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 장 몰살(沒殺) 묘왕동주 제 1 장 몰살(沒殺) 1 참으로 더운 날이었다. 텁텁한 기분이 들 정도로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지만, 후텁지근한 더위는 태양의 유무(有無)와 상관없이 대지를 찜통처럼 달구고 있었다. 삼복(三伏)은 이미 지났고 중추(中秋)도 그리 멀지 않았으니 이제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 법도 하건만, 염천지절(炎天之節)이 반복되기라도 하려는지 요 며칠은 여름 날씨 그대로였다. * * * "이상한 일이야..." 정방(丁龐)은 안 그래도 길게 째진 눈초리를 더욱더 길쭉하게 만들며 혼잣말 을 중얼거렸다. 지금 정방은 마안산(馬鞍山)의 서봉(西峰)을 넘고 있는 중이었다. 한 달 가까운 이번 행보도 이제 구 할 가까이 지나온 셈이어서 이 서봉만 넘으면 목적지인 대고산(大狐山) 일심문(一心門)까지는 백릿길... 그것만 지나면 긴 여정이 무사히 끝나게 되는 것이다. 무사히... 그것은 정말로 '무사히'였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귀물(貴物)을 지닌 일행이, 지난 한 달 동안 그 흔한 녹림도(綠林道) 하나 만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방은 목덜미에 축축이 밴 땀방울을 훔치며 계속 생각했다. '길이 엇갈리기라도 한 것일까?'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정방은 일심문에서 나온 노련한 안내자의 인도를 받으 며 이 길을 지나고 있어야 했다. 정방이 아는 바, 그 안내자는 일심문의 무예 교두인 독이수사(獨耳秀士) 염자연(閻字然)이었다. 별호 그대로 한 쪽 귀가 심하게 짜부라진 짝귀였지만, 자신이 불구라는 사실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호인(好人)이기도 했다. 유쾌한 사람과의 만남이란 모든 강호인의 낙(樂)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정방으로 말하자면 염자연과는 오래 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막역한 사이였 다. 그래서 정방은 한 달 전 이 파견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 다른 네 명의 책임자들과 달리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방의 기쁨이 서봉 초입(初入)의 방가구(方家口)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염자연은 방가구에서 정방 일행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염자연은 고사하고 일심문도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칼날같이 지켜 오던 일정을 하루 늦춰 가면서까지 염자연을 기다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다림에 지친 정방은 결국 염자연의 안내 없이 서봉을 넘기로 작정했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다. "응?" 문득, 정방의 표정이 변했다. 정방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소리가 그의 귓전을 간질이고 있었다. 나직하지만 너무나도 맑아서 듣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소리... 그것이 물소리임을 깨달은 정방은 더위와 갈증에 지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방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황금화 (黃金花)들의 후줄근한 모습이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 갈까?" 정방의 말에 황금화들이 반가운 기색을 떠올렸다. 그것을 본 정방은 자신의 제안이 시기 적절했음에 크게 만족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짜증나는 날씨에 험한 산을 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구나 황금화들 중 다섯 명은 짐 궤짝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허리뼈까지 휘청거리게 만드는 묵직한 짐 궤짝을... "이곳에서 말입니까?" 황금화들의 가장 고참인 사래긍(史來肯)이 정방에게 물었다. 넓은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면, 입 밖으로 꺼내어 불평하지만 않았을 뿐 사래긍 또한 무척이나 덥고 지쳤던 모양이었다. 이번 행보에 참가한 사람 중 정방을 제외하고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바로 사래긍이었다. 그 사래긍이 저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정방은 이 참에 아예 요기까지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왕 쉬기로 한 바에야 시원한 곳이 좋겠지!" 정방은 사래긍을 향해 털털하게 웃어 보인 뒤, 물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곳의 경치는 정방이 상상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정치(情致)가 있었다. 버들가지가 죽 늘어진 우거진 수림 아래 짤그락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야트막 한 개울은 너비가 삼사 장 정도나 될까? 금모래라도 섞인 탓인지 건너편 사장(沙場)은 물빛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맑은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휴우! 이제야 좀 살겠군." "누가 아니래나? 내 옷 좀 보라고. 쥐어짜면 땀이 한대접은 나올 걸세." 황금화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지껄이며 엉덩이 붙일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정방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방의 눈가에 한 가닥 이채가 번뜩였다. 건너편 사장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선객(先客)을 발견한 것이다. "아직 멀었어?" 늙수그레한 목소리... 선객은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사장 한편에다가 진흙과 나무로 엉성한 화덕을 마련하고 큰 가마솥을 걸어 놓은 뒤, 무엇인가를 신나게 끓여대고 있었다. 불을 피운 지 제법 오래된 모양인지, 들썩들썩 까불대는 가마솥 뚜껑... 정방은 눈살을 찌푸렸다. 엄동설한이라면 모를까, 이런 더위 속에서라면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익은 것 같은데?" 오척단구(五尺短軀)에 어울리지 않게 한 자가 넘는 높은 도관(道冠)을 쓴 곰보도인이 여인을 재촉했다. 보아하니 요리를 맡은 사람이 바로 여인인 듯, 두 노인은 여인의 주위를 맴돌며 보채는 중이었다. "이 더위에 화과자(火鍋子:중국 서부 요리. 큰 그릇에 물을 끓여 각종 재료를 넣고 가림없이 익혀 먹음)라니... 웃기는 사람들이군요." 사래긍이 정방을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가 아니래나?" 정방은 픽 웃었다. 하지만 단지 웃을 뿐이다. 돌멩이를 먹든 쇠붙이를 먹든, 그것은 먹는 사람 마음이었다. 건너편 사장의 화과연(火鍋宴)은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선자(仙子)! 대충 끓었으면 이제 그만 먹자고!" 곰보도인이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가마솥의 뚜껑을 활짝 들췄다. "나잇살이나 드신 양반이 왜 이리 자발머리없이 굴어요?"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살집 좋은 녹의(綠衣)여인은 곰보도인의 손목을 짝 소리나게 후려쳤다. "아이쿠! 이 여자가 이젠 사람을 때리기까지 하네?" 곰보도인은 방정맞은 비명과 함께 들고 있던 솥뚜껑을 떨어뜨렸다. "나이를 거꾸로 먹나, 체통없기는..." 녹의여인이 투덜대며 솥뚜껑을 잡았다. 바로 그때, 곁에서 틈만 노리던 대머 리노인이 가마솥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헤헤, 이것 보라지? 이렇게 잘 익었는걸?" 가마솥에서 나온 대머리노인의 손에는 뜨거운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육편(肉 片) 한쪽이 들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세 사람의 짓거리를 바라보던 정방의 안색이 이 순간, 가볍게 굳어 버렸다. 가마솥 아래에는 장작더미가 시뻘건 불길을 토해 내고 있었다. 뿜어 나오는 허연 김으로 미루어 솥 안의 물은 펄펄 끓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속에 손을 집어넣어 고기를 건져 내다니... 철사장(鐵砂掌)이나 홍사장(紅 砂掌) 같은 독특한 외가공부를 익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어디 맛이나 볼까?" 대머리노인은 손에 쥔 육편을 입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우물거리더 니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역시 귀[耳]가 최고라니까!" '귀?' 정방은 등줄기에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달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방금 노인의 입 안으로 들어간 넓적한 육편은 귀, 그것도 사람의 귀와 흡사했음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저 화과 요리의 재료는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이때, 곰보도인이 대머리노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젠장! 연한 부분은 형님만 처먹기요?" 대머리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귀는 본래 두 짝이 아닌가? 내가 먹은 건 단지 한 짝뿐인데, 아우는 왜 그리 화를 내는가?" "그건 멀쩡한 놈의 경우고! 방금 끓인 놈은 짝귀였잖소?" '짝귀?' 곰보도인의 원망에 찬 푸념은 마침내 한 자루의 뾰족한 비수처럼 정방의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순간적으로 염자연의 호탕한 얼굴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우연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이때, 곰보노인에게 계속 공박당하던 대머리노인이 벌컥 짜증을 부렸다. "알았다, 알았어! 물어 내면 될 게 아니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머리노인의 몸이 그 자리에서 훌쩍 솟구쳐 올랐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그는 소매를 걷어붙인 왼팔을 크게 한번 내둘렀다. 그러자 마치 한 마리 날짐승처럼 하늘을 비스듬히 날아 개울을 단숨에 건널 수 있었다. 허공에서의 부드러운 동작도 놀랍거니와, 물이끼가 잔뜩 낀 돌멩이 위에 표창 박히듯 꼿꼿이 몸을 세우는 삽신착지(揷身着地)의 재주는 실로 뛰어나 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대머리노인의 눈앞에는 개울물을 마시다 말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황금 화 두 명이 있었다. 대머리노인은 싱글거리며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게, 젊은이들!" 황금화 소속 평무사(平武士)의 일원인 고엄(高儼)과 서수락(徐守樂)은 난데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대머리노인을 바라보았다. "노부가 자네들한테 빌려 갈 것이 있는데... 괜찮겠나?" 대머리노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은근하게 들렸다. "...?" 서수락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감이 재빠른 그와는 달리, 고엄은 황금화 내에서도 꽉 막히기로 소문난 위인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 장 - 1 묘왕동주 "뭔데요?" 고엄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말이지..." 대머리노인은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말끝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순간 고엄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든 오른손 수도(手刀)는, 말투와는 딴판으로 지독 하리만치 깔끔한 것이었다. 손날에 절세보도(絶世寶刀)라도 달린 것일까? 팍, 하는 경미한 소리와 함께 고엄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손속이 어찌나 빨랐던지, 허공 이 장 높이까지 솟구쳐 오른 고엄의 얼굴에는 여전히 멍청한 표정이 떠올라 있을 정도였다. "킬킬, 이제야 나도 귀 맛을 볼 수 있겠군." 괴소와 함께 개울 건너편에 서 있던 곰보도인이 왼손으로 무엇인가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고엄의 머리가 개울 건너편으로 주르륵 딸려 갔다. 격공섭물(隔空攝物)의 공부를 펼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으니, 뭔가 괴이 한 재주를 부린 것이 분명했다. "헤헤, 자네 것도 필요해." 대머리노인의 시선이 뒤로 물러섰던 서수락의 얼굴 위에 얹혔다.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으로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서수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포감이 온몸을 엄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수락 또한 나름대로 혹독한 수련 속에서 심신을 단련해 온 무사였다. "이,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서수락은 이를 갈며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차창! 기수식(起手式)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장검은 검집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대머리노인의 면문(面門)으로 짓쳐 들었다. 귀청을 울리는 바람 소리와 어지 럽게 피어나는 검화(劍花)는 서수락의 수련이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전개한 대금강추(大金剛錘)와 두 번째 전개한 선전평붕(旋轉 平崩)이 잇달아 대머리노인의 목덜미 옆으로 비껴 지나갈 때, 서수락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고수를 상대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지랑이처럼 흐느적거리던 대머리노인의 신형이 엄밀한 검화를 뚫고 코앞에서 불쑥 솟구쳤을 때, 서수락의 이러한 감정은 절정에 이르렀다. 팍! 고엄을 죽일 때와 동일한 수법이었다. 손을 치켜 올린 동작도 제대로 볼 수 없었건만, 검푸른 기운이 번들거리는 대머리노인의 수도는 어느새 서수락 의 목덜미를 가볍게 긋고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통이 날아오르고 붉은 핏물이 비단처럼 허공에 쫙 펼쳐졌다. "잘한다, 잘해! 재료야 많을수록 좋지!" 곰보도인은 개구쟁이처럼 즐거워하며 또 한 번 손짓을 했고, 서수락의 머리통 은 끈으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많을수록 좋다? 그런 수가 있었군!" 여태 그것을 모르기라도 했던 것일까? 대머리노인은 깨달음을 얻은 선승(禪僧)처럼 초라한 입가를 무너뜨리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악연(愕 然)함을 감추지 못한 정방 일행이 있었다. * * * 정방은 경신술의 달인이었다. "한 줄기 바람에 실려 천리를 난다"라는 뜻의 승표풍비천리(乘飄風飛千里)가 그의 별호였으니, 이 하나만으로도 몸놀림 의 날렵함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목덜미가 일 할 가량 베어지고 나서는, 제아무리 정방이라 할지라도 바람을 탈 수도, 천리를 날 수도 없었다. "헉, 허억!" 지금 정방은 사람 키만한 바위 뒤에 웅크린 채 상처 입은 들개처럼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으..." 정방은 목덜미에 대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보았다. 채 굳지 않은 끈적끈적한 핏덩어리가 으깨진 홍시처럼 손가락 사이에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빌어먹을...!' 정방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일(一) 각(刻). 더운 차 한 잔이나 겨우 마실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아홉 명의 사람이 아홉 구의 시신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정방은 아직까지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 이지 못하고 있었다. 거상련(車商聯)의 청년무사단(靑年武士團) 황금화는 그렇게 간단히 몰살당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문득 그들이 호송하던 물건이 생각났다. '꾸러미는 어찌 되었을까?' 하지만 정방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은정(銀錠) 백 관(貫:1貫은 약 120兩)이라는 어마어마한 물건이라 해도, 생명이 경각에 달린 이때에는 돌멩이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호호! 달아난 곳이 겨우 여긴가요?" 바위 뒤편에서 여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정방에게는 사신 (死神)의 그것처럼 여겨지는 목소리였다. 정방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숨긴 바위 너머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밝은 색상의 녹라군(綠羅裙)을 입은 여인. 인육(人肉)으 로 화과자를 끓이던 여인이었다. "당신의 이름이 바로 정방이죠? 그런데 경공이 소문처럼 대단하지는 않네 요."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수수한 얼굴을 지닌 녹의여인은 보조개까지 만들어 가며 생글거렸다. 정방의 안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나를 알고 있다?' 물론 정방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가 활동하던 하북(河北)과는 수천 리 떨어진 하남(河南). 그는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타관(他官) 사람이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뿐이다. 이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유추하 면, 세 명의 살성(煞星)은 정방의 임무와 행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 너는 누구냐?" 정방은 적의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호호! 제 이름이 궁금한가요?" 녹의여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발그레한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녹선자(綠仙子)라는 별볼일없는 계집이에요. 하지만 몇몇 점잖치 못한 사람들은 저를 부를 때 녹파파(綠婆婆)라고 부르기도 하죠." "녹파파!" 정방의 동공이 활짝 열렸다. 녹파파라 하면 나이 오십을 훨씬 넘긴 전대의 마녀(魔女)였다.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일단 손을 쓰면 나찰(羅刹)보다도 훨씬 지독하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평이었으니, 정방으로서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해도 벅찬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왜 우리에게 이런 살수(殺手)를 쓴 거요?" 정방의 이번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 왔다. "낄낄! 어린애도 아닌 것들이 왜 그리 호기심이 많은지... 네놈도 일심문의 짝귀와 똑같은 것을 묻는구나." 어린애 같은 웃음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왜소한 인영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우스꽝스런 도관을 쓴 곰보도인이었다. "그렇다면 염 형도 당신들 손에...?" "맞아, 그 짝귀의 성이 염씨였지! 흐흐, 그놈도 벌벌 떨다가 묻더군.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곰보도인은 과장스럽게 몸을 떨며 염자연의 목소리를 흉내내었다. 그러다가 떨던 몸을 딱 멈추며 정방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노도(老道)는 그놈에게 이렇게 대답해 줬지." 곰보도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곧 죽을 놈이 그걸 알아 무엇에 쓸 거냐고..." 그 말과 동시에 곰보도인의 오른손이 홱 뒤집어졌다. 순간, 정방은 한 줄기 빠르고 날카로운 기운이 얼굴로 엄습해 드는 것을 느꼈다. "헉!" 정방은 황급히 허리를 비틀며 몸을 피했다. 파앗! 마치 보이지 않는 부젓가락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볼따구니가 화끈거렸다. 정방은 황급히 자신의 볼을 더듬어 보았다. 그의 왼뺨에는 밭고랑 같은 상처가 길게 파였고, 벌어진 상처에서는 끈적거리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문득 상처의 모양이 유성추(流星錘)에 당했을 때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실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유성추!' 정방은 보이지 않는 유성추를 사용하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이름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대마녀 녹파파에 비해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때 녹파파가 눈살을 찌푸리며 곰보도인에게 항의했다. "흥! 요리할 때는 그리 보채더니, 이제는 내 몫까지 가로채기예요?" "킬킬, 선자가 괜히 시간을 끄니까 그렇지. 그리고 요런 잔챙이야 누가 죽인들 대수인가?" 곰보도인은 여유 작작했다. 입은 녹파파를 향해 주절거리지만, 양손은 부채질 이라도 하는 듯 정방을 향해 휘둘렀다. 정방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소나기처럼 빽빽히 전면으로 날아드는 이 살기는 어디서 비롯되었다는 말인가? 이미 체면 따위를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정방은 나려타곤(懶驪打滾)의 꼴불견을 무릅쓰고 몸을 흙바닥 위로 정신없이 내던졌다. 파파파! 의복이 갈라지고 핏물이 튀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정방의 몸뚱이 여기저기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가까스로 급소만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언제나 제멋대로군요, 몽현도인(夢眩道人)!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녹파파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푸념 섞인 말을 들으며 정방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알았다. 그 이름이 바로 몽현도인(夢眩道人)이었다. 보이지 않는 일곱 정의 몽현추(夢 眩錘)가 허공으로 뿌려질 때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간 강호인의 수가 얼마였던가? '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 장 - 2 묘왕동주 정방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깨달았다. 불현듯 몽현도인이 몸을 담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덕(宣德) 연간을 붉게 물들였던 북정회(北正會)와 남마련(南魔聯) 사이의 남북대전, 그 막바지에 화려하게 등장하여 길고 긴 혈전을 종식시킨 철옥... 몽현도인은 바로 그 철옥에 적(籍)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정방은 땅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한 자 길이의 예리한 단검이 들려 있었다. 어차피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국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개울가에서 세 살성의 살수를 피해 달아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금화들의 우두머리인 사래긍 또한 전장(戰場)에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추격이 자신에게 붙은 이상 사래긍만이라도 살아야만 했다. 그만이라도 살아 돌아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거상련에 똑똑히 알려야만 했다. "차앗!" 정방은 벼락같은 기합을 지르며 곰보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레 진기를 끌어올린 탓인지 갈라진 목덜미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죽음을 각오한 그에게는 그 어떤 장애도 될 수 없었다. 정방은 아랫입술을 터져라 깨물면서 검을 쥔 오른손을 힘차게 떨쳤다. 파르륵`-` 단검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며 일어나는 검기는 정방의 성명절기(盛名絶技) 인 표풍검법(飄風劍法)이었다. 그 필사적인 기세 앞에서는 천하의 몽현도인이라 해도 찔끔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 결국 몽현도인은 두 다리를 이리저리 놀리며 몇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달아날 수 없다!" 하지만 정방은 미친 여자처럼 악착같이 몽현도인에게 달라붙었다. 그의 단검에서 표풍검법 중 살기가 짙은 후반부 여섯 초식이 누에 실처럼 줄줄이 뿜어 나왔다.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공격에 지니고 있는 모든 재주를 건 것이다. "이놈이...?" 몽현도인은 더욱 몸을 재게 움직여 단검의 살초들을 피하다가, 오른손 중지를 세차게 튕겼다. 순간, 한 정의 몽현추가 정방의 인후(咽喉)를 향해 소리없이 날아갔다. 정방은 피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몽현추가 날아온다고 짐작되는 곳에 왼팔을 갖다 댔다. 콰직! 몽현추는 정방의 왼쪽 팔뚝에 여지없이 박혀들었다.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산산이 짓이겨지는 무서운 위력의 일격이었다. 어떠한 필사의 각오도 고통까지 막아 주지는 못하는 법이니, 정수리까지 시큰거리는 통증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방은 그 대가로 몽현도인과의 거리를 일 장 이내까지 줄일 수 있었다. '놈의 사지(四肢) 중 하나는 지옥으로 가져 간다!' 정방은 필생의 공력으로 표풍검법의 마지막 수법인 난풍소야(亂風掃野)를 떨쳐 냈다. 뻗어 나간 단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투로(套路)를 짐작할 수 없는 현란한 검영(劍影)이 몽현도인의 전신으로 밀려갔다. "어엇!" 검광 틈으로 언뜻 비친 몽현도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경적(輕敵) 의 과실을 범한 자가 느끼는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정방의 난풍소야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정방은 당황했다. 어느 순간, 그가 쥐고 있던 단검이 몇 배나 무거워진 것이다. 두 냥 서 푼, 너무나도 손에 익은 애병(愛兵)의 무게가 난데없이 변할 리는 없었다. 이것이 무슨 조화일까? 단검이 주춤거린 틈은 비록 촌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빠른 몽현추요, 너무나도 노련한 몽현도인이었다. 피핑! 몽현도인이 다시 한 번 오른손 중지를 튕기자, 한 정의 몽현추가 엄밀한 검광 틈새를 헤집고 정방의 기해혈(氣海穴)에 틀어박혔다. 석판이라도 관통 할 정도의 무서운 위력이었다. "꺼억!" 기해혈은 진기(眞氣)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요처였다. 정방은 공력이 일순간 에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파파파팍! 그리고 뒤따라 날아든 네 정의 몽현추가 전신에 꽂혔을 때, 정방은 살맞은 기러기처럼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쯧쯧, 아우가 개에게 물릴 뻔했군."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장내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오이 꼭지를 따듯 인두(人頭) 를 잘라 내던 대머리노인이었다. "나서기 좋아하더니, 꼴이 볼 만하군요." 녹파파의 조롱까지 이어지자 몽현도인의 얽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제기랄! 놈이 이렇게까지 덤빌 줄 누가 알았나?" 정방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쥐고 있던 자신의 단검을 보게 되었다. "흐윽!" 순간, 정방의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단검에는 호박처럼 둥그스름한 물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시퍼렇게 변색된 피부, 쭉 빼어 문 혓바닥... 그것은 이미 달아났다고 여긴 사래긍의 머리였다. 정방의 안색이 검게 물들었다. 경악은 절망으로, 그리고 이내 공포로 바뀌었 다. "어린 놈이라 그런지 걸음이 무척이나 빠르더라고. 한참을 쫓아가서야 잡을 수 있었지." 사래긍의 머리를 던져 몽현도인을 도운 대머리노인은 자랑이라도 하듯 낄낄 거렸다. "으으..." 정방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기었다. 무슨 의도가 담긴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본능적인 행동조차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게 되었다. 대머리노인의 가죽신이 그의 등을 지그시 밟은 것이다. "아이야! 네가 죽는 것은 이 하남 땅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란다. 너를 사지(死地)로 내몬 네 주인, 황금왕(黃金王)이나 원망하렴." 대머리노인은 손을 내밀어 정방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작고 앙상한 늙은이의 손이었으니 그 무게라고 해봐야 얼마나 나갈까? 하지 만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정방을 짓눌렀다. 정방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대머리노인의 손날에 검푸른 기운이 언뜻 어렸다. "그리고 저승에서 누가 묻거든, 작도수(斫刀手) 강조양(康朝陽)이란 사람이 보냈다고 대답하거라. 아는 사람들이 제법 될 테니까." 그것은 정방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2 정방의 시신이 전달된 경로는 실로 복잡했다. 처음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동백(桐柏)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는 이(李) 소야 (少爺)였다. 그는 포목을 잔뜩 싣고 양성(襄城)으로 가던 중, 길잡이 노인으로 부터 숲 한편에 까마귀들이 잔뜩 몰려 있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다. 호기심에 그곳을 뒤져 본 이 소야는 악취를 풍기며 썩어 가는 시신 한 구를 볼 수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시신을 살피던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시신의 의복에 수놓아진 어떤 문양을 발견한 것이다. 그 문양은 하나의 문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강호뿐만 아니라 상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소야는 음(陰)으로든 양(陽)으로든 그 문파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방의 시신을 커다란 상자에 넣어 밀봉한 뒤, 등봉현(登封縣)에서 운송업을 하는 막총(莫聰)에게 보냈다. 막총은 밀봉된 상자를 열려고 하지 않았다. 설명은 이 소야의 편지만으로 충분했다. 비위가 약한 그는 상자 안에 담긴 물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비위가 제아무리 좋다 해도 애써 시신을 보려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하지만 막총은 그 상자를 자신의 화물선에 선적(船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동백의 이 소야처럼 그 문파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화물선의 목적지는 개봉(開封) 제일의 돈벌레로 소문난 탐전노귀 (貪錢老鬼)의 홍보도방(弘寶賭房)이었다. 정방의 시신은 그 뒤로도 몇 사람의 손을 더 거쳐야만 했다. 안양(安陽)의 금호표국주(金虎 局主) 장손복(長孫福), 석가장(石家莊)의 큰손 왕이파파(王二婆婆), 정주(定州)의 곡물상 천(千) 노야(老爺)... 그리고 정방의 시신은 드디어 입경(入京)했다. 그날은 처음 이 소야가 발견한 날로부터 십구 일이 지난, 팔월 이일이었다. 정방은 살아 한 달 동안 간 길을 죽어 십구 일 만에 온 것이다. * * * 북경성(北京城) 동부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 대대로 황족의 저택이 많고, 황실에서 사용하는 우물이 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은 거리이다. 황궁을 제외하면 중원 천하를 통틀어 고루거각(高樓 巨閣)이 가장 많다는 귀족들의 거리이기도 하다. 저택의 규모나 호화로움을 기록하는 북직예(北直隸:북경성 직할 구역) 가호 대장(家戶臺帳)에 의하면, 왕부정대가에서 가장 큰 저택은 삼황숙(三皇叔) 의 소유인 삼왕부(三王府)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부정대가를 한 번이라도 지나 본 사람이라면 그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의 동쪽 끝에 삼왕부보다 두 배는 커다란 저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명률(大明律)에 입각해 생각해 보면, 평민이 소유한 저택이 황족의 그것보 다 크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북경성 한복판에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그 일로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삼황숙조차 이 일에 대해 언급하려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 장 - 3 묘왕동주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저택의 임자인 그 평민이 신분만 평민일 뿐, 사실은 왕(王)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통 왕이 아닌 황금의 왕. * * * 거상련의 오대산인(五大算人) 중 하나인 옥산판(玉算板) 오정(吳定)은 오만 상을 찌푸리며 청석바닥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웬만한 불상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상자는 이미 오정의 손에 의해 활짝 열린 뒤였다. 상자 안에는 하남으로부터 십구 일이 걸려 올라온 시신이 들어 있었다. 상자 안 곳곳은 작은 벽돌 모양의 백화향(百花香) 덩어리들로 채워져 있었으 니, 이것은 처음 시신을 발견한 이 소야의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백화향은 향중하품(香中下品)이지만 방취(防臭)에 대한 효과는 컸다. 덕분에 악취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꼼꼼하기로 소문난 이 소야도 부패를 막아 주는 지부수(遲腐水)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신은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서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곤죽으로 변해 버렸다. 오정은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꾹 참으며 길쭉한 막대기로 얽혀 있는 시신을 뒤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하나의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합비의 이 소야가 보고 놀란 바로 그 문양이었다. 도전(刀錢:칼 모양으로 주조된 동전)의 문양... 그것은 거상련의 향주(香主)급 이상의 간부들이 의복에 새기는 계급적인 상징물이었다. 칼자루 밑 부분에 표시된 몇 개의 숫자는 이 의복의 임자가 누구인지 말해 주었다. 하지만 오정은 그 숫자를 보지 않고도 시신의 생전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날 떠난 다섯 무리 중 네 무리의 시신이 이미 돌아온 뒤였다. 그렇다면 이 시신은 마지막 하나 남은 정방이라는 것쯤은, 눈치가 빠르지 않은 사람이라 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난리났군." 수건으로 손을 문지르는 오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 * * 사방이 스무 자를 넘지 않는 자그마한 육각정(六角亭)의 이름은 세우정(洗愚 亭)이었다. 동쪽은 넓고도 맑은 연못에 임했는데 서(西)·남(南)·북(北) 삼면은 빽빽한 숲이 울타리처럼 서 있으니, 어느 때고 서늘한 물 기운과 향긋한 숲 향기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염천지절(炎天之節)이라 할지라도 더위가 범접치 못할진대, 하물며 때는 중추절을 얼마 앞둔 호시절(好時節)이었으니... 이런 정자에 올라 두 미녀의 시중을 받으며 혓바닥에 짝짝 달라붙는 연실빙탕 (蓮實氷湯) 한대접을 들이킬 수 있다면, 계절을 잊고 살아 가는 신선이라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황금왕(黃金王) 소래운(蘇來雲)은 신선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다 갖춰 놓고 있었다. 이제 남은 절차는 들고 있던 벽옥잔(碧玉盞)에 담긴 연실빙탕을 들이키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소래운은 최후의 순간, 신선이 되기를 거부했다. 씨잉! 벽옥잔이 날아오는 소리였다. 세우정 아래 서 있던 오정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소래운은 상인인 동시에 무인이었다. 만약 누군가 있어서, "상(商)과 무(武), 두 분야를 놓고 볼 때 소래운의 능력이 어느쪽에 기우느냐?"라고 오정에게 묻는다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소래운의 상재(商才)가 황금왕이라는 별명을 이끌어 냈으니, 소래운 의 무재(武才)가 어떨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 소래운이 집어던진 벽옥잔이다. 오정과 같은 순수한 상인 하나를 황천길 로 보내기에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것이다. 퍽! 둔중한 소리에 실린 한 줄기 달콤한 향기가 오정의 코를 간질였다. 오정은 살며시 실눈을 떴다. 그는 이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리는 벽옥잔이 연못가 석등(石燈)에 박히며 울린 것이고, 향기는 그 와중에 연실빙탕이 공기 중에 날리며 풍긴 것이었다. "천치놈! 자라 새끼처럼 움츠린 꼬락서니 하고는!" 카랑카랑한 노성(怒聲). 오정은 정말로 자라가 된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씨근덕거리는 소래운의 숨소리를 빼고는...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너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정자로부터 들려 온 목소리는 아까에 비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오정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정자 위에서는 소래운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오정과 비슷한 오십대로 보이지만, 실제의 나이는 자그마치 일흔일곱... 소래운은 상인이라기보다는 관리에 더 어울리는 엄정한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벽옥(碧玉) 동곳을 찔러서 묶어 올린 새하얀 머리카락이 그 비범한 귀품(貴品)을 더해 주었다. 오정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하의 우둔한 머리로 어찌 총수(總帥)님의 고명하신 심중을... 헤아릴 수..." "치워라! 내가 그따위 아부나 들으려고 네놈에게 한 해 오천팔백 냥이나 퍼붓는 줄 아느냐?" 짜증 섞인 소래운의 핀잔에 오정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죄송... 합니다..." 소래운은 한동안 오정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빠른 말투로 쏘아붙이기 시작 했다. "내가 화를 내는 건 하남으로 간 우리 애들이 몰살당한 일 때문이 아니야. 그래, 걔들이 죽은 것은 그렇다 쳐. 걔들이라고 별수있겠어? 더 센 놈들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하지만 그 소식이 왜 하나같이 딴사람 입을 거쳐서 와? 우리는 사람이 없니? 최소한 다섯 군데 중에 한 군데에는 쓸 만한 호위를 붙였어야 할 거 아냐! 비싼 돈 주고 데리고 있는 홍당(紅堂) 애들은 뒀다가 국 끓여 먹을래? 금전적 손해는 고사하고, 애들이 왜 죽었는지조차 알 길이 막막하잖아!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긴데..."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소래운은 귀태(貴態) 넘치는 용모와는 달리 천성이 잔소리 많은 사람이었다. 잔소리 많은 사람에게 잔소리 거리가 주어진 것은 조자룡(趙子龍)에게 창 (槍) 무더기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정의 고개는 점점 더 숙여져,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땅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귓구멍을 벌집이라 도 만들 것 같은 기세로 날아드는 수많은 잔소리들이 하나같이 지당한 말이었 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 거상련의 수뇌부는 극비리에 한 가지 사업을 구상했 다.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취약한 하남에 우량(優良)의 거점을 확보한다는 것이 그 사업의 골격이었다. 그래서 선정된 거점이 대고산 일심문을 포함한 다섯 문파였고, 거상련은 포석의 첫 번째 단계로 각 문파마다 십 인의 황금화와 백 관의 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중하기로 이름난 거상련의 오대산인들은 중대한 실수 를 범했다. 액수가 큰 행보에는 암중(暗中) 호위를 붙인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길이 다섯으로 나뉜다는 점과 하남 녹림도의 힘이 다른 지역보다 미약하다는 점 등이 그러한 실수를 범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말에도 성공하면 공신이요, 실패하면 역신이라고 했던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경비를 절감한 공으로 칭찬받았을 일이 이제는 오정으로 하여금 지옥 같은 잔소리 속에서 허덕이게 만들었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소래운은 이 질문을 끝으로 장장 반 시진에 달하는 잔소리를 끝마쳤다. 물론 오정은 할말이 없었다.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다면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일찌감치 꺼내 놓았을 것이다. "휴우! 내가 너 같은 녹봉(祿俸) 도둑놈을 데리고 무슨 일을 꾸미겠니? 가라, 가! 가서 도둑질이나 계속 하렴." 졸지에 녹봉 도둑놈이 된 오정은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잘 가라는 인사 대신 쇠갈고리 같은 짜증이 날아와 박혔다. "믿을 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한 놈도 없으니... 에잉!" 하지만 짜증과 현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괴리감이 있었으니, 소래운에게 믿을 만한 수하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북천권사(北天拳師)라 불리는 홍당의 방지중(方志重)만 해도 소래운의 고굉 지신(股肱之臣)이라 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막내 아들인 방단(方丹) 을 양자로 삼아 소씨 문중에 입적(入籍)시키기까지 했을까? 소래운의 호출을 받은 방지중이 세우정 위에 나타났다. 방지중은 육 척의 당당한 체구에 반백(半白)의 귀밑머리가 중후한 풍채를 더해 주는 육순 노인이었다. 거무죽죽한 굳은살로 뒤덮인 두 주먹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거르지 않고 단련해 온 외가공부의 정심함을 알 수 있었다. 방지중은 소래운을 향해 길게 읍했다. "총수님을 뵙습..." "아, 아! 대충하고 앉게!" 소래운은 예를 올리려는 방지중을 손짓으로 만류하며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방지중은 사양하지 않고 선선히 자리에 앉았다. 소래운과 마주 앉을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방지중에 대한 소래운의 신임도를 알 수 있다. "내가 왜 불렀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으로 믿네." "예!" 방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침나절에 정방의 시신이 돌아오고, 그 일 때문에 오정이 변명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소래운에게 잘근잘근 짓밟혔음 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자네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방지중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반자가 있습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 장 - 4 묘왕동주 "배반자?" 방지중은 오른손을 들어 실처럼 가늘어진 소래운의 눈을 향해 활짝 펼쳐 보였다. 비록 상처투성이 손이지만 달린 손가락의 수만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 지였으니, 다섯 개의 손가락이 소래운의 눈앞에 부채처럼 활짝 펼쳐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흐음!" 소래운의 눈이 더욱더 가늘어졌다. 방지중이 펼쳐 보인 다섯 개의 손가락은 오대산인을 가리켰다. 방지중은 배반자가 그들 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래운의 생각과 도 일치했다. "자네 생각도 그렇군." 소래운은 중얼거렸다. 오대산인은 하남에 거점을 확보한다는 이 사업의 최초 입안자(立案者)이자 진행의 주체였다. 어느 사업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소래운이 이 사업에 임하 며 특히 중요시한 것이 바로 기밀의 유지였다. 살얼음판 같은 작금의 강호 정세에 사패(四覇) 중 하나인 거상련이 세력을 확장하려 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돈다면, 뭇 방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업은 두더지가 굴을 파듯 저 깊은 지하에서 진행되었다. 사업이 얼마나 은밀했느냐 하면, 정작 하남으로 떠난 정방 등의 향주들조차도 출발 직전에야 사업의 전모에 대해 하달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한두 길[路]도 아닌, 다섯 길 모두가 철저하게 괴멸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사업 계획은 사전에 유출된 것이다. '어느 놈일까?' 오대산인의 셈속 밝은 얼굴들이 차례차례 소래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 다. 그 중에는 교활한 자도 있었고, 우직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딱히 간자(間 者)라는 심증이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기이한 점은 또 있었다. 만약 오대산인 중 한 명이 간자라면, 어찌하여 이번 사업만 이렇게 요란스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지금까지 그들 오 인이 입안해 추진한 수많은 사업들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 않은가! 왜 유독 이번 사업일까? "으음!" 소래운은 흰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지중은 찻주전자를 들어 앞에 놓인 찻잔을 채웠다. 소래운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방지중이 차 한 주전자를 깨끗이 비우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뒤였다. "쓸 만한 사람이 하나 필요해." "...?" "누군가 이 사건을 표면적으로 조사해 줘야겠어." 소래운은 '표면적'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주었다. 방지중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 사람을 거명했다. "반호(潘昊)가 좋겠군요." "반... 호...? 반호... 반호라..." 그 이름을 몇 차례 되뇌던 소래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지중이 당주(堂主)로 있는 홍당은, 힘에 있어서 거상련을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무인 집단이었다. 반호는 그 홍당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일류였다. 오늘 시신으로 돌아온 정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절정고수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래운의 마음을 즐겁게 만든 것은 반호의 별명이었다. 미친개[狂狗子]. 하지만 이 별명은 반호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웬만큼 미친개의 입에서도 "저 자식은 미친개야!"라는 말을 끌어 낼 정도로 심하게 미친 녀석이 바로 반호인 것이다. 그 정도로 미친 녀석이었으니, 모든 것이 제 맘대로인 것은 당연한 이치. 하기야 '제 맘대로'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았다. 스스로도 '제 맘'이 뭔지 모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반호 같은 놈이라면 있는 곳뿐만 아니라 없어진 곳에서도 그 행적이 이야깃거 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점이 소래운을 즐겁게 해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반호는 요란한 놈을 찾던 소래운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인물인 것이다. "좋았어, 반호로 하세." 소래운과 방지중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웃었다. * * * 미친개는 과연 미친개였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오시구려!" 방문 저 너머에서 툭 날아온 반호의 말투는 점잖기로 소문난 방지중의 어깨까 지도 잠시 떨리게 만들 정도로 오만방자했다. 방지중은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직속 상관을 깨진 쪽박처럼 여기는 이 시건방진 수하를 어찌 닦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쌓아 온 마음의 수양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방지중은 크게 심호흡하여 마음을 진정한 뒤, 다시 한 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일이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게나." 말을 마친 방지중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 너무나도 달랐다. "아... 하아! 밖에 당, 당주님께서... 하악!" "익! 신경 쓸 것 없어! 익, 이익!" 계집은 자지러지고 사내는 용을 쓴다. 실로 음양(陰陽)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신음성... 방지중의 근엄한 얼굴이 노랗게 물들었다가 곧바로 시뻘게졌다. "이보게, 반..." "정말 귀찮게 구네! 나중에 오라니까!" 그 순간, 방지중의 이성을 붙잡아 주던 최후의 줄이 끊어졌다. 희끗희끗한 세모꼴 턱수염이 사시나무처럼 요동을 친 것과 쌍장이 머리 위로 번쩍 들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빠작! 방문은 비록 두께가 두 치나 되는 두툼한 심재(心材)를 짜 맞춘 것이지만, 방지중의 분노 앞에서는 종잇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지중은 분분이 날리는 파편 사이로 하나의 살색 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어느 팔이 남자의 것이고 어느 다리가 여자의 것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기괴한 체위로 얽힌 남과 여... 방지중의 창날 같은 눈썹이 역 팔 자로 곤두섰다. "이, 이...!" 그런데 방지중의 노갈(怒喝)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텁텁한 느낌을 줄 정도로 부스스한 얼굴 하나가 그를 향한 순간, 그는 참으로 오랫동안 접하지 못한 어떤 종류의 말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썅!" '이런... 개썅...?' 방지중은 일순 멍청해졌다. '누구보고 한 욕일까? 설마 나보고 한 욕일까?' 방지중의 사고 능력이 정상적인 궤도를 되찾았을 때, 그의 앞에는 흉측한 양물(陽物)을 덜렁거리는 나체의 장년인 하나가 고리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바로 미친개, 반호였다. "당주면 다냐? 멀쩡한 남의 집 문짝은 왜 부수고 난리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반호의 안광은 개 혓바닥처럼 불그죽죽한 색깔이었다. 눈빛이 저렇게 돌아가면 낳아 준 부모조차도 몰라본 다는 후레자식이 반호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런 상황에서 놈이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는 세상에 오직 하나. 한 가지 종류의 벌레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당주라고 불러 준 것만으로도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지중은 모범적인 상관이었다. 모범적인 상관이 라면 계통이 무엇이고 권위가 무엇인지를 망각한 수하에게, 그것들을 다시 기억하게끔 만들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놈!" 소엽장(掃葉掌)의 막강한 수편(手片)이 반호의 볼따구니에 작렬했다. 미친 개가 아니라 미친 호랑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거꾸러뜨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느닷없이 신공(神功)으로 따귀를 맞은 반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맴돌았다. 그 회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지중의 벼락같은 발길질이 반호의 엉덩이에 날아와 꽂혔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호의 몸뚱이는 창문을 부수고 건물 밖으로 나가떨어졌 다. "오늘 네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지 못한다면, 내가 방가(方哥)가 아니다!" 어느결에 몸을 날렸는지, 방지중의 노한 음성은 부서진 창문 너머에서 울리고 있었다. 방지중은 명실공히 홍당의 최고수였다. 신주십일존(神州十一尊) 중 하나로 꼽히는 소래운조차도 권각술(拳脚術)의 오묘함만큼은 한 수 뒤짐을 인정하 는 형편이었다. 처음에는 부러진 이빨을 삼키면서까지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치던 반호 였지만, 치차(齒車)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장(掌)·권(拳)·지(指)·퇴(腿) 의 폭풍 앞에서는 별수없었다. 그래서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 그만 때려요! 제가 잘못했다니까요!" 병신이 되기 일보 직전까지 얻어맞은 후에야 '미친개'는 광기(狂氣)를 접었고, 이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방지중은 본래의 온화한 상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잔잔하고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반호는 부어 오른 눈두덩이와 퍼렇게 멍든 볼따구니로 거상련을 출발했다. 물론 매우 은밀히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모난 돌은 빠진 자리도 모난 법... 소문은 소리없이 퍼져, 거상련 문도들은 그날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 미친개가 없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와중에, 혹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혹시 상부 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 장 도박(賭博) 묘왕동주 제 2 장 도박(賭博) 1 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동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으며,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다. <맹자(孟子)>의 한 구절로써, 이와 같은 호탕함을 뽐낸 이는 다름 아닌 공자라 한다. 하지만 비단 공자만 그랬을까? 동악(東嶽) 태산(泰山). 오연한 흰 구름을 머리에 인 채, 사해구주(四海九州)를 만장 발 아래로 굽어보 는 대산령봉(大山靈峰)... 공자가 아닌 누구라도 가슴속에 일편(一片)의 호연지기만 간직하고 있다면, "천하가 작다."며 호방(豪放) 대소(大笑)를 터뜨릴 수 있는 산이 바로 태산일 것이다. 태산 제일봉(第一峰)인 장인봉(丈人峰)에는 보기만 해도 시흥(詩興)이 절로 일 듯한 고창(古蒼)한 장원 한 채가 길게 자리잡고 있었다. 청동빛 기와를 얹은 담장이 삼십여 리에 이르렀고, 사방을 향한 네 대문은 마차 넉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치 활연(闊然)하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청룡 한 마리가 장인봉 중턱을 깔고 길게 엎드려 있는 형상... 이 장원이 바로 강북사패의 하나인 검패(劍覇) 장일기(莊一麒)가 이룩한 산동장가였다. * * * 감규목(甘奎穆)은 힘겹게 허리를 폈다. <취영각(聚英閣)> 오동나무 편액(扁額)에 쓰인 황금빛 글자가 늙은 망막에 들어왔다. 감규목은 허리를 두드렸다. 여든둘의 나이란 허리 한 번 펴는 데에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수고가 필요한 나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건만...' 정말이었다. 불과 삼 년 전만 해도 스스로 늙은이임을 쉽사리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칠십대에서 팔십대로 넘어가는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늙어 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정심한 수련도 인간의 육신을 팔십 년 동안 지켜 주지는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감규목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노쇠는, 그날 세가에서 일어 난 비극이 가져 온 충격 때문이었다. 감규목의 노안에 깊은 고통이 새겨졌다. 벌써 삼 년이나 지났건만, 그러한 고통은 조금도 가시려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화복(華服) 차림의 중년인이 감규목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세가의 네 호법 중 한 명인 예간(芮幹)이었다. 그가 이곳을 지키는 것을 보면 대행(代行) 가주(家主)는 이미 도착한 모양이었다. "세 분 원로(元老)께서는 이미 당도하셨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독살스러워 보이는 뱀눈과는 달리 무척이나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행 가주의 심복이라고 소문난 탓에 감규목은 평소부터 예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예간의 앞을 지나쳤다. 감규목은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거대한 원탁이 있고, 네 사람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문 앞에 서 있는 감규목을 보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정하신 모습을 뵈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문을 향해 정면이 되는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정중히 읍하며 말했다. 흰빛이 희끗거리는 턱수염이 탐스러워 보이는 오십대 후반의 백의노인이었다. "대행 가주께서도 안녕하시었소?" 감규목은 두 손을 모아 가볍게 답례한 뒤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자리를 잡자 일어섰던 네 사람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육(陸) 아우는 아직 강남에 있을 테니, 모일 사람은 모두 모인 셈이구려?" 감규목은 원탁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기울여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가 말한 '모일 사람'이란 가로회의(家老會議)의 참석자를 가리켰다. 삼 년 전 전임 가주 장낙웅(莊樂雄)의 사망과 유일하게 생존한 적통(嫡統)인 장옥평의 실종 이후, 대행 가주와 다섯 명의 가신으로 구성된 가로회의는 산동장가의 최고 의결 기구가 된 것이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감규목의 맞은편에 앉은 백의노인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회의의 시작을 선포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온화한 얼굴 위에 집중되었다. 장후겸(莊後謙). 검패 장일기의 아들이자 전임 가주 장낙웅의 이복(異腹) 형(兄)이기도 한 그는, 세가에 변고가 발생한 뒤 가신들의 요청으로 귀가하여 대행 가주직을 맡고 있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소집한 까닭은, 감(甘) 원로께서 방금 전에 언급하신 육(陸) 선생으로부터 반가운 전갈이 당도했기 때문입니다." 수염에 가려진 장후겸의 입가에는 정말로 반가워하는 듯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호오! 무슨 전갈이기에 가주께서 저리 좋아하실까?" 자주색 도포에 구름 같은 학우관(鶴羽冠)을 쓴 진청화(陳淸華)가 싱글거리며 장후겸의 말을 받았다. 옷차림만 멋들어진 것이 아니라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 비도 단정한 그였으니, 이만하면 선골(仙骨)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요소는 거의 갖춘 셈... 하지만 그를 선골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조화를 일거에 망치는 누리끼리한 안색 때문이다. 감규목은 진청화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대가신 중 가장 젊은 오십대 초반의 나이... 감규목의 눈에 비친 진청화는, 연단(煉丹)과 장생술(長生術)에 미친 정신나간 녀석이었다. 얼마나 정신나 간 녀석인가는, 운룡진인(雲龍眞人)이라는 자호(自號)를 부친이 지어 준 이름보다 더 많이 애용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만일 누군가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바라는 자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오?"라고 묻는다면, 감규목은 "놈의 얼굴빛이나 보고서 얘기하게."라고 답해 줄 것이 다. 누리끼리한 안색... 그것이 바로 부친이 준 이름을 외면하면서까지 찾으려 했던 등선지로(登仙之路)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단(丹)을 만드는 것이 아무리 좋다지만, 그것을 위해 납을 주워 먹는 놈은 누가 뭐래도 정신나 간 녀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명에 세상을 뜬 녀석의 부친 진임(陳壬)과 막역한 사이였던 감규목으로서 는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진청화의 말을 들은 장후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진인께서는 또 가주라 부르시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대행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유념하시어 제가 부끄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 오." 장후겸의 말에는 겸양이 가득 차 있었다. 감규목으로서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었고, 별로 대단할 게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후겸의 말을 듣는 순간, 감규목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옥평이 살아 있습니다." "뭐라고?" 네 명의 가신 중 성질이 가장 급한 양충(梁沖)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듯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대행에 불과하다 해도, 그리고 자신보다 몇 살 연하라고 해도, 현재로 써는 분명히 세가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장후겸에게 '뭐라고?' 따위의 반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후겸은 이해한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산에서 육 선생이 찾았다고 합니다. 이달 초엽에 호남을 출발한다고 하니, 늦어도 중양절(重陽節:9월 9일) 이전에는 세가에 당도할 것으로 여겨집 니다." 장후겸은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원탁 맞은편의 감규목을 향해 내밀었다. 기이하게 구부린 중지가 가볍게 튕겨지자, 손끝을 떠난 종이는 한 마리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감규목을 향한 비행을 시작했다. 원탁이 워낙 넓은 탓에 격공송물(隔空送物)의 공부를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감규목에게는 장후겸의 재주를 감상할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그저 놀라고, 또 놀랄 뿐이었다. 감규목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 펼쳤다. 종이 위에는 장후겸의 말과 한치의 어김도 없는 내용이 아우뻘 되는 침염선생 육염명(陸廉明)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공자(二公子)... 살아 계셨구려!" 감규목의 주름진 눈가에 뿌연 물막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형님! 나도, 나도 좀 봅시다!" 양충이 손을 뻗쳐 감규목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만약 감규목이 황급히 손을 떼지 않았던들, 반갑기 그지없는 전서는 그 우악스런 손길에 찢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감규목은 그런 양충을 탓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전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은 양충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드디어 산동장가의 후계자가 돌아오는군요!" 감규목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입을 벌려 말을 꺼내면 꾹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감규목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충의 말처럼, 장옥평의 귀환은 단순히 없어졌던 옛 주인의 아들이 돌아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산동장가의 대업을 이어 갈 후계자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행 가주를 맡고 있는 백부 장후겸과 어떠한 형태로든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감규목의 머릿속을 훤히 뚫어보고 있기라도 한 듯, 장후겸이 말했다. "저는 삼 년 전 가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옥평이 돌아오면 저는 주공(周公)의 아름다운 선례를 좇을 생각입니다." 온화한 가운데 단호한 결의가 담긴 말이었다. <주례(周禮)>의 저자로 유명한 주공은 상(商)을 멸하고 주(周) 왕조를 세운 무왕(武王)의 아우였다.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이 간사한 도배들의 참언(讒 言)에 속아 주공을 의심했지만, 과거 무왕이 병에 걸렸을 때 주공이 "병을 형님 대신 나에게 내려 달라."고 기원한 축문(祝文)이 든 궤를 발견하고 자신의 실수를 뉘우쳤다는 '금등(金 :금으로 봉함. 주공의 축문이 든 궤가 금으로 봉해 있었던 것에서 유래)'의 고사가 있다. 장후겸이 주공의 선례를 좇겠다고 한 것은, 장옥평이 돌아오면 곧장 가주직을 넘기고 자신은 조카의 보필에만 힘쓰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성격이 유약하고 자질이 부족한 이공자에게 세가의 가주 자리는 너무 과한 짐이 아닐까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신경질적으 로 보이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저, 저런...!" 감규목의 허연 눈썹이 부르르 떨렸고, 양충의 억센 주먹이 불끈 쥐여졌다. 하지만 선수를 친 사람은 다른 데 있었다. "탁(卓)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장씨문중을 이어 갈 차기 가주에게 그따위 망언을 내뱉다니! 지금 제정신이시오?" 장후겸의 질타는 그야말로 서릿발 같았다. 봄볕같이 따뜻한 기운이 감돌던 두 눈에서는 바위라도 단숨에 꿰뚫어 버릴 듯한 섬전 같은 안광이 뿜어 나왔고, 늘어진 소나무 가지처럼 유연해 보이던 두 어깨 위로는 해일처럼 거대한 분노가 넘실거렸다. 이러한 기세 앞에서는 웬만한 철담(鐵膽) 장부라도 꼬리를 말 수밖에 없을 터... 하물며 그 대상이, 아첨에는 밝아도 심지가 약해 평소 양충으로부터 '작심감설(雀心甘舌)'이라고 놀림받는 탁봉(卓逢)이었으니, 그 반응이 어떠 한지는 능히 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아니나다를까, 탁봉은 꾸중들은 개구쟁이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 장 - 1 묘왕동주 "허허! 과연, 과연...!" 난데없는 웃음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사람은 정신 나간 도사 녀석이었다. "강호인들이 대행 가주를 군자라 칭송하는 까닭을 다시 한 번 깨달았소이다! 과연!" 진청화가 연발하는 '과연!' 소리를 들으며 감규목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장후겸의 어린 시절을 잘 아는 그로서는, 어느 날 갑자기 도덕군자가 되어 돌아온 장후겸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믿어지지 않았다. 세간의 말처럼, 세월이란 강퍅(剛愎)과 시기(猜忌)마저 덮어 주는 명약일까? 한편 장후겸은 진청화의 '과연!'에도 별로 고무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육 선생의 전서에는 회행로(回行路)가 적혀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영접단 을 파견하는 것이 차기 가주에 대한 예우일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동안 장후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양충의 얼굴 위로 옮겨 갔다. 그 눈길을 받은 양충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탕, 소리나게 쳤다. "그런 일일랑은 여기 이 사람에게 맡겨 두시오!" 바라마지 않는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장후겸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저는 옥평이 돌아와 곧바로 가주에 오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습 니다. 그리고..." 장후겸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 들보에 걸린 족자를 바라보았다. <이살수립천명(以殺讐立天命)> 원수를 죽여 천명을 세운다. 족자는 지닌 바 의미의 살벌함을 대변해 주듯 붉은 피로써 쓰여 있었다. 그 피는 혈겁에서 살아남은 세가원 전원이 손가락을 깨물어 받아 낸 것이다. 이처럼 혈겁의 장본인인 매용소와 도연향을 응징하는 일은, 세가원 모두에게 있어서 천명 그 자체였다. "남은 삼패(三覇)와 연계하여 원수들이 숨어 있는 철옥을 치는 방안을 마련토 록 하겠습니다!" 천명을 지키겠노라 다짐하는 장후겸의 말은 감규목의 늙은 피를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2 "대공자, 복건지부(福建支部)의 인마가 도착했습니다." 상전에게 보고를 하며 왼손에 검을 쥐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다. 그것은 수하의 나이가 상전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해도, 또 그 검이 검집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매용소(梅龍沼)는 그런 무례를 범한 채앙(蔡仰)에게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황제 앞이라도 결코 검을 놓으려 하지 않을 채앙의 위인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검귀(劍鬼)라는 별명은 아무에게나 붙는 것이 아니었다. "인원은 얼마나 되오?" "철한대(鐵漢隊) 두 개 조(組)를 포함해 모두 일흔한 명입니다." 선이 부드러운 매용소의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찡그려졌다. "광동(廣東)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소?" "그렇습니다." 검을 든 흑삼노인, 채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매용소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자 채앙이 조심스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광동지부장 진영각(陳永刻)은 조(曹) 공자 쪽으로 기울어진 자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편이..." 그 말을 들은 매용소는 웃었다. 어딘지 허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대제자가 아닌가? 서열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 이토록 내 얼굴을 무시한단 말인가?" 매용소의 수양은 나이를 초월할 정도로 깊었다. 하지만 지난 사흘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혼잣말로라도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로 끝난 장옥평 사냥... 그 후 호남지부에 당도한 매용소는 즉각 추적대를 구성하여 그물에서 빠져 나간 사냥감을 다시 포획하려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는 장옥평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장옥평을 빼돌린 마맥회는 그야말로 신출귀몰(神出鬼沒)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그 행사가 신비스러웠다. 하기야 철옥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비교하면 일개 계란에 불과한 마맥회였으니, 그러한 재주라도 없었다면 강남 제일을 자랑하는 거대한 힘 아래에서 일찌감치 뭉개졌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인원이 부족했다. 호남지부는 형산(衡山)에서의 실패와 함께 그 정예가 많이 손상되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호남지 부장 마린(馬隣)은 그렇다고 쳐도, 능히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이교(李校)마저 도 내리지도 않은 징계를 받는답시고 제발로 뇌옥으로 들어가 꼼짝하지 않는 데에는, 천하의 매용소라 할지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 도 타격이 큰 호남지부였으니, 문도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당연한 일... 이렇듯 난감한 매용소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전운리(田運利)라 소개한 학자풍의 중년인은 당면한 두 가지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겠노라 장담했다. 형산에서 드러난 전운리의 지략에 대해서는 이미 매용소도 인정하고 있는 터... 그는 전운리를 자신의 책사(策士)로 삼았고,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전운리는 이틀 만에 이교를 설득하여 호남지부의 인마를 재정비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전운리는 첫 번째 문제인 장옥평의 행방을 알아 내기 위해 사흘 전 호남지부를 떠났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매용 소는 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한편 매용소는 이곳 호남지부에 든 바로 다음날, 위치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광동지부와 복건지부로 전서를 띄웠다. 이것은 누구의 생각도 아닌 그 스스로의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마맥회라는 날쌘 미꾸라지를 잡기에는 호남지부라는 그물이 성근 듯하기에, 광동·복건지부의 지원을 받아 그 빈틈을 메워 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후우!" 매용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광동지부장인 진영각은 아무런 소식도 없고, 복건지부장 우현(于顯)은 두 개 조의 철한대와 몇 알의 쭉정이들을 보낸 것이다. 지부장들이 자신을 철옥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한다면 감히 이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자 매용소는 문득, 조추림(曹秋林)의 준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부터 인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한 사제였다. 지부장들의 소극적인 자세 이면에는 조추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이때 채앙이 말했다. "그리고 총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매용소는 채앙을 바라보았다. 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망산일수(邙山一 )입니다." "부(夫) 노인이?" 매용소의 눈빛에 이채가 담겼다. "그는 어디에 있소?" "지부장의 거처로 안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매용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망산일수 부범악(夫範岳)은 총단을 구성하는 선(仙)·마(魔) 양부(兩府) 중 마부의 부부주(副府主)였으니, 철옥주의 대제자인 매용소로서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직위를 지닌 인물인 것이다. 그런 그가 직접 왔다면 결코 범상한 일일 리가 없다. 그런데 아까의 언짢음 탓일까? 마린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매용소는 한 가닥 야릇한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 * * * 전운리가 호남지부로 돌아온 시각은, 다음날 축시(丑時:오전 1시~3시) 무렵 이었다. 지부의 정문을 들어설 때, 전운리의 마음은 밤하늘만큼이나 암울한 빛깔이었 다. 심중의 갈등 때문이었다. 듣던 대로 마맥회는 녹록한 단체가 아니었다. 그 종적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전운리는 사흘 동안 삼백 리가 넘는 길을 돌아다녀야 했고, 오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야만 했다. 그날 형산에서의 실패 이후, 전운리의 뇌리에는 한 가닥 의혹이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마맥회는 어떻게 그토록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등장, 장옥평을 구해 갈 수 있었을까? 전운리는 이 의혹에서부터 마맥회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물론 계획이 사전에 유출된 데에는 철한대 내부에 있던 귀무심(貴霧深)이라 는 간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감의 정체가 장옥평이라는 사실은 계획의 주체인 이교와 전운리조차도 사냥 도중에야 안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마맥회는 사냥감이 장옥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철옥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개입한 것일까? 하지만 전운리는 이내 이러한 가정을 폐기했다. 마맥회는 소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단체였다. 성과가 불확실한 사안에 다수의 간부들을 투입할 정도로 인적 자원이 풍부하지 못함은 뻔한 일...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마맥회는 이교와 전운리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장옥평의 존재에 대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에서 그런 고급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전운리로서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다. 황서계(黃書契). 전운리 본인이 계원(契員)으로 속한 정보 상인들의 결사(結社)인 황서계가 아니고 그런 은밀한 정보를 팔 수 있는 곳은 천하의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래서 전운리는 지난 사흘 동안 강남, 특히 호남 일대에서 활동하는 황서계원 들의 소재 및 동향 파악에 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중 한 사람이 마맥회와 거래하고 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귀주(貴州)·운남 (雲南) 등, 묘강이라 불리는 지역에 광범위한 정보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 낼 수 있었다. 매용소를 주군으로 모신 뒤 자청한 첫 임무, 이제 전운리는 성공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마맥회와 거래하는 황서계원을 족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는 한 가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쩌면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커다란 희생을... "전운리!" 상념에 젖어 있던 전운리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앞에는 한 쪽 다리가 철봉인 마의인이 서 있었다. 호남지부의 총사인 철각사(鐵脚邪) 이교였다. 이교는 향로(香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인광(燐光)이라도 바른 듯 표면에 양각된 귀면(鬼面)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으스스한 분위기를 안겨 주는 향로였다. 전운리는 이교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사실 지금의 이교는 전운리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 없는 입장이며, 지금의 전운리는 이교에게 공손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전운리가 매용소의 군사로 발탁된 이상, 두 사람은 상하를 논하기 힘든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 장 - 2 묘왕동주 하지만 이교는 한번 상관이면 죽을 때까지 상관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전운리는 그런 이교를 거스르면서까지 자신의 출세를 뻐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마찰 없이 예전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전운리는 이교가 든 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풍(三風)의 연공이 막바지에 달한 모양이군요." 향로의 이름은 구음귀로(九陰鬼爐). 수많은 도굴로 악명을 떨친 원나라 때의 라마승, 양련진가(楊璉眞伽)가 만들었다는 마물(魔物)이었다. 마기를 생명 줄로 삼는 호남지부의 세 마리 살인귀, 삼풍을 움직이는 데에 필수적인 물건이기도 했다. 이교는 전운리의 말에는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자가 기다리고 있다. 가보도록!" "지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말씀입니까?" 이교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말을 전했으니 전운리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뚜벅뚜벅. 쇠다리가 벽돌바닥을 찍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 * * "그 말을 끝으로... 부 노인은 돌아갔소." 매용소가 설명을 마쳤다. 방안에는 세 사람... 매용소와 도연향(陶淵香), 그리고 전운리가 둥그런 다탁 (多卓)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하나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손바닥 반만한 동판 위에 선명한 불꽃 문양을 새긴 사각 영패... 전운리는 영패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만약 한 달 전의 전운리였다면, 영패의 출현에 대해 무척이나 기이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 멸망했다고 알려진 이화산장(離火山 莊)의 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운리는 조금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마련(南魔聯)의 패망 이후 이화산장의 알맹이는 이화신마(離火神魔) 비연리(費延里)와 함께 철옥 총단 으로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費) 부주(府主)는 이제 사부님과 완전히 결별하기로 심중을 굳힌..." 하지만 도연향의 이 말은 매용소의 손짓에 의해 끝을 맺지 못했다. 매용소는 잠시 책망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전운리를 향해 말했다. "이제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소." 전운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매용소의 설명에 따르면, 비연리는 망상일수 부범악이라는 전령을 통해 하나의 제의를 보내 왔다. 철옥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는 파격적인 제의를... 그리고 뜻밖에도 매용소는 그 제의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뜻밖이라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 문득, 전운리는 매용소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수년간 철면신(鐵面神)이 철옥을 경영해 온 방침은, 전운리로서는 도저 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철면신은 수년 전부터 총단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에게조차 그 모습을 드러 내지 않았다. 모든 명령은 옥령기(屋令旗)라는 신물과 금빛 매를 통한 문서에 의해 전달되었다고 하던가?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강호제일의 신비인 철면신다운 통치 방식이었다. 하지만 신비스러움으로 수하들을 다스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가장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 가풍(家風)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어쩌면 모든 문제들이 여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비연리에 관한 대우도 문제가 있었다. 남마련의 멸망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삼마의 배반자 비연리는, 그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곤란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전운리가 철면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전운리는 비연리에 대한 처리를 둘 중 하나로 선택했을 것이다. 충분한 보상으로써 완전한 내 사람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의 선례 를 따르든지... 그런데 철면신의 선택은 무엇도 아니었다. 마부 부주라는 어정쩡한 자리에 앉혀 둔 채, 불만만 쌓이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부분은 또 어떤가? 제자들을 완전 경쟁시켜 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이야 많은 흑도의 종주(宗主)들이 채택한 바 있는 방법이니, 대충 넘어간다고 치자. 하지만 그런 공식적인 발표에도 불구하고 둘째 제자 조추림에 대해 눈에 띌 정도로 편애하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 설마 철면신이 사감(私感)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제가 부족한 인물이란 말인가? 그래서 드러난 결과를 보라! 불만과 위기감이 팽배한 두 마리의 맹수, 비연리라는 승냥이와 매용소라는 새끼 호랑이가 서로 손을 맞잡으려 하지 않는가! "선생...!" 매용소가 다시 전운리를 불렀다. 전운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을 속단하기에는 불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점이라면...?" "옥주의 마음이 과연 비 부주의 생각처럼 확실히 조추림 공자에게 기울었는 가에 대한 확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때 도연향이 끼여들었다. "전운리! 그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전운리의 시선이 도연향을 향했다. 하지만 도연향은 그의 시선에는 아랑곳하 지 않고 매용소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대사형! 둘째 사형이 묘강에서 돌아온 삼 년 전의 일을 잊으셨어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수하의 절반을 잃어버린 채 오랑캐 계집 하나를 달랑 끼고 돌아온 그에게 사부님은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으셨죠. 아니, 징계는커녕 오히려 유실된 인원을 보충하라고 민산독마(岷山毒魔)를 붙여 주기까지 했어요." "사매, 그 일은 거론하지 말아라." 삼 년 동안 곱씹어 온 사부에 대한 원망을 다시금 입 밖에 꺼내 뭐 하랴. 매용소는 그 일을 재론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도연향의 기세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면 '물월(勿越)의 영(令)'은 어쩌구요?" 그 한마디에 매용소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물월의 영이... 무엇입니까?" 곁에서 이들 사형제의 대화를 경청하던 전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월의 영이란 사부님께서 우리 두 사람에게 내리신 지시요. 말 그대로 장강(長江) 이북의 땅을 밟지 말라는 명령이지요." 하지만 매용소의 설명으로도 전운리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않았다. 왜 이들 두 사람에게만 그런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물어 볼 필요는 없었다. 도연향의 푸념 비슷한 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장가(莊家)로부터 보신하라는 사부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삼 년이 지났어요. 우리보고 죽을 때까지 남쪽 촌구석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인가요?" 전운리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전 산동장가에서 벌어진 혈사(血事)가 물월의 영이 발효된 이유인 모양이었다. 사패의 하나인 산동장 가가 건재한 이상 두 사람의 행동 반경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도연향이 물월의 영에 대해 유난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강북일미(江北一美)라 불리던 그녀의 과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제 살던 터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전운리는 다시 매용소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조추림 공자에게는 그 명령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렇소. 부 노인의 말에 의하면, 둘째는 부 노인이 총단을 출발한 것과 같은 날에 수하들을 대동하고 북상했다고 하는군요." 뒤따르는 도연향의 빈정거림... "흥! 아주 신이 났겠군!" 세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갑갑한 분위기를 깬 사람은 전운리였다. "그렇다면 옥주의 의중이 조추림 공자에게 기울어졌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요." 전운리의 시선은 매용소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용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 판단이 맞습니까?" 전운리는 그답지 않게 집요함을 보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매용소는 한참 만에 시인했다. "그렇소."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리라. 전운리의 눈가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이것은 그의 두뇌가 극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철면신의 마음이 조추림을 후계자로 삼는 것으로 굳어 버렸다면, 매용소의 위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매용소가 바로 전운리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둥지가 깨지는데 알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전운리는 알이 아닌 인간이었다. 이제껏 살아 오는 동안 오직 자신의 두뇌와 판단력만을 믿고 온갖 역경을 헤쳐 온 생생한 인간이었다. 그것은 둥지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알과는 달리, 전운리에게는 자신이 자신의 길을 직접 선택할 권한이 있음을 의미했다. 위태로운 둥지를 버리고 다른 둥지를 찾아가느냐, 아니면 둥지를 위기에서 구하여 공(功)을 인정받느냐. 성패(成敗)는 물론이거니와 생사(生死)마저도 갈려 버릴 수 있는 두 가닥의 갈림길이었다. 전운리는 매용소를 바라보았다. 단아한 얼굴과 차분한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고도 투명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패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한번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매용소는 침착하고 심기가 깊었다. 또한 아랫사람을 거느릴 만한 덕망이 있으며, 그 나이에서는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무공이 고강했다. 이런 패를 포기한다면, 향후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그의 숙원을 풀어 줄 수 있는 패를 만날 수 있을까? 그의 터전을 부수고 그의 수하들을 죽인 아미파를 박살내 줄 수 있는 강력한 패를... 기회란 숫기없는 손님과 같아서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간다고 했다. 또한 뒷머리채가 없어서 일단 돌아서면 다시 잡아챌 수 없다고 했다. 기회가 몸을 돌리기 전, 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것은 본인의 몫이었다. '좋아!' 전운리는 결심했다. 그러자 지부 정문을 들어서며 느꼈던 갈등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정리되었다. 황서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들 어떠랴! 어차피 다음 기회란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도박이었다. 전부를 버릴 각오로 달려들어야만 했다. 매용소가 사부를 버리듯이, 그리고 전운리가 계(契)를 버리듯이...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소."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 장 - 3 묘왕동주 매용소가 다시 물었다. 처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전운리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 부주와 손을 잡으십시오." 3 홍면해(紅面蟹) 신이궐(申耳闕)은 정말 별호 그대로 한 마리의 붉은 게 같았다. 미간이 남들보다 배는 넓은 데다가 눈동자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사시(斜視)인 탓에 '게'라는 별명이 붙은 그였다. 더구나 지금은 그런 얼굴 전체가 피칠갑까지 한 상태이니, 그야말로 영락없이 홍면해가 아닌가. 전운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신이궐의 양팔을 뒤로 꺾어 쥐고 있던 괴악( 岳)의 입술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으직! 신이궐의 왼팔 팔뚝께에서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렸다. "흐윽!" 신이궐은 이를 악문 채 눈을 부릅떴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모습이 더욱 게를 연상시켰다.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 전운리는 측은한 눈빛으로 신이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던 신이궐의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전, 전운리! 네, 네가 감히 계규(契規)를 어길 셈이냐?" 신이궐은 원독에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전운리의 평온한 안색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도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네. 하지만 워낙 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게 되었군. 미안하네." 전운리는 말을 하는 도중에 다시 한 번 고개를 까딱였다. 철갑 아래 감춰진 괴악의 어깨 근육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으직! 이번에도 왼팔이었다. 하지만 이미 부러진 하박이 아닌 멀쩡한 상박이었다. "으아악!" 몸통에 가까울수록 고통도 가중되는 법일까? 드디어 신이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 이쯤에서 끝내자고. 더 이상 자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네." 전운리는 신이궐의 앞쪽에 쪼그려 앉았다. "으으..." 신이궐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전운리를 바라보았다. 비록 아직도 증오와 미움의 잔재가 엉겨 붙어 있었지만, 처음 꿇어앉혔을 때와 비교하면 양처럼 순하다 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확인한 전운리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맺혔다. "이제야 말할 마음이 된 것 같군." 그도 그럴 것이, 본디 신이궐은 배짱을 제 가슴속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두 마리 호랑이, 진가쌍호(陳家 雙虎)가 휘두르는 두 자루 박도(朴刀) 위에 자신의 배짱을 얹고 사는 사람이었 다. 그런데 그 두 마리 호랑이가 두 마리 목 없는 귀신이 되었고, 두 자루 박도가 두 자루 고철로 변해 버렸으니, 신이궐이 부릴 배짱은 이미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자, 말해 보게. 마맥회 아이들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딘가?" 전운리는 이번에는 신이궐이 대답할 것임을 확신했다. 뿌득! 백초약포(百草藥 )라는 편액 아래를 지날 무렵, 전운리는 약포 안쪽으로부 터 울려 나온 둔탁한 쇄골음(碎骨音)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누군가의 목뼈가 으스러진다면 저런 소리가 울릴 것이다. 전운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도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도장에 주사를 묻혀 종이 위에 누르면 '신(申)'이 라는 전자(篆字)가 찍힌다. 바로 신이궐이 정보를 거래할 때 사용하는 비표 (秘表)였다. 전운리는 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결심한 뒤였지 만, 언짢은 마음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운리와 신이궐. 겉으로 드러난 바,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전운리는 사천에 서 활약하던 수적 괴수였고, 신이궐은 강남에서 치부한 약포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바, 두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정보 상인의 비밀결사, 황서계의 계원이라는 점이다. 천하를 통틀어 스물을 넘지 않는다는 황서계의 일급계원들 사이에는 몇 가지 묵시적인 철칙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고객의 신상에 관한 철저한 비밀 보장이었다. 고객의 신상에 관한 철저한 비밀 보장. 그것은 황서계라는 조직이 활동할 수 있는 어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항이었다. 고객이 드러나면 고객을 상대한 계원이 드러나고, 계원이 드러나면 계 자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다음은 뻔한 일이었다. 황서계와 같은 음성적인 조직이란 그 성격이 마치 설 뭉친 눈사람과 같아서, 밝은 햇살 아래 노출되면 곧바로 소멸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전운리는 그 규칙을 어겼다. 같은 계원인 신이궐을 살해하고, 그가 거래하던 고객에 관한 정보를 탈취한 것이다. '열흘 안에 통문(通文)이 돌겠지.' 중원 각지에 흩어진 황서계원들이 자신이 한 행동을 알아차리는 데 열흘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유형적인 힘은 지니지 않았지만, 황서계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다. 계를 배신한 계원을, 계는 어떠한 방법으로 응징할까? 전운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 * * "마맥회의 본거지는 알아 낼 수 없었습니다만, 신이궐과 정보를 거래하던 마맥회 간부의 거처는 알아 냈습니다." "간부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격설옹( 舌翁)입니다." "...!" "그는 신분을 감춘 채 영정(永亭)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그를 잡으면 마맥회의 본거지를 알아 낼 수 있겠구려." "하지만 사냥감은 이미 그곳에 없습니다." "...?" "장옥평은 이틀 전에 마맥회를 출발, 북상 중이라고 합니다." "북쪽? 그렇다면 목적지가 혹시...?" "바로 산동입니다. 마맥회는 장옥평을 이용해 산동장가와 제휴를 꾀하려는 것입니다." "선생! 혹시 그들이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는 알아 내었소?" "신이궐은 거기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육로(陸路)를 이용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육로면 더욱 곤란하군. 이곳에서 산동으로 가는 육로는 셀 수 없이 많지 않소?" "그래서 제가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 계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말씀하시오." "우선 문서를 능란하게 위조하는 모필가(模筆家)가 필요합니다." "이교에게 명한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다음은 배, 그것도 빠른 전선(戰船)이 필요합니다." "배라고요? 그들이 육로를 택했다고 하지 않았소?" "후후! 그들은 곧 빠른 배가 쓰일 곳으로 행로를 바꿀 것입니다." 4 비록 소은(小隱)은 산중(山中)에 있고 대은(大隱)은 시전중(市廛中)에 있다 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술(仙術)을 수련해 세상을 벗겠다는 목적으로 건립된 도관(道館)이 시끌벅적한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썩 어울리는 풍경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도관 맞은편에 홍등(紅燈)·청등(靑燈)을 줄줄 이 내건 기루(妓樓)가 떡하니 앉아 있다면 더욱더 그러하리라. 도관의 이름은 청풍(淸風)이었다. 기루의 이름은 명월(明月)이었다. 동파선생(東坡先生)은 저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통해, "만물은 모두 임자가 있지만 오직 맑은 바람과 밝은 달만은 그렇지 않아 누구든지 그 성색(聲色)을 즐길 수 있다."고 노래했던가? 하지만 이곳의 청풍관(淸風館)과 명월루(明月樓)는 그러한 대방가(大方家) 의 시정(詩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청풍관의 주인인 청풍진인(淸風 眞人)은 사이비 방술(方術)과 엉터리 부적(符籍)으로 천금을 모았다는 지독 한 구두쇠였고, 명월루의 주인인 합(蛤) 노태(老太)는 손님들의 골즙 한 방울까지 깨끗이 빨아 내지 못하면 제 분을 못 이겨 두창(頭瘡)이 돋는다는 악질 포주였던 것이다. * * * "사람을 찾는다고...?" 높은 절운관(折雲冠)을 쓰고 푸른 도포를 걸친 말상노인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흐흥! 그딴 것은 동이로(東二路)에서 문수(聞數)질해 먹는 산(算)쟁이들에 게 물어 보게!" 말상노인, 청풍진인은 길쭉한 눈썹을 찡그리며 눈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촌로(村老)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촌로의 머리 조아리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아이고, 어르신! 그런 싸구려 점괘가 어찌 호풍환우(呼風喚雨)의 높은 도력 (道力)에 비하겠습니까? 시줏돈은 섭섭치 않게 가져 왔으니, 제발 이 늙은이 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무지렁이답지 않게 매끈한 아부 때문일까, 아니면 섭섭치 않다는 시줏돈 때문일까? 청풍진인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흠! 눈알은 제대로 박힌 것 같군. 자네, 북곽(北廓)에서 대장간 하는 정(鄭) 노대(老大) 맞지?"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 장 - 4 묘왕동주 촌로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 과연, 과연! 진인 어르신의 신안(神眼)은 하늘을 궤뚫고 귀신을 놀라게 한다더니...!" 촌로는 어느새 말투까지 달라져 있었다. 청풍진인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별로 넓지도 않은 이곳 영정에서 오 년 가까이 도사질을 한 그였다. 웬만한 토박이들의 계보쯤은 앉아서도 줄줄이 꿸 수 있었다. "시줏돈은 얼마나 가져 왔나?" 청풍진인은 눈을 게슴치레 뜨고 정 노대에게 물었다. 정 노대는 허리춤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서안(書案)에 놓았다. "넉 냥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아들놈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라도, 얼마라도 더 드리겠습니다." 넉 냥이라면 정말로 섭섭치 않은 시줏돈이었다. 하지만 청풍진인의 얼굴에는 시퍼런 노기가 떠올랐다. "떽!" 정 노대를 펄쩍 뛰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일갈(一喝)이었다. "드리다니! 이건 내가 갖는 게 아니라, 천존(天尊)께 바치는 예물(禮物)이야! 내가 오리배(汚吏輩)인가, 아니면 강도인가? 천하에 고얀 사람 같으니라고!"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정 노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통수를 한동안 노려보던 청풍진인은 이윽고 안색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성현께서도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으니, 이쯤에서 용서해 주지. 하지만 차후로는 주둥이 단속에 유념하게!" "감사합니다!" 정 노대는 죽을죄를 용서받은 사람처럼 기뻐했고, 청풍진인은 스스로의 위엄과 자비에 매료되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어험! 그럼 오랜만에 서죽(筮竹)이나 뽑아 볼까?" 청풍진인은 서안의 설합에서 산통(算筒)과 서죽을 꺼냈다. "어디 보자... 자네가 찾으려는 사람이 집 나간 아들놈이지?" 정 노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그걸 어떻게...! 과연, 과연...!" 한심스럽게도 정 노대는 방금 전 자신이 내뱉은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 었다. 청풍진인은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잔말 말고 이름이나 말해 보게." "저요?" "집 나간 게 자넨가? 아들놈 이름을 대란 말일세!" 무안으로 얼굴이 붉어진 정 노대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종이에는 석 자의 이름이 그럴듯하게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먹물깨나 먹어 본 놈에게 대필(代筆)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청풍진인은 주문을 남남히 외우며 산통을 흔들기 시작했다. 정 노대는 간절함 이 듬뿍 담긴 눈초리로 청풍진인이 점괘를 뽑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허어!" 청풍진인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서죽을 보더니 크게 탄식했다. "어, 어떻게 나왔습니까?" 정 노대는 침을 꼴깍거리며 청풍진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어렵군, 어려워." 청풍진인은 어렵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 노대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말씀을 해주십시오! 제 자식놈이 어떻게 되었나요?" "천지부(天地否)라, 음양이 제자리를 잃고 위아래가 꽉 막혔어. 나간 것도 들어와 조신(操身)할 판국에 오히려 둥지를 버리고 나갔으니, 이제는 영영 돌아올 수 없을 테지. 아들놈 얼굴 보길랑은 일찌감치 포기하게나." "아이고오!" 정 노대는 죽을상이 되어 무릎걸음으로 서안에 바짝 달라붙었다. "진인 어르신! 제발, 제발 소인의 자식놈을 구해 주십시오!" 청풍진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끌끌! 산 사람이라면 어찌 손을 써보겠지만, 이미 때가 늦었네. 혼이나 시달리지 않도록 제사나 후하게 지내 주는 도리밖에는..." "어허헝!" 드디어 정 노대는 목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허! 신성한 곳에서 곡성(哭聲)을 내다니... 부정탄다. 어서 돌아가게!" 청풍진인은 벌컥 짜증을 냈고, 결국 정 노대는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쫓겨나듯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청풍진인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탐욕스럽던 입가의 주름살이 서서히 펴지고, 탁하던 눈빛에는 계수(溪水)처 럼 맑은 신기(神奇)가 어리기 시작했다. 청풍진인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보고 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쯧쯧!" 청풍진인은 나직이 혀를 차며 생각했다. 정 노대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라고 해서 좋은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신(神)을 돋워 엿본 운세가 덜컥 천지부 의 괘가 나와 버린 것이다. 청풍진인은 뒷전에 시립해 있던 젊은 도사에게 주머니 하나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주머니는 정 노대의 시줏돈 넉 냥이 든 것이요, 종이는 정 노대의 아들 이름이 적힌 것이다. "위패를 만들어 위령제(慰靈祭)를 지내 주거라. 객사(客死)하여 잡귀가 성할 테니, 부적과 법구(法具)로써 부정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어, 청풍진인은 붉은 주사로 몇 장의 부적을 그려 준 뒤, 제사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당부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세간에 알려진 사이비 도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 * * 오늘따라 청풍관을 찾는 손님이 많았다. 청풍진인은 중화의 입가심도 채 끝내기 전에, 눈매가 부드러운 청삼문사와 마주해야만 했다. "도우(道友)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는가?" 그런데 용건을 묻는 청풍진인에게 되돌아온 청삼문사의 대답은 약간 엉뚱한 것이었다. "약포에서 처방전을 가져 왔습니다." 순간, 청풍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뒤에 서 있던 젊은 도사에게 말했다. "너는 물러가거라. 그리고 이곳에는 아무도 얼씬못하게 하거라." 젊은 도사가 물러가자 청풍진인은 청삼문사를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으로부 터 뼛골을 시리게 만들 정도로 싸늘한 안광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자네는 누군가?" 평소 느끼하게만 여겨지던 거짓 위엄은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청삼문사는 태연하기만 했다. "소생은 이번에 새로이 신 약사님을 모시게 된 사람입니다. 위내집(圍內什)이 라고 불러 주십시오." 추호도 지체없는 대답이었지만, 청풍진인의 안색은 여전히 싸늘했다. "신 약사의 밑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방전을 가져 왔다고...?" "어김없습니다." "이놈! 감히 누굴 속이려고!" 돌연, 청풍진인의 몸이 앉은 자세 그대로 위내집을 향해 날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큼직한 서탁, 그 위에 펼쳐진 사주집전(四柱集典)의 책장들이 파르륵 휘날린다 싶은 순간, 위내집의 턱밑 천돌혈(天突穴)에는 대꼬챙이처럼 빳빳한 청풍진인의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음살진기(陰煞眞氣)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 노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는 곧바로 염라 대왕께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청풍진인, 아니 과거 남마련 칠사(七師)의 일원이자 현마맥회의 십 인 간부 중 한 사람인 격설옹 학단성(壑端盛)은, 위내집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서슬에 질린 듯 위내집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세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한 학단성은 살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묻겠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번에 신 약사님을..." "거짓말! 신이궐은 이쪽의 의뢰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사람을 보내지 않는 다!" "...!" "그리고 사람을 보낸다 해도 반드시 진씨 형제를 보낸다. 이제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겠느냐?" 그러자 위내집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 말씀 그대로구나!" "...?" 그 말에 학단성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주인님께서는 선배께서 저를 믿지 않으실 거라 말씀하셨지요. 그럴 때에는 이 서찰을 보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위내집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학단성은 눈빛을 굳히며 그의 목에 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위내집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껄껄 웃었다. "소생에게는 음살진기 앞에서 수작을 부릴 정도로 큰 담량이 없습니다. 안심하시지요." 위내집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한 통의 봉서(封書)를 꺼내 학단성에게 내밀 었다. 그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학단성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봉서가 열리는 부분에는 붉은 주사로 찍은 '신(申)'이라는 인지(印紙)가 붙어 있었다. 학단성 은 그 인지가 백초약포를 경영하는 정보 상인, 신이궐의 비표임을 잘 알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 장 - 5 묘왕동주 "꼼짝 말고 있어라." 학단성은 위내집의 목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이 아니더라 도 위내집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한 가닥 음공(陰功)을 일으켜 위내집의 혈맥을 진동시켰기 때문이다. 학단성은 봉서를 뜯었다. <상례를 파(破)하며 연락을 보내는 것을 이해하시오. 상황이 급박하여 나는 물론이거니와 아랫사람들도 움직일 수 없는 탓에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보내게 되었소. 강남 일대의 육로에 그들이 사람을 풀었소. 호남뿐 아니라 다른 지부의 지원도 받은 듯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소. 약포 주위에도 감시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귀회(貴會)의 행로가 밝혀진 것이 아닌가 의심되오.> 눈에 잘 띄지 않는 누른색으로 쓰였으며, 수취인과 발신인이 명기되지 않은 기이한 편지... 하지만 그 내용은 학단성의 안색을 하얗게 탈색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때 위내집이 말했다. "주인께서는 의뢰받지 않은 물건이지만 분명히 사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가격은 지난번 물건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학단성은 위내집을 바라보았다. 미간에 푸른 기운이 어렸으니 음살진기에 제압당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담담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이궐은 일개 정보 상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인물을 수하로 거둔 셈이다. '이자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나? 아니야, 그러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아...!' 하지만 사안이 너무나도 급박했다. 만에 하나 장옥평의 북상로(北上路)가 적들에게 발각나는 날에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산동장가 와 결련(結聯)하려던 오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이거니와, 가뜩이나 미약한 회의 전력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물건의 대금이네." 학단성은 서탁 설합에서 몇 장의 은표(銀 )를 꺼내 위내집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꼼꼼이 세어 보던 위내집은 빙그레 웃으며 은표 한 장을 되돌려주 었다. "한 장이 더 온 것 같습니다." "그랬나?" 학단성은 짐짓 실수인 체하며 은표를 받았다. 사실은 지난번 금액에 대해 아는지를 시험한 것인데, 위내집은 조금도 이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심이 모두 풀어진 것은 아니다. 학단성은 목소리를 엄숙히 가다듬고 말했다. "자네는 이미 노부의 음살진기에 부상당했네. 노부가 그것을 풀어 주지 않는다면 자네는 향후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걸세. 그리고 노부는 지금 자네를 치료해 주지 않겠네." 사실을 말한다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천돌이라면 비단 신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리병처럼 상하기 쉬운 요혈이 었다. 학단성이 수십 년 수련한 음공이 그 요혈을 침공했으니, 빨리 치료하지 않는다면 운이 좋아야 반병신이요, 아니면 송장이 될 것이 분명했다. "선배! 그, 그럴 수가...!" 위내집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그것을 발견한 학단성은 득의로움을 느꼈다. 의심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최후의 안전 장치는 해둔 셈이었다. "노부를 원망하지 말게. 이번 일이 해결된 뒤 노부를 찾아오면, 어김없이 자네를 치료해 주겠네." 학단성은 나직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위내집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학단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듯,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께서는 약속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위내집은 자리에서 일어나 학단성을 향해 정중히 읍했다. * * * 청풍 도관을 나온 위내집은 소처럼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그는 마치 특정한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 럼 여기저기를 배회했다. 반 시진 가량을 그러고 다녔을까? 위내집이 인적이 뜸한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전면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눈매가 날카로운 삼십대 장한이었다. 장한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위내집에게 속삭였다. "미행은 없었습니다." "확실한가?" 재차 확인하는 위내집의 얼굴에는 푸른 기운이 더욱더 선명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마에도 구슬 같은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예!" 장한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내집은 그제서야 품속에서 한 알의 단환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는 담벼락 밑에 주저앉아 운공에 들어갔다. 장한은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골목 어귀에 나아가 주위를 경계했다. 위내집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독하군!' 한차례 소주천(小週天)을 끝낸 위내집은 크게 호흡하여 폐부에 가득 찬 탁기(濁氣)를 몰아 내려 했다. 하지만 탁기는 더러운 거머리처럼 그의 호흡에 늘어붙었다. 위내집은 두 손을 깍지껴 인지와 중지를 모았다. 판관필(判官筆)이라도 있다 면 좋겠지만, 준비하지 않은 이상 손가락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흐읍!" 체내의 양기를 한껏 끌어올림과 동시에, 한 점으로 모아진 네 손가락이 단중(檀中)·중정(中庭)·거궐(巨闕)의 세 혈도에 차례로 꽂혔다. 그 순간, 위내집은 한 줄기 시퍼런 번갯불이 정수리부터 항문까지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위내집은 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참았다. 그리고... "흐읍!" 다시 한 번 같은 부위를 찔러 가는 위내집.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위내집의 입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섞인 선혈이 화살처럼 뿜어 나왔던 것이다. "후우!" 스스로 타혈요상법(打穴療傷法)을 시전해 병든 피를 몸 밖으로 뽑아 낸 위내집은 다시 눈을 감고 운공에 들어갔다. 위내집이 모든 요상을 끝낸 것은 처음 골목에 들어선 후 이 각이 지난 뒤였다. "괜찮으십니까?" 위내집의 얼굴을 살피던 삼십대 장한, 유적(劉籍)은 그 미간에 어려 있던 푸른 기운이 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늙은이가 과연 독수를 썼군요!" 유적은 분한 듯이 말했다. "이 정도로 그친 게 다행이지." 위내집, 아니 전운리는 주인의 부상에 분노하고 있는 충직한 수하를 부드럽게 달랬다. 본디 격설옹 학단성의 음살진기는 이십 년 전부터 강남 무림을 진동시킨 신공이었으니, 전운리의 공력으로는 해소가 불가능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용소가 그에게 폐혈공(閉穴功)을 시전하지 않은 경우 의 얘기였다. 폐혈공은 스스로의 혈도를 폐(閉)함으로써 궁극에는 금강지신(金剛之身)과 같은 몸뚱이를 이룩하는 기공(奇功)이었다. 물론 전운리에게는 겨우 반나절 동안의 호신지기를 안겨 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매용소가 폐혈공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전운리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폐혈공의 신묘한 위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거, 폐혈공을 비롯한 삼대마공(三大魔功)으로 강호를 공포에 떨게 만든 어떤 가문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 전, 그 이름도 우뚝한 무왕(武王) 관산정(關山頂)에 의해 멸망당한 가문의 이름이... 하지만 전운리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문을 애써 지워 버렸다. 매용소가 삼대마공 전부를 익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 있으랴? 어차피 전운리는 황서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매용소와 공생공사(共生共 死)를 다짐한 이상, 그것이 사람의 무공이든 마귀의 무공이든, 매용소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과연 폐혈공의 효과는 뛰어났다. 경인(驚人)의 음살진기라 할지라도 전운리의 혈맥을 진동시키지 못하고 단지 피부 밑에 머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전운리는 유적을 향해 물었다. "철한대는 출동했는가?" "예! 삼 개 조가 변복(變服)한 채 도관 근처에 대기 중이며, 곧 삼풍도 도착한다 고 합니다. 오늘밤이라도 당장 그 늙은이의 도관을 깨끗이 뭉개 버릴 수 있습니다." 만족한 듯 미소 짓던 전운리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저편에서 한가하게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맥회는 날짐승과 유달리 친한 조직이었다. 열 사람의 간부들이 모두 새의 이름을 암호로 쓰는 것만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들이니 화급한 소식은 새를 통해 전달할 것이 분명했다. "놈이 신호를 보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절대로 손을 써서는 안 되네. 이 점을 괴악에게 분명히 전달하게나." "예!" 유적은 짧게 대답한 뒤 골목을 빠져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전운리는 아까의 일을 생각했다. '위내집이라... 후후!' 전운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위(圍)는 구(口)요, 집(什)은 열[十]을 가리켰다. 구(口) 안에 열[十]이 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전(田)이요, 전은 바로 그의 성(姓)이 아닌가! 상대가 마맥회 안에서도 꾀주머니로 소문난 격설옹이었기에 작은 장난을 섞어 본 전운리였으니, 그 성공이 어찌 통쾌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은 통쾌함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전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장옥평... 이 값비싼 사냥감을 수중에 넣을 때까지는, 통쾌함이란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3 장 동료(同僚) 묘왕동주 제 3 장 동료(同僚) 1 "으하하하!" 병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보기만 해도 오줌을 찔끔 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상판과 뇌성처럼 우렁찬 웃음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항시 아우들에게 핀잔당하던 정개(鄭改)였지 만 이번에는 이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까불다가는 시신도 보존치 못할 테니, 좋은 말로 할 때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리거라!" 정개는 흐뭇한 눈초리로, 산채의 셋째 두령 함악(咸岳)이 얼굴만큼이나 무시 무시한 목소리로 일단의 무리를 을러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영판 서툴기만 하던 셋째였지만 이제는 제법 이력이 붙어, 한소리의 호령만으 로도 능히 사람의 간담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훌륭한 산적이 된 것이다. 이때 산채의 둘째 두령인 호패상(胡覇象)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정개의 곁으로 다가왔다. "킁킁! 마차 안에는 계집년들도 제법 있나 봅니다. 킁! 벌써부터 새콤한 암내가 진동을 하네요." 정개는 호패상의 어깨를 탁, 소리나게 후려쳤다. "이 친구, 벌써부터 밝히기는! 계집 맛을 보려면 우선 사내놈들부터 처리해야 하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정개 또한 금방 계집의 속살 맛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누군가? 비록 강호에서는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이곳 백장산(百丈山) 일대에서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다고 알려진 백골채(白骨寨)의 호걸님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미 포위된 마차 세 대를 터는 것쯤은 노동 축에도 끼지 못했다. 비록 말을 탄 호위 여섯 명과 조무래기 짐꾼 몇 명이 더해졌다 한들, 결과는 조금도 달라질 까닭이 없었다. "어서 내리지 않고 뭐 하느냐? 마빡에 쇠꼬챙이가 한 대씩 박힌 뒤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말을 탄 사내들은 병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선뜻 무기를 버리지 않자, 함악이 다시 한 번 우렁찬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이번 것은 단순한 으름장만이 아니어서, 산길 양쪽을 차단한 이십여 명의 졸개들이 일제히 활을 들어 마차 무리를 겨누었다. 그런데 말을 탄 사내들의 반응은, 이십여 대의 화살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의 그것치고는 너무나도 태연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한심해 못 견디겠군. 장손(長孫) 아우, 자네는 그렇지 않나?" 말을 탄 사내 중, 한 쪽 소매가 헐렁한 것이 외팔이임에 분명한 장년인이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허여멀쑥한 청년이 맞장구를 쳤다. "누가 아니랍니까? 소제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정개와 호패상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뭐가 한심하다는 말일까? 이때 세 대의 마차 중 한 대로부터 여인의 그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좌(左) 오라버니, 조용하게 처리하도록 하세요." 온유한 와중에서도 엄정한 위엄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 말에 외팔이 장년인은 허여멀쑥한 청년을 향해 투덜거렸다. "저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지." 허여멀쑥한 청년은 어깨를 한차례 치켜 올렸다. 마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외팔이 장년인은 안장에서 가죽주머니 하나를 끌러 함악의 발 아래 던졌다. 마른 땅바닥에서 풀썩 먼지가 일어나는 품이 제법 묵직한 것 같았다. "좋은 은으로 스무 냥일세. 녹림처사(綠林處士)들의 한 번 거사(擧事)로는 섭섭치 않은 액수일 터이니, 이것으로 우리를 순순히 보내 주게나." 외팔이 장년인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덤덤해서, 구걸 나온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 주는 행인같이 여겨질 정도였다. 함악은 가죽주머니와 외팔이를 번갈아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백골채의 첫째 두령, 정개를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어처구니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기는 정개도 함악 못지않았 다. 녹림에 투신한 지 십오 년... 참으로 다양한 손님을 맞이한 그였지만, 이렇게 당당한 손님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이 호걸님들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구나!" 제일 먼저 화를 낸 것은 가장 성질이 급한 호패상이었다. 그는 육십 근 가까이 나가는 철퇴로 땅바닥을 내리찍으며 당장 앞으로 뛰어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팔목을 움켜잡는 사람이 있었다. 백골채에서 유일하게 그를 말릴 수 있는 채주 정개였다. 정개는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외팔이 장년인을 향해 공수(拱手)해 보였다. "보아하니 예사로운 분들이 아닌 듯한데... 이름자라도 알 수 있겠소이까?" 아마도 밑천 안 드는 이 장사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취해 보는 정중한 예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개의 예도는 무참하게 묵살당하고 말았 다. 외팔이 장년인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뿐인 손을 휘휘 내두른 것이다. 마치 귀찮은 날파리라도 쫓듯이... "목적이 달성되었는데 이름은 알아 무엇 하겠는가? 어서 돈이나 챙겨 돌아가 게." 그 안하무인의 태도에 호패상의 두툼한 어깻살이 부르르 떨렸다. "형님! 더 이상 못 참겠소!" "아우는 가만히 좀 있게!" 정개는 호패상을 억지로 만류했다. 녹림에 묻혀 행인의 주머니를 터는 천한 도적질이라도, 제대로 해먹고 싶으면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호화로운 마차와 평범해 보이는 호위 등으로, 귀한 집 나리들이 산천 유람이나 나온 것으로 착각할 만한 행렬이었다. 하지만 이십여 대의 화살에 둘러싸여서도 저토록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귀한 집 나리들의 행렬이라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보내자니 체면이 안 서는 일이고, 무작정 덤비자니 뒤가 켕겼다. 드디어 정개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우들의 핀잔을 사던 바로 그 고민이었 다. 그런데 이러한 정개의 고민은 타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나도 더 이상 못 참겠다!" 굵은, 하지만 어딘지 이상한 억양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마차 뒤쪽에 서 있던 짐꾼 중 한 명이 지고 있던 짐을 땅위에 내려놓았다. 정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저 짐꾼은 무엇을 못 참겠다고 하는 것일까? 짐을 내려놓은 짐꾼은 함악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실로 괴이한 모습이었다. 불에 그슬린 개고기처럼 털이라고는 한 올도 찾아보기 힘든 얼굴이 괴이했고, 드러난 팔뚝과 가슴팍을 빽빽히 뒤덮은 백사(白蛇) 같은 문신`-`정개의 눈에는 분명히 그렇게 비쳤다`-`이 괴이했고, 울퉁불퉁 한 자갈 위를 아무 거리낌없이 내딛는 맨발이 괴이했다. "단(但) 공(公)! 잠깐만!" 정개는 외팔이 장년인이 그 짐꾼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동행이던 외팔이 장년인도 짐꾼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단 공'이라니? 짐꾼에게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공(公)' 자가 붙는단 말인가? 정개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짐꾼, 단 공은 함악 앞에 당도했다. 함악도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입을 조금 벌린 멍청한 표정으로 단 공이 하는 짓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 함악의 멍청한 표정은 단 공의 주먹이 콧잔등 위에 떨어질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빡!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쇠망치로 소나무 등걸을 후려친 것 같았다. 함악의 얼굴이 소나무 등걸처럼 튼튼한지는 알 수 없지만, 단 공의 주먹이 쇠망치처럼 무지막지한 것만은 분명했다. 함악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이 장이나 날아갔다. 그의 머리는 상식을 초월한 각도로 젖혀져 뒤통수와 등이 거의 달라붙어 있었다. 목뼈가 부러진 것은 고사하고, 만약 목가죽이 조금만 연했다면 몸뚱이는 그 자리에 놔둔 채 머리통만 뒤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백골채 셋째 두령의 허망한 죽음은 산채에 몸담은 모든 산적들에게 있어서 지독히 비현실적인 일로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말 한 마디 하는 사람도, 하물며 신음 한 토막 내뱉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외팔이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쥐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 소리가 정개의 정신을 퍼뜩 들게 만들었다. "쏴, 쏴라!" 명령을 듣자 마차 전방을 가로막은 졸개놈들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시위를 힘껏 당겼다. 그런데 활을 겨누는 자들은 마차를 포위한 병력 중 절반에 불과했다. 마차 후방에 서 있던 졸개들은 이미 정개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컥!" "아이쿠!" 간발의 시차를 두고 연속해서 터져 나오는 비명들... 그것은 또 다른 짐꾼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등에 큼직한 보따리를 지고 있으니 짐꾼은 분명 짐꾼이었다. 그러나 헝겁으로 둘둘 감은 길쭉한 막대기를 휘두르며 졸개들 틈을 누비는 모습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범을 방불케 했다. 그렇다고 마차 전방의 졸개들의 처지가 더 나은가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매서운 시윗소리와 함께 쏘아진 화살은 단 한 대도 목표물에 꽂히지 못했으니, 그것은 말 등을 박차고 몸을 날린 외팔이 장년인의 재주 때문이었다. 외팔이 장년인이 허공에서 크게 우수를 내두르자, 한 줄기 거센 광풍이 몰아치며 화살들을 단숨에 휩쓸어 버린 것이다. 허여멀쑥한 청년의 재주도 보통이 아니었다. 마상에 꼿꼿이 앉은 채 단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 뿐인데, 졸개들은 그때마다 한 놈씩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자빠지는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괴상한 짐꾼, 단 공까지 졸개들 속으로 뛰어들어 손발을 마구 휘두르니, 걸리는 대로 섬뜩한 파골음(破骨音)이요, 채이는 대로 처절한 비명성(悲鳴聲)이었다. 정개는 눈을 접시만하게 부릅뜨고 이 놀라운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하지만 맷집 하나만큼은 코끼리보다 굳세다는 호패상마저도 단 공의 무지막지한 발길에 채여 피를 토하자, 더 이상 우두커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체면을 따질 상황은 일찌감치 물 건너갔다. 정개는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목숨이라도 보존해야 산적질이라도 해먹을 것 아닌가. 정개는 정신없이 뛰었다. 단 공이 주먹질만큼이나 뜀박질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은 정개에게 있어서 커다란 불행이었다. 갈고리처럼 억센 손에 뒷덜미가 잡혔을 때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두 다리만은 계속 달리고 있었던 탓에, 정개는 잠시 허공에 떴다가 등짝 채로 땅바닥에 떨어지는 꼴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고 말았다. "허억!" 정개는 헛바람을 삼켰다. 등짝의 아픔보다도 얼굴 위에 머물러 있는 단 공의 부리부리한 두 눈이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단, 단 공! 제, 제발 목숨만...!"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3 장 - 1 묘왕동주 정개는 단 공에게 생명을 구걸했다. 하기야 이대로 누운 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무인이라면 이렇게 자빠진 사람을 칠 리는 없으니까. 아마도 뭐라고 우쭐대는 말을 내뱉으며 일으켜 세우겠지. 그러면 그때 살려 달라고 다시 빌어야 하나? 아니면 백장산의 주인답게 소매 속 백골전(白骨箭)으로 기습이라도 노려야 하나? 비록 촌각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정개는 또 한 번 예의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정개의 이번 고민도 타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짐꾼 단 공은 그 자세 그대로 정개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아 버린 것이다.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이제 백장산 백골채의 첫째 두령 정개는 어떠한 고민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 * * "박(朴) 공(公)! 물러나시오!" "..." "이러다 산중에서 날이 저물겠소!" 마차 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좌훈(左勳)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마봉황 (魔鳳凰)은 점점 더 짜증이 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일행의 지휘자는 마봉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그녀 혼자서 독단적으로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일행 중에는 그녀가 지휘하는 마맥회 외에도 다섯 사람이 더 있었다. 행보의 목적지는 산동장가. 길이 길이니만큼 그들 다섯 사람 중 장옥평과 육염명의 의견은 하시라도 존중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마봉황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 사람을 일행에 끼워 준 것만으로도 큰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고 믿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오랑캐 둘과 사문인 형산파에서조차 버림받은 계집애 하나를, 단지 장옥평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동까지 호위해 주마고 약속했으니 이 어찌 큰 혜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들 세 명의 반갑지 않은 불청객들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마봉황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허어! 박 공!" 좌훈이 세 번째로 소리쳤을 때, 마봉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을 밀어젖혔다. "좌 오라버니! 대체 무슨 일이죠?" 비록 입으로는 좌훈에게 묻고 있었지만, 마봉황의 눈은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차 앞쪽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신음조차 제대로 지르는 놈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대부분이 절명한 것 같았다. 시신들 저편에는 대머리에 청색 영웅건 하나를 멋대가리없게 두른 사내 하나가 유유자적하게 서 있었다. 단탈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단신으로 철옥을 없앤다는 엄청난 목표를 지니고 중원에 들어온 묘족(苗族) 오랑캐였다. 마차 뒤쪽에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마차 앞쪽과는 달리 대부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정강이뼈나 어깨뼈 같은 곳이 부러졌 는지 죽는소리를 지르며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사내 하나가 양팔을 벌린 채 누군가를 가로막고 있었다. 박한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사부가 잃어버린 검을 찾는다는 아리송한 목표를 지니고 중원에 들어온 이족(夷族) 오랑캐였다. 박한에 의해 가로막힌 사람은 다름 아닌 마맥회의 전투 대장 좌훈이었다. 고개를 돌려 마봉황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엷은 곤혹이 담겨 있었다. "회주! 행적을 감추기 위해서는 저 도적들을 모두 해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박 공이 그것을 방해하는군요." 좌훈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마봉황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박한을 바라보았다. "박 공! 송양(宋襄)의 인덕(仁德)으로 대사를 그르칠 생각인가요? 좌 오라버 니의 말씀이 옳으니 어서 비켜서세요!"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는 일파(一派)를 이끌어 나가는 여장부의 기상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장부가 뒤통수를 긁어대는 듯한 비웃음을 들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송양이 뭐 하는 물건인지 알 바 아니지만, 저 친구하고 얘기하고 싶다면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될 거야." 삼마(三魔)의 대형인 육족풍(六足風)의 일점혈육이었다. 철옥에 대항해 끈 질긴 투쟁을 벌여 온 마맥회의 회주였다. 그런 마봉황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런 반말을 들어 보았을까? 길고 고운 마봉황의 눈썹이 이마 위쪽을 향해 착 치켜 올라갔다. 분노를 느낀 것은 좌훈을 비롯한 마맥회의 무사들도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좌훈은 엄한 목소리로 단탈에게 주의를 주었다. "단 공! 말씀이 지나치신..." 그러나 단탈은 중원인으로부터 예법 강의를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 다. 그는 좌훈의 말허리를 맵게 끊었다. "단탈! 내 이름은 아합족의 타루가, 단탈이다! 너희들 마음대로 부르지 마라!" 좌훈의 각진 얼굴이 한 꺼풀 얼음막을 씌운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이 달자(達子)가...?" 좌훈은 단탈을 향해 한걸음 내딛었다. 거리로 말하자면 두 자나 간신히 될까? 하지만 그 짧은 거리 안에는 이제껏 단탈을 향해 지켜 오던 예의와 법도의 한계선이 들어 있던 모양이었다. 마봉황은 좌훈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선홍빛 의 전의(戰意)를 읽을 수 있었다. '혹시... 그를 떠올린 것일까?' 마봉황은 과거 남마련 내에서 좌훈과 절친하게 지냈던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 사람의 입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족이 아닌 오랑캐, 그것도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눈총받는 몽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진심으로 그 사람을 대해 주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의 재주를 아껴 주었다. 좌훈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가 무슨 핏줄을 타고났는가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 강남에서 가장 빠른 왼팔을 지니고 있던 좌훈의 이야기였다. 마맥회의 전투 대장 좌훈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재주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자신의 왼팔을 앗아 간 그 사람의 재주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오랑캐를 증오하는 철저한 중화사상자(中華思想者)가 된 것이다. "싸우고 싶나?" 단탈이 좌훈에게 말했다. 그는 유생처럼 한가한 표정에 건달처럼 작작한 자세였다. 향저구(香雎鳩) 구양일산(歐陽一山), 탐혈붕(貪血鵬) 나치(羅恥) 와 더불어 마맥회의 삼대고수로 꼽히는 좌훈을 상대로 "싸우고 싶나?"라고 지껄이면서 말이다. 자연, 마봉황의 눈에 비친 그는 분위기 같은 것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놈일 수밖에 없었다. 좌훈은 눈을 빛내며 한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던 기세가 급등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 이것을 무마한 사람은 단탈과 마맥회의 고리 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모두 진정하십시오!" 마차에서 내린 장옥평이 좌훈과 단탈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장옥평이 요인(要人)은 요인인 모양이었다. 등장과 동시에 달아올랐던 장내 의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딛은 좌훈의 걸음과 치켜 올라간 마봉황의 눈썹이 쉽게 원상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처음 마맥회의 본거지를 떠나 북상(北上)할 때, 팔자좋은 젊은 부부의 유람 행차로 가장하자는 계교를 생각한 것은 마봉황이었다. 물론 장옥평에게 유달리 집착하는 철옥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세 대의 호화로운 마차를 얻어, 한 대에는 부부로 꾸민 장옥평과 구양지(歐陽 芝)가, 다른 한 대에는 집안의 어른으로 꾸민 육염명이, 그리고 마지막 한 대에는 시녀로 꾸민 마봉황과 석소용이 탔다. 그리고 마맥회의 정예 무사 네 명이 십 인 간부 중 두 명인 애비익(哀比翼) 좌훈과 독짐(毒 ) 장손불변(長孫不變)의 인솔 아래 호위 역을 맡고, 나머지 일반 무사 십여 명은 단탈, 박한과 함께 짐꾼으로 꾸몄다. 나흘째 이어진 행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았다. 작은 소동이 있었다면, 석소용이 출발한 지 하루 만에 죽어도 장옥평과 한 마차를 타겠다고 우기고 나선 일뿐... 결국 석소용은 고집대로 장옥평의 마차에 올랐다. 그 일은 마봉황으로서는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말썽쟁 이 계집애로부터 해방되었으니, 한결 홀가분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생각해 보면, 장옥평은 함께 사선(死線)을 넘어온 친구들을 홀대하는 것 같아 못내 미안했을 것이다. 다정다감한 그다운 일이다. 하지만 마봉황은 개의치 않았다. 마맥회주인 자신이 시녀 노릇을 자청하는 판국인데, 아무짝에 도 쓸모없는 혹들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 혹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생전 들어 보지 못한 폭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한편, 장옥평의 심정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좌 선배! 남쪽의 예법은 중원의 예법과 많이 다릅니다. 남쪽에서는 따로이 성(姓)을 쓰지 않는 점을 생각하시면 그가 '단 공'이라는 칭호를 싫어하는 것이 이해되실 것입니다." 비록 논리적인 중재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일단 발동한 좌훈의 기세를 꺾기에 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장옥평이었고, 그는 마맥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황제보다도 더 고귀한 존재였다. 그러니 좌훈으로서도 그의 중재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으음!" 좌훈은 두 걸음 물러서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고, 장옥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주께 박 공에 관해 미리 설명드리지 못한 것은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좌 선배께서는 박 공이 한어에 어둡다는 사실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장옥평이 조금 책망하듯 덧붙이자 좌훈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좌훈과 박한이 인사를 나눈 곳은 백석학(白石壑)을 탈출하는 주가(舟 ) 위였다. 그때 좌훈은 장옥평으로부터 박한이 한어에 어둡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민족이라면 뱃속에서 신물부터 올라오는 좌훈이 아닌가. 그는 단·박, 두 사람과의 자리를 애써 외면했으니, 박한이 중국에서 는 귀머거리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 공자께서 저 사람을 설득해 보시지요." 마봉황이 말했다. 목소리가 쌀쌀맞은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노기는 아직 풀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졸지에 화평사(和平使) 노릇을 하게 된 장옥평은 박한 앞에 다가가 흙바닥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좌 선배는 행적을 감추기 위해 도적들을 모두 죽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글을 쓰고 박한의 얼굴을 보았지만, 박한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너무나도 무표정하여, 이 사람이 글자를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박한의 학문이 필담에 아무 장애가 없는 경지까지 올라 있음을 잘 아는 장옥평이기에, 다시 한 번 글을 썼다. <무슨 까닭에 이런 자들을 편드시는 겁니까? 살려 두면 죄없는 백성들을 해칠 도적들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박한이 글을 썼다. <이들은 비록 병장기를 들고 있지만 무인은 아닙니다.> 아마도 박한은 도적들과 수합(手合)을 나눈 뒤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박한의 글은 계속 이어졌다. <이미 패한 자들을, 그것도 무인도 아닌 자들을 해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3 장 - 2 묘왕동주] 무인의 도리를 모르는 장옥평이 아니었기에 박한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가부득(不可不得)이라는 것이 비일비재했 고, 그가 판단하기에는 지금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장옥평은 다시 한 번 설명하기 위해 박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박한의 눈동자에는 불가부득의 논리로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후우!" 장옥평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할수록 답답한 일이었다. 자빠진 도적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이는 단탈에 다가, 잡아 놓은 도적을 살리려는 박한... 그러나 장옥평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신념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행한 것이다. 장옥평은 마봉황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도저히 박 공을 설득할 수 없군요." 마봉황은 성난 표정으로 박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도적들을 가로막고 선 박한은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록 호리호리한 그였지만, 한번 세운 뜻은 절대로 꺾지 않는다는 불굴의 기백이 몸뚱이 전체를 통해 뿜어 나오고 있었다. 마봉황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저들의 혈도를 짚어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게 해요." 도도하기 이를 데 없다는 마봉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적들을 죽이려면 박한을 때려눕혀야만 하는데, 박한에게 손을 대면 단탈이 가만있을 리가 없고, 단탈에게 손을 대면 장옥평과의 관계가 난처해질 것이다. 장옥평은 마봉황의 말을 박한에게 전했고, 박한은 잠시 생각하더니 옆으로 두 걸음을 비켜 섰다. 허락의 뜻이었다. 다음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도적들은 하나같이 마혈(麻穴)과 아혈 (啞穴)을 짚인 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수풀 으슥한 곳에 나무토막처럼 던져졌다. 그 일이 모두 끝나자 마봉황은 단탈을 바라보았다. 단탈은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까 벗어 둔 짐 상자를 다시 짊어질 따름이었다. 마봉황은 장옥평을 향해 말했다. "장 공자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상대하기 곤란하군요.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좌훈의 얼굴과 헐렁한 왼팔 소매를 바라보았다. "좌 오라버니는 이민족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장 공자께서 는 이 점을 두 분 친구들에게 반드시 충고해 주시기 바래요." 마봉황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 한 말이었다. 2 <주역(周易)>에서는 "짐을 지고 수레에 타면 도적을 부르게 된다[負且乘 致寇至]."라고 경계하고 있다. 짐을 지는 것은 천한 자, 즉 소인의 행동이며, 수레를 타는 것은 귀한 자, 즉 군자의 행동이다. 풀이하면, 소인의 행동을 하면서 군자의 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얘기이다. 박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든 방을 둘러보았다. 흙가루가 수북이 쌓인 바닥, 거미줄투성이 천장, 다 떨어진 창살, 그리고 한쪽 구석에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짚더미... 질 나쁜 나무로 만든 탁자와 그에 못지않게 엉성하게 짠 침상만 없다면, 말 먹이를 쌓아 두는 창고로 여기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낮의 일 때문일까?' 짐꾼으로 꾸민 이상, 주인이 자라는 곳에서 자는 것은 지당한 이치... 그래서 박한은 지난 나흘 동안 잠자리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긴 어제까지는 아무리 허름해도 사람이 거할 만한 방을 배정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객점 점원의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방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이 창고 같은 방이 단탈과 박한에게 돌아온 것이다. '지금의 나는 짐꾼이다. 다른 사람이야 어떤 방에 들던, 짐꾼에게는 짐꾼의 방이 어울리겠지.' 박한은 다시 한 번 <주역>의 구절을 떠올리며 언짢아지려는 마음을 가다듬 었다. 그런 박한의 눈에 비친 단탈은 세상을 매우 편하게 사는 친구인 것이 분명했 다. 단탈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침상은 본체만체 짚더미 위에 벌렁 몸을 뉘였다. 이어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육포를 꺼내 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턱을 우물거리는 품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고승처럼, 더러운 짚더미나 깨끗한 금침(衾枕)이나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한은 피식 웃은 뒤, 밀짚모자를 벗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일단 마음이 가라앉자 엉덩이 밑에서 울리는 삐걱대는 소리도 부드러운 음악처럼 들렸다. 이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박한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문을 두들긴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선 석소용이 처음으로 한 것은 예쁜 눈썹을 찡그리는 일이었다. "아유! 돼지우리 같네요!" 얼룩덜룩한 바닥은 마치 고약한 술꾼이 토사물이라도 토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석소용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석소용은 비교적 깨끗한 바닥만을 요리조리 골라 딛으며 탁자로 다가갔다. "이리 와서 좀 드세요." 석소용은 들고 있던 쟁반을 탁자 위에 놓았다. 쟁반 위에는 노릿노릿하게 구워진 오리 두 마리와 술 한 병이 올려져 있었다. 길을 떠난 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단탈과 박한이 숙소에 들어가면 석소용은 음식을 가지고 두 사람을 찾는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술도 한 병 가져 왔어요." 석소용은 생글생글 웃었다. 비록 주방에서 조리한 음식을, 그것도 장옥평으로 부터 받은 돈으로 산 것이지만, 그녀가 남을 위해 이 정도의 정성을 기울인 일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흘 내내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음식을 먹었을 뿐이었다. 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감사의 말을 한번 들어 볼 생각으로, 비싼 오리구이에 술까지 준비한 것이다. 단탈과 박한은 탁자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리 다리를 주욱 뜯어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술병을 들어 목을 축이는 단탈은 먹성을 타고난 사람 같았고, 젓가락과 술잔이 없어도 체면을 잃지 않는 박한은 품위를 타고난 사람 같았다.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한마디 말도 없이 먹는 행위에만 열중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한어가 짧은 박한의 경우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테지만... 단탈이 술병 주둥이를 입에다 대고 탈탈 터는 것으로써 오늘의 만찬은 모두 끝났다. 단탈은 술병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석소용이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어때요?" 하지만 단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러한 석소용의 기대를 참혹하게 짓밟았다. "고기는 뻑뻑하고 술은 시어." 석소용은 이 낯두꺼운 인간을 째려보았다. "이 백로주(白露酒)가 얼마나 비싼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아무리 비싸도 맛없는 건 맛없는 거야." 단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선고라도 내리듯 잘라 말했다. "이곳 음식은 하나같이 맛이 없지." 석소용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묘강의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요?" "암, 맛있고말고. 특히 우리 부족의 것이 최고지." 단탈은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이 여긴 왜 왔니? 거기 붙어 살지.' 석소용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비록 밉살맞은 구석이 많았지만 그래도 생명에 있어서는 은인이요, 복수에 있어서는 대리인이었다. 먹기를 마친 박한은 침상 위에 정좌하고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그의 명상은 겉보기에 중원에서 행해지는 운기행공과 별차이가 없어 보였다. 저러고 한두 시진 가량 있다가 앉은 자세 그대로 잠든다는 것이 특이해 보일 뿐이었 다. 석소용은 다시 단탈을 향해 말했다. "단탈! 아까는 정말 잘했어요." 단탈은 두 눈을 끔뻑이며 석소용을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 다. "아까 산적들 만났을 때 말이에요. 콧대 높은 염가(廉哥) 할망구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라니! 히히!" 마맥회 사람들이 들으면 펄쩍 뛸 소리지만, '콧대 높은 염가 할망구'란 다름 아닌 마봉황 염산산(廉珊珊)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석소용은 처음부터 마맥회 사람들이 싫었다. 백석학에서 아버지 석오랑을 구출하려던 일행을 가로막은 구양지가 싫었고, 자신을 항상 어린애 취급하며 시녀 옷 따위를 입으라고 강요한 염산산이 싫었다. 물론 그 당시 이미 아버지가 죽은 뒤라는 것과, 시녀 옷이 적도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분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석소용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로 하여금 정떨어지게 만든 것은, 장옥평과 구양지가 부부 행세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은애해 마지않는 장옥평이 미친년처럼 빨간 색깔만 좋아하는 구양지와 한 마차를 타고 한 방에서 자다니. 세상없어도 이것만큼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석소용은 악착같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여우 같은 구양지 의 얼굴을 하루 종일 대해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연적(戀敵)으로부터 정랑(情郞)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단탈은 단탈을 짐꾼으로 만든 게 화가 나서 그런 거죠?" 석소용이 물었다. 그러자 단탈은 고개를 저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3 장 - 3 묘왕동주 "나는 걷는 게 좋아." 단탈은 무언가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아마 산짐승처럼 자신의 다리만 의지하고 살던 묘강에서의 생활 탓이리라. "그러면 왜 그 할망구하고 다퉜어요?" 단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짚더미 옆에 놔둔 짐 궤짝을 들어 탁자 위로 옮겼다. 궤짝을 열자 가죽으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이 나왔다. 석소용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단탈의 애도(愛刀) 가리아였다. 그 칼의 재료로 쓰인 것이 사람의 유골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단탈을 향해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욕을 골백번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두 입 속에서만 맴돌고 말았지만... 단탈은 가리아를 감싼 가죽을 풀었다. 석소용은 한 줄기 매캐한 냄새 속에서도 도신(刀身)과 접촉했던 내피(內皮) 가 검게 타들어 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리아가 뿜어 내는 가공할 독기를 직접 목격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단탈은 한동안 가리아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이쪽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어." 두툼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단탈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조금 우울하게 들렸다. "놈들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해. 정말로 강하지.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마맥회와 손을 잡고, 장가(莊家)의 힘을 빌리고, 나아가 강북의 모든 세력과 연대(連帶)하겠다는 옥평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야." 석소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옥은 단탈에게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있어서도 원수의 집단이다. "원수와 단 하루도 같은 하늘을 공유할 수 없다."은 강호의 철칙에 비추어 본다면, 단탈이건 그녀건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고 철옥의 주인인 철면신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은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깐깐하기 그지없는 석소용이 못마땅한 것투성이인 마맥회와 동행하는 것도 모두 그러한 현실 때문이며, 그 점은 단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단탈은 분명히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단탈이 계속 말했다. "만약 옥평의 말처럼, 여러 사람들의 힘이 모아진다면 철옥을 이기는 것이 한층 더 쉬워지겠지. 아까 한 판 붙으려고 했던 그 외팔이만 해도 쉬운 상대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그런 친구들이 여럿 도와 준다면 큰 힘이 될 거야." 석소용은 푸웃, 소리내어 웃었다. 강남제일쾌수 좌훈을 놓고 그냥 가볍게 '그 외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탈 하나뿐일 것이다. 단탈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아까 산을 오르다 보니 문득 옛날에 들은 얘기 하나가 떠오르더군." "무슨 얘기죠?" 단탈은 손바닥으로 칙칙한 빛깔의 가리아를 어루만졌다.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조심스러움 속에서도 깊은 애정이 담긴 손길이 었다. "내 아버지인 가리아가 해준 얘기지..." 묘강의 겨울은 중원의 겨울에 비해 짧고 따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짧고 따듯하다 한들,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한 겨울이었다. 가리아가 타루가의 자리에 오르고서 첫 번째로 맞이한 가을... 가리아는 겨울 동안 가족들이 먹을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몇 명의 형제들과 사냥을 나서야만 했다. 무엇을 사냥하는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질긴 가죽 과 맛있는 고기를 동시에 갖춘 대지의 선물... 바로 물소였다. 해가 떠오르는 쪽을 바라보며 몇 번의 낮과 몇 번의 밤을 보낸 뒤, 가리아의 일행은 목적지인 녹색의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강기슭을 까맣게 덮고 있는 물소 떼는 일행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그들 외에도 물소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족들과의 교류가 빈번해 묘족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하는 우루족(牛累族)의 사냥꾼들 이었다. 우루족의 인솔자는 가리아에게 함께 사냥할 것을 제안했다. -`아합족에게는 용기가 있고 우루족에게는 도구가 있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훨씬 더 많은 물소를 사냥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가리아는 고민했다. 풋내기 사냥꾼들은 물소 사냥을 우습게 여기지만, 가리아 는 물소를 잡는 것이 표범을 잡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표범에게 발톱과 이빨이 있다면 물소에게는 뿔과 발굽이 있었다. 게다가 어떤 경우는 차라리 표범을 잡는 편이 훨씬 쉬웠다. 최소한 표범은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일은 없으니까. 만약 우루족의 제의를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사냥한다고 해도 열댓 마리의 물소는 능히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많은 형제들이 다칠 테고, 불행히 목숨을 잃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결국 가리아는 우루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루족이 자랑하는 무쇠 창과 무쇠 칼, 거기에 아합족 사냥꾼들의 용기와 기술이 더해지니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다. 해가 머리 위에 머무는 동안 무려 사십 마리가 넘는 물소를 사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친 형제는 없었다. 칼을 잘못 휘둘러 제 허벅지에 반 뼘 길이의 흉터를 만든 애송이를 제외하면... 그날 밤, 뜨끈뜨근한 물소의 간과 염통은 우루족이 준비한 달콤한 술과 어우러져 녹색의 강가에 있던 모든 사냥꾼들을 흥겹게 만들어 주었다. 과음을 삼가는 가리아였지만 이때만큼은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사냥한 물소의 절반인 스무 마리만 가져 간다고 해도 가족들의 겨울 식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타루가인 그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가리아는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술기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의식을 찾은 것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인지... 가리아는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가리아의 몸뚱이는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나도 목이 말랐다. 몸 속에 단 한 방울의 수분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을까? 주위가 어둑했으니 하루는 훨씬 더 지난 것 같았다. 가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주변에 널린 형제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코와 입으로 검은 피를 흘린 채... 유달리 달콤했던 우루족의 술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쁜 자식들! 독주(毒酒)를 먹인 거군요!" 생긴 것과는 딴판으로 단탈이 언어 구사에 있어서 얼마나 능란한가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 든 석소용이 주먹을 꼭 움켜쥐고 발발 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석소용은 가리아가 제 조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동안 씨근덕거 리더니,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가리아는 왜 죽지 않았죠?" 다 함께 먹은 독주가 왜 그의 생명만 남겨 두었을까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몰라. 가리아는 이상하게 독에 강했어. 독뱀에 물려도 별로 아파하지 않았지." 단탈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단탈이 독에 능한 것은 석소용도 잘 알고 있었다. 백석학에서 보여 준 놀라운 독공(毒功)은 차치하고라도, 가죽까지도 시커멓게 변색시키는 독도(毒刀)를 저리도 태연히 쓰다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을 유추해 보면, 단탈이 아버지라 부르는 가리아 또한 독에 잘 견디는 체질이라는 사실은 크게 괴이한 일이 아니었다. 석소용은 다시 물었다. "놈들이 왜 독주를 먹였대요? 물소 고기를 독차지하려고 그랬대요?" "독차지하려는 것은 맞았어." 잠시 말을 멈춘 단탈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워낙에 거친 얼굴이라 일단 붉어지니 험상궂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기는 아니었지." 목소리만 들어도 단탈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것 같은 석소용이었다. "가리아가 그때 본 것은 강물을 붉게 물들인 시뻘건 고깃덩어리들과 그 위를 빽빽히 뒤덮은 탐욕스러운 새들이었지. 물소들은 하나같이 뿔이 뽑히고 가죽이 벗겨져 있었어. 우루족은 뿔과 가죽만 필요했던 거야. 닷새도 못 가서 상해 버리는 고기는 한족들이 사려고 하지 않거든." 단탈은 한동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했던지, 석소용은 자신이 우루족이 아닌 것에 감사의 기도라도 올리고 싶을 지경이었 다. 단탈의 얼굴이 서서히 본래의 신색으로 돌아왔다. 험상궂기야 여전했지만, 그래도 성난 황소처럼 붉게 충혈된 눈빛이 가라앉으니 한결 사람 같아 보였다. "괜찮아요, 단탈?" 석소용이 확인하듯 묻자, 단탈은 뺨에 새겨진 크고 작은 흉터들을 실룩거리다 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아마도 지난 일에 화를 낸 스스로가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 일은 가리아에게 있어서 평생의 고통이었지. 바람이 차가워지 고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 오면 언제나 이 이야기를 꺼냈어. 그런데 이야기를 끝낼 때면 잊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지." "우루족을 조심하라는 얘긴가요?" 석소용이 끼여들자 단탈은 석소용의 머리통을 톡톡 때렸다. "네가 만일 가리아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바보 같다며 머리통을 맞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지만, 석소용은 단탈이 이유를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과연 단탈은 곧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가리아는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아. 내 키가 어린 수숫대만큼 자랐을 때엔, 우루족이란 부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 이 이야기로 미루어, 단탈이 독종인 것은 모두 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았다. 석소용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가리아가 한 말이 뭐죠?" 단탈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동료가 아니면 함께 사냥하지 마라." 동료가 아니면 함께 사냥하지 마라... 석소용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놀란 얼굴로 단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요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녀는 단탈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즉시 알아차린 것이다. "혹시... 마맥회와 우리가 동료가 아니란 말인가요?" "마맥회와 내가 동료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야." 단탈은 석소용의 말을 약간 수정했다. "하, 하지만 마맥회도, 그리고 단탈도..." "철옥을 쳐부수려 하잖아요?"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석소용은 그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녀 자신은 어떤가? 비록 단탈과 그녀가 철옥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한다고는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단탈의 복수'와 '자신의 복수'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대답은 '아니다!'였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그녀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한, 그녀의 복수는 단탈의 복수보다 훨씬 더 고귀한 가치가 있었다. 단탈의 복수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보복(報復)이라면, 그녀 의 복수는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행도(行道)였다. 모든 것은 단탈이 이방인(異邦人), 그것도 천하디천한 묘인이기 때문이다. "아까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다 그런 생각 탓이야. 여자와 외팔이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단탈은 가리아를 가죽으로 말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다. 석소용은 한숨을 쉬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둠이 가슴 위로 한 자락 내리덮인 기분이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4 장 변로(變路) 묘왕동주 제 4 장 변로(變路) 1 까마귀 다섯 마리를 황천으로 보내는 데에는 향 한 자루 탈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들 다섯 까마귀는 마냥 수수깡 같은 놈들만은 아니었으니, 반호는 마땅히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호는 무척 기분이 나빴다. "후레자식들아! 그 새끼는 내 몫이다!" 반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과 동시에 그는 살아남은 마지막 한 명의 까마귀를 포위한 '후레자식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본디 산길을 가던 반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흑일색인 여섯 명의 복면인이었다. 평소의 반호였다면, 미친개라는 별명에 걸맞게 앞을 가로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발광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중을 기했다. 자신이 수행하는, 홍당 당주 방지중의 말을 빌리면 '거상련의 성쇄가 걸린 중대한' 임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마귀들은 일언반구 몽땅 생략하고 반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반호는 남에게 핍박받으면서도 무엇을 떠올릴 정도로 침착한 위인은 못 되었다. 그 무엇이 아무리 중요한 임무라 해도 말이다. 그러니 그늘 좋던 적막한 숲속에서 일장(一場)의 난투가 벌어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날의 길이만 해도 삼 척에 달하는 용두대감도(龍頭大 刀)를 휘둘러 처음 한 놈을 자빠뜨렸을 때까지만 해도 반호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머지 다섯 놈마저 통쾌하게 죽여 그 동안의 다리 고생에 대한 울화를 풀 것을 생각하면, '흐흐' 하는 흉소(凶笑)가 저절로 나올 판이었다. 그러한 반호의 기분은 후레자식들이 나타나는 순간, 끝나고 말았다. 후레자식들은 옷차림이야 날렵한 붉은 경장(輕裝) 차림이었지만, 천고의 죄인이라도 되는 양 눈구멍만 숭숭 뚫린 죽멸(竹刪)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후레자식 중 한 놈은 큼지막한 새장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머리 꼭대기가 새까맣고 나머지는 눈처럼 새하얀 십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만나 보기 힘든 괴이한 무리들... 하지만 손발을 놀리고 병기를 휘두르는 솜씨만큼 은 반호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빼어났다. 이렇게 신비하게 나타난 후레자식들은 반호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호를 공격하던 까마귀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재주도 부족한데 숫자마저 달리니, 향후의 진행 상황은 명약관화한 일... 반호가 "어? 어?" 하는 사이 네 명의 까마귀가 어디 한 군데에다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었다. 그리고 여덟 명의 후레자식들은 마지막 남은 한 마리 까마귀마저 탐내며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놈들은 애당초 까마귀들이 누구의 손님인지는 전혀 생각치 않는 것 같았다. 정말 더럽게도 탐욕스러운 놈들이 아닌가! 그래서 반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놈들의 포위망을 허물고 들어간 것이다. "엇?" 후레자식 중 하나가 깜짝 놀라며 반호를 막아 섰지만, 그가 세차게 휘두른 한 칼에 주르륵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놈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까마귀가 반호의 정면에 활짝 드러나게 되었다. 검은 복면에 뚫린 눈구멍으로 까마귀의 절망에 찬 눈동자가 반호의 시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겁에 질린 탓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반호의 시선이 불그죽죽한 살기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퍽! 까마귀의 머리통은 정수리부터 떨어진 패도막강한 용두대감도에 의해 두 쪽이 나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기세 탓인지 비명조차도 없었다. 반호가 고함을 치고 포위망으로 뛰어든 이후, 실로 숨 한 번 제대로 내쉴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낄낄!" 반호는 득의롭게 웃으며 칼날을 자신의 얼굴 가로 가져 갔다. 킁킁거리자 비릿한 혈향(血香)이 짜부러진 콧구멍으로 스며 들어왔다. 혈관을 펄떡거리 게 만들어 주는 냄새였다. "자, 이제 네놈들 차례다!" 반호는 숨을 훅 불어 칼날 위에 맺힌 핏방울을 허공에 뿌린 뒤, 여덟 명의 후레자식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후레자식들은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후레자식 중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늘씬한 허리에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무척이나 강단있어 보이는 체구였다. 그가 반호를 향해 말했다. "반호! 아, 아니... 반 대협! 우리는 적이 아니고..." 쇳소리처럼 카랑카랑한 것이 애써 변조한 목소리임에 분명했지만, 그런 것을 헤아려 볼 정도로 세심하면 이미 반호가 아니다. "적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한다!" 놈의 말허리를 날카롭게 잘라 버린 반호는 음흉한 웃음을 만면에 머금으며 지껄였다. "그놈의 얼굴 가리개를 쓴 채로 죽여 줄까, 아니면 벗기를 기다렸다가 죽여 줄까? 흐흐! 가지고 온 새들은 걱정하지 마라! 이 어르신네께서 맛있게 잡숴 줄 테니!" 반호는 말을 하는 중에서도 제 살기를 가누지 못해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말을 꺼낸 후레자식은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도움을 받은 반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입 속으로 웅얼거리던 그는 반호를 향해 무엇인가를 냅다 집어던지며 짤막하 게 외쳤다. "달아나!" 그 순간 여덟 후레자식들은 화살처럼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흥!" 반호는 코웃음쳤다. 보아하니 뭘 던져서 시간을 벌겠다는 수작 같은데, 감히 누구 앞이라고 이따위 얄팍한 재주를 부리는 걸까? 반호는 숨을 멈추며 수중의 용두대감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물건을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부서지고, 그와 동시에 손톱만한 것들이 반호의 오른팔에 달라붙었다. 연기가 없으니 독분(毒粉)도 아니요, 폭발이 없으니 화기(火器)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날아온 물건에는 달아날 시간을 벌 만한 아무런 위력도 실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늦을세라 몸을 날려 달아나는 놈들을 추급(追及)하려던 반호는 문득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은 반호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왜냐하면 반호는 어떤 존재`-`그것은 반호가 두려워하는 오직 하나의 존재를 가리킨다`-`와 맞닥뜨릴 때마다 이러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호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과연 '그것'이 있었다! 살아서 꼬물거리는 '그것'이 자그마치 세 마리씩이나 달라붙어 있었다! 반호의 두 눈에 어렸던 살기가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으아악!" 반호는 오른팔을 마구 휘저으며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러한 발광은 세 마리의 '그것'이 반호의 몸에서 남김없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틈에 후레자식들은 아무 탈 없이 달아날 수 있었다. * * * "다친 사람은 없나? 비둘기들은 괜찮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새장 안에 있던 비둘기들도 단지 놀라기만 했을 뿐, 말짱한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한 방철(方哲)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방철의 이 말을 들으며, 황금화의 총두령 임이평(林易平)은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철은 거상련 내의 최강 집단 홍당의 부당주(副堂主)였다. 그리고 그가 부당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부친 방지중의 후광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부당주가 될 만한 경륜과 무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방철이, 일 대 일로 겨뤄도 결코 꿀릴 것이 없는 수하 반호에게 몇 리나 쫓겨와서 한다는 소리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차라리 반 형에게 모두 밝히고 협조를 구하는 것이...?" 임이평은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안 돼!" 방철은 딱 잘라서 거부했다. "총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네. 암중으로 지원할 뿐, 반호로 하여금 우리가 뒤쫓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고!" "하지만 목적지까지는 아직 멀었는데, 그때까지 계속 이짓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지." 대답하는 방철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우리는 상대의 정체조차도 모르고 있어. 그런 놈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우선 반호부터 완벽하게 속여야 하지.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말을 하는 방철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다. "그 인간을 속이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지." 임이평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하기로 따진다면 홍당뿐 아니라 거상련을 통틀어도 능히 장원(壯元)을 다툴 수 있는 인간이 반호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거상련 전용 전서구인 검액신구(黔額神鳩)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반 형 때문에 적을 생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지 않습니까?" 임이평의 불평은 사실이었다. 아까 흑의복면인들을 주살할 때 살아 있는 주둥이 하나는 반드시 남겨 둔다는 것이 사전에 협의한 계획... 그래서 방철은 마지막 한 명의 대혈 세 군데를 절세의 소엽장(掃葉掌)으로 봉쇄해 버린 뒤, 아혈까지 점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사태까지 철저히 방비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인데 반호가 뛰어들어 무지막지한 일도를 내리찍었으니, 움직이기 는커녕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흑의복면인이 무슨 신통한 재주가 있다고 살아남을 수 있으랴! 그런데 방철은 별로 원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렇게 달아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당주께서 사전에 일러주신 계교가 없었다면, 큰 욕을 볼 뻔했네." 방철은 천만다행이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계교라는 것이, "놈은 옛날에 독거미에게 물려 된통 혼난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거미만 보면 기겁을 한다."라는 얘기였으니, 말을 꺼낸 방철이나 말을 듣는 임이평이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매한가지였으리 라. "어쨌거나 준비한 거미를 몽땅 써버렸으니 다시 마련해야지." "또 이 방법을 쓰시게요?" 임이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체면이 뭔지 아는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나도 싫어. 하지만 별수없잖나? 앞으로는 박자를 좀 잘 맞춰서 그런 일이 안 일어나기만을 바랄 수밖에." 방철의 말에 임이평은 나직이 한숨을 쉰 뒤, 수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4 장 - 1 묘왕동주 "빨리 잡아오너라. 죽지 않도록 주의하고..." 임이평이 데려온 여섯 명의 수하는 삼백 명이나 되는 황금화 중에서도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수하들에게 곤충 채집이나 시키는 자신부터가 원망스러워지는 임이평이었다. 2 상현(上弦)이었다. 반쯤 부풀어오른 달이 두꺼운 먹장구름에 가려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사내가 있는 곳은 경사(京師) 외곽의 서산(西山) 중턱이었다. 사내에게선 쉴새없이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목에 걸려 있는 화려한 목걸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괴괴한 밤 풍경에 기이한 느낌을 던지고 있었다. 비단 그런 소리가 아니었어도 사내는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그는 단 한 순간도 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한 그루 교목(喬木)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내의 두 다리가 우뚝 멈췄다. 그는 한 곳을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요?" 그가 바라보는 곳은 교목으로부터 스무 걸음쯤 떨어진 수풀이었다. 잠시 동안 수풀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울려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은 바스락거림과 함께 사람의 머리 하나가 수풀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나무 아래의 사내가 반색을 했다. "아! 구(邱) 사형(四兄)이었군! 기척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굴(屈) 모(某)는 두려워하던 참이었소." 그러자 수풀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뒤덮인 흉측한 생김새의 오십대 초로인이었다. 스스로 굴가(屈哥)라 한 사내는 질 좋은 비단옷에 값비싼 패옥 목걸이까지 건, 일견하기에도 귀인이었다. 반면 나타난 초로인은 허름한 포의(布衣)를 입은 하인 차림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옷차림과 다른 듯하여, 어찌 된 일인지 굴가는 포의 초로인을 무척이나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포의 초로인은 굴가로부터 네댓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굴경(屈京)! 부른 용건은?" 포의 초로인의 입에서는 무척 낮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공 (異功)을 사용한 듯, 그 목소리는 굴가, 거상련의 오대산인 중 한 사람인 만보권(萬寶圈) 굴경의 귓전에 또렷하게 울렸다. "지난번 밀서(密書)는 잘 받았나 궁금해서..." 굴경은 마치 졸렬한 장수가 자신의 공을 확인하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순간, 포의 초로인의 두 눈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광채가 뿜어 나왔다. "죽고 싶은가?" "...!" 이번에도 무척이나 낮고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말 역시 굴경의 귓전에 또렷하게 울렸다. 하지만 아까와는 이유가 달랐다. 어느새 몸을 움직였을까? 포의 초로인은 실제로 굴경의 턱밑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굴경의 가슴에는 포의 초로인의 오른손이 달라붙어 있었다. 포의 초로인의 오른손에는 손가락이 세 개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세 손가락을 독 오른 뱀 대가리처럼 곧추세워 굴경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를 불러 냈단 말인가? 헛수작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굴경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손발을 쓰는 일이라고는 아예 모른 채 오직 숫자에 밝은 머리로만 사십 평생을 살아 온 그였다. 포의 초로인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살기만으로도 온몸이 싸늘히 얼어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나는 그...!" "왜 불렀나?" 포의 초로인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굴경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구 사형! 나를 살려 주시오!" 포의 초로인의 흉측한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무슨 말인가?" 굴경은 포의 초로인을 올려다보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내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소! 나는 분명히 느꼈소! 요 며칠 사이 내 거처 주위에 쉴새없는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인다는 사실을!" 포의 초로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굴경은 포의 초로인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아마 반호에 관한 보고를 올린 다음부터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 같소! 나는 두렵소! 그들은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포의 초로인은 잠시 생각한 뒤 크게 당황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와 굴경의 교통은 지극히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 지극히 사이로운 방법이어서, 비록 치밀하기로 이름 높은 소래운이라 할지라도 단서를 발견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놈들은 타초경사(打草驚蛇)의 계략을 부리고 있다!' 소래운은 허장성세로 그물을 친 뒤, 그물을 한 번 흔들어 뒤 구린 자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태가 아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허장성세란, 상대가 자중하면 단지 허장성세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의 초로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굴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굴경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오늘 낮에 재산을 정리해서 먼저 남쪽으로 보냈소! 하지만 감시의 눈이 심해 가족들과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소! 나를, 그리고 내 가족을 강남으로 데려가 주시오!" 그 순간, 포의 초로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 포의 초로인은 굴경의 멱살을 움켜쥐어 일으켜 세웠다. 한 쌍의 새파란 안광이 겁에 질린 굴경의 얼굴에 꽂혔다. "재산을 강남으로 보냈다고?" "그, 그렇... 소..." 제딴에는 아무리 소리없이 행한 일이라 해도 그런 움직임이 소래운의 그물에 걸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굴경은 소래운이 바라던 바 그대로 움직여 준 것이다. "이 천치 같은 놈!" 포의 초로인은 노갈을 터뜨리며 굴경을 와락 떠밀었다. 그 억센 기운을 굴경이 어찌 감당할까? 굴경은 교목 등걸에 등을 부딪히며 죽는시늉을 했다. 포의 초로인은 품속에서 짧은 비수를 한 자루 꺼냈다. "구, 구... 사형...? 이게 무슨...?" 굴경의 얼굴빛이 돼지 간처럼 검게 변했다. 하지만 포의 초로인은 추호도 지체하지 않고 비수를 날렸다. 그는 이미 굴경을 살해함으로써 드러난 꼬리를 자르기로 작심한 것이다.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다짜고짜 살수를 펼치는 것만 보아도 그의 성정이 얼마나 단호한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바람을 가르며 쏘아 가는 비수는 비록 평범한 물건이었지만, 그 안에는 포의 초로인의 삼십 년 공부가 담겨 있었다. 백면(白面)의 굴경 한 사람을 죽이기에는 넘치는 흉기인 것이다. 그러나 비수는 굴경을 죽이지 못했다. 휘익`-` 한 마리 거대한 새인 양, 웅장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人影)이 포의 초로인과 굴경 사이의 일 장 남짓한 공간에 떨어져 내렸다. 다음 순간, 세 번의 격타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엇!" 포의 초로인은 답답한 비명과 함께 주춤주춤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허공에 서 내려온 인영이 두 발을 땅에 딛기가 무섭게 두 번의 주먹과 한 번의 발길질로써 그를 격퇴시킨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동료였던 자에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살수를 펼치다니! 정녕 잔인한 놈이구나!" 나타난 인영은 위엄 어린 목소리로 포의 초로인을 꾸짖었다. 그는 각진 얼굴에 육 척의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노인이었다. 그의 오른손 인지와 중지 사이에는 한 자루의 비수가 끼워져 있었다. 포의 초로인이 날린 바로 그 비수였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인데, 등장과 동시에 비수를 봉쇄하고 이권일퇴(二拳一腿)로 상대를 물리친 솜씨 는 사람의 재주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포의 초로인은 경악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방, 방 어르신!" 교목에 기대고 있던 굴경의 외침이, 포의 초로인으로 하여금 노인의 정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북천권사 방지중. 거상련의 홍당 당주이자 강북에서 가장 정교한 권각술을 지녔다는 무학 달인이 등장한 것이다. 포의 초로인은 스스로의 성취를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상황에서건 제 한 몸은 능히 보호할 수 있노라 자부해 온 터이나, 상대가 방지중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다면 마땅히 피신할 방도를 강구해야만 할 터... 하지만 포의 초로인은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아니, 달아날 수 없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차압`-`!" 포의 초로인은 벼락같은 기세로 방지중을 향해 달려들었다. 등뒤로 크게 휘말았던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미는 순간, 방지중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가는 세 개의 손가락... 방지중은 당황하지 않았다. "흑삼음지(黑三陰指)를 익혔군!" 방지중은 반 발짝 정도 옆으로 비키며 왼손을 가볍게 휘감았다. 그러자 한 가닥 기운이 그의 전면에 일어나며, 포의 초로인의 오른손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솜뭉치처럼 부드럽고 족쇄처럼 단단했다. 이 놀라운 화경(化勁)의 수법에 포의 초로인은 화들짝 놀라며 오른손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방지중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파파팍`-` 계속 물러서는 포의 초로인과 계속 나아가는 방지중 사이에서 둔탁한 소음이 대여섯 차례 울려 나왔다. 소음이 이어질 때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포의 초로인의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더해 갔다. "이놈!"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방지중은 천둥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이제껏 쓰지 않던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헉!"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4 장 - 2 묘왕동주 포의 초로인은 부르르 몸을 떨며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방지중은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운 비수 자루로 그의 양 어깨 중부혈(中府 穴)과 가슴 아래 거궐혈(巨闕穴)을 매섭게 찍어 버린 것이다. 이 한 수는 비록 지극히 단조로운 독룡출동(毒龍出洞)의 초식이었지만, 인간의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쾌(快)의 묘용이 실려 있었다. "얌전히 있거라!" 방지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소엽장으로써 포의 초로인의 가슴팍 대혈들 을 연이어 후려쳤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 제압에 있어서 만전을 기한 것이다. 이제 포의 초로인을 완전히 제압했다고 믿게 된 방지중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 았다. 굴경이 비틀거리며 달아나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꿇려라!" 싸늘한 방지중의 호령이 밤공기를 쩌렁 울렸다. 순간, 달아나던 굴경 앞에 홍포(紅布)를 입은 장년인 셋이 유령처럼 등장했다. 모두 홍당의 녹을 받는 고수들로서 방지중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 다. 굴경을 잡아 묶는 데에는 많은 시간도, 많은 손도 필요하지 않았다. 홍포인 중 한 명이 굴경의 뒷덜미를 잡고 번쩍 치켜 들자, 굴경은 온몸의 맥이 풀리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증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일종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아이쿠!" 굴경은 하늘이 뒤집어지는 듯한 현기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를 제압한 홍포인 이 그를 머리 위로 들어 방지중의 면전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저자도 함께 꿇려라!" 방지중이 명하자 다른 홍포인이 방지중에게 혈도를 찔린 포의 초로인을 개처럼 끌고 왔다. 방지중의 점혈공부 탓인지 포의 초로인은 굴경과는 달리 전신이 동태처럼 뻣뻣했다. 홍포인은 그런 그를 무릎 꿇리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다. 빠직! 섬뜩한 파골음과 함께 포의 초로인의 무릎 뒤쪽 과간와골(顆間窩骨)이 조각 조각 으스러졌다. 홍포인은 단 한 차례 발을 휘둘러 포의 초로인을 무릎 병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포의 초로인의 두 무릎이 앞쪽을 향해 풀썩 꺾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흙바닥 에 그대로 면상을 박았다. 방지중의 눈빛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본디 방지중은 포의 초로인의 아혈을 제압하지는 않았다. 제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근맥을 움직일 수 있는 혈도를 모두 봉쇄했으니, 혀를 깨물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릎뼈 가 부숴지는 극렬한 고통에 한 번쯤은 비명을 지를 법한 일... 그런데도 포의 초로인은 단 한 마디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적아(敵我)를 따지기에 앞서, 그 꿋꿋함만큼은 사람의 마음을 감탄하게 만들 만한 것이다. "일으켜라!"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포인 한 명이 엎어진 포의 초로인을 일으켜 앉혔다. 그의 무릎 아래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쪼개진 무릎뼈가 허벅지 살을 찌른 탓이다. 그래서인지 흙과 피로 범벅진 포의 초로인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어려 있었다. "두 간인(奸人)을 한자리에 모아 놨으니 심문하기가 훨씬 편하군!" 방지중은 차갑게 웃었다. "방 어르신! 소, 소인은..." 굴경은 사색이 되어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쩌렁쩌렁한 호통이 그의 혓바닥을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굴경! 이 더러운 놈!" 방지중은 엄숙한 얼굴로 굴경을 질타했다. "본(本) 련(聯)이 네게 베푼 은혜가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건만, 네가 감히 배신을 하다니! 네 귀를 화살에 꿰어 모든 문도에게 본보기로 삼겠다!" 방지중은 굴경 앞에 짤막한 화살 한 자루를 던졌다. 촉이 금으로 된 이 화살은, 거상련에서 죄인의 귀를 꿰어 문도들의 경각심을 일깨울 때 사용하는 관이황금전(貫耳黃金箭)이었다. 굴경은 떨리는 시선으로 관이황금전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횃불처럼 타오르는 방지중의 두 눈은 관이황금전의 광채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굴경은 고개를 푹 떨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방지중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가족의 안위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놈이라면, 이제라도 죄를 고백해 라! 가족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마!" 굴경은 고개를 들었다. 절망으로 시커멓게 죽어 버린 얼굴이었지만, 눈가에는 한 올의 생기를 엿볼 수 있었다. 가족들을 살려 준다는 방지중의 말 때문이었 다. "사실이십니까?" 방지중은 자신의 가슴을 쳤다. "나, 방지중이 한 말이다!" 방지중은 강호에서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호한이었다. 그가 보장했다면 천하의 누구라도 믿을 수 있었다. 굴경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겠습니다, 믿지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물어 보십시오." 방지중이 물었다. "하남으로 간 형제들이 몰살당한 것은 네가 사전에 행로를 누설했기 때문이 지?" "그렇... 습니다. 제가 이자에게 알렸습니다." 굴경은 포의 초로인을 가리키며 힘없이 말했다. "며칠 전 반호가 본 련을 출발한 것도 알렸느냐?" "예." 방지중의 눈가에 득의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좋다! 그렇다면 배후에서 너를 사주하던 도당의 정체를 밝혀라!" "그들은..." 바로 이때 한 일(一) 자로 입을 다물고 꿋꿋이 앉아 있던 포의 초로인이 불쑥 끼여들었다. "방지중! 미안하지만 그것에 관한 이야기라면 영영 들을 수 없을 것이오." 방지중은 의외라는 듯이 포의 초로인을 바라보았다. 포의 초로인은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반쪽을 일그러뜨리며 흉측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뜻이냐?" 방지중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포의 초로인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왜냐하면 말이오..." 포의 초로인은 말을 멈추고 굴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으로부터 기이한 광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눈빛을 본 방지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혈을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저런 눈빛을 지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방지중이 황급히 앞으로 내닫으려 할 때, 포의 초로인의 몸이 무릎 꿇은 자세 그래로 굴경을 와락 덮쳐 갔다. 본디 포의 초로인과 굴경 사이는 큰 걸음으로 하나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 그들의 뒷전에 서 있던 세 명의 홍포인이 그 움직임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사건이 벌어진 뒤였다. "으아악!" 돌연 굴경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목줄기에서 붉은 핏물이 쭉 솟구쳐 올랐다. "이놈!" 방지중의 경호성과 함께 퉁,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려든 방지중 이 일권으로써 포의 초로인의 가슴을 후려칠 때 울린 소리였다. 창졸간에 발출한 일 권이었지만 근육을 끊고 뼈를 부러뜨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포의 초로인은 그 권세에 휘말려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아뿔사!" 포의 초로인을 멀찍이 물리친 뒤 굴경의 상태를 바라본 방지중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모로 자빠진 채 사지를 버둥거리고 있는 굴경은 누가 보아도 이미 소생할 가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살의 절반 가량을 뜯긴 뒤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하하!" 이때 누워 있던 포의 초로인이 우렁찬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광소는 어딘지 답답하게 들렸다. 음식을 입에 가득 문 사람이 웃는다면 아마도 저런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뜯겨 나간 굴경의 목살은 다른 곳이 아닌 그의 입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방지중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굴경이 죽은 이상, 하남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 낼 수 있는 유일한 끈이 바로 포의 초로인이었다. '놈이 수작 부릴 틈을 줘서는 안 된다!' 방지중은 쌍수 가득 공력을 끌어올려 포의 초로인을 덮쳐 갔다. 포의 초로인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멸구(滅口)를 위해 무릎이 으스러 지는 고통을 참아 가면서까지 맹수처럼 사람을 물어 죽인 독종임을 감안한다 면 너무나 싱거운 일이었다. 한차례 입을 놀린 것이 최후로 짜낸 힘이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포의 초로인의 코앞까지 당도한 방지중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송장처럼 땅바닥에 누워 있는 포의 초로인, 그 얼굴 위에 떠오르는 미세한 혈선(血線)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본래의 화상 흉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흐흐흐!" 포의 초로인이 웃었다. 웃는 와중에도 얼굴에 떠오른 혈선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4 장 - 3 묘왕동주 방지중은 순간적으로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은 사십여 년 전, 사악하기 그지없는 괴공이술(怪功異術)로 혈풍을 불러일으킨 한 가문의 이름이었다. "모두 피해!" 방지중은 한 모금의 진기로 몸을 보호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날아가던 기세를 억지로 거두는 것보다, 오히려 배가하여 포의 초로인의 몸뚱이를 그대로 뛰어 넘어가 버린 것은, 방지중이 얼마나 노련한 사람인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퍽! 시뻘건 살점이 밤하늘로 비산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상쾌한 공기를 더럽혔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다리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채 몸을 피하지 못한 홍포인 중 한 명이었다. "으악!" 홍포인은 비명을 지르며 땅위를 뒹굴었다. 그는 강호에 이름 높은 거상련 홍당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내였지만, 한 쪽 다리가 통째로 불덩이 속에 들어간 듯한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파파팍! 어느새 홍포인의 곁으로 다가온 방지중은 양손을 바삐 놀려 그의 무릎에서 장딴지 사이의 혈도 다섯 군데를 막았다. 그 홍포인의 발작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이미 혼절했기 때문이다. "당주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홍포인 중 대형 격인 호면철담객(虎面鐵膽客) 장적기(張赤基)가 놀란 목소리 로 물었다. "공양마공(供養魔功)이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방지중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 "공양마공...? 속하는 처음 듣는..." "복주(福州)의 이씨(李氏)들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 장적기의 얼굴에 해연함이 물결쳤다. "그들이라면... 무왕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무리들 아닙니까?" 방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양마공은 그들의 삼대마공 중 하나라네.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 가문에 대한 마지막 충성심을 보이는 사악한 수법이지." "그렇다면 복(福) 아우는...?" 장적기가 말한 복 아우는 공양마공의 파편에 당해 혼절한 홍포인, 복대봉(福 大逢)을 가리켰다. "공양마공으로 해체된 혈육은 지독한 독성을 띠고 있다고 들었네. 사십여 년 전, 이장풍(李長風)이 이 마공을 전개했을 때에는 이십 명이 넘는 호걸협사 들이 목숨을 잃었지. 다행히도 이자의 성취도는 이장풍의 그것과는 비할 수 없이 천박한 것 같네. 빨리 손을 쓰면 별탈 없을 걸세."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등장한 것일까요?" "글쎄..." 방지중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장적기의 말처럼 복주 이가가 다시 강호에 나왔다면, 조금 전 포의 초로인이 자신의 소엽장에 완전히 제압당하지 않은 것도 능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이해가 되었다. 그들의 삼대마공 중 하나인 폐혈공은 어떠한 내가중수법 아래에서도 일신의 요혈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하니까. 방지중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복주 이가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통천광생(通天狂生) 이장풍이 시도하려 했던 역천의 술법에 관한 기억을... '어쨌거나 총수님께서 실망하시겠군.' 방지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굴경과 흔적조차 남지 않은 포의 초로인... 이목을 끌기 쉬운 반호를 남하시킨 뒤, 정교한 계획과 은밀한 움직임 하에 드디어 움켜잡은 단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무용지물. 오직 한 가지 알아 낸 것이 있다면, 삼십여 년 전 멸문당한 복주 이가의 마공이 재등장했다 는 사실뿐이다. 의혹을 풀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킨 결과를 낳은 셈이다. 방지중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돌아가세." 방지화는 문득 하남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떠올랐다. 반호, 그리고 그에게 딸려 보낸 장남 방철과 황금화들... 이제 방지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주길 기다리 는 일뿐이었다. 3 육로를 따라 계속 북상하던 장옥평의 일행이 행보를 멈춘 곳은 무창부(武昌 府)에서 동남쪽으로 백오십 리 정도 떨어진 황석시(黃石市)의 초입이었다. 칙사(勅使)의 자격으로 사천행(四川行)에 오른 보국공(保國公) 정유은(鄭有 恩)이 황석시에 머무는 탓에, 시를 지나는 여행객에 대한 검문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마맥회는 칙사의 행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다. 그 정보에 의하면 칙사는 분명 무창부에 행장을 풀어야 했고, 또 지금까지의 관행으로 보아도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황석시에는 만천하의 풍류객들이 홀딱 반해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기녀가 한 명 있다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보국공이란 놈이 경사에서도 이름이 자자한 호색한이라는 것이다. 한 명의 미녀와 한 명의 호색한은 황석시를 지나는 모든 여행객들로 하여금 호남성이 발부한 노행증(路行證) 외에 새로운 통행증을 마련하는 번거로움 을 끼쳤고, 장옥평의 일행은 이러한 번거로움에 발목을 잡혀 버린 것이다. * * * 세 대의 호화로운 마차는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등성이에 서 있었다. 마차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키 작은 풀이 돗자리처럼 깔렸고, 장옥평과 육염명은 그 위에서 마맥회의 간부들과 함께 향후의 일정에 관해 상의하고 있었다. 마맥회의 간부 중 좌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통행증 문제로 아문(衙門)의 향리와 접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마맥회는 알부자였다. 그것은 남마련이 멸망하기 직전, 마봉황이 조부인 육족풍으로부터 비고(秘庫)의 위치를 들었기 때문이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했던가. 자금이 풍족하면 관부와의 관계도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법이어서, 마맥회는 강남 관부에 많은 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좌훈이 일을 빨리 성사시킬 것임을 믿었다. 석소용이 큼직한 그릇을 들고 왔을 때, 단탈은 거대한 띠처럼 보이는 장강의 수면 위에 의미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단탈,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단탈은 그제서야 강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백일하(白日下)라는 말이 있듯 이, 밝은 햇살은 사물의 어떤 특징을 강조해 주는 것 같았다. 단탈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검고 미욱해 보였다. 석소용이 해를 등지고 서 있었던 탓인지, 단탈은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 탄탈을 향해 석소용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단탈은 석소용이 내미는 그릇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 안에는 밥과 나물 몇 가지가 담겨 있었다. 밥은 기름기가 잘잘 흘렀고, 나물은 싱싱하 고 고소해 보였다. 하지만 단탈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지를 않았다. "팔 아파요, 빨리 받아요." 석소용이 애교스럽게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 단탈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하마터면 그릇을 떨어뜨릴 뻔한 석소용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단탈을 바라보았다. 단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가면처럼 무표정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탈을 제법 겪어 본 석소용은 그의 투박하고도 억센 얼굴로부터 어느 정도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의 단탈은 눈초리가 조금 처지고 미간에 몇 개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것은 그의 기분이 우울하다는 뜻이었다. 볼따구니에 난 길쭉한 상처가 한두 번 실룩거렸지만 입술이 꾹 다물려 있는 것을 보면, 울적한 심사를 말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단탈, 맛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반찬을 몇 가지 더 갖다 줄까요? 참! 염가 할망구는 반찬이 꽤 좋던데, 아예 그걸로 바꿔다 줄까요?" 알랑방귀를 뀌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친해진 단탈이다. 앙칼진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속마음만은 살가운 석소용으로서는, 되는 말 안 되는 말 가리지 않고 우선 단탈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석 같은 단탈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한켠에 놓아 둔 자신의 짐 궤짝을 들고 수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단탈은 쓰게 웃었다. 새끼 오리처럼 꽥꽥거리길 좋아하는 저 꼬마 계집애는, 그가 며칠 전 객점에서 장난삼아 내뱉은 음식 타박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탈로 말하자면 씹어 삼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음식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심난한 판국이었으니 뭐라고 핀잔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게 나랑 친하다고 이러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피한 단탈이었다. 수풀을 헤치며 오백 걸음 정도 들어가자 야트막한 실개천이 나타났다. 개울 주위의 나무들은 햇빛과 수분을 마음껏 누린 탓인지 하나같이 장하고 울창해 보였다. 이러한 풍경은 단탈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묘강... 자연의 힘이 모든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던 그 풍요로운 대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나라아합과 함께 아합족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가 약해진 것은 아니다. 의지가 약해지기에는 죽어 눈을 감지 못한 형제들의 영혼이 너무나도 무거웠 다. 하지만 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리고 나라아합에게 다가가는 길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쩌면 영영 묘강 땅을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움터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리 굴강한 영혼과 육체를 지닌 단탈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단탈은 큰 숨을 내쉬었다. 천박한 상념처럼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는 이러한 두려움을 토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생각만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많은 봉우리를 넘고 많은 물을 건너 이 척박한 동쪽 땅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직접 부딪치고 싸워 가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만 하는 일이다. 두려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단탈은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데 매우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훨씬 더 커다란 미덕으로 인식되는 묘강에서의 삶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4 장 - 4 묘왕동주 단탈은 짐 궤짝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가리아를 포함한 몇 가지 자잘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짐꾼으로 꾸몄다 하여 정말로 남의 짐을 들 필요는 없었기에, 단탈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궤짝에 담고 다녔던 것이다. 단탈은 궤짝 안에서 둥그런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한 자루의 구부려 놓은 활이었다. 이것을 반대편으로 뒤집어 시위를 걸면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는 활이 되는 것이다. 펴 놓으면 그 길이가 석 자나 간신히 넘을까? 보통 중원에서 사용하는 활은 이보다 한 자 하고도 몇 치 정도 길었다. 하지만 묘족들에게는 그렇게 큰 활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정 거리가 짧다는 약점이 있지만, 작은 활은 밀림 속에서 휴대하고 다니기 쉬웠다. 그리고 사실 밀림 속에서는 긴 사정 거리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지러운 덩굴과 커다란 나뭇잎를 뚫고 먼 거리에 있는 사냥감을 쏠 정도로 신기막측한 궁술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다. 단탈은 활을 펴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며 세심히 살펴보았다. 잘 다듬은 대나무의 표면에 소의 뿔을 대어 놓았으니 각궁(角弓)임에는 분명한데, 줌통(손으로 잡는 부분)을 이룬 참나무의 모양이 거칠어 아직 미완성품임을 알 수 있었다. 북행에 참가한 뒤, 짬날 때마다 조금씩 재료를 구해 손봐 온 물건이기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단탈은 궤짝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어 줌통을 다듬기 시작했다. 마디가 툭 불거진 굵은 손가락으로도 능숙하게 다듬질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단탈은 생김새와는 딴판으로 손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 손으로 활을 만들 수 있었던 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남이 만든 활에 살을 걸어 본 기억이 없는 그였다. 활 솜씨가 예사롭지 않듯이 활 만드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시 후 단탈은 단도를 놀리던 손을 멈췄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줌통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입고 있던 베옷의 아랫단을 길게 찢었다. 덕분에 못생긴 배꼽이 훤히 드러났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단탈이 아니다. 단탈은 찢어 낸 천을 줌통에 둘둘 감았다. 미끈거리는 활로는 날랜 짐승을 정확히 겨눌 수 없었다. 단단히 겹쳐 감은 천은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을 훌륭하게 흡수해 줄 것이다. 이제 각궁이 완성되었다. 단탈은 완성된 각궁을 뒤집어 미리 준비해 둔 시위를 걸었다. 시위는 좋은 명주실을 여러 겹 꼬아 감은 것이었다. 단탈은 시위를 가볍게 튕겨 보았다. 팅`-` 단탈은 한 가닥 상쾌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귀에 익은 소리였다. 단탈은 갓 태어난 자식을 대하는 듯한 눈으로 각궁을 내려다보았다. 시위가 가져 온 탄성(彈性)에서 해방된 각궁은 그의 손 안에서 수줍은 소녀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 말대로 배가 고픈 건 사실이군.' 만족감이 지나가자, 그 빈 자리를 공복감이 메우기 시작했다. 어쩐다... 돌아가 봤자 식사는 벌써 끝났을 것이다. 비위에 안 맞는 마맥회 사람들에게 밥 달라고 구걸하느니, 날짐승이라도 한 마리 사냥해 공복감을 달래는 편이 훨씬 속 편했다. 마침 궤짝 안에는 화살도 몇 대 있었다. 급하게 만든 것이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묘족의 활에 맞는 화살이었다. 그런데 궤짝 안으로 들어가던 단탈의 손길이 순간 멈췄다.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수풀이 버석거리는 소리... 하지만 바람이 만든 소리는 아니다. 초식 동물처럼 예민한 단탈의 귀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 냈다. 단탈은 몸을 펴고 소리가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수풀이 열리고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낯은 익지만 친근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일지 않는 얼굴이었다. "여기 있군." 나타난 얼굴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칼집을 낸 것처럼 얄팍한 눈이 관자놀이를 향해 쭉 솟구친 데다가 입 주위가 툭 튀어나와 쥐를 연상케 하는 오십 줄의 사내였다. 단탈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뇌칙서(雷則徐)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하던 마맥회 무사 중 일인이었다. "구석진 데에도 틀어박혀 있네." "회주님이 너무 세심하신 것 아닙니까?" "누가 아니래나? 놔두고 떠나면 그만이지, 굳이 찾아오래서 불쌍한 우리 다리만 고생시킬 게 뭐람!" 입 다물고 등장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한마디씩 내뱉으며 모습을 드러낸 다른 세 사람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마맥회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네 사람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뇌칙서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봐! 좌(左) 대장님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데,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야?" 단탈은 귀찮은 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손에 쥔 각궁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사내 중 하나가 그의 각궁을 가리키며 웃었다. 코가 심하게 뒤집어져 비오는 날 바깥에 나다니는 데 애로가 많을 것 같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뭐야? 저따위를 만드느라고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단 말인가?" 다른 사내가 맞장구쳤다. "하하! 영락없는 애들 장난감이군! 우리 큰애도 저것보다는 괜찮은 활을 다룰걸?" "형님 큰애는 이제 열두 살이잖소?" "그래도 저 친구보다는 활 솜씨가 좋지." 네 사람은 요란스럽게 웃었다. 단탈은 사냥꾼이었다. 활을 모욕하는 것은 사냥꾼을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단탈은 네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장난감이 어떤 위력이 있는지 보여 줄 수도 있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짙은 위협의 기운을 읽은 것일까? 네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이, 이름이 단탈이라고 했나? 행렬에 끼여든 것은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가리는 것이 건강에 좋을 거야!" 뇌칙서가 노기 띤 목소리로 단탈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단탈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싸늘한 웃음이었다. "그 말은, 네 회주라는 계집과 외팔이에게 해주는 것이 좋겠군." 마맥회의 무사들은 마봉황과 좌훈을 하늘처럼 떠받든다. 그들이 어찌 이런 말을 참아 낼 수 있을까? "오랑캐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들창코 청년이 노한 얼굴로 허리춤의 장검을 잡아 갔다. 하지만 장검은 뽑히지 않았다. 곁에 있던 뇌칙서가 그의 손을 잡은 것이다. "임(林) 아우! 저자는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았으니, 어떤 경우라도 시비하지 말라는 회주님의 명을 잊었나?" "하지만 형님도 저자의 말을 들으셨잖습니까?" 들창코 청년, 임빈(林彬)의 노기는 한마디 타일러서 가라앉을 정도로 작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임빈의 눈에, 단탈이 허리를 굽혀 궤짝 안에서 화살 한 대를 꺼내는 광경이 들어왔다. "흥! 남만에서 굴러먹던 재주 따위는 산적 나부랭이에게나..." "써먹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걸?"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빈의 엄포는 온전히 마무리될 수 없었다. 살을 먹이는 것도, 활을 겨누는 것도 볼 수 없었다. 쉬잇! 하지만 어금니를 시큰거리게 만드는 파공성은, 단지 눈으로 볼 수 없었을 뿐, 실제로는 그러한 동작들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 임빈은 머리 꼭지가 선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후두둑 흘러내리 며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 임빈은 황급히 자신의 머리를 더듬어 보았다. "허억!" 임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리카락을 비끄러매었던 동그란 상투가 통째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것이 너희들이 말한 장난감이다." 단탈은 각궁을 내리며 말했다. "내 부상은 다 나았으니, 싸우고 싶다면 염려 말고 덤벼라." 단탈은 시위를 풀고 각궁을 부린 뒤, 네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굳이 장옥평의 체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심하게 손을 쓸 생각은 없었던 탓에, 살기는 끌어올리지 않았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비의 경우였다. 사냥꾼 단탈은 몇 마디 모욕 때문에 생사를 결(決)할 정도로 고고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는 자신의 활을 비웃지 못하도록 교육시켜 줄 정도의 자존심은 있었다. 가장 먼저 단탈에게 달려든 사람은 임빈이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 부모(受之父母)라고 했는데, 머리카락을 상투째 뜯겼으니 눈동자가 뒤집힌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새끼!" 시퍼런 장검이 세 송이의 요사스런 검화(劍花)를 토해 냈을 때, 아니 그보다 앞서 적의로 딴딴하게 응어리진 욕설을 들었을 때, 단탈은 순간적으로 망설였 다. 죽일 수만 있다면 죽이겠다는 임빈의 기세를 읽었기 때문이다. 단탈은 본래 살기를 품고 달려드는 상대를 관대하게 대할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살기를 억제하고 교육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어쩌면 비로소 장옥평의 체면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뇌칙서를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이 단탈에게 달려든 것은, 임빈이 단탈의 주먹에 복부를 얻어맞고 쓰러진 직후였다. 임빈의 일곱 초 삼화검법(三花劍法)은 마맥회의 청년 무사들 중에서는 알아 주는 것이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삼 초를 제대로 전개해 보지도 못하고 방금 전에 먹었던 점심밥을 게워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든 두 사람에게도 임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먹은 음식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단탈의 몸뚱이는 숲속을 맴도는 산들바람처럼 빠르고 가벼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병기와 병기 사이를 물고기처럼 유영하면서, 장난이라도 하듯 내지른 주먹과 발에는 실로 막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두 차례의 격타음과 두 차례의 비명이 지나갔다. 그리고 임빈을 포함해 단탈에게 덤빈 세 사람은 하나같이 제 배를 움켜쥔 채 새우처럼 몸을 구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며칠 전 백장산을 넘을 때 도적들을 개 잡듯 패 죽이던 단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당시 보여준 단탈의 위세가, 반드시 도적들이 약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되었다. 단탈은 세 사람이 한적한 개울가를 더럽히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만약 그가 살기를 품었다면, 세 사람은 걸쭉한 토사물이 아닌 다른 종류의 붉은 액체로 개울가를 더럽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단탈이 말한 말처럼, 형산에서 입었던 부상은 이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완치된 후였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의 그는 무공이 정진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단탈은 이화신마가 자랑하는 악마의 그물, 염마수( 魔繡)에 걸려 매우 위험한 발작을 일으켰다. 만약 점혈요상법에 밝은 구양일산(歐陽一山)의 신속한 조치가 없었다면, 그의 발작은 훨씬 더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4 장 - 5 묘왕동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곁에는 구양일산이 있었고, 구양일산은, 단탈이 예뻐서 그랬을 리는 없지만, 진원(眞元)을 소비해 가면서까지 그의 혈맥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위기가 지나자 과거의 화는 복으로 바뀌었다. 화독과 한독에 번갈아 시달렸던 단탈의 몸뚱이는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독 기운을 유통시키는 방법을 습득해 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약흠(藥欽)으로부터 전수받은 절독공(絶毒功)의 성취도 한층 더 완숙해졌다. 몸 속에 담아만 두었던 패도무쌍한 독 기운을 이제는 어느 정도 수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때처럼 무지막지한 독 기운을 마구 쏟아 낼 수야 없겠지만... 세 사람의 토악질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뇌칙서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다가 그는 처음보다는 훨씬 말랑말랑해진 안색으로 단탈을 향해 말했다. "이 사람들이 병기를 뽑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네가 먼저 활을 쏘았기 때문이네. 그 점은 자네도 알지?" 말은 부드러웠지만 담긴 뜻은 교활했다. 서로 병기를 겨룬 일의 발단이 단탈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그리 고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나는 자네가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서 본 회와 장 공자 사이의 화기(和氣)를 해치는 우(愚)를 범하지 않으리라 믿네." 세 멍청이에게 사냥꾼을 대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 따위는 하찮은 일이었다. 단탈의 입은 하찮은 일을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염려 마라." 단탈은 뇌칙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네 사람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은 그때까지도 허리를 제대로 못 펴고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나같이 구구하군.' 단탈은 네 사람이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단탈은 개울 위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 나오너라."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단탈은 다시 말했다. "그들은 멀리 갔다. 나오너라." "헤헤!" 개울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뒤에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석소용이었다. "귀도 밝아라! 오자마자 금방 아네요?" 단탈은 씨익 웃더니 그 두툼한 손가락을 뻗어 석소용의 발그레한 볼을 꼬집었 다. "이젠 내게도 거짓말을 하는 거냐? 너는 저들과 거의 비슷한 때에 왔지." "히! 단탈은 속일 수가 없네요!" 볼을 꼬집힌 것은 기분 나빴지만, 지금은 단탈의 우울한 기분이 풀어진 것이 더 반가운 석소용이었다. "단탈, 제법이던데요? 활도 잘 쏘고, 주먹도 세고, 또... 음... 헤헤! 하여튼 조금 전에는 무지 멋있었어요!" 석소용은 장황한 말로 단탈을 칭찬했다. 이어 그보다 훨씬 더 장황한 말로 네 사람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 영감쟁이는 생긴 것하고 똑같이 하는 짓도 쥐새끼처럼 치사해요! 먼저 놀린 것도 지들이고, 먼저 칼을 빼 들고 덤빈 것도 지들이라는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나중에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니까 비겁하게 책임을 뒤집어씌우 고 꽁무니를 빼다니! 흥, 그러고도 고추 달린 사낸가? 치사한 건 분명히 구양지나 염가 할망구한테서 배웠을 거야!" 단탈은 대답없이 웃었다. 구양지나 마봉황이 치사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 만, 한번 밉본 상대에 대해서라면 아무렇게나 넘겨짚어 생각해 버리는 석소용 의 못된 버릇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탈은 개울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버드나무에는 화살 한 대가 동그랗게 말린 머리카락 뭉치를 관통한 채 한 뼘이 넘는 깊이로 박혀 있었다. 화살을 뽑아 살펴보니, 살대는 여전히 곧았고 살촉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급히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보면 이곳의 싸리나무도 제법 쓸 만한 모양이었다. 이때 등뒤로 다가온 석소용이 그를 향해 쫑알거렸다. "활 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날아다니는 새는 맞추지 못할 거야. 그렇죠, 단탈?" 단탈은 천천히 돌아섰다. "아무리 잘 쏴도 새는 못 맞출 거야." 설마 못 듣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스러운 듯 석소용은 조금 큰 목소리로 아까의 말을 되풀이했다. 단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러자 석소용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단탈을 올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담긴 눈망울로... "그럼 잡을 수 있어요?"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난 체하려는 마음이야 물론 아니었고, 단지 요 깜찍한 계집애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지가 궁금해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좋은 활과 쓸 만한 화살만 있다면, 날아다니는 새를 잡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석소용은 몸을 비비 꼬면서 단탈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그러면 한 마리만 잡아 줄래요?" 단탈은 잠시 생각한 뒤 석소용에게 되물었다. "배가 고프니?" 석소용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금방 배를 잡고 웃었다. "아하하! 정말 멍청해요! 아니, 내 말은 단탈이 멍청하다는 것이 아니라 방금 한 말이 그렇단 말이에요!" 금방 말을 바꾸는 것을 보면 그래도 단탈이 성나는 것만은 싫었나 보다. "배 고픈 것이 아니라면 새는 왜 잡아 달래는 거냐?" 단탈이 묻자, 석소용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음... 단탈도 그 앵무새 기억하죠? 왜 그 구양지, 불여우 같은 계집애가 키우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말의 첫머리에 불과했고, '구양지'라는 이름을 말하는 석소용은 뭐가 그리도 분한지 이빨을 뽀드득거리고 있었다. 구양지가 키우는 새는 단탈도 본 적이 있었다. 처음 그 새를 보았을 때, 날개가 짧고 부리가 둥글어 무척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부엉이만큼이 나 맛이 없어 보여서 금방 관심을 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번 만져 보려고 하니까 중요한 일이라면서 펄쩍 뛰더라고요! 중요한 일 좋아하시네! 흥, 누가 그까짓 못생긴 새를 잡아먹기라도 한대나?" "그 앵무새가 왔다는 얘기냐?" 석소용이 맞다고 고갯짓을 하자 단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는 마맥회에 서는 새를 특수한 목적에 의해 키운다는 장옥평의 설명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석소용의 말처럼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단탈이 나한테 그것보다 훨씬 예쁜 새로 한 마리 잡아 준다면... 어? 단탈! 어디 가요? 가려면 같이 가요!" 단탈은 칭얼거리는 석소용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To be continue...... 무림야그 >>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염원(念願) 묘왕동주 제 5 장 염원(念願) 1 -뒤숭숭한 때이니... 여러모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야. 연홍(燕弘)은 골목 어귀의 가게에서 산 먼지 묻은 만두로 배를 채우면서 세가의 최고 원로인 감규목의 말을 떠올렸다. 감규목의 당부는, 만약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늙은이의 횡설수설로 여길 정도로 애매했다. 하지만 연홍은 그 안에 담긴 의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연홍은 지난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그 시작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일의 발단은 이틀 전에 열린 가로회의에서 비롯되었다. 회의의 소집자인 대행 가주는 세가를 잠시 떠나 산서(山西)에 다녀올 뜻을 원로들에게 밝혔다. 산서에 자리잡은 의혈당(義血堂)과의 결연이 그 목적이라 했다. 가로회의의 참석자인 오대가신`-`당시에는 육염명과 양충이 세가를 비운 탓에 세 명에 불과했지만`-`의 대부분은 대행 가주의 의견에 대해 찬성의 뜻을 비췄다. 대행 가주는 세가의 후계자인 장옥평이 도착하기 전까지 다른 삼패와의 연대를 공고히 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고, 산서 의혈당은 그 중 하나인 신창(神槍) 서문병(西門秉)이 세운 방회이기 때문이다. 단지 감규목 한 사람만은 신중론을 펼쳤다. 그는 결연을 위해 마주앉은 사람은 동급의 비중을 지녀야 한다는, 고래(古來)의 암묵적인 외교 법칙을 이유로 들어 그 일을 다시 검토해 볼 것을 권했다. 위세가 과거와 여일(如一)한 거상련이라면 몰라도, 쇠퇴일로를 걷는 의혈당과 제휴하기 위해 대행 가주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효율적인 외교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된 지적이었다. 이때 대행 가주는 담담한 웃음과 함께 감규목의 의견에 반박했다. 그는 우선 의혈당과 세가와의 오랜 우호 관계를 거론했다. 그것은 감규목도 부인할 수 없었다. 양충이 장옥평을 마중하기 위해 남하할 때에도 의혈당 당주의 동생인 서문개복(西門開福)이 합류할 정도이니, 의혈당과 장가는 남다른 사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이어 장후겸은 스스로를 한 마리 노새에 비유하면서, 그가 취할 최선의 길은 대행 가주의 허명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장옥평을 위해 한 바리의 짐이라도 많이 옮겨 놓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의 말은 감동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에 진청화가 예의 군자 타령을 연발하고, 탁봉이 예의 감설(甘舌)을 마음껏 휘둘렀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대행 가주는 네 호법 중 한 명인 예간을 거느리고 태산의 장씨세가의 대문을 나서게 되었고, 감규목의 당부를 받은 연홍 또한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자신과 감규목을 제외한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는... 그것이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세가를 출발한 장후겸은 도보로 제남(濟南)의 부(府) 경계선을 넘었다. 그리고 사수(泗水)가 바라다보이는 곡부(曲阜)에 도착한 것이 오늘 사시(巳時)경의 일... 지금 장후겸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으리으리한 객점에 들었고, 연홍은 객점 문을 관찰할 수 있는 골목 어귀에서 더러운 만두로 허기를 때우고 있는 것이다. 연홍은 우걱거리던 만두를 간신히 목구멍 아래로 넘김으로써, 산동장가 사대호법 중 한 사람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는 후줄근한 식사를 마쳤다. 연홍은 밀가루가 달라붙은 손가락을 소매에 문지르며 생각했다. '감(甘) 형님께서는 아직도 대행 가주를 석연치 않게 생각하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소위 세가에서 가신 소리를 듣는 사람들치고 한 번쯤이라도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천치는 없을 것이다.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치욕스러운 혈사가 지나간 뒤... 비명에 간 전임 가주 장낙웅, 그 이복 형 되는 장후겸을 대행 가주로서 세가에 들이는 일을 놓고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바로 감규목이었다. 그러나 세가의 중론은 이미 장후겸을 대행 가주로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물론 장낙웅의 후계로 세가의 뒤를 잇고 싶지 않은 자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생사조차 불분명한 장옥평을 기다리며 가주 자리를 마냥 비워 놓을 수는 없었다. 감규목을 큰형님처럼 따르는 연홍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원로 중 가장 권세가 세다는 감규목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감규목은 왜 그리도 장후겸을 배척하려 했을까? '아마도... 그 일 때문이겠지...' 연홍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기분이 되는 것만은, 홍안의 소년을 반백의 늙은이로 만드는 세월이라는 거대한 힘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사십 년 전 산동세가에서 벌어졌던 사건 하나... 당시 열세 살에 불과하던 연홍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그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의 기억력이 남달리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사건 자체가, 직접 목격한 사람 누구에게나 심복지환(心腹之患)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연홍은 상념에서 벗어나 주의를 집중했다. 객점의 문이 열리고 장후겸과 예간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일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 두 사람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 사람은 먹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아래 위로 온통 새카만 옷을 입었고, 더구나 맑은 하늘을 대할 수 없는 죄인처럼 머리에는 챙이 넓은 갓을 썼다. '누구지...?' 연홍은 괴이함을 느꼈다. 이때 흑의괴인이 장후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장후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리춤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꺼내 흑의괴인에게 건넨 뒤, 예간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지시를 내렸다. 예간은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은 뒤 객점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장후겸도 흑의괴인에게 몇 마디를 했다. 연홍은 청력을 끌어올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들으려 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고 주위가 소란스러운 탓에 토막말 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들은 토막말이라는 것이, '알아서 해치우게'라든지, '조심하고', 또는 '동쪽 석가산(石假山)으로' 따위에 불과하니, 연홍의 의혹은 해소되기는커녕 점점 커져 갈 뿐이었다.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흑의괴인이 장후겸을 향해 복명하는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순간, 연홍은 깜짝 놀랐다. 흑의괴인이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연홍은 황급히 몸을 돌리고 주위에 벌려진 좌판 위를 구경하는 척했다. 흑의괴인의 목표는 연홍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연홍의 등뒤를 그대로 스쳐 갔다. 걸음을 옮길 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상당한 공력을 쌓은 무인임에 분명했다. 흑의괴인이 지나가자 연홍은 다시 객점 앞을 바라보았다. 장후겸은 어느새 객점 앞을 떠나 저만치에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이 공묘(孔廟) 쪽임을 알아차린 연홍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의 다음 행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연홍이 장후겸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장후겸을 미행하는 일이었다. 임무의 본령을 떠올린다면 당연히 장후겸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장후겸의 행적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장후겸이 가는 곳은 산서 의혈당이었다. 행선지와 중요 경유지를 파악하고 있는 이상, 반드시 지금이 아니라 해도 곧 미행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흑의괴인은 어떤가? 지금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것으로 영영 끝이었다. 이는 연홍이 지닌 의혹이 영원히 미궁에 빠지는 것을 의미했다. '좋다!' 드디어 연홍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고양이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흑의괴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흑의괴인은 걸음이 빨랐다.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특별히 지금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밀히 뒤따르는 연홍은 그를 미행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재간의 대부분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러기를 반 시진여... 흑의괴인은 곡부의 시가를 완전히 벗어나 어떤 산속으로 들어섰다. 봉우리의 모양이 대성현(大聖賢)의 유적인 공묘를 향해 부복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하여, 배현봉(拜賢峰)이라는 이름이 붙은 야트막한 산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 1 묘왕동주 변변한 길이 없는 산속에서는 동행이라 해도 종적을 잃기가 쉬운 법이다. 하물며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뒤쫓는 사람인 데야 오죽할까. 연홍은 흑의괴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렸다. 그 덕분일까? 연홍은 어지러운 바위와 울창한 나무 속에서도 흑의괴인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의괴인을 쫓아 형제처럼 모양이 닮은 두 개의 우뚝한 바위기둥 사이를 지났을 때, 연홍은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생각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오느라고 수고했네." 입을 천으로 가린 탓에 약간 이상하게 들리는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가 이상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태껏 그토록 공들여 미행했던 흑의괴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연홍은 잠시 당황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했건만, 이자는 자신의 미행을 어떻게 눈치챈 것일까?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지기라 부른다면, 흑의괴인은 마땅히 연홍의 지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네가 따라올 줄 알고 있었지. 나를 따라온 이유는 아마도..." 흑의괴인은 소매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질 좋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이것 때문이겠지?" 흑의괴인은 손에 든 주머니를 연홍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나오는 데야 연홍이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침착하다고 알려진 연홍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입술에 아교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흑의괴인이 연홍에게 물었다. 그의 말을 속으로 되뇌이던 연홍은, 참으로 어이없는 물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머니 안에 뭐가 들었냐니? 그것을 나에게 묻는단 말인가? 저자가 지금 나를 희롱하는 건가? 하지만 흑의괴인은 정말로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연홍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궁금한 마음이야 자네가 더할 테니까, 직접 확인해 보게." 연홍은 엉겁결에 주머니를 받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주머니에 무슨 수작이 벌어지지는 않았을까 의심했지만, 그의 의심은 기우(杞憂)에 불과한 것 같았다. "열어 보게나. 나도 궁금하군." 흑의괴인이 재촉했다. 연홍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듯한 심정으로 주머니의 끈을 풀어 손바닥 위에 뒤집었다. 찰그락!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만 누른 잎사귀들이 연홍의 손바닥 위에 소복이 쌓였다. 연홍은 그것의 정체를 즉시 알 수 있었다. 금엽(金葉)... 이파리 한 개가 금 반 냥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황금 잎사귀가 바로 그것이었다. "흐흐! 무게 때문에 동전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비싼 것을 주실 줄은 몰랐군." 흑의괴인은 음산하게 웃었다. 여태껏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않던 연홍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연홍의 마른 몸뚱이에서 적의에 물든 긴장감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태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것이다. 주머니 안에 든 금엽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의미가 있다면 장후겸이 흑의괴인에게 주머니를 주었다는 행위 자체이다. 그 행위가 연홍으로 하여금 이 외진 산속까지 흑포괴인을 따라오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그 행위에 의미를 둔 것은 장후겸도, 그리고 눈앞에서 웃고 있는 흑의괴인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장후겸과 흑의괴인은 그 행위를 미끼로 연홍을 이곳까지 유인한 것이다. 흑의괴인은 쓰고 있던 챙 넓은 갓을 훌떡 뒤로 젖혔다. 얼굴을 가린 천 때문에 코 아래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위로 드러난 한 쌍의 눈은 얼음 조각을 박아 놓은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내가 누구냐고? 이거 실망이군, 나는 자네를 분명히 알고 있는데... 자네도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누군지 기억날 걸세." 흑의괴인의 말투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너는 누구냐?" 연홍은 쌍수에 공력을 끌어올리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한 번 농락당한 것은 스스로의 부주위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 농락당하기에는 산동의 흰 호랑이, 백호공(白虎公) 연홍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지? 그러면 내 이름을 말해 주지." 흑의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연홍은 그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흑의괴인이 말했다. "내 이름은 석강(石江)... 기억하나?" "석강!" 어떤 사람의 이름이 연홍처럼 침착하고 노련한 무인을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석강'이라는 두 글자가 가져다 주는 충격은 연홍의 지각을 일시에 마비시켰다. 얼마나 경악했는지, "기억하나?"라는 흑의괴인의 다음 말이 코앞에서 울렸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쾅! 연홍의 양 어깨 위에 흑의괴인, 석강의 두 손바닥이 작렬했다. 쇄골(鎖骨) 두 짝이 산산이 으스러지는 무서운 타격이었다. "크악!"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밀려가는 연홍의 두 팔은 줄 끊어진 인형의 그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뼈가 부숴지고 근육이 찢겨진 이상, 두 팔에 힘을 집어넣을 아무런 방도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하나, 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석강이 외치는 순간, 연홍의 갈비뼈가 수숫대처럼 부러져 나갔다. "기억하나, 내 가족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석강이 다시 한 번 외치는 순간, 연홍의 대퇴골(大腿骨)이 골반으로부터 잘려 나갔다. "기억하나? 기억해?" 석강은 이번에는 연홍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신경질적으로 잡아챘을 뿐이다. 그 순간 연홍은 보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눈으로 보았다. 코가 베어져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두 개의 구멍만 남아 있는 석강의 끔찍한 얼굴을 보았다. "이 얼굴! 나이 열넷에 이런 얼굴이 되어 개처럼 쫓겨난 나를, 그래서 이제는 할비(割鼻)라는 이름이 되어 버린 나를 기억하냔 말이야!" 석강은 짐승처럼 절규하며 벌레처럼 자빠져 있는 연홍을 향해 쌍수를 내질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 2 묘왕동주 2 아이라고 하기에는 뼈마디가 이미 자라 버렸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쪼그라진 귓불 아래 솜털이 애처로워 보이는 소년 손일(孫一)이 실솔( :귀뚜라미) 재주를 팔던 곳은, 과거의 한 시대를 살다 간 어떤 사람을 기리는 사당 근처였다. 사당이란 것이 본래 고인의 혼을 위로하며 그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곳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사당의 주위가 청정해야 함은 당연한 일. 더구나 지금 손일이 그 추녀 그늘을 빌리고 있는 사당은 중원 천지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대성현 공자의 사당[孔廟], 그것도 천하에 널린 수많은 공묘 가운데에서도 원조격인 사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손일이 사당의 청정을 깨뜨리는 것을 방조한 관리인 손조광(孫兆廣)의 행동은, 이십오 년이나 입어 온 관복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배임(背任) 행위였다. 하지만 손조광은 단 한 번도 손일을 쫓아 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손일이 먼 친척 손주뻘이 된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손조광은, 효제(孝悌)는 인(仁)의 뿌리라는, 사당의 주인이 이천 년 전에 설파한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실천할 줄 아는 인자(仁者)이기 때문이다. "에헴! 우리 흑풍(黑風) 선생이 서악(西嶽)하고도 화산(華山)의 정기를 이으셨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어르신들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죠!" 열댓 명의 구경꾼들을 앞에 두고 술술 읊어대는 손일의 말투는 닳고 닳은 만담가(漫談家)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잔뼈가 채 굵기 전부터 해온 짓거리에 이력이 붙은 탓이다. "어느 날 문득 대오각성(大悟覺醒)하시어 후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결심을 하신 흑풍 선생! 그래서 선생께서는 화산에서 보낸 삼십 년을 불철주야 절차탁마(切磋啄磨)하시어 드디어 한 가지 절세신공을 성취하셨으니, 그 신공이 지금 보여 드릴 매화약(梅花躍)의 경공술입니다!" 되지도 않는 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손일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흑풍 선생이 반 뼘이 채 안 되는 새까만 실솔이었으니, 삼십 년 수련은 고사하고 화산에서 이곳 산동의 곡부(曲阜)에 오는 동안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음이 뻔한 일이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허허, 웃으며 재밌어했다. 원래 길거리 재주팔이란 것 자체가 그럴싸한 허풍이 빠지면, 속 없는 만두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손일은 준비한 보퉁이에서 길이가 두 자쯤 되는 막대기를 일곱 개 꺼냈다. 한쪽 끝을 쐐기처럼 뾰족하게 다듬은 막대기였다. 이어 막대기를 한 자 간격으로 땅바닥에 꽂은 손일은 싸릿대로 만든 가느다란 회초리를 들었다. "선생께는 하늘의 운행을 살피시는 혜안이 있어, 북두칠성의 무량한 현묘함을 매화약의 신공에 담으실 수 있었습니다! 자, 이 칠성봉(七星棒) 위에서 시전될 흑풍 선생의 신공을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아닌게아니라, 땅에 꽂힌 막대기의 배치는 칠성 방위를 따르고 있었다. "흑풍 선생! 신공을 보여 주세요!" 손일은 이렇게 외치며 들고 있던 회초리로 새까만 실솔, 흑풍 선생이 앉은 뒷땅을 냅다 후려쳤다. 짝 소리가 먼저인지, 아니면 흑풍 선생이 펄쩍 뛰어오른 게 먼저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물론 신공이라 하기는 턱없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 자 사이 칠성봉 위를 기운차고 날렵하게 뛰어 다니는 흑풍 선생의 다리 힘은 가위 실솔 중 으뜸을 다툴 만했다. 구경꾼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칭찬을 하며 전낭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손일은 고개를 굽신거리며 큼직한 놋쇠사발을 들고 그 사이를 돌아다녔다. 놋쇠사발은 비록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해 보였지만 손일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이었다. 열다섯 살도 채 안 된 소년을 길거리로 내몰아 돈벌이를 강요하는 매정한 가족들이지만 그래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피붙이였다. 그들의 명줄이 달린 사발이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 * * "쯧쯧! 망할 것 같으니라고... 천벌을 받지, 천벌을 받아!" 손조광은 혀를 찼다. 갠 날이면 거의 매일 볼 수 있는 손일의 재주팔이가 정 많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천벌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등뒤에서 난데없이 날아온 중후한 목소리가 손조광의 상념을 깼다. 손조광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눈처럼 새하얀 학창의(鶴 衣)를 입은 노인이 그림 속의 신선 같은 신색으로 서 있었다. "놀라셨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불쌍한 아이에게 어쩐지 심한 말 같아서 하는 참견이외다." 백의노인은 하얀 수염 아래로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풍모가 어찌나 고아한지, 손조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백의노인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아이에게 한 말이 아니라 저 아이의 아비, 어미 되는 작자들에게 한 말이라오." 백의노인은 손조광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손조광은 경전을 섞은 장광설로써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게으르기가 양지녘 당나귀 같다는 손일의 아비 손소팔(孫小八)이 살쾡이만큼이나 앙칼진 독부(毒婦)를 후처로 맞이한 뒤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백의노인이 물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전처의 소생이란 말씀이시오?" "물론이다마다요! 저애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실솔을 잡아 훈련시키는 것도, 모두 방구석에서 빈둥거리는 그 버러지들을 먹여살리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비, 어미라는 것들은 늦둥이 하나만 끼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위한다오. 어디 그뿐인가? 저애의 벌이가 신통치 않은 날에는 개 패듯 몽둥이질까지 한다고 하니, 그런 연놈들이 벼락맞지 않는다면 천하에서 벼락맞을 사람이 누가 있겠소?" "으음..." 백의노인의 눈가에 아픔의 기색이 어렸다. "그런 내막이 있었구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큰 실례를 했소이다." 백의노인이 머리 숙여 사과하자, 오히려 당황한 손조광이 황급히 답례했다. 나이를 따져도 연상임이 분명하고, 행색으로 보아도 귀한 집 큰어른이 분명한 사람에게 이렇게 정중한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손조광에게 사과한 백의노인은 실솔을 부리는 아이, 손일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손일은 손가락으로 그릇 안에 담긴 동전들을 헤아리느라고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표정이 밝은 것으로 미루어 오늘 벌이는 제법 괜찮은 모양이었다. 백의노인이 손일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말고 다른 재주는 없느냐?" 손일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그릇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손일은 금방 경계의 기색을 풀었다. 말을 건 사람이 돈 많고 마음씨 좋은 부잣집 할아버지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손일은 침으로 입술을 한번 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 우리 흑풍 선생께서는 매화약말고도 세 가지 신공을 지니고 계십니다. 한 가지는 오공투(蜈蚣鬪)인데 그것은 상대가 준비되지 않은 탓에 보여 드릴 수가 없고, 다른 두 가지인 신선행(神仙行)과 침향락(沈香樂)은 선생 혼자서도 하실 수 있는 것으로써 당장이라도 보여 드릴 수 있습죠." "마침 무료하던 차이니 그 재주들을 보여 줄 수 있겠느냐?" 그래서 손일은 모처럼 만에 만난 굵직한 손님을 위해 두 가지 재주를 펼치기 시작했다. 신선행이란 실솔이 뒷다리 두 개로만 걷는 재주였고, 침향락은 실솔이 노랫소리에 맞춰 펄떡거리며 춤추는 재주였다. 다리 여섯 달린 벌레가 십주삼도(十洲三島)의 신선처럼 점잖게 걸을 수 없고, 귓구멍이 따로 없는 미물이 침향정(沈香亭)의 양귀비처럼 맵시있게 춤출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흑풍 선생의 재주는 그저 눈요기에 지나지 않을 터... 하지만 백의노인은 찬찬한 눈빛으로 재주를 끝까지 본 뒤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 3 묘왕동주 "허허! 실솔 부리는 재주가 여간 아니구나." 백의노인이 칭찬하자 손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얼굴을 붉혔다. 생활고에 찌들어도 천진무구한 소년임에는 분명했던 것이다. "얘기를 듣자 하니 너 혼자서 식구들을 벌어먹인다고...?" "아이구! 손 나리가 어르신께 쓸데없는 말을 했나 보군요." 손일이 쑥스러워하자, 백의노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그 말이 의외였나 보다. 손일은 백의노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너와 흑풍 선생의 재주라면 대갓집 공자의 놀이 상대로 들어가는 것쯤은 손쉬워 보이는데... 어떠냐? 아버지와 계모에게 구박받고, 동생에게 무시당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좋지 않겠느냐? 네가 원한다면 내가 좋은 집을 소개해 줄 수도 있단다." 백의노인이 말하는 동안 손일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그러다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본이 없었다면 제가 어찌 공기를 마실 수 있겠습니까? 소인이 비록 천하디천한 놈이지만, 낳아 주신 은혜를 저버리는 패륜아는 아닙니다." 백의노인의 턱수염이 실룩거렸다. 어린 놈의 방자한 대꾸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백의노인은 곧 안색을 풀었다. "패륜이라... 그래, 패륜을 범하면 안 되겠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백의노인의 표정은 어딘지 허탈해 보였다. "내가 객쩍은 말을 했나 보구나. 미안하게 됐다." 백의노인은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손일의 앞에 놓인 놋쇠그릇에 던져 넣었다. "흑풍 선생의 재주는 잘 구경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는 말거라." 백의노인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돌아섰다. 백의노인이 던진 물건이 지금껏 재주를 팔아 벌어 온 돈을 모두 합친 것보다 열 배는 더 귀한 금엽(金葉)임을 손일이 알아차린 것은, 백의노인의 훤칠한 뒷모습이 공묘의 큰 대문 안으로 사라진 후의 일이었다. * * * "어린아이가 생각없이 지껄인 말을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것은 다 접어 두고라도, 이런 식으로 충고조의 말을 할 수 있는 수하는 오직 두 명뿐이기 때문이다. 백의노인, 장후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자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날아왔다. "용서를 바랍니다." 그렇게 보였다는 뜻이었다. 장후겸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닐세, 아니야... 내가 잠시 마음이 흔들렸나 보네." 이곳은 드넓은 공묘의 동쪽, 인적을 찾기 어려운 석가산(石假山)이었다. 장후겸은 석가산 한쪽에 주욱 늘어선 돌인형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공자의 제자들과 후대의 십육현유(十六賢儒)를 새긴 것이라 하는데, 거창한 의도와는 달리 무척이나 조잡해 보였다. 산동의 공묘 안에 든 장식물이니 본래부터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 오랜 풍상에 시달리며 그 형태가 많이 부서져 나간 탓이리라.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하잖나? 잠깐이나마 아이의 선한 심성이 부러워졌던 것만은 사실이야. 하지만..." 장후겸은 말을 잠시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벽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흑의괴인을 볼 수 있었다. 흑의괴인에게는 코가 없었다. 코가 베어진 자, 할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가엾은 아이는 가족들에게 배신당할 수밖에 없을 거야. 마치 그 옛날의 누구처럼 말일세." 말을 하는 동안 장후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할비는 장후겸의 이러한 동작이 오랜 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후겸의 목덜미에는 한 줄기 굵은 상처가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상처의 경우, 육체적인 아픔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혼의 아픔을 가져다 주곤 한다. 할비의 코가 그랬고, 장후겸의 목덜미가 그랬다. "간 일은 어떻게 되었나?" 장후겸은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는 미행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후겸은 할비가 이렇게 대답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답을 듣고 보니 기분이 과히 유쾌하지 않았다. "연홍은 자네에게 동생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한 말이지만, 장후겸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리고 할비의 대답을 들었을 때, 장후겸은 또 한 번 자신의 실언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동생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 연홍이 형뻘 되는 석강을 얼마나 따랐는지는, 당시 장가에 있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홍과 석강 사이의 관계였다. 지옥에서 보낸 사십 년이라는 시간은 석강이 지닌 모든 아름다움을 죽여 버렸다. 아름다움이 죽은 석강은 더 이상 석강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석강은 할비가 되었다. 연홍과 석강의 관계는 할비라는 존재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는 것이다. "감규목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할비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장후겸을 향해 물었다. "연홍을 보낸 것이 감규목인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장후겸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산동장가 안에서 감규목을 제외하곤 감히 자신에게 미행을 붙일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할비가 다시 말했다. "감규목은 아직도 스물세 장의 총도(塚圖)에 관해 함구하고 있습니다. 속하가 확인한 바, 그의 의제인 육염명과 양충조차도 총도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장후겸은 빙그레 웃었다. "그를 진정한 가신이라고 하지 않으면 세상 누구를 진정한 가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충직하고 사려 깊은 데다가 입까지 무거우니 말일세.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어. 세가의 적통 옥평이 그 행방이 묘연한 마당에 총도에 관한 일을 발설하여, 나를 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명령만 내리시면 오늘이라도 그를 처리하겠습니다." 할비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충만했다. 하지만 장후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감규목에겐 손대지 않을 걸세." 할비는 침묵했다. 그는 감규목을 증오했다. 하지만 감규목에 대한 그의 증오심이 아무리 크다 한들 장후겸의 그것보다 클 수는 없었다. 그런 장후겸이 감규목을 놔둔다는 데야 뭐라고 토를 달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 4 묘왕동주 "자, 이제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을 말해 주게." 장후겸이 말했다. 그가 곡부에서 할비를 만나고 있는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할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자액(刺額)으로부터 공사가 완공되었다는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할비와 자액은 소년 시절부터 장후겸을 주인으로 섬긴 심복이었다. 본디 두 사람의 주무대는 강남이었다. 하지만 대업이 막바지에 이른 올 여름부터는 두 사람의 주무대가 바뀌었다. 할비는 주인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산동으로 왔고, 자액은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하남으로 간 것이다. 공사가 완공되었다는 할비의 보고에 장후겸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정보다 빠른 셈인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보안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총단을 출발한 이(二) 공자가 도착하는 즉시 기관(機關) 시험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허어! 그 촉박한 일정을 오히려 앞당겨 끝내 버렸군. 과연 자액이야!" 장후겸은 감탄을 거듭했다. 그의 감탄은 할비의 다음 보고가 이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안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장후겸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약간 엷어졌다. "말해 보게나." "구사(邱四)로부터의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장후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구사는 하북(河北) 일대를 거점으로 삼아 거상련을 비롯한 여러 문파의 동향을 감시하던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임무를 잊지 않을 만큼 충직했다. "발견된 것일까?" "그렇게 사료됩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오대산인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사가 포섭했던 자가 사라졌겠지. 그 이름이... 굴경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 나이에... 대응이 신속하군." '그 나이'란 여든을 바라보는 소래운의 나이를 가리키며, "대응이 신속하다."란 하남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거상련의 조치가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이었다. "구사가 전한 마지막 전언에 의하면, 소래운이 하남으로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장후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둬도 상관없겠지. 소래운이 철옥의 존재에 대해 의식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자액에게는 적당히 상대해 주라고 전하게. 단, 제이차 북정회의 회맹(會盟)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말씀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할비는 다음 사안에 대해 보고했다. "총단의 비(費) 부주(府主)가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장후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야 예상했던 일이 아닌가? 둘째가 총단을 떠난 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허헛!" 장후겸은 생각할수록 재미있다는 듯이 즐거워하다가 결국은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할비는 신기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오랫동안 주인으로 섬겼지만, 이처럼 소리내어 웃는 것은 좀처럼 보지 못한 탓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장후겸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연리, 그 늙은 원숭이는 언제나 이런 식이지. 요리조리 잴 수 있는 데까지 잰 연후에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거든. 육족풍을 배신할 때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 교활함 때문에 큰코 다칠 걸세.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늙은 원숭이가 어떤 얼굴이 될지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하!" 할비는 그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그 사안에 대해 한 가지 보고를 덧붙였다. "비 부주는 망산일수 부범악을 호남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후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할비는 장후겸이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호남지부에 머물고 있는 두 제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가뜩이나 달아올라 있는 아이들에게 부채질을 하다니... 늙은 원숭이가 이번에는 제법 머리를 굴린 모양이군." 장후겸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속하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후겸은 고개를 흔들었다. 할비의 말뜻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선뜻 동의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첫째는 재주가 많은 아이야. 그런 아이를 비연리나 건양우사(乾陽羽士) 같은 폐물들과 함께 취급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시다면...?" 장후겸은 가볍게 한숨을 쉰 뒤 말했다. "그 재주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의 기회는 더 주고 싶군." 장후겸은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옥령기(屋令旗)를 첫째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군. 총단으로 돌아가 자중하라고 말이야." 옥령기는 장후겸의 신물이었다. 장후겸의 지배를 받는 모든 자들은 옥령기에 절대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할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주(旗主)로는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까요?" "제갈등룡(諸葛登龍) 정도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겠지. 그라면 첫째도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야." "조치하겠습니다." 할비는 즉각 복명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재주 때문에 장후겸의 첫째 제자는 결국 스스로가 선택한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을... "예간이 올 때가 되었군. 좋은 말을 준비해야 편하게 갈 텐데... 그 친구가 말 보는 눈이 워낙에 없어서 말이야." 아까 장후겸이 예간에게 지시한 것은 두 마리의 말이었다. 처음 세가를 출발할 때 말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있을 미행자가 쉽게 따라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미행하는 자를 빨리 처리하여 행적을 감출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미행은 떨어졌다. 그리고 장후겸이 세가로 돌아가기 전까지, 감규목은 연홍의 죽음을 눈치챌 수 없었다. 더 이상 다리를 혹사시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할비가 말했다. 용건이 끝난 이상, 그는 다시 그의 일을 하기 위해 가봐야만 하는 것이다. 여느 때의 장후겸 같았다면 한마디 위로의 말로써 이 은밀한 만남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 5 묘왕동주 "할비, 자네가 이렇게 수고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장후겸은 할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곧 평생의 염원을 이루는 거야." '평생의 염원'을 이야기하는 장후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3 바로 그 시간, 늙은 원숭이의 정수리에서는 한 가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운공을 할 때나 공력을 끌어올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수련한 양강 공력이 워낙에 초범(超凡)한 탓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운공도 하지 않았고, 공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단지 사과만한 두뇌를 한계 속도 이상으로 회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영연(靈煙)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화신마라는 이름이 대단하긴 대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강북으로 간 우리 아이들하고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는 얘기야?" 늙은 원숭이, 비연리는 답답한 듯 제 목덜미를 손으로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생긴 것부터가 원체 오종종한 위인이 체통없이 이런 짓을 하니, 영락없이 원숭이의 족속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점이 비연리를 폄하하는 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반 시진째 비연리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의(杜懿)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에... 그쪽은 포기하시는 편이... 그 아이들은 삼 년 전부터 본(本) 부(府)의 명령권 밖에서 돌아다닌 탓에... 지금와서 새삼스럽게 지휘 계통을 주장하기도 뭣한 일이라서..." 미련하게 생긴 얼굴을 한껏 찡그려 가며 말하는 품이 무척이나 비연리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두의는 비연리를 어려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강남의 이화산장(離火山莊) 시절부터 비연리의 제일심복 소리를 들었으니 햇수로만 따져도 벌써 삼십 년... 삼십 년 묵은 주종 관계란 해어질 때까지 빨아 놓은 옷감과 같았다. 감정이라는 물이 다 빠져 버린 지 오래여서, 이제는 허연 천처럼 무덤덤함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상대를 어려워하는 듯 끝을 얼버무리는 두의의 말투는 단순한 버릇임을 알 수 있다. "끄응!" 비연리는 목 거죽이 붉게 변할 정도로 벅벅 긁었다. "포기하라고? 아니야, 난 포기 못 해! 그쪽에 가 있는 아이들이 몇인데... 그 노른자 같은 전력(戰力)을 어떻게 포기해!" 두 사람이 공통으로 말하는 '아이들'이란 철면신의 명으로 삼 년 전부터 총단을 떠나 있는 마부 소속의 인원을 가리킨다. 당시 그것에 관한 명이 나올 때에는, 비록 단 한 마디 변변한 설명이 없었다 해도 비연리는 감히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비연리는 스스로 평가하기를 철옥이 강남 무림을 석권하는 데 일등공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이었다. 철면신은 그를 일개 항장(降將)으로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의 비연리가 "나 죽었소." 하고 철면신에게 꼬리를 만 것은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비연리는 남 못지않은 두뇌와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마련을 배신한 이유는 육족풍과 도무비(刀無比)라는 두 거봉(巨峰)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위기 의식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능력으로 보아도, 또 휘하의 세력으로 보아도 비연리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연리는 그들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비연리에게 철면신은 비슷한 종류의 위기 의식을 안겨 주었다. 철옥이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마부 부주라는 허울좋은 중간 관리자에 머물다가, 나이가 들어 결국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는 존재의 상실감... 비연리는 이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제갈등룡(諸葛登龍)과 온청면(溫靑面)에게는 연락할 수 없을까?" 비연리가 물었다. 등룡자(登龍子) 제갈호(諸葛浩)와 청면수라(靑面修羅) 온이(溫二)는 과거 이화산장의 십대고수들로서, 두의와 마찬가지로 비연리의 오랜 수하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열 사람이 현재에도 그대로 남아 있으라는 법은 없어서, 죽은 자와 은퇴한 자를 가려 내면 이제 남은 수는 다섯뿐... 하지만 그 다섯에게는 사라진 다섯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들이 있었다. 그러니 비연리가 제갈호와 온이에게 집착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두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에... 제갈호는... 그리고 온이도 역시 포기하시는 편이..." 비연리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왜?" "그때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강북으로 갈 때에도 앞장서서 자원할 정도로 약삭빠른 놈들이라서... 아마도 지금쯤이면 벌써..." 벌써 옥주의 충실한 개가 되었다는 얘기이리라. 비연리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쁜 놈들! 배신자! 귀신도 씹다가 토해 버릴 더러운 자식들!" 다른 두 마디야 물론 욕이고 중요한 것은 가운데 낀 '배신자'라는 한 마디일 텐데, 사실 비연리가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을까? 두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주인의 분노를 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다만 "나쁜 놈들이지요..."라며 맞장구칠 뿐이다. 비연리는 한동안 씨근덕거렸지만 분노로써 해결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좋아, 그러면 찬찬히 따져 보자고." 비연리는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우선 여기 남은 부의 아이들은 내 편이고..." 손가락 하나. "매용소와 도연향을 추종하는 아이들이 또한 내 편이 되어 줄 것이고..." 손가락 둘. "그리고 네 지부 중 호남지부가 거의 매용소의 밑으로 들어간 것 같으니까..." 손가락 셋. "또 없나?" 비연리는 두의에게 물었다. 두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만약에 말이야, 나와 옥주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느쪽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에 설 만한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에... 우선 복건과 광동, 두 지부가... 그리고 아무래도 후계자끼리의 권력 다툼으로 여기기가 쉬울 테니까 좀처럼 누구 편을 들려 하지 않을지도..." 비연리는 두의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복건과 광동, 두 지부장은 소심할 정도로 신중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복건은 친(親)매용소 성향이 강하고, 광동은 친조추림 성향이 강했지만, 그것은 지금처럼 매용소와 조추림 사이의 반목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지 않았을 경우의 얘기였다. 만약 정면 충돌이 벌어진다면 두 지부장 모두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사내의 진행을 관망할 공산이 컸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선부(仙府)의 건양우사(乾陽羽士) 쪽에 더 신경을 쓰실 필요가..."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5 장 - 6 묘왕동주 "맞았어!" 비연리는 무릎을 쳤다. "그 말코가 문제야! 그 늙은이가 여기 떡 버티고 있으니 좀처럼 움직일 수도 없잖아! 적인지 친구인지 알 수만 있다면 그 늙은이부터 어떻게든 처리할 텐데!" 선부의 부주인 건양우사는 선부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지 정말로 신선처럼 굴었다. 많은 사업에 인원을 차출당한 마부와는 달리, 특정한 임무가 주어지지 않은 선부는 본래의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선부의 주인이 비연리였다면 그 전력을 이용해 무슨 일을 벌여도 일찌감치 벌였을 텐데, 건양우사는 그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치 한 마리의 구렁이처럼 거처인 물미각(勿迷閣)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에잇!" 비연리가 다시 벌떡 일어섰다. "...?" 두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연리를 바라보았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작자를 다시 한 번 만나 봐야겠어!" 비연리는 건양우사를 박살이라도 낼 것처럼 기세 등등하게 자리를 떴다. 하지만 두의는 이번의 결과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비연리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다. 돌아와 내뱉은 첫마디는, 아까의 등등했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두의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었다. "단실(丹室)에 들어갔다고 하는군." 건양우사는 도가의 명문인 무당파 출신이었다. 도사가 단실에 들어간 것을 가지고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연단(煉丹)하느라고 무척 바쁘대." 비연리가 이렇게까지 건양우사를 비호하는 까닭은, 사실은 자신의 자존심을 비호하기 위함임을 두의는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기세좋게 달려갔건만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두의 보기가 얼마나 민망했을까?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줬으면 좋겠어!" 비연리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 작자가 조금이라도 옥주에게 붙을 기미가 보인다면, 놈의 뼈다귀를 추려 불쏘시개로 만들어 버릴 거야! 이화신마가 결코 늙은 말코 따위에게 겁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자네도 물론 알지?" 말과 동시에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두의를 바라보는 비연리. 두의는 '신마(神魔)'라는 별호가 과연 비연리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회의했다. 하지만 그는 충직한 수하였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인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이어 오랫동안 궁금하게 생각하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에... 조추림 공자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속하의 말씀은..." 조추림의 경우는 철면신의 측근임이 분명하니, 지금처럼 노중(路中)에 있을 때 처치하는 것이 나중을 대비하는 방편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비연리는 고개를 저으며 중후하게 웃었다. "후후!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자네는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고 있어." 두의는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연리는 도취감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게나. 매용소가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붙은 것 같은가? 심심해서? 아니면 우리가 예뻐서? 아니지, 아니야! 그놈이 우리에게 붙은 것은, 조추림을 제치고 자기가 후계자가 되기 위함이지!" "...?" "그런데 나보고 조추림을 죽이라고? 그러면 매용소가 뭐가 부족해서 우리를 도와 주겠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후계자 자리가 저절로 굴러 들어올 텐데..." 두의는 머리를 조아렸다. "속하가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이 사람, 뭘 그런 걸 가지고... 허허!" 비연리는 무척 즐거워했다. 마치 한동안 흔들렸던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몇 마디 짧은 대화를 통해 완전히 회복한 듯했다. 그런데 사실 두의는 이미 하나뿐만 아니라 둘, 나아가 셋까지도 모두 아는 머리를 지니고 있었고, 나무도 보고 숲도 보며 나아가 천하까지도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 좋기로 말하자면 열 명의 비연리가 모여도 한 명의 두의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 세평(世評)이고 보면, 비연리가 생각한 둘을 두의가 생각하지 못할 까닭이 없고, 비연리가 본 숲을 두의가 보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두의가 이런 가식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상전에 대한 아첨?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이 아무리 그럴지라도,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기에는 스스로의 신세가 너무 비참해지는 두의였다. 그래서 두의는 이런 일을 할 때마다 가벼운 자기 최면을 이용해 아첨꾼으로 전락하려는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좋은 머리가 모자라는 머리에게 베푸는 작은 적선이라는 자기 최면을... 그런데 가끔은 모자라는 머리에도 번쩍이는 섬광이 스칠 때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비연리의 말에 두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예?" "조추림에게 손을 쓰는 것이 내가 아니라 매용소라면 말이야..." 비연리의 두 눈에서 득의의 광망이 번뜩였다. "아!" 두의는 감탄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비록 철면신의 방침이 후계자들 사이의 완전 경쟁이라 하지만, 조추림에 대해서만은 유달리 각별하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매용소가 비연리와 손을 잡은 것도 모두 철면신의 그러한 편애 때문이었다. 자식처럼 아끼는 조추림이 매용소에게 해코지당한다면, 아무리 철면신이라 하더라도 매용소를 후계자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조추림이 움직이는 경로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겠지?" 두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추림에게는 무문쌍절(武文雙絶)이라 불릴 만한 두 명의 심복이 있었다. 무(武)에 해당하는 사람이 칼을 귀신처럼 쓰는 얼음 덩어리라고 하면, 문(文)에 해당하는 사람은 머리만 유난히 큰 떠벌이였다. 그런데 얼음 덩어리와는 달리 떠벌이는 이번 조추림의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두의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덕분에 조추림의 행적을 알 만한 놈을 한 마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통(李四通)이란 놈이 조추림의 행적을..." 두의의 꾸물꾸물한 대답을 듣던 비연리는 딱 소리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두의!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두의는 빙긋 웃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장강(長江) 묘왕동주 제 6 장 장강(長江) 1 장강의 검푸른 물결 위에는 대륙을 딛어 온 인간들의 역사와 미학(美學)과 문화가 실려 있다. 그곳에는 상(商)나라의 옛터가 있고, 파(巴)나라의 유적이 있고, 진(秦)나라의 잔도(棧道)가 있고, 촉(蜀)나라의 옛성이 있고, 이릉(彛陵)의 싸움터가 있고, 초(楚)나라의 옛 무덤이 있다. 그곳에는 삼협(三峽:瞿塘峽·巫峽·西陵峽)의 웅장한 산수가 있고, 삼루(三樓:岳陽樓·黃鶴樓·騰王閣)의 기특한 풍치가 있다. 그곳에는 사강(絲綱:비단)의 왕국이 있고, 어미(魚米)의 고장이 있고, 원림(園林:유원지)의 고향이 있다. 중국 땅덩이를 만민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장강은 황하와 더불어 어머니를 더욱더 어머니답게 만들어 주는 두 개의 젖줄 중 하나였다.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때는 어느덧 팔월도 거의 지나가, 앙칼진 계집처럼 샐쭉해진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이부자리 틈새로 스며드는 계절... 계절이 어떻든 주야조석(晝夜朝夕)의 법칙만은 변함이 없는 탓에, 오늘도 기나긴 장강을 따라 밤이 찾아왔다. 달은 하현(下弦)이라 천공이 을씨년한데, 장강에 잠긴 달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젊은 사내의 눈동자에 담긴 달은 또 어디에서 온 것일까. * * * 제비처럼 날렵하게 생긴 호화로운 화방(畵舫) 한 척이 정박해 있던 곳은 응천부(應天府:南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강구(西江口)의 한적한 갈대밭이었다. 사월 십칠일, 바로 작년 오늘 그대와 이별할 때 눈물을 감추려 얼굴 숙이고 부끄러운 마음에 눈썹 찡그렸지요 남들은 모릅니다 혼은 이미 끊어지고 꿈이라도 좇아 하늘가 저 달이 없어진다 해도 남들은 모를 거예요 四月十七 正是去年今日 別君時 忍淚伴低面 含羞半斂眉 不知魂已斷 空有夢相隨 除去天邊月 沒人知 반주가 없으면 어떠랴. 또 악기가 없으면 어떠랴. 젊은 여인의 아름다운 노래는 뱃머리에 부숴지는 물소리와 어울려 그 정취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좋구나!" 조추림은 감탄성과 함께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잔은 주천(酒川)의 야광배(夜光杯)였으니 서한(西漢)의 명장 곽거병(郭去病)의 용맹이 솟구치는 듯하고, 술은 서역의 포도주였으니 성당(盛唐)의 절색 양귀비(楊貴妃)의 염태가 드리운 듯하다. 또한 이 두 가지의 조화는 어떤가. 이야말로 왕한(王翰)이 노래한 '포도미주야광배(葡萄美酒夜光杯)'의 명구 그대로가 아닌가. 모름지기 술을 아는 자라면 어찌 흥겹지 않을쏘냐. "공자님, 이것을..." <여관자(女冠子:당나라 때의 敎坊曲의 하나)>의 한 소절을 곱게 부른 여인은 상아젓가락으로 육편(肉片) 한 점을 집어 조추림의 입가로 가져 갔다. 가무(歌舞)를 논한다면 능히 남창(南昌) 제일이라는, 상춘루(常春樓)가 자랑하는 명기(名妓) 호호(好好)였다. 조추림은 약간 풀린 눈으로 코앞에 디밀어진 육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호호를 꾸짖었다. "호호, 네 이년! 술에 취했다면 거친 산채(山菜)나마 안주가 되겠지만, 정(情)에 취했다면 무엇을 안주 삼아 이 마음의 회포를 푼다는 말이더냐?" 하지만 기분만은 과히 나쁘지 않은 듯, 조추림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호의 허리를 와락 끌어당기며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눌렀다. 얼떨결에 입술을 빼앗긴 호호는 조금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왜 토라졌느냐? 내 입에서 쓴 물이라도 올라오더냐?" 조추림이 묻자 호호는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 "그 정이 어디 천첩에게 돌아오는 정이었나요? 두고 온 여인에 취한 정을 어찌 천첩의 입술에 풀려 하시나요?" 호호의 이 말은 단순히 노류장화(路柳墻花)의 교태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 * * 이레 전, 군계일학의 풍모를 지닌 조추림이 산적처럼 살벌한 수하들을 대동하고 상춘루에 들었을 때... 조추림은 한 덩이의 황금을 누주(樓主) 이(李) 대낭(大娘)에게 던져 주며 상춘루 제일의 기녀를 장강 물놀이에 빌릴 것을 요구했다. 이 대낭이야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불려 나온 상춘루 제일의 기녀가 바로 호호였다. 처음에 조추림으로부터 물놀이의 일정에 관해 들었을 때, 호호는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제시한 남창에서 진강부(鎭江府)까지는 자그마치 일천삼백 리 길이었다. 순풍이 부는 계절이라 해도, 그리고 빠르고 편안한 배를 준비했다고 해도 편도로만 열흘이 넘게 걸리는 긴 여행... 난초처럼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는 무리가 많은 행보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호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한 덩이 황금의 무게 때문도 아니었고, 호랑이처럼 무시무시한 수하들 때문도 아니었다. 한 쌍의 눈... 조추림의 얼굴에 박혀 있는 별빛 같은 한 쌍의 눈이 호호의 혼백을 일시에 앗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조추림이 지난 이레 동안 한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입술 장난을 치는 것. 호호가 분홍빛 마음으로 기대하던 어떤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호호는 몸이 달았다. 혹시 고자는 아닐까 의심이 들어 품에 안기는 척하면서 손수 확인까지 해보았지만, 조추림은 그녀의 뺨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튼튼한 젊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젊음을 지녔으면서 어찌하여 아름다운 여체를 외면한단 말인가? 화방이 출발한 뒤 만으로 닷새째 되던 날, 호호는 드디어 깨달았다. 조추림에게는 이미 마음을 준 여인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호호의 존재는 그 여인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한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기녀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제아무리 명기로 이름높다 할지라도 닳고 닳은 꽃에 불과할진대... 그래도 호호는 단념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단지 가식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한 번쯤은 그녀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길 원한 것이다. 그러나 조추림은 어떤가? 청하는 노래마다 애절한 이별가(離別歌)요, 입을 벌릴 때마다 두고 온 정 타령이었다. 이러니 호호가 어찌 토라지지 않을까? 호호의 앙탈에 말문이 막힌 듯, 조추림은 한동안 빈 술잔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푸념을 내뱉듯 스스로를 책망했다. "네 말이 맞구나, 네 말이 맞아. 내가 박행(薄倖)한 게야." 박행이란 곧 박정(薄情)이었다. 조추림의 자책을 들은 호호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눈빛만 보아도 그 감정의 풍부함을 짐작할 수 있는 조추림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너무 심하게 군 것은 아닌가 하는 죄의식이 그녀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지간에 불과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만나지나 말았을 것을! 지금은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생이별이 아니더냐!" 조추림은 쓸쓸히 부르짖으며 탄식했고, 호호는 이제껏 지켜 왔던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박행하다는 자책조차도 두고 온 여인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발로였던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1 묘왕동주 "정말...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호호는 어깨를 바르르 떨다가 찬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몸을 돌려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스스로가 만든 감정의 세계에 이미 푹 빠져 버린 조추림은 그녀가 사라진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침울해 있던 조추림은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더니 호호가 중도에서 그친 <여관자>의 다음 소절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난밤 꿈에 오시니 그대와 속삭일 때 복사꽃 같은 얼굴 여전하고 버들 같은 고운 눈썹 자주 숙였죠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기뻐 가려다가 또 머뭇거리는데 깨어 보니 꿈... 이 슬픔 어찌 견디리오 昨夜夜半 枕上分明夢見 語多時 依舊桃花面 頻低柳葉眉 半羞還半喜 欲去又依依 覺來知是夢 不勝悲 약간 쉰 듯하면서도 낭랑한 노랫소리에는 애절한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픈 듯 조추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그를, 포도주의 취기와 여관자의 애수를 억지로 빌려서까지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를 계속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계절과 무관한 거친 장포 차림에 얼굴을 온통 가린 치렁한 머리카락과 그 밑으로 언뜻 보이는 뾰족한 턱선이, 마치 한 자루의 요사로운 비수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싸늘히 얼어붙도록 만들고 있는 사내... 조추림의 충복, 귀면도(鬼面刀) 남력(南靂)이었다. "이봐, 남력! 자네는 지금 나를 비웃고 있겠지?" 고개를 푹 떨구고 탄식하던 조추림이 남력이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이 어찌나 쓸쓸했던지, 만약 남력이 손톱만큼이라도 조추림을 비웃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남력은 짧게 대답했다. 실제로 아니기에 아니라고 한 것이다. 아마도 선실 안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을 민산독마 오살량(吳煞亮)이라면 정한(情恨)에 몸부림치는 젊은 주인을 향해 소리없는 조소를 던졌을지도 모른다. 헤어진 지 이제 겨우 보름 남짓한 여인, 나라아합(羅羅阿合)을 그리워하며 저토록 가슴 아파 하는 것은 호걸의 풍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력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조추림과 나라아합, 이 두 남녀가 지난 삼 년 동안 얼마나 괴이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보름 전에 헤어진 것은 그저 사내와 여인, 단순한 두 개의 몸뚱이에 불과하다면 설명이 될까? 만약 조추림이 원하는 것이 나라아합의 몸뚱이였다면, 손만 뻗으면 안을 수 있는 호호만 해도 삼흑(三黑)과 삼백(三白)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명기(名妓)였다. 조추림은 그 부드러운 유방과 매끄러운 엉덩이와 감미로운 사타구니 속에서 얼마든지 육신의 울적함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추림이 원하는 것이 하루하루 썩어 가는 인간의 몸뚱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지난 삼 년 동안 조추림을 괴롭혀 온 가슴 아픈 해바라기의 시발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조추림은 나라아합을 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을 원했고, 그녀의 순결한 사랑을 원했고, 그녀의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원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조추림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가 바랄 때 잠시 빌릴 수 있는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추림은 나라아합과 보름 전에 헤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추림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나라아합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단 한 순간도... "지난 삼 년 동안,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지?" 남력은 물론 알고 있었다. 온갖 방술서(房術書)를 읽고, 용한 의원의 처방을 받고, 심지어 기방의 퇴기(退妓)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면서까지, 조추림은 나라아합으로부터 자식을 보고 싶어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라아합의 수태에 공들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자식이 생기면 그제서야 나라아합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조추림은 한 잔의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뒤 계속 말했다. "그런데 정말 안 되더군. 혹시 내가 씨앗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일세. 그러나... 음... 그 일은 얘기하지 않기로 하세. 어쨌거나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치렁한 머리카락에 가려진 남력의 눈썹이 잠깐 일그러졌다. 조추림이 말한 '그 일'이란, 그의 정(精)이 과연 여인을 임신시킬 수 있는지 확인해 본 일을 가리킨다. 그는 의원의 진맥에 만족하려 하지 않고, 여인 하나를 납치해 강간한 뒤 그 결과를 직접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뻐하며 여인을 죽였다.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자식과 함께... 그 일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남력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참혹한 만행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문제는 나라아합에게 있는 것인데... 자네 혹시 폐경(閉經)이라는 말을 아는가?" "압니다." 남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같은 목석도 그런 것을 아는가?" 조추림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고, 남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폐경이니 월경이니 등등의 말을 모르는 남자는 없었다. 여자들에게만 있는 현상이니 남자가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의 성(性)이 다른 성을 향해 느끼는 호기심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전혀 감안하지 않은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다. "안다니 얘기하기는 편하겠군. 시녀들에게 물어서 알아 낸 사실인데... 나라아합은 이제까지 단 한 차례도 월경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군. 자그마치 삼 년 동안 말이야." 남력은 조추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나라아합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봐도 스물다섯을 넘지 않았다. 그런 여자가 어떻게 벌써 폐경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조추림은 우울한 눈빛으로 강물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나는 확신하고 있네. 그녀의 폐경은 그녀의 의지가 만들어 낸 일이라는 것을..." "설마...?" 남력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조추림의 말이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미오(米吾)의 왼팔을 생각해 봐." 아이의 이름은 미오였다. 아이는 비록 한족의 옷과 한족의 음식을 먹고 자랐지만, 부정할 수 없는 묘족이었다. 검은 피부와 튀어나온 광대뼈와 두터운 입술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아이의 부모는 삼 년 전 묘강에서 남력의 동료였던 이잔(易孱)의 청갑수(靑甲手) 아래 살해되었다. 조추림의 명에 의해서였다. 아이의 왼팔 뼈와 근육은 맷돌에 갈린 두부처럼 처참하게 으스러져 버렸다. 이 또한 조추림이 한 일이었다. 돌도 안 지난 아이가 그런 상처를 입은 데다가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했으니, 어찌 살아남기를 바랄까. 그러나 놀랍게도 아이는 살아남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잘라 내야만 할 것 같던 왼팔도 거의 치료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의 곁에는 항상 나라아합이 있었다. 만약 나라아합에게 죽어 가는 아이를 살려 낼 만한 신비스러운 능력이 있다면,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궁을 폐쇄했다고 해도 마냥 경악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짙은 우수에 잠긴 혼잣말이 조추림의 입술 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2 묘왕동주 정말로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바란다면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는 조추림이었다. 아니,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조추림이었다. 하지만... 조추림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그는 나라아합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신양(信陽)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부의 명이자 그의 의지이기도 했다. 신양에서의 일이 성공한다면, 사부는 평생의 염원을 이룸과 동시에 진정한 천하의 큰어른이 될 수 있었다. 마치 석년의 관산정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 자리는 오래지 않아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만약 그녀에게 더 큰 부귀와 권력을 준다면...' 그래도 여전히 나라아합은 마음을 열지 않을까? 조추림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라아합의 마음을 열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는 일이라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조추림은 강물 위를 바라보았다.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하현은 그의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2 같은 시간. 조추림이 타고 있는 화방에서 남서쪽으로 사백 리 가량 떨어진 장강 위에는, 시원스레 물살을 가르며 하류를 향해 나아가는 네 척의 범선(帆船)이 있었다. 범선은 하나같이 삼백 섬[石] 이상 실을 수 있으리만치 거대한 것이었다. 선체 상단에 동그란 철갑 방패를 촘촘이 대고, 난간 곳곳에 노궁(弩弓)을 설치할 수 있는 강철 격자(格子)가 마련된 것으로 미루어, 수전(水戰)을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분명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은 범선의 커다란 돛들을 공처럼 부풀게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야 단잠에 취했건 말건, 네 척의 범선은 거대한 물 괴물들처럼 강물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다. * * * "진강부까지 가려면..." 전운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길쭉한 손가락을 뻗어 세 점을 차례로 짚으며 말했다. "네 군데의 진(鎭)을 더 거쳐야 합니다." 이곳은 검박하게 꾸민 넓은 선실이었다. 선실 한복판에는 여러 개의 나무못으로 바닥에 고정시킨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등 없는 둥근 나무의자들이 원탁과 마찬가지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원탁 위에는 한 장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중원의 다섯 강과 하안(河岸)의 군사 시설이 상세히 표시된 오강총진도(五江總鎭圖)였다. "흐음..." 의자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매용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이러한 종류의 지도는 일반 사람들이 대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수군(水軍) 내에서도 일진(一鎭)의 지휘관급 이상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극비 문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용소는 그렇게 귀한 지도를 바라보면서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앞에 놓인 것이 오방총진도가 아니라 진시황의 장보도라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 향후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는 전운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을 통과할 수 있는 증명서는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전운리는 지도 위에 얹었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어떻게 한 거지?" 매용소의 곁에 앉아 있던 도연향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평소에 입던 화사한 빛깔의 나군(羅裙) 대신에 신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경장(輕裝)을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은 검은 끈으로 질끈 동여매 틀어 올렸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욱 뇌살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사내라면 그 아찔한 염기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힘들 텐데, 그녀를 바라보는 전운리의 시선은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장강의 진장(鎭將)들 중에는 유난히 양씨(梁氏)와 오씨(吳氏)가 많습니다. 사공녀께서는 그 이유를 아시는지요?" 도연향은 대답하지 못했다. 강호 일만 해도 머리가 아픈 그녀가 어찌 장강수진(長江水鎭)의 장수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수 있으랴. 그러고 보면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군부에 관심을 둔 매용소는 그녀보다 훨씬 더 세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매, 당금 황상의 총비(寵妃)가 양씨와 오씨이다." 매용소가 설명하자 전운리는 바로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또한 천하의 수많은 진(鎭)과 영(營) 중에서 장강수진처럼 이권이 확실한 곳은 없지요. 그러니 배운 것은 없어도 욕심은 한이 없는 양·오 두 간교한 외척(外戚)들이 장강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닙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도연향이 물었다. "하면... 뇌물을 썼단 말인가?" 전운리는 빙그레 웃었다. "이 총사가 호남지부의 자금을 약간 유통해 주었죠. 그 내역에 대해서는 이미 서면으로 이 총사에게 제출했습니다." "이 일의 중요성으로 본다면 호남지부의 창고가 바닥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진은 그렇게 통과한다손 치더라도, 전선(戰船)을 운하(運河)로 들이려면 진장의 직인이 찍힌 증명서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그 점에 대한 대책은 준비되어 있소?" 매용소의 지적에 전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미 쾌마편(快馬便)으로 사람을 보냈지요. 진강부 지부대인(知府大人)의 직인이라면 아마도 우리를 운하로 들여보내 주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수고하셨소, 전 선생!" 매용소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전운리의 말이라면 태산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매용소였다. 지난 보름 동안 전운리가 보여 준 지모(智謀)는 일파(一派)의 군사 자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심원한 계략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과감한 처리는 한초(漢初)의 모사인 진평(陳平)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할 수 있었다. 전운리가 처음으로 한 일은 구멍쥐처럼 영정의 도관에 파묻혀 있던 격설옹을 기만하는 일이었다. 신이궐의 수하를 가장하여 격설옹에게 접근한 그는, 철옥의 움직임을 거짓으로 내비쳤다. 이른바 허장성세(虛張聲勢)의 단순한 계략이었지만, 그 능청스러운 심기에 속아 버린 격설옹은 꽁지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격설옹은 다른 마맥회원에게 급전(急傳)을 띄우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철옥의 그물에 여지없이 포착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마맥회의 본거지까지는 밝혀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맥회는 성격 자체가 철저한 점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였다. 인마를 풀어 날짐승을 추적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탓에, 격설옹으로부터 출발한 전서는 두 군데의 중간 연락처를 거치자 그 종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밝혀진 거점을 급습하여 격설옹, 팔색란(八色鸞), 번휴류(繁 ) 등 마맥회 간부 셋을 처치할 수 있었던 일은, 지난 수년 동안 마맥회 토벌에 골머리를 썩여 온 철옥의 일대 쾌사(快事)가 아닌가. 격설옹 학단성... 과거 남마련 칠사의 일원으로서 찬란한 무명을 드날렸던 그였지만, 스물일곱 명의 철한대가 펼친 합격진(合擊陣)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 포위망을 허문 것만 해도 천행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그의 앞을 검귀 채앙과 남해살인귀(南海殺人鬼) 공야무루(公冶無淚)가 가로막았으니 어찌 도생(圖生)을 바랄 수 있을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3 묘왕동주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격설옹에게 흘린 정보가 육로를 통해 북상 중인 장옥평 일행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용천(龍泉)에서 번휴류를 주살하며 그 사실을 확인한 매용소는, 장옥평의 일행이 사전에 계획한 노선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라 믿었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적도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육로를 고집할 리 없기 때문이다. 육로를 봉쇄당한 가련한 짐승들은 사냥개의 이빨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야 할까? 매용소는 이 질문의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감탄했다. 전운리가 그에게 요구한 '빠른 배'의 용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거치며, 매용소는 전운리를 볼 때마다 수어지교(水漁之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劉) 황숙(皇叔)에게 와룡선생(臥龍先生)이 있다면, 매용소에게는 전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봉황이 동행하고 있다고 했소?" 매용소가 묻자 전운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서마다 대지급(大至急)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봉황이 움직였다면, 잡새도 제법 따르겠구려." 매용소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잡새'란 물론 조명(鳥名)을 암호로 삼는 마맥회의 간부를 가리킨다. "전운리!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도연향이 끼여들었다. 그녀는 매용소와는 달리 전운리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운리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강 어딘가에 있겠지요. 우리처럼 배를 타고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시기를 헤아리건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운하까지 갈 필요도 없을 텐데. 이런 식이라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모를 일이 아닌가!" 도연향은 그 점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운리는 내심 혀를 찼다. 그것은 짧은 소견인 것이다. 장강은 강폭이 넓고 오고 가는 눈이 많았다. 강폭이 넓으면 완벽한 그물을 치기에 어렵고, 오고 가는 눈이 많으면 관의 개입을 부르기 쉬웠다. 더구나 곳곳에 주둔한 진(鎭)의 수군들은, 비록 뇌물을 이용해 진장을 구워삶았다 하더라도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는 문제였다. 그런 점들을 모두 무시한 채 중국 제일의 대강인 장강, 그것도 번화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남경 부근에서 보란 듯이 판을 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운하라면 얘기가 달랐다. 강폭이 좁은 데다가 일단 진입만 할 수 있다면 관부의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전운리는 의미 심장한 눈으로 매용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을 분간할 방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요." 전운리는 운하의 이점을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패는 도연향이 아니라 매용소였고, 적어도 매용소라면 이 정도는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선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호남지부의 총사인 이교였다. "무슨 일이오, 이 총사?" 매용소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교는 부르지 않았는데 함부로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는 얘기였다. 과연 매용소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교의 표정에는 감추지 못한 곤혹이 담겨 있었다. * * * 돛 없이, 단지 사공의 노질만으로 움직이는 작은 배... 그것은 중원의 강이라면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봉선(蓬船)이었다. 그러한 봉선이 매용소가 탄 범선의 측현에 대어 있었고, 범선의 갑판 위에는 봉선에서 건너 온 것으로 보이는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오, 대공자!" 네 사람 중 가장 앞쪽에 서 있던 금빛 장포 차림의 노인이 갑판 위로 올라온 매용소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네모난 얼굴에 오른쪽 눈에 검은 안대를 대어 위맹한 기색이 더욱 완연한 노인이었다. '이자가 왜...?' 매용소는 그의 이름이 맹연교(孟年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강(浙江) 땅에서 한 자루 금도(金刀)로 이름을 떨친 무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현재 철옥의 지부 네 곳 중에서 절강지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맹 지부장도 그간 안녕하셨소?" 담담한 인사... 하지만 맹연교의 출현은 무척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네 곳 지부 중에서 유독 절강지부만은 드러내 놓고 조추림을 지지한 탓에, 철옥주의 다른 제자들과는 전혀 교통이 없는 실정이었다. 이는 호남지부가 매용소를 지지한 탓에 조추림과 전혀 교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매용소의 수양은 면전에서 그런 것을 내색할 정도로 얕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연향은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배가 왜 멈췄느냐?" 도연향은 맹연교는 본체만체, 주위를 둘러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아닌게아니라 네 척의 범선은 모두 강 중앙에 멈춰 있었다. 바람이 가신 것도 아니요 강물이 멎은 것도 아니니, 닻을 내렸음이 분명했다. 도연향의 질타에 대답한 이는, 엉뚱하게도 맹연교의 일행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멈추게 했소." 육 척이 넘는 훤칠한 키에 얼굴이 하얀 서생풍의 중년인... 쐐기처럼 갈라진 새카만 콧수염은 담황색 유삼(儒衫)과 어울려 그 유유함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네가 뭐기에 감히 그런 짓을 하느냐?" 도연향이 날카롭게 묻자 얼굴이 하얀 중년인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뒷짐진 손을 풀었다. 앞으로 드러난 그의 오른손에는 날짐승의 깃털로 만든 화려한 부채가 들려 있었다. "죽고 싶은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도연향은 참지 못하고 발작하려 했다. "잠깐!" 이때 매용소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이 범선을 움직이던 사람은 이교였고, 그는 이유없이 다른 사람의 명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곁에 있는 도연향만 해도 백석학에서 이교로 인해 큰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그런 이교가 유삼 중년인의 말을 듣고 배를 멈췄다...? 매용소는 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참에 유삼 중년인이 활랑거리던 부채가 매용소의 눈에 들어왔다. 자루에 용이 조각된 부채는 오색 찬란한 공작새의 깃털로 만든 귀물(貴物)이었다. 그 부채를 보노라니 매용소는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귀하는 혹시 제갈등룡이 아니오?" 매용소가 묻자, 유삼 중년인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이 사람이 바로 제갈(諸葛) 모(某)외다. 강남을 오랫동안 비운 탓에 한 식구이면서도 대공자와 사공녀께 인사가 뜸했던 점, 깊이 사과드리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4 묘왕동주 그 이름을 듣자 도연향도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등룡자 제갈호. 남마련 칠사의 일원이었고 비연리 휘하 이화산장의 십대고수 중 차석을 차지하던 절정의 무인이 바로 그였다. 이화산장 십대고수의 수석은 눌연수사( 然秀士) 두의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의가 제갈호의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의의 머리가 더듬거리는[ 然] 말투와는 달리 희한하게 명철하다는 한 가지 때문이었다. 만약 무공으로만 서열이 결정된다면 제갈호는 결코 두의에게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세인들은 제갈호가 한 자루의 공작선(孔雀扇)으로 펼치는 등룡십삼선법(登龍十三扇法)을 강호 제(諸) 선법(扇法)의 으뜸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반갑소. 매용소라 하오." 비록 입으로는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고 있지만, 내심만은 조금도 반갑지 않은 매용소였다. 비연리가 마부의 부주이니, 제갈호 역시 마부의 소속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갈호는 이미 삼 년 전에 총단을 떠나 강북의 모처로 파견되었다고 하며, 비연리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철옥주의 심복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조추림의 지지자인 맹연교와 철옥주의 심복인 제갈호... 이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갈등룡이 잘났다는 얘기는 일찍부터 들어서 아는 바이나, 과연 우리 배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군요." 제갈등룡의 이름에 주춤했던 것은 일시지간에 불과한 듯, 도연향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당하신 말씀! 이 사람의 천한 이름이 뭐가 대단하다고 감히 대공자와 사공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겠소이까?" 제갈호는 짐짓 호탕한 몸짓으로 도연향의 가시 돋힌 말을 받아넘겼다. "그렇다면 무슨 대단한 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나요?" 도연향이 재차 추궁했다. 그러자 제갈호는 소매 속에서 작은 깃발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 물건이라면 충분히 대단하지 않을까요?" 깃폭의 길이가 두 뼘이 채 안 되는 작은 삼각 깃발... 검은 천의 가장자리는 백금사(白金絲)로 감쳐 있는데 그 한복판에는 금빛 선명한 '철(鐵)' 자가 수놓여 있었다. 깃발이 나타난 순간,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옥주께 충성을!" 그것은 매용소와 도연향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철옥의 주인 철면신의 신부인 옥령기(屋令旗)의 권위란 이처럼 지고무상(至高無上)한 것이다. 제갈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안색을 엄숙히 하고 외쳤다. "철옥의 제자 매용소는 옥주의 명을 받으시오!" "복명!" 매용소는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옥주께선 물월의 영을 어긴 까닭을 물으셨소." "...!" 매용소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갈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물월의 영을 어기고 장강에 배를 띄운 까닭이 무엇이오?" 매용소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나는 아직 장강 북쪽에 발을 들이지 않았소." 장강을 건너지 말라는 '물월'만은 어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순간, 매용소의 뒤쪽에 부복해 있던 전운리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어렸다. 분명히 철면신에게 대항하겠노라 결연한 결심을 굳힌 매용소였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철면신에 대한 경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 옥령기를 대하자 그러한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굴종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후후! 그러니까 영을 어긴 것은 아니다...?" 제갈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힘껏 발을 굴렀다. 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단단한 소나무로 만든 갑판목이 그의 발 밑에서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 호통 소리가 채찍처럼 매용소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지금 옥령기를 상대로 말장난하자는 거요?" 순간, 전운리는 똑똑히 보았다. 매용소의 뒤쪽에 부복하고 있던 채앙의 어깨가 부르르 진동하는 것을... 삼 척 장검 한 자루로 대륙의 서남부를 주름잡던 희대의 검귀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주인 매용소는 제갈호 따위에게 모욕당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채앙뿐이 아니었다. 전운리는 바로 자신의 옆에서 불편한 다리로도 무릎을 꿇고 있는 이교, 그 거친 손등 위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도드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전운리의 눈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이교를 향한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제갈호의 등등한 위세는 계속되고 있었다. "옥령기를 기만함은 곧 옥주님을 기만하는 행위! 그대는 이것을 인정하시오?" 매용소는 고개를 숙였다. "인정하오." "그렇다면 물월의 영의 어긴 까닭을 사실대로 고하시오!" "나는 아직 장강 북쪽에 발을 들이지 않았소." 매용소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제갈호는 한동안 매용소를 노려보더니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매용소는 앞으로도 물월의 영을 거역할 의도가 없다고 보고해도 좋겠소?" 제갈호의 웃음은, 마치 날카로운 이빨과 억센 발톱을 지니고도 주인을 거역할 수 없는 사냥개의 숙명에 대한 짓궂은 조롱처럼 보였다. 매용소는 가슴속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검붉은 빛깔의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철면신의 제자로 들어간 뒤 여러 차례 대한 바 있던 옥령기였다. 여러 차례 받든 바 있던 명령이었다. 하지만 매용소는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매용소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제갈호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보고해도 좋겠소?" 제갈호는 궁지에 몰린 매용소를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후려치며, 마치 고양이가 생포한 쥐를 가지고 장난치듯이... 매용소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바로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콰앙!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오는 입구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귀곡성(鬼哭聲)이 야공(夜空)으로 퍼져 나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5 묘왕동주 후으으`- 끼아아`- 검고, 희고, 붉은 세 개의 안개 덩어리... 선실 입구를 박살내며 튀어나온 것은 바로 이 삼색(三色)의 안개 덩어리였다. "헉!" "엇!" 경악성은 제갈호와 매용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순간, 매용소는 뒤쪽으로부터 어깨를 잡아채는 억센 손을 느낄 수 있었다. 매용소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손의 임자를 확인한 순간, 반격하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대신 구름처럼 일어나는 의혹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파팡! 파앙`-`! 음풍(陰風)을 동반한 사이로운 기운이 갑판 위에 휘몰아쳤다. 삼색의 안개 덩어리가 제갈호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깨비처럼 허공을 훌훌 날아다니며 제갈호를 향해 음사(陰邪)한 장력을 쳐내는 안개들... 비록 제갈호가 제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한 고수라 할지라도 이러한 장력을 맨몸으로 받아 내고도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이익!" 제갈호는 왼발 끝으로 갑판을 찍으며 팽이처럼 몸을 회전했다. 어느 순간 회전의 축으로부터 환상처럼 피어오르는 화려한 선영(扇影)의 벽은 등룡십삼선법의 방어 수법 중 하나인 회룡동장(回龍銅墻)의 작품이었다. 파팍! 제갈호를 덮쳐 간 안개들이 회룡동장의 엄밀함을 뚫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흐으으`-`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다시 울리고, 안개들은 저마다의 형체를 길쭉하게 잡아늘리며 재차 제갈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제갈호는 이번에는 감히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번보(飜步)의 재주로 일 장쯤 뒤로 달아났다. 콰직! 나뭇결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제갈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갑판 위에는 사람 하나가 빠질 정도로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매용소! 감히 옥령기를 지닌 사자(使者)를 공격하다니!" 제갈호는 공작선을 활짝 펼쳐 전면을 방어하는 한편, 노한 목소리로 매용소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오히려 매용소 쪽이었다. "이 총사! 이게 무슨 짓이오?" 매용소는 자신의 어깨를 잡아챈 마의 초로인, 이교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제갈호를 공격하고 있는 안개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천하에서 오직 이교만이 부릴 수 있다는 살아 있는 귀신, 삼풍(三風)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매용소를 전권(戰圈) 밖으로 끌어 낸 이교는 어느새 그의 옷자락을 놓고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갈라진 입술이 벌어지며 낮고도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죄값은 후에 치르겠습니다." 매용소는 답답했다. 그는 지금 이교의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었다. 삼풍을 움직인 이유를 알고자 한 것이다. "내 말은...!" 하지만 매용소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응시하는 이교의 두 눈, 그 속에 담긴 기이한 열망의 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때 전운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제가 부탁한 일입니다. 이 총사에게는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그를 꾸짖지 마십시오." "전 선생이...?" 매용소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전운리를 응시할 때, 이교가 차가운 음성으로 전운리를 질책했다. "전운리!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 매용소의 시선이 다시 이교를 향했다. '도대체...?' 명석하기 이를 데 없는 매용소였지만, 수하들의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제갈호와 삼풍의 싸움은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교와 심령이 상통(相通)한다는 삼풍이었다. 일단 공격 명령이 떨어진 이상, 이교로부터 다른 명령이 나오기 전까지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려드는 것이 그들의 복명 방식인 것이다. 이제 제갈호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할 때가 도래했다. 그도 항아리처럼 두 개의 귀가 달린 이상, 호남지부의 세 마리 괴물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호남지부가 네 곳의 지부 중에서 가장 강성하다고 알려진 이유는, 지부장 마린보다도 걸출한 능력을 지닌 총사 이교와 사납고 용맹스럽기가 시호( 虎)를 능가한다는 철한대장 괴악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이교의 능력 중 대부분이 바로 삼풍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들의 존재가 철옥 내에서도 얼마나 유명한지 알 만한 일 아닌가. "매용소! 어서 이들을... 헉!" 제갈호는 팔방개동(八方蓋洞)의 초식으로 검은 안개, 흑풍(黑風)의 공세를 막아 내며 다급히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연이어 밀어닥친 붉은 안개 적풍(赤風)은 그로 하여금 말의 끝자락을 혓바닥 안으로 삼키게 만들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다가는 꼼짝없이 어육이 될 형국... 제갈호는 정신을 가다듬고 필생의 공력을 공작선에 주입했다. 그와 동시에 공작선의 깃털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곤두섰다. 이번에는 세 군데 방향에서 삼풍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보이는 것은 괴이한 안개요, 느끼는 것은 지독한 요기였다. "하앗!" 제갈호는 공작선을 앞으로 쭉 뻗어 등룡십삼선법 중의 번신풍우(飜身風雨)와 용음진주(龍吟震州)의 두 가지 절초를 연속해서 전개했다. 촤라락`-` 대나무 회초리가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중인들의 귀청을 따갑게 만들고, 삼풍의 괴기로운 몸뚱이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허공으로 격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갈호가 아무런 손해 없이 이득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던 유삼(儒衫)의 왼쪽 어깨 부위는 맹수의 발톱에 당한 것처럼 거칠게 뜯겨 나갔고, 그곳에서는 은은한 혈흔마저 비치고 있었다. 제갈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 범선의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매용소에게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옥주께서는 이 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한편 제갈호와 같이 온 맹연교의 상태는 어떤가?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옥령기의 사자가 공격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일장의 사태를 멍청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갈호를 거들었다. "대, 대공자! 어서 저들을 물리시오! 이것은... 이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요!" 반역 행위!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6 묘왕동주 그 말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매용소의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옥령기를 받든 사자는 옥주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를 공격한다는 것은 옥주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록 철면신을 거역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굳게 설 것임을 결심한 매용소였다. 그러한 결심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하지만 그는 '반역 행위'라는 맹연교의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이 터져 나갈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철면신(鐵面神). 어린 시절부터 앙모하고 또 두려워하던 사부는 언제나 붉은빛이 감도는 강철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철면신이었다. 그 붉은 강철가면이, 거역할 수 없는 절대의 강인함으로 그의 영혼을 지배해 온 바로 그 붉은 강철가면이, 밤하늘을 꽉 채울 듯한 엄청난 크기로 팽창되어 매용소의 몸뚱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안 돼! 너는 결코 사부를 이길 수 없어! 누군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너는 결국 지고 말 거야! 그래서 개처럼 비참하게 죽게 될 거야! 매용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딛고 있던 갑판이 허방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런 매용소를 구원해 준 것은 한마디 말이었다. 짧디짧은 그 한마디의 말속에는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지존(至尊)!" 정수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선승(禪僧)이 돈오(頓悟)의 순간을 맞은 듯... 매용소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지존? 지존이라고? 매용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격정에 떨리는 전운리의 두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운리는 본디 이런 눈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요한 호수처럼 정지된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차가운 피를 지닌 동물처럼 싸늘한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전운리의 눈은 어떠한 횃불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어떠한 웅변보다도 설득력있는 힘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존! 이제껏 전운리는 매용소를 '대공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지존이라 불렀다. 지극히 존귀하여 그 누구의 지배도 용납하지 않는 완성된 자, 지존이라 불렀다. 전운리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쏘아진 화살입니다." 창백하던 매용소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매용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생사를 걸고 혈투를 벌이는 제갈호와 삼풍을 제외한다면... 매용소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후... 후후..." 처음에는 흐느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고 맥이 풀린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광소가 되었다. "으하하!" 그러다 갑자기 매용소는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멈췄다. "잊고 있었소! 정말로 잊고 있었소!" 매용소는 전운리를 향해 말했다. 이제 매용소의 눈은 더 이상 겁에 질려 있지 않았다. 더 이상 망설임의 기색도 없었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은은하여 경박이 없고 투명하여 믿음이 일어나는 눈동자... 전운리가 반한 바로 그 눈동자였다. "우부(愚夫)의 미망(迷妄)을 깨우쳐 주셔서 고맙소, 전 선생!" 매용소는 두 손을 한데 모은 뒤 전운리를 향해 깊이 읍했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매용소는 드디어 철면신을 적으로 삼은 것이다. 흐으으`-` 삼풍의 공격이 더욱 치열해졌다. 제갈호의 몸뚱이에 새겨지는 상흔의 수도 점점 늘어났다. 맹연교는 사색이 되어 비칠비칠 뒷걸음질을 쳤다. 매용소를 만난다는 것이 그리 마음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이 이 지경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어,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맹연교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직까지는 아무도 그를 막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봉선을 대어 놓은 난간을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봉선은 더 이상 아무도 태울 수 없었다. 복숭아보다 조금 작은 둥근 구체가 야공을 가른 순간... 콰앙`-`! 굉량한 폭음과 함께 봉선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벽, 벽력구(霹靂球)?" 맹연교의 얼굴이 입고 있던 금포처럼 싯누렇게 변했다. 그는 봉선을 향해 날아간 구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화신마 비연리의 걸작품, 벽력구가 바로 그 이름이었다. 그리고 한 가닥 늙수그레한 음성이 맹연교의 귓전에 울렸다. "노부는 사천의 채앙이라고 한다." 어느새 맹연교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노인... 허름한 청의에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촌로(村老)의 그것이었다. "너의 금사초혼도법(金蛇招魂刀法)을 견식하고자 한다." 그러나 검집째 쥐고 있던 왼손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순간, 그 촌로는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발검(拔劍)의 자세에 들어간 검귀 채앙을 평범하게 여길 수 있는 강심장이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후... 맹가와 한번 어울려 보려고 했더니, 채(蔡) 형(兄)에게 선수를 뺐겼군. 그러면 노부는 애들하고나 놀아 볼까?" 너무나 구수한 탓에 오히려 음산하게 느껴지는 웃음 소리... "허억!" "헉!" 맹연교가 절강지부에서 데려온 두 호위, 조씨형제(趙氏兄弟)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깡마른 회삼 노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야무루를 알고 있었다. 공야무루가 살명(殺名)을 드날린 주 무대가 바로 절강과 복건의 남부 해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군. 요즘 애들 대갈통은 영 여물지 않아서 말이야..." 조씨형제를 향해 쌍수를 천천히 들어올리는 공야무루는, 채앙에게 맹연교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쓰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3 세상에는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는 뿌리없는 것 두 가지가 있었으니, 사람 중에는 사생아가 그렇고, 말 중에는 소문이 그렇다. 소문이란 대부분 그 진위가 밝혀지는 순간 생명을 잃게 된다. 사실이 되든지 아니면 거짓이 되든지 가부간에 결정나 버리는 것이다. 비약해 보면, 지겹게도 긴 생명으로 끝내는 어떠한 전설이 되어 버리는 소문이란 진위를 판가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것들의 차지가 되기 마련이다. 전설처럼 변해 버린 소문...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7 묘왕동주 멀게는 선조(禪祖) 달마(達摩)가 신발 한 짝을 남기고 떠난 동방(東方)에 대한 소문이 그랬고, 가깝게는 승려로 변장하여 숙부 연왕(燕王)을 피해 불타는 금릉성을 빠져 나갔다는 혜제(慧帝)의 소문이 그랬다. 그리고 이십 년 전, 가장 위대했던 무인의 죽음 이후... 슬픔과 탄식 속에서도 한 가닥 열망의 빛깔로 은밀히 강호를 부전(浮傳)하던 소문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 * * "호부(虎父)에 견자(犬子)가 없다."라는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사탕발림에 그치기 쉬웠다. 호부가 호자(虎子)만 낳는다면, 호부의 마누라가 어디서 씨도둑질이라도 해오지 않은 이상 아들 대에서 휘청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아버지의 엄청난 위명은 아들에게 있어서 가누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곤 한다. 너무나도 무거워 평생토록 짊어져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짐이... 산서 의혈당의 이대 당주(堂主)인 서문도천(西門渡天)이 바로 그런 가련한 아들 중 하나였다. "그래도 나는 소역발산(小力發山)보다는 나은 편이야." 서문도천은 연무장에서 걸어나오다가 이런 혼잣말로 의기 소침해지려는 자신을 위로했다. 오늘 수련에서 확인한 풍운신창법(風雲神槍法)의 화후는 여전히 팔(八) 성(成)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강호의 친구들은 그를 '풍운을 부르는 창술의 명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 주지만, 부친 서문병이 삼십 이전에 극성에 도달한 것과 비교한다면 불혹을 며칠 앞둔 나이가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그였다. 천품(天品)이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자질이 부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문도천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때마다 가슴속 저 밑바닥으로부터 어두운 빛깔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서문도천은 다시 한 번 혼자 중얼거림으로써 자신을 위로했다. "놈을 보라지! 부친이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있는데도 천마문(天馬門)의 기둥뿌리를 갉아먹고 있잖아?" 소역발산 막강(莫剛)은 강북사패 중 하나인 천마문의 작은 주인이었다. 천마문주 막뢰(莫磊)가 환갑 직전에 본 늦둥이라 나이를 따진다면 서문도천의 막내 동생뻘밖에 되지 않는 엽강... 하지만 만약 막강이 진짜로 서문도천의 막내 동생이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박달나무로 만든 창대 아래에서 골통이 박살났을 것이다. 머리는 돌보다도 단단한 놈이 못된 쪽으로는 희안할 정도로 눈이 트여 입만 벌리면 사기였고 손만 후리면 계집질이었으니, 막뢰가 그 놀라운 무공에도 불구하고 풍증(風症)에 시달리는 것이 모두 아귀 같은 자식새끼 뒤치다꺼리 때문이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헛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서문도천도 놈의 상판을 볼 때마다 갈빗대가 욱신거릴 정도로 살의를 느꼈으니, 부친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서문도천은 금방 다시 우울해졌다. 그래서 이오십보(以五十步)로 소백보(笑百步)한다는 옛말이 있던가. 부친의 찬란한 위명에 먹칠하기는 소역발산이나 풍운창절(風雲槍絶)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반드시!' 서문도천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못난 자식이 가업을 말아 먹었다는 소리야 현재의 상황이니 아무리 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못난 자식이 가업을 말아 먹고 죽었다는 소리만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손으로 잃은 것을 그의 손으로 되찾아야만 했다. 반드시...! 서문도천은 가슴을 쫙 펴고 걸음을 옮겼다. 신시(申時)부터는 아우들의 창법을 봐주기로 약속한 그였다. 비록 그보다 별로 자질이 나을 것 없는 아우들이었지만, 산서 의혈당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는 큰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우선 속부터 채우고 나서...' 불쌍한 마누라가 없는 살림에 어렵사리 장만한 장백웅담(長白熊膽)을, 이번에는 눈썹도 찡그리지 말고 단숨에 먹어 버려야지. 명예 회복도 몸뚱이가 건강해야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데 서문도천은 오늘 장백웅담은커녕 점심도 먹지 못할 팔자였나 보다. 손님, 그것도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이름을 떨친 손님이, 그 이름만큼이나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을 들고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 * * 그 노인이 중문(中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의혈당의 네 형제 중 막내 서문흠독(西門欽篤)이 노인을 향해 일갈을 토한 것은, 노인의 외모와 서문독흠의 성격으로 미루어 능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무척 추했다. 전생에 창귀(瘡鬼)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두창(痘瘡)을 아홉 번쯤 거듭해서 앓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노인과 같은 얼굴을 지녔을 것이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에는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고 두 눈에서는 따사로운 빛이 넘치는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노인의 본래 얼굴은 지금과는 달리 선풍도골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보는 사람들 모두 노인을 홀대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문흠독만은 그랬을 것이다. 서문흠독은 더럽고 추한 것을 유달리 싫어하는 예민한 눈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 그곳에 당도한 서문도천이 서문흠독의 과오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네가 도대체 눈깔이 제대로 박힌 놈이냐?" 서문도천은 서문흠독의 따귀라도 후려갈길 것 같은 기세였다. 만약 노인이 말리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노인이 담담한 웃음과 함께 서문도천을 말렸다. 서문도천은 노인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서문흠독의 따귀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보게, 만향(曼鄕). 자네가 너무 화를 내면 이 늙은이가 더 이상 이 집에서 버틸 수가 없구먼... 이 늙은이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아우 되는 사람을 용서해 드리게나." 얼굴이 추하면 목소리라도 좋아야 사람다울 텐데, 노인은 목소리마저 귀성(鬼聲)이었다. 그러나 서문도천은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이 저렇게 된 것은 창(瘡)에 좋은 약을 시험하기 위해 스스로의 피부를 시험 재료로 쓴 탓이고, 노인의 목소리가 저렇게 된 것은 독(毒)을 이기는 약을 시험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시험 재료로 쓴 탓이라는 사실을... 약이란 곧 독이다. 세상에는 사람을 단숨에 죽이는 병증은 없어도, 그럴 수 있는 약들은 지천인 것이다. 그래서 전설상의 신인인 신농(神農)조차도 약성(藥性)을 파악하기 위해 백초를 삼킨 뒤 그 낯빛이 푸르게 변했다고 하지 않던가. 노인은 신농 같은 신인이 아니었다. 고강한 내공과 약에 대한, 의학에 대한 탁월한 지식이 없었다면 오래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들이 얼굴을 태우고 성대를 상하게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을 아는 서문도천은 노인의 부스럼투성이 얼굴을 대할 때마다, 또 노인의 갈라진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노인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곤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동생 교육을 잘못 시킨 저를 벌해 주십시오!" 서문도천은 황망히 허리를 숙였고, 노인은 하늘을 보며 껄껄거렸다. "벌이라고? 허허! 안 본 사이에 성질이 무척 과격해졌구먼. 만향, 자네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보이." 만향은 서문도천의 자(字)였다. 강호인들 교분이란 한유(閑儒)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에 서문도천은 오랫동안 자신의 자를 들어 보지 못했다. 또한 비록 부친보다는 많이 부족하다고 하나 일방(一方)의 패주인 대(大)의혈당의 문주였다. 감히 누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하대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의혈당의 중문(中門) 앞에 서 있는 추면(醜面)의 노인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멍청이 같은 놈! 어서 인사올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이분께서는 아버님의 오랜 친구이시자, 네 둘째 형을 저승 문턱에서 끌어내려 주신 바로 그 어른이시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8 묘왕동주 서문도천은 서문흠독을 꾸짖었다. 눈이 있어도 하늘을 보지 못한다더니, 어찌 삼자(三子)의 한 명인 성심자(聖心子) 이세명(李世明)을 걸인 취급한다는 말인가. 서문흠독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들짝 놀라 흙바닥에 엎드리려 했다. "죄송합니다! 소생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하지만 추면노인 이세명은 소매를 내저어 서문흠독의 행동을 제지했다. "허허! 그만두시게, 그만둬. 노부는 이제 너무 늙어서 세상의 예법 따위는 모두 잊어버렸네." 서문흠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형의 눈치를 살폈다. 그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서문도천은 다시 한 번 그를 구박했다. "어서 들어가서 네 형수에게 귀빈이 오셨다고 일러라! 황제보다도 더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내 얼굴이 부끄럽지 않게 접대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예, 형님!" 서문흠독은 붉어진 얼굴로 나는 듯이 안채 쪽으로 달려갔고, 이세명은 만사 제쳐 두고 서문병의 사당에 분향(焚香)하기를 원했다. 서문도천은 막내 동생의 과실을 거듭 사과한 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이세명을 조사당(祖師堂)으로 안내했다. * * * 황제보다 더 귀한 손님, 이세명이 대접받길 원한 것은 한 주전자의 맑은 차뿐이었다. 이세명의 소박한 식도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서문도천은 고마움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대접할 수 없는 처지를 손님이 먼저 헤아려 주니 고마운 것이요, 산서 의혈당이 어쩌다가 손님 하나 변변히 대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나를 생각하니 비참한 것이다. 이세명은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소탈한가 하면, 북경식 오리구이와 하북오보채(河北五寶菜)라는 이름의 다섯 가지 싱싱한 야채, 그리고 십 년 이상 묵은 옥호춘(玉壺春)만으로도 쉽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의혈당의 전대 당주 서문병은 친구를 위해 당의 일등숙수(一等熟手)를 이천 리나 떨어진 북경으로 보내 요리를 배워 오도록 했고, 이 일은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호인들 사이에서 '신창(神槍)과 성심(聖心)의 만찬'이라 하여, 금란(金蘭)의 상징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문병이 죽고 가세가 기울자 큰 돈을 주고 고용하던 일등숙수를 더 이상 붙잡아 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빈곤은 부엌과 곳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의혈당 풍성한 식탁의 주역인 숙수들이 하나둘씩 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라 온 의혈당 안주인이 세 명의 손아래 동서들과 함께 터무니없이 커다랗게만 여겨지는 부엌을 지키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이세명이 식사를 사양한 탓에, 살림 꾸려 나가기에 근심이 태산 같던 의혈당 안주인은 시름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이 식사를 마다하는데 주인 혼자 배를 채울 수는 없는 노릇... 서문도천은 고통을 호소하는 위장을 미지근한 찻물로 달래야만 했다. 한 주전자의 차가 다 없어질 때까지,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주제가 이제는 고인이 된 의혈당의 전대 당주인 서문병에 관한 것이 주를 이뤘기에, 대화는 이세명이 묻고 서문도천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세명이 궁금하게 여기는 점은 의혈당의 위세가 이전보다 기운 것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 점에 대해 서문도천은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소생의 재주가 천박해서..."라든지, "면목이 없군요." 등 자책의 여운이 짙게 밴 대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반면 서문도천이라 해서 이세명의 근황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삼자는 신주십일존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추구하는 도에 미쳐 세상을 버린 사람들로 알려져 왔다. 독에 미친 산독자가 그랬고, 검에 미친 무숙자가 그랬고, 의술에 미친 성심자가 그랬다. 그런데 마주앉은 이세명이 바로 성심자가 아닌가. 강호에서 종적을 감춘 지난 수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 이렇게 불쑥 찾아온 까닭은 무엇인지... 서문도천은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폐당(弊堂)을 찾지 않으신 지도 벌써 십오 년이 넘으셨군요." 서문도천의 물음에 이세명은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듯한 시늉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맞아. 내가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으니... 햇수로 꼭 십오 년이군. 허어! 세월은 참 빨라!" 이세명이 말한 전쟁이란 북정회와 남마련 사이의 칠 년 전쟁을 가리켰다. 서문도천이 기억하기로는, 이세명은 그 전쟁을 막아 보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시류란 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전쟁은 벌어졌고,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선친께서는 임종 직전에 어르신을 꼭 한 번 뵙기를 희망하셨죠. 어디 계시는지만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갈을 띄웠을 텐데..." "나도 훨씬 지나고 난 후에야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문을 들었네. 황소처럼 튼튼하던 사람이 그렇게 쓰러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나이로 보아도 북망길을 먼저 밟아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닌 이 늙은이라야 옳을 텐데..." 작고한 서문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이세명은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침중한 안색이 되곤 했다. "괜한 말씀을..." 선친의 오랜 친구 되는 어른의 다정한 위로를 듣자 서문도천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효심이 지극했던 그였기에 선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사실 오랜 벗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아들인 자네의 얼굴을 대하겠나? 그저 심산유곡에서 그럴듯한 의서(醫書)나 한 편 남긴 뒤, 늙은 뼈다귀나마 들짐승들의 주린 배나 채워줄 생각이었다네."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서문도천은 민망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세명이 하고자 한 얘기는 단순한 허례가 아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해결하지 않은 일이 남지 않았겠나?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자네를 찾아왔지." "...?" "자네, 혹시 무왕총(武王塚)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서문도천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웃음을 머금으며 담담히 말했다. "듣기야 들었죠. 하지만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과 조금 달랐다. 서문도천은 무왕총에 관한 이야기를 단순한 소문이 아닌, 불길하기 짝이 없는 소문으로 여기고 있었다. 삼 년 전, 산동에서 이름 높은 어떤 가문의 가주가 바로 그 일 때문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세명은 의미 심장한 눈초리로 서문도천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검패(少劍覇) 장낙웅이 그 일 때문에 죽은 것은 알고 있겠지?" 순간, 서문도천은 깜짝 놀랐다. "어르신께서 그 일을 어떻게...?" "몸뚱이는 늙었지만 귀만은 아직 멀쩡하다네." 그러나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귀 밝은 원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단지 귀가 멀쩡하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산동장가 전대 가주인 장낙웅의 죽음 이면에 무왕총이라는 욕망의 집결체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강북에서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꼽아 본다면 사패의 주인이나 그에 버금가는 인물 정도... 의혈당 안에서도 그 일에 관해 아는 사람은 두 사람`-`서문병이 죽었으니 이제는 한 사람이 되었지만`-`에 불과함을 감안한다면, 이세명이 그 일에 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신기한 일임에 분명했다. "나는 이곳, 의혈당의 위세가 전과 같지 않음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네." 이 대목에서는 으레 나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서문도천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6 장 - 9 묘왕동주 "소생의 재주가 천박하여... 어르신 뵐 면목이 없습니다." 으레 나오는 말임을 알았는지 이세명은 가타부타 의견 없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던 참에 노부가 오래 전 구한 물건이 있어서, 자네에게 전해 줄 요량으로 이렇게 찾아온 것이야. 관 속까지 가지고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감이 있거든." 이세명은 말과 함께 품속에서 넓적한 물건을 꺼내 다탁 위에 올려놓았다. 포장한 유지(油紙)가 누렇게 변색한 것으로 미루어 무척 오랜 세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물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이것이...?" "어디에서 이것을 얻었는지는 묻지 말게나. 남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거니와, 또한 설명한다 해도 자네는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이세명은 직접 확인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 물건을 향해 손을 뻗는 서문도천은 기이한 흥분이 전신의 혈관을 치닫고 있음을 느꼈다. '설마... 설마...!' 두 겹으로 단단히 싸여 있던 유지가 서문도천의 손길 아래 벗겨졌다. 그리고 나온 물건은 다섯 장의 양피지였다. 맨 앞장의 머리 부분에는 힘찬 필치로 네 개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무왕총도(武王塚圖)> 쿠웅! 서문도천은 자신의 심장이 내지른 둔중한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천하제일의 영웅이라 했다.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고금제일의 무신(武神)이라 했다. 무왕 관산정! 누구도 잊을 수 없는 불세출의 위대한 무인 무왕이 영면에 든 곳이 바로 무왕총이었던 것이다. 양피지를 넘기는 서문도천의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다섯 장 모두가 산수도(山水圖)였고, 그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에는 기이한 선과 점이 들어 있었다. 각각의 선과 점들에는 깨알 같은 주석(註釋)이 달려 있었으니, 다섯 장의 산수도가 하나를 이루어 어떤 한 지역의 지리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제목이 달리고 측면에 편(編)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각각 제작된 것이 아니라 한 책의 앞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 이세명이 말했다. "보다시피 이것은 무왕총도의 일부에 불과하네. 다섯 장의 산수도는 무왕총이 있는 산의 형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 총(塚) 안으로는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아." 다섯 장의 양피지를 모두 살핀 서문도천은 이세명의 설명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게다가 산수도라는 것은 본디 화필의 운법(運法)이나 화공의 흥취에 따라 그 모양이 많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애를 쓴 흔적은 보이지만, 단지 그림만으로는 중원 십말만 리의 어느 구석에 튀어나온 산인지 알아 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임에는 분명했다. "이, 이런 엄청난 물건을 어찌 소, 소생에게...?" 엄청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물건... 소문에 의하면 무왕총에는 고금제일인이라 알려진 관산정의 모든 것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홉 초로 이루어진 궁극의 검법 천하오절(天河五絶)이 있을 터이고, 악귀마저 쫓는다는 성스러운 기운 검강진기(劍 眞氣)가 있을 터이며, 마음을 풀어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완벽한 심법 해심각(解心覺)이 있을 터이고, 깃털조차 뜰 수 없다는 약수(弱水) 위를 자유로이 떠다닌다는 비인간(非人間)의 경공 약수영(弱水泳)이 있을 터이다.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극고의 무공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것이 과연 존재할까? 비록 신주십일존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고는 하지만, 무왕은 삼자(三子)·삼마(三魔)·사패(四覇)의 나머지 십 인과는 격이 다른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런 무왕의 유학이 담긴 무왕총, 그 장보도가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침착한 성정의 서문도천이었지만 자신이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세명은 추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보기에는 이상했지만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말하지 않았나? 관 속까지 들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물건이라고..." "하, 하지만...?" 거듭되는 서문도천의 물음에 이세명은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는 자네를 믿어." 그리고 서문도천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자네라면 이 물건을 천하인을 위해 써주겠지." 서문도천은 감격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만약 소생 도천이 어르신의 믿음을 저버린다면, 십족(十族)의 대가 끊어지는 천벌이라 할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서문도천은 구족(九族)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문하생까지 포함한 십족의 후사를 걺으로써 이세명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맹세했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는 이세명이 준 이 무왕총도를 하늘에 대해 한 점 거리낌없이 공명 정대하게 사용할 결심이었다. "이 사람, 정말 과격해졌군. 하지만 자네다워." 이세명은 호탕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서문도천에게 자신이 왜 일어섰는지를 설명했다. "내게는 이런 호화로운 집이 안 어울린다는 거... 자네도 아마 잘 알 게야. 늙은 목숨이나마 하늘이 조금 더 말미를 준다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겠지." 서문도천은 하룻밤이라도 거(居)하고 가시라고 몇 번이고 간청했지만, 이세명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운(浮雲)처럼 떠돌기를 좋아하는 이세명의 성품을 아는 서문도천은 하늘같은 어른을 언제까지나 붙잡고 늘어질 수 없었다.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서문도천에게 이세명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산동에는 무왕총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실마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쪽 사람들과 한번 의논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일 게야." 한 가지 공교로운 일은 그로부터 이틀 뒤, 바로 그 산동으로부터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산동에서 온 손님은 이세명과 마찬가지로 벅찬 상대였지만, 경험은 인간을 노련하게 만들어 주는 모양이어서, 서문도천은 훨씬 유연한 자세로 접대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을 때쯤, 서문도천은 마음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무왕총,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 열망의 집결체가 이패(二覇)의 최고 책임자에 의해 그 신비스러운 껍질을 벗는 순간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입운(入運) 묘왕동주 제 7 장 입운(入運) 1 팔월 이십사일 새벽. 남직예(南直隸:남경성 직할 구역) 진강부의 남동쪽, 비만 내리면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의 벌창이 된다고 하여 오지항(汚池巷)이라는 이름이 붙은 더러운 골목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진강부 거리에서 날품을 팔아 먹고 사는 탁보( 保)였다. 시신이 놓여 있던 곳은 바로 탁보의 집`-`담장에 버텨 놓은 대나무에 더러운 거적때기를 둘러 놓은 것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앞이었다. 요의(尿意) 때문에 모처럼 일찍 깬 탁보가 제 바지를 흥건이 적실 정도로 기겁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신고를 받은 지부아문(知府衙門)에서는 두 명의 포교를 오지항으로 파견했다. 사인을 추정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신원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시신은 목 윗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겨진 몸뚱이로 추정한 결과 시신은 사십대 전후의 사내인 것으로 밝혀졌고, 수사는 거기에서 일단락되었다. 포교들은 더 이상 더러운 골목에 머물기 싫었던지 탁보를 용의자로 몰아 끌고 가버렸던 것이다. 오지항에 살던 천민들은 포교들의 불공정함을 욕하기 이전에 탁보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순진한 탁보! 아무도 없을 때 시신을 발견했다면 재빨리 다른 집`-`물론 탁보의 '집'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앞에다 내다 버릴 것이지, 무슨 상받을 일이라고 아문으로 달려가 신고까지 한단 말인가? 가난하고 힘없는 놈이 순진하기까지 하니, 누명이란 바로 그런 못난 놈들을 혼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지항의 천민들은 끌려 가던 탁보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뱀처럼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 갈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 * 팔월 이십육일 저녁. 차기 가주를 마중하기 위해 산동의 장가를 출발한 영접단은 회남(淮南)의 서쪽, 팔공산(八公山) 기슭에 자리잡은 오가둔(吳家屯)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대규모 영접단의 인솔자는 장가의 오대가신 중 하나인 양충, 불 같은 성격에 손속이 저승 사자처럼 무섭다 하여 벽력염왕(霹靂閻王)이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었다. 육염명이 장가로 띄운 전서에 의하면, 장옥평은 육로를 통해 북상하여 회하(淮河)까지 온 뒤 회하를 타고 황하에 합류, 황하를 거슬러 올라 산동(山東)으로 입성(入省)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들이 회하로 진입할 때 이용할 나루터의 이름은 오율진(五栗津), 이곳 오가둔에서 북서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오가둔은 오율진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마을... 그래서 영접단은 이곳에서 장옥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을근거리던 장(莊) 노이(老二)는 씹고 있던 고깃점을 땅바닥에 퉤, 뱉어 내며 말했다. "이 밤을 넘기지 못하오." 장 노이의 주름진 얼굴은 환자에게 임종을 선고하는 의원처럼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하루만 더 안 되겠는가?" 황벽년(黃碧年)이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지만 장 노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해 보시구려! 팔월이요, 팔월! 이 날씨에 나흘이나 버틴 것도 거의 기적 같은 일인데... 이제는 안 되지요. 내일 아침이면 몽땅 내다 버려야 할 거요." 그러면서 장 노이는 연방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에구구, 이게 돈이 얼만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싱싱할 때 먹어 치울 것을!" "으음!" 황벽년은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장 노이는 검패 장일기의 먼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서, 세가의 주방에서 청춘을 보낸 솜씨좋은 요리사였다. 그가 이번 행보에 따라온 이유는 백여 명에 달하는 영접단원의 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옥평 단 한 사람의 입을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입이 짧아 부모들의 애를 태웠던 장옥평이었다. 정든 집을 떠나 삼 년 동안 객지를 전전한 그에게, 장 노이의 산동 요리는 더없이 훌륭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가신들은 "나 같은 늙은이에게 원행(遠行)은 무리야."라며 투덜거리는 장 노이를 간신히 달래어 이 영접단에 딸려 보낸 것이다. 드디어 장 노이가 솜씨를 발휘할 때가 왔다. 육염명이 약속한 바, 장옥평이 팔공산에 도착하기로 한 날이 온 것이다. 장 노이는 세가에서 준비해 온 여섯 자루의 식칼과 열 개의 냄비, 그리고 다섯 개의 큰 솥을 꺼내 놓곤 큼직한 화덕을 마련하여 장작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환영연(歡迎宴) 준비에 바쁜 것은 장 노이뿐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한 무리는 회남의 우시장에서 육질 좋은 농우(農牛)들을 사 오느라 바빴고, 한 무리는 인근 마을에서 닭이며 돼지 그리고 그밖의 재료들을 구해 오느라 바빴다. 휘장과 천막을 준비하고 잔칫상을 마련하느라 바빴던 사람들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장 노이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열과 성을 다한 탓에 환영연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고기는 잘 손질되어 언제든지 요리하기만 하면 되었고, 밀봉을 뜯지 않은 술단지며 과일, 야채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 정도 준비라면 제후의 잔치라 해도 문제없었으니, 그것을 지켜본 황벽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을 어찌하실 작정이오?" 장 노이는 추궁하듯 황벽년에게 물었다. 황벽년은 장 노이의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불그죽죽한 덩어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흘 전, 장옥평의 환영연을 빛내기 위해 장 노이가 애써 다듬은 고기였다. '숙수(熟手)답다, 숙수다워!' 황벽년은 내심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영접단의 모든 사람들이 혹시 장옥평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는 판국인데, 장 노이는 오직 요리 재료가 상하는 것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 노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요리사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어떻게 하시겠소?" 장 노이가 다시 물었다. "할 수 없지. 상해서 버리는 것보다야 사람들 뱃속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테니... 장 노이가 수고 좀 해주게나." 영접단의 안방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황벽년은 고기들을 요리할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죠!" 알뜰한 요리사 장 노이는 당연한 얘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그래도 보고는 해야겠지...' 비록 아무 성과도 없다 해도 하루 동안의 기다림에 대해서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양충의 호랑이 같은 얼굴이 더욱더 구겨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만, 그래도 수하된 도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황벽년은 힘없는 발걸음을 오(吳) 향로(鄕老)의 집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중원의 어떤 마을이나 한 명씩은 꼭 찾아볼 수 있는 향로, 혹은 향노인(鄕老人)은 '어른'을 가리켰다. 관의 힘이 잘 미치지 않는 이런 작은 씨족마을에서는 향로의 말이 곧 법이었다. 마을 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끼리 시비가 벌어졌을 때에는 판관 노릇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큰 돈을 내고 마을 전체를 빌린 양충이, 마을에서 제일 어른인 오 향로의 집에 거처를 정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 향로의 집 문을 들어서기 직전, "황(黃) 어르신!" 하며 부르는 소리가 문고리를 잡아 가던 황벽년의 손길을 멎게 만들었다. 돌아보니 영접단의 일원이자 세가의 검술교두(劍術敎頭) 중 젊은 축에 속하는 비면검객( 面劍客) 시안(施安)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쪽 볼에 큼직한 흉터가 있어서 비면( 面)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언제나 싱글거리는 탓에 오히려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시안은 처음 보는 사람을 데려오고 있었다. 허름하지만 깨끗한 백삼(白衫)을 입은 그 사람은, 얼굴만 봐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오활(迂闊)하게 생겨 먹은 중늙은이였다. 시골 서당에서 훈장질이나 하면 딱 알맞은 행색인데, 아니나다를까... "이분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봉현(長 縣)에서 책방을 하시는 어(漁) 선생이라고 합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1 묘왕동주 훈장이나 책방 주인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황벽년은 스스로의 안목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은 계속 설명을 했다. "어 선생께서는 양 장로님을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안내해 드리는 중이지요." "양 장로님을?" 황벽년은 의아한 듯 어 선생이란 작자를 훑어보다가 슬며시 물어 보았다. "무슨 용건이 있으신지, 여기 이 사람이 여쭤 보면 안 되겠소이까?" "에헴! 하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해서... 양충 장로를 만나기 전에는 찾아온 용건을 발설하지 못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어 선생은 과연 오활하게 생긴 티를 냈다. 황벽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세가에서도 상당한 고위 간부였고 더구나 영접단 내에서는 두 번째 서열을 자랑하는 그가 아닌가. 고리타분하기가 조밥에 삭혀 둔 가자미 같은 유생 놈에게 면전에서 무시당하고 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알겠소이다! 나를 따라오시구려." 황벽년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시안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수하들에게 식사 준비나 하라고 알리게. 남겨 두었던 고기를 장 노이가 몽땅 요리하는 모양이니, 아마 며칠은 잘 먹을 수 있을 걸세." "그렇습니까?" 시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지 않는 장옥평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지난 나흘, 영접단원들 중 변변한 식사를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지대동(食指大動)이라고,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제 허약해진 위장을 장 노이의 솜씨로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이는 시안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 각 후... 수하들이 있던 처소에서 식사를 알리는 종 소리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안은, 종 소리 대신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콰앙`-`! 한 번의 발길질로 문짝을 부순 사람은 성질이 벽력보다도 급하다는 염왕, 양충이었다. 양충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전투 가능한 인원은 전원 행장을 꾸린다!" 그리고 한번 쓰윽 둘러본 뒤 쿵, 발을 굴렀다. "출동이다!" 벽력염왕이 이런 표정일 때 그 앞에서 식사가 어떻다는 둥 고기가 어떻다는 둥, 구구한 얘기를 꺼낼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령은 즉시 시행되었고, 영접단원 중에서 조금이라도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은 허기진 창자를 움켜쥔 채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 * *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팔월 이십사일 오지항에서 발견된 한 구의 목 없는 시신과, 그로부터 이틀 후인 팔월 이십육일, 팔공산 오가둔을 방문한 고리타분한 책방 주인, 그리고 다시 이틀 후 운하 위에서 벌어진 일장의 처절한 수전(水戰)... 이틀 간격으로 연속해서 벌어진, 일견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은 이 세 가지 일이 실상은 시작부터 끝까지 밀접한 관계를 지녔음을,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2 진강부의 북서쪽에 위치한 구강구( 江口)에는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운관(通運關)이 설치되어 있었다. 통운관의 관리는 남경(南京)에서 직접 파견된 문관(文官)과 구강구에 주둔하고 있는 진강지부 무관(武官)이 공동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운하를 드나드는 선박들을 감시·수색하며, 나라에서 지정한 금품(禁品)을 몰래 운송하는 밀매꾼은 아닌가, 혹은 여인이나 아이들을 배 밑창에 감춘 인신 매매꾼은 아닌가를 수시로 확인하는 것이 통운관 관리자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하를 통한 밀매와 인신 매매는 끊이지 않았다. 범법자들의 수법이 날로 기발해지기 때문일까? 물론 그 이유도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백성들의 울분 섞인 탄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산적·수적이 제아무리 무섭다고 하지만, 푸른 옷을 입은 도둑놈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게야! 시세에 야합한 관원보다 더 무서운 도둑놈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런 관원들을 사갈(蛇蝎)보다도 더욱 증오했다. "아이쿠, 나으리!" 잠방이처럼 가랑이가 착 올라 붙은 허름한 바지를 입은 촌로가 전립(氈笠)을 쓴 군졸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았다. "이 늙은 것이 어디서 지랄이야? 더러운 손 떼고 썩 물러서!" 군졸은 우락부락한 낯짝을 더욱 무섭게 만들며 촌로에게 호통쳤다. 그러나 촌로는 물러설 수 없었다. 소주(蘇州)가 비단 이문이 짭짤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천을 떠나 이곳 진강부까지 뱃길로만 수천 리를 달려온 그였다. 어영부영하다가는 막내딸 시집갈 밑천인 촉금(蜀錦) 다섯 필을 몽땅 빼앗기게 생겼는데, 그가 어찌 물러설 수 있겠는가? "나으리! 제발 소인의 딱한 사정을 살펴 주십시오! 그 비단을 팔지 못하면 소인은 돌아갈 뱃삯도 없는 알거지가 됩니다!" "금품만 압수하고 용서해 주려고 했더니, 이 늙은이가 누구 앞에서 패악(悖惡)을 부리는 거냐!" 군졸은 발을 들어 촌로의 배를 걷어찼다. 군졸이야 범강장달이처럼 기골이 장대했고 촌로는 피죽만 먹고 산 사람처럼 체구가 왜소했으니, 그 억센 발길질을 어떻게 감당할까. 촌로는 나 죽네,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갑판 난간에 머리를 세차게 부딪혔다. 촉금은 엄연히 한 지방의 특산물인데 그것이 금품으로 지정될 리가 없었다. 사정을 보아하니 촌로가 군졸의 비위를 거슬린 모양인데, 그렇다면 얘기는 간단했다. 돈 냄새에 환장한 군졸이 촌로를 윽박질러 돈푼이나 긁어 내려는 수작이니, 이제라도 동전 몇 문 소매 속에 찔러 주면 일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촌로는 그런 기초적인 융통성도 없는 초짜였다. "너무하십니다! 이곳 진강부의 시전에만 나가 봐도 엄연히 촉금을 다루는 포목점이 있을 텐데, 촉금이 언제 금품에 올랐다고 소인을 죄인 취급하십니까? 소인에게 대장(大狀)을 보여 주십시오!" 촌로는 깨진 머리를 곧추세우며 악을 썼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군졸이었다. 동전 몇 문 받아 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세상 모르는 무지렁이 놈이 금품의 목록이 적힌 대장을 내놓으라고 바락바락 대든 탓에, 이제는 주위의 이목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허, 이노옴! 네가 드디어 죄를 이실직고하는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졸의 발길질이 촌로의 면상에 날아가 꽂혔다. 우선 이렇게 입막음을 해둔 다음에 적당한 죄를 뒤집어씌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 도적놈! 동문대로(東門大路)의 한 포목점에서 촉금 다섯 필을 도난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네 입으로 죄를 실토했으니 이제는 둘러댈 말이 없겠지?" 둘러댈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둘러댈 재주가 없었다. 솥뚜껑처럼 큼직한 손으로 멱살을 콱 틀어잡고 있는데 무슨 재주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가자, 이놈! 다시는 도둑질을 못 하게 대가리를 박살내 주리라!" 군졸은 촌로를 나룻배에서 끌어 내리려 했다. 주위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일었지만, 다른 군졸들이 눈을 왕방울처럼 하고 노려보자 쑥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어찌 울분이 없겠고 어찌 의기가 없을까마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디 돈 없고 권세 없는 민초들에게는 울분과 의기를 느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뿐... 어디서 귀신이라도 나타나 군졸 놈을 혼내 줬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바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그들의 바람을 들었음인지, 정말로 누군가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하기야 벌건 대낮에 귀신이 나타날 리는 없었다. 귀(鬼)는 음(陰)이 응결된 것이요, 신(神)은 양(陽)이 펼쳐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통상 말하는 귀신이면 음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바람 같은 몸놀림은 정말 귀신 같았다.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귀신처럼 나타난 사람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허름한 차림의 사내였다. "...?" 촌로를 개처럼 끌고 가던 흉악한 군졸은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자 어금니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렸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2 묘왕동주 "넌 뭐야?" 밀짚모자의 사내는 자신이 누군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말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콱! 첫 번째 발길질이 군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소나무라도 부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발길질이었다. 군졸은 스스로를 바위처럼 단단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는 철한이라 믿고 있었지만, 이 한 번의 발길질이 가져다 주는 고통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끄억!" 군졸은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고 고꾸라졌다. 그러나 밀짚모자의 사내는 그가 앞으로 쓰러지도록 놔두지 않았다. 두 번째 발길질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콰직! 맞은 부위가 턱이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비명조차 없었다. 군졸은 코와 입으로 핏물을 터뜨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배와 턱. 군졸은 촌로와 똑같은 방법으로 당한 것이다. "이놈이!" "감히 관인을 치다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던 탓인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입을 쩍 벌리고 바라만 보던 군졸들은, 저마다 노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통운관의 군졸을 패다니! 그들 중에는 이 통운관에서 무려 오 년 동안이나 복무한 고참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고참의 기억으로도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던 것이다. 밀짚모자의 사내는 금방 네 명의 군졸에게 둘러싸였다. 끄트머리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뾰족하게 갈린 네 개의 창끝이 그를 겨누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된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두 발을 '정(丁)' 자 모양으로 버티며 서 있을 뿐이었다. "고얀 놈! 법을 집행하는 관인에게 대항한 죄는 역적질과 매한가지임을 모르느냐?" 군졸 중 한 사람이 창끝을 빙빙 돌리며 밀짚모자의 사내를 위협했다. 하지만 두 다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앞장서서 덤빌 생각은 없는 것 같았고, 그런 사정은 나머지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선착장 바닥에 큰 대(大) 자로 뻗어 있는 군졸은 외가공부깨나 익혔다고 뻐기고 다니던 자였다. 그런데 밀짚모자의 사내는 그런 외가공부를 단 두 방에 저 꼴로 만들어 버렸으니, 감히 선봉을 자처할 담량은 네 사람 중 누구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이때 중재자가 나타났다. 중재자는 밀짚모자의 사내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밀짚모자의 사내는 벙어리처럼 단 한 마디의 말도 안 했지만, 중재자는 유생처럼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러분! 잠시만 손을 멈춰 주십시오!" 군졸들은 나타난 중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때깔 좋은 푸른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귀한 옥대(玉帶)를 두른 미공자였다.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지극히 방정맞았으니, 일견하기에도 권세있는 가문의 큰도련님 같았다. "소생은 산동에 사는 장(莊) 아무개라고 합니다. 저 사람은 소생의 비복인데, 성질이 못된 데다가 욱하는 습관까지 있어 이렇게 죄를 범하고 말았군요. 본디 아랫것의 잘못이란 상전의 책임이기도 하니, 그 잘못을 소생이 감당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금포 미공자는 군졸들을 향해 길게 읍했다.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당신이 어떻게 그 잘못을 감당한다는 말이오?" 군졸 중 고참 되는 이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금포 미공자는 소매 속에서 한 개의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다치신 분의 치료비를 제하고도 오늘 저녁 여러분들이 한잔 걸치시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저놈에게는 소생이 따끔한 벌을 내릴 터이니, 부디 이것을 받으시고 화를 푸시기 바랍니다." 엉겁결에 비단주머니를 받은 고참 군졸은 그 무게가 심상치 않음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싯누런 빛깔이 언뜻 들어왔다. 이것은 치료비와 술값 정도로 치부할 액수가 아닌 것이다. "험, 험! 하인 놈은 불한당인데 주인은 군자로군! 옛말에 모르고 한 짓은 죄가 아니라고 했으니, 우리도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지요. 이보게들! 자네들도 그만 화를 풀게나." 고참 군졸은 동료들에게 외쳤고, 동료들은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 얼른 창을 거뒀다. 일이 순조롭게 풀어지자 선박에 대한 검색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선박 중에는 금포 미공자가 소유한 두 척의 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배를 검색하면서 군졸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동승한 여인들은 귀부인처럼 고아해 보였고, 호위하는 무사들은 조자룡처럼 날래 보였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타고 있는 배만은 금방이라도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되는 부실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체가 귀하다 하여 고래 같은 배만 타고 다니라는 법은 없으니, 크게 문제삼을 일은 없었다. 군졸들이야 잘 봐달라며 찔러 주는 돈 꾸러미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입운증(入運證)에 세 개의 붉은 도장이 찍히고 배들은 닻을 감아 올렸다. 이렇게 해서 단탈의 일행이 탄 두 척의 배는 유서 깊은 대운하(大運河)에 들어서게 되었다. * * * 파파파`-` 순풍이었다. 돛은 등짝 가득히 바람을 받고는 둔탁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석소용은 삐걱거리는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뱃전 아래로 무심히 흘러가는 운하를 바라보았다. 물빛은 더러웠다. 아예 몽땅 황토색이었다면, "황하와 연결되었으니 그렇겠지."라고 치부해 버릴 텐데,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누렇고, 어떤 부분은 검고, 어떤 부분은 붉었다. 마치 어떤 못된 놈들이 운하 양편에서 여러 색깔`-`좋은 느낌을 주는 색깔은 용하게도 쏙 빼놓고서`-`의 염료들을 풀어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냄새는 또 어떤가? 이건 아예 시궁창이었다. 후각을 불쾌하게 간질이는 악취는 물과 그 위에 둥둥 떠다니는 온갖 종류의 부유물(浮遊物)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런 운하를 가리켜 "천하의 절경[天下絶景]에 사람들의 큰 역사[人間大役]"라고 말한 놈이 있었으니, 참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석소용은 메스꺼움과 이니꼬움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칠팔 장쯤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배와 선수(船首)를 나란히 하고 있는 또 다른 배 한 척을 볼 수 있었다. 전장(全長)은 사십 보(步) 남짓... 그 정도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는 배였다. 그런데 낡았다. 돛대라고 하나 세워 놓은 것도 바람만 불면 부러질까 걱정해야 할 정도로 낡았다. 선실을 가린 판자들도 대부분 말라 비틀어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기 위해 굳이 문을 열고 들어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낡았다. 차마 '배'라고 입에 담기에는 천하의 모든 배들에게 면목이 없어질 정도로 낡았다. 낡아도 너무 낡은 배... 하지만 석소용은 그 배를 욕할 수 없었다. 욕하려면 우선 그녀 자신이 탄 배를 욕해야만 했다. 황석시에서 급히 구한 이 두 척의 배는 생김새도 비슷하거니와 특히 낡기로 말하자면 난형난제(難兄難弟)였던 것이다. '그놈의 앵무새 때문이었을 거야!' 그때 구양지를 찾아 일행에게 날아온 앵무새는 전통(傳筒) 하나를 발목에 매달고 있었다. 전통에 무슨 소식이 들어 있는지 석소용은 알 수 없었다. 마맥회의 간부들은 즉시 장옥평과 육염명을 청해 긴급 회의를 벌였지만, 그녀 같은 꼬마 계집애를 회의에 끼워 줄 정도로 자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회의가 끝난 뒤, 일행이 타고 온 세 대의 마차는 말들과 함께 헐값에 처분되었다. 그리고 산 것이 바로 이 두 척의 배였다. 너무 낡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하여간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췻!" 석소용은 운하에 대고 침을 뱉었다. 파양호 어귀에서 식사를 함께 하며 물길을 일러주던 늙은 사공이 가르쳐 준 수부(水夫)의 침뱉기였다. 노련한 수부들이라면 모름지기 열 가지가 넘는 침뱉기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마치 강호인들이 공수(拱手)로 예를 표하듯, 침을 뱉음으로써 인사를 한다고 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3 묘왕동주 깔끔떨기를 좋아하는 석소용이었으니 처음에는 질겁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몇 번 뱉다 보니 이빨 사이에서 나오는 췻, 하는 소리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는 침에 재미가 들려서, 이제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침을 찍찍 뱉고 다니게 된 것이다. "못된 것은 빨리도 배우는구나." 문득, 굵직한 목소리가 석소용의 귓전을 때렸다. 누군가 바라보니 건너편 배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단탈이었다. "흥!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백(河伯:강의 신)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이렇게...!" 석소용은 잔뜩 뻐기며 늙은 사공에게 들은 멋진 대사를 인용하려 했다. 그러나 단탈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반대편 난간 쪽으로 가버렸다. "어? 이봐요!" 석소용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단탈의 뒤통수뿐이었다. '그 동안 고분고분 대해 줬더니...!' 석소용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이때 그녀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용매(茸妹)! 아무리 소리쳐 봐야 저기까지는 들리지 않아." "예?" 석소용이 돌아보니 장옥평의 멀끔한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다!' 석소용은 반가운 마음이 확 일었다. 이렇게 단 둘이 얼굴을 대해 본 것이 얼마 만의 일이던가? 그런데 석소용의 기쁨은 한 순간에 불과했다. "석 아가씨, 저 소리를 들어 봐요."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장옥평의 등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더러운 운하만큼이나 메스꺼운 구양지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돛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파파`- 돛은 울부짖고 있었다. 센 바람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목소리를 흐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바람을 뚫고 저기까지 소리를 전달하려면 보통 재주로는 안 되죠." 그러자 구양지의 어깨에 앉아 있던 앵무새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안 되죠! 안 되죠!" 주인 되는 계집이 석소용의 재주가 보통에 불과함을 친절히 지적하자, 종 되는 미물은 혹시라도 못 들었을까 봐 그 말을 반복한다. 이 얼마나 호흡이 잘 맞는 주종(主從)인가! 석소용은 대들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단탈의 목소리는 들렸어요!" 곁에 있던 장옥평은 조금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들었어." '어?' 하면서 잠시 생각하던 석소용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장옥평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단탈은 내공 같은 거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석소용은 여행 중에 단탈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형산에서 입은 내상을 걱정하여 "왜 운기하여 치료하지 않아요?"라고 석소용이 묻자, 그는 "그런 거 할 줄 몰라."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가 거짓말을 했군요." 구양지가 말했다. 그녀의 말은 매우 상식적이었다. 어떤 사람은 내공을 축적하는 것을 산을 옮기는 일에 비유했다. 즉 내공은 정(精)·기(氣)·신(神)의 일치 속에서 점진적으로 쌓이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공이 전무한 사람이 불과 며칠 사이에 이기전성(以氣傳聲)의 상승공부를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산 하나를 통째로 옮겨 버리는 것처럼 바라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석소용은 상식에 대한 기준이 구양지와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가 정한 기준을 상식으로 삼고, 그 잣대로 외물(外物)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석소용은 소리를 빽 질렀다. "단탈은 거짓말 안 해!" 구양지의 낯빛에 당혹감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듯한 자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석소용으로부터 짙은 적의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용매! 구양 소저께 너무 무례하게 구는 것 아니니?" 장옥평이 중재에 나섰지만, 이것이 오히려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되었다. "뭐가 무례해요? 장 오라버니도 알잖아요! 단탈은 죽으면 죽었지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 기세가 얼마나 매서웠던지 장옥평은 움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석소용은 분해 죽겠다는 듯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단탈에 대한 신뢰와 장·구양, 두 남녀에 대한 불만이 뒤섞이자, 그녀는 한 마리 살쾡이처럼 사납게 변해 버린 것이다. 장옥평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렇게 발끈한 석소용은 스스로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장옥평이 입을 닫은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석소용의 말처럼, 단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탈은 중원에 발을 디뎠을 때 정말로 내공이 없었단 말일까? 장옥평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단탈 자신조차 모르는 무엇인가가 그의 몸뚱이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약흠에 의해 계획되고 단탈에 의해 이루어진 무엇인가가... 순간, 장옥평의 뇌리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시커먼 독 기운에 휩싸인 괴인이 수많은 화룡인들을 촛농처럼 녹여 버리는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다. "독인(毒人)?" 장옥평은 저도 모르게 그 한마디를 입 밖에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구양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독인이라고요? 그런 게 어떻게 존재할 수가...!" 그러나 그런 구양지도 말을 끝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날 괴인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단탈의 신위를 그녀 또한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소?" 장옥평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독인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기야 강호를 유전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칼끝을 딛고 사는 협사(俠士)들이 무슨 여유로 서지학(書誌學) 따위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몇백 년 전에 천하를 공포에 떨게 만든 대마두 천기독사(天忌毒師)가 독인의 경지에 오른 최초의 독공 고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천기독사라는 인물이 과연 실존했는지의 여부조차도 확인할 수 없으니, 그냥 '있었다니 있었나 보다' 하는 식으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등장한 뒤, 독인에 관한 세인(世人)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여기던 독인이 현실에서도 능히 나타날 수 있는 기대 반 공포 반의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세인의 관점을 바꿔 버린 그 사람은, 독공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 알려진 산독자(山毒子) 약흠이었다. 무왕 관산정이 무림맹을 창설한 뒤 약흠에게 가입을 권했을 때, 약흠의 입에서 나온 냉소에 찬 대답은 아직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 병정놀이는 당신이나 실컷 하시오. 이어 약흠은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독인이 될 것이오. 약흠은 독인이 되는 것만이 궁극의 목표라고 했다. 장자(莊子)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극의 경지를 가리켜 지인(至人)이라 칭하였다. 독인은 독공을 익힌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인과 마찬가지의 존재였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마음을 굳이 움직여야만 한다면, 이는 지인의 행(行)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천지와 하나가 되어, 공기가 움직여 바람이 일어나듯, 빗방울이 모여 강물이 흐르듯, 그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지인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4 묘왕동주 약흠이 전한 말에 의하면, 독인에게는 오직 독공만이 존재할 뿐 내공이라는 것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아니, 그것은 필요를 논하기 앞서 적용되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미 심신과 일치된 독공으로써 행(行)의 모든 것을 조화롭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독인인 것이다. 한참 동안 갑판 위의 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독인이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는 충격 때문이었고, 한 사람은 제 분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분이 사그라들 만한 충분한 시간이 흐르자 석소용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독인이 뭐예요?" 장옥평의 미간에 보일 듯 말 듯한 잔주름이 잡혔다. 상대는 성질만 앙칼질 뿐 견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철부지였다. 그 철부지에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장광설을 풀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때, 구원의 손길이 뻗쳐 왔다. "이(二)공자! 이쪽으로 와보십시오! 반가운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편 갑판에서 장옥평을 부른 사람은, 그를 친손자처럼 아끼는 침염선생 육염명이었다. "용매, 잠깐만!" 장옥평은 석소용에게 양해를 구한 뒤 육염명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 * * 육염명이 서 있던 난간에는 밧줄이 하나 걸려 있었다. 밧줄의 다른 끝은 장옥평이 탄 배로부터 오 장쯤 떨어진 곳에서 흘러가는, 날렵하게 생긴 쾌속정의 난간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오십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육염명의 곁에 서 있었다. 아마도 밧줄을 타고 쾌속정으로부터 넘어온 듯... 장옥평은 그가 바로 육염명이 말한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과연 반가운 사람이었다. "하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우형(愚兄)은 너무나도 기쁘다네." 장옥평을 향해 손을 활짝 벌리며 대소를 터뜨리는 중년인은, 중원 동북방의 표국( 局) 중에서는 능히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동방신행(東方信行)의 대표두(大 頭), 단금상편(斷金象鞭) 위징(魏徵)이었다. 동방신행의 노국주(老局主)인 위하릉(魏河陵)은 검패 장일기의 이종당질(姨從堂姪)이었고, 위징은 위하릉의 아들이었다. 즉 장옥평과 위징은 팔촌 형제뻘이 되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 동방신행이 지금처럼 번성한 데에는 산동장가의 후광이 크게 작용했다. 반백의 위징이 스무 살이나 연하인 팔촌 동생에게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것에 기인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장옥평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위징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설마 수천 리 물길 위에서 현제(賢弟)를 다시 만나다니, 하하!" 위징이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더니 자신이 왜 운하 위에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인즉, 그는 한 건의 표행( 行)을 무사히 마치고 산동으로 돌아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그가 호송한 물건은 제남(濟南)의 거부 조(趙) 원외(員外)가 항주부사(杭州府使)인 장인에게 보내는 생신강(生辰 )이었다. 생신강과 같은 뇌물성이 짙은 물건은 출처를 추적하기 어려운 현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항주부사의 눈에 들 정도의 현물이면 그 부피가 상당한 것이 자명한 일... 그러니 위징의 표행이 냄새를 맡고 파리 떼처럼 달라붙는 수적들로부터 표물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였는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금 어려운 일도 있었지." 위징은 붕대로 감은 왼팔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붕대에 배어 있는 검붉은 피딱지로 미루어, 그의 말처럼 단지 '조금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위징이 휘두르는 단금상편은 상비(象鼻)보다도 오히려 맹렬하다고 하고, 동방신행의 표사( 士)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을 모르는 용자라고 한다. 결국 위징 등은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 뒤, 보무도 당당하게 표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위징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반쯤 벗겨진 그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허어! 산동장가의 후계자를 태운 배가 영 말이 아닌데! 황하로 들어선 뒤에도 몇백 리 물길을 더 가야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우리 배로 옮기시는 게 어떤가? 아예 태산 장인봉까지 모셔다 드리지!" 장옥평은 위징이 가리키는 쾌속선을 바라보았다. 선수부터 선미까지의 모양새가 마치 한 마리 제비처럼 날렵하게 빠진 쾌속선은, 두 개의 돛을 동시에 올릴 수 있으며, 유사시에는 좌우 각각 열네 개씩의 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장옥평의 배는 곰보투성이 촌아낙이었고 위징의 배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절세미인이었다. 누가 절세미인을 마다하고 촌아낙을 택할 것인가? 그러나 장옥평은 촌아낙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맙습니다만, 일행이 있는 탓에..." "일행?" 위징이 반문할 때, 그 '일행'의 우두머리가 위징 앞에 나타났다. "우리 구양 소저는 공자님과 앞날을 약속한 사이랍니다. 비록 누추하나마 장 공자에 대해 결례를 범하지 않고자 애쓰고 있으니, 위(魏) 대표두께서는 너무 우리를 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봉황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들을 소개했고, 위징의 얼굴에는 함지박만한 웃음이 맺혔다. "앞날을 약속했다고? 현제, 축하하네!" 장옥평은 당황한 얼굴로 마봉황과 구양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부부로 꾸민 것은 어디까지나 철옥의 눈을 피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그런데 외척(外戚)인 위징에게마저 그런 식으로 소개한다면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장옥평보다 몇 배는 더 놀란 사람이 있었다. 갑판 저만치에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석소용이었다. 그녀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얼굴 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불거져 있었다. 하지만 마봉황은 그런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배시시 웃으며 위징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정 안심되지 않으신다면... 선두에서 우리들을 호위해 주시지요. 시시한 수적 따위라면 동방신행의 깃발만 보아도 꼬리를 말지 않겠어요?" 위징은 껄껄거리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하하! 위(魏) 모(某)가 귀찮다고 아예 떼어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참이었소이다! 아무 염려 마시오. 분부대로 거행해 드리리다!" 그렇게 호기를 부리던 위징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웃음을 뚝 멈추고 장옥평에게 낮게 속삭였다. "기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인데, 믿을 만한 소문에 의하면 장강 상류 쪽에서 활동하던 여섯 마리 물고기가 난데없이 하류 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네." "여섯 마리 물고기라뇨?" 물고기 몇 마리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온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소문까지 난다는 말인가? 장옥평이 이렇게 생각하며 의아해 할 때, 마봉황이 옆에서 끼여들었다. "여섯 마리의 물고기란 혹시 장강육어(長江六魚)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신가요?" 그러자 위징이 손뼉을 쳤다. "맞소! 하나같이 막돼먹은 놈들이지요." 이어 위징은 장강육어가 삼협을 주름잡는 이름난 수적들임을 설명했다. "놈들이 정말로 물고기 눈깔을 달지 않았다면 감히 육 선생님과 현제가 탄 배를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선박이 파손되는 변을 당하면 곤란한 일 아니겠나? 우형이 앞장설 테니, 현제는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 풍치나 감상하게나!" 장옥평은 내심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동방신행의 표사들이 아무리 용감하다고 해도 마맥회의 정예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짐에 불과한 전력을 가지고서, 위징은 저리도 주제넘는 호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가웠다. 이 한 가지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촌수도 따지기 힘든 위징 한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귀환... 삼 년 만에 만난 위징이라는 피붙이가, 장옥평으로 하여금 이제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게끔 해준 것이다. 바람은 여전히 순풍이었다. 동방신행의 쾌속선이 합류함으로써 이제는 세 척으로 늘어난 선단(船團)은, 운하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5 묘왕동주 * * * 세 척의 배가 지나간 뒤 반 각이나 채 흘렀을까? 운하의 제방 한켠에 굴 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빈민촌의 어느 한 집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던 검은 연기는 무슨 조화인지 어느 순간부터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나무가 탈 때에는 저런 빛깔의 연기가 나지 않는다. 연기의 빛깔이 검든, 푸르든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빈민촌의 주민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화재는 빈민촌 주민들 전체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불길을 초기에 잡지 못하면 판자로 만든 빈민촌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도 몇 차례 그런 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삶을 위협받는 데 남녀의 구분이 어찌 있을까? 노소의 구분이 어찌 있을까? 마을 안에 있던 모든 주민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항아리며 나무통을 들고 달려나왔다. 하지만 빈민촌 주민들의 소화(消火) 작업은 한 무리의 회의(灰衣)장한들에 의해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흐흐!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거라!" 각양각색의 병기들을 꼬나 쥔 회의장한들의 기세는 빈민촌 주민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것이었다. 그들은 불타는 집을 빙 둘러싼 채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고 있었다. 만약 불을 끄고 싶다면 그들이 쥔 칼에 물어 봐야 할 형국... 주민 중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보우!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어쩌라구, 이렇게 불도 못 끄게 막는단 말이우?" 그러자 회의장한 중 하나가 웃었다. "끼히히!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뜨거움을 못 느낄 터이니, 너희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기분 나쁜 쇳소리로 웃어 젖히는 그 사람의 몰골은 목소리만큼이나 기분 나빴다. 그는 등이 구부정하고 다리가 열살바기보다도 짧은 난쟁이였다. 하지만 감히 그를 난쟁이라 놀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쭉 찢어진 눈가에 쉴새없이 흐르는 살기 때문이었다. "왕(王) 말라깽이가 무, 무슨 죄가 있다고...?" 겁먹은 얼굴로도 기어이 묻는 것을 보면, 노인과 그 집에 살던 왕 말라깽이와는 남다른 사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쟁이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게딱지 같은 판자집을 잠시 빌리자는 이 어르신네의 부탁을 거절한 죄가 있지! 낄낄!" 한동안 웃던 난쟁이는 하늘로 올라가던 연기를 힐끔 보더니 곁에 있던 장한에게 명했다. "색이 흐려졌다! 청무분(靑務粉)을 더 뿌려라!" 명을 받은 장한은 들고 있던 작은 단지를 불길 속에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단지가 깨지고, 잠시 사그라들었던 푸른 연기가 더욱 맹렬해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난쟁이는 조금 싱겁다는 표정으로 장한들에게 말했다. "형제들은 신나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우리는 이런 냄새나는 곳에서 불장난이나 하고 앉았어야 하다니... 젠장, 소문이라도 난다면 이 왜조(矮 )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난쟁이 왜조... 그의 이름은 장강 상류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공들에게는 저승 사자의 명호와 다름없었다. 위징이 거론하던 장강육어 중에서 막내, '난쟁이 송사리'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 * * 십리경(十里鏡)이 만들어 낸 동그란 세계 속에서는 왜조가 그토록 거세게 피운 푸른 연기도 한 가닥 파란 실오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운리는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왔는가...?' 전운리는 눈에 대고 있던 십리경을 천천히 떼었다. 왜조가 신호를 준비하고 있던 곳은 장가구(張家溝) 어귀... 전운리가 있는 자영구(子孀溝)에서는 직선 거리로 사십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구(溝)'란 말 그대로 도랑으로써, 운하와 운하 주위에 널린 담수호(淡水湖)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한다. 자영구는 운하로부터 무려 삼십여 리나 떨어진 내륙의 광양호(廣洋湖)로 들어갈 수 있는 도랑이었다. 물론 도랑이라고 해도 그 규모를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물길 양편으로 우거진 갈대밭에다가 군데군데 협곡까지 구비되어 있어서, 웬만한 작은 강을 방불케 하는 것이 운하의 도랑이었다. 전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하늘 서편에 걸려 있었다. 비록 낮이 제법 긴 때였지만, 두 시진만 지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뒤덮을 것이다. '야간전투(夜間戰鬪)가 되겠군.' 야간전투라는 단어는 전운리로 하여금 백석학에서의 실패를 연상케 했고, 덕분에 그는 조금 개운치 않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그의 기분은 진강부를 지나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진강부 통운관에서 지부대인의 직인이 찍힌 '특별 입관증'을 지니고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순간, 전운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유적... 사천의 민강에서부터 데리고 다니던 수하였다. 누구보다도 그의 심중을 잘 헤아려, 단 한 번도 약속한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그래서 아무 의심 없이 믿고 보낸 것인데... "쯧!" 전운리는 혀를 찼다. 유적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해서 전운리가 큰 곤란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교섭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능력에다가 약간의 자금, 그리고 반나절의 시간이 더해지자 통운관의 감독관들은 군소리없이 입운증에 도장을 찍어 준 것이다. 유적을 먼저 파견한 이유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함이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관문을 통과했으니 이제 유적의 존재는 접어 두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운리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아무리 잘 짜인 계획이라도 바늘구멍만한 허점 때문에 무너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적의 실종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느낌이 안 좋았다. 전운리는 그것이 단지 느낌만으로 끝나길 바랄 뿐이다. 이때 두 사람이 전운리 앞에 나타났다. 앞선 이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쩍 벌어진 어깨가 다부져 보이는 건장한 애꾸였고, 뒤따른 이는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붉은 점을 볼따구니에 붙인 말라깽이 사내였다. 앞선 애꾸눈의 사내가 전운리를 향해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 형! 막내가 올린 신호를 보았소?" 나이는 마흔이 조금 넘었을까? 두 가닥 짧은 콧수염과 큼직한 귓불이 무척이나 위엄있어 보이는 그는, 장강의 여섯 물고기 중 맏형인 대왕곤(大王鯤)이었다. 비록 체구는 그리 우람하지 않았지만 담량이 크고 경륜이 풍부한 탓에, 곤(鯤:큰 물고기의 이름)이라는 이름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강상(江上)의 대도(大盜)가 바로 그였다. "물론이오." 전운리는 수중의 십리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대왕곤은 잠시 동안 망설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냈소.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한 가지 확답받고 싶은 것이 있소." 확답이라... 전운리는 대왕곤이 무슨 말을 꺼낼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리 발설하지 않고 대왕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우리는 재물이 필요없소." 대왕곤은 힘주어 말했다. 제아무리 재주가 많고 담대하다고 해도 수적은 어차피 수적이었다. 남의 재물을 약탈하여 살아 가는 수적이 재물이 필요없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운리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대왕곤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재물이라면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모은 지 오래요. 재물 따위로 이 대왕곤을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오산일 것이오." 전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의 스물일곱 개 수채 주인 중 가장 부유하다고 알려진 것이 대왕곤이었다. 전운리는 재물을 풀어 그들을 쓸 능력도 없거니와, 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대왕곤은 하나뿐인 눈에 횃불 같은 안광을 피워 내며 전운리를 향해 물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6 묘왕동주 "그렇다면... 이번 거사에 성공하면 철옥에 높이 등용해 주겠다는 전 형의 약속! 믿어도 되겠소?" "믿으시오." 전운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왕곤은 그 대답의 진위를 파악하겠다는 듯 전운리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은 마음에 창이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눈으로부터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 있었다. 전운리가 바로 그런 부류였다. 이때 묵묵히 서 있던 말라깽이가 나서며 으스스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설마 장강 물을 함께 마셨던 동지들을 속일 생각은 아니시겠지?" 그는 장강육어의 셋째인 반교(斑鮫)였다. '반(斑)'은 얼룩이니 얼굴의 붉은 점을 가리키며, '교(鮫)'는 상어이니 그 잔인한 성품을 가리킨다. 그는 전운리가 활약하던 민강도 장강의 지류였음을 들추어, 그들이 과거 한 물에서 놀았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자네는 이 전운리를 너무 치졸하게 보는군." 전운리는 차분하지만 책망기 어린 목소리로 반교를 나무랐다. 하지만 반교는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았다. "말이야 번지르르하다만, 민강의 전운리가 꼬리 없는 여우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만약 조금이라도 우리를 속이려 한다면 창자를 꺼내어 강물에 헹궈 주지." 반교는 끝이 갈고리처럼 휘어진 기형(奇形)의 아미자(蛾眉刺)를 꺼내 제 손바닥의 굳은살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딱딱한 살점이 얇게 벗겨 나갈 때마다 울리는 기분 나쁜 음향은 어떠한 말보다도 험상궂은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곁에서 대왕곤이 말리는 눈짓을 보내건만 못 본 체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번 기회에 꼬리 없는 여우의 기를 확실하게 꺾어 놓을 요량인 것 같았다. '여섯 물고기 중에는 오직 대왕곤 하나만이 인물이라고 하더니... 쯧쯧!' 전운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투만 해도 그랬다. 대왕곤이라면 한 수채의 두령이자 동년배이니, 자신과 얼마든지 평대(平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교는 엄연히 대왕곤의 수하였다. 저러한 방자함은 과거 한 물에서 놀았던 선배에 대한 예의에도 많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데 반교의 방자함을 징치(懲治)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창자를 꺼내 강물에 헹군다...? 하하!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군." 홀연히 나타난 사람은 깨끗한 자색 무복 차림에 어깨에는 엷은 물빛의 피풍(避風)을 두른 매용소였다. 매용소와 장강육어는 이미 장강에서 합류할 때 잠시나마 수인사를 나눈 상태였다. 반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아무리 방자한 성품이라고 해도 철옥의 대제자 앞에서까지 오만불손하게 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 말은... 그게...!" 반교는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눈앞을 꽉 채운 시커먼 그림자는 그의 변명을 혀뿌리에서부터 틀어막아 버렸다. "건방진 놈!" 뇌까지 진동하는 굉량한 호통과 함께 반교의 오른손이 번쩍 쳐들렸다. "흐윽!" 반교는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발바닥이 지면에서 둥실 떠오름을 느낀 것도 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감히 지존 앞에서 병기를 뽑아 들고 있다니..." 반교의 몸이 앞으로 확 낚아채졌다. 그 순간 반교는 자신을 허공 중에 대롱대롱 띄워 버린 무지막지한 위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검은 윤기가 번들거리는 강철투구에 반쯤 가려 있었다. 하지만 투구의 눈구멍에서 뿜어 나오는 새파란 섬광은 그의 영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떻게 해주랴? 네 말대로 창자를 뽑아서 저 장강 물에 헹궈 주랴?" 떨어지는 벼락처럼 나타나 반교를 애 다루듯 제압해 버린 철갑 거한 괴악은, 이빨 사이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목소리로 으르릉거렸다. 이때 매용소는 괴악과 반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온화한 시선은 대왕곤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호걸께서는 전 선생의 말씀을 완전히 믿지는 않으신 듯한데... 내 눈이 틀렸소?" 대왕곤은 매용소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마리 상처 입은 늑대처럼 거칠게 살아 온 사람이었다. 늑대의 덕목이란, 죽을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 불굴의 투지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용소가 발출하는 기파(氣波)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매용소의 기파는 너무도 유장(悠長)했다. 불과 숨 몇 번 내쉴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대왕곤은 등줄기에 축축한 식은땀이 고이고 두 다리가 가늘게 떨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 저항한다면 그의 신지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이것은 약한 내공이 강한 내공에 침범당해 상하는 경우와 비슷했다. 정신적인 타격은 어떠한 내상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인간을 피폐화할 수 있는 것이다. 뿌드득`-` 악 다문 어금니가 부스러지며, 시큰한 통증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매용소의 부드러운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삼협의 왕, 대왕곤의 자존심이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왕곤은 자신을 눌러 오던 기운이 씻은듯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갑작스럽게 영혼의 자유를 되찾은 그는 벙벙한 가운데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 매용소는 대왕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한가로이 뒷짐을 진 채, 멀리서부터 서서히 물들어 오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용소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 대장, 풀어 주시오." "예!"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반교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신음을 삼켜야만 했다. "괴 대장은 이제 그만 사매에게 가보시오. 구슬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잊지 말고 전해 주길 바라오." 괴악은 깍듯이 복명한 뒤 사람들 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뒤, 매용소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선생은 우리 모두의 머리... 손발이 머리를 믿지 못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오." 비록 시선은 여전히 노을에 두고 있었지만, 그 말이 대왕곤과 반교에 대한 훈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면, 매 공자께서는 일이 성사된 뒤 우리를 높이 쓰신다는 말씀이시오?" 하지만 대왕곤의 기세는 아까에 비해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전 선생이 그대를 추천했을 때, 나는 강상(江上)의 수적 중에 무슨 인물이 있으랴 의심했었소." 매용소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중이 염불을 외는 듯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기이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 그래서 그대들을 단지 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로만 사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매용소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대왕곤을 향했을 때, 대왕곤은 이번에는 감히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내지 못했다. 병법에서는 이런 상황을 일러 "물러섬으로써 오히려 승리를 얻는다[以退無乃得勝]."라고 한다. 한 순간 호흡을 풀어 준 것이 오히려 완벽히 제압하는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매용소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일해 준다면, 내 성공과 실패, 내 영광과 오욕을 그대와 함께할 것이오!" 푹 숙인 대왕곤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 대왕곤을 잠시 내려다보던 매용소는 그 넓은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내 사람이 되어 주시겠소?" 대왕곤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지존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천하에 그 누구를 지존으로 모실 수 있단 말인가. 대왕곤은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7 묘왕동주 "지존!" 쿵! 대왕곤은 단단한 바위 위에 이마를 내리찧었다. 그는 격정에 찬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이 대왕곤, 지존께 간뇌도지(肝腦塗地)의 충성을 맹세하오!" 곁에서 지켜보던 전운리는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3 빈민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역을 지나자 물색이 한결 깨끗해졌다. 어쩌면 겉보기에만 그럴지도 몰랐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 때문에 물색이 깨끗한 흑청빛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줄기 강바람이 단탈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 자라기 시작한 까칠한 머리털 위로 바람이 스쳐 가는 기분은 조금은 서늘했고, 또 조금은 이상했다. 그러나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맑은 목소리가 뒤통수에 부딪친 것은 매우 나쁜 느낌을 주었다. "이거...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단탈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단 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싫어하시는 것 같고..." 한 청년이 단탈 앞에서 웃고 있었다. 멀쑥한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었지만, 어딘지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냄새가 풍기는 탓에 단탈은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안다면 그렇게 안 부르면 되겠지." 단탈의 대꾸가 의외인 듯 청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청년은 금세 히죽거렸다. "그냥 단탈이라고 부르면 되겠소?" 단탈은 대꾸하지 않고 청년을 노려보았다. 푸른 비단옷, 화려한 옥대, 자주빛 가죽신, 그리고 잘생긴 얼굴... 단탈은 문득 청년과 장옥평이 무척 닮았음을 깨달았다. 한 핏줄이 아닌 이상 이목구비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비슷한 체형에 한 가지 옷을 걸쳐 놓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분명한 차이점은, 청년은 장옥평과 달리 어둡고 차가운 느낌을 풍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자루 요사로운 비수가 몸 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느낌... 그것은 계수(溪水)처럼 맑은 목소리와 보름달처럼 환한 웃음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하지만... '훗!'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청년이 무슨 느낌을 주든 단탈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나마 청년과 장옥평의 심상(心象)을 비교하던 단탈은 내심 실소를 흘리며 몸을 돌렸다. 단탈이 난간에 기댄 채 운하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청년은 그가 기댄 난간 옆에 팔꿈치를 괴었다. "단탈, 나는 장손불변이라 하오. 이름이 길어 부르기 귀찮다면 그냥 독짐이라고 부르면 되오." 자신을 장손불변 혹은 독짐이라 소개한 청년은 단탈의 옆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참! 당신은 짐새[ 鳥]가 어떤 놈인지 아시오?" 단탈은 대꾸하지 않았다. 상대가 계속 이렇게 나오니 민망함을 느낄 법도 한데, 장손불변은 조금도 그런 내색 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짐새는 공작새만큼이나 아름답지요. 그 편협하고도 괴이한 미감(美感)은 천하의 어떤 새도 따라올 수 없다오. 하지만 그렇다고 놈에게 넋이 빠지면 곤란한 것이, 짐새의 깃털에는 황소도 단숨에 거꾸러뜨리는 극독이 담겨 있기 때문이오." 단탈은 이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계속 지껄일 거면, 내가 다른 곳으로 가주지." 단탈은 난간에 기댔던 몸을 떼며 말했다. 장손불변의 하얀 얼굴에 한 가닥 냉기가 어렸다. 몸 속에 도사리고 있던 요사스러운 비수가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단탈이 막 몸을 뗀 난간 위에서 파팍,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탈의 몸이 우뚝 멈췄다. "발황전(發黃錢)이라고... 내가 가진 몇 가지 장남감 중 하나요." 장손불변은 웃으며 말했다. 단탈이 기댔던 난간 위에는 두 개의 둥글납작한 물건이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중원인들이 사용하는 동전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잠시 피어오른 하얀 연기는 동전이 박힌 난간 주위가 타들어 가며 발생한 것이었다. 아마도 동전 표면에 무슨 기독(奇毒)이 발린 것 같았다. "아시오? 나는 짐새를 이름으로 쓸 정도로 좋아하오. 그 아름다움을, 그리고 그 독함까지도..." 낌새를 보아하니 한 수 보여 줌으로써 실력을 과시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단탈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뇌칙서를 통해 이야기 들었소. 단탈, 당신이 우리 사람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줬다는 것을... 아! 그것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따지려면 그때 바로 따졌지,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겠소?" 장손불변은 손을 내둘렀다. '이놈은... 제멋대로군.' 단탈은 못마땅했다. 마맥회 무사들을 교육시킨 일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다. 누가 따진다 한들 신경 쓰지 않았을 터, 신경 쓸 것이 없으니 당연히 안심할 것도 없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친구인 그 해동의 협객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려 하오." '해동의 협객'이란 박한을 두고 하는 말일 텐데, 이는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었다. 잡아 놓은 산적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방해한 일이나, 군졸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소란을 일으키는 일 등이 마맥회 사람들에게 눈꼴신 협행(俠行)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말해 봐라." 단탈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운하를 통과하면 목적지인 산동장가까지는 보름 길이오." 느긋하게 이어지던 장손불변의 말이 칼로 자른 듯이 뚝 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앞서보다 두 배는 단단한 질감의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름이면 이별의 시간으로는 충분할 것이오." 잠시 생각하던 단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해라." 장손불변은 고개를 들어 하핫, 소리내어 웃더니 단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쉽게 말하면, 당신들은 장옥평 공자나 본(本) 회(會)에 있어서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요." 단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당신들을 사지(死地)에서 구원해 안전한 곳까지 호송해준 것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오." 누구의 뜻일까? 이자 혼자만의 뜻일까? 아니면 마봉황? 아니면...? 단탈의 눈빛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깨도 조금 처진 것 같았다. 그러나 혈관 속을 흐르는 피는 점점 그 속도를 빨리하고 있었다. 장손불변은 특유의 해맑은 눈빛으로 단탈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가에 떠오른 만족스런 미소는, 단탈의 표정에 떠오른 어두운 기색을 실망의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단탈, 그는 다만 한 사람의 오랑캐에 불과하다. 비록 일신의 재주가 비범하다 해도 이러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그토록 장옥평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개 오랑캐에 불과한 그가 중원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산동장가와 같은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마맥회가 보는, 단탈과 장옥평의 관계였다. 물론 단탈과 장옥평, 그리고 마맥회의 목표는 철옥을 타도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동료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목표가 같다고 해서 모두 동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동료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예도라든지,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해주는 대외적인 비중, 쟁취한 성공을 함께 영위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공동의 계획 등...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8 묘왕동주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단탈은 마맥회와 동료가 될 수 없다. 그는 묘족이고, 기반이 없으며, 미래가 불분명하다. 세 가지 중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단탈을 거부할 수 있는 마맥회였으니, 단탈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설령 단탈이 위의 세 가지 이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해도, 마맥회로서는 그를 축출해야만 하는 필연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단탈과 장옥평 사이의 친분이 남다르다는 점이었다. 마맥회는, 장옥평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오직 마맥회 하나뿐이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됐겠지.' 장손불변은 강유가 적절히 조화된 자신의 언변과 그에 따른 단탈의 반응에 대해 십분 만족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반나절쯤 전에 회주로부터 받은 지시를 훌륭하게 이행했다고 할 수 있었다. 회주는 이 지시를 내리며, 혹시 단탈이 불복할지라도 심하게 손을 쓰지 말 것을 덧붙였다. 이 점은 장손불변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장옥평과 동행하고 있는 이상, 그 친구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뜨거운 맛을 한 수쯤 보여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의외로 단탈은 순한 양처럼 장손불변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다. 장손불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이 무척 쉽게 해결된 셈이다. 장손불변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이 해결된 이상 단탈과 마주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장손불변은 단탈의 앞에 이르러 그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려 주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으니, 너무 우울해 하지는 마시오. 살다 보면 다시 만날 수도 있을 테니... 그러면 이만!" 장손불변은 고개를 까딱여 보인 뒤 단탈을 지나쳤다. 서 있는 사람과 걷는 사람, 굳은 얼굴과 미소 띤 얼굴...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걷는 사람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고, 미소 띤 얼굴은 더 이상 미소 띨 수 없게 되었다. 엄청난 힘. 그것은 정말 엄청난 힘이었다. 그런 힘이 걸음을 옮기던 장손불변의 뒷덜미를 낚아챈 것이다. "케엑!"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던 마맥회의 소영웅 장손불변은, 자신의 입에서 이런 듣기 싫은 비명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목덜미의 옷자락을 틀어 잡혀 자빠질 정도로 낚아채진 사람이라면, 그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고수라면 갑작스럽고 급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를 찬찬히 관조(觀照)할 수 있는 안정된 심안(心眼)을 지녀야 한다. 장손불변은 충분히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삼마지수(三魔之首)인 육족풍의 고제자(高弟子)가 고수 소리를 못 듣는다면, 천하에서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손불변은 지금 이 순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시야 속에서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폭발하듯 교체되는 갑판목과 어두운 하늘과 낡은 난간... 안정된 심안을 바라기에는 너무나도 어지러웠다. 검푸른 강물이 눈앞을 꽉 채우며 달려들었다. 순간, 모든 어지러움이 거짓말처럼 딱 정지했다. 단지 뒷덜미를 움켜쥔 엄청난 힘만이 존재할 뿐. "켁! 켁!" 장손불변은 기침을 했다. 폐 안에 있는 나쁜 기운을 몰아 내기 위한 기침이 아니었다. 기도가 외력에 의해 눌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기침이었다. 뒷덜미를 움켜쥔 누군가가 그의 목을 난간에 걸고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쾌했고, 또 괴로웠다. 드윽`-` 뿌드득`-` 목젖 아래에서 난간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젖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너는 뭔가 잘못 알고 있다." 장손불변의 뒤통수 위로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단탈의 것이었다. "옥평과 나의 관계는 우리 두 사람만의 문제... 너 따위가 끼여들 일이 아니다." 단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손불변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독짐이라는 명성에 얼마나 걸맞지 않는 것인지 깨달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묘족 놈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협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식!" 장손불변은 몸을 틀어 뒷덜미를 누르는 단탈의 손을 뿌리치는 동시에, 소매에 장치된 홍예침(紅霓針)을 발사하려 했다. 홍예침은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암기였고, 더구나 그 표면에는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이라는 극독(劇毒)까지 발려 있었다. 하지만 장손불변은 개의치 않았다. 까짓 오랑캐 한 놈쯤 죽는 것이 뭐가 대수일까! 손속을 삼가라던 회주에게도 할말이 있었다. 먼저 그를 욕보인 것은 놈이 아니던가. 그러나 장손불변의 시도는 단지 시도로 끝나 버렸다. 단탈의 힘은 그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홍예침을 발사하기는커녕 뒷덜미를 쥔 단탈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근육과 힘줄이 비틀어지는 통증이 오른팔 전체를 통해 전달되었다. 팔 전체가 바위 밑에 깔린 듯한 지독한 통증이었다. 이제 장손불변은 보다 확실하게 제압되었다. 단탈은 한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찍어 누르는 한편, 다른 손으로 그의 오른팔을 비틀어 뒤로 꺾어 올리고 있었다. 단탈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디든 있고 싶으면 있고, 가고 싶으면 가는 사람이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라." 말이 끝남과 함께 장손불변의 몸뚱이는 자유를 되찾았다. 단탈이 두 손을 풀고 한걸음 비켜선 것이다. 어깨 관절이 심하게 비틀린 탓인지, 장손불변은 잠시 동안 오른팔을 치켜 들 수 없었다. 단탈은 손을 내밀어 난간에 박혀 있던 두 개의 발황전을 뽑아 냈다. "네 장난감 구경은 잘했다." 단탈은 발황전을 손바닥에 놓고 움켜쥐었다가 장손불변의 발 아래로 던졌다. 뎅`-` 장손불변의 입가가 실룩 일그러졌다. 단단한 구리로 만들어진 두 개의 발황전은 지금 이 순간, 괴상한 모양으로 우그러진 한 덩이 구리뭉치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악력(握力)으로써 동전을 저렇게 만드는 재주는, 보통 사람의 눈이라면 모르겠지만, 장손불변 같은 사람의 눈에는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발황전 표면에 발려 있던 화골액(化骨液)은? 장손불변조차도 육족풍의 대철력기(大鐵力氣)를 운용하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중독돼 버릴 수밖에 없는, 그 놀라운 흡수력의 기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리고..." 비웃는 듯한 눈으로 장손불변을 바라보던 단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함께 다니는 것이 싫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 말을 끝으로 단탈은 돌아섰다. "멈춰라!" 장손불변이 어깨를 떨며 소리쳤다. 모욕을 느낀 것일까? 그의 편편한 미간에는 불그죽죽한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단탈의 냉정한 시선이 다시 장손불변에게 향했다. 두툼한 입술 꼬리가 살짝 말려 들어갔다. 비록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그 입술은 "덤비고 싶다면 사양하지 않겠다."은 뜻을 밝히고 있었다. 장손불변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공기 중에 드러난 여인의 그것처럼 새하얀 두 손이 청삼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약간 숙여지는 어깨와 허리. 이것이 한걸음에 세 가지 암기를 뿜어 낸다는 일보삼발수(一步三發手), 독짐의 임전 태세였다. 눈빛과 눈빛, 기세와 기세가 허공에서 얽혔다. 둘 사이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요란한 폭음과 함께 터져 버릴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때... 콰앙`-`! 폭음이 울렸다. 그런데 그 폭음은 두 사람의 눈빛, 두 사람의 기세,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단탈과 장손불변의 고개가 동시에 폭음이 울린 쪽을 향해 돌아갔다. 어둑한 하늘과 칙칙한 운하가 맞닿은 곳... 한 척의 배가 거센 불길을 토해 내며 검푸른 수면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9 묘왕동주 * * * "괴, 굉장한 물건이군요!" 거대한 몸집에 어딘가 모자란 듯한 목소리를 지닌 털북숭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가슴에 두른 화려한 호심경(護心鏡)이 너무나 안 어울리는 이 털북숭이는, 장강육어의 넷째인 식인경(食人鯨)이었다. 능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강 위에서 노략질이나 일삼던 수적 놈이 어디에서 이렇게 놀라운 위력의 화기를 보았겠는가! 도연향은 그렇게 생각하며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 온 느물거리는 목소리는 도연향의 우쭐한 기분에 흙탕물을 끼얹고 말았다. "폭발력 하나는 놀랍군." 그러나 단지 폭발력뿐이라는 투였다. 이렇듯 시건방진 소리를 심드렁하게 내뱉는 작자는 장강육어의 둘째, 이각초소(二脚梢 )였다. 작달막한 키에 대머리의 정수리 부분이 툭 튀어나와 무척 웃기는 몰골이었지만, 무공으로 말한다면 대형인 대왕곤보다도 오히려 낫다는 '다리 둘 달린 문어'가 바로 그였다. 이각초소는 손에 쥔 낭아곤(狼牙棍)을 빙빙 돌리다가 도연향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덧없는 투망질! 제 발로 들어와 걸려 주기 전까지는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이 아니오?" 말을 하는 동안 느끼한 시선으로 자신의 전신을 쭈욱 훑는 이각초소를 보며 도연향은 본능적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아마도 여자들이 다족충(多足蟲)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혐오와 분노가 뒤죽박죽되어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어느쪽에 더 가까운지 구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복합적인 감정을 아주 단순한 살의로 치환할 수 있는 여자가 있었으니, 도연향이 바로 그랬다. 쌍수 가득 끌어올린 지음(至陰)의 옥녀공(玉女功)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도연향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끌어올린 살의를 누그러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장강육어에 대한 예우에 신경을 쓰라는 매용소의 당부 때문이었다. 예우라니! 뒷골목 창부(娼婦)를 보는 듯한 눈초리로 자신의 위아래를 훑고 있는 구역질나는 버러지에게 예우라니! 그러나 도연향은 매용소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도연향은 철면신의 제자들 중 자신의 입지가 가장 박약하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대사형 매용소는 지니고 있는 놀라운 자질로써, 둘째 사형 조추림은 철면신의 전폭적인 후원으로써 철옥 내에서 굳건한 기반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도연향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매용소 같은 자질도, 조추림 같은 후원도 없었다. 결국 언제나 두 사람보다 한 발짝 뒤진 후발(後發)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고, 혼자 힘으로는 앞에 나설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향해 화친의 손을 내밀어야만 했다. 그래서 도연향은 매용소를 선택했다. 삼 년 전, 두 사람이 산동장가에서 나온 직후의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연향이 매용소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사부의 총애를 받는 조추림에 대한 시기심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한다. 대공자와 사공녀가 친한 것은 과거 한 가지 임무`-`물론 산동장가에서의 일을 가리킨다`-`를 함께 수행한 정리(情理) 탓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도연향이라는 여자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녀에게는 그런 식의 낭만적인 정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추림에게는 나라아합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매용소에게는 어떤 여인도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드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사실 그 점이 그녀의 선택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니까. 어쨌거나 그래서 도연향과 매용소는 한 배를 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철면신에 대한 투쟁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두 사람의 결속은 더욱 공고해졌다. 비록 그 결속이 횡적(橫的)인 동맹에서 종적(縱的)인 예속으로 변질되었다 해도 말이다. '히야!' 이각초소는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눈앞의 도연향으로부터 아찔한 향기가 풍겨 나온 것이다. 그 내음은 장미향(薔薇香) 같기도 했고 울금향(鬱金香)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처녀의 살 비린내에 훨씬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여튼 몸 속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그런 도색적인 내음인 것만은 분명했다. 황홀한 향기는 이내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각초소는 내심 그 점이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까? 도연향이 독문절기인 옥녀공(玉女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릴 때 모공(毛孔)을 통해 그런 향기가 발출된다는 사실을, 방금 전 자신이 저승 문턱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어찌 알까? 도연향은 식인경을 향해 물었다. "뭐가 걸린 거지?" 식인경은 강물 위에 피어오른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생긴 걸로 보니 영락없이 장삿배입니다요." 도연향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식인경이란 놈은 메기를 잡으려고 친 그물에 미꾸라지가 걸려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은 이각초소란 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련한 놈들! 메기가 걸리면 오히려 곤란하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저 뒤에 있는 것이겠지?" 도연향은 불꽃 건너편의 운하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세 척의 배가 떠 있었다. 휘황한 화광에도 불구하고 워낙 먼 거리여서 단지 돛의 희끄무레한 형체만 보이는 세 척의 배... 그러나 도연향의 안력은 고절했다. 그녀는 세 척의 배의 외견이 척후(斥候)로 수집한 정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도연향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식인경보다 반 뼘 정도 더 큰 괴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식인경과는 달리 조금도 모자라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쓴 강철투구의 눈구멍에서는 시퍼런 안광이 쏘아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도연향은 잠시 생각한 뒤 명령을 내렸다. "철삭진(鐵索陣)을 열고 준비한 물건들을 보내라!" 이어 이각초소를 향하는 그녀의 눈빛은 기묘한 느낌을 줄 정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디 그대들의 솜씨를 감상해 볼까?" "우리 솜씨...? 계획과는 다르지 않소?" 이각초소는 약간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왜? 투망질보다 잘할 자신이 없나?" 비웃는 듯한 도연향의 말에, 이각초소는 분노한 듯 낭아곤으로 갑판을 내리찍으며 외쳤다. "좋소! 장옥평이란 놈을 잡아다 드리면 된다 이거지요?" 이각초소는 목을 외로 꼬며 칙, 소리나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 한 자씩 씹어 뱉듯이 말했다. "하백의 후예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 드리리다!" "기대하지." 도연향은 정말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이각초소의 큰소리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 * * 불타는 배는 안동(安東)의 곡물상인 사씨(射氏)의 곡물선(穀物船)이었다. 앞서가던 배는 그 한 척뿐이었으니 그러한 추측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잠시 놀라 있던 장옥평은, 이내 운하 위에서 스쳐 지나갈 때 곡물선에 타고 있던 인부들의 순박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거의 동시에, 그 곡물선은 저렇게 격렬한 화공을 당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장옥평이 탄 배와 선수(船首)를 나란히 한 동방신행의 표선( 船)으로부터 한소리 외침이 들려 왔다. "수적이 나타난 것 같소! 모두 조심하시오!" 외친 사람은 동방신행의 대표두 위징이었다. 그는 벌써 붉은빛이 감도는 단금상편을 꺼내 오른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단순한 수적이 아니오!" 굵은 목소리가 장옥평의 귓전을 때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마맥회의 전투대장 좌훈이었다. 그 역시 마디가 있는 굵은 철곤(鐵棍)을 꺼내 들고 있었다. "수적이 아니면...?" 장옥평의 물음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이는 좌훈이 아닌 마봉황이었다. "약탈이 목적인 수적이라면 곡물선에 불을 지를 까닭이 없지요. 또한..."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7 장 - 10 묘왕동주 마봉황은 앞쪽을 가리켰다. 불타는 곡물선, 그 너머에 화광을 받아 으슴푸레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단지 한 척이 있을 뿐인데, 운하 전체를 꽉 막아 버린 듯한 거대한 범선이었다. "수적들은 저런 배를 이용하지 않지요." 장옥평은 마봉황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적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수군(水軍)에 비해 언제나 열세할 수밖에 없고, 그런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기동성을 극대화해야만 할 터이니, 저런 거대한 배를 몰고 운하로 들어오는 바보 짓은 할 리가 없다는 뜻이다. 안력을 돋워 전방을 살피던 장옥평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대한 띠... 불타는 곡물선은 운하를 가로막은 거대한 띠의 한 부분에 걸려 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곡물선의 화광이 운하를 밝히는 까닭에 눈에 띄지만, 만약 그 화광이 없었다면 검은 물빛 속에서 저런 띠를 찾아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곡물선이 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장옥평은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몇 척의 소선(小船)들이 띠의 중간중간에 떠 있었다. 그것들은 개방( 幇)의 거지들이 허리띠 대신 두르고 다니는 새끼줄의 매듭처럼 보였다. 저것들은 왜 저렇게 떠 있는 것일까? 혹시 뭔가 무거운 물체가 매달린 띠를 수면으로 띄우기 위함이 아닐까? 순간, 장옥평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렇다면 곡물선을 불태운 것도 저 띠일 공산이 컸다. "뭐가 옵니다!" 좌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띠를 지지하고 있던 소선들이 옆으로 움직이자, 마치 군진(軍陣)이 개문(開門)했을 때처럼 띠의 한 부분이 스르르 열리며 그 틈으로부터 무엇인가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사람 한둘이 누우면 꽉찰 정도로 작은 뗏목 세 척이었다. 그런데 뗏목들은 사람을 태우지 않았다. 괴이하게도 묵광이 번들거리는 철관(鐵棺) 하나씩을 태우고 있을 뿐이다. "폭약이 들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이르세요!" 마봉황이 다급히 소리쳤다. 조맹덕(曹孟德)의 백만대군을 적벽(赤壁)에서 몰살시킨 것도 그 시작은 염초(焰硝)와 유황(硫黃)을 실은 황개(黃蓋)의 귀순선(歸順船)이었으니, 이처럼 수전에서 폭약을 이용해 적의 배를 공격하는 것은 고래(古來)로부터 전해 오는 유명한 전술인 것이다. 좌훈은 마봉황의 말을 다른 배에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한 줄기 고혹스러운 목소리가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울려 퍼졌다. -`세 마리의 새를 잡아 형산에서 받은 가르침에 감사드리니, 시동생(媤同生)께선 이 형수(兄嫂)의 사례가 박하다 탓하지 마시기를! 비록 촌각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잠시 동안 장옥평은 어떤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모든 감각과 사고가 일시에 마비된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목소리! 밤 늦은 시간에 따듯한 차를 가져다 주며, 그렇게 책만 읽으시면 건강을 해친다고 상냥하게 걱정해 주던 형수였다. 참한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고 하여 숫기없는 그의 얼굴을 붉게 만들던 형수였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형님의 수급을 흔들며 귀모(鬼母)처럼 잔인하게 웃던 형수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장옥평의 어금니 사이에서 뼛골을 갈아 마시는 듯한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 연향...!" 그런데 이 순간, 마봉황의 심장은 장옥평과 조금 다른 이유로 인해 싸늘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그것은 불안감이었다. 여인의 말 중 '세 마리의 새'에 관한 부분이 그녀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든 것이다. "회주!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좌훈의 목소리는 난간 너머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말과 동시에 갑판을 박차며 몸을 날린 것이다. 좌훈의 경공은 눈부신 것이었다. 한 마리 새처럼 오륙 장을 단숨에 날아가 비연약파(飛燕躍波)의 재주로 수면을 한차례 찍어 차자, 그의 몸은 어느새 한 척의 대나무 뗏목 위에 내려서게 되었다. 좌훈은 뗏목 위의 철관을 와락 열어제쳤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앗!" 철관 안에는 매운 냄새를 풍기는 누리끼리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부패를 막아 주는 지부수(遲腐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좌훈 같은 철담장부(鐵膽丈夫)조차도 비명을 토해 낼 수밖에 없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좌 오라버니?" 난간에 기댄 채 상체를 쭉 내밀고 있던 마봉황이 좌훈을 불렀다. 철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영정에 계시던 학(壑) 노사(老師)이십니다." 뗏목 위의 좌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슴이 터져 버릴 듯한 비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좌훈의 말에 마봉황을 비롯한 모든 마맥회원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맥회 십 인 간부 중에서도 수뇌급이라 할 수 있는 격설옹 학단성이 시신이 되어 흘러온 것이다. 좌훈은 다른 두 척의 뗏목에 있는 철관을 확인했다. 그는 그 안에서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쌍의 크고 작은 철부(鐵斧)를 놀릴 때에는 손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떠벌이 부엉이 번휴류, 그리고 면구(面具)를 이용한 변장술에 능해 구양지와 함께 첩보 활동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천면인(千面人) 팔색란(八色鸞)...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팅팅 불은 돼지껍질처럼 끔찍하게 변해 버린 얼굴들이었다. "이 새끼들...!" 끼드드드`-` 좌훈이 들고 있던 관 뚜껑이 소름 끼치는 음향과 함께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단지 한 손의 힘만으로 한 치 두께의 철판을 비틀고 있는 것이다. "잘도... 잘도 우리 형제들을 죽였겠다!" 좌훈의 분노한 시선이 괴물처럼 운하를 가로막은 범선으로 옮아 갔다. -`오호호! 선물은 만족스럽나요? 그러면 이제 형산에서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해 볼까요? 득의에 찬 도연향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띠를 펼치고 있던 소선들이 다시 그 진문(陣門)을 개방했고, 다섯 척의 쾌속선이 일행들이 탄 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일고, 강물이 출렁거렸다. 조금 전까지 밤 강 위를 맴돌던 아름다운 안온(安穩)과 나른한 평화는 지금 이 순간,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강물은 유계(幽界)의 악귀(惡鬼)처럼 인간의 피와 인간의 육신을 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계의 어떤 악귀보다 더 잔인한 인간들은 타인의 피와 타인의 육신을 탐하고 있었다. 그리고 끔찍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개전(開戰) 묘왕동주 제 8 장 개전(開戰) 1 무겁기로 유명한 곤륜산 현오철(玄烏鐵)로 만든 쌍절철곤(雙節鐵棍)은 한 짝의 무게만 해도 오십 근이 넘었다. 그런 중병(重兵)에 좌훈의 고심단련한 내공이 실리니, 떨어지는 곳마다 성한 물건이 남아날 리가 없다. 으직! 회색 옷을 입은 사내의 머리통에 철곤이 떨어졌다. 그나마 머리통이 산산조각나지 않고 형체라도 제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마에 둘둘 감고 있던 두건 탓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박살난 머리통을 지닌 채 살 수 없다. 왼쪽에서 기회를 노리던 사내 둘이 꼬챙이처럼 생긴 기형 병기를 휘두르며 좌훈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내의 진격은 왼팔이 없는 외팔이의 사각(死角)을 예리하게 찌른 탓에, 만약 상대가 좌훈이 아닌 다른 외팔이였다면 위협적인 공격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가 좌훈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감히!" 한소리 우렁찬 호통과 함께 좌훈의 몸이 반 바퀴 회전했다. 방금 한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낸 철곤이 이무기처럼 허리를 뒤튼 것과 동시에, 텅 빈 왼팔 소맷자락은 돌덩이라도 휘감아 놓은 듯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이러한 곤(棍)·수(袖)의 좌우 양격(兩擊)은 마치 두 사람이 펼친 것처럼 속도와 기세가 판이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장강 위에서 장삿배나 털어 먹고 살던 수적의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파팍! 한 자루 꼬챙이가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터져 버렸고, 다른 꼬챙이는 황소에 받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달려든 두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병기를 쥐었던 팔은 이미 근육과 뼈마디가 으스러진 뒤... 더구나 좌훈의 손속에 담긴 놀라운 경력(勁力)은 그들의 심맥(心脈)을 거칠게 뒤틀어 버린 것이다. "꺼져라!" 좌훈은 소맷자락을 다시 한 번 세차게 휘둘렀다. 펑, 소리와 함께 공간의 어느 부분이 놀라운 힘으로 팽창하고, 반병신이 된 두 수적은 그 힘에 떠밀려 속절없이 강물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여섯 명째... 하지만 좌훈의 살기는 처음과 여일(如一)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주마!" 좌훈은 갑판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흔들리는 작은 배 위에서 이처럼 맹위를 떨칠 수 있는 것은, 일신의 재간을 논하기에 앞서 실전 경험이 얼마나 풍부한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부웅! 철곤이 바람을 가르고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갑판 위의 그 누구도 분노한 좌훈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쾌속선은 모두 다섯 척이었다. 좌훈이 제아무리 사자 같은 용맹을 지녔다 해도, 그가 맡을 수 있는 것은 한 척이 한계였다. 그에게 선택된 불운한 쾌속선 위에서는 일장의 장쾌한 도살극이 펼쳐졌지만, 나머지 네 척은 본래의 의도대로 장옥평 등이 타고 있는 배로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 * * "놈의 실력으론 어림없는 일입니다." 괴악이 말하자 도연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잠시 후 식인경의 새우눈이 휘둥그래졌다. 그의 둔한 머리는, 괴악이 말한 '놈'과 자신의 의형 이각초소가 하나임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 그렇다면 왜...?" 실력 차가 그렇게 분명하다면, 왜 멀쩡히 있는 사람을 부추겨 위험 속으로 내몬다는 말인가? 식인경은 도연향의 심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연향은 차갑게 웃을 뿐 식인경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벌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그녀에게 있어서 장강육어란, 매용소의 부탁 때문에 직접 손대지 않는 인간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다. "하백의 후예라고? 허허! 문어 대가리가 혓바닥 하나는 매끄럽더이다." 식인경은 웃음 소리가 들려 온 곳을 바라보았다. 갑판의 난간 위... 불어오는 강바람 속에서도 한 점 흔들림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공야무루가, 뭐가 그리 좋은지 홀쭉한 하관에 괴이한 흉소를 매달고 있었다. 식인경의 펑퍼짐한 얼굴이 노오랗게 물들었다. 비로소 이 새로운 동업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아 버린 것이다. '식인(食人)'이라는 끔찍한 외호와는 달리 천진할 정도로 순박한 그였으니, 이 순간의 당혹감이야 여북 클 것인가. 하지만 비정한 현실은 식인경의 심정과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사르릉`-`! 한 쌍의 백옥환(白玉環)은 쟁쟁( )한 소리를 토해 내며 날쌘 물수리처럼 허공을 선회했다. 그 은은한 광채는 영봉(嶺峯)에서나 볼 수 있는 장엄한 불광(佛光)을 방불케 했다. 어둑한 밤하늘 속을 화려하게 비행하는 한 쌍의 빛무리... 하지만 그 화려함이 육족풍의 삼대절학 중 하나인 비류비환술(飛流飛環術)의 정화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옥환의 아름다운 궤적(軌跡) 안에는 많은 화살들이 존재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한 척의 쾌속선에서 쏘아진 것이다. 목표는 장옥평이 타고 있던 낡은 배... 하지만 그것들 중 목표를 맞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은 튕겨지고, 부러지고, 휘어졌다. 모두 백옥환이 뿜어 낸 비류비환술의 신력(神力) 때문이었다. 할 일을 마친 백옥환은 발출한 사람에게로 되돌아왔고, 알맞게 살이 오른 새하얀 팔이 그것을 맵시있게 받아 들었다. 마봉황이었다. "야앵무! 본 회주를 엄호하라!" 마봉황은 구양지에게 짧게 명한 뒤, 전망이 좋은 선실 지붕으로 몸을 날렸다. 어느 틈엔가 화려한 치마를 벗고 붉은 경장으로 갈아입은 구양지는 둥근 구리방패를 들고 마봉황의 뒤를 따랐다. 물론 무공의 고하를 논하자면, 마봉황은 삼마지수(三魔之首) 육족풍의 진전을 그대로 이었으니 오히려 구양지가 엄호를 받아도 될 입장이었다. 하지만 마봉황은 일행의 책임자였다. 책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고강한 무공이 아닌, 상황을 파악하여 전체를 통솔하는 지휘력이다. 그리고 마봉황은 그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진력을 쓸데없는 곳에 소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실 지붕에 오른 구양지는 마봉황의 엄호에 최선을 다했다. 직경 세 자 남짓한 구리방패와 부친에게 전수받은 관홍지(貫虹指)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구양지의 엄호를 받으며, 마봉황은 현상황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나타난 다섯 척의 쾌속선 중 좌훈이 올라탄 한 척은 이미 마봉황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괴멸된 상태였다. 좌훈의 능력이 발군인 탓도 있지만, 적들의 무공이 너무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네 척은 운하를 횡으로 가로막고 일행을 향해 화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동방신행의 표선에는 두 척이, 그리고 마봉황이 지휘하는 배와 독짐이 지휘하는 배에 각각 한 척이... 놈들이 표선에 특별히 비중을 둔 까닭은 무엇일까? 마봉황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마도 이쪽 사정에 대한 분명한 정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겉보기에 가장 화려하고 가장 빠른, 하지만 실제로는 일행과 무관한 표선에 일행 중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마봉황은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해 두었다. 아무리 철통 같은 그물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꾸민 일인 바에야 반드시 허점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녀는 철옥과의 지리한 숨바꼭질을 통해 그러한 법칙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만약 적의 주력 또한 표선을 일차 목표로 삼아 준다면... 이러한 적들의 오판은 최후의 순간, 마봉황을 사지(死地)에서 구출해 줄 중요한 요인이 될지도 몰랐다. 파파팍`-` 화살의 비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 단순한 공격이 큰 위력을 발휘하는 곳은 표선뿐이었다. 마봉황의 배는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고수가 여럿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화살이란 단지 운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애물 정도에 불과했다. 그 점은 독짐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독짐의 배는 오히려 화살로써 적들을 곤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 배에는 능히 신궁(神弓)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궁수`-`단탈이란 묘인의 활 솜씨가 그토록 빠르고 정확한 것은 마봉황에게도 무척 의외로운 일이었다`- 가 탑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 1 묘왕동주 하지만 동방신행의 표선에는 불행히도 고수도 없고, 궁수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표선에는 두 척의 쾌속선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표선은 곧 현현상마(舷舷相摩)의 격렬한 백병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마봉황은 좀더 시야를 멀리 가져 갔다. 처음, 곡물선을 불태운 검은 띠와 그녀의 선단(船團)과의 거리는 오십여 장으로 접근해 있었다. 범선과 띠의 거리도 그 정도로 보이니, 그녀의 선단과 도연향의 범선은 백 장에 가까운 거리를 두고 대치한 것이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처음 폭발을 발견한 순간 돛을 내린 탓에 그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 마봉황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검은 띠와 그녀의 선단 사이, 오십 장 거리 안에 동쪽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물길 하나를 찾아 낸 것이다. 운하의 동편 일대는 갈대숲이 우거진 탓에 이제껏 그 물길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쯤 나타나는 물길이라면...?' 마봉황은 머릿속에 외워 두었던 운하의 하역도(河域圖)를 떠올렸다. 장가구(張家溝)와 계수호(界首湖)를 지난 지 반나절이었으니, 저 물길은 광양호로 통하는 자영구일 공산이 컸다.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은 왜 사전 배치를 이렇게 해놓았을까? 마치 그녀가 자영구로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쿠웅`-`! 이때 우측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마봉황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표선을 공격하던 두 척의 쾌속선 중 하나가 표선의 측현에 뾰족한 머리를 틀어박고 있었다. 표선의 측현 윗부분이 부숴지며 크고 작은 두 배는 한 덩어리로 얽혔고, 쾌속선에 탄 일단의 무리들이 기괴한 함성을 지르며 표선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표선을 포기할 것인가, 구출할 것인가? 상황은 신속한 판단을 요구했고, 마봉황은 그 요구에 부응했다. 동방신행의 표사들이야 몰살당하건 말건, 마봉황과 마맥회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표선은 포기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단지 일행이 지닌 배 중에서 가장 크고 빠르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놈들이 표선에 집착하는 이상, 표선은 보다 훌륭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마봉황은 다른 배 위에서 사자처럼 싸우고 있던 독짐 장손불변에게 천리전음(千里傳音)을 보냈다. * * * "크하하!" 이각초소는 우렁찬 광소(狂笑)를 터뜨리며 낭아곤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그 위력이 미치는 곳마다 광풍이 일어나니, 상갑판의 난간에 매달아 둔 등롱이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쓰는 낭아곤은 여느 것보다 다섯 뼘이나 더 길었다. 본디 키가 작은 편인 이각초소였으니 그 물건이 다루기 벅찬 장병(長兵)임에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낭아곤을 부리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녹림도들과의 싸움 속에서 청춘을 보낸 위징이 십 합을 채 버티지 못하고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늙은이! 골통을 부숴 주마!" 이각초소는 낭아곤을 길게 잡고 도끼질을 하듯 내리찍었다. 부웅, 하고 일어나는 바람 소리만 들어 보아도, 골통을 부숴 주겠다는 그의 선언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징 또한 단금상편의 맹렬함을 장기로 삼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세를 있는 대로 끌어올리며 뇌문(腦門)을 노리고 떨어지는 낭아곤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빠악! 요란한 격타음과 함께 위징의 손아귀가 부르르 진동했다. 마치 천근의 짐을 짊어진 사람처럼 두 무릎이 시큰거려 왔다. 그는 맹렬함에서 이각초소에게 한 수 뒤진 것이다. "크하하! 죽엇!" 기세를 얻은 이각초소는 다시 한 번 광소를 터뜨리며 낭아곤을 힘껏 내리찍었다. 위징은 자신이 그 일격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시큰거리는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동작이 의지보다 한 박자 정도 늦게 이루어졌고, 그것이 곧바로 위징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다. 부욱`-` 낭아곤 윗부분에 촘촘히 박힌 쇠송곳들이 위징의 얼굴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세차게 훑고 지나갔다. 뜯긴 살덩이들이 갑판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데, 궤도를 수평으로 전환한 낭아곤이 그의 관자놀이 위를 날쌔게 후려쳤다. 퍽! 이미 첫 번째 일격에 명줄의 대부분이 끊겨 버린 위징은, 관자놀이 윗부분이 없어진 처참한 시신이 되어 서서히 뒤로 쓰러졌다. 우두머리가 이럴진대 수하들이야 오죽할까? 싸움이 벌어진 지 일 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죽은 자를 세기보다 산 자를 세는 편이 훨씬 빨랐다. 제아무리 용감한 동방표행의 무사들이라 할지라도 이미 오랜 표행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수전은 너무 돌발적이고, 너무 흉험했다. 이각초소는 위징을 죽인 여세를 몰아 근처에서 어물대던 표사 하나를 박살낸 뒤, 양양한 목소리로 외쳤다. "죽여! 모두 깡그리 죽여 버려! 우리 삼협(三峽)의 호걸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난 나리들에게 보여 주자!"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날아온 낭랑한 웃음 소리가 이각초소의 양양한 기분을 한 순간에 뭉개 버렸다. "하하! 그 모습을 나도 보고 싶구려!" 흠칫 놀란 이각초소의 시선이 웃음 소리의 임자를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세 가닥의 섬광을 발견한 것이다. "헛!" 이각초소는 무화곤(舞花棍)의 재주로써 낭아곤을 머리 위로 휘돌렸다. 마구잡이로 배운 곤법이 아닌 탓에 그의 대응은 빠르고 정묘(精妙)했다. 따땅, 소리와 함께 세 가닥 섬광은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곤을 회수해 다음 공격에 대비하는 이각초소 앞에 푸른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질좋은 청색 비단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미공자였다. "보아하니 철옥의 졸개는 아닌 것 같고... 어디 명호나 들어봅시다." 미공자는 여유있는 목소리로 문명(問名)했다. 물론 고분고분 대답할 이각초소가 아니었다. "흥! 암기나 쓰는 쥐새끼에겐 과분한 명호이시다!" 노호(怒號)와 함께 낭아곤이 허공을 헤집기 시작했다. 붕`-` 휘잉`-` 때로는 쪼개고, 때로는 걸어 베며, 때로는 무찌르는 낭아곤의 현란한 율동은 반경 일 장을 살기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이각초소가 사용하는 곤법(棍法)의 원류는 군(軍)의 삼칠창술(三七槍術)이었다. 수적이 되기 전에는 변방 진(鎭)에서 창술 교두(校頭) 노릇을 했던 그였으니, 그의 곤법이 예사롭지 않은 것도 모두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미공자는 낭아곤이 만들어 내는 살기의 소용돌이 속을 미꾸라지처럼 부드럽게 유영했다. "하하! 암기를 쓴다고 너무 탓하지는 마오. 창이면 창, 암기면 암기... 세상 사람들이 먹고 사는 방식이 다 똑같을 수는 없는 법 아니오?" 허공을 찢는 무시무시한 파공성도, 곤끝에 박힌 섬뜩한 쇠송곳도, 이각초소로가 만들어 내는 그 어떠한 것도 미공자로부터 여유를 앗아 갈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미공자는 뒤로 훌쩍 물러서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배를 되찾아라!"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륙 명의 괴인들이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그들의 행색은 수적들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표사들과는 판이했다. 짐꾼 차림의 중늙은이, 뜨내기 무사처럼 보이는 청년, 머리에 두건을 두른 수부... 그들이 갑판에 오르자 전세는 서서히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명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저런 재주는 경험도 경험이거니와, 반석처럼 단단한 기초가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어디서 저런 자들이...?' 이각초소는 속이 바싹 탔다. 수의 차이가 워낙 큰 탓에 단번에 국면이 전환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추세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수적들이 패퇴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이러한 형세의 변화가 마음에 드는지 미공자는 싱긋 웃었다. 그 다음에 이각초소를 향해 던진 말투는, 마치 오랫동안 미뤄 둔 일을 해결하겠다는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 2 묘왕동주 "자! 이제부터 암기나 쓰는 쥐새끼가 어떤 재주를 부리는지 보여 드리리다." 말을 하는 동안 미공자는 약간 자세를 바꿨다. 두 손을 소매 속으로 감추며, 어깨와 허리를 약간 앞으로 숙인 것이다. 먹이를 향해 활강을 시작하려는 맹금(猛禽)의 자세. 전신에서 뿜어지는 바늘 같은 예기... "너, 너는 누구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이각초소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자 미공자는 미소를 지었다. 화사하지만 어딘지 오싹한 느낌을 주는 그런 미소였다. "그대 같은 쥐새끼에겐 과분한 이름이오." 말과 동시에 미공자는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 순간 몇 줄기의 싸늘한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로 이각초소에게 밀어닥쳤다. "허억!" 이각초소는 삼단벽(三丹壁)의 재주로 낭아곤을 세워 세 군데의 단전을 보호하는 한편, 다급히 보법의 방위를 밟아 몸을 피했다. 피리릿`-` 빳빳한 문풍지가 바람에 진동하는 듯한 경미한 음향이 방금 전까지 이각초소가 서 있던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매우 작은 무엇인가가 그 공간을 갈랐다는 증거였다. 너무 작아서 안 보인 것일까, 너무 빨라서 안 보인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각초소는 등덜미에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호오! 과연 제법 쓸 만한 쥐새끼였구려." 미청년은 발끝으로 갑판을 찍으며 이각초소가 피한 방향으로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가볍게 흔들리는 푸른 소맷자락... "어디 이번에도 피해 보시오!" 무형의 싸늘한 기운이 다시 한 번 이각초소에게 몰아 닥쳤다. '제기랄!' 분명히 암기인 줄은 알겠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각초소는 다급히 몸을 굴려 몰아 닥친 기운으로부터 몸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의 공격은 아까보다 더욱 신속했다. 몸을 굴리던 이각초소는 오른쪽 허벅지에 뜨끔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솔잎처럼 생긴 새끼손가락 반만한 암기가 바지의 허벅지 부위를 뚫고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혈도에 적중된 것도 아닌데 오른쪽 다리 전체가 금방 저려 오기 시작했다. 암기에 독이 발려 있다는 증거이니, 이것은 이각초소에게 있어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두 번째 공격에서 세 번째 공격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대단히 짧았다. "비송침(飛松針)이 맞아 준 건가? 흠! 다음에는 뭐가 맞을까?" 미청년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와 동시에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온전한 다리를 지녔다 해도 피하기 힘든 기쾌한 암기 공격이었다. 하물며 마비가 오기 시작한 뻣뻣한 다리였으니... "으윽!" 오른발을 질질 끌며 기를 쓰고 피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이각초소는 오른쪽 팔뚝과 하복부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기운이 틀어박히는 것을 느꼈다. 얼음물에 담궈 둔 침에 찔리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의 살갗이 개미가 기어가는 듯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번엔 발황전과 은형수표(隱形袖 )라... 매번 하나씩 늘어나니 다음에는 세 대 모두 맞겠소이다!" 미청년은 이각초소를 장남감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각초소는 식은땀을 흘렸다. 타인이 자신을 장난감 취급한다면 누구라도 당연히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타인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분노의 차원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었다. 분노는커녕 오히려 공포를 느끼며 필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달아나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 장난감으로 전락, 망가질 때까지 희롱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망가질 때까지... 지금 이각초소의 심정이 바로 그랬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미청년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마비된 근육과 오염된 핏물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암기에 발린 독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으어... 어어..." 굳어진 혓바닥으로는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이각초소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마지막이오!" 미청년은 호탕하게 외치며 걸음을 내딛었다. 투퉁! 두 대의 수리전(袖裏箭)이 가슴에 꽂혔다. 팍! 한 대의 홍예침이 미간에 박혔다. 이각초소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개구쟁이에게 희롱당하던 장난감이 드디어 망가진 것이다. "그것 봐! 세 대 모두 맞았잖아?" 미청년은 소매를 털며 환하게 웃었다. 암기술의 대가 독짐의 예상은 대부분의 경우 이번처럼 들어맞는다. * * * "허허! 그래도 제법 버텼는걸? 상상 밖이야." 공야무루가 껄껄대며 웃었다. "나리! 어, 어떻게 된 거죠?" 식인경이 공야무루에게 물었다. 다른 배와는 달리 이각초소가 기어오른 배는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의 눈으로도 상황을 직접 파악할 수 있을 법한데, 내공이 빈약한 식인경에게는 백 장에 가까운 거리를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각초소가 올라탄 배에서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한데, 그 이상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니 식인경은 진땀이 흐를 정도로 답답했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뒈졌지?" 공야무루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르던 개가 죽었어도 그보다는 더 심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식인경의 살찐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들은 비록 강남제일문파인 철옥의 수뇌부였고 자신들은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은 수적 나부랭이인 탓에, 그 신분의 격차가 아무리 천지간(天地間)만큼 벌어져 있기로서니! 이제는 한패가 아닌가? 속내야 어쨌든 간에 도와 주겠다고 온 자신들이 아닌가? 식인경은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각초소를 사지로 내몬 도연향은 이 일에 관해 이미 깨끗이 잊은 뒤였다. 이각초소가 죽은, 혹은 이각초소를 죽인 일은 도연향에게 있어서 능멸에 대한 복수도 아니요, 교만에 대한 징벌도 아니었다. 그냥 벌레 한 마리가 죽은, 또는 벌레 하나를 가볍게 죽인 것에 불과했다. 하찮은 벌레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연향에게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이각초소를 죽인 청영(靑影)의 외관(外觀)이 장옥평과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그였을까? 그런데 왜 검을 사용하지 않았지?' 도연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거리가 먼 탓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체형과 외견만은 장옥평을 방불케 했던 것이다. 백석학에서 본 장옥평의 솜씨라면 이각초소를 죽이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장기인 검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도연향은 그 점을 한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만 완수하면 그만인 것이다. "바투우!" 도연향은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갑판 저편에 있던 사내가 도연향에게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사공녀님!"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 3 묘왕동주 간사한 목소리로 굽신거리는 사내는 목소리만큼이나 간사한 얼굴을 지닌 왜소한 중년인이었다. 기이한 것은 헐렁한 단삼(短衫) 밖으로 드러난 사내의 살갗이다. 그것은 불에 그을린 듯 거무튀튀한 빛깔이었다. 군데군데에는 화상으로 인한 물집까지 잡혀 있으니, 풀무질로 평생을 보낸 대장장이의 피부가 바로 이러할까? "준비는 되었겠지?" 도연향이 냉엄한 목소리로 묻자, 검은 피부의 중년인 바투우는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히죽거렸다. "헤헤! 준비는 벌써 끝났습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도연향은 고개를 돌려 강상을 바라보았다. 철삭진에 걸린 곡물선은 이미 전소(全燒)되어 보기 흉한 잔재만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오십 장쯤 떨어진 곳에는 세 척의 배가 떠 있었다. 바로 장옥평과 마맥회의 부스러기들이 탄 배였다. 어느 순간, 도연향의 눈 깊숙한 곳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계획대로 간다!" 2 바투우는 몽고인이었다. 그에게는 포포파파( 砲 )라는 별호가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처럼 적확(的確)하게 그를 표현하는 별명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포포( 砲)란 돌쇠뇌와 대포, 즉 기계나 화약에 의해 작동하는 강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의 총칭이니 바투우가 다루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파파( )란 아비란 뜻이니 바투우가 그 물건들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월만측휴(月滿側虧),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 했다. 거침없는 야성으로 중토를 지배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도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그 운이 쇠하여 장성 북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지배자로 만민 위에 군림한 주씨(朱氏) 일족들은 아직 장성을 넘지 못한 몽고인에 대해 잔인한 도살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한족 사가(史家)들은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붓끝에 침을 바르며 그 통쾌한 한풀이를 칭송했지만, 도살은 어떻게 미화되어도 도살에 불과했다. 피로 물든 대지는 어떤 사관(史觀)으로 왜곡해도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바투우의 고조부는 왕조를 따라 장성(越長城)을 넘지 못하고 중토에 남겨진 몽고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예리한 복수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행운아? 어쩌면 이 행운아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행운이란 우연이지만, 그의 생존에는 필연이 있었다. 그에게는 어떤 군주라도 탐을 낼 만한 특별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흥제국에게 막강한 힘을 안겨 줄 화포 제작술과 화포 조종술이었다. 결국 그는 목숨을 부지하는 조건으로 명조(明朝) 대내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조직에 들어, 그가 지닌 기술을 한족 장인(匠人)들에게 전수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쓰임새가 없어지면 하찮은 몽고인 따위는 즉시 숙청해 버리려던 잔인한 권력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투우의 고조부는 숙청당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쓸모가 있었다. 금대(金代)에서 원대(元代)로 이어 오며 누백년 동안 축적된 화포술은 그 정도로 방대한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잔인한 권력자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바투우의 고조부, 그리고 증조부가 세상을 떴다. 바투우의 조부가 백발이 되고 바투우가 세상에 태어날 무렵, 드디어 그의 일족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끝났다. 대내의 병기창(兵器廠) 내에 포제방(砲製房)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이제는 한족들의 힘만으로도 훌륭한 화포를 제작하고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족을 숙청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명제국의 이념은 그 긴 세월 동안 초창기의 철혈정치에서 안정기의 유화정치로 바뀌어 있었다. 까마득한 과거, 잔인한 권력자들이 몽고인 일족에 관해 세운 숙청의 계획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바투우의 일족은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떤 후예는 새로운 성(姓)을 얻어 관직에 남았다. 어떤 후예는 농부가 되어 논밭을 갈고, 어떤 후예는 상인이 되어 주판을 튕겼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유협(遊俠)의 기질이 있어, 선조의 기술을 밑천 삼아 강호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있었다. 몽고인에 대한 강호의 인식은 매우 냉담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불에 환장한 어떤 마인을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곧 강호에서 가장 화포 제작에 능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그가 바투우였다. * * * 하늘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피이이이`-` 길게 늘어지며 점차 가까워 오는 소리는, 마치 피리를 처음 잡아 본 사람이 분 소성(簫聲)처럼 들렸다. 그리고... 푸아`-` 소성이 떨어진 운하 위의 한 곳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쳤다. 물기둥은 한 마리의 검푸른 용처럼 보였다. 마치 운하 속에서 살던 악룡(惡龍)이 하늘에서 울린 소성에 화답하는 것 같았다. 강물은 풍랑이라도 만난 듯 끓어올랐고, 그 위에 떠 있던 배들은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사납게 요동했다. 푸`-` 푸아`-` 푸아`-` 잠시의 시차를 두고 몇 개의 물기둥이 만들어졌다. 물기둥은 장옥평의 일행이 탄 선단을 중심으로 하여 반경 십여 장의 거대한 원을 이루며 연속적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물기둥이 만든 커다란 병풍 속에서, 마봉황의 일행이 탄 세 척의 배는 나뭇잎처럼 애처롭게 흔들렸다. 바닥의 한쪽이 벌떡 일어섰다. "어맛!" 그 바람에 선실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석소용은 중심을 잃고 데굴데굴 굴렀다. 몇 바퀴 바닥을 구르다가 선실 벽에 뒤통수를 호되게 부딪힌 그녀는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제기랄!"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파 죽겠네. 이게 무슨 난리람!" 뒤통수를 문지르던 석소용은, 조금 전 그녀를 선실 안으로 밀어넣던 장옥평을 떠올렸다. 그때 장옥평은 "별일 아니니 안에 들어가 있어!"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제기랄! 뒤통수에 혹이 났는데, 별일 아니라니!' 아마도 장옥평은 그녀의 뒤통수가 썩은 호박처럼 짓뭉개져야 별일이라고 여길 모양이다. 바닥은 여전히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굴러다니기 싫으면 무엇이라도 고정된 물체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석소용은 선실 벽에 붙어 있던 나무시렁을 붙잡았다. '안 되겠어!' 석소용은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시렁을 잡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경우, 그녀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미였다. 그런데 석소용이 선실 문을 연 순간, 때마침 후방에서 솟구친 물기둥 덕분에 배는 선미(船尾)를 하늘을 향해 세운 채 고꾸라질 듯 앞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 두 발이 허공에 붕 뜬 그녀는 설상가상으로 잡고 있던 선실의 문고리마저 놓쳐 버렸다. 날짐승이 아닌 바에야 제 힘으로 몸뚱이를 추스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꺄아악!" 석소용은 뱃머리 난간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거꾸로 뒤집어진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엉성한 난간, 그리고 강물이 시퍼렇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강물은 굶주린 맹수처럼 입을 쩍 벌리고 그녀가 떨어져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 * "좋은 솜씨군." 말 그대로 좋은 솜씨였다. 화포를 사용하여 백 장 거리의 목표물을 마음대로 희롱하기란 좋은 장구와 정묘한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바투우는 두 가지를 겸비한 최고의 포사(砲師)였다. "황송합니다, 사공녀님!" 바투우는 도연향의 치하에 감사하며, 그가 부리는 네 정(挺)의 삼고굉화포(三 轟火砲)를 믿음과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있는 이상 어떤 한인도 그를 몽고인이라고 깔보지 못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 4 묘왕동주 바투우의 선조들이 이 왕조를 위해 이룬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을 들라면 뭐니뭐니해도 홍무(洪武) 연간, 포제방에서 제작된 관고식철포(寬 式鐵砲)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포신(砲身) 내부의 폭발압을 훌륭하게 견디는 방법은 오직 많은 양의 쇠를 사용하는 것뿐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바깥 직경이 무려 열 치가 넘는데 포구경(砲口徑)은 겨우 두 치에 불과한 기형적인 철포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둔한 철포는 포신이 짧아 충분한 사정 거리를 확보하기가 불가능했다. 거리가 오십 장만 넘어가면 아예 눈을 감고 쏘는 편이 나을 정도로 명중률이 희박했던 것이다. 바투우의 선조들은 이 점을 개량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쇠를 녹이는 용광로의 화력을 높여 보기도 하고, 다른 종류의 금속을 섞어 강성(剛性)과 연성(軟性)을 조절해 보기도 했다. 모든 발명은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 그리고 그 창조의 순간에는 종종 우연이라는 놈이 개입하곤 한다. 작업장에서 냉각용수(冷却用水)를 퍼 나르던 나무물통... 화포 개량에 고심하던 그들의 눈에 늘상 보아 왔던 나무물통, 그 표면에 두른 쇠 테가 들어온 것은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수압으로부터 물통의 원형을 지켜 주는 보조물이었다. 바투우의 선조들은 생각했다. 혹시 나무물통에 통하는 것이라면 철통에도 통하지 않을까? 그들은 이 점을 깊이 연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포관고(砲寬 :화포의 표면에 대나무 마디처럼 두르는 쇠로 만든 테두리)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화포의 역사에 새로운 획이 그어진 순간이었다. 포관고는 철포의 외관을 날씬하게 해주었고, 강한 화탄을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정밀한 조종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특히 바투우의 삼고굉화포는 세 개의 포관고를 사용, 당대에 존재하는 어떤 화포보다도 높은 성능을 자랑하는 화포 기술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바투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장을 살피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한 놈쯤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떨까요?" "뜨거운 맛...?" 도연향은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가 매용소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놈들을 자영구로 몰아넣은 뒤 퇴로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화포나 수뢰를 사용하여 놈들을 몰살하는 일이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장옥평을 산 채로 잡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근신육박(近身肉薄)의 백병전이 불가피한데, 그 무대는 운하가 아닌 광양호였고, 그 주체 또한 그녀가 아닌 매용소였다. 도연향은 운하 저편에 떠 있는 세 척의 배를 살펴보았다. 한 척은 물의 나라라는 소(蘇)·항(杭)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날렵한 배였고, 나머지 두 척은 궁벽한 시골 개천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낡은 배였다. 또한 도연향은 조금 전 날렵한 배 위에서 이각초소를 처치한 푸른 비단옷의 사내를 떠올렸다. 검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체형과 차림새가 장옥평과 흡사했던 사내... '장옥평 본인이겠지.' 마침내 도연향은 이렇게 단정 지었다. 이제 그녀는 놈들의 정예가 탄 배를 추측할 수 있었다. "좋아!" 바투우의 말처럼 뜨거운 맛을 보여 줌으로써, 놈들은 보다 큰 위협을 느낄 것이다. 목숨이 아까운 이상 앉아서 불고기가 되기는 싫을 테니, 일단 눈앞에 보이는 구멍 안으로 도망갈 테고... 도연향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지저분한 놈으로 골라 한 방 먹이는 것쯤은 상관없겠지." 그녀는 바투우의 제안을 수락했다. * * * 팔목이 욱신거렸다. 어깨도 시큰거렸다. 하지만 석소용은 그 고통을 달게 받아들였다. 그 고통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물속으로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자맥질을 좋아한 석소용이니 설마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궁창처럼 더러운 물에 빠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 아닌가. "얘야, 괜찮니?" 자애로운 음성으로 석소용에게 말을 건 노인은 장옥평의 가신인 육염명이었다. 강물로 떨어지는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 갑판 위로 끌어올려 준 사람이기도 했다. "고마워요, 육(陸) 아저씨!" 석소용은 어깨를 문지르며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육염명을 꼭 '육 아저씨'라고 불렀다. 장옥평이 부르는 대로 따라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백부인 석삼도(石三島)보다도 연하인 육염명에게 굳이 할아버지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용매! 위험한데 뭐 하러 갑판에 나왔어?" 책망기가 담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옥평이었다. 그는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 들고 육염명과 석소용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거죠?" 석소용은 주위를 살피다가 장옥평에게 물었다. "지금은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야. 빨리 선실로 들어가!" 장옥평은 조금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쳇! 잔소리꾼!' 석소용은 심통이 났다. 장옥평은 못된 시누이처럼 그녀를 윽박지르는 것밖에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때, 하늘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피이이이`-` 석소용으로서는`-`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소리겠지만`-`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장 공자! 위험해요!" 돌연 여인의 뾰족한 경호성(驚呼聲)이 들렸다. 석소용의 아미가 순간 일그러졌다. 천하의 어떤 소리보다도, 심지어 점차 가까워 오는 저 괴상한 바람 소리보다도 백 배는 더 재수없는 구양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아앙! 바로 직후에 울린 폭음. 만약 석소용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차라리 구양지의 목소리가 훨씬 나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들을 수 없었다. 사람의 고막은 아주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하지만, 반대로 아주 큰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까아악`-`" 석소용의 작은 몸뚱이는 한 줄기 거센 돌풍에 휘말려 허공으로 훌훌 날아 올라갔다. 영혼이 무의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찰나, 석소용은 누군가가 상처투성이 팔뚝을 뻗어 자신을 움켜잡으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 오라버니...?'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석소용은 정신을 잃었다. 선실 지붕에 서 있던 구양지는 천지가 뒤집어지는 혼돈 속에서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눈앞에 어른거리는 허연 물체에 힘껏 박아넣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십여 년 동안 수련한 관홍지의 공력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오른손은 허연 물체에 여지없이 틀어박혔고, 허공에 훌훌 떠올랐던 그녀의 몸뚱이는 겨우 한곳에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몸을 버틸 수 있는 지지점을 찾았다는 것 외에는 그리 자랑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 그녀는 선실의 외벽에 손가락을 틀어박은 채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것이다. "차앗!" 구양지는 그네를 타듯 몸을 흔들어 두 발로 선실 벽을 박찼다. 거기서 생긴 반력을 이용해 다시금 선실 지붕으로 올라오는 재주는, 보기에도 깔끔한 영원등수(靈猿登樹)의 신법이었다. "야앵무, 괜찮나?" 지붕 위에 있던 마봉황이 구양지에게 물었다. 사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기울어진 지붕이지만, 그녀는 발바닥에 아교칠이라도 한 것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천근추(千斤墜)와 비슷한 종류의 공력으로 중심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넘어질 것처럼 기울어졌던 배가 천천히 원상을 회복했다. 그토록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침몰의 횡액(橫厄)만은 면한 것 같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 5 묘왕동주 "속하는 괜찮습니다, 회주!" 구양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장 공자가 부상을 당한 것 같다. 어서 내려가 그를 보살펴라!" 마봉황의 이 한마디는 구양지의 안색을 하얗게 탈색시켰다. 그녀는 비로소 장옥평이 있던 뱃머리 쪽의 갑판 위에 화탄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장옥평은 마맥회 전체의 성쇠(盛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구양지 개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각별한 존재였다. 마맥회의 수뇌부는 이미 그녀와 장옥평의 정략결혼`-`장옥평에게는 비밀이었지만`-`을 추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쳐선 안 된다.' 구양지는 뱃머리 쪽의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갑판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뒤였다. 장옥평은 한 손에 석소용을 움켜쥔 채 우측 난간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함께 있던 육염명은 보이지 않았다. 죽었다면 시신의 잔해라도 남았을 텐데... 아마도 폭발에 휩쓸려 강물 속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구양지는 장옥평에게 달려갔다. "으음...!" 다행히도 장옥평은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비록 의복 여기저기가 찢겨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큰 외상도 없었다. 구양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옥평의 등 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축했다. "으윽!" 그때 갑자기 장옥평이 몸을 튕기며 신음을 토해 냈다. 구양지는 흠칫 놀라며 부축하려던 손을 빼내었다. 어디를 다쳤기에 이리도 고통스러워한단 말일까? 순간, 구양지는 자신의 오른손이 검붉은 진액으로 범벅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장옥평의 등을 받쳤던 손이었다. "장 공자`-`!" 경악한 구양지는 장옥평을 돌려 보았다. 그의 등은 엉망이었다. 의복은 갈가리 찢어졌고, 드러난 등판 위에는 피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검붉은 액체가 엉겨 붙어 있었다. 화기(火氣)에 의해 끔찍하게 녹아 내린 살점이었다. 이때 구양지의 옆으로 경미한 인기척이 울렸다. 지붕 위에 있던 마봉황이 그녀를 뒤따라 갑판으로 내려온 것이다. 마봉황은 다짜고짜 장옥평의 등판에 있는 몇 군데 혈도들을 짚었다. 지공(指功)에 조예가 있는 구양지는 그것이 화기로부터 장기(臟器)를 보호하는 혈도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봉황이 장옥평의 목덜미 밑 대추혈(大樞穴)을 짚는 것을 본 순간, 구양지는 한 줄기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곳은 사람의 의식을 잃게 만드는 혼혈(昏穴)이었던 것이다. 구양지의 의혹을 눈치챈 듯, 마봉황이 한마디를 꺼냈다. "정신을 잃는 편이 낫다." 설명은 그것으로 그만이었지만, 긴말을 싫어하는 마봉황의 성격을 잘 아는 구양지는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그애는 어떤가?" 마봉황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석소용을 가리켰다. "기절했을 뿐,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구양지는 덧붙여 말했다. "장 공자 덕분이겠죠." 그녀의 말대로 석소용은 단지 기절한 것 같았다. 장옥평보다도 오히려 폭발에 근접해 있던 석소용이 이처럼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장옥평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옥평은 그 지옥 같은 폭발 속에서도 석소용을 끌어당겨 품안에 감싸안았던 것이다. 등 부위에 집중된 화상도 그때 입은 것이다. "혹덩이가 끝까지 말썽이군." 마봉황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석소용을 내려다보았다. 푸아`-` 뱃머리 바로 앞에서 시커먼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배가 자빠질 듯 기울었다. 마봉황은 난간을 움켜잡았고, 구양지는 장옥평과 석소용이 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야만 했다. 파`-` 푸아`-` 물기둥은 선단 주위를 맴돌며 계속 솟아올랐다. 정통으로 맞추는 것은 단지 한 방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것일까? 놈들은 아까의 상황을 다시 연출하고 있었다. 마봉황은 멀리서 포연(砲煙)을 피워올리는 범선을 노려보다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투우의 솜씨다." 구양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투우... 이화산장의 십대고수 중 가장 보잘것없는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아홉 명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존재. 그가 아니면 누가 이토록 정묘한 포술(砲術)을 지닐 수 있겠는가! 마봉황은 결심한 듯 구양지를 바라보았다. "바투우가 있다면 이곳에 더 이상 머무는 것은 위험한 일! 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동쪽의 자영구로 들어갈 것이다." 마봉황의 목소리는 엄정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좌 오라버니와 함께 이곳에 남는다." 적과 교전시(交戰時)에 발휘된 군령(軍令)은 절대적인 것이다. 구양지는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복명했다. 이어 마봉황은 몇 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듣고 있던 구양지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마봉황이 내린 임무는 그녀와 좌훈, 두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기에 버거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봉황은 그러한 구양지의 심중을 읽은 것 같았다. 그녀는 구양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을 믿는다." 구양지는 한동안 마봉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네 어디에서나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웃집 언니의 수수한 얼굴... 그러나 마맥회가 이제껏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공신의 얼굴이었다. 어쩌면 마맥회의 얼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마봉황은 그녀와 좌훈을 믿는다고 했지만, 결국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은 그녀와 좌훈이었다. 구양지는 그녀의 짐이 있는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버거운 임무는 대개의 경우 많은 준비물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다른 강호인들이 소지하지 못한 몇 가지 기이한 물건들이 있었다. 첩보전이란 원래 잡다한 도구들이 등장하는 법이고, 그녀는 첩보전의 달인인 야앵무였기 때문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8 장 - 6 묘왕동주 구양지는 짐보따리를 뒤져 몇 가지 물건을 챙겼다. 암기 몇 개, 사람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연막탄, 섬광을 뿜어 내는 신호탄, 스무 발(한 발:장정이 두 팔을 한껏 벌린 길이)이 조금 넘는 천잠사(天蠶絲) 등... 임무 수행에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지니고 있어서 손해는 되지 않는 물건들이다. 선실을 나선 구양지는 마봉황 앞에 똑바로 섰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분명한 목소리로 복명한 구양지는 물기둥이 솟구치는 운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봉황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황석시에서 일행에게 날아든 앵무새가 가져 온 것은 격설옹 학단성의 전언(傳言)이었다. 학단성은 육로를 통한 산동행이 여의치 않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학단성은 싸늘하게 식었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으로 한 짝의 철관에 담겨 흘러왔다. 학단성의 경고 또한 그 시신처럼 싸늘하게 식어 아무 쓸모도 없어진 것이다. 놈들은 고도의 기만술을 발휘하여 학단성으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를 일행에게 전달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다음 용도를 다한 학단성을 처치한 것이다. 파아`-` 물기둥은 끝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것은 희롱이었다. 놈들은 마봉황더러 왜 움직이지 않고 멍청히 서 있느냐며 놀리고 있었다. 마봉황은 눈앞을 가리며 떨어지는 물의 장막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냈다. 단순히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함이라면 행로를 거슬러 장강으로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원점... 일정은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질 것이 분명하거니와, 한번 잡은 꼬리를 어설프게 놓아 줄 상대가 아닌 이상, 결국 어딘가에서는 놈들의 저지선과 맞닥뜨려야 했다. '어쩌면 그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봉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행로를 또 한 번 수정할 만한 여유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학단성, 번휴류, 팔색란은 마봉황이 강남에 포진한 다섯 군데 비밀 분타 중 세 군데를 책임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두 당한 이상 본거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까딱하다가는 새가 떠난 사이 둥지가 부숴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녀가 한시 바삐 산동장가로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한시 바삐 장옥평 개인이 아닌 산동장가 전체와의 결맹을 공고히 하여, 마맥회가 강북에 둥지를 틀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쳐 버려야 한다!' 마봉황은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자영구를 바라보았다.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영구라는 피신로를 활짝 열어 둔 채 공격을 시작했을 리가 없었다. 자영구 저편의 광양호에는 적의 주력 부대가 기다리고 있음이 자명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계략... 이러한 사실을 마봉황은 물론이거니와 적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들은 그 계략을 썼고, 마봉황은 그 계략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상기(象碁:장기)로 말하자면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적들에게 호락호락 당하기엔, 마봉황은 너무도 냉정한 두뇌와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마봉황은 표선에 타고 있는 장손불변을 조금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산동행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 위험이 있으리라는 것은 출발 이전부터 염두에 둔 상태... 그 위험이 이렇게까지 고약한 외통수일 줄은 몰랐지만, 아직 마봉황에게는 남아 있는 한 수가 있었다. 마맥회의 용사들은 회와 마봉황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마봉황은 그것을 믿었다. < 제2부 상권 끝 >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 권 연재 끝 묘왕동주 2 부 상 권 연재가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9 장 회의(會議) 묘왕동주 제 9 장 회의(會議) 1 마봉황이 이끄는 선단이 자영구로 진입하자 도연향의 범선은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철삭진으로 운하를 가로막고 있던 소선들이 통로를 열자, 범선은 유유히 그 사이를 통과해 자영구 입구를 봉쇄했다. 자영구 안에 들어간 마봉황이 다시 운하로 나오려면 철삭진을 지나기에 앞서 우선 범선부터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운하에 떠 있는 한 척의 쾌속정, 그 허물어진 난간 아래 웅크리고 있던 좌훈과 구양지는 이러한 범선의 동태를 똑똑히 관찰할 수 있었다. "역시..." 좌훈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회주의 예상대로 놈들의 주력은 자영구 안에 있군." 쾌속정은 한 포기 부평초처럼 물에 몸을 내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본래 배의 주인은 장강육어의 졸개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체들은 어떠한 배의 주인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연향 정도가 단지 몰이꾼이라면... 대체 주력은 누가 이끌고 있는 것일까요?" 구양지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좌훈은 그렇지 않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영원히 모르는 편이 낫지." 적의 주장(主將)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시점은, 그들이 친 올가미 속에 모가지를 완전히 집어넣은 이후가 되기 쉽다. 그때는 이미 누구도 손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니, 좌훈은 차라리 호기심을 접어 둘지언정 그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도연향의 범선은 자영구 안으로 십여 장 더 들어간 뒤 멈춰 섰다. 돛을 내리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둥지를 틀 모양이었다. "회주와 약속한 시간이 언제지?" "축시(丑時:오전 1시~3시) 말(末)이에요." 좌훈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참혹한 싸움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밤하늘은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그는 목표로 한 대웅좌(大熊座:큰곰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웅좌의 꼬리가 가리키는 방위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예부터 전해지는 유명한 측시법(測時法). 그는 축시 말까지 두 시진 가량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허억!" 이때 갑자기 구양지가 비명을 삼켰다. 만약 그녀가 스스로의 손으로 황급히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까지 접근해 있는 범선에 종적을 발각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좌훈의 책망 어린 눈길이 구양지에게 향했다. 하지만 코앞의 난간을 바라본 순간, 더 이상 구양지를 책망할 수 없게 되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손... 그것은 운하로부터 솟아나와 쾌속선의 난간을 움켜쥐고 있었다. 비록 강심장이라고는 하나 구양지 역시 여자였다. 손 하나가 불쑥 솟아나와 코앞의 난간을 움켜쥐자 본능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난간을 움켜쥔 손에는 아무런 힘도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이대로 놔두면 금방이라도 스르르 풀려 물속으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육 노영웅이에요!"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민 구양지가 낮게 부르짖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난간에 걸린 손가락 끝마디가 툭 풀렸다. 바야흐로 물에서 온 손이 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좌훈의 행동은 신속했다. 그는 오른팔을 난간 틈새로 쭉 내뻗어 물로 돌아가려는 손을 움켜잡았다. "흐윽!" 난간 너머로부터 한 토막의 고통스런 비명이 울렸다. "...?" 좌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구양지의 말처럼 손의 임자가 침염선생 육염명이라면 방금 들린 비명은 어울리지 않았다. 육염명 정도 되는 강골(强骨)이 이 정도에 비명을 지르다니...? 좌훈의 이런 의혹은 육염명의 몸뚱이가 완전히 갑판 위로 올라온 순간 말끔히 해소되었다. 왼팔이 어깨 부위에서부터 통째로 날아가 버린 사람은 제아무리 고수라 해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양지는 입을 가렸고, 좌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잘려 나간 육염명의 어깨 부위는 사람의 비위를 뒤흔드는 칙칙한 빛깔로 변색돼 있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좌훈은 구양지를 바라보았다. "육 선생이 왜 이렇게 된 거지?" 구양지는 아까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타고 있던 배가 바투우의 포격으로 파손된 일, 그리고 그때 갑판 위에 있던 육염명이 감쪽같이 사라진 일 등... 설명을 들으며 좌훈은 육염명의 상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잘려진 부위는 검게 변했는데, 마치 숯불에 잘 그을린 돼지고기처럼 보였다. 나후성(羅候星:중국인들이 日蝕을 일어나게 한다고 믿던 凶星)에 사는 악견(惡犬)들은 화염이 이글거리는 아가리를 가졌다고 한다. 어깨가 그 아가리 속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아마도 이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빌어먹을!" 좌훈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이 급박한 판국에 송장과 진배없는 중환자를 건져 어쩌자는 것인가! 차라리 송장이었다면, 그랬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그러나 때늦은 후회였다. 좌훈은 가까스로 생명의 끈을 움켜쥔 사람을 단지 임무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물속으로 밀어 넣을 정도로 냉혈한은 못 되었다. 애당초 구하지 않았다면 모르는 일이지만... "으으..." 이때, 죽은 듯이 감겨 있던 육염명의 눈꺼풀이 힘겹게 들렸다. "육 노영웅! 정신이 드세요?" 구양지가 이름을 부르자 육염명은 몇 차례 눈을 끔뻑이더니 부르짖듯이 외쳤다. "공자! 우리 공자는?" 깨어나기가 무섭게 꺼낸 첫마디가 '우리 공자'였다. 물론 장옥평을 가리키는 말이다. 곁에서 지켜보던 좌훈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동장가가 삼 년 동안이나 정식 가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쟁쟁한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나이 든 가신들의 이러한 맹목적인 충성심 때문이리라. "장 공자는 무사해요. 지금 회주님과 함께 자영구 안으로 피신했죠." 구양지가 대답하자, 육염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러운 얘기겠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장옥평의 안위였다. "그런데... 여기는 어딘가?" 육염명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려 했다. 좌훈은 그런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우리는 자영구로 들어가지 않았소. 선생은 상세가 위중하니 그냥 누워 계시오." '상세'라는 말에 육염명은 비로소 자신이 부상을 입었음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의 몸뚱이에는 팔은 고사하고 어깨라고 부를 수 있는 것조차 달려 있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파헤쳐진 어깨 근육 사이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갈비뼈라니! 자신의 갈비뼈를 보며 기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육염명은 갑판에 화탄이 떨어진 순간 발생한 엄청난 압력풍에 휩쓸려 운하에 떨어졌다. 어깨가 떨어져 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혼미한 와중에서도 근처에 떠 있던 널빤지 하나를 부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 결국 그 때문에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혼절한 채로 물위에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던 육염명은 낮게 중얼거렸다. "꼴좋군." 이 한마디가 어찌나 담담했던지, 좌훈은 감탄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산동의 영웅으로 이름 높은 침염선생의 창창(蒼蒼)한 호기를 느낄 수 있었다. "육 노영웅, 치료를 해야만 하니 조금만 참으세요." 구양지는 품속에서 작은 옥병을 꺼내, 그 안에 든 검푸른 가루를 환부에 뿌리기 시작했다. 남마련 비전의 금창약(金創藥)인 흑로오즉산(黑露烏 散). 상처가 워낙 중한 탓에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약을 발라 두는 편이 나았다. "으윽!" 육염명의 입술이 메기처럼 옆으로 쭉 벌어졌다. 금창약이라는 것은 본디 살갗에 바르는 약이었다. 그런 것이 뜯겨 나간 근육과 뼈에 닿았으니 그 고통이야 말해 무엇 할까. 한동안 안면 근육을 푸들푸들 떨던 육염명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좌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봐, 귀좌(鬼左)!" 이 시점에서 나온 '귀좌'라는 한마디는 좌훈에게 있어서 의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명호는 과거 남북대전 때 북정회의 사람들이 좌훈에게 붙여 준 별명이었다. 강남제일쾌수라는 별명이 전설 같은 공훈을 세운 그의 좌수쾌검(左手快劍)에 대한 찬사라면, 귀좌라는 별명은 어떠한 적도 용서하려 하지 않던 그의 신랄한 손속에 대한 증오였다. 육염명은 과거 그렇게도 증오했던 그 별명을, 수년이 지난 지금 다 죽어 가는 몸이 되어 다시금 입에 담았다. 왜 그랬을까? 혹시 상처의 고통과 육신의 쇠약을 극복하기 위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격렬했던 시절의 편린(片鱗)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육염명은 턱짓으로 좌훈의 헐렁한 왼팔 소매를 가리켰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갑자기 궁금해서 참을 수 없군. 자네는 처음 외팔이가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나? 혹시 '앞으로 한 팔만 가지고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 따위는 안 했나?" 좌훈은 즉시 대답했다. "그런 걱정 따위는 안 했소! 단지 내 팔을 자른 놈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오!" "하하! 멋있어! 과연 귀좌답군!" 입으로는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육염명은 불쌍할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구양지가 소매로 계속 훔쳐 주었지만 얼굴을 번들거리게 만드는 땀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괜찮소?" 좌훈은 "괜찮아!"라는 허세를 기대하고 물었는데, 육염명은 뜻밖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난 자네보다 늙었거든." 좌훈은 잠시 난색을 표명하다가 심중에 두고 있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육 선생,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소. 미안하지만 당신을 보살피지 못하겠소." "누가 보살펴 달랬나?" 육염명은 힘없이 웃었다. 조금 처량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안색이 엄숙해졌다.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네." 좌훈과 구양지는 육염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 사람이 이곳에 남은 것을 보니, 마맥회주는 결국 이리로 돌아올 계획이겠지?" 좌훈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육염명은 감탄한 듯 말했다. "장계취계(將計就計:적군의 계략을 이용해 아군의 계략을 세움)라더니... 과연 젊은 사람 머리는 다르군! 나 같은 늙은이는 머리가 굳어 버려서 그런 임기응변을 짜내기가 힘들지!" 몇 마디 칭찬을 늘어놓은 육염명은 조금 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공자도 자네들 회주와 함께 오겠지?"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구양지였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본 회는 이미 장 공자와 생사를 함께 하기로 작정했으니까요."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비로소 안심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육염명은 그 점이 무척 걱정스러웠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땀투성이, 힘들어하는 얼굴이었다. 좌훈은 육염명에게 다시 말했다. "우리에게는 해야만 하는 중요한 임무가 있..." "아, 아! 그 임무라는 게 뭔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육염명은 좌훈의 말을 자른 뒤, 두 다리를 펴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이 늙은이도 끼워 주게." 육염명은 하나뿐인 손바닥으로 자신의 단전을 덮었다. 얼굴에 불그레한 화색이 감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 몸을 가지고도 운공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운기행공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와공(臥功)의 자세를 취한 이유는, 제대로 정좌(正坐)하기도 힘든 몸 상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좌훈은 육염명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육 선생의 뜻은 알겠지만, 그 상태로는 짐만 될 뿐이오." "짐이라... 허헛! 이 육염명이 짐이라." 좌훈의 말에 육염명은 허탈한 듯 웃었다. 하기야 그가 언제 짐짝 취급을 당해 보았을까? 생각 같아서는 좌훈의 멱살이라도 잡고 호통을 치고 싶으련만, 처지가 처지이니 그저 저렇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9 장 - 1 묘왕동주 "만에 하나 선생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장옥평 공자의 운신이 더욱 어렵게 되오. 이 점을 명심해 주시길 바라오." 이 말에 모욕을 느낀 듯, 육염명은 흰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베로 만든 주머니를 꺼내 좌훈에게 불쑥 내밀었다. "열어 보게!" 좌훈이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서 비수 한 자루가 나왔다. 자루까지 합친 길이가 한 뼘 남짓 될까? 여인들의 노리개라면 딱 좋을 만한 앙증맞은 물건이었다. "이런 것은 나도 있소." 좌훈은 자신의 허리춤에 꽂힌 두 자루의 비도(飛刀)를 가리킨 뒤, 비수를 육염명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육염명은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추한상(秋寒霜)은 내가 자네만한 나이일 때 검패 장일기 공(公)에게 받은 것이지. 이래봬도 돌을 두부처럼 자르는 보물이라네." 좌훈은 궁금해졌다. 검패가 내린 비수라면 육염명으로서는 신주처럼 소중한 물건일 것이다. 그것을 왜 남에게 준단 말인가? 육염명은 곧 좌훈의 의혹을 풀어 주었다. "나는 자네처럼 내 팔을 자른 놈을 꼭 죽여야겠다는 마음은 없네. 하지만 우리 공자가 위기에 빠졌는데, 두 손 놓고 멍하니 있는다는 것만은 참을 수 없군." 육염명은 눈을 감았다. 이제 운공을 시작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귀좌! 만약에 내가 적의 손에 떨어지는 처지가 된다면... 이 추한상으로 나를 죽여 주게." 좌훈은 더 이상 육염명을 만류할 수 없었다. 그는 육염명이 준 비수를 뒷춤에 찔러 넣고는 자영구 쪽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깊어 가는 밤, 천천히 피어오르는 물안개 너머로 보이는 도연향의 범선... 그것은 철벽처럼 견고해 보였고, 괴물처럼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철벽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위험한 괴물이라 할지라도... 좌훈은 그것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마봉황과 약속한 축시 말까지! 2 군데군데 올이 풀린 굵은 동아줄이 측현이 심하게 파손된 표선과 박한이 탄 낡은 배 사이에 걸렸다. 박한은 그 동아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시선을 동아줄 너머로 보이는 암울한 빛깔의 물길 위에 던졌다. 이곳은 운하에서 동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 물길 양편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갈대숲이 펼쳐져 있었다. 강물은 잔잔했고, 갈대숲은 고요했다. 강물 여기저기에 둥둥 떠다니는 보기 흉한 시신들만 없었다면, 누구도 방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장(一場)의 혈투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박한의 왼손 엄지와 인지는 습관처럼 오른쪽 손목 관절을 지압하고 있었다. 뻐근했다. 손목이 뻐근한 만큼 입맛도 썼다. 그의 손목은 지난 반 시진 동안의 혹사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해동의 북변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를 생각한다면 실로 가소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며칠 동안 밥 한 끼 변변히 못 먹고, 잠 한 숨 제대로 못 자면서 전투를 벌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목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근 한 달 동안 싸움다운 싸움을 벌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을 통해 검의(劍意)는 깊어졌을지 모르지만, 그의 몸은 아직 격렬한 동작을 매끄럽게 소화할 정도로 풀려 있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식으로 싸움이 지속된다면 몸이 풀리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만... 문득, 방금 전 끝난 싸움이 박한의 머리에 떠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이상한 싸움이었다. 싸움에 동원된 무사의 수만 놓고 본다면, 박한의 일행은 일찌감치 어육이 되었어야 정상일 것이다. 물길 양편에 펼쳐진 갈대숲은 마치 넓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항구처럼 소선(小船)들을 토해 냈고, 소선 위에는 어김없이 적들이 타고 있었다. 화살의 소나기, 그리고 백병전. 적의 공격은 줄기차게 지속되었고, 박한의 일행은 살아남기 위해 한 손으로 열 손을 상대해야만 했다. 여기까지는 별로 이상하다고 할 수 없었다. 머릿수의 차이가 큰 싸움이 세상에 어디 한둘뿐일까? 문제는 어육이 되었어야 할 박한의 일행이 머릿수의 차이를 극복하고 '무난히' 적을 물리친 데에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무난히'였다. 박한의 일행이 입은 손실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니까. 하기야 고수의 수는 박한의 일행 쪽이 많았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박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변죽만 울리던 운하에서의 화포 공격은 제쳐 두기로 하자. 방금 전의 싸움에서라도 소선이 지닌 기동력을 십분 발휘했다면, 박한의 일행이 보유한 선박 중 최소한 두 척은 벌써 수로 밑바닥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화약 따위는 준비할 필요도 없이, 단지 불화살 몇 대로도 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런데 놈들은 "우리 여기 있소!"라는 식으로 요란하게 나타나, 화살을 주르륵 쏜 뒤, 얼마 동안 백병전을 시도하다가, "이제 우리는 물러가오!"라는 듯 훌쩍 퇴각했다. 동료들의 시신을 강물 위에 뿌린 채... 박한은 많은 전쟁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이 싸움은 전술을 하나도 모르는 풋내기의 유치한 힘 자랑이 아니면, 뭔가 음험한 올가미를 숨겨 둔 전문가의 계획된 도발, 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전자이길 바라는 마음이야 어찌 굴뚝 같지 않겠느냐마는, 불행히도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이 점이 박한의 기분을 못내 떨떠름하게 만들고 있었다. 씨잇! 박한은 검을 휘둘러 혈조(血漕:검 중앙에 핏방울이 흐르도록 만든 홈)에 고인 핏물을 떨쳐 냈다.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이때 박한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돌아보니 단탈이었다. 단탈은 피에 물든 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긴 그의 옷을 더럽힌 것은 대부분 다른 자가 흘린 피였으니, 태연한 얼굴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테지만. 박한은 조금 신기한 눈으로 눈앞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적을 죽인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단탈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적을 죽인 병기를 꼽으라면 단탈이 쥐고 있는 작달막한 각궁일 것이다. 박한도 군 경력이 있는 탓에 궁술에 대해서는 제법 조예가 있었다. 하지만 단탈의 잔인하리만치 정확한 궁술과 비교하면 여러 수 뒤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한이 보기에 단탈의 궁술은, 많은 궁사들이 열망하는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정신과 활이 하나가 되면 시간이 느려지고 공간이 가까워진다고 한다. 박한에게 궁술을 가르친 교두는 가장 시간이 느려진 때, 그리고 가장 공간이 가까워진 때가 시위를 놓는 최적기(最適期)라고 말했다. 이른바 궁술에 있어서 오상(五常)의 도(道)가 실현되는 때인 것이다. 그러나 단탈이 그런 현학투성이 궁술을 배웠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단탈은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을 매기고, 과녁을 겨누고, 시위를 놓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도가 트이지 않고서는 이르기 힘든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단탈이라는 인간이 새삼 신기하게 보이는 박한이었다. 단탈은 난간에 걸린 동아줄과 그 건너편 표선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다. 아마도 표선으로 건너가자는 얘기인 듯했다. 박한은 표선을 바라보았다. 많이 손상되었지만 아직도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배... 마봉황을 비롯한 마맥회의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배`-`황석시에서부터 줄곧 타고 온 두 척의 낡은 배 중 단탈과 박한이 타지 않은 배`-`를 버리고 표선으로 건너가 있었다.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화탄 때문에 선수 부분이 만신창이가 된 배를 더 이상 끌고 다닌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한은 자신이 탄 배를 살펴보았다. 마봉황이 탔던 배와는 달리 직접 포격당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조금은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태하기는 마찬가지라서, 침몰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비단 마봉황의 배만이 아니었다. 박한과 단탈이 머뭇거리는 동안, 그들과 동승했던 마맥회의 무사들이 하나씩 동아줄을 건넜다. 단탈은 박한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동아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경신술을 익히지 않은 그였지만 한 가닥 동아줄 위에서 신체의 중심을 유지하는 재주만큼은 어떤 경신술의 대가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단탈이 건너기를 마치고 박한마저도 동아줄을 건너니, 비록 죽거나 이탈하여 자리를 채우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참석 가능한 일행 전원이 한자리에 집결한 셈이 되었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토론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은, 한 달 남짓한 여정을 통틀어 최초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 * * 선실 입구에 걸린 몇 개의 등구(燈毬:중국 燈의 일종. 축제의 행진에서 용의 앞에 휘둘리는 月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나무로 틀을 짠 공의 내부에는 심하게 흔들려도 꺼지지 않는 수평 유지 장치가 되어 있다)들이 갑판을 비추고 있었다. 등구의 불빛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비단 침침한 등불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마봉황은 내심으로 표선에 오른 인원을 점고(點考)해 보았다. 현재 인원은 모두 스물. 그녀와 장손불변을 포함한 마맥회원 아홉, 지휘자를 잃고 낙백(落魄)해 있는 동방신행의 표사 일곱, 나머지는 혹덩이 셋과 장옥평이었다. 마봉황은 한숨을 쉬었다. '열하나... 난국을 뚫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로군.' 점혈당해 의식을 잃은 장옥평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석소용과 함께 열외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전투 가능한 인원은 열여덟. 하지만 표사들은 어차피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싸움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인원은 열하나가 전부였다. 마봉황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영구로 진입한 뒤 제법 긴 시간이 지났으니, 자시(子時)는 넘은 것이 확실했다. 구양지와 약속한 시간을 맞추려면 이제 슬슬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봐! 옥평과 꼬마는 어디 있나?" 누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마봉황에게 질문을 던졌다. 거무튀튀한 기형도를 짚고 선 단탈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 무례한 말투에 화부터 치밀었을 마봉황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단탈과 박한, 두 명의 오랑캐는 그녀의 계획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되는 주연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짐짓 친근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장 공자와 석 아가씨는 적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었어요. 의식을 차리지 못해 선실 안에 옮겨 놓았어요." 그 순간 단탈의 안색이 눈에 띌 정도로 변했다. 마봉황은 조금 의외였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이 오랑캐가 중원에서 사귄 두 친구의 안위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에 대한 단탈의 정이 돈독하면 돈독할수록, 그녀의 계획은 성사될 가능성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상태가 안 좋은가?" 거의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했지만, 단탈의 목소리는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석 아가씨는 단지 기절했을 뿐이지만, 장 공자는 화상에다가 내상까지 입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단탈은 마봉황에게 다시 무엇인가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마봉황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가 말할 기회를 가로채 버렸다. 이야기가 구구해지는 것은 계획에 오히려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여 주신 두 분의 신위(神威)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회를 대표해서 두 분께 감사드리고 싶군요." 마봉황은 단탈과 박한을 향해 포권했다. 이 기습적인 감사에 단탈은 무례하게도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고, 박한은 행여 결례라도 범할까 얼른 고개를 숙였다. 포권을 마친 마봉황은 사람들을 주욱 둘러본 뒤, 조금은 저상(沮喪)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화포를 피하기 위해 이쪽으로 진로를 바꾼 것인데, 분위기를 보니 이쪽이 오히려 위험한 것 같군요." 그러자 동방신행의 표사 중 한 사람이 볼멘소리로 외쳤다. "이 자영구는 막다른 호수로 통해 있소! 옛말에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둔다고 했거늘, 회주께서는 어찌하여 퇴로가 없는 곳으로 들어온 것이오? 혹시 뭍으로 피할 계획이라도 있으신 거요?" 매부리코에 눈초리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어딘지 빡빡한 인상을 주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그는 하늘 아래 안 가본 곳이 없다는 표사라서 그런지, 수로의 지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제법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그리 공손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이 당하는 횡래지액(橫來之厄)이 마봉황의 일행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마봉황은 그 표사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협사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어찌 되시나요?" 표사는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가슴을 펴고 외쳤다. "존성대명이랄 것은 없고, 나는 금(金)이라는 성을 지닌 사람이오! 강남에서 명성이 쟁쟁하신 마맥회주께선 이 미천한 표사에게 무슨 하교(下敎)하실 것이라도 있으시오?" 그의 태도는 무례하고 도발적이었지만 마봉황은 개의치 않았다. 비루한 개일수록 깽깽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법. 그럴 때마다 일일이 화를 내는 것도 피곤한 일이 아니겠는가! "금 협사께서 지적하신 대로 이 자영구가 광양호라는 호수로 통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다른 내륙호(內陸湖)와 마찬가지로 광양호라는 호수 또한 자영구 외의 다른 출구가 없다고 알려진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마봉황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금이라는 성을 지닌 표사를 바라보았다. "뭍으로 피하지는 않겠어요!" 마봉황은 칼로 자르듯 말했다. 이 단정적인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마봉황은 설명을 계속했다. "저는 진강구를 지나면서 운하의 군소 수상(水商)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운하 하역도를 일람(一覽)한 적이 있어요. 그 하역도에는 잠상(潛商)들이 애용하는 작은 물길들까지도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었지요." "그, 그렇다면 광양호에도 그런 물길이 있다는 말씀이시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9 장 - 2 묘왕동주 금이라는 성을 지닌 표사가 물었다. 마봉황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하역도가 틀림없다면, 우리는 광양호 안에서도 빠져 나갈 길을 찾을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반가운 기색이 일었다. 절망적인 국면에서도 아직 살아날 길이 있다는 마봉황의 말에는, 비단 표사들뿐만 아니라 마맥회의 무사들까지도 고무된 것 같았다. 마봉황은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곧 약해지려는 결심을 다잡았다. 희생 없이 대사를 이루기란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마봉황은 단탈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어서, 이제껏 그녀가 한 말을 귀담아듣기나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실은 화살받이에 불과한 표사 따위가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말이다. 마봉황은 단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시차를 둔 것은 그의 호칭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타루가에게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어요." 단탈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녀가 사용한 타루가라는 호칭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타루가와 박 공께서 이 배를 맡아 주세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의혹의 기색이 떠올랐다. 공식적으로 권한을 인정받지는 않았지만, 이제껏 선단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은 분명 마봉황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무슨 연유로 지휘권을 출신도 애매한 오랑캐들에게 넘긴다는 것일까? "장 공자의 부상이 생각보다 위중해요. 적들의 공격이 이 표선으로 집중되는 마당에, 장 공자를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러자 단탈이 마봉황에게 물었다. "옥평을 다른 배로 옮겨 따라오겠다는 말인가?" 마봉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때를 대비해 적의 선박 중 작고 빠른 것을 하나 챙겨 두었어요." 단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내뱉었다. "표적이 되어 달라는 건가?" "향후 이 배에 대한 위험이 가중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에요. 그 점을 숨기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타루가가 위험해질수록 장 공자는 안전할 수 있어요." 단탈은 마봉황의 두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봉황은 그가 자신의 눈으로부터 무엇 하나 읽어 내지 못하리라 믿고 있었다. 비단 눈뿐이 아니다. 배신과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마련이 허물어지던 그날부터, 그녀는 염산산이 아닌 마봉황이었다. 마봉황은 한 인간이기에 앞서 마맥회라는 단체의 상징이었고, 그 상징은 때로는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와는 무관하게 수많은 모습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변신의 처세학을 익혔다. 때로는 협의지도(俠義之道)에 죽고 사는 협객의 모습으로, 때로는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추구하는 간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녀의 모든 변신은 복수라는 명제하에 정당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마봉황은 단탈처럼 거칠기만 할 뿐 교활하지 한 사내에게 내면을 쉽게 파악당하는 그런 풋내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옥평은 누가 보호하지?" "그 일은 제가 맡겠어요." 단탈은 부상이 심하다는 장옥평의 간호를 걱정했고, 마봉황은 즉시 자신을 거명했다. 이른바 모수가 스스로를 추천하는[毛遂自薦] 격이다. 단탈은 비웃음을 흘렸다. "후훗! 죽도록 싸워 길을 뚫어 놓으면 그 뒤를 따라오겠다?" 다분히 비꼬는 투였지만, 마봉황은 단탈을 그녀의 계획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말투가 삐딱한 것은 마맥회에 대한 평소의 감정 때문일 뿐, 장옥평의 안전에 관한 일이라면 단탈은 발 벗고 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거칠기만 할 뿐 교활하지 못한 사내들은 대개가 이렇다. 그들은 우정이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종교처럼 숭배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맹종을 지고(至高)의 미덕으로 여긴다. 마봉황이 지켜본 바, 단탈은 그런 사내들의 전범(典範)이었다. 마봉황은 차분한 목소리로 스스로를 추천한 이유를 설명해 나갔다. "타루가께서 어떻게 생각해도 무방해요. 하지만 장 공자를 호송할 배는 무척이나 작다는 것만은 알아 두세요. 몇 사람을 놓고 생각해 보았지만, 내가 그 배에 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에요." 마봉황의 말은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적으로부터 탈취한 나룻배는 작았다. 탈 수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다섯 정도. 부상자인 장옥평과 석소용을 거기에 태운다면, 전투가 가능한 인원의 탑승은 셋이 한계였다. 그 인원으로 부상자들까지 보호하려면 결국 고수 중에서 누군가가 그 배에 타야만 하는데, 간호와 전투를 병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여자인 마봉황이 적임이었다. "그러면 우, 우리는... 이 표선에 남아야 한다는 말씀이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표사 중 하나가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하기야 적의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도 마음 편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른 표사들도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마봉황은 한숨을 쉰 뒤 그를 안심시켰다. "퇴로가 막힌 이상 어차피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요. 장 공자를 보호할 몇몇을 제외한 본 회의 무사 전원도 이 표선을 지킬 거예요." 이때 선실 문이 활짝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낭랑한 목소리로 마봉황의 말을 이어받았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오."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는 사람은 독짐 장손불변이었다. 그는 몇 차례의 악전고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람 나온 귀공자처럼 여유있는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귀공도 이 표선에 남는단 말이오?" 표사들은 반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눈에 비친 장손불변은 가위(可謂)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공의 소유자였다. 장손불변으로 말하자면, 이각초소를 간단히 해치움으로써 표행의 우두머리인 위징의 원수를 갚아 준 협객이었고, 또한 지금까지 표선 위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해 표사들의 생명을 지켜 준 은인인 것이다. 장손불변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본 뒤 말했다. "앞장서서 가나 뒤따라서 가나 위험하기는 어차피 마찬가지, 저 배라 해서 특별히 안전하고 이 배라 해서 특별히 위험하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병법에서도 사지(死地)에 들었을 때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각오가 필요하다고 했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장손불변의 눈길은 사람들의 얼굴 위로 주욱 흘러갔다. 그러다가 마봉황의 얼굴에 이르렀을 때, 장손불변의 눈길은 잠시 정지했다. "...!" 순간, 마봉황은 장손불변이 이미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마봉황과 마맥회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장손불변의 시선은 다시 움직였고, 이윽고 하나의 거무튀튀한 얼굴 위에 얹어졌다. "불초는 이제부터 이 표선을 무덤으로 알고 적들과 통쾌하게 싸워 볼 생각이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사내라면 나를 따르시오!" 일장의 열변이 끝날 무렵, 장손불변은 거무튀튀한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무튀튀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장손불변의 열변은 물론이거니와 어떠한 명연사의 열변도 그 얼굴에 떠오른 무덤덤함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장손불변은 거무튀튀한 얼굴의 주인, 단탈을 향해 조금 따지는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런데 단탈로부터 돌아온 말은 약간 엉뚱한 것이었다. "몸은 좀 어떠니?" 장손불변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단탈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그의 등뒤에서 누군가 울먹거렸다. "저는 괜찮은데... 장 오라버니가 많이 아픈 것 같아요." 멍한 표정은 이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리고 분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장손불변은 뒤에서 울먹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석소용, 방금 전까지 선실의 나무침상 위에서 죽은 듯이 자빠져 있던 것을 청신환(淸神丸)을 먹여 깨운 뒤 갑판으로 데리고 나왔으니, 그의 뒤에서 울먹일 사람은 그녀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대답한 사람이 누구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지만 소 닭 보듯 자신을 무시한 단탈의 행동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이때 마봉황이 끼여들지 않았다면, 장손불변은 지니고 다니는 스물아홉 종의 독암기를 몽땅 단탈에게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석 아가씨, 무사해서 다행이군요." 지금 장손불변과 단탈, 두 사람이 싸운다면 가장 곤란한 것은 마봉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적시에 두 사람 사이를 자르고 들어갔고, 장손불변은 마음속의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이 미묘한 심리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탈은 석소용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라." 석소용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단탈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어디 보자." 단탈은 석소용의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세우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은, 넘어진 딸자식을 일으켜 세우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보는 아버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한참 동안 석소용을 살핀 단탈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로 괜찮구나. 다행이야." 여전히 무뚝뚝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다른 미묘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었다.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강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만이 지닐 수 있는 분위기. 햇살처럼 따듯하고, 철벽처럼 안전하며, 절대자처럼 항거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자의 전유물... 바로 아버지의 느낌이었다. "와앙!" 얼굴을 몇 차례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리던 석소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탈의 품에 머리를 묻으며 대성 통곡을 터뜨렸다. 겉으로는 아무리 조숙한 체해도, 그녀는 아직 따듯한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형산에서 아버지를 잃은 뒤, 그녀를 따듯하게 보살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 단탈로부터 아버지의 느낌을 받자, 그 동안 겪은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일제히 북받쳐 오른 것이다. 단탈은 다 자란 계집애를 품에 안고도 별로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둘이 피붙이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오라버니가 다쳤대요! 어쩌죠? 만약 오라버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석소용은 울먹이며 말했다. 단탈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장옥평의 부상에 대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단지 장옥평이 탔던 배가 화포라는 무기에 의해 부숴졌다는 사실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마봉황이 다시 끼여들었다. "장 공자의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에요. 단지 내상이 큰 탓에 혼절했을 뿐이죠." "정말인가?" 신문하는 듯한 단탈의 물음에 마봉황은 정색을 하고 쌀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 공자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타루가 혼자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혼자만 장옥평을 위하는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단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장옥평의 관계가 우정에 의해 맺어져 있다면, 마맥회와 장옥평은 필요에 의해 맺어져 있었다. 관계의 순수성이야 어떻든 간에, 장옥평이 소중한 존재인 것은 쌍방이 매한가지였다. 단탈의 품속에서 마음껏 울던 석소용도 어느덧 조금은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이 배는 곧 시끄러워질 거야. 너는 옥평과 함께 다른 배로 오거라." 단탈의 말에 석소용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또 단탈과 따로 가는 거예요?" 석소용의 큰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소녀의 여린 심지라는 것이 원래 이런 식이어서, 일단 기댈 것을 찾은 뒤에는 좀처럼 그것과 떨어지려 하지 않는 법이다. "결국 같이 가는 거야." 단탈은 기껏 빗어 놓은 석소용의 머리카락이 까치집이 될 정도로 거칠게 쓰다듬은 뒤, 자신의 가슴을 탕 치며 다시 말했다. "내가 길을 열어 주마.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 "날 지켜 주는 거죠?" "물론!" 단탈은 마봉황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계획대로 내가 앞을 맡지." "고마워요. 장손 동생이 타루가를 도울 거예요." 마봉황의 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였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불사하는 그녀였지만, 스스로 미끼가 된 줄도 모른 채 적의 올가미 속으로 들어가려는 제물에게 진심이 담긴 감사를 보낼 정도의 자비심은 있었던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0 장 계략(計略) 묘왕동주 제 10 장 계략(計略) 1 쪽배 중앙을 가로지른 널빤지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전왕(展枉)은, 갑자기 배가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문득 옆자리가 허전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앉아 있던 고참 여풍귀(呂豊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 전왕은 깜짝 놀랐다. 쪽배에 탄 사람은 그와 여풍귀 둘뿐이었다. 탈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쪽배 자체가 원래 작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배 위에서 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전왕의 손이 반사적으로 목에 건 호각으로 향했다. 문제가 생기면 호각을 불어야 했다. 그것은 창망 중에도 떠오를 정도로 뇌리에 깊이 새겨 놓은 수칙이었다. 그때 후드득거리는 물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전왕은 뒤를 돌아보았고, 이내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여풍귀였다. 여풍귀는 운하 위에다가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물소리가 요란한 것으로 미루어 꽤나 참아 온 모양이었다. "허어! 운하 물이 불어나니 양 대강(大江)에는 홍수가 나겠구려." 제풀에 놀라 허둥댄 것이 멋쩍었던 탓일까? 전왕은 여풍귀의 등을 향해 우습지도 않은 농을 던졌다. 여풍귀는 오줌발을 거두는 듯 가볍게 진저리를 치며 그의 농을 받아 주었다. "자네 처가가 상주(常州)랬지? 어서 전갈이나 보내게, 물에 떠내려가지나 말라고!" "하하! 객쩍은 소릴랑은 그만 하시고 이리 오시오. 지린내는 아무리 제 것이라도 지릴 테니까." 전왕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풍귀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쪼그리고 있다 보니 오금이 저려 못살겠군. 나는 여기서 몸이나 풀고 있을 테니, 자네는 거기서 눈 좀 더 붙이게나." 그러면서 여풍귀는 양팔을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긴...' 전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금이 저릴 만도 했다. 창칼을 벗삼던 싸움꾼이 이렇게 조사(釣師) 흉내나 내며 앉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여풍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신도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졸지 않았던가. 본디 전왕과 여풍귀는 철옥 복건지부의 철한대에 소속된 철한인(鐵漢人)이었다. 그런 그들이 멀리 북쪽의 대운하까지 오게 된 것은, 한 달 전 복건지부로 날아든 한 장의 전서 때문이었다. 전서는 철옥의 대공자인 매용소가 보낸 것으로써, 지부의 인마를 호남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반나절이 넘게 고민하던 지부장 우현은, 철한대 두 조와 무사 십여 명을 파견하는 것으로써 매용소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생색만 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전왕과 여풍귀가 그 안에 포함된 것이다. '썩을!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전왕은 내심 투덜거렸다. 파견대에 낀 것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싸움을 업으로 삼은 철한인이었으니, 어디에서든 후련하게 싸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싸움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한 일이라고는 바람난 처녀처럼 이리저리 싸돌아 다니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밤, 드디어 싸움다운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전선(戰線)에 투입되지 못했다. 그저 뱃사공처럼 쪽배에 올라 수뢰가 설치된 철삭진으로 운하를 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철한인의 상징인 철갑 무장조차도 해체한 채로... 전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안개가 엷게 낀 운하 위에는 쪽배들이 칠팔 장 간격을 두고 떠 있었다. 운하에 횡으로 늘어서 철삭진을 통제하고 있는 쪽배의 수는 모두 여덟. 각각 두 사람씩 타고 있는데, 모두 복건에서 파견된 철한인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지금의 간부들은 복건에서 올라온 인마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후우!" 전왕은 함숨을 쉬었다. 강철 부대로 소문난 철한대가 쇠사슬 관리인으로 전락한 것은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불평해봤자 아무 소용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럴 바에야 여풍귀의 말처럼 잠이나 자두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전왕은 팔짱을 낀 채 고슴도치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한편 여풍귀는 허공을 상대로 휘두르던 주먹질을 모두 끝내고 호흡을 조절했다. 그가 한 주먹질은 철한인들의 기초 수련 과정인 용투권법(龍鬪拳法)이었다. 큰 동작에서 나오는 박력이 장점인 용투권법이지만, 쪽배 위에서 정식 투로(套路)를 전개할 수는 없었다. 한바탕 몸을 흔들었지만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여풍귀는 뒤를 돌아보았다. 전왕이 앞으로 푹 숙인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철한대의 규율은 엄격했다. 작전 중에 졸다가 발각되면 태병(怠兵)으로 분류되어 중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풍귀는 전왕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전왕은 철한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투지와 용맹을 갖추고 있었다. 탓하려면 그런 투지와 용맹을 썩히는 상관을 탓해야 마땅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기분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해야겠군.' 여풍귀는 전방을 응시하며 형(形)을 취하기 시작했다. 손목을 구부리고 손가락을 한껏 뒤로 젖히니 그것이 용조(龍爪)였고, 상체를 비스듬히 왼쪽으로 비틀어 엉거주춤 굽히니 그것이 '움츠려 못으로 들어가는[縮入沼]' 자세였다. 용투권법의 기수식인 청룡입소세(靑龍入沼勢)... 그런데 그때였다. "...!" 자연스럽게 좌측을 향하던 여풍귀의 두 눈이 돌연 크게 부릅떠졌다. 뿌연 물안개 저편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사건을 목격한 것이다. 그 사건은 좌측에 떠 있던 쪽배 위에서 벌어졌다. 본디 그 배에는 두 명의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고, 여풍귀는 그 그림자가 복건지부에서 함께 지내던 동료들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 위의 그림자가 셋으로 늘어났다.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난 세 번째 그림자는 안개 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붉었다. "어?" 여풍귀가 첫 번째 경호성을 터뜨릴 때, 붉은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 여풍귀가 두 번째 경호성을 터뜨릴 때, 두 동료의 그림자가 허수아비처럼 풀썩 넘어졌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 계속 '어?' 소리만 하고 있다면 병기를 잡을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여풍귀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전 아우! 적이...!" 그러나 여풍귀의 뒷말은 목구멍 아래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널빤지 위에서 졸고 있던 전왕은 몸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 목줄기에 박힌 비도(飛刀)의 손잡이가 여풍귀의 망막 속으로 주욱 확대되어 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익`-` 검은 그림자였다. 쪽배의 측현을 차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그 그림자는 한 마리의 거대한 박쥐처럼 여풍귀를 덮쳤다. 건너편 쪽배를 습격한 붉은 그림자처럼 신쾌(迅快)하기 이를 데 없는 몸놀림이었다. 하다못해 방금 전까지 연습하던 용추권법이라도 내질러야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검은 그림자의 공격이 너무 빨랐다. 이마가 선뜻했다. 북풍한설에다가 이마만 내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선뜻함은 굶주린 맹수처럼 순식간에 그의 의식을 잡아먹었다. 여풍귀의 몸뚱이는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좌훈은 오른팔을 내밀어 운하 속으로 빠지려는 적의 시신을 황급히 잡아 끌었다. 비도를 날려 그자의 이마에 바람 구멍을 만들어놓은 것까지는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었지만, 만에 하나 물소리라도 낸다면 이제껏 쏟아 부은 노력이 공염불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좌훈은 비도를 수습한 뒤, 두 구의 시신을 배 중앙에 앉혀 놓았다. 자꾸 넘어지려고만 하는 시신을 서로 기대어 앉히는 일은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요령이란 것은 원래 반복할수록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이미 세 번이나 같은 일을 치른 그인지라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매(芝妹)는 끝났을까?' 좌훈은 구양지가 오른 배를 바라보았다. 구양지는 좌훈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배의 처리가 모두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렇다면 이것으로써 철삭진을 유지하던 여덟 척의 배는 모두 정리된 셈이었다. 소비 시간은 반 시진 하고도 일 각 정도. 물론 더 빨리 처리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속함이 아닌 은밀함이었다. 좌훈은 이 정도 결과에서 만족할 수 있었다. 좌훈은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배에 연결된 철삭을 따라 헤엄치기 시작했다. 비록 한 팔이 없고, 또 등에는 무거운 철곤까지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수영 솜씨는 그런 대로 봐줄 만했다. 좌훈은 역겨운 물 냄새를 맡으며, 구양지를 통해 전달받은 마봉황의 지시를 생각했다. 약속 시간인 축시 말까지 좌훈과 구양지가 완수해야 할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임무는 철삭진의 수뢰에 의해 봉쇄당한 운하를 개방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배에 탄 적들을 남김없이 처리해야만 하는데, 그 일은 이제 막 완료되었다. 남은 것은 철삭에 달린 수뢰들을 제거하는 일. 비록 화기에 대해 문외한인 좌훈이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마맥회의 재주꾼 구양지가 그 방면에 있어서 제법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임무는 마봉황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범선이 보유한 화포를 무력화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첫 번째 임무보다 훨씬 힘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거사(擧事)하기도 어렵거니와, 범선 위에는 쪽배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고수들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훈은 이 두 번째 임무만큼은 완수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한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투우!' 물살을 헤집던 좌훈의 오른팔이 잠시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한 모금의 더러운 물이 울컥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수면 위로 내밀어 그것을 뱉어 냈다. 과거의 친구, 그러나 현재의 원수! 남마련이 화염에 휩싸이던 날, 그 가공한 화포술로써 좌훈 부부에게서 한 팔씩을 앗아 가버린 바투우! 좌훈은 이를 악물었다. 원한을 잊는다면 강호인이라고 할 수 없었고, 좌훈은 스스로를 너무도 분명한 강호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문득, 저만치에서 구양지가 헤엄쳐 오는 것이 좌훈의 눈에 들어왔다. 축시 말까지는 이제 한 시진이 남아 있었다. * * * 쾌속선이 멀어졌다. 쾌속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표선은 광양호를 향한 운항을 시작했으니, 표선 위에 있는 단탈의 눈에는 쾌속선이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쾌속선에 탄 사람은 다섯이었다. 장옥평, 석소용, 마봉황과 배를 능숙하게 부릴 줄 아는 두 명의 마맥회 무사가 그들이었다. 적으로부터 탈취했다는 쾌속선은 튼튼해 보였고, 단탈은 그 점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쾌속선이 튼튼할수록 장옥평과 석소용이 무사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옥평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등판은 온통 엉망이 된 참혹한 모습이었다. 부상이 엄중한 탓인지, 그는 배를 옮겨 타는 순간까지도 끝내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옥평과 나는 언제나 이런 식이군.' 단탈은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그와 장옥평, 둘 중 하나가 정신을 잃었을 때에는 언제나 큰 위험이 닥쳐 왔다. 묘강에서도 그랬고 형산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 정신을 잃은 사람을 결사적으로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때 한 사람의 비아냥거림이 단탈의 신경을 건드렸다. "후후! 마치 애인을 두고 떠나는 사람 같은 표정이구려!" 바로 장손불변이었다. "저들은 언제쯤 따라오나?" 단탈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불쑥 물었다. "글쎄요..." 단탈에게 그토록 모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손불변은 여전히 경어를 쓰고 있었다. 모욕을 잊을 사람은 아닐 테니, 말버릇 자체가 원래 그런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따라오면 곤란하지 않겠소?" 장손불변의 대답이었다. 알쏭달쏭한 대답이지만 단탈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적의 목표는 장옥평이었다. 장옥평이 쾌속선에 탔다는 사실을 적이 알아차린다면, 애써 빼돌려 오히려 위험에 빠뜨린 격... 그렇다면 쾌속선과 표선의 거리는 가능한 한 떨어지는 편이 바람직했다. "심심한데, 옛이야기나 한 토막 들어 보겠소?" 장손불변은 지나가는 투로 말을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천오백여 년 전에 유씨(劉氏)라는 임금이 있었소. 어느 날 그는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숙적 항씨(項氏)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생명이 경각에 놓이게 되었지요. 애당초 군세(軍勢)가 비교되지 않았던 탓에, 유씨가 힘으로써 항씨를 물리치기란 불가능한 상태였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나 하면, 음... 아마 지금의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오." 이 대목에서 장손불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단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자! 문제 하나를 내겠소. 과연 유씨는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했을 것 같소?" 단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곁에서 돛줄을 풀던 표사 하나가 냉큼 끼여들었다. "장손 대협! 혹시 한고조(漢高祖)와 초패왕(楚覇王)의 형양대전(衡陽大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장손불변은 반색을 하며 그 표사를 칭찬했다. "하하! 견문이 대단하시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0 장 - 1 묘왕동주 우쭐해진 표사는 장손불변이 낸 문제의 해답을 말했다. "그때 한고조 유방(劉邦)은 상장군(上將軍)인 기신(紀信)의 희생에 힘입어 항우(項羽)의 포위망을 뚫고 형양성을 탈출했지요. 아아! 이것만 보아도 예부터 성군(聖君)의 곁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신열사들이 있음을 잘 알 수 있지요." 표사는 싸구려 설선가(舌善家)처럼 과장된 감탄사까지 섞어 가며 침을 튀겼다. "유방을 성군이라 부르기는 힘들겠지만, 주군을 대신해 생명을 버린 기신이 충신열사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장손불변은 점잖은 목소리로 일부는 부정하고 일부는 인정했다. 단탈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방이란 놈이 성군이든 아니든, 그리고 기신이란 놈이 충신열사건 아니건, 그것은 한족들의 역사요, 한족들의 이야기였다. 부족을 재건한다는 오직 한 가지 목표만으로 수천 리를 달려온 남만의 왕에게는 손톱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박한에게나 가봐야겠군.' 단탈은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말 많은 놈들 사이에 있느니 차라리 박한과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박한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아는 한어가 몇 안 되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설령 한어를 안다 할지라도 박한은 말을 아끼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몸을 돌리던 단탈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쌍검! 장손불변은 허리 양쪽에 검을 차고 있었다.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 고풍스러운 두 자루 검은 단탈에게 있어서 낯익은 물건이었다. 형산에서 장옥평이 사용하던 쌍검이 바로 저런 모양이었던 것이다. 장손불변은 검을 장기로 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아무리 데면데면하게 여기던 단탈이었지만, 그 정도쯤은 알고 있었다. 장손불변은 왜 쌍검을 차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장옥평의 것을? 단탈은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표선이 향하는 곳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위지(危地). 다른 사람의 병기에 의혹을 품을 여유 따위는, 애당초 표선에 탄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바람이 차가워졌다. 갈대숲에서 울려 나오던 밤새의 울음 소리도 어느덧 잦아들었다. 단탈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미골(尾骨)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기이한 경련... 그는 안색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짙어진 위험의 냄새가 사방에서 풍기고 있었다. 2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쪽이 아니잖아요!" 배는 한 개의 세모난 방향타(方向舵)와 두 개의 노가 모두 후미에 달린, 앞이 뾰족하고 뒤가 넙적한 설형(楔形:쐐기 모양)의 쾌속선이었다. 그 쾌속선 위에서 석소용은 들창코 청년을 향해 빽 고함을 질렀다. 방향타를 쥐고 있던 들창코 청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석소용을 바라보다가, 이어 쾌속정 중앙에 있는 마봉황의 눈치를 살폈다. 석소용의 시선도 덩달아 마봉황을 향했다. 그녀는 마봉황이 "네가 잘못했다!"라며 청년을 꾸짖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임빈! 그대로 가라!" 마봉황은 엄한 목소리로 방향타를 쥔 들창코 청년, 임빈을 향해 말했다. "뭐라고요?" 석소용은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의 귀는 너무도 멀쩡했고, 마봉황의 목소리는 너무도 분명했다. "무슨 소리예요! 이쪽은 단탈이 간 방향과 반대잖아요!" 석소용은 마봉황에게 따졌다. 그러나 마봉황은 냉랭하게 그녀를 공박했다.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석 아가씨는 입 다물고 장 공자 곁에나 가 있어요." "헤에?"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석소용은 웃고 말았다. 애 취급당한 것에 화가 났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단순히 화만 내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방향이 잡히자 임빈은 방향타를 놓고 하나의 큰 노를 기운차게 젓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마맥회 무사`-`쥐새끼 같은 낯짝을 한 뇌칙서라는 중년인이었다`-`도 기다렸다는 듯이 노질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배를 다루는 솜씨는 어떤 선원에 못지않았다. 배는 뾰족한 선수를 하늘을 향해 불쑥 치켜 든 채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표선이 간 광양호 쪽과는 정반대 되는, 말하자면 운하로 난 자영구의 입구 쪽이었다. 배는 운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석소용은 냉수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한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한 가지 무서운 가정이 떠오른 것이다. "당신들 설마..." 그러나 마봉황은 석소용은 본 척도 않은 채 노를 잡은 두 사내에게 명했다. "급하다! 서둘러라!" '설마' 하던 생각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석소용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단탈을 속였군요! 당신들은 단탈을 속였어!" 석소용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마봉황은 간교하게도 타루가니 뭐니 하면서 단탈의 비위를 맞춘 다음, 장옥평을 위한 일이라면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그를 적들이 기다리는 광양호로 들어가도록 했다. 금방 따라갈 것이라고 속여서 말이다. 그리고 그의 표선이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방향을 바꿔 운하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의 주력은 장옥평이 타고 있는, 그러나 사실은 껍데기에 불과한 표선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선탈각(金蟬脫殼). 교활한 매미 마봉황은 우둔한 껍질 단탈을 사지로 들이밀고는 훨훨 날아가려는 것이다. "비겁해! 당신은 비겁해!" 석소용이 손가락질하며 악을 쓰자, 마봉황은 사나운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두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매섭게 얽혔다. 하지만 이 눈싸움은 금방 끝났다. 뜻밖에도 마봉황이 석소용의 시선을 외면한 것이다. 마봉황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 배에는 아가씨의 친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수족과도 다름없는 수하들이 거기에 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결국 다 죽잖아!" 마봉황은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당신은 비겁해! 사람들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서 죽음의 길로 보내다니! 마봉황의 목숨이 그렇게 귀한 거야? 모두 희생하면서까지 살아야 할 정도로 비싼 거야?" 마봉황은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백칠십 명 마맥회원들의 앞날을 책임지고 있는 목숨이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이 죽는 한이 있어도 나와 장 공자만은 살아야 해요. 그리고..." 마봉황의 눈에 아픔의 빛이 담겼다. "독짐을 비롯한 마맥회 무사들은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와 장 공자를 위해 사지로 뛰어든 거죠." 임빈과 뇌칙서의 얼굴에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석소용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마봉황은 실로 놀라운 군주였고, 마맥회 무사들은 실로 놀라운 충신들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마봉황의 주장은 객관적인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만약 제삼자에게 일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두 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의당 마봉황과 장옥평을 선택할 것이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이 지닌 가치는 다대했다. 그것을 부정할 정도로 안목이 짧은 석소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객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에 불과했고, 이러한 생사지투에 있어서 객관을 논할 만치 한가한 제삼자는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주관이라는 시각으로써 자신과 주변을 바라본다. 그 시각에 비친 모든 세계는 결국 시각의 주체만을 위해 움직이는, 그들 자신만의 세계인 것이다. 저마다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 자신의 목숨일진대, 생명의 가치를 논하는 데 있어서 누가 감히 객관과 합리를 논하랴! "당신은 틀렸어!" 석소용이 다시 소리치자 마봉황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불가항력의..." "불가항력으로 죽어 줄 목숨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석소용은 칼로 자르듯 마봉황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마봉황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석소용을 향해 한걸음을 내딛었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요." 마봉황의 수더분한 얼굴에는 눈빛에 못지않은 싸늘한 기운이 한 꺼풀 덮여 있었다. 석소용은 한 발 물러서며 코웃음쳤다. "흥! 나를 장 오라버니처럼 만들 생각이라면, 단념하는 게 좋을걸?" 석소용은 품속에서 한 자루 단검을 꺼냈다. 날의 길이가 한 뼘이 채 안 되는 그 물건은, 마맥회의 은신처를 출발하기 전 호신용으로 쓰라며 마봉황이 선물한 보검이었다. "장 공자를 점혈하는 광경을 보았나요?" 의외라는 듯 마봉황이 묻자 석소용은 키득거렸다. "히히! 내가 완전히 기절해 있었다고 생각해? 좀 아프긴 했지만 금방 깨어났지." 석소용은 포격 이후 그리 오랫동안 기절해 있지 않았다. 별다른 부상 없이 단지 놀랐을 뿐이니 금방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기절한 것처럼 가장한 이유는 그녀를 구하려다가 부상당한 장옥평 때문이었다. 죄책감도 죄책감이거니와, 그녀는 사람들의 질책이 자신에게 퍼부어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나도 다쳤소.' 하고 쥐죽은듯이 있었던 것이다. 마봉황은 석소용이 쥔 단검을 일별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곤란한 아가씨로군. 그런 것을 빼 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죠?" 마봉황은 강호에서 능히 여중최강(女中最强)을 논할 수 있는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설령 단탈이나 박한이 직접 따진다 할지라도 힘으로는 굴복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 재주라고는 어깨 너머로 배운 호신용 검법 몇 수가 전부인 석소용이 어찌 대항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석소용은 픽 웃었다. "당신과 싸우려는 게 아니야." 말과 동시에 석소용은 수중의 단검을 마봉황에게 냅다 집어던졌다. 가까운 거리에 매서운 기세였지만, 마봉황을 어떻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마봉황은 냉소를 흘리며 왼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한 줄기 미풍이 이는가 싶더니, 단검은 그녀의 왼손 인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버렸다. 하지만 석소용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마봉황과 싸우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준 단검 따위는 필요없어! 더러워서 안 가져! 그래서 돌려주는 거야!" 그러더니 석소용은 난간 위로 냉큼 뛰어올랐다. "무슨 짓을...?" 마봉황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석소용은 손가락으로 마봉황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빠르게 쏘아붙였다. "넌 더러운 년에다가, 치사한 년에다가, 야비한 년이야! 난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너처럼 혼자만 잘났다고 날뛰는 늙은 암탉 같은 년은 처음 봤어! 지금은 옥평 오라버니와 같이 있으니까, 살아서 목적지까지 가기를 바래 주겠어. 하지만 넌 꼭 지옥에 떨어질 거야. 네 얼굴 가죽이 아무리 질기다 해도, 그 동네 괴물들의 이빨 앞에는 어림없지! 그때가 되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후회해 봤자 소용없을걸?" 아마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지독한 욕설이었을 것이다. 마봉황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사람처럼 입을 딱 벌렸다.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 석소용은 고개를 돌려 강물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물은 정말 싫은데..." 그리고 금방 다시 말했다. "하지만 별수없지." "석 아가씨!" 마봉황이 외쳤다. 그러나 석소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켜 주겠다는 사람이 있었어. 그에게 갈 거야." 그 말이 끝이었다. 풍덩`-` 물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난간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마봉황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리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그녀의 망막에는, 물안개를 헤치며 헤엄치는 석소용의 뒤통수가 담겨 있었다. "속하가 다시 잡아오겠습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0 장 - 2 묘왕동주 곁에 있던 뇌칙서가 곧바로 물로 뛰어들 태세를 갖췄다. 평소에 떨던 깔끔과는 딴판으로, 석소용은 더러운 강물 속에서도 맵씨 좋게 헤엄치고 있었다. 일견해도 하루 이틀 사이에 배운 수영 솜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수공에 장기가 있어 지중활리(地中活鯉)라는 별명이 붙은 뇌칙서라면 그녀를 잡아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마봉황은 넋 빠진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주?" 뇌칙서가 다시 물었다. 마봉황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뇌칙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라." 어딘지 맥이 풀린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저 아이가 적들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형제들의 희생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릅니다!" 뇌칙서는 보기 드물게 마봉황의 지시에 대해 토를 달았다. 그러나 마봉황은 고개를 다시 한 번 저었다. "광양호에 있는 적들이 안다 해도 상관없다. 이것은 어차피 시간과의 싸움이니까..." 몇 마디를 하는 동안 마봉황은 본래의 냉엄한 신색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았다. "가자! 야앵무와 약속한 시간에 늦어선 안 된다!" 마봉황이 명하자 뇌칙서와 임빈 두 사람은 다시 노질을 시작했다. 슈랑`-`슈랑`-` 두 개의 큰 노는 힘찬 기세로 물살을 갈랐다. 노 젓는 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나온 괴물들의 흐느낌처럼 기분 나쁘게 고막을 자극했다. 머리카락에 휘감기는 물안개의 촉촉함을 느끼며, 마봉황은 광양호 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내가 잘한 일일까?' 석소용의 욕설 때문일까? 마봉황은 이 금선탈각의 책략에 대해 처음으로 회의를 품었다. 어쩌면 이 계획은 출발할 때부터 준비된 일일지도 모른다. 장옥평과 외모가 비슷한 장손불변을 행렬의 일원으로 선발한 것부터가 그랬다. 상황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돌아갈 것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장손불변으로 하여금 장옥평과 똑같은 의복을 입게 한 그 순간부터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매미 껍질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단탈과 박한... 처음부터 그들 두 사람을 제물로 삼을 의도는 없었다. 단지 여행 중에 확인된 그들의 능력이 쓸 만했기에, 그들을 장옥평의 대역인 장손불변 주위에 배치한다면 보다 오랫동안 적들을 기만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뿐이다. 그 정도의 배역이라면 미개한 오랑캐의 쓰임새로는 오히려 과분하지 않겠는가! 조직이란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기적인 생명을 지닌 존재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머리와 발톱의 가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조직에 있어서도 중요한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가 있었다. 마봉황은 마맥회라는 조직에 있어서 머리였다. 그리고 장옥평은 마맥회에 날개를 달아 줄 산동장가라는 다른 조직의 머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탈은? 그리고 박한은? 마봉황의 사고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두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극히 미미했다. 비유하자면 제법 값은 나가지만 결국 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인 셈이다.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의 다른 부위, 예를 들자면 독짐 장손불변처럼 중요한 부위마저 결연히 잘라 버리는 마봉황에게, 거치적거리는 장신구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봉황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쾌했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불쾌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석소용의 욕설처럼 자신이 정말로 천하에 다시없는 악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답지 않다!" 마봉황은 나직한, 하지만 단호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후회와 미련 같은 감상은 인간은 몫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마련 수천 식솔의 혈한(血恨)을 어깨 위에 짊어진 철의 여전사, 마봉황이었다. 3 그 이맛살은 마른 두부처럼 푸석푸석했다. 조금 힘주어 문지르면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겨질 정도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몸통에서 잘린 지 며칠이 지난 사람의 머리, 그 이맛살이 생살처럼 탱탱하기를 기대하기란 힘들 테니까. 그 이맛살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매만진 서운삼(徐雲三)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문수침(紋繡針)을 내려놓고 말았다. 일할 마음이 싹 가셔 버린 것이다. 서운삼에게는 두 개의 직업이 있는데, 하나는 알려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여덟 가지 문수침으로 사람의 몸뚱이에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을 새기는 문신쟁이가 그의 알려진 직업이었다. 문신쟁이로서 그는 대단히 유명했다. 남경에 사는 서(徐) 삼야(三爺) 하면, 그 바닥에서 몰라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런 서 삼야가 썩어 가는 인두(人頭)에 문수침을 대다니! 마음에 드는 피부가 아니면 천금을 준다 해도 침을 쥐지 않는다는 남경 서 삼야의 자존심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서운삼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놈의 대가리에 대고 언제까지 제사만 지낼 작정이오? 이러다 날 새겠소!" 서운삼의 잿빛 눈썹이 살짝 이지러졌다. "기다리게." 하지만 목소리의 임자는 서운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정 마음이 안 내키면 그만두시구려. 붓으로 쓰면 그만이지 굳이 문신을 새길 필요는 없는 일 아니오?"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하기야 인두 자체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할 테니, 굳이 그 위에 문신을 새길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문신을 새겨야겠네." 서운삼은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대답했다. 문신은 그의 상징, 자존심은 나중 문제였다. 서운삼의 두 가지 직업 중 알려지지 않은 것... 그것은 잠자리를 가리는 서운삼으로 하여금 남경의 보금자리를 떠나 황량한 물가에서 노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입이 짧은 서운삼으로 하여금 거친 밥과 덜 익은 물고기를 먹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자존심이 강한 서운삼으로 하여금 인두의 푸석푸석한 피부에 문수침을 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서운삼은 곁에 놓아 둔 걸망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 안에는 서역(西域)의 백분(白粉)이 들어 있었다. 서운삼은 인두 위에 정성스럽게 백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운삼은 분단장한 인두를 마주할 수 있었다. 흐릿한 등불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는 인두는 보는 사람의 오장(五臟)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흉측했다. "흐흐! 인두에 화장이라... 취미가 고상하시구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번에는 이죽거리고 있었다. 서운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 상강(湘江) 일대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살수, 애혈(愛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피 냄새를 연상케 하는 얄팍한 입술. 그 위에는 한 조각 엷은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자네는 자네 일이나 걱정하게. 놈들로부터 빠져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서운삼은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애혈은 별로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놈들을 만만히 생각하면 큰코다칠..." "물에서 나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애혈은 서운삼의 말허리를 잘랐다. 서운삼은 이 무례한 살수를 잠시 동안 노려보았지만, 결국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오래 산 사람들은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알지." 서운삼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중얼거린 뒤, 물안개가 한 겹 깔린 광양호를 바라보았다. 이 호수 어딘가 계(契)를 배반한 놈이 있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동료를 살해한 놈의 만행에 모든 계원(契員)들은 분노했고, 놈에 대한 징치(懲治)는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놈의 배경이 강남제일문파인 철옥이라는 점 때문에 망설이는 계원은 없었다. 살해된 계원의 복수를 위해? 복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계원들 중에서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감정들을 소중히 여기는 어린애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료의 밥그릇을 무력으로 가로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번 일이 묵과되는 날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동료의 밥그릇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게 될 것이요, 그것은 계 자체의 몰락을 뜻했다. 계가 몰락한 자리에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승냥이 몇 마리만 남을 뿐... 계원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타산을 잠시 접어 두고 한마음이 된 것이다. 강남 일대에서 활약하는 계원들은 바빠졌다. 그들은 지닌 바 능력을 발휘하여 놈의 행적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호에 대해 유난히 후각이 발달한 애혈이 큰 공을 세웠다. 진강구 지부아문(知府衙門)의 정문을 나서던 놈의 끄나풀을 생포한 것이다. 비록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노적가리처럼 풍부한 끄나풀이었지만, 상대는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애혈이었다. 일곱 가지의 예리한 고문 도구와 열두 가지의 끔찍한 고문 수법은 끄나풀의 혓바닥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고, 말랑해진 혓바닥은 조금씩 영혼을 갉아 들어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놈에 관한 모든 것을 불고 말았다. 오늘밤 광양호에서 벌어지는 일장의 몰이극에 대해 서운삼이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가치를 상실한 끄나풀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죽었다. 애혈은 계를 위해 여러 가지 고마운 정보를 알려 준 끄나풀에게 깔끔한 죽음을 선사해 주었다. 단 한 번의 칼질로 목을 잘라 준 것이다. 그리고 잘린 목은 지금 서운삼 앞에 놓여 있었다. 하얗게 분칠한 귀기로운 모습으로... 서운삼은 이번 행사에 직접 참여한 계원들을 꼽아 보았다. 암중에 도움을 준 사람들은 다수이지만, 몸소 일선에 나선 사람은 셋. 남경의 문신쟁이 서운삼, 상강의 살수 애혈, 장봉현(長 縣)의 책방 주인 어고(漁考)가 그들이었다. 이제 서운삼과 애혈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남은 것은 어고가 산동의 호랑이들을 운하로 인도하는 일뿐이다. '어(漁) 선생이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책방 주인이 사패 중 하나를 동원하는 것도, 직업 살수가 금전이 안 걸린 살인을 하는 것도, 그리고 자신이 인두에 문신을 새기는 것도... 모두가 벅찬 일, 손에 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놈이 철옥이라는 괴물에 달라붙어 있는 이상, 싸움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수의 계원들이 놈과 철옥을 파멸시키기 위한 작업에 동참할 것이다. 계, 그리고 계원들의 존립을 위해... "후우!" 서운삼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인두의 이마에 문수침을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1 장 공작(工作) 묘왕동주 제 11 장 공작(工作) 1 머리통이 물 밖으로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한마디의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쁜 년! 나쁜 년! 나쁜 년!" 지금 석소용은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강물 복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맨 처음 마봉황의 쾌속선에서 뛰어내릴 때에는 그래도 기세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소용은 단숨에 단탈에게 헤엄쳐 가서 마봉황의 야비한 술책을 몽땅 일러바칠 생각이었다. 단탈의 성격으로 미루어 이 일을 참아 넘길 리가 없을 테니, 마봉황은 언젠가 단탈의 주먹 아래에서 묵사발이 되고 말 것이다. "염가 할망구, 넌 이제 큰일났다!" 이것이 석소용의 당시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척의 배, 그 사이의 거리에 대해 너무나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금방 단탈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자영구라는 현실의 세계에서 헤엄쳐 보니, 이게 무슨 더러운 경우람! 가도 가도 끝이 없지 않은가! 악으로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어깨는 떨어져 나갈 것처럼 무거웠고, 두 다리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송아지 살코기처럼 나긋나긋한 몸뚱이로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을 강물에 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육체의 피로는 정신의 분노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마봉황, 그 야비한 계집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면전에서 좀더 욕설을 퍼붓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래서 죄 없는 강물에게 '나쁜 년!' 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석소용은 강물 위에 떠 있는 시커먼 물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제발 단탈의 표선이길 바라며, 또 한편으로는 자꾸만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석소용은 그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표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나무들을 말굽 모양의 이음쇠로 박고, 다시 동아줄로 친친 엮어 만든 큼직한 뗏목이었다. '적인가 봐... 소용아, 넌 참 재수도 없구나!' 석소용은 울고 싶어졌다. 아니, 실제로 조금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수없었다. 그것이 적의 뗏목이든 아니든, 단탈을 찾으려면 반드시 저것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이 내고 있는 물소리를 원망하면서도 뗏목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뗏목 위에는 과연 적들이 있었다. 시커먼 투구, 단단한 철갑, 그리고 흉흉한 장창... 석소용은 그 복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형산에서 그토록 그녀를 괴롭히던 철한대의 복장이 바로 저랬다. 그러나 지금의 그들은 형산에서처럼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위험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을 벌판의 짚단처럼 뗏목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시커먼 투구는 벗겨졌고, 단단한 철갑은 갈라졌으며, 날카로운 장창은 부러졌다. 한마디로 깨끗이 몰살당한 것이다. 석소용은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오매불망 그리던 단탈의 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대신 쓸데없는 것들은 많았다. 쪼개진 판자며 부서진 배, 그리고 둥둥 떠 있는 시체... 석소용은 그제야 이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탈은 석소용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곳에는 본디 철옥의 매복이 있었고, 놈들은 단탈이 탄 표선을 발견하자 곧바로 공격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치열한?' 석소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었다. 보지 않았으니 거기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분명한 것은, 단탈은 놈들을 모조리 처치한 뒤 늠름히 이곳을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멋있군! 정말 멋있어! 근데 좀 천천히 가면 어디가 덧나?"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찾아왔다. 기쁨은 강적들을 이처럼 무참히 쳐부수는 단탈의 강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슬픔은 아직도 더 헤엄쳐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소용은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판자 중에서 적당한 놈 하나를 골라잡았다. 이것만 있으면 물위에 떠 있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같이 가, 단탈!' 석소용은 마음속으로 외치며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 * * 휘익`-` 군천월(君泉月)은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을 발휘하여 범선 위로 올라갔다. 갑판에 내려선 군천월은 범선의 측현에 대어진 연미차주[燕尾車舟:車舟는 양쪽에 바퀴가 달려 발로 밟아서 움직이는 배로서, 당서(唐書)에 의하면 그 속력이 돌진하는 말보다 빨랐다고 한다]를 내려다보았다. 연미차주 위에는 생김새가 닮은 장년의 수부 두 사람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들 두 수부는 도(陶)라는 성을 지닌 형제들로서, 장강육어의 수하들 중에서도 연미차주를 잘 다루기로 손꼽힌다고 했다. 군천월은 그 말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한 시진 내내 목구멍에 생선 가시라도 걸린 듯한 불쾌한 배멀미에 시달리면서, 몸소 확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기하도록." 군천월은 두 사람에게 짧게 지시한 뒤 범선의 선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현위치는?" 매용소는 접을 수 있는 간이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결과에 대한 초조함도 생길 법한데,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군천월은 공손한 자세로 매용소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 소명사주(小皿砂洲)에 진입했을 겁니다." 본디 군천월은 호남지부 산하 철한대의 조장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백석학의 전투에서 조원 대부분을 잃은 뒤 처량한 신세로 전락, 지금은 한 척의 연미차주로 자영구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본대와 매복을 연결시켜 주는 전령(傳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벌써 소명사주에...?" 매용소는 조금 놀랐다. 소명사주는 자영구와 광양호를 연결하는, 호로병에 비유하자면 병목 부위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사주(砂洲)였다. 소명사주를 지나는 물길은 수로의 폭이 넓은 대신 수심이 얕고 곳곳에 모래섬이 솟아 있었다. 작은 배가 아니고서는 기동성을 살리기 힘든, 병법에서 말하는 이른바 비지( 地)인 셈이다. 매용소는 머릿속으로 소명사주의 지형을 떠올리는 한편, 한 줄기 경이감이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냥감은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전진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자영구를 따라 안배한 세 곳의 매복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냥감은 상상 이상으로 사나운 것이다! 매용소는 군천월에게 물었다. "상황은 어떤가?" "당운천(唐雲泉)이 이끈 첫 번째 매복은 일식경(一食頃:30분) 동안 놈들과 교전한 뒤 후퇴했습니다. 피해 상황은 사망 스물일곱에 부상 스물하나... 그런데..." "그런데?" 군천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보고했다. "가사목(賈史穆)과 홍분예(紅粉 )가 이끈 두 번째 매복은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고 허물어졌습니다." 매용소는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청색 유삼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전운리가 서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들은 언제나 상상을 넘어서는군요. 비록 매복만으로 그들을 어찌하겠다는 의도는 없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써니... 으음!" 전운리는 낮은 신음으로 말끝을 얼버무렸다. 사실 운하에 배치한 도연향의 저지선은 사냥감을 통째로 자영구로 몰아넣기 위한 위협용에 불과했다. 사람의 눈이 많은 운하에서 언제까지나 추격전을 벌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운하에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곁길이 많았다. 만에 하나 사냥감이 산개(散開)하여 도주하는 날에는 지금까지 들인 공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냥감이 일단 자영구로 들어온 이상 상황은 달랐다. 멧돼지의 난폭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동시에 갖춘 사냥감이었다. 일격에 요절내 버릴 요량이었다면, 이화신마가 보낸 바투우의 화포술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문제는 사냥감에 포함된 한 알의 보물, 장옥평이었다. 그 보물을 온전히 수중에 넣기 위해서는 훨씬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운리는 자영구 삼십 리 물길을 따라 연쇄적인 매복을 계획했다. "피곤한 적에게는 쉴 틈을 허용하지 마라."은 병법 그대로였다. 이른바 치고 빠지는 차륜전(車輪戰),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격 속에서 사냥감은 제풀에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였던가?' 전운리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며칠 동안 지나치게 심력을 소모한 탓인지 목뒤가 철심이라도 박힌 것처럼 뻣뻣했다. 그리고 군천월의 보고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또 한 가지 있었다. 전운리는 세 차례의 연쇄 매복의 배치를 의도적으로 뒤로 갈수록 강해지도록 만들었다. 당운천의 첫 번째 매복에 비교한다면, 가사목·홍분예의 두 번째 매복의 전력은 두 배 이상인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는 무사하고 두 번째는 박살났다. 우연일까? 아니면, 그 동안에 무슨 전기(轉機)라도 있어서 사냥감들이 바짝 독이 오르기라도 한 것일까? 이때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군천월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놈들 중에서는 두 사람의 활약이 제일 두드러졌습니다." 전운리는 군천월이 말한 두 사람이 누구일까를 추리해 보았다. 필경 일행 중에서 가장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들일 테니, 장옥평과 마봉황 정도면 대충 아귀가 맞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군천월의 뒷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군사(軍師)께서는 형산에서 장옥평과 함께 포위망을 뚫던 두 괴인을 기억하시겠지요?" '두 괴인...?' 전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군천월이 말한 두 괴인의 형상을 떠올리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신경을 쏟은 것은 장옥평과 마맥회이지, 형산에서 잠깐 본 두 괴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검은 칼과 단인검(單刃劍)을 사용하던 괴이한 복장의 두 사람 말인가?" "예! 바로 그들입니다!" 이때 매용소가 끼여들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강한가?" 군천월은 추호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속하가 지켜본 바, 놈들이 매복을 허물어뜨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두 사람의 힘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검은 칼을 쓰는 자의 무공은 정말... 속하도 형산에서 겪은 적이 있지만, 그때보다 더욱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도법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참 늘어놓던 군천월은 어느 순간,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상전 앞에서 다른 사람의 무공을 칭찬하는 짓은 커다란 불경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용소는 그런 점에 있어서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게." 이 말에 용기를 얻은 군천월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칠로지(七老沚)에서 대기하던 두 번째 매복은 도합 네 방향에서 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분예가 두 패의 수적을 거느리고 놈들의 진로를 좌우에서 차단하는 사이, 철한대 이 개 조가 벌자(筏子:뗏목) 두 채를 이용하여 놈들의 배에 오른다는 것이 사전의 계획이었죠. 공격은 갑작스러웠고 각 공격로의 시간 안배 또한 적절했습니다. 홍분예가 화살 공격을 퍼부어 놈들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사이, 후면으로 접근한 철한대 일 개 조가 놈들의 배에 승삭구(繩索鉤)를 거는 데 성공했지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약간 이상한 상황이었다. 철한대 육조의 조장 가사목(賈史穆)이 던진 갈고리가 표선의 난간대에 걸렸을 때, 그 갈고리의 용도는 분명히 뗏목에 타고 있던 철한인들을 적의 표선 위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갈고리의 용도는 반만 들어맞았다. 갈고리에 걸린 밧줄 위로 사람이 건넌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가 철한인이 아니라는 점이며, 방향 또한 뗏목에서 표선으로가 아닌 표선에서 뗏목으로였다는 점이다. 갈고리가 걸리기가 무섭게 밧줄 위를 달려 내려온 사내는 파계한 지 한 달쯤 지난 땡초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군천월은 그 사내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검은 표범가죽 아래로 시퍼런 안광을 뿜어 내며 형산을 제 집 안방처럼 누비던 이족(異族) 사내! 당시 여든한 명 철한대 중 오분지 일 가량이 그의 시커먼 칼 아래 베어졌고, 스물일곱 명 화룡대 중 대부분이 그의 무지막지한 손 아래 녹아 버렸다. 지금은 비록 그때처럼 검은 표범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지만, 게다가 까칠한 이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웅건까지 두르고 있었지만, 군천월은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시 사내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시커먼 연기를. 곤오철(昆吾鐵)로 만들어진 철갑을 단숨에 갈라 버리던 무시무시한 칼을... 뗏목 위가 삽시에 시커메졌다. 일(一) 대 구(九)의 싸움이었지만, 과연 그것을 싸움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홉이 양이고 하나가 늑대라면, 그들 사이에 과연 '싸움'이라고 부를 만한 대등하고도 치열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까? 누구의 눈에도 볼품없게 여겨질 괴상한 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공간을 살기로 메워 버렸다. 그것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구분되는 검은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장창과 철갑과 골육을 무 베듯 갈라 버렸다. 형산의 악몽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가련한 가사목! 철한대의 무공 외에도 가전(家傳)의 삼환보(三幻步)가 큰 자랑거리였던 가사목이지만, 통나무를 묶어 만든 뗏목은 삼환보의 방위를 밟기에 너무나도 좁았다. 한 자루 볼품없는 칼에서 내뿜어진 검은 돌풍은 그의 몸뚱이를 여지없이 휩쓸었고, 그의 육편과 뇌수가 발린 철갑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1 장 - 1 묘왕동주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도륙의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군천월은 한마디 신음도 내뱉지 못했다. 다만 한 자루 볼품 없는 칼이 자신의 연미차주로 옮겨 오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누구도, 어느 누구도 그 칼을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륙이 끝났다. 아홉 사람의 목숨을 저승으로 보낸 이족 사내는 조금도 지친 것 같지 않았다. 아홉 사람의 핏물에 젖은 칼은 조금도 만족한 것 같지 않았다. 이족 사내는 두어 번 칼을 휘둘러 핏물을 떨군 뒤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머리통을 수면 위로 내놓은 채 자라처럼 헤엄치기 시작했다. 표선 주위를 맴돌던 다른 철한대의 뗏목을 다음 제물로 삼을 모양이었다. 아마 그 뗏목 위에서도 아까와 비슷한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장강육어의 홍일점 홍분예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군천월은 차마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넋이 빠진 얼굴로 전장을 응시하던 도씨 형제에게 연미차주를 돌릴 것을 명했다. '그 둘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군!' 군천월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운리는 자신의 계획에 작은 틈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두 괴인의 존재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전운리와 같은 모사형(謀士形) 인간이 지니는 공통적인 맹점일 수도 있다. 모사형의 인간은 영리하고 치밀하지만, 실전에서는 한걸음 떨어진 관찰자일 수밖에 없었다. 관찰자는 냉정할 수 있지만 그 느낌이 생생하지 못하다. 한 달 전 형산에서의 장옥평 사냥이 그 좋은 예인 것이, 전운리는 계획을 세운 주체(主體)임에도 불구하고 실전에 있어서는 결국 십리경의 작은 유리알을 통해 싸움을 지켜본 객체(客體)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전에 있어서 주체인 군천월은 어떠한가? 어쩌면 군천월은 장옥평보다 두 괴인을 훨씬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두 괴인은, 실전에 임한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솜씨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쯧!" 전운리는 낮게 혀를 찼다. 이제는 두 괴인의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했다. 단지 장옥평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던 그들의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한 것이다. 이때 매용소가 전운리를 향해 물었다. "군 조장이 말하는 자가 묘강에서 왔다는 바로 그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묘강의 을온족(乙溫族)을 단신으로 무너뜨리고 중원으로 들어온 묘족 사내입니다." 그리고 전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는 백석학에서 회복하기 힘든 위중한 부상을 입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피를 토하며 광증을 부린다면 중상도 예사 중상이 아니다. 백석학에서 그 묘족 사내는 분명히 그런 증세를 보였다. 그런데 무슨 조화로 그 짧은 시간에 회복했을까? 군천월의 보고를 듣자 하니, 오히려 무공이 증진된 것 같지 않은가? "어쨌거나 오랑캐 중에서 그런 상승 무공을 지닌 자가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오!" 매용소는 심중의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모든 중원인이 그렇듯, 그가 이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예기(禮記)>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중토(中土)의 사방은 이(夷)·만(蠻)·융(戎)·적(狄)의 오랑캐들이 축생(畜生)처럼 살아 가는 벽지(僻地)인 것이다. 하지만 그 축생의 손에 의해 공들여 설치한 매복이 뻥뻥 뚫려 나가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매용소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자는 왜 장옥평과 함께 있는 것일까요?" 전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묘족 사내와 그에게 멸망당한 을온족, 그리고 삼 년 전 묘강을 다녀온 조추림. 일견 독립된 것 같은 이들 세 가지 정보 사이에는 분명히 유기적인 연관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줄이 끊어진 세 알의 구슬과 같았다. 현재로써는 세 가지 독립된 정보를 관통하는 인과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줄이 끊어진 세 알의 구슬로는 목걸이를 만들 수 없듯, 인과가 밝혀지지 않은 세 가지 독립된 정보로는 정설(定說)을 유추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전운리는 상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불경을 범한 것이다. 하지만 매용소는 이러한 불경을 눈감아주었다. 그는 더 이상 전운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군천월을 향해 치하의 말을 던졌다. "수고가 컸네." 전령이란 좋은 소식을 전할 때 그 임무가 빛나기 마련. 이번처럼 우울한 소식은 전령을 죄없는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죄없는 죄인 군천월은 매용소의 치하에 그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전운리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들이 소명사주를 통과할 테니 곧 본대(本隊)와 마주칠 것입니다. 아마 그때는 모든 것이 확연해지겠지요." 그런데 이때, 문득 생각난 듯 군천월이 말했다. "소명사주의 이 총사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이 총사는 지존께서 수고하시지 않도록, 직접 장옥평을 생포해 보이겠노라 장담했습니다." "뭐라고?" 매용소는 깜짝 놀랐다. 이번 계획에 있어서 매복이 할 일은 어디까지나 사냥감을 지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정면 승부를 결하는 것은 매복이 아닌 본대가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소명사주에 포진한 이교가 엉뚱하게도 일전불사를 외치고 나왔다. 이교는 왜 매용소의 명을 어기려 하는 것일까? "이 총사는 형산의 실패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 같군요." 전운리의 설명에 매용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형산 건(件)으로 인해 제 발로 뇌옥에 들어갈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이교였다. 이 기회에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욕심이 든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위험하다!' 이 순간, 매용소의 본능은 이교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물론 소명사주에 포진한 전력은 세 군데 매복 중 최강이었다. 매복의 책임자인 이교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위인이며, 지원으로 딸려 보낸 네 사람의 마승(魔僧)`-`그들 역시 바투우와 마찬가지로 비연리가 보낸 지원대 중 일부였다-`도 내로라 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매복이 허무하게 뚫린 것을 감안한다면 정면 승부는 위험했다. 이교는 설욕에만 집착한 나머지 만용지장(蠻勇之將)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대왕곤!" 매용소가 호명하자 갑판 저만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왕곤이 달려왔다. "본대가 보유한 연미차주가 몇 척인가?" "모두 세 척입니다만..." "즉시 준비하라!" 말과 동시에 매용소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이때 뒤에 있던 전운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 진로를 정면으로 가로막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의도가 담긴 행동이었다. 매용소는 의아한 표정으로 전운리를 바라보았다. "지존께서는 본대를 떠나셔서는 안 됩니다." 전운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용소는 드물게도 매서운 눈초리가 되어 전운리에게 소리쳤다. "이 총사는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오!" 전운리가 매용소의 두뇌라면, 이교는 매용소의 한 팔이었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시기에 이교 같은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매용소는 졸지에 한 팔을 잃은 불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운리는 매용소의 질책에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층 무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속하가 감히 이 총사를 가벼이 여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지존께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이 일거에 무너지게 됩니다. 지존께서는 오늘, 일개 공자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음을 각별히 유념해 주십시오." 매용소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전운리는 매용소를 만류할 때부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 선생이...?" 전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용소는 한동안 전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외쳤다. "채 노사!" 시선은 여전히 전운리의 두 눈에 고정한 채였다. "부르셨습니까?" 왼손에 장검을 쥔 채앙이 매용소에게 달려왔다. "전 선생과 함께 소명사주로 가주시오." "알겠습니다." 채앙은 복명했고, 매용소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전운리는 매용소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뒤 연미차주를 대놓은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막 난간을 넘으려 할 때, 그는 매용소의 음성을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전 선생!" 전운리는 돌아보았다. "선생께서는 이 총사 못지않게 중요한 몸이오.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 주시오." 하지만 이러한 매용소의 당부는 기우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전운리는 과거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운리는 소리없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2 카악! 괴악은 뒷전에서 울린 가래 돋우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갑판 위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고 있는 사람은 공야무루였다. 헐렁한 소매로 입가를 쓱 훔친 공야무루는 괴악에게 다가왔다. "꼴에 할 짓은 다 하는군." 공야무루는 턱짓으로 돛대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괴악이 바라보니 돛대 아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제단(祭壇)이었다. 영정도 없고 위패도 없이, 허름한 궤짝을 제탁(祭卓) 삼고 이 빠진 그릇을 제기(祭器) 삼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제단이 돛대 아래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앞에서는 몇 사람이 고두배(叩頭拜)를 올리고 있었다. 회색 옷에 두건을 두른 장강육어의 수하들이었다. 특히 제일 앞에 엎드린 사람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고 있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있음에도 덩치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장강육어의 넷째인 식인경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각초소의 제단이군요." 괴악이 말하자 공야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다가 뒈진 놈에게는 저런 제단도 과분하지. 흐흐!" 그러나 괴악의 생각은 공야무루와 달랐다. 이각초소가 비록 건방지게 굴었다고 해도, 어쨌거나 한솥밥을 먹기로 한 사람이었다. 전운리가 장강육어를 이 일에 끌어들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호인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수적 떼마저도 끌어들여야 할 정도로 전력 보충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매용소는 이러한 전운리의 의도를 파악, 대왕곤을 마음으로부터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참으로 호흡이 잘 맞는 장수와 참모가 아닌가! '하지만 사공녀는 아니지.' 괴악은 갑판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도연향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가 앉은 의자는 웬만한 세도가의 집에서나 찾을 수 있을 만한 화려한 태사의였다. 그 위에 앉아 옥배에 담긴 감주를 홀짝거리는 광경은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선녀처럼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단지 보기 좋을 뿐이었다. 지금은 엄연히 작전 중이었으니, 태사의를 내어다 놓고 호사를 부리는 것이나, 감주(甘酒)를 홀짝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구나 단지 자신에게 불손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쓸 만한 수하를 개죽음시키다니! 매용소라면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매용소와 도연향의 그릇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는 괴악이었다. "어허헝!" 곡성이 울렸다. 식인경이 북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 것이다. "저놈이 재수없게...!" 공야무루의 찢어진 눈에 살기가 어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제단을 박살낼 기세였다. 괴악은 제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네가 혼내 주려는가?" 뒷전에서 공야무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괴악은 제단 앞에 섰다. 여러 쌍의 냉랭한 눈초리가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식인경은 곡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두 거한의 눈길이 허공의 한 점에서 마주쳤다. 괴악은 식인경에게 말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1 장 - 2 묘왕동주 "자리를 비켜 주게." 식인경은 아마도 제단을 치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괴악을 노려보다가 소리쳤다. "못 하오! 이제는 죽은 사람까지 욕보이려 하시오?" 만약 괴악이 힘으로 제단을 치우려 한다면 참지 않겠다는 투였다. 괴악은 묵묵히 있더니 머리에 쓴 투구를 벗었다. "하긴... 여기라도 상관없지." 괴악은 그 자리에서 궤짝으로 만든 제단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숙인 뒤통수 위로 수적들과 식인경의 놀란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일 배, 또 일 배... 약식(略式)으로 삼배(三拜)를 마친 괴악은 다시 투구를 썼다. 작전 중에는 무장을 해체하지 않는다는 철한인으로서의 원칙을 깨뜨렸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 만큼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식인경을 향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각초소는 훌륭한 동료였다." 비록 짧은 말이지만, 만일 이각초소가 훌륭한 동료가 아니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이 식인경을 대신해 박살내 주겠다는 듯한 무뚝뚝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식인경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흥! 요즘은 사지로 내모는 소모품을 동료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려!" 식인경을 바라보는 괴악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각초소는 훌륭한 동료였다. 할말은 그것뿐이다." 괴악은 몸을 돌렸다. 위로나 설명 따위는 어차피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할말을 했으니 이곳에서의 용무는 끝난 것이다. "괴 대장, 그대는...!" 식인경이 괴악의 등에 대고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소리의 커다란 외침이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자영구 쪽에서 배가 한 척 나오고 있습니다!" 상갑판에 설치한 망루에서 번을 서던 보초가 외친 것이었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영구 쪽으로 향했다. 엷은 물안개를 헤치며, 과연 한 척의 쾌속선이 범선을 향해 흘러오고 있었다. 누가 탄 배일까? 아군일까, 적군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군이든 적군이든 지금 이 시간에 자용구에서 나오는 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구양지는 갑판 위의 부산함을 생생히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번초(番哨)의 외침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위치한 곳이 범선 갑판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의 위치는 도연향이 탄 범선의 선미, 선체(船體)와 강물이 접하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수면 위로 내놓은 채, 왼손 다섯 손가락을 선체 벽면에 찔러 넣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구양지는 자영구 쪽에서 나타난 쾌속선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축시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니, 약속한 시간보다 반 시진 가량 늦은 셈... 마봉황의 철저함으로 미루어 볼 때, 자영구 안에서 지난 두 시진여 동안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이 갔다. 구양지는 고개를 들어 범선의 갑판 위를 힐끔 바라보았다. 놈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이럴 줄 알았지!"라며, 저지선을 자영구 입구로 이동시킨 것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심정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심심하던 참에 잘 걸렸다!"라며, 손가락 관절을 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림없지!" 구양지는 싸늘하게 웃으며 왼손에 운용하고 있던 관홍지의 공력을 서서히 풀었다. 손가락이 선체로부터 빠져 나오며, 그녀의 머리는 소리없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구양지의 잠수는 수심 여섯 자쯤 되는 곳까지 계속되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고대광실의 대문짝만큼이나 큼직한 방향타가 있었다. 범선이 정지해 있으니, 마땅히 권상기(卷上機:도르래와 밧줄을 이용, 방향타를 수면 위로 들어올리는 장치. 배가 정박하거나 얕은 물을 지날 때 방향타가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에 의해 수면 위로 끌어올려져야 했을 방향타이지만, 놈들은 방향타를 물속에 그대로 넣어 두고 있었다.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일는지도 모른다. 구양지는 방향타의 하단부를 더듬었다. 그곳에는 기묘한 물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크기로 말하자면 벽돌 두 개를 합쳐 놓은 정도나 될까? 별로 특별한 구석이 없는, 그저 평범한 목침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구양지는 그 물건을 방향타에 부착하기 위해 구층 석탑을 쌓을 정도의 공을 들여야만 했다. 그 물건은 철옥의 철삭진을 이루고 있던 수뢰(水雷)들 중 하나였다. 곡물선 하나쯤은 흔적도 없이 수장시켜 버린 강력한 화기인 것이다. 좌훈의 도움을 받아 철삭진의 수뢰들을 제거하던 구양지는, 철옥이 화기에 있어서 얼마나 진보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그 점은 수뢰를 작동하는 기폭장치(起爆裝置)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수뢰에는 두 개의 기폭장치가 되어 있었다. 하나는 수뢰를 양쪽에서 고정한 굵은 철삭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삭과는 별도로 연결된 가는 은사(銀絲)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장치에 동시에 압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수뢰는 폭발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뢰가 엉뚱한 이유`-`예를 든다면 수뢰를 지지하던 쪽배 사이의 거리가 벌어져 그 때문에 철삭이 잡아당겨진다든지, 또는 운하 위를 떠다니는 부유물에 의해 충격을 받는 등`-`로 작동하지 않게끔 해주는 안전 장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뢰는 목표물이 철삭에 걸렸을 때에 발생하는 압력과 은사를 잡아당기는 사람의 손이 동시에 있어야 작동되는 것이다. 누가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화신마, 그 빌어먹을 천재가 아니면 세상의 누구도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없었다. 그 정도 나이면 이제는 머리 굴리는 일에서 은퇴하여 손주 재롱이나 즐길 법도 한데, 놈은 한창 물오른 청년처럼 하루가 다르게 발전된 솜씨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기에 관한 한 구양지도 전문가라면 전문가. 그녀는 자신이 지닌 지식을 총동원하여 수뢰의 해체에 성공했다. 수뢰를 철삭으로부터 떼어 낸 뒤, 수뢰에 연결된 은사를 제거하는 과정은 매우 신중을 요하는 작업이었지만, 그녀는 맹금(猛禽)처럼 예리한 눈과 우유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을 완수했다. 철삭진을 이루던 수뢰들은 기폭장치를 잃은 채, 운하 밑바닥으로 하나둘씩 가라앉았다. 오직 하나, 지금 이 순간 구양지가 어루만지고 있는 것만 남긴 채... 수뢰가 방향타에 잘 부착되어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구양지는 싸늘하게 웃었다. 적이 자랑하는 칼로 적의 몸뚱이를 찌르는 일은, 즐겁다 못해 통쾌하기까지 한 일. 구양지는 몸을 돌려 범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른손은 푸른빛이 감도는 가는 실을 감아 쥐고 있었다. 천잠사(天蠶絲). 가늘기는 명주실이요, 질기기는 쇠심줄이라는 사중지보(絲中至寶)가 바로 그것이었다. 천잠사의 다른 끝은 철삭과 은사를 동시에 묶고 있었다. 바로 방향타에 부착해 둔 수뢰의 기폭장치들이었다. 스무 발이 넘는 천잠사가 다 풀린 뒤에야 구양지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범선은 이제 제법 멀어져 있었다. 구양지는 가볍게 천잠사를 당겨 보았다. 한쪽 끝이 고정된 팽팽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 이 정도면 작동에 필요한 압력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제 수중의 천잠사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구양지의 임무는 끝나게 된다. 그 뒤는 좌훈의 몫이었다. '부탁해요, 좌 오라버니!' 구양지는 마음속으로 좌훈을 성원하며 오른손을 힘껏 낚아챘다. * * * "발각된 것일까요?" 뇌칙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마봉황은 어떠한 확신도 내릴 수 없었다. 범선과는 백 장이 조금 못 미치는 거리였다. 그녀의 안력이라면 범선 위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거리이지만, 지금은 깜깜한 그믐밤. 더구나 물안개까지 끼여 있었다. 마봉황은 손을 들어 쾌속선을 일단 멈추게 했다. "설령 발각되었을지라도 적아(敵我)를 판별하기 전에는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야앵무의 행동을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의 종적은 이미 알려졌습니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뇌칙서의 말이다. "으음!" 마봉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뇌칙서는 충직한 수하였다. 그런 그가 상관, 그것도 조직의 최고 수뇌인 그녀에게 투덜거릴 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사실, 마봉황이 탄 쾌속선이 이곳까지 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행을 두 패로 나누기 전, 마봉황 일행은 철옥의 매복과 한차례 접전을 벌인 바 있었다. 그때 일행은 독짐 장손불변을 위시한 마맥회 무사들의 결사적인 저항과 단탈·박한 두 사람의 활약에 힘입어 큰 피해 없이 철옥의 매복을 물리쳤다. 그런데 마봉황이 진로를 바꿔 다시 운하를 향해 이동하니, 한 번 통과한 매복과 다시 맞닥뜨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비록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양순해진 매복이지만, 단지 세 사람의 힘으로 통과하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적들은 임빈의 허벅지에 한 대의 화살을 꽂았고, 뇌칙서의 등에 밭고랑 같은 자상을 새겨 놓았으며, 귀자모(鬼子母) 같은 신위를 보인 마봉황의 육신을 물에 젖은 솜처럼 노곤하게 만들었다. 매복이 입은 손해도 다대했지만, 마봉황의 일행 또한 더 이상 전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더욱 곤란한 점은 교전이 남긴 상처나 피로감 등이 아니었다. 매복을 통과했다고는 해도 그들의 입까지 모두 처리한 것은 아니니, 결국 이 쾌속선의 존재는 적의 본대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후에 벌어질 상황은 너무도 분명했다. 적의 수뇌부는, 그들의 계획에 없던 쾌속선의 존재에 대해 잠시 혼란을 느끼겠지만, 곧 추격대를 편성해서 추격을 시작할 것이다. 방금 전 뇌칙서의 불평에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함축되어 있었다. 마봉황은 수하들에게 말했다. "불안해 하지 말아라. 지금으로써는 애비익과 야앵무를 믿는 도리밖에 없다." 광양호로 간 표선도 어느 때건 놈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이 금선탈각지계가 아무리 놈들의 허를 찌르는 것이라 한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된다. 표선이 당함으로써 알려지든 매복의 입을 통해 알려지든, 어차피 백일하에 드러날 계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마봉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처음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암연(暗然)한 그믐의 야기(夜氣). 뿌옇게 어린 물안개. 그리고 땀구멍까지 틀어막는 듯한 끈끈한 긴장감... 그 속에서, 마봉황의 배는 과연 얼마 동안이나 멈춰 있었던 것일까? 번쩍`-` 마봉황은 범선 위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백색 섬광을 볼 수 있었다. 백색은 순식간에 황색으로, 그리고 다시 적색으로 변했다. 뒤따라 도달한 폭음... 꽈르릉`-`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2 장 격전(激戰) 묘왕동주 제 12 장 격전(激戰) 1 단 두 사람... 단 두 사람에 의해 난다 긴다 하는 수하들이 줄줄이 박살나는 광경을 지켜본다면, 과연 어떤 심정이 될까? 누군가 있어서 이 질문을 지금 이교에게 던진다면, 이교는 "의외로 봐줄 만했다."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이교의 성정 자체가 워낙 무덤덤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하들을 박살낸 두 사람의 솜씨가 출중했던 까닭이 더 컸다. 박살내는 자들도 자연스럽고 박살나는 자들도 자연스럽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이, 무적의 전투 부대라 불리는 철한대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파괴당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오히려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고 일 각이 지난 뒤, 개개인의 능력이 이교 본인과 비교해도 큰 차이 없다는 홍의사마승(紅衣四魔僧)까지 전장에 투입되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총단의 비연리가 매용소를 지원하는 뜻에서 여덟 명의 마부 고수를 보내 준 것은 갸륵한 일이요, 또 든든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여덟 명 중 절반을 차지하는 홍의사마승이 한 자루의 검은 칼과 한 자루의 날렵한 검 아래 피를 뿌리는 것은 갸륵한 일도 아니요, 또 든든한 일도 아니었다. 단 두 사람. 그리고 단 두 자루의 병기에 의해 말이다. 무슨 조화일까? 형산에서 장옥평과 함께 날뛰던 두 명의 괴인은 한 달 사이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결국 이 물건을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인가?' 이교는 들고 있던 푸르스름한 향로를 내려다보았다. 악승(惡僧) 양련진가의 사이한 술법이 담긴 마물 구음귀로. 이 향로 안에 구음정향(九陰晶香)을 넣고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상승 공력으로 향연(香煙)을 올리면, 이교가 자랑하는 세 마리 악귀 삼풍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교는 쉽사리 결심할 수 없었다. 삼풍은 마기를 힘의 근원으로 삼는 저주받은 생명체였다. 구음정향은 기폭제일 뿐 마기 자체가 될 수는 없는데, 삼풍은 이미 제갈등룡이라는 절정의 고수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본신(本身) 마기의 큰 부분을 상실한 상태였다. 인간의 상처가 치유되는 데 시일이 필요하듯, 삼풍의 마기가 보충되는 데에도 나름대로의 시일이 필요했다. 그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삼풍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표선 위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은 이교로 하여금 순리를 따르게끔 허락해 주지 않았다. * * * "끄아악!" 마공수(魔空修)의 귓전에 들려 온 것은 생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득 찬 단말마(斷末魔)였다. 그는 단말마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십육 년 동안 동고 동락한 사람의 목소리를 어찌 잊을까! 단말마의 주인은 마공수의 의제이자 홍의사마승의 셋째인 마공여(魔空餘)가 분명했다. 마공여가 죽다니! 그토록 자랑하던 동피금종조(銅皮金鍾 )의 외문기공은 어디다 내버리고, 저토록 비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는단 말인가? 마공여는 다른 두 의제와 더불어 한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까칠한 밤송이 머리에 살갗이 거무죽죽한 그 사내는 생김새만큼이나 괴상한 칼을 쓰고 있었다. 그 사내의 재주가 보통이 아님은 홍의사마승 중 셋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 빨리 마공여를 죽이다니! '나머지 두 아우는...?' 마공수는 치밀어 오르는 비통함 속에서도 셋째 마공오(魔空悟)와 넷째 마공멸(魔空滅)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닌 바 능력이 마공여와 비교해 난형난제인 아우들이었다. 마공여를 간단히 죽인 칼이라면 그들도 간단히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공수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망할 놈의 검! 촌각이라도 시선을 돌렸다가는 새파란 섬광을 흩뿌리는 한 자루 검이 그의 정수리를 두 조각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싸움이 시작된 이후 그로 하여금 단 한 차례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만든 바로 그 망할 놈의 검이! 취리익`-` 독사의 울음 소리처럼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을 쥔 사람의 몸뚱이는 섬전처럼 눈앞으로 확대되어 오는데 검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마공수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정도로 어리석은 마공수는 아니었다. 그는 일단 연등미종보(蓮登迷 步)를 발휘하여 몸을 피했다. 소림공부(少林功夫)의 일맥을 이은 남파보현사(南派寶賢寺)의 연등미종보는 오묘하기 그지없었고, 마공수로 말하자면 현남파보현사 장문인 공화(空華) 대사보다 더 능란하게 이 보법을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공수는 한때 공수(空修)라는 법명(法名)으로 공화 대사의 사형 노릇을 하던 남파보현사의 정식 제자였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마승(魔僧) 소리를 듣고 다니지만... 그런데 오늘은 남파보현사의 연등미종보도, 그리고 홍의사마승의 대형 마공수도, 영 이름 값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싸악`-` 볼따구니 옆으로 싸늘한 예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라졌던 검이 허공의 한 점에서 허깨비처럼 불쑥 나타나더니, 마공수의 얼굴을 사납게 베어 온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마공수가 허리를 뒤챘지만, 검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덕분에 볼따구니 살의 일부는 꼼짝없이 얼굴과 이별하고 말았다. "아, 아미타불!" 입에 담지 않은 지 십 년이 넘는 불호(佛呼)가 이런 순간에 튀어나온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공수는 자신이 불호를 내뱉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상대를 향해 두 번의 장력을 연거푸 때려 내고 있었다. 남파보현사의 금강장(金剛掌)을 그 나름대로 개량한 마불승천장(魔佛昇天掌)이었다. 마공수의 능기(能技)는 정종내공(正宗內功)을 바탕으로 한 웅맹한 장법에 있었다. 단단한 청석에 선명한 손도장을 남길 수 있는 그였으니, 작심하고 때려 낸 장력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마공수의 상대는 움직이지 못하는 청석이 아니었다. 커다란 귓불을 빼고는 무엇 하나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 그러나 그는 청석보다 백 배는 더 위험한 상대였다. 촤악`-` 한걸음을 뒤로 내딛으며 어깨 위로 비스듬히 후려 돌리는 가벼운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일검에 마공수의 연환장력은 허무하게 갈라져 버렸다. 거센 물줄기가 암초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두 줄기로 갈라지는 형국이었다. '도, 도대체 무슨 놈의 검이 저리도 날카롭단 말이냐!' 마공수는 눈을 부릅떴다. 한 쌍의 육장으로 성명(盛名)한 후, 장력이 이토록 맥없이 스러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공수가 경악하고 있을 때,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다시 움직였다. 물러서며 방호할 때에는 폭풍우에도 꿈쩍하지 않을 거암 같더니, 두 발을 엇갈아 찍으며 갑판을 미끄러져 올 때에는 먹이를 발견한 물수리 같았다. 실로 경신읍귀(驚神泣鬼)할 공수의 전환에 기괴무쌍(奇怪無雙)한 완급의 조절이었다. "타`-`앗`-`" 사내의 입에서 맑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순간 마공수는 온몸이 무시무시한 살기에 활짝 노출되는 것을 느꼈다. '피해야 한다!' 마공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두 다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의 몸뚱이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정체 모를 힘에 옭매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살기의 번개! 온몸을 옥죄는 무형의 족쇄! '쌍놈의 검! 지옥에나 떨어져라!' 마공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떨어져 내리는 살기를 향해 극성의 마불승천장을 쳐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느다란 대가지로 산사태를 막아 보려는 격. 팍! 일순, 마공수는 머리 꼭대기가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통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강렬한 느낌... 남파보현사의 사미승 시절, 호랑이 같던 교두승(敎頭僧)의 몽둥이가 머리통에 떨어질 때의 느낌이 바로 이랬던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자꾸만 그 시절이 떠오르고 있었다. "커억!" 또 하나의 귀에 익은 단말마가 마공수의 귓전에 들려 왔다. 둘째 마공오(魔空悟) 같기도 했고, 넷째 마공멸(魔空滅) 같기도 했다. 살살거리는 둘째와 무뚝뚝한 넷째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참으로 형편없는 대형이 아닌가! 하지만 정수리에서 미간까지 갈라진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정도 생각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아미... 타... 불..." 마공수는 앞으로 내뻗은 두 손을 한차례 허우적거리고는 나무토막처럼 갑판 위에 쓰러졌다. 맺지 못한 불호를 입술 끝에 매단 채로... 휘릭`-` 박한은 하방으로 뻗어 내린 해동검을 반 바퀴 휘돌리며 회수했다. 무척 매끄러운 동작이지만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의식은 어떤 종류의 경이로움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공이 상승한 것일까?' 하지만 그런 식의 단순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공수를 연결하는 호흡이나 단전에 재어 있는 공력, 그리고 손의 빠르기는 한두 달 전과 비교하여 별 차이가 없었다. 단련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혹독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니 근력이 늘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뭔가 달라져 있었다. 박한은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박한은 방금 전, 붉은 승포를 입은 중과 싸우던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홍의승(紅衣僧)은 위력적인 장법의 소유자였다. 그자의 손에서 뿜어지는 장력은 실로 산을 밀치고 바다를 뒤집을 듯했으니, 평범한 수법으로 그자를 해치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박한은 자신의 검기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홍의승을 압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대 밖의 일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고 해도, 이처럼 쉽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을 텐데... 특히 마지막 수법! 그것은 분명히 허공을 날아 적의 뇌문을 공격하는 표두직강(豹頭直降)의 변형 공격이었다. 그러나 박한이 이제까지 알고, 또 시전하던 표두직강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때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또 하나의 자아(自我)가 있어, 보다 높은 차원의 공간에 앉아 홍의승과 그의 대결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 박한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까지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홍의승의 눈동자가 피할 곳을 찾아 빠르게 진동하는 것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넌 달아날 수 없어!'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기세가 일어났다. 검끝에서 피어오른 생경한 힘이 홍의승의 전신을 무섭게 압박해 갔다. 과연 홍의승은 박한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무공 이전에 기세에서, 기세 이전에 마음에서 완전히 제압된 것이다. 마무리는 간단했다. 모든 것이 제압당한 홍의승의 정수리에 필살의 일검을 가하기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박한은 궁금했다. 그의 검은 어떻게 변화한 것일까? 그의 사부 절심거사(絶心居士)의 본국검에는 이렇게 신비한 힘이 없었다. 도대체 그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쉬익`-` 이때 한 자루 장창이 박한의 오른쪽 옆구리를 노리며 짓쳐 들어왔다. 오른손잡이 검수에게 오른쪽 옆구리는 사각(死角)의 일종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잠시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던 박한이 아닌가! 당황할 법도 한 일인데, 그는 놀랍게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한의 검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검에는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라도 투명하게 관조할 수 있는 눈이 있었고, 아무리 음습한 위험이라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코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은 박한 자신의 눈과 코일지도 모른다. 육신의 눈과 코가 아닌, 마음의 눈과 코... 이번에도 박한은 대전자(對戰者)이자 관전자(觀戰者)로서, 그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반신을 노리며 짓쳐 오는 장창도 예외일 수 없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2 장 - 1 묘왕동주 마음은 기세를 만들고 기세는 검로(劍路)를 이루었다. 박한은 칼날을 밑으로 하여, 검을 옆구리 아래로 스쳐 돌렸다. 익숙한 내략(內掠)의 방어 자세. 그러나 본래 그가 익힌 내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틀만 빌렸을 뿐, 검의(劍意)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치잉`-` 검끝에 장창의 날이 걸렸다. 철갑을 뒤집어쓴 적이 비틀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검에 얻어맞은 창날은 멀쩡했다. 하지만 박한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이 걸친 장갑이 얼마나 억센지는 이미 형산에서 경험한 터... 그래서 그의 두 번째 검은 장갑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 곳에 떨어졌다. 칵! 한 자루 해동검은 철갑인의 턱밑 인후부에 작은 마름모꼴 구멍을 뚫은 뒤, 매정할 만큼 빠른 속도로 빠져 나왔다. "끄르르..." 인후가 상한 철갑인은 변변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런 철갑인을 보며, 박한은 성큼 자라 버린 자신의 검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문득, 박한은 절심거사의 유명(遺命)이 떠올랐다. -`잃어버린... 이 못난 사부가 잃어버린 검을 찾거라. 그래서 해동의 검은 결코 중국의 검에게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거라. 장년의 한창 시절, 하늘을 찌를 듯한 자부심으로 중국 대륙을 주유하다가 공손(孔孫)이라는 속가성(俗家姓)을 쓰던 중년의 도사에게 무참히 꺾인 절심거사의 평생 숙원은 바로 그것이었다. '제자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박한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것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서 있음을 깨달은 자가 느끼는 희열이기도 했다. 처음 용만 나루를 건너 중국에 들어올 때에는, 금방이라도 사부의 유명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몸은 호랑이처럼 날랬고, 그의 검은 바람처럼 빨랐다. 자신감이 용솟음쳤다. 반도를 울리던 본국검으로 중국의 뭇검호(劍豪)들을 무릎 꿇린 뒤, 사부에게 치욕을 안겨 준 도사를 찾아간다는 것이 그의 당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박한의 자신감은 석삼도라는 일대검선(一代劍仙)을 만난 순간 허무하게 무너졌다. 석삼도에게는 그가 감히 엿볼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이 있었다. 육신으로 익힌 자, 그리고 마음으로 깨달은 자... 그 두 개체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석삼도는 박한에게 어떤 검법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직 하나, 명상의 잔잔한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석삼도는 박한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박한의 앞에 가로놓인 장애는 육신의 힘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석삼도는 그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을 가르친 것이다. 그 후 밤마다 반복해 온 박한의 명상은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의 검이 정지해 있는 곳을 깨닫는 작업이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조차 모르는 자에게 나아갈 곳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스스로 부족함을 마음 깊이 승복하지 않는다면, 어떤 깨달음도 바랄 수 없는 것이다. 명상이 반복되면서 박한은 조금씩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때로는 사부의 유명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명상에 몰두할 수 있었다. 영혼과 육신의 조화. 그 현묘한 경지가 조용히 무르익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는 그토록 열망해 마지않던 세계를 향해 한걸음 나아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가 택했던 방법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후르르`-` 병장기 소리와 비명성이 난무하는 표선 갑판 위로 세 줄기 사이한 기운이 몰아쳤다. "...!" 박한의 안색이 굳어졌다. 단지 느낌만으로도 보는 이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이 요악(妖惡)한 기운들은, 각각 희고, 붉고,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한 자루 시커먼 칼을 종횡으로 휘두르며 비대한 홍의승 하나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단탈이었다. 박한이 아는 단탈은 기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인한 사내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가 사람인 경우의 얘기이고, 상대가 사람보다 귀신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라면 그런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단탈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 눈앞에 불쑥 나타난 네 자루의 장창은 박한으로 하여금 마음먹은 바를 행동에 옮기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슉`-`슈웃`-` 시공의 절묘한 배합을 이루며 네 자루 장창이 박한에게 퍼부어졌다. 해동검을 쥔 박한의 오른손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2 꽈르릉`-` 물위에 떠 있었으니 천번지복(天飜地覆)이란 표현은 썩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재난이 도연향이 타고 있던 범선에 떨어졌다. 폭발은 선미에서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선미를 한껏 치켜 올린 듯, 범선은 선수를 아래로 향한 채 곤두박질치듯 기울어졌다. "앗!" 태사의가 뱃머리 쪽 난간을 향해 주르륵 미끄러졌다. 잘 손질된 갑판을 굳이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이런 급경사라면 갑판 위에 있던 모든 물체가 아래를 향해 쏠리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꼼짝없이 태사의와 함께 강물로 떨어질 판인지라, 도연향은 별수없이 몸을 솟구쳐야만 했다. 태사의에 깔아 둔 여우가죽이 아까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범선은 부력(浮力)에 의해 곧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박살난 선미가 복구될 리는 만무하며, 또 기승을 부리는 화마(火魔)가 사그라질 리도 만무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도연향은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갑판 위는 이미 아수라장.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이때 후두둑,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불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의 폭발 때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 목편들이 화염에 휩싸인 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범선을 강타한 앙신(殃神)의 잔인한 손길은 거기에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돛대가 쓰러진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범선을 움직이는 네 개의 세로 돛(뒤폭이 앞폭보다 넓은 네모꼴의 돛) 중 가장 뒤편에 있던 것이 갑판을 향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이라고, 쓰러지던 돛대는 그 앞에 서 있던 돛대마저도 우지끈 부러뜨리고 말았다. 이제 갑판 위의 광란은 극에 달했다. 마룻줄(돛이나 활대 등을 올리고 내리는 밧줄)에 쓸려 나동그라지는 자, 돛대에 깔려 비명을 지르는 자, 불붙은 돛에 덮여 발광하는 자... 도연향은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외쳤다. "이 배의 밑창에는 여섯 개의 격벽(隔壁)이 설치되어 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 경거망동을 삼가라!" 여섯 개의 격벽은 이 범선의 큰 자랑이기도 했다. 애당초 험한 전투를 치를 목적으로 건조된 범선인지라 이런 유형의 재난에 대해서는 대처 능력이 유난히 우수했다. 격벽으로 구획 지어진 여러 개의 밀실(密室)은 비상시 독립된 부상기(浮上機)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모든 밀실이 침수되어도 오직 하나의 밀실만 온전하다면, 곧바로 침몰하는 상황만은 모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외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갑판 위를 휩쓸던 공포의 물결이 많이 가라앉는 듯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갑판 위는 여전히 불길에 휩싸인 아수라장이었고, 방향타와 돛대가 부서진 범선은 이미 선박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후였다. 지금의 범선은 나무로 짜놓은 거대한 궤짝, 그것도 오래지 않아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 궤짝과 다름없었다. '앞쪽의 격벽이라도 온전하다면 최소한 반 시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도연향은 범선의 상태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영구에 모습을 드러낸 쾌속선에 대해 온 신경을 경주할 때였다. 도연향은 선미의 폭발이 결코 우연의 산물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쾌속선의 등장과 예상치 못했던 선미의 폭발. 이 두 가지가 이처럼 절묘한 시차를 두고 연속적으로 발생한 데에는, 우연이란 말로 얼버무릴 수 없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바투우!" 도연향은 바투우를 찾았다. 수전에 있어서 화포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불과 수시진 전에 직접 견식한 바 있는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영구 쪽에서 나타난 쾌속선을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투우의 화포술이라고 판단한 것이고, 이러한 판단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바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투우! 어디 있느냐?" 입으로는 앙칼지게 외치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바투우는 상관의 호출을 거역할 정도로 담이 큰 위인이 못 되었다. 일신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도연향은 아수라장으로 변한 갑판 위를 돌아다니며 바투우를 찾기 시작했다. 바투우를 찾아 돌아다니던 도연향은 앙신의 손길이 인간에게 얼마나 평등하게 작용하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신에 고절한 재간이 있다 하여 그 손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몸뚱이 여기저기가 긁히고 그을린 공야무루와 괴악이 그 증거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연향의 눈썹이 역 팔 자로 솟구쳤다. 쓰러진 돛대에 다리를 깔려 괴로워하는 바투우와,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웅크린 식인경을 발견한 것이다. 바투우의 다리를 깔아뭉갠 돛대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수적 둘의 몸뚱이마저 짓누르고 있었다. 이에 식인경은 자신의 수하들을 구하기 위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있었다. 바투우는 죽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멍청한 자식!" 식인경에게 달려간 도연향은 다짜고짜 그의 앞가슴을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식인경은 갑판 위를 뒹굴었다.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돛대는 갑판 위로 육중하게 떨어졌고, 바투우와 두 수적의 입에서는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쿨룩! 쿨룩!" 식인경은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댄 호심경은 가운데가 우그러져 더 이상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도연향의 발길질이 얼마나 모질었는가를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이게 무슨...?" 짜악! 식인경은 도연향에게 뭐라고 항의하려 했지만, 쏜살같이 날아온 수편(手片)에 고개가 홱 돌아가고 말았다. "이 천한 놈아! 철옥의 간부보다 버러지만도 못한 네 수하들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도연향은 도끼눈을 부릅뜨고 식인경을 꾸짖었다. 그런데 식인경은 그녀의 말에 조금도 승복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터진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는 것이, 승복은커녕 오히려 대들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새끼가...?' 도연향은 노기를 감추지 않고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 갔다. 노략질이 업인 수적들을 수하로 받아들인 것 자체부터가 불결하게 여겨지던 그녀였다. 허리에 두른 옥녀현현대(玉女玄玄帶)로 주제 모르는 천한 놈의 머리통을 박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뱃머리 난간 쪽에서 들려 온 공야무루의 외침이 옥녀현현대를 풀던 도연향의 손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사공녀! 그 배가 다가오고 있소이다!" 도연향은 순간적으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작정한 대로 식인경의 머리통을 박살낼 것인지, 아니면 우선 공야무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상황을 살필 것인지... 이런 도연향의 망설임은 제삼자에 의해 해결되었다. 굴뚝에서 기어나온 사람처럼 온몸에 검댕을 뒤집어쓴 괴악이 도연향과 식인경 사이를 성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괴악은 바투우와 수적들이 깔린 돛대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의 힘으로는 벅찬 일, 이것은 내가 치우겠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2 장 - 2 묘왕동주 괴악의 신력은 과연 일품이었다. 구부린 무릎을 한껏 버티며 두어 차례 용을 쓰자, 오백 근이 훨씬 넘는 돛대가 훌쩍 들린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연향은, 고개를 돌려 식인경을 노려보았다. "딱 한 번만 말해 주마! 바투우는 네놈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소중한 사람이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면 대왕곤부터 박살내 줄 터이니, 미련한 머리통에 잘 새겨 두어라!" 얼음 가루라도 풀풀 떨어질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 그리고 도연향은 괴악을 바라보았다. "괴악! 그대는 이자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덩치가 비슷해서 그런가?" 식인경을 치죄할 기회를 놓친 데 대한 힐난이었다. 괴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바투우의 상세를 살폈다. "좋아! 때가 때이니만큼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괴악을 향해 싸늘하게 내뱉은 도연향은 다시 식인경을 돌아보았다. "괴 대장에게 고맙다고나 해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덕이니까!" 식인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전신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식인경을 비루하게 보는 도연향이지만, 그가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는 거냐?" 도연향이 냉소하자 식인경은 고개를 번쩍 치켜 들었다. 뜻밖에도 투실투실한 그의 두 뺨에는 굵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연향은 구역질을 느꼈다. 그녀는 그 눈물 자국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눈물을 질질 짜대는 흉물과 마주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흉물은 그만 떨고 아랫것들이나 추스려 불길을 잡아라!" 도연향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돌리더니 공야무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 * 의식을 되찾았을 때, 바투우가 처음 느낀 감정은 짜증이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왜 이렇게 소란을 떠는 것일까? 바로 다음 순간, 바투우는 하체에서 솟구친 극심한 통증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치 왼쪽 다리만 지옥 안쪽에 들이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이 드시오?" 코앞에서 울린 묵직한 목소리가 바투우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휘황한 밤하늘을 배경 삼아 강철투구를 쓴 괴악이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이 어찌 휘황할 수 있을까마는, 불행히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방에서 치솟는 화염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 다리... 내 다리가 어떻게 된 거요?" 바투우는 고통에 몸을 떨며 괴악에게 물었다. "뼈가 으스러진 모양인데, 자르지는 않아도 될 것 같소." 괴악의 대답은 그만한 것이 다행이라는 투였다. 뼈가 으스러졌는데도 말이다! 끼드드`-` 문득, 바투우는 땅이 울부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 이 생각은 금방 수정되었다. 자신이 있던 곳이 땅위가 아닌 강물 위,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강물에 떠 있는 범선의 갑판 위라는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끼이이`-` 갑판이 울부짖고 있었다. 갑판 아래 목골(木骨)과 그 아래 배 밑창이 함께 울부짖고 있었다. 범선 자체가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었소?" 바투우가 묻자 괴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이 배는 침몰하고 있는 것 아니오?" 괴악은 웃었다. 어딘지 사람을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바투우, 팔자 좋게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오. 당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거든." "누가...?" 괴악은 대답 대신 턱짓을 했다. 그의 턱이 가리키는 곳에는 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도연향의 뒷모습이 있었다. "당신의 솜씨가 필요한 모양이오." 바투우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래도!" 괴악은 바투우의 허리를 잡아 훌쩍 일으켰다. "흐윽!" 바투우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부러진 뼛조각이 근육을 헤집는 아픔이 비명 한 번으로 사라질 정도로 가벼울 리 없다. 그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괴악, 이 우악스러운 위인은 바투우의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바투우를 짐짝처럼 질질 끌며 도연향에게 데려갔다. "바투우를 데려왔습니다." 괴악의 보고에 도연향이 신형을 돌렸다. 그녀는 괴악의 부축을 받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투우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싸늘한 안색으로 되돌아갔다. "다리를 다쳤는가?" 도연향이 물었을 때, 바투우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 무서운 고통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바투우의 대답 따위를 바라지 않은 듯했다. "화포를 쏘는 데 다리는 필요없겠지." 도연향은 나직이 중얼거린 뒤, 자영구 쪽을 가리키며 짧게 명했다. "저 배의 접근을 막아라!" 괴악도 그렇거니와, 도연향 또한 남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따듯한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바투우는 세상의 모든 냉혈한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싶어졌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도연향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봐야만 했다. 자영구에서 나타난 쾌속선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어느덧 범선과의 거리는 오십여 장... 강물의 흐름이 운하에서 광양호 쪽임을 감안한다면 신속한 전진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느냐!" 이렇게 재촉하는 도연향에게, "나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다."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바투우는 더듬거리며 다른 핑계를 끌어댔다. "버, 범선이 가라앉을지도..."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 입을 피곤하게 만들 셈이냐!" 도연향의 매서운 질타에, 바투우는 찔끔 겁먹은 척 목덜미를 움츠렸다. 도연향이라는 암고양이가 분노했을 때에는 그저 웅크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것은 철옥에 적을 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식과 마찬가지였다. 도연향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밭은 숨을 몇 차례 몰아쉬더니 괴악을 향해 지시했다. "바투우를 도와서 저 배의 접근을 막아라! 놈들이 운하로 들어가면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을 묻겠다!" 도연향은 눈 주위가 거무죽죽하게 물들 정도로 독이 올라 있었다. 괴악은 아무 불평 없이 바투우를 이끌고 화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 휘리링`-` 칙칙한 묵기(墨氣)를 흘리는 검은 덩어리가 어깨 위로 지나갔다. 뒤이어 우지끈, 하며 무엇인가 쪼개지는 소리가 뒤통수에 얹혔다. 단탈은 허리를 낮추고 잰 걸음으로 몸을 옮겼다. 어깨가 선뜻했다. 느낌만으로도 살점이 반 주먹 이상 날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지고 서 있던 선실 문짝이야 보나마나 박살났을 테고... 휘익`-`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붉은 덩어리가 밀려왔다. 그것은 아까의 검은 덩어리와 달리 후텁지근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기분 나쁘기로 따지자면 거기서 거기지만. '이것들은 대체 뭐 하는 물건들이지?' 단탈이 어디에서 이런 마물들과 겨뤄 봤을까? 가리아를 휘두르기도 전에 께름칙한 마음부터 일어나는 판국이니 제대로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단탈은 어깨의 통증을 무릅쓰고 갑판 위를 한 바퀴 굴렀다. 그러자 붉은 덩어리가 갑판목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져 왔다. 하늘을 날던 허깨비가 순식간에 땅귀신으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단탈은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등을 갑판에 댄 채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그러면서 가리아를 불쑥 내밀자 반경이 여섯 자에 달하는 시커먼 도기(刀氣)의 원이 만들어졌다. 도기의 원은 미끄러져 오던 붉은 덩어리에 여지없이 박혀 들어갔다. 끼이악`-`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비명이 붉은 덩어리로부터 터져 나왔다. 가리아에 실린 힘에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리아를 통해 전달되어 온 느낌은 단탈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걸쭉한 죽을 휘저은 듯한 허전함이 전부였다. 그 어떤 존재를 베었다는 느낌은 전혀 오지 않은 것이다. 다만 정수리를 쓰라리게 만드는 후끈한 열기만이 놈이 실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 "이건 아예 괴물이군!" 단탈은 고개를 찔끔 움츠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문득, 단탈은 묘강 오란산(烏丹山)의 늪에서 거머리에게 죽을 뻔한, 그리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 마리의 크기가 새끼손가락보다 크진 않지만, 일단 피 냄새를 맡으면 끈끈하고 기분 나쁜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사람을 휘감아 버리는 거머리. 거대하게 뭉친 이상 거머리는 더 이상 거머리가 아니었다. 하나의 뇌가 하나의 몸을 통제하는 단순한 존재로써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무수한 뇌가 무수한 몸을 통제하는 복잡한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늪을 빠져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놈들에게 헌사(獻辭)한 것일까? 단탈처럼 튼튼한 위인이 현기증으로 며칠을 누워 살았으니, 거머리 뱃속에 들어간 피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나 혼이 났던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지레 현기증부터 일어나는 단탈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느낌이 그때와 흡사했다. 이 희고, 붉고, 검은 세 개의 덩어리들은 오란산의 거머리와 같았다. 덩어리 자체가 지닌 힘도 위험하거니와 덩어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덩어리를 더욱 귀기롭게 만드는 연기조차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끼이아`-` 이때 눈알을 후빌 듯한 사기(邪氣)와 함께 희고, 검은 두 개의 덩어리가 갑판에 누워 있는 단탈을 향해 내리꽂혔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피하면, 가리아에 얻어맞고 물러난 붉은 덩어리가 다시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이 세 개의 덩어리와 단탈 사이에서 벌어진 몇 차례 충돌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이대로라면 변변한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제풀에 지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단탈로 하여금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가리아가 별 효력이 없다면...?' 단탈은 몸을 둥글게 휘었다가 힘차게 튕겼다. 활처럼 당겨진 복근(腹筋)이 갑자기 수축되며, 그의 몸뚱이는 희고 검은 두 덩어리를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 "이야압!"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2 장 - 3 묘왕동주 단탈은 왼손바닥을 활짝 펼쳐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손목을 수직으로 꺾어 올려 장지(掌指:손바닥을 폈을 때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의 끝)가 위를 향하는 정립장(正立掌)의 형태였다. 순간, 그의 장심으로부터 뿌연 반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손바닥 주변을 맴돌던 먼지들이 보이지 않는 흡력(吸力)에 의해 그의 장심으로 모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우우웅`-` 반점은 급격한 속도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고, 그에 따라 반점의 색깔도 점점 짙어졌다. 급기야 단탈이 왼손을 뻗어 내는 시점에 이르러선, 반점은 거북이 알만큼이나 커져 있었고 색깔도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마치 검은 공을 손바닥으로 밀어 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 * * "독구척(毒球擲)!" 이교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구음귀로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까까머리 괴인이 흑풍과 백풍을 향해 전개한 수법은 독구척이 분명했다. 체내의 독공을 장심으로 뿜어 절독(絶毒)으로 뭉쳐진 하나의 환(丸)을 형성, 그것을 상대에게 격출하는 괴공(怪功) 독구척. 놀라운 독공으로써 신주십일존 중 한자리를 차지한 산독자 약흠에게는 절독쌍절공(絶毒雙絶功)이라는 두 가지 절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독구척이요, 다른 하나는 이름부터가 괴이한 멸신기세지결(滅身忌世之訣)이었다. 최후의 독공이라는 멸신기세지결의 절기는 단 한 번도 강호인들의 눈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약흠의 오랜 친구인 무숙자 석삼도의 입을 통해 전설처럼 전해진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 반면 독구척의 절기는 강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공포스러운 검은 공은 마치 지옥의 입구가 열릴 때마다 기어나오는 마귀처럼, 약흠이 원수들을 해치울 때마다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약흠이 강호에서 자취를 감춘 것도 어언 십여 년. 그런데 약흠의 독구척이 재현되고 있었다. 중원 땅을 밟은 지 두 달도 안 되는 묘족 오랑캐의 육신을 통해... 이교가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 * * 후르릉`-` 희고, 검은 두 덩어리는 허공에 둥둥 뜬 채 연기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떨고 있었다. 마치 목전까지 밀려온 검은 공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독구척이 만들어 낸 검은 공은 희고, 검은 두 덩어리와 단탈 사이의 공간 한곳에 우뚝 멈춰 있었다. 검은 공을 가운데 놓고 한 사람과 두 괴물이 정족지세(鼎足之勢)로써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단탈의 안색은 핼쑥했다. 그가 만들어 낸 독구(毒球)는 희고, 검은 두 덩어리가 내뿜는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저항하는 힘이 하나에 불과하다면 간단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단지 산술적으로 합해진 두 줄기 힘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희고, 검은 덩어리가 내뿜는 두 줄기 힘의 조화는 기묘했다. 하나와 하나가 합쳐 둘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질까 보냐!' 약흠으로부터 물려받은 절독공은 미친 말처럼 체내를 질주하고 있었다.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고, 머릿속은 벌집이 들어 있는 것처럼 윙윙거렸다. 하지만 단탈은 모든 고통을 무릅쓰며 절독공을 더한층 끌어올렸다. 우우웅`-` 삼각의 정족지세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먹이를 발견한 구렁이의 대가리처럼 한두 차례 꿈틀거린 독구가 희고, 검은 덩어리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까아악`-` 희고, 검은 덩어리들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더욱 요란하게 몸뚱이를 떨었다. 그에 따라 두 덩어리로부터 뿜어 나오는 두 가지 이질적인 힘도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상승된 절독공을 등에 업은 독구의 전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가리아에 얻어맞고 물러난 붉은 덩어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붉은 덩어리는 소리없이 둥실 떠올라 희고, 검은 덩어리와 대치하고 있는 단탈의 등판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단탈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몸을 피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족지세란, 말 그대로 다리가 셋 달린 솥과 마찬가지였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두 다리에 쏠렸던 힘까지도 일시에 그리로 집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철옥 호남지부의 최강 병기 삼풍은 여느 때처럼 합공에 성공하고, 단탈의 육신은 과거 삼풍에 의해 죽어 간 수많은 강호 고수들처럼 너덜너덜 찢길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만약 단탈에게 박한이라는 고마운 동료가 없었다면 말이다. * * * 박한의 목숨을 노리던 네 자루의 장창 중 셋은 이미 본래의 의도와 무관하게 갑판 위에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 장창의 주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인부터가 뒹굴고 있는 판국인데, 병기가 무슨 신통한 재주가 있어서 안 뒹굴고 버티겠는가! 박한은 노련한 백정이었다. 그는 단단한 근육이 많은 힘센 농우(農牛)를 잡는 데 있어서, 어느 부위부터 칼집을 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쉭`-`쉭`-` 두 번의 경미한 파공성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네 번째 철갑인의 몸뚱이 위에서 피어올랐다. 첫 번째 파공성은 우견갑(右肩甲)과 흉갑(胸甲) 사이에서 울려 나왔으니, 이는 견정혈(肩貞穴)과 견갑골(肩胛骨)을 동시에 꿰뚫어 버림으로써 손에 쥔 장창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함이다. 또한 두 번째 파공성은 흉갑과 좌요갑(左腰甲) 사이에서 울려 나왔으니, 이는 경문혈(京門穴)을 허리 근육과 함께 잘라 버림으로써 두 다리로 버티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빠르고 정확함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검초. 그래서 이번의 도축(屠畜)도 어김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크윽!" 네 번째 철갑인은 고통스런 신음을 내지르며 허물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회복 불가능한 적의 명줄을 단숨에 끊어 주는 일뿐이었다. 그것이 박한이 숭상하는 무인의 도리였다. 하지만 박한은, 그로서는 참으로 드물게 무인의 도리를 외면했다. 더 시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앗`-`!" 박한은 갑판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스스로는 의식할 수 없었지만, 허공을 가르는 박한의 몸은 달무리와 흡사한 희뿌연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이른바 검기에 실려 허공을 난다는 어검비행(馭劍飛行)이 바로 그것이다. 해동검과 하나가 된 채 삼 장을 단숨에 비행한 박한은, 역시 해동검과 하나가 되어 무엇인가를 갈라 버렸다. 께에에`-`엑`-` 한 줄기 처절한 비명이 단탈의 배후를 노려 가던 붉은 덩어리, 적풍(赤風)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3 장 탈주(脫走) 묘왕동주 제 13 장 탈주(脫走) 1 잘 벼린 검에 심장을 찔린 기분은 과연 어떨까? 찔려 보지 않은 사람이야 알지 못하니 말할 수 없을 것이요, 찔려 본 사람은 알기는 알지만 역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잘 벼린 검이 아니라도, 심장에 무언가 박힌 기분을 말할 정도로 튼튼한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에게 몇 개의 심장이 있어서 누군가가 그 중 하나를 검으로 찌른다면, 남아 있는 심장 덕분에 죽지는 않을 테니 그 기분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교가 바로 그랬다. 물론 가슴을 갈랐을 때 나오는 심장이야 하나뿐이겠지만, 그는 그것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의 심장을 세 개나 더 가지고 있었다. 바로 삼풍과 공유하는 심령의 심장이다. 그래서 이교는 한 자루 날카로운 해동검이 적풍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오히려 당사자인 적풍보다 훨씬 극렬한 고통을 느꼈다. 흡사 얼음으로 만든 송곳과 화염으로 만든 비수가 동시에 가슴살을 저며 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끄으윽!" 이교는 가슴을 부둥켜안으며 몸을 뒤뚝거렸다. 철각사(鐵脚邪) 이교가 신음을 토하다니! 그의 위인 됨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채로운 고통이 있어서, 그 중에는 철각사라 할지라도 의연히 버텨 내지 못하는 지독한 것도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 이런 일이...!" 이교가 입을 벌려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붉은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심령을 함께하던 적풍이 치명상을 입자, 그의 몸을 유지하던 질서가 일거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제 이교는 남아 있는 흑풍과 백풍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풍의 존재가 유명무실하게 된 이상, 그들도 절세의 독구척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길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교는 이를 악물고 허물어지려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준비한 구음정향을 마지막 덩어리까지 구음귀로에 집어넣었다. 구음정향은 삼풍에게 있어서 흥분제와 같은 존재였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세 번은 부릴 수 있는 양. 그것을 한꺼번에 사용했으니 삼풍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귀력(鬼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약효가 떨어진 뒤 나타날 후유증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이교는 구음귀로를 감싸 쥔 쌍수 가득 삼매진화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푸스스`-` 구역질나는 악취와 함께, 구음귀로의 노구(爐口)로부터 파르스름한 귀연(鬼煙)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오`-`옴(唵)!" 이교의 동공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아아나삼바바바아바흑..." 그의 입술이 실성한 사람처럼 빠르게 달싹거림에 따라, 유부(幽府)의 대기처럼 축축하고 음산한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흩어진 삼풍의 귀력(鬼力)에 채찍질을 가하는 밀종(密宗) 비전(秘傳)의 오혼태망주(汚魂笞亡呪)였다. 이교의 몸 주위를 감돌던 귀기가 그 농도를 부쩍 더해 갔다. * * * 붉은 덩어리의 실체는 다섯 자도 안 되는 난쟁이였다. 성성이를 연상케 하는 두상(頭相)에 날카로운 송곳니, 피를 바른 듯한 적발(赤髮), 전신을 가득 뒤덮은 적모(赤毛), 너무 붉은 탓에 오히려 검게 보이는 선혈... 짐작한 대로 놈은 요물이었다. 하기야 붉은 연기에 휩싸여 허공을 둥둥 떠다닐 때에 비하면 훨씬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런 물건을 요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천하의 그 무엇도 요물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요물을 부려 인간을 해치다니...!' 요물이 인간을 해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요물이란 그렇게 생겨 먹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요물을 부려 인간을 해치는 자는 지탄받아 마땅했다. 민간에서는 요물에 홀려 죽은 인간은 저승에도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육신을 해치는 것도 범해선 안 되는 무거운 죄일진대, 어떻게 인간의 영혼까지 해치려 한단 말인가! 박한은 이러한 분노에 휩싸인 채 적모괴인의 가슴에 깊이 박힌 해동검을 뽑았다. 한 줄기 검붉은 피화살이 앞자락을 더럽혔지만 그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 적모괴인의 숨통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뒤집힌 눈알, 누르스름한 거품이 맺힌 입... 하기야 심장이 정통으로 꿰뚫렸으니, 괴물이 아니라 괴물 할아비라도 별수없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 박한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요한 옹달샘에 누군가 돌멩이를 던진 듯한 기분이 바로 이럴까? 투명하게 전체를 조명하던 그의 심안(心眼) 속으로 한 줄기 강렬한 사기(邪氣)가 날아든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크르르르`-` 하얗게 뒤집혔던 적모괴인의 눈알에 은은한 혈광(血光)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밤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린 붉은 연기가 놈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엇!" 박한은 깜짝 놀랐다. 적모괴인은 분명히 소생하고 있었다. 두 눈알은 석류알처럼 붉게 물들고, 쩍 벌어진 입에서는 쇠붙이를 비벼대는 듯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한에게 당하기 전보다 오히려 드세진 기세였다. 박한은 공포를 느꼈다. 만일 이 같은 상황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포에 짓눌려 해야 할 일을 망각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요물! 저승으로 가라!" 박한은 크게 꾸짖으며 적모괴인의 목줄기에 해동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해동검은 적모괴인의 몸뚱이 대신 애꿎은 갑판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적모괴인은 얼음이라도 지치듯 갑판 위를 미끄러지며 그의 일검을 피해 낸 것이다. '빨라졌다!' 박한의 이마에 몇 가닥 주름이 잡혔다. 이 장 떨어진 곳까지 미끄러진 적모괴인은 다시 붉은 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거대한 횃불처럼 보이는 붉은 덩어리는 아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활기가 넘친다고나 할까? 그리고... 까아아`-` 끼에에`-` 등뒤에서 울린 두 줄기 괴성이 박한의 이마에 잡힌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단탈과 대치하던 희고, 검은 두 덩어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요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한 놈의 기운이 강해지자 나머지 두 놈의 기운마저 덩달아 강해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요물들은 설마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체(不死體)라도 된다는 말인가? 후르릉`-` 붉은 덩어리가 박한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놈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인간을 용서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박한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한 번 벤 요물, 두 번 베지 못하란 법이 있으랴! 오른쪽 다리가 우전방으로 두 자쯤 이동하며, 박한의 전체적인 자세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낮춰졌다. 동시에 그의 왼쪽 옆구리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독수리가 먹이를 덮치듯, 광풍이 횃불을 덮치듯... 해동검이 만들어 낸 빛의 수레바퀴가 붉은 덩어리를 휩쓸었다. 퍽! 붉은 연기에 덮여 있던 적모괴인의 몸뚱이가 박한의 눈앞에 활짝 드러났다. 거센 검풍(劍風)이 붉은 연기를 흩날려 버린 것이다. '베었다!' 박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번의 일검은 적모괴인의 옆구리에 두 뼘에 달하는 검상을 만들어 놓았다. 일견해도 치명상. 만약 사람이 저런 검상을 입었다면, 복강(腹腔) 안에 들어 있는 오만가지 잡다한 것들을 쏟아 내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 적모괴인의 반응은 사람과 자못 달랐다. "흐윽!" 박한은 둔탁한 신음과 함께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입은 마의의 가슴팍은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해동검을 회수하는 순간 날아든 무형의 열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박한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적모괴인의 다음 행동이었다. 웨에에`-`엑`-` 적모괴인은 양팔을 원숭이처럼 내두르며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흩어졌던 붉은 연기가 거짓말처럼 원래 상태로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 덩어리가 적모괴인으로, 그리고 적모괴인이 다시 붉은 덩어리로... 이 요란한 변신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숨 몇 번 내쉴 정도나 될까? 박한은 기가 막혔다. 붉은 덩어리로부터 뿜어 나오는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놈의 옆구리에 새겨 놓은 검상은 어디로 간 걸까? 깊이와 각도를 감안한다면, 죽어도 열두 번은 죽었을 텐데... 바로 그때였다. "...?" 박한은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까 적모괴인이 소생할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했다. 그의 청정한 세계가 더럽고 사악한 기운으로 침범당하는 기분... 그르르`-` 붉은 덩어리는 미친 듯이 몸을 떨었다. 방금 전 전해 온 그 기운에 호응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붉은 덩어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놈의 공격 방법은 다채로웠다. 때로는 몸뚱이 전체로 부딪쳐 오고, 때로는 붉은 연기를 길쭉하게 늘려 후려쳐 오고...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살갗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그것이다. 박한은 검을 나선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밀어닥치는 열기를 흐트러뜨렸다. 흡사 봄바람에 날리던 꽃잎이 지표에서 솟아오른 온기를 만나 작은 꽃 회오리를 만드는 듯... 중원의 이화접목(移花接木), 혹은 차경미기(借勁彌氣)와 유사한 이 재주는, 과거 절심거사에 의해 '꽃잎 얹기'라고 명명된 해동의 비기였다. 꽃잎 얹기의 유유한 검무(劍舞)로 붉은 덩어리의 공세에 대응하면서, 박한은 방금 전에 느꼈던 이상한 기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럽고 사악한 기운. 박한에게 있어서 그 기운은 창자의 한쪽 끝을 쥐어짜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붉은 덩어리는 달랐다. 놈은 그 기운이 날아들 때마다 녹용이라도 달여 먹은 영감쟁이처럼 펄펄 날뛰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날아오는 것일까?' 박한은 심안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수많은 눈이 그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그는 보다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박한의 심안은 드디어 더럽고 사악한 기운의 발원지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기운은 표선의 좌측 현으로부터 오 장쯤 떨어진 물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한은 조금씩 위치를 이동했다. 심안이 찾아 낸 것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검은 배, 의족의 초로인, 손에 들린 푸른 향로, 그리고 향로로부터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파르스름한 귀연(鬼煙)... 저자였다! 저자가 바로 이 세 마리 요물들의 주인이었다. 지치고 상처 입은 요물들에게 마력을 공급해 주는 장본인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3 장 - 1 묘왕동주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한다. 머리를 잘라 뱀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설사 이러한 이치를 모른다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끝없이 되살아나는 요물과 상대하고 싶지 않다면, 저자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박한은 검자루를 하단전(下丹田)으로 당겨 중단세(中段勢)를 취한 뒤, 서서히 체내의 진기를 끌어모았다. 불광(佛光)처럼 상서로운 기류가 검신을 따라 흐르더니, 검을 쥔 팔로, 이어 어깨로, 급기야는 박한의 몸 전체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박한의 몸이 완전히 희뿌연 기류에 뒤덮인 순간... "차아앗`-`" 길게 꼬리를 무는 창룡음(蒼龍吟)과 함께 박한은 검과 하나가 된 채 허공을 날았다. 비록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하나, 붉은 덩어리는 조금 전 어검비행에 의해 가슴을 관통당한 고통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박한이 다시 그 수법을 전개하자 놈은 움츠러든 기색으로 몸을 피했다. 박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목표는 놈이 아니었으니까.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룬 박한은 붉은 덩어리가 떠 있던 공간을 그대로 통과하여 표선의 난간에 부딪쳤다.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이 부숴졌다. 목편(木片)이 비산했다. 박한은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화려한 혜성인 양, 그는 목편을 꼬리처럼 매단 채 물위를 날았다. 검은 배, 그 위에 서 있던 의족 초로인의 경악한 얼굴이 박한의 시야에 확대되었다. * * * 이 무렵, 단탈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의 장심에서 발출된 독구는 오히려 그의 면전에서 세 자 떨어진 곳까지 밀려와 있었다. 갑자기 드세진 희고, 검은 두 덩어리의 위세는, 믿을 수 없게도, 그가 극한까지 끌어올린 절독공조차 압도했던 것이다. 단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만일 독구에 격중당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인 것이다. 독구의 독성이 아무리 맹렬하다 한들 이미 독인의 초입에 들어선 단탈을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니, 외부로부터 전해 올 충격은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체내에서 맥동하고 있는 절독공은 그를 충분히 상하게 만들 수 있었다. 독구에 격중당하는 것은 끌어올린 절독공을 외부로 발산하지 못하고 스스로 떠안는 격. 절독공은 이제까지의 조화를 잃고 역류하게 될 것이요, 이것은 곧 단탈의 파멸을 의미했다. 박한이 의족 초로인을 향해 날아갈 때, 단탈은 이토록 난감한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한의 어검비행은, 단탈과 희고, 검은 두 덩어리가 이루던 정족지세의 파국을 가져 왔다. 단탈에게 있어서는 천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파국이었다. 캬아우`-` 희고, 검은 두 덩어리가 울부짖었다. 순간, 단탈은 그들 두 덩어리가 이루고 있던 힘의 공조(共助) 체제에 어떤 균열이 생겼음을 간파했다. 균열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급기야 셋 사이에 존재하던 압력의 균형이 삽시에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먼저 허물어진 것은 검은 덩어리였다. 흰 덩어리가 음유한 기운을 내뿜는 것에 반해, 검은 덩어리의 기운은 강성 일변도. 이런 종류의 기운은 자칫 경직되기 일쑤여서, 순간적으로 닥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압력의 불균형은 동그랗던 독구를 밀가루 반죽처럼 길쭉하게 잡아늘렸다.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좁은 관(管)이 생기고, 누군가가 독구를 그 관 안에 강제로 밀어넣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관의 끝에는 검은 덩어리가 떠 있었다. 한껏 잡아늘린 시윗줄을 튕기듯, 섬전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간 독구가 검은 덩어리에 작렬했다. 끼아아`-`악`-` 그와 동시에 인세에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끔찍한 비명이 검은 덩어리에게서 터져 나왔다. 이제껏 놈을 보호하던 견고한 마기가 독구척에 실린 거세무비한 독 기운에 의해 산산이 파괴된 것이다. 퍽, 소리와 함께 놈을 둘러싼 검은 연기가, 말 그대로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단탈은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해골처럼 깡마른 난쟁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한 오라기의 털도 없이, 옻칠한 목탁처럼 검게 반들거리는 난쟁이. 원래 피부가 저런 색이었을까? 하지만 단탈은 그 난쟁이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칠규(七竅)로 검은 피고름을 쏟아 내며 빠른 속도로 녹아 들어가는 존재라면, 설령 진짜 귀신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흐으으`-` 홀로 남은 흰 덩어리가 뒤로 달아나는 모습이 단탈의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그대로 놔주기에는 지금까지의 시달림이 너무도 지겨운 단탈이었다. 그는 진드기처럼 흰 덩어리에게 달라붙었다. 절독공을 무리하게 운전(運轉)한 탓에 육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바위에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관절이 뻐근했고, 경맥의 급격한 수축으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여야 할 놈은 반드시 죽이는 것이 단탈의 방식이었다. 독도 가리아가 맹수의 어금니 같은 검은 칼날을 드러냈다. 장한도법(長恨刀法). 이세명에게 배신당해 묘강의 척박한 동굴 속에서 쓸쓸히 죽어 간 산독자 약흠. 그 처절한 한을 자양(滋養)으로 하고, 부족을 되살리겠다는 단탈의 의지를 근간(根幹)으로 하여 완성된 비상리(非常理)의 무공. 그 두 번째 초식인 회수혈루(回首血淚)와 세 번째 초식인 야우장단(夜雨腸斷)이 가리아의 검고 짧은 도신을 통해 연속적으로 뿜어졌다. * * * 그것은 칼이라고 부르기엔 폭이 너무 좁은, 한쪽 면에만 날이 서 있는 기형검이었다. 북동쪽 변방의 무사들이 이런 종류의 검을 즐겨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듯한데, 정확한 부분까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기야 지금에 와서 기억의 먼지를 걷어 내고 그런 것을 떠올려 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기형검은 이미 할 일을 모두 마쳤고, 또 자신은 죽어 가고 있는데... 그래서 이교는 그저,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천산(天山)의 음정강모(陰晶鋼母)로 만들었다는 희대의 마물 구음귀로를 두 쪽으로 가르고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명치까지 관통해 버린 그 외날 기형검을... "넌... 누구냐...?" 이교의 입술이 달싹였다. 기형검의 주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교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년기의 막바지에 접어든, 느긋해 보이는 귓불을 지닌 호상(好相)의 사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요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매용소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반했지...' 문득, 매용소와 처음 만났던 과거의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광경이라기보다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웃음 비슷한 것이 이교의 입술 끝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저 사내는 왜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것일까? 죽어 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아량도 베풀지 않는 냉혈한은 아닌 것 같은데? "넌... 누구냐...?" 다시 묻자, 기형검의 주인은 이교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귀가 아닌 눈으로 다른 이의 말뜻을 파악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기이한 표정, 그리고 잠시의 침묵. 이윽고 기형검의 주인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박한!" "박한..." 이교는 두어 번 그 이름을 뇌까렸다. 이상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름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쨌거나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뛰어난 적이 아닌가! 형산에서도, 그리고 이곳 소명사주에서도... 이교는 실패했다. 이교의 주도 아래 벌어진 필승의 사냥을 두 번 다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눈앞에 서 있는 기형검의 주인과 독구척을 사용한 묘인의 공로였다. 물론 다른 요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몸으로 부딪쳐 철옥의 막강한 저지선을 돌파한 것은 이들 두 사람이었다. 강호에 이름 한 자도 알려지지 않은, 실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이들 두 사람이었다. 적인들 어떠랴! 이교는 이들 두 사람을 칭찬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끼아아`-`악`-` 이때 표선 쪽에서 섬뜩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교는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흑풍...!' 이교는 검은 피고름을 흘리며 빠른 속도로 녹아 들어가는 흑풍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흑풍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단지 흑풍만이 아니었다. 이교 또한 흑풍이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이교는 또 볼 수 있었다. 독구척의 경인(驚人)할 수법으로 흑풍을 해치운 묘인이 후방으로 달아나는 백풍에게 달라붙는 모습을, 그 손에서 춤추는 검은 칼을, 백풍의 전신을 난자하는 검은 번개까지도... 검은 번개가 지나는 곳마다 새하얀 육편(肉片)과 붉은 핏물이 튀어올랐다. 검은 번개는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두부를 자르고 지나가는 면도(緬刀)처럼, 그렇게 백풍의 몸뚱이를 종횡으로 갈라 버렸다. 울컥! 이교의 입에서 핏덩이가 뿜어 나왔다. 몸뚱이가 녹아 들어가는 흑풍의 고통과 사지가 난자당하는 백풍의 고통이 심령의 연결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 탓이다. 마도(魔刀). 묘인의 도법은 마도라고밖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구음귀로가 훼손된 상태라고는 하나 도검의 침범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풍의 육신이 아니었던가! 그 백풍을 저리도 간단히 조각내 버리다니. 그리고 적풍... 구음정향의 귀연을 한껏 들이마시고 소년처럼 활기차게 날뛰던 그 적풍은 표선의 난간가에 버려져 있었다. 버려져 있었다...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적풍은 초겨울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쓸쓸하게 버려져 있었다. 더러운 넝마처럼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육신을 보호해 주던 붉은 연기를 모두 잃은 채, 적모로 뒤덮인 추괴한 몰골을 밤공기 속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교는 슬퍼졌다. 이것이 저주받은 피조물 삼풍의 처량한 말로였다. 그들은 오직 세 가지만을 버팀 삼아 살아 가는 기형아들이었다. 주인인 이교와 힘의 원천인 구음귀로,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이풍(二風). 이 세 가지는 그들에게 있어서 존재 그 자체였다. 세 가지 중 단 한 가지만 흔들려도 그들의 존재는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세 가지가 모두 이 세상에서 소멸되려 한다. 홀로 남겨진 적풍이 무엇을 의지하며 이 세상에 잔존(殘存)할 수 있단 말인가! 피잇`-` 이때 그 무서운 기형검이 이교의 명치에서 뽑혀 나갔다. 박혀들 때만큼이나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이교는 명치에 난 구멍을 통해 핏물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팠지만 후련했다. 몸 속에 쇠붙이가 박혀 있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느끼지 못할 불쾌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십여 년 전, 잘린 오른쪽 다리 대신 철봉을 끼워 넣으면서 그러한 불쾌감을 알게 되었다. 기형검의 주인은 몇 발짝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교는 힘겨운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박한이라고 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힘들군. 나를 쉬게 해주겠나?" 몸짓을 곁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교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팔을 억지로 쳐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베는 시늉을 했다. 기형검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두 걸음 정도로 좁혀졌을 때, 그 놀랍고도 무서운 기형검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철각사 이교는 어떠한 죽음도,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직시할 수 있는 장부(丈夫)였다. 최후의 순간, 이교는 눈을 감지 않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3 장 - 2 묘왕동주 * * * 사천의 낭인 채앙이 '검귀'라는 지독한 별호로 강호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기까지는, 무려 이백여 회에 달하는 진검 승부가 필요했고, 그에 필적하는 수의 검수(劍手)들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채앙이 모든 승부에서 이긴 것은 아니다. 승리의 횟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수이지만, 그도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십칠 년 전, 강북에서 가장 악랄한 검객으로 알려진 견불도생(見不圖生)과의 싸움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패배를 겪고도 살아남았으니 그의 운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고, 패배 때문인지 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검은 더욱 빨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검귀'라는 별호를 얻었고, 이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위처럼 단단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느낌을 받게끔 만드는 무서운 승부사가 된 것이다. 그 채앙이, 일 대 일 승부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다고 자부해 오던 바로 그 채앙이,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어깨를 떨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전운리는 채앙의 긴장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검귀가 진짜 검수를 발견한 것이다! "채 노인." 전운리가 부르자 채앙이 고개를 돌렸다. 살아 온 햇수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수의 잔주름으로 뒤덮인 채앙의 얼굴은 땀방울에 뒤덮여 있었다.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은 기쁨과 열망을 담고 있었다. 채앙은 진짜를 만난 것을 기뻐하며, 진짜와 겨루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운리는 채앙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검귀의 승부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 전운리가 이끈 세 척의 연미차주는 소명사주 하안에 무성하게 우거진 수초(水草)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본 것은 기형검을 쓰는 괴인이 이교의 가슴에 검을 꽂는 광경이었다. 가슴이 관통당하고도 한동안 버티던 이교는 끝내 괴인의 일검에 의해 목 없는 시신이 되고 말았다. 이교의 죽음은 채앙 못지않게 전운리에게 있어서도 충격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받은 충격은 그 성질이 판이했다. 채앙의 충격이 오륙 장을 어검비행하여 이교의 가슴에 검을 박은 검수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전운리의 충격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진 소명사주의 매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소명사주의 매복은 그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교전이 완료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몇 명이나 살아남느냐이지 매복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놈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만 남은 셈이었다. 이 시점에 전운리가 인솔한 세 척의 연미차주가 합류한다 한들 매복이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빨리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이때 채앙이 앞으로 나섰다. 협소한 연미차주의 갑판 위였으니 앞으로 나섰다 해도 겨우 한두 걸음에 불과할 것이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전운리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채앙이 기형검을 쓰는 괴인과 승부하려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채앙이 굳이 지금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놈들의 배는 곧 자영구로 접어들 것이고, 그러면 결국 본대와 마주치게 된다. 승부는 그때 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채앙은 왜 지금 나선 것일까? 설마 그 정도의 인내심도 없단 말인가? 채앙은 전운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씨잇`-` 발검과 동시에 허공의 어느 부분이 반월형 빛의 선(線)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채앙은 항상 들고 다니던 장검으로 허공을 향해 일검을 날린 것이다. 헛된 일검. 전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시작과 끝이 한 호흡에 이루어질 정도로 빠르고 보는 이의 눈을 아리게 만들 정도로 매서웠지만, 벨 대상이 없는 칼질은 헛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윽고 채앙이 돌아섰다. 방금 전의 일검은 한바탕 춘몽(春夢)인 듯, 장검은 검집에 든 채 그의 왼손에 굳게 쥐여 있었다. "추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미안하오." 채앙은 여느 때처럼 높낮이 없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 순간, 전운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채앙은 평소의 채앙으로 돌아와 있었다. 열병 환자처럼 흘리던 땀방울도 깨끗이 말랐고, 영혼까지 사로잡은 것 같던 긴장감`-`기쁨과 열망이 뒤섞인`-`도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일검, 허공에다 휘두른 그 헛된 일검으로 인해... "전 모는 채 노인의 기파에 감탄했소이다!" 전운리는 채앙을 향해 포권하며 감탄했다. 모든 것을, 심지어 마음속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마저도 검으로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검귀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전운리는 하나의 도(道)에 몰두한 나머지 감정마저 도와 하나가 되어 버린 거장(巨匠)에 대해 예의를 표할 줄 아는 식자(識者)였다. 반 각이 지나자 소명사주에서 벌어진 교전이 완료되었다. 이교를 주장으로 한 소명사주의 매복은 무수한 사상자를 남긴 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한 명의 철각사가 죽었다. 세 명의 괴물이 죽었다. 그리고 네 명의 마승이 죽었다. 그 밖에도 많은 목숨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길을 통해 유부로 들어갔지만, 강물은 여전히 고요했고 물안개는 여전히 포근했다. 소명사주의 밤은 인간들의 생사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매복을 무너뜨린 표선이 연미차주가 숨은 수초 더미 앞을 지나 광양호로 들어간 뒤, 전운리는 비로소 십리경으로부터 눈을 뗄 수 있었다. "이상하군." 전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채앙이 묻자 전운리는 십리경을 들어 멀어지는 표선을 가리켰다. "소생은 저들 중에서 제법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의 용모를 대충 들어 알지요. 한데 안 보이는 얼굴이 제법 되는군요." "안 보이는 얼굴?" "그렇소이다. 우선 마봉황이 동행한 것으로 아는데... 여인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군요. 마봉황이 왔다면 그 호법(護法) 격인 좌훈도 왔을 텐데, 외팔이도 보이지 않고요." 채앙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입가의 주름을 실룩거리며 대답했다. "노부는 그런 것까지는 신경 써서 보지 않았소." 검귀의 관심은 오직 한 사람, 이교를 벤 기형검의 괴인에게만 쏠렸던 것이다. 전운리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난투극을 외면하고 안 보이는 얼굴들이나 찾는 것은 참으로 재미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인생을 그런 식으로 재미없게 사는 사람도 백에 하나쯤 있으니, 전운리가 바로 그랬다. 이때 동승한 군천월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운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장옥평은 확인되었잖습니까?" 전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쌍검을 차고 선실 주위를 얼쩡거리던 청삼 미공자, 장옥평의 존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물론 이상한 점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호( 虎)와 같은 맹위를 떨친 두 괴인에 비해 장옥평의 활약은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마치 적과 마주치기를 두려워하는 비겁자처럼, 선실 문턱만 쉴새없이 넘나들며 그 모습을 감추려 한 것이다. 형산에서 보여 준 그 절륜한 검법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운리는 이내 마음속의 의구심을 버렸다. 따지고 보면 이 작전의 목표는 장옥평이었다. 최악의 경우, 마맥회의 새들이 모두 날아갈지라도 장옥평 한 사람만 나포하면 그간의 모든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장옥평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시시한 조무래기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느덧 표선의 그림자가 물안개 속으로 희미해졌다. 방향을 짐작하건대, 그들은 광양호의 북쪽 호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전운리는 조금이라도 북쪽으로 가려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달아날 마음이 있었다면, 애초 도연향에 의해 진로가 막혔을 때 산동행을 포기한 채 장강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본대로 돌아갑시다." 전운리는 십리경을 접으며 말했다. 상대의 전력과 동태를 대충 파악했으니, 이제 본대를 이끌고 최후의 올가미를 조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두 괴인이 보여 준 무위는 놀라웠다. 아니, 단지 놀랍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둘, 장옥평을 더해도 셋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본대가 보유한 전력은 어떠한가? 대형 전선(戰船) 세 척에 소형선 삼십여 척, 그리고 다수의 고수들을 포함한 무사의 수만 해도 이백에 달했다. 이런 절대 우위를 확보하고도 작전에 실패한다면, 전운리는 죽을 때까지 무능력한 참모라는 오명(汚名)을 씻지 못할지도 모른다. 전운리의 귀환령이 떨어지자, 연미차주들을 부리던 수부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그런데 이때, 채앙이 낮은 경호성을 발했다. "조용히!" 수부들은 부지런히 놀리던 손길을 멈췄고,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숨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잠시의 정적이 지나갔다. 찰팡`-`찰팡`-` 사람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앙증맞은 물장구 소리가 자영구 쪽으로부터 들려 온 것이다. 찰팡`-`찰팡`-` 물장구 소리는 점차 가깝게 들렸다. 이것은 물장구 소리를 내는 존재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안으로도 그 존재를 식별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을 때. "...!" 전운리의 눈 깊숙한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한 달 전 형산에서 보았던 어떤 소녀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얼굴이 눈앞을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전운리는 너무도 의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2 "어깨 좀 낮추시구려! 팔 떨어지겠소!" 본디 부축이란 체구가 비슷한 사람이 해야 편한 법이다. 괴악은 바투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으니, 괴악의 어깨에 한 팔을 걸친 바투우가 푸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푸념한다고 해서 몸을 숙여 줄 괴악이 아니다. 푸념은 푸념으로 끝나고, 바투우의 팔은 조금 더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도연향이 있는 곳에서 삼고굉화포가 설치된 철격자(鐵格子)까지는 기껏해야 서른 걸음 남짓. 그러나 바투우에게는 삼백 걸음처럼 느껴지는 거리였다. 어느덧 갑판 위의 소란은 진정 국면으로 들어갔다. 수부들을 인솔하여 후미의 불길을 잡아 가는 식인경은 미욱한 생김새와는 달리 제법 통솔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괴된 부분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탕이 원체 튼튼한 탓에 그런대로 버티고는 있지만, 범선이 곧 자영구 바닥에 얹히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기랄! 중구소천궤(重九燒天櫃)가 터진 게 분명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바투우가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괴악이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라고 했소?" "철삭진에 설치한 중구소천궤가 터졌단 말이오! 냄새만 맡아도 금방 알 수 있지. 중구소천궤에 사용한 묵전화약(墨塼火藥)은 탈 때 약간 시큼한 약향(藥香)을 내거든."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3 장 - 3 묘왕동주 바투우는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중구소천궤는 흑색 화약을 저온에서 압축하여 검은 벽돌 모양의 단단한 고체로 만든 뒤, 이것을 정교한 이중 뇌관과 함께 옻칠로 방수 처리한 상자 안에 장치한 궤형(櫃形) 수뢰였다. 저온 압축법을 개발한 사람은 비연리였고, 이중 뇌관을 고안한 사람은 바투우였으니, 이야말로 두 거장이 한마음이 되고 두 기술이 하나가 되어 화기사(火器史)에 큰 획을 긋는 눈부신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바투우는 화기에 대해 더 각별한 정을 두고 있었다. 화기를 처음 시험한 사람도 그였고, 화기의 이름을 지은 것도 그였다. 화기를 처음 시험한 날이 중양절(重陽節:9월 9일)이었던 탓에 아홉이 두 번 겹친다 하여 중구(重九)라 했고, 시험한 화기의 위력이 하늘조차도 태울 듯 놀라웠다 하여 소천(燒天)이라 한 것이다. 그러니 이 화기를 아끼는 바투우의 마음이 어떤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걸작품이 아군의 배를 태우다니! 그래서 창조자인 자신의 다리를 이 꼴로 만들다니! 이는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삯바느질로 평생을 바친 어머니가, 그 지극한 공덕에 힘입어 출세한 아들에 의해 해코지를 당한 격이었다. 바투우가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괴악은 바투우의 이러한 심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화포나 잡으시오." 바투우는 괴악을 째려보았지만, 결국 그의 말대로 화포를 잡고 말았다. 괴악에게 신경질을 부려 봤자 부러진 다리가 달라붙지도 않을 것이요, 상처 입은 자존심이 복구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부러진 다리요, 어차피 뭉개진 자존심이라면, 차라리 그가 겪은 모든 불행의 발단이 된 저 빌어먹을 놈의 배에게 화풀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다행히도 범선은 즉시 침몰하지 않았다. 화풀이할 시간은 충분한 것이다. '이 바투우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마!' 바투우는 삼고굉화포의 손잡이를 잡았다. 박달나무 위에 흰 천을 감아 놓은 손잡이의 감촉은 침잠되었던 그의 자부심을 다시 끌어올려 주었다. 손잡이를 당겨 발사각을 조정하고 기름 먹인 삼베 심지에 불꽃을 당기면, 그는 다시 한 번 '화포의 아버지' 포포파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투우에게는 겪어야 할 불행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불행은 한 번의 폭음, 그리고 거의 동시에 피어오른 자욱한 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 * 펑! 물 밖에서 울린 소리는, 그것이 아무리 귀에 익은 소리라 할지라도 물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약간 생경한 느낌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우아한 자맥질로 마봉황의 배를 향해 나아가던 구양지는, 그런 이유로 강물을 헤집던 손발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내 방금 울린 폭음이 자신이 애용하던 현훈탄(眩暈彈)의 폭발음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구양지는 다리를 재게 움직여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 그리고 구양지는 보았다. 범선의 갑판 위 어느 곳으로부터 번져 나가기 시작한 희뿌연 연막(煙幕)을... 연막이 번지는 기세는 가문 날의 산불 같았다. 그것은 뻔뻔스러운 거지처럼 야기에 지배를 받는 어두운 공간을, 그리고 화광에 지배를 받는 밝은 공간을 널름널름 집어삼키고 있었다. 구양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 연막은 그녀가 직접 제작한 현훈탄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현훈탄의 효과를 이렇게 멀리서 관찰한 적이 없었다. 현훈탄이 터진 대개의 경우, 그녀는 연막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현훈탄을 범선의 갑판 위에서 사용한 사람은 누구일까? 구양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반 시진쯤 전에 그녀로부터 현훈탄을 받아 들고 적당의 소굴로 잠입한 좌훈이 아니면, 누가 이처럼 절묘한 시간에, 그것도 아수라장이 된 범선 위에서 연막을 터뜨릴 수 있겠는가! 구양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한 척의 쾌속선을 볼 수 있었다. 철삭진은 해체되었다. 범선도 움직일 수 없다. 이 정도면 마봉황이 그녀에게 내린 임무는 대부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바투우의 화포! 그것이 건재한 이상, 지금까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구양지는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좌훈과 육염명, 그 두 사람은 현훈탄의 연막 속에서 과연 어떤 활약을 보여 줄 것인가! * * * 폭음은 삼고굉화포가 설치된 철격자로부터 다섯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울렸다. 화포의 발사각을 조정하고 있던 바투우는 귓전에서 터진 이 일성(一聲)의 폭음에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자욱한 몽연(夢煙)이 피어올랐다. 몽연의 기세는 대단했다. 폭음의 여운은 아직도 중인(衆人)의 귓가에 쟁쟁한데 시계(視界)는 이미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폭음의 놀라움에서 해방된 바투우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극심한 분노였다. 똥이었다! 불에 구운 뒤 잘게 빻아 체로 친 탓에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분가루처럼 비치겠지만, 갑판 위를 뒤덮은 이 몽연의 정체는 바로 인분(人糞)이었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분말 형태의 인분이 공기 중에서 연소(燃燒)할 때 발생하는 연기였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정말 더러운 새끼가 아닌가! 구질구질하게 인분으로 만든 연막탄을 사용하다니! 바투우는 마음속으로 세상의 모든 화약장이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만약 그 화약장이들이 눈앞에 있다면, 무한한 과학의 바다에서 그가 건져 낸 최신의 연막 기술, 인분탄보다 백 배는 깨끗하고 백 배는 확실한 수은발연탄(水銀發煙彈)의 제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곧 이어 일어난 비참한 사건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바투우의 바람은 팔자좋은 생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사건은 괴악의 경고와 함께 시작되었다. "위험해!" 그와 동시에, 솥뚜껑 같은 괴악의 손이 바투우의 몸뚱이를 와락 밀어붙였다. "어? 어?" 안 그래도 부러진 다리뼈 때문에 제대로 가누기 힘든 몸뚱이였다. 두어 번 팔을 허우적거린 바투우는 중심을 잃고 갑판 위로 나뒹굴고 말았다. "으악!" 얼추 맞춰 있던 뼈가 다시 어긋났다. 뒷골이 흘러나온 것 같은 고통이 바투우의 가는 눈을 왕방울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고통을 안겨 준 괴악을 원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화포 앞의 갑판, 그 위에 박혀 있는 한 자루의 시퍼런 비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비도는 날의 길이만 해도 두 뼘에 달하는 큼직한 것이었다. 정수리에 저런 것이 박히면 다리의 고통에 괴로워하던 시절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인데 어찌 괴악을 원망할 수 있을까? 바투우는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박힌 각도로 미루어 비도는 머리 위에서 직하방으로 내리꽂혔다. 다시 말하면 비도를 던진 자가 그쪽에 있다는 얘기였다. 바투우의 눈에 비친 상방(上方)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연막이 터지기 전에는 뭐가 있었더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던 것 같았다. 활대에 이리저리 연결된 몇 가닥 밧줄들을 제외하면... 바로 그때였다. "하아아`-`압`-`" 천장(天將)이 강림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맹수의 포효처럼 길게 이어지는 기합성이 엄청난 속도로 바투우를 향해 내리꽂혔다. 자욱한 연막은 다가오는 위험을 안 보이게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지독한 공포마저도 가려 줄 수는 없었다. 바투우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쩡`-` 터져 나온 불꽃은 연막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강렬했다. 불꽃과 함께 팔뚝으로 전달된 반탄력은, 좌훈의 온몸을 부르르 떨리게 만들 정도로 강맹한 것이었다. 좌훈은 튕겨 오른 쌍절철곤을 회수하며 갑판 위에 내려섰다. 그로부터 예닐곱 걸음 떨어진 곳에는 몸뚱이의 절반을 연막에 파묻고 있는 철갑거한이 버티고 있었다. 거한의 꽉 다문 입술에는 입 모양을 따라 한 줄기 혈선이 만들어져 있었다. 볼따구니가 불룩한 것으로 미루어 입 안 가득 핏물을 머금은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좌훈이 허공에서 내리찍은 일격에는 그의 본신 공력에다가 삼 장이 넘는 허공에서 내리꽂힌 힘까지 더해 있었다. 설령 철갑뿐 아니라 몸뚱이까지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막강한 역도를 제자리에서 멀쩡히 받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좌훈은 당황했다. 현훈탄을 터뜨린 뒤, 혼란 중에 재빨리 바투우를 살해하고 달아나는 것이 애초의 계획. 그런데 그 계획이 꼬이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이 꼬이게끔 만든 장본인은 바로 지금, 입으로는 피를 질질 흘리며, 일 장이 넘는 염왕도(閻王刀)를 꼬나 쥐고 달려들려 하는 것이다. 바빠 죽겠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염왕도를 상대해 줄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는 좌훈과 마찬가지로 한 쪽 팔이 없는 외팔이 노인이었다. 후릉`-` 연막이 확 밀려나며 한 줄기 웅혼한 힘이 철갑거한의 염왕도를 후려쳤다. 철갑거한이 달려들던 기세도 대단했지만, 염왕도를 후려친 힘도 그에 못지않았다. 철갑거한은 더 이상 좌훈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몇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유령처럼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육염명이었다. 그는 비록 한 팔밖에 없었지만 처음의 기세를 잘 살려 철갑거한을 사납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귀좌! 서두르게!" 육염명의 전음이 좌훈의 고막을 때렸다. 이에 좌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넋 놓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은 촌각에 불과한 것이다. 좌훈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철갑거한의 뒤쪽에 자빠져 있던 바투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놈은 교활하게도 연막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좌훈은 알고 있었다. 바투우에게는 혼자 힘으로 멀리 달아날 능력이 없음을... 과연 바투우는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놈은 기고 있었다. 배때기를 갑판에 붙인 채 벌레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다친 다리 탓인지 낮게 깔린 연막을 이용하려는 속셈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저렇게 기는 것은 놈에게 무척 어울리는 짓이었다. 바투우를 향해 달려가는 좌훈의 피는 해묵은 원한으로 들끓고 있었다. 부우웅`-` 뒷전에서 울린 파공성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굴린 것은 포포파파 바투우가 아닌 무인 바투우였다. 콰직! 곁에서 울린 천둥 같은 소리가 바투우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소나무 심재(心材)로 만든 갑판목이 박살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만일 그의 동작이 조금만 늦었다면 박살난 것은 그의 뼈와 목숨이었을 것이다. 화포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던 무공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구명(救命)의 일등공신이 되어 준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 노갈(怒喝)과 함께, 무엇인가가 거칠게 뜯겨 나가는 소음이 아래쪽으로부터 바투우의 면문을 향해 밀려들었다.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그의 얼굴 아래에는 갑판이 놓여 있었다. 그를 공격한 위인은, 갑판을 뚫고 들어간 철곤을 그대로 쳐올려 바투우의 얼굴을 뭉개 버릴 작정인 것이다. 요란하게 울린 소음은 철곤을 가로막는 갑판목이 밑에서부터 부러지는 소리. 참으로 무지막지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무지막지의 소유자가 자신의 옛 친구 좌훈이라는 사실을 이미 안 바투우는, 또 자신이 좌훈에게 행한 배신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바투우는, 어떤 종류의 불만도 품을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그저 목숨이라도 건질 욕심에 뒤로 한껏 허리를 젖히는 일뿐이었다. 쉬익`-`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3 장 - 4 묘왕동주 칼날 같은 바람이 바투우의 얼굴을 스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여파로 솟구친 갑판목의 파편이 그의 얼굴과 앞가슴에 몇 개의 상처를 만들었다. 그래도 하늘이 보살핀 탓인지 머리통이 부숴지는 참사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투우의 생명은 여전히 풍전등화(風前燈火). 무지막지한 좌훈과 그에 못지않게 무지막지한 철곤 아래 놓여 있었다. 그래서 바투우는 다시 기었다. 그 속도는 기는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죽을힘을 다한다면 뭐든지 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면서 바투우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좌훈이다!" 또 외쳤다. "좌훈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 명색이 이화신장의 십대고수 중 한 사람인 바투우가 누군가를 피해 달아나면서 구원을 요청하다니! 그러나 그 '누군가'가 좌훈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바투우는 감히 좌훈과 대적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좌훈에 대한 공포에 시달려 왔다. 그에게 있어서 좌훈은 곧 저승 사자였다. 좌훈과 만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에 감히 누가 저승 사자와 대적할 수 있을까? 눈앞에 삼고굉화포가 설치된 철격자가 보였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좌훈의 외침이 울렸다. "어디까지 달아나나 보자!" 바투우는 날쌔게 몸을 뒤집어 삼고굉화포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깡`-`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성과 함께 포신 위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살았다!' 바투우는 삼고굉화포 아래에 누운 채, 자신이 죽을 고비를 또 한 차례 넘겼음을 알 수 있었다. 좌훈의 일격은 비록 떨어지는 벼락처럼 무시무시했지만, 삼고굉화포의 견고한 동체를 단숨에 동강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도하던 바투우의 얼굴이 금방 노랗게 변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삼고굉화포를 지지한 철격자들이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껏 달아난 곳이 막다른 구멍이라니! 좌훈도 그러한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대소를 터뜨리더니 바투우를 꾸짖었다. "이 더러운 배반자야! 네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겠지?"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좌훈은 철곤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꽝! 둔탁한 폭음과 함께 철격자의 네 다리가 부러져 나가며 육중한 포신이 바투우의 몸뚱이를 덮쳤다. "컥!" 창자가 목구멍 쪽으로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바투우의 두 눈알이 툭 불거져 나왔다. "죽어라!" 꽝! 철곤이 또 한 번 삼고굉화포를 강타했다. 그토록 견고하던 삼고굉화포의 포신이 움푹 우그러들 정도로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끄으으`-`" 바투우의 입에서 붉은 거품이 흘러나왔다. 삼백 근이 넘는 포신에 깔린 데다가 그 위에는 철곤의 괴력까지 실렸으니, 금강역사(金剛力士)도 아닌 그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높은 산에 올랐을 때처럼 고막이 윙윙거리고, 식초를 동이째 들이킨 것처럼 입 안이 시큼했다. 인간이 저승 문턱에 올라서면 왕왕 오감(五感)이 어지러워진다는데, 지금의 상태가 바로 그런 것 같았다. 꽝! 세 번째 금속성이 울렸다. 포포파파 바투우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이기도 했다. * * * "개새끼!" 좌훈은 바투우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루 표현하지 못할 통쾌감을 느꼈다. 놈은 제 손으로 직접 만든 화포에 깔린 채 눈알을 까뒤집고 있었다. 입에는 피거품을 물고 엉덩이로는 구린내를 풍기는 꼴로 미루어, 이미 오장(五臟)이 터져 나간 것 같았다. 실로 배신자다운 최후였으니 좌훈이 어찌 통쾌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통쾌감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놈!" 앙칼진 교갈과 함께 한 줄기 기운이 좌훈의 후방을 급습했다. 그 기운은 독사처럼 위험하고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좌훈은 대경(大驚)하며, 왼쪽 소매를 휘둘러 후방을 방호(防護)했다. 스르랑`-` 영롱한 방울 소리와 함께 낭창낭창한 무엇인가가 좌훈의 소매를 한 번 훑어 감고는 빠르게 물러났다. "으음!"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본 좌훈은 침음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의 소매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는 외팔이가 된 뒤, 길이가 절반으로 줄어든 왼팔을 보다 유용하게 하기 위해 불문(佛門)의 기공 중 하나인 철수공(鐵袖功)을 수련했다. 수련 햇수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철수공을 십 성 경지까지 올리는 놀라운 성취를 보였다. 십 성의 철수공이라면 도검에도 상하지 않는, 말 그대로 강철 소매[鐵袖]. 그런데 그 철수를 이처럼 간단히 망쳐 놓은 자는 어느 방면의 고인이란 말인가? 좌훈은 전신에 공력을 끌어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대여섯 걸음쯤 떨어진 곳... 흑의 경장의 미녀가 오른손에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채대(彩帶)를 말아쥔 채 좌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채대의 끝에는 하나의 금빛 방울, 그리고 세 개의 미늘... 좌훈은 단번에 그 병기를 알아보았다. 철옥주의 넷째 제자이자 이 범선의 주장인 도연향, 그녀의 애병 옥녀현현대가 일금령삼조구(一金鈴三釣鉤)의 독기(毒器)를 감춘 괴병(怪兵)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는 좌훈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병신이 제법이구나!" 듣기 좋은 음색과는 달리 만면에 흉흉한 살기를 번들거리며 육염명을 공격하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앙상한 체구에 포대 같은 헐렁한 회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좌훈은 그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었다. 도연향에게는 남해의 살인귀라 불리는 호법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고 했다. 지금의 회포노인이 아마도 그 살인귀 공야무루일 공산이 컸다. "흐읍!" 육염명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하나뿐인 손바닥으로 맹렬한 장력을 격출해 냈다. 하지만 한 손이 네 손을 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 당장이야 어떻게 버티겠지만, 육염명의 손발이 곧 어지러워질 것은 자명했다. '너무 지체했구나.' 좌훈은 안색을 굳혔다. 누구보다 그의 책임이 컸다. 보다 통쾌하게 복수하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좌훈은 빠른 곁눈질로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선미에서 발생한 재난과 난간 부근에서 터진 연막탄의 효과는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었다. 비록 도연향이나 공야무루 같은 고수들은 예외였지만, 여타의 졸개들은 쉽사리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지금뿐이다!' 사고의 종점은 결국 탈출이었다. 하지만 혼자만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좌훈은 갑판을 박차고 도연향에게 달려들었다. 좌훈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도연향은 질주해 오는 미친 소 앞에 맨몸으로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어 걸음 옆으로 피하고 말았다. 바투우가 그의 손에 죽은 것을 생각하면 결코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미친 소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연향은 일방적으로 길을 내줄 정도로 졸렬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라랑`-` 옥녀현현대가 살아 꿈틀대는 영사(靈蛇)처럼 화려한 변화를 일으키며 좌훈의 측신(側身)을 쓸어 갔다. 이 악교파미(惡蛟擺尾)의 일초는 현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좌훈이 휘두른 철곤은 그 변화를 무찌르지 못하고 채대 끝에 휘감기고 말았다. '됐다!' 도연향의 몸에서 아찔한 화향(花香)이 풍겨 나왔다. 본신의 옥녀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지금은 일개 사창굴(私娼窟)로 전락했지만, 원나라 말엽에는 그 성세가 라마교에 버금갈 정도로 번창했던 옥녀열락교(玉女悅樂敎)의 호교절학(護敎絶學) 옥녀공. 이미 오래 전에 절전된 이 무공을 철면신이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철면신은 이 무공을 제자 중 홍일점인 도연향에게 하사했고, 다행히도 그녀는 옥녀열락교의 비전을 이어받기에 매우 적합한 근골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옥녀공은 수발이 자연스러운 능소능대(能小能大)의 경지... 만약 좌훈의 내공이 도연향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는 옥녀공의 괴이신랄한 공습에 칠규(七竅)로 피를 뿜으며 즉사할 것이요, 좌훈의 내공이 도연향보다 강하다 할지라도 수세에 몰린 이상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입을 것이다. 도연향은 이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훈의 대응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좌훈은 내공을 끌어올려 옥녀공의 공습에 애써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달려가는 신형을 멈추지 않은 채, 옥녀현현대에 휘감긴 철곤을 도연향을 향해 내던진 것이다. 싸움에 임해 병기를 던지다니! 그것도 마맥회의 전투대장 좌훈이! 그러나 이 한 수의 임기응변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채대는 그 끝에 백 근에 달하는 쇳덩이를 매단 채 도연향에게로 빠르게 되돌아갔다. 아무리 공력 수발에 능하다 해도, 일 장이란 거리는 당기던 힘을 완전한 무(無)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가까웠다. "윽!" 도연향은 좌장을 후려쳐 철곤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한 쪽 어깨를 호되게 얻어맞고 짤막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나마 옥녀공의 호신지기(護身之氣)가 그녀의 전신을 보호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정한 철곤은 도자기처럼 우아한 그녀의 어깨 선을 깨진 바가지처럼 만들었을 테니까. 좌훈은 지극히 무인답지 못한 수법으로 도연향을 물러서게 만든 뒤,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쪽 팔이 없는 노인 한 사람이 공야무루와 괴악의 협공에 갇힌 채 쩔쩔매고 있었다. 순간, 도연향은 노인의 얼굴이 어딘지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 그녀가 산동장가에서 보낸 기간은 한 해였다. 한 해라면 세가의 원로 가신 얼굴쯤은 충분히 익힐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설마... 육염명?' 도연향의 두 눈이 빛났다. 뜻밖의 소득을 얻을 기회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물러서라!" 좌훈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양 어깨를 힘차게 휘둘렀다. 일수일권(一袖一拳). 비록 배산도해(排山倒海)의 절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신속함만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석년(昔年), 강호를 위진하던 강남제일쾌수의 솜씨는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어도 결코 감소하지 않은 것이다. 한 번의 소맷짓과 한 번의 주먹질로 두 사람의 강적을 물러서게 만든 좌훈은 육염명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난간 쪽으로 달리시오! 곧 뒤따르겠소!" 육염명이 몸을 돌려 난간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과, 물러섰던 두 강적의 공세가 밀어닥친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육염명이 난간까지 달려갈 시간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3 장 - 5 묘왕동주 좌훈은 두 다리로 굳건하게 버텨 선 채,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섰다. 너덜너덜한 소매가 철봉처럼 변해 철갑거한의 염왕도를 후려칠 때, 우권으로 내지른 질풍불림(疾風拂林)의 일권은 공야무루의 음유한 장력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몇 시진째 변변한 휴식 한 번 없이 혹사해 온 육체로 두 사람의 강적을 동시에 물리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윽!" 좌훈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쿵`-`쿵`-` 철갑거한도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물러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 좌훈의 일격을 받아 내며 입은 손해가 겉보기보다 큰 것 같았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멀쩡한 것은 가장 늦게 싸움에 투입된 공야무루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공야무루의 회복이 가장 빨랐다. "죽어랏!" 공야무루는 쏜살처럼 앞으로 달려나오며 좌훈을 할퀴어 왔다. 그의 깡마른 쌍수를 통해 전개된 야묘박서(野猫搏鼠)의 일초는 과연 이것이 그 흔한 야묘박서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신랄하게 변해 있었다. 파악`-` 꺾어 치는 듯한 좌훈의 우장이 공야무루의 좌수를 비스듬히 봉쇄했다. 절묘한 추창망월(推窓望月)의 수법이었다. 그러나 공야무루의 실초는 좌훈의 왼팔 소매를 할퀴어 뜯어 간 우조(右爪)였다. 철수공을 운용하지 못한 소매는 누에고치에서 뽑아 낸 잠사(蠶絲)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도연향의 채대 아래에서 가뜩이나 보기 흉하게 변해 있던 좌훈의 왼팔 소매는 공야무루의 손가락에 걸려 단숨에 뜯겨 나갔다. 공야무루의 우조(右爪)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좌훈의 왼쪽 어깨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고통이야 여북했을까? 하지만 그것은 둘째 문제였다. 쇄골(鎖骨)을 제압당하면 모든 것이 끝장인 것이다. 그래서 좌훈은 꺾어 친 우장의 다섯 손가락을 한 점으로 모으며 공야무루의 얼굴을 향해 봉황탁(鳳凰啄)의 일초를 찔렀다. 창졸간의 반격이라 어설픈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러한 근접전에서는 능히 구명절초(救命絶招)가 될 수 있는 수법이었다. "엇!" 공야무루는 황급히 뒤로 달아났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뿜어나온 매서운 경기(勁氣)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강퍅해 보이는 그의 매부리코는 꼴사납게 우그러져 버렸다. 공야무루의 코에서 두 줄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살인귀가 흘리는 코피는 보는 이로 하여금 희극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이야압`-`!" 공야무루가 물러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철갑거한이 달려들었다. 전력을 끌어올린 탓인지 염왕도가 다가오기 전에 세찬 바람부터 몰아쳤다. '기회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좌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야무루는 철갑거한보다 훨씬 껄끄러운 상대였다. 공야무루는 진퇴가 노련한 백전노장이었고, 그의 성명절기인 경령장(輕靈掌)은 음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에 비해 철갑거한의 공격은 강맹한 반면 단순했다. 얼굴에 부상을 입고 물러난 공야무루가 다시 달라붙어 온다면, 그때는 쉽게 몸을 빼낼 수 없을 것이다. 달아날 작정이라면, 철갑거한 혼자서 달려드는 지금이 적시인 것이다. "차앗!" 좌훈은 한껏 웅크렸던 오른팔을 힘차게 내밀었다. 펑`-` 성질과 세기가 비슷한 두 줄기 힘이 허공에서 세차게 부딪쳤다. 당연히 같은 충격이 두 사람에게 되돌아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판이했다. 한 사람은 이를 악물며 충격에 버틴 반면, 다른 사람은 몸을 가볍게 하여 충격에 몸을 실은 것이다. 전자가 철갑거한이라면 후자는 좌훈이었다. 허공에서 오른팔을 크게 휘저어 중심을 회복한 좌훈은, 내처 천마행공(天馬行空)의 경신술을 전개하여 난간을 향해 날아갔다. 본디 좌훈과 난간 사이의 거리는 십 장 남짓. 경공이 장기가 아닌 좌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공의 귀신이라 알려진 육족풍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비행하기에는 벅찬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좌훈은 그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철갑거한으로부터 돌아온 반력(返力)이 한몫을 톡톡히 해준 것이다. "서라!" 뒷전에서 공야무루의 호통이 들렸다. 그러나 좌훈은 걱정하지 않았다. 공야무루의 몸이 아무리 재빠르다 할지라도 자신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가속이 붙은 그를 공야무루가 따라잡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난간을 몇 장 남겨 둔 허공에서, 좌훈은 어떤 광경을 목격하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육염명은 아직도 범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라면 운하 속에 있어야 할 그인데! 난간 위를 막 넘어갈 무렵, 좌훈은 무엇이 육염명으로 하여금 범선 안에 남도록 강요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알록달록한 끈!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독사처럼, 육염명의 허벅지에 세 개의 독 미늘을 박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문과 한 여인의 악연(惡緣)은 참으로 질긴 것이었다. 도연향의 옥녀현현대는 저 늙은 명숙이 붙잡은 최후의 생명줄마저 용납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틀렸구나!' 좌훈은 내심 장탄식을 터뜨리며 하나뿐인 손을 뒷춤으로 가져 갔다. 뒷춤에 꽂아 두었던 어떤 물건이, 유난히도 섬뜩한 감촉과 함께 좌훈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훗날 누군가 좌훈에게 묻는다면, "나는 육 선생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고 당당히 말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일의 성패란 본디 하늘에 달린 것. 최후의 순간에 난간을 넘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저 육염명의 명운이 여기서 다한 탓이다. 강물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는 좌훈의 시야에 육염명의 뒷모습이 담겼다. 흐트러진 백발 사이로 비친 목덜미는 환갑을 넘긴 노인답지 않게 팽팽해 보였다. 좌훈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육염명이 검패로부터 하사받은 비수 추한상(秋寒霜)은, 가을날의 서릿발처럼 차갑고 선명한 빛줄기를 매단 채 주인을 향한 최후의 비행을 시작했다. -`귀좌! 만약에 내가 적의 손에 떨어지는 처지가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것으로 나를 죽여 주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4 장 반전(反轉) 묘왕동주 제 14 장 반전(反轉) 1 늦은 인시(寅時:오전 3시~5시). 광양호 동쪽, 이름 모를 야산의 능선에는 새벽 안개가 백룡(白龍)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세상은 아침을 향해 치닫건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시간의 궁지에 몰린 밤은 추한 권력자처럼 막바지 패악(悖惡)을 부리고 있었다. * * * "이(李) 아우가 죽었습니다." 반쯤 부숴진 선실 문을 닫으며 풀죽은 목소리로 보고하는 사람은 동방만옥(東方巒玉). 철옥과의 투쟁 속에서 장년을 보낸 마맥회의 고참 무사였다. 그가 말한 '이 아우'란, 장손불변과 비슷한 연배의 청년 무사 이작(李作)이었다. 이작은 반 시진 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한 명의 철한인과 두 명의 수적을 죽이는 공훈을 세웠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작에게 돌아간 녹(綠)은 하나의 구멍이었다. 왼쪽 갈비뼈 아래 반 뼘쯤 되는 곳에 뚫린 그 구멍은 조금만 깊었다면 등 쪽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어쩌면 그 구멍을 달고도 반 시진을 더 버틴 이작의 튼튼한 몸뚱이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당삼(唐森)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살아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어진 동방만옥의 보고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처량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보고받는 입장인 장손불변의 기분까지도 처량해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손불변은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모름지기 열사(烈士)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각반(脚絆)의 끈이 풀어졌군요." 장손불변은 동방만옥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켰다. 흠칫 놀란 동방만옥이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자 장손불변은 낮게 혀를 차며 이렇게 덧붙였다.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텐데, 끈이 너덜너덜해진 각반 따위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겠지요. 아예 풀어 버리세요." 끈이 너덜너덜해진 각반이나 깨어나지 못하는 당삼이나 거추장스럽기는 마찬가지 존재였다. 동방만옥은 노련한 사람이라, 이 말에 담긴 숨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장손불변은 그렇게 믿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동방만옥이 선실을 나가자 장손불변은 마음 속으로 현재의 인원을 점검해 보았다. 마맥회 무사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장손불변과 동방만옥, 그리고 당삼의 사촌인 당장원(唐長源)`-`비록 엉덩이에 화살을 한 대 맞았지만, 뒤통수가 삼분지 일이나 날아간 당삼보다는 훨씬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이 전부였다. 동방신행의 표사들은 네 명이나 살아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네 명을 합쳐 봤자 절룩거리는 당장원 하나를 못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장손불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동방신행의 표사들이 넷이나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단탈과 박한의 보호 때문이었다. 두 명의 빌어먹을 오랑캐들은, 그 놀라운 무공에도 불구하고 바보가 아니면 멍청이가 분명했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살아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표사들에게 왜 그토록 신경을 쓴단 말인가! 덕분에 애꿎은 마맥회의 전사들이 치른 줄초상을 떠올리면, 새삼스럽게 두 오랑캐들에 대한 증오심이 치밀어 오르는 장손불변이었다. 이때 선실 문이 열리고, 두 오랑캐들 중에서 조금 더 증오스러운 단탈이 들어왔다. 네 명의 표사 중 가장 말이 많은 금(金)이라는 놈을 꼬리에 달고서.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다." "무엇을 물으려 하시오?" 장손불변은 첫마디부터가 딱 부러지는 단탈에게 퉁명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옥평이 탄 배와는 언제 합류하는 거지?" 단탈의 태도가 어찌나 오만 불손했던지, 장손불변은 당장 "운하로 달아난 배를 이 광양호에서 어떻게 합류하냐?"라고 받아 쳐주고 싶었다. 만약 은애(恩愛)와 경외(敬畏)의 상징인 그의 사저(師姐), 마봉황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장손불변이 떠올린 마봉황은 화사하고 포근하게 웃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 만전을 기하느라고 행보가 더뎌지는 모양이오." 단탈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이번에는 수다스러운 금이라는 표사가 나섰다. "귀(貴)회주가 말씀하신 물길은 어디에 있는 거요?" 비록 존칭을 쓰긴 했지만, 놈의 말투도 단탈에 못지않게 오만 불손했다. 표사들에게 있어서 장손불변이란 존재는, 두 시진 전과는 달리 더 이상 영웅이 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웅이 되려면 영웅에 걸맞는 활약이 있어야 하는데, 장손불변은 몇 번의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선실을 거의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천하의 독짐이 목숨이 아까워 그랬을까? 절대로 아니다. 장손불변은 죽어 가는 수하들의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것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손불변은 일선에 나설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시점이 될 때까지 철저히 장옥평으로 보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급적 몸을 감춰야 했다. "물길이란 게 있는 거요, 없는 거요?" 금이라는 놈이 다시 물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시오. 이 호수는 나도 초행(初行)이오. 길눈이 어두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곧 날이 밝을 테니 그때 함께 찾아보기로 합시다." 이만큼 설명했으면 축생(畜生)이라도 알아들을 법한데, 금이라는 놈은 전혀 승복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차라리 육지로 달아납시다! 호반에 수초가 우거진 데다가 동쪽에는 산도 있지 않소! 흩어져 달아나면 놈들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거요!" 장손불변은 마침내 짜증을 내고 말았다. 물론 금이라는 놈을 이해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놈은 도생(圖生)할 권리가 있었고,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권리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장손불변 자신을 포함하여... 장손불변이 짜증낸 것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금이라는 놈은 다른 세 명의 표사들과 마찬가지로 대세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하찮은 자'였다. '하찮은 자'가 수초가 우거진 호반으로 달아나든, 산이 있는 동쪽으로 달아나든, 장손불변은 그런 것까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뒤켠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선 단탈과, 갑판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박한은 달랐다. 단탈과 박한은 장옥평이 이 배에 있음을 알리는 명패와 다름없었다. 마봉황의 금선탈각지계가 별다른 문제 없이 이제까지 적을 기만할 수 있었던 것도, 단탈과 박한이 이 배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금이라는 놈이 바람을 집어넣어 단탈과 박한이 넘어간다면, 이야말로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 장손불변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이다. "육지가 안전하다? 협사께서는 그 점을 자신하실 수 있겠소?" 장손불변은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물었다. 도생에 급급한 '하찮은 자'를 설득하는 데 있어서 명분이란 너무 과분한 약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점잖은 엄포로 공포를 느끼게 하는 편이 훨씬 강력하고 효과 빠른 약일 것이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물위에 있는 것보다는 싸우기가 훨씬 용이하지 않겠소? 몸을 숨길 장소도 많고..." 장손불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지, 금이라는 놈은 조금 움츠러든 기색이었다. "협사께서는 철옥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신 모양이군." "무슨 소리요?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누구와 싸웠다고 생각하는 거요?" 금이라는 놈은 발끈해서 대들었다. "호오, 그러셨소?" 장손불변의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우기는 언제 싸웠다는 말일까? 단탈과 박한이 보살펴 주지 않았다면, 다섯 합도 버티지 못하고 꼬치 신세가 되었을 주제에.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우리 마맥회는 철옥과 투쟁을 벌인 지난 십 년간 대소(大小) 팔십 회가 넘는 전투를 치렀소. 하지만 그 중 육상전은 절반도 되지 않지. 당신은 그 이유를 아시겠소?" 금이라는 놈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땅에서는, 특히 초목이 있는 곳에서는 놈들을 당할 수가 없소. 놈들의 갑주(甲胄)는 도검에도 끄떡하지 않으며, 이화신마의 화기는 야전(野戰)에서 천군만마(千軍萬馬)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하오. 한데도 협사께서는 뭍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시겠소?" 이어 장손불변은 단탈을 바라보았다. "땅에서 그들의 무서움은 당신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단탈의 동의가 필요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금이라는 놈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겁에 질려, 두 번 다시 뭍으로 달아나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단탈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평이 도착할 때까지는 흩어질 수 없지. 어디로 피할 것인가는 옥평이 도착한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지." 단탈은 몸을 돌려 선실을 나갔고, 쭈뼛거리던 금이라는 놈도 뒤따라 나갔다. 선실 안에 홀로 남은 장손불변은 쓰게 웃었다. 그에게 있어서 철옥은 철천지 원수였다. 비록 필요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철천지 원수의 위세를 과장한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금이라는 놈의 주장이 옳았다. 철옥이 이 작전에 얼마의 인마를 투입했는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제아무리 강남제일세(江南第一勢)를 자랑해 봤자 강호의 일개 문파에 불과했다. 드넓은 호반 전체에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 재주는 없는 것이다. 삶을 도모할 작정이면 지금이라도 뭍으로 달아나는 것이 최상책이다. 그러나 장손불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맥회는 피를 딛고 일어난 조직이었다. 마맥회는 피를 딛고 걸어온 조직이었다. 철옥을 무너뜨리고 남마련의 영광을 재현할 그날까지, 열사의 희생은 살아남은 모든 회원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몇 번이라도 열사가 되어 주리라! 장손불변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그의 이름은 불변(不變)이었다. 그는 이름처럼 영원히 바래지 않을 충성의 상징이 되고 싶었다. * * * 그릇은 내용물을 모두 비웠음에도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온기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과, 역시 비슷하게 떨리는 손과, 팔뚝, 어깨, 그리고 파랗게 질린 두 뺨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석소용은 집게손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입천장을 긁자 파 껍질처럼 얇은 피부가 떨어져 나왔다. 익어 버린 입천장의 살갗. 그릇에 담겼던 뜨거운 국물을 단숨에 들이킨 죄였다. 입천장은 쓰라렸지만, "한 그릇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허기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느냐?" 문득, 머리 위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석소용은 고개를 들었다. 유생풍의 청삼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드냐고? 내가 기절했었나?' 석소용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피곤함이었다. 그것도 더러운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지독한 피곤함. 그 후의 기억은 누가 지워 버린 것처럼 깜깜했다. 의식이 비몽사몽을 넘나들던 중 뜨거운 국그릇 하나가 두 손에 쥐여졌고, 그녀는 그것을 정신없이 마셨던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4 장 - 1 묘왕동주 그 순간, 석소용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만날 수 있는 부류는 오직 둘, 단탈이 아니면 적이었다. 참으로 비정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당신은 누구... 아!" 벌떡 일어서려던 석소용은 애처로운 신음을 토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이 통째로 없어진 사람처럼 무릎 위와 무릎 아래가 따로 놀고 있었다. "쯧쯧! 죽었다 살아난 줄도 모르고... 조금 더 쉬어야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청삼 중년인, 전운리는 혀를 찼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물에서 건져 냈을 때의 석소용은, 조금 전까지 그토록 열심히 헤엄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체온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알아 내고자 했던 전운리는 졸지에 간병자(看病者)가 되어 본대로 귀환해야만 했고, 그녀는 반 시진의 휴식과 두 종류의 효과 좋은 환약과 다섯 장의 보송보송한 모포의 도움으로 체온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석소용은 약간의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색을 읽은 전운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는 왜 그런 곳에서 헤엄치고 있었지? 배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석소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왜 헤엄치고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갈 같은 마봉황 때문이었다. 마봉황의 교활한 배신 행위를 단탈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질 때까지 헤엄쳤던 것이다. 하지만 석소용은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었다. 마봉황이 한 짓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공개해야 마땅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점혈당해 있는 장옥평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장옥평이 무슨 죄가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시치미를 떼기로 작심했다. "배라니요? 무슨 배를 말하는 거죠? 난 날이 더워서 물장난을 좀 쳤을 뿐이에요." 석소용이 조금만 더 세심했다면 이렇게 조잡한 거짓말은 지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중추절(中秋節)을 넘긴 가을 밤은 덥다고 할 수 없었고, 설령 삼복 더위라 해도 고운 옷에 가죽신까지 신은 채 체온이 떨어져 죽기 직전까지 헤엄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운리는 석소용의 눈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아가씨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아가씨는 형산파 석(石) 장로의 여식이지?" 얼마나 놀랐던지 석소용은 들고 있던 국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형산에서 장옥평과 만난 뒤, 지금까지 줄곧 함께 다니지 않았나?" 조용한 음색에 차분한 어조. 석소용은 문득, 전운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과연 누구이기에 자신에 대해 이리도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이제 사실을 말해 주겠나? 아가씨는 왜 그런 곳에서 헤엄치고 있었지?" 석소용은 당돌한 표정으로 전운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저에 대해 아는 거죠?" 전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형산파 장로이자 석소용의 부친인 천애검선(天涯劍仙) 석오랑(石五浪)은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했고, 그가 자결하게끔 몰고 간 장본인은 바로 전운리 자신이었다. 비록 냉정한 심기를 지닌 전운리였지만, 나이 어린 소녀에게 "네 아비를 죽인 사람이 바로 난데, 네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있겠느냐?"라고 대답할 배짱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가씨는 포로고, 나는 신문자(訊問者)야. 나는 아가씨에게 질문할 수 있지만, 아가씨는 그럴 수 없지.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라네." 그러나 전운리는 스스로 신문자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데 실패했음을 알고 있었다. 신문자가 고양이라면 포로는 쥐였다. 신문자가 물수리면 포로는 물고기였다. 이처럼 신문자는 포로에 대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존재여야만 했다. 원래 '신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랬다. 이 단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우월과 절대적인 열등이라는 극단의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쯤은 전운리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상식일진대, 이번만큼은 상식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천애고아가 된 어린 소녀를 다시 윽박지르는 것은 참으로 저열한 일이고, 전운리는 자존심이 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과시용으로 드러나는 자존심이 아닌 진짜 자존심 말이다. 석소용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아도 별일없으리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설사 몇 대 맞더라도 대답하지 않겠노라 다짐한 그녀가 아닌가! "난 대답하지 않을래요!" 그리고 석소용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때, 전운리의 곁을 어슬렁거리던 장강육어의 셋째 반교가 참다 못해 끼여들었다. "개구리 똥만한 계집애가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나, 왜 이렇게 겁이 없어?" 반교는 품속에서 아미자를 꺼냈다. 이어 전운리를 바라보며 흉소를 흘렸다. "흐흐! 전 형은 가만히 보고만 계시오. 소제가 요런 계집을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 조금만 있으면 똥오줌을 질질 싸면서 모든 것을 불게 될 거요." 스걱, 스걱`-` 반교는 아미자로 제 손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굳은살이 깎여 나가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호라! 이제 보니 얼굴도 제법 반반하잖아? 전 형! 원하는 것을 모두 불게 만들어 줄 테니 이 계집을 내게 넘겨주시면 어떻겠소?" 굳은살을 깎아 내는 것도, 그리고 음욕(淫慾)을 드러내는 것도 모두 '요런 계집'을 상대하는 법이었다. 대개의 경우, '요런 계집'은 이쯤에서 혓바닥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석소용은 반교가 알고 있는 '요런 계집'과는 많이 달랐다. 두려움? 한 달 전의 석소용이라면 이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아니 불과 몇 시진 전에도 적잖은 생사의 고비들을 넘긴 그녀였다. 간담만은 천하의 어떤 대장부에 못지않았으니, 저런 유치한 엄포에 두려움을 느낄 리가 없었다. 석소용은 반교를 노려보았다. 생김새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말라깽이는 본디 싫어하는 데다가 볼따구니에 박힌 동전만한 붉은 점에는 털까지 숭숭 났으니, 유달리 깔끔을 떠는 그녀의 눈에 비친 반교는 마차 바퀴에 치어 죽은 쥐새끼처럼 더럽고 흉측한 존재였다. 그런 놈이 언감생심, 자신처럼 곱고 순결한 소녀에게 음욕을 품다니! 이것이야말로 땅위의 두꺼비가 하늘을 나는 거위고기를 탐하는 격이 아닌가! "이 말 대가리 같은 점박이 새끼야! 구린내나는 아가리로 감히 누구에게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반교는 아미자를 놀리던 손을 멈추고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러나 멀쩡한 귀에 왜 환청이 들리겠는가? "이, 이년이...?" 하지만 반교의 어설픈 말대꾸는 시작과 함께 대가리께에서 똑 잘려 버렸다. 췻! 석소용은 오른손을 허리에 착 붙인 채 보기에도 호쾌하게 침을 뱉었다. 이에 반교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저 침 뱉기는 하백의 후예들 사이에서 통하는 감정 표현법이었다. 요 발칙한 계집애는 어디서 그것을 주워 배워, "나는 지금 화났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건드리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이어 꽃물이라도 들인 듯한 석소용의 입술이 벌어지자, 반교의 혼백은 구만리 장천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뭐? 이년? 야! 단탈의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거지 같은 새끼야! 구역질나는 상판때기를 가지고 뭐가 잘났다고 자꾸 아가리를 놀리려는 거니? 너 같은 새끼는, 두꺼비랑 지네랑 염가 할망구랑 한데 묶어서 가마솥에 집어넣고 한 삼 년은 푹 고아 버려야 해! 그래야 돼지 먹이로라도 쓰지!" 욕설에는 네 가지 요결(要訣)이 있다. 첫째는 기세요, 둘째는 목청이요, 셋째는 시기, 넷째는 어의(語義)였다. 석소용의 욕설 공부로 말하자면, 비록 시기와 어의 면에서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지만 기세와 목청 면에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남악(南嶽)의 창연웅장(蒼然雄壯)한 산세를 바라보며 갈고 닦은 기세와 목청이 아닌가? 장강의 점박이 상어가 무슨 재주로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말문이 턱 막혀 버린 반교는 두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뜨며 아미자를 쥔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것이 이 놀랍도록 담대하고 발칙하고 입심 좋은 계집애에게, 말이 짧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이때 전운리가 짜증스러운 안색으로 반교를 제지했다. "자네는 가만히 있게." "하지만 이 발칙한 것이..." "가만히 있으래도!" 반교는 씨근덕거리다가 침을 한번 뱉고는 몸을 홱 돌렸다. 일전에 괴악에게 당한 일도 있고 한지라, 전운리에게 더 이상 성질을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전운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석소용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염가 할망구...? 혹시 마맥회주 염산산을 말하는 건가?" 석소용은 잠시 멍해졌다. 욕설이란, 왕왕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슨 단어를 구사했는지 잊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종목이다. 지금의 그녀가 바로 그랬다. "그리고 단탈? 단탈이 누구지? 장옥평과 함께 다니던 두 사람 중 하나인가?" 하마터면 석소용은 제 입을 쥐어박을 뻔했다. 오직 함구함으로써 소여협(少女俠) 석소용의 기개를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순간의 분을 못 참고 단탈의 이름까지 입 밖에 꺼내고 만 것이다. 전운리는 단지 몇 마디의 욕설로써 석소용의 괄괄한 성질을 파악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흐음!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단탈이란 친구도 별볼일없는 모양이군. 아가씨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저 친구는 장강을 주름잡는 유명한 수왕(水王)이지. 단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 친구에게 걸리면 진주(晉州)의 농어처럼 단박에 회 떠지고 말걸?" 장옥평이 애뜻한 정랑이라면, 단탈은 무적의 보호자였다. 적어도 석소용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전운리의 폄하(貶下)를 참아 넘길 수 없었다. "저런 말 대가리가 왕? 웃기고 있네. 진짜 왕은 단탈이야! 단탈은 묘왕(苗王)이야! 만약 단탈이 여기 있다면, 당신들 모두 다리가 둘뿐인 것을 원망해야만 할걸?" 석소용은 생파를 먹인 투견(鬪犬)처럼 씩씩거렸고, 전운리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단탈이란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을온족을 수수깡처럼 박살내고, 화룡대(火龍隊)를 촛농처럼 녹이고, 결국 호남의 세 마리 귀신 삼풍마저도 유부로 보내 버린 묘인! 그의 이름이 바로 단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아이는 왜 마봉황을 싫어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표선에 타지 않고 물위를 헤매고 있었던 것일까? 전운리의 추리는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었다. 둥`-`둥`-`둥`-` 세 번의 북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주장 매용소의 소집령이었다. 소집령이 울린 이상, 세 척의 범선과 삼십여 척의 소형선에 산개해 있던 간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매용소 앞에 집결해야 한다. 번거로운 허례를 꺼리는 매용소의 성품에 비추어 소집령의 발동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운리는 자신의 목덜미를 두어 번 문질렀다. 피곤한 밤이었다. 날 새기 전까지 뻣뻣해 오는 목덜미를 몇 번이나 더 문질러야 할지... 전운리는 나직이 한숨을 쉰 뒤, 철한인 셋을 불러 석소용의 감시를 명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4 장 - 2 묘왕동주 "말로는 당할 수 없을 테니 뭐라고 지껄이건 대꾸하지 말아라. 따듯한 국이나 한 그릇 더 갖다 먹이고..." 안 그래도 국 한 그릇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석소용이었으니, 반가운 마음이 와락 일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전운리는 세심하다는 칭찬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 * * 소형 선박들을 점검하던 대왕곤이 마지막으로 귀환함으로써, 소집령에 해당되는 간부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매용소는 예의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사람들이 모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안정된 자세였다. 하지만 전운리는 뭔가 계획에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매용소의 미간에 세로로 잡힌 보일 듯 말 듯한 잔주름들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매용소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자영구의 첫 번째 매복이 본대로 돌아왔소." 전운리는 빠른 눈길로 참석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곧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매복의 주장은 철한대의 조장들 중에서 가장 고참인 당운천(唐雲泉). 첫 번째 매복이 돌아왔다면 의당 이 자리에 그의 얼굴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운리의 내심을 짐작한 것일까? 매용소가 신호를 보내자 두 명의 철한인이 사람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두 명의 철한인은 두 자루의 장창과 한 장의 마포로 만든 담가(擔架)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담가 위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신 한 구가 올려져 있었다. 바로 당운천이었다. 몇 사람이 나직한 신음을 토하거나, 혹은 삼켰다. 전운리로 말하자면 어떤 쪽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당운천의 시신을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이윽고 고개를 든 전운리는 맞은편에 서 있는 군천월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운천은 계획대로 교전하다가 철수했다고 하지 않았나?" 군천월도 당운천의 죽음에 대해 당황해 하고 있었다. "분, 분명히 그렇습니다! 당 형님은 제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전운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군천월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군천월이 둘러볼 때까지만 해도 당운천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당운천이 죽은 시점은 그 이후란 얘기인데, 문제는 그 시간에 누가 당운천이 매복한 곳을 지나갔다는 말인가? 표적으로 삼은 표선은 당운천이 있던 곳과는 반대 방향인 광양호 쪽으로 계속 전진하지 않았던가? 쩡`-` 순간, 전운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린 한 줄기 강렬한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채앙과 함께 표선을 정탐할 때... 당시 전운리는 마봉황과 좌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의혹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혹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목표로 여긴 장옥평의 모습이 있었고, 또 잠시 후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석소용이라는 포로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의혹을 지워 버리게끔 강요한 상황이, 나아가 결국 그 의혹을 간과해 버린 순간의 부주의가 지금 전운리로 하여금 당운천의 싸늘한 몸뚱이 앞에서 경악하도록 만든 것이다. 매용소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에 의하면 당운천을 죽인 자는 한 쌍의 백옥환을 무기로 사용하는 여자라 하오." 이 말은 '설마'로 끝나 주기를 바란 가설을 정설로 확인시켜 주었다. 전운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냥감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나뉜 시점과 장소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첫 번째 매복과 두 번째 매복 사이, 혹은 두 번째 매복과 소명사주 사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뉜 사냥감은, 한 무리는 광양호 쪽으로, 다른 무리는 운하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두 무리 중 알짜는 어느쪽일까?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당운천을 죽인 백옥환을 쓰는 여자는 분명히 마봉황. 그렇다면 운하 쪽으로 이동한 무리가 알짜였다. '내가 이런 실수를...' 전운리는 눈을 감은 채 장탄식을 터뜨렸다. 목덜미의 뻣뻣함은 이제 극에 달해, 조금만 세게 젖히면 마른 솔가지처럼 그대로 부러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전 선생,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이다." 매용소는 전운리를 향해 물었다. 질책의 기색은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 하지만 전운리의 귀에는 어떠한 질책보다도 쓰라리게 들렸다. "가짜일... 가능성이 큽니다." 매용소의 물음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전운리는 이미 그 물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자신이 소명사주에서 본 장옥평이 가짜라는 뜻이었다. 매용소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영리한 여자가 장옥평을 놔두고 혼자만 빠져 나갔을 리 없겠지요." 매용소는 잠시 시간을 둔 뒤 다시 물었다. "사매가 그들을 저지할 수 있겠소?" 전운리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기대하기 희박한 일이었다. 도연향이라는 그물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디가 질기고 어디가 연한지, 어디가 촘촘하고 어디가 성긴지 이미 겪어 본 그들이었다. 일단 경험해 본 그물에 또 한 번 당할 정도로 녹록한 사냥감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공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용소는 한숨을 쉬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결국 멋지게 당한 셈이구려." 전운리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 작전이 무위로 끝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동원한 막강한 전력이 한낱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작전 중 희생된 수하들을 생각해 보라! 그 많은 죽음들이 몽땅 개죽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막강한 전력은 조롱거리로, 수하들의 죽음은 개죽음으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전운리는, 지난번 백석학에서의 사냥이 실패로 끝난 뒤 한동안 폐인이 되어 버린 이교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선생의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마봉황의 계교가 워낙 시기 적절했던 탓이오." 매용소는 전운리를 위무(慰撫)한 뒤 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대왕곤!" "옛!" 대왕곤이 외눈을 빛내며 나서자, 매용소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놈들이 호수 어디쯤에 있는지는 파악해 놓았겠지?" "물론입니다!" "본대의 전인원을 동원한다. 출동이다." "복명!"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그들은 저마다 지휘하는 배로 돌아가 매용소의 출동령을 시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추격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겠지요?" 매용소의 물음에 전운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용소는 내심 혀를 찼다. 치밀함을 장기로 삼는 사람이니만큼 그 치밀함이 손상되었을 때의 충격도 큰 것이다. "그렇다면 제 발로 사지에 들어온 인간들의 얼굴이나 구경하는 게 어떻겠소? 저토록 멋지게 싸워 온 자들이라면, 마무리 정도는 성대하게 해주는 것이 예의 아니겠소?" 매용소는 애써 쾌활한 표정으로 전운리에게 말했다. * * * 찌익`-` 서운삼은 한 장의 종이를 찢었다. 찢은 것을 겹쳐서 찢고, 다시 겹쳐서 한 번 더 찢었다. 그리고 이제는 손바닥 반만하게 변해 버린 종이쪽들을 호수에 던졌다. "종이에 한이라도 맺힌 사람 같소." 애혈은 언제나처럼 이죽거렸고, 서운삼은 언제나처럼 허허 웃었다. "웃으시는 것을 보니 어 선생이 시간을 맞춘 모양이죠?" 애혈의 물음에 서운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물결에 쓸려 이리저리 흩어지는 종이쪽들은 장봉현의 책방 주인 어고가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고가 회안부(淮安府)를 지나며 남긴 전언을, 서운삼의 수하가 비합(飛 ) 편으로 보내 왔기 때문이다. 어고가 남긴 전언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저 "모월 모일 모시에 산동의 손님들과 함께 회안부의 입운관(入運關)을 지난다."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내용이 황서계가 계획한 이번 복수극의 절정이 되는 부분인데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남경의 서 삼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놈들이 깜짝 놀라겠군요! 으하하!" 애혈도 통쾌한 기분이 들었는지, 그답지 않게 목구멍까지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서운삼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이번 일로 인해 마맥회를 다시 보게 됐네." "예상보다 질기다는 뜻이오?" "질기다... 허허! 좋은 표현이군." 서운삼은 어둠과 밝음이 뒤섞인 채 일렁거리는 호수 저편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들이 철옥의 패도 아래에서 이제껏 버텨 온 것도 단지 운이 따른 탓만은 아니었어. 이번 일만 보아도 그들이 지닌 저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자영구의 모든 매복을 뚫고 이 호수까지 온 것은 결코 작은 일이라 할 수 없을 게야." 애혈은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그렇다면 마맥회와 거래하던 신 약사도 죽었으니,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임자라도 되어 보시겠소?" "혹시 자네가 생각이 있는 건 아닌가?" "나도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뭐라는 것인지 정도는 아는 놈이오." "허허!" 오상(五常)의 도리를 거론하는 애혈의 표정이 얼마나 엄숙했던지, 서운삼은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어디 슬슬 움직여 볼까?" 애혈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걸치고 있던 헐렁한 마의 단삼을 벗었다. 그러자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야행의(夜行衣)가 드러났다. "다른 야행의와는 좀 다르군." 서운삼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애혈은 야행의의 팔뚝 부분을 가볍게 잡아 당겼다. 팔뚝에 밀착되었던 옷감이 두 치 가까이 늘어났다가 쫙, 소리를 내며 원상으로 돌아갔다. "일전에 동번(東番:대만)에서 구한 물건이오. 부상(扶桑)인가 하는 나라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방수 효과가 좋아서 나 같은 놈에게는 쓸모가 큰 물건이지요."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4 장 - 3 묘왕동주 서운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해 늦은 봄마다 동남부 해안을 어지럽히는 왜구들이 사는 곳이 바로 부상이었다. 그들이 하는 짓을 보건대, 부상이라는 나라에는 애혈과 같은 살수들이 탐낼 만한 물건이 많은 것 같았다. "주시오." 애혈은 손을 내밀었다. 서운삼은 곁에 놓아 두었던 상자를 그에게 건넸다. 나무로 짠 상자는 이음새 부분에 유지(油脂)를 덧입혀 물이 새들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화탄이라도 몇 개 집어넣고 싶구려." 그러자 서운삼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놈을 죽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게. 단지 그 일뿐이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야. 우리는 놈과 철옥에게 똑똑히 가르쳐 줘야 하네. 우리를 건드린 자에게 우리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압니다, 알아!"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듯 두어 번 입맛을 다신 애혈은 호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운삼은 애혈을 향해 말했다. "조심하게. 2 -`팔월 이십육일 저녁. 팔공산(八公山) 오가둔(吳家屯) 출발, 회하(淮河)로 진입. -`팔월 이십칠일 낮. 중도유수사(中都留守司) 관할의 봉부시(蜂埠市) 통과. -`팔월 이십칠일 밤. 주주(酒州) 통과, 홍택호(洪澤湖)에 입호(入湖). -`팔월 이십팔일 새벽. 홍택호 통과, 황하에 진입. -`팔월 이십팔일 낮. 회안부(淮安府)에 설치된 입운관에 도착, 곧장 운하로 진입. * * * 끄륵, 끄르륵. 보이지 않는 손이 위와 창자를 쥐어짜고 있었다. 물론 그 기분이야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더러웠다. 서문개복(西門開福)은 그런 더러운 기분 속에서도, 지금 벌리고 있는 입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위와 창자는 참으로 줄기차게 무엇인가를 입을 향해 올려 보내고 있었다.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정작 입으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하루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위액이라도 나왔는데, 이제는 그것도 바닥이 난 모양이다.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토한답시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도 뒷사람 보기 뭐한 일이라서 서문개복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서문 형! 좀 어떠시오?" 뒷사람이 물었다. 서문개복은 난간 너머로 숙인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위와 창자를 쥐어짜고 있었다. 기분도 여전히 더러웠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는 상태를 묻는 황벽년(黃碧年)에게 웃어 보이려 애썼다. "괜찮아요, 난 괜찮아... 황 형에게 추한 꼴을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송구스럽소." 하지만 반쪽이 된 얼굴로 짓는 웃음이 좋아 보일 리 없다. '쯧쯧!' 황벽년은 내심 혀를 찼다. 단전에 축적된 내공은 외적으로 강한 힘과 지구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해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원활한 혈류(血流)와 건강한 장기(臟器)를 지니게끔 해준다. 내공이 일정 수준에 오른 사람이면 멀미 따위에 녹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황벽년의 눈앞에 서 있는, 수척한 얼굴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서문개복은 참으로 특별한 존재였다. 내가고수라고 자부할 수 있는 무인이면서도, 이 배에 발을 붙인 지난 사흘 내내 배 멀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벽년은 서문개복을 비웃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저토록 배멀미에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개복은 본디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든 운명이었다. 날 때부터 경맥의 일부가 막혀 있는 폐맥증(閉脈症) 환자였기 때문이다. 막힌 경맥이 하필이면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인 탓에, 짧은 생애조차 한 번이라도 마음껏 먹어 보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가련한 소년 서문개복. 그런데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두성(南斗星)은 그를 그렇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두성은 한 사람의 고명한 의원으로 하여금 불치의 병이라 알려진 그의 폐맥증을 치료하도록 안배해 놓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지금 서문개복이 보이고 있는 멀미증은 병마에 시달리던 가련한 소년 시절의 흔적이었다. 깃털처럼 많은 낮과 밤이 지났지만, 그리고 놀라운 내공이 단전에 쌓였지만, 병마의 흔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는데... 이번 뱃길은 너무 험하군요." 서문개복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훔치며 변명처럼 말했다. 하기야 그런 생각은 황벽년도 마찬가지였다. 팔공산에서 대운하까지는 구백 리 물길이었다. 아마 누군가 그에게 "구백 리 물길을 이틀 반 만에 주파했노라."라고 말했다면 그는 코웃음 한 번으로 흘려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거짓말 같은 일을 그와 그가 속한 선단(船團)이 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 일등공신은... "여어, 서문 현질! 다 토했으면 이리 와! 온미주(溫米酒)를 한 잔 들이키면 뱃속이 한결 나아질 거야!" 걸걸한 목소리. 서문개복과 황벽년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탄 배의 갑판 한가운데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두 사람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이틀 하고도 한나절 동안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닦달하여 구백 리 물길을 주파하도록 만든 일등공신. 그는 다름 아닌 양충이었다. 서문개복은 서문씨요, 양충은 양씨다. 서문개복은 산서의혈당의 둘째 당주요, 양충은 산동장가의 원로 가신이다. 비록 현질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서문개복은 양충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문개복은 후들거리는 다리로도 양충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성질은 벽력(霹靂)이요, 손속은 염왕(閻王)이라는 양충.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느니, 남자답게 가서, 남자답게 마시고, 남자답게 토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황벽년은 한숨을 쉰 뒤 서문개복을 뒤따랐다. * * *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할 걸세. 앞으로 한 시진이면 자영구에 도착할 테니까." 말과 함께 허리에 찬 자모권(子母圈)을 뽑아 보임으로써, 양충은 자신이 언행일치(言行一致)에 철저한 사람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전갑(戰甲) 차림의 초로인이 핀잔을 주었다. "형님도 원! 어 선생이 말한 곳은 광양호가 아니오? 자영구의 물길이 자그마치 삼십 리외다! 좀 진중하게 기다리실 수는 없소?" "진중? 개 같은 철옥 놈들이 우리 둘째 공자를 해코지하려 하는데, 자네 지금 나더러 진중하라고 했나?" 양충은 고리눈을 부릅뜨며 전갑의 초로인을 꾸짖었다. 이에 전갑의 초로인 양관태(梁觀兌)는 어깨를 찔끔 움츠리고 말았다. 양관태로 말하자면 봉부시에서 양충 일행에 합류한`-`합류당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육품(六品)의 참장(參將)이자, 구백 리 물길을 이틀 반 만에 주파하도록 만든 이등공신쯤 되는 사람이었다. 본디 이 시간이라면 중도유수사의 관저에서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 있어야 할 양관태가 의자도 없는 갑판 바닥에 앉아 시큼한 곡주(穀酒)를 홀짝거리게 된 데에는, 타고난 성이 양(梁)이라는 사실이 강력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작금에 양이라는 성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귀성(貴姓)이었다. 본래는 몰락한 선비 가문에 불과했지만, 궁녀로서 대내에 들어간 여식 하나가 당금 황제의 눈에 들어 총애를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재주라고는 오촌 당질녀 되는 양비(梁妃)에게 올릴 뇌물 긁어 모으는 것 외에는 없는 양관태 같은 인간이 중도유수사의 참장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양씨 문중에는 양비뿐 아니라 양충도 있었다. 나이 열다섯에, 네 뜻이 뭐냐고 묻는 친척 어른들 앞에서 "절세의 유협이 되겠습니다!"라는 청천 벽력 같은 대답으로써 입지(立志)한 놈이 바로 양충이었다. 그 대가로 통나무 같은 장딴지 가득 붉은 회초리 자국을 새기게 되었지만, 양충의 머리에는 애당초 포기란 단어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날 밤, 집안의 금붙이는 물론이거니와 놀러 온 친척의 비단옷까지 훔쳐 강호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말이 좋아 유협이지, 검패의 수하에 들기 전까지는 흑도의 하류배나 하는 짓들도 서슴지 않던 양충이었다. 그 눈에 집안이 보일까, 아니면 어른이 보일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양충은 무려 이십 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문중을 괴롭혔다. 빈한하다고는 해도 먹고 살기엔 큰 지장이 없던 양씨 문중은, 잘난 유협 한 명으로 인해 가문 날 논바닥처럼 피폐해지고 말았다. 여북하면 양충의 부친`-`양관태에게는 백부가 되는 사람이다`-`이 친척들 볼 면목이 없다 하여 감숙(甘肅)의 촌구석으로 달아나듯 이사했을까? 이상이 양충과 양씨 문중 사이에 이어진 오십 년 악연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러한 악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봉부시 선박제조창(船舶製造廠)에 순감(巡監)나왔던 양관태가 기녀도 없고 미주도 없는 이 척박한 물길 여행에 끌려들게 된 것도, 끊이지 않는 악연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양충에게 있어서 양관태란, 어릴 적 발가벗고 함께 뛰놀던 절친한 사촌 동생도 아니요, 민초들의 두려움을 사는 존귀한 육품 무장도 아니었다. 그저 중토(中土) 오대강(五大江)의 관문에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끗발 좋은 출입증에 불과한 것이다. 양충은 양관태가 패검(佩劍)을 뽑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잡아 먹을 듯한 시선을 거뒀다. 동석한 서문개복과 황벽년은 이미 병기를 빼어 들고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병기를 빼어 들지 않아도 양충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었다. 이틀 전, 양충을 찾아 오가던 향노인 집을 방문한 장봉현의 책방 주인 어고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고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들고 있던 술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이지만 허리가 곧은 탓에 그리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활한 유생 티만은 이틀 전과 여일했다. 양충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어고에게 말했다. "무공도 없으신 분이 이처럼 험한 여정에도 끄떡없으시니, 참 대단하외다!" 어고는 고개를 반쯤 숙여 보임으로써 양충의 보비위에 답례했다. 양충은 몇 번 헛기침을 더 한 뒤에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우리 공자가 광양호에 계신다는 얘기... 틀림없소이까?" "틀림없소이다." "믿어도 되겠지요?" "믿어도 됩니다." "하핫!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려." 양충은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양충과 어고의 대화는 한마디로 꼴값이었다. 방금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지난 이틀 반 동안 무려 열 번도 넘게 반복된 것이었다. 양충은 벽력염왕 꼴값을 하려는 듯 "틀림없소이까?", "믿어도 되겠지요?"을 열심히 반복했고, 어고는 유생 꼴값을 하려는 듯 "틀림없소이다.", "믿어도 됩니다."을 열심히 반복했다. 매번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로... 그런데 이번의 꼴값에는 작은 여흥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 선생께서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떠한 대가도 원하지 않는다 하셨지만, 노부는 공자를 받드는 임무를 띤 사람으로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구려." 양충은 품속에서 큼직한 비단주머니를 꺼내 어고에게 내밀었다. "앗!"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4 장 - 4 묘왕동주 그 광경을 목격한 양관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저 비단주머니는 봉부시 선박제조창의 신임 감독관이 그에게 뇌물로 준 물건이었다. 황실의 외척인 그가 역겨운 뻘내를 참아 가며 선박제조창까지 직접 찾아간 것도 모두 저 물건을 얻어 내기 위함이었는데, 무슨 조화를 부렸기에 저 물건이 양충의 품속에서 나온단 말인가? 양관태의 경악에는 아랑곳없이, 어고는 양충이 건넨 주머니의 주둥이를 열어 내용물을 슬쩍 살핀 뒤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본디 계의 배반자를 치죄할 목적으로 준비한 탓에, 개인적인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는 것이 계원들 간의 약속이었소이다. 하지만 성현께서도 지나친 겸양은 오히려 비례(非禮)라 하셨으니, 여비 조로 넣어 두겠소이다." 양관태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일이다. 동생의 돈을 훔쳐 제 맘대로 쓰는 형 놈이나, 은 백 냥이라는 거금을 여비 조로 넣어 두겠다는 유생 놈이나, 밉기로 말하자면 그 놈이 그놈. 생각 같아서는 관군이라도 풀어서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양관태는 자신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양충이 사촌 형이라서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아예 죽여 버릴 자신이 서기 전에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망종이 있는 것이다. 결국 양관태는 언제나처럼 한숨과 자책으로 마음속의 울화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이리 팔자가 기구할까?' 뱃머리에서 망을 보고 있던 무사 하나가 양충을 향해 소리친 것은, 팔자 좋기로 유명한 중도유수사의 참장 양관태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팔자타령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전방에 뭔가 나타났습니다!" * * * 식인경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주가(舟 )의 뒷전에서 부서지는 하얀 포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솥뚜껑만큼이나 큼직한 그의 두 손은 소나무로 만든 주가의 방향타를 움켜쥐고 있었다. 주가의 방향타를 움직이는 것이 그의 임무라면, 그는 매우 임무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반 시진 가까이 고개 한 번 들지 않은 채 방향타와 강물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식인경의 심중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푹 숙인 고개 밑으로 이따금씩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자라 같은 새끼..." 식인경의 이빨 사이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욕설은 그가 아니면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에게 하는 욕설은 비록 다른 이가 듣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쓰라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인경이 자책하는 것은, 반 시진 전 범선 위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범선 후미에서 일어난 폭발. 갑판 위에서 터진 연막탄. 화포를 쏘던 몽고인의 죽음. 그리고 거의 생포했다고 여긴 늙은 외팔이의 죽음. 이 네 가지 사건은 실로 폭풍이 몰아치듯 연속적으로 발생되었다. 늙은 외팔이가 비수를 뒤통수에 박은 채로 고꾸라졌을 때에도, 사람들은 처음의 폭발을 수습하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네 가지 사건이 얼마나 숨가쁘게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늙은 외팔이가 젊은 외팔이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도연향은 술취한 것처럼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어 자영구에서 나타난 배가 범선으로부터 이십 장쯤 떨어진 곳을 유유히 지나쳐 운하로 들어가자, 도연향은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겁이 많은 식인경은 물론이거니와 공야무루와 괴악 같은 강골(强骨)들까지도 한동안 그녀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범선. 그 위에서 미쳐 날뛰는 도연향. 그러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최소한 식인경을 포함한 수적들에게는 말이다. 문제는 도연향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에 발생했다. 범선이 보유하고 있던 세 척의 주가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식인경에게 그것들을 모두 띄울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식인경은 그녀의 명을 따를 수 없었다. 이미 두 척의 주가가 불길에 휩싸인 뒤였기 때문이다. 식인경은 이러한 상황을 도연향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몇 마디도 채 꺼내기 전에, 도연향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수편(手片)이 날아왔다. 어금니가 부러지고 입 안쪽의 살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강력한 수편이었다. 식인경이 도연향의 수편 아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한 척에 불과할망정 온전한 주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리라. 그 주가는 곧 강물에 내려지고, 도연향은 사람들을 선발했다. 선발 기준은 간단했다. 부상자는 모두 제외되었고, 온전한 사람들 중에는 무공이 고강한 순서대로 뽑혔다. 수적들 중에는 식인경을 포함하여 세 명이 선발되었다. 적은 숫자였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은 수적의 숫자는 불과 열 명 남짓. 그것도 선발된 셋을 제외하면 모두 몇 달 동안은 정양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순간, 식인경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도연향은 이 주가로써 운하로 달아난 소선을 추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발되지 못한 사람들은? 철옥의 문도들이야 식인경의 소관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팔다리가 부러지고 몸뚱이가 시커멓게 그을린 수적들은? 바야흐로 범선은 물속으로 잠겨드는데, 그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 이십 장이 넘는 거리를 헤엄쳐 목숨을 부지한단 말인가! 그래서 식인경은 간청했다. 모든 모멸감과 모든 수치심을 접어둔 채 애원했다.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만 하기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개처럼 애걸했다. 제발 부상자들부터 뭍으로 옮긴 뒤에 추격을 시작하자고... 그리고 식인경은 몸을 웅크렸다. 도연향의 삐뚤어진 성격을 알아 버린 그이기에, 곧바로 날아들 매로부터 조금이라도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매가 날아오지 않았다. 다만 싸늘한 코웃음이 날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식인경이 고개를 들었을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전방에 수상한 선단이 접근해 옵니다!" 돌연 주가의 뱃머리 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식인경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그의 볼따구니에는 두 줄기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울지 말자. 더 이상 울어서는 안 된다.' 식인경은 자신을 향해 몇 번이고 다짐했다. 언제나 당하고, 또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바보는 되고 싶지 않았다. 퉤엣! 한 덩이의 가래가 갑판에 달라붙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입 안 때문인지 가래는 불그죽죽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식인경은 자신이 뱉어 놓은 가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가래와 같은 빛깔의 검붉은 불길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나는 자라 새끼가 아니다." 식인경은 중얼거렸다. "하백의 후예는 결코 자라 새끼가 되어선 안 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 * * 전방으로부터 수상한 선단이 접근해 온다는 망초(望哨)의 보고는 도연향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도연향은 사람들을 밀치며 뱃머리 쪽으로 나아갔다. 동틀 시간이 멀지 않아서 그런지 운하 위의 대기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물위에 드리운 안개도 덜 저은 풀죽처럼 그 밀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도연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지금, 도연향이 탄 주가는 황하를 향해 달아나는 한 척의 쾌속선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다. 물론 자영구를 거슬러 올라와 그녀와 그녀의 범선을 낭패에 빠뜨린 그 고약한 쾌속선이었다. 어떤 얼굴이 그 배에 타고 있을지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다. 좌훈과 육염명 정도 되는 위인들이 목숨을 걸고 범선에서 공작을 펼친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 배에는 이 사냥의 최종 목표인 장옥평이 타고 있다! 좌훈이 날린 비도가 육염명의 목덜미에 틀어박혔을 때, 도연향은 이러한 심증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애써 육염명을 생포하려 했던 이유, 그리고 좌훈이 잔인하게도 동료를 살해해야만 했던 이유. 이 두 가지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육염명이란 존재가 인질로서 가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 중에서 육염명을 인질로 인정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장옥평뿐이었다. 그래서 도연향은 육염명이 고꾸라질 때, 눈앞이 붉게 물들 정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식인경을 사납게 닦달, 이 주가를 내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식인경, 이 비루한 수적은 정말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멍청이였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그 다급한 상황에서 어찌 감히 수적들부터 구하자는 망발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제깟 놈이 무슨 보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연향은 어찌나 어이가 없었던지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예 멍청이를 죽여 버릴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바꿨다. 비록 멍청하다고는 해도 주가를 부리는 재주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놈이었다. 놈을 죽이면 당장 장옥평을 추격하는 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도연향은 자신의 권위와 분노를 알리는 방법으로 조금 특이한 것을 채택했다. 놈을 보살로 만든 수적들을, 놈이 보는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죽여 버린 것이다. 몇 놈이나 죽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따위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나중에는 공야무루`-`그는 좌훈에게 맞아 코뼈가 주저 앉은 탓에 누구 못지않게 독이 올라 있었다`-`까지 그녀를 거들었으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수적 몇 놈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작업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말았다. 그때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식인경의 상판이라니! 결국 추격은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지금, 도연향이 탄 주가는 자영구에서 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운하 위에서 장옥평이 탄 배를 불과 이십여 장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두 척인가요?" 도연향은 곁에 있던 공야무루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 어째 느낌이 좋지 않소이다." 공야무루의 대답은 도연향의 지금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전방에 나타난 선단이 주는 느낌은 불길함 그 자체였다. 안개 저편에 거뭇거뭇하게 자리잡은 그림자는 백 장에 달하는 거리를 감안할 때, 결코 그녀가 탔던 범선에 못지않은 크기를 지닌 것 같았다. 운하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상선이나 여객선은 저런 몸집을 지니고 있지 않다. 더욱이 지금은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수부라면 가급적 운항을 피해야 할 안개 낀 새벽이 아닌가! 이때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접근하던 두 개의 그림자가 그 간격을 서서히 벌리기 시작했다. 마치 장강 쪽에서 다가오는 두 척의 배들을 발견하고는, 배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물길을 비켜 주려는 의도 같았다. 백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접근하는 두 무리가 만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주가의 주장인 도연향이 해야 할 일은 추격전을 계속 이어 갈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장옥평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추격을 멈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느낌이 너무 안 좋았다. 도연향은 어떠한 판단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도연향이 망설이는 순간에도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칠십 장, 육십 장, 오십 장... 그러던 어느 순간, 강둑 저편에서 일진의 새벽바람이 홀연히 일어났다.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운하 위에 뭉쳐 있던 안개 덩이가 새벽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올라갔다. 주가의 갑판 위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전방을 살피던 모든 이들의 시야가 일시에 탁 트였다. 그것은 두 척의 범선이었다. 운하 속에 웅크린 이무기가 튀어나온 듯,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난 두 척의 범선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뱃머리에 거대한 금빛 깃발을 올리고 있었다. 깃발에 수놓인 여섯 개의 글자는 하나하나가 새파란 비수가 되어 도연향의 망막에 박혀들었다. -`동쪽에서 일어나 구주에 떨친다[興東方震九州].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리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도연향은 이 세상에 자신과 거대한 깃발만이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펄럭이는 깃발은 하늘을 삼키고, 강물을 삼키고, 급기야 그녀의 투지마저도 삼켜 버렸다. 투지가 사라진 그녀의 마음속, 남은 것은 공포뿐이었다. "퇴각! 퇴각이다!" 수하들을 향해 정신없이 외치는 도연향의 안색은 시체의 그것처럼 푸르뎅뎅하게 질려 있었다. 여섯 개의 글자가 수놓아진 금빛 찬란한 깃발. 그것은 동방의 패자(覇者), 장씨가문을 상징하는 산동흥진기(山東興震旗)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명가(命價) 묘왕동주 제 15 장 명가(命價) 1 "으으..." 장옥평은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봉황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진 전 마봉황의 손을 통해 발휘된 육족풍의 폐맥점혈수(閉脈點穴手)는 강호일절이라 칭송받을 만큼 고명한 수법이었다. 일단 이 수법이 시전되면 당한 동안에는 죽은 사람이요, 혈도가 풀린 뒤에도 한동안은 폐인처럼 혼미한 상태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옥평의 내공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후했다. 저 정도라면 마봉황 자신과 비견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감탄에 잠겨 있는 마봉황의 귓전에 문득, 모기 소리 같은 전음이 스며들었다. "꼼꼼한 것은 여전하십니다. 그 혼란 중에도 장 공자의 혈도를 풀어 놓으셨군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좌훈이 웃고 있었다. 악몽 같은 밤을 보내며 지칠 대로 지친 그이겠지만 표정만은 밝아 보였다. 좌훈의 전음처럼 장옥평의 혈도는 이미 풀려 있었다. 이 범선에 오르기 직전, 마봉황이 한 일이었다. 뜻밖의 원병(援兵)을 만난 기쁨 속에서도 그의 혈도를 푸는 것을 잊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점혈당했다는 사실은 가급적 알려지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에게조차도. 마봉황은 수하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구양지, 뇌칙서, 임빈... 모든 이들의 표정도 좌훈의 그것처럼 밝았다. 아마도 마봉황 자신의 얼굴도 그럴 것이다. 죽음 속에서 얻어 낸 생명이란 누구에게나 기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고 마봉황의 수하들은 과연 언제까지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광양호 안에서는 수하들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마봉황은 우울해졌다. 강철처럼 차갑고 단단한 심장을 지녔다 해도, 인간인 이상 이런 종류의 번민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용서해라.' 마봉황은 이미 죽은 자, 그리고 곧 죽어 갈 자들을 위해 소리없는 사과를 보냈다. "아이고!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람. 공자! 이(二)공자!" 질그릇 깨지는 듯한 곡성이 마봉황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녀는 잠시 머릿속에 찾아온 인간의 마음을 떨쳐 버리려는 듯 한두 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금 정면을 향한 마봉황의 얼굴에는 엄하고도 냉정한 본연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공자,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고래고래 악을 쓰는 사람은 붉은 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이제 막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장옥평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장옥평이 정신을 차리는 데 가장 큰 장애는 그 노인이었다. 멀쩡한 사람이라 해도 저렇게 세게 흔들어대면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테니까. 마봉황은 붉은 옷을 입은 노인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멧돼지 같은 얼굴에 디룩디룩 굴러다니는 눈동자만 보아도 노인의 성정이 얼마나 화급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월이 가르쳐 주는 노회(老獪)의 덕목을 저토록 완전히 무시하며 늙어 가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봉황은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장 공자께서는 단지 혼절한 것에 불과하니, 양 노영웅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봉황은 붉은 옷을 입은 노인, 양충에게 말을 건넸다. 이것은 비단 그를 안심시키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장옥평만 끼고 법석을 떠는 예의없는 늙은이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양충의 곡성이 뚝 멈췄다. 그리고 그 얼굴이 마봉황을 향했을 때, 그녀는 그 눈빛과 표정에 담긴 노기를 읽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떤 잡종 새끼가 우리 공자를 이 꼴로 만들었느냐?" 두 손으로 장옥평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멱살이라도 틀어 잡을 듯한 기세였다. 마봉황은 고소를 흘렸다. 양충 같은 위인에게 예의를 기대한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까지 예의를 잃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녀는 양충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벽력염왕의 대명을 경모한 지 오래인데, 이렇게 뵙게 되니 천한 눈이 새롭게 떠지는 듯하군요. 소녀의 이름은 염산산이라고 합니다." "염산산이고 뭐고 간에..." 말을 이어 가던 양충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고개를 한두 번 갸웃거렸다. "염산산?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그러자 곁에 있던 중년인이 양충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아마도 염산산이 뭐 하는 사람인지 귀띔해 주는 것 같았다. 양충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마봉황에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마맥회주요?" "부끄럽지만 소녀가 삼마의 잔병(殘兵)을 이끌고 있지요." 양충은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결코 호락호락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으으음..." 품안의 장옥평이 다시 한 번 나직한 신음을 토해 내자, 양충의 눈빛과 표정은 다시금 시뻘건 불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상기되었다. "어떤 놈이 우리 공자를 이렇게 만들었소?" 양충이 다시 물었다. 마봉황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찰거머리처럼 그녀의 쾌속선을 추격해 온 도연향의 주가가 있었다. "저따위 쥐새끼들이 감히 대산동장가의 후계자를 건드려?" 양충은 펄쩍 뛰었고, 마봉황은 다시 한 번 고소를 금치 못했다. 추격하는 배가 있었으니, 그들이 적이라는 사실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범선 위에 탄 모든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짐작하고 전투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양충을 제외하면 말이다. "저 배에는 도연향이 타고 있어요." 마봉황은 양충의 주의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하나의 이름을 언급했고, 그 효과는 탁월했다. "도연향이라고!" 양충의 눈이 퉁방울처럼 부릅떠졌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한심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끝마다 '우리 공자, 우리 공자' 노래하는 양충이지만, 도연향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그 애틋한 '우리 공자'의 존재를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린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붙들고 있던 '우리 공자'를 팽개친 채, 뱃머리 난간을 향해 저토록 부리나케 달려갈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만약 마봉황이 다급히 부축하지 않았다면, 불쌍한 '우리 공자'는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가신 덕분에 뒤통수가 깨지는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잡아! 저 배를 잡아! 놓치면 다 죽을 줄 알아!" 양충의 벽력 같은 고함이 새벽 운하 위에 울려 퍼졌다. * * * "지금..." 도연향의 어깨가 마치 동지섣달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도연향의 말은 유달리 느리게 들렸다. 아니, 실제로도 느렸을 것이다. 덕분에 말속에 담긴 감정은, 오히려 어의(語義)보다도 생생하게 듣고 있는 모든 이들의 고막에 박혀들었다. 정확히 무슨 감정이라고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지금 그녀는 극도로 분노했으며, 이 상태를 넘어설 경우에는 반드시 누군가 피를 흘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인경은 빳빳이 치켜세운 고개를 떨구려 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그러나 식인경은 무서워하고 있는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비겁의 그늘에 숨은 채 남들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조그만 목소리로 "나는 자라 새끼다." 따위나 중얼거리는 겁쟁이는 두 번 다시 되고 싶지 않았다. 식인경은 아랫배에 한껏 힘을 집어넣으며 방금 전에 했던 얘기를 천천히 반복했다. "못 들으셨다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소. 부상자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추격한 배인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 빡`-` 식인경의 얼굴에 도연향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아랫배에 그토록 힘을 집어넣었건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식인경의 거대한 몸뚱이는 짚단처럼 뒤로 날아가 타목(舵木)에 세차게 부딪혔다. 등판의 아픔보다 얼굴의 아픔이 훨씬 지독했다. 반사적으로 맞은 부위를 더듬던 식인경은, 손가락 끝에 걸리는 너무나 이질적인 감촉에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코 아래 부분은 이미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를 벗어나 있었다. 코는 완전히 왼쪽으로 돌아갔고, 우반면(右半面)의 이빨은 모조리 날아가 헐렁한 살갗이 구강 안쪽으로 움푹 꺼져 있었다. 무서웠다. 식인경은 도연향이 얼마나 무섭고도 위험한 존재인지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한 대만 더 맞는다면 그나마 온전한 반면(半面)마저 박살날 것이라 생각하니, 애써 쌓아 둔 용기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마터면, "잘못했습니다!"을 외치며 개처럼 바닥에 엎드릴 뻔했다. "빨리 키를 잡아라! 빨리!"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도연향의 새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식인경은 자신의 뇌리를 지배하던 모든 공포가 씻은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포가 사라지자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도도한 척해도, 아무리 강한 척해도, 결국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저런 소리를 지르고,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렇고 그런 계집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계집 때문에 의형이 죽고, 수하들이 죽고, 자신은 자라 새끼처럼 벌벌 떨고 있다. 이 어찌 우습다 하지 않겠는가! 식인경은 방향타에 댄 등을 서서히 떼어 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악귀처럼 웃어댔다. "크흐... 키를 잡으라고요? 잡죠! 암, 잡고말곱쇼!" 식인경은 돌아서서 키를 잡았다. 손바닥 가득 들어오는 잘 다듬어진 소나무의 감촉이 너무나도 즐겁게 느껴졌다. "흐흐!" 짧은 웃음, 그리고... 뚝! 타목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뿌드득! 이번에는 조금 긴 여운을 남기는 소리였다. 아무리 심(心)이 부러졌다 해도 직경이 사발만한 나무를 완전히 꺾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슨 짓이냐!"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식인경의 등판에 무시무시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평생에 두 번 경험해 볼 수 없는 충격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1 묘왕동주 "끄허억!" 식인경의 입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핏줄기가 뿜어 나간 방향은 앞이 아닌 위였다. 등판에 가해진 충격이 그의 허리뼈를 완전히 꺾어 놓았기 때문이다. 뿜어 낸 핏물이 하나하나의 방울들로 흩어져 식인경의 얼굴에 떨어졌다. 마치 온 세상이 시뻘겋게 변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피의 비가 지나간 뒤, 푸른빛이 서서히 더해 가는 하늘이 그의 망막 가득 밀려 들어왔다. "큭! 끄으으..." 식인경은 부러진 타목을 움켜쥔 채 돌아서려고 애썼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몰골이 보기에 썩 좋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하백의 후예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하백의 후예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는지 저 잘난 인간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허리뼈가 뒤로 꺾인 사람에게는 뒤로 돌아서는 단순한 동작마저도 쉽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이 돌기 시작했다. 뒤이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몇 개의 신발들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머리통에 둔중한 진동이 전달되어 왔다. 식인경은 비로소 자신이 쓰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새끼가 키를 부러뜨렸어! 키를 부러뜨렸단 말이야!" 도연향은 여전히 새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 안에 담긴 분노, 분노보다 더 큰 공포, 공포보다 더 큰 절망이 식인경을 통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있었다. 뒤집어진 바퀴벌레처럼 버둥거리는 몸뚱이와, 구멍난 물주머니처럼 피를 줄줄 흘리는 입으로도 웃을 수 있었다. 통쾌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四) 대왕님, 잘하셨습니다!" "하하!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식인경의 입가가 씰룩였다. 사 대왕은 바로 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강육어의 넷째 수령인 '사람을 잡아먹는 고래', 식인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 목소리들의 임자는 소율(少栗)과 이(李) 노이(老二)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장강을 주름잡던 형제들이 아니면 누가 그를 사 대왕이라고 불러 주겠는가! 식인경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깎은 밤처럼 멀쑥하게 생긴 소율과 물버짐 때문에 못살겠다고 투덜거리던 이 노이... 몸이 온전한 탓에 범선에서 살아남았던 그들 두 사람의 심정 또한 식인경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도 식인경과 마찬가지로 하백의 후예였으니까. 뿌득!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여러 사람들의 경호성(驚呼聲)이 들렸다. 비록 괴상한 몰골로 갑판 위에 자빠져 있던 탓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식인경은 소리만으로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이 주가에는 그가 담당한 것 외에도 좌우 양쪽에 두 개의 방향타가 달려 있었다. 세모꼴의 넓적한 판자로 만들어진 좌우 방향타는 주가가 방향을 바꿀 때 보다 빠르게 회전할 수 있게끔 도와 주는 보조타(補助舵)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타(主舵)가 망가졌을 경우에도 보조타가 있는 이상 주가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소율과 이 노이가 부러뜨린 것이 바로 그 두 개의 보조타였다. 이제 이 주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일놈들!" 공야무루의 외침이 들렸다. 뒤따라 두 마디의 비명이 들렸다. '형제들!' 식인경의 눈에 뿌연 물막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두 마디의 비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인경은 최후의 힘과 최후의 용기를 짜내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조금만 있으면 당당한 하백의 후예로서 짙푸른 하백의 나라에 영원히 묻힐 수 있는데, 여기서 계집아이처럼 눈물을 보여 먼저 간 형제들에게 핀잔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물기로 흐릿한 식인경의 망막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강철투구 아래로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그 사람만은 수적들의 갑작스럽고 무모한 반항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수적을 동료로 인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 가닥 부드러운 채대가 식인경의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났다. 예상우의(霓裳羽衣)처럼 펄럭이며 그의 얼굴을 덮어 오는 그 모양이 보기에 무척 좋았다. 쫙`-` 그리고 암흑이 밀려들었다. "죽어! 이 새끼! 죽어!" 쫙`-`쫘악`-` 허리가 뒤로 꺾인 채 갑판 위에 자빠져 있는 식인경을 죽이는 데에는 한 번의 채대질로 충분했다. 그러나 도연향은 식인경의 시신을 내리치는 옥녀현현대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운몽택(雲夢澤)에서 초왕(楚王)의 시신에 일천 편(鞭)을 가하던 오자서(吳子胥)의 광기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고스란히 옮아 온 것 같았다. "더러운 새끼! 죽어! 죽어!" 도연향의 욕설이 거듭되는 것과 비례해서 채대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고, 자연 식인경의 몸뚱이는 그 원형을 상실해 갔다. 머리는 이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고, 암소처럼 두리뭉실한 몸통도 그녀의 채대가 퍼부어질 때마다 점차 그 크기가 줄어들어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식인경의 잔해가 갓난아이만큼이나 작아졌을 때, 괴악이 도연향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이미 죽었소." 순간, 식인경의 잔해를 향해 떨어지던 옥녀현현대가 기묘하게 방향을 틀며 괴악의 목덜미에 휘감겼다. "그래서? 죽었으니 어쩌란 말이냐?" 괴악을 향한 도연향의 동공은 바늘 끝처럼 오므라들어 있었다. "너는 처음부터 저 버러지 같은 새끼를 유난히 감싸고 돌았지! 그래, 이런 꼴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냐?" 괴악은 단지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흥! 풍뎅이처럼 잘난 갑옷 하나 믿고 건방을 떠나 본데... 어디 그렇게 믿을 만한지 확인해 볼까?" 드드득`-` 괴악의 견갑에 부착된 목 보호대가 불쾌한 음향과 함께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악은 그 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동료가 되겠다고 온 사람들이 왜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당신의 말을 거역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소?" 괴악이 말했다. "당신... 이라고?" 도연향의 동공이 더욱 작아졌다. 그 동공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눈에서 튀어나와 괴악의 얼굴에 박혀들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괴악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싸우는 일밖에 모르는 일개 우부(愚夫)에 불과하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책임이 모두 당신에게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소. 모든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당신이오. 내가 보기에는 저 식인경이 당신보다 훌륭한 상관이고, 훌륭한 무인이오. 당신이라는 여자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모든 이들을 망쳐 버리는 바보에 지나지 않소." "이 새끼!" 특`-` 급기야 견갑에서 돌출되어 있던 목 보호대가 채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채대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탐욕스러운 기세로 괴악의 목에 휘감겼다. 괴악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채대에 달린 세 개의 독 미늘이 그의 목덜미에 뿌리까지 박혀든 것이다. "오호호! 삼화지독(三花之毒)은 해약 없이는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하는 극독이지! 어디, 지금도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느냐?" 도연향의 미친 듯한 웃음 소리를 들으며 괴악은 쓰게 웃었다. 문득, 이런 여자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던 대공자의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악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가는 이미 두 척의 범선 사이에 들어 있었다. 범선 위의 무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떤 자들은 궁노를 겨누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운하 위에 검은 물을 뿌리고 있었다. 검은 물. 그것은 아마도 사천 지방에서 생산된다는 흑유(黑油)일 것이다. 그것을 뿌리는 이유는 물로 달아나는 자를 막기 위함일 테고... "이제 그만 하시오." 괴악은 오른손을 들어 목을 휘감고 있는 도연향의 채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그의 유유한 언행에 기가 질린 탓인지, 도연향은 채대가 다 풀리도록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해약은 필요없소." 괴악은 후배갑(後背甲)에 묶어 둔 염왕도의 매듭을 풀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도연향은 눈빛을 기묘하게 빛냈다. "해약이 필요없다고? 한 시진 뒤에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고통 속에서 죽을 텐데도?" "그렇소." 괴악은 염왕도를 움켜쥐며 덧붙였다. "어차피 한 시진 뒤에는 이 배에 있는 누구도 살아 있지 못할 테니까." 2 인간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소멸된다. 그러나 자연 속의 모든 존재가 인간처럼 고통과 슬픔에 휩싸인 채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빠른 속도로 옅어지는 안개만 해도 그렇다. 밤의 일부처럼 나타난 안개는, 그 소멸의 운명 또한 밤과 함께했다. 그 소멸에는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슬픔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 순조로운 안개의 순교(殉敎)를 어지럽히는 일단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물살을 소리없이 가르며 광양(廣洋)이라는 이름의 호수 위 한 지점을 포위하는 그림자들. 그것들은 능히 떼라 불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포위망 속에는 한 척의 표선이 들어 있었다. * * * "자네, 석가장(石家莊)의 진(陳) 이모를 기억하나?" "몇째 이모 말이오?" "이 친구하고는! 아무려면... 설마 할망구들을 얘기할까?" "그러면 일곱째 이모?" "아무렴! 석가장 진다루(陳茶樓)에서... 차맛도 일품이었지만... 기억할 만한 이모는 오직 진(陳) 칠이(七姨)뿐이지!" "..."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가?" "형님, 난 키 큰 여자는 별로..." "키 큰 여자가 뭐가 어때서?" "뭐가 어떠냐고? 젠장! 평소 왜각(矮脚)이라고 놀리지나 말 것이지. 물론 일곱째 이모가 예쁜 건... 그래도 나보다 목 하나가 더 큰... 그런데 뭐가 어떠냐고요?"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2 묘왕동주 동방신행의 표사 둘이 난간에 기대 서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새벽바람에 뒤섞인 채 때로는 선명하게, 그리고 때로는 흐릿하게 단탈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듣자 하니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어떤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웃음과 여유를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단탈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은 차라리 우는 편이 훨씬 나았다. 피곤에 지치고 핏물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얼굴. 그런 얼굴로 억지 웃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썩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단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쩍 밝아진 푸른빛이 새벽의 으슴푸레한 기운을 몰아 내고 있었다. 바야흐로 해 뜰 무렵인 것이다. 밤. 어떤 가을밤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길고 너무도 잔인했다. 그토록 길고 잔인했던 밤이, 이제 과거라는 이름의 각질(角質)을 뒤집어쓴 채 시간의 무덤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폭군이 죽었다 해서 폭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밤은 이제 시간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밤이 가져다 준 끔찍한 혈사(血事)만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폭정이 사라지기 전에는 평화를 얻지 못하듯, 혈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단탈의 시선은 갑판 위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표사들이 나누던 여자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란 길가 사당의 향불과 비슷했다. 누가 피웠는지 모르는 새 시작되어 언제 사그라지는지 모르는 새 끝나 버리는 것이다. 이제 한 표사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고, 다른 표사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중얼거리는 말은 어쩌면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비참하고 모두가 힘든데, 누가 누구에게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단 말인가? 비참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 아니었다. 엉덩이에 화살이 박힌 탓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마맥회의 무사도 그러했고, 표사들 중에는 그래도 제법 배짱있어 보이던 금(金)이라는 젊은이도 그러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박한만은 달랐다. 부러진 표선 깃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박한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갑판에 댄 채 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있는 두 다리도 편해 보였고, 조금 아래로 처진 어깨의 선도 편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편해 보이는 것은 얼굴 위에 나타난 표정일 것이다. 박한의 표정은, 아합족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고된 사냥을 마치고 가족들에게 돌아와 하루나 이틀쯤 휴식을 취한 사냥꾼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땀과 핏물로 더럽혀진 것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렇듯 묘한 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친구야!" 단탈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좀처럼 놀라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의 박한을 보고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단탈은 박한이 앉은 뱃머리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부쩍 엷어진 물안개 저편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배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배 그림자들이 버티고 있는 곳은 표선의 전방뿐만이 아니었다. 단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쪽 측방, 그리고 후방. 배 그림자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만약 완전한 포위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형국을 두고 이르는 말이리라. 단탈이 표선을 둘러싼 배 그림자들을 발견한 것은, 두 명의 표사가 여자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과 일치했다. 비록 약간의 시차는 있을지 몰라도, 두 명의 표사도 단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 완전한 포위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들이 추억 속의 여자를 억지로 끌어 낸 것도, 어쩌면 배 그림자들로 인한 압박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지 모른다. 비정한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용자(勇者)는 드문 법이다. 단탈이 박한에게 감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탈이 본 광경을, 그리고 표사들이 본 광경을 박한이라고 왜 보지 못했을까? 그러니 박한도 지금의 상황이 밤새 겪었던 어떤 상황보다 훨씬 위험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리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니.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만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말도 통하지 않는 마당에 머릿속에 감춰진 생각을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단탈은 박한에 대한 감탄을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그러나저러나..." 단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뒤따라오겠다던 마봉황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의문은 또 하나 있었다. 놈들은 무슨 까닭에서 저렇게 포위만 하고 있는 것일까? * * * 뒤따라가겠다는 말부터가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니, 마봉황이 광양호에 모습을 나타낼 리는 없었다. 이것이 단탈의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표선을 포위한 철옥의 선단은 매용소의 진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단탈의 두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매용소가 의도적으로 진격 명령을 미룬 것은 아니었다. 진격 명령을 내리지 못할 만큼 골치 아픈 사건이 그가 탄 범선 위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한 줄기 둔탁한 소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소음은 곤오철로 만든 갑옷과 갑판목이 부딪치면서 울린 것이다. 그 소음이 울릴 때, 전운리는 애용하는 십리경으로 선단에 의해 포위된 표선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모든 신경을 십리경의 작은 유리알에 집중하고 있던 그는 난데없이 울려 온 그 이질적인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시커먼 철갑으로 전신을 무장한 철한인 중 하나였다. 쓰러진 철한인 옆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에는 복면을, 오른손에는 큼직한 상자를, 그리고 몸에는 착 달라붙는 검은 야행의를 걸친 괴한이었다. 목이 좁은 가죽신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괴한이 방금 전까지 호수 속에 있었음을 말해 주었다. 바로 다음 순간, 전운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괴한이 서 있던 곳은 전운리의 좌측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난간가였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괴한은 바람처럼 몸을 움직여 전운리의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전운리는 괴한의 두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괴한의 눈은 둥글게 굽어 있었다. 웃고 있다는 증거였다. 전운리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단지 웃고 있는 눈만으로도 상대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것이다. 괴한이 오른손에 든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는 전운리의 품안에 들어갔다. 전운리는 상자를 버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그의 침착한 성격에 비춰 본다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구미은호 전운리라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괴이한 공포에 사로잡힌 백치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후방 어딘가에서 날아온 송곳 같은 기운이 전운리의 귓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오른쪽 어깨 위`-`를 스치며 괴한을 향해 뻗어 나갔다. "헉!" 전운리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전방을 향해 부릅뜬 그의 눈에 담긴 것은 한 자루의 예리한 장검이었다. 그것이 귓가를 스치고 뻗어 나간 송곳 같은 기운의 실체였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이런 경우를 만나면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검도 괴한에게는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목을 슬쩍 기울임으로써 장검의 살기를 피한 괴한은, 고양이처럼 영활한 몸놀림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달아난 방향은 전운리의 좌측이었다. 결과적으로 괴한은 가장 좋은 방향을 선택한 셈이 되었다. 괴한의 생명을 노리던 장검은 전운리의 우측 어깨 위에 있었다. 장검의 후속 공격은 전운리의 머리에 의해 가로막히게 된 것이다. "앉으시오!" 빠르고도 낮은 목소리가 전운리의 귓전에 울렸다. 그는 엉겁결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매서운 바람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장애물이 사라지자 장검이 괴한을 향해 찔러 가는 소리였다. 전운리는 그제야 장검의 주인이 채앙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씻`-`씨잇`-` 두 번의 벼락같은 검초가 괴한을 향해 퍼부어졌다. 검끝에서는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러나 괴한은 채앙의 연환검초를 쉽게 피해 냈다. 채앙의 공격이 반 호흡쯤 늦게 시작되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괴한의 몸놀림이 워낙 표홀하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채앙도 화가 난 것 같았다. 삼 검을 연속해서 허탕친 것은 검귀라는 이름으로 불린 뒤 처음 겪는 일일 테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네 번째 공격으로 전환해 가는 그의 장검은 활화산 같은 파괴력을 뿜어 내고 있었다. "타하앗`-`" 길게 이어지는 기합과 함께 채앙의 몸이 허공을 가르고, 장검은 희뿌연 광채를 유성처럼 매단 채 괴한의 심장을 노리며 쏘아 갔다. 응축된 기세를 단 한 순간에 폭출시켜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그의 독문수법, 첨혈점(添血點)이 전개된 것이다. 이번만큼은 괴한도 무사할 수 없었다. 괴한은 허리를 최대한 뒤틀어 첨혈점의 검초를 피하려 했지만, 오른쪽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다. 지켜보던 전운리는 채앙이 괴한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는지는 바로 다음 순간에 판명나고 말았다. "음!" 채앙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전운리는 채앙의 등을 보는 위치에 있었기에, 채앙과 괴한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채앙을 보건대, 그가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입었다는 것만을 짐작했을 뿐이다. 괴한은 놀라운 인내력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오른쪽 가슴으로 피를 콸콸 뿜어 내면서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채앙의 추급(追及)이 느슨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난간 위로 성큼 뛰어올랐다. 괴한은 몸을 돌렸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전운리는 괴한의 차가운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갑판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전운리! 계는 반드시 너와 철옥을 파멸시킬 것이다!" 이어 괴한의 몸뚱이는 흡사 드러눕는 듯한 자세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난간 너머는 호수. 땅과 물과 수초가 어울려 이루어진 천연의 도주로가 괴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전운리는 괴한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괴한이 남긴 말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교를 만류했다. 왜냐하면 반교는 괴한을 좇아 호수로 뛰어드는 우를 범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처럼 공을 세울 기회를 잡은 반교는 전운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말리는 거요?" 볼멘 음성으로 미루어 전운리를 훼방꾼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를 이길 자신이 있는가?" "흥! 호랑이도 물에 빠지면 고기밥이 되는 법! 땅위에서 무슨 재주가 있건, 놈은 지금 물속에 있소. 더구나 놈은 채 노사에게 중상을 입은 몸이잖소?" 반교는 수중전에는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렇지 않다면 단신으로 호수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운리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채 노인의 검은 위력적이지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도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는 수련을 쌓았지. 게다가 그는 물속에서 무적이야." "지금 내 수공(水功)을 무시하는 거요?"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3 묘왕동주 "자네의 수공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 다만 그의 이름이 애혈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지." 이 말을 듣고도 입을 다물지 않는다면 천치임에 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애혈이라는 이름 앞에서 수공을 자랑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드물기 때문이다. 반교는 천치가 아니라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때, 전운리의 곁으로 다가온 매용소가 물었다. "그자가 상강(湘江)의 수상살수(水上殺手)라고 불리는 애혈이란 말이오?" 난간가에 있던 채앙은 어느새 매용소의 뒤에 시립해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전운리는 매용소의 물음에 대답한 뒤 채앙을 향해 물었다. "괜찮소이까?" 채앙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한 자루의 수리전(袖裏箭)이 박혀 있었다. 아마도 애혈의 반격을 팔뚝으로 받아 낸 모양이었다. 매용소가 물었다. "애혈이라면 강남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살수. 더욱이 물속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고 들었소. 한데 전 선생께서는 무슨 근거로 그가 애혈이라고 단정하시오?" 전운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계에 대한 사항은 반드시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계규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소를 머금었다. 계를 등진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이다. "황서계에서 그런 잠입술을 지닌 사람은 애혈뿐입니다." 매용소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과연 총명한 사람이어서 애혈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황서계'라는 한마디에서 모든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매용소는 전운리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상자는?" 전운리는 자신이 들고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애혈이 준 것인데, 뭐가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운리는 대답과 함께 상자의 뚜껑에 손을 댔다. 그러자 매용소가 황급히 말렸다. "황서계가 보낸 거라면 위험하지 않겠소?" 전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애혈은 화살 한 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처리할 위인이 아닙니다." 애혈이 전운리의 앞에 머물러 있던 시간은 매우 짧았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의 경우였다. 애혈 정도의 살수가 살인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없는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운리는 무사했으니, 다시 말해 애혈은 전운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상자를 열기 직전, 전운리는 매용소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툭. 경미한 음향과 함께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그와 함께 한 줄기 구역질나는 악취가 피어올랐다. 3 -`어차피 한 시진 뒤에는 이 배에 있는 누구도 살아 있지 못할 테니까. 괴악은 이렇게 예언했고, 그 예언은 일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거의 사실로 입증되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철노(鐵弩)의 강전은 주가에 타고 있던 철한인들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 버렸다. 물론 철노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곤오철로 만든 갑옷을 어쩌지는 못했다. 하지만 갑옷이란 신체에 있어서 요처라고 할 수 있는 부위만 보호하는 방어구. 갑옷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부위는 피육(皮肉)에 불과했다. 요처건 요처가 아니건 어쨌거나 다 같은 몸뚱이라면, 엄지손가락 굵기의 강전을 수십 개씩 몸뚱이에 꽂고서도 살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운하보다 강전의 소나기가 더 두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일부 철한인들은 갑옷을 입은 채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주가 위에서 죽어 간 철한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운하의 수심은 인간의 생명을 충분히 앗아 갈 정도로 깊었다. 그리고 철한인들의 갑옷에는 격렬한 전투에도 풀리지 않도록 고안된 복잡한 철고리가 부착되어 있었다. 물속에서는 겉옷 하나를 벗는 데에도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한 법. 운하 바닥의 더러운 진창 속에서 갑옷을 벗기 위해 몸부림치던 철한인들 중 대부분이 더 이상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요행히 갑옷을 벗고 물위로 떠오른 철한인들은 기다리고 있던 강전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철한인들의 우두머리 괴악의 최후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강전의 소나기가 퍼부어질 때, 괴악은 주가에 달린 선실 문짝을 뜯어 들고 불길이 이글거리는 운하로 뛰어들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그인만큼 삶을 도모하기 위한 행동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는 저승에 가서라도 화살 따위에 죽어 왔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흑유가 만들어 낸 불꽃은 맹렬했지만, 그의 투지보다 맹렬하지는 않았다. 범선으로부터 쏟아지는 강전은 혹독했지만, 그의 각오보다 혹독하지는 않았다. 결국 괴악은 전신을 불에 그을리고서도, 또 여섯 대의 강전을 팔다리에 박아 가면서도 적의 주함(主艦)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갑판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괴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별다른 저항 없이 범선의 지휘자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노인과 마주설 수 있었다. 염왕도의 괴악과 자모권의 노인... 두 사람의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염왕도는 상처 입고 지친 몸뚱이로 다루기에 너무 벅찬 병기였고, 노인의 자모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벽력처럼 무시무시했다. 결국 괴악은 목덜미에 도끼질처럼 강력한 공격을 연속으로 얻어맞고 갑판 위에 쓰러지게 되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괴악은 힘겹게 입술을 열어 노인에게 물었다. -`이름을... 알고... 싶다... 노인은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이에 괴악은 후련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다. 노인에게는 괴악이라는 걸출한 용사의 목숨을 거둬갈 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철갑거한을 바라보는 양충의 시선에는 실로 복잡한 빛이 담겨 있었다. 사내는 용사 칭호를 들을 만했다. 판자때기 하나에 몸을 의지해 불길 속을 헤치고 이 배에 올랐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용사에게는 걸맞는 대접이 필요했다. 양충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충은 수하들로 하여금 철갑거한을 공격하지 말도록 명했다. 그를 상대함에 있어서 전력을 다했음은 물론이다. 결국 양충이 자랑하는 십팔 수의 자모연환권초(子母連環圈招)는 철갑거한을 쓰러뜨렸다. 지치고 부상당한 몸으로 폭풍우처럼 사납게 몰아치는 자모권의 경풍을 견디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갑판 위에 길게 누운 철갑거한은 최후의 기력을 짜내어 양충의 이름을 물어 왔다. 양충은 선선히 자신의 이름을 밝혀 주었다. 양충은 철갑거한의 시신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명복을 비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에 의해 죽어 간 참으로 보기 드문 용사에게, 자신의 이름이 작은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괴악의 최후가 남다르다면, 공야무루와 도연향의 몰락 또한 남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 활동 무대가 남해였으니만큼 공야무루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흑유에 의한 불길이 결코 물속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묘한 장력으로 자신을 향해 쏘아 오는 강전 몇 대를 쳐낸 뒤, 곧장 운하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도연향은 달랐다. 물 구경하기 힘든 하북이 고향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물을 꺼린 탓에, 공야무루처럼 운하에 뛰어들 수 없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강전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철한인의 시체를 방패 삼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 하지만 인간의 시체라는 것은 방패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몇 대의 강전이 그녀의 사지에 적중되었다. 옥녀공의 호신지기가 아무리 영험하다 한들 근거리에서 기계적인 힘에 의해 발사된 강전을 튕겨 낼 수는 없었다. 고통에 의해, 그리고 안고 있던 인간 방패를 후려치는 강전의 힘에 의해 뒷걸음질치던 도연향은 결국 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편 공야무루는 도연향보다 앞서 운하로 피했지만, 그 또한 그리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다. 그는 타고난 살기가 강한 탓에 강호에 살성(煞星)으로 알려진 위인. 하지만 신의를 배반하고 맹약을 가볍게 여기는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곧바로 주인을 버리고 혼자 몸을 피한 자신을 원망했고, 그러한 자책감은 그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물속 깊숙한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도연향이 운하로 떨어졌다. 공야무루는 천우신조라고 생각하며 수면 쪽으로 올라가 그녀의 교구를 받아 안았고, 헤엄칠 줄 모르는 그녀가 자신과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 채대로 두 사람의 허리를 묶었다. 그러나 공야무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산동장가의 모든 식솔들에게 있어서 도연향의 존재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사실이었다. 몇 척의 쾌속선이 범선에서 내려지고, 간편한 복장을 한 십여 명의 무사들이 비수를 뽑아 든 채 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벌어진 싸움은 격렬했다. 빠른 신법과 음유한 장력을 장기로 삼는 공야무루에게는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는 싸움이었지만, 그는 등뒤에 매달린 도연향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물결과 거품, 그리고 번져 오르는 핏물... 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공야무루가 있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맹수 사냥에 쓰이는 쇠그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속으로 던져졌다.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린 십여 자루의 구겸창(鉤鎌槍)이 쇠그물의 뒤를 따랐다. 이미 헐렁한 장포 아래로 크고 작은 몇 개의 자상을 새기고 있던 공야무루였다. 쇠그물은 그의 육신을 옥죄었고, 갈고리는 그의 사지를 찍어 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뚱이가 끌어올려질 때, 공야무루는 자신과 도연향의 앞에 놓인 운명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 운명은 새벽 운하를 물들인 핏물처럼 끔찍한 빛깔로 채색되어 있었다. * * * 도연향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발작 같은 몇 번의 기침으로 기도를 막고 있던 오물들을 토해 낸 뒤였다. 도연향이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적갈색으로 흥건하게 젖은 갑판목이었다. 그녀는 그 축축한 갑판목에 한 쪽 뺨을 댄 채 굼벵이처럼 엎어져 있었다. "정신이 드시오?" 도연향의 머리 위에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얹혔다. 그 목소리는 어딘지 귀에 익었다. 기억의 한켠을 덮고 있던 세월의 장막이 먼지털이에 걸린 거미줄처럼 걷혀지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삼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소?" 우울한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도연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개는 곧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소, 도연향?" 사내는 다시 한 번 묻고 있었다. 도연향은 피가 배어나오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한 시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모든 것은 뒤바뀌었다. 쥐는 고양이가 되고 고양이는 쥐가 된 것이다. 전자가 사내라면 후자는 그녀. 어찌 생각하면 간단한 반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소중한 것들을 남김없이 앗아 갈 무서운 반전이었다. 꿈, 욕망, 지위, 그리고 생명까지도... "아아!" 마침내 도연향의 입에서 구슬픈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우렁우렁한 욕설이 그녀에게 퍼부어졌다. "독사 같은 계집! 끝까지 요망을 떠는구나!"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4 묘왕동주 증오와 경멸로 점철된 욕설이었다. 갑판을 향한 도연향의 눈빛 속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욕설에 담긴 그 무엇인가가 절망적인 현실에 눌려 있던 그녀의 오기에 불길을 당긴 것이다.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굳이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신변이 장씨가문의 수중에 떨어지는 일은 도연향이 가장 원치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이제 그녀의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이제 그녀가 그 안으로 굴러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럴 바에야 궁상을 떠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추하게 보일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바로 도연향이었다. 도연향은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내공이 봉쇄된 데다가 두 손목은 뒤로 결박당한 탓에,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뺨과 어깨를 갑판에 비벼야만 했다. 하지만 설령 옥 같은 뺨이, 또 도자기 같은 어깨가 거친 갑판에 긁혀 찢어진다 한들 그녀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벌레처럼 엎어져 있는 몰골만 면할 수 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도연향은 앉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자존심이란 눈의 높이에 비례하는 법. 그래서 그녀의 자존심은 훨씬 견고해졌다. 도연향이 조금 전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노인을 노려보았다. 비록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만은 하북일미(河北一美) 도연향의 오연함이 떠올라 있었다. "양 아저씨께서는 삼 년 만에 만난 작은 마님을 너무 박대하시는군요. 호호!" 도연향은 갑자기 방울 소리 같은 교소를 터뜨렸다. 도연향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노인, 양충의 얼굴이 불덩이를 삼킨 듯 달아올랐다. "이, 이... 요물이 감히..." 하지만 도연향은 양충이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도도한 시선을 자신의 정면에 앉아 있는 젊은 사내에게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도련님은 예의를 아는 군자인 줄 알았는데, 형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죠?" 젊은 사내는 바로 장옥평이었다. 새벽 놀이 비스듬히 드리운 그의 얼굴은 무척 초췌해 보였다. 사실 장옥평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심맥으로 침투한 화독(火毒)도 화독이거니와, 오랜 시간 기혈이 막혀 있었던 탓에 누군가의 부축이 없으면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든 상태인 것이다. 그런 장옥평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봉황에 의해 산동장가의 다음 안주인으로 공표된 구양지였다. 물론 장옥평이 바라건 바라지 않건... 장옥평은 도연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직도... 아직도 내가 형수라 불러 주길 원하시오?" "그 말씀은 무슨 뜻이죠? 도련님께선 여기 이 사람을 형수라 부르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요?" 장옥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연향은 그를 희롱하고 있었다. 부모와 형의 목숨을 앗아 가고, 그것도 부족해 방금 전까지도 그의 목숨을 노리던 원수가, 모든 것이 뒤집어진 이때에 원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도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는 그의 유정(有情)함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도연향과 만나게 되면, 불문곡직하고 가족들의 원수를 갚겠노라 결심한 그가 아니던가. 환상 속에서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심장을 찔러 가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분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만리나 떨어진 묘강으로 달아나면서, 또 형산 운문곡에서 혹독한 수련을 쌓으면서, 그토록 곱씹었던 치떨리는 증오심과 복수에 대한 의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막상 도연향을 대하니 형의 수급을 든 채 야차처럼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백을 채워오는 것은 밤참을 날라 주며 아름답게 미소 짓던 형수의 얼굴이었다. 장옥평은 모든 것을 원망했다. 영원히 아름다운 형수로 남아 주지 않은 그녀를 원망했고, 그런 그녀에게 매정히 대하지 못하는 자신의 유약함을 원망했고, 나아가 두 사람을 이런 관계로 몰고 간 잔인한 운명을 원망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 년 전의 어느날부터, 장옥평과 도연향은 하나의 철망 안에 들어 있는 두 마리 투견이었던 것이다. 오직 한 마리만이 철망 안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나는 다만 원망스러울 따름이오." 장옥평은 힘없이 말했다. "오호호!" 도연향은 갑자기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던 머리카락이 출렁거릴 정도로 요란한 웃음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웃음이 사그라들었을 때,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기 전에 한번 놀려 보려고 했더니 그것도 잘 안 되는군요. 고지식하고, 순진하고, 또 남에게 심하지 못하고... 도련님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여전히 어리숙한 숫보기죠." 장옥평은 묵묵히 도연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는 삼 년 전에도 도련님에게는 강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후후! 검이야 삼 년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으니, 어디 으슥한 골짜기에서 고생깨나 했나 보죠? 하지만 강호인이 되기에는 아직 어림없어요. 강호란 도련님같이 어리숙한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기에는 너무 빡빡한 동네이니까." 그 차분한 목소리는 삼 년 전 장옥평을 아껴 주던 형수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장옥평은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형수' 소리를 뱉을 뻔했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도 그랬을지 모르고, 만약 그랬다면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두고두고 자책에 빠졌을 것이다. 장옥평의 실수를 막아 준 사람은 뜻밖에도 도연향이었다. "이제 시작해 볼까요?" 무엇을 시작하자는 말일까? 장옥평은 의아한 눈으로 도연향의 얼굴을 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도연향의 얼굴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까의 차분함이 거짓인 양, 한 꺼풀 얼음막을 뒤집어쓴 듯한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옥평!" 도연향은 장옥평을 똑바로 바라보며 매서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약간 젖힌 턱과 활짝 핀 어깨가 목소리에 담긴 위엄을 한층 더해 주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도연향의 얼굴 위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관객의 시선을 의식한 노련한 배우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나 하고픈 바를 행하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취하는 도리.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도연향은 말했다. "너는 내 목을 쳐서 형의 원수를 갚도록 해라." 이 여인이 도연향이었다. 교활하고 사악하며 이기적인 여인. 그러나 강하고 영리하며 진퇴의 시기를 아는 여인. 그래서 이십칠 년 생애를 자신의 처세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살아 온 여인, 도연향이었다. 장옥평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졌다. 그는 결국 자신이 그녀의 요구대로 행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투견에게 지워진 굴레였다. 장옥평은 손을 치켜 들었다. 양충이 기다렸다는 듯 대감도를 꼬나 쥐고 앞으로 나섰다. * * * 철옥의 주력에 의해 표선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것은 한 식경 전의 일이었다. 그 말을 전하던 동방만옥의 표정은 한 발짝쯤 관 속에 들이민 늙은이의 그것처럼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장손불변은 그의 심약함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지금 장손불변은 홀로 선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붙박이 탁자 위에는 몇 가지 물건들이 올려져 있었다. 비송침, 홍예침, 은형수표, 수리전, 발황전, 비황석... 그것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길이가 한 뼘을 넘지 않는 암기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장손불변이 독짐으로 불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장손불변은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입고 있던 푸른 비단 겉옷도 벗어 놓았다. 다룰 줄 모르는 쌍검도, 그리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비단옷도 어차피 가면에 불과했다. 가면의 용도는 마봉황이 안전한 곳까지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데 있었다. 지금은 가면을 벗을 때였다. 장손불변은 탁자 위의 암기들을 하나씩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암기를 장치하는 부위는 저마다 틀렸다. 어떤 것은 가슴에 둘러지고, 어떤 것은 팔목에 채워졌으며, 어떤 것은 허리띠 속으로 들어갔다. 문득, 장손불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적을 감쪽같이 속인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쫓던 목표물이 가짜임을 확인한 철옥 놈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생각하면 유쾌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일은 독짐의 명성에 걸맞는 굵직한 놈 몇을 골라 저승길 길잡이로 앞세우는 것뿐이었다. "그 또한 통쾌한 일이겠지!" 장손불변은 가죽신 밑창에 두 자루 독표(毒 )를 끼워 넣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선실 창문으로 젊은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이유지(利而誘之)에 금선탈각이라... 여기 있는 매(梅) 모(某)는 오직 감탄했을 따름이오! 감히 청하건대, 옥평의 역을 맡은 배우가 어느 분인지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장손불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사라졌다. * * * 난데없이 들려 온 젊은 사내의 목소리는 마치 사방이 막힌 골짜기에서 울린 것처럼 그 발원지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단탈은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메아리처럼 천지사방(天地四方)에서 웅웅거리고 있었지만 사내의 말을 알아듣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의미만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익을 던져 적을 유인한다는 이이유지나 매미가 껍질을 벗는다는 금선탈각과 같은 고등 병법을 단탈이 어디서 들어 보았겠는가? 게다가 옥평의 역을 맡은 배우라니! 둥`- 둥`- 둥`- 둥`-` 북은 진군(進軍)의 상징, 그 소리에는 사람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감춰져 있다. 그러한 북 소리가 표선을 포위하고 있던 선단에서 울려 나왔다. 호수 위에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수십 척의 배들이 북 소리에 맞춰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단탈은 팔짱을 풀며 허리춤에 달고 있던 가리아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뱃머리 갑판에 바위처럼 앉아 있던 박한도 자세를 풀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기랄! 이젠 끝장이야!" "내가 뭐랬어! 진작에 뭍으로 달아났어야만 한다고 했지?" 체념 섞인 광기가 전염병처럼 표사들 사이에 번져 나갔다. 꺽꺽거리며 크게 울부짖는 자, 욕설을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는 자, 얼빠진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는 자... 표사들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단탈과 박한의 보살핌 때문이었다. 단탈과 박한은 마맥회 무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그들에게 보다 많은 신경을 써주었고, 그 결과 표사들은 험악한 전투를 치르고도 네 명씩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 오는 적들의 기세를 보라! 지난밤 겪었던 어떠한 전투보다도 흉험한 전투가 목전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누가 한가하게 남을 도와 줄 것이요, 누가 한가하게 남의 도움을 기다릴 것인가! 이때 선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그 사내를 보았을 때, 단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그 사내가 누구인지 금방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탈은 곧 그 사내가 장손불변임을 알아차렸다. 선실 안에 있던 사람은 오직 장손불변뿐이니, 나타난 사내는 당연히 장손불변일 것이고, 또한 실제로도 그랬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5 묘왕동주 그런데 단탈로 하여금 눈을 크게 뜨게끔 만든 기묘한 이질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장손불변은 단탈이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매우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푸른색 비단 겉옷 대신에 몸에 달라붙는 흑청색 착수의(窄袖衣)를 입었고, 화려해 보이던 옥대 대신에 암기가 줄줄이 꽂힌 검은 가죽띠를 둘렀다. 단지 그것만으로 귀공자 같던 과거의 장손불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품고 있는 독기를 짐작케 해주는 독짐 장손불변이 서 있는 것이다. '쌍검은?' 단탈은 쌍검을 기억해 냈다. 장손불변이 차고 있던, 장옥평이 쓰던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한 쌍검. 당시 장손불변은 왜 쌍검을 차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왜 차고 있지 않은 것일까? 쌍검의 가치가 최후의 싸움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선실 안에다가 놓고 나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진정한 쓰임새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 단탈은 싸늘한 기운이 등덜미를 훑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마봉황의 용병술을 알아차린 것이다. * * * 범선과 표선 사이의 거리는 이제 십여 장에 불과했다. 안개는 밤과 함께 사라진 뒤였으니, 가뜩이나 영민한 매용소의 안력이 표선 위의 동정을 어찌 살피지 못할까. 매용소는 표선 위의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는 곧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세 사람을 가려 낼 수 있었다. 사납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묘인, 신검합일로 이교를 죽였다는 검객, 그리고... "바로 저 친구로군요." 매용소는 전운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전운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함으로써 전운리의 주의를 환기하려던 매용소는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전운리의 망연(茫然)한 심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서계가 전운리에게 보낸 선물은 그 전달자의 직업에 걸맞는 것이었다. 상자 속에 들어 있던 것은 하나의 수급이었다. 아름다운 효색(曉色) 속으로 퀴퀴한 악취를 풍겨 올리는,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두터운 분가루가 오히려 더러운 느낌을 주는 수급... 이 구역질나는 선물을 보낸 자들은, 친절하게도 받는 이가 궁금증을 느끼지 않도록 서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급의 이마 한복판에는 쓰여진 '황(黃)'이라는 글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수급의 임자가 누구인지 헷갈리지 않도록 하나의 물건을 동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급의 입술 사이에 끼워진 지부대인의 입운증(入運證)이 그것이었다. 지부대인의 입운증을 받기 위해 쾌마 편으로 진강부로 간 사람은 전운리가 민강에서부터 거느리고 있던 유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종적을 감췄고, 전운리는 전선을 이끌고 운하에 들기 위해 작은 수단을 부려야만 했다. 당시에는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치 않았던 일이었는데 그 배후에는 황서계의 음습한 손길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수급이 든 상자를 품속 깊이 끌어안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다. 심복지신(心服之臣)이란 주인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주인이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매용소는 전운리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표선 쪽으로 옮겼다. '어떻게 할까?' 매용소는 손 안에 들어 있는 마봉황과 장옥평의 충직한 소모품들의 처리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죽어 간 수하들을 생각하면 저들의 몸뚱이를 토막내 물고기 밥으로 만드는 것이 주군 된 자의 도리였다.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힘에 비추어 볼 때, 그 도리를 행하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몇 가지 호기심이 매용소로 하여금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교와 삼풍은 철옥 호남지부의 최강 병기였다. 제갈등룡, 공작선(孔雀扇) 하나로 강남의 여섯 개 성(省)을 질타해 온 강자조차도 그들의 합공 아래에서 삼십 합을 견디지 못하고 넝마처럼 변해 버린 것만 봐도 그들의 가공할 공격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교와 삼풍이 죽었다. 중원에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이방인들에 의해... 저 이방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의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왜 철옥에 맞서는 것일까? 결국 매용소는 좀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 * * "귀하들이 보여 준 용기와 무위에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소생은 매용소라고 하오. 감히 존성대명을 여쭙는 것은 오로지 경모(敬慕)의 일념에서 나온 행동이니, 무례하다 너무 꾸짖지 말아 주시길 바라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자신을 매용소라 소개한 사람은 아래위로 단출한 자주색 무복을 입은 삼십대 초반의 사내였다. 그는 장손불변의 표선과 뱃머리를 마주보고 있는 범선에 타고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칙칙한 빛깔을 뿌리고 있는 그 범선은 운하를 가로막고 있던 도연향의 배만큼이나 거대했다. 하기야 우두머리가 탄 배이니 다른 것들보다 작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꿀꺽. 장손불변은 자신의 울대 어름에서 울려 온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의 박동도 점차 빨라지는 것 같았다. 긴장의 기미였다. 그러나 장손불변의 긴장은 단지 매용소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중량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매용소가 거물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약간 다른 이유에서였다. 장손불변이 바라는 것은 싸움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싸움이 아닌, 열사가 되기 위한 이제까지의 노력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비장하고도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적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표선에 탄 사람들은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밉살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매용소는 대화를 시도하고 나섰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장손불변은 마음을 진정시킨 뒤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웃기는군! 이 마당에 이름은 알아 뭐 하려는 것이냐? 혹시 비석이라도 세워 줄 생각인가? 철옥의 나리들이 자비로운 줄은 알고 있지만, 많은 수하들을 죽인 우리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줄은 몰랐는데?" 장손불변은 싸늘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이처럼 몇 마디 말로써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은 그의 장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의도였다면, 그는 상대를 잘못 택한 셈이다. 매용소의 수양은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 귀하가 옥평의 역을 맡은 배우였구려. 내 눈이 분명하다면 독짐 장손 소협 같은데... 맞소이까?" 장손불변은 입가를 몇 차례 실룩였다. 매용소의 수양은 큰 호수와 같았다. 작은 돌멩이 몇 개로는 작은 파문조차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이대로 이야기가 구구해지면 영웅의 찬란한 최후에 오점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장손불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오냐, 그렇다면...!' 장손불변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손 놀림으로 팔목에 장치해 놓은 비송침의 발사 고리를 풀었다. 적의를 품고 대치한 두 집단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비슷했다. 어떤 계기가 터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전장으로 뛰어들게 되는 법이다. 이른바 집단 전투의 생리. 이 점을 잘 아는 장손불변은 한 대의 침으로써 난투의 계기를 만들려 한 것이다. 장손불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매용소를 노려보았다. 거리는 십오 장 정도, 맞바람 같은 것은 없었다. 운이 좋다면 명중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어디에 박아 줄까...? 미간? 아니야, 가슴을 노리는 편이 확률이 높지. 장손불변의 손가락 관절이 기묘하게 구부러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장손불변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표적으로 삼은 매용소의 가슴에 고정해 둔 시선이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좌측으로 홱 돌아가 버린 것이다. 영문을 몰라 부릅떠진 장손불변의 두 눈에 투박한 느낌을 주는 흑갈색 얼굴이 새롭게 들어왔다. 밤송이처럼 까칠한 머리카락, 자잘한 흉터로 뒤덮인 피부, 딱지가 앉은 것처럼 두툼하게 튀어나온 입술... 바로 단탈의 얼굴이었다. 다짜고짜 장손불변의 멱살을 잡아 돌려 세워 놓은 단탈이 심중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꺼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격앙된 감정 때문이었다. 단탈은 입을 열었다. 몇 번의 심호흡을 거친 뒤였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옥평의 역이란 게... 무슨 뜻이지?" 장손불변은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단탈은 장손불변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저자가 말했잖아, 네가 옥평의 역을 했다고! 그게 무슨 뜻이냔 말이다!" "그, 그건..." 장손불변이 더듬거릴 때 매용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저런! 귀하는 이 일에 관해 전혀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구려." 단탈의 사나운 시선이 매용소에게 옮겨졌다. "귀하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분을 이 자리에 모시고자 하는데... 아마 귀하께서도 잘 아는 분이리라 믿소." 단탈은 장손불변을 거칠게 밀어 버린 뒤,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그게 누구냐?" 매용소는 단탈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뒷전을 향해 나직이 명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매용소 옆으로 끌려왔다. 새둥주리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자루처럼 커다란 모포를 어깨에 두른 사람이었다. 단탈은 잠시 멍해졌다. 저애가 어떻게 놈들의 수중에 들어갔단 말인가! 단탈을 본 석소용이 처음으로 한 행동은 참고 참아 온 울음보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울 이유는 많았다. 단탈이 무사한 것을 보니 반가워서 눈물이 나왔고, 밤새 겪은 고초를 생각하니 힘겨워서 눈물이 나왔고, 여기저기서 구박받고 돌아다니는 팔자가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왜 우는 거냐? 다치기라도 한 거냐?" 건너편 표선 위에서 단탈이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너무 따듯하게 들려서 석소용은 본격적으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석소용이 울음이 길어지자 매용소가 달랬다. "자, 자! 석 아가씨, 이제 그만 울고 친구에게 설명해 줘야지?" 석소용은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뭘요?"라고 되물었다. 매용소는 이마에 돋은 땀을 한번 훔쳐 낸 뒤,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미끼로 쓰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니, 석 아가씨가 잘 이야기해서 그의 의혹을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매용소의 이 말은 효과가 있었다. 석소용으로 하여금 머릿속에 묻어 두었던 마봉황에 대한 악감정을 되새기게 만든 것이다. "맞아!" 석소용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을 몽땅 집어삼킨 뒤,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그리고는 단탈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단탈! 우린 속았어요! 마봉황, 그 나쁜 년한테 속았어요!" 순간, 석소용은 단탈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평소의 그를 떠올리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희로애락에 대한 표현 방법이 다른 이들과 약간 다른 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단탈은 누가 보더라도 그 심중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6 묘왕동주 '옳지!' 석소용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고자질이란 듣는 사람이 적당히 화를 내줘야 할 맛이 나는 법. 그래서 그녀는 내친 김에 몽땅 일러바치기로 작정했다. "그년은 단탈과 헤어지자마자 반대쪽으로 달아났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어도 자기랑 옥평 오라버니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나요.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내가 '그건 나쁘다.'라고 하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요.'라면서 무시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난 강물로 도망쳤죠. 난 그렇게 치사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근데..." 석소용은 고개를 돌려 전운리를 찾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그만 저 사람한테 붙잡히고 말았어요. 하기야 뭐,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죠. 하지만 저 말 대가리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반교의 얼굴로 옮겨졌다. "저 말 대가리는 나한테 욕도 하고 강간도 하려고 했어요! 단탈이 저 자식 좀 혼내 주세요!" 폭포수 같은 고자질이 끝났다. 석소용은 의기 양양하게 매용소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 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귀신이라도 대하는 표정으로 석소용을 보고 있던 매용소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표선을 향해 말했다. "마맥회주 마봉황이 여중제갈(女中諸葛)로 불린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아는 바이나, 수하를 사석(捨石)으로 삼아 위기를 모면하는 고육계(苦肉計)를 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소. 소생은 깨끗이 패배를 시인하는 바이오. 다만 이곳에서 일개 소모품으로 사라질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뿐..." 장손불변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매용소! 이름 모를 농부도 어의(御衣)를 바꿔 입음으로써 제(齊)의 경공(景公)을 살렸고, 한(漢)의 장수 기신(紀信)은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면서도 패공(沛公:劉邦)에 대한 충절을 꺾지 않았다! 마맥회의 용사는 언제 어디서든 마봉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네가 어찌 감히 사석이니 고육계 따위의 망령된 소리를 지껄이느냐! 너 또한 수하들을 거느린 몸이라면, 더 이상 요사한 말로써 장부의 죽음을 욕보이려 하지 마라!" 구구절절 충과 의로 점철된 열변이었다. 만약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장부의 덕목이라면 장손불변은 장부라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매용소는 장손불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예란, 이를 테면 북풍한설을 견뎌 낸 매화가지가 이른 봄에 터뜨리는 꽃망울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얻고자 해서 얻을 수 있는 계획에 대한 결과가 아니다. 매순간을 인내 속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명예'라는 말조차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하게 주어지는 덕목이 바로 명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손불변은 명예욕에 사로잡혀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려는 우부(愚夫)였다. 부모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새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치료해 주는, 그런 식의 삐뚤어진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장손불변에 대한 힐난은 전혀 의외의 사람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장부의 죽음 좋아하시네! 그래, 너는 만고의 충신 열사라서 니 염가 할망구를 위해 죽는다 치자! 동방신행의 표사들이 그년의 부하니? 단탈하고 박 아저씨가 그년 부하니? 죽으려면 너 혼자나 죽을 것이지, 멀쩡한 사람들은 왜 끌고 들어가?" '너'란 장손불변을 가리키는 말이요, '염가 할망구'와 '그년'은 마봉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계집애의 입에서 저런 폭언이 튀어나왔으니, 굳이 장손불변의 도도한 자존심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마맥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닥쳐라!" 장손불변은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며 외쳤다. "일단 싸움에 휩쓸린 이상, 대의에 따라 목숨의 경중이 가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 회주께서는 마맥회 오백여 전사들의 목숨과 남마련 재건의 대명(大命)을 한 몸에 짊어지고 계신 분이다! 어린 년이 뭘 안다고 함부로 주둥이를 조잘거리는 것이냐!" 그러나 말싸움에서 질 석소용이 아니다. "사기나 쳐서 먹고 사는 년이 무엇을 책임지고 무슨 놈의 대명을 짊어진다는 거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그년이 천하에서 오직 제 목숨만 귀한 줄 아는 거라고!" 두 개의 난간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이 기묘한 설전을 지켜보며, 매용소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석소용은 이미 수중에 들어온 포로였고, 장손불변은 아직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었다. 이 둘을 대면시키는 것은 대개의 경우, 둘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를 이용해 아직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적으로 하여금 심리적 동요를 유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포로는 이를 박박 갈면서 적에게 욕을 퍼붓고, 적도 이에 질세라 목소리를 높여 포로를 꾸짖고 있다. 어찌 기사(奇事)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로 다음에 벌어질 일에 비교한다면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 * * "그렇군. 너도 알고 있었어." 장마철 피어난 곰팡이처럼 축축하고 음울한 목소리가 장손불변의 귓전에서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장손불변은 얼굴을 향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오는 손바닥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굳은살과 흉터로 뒤덮인 그 손바닥은 무척이나 억세고 위험해 보였다. "크흡!" 온 세상이 악신(惡神)의 손아귀에 들어간 듯한 착각 속에서, 장손불변은 외마디 신음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의 신음은 완강한 벽에 가로막혀 사그라지고 말았다. 완강한 벽이란 다름 아닌 손바닥이었다. 그 손바닥이 장손불변의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자와 네가 내 목숨 값을 마음대로 정했다 이거지?" 손바닥의 주인, 단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축축하고 음울했다. "내 목숨이란 게 그 여자를 대신해 죽어 줄 정도의 값어치밖에 안 나간다 이거지?" 장손불변은 얼굴 윗부분을 덮고 있는 억센 손가락들 사이로 단탈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단탈의 눈에는 목소리만큼이나 깊은 어둠이 침전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단탈의 눈 속에서 파란 불꽃이 번쩍였다. "으윽!" 장손불변은 엄청난 힘이 얼굴 전면을 압박해 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강철집게 속에 얼굴을 들이민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장손불변의 두 발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단탈의 오른손에 얼굴을 잡힌 채 허공으로 들린 것이다. "내가 고작 남 대신 죽어 주기 위해 동쪽으로 왔다고 생각하나?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단 말이다!"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단탈로부터 뿜어지는 위험한 냄새도 더욱 짙어졌다. 장손불변은 단탈의 손가락 사이로 눈알을 굴렸다. 흥분한 단탈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한뿐이었다. 그러나 뱃머리 부근에 서 있는 박한을 발견했을 때, 장손불변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박한은 그답지 않은 싸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으로 미루어 박한은 단탈을 말릴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이 분명했다. 단탈의 흥분은 끝을 짐작할 수 없으리만치 사나운 기세로 질주했다. "그런데 나보고 그 여자 대신 죽으라고? 내가 죽으면 누가 그 일을 해주지? 너? 아니면 그 여자?" "하, 하지만 단탈, 당신은 장, 장 공자를 친구로 생각하..." "닥쳐!" 우둑`-` 한층 거세진 악력에 장손불변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참 편리하구나. 필요없을 때에는 거치적거린다고 사라져 달라더니, 이제는 우정을 생각해서 얌전히 죽어 달라 이건가? 이게 너희 한족들의 방식인가?" 장옥평을 거론한 것은 오히려 단탈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 "나는 동쪽으로 오기 전, 조상 할머니께 맹세했지. 반드시 부족의 어머니를 되찾아, 바람만 울부짖는 쓸쓸한 골짜기 가득 건강한 아이들이 뛰놀게 만들겠다고... 그리고 누군가 그 일을 방해하려 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장손불변은 등덜미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단탈의 분노가 단지 엄포용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때, 더 이상 관망만 할 수는 없었던지, 마맥회 무사들이 호통을 치며 달려들었다. "이놈!"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석 자 길이 단창으로 단탈의 왼쪽 옆구리를 찔러 간 자는 당장원이었고, 폭이 넓은 오구도(吳鉤刀)로 단탈의 등줄기를 베어 간 자는 동방만옥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단탈, 그것도 분노한 단탈이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단 말이다!" 단탈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당장원의 단창은 동방만옥의 오구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단창의 중동을 움켜쥔 단탈의 왼손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른손으로는 한 사람의 몸뚱이를 치켜 들고 있으면서도 왼손 하나만으로 두 사람을 상대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탈은 달랐다. 단탈의 왼손이 주르륵 단창을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당장원의 오른쪽 어깨에서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음향이 울렸다. 단지 덥석 움켜쥐었을 뿐인데 근육과 뼈가 한꺼번에 절단된 것이다. "크윽!" 거의 동시에 동방만옥으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탈이 움켜쥔 당장원의 어깨를 잡아채자, 당장원이 들고 있던 단창이 무서운 힘으로 오구도를 밀어젖히며 동방만옥의 아랫배에 틀어 박힌 것이다. '이때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5 장 - 7 묘왕동주 당장원과 동방만옥, 두 사람의 무사가 중상을 입고 격퇴될 때, 단탈에게 얼굴을 잡혀 있던 장손불변에게도 순간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장손불변은 오른발로 단탈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음!" 단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손불변이 신고 있던 가죽신 밑창에는 충격이 가해지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독표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 독표가 그의 허벅지 깊이 박혀든 것이다. 장손불변의 반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축 늘어뜨린 쌍수를 휘젓자 몇 가지 암기들이 단탈의 가슴팍을 향해 폭출된 것이다. 애당초 팔 하나를 사이에 둔 그들이었으니 무슨 수로 피하겠는가? 파파팍`-` 암기들은 미세한 음향과 함께 고스란히 단탈의 몸뚱이에 박혀들었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독이 발린 암기들이었다. '됐다!' 장손불변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의 눈앞에는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쓰러지는 단탈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장손불변은 단탈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이미 단탈이라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독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아무리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짐이라 할지라도 단탈 앞에서는 한낱 날짐승에 불과한 것이다. 상황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탈의 오른손은 여전히 장손불변의 얼굴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뇌수까지 시큰하게 만드는 그 무시무시한 악력도 그대로였다. "후! 후후후!" 단탈은 나직이 웃었다. 장손불변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조금 아팠어." 단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고통이 장손불변의 두 정강이 위에 떨어졌다. "흐윽!" 장손불변의 두 정강이 뼈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탈은 '조금 아팠던' 독표에 보복한 것이다. "네가 내 목숨 값을 매겨 줬으니, 나도 네 목숨 값을 매겨 주지." 으드득`-` 자신의 두개골에서 울리는 섬뜩한 소리를 들으며 장손불변은 두 눈을 부릅떴다. 단탈의 오른손이 맹수의 아가리처럼 그의 얼굴을 조여 온 것이다. 발버둥을 치며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단탈의 팔뚝은 수십 번 꼬아 놓은 동아줄처럼 단단하기만 했다. "우... 으으..." 비명이라도 지르면 시원하련만, 하악골(下顎骨)을 으스러뜨리며 조여드는 엄지와 소지(小指) 두 손가락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단탈이 말했다. "아까 말했지? 내 일을 방해하려 드는 자는 용서하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너는 내 맹세를 위해 죽어 줘야겠어." 그와 함께 단탈의 동체(胴體)에서 한 줄기 암류(暗流)가 일어났다. 그 암류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오른팔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깨, 팔꿈치, 팔뚝... 손바닥이 검은 기운에 뒤덮이기 직전, 단탈은 장손불변에게 속삭였다. "어때, 다른 사람에 의해 목숨 값이 매겨지는 기분이?" 퍽! 종이 한 장 찔러 넣을 틈 없이 바싹 밀착된 손바닥과 얼굴 사이에서 작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산독자가 만들고 단탈이 계승한 절세의 독공 독구척이 장손불변의 얼굴에 작렬한 것이다. 털썩`-` 장손불변은 두부(頭部)의 반 이상이 녹아 버린 흉측한 몰골로 갑판 위에 떨어졌다. 천수백 년 전 한나라 장수 기신은 한왕 유방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초패왕 항우에게 거짓 항복함으로써, 유방이 형양성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 의기를 가상히 여긴 항우는 그에게 투항을 종용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소뿐. 결국 그는 끓는 가마솥에 산 채로 던져졌다. 그의 이 장렬한 죽음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충신열사의 표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기신을 본받아, 마맥회 오백여 회원들의 심장에 회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열사로 영원히 남겨지기를 원하던 장손불변. 하지만 그는 야만인이라 경멸해 오던 단탈의 손에 의해 생을 허무하게 마감하고 말았다. 최후의 순간, 다른 사람에 의해 목숨 값이 매겨진 것에 대해 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협상(協商) 묘왕동주 제 16 장 협상(協商) 1 "다시 말씀해 주시겠소?" "살려 두시는 편이 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허어!" "역시 쉽게 납득하지 못하시는군요." "저들이 매복을 뚫으며 얼마나 많은 아군을 살상했는지는 전 선생께서도 잘 아시잖소? 수하들은 죽어 간 동료들의 복수를 바라고 있소. 그리고 이 총사의 최후를 생각하면 나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심정이오." "장수 된 자는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잊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저 두 사람은 이 총사와 삼풍을 죽일 만큼 강한 반면, 큰 가치가 없는 자들이지요. 우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저들을 죽일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저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공격하고 공격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은원이라면 양측 모두 빨리 덮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겁니다." "으음!" "저들을 놔줌으로써 지존께서는 두 가지 이득을 얻으시게 됩니다." "두 가지 이득?" "우선, 지존께서는 이번 작전을 통해 이미 정예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전력을 잃으셨습니다. 그런데 속하가 지켜본 바, 저들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몇 명을 더 잃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수를 달성했다는 위안감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것은 명백히 수지가 안 맞는 일입니다. 지금은 전력을 보호하는 데에 총력을 경주할 때임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계속하시오." "삼 년 전, 조 공자는 묘강에 다녀왔지요. 단탈이란 자가 온 곳이 바로 묘강입니다. 단지 우연일까요?" "...!" "이화신마가 조계광(趙桂廣)을 통해 보낸 편지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속하는 이화신마가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노리고 있다고 귀띔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소." "만약 단탈이 조 공자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다면, 이화신마가 쓴 차도살인을 우리라고 쓰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단탈이란 자를 조추림에게?" "그렇습니다." "으음! 차도살인이라..." * * * 기름기로 범벅이 된 손이 탁자 위에 놓인 그릇 쪽으로 이동했다. 손이 잡은 것은 잘 구워진 닭 한 마리. 손은 그 닭을 몸통째 들어 두툼한 입 쪽으로 가져 갔다. 매용소는 조금은 감탄스러운 눈길로 구운 닭을 움켜쥔 손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공을 뿜어 내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은 세상에 무수히 많은 다른 손들과 비슷해 보였다. 피부색이 좀더 짙다는 것과 자잘한 흉터들이 잔뜩 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단탈!" 손의 주인 단탈의 곁에는 석소용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단탈의 맨가슴을 애무하듯이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애무와는 거리가 먼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더구나 눈썹을 뽑는 집게 따위를 들고 애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석소용은 그 집게로 단탈의 가슴팍에 박혀 있는 암기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암기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 매용소가 처음 보는 것도 두 가지나 있었다. 그리고 모두 위험한 독액이 발린 것이 분명했다. 은으로 만든 집게가 시커멓게 변색된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암기를 뽑는 일은, 단탈이 들고 있던 구운 닭을 다 먹어 치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 드시지요." 매용소는 예의상 이렇게 권했지만 단탈이 설마 더 먹을 줄은 몰랐다. 구운 닭 세 마리라면 웬만한 대식가라도 배를 문지르며 물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밤의 격전 탓일까? 단탈은 놀라운 식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염치도 없이 또 한 마리의 구운 닭을 움켜쥐었고, 매용소는 내심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잡힌 것은 단탈이 다섯 마리의 닭을 해치우고도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석소용의 집게도 어느덧 멈춰 있었다. 탁자 위에는 닭뼈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단탈의 몸에서 뽑힌 몇 개의 암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단탈과 석소용과 박한이, 다른 쪽에는 매용소와 전운리와 채앙이 마주하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며 말문을 연 사람은 박한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탁자 건너편을 향해 허리를 굽힌 뒤 이렇게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박한이라고 왜 탁자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적당(賊黨)의 수뇌라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물 한 사발이라도 대접받았다면 반드시 사례해야 하는 것이 그가 숭상하는 해동의 예법이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그의 앞에 놓인 한 마리분의 닭뼈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아... 예, 예!" 얼떨결에 두 손을 모아 흔들던 매용소는, 박한의 사례에 걸맞는 적당한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이어진 석소용의 말은 그의 노력이 말짱 헛수고임을 선고했다. "그 한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대꾸하지 않는 게 속편할 거예요." 물론 박한은 한두 마디의 한어를 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외어 둔 것을 읊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 한마디밖에 할 줄 모른다."은 석소용의 설명이 과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아가씨는 두 분과 매우 친한 모양이군. 자칫 실례를 범할까 두려우니, 아가씨께서 두 분을 내게 소개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매용소는 여자들, 특히 어린 소녀들의 호감을 끌 수 있는 사내였다. 외관은 단정하고 표정은 온화하며 말투는 상냥하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그런 면에서는 석소용도 또래의 소녀들과 별반 다른 구석이 없는지라, 매용소의 부드러운 요청을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석소용은 우선 박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저씨는 박한이라고 해요. 동방에 있는 조선국에서 검법을 수련하러 오셨죠. 큰아버지께서는, 장차 중원의 검객들이 저 아저씨로 인해 동방의 검을 배우러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언하셨어요. 믿기 힘들지만 큰아버지 말씀이니 믿을 수밖에요." "큰아버지?" 그러자 전운리가 매용소에게, 문제의 '큰아버지'가 삼자의 일 인인 무숙자 석삼도라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그 말에 고무된 석소용은 제법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단탈을 소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분은 단탈이에요. 아합족의 타루가인데, 타루가는 아합족 말로 왕이란 뜻이래요. 몇 년 전에 어떤 못된 중원인이 부인을 잡아갔기 때문에, 그 부인을 찾으려고 중원에 온 거죠. 참! 단탈을 부를 때에는 꼭 타루가라고 불러야만 해요. 참고로 말해 두거니와, 마맥회의 외팔이 좌훈이 그렇게 안 부르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죠. 알아서 처신하세요." 좌훈이 혼쭐이 났다는 건 우쭐한 마음에서 나온 허풍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면 그런대로 쓸 만한 소개라고 할 수 있었다. 매용소는 전운리와 의미있는 시선을 교환했다. 석소용의 장황한 소개 중에 등장하는 '못된 중원인'과 '부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단탈이 말했다. "싸움은 끝난 건가?" 단탈의 말에 채앙의 얼굴에 푸르스름한 노기가 스쳤다. 그 기색을 눈치챈 석소용이 황급히 덧붙였다. "왕은 원래 평민에게 반말을 하는 법이죠." 석소용의 부연이 아니더라도 매용소는 단탈의 반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저 험상궂은 얼굴로 살살거리며 존대말을 쓴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매용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탈에게 물었다. "타루가께선 싸움을 원하시오?" "싸움은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다." 매용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설명드리기 어렵지만, 소생으로서는 불가피한 싸움이었소. 타루가께서 번거로우셨다면 깊이 사과드리는 바이오." 이어 매용소는 다시 말했다. "따지고 보면 타루가와 소생이 서로 싸울 만한 이유가 어디 있겠소? 타루가께서 동의하신다면, 이쯤에서 싸움을 멈추는 것이 어떨지...?" 단탈은 부리부리한 눈망울로 매용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단탈이었다면 매용소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매용소는 장옥평의 원수였고, 어제까지만 해도 단탈은 장옥평의 원수는 곧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장옥평은 단탈을 사지에 던지고 홀로 피신했다. 장옥평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마봉황이 그렇게 만들었고 장손불변이 그렇게 만들었다. 문득, 어제 저녁 장손불변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장옥평 공자나 본 회에 있어서 짐밖에 되지 않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1 묘왕동주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중원인들은 그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이방인 하나를 희생시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선한 성정 탓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단탈이 친구라 믿어 온 장옥평조차도 가문이 건재함을 알아차린 뒤에는 그를 짐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단탈은 여전히 장옥평을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로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도외시한 채 매용소를 향해 증오의 이빨을 드러내야만 할 것인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홀로 짊어져야 하는 인생의 목표가 너무도 분명한 단탈이었다. "싸울 이유가 없는지도 모르지." 단탈은 맥이 풀린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우리 사이의 전쟁은 일단 끝난 것으로 알겠소이다." 매용소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종전(終戰)을 선포했고, 단탈은 묵묵한 고갯짓으로 동의의 뜻을 표했다. 잠시 후,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선실에 단촐한 주연이 마련되었다. 화해의 잔치였다. * * * 급히 마련한 안주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미리 준비해 온 술도 시큼털털한 하품(下品)이었다. 하지만 술자리가 냉랭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진 원인을 굳이 따진다면, 매용소가 새로 청한 네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셋은 비연리가 지원으로 보낸 여덟 명의 고수 중 살아남은 자들이며, 나머지 하나는 장강육어의 첫째 대왕곤이었다. 대왕곤이야 원래 신중한 위인이니 그렇다 치고, 비연리가 보낸 세 사람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매용소는 세 사람의 심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단탈과 박한의 손에 죽은 홍의사마승은 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랫동안 동고동락해 온 동료였다. 동료를 죽인 자를 앞에 두고 실실거릴 정도로 배알이 없는 위인들이라면 이미 강호인으로서 자격이 없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 사람은 훌륭한 강호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감히 본심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주인인 매용소 때문이었다. 그래도 매용소는 세 사람을 이 자리에 청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단, 자리가 이처럼 경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자, 자! 화해의 잔치치고는 너무 살벌한 것 같지 않소? 소생은 주인 된 몸으로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구려. 벌주 삼배로써 용서를 구할까 하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용소는 세 잔의 술을 연거푸 비웠다. 단탈은 그때까지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 있던 것처럼 보였다. 매용소는 빈 잔 가득 술을 채워 단탈에게 내밀었다. "타루가께서도 한잔하시지요!" 단탈은 시선을 들어 눈앞에 내밀어진 술잔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받으려 들지는 않았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무안해진 매용소가 이렇게 얼버무리려 했지만, 단탈은 빡빡하게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남이 주는 술을 먹지 않는다." '우리'란 아마도 묘강에 있던 단탈의 부족을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닭고기는 먹어도 되고요?" 석소용이 단탈에게 물었다. 단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술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피력했다. "술이란 대지의 신이 인간끼리의 만남을 축복하기 위해 내려 준 선물! 가족과 친구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쾅! 탁자가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비연리가 보낸 세 사람 중 가장 성질이 급한 선풍권(旋風拳) 조계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탁자를 후려치며 일어선 것이다. "남쪽 촌구석에서 온 놈이 어찌 이다지도 건방지게 군단 말이냐! 나는 네놈이 과연 대공자께서 내린 잔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조계광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단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매용소를 향해 한마디를 물었을 뿐이다. "다시 싸우자는 건가?" 매용소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외다! 모든 잘못은 남쪽 풍습에 과문(寡聞)한 소생에게 있소. 저 사람에게도 주의를 주겠으니, 타루가께서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라오." 이어 매용소는 조계광을 향해 말했다. "조계광! 그대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가 보지? 이 매용소의 체면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건가?" "아니, 저, 저는..." 조계광이 한 행동은 매용소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매용소로부터 외려 질책을 당했으니, 그의 얼굴이 당혹으로 붉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매용소는 조계광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노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다음에 나올 말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면 약간의 연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타루가께서 사시던 곳이 풍습이 선하고 인재가 많은 복지(福地)임은, 나라아합이란 여인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그대가 그 지방을 싸잡아 능멸하는 것은 그곳에 대해 들은 것이 있어서도 아니요, 아는 것이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직 타루가께 무례를 범해 이 매용소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일 터! 나는 이 일을 비 부주에게 반드시 따지고야 말겠다!" 순간, 단탈이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단탈의 목소리에는 격앙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매용소는 단탈을 향해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단탈은 매용소 쪽으로 상체를 쭉 내밀며 다시 물었다. "나라아합! 방금 나라아합이라고 했느냐?" "그, 그렇소만... 헉!" 매용소의 상체가 단탈에게로 쭉 끌려갔다. 어느 틈엔가 단탈의 손아귀에 멱살이 틀어 잡힌 것이다. 단탈이 나라아합이라는 이름을 듣고 흥분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입술 새로 헛바람이 튀어나온 것은 매용소의 연출과 무관한 일이었다. 하기야 예측했다 한들 별수없었을 것이다. 상대는 장손불변 정도 되는 고수를 한 손으로 간단히 제압해 버린 무서운 악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무례하다!" 짧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매용소는 그와 동시에 단탈의 턱 밑에 바짝 들이밀어진 새파란 검신을 볼 수 있었다. 검자루를 쥔 것은 초라하게 늙어 버린 손. 바로 채앙의 손이었다. 아마 매용소의 멱살을 잡은 사람이 황제라 할지라도 채앙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채앙의 검은 단탈의 목에서 한 치 정도 거리를 둔 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검 한 자루가 그의 검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한 쪽에만 날이 서 있는 기형검이었다. 매용소는 나직이 한숨을 쉰 뒤, 두 검의 주인들에게 말했다. "채 노인은 물러서시오. 타루가께서 잠시 흥분하신 모양인데, 아마도 금세 평정을 되찾으실 거요. 그리고 박 공께서도 그만 검을 거두시지요. 채 노인은 단지 타루가를 말리고자 했을 뿐, 정말로 손을 쓸 의도는 없었을 것이오." 먼저 검을 거둔 사람은 나중에 손을 쓴 박한이었다. 검을 거두라는 매용소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으니, 어쩌면 그는 채앙의 일 검이 단지 위협용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위협용 공격에 과시용 방어. 장군에 멍군... '이교가 허무하게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군.' 매용소도 당대의 검객이었다. 하지만 박한이 대수롭지 않게 보여 준 빠른 발검(拔劍)과 장중한 수검(收劍)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박한이 검을 거두자, 채앙도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매용소는 단탈을 향해 말했다.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예의를 지켜 물어 주시길 바라오." 하지만 단탈의 격동은 좀처럼 가라앉으려 하지 않았다. 매용소의 얼굴에 꽂힌 그의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똥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나라아합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매용소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의를 지켜 물어 주시오!" 멱살을 졸라 오는 힘은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매용소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칼자루를 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선실 안의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단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으음!" 단탈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매용소의 멱살을 놓고 말았다. "잘 생각하셨소." 매용소는 구겨진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이때, 곁에서 말똥말똥 보고 있던 석소용이 불쑥 끼여들었다. "나라아합이라는 여자가 바로 단탈의 부인인가요?" 매용소는 빙긋 웃으며 단탈을 가리켰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2 묘왕동주 "그것을 소생이 어찌 알겠소?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 보도록 하시오." 석소용은 단탈을 향해 물었다. "부인 맞아요?" 하지만 단탈은 입을 꾹 다문 채 매용소의 얼굴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석소용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다시 한 번 칭얼거렸다. "갑자기 귀가 먹었어요? 왜 대답을 안..." "나라아합은 어디 있느냐?" 단탈은 석소용은 무시한 채 매용소를 향해 물었다. 멱살을 잡거나 하는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 기세만큼은 조금도 누그러진 것 같지 않았다. 석소용은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왔지만, 그 기세에 눌렸는지 아무 소리도 못 했다. 매용소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 여인은 본 옥의 총단에 있소." "총단이 어디냐?" "폐옥(弊屋)의 총단은 구의산(九疑山) 사영곡(斜影谷)에 있소이다." 매용소는 태연히 대답했고, 비연리가 보낸 세 사람은 기절할 듯이 놀라 소리쳤다. "대공자!" "총단의 위치를 누설하는 자에게 어떤 벌이 내리는지 모르십니까?" 철옥은 신비한 문파였다. 남칠성(南七省)에 군림하면서도 총단은커녕 지부의 위치조차 명확히 알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철저한 보안 유지가 옥규(屋規)로 명시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요, 매용소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매용소는 세 사람의 항의를 묵살했다. 총단의 위치를 누설하는 일은 커다란 죄였고, 이러한 계율은 매용소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사부를 버리고 스스로 지존이 되려고 작정한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누가 감히 지존에게 계율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매용소는 매서운 눈빛으로 세 사람의 입을 틀어막은 뒤, 단탈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타루가께서는 여인을 되찾으실 생각이 있으시오?" 단탈의 이맛살이 실룩거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은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사영곡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는 편이 나을 것이오." "무슨 뜻이냐?" "부인과 함께 죽을 생각이면 몰라도, 부인과 함께 묘강으로 돌아갈 생각이면 사영곡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철옥의 총단은 사람을 죽이는 곳이지, 사람을 내어 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오." 으드득`-` 단탈의 주먹에서 소리가 울렸다. 매용소는 그의 주먹을 슬쩍 바라보았다. 권륜(拳輪:새끼손가락에서 손목까지의 둥근 부분)에 뭉친 근육이 터져 나갈 것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권륜에 뭉친 근육만큼이나 단단한 결의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매용소는 가벼운 웃음으로 단탈의 말을 일축했다. "장부다운 말씀!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허세요." "허세라고?" "그렇소. 타루가께서 강한 것은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세상에는 뜻만 가지고 이룰 수 없는 일도 있소. 일례로 이번 산동행을 생각해 보시오. 타루가께선 소생에게 가로막혀, 산동으로 가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마봉황과 장옥평에게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소.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보일 듯 말 듯한 경련이 단탈의 턱 근육 위에 머물다 사라졌다. 미끼로 이용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다시 한 번 떠올린 것일까? "총단에는 타루가께서 지난밤에 겪어 보신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정예들이 운집해 있소. 아니, 그것뿐이 아니지. 초목(草木)이 개병(皆兵)이라! 열 걸음마다 오묘한 기관이 설치되어 있고, 백 걸음마다 위험한 함정이 감춰져 있는 곳이 철옥 총단이오. 그런데도 누구도 막지 못한다 자신하겠소?" "으음!" 단탈은 침음했다. 이제 단탈은 뇌관이 제거된 화탄 같았다. 전신에서 내뿜던 맹수 같은 기세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철벽에 가로막혀 내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기색을 간파한 매용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언뜻 보기에 단탈은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는 용사형의 인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전투에 임할 때 드러나는 가공무쌍한 투지가 그를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에 불과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너무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일수록 무의식의 영역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법이다. 그것은 용기의 유무와 무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단탈에게 드디어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만한 전기가 찾아왔다. 지난밤 내내 벌어진 지독한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밤새 겪은 육체의 피로와 영혼의 좌절 속에서 불가항력이란 말을 떠올렸고,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실감했을 것이다. 매용소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본격적인 흥정뿐... "이 시점에서 소생은 타루가와 거래를 하고자 하오." 단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글거리는 눈으로 매용소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라아합이란 여인은 소생이 찾아 드리겠소." 의외였을까? 한 방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단탈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당신이 찾아 주겠다고?" "그렇소. 소생이 찾아 드리겠소." 단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그 눈을 통해 매용소의 내심을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매용소는 단탈의 그런 수고를 덜어 주었다. "하지만 거래는 거래! 대신 타루가께서도 소생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셔야겠소." "그게 뭐냐?" 매용소는 멀뚱히 앉아 있는 조계광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조계광의 역할은 전령이었다. 이화신마 비연리는 조계광을 통해 한 가지 정보를 알려 왔다. 현재 북상(北上) 중으로 알려진 조추림의 행적이 바로 그 정보였다. 비연리의 서신을 읽은 매용소는 큰 불쾌감을 느꼈다. 매용소는 조추림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고, 또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매용소가 손수 조추림을 제거한다면, 사부 철면신의 모든 분노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비연리의 노림수는 바로 그것이었다. 매용소와 철면신의 양패구상(兩敗俱傷)을 유도해 결국 철옥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는 것이다. '교활한 원숭이 같으니라고!' 매용소는 조계광을 향해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 단탈과의 거래는 저 전령의 입을 통해 비연리의 귀에 흘러 들어갈 것이다. 굳이 그를 이 어색한 자리에 끌어 낸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비연리, 그 교활한 원숭이는 이 일을 전해 듣고 무슨 표정을 지을까? 매용소는 시선을 단탈에게 돌렸다. 단탈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나라아합을 남쪽에서 데려온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매용소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단탈의 두 눈에서 무서운 광망이 뿜어 나왔다. 그리고 어금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하나... "조추림!" 매용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조추림이오." 단탈이 조추림을 알고 있다는 것은 흥정을 순조롭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매용소는 흔쾌한 표정으로 자신의 요구를 말할 수 있었다. "조추림을 죽여 주시오. 그것이 소생이 제안하는 조건이오." 잠시 동안 선실 안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국외자(局外者)로서 탁자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석소용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당신을 어떻게 믿죠? 당신이 반드시 나라아합을 찾아 준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매용소는 정색을 하고 단탈에게 말했다. "소생은 일파(一派)의 지존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오. 지존이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 문파 전체의 신의가 허물어지는 법! 소생은 비록 우부(愚夫)이지만 지존이 갖춰야 할 덕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소. 타루가께서 소생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그 여인을 반드시 타루가께 보내 드릴 것을 맹세하겠소." 이 거래는 공평했다. 매용소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차피 조추림과 청산해야 할 원한이 있는 단탈이 아닌가! 또한 매용소는 거래가 성립된 후, 나라아합이란 여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그는 지존, 그것도 진정한 지존을 꿈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단탈의 입이 열렸다. "조추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매용소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거래는 성립된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3 묘왕동주 2 "공자님! 기침하셨습니까?" 조추림을 깨운 것은 방문 밖에서 울려 온 사내의 목소리였다. 조추림은 잠결에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십여 년을 수족처럼 데리고 다니던 심복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군.' 조추림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심복이 지금 그러한 금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조추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바닥에 늘어붙어 있는 햇살은 짤막했다. 이미 아침을 먹기에는 늦어 버린 시간. 어제 마신 열반주(涅槃酒)는 그 이름만큼이나 독한 것이어서, 어지간히 술을 즐기는 그도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문득, 참깨로 비린내를 없앤 잉어죽으로 깔깔한 속을 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추림은 방문 밖을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들어오게." 방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목소리의 주인 남력과 진강부의 어린 요화 남장미(藍薔薇)`-`호호가 남창으로 돌아간 뒤 새로 얻은 기녀이다`-`그리고 조추림으로서는 초면인 당당한 풍채의 사십대 화복인(華服人)이었다. 조추림은 양팔을 옆으로 벌렸다. 그러자 남장미가 다가와 그의 팔에 겉옷을 끼워 주었다. 매일 아침 그녀가 하는 일이었다. 이때 화복인이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혔다. "철비량(鐵備良)이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철비량?" 조추림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철비량은 그의 사부 철면신이 강호에 깔아 둔 몇 군데 비밀 세력 중 하나인 회남(淮南) 철가장(鐵家莊)의 장주였다. 이러한 비밀 세력들은 강호는 물론이거니와 철옥 내부에 있어서도 그 존재가 철저하게 감춰져 있었다. 철면신의 총애를 받는 조추림조차도 피상적인 부분 외에는 알지 못할 정도이니, 철옥 산하라기보다는 철면신 개인의 조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대는 회남에 있어야 하지 않나? 왜 여기에 온 거지?" 조추림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철비량을 만난 것 자체는 그리 의아한 일이 아니었다. 회남의 철가장은 신양으로 가는 북상로의 경유지 중 하나였으니, 언제 만나도 만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회남으로부터 수백 리 떨어진 홍택호반(洪澤湖畔)의 객점. 철비량이 조추림을 배알하는 시기는 적어도 닷새 이후여야 했다. "철가장으로 금응이 날아왔습니다." 철비량이 대답하자, 조추림의 얼굴에 귀찮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사부께서 보내셨군. 이번에는 어떤 잔소리가 적혀 있던가?" 철비량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추림의 말을 부정했다. "옥주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뭐?" "금응은 총단에서 왔습니다." 조추림은 멍해졌다. 총단에서 온 금응이라면 바로 조추림이 키우는 것이었다. 금응을 관리하는 사람은 총단에 남아 있는 그의 수하 마중산(馬重山). 마중산은 주인의 금응을 가벼이 사용할 정도로 경망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총단에 있는 조추림의 기반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 순간, 조추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조각난 논리들을 꿰어 나가던 사고(思考)가 급기야 총단에 두고 온 생명보다도 소중한 여인, 나라아합에 미친 것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예?" "뭐라고 써 있었지? 그녀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고 하던가?" 조추림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철비량은 고개를 저었다. "전서에는 다만 공자님의 수하 중 이사통(李思通)이라는 자가 실종되었다고 써 있었습니다." 조추림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사통은 쓰임새가 많은 수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나라아합에 관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토해 낼 뿐이다. 이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력이 입을 열었다. "심각한 일입니다." 조추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촌각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철비량의 말 몇 마디로 비롯된 극단의 긴장과 극단의 이완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신경을 식초에 절인 배추처럼 후줄근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별다른 대꾸가 없어도 남력은 곧바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주인의 성정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 심복인가 알 수 있다. "이사통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가 주위에 일언반구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극히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잠시 생각한 남력이 덧붙였다. "또한 그는 이번 여행의 진로를 알고 있습니다." 조추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남력을 바라보았다. "진로라고?" 남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군가 공자님의 행적을 탐문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이사통을 노릴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노리는 자가 있다는 얘기인가?" "가능성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조추림은 비로소 심각해졌다. 남력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다. 이사통은 조추림에게 있어서 입 안의 혀와 같은 존재였다. 이번 여행의 동선(動線)만 해도 그랬다. 그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오히려 일행에 합류하지 않은 이사통이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사통은 그만큼 사무 능력이 뛰어났고, 각지의 문물에 대해서도 정통했던 것이다. 조추림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만약 누군가 이사통을 납치해 그 입을 통해 뭔가를 캐내려 든다면?' 아마도 제법 굵직한 정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철비량의 존재에 관한 사항 등을... 하지만 가장 값비싼 정보는 뭐니뭐니 해도 이번 행로에 관한 것이었다. 조추림의 행적도 행적이거니와 신양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관한 일이 드러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의 사부 철면신이 오랫동안 추진해 온 대계(大計)는 되돌리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될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사통이 알고 있는 정보는 조추림의 개인적인 부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하기야 신양의 공사 건은 그의 제일가는 심복 남력조차도 정확히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정을 서둘러야겠습니다." 남력이 말했다. 그러자 철비량은 회남까지 갈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음을 밝혔다. 조추림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추림 일행이 두 대의 마차에 나눠 타고 홍택호반의 객점을 출발한 것은 구월 초하루. 객점 주방의 아궁이들이 점심 손님 맞을 준비로 한창 달궈졌을 무렵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4 묘왕동주 3 그는 어둠 속에 있었다. 어둠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한 어둠, 얼굴 앞에 내민 손조차 안 보이는 그런 종류의 어둠은 아니었다. 어둠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작고 보잘것없는 등잔불이었다. 심지의 굵기가 그야말로 머리카락처럼 가는 그 등잔불은, 심지만큼이나 가늘고 여린 느낌을 주는 조그만 빛무리를 어둠 속으로 피워올리고 있었다. 심지는 무척이나 길었다. 그래서 심지가 다 타들어 가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긴지 알지 못했다. 단지 한 마리의 오리구이가 들어올 때마다 그 심지가 갈린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시간, 그리고 음식. 어둠과 등잔불이 끈질긴 투쟁`-`어쩌면 평화일지도 모른다`-`을 벌이는 이 공간 속에서, 그의 시간 관념은 음식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두 번의 식사를 마친 뒤, 그는 한구석에 마련된 측간에서 용변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네 번의 식사를 마친 뒤, 그는 간단한 도인체조(導引體操)로 부족한 운동을 보충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식사에는 어김없이 오리구이 한 마리와 신선한 야채 다섯 가지, 그리고 향기로운 옥호춘(玉壺春) 한 병이 들어왔다. 그것은 작고 보잘것없는 등잔에 새로운 심지가 꽂히는 때이기도 했다. 처음, 그러니까 그가 이 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는 두 번의 식사에 해당하는 시간이 바깥 세상의 사람들`-`낮의 밝음과 밤의 어둠을 향유하며 살아 가는 사람들`-`이 말하는 하루와 엇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심지는 사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심지가 갈릴 때마다 나무로 만든 침대 머리맡에 금을 긋기 시작했다. 하나의 금이 바깥 세상의 사흘이라고 생각하면서... 첫 번째 심지가 첫 번째 금이 되었다. 두 번째 심지가 두 번째 금이 되었다. 세 번째 심지도, 그리고 네 번째 심지도... 수없이 많은 심지들은 그가 동화되어 버린 공간 속으로 언제나처럼 등장해, 언제나처럼 머물다가, 언제나처럼 사라졌다. 침대 머리맡의 벽 위에 빽빽한 금들을 남긴 채. 그는 그것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반복임을 알고 있었다. 사내는 익숙한 동작으로 등잔불의 심지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그는 사내가 탁자 앞에 앉아 심지를 갈아 끼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몽당한 심지가 사내의 손가락에 의해 뽑히고 새로운 심지에 불이 밝혀지기까지, 철저한 어둠이 열 평 남짓한 석실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촌각에 불과했다. 이윽고 새로운 빛이 탄생했다. 오십 줄에 접어든 사내의 얼굴이 그 빛 안에 떠올랐다. 이마를 감싼 푸른 두건을 제외한다면 무엇 하나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푸른 두건의 사내였다.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편안해. 너무 편안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지." "다행이군요."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대답이건만, 사내는 그저 웃었다. "그런데 자네 얼굴은 무척 안돼 보이는군.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공사 막바지에 조금 무리를 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표정이 밝은 것을 보면 순조롭게 끝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래..."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기어이 해냈군! 하기야 진규(陳奎), 자네가 아니면 누가 그 공사를 감히 해낼 수 있을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목례하는 사내, 진규는 예의바르고 겸손한 자세로 그를 대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그 누구도 두 사람이 간수와 죄수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간수와 당당하고 기품있는 죄수, 그리고 불완전한 어둠이 지배하는 열 평 남짓한 석실. 현실이란 왕왕 이처럼 상식과 일치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다시 물었다. "대법(大法)은 어떻게 되었나? 대법도 거의 완성되었는가?" 이번 질문은 좀 곤란한 듯, 진규는 쉽게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끈질기게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떼었다. "오늘 일곱 번째 대법이 실시됩니다." 그는 잠시 손가락을 헤아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일곱 번째면... 예순네 명인가?" "그렇습니다." 진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순넷... 허어! 늙은이의 죄업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는 탄식했다. 진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석문 앞에 내려 두었던 쟁반을 들고 왔을 뿐이다. 쟁반 위에 올라 있는 것은 사흘마다 새 심지와 함께 그에게 제공되는 만찬. 한 마리의 구운 오리와 다섯 가지의 야채, 그리고 한 병의 좋은 옥호춘이었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만이 존재했다. 그와 진규, 두 사람 모두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가 타들어 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음만이 벌레의 울음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식사를 시작했다. 식욕이 동한 탓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진규는 이 석실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규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진규도 삐뚤어진 야망의 희생자. 진규를 그렇게 만든 데에는 그의 책임도 큰 것이다. 식사는 곧 끝났다. 북경식으로 구운 오리와 신선한 야채, 그리고 뒷맛이 순한 옥호춘은 과거에도 그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아무리 입맛이 없다 한들, 그것들을 먹어 치우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식사를 마치자 진규는 조용한 동작으로 빈 그릇들을 수습했다. 그가 말했다. "공사가 끝났으니 후겸(後謙)도 곧 오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잘하면 죽기 전에 그 친구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겠군." 진규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대계(大計)가 마무리되면 어르신을 찾으시겠죠." "대계... 대계라... 후후!" 허탈하게 들리는 웃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 그릇을 거둔 진규는 그에게 목례를 한 뒤 석실을 나갔다. 그긍`-` 석문이 닫히는 소리. 뒤이어 강철로 만들어진 기관이 석문의 돌쩌귀를 단단히 고정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죄 많은 육신을 어느 땅이 받아 줄까? 나는 죽어 썩지도 못할 게야." 피폐한 그의 목소리가 작은 심지가 만들어 내는 황량한 불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사방이 백오십 걸음 정도 되는 널따란 대전 안에는 기이한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내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피 내음. 닫힌 공간 속에서 진흙처럼 말라 버린 역겨운 피 내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벽에 걸린 붉은 유등(油燈)들은 대전 내부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 정중앙에는 사방 마흔 자쯤 되는 석단(石壇)이 마련되어 있었다. 석단 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새하얀 느낌을 주는 관(棺) 하나. 그 곁에는 네 개의 청동향로가 사방의 방위에 따라 배치되었다. 관은 토번(土番) 백옥강(白玉江)에서 생산하는 한옥(寒玉)을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폭 두 자에 길이 여덟 자, 높이는 석 자가 되는 그 관의 이름은 겁면관(劫面棺). 이음새 없이 통째로 다듬어 만들었으니, 그만한 크기의 한옥괴(寒玉塊)가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물건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한옥괴의 존재 여부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꺼내라!"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두 명의 흑의인이 석단 위에 올라 겁면관의 뚜껑을 열었다. 겁면관의 내부는 담황색의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액체는 인간의 영혼을 황홀하게 만드는 그윽한 약향(藥香)을 풍기고 있었다. 그 액체의 이름은 겁면수(劫面水)라고 했다.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겁면수는 신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는 자연물이 아닌, 십여 년 전 몇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된 인공물인 것이다. 겁면수는 그 부피만큼의 금덩어리보다도 수십 배 귀한 물건이었다. 백 가지 독소를 정화해 준다는 벽옥장(碧玉漿), 체내의 노폐물을 제거해 주는 암향선지(暗香仙芝), 내장의 위치를 잡아 주는 혈설련(血雪蓮), 골격을 튼튼히 만들어 주는 포신골(包神骨) 등이 겁면수를 이루는 기본적인 재료였다. 황궁의 약고(藥庫)에서도 찾기 힘든 귀한 이 약방지보(藥房之寶)들이 정확한 비율에 의해 배합된 것이 바로 겁면수였다. 그러니 겁면관을 이루는 한옥괴도 겁면수에 비하면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겁면수 안에는 한 사람이 잠겨 있었다. 그 사람은 마치 청동으로 만든 것처럼 전신에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석단 위에 오른 두 흑의인은 더할 수 없으리만치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사람을 겁면관 밖으로 꺼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5 묘왕동주 두 흑의인이 커다란 베수건으로 그 사람의 몸뚱이를 닦아 주는 동안, 석단 아래로부터 올라온 다른 흑의인 두 명이 겁면관 위에 무엇인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닦는 사람은 닦는 사람대로, 설치하는 사람은 설치하는 사람대로, 그들은 묵묵히 맡은 일을 해 나갔다. 그 손길에는 여러 번 해보지 않고는 얻기 힘든 익숙함이 담겨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석단을 내려갔다. 석단 위의 풍경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석단 위에는 반투명한 나장(羅帳)이 드리운 호화로운 침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침상 안에는 전신에 푸른 기운이 감도는 노인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바로 겁면관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이었다. 온이(溫二)가 온청면(溫靑面), 혹은 청면수라(靑面修羅)라는, 과히 아름답지 못한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수라에 걸맞는 용맹 탓도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청살기(靑煞 )로 인해 푸르게 변해 버린 얼굴 탓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살기가 경지에 오르면 공력을 일으키지 않아도 전신의 살갗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게 된다. 온이가 과거 이화산장의 십대고수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혔던 것도 모두 청살기를 바탕으로 한 패도적인 외문기공 때문이었다. 그 온이가 지금 다른 사람의 푸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기운이 너무도 선명하여 마치 청동으로 만든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푸른 살갗에 누구보다도 익숙한 온이였지만 저 얼굴을 볼 때마다 척추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달려 내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진저리를 쳤다. 그 기색을 눈치챈 듯, 곁에 있던 막홍(莫鴻)이 얼굴 가득 자리잡은 흉터들을 실룩이며 말문을 열었다. "참으로 정이 안 가는 얼굴 아닙니까?" 사실 막홍만 해도 강호에서 정 안 가는 얼굴을 지닌 위인으로 유명했다. 본바탕도 음사한 데다가 강호를 전전하는 동안 흉터까지 얻은 탓에, 담 약한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흉한 얼굴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악면진인(惡面眞人)이라는 별호가 붙었을까? 그 막홍에 비하면 지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노인은 미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드시 막홍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두 가닥 멋들어진 교룡 수염에 콧날 우뚝하고 골격 번듯하니, 젊었을 때에는 많은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어 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온이는 막홍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관의 미추(美醜)와는 무관한 문제였다. 잘생기면 뭐 하나? 오히려 잘생긴 외관이 요악한 분위기를 한층 더해 주는데... 온이는 문득, 노인의 푸른 얼굴을 짓뭉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온이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석단 아래를 향해 말했다. "가져 와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의인 하나가 검은 상자를 들고 석단 위로 올라왔다. 목침만한 크기, 흑단(黑檀)으로 만든 상자였다. 온이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물건은 옻칠이라도 한 것처럼 새카만 윤기가 번들거리는 철가면이었다. 온이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철가면을 들어 노인의 얼굴에 씌웠다. 가장자리에 달린 여섯 개의 가죽끈을 조여 노인의 얼굴에 철가면을 단단히 고정시킨 온이가 막홍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깨어 있게 되는가?" 막홍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인혼액(引魂液)이 넉넉하지 못하니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물을 바치는 데 드는 시간이 있으니, 한 시진 안에는 끝내기 힘들겠지요." 온이는 막홍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랐다. 불쾌한 시간은 짧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게." 온이는 자신의 심경을 짧게 피력한 뒤 석단을 내려갔다.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눈을 뜰 때마다 대했던 침상의 천장이었다. 그는 몇 번 눈을 껌벅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석류를 씹는 듯한 신맛이 입 안에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맛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러한 신맛을 느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침상에 드리운 나장을 걷었다. 침상 주위에는 네 개의 청동향로가 서 있었다. 청동향로의 노구(爐口)에서는 서로 다른 네 가지 빛깔의 연기가 뭉클거리며 뿜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 낯익은 경물. 그가 깨어나 대하는 경물은 언제나 이와 같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 말이다. 입 안을 감돌던 신맛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철가면 안에 감춰진 그의 눈빛은 점점 더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때 한 줄기 음산한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는 잠시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황은 잠깐에 불과했다. 역시 언제나 받아 온 물음. 깨어난 뒤 처음 듣는 목소리는 언제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물어 왔던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철면신..." 영혼이 없는 자의 독백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은 중얼거림이 철가면의 입구멍 틈에서 흘러나왔다. "그렇다! 그대는 철면신, 강남제일문파 철옥의 주인 철면신이다!" "나는 철면신, 강남제일문파 철옥의 주인..." 그는 구관조처럼 목소리가 한 말을 되뇌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순간,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수많은 영상이 그의 뇌리를 난자하며 지나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영상은 유리 파편처럼 산산조각난 채 폭죽이 터지듯 명멸하고 있었다. 점점 강해지는 신맛... "그대의 이름은 관명(關明)이다." 그의 몸이 우뚝 멈췄다. "관명...?" "그렇다. 최강의 무인, 무왕 관산정의 유일한 아들 관명이다." "무왕 관산정의 아들... 무왕... 관... 산정...? 으윽!" 그는 무왕이라는 이름을 뇌까리다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머리를 감싸쥐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고통을 달랬다. 그와 동시에 네 개의 청동향로가 더욱 거센 기세로 네 가지 빛깔의 연기를 뿜어 내기 시작했다. 연기는 거대한 구렁이처럼 그의 몸뚱이를 휘감았다. 바늘 끝처럼 수축되었던 그의 동공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 동공에 서서히 맺히는 것은 열락의 감동... 네 가지 빛깔의 연기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듯하고 평화로웠다. 그것은 불안정한 그의 육체와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가 안정을 되찾는 기미를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흐으으... 나는 관명... 무왕의 아들 관명..." 그의 몽롱한 대답에 목소리의 임자는 만족스러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 기괴한 대화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육족풍 염자량(廉子良)!"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대전의 천장으로부터 한 폭의 족자가 내려왔다. 족자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래위로 붉은 무복 차림에 약간 마른 체구의 노인. 팔목에 걸린 한 쌍의 백옥환은 마치 옥가루를 바른 것처럼 생생해 보였다. "도무비(刀無比) 나광(羅光)!" 또 한 폭의 족자가 내려왔다. 그 위에는 시뻘건 거도(巨刀)를 허리에 비껴 찬 당당한 체구의 중년인이 그려져 있었다. "이화신마 비연리!"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오종종한 인상의 노인이 다른 족자에 실려 대전으로 내려왔다. "검패 장일기!" 뽑아 든 장검으로 천중(天中)을 가리키고 있는 중년인. 깨끗한 장포가 수려한 이목구비와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신창 서문병!" 등에 맨 장창만 제외한다면 어딘지 한량처럼 보이는 중년인의 여유있는 모습이 족자에 실려 내려왔다. "거령신(巨靈神) 막뢰!" 막뢰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얼굴에는 반달 모양의 흉터 두 개, 양손에 든 자모거치도(子母鋸齒刀)는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끼에 가까웠다. 그리고... "황금왕 소래운!" 화려한 비단옷에 뒷짐을 진 자태가 귀품(貴品)을 자아내는 반백의 초로인의 그림이, 앞선 여섯 폭의 족자와 나란히 걸렸다. 그는 네 가지 빛깔의 연기에 둘러싸인 채, 일곱 족자에 담긴 일곱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이들을 기억하는가?"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6 묘왕동주 목소리가 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부정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불길한 기억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대는 이들을 기억한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목소리는 그의 손에 곡괭이를 쥐여 주고 있었다. 그 곡괭이로 단단한 부인(否認)의 껍질 속에 감춰진 불길한 기억들을 캐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기억하라, 이들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철가면 속에 감춰진 그의 얼굴에 괴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한과 공포와 분노가 범벅이 된 표정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침대 턱에 걸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 난..." 그는 손을 내저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말이 아닌 걸쭉한 침이었다. "기억하라! 무왕 관산정이 흘리던 피눈물을! 단지 무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대를 죽이려 했던 이자들의 만행을! 그래서 사지가 갈가리 찢겨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대의 원한을!" 입 안의 신맛은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철가면의 턱받이에 고인 걸쭉한 침은, 이제 의복의 앞자락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으, 으으..."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솜털까지 곤두서게 만드는 그 신맛을, 답답하고 후텁지근한 이 공간을, 그리고 한과 공포와 분노뿐인 이 시간을... 그는 두 손으로 옷을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악!" 수백 마리의 들소가 머릿속을 질주하는 것 같았다. 수백 개의 단단한 발굽이 말랑말랑한 그의 뇌수를 짓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바로 다음 순간, 갖가지 빛깔의 폭풍이 그의 망막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의식은 빛깔의 폭풍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 * * 과거에는 진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하지만 지금은 오직 자액(刺額)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는 그 사내가 대전에 들어선 것은, 새로운 피비린내가 대전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무렵이었다. 냉막한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던 온이는, 대전 입구에 서 있는 자액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자액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온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대전의 중앙에는 형형색색의 연기가 작은 동산처럼 뭉쳐 있었다. 대저 연기란 것은 비어 있는 공간을 향해 움직이게 마련인데, 저 연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한곳에 응축된 채 요사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울리는 소름 끼치는 파육음(破肉音). 대전의 중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액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온이가 대답했다. "으음!" 자액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앙제(鴛鴦祭). 이름만 들으면 선남선녀들의 가연이 성사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앙제는 그런 아름다운 제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미치광이가 하늘의 섭리를 거역하기 위해 창조한 끔찍한 살육제(殺戮祭)인 것이다. 원앙제의 다른 이름은 구전환혼대법(九轉還魂大法)이었다. 아마도 이 이름이 훨씬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저승의 문턱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무려 아홉 번의 살육제를 반복해야하니 말이다. 일차대법 때만 하더라도 자액은 그리 큰 죄책감 없이 대법의 과정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강호를 유전하며 주름살을 얻어 낸 무사였고, 무사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죽음이란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이차대법이 치러졌다. 그때에는 두 개의 죽음이 필요했다. 삼차대법에는 넷, 사차대법에는 여덟, 오차대법에는 열 여섯... 원앙제라는 이름의 대법은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식인충군(食人蟲群)이었고, 그 식인충군은 늘어난 수만큼의 죽음을 원했다. 회가 거듭될수록 피 내음이 짙어 갔다. 대전의 벽과 기둥, 천장과 바닥, 심지어는 대법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장까지... 피 내음은 모든 곳에 짙게 배었다. 그리고 이번 칠차대법에는 무려 예순네 사람이 전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저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연기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름 끼치는 파육음은 그들의 육신이 산 채로 찢기는 소리인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을 지닌 자액이었지만, 한 줄기 우울한 죄책감에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 내음과 파육음의 향연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크아아악! 대전 벽을 울리는 처절한 괴성이 연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대법은 바야흐로 막바지. 예순넷의 목숨으로 흉성(兇性)을 달랜 반활반시(半活半屍)의 괴물은 잠잠해질 테고, 막홍이 태일진원주(太一鎭怨呪)를 외우면 사방혈정(四方血鼎)에서 흘러나온 사색의 연기는 괴인의 모공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어 괴물의 입에 정량의 인혼액을 흘려 넣으면, 괴물은 이전처럼 가사 상태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러면 이 저주받을 대법이 또 한 번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콰우우`-`" 맹수의 포효 같은 괴성과 함께 연기가 쩍 갈라지고, 꿈에 볼까 두려운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연기가 갈라짐에 따라 석단 위의 광경도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순간,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잘린 팔뚝, 뜯긴 다리, 절반이 날아간 얼굴... 예순네 명의 산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잔해로 바뀌어 석단 위에 쌓여 있었다. 석단 위는 살아 있는 사람이 결코 보아서는 안 되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어떠한 지옥이라도 그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크르르... 크흑!" 어깨를 거칠게 들썩이고 있는 괴물의 몸뚱이는 검붉은 선혈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철가면의 눈구멍 틈으로 뿜어지는 눈빛만은 인간의 영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푸른빛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제정신을 차린 것은 자액이었다. 이것은 무공의 고하를 논하기에 앞서 살아 온 삶의 질(質) 문제였다. 그는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거친 삶을 살아왔고, 덕분에 보통 사람보다 훨씬 단단한 신경 조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자액의 시야에, 반활반시의 괴물이 석단에서 가장 근접해 있던 막홍을 향해 뛰어내리는 광경이 들어왔다. "막홍! 물러서라!" 자액은 다급하게 외치며 신형을 날렸다. 막홍은 괴물이 목전에 당도할 때까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가 아닌 누구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태와 직면하게 된다면 그처럼 굳어 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크아아`-`!" 예순넷의 목숨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 피를 갈구하는 듯한 괴성과 함께 칼날처럼 세워진 괴물의 손이 막홍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퍽!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막홍은 대전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하지만 괴물의 손 때문은 아니다. 삼 장 허공을 단숨에 날아온 자액이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으로 막홍의 옆구리를 밀어 버린 것이다. 자액은 착지와 동시에 막홍의 전면을 방호했다. 그가 괴물을 직접 취해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에 걸쳐 겁면수의 무궁한 효능과 사방혈정의 사기를 흡수한 괴물은 이미 도검수화(刀劍水火)가 침범할 수 없는 불괴(不壞)의 신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그이기에 괴물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막홍을 밀어 버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난데없는 훼방꾼 때문에 목표를 놓친 괴물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앞을 막아 선 자액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철가면의 눈구멍 사이에 자리잡은 푸른 눈동자에 귀화(鬼火)와도 같은 분노의 빛이 어렸다. '위험하다!' 괴물이 자신을 향해 손바닥을 뻗어 내는 광경을 목격한 자액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하압!" 자액은 필생의 공력을 끌어올려 괴물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이번 일장으로 괴물을 제압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몸만은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능히 자부할 만한 무공을 지닌 고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무참했다. "우욱!" 자액의 가슴 위에 엄청난 충격이 작렬했다. 수천 근 쇠뭉치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몸뚱이는 투석기를 떠난 돌멩이처럼 후방으로 쭉 밀려가 대전의 돌기둥에 세차게 부딪혔다. 고통보다 놀라움이 앞섰다. 자액이 아는 한 최고의 고수는 소림사 방장도 아니요, 무당파 장문인도 아닌, 그의 주인이었다. 그의 주인은 그를 열 합 안에 제압할 수 있는 극고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천하에서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닌 자는 오직 그의 주인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저 괴물은 단 일 합만에 그를 날려 버렸다. 단 일 합, 장난처럼 보이는 한 번의 손짓으로 말이다. 지금의 능력이 이러할진대, 아홉 차례의 대법을 모두 거쳐 완전히 소생한 괴물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을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6 장 - 7 묘왕동주 "크아아`-`!"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자액을 향해 달려왔다. 자액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의 거력(巨力)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공포심이었다. 그런 자액에게 구원의 손길이 닿았다. 살심에 사로잡힌 악마에게 다른 제물이 던져진 것이다. "...!" 어느 순간, 자액은 일 장 앞에 우뚝 서 있는 괴물을 볼 수 있었다. 그 괴물은 선혈에 물든 두 손으로 한 흑의인의 양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자액은 그 흑의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이 저주받을 대법을 돕기 위해 선발된 몇 명의 조수 중 하나라는 사실뿐이었다. 드드득`-` 그리고 자액은 보았다. 인간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마치 종이로 만든 인형을 찢듯, 괴물은 너무도 간단한 동작으로 한 인간을 두 개의 육괴(肉塊)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뱃속에 들어 있어야만 되는 갖가지 덩어리들이 철버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발치에 수북이 쌓였다. 피어오르는 김, 구역질나는 비린내... "크워억`-`!" 양손에 움켜쥔 육괴를 머리 위로 치켜 들어 쏟아지는 선혈을 머리 꼭대기부터 뒤집어쓴 괴물은 만족의 괴성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마신(魔神), 그 자체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괴물이 더 이상의 제물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자액의 일 장 앞에서 멎어 버린 괴물의 두 다리가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찰그랑찰그랑`-` 어디에선가 요령(搖鈴)이 울렸다. 끓는 물에 들어간 눈덩이처럼, 요령의 맑은 금속성은 사악한 살육의 현장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붉게 물든 괴물의 몸뚱이가 부르르 진동했다. 그리고 주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액은 막홍이 태일진원주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궤(常軌)에서 튕겨나 끝을 짐작할 수 없이 치달리던 구전환혼대법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후우욱`-` 석단 위에 감돌던 네 가지 색깔의 연기가 괴물의 몸뚱이를 향해 밀려들었다. 자액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그는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막홍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막홍의 곁에는 침중한 안색의 온이가 서 있었다. 온이의 억센 손아귀에는 또 다른 흑의인의 목덜미가 쥐여 있었다. 혈도를 제압당한 듯, 복면인은 허수아비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자액은 그제야 제물을 던져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온이는 하나의 제물로 괴물의 흉성이 가라앉지 않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또 다른 제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푸스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연기의 농도는 점차 옅어졌다. 그리고 막홍이 송주(誦呪)를 완전히 끝냈을 때, 자액은 대전의 바닥에 잠자듯 누워 있는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리해라." 명을 내리는 온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몇 명의 흑의인들은 괴물의 얼굴에서 철가면을 벗기고 그 몸뚱이에 엉겨 붙은 핏물을 말끔히 닦아 내었다. 석단 위의 침상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겁면관이 나타났다. 겁면관 안에 담긴 담황색 액체 속으로 괴물의 몸뚱이가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자액은 온이를 바라보았다. 온청면이라 불리는 온이의 얼굴도 백지장처럼 핼쑥하게 변해 있었다. 뭐라고 감사의 말이라도 건네는 게 도리겠지만, 눈앞에서 두 쪽이 난 흑의인을 떠올리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이는 그러한 자액의 심중을 짐작한 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었습니다." 자액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온이의 말대로, 대법을 돕는 흑의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절반쯤은 죽어 버린 목숨인지도 모른다. 흑의인들은 복구할 수 없는 지독한 심령 금제를 당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대법은 그만큼 극비리에 진행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흑의인들의 입장에서도 심령이 제압당해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이 끔찍한 만행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저주받은 자는 대법의 총책임자 자액과 대법의 진행자 온이, 그리고 술사(術士) 막홍, 셋만으로 충분했다. 이 돌발적인 사건의 원인은 곧 밝혀졌다. 대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외상이 전혀 없는 노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막홍은 노인의 사인(死因)이 마비산(麻痺散)의 강한 약효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물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괴물을 가사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한 사람분의 목숨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온이는 대법의 진행자로서 과실을 시인했고, 다음부터는 여분의 제물을 준비해 둘 것을 다짐했다. 칠차대법까지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수는 도합 백스물일곱. 대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구백에 가까운 생명이 더 필요했다. 자액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떤 종류의 죄악은 어떤 종류의 명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7 장 귀환(歸還) 묘왕동주 제 17 장 귀환(歸還) 1 나 홀로 타향 땅의 나그네 되어 명절이 돌아오면 그리운 사람들 고향 땅 형제들 산 놀이 즐기련만 두루 꽂은 수유꽃은 한 송이 부족하리 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遙知兄弟登高處 遍揷茱萸少一人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는 타향 땅의 객수(客愁)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을 중양절(重陽節)의 삽수유(揷茱萸) 풍습에 담아 이렇게 노래했다. 중양절은 중구절(重九節), 혹은 수유절(茱萸節)이라고 한다. 양(陽)의 수인 아홉이 두 번 겹치니 중구절이고,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동절(冬節)의 추위를 막기 위해 산수유 꽃을 머리에 꽂으니 수유절인 것이다. 중양절은 차분한 명절이다.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 가을의 풍요와 겨울의 안온을 기원하며 연을 날리고, 화전(花煎)을 부쳐 먹고 국화주를 마시면서 이 차분한 명절을 즐긴다. 구월 십일일. 명절의 즐거움이 가시기도 전, 태산 장인봉 중턱에 자리잡은 산동장가에는 또 하나의 경사가 찾아왔다. 삼 년 동안이나 가문을 떠나 있던 세가의 유일한 적통(嫡統) 장옥평이 장인봉 아래 조양정(朝陽亭)에 당도했다는 전언이 날아든 것이다. 이 전언을 가져 온 사람은 세가의 젊은 검술교두인 비면검객 시안이었다. 그는 쾌마 편으로 이백여 리를 내처 달려온 탓에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세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양충에 이은 두 번째 영접단이 대행 가주 장후겸의 지휘 아래 장인봉을 내려갔다. 하지만 영접단에 선발되고 선발되지 않고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세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접단을 따라 나섰기 때문이다. 화원을 손질하던 오(吳) 노팔(老八)도, 이불보를 빨던 대(代) 낭낭(娘娘)도, 세가 담장의 깨진 기와를 보수하던 떠꺼머리 쌍둥이 소작(少雀)과 소와(少蝸)까지도... 장인봉 기슭 망우정(忘憂亭)에 영접단이 준비해 온 연석이 마련되었다. 수십 개의 차일(遮日)이 내걸리고, 향기로운 국화주가 줄줄이 옮겨졌다. 하늘은 푸르렀다. 바람은 새털처럼 가벼웠고, 공기는 살구처럼 상큼했다. 가을의 이 아름다운 축복에 감싸인 채, 관도 저편에서 한 폭의 거대한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쪽에서 일어나 구주에 떨친다."은 산동흥진기. 바로 산동장가의 상징이었다. 깃발을 당당하게 치켜 든 사람은 벽력염왕 양충이었다. 그 어깨는 깃폭보다도 넓게 보였다. 양충의 뒤를 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리의 한복판에는 푸른 비단옷에 유생건 차림의 장옥평이 있었다. 하인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고, 노신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몸뚱이만큼이나 해묵은 충성심을 지닌 감규목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장후겸은 그런 감규목에게, "저 아이는 참으로 아버님을 닮았군요."라고 말했다. 감규목은 문득, 작고한 검패 장일기를 떠올렸다. 청수한 이목구비에 깨끗한 장포를 즐겨 입던 그 고아한 모습이 장옥평의 청량한 신태 위에 아련히 겹쳐졌다. 감규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가을날의 축복과 하인들의 환호성과 노신들의 눈물... 그 속에서 장옥평은 돌아왔다. * * * "아!" 장옥평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쪽 벽에는 단출한 옷장 하나, 그 옆에는 책이 빽빽히 들어찬 커다란 책장, 동쪽 벽에는 격자무늬가 아름다운 사창(紗窓), 그 아래로 새하얀 이불보가 넉넉해 보이는 나무침상, 그리고 방 한복판에는 침향목으로 만든 서탁(書卓), 그 위에 놓인 문방구... 삼 년 전과 똑같았다. 모든 가구와 집기는 장옥평의 손때가 묻은 것이고, 놓인 위치 또한 장옥평이 정한 그대로였다. "왜 그러고 있느냐?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등뒤에서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장옥평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 아닙니다, 백부님! 소질(小姪)은 단지 방의 모습이 예전과 너무 똑같아서..." "놀랐단 말이렷다? 허허!" 자애로운 목소리의 주인, 장후겸이 웃자 탐스러운 턱수염이 마치 드넓은 창해(滄海)처럼 보기 좋게 물결쳤다. 장옥평은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후겸은 장옥평이 기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아니, 단지 그 정도 말로써는 장후겸이 지닌 풍부한 느낌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장후겸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부러움을 살 만큼 기품있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장옥평은 조모로부터 장후겸의 모친`-`장일기의 후처`-`에 관해 들은 말이 있었다. 물론 조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방을 꾀어 낸 밉살스러운 요물이었으니 좋은 평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조모는 그녀의 용모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사가인(才士佳人)이 많기로 유명한 항주(杭州)에서도 독보적인 미명을 날렸다 하니, 미움이 아무리 뼈에 사무쳤다 해도 용모에 관해서는 감히 거론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호기협(江湖奇俠)을 부친으로, 오국미녀(吳國美女)를 모친으로 삼은 장후겸... 그 풍모의 비범함은 당연한 일이리라. "저..." 장옥평은 조심스럽게 말머리를 꺼냈다. "마맥회에서 오신 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장후겸은 이 물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손님들은 연화사(蓮花舍)에 모셨지." "연화사?" 장후겸은 빙그레 웃었다. "남쪽 연화지(蓮花池)에 있던 건물은 불타 버렸단다. 그 터에 새로 건물을 올렸는데, 마땅한 이름이 없어 그렇게 지었단다." 장옥평은 잠시 말을 잊었다. 세가의 남쪽에는 여름철이면 수련(睡蓮)이 만발하는 연못이 있었다. 유달리 연꽃을 좋아했던 그의 누님은 매용소와 결혼한 뒤, 연못가에 연리각(連理閣)이라는 집을 짓고 두 사람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았다. 하지만 누님은 이제 세상에 없다. 연리각도 불타 사라졌다. 모두 삼 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후겸이 다시 말했다. "손님들 중에는 상태가 안 좋은 사람도 있는 듯하더구나. 양당(藥堂)의 구(具) 약사(藥師)에게 전갈했으니 적당한 조처가 곧 취해질 게다." "그토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다니, 소질은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장옥평이 허리를 숙이려 하자, 장후겸은 손을 내밀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이게 누구의 집이더냐? 누가 이 집의 주인이더냐? 너는 곧 세가의 정식 가주가 될 몸이다. 예의바른 것도 좋지만, 네 허리는 곧 산동장가의 허리! 함부로 남에게 허리를 숙이는 버릇은 고쳐야 할 것이야." 백부의 온화한 질책에 장옥평은 얼굴을 붉혔다.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장후겸은 예의 보기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 뒤, 품속에서 작은 목갑 하나를 꺼내 장옥평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네 귀가를 축하하는 백부의 선물이다. 여독(旅毒)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장옥평은 목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맑고 새콤한 향기를 풍기는 앵두만한 검은 열매 두 개가 담겨 있었다. "천산(天山)의 설련실(雪蓮實)이지. 옥문관(玉門關)까지 사람을 보내 구해 온 물건이니, 너는 마땅히 고마워해야 할 게다. 사실 이 백부는 겉만 번지르르하지 기실은 빈털터리거든? 하하!" 말을 마친 장후겸은 부드러운 웃음 소리를 흘리며 방문 앞을 떠났다. 장옥평은 목갑의 부드러운 촉감으로부터 혈육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또한 삼 년 만에 대하는 정이었다. 2 금우(金藕)는 요 며칠 동안 깐깐한 시어미를 둔 며느리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며느리는 그였다. 깐깐한 시어미는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꼬마 계집애였다. 당당한 대장부인 그가 며느리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이고, 자식은커녕 애인 하나 없어 보이는 꼬마 계집애가 시어미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왕왕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봐요! 굼벵이도 이보다는 빠르겠어요! 더 빨리는 못 가요?" 마차 안에서 들려 온 짜증 섞인 목소리는 마부석에 앉은 금우의 밸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금우는 표사였고, 표사란 직업은 그 성격상 거친 성질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그는 거친 점에 있어서 자신이 어떤 표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깐족이는 계집애에게 성질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계집애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 금우는 한 번의 큰 심호흡으로 인간이 되었다. "왜 대답이 없죠?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요?" 덕분에 다시금 들려 온 계집애의 짜증에도 느긋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금우였다. "빨리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소저께서 직접 확인하면 될 것 아니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7 장 - 1 묘왕동주 마차 창문에 드리운 휘장이 살짝 걷히며 깜찍한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두 뺨에 팬 보조개가 귀여운 소녀. 바로 석소용이었다. 석소용은 마차 밖을 주욱 훑어보았다. 폭이 열 걸음이 넘는 관도였으니,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시원스럽게 달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차는 달릴 수 없었다. 저만치 앞서가는 만장(輓章)의 물결 때문이다. 어느 고을 부농(富農)이라도 죽었는지 상행(喪行)은 제법 성대해 보였다. 생전에 시주깨나 했던 탓일까? 남남한 독경 소리가 상행의 앞자락을 이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상복, 그리고 상복.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석소용에게 망자에 대한 예우나 부도(浮屠)에 대한 경외심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오라질 놈의 송장, 괜한 사람 앞길을 막고 지랄이야!" 너무도 자연스럽게 욕설을 내뱉고 있는 작고 조그만 입술을 바라보며, 금우는 산동에 있는 아내가 제발 딸년만은 낳지 말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의 성질로 미루어 딸년 입에서 저런 소리가 흘러나온다면, 딸년이 맞아 죽든지 그가 화병으로 죽든지 양자 간에 하나는 반드시 결딴날 것이기 때문이다. "금 아저씨!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죠?" 뾰족한 질책에 금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창 밖으로 얼굴을 빠끔히 내민 석소용은 도끼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딸년 생각에, 석소용을 응시하던 눈길이 자못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아, 아니외다, 소저! 잠시 딴생각을 하다 보니..." "딴생각? 흥! 혹시 둘뿐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점입가경이란 말은 이런 때를 두고 나온 것이리라. 금우는 비록 혈기가 왕성한 나이였지만, 어떤 고기가 말랑말랑하고 어떤 고기가 질긴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질긴 고기를 씹어 평생 재산인 이빨을 버릴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이다. "소저는 이상한 말을 다 하는군. 내가 겨우 그 정도 잡배로밖에 보이지 않소?" 금우는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훈계해 보았지만 씨알이 먹히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뭐가 이상한 말이죠? 사내들은 다 똑같잖아요! 점잖은 척해도 예쁜 여자 하나만 지나가면 침이나 흘리고,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나쁜 짓이나 하려고 하고... 하긴, 사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죠. 단탈이나 박 아저씨 같은 사람은 진짜로 안 그러니까. 나머지는 모두 수캐들이에요!" 수캐가 저지르는 나쁜 짓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 금우는 갑자기 이런 의혹이 들었다. 한번 열린 석소용의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탈도 못됐어!"라고 내뱉은 그녀는, 비난의 화살을 서서히 단탈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지난 십여 일 동안 그녀의 볼이 퉁퉁 부었던 것은 단탈의 한마디에서부터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지켜 준다, 복수해 준다, 지껄이지만 사실은 내가 귀찮았던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하남(河南)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나를 떼어놓고 갈 리가 없지! 하여간에 남자들은 오랑캐건 중원인이건 하나같이 못됐어! 정말 못됐어!" 만장 폭포가 이처럼 요란할까? 귓전을 정신없이 후려치는 석소용의 푸념을 들으며, 금우는 울울한 마음을 어디에다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산동으로 간다고 했지? 가는 김에 이 아이를 옥평의 집에 데려다 주게. 금우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단탈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렇게 말했고, 금우는 그 정도 일이라면 혼자서라도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믿었다. 사람을 호위하는 일은 표사나 보표(保 )의 기본적인 임무였고, 금우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그 임무를 수행한 바 있었다. 그가 부상과 피로에 지친 세 명의 동료에게, "석 아가씨는 이 아우가 잘 모실 테니, 형님들은 일단 치료부터 받고 천천히 올라오시구려."라고 큰소리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금상첨화라고 보수도 쑬쑬했다. 적의 우두머리인 매용소가 노자 조로 건넨 돈주머니는 괴춤이 흘러내릴 정도로 묵직했다. 두둑한 노자는 여행을 즐겁게 만든다. 튼튼한 마차와 기름진 음식, 게다가 푹신한 잠자리. 그래서 금우는 즐거울 수 있었다. 석소용이란 계집애가 한번 심통이 나면 얼마나 다루기 힘든 존재인지 알기 전까지는... 금우는 그답지 않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석소용을 달랬다. "타루가가 소저를 떼어놓은 것은 모두 소저를 위한 것 아니오? 타루가가 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소저도 잘 알잖소? 더구나 타루가에게는 능숙한 길잡이가 따라붙었으니, 소저가 위험을 무릅쓰고 타루가를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아무리 좋은 말도 석소용의 심통을 풀어 줄 수는 없다. 지난 십여 일의 동행으로 그러한 사실을 잘 아는 금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탈을 비호하고 나선 것은, 단탈이야말로 생명의 은인들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소용의 눈이 번쩍 빛났다. 메추리알만큼이나 큼직한 눈을 잔뜩 흘기니, 드러난 흰자위가 가을 햇살을 받아 희번덕거렸다. "흥! 타루가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타루가! 입 밖에 내뱉은 말도 못 지키는 게 무슨 왕이야! 단탈은 분명히 나한테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장담했단 말이야! 그런데 제 마누라 얘기가 나오니까 약속 따위는 나 몰라라 길거리에다 내팽개쳐? 게다가 뭐? 마누라 찾을 동안 나는 산동에나 가 있으라고? 염가 할망구가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인간이 그따위 소리를 해? 흥! 흥! 정말 흥이다!"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의 독설을 숨 한번 들이키지 않고 단숨에 끝내 버리는 석소용을 보며, 금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탄식밖에는 없을 것이다. 성질도 더러운 데다가 변덕까지 죽 끓듯 하는 계집애였으니, 그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 아침 나절 평읍(平邑)의 객사(客舍)에서 밥상을 받을 때에는 전혀 다른 내용의 신경질을 부리던 그녀였다. 말썽의 발단은 돈 많은 손님을 대접한답시고 객사 주인이 특별히 내놓은 상아젓가락, 그 위에 자리잡은 생생한 봉황 무늬였다. 당시, 젓가락을 바라보던 석소용의 눈매가 점차 가자미의 그것을 닮아 가는 것을 지켜본 금우는 한 가닥 짙은 불길함을 예감했다. 그리고 시작된 욕설. 물론 봉황을 이름 대신 사용하는 염가 할망구에 대한 욕설이었다. 석소용의 욕설은 뱃속에 들어간 밥알들이 거꾸로 곤두설 정도로 지독했다. 덕분에 금우는 값비싼 요리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석소용의 신경질은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그녀는 오전 내내, "빨리 산동장가에 도착해서 염가 할망구를 박살내 줘야지!"라는 말도 안 되는 허풍과 함께, "길 떠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여기밖에 못 온 것은 금 아저씨의 말 부리는 솜씨가 형편없기 때문이야!"라고 투덜거려, 마구간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금우의 자존심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난데없이 수캐 운운하더니 급기야 산동장가를 향한 행보 자체를 가지고 짜증을 부리는 데에는, "나는 귀머거리다."라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되뇌던 금우조차도 손발 모두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성질 더러운 변덕쟁이는 기억력마저 그리 좋지 못했으니, 가는 길이 더디다고 불평하던 조금 전의 제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문득, 금우는 석소용의 푸념과 짜증과 욕설과 변덕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하지만 목적지인 태산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열흘 길, 지옥 같은 이 임무는 아직 절반 가량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정말 싫다!' 금우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관도 앞쪽을 가로막고 있는 상행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상행은 잿빛의 거대한 굼벵이처럼 보였다. 마차가 시원하게 달려 줬다면, 그래서 석소용의 작은 머리통이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불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라질 놈의 송장, 괜한 사람 앞길을 막고 지랄이야!" 급기야 금우는 석소용이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 * * -`물고기가 물을 잃었으니, 나는 이제 어떻게 살꼬! 바투우의 죽음을 전해 들은 비연리는 이렇게 울부짖으며 제 방에 틀어박혀, 꼬박 하루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평소, "나는 부모가 죽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독종이었지."라며 자신의 독함을 수하들에게 주지시키려 애썼던 비연리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바투우에 대한 그의 마음이 이미 주종지간(主從之間)을 초월한 상태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 만에 침소에서 나온 비연리의 두 눈은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얼마나 코를 풀어댔는지 콧방울의 허물도 절반 가량이나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슬픔은 어느 정도 가신 것 같았다. "간 사람이야 갔다 쳐도, 산 사람은 먹어야 살지."라고 중얼거리며, 굶주린 위장의 고통을 호소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제는 거의 유일한 심복이 되다시피 한 눌연수사 두의는 이 가련한 주인을 위해 식탁을 마련했고, 비연리는 앉은자리에서 삶은 돼지고기를 두 근 반이나 먹어 치운 뒤에야 포만감 어린 긴 숨을 토해 냈다. 식탁을 물린 비연리는 느끼하다고 투덜거리면서, 조계광을 불러오라고 말했다. 조계광이라면 기세 등등하게 총단을 떠났다가 동료들의 줄초상을 알리는 부고장(訃告狀)을 들고 돌아온 문제의 전령이었다. 두의는 "이제야 움직일 마음이 동하셨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조계광에게 사람을 보냈다. * * * 개구리를 먹으려면 박박 씻어야 하지 살갗이 미끌미끌 매운기가 있기 때문 한 번 씻고 두 번 씻고, 아이고 맛있구나`-` 개구리를 먹으려면 박박 씻어야 하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는 중원의 여느 아이들과는 그 생김새부터가 자못 달랐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 유달리 짧은 인중, 두툼한 입술... 뱀이 물었다. 자국을 보니 독뱀이구나 안 자르면 죽는다. 죽으면 안 되지 한 뼘 두 뼘 이쯤에서 자르자. 아이고 아프구나`-` 아프기 싫으면 물리지 말아야지 나라아합은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라는 후렴을 부를 때마다 코를 씰룩거리며 인상을 쓰는 아이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래서 그녀는 참지 못하고 두 팔을 벌렸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7 장 - 2 묘왕동주 "미오, 이리 오렴. 엄마가 안아 주마." 까마귀, 개구리, 뱀 등으로 시작되는 괴상망측한 연가(連歌)를 신나게 부르던 아이, 미오는 쪼르르 달려가 나라아합의 품에 답삭 안겼다. "헤헤! 나 노래 잘하죠?" 미오는 나라아합의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기며 자랑하듯 말했다. "그래, 아주 잘하더구나. 누구한테 배웠니?" "누우(累尤) 아저씨요! 아저씨 부족의 아이들은 이 노래를 외우지 못하면 숲에 들어갈 수 없대요. 으음... 그리고 아저씨는 동물들이 어떻게 우는지도 가르쳐 줬어요. 한번 들어 볼래요? 까마귀는 날개로 날지, 날면서 괘울괘울! 개구리는 뒷다리로 뛰지, 뛰면서 까욱까욱! 뱀은 배때기로 기지, 기면서 씨롯씨롯!" 나라아합은 풋, 웃었다. "미오는 엉터리야. 까마귀는 까욱까욱 울고, 개구리는 괘울괘울 운단다." "어? 그런가?" 미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라아합은 그런 미오를 품속 깊숙이 끌어안았다. 진짜 부모의 얼굴은 기억하지도 못한 채 나라아합 하나만을 의지하며 자라나는 팔병신 미오. 머리 하나만은 유난히도 영특한 탓에 나이가 들수록 재롱이 여간 아니다. 귀여울수록 가여움도 커지는 법이어서, 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의 살 내음을 맡고 있는 미오를 내려다보며, 나라아합은 가슴 한구석을 아리게 파고드는 비애를 느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두 사람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콰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침상 우측에 나 있는 작은 쪽문이 산산이 부서지고, 핏물로 범벅이 된 사람 하나가 나무 파편과 뒤섞여 방안으로 굴러 들어온 것이다.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나라아합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휑하니 뚫린 두 눈, 수염 한 올 찾아볼 수 없이 맨질맨질한 코밑과 턱. 그 사람은 누우였다. 과거 을온족의 이름난 사냥꾼이던, 하지만 지금은 남성과 시력을 동시에 제거당한 채 비참하게 살아 가는, 조추림과 나라아합 사이의 통역관 누우였다. "무슨 일이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짓을 했나요?" 누우에게 달려간 나라아합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우의 전신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뒤덮여 있었다. 특히 등줄기 한복판을 횡으로 길게 가르고 지나간 자상은 그녀가 보기에도 치명상 같았다. "나, 나라... 아합...! 나, 나는...!" 누우가 입을 벌리자 거품이 섞인 핏물이 흘러나왔다. "아, 아니에요. 말하지 말아요, 누우." 나라아합은 황급히 누우의 말문을 막은 뒤, 들썩거리는 그의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나라아합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자신과 누우가 하나의 몸, 하나의 영혼이 되기를 기원했다. 누우가 느끼는 모든 고통이 가녀린 두 손을 타고 자신에게 건너올 수 있기를 기원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기원은 무량한 자연의 법칙과, 신비한 생명의 힘과, 아합이 상징하는 어머니의 따듯한 이름으로 받아들여졌다. 손목이 떨려 왔다. 이어 수십 자루의 칼날 아래 난자당하는 듯한 무서운 고통이 그녀의 몸으로 밀려들었다. 나라아합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겪는 고통이 괴로워서가 아니었다. 누우는 살아날 수 없었다. 그녀가 지닌 힘이 아무리 신비하다 할지라도, 척추의 절반이 끊어진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이처럼 무서운 고통의 늪을 헤매야만 하는 누우의 운명이 너무나 가련해서 눈물을 흘렸다. "엉엉! 누우 아저씨, 많이 아파요? 죽으면 안 돼요! 어엉!" 미오도 울고 있었다. 재미있는 노래와 동물들의 울음 소리와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쪽 고향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 주던 마음씨 좋은 누우 아저씨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목이 메도록 울고 있었다. 이때 굳은살 박힌 커다란 손이 미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들리는 누우의 목소리. "미, 미오... 울지 마라. 아저씨는 괘, 괜찮아." 들썩거리던 누우의 가슴은 어느덧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꼬옥 누르고 있는 나라아합의 손목을 잡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 어서... 어서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나라아합으로부터는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누우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얼굴에 떨어지는 따듯한 물방울...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쳐 올라왔다. 비록 눈이 없다 한들, 그 물방울이 나라아합의 눈물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몸과 영혼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까지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나라아합의 눈물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라아합, 어, 어서 피하세요! 나쁜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마(馬) 어른과 목(木) 어른이 입구에서 막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겁... 으윽!" 누우는 피를 토하듯 외쳤다. 하지만 나라아합은 누우의 가슴에서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손을 떼면 누우의 생명은 촌각도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아합`-`!" 누우는 마지막 생명을 끌어올려 절규했다. 그 순간... 쾅! 방문이 터져 나갔다. 이어 누우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아아!" 누우의 입에서 절망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 번의 손짓으로 화려하게 꾸민 방문을 박살낸 비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 길게 누운 장님 사내, 사내의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은 남국(南國)의 미녀, 그 곁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꼬마... 문득, 비연리는 방안의 공기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을까? 비연리는 곧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의 공기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국의 미녀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우울하게 만드는 짙은 슬픔은 바로 그녀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는 목덜미, 부드러운 어깨,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노산(勞山)의 신선이 가진 병에서는 미주가 끝없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신기한 병이었다. 다만 미주가 아니라 슬픔을 토해 낼 뿐이다. 비연리는 넋을 놓은 채 그녀가 만들어 내는 슬픔의 세계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비연리의 뒷전에 서 있던, 비연리보다는 냉정한 성정을 지닌 두의였나 보다. "에... 부주님. 뭐라고 말씀하셔야 될 줄..." 두의의 어눌한 말투에 비연리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한낱 계집이 흘리는 염태(艶態)에 미혹당해 수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화도 났지만 신기한 마음이 더 컸다. 자신이 누군가! 삼마의 유일한 생존자 이화신마 비연리가 아닌가! 그런 자신을 단박에 홀려 버리는 계집이라면, 변덕쟁이 조추림이 간, 쓸개 모두 빼놓고 삼 년 동안이나 애태우는 것도 아주 이해 못 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어쨌거나 구긴 체면과 뺏긴 기선은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네가 나라아합이라는 계집이냐! 요망한 년 같으니라고! 감히 뉘 앞에서 청승을 떠는 게냐?" 비연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렁찬 호통과 함께 들고 있던 물건을 나라아합에게 던졌다. 공처럼 데굴데굴 구르던 물건은 그녀의 발치에 이르러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물건을 보았다. 반쪽이 시커멓게 그을린 사람의 머리통... 살아생전에는 한 자루 검은 채찍을 잘 써서 독사편(毒蛇鞭)이라는 명호를 얻었던 청년 고수 목인걸(木仁傑)은, 이렇게 흉측한 수급으로 변해 나라아합의 치맛자락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입구를 지키던 마중산(馬重山)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오살(五殺) 따위가 너를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모양이냐? 하지만 네가 믿던 놈들은 하나같이 수수깡이었지! 두 합을 버틴 놈이 없더라, 이 말이다!" 사실 비연리의 언행에는 과장된 부분이 많았다. 오살`-`삼 년 전 묘강에서 다섯 동료를 잃기 전에는 그 이름도 당당한 십살(十殺)이던`-`은 비록 쓸 만한 위인들이지만, 수좌인 귀면도 남력을 제외한다면 이화신마는커녕 그 뒷전에 서 있는 두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삼류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오살의 한둘을 해치운 것따위를 가지고 저렇게 으쓱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을 모를 리 없는 비연리라면, 그가 억지로 언행을 과장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평범하게 나간다면 나라아합이 지닌 신비한 분위기에 휘말려 아무것도 못 할지 모른다는 미묘한 위기감 때문이 아닐까? 나라아합은 한어에 그리 능통하달 수 없지만, 그래도 한인과 의사 소통을 하기에 큰 지장이 없는 수준은 되었다. 덕분에 비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에 대해 그녀에게 충분히 피력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하던 바대로 말이다. 문제는 그녀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냉큼 일어서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정녕 노부가 손쓰기를 바라는 거냐?" 비연리는 지금까지의 기세를 살려 나라아합을 향해 호통쳤다.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색한 억양이 오히려 아름답게 들리는 한어가 나라아합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비연리는 흠칫 어깨를 떤 뒤, "감히 뉘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라든지, "어른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느냐?"라는 등, 상황과 무관한 호통을 쉬지 않고 질러댔다. 그러나 비연리는 이미 나라아합이 지닌 신비한 능력에 사로잡힌 뒤였다. 그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하여간 감정 하나는 풍부한 노인네라니까...' 두의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7 장 - 3 묘왕동주 * * * 결국 누우는 죽었다. 자신의 육체로 밀려들던 무시무시한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순간, 나라아합은 누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라아합은 누우의 가슴에 얹고 있던 두 손을 살며시 떼었다. "엄마,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 미오가 물었다. 미오는 눈물과 콧물에 휩쓸려 절반쯤 흘러내린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미오의 머리를 가슴 깊이 끌어안고 몇 방울 눈물을 떨구었을 뿐이다. 문득, 방문 밖이 어수선해졌다. 간간이 들리는 소음은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비연리가 데리고 온 마부의 수하들이 방문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듯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소음은 곧 가라앉았다. 그리고 장중한 도호(道號)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원시안진(元始安鎭)!" 몽롱하게 풀어져 있던 비연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귓전을 울리는 저 도호성은 참으로 고약한 인간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묵을 대로 묵은 생강이어서 이내 안색을 펴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는 말까지 녹신녹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허! 고매하신 우사(羽士)께서 지분 냄새나는 규방에는 어인 일이시오?" 행여 옷자락이라도 찢길까 조심스러운 거동으로 부서진 문짝을 넘어온 사람은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도사였다. 그는 오른손에 든 불진으로 한차례 허공을 휘저은 뒤, 다시 한 번 도호를 뇌까렸다. "원시안진! 옥내(屋內)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는 말에 빈도가 이렇게 늙은 몸뚱이를 끌고 나왔소이다. 한데, 알고 보니 비 부주께서 벌이신 일이었구려." 이어 노도인은 저만치 굴러다니는 목인걸의 수급과 잠자듯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는 누우의 시신을 일별했다. 학의 깃털처럼 새하얀 노도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쯧쯧, 무지한 아랫것들이 비 부주의 노여움이라도 샀던 모양이구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손속이 좀 과하셨던 감이 있소이다. 원시안진, 원시안진!" 시신들을 향해 불진을 떨치며 나직이 도호를 읊조리고 있는 노도사는 한마디로 굉장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한 자가 넘는 태극보관(太極寶冠), 몸에는 비단으로 만든 하피(霞 :도사가 입는 치마 모양의 겉옷), 왼손에 쥔 것은 신명을 받드는 옥간(玉簡)이요, 오른손에 쥔 것은 청정(淸淨)을 상징하는 불진이다. 어디 그뿐이랴? 등에 멘 것은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보검(闢邪寶劍)인데, 허리춤에서 출렁거리는 주머니에는 요물을 쫓아 내는 신감(神鑒:도사가 지니고 다니는 거울)이 들어 있으리라. 이야말로 "내가 바로 도사 아닙니까?"라며 광고하고 다니는 격... 도가 명문 무당파의 전대 장로, 적양우사의 차림새는 언제나 이렇게 거창했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이 괴물에게 고자질한 거지?' 비연리는 어금니 쪽의 입 안 살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비연리는 옥주 철면신이 없는 철옥 총단에서 왕이나 다름없었다. 왕이라 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고, 또한 그를 왕처럼 떠받들어 주는 부하들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못마땅한 일은, 그런 힘과 부하들을 지닌 왕이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눈엣가시와도 같은 또 하나의 왕. 늙어 죽지도 않는 괴물. 적양우사가 바로 그였다. "험! 험! 일전에 차나 한잔 얻어먹을까 선운각(仙雲閣)에 들러보았지요. 그런데 단실(丹室)에 들어가셨다 하여 차는커녕 맹물 한잔 못 얻어먹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소이다. 그래, 하시던 일은 잘 돼 가십니까?" 비연리는 눈을 내리깔고 느물느물 말했다. '보잘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제 와서 여기는 웬일이냐? 괜한 일에 참견하려들지 말고 네 일이나 제대로 해라!'는 뜻이다. 하지만 묵은 햇수로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뒤질 리가 없는 적양우사가 아닌가! 그는 온화한 안색으로 비연리의 풍자를 받아 쳤다. "노도(老道)의 연단이야 어차피 원숭이 장난 같은 것, 잘되고 못 되고가 어디 있겠소." 비연리의 얼굴이 조금 노래졌다. 스스로의 생김새가 원숭이와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은, 걸음마를 뗄 무렵 알아 버린 우울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유난히 원숭이 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이화신마라는 이름을 얻은 뒤에는 누구도 감히 면전에서 원숭이 소리를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헐, 허허! 우사께서는 검만 매서우신 줄 알았더니, 농담도 잘 하십니다그려." "그저 노망난 늙은이의 주책이지요." "허, 허헛!" 의미없는 웃음으로 말을 얼버무린 비연리는, 이 순간 머리가 깨져 나갈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엉덩이 무거운 괴물이 이곳까지 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혹시 나라아합의 신병을 확보해 달라는 매용소의 전언이 새어나가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면, 말한 것처럼 이곳에서 벌어진 소란을 우연히 전해 듣고 호기심에 못 이겨 찾아온 것일까? 비연리는 다시 생각했다. 하기야 무엇이 저 괴물을 움직였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저 괴물은 이제 어떻게 할 참인가? 등에 멘 보검을 으쓱거리며 그의 일을 노골적으로 저지할 속셈인가? 아니면 몇 마디 말로써 점잖게 훈계하려 들 것인가? 이런 유형의 사고는 그 성격상,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비연리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폭주하는 사고량이 그의 두뇌가 소화해 낼 수 있는 한계량을 초과해 버린 것이다. 이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구원자의 정체는, 비연리 본인은 펄쩍 뛰며 부정하겠지만, 모든 강호인들로부터 비연리의 두뇌임을 인정받은 말더듬이 모사 두의였다. "에... 우사께서는... 아니, 아니지. 그러니까 저희 부주께서는 저 여인을 신양(信陽)으로 모셔 가려고 하시는데... 신양에는 저 여인을 애달프게 기다리는 조추림 공자가 있지요. 에... 우사께서는 그 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한다!' 물론 입 밖에 내서 한 말은 아니지만, 비연리는 두의를 향해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조금 직설적인 감이 없지는 않지만, 적양우사 같은 능구렁이에게는 두의처럼 정공법으로 나가는 편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신양에 조추림이 있다는 말도 아주 적절했다. 그에게 데려다준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속인 것은 아니지만, 듣기에는 마치 계집을 제 서방에게로 데려다 준다는 뜻 같지 않은가? 수십 년 곪은 정(精)이 골수까지 스며 있을 늙다리 말코가 젊은 남녀 사이의 애틋한 정사(情事)에 감히 뭐라고 참견할 것인가! 적양우사도 그렇게 생각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노도가 간섭할 성질의 일이 아닌 듯하구려." 비연리는 크게 웃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 내며 적양우사의 말을 거듭 확인했다. "그렇지요? 우사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이어진 적양우사의 말이 너무도 뜻밖이어서, 비연리의 입은 쩍 벌어지고 말았다. "마침 옥주께서 선부의 인마를 이끌고 신양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리셨소이다. 기왕 가는 길이라면, 선(仙)·마(魔) 양부가 동행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 같소만... 비 부주의 고견은 어떠시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비연리는 가까스로 벌린 턱을 다물고는 두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저 일에 대해 아는 바 없냐?"은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두의는 고개를 저음으로써, "전혀 아는 바 없다."라고 대답해 왔다. 비연리는 등줄기 홈을 따라 눅눅한 식은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사실 적양우사를 떼어 버리기란 단지 귀찮은 일일 뿐, 그다지 큰 문제는 될 수 없었다. 문제는 옥주의 명령이 적양우사에게만 하달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가지 중대한 상황을 시사하고 있었다. 옥주 철면신은 이미 비연리의 역심(逆心)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꿀꺽. 비연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망막에 한 사람의 모습이 확대되어 오기 시작했다. 후리후리한 몸뚱이를 휘감은 묵빛 장포, 얼굴을 가린 시커먼 철가면. 비정한 '흑(黑)'과 단단한 '철(鐵)'로 대변되는 공포의 상징 철면신... 십여 년 전의 어느 날, 천하의 이화신마를 삼십여 초만에 흙바닥에 메다꽂던 철면신은, 이름 그대로 철면(鐵面)을 지닌 신(神), 그 자체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제 17 장 - 4 묘왕동주 3 첫날 번거롭던 만찬과는 달리 둘쨋날의 저녁은 조촐했다. 장옥평은 일신상의 피로를 이유로 사양했고 이에 마맥회의 손님들도 휴식을 원하고 나선 탓에, 연회 자체가 취소돼 버린 것이다. 그러자 대행 가주 장후겸은 이것으로써 환영연이 모두 끝났음을 선포했다. 명문인 산동장가의 환영연치고는 그 기간이 지나치게 짧은 감이 없지 않지만,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일이 미주가효(美酒佳肴)와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복수와 설한(雪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술시(戌時) 초. 장옥평은 그의 방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검박한 식사를 마친 장옥평은 아침 나절 묘당(廟堂)에 올린 네 개의 위패에 관해 생각했다. 세가원들이 향불을 피운 것은 육염명의 이름자가 쓰인 위패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머지 세 위패 위에는 그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옥평은 달랐다. 그는 세 위패 위에 쓰인 이름들을 잘 알고 있었다. 단탈, 박한, 그리고 석소용. 이들 세 사람은 그의 친구였다. 그가 가장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 주었던 전우였다. 그런데 어찌 그가 이들 세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 양충의 범선 위에서 세 사람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장옥평은 하늘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과 비탄에 잠겼다. 마봉황 염산산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장옥평을 무사히 피신시키기 위해 적의 주력이 웅크리고 있는 죽음의 호수로 돌진했다고 한다. 이때, 장옥평은 입술을 짓씹으며 호수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양충의 의견은 그와 달랐다. 이 충성스러운 노신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까스로 되찾은 세가의 적통을 한시라도 빨리 세가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이에 마봉황이 적 세력의 강대함을 이유로 들며 양충을 지지하고 나섰고, 중론(衆論)은 싸움을 피해 산동으로 가는 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결국 선단은 뱃머리를 돌렸고,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난 구월 십일일, 장옥평은 한 줄기 깊은 죄의식을 가슴에 새긴 채 산동장가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오늘 아침 장옥평이 그들의 위패 앞에서 그리도 섧게 통곡한 것도 모두 그러한 죄의식의 발로였다. 그래서 그는 울었다. 풀어헤친 머리가 봉초(蓬草)처럼 뒤엉키도록, 찧어댄 이마가 짓물러 벗겨지도록, 쉬어 버린 목구멍에서 꺽꺽거리는 소리만 나오도록... * * * 백부 장후겸이 선물한 천산설련실은 능히 영약이라고 부를 만큼 그 효능이 무궁했다. 한 시진 남짓한 운공을 마치자 운하에서 입은 화독과 내상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다. 운공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 할 때, 장옥평은 방문 밖에 내걸린 은방울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찾아온 사람은 세가의 오대가신`-`육염명이 죽었으니 이제는 사대가신이라 불러야 마땅하겠지만`-`중 가장 나이가 많은 감규목이었다. 가신이라고는 하지만, 감규목은 조부 장일기와 청춘을 함께 보낸 세가의 큰어른이었다. 장옥평은 옷매무새를 정히 하고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오갔다. 감규목은 장옥평이 세가를 떠나 보냈던 삼 년에 대해 퍽 궁금해 했기에, 장옥평은 긴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묘강에서 목숨을 건진 과정, 약흠의 소개로 석삼도의 비검을 배운 일, 형산에서의 혈전과 마맥회와의 만남, 그리고 운하에서 벌어진 비극 등... 감규목은 매대목마다 감탄을 연발했고, 그 과정에서 한 주전자의 식은 차가 두 사람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이 정도면 한밤의 담소치고는 긴 셈. 장옥평은 곧 노인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인은, "공자께 보여 드릴 물건이 있소이다."라는 말로 장옥평의 예상을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어떤 물건이죠?" 장옥평이 물었다. 그러자 감규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두른 요대를 풀기 시작했다. 폭은 한 뼘 남짓, 값비싼 홍옥(紅玉) 장식이 달린 커다란 요대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감규목의 행동을 지켜보던 장옥평은 어느 순간, 그 요대가 재미있게 설계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쌍의 주름진 손에 의해 뒤집어진 요대는 그 안감에 얄팍한 물건을 넣게끔 두 겹으로 고안되었던 것이다. 과연 감규목은 요대의 안감을 들추고 어떤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방충유(防蟲油) 먹인 가죽으로 감싼 여러 장의 양피지였다. 감규목이 내민 양피지들을 한참 동안 살펴본 장옥평은, 그것이 어떤 거대한 건축물의 내부도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본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듯... 그러나 앞부분 몇 장이 뜯겨 나간 탓에 다른 사항`-`건축물의 목적이라든지 위치 등`-`에 관해서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감 아저씨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걸 보면 대단히 귀한 물건이겠군요. 대체 뭘까요? 아까 백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의혈당 서문 당주가 무왕총도(武王塚圖)의 전반부를 손에 넣었다던데... 설마 그 뒷부분이라도 되는 것은 아니겠죠?" 장옥평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감규목은 전혀 웃지 않으며 대답했다. "맞소이다." 장옥평의 얼굴에 머물던 웃음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감규목은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또박또박 덧붙였다. "그것은 스물여덟 장 무왕총도(武王塚圖) 중에서 후반부 스물 석 장이라오." 이어 그는 스물세 장의 양피지가 어떤 연유로 하나의 화려한 홍옥 요대 속에서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들려 주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긴 이야기였다. < 제2부 중권 끝 >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중권 연재 끝 묘왕동주 2부 중권의 연재가 모두 끝났습니다. 하권을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8 장 추격(追擊) 묘왕동주 제 18 장 추격(追擊) 1 "대왕곤? 사천의 그 흉악한 외눈박이 강양대도(江洋大盜) 말이냐?" 오만상을 찌푸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사람은 두 가닥 가느다란 콧수염이 어딘지 간사한 느낌을 주는 오십대 초반의 말라깽이였다. 난쟁이 소리나 간신히 면할 정도의 단구(短軀)에 걸친 요란한 전포(戰布)는 배우처럼 우스꽝스럽기만 한데, 허리에 찬 장군검은 그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 준다. 이자가 바로 중도유수사의 총병(總兵), 정사품 무장 배낙유(裵洛有)였다. "바로 그자입니다. 잠상(潛商)을 적발하기 위해 포구에 침투시킨 변복(變服) 수하가 놈의 얼굴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딱딱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사람은 중도유수사 휘하의 젊은 참장(參將) 이연심(李淵心)이었다. 이연심의 펑퍼짐한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관병에게 있어서 대왕곤이라는 이름은 녹림과 수상을 통틀어 반드시 주살해야만 하는 네 명의 대도 중 하나. 밀품을 몰래 빼 파는 잠상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거물이었다. 잡기만 하면 전장에서 적의 장수를 참한 것과 같은 공적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공명심에 불타는 젊은 무장 이연심이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불행히도 배낙유라는 위인은, 막하에 거느린 중도유수사 칠천 관병의 등등한 기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겁쟁이 중의 겁쟁이였다. 오직 평안무사(平安無事)로 임기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심약하기 짝이 없는 졸장부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대도 대왕곤이 출현했다는 보고는 전란(戰亂)이 일어났다는 보고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지금 어디까지 허물어졌느냐? 설마 이 유수사 앞의 방어선까지 뚫린 것은 아니겠지?" 배낙유의 호들갑에 이연심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놈은 소형선 한 척으로써 오하진(五河津)의 포구를 통과했습니다. 회남 방향으로 이동 중인데, 일행의 수가 열 명 안쪽이라고 합니다." "소형선 한 척?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놈이 얼마나 교활하고 난폭한지 아느냐? 분명히 떼거지를 이끌고 왔을 거야!" 그러더니 배낙유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아! 이 일을 어쩌지? 못된 놈 같으니라고! 도적질을 하려면 해먹던 곳에서 할 것이지, 여기는 뭐 하러 와?" 배낙유는 이연심의 보고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거기다 대고 계속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연심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 참장! 소형선 한 척이 전부라는 게 사실인가?" 통병의 집무실로 들어선 사람은 이연심과 같은 직급의 참장이었다. 하지만 실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연심과는 달리, 그는 기생이나 옆에 끼고 좋은 세월을 보내며 간간이 들어오는 뇌물이나 챙기는 전형적인 오리배였다. 하지만 이연심은 감히 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나이 차도 스무 살이 넘는 데다가, 내명부(內命婦)의 실세로 알려진 양비(梁妃)의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촌 형 양충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닷새 전에야 간신히 유수사로 복귀한 정육품 참장 양관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소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니까!" 이연심의 딱 부러지는 대답과 배낙유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흐음! 이것 봐라?' 양관태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배낙유의 안일주의는 유명한 것이니 그의 말이야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반면에 이연심은 혈기가 지나치게 왕성하다는 것을 빼고는 흠잡을 데가 없는 훌륭한 군인이었다. 이연심이 저리 장담한다면 그에 걸맞는 근거가 있을 터. 대왕곤이라는 거물은 정말로 소형선 한 척 위에 달랑 몸을 싣고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연심은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공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래서 양관태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 있냐니까?" "오하진 포구를 통과한 것이 오늘 아침이라고 하니 지금쯤이면 봉양부(鳳陽府)를 지날지도..." "봉양부라..." 양관태는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두어 번 꼰 뒤, 이윽고 크게 선심 쓰는 투로 말했다. "안 그래도 통병님의 허락도 없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송구하던 참인데, 놈이라도 잡아 그 죄를 씻어야겠네." 배낙유가 반색을 했다. "참말인가? 자네가 할 수 있겠나?" "소장이 누굽니까? 천하의 양관태 아닙니까? 정병(精兵) 삼십 명만 주시면 당장에 놈의 수급을 베어 오겠습니다." "삼십이든 삼백이든 마음대로 갖다 쓰게! 그리고 이 참장! 자네가 양 참장을 도와 주게나!" 이연심은 크게 실망했다. 일찍부터 무과에 뜻을 두고 정진한 탓에, 병기십팔반(兵器十八般)을 다루는 것으로 말하자면 중도유수사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는 그였다. 강호의 일류고수라면 모를까 상대가 수적 나부랭이라면 결코 뒤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터. 그래서 이번 기회에 큰 공을 세워 보려 한 것인데, 얌체 같은 양관태가 중요한 대목에서 불쑥 끼여든 것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공은 공대로 양관태에게 빼앗기게 생겼으니, 그가 어찌 실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연심 또한 권력의 생리를 안다. 전공(戰功)에 대한 욕심으로 양관태라는 세도가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 공직(公職)을 하루 이틀 하고 말 생각이 아니라면 혈기를 억누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소장이 앞장서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에 맥이 풀리는 것만은 이연심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정병 삼십 명이면 된다는 말은 어차피 허세였다. 양관태는 신강(新疆)에서만 자란다는 취렵총(翠 ) 위에 떡하니 올라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가을 햇살 아래 번쩍거리는 창날들의 광채가 그의 눈을 아리게 했다. 창날의 숫자는 자그마치 일백. 왁살스럽기로 소문난 도부수(屠夫手) 열을 따로이 데려왔으니, 병사만 백십 명을 차출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중부유수사 일등 고수라는 이연심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 이 정도 인원이면 뭍으로 오른 물고기 몇 마리를 때려잡는 데에는 충분하다 못해 오히려 과하다고 할 수 있는 전력(戰力)이 아닌가!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어! 흐흐!' 양관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창창한 관로(官路)를 밟을 만한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배경이라 할지라도 손톱만큼의 공도 없는 인간을 고위직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그 점을 항상 아쉬워하던 그였으니, 불쑥 나타난 대도 대왕곤의 존재란 그를 저 찬란한 고지로 인도해 줄 길잡이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잠시 후 하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갈림길 주변을 살피던 이연심이 한 그루 측백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몽(曹蒙)이 흑호(黑號)를 남겼군요." 지상으로부터 한 길 반쯤 되는 나뭇가지 아래로 몇 개의 매듭이 달린 붉은 헝겊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흑호, 밀정들이 이용하는 암호가 바로 그것이다. 이연심은 붉은 헝겊의 매듭 수를 꼼꼼이 세어 보았다. "놈들은 반나절쯤 전에 이곳을 통과했습니다. 서북쪽이니... 낙성교(落星橋) 쪽으로 간 모양입니다." "낙성교라고? 그 건너편에는 철가장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요." 양관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철가장은 오륙 년 전엔가 강남에서 이주해 온 철씨 성을 지닌 상인이 세운 장원이었다. 부촌으로 소문난 소주(蘇州)에서도 큰 주루를 몇 개씩 경영했다는 철 대인은, 경력만큼이나 장사 수완이 좋았다. 관부의 연줄을 끌어대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장사 수완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회양 일대에서 그의 주머니를 한 번쯤이라도 받아 보지 않은 관인은 드물었다. "이 수적 놈이 혹시 비적질까지 하려는 게 아닐까?" "워낙 간이 큰 놈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연심의 대답에 양관태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유달리 씀씀이가 호쾌하던 철 대인이다. 지금까지의 정리(情理)는 둘째치고라도, 철 대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큼직한 돈 구멍 하나가 막히게 되는 셈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어서 가세!" 양관태는 이연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 궁둥이에다가 매운 일편을 가했다. 오하진의 포구에서 대왕곤을 발견한 뒤 이백여 리를 끈질기게 미행한 관의 밀정은 조몽과 신흘(申屹)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연심 휘하의 하급교리(下級校吏)인데, 조몽은 나이가 많아 둔한 반면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뛰어났고, 신흘은 나이가 어려 날랜 반면 경험이 부족해 실수가 잦았다. 밀정 일이란 본디 성정에 큰 영향을 받는 터라, 이연심이 믿는 것은 풋내기 신흘보다는 노련한 조몽 쪽이었다. 더욱이 조몽은 과거 사천에서 근무할 당시, 장강육어의 토벌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어서 대왕곤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흑호가 매달린 갈림길에서 동북쪽으로 사오 리쯤 떨어진 관도 위에서, 이연심은 두 명의 밀정 중 신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신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은 허름한 변복 때문도 아니요, 챙이 넓은 방갓 때문도 아니었다. 하기야 거치적거리는 베옷은 어디엔가 벗어 던진 뒤였고, 방갓도 갓끈이 목에 걸린 채 등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 그런 것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연심이 아끼는 아랫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 토사 곽란이라도 앓은 사람처럼 핼쑥하게 변해 버린 그 얼굴이, 평소 재기 넘치던 신흘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신흘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하여 이연심의 관병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관도 밖으로 달아나려 하겠는가. "신흘!" 이연심은 큰 소리로 신흘의 이름을 불렀다. 바삐 움직이던 신흘의 두 다리가 우뚝 멈췄다. "신흘! 나다, 나! 네 상관 이연심! 왜 도망치는 거냐?" 이연심 쪽으로 돌려진 신흘의 얼굴에는 실로 다채로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공포가, 다음에는 놀라움이, 그리고 안도감이... "참장님! 정말로 참장님이셨군요!"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8 장 - 1 묘왕동주 신흘은 울부짖듯 외치며 이연심을 향해 뛰어왔다. 마치 모진 일을 당한 아이가 아버지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연심은 갑자기 십 년은 어려진 것 같은 수하의 행동에 의구심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왜 미행을 그만둔 거지?" 이연심의 질책 어린 추궁에도 불구하고 신흘의 나이는 쉽게 회복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연심이 탄 밤색 말의 앞다리에 와락 매달리며 눈물 콧물을 쏟아 부었다. "쇤네는 이제야 살았습니다! 이제야 살았어요!" 말이 좋아 "이제야 살았습니다!"이지, 이연심이 급히 고삐를 추스리지 않았다면 놀란 말의 발굽에 밟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연심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놈! 정신차리지 못할까! 이게 무슨 추태냐!" 그리고 들고 있던 말채찍으로 어깨를 한 대 후려치니, 그 화끈한 통증에 신흘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어찌 된 일이냐? 대왕곤을 끝까지 미행하라는 내 지시를 벌써 잊었느냐?" 그러자 신흘은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참장님! 가시면 안 됩니다! 놈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면? 귀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예! 귀신입니다, 귀신! 속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후 이어진 신흘의 장황한 설명은, 워낙에 두서가 없는 탓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이연심으로서는 대부분이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떤 놈의 주먹질 한 번에 철가장의 표문(表門)`-`이연심은 그 문이 좋은 단풍나무로 만든 것임을 기억하고 있었다`-`이 박살나 버렸다는 말이 그랬고,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철가장 식솔 대부분이 칼바람을 일으키며 휙휙 날아다니는 강호인이었다는 말이 그랬고, 그토록 놀라운 재주를 지닌 철가장 식솔들이 불과 한 식경 만에 깡그리 죽어 버렸다는 말이 또한 그랬다. "그러니까 네 말은 대왕곤이 이끈 몇 놈이 철가장에서 튀어나온 삼십 명의 강호인들을 깡그리 죽였다 이거냐?" 이연심이 정리해서 묻자 신흘은 다시 도리질을 쳤다. "열 놈이 아닙니다! 직접 싸운 사람은 밤송이 대가리하고 칼잡이, 두 놈뿐이었어요. 대왕곤은 싸움판에 끼여들지도 않았다니까요!" "그런데 너는 왜 혼자지? 조몽은 어디에 있는 거냐?" 그러자 신흘은 몸뚱이를 부르르 떨었다. "두 놈 중에 한 놈이 우리들을 보았어요. 밤송이처럼 머리카락이 짧은 놈이었지요. 그때 조 형님과 저는 덤불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그 밤송이 대가리 놈이 쇤네들이 숨어 있는 쪽을 노려보더라구요. 그러더니 시체 한 구를 쇤네들을 향해 휙 집어던지는 게 아니겠어요? 스무 걸음도 더 되는 거리였는데, 시체는 정말 탄석(彈石)처럼 날아왔습죠. 그런데 그 시체가... 시체가...!" "시체가 뭐란 말이냐? 네 아비 시체라도 된다는 말이냐?" 신흘의 눈동자에 다시 공포의 빛이 어렸다. "시체는 철가장의 세 집사 중 하나인 유(劉) 노인이었어요. 그는 원앙쌍권(鴛鴦雙圈)을 들고 밤송이 대가리에게 달려들었다가 단칼에 쓰러져 버렸지요. 그런데 날아오던 그의 시체가 눈 깜빡할 사이에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녹더니, 쇤네 옆에 떨어질 때에는 피곤죽으로 변해 있더란 말입니다! 조 형님은 그만 시체를 피하지 못하고 깔려 죽었지요! 가지 마세요! 가면 조 형님처럼 죽습니다! 놈들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에요!" 신흘은 다시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이연심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상의 장원이니만큼 호원무사(護園武士)들이 있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저승 갈 날을 받아 둔 사람처럼 골골거리던 늙은 유 집사까지 무공을 감춘 고인이라는 얘기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더구나 원앙쌍권이라니! 그 물건은 웬만큼 숙달되기 전에는 한 바퀴 돌려 보지도 못한다는 기문괴병(奇門怪兵)이 아닌가! 이연심은 신홀을 노려보았다. 이놈이 혹시 미행에 실패한 뒤 그 책임을 모면코자 둘러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이라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 분명하고, 그 여파가 너무나 엄청나다. 바보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감히 저런 거짓말로 둘러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연심은 결국 자신의 두 눈으로 철가장의 상황을 직접 확인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양 참장님!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왕곤이란 놈이 한가락하는 강호인들을 데려온 모양입니다. 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양관태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그는 눈동자를 디룩디룩 굴리더니, 갑자기 제 무릎을 후려치며 외쳤다. "이런, 이런! 내 정신 좀 봐! 유수사 내에 급한 일이 있는 것을 깜빡했구먼. 대내에서 사람이 왔다는 것을 잊어버리다니... 귀비(貴妃)께서 보낸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지 않겠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러시겠죠. 어서 가보십시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다. 양관태의 위인 됨이 어떤지에 관해서야 너무도 잘 아는 이연심이었으니, 속이 빤히 보이는 변명일랑은 적당한 선에서 잘라 주는 것이 중도유수사의 늙고 젊은 두 참장 모두에게 좋은 일이리라. 공에 대한 욕심을 포기한 양관태는 다섯 명의 도부수와 이십 명의 창병에게 둘러싸여 유수사로 회군했다. 비로소 홀가분해진 이연심은 "죽어도 못 갑니다!"을 연발하고 있는 신흘을 억지로 앞세우고 철가장을 향해 달려갔다. * * * 과연 신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철가장의 표문 앞 공터는 이미 시산혈해로 변해 있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벌판에 즐비하게 널린 날짐승들의 시체처럼, 물경 삼십을 헤아리는 주검들이 다채로운 자세를 취한 채 공터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관병들 중에서 비위가 약한 몇은 벌써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꼴사나운 일이긴 하지만 속이 메슥거리기는 이연심도 마찬가지. 그러니 병사들만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신흘도 한 가지만큼은 거짓말을 했다. 철가장 늙은 집사의 시체에 깔려 죽었다는 조몽이 두 눈 버젓이 뜨고서 공터 한켠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조몽! 괜찮은가?" 이연심은 말에서 뛰어내려 조몽에게 달려갔다. 조몽의 신색은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굵은 식은땀으로 뒤덮였고, 살갗에는 흑갈색 반점이 저승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신만큼은 온전한 것 같았다. "차, 참장님..." 조몽은 몸을 일으켜 상관에 대한 예를 갖추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연심의 눈에도 어림없는 짓이었다. 안면이 굳어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놈이 무슨 재주로 예를 취할 수 있으랴. "그대로 있게!" 이어 이연심이 손짓을 하자, 군졸 하나가 큼직한 약낭(藥囊)을 들고 달려와 조몽을 돌보았다. 약에 정통한 군졸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조몽의 증상은 중독이었다. 그러한 중독의 흔적은 많은 시신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악취, 부패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피부의 변색 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기독(奇毒)이 이 공터를 휩쓸고 지나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침을 튕겨 악혈(惡血)을 뽑아 낸 뒤, 장기의 독성을 제거하는 단환 두 알을 복용시키자, 뻣뻣하던 조몽의 혓바닥이 조금씩 풀렸다. 조몽에게는 이연심의 신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점은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도 곧바로 상황 보고에 들어가는 투철한 책임 의식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조몽의 보고는 신흘의 그것보다 훨씬 조리있었다. 하지만 내용면에 있어서는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철가장에서 달려나온 사람들은 늙수그레한 비복이건 펑퍼짐한 침모(針母)건 하나같이 무공을 감춘 강호인이었고, 특히 선두에 선 두 명의 집사`-`이연심은 그들이 각각 유(劉)와 엄(嚴)이라는 성을 쓰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조몽처럼 경험이 풍부한 군인으로서도 처음 대하는 굉장한 고수였다. 철가장 식솔들의 상대는 불과 두 명. 밤송이 대가리를 한 흉한과 정수리에 뾰족한 상투를 튼 칼잡이였다. 몇 마디 곱지 않은 대화가 오가고, 철가장 식솔들이 살기를 뿜으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조몽은 손을 들어 관병의 손에 의해 공터 가운데 쌓여 가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저 시신들이 싸움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된 거지? 놈들에게 당한 건가?" 이연심이 묻자 조몽은 고개를 저었다. "속하는 단지 시신에 깔렸을 뿐입니다." "허공에서 녹아 버렸다는 유 집사의 시신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마 그대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이 참장님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뵐 수 없었을 겁니다." 조몽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절반 이상이나 녹아 버린 시체가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 하지만 조몽은 그 밑에 깔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게 탓이 아니었다. 신체 내부의 균형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는 지독한 현기증이 그를 숨쉬는 인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함께 있던 신흘은 이미 줄행랑을 친 뒤였다. 위험에 빠진 고참을 내버려둔 채 혼자 달아난 신흘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쫓아가 주리를 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조몽의 의식은 거역할 수 없는 현기증에 실려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조몽을 내리누르던 시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의 억센 손이 그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밤송이 대가리를 한 흉한이 그를 일으켜 앉힌 것이다. -`그것도 못 피해? 겁만 줘서 쫓아 버릴 생각이었는데 일만 귀찮게 됐잖아! 밤송이 대가리는 이렇게 말하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조몽의 정수리를 덮어 눌렀다. 순간, 높은 곳에서 추락할 때와 흡사한 아찔함이 조몽의 몸뚱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찔함이 사라지자 흐릿하던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독한 현기증도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조몽은 그제야 밤송이 대가리가 자신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나루터부터 졸졸 따라온 이유가 뭐지? 조몽으로 말하자면 군에서는 아주 드물게도 기개가 살아 있는 장부였다. 이미 적도들의 수중에 떨어진 이상, 구차한 말로 천군(天軍)의 위신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당당하게 밝혔다. 아니나다를까 밤송이 대가리의 뒤에 서 있던 대왕곤의 외눈에서 무서운 빛이 뿜어 나왔다. 하지만 밤송이 대가리는 조몽이 관군의 밀정이라는 사실에도 별로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군인? 난 관심없어. 밤송이 대가리는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중 주먹만한 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한두 번 돌멩이를 어루만지더니 조몽의 발 아래 툭 던졌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8 장 - 2 묘왕동주 -`봐주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야. 밤송이 대가리는 멍해진 조몽을 남겨 둔 채 사람들을 재촉하여 공터를 떠났다. 대왕곤은 조몽을 살려 두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감히 밤송이 대가리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놈들의 우두머리가 대왕곤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게 그 돌멩이입니다." 이연심은 조몽이 내민 돌멩이를 받아 들고 꼼꼼히 살펴보았다. 돌멩이의 생김새는 괴이했다. 밀가루 반죽을 세게 움켜쥔 뒤 말려놓은 것처럼, 돌멩이 표면에는 흑갈색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연심은 돌멩이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산초(山椒) 향기를 맡을 때처럼 코끝이 싸했다. 순간, 조몽을 치료하던 군졸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참장님! 코피가...!" "응?" 이연심은 그제야 자신이 코피를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코밑을 훔친 뒤 해독단 한 알을 삼켰다. '설마 이 손가락 자국이 독공의 흔적이란 말인가?' 이연심은 마음이 급속도로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강호 견문이 짧아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돌멩이에 자국을 남긴 흉한의 수법이 강호인들이 흔히 말하는 내·외공력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만약 그것이 독공이라면, 인간의 골육을 녹여 버린 것도 모자라 단단한 돌멩이 위에 선명한 손가락 자국을 남길 정도의 독공이라면, 밤송이 대가리는 군졸들로서 감히 어찌해 볼 수 없는 무서운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돌멩이는 일종의 경고. 그 무서운 고수는 하나의 돌멩이를 통해, "계속 귀찮게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은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쩐다?' 떼죽음 당한 철가장 식솔들이 모두 무공을 감춘 강호인이었으니, 이 사건은 기록상 강호인들이 연루된 살인 사건, 즉 흑살건(黑殺件)으로 분류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흑살건에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양관태의 보신술(保身術)을 본받아 군사를 물릴 것인가. 이연심은 이 대목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조몽이 말했다. "참장님, 이곳은 아직 독기가 남아 있습니다. 일단 병사들을 물리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연심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신들을 끌어 모으던 병사들이 눈에 띄게 술렁이고 있었다. 몸이 부실한 몇 사람은 벌써부터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비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굴뚝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얼굴들은, 철가장 식솔들을 죽인 독 기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해 주었다. '빌어먹을! 별수없지!' 마침내 이연심은 결단을 내렸다. 양관태 같은 인간을 본받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싫은 일도 배워야만 했다. "증상이 심한 아이들에게 오풍단을 나눠 주거라. 뒤처리는 관아에 맡기고 우리는 유수사로 돌아간다." 하지만 목소리에 맥이 풀리는 것만은 이연심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도유수사의 젊은 참장 이연심이 인내와 포기라는 미덕을 배운 이날은,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을 엿새 앞둔 구월 십사일이었다. 2 반호가 입고 있는 잿빛 무복의 안쪽은 자신이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바깥쪽은 다른 사람이 흘린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땀은 육신을 흥분시키고 피는 정신을 흥분시킨다. 적당한 흥분 상태란 그가 평소에도 바라 마지않던 최적의 상태. 그래서 그는 즐거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휘두르니 삼십 근 용두대감도도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컥`-`카각`-` 바람을 세차게 가른 용두대감도 아래에서 두 자루의 각기 다른 병기가 산산이 부숴졌다. 병기의 주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들고 있던 애병(愛兵)의 파편에, 다음 순간에는 그러고도 조금의 기세도 잃어버리지 않은 용두대감도의 패도무쌍한 칼날에 생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베어진 상처에서 폭죽처럼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입고 있는 청의 무복은 피의 붉음을 너무도 잘 대비해 보여 주고 있었다. "크하하! 이거 정말 싸울 맛 나는데?" 반호는 신이 났다. 반호가 거상련의 이인자 방지중에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얻어터지고, 축 늘어진 어깨로 거상련의 대문을 나선 지도 어언 한 달여. 신날 기회는 충분히 있었지만 실제로 신난 적은 없었다. 바꿔 말하면, 싸울 기회는 충분히 있었지만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바람처럼 나타나는 여덟 명의 후레자식들! 타는 듯한 붉은 경장에 눈구멍이 숭숭 뚫린 죽멸을 뒤집어쓴 그 놈들은, 반호가 약올라 죽는 꼴을 보려고 작정했음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매싸움마다 몫을 톡톡 가로채 가는 놈들의 행동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프게 보이던 후레자식들의 행사는 회를 거듭할수록 일사불란해졌다.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반호의 앞을 가로막으면, 나머지 일곱 놈들은 질풍 같은 기세로 반호를 노리던 적도(敵徒)들을 공격했다. 물론 놈들의 작태를 멍청히 보고만 있을 반호는 아니지만, 두목으로 보이는 놈의 권장지술(拳掌之術)은 고명하기 짝이 없었다. 반호가 놈에게 가로막혀 '어? 어?' 하는 사이에 적도들은 하나둘씩 쓰러지고, 그나마 살아남은 하나마저 냉큼 들춰 멘 후레자식들이 "먼저 갑니다!"라며 유유히 사라지면, 두목으로 보이는 놈은 "반 대협, 계속 수고하시오!"라고 말하곤 놀라운 신법을 발휘하여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 횟수로 벌써 여섯 번. 반호의 성질에 화병이 안 생기고 하남과 하북의 경계인 감단(甘鄲)까지 당도한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다 못한 반호는 한 가지 계교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당할 재주가 없는 거머리들을 노중(路中)에서 떨궈 버리겠다는 것이 그의 계교였다. 문물이 번성한 고도(古都) 감단은 이 계교를 시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되어 주었다. 감단의 시장통을 정신없이 헤집고, 마차와 배를 수없이 갈아타며, 거머리 떼기에 총력을 기울인 지 닷새.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반호는 마시장에 나온 말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놈을 훔쳐 타고 성(省)의 경계를 단숨에 넘어 하남으로 진입해 버렸다. 뒤따라오는 놈들은 없었다. 반호는 드디어 후레자식들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오늘... 산세도 수려한 마안산(馬鞍山) 서쪽 숲에서, 반호는 드디어 제대로 된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휙휙`-` 반호는 좌우로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 의기 양양한 기분을 한껏 뽐내 보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세 사람의 청의장한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함께 온 동료 일곱이 일 각도 지나기 전에 이승과 이별했으니,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호는 세 사람의 시선이 수풀의 한곳을 향해 자꾸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쯧쯧! 다 뒈진 다음에야 나올 생각이냐? 애들이 무섭다는데 불쌍하지도 않니?" 반호는 수풀을 향해 빈정거렸다. 그는 이미 그곳에도 사람이 숨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의력이 특별히 뛰어난 탓은 아니었다. 키 작은 관목림 속에 숨으려면, 통천관(通天冠)만큼이나 커다란 관(冠)만은 벗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놈이라면 말이다. 반호가 빈정거리자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수풀은 다시 잠잠해졌다. 반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세 명의 청의장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나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렴! 이 어르신께서는 애들 데리고 몸이나 풀련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광기가 스치는가 싶은데, 용두대감도의 그물 같은 도세(刀勢)는 어느새 세 사람을 덮쳐 가고 있었다. "저, 저놈이!" 수풀 속에서 다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줄기 매서운 경기가 반호의 배후를 노리고 쏘아 왔다. "바보! 늦었다!" 구부러진 두 무릎을 힘차게 펴자 반호의 몸뚱이는 달려가던 탄력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른바 잉어가 파도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금리도천파(金鯉渡穿波)의 상승공부인데, 반호 같은 개차반이 시전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해 보였다. 씻`-`씨잇`-` 수풀로부터 쏘아 온 두 줄기의 매서운 경기는 반호의 발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세 개의 겁에 질린 얼굴들이 젯상에 오른 제수(祭需)처럼 가지런히 반호의 시선에 담겼다. "으아압! 노룡파미연수란(怒龍擺尾淵水亂)!" 천둥 같은 고함. 폭풍 같은 칼 바람. 수련한 적룡도법(赤龍刀法) 중에서도 가장 자랑으로 삼는 초식이니만큼, 그 결과 또한 확실했다. '노룡'에 한 놈, '파미'에 한 놈, 그리고 '연수란'에 한 놈. 세 명의 청의장한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해둔 것처럼 음절에 맞춰 착착 자빠져 준 것이다. "으흐`-`으하하`-`!" 한 바퀴 공중제비와 함께 지면을 딛은 반호는 가가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득의로움은 그야말로 절정에 올라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북경의 미친개가 곧 천하제일고수였다. 이렇게 한참 동안 웃고 난 반호는 문득,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도 기분좋은 나머지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놈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수풀 속에 숨은 놈에게는 뭔가 한가락 재주가 있을 것 같았다. 비유하자면 삶은 달걀의 노른자. 흰자는 이제 다 발라 먹었으니, 제일 맛있는 노른자를 먹어 주는 일만 남은 것이다. "다 죽었는데 안 나오고 뭐 하니?" 반호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한참이 지났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반호의 입가에 어린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얘! 다 죽었다니까?" 그리로 다가간 반호는 용두대감도로 수풀을 들쑤셔 보았다. 수풀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껴 먹으려던 노른자가 달아난 것이다. * * * 노른자는 발만 달린 것이 아니라 화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노른자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린 곳은 반호가 일장의 도살극을 펼치던 관목림에서 몇 마장 떨어진 자갈밭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8 장 - 3 묘왕동주 "황금왕, 이 급살을 맞아 뒈져 버릴 늙은이 같으니라고! 보낼 새끼가 없어 저런 불상놈을 보내?" 노른자의 정체는 일곱 자루의 보이지 않는 유성추로 대강남북을 휩쓸고 다녔다는 흑도의 거마(巨魔) 몽현도인(夢眩道人)이었다. 하지만 손바닥만한 그의 얼굴은 노른자에 어울리지 않는 벌건색을 띠고 있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한답니까? 기왕 이렇게 된 일이니 그만 진정하시구려." 곁에 있던 왕호(王昊)가 위로랍시고 몇 마디를 읊었건만, 그것조차도 귀에 거슬리는 몽현도인이었다. "자네도 그 자식이 얼마나 미친 놈인지 보지 않았나? 노룡파미가 어쩌고 어째? 애들 데리고 초식 이름 자랑이나 하는 유치한 놈에게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 그런데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왜소한 몽현도인이 찔러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세차게 삿대질을 해대며 거구의 왕호에게 대드는 것은 볼 만한 광경이었다. 무안을 느낀 듯 왕호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쳇! 내가 동네 북인가? 그러기에 애당초 다섯 명만 내보내자고 했잖소! 굳이 열 명 전부를 내보낸 게 누군데, 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그러시오?" 왕호의 반응이 만만치 않자 몽현도인은 어깨를 찔끔 움츠렸다. "그, 그거야 놈의 의심을 피하려면 아무래도 여럿이 나서는 편이 나을 테니 그랬지. 놈이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 줄 누가 알았나?" 비록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라지만 그것은 이십 년에 가까운 나이 차이 탓이지 결코 왕호의 뼈대가 노골노골한 탓이 아님을 잘 아는 몽현도인이었다. 왁살스럽기로 말하면 반호 못지않다고 알려진 위인이 바로 관중철일산(關中鐵日傘) 왕호였으니, 이쯤에서 짜증을 그치는 것이 두 사람의 우애를 지키는 데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몽현도인의 분노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영주(令主)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이 나이에 저런 새끼 앞에서 꼬리를 말아야겠어? 북경의 미친개가 아무리 사납기로서니, 아무려면 아우와 나, 둘이 못 당할라고!" 몽현도인은 씨근덕거렸다. 신양 북쪽 영원평(寧原坪)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공사는 그 첫 번째 요결도 보안이요, 그 두 번째 요결도 보안, 오직 보안만이 지상의 과제였다. 무한정으로 요구되는 인력의 조달만 해도 그랬다. 어떤 연줄을 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핵심적인 장인(匠人)들을 제외한 인부들은 나랏일에 동원된 줄 알고 이 공사에 참여했으며, 그들의 행동은 무공을 익힌 감시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제한되었다. 또한 공사의 내막에 대해 약간이라도 눈치챌 만한 위치에 있는 장인들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자신들이 만든 건축물 내부에 갇힌 채, 모종의 사이한 대법에 제물로 바쳐질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보안은 비단 인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몽현도인과 왕호가 소속된 호밀령(護密令)은 말 그대로 비밀을 수호하는 조직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하남으로 들어오는 강호인들의 동향을 정탐, 거동이 수상한 자들을 주살하는 것. 두 달 전, 몽현도인 등의 마두가 거상련의 황금화들을 몰살시킨 것도 모두 그러한 임무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그 호밀령조차도 자신들이 지키는 비밀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중원의 한 구역을 주름잡던 거흉노마(巨兇老魔)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믿기 힘든 일이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현실이었다. 이로 인한 문제가 아주 없었다면, 그것은 물론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호밀령의 영주 청면수라 온이는 노마들의 불만을 불식시키리만큼 난폭한 사람이었다. 이 년 전의 어느 날인가, 사천에서 독행대도(獨行大盜)로 악명을 날리던 사천일진풍(四川一陣風)이라는 마두가 육포(肉脯)로 변한 채 중인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를 육포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온이의 청살기였다. 바로 전날 밤 사천일진풍이, "궁금해서 못 참겠네. 도대체 무슨 공사를 하는 건지 알아봐야겠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호기심이란 것이 인간을 얼마나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똑똑히 배울 수 있었다. 사실 호기심만 억누를 줄 안다면, 중원 천지를 돌아다녀 봐도 호밀령만큼 괜찮은 자리도 찾기 힘들 것이다. 철옥 총단에 있을 때와 비교해 두 배는 자유롭고 두 배는 쏠쏠한 자리가 바로 호밀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흉노마들은, "사천 애들은 천년이 지나도 바보일 거야."라든지,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이 공사뿐인 줄 알아? 난 우리집 큰아이가 올해 몇 살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등, 되지도 않는 말로써 굴종을 지혜로 승화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보름 전, 이러한 보안지상주의(保安至上主義)의 원칙에 작은 변화가 발생했다. 그 변화는 호밀령주 온이의 명령에서 비롯되었다. -`곧 거상련에서 파견한 정탐꾼이 도착할 것이다.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적당히 상대하되, 기회를 보아 본 옥(屋)의 신물(信物)을 놈에게 흘리도록! 온이로 말하자면 아홉 번 우려 낸 찻물처럼 무미건조한 위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적당히'는 어의(語義) 그대로 '적당히'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이한데, 게다가 신물이라니? 신양으로 파견나올 때 철옥 문도임을 입증하는 영패를 남김없이 반납한 호밀령이 아닌가! 여물기가 차돌멩이라는 녹파파(綠婆婆)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살아 온 날의 수가 온이의 배나 되는 철배노타(鐵背老駝)가 그녀를 거들었다. 그러나 온이는 그들의 이의를 너무도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하라면 해. 온이가 하라면 호밀령은 해야만 한다. 그래서 호밀령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신양 일대의 대장간을 돌아다녔다.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영패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오늘, 몽현도인과 왕호는 거상련에서 온 정탐꾼 반호와 일착으로 맞닥뜨린 죄과로, 데리고 온 수하 열 명을 모조리 잃고 달아나는 치욕을 감내하게 된 것이다. 왕호는 부쩍 기울어진 가을 해를 바라본 뒤, 몽현도인을 향해 말했다. "이제 놈도 떠났을 테니 슬슬 돌아가 봅시다. 시신이라도 거둬 줘야 하지 않겠소?" 죄없이 죽은 애들은 예나 지금이나 불쌍하긴 마찬가지... 몽현도인은 왕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열 구의 시신이 널린 관목림의 공기는 피비린내로 뒤덮여 있었다. 말라붙은 대지는 그들이 흘린 핏물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몽현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혐오스러운 피비린내 때문도 아니요, 게걸스러운 마른 땅 때문도 아니었다. 열 구의 시신은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얼굴들이 박살나 있었다. 반호란 놈은 뭐 그리 맺힌 게 많았던지, 열 개의 목숨을 앗아 간 것도 부족해서 열 개의 얼굴에 열 번의 주먹질을 한 모양이었다. "미친 놈!" 몽현도인은 이를 갈았다. 열 구의 시신 중 영패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홉 구뿐이었다. 몽현도인은 들끓는 살심 속에서도 안도감을 느꼈다. 워낙에 유명한 미친 놈이라서, 혹시 시신을 수색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완전히 미친 놈은 아닌 게로군." 몽현도인은 왕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몽현도인이 잘 모르는 점이 있었으니, 반호는 완전히 미친 놈이라는 사실이다. 완전히 미친 놈에게 시신을 뒤지는 세심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패를 거둬 간 사람은 절대로 반호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감단에서 헤매던 거상련의 홍당 부당주 방철(方哲) 일행이 얼마나 어렵게 반호의 종적을 찾아 냈는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 관목림까지 얼마나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시신의 품에서 철(鐵) 자가 새겨진 영패를 찾아 내고는 얼마나 기절할 듯 놀랐는지, 그리고 이 놀라운 정보를 얼마나 급하게 비합(飛 ) 편에 띄웠는지, 몽현도인은 절대로 알지 못했다. 3 정통(正統) 5년(1440) 정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삼 년 팔 개월 전의 일이다. 자시(子時:오후 11시~오전 1시)를 훨씬 넘긴 늦은 시각, 산동장가 오대가신 중 한 사람인 감규목은 지금은 작고한 동료 진임(陳壬)`-`현(現)오대가신 중 하나인 진청화(陳淸華)의 부친`-`과 함께 가주 장낙웅의 부름을 받았다. 중년의 가주가 늦은 시간을 무릅쓰고 나이든 가신들을 은밀히 부른 것은 드문 일이기에, 두 사람은 의혹을 느끼며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장낙웅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성정이 얼마나 차분한지를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의혹은 커져만 갔다. 장낙웅은 두 사람에게 여러 장의 양피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을 살펴본 두 사람은, 그 대단한 살아 온 날의 수에 부끄럽게도, 거품을 물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강호상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무왕총도, 무왕총의 장진도(藏珍圖)였던 것이다. 장낙웅은 어떻게 무왕총도를 입수한 것일까? 장낙웅은 무왕총도를 입수한 경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경륜이 풍부한 두 사람이 그 물건의 진위를 가려 줄 것을 희망했을 뿐이다. 무왕총도는 곧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무왕과 장낙웅의 부친인 검패 사이에 오간 문서는, 가내(家內)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진임에 의해 보관되고 있었다. 무왕총도에 적힌 무왕의 필치를 감정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호인치고 천하제일인 무왕의 유학(遺學)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요, 그 점에 있어서는 산동장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왕총도가 진품임이 확인된 이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지보(至寶)가 손안에 굴러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냥 즐거워할 수만 없는 미묘한 문제가 숨어 있었다. 주씨(朱氏)의 제국이 들어선 이래로 무왕 관산정만큼 그 이름 값이 비싼 강호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살아서는 강호 최대의 역사인 무림맹을 이룩했고, 죽은 뒤에는 강호 최대의 혈겁인 남북전쟁을 야기했다. 누군가가 무왕이 남긴 유학을 얻는다면 이는 그 비싼 이름 값을 계승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하면, 무림맹과 같은 위대한 역사와 남북전쟁과 같은 처참한 혈겁이 다시 한 번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장낙웅과 두 명의 가신이 무왕총도의 처리를 놓고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선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육염명, 양충, 탁봉 등의 다른 가신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가주의 아들인 장대평과 장옥평에게마저 무왕총도의 존재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밀한 가운데 총도가 가리키는 위치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총도가 가리키는 지명은, 전반부 몇 장이 유실된 탓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삼 개월에 걸친 조사로, 그곳이 대략 하남의 남쪽이라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하남의 남쪽. 그곳에는 신양이 있었다. 그리고 신양은 무왕이 영락제의 철권 통치에 맞서 무림맹을 처음 건설한 성지(聖地)였다. 장낙웅을 비롯한 세 사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무왕은 자신이 이룩한 성지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정확한 위치 확인과 발굴이었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대량의 인마를 현지에 파견해야만 했다. 당시의 강북 강호는 사패(四覇)에 의해 완벽한 균형 상태에 들어 있었으니, 대량의 인마를 동원하면서 다른 삼패의 눈을 속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장낙웅은 세가의 정예들을 세 차례에 걸쳐 하남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8 장 - 4 묘왕동주 오월 초하루, 육염명과 양충이 이백 명의 무사로 구성된 일진(一陣)을 이끌고 하남으로 출발했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오월 초이레, 감규목과 탁충이 백 명의 무사로 구성된 이진(二陣)을 이끌고 일진의 뒤를 따랐다. 비밀은 이때까지도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이 왜 하남에 왔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감규목 하나뿐. 양충의 경우 영문도 모르는 일에 동원되었다는 점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지만, 감규목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 성질 급한 의제(義弟)를 달랠 수 있었다. 며칠만 참으면 되었다. 장낙웅이 이끄는 본(本) 진(陣)이 도착하기만 하면, 무왕총이라는 꿈의 궁궐이 산동의 호걸들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낙웅의 본 진은 도착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뒤, 하남으로 파견 나온 산동장가의 가신들은 청천 벽력 같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후일 '산동의 비극'로 알려진, 매용소와 도연향에 의해 자행된 가족 간의 살인극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감규목은 짙은 회한이 배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취영각(聚英閣)의 은밀한 방. 삼 년 전부터 산동장가의 최고 의결기관인 가로회의가 열리는 장소였다. 여느 때라면 대행 가주 장후겸과 오대가신, 도합 여섯 사람이 이 방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오늘은 한 사람이 빠지고 한 사람이 새로 참가했다. 빠진 사람은 운하에서 목숨을 잃은 침염선생 육염명이요, 들어온 사람은 곧 세가를 이어받을 후계자 장옥평이다. 양충은 입가를 몇 차례 실룩이다가, 감규목의 눈길이 자신의 얼굴에 이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탁자를 꽝, 내리쳤다. "이 아우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겨 왔다는 거요?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삼 년 동안이나?" 침향목 원탁은 비록 잘 만들어진 물건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벽력염왕의 주먹질을 비웃을 만큼 튼튼하지는 못했다. 감규목은 원탁 위에 움푹하게 남은 우악스러운 주먹 자국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갔지만 물건은 남았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형(愚兄)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게나." 양충은 감규목의 말뜻을 헤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그러다가 돌연 대경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면 무왕총도가 아직 세가에 있단 말이오?" "그렇다네." 감규목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장옥평을 향해 의미 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그의 눈길을 받은 장옥평은 품에서 기름 먹인 가죽 뭉치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스물세 장의 양피지... 그젯밤 감규목이 건넨 무왕총도의 후반부였다. 감규목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와 진(陳) 장로가 함께 변을 당했으니, 당시 세가 내에서 총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네. 나는 가주가 총도를 보관하던 밀고(密庫)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 세가에 돌아온 직후, 그 밀고를 살펴보니 다행히 총도는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네. 참사의 여파가 그곳까지는 미치지 않았던 게야. 그때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 총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그러다가 한 가지 보고를 받게 되었네. 둘째 공자의 시신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결심했지. 둘째 공자가 세가로 돌아오는 날까지, 총도와 총도의 비밀을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아무리 그렇대도 이 아우에게까지..." 양충의 목소리는 아직 부어 있었지만, 달아올랐던 얼굴만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자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어. 기억나나, 당시 세가가 얼마나 심각한 누란지경(累卵之境)에 처해 있었는지? 그런 때에 무왕총도가 세가에 있다는 소문이 났다고 생각해 보게. 세가의 존립 자체가 흔들렸을지도 몰라." 감규목은 무거운 짐을 벗은 사람처럼 후련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때, 멀뚱히 앉아 있던 진청화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매용소와 도연향, 두 반도(反徒)는 무왕총도를 차지하기 위해 그런 참극을 저지른 것입니까?" "글쎄... 시기가 공교롭긴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진청화는 감규목과는 달리 이미 확신을 내린 듯했다. "더러운 놈들! 신외지물(身外之物)에 눈이 어두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이까지 부득부득 가는 모습이, 아마도 부친 진임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단(丹)을 만든답시고 주워 먹은 납 때문에 누렇게 뜬 얼굴로는, 아무리 이를 갈아 봤자 무서워 보일 턱이 없었다. 감규목은 혀를 찼다. 그것은 진청화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매용소와 도연향이 철옥주 철면신의 제자가 된 것은 산동장가의 식구가 된 것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 즉, 두 사람이 산동장가에서 벌인 모든 행동은 철면신의 뜻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한데 장낙웅이 무왕총도를 입수한 것은 두 사람이 들어온 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철면신이 미래를 예시하는 재주가 있지 않은 바에야, 두 사람이 무왕총도를 탈취하기 위해 장씨의 식구가 되었다는 주장에는 명백한 '시간의 오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무왕총도와 두 사람에 의해 자행된 살겁. 이 두 가지를 원인과 결과라는 일 대 일 관계로 도식화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았다. "감 장로께서 그 동안 마음 고생이 크셨겠습니다." 담담한 위로가 감규목에게 던져졌다. 감규목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목소리만큼이나 담담한 장후겸의 얼굴이 있었다. 호불호(好不好)를 논하기에 앞서 감규목은 우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왕총도라는 엄청난 물건조차도 장후겸이라는 인간이 지닌 단단한 이성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함구했던 점, 대행 가주께도 사과드리오. 그저 오래 산 늙은이의 고집이거니 생각하시길 바라오." 감규목이 고개를 숙이자, 장후겸은 천만부당하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별말씀을... 여러 원로분들의 충정이 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만 감동했을 뿐입니다." 장후겸은 정말로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대행 가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늙은이의 마음이 편해지는구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감규목의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는 장후겸이라는 인간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장후겸을 믿지 않았고, 세가를 떠나 있던 청장년의 장후겸을 믿지 않았으며, 다시 돌아와 대행 가주직을 맡게된 초로의 장후겸을 믿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달, 장후겸을 미행하기 위해 세가를 출발한 산동백호공(山東白虎公) 연홍(燕弘)은 바닷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런 마당에 어찌 믿음을 논할 수 있으랴! 하지만 연홍의 실종을 들어 장후겸을 탄핵할 수는 없었다. 우선 그의 실종에 장후겸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무할 뿐더러, 대행 가주의 행보에 일개 가신이 미행을 붙인 것 자체가 중인의 지지를 얻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감규목으로서는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장후겸이 결정적인 허점을 드러내기만 기다릴 따름이다. 장후겸이 장옥평에게 말했다. "백부에게 총도를 보여 주지 않겠느냐?" 장옥평은 두말없이 총도를 바쳤다. '둘째 공자는 심성이 너무 순해.' 감규목은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입맛을 쓰게 다셨다. 장옥평의 유순함은 비록 세인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미덕이지만, 거짓과 음모가 난무하는 강호를 살아 가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만일 장후겸이 그의 생각처럼 본심을 감추고 있는 효웅(梟雄)이라면, 순하기만 한 장옥평은 결코 적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총도를 찬찬히 살펴본 장후겸은 만면에 보기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무왕총도의 전반부는 현재 의혈당에 있습니다. 의혈당의 서문 당주가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밝힌 것은, 아마도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무왕총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사료되는군요." "탁월한 식견이시오! 의혈당의 세 형제들로는 어림없는 일이지. 암, 어림없고말고!" 장후겸의 열렬한 추종자 탁봉(卓逢)이 행여 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서문 형제들의 성정이 광명 정대한 탓도 있을 게요." 감규목은 씁쓸히 덧붙였다. 선배 되는 자들은 보물을 독차지하려다가 화를 입었다. 그런데 후배 되는 자들은 보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대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선배 되는 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감규목으로서는 면목없다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무왕총도의 후반부가 들어온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더구나 우리에게는 철옥을 쳐서 삼 년 전의 원한을 씻는다는 대명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말한 장후겸은 잠시 말을 끊음으로써 사람들의 주의가 집중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사람들의 주의가 집중되자 그는 힘주어 말했다. "소생은 의혈당과 제휴, 남은 이패(二覇)에게 전갈을 보내어 사패의 이차 회맹을 이룰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부드럽게 이야기할 때에는 대인(大人)의 관후(寬厚)가 담겨 있더니, 힘주어 주장할 때에는 종사(宗師)의 위신(威信)이 풍겨 나온다. 이 사람이 바로 검패의 큰아들 장후겸이었다. "허어! 북정회(北正會)가 다시 태동하는 건가요?" "감개무량! 감개무량한 일이외다!" 진청화와 탁봉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장후겸은 가벼운 목례로 그들의 성원에 답한 뒤 장옥평에게 말했다. "북정회의 사인좌(四人座)에 산동장가의 대표로 앉을 사람은 내가 아닌 너다. 그러려면 회맹이 이루어지기 전에 가주위(家主位)를 물려받아야겠지." 장옥평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백부님! 소, 소질은 아직 어리고 미욱하여 세가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습니다. 부디 백부님께서..." "너는 이 백부를 성제(成帝:永樂帝)로 만들 셈이냐?" "...!" "이 백부는 주공(周公)으로 남기를 바란다." 영락제와 주공, 두 사람 모두 군주의 자리에 앉은 조카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영락제는 선제의 유명을 어기고 조카를 폐했고, 주공은 선왕의 유명을 지켜 조카를 끝까지 보필했다. 장후겸은 이 고사를 인용해 장옥평의 겸양을 봉쇄한 것이다. 장후겸은 주위를 향해 말했다. "회맹은 시월 초로 잡겠소! 회맹 장소는 의혈당과 의논하여 선정할 것이며, 그 기간까지 모든 가원들은 방만한 행동을 삼가하여 심신을 정히 할 것을 당부하오! 그리고 운룡진인(雲龍眞人)께서는 가주 이임식이 거행될 길일(吉日)을 택해 주십시오." "아무렴요! 그런 일이라면 의당 이 사람이 맡아야지요." 신이 난 진청화는 손가락 마디를 짚으며 갑자을축(甲子乙丑)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통쾌하게 싸울 기회가 왔군!" 괄괄한 양충은 벌써부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감규목은 신이 나지도, 그렇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닥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예감했을 뿐이다. 연홍의 실종. 의혈당에서 나타난 총도의 전반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가주위의 승계. 이 모든 일들의 이면에는 깊게든 얕게든 대행 가주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론(異論)도 제기할 수 없었다. 우연은 우연으로, 필연은 필연으로... 모든 사건은 나름대로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벌어졌고, 장후겸은 그것들을 신속하고 공명하게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시기와 강퍅마저도 몰아내 줄 수 있는 명약인 것일까? '불길해...' 감규목은 혓바닥이 깔깔하게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파죽(破竹) 묘왕동주 제 19 장 파죽(破竹) 1 하남성 남동쪽에 위치한 상성(商城)은 그리 작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리 크지도 않은, 중원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규모의 현(縣)이다. 그 명칭만을 놓고 본다면 상업이 매우 번창한 곳이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 그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상업의 성[商城]'이 상업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영지(領地)의 구 할이 전답이며 나머지 일 할의 대부분은 그 전답을 가꾸는 사람들이 살아 가는 데 필요한 주거시설이었으니, 이곳이 '상업의 성'이 될 턱이 없는 것이다. 혹자들이 말하기를, "아마 고대의 상(商:殷)나라와 연관이 있었을 거야."라고 하지만, 남아 있는 사료(史料)가 없으니 단지 가정에 불과할 뿐이다. 하남성 전역을 적시는 가을 비는, 이 상성에서도 꼭두새벽부터 내리고 있었다. 기왓장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여운 속에서 복건제일도 남력이 모종의 결단을 내린 곳은, 상성 굴지의 부농(富農) 마(馬) 대야(大爺)의 장원... 그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호화로운 별실이었다. "남(南) 형(兄)의 뜻이 그러한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남 형께서 소제의 행동까지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격렬한 어조로 항의하는 사람은, 회남 일대에서 유지로 활약하던 철가장주(鐵家莊主) 철비량이었다. 항의를 받는 입장인 남력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치렁한 흑발 사이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철비량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남력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그들은 내가 이십 년이 넘도록 거느려 온 사람들이오! 그들의 복수를 주인 되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소! 나 철비량은 비록 강호에서 사마외도(邪魔外道)라고 손가락질을 받지만, 적어도 은원이 무엇인지는 헤아릴 줄 아는 놈이오!" 철비량이 흔들어대는 종이에는 하나의 놀라운 소식이 적혀 있었다. 철가장의 세 집사 중 하나인 추대복(秋大福)의 서명이 적힌 그 종이 위에는,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철가장이 처참하게 박살났다는 비보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철가장 세 집사의 정체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철비량의 수족이 되었던 요동삼살(遼東三煞)이었다. 그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추대복 하나뿐. 원앙쌍권의 달인인 유막(劉幕)도, 오십 근 철부(鐵斧)를 장작개비처럼 휘두르던 엄자당(嚴自當)도, 철가장에 남아 있던 삼십 명의 수하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겨우 두 사람에 의해... 한때 요동의 큰 호랑이라 불리던 관동대호(關東大虎) 철비량이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남력은 철비량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 행보의 총책(總責)은 나요. 철(鐵) 형(兄)은 지시를 따르시오." 남력의 얄팍한 입술이 벌어지며 억양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비량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물론 이 행보의 총책은 회남에서 합류한 철비량도 아니요, 대별산(大別山)에서 합류한 검완(黔完)도 아니요, 이곳 상성에서 합류한 마웅풍(馬雄風)도 아닌, 출행부터 조추림을 보필해 온 남력이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명령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회남에 두고 온 수하들이 죽었다는 사실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하들을 죽인 장본인이 지금 일행의 뒤를 추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만큼은 남 형의 지시에 따를 수 없소! 수하들의 복수는 내 손으로 하겠소!" 철비량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철비량은 그가 내뱉은 말보다 훨씬 더 단호한 칼빛을 마주해야만 했다. "주제를 알고 자중하길 바라오." 남력은 조용히 말했다. 그의 안령도(雁翎刀)는 철비량의 턱밑에 바짝 들이밀어져 있었다. 철비량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력의 출수는 그야말로 섬전 같았다.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방호할 수 없을 만큼 빨랐던 것이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대별산 풍림채(楓林寨)의 채주 검완이 한걸음 나서며 싸늘하게 외쳤다. "남 형! 우리가 비록 지금은 그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입장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지위의 고하를 논할 수 없는 관계! 설마 복건제일도(福建第一刀)라는 명성으로 우리를 마음대로 휘두를 생각은 아니시겠지?" 검완의 오른손은 어깨 위로 삐죽 솟은 검자루에 대어져 있었다. 철비량의 철가장, 검완의 풍림채, 그리고 마웅풍의 마가곡물상(馬哥穀物商)은 모두 철면신이 강호에 깔아 둔 포석이었다. 검완의 말대로 철비량과 남력은 고하를 논할 수 없는 관계. 무력으로써 위협받는 수모를 겪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 아! 다들 진정하세요. 한 배에 탄 사람들끼리 이래서 되겠소?" 푸짐한 얼굴의 마웅풍이 험악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남력의 안령도는 철비량의 턱밑을 떠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검완은 검자루를 움켜잡은 오른손을 풀 수 없었다. 이때, 방구석에서 듣기 거북한 탁성(濁聲)이 울렸다. "낄낄! 오래 살려면 주제를 알아야지! 암, 주제를 알아야 하고말고!" 방구석에 마련된 작은 다탁(茶卓)에는 등이 심하게 굽은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나뿐인 눈으로 기분 나쁜 청광(靑光)을 뿜어 내는 그 노인은 험악한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吳) 노인! 당신까지 우리를 무시하기요?" 검완이 노해 외쳤다. 등 굽은 노인은 짐짓 겁먹은 체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괴소를 흘렸다. "흐흐! 아직 덜 늙어서 그런지 성질들이 대단하구먼. 하지만 생각은 짧아! 암, 짧고말고! 남(南) 노제(老弟)는 철 장주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철 장주의 목숨을 구하려는 게야! 생각해 보게. 두 놈이 자그마치 삼십을 죽였어. 게다가 놈들 중 하나는 노부도 장담하기 힘든 독공고수라고 하지 않던가? 남 노제는 그들을 상대로 승부를 논해 볼 수 있겠지만, 자네들의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지." 그러자 철비량이 말했다. "그, 그래서 함께 남겠다는 게 아니오! 힘을 모을수록 놈들을 죽일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소?" 이 말에 대해 대답한 사람은 남력이었다. "공자님은 당신들 삼파(三派)의 정예를 이끌고 신양으로 가라는 옥주의 명을 받았소. 우리에게는 행보를 멈출 여유가 없소." 남력은 철비량의 턱밑에 들이댄 안령도(雁翎刀)를 천천히 거두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오 노인과 남아 추격자를 처리하겠소. 당신들은 공자를 모시고 행보를 서둘러 주기 바라오." 오 노인이라 불린 외눈박이 꼽추노인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낄낄,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 내가 남는다면 적어도 승산이 일 할은 높아지지." 남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사람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이 일은 공자께 절대 비밀이오. 나와 오 노인은 개인적인 일로 잠시 뒤처지는 것이니, 모두 이 점을 명심해 주시오." 비록 남력에 대한 불만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지만, 이 말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조추림의 성격은 장마철 개구리와 같아서, 누구도 그 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만약 추적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귀에 흘러 들어간다면, 가뜩이나 늦어진 이 행보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남력과 오살량이 방을 나간 뒤, 남아 있던 삼파의 주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남력의 칼은 정말 빠르군! 동풍일기(東風一奇) 복(福) 늙은이가 이십 초를 버티지 못했다는 소문이 생판 거짓은 아닌... 흠, 흠!" 감탄을 연발하던 마웅풍은 철비량과 검완의 매서운 눈총을 받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철비량은 아직도 소름이 가시지 않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검완에게 말했다. "철가장과 대별산은 멀다 할 수 없는 거리요. 철가장이 그 꼴이 되었다면, 검(黔) 형(兄)의 풍림채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게요." 그 말을 들은 마웅풍이 또 끼여들었다. "이런! 그렇다면 이곳만이라도 완전히 정리해서 쓸데없는 손해를 피해야겠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과 같은 마웅풍의 말에 철비량과 검완은 또 한 번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일일이 핀잔주기도 피곤한 일이어서, 그들은 마웅풍의 말을 아예 무시해 버리기로 작심했다. "회남과 대별산의 거리로 보건대 아마 지금쯤이면 놈들이 닥치지 않겠소? 걱정되지는 않소?" 철비량의 물음에 검완은 눈을 빛냈다. "나는 걱정하지 않소!" 그 자신감 배인 목소리에 철비량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하기야 정체를 감춘 철가장과는 달리 버젓한 녹림 방파로 강호에서 활약하고 있는 풍림채였다. 그 위세가 철가장보다 강성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그 차이란 것이 큰맘 먹고 헤아려 보기 전에는 분간할 수 없는 미미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검완의 자신감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풍림채 또한 철가장과 마찬가지로 그 정예의 대부분을 조추림에게 징발당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철비량의 의구심을 짐작했는지, 검완은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풍림채에는 소제의 사부님이 계시기 때문이오." 2 함잔행(咸殘行)의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강호인은 드물었다. 하지만 '잔행(殘行)'이라는 으스스한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강호인 또한 매우 드물었다. 함잔행은 평생에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상대도 살려 두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함잔행의 검 아래에서 살아난 상대는, 당시`-`그러니까 그가 불혹(不惑)의 나이를 막 넘길 무렵인 이십칠 년 전`-`사천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던 채앙이었다. 사실 채앙이 결투에서 지고도 목숨을 건진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은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함잔행과 채앙, 두 검객의 실력은 실로 용과 호랑이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이런 경우에 승부를 판가름하는 요소는 아무래도 경험과 노련함일 것이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함잔행이 채앙보다 앞섰다. 광풍폭우(狂風暴雨) 같은 이백여 초가 지난 뒤, 채앙이 허초에 유인되어 균형을 잃었을 때, 함잔행의 검은 그의 가슴에 큼직한 바람 구멍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채앙도 고수라면 고수. 손 놓고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채앙의 검은 함잔행의 길쭉한 아래턱을 한 치 가까이 잘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분노로 눈이 뒤집힌 함잔행은 쓰러진 채앙의 목을 단칼에 끊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공증인 격으로 참가한 아미파(峨嵋派) 장로 홍지대사(弘智大師)가 둘 사이에 끼여든 뒤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1 묘왕동주 함잔행의 검이 아무리 잔인하다 해도 아미파 장로를 상대로 수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는 떨어져 나간 아래턱을 주워 들며 앞으로 공증인 따위는 절대로 부르지 않겠노라 결심했고, 덕분에 그 이후부터 채앙과 같은 행운아는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잔행'이라는 으스스한 이름 앞에 견불도생(見不圖生)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도 모두 이에 기인한다. 견불도생. 일단 마주한 이상 살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자. 강북에서 가장 잔인한 검객 함잔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 함잔행이, 육십을 넘긴 뒤로는 아예 일선에서 물러나 출세한 둘째 제자의 산채에서 호의호식하던 함잔행이, 오늘에야 드디어 임자를 만나게 되었다. * * * 쏴아아`-` 하남 전역을 적시는 빗방울은 지금 이 순간, 남직예와 하남의 경계인 대별산의 은밀한 계곡에도 쏟아지고 있었다. 대왕곤은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비에 젖으면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일진대, 대왕곤은 과연 대강을 주름잡던 수적의 괴수답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번뜩이는 독목(獨目)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왕곤은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단탈과 박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천천히 정면으로 돌렸다. 그의 정면에는 아름드리 나무를 큰 못과 동아줄로 엮어 놓은 높다란 목책(木柵)이 자리잡고 있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폭우 속에서도 거대한 짐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목책은 일견하기에도 무척 튼튼하게 만들어진 듯했다. 대왕곤과 목책 사이의 거리는 십여 장, 허전한 느낌은 주지 않는 공간이었다.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그 공간의 여기저기를 채운 채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들고 설치던 박도(朴刀)니, 낭아봉(狼牙棒)이니, 쇠도리깨 등은 오래 전부터 질퍽한 흙탕물 속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십여 장의 공간 위에 펼쳐진 이 우울한 상황은, 단탈이라는 장인(匠人)이 단지 한 쌍의 육장만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그가 재료를 다루는 솜씨는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쓰러진 사내들로부터 아직도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정묘한 손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왕곤은 이 점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탈이 저들의 목숨을 붙여 놓은 것은 대왕곤의 요구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까. 끼이이`-` 육중한 느낌을 주는 소리와 함께 목책의 어느 부분이 활짝 열리고, 흑의를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흑의사내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어깨는 산악처럼 당당했고 눈빛은 횃불처럼 이글거렸다. 그들이 나타나자 쏟아지던 빗줄기마저 그 위세가 오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대오를 정연하게 이루고 있던 흑의사내들이 스르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갈라진 사이로 험상궂은 인상의 흑의 초로인이 걸어나왔을 때, 대왕곤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자가 풍림채에 머물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혹시 그 노귀(老鬼)도...?' 대왕곤은 반사적으로 흑의 초로인의 뒤쪽을 살폈다. 과연 그곳에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을 지닌 갈삼(葛衫) 노인이 서 있었다. 흑의 초로인의 사부이자 과거 강북에서 가장 잔인한 검객으로 불리던 노독물이 풍림채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대왕곤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흑의 초로인과 갈삼 노인이 버티고 있다면, 풍림채의 산적들이 뿜어 내는 대단한 기세도 그런대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능력있는 조력자는 삼복(三伏)에 먹은 개고기처럼 사람들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게 해주는 법이니까.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지!' 대왕곤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기세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저쪽에서 준비한 패가 두 마리의 승냥이라면, 이쪽에서 준비한 패는 두 마리의 호랑이이기 때문이다. "대왕곤, 이 붕어 새끼 같은 놈아! 장강이 묘자리로 좁더냐? 수적질을 해먹던 놈이 뭐가 부족해서 이 산세 울창한 대별산까지 와서 뒈지려 하느냐?" 가슴속까지 후련해지는 우렁찬 목소리로 욕설을 퍼붓는 흑의 초로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견불도생 함잔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 초로인은 그의 첫째 제자이자, 풍림채의 주인 검완에게는 사형 되는 낭심검(狼心劍) 호문도(胡聞都)였다. '머리는 나쁜 놈이 신기하게 욕 하나는 잘한단 말이야.' 만약 잘하는 것이 정말로 욕 하나였다면 함잔행이 이렇게 흡족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문도가 잘하는 것은 욕뿐만이 아니었다. 함잔행이 창안한 사십팔 초의 잔행무정검법(殘行無情劍法)을, 이제는 함잔행 본인보다도 오히려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제자가 바로 호문도였다. 좋은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오랜만에 군자가 될 기회를 잡은 함잔행은 제자의 용자(勇姿)를 느긋한 눈으로 지켜보기로 작정했다. 이때, 곁에 있던 막내 제자 진방(晋邦)이 함잔행의 귓전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쪽에 서 있는 애꾸가 바로 대왕곤이죠. 요즘 삼협에서 제법 이름을 얻고 있는 수적이라고 합니다. 아마 둘째 형하고는 조금 안면이 있을 겁니다." 진방이 말하는 둘째 형이란 풍림채의 채주 검완을 가리킨다. "대왕곤? 그런 송사리의 이름을 사부가 어찌 기억하겠느냐?" 함잔행은 진방을 향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부님께서 강호를 위진(威震)하실 때에 놈은 솜털도 벗지 못한 애송이였으니까요." 무공은 두 사형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지만 아부 하나만큼은 입 속의 혓바닥처럼 매끄럽게 할 줄 아는 놈이 바로 진방이었다. 과거 함잔행은 그 점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첫째는 무공이 고강해 자신의 검법을 훌륭히 이어받았고, 둘째는 수완이 좋아 이처럼 커다란 산채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부 잘하는 놈이 하나쯤 있다 한들 크게 문제삼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때, 석상처럼 서 있던 대왕곤이 말문을 열었다. "장강에서 고깃배나 털던 졸장부가 대별산의 호걸들께 무슨 불만이 있겠소? 소생은 그저 길잡이로 온 것에 불과하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이분들과 하시길 바라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큼 걸어나오는 사람. 실뱀 같은 흉터로 빽빽히 뒤덮인 거무튀튀한 살갗과 퉁방울처럼 부리부리한 두 눈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했다. 더구나 쓰고 있던 챙 넓은 모자를 뒤로 슬쩍 젖히자 중인 앞에 나타나는 까칠한 대가리. 살만 조금 쪘다면 노지심의 환생이라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막내야, 저건 뭐라는 물건이냐?" 함잔행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그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 많기로 소문난 진방이었지만, 밤송이 대가리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때, 밤송이 대가리가 입을 열었다. "조추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함잔행과 그의 두 제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낮도깨비 같은 놈의 입에서 설마 조추림의 이름이 흘러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호문도가 고개를 돌려 함잔행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길잡이를 자처한 대왕곤이 끼여들었다. "참고로 말해 두거니와, 회남 철가장의 친구들은 여유에 취해 대답을 미루다가 서까래가 뒹굴고 주춧돌이 파헤쳐지는 참화를 겪고 말았소이다." 대왕곤이 신호를 보내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졸개 하나가 큼직한 마대 자루 하나를 들고 와 그의 발 아래 풀어 놓았다. 마대 안에서 나온 물건은 몇 자루의 병기였다. 대왕곤은 그 중에서 반달 두 개를 겹친 듯한 권(圈) 하나와 보기에도 섬뜩한 도끼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몸놀림이 제비보다 빠르다는 쌍권야(雙圈爺) 유(劉) 노인과 신력이 항우에 버금간다는 삼산초부(三山樵夫) 엄(嚴) 장군이 촌구석 장원의 집사로 썩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소?" 대왕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개의 병기를 흙바닥에 던지더니, 이번에는 칼날이 부러져 나간 쌍수도(雙手刀)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에 비하면 쌍수도 추(秋) 이야(二爺)는 훨씬 나은 편이지요. 병기는 비록 이처럼 부러졌지만, 그래도 목숨만은 건져 달아날 수 있었으니까." 일선에서 은퇴했다고는 하나, 회남의 철가장이 어떤 곳인지는 제자들에게 들어 알고 있는 함잔행이었다. 철가장이 겨우 저 정도 인원에 의해 박살났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단지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대왕곤의 발치에서 뒹구는 세 자루 병기`-`함잔행은 그 병기들이 철가장에서 집사 노릇을 한다는 요동삼살의 물건임을 알고 있었다`-`가 너무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함잔행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빠른 속도로 채운 것은 빙굴에서 흘러나온 듯한 냉기였다. 요동삼살은 요동삼살이고 함잔행은 함잔행이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요동삼살 따위와 자신이 한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대왕곤이란 놈은 요동삼살을 들먹이며 되지도 않는 공갈을 치고 있었다. 함잔행에게, 천하의 견불도생에게 말이다! 호문도는 발군의 재질과는 달리 눈치가 그리 빠르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부의 얼굴에 떠오른 냉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호문도는 우선 밤송이 대가리를 향해 외쳤다. "굽다 만 개고기 같은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냐!" 이어 대왕곤을 향해서 으름장을 놓았다. "대왕곤! 지금이라도 물러간다면 둘째의 얼굴을 보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계속 비위를 건드린다면..." 창`-` 호문도는 등에 맨 검을 날렵하게 뽑았다. 본디 견불도생의 검법은 발검이 일품인 탓에, 검을 뽑아 정면을 겨누는 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깔끔한 것이었다. "물고기 몇 마리 회를 뜨는 게 일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마!" 호문도는 살기 넘치는 목소리로 을근거렸다. 이러한 언행은 무척 위협적인 것이어서 대왕곤이 몇 마디 말과 몇 개의 병기로 보여 준 공갈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호문도는 검을 뽑지 말았어야 했다. 뽑더라도 최소한 중인의 감탄을 살 정도로 멋있게 뽑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가 검을 그렇게 멋있게 뽑지만 않았어도, 밤송이 대가리의 뒤쪽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2 묘왕동주 사내는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밤송이 대가리와 비슷한 허름한 마의를 입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쟁반만큼이나 큼지막한 밀짚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는 점이다. 누구의 눈에도 무사라기보다는 농군처럼 비칠 그 사내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달아올랐던 장내의 공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은 어느 시간과 어느 장소에서 누구의 입을 통해 나와도 별로 어색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인사였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인사가 밀짚모자의 입을 통해 나오자 장내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정중해도 너무 정중했고, 곡진해도 너무 곡진했다. 오히려 비아냥끼라도 섞여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이상하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밀짚모자가 더욱 정중하고 곡진한 어조로, 자신의 이름은 박한이며 해동에서 왔고 한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을 때, 풍림채 녹림도들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풍림채 녹림도들의 얼굴을 일그러뜨릴 일은 단지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왕곤은 코끝을 묘하게 찡그리더니 밀짚모자에게 말했다. "강물은 우물물을 범하지 않는 법... 불초는 박 공께도 귀찮은 부탁을 아니 드릴 수 없구려. 청컨대 철가장에서와 같은 독수(毒手)만은 피해 주시면 고맙겠소." 그러자 대왕곤의 뒤쪽에 서 있던 영리해 보이는 청년 하나가 밀짚모자 앞으로 달려와, 빠른 손 놀림으로 흙바닥 위에 몇 자를 갈겨 썼다. 그러자 밀짚모자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왕곤이 말하고 청년이 글을 쓰고 밀짚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호문도는 이 모든 일들이 끝날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이... 이..." 호문도가 최초로 보인 반응은 경련이었다. 경련은 크게 부릅뜬 그의 눈두덩에서 시작되어 얼굴 전체로, 그리고 단단한 근육이 뭉친 어깨로 흘러갔다. 호문도의 몸뚱이를 타고 흘러가던 경련의 종착점은 검자루를 쥔 오른손이었다. 그 순간 천둥 같은 호통과 함께 호문도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 새끼들이!" 사제 검완의 체면 따위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애꾸눈 물고기와 밤송이 대가리와 밀짚모자를 동시에 육젓으로 만들겠다는 욕망만이 이글거릴 뿐이다. 섬광과 빗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챙`-`까가각`-` 맑은 금속성과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촌각의 사이를 두고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자루의 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은 빗속으로 날아오른 한 마리의 날렵한 새 같았다. 그것은 우아한 호선과 함께 허공에 작은 원을 두어 개 만든 뒤, 사오 장 뒤에 서 있던 함잔행의 발치에 틀어박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저 검은 누구의 것일까?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멍한 얼굴로 있던 산적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호문도. 맵시있는 동작으로 기형검을 갈무리하는 밀짚모자. 후득`-`투드드득`-` 사람들의 감각 속에서 잠시 사라졌던 빗줄기가 지면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순식간이었다. 호문도가 노호성(怒號聲)을 터뜨리며 덮쳐 가고, 밀짚모자가 기형검을 뽑아 호문도의 장검을 막아 내고, 기형검과 장검이 아교칠을 한 것처럼 딱 달라붙은 채 두어 바퀴 돌아가고, 장검이 호문도의 손아귀를 빠져 나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가고... 그것들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대결 당사자인 호문도조차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왕곤은 처음부터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토록 담담한 목소리로 밀짚모자에게 사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체면을 세워 주신 일, 감사드리오!" 대왕곤의 말이 영리해 보이는 청년의 손가락을 통해 밀짚모자에게 전달되었다. 밀짚모자는 호문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처음 서 있던 곳`-`밤송이 대가리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밤송이 대가리가 다시 물었다. "조추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처음과 같은 말, 같은 투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풍림채 호걸들의 귀에는 전혀 다른 말, 전혀 다른 투로 들렸다. 그것은 상대가 함잔행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공갈은 이제 현실이 된 것이다. * * * 사제지간(師弟之間)이란 게 대개 그렇듯, 견불도생 함잔행의 세 제자들도 하늘처럼 떠받들던 그의 사부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함잔행의 은퇴에 관한 비사였다. 아무리 환갑이면 송장 소리를 듣던 시대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잔행의 은퇴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함잔행은 왜 이렇게, 마치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퇴해야만 했던 것일까? 함잔행이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도 당하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길 만한 상대만을 골라 겨루니 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패배한 상대를 살려 두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패배한 상대를 살려 두면 그 중에는 분명히 더욱 강해지는 자가 나올 것이요, 그들은 반드시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할 것이다. 함잔행은 그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이기는 족족 상대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이 원칙에 하나의 예외가 발생했다. 아미파의 빌어먹을 땡초 홍지선사 때문에 어떤 자를 살려 줘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모두 죽였는데 그놈 하나쯤 살려 둔다고 큰 문제가 생길까?"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문제가 커졌다. 놈은 함잔행에게 뚫린 오른쪽 가슴의 바람 구멍이 무색할 만큼 그 명성이 욱일승천했다. 십 년이 흐른 뒤에 사천 제일의 검객 소리를 듣더니, 다시 십 년 뒤에는 강북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승부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놈은 검귀라 불린다. 투지로 가득 찬 육체와 승부로 단련된 영혼을 지닌 검의 귀신 검귀. 함잔행은 알게 되었다. 놈이 자신의 앞에 서는 날이 바로 평생 동안 쌓아 올린 견불도생의 업적이 허물어지는 날이 될 거라는 것을. 그래서 두려웠다. 놈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함잔행은 깨달았다. 패배의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없는 자는 애당초 검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결국 함잔행은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 * * "막내야, 사부님은 좀 어떠시냐?" "여전하세요. 그렇게 좋아하시던 용봉탕(龍鳳湯)을 올려도 본 척도 안 하고 누워만 계시죠." "허어! 벌써 이틀째 곡기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으셨잖아? 마을로 내려가 의원이라도 데려와야겠군!" "그런데 대사형!" "응?" "사부님께서는 왜 놈들에게 순순히 조추림 공자의 행적을 밝히신 걸까요?" "..." "며칠 전에 연무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소제가 보기에는 사부님의 검은 조금도 무뎌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허무하게 패배를 인정하신 걸까요?" "막내야." "예?" "너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싸워 봤느냐?" "음... 스무 번쯤 싸워 봤지요." "아니, 그런 싸움말고 진짜로 생명을 걸고 하는 싸움 말이다." "원, 대사형도! 저야 항상 사부님 곁에서 시중드는 몸인데, 언제 그런 싸움을 해볼 기회가 있었겠어요?" "사부님께서 왜 그렇게 허무하게 패배를 인정하셨는지 물었느냐? 그렇다면 너는 말해 줘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다." "예?" "언젠가 네가 사부님의 그늘을 떠나 강호를 돌아다니고, 많은 적들과의 진검 승부에서도 운좋게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부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검을 쥐고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돼. 강호가 투지를 잃어버린 사람이 살기에 얼마나 각박한 곳인지를." 3 "나이가 어찌 되는데?" 손(孫) 노인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 목소리뿐이랴. 한 쪽 눈은 크게 치켜 뜨고 다른 쪽 눈은 한껏 짜부라뜨린 표정에서도 눈꼴시어 못 봐주겠다는 속마음이 그대로 풍겨 나오고 있었다. "흥! 영감님이 주책이야! 처녀 나이는 왜 묻고 난리예요?" 그런 손 노인을 향해 콧물이 튀어나올 정도로 코방귀를 뀌어대는 사람은, 분홍빛 배자(褙子)에 연록색 바지를 입은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허! 어린것이 말버릇 한번 고약하다! 처녀 나이는 왜 묻냐고? 머리에 쇠똥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계집애가 독하디독한 화주(火酒)를 달라니까 묻는다! 몇 살인지 말 안 하면 죽어도 안 팔아!" 한바탕 훈계를 마친 손 노인은 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좌판에 펼쳐 놓은 두부 접시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안 판다고요? 돈 줘도 안 팔아요?" 허리춤에 양손을 착 붙이고 눈자위를 하얗게 만드는 소녀의 성질도 여간내기는 아닌 듯했지만, 두부 장사 삼십 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과 쇠가죽보다 질긴 고집뿐으로 알려진 손 노인에게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허허, 말세로다! 요사이 어린것들은 쇠붙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떽!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오히려 버럭 화를 내는 손 노인의 기세에 소녀는 찔끔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난... 스물두 살인데... 그래도 안 팔아요?" 기어 들어가는 소녀의 말에 손 노인은 고소를 참을 수 없었다. 발그레한 두 뺨과 솜털이 송송한 귓불이, 아무리 많이 봐줘도 열 여섯을 넘기 힘든 소녀였다. 그런 놈이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스물둘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어찌 가소롭지 않으리오. '너는 짖어라. 나는 장사나 할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3 묘왕동주 손 노인은 아예 상대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손님은 소녀 하나만이 아니었다. 두어 달 전부터 단골이 된 뜨내기 공손(孔孫) 영감도 술병이 비었다고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두부만 먹는 것도 안 돼요?" 뒤통수에 실리는 소녀의 처량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손 노인은 공손 영감의 술병에 반 되의 화주를 새로 채워 주었다. * * * "빌어먹을 영감쟁이! 손자의 손자의 손자 대까지 두부나 팔다 뒈져라!" 석소용은 하늘을 노랗게 만드는 허기 속에서도 욕설을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입맛 까다로운 그녀가 산길 좌판에서 파는 두부 따위에 식욕이 당긴 이유는 간단했다. 입맛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늘 하루 위장 속으로 집어넣은 음식은, 장인봉 아래의 객점을 출발하면서 먹은 반 공기의 밥과 두 가지 나물 볶음이 전부였다. 그때가 이른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무렵이니 따져 보면 다섯 시진을 쫄딱 굶은 셈이다. 그러다 발견한 두부 좌판이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런데... '내가 미쳤지! 잘 먹지도 못하는 화주는 뭐 하러 시켰을까?' 석소용은 스스로를 마봉황 염산산이나 야앵무 구양지 못지않은 강호여걸(江湖女傑)이라고 믿었다. 강호여걸이라면 그에 합당한 풍도가 있어야 한다. 모름지기 두부를 먹을 때에도 화주 한 병 정도는 입가심으로 마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강호여걸에 대한 그녀의 지식은 거기가 한계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화주는커녕 두부마저도 안 팔겠다고 뻗대는 두부 장수를 다루는 법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금 아저씨하고 같이 올걸.' 어제 낮에 석소용과 헤어져 동방신행으로 돌아간 금우는,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장씨세가의 정문까지 데려다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됐어요."라는 매몰찬 한마디로 금우의 간곡한 제안을 일축해 버렸다. 금우라는 인간이 워낙에 재미없는 탓도 있거니와, 어린애처럼 누구의 보호를 받아 가며 산동까지 왔다는 사실을 장옥평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금우를 쫓아 버린 것인데, 접시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던 먹음직스런 두부를 생각하면 그의 극진하던 보살핌이 새삼 아쉬워지는 그녀였다. 어쨌거나 두부는 이제 잊어버려야 했다. 하기야 맛있는 것이 어찌 두부뿐이랴! 장씨세가에 도착하기만 하면 딱 벌어진 진수성찬을 대접받을 그녀가 아니던가! "칫! 누가 그까짓 고린내나는 두부 따윌 먹겠대?" 석소용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친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산모롱이 너머로 푸른 용 같은 기와의 물결이 보이는 듯했다. * * * 눅눅한 느낌을 주는 땅거미가 장인봉 중턱을 휘감을 무렵이면, 손 노인은 먼저 간 마나님 생각에 술단지를 기울이곤 했다. 안주라고 해봤자 쉰내가 배기 시작한 두부뿐이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생각해 보라. 두부 장수에게 팔다 남은 두부만큼 좋은 안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은 말벗 해줄 단골 손님까지 있었다. 세 시진째 좌판을 지키고 있는 뜨내기 공손 영감이 바로 그였다. "오늘은 웬일이신가? 이맘때면 골패 쥐러 다니느라 한창 바쁠 사람이...?" 손 노인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었다. "그 짓도 하루 이틀이지, 뜨내기 주머니가 어디 그렇게 두둑할 수 있겠소? 안 그래도 등짐이라도 져서 돈 좀 벌어야 할 판국이오." 공손 영감은 만면에 늙수그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홍역이라도 잘못 앓았는지 볼따구니 가득 얽은 자국이 있는 데다가 대꼬챙이처럼 훌쭉한 그였으니, 웃는 얼굴이라고 특별히 보기 좋을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손 노인의 눈에 비친 공손 영감은 보기 좋은 웃음이 무엇인지 잘 아는 늙은이 같았다. "영감쟁이가 실없이 웃기는... 옛소! 벌어진 주둥이나 다물고 이거나 한 병 더 하시게." 손 노인은 공손 영감의 좌판에 술병 하나를 탕 소리나게 올려 놓았다. 공손 영감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제 돈이 다 됐는데..." "뜨내기 돈주머니 사정이야 이미 들어 알았으니 입 피곤하게 만들지 마시게! 돈이란 게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지. 나, 돈 몇 푼 벌자고 임자 붙잡고 술 마시는 거 아니야!" 손 노인이 술병을 반강제로 공손 영감의 손에 떠맡겼다. "그것 참! 산인(山人)의 호기도 유분수지, 매일 이러면 돈은 어느 세월에 모으겠소? 주인장께서도 어서 돈 벌어서 그럴듯한 가게라도 한 채 장만해야지, 언제까지나 이런 차일(遮日) 밑에서 두부나 팔 게요?" 그러자 손 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차일 치고 하는 두부 장사가 어디가 어때서? 겨울에는 양지녘 햇살 따듯하지, 봄가을로는 산들바람 솔솔 불지. 이 장사 삼십 년을 해오는 동안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는데, 차림새가 구질구질하다고 노형까지 나를 무시하긴가? 객쩍은 소릴랑은 집어치우고 어서 잔이나 받아!" 목덜미에 힘줄까지 세워대는 품이, 잔을 안 받으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였다. 공손 영감은 혀를 몇 번 차고는 손 노인이 따라 주는 잔을 받았다. 권커니 작커니, 세상의 풍파에 찌든 두 늙은이가 두부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를 얼마나 했을까? 두부를 우물거리던 공손 영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쯧쯧! 어느 동네나 밤만 되면 박쥐 같은 녀석들이 설치고 돌아다닌단 말이야." 이 밑도끝도없는 말에, 손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위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다. 바뀐 것이라고는 아까보다 조금 더 농밀해진 어둠뿐이었다. 손 노인은 "이 영감쟁이가 취했나?"하는 표정으로 공손 영감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술은 어지간히 센 탓인지 공손 영감은 손톱만큼의 취기도 보이지 않았다. "형씨!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 어?" 손 노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귀를 쫑긋거렸다.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듯한 소리가 장인봉으로 향한 오솔길 쪽에서 들려 왔기 때문이다. 음색이 높은 것으로 미루어 여자의 목소리인 듯한데, 거리가 먼 탓인지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손 노인은 눈을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 어두컴컴한 오솔길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제까지 흐릿하게만 들리던 것과는 종류부터가 다른 앙칼진 교갈(嬌喝)이 터져 나왔다. "난 당신들하고 얘기하기 싫어요! 싫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죠?" 한 번 들어 본 목소리였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손 노인은, 해거름께에 찾아와 화주를 안 준다며 투덜대던 분홍 배자의 소녀를 기억해 냈다. 과연 컴컴한 오솔길 저편에서 그 소녀가 나타났다. 그런데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청년 두 명을 좌우에 거느리고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일행이 아님은 금방 밝혀졌다. "자꾸 이러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분홍 배자의 소녀가 청년들을 향해 홱 돌아서더니, 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집을 벗기지 않아 그 예리함은 알 길이 없지만,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리는 장식이 예사로운 물건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녀도, 그리고 번쩍거리는 장식의 단검도, 청년들을 겁주기에는 어림없는 것 같았다. "허어! 몇 마디 얘기만 하자는데 그런 흉한 물건을 들이댈 필요는 없잖소? 자칫 실수라도 하여 고운 살갗이 상할까 염려되오이다." 희멀건한 얼굴의 청년이 느물거렸다. 그러자 이마가 약간 벗겨진 뱀눈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아녀자가 칼을 빼 드는 곳은 주방이지 대장부의 앞이 아니거늘... 얼굴은 예쁘장한 게 가정 교육은 형편없군." 청년 둘이 소녀 하나를 둘러싸고 수작하는 광경을 지켜본 손 노인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천하의 불상놈 같으니라고!" "아는 자들이오?" 공손 영감이 나직이 물어 왔다. "머리 벗겨진 놈은 처음 보지만, 저 기생오라비 같은 놈은 내 잘 알지. 태안(泰安)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악질 토호(土豪)인 조(曹) 대반(大班)이 저놈의 아비라네. 아비란 게 그 모양인데 자식새끼라고 제대로 될 턱이 있나? 노략질과 계집질이 제 아비 뺨친다는 파락호가 바로 저놈이야." 속이야 부글부글 끓었지만, 손 노인은 목소리를 죽여 가며 조가(曹哥) 이대(二代)를 욕했다. 자칫 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장사를 계속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젠장! 나는 저런 꼴을 볼 때마다 하늘이 원망스럽다니까. 영웅 호걸이란 작자들은 모두 뭐 하는 거야? 저런 놈들 혼내 주지는 않고..." 손 노인이 투덜거렸다. "하늘의 그물이 비록 성글어도, 죄 지은 자가 그 틈을 빠져 나가기란 힘든 법이라오." 공손 영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었다. '무슨 검법일까? 막 배운 솜씨는 아닌데?' 산동에서 청년 고수로 이름을 제법 날리는 열심수(裂心手) 이관(李寬)은, 한 자루 화려한 단검 끝에서 여러 송이의 검화(劍花)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하고는 감탄하는 마음이 되어 버렸다. 단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분홍 배자를 입은 소녀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재주는 비교적 쓸 만했다. 검집을 뽑지 않은 탓에 본격적인 위력은 발휘되지 않았지만, 간단한 권각술 몇 가지가 밑천인 조귀상(曹貴相)을 궁지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아이고! 아얏! 이, 이 형! 보고만 있지 말고 소제를 좀 도와 주시... 으윽!" 조귀상은, "요런 어린 계집애는 소제 혼자서도 충분하오."라던 조금 전의 장담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대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몸뚱이 곳곳을 두드리고 다니는 소녀의 단검이, 그의 기억력을 감퇴시킨 모양이었다. '천치 같은 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관은 조귀상이 못마땅했지만, 그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주머니 걱정 없이 강호를 돌아다니려면 돈 많고 소심한 전주(錢主)가 하나쯤 필요하다는 것은, 모든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상식처럼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만간 관 속에 들어갈 갑부 아비를 둔 조귀상은 너무나 훌륭한 전주 재목이었다. 한 순간의 경멸감으로 평생 전주를 떼버리는 짓은 바보나 하는 짓. 이관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녀를 덮쳐 갔다. "요 깜찍한 년!"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4 묘왕동주 오래 손쓰고 싶은 생각도 없는 데다가, 계집을 상하게 하여 음욕(淫慾)을 채우려던 본래의 계획을 망칠 생각은 더 더욱 없는 이관이다. 사문의 금나수 중에서도 표홀함이 으뜸인 춘풍벽류(春風擘柳)의 초식을 전개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소녀는 좋은 자질과 훌륭한 검법을 지녔지만 실전 경험만큼은 전무한 것 같았다. 이관이 쾌속하게 달려들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두 눈을 질끈 감고 마구잡이로 단검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런 소녀를 제압하기란 식은죽 먹기. 이관은 너무도 간단하게 소녀의 오른손 맥문을 움켜쥘 수 있었다. "아...!" 소녀는 몸을 비비 꼬며 쥐고 있던 단검을 놓쳐 버렸다. 맥문을 짚이자 우반신이 마비되는 고통이 엄습한 것이다. "후후! 감창 부릴 기회는 얼마든지 줄 테니, 지금은 이 오라버니께서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거라." 이관의 두 눈은 먹이를 대한 맹수처럼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가까이서 보니 구슬을 박아 넣은 것처럼 초롱거리는 눈동자며 야무져 보이는 입매가 예사 미색이 아니었다. 금상첨화라고, 거기에다가 나이까지 어리지 않은가! 청루에서도 동기(童妓)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 그로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장인봉 산놀이 끝에 꿀단지를 발견한 셈이었다. 불행한 일이라면, 운명은 그에게 꿀단지를 볼 기회만 주었을 뿐 핥아 볼 기회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손을 놓지 못할까!" 어디선가 날아온 천둥 같은 노성이 이관의 고막을 후려쳤다. 그 노성에는 속인(俗人)이 범접할 수 없는 무량한 신기(神氣)가 어려 있었다. "헉!" 이관의 심장은 발등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뭐, 뭐지...?' 이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조귀상이었다. 표정으로 미루어, 조귀상은 방금 전에 울린 천둥 같은 노성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관은 그제야 그 노성이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으로 시전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법을 보아하니 열심최명노인(裂心催命老人)의 문하인 것 같구나! 하(夏) 노인이 비록 편벽신랄(偏僻辛辣)한 성품이지만 그래도 색계(色戒)에 대한 것만큼은 철저하다고 들었는데, 어쩌다가 너 같은 망종을 키워 냈는지 모르겠다!" 창노한 전음성이 다시 한 번 이관의 고막을 후려쳤다. 이관은 고통과 경악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한 수의 금나수에서 사부의 이름까지 끄집어 내는 안목이라면, 결코 강호물을 한두 해 먹은 애송이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단지 전음만으로 상대의 기혈을 흐트러뜨리는 무시무시한 내공이라니! "...!" 고통과 경악에 물든 이관의 망막에,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두 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산중에서 두부나 먹는 늙은이들이 무슨 힘이 있으랴는 생각에서 못 본 셈치고 일을 저지른 것인데, 놀랍게도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신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세 번째 전음이 날아왔다. 앞선 것들보다 두 배는 강렬한 공력을 담고서... "썩 꺼지지 않고 무엇 하느냐! 노도(老道)가 직접 손을 써서 징계하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커억!" 그 위력이 어찌나 맹렬했던지, 이관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고꾸라질 뻔했다. "이 형! 왜 그러시오?" 조귀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하기야 넋 빠진 표정으로 헛바람만 꺽꺽 들이키는 이관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이관은 사실 정상이 아니었다. 진기가 헝클어진 탓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다가는 전음의 주인에게 무슨 액을 당할지 모르는 일. 그는 심신을 급히 뒤스른 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어린 소저가 너무 사람을 무시하기에, 홧김에 그만 손이 나간 것이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마시오." 말과 함께 소녀의 맥문을 슬그머니 풀어 주는 이관. 그러자 소녀의 얼굴에도 조귀상의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어리둥절함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만 가보겠소. 밤길 조심해서 내려가시오." 이관은 불만으로 얼굴이 부은 조귀상을 앞세워 몸을 돌렸다. 평생 만나기 힘든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려 버리게 되니, 며칠 동안은 원통해서 잠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즐거움도 목숨만큼 소중하지는 않았다. 너무나 혼난 나머지 두 노인 근처로는 얼씬도 못 하고, 길도 없는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관에게 최후의 전음이 들려 왔다. "차후에도 네놈의 악행이 들려 온다면, 노도가 직접 손쓸 것도 없이 네놈의 사부인 열심최명노인에게 따질 것이다! 이를 명심하여 죄업을 쌓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이관의 사부인 열심최명노인 하대종(夏代宗)은 편벽신랄한 사람이었다. 편벽하다는 것은 스스로 세운 규칙에 예외가 없다는 뜻이요, 신랄하다는 것은 일단 손을 쓰면 반쯤 죽여 놓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관은 부르르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사부가 자신의 난행(亂行)을 아는 날에는, 중원에서 사부의 손 아래 불구가 되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관외(關外)로 달아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추의 밤이 더울 리 없건만, 이관의 등덜미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 * 세상에는 때때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는데, 수캐가 순식간에 군자로 변하는 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방금 전 그 괴이한 일을 목격한 석소용은 그 자리에 못박이기라도 한 듯,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인봉을 내려오는 동안 끈질기게 달라붙던 두 명의 청년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두 마리의 수캐였다. 천박하게 타오르는 더러운 눈빛과 입가에 맺혀 있는 음충맞은 흉소가 그 명백한 증거였다. 그래서 주저없이 단검으로 응대한 것인데, 그저 별볼일없는 한량일 것이라 단정한 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만일 그들 중 하나가 무공을 익힌 강호인인 줄 알았다면 검집을 씌운 채로 상대하는 자비심 따위는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그녀의 보잘것없는 검술에, 검집을 씌웠건 씌우지 않았건 그 결과야 큰 차이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석소용은 패했다. 이긴 수캐들에게 남은 것은 패한 그녀를 욕보이는 일이었고, 패한 그녀에게 남은 일은 이긴 수캐들에게 욕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수캐가 난데없이 군자로 변해 버렸다. 이 어찌 괴이한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치욕을 피했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구심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석소용은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석소용은 산동장가의 정문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한 일이었다. 생김새부터 무뚝뚝한 산동장가의 호문(護門) 무사는 우선 나흘 전에 벌어진 즉위식을 통해 장옥평이 가주 자리에 올랐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가주께서는 피객패(避客牌)를 내걸으셨소. 피객패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몰라도, 아마 그것을 내걸면 아무리 멀리서 온 손님도 돌아가야 하는 게 강호의 예절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석소용은 배운 것을 즉시 시행할 정도로 예절 관념이 철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문 무사를 붙들고 늘어졌다. 말 끄트머리가 교묘하게 말려 올라가는 아양,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콱 죽어 버리겠다는 위협,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청승... 물경 반 시진 동안을 이렇게 들볶인 호문 무사는, 결국 처음의 무뚝뚝함을 허물고 말았다. -`이건 비밀 중에도 비밀인데, 소저가 가주님의 의동생이라니까 말해 드리는 거요. 듣고 소문이나 내지 마시오. 누가 들을세라 벌레 소리처럼 속삭인 '비밀 중에도 비밀'은 장옥평이 현재 산동장가에 없다는 것이었다. 호문 무사의 설명에 의하면, 장옥평은 가주가 되자마자 가문의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모처로 출발했다고 한다. 석소용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허기를 호소하는 위장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새로 산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대문 앞 맨땅에 털버덕 주저앉고 말았다. 큼직한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예쁜 입술에서는 추연한 탄식이 푹푹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호문 무사는, 사실은 곰살가운 성격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했다. 훌쩍거리는 석소용에게 이렇게 귀띔해 주었으니 말이다. -`내일 정오에 장비를 운송하는 후발대가 출발하오. 소저께서 원하신다면 인솔자 되는 분께 통지해 드리겠소. 석소용은 울음을 그치고 인솔자가 누구인지 물어 보았다. -`가주님의 정혼자와 그 친정 분들이지요. 석소용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가주님의 정혼자 되는 분'이란 밉살스런 구양지였고, '그 친정 사람들'이란 야비한 마봉황과 그 졸개들임은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석소용은 마맥회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다. 자신 등을 운하에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더니, 어느새 산동장가에 들어가 가주의 처가(妻家) 자리를 꿰차 버린 것이다. 인솔자에게 통보해 주겠노라 재차 권하는 호문 무사를 뒤로한 채 석소용은 산동장가의 대문 앞을 떠났다. 손해 보고는 못 사는 게 그녀의 성격인지라, 운하에서 드러난 마봉황의 악랄함을 중인들 앞에서 폭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신으로 마봉황을 만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한다면 그나마 운좋은 일, 그녀가 아는 마봉황은 자신의 허물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살인멸구(殺人滅口)도 서슴지 않을 독종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석소용은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장옥평을 만나야만 했다. 단지 마음속의 연인이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그녀가 강호의 여인으로서 홀로 설 수 있기까지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장옥평이기 때문이다. 석소용은 길게 드리운 산동장가의 담장을 바라보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고, 마침내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계교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했다. 그 준비물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봉우리를 내려가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어정거리던 두 마리 수캐들을 만나고만 것이다. 재수없게도 말이다. '까짓것, 개한테 물렸다 치고 잊어버리자.' 석소용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떨어진 단검을 집어 들었다. 이 단검을 준 사람은 전운리, 자영구의 더러운 물에서 빠져 죽을 뻔한 그녀를 구해 준 철옥의 모사였다. 철옥에는 우두마면(牛頭馬面)의 귀졸(鬼卒)들만 있는 줄 알았던 그녀에게, 훈장처럼 점잖은 전운리와 귀공자처럼 고상한 매용소의 존재는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선들이 모여 있건 부처들이 모여 있건, 철옥은 그녀에게 있어서 철천지원수의 집단! 그녀는 단검을 갈무리하며 그 동안 희석되었던 철옥에 대한 원한을 다시 한 번 불살라 보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5 묘왕동주 석소용은 하늘을 보았다. 하현(下弦)을 향해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은 어느덧 중천에 떠 있었다. 후발대의 출발 시간이 내일 정오라 하니, 밤을 도와 움직여도 빠듯한 감이 있었다. 이처럼 길 위에서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몇 발짝 안 가 두부 장수의 좌판을 발견한 석소용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시켜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산동장가에서 대접받기로 한 진수성찬은 오래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위장이 그녀의 두 다리에게 멈추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신경질쟁이 두부 장수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의 곰보 노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오직 두부뿐이었다. "저... 할아버지... 술 달란 말은 안 할 테니까 두부 조금만 파시겠어요?" 석소용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4 남직예 중서부에 위치한 합비성(合肥城)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른바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지도를 놓고 합비성을 찾아보면 사통팔달(四通八達)이란 말이 이 도시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북쪽으로는 회남을 거쳐 중도유수사에 이르는 군용도로, 서쪽으로는 여주부(廬州府)의 비옥한 대지를 가로질러 하남성으로 통하는 곡물 수송로, 그리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장강 굴지의 포구인 안경시(安慶市)와 무호시(蕪湖市)로 연결되는 상업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합비성이었다. 오가는 짐수레가 많으니 오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요, 그들이 이용하는 시장 점포가 번성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리라. 오죽하면, 합비인(合肥人)은 열에 아홉이 장사꾼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을까. 사십여 개가 넘는 큰 시장이 일 년 열두 달 왁자지껄한 소음을 토해 내는 합비성... 이 합비성에서도 음식맛 좋기로 소문난 서문반점(西門飯店)의 점소이 소흑(小黑)이 그 놀랍고도 신비한 이국 미녀를 본 것은, 상강(霜降)을 이틀 지난 구월 이십이일의 일이었다. "소흑! 이층 손님들 나가셨다. 그릇 치워라!" 관오(關伍)는 탁자에 남은 물기를 마른걸레로 훔치며 말했다. 여느 때 같으면, "예! 관 대형!" 하며 이층으로 뛰어 올라갈 소흑이건만,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관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소흑은 탁자에 턱을 괸 채, 넋 나간 표정으로 후원(後園)으로 통하는 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흑!" 관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 예!" 소흑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릇 치우라니까 어디다 혼을 빼놓고 있는 거냐? 머리통에 혹이라도 달려야 정신차리겠느냐?" 관오는 소흑을 향해 불거진 뼈마디가 억세 보이는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내심으로 얼마나 소흑을 귀여워하고 있는지는 서문반점의 식솔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 관오의 주먹은 비록 두꺼운 송판도 쪼갤 만큼 강하지만, 소흑의 머리에 떨어질 때에는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솜뭉치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낡은 탁자에 앉아 산판(散板)을 놓는 벙어리 회계(會計) 곡(谷) 수재(秀才)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빨리 안 움직여? 진짜 주먹맛 좀 볼래?" 소흑의 얼굴 위에 떠 있는 몽롱한 기색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관오는 들고 있던 걸레를 탁자 위에 팽개치고는 소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이때, 소흑이 불쑥 말했다. "관 대형은 못 봤죠?" 소흑의 머리통 위에 떨어지려던 관오의 주먹이 우뚝 멎었다. "뭘 못 봐?" "아까 묵죽별원(墨竹別院)에 든 여자 손님 말이에요." 묵죽별원은 이곳 서문반점에서 가장 잘 꾸며진 별채였다. 다섯 개의 숙사(宿舍)로 구성된 묵죽별원은 이틀 전 찾아온 잘생긴 자의(紫衣) 공자가 통째로 빌리고 있었다. 자의 공자는 두 명의 수행만을 데리고 있었으니, 아마 누굴 만나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과연 이러한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아, 오늘 정오 무렵 강호인으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사인교(四人轎) 하나를 들고 반점에 들어와 자의 공자를 찾았다. 지배인 이(李) 노야(老爺)는 막둥이 소흑에게 그들의 안내를 맡겼고, 소흑은 위풍당당한 그들의 풍채를 선망의 눈동자로 힐끔거리며 묵죽별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자의 공자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손님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오종종한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의 공자의 환대에 답례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걸 듯한 다정한 모습으로 묵죽별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인교의 휘장이 열렸다. 순간, 소흑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사인교에서 나왔어요. 그 여자는 아이 하나를 안고 있었는데, 뭐랄까... 피부 색깔이 까무잡잡한 것이 남쪽 지방에서 온 것 같았죠. 그런데..." "그런데...?" "그 여자는... 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하여튼 너무 예쁘고 너무 신비했어요. 정말 선녀 같았죠. 전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춰 죽는 줄 알았다고요. 음... 아마 임(林) 낭낭(娘娘)보다도 훨씬 예쁠 거예요." "이놈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이제껏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 채 헛되이 들려 있던 관오의 주먹이 번개처럼 소흑의 머리통 위에 떨어졌다. 사실 관오가 소흑을 때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임 낭낭은 사흘에 한 번씩 서문반점에 와서 노래를 부르는 가기(歌妓)였다. 언제나 면사를 쓰고 있는 탓에 외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가을 하늘처럼 서늘한 기운이 흐르는 눈동자만으로도 그 미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 깊숙한 곳에 남몰래 애틋한 정을 키워 오던 관오였는데, 소흑이라는 놈이 감히 저따위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아야! 아후..." 소흑은 머리를 감싸 쥐며 죽는시늉을 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맘먹고 때린 꿀밤. 아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꾸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층 꼴이 이게 뭔가? 치우지 않은 탁자가 세 개나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보니, 이 노야의 근엄한 얼굴이 이층 난간 너머로 삐죽 나와 있었다. 이층의 탁자를 치우는 것은 본래 소흑의 소임인지라, 이 노야의 노한 눈초리는 자연히 그에게 향해 있었다. "갑니다요, 가!" 이 노야를 황제 폐하처럼 무섭게 여기는 소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다른 손으로는 관오가 팽개쳤던 걸레를 집어 바람처럼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 * * -`어머니! 아래에서 피가 나왔어요. 저 죽으려나 봐요. 그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비아아합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녀의 초경(初經)이었다. 다음날, 그녀가 어머니 비아아합의 손에 이끌려 선 곳은 아합족의 비조(鼻祖)인 할머니 나무 앞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지난밤 흘린 경수(經水)로 붉게 변한 속옷을 태우며 다음 대의 아합이 될 것을 맹세해야만 했다. 그날 비아아합은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자와 어머니는 둘이 아닌 하나... 하지만 아합은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길만을 걸어야 한단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아합은 모든 가족의 모태, 초목으로 말하자면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존재였고, 모든 자매들은 자신이 아합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여자를 버리고 어머니로서 평생을 살아 갈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닥칠 슬픈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비아아합은 할머니 나무처럼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아합이 된 그녀 앞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 펼쳐져 있었다. 다른 자매들이 산 과일을 따고 물고기를 말리고 가죽을 다듬는 동안, 그녀는 비아아합에게 아합의 힘을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가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힘을 배웠고, 자궁을 개폐함으로써 출산을 조절하는 힘을 배웠으며, 어느 순간에도 어머니의 마음을 잃지 않는 힘을 배웠다. 시간이 흘렀다. 자매들은 하나둘씩 초야(初夜)를 치렀다. 자매들은 그렇게 계집애에서 여자로 변해 갔다. 그 중에는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된 자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려야만 했다. 아합의 초야는 부족의 아버지 타루가와 함께해야만 했고, 다음 대의 타루가 단탈은 아직 왕이라 불리는 짐승을 잡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단탈이 사냥에서 돌아왔다. 그의 어깨 위에는 오란산(烏丹山)의 왕이라 불리던 짐승의 가죽이 올려져 있었다. 단탈은 이렇게 말했다. -`흑왕(黑王)을 잡아왔소! 단탈은 드디어 타루가가 된 것이다. 그날 밤 그녀는 모든 가족들의 축하와 환호 속에서 수년 동안이나 기다려 온 초야를 치를 수 있었다. 단탈의 억센 팔뚝에 안긴 채, 그녀는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속에서 자신이 진정한 아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합족의 운명에 드리운 앙신(殃神)의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뒤 우기(雨期)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바로 그날 부족의 터전인 슬픈 바람의 골짜기에 한 무리의 중원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잔인한 마음을 지녔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가족들은 그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쇠붙이 아래 하릴없이 목숨을 잃어 갔고, 빗물은 그대로 핏물이 되었다. 공포와 죽음이 슬픈 바람의 골짜기를 잔인하게 휩쓸고 지나간 이날,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과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남자. 하지만 그녀의 가족을 파괴한 남자... 그의 이름은 조추림이었다. -`사랑하오. 조추림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밥을 먹다 말고도 사랑한다고 말했고, 잠을 자다 말고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녀가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는 양,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듭하여 사랑한다고 말했다. 조추림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주기 위해 애썼다. 반짝이는 돌과 구슬을 주었고, 매끄러운 옷과 아름다운 장신구를 주었고, 화려한 집과 편안한 침대를 주었다. 그녀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자 멀리 남창까지 나아가 비파를 배워 왔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미오가 걸음마를 떼자 온갖 놀이 기구들이 마련된 커다란 방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듯 조추림의 지난 삼 년은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한 세월이었다. 그 세월은 그녀로 하여금 조추림의 애정이 얼마나 맹목적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6 묘왕동주 그녀가 아합이 아니라면? 그녀가 한 부족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어쩌면 그녀는 조추림의 극진한 사랑에 둘러싸인 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육체의 편안함과 정신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 * * 딸깍. 잘 맞춰 놓은 틀이 버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잠시 후 비슷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하지만 나라아합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창 밖으로 펼쳐진 저녁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실례하오.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서..." 젊은 사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라아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묵는 다섯 평 남짓한 방의 문가에는 자의 무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삼십대 초반의 헌헌장부가 서 있었다. "나는 매용소라고 하오. 조추림의 사형뻘 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굳이 소개하지 않았어도 나라아합은 그가 조추림의 사형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철옥 총단에서 삼 년을 보내는 동안 문파의 대제자가 누구라는 사실 정도는 들어 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저녁을 그대로 남겼다는 말을 들었소.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소? 주방에 부탁하여 운남(雲南) 요리로 해달라고 했는데..." 나라아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식사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오." 매용소가 웃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나라아합은 그제야 조금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한어는, 비록 어색한 사성(四聲:중국어에 있는 네 가지의 음조. 한자의 음을 소리의 높낮이와 길이로 분류한 네 가지의 음운)이 거슬리긴 했지만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녀는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한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주위의 사람들도 그녀가 한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한어를 감춘 까닭은 오직 하나, 조추림에 의해 두 눈과 남성을 상실당한 누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한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누우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누우는 열흘 전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누우를 죽인 자들 수중에 있다. 이제는 애써 한어를 감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으응..." 침상 쪽에서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아합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침상으로 걸어갔다. 침상 위에는 미오가 잠들어 있었다. 고개가 삐뚜로 젖혀진 것이, 아마도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가 빠진 모양이었다. 나라아합은 아이의 머리를 베개 위에 올려놓은 뒤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잡아주었다. 바로 그때, 등뒤에서 매용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의 아이요?" 나라아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합은 부족 모두의 어머니. 부족의 모든 아이들은 아합의 아들딸이었다. 매용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흐음, 하지만 단탈을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이불깃을 매만지던 나라아합의 손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매용소는 분명히 '단탈'이라고 했고, 그것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서 입증되었다. "단탈은 워낙 특이하게 생긴 사람이라서, 한 번 본 것뿐인데 쉽게 잊혀지지가 않는구려." 매용소의 목소리가 더운 물에 넣은 풀죽처럼 이리저리 이지러지며 멀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려 애를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가고, 남겨진 껍데기만이 흐느적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필사적인 노력 끝에 나라아합은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용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신양이라는 곳에 있소." 매용소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그는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기로 약속했소. 그 일을 하기 위해 신양으로 갔소." "그 일이 뭐죠?" "꼭 들어야겠소?" "단탈에 관한 일이라면 나는 뭐든지 알고 싶어요." 매용소는 나직이 한숨을 쉰 뒤 말했다. "나는 단탈에게 조추림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소." 나라아합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건강한 모습으로 단탈과 만나야 하오. 당신이 내일 아침 식사를 다 먹었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겠소." 매용소는 이렇게 말한 뒤 방을 나갔다. 나라아합은 매용소가 방을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을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꼬옥 끌어안고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단탈이... 타루가가 살아 있었어..."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추림은 그녀의 남자였다. 그녀는 조추림의 여자였다. 하지만 단탈이 살아 있는 한, 타루가가 살아 있는 한, 그녀는 아합이었다. 문득, 비아아합의 목소리가 그녀의 뇌리에 울렸다. -`아합은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길만을 걸어야 한단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아합은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길만을 걸어야 한다. 나라아합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 * "이 새끼야! 이걸 먹으라고 갖다 준 거냐?" 장강육어의 셋째 반교는 육포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이게 육포냐, 밀가루 떡이지!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 모양이냐?" 아닌게아니라, 땅바닥에 쫙 달라붙은 육포는 물씬하니 부쳐 놓은 밀가루 떡 같았다. 더구나 가장자리에는 허연 곰팡이까지 피었으니, 비단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안 먹겠노라 성질을 부릴 만한 일이다. "그, 그게... 그 동안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이 자식이 어디서 말대꾸야!" 육포를 가져 온 졸개는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번쩍 치켜 올라간 반교의 손바닥에 그만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왕곤이 반교를 말렸다. "대충 하게. 이런 날씨에 육포가 눅눅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반교는 대왕곤과 졸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치켜 든 손은 곧 내려왔지만, 실룩대는 볼따구니는 언짢은 마음이 가시지 않았음을 말해 주었다. 대왕곤은 반교의 불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강을 주름잡던 수적 두령이 한낱 길잡이로 전락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륙을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마음속 불만이 어찌 소소하기만 하겠는가! 반교가 말했다. "대형, 이제 하남 경계도 넘었잖소! 두 놈이야 조추림을 쫓아가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놔두고, 우리는 그만 돌아갑시다.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면 우리도 할 바는 다한 거 아니오?" 반교가 말한 '두 놈'이란 물론 단탈이라는 묘인과 박한이라는 해동인이었다. 대왕곤은 열댓 걸음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아서 폭이 좁은 기형검을 닦고 있는 박한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처럼 소란스러우니 한 번쯤은 고개를 돌릴 법도 한데,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는 바위처럼 요지부동이다. "지존의 명을 잊었나? 우리는 어차피 신양으로 가야 하네." 대왕곤의 말에 반교는 빽 소리를 질렀다. "지존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지존! 운하에서 죽은 형제들을 생각해 봐요! 지존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와요?" 대왕곤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장강육어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와 반교, 그리고 막내 왜조(倭 )뿐. 삼협을 호령하던 여섯 마리의 물고기는 이제 세 마리의 물고기로 줄어든 것이다. 반교가 계속 투덜거렸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내가 뭐랬소? 잘난 인간들과는 사귀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잖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울리지도 않는 광대짓일랑은 이쯤에서 때려치우고 사천으로 돌아갑시다!" 대왕곤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럴 수 없음은 아우도 잘 알지 않는가?" "알긴 뭘 알아요! 수적이 수적질하다가 뒈지면 그만이지, 철옥은 뭐고 지존은 또 뭐란 말이오!" 반교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다. 대왕곤은 하나뿐인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라고 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아우들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그라고 해서 슬퍼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다시 수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꿈을 상실한 인간이 과연 인간임을 자처할 수 있을까? 대왕곤은 글을 배우지 못했다. 물론 성현의 가르침 또한 듣지 못했다. 하지만 위의 물음에 대해서는 분명히 대답할 수 있었다. 꿈을 상실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 순간마다 자신이 품은 꿈을 소중히 여겼고, 기회가 올 때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열여섯에 처음으로 살인을 하고 관아의 오라를 피해 강호를 떠돌아다닌 지도 어언 이십여 년... 마음이 통하는 다섯 아우들을 만나 삼협의 거친 물살 위에서 의형제를 맺을 때에도, 용담호혈 같은 수채(水寨)를 만들어 밥맛없는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의 늙은이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때에도, 그리고 네 차례의 토벌군을 통쾌하게 때려눕혀 장강 상류의 패권을 차지했을 때에도... 대왕곤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포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록 적당(賊黨)의 괴수로서 청춘을 보냈지만,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겠노라는 포부였다. 사내로 태어나 강호의 물을 마시기로 작정한 이상, 관아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는 치졸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토벌군의 소식에 마음을 졸이는 구차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명문 출신의 도련님들을 볼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시기심과 열등감을 삼켜야만 하는 비루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19 장 - 7 묘왕동주 대왕곤은 강호인이 되고 싶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과 권력을 지닌 당당한 강호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꿈이 성사되기에는, 삼협의 수채는 너무나도 협소했고, 이마에 두건을 두른 졸개들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러던 참에 대왕곤은 전운리의 제의를 접할 수 있었다. 전운리의 새 주인 매용소가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제의였다. 매용소는 철옥의 대제자였고, 철옥은 강남 강호를 지배하는 강력한 문파였다. 매용소의 막하(幕下)에 투신하여 공을 세우면, 정저지와(井底之蛙)에 불과한 대왕곤도 당당한 강호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왕곤은 아우들을 설득했다. 둘째 대팔초소(大八梢 )와 셋째 반교는 심드렁한 기색이었지만, 그는 성심을 다해 두 사람을 설득했다. 자신이 꿈꾼 미래를 함께 나누자고 설득했다. 결국 아우들은 대왕곤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고, 그는 급히 수채를 정리하여 매용소의 선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경박한 판관(判官)처럼 불공평했고, 부정한 세리(稅吏)처럼 탐욕스러웠다. 하나의 꿈이 하나의 현실로 바뀌는 데에는 너무나도 큰 대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용감하기로 따지자면 나머지 네 아우들을 합친 것보다 더하다는 대팔초소가 죽었다. 모나지 않은 마음씨 때문에 수하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식인경(食人鯨)과 홍분예(紅粉 )도 죽었다. 어디 그뿐이랴! 삼협에서 데려온 수하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룻밤 싸움이 낳은 결과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대왕곤은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우들의 원수일지도 모르는 단탈과 박한, 두 사람을 위해... 하지만 대왕곤은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리 가슴 아파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꿈을 잃은 자는 인간이 아니었고, 대왕곤은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왕곤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반교에게 말했다. "아우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이미 그분을 섬기기로 작정했네. 하지만 자네까지 내 뜻을 따를 필요는 없겠지. 자네의 삶은 자네의 꿈을 위해 마련된 것이니까." 대왕곤은 품속에서 한 다발의 전표를 꺼냈다. 중경전장(重慶錢莊)의 인장이 찍힌, 사천에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전표였다. "수채를 정리한 돈 중 자네 몫이라네. 어디서든 한평생 살아 가기에 부족함이 없을 걸세." 대왕곤은 전표 다발을 반교에게 내밀었다. 십 년을 동고동락해 온 의형의 말이 너무도 의외였던지, 반교는 입을 반쯤 벌리고 전표 묶음과 대왕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대왕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 눈빛의 의미를 왜 모를까? 그 분노가 애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찌 짐작하지 못할까? 하지만 대왕곤은 짐짓 못 본 척, 할말을 마저 했다. "함께 가겠다는 아이들이 있다면 외면하지 말고 데려가게. 막내에게는 내가 잘 일러두겠네." 촤악`-` 반교는 대왕곤의 손에서 전표 묶음을 낚아챘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대문파의 감투가 그리도 소중하단 말이오?" 대왕곤은 그런 반교를 아픔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반교가 말한 '대문파의 감투'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했다. 대왕곤이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꿈꿔 온 이상(理想)이었고, 그 이상이 지금은 '대문파의 감투'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왕곤은 그 미묘한 차이를 반교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누구에게 설명한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꿈, 자신의 삶이 아니던가! "좋소, 좋아! 아주 좋아!" 반교는 전표 다발을 품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더니, 웃옷의 앞자락을 거머쥐었다. 강호의 방식대로 포(袍)를 잘라 단교(斷交)를 선언하려는 듯... 하지만 반교는 끝내 앞자락을 잘라 내지 못했다. 할포(割袍)로 잘라 버리기에는 그들 사이의 우의(友誼)가 너무 질겼던 탓일까? 그는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앞자락을 움켜쥔 손을 떨다가, 흙바닥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어 놓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일장광소(一場狂笑)를 터뜨렸다. "난 가겠소! 가서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살아 드리지! 아하하! 후련하다! 정말 후련해!" 반교는 후련하다는 말을 거푸 내뱉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그와 친한 졸개 몇이 대왕곤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중에는 육포를 눅눅하게 만들었다 하여 그에게 맞을 뻔한 놈도 끼여 있었다. "괜찮으니 따라가려무나." 대왕곤이 허락하자, 그들은 저마다 고개를 조아린 뒤 반교의 뒤를 따라갔다. 대왕곤은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된 일이야. 차라리 잘된 일이지." 남의 처마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처마 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의 경우였다. 처마 밑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까지 굳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진작... 진작에 이랬다면...' 대왕곤은 눈을 감았다. 진작 이랬다면 세 아우들을 운하에 묻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그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 * * 일 각쯤 지난 뒤 단탈이 나타났다. 단탈은 어깨 위에 들춰 멘 새끼 노루를 털썩 내려놓더니 대왕곤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줄어든 것 같군." 대왕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사람이 떠난 거지." 단탈은 반말을 하는 것에 익숙한 만큼 반말을 듣는 것에도 익숙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대왕곤은 단탈에게는 평대를, 박한에게는 존대를 취하는 기이한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단탈은 사람이 줄어든 것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졸개 한 명으로부터 단도를 빌리더니, 잡아온 새끼 노루의 내장을 발라 내기 시작했다. 대왕곤이 반교와 헤어지고, 눅눅해진 육포에 질린 일행이 연한 노루고기로 입맛을 달랜 그날은 구월 이십육일.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황량한 바람이 사람의 뒷골을 제법 으스스하게 만드는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0 장 결맹(結盟) 묘왕동주 제 20 장 결맹(結盟) 1 제일차 북정회는 선덕(宣德) 3년(元年:1428)에 결성되었다. 무왕 관산정이 사망하고 무왕의 후계자로 부상한 관명이 실종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림맹을 받치던 강북사패와 강남삼마는 반목하게 되었고, 몇 개월 동안의 신경전을 거친 뒤 무림맹은 결국 흔적도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무림맹이 와해된 자리에 새로 등장한 세력은 북정회와 남마련. 그들 양대 세력의 수뇌부는 상대에 대한 증오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제일차 북정회를 이끈 수뇌는 강북사패였고, 맹주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검패 장일기가 맡게 되었다. 결맹(結盟)의 목표는 오직 하나, 영원한 적수인 삼마를 물리치고 무왕의 사망 이후 표류하던 강호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제일차 북정회의 성과는 칠 할의 성공과 삼 할의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칠 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남마련을 괴멸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남마련이 사라진 강남 강호는 신흥 강자인 철옥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당시 사패의 거두는 칠 할의 성공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철옥을 새로운 적으로 지명하여 지속적인 싸움을 전개하기엔, 칠 년 동안 치른 남마련과의 소모전이 너무 격렬했던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강호는 평화를 되찾았고, 제일차 북정회는 그렇게 해산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란 늙어 가는 자에게는 비정할 수밖에 없는지라, 사패 중 삼패의 주인이 그 얼굴을 바꾸었다. 제일차 북정회의 결성으로부터 십오 년이 지난 정통 7년(1442)의 어느 가을날... 하남성 개봉부(開封府) 북쪽에 위치한 무릉산장(武陵山莊)의 후원에서 제이차 북정회가 결성되었다. 무릉산장의 장주는 과거 한 쌍의 음양판관필(陰陽判官筆)로써 협명을 떨친 하남의 노기인 전춘추(田春秋)였다. 무릉산장이 제이차 북정회의 결맹 장소로 선정된 데에는, 장주 전춘추가 현의혈당주인 풍운창절 서문도천의 이종 당숙이라는 혈연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또한 산장의 지리적 위치가 사패의 터전`-`하북·산동·산서·섬서의 네 성(省)`-`에서 특별히 멀지도 않고 특별히 가깝지도 않은 중립지(中立地)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제이차 북정회의 결맹 목표는 두 가지였다. 삼 년 전 산동장가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철옥에 대한 공동 징계가 그 첫 번째 이유요, 신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무왕총에 대한 공동 발굴이 그 두 번째 이유였다. * * * 거상련의 이인자 방지중이 그 주인 되는 소래운과 마주한 곳은 무릉산장 후원에 자리잡은 아담한 별채였다. "맹주위에 오르신 것,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방지중의 절도있는 하례(賀禮)에도 소래운의 얼굴에 떠오른 뜨악한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길쭉한 홀(笏)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방지중에게 불쑥 내밀었다. "자네도 한번 구경해 보게나. 이게 그 유명한 북정회 맹주의 신물, 집법옥규(執法玉圭)라네." "어찌 제가 감히 집법옥규를..." 방지중은 점잖게 사양했다. 한두 번 더 권하던 소래운은 그것마저도 시시해진 듯, 들고 있던 홀을 탁자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한 모양이지? 검패 장일기가 들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도 탐나던 물건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안 그러신 모양입니다?" "왜 아니겠나? 아까 즉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고! 하나같이 애송이들만 앉아 있지 않던가! 그들이 준 맹주 자리가 뭐 그리 탐나겠어?" 방지중은 소래운의 투정 비슷한 푸념을 들으며 내심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실, 북정회 맹주 자리가 소래운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쯤은 사패의 일원이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패 중에서 아직까지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은 소래운뿐이었고, 사패의 후예들 중에서 선조의 동배(同輩) 되는 그와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툴 정도로 무례한 놈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래운이 싱겁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 방지중은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신양으로는 언제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소래운은 비로소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어쨌거나 그는 새로이 결성된 북정회의 맹주였다. 비록 면면이 젊은 사람들로 교체되었다고는 해도, 북정회는 유한부인들의 다회(茶會)처럼 가벼운 모임이 아니었다. 결성만으로도 강호를 들끓게 만들 수 있는 천하지대회(天下之大會)인 것이다. 그런 모임의 우두머리가 된 이상, 매사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과 내일은 결맹 축하연이 열리니 출발은 아무래도 그 후가 되겠지." 소래운은 이쯤에서 말을 멈추고 방지중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방지중의 편편한 미간에는 한 줄기 근심의 기운이 드리워 있었다. 소래운은 그 기운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아들이 걱정되는가?" "면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방지중은 자신의 소심한 부정(父情)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의 큰아들이라면, 반호의 뒤를 쫓아 하남으로 파견된 홍당의 부당주 방철이었다. 방철은 미리 준비해 간 전서구 편으로 조사한 사항을 보내 왔는데, 그 주기는 결코 닷새를 넘기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하남 남쪽으로 내려간다."은 보름 전의 전서를 마지막으로 그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버린 것이다. 방철의 충직한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일신상에 변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철담협골을 지녔다 한들 자식에 관해서만큼은 소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아버지들의 공통된 모습. 그래서 방지중은 쟁쟁한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조급한 심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네 큰아들은 어디에서건 한 몸을 건사할 능력이 있는 친구야. 더구나 그 곁에는 반호도 있지 않은가? 너무 심려하지 말게나." 소래운은 이렇게 위로했지만, 그 곁에 반호가 있다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반호란 인간은 필요할 때에는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직속 상관인 방지중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불길하군요. 강호의 문제란 문제는 모두 신양으로 모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방지중이 말했고, 소래운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신양에는 세 가지의 커다란 사안들이 뒤엉켜 있었다. 첫 번째 사안은 철옥의 강북 진출이었다. 올 여름 거상련이 기획한 하남 사업은 일단의 괴한들에 의해 무산되었고,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방철은 그들이 철옥도(鐵屋徒)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고해 왔다. 전서에 선명하게 찍힌 철옥 영패의 탑본( 本)이 방철의 보고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였고, 이에 소래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철의 보고는, 장강을 경계로 하여 유지되던 사패와 철옥 사이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가 발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철옥도가 집결해 있다는 하남 남쪽에는 바로 신양이 있었다. 두 번째 사안은 복주이가(福州李家)의 흔적이었다. 무왕 관산정의 검 아래 괴멸된 그 저주받은 가문의 삼대마공 중 하나가, 거상련을 염탐하던 구(邱)라는 사내의 몸을 빌려 사십여 년 만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구라는 사내는 마공의 힘을 빌려 자폭했고, 덕분에 복주이가에 대한 후속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복주이가와 철옥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은 짐작할 수 있는 일. 즉, 하남 남쪽에는 철옥뿐 아니라 복주이가에 관한 비밀도 숨어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사안은 당금 강호의 최대 보물, 무왕총도였다. 오만가지 소문 속에서 신비로만 점철되었던 스물여덟 장의 무왕총도가, 전반부 다섯 장은 산서 의혈당에서, 후반부 스물세 장은 산동장가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리는 언제나 명분에 우선하는 법. 만약 무왕총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무왕총의 공동 발굴이라는 매혹적인 선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과거의 전우애가 끈끈하다 한들 북정회의 재결성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왕총이 위치한 곳도 바로 신양이었다. 단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어지럽힐 수 있는 중대한 사안들... 그런 사안들이 자그마치 세 개씩이나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신양에 웅크리고 있었다. '골치 아프군!' 소래운은 머리를 두어 번 흔든 뒤, 미지근해진 찻물로 목을 축였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었다. 모든 비밀은 신양에 웅크리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득, 문밖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울렸다. "총수님! 신도(申屠) 선생께서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소래운의 얼굴에 반가움의 기색이 스쳤다. "어서 모셔 오거라." 방지중은 소래운에게 물었다. "신도 선생이라면 북경 삼왕부(三王府)의...?" "바로 보았네. 북경을 출발하기 전에 인편으로 삼황숙(三皇叔)께 부탁드렸는데, 잊지 않고 그를 보내 주셨군." 방지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라면 왕부 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삼황숙의 귀빈이지 않습니까? 삼황숙이 선뜻 보내 준 게 오히려 이상하군요." "선뜻...? 하하!" 소래운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삼황숙은 오래 전부터 이왕부(二王府)에 있는 것보다 더욱 높고 화려한 금패루(金牌樓)를 갖고 싶어했지." "아하!" 방지중은 그제야 일의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고 정갈한 유삼(儒衫)에 육합모(六合帽)를 쓴 노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신도 선생!" 소래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노인은 소래운의 앞에 이르러 정중히 읍(揖)했다. "신도설(申屠設)이 총수를 뵈오이다!" * * * 이가 빠진 사기그릇 안에는 몇 알의 삶은 감자가 담겨 있었다. 사기그릇 옆에는 동록(銅綠)이 푸르스름하게 뒤덮인 촛대 하나가 있고, 그 위에서는 엄지손가락만큼 짧아진 궁촉(宮燭)이 허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작은 불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곳은 몇 개의 초라한 정물들이 답답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이루는 어떤 다락방. 할비는 그 다락방 안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감자 몇 개, 그리고 떫은 차 한 주전자가 그의 공복을 채워 줄 식사의 전부였다. 탁자 곁에 놓인 다섯 자 높이의 횃대 위에는 금빛 깃털이 신령스러워 보이는 매 한 마리가 올라 있었다. 창공의 지배자로 태어나 낮은 천장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불만스러운 듯, 매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개를 퍼드덕대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곧 마음껏 날게 해줄 테니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0 장 - 1 묘왕동주 할비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들고 있던 감자를 입으로 가져 갔다. 감자를 우물거리는 중에도 그의 두 눈은 한 권의 얄팍한 책자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구월 이십팔일. 의혈당, 풍운창절 서문도천의 인솔하에 팔십사 명 도착. -`시월 일일. 거상련, 황금왕 소래운의 인솔하에 백사십 명 도착. 천마문, 소역발산 막강의 인솔하에 오십삼 명 도착. 천마문주 거령신 막뢰는 고질(痼疾)로 불참. -`시월 이일. 장씨세가, 장옥평의 인솔하에 백칠 명 도착. -`동일(同日) 정오. 북정회 결맹식 거행. 제일차 사인수령회의(四人首領會義)에서 소래운을 맹주로 선출. 책자 위에는 지난 며칠 동안 무릉산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적혀 있었다. 이번 북정회의 결성은 십칠 년 전과는 달리 매우 은밀한 가운데 추진되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책자를 작성한 사람이 북정회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할비가 위의 내용을 읽는 동안 그릇 안의 감자는 거의 사라졌다. 그는 찻물을 한 잔 들이키고는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다음 장에는 오직 한 줄만 적혀 있었다. -`교수선생(巧手先生) 신도설이 합류한 것이 확인됨. "신도설?" 할비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교수선생 신도설은 강호인이라기보다는 관인에 가까웠다. 그는 나라에서 주관한 중요한 역사(役事)를 여럿 감독한 바 있고, 특히 영락제 때에는 북위(北魏) 시대 세 황제의 능(陵)을 성공적으로 발굴하여 그 이름이 정사(正史)에 기록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호사가들은, 당시 강호에서 제일가는 기관의 대가인 괴노반(怪魯班) 연자단(燕仔端)과 그를 묶어 남북쌍기사(南北雙機師) 혹은 북교수남노반(北巧手南魯班)이라 부르며, 두 사람의 높은 경지를 칭송했다. 신도설은 그 놀라운 재주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연자단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런 추세로 두 사람의 명성이 계속 올라갔다면, 어느 때고 두 사람은 누가 진정한 토목지술(土木之術)의 일인자인가를 가리기 위해 솜씨를 겨뤘을 테고, 그러면 남북쌍기사라든지 북교수남노반이라는 이인일호(二人一號)가 아닌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 우뚝하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인자 쟁탈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괴노반 연자단은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제자인 병서생(病書生) 연계량(燕計量)과 함께 이십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했기 때문이다. 연자단은 이름 앞에 '괴(怪)' 자가 붙은 사람답게 행동거지를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지극히 즉흥적이고 강퍅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들 부자의 실종에 대해서는 무수한 소문이 난무했지만, 그 소문들은 곧 "연자단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지."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괴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연자단의 실종 덕분에 신도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일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신도설 본인은 그 일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괴팍한 연자단에 비하면 가위 성인군자라 할 수 있는 그였지만, 자존심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강했던 모양이다. 그 후 신도설은 강호 일에 완전히 손을 떼고 북경에 있는 어떤 왕부에 식객으로 들어갔고, 한때 호사가들의 혓바닥을 바쁘게 만들었던 북교수남노반의 이야기는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강호인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칠 년이 지난 지금, 북정회의 동향을 정리한 한 권의 얄팍한 책자 끄트머리에 신도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어지간한 할비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경이로움이 피어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도설이 합류했다... 후후! 옥주께서 재밌어 하셨겠군." 할비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그릇 안에 담긴 마지막 감자를 만족스럽게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친 할비는 품에서 한 장의 담황색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준비한 붓으로 그 위에 기이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쥐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의 가느다란 필봉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 도형은 천과문(天 文), 그 유래를 고대 과두문( �뗙�)에 두고 있는 암호였다. 몇 개의 도형을 그려 가던 할비는 잠시 붓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거상련의 미친개는 지금 처리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는 다시 붓을 놀렸다. 한 장의 담황색 종이가 천과문의 어지러운 도형으로 채워지는 데에는 반 각 가량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할비는 종이 위의 내용을 되풀이해서 확인한 뒤 정성스럽게 말기 시작했다. 꾸우우`-`꾸욱`-` 탁자 옆 횃대 위에서 매가 울부짖고 있었다. 잠시 후, 개봉부 근교에 자리잡은 누추한 다락방의 창문이 활짝 열렸다. 다락방 창문을 통해 창공으로 날아오른 것은, 쭉 뻗은 날갯죽지가 유난히도 억세 보이는 한 마리의 금빛 매. 매가 향한 곳은 할비의 유일한 친구, 자액이 머무는 신양이었다. 2 밥 속에서 머리카락이며 벌레 따위의 잡동사니들이 나온 것도 이해했다. 짐꾼이 먹는 게 원래 그러려니 생각하면 비위에 안 맞아도 참아 넘길 수 있었다. 목욕은커녕 세수 한 번 변변히 못한 것도 이해했다. 일부러 칠한 검뎅이 지워지면 여자라는 것이 탄로날지도 모르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사내들 틈에 섞여 잠을 자야 하는 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잠에서 깰 때마다 침을 게게 흘리는 사내의 얼굴이 코앞에 놓여 있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십육 년 동안 몸과 영혼을 깨끗이 지켜 온 방년(芳年)의 소녀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반드시 석소용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함`-`!" 석소용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십여 관이나 나가는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해동갑을 했으니 삭신이 쑤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등줄기는 배기고 팔다리는 시렸다. 낙엽 더미라는 게 상상처럼 낭만적인 이부자리는 되어 주지 못한 탓이다. 수풀 저편에서 울리는 사내들의 걸걸한 노랫소리가 석소용의 귓전을 간질였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레 동안 그녀와 한 무리로 움직인 짐꾼들이 아니면, 깊은 가을밤, 이 황량한 산골짜기에서 노래를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같이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하루에 반 냥이라는 후한 품삯에 흥이 솟아, 또 두어 단지의 시큼한 농주(農酒)에 흥이 솟아 모닥불을 피워 놓고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잠을 이루려 애쓰는 석소용에게는, 다만 요란스러운 까마귀 떼일 뿐이다. "더럽게도 못 부르네!" 투덜거리던 석소용은 낙엽 더미 속으로 얼굴을 푹 파묻어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남녀의 이야기 소리가 석소용의 선잠을 깨웠다. '이것들이 올빼미 고기라도 삶아 먹었나, 자라는 잠은 안 자고...!' 고개를 내밀어 한소리 퍼부으려던 석소용은, 문득 엄습하는 기이한 기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직이 속삭이는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내가 말했다. "세가의 사람들은?" 여자가 대답했다. "모두 잠든 것 같아요." 순간, 석소용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방금 들린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이가 갈리도록 증오하는 구양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갈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구양지에게 반말로 물어 볼 수 있는 사내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이번 일행에 참가한 사내는 오직 한 사람, 마맥회의 전투 대장 좌훈뿐이었다. '이 외팔이는 만만히 볼 수 없지!' 좌훈이라면 대강남북을 통틀어도 적수를 찾기 힘든 무서운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불과 열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으니, 바스락 소리라도 내는 날에는 곧바로 발각당할 것이 뻔했다. 그 다음에는? 석소용은 다음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좌훈과 구양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앵아(鸚兒)가 돌아온 것 같던데, 무슨 소식을 가져 왔지?" "강남에 있는 형제들이 십오일까지 신양으로 온다는 소식이었어요." "십오일이라... 그렇다면 일정을 거기에 맞춰야겠군. 그래, 누가 온다고 하던가?" "아버지와 진(眞) 언니, 그리고 나(羅) 오라버니도 오신다는군요." "나 아우까지 온다면 회 전체가 강북으로 이동하는 셈이군." "회주께서 내린 지시대로이지요. 회주께서는 이번에 신양에서 벌어지는 발굴 사업에 본 회가 사패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참가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모양이에요." "배타성이 강한 사패가 과연 그것을 용인해 줄까?" "장 공자를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지요." 이 순간, 석소용의 자그마한 두뇌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아 가고 있었다. 석소용은 두 사람의 대화를 대충 정리해 보았다. 마봉황은 '앵아'라는 이름의 못생긴 앵무새를 통해 강남에 있는 마맥회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마맥회의 사람들은 마봉황의 지시대로 강북으로 오는 중인데, 그 중에는 구양지의 부친인 구양일산과 좌훈의 마누라인 진연(眞娟), 그리고 '나 오라버니'라는 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달 보름까지 신양에 도착해서 마봉황과 합류할 예정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석소용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듣자 하니, 막연히 하남성 남쪽으로 가는 줄 알고 있었던 이 후발대의 행선지는 신양인 듯했다. 후발대란 것은 원래 선발대를 따라가는 법이니, 그렇다면 장옥평이 간 곳도 신양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조추림이란 놈을 쫓는 단탈도 신양으로 간다고 하지 않던가! '뭐가 이따위야? 도대체 신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괜히 짜증이 난 석소용이 눈살을 찌푸릴 때, 다시 좌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대사(大事)와 직결되는 일인 만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줘. 장 공자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지?" 석소용은 바짝 긴장했다. '장 공자와의 관계'란 장옥평과 구양지의 관계였으니, 천하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 대답만큼은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그러는지, 지금까지는 잘도 나불거리던 구양지는 갑자기 요조숙녀라도 된 것처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건... 소매는 최대한... 장 공자도 소매를..."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그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망할년! 누구 환장하는 꼴을 보려고 저러나?'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0 장 - 2 묘왕동주 석소용은 속옷을 몇 개 껴입은 사람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낙엽 더미가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누구냐!" 좌훈이 매섭게 외쳤다. '아이고! 난 몰라!' 석소용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움푹한 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어디로 달아날 수도 없거니와, 설령 달아난다고 해도 그녀의 경공으로 미루어 몇 발짝 못 가 붙잡힐 것이 뻔했다. 바야흐로 이레 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위기를 맞이하여,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드리는 일뿐이었다. '부처님! 살려 주세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부처님의 그것과도 흡사한 후덕장중(厚德莊重)한 웃음 소리가 밤하늘을 진동한 것이다. "허허! 마맥회의 두 영웅께서는 이 호젓한 밤중에 무슨 밀담을 그리 정겹게 나누시는가?" 웃음 소리에는 기이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그 여운이 천지 사방에서 웅웅거리니, 석소용은 웃음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울렸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실로 다채로운 소음들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어떤 쥐새끼가 몰래 엿듣는 거냐!"라는 좌훈의 노갈, 우지끈 하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모든 소음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소음들이 사라진 뒤에도 석소용은 낙엽 더미 속에서 나올 수 없었다. 고개만 내밀면 좌훈의 억센 손아귀가 뒷덜미를 덥석 움켜쥘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울렸다. "아이야, 이제는 나와도 된단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타이르는 듯한 그 목소리는 오직 자애롭기만 했다. 이에 석소용은 용기를 얻어 낙엽 더미 밖으로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사위는 어두웠다.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좌훈과 구양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석소용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다시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쯧! 거기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참이냐? 어서 피하지 않으면 노도(老道)도 더 이상 도와 줄 수 없단다." 석소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기심을 채우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석소용은 아무데나 대고 넙죽 고개를 숙인 뒤, 짐꾼들이 모여 있는 계곡 쪽으로 뛰어갔다. 아무리 퀴퀴한 냄새가 싫어도, 아무리 침 흘리는 얼굴이 싫어도, 오늘밤에는 별수없이 더러운 사내들 틈에 섞여서 자야 할 것 같았다. 공손 영감은 한 그루의 커다란 떡갈나무 위에서 남장(男裝)을 한 소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장인봉의 두부 장수 손 노인이 감탄해 마지않던 푸근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턱수염을 한차례 매만진 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축정(蓄精)하여 도를 닦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저렇게 귀여운 손녀가 있다면 속인(俗人)으로 늙어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게야." 공손 영감이 소녀를 도와 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이레 전 장인봉 중턱에서였는데, 당시 그는 열심최명노인의 제자에게 능욕당할 뻔한 소녀를 위해 현문비기(玄門秘技)인 축사후(逐邪吼)의 전음 공부를 발휘했다. 위기에 처한 아녀자를 구하는 일은 강호의 공도(公道)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공손 영감이 그 소녀를 구해 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녀가 검집을 끼운 채로 휘두르던 몇 초의 고양이 발짓 같은 검법에는, 놀랍게도 그가 한때 검도 수행의 목표로 삼았던 선배 고인의 자취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소녀에 대해 호기심이 일어난 것은, 오십여 년 동안 정진해 온 수행(修行)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소녀는 산동장가의 행보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쁜 얼굴을 숯검뎅으로 가리고 은어처럼 깨끗한 몸뚱이를 더러운 남장으로 가리면서까지, 굳이 이 후발대에 끼여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공손 영감 역시 산동장가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름 석 자만 대면 강호 어디에서나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그가, 삽이며 곡괭이 따위의 연장을 잔뜩 짊어진 짐꾼으로 위장해 일행에 합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왜 산동장가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일까? 문득, 공손 영감은 반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반년 전, 공손 영감의 처소에 한 사람이 뛰어들었다. 그 사람을 발견한 공손 영감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크게 놀랐다. 하나는 그 사람이 중병을 앓는 환자라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런 환자가 수많은 문하 제자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처소까지 숨어들었다는 점이다. 그 사람은 기이하게도 낯이 익었다. 그 사람이 이름을 밝히자 공손 영감은 어찌하여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이십 년 전 실종된 괴팍한 친구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공손 영감은 아까의 두 가지 놀라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의 아들은 어릴 적부터 고질을 앓아 온 환자였으며, 또한 황궁도 제집처럼 드나들 정도로 뛰어난 토목지술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부친과 함께 실종되었다고 들었네. 부친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부친께서는 지금 무왕총 안에 계십니다. -`무왕총? 소문의 그 무왕총 말인가? -`소문과는 다릅니다. 무왕총은 그 안에 드는 모든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지옥입니다. 부친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공손 영감의 오랜 수양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공손 영감의 친구는 오래 전부터 무왕총을 만드는 일에 가담해 왔다. 그가 그 일에 가담한 이유는 오직 하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고금을 통틀어 자신보다 훌륭한 토목지술을 지닌 자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일에 가담했고, 그 결과 무왕총을 인간의 힘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무서운 함정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무왕총의 주인은 그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무왕총에 대해 주인보다도 정통해 있는 조력자는 필요없었던 것이다. 무왕총의 주인은 당연히 그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부친께서는 공사가 시작될 무렵부터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죠. 그 덕분에 놈들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한 팔은 잃으셨지만... -`자네도 계속 부친과 함께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놈들은 소생마저 제거하려 했지만, 다행히 놈들로부터 벗어나신 부친께서 구해 주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자네만 빠져 나온 거지? 자네 부친은? -`부친께서는 무왕총이 얼마나 훌륭한 걸작인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오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배반한 놈들에게 직접 복수하겠노라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소생은 암로(暗路)를 통해 밖으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연씨(燕氏)의 토목지술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신 것 같았지요. -`허어! 세월이 그렇게 흘렀건만 그 고집은 젊은 시절 그대로군! -`부친께서는 무왕총에 대해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친께 위험이 닥칠 것 같아 이렇게 도장 어르신을 찾아뵌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의 아들은 공손 영감에게 한 권의 책자를 건넸다. 책자 안에는 무왕총의 기관에 대해 친구의 아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공손 영감이 무왕총으로 들어가 부친을 도와 주기를 애원했다. 공손 영감은 무왕총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무왕총을 관리하는 자들 대부분이 강남 말투를 썼습니다. 부친께서는 그 일에 대해 상세히 아실 듯한데, 무슨 까닭에선지 소생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공손 영감은 금방 철옥을 떠올렸다. 강남의 문파 중에서 그런 공사를 추진할 수 있는 곳은 철옥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아들은 철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구 부자가 실종될 당시에는 철옥이라는 문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단서는 있었다. -`부친께서 놈들과 나누시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산동으로부터 지시가 도착했다."은 대목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놈들의 수뇌가 산동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부터 그 이야기가 나오던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삼 년 전부터 들은 것 같습니다. 공손 영감은 혀를 찼다. 많은 것이 불분명했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무왕총이 그의 친구가 만든 무서운 함정이라는 점과, 무왕총의 위치가 석년 무림맹이 위치했던 하남성 신양이라는 점, 그리고 놈들의 수뇌가 산동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어쨌거나 공손 영감은 이 일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쳐도, 그는 위험에 빠진 친구를 외면할 정도로 매정하지 못했다. 사문의 힘을 빌릴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만약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의 사질 되는 장문인은 두말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것이 분명했다. 사문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렇게 다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손 영감은 곧 그 생각을 버렸다. 안 그래도 자신에 대해 극진한 제자들의 대우가 부담스럽기만 하던 공손 영감이기에, 더 이상 사문으로부터 마음의 빚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단신으로 이 일에 개입할 것을 결심했다. 개방( 幇)의 친구들에게 부탁, 당금 강호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전반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데 두 달이 소요되었다. 무왕총이 있다는 신양을 은밀히 관찰하는 데 또한 두 달이 소요되었다. 그 일이 모두 끝난 뒤, 공손 영감은 산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왕총은 거의 완성 단계라고 했다. 무왕총이 완성되면 무왕총의 주인은 반드시 모종의 움직임을 보일 것이요, 그것은 산동에서 시작될 공산이 컸다. 지난 반년 동안의 일을 되새기던 공손 영감은 문득,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수풀을 헤치고 달려오는 기미를 감지한 것이다. "듣던 대로 마맥회 젊은이들은 남다른 구석이 있구나."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 공손 영감의 신형은 마치 허깨비가 꺼지듯 떡갈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암향표(暗香飄)의 놀라운 신법이었다. 잠시 후,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울리고 장내에는 두 사람이 나타났다. 공손 영감의 웃음 소리에 이끌려 장내를 떠났던 좌훈과 구양지였다. "우리가 속았다고요?" 구양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육합전성(六合傳聲)을 시전할 정도의 고수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달아난다는 것이 어딘지 이상하지 않아?"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0 장 - 3 묘왕동주 좌훈은 침중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아까 암중인(暗中人)이 터뜨린 웃음 소리에는 사방을 진동하는 여운이 뒤따른 탓에, 단지 그것만으로 방향을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한 그루 교목(喬木) 위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좌훈과 구양지는 순간적으로 암중인이 그 나무 위에 있었다고 판단, 나무 뒤편의 숲으로 추격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뭇가지는 누가 부러뜨린 거죠?" "글쎄... 확인해 보면 알겠지!" 좌훈은 대답과 동시에 훌쩍 몸을 날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교목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곧 부러진 나뭇가지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좌훈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무인답게 부러진 나뭇가지로부터 두 가지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하나는 그것이 일종의 격공지력(隔空指力)에 의해 부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력이 날아온 방향이 북쪽으로 스무 걸음쯤 떨어진 떡갈나무 위라는 것이다. "으음!" 좌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해 냈다. 사람의 청각을 어지럽히는 육합전성과 스무 걸음 떨어진 나뭇가지를 간단히 잘라 내는 격공지력. 그것은 마맥회의 삼대고수 중 한 사람인 그조차도 자신있게 구사할 수 없는 상승 절기였다. 이 놀라운 재주를 지닌 암중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슨 이유로 일행의 주위를 맴도는 것일까? 좌훈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3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 언덕은 이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일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천산만구(千山萬邱)가 대지를 뚫고 솟아 있었다. 그 중에는 오악(五嶽)처럼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름을 드날리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니 이름없는 언덕이 몇 개쯤 있다 하여 크게 문제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언덕을 소홀히 취급했다. 기기묘묘한 수림(樹林)이 있는 것도 아니요, 맑은 계수(溪水)가 흐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망이 특별히 좋지도 않았으니, 볼거리 없는 언덕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볼 것이라고는 언덕 자락 잣나무 숲 너머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커다란 돌비석, 그리고 그 앞에 드러누워 썩은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연못이 전부인 언덕. 두 달 동안의 지루한 여정을 모두 마친 조추림이 회남·대별산·상성에서 차출한 이백여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그 구릉에 오른 날짜는, 입동(立冬)을 막 지난 시월 육일이었다. 언덕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잣나무 숲은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조추림은 큰 탄성을 토했다. "그는 스스로를 천자(天子)의 반열에는 올리지 못했지만, 제후(諸侯)의 반열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나 보구나!" 근 한 달여 동안 조추림을 시중들어 온 진강부의 미기(美妓) 남장미가 애교 넘치는 보조개를 만들며 물었다. "무왕이란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조추림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왕이 아니면, 천하에 어떤 강호무부(江湖武夫)가 스스로를 제후의 반열에 올릴 수 있겠느냐!" "한데 공자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그가 스스로를 제후의 반열에 올렸다고 생각하신 거죠?" 조추림은 손을 들어 울창한 잣나무 숲을 가리켰다. "하하! 너는 천자의 묘에는 소나무요, 제후의 묘에는 잣나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느냐?" 남장미는 코끝을 예쁘게 쫑긋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소녀가 죽으면 무슨 나무를 써야 하나요?" "하하! 노류장화(路柳墻花)의 무덤에 나무는 무슨 나무! 기껏 쓴다 한들 양류(楊柳) 버들 몇 그루면 그만이지!" 조추림은 호탕하게 웃었다. "흥! 천한 기생년이라고 무시하시는군요. 두고 보세요. 소녀는 어떤 제후 부럽지 않게 아름드리 잣나무로 묘목(墓木)을 쓰고 말 테니까!" 남장미는 눈을 흘기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스물도 안 된 계집치고는 대단한 교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그긍`-` 이때, 잣나무 숲속에서 둔중한 굉음이 울렸다. 남장미는 깜짝 놀라며 조추림의 품에 안겼고, 언덕에 오른 무사들은 일제히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조추림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사람은 평범한 마의에 이마에는 푸른 두건을 두른 오십 줄의 사내였다. 그 사내는 조추림의 앞으로 다가와 양 손을 앞으로 모았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소." 조추림은 품안의 남장미를 가볍게 밀친 뒤, 푸른 두건을 쓴 사내에게 마주 포권했다. "황송하게도 우공봉(右供奉)께서 직접 나와 주셨군요." 철면신을 제외하고는 두려운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는 조추림이지만, 눈앞에 서 있는 푸른 두건의 사내, 자액과 그 유일한 친구 할비에게만큼은 반보 정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공봉이라는 지위도 지위거니와 이십여 년 전부터 자신을 키워 준 공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사는 이미 끝난 터... 기일(期日)에 당도치 않으셔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소. 노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소?" 자액이 묻자, 조추림은 "일은 무슨 일, 다만 소생이 나귀처럼 게으른 탓이지요."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사통이 실종되었다는 전서도 일이라 할 수 있고, 수습할 것이 있다며 남력과 오살량이 뒤처진 것도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액에게까지 알릴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사부님의 명대로 세 곳의 정예들을 이끌고 왔지요." 조추림은 뒷전에 운집한 이백여 명의 억센 무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세 무리의 우두머리인 철비량, 검완, 마웅풍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자액에게 인사했다. "환영하네. 자네들에게는 곧 임무가 주어질 터이니, 그때까지는 여독을 푸는 데에만 전념토록 하게." 세 사람에게 간단한 환영의 말을 건넨 자액은 문득, 조추림의 곁에 서 있는 남장미를 바라보았다. 이어 조추림을 향한 그의 시선은 남장미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조추림은 남장미의 허리에 팔을 척 두르며 대답했다. "우공봉께서는 풍류를 즐기지 않으시니, 한 번 교태로 진강부 삼만 호(戶)의 장정들을 몽롱하게 만든다는 진강제일가기(鎭江第一佳妓) 남장미를 소개해도 아무 소용 없겠지요?" "아이! 공자님도!" 남장미는 조추림의 손길이 부끄러운 듯 허리를 틀었지만, 사내들의 눈에는 오히려 유혹적인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자액은 여느 사내들과는 달랐다. 얼음 조각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그 사실을 반영해 주었다. "이곳이 옥주께서 정하신 제일중지(第一重地)라는 사실은 잘 아시리라 믿소." 조추림은 안색을 굳히고 자액에게 반문했다. "소생을 그것조차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여기셨소이까?" "그렇다면 허락받지 않은 외인을 그 제일중지로 데려온 이유는 무엇이오?" "외인이라고요?" 조추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남장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공봉께서는 너를 외인이라 하시는구나! 네가 정녕 외인이더냐?" 남장미는 까르륵, 웃으며 조추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외인이라뇨? 하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데, 천첩이 어찌 공자님께 외인이 될 수 있겠어요? 내인(內人)이지요!" 비록 육체 관계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여러 날을 조추림과 같은 천장 아래에서 보낸 남장미였다. 그래서 내인이라는 말까지 지어내면서 자신있게 말한 것인데, 되돌아온 조추림의 말을 들은 그녀는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쯧쯧! 나는 내외(內外)를 가리고자 한 말이 아니란다." "예?" 조추림은 손바닥으로 남장미의 봉긋한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말은, 네가 곧 사람이 아닌 귀신이 될 거라는 얘기지." 순간, 남장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의 연약한 심맥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의 진기가 조추림의 손바닥을 통해 뿜어진 것이다. 그 진기는 십칠 년 동안 곱게 자라 온 그녀의 갈비뼈들을 남김없이 으스러뜨리고는, 어린 사슴의 그것처럼 말랑말랑한 그녀의 심장마저도 터뜨려 버렸다. "이, 이게..." 아무 죄도 없는 자신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가를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장미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것은 검붉은 선혈이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자신이 십여 일 동안 모신 잘생긴 공자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 구조를 지녔는지 알지 못했다. 그 공자는 때로는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껄끄러운 늙은이에게 잔소리 듣느니 십여 일 동안 품고 다니던 소지품 하나를 팽개치는 편이 훨씬 개운하다고 생각하는, 매우 냉정한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동안 고마웠다." 어느새 남장미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조추림은, 그녀가 흘린 피로 옷을 더럽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그는 다정다감한 공자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죽어 가는 그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풀썩`-` 남장미의 교구는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조추림은 뒷전에 서 있는 사내들 중 하나를 지목해 말했다. "잣나무 아래에 잘 묻어 주거라. 제후의 나무로 무덤을 꾸미려던 아이였으니까." 자액은 본래 서 있던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조추림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너무도 무감동하여 흡사 물고기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조추림은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리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사가 끝났다 하셨소? 그 장관을 한시 바삐 구경하고 싶군요!" * * * 시월 육일 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각자의 처소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호밀령의 마두들에게 소집령이 하달되었다. 그들은 자유 시간을 침범당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소집령이 가리키는 대전에 집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괴상한 일을 시키려고 부른 거지?" "그 시체 같은 얼굴로 뭔 일을 못 시키겠어?" "쉿! 영주가 왔다!" 웅성거리던 대전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대전 안에 나타난 사람은 호밀령의 영주인 청면수라 온이였다. "번을 서는 이십팔 명과 외부로 나간 십칠 명을 제외하고 모두 집합했습니다." 부영주인 유명마도(幽冥魔刀) 역천비(易擅飛)의 약식 보고가 끝나자, 온이는 대전에 모인 사람들을 주욱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거상련에서 보낸 미친개는 어디까지 왔나?"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작도수(斫刀手) 강조양(康朝陽)이었다. "몽현도인의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북쪽으로 팔십 리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온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가 미친개였으니 몽현도인도 속깨나 끓였겠군." 반호는 사람의 신경을 긁어 놓는 데 있어서 탁월한 재주를 지닌 인간이었다. 그런 반호를 열흘 가까이 암중 미행한 몽현도인이었으니 아마도 지금쯤이면 그 오종종한 낯짝이 홍시처럼 시뻘겋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온이는 소매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사람들에게 흔들어 보였다. "거상련의 미친개를 처치하라는 옥주의 명이 내려왔다. 이제 연극은 끝난 것이다." 호밀령의 마두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의혹의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와 처치하려면 왜 진작에 처치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있지도 않은 영패를 만들어 놈의 수중에 흘러 들어가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또 보안 유지에 만전을 기하라고 해놓고, 불과 팔십 리 떨어진 곳까지 놈을 유인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러나 온이는 매정하게도 그들의 의혹을 단 한 가지도 풀어 주지 않았다. 다만 묵직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귀가 먹었나? 나가서 놈의 머리통을 가져 오란 말이다!" 귀먹은 사람은 없었다. 부영주인 역천비 이하 호밀령의 모든 마두들은 반호의 머리통을 가져 오기 위해 올빼미가 되어야만 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1 장 포향령(飽享嶺) 묘왕동주 제 21 장 포향령(飽享嶺) 1 운하에서 헤어질 때, 매용소는 조추림의 최종 목적지가 신양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원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단탈을 위해 대왕곤으로 하여금 그를 안내하게끔 배려해 주었다. 단탈은 가능한 한 조추림의 행로를 그대로 더듬어 가기를 원했다. 만에 하나 길이 어긋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운하에서 신양까지는 수없이 많은 길이 있었다. 조추림이 그 중에서 어떤 길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주 막막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화신마 비연리는 조추림이 총단에 남겨둔 심복 이사통을 고문하여 조추림이 회남의 철가장을 경유한다는 것을 알아 냈고, 이 정보는 매용소의 입을 통해 단탈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운하의 격전을 통해 한층 단련된 단탈과 박한은, 이제 장원 하나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철가장은 비록 와룡복호지처(臥龍伏虎之處)라 불릴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막강한 패도(覇道)에 눌려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말았다. 결국 철가장은 삼십여 명의 식솔들을 잃은 뒤 백기를 들었고, 그 과정에서 단탈은 조추림의 다음 행선지가 대별산 풍림채라는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대별산 풍림채에 있던 함잔행과 그 제자들은 우직하기만 한 철가장의 세 집사들보다 훨씬 영리했다. 그들은 단 한 차례의 접전으로 단탈과 박한, 두 사람이 그들의 여생을 주관할 수 있는 사신(死神)임을 재빨리 알아챘다. 그들은 피를 보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조추림의 세 번째 행선지를 토설했고, 덕분에 풍림채는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한 순간에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함잔행의 입장에서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겠지만... 초승달이 뜨는 시월 초엽의 어느 밤, 단탈 일행은 조추림의 세 번째 행선지로 밝혀진 상성의 마가곡물상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마가곡물상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범강장달이 같은 무사들이 아닌, 관 속에 있는 편이 오히려 어울릴 늙은이들이었다. 늙은이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들은 강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불쌍한 장사치들이며 나리들께서 찾으시는 무사들은 닷새 전에 신양으로 떠났다고 진술했다. 노중에서 조추림을 추격하지 못한 것은 분했지만 별수없었다. 단탈은 길이 어긋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신양! 조추림이 간 곳은 신양이었다. 조추림이 신양에 있는 이상, 그리고 단탈이 신양으로 가는 이상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단탈은 그 악몽 같은 우기를 잊을 수 없었다. 창에 관통당한 몸뚱이로 약흠의 골짜기를 찾아온 아버지 가리아의 처참한 몰골을 잊을 수 없었다. 빗물 속을 둥둥 떠다니던 여동생 마나의 불어터진 주검을 잊을 수 없었다. 조상 할머니의 영혼이 배인 그 나무, 죽어 간 자손들 때문에 더욱 슬퍼 보이던 그 나무의 눈물 자국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모든 비극의 장본인은 바로 조추림이었다. 단탈은 곧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 * 포향령(飽享嶺), 혹은 천보포향령(千步飽享嶺)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고개는 평야가 많은 하남성 남부에서 보기 드문 험준함을 자랑한다. 포향이라 함은 먹을 것을 배불리 먹는다는 뜻이다. 거기에 천보가 붙었으니, 풀어 말하면 '천 걸음을 가는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개'라는 뜻이었다. 몇 군데 좋은 샘물이 나온다는 것만 제외하면 어디 한 군데 특별한 점이 없는 그 고개에 이처럼 괴이한 이름이 붙은 까닭은, 고개 밑에 자리잡은 각양각색의 식당군(群)에서 찾을 수 있었다. 포향령은 남직예로부터 시작되어 하남 남부를 관통하여 신양으로 들어가는 곡물 수송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남성을 동서로 이어 주는 이 고개에는 자연 오가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행인은 많고 고개는 높다. 높은 고개를 앞에 대하면 창자가 허전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그래서 고개 밑에는 자연 밥장사가 성행하게 되었고, 그 늘어선 길이가 자그마치 천 걸음이 되는 탓에 천보포향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신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던 단탈 일행도 인지상정의 범례(凡例)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까마득히 높게 보이는 고개와 고개 밑까지 주욱 늘어선 식당의 군을 보고는, 그 중 한 곳을 택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추림이 신양에 도착하고 하루가 지난 시월 칠일이었다. "이런 쌍놈의 집구석을 봤나! 이따위 국물로 밥장사를 해먹겠다는 거야?" 난데없이 들려 온 거친 욕설에 대왕곤은 고개를 돌렸다. 장사꾼 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 하나가 국수 그릇을 탕, 소리나게 탁자에 팽개치며 회계대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누구 조갈(燥渴)나서 죽는 꼴을 보려고 그러나? 주인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 그러자 일행으로 보이는 중늙은이가 혀를 끌끌 찼다. "이상한데? 이 집의 고깃국은 포향령에서도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짜지?" 식당을 두둔하고 나서는 품이 아마도 이곳에서 몇 번이나 젓가락을 놀려 본 적이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주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영감이 부리나케 달려와 두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들어온 소금이 워낙에 짠 탓에, 주방에서 간 맞추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흥! 이거 왜 이러시나? 말 몇 마디로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장사 그따위로 하면 곤란하지! 나, 이래봬도 신양에서는 알아주는 마당발이야. 내가 입 벌리면 발 끊을 손님 여럿 있을 텐데..."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는 천성이 좀 야비한 것 같았다. 그가 이렇게 느물대자, 주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한동안 쩔쩔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기왕 드시던 것이니 마저 드시고요, 사죄하는 뜻에서 음식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짤그랑 소리가 울리는 것이, 감주(甘酒)로 목이라도 축이라고 동전 몇 문을 찔러 주는 모양이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는, "흠! 다음부터는 주방에 있는 애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하더니 국수 그릇을 다시 붙잡았다. 이 수작을 낱낱이 지켜보던 대왕곤은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도적질에는 이골이 난 몸이지만, 세상에는 수륙(水陸)을 가릴 것 없이 너무 많은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푸른 관복을 입은 놈도 있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놈도 있으며, 남루한 베옷을 입은 놈도 있다. 하지만 걸친 게 무엇이건 간에 모두 도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음식이 짜기는 더럽게 짜네요." 한 식탁에 앉아 있던 졸개 중 하나가 대왕곤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너도 저놈처럼 야료라도 부리고 싶은 게냐?" 졸개는 황급히 도리질을 치며, "아닙니다요!"라고 말한 뒤, "제가 비록 칼 들고 고깃배는 털지언정, 밥장사 상대로 야료 부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요."라고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왕곤은 피식 웃고는, 그의 왼편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단탈과 박한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접시에 쌓인 만두들을 집어먹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혓바닥이 없어 짠 줄 모르겠느냐? 아무 소리 말고 뱃속이나 채워 두어라. 해거름까지는 고개를 넘어야 하니까." 음식이 짠 건 사실이었다. 주인 놈에게 한바탕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냐마는, 방금 장사치들이 하는 짓을 보니 한 부류로 놀고 싶지는 않은 대왕곤이었다. 포향령을 넘다 보면 좋은 샘이 몇 있다고 한다. 짠 밥으로 생긴 조갈은 거기서 풀면 그만일 것이다. 몇 무리의 손님들은 저마다 짠 음식에 대해 타박하며 문을 나갔다. 중화참을 맞아 북적대던 열설루(悅舌樓)에 작은 휴식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열설루의 주인, 호 노야의 마음은 편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애꿎은 식탁을 걷어차며, "염병할 놈들!"이라고 씨부렁거렸다. 정말로 호 노야는 모두가 염병에 걸리길 바랐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천벌을 받을 거라는 둥, 밀가루를 바다 속에서 캐왔느냐는 둥, 야속한 소리를 지껄이는 손님들이 염병에 걸리길 바랐다. 그 와중에서 다만 동전 몇 문이라도 챙겨 보려고 으름장을 놓던 아까의 그 망할놈도 염병에 걸리길 바랐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반드시 염병에 걸려야 할 놈은, 닷새 전 호 노야의 침실로 뛰어든 외눈박이 꼽추였다. 술장사 삼십 년에 흉한 꼴은 어지간히 겪어 봤노라 자부하던 호 노야였지만, 그 꼽추의 손에 들린 하나의 머리통을 발견하고는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바싹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 머리통은 원래 이 일대 굴지의 음식점인 팔미대복관(八味大福館) 주인 이가(李哥)의 어깨 위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꼽추는 품에서 한 자루의 비수와 한 주먹의 은자를 꺼내어 호 노야의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호 노야에게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질문 말미에다가 팔미대복관의 주인은 머리가 나빠 비수를 선택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아니고서야 그 상황에서 어찌 은자를 집지 않겠는가! 호 노야는 은자를 집었고, 꼽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밖을 향해 "들어오너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건장한 사내 하나가 큼직한 가마니 하나를 짊어지고 들어와 침실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꼽추는 가마니 속에서 한 줌의 하얀 가루를 끄집어 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이레 동안, 이 식당에서 나가는 모든 음식에 이것을 한줌씩 넣어라. 만약 이 말을 어길 시에는 은자와 비수가 자리바꿈을 할 터이니, 명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꼽추는 뭐가 그리 바쁜지, 벌벌 떠는 호 노야를 남겨 둔 채 휑하니 떠나 버렸다. 다음날 아침 거리에 나선 호 노야는, 지난밤 천보포향령 동편에 자리잡은 식당가에서 줄초상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팔미대복관을 비롯한 몇 군데 식당의 주인이 자신의 침실에서 목 잘린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기이한 것은, 그날 아침에는 유난히도 식당 주인들이 거리에 많이 나왔고, 또 줄초상 소식을 전해 들은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안도의 빛이 어려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호 노야처럼 말이다. 각설하고, 상대는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강호인이었다. 살아남은 다른 주인들도 그렇겠지만, 호 노야 또한 강호인을 상대로 오기를 부릴 만한 뱃심은 몸뚱이 어느 구석에도 담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날 아침부터 주방에서 나가는 모든 음식 그릇에 꼽추 노인이 놓고 간 하얀 가루 한줌씩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음식이 짜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간이 다된 음식에 소금이 한줌씩 더 들어갔으니, 짜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난 선설루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호 노야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음식이 짜다는 불평은 지난 닷새 동안 천보포향령 동편의 모든 식당들로부터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짜다.'는 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올라오는 호 노야였다. 그는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들을 돌아보았다. 물을 그득 부어 푹푹 끓이면 개밥으로나 쓸까? "금싸라기처럼 귀한 소금을 개밥이나 만들려고 식당마다 뿌렸단 말이지? 하여간에 강호인이라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염병할 놈들뿐이라니까!" 호 노야는 다시 한 번 씨부렁거렸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1 장 - 1 묘왕동주 2 박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기분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주 예민한 사람이 감기에 걸리기 하루 전쯤에 느낄 수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균형 상태에 있는 신체의 어딘가에서 불화(不和)의 조짐이 움트고 있었다. 비록 구체적인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몸뚱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박한은 일행을 돌아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징후를 감지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저 하나같이 땀을 줄줄 흘리며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병이 생기려는가?' 박한은 이렇게 생각하며 잠시 늦추었던 걸음을 재촉했다. 심신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에게 병이란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절심거사의 문하에서 검을 수련한 뒤부터는, 그 흔한 배탈 한 번 앓아 본 적이 없는 박한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몸뚱이란 것이 원래가 간신배의 교언영색(巧言令色)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인간을 병(病)의 질곡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무공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십 년이 건강했다 하여 앞으로의 십 년도 건강하리라는 장담은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명상을 통해 다른 차원의 경지로 나아가기 시작한 신체는 미미한 불화의 조짐에도 즉시 반응할 정도로 오묘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내기(內氣)를 운용한 것이 아닌데도, 박한은 몇 걸음 내딛는 동안 아까의 이상한 징후가 많이 사그라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그릇의 먹물을 냇물에 부어도, 끊임없는 냇물의 흐름이 먹물의 흔적을 순식간에 삼켜 버리는 것과 흡사했다. 석삼도가 추구하던 등선(登仙)의 길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은 조금 흡족해졌다. 그러나 박한의 흡족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 * "이봐! 젊은 친구가 무슨 땀을 그리 흘려? 장가가서 구박받지 않으려면 보약이라도 몇 재 먹어야겠는걸?" 나이가 제법 지긋한 수적 하나가 곁에서 걸어가는 젊은 졸개의 어깨를 탁, 치며 핀잔을 주었다. 젊은 졸개는 자신이 땀을 흘리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땀이라고요? 제가요?"라고 말하며 나이 든 졸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 땀이야 아저씨가 흘리면서 괜히 나보고... 어?" 말을 하던 젊은 졸개는 깜짝 놀랐다. 나이 든 졸개의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점차 검은 색깔로 변하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는 허수아비처럼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괴현상은 비단 젊은 졸개에게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젊은 졸개를 부축하려던 나이 든 졸개가 팔을 한두 차례 내저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대왕곤의 졸개들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픽픽 자빠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대왕곤이 그 기미를 눈치챘을 때에는,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졸개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대왕곤의 입에서 다급한 경호성이 튀어나왔다. 그는 황급히 걸음을 돌려 졸개들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그는 한걸음도 채 내딛지 못하고 신형을 휘청거렸다. 심장이 방망이질치듯 쿵쾅거리고, 목구멍에 대추라도 걸린 것처럼 호흡이 힘들었다. 대왕곤은 자신이 뭔가 고약한 기독에 중독되었음을 깨달았다. '대체 어디서...?' 대지가 천천히 회전하는 듯한 현기증 속에서도 대왕곤은 의혹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번 추격에 참가한 이후, 중독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이유는 단 하나, 단탈이라는 살아 있는 독 덩어리가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리 준비해 온 음식을 먹기 전에는 언제나 은막대로 첨독(添毒) 여부를 시험했다. 오죽했으면 고개 중턱에서 만난 샘물조차도 은막대를 담궈 본 다음에 마셨겠는가! 짜디짠 점심 탓에 목구멍이 갈라지는 듯한 조갈 속에서도 말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경로로 중독된 것일까? 이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하하하!"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십여 걸음 떨어진 길가 바위 뒤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꼽추노인을 본 순간, 대왕곤의 어금니는 거칠게 맞물려졌다. "오살량...!" 꼽추노인의 정체는 사천의 민산 일대에서 잔혹한 심성과 기경할 용독술로 악명을 떨친 노독물(老毒物), 민산독마 오살량이었다. * * * "우하하하! 꼴들이 보기 좋구나!" 오살량은 하늘이 떠나갈 듯한 대소를 터뜨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고갯길 위에는, 그가 안배한 연환계(連環計)가 말처럼 '보기 좋게' 완성되어 있었다. 오살량은 이 연환계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 하면, 과거 사천에서 이름 높은 당씨(唐氏)들로부터 몇 가지 기독(奇毒)을 훔쳐 낼 때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식당 주인을 위협해서 음식에 소금을 집어넣는다거나,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 천보포향령의 모든 샘물마다 혈감(血甘)을 푸는 일 따위의 번거로운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혈감이라는 물건은 그 자체로 아무런 독성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닷새 동안 이 고개를 넘은 많은 행인들은 혈감이 풀린 샘물을 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혈감은 한 가지 물건과 접하면, 어떠한 사람도 저항할 수 없는 무서운 독으로 바뀐다. 오살량이 방금 전 공기 중에 살포한 극미한 분말, 무형산(無形散)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연환계는,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그물이었다. 오살량은 추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길목에 거대한 그물을 펼쳐 놓은 것이다. 인상 착의를 확인한 오살량이 무형산을 살포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는 무서운 그물을... "솜씨가 좋군요." 짧은 칭찬과 함께, 남력이 한 무리의 사내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살량은 득의 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기에 내가 뭐랬던가? 남 노제는 칼 뽑을 기회도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남력은 자신의 안령도가 곧 쓰이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추격자의 수효는 모두 여덟... 그 중 일곱은 오살량이 하독(下毒)한 혈감과 무형산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졸개로 보이는 다섯은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고, 제법 강단있어 보이는 두 사람`-`하나는 외눈박이였고 다른 하나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검객이었다`-`도 하체에 맥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달랐다. 사방으로 뻗친 짧은 머리카락이 파계승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은 얼굴의 사내였다. 그의 두 눈은 형형한 빛을 뿜어 냈고, 그의 두 다리는 석주(石柱)처럼 굳건해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에게서는 어떠한 중독의 기미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독공고수가 있다더니...' 남력은 상성에서 받은 전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철가장을 무너뜨린 자들 중에는 인간의 몸뚱이를 녹여 버리는 독공고수가 있다고 했다. 혈감과 무형산에 당하고도 쓰러지지 않는 자를 독공고수라 부르지 않으면, 천하의 그 누구를 독공고수라 부를 수 있겠는가! 이때 남력의 얼굴을 노려보던 독공고수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입술의 양 꼬리가 귀 쪽으로 벙긋 당겨진 것이다. 약간 괴이해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웃음이었다. 이 난데없는 웃음에 남력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할 때, 그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는 얼굴이 있군." 마치 어릴 적 헤어진 친구와 다시 상봉한 듯한 말투였다. 남력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지만 누구도 그 사내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력이 두리번거리자 그 사내는 섭섭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우린 삼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지. 나는 그때 흑왕을 막 잡은 뒤였고... 왜 있잖아? 커다란 검은 표범 말이야." "...!" 남력의 눈이 커졌다. 그 이름이 단탈이라고 했던가? 삼 년 전의 어느 날, 묘강의 울창한 숲속에서 검은 표범가죽을 말리던 사내... 단탈은 당시 조추림과 십살을 속이고 장옥평을 빼돌렸고, 조추림과 십살은 그 대가로 단탈이 살던 부족을 피로 씻었다. 바로 그 단탈이 삼 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남력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단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가워... 너무 반가워서 죽고 싶을 지경이야." 죽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죽이고 싶은 것일까? 말이 끝나는 순간, 단탈의 몸뚱이는 십여 걸음의 거리를 단숨에 지워 버리며 남력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결에 뽑았는지, 그의 오른손에는 거무튀튀한 칼이 들려 있었다. 중독된 일행의 안위 따위는 완전히 도외시한 돌격이었다. 본디 남력의 앞에는 오살량이 서 있었다. 기묘한 용독술로 이름 높은 오살량이지만, 일신에 지닌 무공은 남력에 비교할 수 없이 천박한 그였다. 단탈이 질풍처럼 달려들자, 그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나려타곤(懶驪打滾)의 수법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단탈의 목표는 오살량이 아니었다. 오직 남력만을 목표로 달려들던 그에게, 굼벵이처럼 땅을 굴러 달아나는 꼽추 늙은이의 존재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오살량은 본체만체, 한껏 뒤로 젖힌 오른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쐐애액`-`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떨어지는 칼날 아래에서 가련한 공기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이 무지막지한 기세의 칼날을 누가 감히 막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한 자루의 시퍼런 안령도는 어떠한 기세라 할지라도 피하지 않는 굳센 병기였다. 적어도 복건제일도라 불리는 귀면도 남력의 손에 들렸을 때에는 그러했다. 꽝! 한 줄기 맹렬한 폭음이 울렸다. 단탈과 남력, 수직으로 떨어져내린 거무튀튀한 칼과 비스듬히 올려 친 안령도가 거세게 부딪친 것이다. 그 순간, 남력은 안령도를 움켜쥔 손목이 뒤로 꺾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불과 삼 년 전만 해도 미개한 오랑캐에 불과하던 단탈이 아닌가! 그런 단탈이, 그것도 다른 병기가 아닌 도에 실린 기세로 복건제일도를 밀어 내다니! 한 자루의 거무튀튀한 칼은 남력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을 시간적인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휘리릿`-`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1 장 - 2 묘왕동주 그 뭉툭한 칼끝에서 맹금의 울음 소리와도 흡사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살갗이 아릴 정도의 맵싸한 기운이 남력의 얼굴을 횡으로 후려쳐 왔다. 아무리 물러설 줄 모르는 남력이라 해도 얼굴이 반쪽나는 일을 멍청히 당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그는 허리를 뒤채며 몸을 피했다. 하지만 얼굴을 덮고 있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절반 이상이나 녹아 붙는 데에는 등골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독!" 남력은 낮게 부르짖었다. 단순히 도기(刀氣)라면 머리카락을 벨 수는 있어도 녹일 수는 없었다. 단탈의 칼이 무시무시한 독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남력은, 천주부동(天柱不動)의 자세로 백회(百會)에서 단전(丹田)에 이르는 요처를 방호하는 한편, 재차 몇 발짝을 물러서 중독에 대비해야만 했다. 이쯤되면 단탈의 패도에 완전히 기선을 빼앗긴 셈이다. 이 추세가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천하의 남력이라도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남력에게는 몇 사람의 방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철가장·풍림채·마가곡물상에서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이야압!" 쌍창합격(雙槍合格)이 일품이라 알려진 강씨(姜氏) 형제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단탈에게 쇄도했다. "이놈!" 달려오는 황소를 한 손가락으로 세울 수 있다는 지공(指功)의 달인 조환(曹桓)과 십살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곽극달(郭克達)이 절기를 발휘하며 단탈의 우반신을 휩쓸어 갔다. 이들 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각기 한 지방을 주름잡던 강호들이었다. 그들이 주장(主將)을 위기로부터 구하고자 전심전력으로 전개한 공격이었으니, 그 위력이란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했다. 깡`- 빠바박`-`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단탈의 신형이 일 장 가까이 밀려나갔다. 전방을 꽉 채우고 밀려든 네 사람의 공격에 그만 격퇴된 것이다. 한차례의 접전에서 성과를 거둔 네 사람은 한층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단탈을 향해 재차 쇄도해 들어가는 네 사람의 기세는 태산도 무너뜨릴 것처럼 굉렬(轟烈)해 보였다. 그런데 단탈은 아까와는 달리 네 사람의 공세를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 줄기 괴이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처음 남력을 보았을 때 머금은 것과 흡사한 웃음. 마치 유령의 그것처럼 싸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전장으로부터 삼사 장 떨어진 곳까지 몸을 빼낸 오살량은, 믿었던 남력이 두 합 만에 물러서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비록 큰 손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지만, 검은 얼굴의 사내가 뿜어 내는 광기와 같은 기파(氣波)는 복건제일도 남력을 오히려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원 천지에 원수들을 깔아 놓은 오살량에게 있어서, 철옥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피신처였다. 그리고 남력은 조추림과 더불어 오살량이 철옥에서 활개치고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결코 이런 곳에서 잃어서는 안 되는 요인(要人)인 것이다. 그 순간, 오살량은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신 공부가 달리는 그가 남력조차 쩔쩔매는 고수를 제압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그의 장기인 용독술인데, 불행히도 검은 얼굴의 사내에게는 그것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좋다!' 오살량은 눈빛을 빛내며 혈감과 무형산에 중독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사내들에게 달려갔다. 그들 중 살아 있는 한 놈을 인질로 삼는다면, 검은 얼굴의 사내도 싸움에만 전념하지는 못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환갑을 넘긴 나이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강호의 도리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넘어진 다섯 명의 졸개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앉아서 독기에 저항하고 있는 두 사람만은 아직 명줄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두 놈씩이나 있을 필요는 없지!' 인질은 하나로 충분했다. 어떤 놈을 처치할까 고민하던 오살량은 문득, 그 중 하나가 낯이 익음을 발견했다. '이놈은 삼협의 대왕곤이 아닌가!' 활동 무대가 비슷하고 눈이 하나뿐이라는 게 일치한 탓에 기억하고 있는 외눈박이 수적 대왕곤. 그는 지금 이 순간 퍼렇게 질린 얼굴 가득 시커먼 땀방울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저승 문턱에 한 발을 들여놓은 행색. 오살량은 비릿한 살소(殺笑)를 머금었다. 죽일 놈이 정해진 것이다. "아는 처지에 좋은 일 한번 해주마!" 오살량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는 목숨인 바에야, 인질이 되어 고생하느니 깨끗이 죽어 버리는 편이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치켜 든 쌍수가 대왕곤의 머리통 위에 떨어지기 직전, 오살량은 등뒤에서 터져 나온 날카로운 쇳소리에 몸을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끼이이익`-` 자신도 모르게 뒤쪽을 돌아본 오살량은, 눈앞에 전개되는 엄청난 상황에 그만 눈알이 툭 불거지고 말았다. 그것은 망혼(亡魂)이었다. 두리뭉실한 형체의 시커먼 유령이었다. 그런 유령이, 생김새에 걸맞는 소름 끼치는 귀곡성과 함께 한 자루의 거무튀튀한 칼끝에서 튀어나왔다. 어쩌면 칼과 칼을 쥔 단탈 자체가 시커먼 유령으로 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파파팍`-` 콩 볶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창날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두 자루 장창으로 건곤전도(乾坤轉倒)의 연수합격을 연출하던 강씨 형제는 유령이 토해 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력(巨力)에 휩쓸려 버렸다. "아아악!" 삼 장이나 날아가 떨어진 그들 형제의 가슴팍은 코끼리가 밟고 지나간 것처럼 끔찍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끔찍한 신세에 처한 것은 비단 그들 형제만이 아니었다. 조환은 경악에 물든 시선으로 자신의 목줄기를 관통한 한 자루 장검을 바라보았다. 장검의 끝에는 하나의 손목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장검일까? 그리고 저 손목은 누구의 것일까? 의혹은 구름처럼 일고 있었지만, 목줄기를 관통당한 사람은 품고 있는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다. 모로 쓰러지는 조환의 눈은 풀리지 않은 의혹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조환의 목을 관통한 장검과 그 끝에 매달린 손목의 임자는 곽극달이었다. 지금 이 순간, 곽극달은 바다를 처음 대한 어린아이처럼 넋이 빠져 있었다. 한번 검을 뽑으면 무엇도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불고검(不顧劍)이라 불리는 곽극달은, 별호만큼이나 단호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방금 전 시커먼 유령이 장씨 형제를 덮쳐 갈 때에도, 추호의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그 측면을 향해 일검을 찔러 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커먼 유령에게는 취약 부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체가 공격을 위한 병기인 동시에 방어를 위한 갑주이기도 했다. 찔러 간 장검이 무엇인가에 막혀 튕겨졌다. 다른 무엇인가가 장검을 쥔 손목께를 가르고 지나갔다. 장씨 형제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 손목을 매단 채 날아간 장검은 조환의 목줄기를 관통해 버렸다. 하나의 흐름으로 일관된 이 일련의 사태를 똑똑히 목격했으니, 곽극달이 어찌 넋이 빠지지 않겠는가! 이때 장씨 형제를 날려 버린 그 유령이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생물과도 다른 종(種)이었으니,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한 것은 곽극달 혼자만의 생각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개를 돌린 유령은 곽극달을 향해 스윽 밀려왔다. 곽극달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것은, 몸뚱이 전체가 유령의 괴이한 그림자에 먹힌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도령체(刀靈體)구나!" 남력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결코 수하 넷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경호성 따위나 내뱉으며 머뭇거리는 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시커먼 유령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남력이 꼼짝못하고 수하 넷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단련된 신경 조직마저 마비시킬 만큼의 커다란 경이감 때문이었다. 도기의 수발이 절정에 달해, 어느 순간 신체 자체가 도기에 휩싸여 사람과 병기가 하나가 되어 버린다는 절정의 경지. 그것이 바로 도령체였다. 과거 삼마의 일인이자, 도객으로서는 백년 이래 최고봉을 이루었다는 도무비. 남마련이 화염에 휩싸이던 날, 분노한 도무비가 칼을 뽑자 일진의 귀곡성과 함께 불그스름한 안개가 누에고치처럼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고 한다. 그때 도무비는 이 도령체로써 무려 이십여 명의 북정회 일류 고수들을 도륙했으니, 그 파괴력이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도무비를 끝으로 누구의 접근도 불허한 환상의 경지 도령체가, 완강하기만 하던 그 벽이 지금 한 사람에 의해 허물어졌다. 남력은 단탈의 적이기에 앞서, 한 자루 안령도를 휘두르며 강호를 질타해 온 도객(刀客)이다. 몽매에도 그리던 도령체를 목격한 그는, 단탈에게 갈채라도 보내고 싶은 괴상한 심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단탈은 남력에게 단 한 점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스멀거리던 시커먼 유령이 조금씩 옅어지며 단탈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이하게도 창백한 얼굴,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은 하늘을 찌를 듯 곤두서 있다. 단탈이 말했다. "너만은 반드시 죽인다."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잠시 도령체를 푼 것 같았다. 푸스스`-` 수그러들었던 도령체의 묵기가 뭉클뭉클 일어났다. 남력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가 수련한 귀영참선도법(鬼影斬仙刀法)으로 도령체의 신화를 깨뜨리든지, 아니면 도령체의 신화에 꺾여 이 포향령에 뼈를 묻든지... 화악`-` 도령체의 시커먼 동체가 남력의 눈앞으로 밀려왔다. 오살량의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검은 얼굴의 사내가 무서운 실력자임은 짐작했던 일이지만, 이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개개인의 무공이 오살량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고수 넷을 눈 깜짝할 새에 저승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인질은 단순히 남력을 돕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살량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그러려면 한시 바삐 대왕곤을 처치하고 밀짚모자의 사내를 수중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오살량이 대왕곤을 처치하고자 다시 오른손을 치켜 들었을 때 고약한 일이 벌어졌다.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사내 하나가 그에게 달려든 것이다. "이 더러운 꼽추야! 우리 형님을 건드리지 마라!"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1 장 - 3 묘왕동주 고개를 돌린 오살량은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얼굴에 기겁을 했다. 아마도 그의 정신이 검은 얼굴의 사내에게 쏠린 사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접근한 모양이었다. 사내의 볼따구니에는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시퍼런 반점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아미자는 볼따구니의 반점보다 훨씬 기분 나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대왕곤을 후려치려던 손바닥으로 사내의 공격을 막아 간 것은 엉겁결에 한 행동이었고, 그런 장력이 교묘할 리 없었다. 푹!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장심이 꿰뚫리는 극렬한 통증이 오살량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통증은 곧장 분노로 이어졌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오살량은 왼손을 갈퀴처럼 구부려 사내를 힘껏 할퀴었다. 그는 왼손 인지와 중지에 인조 손톱을 끼우고 있었다. 두 겹의 얇은 강판으로 만든 그 인조 손톱의 틈새에는, 그가 과거 사천의 당씨에게서 훔쳐 낸 칠보절(七步折)이라는 이름의 독액이 담겨 있었다. 부욱`-` 사내의 가슴에 두 줄기 길쭉한 고랑이 파였다. 내친 김에 뻗어 친 강력한 발길질이 사내의 갈비뼈를 산산이 으스러뜨렸다. "켁!" 푸른 반점의 사내는 두 눈을 하얗게 까뒤집으며 뒤로 자빠졌다. 그런데 그가 자빠진 곳은 하필 대왕곤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결국 그와 대왕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땅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독 기운으로 의식을 잃었던 대왕곤은 외부로부터 전해 온 갑작스런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힘겹게 뜬 그의 두 눈에 비친 사람은, 뜻밖에도 하남성 경계 부근에서 헤어진 의동생 반교였다. "끅`-`끄윽`-`" 반교는 뒤집어진 딱정벌레처럼 사지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반쯤 벌린 그의 입에서는 침인지 거품인지 모를 허연 액체가 부글거리고 있었다. "자, 자네... 왜...?" 대왕곤은 반교에게 묻고 싶었다. 잘 살아 주겠노라 호언하며 떠난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를, 강한 자에게 여간해서는 덤비지 않는 그가 왜 오살량 같은 고수에게 달려들었는지를, 할포단교(割袍斷交)까지 하려던 그가 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는지를... 대왕곤은 반교에게 묻지 못했다. 물론 지금의 반교는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묻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이미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 가지 물음의 대답은 결국 하나였다. 장강육어는 영원한 형제였던 것이다. 살아서도, 그리고 죽은 뒤에도... "싸가지없는 새끼들! 오냐, 원한다면 함께 죽여 주마!" 오살량의 추괴한 얼굴에 살기가 가득 차 올랐다. 그는 성한 왼손을 품에 넣어 한 움큼의 독질려(毒 藜)를 꺼냈다. 이 암기 또한 그가 당씨들로부터 훔쳐 낸 무기였다. 남의 눈을 의식한 탓에 여간해서는 사용을 피했지만, 지금의 그는 남의 눈을 의식할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오직 독질려가 두 사람에게 가져다 줄 지독한 고통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뒈져라!" 독살맞은 외침과 함께 뒤엉킨 대왕곤과 반교 위로 독질려의 우박이 퍼부어졌다. 죽음의 사자,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 줄 사자가 두 사람의 몸뚱이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사자가 박힌 곳은 두 사람의 몸뚱이가 아닌, 하나의 챙 넓은 밀짚모자였다. "앗!" 오살량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독질려에는 사천의 당씨들이 쌓아 온 오백 년 전통이 담겨 있었다. 결코 밀짚모자 따위로 막아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오살량은 밀짚모자가 날아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평범한 얼굴의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오살량이 기억하는 한, 그 사내는 분명히 혈감과 무형산에 중독된 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인질로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사내가 허름한 밀짚모자로 비완포적(飛椀捕滴)의 놀라운 재주를 발휘하다니! 그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안색이야 비록 백지장처럼 창백했지만, 그 눈빛만은 청산(靑山)의 벽수(碧水)처럼 맑기만 했다. 순간, 오살량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놈은 이미 혈감과 무형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오살량이 이렇게 경악하고 있는 동안, 그 사내는 어깨 위로 삐죽 솟은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슬쩍 움직였다. 하지만 삼 장의 거리를 단숨에 없애는 것을 단지 '슬쩍 움직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싸악`-` 목덜미를 향해 날아든 새하얀 빛 덩어리는 오살량의 의식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몸통에서 깨끗하게 분리된 수급 하나가 초겨울의 푸른 하늘에 선연한 피 무지개를 만들었다. 3 귀영참선도법은, 귀영(鬼影)이라 불릴 만큼 경묘(輕妙)했고 참선(斬仙)이라 불릴 만큼 냉혹한 수법이었다. 또한 복건제일도 남력에게는 자신이 수련한 도법의 장점을 십분 살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남력은 귀영의 경묘함도, 참선의 냉혹함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령체라는 엄청난 거력이 그의 모든 장점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안령도를 휘둘러 보았지만, 수레를 가로막으려는 사마귀의 형국. 결국 남력은 반 각 만에, 바위라도 쪼갤 듯한 무시무시한 삼 도를 얻어맞고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스으으`-` 도령체를 이루던 단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의 검은 얼굴은 유난히도 창백했다. 턱선을 따라 흐르는 보일 듯 말 듯한 혈선(血線)은, 그가 적들을 쓰러뜨리는 데 얼마나 과도한 내력을 소모했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구천망혼(九泉亡魂). 장한도법의 네 번째 단계인 이 수법은 이름 그대로 시전자 자신이 구천을 떠도는 유령이 되는 것이다. 도기로 똘똘 뭉쳐진 도령체의 유령 앞에서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 하지만 위력이 강한 만큼 시전자의 몸에도 큰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 지금 단탈의 몸뚱이를 쉴새없이 후려치는 지독한 고통이 그 증거였다. 이때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마포(麻布) 중년인의 입술이 달싹였다. "단탈... 자네 이름이 단탈이지?" 단탈은 그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범인이라면 단지 살갗이 베인 것만으로도 절명할 수밖에 없는 독병(毒兵) 가리아에 의해 양 어깨가 반쯤 떨어지고 가슴이 갈라진 상태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저 신기하기만 할 뿐, 단탈은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 중에는 독에 특별히 강한 사람도 있다. 가리아가 그랬고 단탈이 그랬다. 그러한 부류에 한 사람쯤을 더 집어넣는다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곧 죽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마포 중년인이 다시 말했다. "이곳에는 왜 온 거지? 원수를 갚으려고 온 건가?" 단탈은 고개를 저었다. "나라아합을 찾으러 왔다." 마포 중년인은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폐에 차 있던 죽은 피가 뿜어지며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헉, 헉... 재미있군... 겨우 여자 하나를 찾으러 왔다는 말이지? 여자 하나를 찾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도령체를 익혔고... 쿨룩! 그래서 지금 사지(死地)가 될지도 모르는 신양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지?"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포 중년인은 웃었다. 입가로 핏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흐, 흐흐... 삼 년 동안 그 여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그 여자는 삼 년 동안 조 공자와 함께 살았고, 조 공자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잤네. 이제 완전히 조 공자의 여자가 되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말인가?" "물론!" 단탈은 짧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라아합은 조추림에게 끌려갔고, 그녀에게는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 조추림이 그녀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는가는 보지 않고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추림과 잠자리를 함께했다 할지라도 단탈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단탈은 단지 그 이유로 절망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탈이 나라아합을 되찾고자 하는 데에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잃어버린 아내를 되찾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나라아합은 곧 아합족이었다. 가족이 풍성했을 때에도 그랬거니와, 가족이 몰살당한 지금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탈은 아내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잃어버린 아합족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그 여자가... 자네에게 돌아와 줄 것 같은가?" 마포 중년인이 묻자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사람이야..." 마포 중년인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네도... 그 여자도..." 그 말을 끝으로 마포 중년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은 영원히 떠지지 않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상권 제 21 장 - 4 묘왕동주 * * * 대왕곤이 반교를 처음 본 곳은 사천의 한 관도였다. 반교는 커다란 가쇄(枷鎖)를 쓰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두 명의 압송관인(押送官人)이 따라가고 있었다. 당시 살인죄를 범한 그는, 형지(刑地)인 사천행도사(四川行都司)로 끌려가는 죄수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성마르게 생긴 반교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직까지도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때 대왕곤은 큰 칼을 뽑아 들고 뛰어나가 압송관인들을 죽여 버렸고, 반교가 쓰고 있던 가쇄를 부숴 버렸다. 반교는 이를 고마워하며 스스로 아우 되기를 원했다. 벌써 십 년 하고도 한두 해 전의 일이었다. "으... 끄윽..." 반교의 입에서 딸꾹질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던 대왕곤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셋째야! 정신이 드느냐?" 반교의 눈꺼풀이 힘겹게 떨어졌다. 이것이 정말로 삼협의 독종 반교의 눈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순해 보이는 눈망울이 눈꺼풀 사이에서 나타났다. "무, 무사했구려... 흐으..." 반교는 입을 삐죽였다. 아마도 웃으려는 듯. 하지만 피와 거품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입으로는 어떤 모양을 만들어도 웃음처럼 보이지 않았다. "꼽추 놈은... 어떻게 되..." "놈은 박 공이 단칼에 죽여 버렸네. 자네가 정신을 차린 것도 놈이 지닌 해독약을 먹었기 때문이지." "해독... 약... 흐으..." 반교의 입이 다시 삐쭉였다. 그는 오살량의 해독약이 자신의 목숨을 살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러진 갈비뼈가 흉부의 기관들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은 해독약 따위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다. 대왕곤은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삼키며 반교를 책망했다. "이 바보 같은 친구야! 왜, 왜 돌아왔느냐?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게 아니냐?" 아무리 해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니고는 달리 꺼낼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대형이 잘 가나... 보려고... 흐으... 그런데 그 개 같은 꼽추 놈이... 감히 대형을... 끅! 끄윽!" 반교의 몸이 급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셋째야! 셋째야!" 대왕곤은 반교의 몸을 흔들다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옆에는 박한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밀짚모자를 쓰지 않은 박한의 얼굴은 무척 헌앙해 보였다. 해약의 도움 없이도 오살량의 독수를 풀어 버리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박한도 지금은 슬퍼하고 있었다. 반교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슬픔의 기운이었다. 박한은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한때는 적이었다가 잠시 동료가 되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아니면 추악한 암수와 비정한 싸움으로 점철된, 반호가 토해 낸 피거품보다도 더러운 강호를? 그 속에서 뒹굴다 죽어 간, 그리고 죽어 갈 모든 인간들을...? 글을 아는 수하가 남김없이 죽어 버렸으니, 이제 대왕곤은 박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박한의 슬픔이 세상을 사랑하는 대인대덕(大仁大德)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반교가 대왕곤의 팔뚝을 덥석 움켜잡았다. 죽어 가는 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억센 힘이었다. "대형! 날 버릴 생각은 아니었죠? 이 일만 끝나면 나, 나를 찾아 삼협으로 올 생각이었죠?" 반교는 삼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던 것일까? 대왕곤은 눈을 꽉 감았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렸다. 하지만 아린 눈알이 아무리 아프다 한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에 어찌 비할 수 있으랴. 꽉 감긴 그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외눈박이가 흘리기에 비장할 수밖에 없는 눈물 방울이... "흐으... 그럴 줄 알았지! 난 형님이 다시 삼협으로 갈 줄 알고 있었다니깐... 크흐..." 대왕곤은 아무 대답 없이 눈물만 흘리는데, 반교는 오히려 키득거렸다. "셋째, 너는... 그렇게까지..." 대왕곤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에게 삼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은 반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까닭으로 이 고개까지 따라왔단 말인가! 반교는 어떻게 해서든 대형의 생각을 돌려 보겠다는 마음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래서 삼협에서의 호쾌한 나날들을 다시 한 번 누려 보고자 한 것이다. 문득, 반교의 두 눈에 기이한 광기가 감돌았다. 그의 생명을 밝히던 심지가 마지막 광채를 사르고 있었다. "마, 막내까지 삼협으로 오면... 우, 우리는 다시 와, 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흐흐... 그러면 정말 신이... 날... 거야..." 대왕곤의 팔뚝을 움켜쥔 반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셋... 째야... 으흐흑!" 대왕곤은 반교의 몸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고개가 떠나가도록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 비정한 세상은 꿈을 이루어 보려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제목이 잘못(죄송) -> 하권 제목이 잘못됐군요 상권이 아니라 하권입니다.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신양(信陽) 묘왕동주 제 22 장 신양(信陽) 1 캬우! 반호는 놀란 나머지 움켜쥐고 있던 나무 뿌리를 놓칠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죽을 고생을 하며 기어오른 이십여 장 비탈을 굴러 떨어져 어디 한 군데는 제대로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나무 뿌리를 놓치지 않았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컹! 컹! 그가 움켜쥔 나무 뿌리 옆,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들 만한 크기의 동굴 안에서 머리만 내민 채 반호를 향해 짖고 있는 동물은 한 마리의 너구리였다. 너구리는 어렵사리 마련한 보금자리 주위를 얼쩡거리는 인간을 향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반호의 몸 상태는 너구리가 짖는다 하여 화를 낼 정도로 팔팔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너구리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로 심한 부상과 피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 상태가 여하간 심중의 화를 즉석에서 푸는 인간. 죽을힘을 다해 나무 뿌리에 매달린 몸을 끌어올리며 너구리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은 것은, 모두 그 인간성에 기인한 행동이다. 깽! 너구리는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동굴 안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성질 같아서는 쫓아 들어가 껍질이라도 벗겨 버리고 싶지만, 동굴 입구가 워낙 비좁아 보인 데다가 왼쪽 옆구리에 입은 관통상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반호는 그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너, 운이 좋았다. 다음에 만나면 뭉개 버릴 줄 알아라." 너구리가 사라진 구멍을 향해 한차례 엄포를 놓은 반호는 다시 팔다리를 놀려 비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세 좋게 신양을 향해 내려가던 반호가 원숭이처럼 비탈에 달라붙어 끙끙대는 신세가 된 것은, 악당들의 변화 때문이었다. 악당들이 갑자기 변한 것은 어젯밤부터였다. 어젯밤부터 반호가 상대한 놈들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수수깡이 아니었다. 놈들은 강해졌고, 또 치밀해졌다. 어젯밤 싸움에서 반호는 다섯을 채 죽이기도 전에 한 번 찔리고, 세 번 얻어맞고, 여섯 번 차였다.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타격이었지만, 워낙 튼튼한 몸뚱이와 그보다 더 튼튼한 오기를 지닌 반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왼쪽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놓은 난쟁이 도인에게 달려들어 놈의 손가락 하나를 이빨로 끊어 버린 다음,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아난 것이다. 놈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반호는 동이 틀 무렵까지 그러한 격전을 세 번이나 더 겪어야만 했다. 매싸움들은 반호에게 보다 많은 피로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반호는 초인적인 생존력을 발휘해 놈들로부터 몸을 피했고, 해가 중천에 오른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너구리가 살고 있는 비탈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 비탈만 오르면 놈들을 떼어 놓을 수 있을 거야!" 반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토록 고생하며 오른 비탈도 이제 불과 사오 장밖에 남지 않았다. 비탈만 올라가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배를 채울 열매라도 발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반호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올라오느라고 수고했다." 정오의 가을 햇살을 머리 위로 받으며 반호를 치하한 사람은 훌쭉한 얼굴이 성마른 느낌을 주는 금포 중년인이었다. 비탈을 막 기어오른 반호는 입을 헤 벌리고 금포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죽 도열해 있는 십여 명의 사내들을 살펴보았다. 아는 얼굴들이 몇 끼여 있었다. 지난 여덟 시진의 추격전을 통해 익힌 얼굴들이었다. "퉤! 동작들 한번 빠르군!" 반호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뒤,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는 금포 중년인에게 물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네가 죽인 애들의 상관 되는 사람이지. 역천비라는 이름은 들어 보았겠지?" 금포 중년인의 대답을 들은 반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해남 촌구석에서 약초나 캐던 유명마도가 너냐?" 해남도(海南島) 출신이긴 하지만 약초는 한 번도 캐본 적이 없는 역천비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과연 듣던 대로 미친 놈이군." 이때 역천비의 등뒤에서 높은 도관을 쓴 난쟁이 도인이 달려나오더니 반호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기에 뭐랬소이까? 말이 안 통하는 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난쟁이 도인을 본 반호는 반색했다. "여어! 손가락은 괜찮냐?" 어젯밤 반호에게 물려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간 난쟁이 도인, 몽현도인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개처럼 물기나 하고... 네가 그러고도 사내냐?" "으하하! 개가 사람을 무는 거야 당연하지!" 반호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마음까지도 유쾌하지는 못했다. 눈앞에 있는 적들은 이제껏 그가 싸워 온 어떤 자들보다도 강해 보였다. 그에 비해 그는 다치고 지친 몸. 더구나 지니고 있던 힘의 대부분을 비탈을 기어오르는 데 소진해 버리지 않았던가. "말이 길어질 필요는 없겠지. 우리는 네 수급이 필요하다." 역천비가 말했다. 반호는 픽 웃더니 뒷골목 건달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윗도리를 벗어부쳤다. "누가 내 수급을 가져 갈 거냐?" 말아 쥔 윗도리를 앞으로 내밀어 건들거리는 것이, 맹룡(猛龍)만이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역천비는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몽현도인이 기다렸다는 듯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노도는 저놈의 생간을 씹어야 직성이 풀리겠소이다." 반호는 껄껄 웃으며 용두대감도의 끝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너 하나로는 힘들지. 나중에 후회 말고 몇 놈 더 데리고 오너라." "개새끼!" 얼굴이 시뻘게진 몽현도인이 반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돼먹지 않은 허세를 부리는 미친 놈의 이마빼기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반호는 이 순간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건, 자신에 의해 손가락이 잘려 나간 몽현도인이 가장 먼저 나서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몽현도인의 무서움은 몽현추를 통한 원거리 공격. 하체가 풀린 자신이 그 거리를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몇 마디의 말로써 그 불 같은 성질을 긁어 몽현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거리를 없애도록 유도한 것이다. 피피핑`- 몽현도인의 소매 속에서 일곱 정의 몽현추가 튀어나왔다. 살갗을 찌르는 싸늘한 살기가 반호의 전신을 압박해 왔다. 노리는 부위가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실체가 보이지 않는 살기, 몽현추의 장점이었다. '방향만 알면...!' 반호는 왼손에 쥐고 있던 윗도리를 앞으로 던졌다. 그의 윗도리는 마치 한 장의 보자기처럼 활짝 펼쳐지며 몽현추의 살기를 감싸버렸다. 퍼퍼퍽! 아름드리 나무도 그대로 관통하는 몽현추였다. 얇은 천이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일곱 정의 몽현추는 반호의 윗도리에 일곱 개의 구멍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반호가 알고자 한 것은 몽현추가 날아오는 각도였던 것이다. 반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달려갔다. 일곱 정의 몽현추가 반호의 몸뚱이 군데군데에 그 흔적을 새겨놓은 채 스쳐 갔다. 하지만 의복에 뚫린 구멍으로 각도를 확인한 그는 큰 손해 없이 몽현추를 모두 피해 낼 수 있었다. 반호는 왼손을 크게 저어 몽현추가 지나간 공간을 휘감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줄이 그의 왼팔에 휘감겨 겨드랑이 아래에 꽉 끼워졌다. "와라!" 반호는 몽현추의 줄을 틀어쥔 왼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묵직한 느낌과 함께 몽현도인의 몸뚱이가 그를 향해 주르륵 딸려 왔다. "위험하다! 물러서!" 역천비가 경호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왔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하방으로부터 비스듬히 쳐 올린 반호의 용두대감도가 몽현도인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깊숙이 틀어박힌 것이다. 반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몽현추에 파이고 긁힌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정상이 아닌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인 탓이다. 만약 몽현도인이 병기의 장점을 살려 원거리에서 대적했다면, 반호는 십 초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1 묘왕동주 몽현도인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른쪽 겨드랑이가 칼에 갈라진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반호의 칼이 한 치만 더 파고든다면 꼼짝없이 저승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이다. 분노로 들끓던 마음이 급속도로 식으며 후회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난쟁아! 그 옷이 얼마짜리인 줄이나 아느냐?" 반호는 몽현도인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몽현도인의 몸뚱이를 조금씩 돌려 세워 역천비 등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네가 평소에 인덕을 많이... 아주 많이 쌓았길 바란다." 반호는 정말로 그렇길 바랐다. 그리고는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석상처럼 굳어진 역천비를 향해 말했다. "개가 살면 사람도 살고, 개가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 어때?" 역천비의 눈두덩에 잔경련이 스쳤다. 개와 사람을 둘 다 살려야 할지, 아니면 둘 다 죽여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몽현도인이 평소 역천비에게 쌓은 인덕은 반호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나 보다. "몽현도인은 포기한다! 공격하라!" 역천비는 이를 갈며 이렇게 외쳤다. 그의 뒤에 포진해 있던 십여 명의 마두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역천비와는 달리 아직 살아 있는 동료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 하느냐! 영주의 명을 잊었느냐!" '영주'라는 말이 나오자 마두들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어렸다. 온이의 무지막지한 청살기를 떠올렸다면 그럴 만도 한 일이다. 그들은 할 수 없다는 듯 반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반호가 최후의 기력을 짜내어 성사시킨 인질극이 너무도 싱겁게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별수없지. 같이 죽는 수밖에..." 반호는 툴툴거렸고, 몽현도인은 더욱 많은 땀을 흘렸다. 최소한 자신만큼은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비정한 미래를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장내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크윽!" 반호를 향해 다가오던 마두 중 하나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풀썩 고꾸라졌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향했다. 순간, 그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두의 등줄기에 달라붙은 새빨간 박쥐 한 마리를... "혈편복!" "혈편복?" 역천비와 반호가 거의 동시에 토해 낸 외침. 그것을 신호로 마두들의 후미를 급습하는, 죽멸을 눌러쓴 여덟 명의 홍의사내들. "어?" 여덟 명의 홍의사내들은 반호와 구면이었다. 이번 하남행에 있어서 지겹도록 거치적거리던 후레자식들인 것이다. 감단에서 떨군 줄로만 알고 있던 그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거상련 황금화의 총두령 임이평이 자랑하는 무형회선(無形回旋) 혈편복(血 )은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반호의 의문이 쌓여 가는 동안, 두 무리의 난투는 전면전의 양상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전면전이 되었다는 것은, 처음의 기습 효과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후레자식들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지만, 역천비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마두들의 대응책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후레자식들 중 하나가 난전을 교묘히 뚫고서 반호의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뭐 하고 있나? 우리도 오래 버티지는 못해!" 멍청하던 반호의 표정에 노기가 떠올랐다. 후레자식에게 반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후레자식은 반호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깊숙이 눌러쓴 죽멸을 휙 벗어 던지며 다시 외쳤다. "자, 이제 됐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빨리 달아나!" "어?" 반호는 갑자기 나타난 거상련의 홍당 부당주 방철의 얼굴에 어리둥절해졌다. 혈편복 하나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방철이라니! 그러나 방철은 반호에게 긴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었다. 만면에 살기를 띤 역천비가 두 자 길이의 시퍼런 도를 뽑아 들고 그에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방철은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리며 쌍수를 어지러이 떨쳐 냈다. 부친 되는 북천권사 방지중으로부터 물려받은 절세의 수법, 소엽장이 전개된 것이다. 파팍! 파파팍! 역천비의 유명천기도법(幽冥天忌刀法)과 방철의 소엽장이 공기 중에 매서운 파공성을 만들며 얽혀들었다. 유명천기도법은 매섭기가 정월의 북풍 같았지만, 소엽장의 엄중한 수비를 허물 수는 없었다. "너는 거상련의 방철이구나!" 단숨에 아홉 초식을 뿜어 내고도 승기를 잡지 못한 역천비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방철은 역천비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두 눈으로는 역천비의 칼끝을 노려보며, 다만 이렇게 외쳤을 뿐이다. "반호! 네가 가야 우리도 갈 수 있다!" 역천비도 시선을 방철의 얼굴에서 떼지 않은 채 외쳤다. "반호를 놓치지 마! 놈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고 작은 두 사람이 반호를 향해 달려왔다. 평소 몽현도인과 호형호제하던 사이인 관중철일산 왕호와 작도수 강조양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렵사리 찾아온 구명(救命)의 기회였다. 궁금한 점이야 많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난쟁아! 친구들이 찾는다!" 반호는 제압해 둔 몽현도인을 돌려 세우더니 그 등짝을 냅다 발로 찼다. "으악!" 용두대감도가 갈비뼈와 근육을 훑고 빠져 나가는 고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몽현도인은 비명을 지르며 반호를 향해 달려오던 왕호와 강조양에게 날아갔다. 두 사람이 몽현도인을 받아 드느라 주춤거릴 때, 반호는 조금 전 기어 올라왔던 벼랑을 향해 달려갔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장내의 상황 탓에 누구도 그를 가로막지 못했다. "놈을 잡아!" 뒤통수에 실리는 역천비의 외침을 들으며, 반호는 두 팔을 활짝 펴고 비탈 아래로 뛰어내렸다. 반호가 사라지고 반 각쯤 지나자, 상황은 중과부적이라는 말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황금화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라지만 강호에서 청춘을 보낸 호밀령의 마두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방철과 임이평 두 사람의 힘으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지라, 결국 거상련의 무사들은 세 사람의 동료를 잃은 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으으..." 몽현도인은 겨드랑이로 피를 흘리며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런 몽현도인을 바라보노라니 역천비는 부아가 치밀었다. "등신 같은 늙은이!" 역천비는 향후의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밀령 전체가 투입되었는데 별다른 수확 없이 돌아간다면, 온이의 그 무시무시한 청살기 아래 오징어가 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까요?" 강조양이 역천비에게 물었다. 이 시점에서 역천비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철이 달아난 방향과 반호가 달아난 방향은 정반대였다. 당연히 양쪽 모두를 추격해야겠지만, 불행히도 지금의 인원으로는 무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윽고 강조양에게 지시했다. "방철이 달아난 방향을 전서구 편으로 영주에게 보고해라! 우리는 반호를 쫓는다." 아무래도 반호에게 비중을 둔 것은 온이의 청살기 덕분이리라. 비탈은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것이었다. "원숭이 같은 놈..." 비탈을 내려다본 역천비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몸을 하고도 이 가파른 비탈을 내려간 반호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내려가 수색하라!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밀령의 마두들은 저마다 경신술을 발휘하며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한 식경이 지난 뒤. 비탈 아래 잡목림을 수색하던 호밀령의 마두들이 사라지자, 비탈의 어느 한 부분이 들썩거렸다. 이윽고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 하나가 들춰지더니, 반호의 얼굴이 돌 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2 묘왕동주 "제기랄! 갑갑해서 죽을 뻔했네." 반호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한 식경 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던 곳은 비좁은 너구리 굴이었다. 생명이란 과연 소중한지라, 천하의 미친개가 너구리 굴속에서 쥐죽은듯 웅크리는 인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쌍한 것은 반호의 엉덩이에 깔려 죽은 너구리였다. 그러나 반호는 별로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뭉개 버리겠다는 경고대로 실천했을 뿐이니까. 불현듯 머리 위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호의 귀가 쫑긋거렸다. "놓쳤나 보죠?" "개가 사람을 잡는 것은 쉬워도, 사람이 개를 잡는 것은 쉽지 않겠지." '저 새끼가 감히 누구보고 개래?' 반호는 울화가 치밀었다. 불쾌한 별명의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기분과 남이 말하는 것을 듣는 기분은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다행인 것은 위에 있는 놈들에게 발각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깔려 죽은 너구리의 선견지명 덕분이겠지만, 반호가 숨어 있는 굴은 비탈 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각도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비탈을 굴러 내리던 그가 대뜸 이 굴 안으로 숨은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형님은 어떻게 하지요? 이대로 두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별수있나? 총(塚)으로 후송해야지." 반호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저 위에 있는 놈들 중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형님은 난쟁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자네가 업고 가게. 부영주께는 내가 잘 말해 주겠네." 반호의 입가에 음충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하면 망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2 "자액으로부터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할비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장후겸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몇 명의 가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할비를 눈치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재주로 말한다면 할비는 능히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에게 그런 재주가 없었다면, 사패의 한 곳인 산동장가를 삼 년 동안이나 제집 드나들듯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부는 이번 기회에 무왕이 지니고 다니던 천인정(天人靖)이나 보았으면 합니다." "천인정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강호인치고 누가 없겠소이까? 듣자 하니 그 보검(寶劍)에서 뿜어지는 자하광(紫霞光)은 감히 사람의 안력으로 마주할 수 없다고 하더이다." "그러고 보면 무왕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천인정은 검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한번쯤은 가져 보고 싶은 신기(神器)가 아니겠소?" 가신들은 따듯하게 데운 술 주전자를 앞에 두고 이야기 꽃이 한창이었다. 일견 장후겸은 온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귓전에 왱왱거리는 할비의 보고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추림 공자의 주관하에 두 차례에 걸친 무왕총의 기관 시험이 끝났습니다. 시험 결과, 기관의 팔 할 가량이 순조롭게 작동되었다고 합니다." 장후겸의 흰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팔 할이라고? 나머지 이 할은 어떻게 된 것인가?" 장후겸은 할비를 향해 물었다. 강호 어디에서나 고수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그가 할비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혜광심어(慧光心語)가 바로 이러한 경지일 것이다. "몇 군데의 기관에서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연(燕) 노괴(老怪)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할비의 말을 들은 장후겸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연 노괴는 쥐였다. 무왕총을 헤집고 다니는 한 마리의 커다란 쥐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장후겸과 그의 추종자들도 쥐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연 노괴를 잡아죽이려 애썼다. 하지만 연 노괴는 죽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사람과 쥐의 관계라는 게 원래 이랬다.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쥐를 잡아죽이려고 하지만, 쥐는 그리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이다. "끈질긴 것 하나만큼은 높이 사줄 만하군.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기로 하세." 장후겸은 할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 노괴는 본디 무왕총 건설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무왕총은 장후겸이 평생 동안 품어 왔던 꿈을 실현시켜 줄 무대... 그래서 장후겸은 연 노괴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꿈이 대(大)라면 사의(謝意)는 소(小)였다. 연 노괴는 무왕총에 대한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자였고, 장후겸은 소에 연연하여 대를 그르치는 우부(愚夫)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죽이려 했던 것인데, 연 노괴는 장후겸이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는 끈질긴 인간이었다. 최후의 순간, 그는 청면수라 온이의 청살기 아래 팔 하나를 남겨 놓은 채 자신이 설계한 기관 안으로 달아난 것이다. 그것도 이미 신병을 확보해 둔 자식놈까지 구해 가지고서... 달아난 연 노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쥐가 되었다. 자신이 만든 무왕총을 돌아다니는 한 마리의 커다란 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벌써 구 개월 전의 일이었다. '상관없겠지.' 찜찜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후겸은 이쯤에서 쥐에 대한 신경을 끄기로 작심했다. 사람과 쥐의 관계라는 게 역시 이랬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잡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 사람 쪽에서 그러려니, 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원앙제는 어찌 되었는가?" 장후겸은 화제를 돌렸다. 원앙제는 무왕총이라는 무대에 등장할 최고의 배우를 만들어 내는 공정이었다. 장후겸으로서도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팔차 대법까지 무사히 끝났다고 합니다. 북정회가 도착할 즈음이면 아마도 모든 대법이 끝나 있을..." 이제껏 잘 이어지던 할비의 보고가 칼로 자른 듯이 뚝 끊겼다. 바로 다음 순간, 웅장한 내공이 실린 대갈이 장후겸이 머무는 막사를 흔들었다. "웬 놈이냐!" 그리고 휙휙거리는 바람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 왔다. 마치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다. 막사 안에 홀로 남은 장후겸의 안색이 조금 굳어 있었다. 눈치로 보아하니 암중에서 보고하던 할비가 누군가에게 발각된 모양이었다. 할비는 구대문파의 장로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무공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그의 은신술은 천하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살수만큼이나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고인이 있어 그런 할비의 종적을 알아차렸다는 말인가? 잠시 후, 달려나갔던 가신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백의를 입은 청년 하나가 가신들을 뒤따라 들어왔다. 장후겸의 조카이자 산동장가의 젊은 가주 장옥평이었다. '설마 이 아이가...?' 장후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약하다고만 생각해 온 장옥평에게 할비를 물리칠 만한 능력이 있었다니... 하지만 이내 안색을 평온히 하고 물었다. "옥평아,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장옥평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을 가린 괴한이 이 막사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었습니다. 소질이 발견하고 놈을 잡으려 했지만, 신법이 워낙 신비한지라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모두 소질의 불찰입니다." 장옥평의 얼굴에는 분하고 송구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가신 중 하나가 그를 두둔하고 나섰다. "가주님의 검법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괴한도 대단한 놈이지만 가주님의 일검을 어깨에 얻어맞고는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 버렸지요." 장옥평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경비에 소홀하여 백부님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유의하겠습니다!" "쯧, 네게 무슨 과실이 있겠느냐?" 장후겸은 내심 쓰디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조카의 죄를 용서해 줄 수밖에 없었다. 시월 칠일 개봉부를 출발한 북정회 본대가 세 번째 숙영지(宿營地)로 선택한 곳은, 청류강(淸流江)의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하남성 중부의 야트막한 둔덕이었다. 해시(亥時:오후 9시~11시) 무렵, 산동장가 사람들이 유숙하던 동편 막사군(群)에서 의문의 침입자로 인한 작은 소란이 벌어졌지만, 그것도 잠시뿐... 침입자는 달아났고 숙영지는 다시 조용해졌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번초(番哨)들이 밝히는 화톳불의 숫자가 소란이 일어나기 전보다 두 배는 많아졌다는 점 정도.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3 묘왕동주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둔덕을 새하얗게 뒤덮은 서리를 볼 수 있었다. 달콤한 가을 잠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에게, 겨울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과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면서도 약속이나 한 듯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무왕이 잠들어 있는 신양은 이제 육백 리 길. 늦어도 나흘 후면 무왕총을 대할 수 있었다. 가장 화려한 신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기대감은 추위로 얼어붙은 사람들의 몸뚱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날은 시월 십일이었다. * * * 오리구이, 나물, 그리고 옥호춘... 그는 또 한 번의 작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만찬을 즐기는 동안, 만찬을 준비해 온 흑의인은 석실 구석에 있는 등잔의 심지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진규가 갈아 끼우던, 유난히도 가늘고 긴 심지였다. 진규에게 바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삼 개월 전부터 심지를 갈아 끼우는 일만은 꼭 손수 해주던 진규였는데... 그는 궁금함을 느꼈지만 흑의인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를 시중드는`-`혹은 감시하는`-`몇 명의 흑의인들은 하나같이 혀의 절반이 잘려 나간 벙어리들이었다. 물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어버버, 하는 이상한 소리밖에 없을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 마리의 오리구이와 다섯 가지 나물, 그리고 한 병의 옥호춘이 전부인 만찬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쟁반 위에 놓인 수건으로 입가를 닦음으로써 흑의인에게 만찬이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흑의인은 가져 온 쟁반 위에 빈 그릇들을 주섬주섬 담았다. 그러다가 문득, 흑의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깨끗이 빈 그릇들과는 달리 옥호춘이 담겼던 주석병이 아직 절반 가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짓으로 술병을 그대로 놔둘 것을 요구했다. 흑의인은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였지만, 결국 그의 말대로 술병을 치우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도 가끔 음식을 놔두고 가라는 요구를 했고, 비록 수인(囚人)의 신분이긴 했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상부의 명이 지엄했던 것이다. 흑의인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석실을 나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석실 한켠에 있는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머리맡의 돌벽에는 짧고 가느다란 금들이 빽빽히 새겨져 있었다. "일곱, 여덟, 아홉..." 최근에 새긴 금들을 소리내어 세어 가던 그는 이윽고 빙긋 웃었다. "과연 오늘이었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다시 석탁 앞에 앉았다. 석탁 위에는 옥호춘이 담긴 술병 하나만이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주석으로 만든 술병의 표면은 가느다란 심지가 피워 내는 작은 불꽃을 받아 기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즐거워진 기분 탓일까? 그는 술병이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석실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허름한 폐포(弊袍)에 신발조차 신지 않은 앙상한 노인이었다. 알맹이 없이 펄럭거리는 왼팔 소맷자락이 폐포노인의 초라함을 한결 더해 주고 있었다. 그 폐포노인이 나온 곳은, 석실 구석에 있는 측간이었다. 본래 측간에는 검은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폐포노인은 마치 용변이라도 보고 나오는 사람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그 안에서 걸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폐포노인이 처음으로 이 석실에 나타난 것은 대략 구 개월쯤 전의 일이었다. 물론 구 개월쯤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짐작에 불과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오직 석벽에 새겨지는 눈금으로만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그 뒤로 폐포노인은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주기는 정확히 열 개의 금`-`바깥 세상의 기준으로는 한 달일 것이다`-`이 그어지는 시간. 그때마다 폐포노인은 측간에서 저런 표정으로 걸어나왔던 것이다. 석탁 쪽으로 걸어오는 폐포노인의 걸음걸이는 여느 때와는 달리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잠시 살피던 그는 이내 폐포노인의 오른쪽 발가락 중 세 개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음을 발견했다. 지난번만 해도 멀쩡하던 발가락이었는데? "잘 있었나?" 건성기가 다분한 인사를 툭 던진 폐포노인은 하나뿐인 손을 뻗어 석탁에 놓인 술병을 잡았다. 그리고는 보기에도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술병에 담긴 옥호춘이 백년 전부터 자신의 것으로 결정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눈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반 병 남은 옥호춘이 폐포노인의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폐포노인은 손등으로 입가를 쓰윽 훔치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안주!"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매 속에서 오리 다리 하나를 꺼냈고, 폐포노인은 그것마저도 말끔히 먹어 치웠다. "쩝! 요즘 오리들은 너무 마른 것 같지 않나?" 폐포노인은 살 한 점 묻어 있지 않는 오리뼈를 아쉬운 듯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가타부타 대답없이 웃기만 하자, 폐포노인은 오리 뼈를 석탁 위에 팽개치며 투덜거렸다. "젠장! 한 달 만에 만나는 고기는 영양 부실에다가, 한 달마다 만나는 친구는 반벙어리라니...! 내 팔자도 오라지게 더럽지." 그와 폐포노인 두 사람은 서로에 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름이 너무도 유명했기 때문이지, 특별한 친교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와 폐포노인이 처음 얼굴을 맞댄 것은 칠 개월 전, 그러니까 폐포노인이 측간의 휘장을 들치고 처음 걸어나온 날이었다. 두 사람은 곧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 서로는 이 저주받은 공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인간`-`벙어리 간수 따위가 아닌 인간의 냄새가 풍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 웃기만 하자 폐포노인이 이죽거렸다. "거울이 없어서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자네는 웃지 않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아." 대저 웃는 얼굴은 그렇지 않은 얼굴보다 훨씬 보기 좋은 법이다. 하지만 그는 폐포노인의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욕지기를 느끼게 할 만큼 추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폐포노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조심하도록 하지." 폐포노인은 힝,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찌 생각하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가끔은 명(名)과 실(實)이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폐포노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별호 앞에 '괴(怪)' 자가 붙은 만큼 성미가 고약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발은 어떻게 된 건가?" 그가 폐포노인에게 물었다. 폐포노인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더니,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 "쌍놈의 새끼들! 을목관(乙木關)에 들어갔다가 이 꼴이 되고 말았지! 그 새끼들은 걸작이 뭔지도 모르는 촌놈들이야! 내가 경금관(庚金關)에다가 단철신사(斷鐵神絲)를 설치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것을 제놈들 맘대로 을목관에다가 옮겨 놓았지 뭔가!" 폐포노인의 오른쪽 발가락 세 개는 그 뿌리께부터 잘려 있었다. 피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리 오래 전에 잘린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그대로 있게." 그는 폐포노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소매에서 기이하게 생긴 침(針)을 몇 개 꺼내어 양쪽 발등의 혈도 몇 군데를 찔러 검은 피를 뽑아 냈다. 폐포노인은 그가 치료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성미가 고약하다지만 그의 치료에 대해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이는 비단 폐포노인뿐만 아니라 천하의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 좀 편해질 걸세." 그는 침을 뽑으며 이렇게 말했다. 간단한 침술로 환부에 고여 있던 나쁜 피를 제거한 것이다. 폐포노인은 오른발을 두어 번 움직여 보더니 그에게 물었다. "그 침은 어디서 났나? 놈들이 아무리 덜 떨어졌다고는 해도, 설마 자네에게 침을 갖다 주지는 않았을 테고..." 그는 빙긋 웃으며 탁자 위에 뒹구는 오리 뼈를 가리켰다. "속이 빈 조류의 뼈라도 결만 잘 맞춰서 다듬으면 의외로 단단해질 수 있지." "압골침(鴨骨針)이라... 재주도 좋군! 한데 그걸로 자네 자신은 치료할 수 없는가?" 그는 폐포노인의 이번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흠! 흠!" 이번만큼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폐포노인도 더 이상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폐포노인은 그러한 어색함을 깨려는 듯,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 조금만 있으면 이 무덤이 내 손바닥 안에 들어온다네! 딴은 제법 머리를 굴려 변화를 가미한 모양이지만, 기관 중추를 알아 내는 것도 이제는 시간 문제야!"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4 묘왕동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무덤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죽이는 천만 가지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인간의 능력으로 그 기관 중추에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폐포노인에게만큼은 그럴 능력이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와 더불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폐포노인은, "기관 중추에 도달하면 다시 찾아오겠네."라고 말한 뒤, 측간 쪽으로 걸어갔다. 측간에는 대소변이 떨어지는 구멍 외에도, 폐포노인만이 아는 또 다른 비밀 출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비밀 출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석실`-`하나의 가느다란 심지가 작은 불꽃을 쉬임없이 피워 내는`-`을 벗어날 수 없는 몸... 비밀 출구 따위는 알아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조심하게." 그가 말했다. 사실 그가 폐포노인에게 해줄 말은 이것이 전부일는지도 모른다. "염려 말게." 폐포노인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측간에 드리운 검은 휘장을 들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무덤 속에서는 나를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없다네." 말이 끝난 순간, 폐포노인의 모습은 석실에서 사라졌다. 폐포노인이 이 석실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을씨년스럽게 펄럭이는 검은 휘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휘장도 곧 멈춰 버렸다. 3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서인지 공기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밤. 상현달은 중천에 달라붙어 있고, 그 주위로는 음산한 달무리가 불길한 그늘을 드리웠다. 우거진 수풀 사이, 장정 네댓이 앉으면 꽉차 버릴 만큼 비좁은 공터는 지금 이 순간, 세 사람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앉은 이 둘에 누운 이 하나. 앉은 둘은 초췌한 안색의 장년인들이요, 누운 하나는 상처투성이 청년이다. "어떻습니까? 살아날 수 있을까요?" 장년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묻고 있는 그는 거상련 황금화의 총두령 임이평이었다. 그의 목에는 검붉은 헝겊이 친친 둘러져 있었다. 한 자루의 유엽비도(柳葉飛刀)가 만든 작품이었다. 유엽비도의 주인은 비얼자(飛孼子) 전위양(展衛楊). 요대에 두른 열두 자루의 비도로써 오(吳)·월(越) 두 지방을 공포에 떨게 하던 마두였다. 그렇다고 임이평이 일방적으로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전위양이 던진 유엽비도는 그의 목덜미에 한 치 깊이의 상처를 새겼지만, 그가 던진 혈편복은 전위양의 미간에 정통으로 박혔기 때문이다. 방금 임이평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장년인은 거상련의 홍당 부당주 방철이었다. 그는 임이평의 눈빛에 담긴 간절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는 마음이야 여북 쓰라릴까.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틀렸네. 폐가 상하고 장기(臟器)들이 제 위치를 벗어났어." 방철은 힘없이 말하며 청년의 팔목에서 손을 떼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청년은 이번 하남행에 방철을 수행한 황금화 중 한 사람이었다. 한나절 동안 숨가쁘게 닥쳐 온 혈전 속에서 동료 다섯을 먼저 보낸 청년은, 반 시진 전 개울가에서 그들을 덮친 한 무리의 괴인들로부터 몸을 빼내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방철이 대답하자, 임이평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는 눈물을 아낄 줄 아는 대장부였다. 하지만 불과 한나절 사이에 친동생처럼 아끼던 수하 여섯을 잃게 되자, 북받쳐 오르는 비탄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속명단(續命丹)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명줄이라도 어떻게 이어볼 수 있을 것을..." 방철의 이 말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했다. 거상련 비방(秘方)의 속명단이 아무리 영험한들 무엇 하랴. 속명단이 든 약낭을 지닌 황금화는 오늘 낮에 벌어진 첫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속명단은 그때 이미 일행과 상관없는 물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임이평의 두 눈에서 드디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득, 아교 칠을 해놓은 것처럼 꽉 감겨 있던 청년의 눈까풀이 힘겹게 들렸다. "임... 두령님..."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을 비집고 토막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정신이 드나? 나 여기 있네!" 임이평은 청년의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외쳤다. 하지만 청년의 눈동자는 허공의 한점에 고정되어 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각은 그의 생명보다 한 발 앞서서 명부의 문턱을 넘어가 버린 것 같았다. "저... 지금 주, 죽는 건가요...?" 곧 겪게 될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청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청년은 곧 죽는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임이평은 현실을 그대로 말해 줄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임이평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듯, 청년이 재차 물었다. "아니죠? 죽는 거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말씀해 주세..." "자네가 왜 죽어? 자넨 안 죽어!" 방철이 불쑥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고통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그러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아!" 창백하던 청년의 얼굴에 화색과 비슷한 안도감이 감돌았다. 청년이 아는 한, 방철은 그 부친 방지중의 장중함을 그대로 이어받아 식언(食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철이 죽지 않는다고 보장했으니 자신의 몸뚱이는 곧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회생의 기쁨이 청년의 갈라진 입술 위에 머문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소리없이 펼쳐진 방철의 소엽장이 청년의 심장으로 이어진 모든 혈관을 한 순간에 절단해 버린 것이다. 미소가 얼어붙고, 청년의 고개는 툭 떨어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임이평은 저도 모르게, "억!" 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부, 부당주님... 왜...?" 그러나 방철의 두 눈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뻘겋게 충혈된 것을 발견한 임이평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청년을 아끼는 마음이야 매한가지인 두 사람이었다. 고통없는 죽음. 그것은 두 사람이 청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였다. "철군자수(鐵君子手) 방철이 수하에게 살수를 쓴다... 사람들이 과연 믿어 줄지 모르겠군." 답답한 밤공기를 헤치고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어젯밤 이후 이곳 신양은 철옥의 나라였다. 동서남북 사방을 막론하고 철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갖은 수단을 부려 추격을 따돌렸다 싶으면 매복과 만나고, 죽을힘을 다해 매복을 물리쳤다 싶으면 전혀 다른 추격대가 나타난다. 그 지겨운 짓을 지난 한나절 동안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이젠 놀랄 기운도 없는 방철과 임이평이었다. 방철과 임이평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상대의 눈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청년의 시신을 바로 눕히고 몸을 일으켰다. "철옥은 당당한 문파라고 들었거늘, 어찌하여 암중의 희롱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려 하는가! 우리들의 목숨을 취하고 싶다면 썩 앞으로 나서라!" 방철은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그러자 아까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왔다. "도망가는 솜씨만 는 줄 알았더니, 혓바닥 놀리는 솜씨도 제법 매서워졌군." 그리고 칠팔 장쯤 떨어진 활엽수림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보통 사람보다 약간 작은 키에, 딱 벌어진 어깨가 다부진 인상을 주는 사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특이한 것은 사내의 낯빛이었다. 사내의 낯빛은 강시( 屍)의 그것처럼 푸르뎅뎅했던 것이다.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방철은 어느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은... 온청면(溫靑面)?" 사내의 얼굴은 방철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칠 년 동안의 남북전쟁을 통해 그 용맹을 떨친 푸른 얼굴의 수라[靑面修羅] 온이. 그 온이가 남북전쟁이 끝나고 수년이 지난 지금 방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이다, 방철!" 온이는 푸른 얼굴 가득 음산한 웃음을 떠올렸다. "이화산장은 그때, 그때 분명히 멸망했는데... 그대가 어떻게 이곳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방철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온이는 한 사람의 의문을 애써 풀어 줄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가 얼마 못 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5 묘왕동주 "우리 사이에 긴말은 필요없지." 온이의 두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청면수라의 독문무공인 청살기가 운용된 것이다. 방철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 입술을 짓씹으며 사그라지는 투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적들에게 희롱당하느니 통쾌하게 싸우다가 죽기를 결심한 그가 아닌가. 온이가 아니라 이화산장의 장주 비연리가 나타났다 할지라도, 죽기를 결심한 이상 달라질 것은 없었다. 방철은 가슴을 활짝 펴고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철옥이 이곳에서 뭔가를 꾸민다는 사실은 이미 거상련에 낱낱이 알려졌다! 비록 나는 이곳에 묻힐지라도, 내 원수는 총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방철은 이 말에 온이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온이는 다만 음산하게 웃었을 뿐이다. "흐흐! 흘린 정보를 주워 보고한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운가?" 이 한마디에 방철은 당황하고 말았다. 흘린 정보라니? "저승에 가서 네 주인 황금왕이 앉을 자리나 마련해 두거라." 온이는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방철과 임이평을 둘러싼 밤 풍경이 일변했다. 어둑한 수풀 곳곳에서 수많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삽시에 방철과 임이평을 휘감았다. 그 자욱한 살기 속에서 방철과 임이평은 한 줄기 불길한 피비린내를 예감할 수 있었다. * * * 대전 안을 짓누르는 피비린내는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자그마치 이백오십육 명이 흘린 피비린내였다. "웩! 우웨엑!" 조추림은 기둥을 붙잡은 채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바닥을 향한 그의 입은 싯누런 토사물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곁에 서 있는 자액은 그런 조추림에게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자액은 이십여 년 전, 주인의 명으로 조추림을 양육하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조추림은 천상의 금동(金童)처럼 귀여운 꼬마였다. 그러나 그 꼬마의 마음속에 인세에서 찾아보기 힘든 극단적인 감정이 하나둘도 아니고 수십 개씩이나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자액은 어느 날엔가 알게 되었다. 조추림이 아홉 살 때, 그가 키우던 고양이 반비(斑鼻)가 죽은 일이 있었다. 당시 조추림은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묘낭반비만사(友猫娘斑鼻輓詞)>라는 제목의 장문(長文)의 조사(弔詞)를 지었다. 그 글을 읽은 자액은 감탄했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지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구구절절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액은 조추림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글 선생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데 조추림의 글 선생은 궁벽한 촌구석에 어울리지 않게 엄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것이 달제어(獺祭魚)의 못된 기교부터 배워 어디에 쓰겠느냐며 조추림을 꾸짖었다. 달제어란 수달이 물고기를 벌여 놓고 제사지내는 것처럼, 남의 글들을 모아 짜깁기하는 짓을 풍자하는 말. 조추림은 무안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자액은 글 선생의 고지식함에 끌끌 혀를 찼다. 문제는 다음날 벌어졌다. 밤사이에 글 선생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수십 번이나 난도질당하여... 괴이함을 느낀 자액은 관아로 숨어 들어가 그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그때 자액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글 선생을 죽인 자는 자액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잔인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치명상이 된 수법은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신묘한 검초(劍招)라는 점, 그리고 그 검초가 당시 조추림의 교과(敎科)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까지도... 하지만 자액은 조추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는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살인자는 바로 너잖아?"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액은 한 가지를 결심했다. 앞으로 조추림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놀라지 않으리라는 결심이었다. 그러한 자액의 결심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다. 지금 이백오십육 명의 죽음 앞에서 구역질을 하고 있는 저 잘생긴 청년은, 때로는 그 십 배의 사람들을 개미처럼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막홍이 진원주를 외기 시작했다. 몽롱하고도 사이한 주문은 대전 안을 짓누르는 피비린내 속으로 은밀하게 번져 나갔다. 석단(石壇)을 중심으로 반경 오 장이 넘는 거대한 연기의 원기둥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연기가 옅어짐에 따라 드러나는 석단 주위의 광경은 결코 인간이 봐서는 안 될 끔찍한 것이었다. 이윽고 연기가 남김없이 사라졌다. 시체의 산, 피의 강물... 그리고 자액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석단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을, 그 얼굴에 씌워진 검은 철가면을,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사악한 청광(靑光)을... 이제 원앙제는 끝났다. * * * 원앙제를 지켜보며 괴로워한 일은 벌써 까맣게 잊은 듯, 처소로 돌아온 조추림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액은 조추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틀 전 실시한 두 차례의 기관 시험도 나쁘지 않았고, 오늘은 그토록 공을 들인 원앙제마저도 무사히 끝났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약속된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조추림은 그래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점심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오랜 토악질로 텅 비어 버린 위장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들었던 탓일까? 후식(後食)으로 나온 유병(油餠)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운 조추림은 느긋한 표정으로 긴 숨을 토해 냈다. 그의 만족감이 절정에 오른 것은 바로 이 무렵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산이 그렇듯, 만족감이라는 이름의 산도 절정 다음에는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단의 선단 인마들이 당도했다는 보고가 있고 반 시진이 지난 뒤, 한껏 고조되었던 조추림의 만족감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조추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생의 처는 잘 있겠지요?"라는 의례적인 물음에 대해 너무도 놀라운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조추림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 공자의 처는 지금 비 부주와 함께 있을 거라고 했지요. 그 또한 신양으로 온다고 하던데, 출발 시기가 달라 이렇게 따로 오게 된 거외다." 느릿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대답한 사람은 호화찬란한 도복 차림을 한 선부의 부주 건양우사였다. 조추림은 중풍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발을 덜덜 떨었다. "비연리, 이 늙은 개잡종이 감히!" 그 말을 듣는 순간, 건양우사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져 버렸다. 아니, 머리를 얻어맞은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망치가 아닌, 나이와 지위를 무시한 지독한 욕설에 얻어맞은 것이다. "조 공자,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소이다." 건양우사는 잠시 이성을 잃어버린 이 귀공자를 점잖게 훈계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조추림의 변화 무쌍함을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일단 광증이 도지면 황제에게도 '늙은 개잡종'이라고 욕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조추림이다. "우사께서는 그 늙은 것이 그녀를 데려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단 말이오?" 광기의 살촉이 건양우사에게 돌려졌다. "그, 그것이... 비 부주도 이리로 온다고 하기에..." "단지 그 말만을 믿고 내 여자를 데려가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단 말이지!" 그나마 허례라도 유지해 주던 존칭은 말을 하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놈이...?' 처음에는 그저 무안해 하기만 하던 건양우사의 마음속에서도 서서히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구대문파에서도 수석을 다투는 무당파의 장문인이 그의 사질(師姪)이었다. 그래서 옥주인 철면신조차도 감히 하대하지 못하는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서른도 채 안 된 애송이에게 아랫것 취급을 당하다니! 건양우사는 신선풍의 풍모와는 달리 수양이 깊은 사람이 못 되었다. 하지만 설령 그가 쌓은 수양이 지금보다 십 배는 깊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애송이에게 모욕을 당하고 참기에는 그의 배분이 너무 높은 것이다. 그런데 건양우사의 분노가 막 터지려 할 때, 누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무 소리 없이 보고만 있던 자액이다. "조 공자, 이미 벌어진 일이오. 우사께서는 비연리의 반심을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으니, 이 정도로 그만두시오." 건양우사가 판단할 때에는 분명히 형평에 어긋난 말이었다. 말만 다를 뿐이지, 마치 "비록 건양우사가 천고의 대죄를 범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줘라."은 식이 아닌가! 건양우사는 당연히 기가 막혔고, 그래서 이에 항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귓전에 들려 온 자액의 전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의 항의를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6 묘왕동주 "이번 거사가 끝나면 옥주께서는 조 공자를 후계자로 선포하실 계획이오. 이 마당에 조 공자와 반목한다면 우사께서 원하시던 남파무당(南派武當)은 성사되기 힘들 것이오." 남파무당! 그것은 건양우사의 꿈이었다. 본디 건양우사에게는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사부이자 전전대 장문인인 반우도인(半愚道人)이 후계조차 정하지 못한 채 급사(急死)했을 때였다. 당시 대제자인 옥양자(玉陽子)에게는 오랜 지병(持病)이 있었고, 셋째 제자인 현양자(玄陽子)는 타고난 역마살 때문에 사문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는 둘째 제자인 자신에게 장문인 자리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장미빛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꽉 막힌 늙은이들의 집단, 장로원(長老院)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옥양자를 끝내 장문인으로 추대했고, 그는 여기에 대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원망을 마음으로 삭이며 후일을 도모해야만 했다. 후일은 곧 찾아왔다. 그의 사형 옥양자가 장문인 자리에 앉은 지 구 년 만에 세상을 뜬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장문인 자리는 옥양자의 유일한 제자인 석죽(石竹)에게로 이양되었을 것이다. 건양우사의 야망이 끼여들 틈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때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석죽은 후계를 두지 않으려던 옥양자가, 장문인이라는 자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둔 제자였다. 옥양자가 죽었을 때, 석죽의 나이는 스물일곱. 현문(玄門)에 입문해 도명(道名)를 얻은 지도 겨우 칠 년에 불과했다. 석죽의 자질은 훌륭한 편이었지만, 무당파의 정종 공부는 세월을 초월하여 넘보기에는 너무나도 박대정심(博大精深)한 것이었다. -`소청검법(少淸劍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석죽이 어찌 장문인의 중임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이오! 외인이 비웃을까 두렵소이다! 건양우사는 이 점을 정면으로 문제삼고 나섰다. 그것은 충분히 문젯거리가 될 수 있었고, 석죽을 아끼는 장로원의 늙은 귀신들은 난감해 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으랴. 건양우사는 마음속으로 득의의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상상조차도 못 한 방해자가 나타났다. 현양자, 이 고약하기 짝이 없는 사제가 돌아온 것이다. 현양자는 삼청궁(三淸宮)이 건립된 이래 가장 뛰어난 기재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 스물하나에, 난해하기로 소문난 무당파의 소청(少淸)·태청(太淸) 양대검법의 주해서(註解書)를 새로이 쓸 정도로 발군의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현양자가 무당산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무당파 전대 장문인의 자리는 옥양자가 아닌 그에게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겸손한 옥양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기심 많은 건양우사조차도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희대의 천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현양자는 한 지붕 아래에서 오래 머물기를 싫어하는 낭인 기질이 강했고, 결국 그 기질 때문에 '이검면아(以劍面我)'라는 알쏭달쏭한 넉 자를 남기고 무당산을 떠났다. 그가 떠나던 날 건양우사가 얼마나 기뻐했는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중대한 시기에 돌아오다니! 하필이면...! 이때부터 예정된 수순이 진행되었다. 건양우사로서는 처절한 좌절의 수순이기도 했다. 장로원의 늙은 귀신들은 쾌재를 부르며 현양자를 차기 장문인으로 추대하려 했다. 현양자는 잘난 사람답게 점잖은 목소리로 장문인 자리를 사양했다. 그가 제시한 것은 장로원 집정 체제였다. 석죽이 무당 공부의 요체를 터득하여 장문인에 정식으로 오를 때까지 장로원이 문파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자신은 사숙으로서 석죽의 수련을 도와 주겠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대나무 껍데기로 등줄기나 긁으며 죽을 날을 기다리던 장로원의 늙은 귀신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소원(故所願)일 수밖에 없는 의견이기도 했다. 건양우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양의 깊이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몸담아 온 사문이 이토록 완강하게 자신을 거부하는데, 아무리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결국 건양우사는 그를 추종하는 소수의 제자들을 이끌고 무당산을 떠났다. 높고 험한 무당산을 내려가는 동안 그는 이를 갈며 맹세했다. 기필코 나를 장문인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문파를 만들겠다! 그래서 나를 배척한 무당파를 반드시 꺾어 누르고 말겠다! 그의 맹세 속에 자리잡은 새로운 문파... 그 이름이 바로 남파무당이었다. 남파무당에 대한 염원은 어떠한 진정제보다도 확실하게 건양우사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두 번 내뱉은 뒤 조추림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노도의 실수도 작은 것 같지 않구려. 비 부주가 음흉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감히 반심을 품었다고는 생각지 못했소이다. 그자가 이곳에 당도하기만 하면, 노도가 책임지고 조 공자의 처를 되찾아 드리겠소." 겸허한 사과였지만 조추림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흥!" 조추림은 싸늘하게 웃었다. 마치 네까짓 게 무슨 재주로 그녀를 되찾아 준단 말이냐는 듯... 하지만 실리를 좇기로 작심한 건양우사는 더 이상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몇 마디 듣기 좋은 말로써 조추림을 달래기 시작했다. 늙은 생강은 그래서 매운 것이다. * * * 본초학(本草學)에서는 황토(黃土)를 각종 열독에 좋은 약재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그 맛이 달다고 한다. 열독에 좋은지 나쁜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맛이 좋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반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이놈의 영감쟁이를 만나기만 해봐라!' 반호는 우물거리던 황토를 뱉은 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 이빨과 입천장에 달라붙은 흙 알갱이를 남김없이 긁어 냈다. 반호가 옆구리의 상처가 곪는 것을 막기 위해 황토를 문지른 것은 북경 도박장에서 얼굴을 익힌 고(顧) 노대의 노래 때문이다. 고 노대는 약방에서 약초 써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직업 의식이 투철해서인지, 아니면 머리가 아둔해 약초를 외우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틈만 나면 백종본초가(百種本草歌:약재들의 성질을 설명하는 글에 가락을 붙여 만든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찌나 자주 흥얼거렸는지 고 노대의 도박 친구 중 이 노래를 못 외우는 사람은 없었고, 반호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본초에서 맛이 달다고 한 것은 약재로 사용할 때 그 미감(味感)이 달다는 뜻이지 한 움큼이나 그냥 먹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잘못은,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황토를 한 움큼이나 날로 처먹은 멍청이에게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멍청이는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내가 땅강아지처럼 흙이나 주워 먹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반호는 입 안 가득한 흙 냄새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몽현도인을 후송하는 왕호를 하루 하고도 반나절 동안 미행한 반호는 중요한 정보를 하나 알게 되었다. 왕호가 간 곳은 신양 북쪽에 위치한 야트막한 구릉이었다. 능선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던 왕호가 걸음을 멈춘 곳은 구릉 남쪽으로 난 암벽이었다. 왕호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반호는 어느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암벽을 구성하고 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위로 들리더니 난데없는 동혈 하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왕호가 동혈 안으로 들어가자, 바위는 다시 내려왔다. 일단 바위가 내려오자 동혈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있던 반호는 그 동혈이 적들의 비밀 본거지로 통하는 입구임을 깨달았다. 처음 거상련을 출발할 때, 그의 직속 상관 방지중은 이렇게 말했다. -`하남 어딘가에는 거상련의 존립을 위협하는 놈들이 있네.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 내는 게 자네의 임무지. 반호는 기뻤다. 이제 거상련으로 돌아가 밝혀 낸 사실을 보고하기만 하면 지긋지긋한 임무가 모두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신양 일대는 여전히 놈들의 세력권.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짓을 할 수는 없다. 질척한 황토로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틀어막으면서도, 반호는 어떤 길로 돌아갈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눈에 문득, 구릉 북동쪽을 휘감고 돌아가는 회하(淮河) 줄기가 들어왔다. 회하를 따라가면 남직예가 나온다. 남직예를 거쳐 북경으로 간다면 하남을 가로질러 가는 것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육로가 시끄러웠던 만큼 수로는 안전하지 않을까? 지금은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임무를 무사히 마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마침내 반호는 회하를 따라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살금살금 구릉을 내려와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반호는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열두 시진 전, 방철이 택한 방향도 회하 쪽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회하로 향한 반호와 회하에서 돌아오는 온이가 도중에 마주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반호는 다람쥐처럼 날쌔게 몸을 날려 길가의 바위 더미 뒤에 숨었다. 급작스러운 움직임 탓에 옆구리의 상처가 결려 왔지만, 적지에서 다수의 인기척을 감지하고도 굼벵이처럼 꾸물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오솔길 저편에서 십여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놈들일까?' 반호는 숨을 죽이고 두 눈을 빛냈다. 선두에 선 자는 다른 자들과 달리 말을 타고 있었다. 얼굴에 감도는 푸른빛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괴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2 장 - 7 묘왕동주 '저 자식은 온청면이잖아?' 반호는 북정회와 남마련이 벌인 남북전쟁을 통해 뼈가 굵은 사람인지라 이화산장의 대표급 고수인 온이의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온이 외에도 눈에 띄는 얼굴들은 제법 되었다. 유명마도 역천비, 작도수 강조양 등, 이제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올라오는 얼굴들이었다. '자식들! 줄줄이 다 모였네. 밥이라도 먹으러 가는 건가?' 온이의 일행이 가까워짐에 따라 반호의 목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놈들이 밥을 먹든 잠을 자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무사히 지나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선두에 선 온이가 바위 더미 앞에 이르렀다. '옳거니! 제발 그렇게 앞만 보고 지나가라!' 반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온이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리고 있던 목을 쑥 뽑아 올렸다. 이상한 물건 두 개가 보였다. 그 물건들은 온이가 탄 말 안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공처럼 둥글둥글한,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주는 두 개의 물건...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본 순간, 반호의 오감은 정지해 버렸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뇌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말로 갑작스럽게 오감이 돌아왔다. 온이는 반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그가 탄 안장에는 두 개의 불길한 물건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풍경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반호는 조금 전의 반호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반호가 사람이라면, 지금의 반호는 미친개였다. 미친개는 결코 조심하지 않는다. 이를 드러냄에 있어서 결코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행동함에 있어서 결코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으아아악`-`!" 반호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느새 뽑아 든 것일까? 그의 오른손에는 시퍼런 용두대감도가 번뜩이고 있었다. 놈이 튀어나온 바위는 불과 이 장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된 갑작스런 기습으로부터 멀쩡히 피하기란, 온이와 같은 절정고수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으윽!" 온이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벅지 위에 떨어진 섬뜩한 느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약 본능적으로 몸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는 섬뜩한 느낌을 허벅지가 아닌 정수리로 받았을 테고, 만일 그랬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황천길에 들어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쉬이익`-` 무시무시한 칼 바람이 다시 한 번 온이의 면문을 노리고 밀려왔다. 말 위에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꼼짝없이 얼굴이 쪼개질 판국이다. 온이는 별수없이 말 위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놈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온이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이 새끼! 죽인다!" 놈은 말 등을 훌쩍 뛰어넘으며 땅바닥을 구르는 온이를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순간, 온이는 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호?' 호밀령의 부영주 역천비는 반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 반호가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길게 생각하기에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칼날의 기세가 너무 맹렬했다. 온이는 오른쪽 주먹을 쭉 쳐올려 반호의 일도를 막았다. 퍽! 주먹과 칼날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온이는 주먹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히 주먹은 멀쩡했다. 그가 수련한 청살기 덕분이었다. 하기야 청살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다리 하나가 날아간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그의 허벅지에 떨어진 일도는 인간의 다리쯤은 가볍게 잘라 버릴 정도로 패도막강했기 때문이다. "앗!" "반호다!"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듯 뒤따라오던 수하들이 외쳤다. '둔해 빠진 놈들!' 온이가 수하들의 무능을 원망할 때, 반호로부터 네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으아아악`-`!" 미친 놈처럼 고래고래 악을 쓰며 수중의 용두대감도를 사납게 휘젓는 반호.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시뻘건 안광은 그가 제정신이 아님을 말해 준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빛만 보아도 간이 오그라들 상황이었다. 그러나 온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간이 오그라들기는커녕 분노가 치밀었다. 방철조차도 그의 손 아래에서 오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 수하인 반호 따위에게 이렇게 밀리다니! 온이는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분노는 증오를 부르고, 증오는 살기로 나타났다. 꽝! 둔중한 폭음이 울렸다. 증폭된 살기는 온이로 하여금 이번 일 장에 전력을 실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극성의 청살기가 실린 장력은 산이라도 허물어뜨릴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크웩!" 반호는 입으로 시뻘건 핏물을 토해 내며 여섯 걸음이나 물러나, 온이가 타고 온 말에 부딪혔다. 그에게 있어서 온이는, 지치고 부상당한 몸으로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었던 것이다. 반호를 직접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온이는 이미 한 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반호를 죽이는 일을 무능한 수하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놈을 죽여!" 온이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밀령의 마두들이 반호에게 달려들었다. 그 흉폭한 기세는 마치 먹음직스런 고깃덩이를 발견한 개 떼와 흡사했다. 그러나 반호에게는 아직 남겨 둔 한 수가 있었다. "오냐, 이 새끼들아! 다 덤벼!" 반호는 축 늘어뜨리고 있던 용두대감도를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이제껏 멀쩡하던 용두대감도가 지이잉, 하는 긴 울음 소리를 토하며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해!"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온이가 크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반호의 용두대감도는 이미 커다란 수평의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전 속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째앵`-`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용두대감도가 산산이 폭발했다. 반호는 폭발하는 용두대감도를 크게 휘돌렸다. 마치 물이 가득 담긴 큰 바가지를 휘두르는 듯한 형국. 잘게 부숴진 금속편의 군(群)이 반호를 향해 달려들던 마두들을 휩쓸어 갔다. "크윽!" "으악!" 비명들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폭양해체도법(爆陽解體刀法)에 의해 손톱만한 크기로 변한 무수한 도편(刀片)은 이처럼 근거리에서는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혼비백산한 호밀령의 마두들... 손때 묻은 용두대감도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촌각의 시간을 번 반호는 죽을힘을 다해 곁에 있던 말 등에 기어올랐다. 바로 온이가 아끼는 말이었다. 진기가 빠져 나가자 광기도 수그러진 것일까? 아니면 역불급(力不及)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떠올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거나 반호는 달아나려 하고 있었고, 온이는 그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놈이 달아난다! 막아!" 온이가 외쳤다. 역천비는 반호의 폭양해체도법 아래에서도 비교적 부상 정도가 경미했다. 그는 "막아!"라는 온이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반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날렵하게 뽑힌 그의 유명마도는 말 등에 시체처럼 늘어진 반호의 등줄기를 향해 떨어졌다. 반호는 엄중한 내상으로 혼미한 정신으로도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감지했던 모양이다. 그는 쥐고 있던 칼자루로 말의 옆구리를 호되게 찔렀다. 푸르르`-` 깜짝 놀란 말은 앞으로 껑충 내닫았고, 반호를 노리던 유명마도는 간발의 차이로 허공을 갈랐다. 역천비는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답석교(踏石橋)의 재주로 재차 반호를 추급했다. 그러나 온이의 말은 준마 소리를 들을 만큼 빨랐다. 역천비의 경공술은 천박하지 않지만, 일단 가속이 붙은 준마를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지고, 역천비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되돌아왔다. 물론 온이로부터 날아온 것이 듣기 좋은 소리일 리 없다. "못난 새끼!" 연배로 보나 지위로 보나 온이에게 '못난 새끼'라는 욕을 들어서는 안 되는 역천비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반호가 살아서 날뛰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 설령 따귀를 맞는다 할지라도 할말이 없는 것이다. 온이는 역천비를 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하루를 주마! 그 안에 놈의 머리통을 가져 와!" 뒷말은 없었지만, 만일 반호의 머리통을 가져 오지 못하면 자신의 머리통으로 이 난폭한 상관의 분노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천비는 잘 알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역천비는 골이 띵해질 때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운명(運命) 묘왕동주 제 23 장 운명(運命) 1 단탈 일행은`-`일행이라고 해봤자 단탈과 박한, 그리고 대왕곤이 전부였지만`-`곤란에 빠져 있었다. 남력과 오살량이 천보포향령에 설치한 함정을 뚫고 단탈 일행이 신양에 도착한 것도, 벌써 한나절 전의 일. 그들에게 있어서 신양은 어딘지 모르게 황폐한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막막하군." 길바닥의 흙먼지를 휩쓸던 싸늘한 바람이 세 사람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갈 때, 단탈은 조그만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찾는 조추림은 이곳 신양 어딘가에 있었다. 하지만 정보는 단지 그것뿐. 신양은 그 안에 있는 한 사람의 종적을 찾기에 터무니없이 넓었다. 그래서 단탈은 막막했다. 이 막막함에 대해, 단탈은 그 일차적인 책임이 대왕곤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왕곤은 길잡이였고, 길잡이란 그를 따르는 일행으로 하여금 막막함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탈은 대왕곤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왕곤의 품에 안긴 한 개의 나무상자 때문이었다. "먹게." 대왕곤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어른 주먹만한 만두 세 개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었다. 대왕곤은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부리부리한 눈을 볼 수 있었다. "자네나 들게. 난 생각없네." 대왕곤은 만두를 권하는 부리부리한 눈의 임자, 단탈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단탈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만두는 제법 큼직했고 또 세 개씩이나 되었지만, 단탈은 순식간에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하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잘 먹기로 말하자면 개방의 거지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위인이 바로 단탈이니까. 대왕곤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품에는 거친 송판으로 만든 상자가 있었다. 그 상자 안에는 몇 줌의 뼛가루가 들어 있었다. 포향령의 고개 위에서 민산독마 오살량의 독수에 목숨을 잃은 반교의 뼛가루였다. 하루 전만 해도 누구보다도 크게 웃고,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떠들고, 누구보다도 불같이 성내고, 또 누구보다도 활기차게 뛰어다니던 반교. 하지만 그 반교는 지금 요강 하나도 제대로 들어갈 수 없는 답답한 상자 안에 갇히고도 불평 한마디 못 하게 되었다. 대왕곤은 반교를 땅에 묻을 수 없었다. 반교는 누가 뭐래도 하백의 후예였다. 하백의 후예가 잠들 곳은 땅이 아닌 하백의 나라. 그래서 대왕곤은 포향령에서 반교를 화장한 뒤 그 뼛가루를 추려온 것이다. 반교의 뼛가루가 담긴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왕곤은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결코 눈물이 헤픈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신념에 따라 살아 가는 사람이고,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선 좀처럼 눈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람! 이 빌어먹을 놈의 눈물은 흘려도 흘려도 마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 하다가도 반교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 어느새 뺨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다. -`마, 막내까지 삼협으로 오면... 우, 우리는 다시 와, 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흐흐... 그러면 정말 신이... 날... 거야... 문득 누군가 대왕곤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박한이었다. 박한은 아직도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천성이 알뜰한 탓일까? 오살량의 독질려를 막느라 이제는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밀짚모자였지만, 박한은 그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대왕곤이 자신을 보자, 박한은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박한이 가리키는 곳에는 붉은 깃발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비록 글자를 모르는 대왕곤이지만 그 깃발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강호에서 굴러먹던 자들이라면 누구나 주기(酒旗)쯤은 알아볼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왕곤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운하에서 신양까지 동행하는 동안 박한이 무엇을 하자는 식의 의견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왕곤이 선뜻 몸을 움직이지 않자, 박한은 씨익 웃으며 단삼 자락을 젖혔다. 그의 허리춤에는 때가 꼬질꼬질한 헝겊으로 만든 길쭉한 주머니 하나가 둘려 있었다. 박한의 자신있는 미소로 미루어 아마도 돈이 들어 있는 듯한데, 돼지 창자처럼 보이는 모양새라든지 행여라도 풀어질까 꽉 동여맨 매듭 등이 중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때 단탈이 만두를 싸 왔던 종이를 소리나게 구기며 말했다. "컬컬하던 참인데 잘됐군." 그리고 단탈은 일행에게 따라오란 말도 없이 주기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루 안의 공기는 냉랭했다. 그것마저 싸늘한 바람 탓이라고 하기에는 주루의 벽과 창문이 너무 튼튼해 보인다. 점소이가 안내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대왕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곧 주루 안의 공기가 왜 이렇게 냉랭한지 알게 되었다. 대왕곤 일행이 둘러앉은 탁자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섯 사람이 하나의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셋씩 사이좋게 편을 갈라 한 쪽은 회색 옷을, 다른 쪽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대왕곤은 그들이 벌이는 것이 어떤 종류의 흥정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썰미가 특별히 좋은 탓이 아니었다. 저러다가 똑 소리를 내며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힘주어 세운 여섯 개의 모가지들은, 저 흥정이 선량하게 살아 가는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도움되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조건이면 귀하께서 모시는 어른도 만족하실 텐데?" 회의사내들 중 하나가 입 안에 자갈이라도 머금은 듯한 껄끄러운 목소리로 탁자 맞은편에 자리잡은 청의사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볼품없는 염소수염이 어딘지 야비한 느낌을 주는 장년인이었다. 세 사람의 청의사내들 중 앞이마가 훤하게 벗겨진 초로인이 말했다. "홍루교(鴻淚橋) 일대를 내놓으란 것이 우리 주인님이 만족해 하실 조건이란 말인가!" 염소수염이 대뜸 그 말을 받았다. "허어! 홍루교 일대라고 해봤자 냄새 풍기는 퇴기(退妓)들이나 득실거리는 기루 넷이 전부가 아니오? 그 기루들을 관리하는 애로를 우리 주인님께서 덜어 주시겠다는데, 게다가 알토란 같은 부귀도방(富貴賭房)을 덤으로 넘겨주신다는데, 그래도 좋은 조건이 아니란 말이오?" 앞이마가 벗겨진 청의 초로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뒷골목 거래에도 법도가 있는 법! 낙양(洛陽)의 천(千) 노귀가 뱃속이 시커멓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몰염치하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구나! 부귀도방이 처음부터 너희들 것이더냐! 본디 우리 주인님께서 의제 되시는 허(許) 이야(二爺)께 넘긴 것을 천 노귀가 악질적인 고리(高利)로 빼앗아 간 것이 아니냐!" "처음부터 임자있는 물건이 천지간 어디에 있겠소? 지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자지!" 끝까지 유들유들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염소수염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그러자 앞이마가 벗겨진 청의 초로인이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네놈이 저기 앉아 있는 늑대 한 마리를 믿고 이러는 모양인데, 고렴(高廉)이라는 이름이 신양에서도 통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지!" 그의 손가락은 동쪽 창가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흑의 장년인을 향하고 있었다. 흑의 장년인의 얼굴빛은 그가 입고 있는 흑의에 버금갈 정도로 검었다. 염소수염은 의외인 듯 두 눈을 반짝거렸다. "호오! 누항(陋巷)의 촌로(村老)치고는 제법 안목이 있구려. 낙양 관림(關林)의 흑면랑(黑面狼) 대협을 알아보다니!"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자 대왕곤은 흥정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낙양에서 온 패거리들은 신양 토박이들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듯한데, 일을 쉽게 끝내기 위해 낙양의 이름난 검객 고렴을 조력자로 초빙해 온 모양이었다. '싸움이 안 되겠군.' 대왕곤은 동쪽 창가에 앉아 있는 흑의 장년인, 고렴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펴고, 탁자 위에 놓아 둔 장검을 집어 들고... 모두 간단한 동작에 불과했지만 고렴의 전신에서는 맹수와도 같은 야성이 넘치고 있었다. 흑면랑 고렴은 낙양뿐만 아니라 하남 강호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성가(聲價) 높은 고수였다. 신양처럼 퇴락해 버린 도시에서 웅크리고 살아 온 뒷골목 패거리들에게는 너무 벅찬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청의사내들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다. "두 분께서 수고해 주셔야겠소이다!" 앞이마가 벗겨진 청의 초로인이 등뒤를 향해 이렇게 외치자, 남쪽 창가에 앉은 두 명의 백의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둥글둥글한 얼굴이 탑본이라도 한 듯이 닮은 백의청년들... 그들이 걸음을 내딛자 번쩍거리는 신광이 두 눈에서 폭출하고, 우드득거리는 기음(奇音)이 온몸 관절에서 울려 나왔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공을 수련한 듯했다. 검은 옷에 호리호리한 고렴과 흰옷에 둥글둥글한 백의청년들. 쌍방이 마주서자 여러모로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고렴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양성(襄城)에서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백의청년들 중에서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양성이 멀다 해도 낙양보다는 멀지 않겠지요! 그러나저러나 명성이 자자한 흑면랑이 고리업자의 수족 노릇을 하다니... 요즘은 낙양 밥벌이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구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1 묘왕동주 고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흑면랑이라는 이름... 네 돼지 같은 주둥이로 함부로 나불거릴 수 없는 것임을 곧 알게 될 거다, 이당(李當)!" 대왕곤은 비로소 신양 패거리가 도움을 청한 백의청년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양성 일대를 주름잡는 명문 철권이가(鐵拳李家)에는 산돼지처럼 맹렬하고 곰처럼 억센 두 형제가 있다고 한다. 이당이라면 그 중 맏이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이당의 옆에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놈은, 그의 동생인 이탁(李濯)이리라. 이때 점소이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대왕곤의 탁자 쪽으로 다가오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뭘 드시겠습니까?" 대왕곤은 실소가 나왔다. 옆자리에서는 금방이라도 핏물이 튀길 것 같은 상황인데도 장사하겠다고 주문을 하라니, 이 또한 웃기는 놈이 아닌가. 언짢아진 대왕곤이 점소이에게 뭐라고 쏘아붙이려 할 때, 곁에 있던 단탈이 앞질러 외쳤다. "술집에 뭘 먹으러 왔겠느냐! 잔말 말고 술이나 내오너라!" 단탈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이 장의 거리를 두고 팽팽히 맞서 있던 흑면랑과 이씨 형제들까지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단탈은 태연했다. 그는 입가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까지 떠올려 가면서 지껄이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귀머거리가 아니면 못 들을 리 없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술집이란 게 괜찮군! 눈요깃감도 쓸 만하고 말이야! 아쉽게도 내가 살던 곳에는 이런 술집이 없었지! 하하!" 대왕곤은 멍한 얼굴로 단탈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껏 겪은 바, 단탈은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철저한 이방인답게 자신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강호 시비에는 결코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단탈의 행동은 어떠한가? 단탈은 평소와 다르게 시비를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신양·낙양을 막론한 모든 패거리들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얼굴 가죽이 유달리 얇기라도 했던 탓일까? 이씨 형제의 경우에는 노한 기색이 더욱 확연했다. 하기야 중인환시리에 술집 눈요깃감으로 취급당하고도 아무 소리 못 한다면, 철권이가의 진전을 이었노라고 말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씨 형제 중 동생 되는 이탁이 단탈을 향해 말했다. "이봐! 오래 살고 싶다면 조금 더 신중해지는 법을 배우는 편이 좋을 거야." 다분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곧바로 손을 쓸 의도는 없는 듯하니, 이탁의 이러한 대응에는 명문의 자제다운 대범함이 깃들여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단탈은 애시당초 상대를 자극할 작정으로 이죽거린 모양이다. "신중이야 싸움하는 사람에게나 필요하지, 술 마시는 사람에게도 필요한가?" 단탈이 말하자 이탁의 혈색 좋은 얼굴에 찬바람이 감돌았다. 거친 콧바람을 씨근덕거리던 이탁은 급기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단탈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아이고! 이걸... 이 일을 어쩌나?" 단탈과 이탁을 번갈아 살피던 점소이의 얼굴이 노랗게 물들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품으로 보아 이제는 장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없어진 것 같았다. 물론 대왕곤은 단탈을 염려하지 않았다. 단탈이라는 인간은 이탁이 아니라 철권이가의 모든 가솔이 달려들어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했다. 단탈은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러는 것일까? 상대도 안 되는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걸 정도로 가벼운 인간은 아닐 텐데? 그런데 이탁보다 앞서 대왕곤이 앉은 탁자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단탈만큼이나 검은 얼굴을 지닌 고렴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탈을 그대로 지나쳐 그 맞은편에 앉은 박한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두 주먹을 눈 높이로 천천히 모았다. 관림의 늑대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포권이었다. 박한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고렴에게 답례했다. 이 간단한 포권례(抱拳禮)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유일한 의사 소통이었다. 하지만 대왕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두 사람이 구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렴은 이미 박한이 반벙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포권만 할 뿐,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은 것이다. 고렴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염소수염의 회의사내에게 단호히 말했다. "박 형이 주루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소. 박 형이 이번 거래에 참견한다면 나는 깨끗이 손을 떼겠소." 마치 자신으로서는 박한의 그림자조차도 감히 밟지 못하겠다는 식의 말이었다. 이 말 또한 고렴의 위인 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들이 되었다. "고, 고 대협! 주인님께서는 선금까지 지불했는데, 이제 와서 이 일에서 손을 뗀다고 하시면..." 쩔컹! 염소수염의 항의는 고렴이 주루 바닥에 던진 큼직한 주머니 하나로 묵살되었다. "공 없이 녹을 바랄 수는 없는 일. 추후 천 노야를 찾아 사죄드리리다." 말을 마친 고렴은 박한을 향해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한 뒤 주루를 나가 버렸다. '중원 문물에 어두운 친구가 언제 고렴 같은 강적과 겨뤄 본 것일까? 설마 비무행(比武行)이라도 했단 말인가?' 대왕곤은 골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단탈의 일탈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이제는 박한까지 대왕곤에게 의문을 안겨 주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지붕 아래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대왕곤 하나뿐이 아니었다. "결례가 안 된다면 귀하들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을 듣고 싶소만..." 이당이 대왕곤 일행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여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고렴으로 말하자면 그들 형제가 힘을 합쳐도 자신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그런 고렴이 깍듯이 떠받드는 사람들이니 어찌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난 결례니, 존성대명 따위의 간지러운 말은 잘 모른다." 이당의 안색이 돼지 간처럼 검붉게 변했다. 하지만 단탈은 아랑곳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기다리기 지겨우니 어서 싸움이나 시작해라. 사람이 가버려 곤란하다면 나라도 대신 상대해 주마." 말을 마침과 동시에 탁자를 짚고 일어서려는 단탈. 누가 듣더라도 상대를 도발하는 언사요, 누가 보더라도 싸우고 싶다는 행동이다. 흠칫 놀란 이당과 이탁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엄청나게 강할지도 모르는 놈들과 이득없는 싸움을 벌이느냐, 아니면 비록 체통은 서지 않지만 이쯤에서 물러나 안전을 도모하느냐... 두 사람은 금방 결론을 내린 듯했다. 명문의 자제답게 사리 판단이 분명한 탓인지,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약속이나 한 듯 가식적인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이 택한 패는 화해. 사실, 이득없는 위험한 싸움에 몸을 던지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이당은 그들 형제를 이곳 신양까지 초빙했던 청의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고렴이 돌아갔으니 우리 형제가 이 흥정에 개입하는 것은 공정치 못할 것이오. 우리도 이만 돌아가겠소." 그리고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루를 떠났다. 난처해진 것은 이제까지 한껏 무게를 잡아 온 여섯 사람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흥정의 결말을 봐야 할 텐데, 그들은 대왕곤이 보기에도 남들 앞에서 드잡이질을 할 만큼 실력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아니, 뒷골목 이권 다툼에서 실력이 없다면 하다못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강단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것조차도 없는 듯했다. 하기야 그게 아니라면 비싼 돈을 들여 가며 조력자를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탈의 눈치를 살피던 여섯 사람은 주루 입구를 향해 조금씩 옆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탈은 결코 그들을 놔줄 생각이 아니었다. "거기 서!" 여섯 사람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모두 가버리면 싸움은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단탈은 탁자를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리며 싸움을 재촉했다. 여섯 사람은 아연 사색이 되었다. 단탈이 탁자를 두드릴 때마다 탁자의 네 다리가 주루 바닥을 뚫고 푹푹 박혀드는 광경을 본 것이다. "싸, 싸우지 않겠소이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염소수염이 먼저 말했다. 그리고는 동의를 구하듯 청의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마, 맞소. 우리도 평화를 사랑하지요." 앞이마가 벗겨진 청의 초로인이 급히 대꾸했다.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안 싸우겠다고? 지금 누구 놀리는 거냐?" 단탈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이었으니 여섯 명의 뒷골목 인생들의 간이 얼마나 오그라들었는지는 불문가지... 그 중에서도 가장 눈치 빨라 보이는 염소수염이 간사하게 웃으며 두 손을 비볐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2 묘왕동주 "대협께서는 그만 노기를 푸시지요. 소인들의 미욱한 손짓발짓이 어디 대협의 눈에 차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면 뭐가 눈에 찰까?" "예?" "싸움질은 못하더라도 뭐 하나쯤은 재주가 있을 게 아냐!" 앞이마가 벗겨진 청의 초로인이 냉큼 대답했다. "소인은 노래를 잘하지요." "노래?" "어릴 적부터 주위에서 노래 잘 부른다는 소리가 자자했습니다."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듣는 것도 좋은 일이지. 어서 불러." 그러자 염소수염도 질세라 끼여들었다. "소인도 노래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단탈은 사나운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함께 불러. 만일 노래가 귀에 거슬리면 너희들 손짓발짓이 얼마나 미욱한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그리하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뒷골목 이권을 두고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던 신양·낙양의 패거리들은, 혹시라도 음율이 어긋날까 걱정하면서 한 목소리로 <서강월(西江月)>의 구성진 곡조를 뽑아 내게 되었다. * * * 자작(自酌)은 사람을 빨리 취하게 만든다. 그 술이 백건아(白乾兒)와 같은 싸구려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세상의 일이란 봄날 꿈처럼 짧으니 사람의 정이란 가을날 구름처럼 엷으니 뭔가를 해보려 애쓰지 말게나 모든 것은 운명대로 돌아간다네 世事短如春夢 人情薄如秋雲 不須計較苦勞 萬事原來有命 "모든 것은 운명대로 돌아간다..." 한 병의 백건아에 얼굴이 불그레 달아오른 대왕곤은 귓가에 흘러드는 <서강월>의 노랫말을 나직이 뇌까려 보았다. 여섯 사람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도 그런대로 들어 줄 만했고, 뱃속으로 흘러 들어간 백건아도 그런대로 마실 만했다. 그 때문인지 밑바닥까지 떨어진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대왕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한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통쾌하게 마시는 박한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 운하의 선상에서도 그랬고, 신양까지 오는 도중에서도 그랬다. 박한은 본래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그 반면, 두 병이 넘는 백건아를 마셨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신색을 유지하고 있는 단탈은 타고난 술꾼인 것 같았다. 하기야 워낙 칙칙한 피부라 술기운이 드러날 리도 없겠지만... "대가리를 굴리려 애쓰지 마라, 어차피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떤가? 나 같은 놈에게 썩 어울리는 경구(警句)가 아닌가?" 대왕곤이 이렇게 말하자, 단탈은 대왕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지?" 단탈은 그답지 않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대왕곤은 재촉했다. "할말이 있으면 해보게. 다 들어 줄 테니까." 대왕곤이 물었다. 단탈은 술병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운명이라... 한어를 처음 배울 때, 그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무척 고생한 기억이 나는군." "자네가 살던 곳에는 운명이란 뜻을 가진 말이 없나?"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굳이 비교한다면 '아합아게'라는 말이 운명과 비슷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걸세." "아합아게?" "어머니의 뜻이란 의미지.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부족의 어머니인 아합의 뜻." 대왕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운명은 신의 뜻, 어머니를 신처럼 떠받드는 이들에게는 신의 뜻이 곧 어머니의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왕곤은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아합아게는 이곳에서 말하는 운명과는 조금 달라." "뭐가 다른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 도망치는 자는 아합아게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고. 아합아게는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용기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비로운 어머니의 뜻... 곧 소망이지." '소망'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준 단탈은 계속 이야기했다. "자네들이 중원이라고 부르는 이 땅은 넓어. 또 풍요롭지. 하지만 내가 살던 곳은 이렇게 넓지도, 또 풍요롭지도 않지. 살을 익힐 듯한 더위, 뼈까지 얼릴 듯한 추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맹수와 독충, 애써 가꾼 보금자리를 때만 되면 휩쓸어 버리는 폭우... 그래서 아이들이 많이 죽지. 슬픈 일이야." 두 병의 백건아가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해준 것일까? 단탈은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많은 말을 했다. "생각해 보게. 만일 우리들이 이곳 사람들처럼 운명이라는 말을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를! 신의 뜻? 그리고 자연의 뜻? 그 뜻은 우리에게 너무 잔인했어. 거칠고 척박한 땅이나마 인간에게 허락하려 하지 않는 비정한 뜻이었네. 그 뜻을 의지해 살려고 했다면, 그 뜻을 핑계대고 도망갈 궁리나 했다면, 우리 아합족은 결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걸세. 맞아,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치 않았어. 우리를 죽이려는 모든 뜻과 싸웠지. 아합아게는 어머니의 뜻이자 소망이라고 했지? 어머니는 결코 아이들을 죽이려 하지 않지.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은 우리의 소망이야. 그래서 우리는 싸웠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결국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단숨에 쏟아 놓은 단탈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진 대왕곤의 얼굴을 발견한 모양이다. "이것이 우리 아합족의 운명, 아합아게라네. 어떤가? 이곳에서 말하는 운명과 조금 다르지?" 대왕곤은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탈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것이다. 단탈은 대왕곤의 생각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대왕곤은 입을 열었다. "나는... 셋째의 죽음을 겪은 뒤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네." 단탈은 말없이 대왕곤의 뒷말을 기다렸다. "나는 그 결심 때문에 이제껏 나를 지탱해 주던 꿈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대왕곤은 고개를 들어 단탈을 바라보았다. "그 결심을 따르는 것이, 자네가 말하는 아합아게에 어긋나는 것일까? 나는 내 꿈, 내 삶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것일까?" 단탈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자네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또 자네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무슨 꿈을 꾸어 왔는지 모른다네. 그런 내가 자네의 아합아게에 대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오직 자네의 몫... 자네가 생각하고, 자네가 판단하고, 자네가 행동해야만 하는, 자네만의 문제겠지." "매정한 사람이군." 단탈은 슬쩍 웃었다. "매정하다고 욕하니 한 가지만 말해 주겠네. 아합아게는 마누라가 차려 주는 아침 식탁과 같아. 그 위에 무슨 음식이 올라올지는 누구도 모르지. 하지만 뭐가 올라오든 마누라를 화나지 않게 하려면 열심히 먹어 줘야 하지 않겠나? 아주 열심히 말이야." 단탈의 말을 한두 번 음미해 본 대왕곤은 빙그레 웃었다. 반교가 죽은 뒤 처음 짓는 기분좋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말이 없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이제 보니 유세(遊說)하고 다녀도 되겠군." "유세?" "쉽게 말해서 떠벌이란 말이지." 단탈은 눈을 크게 뜨고 짐짓 노한 표정을 지었다. "난 떠벌이가 아니야." 그러면서도 대왕곤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는 것을 보면 화가 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술. 대왕곤은 매용소의 선실에서 벌어진 화해의 술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단탈은 가족과 친구가 아니면 술을 따라 주지도, 또 받지도 않는다고 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3 묘왕동주 이제 단탈은 대왕곤을 친구로 받아들인 것일까? 혹시 조금 전 단탈이 이곳에서 벌인 작은 소란도 친구의 우울함을 풀어 주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또 운명과 아합아게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도 허물어져 가는 친구의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박한이 때가 꼬질꼬질한 돈주머니를 꺼내면서까지 술을 마시고자 한 것도 설마...? 그러나 대왕곤은 모든 의문을 속으로 삭일 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믿음이란 본디 확인이 필요없는 덕목. 단탈과 박한이 그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굳이 확인하고자 하여 두 사람의 신심(信心)을 흠내고 싶지는 않았다. 대왕곤은 하나뿐인 눈에 굳센 빛을 담았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일을 벌인 저 무뚝뚝한, 그러나 따듯한 마음을 지닌 이방인들을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대왕곤은 단탈이 따라 준 술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워 버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힘껏 팽개쳤다. 쨍`- 사기로 만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넓은 주루를 통쾌하게 관통했다. 가슴속의 우울함까지 단숨에 뚫리는 듯했다. 그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왕곤은 탁자를 내리치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언제까지 술집에서 노닥거릴 셈인가?" 단탈과 박한은 기이한 표정으로 대왕곤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난 바쁘단 말이야! 어서 조추림이란 놈을 잡으러 가야지!" 대왕곤은 짐짓 활기찬 목소리로 말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탁자 옆에는 지금까지 줄기차게 노래하던 여섯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사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잔뜩 겁먹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왕곤이 잔을 팽개친 것이 아닐까 저어하는 눈치였다. 대왕곤은 그들 중 이마가 벗겨진 청의 초로인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귀하의 주인께서는 이곳 신양 땅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그, 그렇습니다만..." 청의 초로인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귀하의 주인을 만나고 싶소." 대왕곤은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 어떤 종류의 단서`-`그것이 강호인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만`-`는 빛을 싫어하는 벌레와 비슷하다.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음지에 고이는 것이다. 그래서 대왕곤은 조추림에 관한 단서를 음지에서 찾기로 마음먹었다. 도시의 음지, 마음의 그늘을 지닌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 바로 뒷골목이었다. 신양은 그 부침(浮沈)을 무림맹과 함께한 도시였다. 무림맹이 건재하던 시기, 신양은 부와 번영의 상징이었다. 가호(家戶) 십칠만에 인구 팔십만, 모든 골목 앞에는 날아갈 듯한 패루(牌樓), 모든 길 위에는 알록달록한 전석(塼石), 느긋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허리에는 두둑한 돈 주머니, 화려한 단청이 번쩍거리는 주루에는 그윽한 주향, 선녀처럼 아름다운 청루야화(靑樓夜花)들의 눈매에는 간들거리는 교태... 그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어울린 신양은 행복의 도시였다. 관서 출신인 주담(朱潭)이 신양의 뒷골목으로 대변되는 금금호동(金錦胡同)에 둥지를 튼 것은, 무림맹이 창출한 부와 번영의 광채가 신양 전역을 찬란하게 비출 무렵이었다. 시궁창에는 쥐가 있고, 연못에는 수련이 있다면, 뒷골목에는 주담이 있다. 그는 뒷골목이 요구하는 만큼 너그럽고, 뒷골목이 요구하는 만큼 잔인했으며, 뒷골목이 요구하는 만큼 대범하고, 뒷골목이 요구하는 만큼 약삭빨랐다. 즉, 그는 천생이 뒷골목 인생인 것이다. 금금호동에서 주담이 보여 준 성장 속도는 실로 눈부셨다. 그는 자리를 잡은 지 일 년 만에 육대장(六大將)이라 불리는 여섯 명의 왁살스러운 사내들을 아우로 끌어들였고, 사 년 만에 무림맹으로 공급되는 의복과 육류의 권리를 따냈으며, 십 년 만에 시전(市廛) 일대의 모든 패거리들을 일통하여, 급기야 금금호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떠올랐다. 그 당시 신양 사람들은 주담을 두려워하며 가리켜 '주금금(朱金錦)'이라고 불렀다. 금금호동이 곧 주담의 소유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당시의 주담은 어느 누구도, 설령 대명제국의 황제라 해도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가 좋았지.' 주담은 쓰게 입맛을 다시며 대머리 모달(毛達)이 데려온 애꾸를 바라보았다. 애꾸는 스스로를 사천의 대왕곤이라고 소개했다. 대왕곤이라면 주담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장강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만약 주담이 아직까지도 주금금이었다면 제아무리 대왕곤이라 할지라도 저리 건방지게 이 집 대문을 들어서지는 못했을 것이요, 고개를 조금 까딱임으로써 인사를 대신하지도 못했을 것이요, 더군다나 근자에 이 일대에서 벌어진 자질구레한 일들을 깡그리 읊어대라고 윽박지르는 짓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골목이 예전의 금금호동이 아니듯, 주담도 예전의 주금금이 아니었다. 무림맹이 와해된 그날, 사라진 것은 비단 무림맹뿐만이 아니었다. 황금과 비단이 굴러다니는 골목 금금호동도, 그 금금호동의 지배자로 만인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던 주금금도, 부와 번영의 광채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모든 것들이 무림맹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황량하고 퇴락한 몇 개의 골목, 그리고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늙은 몸뚱이뿐... "낙양의 고렴과 양성의 이씨 형제는 이분들을 뵙더니 곧장 되돌아가셨습니다." 대머리 모달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놈의 말인즉슨, 대왕곤과 대왕곤의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괴인은 고렴과 이씨 형제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고수라는 뜻. 섣불리 대하다가는 그나마 유지하던 이 보잘것없는 기업마저 박살날 터이니, 신중히 생각해서 처신하라는 의미였다. '어쩌다 저런 등신 같은 놈들만 남아서...' 주담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인생지사(人生之事) 월만측휴(月滿側虧)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좀 심했다. 한때는 그토록 잘 나가던 주금금인데, 기개있는 수하 한둘쯤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탄해 봐야 소용없었다. "우리는 바쁜 몸들이오. 빨리 말해 주시길 바라오." 대왕곤이 묵직한 음성으로 재촉했다. 그의 외눈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곱게 물러갈 것 같지는 않았다. 주담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시작했다. "노부는 늙고 병들어 바깥 사정에는 영..." 대왕곤의 눈빛이 칼날처럼 살벌해졌다. "영... 어떻다는 말이오?" 주담은 찔끔 놀라 말을 바꿨다. "하, 하지만 그래도 나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애들이 많이 있으니 그애들에게 물어 보시면 될 거외다." "그들을 당장 모아 주시오." "애들이 워낙 흩어져 있는 탓에, 당장은 조금 곤란한데..."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늑장을 부려도 좋소." 대왕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뒤 서 있던 괴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까칠한 머리통에 부리부리한 두 눈은 보기만 해도 얼마나 사나운 놈인가를 짐작케 해준다. "부르리다! 지금 당장 애들을 전부 부르리다!" 주담은 황급히 외쳤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뒤, 주담의 집에는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의 차림새는 모두 달랐다. 성별이나 나이 또한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있었으니, 그것은 눈자위에 줄줄 흐르는 불량기였다. 그 중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빨부터 드러내는 들개 같은 놈도 있었지만, 박한이 한 수를 보여 주자 금방 양처럼 순해졌다. 한아름이나 나가는 석등(石燈)을 단숨에 베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칼잡이에게 뒷골목 패거리의 이빨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이다. "아는 바가 있는 사람은 주저없이 털어놓거라!" 주담의 말이 떨어지자 사십여 개의 입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십여 개의 입들이 일 각 가까이 주절거렸지만, 대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너절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왕곤은 손을 번쩍 치켜 들며 외쳤다. "잠깐!" 사십여 개의 입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딱 다물어졌다. 대왕곤은 그 중 하나를 지목해 물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소?" 대왕곤에게 지목당한 사람은 다리가 유난히 길쭉한 말상의 장년인이었다. 대왕곤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안색이 핼쑥해졌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시오." 대왕곤이 재촉하자 말상의 장년인이 대답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4 묘왕동주 "이삼 일 전에 마차 한 대를 호위한 무인들의 무리를 북곽(北廓)에서 본 것 같다고 했습니다만... 뭐가 잘못됐나요?" "그들이 무인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소?" "눈깔은 괜히 달렸겠습니까? 눈 밑에는 칼날을 박아 놓은 것 같고 어깨에는 쇠몽둥이를 박아 놓은 것 같으니, 한가락하는 무인이란 것쯤은 척 보면 알 수 있죠." "수는 얼마나 되었소?" 말상의 장년인은 기억을 더듬듯 눈알을 위로 한두 번 굴리더니, 이윽고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 명은 분명히 넘었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무게를 잡고 가니까 제법 볼 만하던데요?" 이삼 일 전에 지나간 백 명 이상의 무인들이라면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대왕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본 곳에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겠소?" 말상의 장년인은 주담의 눈치를 살폈다. 아랫사람이란 이처럼 무슨 일 하나를 하는 데에도 윗사람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주담일 텐데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가급적이면 강호인들의 분쟁에 끼여들지 않으려는 눈치가 역연했다. "우리의 일에 노야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소. 방향만 확인하면 곧장 돌려보내 드리리다." 대왕곤이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했다. "뭐...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마땅히 도와 드려야죠." 이렇게 대답하는 주담의 얼굴에는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이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께름칙한 마음이야 여전하련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망한 부자는 이래서 서럽다. * * * 콱! 문득 볼따구니가 따끔거렸다. 콱! 콱! 콱! 이번에는 팔다리 가릴 것 없이 따끔거렸다. 전신을 통해 전달된 이 성가신 통증에 반호는 눈을 떴다. "흐윽!" 반호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앞으로 확대되어 오는 뾰족한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후려치지 않았다면, 그는 졸지에 애꾸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께에엑`- 저만치 나가떨어진 그것이 듣기 거북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리고, 새까만 날짐승들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구리터분한 노린내, 떨어져내리는 깃털들... "흐, 흐흐... 꼴좋구나, 반호야." 반호는 방금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짐승들은 다름 아닌 까마귀였다. 해질녘을 맞아 둥지로 돌아가던 놈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그를 훌륭한 저녁 식사감으로 여겼음이 분명했다. 까욱`- 까욱`- 까마귀 떼는 반호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놈들의 후각은 더할 데 없이 예민했다. 마치 반호에게는 삶의 희망이 얼마 없음을 알기라도 하듯, 놈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까마귀를 일러 죽음의 냄새를 가장 빨리 맡는 날짐승이라고 하지 않던가. "망할 새끼들...!" 반호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호가 이 눅눅한 낙엽 더미 속에 몸을 감춘 것은 추격자의 이목으로부터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청면수라 온이의 청살기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처음 말 등에 올랐을 때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지독한 한독(寒毒)이 사지백해로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세 시진 가량을 달린 반호는, 운기행공을 하지 않은 채 더 이상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한독이 심장까지 침투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온이는 분명히 그를 놔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말의 빠른 다리가 아니라면 그는 추격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을 타서도 안 된다. 그러나 말을 멈출 수도 없다. 이러한 모순의 상황 속에서 반호는 하나의 계교를 생각해 냈다. 추격자들의 눈이 흙바닥에 선명하게 찍히는 말발굽 자국에만 쏠려 있기를 바라며, 말은 그대로 달리게 하고 자신은 뛰어내릴 작정을 한 것이다. 이때 반호가 사용한 몇 가지 기술상의 수고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령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관도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에 매달린 일이라든지, 또는 말을 그대로 달리도록 하기 위해 말의 엉덩이에 큼직한 상처를 만들어 놓은 것 따위의 일들 말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위태롭게 몸을 움직이던 반호의 허리띠에는 공처럼 둥글둥글한 두 개의 물체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반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잊고 온이에게 달려들게 만든, 바로 그 물체였다. 그 묵직한 무게는 반호를 더욱 지치고 힘겹게 만들었지만, 반호는 결코 그것들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하려다 죽임을 당한 방철과 임이평... 그들의 수급을 자신이 거두지 않는다면 누가 거두겠는가. 그들의 복수를 자신이 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해주겠는가. 그렇기에 반호는 살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그런 반호에게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관도로부터 삼사 장 정도나 떨어졌을까? 우묵하게 파인 땅에 덤불과 낙엽 더미와 암석이 한데 어울려 있으니, 외부로부터의 발견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훌륭한 은신처였다. 그곳으로 뛰어내린 반호는 낙엽 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신쾌한 속도로 미루어 온이가 파견한 추격자들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반호의 유인계(誘引計)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유인계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결국 추격자들은 지친 말을 발견할 것이고, 그러면 말 등에서 사라진 반호를 찾기 위해 추격로를 되짚어 돌아올 것이다. 반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진 가량, 어쩌면 그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 안에 한독을 몰아 낸 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급히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운기행공에 든 지 불과 일 각도 지나기 전, 반호는 한 모금 검은 핏물을 토하며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몸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온이의 청살기는 이미 그의 주맥(主脈)에 위험한 손상을 입힌 것이다. 몇 번이나 이를 악물며 진기를 돌려 보려 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지독한 고통뿐... 반호는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그렇게 혼절해 있었을까? 만일 까마귀들이 귀찮게 쪼아대지 않았던들, 반호는 영원히 의식을 되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끈질긴 사람이라도 광기와 분노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까욱`- 까욱`- 반호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까마귀 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시간은 그를 점점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생명의 기운은 조금씩 몸뚱이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니! 정말 이대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단 말인가? 천하의 반호가 이토록 맥없이...? 바로 그때였다. "이봐, 까마귀들이 왜 저리 극성이지?" "글쎄... 뭐가 있는 모양인데?" 관도 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반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추격자들이 드디어 그의 종적을 발견한 것일까?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나타난 방해자들을 의식해서인지 까마귀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울어댔다. 잠시 후, 반호를 가리고 있던 수풀이 버스럭거리더니 세 개의 머리통이 불쑥 솟아올랐다. "...?" 반호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 * * 단탈은 대왕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놈은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대왕곤은 고개를 흔들었다. 낙엽 더미에 반쯤 묻혀 있는 사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그라고 해서 알 리 없었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사내는 정상이 아니었다. 시체처럼 푸르뎅뎅한 피부와 핏물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하관이 그래 보였다. 더구나 허리춤에 비끄러맨 수급이라니! 대왕곤은 호기심을 느꼈다. 인적이 드문 길가 덤불에 사람의 수급을 지닌 채 누워 있는 저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사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뭐라고 말한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잘 들리지 않았다. "크게 말해 봐라." 단탈이 외치자 사내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달싹거렸다. 이번에는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5 묘왕동주 "구해 주려면 어서 구해 주고, 아니면 당장 꺼져!" 살려 달라는 놈치고는 너무 당당하고 뻔뻔스러운지라 단탈과 대왕곤은 황당함을 느꼈다. "다 죽어 가는 녀석이 뭘 믿고 큰소리지?" 단탈이 말했다. 사내가 곧바로 응대했다. "난 나에게 욕하는 새끼를 가만 놔둔 적이 없는 사람이야. 내 몸이 이렇게 된 걸 고맙게 여겨라." "허... 허허!" 단탈은 웃었다.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으련만 그저 웃기만 하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사내의 상태가 자신의 주먹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본 모양이다. 이때 박한이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냥 가자고! 저런 놈은 그냥 놔두는 게 나아!" 단탈이 말렸지만 박한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박한은, 사내의 허리춤에 달린 두 개의 수급을 가리키더니 사내에게 뭐라고 물었다. 사내가 귀찮은 듯 말했다. "이놈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거지? 나보고 뭐라는 거야?" "해동국의 말일 거요. 당신이 사람의 머리를 두 개씩이나 꿰차고 다니는 이유를 묻는 것 같소." 이제 박한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대왕곤이 사내를 향해 대답해 주었다. 그 순간,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수급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던 듯 손을 힘겹게 내려 허리춤을 더듬던 사내는, 두 눈으로 원독에 찬 광망을 뿜어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닭똥처럼 굵은 눈물이 사내의 두 눈에 차 올랐다가 양 관자놀이로 흘러내렸다. "난... 난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서 복수해야 해..." 사내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박한은 사내의 눈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사내의 가슴에 자신의 두 손을 올려놓았다. "이, 이봐! 뭐 하는 거야! 가슴을 건드리지... 쿨룩, 쿨룩!" 박한의 행동을 다급히 제지하던 사내는, 내식이 엉킨 듯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박한은 사내의 가슴에 댄 두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박한의 정수리에서 은은한 기운이 피어오른 것이다. 그 기운은 봄날의 훈풍처럼 따스하고, 불타의 광배(光背)처럼 자비로워 보였다. 사내의 몸은 곧 그 기운에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대왕곤이 이 신비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단탈의 음성이 귓전에 실렸다. "해동이라는 나라, 설마 저렇게 착한 친구들만 사는 건 아니겠지?" "무슨 뜻이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치료해 주기 위해 큰 노력을 들이니까 하는 말일세." "저것이 치료라고?" 대왕곤의 눈이 커졌다. 맨손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재주는 중국에도 있었다. 추궁과혈(推宮過血)이나 추나요상법(推拿療傷法) 등이 바로 그것이니, 어쩌면 중국이 원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박한이 시전하는 방식은 추궁과혈, 추나요상술 등과는 판이했다. 그것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마치 햇빛과 단비가 시들어 가는 초목을 살려 내듯, 박한은 보다 높은 차원의 힘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명의 기운을 되찾게끔 해주고 있는 것이다. '혹시 호사가들이 말하는 활검(活劍)의 경지가 바로 저것이 아닐까?' 대왕곤이 이런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을 즈음, 단탈이 다시 말했다. "나는 저런 광경을 여러 번 보았지. 직접 겪어 보기도 했고." "저런 힘을 지닌 사람이 박 공말고도 또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단탈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이하게 여긴 대왕곤은 단탈을 돌아보았다. 순간, 대왕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탈은 자세를 약간 낮추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서 있던 그인데, 허리와 두 무릎이 보일 듯 말 듯 구부러진 것이다. 비록 미미한 변화에 불과하지만, 대왕곤은 단탈의 기세가 현저히 바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탈은 한껏 당겨 놓은 시윗줄처럼 팽팽해져 있는 것이다. 단탈이 나직이 말했다. "누가 오는군. 몸이 날랜 자들이야." 대왕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곧 관도를 따라 달려오고 있는 예닐곱 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달려오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단탈의 말처럼 몸이 날랜 자, 경공의 기초가 훌륭한 무인임에 분명했다. 대왕곤은 긴장했다. 3 역천비의 얼굴은 거지처럼 더러웠다. 지난 네 시진 동안 흘린 땀과, 지난 네 시진 동안 뒤집어쓴 흙먼지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역천비는 웃었다. 웃으며 소리쳤다. "쥐새끼 같은 놈! 드디어 잡았구나!" 역천비는 똑똑히 보았다. 며칠 동안 그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았던 반호는 지금 반송장처럼 축 처진 채 땅위에 자빠져 있었다. 딴에는 머리를 굴린답시고 말 등에서 뛰어내린 모양이나, 영주의 청살기가 기어이 놈을 쓰러뜨린 것이다. 잠시 후면 며칠 동안의 모든 고생을 보상받을 것이다. 역천비가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런데 역천비가 고생을 보답받는 데에는 작은 문제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다. 귀찮은 날파리들이 반호 주위에 꼬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차림새는 괴이했다. 특히 반호의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있는 밀짚모자를 보았을 때, 역천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밀짚모자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목숨 빚이 있소. 공연히 끼여들어 화를 당하는 일이 없길 바라오." 역천비는 점잖게 경고했다. 결실을 눈앞에 두고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역천비의 말에 대꾸한 사람은 한 쪽 눈에 안대를 찬 사내였다. "어디에서 오신 분들인지 명호를 들을 수 있겠소?" 역천비는 낮게 코웃음쳤다. "세상에는 말해 줄 수 있는 것과 말해 줄 수 없는 것이 있소. 또한 알아도 되는 것과 알면 안 되는 것이 있소. 당신은 어찌하여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기 위하여 말해 줄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시오?" 안대를 찬 사내는 잠시 역천비의 말을 음미해 보더니 빙긋 웃었다. "말하길 좋아하는 모양이니 나도 몇 마디 하리다. 사냥꾼도 품 안에 들어온 새는 잡지 않는다 했고, 또한 사람을 구하려면 저승 문의 빗장까지 확실히 걸어 놓고 오라고 했소. 애써 구해 놓은 사람을 어찌 명호도 밝히지 않는 무리에게 넘기겠소?" 역천비의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 "경주(敬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받겠다는 말이오?" 안대를 찬 사내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더니 곁에 서 있는 밤송이 대가리를 가리켰다. "나야 경주고 벌주고 상관없지만,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친구가 아니면 술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뜻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오." 역천비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대개 날파리를 처음 보면 쫓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드디어 양 손바닥을 마주쳐 날파리를 죽이려 든다. 지금 역천비의 심정이 바로 그랬다. 죽여야 할 날파리에게는 문답이 필요없는 것이다. 해남사룡(海南四龍)은 십여 년 전부터 역천비를 섬겨 온 하인들. 그들은 상관의 심정을 금방 알아차렸다. "없애 버릴까요?" 해남사룡의 첫째 나룡(癩龍)이 묻자 역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파리 셋을 잡아죽이는 데 어찌 역천비처럼 명성이 자자한 위인이 직접 손을 쓰겠는가! 단지 고갯짓 한 번이면 충분했다. 역천비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따라온 여섯 사람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한 자루 시커먼 칼이 그들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 * * 해남사룡 중 셋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첫째 나룡은 가슴이 길게 갈라졌고, 셋째 오룡(汚龍)은 목이 잘렸으며, 막내 취룡(臭龍)은 정수리가 쪼개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둘째인 추룡(醜龍), 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단지 어깨를 베였을 따름인데, 무슨 까닭인지 흙바닥 위를 뒹굴며 온몸을 뒤틀고 있기 때문이다. 간질이라도 걸린 놈처럼... 해남도의 네 마리 용이 이렇게 비참한 꼴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역천비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수하 넷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해남사룡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한 자루 시커먼 칼은 그만큼이나 단호했다. 그 시커먼 칼이 천천히 움직였다. 칼끝이 겨눈 곳은 역천비의 얼굴. 칼을 쥐고 있는 밤송이 대가리의 두 눈 또한 그곳에 고정되었다. "잔인하구나!"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6 묘왕동주 역천비는 이를 갈며 자신의 애병, 유명마도를 뽑아 들었다. 놈은 잔인할 뿐 아니라 강했다. 해남사룡의 실력이 비록 일류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칼질 몇 번으로 몰살시킬 만큼 수수깡은 아니었다. 역천비의 뒤에 서 있던 강조양과 녹파파도 생각지도 않던 강적의 출현에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밤송이 대가리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두툼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생김새와 잘 어울리는 투박한 저음이었다. "나는 적이 아니면 안 죽여." 말과 함께 밤송이 대가리는 아직까지 경련을 멈추지 않은 추룡의 머리를 걷어찼다. 둔탁한 파골음이 울려 퍼지고 추룡의 경련은 가위로 자른 듯 뚝 멎었다. "지독한..." 잠시 치를 떨던 역천비의 두 눈에 문득 이채가 어렸다. 밤송이 대가리의 뒤쪽, 반호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밀짚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광경을 본 것이다. 역천비를 놀라게 만든 것은 반호의 변화였다. 시체처럼 푸르뎅뎅하던 반호의 안색에 서서히 화색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반호가 살아난다면? 그래서 결국 놓친다면? 역천비는 뒷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직속 상관 온이의 얼굴은 더욱 푸르게 바뀔 것이요, 역천비는 저기 누워 있는 해남사룡의 처지를 오히려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놈!"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역천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 그는 큰 호통을 지르며 밤송이 대가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휘리릭`- 두 자 길이의 유명마도가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밤송이 대가리의 전면으로 밀려갔다. 역천비가 자랑으로 삼는 유명천기도법의 절초 와선표(渦旋飄)가 시전된 것이다. "결국 너도 적이 되겠단 말이지?" 밤송이 대가리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쫘아악`- 도영의 소용돌이가 일순간에 갈라졌다. 그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칼... 와선표에 실린 역도가 더 강한 역도를 만나 허무하게 갈라진 것이다. 그러나 역천비는 무수한 싸움을 통해 단련된 노련한 무인. 그는 엄밀한 도영(刀影)으로 자신의 몸을 휘감으며 시커먼 칼을 흘려 보냈다. 그리고 시커먼 칼이 채 회수되지 않은 틈을 비집고 내리찍은 벼락같은 좌장(左掌)은, 그의 별호에 왜 '유명'이라는 으스스한 단어가 붙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다시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마치 유부를 떠도는 귀신의 몸놀림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퍽`- 역천비의 좌장은 밤송이 대가리가 엉겁결에 치켜 든 팔뚝을 세차게 두드렸다. 수백 근 위력이 실린 장력이었으니 밤송이 대가리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친 것은 당연한 일. 그러한 순간에도 칼을 크게 휘둘러 후속 공격에 대비하는 것을 보면 밤송이 대가리의 실력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지만, 역천비는 이미 칼의 세력권을 벗어난 뒤였다. '우악스럽게 강하기만 할 뿐, 교묘한 점은 부족한 놈이군.' 역천비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의 능기(能技)는 유연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근접전에서의 빠른 공수 전환. 힘만 믿고 달려드는 놈을 요리하는 데에는 제격인 것이다. 그러나 역천비의 이러한 생각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밤송이 대가리, 다시 말해 단탈은 결코 힘만 믿고 달려드는 미련퉁이가 아니다. 단탈의 칼이 힘과 교묘함을 함께 갖추었음은 이미 포향령에서 입증된 바, 당시의 상대인 남력은 단지 힘만으로는 꺾을 수 없는 강자였던 것이다. 지금 단탈은 본신 능력의 절반 정도밖에는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약흠이 단탈에게 물려준 절독공은 세상을 두렵게 만들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위력이 막강한 만큼 단점도 있었으니, 독에 관한 한 천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탈조차도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단탈에게 커다란 전기가 찾아왔다. 형산의 전투에서 화룡대(火龍隊)에게 당한 염마수의 화공이 바로 그것이다. 외부로부터 가해진 지독한 화기는 단탈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모든 독기를 일제히 격발시켰고, 그 결과 단탈은 주화입마 직전에 이르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적시에 가해진 구양일산의 치료는 단탈이 지닌 끈질긴 생명력과 어울려 화를 복으로 바꾸었고, 그 뒤 단탈의 독공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단탈은 과거 약흠이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진정한 독인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완성을 눈앞에 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깨달음의 비약이 아닐까? 만약 스스로를 돌보는 데 조금 더 세심한 사람이라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할 때가 바로 이 단계일 것이다.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차분한 심안으로 자신을 조명함으로써,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탈은 스스로를 돌보는 데 세심한 사람이 못 되었고,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단탈은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죽을힘을 다해서 싸워 왔다. 운하에서도, 신양으로 오는 노중에서도, 그리고 포향령에서도... 심신의 조화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내기(內氣)를 무리하게 운전하는 일은 벼랑 끝에 앉아 술을 퍼마시는 것처럼 위험하다. 계속되는 싸움과 누적되는 피로... 그 속에서 어느 순간, 단탈의 내부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무서운 자멸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아니, 포향령에서 도령체를 끌어올린 이후로 줄곧 단탈을 괴롭혀 온 답답한 장애는 그 전조(前兆)라고 할 수 있었다. 단탈의 위기를 가장 빨리 알아차린 사람은, 지난 두 달 동안 단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험로를 뚫어 온 박한이었다. 하지만 박한은 선뜻 싸움에 뛰어들 수 없는 입장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이 박한의 그러한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검기를 반전(反轉)하여 남을 치료한다는 것은 박한으로서도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 패도적이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는 검기를 거대한 자비의 힘으로 바꾸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그 힘으로써 끊어진 혈맥과 부숴진 근골을 어루만져 주는 일은 더욱 그러했다. 박한은 일 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의 험한 전투를 치른 것과 맞먹는 손해를 입고 만 것이다. 이러한 치료가 얼마나 큰 효과를 거둘지는 박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시술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피시술자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 결국 생사는 당사자의 몫이다. 어쨌거나 단탈을 위기에서 구해 줄 사람은 박한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박한은 그 자리에 앉아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고전의 기색이야 역력하지만, 단탈은 아직까지 큰 부상 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싸움에 개입하지 않은 대머리 노인과 녹색 치마의 여인이 나선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두 사람은 일견하기에도 심상치 않은 기도를 발산하고 있었다. 박한으로서는 두 사람이 나서는 시기가 가급적 늦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단탈과 역천비, 가리아와 유명마도의 싸움은 어느덧 일백 번의 격돌을 넘기고 있었다. "이런 오라질 일이!" 역천비는 단내가 풀풀 나는 입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화가 났다. 금방 허물어질 것 같으면서도 끝내 허물어지지 않는 밤송이 대가리 때문에 화가 났고, 기선을 잡고도 싸움을 쉽게 끝내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 밤송이 대가리의 전신에는 자잘한 도흔이 빽빽히 새겨져 있었다. 물론 유명마도가 남긴 흔적이었다. 그러나 밤송이 대가리는 여전히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었다. 처음에는 곧 꺾이리라 생각한 두 다리.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역천비의 눈에 비친 그것은 너무나도 튼튼해, 설사 황소가 들이받는다 할지라도 멀쩡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 다 잡아 놓은 적을 합공으로 쓰러뜨리는 것은 유명마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일이지만, 역천비를 엄습한 막연한 공포감은 자존심을 꺾어 누를 만큼 묵직한 것이었다. "둘 다 보고만 있을 셈이냐!" 역천비는 체면 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큰일이다!' 대왕곤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까지 관망만 하고 있던 두 명의 적, 대머리 노인과 녹색 치마의 여인이 전장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박한이 나설 수만 있다면 얘기는 간단하겠지만, 불행히도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박한의 머리 위에는 허연 김이 어려 있었다. 이는 행공(行功)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증거이니, 박한은 지금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재주의 높고 낮음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박한의 행공이 끝나기 전까지 단탈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임을 깨달은 순간, 대왕곤은 쏜살같이 달려나가 노인과 여인을 가로막았다. 난데없는 훼방꾼에 노인과 여인이 멈칫한 사이, 대왕곤은 소매 속에서 두 자루의 계조겸(鷄爪鎌)을 뽑아 들었다. 삼협을 떠난 뒤 한 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던 그의 애병이다. "비겁하게 합공을 할 셈이냐!" 대왕곤은 큰 소리로 꾸짖으며 양손의 계조겸을 매섭게 내질렀다. 푸르릉`-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3 장 - 7 묘왕동주 문풍지 떨리는 듯한 파공성이 난무하고, 닭발처럼 생긴 계조겸의 갈퀴가 노인과 여인을 할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매서워 봤자 마구잡이로 수련한 수적의 재간, 상대는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 닳고 닳은 마두들이다. "호호! 저자는 소매가 데리고 놀아 주지요. 강 오라버니는 부영주를 도와 드리세요." 여인은 노인의 등을 툭 민 뒤, 계조겸의 공세 속으로 사뿐히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두 자루의 계조겸 사이를 빠져 나오는데, 그 보법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유연해 보였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여인은 생긋 웃으며 통통한 손바닥을 살짝 내밀었다. "크흑!" 대왕곤은 신음을 삼키며 왼손에 쥐고 있던 계조겸을 놓치고 말았다. 단지 살짝 짚고 지나갔을 뿐인데, 여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암경(暗勁)은 그의 손목 관절을 여지없이 탈구시킨 것이다. 여인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신 같은 망둥이가 끼여들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죠!" 나직한 조소가 울리고, 대왕곤은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는 여인의 발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왕곤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피하면 단탈은 세 명의 강적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퍽! 연꽃 문양이 수놓아진 여인의 신발이 대왕곤의 왼쪽 가슴을 강타했다. 심장까지 전달되는 아찔한 충격이 대왕곤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왕곤은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왼쪽 겨드랑이에 여인의 발목을 단단히 휘감고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계조겸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힘껏 긁어 버렸다. "아악!" 살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여인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대왕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반사적으로 내지른 여인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적중된 것이다. 입으로 피를 토하며 일곱 걸음이나 물러서는 대왕곤. 여인은 그런 그를 결코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대충 놀아 주려고 했더니... 기어이 피를 보고 싶단 말이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여인은 대왕곤을 향해 몸을 날리며 쌍장을 힘껏 내질렀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패도적인 공력이 실린 공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맨몸뚱이로라도 막는다!' 대왕곤은 이를 악물고 양팔을 활짝 벌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뚝심 하나만큼은 남에게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설령 몇 대 더 맞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허리를 조여 붙일 작정인 것이다. 사실 대왕곤의 이러한 시도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허리꺾기와 같은 투박한 기술이야 보통 사람에게나 통할까, 여인과 같은 내가고수 앞에서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 장력에 맞는 순간 전신 근맥이 산산이 끊어질 것이 뻔한데, 무슨 힘으로 상대의 허리를 조일 것인가! 만약 이대로 두 사람이 충돌했다면, 대왕곤은 십중팔구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충돌하지 않았다. 충돌 직전, 한 줄기 힘이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오른 것이다. 그 힘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아무도 그 힘 앞에서는 항거할 수 없었으니, 대왕곤은 구름에 올라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 대왕곤의 시야에 여인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가는 박한의 뒷모습이 담겼다. 마침내 박한은 행공을 끝낸 것이다. '단탈은?' 대왕곤은 황급히 단탈이 싸우던 곳을 살폈다. 단탈은 무사했다. 대머리 노인이 가세한 뒤 싸움은 더욱 일방적으로 변해 있었지만, 단탈은 여전히 자신의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아아!" 대왕곤은 전신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그는 할 일을 다했고, 남은 것은 박한의 몫이었다. 비록 몸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삼협을 떠난 이후로 지금처럼 자신이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파파파`- 멀리서 저무는 가을 노을이 한 자루 해동검에 의해 난분(難分)되기 시작했다. 검끝에서 서리서리 뿜어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은 붉게 물든 서녘 하늘처럼 장엄하고, 또 위대해 보였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입총(入塚) 묘왕동주 제 24 장 입총(入塚) 1 "난 괜찮아." 단탈은 무뚝뚝하게 내뱉으며 어깨 위에 얹힌 박한의 손을 밀어 냈다.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박 공의 치료를 받아들이게. 자네는 아직 할 일이 많잖아?" 대왕곤이 단탈에게 말했다. 그는 박한의 솜씨에 완전히 매료된 듯, 아예 대변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고집 피우는 게 아닐세. 그의 치료는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내게는 도움이 안 돼." 단탈이 원동력으로 삼는 절독공과 박한이 시전한 활검은 그 성질이 너무나도 다르다. 절독공이 파괴의 정점에 있다면 활검은 조화의 정점. 이는 같은 크기의 대접에 담긴 독수(毒水)와 약수(藥水)에 비유할 수 있다. 한 방울의 독수라면 한 대접의 약수로써 정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한 대접의 독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만약 박한이 섣불리 단탈의 내부를 바꾸려 들다가는, 두 사람 모두 큰 피해를 입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대왕곤의 얼굴에는 걱정의 빛이 가시지 않았다. 단탈은 잠시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대왕곤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크윽!" 대왕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탈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지금 남 걱정할 땐가?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오히려 자네야." 대왕곤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집에게 얻어맞은 것도 창피한데 치료까지 받으라고? 소문날까 무섭네." 이때 나직한 신음 소리가 울렸다. 박한의 치료를 받은 사내가 드디어 의식을 되찾는 모양이었다. "질긴 것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단탈이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사내가 살아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적을 물리쳤는데, 막상 당사자가 죽는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반호? 그러면 당신이 북경의... 반호란 말이오?" 사내에게 되묻는 대왕곤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다니까! 피곤하게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들지 마라." 대왕곤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반호라는 사내는 생명의 은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눈곱만치도 없는 듯했다. 방자하기 짝이 없는 말투가 그 증거였다. 대왕곤은 단탈의 귓가에 입을 바싹 갖다 대고 속삭였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아. 저건 세상을 위해 죽어 주는 편이 나은 놈이야." 세상을 위해 죽어 주는 편이 나은 놈들은 대개의 경우 눈치가 빠르다. 반호는 대왕곤을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속살거렸지?" "그, 그냥 우리끼리의 객쩍은 얘기요. 반 형은 모르셔도 되오." 대왕곤은 시치미를 뗐다. 반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대왕곤과 단탈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대왕곤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얼버무린 뒤 화제를 돌렸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되었는지 얘기나 해보시구려." 반호는 갑자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냐고? 지금 나한테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냐고 물은 거지?" 그러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변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나는 거상련의 존립이 걸린 막중한 임무를 띠고 하남성 남부에 출몰하는 괴집단의 동향을 정탐하기 위해 이곳까지 파견된 몸! 놈들도 어디서 내 이름을 들어 보았는지, 나 하나를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그 치열했던 험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려. 하지만 내가 누구야? 내가 바로 반호야!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어. 나는 놈들을 하나하나 까부수며 남하했지. 사십, 아니지, 오십 명은 넘게 죽였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놈들이 세졌어. 진짜배기들이 나오더라고. 난쟁이 하나를 인질 삼아서 도망가 보려고 했지만, 자식들은 매정하게 본 척도 안 하더군. 이젠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지. 바로 그때 나를 구해 준 사람이 방 부당주하고 임 두령이야. 참! 얼굴이나 봐둬. 이게 방 부당주고, 이게 임 두령이야." 반호는 마치 자식놈 인사시키듯,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 개의 수급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젠장, 근데 보라고! 둘 다 죽었잖아? 온이란 새끼 짓이지. 죽인 것도 부족해서 목을 잘라서 안장에 매달고 다니더군. 그때 나는 놈들의 소굴을 발견하고 몰래 북경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그 지랄 같은 광경을 보고 만 거야. 생각해 봐. 밋밋한 방 부당주에 깐깐한 임 두령이었지만 그래도 한솥밥 먹던 동료가 아니겠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참아? 난 그런 거 절대로 못 참는 사람이야. 그래서 당장 뛰어나가 온이, 그 새끼를 죽여 버리려고 했지. 하지만 난 너무 지쳐 있었어. 게다가 놈들은 개미 떼처럼 우글거렸고. 가까스로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날 수는 있었지만, 오래 못 가 결국 이 꼴이 되고 말았지. 빌어먹을!" 대왕곤과 단탈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장황한 설명, 그러나 알아듣기 힘든 설명이었다. "참! 추격자가 있을 텐데... 혹시 날 찾는 놈 없었어?" 반호는 비로소 생각난 듯 물었다. 대왕곤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몇 사람이 와서 반 형을 내놓으라고 합디다. 하지만 살아 돌아간 것은 둘뿐이었소." 살아 돌아간 둘이란 대머리 노인과 녹색 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킨다. 두 사람의 재주는 제법 비범하다 할 수 있었지만, 박한의 신비한 검법 앞에서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손짓발짓에 불과했다. 손날에 검푸른 기운을 번뜩이며 달려들던 대머리 노인은 여섯 수 만에 두 손목이 날아갔고, 영활한 보법을 자랑하던 녹색 치마의 여인은 세 수 만에 절름발이가 된 것이다. 박한은 그 두 사람을 굳이 죽이려 들지 않았다. 반항할 능력을 상실한 적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관대한 사람이 바로 박한이기 때문이다. 결국 손목이 날아간 노인은 다리가 상한 여인을 업은 채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단탈을 상대로 놀라운 칼 솜씨를 자랑하던 금포 중년인은 두 사람과 달리 박한의 검 아래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금포 중년인은 상대의 자비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하고 맹렬했기에, 박한도 그를 상대함에 있어서 감히 만심(慢心)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왕곤은 목덜미가 갈라진 금포 중년인의 시신을 반호에게 보여주었다. 반호는 분하다는 듯 내뱉었다. "해남도에서 놀던 역천비란 놈이지. 젠장! 저렇게 쉽게 죽여서는 안 되는 놈인데... 하지만 온이가 아직 남았으니 용서해 주기로 하지. 온이는 건드리지 마. 그 새끼는 반드시 내 손으로 찢어 죽일 테니까." 말인즉슨 제 일을 왜 빼앗았느냐고 타박하는 것이니, 이야말로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대왕곤으로서는 괄괄한 단탈이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단탈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반호를 보며 말했다. "아까 말한 '놈들의 소굴'이란 곳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라." 단탈이 남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에, 대왕곤은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현재의 신양은 과거와는 달리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작았다. 그 예로 터무니없이 몰락해 버린 금금호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러난 현실은 어떠한가? 신양은 결코 가벼이 취급할 곳이 아니었다. 조추림의 행적이 사라진 곳, 황금왕이 아끼는 홍당 고수들을 파견한 곳, 그리고 역천비와 같은 무서운 마두들이 활보하고 다니는 곳... 하나같이 이곳 신양이기 때문이다. '혹시 모든 것들을 꿰뚫는 커다란 축이 신양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대왕곤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렇다면 단탈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반호가 말한 '놈들의 소굴'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반호는 이런 식의 골치 아픈 추리보다 단탈의 딱딱한 말투를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는 턱을 삐딱하게 치켜들며 단탈에게 눈을 부라렸다. "말해... 봐라...? 너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단탈은 픽, 웃었다. 그러더니 번개처럼 팔을 뻗어 반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반호라고 했나? 성질은 너만 있는 것이 아니야." 반호의 눈가에 불그죽죽한 기운이 떠올랐다. 아무리 몸 상태가 엉망이라지만, 처음 보는 새파란 놈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얌전히 있는다면 천하의 반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대는 다름 아닌 단탈이다. "이 새끼가... 끅! 끄윽!"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1 묘왕동주 반호는 뭐라고 한바탕 퍼부으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꺽꺽대는 괴상한 소리뿐이었다. 멱살을 조여 오는 힘은 아예 인간의 것이 아닌 듯했고, 그것을 견디기에는 너무 쇠약한 반호였다. 반호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기 직전, 하나의 손이 단탈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단탈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 박한의 부드러운 눈웃음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아픈 사람이니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여간 착하기만 한 친구라니까..." 단탈은 고소를 지으며 반호의 멱살을 풀었다. 그는 반호의 구겨진 옷깃을 탁탁 펴주며 달래는 투로 말했다. "이봐, 여기서 죽으면 복수는 어떻게 하려고? 성질도 상대를 봐가면서 부려야지." "이 손 못 치워?" 반호는 단탈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그러나 복수에 대한 생각만큼은 단탈과 일치했는지 더 이상의 거친 언행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왕곤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반 형은 놈들이 소속한 단체가 어딘지 아시오?" 반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몰라. 놈들의 행사가 어찌나 신비하던지 아무리 조사하려고 해도 알아 낼 수가 없었어." 호밀령의 마두들이 들으면 통곡할 소리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들을 수 없는 입장이다. "혹시 놈들이 철옥의 소속이라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소?" "철옥? 강남 촌구석에서 놀던 애들이 뭐가 부족해서 여기까지 와서 놀겠어?" 두 눈을 크게 뜨며 대왕곤에게 오히려 반문하는 반호. 그러자 대왕곤은 역천비의 시신을 가리켰다. "저자는 강남보다도 훨씬 남쪽에서 놀던 해남도 출신 아니오?" "어? 정말 그렇군!" 반호는 비로소 심각해졌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머리를 벅벅 긁고, 또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대왕곤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철옥 같기도 해. 아니, 철옥이 분명해!" 대왕곤은 반호의 눈을 피해 한숨을 쉬었다. '모른다'가 '같기도 해'로, 다시 '분명해'로 바뀌는 데에는 반 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반호가 진정으로 거상련의 존립이 걸린 막중한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면, 황금왕은 거상련을 처분하고 다른 장사를 시작할 작정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단탈로서는 원하는 대답이 나온 셈이다. 그는 반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놈들의 소굴이 어디지?" * * * 온이는 가끔 자신이 한 마리의 개미귀신이라고 생각했다. 개미귀신은 탐욕스러운 포식자이자 유능한 수렵자이다. 놈은 양지바른 모래 땅에 깔대기 모양의 개미지옥을 파놓고, 접근한 개미가 그 안으로 굴러 떨어지면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배를 채우는 것이다. 온이가 개미귀신이라면 무왕총은 개미지옥이었다. 강호 전체를 포식의 대상으로 삼는, 커다랗고도 위험한 개미지옥. 그런데 이 개미지옥으로 곤란한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먹기도 고약한 데다가, 막상 먹는다 해도 조금도 배부르지 않은 노래기 같은 존재들이었다. 처음 강조양과 녹파파가 노래기에게 반호를 빼앗겼다는 보고를 가져 왔을 때, 온이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두 사람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여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열 합도 버티지 못하고 불구가 되었다는 두 사람의 구슬픈 이야기는 온이로 하여금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식케 해주었고, 결국 온이는 두 사람에게 "공과는 추후에 따지기로 하고, 가서 상처나 치료해라."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게 되었다. 온이는 생각했다. 만일 노래기 손에 들어간 반호가 죽지 않았다면? 비록 청살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온이였지만, 상대가 강호에서 악명 높은 미친개임을 감안한다면 그 생사를 선뜻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자 불현듯 반호와 마주친 장소가 떠올랐다. 반호는 무왕총으로부터 불과 십리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온이를 암습했다. 십리!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가 아닌가! 드디어 온이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총의 위치에 대해, 나아가 비밀 출입구의 존재에 대해 반호가 눈치채기라도 했다면 그 여파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이러한 온이의 불안감은 민남칠성방( 南七星幇)이 귀환할 즈음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다. 반호를 저지하기 위해 급파된 민남칠성방의 일곱 마인. 그러나 온전히 돌아온 사람은 둘째 천선마성(天璇魔星)과 여섯째 개양마성(開陽魔星)이 전부였다. 그나마 입을 놀려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은 개양마성 하나뿐. 양팔이 잘린 천선마성은 온이의 면전에 이르러서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것이다. 개양마성의 보고에 의하면, 민남칠성방이 반호 등과 격돌한 곳은 처음 역천비가 죽은 장소와 무왕총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한다고 한다. 그것은 놈들의 행로가 무왕총으로 향한다는 증거. 과연 반호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개새끼 한 마리가 끝까지 말썽이군." 온이는 개새끼에 대해 이를 갈면서도 그 처리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호밀령의 임무는 무왕총의 비밀 수호. 그것에 비추어 볼 때, 호밀령주 온이는 호밀령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무왕총으로 접근하는 반호를 제거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해질녘에 총으로 들어온 좌공봉 할비의 전언에 의하면 북정회의 인마가 무왕총에 도착할 시기가 목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제 호밀령에게는 '손님 맞이'라는 새롭고도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상대가 역천비를 죽일 만한 고수임을 뻔히 알면서도 단지 민남칠성방만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이러한 내막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긴 시간을 그렇게 고심했을까? 마침내 온이는 반호와 노래기에 관한 건이 더 이상 자신의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몇 장의 문건을 챙긴 뒤 숙소를 나섰다. "나타난 삼 인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상련의 반호가 길을 안내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조추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서 보고하고 있는 온이를 바라보았다. 온이는 낯짝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들고 있는 문건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온이가 밉살스러워졌다. 나라아합의 신병이 매용소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부터 만사에 흥미를 잃은 그였다. 보고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보다 세심한 수하라면 보고하기 전에 상관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헤아려 봐야 하지 않을까? 조추림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 자리에는 자액이 앉아 있었다. 자못 심각한 표정. 자액은 온이의 보고에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저 영감이 저러고 있으니 보고를 그만두랄 수도 없고... 참, 할비와 늙은 말코는 어디로 갔을까? 맞아, 두 사람은 인원 배치를 점검할 겸 총(塚) 내(內)의 지리를 익힌다고 했지. 제기랄! 이럴 줄 알았다면 숙소에나 틀어박혀 있는 건데...' 그러나 조추림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온이의 보고는 쉽게 끝나려 하지 않았다. 자액이 집무실로 사용하는 사방 오 장의 석실에는 온이의 메마른 음성만이 끝없이 울렸다. 조추림으로서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 울림이었다. "세 사람의 인상 착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어 온이는 누가 애꾸라는 둥 누가 머리카락이 짧다는 둥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석(末席)에 자리한 한 사람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탄성을 지른 사람은 상성 마가곡물상에서 데려온 마웅풍이란 놈이었다. 이 석실 안에는 철옥 내에서의 위치로 보나 일신에 지닌 재간으로 보나 놈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도 끼여들겠다는 말이지? 웃기는 노릇이군!' 이 지루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는 조추림이었으니, 눈살이 찌푸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추림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일까? 마웅풍은 죽을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고, 잠시 멈췄던 온이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이제 우리 호밀령이 입은 피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부영주 역천비가 살해당했고, 강조양과 녹파파가 불구가 되었으며..." 조추림은 이 지루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온 영주! 가급적 간단히 해주게!" 보고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면 보고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온이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조추림의 말을 받았다. "반호는 비문(秘門)의 위치를 알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드디어 온이는 조추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비문의 말뜻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조추림은 슬그머니 짜증이 솟구쳤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2 묘왕동주 이때, 아까 탄성을 내뱉은 마웅풍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조추림은 고개를 홱 돌려 마웅풍을 노려보았다. 그 매서운 시선을 마웅풍 따위가 어찌 감히 받아 낼 수 있을까? 마웅풍의 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닥을 향해 툭 꺾였다. 그런 마웅풍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이 석실 안에서 가장 심각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자액이었다. "그들의 인상 착의가 어떻다는 건가?" 마웅풍은 숙였던 고개를 살짝 쳐들어 조추림의 눈치를 살핀 뒤,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남에서부터 공자님을 추격하던 자들이 있었지요. 그들의 인상 착의가 바로 그랬습니다." 조추림으로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나를 추격한 자들이라고?" "그렇습니다. 남 형과 오 노인이 뒤로 처진 것도 그들을 해치우기 위함이었지요." 신양으로 진입하기 직전, 남력은 개인적으로 처리할 것이 있다며 일행으로부터 이탈할 것을 요청했다. 그 일을 똑똑히 기억하는 조추림은 불길한 혼란에 빠졌다. 비문으로 접근한다는 놈들과 남력이 해치우려던 놈들이 동일하다면, 대체 남력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때 마웅풍이 조추림의 불길한 혼란에 쐐기를 박았다. "놈들이 버젓이 살아 이곳으로 온다면, 남 형과 오 노인은 어쩌면 놈들에게 당했을지도..." "뭐라고!" 조추림의 표정이 일순간에 돌변했다. 남력은 그가 십여 년 동안 함께 지낸 수하였다. 인간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조추림에게는 몇 안 되는 친인(親人)인 것이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것이냐?" 조추림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게 된 마웅풍은 쩔쩔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 남 형이 소인들에게 특별히 당부했습니다. 일정이 촉박하니 공자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고..." "닥쳐라!" 조추림은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기가 무섭게 허리춤의 검자루를 움켜잡아 가는 품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마웅풍을 두 쪽내 버릴 것 같았다. 아니, 만약 자액의 만류가 없었다면 마웅풍은 틀림없이 두 쪽나고 말았을 것이다. 자액은 검자루를 움켜쥔 조추림의 오른손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참으시오, 조 공자!" 조추림의 눈초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자액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남력이 친인이라면 자액 또한 친인, 그것도 무척 어려운 친인이었다. 아무리 분노한 조추림이라 할지라도 자액을 무시하면서까지 발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액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소. 그들이 조 공자를 뒤쫓아온 무리라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고, 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남력과는 도중에서 어긋났을지도 모르는 일... 남력은 다른 이의 손에 쉽게 꺾일 친구가 아니니, 이렇게 화부터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연 아직까지는 확인된 것이 별로 없었다. 만일 여기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웅풍을 벌한다면, 그것은 남력의 뛰어난 재주를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결국 조추림은 검자루를 움켜쥔 오른손을 풀고 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온이가 입을 열었다. "하명을 기다립니다." 조추림은 태사의에 몸을 묻고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놈들이 언제쯤 이곳에 도착할 것 같은가?" "여섯 시진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조추림은 결심한 듯 온이를 바라보았다. "놈들이 비문으로 접근한다면 굳이 저지하지 말고 입총(入塚)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하라면 하는 사람이 온이였다. 그는 두말없이 복명하고 물러갔다. "무왕총의 비문을 노출시킬 작정이오?" 자액은 조추림의 지시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매사에 철저한 그였으니 비문이 외인에게 노출되는 일을 꺼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조추림은 결심을 되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온갖 놈들이 다 들어올 곳인데, 몇 놈쯤 더 들어온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조추림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소생은 반드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놈들이 과연 남력을 만났는지를... 만약 놈들이 남력을 만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로 올 수 있었다면..." 뒷말은 따로 없었다. 다만 어금니가 갈리는 섬뜩한 소리뿐. 2 무왕총이 위치한 이름없는 구릉에 단탈 일행이 도착한 것은 시월 십이일 자정 무렵, 온이의 예상보다 무려 여섯 시진이나 늦은 시각이었다. 시간이 이렇듯 지체된 원인은 대왕곤에게 있었다. 반호의 설명에 의하면 '놈들의 소굴'은 하나의 동혈, 그것도 교묘한 기관 장치에 의해 감춰진 암동(暗洞)을 입구로 삼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왕곤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조추림은 백 명이 훨씬 넘는 강호인들을 이끌고 신양에 왔다. 그 많은 인원이 들어갔다면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동혈일 수 없었다. 더욱이 그곳에는 거상련의 촉각에 걸린 신비한 괴집단까지 둥지를 틀고 있다 하지 않던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동혈은 천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공적인 건축물의 입구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 규모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할 공산이 컸다. 아니, 대왕곤은 그렇게 단정 짓고 있었다. 그래야만 수천 리를 멀다 않고 이곳까지 온 조추림의 행동이 논리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하에서 장시간 머무는 데에는 많은 준비물이 필요할 것이다. 대왕곤은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전진을 잠시 보류한 채 신양 외곽의 마을에 들렀고, 그곳에서 필요한 준비물들을 마련했다. 온이의 예상에 없던 여섯 시진은 그 과정에서 발생된 오차인 것이다. "이쪽이야!" 돈이라도 흘린 사람처럼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한참 동안을 헤매던 반호는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치켜 들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분명하오?" "날 못 믿겠다는 거야?" 대왕곤이 묻자 반호는 벌컥 화를 냈다. 대왕곤은 고소를 흘렸다. "반 형이 잘못 짚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아시오?" 반호는 무안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동트기 전인 인시(寅時:오전 3시~5시)인지라 붉어진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쳇! 내가 올빼미인 줄 아나? 이렇게 어두운데 무슨 재주로 단번에 길을 찾겠어? 하지만 이번엔 믿어도 돼. 저 땅을 보라고." 대왕곤은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그 위에는 깊이가 반 자쯤 되는 작은 구덩이 하나가 파여 있었다. "봤지? 저번에 왔다 돌아갈 때 내가 남긴 거야." 반호는 의기 양양하게 말했다. 대왕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호를 올려다보았다. "땅은 뭐 하러 팠소?" "뭐 하러 파긴! 어떤 빌어먹을 영감쟁이가 흙 맛이 달다고 하기에... 흠, 흠! 뭘 그런 것까지 묻고 그래! 방향만 맞으면 되는 거 아냐?" 반호에 대해서라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대왕곤이기에 구덩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반호의 말대로 방향만 맞으면 되는 것이다. 단탈 일행은 반호를 앞장세운 채 잣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잣나무 숲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호는 제법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반 각쯤 걷자 나무들의 간격이 조금씩 널찍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숲이 거짓말처럼 끝났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는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암벽이 나타났다. 반호는 손뼉을 치며 암벽의 어느 부분을 가리켰다. "바로 저거야! 저기를 보라고!" 반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실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위로 여닫는 창문처럼 암벽의 일부가 위로 들려 있고, 그 아래로 시커먼 동혈 하나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반호의 말에 의하면, 저 바위문은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이음새가 너무 감쪽같아서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동혈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3 묘왕동주 "열려 있군." 단탈이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온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수상한 냄새가 나지?" 대왕곤이 동의를 구하자 단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맨 나중에 들어간 놈이 문 닫는 것을 깜빡 했나 봐." 단탈과 대왕곤은 방금 말을 꺼낸 반호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봐 주었다. 반호는 그들의 시선을 쫓듯 두 손을 홰홰 내둘렀다. "내 말은, 쉽게 생각하자는 거야. 수상한 냄새가 나건 구린 냄새가 나건 어차피 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잖아? 여는 방법도 잘 모르는 마당에 오히려 잘된 일 아냐?" 단탈은 안색을 굳혔다. 반호의 말이 맞았다. 얼마나 힘겹게 추격해 온 길인가! 만약 저 안에 조추림이 있다면, 단탈은 닫힌 문이라도 부수고 들어가 놈을 죽여야만 했다. "너도 들어갈 건가?" 단탈이 묻자, 반호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지! 내가 무슨 낯짝으로 그냥 돌아갈 수 있겠어? 온이, 그 새끼 모가지를 들고 가기 전에는 죽어도 안 돌아가!" 비록 박한의 치료로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반호는 최소한 사나흘은 차분히 정양해야 할 환자였다. 하지만 반호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미친개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죽은 동료들의 수급이 허리춤에서 썩어 가는 한, 반호는 자존심을 위해 백 번이라도 목숨을 던질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해라." 단탈은 반호를 말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을 위해 목숨을 걸 권리가 있었다. 단탈 자신만 해도 그랬다. 역천비와의 괴로운 싸움을 통해 한층 증폭되어 버린 체내의 장애는 이제 평상시에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묵직한 무게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어떻든, 또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든, 단탈은 동혈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때 대왕곤이 단탈에게 다가왔다. "내 재주로는 짐만 되겠지. 나는 들어가지 않겠네." 대왕곤은 등에 메고 있던 화접자(火摺子) 다발을 벗어 단탈에게 내밀었다. 여섯 시진 동안 장만한 준비물 중 하나였다. "공들여 만든 물건이니 제법 오래갈 거야. 저 안에서는 이게 나보다 훨씬 큰 도움이 될 걸세." 단탈은 한동안 대왕곤의 얼굴을 보다가 불쑥 물어 보았다. "앞으로 어쩔 셈인가?" 대왕곤은 고개를 들어 야기(夜氣)가 채 가시지 않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고개를 치켜 든 채 허무감이 옅게 밴 목소리로 말했다. "지존께서도 수일 내로 신양에 오실 걸세. 나는 우선 신양으로 돌아가 지존을 기다리겠네. 짧은 기간 모신 주인이지만, 작별 인사 정도는 올리는 게 도리겠지." "작별 인사..." "그때 주루에서 자네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지? 고개 위에 셋째를 묻으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고. 그리고 그 결심 때문에 이제껏 나를 지탱해 주던 꿈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 결심이 뭔지 아나? 하긴, 결심이랄 것까지도 없겠지. 하나 남은 막내 놈을 데리고 삼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니까. 나는 삼협으로 돌아가 죽어 간 아우들을 대신하여 호쾌하게 살아 볼 생각이네. 왼쪽 어깨에는 둘째를 얹고, 오른쪽 어깨에는 셋째를 얹고, 왼쪽 다리에는 넷째를, 오른쪽 다리에는 다섯째를... 장강육어는 다시 한 번 강상(江上)을 주름잡는 큰 강도가 되는 거야." 단탈은 아무 말 없이 대왕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왕곤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단탈에게 물었다. "내가 비겁한 건가?" 주루에서도 그랬듯, 단탈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네는 마누라가 어디에 밥상을 차려 놓았는지를 발견한 거야." 단탈은 대왕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나는 믿네. 자네는 그 밥을 정말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야. 자네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어." 대왕곤은 두 뺨에 깊은 주름이 생길 만큼 큰 웃음을 지었다. 외눈박이가 짓는 웃음이지만 단탈의 눈에는 참 보기 좋았다. "사실 처음에는 단탈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자네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군. 무사히 여자를 찾아 묘강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해 주겠네." "염려 말라고. 그런 말 안 해도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까." 단탈은 자신있게 말했다. 단탈과의 작별을 마친 대왕곤은 박한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박 공 같은 선인(仙人)과 교분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이 천한 수적을 어여삐 여기신 탓일 것이오. 어떠한 위험이라도 박 공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믿기에, 구차한 말은 늘어놓지 않겠소이다. 그 동안 고마웠소. 불초 대왕곤은 박 공과 함께한 소중한 기억들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외다." 대왕곤의 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신양으로 오는 동안 단탈에게 느낀 것이 끈끈한 우정이라면, 박한에게 느낀 것은 무한한 존경... 대왕곤의 눈에 비친 박한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선인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어에는 여전히 깜깜하지만, 어투와 표정으로 사람의 감정을 짐작하는 데에는 이력이 난 박한이다. 그 또한 대왕곤에게 마주 포권하며, 알고 있는 유일한 작별 인사를 읊었다. "감사드립니다." 세 사람이 이렇듯 유쾌하고도 섭섭한 작별을 나누고 있을 때, 반호는 어느새 동혈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단탈과 박한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소리쳤다. "뭐 하냐! 난 들어간다!" 그리고는 누가 막기라도 할까 봐 꽁지가 빠지게 동혈 안쪽으로 사라졌다. 단탈과 박한은 다시 한 번 대왕곤과 인사를 나눈 뒤, 반호의 뒤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대왕곤은 세 사람이 동혈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가 자리를 떠난 것은 어슴푸레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대왕곤이 자리를 뜨고 반 시진쯤 지난 뒤, 동혈 입구를 차일(遮日)처럼 덮고 있던 바위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쿠웅`-` 바위문은 둔중한 비명을 지르며 동혈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제 동혈이 뚫려 있던 암벽에서는 어떠한 기이한 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단탈, 박한, 반호는 무왕총의 첫 손님이 되었다. 무왕총이 첫 손님을 받은 시각은 시월 십삼일, 옅은 구름 너머로 계명성(啓明星)이 빛을 발하던 인시 말이었다. * * * 마봉황이 이끄는 산동장가의 후발대가 무왕총이 위치한 이름없는 구릉에 도착한 시각은, 단탈 등이 무왕총으로 진입한 시월 십삼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 무렵이었다. 시일을 하루나 이틀 정도 앞당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강남에서 출발한 마맥회원들이 신양에 당도하는 시기와 맞출 생각에, 마봉황은 의도적으로 일정을 늦춘 것이다. 강남을 출발한 마맥회원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정보다 하루 빠른 시월 십사일 정오에 신양에 도착, 마봉황과 합류할 수 있었다. 석소용은 인부들 틈에 숨어 그들이 상봉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새로 도착한 마맥회원들의 인솔자는, 남마련 칠사의 우두머리이자 구양지의 부친이기도 한 십지관홍(十指貫虹) 구양일산(歐陽一山). 구양일산은 신발까지 뒤덮을 정도로 긴 흑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석소용은 그가 형산에서도 그런 차림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양일산은 일남일녀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었다. 여자는 애비익이라는 암호명을 좌훈과 함께 쓰는 마맥회의 여장부 진연이었고, 남자는 시뻘건 거치도(巨齒刀)를 허리에 찬 거구의 중년인`-`석소용은 그 중년인이 마맥회 삼대고수 중 하나인 탐혈붕(貪血鵬) 나치(羅恥)임을 모르고 있었다`-`이었다. 석소용은 중년인의 호목(虎目)을 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자식! 무섭게도 생겼네."라고 중얼거렸다. 그날 오후, 구릉 아래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인마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선 거상련이 보낸 후발대가 사람의 눈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굉장한 장비들을 앞세워 도착했다. 이어 해질 무렵에는 산서와 섬서 방면에서 온 인부들이 꾀죄죄해 보이는 등짐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시작될 무렵, 마침내 북정회 본대가 그 구릉에 당도했다. 본대가 당도했다는 소식은 석소용의 가슴을 콩당콩당 뛰게 만들었다. 본대에는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장옥평이 있기 때문이다. 석소용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장옥평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비정했다. 장옥평은 그 이름도 당당한 북정회 사인거두의 일원이었고, 그녀는 천하디천한 인부`-`그것도 여자임을 감추고 있는`-`에 불과했던 것이다. 장옥평의 신세를 향기로운 여아홍(女兒紅)에 비유한다면, 석소용의 신세는 시큼한 농주(農酒). 두 사람은 담아 두는 항아리의 재질부터 달랐다. 사인거두(四人巨頭)들의 숙소는 인부들이 머무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편편한 초지(草地) 위에 설치되었고, 그 일대는 병장기를 지닌 북정회 무사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잡인의 접근을 금한다는 엄명이 인부들에게 하달된 것은 물론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4 묘왕동주 그곳의 경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놓고 인부들은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본디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어서, 그 근처에서 용변을 보던 이(李) 노삼(老三)이 맞아 죽었다는 둥, 물을 뜨러 간 배(裵) 말라깽이는 시체도 찾지 못했다는 둥, 무성한 유언비어들이 인부들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맞아 죽었다는 이 노삼이 누군지, 또한 시체도 찾지 못했다는 배 말라깽이가 누군지, 석소용은 물론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뜬소문 때문에 장옥평을 만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석소용은 인부들 무리에서 빠져 나와 장옥평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일은 은밀히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마맥회 사람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잔인하고 야비한 마봉황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북정회의 기라성 같은 군웅들 앞에서 마봉황의 무도한 만행을 폭로하겠다는 그녀의 의도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면 구양지 그년도 더 이상 장 오라버니 앞에서 알랑거리지 못하겠지! 이렇게 생각한 석소용은 아무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하지만 석소용은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신양 북쪽의 자그마한 구릉이, 강호에서 얼마나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며칠 전 할비로 인해 벌어진 소동 때문에, 북정회의 사인거두들이 머무는 숙소 주변에는 "신원이 불분명한 접근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주살하라."은 살벌한 명령이 떨어져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엄지손가락보다도 굵은 강전(鋼箭)들이 그녀가 몸을 숨긴 나뭇등걸에 꽂힌 뒤에야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팍팍, 소리와 함께 나뭇등걸이 요동을 칠 때마다 그녀의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석소용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비록 발각되긴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나처럼 작고 귀여운 소녀를 설마 죽이기야 할까?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불행히도 강전이란 놈은 사람과 달리 작고 귀여운 소녀를 알아보는 눈을 달고 있지 않았다. 강전은 더욱 세차게 쏟아졌고, 나뭇등걸의 한쪽 귀퉁이가 와작 소리를 내며 으깨졌을 때, 석소용은 뾰족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뭇등걸을 으깬 강전이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강전에는 무서운 회전력이 실려 있었다. 단지 스치기만 했는데도 살점이 떨어지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환부로부터 번져 가는 야릇한 느낌! 그것은 살촉에 뭔가 고약한 약품이 발려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렇게 죽나 봐.' 너무도 아프고 두려운 나머지 석소용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귓전에 한 줄기 자상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얘야, 두려워하지 말거라.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그리고 석소용은 단잠에 빠져 들 듯 부드럽게 의식을 잃었다. 한편, 석소용의 비명을 똑똑히 들은 어둠 속의 감시자들은 옳다꾸나 싶었는지, 목표로 삼은 나뭇등걸을 향해 무수한 강전과 암기를 퍼부었다. 나뭇등걸은 무쇠가 아니었다. 하기야 무쇠로 만들어졌다 한들 이처럼 엄청난 공세에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뭇등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숴져 버렸다. 감시자들은 병장기를 뽑아 들고 나뭇등걸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있을 침입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오소리 한 마리가 전신에 강전과 암기를 박은 채 널브러져 있었을 뿐이다. 감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면서, "젠장! 짐승 한 마리 때문에 그 소란을 피우다니!"라든지, "이상하군. 내 귀에는 꼭 사람 소리처럼 들렸는데."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밤 해시(亥時:오후 9시~11시) 무렵. 인부들의 숙영지에서 취침 점고를 하던 산동장가의 늙은 무사는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즉시 윗사람에게 보고되었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공사에서 인부가 도망가는 일은 다반사였다. 결국 사라진 두 명에 관한 건은 해시가 지나기 전에 유야무야 마무리되었다. 점고는 인부들 내부에서도 있었다. 대충이나마 인부들끼리는 얼굴들을 익힌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부들이 실시한 자체 점고가 남루한 천막 몇 채를 돌자, 사라진 사람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사라진 사람은 소문처럼 이 노삼도 아니요, 배 말라깽이도 아니었다. 그들은 호남 사투리를 쓰던 곱살한 석가(石哥) 젊은이와 호북에서 왔다는 곰보투성이 공손 영감이었다. 인부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은 즉시 수정되었다. 용변을 보다 맞아 죽은 사람은 석가 청년이 되었고, 시체도 찾지 못한 사람은 공손 영감이 되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 특별히 슬퍼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떠돌이 품팔이의 우정이란 게 원래 이런 법이다. * * * 통로는 결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었다. 단면의 넓이가 매우 균일할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연장이 사용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로는 그 지리를 모르는 자에게 있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로와 같았다. 백 걸음쯤 걸어가면 어김없이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 중 한 곳을 선택해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돌다 보면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수십 차례 반복된 갈림길과 불규칙한 진로... 그 속에서 방향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묘강의 울창한 밀림을 제집 안방처럼 싸돌아다니던 단탈조차도 통로에 들어선 지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모든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당황하고 말았으니, 그러한 능력이 없는 박한과 반호는 오죽할까.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대왕곤이 건넨 화접자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만약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세 사람은 평생 겪은 어떠한 위기보다도 더욱 끔찍하고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세 사람은 쉬임없이 걸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선두에 선 단탈의 동물적인 감각뿐이었다. "요기나 하고 가지." 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리아는 단단한 화강암 바닥에 깊숙한 자국을 만들었다. 단탈은 한 뼘도 채 남지 않은 화접자를 그 자국에 꽂았다. 화접자는 아직 십여 개가 남아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급적 아낄 필요가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데에는 몽땅한 화접자로도 충분한 것이다. 단탈은 통로 벽에 기대어 앉아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태기를 뒤적거렸다. 망태기 안에는 몇 가지 음식물이 들어 있었다. 이 또한 대왕곤이 마련한 준비물 중 일부였다. 단탈은 대왕곤의 세심한 정성이 새삼스럽게 고마워졌다. 다행히도 음식물은 말린 것답지 않게 제법 맛있었다. 특히 꾸덕꾸덕하게 말린 살구는 한입만 베어물어도 침이 줄줄 나올 정도로 시어서, 목이 마른 데에는 그만이었다. 단탈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반호에게도 말린 살구를 몇 개 건넸다. 그것들을 단번에 해치운 반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런 거말고 배를 채울 만한 것은 없냐?" 그러더니 단탈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망태기를 낚아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니 아껴 먹어라." 단탈이 말하자, 반호는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흥! 먹는 것 가지고 쩨쩨하게 굴기는!" 반호는 장정 주먹만큼이나 큼직한 떡 두 개를 양손에 나눠 들더니 단탈이 보란 듯 꾸역꾸역 처먹기 시작했다. 단탈은 고소를 지을 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고마워할 줄 모르기는 단탈도 반호에 못지않았다. 얼굴 두께만 가지고 말한다면 두 사람은 난형난제(難兄難弟)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동굴 바닥에 꽂혀 있던 화접자가 최후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미로 같은 통로를 헤맨 이후 열한 개째의 화접자가 꺼져 가는 것이다. 단탈은 새 화접자를 꺼내어 불꽃을 옮겼다. 짧은 휴식은 끝났다. 다시 미로를 헤맬 시간이 된 것이다. 3 그 구릉은 신양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남성을 가로지르는 회하(淮河)는 구릉의 북쪽과 동쪽을 휘감았고, 서쪽 하늘 끝에 병풍처럼 서 있는 현수산(賢首山)은 경박하지 않은 웅자(雄姿)를 뽐내었으며, 남쪽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평(寧原坪)의 너른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구릉에는 잣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잣나무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황금왕 소래운은 잣나무 향기에 둘러싸인 채 영원평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기이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영원평은 그에게 있어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무왕 관산정, 이 위대한 무인의 거대한 발자취인 무림맹이 바로 저 영원평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청이 화려하던 기둥도, 푸른 돌이끼가 창연하던 주춧돌도... 문득 소래운은 우울해졌다. 그가 느끼는 우울함은 어쩌면 노인들이 느끼는 공통된 회한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시절의 흔적은 노인에게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지만, 추억이란 때로는 노인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선 이 물을 빼내야 합니다." 지하 건축물 발굴에 있어서 혁혁한 업적을 남긴 교수선생 신도설은 이렇게 말했다. 북정회의 고문으로서 이번 발굴 작업의 총지휘를 맡은 그의 손에는 스물여덟 장의 무왕총도가 들려 있었다. "이 더러운 연못 속에 무왕총의 입구가 있단 말입니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5 묘왕동주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사람은 북정회의 사인거두 중 한 사람인 소역발산 막강이었다.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커다란 체격이었는데, 눈두덩에 어두운 기운이 끼어 있는 것이 젊은이답지 않은 음침한 인상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노부가 총도를 잘못 해석하지 않았다면, 이 연못 아래에 무왕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가 있소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못으로 향했다. 연못은 고약한 냄새를 풍길 정도로 썩어 있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오직 고여 있는 물만이 썩을 뿐이다. 이처럼 고지대에 어떻게 해서 물이 고이게 되었을까? "신도 선생께서는 이 연못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산동장가의 젊은 가주 장옥평이 물었다. "잘 보셨소. 하남은 중원에서도 천기(天氣)가 가장 안정된 곳이라고 할 수 있소. 단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만으로는 이 정도 양의 물이 고이기 힘들 것이오." 신도설의 음성은 낭랑하고도 차분했다. 그 음성에는 오랜 기간 관직에 몸을 담았던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엄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면 작업을 시작하겠소." 북정회주 소래운은 곧바로 발굴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즉각 하달되었다. 구릉 아래에 머물러 있던 인부들은 저마다 연장을 짊어지고 올라왔다. 신도설은 우선 인부들을 지휘하여 연못의 가장자리 중에서 가장 낮은 부분에 도랑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도랑을 통해 물을 뺄 계획인 것이다. 연못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릴 만큼 경사진 곳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그래서 도랑을 완성하는 데에는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고용당한 자들은 부지런했고, 고용한 자들은 인내심이 있었다. 거상련에서 특별히 고용한 목수들도 큰 몫을 해냈다. 그들이 급히 제작한 열두 대의 용골차(龍骨車:물을 자아올려 논밭에 대는 기계)는 물 빼기 작업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가운데 연못의 물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 발굴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노력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청화와 같은 얌체도 있었기 때문이다. 산동장가의 가신 중 한 사람인 진청화는 천성적으로 이런 종류의 공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힘들여 뭔가를 발굴하는 일 따위는 놀기만 좋아하는 도사에게 있어서 어떠한 가치도 지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산동을 떠나 신양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로지 세가의 원로 가신인 감규목 때문이었다. 여든이 넘은 감규목마저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참가하는 마당인데, 새파란 그가 어찌 감히 가지 않겠노라고 튕기겠는가! 그러나 진청화의 인내심은 접시물만큼이나 천박했다. 어찌나 천박했는지, 수백 명이 공들인 연못보다 훨씬 빨리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운룡진인이 어찌 풍진(風塵)의 물욕(物慾)에 마음을 빼앗기겠는가! 천박한 인내심은 청정한 고고함으로 둔갑하고, 진청화는 만만한 젊은 가주 장옥평을 찾아가 발굴 작업에서 이탈할 의사를 밝혔다. 이유를 묻는 장옥평에게, 그는 무게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너편에 보이는 현수산에는 선도(仙道)에 좋은 약재가 많이 자라지요. 빈도는 이곳에 온 김에 채약(採藥)이나 할 작정이외다." 현수산이 웅장해 보이는 것은 하남 남부가 평야 지대인 탓이지, 결코 산 자체에 선기(仙氣)가 어린 탓은 아니다. 그러니 선도에 좋은 약재가 특별히 많을 리도 당연히 없다. 이것을 아는 장옥평이지만 진청화를 말리지는 않았다. 존장에 대한 예우 때문만은 아니다. 진청화 같은 위인은 차라리 어디로 가주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결국 진청화는 항상 대동하고 다니던 도동(道童) 둘을 거느리고 본대를 이탈했다. 목적지는 현수산이지만, 장옥평에게 말한 것처럼 선약(仙藥)을 캐기 위함은 아니었다. 현수산 어딘가에서 풍광(風光) 수려한 계곡이라도 발견한다면, 진청화는 그곳에서 사나흘 머물면서 계집보다도 야들야들한 두 명의 도동을 마음껏 사랑해 줄 작정이었다. 한데 그런 음란한 마음이 원시천존의 노여움이라도 산 것일까? 이 얌체 같은 남색가(男色家)는 결국 현수산에 다다를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구릉으로부터 두어 마장 떨어진 곳에서 마주친 한 사람의 왜소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다짜고짜 진청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록 체내에 쌓인 중금속 때문에 항상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청화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노인은 여섯 수 만에 진청화의 양 비파골(琵琶骨)을 콩가루처럼 으깨 놓을 만큼 무서운 고수였던 것이다. 진청화가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노인이 "이런 짓까지 내가 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두 도동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픽 자빠진 두 도동의 얼굴 위에는 조그맣고 시커먼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진청화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천하에서 저런 모양의 손자국을 남길 수 있는 장력은 오직 하나뿐. 양강장력으로는 천하제일로 알려진 대양수(大陽手)가 바로 그것이다. '대양수는 죽었다고 알려진 이화신마의 독문 절기인데...?' 그 순간, 진청화는 장옥평의 입을 통해 들은 강호비화(江湖秘話)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비연리는 아직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건강히 돌아다니며 철옥 마부의 부주 자리에 앉아 있다는 구절이었다. 진청화는 비명이라도 질러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혈도를 찍어 가는 비연리의 손속은 너무나도 쾌속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장정 몇 사람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그를 커다란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진청화가 자루에서 나왔을 때, 그는 자색 무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헌헌장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외다, 운룡진인!" 자의 미장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진청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산동장가의 사람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미소였다. "너, 너는...!" 진청화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 * * 물을 빼는 데에만 한나절이 꼬박 소비되었다. 물이 빠지자 연못은 검고 끈적한 바닥을 드러냈다. 바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 그리고 연못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속을 메슥거리게 만드는 악취가 진동했다. 하지만 신도설이 지시를 내리자 인부들은 두말하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가 진흙과 오물들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일에는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하기야 익숙하지 않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매일 지불되는 품삯은 웬만한 욕지기쯤은 뱃속으로 삼키게 만들 정도로 두둑하기 때문이다. 진흙은 토양 중에서 가장 무르다. 거기에다가 인부들의 열성까지 더해지자, 작업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반 시진이 지나기 전, 신도설은 연못 중심부에서 곡괭이질을 하던 한 인부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단단한 바닥이 나왔습니다!" 모든 것은 총도에 적혀 있는 내용과 일치했다. 신도설은 잘 다듬어진 콧수염 밑으로 기분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무왕총 발굴의 첫 단계는 이렇게 순조롭게 끝났다. 무왕총 발굴의 두 번째 단계는, 단단한 바닥 어딘가에 감춰진 입구를 여는 것이었다. 연못의 가장자리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높이가 이 장쯤 되는 석비(石碑) 하나가 서 있었다. 모서리가 마모된 정도로 보아 만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석비였다. 그 석비는 신도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스물여덟 장의 무왕총도를 완전히 해독한 신도설은, 그 석비가 무왕총의 입구를 작동시키는 열쇠임을 알고 있었다. 석비 위에는 물론 비문이 쓰여 있었다. 신도설은 비문의 한 자 한 자를 탑본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원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두 손으로만 작업을 진행했다. 마치 화약고 안에 횃불을 들고 들어간 사람처럼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진행되는 탑본 작업. 덕분에 작업이 모두 끝났을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소래운은 다음 작업을 내일로 미루었고, 대기해 있던 인부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릉을 내려갔다. 그날 저녁 술시(戌時:오후 7시~9시) 무렵. 북정회 사인거두들의 임시 숙소에서는 제이차 사인수령회의(四人首領會議)가 열리게 되었다. 회의의 소집자는 북정회주 소래운이었다. 회의가 열리기 직전, 산동장가의 가주 장옥평은 마맥회도 회의에 참석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마맥회를 하나의 당당한 주체로 인정하여 발굴 작업에 정식으로 참가시키자는 제안과 다름없었다. 반응은 분분했다. 천마문의 소역발산처럼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황금왕 소래운이 흔쾌히 수락했고, 사람 좋은 의혈당주 서문도천도 별다른 불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장옥평의 제의는 삼 대 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패군지장(敗軍之將)이라 내치지 않고 받아 주시니, 본 회주는 오로지 감읍할 뿐입니다." 마봉황 염산산은 두루 포권함으로써 막사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례했다. "삼마와 사패는 무림맹 시절부터 형제의 우의가 있었소. 비록 그 후 가슴 아픈 과거를 겪기도 했지만, 그것은 시대가 우리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일 뿐... 오늘 이렇게 옛 형제들의 후인을 만나게 되니, 이 늙은이는 감격을 감출 수 없구려. 환영하오, 염 회주!" 소래운이 북정회 사인거두를 대표하여 마봉황에게 답례했다. 마봉황과의 상견례가 끝나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신도설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 노부는 이 일대 토양의 지질(地質)과 바위들의 풍화된 상태를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6 묘왕동주 이렇게 서두를 꺼낸 신도설은 매우 전문적이고도 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아시다시피 화강암이란 것은 매우 단단합니다. 그 안에다가 무엇을 만들려면 시간이 보통 드는 게 아니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춘추 시대의 노공(魯公)은 화강암 산을 굴착하여 부친의 능을 만들었는데, 그 공사가 노공의 아들 대에 가서야 끝났다고 합니다. 노공도 요절한 편은 아니니, 그 기간은 이십 년이 넘게 걸린 것이지요. 신도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은, 비단 장막 안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사인수령회의가 열리는 거대한 장막, 그로부터 이십여 장 떨어진 잣나무 위의 공손 영감도 신도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인수령회의가 열리는 장막 일대에는 엄중한 감시망이 깔려 있었다. 어제 이맘때 이곳을 얼쩡거리던 석소용은 바로 그러한 감시망에 걸려 낭패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공손 영감은 석소용 같은 계집애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인물. 마맥회의 삼대고수 중 하나인 좌훈을 어린애처럼 다룬 바 있는 천외천(天外天)의 실력자였다. 북정회의 감시망이 이보다 몇 배 더 삼엄하다 한들 그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도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무왕총의 소문이 강호에 처음 나타난 것은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무왕 사망 이후 그때까지의 시간은 불과 오륙 년... 이런 화강암 산을 통째로 깎아 하나의 능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공손 영감은 흡사 잣나무 가지와 한 몸이 되어 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십여 장 떨어진 장막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도력(道力)을 얻은 자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는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신도 선생! 그렇다면 무왕이 살아 있을 때에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지요. 혹은 무왕총에 관한 소문이 퍼진 이후로도 공사가 계속 진행되었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두 가지 모두일지도...' 공손 영감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때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대화에 끼여들었다. 소래운이었다. -`여러분께서 반드시 아셔야 할 일이 있소이다. 사실 이곳 하남성 남부에는 오래 전부터 기이한 암류(暗流)가 흐르고 있었소. 이어 소래운은 몇 가지 사실을 밝혔다. 거상련이 지난 두 달 동안 하남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 또한 그 일을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수하들이 모두 실종되었다는 점, 수하들이 실종되기 직전 보내 온 전서에 의하면 철옥도들이 이 일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 등... 사람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소래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손 영감은 그들이 얼마나 경악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본 회주는 이곳 무왕총과 강남의 철옥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소! 소래운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사람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그것은 분노 때문일지도 모른다. 산해진미가 풍성한 잔칫상 위에서 더러운 쥐를 발견했을 때 느낄 법한 분노... 하지만 공손 영감은 놀라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다만 빙긋이 웃었을 뿐이다. '부자는 괜히 부자가 되는 게 아니야. 저 구두쇠가 마맥회를 선뜻 받아들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소래운으로 말하자면 강호에서 가장 셈 빠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소래운이 제 몫이 줄어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왕총 발굴 작업에 마맥회를 참가시킨 데에는, 철옥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였음이 분명했다. 소래운의 눈에 비친 마맥회는 한 마리의 사나운 개가 아니었을까? 철옥이라는 이름의 도적 냄새를 가장 잘 맡고, 그래서 그 도적을 향해 가장 맹렬하게 짖어 줄 수 있는 개... 부오옷`- 부오옷`-`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공손 영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해시(亥時:오후 9시~11시)를 지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공손 영감은 문득, 지난밤 자신이 구해 준 소녀를 떠올렸다. 산동에서부터 죽 지켜보면서 여러 번 느낀 것이지만, 그 소녀는 참으로 커다란 간담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신상의 재주는 너무 보잘것없었다. 북정회의 감시자들이 쏜 강전의 촉에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독액이 발려 있었으니, 만약 공손 영감이 부근에서 주운 오소리의 시체와 바꿔치기하여 급히 치료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더 이상 커다란 간담을 뽐낼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공손 영감의 수중에 사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효능 좋은 영단(靈丹)이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 독을 제거하고 영단을 먹여 재웠으니,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난밤의 고난이 복이 될지언정 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슬슬 가봐야겠군.' 공손 영감은 앉아 있던 잣나무 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토굴 입구를 아무리 잘 가려 놓았다 하더라도, 잠들어 있는 소녀의 곁을 너무 오래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 후 싸늘한 밤바람이 휘이잇, 소리를 내며 잣나무 숲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손 영감의 자취는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4 닫힌 공간에서 사람이 체감하는 시간은, 열린 공간에서의 그것에 비해 훨씬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공간의 개폐 여부와는 무관하게 항시성(恒時性)을 지닌 체내시계(體內時計)가 있다.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리 대사, 그 중에서도 육신과 영혼을 동시에 쥐어짜는 시장기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위장은 본디 정직한 것이어서, 하루 세 때를 먹는 사람은 하루 세 번의 시장기를 느끼게 된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체내시계의 움직임은, 입맛의 유무에 따라 느려지기도 하고 혹은 빨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스스로에게 속한 신체 기관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박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쪼르륵`-` 박한은 자신의 배에서 울린 처량한 소리로부터 이 지긋지긋한 미로를 헤맨 시간이 얼마인지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박한은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서는 화접자를 든 단탈이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걸이만 놓고 본다면 단탈이 지금 걷는 길은 미로가 아니었다. 단탈의 걸음걸이에는 닳고 닳은 건달이 익숙한 유곽 골목을 거니는 듯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불현듯 박한은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무엇이 단탈을 여유있게 만드는 것일까? 타고난 낙천성일까, 아니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일까? 단탈은 노련한 표범 같았다. 노련한 표범은 어느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또한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그 사냥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만약 사냥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련한 것이고, 그래서 표범인 것이다. "으음..." 문득, 뒷전에서 들려 온 신음 소리에 박한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땀으로 범벅이 된 장년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구했지만 통성명을 못 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장년인. 장년인은 많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을 보면, 그 장년인도 장부임에는 분명했다. 장부라 하기엔 성질이 조금 더럽긴 하지만... 이때 단탈이 걸음을 멈췄다. 단탈 앞에는 네 개의 갈림길이, 마치 네 마리의 먹성 좋은 괴물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단탈은 네 곳의 갈림길 앞에 일일이 서보았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것은 갈림길이 아니었다. 그는 쥐고 있는 화접자, 그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박한은, 그의 이런 행동이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행해졌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박한은 그의 행동이 매우 영리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난마처럼 얽힌 미로였지만, 그 전체가 밀폐되었을 리는 없었다. 퀴퀴하긴 하지만 그래도 호흡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는 공기가 그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완전 밀폐되지 않은 공간이라면 공기의 흐름이 반드시 존재한다. 비록 폐쇄된 정도가 다른 공간보다 심하여 감각으로는 느끼기 힘들지라도, 공기의 흐름 자체가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불꽃은 공기의 흐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 단탈은 그 불꽃으로써 공기의 흐름을 짚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단탈은 네 개의 갈림길 중 한 곳을 택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박한이, 그리고 장년인이 따랐다. 어슬렁어슬렁 두 발을 떼어놓는 단탈을 보며, 박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미로가 영원히 이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어딘가에 출구란 것이 존재한다면... 단탈은 반드시 그곳을 찾아 낼 것이다! * * * "놈들은 반혼로(絆魂路)를 구 할 가량 지났습니다. 아마도 반 시진 이내에 완전히 통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온이의 보고는 자액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는 석탁에 놓인 커다란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왕총 내부의 요처에는 이것과 똑같은 크기의 모래시계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부의 모래가 남김없이 하부로 떨어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열두 시진. 무왕총 내부에서는 일월(日月)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모래시계로써 날짜의 흐름을 가늠하는 것이다. 지금 자액이 바라본 모래시계의 상단에는 아직 두어 줌 가량의 모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시월 십오일이 아직 반 시진 가량 남았음을 말해 준다. 조추림을 추격해 온 놈들은 놀랍게도 하루 반 만에 '인간의 혼을 묶는 미로', 반혼로를 통과하려 하는 것이다. "잘됐군! 안 그래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7 묘왕동주 곁에서 들려 온 자신만만한 음성에 자액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태사의로부터 몸을 일으키는 조추림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추림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놈들을 상대할 기세였다. "그들이 동귀관(銅鬼關)을 통과한 뒤에 나서는 것이 어떻겠소?" 자액이 조추림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무왕총을 움직이는 기관 장치는 반혼로의 출구를 자유자재로 이동시킬 수 있을 만큼 정교했다. 기관을 작동하기만 하면, 놈들은 일백팔 개의 귀신 동상이 들어오는 모든 인간들을 박살내 버리는 무시무시한 무인관문(無人關門), 동귀관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추림은 싸늘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도 모두 우공봉의 의견을 존중해서입니다. 하지만 소생의 참을성은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이제 말리지 마십시오." 그래도 말린다면 좋은 말로 해결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액은 조추림이란 인간을 너무도 잘 알기에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 대신 온이에게 당부했다. "뒤처리할 사람들을 뽑게. 단, 공자를 수행하는 일이니 만큼, 쓸 만한 자들이어야 하네." 잠시 생각하던 온이는 능력있는 몇 사람을 거명했고, 자액은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조추림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우공봉께서는 소생을 어린애로만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자액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만에 하나 조 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옥주를 뵐 면목이 없어지게 되오. 기우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온 영주가 붙여 주는 사람을 반드시 데려가기 바라오." 조추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풀었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곧바로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하지만 우공봉께서는 이번 기회에 소생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님을 아시게 될 겁니다." 조추림의 이런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자액은 여전히 심중의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상대가 복건제일도 남력과 민산독마 오살량을 격파할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들이라면, 또한 반혼로를 하루 반 만에 통과할 정도로 발달된 감각을 지닌 자들이라면, 아무리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수련한 조추림이라도 승리를 쉽게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조 공자가 그들과 마주칠 곳은...?' 조추림이 석실을 나간 뒤, 자액은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어 빠른 손 놀림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무왕총의 내부 배치도가 적힌 책이었다. * * * 석소용이 깨어난 것은 시월 십육일 인시(寅時:오전 3시~5시) 무렵이었다. 그녀는 혼절한 지 하루 하고도 세 시진 만에 깨어난 것이다. "아이야, 이름이 뭐냐?" 눈을 뜬 석소용이 가장 먼저 본 것은, 곰보 자국이 기이하게 낯익은 느낌을 주는 어떤 노인의 얼굴이었다. "석, 석소용이요..." 곰보 영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石)이라... 무숙자 선배에게 망아지 같은 질녀가 한 명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 역시 그렇구나." "우리 백부님을 아세요?" "아다마다. 형산 운문곡(雲門谷)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는걸. 그래, 선배께서는 무양하시냐?"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잘 계셨어요. 그런데..." "그런데?" 석소용은 한참 망설이다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백부님께서는 우화등선(羽化登仙)하셨을 거래요." '어떤 사람'이란 다름 아닌 박한이었다. 백석학의 싸움이 끝난 뒤 석소용은 단탈과 박한에게, "백부님을 초빙해 철옥을 혼내 주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단탈과 박한은 그녀의 의견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탈은 무시한 것이고 박한은 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박한과 필담을 나눴는데, 그때 박한은 "운문곡에서 하직할 때 그분은 이미 속기(俗氣)를 벗으셨지요. 아마 지금쯤은 무하유(無何有)를 소요(逍遙)하고 계실 겁니다."라고 썼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신선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우리 큰아버지일 거야."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석소용처럼 생각해 온 사람이 세상에 또 있었다. "축하드릴 일이야. 당금 천하에서 오직 그분만이 검선(劍仙)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지." 곰보 영감은 허공을 응시하며 뜻 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석소용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도 무왕총에 관심이 있는 거냐?" 석소용은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무왕총이 뭔데요?" 이 말을 거짓으로 여긴 것일까? 곰보 영감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엄한 목소리로 석소용을 추궁했다. "그렇다면 조그만 계집아이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무서운 일에 끼여들었단 말이냐?" "그건 말이죠...!"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은 석소용은, 석류처럼 빨간 혓바닥을 낼름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자신과 산동장가의 젊은 가주 장옥평이 얼마나 절친한 관계인지, 그런데 운하에서 마맥회의 악당들이 그 관계를 갈라 놓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대해 온 폭로의 순간인가! 비록 관객은 한 명뿐이고 무대도 초라했지만, 그녀는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장광설(長廣舌)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공손 영감은 말 한마디 엄하게 한 죄과로 장장 한 시진 동안 꼼짝못하고 비좁은 토굴 속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 * * 시월 십육일 진시(辰時:오전 7시~9시) 초. 일찌감치 아침을 마친 북정회의 무사들은 단단한 화강암 바닥을 드러낸 연못 주변에 모였다. 무왕총에 들어갈 인선(人選)은 이미 밤사이 마친 상태였다. 회주 소래운에 의해 행해진 인선은 매우 엄했다. 무왕총 안에서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철옥의 마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안 들어가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사람의 수는 일백오십여 명. 거기에 솜씨 좋은 장인 십여 명을 합하니, 무왕총 발굴대의 머릿수는 총 일백칠십에 이르게 되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무왕총 부근을 철저히 경계하며 외인의 근접을 차단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모두 물러서 주시길 바라오."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 사람은 교수선생 신도설이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미루어 그는 밤새 한잠도 못 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입구 기관의 작동법을 밝혀 낸 듯, 그의 입가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중인들이 멀찍이 물러선 것을 확인한 신도설은 마맥회의 구양일산을 향해 말했다. "소생은 구양 대협의 관홍지(貫虹指)가 천하일절(天下一絶)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 왔지요.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고명한 공부를 견식코자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오." 구양일산은 가벼운 목례로 신도설의 칭송에 답한 뒤 석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오른손 인지를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운 뒤 신도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 번째 줄의 일(一), 편(片)!" 비문은 각 줄마다 이십여 자씩 모두 일곱 줄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도설이 외친 '일' 자와 '편' 자 사이에는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편이라 하여 비문에서의 뜻마저 일편은 아닌 것이다. 구양일산은 오른손 인지를 '일' 자에 대고 신중히 획을 그었다. 순간, 그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손가락을 통해 기이한 느낌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때 신도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확인한 바, 석비에 새겨진 모든 글자에는 기관이 장치되어 있소. 다른 글자를 건드리면 입구가 영영 폐쇄될지도 모르니, 구양 대협께서는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하시길 바라오." 구양일산은 고개를 끄덕인 뒤, '편' 자마저 작동시켰다. 그러자 신도설이 다시 두 자를 외쳤다. "두 번째 줄의 고(孤), 심(心)!" 신도설은 계속 글자를 불러 나갔다. 세 번째 줄에서는 하(河), 북(北), 인(人) 자를, 네 번째 줄에서는 무(武), 왕(王) 자를, 다섯 번째 줄에서는 관(關), 산(山), 정(頂) 자를, 여섯 번째 줄에서는 유(遺) 자를, 그리고 일곱 번째 줄에서는 연(緣), 자(者) 자를 외쳤다. 구양일산의 손가락은 신도설이 외치는 글자들을 어김없이 그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관지(款識)의 입(入)!"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4 장 - 8 묘왕동주 신도설이 말했다. 비문의 관지에 쓰인 이름은 입운거사(入雲居士)였다. 그 중 입 자의 삐침을 따라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가는 구양일산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일편고심(一片孤心) 하북인(河北人) 무왕(武王) 관산정(關山頂) 유(遺) 연자(緣者) 입(入)! 한 조각 외로운 마음으로 하북 사람 무왕 관산정이 남기나니, 인연이 있는 자는 들지어다! 그그그`-` 순간, 연못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발 밑에서 울리는 둔중한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오오!" "저런 일이!" 연못의 바닥이 열리고 있었다. 사방 스무 걸음이 넘는 거대한 화강암 암반이 통째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드러난 통로를 따라 땅속으로 뻗어 내려간 돌계단을... 가슴 떨리는 신비와 무수한 의혹을 간직한 무왕총은 마침내 중인들의 눈앞에 공개된 것이다. * * * 그는 물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여러 날 만에 마시는 물이라 그런지 유난히 달콤하게 느껴졌다. 본디 무왕총 아래로는 거대한 수맥(水脈)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을 마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도 버젓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그의 운이 특별히 좋은 탓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그는 아무도 모르는 수혈(水穴)을 무려 아홉 군데나 파악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그그`-` 문득, 기이한 소리와 함께 샘물 위에 잔물결이 일었다. "엇!"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펄쩍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과 수염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윗옷 앞자락을 흠뻑 적셨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흡사 방금 전에 울린 소리에 영혼이 먹혀 버린 사람처럼... 이윽고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이 지옥에 손님이 찾아온 건가?" 그는 머릿속으로 무왕총의 내부 배치도를 떠올렸다. 무왕총의 내부 배치도는 인간의 암기력으로 수용할 수 없는 수백 장의 복잡한 기관도(機關圖)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장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어두운 통로 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뜀박질은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한 달 전 오행지관에서 잃어버린 세 개의 발가락 때문일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위기(危機) 묘왕동주 제 25 장 위기(危機) 1 수만 장의 통로가 개미굴처럼 얽힌 무왕총에는 스물여덟 개의 석조대전(石造大殿)이 이십팔숙(二十八宿)의 방위에 맞춰 위치하고 있었다. 살육, 강탈, 원한, 그리고 추격... 태어나 성장한 곳은 각기 다르지만 질기디질긴 악연으로 남은 인생이 얽혀 버린 두 젊은이가 마주친 곳은 규랑전(圭狼殿), 반혼로의 출구를 입구로 삼는 거대한 석조대전이었다. 대전 구석에 서 있는 세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조추림은 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남들에 비해 표현력이 풍부한 그였지만 이 기분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오직 하나, 좋은 기분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만 빼놓고는. 어쨌거나 조추림은 감정의 흔들림에 무척 민감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그는 굳이 규랑전까지 나와 세 사람을 대적코자 했던 이유마저 망각한 채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조추림의 시선이 세 사람 중 하나의 얼굴 위에 고정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조추림은 자신을 뒤흔드는 그 괴상한 기분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삼 년 전과는 달리 반 뼘도 안 되는 보기 흉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지만, 삼 년 전과는 달리 남루한 단삼이나마 옷처럼 보이는 것을 걸치고 있었지만, 삼 년 전의 그 어처구니없이 굵은 눈썹도 사라져 버렸지만...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부리부리한 눈, 두툼한 입술, 각진 턱! 그리고 문신처럼 몸뚱이를 휘감은 새하얀 흉터들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잊지 않았다. 심지어 그 괴상한 이름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 탈...?" 단탈의 각진 턱이 실룩거렸다. 그리고 두툼한 입술 사이로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바로 너였어." 단탈은 조추림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기이해 보였다. 그의 의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이 존재하여 그 힘에 의해 저절로 끌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단탈의 걸음걸이는 곧 바뀌었다. 두 뼘 남짓하던 보폭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내딛는 속도도 점차 빨라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단탈의 입에서 커다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악!" 한계에 이른 제방이 무너지듯, 눌릴 대로 눌린 가죽공이 폭발하듯, 모든 분노와 모든 한을 일시에 쏟아 버리는 듯한 괴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단탈은 대전의 돌바닥을 박차며 조추림을 향해 쏘아왔다. "감히...!" "멈춰라!" 붉고 푸른 두 개의 그림자가 단탈과 조추림 사이에 끼여들었다. 성숙이룡신(星宿二龍神), 조추림의 호위를 맡은 호밀령의 아홉 고수 중 두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조추림의 명이 있기 전까지 절대로 나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얼빠진 듯한 얼굴로 주춤거리는 조추림과 섬뜩한 괴성을 지르며 쏘아 오는 단탈의 모습으로부터,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 의식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남아 있는 호밀령의 일곱 고수들 또한 성숙이룡신에게 뒤질세라 분분히 몸을 날렸다. 공기가 찢어질 것처럼 진동하고 검광도광(劍光刀光)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아홉 명의 고수가 한마음으로 전개한 인(人)의 장막은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엄밀했다. 날아가는 새가 그물에 걸리듯, 단탈의 몸뚱이는 삽시에 인의 장막에 뒤덮였다. 아홉 자루의 위력적인 병기들과 아홉 명의 날고 기는 고수들로 이루어진 이 장막은, 피육으로 이루어진 인간 하나쯤은 단숨에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장막을 뚫고 단탈의 단속적인 외침이 튀어나오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조`-`!" 두 자루 음양합벽도(陰陽合璧刀)가 유리그릇처럼 산산조각났다. 청해(靑海) 지방에서 사신(死神)으로 군림하던 성숙이룡신(星宿二龍神)은 가슴팍이 횡으로 갈라진 채 인의 장막으로부터 튕겨 나갔다. "추`-`!" 장막 안에서 검은 달이 떠올랐다. 그 검은 달은 엄청난 속도로 권역(圈域)을 확산하며 장막의 우측을 휩쓸어 버렸다. 한 자루 사두철괴(蛇頭鐵拐)로 명성을 날리던 삼목사왕(三目蛇王) 전온(全穩)과, 등허리 혹처럼 둥글둥글한 쇠망치를 병기로 쓰는 철배노타(鐵背老駝)가 그 권역에 쓸려 난도분시(亂刀分屍)되었다. "림`-`!" 이제 더 이상 인의 장막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갖 악행으로 해남 강호를 어지럽히던 광동의 세 망나니, 나부삼잔(羅浮三殘)이 비명과 함께 훌훌 날아갔을 때, 조추림은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 오는 검은 칼 한 자루와, 칼에서 뿜어 나오는 소름 끼치는 묵기(墨氣)와, 무엇보다도 강렬한 살기를 뿜어 내는 한 쌍의 충혈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이름 석 자를 외치는 사이, 아홉 명의 호밀령 중 일곱이 피떡으로 변했다. 남은 둘도 생불여사(生不如死)라. 도세(刀勢)의 여력을 감당하지 못한 듯 신형을 가누지 못하고 질려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신위인가! 이러한 신위 앞에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조추림 역시 사람이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수련한 그가 무엇 때문에 물러선단 말인가! 차앙`-` 한 줄기 맑은 검명(劍鳴)과 함께 조추림의 허리춤에서 눈부신 광채가 폭출했다. 발검(拔劍), 그가 뽑아 든 장검은 과거 천하제일인의 손에서 무수한 전설과 신화를 쌓았던 희대의 보검, 천인정(天人靖)이었다. 가리아와 천인정! 어둠으로 대변되는 독도(毒刀)와 빛으로 상징되는 신검(神劍)! 모든 것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 희대의 두 이기(利器)는 각기 무서운 기세를 실은 채 세차게 충돌했다. 꽈앙`-` 두 자루 병기에 실린 가공할 기세는 커다란 폭음과 함께 상쇄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격마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으음!" 조추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여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천인정을 움켜쥔 오른팔은 얼음물 속에 담갔다 꺼낸 것처럼 저렸다. 단탈의 피해도 적지 않은 듯했다. 그의 각진 턱에는 한 줄기 검붉은 혈선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 혈선은 어쩌면 맨 처음 호밀령의 고수들을 물리칠 때부터 그렇게 매달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탈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까보다도 오히려 강한 살기를 내뿜는 듯했다. 조추림의 얼굴에 냉기가 떠올랐다. 비록 공(攻)과 수(守)는 그 기세부터가 다르다 할지라도, 또한 창졸간에 발출한 일검이라 그 위력을 십분 살리지 못했다 할지라도, 조추림은 방금 전 격돌의 결과를 용납할 수 없었다. 천한 오랑캐가 휘두른 칼에 자신이 밀려났다는 사실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단`- 탈`-`!" 조추림은 벼락같이 외치며 단탈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검 천인정은 흡사 구름 속을 노니는 창룡처럼 뿌연 서기에 감싸인 채 단탈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검강(劍 )!' 대전의 한구석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박한은 눈을 빛냈다. 박한은 사부인 절심거사로부터 중원 검학의 으뜸이 검강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 또한 검기를 유형화하여 강기( 氣)를 이루어 보고자 노력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형산 운문곡에서 무숙자 석삼도를 만난 뒤, 검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크게 변했다. 검의 경지는 실로 광활하여 강기의 유무가 그 고하를 가리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박한의 눈앞에 검강을 수련한 검도고수가 나타났다. 평소 같으면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검을 겨뤄 볼 그이건만, 이번만큼은 나서지 않았다. 아니, 감히 나설 수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단탈은 "이것은 나의 싸움이다!"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고, 그 맹렬한 의지는 박한조차 감히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탈은 정상이 아닌 몸으로 저렇게 싸워도 되는 것일까? 박한의 얼굴에는 근심의 기색이 드리워졌다. 삼 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별러 온 필생의 적 조추림은 과연 단탈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검봉(劍鋒)이 이르기도 전에 정수리를 찍어 누르는 무서운 중압감은, 검에 실린 진정한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오냐!" 단탈은 가리아를 머리 위로 크게 휘돌렸다. 쫘아악`-`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 1 묘왕동주 모든 것을 빨아들인 뒤 잔인하게 토막내 버리는 악마의 검은 달이 다시 한 번 가리아 끝에서 피어올랐다. 약흠의 원한이 점철된 장한도법의 첫 번째 수법, 흑월삼륙(黑月三戮)이었다. 콰작! 검신을 뒤덮은 뿌연 서기는 검은 달의 가장자리에 걸리고, 시퍼런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가리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진동했다. 손목을 이루는 뼈와 근맥이 과도한 하중으로 뒤틀렸다. 하지만 단탈은 이를 악물고 가리아를 밀어붙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지는 한이 있어도 조추림에게만큼은 질 수 없었다. "으아아아`-`!" 또 한 번의 포효가 단탈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시커먼 도기가 노도처럼 일며 회수혈루(回首血淚)와 야우장단(夜雨腸斷), 장한도법의 이초와 삼초가 가리아로부터 줄줄이 뿜어나왔다. * * * "약흠! 약흠의 전인이구나!" 자액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지금 그는 규랑전의 바로 옆에 마련된 두 평 남짓한 밀실에 들어 있었다. 무왕총 내의 모든 석조대전들은 저마다 다른 종류의 기관을 품고 있었다. 기관이 있다면 기관을 움직이는 곳도 있게 마련. 격벽(隔壁)을 편광성(偏光性)이 큰 광석으로 만든 탓에 규랑전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이 밀실은, 말하자면 규랑전의 기관을 움직이는 두부(頭部)인 것이다. 격벽이 지닌 편광성은 규랑전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으로부터 밀실의 존재를 은폐시켜 준다. 지금 규랑전에서는 두 사람이 생사를 건 무서운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검은 칼을 쓰는 흉한과 보검을 쓰는 조추림의 결투였다. 자액이 소리를 지른 것은 흉한의 도법 때문이었다. 그 도법의 원형(原形)은 분명히 무왕의 천하오절(天河五絶)이었다. 십여 년 전, 약흠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고 있던 궁극의 검법 천하오절! 당시 약흠은 영세분린(永世焚燐)의 불꽃에 휩싸이고도 천하오절의 요결이 적힌 비급을 꽉 움켜쥔 채 급류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성심자 이세명은 약흠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 했고, 이 말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영세분린은 모든 독공의 상극이었다. 더구나 약흠은 이미 이세명이 자랑하는 용화신수(龍華神手)에 의해 허리뼈가 으스러진 몸. 상식적으로도 약흠은 절대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하오절을 원형으로 삼은 도법이 나타나다니! 약흠의 전인이 나타나다니...! 약흠을 유인, 제거한 데에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만약 필연적인 이유가 없었다면, 독에 미친 채 세상을 등지고 살아 가는 약흠을 제거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액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약흠은 죽지 않았다. 비단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수련한 조추림마저도 압도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후인을 길러 낸 것이다. '저자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자액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평생의 염원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존재를 만났다면 아마 누구라도 그런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단탈은 강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조추림이지만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현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십 합도 채 지나기 전, 단탈이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제일인 무왕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신보다 강한 것이다! 생사를 담보로 한 결투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실제로 조추림은 그런 종류의 싸움을 여러 차례 치렀고,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상대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가 약자였다. 살아남을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가 아닌 단탈인 것이다. 그러면 살아남을 권리를 지니지 못한 그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콰콰콰`-` 가리아의 검은 도기는 미친 말처럼 규랑전 안을 질주하고 있었다. 절세 명검인 천인정이 아니었다면, 혹은 깃털보다도 가볍다는 약수영(弱水泳)의 경신술이 아니었다면, 승부는 일찌감치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조추림의 손에 들린 병기는 천인정이었고, 조추림이 익힌 신법은 약수영이었다. 물론 단탈에게 있어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몇 차례에 걸친 공격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단탈은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데, 조금만 더 노력하면 죽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조추림은 예상 밖으로 끈질겼다. 고비가 닥칠 때마다 보검과 신법의 묘용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다가 조추림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탈은 드디어 장한도법의 네 번째 수법인 구천망혼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구천망혼을 전개하는 것이 엄청난 무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단탈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단탈이 지금까지 장한도법을 펼친 것은 조추림에 대한 원한의 산물일 뿐, 현실적으로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역천비를 상대할 때에는 흑월삼륙조차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단탈이 아니던가! 거대한 분노와 거대한 살의(殺意)는 단탈로 하여금 운하에서와 마찬가지의 무위를 펼치게 해주었지만, 그 폐해는 곧바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뒤틀리는 기혈과 가쁜 호흡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구천망혼을 전개한다면, 단탈은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스으으`-` 한 자 남짓한 가리아의 도신을 통해 뿜어 나오던 검은 기운이 어느 순간, 부쩍 짙어졌다. 그 검은 기운은 살아 있는 구렁이처럼 단탈의 몸뚱이를 휘감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지...?' 조추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몸뚱이 전체가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단탈이 망막 가득 확대되어 왔을 때, 조추림의 당황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 순간 검은 기운 속으로부터 한 줄기 살기가 폭출했다. 살기는 마치 연편(軟鞭)처럼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며 조추림의 허리를 쓸어 왔다. "헛!" 조추림은 다급히 엽리장신(葉裡藏身)의 검초를 전개하여 휘어 쳐오는 살기를 막았다. 파앙`-` 폭음과 함께 조추림의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조추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슴이 등과 달라붙는 듯한 엄청난 압력이 그의 전신을 짓누른 것이다. 몸뚱이 어딘가가 크게 상한 듯했다. 하지만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검은 기운으로 화한 단탈의 두 번째 공격이 숨돌릴 새 없이 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조추림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모든 공력을 검신에 집중시켰다. 파앙`-`! 두 번째 충돌은 첫 번째보다 오히려 강했다. 극성으로 끌어올린 검강진기(劍 眞氣)가 일시에 흩어질 정도로... "크으윽!" 조추림은 입으로 핏물을 토하며 주르륵 밀려났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지독한 고통이 조추림의 두 다리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천인정을 쥔 오른팔은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세 번째 공격이 날아온다면, 그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단탈을 둘러싼 검은 기운이 옅어졌다. 그는 조추림으로부터 삼 장쯤 떨어진 곳에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단탈은 코와 입으로 검은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그에게 끝없는 힘을 공급해 주던 무서운 독공이 지금은 그의 육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단탈은 가리아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불거진 근육과 팽창된 혈관이 고통을 호소했다. 가리아는 물소 백 마리를 합쳐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단탈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의지가 있었다. 보라! 가족을 멸하고 가족의 어머니를 앗아 간 조추림이, 저기 저렇게 모든 저항력을 상실한 채 축 늘어져 있지 않는가! 어찌 여기서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우아아악`-`!" 단탈은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조추림을 향해 달려갔다. 한 번! 단 한 번의 칼질이면 되는 것이다! * * * '지금이다!' 조추림이 서 있는 곳은 안전 지대였다. 그것을 확인한 자액은 눈앞의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 * * 쩡`-`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 2 묘왕동주 마치 석벽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대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박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던 단탈의 모습이 시야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단탈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전 바닥이 꺼지고 있었다! 사방이 오십 걸음 정도 되는 석조대전의 바닥이, 마치 처음부터 허방에다가 깔아 놓은 것처럼 아래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함몰은 단탈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대전 전체로 확산되어 갔다. 고요한 호수 위에 커다란 바위를 떨어뜨린 듯,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는 나락(奈落)의 동심원! 박한은 함몰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마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귓전에 실린 다급한 경호성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경호성의 주인은 그보다 조금 더 함몰에 근접해 있던 반호였다. 박한은 허리를 뒤틀며 반호를 향해 왼팔을 내뻗었다. 사색이 된 반호가 그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몸이 붕 떴다.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박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대전의 벽면 어느 한 부분에 열려 있는 작은 출구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하아앗!" 박한의 입에서 맑고 청량한 기합이 터져 나왔다. 2 -`신중(愼重)은 장수(長壽)를 낳는 모태요, 모험은 장수를 깨뜨리는 송곳이다. 탁봉은 이 말을 좌우명으로 여기며 살아 왔다. 위험이 있는 곳이라면 만금이 쌓인 보물창고라 할지라도 그는 얼마든지 초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왕총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탁봉에게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쓸 만한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면 밖에 남은 인원은 누가 관리하겠는가! 또 강호는 흉험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인데, 못된 자들이 나타나 무왕총의 입구를 점령하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탁봉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이 점을 강조했다. 무왕총에 들어갈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탁봉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부류가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거상련의 여섯 당주 중 철심판관(鐵心判官)과 적면호(赤面虎)가 남았고, 의혈당의 서문형제 중 셋째 서문면인(西門勉仁)과 막내 서문흠독(西門欽篤)이 남았으며, 천마문에서는 소역발산의 의숙(義叔) 되는 용음노수(龍吟老 )가 남았으니 말이다. 물론 입총하지 않았다 하여 모두가 탁봉처럼 보신책에 급급한 겁쟁이일 리 없다. 우벽산(于壁山)이라는 이름보다도 우불퇴(于不退)라는 별명이 훨씬 널리 알려진 용음노수가 남은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탁봉의 주장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그는 어둡고 퀴퀴한 지하로 내려간 일백칠십여 명의 발굴대와는 달리, 연못 가장자리에 펼쳐 놓은 죽심(竹 ) 대자리 위에서 온유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거상련의 일류 요리사가 만든 고급 북경 요리를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신경 쓰지 말게." 곁에 있던 서문면인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까지만 해도, 탁봉은 느긋하기만 했다. 구릉 밑에서 인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바는 아니나, 왁살스러운 놈들끼리 싸움이라도 벌이는 줄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신경 쓰지 말게."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서문면인의 동생 서문흠독이 밀가루라도 뒤집어쓴 듯한 낯빛이 되어 달려오자, 탁봉은 더 이상 느긋할 수 없었다. "저, 저 아래... 저 아래에!" 서문흠독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을 심하게 더듬고 있었다. 그러한 말더듬증은 참새가슴 탁봉에게도 곧바로 전염되었다. "무, 무슨 일인가?" "진 대협께서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진 대협? 우리 세가의 진청화 장로 말인가?" "그렇습니다!" 탁봉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진청화가 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요란을 떠는 것일까? 채약(採藥)을 하겠노라며 간 사람이니, 약을 캤으면 돌아올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때 탁봉이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구릉 등성이에서 창노한 음성이 울렸다. "진 노제! 걸음을 멈추게!" 탁봉은 그 음성의 임자를 알고 있었다. 싸움에 임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용음노수 우불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는 왜 진청화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것도 막강한 내공이 실린 음성으로... 탁봉은 등성이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만약 그곳에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탁... 장로님! 나 좀... 나 좀 살려 주세요!" 탁봉을 발견한 진청화는 말라붙은 진흙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러나 탁봉은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멈추게! 안 그러면 노부의 손속이 무정타 원망하게 될 걸세!" 진청화의 전면 오륙 장 떨어진 곳에는 용음노수가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단지 경고만이 아닌 듯, 그의 오른손 안에서 두 알의 자모철담(子母鐵膽)이 섬뜩한 금속성을 지르며 비벼지고 있었다. 천마문은 산동장가의 오랜 맹우였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산동장가의 가신에게 천마문의 원로가 저렇게 협박하는 것은 분명히 매정한 처사였다. 그러나 탁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용음노수가 좀더 모질게 나가 주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진청화가 계속 다가오면 재미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누가... 제발 나 좀 살려 줘!" 진청화의 오른쪽 뺨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뺨은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안구가 사라진 왼쪽 눈구멍에서 눈물 아닌 핏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 본디 이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진청화 한 사람을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의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진청화에게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진청화가 아무리 비통하게 울부짖어도, 또한 그의 행색이 아무리 비참하게 변했다 해도 그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진청화의 몸뚱이를 결박하고 있는 굵은 밧줄, 그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새하얀 구체(球體)들이 그들을 꽝꽝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이때 카랑카랑한 전음성이 진청화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어서 동료들에게로 가지 않고 무엇 하느냐! 본좌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네놈은 숯덩이가 된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진청화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란 토끼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탁봉을 향해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탁 아저씨! 불쌍한 조, 조카를 살려 주세요!" 탁봉은 진청화가 얼마나 간절한 심정인지 알 수 있었다. 여북하면 평소 사용하던 '탁 장로' 대신에 어릴 때 사용하던 '탁 아저씨'란 호칭이 튀어나왔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청화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단 하나만으로도 반경 삼 장을 초토화시키는 무서운 화기 벽력구(霹靂球). 그것을 주렁주렁 매달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저렇게 비틀거린다면, 조카가 아니라 구대독자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러한 탁봉의 심사를 이해했던 것일까? 용음노수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 노제! 노부를 용서하게!" 용음노수의 자모철담은 세 아름 소나무를 단숨에 관통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무서운 자모철담이 매서운 파공성을 허공에 뿌리며 진청화를 향해 쏘아 갔다. 과거 남북전쟁을 통해 이화신마의 벽력구가 얼마나 무서운 화기인지 신물나게 경험한 그이기에, 하나를 죽여 여럿을 구한다는 비정한 결심을 내리게 된 것이다. 두 알의 자모철담은 진청화의 두 무릎에 여지없이 적중되었다. 아무리 손속에 정을 두었다 해도, 용음노수의 자모철담은 인간의 무릎뼈가 견딜 만한 녹록한 병기가 아니다. "아악!" 진청화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엎드려!" 용음노수의 입에서 대갈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천번지복(天飜地覆)의 폭음은 울리지 않았다. 다만 늙은이의 교만스러운 웃음 소리만이 울렸을 뿐이다. "으헤헤! 노부가 뭐라고 했소이까? 강북의 호걸들은 하나같이 예도(禮度)가 높은 탓에, 손님이 오면 모두 큰절을 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소이까?" 청년의 듣기 좋은 웃음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하하! 반신반의했건만 정말 비 부주의 말씀대로군요."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 3 묘왕동주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패대기친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짝 달라붙은 진청화와 그 옆에 선 일노일소를 볼 수 있었다. 순간, 용음노수와 탁봉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비연리!" "매용소!" 죽었다고 알려진 비연리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었다. 비연리가 남마련을 배신하고 철옥에 투신했음은 이미 북정회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연리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산동장가의 원수이자 철옥의 대제자인 매용소와 함께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강북의 호걸들은 예도만 높을 뿐, 동료를 아끼는 마음은 배우지 못한 모양이외다. 동료를 이렇게 헌신짝처럼 팽개치다니... 쯧쯧! 불쌍하기도 하지." 그러나 비연리는 말처럼 진청화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진청화의 등짝에 발을 척 올려놓은 채, 그 몸뚱이에 매달린 구체들을 주섬주섬 떼어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용음노수의 살집 좋은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달아올랐다. 적에게 기만당해 동료를 상해했다는 자괴감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이 더러운 마귀야! 가짜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다니... 이화신마라는 명호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비연리는 고개를 들어 용음노수를 보았다. "어? 자네는 낯이 익은데? 혹시 검패의 집을 지키던 개였던가? 아니면 황금왕의 개?" "이 원숭이 새끼가!" 주인까지 바꿔 부르며 무시하는 데에는, 상대가 아무리 무서운 이화신마라도 참아 넘길 용음노수가 아니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용음노수가 두어 발짝도 채 떼어 놓기 전, 비연리는 들고 있던 구체 하나를 휙 던지며 말했다. "이게 가짜라고 했나?" 구체는 사오 장 정도 되는 유연한 포물선을 그리며 용음노수의 면전으로 날아갔다. "흥!" 용음노수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좌수를 휘둘러 날아온 구체를 후려쳤다. 순간, 한 줄기 섬광이 그의 코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꽝`-` 엄청난 폭음이 울리고, 초열지옥에서 몰아칠 법한 지독한 열풍(熱風)이 용음노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쳐 나갔다. "아악!" "으아악`-`!"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불덩어리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미친 듯이 흙바닥 위를 뒹굴었지만 그들을 휘감은 불꽃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살갗을 익혀 버릴 듯한 뜨거운 바람, 고통받는 자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 그 속에서 주위를 뒤덮은 자욱한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흙먼지가 모두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용음노수는 아까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서 있는 것은 그의 하체뿐이었다. 허리 윗부분이 몽땅 날아간 채로 발목까지 흙 속에 박혀 있는 인간의 하체는 생각처럼 끔찍해 보이지 않았다. 단지 허리 잘린 석상 따위를 보는 듯했다. 사람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진청화가 매달고 있던 벽력구는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가짜 벽력구는 천마문에서도 손꼽히는 노고수를 저렇게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의심(疑心)이 암귀(暗鬼)를 만든다더니, 저 친구는 남을 못 믿어 스스로 귀신이 되었군. 미련한 친구 같으니라고..." 비연리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자 곁에 있던 매용소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의미한 살생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어떻겠소?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이 매용소가 책임지고 보장하겠소." 모름지기 대장부라면 이 시점에서, "개소리 작작 해라!"라고 외치며 분노를 터뜨려야 할 것이다. 물론 탁봉은 대장부가 아니기에 가슴을 졸이며 눈치만 엿보았다. 탁봉 대신 나선 사람은 의혈당의 대장부들이다. "매용소! 화기 몇 알을 믿고 큰소리치는 거라면,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 의혈당 서문 형제들의 손에는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이화창(梨花槍)이 들려 있었다. 재주가 달릴지언정 의기만은 절대 꺾이지 않겠노라 결심한 듯, 그들의 눈은 정기(正氣) 어린 투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매용소는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의혈당 문하에는 오직 의혈 장부들만 있다는 말은 익히 들었소. 귀하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하지만 내가 화기만을 믿고 큰소리친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오?" 매용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장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본디 북정회 무사들은 매용소와 비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일단의 무리들이 그들을 다시 크게 에워싸 버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 두거니와, 나 매용소는 무의미한 살생 가급적 피하고 싶소." 매용소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승자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가 담겨 있었다. * * * -`의혈당하유재의혈장부(義血堂下唯在義血丈夫). 매용소가 말한 것처럼 의혈당 문하에는 오직 의혈 장부들만 있었다. 하지만 강호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의혈만으로 뜻을 이루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문 형제를 위시한 의혈당 장부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매용소의 철옥도들에 저항했다. 이에 고무된 다른 사람들도 병기를 뽑아 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알맹이가 빠지고 쭉정이들로만 구성된 북정회였다. 그런 그들이 이화신마나 매용소 같은 절정고수가 버티고 있는 철옥도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서문 형제의 쌍창합격은 이화신마의 대양수 아래 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거상련의 두 당주들은 마부의 부부주(副府主)인 망산일수(邙山一 ) 부범악(夫範岳)과 비연리의 심복인 눌연수사 두의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제 북정회 무사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산동장가의 탁봉뿐이었다. 그 탁봉이 두 팔을 번쩍 쳐든 채 무릎을 꿇자, 북정회 무사들은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패와 완승. 북정회와 철옥의 첫 번째 대결은 이렇듯 싱겁게 끝나 버렸다. 그 결과 신도설이 찾아 낸 무왕총의 입구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북정회와 철옥, 양자 모두가 간파하지 못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싸움으로 인해 감시가 소홀해진 사이, 홀연 나타난 노인과 소녀가 무왕총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바로 공손 영감과 석소용이었다. * * * 추락의 시작은 암흑이었다. 발 밑에서 솟구친 암흑이 단탈의 시야를 앗아 갔을 때, 그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락 초, 단탈이 허공에서 보인 행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는 머리 위를 비추는 잔광(殘光)의 도움을 받아 함께 추락하던 석판들을 번갈아 디뎠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추락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열 개의 발가락과 두 개의 발바닥, 그리고 그것들을 통솔하는 하체의 근육. 그것들의 연계성(連繫性)으로 논한다면, 천하에서 단탈을 당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디딜 물체만 계속 제공된다면, 그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신체의 균형을 잃지 않은 채 추락을 즐길 사람이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석판의 수는 한도가 있었고, 한번 디딘 석판은 두 번 디딜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단탈은 아무것도 없는 진정한 허공에 머물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날개가 달리지 않은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단탈도 신체의 균형을 상실한 채 아래로 곧장 떨어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추락이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추락부터 첫 번째 충돌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그 시간이 두 배만 되었던들, 충돌을 고스란히 감당한 그의 왼쪽 어깨는 땅바닥에 떨어진 홍시처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문드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충돌이 있었다고 해서 추락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충돌 이전의 추락과 다른 형태인 것만은 분명했다. 두 번째 추락은 사면(斜面)을 따라 내려가는 활강의 형태로 나타났다. 등으로부터 느껴지는 벽면은 단탈에게 한 가지 고통과 한 가지 기쁨을 안겨 주었다. 마찰로 인해 허물이 벗겨지는 통증이 전자라면, 그래도 무엇인가에 접촉해 있다는 안도감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속도만큼은 충돌 이전에 비해 그다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사면이라고는 하지만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지니고 있었으니,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 턱이 없는 것이다. 이 속도로 떨어지다가 바닥에 부딪히는 날에는 제아무리 단단한 몸뚱이를 지닌 단탈이라도 무사하길 바랄 수 없었다. '속도를 줄여야 한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 4 묘왕동주 단탈은 허리를 틀어 배를 벽면 쪽으로 향하게 한 뒤, 쥐고 있던 가리아를 힘껏 찔러 넣었다. 끼이이익`-` 가리아는 벽면의 표면을 거칠게 긁어 내려갔다. 그 접촉 부위에서 튀긴 불꽃은 단탈로 하여금 흐릿하나마 주위를 살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활강하는 곳은, 만약 수평으로 나 있다면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다니기 힘든 협소한 정방형 통로였다. 단탈은 가리아를 움켜쥔 손에 조금씩 힘을 더해 갔다. 그에 따라 가리아는 점점 더 깊이 사면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리아는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않게 되었다. 가리아를 움켜쥔 단탈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추락은 이렇게 끝났다. 이제 단탈은 사면 위의 한곳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한 점의 빛도 없는 암흑 속. 두꺼운 헝겁을 얼굴에 뒤집어쓴 것처럼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탈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눈초리가 아릴 정도로. "놓쳤구나..." 단탈의 입술 새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 놓쳤어, 놈을 놓쳐 버렸어..." 돌연 단탈은 머리로 사면을 들이받았다. 꽝! 두 번도 필요없었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칼질이면 조추림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또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최후의 일격을 기다리던 조추림은 어디로 가고,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어둠 속에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꽝! 꽝! 꽝! 깨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얼굴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이성을 잃은 단탈은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 머리 위 까마득한 곳으로부터 들려 오는 기이한 소리가 단탈의 자해를 멈추게 만들었다. 단탈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짙게 뒤덮은 암흑을 응시했다. 소리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풀벌레의 울음 소리 같던 그것은, 어느덧 물소 떼의 발굽 소리처럼 커져 있었다. '이 소리는...?' 단탈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우기(雨期)를 맞아 불어난 계곡 물이 하류를 향해 세차게 흘러내릴 때, 바로 이런 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단탈의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쏴아아`-` 어둠을 뚫고 급습한 물벼락이 단탈의 몸뚱이를 후려갈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지 맞는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터져 버릴 정도의 거센 물벼락이었다. "우욱!" 끝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는 가장 난폭한 군주처럼 단탈을 찍어 눌렀다. 그 무서운 압력은 인간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면에 박혀 있던 가리아가 조금씩 아래로 꺾였다. 단탈의 몸뚱이가 받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탈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리아의 손잡이를 죽자꾸나 하고 움켜쥐는 것밖에는... 결국 가리아는 사면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단탈로서는 유일한 지점(支點)이 사라진 것이다.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콰콰콰`-` 세찬 물벼락이 단탈의 몸뚱이를 삼켜 버렸다. * * * 그는 걸음을 멈추고 통로의 오른쪽 벽면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한참 만에 귀를 뗀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벽은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진동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하의 물줄기를 무왕총 내부로 끌어들여 특정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몽땅 수장시켜 버리는 악독한 기관, 수귀관(水鬼關)이 작동된 것이다. 수귀관은 여타의 기관들과 달리 사용에 있어서 두 가지 중대한 제약이 있었다. 첫 번째 제약은, 수귀관의 효력이 무왕총의 모든 구역에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의 성질에 기인한다. 낮은 곳의 물로써 높은 곳의 사람을 핍박할 수는 없는 법. 다시 말해 회하의 수위보다 높은 지역에서는 이 수귀관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약은, 그렇게 작동하여 물이 무왕총의 낮은 곳에 고여 버리면, 그곳은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구역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어떠한 정교한 기관도 그 물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귀관은 두 번 사용할 수 없다. 이것이 수귀관의 두 번째 제약이었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수귀관은 사용에 있어서 극도의 신중을 요하는 기관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무왕총을 설계한 그는 물론이거니와, 지금 무왕총을 움직이는 자들도 그러한 사실을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수귀관이 작동되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수귀관을 사용하여 제거해야 할 정도로 곤란한 존재가 무왕총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까 입구로 들어온 자들이 벌써 이 부근까지 왔단 말인가?' 이 가정은 곧 부정되었다. 입구가 작동된 것은 불과 두 시진 전의 일. 무왕총의 내부를 손금 보듯 훤히 아는 그로서도, 이곳까지 오려면 여섯 시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귀관을 작동하게 만든 그 존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3 벌써 세 시진째 쏟아져 들어오는 감시자들의 보고는 자액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만들었다. 만약 할비가 그를 도와 주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바빴을 테고, 그랬다면 조추림을 위로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할비는 유능한 조수 노릇을 해주었고, 자액은 조추림을 위로할 짬을 낼 수 있었다. "다 끝난 일이오." 조추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실성한 듯한 눈길을 바닥에 던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약을 복용했지만, 그의 안색은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약흠의 전인으로부터 받은 육체적·정신적 상처는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수귀관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이오. 이제 그만 잊어버리도록 하시오." 자액이 다시 위로했다. 그러자 조추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돌 뿐 자액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소?" 자액이 물었다. 조추림은 시선을 들어 자액을 바라보았다. 그렇더니 귀찮다는 듯, 불쑥 내뱉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라고 그랬소." 자액의 미간에 푸르스름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는 도살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처도 아니었다. 만약 말한 사람이 조추림만 아니었던들, 자액은 결코 참아 넘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소! 하던 일이나 계속하리다. 하지만 공자가 이러고 있는 것을 옥주께서 아시면, 과히 좋아하지 않으실 거외다." 한마디 뼈있는 말을 던진 자액은, 할비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석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순간에도 감시자들의 보고는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보고는 이 석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수많은 원추형(圓錐形) 철통(鐵筒)들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이설신관(移舌神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장치는, 원추형 철통 두 개와 견면(繭綿)으로 만든 고려지(高麗紙) 두 장, 그리고 탄성이 뛰어난 은잠사(銀蠶絲)를 이용해,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였다. 호남 지방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중에는 가는 실로 연결한 두 개의 대롱으로 여러 걸음 밖에서도 귓속말을 나누는 전화통(傳話筒)이라는 물건이 있다. 이설신관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전화통의 기능을 극대화해 대화 거리를 백여 장까지 확대한 이기(利器)였다. 이설신관의 다른 쪽 철통은 무왕총 곳곳에 만들어 놓은 밀실에 설치되어 있었다. 모든 밀실 안에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감시자들이 들어 있고, 그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이설신관을 통해 자액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보고의 대부분은 자액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인간의 일이 완벽할 수만은 없는지라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 시진 전에 총으로 들어온 신원 미상의 노인과 소녀의 존재가 바로 그랬다. 하지만 무왕총이라는 괴물은 두 사람쯤 덤으로 녹여 줄 정도로 큰 위장을 지니고 있었다. 자액은 두 사람의 존재를 곧 잊고 말았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 5 묘왕동주 "북정회, 심호전(心狐殿) 진입! 북정회, 심호전 진입!" 석벽 위의 한 철통으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호전은 무왕총의 스물여덟 개 석조대전 중에서 남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로 들어온 사람이 심호전에 들기까지는 두 군데의 미로와 여섯 군데의 철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물론 본격적인 기관이 작동되지 않은 이상 그것들을 큰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북정회는 무왕총도라는 훌륭한 해도(海圖)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 해도에 적힌 뱃길은 풍랑이 일어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겠지만... "빠른 편이군." 모래시계를 힐끔 바라본 할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북정회의 진입 속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신도설의 능력이 소문대로인 모양이군." 자액이 할비의 말을 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석벽의 상단에 튀어나온 철통에서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대지급(大至急)! 대지급! 개천문(開天門)에 다수의 강호인 출현! 그들은... 그들은..." 사내의 외침은 칼로 자른 것처럼 뚝 끊겼다. 그리고 잠시 동안, 철통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개천문은 입구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거대한 철문의 이름이었다. 물론 개천문 주위에도 밀실이 있고, 그 밀실에는 감시자가 들어 있었다. 잠시 후, 철통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 흘러나온 것은 조금 전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이 주발 같은 건 뭐지? 에... 엣취! 엣취! 이놈은 왜 여기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재채기가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 자액과 할비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슷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은 목소리의 임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의 임자를 아는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비연리! 비연리구나!" 자액과 할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두 사람은 석벽을 향해 화살처럼 달려오는 조추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추림의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비연리의 목소리가 그의 눈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개잡종 새끼! 네가 드디어 이곳에 들어왔구나!" 조추림은 두 사람을 밀치며 고함을 질렀다. 자액은 철통의 주둥이를 급히 잡아당겼다. 이설신관은 공평한 도구였다. 저쪽 철통으로 들어온 말이 이쪽 철통으로 나오듯, 이쪽 철통으로 들어간 말은 저쪽 철통으로 나가는 것이다. 툭, 하는 경미한 소리와 함께 철통 바닥에 붙어 있던 고려지가 찢어지고, 철통은 석벽으로부터 뽑혀 나왔다. "조 공자! 자중하시오!" 자액은 조추림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 "무엇을 자중하란 말인가! 그녀가 이곳에 왔는데 내가 어떻게 자중한단 말인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는 조추림은 자액조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비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조추림은 자액의 멱살을 틀어 잡고 으르렁거렸다. "조, 조 공자..." 당황한 자액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런데 이때, 할비가 조추림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연리는 저기 있소이다." 조추림의 시선은 할비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홱 돌아갔다. 그 순간, 할비는 치켜 든 손가락을 쭉 뻗어 조추림의 목덜미 뒤 풍부(風府), 아문( 門), 천주(天柱)의 세 군데 혈도를 연달아 짚어 버렸다. 뻣뻣하게 굳은 조추림이 스르르 앞으로 넘어갔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자액은 넘어지는 조추림을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할비의 절옥지(絶玉指)는 달리는 말도 단번에 멈출 정도로 위력적이다. 더구나 조추림은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가. 그러나 할비는 얄미울 정도로 태연했다. "벌써 잊었는가? 그는 복주(福州) 이가(李家)의 폐혈공(閉穴功)을 익혔네. 이 정도로 다치진 않을 걸세." "아무리 그래도..." "그는 기절해 있는 편이 나아." 할비는 단호하게 말했고, 자액은 다소 못마땅한 눈으로 그런 할비를 바라보았다. 자액과 할비, 두 사람은 하나의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슷한 과거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정마저도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할비는 자액에 비해 훨씬 단호하고 잔인했다. 방금 전의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액은 곧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두 개의 몸을 지닌 하나의 존재였다. 할비는 그 존재의 강성(剛性)이었고, 자액은 그 존재의 유성(柔性)이었다. 비록 서로를 나무랄 수는 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부정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비연리가 나타났으니 대공자도 들어왔겠군. 이 일을 옥주께 알려 드려야 하지 않을까?" 자액이 묻자, 할비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가 제갈등룡의 옥령기를 부정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곤, 옥주께서는 분노에 앞서 슬퍼하셨지. 어쩌면 옥주께서는 그때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아셨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대공자도 북정회와 함께...?" 할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액은 우울한 마음이 되었다. 그는 매용소에 대해 약간 특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굳이 표현한다면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랄까? 매용소는 조추림에 비하면 몇 배는 뛰어난 지도자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매용소가 아무리 뛰어나도, 또 조추림이 아무리 괴팍해도, 장후겸의 후계자 자리는 조추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조추림은 장후겸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북정회, 두린전(斗麟殿) 진입! 북정회, 두린전 진입!" 또 하나의 보고가 들어왔다. 물론 두린전 내의 밀실에 숨어 있는 감시자가 보내는 보고였다. 문득 자액은 한 가지 의혹을 떠올렸다. 모든 밀실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비연리는 어떤 방법으로 밀실을 찾아 낸 것일까? * * * 강호에서 유서 깊은 오독문(五毒門)의 문주, 오독기서생(五毒奇書生) 여문비(余文飛)에게는 신기한 보물이 몇 가지 있었다. 이름부터가 휘황찬란한 금동의(金童蟻)가 그 중 하나였다. 금동의는 하나의 철상자 안에서 양육되는 개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 만랄반도(滿剌半島:지금의 말레이반도)에 서식한다는 이 개미는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곤충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육(人肉)이었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박하향(薄荷香)이었다. 빌어먹을 박하향! "에... 엣취! 으에취!" 비연리는 재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로 말한다면 사람, 그것도 강호에서는 매우 비중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개미의 호불호 따위에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개미의 호불호 때문에 박하향을 뒤집어쓴 몰골로 재채기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에, 엣취! 이 빌어먹을 냄새를 견딜 수 없어! 엣취!" 두의는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연리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다 멀쩡한데 유독 그 혼자만이 저렇게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독기서생은 비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박하 가루가 든 주머니를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랫사람 된 도리라면야 당장이라도 저 주머니를 틀어막아야 하겠지만, 두의는 그럴 수 없었다. 박하향이 묻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편식쟁이 개미들 때문이다. "찾은 것 같소이다!" 오독기서생이 나직하게 외쳤다. 과연 금동의 무리는 동쪽 석벽의 한 부분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놈들이 선객(先客)의 냄새가 밴 대전 바닥을 외면한 채 저 벽면에 달라붙어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 벽면 너머에는 놈들로 하여금 군침을 흘리게끔 만드는 싱싱한 인육이 있는 것이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은 뻔했다. 오독기서생이 작은 호각을 불어 금동의를 회수하고, 달려나간 비연리가 그 석벽을 후려치면, 석벽이 쪼개지며 토끼눈을 한 사내가 나타나는 것이다. 비연리는 고수였다. 정신없이 튀어나오는 재채기도 그의 손발을 느리게 만들지 못했으니, 사내를 제압하는 데에는 결코 두 번의 수고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지독한 놈!" 비연리는 이를 갈며 움켜쥔 사내의 맥문을 풀었다. 사내는 모래성처럼 풀썩 허물어졌다. 이미 절명한 듯, 사내의 코와 입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벽이 부서지기 직전 극독을 복용한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5 장 - 6 묘왕동주 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찾아 낸 모든 사내들의 최후가 바로 저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사내의 품에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용소는 팔짱을 낀 채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왕총은 단순한 장보지처(藏寶之處)가 아니었다. 매용소는 이미 이렇게 확신 내리고 있었다. 그의 사부 철면신이 지난 수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하남에서 추진해 온 사업! 그 결정체가 바로 이 무왕총이었다. 증거는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신양에서 그를 기다린 대왕곤의 보고, 진청화를 고문해 알아 낸 정보, 그리고 금동의를 사용해 색출해 낸 감시자들... 매용소는 고개를 들었다. 전석(塼石)을 짜맞춰 만든 거대한 반구형(半球形)의 천장은, 이 건축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원과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자되었는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지난 수년간 총단의 사업이 계속 부진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강남제일을 자부하는 철옥이라 해도 결국 강호의 일개 방파에 불과할진대, 이런 엄청난 공사를 비밀리에 추진하려면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것이 당연했다. 이제 매용소는 한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철면신은 왜 무왕총을 만든 것일까? 사패를 제거하고 강호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었다. 매용소는 한숨을 쉬었다. '사부! 사부는 대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오?' * * * 이곳은 어디일까? 단탈은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암흑, 그것도 물속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단탈은 자신이 겪은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는 조추림을 죽이려다 함정으로 떨어졌다. 그 뒤 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가리아를 이용해 멈췄고, 잠시 뒤에 퍼부어진 물살에 휩쓸려 이곳까지 떨어졌다. 지금 이곳에 가득 찬 물은, 아마도 그때 쏟아져 고인 것이리라.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단탈은 스스로에게 거듭 당부했다. 조추림을 만난 뒤, 그는 줄곧 흥분해 있었다. 흥분의 결과가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었다. 만약 여기서 냉정을 되찾지 못한다면, 어쩌면 이 고난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단탈은 목숨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을 냉정이라 판단했고, 그러자 냉정은 곧 되돌아왔다. 냉정을 되찾자 상하를 구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의 몸뚱이는 물에 뜨는 법. 단탈은 아직까지도 꽉 움켜쥐고 있던 가리아를 허리춤에 묶은 뒤, 팔다리를 활짝 벌리고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곧 자신의 몸을 떠받치는 부력(浮力)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과 가슴에 단단한 무엇인가가 부딪혔다. 단탈은 왼손으로 그것을 더듬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감촉은 차갑고도 매끄러웠다. 그는 자신이 철판에 부딪혔음을 알아차렸다. 사면을 따라 계속 떨어졌다면 천장 어딘가에는 반드시 그가 굴러 떨어진 통로가 있어야만 했다. 단탈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철판을 따라 몸을 이동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더듬었을까? 단탈의 몸은 곧 하나의 벽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구멍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따위로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서 버틸 수 있을까? 약흠에게 전수받은 독공은 내공으로서도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약흠이 전수해 준 것은 싸움에서 이기는 법뿐이었다. 그는 강호인들 대다수가 알고 있는 잡다한 기술들, 가령 호흡을 늦추는 지식법(遲息法) 따위는 익힐 기회가 없었다. 단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은, 천장을 더듬기 시작하고 일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물속에서 허둥거리던 시간까지 합하면 그가 호흡을 멈춘 시간은 일 각 반. 지식법을 익히지 못한 단탈이 일 각 반 동안이나 물속에서 버틴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몇 번씩이나 왕복하며 더듬은 천장에는 어떠한 구멍도 없었고, 그래서 잠시 후면 물과 암흑뿐인 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익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단탈의 체내를 불안하게 돌아다니던 절독공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천만 개의 칼날이 전신을 난자하는 듯한 고통이 단탈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꾸르륵`-` 목구멍으로 물이 들어오는 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단탈의 고막을 울렸다. 그 소리는 절독공이 흐트러지는 지독한 고통과 어우러져, 그를 절망의 벼랑으로 밀어붙였다. 이렇게 끝나는가? 몸뚱이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단탈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타루가의 아들은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 가리아는 늑대의 발톱에 부상당한 단탈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탈은 가리아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애썼다. 눈물이 아닌 의지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하늘이 자신에게 씌운 모진 형극의 길을 헤쳐 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기력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지금은...? 이것이 나의 운명, 나의 아합아게일까? 단탈은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것만이 비정한 운명, 비정한 아합아게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분노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문득 웃고 있는 나라아합의 얼굴이 단탈의 망막을 스쳐 갔다. '나라... 아... 합...' 그것을 끝으로 단탈은 의식을 잃었다. 그는 암흑보다 더 캄캄한 절망의 벼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제 어떠한 희망의 빛도 그를 비춰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탈을 비춰 줄 희망의 빛은 분명히 존재했다. 철컹`-` 천장의 한구석에 작은 문이 열리며 암흑뿐인 수귀관에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니면 좋을 텐데..."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한 사람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다시 물밖으로 나온 그의 등에는 축 늘어진 단탈의 몸이 업혀 있었다. 그것은 단탈이 의식을 잃은 지 반 시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지옥(地獄) 묘왕동주 제 26 장 지옥(地獄) 1 열한 개의 대전과 스물네 개의 철문. 그것은 북정회 군웅들이 지난 아홉 시진 동안 지나온 장애물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특별한 위험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무왕총은 말 그대로 무덤이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고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해이해졌다. 철옥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사그라졌다. 그리고 스물다섯 번째 철문이 신도설에 의해 열렸을 때,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넋을 잃고 말았다. 거대한 대전. 이제까지 지나온 열한 개의 대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대전이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전 안은 매우 밝았다. 대전을 밝게 만드는 빛은 천장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느낌은, 혹시 자연광(自然光)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전 중앙에는 눈처럼 하얀 대리석으로 쌓은 거대한 석단(石壇)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단 위에 놓인 관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갖가지 장식들이 찬란한 빛을 뿌리는 호화로운 관...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모든 사람들은 대전 중앙의 석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석벽에 달린 철통 중 하나로부터 감시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정회, 각룡전(角龍殿) 진입! 북정회, 각룡전 진입!" 자액과 할비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각룡전은 무왕총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전, 이번 연극의 주무대였다. 그 무대 위로 드디어 배우들이 올라온 것이다. "시작인가?" 자액이 물었다. "그런 것 같군." 할비가 대답했다.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은 어린 소년처럼 설레고 있었다. 가문으로부터 축출당한 지 어언 사십여 년. 그 장구한 세월 동안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다. 그 간난신고가 드디어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귀원대계(歸元大計)라 이름붙인 열매를... * * * 석단은 수십 개의 석계(石階)가 사각뿔 모양을 이루며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이었다. 석계 최하단부의 너비는 무려 십여 장. 그것은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다. 단의 초석(礎石) 위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치로 하나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왕의 석계, 누가 감히 밟을 것인가?> 무왕의 석계, 누가 감히 밟을 것인가! 누가 감히 밟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나설 수 없었다. 하물며 신주십일존이라는 이름하에 무왕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황금왕 소래운조차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때 소래운의 등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석계의 수가 모두 여든두 개로군요." 소래운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산동장가의 대행 가주직을 벗고 야인의 신분으로 돌아간 장후겸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든둘이라... 회주께서는 그 여든둘이라는 숫자에서 연상되는 것이 없으시오?" 소래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든둘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왕의 생애를 상징하는 숫자였다. 그 위대한 무인은 여든두 해 동안 이 땅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러고 있을 겁니까?" 천마문의 소역발산 막강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래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러고 있지 않으면?" "어서 올라가야 할 것 아닙니까? 저 위에는 분명히 무왕의 유진(遺眞)이 있을 겁니다!" 막강은 당장이라도 석계를 오를 듯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소문대로 아비 망신은 다 시키는 놈이로다!' 소래운은 혀를 찼다. 소래운이 기억하는 한 무왕보다 강한 무인은 없었다. 그가 한 자루 보검을 휘두르면 하늘이 울부짖고 땅이 갈라졌다. 사패의 우두머리인 장일기도, 삼마의 대형인 육족풍도, 그의 보검 아래에서는 이십 초를 버티지 못했다. 너무나도 불가해(不可解)한 그의 무공은, 패한 사람으로 하여금 설욕의 투지조차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천외천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래운이 기억하는 한 무왕보다 무서운 효웅은 없었다. 그는 연적찬위(燕賊簒位)라는 정치적 혼란을 틈타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이루었다. 무림맹은 강호에 알려진 것처럼 성지(聖地)가 아니었다. 무림맹은 관산정 개인의 왕국이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덕치(德治)를 표방하면서도, 내부적으로 잔인한 숙청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권위에 반발하던 복주이가의 가주 이장풍의 최후는, 그가 얼마나 무서운 효웅인가를 알려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무왕의 석계였다. 가장 강한 무인이자 가장 무서운 효웅의 석계였다. 어찌 소역발산 따위의 망둥이가 넘본단 말인가! "내가 올라가겠네." 소래운은 이렇게 말했다. 막강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무왕의 석계를 밟을 자격이 있는 이는 오직 소래운 한 사람뿐인 것을. 소래운은 첫 번째 석계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초석과 마찬가지로 첫 번째 석계 위에도 하나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일(一) 세(歲). 하북 진황도(秦皇島)의 농가에서 태어나다.> 무왕 관산정은 원나라 지정(至正) 3년(1343), 하북 진황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번째 석계에는 그러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렇듯 모든 석계에는, 그에 해당하는 나이에 무왕이 행한`-`혹은 겪은`-`일이 적혀 있었다. 소래운은 이 석계를 왜 무왕의 계단이라 칭하는지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 석계는 다름 아닌 무왕의 연보(年譜)였던 것이다. 소래운은 발 아래로 지나가는 문구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석계를 올라갔다. <이십육 세. 보검 천인정을 얻어 강호에 처음 나서다.> <삼십사 세. 의인(義人)의 복수를 위해 일야(一夜)에 일백칠십구 명의 도적을 죽이다. 이 일로 무왕의 칭호를 얻다.> <육십 세. 강남의 세 마인과 강북의 네 패주를 굴복시켜, 무림맹을 창설하다.> 석계의 너비는 점점 좁아졌다. 그에 따라 석계 꼭대기에 놓인 관도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관 앞에는 목침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저 궤짝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소래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몇 개의 석계만 오르면, 그는 드디어 무왕의 석계를 모두 오르게 된다. 그러면 저 궤짝이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든한 번째 석계를 디뎠을 때, 소래운의 발길은 그 자리에 우뚝 얼어붙어 버렸다. <팔십일 세. 사랑하는 아들 명(明)을 먼저 보내고 비탄에 잠기다.> 잠깐 동안 어떠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고가 다시 회복되었을 때, 소래운이 처음으로 느낀 것은 구름 같은 의혹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소래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왕은 오직 하나의 아들만을 두었다. 그 이름은 관명. 무왕의 권위로써 무림맹의 제이대 맹주에 오를 강호 최고의 행운아였다. 그러나 그는 무림맹의 제이대 맹주가 될 수 없었다. 무왕의 초상(初喪)이 끝나기도 전에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명의 실종에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이 석계 위에 적혀 있는 것처럼 관명은 무왕보다 한 해 앞서서 죽었다. 그 뒤로 두 해 동안 관명 행세를 한 것은 역용술에 뛰어난 천면괴(千面怪)라는 흑도고수였다. 천면괴는 물론 죽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비밀이란 것은 호랑이와 같았다. 호랑이를 키우려면 호랑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엔가 호랑이에게 먹혀 버리고 만다. 비밀의 속성도 이와 마찬가지라서, 천면괴는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을 키운 죄로 비밀에게 먹혀 버린 것이다. 천면괴가 죽은 이상, 천하에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일곱뿐이었다. 삼마와 사패, 무왕의 권력 세습에 불만을 품고 후계자 관명을 살해한 흉수들이기도 했다. 삼마와 사패는 이 일이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죄가 있다면, 무능한 아들에게 무림맹주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계승하려고 했던 무왕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강호로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무왕은 누가 뭐래도 강호 제일의 성자(聖者)였다. 아무리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강호라지만, 성자의 아들을 살해한 패륜의 무리에게 정통성을 부여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정통성이란 권력을 발아(發芽)시키는 필수적인 자양분. 만약 그 일이 알려지는 날에는, 삼마와 사패는 그토록 원하던 권력과 영영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비밀을 지켰다. 칠 년 동안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까지도...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 1 묘왕동주 그런데 저 석계 위에 그 비밀이 적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저 아래에서 누군가 외쳤다. "회주! 왜 그러십니까?" 소래운은 석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눈, 눈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들이 소래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눈들은 소래운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석단 위에 올라 무왕총의 비밀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소래운은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저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범행 현장에 다시 가볼 수밖에 없는 범죄자의 심리. 소래운은 지금 그런 심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팔십이 세. 원수들의 세도가 날로 강성해지니 노쇠한 부정(父情)은 하늘을 원망하다. 원한과 저주를 가슴 가득 품은 채 무림맹의 심처(深處)에서 졸(拙)하다.> 마지막 석계가 소래운의 발 아래로 지나갔다. 그 위에 적힌 문구는 소래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사그라지려는 용기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굴욕은 살아 있는 무왕에게 당한 것만으로도 족했다. 죽은 자에게까지 압도당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소래운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앞을 바라보았다.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관, 요요한 묵광(墨光)을 뿌리는 궤짝. 소래운은 궤짝의 뚜껑에 손을 대었다. 철컹`-` 단지 손을 대기만 했을 뿐인데, 궤짝은 섬뜩한 금속성과 함께 그 입을 활짝 벌렸다. 소역발산이 기대했던 무왕의 유진은 궤짝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그 안에는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 종이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로 오늘[今日], 복수를 이루다.> 그긍`-` 순간, 가벼운 진동과 함께 관 뚜껑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맵싸한 약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소래운의 눈앞에는 한 구의 벌거벗은 시신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발이, 다음에는 허벅지가, 그리고 몸통이... 군데군데에 부패된 흔적이 남아 있는 그 시신은, 마치 헝겊 인형을 꿰매 놓은 듯 끔찍한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드디어 관 뚜껑이 활짝 열렸다. "허억!" 관 속에 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소래운은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경악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가 저 안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일곱 명의 절대자에 의해 살해되어 아무도 모르는 밀지(密地)에 파묻힌 무왕의 후계자가 어찌 저 안에 들어 있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대전 전체가 가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석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그 진동은, 처음에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진동은 순식간에 증폭되어 대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이 일어선다!"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돌로 만든 바닥이 무슨 재주로 일어설까? 하지만 그의 외침은 사실이었다. 물위로 부상(浮上)하는 고래처럼, 높이 삼 장에 달하는 거대한 토벽(土壁)들이 대전 곳곳에서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것이다. "신도 선생!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거상련 홍당 당주인 방지중이 다급한 목소리로 신도설에게 물었다. 그러나 신도설은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부릅뜬 눈으로 대전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토벽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입에서는 부정과 경악이 뒤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팔괘(八卦)가 모두 혼문(昏門)이라니! 이것은 팔괘동장무토대진(八卦同葬戊土大陣)이다!" "팔괘동장무토대진? 그것이 왜 이곳에...?" 방지중은 강호 견식이 풍부한 사람답게 팔괘동장무토대진을 알고 있었다. 교수선생 신도설과 함께 남북쌍기사(南北雙機師)로 불리던 기관진식지술(機關陣式之術)의 대가, 괴노반(怪魯班) 연자단(燕仔端)! 육십사 개의 토벽으로써 그 안에 든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리는 팔괘동장무토대진은, 그 연자단이 자랑하는 오행관(五行關) 중 무토(戊土)에 해당하는 기문진이었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신도설 곁에 내려섰다. 여든두 개의 석계를 단숨에 달려 내려온 소래운이었다. "신도 선생! 무왕총도에는 오행관에 대해 적혀 있지 않았소?" 석계 위에 있을 때만 해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던 소래운이지만, 지금은 이미 거물에 걸맞는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사패의 일인이자 당대의 북정회주다운 면목을 보여 준다 아니할 수 없다. "총도에 적힌 기관은 지금까지 통과해 온 것이 전부였소!" 신도설은 굳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파훼법을 아시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천하에서 연자단의 기문진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노부밖에 없소이다. 어서 사람들을 이리로 모아주시오." 모든 종류의 기문진이 그러하듯, 이 팔괘동장무토대진도 발동과 동시에 인간의 방향 감각을 무용화시키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무왕총처럼 닫힌 공간 안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은 칼을 물고 엎어지는 일만큼이나 위험했다. "이쪽으로 모이시오!" 소래운은 내공을 돋우어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때늦은 감이 있었다. 스으으`-` 녹황색 연기가 바닥으로부터 피어올랐다. 연기는 바닥과 토벽의 틈새로부터 뿜어지고 있었다. "독연(毒煙)이다!" 무왕총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사패와 마맥회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였다. 한 길이나 솟아오른 독연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기문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점점 농밀해지는 독연과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있는 토벽. 군웅들은 초조해졌다. 의혈당의 둘째 당주 서문개복(西門開福)이 자신의 앞에 우뚝 선 토벽을 향해 거센 장력을 발출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쿵`-` 토벽이 둔중한 굉음과 함께 부르르 떨렸다. 이 소리를 들은 신도설은 다급히 외쳤다. "연자단의 기문진을 힘으로 부수면 안 돼!" 그러나 서문개복은 이미 평정을 잃은 뒤였다. 그는 가전의 벽산장(劈山掌)으로 토벽을 또 한 번 후려쳤다. 콰앙`-` 토벽이 폭발했다. 장력 때문이 아니라, 토벽 내부에 들어 있던 무엇인가가 외부로부터 전해 오는 충격에 반응하여 폭발한 것이다. "으악!" 산산조각난 토벽의 파편이 서문개복을 휩쓸었다. 그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잘 다져 놓은 고깃덩어리처럼 변해 버렸다. 그는 무왕총이라는 이름의 제단 위에 올려진 첫 번째 제물이 된 것이다. 서문개복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앙`-` 또 하나의 토벽이 폭발했다. 이번 폭발은 세 사람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연이어 울린 폭음이 대전 안의 모든 소리들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쾅`- 콰앙`-`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 비산하는 파편. 무왕총은 더 이상 죽은 자를 위한 무덤이 아니었다. 그곳은 산 자들을 위한 무덤이었다. 2 죽음의 기관이 작동된 것은 비단 북정회 군웅들이 있던 각룡전만이 아니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 2 묘왕동주 * * * 쉿`-` 방울뱀의 혓소리 같은 날카로운 음향이 울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연리가 지휘하는 마부에서도 기관에 대한 지식이 가장 해박하다고 알려진 독심제갈(毒心諸葛) 최엄(崔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 친구 하고는...! 그러기에 내가 발 밑을 조심하라고 했잖아?" 최엄과 친분이 있는 마부 고수, 흑묘군(黑猫君)이 최엄에게 다가갔다. 그는 최엄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줄로만 안 것이다. 하지만 예의 쉿, 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을 때, 그 또한 최엄과 마찬가지로 풀썩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발목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은 자신의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쓰러진 최엄이 상체를 쳐들며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단철신사! 연자단의 단철신사(斷鐵神絲)다! 모두 물러..." 하지만 최엄의 외침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통로 좌측 벽 하단에서 튀어나온 뾰족한 쇠송곳 하나가 그의 관자놀이를 여지없이 관통한 것이다. 최엄의 관자놀이를 관통한 쇠송곳은 빠르고 은밀하게 통로의 우측 벽 하단으로 사라졌다. 쇠송곳 끝에는 가느다란 은빛 실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최엄의 머리통은 은빛 실에 꿰인 채, 바닥으로부터 반 자 높이의 허공에 매달리게 되었다. 머리통은 무겁고 은빛 실은 예리하다. 최엄의 머리는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가는 실로 삶은 달걀을 자르듯, 은빛 실은 최엄의 후두부(後頭部)를 부드럽게 가르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너무도 깔끔하여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죽음 앞에 사람들은 할말을 잊었다. 쉿`- 쉬잇`-` 최엄의 목숨을 앗아 간 날카로운 음향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 음향은 통로의 벽을 타고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벽을 조심하시오! 단철신사는 그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소!" 매용소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통로는 너무 어두웠다. 또 인간의 뼈와 살을 두부처럼 잘라 버리는 은빛 실, 단철신사는 너무 빨랐다. "내 발목! 내 발목이...!" "아악!" 비좁은 통로는 곧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 * * 반호는 같은 고민을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마움의 대상은 물론 박한이었다. 석조 대전이 무너질 때, 박한은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려는 반호의 팔뚝을 낚아채며 몸을 날렸다. 당시 반호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어도 제대로 모르는 오랑캐 청년의 몸에서 어검비행이라는 엄청난 신공이 발휘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반호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박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처음으로 고민했다. 추락을 모면하기 위해 대전을 벗어난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결국 대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온 화접자는 이미 떨어진 뒤였다. 화접자 없이 칠흑 같은 미로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함몰이 완전히 끝난 대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저갱으로 변해 있었다. 대전 벽에 달린 유등(油燈)의 잔광(殘光)으로는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반호는 난감해졌다. 신공을 지닌 박한이야 무저갱을 지날 수 있다지만, 반호는 달랐다. 부상도 부상이거니와, 설령 멀쩡한 몸이었다 해도 그에게는 그만한 거리를 뛰어넘을 재주가 없었다. 박한은 의리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난감해 하는 반호에게 등을 내밀더니 업히라고 손짓했다. 반호는 사양하지 않았다. 사지 멀쩡한 놈이 누군가에게 업힌다는 것은 무척이나 창피한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신나는 비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몸뚱이 주위로 희미한 빛의 막이 씌워진 듯한 기분을 느꼈을 때, 반호의 몸은 어느새 대전의 반대편 출구에 도착해 있었다. 반호는 이때 두 번째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반호가 세 번째로 박한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은 다섯 장의 육포와 한 줌의 말린 살구 때문이었다. 반호는 사실 굶주려 있었다. 이 괴상망측한 동네에 들어오기 전에도 굶주려 있었거니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박한은 의리도 있거니와 눈치도 빠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한두 장도 아닌 다섯 장이나 되는 육포를 반호에게 건넸고, 반호가 그것들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우자, 한 움큼의 말린 살구를 덤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반호는 세 번째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호는 끝내 박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러하듯, 반호 역시 이민족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나이로 보아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박한이 아닌가! 그런 박한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도리를 외면한 반호는 곧 벌을 받았다. 벌은 어떤 종류의 냄새로부터 시작되었다. 반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코끝이 간지러웠다. 비린내 같기도 하고 노린내 같기도 한 고약한 악취가 통로 앞쪽으로부터 풍겨 오고 있었다. 그 악취는 반호로 하여금 지난날의 끔찍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로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을... 반호 곁에 있던 박한이 유등`-`도중에 지나친 어떤 대전의 벽에서 떼어 낸 것이다`-`을 통로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반호의 동공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으아악!" 반호는 비명을 지르며 박한의 등뒤로 몸을 숨겼다. 독거미였다! 통로 앞쪽을 가득 메우며 기어오는 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독거미들이었다! 독거미들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몸통이 붉은 놈, 몸통이 푸른 놈, 다리에 털이 숭숭한 놈, 대가리가 툭 튀어나온 놈... 놈들에게는 적아(敵我)의 구분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 심지어 다른 독거미들까지도 물어뜯었다. 그 무자비하고도 부단한 진군(進軍)이라니! 박한은 공포에 질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반호를 부축한 채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쪽의 통로 또한 독거미들에 의해 정복당해 있었던 것이다. 이 돌연한 사태는 박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검비행이 아니라 세상에 그 어떤 경신읍귀(驚神泣鬼)한 무공이라 할지라도 좁은 통로로 끝없이 밀려드는 독거미 떼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독거미에 대해 별다른 악감정이 없는 박한이 이럴진대, 독거미라면 자다가도 펄쩍 뛰는 반호는 오죽할까? "아아! 하늘은 어찌하여 저 빌어먹을 놈들과 반호를 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걸까!" 반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탄식을 토해 냈다. 그는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죽음도 죽음 나름이다. 그는 최소한 거미 밥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때 박한이 반호의 주먹을 덥섭 잡았다. 그러더니 반호의 주먹을 억지로 펴기 시작했다. "이, 이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반호가 물었다. 박한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반호의 손바닥 위에다가 글씨를 썼다. 그가 쓴 글은 매우 간단했다. <미안하오.> 반호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가 미안하단 말인가? 그 시간을 기점으로 반호의 의식은 정지되었다. 등뒤로 슬며시 세운 박한의 손칼이 반호의 뒷덜미에 떨어진 것이다. 반호로서는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장을 터뜨릴 것만 같던 공포도 의식과 함께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독거미 떼는 통로 양쪽 오 장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박한은 놈들이 내뿜는 역한 독기로 인해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박한은 해동검을 뽑았다. 검을 가슴 앞에 세운 채 잠시 정신을 집중한 그는 바닥을 향해 큼직한 원을 그렸다. 그리고는 왼쪽 손바닥을 원의 중심에 댄 뒤 짧은 기합을 토해 냈다. "음!"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잘 익은 수박을 도려내듯, 반경 한 자 반, 두께 두 자의 원판이 바닥으로부터 툭 떨어지며 박한의 손바닥에 붙어 나온 것이다. 박한은 빠른 손 놀림으로 반호를 들어 바닥에 뚫린 둥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몸뚱이가 꼬이고 팔다리가 뒤틀렸지만 지금은 모양새를 따질 경황이 없었다. 대충 구멍에만 맞게 쑤셔 넣을 뿐이다. 반호가 구멍 안에 들어가자 박한은 그 위에 원판을 덮었다. 자세도 괴상한 데다가 공기까지 잘 통하지 않을 터이니, 밑에 깔린 반호가 얼마나 답답할까? 기절했으니 망정이지, 만일 기절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독거미를 두려워하는 반호라도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 3 묘왕동주 독거미 떼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박한은 원판 위에 정좌한 뒤 유등을 껐다. 어둠 속에서 살아 온 독거미에게 있어서 유등의 잔광은 강력한 자극제가 될지도 모른다. 박한은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암흑과 비린내, 그리고 기분 나쁜 소음... 첫 번째 독거미가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박한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각이란 이런 암흑 속에서는 불필요한 감각, 그렇다면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독거미 떼는 서서히 박한의 몸뚱이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한은 정물(靜物)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를 움직이게 하고[動], 피곤하게 하고[困], 위험하게 하는[危] 모든 것들은 결국 그와 그의 검을 강하게 만드는 수행이었다. 용만 나루를 건너 중국에 들어온 것도,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의 검객들을 찾아다니며 검을 시험해 본 것도, 몇몇 친구들을 위해 얼굴도 알지 못하는 적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온 것도, 그리고 이 지옥 같은 곳으로 들어온 것도... 지난 팔 개월 동안 그가 행해 온 모든 것들은, 결국 그의 깨달음을 궁극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채찍이었다. 석삼도를 만난 이후 박한의 검은 변모하기 시작했다. 석삼도의 비검은 결코 죽음을 부르는 파괴에서 비롯되는 힘이 아니었다. 검과 사람과 세계가 일체가 될 때 생성되는, 무한히 밝은 친화력! 그것이 바로 비검이었다. 지금 박한은 자신의 비검이 어느 단계에 올랐는지 알지 못했다. 친화력 또한 미지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독거미에게 생명을 맡기는 것은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한에게는 수미산(須彌山)처럼 거대한 믿음이 있었다. 명경(明鏡)처럼 청정한 마음은 어떠한 사나운 존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이윽고 박한의 몸뚱이는 독거미 떼에게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 * * 무왕총에 진입한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기관뿐만이 아니었다. 총 내의 모든 대전과 모든 통로의 구조가 일거에 변하면서, 요소마다 매복해 있던 칠백에 달하는 철옥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사냥꾼이었다. 무왕총 안으로 들어온 사냥감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냥꾼이었다. 상성에서 곡물상으로 있다가 조추림에 의해 무왕총으로 합류한 마웅풍도 그런 사냥꾼 중 하나였다. 물론 그는 괜찮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마가검법(馬家劍法)의 유일한 전승자로 알려진 그는, 몇 년 동안의 상인 행세로 인해 살갗 밑에 비곗살이 붙긴 했지만, 그래도 과거의 실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후후! 우봉공께서는 기관이 만능인 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기계란 게 원래 이렇지. 결국에 가서는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잖아?" 십여 명의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통로를 걸어가던 마웅풍은 유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지껄였다. 통로를 따라 삼십여 장쯤 더 나아가면 여복전(女 殿)이라는 이름의 대전이 나온다. 마웅풍이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여복전에는 두 마리의 사냥감이 숨어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 사냥감은 여복전 내에 장치된 선풍쇄혼관(旋風碎魂關)으로 쓸어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선풍쇄혼관은 작동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가 이렇게 나선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지!' 마웅풍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검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람의 피 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의식 저편으로 깊이 침잠해 버린 예전의 살인 감각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킬 작정인 것이다. "철문입니다!" 수하 중 하나가 횃불을 높이 치켜 들며 말했다. 불빛을 받아 둔탁한 묵광(墨光)을 뿌리는 철문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만큼 견고해 보였다. "열어라!" 마웅풍이 짧게 명령하자, 복면인 하나가 달려와 철문 옆 석벽 속에 감춰져 있던 기관을 작동시켰다. 그는 마웅풍이 데려온 수하가 아닌, 몇 년 전부터 무왕총 안에서 기거하며 기관의 조작법에 대해 훈련받은 전문가였다. 무왕총의 총지휘자 자액은 무자비한 기관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매복한 모든 패거리에게 복면인과 같은 전문가를 딸려 보낸 것이다. 철컹! 쇠빗장이 풀리는 격렬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마웅풍은 허리에 두르고 있던 일곱 자 길이의 연검을 풀었다. 변화에 중점을 둔 마가검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시전할 수 있다는 가전의 명검, 칠척환요검(七尺幻妖劍)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 몸이나 풀어 볼까?" 마웅풍은 칠척환요검의 낭창낭창한 검신을 두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가장 먼저 철문 안으로 들어간 마웅풍이 가장 먼저 쓰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쓰러졌다고 해서 어디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한 자루의 낡은 지팡이가 가슴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딱딱한 대전 바닥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기이하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는 일조차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가위(可謂) 완벽히 제압당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전 바닥과 얼굴을 대고 있는 마웅풍의 귓속으로 답답한 신음성이 연속해서 들려 왔다. 모든 심음성마다 반드시 따라붙는 것은 털썩거리는 소리. 아마도 사람이 바닥에 쓰러질 때 울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전 안에는 어떠한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어떤 소녀의 짤랑거리는 목소리가 울릴 때까지는... "과! 정말 빠르네요! 제가 본 사람들 중에선 제일 빠른 것 같아요." "허허! 네가 늙은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노인의 너털웃음이 울렸다. 그러자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근데 이 자식들은 뭐죠? 북정회 사람들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매용소의 부하들도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 무왕총을 만든 무리일 게다. 이들은 무왕총에 들어온 사람들을 해치려 하지." "무왕총은 무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거잖아요? 근데 왜 기관을 작동시키고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죠?" "무왕총은 못된 사람들이 못된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커다란 함정이지. 노도는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강호에 나온 거란다." "못된 사람들이 누군데요?" "철옥이 아닐까 생각되는구나." 대전 바닥에 엎어져 있던 마웅풍은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저 노인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신비에 싸인 무왕총의 내막을 저리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소녀와 노인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매용소는 무왕총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던데요?" "철옥은 얼마 전에 두 패로 갈렸단다. 옥주 철면신이 이끄는 주류와 매용소, 비연리가 연합한 비주류로 갈렸지. 주류가 아닌 이상 무왕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거야.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겠지. 매용소도 능히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 칭할 수 있는 기재(奇才)니까." "매용소가 인중지룡이라고요? 그럼 우리 장 오라버니보다 더 낫다는 얘긴가요?" 소녀의 반문에는 불복의 기색이 역력했다. "장옥평도 물론 뛰어난 인물이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석삼도 선배가 아무 이유 없이 전인으로 삼지는 않았을 테니까. 안타까운 사실은, 당대의 쌍벽(雙璧)이라 할 수 있는 두 젊은이들이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지. 하늘의 장난치고는 너무 잔인한 일이야.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서 소녀와 노인의 대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마웅풍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신발 한 쌍을 볼 수 있었다. 발가락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낡은 신발. 그러나 추상처럼 준엄한 신발이기도 했다. "검을 보아하니 마가(馬家)의 후예로구나. 가문이 황폐하여 생활이 곤궁해진 것은 들어 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邪道)로 빠진다면 네 조부 되시는 진천(震天) 공(公)께서 저승에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느냐! 사도란 겉보기에는 화려해도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니, 너는 이 점을 명심하여 더 이상 선조들이 이룩한 협명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발로부터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매서운 질타를 당한 마웅풍이지만, 그는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아혈이 봉쇄된 탓도 있겠지만, 설령 말을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상대가 어디 보통 신발인가? 자신과 십여 명의 수하들을 눈 깜짝할 새에 제압해 버린 엄청난 고수의 신발이자, 죽은 지 사십 년이 넘는 조부 마진천(馬震天)을 들먹이는 까마득한 선배의 신발이 아니던가! 그가 무슨 대꾸를 할 수 있으랴! "한숨 자고 나면 혈도가 풀릴 게다. 횃불은 노도가 잘 쓰마." 눈앞에서 신발이 사라지고, 발걸음 소리도 점차 멀어졌다. 횃불이 사라지자 가뜩이나 어두컴컴하던 대전은 암흑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정적과 어둠 속에서 바닥과 입을 맞춘 채 엎어져 있는 마웅풍은, 저 신발의 임자가 누구인지에 관해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해야만 했다. 3 "정신이 드는가?" 열흘은 굶은 사람의 그것처럼 맥이 풀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듣는 이로 하여금 큰 신뢰감을 느끼게 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 4 묘왕동주 단탈은 눈을 떴다. 순간, 그는 눈이 부심을 느꼈다. '빛...?' 장님이 아닌 이상, 눈을 감았을 때 느끼는 기분과 눈을 떴을 때 느끼는 기분은 반드시 달라야만 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장님이 아닌 사람들은 시각이 가져다 주는 기쁨에 대해 망각하고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그 절망적인 암흑 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사람은 시각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마치 지금의 단탈처럼. 단탈이 눈두덩을 일그러뜨리며 빛이 선사하는 희열에 잠겨 있을 때, 힘없는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 왔다. "독인(毒人), 독인이라! 허허! 살아생전에 그 경지를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약흠도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서... 허허!" 단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누웠던 나무침상 옆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오관이 이리저리 일그러져 그 원형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추면인(醜面人)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단탈이 물었다. 추면인은 그런 단탈을 나무랐다. "약흠도 자네처럼 무례하지는 않았지. 나이 든 사람과 얘기할 때에는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단탈은 추면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나를 물속에서 꺼내 준 사람이 당신이오?" 추면인은 웃었다. 그는 이 두 번의 물음으로 단탈의 성격을 파악한 것이다. "자네를 물속에서 꺼내 준 것은 내가 아니네. 내가 한 일이야 별게 아니지. 자네가 물을 토하도록 몇 군데 눌러 준 것과 자네의 몸 속에 있던 엉킨 기혈을 풀어 준 것이 전부니까." 별게 아니라는 추면인의 말은 사실과 매우 달랐다. 고도의 침술로 단탈의 폐에 차 있는 물을 빼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엉망으로 뒤얽힌 단탈의 기혈을 순조롭게 만든 것은, 한때 강호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진 그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단탈을 위해 개정대법(開頂大法)의 일종인 생사환위요상술(生死換位療傷術)을 시전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불완전한 단탈의 독공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자신이 지닌 진원의 대부분을 소진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별게 아니라면 세상 천지에 별것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추면인은 단탈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달탈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입은 손해 따위는 그에게 있어서 눈곱만치도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추면인에게 중요한 일은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약흠이 이렇게 강한 후예를 키워 냈고, 하늘의 도움으로`-`정말로 하늘의 도움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약흠의 후예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약흠의 후예! 추면인이 세상에 뿌려 놓은 죄악의 덩굴을, 그리고 그 덩굴에서 비롯된 추면인의 모든 번뇌를 단칼에 끊어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나를 물속에서 꺼내 준 사람은 어디 있소?" 단탈이 물었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네. 아마도 무왕총의 기관 중추를 찾는답시고 싸돌아다니고 있을 테지." 단탈은 두 눈을 빛냈다. "무왕총? 이곳이 무왕총이오?" 이 물음이 의외인지라 추면인은 기이한 눈으로 단탈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온 건가?" 단탈은 추면인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는 이곳을 철옥의 비밀 거점으로 알고 있으며, 조추림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는 등을... 추면인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렇겠지. 약흠도 이 무왕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테니까." 단탈은 자꾸 약흠을 거론하는 추면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처음의 질문을 다시 했다. "당신은 누구요?" 추면인은 단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약흠에게 들었겠지? 내 이름은 이세명이라네."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사강(李師强)이었다. 그의 부친은 강호에서 매우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씨앗이 풍성한 탓에, 그는 형제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환갑이 다되어 얻은 막둥이인 그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는 부친과 형제들의 사랑 속에서 다복한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무이산(武夷山)을 지나던 그는 어떤 이인(異人)으로부터 한 권의 보전(寶典)을 얻게 되었다. 보전에는 화타(華陀)로부터 전해 오는 활인법(活人法)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가문의 괴이신랄한 사공이술(邪功異術)을 내심 못마땅해 하던 그에게, 화타의 보전은 새로운 인생 지표를 제시해 주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보전을 두루 익힌 그는 사강이라는 패도적인 이름을 '세상을 밝힌다'는 뜻의 세명(世明)으로 고치고,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활인행(活人行)을 시작했다. 보전에 적힌 비술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발길이 닿은 마을에는 창궐하던 역병(疫病)이 자취를 감췄고, 그의 손길이 닿은 집안에는 죽어 가던 환자가 벌떡 일어났다. 따듯한 그의 눈빛은 곧 성자의 눈빛이요, 자비로운 그의 행동은 곧 성자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성스러운 마음을 지닌 스승', 성심자(聖心子)라 불렀다. 이렇게 강호를 유전한 지 몇 해였던가... 어느 날 이세명은 청천 벽력 같은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가문, 복주에서 명성을 드날리던 그의 가문이 멸망했다는 소문이었다. 그의 가문을 멸망시킨 사람은 강호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을 지닌 사람이었다. 무왕 관산정! 그의 가문은 이 희대의 영웅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하나, 이름을 고치고 강호를 떠돌던 이세명뿐이었다. 그러나 강호인들 중 누구도 무왕의 이 악랄한 만행을 성토하려 들지 않았다. 무왕의 위명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문은 이미 무왕의 조작에 의해 강호의 공적으로 낙인찍힌 뒤였다. 생각해 보라! 죽은 아내를 되살리는 사악한 대법을 펼치기 위해 무려 천여 명의 목숨을 제물로 쓰려 했던 살인마의 가문을 어느 누가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겠는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 가문을 멸망시킨 무왕은 효웅이 아닌 영웅, 악인이 아닌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이세명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원앙제(鴛鴦祭)라는 이름의 그 사악한 대법을 결코 행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원앙제가 지닌 치명적인 오류는 그의 부친에 의해 이미 밝혀진 뒤였다. 원앙제는 유부에 머물던 혼백을 이승으로 불러올 수는 있지만, 혼(魂)과 백(魄)이 함께 머무는 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원앙제로 인해 되살아난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양(陽)의 백이 사라지고 음(陰)의 혼만 남게 되는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부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친이, 어찌 부인을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저주받은 괴물로 환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것은 부친을 껄끄럽게 여기던 무왕이 부친을 제거할 목적으로 강호에 유포시킨 날조된 소문이었다. 이세명은 번뇌에 빠졌다. 가문의 복수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악한 분노와 세상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선한 자비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마음속에서 충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이세명을 찾아왔다. 사패의 하나인 산동장가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장자(長子) 장후겸이 바로 그였다. 이세명과 장후겸의 만남. 그것은 향후 수십 년간의 강호 판도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소!" 단탈이 단호한 음성으로 추면인 이세명의 말을 잘랐다. 이세명은 시선을 돌려 석벽 위의 한곳에서 작은 불꽃을 피워 내는 심지를 바라보았다. 갈아 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심지는 아직 상당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그 심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세명은 시선을 다시 단탈에게로 돌렸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군. 그러면 자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단탈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매단 가리아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것을 본 이세명은 빙긋 웃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약 노인은 나를 강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당신을 죽여 달라고 했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암,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고말고." 이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탈을 보며 말했다. "자네는 약흠처럼 은원이 분명한 사람 같군."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게 받은 도움은 어떻게 갚을 생각인가? 별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없었다면 자네는 이렇게 앉아 있지도 못할 것 아닌가?"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 5 묘왕동주 단탈은 말문이 막혔다. 비록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단탈은 이세명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작지 않은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탈의 경지는 의식을 잃기 전보다 오히려 상승되어 있었다. 그토록 위태하게 흔들리던 절독공도 이제는 조화를 얻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세명은 단탈의 은인인 셈. 단탈은 약흠과의 계약을 위해 자신의 은인을 죽여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역설적인 고민은 이세명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 "자네는 약흠과의 약속을 지키게. 단,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단탈은 이세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 선뜻 수락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부탁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후후! 장사꾼 같은 표정일랑은 짓지 말게나. 자네와는 안 어울려." 이세명은 가볍게 웃은 뒤 덧붙였다. "과한 부탁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것은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단탈의 두 눈에 의혹의 기미가 내비쳤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이 이상한가?"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단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그것 보게. 내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지 않는가?" 장후겸은 이세명에게 연수를 제안했다. 그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 각자의 한을 풀어 보자고 말했다. 이러한 유혹은 번뇌에 시달리던 이세명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세명은 장후겸과 손을 잡고 무왕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기에 이르렀다. 이세명에게는 강호제일의 성인 성심자라는 명성과 그의 가문이 누백년에 걸쳐 축척해 온 괴공이술이 있었다. 장후겸에게는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전전하며 규합해 놓은 비밀스러운 세력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결합 앞에서는 천하의 어떠한 강자라도, 천하의 어떠한 세력이라도 맥을 못 추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왕은 단순한 강자가 아닌 전능자(全能者)였고, 무림맹은 단순한 세력이 아닌 강호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모든 지혜를 짜내어 무왕과 무림맹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무왕이 건재한 무림맹은 어떠한 계교로도 파괴할 수 없는 완벽한 집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어떠한 낙담 속에서도 쉼없이 흘러갔다. 그런데 무왕과 무림맹을 무너뜨릴 무기는 바로 그 '시간의 흐름'이었다. 이세명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영락(永樂) 19년(1421), 그러니까 무왕의 나이도 어느덧 여든을 바라봐, 영원히 꼿꼿하리라 믿었던 그의 허리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앞으로 굽어질 무렵이었다. 첫 번째 징후는 주종간의 불화로 나타났다. 무림맹을 깨지지 않는 철옹성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일곱 명의 기라성 같은 강자, 삼마와 사패가 무왕에게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왕의 노쇠가 그들의 반발에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무왕이 구상한 권력 이양 방침`-`무림맹주직을 아들 관명에게 물려주려던`-`은 그들의 반발에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세명과 장후겸은 이 상황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수없이 많은 눈을 풀어 무림맹의 변화를, 갈라지기 시작한 주인과 신하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왕이 사망하기 한 해 전인 영락 이십일 년의 어느 날, 두 사람은 결정적인 비밀 하나를 움켜쥐게 되었다. 삼마와 사패에 의한 관명 살해 음모를 발견한 것이다. 이세명과 장후겸은 결코 관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이목을 동원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결국 관명은 삼마와 사패의 마수 아래 희생당하고, 그 빈자리는 천면괴라는 가짜가 대신하게 되었다. 복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무왕을 죽인 것이 당신이오?" 단탈이 물었다. "무왕을 죽였다... 그 표현은 옳지 않은 것 같군. 어쩌면 그 반대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 단탈은 이세명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세명은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하려 들지 않았다. "무왕은 그때 괴질에 걸려 있었지. 나는 진맥을 이유로 무왕을 만났고, 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네. 무왕은 한 가지 기독(奇毒)에 중독되어 있었고, 나는 독에 중독된 사람을 잘 고치기로 유명한 의원이거든." "독?" 단탈은 부쩍 흥미를 느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을 중독시킨 독은 과연 무엇일까? 무왕이 중독된 독은 본초학(本草學)에 정통한 이세명으로서도 처음 대하는 괴이한 것이었다. 무왕의 혈액을 채취해 한 달이 넘게 연구하고서야, 이세명은 간신히 그 기독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기독은 절정에 이른 독공고수가 수십 년 동안 체내에 축적한 인독(人毒)이었다. 비록 미량에 불과하지만 무왕은 과거 인독에 당한 적이 있었고, 세월이 흘러 육신의 노쇠가 시작되자 당시 몰아 낸 줄로만 알고 있던 독성이 다시금 골수를 침범해 들어온 것이다. 인간에게는 천적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독에도 천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독이란 해약이 존재하지 않는 최고이자 최후의 독인 것이다. 그 순간, 이세명은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산독자 약흠! 당대에 인독을 사용할 수 있는 독공고수는 오직 그뿐이었다. 무왕이 무림맹을 창설하기 직전, 무림맹의 가입 건을 놓고 약흠과 싸웠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무왕과 약흠의 싸움은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격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승부 또한 강호에 알려진 것처럼 무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기적으로 보면 무왕의 승리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결국 약흠이 승리한 셈이었다. 불패(不敗)로 알려진 무왕의 연혁에는 이처럼 누구도 모르는 무승부의 기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무왕과 약흠, 당사자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이세명과 장후겸은 머리를 맞댔다. 무왕은 이미 소생이 불가능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는 무엇일까? 살해된 관명. 그리고 죽어 가는 무왕. 이세명과 장후겸은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무왕에 대한 이세명의 복수와 가문을 되찾고자 하는 장후겸의 염원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계획! 그 계획은 설한귀원대계(雪恨歸元大計)라고 명명되었다. "계획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 그 중에서 설한(雪恨)은 이루어진 셈이니, 이제는 귀원대계(歸元大計)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여기까지 말한 이세명은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이렇게 덧붙였다. "산 자를 죽여 죽은 자를 되살리는 원앙제...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의 가문, 복주이가가 고안해 낸 그 원앙제가 계획의 시작이었네." * * * 막홍은 천성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강호인의 아들로 태어나 강호인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막홍이 천성적으로 강한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강호에서 인정받을 만한 재주가 필요했다. 그는 그러한 덕목을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하는 자 모두가 성공하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박정한 것이 하늘이고 빡빡한 것이 세상인지라, 그는 그가 투자한 노력만큼이나 커다란 좌절을 가슴에 안은 채 청춘을 흘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편벽에 빠지기 쉽다. 일단 편벽에 빠진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막홍이 바로 그런 예였다. 한번 좌절을 맛본 막홍은 우선 자신이 보유한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한 번 본 것을 낱낱이 기억하는 오성을 지니지 못했다. 뜻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근골을 지니지 못했다. 한번의 눈길, 한번의 손길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천품을 지니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집념이 있었다. 또한 필요하다면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는 독심(毒心)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좌도(左道)의 방술(傍術)은, 마치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순백의 설원(雪原)처럼 매력적인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좌도의 방술에 미친 듯이 탐닉했다. 진주(晉州)의 배교(拜敎), 서역(西域)의 음지밀교(陰地密敎), 모산(茅山)의 화화문(化化門)... 막홍은 강호인들에게 지탄받아 온 좌도 문파들의 흔적을 더듬었다. 주문과 술법과 약물을 이용한 그의 방술은 날로 깊이를 더해 갔다. 그런 막홍에게 어느 날,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수많은 좌도술사들이 꿈속에서도 이루고 싶어하던 환혼술(還魂術)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6 장 - 6 묘왕동주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가치가 일성(一城)과 맞먹는 영약신수(靈藥神水)들이 막홍에게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좌도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복주이가의 원앙제도 마음껏 참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새하얀 옥관에 담긴 한 구의 시신`-`대법에 쓰일 가장 중요한 재료이기도 한`-`을 보았을 때, 그는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고 말았다. 그 시신은 가장 완벽한 자의 것이었다. 옥에 티라고, 그 시신이 본래 지니고 있던 영혼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무슨 까닭인지 막홍의 상관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누구의 영혼이면 어떠랴! 막홍은 가장 완벽한 자를 실험의 재료로 삼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막홍은 식음을 잊은 채 환혼술에 몰두했다. 그러기를 십여 성상... 드디어 복주이가가 고안하고 막홍이 발전시킨 원앙제라는 이름의 대역사가 완성되었다. 공허하기만 하던 막홍의 자존심은 비로소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막홍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작품을 감개무량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랑스러웠다. 하늘의 뜻과 자연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대역사를 완성한 자신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다. 문득, 막홍이 있던 대전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홍! 시간이 되었다!" 막홍은 그것이 자액의 목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자액은 이 대전과 멀리 떨어진 기관 중추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이 대전까지 실어다 준 것은 다름 아닌 이설신관이었다. 막홍은 품에서 작은 옥병을 꺼냈다. 그 옥병 안에는 인혼액(引魂液)이라는 이름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인혼액은 그의 걸작품을 움직이는 자극제였다. 막홍은 감개한 눈빛으로 걸작품을 바라보았다. 그의 걸작품은 시커먼 철가면을 쓰고 있었다. 막홍은 그 철가면의 입 구멍으로 인혼액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옥주, 일어나셔야 할 때입니다." 그으흐`-` 철가면의 입 구멍에서 기괴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음 순간, 막홍은 철가면의 눈 구멍에서 뿜어 나온,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두 가닥 청광(靑光)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철면신이 바야흐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묘왕(苗王) 묘왕동주 제 27 장 묘왕(苗王) 1 귀원대계! 그것은 떠난 자가 돌아오기 위한 계획이었다. 보금자리를 잃은 자가 보금자리를 되찾기 위한 계획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잘못된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계획이었다. 홍안의 소년 시절... 단지 서출(庶出)이란 이유만으로 동생 장일기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고, 석강과 진규, 두 시종만을 거느린 채 가문으로부터 축출당한 장후겸. 그의 삶은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험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고난을 견뎌 냈다. 그리고 하나의 강력한 방파를 창설할 수 있었다. 남마련이 무너지고 북정회가 해산한 후, 단일 세력으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된 철옥! 장후겸은 그 철옥의 주인, 철면신이 된 것이다.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말이 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세상을 영리하게 살아 가는 데 있어서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지는 몇 가지 교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 특히 사소취대라는 말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은 장후겸의 귀원대계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장후겸을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귀원대계는 철옥을 버림으로써 산동장가 가주의 위를 되찾는 것을 골자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장후겸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고통과 원한으로 점철된 장후겸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을,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심장을 씹는 기분으로 귀환만을 간구해온 장후겸의 염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장후겸은 버릴 수 있었다. 철옥이 아니라 나라라 할지라도, 철면신의 권세가 아니라 황제의 권세라 할지라도, 그는 가차없이 버릴 수 있었다. 산동장가의 진정한 가주가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지고무상의 가치라 할지라도 헌신짝처럼 팽개칠 수 있었다. 귀원대계는 복수를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혐오스러운 피비린내는 아우 장일기와 그 직계 자손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복수 이전의 교훈, 형이 아우에게 내리는 교훈이었다. 가족들에게 배신당한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우 장낙웅만큼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장후겸은 두 제자를 산동장가의 사위와 며느리로 들여보내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수 있었다. 가주가 죽더라도 산동장가의 원기(元氣)만큼은 남아 있어야 하기에, 우연을 가장하여 무왕총도의 일부를 장일기의 손에 흘러 들어가도록 조작하는 번거로움까지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번거로움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장낙웅은 무왕총도에 눈이 뒤집혀 세가의 정예를 외부로 내돌렸고, 장후겸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을 움직였다. 결국 장낙웅은 가족의 손에 의해 죽었다. 장후겸은 아우에게 교훈을 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비록 장낙웅의 두 아들 중 하나는 의외의 생명력을 발휘하여 그의 교훈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가 유약한 조카쯤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다. 설사 그 조카가 삼자의 하나인 석삼도의 고제(高弟)라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주이가의 마공과 무왕의 무학을 한 몸에 집대성한 자신이 아니던가! 석삼도 본인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의 상대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귀원대계의 완성은 목전에 도래해 있었다. 보라! 공포에 질린 양 떼처럼 우왕좌왕하는 군웅들을! 그들은 본디 양이 아니었다. 면면이 한 지방을 주름잡을 수 있는 호랑이들이었다. 그러나 장후겸의 이십 년 적공이 담긴 무왕총은 사나운 호랑이를 양으로 바꿔 놓았다. 이제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단 발동된 무왕총의 기관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찍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만들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웅들의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기적을 가져다 줄 구원자의 출현을 목메도록 간구할 때... 바로 그때, 장후겸은 구원자로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것이다. 구원자를 마다할 가족이 있을까? 강호의 대영웅을 마다할 가족이 있을까? 그때가 되면 사십여 년 전 그를 내쳤던 가문의 늙은이들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칠 것이다. 살아남은 군웅들도 감격에 찬 목소리로 그의 영웅적인 업적을 칭송할 것이다. 만인의 찬양을 받으며 산동장가로 들어설 때, 장후겸의 귀원대계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 * * "화도(火刀)를 가진 사람 있나?" "예!" 누군가 대답했다. 화도끼리 부딪치는 찰칵거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어둠 속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곧 주위를 밝혔다. 매용소는 뒤를 돌아보았다. 공포에 사로잡힌 수많은 얼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들 너머로 시커먼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통로가 자리잡고 있었다. 저 통로 어딘가에는 여전히 단철신사가 튀어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생명이 끊어진 시신들을 상대로 그 능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을 것이다. 가벼운 진저리가 매용소의 두 어깨를 흔들었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참혹한 죽음, 참혹하게 죽어 간 수하들... 매용소는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수하들을 아끼는 마음이야 결코 작지 않지만, 지나간 일은 잊어야만 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지존이기 때문이다. 매용소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어느 한 사람의 얼굴에 이르렀을 때, 그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친 곳은 없소?" 매용소의 시선이 향한 사람은 일행 중 유일한 여인, 나라아합이었다. "괜찮아요." 나라아합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인의 몸으로 아까와 같은 일을 겪고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본디 매용소는 나라아합을 무왕총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이미 위지(危地)로 판명된 무왕총에 무공도 모르는 여인을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비단 무모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단탈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 나라아합이 그녀답지 않은 강경한 어조로 입총을 희망했을 때, 매용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매용소는 지금도 당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집을 부리다가도 결국 어머니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처럼, 매용소는 형용하기 힘든 감미로운 복종심에 사로잡힌 채 그녀의 청을 수락해 버린 것이다. 나라아합의 품에는 미오가 안겨 있었다. 미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수고했소, 채 노인!" 매용소는 나라아합의 옆에 서 있는 채앙을 치하했다. 가녀리기만 한 여인과 아이가 그 끔찍한 통로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왕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매용소는 나라아합과 미오의 안전을 채앙에게 맡겼던 것이다. "맡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채앙의 전신에는 자잘한 혈흔이 비치고 있었다. 단철신사로부터 두 사람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얻은 상처였다. 그러나 채앙의 눈빛은 여전히 냉정하고 고요했다.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일행의 면면을 모두 점검한 매용소는 비연리를 비롯한 마부 고수 십여 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비연리도 단철신사에 당한 것일까? "비 부주를 본 사람 없나?" 매용소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비 부주께서는 반대쪽으로 피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반대쪽? 그렇다면 뒤로 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매용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은 심각했다. 기관에 정통한 독심제갈 최엄이 죽은 것도 그렇거니와, 길잡이가 사라진 상태에서 일행이 두 패로 나뉜 것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매용소는 문득, 한 쌍의 심유로운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운하에서의 실패 이후 줄곧 우울한 표정을 떨치지 못하던 모사 전운리였다. 전운리는 매용소의 시선을 받자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소생도 기관지학에 대해 약간 배운 적이 있지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선두에서 길을 터보고 싶습니다만..." 매용소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해주시겠소?" 전운리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일행이 나뉜 것은 비단 매용소의 무리뿐만이 아니었다. 팔괘동장무토대진에 갇힌 북정회의 군웅들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독연과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토벽을 피해 우왕좌왕하다가, 대전의 벽 곳곳에 입을 벌리고 있는 여섯 개의 통로를 발견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 묘왕동주 통로 저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급한 것은 발등에 떨어진 불. 대전을 꽉채운 독연과 눈앞에서 뻥뻥 터져 나가는 토벽이었다. 이미 삼십이 넘는 희생자를 낸 북정회 군웅들은 이후의 일을 느긋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군웅들은 폭발을 피해 가까운 통로로 몸을 피했고, 그 결과 입총부터 줄곧 함께 행동하던 북정회 군웅들은 무왕총의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본디 팔괘동장무토대진은 도살을 위한 기관이라기보다는 뭉쳐 있던 군웅을 분산시키기 위한 기관이었다. 무왕총을 움직이는 자들은 그 안에 들어온 손님들을 몰살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만약 몰살이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간단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통로를 수귀관으로 돌린 뒤, 회하의 물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왕총,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되는 귀원대계의 목적은 몰살이 아니었다. 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단계적인 과정과 신중한 연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팔괘동장무토대진은 본래의 역할을 완수했다. 뿔뿔이 흩어진 군웅들... 무왕총은 그들을 위해 몇 가지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촤차창! 좌우로 환상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자모권(子母圈)은, 거대한 철부(鐵斧)를 치켜 들고 소역발산 막강을 향해 달려가던 텁석부리의 등줄기를 여지없이 갈라 버렸다. 텁석부리는 이제껏 달리던 탄력으로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척추가 끊어진 상태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법. 그는 결국 철부를 내리찍지 못한 채 픽 고꾸라지고 말았다. "막 현질! 어서 일어나게!" 편복취혈( 取血)의 신쾌한 자모권초로 텁석부리를 쓰러뜨린 양충은, 넋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소역발산을 향해 외쳤다. 이 미련한 놈은 일신에 익힌 외가공부만 믿고 겁없이 날뛰다가, 양쪽 허벅지에 기습적인 삼 도를 얻어맞고 저렇게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우라질!" 소역발산은 욕설을 내뱉으며 껑충 뛰어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 다리가 남아나지 않았을 테지만, 원체 튼튼한 몸뚱이인지라 별다른 손해는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새끼!" 소역발산은 벼락처럼 호통을 치며 자신에게 삼 도의 피해를 안겨 준 콧수염의 중년인에게 달려갔다. 콧수염의 중년인은 날렵하게 몸을 빼내며 재차 도를 휘둘렀지만, 이는 성난 멧돼지를 바늘로 찌르는 격. 소역발산은 우악스럽게도 어깨로 도초를 받아 내었고, 당황해 하는 상대를 향해 뇌공교격(雷公交擊)의 일권을 내질렀다. 우르릉, 하는 뇌성이 울리며 콧수염의 중년인은 뒤로 날아갔다. 그의 가슴은 이미 엉망으로 으스러져 있었다. 천마문이 자랑하는 뇌공권(雷公拳)의 위력이었다. "뒤를 조심해!" 양충의 외침과 함께, 소역발산은 등을 후려치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내뻗은 진기를 수습하기도 전, 철편(鐵鞭) 한 자루가 그의 널찍한 등판을 후려친 것이다. 외가공부로 보호받는 몸뚱이라지만 결국 피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아픔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으야아압!" 소역발산은 한 쪽 다리를 축으로 몸뚱이를 크게 돌리며, 마치 성난 곰이 나무를 후려치듯 오른손을 크게 휘저었다. 칠 척에 가까운 거구가 쭉 뻗어 돌리는 손짓이었으니, 그 위력이 미치는 영역은 놀랄 만큼 넓었다. "엇!" 철편을 휘둘렀던 사내는 소역발산의 솥뚜껑만한 손에 그만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드득`-` 마치 백숙의 다리가 뜯기듯, 사내의 팔은 몸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사내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곧바로 날아든 곤봉 같은 흉기에 머리통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그 흉기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팔이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알든 모르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크아아`-`" 소역발산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팔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인간의 팔이란 것이 의외로 쓸 만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듯, 병기고 사람이고 걸리기만 하면 사정없이 부러져 나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한두 놈 죽이는 것은 대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한 사실은 소역발산도 잘 알고 있었다. 소역발산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북정회 무인들이 악전고투를 벌이는 곳은 벽면의 유등이 기분 나쁜 빛을 흩뿌리는 이름 모를 석조대전. 팔괘동장무토대진을 피해 통로 중 한곳으로 뛰어든 그들이, 암기가 쏟아지는 살벌한 통로를 이백 장이나 통과한 뒤에야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석조대전의 첫인상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기문진과 암기에 혼이 날 대로 난 소역발산의 눈에는 평화로운 안전 지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은 석 자 두께의 철문이 입구를 가로막았을 때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적이 나타났다. 놈들 중에는 알 만한 얼굴도 제법 있었다. 소역발산의 사촌 동생인 막호(莫虎)를 죽인 자는 관중에서 이름을 떨치던 관중철인산 왕호였고, 양충의 자모권에 척추가 갈라진 텁석부리는 종남산에서 활약하던 녹림거흉 남산철부(南山鐵斧)였다. 그런 흉흉한 놈들을 꾸역꾸역 토해 놓은 이 석조대전은 더 이상 안전 지대가 될 수 없었다. 쌓여 가는 피로, 쓰러지는 동료들... 시간이 갈수록 소역발산의 눈빛은 원독으로 물들었다. 그는 적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무왕총에서 그가 만날 수 있는 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개 같은 철옥 새끼들아`-`!" 소역발산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 * * 비연리는 식물로부터 발출되는 향이나 가루에 대해 유달리 민감한 체질이었다. 오독기서생 여문비가 뿌리던 박하향에 곤욕을 치른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포자(胞子), 그것도 독분(毒粉)이 가득 담긴 포자가 주렁주렁 매달린 거대한 고사리는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꽈릉`-` 통로가 무너질 듯 진동하며 시뻘건 화염이 고사리들을 휩쓸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겁한 비연리가 고사리를 향해 벽력구를 집어던진 것이다. 그런데 비연리의 곁에 있던 두의는 다른 이유로 질겁했다. "부주님! 기, 기관이... 아무래도 화기는 자제하시는 편이...!" "자제? 저 끔찍한 놈들을 보면서도 자제라는 말이 나와?" 말과 함께 비연리는 또 하나의 벽력구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문비까지 달려들어 비연리의 팔에 매달려야만 했다. "비 형님! 차, 참으십시오! 독이라면 소, 소제가 조금 아니까 이것들은 소제가 맡겠소이다!" 비연리는 여문비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맡겠다고?" 그의 말투에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다. 박하향이나 뿌리고 다니는 놈을 내가 어떻게 믿겠느냐는 듯. "한 번! 딱 한 번만 이 아우를 믿어 보시구려, 형님!" 흰머리가 성성한, 안면이 있는 후배가, 더구나 유서 깊은 방회의 주인이 이렇게 사정조로 나오는 데야, 아무리 식물에 대한 혐오감이 뼈에 사무친 비연리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꺼내 든 벽력구를 품속으로 갈무리했고, 여문비와 두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문비는 자신이 뱉은 말을 실천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 화접자를 내밀어 고사리가 빽빽한 통로를 한참 동안 조사하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요?" 비연리는 혹시라도 능력이 모자라 저러는 것이 아닌가 싶어, 품 속의 벽력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뭐가 이상해?" "북쪽에서만 자라는 장군궐(將軍蕨)이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하고, 또 그 장군궐에 독포자가 달린 것도 이상하고..." "이 징그러운 놈의 이름이 장군궐인가?" "이렇게 큰 궐초(蕨草:고사리)는 장군궐밖에 없지요." "장군궐이고 졸병궐이고 간에 빨리 어떻게 해보게." "그런데 누군가 먼저 지나간 것 같은데요?" 여문비의 이 말은 가뜩이나 주름 많은 비연리의 얼굴을 더욱 쭈글쭈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문비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이런 초목진(草木陣)은 처음이 가장 무서운 법인데, 이미 살기가 한풀 꺾였으니 지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비연리는 가타부타 대답없이 얼굴만 더 찡그렸다. 초목진이 발동된 상태에서 지나갔다면, 무왕총의 기관을 작동한 자들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헤어진 매용소 일행이었을까? 하지만 매용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2 묘왕동주 어쨌거나 여문비는 한번 믿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선 독의 침범을 막는 단환을 사람들에게 복용시킨 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장군궐이 울창한 통로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독초에 대한 그의 지식은 박대하기 이를 데 없어서, 단지 느낌만으로도 포자가 터지는 시간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뒤따르던 비연리는 내심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십여 장쯤 전진했을까? 여문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왜 그러는가?" 비연리가 묻자 여문비는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몇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살갗이 시커멓게 변색된 것을 보면 독분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비연리는 이 무왕총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무섭다 무섭다 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무왕총이 철면신의 소굴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고, 비연리로 말하자면 철면신을 무척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연리가 무왕총 안으로 들어온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 철면신을 제거할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연리의 이러한 판단은 제법 논리적인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철면신이 보유한 힘과 북정회가 보유한 힘은 우열을 논하기 힘들 정도로 백중했다. 그리고 양측 모두 비연리·매용소가 연합한 힘보다 두 배 이상 강했다. 세 개의 세력이 대립한 상황에서 가장 약한 세력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두 개의 강한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틈을 노려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는 길! 그것이 아니면 불리한 형세를 뒤집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무왕총처럼 밀폐된 공간 속에 두 개의 강한 세력이 모인 것은 가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래서 비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무왕총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어부지리를 취하기 위해! 그러나 비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철면신의 힘과 북정회의 힘은 물론 백중했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 위에 탁 트인 하늘이 있을 경우의 얘기였다. 단순히 닫힌 공간이라고만 생각한 무왕총이 오직 기관만으로도 수많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서운 함정임을 알아차렸을 때, 비연리는 이 안에서는 바깥 세상의 역학 관계가 아무런 소용도 없음을 깨달았다. 철면신이 거미라면 무왕총은 거미줄. 거미는 거미줄 위에 있을 때 몇 배 강한 능력을 발휘한다. 무왕총 안에서의 철면신은 바깥 세상의 역학 관계 따위는 일축해 버릴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문득 자신의 신세가 거미줄에 걸린 곤충과 같다고 생각한 비연리는 한 줄기 섬뜩한 오한에 몸을 떨고 말았다. 바로 그때, 통로 앞쪽에서 불규칙한 금속성이 들렸다. 그 여운이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금속성의 진원지는 제법 먼 거리인 것 같았다. "마저 뚫게나! 가봐야겠네!" 비연리는 여문비를 재촉했다. 삼십여 장을 더 지나자 통로가 끝났다. 통로의 끝은 하나의 대전과 연결되었고, 금속성은 그 안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비연리는 대전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는 곧 사람과 쇠붙이가 한데 어울려 서로를 치고 받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잘 짜여진 배합을 이루며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는 쇠붙이들의 정체는 정교한 기관에 의해 작동되는 동인(銅人)이었다. 소림사의 동인관(銅人關)이나 목인관(木人關)이 강호일절이라 하지만, 이 대전에서 움직이고 있는 동인들도 그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 동인과 싸우는 사람들을 살펴보던 비연리는 깜짝 놀랐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 것이다. 그때, 동인들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치르던 사람들도 대전으로 막 들어온 비연리 일행을 발견했다. 그 순간, 몇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비연리, 이 간악한 놈!" "형제를 배신하고 영달을 꾀하더니, 이제는 더러운 술수로 사람들을 몰살하려 하느냐!"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는 욕설에, 비연리는 억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형제를 배신하고 영달을 꾀했다는 욕이야 그렇다 쳐도, 저 멍청한 놈들은 비연리가 무왕총의 기관을 작동한 자들과 한패인 줄 알고 있었다. 비연리도 죽도록 고생하는 마당인데!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쓰는 다른 마맥회 무사들과는 달리 좌훈은 비연리에게 욕하지 않았다. 비연리에 대한 원한이야 누구 못지않지만, 그는 욕이란 것이 뱃가죽을 째고 들어가거나 머리통을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욕할 힘이 있다면 차라리 아껴 두었다가, 비연리의 뱃가죽을 째거나 머리통을 부수는 데 쓰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마맥회 삼대고수 중 하나이자 도무비의 진전을 이어받은 탐혈붕(貪血鵬) 나치(羅恥)도 좌훈과 같은 생각임이 분명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비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철컹! 철컹! 몇 구의 동인이 나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나치는 비연리의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치를 보호하기 위해 쩔쩔매야만 했다. "여어! 누군가 했는데 나예(羅譽)로군! 그 동안 잘 지냈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비연리는 조금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나치에게 손을 흔들었다. 으득`-` 나치의 턱 근육이 비틀렸다. 얼굴 하관을 뒤덮은 험악한 칼자국들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꿈틀거렸다. 그의 본명은 '예(譽)'였다. 하지만 도무비가 죽는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던 그날 이후, 그는 '예'라는 멋진 이름을 버리고 '치(恥)'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택했다. 명예가 치욕으로로 바뀐 그날! 남마련이 화염에 휩싸이던 그날... 비연리는 그날의 장본인 중 하나였다. 그 비연리가 지금 옛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나치가 어찌 참겠는가! 빡`-` 나치의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던 동인 하나가 시뻘건 거치도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나치의 육 척 거구는 비연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 * * 낙오자의 궁색함이란 원래 재주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 법이라서, 황금왕 소래운조차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감탄했던 권각술의 달인 방지중은 지금 이 순간, 그 놀라운 무공이 무색할 정도로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본디 방지중은 어떤 무리에 속해 있었다. 신도설을 중심으로 각룡전을 빠져 나온 그 무리는 기문진에 의해 뿔뿔이 흩어진 여러 무리들 중에서 가장 확실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기야 소래운·서문도천·장옥평 등 북정회 사인수령 중 세 사람과 마맥회주 마봉황이 그 안에 있었으니, 각 문파의 정예들이 다수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방지중이 그런 무리에서 떨어져 낙오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에 의한 행동이었다. 소래운을 호위한 채 무왕총의 입구를 향해 달려가던 그는 어느 순간, 이번 발굴대에 참가한 소래운의 양자 소단(蘇丹)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소단의 나이는 이제 갓열넷, 이번 신양행이 첫 출도였다. 방지중은 사색이 되었다. 난생처음 강호에 나온 소년이 한치 앞도 짐작할 수 없는 무서운 함정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단의 본명은 방단(方丹), 바로 방지중 자신의 막내 아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방지중은 소래운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방지중은 아무도 없는 통로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우르릉`-` 돌연 엄청난 진동이 통로를 뒤흔들었다. 방지중은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진동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진동은 곧 지나갔다. 방지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들고 있던 화접자로 통로를 비춰 본 순간, 그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통로의 방향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달려온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까까지만 해도 벽으로 막혀 있던 자리에는 처음 보는 통로가 뚫려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이룩한 건축물일진대, 어찌하여 이런 신비막측함이 깃들여 있단 말인가! 그때, 새로운 통로 저편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 소리가 울려나왔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년의 비명 소리였다. "단(丹)아!" 소스라치게 놀란 방지중은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갔다. 두 개의 통로가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이백 평 남짓한 장방형의 석실... 석실의 내부는 밝은 편이었다. 벽면의 상단에 장치된 이십여 개의 유등 때문이었다. 유등이 뿌려 내는 불빛 아래로 방지중을 발견했을 때, 온이는 잠깐 동안 의아함을 느꼈다. 방지중은 분명히 소래운과 함께 있었고, 온이가 확인한바 그들이 속한 무리는 무왕총의 동쪽 구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방지중은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 버지..."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3 묘왕동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온이의 발치에서 울렸다. 온이는 그 목소리의 임자가 자신에 의해 한쪽 어깨가 으스러진 소년임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었던가? 그래서 돌아온 거로군." 온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소년의 다친 어깨를 툭 찼다. "아악!" 소년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온이는 나직이 혀를 차며 방지중에게 말했다. "며칠 전에는 방철의 목을 잘랐지. 아무래도 당신과 나는 전생에 인연이 깊은 모양이군." 방지중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네놈이 감히..." 하지만 방지중은 꼼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온이의 발이 소년의 머리 위에 지그시 올려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흐흐!" 온이는 득의의 웃음을 떠올렸다. 북정회의 낙오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통로를 점검하던 그가 방지중을 만난 것은 분명히 계획에 없던 일이다. 방지중은 사패에 필적하는 거물. 만약 일 대 일로 만났다면 그는 감히 방지중을 상대할 생각을 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온이의 뒤에는 십여 명의 호밀령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것은 확실한 인질이 있다는 점이다. "아들 둘을 머리통 없는 귀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온이는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호밀령 중 세 사람이 방지중에게 다가갔다. "이... 이 비열한 놈!" 만면에 살기를 띤 채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면서도, 방지중은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이대로 그가 죽어 준다면 온이는 과연 그의 아들을 살려 줄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 뻔한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가 먼저 움직여 아들을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세상 아버지들의 공통된 마음, 자식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놈은 이미 종이호랑이다! 마음껏 찢어 주거라!" 온이가 차갑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각기 다른 세 종류의 병기가 방지중을 향해 퍼부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방지중을 구한 것은 온이의 등뒤에서 난데없이 터져 나온 고함 소리였다. "우워어어억`-`!" 온이는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뒷전의 호밀령들을 단번에 갈라 치며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빛무리 하나를 목격할 수 있었다. 대경 실색한 온이가 옆으로 물러난 것과 방지중이 세 호밀령을 향해 반격을 개시한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빛무리는 온이의 옆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빛무리로부터 뚝 떨어져 자신을 향해 몸을 날려온 장년인을 보았을 때, 온이는 머릿속으로 재수없는 이름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반호?' 이때 이미 온이는 재수없는 이름의 주인과 한 덩어리가 된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수귀관에 떨어진 줄로만 알고 있던 반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온이는 의문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꽝! 별안간 온이의 얼굴 위로 무서운 충격이 가해졌다. 흡사 바위에 머리를 찧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이마이지 바위가 아니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이마... "죽어! 죽어라!" 꽝! 꽝! 꽝! 바위처럼 단단한 이마는 온이의 얼굴을 계속해서 내리찧었다. 그 놀라운 이마의 소유자 반호는 박치기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코뼈가 내려앉은 온이의 코를 이빨로 힘껏 물어뜯었다. "으악!" 온이는 비명을 질렀다. 싸움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많이 겪어 본 그였지만, 설마 이빨로 물어뜯는 개 같은 놈과 싸우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탓에 그만 비명까지 지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온이는 설사 반호가 정상적인 몸이었다 할지라도 감당하기 힘든 고수였다. 기습적인 육탄 돌격에 이은 박치기와 물어뜯기로 기선을 잡기는 했지만, 실력의 차이는 금방 현실로 드러났다. 퍽! 바닥을 뒹굴며 엎치락뒤치락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둔탁한 격타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허공으로 날아오른 반호.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반호의 이빨 사이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살점이 물려 있었다. "바, 반호, 이... 개, 개 같은... 새끼..." 코가 잘린 탓에 말조차 변변히 할 수 없었다. 온이는 미칠 듯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채 반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를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물러나라!" 파팡`-` 질풍 같은 장력이 온이의 측신(側身)을 쓸어 왔다. 무서운 기세로 호밀령 셋을 때려눕힌 방지중이 반호를 구할 목적으로 온이를 가로막은 것이다. 증오심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반호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호를 향해 쏘아 가던 청살기는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온이와 방지중은 허공에 커다란 폭음을 남긴 채 한 걸음씩 물러나게 되었다. 방지중의 공력은 과연 초절한 것이었다. 온이는 한 번의 접전만으로도 방지중이 자신보다 상수임을 깨달았다. 문득 온이는 의혹을 느꼈다. 왜 아무도 자신을 도와 주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이끌고 온 호밀령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호밀령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이를 도울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곁눈질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확인한 온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호밀령들은 이 장방형 석실의 한쪽 구석까지 밀려나 있었다. 그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검 한 자루였다. 단지 검 한 자루! 생명이라도 달린 것처럼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검 한 자루였던 것이다! 검을 조종하는 사람은 전장으로부터 삼사 장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내였다. 그 사내는 방지중의 아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소년을 보호하려는 듯.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 움직임이 한 자루 검으로 하여금 호밀령들을 몰아붙이게 하고 있었다. 검과 인간이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어검(馭劍)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어찌 저런 신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온이는 망연해지고 말았다. 온이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방지중의 노갈이었다. "온이! 노부는 이제부터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 넋 빠진 적을 공격해 이득을 취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였으니, 정도 명숙 방지중의 당당한 호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간다!" 한소리 우렁찬 호통과 함께 방지중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날아든 것은 칼날처럼 곧추세운 수도(手刀), 다음엔 보기에도 화려한 원앙각(鴛鴦脚), 그리고 폭풍 같은 권(拳)·장(掌)·지(指)·퇴(腿)가 온이를 향해 퍼부어졌다. '제기랄!' 그런 방지중에게 맞서 십여 차례 손속을 겨루던 온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적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평소 온이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온이는 위축될 대로 위축된 상태였다. 방지중과 싸우는 것도 벅차거니와, 어검의 절정 경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절대검수(絶對劍手)가 존재하는 이상, 온이가 그들을 꺾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온이로서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온이는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람쥐처럼 날쌔게 몸을 날린 반호가 그의 두 다리를 힘껏 끌어안은 것이다. 온이는 이를 갈았다. 반호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앞길을 더럽히는 가장 지저분한 오물이었다. 그 오물이 이제는 그의 유일한 생로마저도 더럽히려 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가 괴성으로 터져 나왔다. 온이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오른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네놈만은... 네놈만은 반드시 죽이리라!' 그러나 온이의 오른손은 끝내 반호에게 떨어지지 못했다. 바람처럼 날아온 방지중의 주먹이 그의 정수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으스러진 두개골의 파편이 골을 헤집을 때, 온이는 푸른 얼굴 가득 불신의 기색을 떠올렸다. 그는 이곳 무왕총에서 진행되는 귀원대계의 핵심이었다. 그에게는 크나큰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고, 또 그 약속은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죽다니! 그것도 미친개 한 마리 때문에!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4 묘왕동주 온이의 최후를 장식한 사람은 반호였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온이의 몸뚱이를 냉큼 타고 앉았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흐흐! 이제 내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알겠지?" 반호는 웃으면서 단검을 내리쳤다. 청살기가 흩어진 온이의 목은 썩은 무처럼 간단히 잘려 나갔다. 2 단탈은 목을 돌렸다. 꼼짝도 하지 않고 긴 이야기를 들은 뒤라서 그런지 뒷목이 조금 뻣뻣했다. "내 이야기는 이제 다 끝났네." 이세명이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단탈에게 물었다. "부탁을 들어줄 텐가?" 단탈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요를 싫어한다는 것은 잘 아네. 그렇다고 얼굴에 써 있거든. 그래서 하는 얘기네만, 이건 강요가 아니야. 마음내키지 않으면 싫다고 하게나. 그래도 자네가 이 지옥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걸세." 단탈은 의혹을 느꼈다. 이세명은 이 석실을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그는 약흠의 척추를 끊어 놓은 대가로 절독공의 무서운 독기에 침범당한 바 있었다. 약흠의 절독공에는 어떠한 해독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온연초(穩然草)라는 이름의 희귀한 약초만이 독기의 발작을 늦춰 주는 유일한 지연제(遲延劑)가 될 뿐이었다. 바로 이 석실을 비추고 있는 심지가 온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가 연소할 때 발생하는 무취의 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그는 단 한 시진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이세명이 어떻게 단탈이 빠져 나가도록 도와 준다는 것일까? 이세명은 단탈의 이러한 의혹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단탈의 뒤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를 도와 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저 사람이지." 단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팔이 없는 늙은이가 초라한 몰골로 서 있었다. 늙은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잠시 단탈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늙은이의 등뒤에서 펄럭이고 있는 검은 휘장을 발견한 단탈은, 늙은이가 어느 곳을 통해 이 석실로 들어왔는지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 자네를 물에서 건졌지." 이세명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단탈은 외팔이 늙은이를 향해 물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소?" 외팔이 늙은이, 무왕총의 모든 기관을 설계한 희대의 천재이자 자신을 배신한 장후겸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아 온 괴노반 연자단은 단탈의 무례한 말투에 얼굴을 찡그렸다. "물에 빠진 놈을 기껏 구해 줬더니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하지만 이내 찡그린 얼굴을 풀고 껄껄 웃었다. "하지만 마음에는 들어! 사내놈이라면 건방질 줄도 알아야지! 하하!" 한참을 웃던 연자단은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이세명을 향해 말했다.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지. 무왕총의 전기관이 발동되었네. 귀원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지." 이세명은 예측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물도 나왔는가?" "두 시진쯤 전에 나왔네." 연자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 말대로 놈은 정말로 괴물이야. 시험삼아서 기관으로 장난을 쳐보았는데, 한 자 두께의 철문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더군." 이세명은 한숨을 쉬었다. "살아 있을 때에도 당할 자가 없었는데, 대법과 영물의 힘으로 불괴지체(不壞之體)를 이룬 다음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연자단은 단탈을 힐끔 바라보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이놈이 정말로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을까?" 이세명은 고개를 힘없이 흔들었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젊은이가 죽이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 괴물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지. 장후겸을 제외하고는..." "장후겸의 무공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그 괴물에게는 미치지 못할 텐데?" "장후겸은 그 괴물의 약점을 알고 있다네. 원앙제로 되살아난 존재에게는 혼문(魂門)이라는 오직 한 군데의 약점이 있지." "혼문? 그런 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구먼." 연자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 그대로 대법이 실시되는 동안 혼이 드나드는 문이지. 원앙제는 혼이 드나드는 과정을 아홉 번이나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그 통로가 되는 부위는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네." 이세명은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불행히도 대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혼문의 위치를 알 수 없다네. 그리고 안다 해도..." "안다 해도?" "혼문은 외가공부에서 흔히 말하는 연문(練門)과는 차원이 다르다네.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하지 않지. 장후겸이라도 전력을 다하기 전에는 결코 혼문을 파괴할 수 없을 걸세." "제기랄!" 연자단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장후겸으로 말하자면, 그가 천하제일고수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초고수였다. 그런 장후겸이 전력을 다해야만 파괴할 수 있는 곳이 혼문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안다 해도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이세명은 단탈을 향해 물었다. "결정했나?" 단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명은 잠시 동안 단탈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단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네!" 단탈은 자신의 손 위에 얹힌 이세명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이 쭈글쭈글 잡힌 손이었다. 한 순간의 원한에 사로잡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낸 가련한 늙은이의 손이기도 했다. 단탈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중원인이 아니오. 그래서 당신처럼 이 안에 들어온 중원인들의 생명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약 노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할 것 같소." "고맙네! 고마워!" 고맙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이세명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 있었다. 단탈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리아를 뽑아 들었다. 이 광경을 본 연자단의 두 눈이 커졌다. "너... 너 지금 뭐 하려는 거냐?" 그 말에 대해 대답한 사람은 단탈이 아닌 이세명이었다. "그를 말리지 말게. 그는 마땅히 할 일을 하려는 거라네." "하지만..." "자네는 내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 왔는지 잘 알지 않는가? 이제, 이제 나는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치고 죄의식에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네.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세명의 얼굴은 여전히 추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오랜 방랑을 끝낸 나그네의 그것처럼 평화로웠다. 그의 눈을 바라본 연자단은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차마 이세명의 죽음을 지켜볼 수는 없었던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단탈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단탈, 아합족의 타루가 단탈이오. 나는 아합의 이름을 걸고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소." "자네를 믿겠네." 이세명은 웃으며 말했다. 단탈은 가리아를 치켜 들었다. * * * 처음 무왕의 석계가 있던 대전을 빠져 나올 때만 해도 칠십 명에 달하던 인원이었지만,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과 삼십 명에 불과했다. 이제껏 지나온 몇 개의 대전들, 그리고 대전들을 이어 주는 어두운 통로는 나머지 사십 명을 감쪽같이 삼켜 버린 것이다. 한 가지 기이한 점은 북정회주 소래운의 변화였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위축되는 것 같았다. 진동이 일어날 때마다 깜짝 놀랐고, 기관이 발동될 때마다 몸을 떨었다. 비록 백척간두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황금왕이 저토록 위축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행 중에는 소래운을 대신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산동장가의 가주 장옥평은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기에 너무 어렸고, 의혈당의 당주 서문도천은 제 가슴에 박힌 강전의 처리부터 고심해야만 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5 묘왕동주 시시각각 숨통을 죄어 오는 공포와 일행의 우두머리인 소래운의 위축은, 사람들을 자포자기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도설의 기관지학도 아무 소용 없었다. 그토록 용맹스럽던 무인들이었건만 이제는 곳간 속의 쥐새끼처럼 바스락 소리에도 놀라 몸을 움츠리는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놀라운 무위와 지도력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잃은 채 음습한 무덤 어딘가에 영영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석벽 안에 새로운 통로가 있을 것이오." 신도설은 땀을 줄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더위를 느낄 때 땀을 흘린다. 신도설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통로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신도설의 처지는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이미 혼절해 버린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오?" 장후겸이 신도설에게 물었다. 장후겸의 이마에도 엷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본디 그는 신도설보다 훨씬 많은 땀을 흘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신도설을 위해 내력의 일부를 계속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후겸은 별로 땀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확실하지는 않소. 다만 내가 연자단이라면 이 방향으로 새로운 통로를 만들었을 것이오. 그는 팔괘의 방위에 맞춰 이 통로를 설계한 듯하오. 팔괘가 조화를 완성하려면 이쪽이 뚫려 있어야 하지요." 신도설은 입으로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내심 연자단의 잔인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이번의 기관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부술 수 없는 두꺼운 철문으로 통로의 양편을 차단만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통로 아래쪽으로 끌어들인 지심화맥(地心火脈)의 열기는 어떤 정교한 기관보다도 확실하게 사람들을 통구이로 만들 테니까. 연자단의 오행관 중 병화(丙火)에 해당하는 생증식탁(生蒸食卓)이 바로 이것이었다. "도움이 없이도 견딜 수 있겠소?" 장후겸이 묻자 신도설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는데 노부라고 못할 것은 없겠지요." 신도설은 강호인이 아니었다. 일신의 공부라고는 단순히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한 도인체조가 전부였으니, 그가 생증식탁의 무서운 열기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후겸은 신도설 하나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구해야만 했다. 강침을 빽빽히 꽂은 무인거(無人車)들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연동철거대진(連動鐵車大陣) 속에서도, 인간의 살을 태우는 독수(毒水)가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화혈연(化血淵) 속에서도, 사람들은 장후겸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장후겸은 천장(天將)처럼 강하고 부처처럼 자비로웠다. 그는 한 쌍의 육장만으로 아홉 대의 무인거를 고철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스스로 상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의 열정적인 웅변은 사람들로 하여금 철옥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신도설은 그런 장후겸이 자신을 위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노부 걱정은 마시고 어서 사람들을 구하세요." 장후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움켜잡고 있던 신도설의 맥문을 놓았다. 이제껏 심맥을 보호해 주던 힘이 사라지자, 신도설은 갑자기 엄습한 지독한 열기에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한동안은 버틸 수 있으리라는 그의 생각은 한갓 몽상에 불과했다. 그가 특별히 약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꽈앙`-` 장후겸의 장력이 신도설이 가리킨 석벽을 후려쳤다. 통로가 진동하고 돌가루가 튀었다. 신도설은 장후겸의 무공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숨조차 내쉬기 힘든 열기 속에서도 저렇게 엄청난 장력을 발휘하다니! 꽈앙`-` 장후겸이 석벽을 향해 두 번째 장력을 날렸을 때, 신도설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기분이 상쾌했다. 이어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신도 선생! 정신이 드시오?" 그 음성은 무의식의 세계를 부유하던 신도설의 정신을 육신과 결합시켜 주었다. 신도설은 눈을 떴다. 그가 처음으로 대한 것은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후겸의 얼굴이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가까스로 떠올린 신도설은 장후겸을 향해 물었다. "토, 통로는 어떻게...?" 장후겸은 희끗한 수염 아래로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통로는 과연 그곳에 있었소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신도설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일 장이 넘는 두께의 화강암 벽을 뚫고 반대편 통로로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그 구멍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신도설은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은 단지 시원한 바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애써 감추려는 듯 뒷짐을 진 장후겸의 두 손이 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는 것을... "어서 일어나세요. 모든 사람들의 눈이 되어 주셔야지요." 장후겸이 말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되어 주시고요!' 신도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 * * 한솥밥을 먹던 사람에게 검을 겨누는 심정이 그리 유쾌할 리 없었다. 상대가 재주있는 후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원시안진(元始安鎭)! 노도는 대공자와 손속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소. 여인을 넘겨주고 순순히 투항한다면, 노도는 책임지고 대공자의 안전을 보장하겠소이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라는 것은 건양우사 자신부터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혓바닥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로 매용소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매용소와 싸우고 싶지 않은 건양우사가 자청해서 매용소에게로 온 것은 나라아합 때문이었다. 나라아합이 무왕총으로 들어온 이상, 건양우사는 반드시 그녀의 신병을 확보해야만 했다. 철면신의 확고한 후계자 조추림은 나라아합이 매용소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순전히 그의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디다가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나라아합이 품에 들어오지 않는 한 조추림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테고, 그것은 남파무당의 설립에 커다란 악재(惡材)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남파무당의 설립은 건양우사의 꿈과 열망. 건양우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파무당을 세워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불쾌한 심정을 감수한 채 매용소에게 올 수밖에 없었다. 매용소는 씁쓸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건양우사가 이끌고 온 사람의 대부분은 낯이 익었다. 선부의 정예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석(宴席)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웃음과 울음을 함께했던 동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생사를 결해야 하는 적일 뿐이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매용소는 결심한 듯 건양우사를 향해 말했다. "구차한 이야기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군요. 어서 시작하시지요. 우사께는 소생이 직접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매용소는 가벼운 손 놀림으로 허리춤의 장검을 뽑았다. 건양우사는 수중의 불진을 흔들며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병법의 기본도 무시한 채, 결국 노도로 하여금 손을 쓰게 만드는 거요?" 건양우사가 이끌고 온 사람의 수는 오십에 달했다. 일행이 삼십도 채 안 되는 매용소로서는 중과부적이란 말을 떠올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매용소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고하를 가리는 데 있어서 머릿수란 부수적인 것! 만약 머릿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소생은 십 배가 넘는 수하를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건양우사는 주름진 얼굴 가득 안타까운 기운을 떠올렸다. "대공자의 호협함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노도가 시험해 보리다." 건양우사는 등에 멘 벽사보검(闢邪寶劍)을 뽑아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세워 보였다. 후배에게 먼저 인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건양우사는 무당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겸손할 줄 알았다. "먼저 손쓰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매용소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건양우사를 향해 매서운 일검을 찔러 갔다. 대전 안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석소용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대전과 벽면 하나를 사이에 둔 밀실 속에 있었다. 대전과 밀실 사이에 가로놓인 벽면은 편광성이 강한 광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대전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일목요연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본래 이 밀실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혈도가 찍힌 채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은 주인 행세를 하기가 어려운 법이니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6 묘왕동주 "완전히 전쟁터네요. 좋게들 살지 왜들 저렇게 싸우려고만 하는지... 쯧쯧!" 석소용은 짐짓 어른스럽게 말하며 혀를 찼다. 공손 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우울한 얼굴로 한 사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는 싸움인지라 석소용의 산만한 안력으로는 형세를 쉽게 판가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간간이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늙은 도사와 검을 겨루고 있는 매용소였다. 매용소는 생긴 것이 귀공자풍이라서 그런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화려한 검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장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현란한 검화(劍花)가 우수수 떨어졌고, 그 검화가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검화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런 매용소를 상대하는 사람은 번쩍거리는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였다. 매용소의 화려한 검법 아래에서도 쉽사리 밀리지 않는 것을 보면 늙은 도사도 대단한 사람 같았다. 다음에 눈에 띈 것은 운하에서 그녀를 건져 준 마음씨 좋은 모사 아저씨였다. 전운리라고 했던가? 그의 무공은 석소용의 눈에도 보잘것없이 비쳤다. 그런 것을 보면 "꾀 많은 사람치고 큰 고수 없다."은 강호의 풍문이 생판 거짓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상대 또한 전운리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고만고만한 재주를 지닌 탓에, 전운리는 위태하나마 평수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석소용이 그 남국 미녀를 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그녀는 대전의 한쪽 벽에 기댄 채 아이 하나를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늙은 검객이 서 있었다. 석소용은 그 늙은 검객이 과거 매용소의 호위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늙은 검객은 그녀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고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의복은 피로 얼룩졌지만, 늙은 검객의 칼솜씨는 여전히 빠르고 냉혹했다. 그런데 저 남국 미녀는 어쩌다가 저런 싸움판에 끼여들게 된 것일까? 문득, 석소용은 범선 위에서 매용소가 단탈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타루가께서 소생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그 여인을 반드시 타루가께 보내 드릴 것을 맹세하겠소. '앗! 저 여자가 바로 단탈의 부인이구나!' 석소용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공손 아저씨! 빨리 저 여자를 구해 주세요! 저 여자가 다치면 큰일나요!" 석소용은 공손 영감의 옷깃을 흔들었다. 공손 영감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내가 풀어야 할 일이었지." 공손 영감은 밀실의 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그긍`-` 돌끼리 마찰하는 음향이 울리고, 밀실과 대전 사이에 가로놓인 벽면 중 일부가 천천히 돌아갔다. 공손 영감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한때 무당파의 제자였다가 건양우사를 따라 철옥에 가입한 사연척(査然陟)이었다. "엇?" 공손 영감의 모습을 발견한 사연척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닌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이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사연척을 상대하던 사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쌔게 단창을 찔러 갔다. 적과 병기를 겨눈 상태에서 엉뚱한 짓을 했으니, 사연척은 가슴이 꿰뚫려 죽어도 뭐라고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돌보심으로 사연척은 죽지 않았다. 사실 사연척을 돌본 것은 한 자루의 평범한 나무지팡이에 불과했지만... 휘리릭`-` 사연청의 가슴을 노리던 단창 두 자루는 공손 영감이 슬쩍 내민 나무지팡이에 딱 달라붙은 채 허공에 큰 원을 몇 차례 그렸다. 공손 영감은 나무지팡이의 끝을 아래로 툭 떨구었다. 단창의 임자는 중심을 잃고 주춤거리다가 세차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동공이 풀어진 것으로 보아 나무지팡이가 뿜어 낸 힘에 의해 완전히 제압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연청의 반응이었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많이 변했구나. 속진(俗塵)에 물들면 도(道)를 잃는 법이지. 그렇지 않느냐, 석오(石悟)?" 공손 영감은 조용한 목소리로 사연청에게 말했다. 사연청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진저리를 치더니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석오가 사숙을 뵙습니다!" 공손 영감은 나무지팡이를 번쩍 치켜 들었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사연청의 등짝을 힘껏 내리쳤다. 쫙, 소리와 함께 사연청은 그 자리에 납작하게 뻗고 말았다. "내가 왜 너를 때리는지 아느냐?" 공손 영감은 이렇게 소리치는 한편, 가벼운 손짓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한 사람의 선부 고수들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사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를..." 빡! 공손 영감의 지팡이가 또 한 번 사연청의 등짝에 떨어졌다. "개도 안 돌아보는 사문 따위가 뭐가 중요하기에! 너는 왜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사연청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아무 말도 못 할 때, 이번에는 매용소의 수하 중 세 사람이 공손 영감에게 달려들었다. 공손 영감은 귀찮다는 듯 나무지팡이를 휘둘렀고, 세 사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허공으로 훌훌 날아갔다. 공손 영감이 외쳤다. "도(道)란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명예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길이다! 그런데 너는 무슨 도를 택했느냐! 무슨 도를 택했기에 이 어두운 무덤 속에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있단 말이냐!" 대전 벽과 천장이 쩌릉 울렸다. 대전 안을 피로 물들이던 싸움은 어느덧 멎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병기를 내린 채 공손 영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손 영감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건양우사의 호화찬란한 모습이 있었다. "오랜만이오, 사형." 공손 영감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양우사는 아랫입술을 실룩거렸다. "사도(邪道)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세상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꾸미고 있는 줄은 몰랐소." "그, 그건..." 갑작스러운 사제의 출현에 건양우사는 극도로 당황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 텐데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발목이 점점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키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었다. 그런데 눈 높이는 왜 이렇게 자꾸 낮아지는 것일까? 건양우사의 주름진 노안이 붉게 물들었다. 그날도 이랬다! 그날도 이런 기분으로 장문인 자리가 사질에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날도 이런 기분으로 산문을 떠났다. 그 후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해, 낮아진 눈높이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그런데 아직도 이 모양이라니! 건양우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벽사보검으로 공손 영감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켰다. "현양(玄陽)! 네놈이 감히 내 앞에서 사형 소리가 나오느냐! 내가 무당산을 내려온 게 누구 때문인데! 내가 사도로 빠져 든 것이 모두 누구 때문인데!" 공손 영감, 아니, 무당파가 배출한 불세출의 천재 현양자(玄陽子)는 건양우사를 향해 말했다. "모두 사형 때문이오. 사형은 스스로를 망친 것이오." "알량한 말재주로 농락하려 들지 마라! 모두 너 때문이었어! 너만 아니었다면 나는 장문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결코 네놈에게 훈계 따위는 듣지 않았을 거야!" 현양자는 고개를 흔들더니 품에서 두 개의 주머니를 꺼냈다. "사형께서는 이것을 읽어 보시오. 그러면 과연 누가 사형을 망쳤는지 알게 될 것이오." 현양자가 던진 두 개의 주머니는 칠팔 장 허공을 천천히 날아 건양우사의 앞에 이르렀다. 건양우사는 두 개의 주머니를 잡아챘다. 첫 번째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누런 종이였다. 귀퉁이가 말라 부스러진 것으로 미루어 세월의 사연이 깃들인 종이인 듯했다. 그 종이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옥양은 천품(天品)이나 명운이 박하고, 건양은 옹졸하나 대기(大器)의 덕을 갖췄다. 옥규(玉圭)를 단념하면, 건양으로 하여금 사승(師承)을 잇게 하라.> 건양우사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필체가 눈에 익었다. 종이 위에 쓰인 것은 바로 그의 사부인 반우진인(半愚眞人)의 필체였던 것이다. 이때 현양자가 말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7 묘왕동주 "그 주머니는 사부께서 사람을 보내 소제에게 전하신 물건이오." 건양우사는 황급히 다른 주머니를 열었다. 그 주머니에서도 역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건양은 도골(道骨)이나 진각(塵殼)을 벗지 못했다. 옥규를 단념하면, 그로써 사문을 잇게 하라.> 이번 것은 반우진인의 대제자이자 무당파 전대 장문인인 옥양자의 필체였다. "대사형은 사부께서 소제에게 유지를 전한 것을 모른 채 돌아가셨소. 하지만 대사형의 유지도 사부님과 같았소. 두 분께서는 결국 문파의 옥규를 둘째 사형에게 전할 생각이셨던 것이오." 현양자가 다시 말했다. 건양우사는 두 장의 종이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옥규는 장문인의 자리를 상징하는 집법령부(執法令符)였다. 건양우사는 그것을 수중에 넣기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옥규는 그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문을 원망하며 무당산을 내려갔다. 새로운 문파, 그를 장문인으로 인정해 주는 전혀 새로운 문파를 만들어 사문이 안겨 준 치욕을 백배 천배로 갚아 주기 위해! 그런데, 그런데... "으하하하!" 건양우사는 천장을 바라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했던 것인가! 결국 내 손아귀에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가! 잠시만 돌아보았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도대체 이날 이때까지 무엇을 보며 살아 온 것일까? 건양우사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번에는 목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으허헝!" 그의 통곡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건양우사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망연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벽사보검이 들어왔다. 삶과 죽음이 촛농처럼 엉겨붙어 벽사보검의 검신 위에 어른거렸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어이없는 것이라면... 그래, 죽자. 그냥 죽어 버리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건양우사는 바닥에 떨어진 벽사보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지체없이 찔러 갔다. 바로 그때였다.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건양우사의 정수리에 무서운 충격이 가해졌다. "파(破)`-`!" 한 자가 넘는 태극보관(太極寶冠)이 산산이 부서지며 건양우사는 두 눈을 부릅떴다. 파(破)! 선가(禪家)에서는 '할(喝)'이라고도 하는 그 한 음절의 척사후(斥邪吼)는 한 줄기 시퍼런 벼락이 되어 건양우사의 더럽혀진 영혼에 내리꽂혔다. 깨달음의 전광(電光)은 모든 것을 깨어 흔적도 없이 부숴 버렸다. 장문인 자리에 대한 열망, 사문에 대한 원망, 현양자에 대한 해묵은 열등감, 웃음과 울음, 심지어는 삶과 죽음까지도... 건양우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나무지팡이를 쥐고 있는 현양자가 서 있었다. 건양우사는 흡사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스르르 일어섰다. 그리고 부서진 태극도관을 벗었다. 화려한 겉옷과 비단으로 만든 하피(霞 )도 벗었다. 신감(神鑒)이 들어 있는 주머니도 던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가죽으로 만든 값비싼 신발을 벗어 던진 순간, 건양우사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의 벌거숭이가 되었다. 현양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뒤, 벌거숭이로 서 있는 건양우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리오." 건양우사는 현양자의 인사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너무나 즐거운 듯 한동안 낄낄 웃더니 사타구니 사이로 초라한 성기를 덜렁거리면서 대전을 빠져 나갔다. 현양자는 이제 막 껍질을 벗은 사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부님과 대사형의 안목은 정확하셨어. 그는 단 한 순간에 나를 뛰어넘어 버렸구나." 부러웠던 것일까? 하지만 현양자의 눈빛 속에는 오랜 짐을 벗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잔잔하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방금 전 목도한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아무도, 심지어는 매용소조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이감에 결박당해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이때 현양자가 나온 밀실 안으로부터 어린 소녀의 얼굴 하나가 쏙 튀어나왔다. 소녀는 대전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대전 구석에 있는 남국 미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언니가 단탈의 부인 나라아합이죠? 진짜 왕비처럼 예쁘네요. 난 석소용이라고 해요. 단탈의 친구죠." 소녀는 방긋 웃으며 이렇게 조잘거렸다. 3 비연리가 이끄는 마부 고수들과 북정회로부터 이탈한 마맥회원들이 벌이는 싸움은,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괴상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싸움을 그렇게 만든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전장으로 뛰어드는 시커먼 쇠붙이, 바로 동인(銅人)들 때문이었다. 이 대전의 본래 주인이기도 한 동인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기계적인 동작만을 반복하는 무생물이었다. 두 패의 생물과 한 패의 무생물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삼파전을 벌이니, 싸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어떤 경우에는 마부 고수와 동인이 한패가 되어 마맥회원을 공격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마맥회원과 동인이 한패가 되어 마부 고수를 공격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동인들이 갑자기 양쪽에서 휘몰아칠 때면, 마부 고수와 마맥회원은 방위를 분담하여 동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등을 마주댄 적이 죽으면, 누구도 자신의 후방을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기에... 본디 싸움이라는 것은 기세가 중요할진대, 이렇게 단절된 호흡으로는 기세가 제대로 일어날 리 없고, 그러니 싸움 또한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인진(銅人陣), 그러니까 연자단의 오행관 중 경금(庚金)에 해당하는 동귀관(銅鬼關)이 모든 싸움에 장애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비연리, 좌훈, 나치. 이들 삼 인이 어울려 벌이는 일 대 이의 험악한 싸움만큼은 곤오철로 만들어진 동인도 감히 끼여들지 못했다. 한 쪽이 수십 년 전부터 강남 강호에 전설처럼 군림하던 삼마의 일원이라면, 다른 쪽은 수많은 악전고투 속에서 강철처럼 단련된 마맥회의 투사들이 아니던가! 기관의 운전(運轉)에 따라 싸움에 휘말려 버린 동인의 운명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귀좌(鬼左)! 한 팔이 없어지고 나더니 오히려 강해진 것 같구나!" 비연리는 자신을 향해 퍼부어진 좌훈의 무지막지한 철곤 세례로부터 몸을 빼내며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비연리! 여기도 있다!" 시뻘건 잔영(殘影)을 꼬리처럼 매달며 비연리의 목을 수평으로 베어 온 것은 나치의 거치도... 비연리는 좌장을 비스듬히 쳐 올려 거치도의 진로를 흐트러뜨리는 한편, 우장을 벼락처럼 내뻗어 좌훈의 가슴을 향해 대양수의 일 장을 날렸다. 이러한 좌수우공(左守右攻)의 신묘한 배합은, 그가 단지 교활하기만 한 간웅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 하지만 맥없이 격퇴당하기에는 비연리에 대한 원한이 너무 거대한 좌훈이었다. "이야아압!" 좌훈의 우렁찬 기합과 함께, 한 덩이 쇠뭉치 같은 둔기가 공격의 여파로 허점을 드러낸 비연리의 오른쪽 옆구리를 쓸어 갔다. 철수공(鐵袖功)의 위력적인 공부가 집결된 좌훈의 왼쪽 소맷자락이었다. "음!" "으윽!" 대양수는 양강장력의 최고봉이요, 철수공은 불문의 기공이다. 좌훈과 비연리는 각각 가볍지 않은 손해를 입은 채 한걸음씩 물러나야만 했다. 좌훈의 후퇴는 자유로울지라도 비연리의 후퇴는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비연리에게는 또 다른 강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파파`-` 비연리는 자신의 전신을 난자해 오는 시뻘건 거치도를 보며, 한 사람이 이름까지 버려 가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한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원숭이처럼 영활한 신법을 발휘하여 거치도의 공세 속을 빠져 나오긴 했지만, 팔다리에 몇 개의 자상이 새겨지는 것만은 면할 길이 없었다. "비 형님! 아우가 도와 드리겠소!" 비연리를 추격하는 나치를 가로막은 사람은 오독기서생 여문비였다. 여문비의 오독마수(五毒魔手)는 다섯 가지 지독한 독물을 이용해 수련한 독문절기(毒門絶技). 나치는 더 이상 비연리의 목숨을 노리지 못하고 여문비가 전개하는 독장(毒掌)에 대비해야만 했다. 나치의 입장으로 본다면 여문비는 결코 만만할 수 없는 상대. 단숨에 해치울 능력은 없었다. 본디 일 대 이로도 팽팽하던 국면이었다. 여문비가 비연리를 도와 나치의 발목을 묶자, 좌훈은 곧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펑`-`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8 묘왕동주 좌훈은 가슴을 압박하는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늙은 것이 무슨 근력이 저리도 좋은지, 비연리의 대양수는 시간이 갈수록 위력을 더하고 있었다. '놈과 싸우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질 수 없다!' 좌훈은 이를 악물었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비연리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귀좌! 힘이 빠진 모양인데 그만 쉬게 해줄까?" 비연리는 쌍장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리고 두 눈으로는 좌훈을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그의 두 손바닥 사이에서 기이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좌훈은 과거, 비연리가 연성하려고 하던 한 가지 무서운 수법의 이름이 떠올랐다. '화염장(火焰掌)?' 비연리가 날카로운 기합을 지르며 쌍장을 내밀었다. "오옷`-`!" 순간적으로 좌훈은 인간의 손바닥이 시뻘건 화염을 뿜어 내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본신의 삼매진화(三昧眞火)를 화염의 형태로 유형화한 것이니, 강호에서 일컫는 화신지경(火神之境)이 바로 저 경지였다. 철수공의 소맷자락으로 비연리의 화염장을 막아 보려 했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장대비를 막는 격. 좌훈은 앞가슴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훌훌 날아가 칠팔 장 떨어진 대전 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화염장에 당하는 순간까지도 쌍두사(雙頭蛇)의 수법으로 쌍절철곤을 날렸으니, 이는 비연리에 대한 좌훈의 감정이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아이쿠!" 비연리는 하체로부터 솟구치는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좌훈이 던진 쌍절철곤이 그의 왼쪽 비골( 骨)을 으스러뜨린 것이다. 화후가 이제 겨우 오 성에 불과한 탓에, 그는 화염장을 전개할 때 하체에 실린 무게 중심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없었다. 덕분에 장딴지를 향해 날아오는 쌍절철곤을 빤히 보고도, 꼼짝못하고 당해 버린 것이다. 으득`-` 비연리는 쌍절철곤을 포개 쥐고선 단숨에 꺾어 버렸다. 그리고 절름거리는 걸음걸이로 벽 아래에 축 늘어져 있는 좌훈을 향해 다가갔다. 놈의 모가지도 저 철곤처럼 꺾어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대전 안으로 '그 괴물'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꽝! 한 번의 폭음성. 후두둑`-` 동인의 파편이 바닥으로 뿌려지는 소리.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끔찍한 비명이었다. "으, 으... 으아악!" 깜짝 놀란 비연리는 좌훈에게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비명이 울린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비연리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곳에는 비연리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눌연수사 두의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양팔이 어깨 부근에서 끊어진 두의는, 그것도 모자라 거꾸로 선 채 가랑이부터 천천히 찢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목숨이란 보기보다 질긴 것이어서, 두의는 흘러내린 창자에 얼굴이 뒤덮일 때까지도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좌우의 갈비뼈가 어그러지고, 그 안에 있던 심장이 튀어나오자, 그곳에는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두 쪽으로 찢긴 참혹한 고깃덩이만 있을 뿐... 두의를 두 쪽으로 찢어 버린 '그 괴물'이 비연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비연리는 그 얼굴에 씌워진 시커먼 강철가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철, 철면신?" 비연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 세 구의 동인이 철면신에게 달려들었다. 생명이 없는 놈들이었으니 공포나 두려움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오직 기관이 운전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쾅! 콰쾅!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이 묵빛 장포로 감싸인 철면신의 몸뚱이를 두들겼다. 그러나 철면신은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청동빛 손을 크게 휘둘러 동인들을 후려쳤을 뿐이다. 형도, 격식도 없는 마구잡이의 일격. 그러나 그 위력만큼은 가공했다.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난 동인의 파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자욱한 파편은 철면신으로부터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있던 망산일수 부범악의 시선을 가려 버렸다. 수많은 궤적을 그리며 낙하하는 그 파편들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를 언뜻 보았다고 느꼈을 때, 부범악은 한 줄기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향기는 실로 기이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구역질나는 피비린내 같기도 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정신까지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영험한 약향(藥香)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부범악은 오랫동안 생각할 수 없었다. 낙하하는 파편 사이로 날아온 하나의 청동빛 손이 그의 머리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엄청난 고함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철`-`면`-`신`-`!" 그와 동시에 비연리는 철면신을 향해 날아가는 나치의 모습을 보았다. 칼끝에서 쭉 뻗어 나가는 은은한 홍광(紅光)을 보았을 때, 비연리는 나치의 경지가 자신의 예상보다 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석년, 도무비가 연성한 도의 절정 도령체. 나치는 그 도령체의 초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마치 자신이 얼마 전 화염장을 연성한 것처럼... 붉은 홍광이 철면신의 머리로 떨어졌다. 만약 인간이라면 도령체의 패도(覇道) 아래에서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땅`-` 철면신의 좌수와 나치의 거치도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거치도는 손잡이만 남은 채 산산조각나 버렸다. "크악`-`!" 나치는 우박처럼 퍼부어진 도편(刀片)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다음 순간, 비연리는 나치의 등을 뚫고 튀어나온 청동빛 손을 볼 수 있었다. 도령체가 실린 거치도를 박살내고 그 주인의 뱃가죽마저 뚫어 버린 손이었다. 펑! 나치의 육 척 거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철면신만이 있었을 뿐이다. 몸 주위를 맴도는 자욱한 혈향에 취한 듯, 철면신은 소름 끼치는 괴성을 터뜨렸다. "으워어어어`-`!"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마성(魔性) 가득한 포효에 비연리는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저건, 저건 사람이 아니야! 저건 악마다!" 비연리는 철면신을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저건 그 철면신이 아니었다. 저건 말 그대로 악마였다. 문득 철면신의 시선이 비연리에게 고정되었다. 눈구멍에서 뿜어 나온 으스스한 청광이 한층 강해졌다. 그리고... "비`-`연`-`리`-`!" 철가면의 입구멍 사이로 인간 세상에서는 들어 볼 수 없는 끔찍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은 마치 못다 푼 한을 풀기 위해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끔찍한 악마의 그것처럼 들렸다. 대전 안에 시커먼 폭풍이 일었다. 악마로 화한 철면신이 움직인 것이다. * * * "철면신이 동귀관으로 들어갔소. 비연리는 끝장이오." 자액이 조추림에게 말했다. 조추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복주이가의 폐혈공을 극성에 이르도록 수련했으니, 할비의 점혈 수법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약흠의 전인과의 대결에서 얻은 내상이 예상보다 훨씬 위중하다는 뜻. '할비의 단호함이 오히려 복이 된 셈이군.' 조추림의 안색을 살피던 자액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런 상태로 매용소와 비연리에게 달려갔다면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조추림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자액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다. 그 모습을 본 조추림이 빈정거렸다. "알려 준들 대수겠소? 내가 아무리 발광해 봤자 우공봉의 손가락 하나면 잠잠해질 텐데." 자액은 눈살을 찌푸렸다. "공자, 우공봉이 손을 쓴 것은 불가피한..." "그만!" 조추림은 자액의 말을 매섭게 잘랐다. "구구한 소리는 듣기 싫소.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9 묘왕동주 자액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건양우사를 매용소에게 보냈소. 물론 그녀의 안전에 유의하라고 신신당부했소. 건양우사가 매용소와 만난 곳은 미호전(尾虎殿). 그런데..." "그런데...?" "그 뒤 매용소와 건양우사 모두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났소. 무왕총 안의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오." "흥! 정말 무왕총은 신비하군! 만든 사람들의 이목조차도 따돌릴 정도로 신비해!" 조추림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할비에게 다가갔다. "우공봉!" 할비는 조추림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나라아합을 찾으러 갈 것이오! 당신이 앞장서시오!" 자액이 황급히 나섰다. "공자! 공자께서는 귀원대계가 끝나기 전까지 이 기관 중추를 지키셔야 하오!" 조추림은 크게 웃었다. "하하! 내가 여기서 할 일이 있다는 거요? 오! 이제 보니 지휘자가 나였던 모양이군! 그러면 어디 한번 기관을 작동시켜 볼까요?" 자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칠 줄 모르는 조추림의 비아냥거림에 짜증이 솟구친 것이다. 그러나 남의 기분에 아랑곳할 조추림이 아니다. "이보시오, 좌공봉! 나는 무왕총도, 귀원대계도 모두 관심없소. 오직 그녀만이 중요할 뿐이오. 그런 내가 그녀를 찾으러 가겠다는데, 당신이 말리겠다는 거요?" 이때, 할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할비는 공자의 명을 받들겠소." "과연 충직하시군!" 조추림은 할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시 한 번 이죽거렸다. 자액은 착잡함을 느꼈다. 나라아합에 대한 조추림의 집착은 이미 남녀간의 애정의 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조추림에게 있어서 자신의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조추림은 스스로를 나라아합이라는 주체(主體)에 종속된 객체(客體)로 규정하고 있었다. 조추림은 오직 나라아합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추림의 마음은 현재로서는 무엇으로도 바꿔 놓을 수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조추림이 가장 존경하고 어려워하는 장후겸이 직접 나선다 해도 별수없을 것이다. 자액은 할비에게 무왕총의 기관 배치가 상세히 기록된 두꺼운 책을 주었다. 나라아합을 추적하는 데에는 그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실을 나서는 조추림과 할비의 모습을 보며, 자액은 문득 한 가지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다. 만약 나라아합에게 버림받는다면 조추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 * * "잘 보아 두거라. 이것이 그 괴물의 능력이니까." 연자단이 말했다. 단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넓은 대전은 바닥에 널린 갖가지 물체들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바닥을 뒤덮은 물체들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쇠붙이도 있었고, 옷가지도 있었으며, 사람의 잔해도 있었다.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본 단탈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파괴는 단 한 번에 이루어졌다. 괴물에게는 두 번 손을 써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단 한 번만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서운 괴물! 단탈은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럽쇼! 살아 있는 놈도 있는데?" 연자단의 외침에 단탈은 고개를 돌렸다. 대전의 한쪽 벽 아래에는 한 사람이 기대 앉아 있었다. 대전 안의 유일한 생존자 좌훈이었다. "흐... 흐으... 재미있군! 여기서 자네를 만나다니... 흐흐!" 단탈을 발견한 좌훈은 이렇게 말했다. 두 다리가 부러지고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도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단탈은 좌훈의 목을 움켜쥐고 끌어올렸다. 반항력을 완전히 상실한 좌훈의 몸이 단탈의 힘에 의해 공중으로 들렸다. "흐흐... 운하에서의 일 때문에 이러나?" 단탈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그러나 좌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네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만약 마맥회를 버려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단탈은 좌훈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좌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인해 보랏빛으로 변했다. "나는 너희들이 나와 옥평 사이에 끼여든 것이 화가 나!" 이때, 옆에서 보고 있던 연자단이 단탈의 등을 후려쳤다. "다 죽어 가는 놈에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네 손으로 죽일 작정이냐?" 단탈은 연자단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연자단은 눈을 부라리며 또 한 번 단탈의 등을 후려쳤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그런 눈깔로 보는 게 아냐! 그 손일랑 어서 못 풀어?" 단탈은 손을 풀었다. 연자단의 손바닥 때문은 아니었다. 좌훈은 그가 아니더라도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좌훈의 몸뚱이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단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우정을 말한 건가? 우리가 장옥평과 자네 사이의 우정을 허물어뜨려서 화가 난다고? 이봐, 단탈. 정신차려! 자네는 중원 사람이 아니야. 근본적으로는 자네 스스로가 중원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지. 이방인이면 이방인답게 굴라고.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어쭙잖은 감정 놀음에 빠지지 말고, 어서 자네 일을 마치고 돌아가란 말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좌훈은 검은 피를 토했다. 그 핏물 속에는 내장 부스러기가 섞여 있었다. 그의 오장육부는 비연리의 화염장에 당했을 때 이미 회생하기 힘들 만큼 망가져 버린 것이다. 단탈은 좌훈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연자단은 그런 단탈의 등을 떼밀었다. "자, 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자고! 우린 할 일이 있잖아?" 좌훈이 피로 물든 입술을 달싹거렸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할까? 이곳 사람들 누구도 자네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않지. 자네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자네를 싫어하게 될 거야. 왜냐고? 흐흐! 바로 자네가 이방인이기 때문이지." "곧 죽을 놈이 말도 많군. 자, 가자!" 연자단은 단탈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 폐허가 된 대전 안에 홀로 남겨진 좌훈은 천천히 몸을 뉘었다. 잠시 후 대전 안에는 마맥회의 노래, 성수가(聖樹歌)가 나직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임이여 알아 주소서, 임이여 알아 주소서 우리가 흘린 땀, 우리가 흘린 피를 어허이야`-`어허이야`-` * * * 까마귀는 날개로 날지, 날면서 까욱! 까욱! 개구리는 뒷다리로 뛰지, 뛰면서 괘울! 괘울! 뱀은 배때기로 기지, 기면서 씨롯! 씨롯!" 미오는 신나게 노래했다. 미오의 노래가 끝나자 석소용은 박수를 쳤다. 한어가 아닌 탓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서 박수를 쳐준 것이다. "아줌마! 나 노래 잘하죠?" 미오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한어로 물었다. '아줌마'라는 한 마디에 귀여운 맛이 싹 가셨지만 그래도 석소용은 "잘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미오가 아가씨를 좋아하는군요. 아이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선악을 구분하는 힘이 있지요. 아가씨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라아합이 말했다. 면전에서 칭찬받는 것도 민망한 일이어서, 석소용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근데 한 가지 물어 봐도 돼요?" 석소용이 묻자 나라아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이 사는 궁전 말이에요, 큰가요?" 나라아합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새하얀 치아와 붉은 잇몸이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단탈은 나무를 엮어서 만든 집에 살아요. 지붕은 큰 나뭇잎과 띠로 올리고요." 나라아합의 대답은 석소용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왕이라고 큰소리만 쳤지, 알고 보니 움집에 사는 가난뱅이였던 것이다. 그런 석소용의 눈치를 짐작했던지 나라아합은 덧붙여 말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0 묘왕동주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궁전이죠. 아침이면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가 잠을 깨우고, 낮에는 마을 뒷숲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또 저녁에는 골짜기 위에 걸린 해님이 붉은 장막을 내려 주지요. 중원에서 본 어떤 집보다도 편안하고, 중원에서 본 어떤 마을보다도 활기 찬 곳이 바로 아합족의 마을이에요." 소녀란 대개 이런 종류의 대사에 약하다. 석소용도 영락없는 소녀인지라 금방 몽롱한 눈빛이 되었다. "음식도 맛있다면서요?" 나라아합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곡에서 잡아 올린 작은 물고기를 모닥불에 구우면 마른 풀잎처럼 바삭바삭해지지요. 물소 갈비를 큰 나뭇잎으로 싸서 찌면 고기에서 꽃 향기가 난답니다. 마을 뒷숲에는 싱싱한 과일도 열리고요." 꽃 향기가 나는 물소 갈비란 말에 석소용은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중에 놀러 가도 되나요?" 석소용이 묻자 나라아합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단탈의 친구라면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한 손님이지요." "히야`-`!" 원래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인 데다가, 나라아합이 들려 준 이야기는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꼭 놀러 갈 게요!"라고 대답하는 석소용의 머릿속에는 무왕총의 위험 따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 * *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할비가 선뜻 조추림을 따라 나선 것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할비는 나라아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추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녀(妖女) 정도로만 여길 뿐이다. 그가 신경 쓰는 존재는 매용소였다. 나라아합의 종적이 사라진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매용소의 종적이 함께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할비에게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런 할비의 눈에 비친 매용소는 무서운 잠재력을 지닌 호랑이였다. 비록 지금은 때를 만나지 못해 곤궁한 처지이지만, 만약 힘이 주어진다면 그 호랑이는 향차의 강호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존재로 부상할 것이 분명했다. 매용소가 이 무왕총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할비는 하늘이 매용소를 버린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매용소를 제거하는 데 십(十)이라는 노력이 필요하다면, 무왕총 안에서는 단지 일(一)만으로도 충분했다. 할비의 심복지환(心腹之患)은 스스로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 매용소가 종적을 감췄다. 할비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매용소가 증발된 미호전 내부를 배회하던 조추림과 할비 앞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침한 인상을 주는 삼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사내의 이름은 좌이(左二). 할비가 비밀리에 키운 열 명의 심복, 십비(十秘) 중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본디 열 명으로 구성되었던 십비는, 거상련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하북으로 파견된 구사(邱四)가 감쪽같이 사라진 이후 아홉이 되었다. "기표전(箕豹殿)으로 연결된 통로에서 소변 자국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할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변 자국이라면 특이한 것도 없지 않은가?" "높이로 보아 다섯 살 미만의 사내아이였습니다." 할비의 눈이 빛났다. 그가 들은바, 나라아합은 묘족 아이 하나를 키운다고 했다. 아이 혼자서 기표전으로 갈 리는 없다. 아이는 분명히 나라아합과 매용소의 보호를 받으며 그리로 갔을 것이다. "십비(十秘)에게 소집령을 내린다. 시간은 명령을 받는 즉시, 장소는 기표전이다." 할비는 좌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표전에서 조추림과 할비, 그리고 십비가 발견한 것은 혈도가 제압된 채 뻣뻣이 굳어 있는 밀실의 감시자뿐이었다. "밀실이 완벽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공봉님들께서 하시는 일은 정말 확실하군요." 조추림은 이죽거렸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뒤부터 조추림은 광기를 이런 식으로 해소하고 있었다. '이건 심각한 문제군.' 밀실의 감시자를 깨워 상황을 전해 들은 할비는 정말로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매용소의 일행 중에는 무왕총의 기관에 제법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신출귀몰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들이 계속 무왕총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할비의 입장으로 볼 때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일... 할비는 일단 자액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할비는 밀실에 장치된 이설신관의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는 심장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몸을 휘청거렸다. "쯧쯧! 하지(下肢)가 부실한 것으로 보아 보약이라도 몇 재 잡숴야겠소이다." 조추림의 이죽거림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할비는 벽에 기대 선 채 방금 전 자신에게 닥친 통증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지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번의 통증이 할비의 심장을 압박했다. "헉!" 할비는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허리를 뒤틀었다. "우공봉님! 괜찮으십니까?" 십비의 첫째인 독고일(獨孤一)이 황급히 할비를 부축했다. 고통의 순간은 매우 짧았다. 확대되었던 할비의 동공이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고통이 사라지자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쌍둥이가 다른 반쪽을 잃었을 때 느낄 법한 공허감... 순간, 할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뭔가 불길한 가정이 떠오른 것이다. 할비는 이설신관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액! 내 말 들리는가?" * * * "자액! 내 말 들리는가?" 원통형의 철통 중 하나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단탈은 가리아를 다시 뽑아 들었다. 석실 안에는 방금 죽인 푸른 두건을 두른 늙은이 외에도 또 다른 적이 숨어 있는 듯했다. 연자단은 그런 단탈을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다. "으하하! 참새 새끼처럼 놀라는 꼬락서니 하고는!" 연자단은 바닥에 쓰러진 자액의 시신을 성큼 넘어 이설신관이 설치된 석벽으로 다가갔다. "이 사람, 진규! 대답을 하라니까!" 철통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자단은 음침하게 웃으면서 철통에 대고 말했다. "흠! 흠! 거기 있는 사람은 할비인가?" 철통은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자액은 지금 자네와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네." 연자단이 말하자, 철통으로부터 뼈를 가는 듯한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자단... 네놈이었구나...!" "으헤헤! 오냐, 나다! 이 무왕총을 설계하신 연자단 나리이시다! 놀랐느냐?" "자액을 어떻게 했느냐?" 철통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자단은 자액의 시신을 힐끔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그게 말이야... 이 기관 중추는 원래 내 방이란 말이야! 주인이 방을 비워 달라는데 손님이 건방지게 거절을 하더라고. 그래서 작은 소란이 있었는데, 이제 다 끝났으니 자네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걸세. 그 손님 가슴에다가 구멍을 두 개 뚫어 놓았거든." "연자단`-`!" 철통이 토해 내는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연자단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을 움츠렸다. "이봐, 할비! 이설신관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물건인지 자네도 잘 알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충분히 잘 들린다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 연자단을 배신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지. 각오하는 편이 좋을 거야." 연자단은 그 말을 끝으로 철통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단탈은 연자단과 철통이 벌이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작은 철통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나오는 것은 분명히 신기한 일이었다. "이 방에 다시 들어오니 감회가 새롭구먼.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야." 연자단은 석벽 앞에 설치된 갖가지 기관 장치를 쓰다듬었다. 마치 자식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1 묘왕동주 "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연자단은 석벽에 가득 달린 이설신관을 모두 개방했다. "모두에게 지시한다! 현상황을 보고하라!" 연자단이 명했다. 기관 중추에서 떨어진 명은 지엄한 것이었다. 수십 개의 철통이 일제히 사람의 목소리를 쏟아 놓기 시작했다. 철통이 토해 놓은 말의 홍수는 단탈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자단, 이 놀라운 위인은 그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집어 내고 있었다. 철통의 보고가 모두 끝나자 연자단은 생각에 잠겼다. 들어온 정보를 나름대로 분류하여, 무왕총의 현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반 각쯤 생각하자, 연자단은 무왕총의 현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통로, 모든 대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눈으로 바라보듯 생생하게 감지되었다. 그는 심지어 현양자의 인도로 자액의 이목에서 사라진 매용소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자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바야흐로 이 무왕총은 그에게 완전히 장악된 것이다! 연자단은 우선 기관 중추로 향한 통로를 하나의 암도만 남겨 두고 모두 폐쇄했다. 그 암도는 잠시 후 단탈이 사용할 통로였다. 단탈이 그 암도를 통해 나가면 연자단은 그것마저도 폐쇄할 것이다. '통로들은 영원히 열리지 않겠지...' 연자단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왕총을 설계한 것에 대한 죄책감? 그런 것 따위는 연자단에게 없었다. 그는 선인(善人)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악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그가 이 기관 중추 안에서 뼈를 묻겠노라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무왕총을 사랑했다. 하시라도 무왕총을 탈출할 수 있었던 그가 한 마리 생쥐처럼 이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그러한 애정 때문이었다. 이제 연자단은 막 무왕총을 되찾았다. 앞으로 그 누구도 연자단으로부터 무왕총을 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왕총은 그 창조자인 연자단을 심장에 품은 채 영원한 동면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놈을 혼내 주는 일이었다. 연자단은 단탈을 돌아보았다. "이제 자네 차례야." 단탈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런 단탈에게 연자단은 말했다. "기대해도 좋아. 자네는 매우 극적인 싸움을 하게 될 거야." 4 장후겸은 혼란에 빠졌다. 장후겸의 혼란은 그가 이끌던 일행이 각룡전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각룡전은 무왕의 석계가 있는 곳. 팔괘동장무토대진으로써 사람들을 분리시킨 곳이기도 했다. '뭔가 착오를 일으킨 것일까?' 장후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계획에 따르면 지금쯤 나타나야 할 곳은 방묘전(房卯殿), 서른여섯 개의 죽창진(竹槍陣)이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 절지(絶地)여야만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각룡전이라니! 그런데 이때, 둔중한 음향과 함께 각룡전의 벽면에 나 있는 여섯 개의 통로가 일제히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중 한 곳으로부터 전신이 피로 물든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장후겸은 또 한 번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나타난 두 사람은 소역발산과 양충이었다. 두 사람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싹둑 잘린 채 부러진 창 하나를 옆구리에 꽂고 있는 소역발산, 얼굴 반쪽이 뭉그러진 채 크고 작은 자상을 전신에 빽빽히 새기고 있는 양충.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 동안 두 사람에게 가해진 혹독한 시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역발산 등이 들어온 지 일 각쯤이나 지났을까? 각룡전으로 세 번째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때 장후겸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허허, 웃고 말았다. 소역발산은 새로 나타난 무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놈들이 바로 철옥이오! 이 끔찍한 도살극의 원흉이외다!" 철옥이라면 자다가도 이가 갈리는 북정회 군웅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욕설을 퍼부으며 나타난 무리를 공격했다. 장후겸도 별수없이 그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다. 철옥도들은 대부분 호밀령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정면 승부에서 결코 북정회 군웅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반 시진이 지나기 전 싸움은 끝났고, 남은 것은 바닥에 널린 이십여 구의 시신과 예닐곱 명의 투항자들뿐이었다. 네 번째로 각룡전에 들어온 사람은 일행에서 낙오된 방지중이었다. 방지중은 자신의 아들이자 소래운의 양자인 방단을 두 팔에 안아 들고 있었다. 방지중을 뒤따라 두 사람이 각룡전으로 들어왔다. 그 중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장옥평은 깜짝 놀랐다. "박 공!" 마봉황은 박한이 장옥평을 대신하여 운하에서 장렬히 전사했다고 했다. 그 박한이 어떻게 이곳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장옥평은 마봉황을 돌아보았다. 마봉황은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박한은 담담했다. 그는 장옥평을 향해 정중히 포권한 뒤, 마봉황과 구양지에게도 일일이 인사했다. 그리고 대전 바닥에 정좌하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장옥평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명상에 잠긴 박한의 모습은 그의 사부 석삼도를 떠올리게 했다. 석삼도는 한 그루의 푸른 잣나무 아래에서 언제나 저런 자세로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단지 외양만 비슷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 주위를 감도는 평화로운 안정감이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손님들은 끊이지 않았다. 반 시진쯤 지난 뒤, 각룡전은 다섯 번째 손님을 받았다. 그 손님을 이끌고 온 사람은 단촐한 자색 무복에 허리에는 고색 창연한 장검을 찬 미장부였다. 그 미장부를 발견한 산동장가의 가신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매용소!" 성미가 급한 몇은 벌써부터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런데 매용소의 일행에는 뜻밖의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토끼처럼 달려와 장옥평의 품에 안긴 소녀는 박한과 함께 운하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석소용이었다. 엉겁결에 석소용을 안은 장옥평은 다시 한 번 마봉황을 돌아보았다. 마봉황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장옥평은 석소용에게 물었다. "용매, 운하에서는 어떻게 된 거지?" 석소용은 애틋한 눈으로 장옥평을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께서는 소매가 그 동안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러더니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장옥평의 품에 더욱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운하에서 그녀가 겪은 일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각룡전 안으로 여섯 번째 손님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여섯 번째 손님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대전 정문을 통해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시커멓고 짧은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오직 대전 정중앙에 마련된 무왕의 석계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석계 앞에 도달한 그는 석계의 가장 아랫계단에 들고 있던 시커먼 칼을 내리꽂았다. 그리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단탈이었다. "단탈! 정말로 이곳에 와 있었군요!" 석소용이 단탈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단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탈! 이쪽을 봐요! 당신의 부인이 여기에 있어요!" 석소용은 이번만큼은 단탈로부터 어떤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단탈은 마치 석상처럼 꼼짝하지 않은 채, 횃불처럼 타오르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전의 정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지금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단탈을 바라보던 장옥평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단탈은 지금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 주위로 소용돌이치며 나가는 무형의 살기는 이제까지 장옥평이 겪어 온 어떠한 기운보다도 패도적인 것이었다. 단탈은 누구와 싸우기 위해 저토록 무섭게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일까? 잠시 후, 각룡전 정문에 일곱 번째 손님이 나타났다. 묵빛 장포에 시커먼 강철가면... * * * 장후겸의 두뇌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2 묘왕동주 귀원대계가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은 분명했다. 원앙제로 인해 되살아난 철면신은 장후겸이 준비한 최고이자 최후의 패였다. 물론 패란 것은 언젠가는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보다 결정적인 시기에 철면신을 등장시킬 계획이었다. 철면신은 절대적인 파괴자였다. 그 절대적인 파괴력 앞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존재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철면신에 의해 살해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 장후겸은 바로 그때 철면신을 파괴할 것이다. 절대적인 파괴자 앞에서 사람들을 구해 낸 장후겸은 절대적인 구원자로서 추앙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장후겸이 계획한 귀원대계의 대단원이었다. 그런데 철면신이 등장했다! 계획에 없던 시간, 계획에 없던 장소에서! 그러나 장후겸에게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저 철면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도록 만들어진 마물이었다. 만약 장후겸이 끝내 나서지 않는다면 철면신이 이 대전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리면 장후겸의 귀원대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장후겸은 결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마무리를 앞당기는 도리밖에는 없는가?' 한 가닥 불길한 예감이 장후겸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철면신을 가장 먼저 공격한 사람들은 마봉황과 구양일산이었다. 마봉황의 손을 떠난 한 쌍의 백옥환(白玉環)이 영롱한 소리를 토하며 철면신을 향해 날아갔다. 육족풍의 삼대절학 중 하나인 비류비환술(飛流飛環術)이 전개된 것이다. 구양일산의 십지도 매서운 지력을 내뿜었다. 남마련 칠사의 우두머리였던 십지관홍이 전력을 다해 발출한 관홍지는 바위라도 관통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빠악`-` 북해의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한 쌍의 백옥환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마봉황은 엄청난 거력에 휩쓸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흐윽!" 구양일산의 형편은 마봉황보다 오히려 처참했다. 철면신의 요혈을 찌른 그의 열 손가락은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졌고, 한 쌍의 청동빛 손은 그의 단전 부위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뜨렸다. "아버지!" 대경한 구양지가 구양일산의 단전에 쌍수를 박아 넣은 철면신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보다 몇 배 강한 마봉황과 구양일산의 합공을 한 동작으로 박살낸 철면신이었다. 그녀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구양지가 발출한 장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철면신은 새로운 제물의 등장에 만족스러운 음소(陰笑)를 흘리며 손을 내뻗었다. 단순한 동작에 불과했지만, 구양지는 자신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가 푸른 수영(手影)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음을 느꼈다. 어느 순간,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청동빛 손을 발견한 순간, 구양지는 눈을 꽉 감고 말았다. 이러한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준 사람은 장옥평이었다. "지매(芝妹)! 어서 물러나시오!" 장옥평의 쌍검이 예(乂) 자로 교차되며 그 사이에서 발생한 부드러운 기운이 철면신의 살수를 가로막았다. 순간, 장옥평의 두 다리는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철면신의 역도는 인간의 몸뚱이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공격을 가로막은 장옥평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 철면신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뿜어 나왔다. "장... 일... 기...!" 장옥평은 전신을 억누르는 압력 속에서도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장일기는 그의 조부였다. 저자는 왜 자신을 보고 조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 하지만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시작과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손 그림자가 그의 전신을 뒤덮어 온 것이다. 장옥평은 두 눈을 빛내며 손 그림자의 공세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리고 수중의 쌍검으로 산동장가의 백화검법(百華劍法)을 전개했다. 하지만 검끝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쇠붙이를 때릴 때와 같은 단단한 질감의 느낌뿐. 바로 다음 순간, 쌍검 중 한 자루가 철면신의 손아귀 안에 들어갔다. 까드득`-` 검채 장일기가 자랑으로 여기던 백화보검(百華寶劍) 중 장검이 모래처럼 으스러졌다. 희대의 보검을 으스러뜨린 그 무시무시한 손은 장옥평의 얼굴을 향해 밀려들었다. 만일 우측에서 날아온 한 자루 해동검이 그 손의 진로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장옥평의 머리통은 흔적도 없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허공을 둥둥 날으는 신비한 해동검과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철면신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검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한 자루의 기형검은 해동의 검사들이 사용하는 해동검이었다. 현양자는 과거 무당산을 내려와 유랑하던 시절, 저런 검을 사용하는 해동검객과 비무한 경험이 있었다. 해동검객은 결국 이십 초 만에 그의 무당검도 아래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원의 어떤 검학보다도 유연하고 아름다운 해동의 검예(劍藝)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해동검객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생김새의 해동검이 지금 이 순간, 현양자의 눈앞에서 전설로만 전해 오는 어검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과연 천하는 넓도다!" 석삼도가 우화등선한 이후, 검으로는 천하제일임을 자부하던 현양자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으음!" 장후겸은 침음을 흘렸다. 한 자루 검을 날려 철면신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저 청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검은 검패의 보검도 으스러뜨리는 철면신의 무서운 손 아래에서도 부숴지지 않았다. 그것은 검을 조종하는 청년의 검도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의미했다. 만약 저 청년이 끝내 철면신을 감당해 낸다면? 장후겸의 등줄기에 엷은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영영 나설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있었다. 철면신이 어검술의 엄밀한 검벽(劍壁)을 뚫지 못하듯, 검 또한 철면신에게 뚜렷한 손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쌍방 모두가 부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후겸은 눈을 빛냈다. 원앙제로 되살아난 철면신은, 인간과는 달리 아무리 움직여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싸움이 장기화되면 이기는 것은 결국 철면신일 것이다! 장후겸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동검을 조종하는 박한의 피로도 짙어졌다. 놈은 괴물이었다. 검기에 휩싸인 해동검 아래 수십 차례나 요혈을 찔리고도 놈은 끄떡하지 않았다. 흡사 바위벽을 끌어안고 씨름하는 격이었다. 치켜 든 박한의 오른손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의 수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런 박한의 눈에 괴물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괴물로부터 오 장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박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웃음은 마치 "지금부터는 내가 할 테니 자네는 염려 말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박한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느꼈다. 박한의 눈에 비친 그는 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저갱 같은 함정 속으로 떨어지기 직전만 해도 그는 안정되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부조화가 그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부조화를 이겨 내고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박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강자(强者)임을... 박한은 안심하고 해동검을 거둘 수 있었다. 해동검이 물수리처럼 허공을 선회하며 박한에게 돌아간 것과 동시에, 단탈은 맹렬한 기합을 지르며 철면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이야아압`-`!" 가리아에서 뿜어 나온 시커먼 도기가 철면신의 허리를 휩쓸었다. 철면신은 오른팔을 뻗어 도기의 공격을 방어했다. 빡`-` 철면신의 팔뚝에 부딪힌 가리아가 튕겨 나갔다. 단탈은 어깨까지 전달되는 시큰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리아에 얻어맞은 철면신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던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면신이 대전에 들어온 이후 첫 후퇴였기 때문이다. "우워어어어`-`"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3 묘왕동주 철면신은 갑자기 단탈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나운 기세로 단탈을 덮쳐 왔다. 단탈은 철면신의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 대전에 들어온 뒤 지금까지 그가 싸움에 끼여들지 않았던 것은 마음의 기저부로 침잠되어 가는 투지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단탈도 인간인 이상,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무서운 괴물 앞에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을 제거하고 투지를 극성으로 불사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시간은 박한이 벌어 주었고, 단탈은 그 동안 모든 준비를 마쳤다. 지금의 단탈은 투지의 결정체. 철면신의 기세에 눌릴 이유가 없었다. "이야아압!" 단탈은 철면신과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가리아 끝에서 피어오른 커다란 검은 달이 철면신의 몸뚱이를 휘감았고, 그 속에서 벼락같은 삼 도가 떨어져 내렸다. 까가강`-` 단탈의 삼 도는 철면신의 몸뚱이에 그대로 적중되었고, 철면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걸음 물러섰다. "크아아`-`" 철면신은 양팔을 휘저으며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뜻 단탈을 향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단탈의 눈이 번쩍 빛났다. 철가면의 눈구멍으로 뿜어 나오는 으스스한 청광, 그 안에 도사린 어떤 종류의 감정을 분명히 읽은 것이다. '어쩌면?' 단탈은 왼손을 치켜 들었다. 그의 왼손이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손바닥 위로 시커먼 공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으워어억`-`" 철면신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단탈은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세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놈의 눈빛 속에 도사린 감정의 정체는 바로 두려움이었다. 두려움! 천적(天敵)에 대한 두려움! * * * 이세명은 혼문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철면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탈뿐이라고 말했다. 원앙제로 부활한 철면신은 절대무적(絶對無敵)의 불사신(不死身)이었다. 철면신은 이미 인간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악마의 영역에 들어 있었다. 인간이 악마보다 강할 수 없듯, 인간의 육신을 지닌 단탈이 악마의 영역에 든 철면신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이세명도 알고, 또한 단탈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명은 단탈만이 철면신을 죽일 수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단탈은 철면신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천적! 철면신은 탄생한 순간부터 이미 단탈을 천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원앙제의 도구로 쓰인 철면신의 육신은 과거, 약흠이 전개한 절독공의 지독한 독성에 의해 한차례 파괴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약과 신수, 그리고 하늘의 법을 거스르는 사이한 대법으로 철면신의 육신은 더욱 강해졌지만, 골수까지 스며 있던 절독공의 독성만큼은 제거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독성이 내부로부터 발작한다면 제아무리 불괴지체를 이룬 철면신이라 해도 결국 파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세명은 단탈을 살려 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고, 최후에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아낌없이 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 * * * "크아아아`-`" 어느 순간부터 철면신은 단탈을 향해 필사적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천적을 말살시키기 위한 발악과 마찬가지였다. 철면신의 공격이 몸뚱이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살이 갈라지고 핏물이 튀었다. 하지만 어떠한 고통도 단탈의 투지를 꺾어 놓지는 못했다. '놈의 내부를 흔들어야 한다!' 단탈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외부의 충격으로는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철면신에게 단탈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약점은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절독공의 독성이었다. 하지만 혼문을 모르는 이상 내부를 흔들어 놓을 방법이 없었다. 철면신의 미친 듯한 공세는 시간이 갈수록 그 험악함을 더해 갔다. 박한과의 싸움까지 감안한다면 최소한 이백 초는 넘는 격전을 벌인 뒤였지만, 철면신은 지금 막 싸움을 시작한 것처럼 원기 왕성했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그 끝없는 지구력 앞에서는 단탈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촤촤촤`-` 수십 개의 청동빛 손 그림자가 병풍처럼 주르륵 펴지며 단탈의 머리를 향해 밀려들었다. 단탈은 가리아로 장한도법의 세 번째 수법 야우단장을 전개해 손 그림자의 환상들을 봉쇄해 버렸다. 하지만 미처 막아 내지 못한 손 그림자 하나가 단탈의 가슴을 후려쳤고, 단탈은 입으로 피분수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공격의 효과에 만족한 것일까? "으워어어`-`" 철가면의 입구멍을 통해 치 떨리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고통으로 물들었던 단탈의 두 눈으로 번쩍이는 광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비로소 철면신의 내부를 뒤흔들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강철가면부터 벗겨 내야만 했다. 단탈은 가리아를 쥔 오른손에 침을 뱉었다. 핏물 섞인 끈적한 침이 가리아와 그를 더욱 하나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간다!" 단탈은 철면신을 향해 질주해 갔다. 그리고 둘 사이의 거리가 삼 장 정도까지 좁혀졌을 때, 단탈은 대전 바닥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철면신은 양손을 활짝 펼쳐 허공에 떠 있는 단탈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저 손에 잡힌다면 제아무리 단탈이라도 넝마처럼 찢겨 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발 놀림으로 말하자면 천하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단탈이었다. 그는 두 발을 번개같이 움직여 자신의 하체를 노리고 날아온 철면신의 양손을 번갈아 찍어 찼다. 그 반동으로 한층 더 몸을 솟구친 단탈은 하방을 향해 허리를 틀면서 가리아를 짧게 내리찍었다. 싸악`-` 가리아는 철면신의 얼굴을 종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철면신이 쓰고 있던 강철가면은 두 쪽으로 갈라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관명의 시신을 본 이후 줄곧 의기 소침해 있던 소래운은 드러난 철면신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놀란 것은 소래운뿐만이 아니었다. 북천권사 방지중, 산동장가의 감규목과 양충, 그리고 수양이 깊기로 소문난 무당파의 현양자까지도... 과거 무림맹이 건재하던 시절에 강호를 활보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 순간의 놀라움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가장 위대했던 무인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 * * 삼마와 사패에 의해 살해된 관명. 골수에 침범한 독 때문에 죽어 가는 무왕. 이세명은 이 두 가지를 이용해 복주이가의 복수를 이루려 했다. 설한대계(雪恨大計)라 명명한 이 복수극의 골자는 아비 되는 무왕에게는 육신의 안식을 빼앗고 아들 되는 관명에게는 영혼의 안식을 빼앗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우선 무왕에게 관명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비탄에 잠긴 무왕에게 아들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복주이가의 원앙제였다. 아들에 대한 애정으로 눈이 먼 무왕은 이세명의 제안을 두말없이 수락했다. 천여 명의 목숨이 희생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아들의 목숨에만 연연하는 삐뚤어진 부정 앞에서, 이세명은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이중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며칠 뒤 이세명은 무왕을 찾아가 관명의 시신이 너무 훼손되어 대법의 재료로 사용할 수 없음을 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부자지간이라면 몸을 바꾸어도 큰 부작용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일러두었다. 무왕은 당장 매달렸다. 자신은 어차피 오래 살 수 없는 몸이니 아들만이라도 자신의 몸에 담아 타고난 수명을 누리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이세명은 물론 무왕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설한대계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 * * 훗날, 중원에서는 극소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알려진 무왕(武王)과 묘왕(苗王)의 대결... 그것은 관산정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로도, 오십여 초가 넘는 무시무시한 싸움이 더 이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결정되었다. 당시, 단탈은 관산정이 입을 벌리는 순간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약흠의 독공을 사용했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4 묘왕동주 관전자들조차도 기가 질릴 정도로 지독한 난타전 속에서, 단탈의 좌수가 발출한 독구척(毒球擲)은 허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가 관산정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혔다. 도령체의 놀라운 공격 속에서도 철벽 같은 견고함을 무너뜨리지 않던 관산정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독구척의 독기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관산정은 대전 바닥에 다섯 치가 넘는 깊은 족적을 여섯 개나 남기며 뒤로 밀려났고, 급기야 입을 크게 벌리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단탈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단탈이 사용한 도초가 과연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를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탈이 들고 있던 시커먼 칼 빛이 잿빛으로 엷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칼은 이미 관산정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칼이 이동한 거리는 이 장여... 물론 멀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각룡전 안에는 내로라 하는 고수들이 운집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능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단탈의 칼이 날아가는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단탈의 칼은 그야말로 찰나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이 장의 거리를 뛰어넘은 것이다. 천하에 어떤 도초가 있어 이러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훗날 검선의 반열까지 오른 현양자는 그때 일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무왕의 천하오절 중 마지막 검초가 당시 단탈이 사용한 도초와 비슷했던 것 같소. 만약 단탈이 전개한 도초가 천하오절에서 비롯되었다면, 무왕의 두 번째 죽음은 자신의 절학에 의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현양자의 이야기는 한 가지 분명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당시, 단탈의 도초는 분명히 천하오절을 모체로 삼은 장한도법의 마지막 수법 장한면면(長恨綿綿)이었다. 그러나 장한면면은 불괴(不壞)의 외부로 보호받는 관산정의 내부를 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관산정의 이빨이 가리아를 으스러뜨리기 직전, 단탈의 오른손을 통해 발출된 천기멸세진결(天忌滅世眞訣)의 독기는 관산정의 목구멍을 뚫고 체내로 들어갔고, 관산정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칠규(七竅)로 검은 피고름을 쏟으며 쓰러졌던 것이다. 무왕과 묘왕의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백년 이래 중원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무왕 관산정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묘왕 단탈에 의해 패한 것이다. 무왕의 패배! 그것은 곧 장후겸의 파멸을 의미하기도 했다. 終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때 단탈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적지 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고, 사부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가 최후로 사용한 두 가지 수법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한꺼번에 시전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이었다고 한다. 단탈은 아마도 많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탈이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단탈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탈이 무왕을 쓰러뜨린 뒤에도 무왕총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희생자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단탈이 무왕을 쓰러뜨리고 난 뒤 사람들이 있는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 청년이 단탈의 가족을 죽이고 나라아합을 빼앗아 간 조추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조금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악당이라니! 나는 요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고는, "잘생긴 사람이라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야. 좋은 사람은 오히려 못생긴 사람 중에 많지."라는 얘기를, 산문을 청소하는 무연(無然)`-`그는 못생겼지만 마음은 착한 도동(道童)이다`-`에게 해주곤 한다. 조추림은 죽었다.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죽었다. 자신의 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버린 것이다. 나는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 돌발적인 자살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나라아합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이리로 오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라아합은 그에게로 가는 대신, 단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라아합에게 자신에게로 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라아합은 더욱 굳게 단탈의 손을 잡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해 버리다니...!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로 깜짝 놀랄 일은 조추림의 목에서 붉은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올 때 벌어졌다. 장 오라버니의 백부인 장후겸이 갑자기 사람들을 밀치며 달려와 조추림을 끌어안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추림은 죽기 직전, 그에게 "모두 끝났어요,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버지라니? 그렇다면 조추림이 그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이때 단탈이 장후겸을 향해 말했다. -`철면신! 당신의 귀원대계는 실패했소!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좀처럼 단탈의 말을 믿으려 하지는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후겸은 무왕총 안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실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단탈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장후겸이 대전이 떠나갈 듯한 광소를 터뜨렸을 때, 사람들은 단탈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끝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준비한 계획인데! 장후겸의 광소는 통곡보다도 오히려 슬프게 들렸다. 마치 듣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돌연 단탈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단탈은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을 뻘뻘 흘릴 만큼 탈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단탈을 구해 준 것은 사부님이었다. 장후겸은 정말로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무당파의 최고수인 사부님조차도 쩔쩔매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박한 아저씨가 사부님을 거들자 전세는 팽팽해졌다. 게다가 장 오라버니까지 나섰으니, 제아무리 무서운 무공을 지닌 그라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장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 장 오라버니의 표정은 무척 기이했다.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어우러져 고통으로 바뀐 듯한 표정이랄까? 각설하고, 장후겸은 죽었다. 그는 장 오라버니의 검에 가슴을 찔려 죽었다. 어찌 보면 그의 죽음은 조추림과 같은 자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가슴을 찔러 오는 장 오라버니의 검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끝까지 저항했다면 그를 죽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왕총의 비극은 장후겸의 죽음으로 끝났다.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다시 대한 날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인 정통 7년 시월 이십일. 이제는 진정한 무왕의 무덤이 된 무왕총은 사람들이 모두 나오기를 기다려 그 입구를 굳게 닫았다. 그 입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몇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우선 결성된 뒤 한 달 만에 해산될 수밖에 없었던 북정회의 네 수령에 대한 이야기. 강호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소래운은 이 년 전 가을에 죽었다. 무왕총에서 나온 지 일 년 만의 일이었다. 거령신 막뢰가 그보다 두 달 앞서 죽었다 하니, 이제 이 세상에는 신주십일존(神州十一尊)이라는 이름을 지닌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소래운의 사인은 노환(老患). 무왕총에서 나온 이후 그는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급속히 늙어 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래운이 죽은 뒤 거상련은 주력을 상계(商界) 쪽으로 바꿨고, 그래서 지금은 강호에서 거상련의 도전(刀錢) 문양을 달고 다니는 무인 보기가 대장간에서 얼음 보기만큼이나 어렵다. 소역발산 막강은 여전히 평판이 안 좋았다. 막강의 뒤를 이어 천마문주의 자리에 오른 그는 여전히 색을 밝히고, 여전히 노름을 좋아하며, 여전히 폭음을 즐겼다. 그는 무왕총에서 한 팔을 잃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주사(酒邪)를 부렸고, 급기야 거느리고 있던 다섯 명의 마누라도 그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문주가 이 모양이니 문파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그래서 천마문은 비봉방(飛鳳幇)이라는 신흥 문파에게 섬서의 패주 자리마저 빼앗긴 채 쇠퇴 일로를 걷고 있는 실정이었다. 천마문과는 반대로, 산서 의혈당은 삼 년 전보다도 오히려 번창하여 이제는 과거의 영예를 거의 되찾은 듯했다. 당주 서문도천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서문도천은 사석을 통해 삼 년 전 그에게 무왕총도를 준 사람이 이세명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단탈의 말에 의하면, 진짜 이세명은 오래 전부터 무왕총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세명으로 변장해 서문도천에게 무왕총도를 준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도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배후에 장후겸이 있을 것이라는 점 외에는... 장 오라버니는 지금 산동에 있다.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산동장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철옥과의 해묵은 원한을 청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철옥의 지존 매용소도 장 오라버니만큼이나 분주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장 오라버니를 본 것은 한 달 전, 바로 장 오라버니의 혼례식 때였다. 장 오라버니의 신부는 마맥회의 새로운 회주가 된 구양지였다. 마봉황이 반신불수가 되고, 한때 마맥회를 이끌던 간부 중 대부분이 죽었으니 회주 노릇을 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을 것이다. 삼 년 전의 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혼례식장에 서 있던 장 오라버니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삼 년 전의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장 오라버니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삼 년 전 나는 열여섯 살이었고, 열여섯 살짜리 계집애는 대개 잘생기고 기품있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열아홉 살이다.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 제 목 : [묘왕동주] 2 부 하권 제 27 장 - 15 묘왕동주 장 오라버니에 관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삼 년 전부터 강호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십비당(十秘堂)의 존재이다. 한 명의 당주와 아홉 명의 살수로 이루어진 이 살수방(殺手幇)은, 산동장가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일이라면 대가없이도 해주겠노라 공언하고 다녔다. 그들이 왜 그렇게 산동장가를 증오하는지는 장 오라버니조차 모른다고 한다. 장 오라버니의 검법이야 당금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니 크게 염려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화살은 막기 어려운 법이다. 다음에 장 오라버니를 만나면 조심하라고 말해 줄 생각이다. 다음은 박한에 대한 이야기. 박한은 무왕총의 비극으로부터 육 개월이 지난 뒤 해동으로 돌아갔다. 해동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찾은 곳은 무당파, 바로 내가 머물던 곳이었다. 당시 상청궁(上淸宮) 앞뜰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한 나는, 어리석게도 그가 나를 만나러 온 줄로만 알았다. 물론 그는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사부님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사부님은 박한을 데리고 천리동(千里洞)으로 올라가셨다.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는 엄명이 있으셨지만, 고리타분한 도사들과는 천성부터가 다른 내가 그 말을 따를 리가 없었다. 나는 천리동으로 올라갔고, 두 사람의 비무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되었다. 비무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상해 얘기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승자와 패자 모두 즐거워했고, 그래서 비무는 시작할 때보다 오히려 유쾌하게 끝났다. 사부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향차 많은 중원의 검객들이 그의 검을 배우기 위해 해동으로 가게 될 것이다. 누가 닮은꼴이 아니랄까 봐 백부님과 똑같은 얘기를 하다니! 어쨌거나 백부님과 사부님의 예언은 얼마 전에 현실로 드러났다. 매용소의 심복 채앙이 해동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내게 채앙의 해동행(海東行)을 알려 준 사람은 장봉현에서 책방을 하는 어 선생이다. 이건 비밀이지만, 그는 정보 상인의 결사(結社)인 황서계의 계원이었다. 나는 황서계원의 단골이 될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정보를 주는 일을 계의 배반자에 대한 징계의 일환이라고 여겼고, 그런 까닭에 나는 철옥에 관한 한 그의 공짜 손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서계를 배반한 자의 이름은 전운리. 내게 국과 모포를 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과 모포로 살부지수(殺父之讐)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산동장가와 철옥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이는 날, 나는 장가의 편에 서서 전운리를 죽일 것이다. 참! 가장 중요한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나는... * * * 췻! 석소용은 오른손을 허리에 착 붙인 채 보기에도 호쾌하게 침을 뱉었다. 왜조(倭 )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저 침 뱉기는 하백의 후예들 사이에서 통하는 감정 표현법이었다. 이 발칙한 것은 어디서 그것을 주워 배워, "나는 지금 화났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건드리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천한 수적 놈이 감히 이 아가씨의 호젓함을 방해하다니!" 석소용은 삼 장 물위를 단숨에 뛰어 건너 왜조가 탄 배의 갑판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두 자 길이의 단봉검(丹鳳劍)을 뽑아 왜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열심히 수련한 탓에 석소용의 검법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왜조는 죽을힘을 다해 분수궐(分水 )을 흔들어 보았지만, 십 초도 지나기 전에 매서운 일검을 장딴지에 얻어맞고 갑판 위를 뒹굴게 되었다. "흥! 겨우 그런 재주로 까불다니! 다시는 수적질을 못 하게 손목을 잘라 주마!" 석소용은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단봉검을 치켜 들었다. 그런데 이때, 선실 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 간 큰 아가씨가 겁도 없이 삼협(三峽)을 쪽배로 오르나 했더니, 이제 보니 호북에서 이름 높은 단봉여협(丹鳳女俠)이 오신 게로군! 오랜만이오! 날 기억하겠소?" 석소용은 선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턱수염이 텁수룩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석소용은 그 사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왕곤...? 그때 단탈과 박한을 무왕총까지 안내했던 대왕곤 맞죠?" 텁석부리 사내, 대왕곤은 껄껄 웃었다. "맞소, 욕쟁이 아가씨! 무왕총의 참극 이후 무당파 노검선(老劍仙)의 속가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내 풍문으로 들었지! 이렇게 옛 친구를 만나니 너무 반가워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하하!" 석소용은 치켜 든 단봉검을 거두었다. "아저씨의 가족인 줄 알았다면 심하게 손쓰지 않는 건데... 미안하게 됐어요." "누굴 탓하겠소? 눈은 있으되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막내 탓이지!" 석소용은 방긋 웃었다. 이때, 한 줄기 시원한 강바람이 불었다. 강바람은 석소용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때는 만추(晩秋)의 정취가 절정인 구월 말이었고, 난간 너머로 보이는 삼협의 풍광(風光)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인지라, 석소용은 온몸이 둥실 떠오르는 듯한 상쾌함에 가벼운 기지개를 켰다. '삼 년이라는 세월이 억지만 부리던 떼쟁이 소녀를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시켜 놓았던가?' 대왕곤은 경이로운 눈으로 석소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문득, 대왕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석소용은 날렵한 경장을 단단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등에는 커다란 봇짐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일견 먼 길을 나선 듯한 행색이었다. "한데 웬일로 이 궁벽한 곳까지 오셨소?" 석소용은 시선을 돌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저 물길을 따라 오십 리쯤 가다 보면 작고 정겨운 나루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는 남서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 석소용은 몽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묘강에 가려고요." "묘강이라..." 묘강이라는 말을 나직이 되뇌어 보는 대왕곤의 눈빛도 석소용과 마찬가지로 몽롱해졌다. 문득, 석소용의 눈앞에는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삼 년 전의 어느 날, 미오의 손을 양쪽에서 잡은 채 남쪽으로 떠난 단탈과 나라아합... 중원에서 겪은 일 따위는 이미 잊은 듯, 두 사람의 얼굴에는 무한한 행복감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 잘됐어... 그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석소용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헤헤 웃었다. 그런데 두 눈에 왜 눈물이 고이는지 알 수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보군." 대왕곤이 말했다. "헤헤." 석소용은 삼 년 전 그날처럼 웃었다. 그런데 두 눈에는 왜 눈물이 고이는지 알 수 없었다. * * * 이상한 사람, 하지만 그리운 사람이었다.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