 그 항렬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으니, 배분을 따지기 힘든 명숙(名宿)으로 이름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장옥평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 명숙이 뭐가 부족해서 제 문파를 등지고 철옥에 가입했단 말인가? "건양우사와 이화신마... 솔직히 그들 중 하나만 해도 우리들로서는 벅찬 일이지요. 그러나 철옥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도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이 구름같이 많답니다." 마봉황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마맥회의 총 인원은 삼백여 명... 그 중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마봉황을 포함해 새 이름을 별호로 삼는 열 명의 간부들 정도... 그 인원으로 철옥을 상대하기란 누가 보아도 바위에 계란 던지기에 불과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한숨을 쉬고 싶기는 장옥평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형산에서의 일전(一戰)을 통해 철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경험한 그였지만, 그래도 한 가닥 위안으로 삼는 것은 일 대 일(一對一)이라면 그들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검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건양우사에 이화신마라니! 둘 다 스승인 석삼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전설적인 인물들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그들을 수하로 거느린 철옥의 옥주 철면신은 도대체 어떤 괴물일까? 이때, 마봉황이 말했다. "우리도 철옥과의 싸움에 승산이 없음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장 공자를 구조하는 데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거예요." 장옥평은 마봉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장옥평을 구하기 위해 마맥회의 간부 중 네 명이 사지(死地)로 뛰어들었고, 오래 전 침투시킨 간자를 희생했다. 그것은 장옥평이 예뻐서도 아닐 것이요, 마봉황이 보살 같은 마음씨를 지녀서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값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렇게 야박한 장사를 할 정도로 두꺼운 얼굴을 지니지는 않았죠." 마봉황은 스스로 한 말이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잠시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을 하며 덧붙였다. "우리는 단지 이 일을 계기로 강북사패(江北四覇)와의 협력 관계를 보다 돈독히 구축하려는 거예요." 장옥평은 육양명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육염명이 강남에 온 이유는 오직 하나, 마맥회의 초청 때문이었다. 육양명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참으로 끈질긴 초청이었다. 이 년 동안 열여섯 차례나 밀사(密使)가 산동으로 왔으며, 간부급인 야앵무와 격설옹( 舌翁) 또한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 끈질김은 결국 장가의 가신회의(家臣會議)를 움직였고, 육염명으로 하여금 노구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너 지난날 호적수(好敵手)였던 구양일산을 만나도록 만든 것이다. 사실, 마맥회는 장씨세가를 포함한 강북사패에게 있어서 참으로 묘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마맥회는 남마련의 적통(嫡統)임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강북사패가 남마련과 싸우며 흘린 핏물은 아직도 대지 여기저기에 시커멓게 말라붙어 있었다. 마맥회를 보는 강북사패의 시각이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名分)이었다. 처음 남북대전이 끝났을 무렵만 하더라도 강남이라는 큼직한 부상(副賞)에 허리를 굽신거리던 철옥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본디부터 철옥의 세력권이던 광동(廣東) 북부·복건(福建)·절강(浙江)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호남(湖南)·강서(江西) 지역마저도 깡그리 철옥의 수중으로 떨어진 뒤... 철옥은 실로 '하늘 높은 줄 모른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강북사패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반가운 일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현실이라는 잣대를 통해 본 마맥회는 강북사패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효자와 마찬가지였다. 강북사패와 마맥회. 일 대 일(一對一)로 비교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너무도 차이가 나는 이 두 세력은, 명분과 현실의 부조화 속에서 맹방(盟邦)도 아니고 적도 아닌 기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 공자께서는 귀가(歸家)하시면 곧장 가주에 오르시겠죠. 어때요? 철옥의 타도를 위해 우리와 손을 잡아 보는 것은?" 마봉황은 차분한 목소리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사정하는 투도 아니고 협박하는 투도 아니었다. 스스로는 '장사'을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주 노련한 장사꾼처럼 말하고 있었다. 장옥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봉황을 바라보았다. 미녀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미모를 따지자면 구양지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소녀처럼 맑은 눈빛이 청초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눈가에 엷게 잡히는 잔주름으로 미루어 장옥평보다 연상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봉황을 정교하게 세공한 머리 장식과 양 팔목에 끼고 있는 백옥환(白玉環), 약간 풍염(豊艶)한 몸매... 그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누님과 같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바로 마봉황이었다. 육염명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 기재(奇才)였고, 여자 중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고수였으며, 말 한마디에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수많은 충신들을 거느린 마맥회주였다. "좋습니다." 그러한 동의는 개인적인 은원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천여 명의 식솔을 거느린 산동장가의 차기(次期) 가주로서, 가문의 이익과 전대 가주의 복수를 위해 마봉황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옥평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제1부 하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