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전편 표지 제목: 구인회 전편(전2권) 지은이: 검궁인 - 차 례 - 서문(序文) 서막 1 서막 2 제1장 나는 누구인가? 제2장 새로운 삶 제3장 계약(契約) 제4장 넘어야 할 한계(限界) 제5장 변신(變身) 제6장 귀환(歸還) 제7장 상벌(尙閥)들의 전쟁 제8장 붕괴(崩壞) 제9장 진짜 색골(色骨) 서문(序文) 인간의 역사는 피의 역사다. 역대 왕조(王朝)가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를 수많은 사서(史書)들이 그 기록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하기에 비정(非情)의 역사는 그 순환을 멈추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사회. 오늘날에도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善)을 믿는다. 진실을 외면하는 자는 언제고 그 대가를 받는 법이다. 이른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뿌린 씨를 스스로 거두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배신했던 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배신당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아마도 그는 상대를 손가락질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배신은 더러운 것이다. 9명의 아이들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키워졌다. 그러나 그들이 임무를 완수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아이들은 세상을 증오했다. 그리고...... 운명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 사이에 다시 배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원히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 그것은 욕망을 지닌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인간이기에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구인회(九人會)>는 배신에 관한 기록이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서막 1 누군가 물었다. "검호(劍狐)를 아시오?" "......." "음시음(吟詩音)을 아시오?" 두 번째 질문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그가 음시음이란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음양동자(陰陽童子)는? 아황(亞黃)은? 치독(痴毒)은? 탕미인(蕩美人)은? 그들 가운데 한 명도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오?" "......."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그럼 만권서각(萬卷書閣)은? 무무(無無)는? 정말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질문자의 음성에는 탄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 용대형(龍大兄)도 누군지 모르겠구려?" 역시 묵묵부답. "하면...... 구인회(九人會)는 아시오?" 처음으로 그가 입술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척이나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르오!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오?" 마치 오랜 시간에 걸쳐 고문이라도 당한 듯 그의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필히 알고 있어야 할 이름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서막 2 대륙을 지배했던 원(元)이 스러져 갈 무렵. 그들은 최후의 용트림을 시도했다. 이미 중원에서 기반을 잃은 그들은 암중으로 비밀 자객집단을 양성하여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 중원에서는 일대 영웅인 주원장(朱元 )이 우후죽순처럼 봉기한 홍건적(紅巾賊:백련교도를 말함)의 세력을 등에 업고 명조(明朝) 창업의 기틀을 세우고 있었다. 즉, 원은 정보활동을 통해 주원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 비밀세력을 키운 것이다. 그들은 홍건적의 요인 암살과 중원 무림인들의 말살(抹殺)을 주목적으로 세워진 자객집단이었다. 이름하여 무혈루자(無血淚子). 여기에 소속된 자들은 한결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다. 본시 무림인들은 협의도(俠義道)를 추구하는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적(夷狄)인 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중토를 수복하는데 모른 척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의 치하에서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 때문이었다. 무혈루자는 전문 살수집단으로 치밀한 정보망과 집요한 추적, 잔혹한 암살 행위에 무림인들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중원 무림인들은 암암리에 무혈루자를 상대할 대계(大計)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 계획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계획에 참여한 자들 중에서도 세부사항까지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물론 무혈루자의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전 무림이 이 비밀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파(自派)의 비급(秘 )이나 보물조차도 아낌없이 털어 내놓았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무혈루자를 분쇄하는데 있었으며, 두 번째 목표는 중토를 수복하는데 두었다. 그러나 계획의 이면에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사(秘事)가 깔려 있었으니, 그 사실을 아는 이 또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세인들은 그 비밀계획이 고해성(苦海城)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고해성에서 끝났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난세(亂世)는 영웅(英雄)을 부르기 마련이고, 일세의 영웅은 난세를 평정함으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다. 그렇다. 그들의 영예는 길이 빛나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원이 주원장에게 패퇴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으로 쫓겨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영웅들로 추앙 받았었다. 명(明)의 건립에 그들이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들이 잃어버렸던 중토를 되찾고 한족(漢族)의 국가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그들에 관해 알아야만 했다. 한족의 중토 회복은 원의 밀정집단인 무혈루자의 자객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악마집단을 제거한 장본인들이 그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일명 혈루자(血淚子)라 불렸다. 무혈루자와 달리 그들은 피눈물을 쏟으며 봉기했기 때문이다. 일신의 영욕은커녕 공명심조차 초개처럼 여기고 암약하기를 수십 년. 그러다 그들은 마침내 중원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혈루자의 무리들을 척살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혈루칠십이자(血淚七十二子)로 불렸던 그들은 뜻밖에도 대업을 완수하자마자 전 중원 무림인들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돌고 도는 것이 세상사라고 하나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혈루칠십이자는 졸지에 설 땅을 잃고 말았으며, 천하 어느 곳에서도 반겨줄 이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난세를 종식시키고 명이 일어서는데 초석이 되었던 그들은 하나 둘 대지에 피를 뿌리며 산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순 명료했다. 그것은 고해성에서 시작된 비밀계획 중에 대업이 완성된 후 혈루칠십이자가 반드시 척살 되어야 한다고 명시(明示)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중원 무림인들은 무혈루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파의 이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고해성에 모든 것을 바쳤으며, 그 가운데 탄생한 것이 바로 혈루자였다. 하지만 대업이 완성을 본 뒤에는 유감스럽게도 혈루자야말로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신의 역사는 깊이 숨겨진 채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치부를 감추려는 몇몇 무림 고인들이 비밀을 안은 채 철저히 입을 다물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이 비사는 영원히 땅 속으로 묻혀 버릴 뻔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망각되었어야 할 그 일은 조심스럽게 무림의 일각에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핏빛 풍운(風雲)을 일으켰다. 때는 영락(永樂) 3년. 태평성대를 누려야 할 그 시기에 말이다. 제1장 나는 누구인가? 1 쏴아아아......! 물소리가 들리고 있다. 한 척의 작은 배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고 있었다. 소선(小船)은 야음(夜陰)을 틈타 아무 기척도 없이 남쪽에서 북을 향해 물살을 저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배에는 지붕이 씌워져 있지 않아 갑판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노를 젓고 있는 5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배 안에는 검은 옻칠을 한 관(棺)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 헐떡이며 말했다. "빨리......! 놈들이 곧 눈치채고 쫓아올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노를 젓는 판국인지라 그 말은 그리 효험을 거두지 못했다. 5인의 사내들이 죽어라 팔을 움직여도 배가 움직이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만 힘든 와중에도 그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긴장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극적이었소. 공자를 구출하기 위해 사십구 인의 결사대(決死隊)가 뛰어들었지만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백분지 일도 안 되지 않았소? 하늘의 가호가 있기 전에는." 그 말을 받아 울부짖는 음성들도 있었다. "흐으으...... 우리는 해냈소. 금화성(金華城) 놈들이 공자를 납치해 간지 벌써 오 개월이 넘었는데 이렇게 무사히 구출해 낼 수 있었으니 말이오. 하늘이 아직 우리 구룡상막(九龍商幕)을 버리지는 않으신 듯하오." "하지만 모두...... 죽었소. 놈들이 무림인들을 끌어들여......." 맨 처음 음성의 주인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조용히 하고 긴장을 조이기 바라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지 않소? 이 강을 건너도 그 곳은 예전처럼 구룡의 영지가 아니니 말이오. 우리는 최소한 황하를 건너기 전까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오." 쏴아아아! 물결 소리가 높아졌다. 소선은 어느덧 양자강의 북쪽 강안(江岸)에 닿고 있었다. 쿵! 배가 기슭에 닿자 5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타타타탁......! 그들은 배에서 내리더니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가에는 갈대가 무성히 자라나 있어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2명이 앞뒤에서 관을 메고 있었고, 나머지 3인은 엄호하듯 앞과 뒤를 경계하며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장도(長刀)가 쥐어져 있었는데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도록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얼마쯤 갔을까? "흐흐흐......!" "멈춰라! 황하오의(黃河五義)! 예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휘익! 휙! 음침한 외침과 함께 어디선가 10여 명의 흑영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으음......." 황하오의 중 누군가가 절망에 찬 신음을 발했다. 그러나 관을 호위하던 3인은 재빨리 전면으로 신형을 날리며 전광석화처럼 장도를 휘둘렀다. "아우들! 빨리 달아나라. 여기는 우리가 맡겠다." 채채채챙! 요란한 금속성이 울리며 불꽃이 작렬했다. 3인이 급기야 목숨을 내던지고 방해자들과 칼부림을 벌였던 것이다. "형님!" 관을 멘 두 사람은 눈물을 뿌리며 몸을 날렸다. 그렇게 그들이 약 한 마장쯤을 달아났을 때였다. "으아악!" 뒤편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크으으......!" 두 사람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도 달리는 걸음만은 멈추지 않았다. "멈춰라! 마차 안을 확인해 봐야겠다." "에구, 나리! 그 속에는 시신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시끄럽다! 직접 확인해야겠으니 잔말 말고 비켜라." "제발 고인(故人)에게 더 이상의 모욕은......." 이 실랑이는 검은 휘장이 드리워진 한 대의 마차를 놓고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다 채근을 하는 쪽이 이겼는지 이내 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뚜껑을 열어야겠다." "나리, 부디 그것만은 안 됩니다요." "흐흐...... 왜,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느냐?" "그...... 그게 아니라 이미 죽은 분을......." "비켜라!" 덜컹! 못이 빠지면서 관 뚜껑이 열렸다. 빛! 눈부신 빛이 느껴졌다. 뿌연 빛 무리 속에서 하나의 험상궂은 얼굴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듯했다. 하지만 그 자는 끝내 나를 건드리진 못했다. 그 자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진다 싶은 순간, 핏물이 확 뿜어져 내 얼굴 위로 뿌려졌을 뿐이다. 그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바로 뒤에 또 다른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이하게도 그는 나를 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왜......? 험로(險路)를 달리는지 마차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가는 곳마다 무수한 위험이 뒤따랐다. 관은 양자강을 건너고도 수십 일간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 동안 운반자는 수도 없이 바뀌었으며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매번 관을 탈취하려는 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피아(彼我) 구분도 없이 칼부림을 하다 대부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지만 그래도 관만은 빼앗기지 않고 여전히 북쪽으로 운반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몇 명의 희생자가 생겼는지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단, 희생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번번이 관의 호송을 도왔다. 끼이익! 관 뚜껑이 열리며 다시 뿌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나를 어루만졌다. 그는 내 얼굴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엇인가를 천천히 끌어내렸는데, 그로 인해 나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눈 앞은 더욱 환해졌고 얼굴에 차가운 공기가 와 닿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있어도 여전히 뿌연 안개가 주변을 휩싸고 있는 듯하여 나는 아무것도 명확히 볼 수가 없었다. 문득 격정에 찬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영호공자(令狐公子)!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비록 우리 구룡의 형제들이 수백 명이나 희생되긴 했지만 공자께서 무사하실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저희들의 복수를 해 주리시라 믿기에......." 울먹이는 그 음성은 나로 하여금 재삼 의혹에 빠지게 만들었다. 희생이니, 복수니 하는 어휘들은 별로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노와 증오가 깃든 그 음성의 주인이 왜 그런 것을 내게 종용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무엇인가가 입 안으로 슬며시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향긋한 죽이었다. "영호 공자, 이제 황하를 건너기만 하면 추적도 끝날 것입니다. 부디 그때까지 더 이상의 변고가 없기를......." 그는 간절한 기원과 함께 다시 내 몸에 천을 칭칭 감았다. 얼굴도 무엇인가에 의해 도로 가려졌다. 쿵! 둔중한 음향과 함께 도로 암흑이 찾아왔다. 아마도 나를 가두고 있는 관 뚜껑이 닫힌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어디로 급촉하게 달려가는지 온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2 "크아아악......!" 비명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지옥에라도 온 것일까? 대체 나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가는 곳마다 싸움이 벌어지고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나를 지키는 자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그들의 손에서 날 탈취해 가려는 자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죽음을 불사하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무리들과, 역시 필사의 각오로 그에 맞서는 사람들....... 양측의 죽음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계속하여 어딘 가로 운반되어지고 있었다. 몇 번인가는 추적자들의 수중에 넘어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내 뒤집어지곤 하여 나를 호송하는 자들의 열의와 끈기에 절로 감탄이 일었다. 그들은 줄곧 날더러 소주(少主), 혹은 영호 공자라 부르며 지극히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영호(令狐)란 성(姓)이 왜 그리 낯설게 들리는 것인지. 나는 그것이 내 성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 그런 성은 없었다. 아니, 사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들은 황하를 건너야 안심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황하를 건너게 되었다. 덜컹! 관 뚜껑이 이번에는 세차게 열렸다. 그에 따라 눈부신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사방으로부터 여러 마디의 부르짖음이 동시에 들려 와 나는 한동안 귀가 멍멍했다. "오오! 영호 공자!" "결국...... 살아 돌아 오셨구려!" "아아! 하늘은 우리 구룡상막을 버리지 않으셨소!" "소주......!" 대전(大殿). 100인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관을 둘러싼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관 뚜껑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그 속에는 전신을 흰 천으로 휘감은 한 인물이 시신인 양 말없이 누워 있었다. 관 옆으로는 5인이 둘러서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약상자(藥箱子)를 들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누렇게 병색이 돌았고, 나이는 오순이 넘어 보였다. 나머지 4인은 중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그들에게서 한결같은 것은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믿음이 뒤엉켜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오직...... 믿을 거라곤 구양선생(九陽先生)의 의술뿐이외다. 선생에게 우리 구룡상막의 미래가 걸려 있소이다." 그는 금의를 입은 노인으로, 엄숙한 신색에 비해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구양 선생이라 불린 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의술이 신묘하다 해도 하늘의 법은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외다. 최선을 다한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구려." 말을 마치자 그는 들고 있던 약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굵고 가느다란 침(針)을 비롯하여 가위나 칼, 붕대, 여러 종류의 약병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가위를 꺼내 들더니 관 속 인물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천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관 주위에 있던 4인의 인물은 물론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천이 잘려 나가자 숱한 사연 속에 이곳까지 이르게 된 인물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신(裸身)이었다.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수척한 편이었으나 키가 헌칠하고 수려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그의 왼쪽 가슴에 북두칠성(北斗七星) 모양의 점이 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점을 본 중인들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역시......!" "영호 공자가 맞소이다." "어서 얼굴을......!" 구양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위로 가위를 옮겨가 사나이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을 잘라냈다. 그런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으음, 이럴 수가......!" 구양 선생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아!" 나머지 4인은 안색이 변한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떤 자는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이 제거된 사나이의 얼굴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끔찍하게도 피부가 검푸르게 변색되었을 뿐 아니라 오관(五官)이 썩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의 얼굴이 어떤 것이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으며 진물이 흘러 나와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까지 했다. "허어! 심각하군. 오랫동안 묶여 있어 체내의 독기(毒氣)가 얼굴로 몰려 버렸소." 구양 선생의 말에 4인 중 한 중년인이 물었다. "독이라고? 그렇다면 금화성 놈들이 전아(典兒)에게 독을 썼단 말이오?" 그 자는 얼굴이 각이 져 위풍당당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렇소이다. 다행히 급성이 아니라 만성독이라 얼굴로 올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이오." "죽일 놈들!" 중년인은 이를 갈더니 구양 선생에게 물었다. "해독은 가능하오?" "글쎄올시다." 구양 선생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환자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지금 영호 공자는 갖가지 악독한 금제(禁制)에 걸려 있소이다. 내가고수에 의한 중수법(重手法)으로 혈맥이 짚여 있는 데다 십팔 종의 독물에 중독되어 혈류가 제대로 운행되지 못하는 상태요. 뭐라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 구양무종(구陽武宗), 평생의 의술을 총동원해 보겠소이다." 금의노인은 격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떨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호 조카는 살려 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구룡상막은 머지않아 와해될 것이오. 금화성 놈들이 천하의 상권(商權)을 지배하는 꼴을 어찌 두고 보겠소?" "으음......." "부탁하오, 구양 선생! 우리의 희망을 저버리지 마시오." 구양무종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입술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노부에게 시간을 주시오. 적어도 앞으로 보름 정도는 소요될 것이오." 금의노인은 안도와 염려가 뒤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부디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차라리 이 늙은 목숨을 바쳐 해결될 일이라면 이토록 마음을 졸이지는 않으련만." 그 한마디로 인해 대전에는 숙연한 공기가 감돌았다. 고통스럽다.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구양 노인은 아마도 내 몸을 자신의 실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내 전신을 멋대로 주물러대더니 급기야 굵고 짧은 수백 개의 침을 꽂았다. 그 침의 빈 관을 따라 체내의 피란 피는 모두 빠져 나가는 듯해 정신이 가물가물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내 몸을 펄펄 끓는 초산수(醋酸水)에 담갔다 꺼낸 후 예리한 비수로 여러 부분의 살점을 도려 내기까지 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얼굴에 대한 수술이었다. 그는 내 얼굴 가죽을 몇 번이나 벗겨 냈으며, 그 때마다 껍질이 없는 맨살 위에 고약(膏藥)처럼 진득한 것을 덕지덕지 붙였다. 그 약이 가져다 주는 고통은 가히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수차례나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그런 고통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차례나 겪는 동안 나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내 상태였다. 끔찍한 고통을 수없이 치르면서도 나는 한 번도 혼절하지 않았으며 정신도 저주스러울 정도로 맑기만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며, 어떤 자는 절을 하면서 흐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영호 공자라 불렀다. 영호전(令狐典). 아마도 그것이 내 이름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이 귀에 설기만 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영호전이란 이름만이라도 떠올려 보려고 수없이 노력해 보았으나 그것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 날 보러온 자들의 말대로 구룡상막의 대공자인 영호전이 나란 말인가? 모르겠다.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3 얼굴을 감쌌던 붕대가 끌러지는 순간이다. 방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인 채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영호전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오!" 누군가의 탄성과 함께 중인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그의 얼굴에 못박혔다. 흥분과 격동을 이길 수 없었는지 그들의 안면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영호전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뿌연 빛이 밀려들어와 눈이 부셨을 뿐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차츰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정경은 아주 고풍(古風)스러웠다. 방은 꽤 넓었으며 사방의 벽에는 고서화들이 걸려 있었다. 특히 그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비파(琵琶)였다. '비파라.......' 영호전은 맞은편 벽에 안치되어 있는 고색창연한 비파를 바라보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그가 비파에 어떤 감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 방이 몹시 낯설었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처음 보는 인물들로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중년인에서 늙은이까지 10여 명쯤 되었는데, 하나같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표정으로 미루어 감격의 눈물 같았지만 영호전으로서는 난감하여 견디기가 힘들 따름이었다. "나는......."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의 반응도 다를 바 없었다. "오오!" "영호 공자!" 그들의 환호성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으음, 성공인 듯하오." 음성으로 미루어 구양무종이 틀림없어 보이는 노인이 누렇게 뜬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외의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감돌았다. 하지만 영호전으로서는 시종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 장내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번졌다. 영호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충격을 주었는지 그들은 모두 아연해하는 표정이었다. 가장 실망감을 드러낸 사람은 구양무종이었다. 그는 비쩍 마른 손을 뻗어 영호전의 손목을 잡았다. 영호전은 두 개의 손가락이 자신의 맥을 짚는 것을 느끼며 잠자코 있었다. 한참 후. 구양무종은 길게 탄식을 발했다. "아아! 공자는 신기(神氣)가 흐트러지고 말았소이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뇌맥(腦脈)이 손상된 것 같소." 금의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전아가 기억을 상실했단 말씀이오?" 구양무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어찌 이런 일이......!" 금의노인을 비롯하여 중인들은 저마다 크게 낙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안면을 굳혔다. 당사자인 영호전만이 담담한 기색이었다. '그래, 난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릴 리가 없지.' 그의 중얼거림은 자조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간간이 무엇인가 생각나는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기억들은 너무도 단편적이라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아득한 전생에서의 일 같은 느낌이 드는 그였다. 최근만 해도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곳으로 운반해 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일 또한 실감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나는 영호전이란 말인가? 이들의 호의를 접수해도 마땅한 인물이란 말인가?' 그는 여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고, 그 때문에 자신을 알고 있으며 커다란 기대를 품고 있는 듯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한 가닥 미안한 마음마저 들고 있었다. 영호전은 새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기억이 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끝내 많은 얼굴들 가운데 아무도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가히 필사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호전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현재 몸 담고 있는 구룡상막(九龍商幕)은 중원의 남북을 분할하는 막강한 상조직(商組織) 중 하나였다. 이 단체는 금화성(金華城)과 더불어 각기 북과 남에서 오랫동안 전체 상권을 거머쥐고 실력을 행사해 왔다. 구룡상막의 거점은 정확히 말해 양자강 이북의 전 지역으로 거기서 행해지는 모든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각처에 널린 주루(酒樓)는 물론 기원(妓院), 전장(錢場), 마장(馬場), 선단(船團), 표국( 局), 금광(金鑛) 등 이권을 추구하는 여하한 상행위도 반드시 그들의 관장 하에 이루어지곤 했으며, 그 역사만 해도 물경 50년이 넘은 터였다. 금화성도 그러했다. 그들은 양자강 이남에서 교역권을 장악한 채 구룡상막과 엇비슷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구룡상막과 금화성 간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숱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금화성이 전통을 깨고 양자강 이북의 권리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는 구룡상막으로서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양측의 불협화음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도처에서 상인들끼리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였는데 그 때마다 늘 패배하는 쪽은 구룡상막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금화성 측은 막대한 황금을 풀어 무림인들을 대거 영입시킨 바 있다. 그로 인해 수년래 구룡상막은 영지를 빼앗기기 시작했으며 패퇴를 거듭하다 종내 황하 이북으로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이렇듯 영지가 축소된 것은 그렇다 치고, 금화성 측은 더욱 놀라운 일을 자행했다. 그들은 급기야 녹림도(綠林道)를 움직여 구룡상막 내에 자객을 밀파시켰던 것이다. 그 자객들에 의해 구룡상막의 요인들이 하나 둘 죽어 갔다. 또한 그것으로도 모자라 6개월 전에는 황하 이남의 상권을 되찾기 위해 나섰던 구룡상막의 후계자, 즉 영호전이 그들에게 납치되는 불행한 사건까지도 벌어졌다. 영호전은 구룡상막의 창설자인 용혈재신(龍血財神) 영호신광(令弧神光)의 독자였다. 그는 타고난 상술의 귀재로 해박한 학문과 지혜로 인해 차기 구룡상막주로 내정된 바 있다. 그가 납치됨으로써 구룡상막은 막바지의 위기에 몰렸다 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때맞추어 구룡상막의 주인인 영호신광조차 자객에 의해 폐인이 된 터인지라 희망이라고는 오직 영호전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영호전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구룡상막에서 결사조직을 편성하여 목숨을 걸고 금화성으로부터 그를 빼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상실하여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과거를 되찾기 위해 그 자신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었으나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4 일명 구룡연(九龍淵)이라 불리는 곳이다. 중원 북쪽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곳으로 석문(石門)에 위치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낙산사(洛山寺)의 서쪽에 있었는데, 장원의 규모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구룡연의 구룡전(九龍殿). 많은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6개월만에 사지(死地)에서 살아 돌아온 그들의 소주인을 배알하고 있었다. 영호전은 그들의 앞을 지나치면서도 기억을 되찾아 보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도 그가 아는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보아도 허사였다. '모르겠다. 이들 중 한 명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들은 나를 알고 있는데 나는 모르는 것이다.' 영호전은 참담한 나머지 스스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바쁘게 움직여야 할 처지이건만 온통 모르는 사람들 속에 갇혀 있는 형국이고 보니 무력감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한 가닥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와 그를 위로했다. "공자,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시간이 지나면 난제들은 저절로 해결이 될 것이오." 줄곧 곁에서 수행하던 구양무종이었다. 영호전은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자! 무리하면 건강에 해로우니 그만 들어갑시다." 구양무종은 영호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실상 작금과 같은 사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연 일주일에 걸쳐 구룡상막의 요직에 있는 인물들이 구룡연으로 와 영호전에게 얼굴을 보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가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라곤 현기증이 전부였다. 심지어 기억을 짜내느라 과다하게 심력을 소모한 탓에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호전의 고뇌는 덜어지지 않았다. 지난 반 년 동안 금화성에 납치되어 있으면서 그는 과거를 몽땅 잃어버린 것이었다. 문제는 그 자신에게도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구룡연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며 구룡상막의 유일한 주인으로 여기고 있으니 보통 난감한 노릇이 아니었다. 영호전은 측근의 사람들에게 구룡상막의 조직체계나 영업 내용, 방계의 각종 사업에 관해 매일 보고를 들어야 했다. 그 일도 고역이었다. 알고 있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다만 구룡상막의 사업 규모에 대해서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범위가 실로 경이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기억은 잃었으되 지혜와 오성만은 타인으로 하여금 감탄을 하게 만드는 수준이어서 그는 시일이 흐르자 구룡상막의 실세에 관해서는 거의 파악할 수가 있었다. 영호전의 부친인 용혈재신 영호신광도 상인의 자식으로, 가업을 이어 받아 그 같은 성세를 이루었다. 대륙 각지에서 9명의 거상(巨商)들을 포섭하여 오늘날의 구룡상막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였다. 그 9명의 거상들은 그와 결의형제를 맺고 구룡연의 핵심이 되었다. 구룡연이 번창할 때 양자강 일대에까지 영향력이 미친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본래는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청해(靑海), 동해(東海) 등이 교역의 주무대였으나 꾸준히 세력을 확장시켜 그 선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금화성과의 분란을 겪게 된 시기는 2년 전쯤부터였다. 양자강 이남의 상권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구룡상막의 상역을 침범해 오면서 도처에서 유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금화성주는 뇌만령(雷萬靈)이라는 인물로 강남에서 대대로 가업을 이어받아 부(富)를 유지해 온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근역의 상권을 자연스럽게 잠식해 갈 수 있었을 뿐더러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원의 전 상권을 일통해 보려는 야심마저 품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구룡상막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뇌만령은 백방으로 구룡상막을 무너뜨릴 음모를 획책하다 마침내 상인들 사이에서는 금기사항으로 여겨지고 있는 녹림도와의 연합까지도 시도했다. 그때부터 금화성은 구룡상막을 철저히 압박해 갔다. 지난 5여 년의 세월 동안에도 구룡상막은 꾸준히 그들에게 침식당해 왔다. 녹림도를 끌어들이기 전에도 벌써 그들은 황금과 미색 등, 온갖 수단을 발휘해 무림인들을 다수 영입했다. 결과적으로 구룡상막의 기둥인 구룡상노(九龍商老) 중 오로(五老)가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당했고, 이로써 구룡연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양자강 이북에서 황하 이남 사이에 이르는 영지를 금화성에 고스란히 내줄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때 발생했던 용혈재신 영호신광의 독상(毒傷) 사건은 구룡상막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평소 건강하기만 하던 영호신광이 어느 날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알고 보니 그가 먹은 음식물 속에는 다량의 독이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 구룡연의 기둥인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렇듯 비열한 방도를 쓴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직후에 그의 유일한 혈육인 영호전이 금화성에 납치되는 비극도 벌어졌으니....... 비록 반 년 만에 구출되었다고는 하나 주인이 없는 구룡상막의 힘은 그 동안 전에 비해 형편없이 축소되어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다. 밀실(密室)에 당도하자마자 만난 사람은 안색이 밀랍같이 창백한 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죽은 듯 침상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시신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간신히 맥박이 뛰고 있을 뿐 내가 보기에도 살아날 가망이라곤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곤 이것뿐이었다. "언제부터였소?" 구양무종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일 년이 조금 넘었소이다." 나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누구를 딱히 나무라자는 건 아니었다. "해약(解藥)이 전혀 없단 말이오?"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구양무종의 대답은 역시 예상치를 넘지 못했다. "백방으로 해약을 구하기 위해 노력 중이나 여태까지는 별 소용이 없었소.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곧 금화성에 있다는 뜻이겠지, 안 그렇소?" 구양무종은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그러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소." 그래도 거기까지는 나았다. 구양무종의 다음 말은 나를 더욱 절망으로 몰고 갔다. "기억을 못하시는 모양이오만 공자께서는 바로 그 해약을 구하기 위해 떠났다 납치되셨소." 나는 기가 막혀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내가 해약을 구하려다 그들에게 납치되었다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친이 사경을 헤매고 있거늘, 아들의 입장에서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문제는 그 일이 전혀 기억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한심한 기분이 든 나머지 불쑥 물었다. "금화성이 철장동벽(鐵薔桐壁)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러자 이제껏 말이 없던 구자경(仇子鏡) 노인이 나섰다. 그는 구대 상로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과거 천산북로의 거상이었는데 후에 자청하여 부친의 심복이 되었다고 했다. "조카, 그 늙은이는 상계의 금기를 깨고 무림인들을 끌어들였네. 우리는 상술 면에서는 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나 무림계의 인물들과 다툴 능력은 없네." 그것은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만일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구룡상로 중 살아있는 사람은 4인뿐이다. 그들이 현재까지 구룡연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자경 노인의 말처럼 그들은 노련한 상인일 따름이지 무림인들과 맞서 구룡연을 부활시킬 만한 힘은 없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금기라고는 하나 그들이 먼저 무림인을 동원한 이상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철지산(鐵地山) 노인이 나섰다. 그도 사로 중 한 명으로 지난날 청해 일대를 주름잡던 거상이었다. 나이는 오순이 훨씬 넘었으되 화급한 성품 탓인지 중년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털보 노인이었다. "맞소, 빌어먹을......! 놈들이 금기를 범했거늘 우리만 굳이 지키려 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오." 나머지 이로, 즉 모궁비(毛宮飛)와 낙운시(洛雲試) 두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동감이오. 지금까지는 대형(大兄)께서 병상에 누워 계셨기 때문에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지만 이제 조카가 대권을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측에서도 놈들을 상대할 확실한 방도를 모색해야 하오." 나는 그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여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네 분 숙부께서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소질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망설일 것 없이 이 시각 부로 그 일에 대해 신중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자경 노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조카, 거기까지는 무리가 아닌가? 아직 기억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찌......." 그 말에 나는 입 안에서 쓴맛이 감돌기는 했지만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렇습니다. 소질은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하여 어떤 일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언제까지고 손발을 묶어 두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다행히 그 동안 본막의 업무는 대충 파악해 두었습니다. 숙부들께서 도와주시면 일을 집행하는데 별 지장은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아! 그게 정말인가?" "오오, 그렇다면 무얼 더 기다리겠는가?" 사로는 모두 민망할 정도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의 심정은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듯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구양무종의 태도였다. 그는 찬동도 반대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는데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좀체로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느 때도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위인.......' 이것이 그에 대한 내 식의 정의였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얼굴이 긴 노인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여하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의 도리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저 분이 내 부친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복수를 해 드려야겠지. 나아가서는 구룡연의 힘을 과거와 같이 강하게 만드는 것도 내 의무일 것이다.' 행동을 결정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러다 보면 만에 하나, 기억이 회복되어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바이니까. 제2장 새로운 삶 1 "남자 경험은?" "어...... 없습니다." "어제 들어왔다고?" "네......."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망사의를 입은 그녀는 갸름한 얼굴과 눈처럼 흰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커다란 눈은 두 개의 보석을 박아놓은 듯 반짝였고, 입술은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몸매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유연하고 가냘팠다. 요정(妖精)이랄까? 소녀는 빼어난 미색 탓에 미지의 세계에서 날아온 환상적인 존재 같았다. 지금 그녀는 자꾸만 움츠러들고 있었다.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사내의 구릿빛 근육도 근육이려니와 불타는 듯 강렬한 눈빛이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이곳은 남궁세가(南宮勢家)의 후원에 있는 욕실이다. 남궁세가는 예로부터 도(刀)로 쟁쟁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가문 전래의 단봉구비도(丹鳳九飛刀)는 천하무적이다. 사내의 이름은 남궁호연(南宮浩然). 그는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家主)로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유분방한 기질로 인해 일찍부터 명문가의 여인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런 그를 두고 주위 사람들은 염려했으나 일각에서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숙하다며 대견하게 여기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의 측근에서는 그의 빗나간 행위를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탕아 기질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찰랑대는 욕수(浴水)에 알몸을 담근 채 느긋한 표정으로 소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방면에서는 몰라도 다년간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여자 보는 안목만은 일가견이 있었다. 소녀는 명분상으로는 그의 목욕 시중을 들러 왔다. 그러나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는 그로서는 소녀의 몸매를 감상하는데 시간적인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자에 관한 한 남궁호연의 정의는 이렇다. 우선 단순히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나름대로의 개성과 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피부는 무조건 부드러워야 한다. 아무리 몸매가 좋아도 피부가 거칠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눈 앞의 소녀는 그의 관점에 걸맞았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을 정도였다. 그녀는 불과 열다섯 살로 난초처럼 청초하면서도 순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나이가 어린 만큼 피부도 결이 고와 그에게 더 없는 만족감을 선사했다. 또 한 가지, 어딘가 모르게 사내의 욕정을 자극하는 교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 면은 아마도 천부적인 듯했다. 소녀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남궁호연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수줍어하면 할수록 대개의 사내들은 더욱 더 욕정이 들끓게 되리라는 것을. 얇은 망사의 덕분에 은은히 비쳐 보이는 풋풋한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며 그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후후....... 됐어, 저 정도면. 하도 잔소리를 했더니 송노인(宋老人)이 이번에는 꽤 신경을 쓴 모양이군.' 소녀의 이름은 나나(娜娜)라고 했다. "뭘 하느냐? 어서 씻기지 않고." 남궁호연의 채근에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짧게 답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소녀는 곧 그에게로 다가가 벗은 몸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흠, 역시 순진한 계집이로군.' 남궁호연은 내심 중얼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이 출렁임에 따라 욕실 내의 수증기는 아까보다 더 짙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그는 보드라운 소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오는 것을 느끼며 뿌듯한 쾌감을 즐겼다. 그러기를 한참 여. 소녀 특유의 신선한 체향(體香)이 후각을 자극해 오자 남궁호연은 슬며시 눈을 떴다. '흠!' 그의 코앞에 작고 소담스러운 나나의 가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더구나 그의 어깨를 열심히 문지르고 있는 탓에 그녀의 가슴은 어쩔 수 없이 크게 출렁이고 있었다. "후후......." 남궁호연의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려갔다. 그는 서슴없이 손을 뻗어 나나의 유방을 거머쥐었다. "앗! 안돼요." 그녀의 몸이 휘청 하는가 싶더니 한쪽으로 쏠렸다. "안 된다고? 어디 안 되나 보자." 남궁호연은 그녀를 와락 끌어당겼다. "고...... 공자님......!" 나나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고 버둥거렸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야말로 남궁호연의 욕정을 부채질한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듯. 남궁호연은 키득거리며 입을 맞추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는 흠칫했다. 나나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하여 자신의 손길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같잖은 일이 있나?' 남궁호연의 검미가 불쑥 치켜 올라갔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한낱 시비 따위가 그의 앞에서 거부의 몸짓을 보이다니 어디 말이 되는가? 또한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여인일지라도 그를 보고 혹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소위 명문가의 여인들도 제 쪽에서 먼저 달아올라 그의 품에 안기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나는 달랐다. 그녀의 저항은 그가 느끼기에도 공연한 앙탈이 아니었던 것이다. '감히 날 거부한단 말이지?' 그는 오기가 치민 나머지 발버둥을 치는 소녀의 몸을 더욱 세차게 당겨 안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거라! 이건 명령이다." 바르르....... 나나의 몸이 눈에 띄게 경련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동작을 멈추었다. 아마도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남궁호연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다. "흠, 좋은 냄새야." 그는 나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심호흡을 하여 그녀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그의 눈에 삼단같이 긴 머리칼이 물에 젖어 고운 결을 이루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망사의는 벌써부터 몸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넌 제법 쓸 만한 계집이구나." 남궁호연의 손이 그녀의 몸을 애무해 가기 시작했다. 동그란 어깨와 가냘픈 허리, 제법 풍성하게 부풀어오른 둔부 등에 차례로 그의 손길이 지나가자 나나의 몸에는 긴장감으로 인해 잔 소름이 돋아났다. "괜찮다. 너도 곧 좋아질 테니." 남궁호연은 아랫도리가 빳빳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흡!" 나나의 입에서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남궁호연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에 더욱 흥분이 된 남궁호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본격적으로 그녀의 몸을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욕실은 때아닌 열풍(熱風)으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나도 이제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되려 그의 목을 가냘픈 두 손으로 조여 안은 채 바짝 달라붙고 있었다. 두 사람을 수용하게 되자 욕조의 물은 밖으로 넘쳐 흘렀으며, 간간이 포말을 일으키고 있었다. "헉!" "아아......." 나나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했다. 욕망에 불타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의외로 점점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던 것이다. "흐흐....... 근사한 계집이다, 너는."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남궁호연은 마침내 그녀의 몸을 욕조에 걸쳐놓은 후, 행위에 돌입해 갔다. 그는 나나의 다리 사이로 팽창한 자신의 육신을 힘차게 밀어넣었다. "하악!" 나나는 신음을 발하며 상반신을 욕조 밖으로 늘어뜨렸다. 그녀의 다리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남궁호연의 율동에 따른 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쾌감을 즐겼다. 몸을 밀어붙일 때마다 뼈마디까지 번져오는 강한 자극은 그를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황홀경으로 몰고 갔다. "허억!" 마침내 그는 쾌락의 절정에 도달한 듯 몸을 경직시키며 두 손으로 나나의 젖가슴을 세차게 움켜잡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욕조 밖에 있던 나나의 손이 슬며시 움직인 것은.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건을 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무엇인가를 집어들더니 지극히 자연스럽게 남궁호연의 등을 껴안았다. 푹! 섬뜩한 소리가 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끄윽!" 남궁호연은 눈을 부릅떴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의 입은 딱 벌어진 채 굳어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곧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등판에는 한 자루의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나가 수건 속에서 꺼낸 물건이었다. 두 사람은 그 때까지도 빈틈없이 서로를 껴안고 있었으나 이미 이승과 저승으로 경계가 나뉘어진 상태였다. 남궁호연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나나는 무거워진 그의 몸을 왈칵 밀쳐 버렸다. 쿵! 남궁호연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욕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중심부는 여전히 팽창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불행히도 영원히 쾌감을 느낄 수 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호호호......." 나나는 교소를 흘리며 욕조에서 일어났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기만 하던 그녀의 나신에서는 피가 섞여 불그스름해진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도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청초한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은 죽음의 늪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었으며, 입술 가장자리에는 조롱을 뜻하는 미미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스산한 음성으로 낮게 읊조렸다. "네가 미리 들어 두었어야 하는 건데. 널 죽인 건 내가 아니라 혈검문(血劍門)이란 사실을 말이야." 스으.......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나나의 신형은 유령처럼 흐릿하게 변해 사라져 갔다. 오악표국(五嶽 局). 구룡상막이 관장하는 강북의 십대표국(十大 局) 중 하나로 구룡상막으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오악표국은 이름 그대로 오악(五嶽)을 거침없이 오가며 표행을 한다. 또한 구룡연의 지원을 받아 다량의 표물을 호송함으로써 중원 전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오악표국이 있기까지에는 한 인물의 절대적인 힘이 필요했다. 오악출룡(五嶽出龍) 전해룡(全海龍). 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치밀한 계획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오악표국의 사람들은 그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익힌 오악도법(五嶽刀法)은 무림에서도 일절로 꼽힐 만큼 유명한 것이었다. 깊고 넓은 연못은 새벽안개에 휩싸이자 신비롭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창출해 내고 있었다. 연못가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뒤로 단정히 빗어 넘긴 백발에 짧게 깎은 수염이 인상적이다. 얼굴은 약간 마른 듯했으나 대체적으로 청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눈은 물처럼 담백했으며, 일신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유삼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금색 수실이 매달린 장도(長刀)를 차고 있었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보도(寶刀)임을 알 수 있었는데, 노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그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못가의 나무들은 보일 듯 말 듯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곱게 물든 단풍잎이 연못의 수면 위로 내려앉았다. 문득 뒤에서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 소리는 노인의 지척에 이르자 뚝 멈추었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혈리마가 준비되었습니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성의 주인공은 뿌연 안개에 가려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다 다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저만치 멀어져 갔다. 노인의 눈에서 번쩍 이채가 솟았다. "기이한 일이군. 오랫동안 소식 없다가 무슨 일로 갑자기 노부를 청하는 것일까?" 휘이이잉! 싸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노인의 얼굴 위에서 어지럽게 뒤엉켰고, 그의 주위로 는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스스스스....... 일순 허공에 화려한 빛 무리가 흩뿌려졌다. 츠츠츳! 그것은 찰나지간의 일로, 노인의 장도는 처음부터 뽑혀 나오지도 않은 듯했다. 그의 입가에 한 가닥 희미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흠, 이 전해룡의 솜씨가 아직은 녹슬지 않았군." 노인은 만족한 듯 빙글 돌아섰다. 그는 안개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는 낙엽들이 가루가 된 채 연못 위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2 전해룡은 예를 갖추기 위해 장읍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밀리에 연락을 받고 구룡연으로 달려오기는 했으나 구룡연의 새 주인이 이렇게 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상좌에 앉아 있는 인물, 즉 약관에 불과한 한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악표국은 창업 초기부터 구룡상막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해 왔다. 때문에 언제고 구룡상막에는 이의 없이 군신(君臣)의 예를 취해야만 했다. 그런데 막상 상대가 너무 젊고 보니, 그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불만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반면 구룡상막주 영호전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놀랄 것 없소이다, 전 국주.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으나 아버님께서는 전권을 본인에게 이양하셨소." 착 가라앉은 그 음성을 듣자 전해룡은 일시에 불신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영호전의 말 속에 담겨 있는 권위와 자부심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대기(大器)로군.' 그는 비로소 영호전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 때에 영호전은 백색 유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전해룡의 눈길을 유난히 끌게 된 것은 그의 빼어난 용모가 아니라 넓고 반듯한 이마에 서려 있는 정기(精氣)였다. 또한 강인한 심성을 대변하듯 우뚝 솟아 있는 코와 단단히 맞물려 있는 주사빛 입술도 그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룡은 가을 호수처럼 시원스레 빛나는 상대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내심 중얼거렸다. '비록 나이는 어리나 출중한 기도로군. 과연 구룡상막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그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물답게 자신의 안목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한눈에 영호전의 외양에서 여러 가지 단면들을 발견해 내며 적이 안도하고 있었다. 영호전은 그를 향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번에 귀하를 초빙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요." 전해룡은 사뭇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르침이라시면......?" "전 국주께서는 백전노장으로 강호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셨다고 들었소. 그래서 강호 정세에 대해서도 해박한 견식을 지니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청한 것이외다." 전해룡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노부가 알기로 구룡연은 이제까지 무림 일에 일체 관여해 오지 않았거늘, 새삼 무엇을 하문코자 하시오?" 영호전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 국주를 부른 것은 극비사항에 해당되는 일이니, 이 점 유념해 주시오. 그리고 선대의 교분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본인을 도와주시기 바라오." "그야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영호전이 말한 선대의 교분이란 오악표국을 세운 전대의 국주와 구룡연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양측은 힘과 금력으로 뭉쳐진 사이였다. 전해룡도 실은 선대의 연(緣)을 빌어 오늘날까지 구룡상막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전해룡은 지체없이 고개를 꺾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노부 아는 대로 답하리다." "고맙소." 영호전은 일단 사의를 표한 뒤, 담담히 말을 이었다. "본인이 궁금한 바는 첫째로 당금 무림에서 누가 가장 강하고, 어떤 세력이 가장 크냐는 것이오." 뜻밖의 질문에 전해룡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만 그는 곧 대답했다. "그것은 뭐라 단언하기 힘든 사항입니다. 상대성 때문에 한 마디로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단편적으로 평가를 내린다해도 신빙성을 장담 못하오이다." "본인이 알고 싶은 것은 국주의 견해요." "노부의 생각으로는......." 전해룡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무림에서의 최강 문파로는 역시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소림사를 들 수 있겠으나, 그들은 불문의 사람들인지라 되도록 강호 출입을 삼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그들의 잠재력을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겠구려." "또한 조직의 방대함으로 치자면 개방이 으뜸이외다. 방도들의 숫자만도 십만을 헤아립니다." 영호전이 물었다. "개방이라면......?" "거지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외다." 전해룡은 이에 덧붙여 개방의 내력이나 특성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었다. 영호전은 내내 조용히 경청하고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밖의 문파에는 어떤 것들이 있소?" "소림과 개방을 포함한 구파일방(九派一幇)은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정통무맥이나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숱한 규약들에 스스로를 가두고 무림 활동을 제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최근에는 그들을 능가할 만한 거대 단체들이 난립해 있기도 하지요." "그들에 대해 설명해 주겠소?" "혹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은 통칭 일회이교삼곡사사문(一會二敎三谷四死門)이라고 불립니다." "일회이교삼곡사사문?" "사대사문(四大死門)과 삼대괴곡(三大怪谷), 천지쌍교(天地雙敎), 구인회(九人會)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소?" 전해룡은 강한 호기심을 담은 영호전의 눈빛이 쏘아져 오자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지요. 사대 사문이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네 개의 문파로 무정문(無情門), 혈검문(血劍門), 사망각(死亡閣), 낙일애(落日崖) 등입니다." "그들은 꽤 악명을 떨치고 있겠구려?" "그렇습니다." 전해룡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정문과 사망각은 공공연히 살인청부를 행하는 단체로 돈만 주면 어떤 종류의 살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반면 혈검문은 여인들만의 집단으로 은밀하게 활동하는데, 혈검소비(血劍小匕)를 무기로 사용하고 있소이다. 이들의 정체나 목적에 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소이다." "낙일애는?" 채근하듯 묻는 영호전이었다. 전해룡은 언뜻 두려움을 내비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낙일애는 태산의 낙일애와 동명(同名)이며,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 합니다. 사대 사문 중 가장 신비한 집단이지요." 영호전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신비하다는 건 어떤 의미요?" "그들도 살인청부집단이랄 수 있으나 방법상 아주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말이오?" "첫째로 서면 등의 간접적인 형식은 안 되고 청부자가 낙일애로 직접 찾아가 원한의 배경이나 죽이고 싶은 상대가 누구인가를 말해야 합니다." "음." "둘째로 그들은 살인을 대행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방도를 알려준다고 합니다. 낙일애 안에는 한 기인이 살고 있는 바, 그에게 배운 무공을 사용하면 어김없이 원하는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호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특이하긴 하구려." 전해룡이 부언 설명했다. "더욱 납득하기 힘든 일은 그 기인이 가르쳐 주는 무공은 오직 해당자만 죽일 수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호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했다.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하오?" "노부의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으나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행해져 왔던 일인만큼 진위 여부는 회의할 필요가 없는 줄로 사료됩니다." "흐음!" "노부가 추측하기로 낙일애의 기인은 가히 무학종사(武學宗師)에 버금가는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죽이고자 하는 대상을 말하면 그 자가 사용하는 무공의 단점들을 단번에 파악해 내고, 역으로 그 허를 찌르는 방도를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호전의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그렇다면 낙일애에 들어앉아 세상을 조롱하는 기인의 무공이야말로 천하제일이라고 해야 되겠구려?" 전해룡은 부인하지 않았다.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절정고인임에는 틀림없을 테니까요."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단, 그는 아무에게나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을 가릴 뿐 아니라 조건까지 내걸고 있어 그에게서 무공을 익히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조건을 내세운다고 합디까?" 전해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청부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음, 기인이기보다는 괴인(怪人)이라고 보아야겠군." 영호전은 연이어 물었다. "삼대 괴곡은 어떤 단체들이오?" "그들은 간단히 삼곡(三谷)으로도 불리며 천독곡(天毒谷), 불사곡(不死谷), 불회곡(不廻谷) 등입니다." 영호전은 전해룡의 말을 뇌리에 깊이 새겨두었다. 그것은 하나같이 새롭고 신비로운 정보들로써 그로 하여금 절로 무림에 대한 경외감을 품게 만든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삼곡에 대한 설명을 마친 전해룡은 영호전이 묻기도 전에 스스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구인회에 관해서도 알려드리고 싶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에 관해서만은 노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영호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에서 내로라 하는 세력이라면서 어찌 전 국주께서 모르실 수가 있소?" 전해룡은 빙긋 웃었다. "그것은 노부만이 아니라 전 무림인들이 마찬가지입니다. 구인회에 대해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사실 구인회라는 이름이 들려 오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어떤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을 따름입니다." 영호전은 침음성을 흘렸다. "정녕 괴이한 일이군. 그러면서 어떻게 구인회라는 이름이 항간에 널리 알려졌단 말이오?" 전해룡은 대답했다. "구파일방으로부터 흘러 나온 말 때문입니다." 영호전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들이 구파일방과 연관이 있단 말이오?" "그런 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구파일방의 영수들은 구인회의 이름으로 발부된 초청장을 받고 어디론가 떠나더니 일 년 만에야 돌아왔습니다. 이후로 구파일방의 영수들은 그 일에 대해 일체 함구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이 구인회에 크게 당했다는 것입니다." 영호전은 안색이 변해 되물었다. "그 말은 그들이 구인회에게 패배했다는 뜻이오?" 전해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노부로서는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추측이 나돌더라는 얘기올시다." "으음......." 영호전은 침음했다. 그는 심중에 기이한 파문이 이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구인회...... 구인회라......!' 전해룡은 그 뒤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강호무림사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내용들은 대개가 현존하는 여러 기인들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무림계는 방대하여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기인이사들이 존재하고 있소이다. 그들 중 누가 가장 강한지는 감히 논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무공 특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으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영호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해룡에게서 들은 말들이 향후의 행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구룡연의 무림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이 날의 대담(對談)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오백일 번과 오백이 번, 시작하시오!" 휘이익! 허공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었다. 동시에 한 가닥 회영(灰影)이 군중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실로 눈이 번쩍 뜨이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그는 흑발을 아무렇게나 허리까지 늘어뜨렸으며, 살결은 피가 스며 나올 듯이 투명하면서도 붉었다. 눈에서는 연신 청광(淸光)이 번뜩였고, 일신에서는 냉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섬뜩한 것은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사이한 미소였다. 그로 인해 그의 성품이 얼마나 독랄할지는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능히 알 듯했다. 그의 앞에는 계피학발(鷄皮鶴髮)의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산뜻한 백의에 옥검(玉劍)을 등에 멘 노인은 용모는 평범했으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요히 가라앉은 그의 눈에는 추측하기 힘든 현기가 담겨 있었다. 가을의 따가운 햇살 아래 수백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간에 서서히 긴장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괴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진 것도 그 때였다. 싸악! 섬뜩한 음향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자 핏빛 검망이 사위를 에워쌌다. 그것은 괴인의 단검이 뿜어낸 검기에 의해서였다. 그처럼 그가 가공할 기세로 짓쳐 들어가도 노인은 원래의 자세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괴인이 지척에까지 이르자 비로소 노인의 등에서 싸늘한 백광이 빛살처럼 솟구쳐 올랐다. 츠읏! "헉!" 괴인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노인의 공세에는 도저히 피할 여지라곤 없어 보였다. 하지만 괴인 또한 고수였다. "끼야아아!" 그는 괴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그 상태에서 사방으로 검을 어지럽게 휘둘러댔다. 이후 그들의 동작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어지럽게 뒤엉키는 회영과 백영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 가운데 괴인은 당황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외견상으로는 동수를 이루고 있는 듯했지만 그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몸을 지탱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나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힘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타앗!" 노인이 우레와 같은 노갈을 터뜨렸다. 파파팟! 휘황찬란한 백광이 천지를 삼켜 버릴 듯 작렬했다. 상대적으로 괴인의 검광은 씻은 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에 따라 정적이 장내를 뒤덮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두 사람이 일으켜 놓은 먼지 구름뿐이었다. 잠시 후. 분진이 가라앉자 상황이 드러났다. 중인들에게 위압감을 주던 흑발의 괴인은 열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깻죽지로부터 선혈을 흘리고 있는 그의 안면에는 경악과 회의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반면에 노인의 태도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띈 채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중인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역시 옥검백로(玉劍白老)의 명성은 명불허전이로야! 하북(河北) 제일의 명검수답군." 그제야 멍하니 서 있던 중인들도 환호를 터뜨렸다. "와아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옥검백로는 대 아래로 내려오시오." 비무장의 한쪽에 마련된 대 위에서 시험관이 외쳤다. 이곳은 구룡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연무장(鍊武場)으로 최근 들어 영호전의 지시에 따라 축조된 것이었다. 지금 연무장은 천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밖에도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자들까지 있어 그 수효는 일일이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무림인들은 대부분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황금을 탐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구룡상막에서 내건 조건은 그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녹봉(祿俸)으로 무려 황금 500만 냥이 걸린 것이다. 이는 파격적인 액수였다. 설사 황궁의 무사들일지라도 그 만한 녹봉을 받는 자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과연 소문이 무림에 퍼지자마자 각처에서 내로라 하는 무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구룡연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무를 통해 고용할 무사들을 뽑기로 한 것이었다. 구양무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지난 두여 달에 걸쳐 보여준 영호전의 행동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이제 영호전이 벌이는 일들은 추측이 불가능했다. 사전에 누구와 의논하는 바도 없었거니와, 심지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영호전은 그 동안 수많은 일들을 벌였으나 하나같이 완벽하게 처리했으며, 그 일들은 모두 구룡상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양무종은 내심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놀랍다! 분명 기억을 상실해 자신을 다스리기도 힘들 터인데 이처럼 주변의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해 가다니.......' 사실이었다. 그 동안 영호전이 보여준 행동들은 가히 초인적인 것들이어서 구양무종조차 때로는 전율이 일곤 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허허허! 조카는 귀재(鬼才)야. 이제 우리 구룡연은 금화성 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어." 철지산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대소를 터뜨렸다. 내전(內殿)이었다. 사로(四老)는 영호전과 함께 자단목으로 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런데 사로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어려 있는 반면, 영호전의 표정은 시종일관 물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철지산은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다는 듯 연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보였다. "최고야! 빌어먹을....... 무림인이란 작자들이 황금에 이렇게 맥을 못 출 줄 알았더라면 진작 손을 썼을 것을." 영호전은 씨익 웃었다. "이제부터라도 시작하면 되지 않습니까?" 철지산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시작이라니? 이미 황금 오백만 냥을 풀었고, 각처에서 천 명 이상이 고개를 숙이고 찾아왔는데도 말인가?" 영호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앞으로 지금까지 쓴 것보다 열 배는 더 써야 한다는 것이 소질의 생각입니다." "열 배!" 사로는 입을 딱 벌렸다. 낙운시는 구룡연의 회계담당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구룡상막의 재정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영호전을 응시하며 난감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조카, 우리 구룡연은 이전 같지 않네. 오천만 냥은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일세." 영호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소질은 금후로 황금 백만 관(貫)을 쓸 작정입니다." "맙소사!" 비명과도 같은 부르짖음이 사로로부터 터져 나왔다. 황금 1관이면 100냥이다. 따라서 100만 관이면 물경 1억 냥에 해당되는 거금이 아닌가? 대륙의 절반을 주무르던 구룡연의 사로조차도 언뜻 감이 잡히지 않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낙운시가 질린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조카...... 설마 파산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 영호전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어쩌지요? 황금 오백만 냥의 녹봉에 꼬여든 무림인들은 제 계산상으로는 십품위(十品位)의 무사들일 뿐입니다." "십품위?" 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연무장에서 며칠째 행해지는 비무에 참관을 하긴 했으나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상인들에 불과했다. 물론 비무를 거쳐 뽑힌 고수들의 무공이 대단한 수위인 것만은 분명했고, 사로의 눈에는 신기(神技)에 가깝게 비쳐졌다. 그런데 영호전은 그들을 고작 십품위 정도로 평가하고 있으니 그의 내심을 점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영호전은 잠시 사로를 차례로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은 여전히 담담한 빛만을 흘려낼 따름이었으되, 그 눈빛에서 사로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는 철혈(鐵血)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음! 이미 결정을 지은 게로군. 번복은 없을 테고.' 그들은 심중으로 똑같은 말을 읊조리는 한편, 영호전이 이 순간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확실히 영호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영호신광의 독자인 그는 지금까지 상술 쪽보다는 학문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말하자면 속기(俗氣)와는 거리가 먼 고고한 성품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내놓고 기세를 과시하는 법은 없었지만 영호전은 사로가 섭섭하게 여길 정도로 매사에 독선적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철두철미한 계산이 깔려 있어 꼬투리를 잡을 만한 구석도 전혀 없었으니, 그의 곁에서 사로는 거의 허수아비나 진배없었다. 영호전이 말했다. "우리는 본막의 전 조직을 동원하여 더 널리 고절한 무예의 소유자들을 영입시켜야 합니다. 진정한 고수들은 필경 황금을 우습게 여길 테고, 이에 대비하여 소질은 한 가지 방안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낙운시는 입맛을 쩍 다셨다. "그런 것도...... 있었는가?" 나머지 삼로는 멍한 표정으로 영호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숙부들께서도 이제는 아셨겠지만 무림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명예입니다. 특히 초고수의 경우에는 황금만으로는 움직이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면?" "그들의 호승심과 명예욕을 부추긴다면 가능성이 있지요. 무인들이란 어떤 면에서는 단순하기도 하니까요." "으음......." 영호전의 말이 이어졌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조만간 사품위까지의 고수들도 곧 끌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은 또 한 번 의혹을 야기시켰다. 사로는 하나같이 머릿속이 혼란해져 더 이상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구자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대체 어떤 자가 일품위의 인물이란 말인가?" 영호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뭐라 딱 잘라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만 그 자는 봉록이 최소한 황금 오십만 관에 해당되는 인물일 것입니다." "......!" 사로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황금 50만 관, 다시 말해 황금 5000만 냥이라면 구룡상막이 적어도 10년 이상 전력을 다해 사업을 벌여도 모아질까 말까한 거액이었던 것이다. 영호전의 눈에서 문득 기광이 솟구쳤다. "어쩌면 우리는 일품위에 해당되는 무인을 끝내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넓은 무림 천하를 다 뒤져본다면 꼭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만......." 사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양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호전의 제안은 다 짜여진 각본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들로서는 아무런 대책도 서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겨우 약관에 불과한 영호전의 포부는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발상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이야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일편으로는 자신들이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낙운시가 입을 열었다. "그처럼 막대한 금액을 지출하게 되면 구룡연의 재정은 바닥이 날지도 모르는데, 그 점은 어찌 대처할 셈인가?" 영호전은 스스럼없이 응대했다. "소질은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숙부께선 우리가 강남북의 상권을 통틀어 장악하게 된다면 거기에서 나올 이득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뭣......!" 사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낙운시는 믿어지지 않는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그렇다면 조카의 말은...... 금화성을 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영호전은 부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 쪽에서 먼저 걸어온 싸움입니다." "그래도......!" "싸움에서는 승자만이 살아남는 법입니다." "우......!" 낙운시를 비롯하여 구자경, 철지산, 모궁비 등은 질려 버린 듯 비명과도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인이었다. 평생에 걸쳐 철저히 이득만을 추구해 온 인물들로 사업방면에서라면 남다른 투지(鬪志)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영호전이 말하는 싸움은 그게 아니었다. 단순한 이권 다툼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으므로. 다시 말해 그는 대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쟁의 승리에 따른 이득이란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실내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상황은 의식의 급전환을 요구했고, 거기에 부응하자니 사로는 고심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로는 모종의 결단을 내린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구자경을 위시하여 그들 네 사람은 차례로 바닥에 무릎을 꿇기에 이르렀다. "조카, 아니 영호전 상주(商主)께 금일 이후로 영원히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바이오." "원컨대 우리 구룡연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시오!" 4 이곳은 구룡연의 밀실(密室)이다. 지금 내 앞에는 여러 폭의 그림이 놓여 있다. 그림은 수십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초상화(肖像畵)다. 사실 이런 행위에 이제는 신물이 난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초상화를 들여다보아야 낯익은 인물이라곤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고 있자니 차라리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왜 한 명도 기억나지 않는단 말인가?" 내 넋두리에 구양무종이 은근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정말 아무도 모르시겠소?" "그렇소." 나는 초상화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대꾸했다. 아마도 내 음성은 퍽 무뚝뚝하게 들렸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잘 보시오. 그들은 모두 공자가 어릴 때부터 측근에 있던 인물들이오." 나는 그의 말대로 새삼 뚫어져라 초상화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초상화 속의 인물들 중 기억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초상화 속에는 중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백발노인으로부터 홍안의 소년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여인들도 몇 명 있었는데, 모두가 미색이 빼어났으며 품위 있는 여인들이었다. 한 가닥 위안이라면 측근이었다는 그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자조의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후후....... 새로 사귀게 된 이 인물들이 마음에 드오. 비록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몽롱하기는 하지만 말이오." 구양무종이 영민한 위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내 의중을 눈치채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래도 자책에서는 많이 벗어나신 듯하여 다행이오. 기왕이면 희망도 가지시기 바라오. 언젠가는 기억이 정상으로 되돌아올 테니 말이오." "후후....... 뇌호(腦戶)가 파괴되고도 말이오?" "어쩌면......." 구양무종의 안색이 어색해진 것을 나는 안다. "내게 헛된 희망을 품게 하지 마시오. 그러느니 새로 태어났다고 여기고 현 상황에 적응해 가는 게 빠르겠소." "벌써 그렇게 하고 계시지 않소이까? 공자의 그 무서운 정신력이야말로 희망을 걸 수 있는 요인이외다." "후후....... 그 말은 칭찬으로 알겠소." 구양무종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품속에서 한 장의 초상화를 꺼냈다. "이것도 한 번 보시오." "......."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내미는 초상화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한 청년을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청년은 훤칠한 키에 짙은 눈썹의 소유자로 백색 유삼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신물이라도 되는 양 비단으로 된 섭선을 쥐고 있었는데 인상이 몹시 특이했다. 영준한 용모에 비해 눈에 암울한 우수가 어려 있었고, 입술은 한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손잡이가 거무튀튀한 묵검(墨劍)이 눈길을 끌었다. "이 사람은 누구요?" 그림에 불과하기는 해도 인물의 모습은 정묘하게 묘사되어 있어 마치 산 사람을 보는 듯했다. 특히 그의 깊게 가라앉은 눈에는 삶에 대한 어떤 열정도, 기대도 담겨 있지 않아 심금을 은근히 흔드는 면이 있었다. 동병상련이랄까? 나는 왠지 초상화 속의 청년과 지금의 내 처지가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후...... 이 자는 꼭 내 자신 같구려."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에 구양무종의 몸이 가볍게 경련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가 다급히 내게 물었다. "이 사람이 기억나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못하오. 다만 이 자의 분위기에 마음을 끌렸을 뿐이오." 구양무종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는 초상화를 내 코앞에 바짝 갖다댔다. "잘 생각해 보시오. 어쩌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소. 정신을 집중하면 할수록 혼란만 가중될 뿐이오. 당신이 시키는 대로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소만." "으음, 알았소이다." 구양무종은 한숨을 쉬며 초상화를 내렸다. "대체 그 자가 누구기에 그러오? 보아하니 내 측근의 인물은 아닌 듯한데." "그의 이름은 고신만리(高辛萬里)라고 하오." "고신만리?" "역시 전혀 모르겠소이까?" "글쎄. 고신만리라......." 구양무종의 눈은 긴장을 담은 채 계속 내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따가운 눈길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으나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눈치로 미루어 반드시 내가 알고 있어야 할 인물인 듯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미안하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 같소." "으음......." 구양무종의 한숨 소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초상화를 도로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사과하실 것까지야....... 부담 갖지 마시오. 공자의 기억은 차츰 돌아올 것이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소." 구양무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렸다. "저녁에 화소저(華少姐)가 온다는 기별이 왔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날더러 만나 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무리외다. 부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그녀를 만나서 대체 뭘 하라는......." 구양무종이 내 말을 끊었다. "투정은 공자께 어울리지 않소. 이제껏 잘해 오셨으면서 새삼스럽게 웬 불평이시오?" "하도 답답해 그러오." 그는 밀실을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화 소저께 잘 대해 주시오. 그녀는 공자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아직 모르고 있으니 충격을 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오. 물론 공자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는 바이지만." 그가 사라지자 내 기분은 아주 참담해지고 말았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젖도 못 뗀 아기가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듯한 형국이니, 나로서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한결같이 막막하기만 하다. 제3장 계약(契約) 1 "호호호......! 구룡연의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바뀔 줄은 미처 몰랐어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청아한 음성이다. "허허, 젊은 상주의 분부를 따르다 보니 그리 되었소. 구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오." "정말 대단해요. 전(典) 오라버니가 대체 어떤 결심을 하셨기에 이런 혁신을 단행했는지 궁금해요.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상주께서는 이전의 그 분이 아니외다." "진작 그러실 일이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어요." 화원으로 통하는 월동문으로 일로일소(一老一少)가 담소를 나누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구룡연의 사로 중 한 명인 낙운시와 타는 듯 붉은 궁장(宮裝) 차림의 미녀였다. 그녀가 들어서자 화원 안은 일시에 환한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여인의 미모가 워낙 빼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개성이 뛰어난 탓이었다. 눈처럼 흰 피부 위에 자리잡은 이목구비는 솜씨 좋은 장인이 조각한 듯 또렷했으며, 상큼하게 치켜 올라간 봉목이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장미처럼 붉은 입술을 놀려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에게는 사내에 못지 않은 당당함이 풍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긋나긋한 몸놀림하며, 요염한 면이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몸매도 균형이 잡혀 있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현란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낙운시는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인의 고운 자색이 그도 보기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화원에는 하얀 국화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국화밭 한가운데에 금의화복을 입은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유약한 듯했으나 뒷짐을 지고 있는 그에게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강인한 기개가 엿보였다. 다만 그의 등에서는 왠지 모를 진한 고독이 느껴졌다. 그를 발견하자 홍의녀는 반색을 하며 달려갔다. "전 오라버니!" 그녀의 달려가는 모습은 한 마리의 붉은 비조(飛鳥) 같았다. 화복청년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코끝에 사향 냄새가 확 풍긴다 싶자 어느새 홍의녀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의 품에 담쑥 안겨 있었다.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그녀는 팔을 청년의 목에 두른 채 열렬히 뺨을 비벼댔다. 화복청년, 즉 영호전은 무척이나 놀랐다. 미리 전갈을 받기는 했으나 그가 기다리던 여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애정 표현을 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도 홍의녀의 더운 입김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오라버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그간 소식도 뚝 끊어 버리고, 소매가 보고 싶지도 않았나요?" 낙운시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허허허, 그럼 이 늙은이는 이만 가 보리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나갔다. 영호전은 당황하여 슬그머니 그녀를 떼어 놓으려 했다. "이제 그만......." 그러나 그는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여인은 되려 밀착되어 오며 아예 그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숨결과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지자 영호전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전신에 맞닿아오는 여인의 무르익은 육체는 그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만 하라니까.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호호, 뭐 어때요? 우리는 정혼한 사이잖아요." 영호전은 내심 쓰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 아가씨야! 설사 부부가 되었다 해도 여인으로서 이런 행위는 좀 지나치지 않은가?' 그의 생각이야 어떻든 여인은 제멋대로 수십 번이나 입맞춤을 퍼부은 후에야 비로소 떨어져 섰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그의 팔만은 놓칠세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화무쌍(華無雙). 그녀는 북경(北京) 구문제독(九門提督) 화철숭(華鐵嵩)의 무남독녀로 일찍이 영호전과 정혼한 사이였다. 그녀가 얼마나 영호전을 사모하고 있는지는 구룡연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터였다. 영호전은 몸을 숙여 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선물이다." 화무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게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호호! 고마워요." 그녀는 국화를 받아 들더니 단순호치(丹脣皓齒)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며 재잘거렸다. "소매는 이런 선물도 좋지만 더 받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지?" "이번에 오라버니를 보러 오기 위해 제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세요? 아버님께서는 말만한 계집애가 어디를 함부로 나다니느냐고 극구 반대하셨지만 이틀 밤낮을 졸라 결국 승낙을 받아 냈다구요." 영호전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입술은 너무도 아름다워 입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절로 일 정도였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그가 내심 고소를 짓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의 청아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호호호....... 오는 도중에 호위무사들을 따돌리고 먼저 달려왔어요. 오라버니도 이런 제가 싫지는 않죠?" "싫기는." "그럼 제 부탁도 들어주시겠네요?" "뭔지 알아야 들어줄 수 있지." 화무쌍은 여전히 명랑하게 종알거렸다. "소문을 듣자니 구룡연에서는 강호무사들을 고용했다더군요. 이 무쌍에게도 그 중 몇 분은 소개해 주겠죠?" 영호전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무사들을 소개받아 무엇을 하겠다고?' 그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입술을 삐죽였다. "쳇! 인색하게 굴지 말아요. 구문제독부에서는 어떤 교두(敎頭)도 이제 소매의 스승이 되지 못해요.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강호의 무사들이라면 또 다른 절기를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미래에 대한 무한한 희망과 기대가 담긴 눈동자였다. 영호전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물었다. "무술은 배워 어디에 쓰려고?" "호호....... 호신공부(護身工夫) 차원에서죠. 참, 당신이 장차 바람이라도 피우게 되면 그때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영호전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떠 보였다. "날 때리겠다는 건가?" 화무쌍은 그의 팔을 꼬집었다. "윽!" "물론 하늘같은 낭군을 패지는 못하죠. 그러나 당신을 유혹한 계집들은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요." "엄처(嚴妻)로군." 영호전은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그녀의 천진한 행동은 무겁기만 했던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묘용이 있었다. 그는 어느덧 조금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그녀의 존재로부터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어찌 된 거예요? 구룡연은 원래 무림인들과 가까이 하지 않았잖아요? 무슨 마음으로 그들을 끌어들였죠?"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오라버니가 변한 게 아니고요?" 영호전은 그녀를 정시하며 반문했다. "왜, 내가 변한 것처럼 보이나?" "그래요." 그녀의 반짝이는 눈이 그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실은 아까부터 느꼈던 건데, 책벌레였던 오라버니가 지금은 꼭 무인 같아 보여요. 건강해진 듯도 하고." 영호전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물었다. "그래서 나쁜가?" "나쁘긴요? 호호호....... 솔직히 그런 변화로 인해 아쉬웠던 부분이 채워진 걸요. 무쌍은 강한 사람이 좋아요." 그는 화무쌍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은 강해야 한다. 나도 최근에야 그 점을 깨달았지. 강하지 못하면 종국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삶이란 적자생존의 법칙을 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녀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세상에......! 당신은 변한 정도가 아니라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네요?" "상황이 나로 하여금 변하게 했을 뿐이다. 나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금화성의 무리들에게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으나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아!" 화무쌍은 탄성을 발하더니 급히 물었다. "혹 금화성과 직접적인 격돌이 있었나요?" 영호전은 침중하게 말했다. "너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님께서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다. 구룡연을 무너뜨리려는 금화성의 암계에 당하셨지. 그들은 다방면으로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다." "그런 일이......!" 버들가지처럼 휘어진 화무쌍의 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금화성 놈들...... 그냥 두면 안 되겠군요?" "음." "좋아요! 소매가 당장 아버님께 고해서 금화성을 치시라고 하겠어요." 화무쌍은 분노가 치미는 듯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영호전은 고개를 저었다.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그들은 겉으로 나서기를 꺼려 주로 강호인들을 이용했다. 또한 그들도 북경의 권가(權家)에 끈을 대고 있으니 자칫 경솔하게 움직였다간 천하가 어지럽게 될 수도 있다." "......!" "결국 나도 놈들과 똑같은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화무쌍은 눈을 빛내며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일이 이미 상당히 진척된 모양이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다행이에요. 모쪼록 금화성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굳건히 일어서기를 바래요." "고맙다, 무쌍." 영호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 먼길을 와 피곤할 테니 안으로 들어가자." "네." 그를 올려다보는 화무쌍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은 정혼자인 영호전을 상대로 그녀가 처음 내비친 것이었다. 사실 화무쌍은 천하의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부터 그에게서 보호를 받는 일이란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던 그녀였다. 화무쌍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매력 있어! 전 오라버니는. 예전보다 더욱 더.' 심리의 반영일까? 눈꼬리마저 고운 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그녀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우선 목욕부터 해야겠어요, 피로를 풀려면. 호호......." '윽!' 내심 비명을 발한 영호전은 역시 들리지 않게 읊조렸다. '정말 못 말리는 아가씨로군. 언행이 도무지 제멋대로이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2 늦가을의 양광(陽光)이 쏟아져 내리는 오후다. 하늘은 더없이 청명했다. 백우헌(白羽軒). 구룡연의 좌측에 위치한 가산(假山) 위에는 한 채의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그 곳에는 지금 흑오목으로 된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일남일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관옥 같은 얼굴에 반듯한 이마가 돋보이는 청년은 바로 구룡상막주인 영호전이었다. 그의 앞에는 화무쌍이 요염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타는 듯이 붉은빛 능라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더욱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녀의 관능미(官能美)는 의도적인 연출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미색이 받쳐 주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금색 허리띠로 질끈 졸라맨 허리는 풀잎처럼 연약해 보여 급격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큰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호흡할 때마다 기복을 보이는 그 풍만한 가슴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일으킬 만큼 도발적이었다. 날씬한 허리 아래로 둥글게 퍼져 나간 둔부 또한 무르익은 성숙한 여인의 매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붉은 띠로 동여매고 있었는데, 몇 올의 머리카락이 흰 얼굴 위로 드리워져 바람결에 가볍게 살랑거렸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영호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큰 눈은 정인(情人)을 애무하는 손길처럼 강렬하고도 뜨거운 빛을 발산해 내고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호호! 정말 모두가 기를 쓰고 있군요. 황금의 위력이 저렇듯 목숨을 잃는 일도 불사하게 만드나 보죠?" 화무쌍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다정한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연무장으로 향해져 있었다. 이 곳 정자에서는 연무장의 광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던 것이다. 연무장에 마련된 비무대 위에서는 두 명의 괴인(怪人)이 치열한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쉬쉬쉬쉭! 쉴새없이 파공성이 난무하며, 그에 따라 대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도기(刀氣)가 연이어 발출되었다. "차앗!" "크크크! 어림없다!" 그들이 내지르는 기합성이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가 하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중인들의 고막을 찢었다. 이미 수백초를 겨룬 듯 두 괴인은 꽤 지쳐 보였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걸레쪽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아직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상대를 향한 필승의 의지로 충만해 있는 두 괴인의 눈빛은 어찌 보면 엄숙하기조차 했다. 이처럼 연무장에서는 연일 중원 전역에서 모여든 강호인들이 죽기살기로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 그 숫자는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것은 비무자들의 무공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무장은 정자와 다소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비무 광경을 지켜보는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는 거리였다. 면밀한 무공의 관찰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래서일까? 정자에 앉으면서부터 줄곧 화무쌍의 눈길은 연무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영호전도 함께 연무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직 멀었다. 저들의 실력은 고작해야 사품위(四品位)에 불과할 뿐 내가 원하는 고수들은 여태도 오지 않았다." 화무쌍이 물었다. "오라버니가 원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인데요?" "적어도 일문의 종사급은 돼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영호전을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욕심이 큰 것 아니에요? 과연 그런 자들이 봉록을 받고 일을 하려 들지 모르겠군요." 영호전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황금은 귀신도 부린다고 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후후...... 그들이 명예를 숭상한다는 건 안다." 그는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황금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최소한 미끼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 화무쌍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두고 봐라. 머지 않아 거물들이 모이게 될 테니." 확신에 찬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화무쌍은 반신반의했다. 그녀는 정혼자이긴 했으나 영호전의 심중을 완전히 헤아릴 만한 재간은 아직 없는 듯했다. 소문은 빠르다. 구룡상막에서 막대한 황금을 뿌려 가며 무사들을 채용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무림 전역으로 번졌다. 일각에서는 황금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 몸을 파는 무사들을 경원하는 소리가 드높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문의 파장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그에 따른 호응도 만만치 않았다. ―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가주인 당호연(唐浩然)이 황금 500만 냥을 받고 구룡상막으로 들어갔다. ― 장왕(掌王) 만시량(萬示亮)이 구룡상막에 들었다. ― 사검마성(死劍魔聖)도 거금을 약속 받고 구룡상막의 무사가 되었다고 한다. ― 모산파( 山派)의 장문인이 구룡상막의 봉록을 받는 무인이 되었다. 소문에 소문이 이어지며 무림은 온통 들끓었다. 사실 그 정도라면 강호를 한바탕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거론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고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이 제시되었든 그들이 일개 상단(商團)의 고용무사가 되었다는 것은 정녕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무림인들의 관심은 당연히 구룡상막의 상주가 누군가에 대해 모아지게 되었다. 무림사를 통틀어도 전례가 없던 일, 즉 황금으로 무림의 고수들을 매수하는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인물은 과연 어떻게 생겨 먹은 자란 말인가? 탁탁...... 타다닥! 낙운시는 주판알을 부지런히 퉁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갔다. 이윽고 계산을 마쳤는지 그는 두터운 장부를 덮고는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상주...... 이제 어찌하오리까? 예정했던 금액의 절반이 넘게 지출되었소이다." 떨리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영호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장부를 펼쳐 들었다. 일품위와 이품위의 난은 비어 있었다. 삼품위의 봉록은 황금 1000만 냥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며, 그 항목에 기재되어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영호전은 나직이 읽었다. "흑사갈(黑蛇蝎) 위지매령(尉遲梅玲)과 반고(蟠高)......." 낙운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상주, 그들 두 사람은 무명인데다 나이가 삼십도 채 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삼품위에 올려놓으셨소? 사품위의 인물들이 오히려 쟁쟁한 명성을 떨치는 무인들이 아니오? 그들 여덟 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영호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낙 장로, 능력이란 측정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오. 사품위에 올라 있는 여덟 명의 인물들은 명성은 얻었는지 몰라도 실용가치 면에서는 모자라오이다." "상주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지매령과 반고의 능력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셨소?" 영호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간단하오. 위지 낭자와 반고는 나에게 그들 팔 인의 옷자락을 하나씩 베어다 주었소." "그게 정말이오?" 낙운시는 무공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견으로도 상대방의 옷자락을 베어 올 수 있을 정도라면 목숨을 취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낙운시는 경이가 담긴 눈으로 영호전을 응시했다. '그들 이 인을 또 언제 시험을 했었단 말인가?' 근자에 들어 놀란 일이 어디 한두 번일까마는 그로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호 조카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대담해지기도 했지만 무서울 정도로 치밀해졌다.' 그는 불현듯 두려움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영호 조카로 인해 우리 구룡상막은 불후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든가, 아니면...... 흔적도 없이 와해되고 말 것이다.' 낙운시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필생의 도박에 임하자니 그는 은근히 겁이 났던 것이다. 3 무사들의 영입은 일단락 지어졌다. 구룡연은 더 이상 무사들을 모집하지 않았다. 봉록을 받고 가입한 자들의 숫자는 도합 1,500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단계별로 십품위까지의 등급이 매겨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등급이나 봉록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것은 무림인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은 곧 해소되었다. 구룡연에서는 그들에게 승급 기회를 부여한다는 발표를 했다. 누구나 상위급의 무사에게 도전할 수 있으며, 그를 이기기만 하면 그 등급을 차지하게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구룡연은 변신에 성공했다. 과거에는 단순한 상조직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대무벌(大武閥)로 화해 있었다. 구룡연의 대문 앞에서만도 등급이 표시된 화복차림의 무인들이 눈에 정광(精光)을 번뜩이며 주야로 경비를 섰다. 등급의 구분은 화복의 소매에 금색 실로 띠를 수놓아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 띠가 많을수록 등급은 높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품위까지에 해당되는 얘기이고, 그 이상은 굳이 표식을 달지 않았다. 천수여래(千手如來) 당호연(唐浩然). 장왕(掌王) 만시량(萬示亮). 사검마성(邪劍魔聖). 모산붕사( 山崩士) 악표붕(岳 鵬). 철수환룡(鐵手幻龍) 능천강(凌天鋼). 야수제(野獸帝) 원공공(袁空空). 만화부인(萬花夫人) 염시분(艶翅雰). 탕왕(蕩王) 서문경(西文慶). 이 인물들이 사품위에 올라 있는 팔대 고수들이었는데, 그들은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명성과 무공으로 고작 사품위로밖에 책정되지 못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분명 타인에게 패한 이력이 있었고, 그들을 패배시킨 두 명의 인물이 삼품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대청(大廳). 사품위에 해당되는 8인이 긴 탁자를 놓고 좌우로 나뉘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전광처럼 형형했으며 기도 역시 범상치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호기심이 충만해 있었다. '대체 구룡상막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것은 그들의 공통적인 의문이었다. 이제껏 그들은 구룡상막주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각기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었다. 막대한 황금을 풀어 무림인들을 끌어 모으는 구룡상막주는 필경 일대 기인일 것이므로. 디딩...... 디디딩......! 어디선가 비파음이 은은하게 울려왔다. 그에 따라 8인의 시선은 일제히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향해졌다. 대전으로 통하는 회랑으로부터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영호전이었다. 그는 일신에 금의화복을 입고 있었으며 늘 그렇듯 사람들 속에 싸여 있어도 수려한 외관으로 인해 눈에 확 띄었다. 나이에 비해 품위를 갖추고 있어 더욱 그렇기도 했지만.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그에게서는 당당한 기풍과 함께 여유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화무쌍이었다. 백색의 능라의(綾羅衣)를 입고 있는 그녀 또한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였다. 사로(四老)가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잇고 있었다. 이윽고 영호전과 화무쌍은 상단에 마련된 태사의에 나란히 앉았고, 사로는 그들 뒤에 가로로 죽 늘어섰다. 장내에는 내내 적막만이 감돌았다. 영호전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앉으시오, 여러분."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속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8인은 흠칫하는 한편, 제각기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영호전의 기도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들은 어느 틈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왜......?' 그들은 내심 같은 말을 읊조리며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들은 개개인이 일문의 지존이나 다름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 상주인 약관의 청년에게 먼저 예의를 표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말이다. 영호전은 그러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을 차례로 둘러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본인은 영호전이라 하오. 앞으로 여러분과 고락을 함께 하게 될 구룡상막의 상주외다." 8인은 안면이 굳어진 채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비에 싸여 있던 구룡상막주가 이처럼 젊은 청년이고 보니 그들로서는 입이 달라붙어 버렸던 것이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자 그들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무쌍은 그들의 심정은 개의치 않고 눈길을 돌려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선천적으로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그녀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솔직한 편이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는 빙산이라도 녹여 버릴 듯 달콤한 교소가 흘러 나왔다. "호호호! 전 오라버니, 저 분들이 이른바 사품위에 올라 있는 무사들이란 말이죠?" 그 말에 8인의 불쾌감은 한층 더해졌다.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무리 품계가 정해졌다지만 우리들을 일개 무사로 칭하다니.' 하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화무쌍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기도 했다. 화무쌍이 있음으로 하여 대청 안이 눈부시게 환해졌기 때문이었다. 탕왕(蕩王) 서문경은 아예 드러내 놓고 군침을 삼켜대고 있었다. 그의 뱁새눈은 화무쌍의 늘씬한 몸매를 훑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소문대로 색광(色狂)이었던 것이다. 영호전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 분위기를 일신시켰다. "본인은 금후로 일 년간 여러분의 능력을 산 사람이오. 잘 아시겠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이 기간 동안에는 이의 없이 본인의 지시에 따라주셔야만 하오." 8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해진 계약에 이의를 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황금을 필요로 하여 구룡상막에 들어온 그들이었다. 그러니 영호전의 요구는 당연히 수용해야만 했다. 물론 아직도 영호전을 비롯하여 구룡상막을 얕보는 마음은 있었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고작 상인들의 단체가 자신들을 어찌 함부로 다루겠는가고 말이다. 그들은 정말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상대가 일찌감치 자신들의 계산을 넘겨짚고 있다는 사실을. 영호전의 음성이 이어졌다. "편의상 지금부터 그대들을 황금팔상(黃芩八相)이라 부를 테니 그리 아시오." 8인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그것은 곧 이 시각부터 그들이 구룡상막의 수하가 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지시에 따르는 것이야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를 이렇게까지......?' 그들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영호전은 여전히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인 중 1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소이다. 우리들을 지휘하게 되는 인물은 누구요?" 장왕(掌王) 만시량이었다. 빗자루처럼 생긴 눈썹에 우뚝 솟은 매부리코의 소유자로 부릅뜬 그의 눈에서는 사뭇 위협적인 안광이 번쩍였다. 영호전은 여유 있게 응수했다. "본인이외다. 그대들을 통수하는 것도,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쥔 것도 모두 나요." "뭐, 뭣이?" 8인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만시량이 뭐라 하기도 전, 탕왕 서문경이 흥분하여 나섰다. "상주! 생살여탈권이라니, 그건 너무 지나치지 않소?" 그 정도면 그로서는 최대한으로 부드럽게 나간 것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벌써부터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불복하겠다는 말씀이오?" 영호전은 정곡을 찌르듯 반문하더니 차갑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농(弄)을 하고 싶은 모양이오만 부디 자중하시기 바라오. 그러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테니 말이오." "이...... 이런......!" "으으......." 8인의 안면은 무참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그들을 향해 영호전의 말은 계속 되었다. "처음부터 상호간에 이루어진 협정은 장난이 아니었소. 본인은 물경 오백만 냥이란 거금을 투자했소이다. 과연 천하에서 누가 그만한 금액을 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영호전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본인은 그대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경고하거니와, 본구룡상막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오. 본인의 마음 여하에 따라 여러분들이 그토록 자부하는 힘쯤은 얼마든지 꺾을 수 있소이다." 협박의 성격이 농후한 그의 말은 8인의 귀에는 일종의 광언(狂言)으로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신분과 지위는 무림에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평소 안하무인격이었던 그들이 영호전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영호전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불만이 있는 분은 앞으로 나서시오. 본인을 죽일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말리지 않겠소." 대청 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영호전의 폭탄선언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것이나 다름없었고, 8인은 지극히 불쾌했지만 그의 두둑한 배짱만은 인정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 사이 가슴을 졸인 것은 영호전의 뒤에 시립하고 있는 사로였다. 그들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설마하니 영호전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잠시 납덩이 같은 침묵이 대전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뒤로 모산붕사( 山崩士) 악표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춧빛이 감도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붉어져 있고, 은빛 수염은 바람을 타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보자보자 하니 어린아이가 너무하는군! 어디 정말 노부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겠다." 노성과 함께 솥뚜껑인 양 커다란 그의 손바닥이 전광처럼 전면을 향해 뿌려졌다. 위이이잉! 그 빠르기란 가히 빛살과도 같았다. 막대한 괴력(怪力)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영호전의 천령개를 향해 떨어졌다. 이름하여 천붕장(天崩掌), 하늘을 쪼갠다는 무시무시한 장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상주!" 사로는 질겁을 하여 경악성을 발했다. 여차하면 영호전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어질 판국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호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조소를 머금은 채 악표붕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읏! 문득 그의 앞에 하나의 흑영(黑影)이 환상처럼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한 줄기 섬뜩한 묵광(墨光)이 허공을 갈랐다. 파앗! 묵광은 일직선으로 천붕장의 장세를 뚫고 들어갔다. "크으윽!" 악표붕의 입에서 참담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연달아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고 있었다. 4 상황은 급전되었다. 모산붕사 악표붕. 당대에 명성이 자자하던 그의 가슴팍에는 믿을 수 없게도 십자(十字)형의 혈흔이 은은히 새겨져 있었다. 영호전의 앞에는 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대략 27~28세 정도 되었을까? 헌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였다. 단지 흠이라면 푸른 기가 돌 만큼 창백한 안색뿐이었다. 청년의 입가에는 차디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음울하게 느껴지는 잿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한 자루 묵검을 비껴 차고 있었다.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언제 출현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과연 그가 발검을 했었는지조차 그들은 알지 못했다. "으으......!" 악표붕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계속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그러나 상처보다 더욱 쓰린 것은 마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수치와 당혹으로 인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영호전은 태연히 말했다. "상처는 그리 대단치 않을 것이오. 고작 두 푼 정도 깊이로 베어졌을 테니 말이오." 그 말에 중인들은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욱 경악에 이른 자는 바로 회의청년이었다. 반고(蟠高). 이런 이름을 가진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상주는 무공을 모르거늘, 어떻게 내 검에 베인 상처가 두 푼 깊이라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그의 아연한 눈길을 받으며 영호전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었다. "이 정도면 시험은 끝났으리라고 보는데, 어떻소?" 더 이상 누구도 응대하는 자가 없었다. "여러분의 능력에 관해서는 본인도 익히 알고 있소만 일에는 순서가 있어야 하고, 무리에는 영수(領首)가 있어야 하는 법이오. 본인은 비록 무인은 아니나 일을 추진하는 자의 입장에서 명령체계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소." "으음......." 모산붕사 악표붕은 한차례 신음을 흘렸다. 그 의미는 좌절에 가까운 것이었다. 영호전은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본인에게도 자구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추후로는 오늘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믿소. 반고의 실력은 악 대협 외의 여러분들도 아실 터인즉 더 설명하지 않겠소." 이는 반고에게 패한 전력이 있는 8인에게는 다시없는 수치감을 유발시키는 말이었다. 이제 그들은 싫든 좋든 영호전이 말한 황금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해야 했다. 반고와 같은 초고수까지도 수족처럼 부리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영호전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참, 반고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군."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만 나오시오, 위지 낭자." 스스스....... 멀쩡하게 보이던 천장이 거짓말처럼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한 줄기 흑영이 떨어져 내렸다. 중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숨어 있는 것을 몰랐다니......!' 흑영. 그 자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검은색 가죽옷으로, 몸에 찰싹 달라붙어 늘씬하면서도 굴곡이 완연한 육체의 선을 중인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코 아래까지 검은 면사를 드리우고 있어 정확한 용모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아래로 보이는 흰 피부와 붉은 입술, 동그란 턱 정도면 그녀가 절세의 미인임은 추측이 가능했다. 그 밖에 그녀의 손도 시선을 끌었다. 섬세하고 투명하게 느껴지는 그 손에는 한 송이의 붉은 장미가 쥐어져 있었다. 전신을 통해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흑의녀.......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얼음장과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 접근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영호전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역시 서로 간에 안면이 있겠지만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이 분 낭자의 명호는 흑사갈(黑蛇蝎)이며, 방명은 위지매령이라고 하오." 그 말에도 토를 다는 자는 없었다. 결국 영호전과 사품위의 8인, 즉 새로 임명된 구룡상막의 황금팔상 사이에는 명령체계가 확정된 셈이었다. 황금팔상은 새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이 어린놈의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단순히 거부라고 보기에는 심기가 너무도 깊다. 저 반고란 놈과 위지매령이란 계집만 해도 그렇다.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절정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저런 자들을 호법(護法)으로 고용할 정도라면.......' 그들은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짐작컨대 저들과의 거래는 단지 금전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어떤 수단을 동원했을까?' '영호전, 저 자야말로 무공은 익히지 못했어도 장차 무림에 폭풍을 일으킬 만한 존재다.' 황금팔상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상념들을 영호전은 거의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완연히 다른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 여러분께서는 드디어 본인과 한 배에 타게 되었으니 한 가지 약속을 하겠소. 언제고 본구룡상막을 위해 공을 세우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후한 상을 내리겠소이다." 그의 말은 묘한 어감을 풍겼다. 반대로 과(過)를 저지르게 되면 어떤 벌이라도 각오하라는 의미가 내포된 듯했다. 황금팔상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기가 막힌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 잘못 걸렸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어지는 영호전의 낭랑한 음성이 그들의 고막을 두드렸다. "하하하! 오늘은 무척 기쁜 날이오. 내 특별히 작은 연회를 마련했으니 여러 분들께선 마음껏 즐겨 주시기 바라오." 디디디딩......! 기다렸다는 듯 청아한 비파음이 울렸다. 구룡대전의 벽은 온통 황금빛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사면의 벽에는 각각 아홉 마리의 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쪽 벽의 용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벽면은 소리 없이 위로 올라갔다. 그곳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臺)였다. 대 위에는 20여 명의 악사(樂士)들이 열을 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눈부신 화복을 입은 채 흥겨운 가락을 연주했다. 이따금 울리는 고(鼓) 소리와 함께 칠현금(七玄琴)이 은은한 선율을 냈고, 거기에 비파(琵琶)와 소(簫), 적(笛) 등의 음색이 어우러지니 가히 천상의 선음을 방불케 했다. 황금팔상은 금세 음악에 도취되어 몽롱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에 일어났던 불쾌한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어느덧 그들의 맺혔던 마음도 봄눈 녹듯 훈훈히 녹아 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상처를 입은 악표붕조차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스르륵! 다른 한쪽의 벽면이 올라가며 또 하나의 대가 미끄러져 나왔다. 이번의 대 위에는 황금팔상으로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의 음식들을 총망라해 놓은 듯 상차림은 호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상 사이에는 음식 시중을 들어줄 아름다운 소녀들까지도 다소곳이 서 있었다. 소녀들의 빼어난 미색을 대하는 황금팔상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어디 그뿐인가? 그윽한 주향(酒香)이 코끝에 닿아 오자 그들은 별천지에 들어선 듯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귀주(貴州)의 모태주(茅台酒)에서 노주(瀘州)와 경지(境芝)의 고량주(高粱酒), 복주(福州)의 사평주(四平酒)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없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그 술들은 적어도 100년 이상 묵은 술로 그 가치를 도저히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술잔도 모두 희귀한 것들 뿐이었다. 서각배(犀角杯), 고등배(古藤杯), 비취배(翡翠杯), 유리배(琉璃杯) 등등의 잔이 술맛에 따라 선택하도록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상 한가운데에는 화사한 목란화(木蘭花)와 신이화(辛夷花)가 커다란 꽃병에 꽂혀 있어 시각적인 효과까지 더해 주었으니, 이 정도의 주석(酒席)이라면 당금 황제라 해도 쉽사리 마련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영호전은 백주가 담긴 서각배를 높이 들어올렸다. "자! 여러분, 축배를 듭시다. 본구룡상막이 바야흐로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황금팔상을 맞이했으니 오늘 같은 날 자축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소?" "호호호! 맞아요, 우리 건배해요!" 옆에 있던 화무쌍도 한마디 거들었다. 황금팔상도 더는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도리어 환호성을 터뜨리며 외쳤다. "좋소이다, 상주를 위하여!" "구룡상막 만세!" 그들은 흔쾌한 얼굴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향기로왔고 음식은 입게 넣기가 바쁘게 살살 녹았다. 그야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맛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희희낙락인 그들의 곁에서는 예의 소녀들이 시중을 들었다. 탕왕 서문경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분주했다. 입에 술과 음식을 마구 구겨 넣으며 시중드는 소녀들의 몸을 요모조모 훔쳐보자니 여간 바쁜 것이 아니었다. 소녀들은 대단한 미모를 소유한데다 청순한 분위기까지 겸비하고 있어 그를 홀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겁먹은 듯 커다란 눈망울에 보송보송하게 솜털이 나 있는 불그스름한 뺨, 이따금 보조개를 만들며 미소짓는 그녀들의 모습에 그는 거의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흐흐흐...... 볼수록 탐나는 계집애들이로군.' 본시 반반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그였다. 급기야 서문경은 뱁새눈을 더욱 가늘게 좁히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 소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소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며 조그맣게 대꾸했다. "지선(池善)이라 합니다." "호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이름도 곱구나. 그래, 이리로 가까이 와 보아라." 소녀는 주춤거리기는 했지만 곧 그에게로 다가갔다. "자, 술 한 잔 따라 보겠느냐?" "네." 그녀는 보기보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러나 서문경의 동공에 쏘아져 들어온 것은 오직 하얗고 자그마한 그녀의 손일 따름이었다. 그는 시선을 움직여 소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으나 균형 잡힌 몸매였다. 서문경은 점잔을 가장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아주 절색이 되겠구나." 칭찬을 핑계 삼아 그는 소녀의 엉덩이를 슬쩍 어루만졌다. "어맛!" 지선은 화들짝 놀라 저만치 물러났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다른 소녀들 틈으로 얼른 숨어 버리고 말았다. 서문경은 입맛을 쩍 다시며 내심 중얼거렸다. '흠, 나중에 상주에게 부탁해 재미 좀 봐야겠군.' 옆에 있던 우람한 체구의 철수환룡(鐵手幻龍) 능천강이 그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허허....... 조심하시구려.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나마 사품위의 자리조차 온전하지 못할 테니까." "그건 능 형이 걱정할 일이 아니외다. 난 하루라도 계집 없이는 잠을 못 자는 성미요." "쯧, 서 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려." "흐흐! 변할 필요도 못 느끼니 굳이 강요하지 마시오." 빈축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응수하는 서문경의 색탐(色貪)이야말로 아무도 못 말리는 것이었다. 5 영호전은 좌중을 바라보다 뒤에 서 있던 낙운시에게 뭐라 지시했다. 낙운시는 즉시 한쪽 벽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벽면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이번에 미끄러져 나온 것은 좀더 넓은 대였으며, 그것을 본 황금팔상의 눈은 또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오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대 위에는 40여 명의 곱게 단장한 미녀들이 앉아 있었는데 마치 활짝 핀 꽃송이들을 보는 듯했다. 그녀들은 모두 보기 드문 미녀들로서 한 명도 빠짐없이 화려하게 성장(盛裝)을 하고 있었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인들의 인종(人種)이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금발벽안(金髮碧眼)이 있는가 하면 까무잡잡한 피부에 회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 눈이 움푹 들어간 여인, 늘씬한 체격의 색목여인 등 이족(異族)들이 한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사르르....... 미녀들은 주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률은 더욱 흥겨운 것으로 바뀌었고, 여인들은 하늘거리는 나삼을 휘날리며 멋들어진 춤사위를 전개해 갔다. 그 바람에 대청 안은 금세 휘황한 꽃 무리에 휩싸인 것 같았다. "......!" 황금팔상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다시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말이다. 특히 그들은 이국 미녀들의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를 훔쳐보느라 넋을 빼놓고 있었다. "으음......!" 만화부인(萬花夫人) 염시분은 부지중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미색의 소유자였다. 붉은 능라의를 휘감고 있는 그녀의 농염한 몸매는 오래 전부터 무림의 요화(妖花)로 명성을 떨쳐오고 있었다. 그녀는 갓 삼십대로써 아직도 피부가 희고 팽팽하여 소녀들과 비교해도 별 차이를 못 느낄 정도였다. 오히려 무르익은 몸매는 보기만 해도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황금팔상 가운데 유일한 여인이다. 미에 대한 그녀의 집착과 자부심은 대단하여 하루에도 세 번씩 우유(牛乳)로 목욕을 하며,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초라함을 느끼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이국 미녀들의 모습에 그만 주눅이 들고만 것이다. 그녀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아아! 내 나이가 십 년만 젊었더라면....... 저 아이들과 한 번 견주어 볼 만할 텐데......!' 그야말로 인생무상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옆에서 걸쭉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핫핫핫! 상주께선 과연 중원제일의 부호답게 기막힌 연회를 준비하셨구려." "저런 미녀들은 어디서 구해 오셨소? 황금만 잘 다루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방면에 재주가 비상하신 것 같소." 천수여래(千手如來) 당호연과 장왕 만시량은 성품이 호탕한 탓에 거리낌없이 떠들어댔다. 그들은 흥에 겨워 연신 술잔을 주고받으며 미녀들의 몸매와 춤을 함께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뾰족한 얼굴에 검은 피부, 고양이같이 음산한 눈빛을 지닌 야수제(野獸帝) 원공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과묵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도 간간이 탄성이 흘러 나오곤 했다. 그러기를 한참 여. 낙운시가 손을 젓자 여인들은 거의 동시에 춤동작을 멈추더니 썰물이 빠져 나가듯 나타났던 벽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덕분에 사위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오직 비파가 울려내는 가락만이 여운처럼 은은히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실내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짙은 어둠 속에 잠기고 말았다. "......?" 의아해하는 중인들의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열린 벽 속에서는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맑은 물이 가득 담긴 채 출렁이고 있는 거대한 수족관(水族館)이었다. 수족관의 내부는 휘황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붉고 흰 산호들로 장식이 되었으며 갖가지 수초들이 우거져 마치 바다의 일부를 옮겨 놓은 양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작 주된 구경거리는 그것들이 아니었다. 수족관 속에는 한 쌍의 남녀가 서로 포옹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 속에서 오래 견디기 위해서인지 수면 위로 연결된 대롱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있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중인들은 똑같은 의문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뭔가 색다른 진풍경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며 기대에 찬 시선을 수족관의 남녀에게 던지고 있었다. 이윽고 수족관은 대전의 한가운데에 이르러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보여지는 그것은 흡사 화려하게 빛나는 하나의 거대한 발광체와도 같았다. 디디디디딩......! 비파 소리가 서서히 고조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수족관의 남녀는 포옹을 풀더니 각자 입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씩 몸에서 떼어 내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들은 중인들의 눈에 추하기보다는 신비스럽게 비쳐지고 있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릴 정도로 긴 여인의 흑발이 해초와 더불어 수중에서 잔잔히 나부꼈다.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꽃잎처럼 붉은 입술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서려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그녀의 나신은 가냘프면서도 금방이라도 수면을 차고 날아오를 듯 날렵해 보였다. 동그란 어깨와 알맞게 부푼 젖가슴, 대리석으로 빚은 듯 매끄러운 다리가 형용키 어려운 매력을 발산해 내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녀의 분위기가 욕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우아하고 고귀해 보인다고나 할까?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관자놀이까지 길게 뻗은 눈썹과 서글서글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는데,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용모는 송옥이나 반안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잘 다듬어진 근육과 균형 잡힌 몸매는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두 남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팔과 다리가 일렁이는 머리칼과 함께 유연하게 물살을 갈라갔다. 아득한 꿈속을 헤매듯 두 사람은 인세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비경(秘景) 속에서 마음껏 노닐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이 쉴새없이 출렁이며 물방울들을 무수히 수족관 밖으로 퉁겨 내곤 했다. 언제 빼냈는지 두 사람의 입에는 대롱이 물려 있지 않았다. 그 상태로 그들은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 듯 이따금씩 입을 벌렸고, 그 때마다 수중에는 흰 기포가 생성되었다. 중인들은 비록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두 사람의 표정으로 내용만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디디딩...... 뚱땅......! 서서히 비파음에 다른 악기의 선율에 더해지며 은은하게 울리던 주악 소리는 점차 화려하게 변해 갔다. 두 남녀의 몸짓도 한층 더 활발해졌다. 하늘거리는 머리칼과 함께 여유롭게 유영하는 모습, 행복에 겨운 듯 미소짓는 표정 등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두 사람의 깨끗한 나신이 환상의 세계를 펼쳐내는 가운데 어디선가 시(詩)를 읊는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봄 강을 흐르는 물 거울같이 반반하여 저 멀리 바다까지 연하여 흘러가고 밝은 달 바다 위에서 물결 타고 떠오네 春江湖水蓮海平 海上明月共潮生 강물이 멀고 긴 길 돌고 돌며 흐를 적에 꽃향기 무르익는 들판을 지나가네 꽃밭에 달이 비치면 눈빛같이 빛나네 江流宛轉 甸 月照花林皆似霰 결국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지순한 사랑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몸짓이나 표정은 중인들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탕왕 서문경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타고난 기질로 인해 수족관 속의 여인이 옷을 벗을 때는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선 바 있었다. 여인의 선연하고 아름다운 몸매가 시각을 거쳐 그의 육신에 대뜸 불을 싸질러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욕정으로 인해 혼탁했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아져 있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두 남녀가 벌이는 수중무에 마음이 정화(淨化)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두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화무쌍이 영호전의 어깨에 살며시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아름다워, 정말......." 언제고 그의 곁에만 있으면 무섭도록 타오르던 그녀의 눈빛도 이 순간만큼은 영롱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호전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입가에는 자못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들리지 않게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흠,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군.' 그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4장 넘어야 할 한계(限界) 1 밤. 사위는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어두웠다. 스스스....... 음산한 바람이 허공을 스치고 있다. 영호전은 처소에 들었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침상이 아닌 바닥에 앉은 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진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땀으로 목욕을 하는 듯했다. 그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기이하게 붉으락푸르락 하기만도 벌써 수십 차례다. 마침내 그는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는 고통으로 인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의 체내에 기현상이 생긴 것은 보름 전부터였다.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발작증을 보인 것이다. 일단 증세가 일어났다 하면 온몸의 혈맥이란 혈맥은 남김없이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그 뒤로는 예외 없이 광기(狂氣)에 가까운 기운이 십이경락과 임독양맥(任督陽脈)을 뚫을 듯 솟구쳐 올랐다. 그 바람에 어떤 때는 누운 채로 천장까지 붕 떠오른 적도 있었다. 또한 그런 현상을 겪고 난 후에는 의례 전신에서 맥이 빠져 완전한 무기력 상태가 되곤 했다. 지금도 그는 이유도 모르는 채 혈맥 속에서 미친 듯 들끓는 기운을 달래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이글거리는 태양을 삼키기라도 하는 듯 그의 몸은 온통 불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 가공할 열기에는 온몸이 그대로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노도처럼 끓어오르는 광폭한 기운을 그로서는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었다. '으으...... 정말 죽겠군!' 영호전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려 입술을 깨물었다. 극도의 고통을 참다보니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급기야 그의 눈에서는 화염과도 같은 광채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지않아 발작증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그 증세를 참아낸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초인적인 인내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으니까. "으음!" 마침내 그는 신음을 흘렸다. 태산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기운이 천정혈(天井穴)로 불쑥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은 금시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윽! 이건 여느 때와 또 다르지 않은가?' 영호전은 내심 부르짖었다. 확실히 체내를 치달리는 괴이한 기운은 이전 것과는 강도 면에서 크게 차이가 있었다. 예상치를 넘어 그야말로 전신이 폭발해 버릴 듯한 무서운 고통을 수반해 왔다. '안돼...... 이대로 지면 안 된다!' 그는 이를 악물며 끝까지 버텨 보려고 사력을 다 했다. 그러나 주위의 경물이 그의 시야에서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결국 또......!' 정명하던 그의 눈빛은 급격히 응축되었다. "헉!" 그는 한 차례 헛바람을 들이키더니 기어이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의 몸에서는 그 때까지도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영호전은 눈을 떴다. 혼절했다 깨어났을 때 그는 침상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안면 가득히 수심을 담은 화무쌍이 앉아 있었다. 영호전은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가끔 체내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솟구쳐 올라 이 모양이 되곤 하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 이젠 습관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다." 태연히 말하는 그에 비해 화무쌍은 고운 아미에 음울한 그늘을 드리웠다. "혹시 중병이라도......?" 그녀는 말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정말로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호전은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누가 날 여기다 눕혔지?" "소매가요." "후후....... 무거웠을 텐데, 사람을 부르지 않고?" 짓궂은 표정인 그를 향해 화무쌍은 정색을 지었다. "어디 그럴 경황이 있어야죠. 그렇지 않아도 오라버니가 깨어나지 않기에 구양 선생을 부르려던 참이었어요." 영호전은 달갑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관두어라. 그를 청하고 싶지 않다." "왜요?" "공연히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겠느냐?" "호들갑이라뇨? 오라버니는 아까......." 화무쌍의 말을 그는 중도에서 끊어 버렸다. "괜찮다. 이러다 금세 괜찮아진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혼절한 후에는 되레 전신이 날아갈 듯 상쾌해지곤 했던 것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으나 안색은 평소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영호전은 침상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억!" 그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갑자기 가슴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는 그만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가가!" 화무쌍이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러다 영호전의 얼굴을 내려본 순간, 그녀는 뾰족한 비명을 발했다. "악!" 놀랍게도 영호전의 얼굴은 반쪽은 검고, 반쪽은 희게 변색되어 공포스러운 형상으로 화해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람!" 화무쌍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도무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얼굴이 어찌 양면으로 나뉘어져 변색될 수가 있단 말인가? 영호전은 다시 의식을 잃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넓은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화무쌍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더듬거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요. 구양 선생을......." 그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침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일어날 것 없소, 화 소저." "아!" 들어서는 인물은 바로 구양무종이었다. 그는 곧장 침상으로 다가가더니 영호전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동작은 위급한 사태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절제되어 있었다. 엄숙하기만 하던 그의 표정은 잠시 후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 깊은 곳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이 떠올랐다. 화무쌍이 초조한 나머지 다급히 물었다. "어떤가요? 고칠 수 있는 병인가요?" 구양무종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소만...... 이대로 놔두면 안 되는 것만은 확실하오. 어쩌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화무쌍은 금세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구양무종은 나직하게 웃었다. "허허.......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건 없소이다. 노부에게 한 가지 방안이 있소." 그녀의 얼굴은 대번에 환하게 밝아졌다. "어떤 방안인데요?" "영호 공자는 한 차례 환난을 겪은 후 심맥이 손상되는 바람에 혈맥 속에 울혈(鬱血)이 쌓여 있소. 이것은 반드시 풀어 주어야 하나 약으로는 한계가 있소." "하면......?" 화무쌍은 불안한 눈빛으로 영호전을 응시했다. "일단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요." "안정?" 구양무종은 침착하게 설명해 나갔다. "그렇소. 이를 위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접해야 하는데 개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불문의 선공(禪功)이나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을 익히는 것이오." 그 말에 화무쌍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기이하게 변했다. 하지만 구양무종은 미처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노부는 영호 공자께 그것을 시행해 볼 참이오." "어떻게요?"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노부의 친구들 중에 공자를 도와줄 사람이 있소이다." 구양무종은 침상에서 떨어졌다. "준비하겠소. 공자께서는 곧 깨어날 것이오." 그는 예의 차분한 동작으로 방문을 나섰다. 화무쌍은 혼자 남게 되자 수려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뭔가를 두고 갈등을 겪는 듯 그녀는 안색의 변화를 거듭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기도 했다. 문득 그녀는 섬섬옥수를 뻗어 영호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건...... 운명인지도 몰라." 그녀의 눈에서는 투명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결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었다. 두두두두......! 마차는 사흘 낮, 사흘 밤을 쉬지 않고 질주했다. 황진(黃塵)이 풀풀 날리는 가운데 마침내 저 멀리 수려하고 웅장한 산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태행산(太行山).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그 장대한 규모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밀림이 우거진 산봉우리를 감싸며 떠돌고 있는 구름은 태고(太古)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마차는 태행산 기슭에 당도하자 멈춰 섰다. 울창한 숲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차 안. 영호전은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발작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혼절하곤 했다. 구양무종이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가 적절히 손을 써 주었다. 만일 그의 금침대법이 없었다면 영호전은 이미 산 목숨이 아니었으리라. 2 "지금부터는 걸어가야 하오." 구양무종의 말이 나는 아무래도 미심쩍게 들렸다. 그는 나를 데리고 비밀리에 구룡연을 빠져 나왔다. 무엇 때문인지 시위는 한 명도 대동하지 않았다. 결코 짧지 않을 여정에 오직 혼자서 내 시중을 들어온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공자께서 만나실 노부의 친구들은 오래 전 속세를 떠난 자들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오. 그래서 수행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오." 나는 어떤 면에서건 그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 사실 불가의 선공이나 도가의 수행법을 익혀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도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낸 사람도 그였고, 지금까지의 내 삶도 따지고 보면 그에 의해 지탱이 되어온 셈이므로. 아무튼 구양무종과 나는 건량을 등에 한 보따리씩 나누어 진 채 태행산의 울창한 밀림을 헤치며 전진했다. 스스스스! 초겨울의 삭막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날씨는 몹시도 을씨년스럽다. 머리칼과 옷자락은 바람결에 찢어질 듯 나부낀다. 나는 숨이 차올라 걸음을 멈추려다 그만 두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전진하는 구양무종 때문이다. 손을 내려다보니 꽤 야윈 것 같다. 아마도 수시로 일어나는 발작으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약화된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과거의 기억도 찾지 못한 채 이 상태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서 가는 구양무종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다. 길게 자란 그의 은빛 수염이 갈대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비쩍 마른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해 보인다. 그래도 그의 걸음걸이는 꽤 여유 있게 느껴진다. 차라리 다행이다. 그가 불안해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태행산은 산세가 그리 험악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러나 울창한 밀림으로 인해 자칫 길을 잃으면 영영 돌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오지(奧地)에 해당되는 곳이다. 지금 우리는 밀림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둡다. 한 점의 빛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듯 밀림 속은 컴컴하고 음습하기조차 했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의 거목(巨木)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온갖 식물들과 덩굴들이 엉켜 있어 도무지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고개를 들면 고작 손바닥만한 하늘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어디선가 간간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곤 했다. 숲이 깊으니 아마도 그 소리는 대부분 맹수들의 것인 듯하다. 허리까지 차 오르는 무성한 풀잎들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구양무종은 익숙하게 풀잎을 헤치고 걸어갔다. 이 길이 초행이 아닌 듯 그의 걸음은 갈수록 날렵하고 빨라졌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가기가 벅찼으나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어느덧 주위는 짙은 암흑으로 화해 있었다. 우리가 밀림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밀림 속에서 잠을 자기를 사흘이다. 마침내 나는 한 절곡(絶谷)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곳의 풍경은 매우 이채로웠다. 곡구(谷口)에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난립해 있었는데, 그 형상이 사뭇 괴이했다. 주위에는 말라 죽은 고사목(枯死木)들이 삐죽삐죽 서 있어 대체적으로 황량한 풍경이었다. 때마침 땅거미가 밀려와 음침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이따금 뼛속까지 후비는 듯한 한풍이 불어와 더욱 더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준다. 구양무종은 괴석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노라니 나는 왠지 가슴이 써늘해지는 기분이다. 그는 신비로 무장된 위인이다. 비록 겉으로는 날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듯했지만 간혹 느껴지는 그의 섬뜩한 눈빛은 알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구룡연 내에서도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에게는 늘상 범접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아주 먼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공자, 이제부터는 노부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오도록 하시오.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큰일나오." '......?' 나는 의아했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구양무종은 괴석 사이를 이리 돌고 저리 돌며 전진해 갔는데, 그의 움직임은 도통 질서가 없어 나를 당혹시켰다. '설마 의도적으로 날 혼란에 빠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하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겠는가?' 나는 기실 심중에서 번갈아 일어나는 의혹과 안도감에 어이없을 만큼 시달렸다. 그 대책 없는 모순(矛盾)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쫓아가는 나에 대한 자조인지도 몰랐다. 구양무종이 문득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공자께서는 부디 의심하지 마시길 바라오. 내가 이런 식으로 공자를 인도하는 이유는 단지 이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외다." "절진?" "그렇소. 미리 언급했듯 노부의 친구들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나머지 약간의 손을 써두었소." "그럼 이 숲에 진법을 설치했단 게요?" "허허, 공자도 진법에 대해 아시오?" "잘 모르오만 책을 통해 제갈무후의 팔진도(八陣圖)에 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소." 구양무종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팔진도는 동당(洞當), 중황(中黃), 용등(龍騰), 조비(鳥飛) 연형(連衡), 악기(握奇), 호익(虎翼), 절충(折衝) 등의 진도를 말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세간에 알려져 있는 진법 중 일부분에 불과할 따름이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유명한 팔진도가 말이오?" "그렇소이다. 후세의 병법가들이 제갈무후 이후로 꾸준히 발전시켜 왔는지라 당대에 이르러서는 무궁한 위력을 발휘하는 진법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소." 구양무종는 사뭇 신비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난석들만 해도 언뜻 보기에는 천연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소.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뎌도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무서운 변화를 일으키게 되어 있소." 나는 거듭 놀라야 했다. 아무리 보아도 난석들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지 않소?" 나는 은근히 오기가 일어났다. "좋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으니." 나는 즉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등뒤에서 구양무종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공자!" 이어 고막이 터질 듯한 뇌성이 울렸다. 우르르릉......! 동시에 시야가 먹물을 부은 듯 캄캄해지더니 사위에서 무시무시한 광풍(狂風)이 일어났다. '으읏!'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 몸쯤은 그대로 날려 버릴 듯 바람이 마구 불어대는 데다가 뇌성벽력까지 쉬지 않고 울리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었나? 그가 말한 진법이.' 정말이지 일순간에 천지가 뒤집히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보이지도 않았고, 발 아래 땅도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우주가 혼돈(混沌)된 가운데 집채만한 바위라도 견디지 못할 광풍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쯤 되고 보니 나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구양무종의 말은 맞았다.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진법은 정말로 인간의 힘으로는 뚫지 못할 절진 중 절진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전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았다. 뜻밖에도 발이 닿은 곳은 지면이 없어져 버린 듯 허당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맥없이 고꾸라질 뻔했다. 우르르르...... 쿠쿵! 쿠쿠쿵! 그 동안에도 뇌성과 굉음은 줄곧 그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칠흑 같은 암흑을 뚫고 이번에는 무엇인지 모를 시뻘건 광구(光球)가 멀리로부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억!" 화르르르릉......! 놀라운 일이었다. 광구는 급격히 팽창하는가 싶더니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화염기둥을 형성시켰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저것은 분명 진법이 만들어 낸 허상(虛像)이리라. 결코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휘류류류류륭......! 화염기둥은 점차로 접근해 왔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계속 그것을 정시했다. 어차피 피하려 한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운데다 방위를 가늠하지 못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크윽!" 나는 부지중 비명을 질러 놓고 그 뒤로 더욱 놀랐다. 화염기둥이 몸에 다가들자 강한 열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이럴 수가......! 정말 불이란 말인가?' 회의는 잠시 뿐이었다. 나는 곧 전신이 타 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랬다! 나는 어느새 화염지옥 속에 들어 있었고, 불길은 집요하게 나를 따라 붙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보기는 했으나 도무지 화염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무력한 내 육신은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했고, 기혈이 들끓으며 제멋대로 뒤엉켜 버린 가운데 급기야 피부가 오그라 드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그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차츰 의식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휙! 무엇인가 흰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나는 그가 누군지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양무종!' 3 영호전은 눈 앞의 풍경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난석이 흩어져 있는 계곡의 한 부분이었다. 그의 앞에는 구양무종이 서 있었다. 영호전은 얼굴을 붉혔다. '공연한 오기로 망신만 당했군.' 구양무종은 껄껄 웃었다. "헛헛! 어떻소? 이 정도면 능히 천군만마(千軍萬馬)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영호전은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기분 좋겠구려. 내 무력함을 실컷 구경했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는 구양무종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에 겪었던 일은 다시 생각해 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만일 적시에 구양무종이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필경 죽고 말았을 것이다. 영호전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진도를 설치해 놓았을까? 정말이지 가공할 진세였다.' "이제 다 왔소. 바로 저 곳이오, 공자." 구양무종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영호전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곡 안쪽. 난석림 저편으로 한 채의 장원(莊園)이 보였다. 장원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담도, 기와도 모두 흑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영호전은 내심 중얼거렸다. '음침한 곳이로군.' "저곳에는 세상일에 관여하기를 싫어하는 이인(異人)들이 살고 있소. 공자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오." 영호전은 자조의 미소를 흘렸다. "후후! 결국 구걸을 하러 온 셈이군." "허허, 못마땅하시더라도 참으시오. 옛말에도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지 않소?" "어쩌겠소? 아쉬운 건 내 쪽이니." 구양무종은 문득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소. 불편하겠지만 공자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물어서는 안 되오." 영호전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것이오?" "그렇소." 구양무종은 더 말하지 않고 앞장 서 걸었다. 영호전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구양무종의 음성이 귀로 전해져 왔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오. 노부는 공자께서 그들과 화기를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오." 영호전은 내심 투덜거렸다. '알았소, 객이 주인을 넘볼 수야 있겠소?' "그들은 노부의 친구들이기는 하나 노부도 그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점이 더 많소. 과거 그들에게 의술(醫術)로 도움을 준 적이 있어 겨우 안면을 트고 있을 뿐, 그들의 괴벽함은 노부도 어찌해 볼 수가 없기 때문이오." 마침내 두 사람은 장원 앞에 당도했다. 가까이서 보이는 장원은 제법 웅장했다. 그러나 주변의 음침한 풍경 탓으로 어쩐지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대문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휘이잉! 북풍이 장원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쿵쿵쿵......! 구양무종은 정확히 대문을 일곱 번 두드렸다. 그러자 대문이 약간 열리며 그 사이로 한 쌍의 눈이 나타났다. 그 눈은 회색이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듯한. 눈동자는 빠르게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두 방문객을 향해 억양이 없는 음성을 흘려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구양무종은 정중히 포권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 선인들을 만나 뵈러 왔소이다. 나는 구양무종이라 하오. 번거롭겠지만 좀 전해 주시오." "기다리시오." 회색 눈동자의 주인은 무심히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끼이익! 듣기 거북한 음향과 함께 대문이 열렸다. "자! 들어갑시다, 공자." 영호전은 구양무종의 인도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 안에는 허름한 마의를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핏기 한 점 없는 창백한 얼굴에 깡마른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뼈에 가죽을 발라놓은 듯 마른 얼굴에 입술 역시 얄팍했다. 전체적으로 음산한 느낌을 주는 노인이었다. 그의 시선이 영호전에게 가 멎었다. "이 어린아이는 누구요?" 구양무종은 담담히 대꾸했다. "선인들을 뵙고 말씀드리리다, 무명노(無名老)." "좋도록 하시오." 그들은 무명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장원의 내부는 겉에서 보기보다 더욱 삭막했다. 그 흔한 화원 하나 없을 뿐 아니라 바닥에는 전부 검은 석판들로 덮여 있어 운치라고는 찾을 길이 없었다. 몇 채의 전각과 흑옥(黑屋)들이 자로 짜 맞춘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어져 있었는데, 그 건물들의 모양도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무지 인간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정말 괴이한 장원이로군.' 영호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를 위시한 3인은 곧 한 채의 소전(小殿)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군.' 영호전은 소전 안을 훑어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 곳에는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들만이 놓여 있을 뿐 이렇다할 장식물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나마 가구조차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영호전은 점점 더 괴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성정이 괴벽하다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군. 나 같으면 이처럼 주변이 모조리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단 하루도 살아내기 힘들 텐데.' 그 끝에 그는 실소를 흘렸다. '후후! 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왔건만 어쩐지 지옥 문턱을 넘어 들어온 기분이구나.' 구양무종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노부가 그 분들을 만나 보고 오겠소." 영호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어서 다녀오시오." 구양무종은 무명노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소전의 한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영호전은 탁자로 걸어가 그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로부터 적막한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 그 기회를 빌어 그는 점차 상념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자신의 삶조차 분명히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병까지 얻고 보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금방 돌아온다던 구양무종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영호전은 무료함을 느꼈다. 더구나 손님을 맞으면서도 차 한 잔 갖다주지 않는 점은 괘씸하게까지 여겨졌다. '인심 한 번 고약하군.' 대략 한 식경이 또 지났다고 생각될 즈음, 구양무종과 무명노가 마침내 모습을 보였다. 영호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은 잘 되었소?" 구양무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접견은 허락 받았소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소이다." "조건?" "그렇소. 그들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소." 영호전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려. 대면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무슨 도움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구양무종은 안심하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놓으시오. 적어도 그들 나름의 방도가 있을 테니 말이오." 그는 무명노를 돌아보며 말했다. "영호 공자를 안내해 주겠소?" 무명노는 대답도 없이 돌아섰고, 구양무종은 재빨리 영호전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따라갑시다." 영호전이 멈칫거리자 그는 사뭇 부드럽게 덧붙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놀랄 일은 있을지언정 위험은 결코 없을 것이오.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공자께선 필히 큰 수확을 얻게 되실 게요." "으음." 영호전은 낮게 신음을 발하며 구양무종과 함께 무명노의 뒤를 따라갔다. 4 밤. 계곡의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마침 보름인지라 만월(滿月)은 주변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3인은 장원의 후면으로 들어갔다. 앞장 선 무명노는 두 개의 담을 통과하여 한 채의 흑옥(黑屋) 앞에서 걸음을 뚝 멈췄다. '이곳인가?' 영호전은 흑옥을 살펴보았다. 검은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 건물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벽이고, 지붕이고 흑오석(黑烏石)으로 짜 맞추어 놓아 틈이라곤 찾을 길이 없는 괴이한 구조물이었다. 유일하게 출입구인 듯한 문이 하나 나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단단하기 그지없는 흑오석으로 되어 있었다. 무명노는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소름이 끼칠 정도로 괴이한 음향이 울렸다. "들어가게, 어린 친구." 무명노의 음성은 문소리만큼이나 기분 나쁜 것이었다. 영호전은 잠시 망설였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구양무종을 돌아보았다. 구양무종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호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두려워하랴. 일단 부딪쳐 보기나 하자. 그들이 아무리 괴벽한 인물이라고 한들 설마 사람을 잡아먹지야 않겠지.' 그는 성큼성큼 흑옥 안으로 들어갔다. 쿵! 육중한 굉음과 함께 뒤에서 문이 닫쳤다. 그 건너편에서 구양무종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공자, 백 일 후에 만납시다." 영호전은 흠칫했다. '백 일 후라고?' 그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흑오석으로 된 문은 이미 굳게 닫쳐 버린 후였고, 사위는 칠흑같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는 막막한 기분으로 새삼 흑옥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무엇도 시야에 잡히는 것이라곤 없었다. 심지어 어디가 벽이고, 어디가 바닥인지조차 구별이 안 되었으니 흑옥의 구조를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완전하게 외부와 차단된 암흑의 공간 속에 서 있는 심정은 그야말로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호전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꼼짝없이 갇힌 셈이 되었군.' 그때였다. 한 가닥 날카로운 파공성이 귓전으로 다가왔다. 쐐애액...... 퍽! "으윽!" 영호전은 어떤 단단한 물체가 자신의 등을 세차게 후려치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스스로 등줄기가 터지고 뼈가 박살나지 않았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우욱!" 그로 인해 그는 족히 한 사발은 됨직한 핏물을 토해내며 비틀거려야 했다. 쐐애액! 재차 고막을 찢을 듯한 파공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오른쪽이었다. 그나마 방향을 가늠하게 된 그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허리를 틀었다. 그러나 너무 느렸다. 퍽! "으윽!" 영호전의 입에서 또 한 차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괴물체에 오른쪽 가슴을 격중 당한 그는 반대로 왼쪽 가슴, 즉 심장부가 터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으으......!" 그 간의 병고로 인해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는 그는 그 찰나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만일 이를 악물고 견뎌내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지고 말았으리라. 쐐애애액! 파공성은 그치지 않고 다시 들려 왔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닥에 엎드린다면 피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걸(?)을 해도 비굴하게 할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쐐액! 퍼퍼퍼......퍽! 괴물체는 이제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연이은 격타음과 함께 그는 전신을 난타 당했다. "크윽!" 설사 금강불괴지신이라 해도 이러한 공세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피와 살점이 튀었다. 어둠의 공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영호전은 전신을 통해 뼈까지 욱신거리는 극렬한 통증과 싸워야 했다. 입으로는 계속하여 핏물이 뿜어져 나왔고 정신마저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쿡쿡 웃었다. '후후! 쓰러지겠지만 버틸 때까지는 버텨보아야겠지.' 슈욱! 퍽! "크윽!" 급기야 그는 뒤통수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이 완전히 비워져 버린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호전은 정신을 되찾았다. 싸늘한 바닥의 감촉이 뺨에 느껴지자 그는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ㅆ! 마치 그가 일어서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예의 파공성이 일더니 정체불명의 물체가 그를 강타했다. 퍼퍼퍽......! "크윽!" 그는 다시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렇게 두드려 맞고,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대체 몇 차례였던가? 횟수가 거듭될수록 날아드는 물체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충격도 한층 더해 갔다. 슈슈슉......! 퍽! 퍼퍽! "크으으......." 이제 그는 얻어맞는 일 자체가 습관이 되어 버린 양 괴물체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격은 그가 정신을 잃는 순간에야 멈추었고, 깨어나면 여지없이 재개되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으나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그것은 그가 괴물체의 공격에 견뎌내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중요한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무수히 정신을 잃으며 피를 토하는 가운데 비례적으로 자신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영호전은 현재 전신의 살점이 터져 피륙이 뒤엉킨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흑옥의 내부가 칠흑같이 어두웠으므로 그는 자신의 상태도 알지 못했다. 만일 그가 한 번이라도 자신의 몸을 살펴볼 수 있었다면 크게 놀랐으리라. 기이하게도 그의 상처들은 혼절했다 깨어나 일어설 때면 말끔히 아물어 있곤 했던 것이다. 그 위로 또 살점이 터지고 멍이 들기는 했으나 새로운 상처 역시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그의 피부와 뼈가 단단해져 가는 이유는 바로 그런 현상의 반복으로 인해서였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에는 의례 누군가 그의 상처에 종류 미상의 약수(藥水)를 뿌리고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영호전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겪음으로써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의 반응도도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무 때고 예고도 없이 날아와 전신을 강타하는 괴물체에 대해 반사작용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이제 그는 파공성만 들어도 물체가 쏘아져 오게 될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다. 가끔씩은 몸을 움직여 그것들이 그저 살짝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피해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때로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재빨리 감각과 연결시켜 실제적으로 운용하게 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영호전은 흑옥에서 무차별로 난타 당하면서 바로 그 본능과 감각을 직결시킬 수 있는 오의(奧意)를 깨닫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불시의 공격이나 적의 암기 등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쐐액! 슉...... 퍽! 퍽! 괴물체는 끝도 없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영호전의 입에서는 더 이상 비명 따위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절반쯤은 피해내고, 절반 정도는 얻어맞았지만 이전처럼 크게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그의 몸은 전체가 굳은살로 화해 있어 괴물체가 요혈(要穴)을 강타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혈도란 살짝 건드려지기만 해도 심대한 타격을 입게 마련이나 금번의 계기를 통해 아예 체질이 변해 버린 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에 불과했다. 그는 치명적인 요혈에 괴물체가 적중되어도 단지 둔중한 타격만을 느낄 뿐 아무 이상도 없이 멀쩡했던 것이다. 영호전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오오, 이것이었어! 이곳의 기인들이 내게 준 선물은.' 그는 희열을 금치 못했다. 앞서도 언급했듯 수없이 괴물체에 얻어맞는 동안 그의 피부와 혈도는 무쇠처럼 단단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거기에 또 다른 변화가 더해졌으니....... 그의 육신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강(剛)에서 유(柔)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렇듯 단단함을 과시하던 피부와 혈도 부위가 점차로 유연하게 변해 갔던 것이다. '얼마나 됐을까? 이곳에 들어온 지가.......' 이제 괴물체는 날아오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었다. 고통에서 해방되자 무료함마저 느껴지는 그였다. 덜컹! 문득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느닷없이 그가 앉아 있던 바닥이 푹 꺼져 버린 것이다. "으아악!" 그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제5장 변신(變身) 1 지하 수백 장 밑에 석부(石府)가 축조되어 있었다. 그 곳은 전체가 흑암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음랭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으으......." 석부 안으로부터 한 가닥 신음이 흘러 나왔다. 이는 인내의 한계를 벗어난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춥다! 너무......." 쏴아아아......! 한풍(寒風)이 분다. 아니, 빙풍(氷風)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뼈를 엘 듯 차디찬 바람이 쉴새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석부를 휩싸고 도는 바람은 그 안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한랭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 1명의 괴인(怪人)이 정좌한 채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사실 석부는 빙굴(氷窟)이나 다름없었다. 천장은 물론 벽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두꺼운 얼음이 뒤덮여 있었다. 천장과 벽면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빙한지기(氷寒之氣)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으으......." 괴인의 전신에는 살얼음이 덮여 있었다. 봉두난발을 한 머리칼에서 수염, 갈기갈기 찢겨진 의복 등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주위는 겨우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속에서 괴인은 마치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으으......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구나. 이러다간 끝내 얼음덩이가 되어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영호전이었다. 흑옥에서 추락해 오게 된 곳이 바로 이 괴이한 석부였다. '대체 여긴 무엇 하는 곳이기에 이리도 춥단 말인가?'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의혹도 한낱 감정의 사치에 불과했다. 사방으로부터 무섭게 몰아쳐 오는 빙한지기는 곧 그의 사고(思考) 자체를 마비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살얼음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가다가는 목숨을 잃을 확률이 컸다. '후후! 이곳이 내 운명의 마지막 장소인가?' 영호전은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매달았다. 그것은 이 순간에도 포기되어지지 않는 삶에 대한 집착을 향해서였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서서히 졸음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내심 부르짖었다. '안돼!'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그는 생명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외침은 소리가 되어 튀어나오지도 못했다. 아무튼 이대로 잠이 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럴 수는 없다, 결코......!' 그는 이를 악물고 단전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단전에서는 조금씩 따스한 기운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이내 뜨거운 열기로 화하여 그의 전신 360개 혈을 휘돌기 시작했다. 덕분에 얼어붙었던 신체는 거짓말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열기는 사지백해로 고루 퍼져 나가며 전신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불덩이로 화해 임독양맥(任督兩脈)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쩍! 쩌저적......! 그의 몸을 덮고 있던 한 치 두께의 얼음이 터져 나갔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신광(神光)이 뿜어져 나왔다. '엇?'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앉은 채로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체내의 열류가 하나로 크게 뭉쳐 곧장 백회혈(百會穴)로 뚫고 올라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쾅―! 폭음이 울렸다. 그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동시에 그의 몸은 맥없이 뒤로 벌렁 넘어가 큰 대자로 뻗어 버렸다. 하지만 정신은 그 순간에도 명료하기만 했다. 영호전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도 사지백해로 막강한 기운이 미친 말처럼 치달리고 있었다. 360혈을 몇 주천하는가 싶더니 종내 발바닥 용천혈(湧泉穴)에서 정수리의 백회혈까지 일직선으로 쏘아갔다. "헉!" 그는 퉁겨지듯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다시 쓰러졌다. 눈앞에는 별이 번쩍인다 싶을 만큼의 충격이 닥쳐왔다. 우두둑...... 두둑......!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체내 곳곳에서 뜻하지 않게 뼈마디 부딪치는 음향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곧 피부가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인가?' 영호전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화르르르! 그의 내부에서는 무서운 잠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오오!' 영호전은 눈을 크게 떴다. 한 가닥 서광이 체내로부터 비치는 듯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눈 앞이 환해졌다. 단전에서 생성된 기류는 그의 체내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그 기류가 한 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영호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마침내 아홉 바퀴째 순환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졌으며, 시야도 밝아져 석부 안이 대낮같이 밝게 보였다. 영호전은 웅크렸던 허리를 폈다. 우두둑! 역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내며 그는 일어섰다. "엇!" 그의 입에서는 놀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온몸이 붕 떠올라 하마터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던 것이다. 그는 불가사의한 느낌에 사로잡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부 안은 꽤 넓었으나 텅 비어 있었다. 주변에서 그를 향해 휘몰아쳐 오던 한기도 어느덧 그쳐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음, 미처 발견하지 못했군.' 그곳에는 하나의 문(門)이 있었다. 전체가 동(銅)으로 주조된 그 문을 향해 걸어갈 때, 그의 걸음걸이는 날아갈 듯 가벼워 보였다. 고색창연한 동문의 한가운데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빙하신문(氷河神門).> '빙하신문?' 영호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름은 그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슬며시 문을 밀었고,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읏!"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무시무시한 냉기류가 밀려나온 것이다. 휘류류류륭!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만일 얼마 전이었다면 그 냉기에 온몸이 얼음덩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영호전은 찬탄과 함께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문을 넘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지하동부였다. 천연적으로 형성된 듯한 동부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으으...... 정말 지독하군!' 그는 절로 이빨이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석부에서 느낀 한기는 바로 이곳에서 불어온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단전에 힘을 주며 걸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지. 어디, 어느 한계에까지 이를 수 있나 보자.' 그는 오기를 느끼며 동부를 가로질러갔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동부는 하나의 통로로 이어졌다. 통로는 바닥과 천장, 벽 등이 모조리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채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통로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그대로 얼음덩이가 되고 말 정도로 무서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했다. 얼마나 갔을까? 통로가 끝나며 장방형의 빙실(氷室)이 나타났다. 빙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빙실 한가운데 빙대(氷臺)가 있었다. 그 위에 주먹만한 구슬이 놓여 있었는데 구슬로부터 뿌연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구슬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석부와 빙굴에 휘몰아치던 한기는 바로 구슬로부터 연원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구슬을 향해 걸어갔다. '으읏!' 구슬을 둘러싸고 있는 한기의 소용돌이에 접하자 숨이 콱 막혔다. 손끝으로부터 가공할 냉기가 스며들어 온몸의 혈관이 그대로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단전에 힘을 주며 구슬을 움켜쥐었다. '됐다!' 휘리리링......! 순간 엄청난 한기류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헉!" 영호전은 입을 딱 벌렸다. 휘류류류륭! 뿌연 한기가 구슬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며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싸 버린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한기였다. 영호전은 선 채로 얼어붙어 버렸다. 손끝에서 발끝, 머리끝까지 온통 투명한 얼음이 덮이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그는 얼음기둥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2 스스스! 빙실에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모두 10명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검은 복면을 한 인물들이었는데 복면 사이로 보이는 2개의 눈으로부터는 현기(玄機)에 찬 안광이 흐르고 있었다. "......." 그들은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영호전을 둘러쌌다. 그들 중 1명이 손을 뻗어 얼음을 만져보았다. 잠시 후 그는 탄성을 발했다. "이럴 수가......!"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경이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확인해 보시오! 이 아이는 죽지 않았소. 빙하신주(氷河神珠)를 취하고도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소." "그...... 그럴 수가!" "오오! 그게 사실이오?" 복면인들은 앞을 다투어 얼음을 만져보았다. 그들은 얼음을 통해 영호전의 맥을 짚어본 후 한결같이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그런데 빙하신주라니? 그것은 천지간에 존재하는 극음극빙지기(極陰極氷之氣)가 모여 형성된 신비한 정령체(精靈體)를 말하는 것이다. 고설(古說)에 의하면 이를 복용하거나 그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극음지정(極陰之精)을 얻게 되며 그 효용은 무한하다고 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체는 빙하신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결코 견딜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10인의 복면인 가운데 1명이 중얼거렸다. "으음! 어쩌면 이번 도박은 꽤 승산이 높을 듯하오." 다른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박이 아니오. 이건...... 운명이오. 신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음이라고 보오." "맞소......!" 10인의 복면인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영호전이 신비의 계속에 들어온 지 어언 90일이 지났다. 그는 긴 혼몽 속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순간 그는 어리둥절했다. '......?' 그의 주위에 10인의 복면인들이 둘러싼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더욱 괴이한 일은 그들이 십방(十方)으로 나뉘어 정좌한 채 그를 향해 일제히 쌍수(雙手)를 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영호전은 의혹이 가슴 가득 일었으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며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이 등을 뒤덮고 있었고 얼굴에는 수염이 고슴도치처럼 자라 있었다. '욱!' 그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열 방향으로부터 각각 다른 기운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뜨겁고, 차갑고, 비틀리고, 퉁겨내고, 잡아당기고, 진동을 일으키며 파고드는 듯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열 가닥의 생소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10명의 복면인들이 뻗고 있는 장심(掌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 기운은 모두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운데 있는 영호전의 몸을 축으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영호전은 입을 딱딱 벌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어떤 때는 몸이 펄쩍 뛰었다 떨어지기도 했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가 뒹굴기도 했고, 또는 불구덩이에 빠진 듯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더구나 열 가지의 각기 다른 기운은 체내로 속속 스며들어 혈맥을 따라 마구 휘돌고 있었다. 그 기운들이 제각각 부딪치고 엉키며 혈맥을 멋대로 휘저어 놓고 있었다. "으...... 으아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무시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에 눈앞에서 번갯불이 작렬하는 듯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심장이 공처럼 부풀어오르는 듯하다가도 이내 아주 작게 응축되는 것 같아 그는 호흡을 하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십이중루와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따라 미친 듯이 휘도는 기운이 점차 하나로 합류되기 시작했다. "훅! 후욱......."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내뿜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몸 주위에는 열 가지 색조의 서기(瑞氣)가 구름처럼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는 붉게 달아올랐고, 전신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마침내 영호전은 체내에서 거대한 잠력이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이 느낌은.......' 문득 그를 향하고 있던 10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놀랍게도 그 열 쌍의 눈은 섬뜩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윽!"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영호전은 부지중 신음을 토했다. 자신의 몸이 일시지간 어마어마한 잠력에 터질 듯했기 때문이었다. 10인의 입에서 차례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윽!" "큭! 커억......!" 동시에 그들은 일제히 벌렁벌렁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콰당! 쿵! 쿠웅! 그것은 영호전의 전신으로부터 부지불식간에 뻗어 나온 막강한 잠력 탓이었다. 동시에 영호전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폭음을 들었다. 쾅! 그는 혼절하고 말았다. 10인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들의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눈동자는 이미 정기를 잃고 있었다. 마치 중병에라도 걸린 사람들 같았다. "으음! 이제...... 끝났소." "허허...... 그렇구려." 10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위안이라도 하듯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모두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의 행위에 대한 결과이기도 했다. "콜록 콜록.....! 이제 모두 끝났소. 우리가 할 일은......." 누군가 기침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은 하나 둘 밖으로 사라졌다. 쿵! 문 소리와 함께 석옥 안은 암흑 속에 묻히고 말았다. 3 혹한(酷寒)의 겨울이다. 2월로 접어들자 날씨는 더없이 스산했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덮여 있었다. 두두두두두......! 설원(雪原)을 한 대의 마차가 힘차게 달려왔다. 마차 바퀴 주위로 뽀얀 눈가루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마차 안. 영호전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이 약간 수척해졌을 뿐, 겉으로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은 물처럼 담담한 가운데 유현(幽玄)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아닌가? 지금 그의 앞에는 구양무종이 앉아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는 전보다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소이다. 본시 한운야학(寒雲野鶴)처럼 한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인지라 홀연히 떠나 버렸소." 영호전은 담담히 대꾸했다. "서운한 일이오. 그 분들에게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는데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구양무종은 희미하게 웃었다. "섭섭해할 것 없소. 그 분들은 자신들이 내키지 않으면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않는 분들이오." 영호전은 휘장 사이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내게는 은인 같은 분들이오. 금생에 그 은공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허허...... 공자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니 그 분들도 만족하실 것이오." 문득 구양무종은 껄껄 웃었다. "허허헛! 이제 공자는 새롭게 태어났소이다. 필경 몸이 무쇠보다 강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워졌을 것이오. 어떻소?" 영호전은 빙긋 웃었다. "그렇소. 사실 지금까지도 내게 일어난 변화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호전은 내심 의혹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눈 앞의 구양무종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왜 내게 이런 혜택을 안겨주었을까?' 생각해 보면 구양무종은 신비하기 그지없는 위인이었다. 일개 의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의문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범인이 상상할 수 없는 이인들이오. 공자는 그 분들이 남긴 책자가 무엇인지 아시오?" 영호전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들어 있는 책자를 어루만졌다. 그가 깨어났을 때 옆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그가 미처 대꾸하지 못하자 구양무종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아마도 그 책자에는 이인들의 지고무상한 무학(武學)이 담겨 있을 것이오. 그것을 익히면 공자는 무림계에서도 손꼽히는 고수가 될 것이 분명하오." 영호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더러 무림인이 되란 말이오?" "그야 공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달린 일이오." "으음......." "사실 공자는 이미 무림계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요. 구룡연에서 황금을 미끼로 수많은 무인들을 포섭한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지 않았소? 이젠 좋든 싫든 무림에 뛰어든 셈이오." 영호전은 내심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두두두두......! 마차는 눈보라를 휘날리며 계속 질주해 나갔다. 한동안 창 밖을 내다보던 구양무종의 눈에 이채가 솟아올랐다. "짐작하시겠지만 구룡연으로 돌아가면 많은 일들이 공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영호전은 고소를 지었다. "각오하고 있소." 그가 구룡연을 떠난 것은 정확히 100일 전이었다. 구룡연을 떠날 때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일일이 지시를 남겨 두었었다. 아마도 돌아가는 즉시 산더미 같은 일이 그를 기다릴 것이 틀림없었다. 구양무종은 힐끗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의 병은 완전히 치유되었을 뿐더러 금생에 다시없는 기연까지도 입었소. 그러니 공자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오." 영호전은 그의 눈을 마주보며 담담히 말했다. "고맙소." 구양무종은 문득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노부는 이쯤에서 떠날까 하오. 공자의 곁에 더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말이오." 영호전은 흠칫했다. "꼭...... 떠나야 하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본인은 선생께서 항상 옆에 있었으면 하오. 물론 선생만 괜찮다면 말이오." 영호전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과거의 기억은 되찾지 못했지만 그는 구룡상막이란 거대한 조직을 움직일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구양무종은 비록 의원이지만 그 이상의 지혜와 숨은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만일 그가 곁에 있어 준다면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구자경을 비롯한 사로가 있지만 그들은 상인일 뿐이었다. 험난한 강호를 운영하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구양무종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호전은 다시 물었다. "내 곁에 있어 줄 수 없소?" 구양무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말씀은 고마우나 노부에게는 달리 할 일이 있소이다." 그는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어느새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는 몇 조각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구양무종은 담담히 말했다. "노부에게도 괴벽이 있소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한다오. 이번에는 좀 먼 곳으로 유람이나 할 생각이오." 영호전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선생이 안 계시면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님은 어찌해야 하오?" "허허! 그 점은 노부도 어쩔 수가 없구려. 영친의 병세는 너무 깊어 노부도 뚜렷한 방안이 없소이다." "으음." "너무 섭섭히 생각은 마시오. 노부는 이 길로 중원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영친의 병을 고칠 명약이 있는지 알아보겠소이다." 영호전은 그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선생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오." 구양무종은 문득 그를 정시하며 말했다. "공자, 세상은 눈으로 보기보다 훨씬 추하오. 근자 들어서는 인심마저 흉흉해졌소이다." 영호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슨 말씀이오?" "향후 공자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오. 하지만 그때마다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오." 구양무종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았다. "금화성은 평범한 상벌(商閥)이 아니오. 그들이 무림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그 점을 말해 주고 있소. 그들과 대치하려면 공자는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오." 영호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오." "단지 무림인들을 잘 다루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오." "그럼?" "무엇보다도 공자께서 무공을 익히셔야 하오. 그것만이 구룡연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오." 영호전은 잠시 생각하다 수긍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그는 이제 과거의 영호전이 아니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이다. 그것은 구양무종의 주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일개 상인으로서 앞일을 헤쳐 나가는데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반나절 후 마차는 전양(田陽)이란 작은 시진에 당도했다. 구양무종은 마차를 멈추게 했다. "노부는 이곳에서 내려야겠소." 그는 영호전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기왕 떠나기로 작정했으니 구태여 구룡연까지 갈 것 없이 여기서 작별을 할까 하오." "구양 선생......." "사람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는 법이오.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영호전은 가볍게 탄식했다. "선행의 뜻이 그러하다면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겠구려. 모쪼록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랄 뿐이오." "허허! 인생은 돌고 도는 것, 앞날을 어찌 알겠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오." 구양무종은 마차에서 내려 주름진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훗날 봅시다." 그는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영호전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은 잠시 후 사람들 사이에 묻혀버렸다. "음......." 영호전은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신음을 발했다. 4 태행산에서 구룡연이 있는 석문(石門)까지는 사흘 정도의 여정이었다. 서두른다면 더 일찍 당도할 수도 있었으나 나는 마부(馬夫)에게 되도록 천천히 마차를 몰도록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잠자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모두 마차 안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구룡연에 도착하기 전에 아무에게도 방해 받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차 안에서 10명의 기인으로부터 받은 책자를 펼쳐 보았다. 구양무종의 말대로 그것은 일종의 무예서(武藝書)였다. 10명이 공동으로 작성한 듯, 책자의 필체는 모두가 틀렸다. 책자에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도해(圖解)와 구결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검법(劍法)에서 도법(刀法), 장법(掌法), 보법(步法), 필법(筆法) 등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강호의 무예가 총망라된 듯 빽빽한 글씨와 여러 장의 그림으로 된 책자는 무척 두터웠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책자에 빨려 들어갔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던 내가 이렇게 쉽게 무학이란 세계에 젖어들 줄은 몰랐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무학이 나타났고, 그것을 암기하고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흉내 내는 동안 나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이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무학들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나는 무학을 익힌 적이 없다. 그런데 책자에 기재된 무학들을 손과 발로 간간이 실연(實演)하는 동안 어쩐지 몹시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막막하기만 하던 심정에 비한다면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책자의 무공들은 하나같이 신비했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환허태극천뢰장(幻虛太極天雷掌). <무림에는 수많은 장법(掌法)이 내려오고 있다. 노부는 천하의 모든 장법을 두루 섭렵했다. 그것은 무학 중에서 유독 장법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년에 이르자 노부는 세상의 모든 장법들이 그 종류는 다양하나 종내 하나로 귀일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의 법칙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결국 수많은 장법도 하나의 이치에 도달하며 그 이치를 깨닫기만 하면 1만 가지 장법을 한 손으로 펼쳐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노부는 그 깨달음을 일식의 장법에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환허태극천뢰장은 일식의 장법이지만 그 속에는 1만 가지 장법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환허태극천뢰장의 설명이었다. 책자에는 흰 수염을 휘날리는 도인(道人)이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뻗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구결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 구결들은 환허태극천뢰장을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장세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해설해 놓고 있었다. 구결을 읽는 동안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허태극천뢰장은 일식(一式)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결에는 환허태극천뢰장을 달리 현음촉심수(玄陰 心手)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구결에 심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허공으로 손을 뻗게 되었다. 도해에 따라 손바닥으로 허공을 더듬듯이 느릿하게 원을 그려보았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주 느리게 원을 그리는 동안 장세(掌勢)가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음촉심수는 마음만 먹으면 능히 태산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또는 작은 풀잎 하나를 꺾을 수도 있었다. 또한 미풍처럼 상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질 수도 있었다. 느릿한 동작에서는 1만 가지 이상의 변식(變式)이 가능한 것이다. 또 빠를 때는 전광(電光)보다 빠르며 부드러울 때는 물처럼 유(柔)하며, 강할 때는 금강석보다 강한 힘을 내뿜을 수도 있었다. "아아! 과연 현음촉심수야 말로 천하제일의 장법이다." 나는 절로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천천히 달리는 동안 나는 수도 없이 허공에 원을 그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누군가 내가 하는 양을 보았다면 실없는 사람이라고 비웃겠지만 나는 한 번씩 원을 그릴 때마다 수많은 장법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단언컨대 나는 이 장법이야말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공을 실어 현음촉심수를 시전한다면 무궁무진한 위력이 나올 것이다. 그 사실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서서히 몰입되어 갔다. 어쩌면 과거에 나는 무공을 익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빨리 무학의 오의에 심취할 수가 있겠는가? 어쨌든 그 점은 지금으로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시간이 아까웠고, 마차가 가는 동안 쉴새없이 비급을 넘기기에 바빴다. 마차는 설원을 달리고 있다. 창 밖으로 빽빽하게 우거진 관목림이 보였다. 휘이이잉! 이따금 차디찬 북풍이 설원을 휩쓸며 자욱한 눈보라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영호전은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반쯤 미친 듯이 무공비급에 빠져 있었다. 마부는 가끔 마차 안에서 무엇을 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으나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영호전으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들었던 것이다. 되도록 느리게 마차를 몰면서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며 두둑한 요금을 지불 받았기에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말을 몰 뿐이었다. 그가 어찌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마차 안에서 희대의 고수가 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제6장 귀환(歸還) 1 제법 사람들이 붐비는 시진. 한 청년이 대로 한복판을 가로지르듯 걷고 있었다. 영준한 용모에 비해 걸친 옷은 허름한 마의였으며, 머리도 대충 빗어 뒤로 묶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봐, 저 청년이 누구지?" "글쎄? 못 보던 친구인데?" 행인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에게서 강렬한 매력이 흘러 넘쳤기 때문이었다. 비록 행색은 초라하나 유현한 눈빛하며 기도가 범인을 초월했던 것이다. 청년은 다름 아닌 영호전이었다. 구룡연이 가까워지자 그는 마차를 버리고 걸어가기로 했다. 물론 무공을 익히기 위해 좀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며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고, 때로는 허공으로 손을 뻗어 휙휙 휘두르곤 했다. 그 광경에 행인들은 혀를 끌끌 찼다. "안됐군, 안됐어....... 이제 보니 미친 녀석이었군." "글쎄 말이야. 생긴 건 멀쩡한 젊은 친구가......." 행인들의 관심은 곧 멀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잘생기면 뭐하겠는가? 제정신이 아니면 돌아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영호전은 비급의 무공을 시연하며 걷다가 뚝 걸음을 멈추었다. 행인이 많아져 이따금 어깨를 부딪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거리 한 쪽에 병기점(兵器店)이 눈이 띈 것이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진열되어 있는 병장기의 종류가 꽤 많아 보였다. '흠, 손에 맞는 병기가 있을까?' 그는 성큼성큼 병기점을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옵쇼!" 병기점 주인인 듯한 중년사내가 그를 맞이했다. "헤헤! 어떤 병기를 찾으십니까?" 영호전은 담담히 말했다. "마음에 드는 병기가 있나 한 번 둘러볼까 하오." "예에!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헤헤...... 저희 병기점엔 없는 것 빼고 다 있습니다요."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인은 너스레를 떨며 안으로 인도했다. 영호전은 병기점 안으로 들어가 진열된 병장기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제법 다양한 종류의 병기들이 가지런히 병기가에 걸려 있었다. 검(劍), 도(刀), 창(槍), 편( ), 추(鎚), 극(戟) 등.......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실 영호전은 특별히 어떤 병기를 살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흥취가 일어나 병기점에 들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각종 병장기들을 보자 마음이 달라졌다. '흠, 잘 찾아보면 괜찮은 것을 고를 수도 있겠군.' 그는 곧장 검가(劍架)로 다가갔다. 곁에서 중년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이래 보여도 하나같이 솜씨 좋은 장인들이 벼른 것들입니다. 쇠는 유명한 항산(恒山)의 철광에서 나온 것만 썼습죠." "글쎄올시다." 영호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검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흠, 분명 잘 만든 것들이긴 하나 모두가 평범한 것들이로군.' 그는 개중에서 가장 낫게 여겨지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얍! 얍!" "형! 내가 이기면 꼭 토끼사냥에 데려가 주는 거야? 약속을 어기면 안돼, 알았지?" "암, 물론이지. 그런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까?" "흥! 무시하지 마. 오늘은 기필코 형을 꺾고 말 테니까. 어젯밤에 잠도 안 자고 계속 연습했단 말이야." "어디, 하앗!" "앗!" 소년들의 낭랑한 기합성이 들려 왔다. 영호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병기점의 안쪽이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정원에서 열을 올리며 칼싸움을 하는 두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두 소년은 병기점 주인과 무척 닮은 얼굴이었다. 한 소년은 제법 키가 크고 어른 티가 났다. 하지만 안면을 뒤덮고 있는 여드름과 천진한 웃음은 그가 아직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에게 맹렬하게 달려드는 또 한 소년은 동생인 듯했다. 대략 10살 전후로 보였다. "어림없어! 그 정도론." 쨍! 째쨍! 키 큰 소년은 줄곧 여유 있게 공격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한 자 정도 되는 짧은 검이 들려져 있었는데 솜씨는 둘 다 서툴기 그지없었다. 가끔씩 부딪쳐 울리는 소리만이 꽤 날카롭게 들릴 뿐이었다. 병기점 주인은 혀를 끌끌 찼다. "녀석들, 또 저짓이로군." 영호전은 소년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이들이 진검을 쓰다니, 다칠까 걱정되지도 않소?" "글쎄 말입니다." 중년인은 한숨을 쉬더니 소년들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소(蘇)아야! 악(嶽)아야!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소년들은 검술에 열중한 나마저 그의 말은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주인은 영호전을 바라보며 탄식을 불어냈다. "소인의 못난 두 아들놈 입죠. 어렸을 적에는 목검을 가지고 놀더니 조금 크니까 싫증을 내지 뭡니까?" "그래서 진검을 줬단 말이오?" "어쩌겠습니까? 밥도 안 먹고 밤낮없이 졸라대는 걸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 말이 맞습니다요." "후후......." 영호전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소년들의 이마에는 어느 새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키 큰 소년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소아야, 그만 하자. 아무리 해도 넌 날 이기지 못해." 그 말은 사실이었다. 꼬마 소아는 땀투성이가 된 채 헐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려 하지는 않았다. "흥! 질 것 같으니까 괜히 그러는 거지? 형은 나빠! 토끼사냥 가는데 한 번쯤 데려가 주면 어때서?" "위험하니까 그렇지, 이 바보야!" 소년은 뒤로 물러나며 면박을 주었다. "흥! 안돼, 데려가야 해." 꼬마 소아는 악착같이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에이, 그만 하자니까." 악아는 귀찮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챙! 째애앵!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아!'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영호전은 안색이 일변했다. 햇살에 검에 반사되는 순간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시선을 모아보았다. 그러자 소아가 쥐고 있는 검날에 미세하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그것은 보통 안력이 아니면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새겨진 글자였다. - 천군제왕검(天軍帝王劍). 분명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영호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럴 수가! 저것이 분명 육백 년 전에 사라졌던 전설의 천군제왕검이란 말인가?' 그가 이처럼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이었다. 무림은 마도(魔道)의 무리들이 일으킨 혈풍에 휩쓸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군제왕(天軍帝王)이었다. 그에 대해서 세간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의 신분이나 내력은 물론 이름조차도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다만 그는 악이라면 가차없이 응징했고, 일신의 무공도 신의 경지에 올랐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출현으로 혈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무림이 그의 출현으로 평화를 되찾게 된 것이었다. 반면에 마도인들은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듯 추풍낙엽처럼 산화하고 말았다. 무림에 평화가 도래하자 무림인들은 만장일치로 천군제왕이란 명호를 선사하며 그를 무림맹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무림인들의 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이후로 그의 모습은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그의 이런 행위는 무림에 상징적인 귀감이 되었다. 무림인은 명예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는 명예마저 초개처럼 던져 버린 것이다. 결국 그의 존재는 더욱 무림인들의 존경을 사게 되었다. 천군제왕이란 명호는 영원히지지 않는 태양이 되어버렸다. 기이한 것은 그 후로도 무림에 환난이 도래할 때마다 천군제왕검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마도인들이 발호하면 천군제왕검이 반드시 뒤따라 나타나 그들을 섬멸하고 사라졌던 것이다. 영호전이 천군제왕의 신화를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는 구룡상막의 한 서고(書庫)에서 천궁전(天宮典)이란 무림의 사서를 우연히 읽게 된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소검이 전설의 천군제왕검이란 말인가?' 그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으아앙!" 소아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소아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쓰고 있었다. 아마 싸움에 지자 분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었다. 난감해하던 악아가 동생을 토닥이는 모습이 보였다. "소아야, 널 데려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숲 속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해? 호랑이가 나타날지도 모른단 말야." 호랑이 흉내까지 곁들여 설득작전을 펴는 그에 반해 소아는 막무가내였다. "이이잉! 그 말은 전에도 했잖아. 날 떼어 놓으려고 그런다는 거 다 안단 말야!" "아이고 이 녀석......!" 악아는 대책이 없어지자 방향을 바꾸었다. "좋아. 그럼 내년부터 데리고 갈게. 하긴 너도 내년이면 열두 살이니까." 소아는 울다 말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 "암! 정말이구말구." 소아는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씨! 그게 언제야? 이제 막 새 해가 되었으니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하는 걸." 악아가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태까지 잘 참아 왔으면서 뭘 그래? 내년부터는 꼭 데려간다니까. 넌 내가 약속 안 지키는 거 한 번이라도 봤니?" "알았어." 소아는 불만인 듯 입술을 깨물면서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형은 형이고, 아우는 아우였던 것이다. 두 소년은 휘두르던 검을 제각기 마당의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다른 놀이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병기점 주인이 말했다. "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아직 꼭지도 덜 떨어진 녀석이 형이 하는 일은 다 따라하겠다고 조르니, 원!" 혀를 차는 그를 보며 영호전은 담담히 말했다. "저 검을 내가 사면 안 되겠소?" 주인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떤 것 말씀입니까요?" "소아가 가지도 놀던 검 말이오."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저건 보시다시피 형편없는 물건인데 어찌......?" 영호전은 씩 웃었다. "상관없으니 잘 다듬어 주기나 하시오." "그...... 그렇지만......." "나중에 소아가 찾으며 울까봐 그러시오?" 주인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요. 녀석에겐 다른 걸 안겨 주면 되지요." 그는 상인이었다. 고객은 왕(王)이며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야 그로서는 두 아들과 함께 먹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병기점 주인은 황급히 마당을 향해 내달았다. 영호전은 그가 소중한 듯 소아가 사용하던 검을 두 손으로 받쳐오는 것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기이한 운명이로군. 저것이 정말 천군제왕검이라면 난 뜻밖의 기연을 만난 셈이겠지.' 2 륭평산(隆平山). 태행산에서 50리쯤 떨어진 곳으로 규모는 작지만 산세가 제법 험한 곳이다. 휘익! 바람을 타고 륭평산의 한 산봉우리에 떨어져 내리는 인영이 있었다. 이제 약관에 이르러 보이는 마의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영호전이었다. 영호전은 발 아래로 구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몸 안에 흐르는 기운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대체 지금의 내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는 알지 못했다. 10인의 복면인들이 자신에게 불어넣어 준 것은 그들의 전신내공이었다. 그들의 내력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으며 그 힘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을 뿐이며 시시각각 그의 혈맥을 타고 흐르며 융화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의 내력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는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내공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산봉우리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품속에서 검을 꺼냈다. 고동색 검집에 감싸여 있는 소검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 그는 서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마치 용의 울음과도 같은 음향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백옥(白玉)색의 검신이 드러났다. 병기점 주인의 막내아들이 사용할 때는 그저 거무튀튀할 뿐이었는데 병기점 주인이 깨끗이 갈고 닦자 본래의 신광(神光)을 되찾은 것이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검신에서는 담담한 금빛 서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영호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녕 하늘이 나를 도왔다. 이렇게 쉽게 희대의 명검을 얻게 될 줄이야.' 그는 천군제왕검을 앞으로 뻗었다. 슥! 그의 자세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벽력진천검(霹靂震天劍)....... 비급에 적혀 있기로는 하늘 아래 가장 완벽한 검법이라고 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누군가 이 자세를 본다면 허점투성이라고 비웃겠지. 하지만 진정한 검의 위력을 안다면.......' 벽력진천검은 10명의 기인들 중 1명이 남긴 검법이었다. 그는 이미 벽력진천검을 어느 정도 깨우치고 있었다. 진검으로 시연해 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이 검법은 겉으로는 허술해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허(虛)를 실(實)로 변화시키기 위한 기수식(起手式)에 불과할 따름이다. 일단 전개되면 가공할 위력을 지닌다.' 벽력진천검은 지상 최고의 검법이었다. 환(幻), 허(虛), 탄(彈), 진(震), 쾌(快) 완(緩), 공( ), 절(折) 등의 숱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 자유자재로 그때마다 적절한 검식을 쏟아내는 묘용을 지니고 있었다. "타!" 영호전의 입에서 낭랑한 기합성이 울려 나왔다. 동시에 천군제왕검은 휘황한 빛 무리를 뿌리며 허공에 호선을 그렸다. 츠츳! 단순히 보이는 일식(一式)이었으나 그 속에는 현란한 변화가 깃들여 있었다. 검광이 번쩍 하는 순간 5장 앞에서 폭음이 울렸다. 꽈르르릉! 일시지간 사위는 어두워졌다. 실로 가공할 위력이 나타났다. 5장 밖의 거대한 암석이 가루가 되어 버렸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3 푸른 달빛이 눈 덮인 대지를 비추고 있다. 주위의 경물은 태고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스스스! 한 가닥 달빛을 가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인영(人影)이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인영의 신법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인영은 잿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한 자루의 목검을 차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푸르게 느껴질 정도로 창백했다. 제법 영준한 용모였으나 냉막한 기운 때문에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인영은 한 나무 위에 내려섰다. 반고(蟠高)라 불리는 사나이. 그는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구룡각(九龍閣)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룡상막의 중심부에 위치한 9층의 전각이었다. 전각으로부터 불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반고는 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구룡각의 상층부였다. 구룡각의 실내(室內). 그곳은 황궁의 내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사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천축산 융단이 깔려 있었으며 사면의 벽에는 진귀한 장식물들이 걸려 있었다. 한쪽 벽에는 고서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한눈에도 명가의 솜씨임이 분명해 보였다. 바람이 일어 출렁거리는 강물이나 무성한 숲, 산모퉁이를 돌아 유유히 흐르는 안개가 마치 실물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정묘한 화법(畵法)으로 그려져 있었다. 창문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격자 창은 오색의 비단천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공작등(孔雀燈)이 휘황한 불빛을 비치고 있었다. 방 한쪽에는 있는 자단목으로 된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백옥을 깎아 만든 비파가 놓여 있었다. 실내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이 방에는 고아한 기품이 전신에 배어 있는 여인이 머물고 있었다. 능라의를 입고 머리는 궁장을 틀어 올린 절세미녀였다. 빙결 같은 피부, 요요로운 눈빛, 한껏 무르익은 관능미 넘치는 몸매를 지닌 여인은 다름 아닌 화무쌍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듯 실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영주(令主)." 차갑고 건조한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스스스....... 화무쌍의 앞에 안개가 모이는 듯하더니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잿빛 장포를 걸친 청년, 그는 반고였다. "보고 드립니다." 반고는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시월풍(十月風)은 예정대로 불기 시작했습니다. 놈들은 허(虛)를 찔렸지만 신속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음!" 화무쌍의 봉목에서는 이따금 기이한 광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반고는 계속 몇 가지 보고를 올렸다. 잠시 후 화무쌍은 아미를 가볍게 찡그리며 말했다. "시월풍은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어. 그들이 아무리 교활하다고 해도 결코 막을 순 없을 거야. 금화성의 36개 지부(支部)가 무너지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 "한 달이면 탈환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화무쌍의 입에서 교소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 놈들은 반드시 마각을 드러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장강 이남의 칠십이 개 지부마저 위태로워질 테니까." 그녀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반고의 예리한 눈이 번뜩 빛을 발했다. "무영대(無影隊)를 발동시켰습니다. 지금쯤 금화성 안으로 파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화무쌍은 빙글 돌아서며 정색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방심해서는 안돼. 그들의 배후를 표면으로 완전히 끌어낼 때까지는 시월풍이 절대 노출되어서는 안돼. 알겠지?" 반고의 음성은 여전히 무감동했다. "압니다." 그녀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매령에게서 연락은?" 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화무쌍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구양무종이 공자의 병을 고친다며 태행산으로 데려간 건 아무래도 수상해. 처음부터 그를 믿는 것이 아니었어." 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무쌍은 그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말했다. "필히 그 자의 내력을 알아내야 해. 물론 매령이라면 잘 해내겠지만. 이제껏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 갑자기 화무쌍의 말이 끊겼다. 반고의 신형이 화살처럼 창 밖으로 날아간 것은 그 때였다. 와장창! 그는 곧바로 창문을 박살내며 사라졌다. "대체 누가......!" 화무쌍은 부서진 창문을 바라보며 아미를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지붕 위. 장원을 둘러보는 반고의 눈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칼날처럼 예리한 그의 눈빛을 피해갈 수 있는 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 것이라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적막이 감도는 구룡연의 거대한 모습뿐이었다. 이쯤 되면 그로서도 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신형을 날렸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방 안으로 돌아온 반고는 예의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화무쌍의 안색은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뭇 불안감이 깃든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야. 분명 인기척이었어." "어쩌면 그럴지도......." "그 자가 우리의 말을 들었을까?" "그건 누구도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으음......." 화무쌍은 길게 신음을 흘릴 뿐 더 말하지 않았다. 한편. 창 밖에서 방 안의 정경을 엿보고 있던 괴영은 지붕 속에 교묘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느 틈엔지 귀신같이 기왓장을 들어내고 그 속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화무쌍과 반고의 대화를 모두 들었으며, 그 때문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정녕 뜻밖이다. 화무쌍이라는 여인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는 답답한 나머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곳에는 내가 모르는 일이 너무도 많다. 시월풍은 대체 무엇이고, 반고와 위지매령의 정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괴영은 바로 영호전이었다. 구룡연으로 복귀하게 된 그는 일부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들어왔다. 그것은 단지 화무쌍을 놀라게 해 주려는 의도에서였는데 의외로 엄청난 비밀을 엿듣게 된 것이었다. '후우! 향후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 옳을지.......' 그는 어둠 속에서도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아야 했다. 구룡상막. 석문에 위치한 이 곳은 웅장한 고루거각으로 이루어졌으되 가히 동장철벽이나 다름없는 장소이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당금 강호를 위협할 만큼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이 곳도 조용하기만 하다. 밖으로 전해지는 소리라야 간간이 울리는 무사들의 기합성이 전부였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오늘의 구룡상막은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온종일 어수선할 정도로 장원 전체가 술렁였으며 늦은 시각까지도 청룡목단등(靑龍木端燈)과 백련홍화등(白蓮紅花燈)이 장원의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영호전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르자면 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사실 몇 달 전부터 구룡상막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영호전이 기이한 병에 시달린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봐란 듯이 완쾌되어서 돌아왔고, 소문은 단번에 근거 없는 낭설로 일축되고 말았다. 단, 그의 쾌유는 전 수하들에게 또 다른 비밀로 부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당분간 대외적으로는 일체 알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장원의 입구(入口). 거대한 위풍에 어울리게 한 쌍의 석사자(石獅子)가 좌우로 나뉘어져 우뚝 서 있다. 오른쪽의 석사자 옆에는 호장무사(護將武士)인 듯한 건장한 청의장한 2명이 버티고 있었다. 두 청년의 인상은 비슷했다. 상당한 수준의 외공(外功)을 익힌 듯 두 사람 다 태양혈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지루해하는 기색이 깔려 있기도 했다. 아무리 자부심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 해도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는 일이란 흥미와 무관할 터이므로. 개중 오른쪽의 장한이 입을 열었다. "이봐, 구 형. 시간이 어떻게 됐나?" 이심전심인지 왼쪽의 장한이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젠장! 해시(亥時)가 되려면 아직 멀었네 그려." 해시는 그들의 교대 시간이었다. "빌어먹을!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 게야?" "왜, 피곤한가?" "피곤?" 오른쪽 장한은 되묻더니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자네는 안 그런가? 보아하니 아까부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이나 해대더구만." "이 친구, 난 사람 아닌가? 장원 안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향긋한 술이 넘쳐 나도록 쌓여 있는데 이 청승이나 떨고 있자니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네." "우리 주제에 누굴 탓하겠나?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도 있는 것일 텐데." "하긴. 크큭!" 두 장한은 주거니 받거니 넋두리를 늘어놓더니 갑자기 음성을 낮추어 두런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영호 공자는 어딜 갔다 온 걸까? 장장 넉 달씩이나 상막을 비우고 말이야." "그야 낸들 어찌 알겠나?" "어쨌든 병이 완쾌된 것만은 사실인 듯하던데......?" "흐흐...... 우리가 그만치 희생을 한 덕분이지." 한 장한의 말에 나머지 1명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희생이라니?" "그럼 아니란 말인가? 그 덕에 우리는 꼬박 넉 달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 당하지 않았었나?" "말 되는군. 그렇지만 막상 영호 공자의 달라진 모습을 보니 왠지 내 가슴이 뿌듯하더군." "솔직히 그건 나도 그렇다네. 정작 좋아서 펄쩍펄쩍 뛸 사람은 따로 있지만 말이야." "흐흐흐....... 화 소저?" "왜 아니겠나? 오랜만에 그립던 님을 만났으니 모르긴 몰라도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일 게야." "그렇겠지." 대답하던 장한은 입맛을 쩍 다셨다. "화 소저의 사랑을 받는 영호 공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비록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선녀가 하강한 것 같았어. 아아! 그 황홀한 자태라니......." 그는 말 도중에 동료에게 어깨를 한 대 얻어맞고 만다. 퍽! "윽! 왜 때리고 난리야?" "이 친구야, 꿈 깨! 그럴 시간 있으면 부지런히 자네에게 어울리는 여자나 찾아보라고." "흐흐...... 어떤 여자가 나한테 어울릴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난 일단 자네의 물건 크기를 잘 모르거든." "뭐, 뭣?" "으핫핫핫핫! 뭘 그리 놀라나? 고자만 아니라면 어딜 간들 자네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없겠냐고." "크크....... 그래, 한 번 노력해 보도록 하지." 두 장한은 그처럼 질척하게 이어지는 입담으로 지루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4 구룡전. 영호전은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리 보는 이로 하여금 안도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종의 여유랄까? 그에게서는 인고(忍苦)를 거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달관이 엿보이고 있었다. 늘 굳어 있던 입가에도 전 같으면 좀체로 찾아보기 힘들었던 따스한 미소조차 떠올라 있었다. 그의 이런 변화는 전신에서 흘러 나오는 기도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그야말로 곁에서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미동도 하지 않을 굳건한 기개가 은연중 배어 나왔다. 그가 일신에 걸치고 있는 것은 백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모습은 가히 눈이 부실 정도였다. 기실 4개월이라는 기간은 길다면 길겠지만 적어도 한 인간을 변모시키는데 있어서는 짧다고 볼 수 있다. 영호전은 그 기간을 통해 완벽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덧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구룡상막을 이끌어갈 절대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는 성장을 한 화무쌍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은밀하게 일렁이고 있는 불안의 빛을. "상주(商主)의 쾌차를 하례드리오." "우리 구룡상막의 홍복이외다." 대전 안에는 사로를 비롯한 구룡상막의 주요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영호전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기만 했다. 이윽고 인사치레가 모두 끝나자 중인들은 그 동안 대내에서 처리해 온 일들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화포(火砲)와 병기의 구입은 끝났습니다. 금화성에서 고용한 무사들의 신상파악도 마친 상태입니다." "그들은 총 이천여 명에 달했는데 실력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절반쯤 뒤떨어집니다." "한 달 전 와룡(臥龍) 계곡에서 실시한 지옥훈련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낙오자도 없었지요. 이제 그들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일류고수가 되어 있습니다." "음, 수고들이 많았구려." 영호전은 그들의 보고를 경청하며 성과를 치하했다. 1000여 명의 무사들은 금화성과 일전(一戰)을 벌이기 위해 고용한 바 있었다. 그리고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마침내 완전하게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셈이었다. 이 일에서 필요한 세부사항들에는 일일이 화무쌍의 입김이 작용을 했다고 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세밀한 안배가 영호전의 부재중에도 오늘을 이룩했다고 보면 맞았다. 영호전이 말했다. "그 정도면 준비는 충분한 것 같소. 금후로는 행동만이 남았다고 보는데,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중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영호전의 시선은 찰나적으로 화무쌍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어젯밤에 엿본 일 때문이었다. 그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강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구룡전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영호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 곳에는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호호...... 전 정말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가가께서 이처럼 건강을 회복하시다니. 혈색이 아주 좋아 보여요." 화무쌍이었다. "이 방에는 언제 들어와 있었지?" 그녀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계속 화사한 웃음으로 일방적인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가가가 돌아오시면 드리려고 마련한 선물이 있어요." "선물?" 영호전은 마지못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군. 그런 것까지......." "자! 한 번 입어보세요." 그녀가 그의 앞에 내민 것은 한 벌의 금삼이었다. 그것은 한눈에도 매우 공들여 지은 옷임을 알 수 있었다. 영호전의 입가에는 재차 웃음기가 그어졌다. "너무 황송해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군. 난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데." "아이, 제가 언제 가가께 무얼 바란 적이 있나요?" "후후...... 지금 당장 입어볼까?" 화무쌍은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저었다. "목욕부터 하신 후에요." "음, 그게 좋겠군." 욕실. 장미나무로 만들어진 욕조에서는 뽀얀 수증기와 함께 그윽한 향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영호전은 그 속에 물에 몸을 담근 채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있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목욕물 덕에 서서히 몸이 풀리면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뇌리에 떠오른 무수한 상념들은 그 순간에도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실상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숱한 일들 중 가볍게 넘어갈 만한 일은 한 가지도 없었다. 특히 본의든 아니든 석옥 안에서 치러내야 했던 수련은 그의 인생에 있어 대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강한 의문에 봉착하고 만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구양무종은 분명 내 병을 고치기 위해 태행산으로 간다고 했긴 했었는데.......' 영호전은 눈을 빛내며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그 곳에서 병을 고쳤다기보다는 무공을 익혔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병을 빌미 삼아 의도적으로 내게 무공을 익히게 하려고 작정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무종의 능력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왜 내게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일을 벌였을까? 무엇 때문에?' 의혹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의 신분에 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왜 그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것일까?' 사고(思考)의 고리는 어젯밤의 일과도 연결되었다. '화무쌍은 반고에게 그의 내력을 밝혀 내라고 명했다. 그럼 그녀도 구양무종을 잘 모른다는 얘긴데, 그녀는 무슨 이유로 그에 대해 알고자 했을까?' 영호전은 갑자기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혹시 그녀도 나와 똑같은 의혹을......?' 그의 얼굴이 일시지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튼 화무쌍은 무엇인가 큰 일을 꾸미고 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시켜 나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왜, 그녀는 무엇을 바라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인가?' 영호전의 추리는 차례로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으되 유감스럽게도 답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과 화무쌍과의 관계를 재삼 심사숙고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나와 어떤 원한관계는 없는지?'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드는 그였다. '상황은 무서운 변수를 품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영호전은 전신에 가벼운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구축해 놓은 세력을 이용해 금화성을 치고 구룡상막을 통째로 삼키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충격을 덜고자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이건 지나친 비약이다.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고. 나야말로 그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쏴아아아아......! 그는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상념들을 모두 털어 버리려는 듯 욕조에서 일어섰다. '속단은 금물이다. 현재의 나로서는 무슨 일이든 침착하게 관망할 필요가 있다.' 화무쌍은 손뼉까지 쳐가며 찬탄해마지 않았다. "멋져요! 역시 가가는 천하제일 미남이세요." "후후, 금삼을 입혀 놓더니 얼굴에 금칠까지 하긴가?" 영호전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꾸했다. 그것은 지나친 칭찬으로 인해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녀의 태도에서 뭔가 과장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애써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추켜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 동안 나를 대신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느라 수고도 많았는데." "호호, 별 말씀을요. 좀 힘이 들긴 했지만." "무척 미안하고 고맙게 여기고 있다." 화무쌍은 어깨를 으쓱하며 생긋 웃었다. "그러실 것까지요. 한 집안 일인 걸요." 그 말은 곧 그녀와 영호전이 정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영호전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야 그렇지. 화매와는 어차피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야 하니까 일찌감치 서로 돕는 것도 의의는 있을 게야." "호호......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됐어요." "내가 아직 제 구실을 다 하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툴툴 내뱉는 그를 향해 화무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가께서 제 구실을 못하시다뇨? 그건 또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세요?" 영호전은 일부러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기정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 정도는 내게도 있으니까." "가가!" "난 이대로 화매의 꼭두각시가 되어도 상관없어. 엄처시하가 알고 보면 가장 편한 처지일 수도 있지." "뭐라구요?" 화무쌍은 매섭게 눈을 흘겼다. "대체 저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영호전은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야, 농담이었어. 하하하하하......!" 나름의 의미가 담긴 말들을 화무쌍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의외로운 것은 이어지는 그녀의 다음 행동이었다. "가가......!" 그녀는 그 상황에서 영호전의 목에 와락 팔을 둘러왔다. 그는 코로 확 끼쳐 오는 사향냄새에 내심 흠칫했다. '본격적인 유혹인가?' 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으로 인해 난감해 있을 때, 화무쌍은 아예 그의 몸에 동체를 바짝 밀착시켜 왔다. 전에도 이런 경험은 수태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대담함에는 놀랄 바가 없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체의 감각이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그였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가가." "음?" "가가는 상인(商人)으로 만족하세요?" "그건 무슨 말이지?" 화무쌍의 음성은 행동에 비해 가라앉아 있었다. "혹 무공을 직접 배울 생각은 없나요?" 영호전은 무척 놀랐으나 짐짓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공을 배우다니?" 그는 화무쌍의 눈빛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가가도 말씀하셨죠? 강해야 살아나갈 수 있다고. 그것은 진리에 가까운 말이에요. 인생은 어쩌면 전쟁터인지도 몰라요. 요즘의 상황으로 보아선 더욱 그렇죠." "그야 그렇지." "강한 자만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 야망을 향해 달려갈 수도 있는 거예요. 금화성과 구룡상막의 싸움에는 이미 다수의 무림인들이 개입되었어요. 가가께서 아무리 뛰어난 지략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죠." 영호전은 피식 웃었다. "놀려도 어쩔 수 없군. 나는 알다시피 내 손으로는 닭 잡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야." "현재로선 그렇겠지만......." 화무쌍은 얼굴을 그에게로 갖다댔다. 그녀는 향기로운 입김을 내뿜으며 한껏 달콤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되잖아요?" 영호전의 표정이 취한 듯 흐려졌다. "이제 배워 어쩌게?" 그녀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매달렸다. "그 점은 염려 마세요. 가가께서 마음만 정하신다면 제게 방도가 있으니까요." "무슨?" "스스로 몰라서 그렇지, 당신의 자질은 천재에 가까워요. 그리고 소매는 가가를 일약 무림의 일류고수로 키워줄 만한 고인(高人)을 알고 있어요." 영호전은 기이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대체 너는......!" 화무쌍의 얼굴은 그의 눈과 지척에 있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이것이 솔직한 영호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신비로운 기운은 그로 하여금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화무쌍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래요. 전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님 몰래 무공을 익혔어요." "그건 나도 안다." "물론 제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지도 잘 아시죠? 그렇지만 가가의 나약한 면만은 싫어요." "할 말 없게 만드는군." 그녀는 영호전의 품에 살며시 얼굴을 묻었다. "소매는 자신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요. 당신이 원하셔야 가능하겠지만요." 화무쌍의 말은 선택의 여지를 상대에게 둔 듯하나 실은 종용이었다. 동시에 영호전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그녀의 눈은 강한 기대 탓인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제7장 상벌(尙閥)들의 전쟁 1 "화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영호전은 빙긋 웃으며 그녀로부터 몸을 슬쩍 떼어냈다. 그의 자연스러운 동작에도 불구하고 화무쌍은 기이한 표정으로 탐색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을요?" 영호전은 표정을 고쳐 정색을 하며 말했다. "화매가 말하는 그 고인은 어느 정도 수준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지?" 화무쌍은 묻는 그의 의도를 납득할 수가 없자 어쩔 수 없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가요? 그 말씀은." 그녀의 직설적인 질문에 영호전은 갑자기 대소했다. "하하하하하......!" 웃음을 멈춘 그는 나직하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화매,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어떤 일에건 최고가 아니면 나서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금화성을 치겠다는 것은 단순한 복수심에서만은 아니다." 화무쌍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요?" "대륙제일의 상권(商權)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아!" 그녀는 탄성을 발하는 한편, 생애 최초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영호전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힘주어 덧붙였다. "나는 천하제일상(天下第一商)에 도전하고자 한다. 무예를 익히게 되더라도 무림제일인에게가 아니면 거절하겠다." "가가......?" 화무쌍의 안면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설마하니 그의 입에서 그런 말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알기로 영호전은 달라졌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들리지 않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는 이 분은 예전에 보던 그 분이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변하게 되었을까?' 화무쌍은 놀라는 이면에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상대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영호전은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옆모습이었다. 창을 흠뻑 적셔 놓은 붉은 노을 탓일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더욱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무심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에서는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미로운 빛이 흘러 나오는 듯했다. 화무쌍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정녕......!' 그것은 영호전의 모습이 그녀의 가슴속에 재삼 화인(火印)처럼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화무쌍이 애초에 가졌던 의식의 틀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배울 수도 있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가가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요." 영호전은 그녀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그의 입에서는 담담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나를 위해 무리할 건 없다, 화매. 나는 이대로도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그 말씀은......?" 일순 화무쌍의 얼굴에는 당황기가 스쳤으며, 영호전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위지매령은 어디에 있지?" "그녀는 소매가 모처로 심부름을 보냈어요." 어느새 침착성을 되찾은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반대로 영호전의 눈에서는 기광이 일렁였다. "화매, 잊지 마라. 이 곳은 구룡연이지, 구문제독부가 아니다. 구룡연에 속한 사람은 내가 관리한다." "네?" 화들짝 놀라는 화무쌍에게 그는 잘라 말했다. "날 돕는 것은 고마우나 내가 돌아온 이상 추후로 지나치게 개입하는 일은 삼가해다오." "가가!" 황당한 표정이 되어 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영호전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화매, 방금 떠올랐는데 금화성을 치는 이번 계획은 시월풍(十月風)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느냐?" "네에?" "왜, 너무 낭만적이라 어울리지 않나?" "당신......!" 화무쌍은 경악한 나머지 뭔가 말을 쏟아내려다가 제 풀에 황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그녀는 영호전의 은근한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 그렇게 부르도록 하자. 나는 그 이름이 매우 마음에 드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화무쌍은 그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칠흑야(漆黑夜). 천지가 암흑에 뒤덮여 있었다. 그 가운데 섬칫하리 만큼 무서운 고요만이 흐르고 있다. "누구냐?" 한 줄기 날카로운 외침이 허공을 울렸다. 구룡연이다. 이 곳에는 지금 10리 밖까지 그물처럼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도처에 일급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고, 각종의 암기와 기관장치가 물샐틈없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가히 철의 장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런데도 불시의 침입자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괴인영(怪人影). 그 자는 비틀비틀 방향을 잃은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단지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찌 보면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의 입에서는 모기 소리만한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월풍은...... 대륙풍(大陸風)......." 어둠으로 인해 인영의 정체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체구가 왜소하다는 것 정도가 보여지는 전부였다. 그는 계속하여 기진한 음성으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등뒤에서 차디찬 음성이 들려 왔다. "몇 호냐?" 괴인영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 대답했다. "대륙...... 팔호(八號)....... 빨리 삼호(三號)를......!" 쿵! 급기야 그는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휙! 휙! 그 자리에 2명의 중년 흑의인이 나타났다. 개중 한 사람은 검을, 한 사람은 필(筆)을 메고 있었다. 그들은 급히 쓰러진 인물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에는 똑같이 놀란 음성을 발했다. "위지 낭자!" "이럴 수가......!" 그들의 동작은 무섭도록 빨라졌다. 잠시 후. 모종의 응급처치를 거친 두 사람은 예의 왜소한 인영을 안고 어딘가를 향해 황망히 신형을 날렸다. 휙! 휘휙!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슷! 어둠 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인영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일신에 화려한 금삼을 걸치고 그 위에 구룡포의(九龍袍衣)를 덧입은 그 청년은 영호전이었다. 그는 홀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륙풍이라...... 후후훗! 모두 멋대로군."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의 신형은 벌써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2 별각(別閣). 화무쌍은 방금 목욕을 마쳤다. 염색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까지 피어 올라 그녀의 매력을 한결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녀의 표정만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녀는 몸에서 흘러내리는 물기조차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몸을 가린 커다란 수건에서는 연신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침상에 못박혀 있었다. 주인의 모습에 어울리게 화려하기 그지없는 침상이었는데, 그 위에는 한 여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여인은 이 곳 삼품위의 고수인 위지매령이었다. 그녀는 매섭도록 당차 보였던 평소의 모습과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변을 당했는지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정도로 처참하게 몸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금침 밖으로 드러나 있는 상체만도 엉망진창이었으며, 입고 있는 흑의는 걸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했는데 그나마 의식을 잃은 듯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길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상징처럼 늘상 들고 다니던 붉은 장미도 온데간데없었다. "네가 정말...... 위지매령이 맞느냐?" 화무쌍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침상가로 다가갔다.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인지 심호흡과 더불어 금침을 들추어보았다. "아!" 그녀의 입에서는 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위지매령의 하반신에는 일부러 벗겨 놓은 듯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녀의 은밀한 곳이 뭉개져 피떡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겐가 난행(亂行) 당한 흔적이 분명했다. "이...... 이건, 해도 너무 했어......!" 화무쌍은 한껏 감정을 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녀도 여인이고 보니 위지매령이 겪었을 고통이 어렵지 않게 연상되었던 것이다. "죽일 놈!" 그녀는 미지의 대상을 향해 이를 가는 한편, 신경질적으로 위지매령의 찢어진 상의 조각을 벗겨냈다. 그러자 코에 확 끼쳐 오는 지독한 악취에 화무쌍은 구역질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위지매령의 아랫배에는 검은색의 장인(掌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부위는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악취는 그 때문에 발생된 것이었다. 이쯤이면 회생할 가망이란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었다. 화무쌍의 눈에서는 재삼 살기가 폭사되었다. "역시 짐작대로군. 그 놈의 정체는 독의(毒醫) 구양무종(歐陽武宗)이었어." 그녀는 위지매령의 나머지 옷자락을 찢어발겼다. 북! 부욱! 이윽고 위지매령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으며, 그 상태로 놓고 보니 더욱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였을 뿐만 아니라 미세한 혈공(血空)들이 수십 군데나 뚫려 있었던 것이다. 화무쌍의 눈썹이 바람을 받은 듯 파르르 떨렸다. "우우...... 무영혈공침(無影血 針)까지......!" 무영혈공침이란 꼬리 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진 우모침(牛毛針)의 일종으로 발출 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일단 적중 당하면 피부를 뚫고 깊숙이 들어가 핏속에서 녹아 버린다. 따라서 화타나 편작이 현신한다 해도 도저히 생명을 건질 수 없는 독랄한 암기이다. 화무쌍은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깨물며 위지매령의 몸에 나 있는 혈공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 지독한 수법까지 사용한 것은 필경 나에 대한 경고겠지. 더 이상 날뛰지 말라는."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파파파파팟!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지력은 정확히 혈공들을 향해 속속 쏘아졌다. 그에 따라 이제까지 미동도 없던 위지매령의 몸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학!" 위지매령은 마침내 믿을 수 없게도 눈을 반짝 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그 빛은 너무도 맑고 영롱하여 도시 죽음을 앞둔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다. 창백하던 얼굴에도 이내 화색이 돌아 본래의 아름답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게도 삶의 징조는 못 되었다. 죽기 직전에 일어나는 화광반조 현상일 따름이었다. 위지매령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영주(令主)...... 속하는......." 화무쌍은 빠른 어조로 말을 받았다.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속히 할 말만 해라. 시간이 없다." 그것은 냉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다. 위지매령은 서운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따위는 염두에 둘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빛은 급격히 꺼져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코와 입에서는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위지매령은 안간힘을 써 입술을 달싹였다. "예...... 예상대로 그 늙은이는 구양독성가(歐陽毒聖家)의....... 속하는 놈이...... 를...... 만나는 것을......." 그녀의 음성은 점점 잦아 들어갔다. 파팍! 화무쌍이 그녀의 유방 사이에 대고 지력을 퉁겼다. "컥!" 위지매령은 듣기 거북한 신음을 터뜨리더니 입에서 검은 핏덩이를 왈칵 쏟아냈다. "놈이 누구를 만났다고?" 감겨져 가던 위지매령의 눈이 가느다랗게 떠졌다. 그녀는 신음과도 같은 음성을 발했다. "놈이...... 음시음(音詩音)...... 음시음에게 삼절음보(三絶音普)를 건네는 것을... 속하는 보았......." 위지매령의 눈동자가 무엇에 놀란 듯 위로 한껏 치솟았다. 이어 그녀의 몸이 자잘한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목을 뒤로 힘없이 꺾었다. 툭! 일신이 차디차게 식은 지는 이미 오래였다. 기실 그녀의 죽음은 진즉부터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화무쌍은 무감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막상 상대의 죽음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안색은 잠시 동안 수십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그러더니 스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삼절음보......! 드디어 그들이 손을 잡았단 말인가?" 한편. 스스스....... 별각의 지붕 위로 물 흐르듯 가볍게 날아가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처마 밑에서 신형을 멈추었다. 그 곳에는 한 흑의인이 쓰러져 있었다. 인영은 어둠 속에서 흑의인을 내려다보며 하얗게 웃었다. "후후후......" 그는 흑의인의 배심혈을 슬쩍 치더니 비쾌하게 신형을 날려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인영의 모습이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힌 후, 흑의인은 오한이 인 듯 몸을 떨더니 눈을 거슴츠레하게 떴다. "아, 아니!" 그는 스스로의 직무 태만에 당황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그는 주위를 훑어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별일은 없군. 내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천군제왕검(天軍帝王劍). 촛불 아래 드러나는 위대한 이름이 있고, 그 검신을 신비로운 듯 어루만지는 손이 있었다. 여인의 섬섬옥수인 양 하얗고 섬세하면서도 일면으로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손이다. 손의 주인은 영호전이었다. 그의 준수한 안면에는 뭐라 형용키 힘든 은은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검신에서 흘러 나오는 서기 때문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그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확대되어 한쪽 벽에서 구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검을 얼굴에 갖다댔다. 차디찬 금속의 감촉이 피부를 통해 전해져 오자 그는 가볍게 전율했다. 검신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는 왠지 짙은 우수가 느껴졌다. 눈빛만이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다린 것일까? 검신에 비친 그의 얼굴 위로 환상처럼 글자가 나타났다. "또......!" 그는 그 기현상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검을 얼굴에서 떼고 검신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글자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천군제왕검이라는 글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언뜻 스쳐 지나듯 떠올랐던 다른 글자들은 정말로 환영이었는지 자취를 감추어 버려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호전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 검에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 벌써 다섯 차례나 글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화무쌍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조직을 부리는 것으로만 보아도 높은 신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대륙제삼풍(大陸第三風)으로 통하는 건 그녀 위에 다른 누군가가 또 있다는 얘기다.' 그의 생각은 빠르게 이어져 갔다. '그녀가 상대하고자 하는 적도 역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필경 금화성과 관련이 있으리라.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구양무종의 개입이다. 그는 대체 어떤 식으로 두 세력간에 가로놓여 있는 것일까?' 그는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곧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쨌든 위지매령이 그토록 처참히 당한 점으로 미루어 그들 은 치열한 암투(暗鬪)를 벌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천천히 검을 쓰다듬었다. '나는 당분간 무공을 익히게 된 사실을 외부로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소용돌이를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그의 입가에는 언뜻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기회가 닿는 대로 더욱 강한 무학들을 익혀야 한다. 구룡연은 사실 껍데기에 불과하다. 후후...... 하긴 이 곳의 주인이라는 나도 알고 보면 허수아비가 아니던가?' 영호전은 검을 검집에 도로 꽂아넣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검의 손잡이 부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고해성(苦海城).> 그 세 글자는 의외로 꽤 깊게 새겨져 있었는데, 본래 검신에 씌어 있던 글자들과는 필체가 사뭇 달랐다. 아마도 누군가가 검을 소유하게 되자 추가로 써 넣은 듯했다. 기이한 것은 그 글자들이나 필체가 왠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고해성이라......!' 영호전은 그 이름에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강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전에 구양무종을 통해 들어보았거니와, 거기서 그는 이제 보이지 않는 운명의 굴레마저 읽어내고 있었다. '대체 뭔가? 내 의식을 사로잡는 듯한 이 기분은.' 그는 신음처럼 그 이름을 새삼 되뇌어 보았다. "고해성...... 고해성......." 낮게 울려 나오는 그의 읊조림을 제외하면 사위는 섬뜩하리 만치 고요했다. 3 두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화북평야를 울렸다. 피를 토하듯 천지간을 시뻘겋게 물들인 석양 아래 버섯구름이 뭉클뭉클 피어 오른다. 그 싯누런 황진(黃塵)을 뚫고 질풍같이 달려오는 것은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기마대였다. 무수한 깃발들이 황토풍을 휘감고 찢어질 듯 나부꼈다. 그런 가운데 기마대는 드넓은 화북평야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사천성 쪽으로 무시무시하게 질주해 가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란 너무도 당당했다. 주위의 험준한 산악과 광활한 평야지대까지도 모조리 그들을 맞이하여 경배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 말은 결코 광오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기마대는 당금의 천하무림을 위협할 정도로 위명이 자자한 구룡상막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수(領受)격인 탕왕 서문경을 위시하여 그 휘하의 일류급 고수 1000여 명을 감히 뉘라서 비웃을 텐가? 두두두두두....... 그들은 서서히 여덟 갈래로 갈라져 전진하고 있었다. 석양을 배경으로 해일처럼 밀려가는 그들 기마대는 가히 일대 장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뒤로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어둠은 흡사 악마가 머리칼을 한 줌씩 풀어헤치듯 음산하게 석양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단강(丹江). 사천(四川)의 남단에 위치한 강이다. 평소 이 곳은 절경(絶景)으로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강의 하구에 펼쳐져 있는 눈부신 백사장도 그렇거니와, 시리도록 푸른 강물이 보여주는 신비경은 무수한 시인(詩人)들의 입을 통해 노래로 불려진 바 있었다. 또한 단강이 유명한 이유는 그 곳으로부터 20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금화성의 사천지부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단강은 놀랍게도 피바다로 화해 있었다. 그 광경이란 평소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다. 전율이 일 정도로 끔찍스러울 따름이다. 붉은 강물 위에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은 채 죽어 있는 자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족히 수백 구는 될 듯했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시체는 냄새를 맡고 몰려든 까마귀 떼에 의해 전신이 무참하리 만큼 갈기갈기 찢겨져 있기도 했다. 백사장이라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간 시체들이 겹겹이 쌓아 올려져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듯 시체더미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이 흰 백사장을 시뻘겋게 적셔가고 있었다. 단강 기슭의 한 장소이다. 너른 풀밭을 이루고 있는 그 곳에서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듯한 무림인들이 둥글게 원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수백에 달했고, 그 한가운데에서는 2명의 인물이 대치하고 있었다. 개중 한 사람은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가슴에 금룡(金龍)이 새겨진 흑색의 비단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 자는 뼈만 발라 엮어놓은 듯 바싹 마른 체구였다. 가느다란 뱁새눈에 입술은 얇게 말려 올라가 있었으며, 세모꼴의 창백한 얼굴에는 일말의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인상은 그렇다 치고 그의 전신에서 흘러 나오는 잔인하고 싸늘한 기도는 보는 이를 질식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탕왕(蕩王) 서문경(西文慶)이었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인물은 90이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산뜻해 보이는 백포(白袍)를 걸치고 있었으며 굳강하기 이를 데 없는 호면(虎面)의 소유자였다. 머리칼은 은백색이었으나 기이하게도 눈썹만은 검었다. 먹을 듬뿍 찍어 그은 듯 시커멓게 쭉 뻗은 눈썹과 그 아래서 번쩍이는 한 쌍의 호목(虎目)은 그대로 그의 막강한 기세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한 마디로 태산을 방불케 할 만큼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그에 반해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는 짙은 사기(邪氣)와 교활함이 느껴졌다. 노인은 오른손에 관왕도(關王刀)를 쥐고 있었는데, 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광이 사위로 무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 빛은 단지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반사된 가벼운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지대한 위협을 선사하고 있었다. 웅천마군(雄天魔君) 사마광(司馬廣). 이것이 노인의 명호였다. 그의 관왕오도(關王五刀)는 오래 전부터 무림의 일절로 정평이 나 있었다. 사마광의 출신으로 말하자면 원래는 하남에 있는 웅천세가(雄天世家)의 가주(家主)였다. 그러나 2년 전 그는 금화성에서 제시한 조건에 현혹된 나머지 웅천세가를 통째로 금화성에 넘긴 바 있는 위인이다. 그의 성품은 생김새와는 달리 말할 수 없이 용렬하여 이권(利權)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금화성에 귀속이 된 후로는 정사(正邪) 양쪽에 걸쳐 무림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어온 터였다. 서문경이 그를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사마광, 정말 오랜만이다. 금화성 내에 숨어 있어서 얼굴을 본 지도 이십 년이 넘은 것 같구나." 사마광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흐흐...... 계산은 잘 하는군. 그래, 꼭 이십 년 만이다. 그 때는 용케도 달아났지만 오늘은 좀 틀릴 게다. 더구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백사장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응시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번갯불과도 같은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어투를 바꾸어 분성을 발했다. "감히 나의 백검귀영대(白劍鬼影隊)를 저토록 무참하게 짓밟다니! 너는 오직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더 이상 살아 있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크크...... 누구 맘대로?" "놈!" 사마광의 호면이 극도의 분노로 인해 푸들푸들 떨렸다. "네 놈은 실력이 모자라니까 비겁한 술수로 백검귀영대를 이 곳까지 유인해 전멸시켰다. 그러고도 향후로 뻔뻔스럽게 무림인을 자처할 수 있겠느냐?" 이 때에 그는 경황중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군웅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문경의 휘하에 있는 고수들로 찌를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르자면 사마광은 수장(首將)인 서문경의 위신을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그의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푸핫핫핫핫......!" 서문경은 느닷없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더니 곧 웃음을 뚝 멈추고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웃기지 마라, 사마광! 네가 지금 무림인의 명예를 논하고 자빠졌는 모양이다만 그건 네놈의 몫이 아니다. 크크...... 내가 명예를 저버렸다면 너는 어떻게 했지? 자신은 물론 가문까지 고스란히 금화성에 갖다 바쳤다." "뭐, 뭣이!" 노호하는 사마광을 향해 서문경은 조소를 그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러기 전에도 네놈의 행적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삼십 년 전, 네놈은 아무도 모르게 내 아내와 하나 밖에 없는 여식을 차례로 유인해 간살(姦殺)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뒤가 캥기니까 나를 위시하여 내 수하들 오백 명까지도 도륙을 하려 했었지." 그 정도면 상상을 불허하는 이력(履歷)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뼈아픈 일을 당한 서문경은 세월을 빌어 감정을 가라앉히는데 성공했는지 무감한 듯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네놈은 날더러 뻔뻔하다고 했지만 나는 네놈이 차라리 존경스럽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그처럼 멀쩡한 낯짝으로 나를 대할 수 있는지 말이다." 사마광의 호목이 불을 뿜었다. "우우! 이십 년 전 파사도(巴査都)에서 네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 때 놓쳤던 것이 철천지한이로구나." 그 말에 서문경은 기소를 흘렸다. "크크크...... 이해한다. 내가 나발을 불고 다니면 금화성에서 네 놈을 더럽다고 쫓아낼지도 모르니까. 안 그렇느냐?" "놈! 그러는 넌 계속 구룡상막의 주구(走狗)로 남아 있을 자신이 있느냐? 마누라도 죽고 없으니 네놈의 기질상 그 질탕한 계집놀이를 멈출 수 없을 텐데?" 서문경은 조롱을 당하면서도 노하기는커녕 대소했다. "핫핫핫핫핫! 걱정도 팔자로구나. 피차에 주구 노릇을 하기는 마찬가지라도 내 염려는 접어두어라. 나는 최소한 일신의 능력을 밑천 삼아 구룡상막에 들어갔다. 계집질도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한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위로 말아 올려졌다. "소문을 들으니 너야말로 한심하더구나. 금화성의 사천지부는 너로 인해 썩을 대로 썩었다고 하더군.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 황금을 주워 모으고 있다면서? 그 황금을 이용해 눈에 드는 여인은 유부녀든, 처녀든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운다는 소문도 내 귀에까지 들려 오니......." "닥쳐라!" 사마광은 차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천둥 같은 호통을 쏟아냈다. 그의 얼굴은 수치감으로 인해 벌써부터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서문경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란 놈은 개만도 못한 놈이다. 적어도 너에 비하면 난 신선(神仙)이다." 급기야 사마광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외치기에 이르렀다. "어디서 근거도 없는 낭설을 주워 듣고 나를 매도하는 게냐? 네 따위 놈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도 없다!" 4 파앗! 마침내 허공을 두 조각 내듯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소문의 진위야 어떻든 백포를 휘날리며 떠오르는 그의 신태는 흡사 한 마리의 대붕(大鵬)과도 같았다. 그처럼 허공으로 3장 가량이나 솟구친 그는 수중의 관왕도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사자후에 버금가는 일갈이 터져 나왔다. "단혼도극(斷魂刀極)!" 그 순간 시퍼런 광망이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파파파파! 귀를 찢을 듯한 파공성이 울리자 지상에 우뚝 서 있던 서문경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러나 와중에도 응수만은 신속했다. 그는 양 손을 벼락같이 뒤집으며 일진의 장풍을 날렸다. 파파파파팍! 요란한 격돌음이 각기 허공과 지상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울렸다. 그로 인해 무수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음 순간, 불똥과 함께 허공에 떠올라 있던 사마광은 내리 꽂히듯 수직으로 하강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문경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놀랍게도 사마광은 그냥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관왕도로 정확하게 서문경의 정수리를 쪼개왔던 것이다. "과연 관왕오도(關王五刀)다!" 서문경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관왕오도는 사마광이 평생을 바쳐 창안해 낸 5초의 도법(刀法)이었다. 이 도법만으로 그는 사생활과는 별개로 무림을 떨어 울리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허공에서 일성의 외침이 터졌다. "항마천우도(降魔天羽刀)!" 파츠츠츠! 관왕도의 무시무시한 광망이 파공성을 동반한 채 쏘아져 왔다. 그것은 관왕오도의 제2초였다. "안 되지! 이대로 죽어 줄 수는 없다." 서문경은 여유를 회복하며 쌍장을 어지럽게 펼쳐냈다. 파파파파파팍! 또 한 차례 격돌음이 천지를 진동시키고 난 직후였다. "살인마벽도(殺人魔壁刀)!" 사마광의 웅후한 외침 뒤로 서문경은 코웃음을 쳤다. "크ㅋ!" 그 웃음의 의미는 언뜻 듣기에도 자신감의 표명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을 기해 서문경의 양 손바닥이 청색(靑色)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의 손바닥은 이내 청수정(靑水晶)과도 같이 투명하게 변했다. 그것은 탕왕 서문경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만든 그의 독문무공 패천섬환공(覇天閃幻功)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자! 사마광,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 유명한 패천섬환공을 직접 목도하게 되자 중인들은 한결같이 가슴이 크게 진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줄곧 서문경의 휘하에 들어 있으면서도 이제서야 그의 진면목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구룡연 내에서 보았던 서문경의 행태에는 다분히 문제가 있었다. 언행이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경박스러운 데다가 시녀들과 함부로 놀아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나마 연무장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고, 매일 술에 취해 여인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희롱을 일삼던 그였다. 때문에 그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되 영호전이 그를 영수로 임명했을 때 그들은 적지 않은 불만을 품었었다. 그런데 그 불만은 지금 이 순간에 일소되었다. 삼엄한 기세로 사마광과 격돌해 가는 서문경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방금 전에 들었던 그의 과거지사를 접목시키니 중인들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그에 대한 존경심마저 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사마광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중인들은 기대와 불안감이 뒤범벅이 되어 손에 땀을 쥔 채 이 일생일대의 혈전(血戰)을 관전하고 있었다. 휘류류륭! 서문경의 쌍장이 휘둘러지자 실로 가공스러운 경기가 사위에 회오리쳤다. 천지가 온통 푸른빛을 띤 장영에 휩싸인 것도 그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그 광경에 사마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우! 놈의 실력이 그 간에 이토록 크게 발전해 있었다니, 이십 년 전만 해도 나와 동수를 이루었건만.' 그러나 그도 초고수인지라 냉정을 잃지는 않았다. "마영환극도(魔影環極刀)!" 관왕도의 제4초가 펼쳐졌다. 도의 시퍼런 그림자가 허공에서 5개로 나뉘어지자 사나운 경풍이 파공성과 더불어 다섯 갈래로 몰아쳤다. 휘류류류류류! 서문경은 쌍장을 휘둘러 이에 맞섰다. 파파파팍! 종전에 비해 훨씬 더 강한 격돌음이 양인 사이에서 일었다. 두 사람은 비로소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사마광. 그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반면에 서문경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틈엔지 그의 왼쪽 어깨 부위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져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다. 서문경은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며 낮게 부르짖었다. "으음, 좋다! 좀더 근사한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그는 품속을 뒤져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전체가 금빛이 도는 장갑으로 손등 부분에 무수한 침이 돋아나 있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이어 서문경이 장갑을 손에 끼자 흡사 황금으로 조각된 고슴도치를 손등에 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마광은 안색을 굳히며 신음처럼 읊조렸다. "그, 그것은 천황피(天皇皮)......!" 그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황피란 만년철삭(萬年鐵索)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써 천하의 어떤 병기로도 손상시킬 수가 없다는 기물(奇物)이었다. 상대적으로 서문경은 기세를 높여 외치고 있었다. "받아라! 사마광." 파아아아― 무수히 일어난 황금빛 장영이 막대한 경기를 동반한 채 사마광의 일신을 덮쳐갔다. 그들 두 절대고수의 대결은 실로 무림사에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각자의 무기가 지닌 장점도 도외시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필생의 절학들이 난무하다 보니 관전 중인 중인들로서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여. 두 사람의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차앗!" 한 소리 기합성과 함께 사마광의 손에서 눈부신 은광이 쏟아져 나갔다. 위력도 위력이려니와 그 속도란 빛살과도 같아 단번에 서문경의 몸을 양단 낼 듯했다. "멸겁진천도(滅劫震天刀)!" 그것은 관왕오도의 제5초, 즉 최후 초식이었다. 서문경의 얼굴도 그 찰나에는 긴장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한 차례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몸을 회전시켰다. 패천섬환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의 전신에서 청색의 광망이 전면으로 무섭게 뻗어 나갔다. 그 역시 독문의 무공 중 마지막 초식을 떨쳐낸 것이었다. 펑! 퍼펑! 콰르르릉! 폭발음에 가까운 굉렬한 음향이 일었다. 그리하여 중인들이 고막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에 귀를 틀어막을 때, 눈부신 은광이 사방으로 난무하듯 퍼져 나갔다. 그 빛은 삽시간에 방원 10여 장을 뒤덮어 버렸다. 잠시 후. 은광이 걷히며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탕왕 서문경.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누른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움켜쥔 그의 손가락 사이로는 핏물이 흘러 나왔다. 사마광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 방금 전에 비해 창백하게 질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잠자는 순간에도 놓지 않는다는 관왕도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의 독문무기인 그 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그와 서문경의 사이에서 산산조각이 난 채 반짝이고 있는 물체들이 그 쟁쟁한 위명을 떨치던 관왕도였다. 다시 말해 사마광의 애도(愛刀)는 서문경의 천황피에 의해 처참할 정도로 박살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서문경의 입술을 비집고 싸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사마광, 너는 오늘에야 비로소 비열하기 짝이 없는 놈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통렬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 말에는 일말의 처절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마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다. 나는 절대 죽지 않아. 네놈 따위의 손에 죽어 가다니 말도 안 된다. 크으윽!" 끝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아무리 오기를 부리려 해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신음 뒤로 별수 없이 피를 토해야만 되었으므로. "난...... 평생을 내가 뜻한 바대로 살아왔다. 이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그는 신형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세를 바로잡으려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으며 그럴수록 그의 안색은 더욱 하얗게 탈색이 되어 갔다. 결국 그는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윽!" 쿵! 그의 몸은 기어이 썩은 고목처럼 풀밭 위로 처박히고 말았다. 경악과 회의로 인해 잔뜩 부릅떠진 그의 눈은 그 상태로 서서히 생기를 잃고 굳어져 갔다. 사마광은 그렇게 죽었다. 차갑게 식어 가는 그의 등판에는 무수한 황금바늘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황피의 손등 부분에 박혀 있던 침이었다. 휘이이이잉....... 부드러운 훈풍이 일렁이는 가운데 사마광이 흘린 피가 사위에 비릿한 내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라면 맞으리라. 사천을 기점으로 하여 강북(江北)의 전역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공세가 전개되었다. 그 기세에는 하늘도 놀라고 땅도 뒤흔들렸다. 고래(古來)로 인세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어 왔다. 우선적으로 대륙의 주인이 되기 위한 제후(諸侯)들 간의 전쟁이 있었다. 이는 일국의 흥망(興亡)을 좌우하는 싸움으로써 세칭 군웅할거의 시대를 연 바 있다. 그와는 다르나 더욱 처절무비한 전쟁도 있었으니, 무림계(武林界)의 혈전(血戰)이 그것이었다. 지금 중원에는 시절이 시절인지라 춘풍(春風)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봄바람을 비웃듯 피바람의 서막은 열렸다. 4월초에 시작된 이 싸움은 대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크고 무시무시한 대 전쟁이었다. 의외로운 것은 그 전쟁이 다름 아닌 상벌(商閥)들의 이권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다. 강북의 상권의 거머쥐고 있는 구룡상막과 강남 상권의 대부(代父)격인 금화성의 싸움이 마침내 암투에서 전면전으로 양상을 달리한 것이었다. 대륙의 진정한 거상(巨商)이 어느 쪽인가를 가리는 이 전쟁은 정녕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흐르고....... 중원무림은 날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급기야 이대상벌(二大商閥) 간의 싸움이 강북만이 아니라 전 무림으로 파급되었으니 말이다. 이는 중원의 역사를 통틀어도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바야흐로 금화성을 지지하는 강남의 무림과 구룡상막을 돕기 위한 강북의 무림이 대대적인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르자면 단순한 이유로 벌어졌던 전쟁이 사상 초유의 대혈전으로 비화될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제8장 붕괴(崩壞) 1 만금산장(萬金山莊). 이 곳은 개봉(開封)에 있는 금화성의 하남(河南)지부다. 규모는 엄청나게 크다. 곳곳에 우거져 있는 숲은 웬만한 산을 방불케 할 만큼 빽빽하고 풍성하다. 그뿐인가? 도처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의 날렵한 지붕들은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으로 요란하게 채색된 단청으로 인해 보고 있노라면 황홀하기조차 하다. 주위의 경관 덕에 수려한 풍치와 인간들이 빚어낸 조형미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이 곳은 원래 구룡상막의 소유였다. 그러나 2년 전 금화성은 무력(武力)으로 이 곳을 강탈한 바 있다. 개봉 내에 있는 기루를 위시하여 전장(錢場), 도박장, 객점, 골동상 등등 구룡상막의 산하였던 상점들까지도 송두리째 빼앗은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만금산장의 하루 수입이다. 자그마치 황금 500만 냥! 그것은 황궁의 하루 운영비와 맞먹는 액수였다. 밀전(密殿). 달리 표현하자면 만금산장의 심처(深處)이다. 타타탁......! 황금빛의 주판을 퉁기는 누군가의 손이 있다. 그 손은 하얗고 통통해 탐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손이다. 그런데 열 손가락 모두에 남김없이 화려하면서도 희귀해 보이는 보석반지들이 끼워져 있다. 황금빛 주판과 함께 반지들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에 휘황한 빛을 뿌린다. 손의 주인은 뜻밖에도 한 노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육순 가량 되었을까? 풍채는 근사하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위인이다. 살이 쪄 부드러운 곡선을 드리운 그의 안면에서는 탐욕과 함께 심술궂은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 보인다. 노인은 일신에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화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색은 건강을 대변해 주는 대추빛이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퉁방울같이 튀어나온 큰 눈은 연신 만족감을 표명하듯 희번덕였고, 두꺼운 입술은 귀밑까지 쭉 찢어져 있었다. 노인은 주판을 옆으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짧게 깎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밀전 안을 서성였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흘흘...... 좋아. 갈수록 수입이 느는 추세이니.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본성(本城)에서 요구하는 차입금을 채워 넣고도 거금이 내 수중으로 굴러 들어오게 될 게야." 부(富)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가진 그 노인이 만금산장의 주인인 황금자(黃金子) 백만호(百萬豪)였다. 현재 그가 머물고 있는 밀전의 내부도 더없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이는 곧 백만호가 벌써 많은 돈을 착복하여 자신을 위해 유용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쪽에는 계산장부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일말의 자부심이 어렸다. 그 장부들은 상납금을 어김없이 바치고도 개인의 몫까지 알뜰히 챙겨온 그의 수완을 말해 주는 것이었기에. "아함!" 그는 하품을 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돈 계산을 하다 지쳤는지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어려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매달려 있는 끈을 잡아당겼다. 스르르....... 방문이 열리며 한 가닥 고혹적인 음성이 들려 왔다. "부르셨습니까?" "오냐." 그의 대답이 있자 두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들은 한눈에도 사내의 욕정을 자극시킬 만큼 농염한 매력을 발산해 내는 여인들이었다. 붉은색의 연의(軟衣) 아래 드러나 보이는 앙증맞은 발에서조차 진한 육향이 풍겨 나오는 듯했다. 백만호는 열기가 담긴 시선으로 굴곡이 뚜렷한 그녀들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흐흐흐...... 여운(麗云), 지염(池艶), 깜찍한 것들! 너희들은 언제 보아도 예쁘구나." "아이, 주인님도......." 왼쪽에 있던 여운이 몸을 살짝 뒤틀며 콧소리를 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욕정을 부추기는 몸짓이었다. 백만호의 눈에는 금세 불길이 확 일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몹시 피곤하구나." "네." 욕실(浴室). 커다란 마름모꼴의 대리석 욕조가 마련되어 있었다. 욕조의 둘레에는 다채색의 연유(鉛釉)가 덧씌워져 있어 광택과 함께 아름답게 새겨진 무늬가 더욱 돋보였다. 그 위에는 마노와 산호, 아란석(鵝卵石)을 비롯한 보석들이 조화를 이루며 무수히 박혀 있었다. 물 속에서 은은히 비쳐 보이는 욕조의 밑바닥도 호사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투명한 상아색 바탕에 용문(龍文)과 어문(漁文)이 각기 양각과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유명한 장인(匠人)의 손에 의해 이룩된 듯 아름다울 뿐 아니라 격조마저도 느껴질 정도였다. 수증기가 구름처럼 뭉실뭉실 피어 오르는 욕조 안에는 세 사람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들은 백만호와 앞서의 여운과 지염이라는 두 여인이었다. 물론 그들 세 사람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옷을 입은 채 목욕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백만호는 피둥피둥한 상체만을 물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여운은 뒤편에서 그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고, 지염은 반대로 정면에서 그의 어깨를 닦아주고 있었다. 위치야 서로 달랐지만 그녀들의 관능적인 육체의 곡선만은 손동작에 따라 동일하게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피부는 열기 탓에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덕분에 수밀도를 연상시키는 젖무덤이나 2개의 만월을 나란히 붙여 놓은 듯 탐스럽고 실팍한 엉덩이가 더욱 부드럽게 느껴지는 질감을 보여주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은밀한 부위의 수초와 길게 풀어헤쳐진 머리칼은 수증기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러한 시각적 현상도 그렇지만 어쩌면 욕조에 풀어 놓은 천년화란향(千年華蘭香)보다 짙게 풍기는 그녀들의 육향이 실제로는 더 유혹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만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눈치 빠른 지염이 애교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주인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백만호는 눈을 감은 채 침중하게 답했다. "걱정은 무슨? 나도 이제 늙은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한창 젊었을 때는 하루에 다섯 명까지도 상대를 했는데 지금은 너희들조차 상대하기가 벅차구나." 그는 사뭇 우울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귀에 대고 지염은 속삭이듯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일이라면 소녀에게 맡기세요. 방도가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이냐?" 백만호의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네, 우선 목욕을 마치고 여운과 함께 잠자리에 드세요. 그 후에 소녀가 회춘(回春)의 비방을 알려드릴게요." "흠! 기대가 되는구나." 그 말에 지염은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확실한 방도이니 믿으셔도 돼요." "그래, 알겠다. 귀여운 것!" 백만호는 기분이 흡족해져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여운이 한 마디 거들었다. "주인님도 참! 그까짓 일로 침울해하셨다니 주인님답지 않으세요. 당세의 호걸(豪傑)이신 분이 어찌......."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흘흘흘...... 네 말이 맞다." 백만호가 손을 뻗어 이번에는 여운의 풍만한 유방을 덥석 움켜쥐었던 것이다. "흐응!" 경험이 많은 탓일까? 그녀의 몸은 백만호의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전신에 자잘한 경련이 이는가 싶더니 금세 강렬한 욕구를 느낀 듯 활처럼 뒤로 확 휘어졌다. "아아아......!" 그녀는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몸을 움직여 백만호의 어깨에 양 다리를 차례로 걸쳤다. 행위는 그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끙!" 백만호는 한 소리 괴상한 신음을 발하더니 막바로 그녀의 엉덩이를 끌어다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하악!" 여운의 기성은 앞서 호걸 운운하던 칭찬에 이어 사그라져 가던 그의 기세를 일시적으로나마 높여 놓은 듯했다. "으으음......!" 백만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은 채로 힘찬 율동을 거듭했고, 그에 따라 욕조 안의 물이 마구 출렁였다. 욕조 밖에는 자단목으로 만든 기다란 나무 침대가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그 곳에서 이루어졌을 일이 지금은 욕조 안에서 벌어져 그의 흥취를 돋구어 주고 있었다. 물 속에서 뒤엉킨 두 사람은 미친 듯 서로를 탐했다. 백만호는 미끈거리는 가운데 갓 잡아 올린 생선인 양 싱싱하게 파드득거리는 여운의 육체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묘미를 느끼며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급기야 몸을 구부려 두터운 입술로 그녀의 붉은 입술을 삼킬 듯 덮쳐갔다. "으음......!" 여운은 자세가 바뀌자 그의 어깨에서 스르르 다리를 끌어내리는 대신 백사 같은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는데, 그러면서도 엉덩이만은 쉴새없이 놀리고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요부(妖婦)인 듯했다. 단지 봉사(?)하는 심정으로만은 결코 그녀처럼 타오를 수는 없으리라. 그녀의 힘과 기술에는 백만호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굉장한 계집이야!' 그는 불길 같은 흥분에 사로잡힌 채 내심 중얼거렸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즐길 수만 있다면......!' 그 때에야 백만호는 그런 가능성을 제시하던 지염의 존재를 떠올렸으나 그녀는 욕실에서 나가고 없었다. '흐흐...... 일단 여운과 실컷 재미를 보라고 했겠다? 비방은 연후에 알려준다고.' 기대는 재삼 그에게 활력이 되어 주었다. 그래도 아직 백만호의 몸은 쓸만했다. 워낙 과욕을 부려서 그렇지, 기능이 아주 상하거나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가운데 점차 쾌락의 정점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더웠던 욕실 안에는 일대 열풍이 휘몰아쳤다. "헉!" "하아아아......!" 백만호와 여운은 욕조 안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다. 몸은 아래 위로 포개져 있었으되 행위는 막을 내린 후였다. 여운은 섬섬옥수로 그의 평평한 가슴을 쓰다듬었다. "하여간 대단하세요, 주인님은." 음성이나 입가에 매달린 미소로 미루어 그녀도 욕조 안에서 이루어진 정사(情事)가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백만호가 되묻자 그녀는 냉큼 대꾸했다. "그럼요! 최고예요. 항상 그러셨지만." "흘흘......." 그는 유치하게도 우쭐한 기분이 되어 손을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으로 거침없이 밀어넣었다. "웃!" 여운은 가볍게 몸을 움츠렸으나 곧 풀어져 그의 손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그녀는 이미 질척거리는 상대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그것을 즐기기도 했으므로. 백만호의 애무는 집요했다. "좋으냐? 여운." "으음...... 네." 여운의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는 다시금 더운 숨결이 토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처럼 또 한 차례의 본격적인 행위로까지는 진전되지 않았다. 확실히 백만호의 육신은 늙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쉴새없이 일어나는 욕구의 분출도 단발로 그쳐야 했으므로. "어...... 어떻게 저를 좀......." "흘흘......." 백만호는 그녀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실소를 흘리는 한편,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그만 일어나자." "네? 네......." 그제야 여운도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쏴아아......!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욕조를 빠져 나왔다. "수건을 준비하겠어요." "여운." 욕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백만호가 불렀다. "네?" "수건은 지염에게 들려 보내도록 해라." 여운이 눈이 동그래져 가지고 되물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휴식은 취하셔야......?" 그녀는 말하다 말고 제 풀에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생각해 보니 한시라도 빨리 회춘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대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녀가 나가고 난 뒤 백만호는 툴툴거렸다. "역시 사내에게는 그 방면의 일이 가장 중요해. 내 계집 한 명의 욕정도 다 채워주지 못해 전전긍긍이니 원......!" 2 여인(女人). 그녀의 이름은 지염이다. 그녀는 침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었는데, 일신에 잠자리 날개같이 반투명한 능라망사의를 입은 채 여봐란 듯 요염한 자태로 몸을 꼬고 있는 상태였다. 느슨하게 풀어진 앞섶 사이로는 뿌연 젖무덤이 반 이상 비어져 나와 있으며, 늘씬하게 빠진 두 다리는 아예 옷 밖으로 훤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것은 한 마디로 탕기(蕩氣)였다. 정작 얼굴은 옥같이 맑고 깨끗하나 상큼하게 치켜 올라간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더없이 도발적이었다. 촉촉하게 윤기가 흐르는 붉은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럽고 달콤한 질감과 함께 강한 흡입력이 연상되는. 지염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분명 절세의 미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내의 심혼을 송두리째 빨아들이고도 남을 만한 관능적인 매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침상 위에는 그녀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가벼운 침의(寢衣)를 걸친 채 한 손에 술잔을 쥐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는 백만호였다. 지염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의 눈은 두툼한 안면 가죽에 파묻힌 채 유난히도 반짝였다. 방금 전에 여운과 질탕한 정사를 치렀던 만큼 어떤 욕구가 치밀어서는 아니다. 단지 미지의 경험과 그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번에 몽땅 털어 넣었다. 그것은 몸이 지쳐 있었기 때문으로, 무엇이든 시도해 보려면 원기를 북돋워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지염이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배시시 웃었다. "확실히 주인님은 요즘 쇠약해지셨어요." "음, 그건 사실이다." 대답하는 그의 음성은 잔뜩 쉬어 쇳소리에 가까웠다. "호호호...... 본래 남자의 기력이 쇠하는 까닭은 음양교접(陰陽交接)의 도리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끙! 그 정도의 상식쯤은 나도 알고 있다만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가 보구나.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니......." 백만호는 의외로 내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지염은 그를 향해 정색을 지어 보였다. "그 생각도 잘못된 것이에요. 적어도 그 방면의 일만은 남자든 여자든 나이를 초월해 즐길 방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너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 "호호호...... 물론 도와드려야죠. 주인님이 강건하셔야 소녀나 여운도 살아가는 재미를 잃지 않을 테니까요." "흘흘...... 그럼 나를 위해서만은 아니란 얘기냐?" "아이, 주인님도! 그게 그거 아닌가요?" 지염은 짐짓 장난스럽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이것을 드셔야 해요. 예로부터 전해 오는 강정약(强精藥)으로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이라는 거예요. 술 한 잔을 먼저 드셨으니 약 기운도 빨리 퍼질 테구요." 그녀는 침상 곁에 있는 다탁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약사발을 들어 공손히 내밀었다. 백만호는 그릇을 건네 받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흐음, 이제껏 무수히 많은 강정약을 먹었지만 이런 향내는 처음이구나." 그가 이전에 받았던 약사발에서는 대개 쓴 냄새가 아니면 기이한 냄새가 났었다. 그런데 이번 약에서는 난초향과 같이 산뜻하면서도 그윽한 향내가 풍기는 것이었다. 지염은 입술 꼬리에 웃음을 매달았다. "주인님께 드리려고 특별히 제조한 거예요. 향기를 충분히 음미한 후 드시도록 하세요. 기분도 좋아지고 이내 왕성한 기운이 솟을 테니까요." "정말 그럴까?" 백만호는 어린애처럼 굴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난향이 풍기는 약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음, 맛도 꽤 괜찮군." 그는 약이 뱃속에 들어가자 마음이 한결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자! 그럼......." 지염은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그의 앞에서 망사의를 벗어 내렸다. 그녀의 풍만하고 균형 잡힌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백만호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발했다. "으음......." 아마 무감하던 육신에 불길이 당겨진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의 눈빛에도 흥분해 가는 기색이 역력히 엿보였다. 반면에 지염의 태도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조금 전과는 달라 보였다. 뭐랄까? 마치 중대한 의식이라도 치르려는 듯 엄숙하기까지 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백만호를 향해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소녀가 시전하려 하는 것은 열선전전(列仙全傳)에 나와 있는 등초술(燈草術)이에요." 열선전전(列仙全傳)이란 팽조서인(彭組仙人)이 지은 방중술(房中術)과 강정비법(强精秘法)에 관한 책자였다. 이르자면 그 방면에서는 당대에까지 최고로 꼽히는 기서이다. 백만호. 그는 평생 아내도, 후실도 두지 않은 위인이다. 황금만을 죽어라 끌어 모았는데, 그 이유는 돈만 있으면 여자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철학은 틀리지 않았으며 한 여자에게서 금세 싫증을 느끼는 그의 기질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백만호는 아무리 절세 미녀라 해도 한 달 이상은 품지 않았는데, 지염만이 예외였다. 그녀는 벌써 2년째 그의 곁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의 만년(晩年)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지염은 방중술의 전문가였다. 똑같이 백만호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운이 그녀에게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지염은 채음보양술(採陰補陽術)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어 그나마 백만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색(好色)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녀의 덕분이었다. 지염은 갖가지 기교를 다 발휘하여 백만호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면서도 그의 몸은 최대한 상하지 않게 배려해 주었다. 그러다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자 이제는 열선전전에 나오는 건강비결(?)까지도 가르쳐 주겠노라고 하지 않는가? 백만호는 그녀를 보며 내심 중얼거린다. '내 보물! 흐흐흐.......' 하지만 들려오는 지염의 음성은 엄중하기만 하다. "주인님, 지금 무얼 생각하시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셔야 한다고." "내 깜빡 잊었구나. 흘흘......." "됐어요. 어서 시작하기나 하세요." "알겠다." 백만호는 곧바로 지염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평상시와는 전혀 틀려 보였다. 일정한 형식이 있는 듯 일체 들뜨지 않고 차분하기만 했다. 다만 욕정을 참기가 힘든 듯 미미하게 떨릴 뿐이었다. 그의 손이 열심히 쓰다듬는 것은 지염의 작고 앙증맞은 발이었다. 먼저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에서 시작하더니 차츰 위로 옮겨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등초술이 요구하는 바로써 몸의 자극은 말초신경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백만호는 다음으로 지염의 손가락을 애무했다. 가운데에서 둘째, 넷째 손가락을 차례로 잘근잘근 깨물더니 손을 뻗어 팔꿈치의 안쪽을 정성껏 어루만지기도 했다. 그녀의 뽀얗게 빛나는 어깨에 가 닿은 것은 그의 혀끝이었다. 그는 녹아날 듯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을 느끼며 그 부위에 진득한 타액을 잔뜩 발라 놓았다. 그러는 동안 백만호의 눈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신음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지염...... 참기가 힘들구나." 그는 팔을 벌려 지염을 껴안으려 했다. "아뇨! 참으셔야 해요." 그녀는 싸늘하게 내뱉으며 홱 돌아앉아 그를 피했다. "아, 그렇지!" 백만호는 정신이 번쩍 든 듯 쳐들었던 손을 황급히 끌어내려 지염의 허리께로 가져갔다. "계속하세요." 애무는 그녀의 말대로 계속 되었다. 그는 가능한 한 지염과 몸이 닿지 않도록 애쓰며 그녀의 등뒤에서 손을 놀렸다. 결국 그녀의 동체에서 오르내리던 그의 손은 각기 한 쪽 유방과 비지(秘地)로 향했다. "흠......!" 백만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폭발 직전에 이른 욕정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는 눈을 꾹 감고 동작을 진행해 갔다. 어쩌겠는가? 소원대로 오래 살면서 기력을 지탱하여 인생을 즐기려면 필히 거쳐야 할 관문인 것을. '끙! 정말 환장할 노릇이군. 다른 때 같으면 단번에 찍어 눌러 버렸을 텐데.......' 지염은 여전히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시종일관 어떠한 동요도 일지 않았으며, 이는 백만호의 입술이 이마를 지나 코에서 입술에까지 뜨거운 김을 훅훅 내뿜어 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던 그의 입술은 곧 목으로 내려오더니 목덜미에서 젖꼭지로 옮아갔다. "으음......." 지염은 처음으로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아울러 그녀도 욕구가 이는 듯 몸을 살짝 뒤틀었다. 그녀의 이런 반응이야말로 사전에 약속된 신호였다. "허억!" 백만호는 숨이 넘어갈 듯 한 차례 헛바람을 들이키더니 마침내 성난 멧돼지처럼 본격전에 돌입해 갔다. 그러나 그의 남성이 막 진입을 시도하려는 순간, 지염의 냉랭한 한 마디가 귓전에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구천일심(九淺一深)을 잊지는 않으셨겠죠?" "그, 그래...... 우우......!" 지염의 지시는 계속 되었다. "이번에는 우삼좌삼(右三左三)." "음......." 그것은 마치 뱀장어가 여울을 따라 올라가듯, 혹은 거머리가 논에서 헤엄치듯이라는 비유로써 서로 성감(性感)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지염이 다시금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연기법(練氣法)을 시전하세요." 연기법이란 낡은 기(氣)를 토해내고 새로운 기를 흡수하는 호흡법의 일종으로써 특히 남녀간의 교접 중에 시행하면 지대한 효과를 얻게 되는 강정법이었다. "후우! 후욱......!" 백만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틀거렸다. 그의 허리가 처음에는 유연하게 움직이는 듯하더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격렬하게 율동하기 시작했다. "흐음!" 백만호는 일순 기이한 열류가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며 기성을 발했다. 그것은 아주 색다른 쾌감이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등초술의 고도단계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황홀감에 겨워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흐으......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행위는 다각도로 이루어졌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지염의 섬섬옥수가 급기야 그의 전신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쓰다듬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녀의 손길이 스쳐갈 때마다 백만호는 그 부위를 통해 전신이 녹아나는 듯한 극도의 쾌감을 맛보았다. 지염의 두 손이 보이는 움직임은 특이했다. 그림이라도 그리듯이 모종의 질서를 유지하며 상대의 몸을 애무해 갔다. 뿐만 아니라 잠시 후에는 붉고 도톰한 입술까지 가세하여 그의 몸 위를 샅샅이 훑어가고 있었다. "흐으으으........" 백만호의 눈꼬리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신 구석구석에서 불길처럼 피어 오르는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이 그를 감동(?)의 세계로까지 이끌어간 모양이었다. 경황 중에도 연기법만은 본능처럼 계속하고 있었으니 회춘에 대한 그의 집착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이었다. 간간이 지염의 입에서도 비음이 새어 나왔다. "으음......!" 그녀의 뜨거운 손길과 입술은 지금 사내의 단전 아래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서도 구천일심이나 우삼좌삼의 이론이 행해지고 있는지는 그녀 자신 외에는 모를 일이었다. 또한 그녀가 정말로 만족해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 느끼는 쾌감인지, 아니면 충견(忠犬)으로의 역할인지도. "헉!" 벼락을 맞은 듯 백만호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킬 때, 그녀의 얼굴에는 뿌연 액체가 뒤집어 씌워졌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미소였다. 3 추녀(醜女). 방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는 너무도 못생겼다. 우선 얼굴이 지나치게 펑퍼짐한데다가 피부에는 분화구와도 같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목구비의 생김새는 하나씩 보면 대체로 평범 수준은 되었는데, 문제는 그것들이 모두 제 자리를 약간씩 빗나가 있어 전체적인 조화를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이었다. 가장 황당한 것은 거칠고 넓은 이마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혹이었다. 붉은색을 띤 그 혹은 마치 고무로 만들어진 듯 움직임에 따라 제멋대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명색이 여인이랍시고 머리카락은 치렁치렁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그나마 사람의 털이 아니라 들짐승의 털처럼 푸석푸석하고 뻣뻣해 보였다. 게다가 여인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다. 그녀를 놓고 이렇게 읊조리는 자가 있다. "흐흐흐...... 저 꼴에도 몸매 하난 끝내준단 말이야. 그것만은 개봉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자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인물로 방 안을 거의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음침한 인상에 체구까지 바싹 말라서인지 한눈에도 어지간한 색골(色骨)로 보이는 사내다. 냉공소(冷公 ). 이 이름은 개봉에 사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적어도 그 곳에서는 최고의 난봉꾼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는 종종 이 천향루(千香樓)를 찾아온다. 그것은 여자를 고르는 안목이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찾는 여자란 최소한의 투자로 남자에게 최대한의 충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 여자였다. 사실 이 추녀 미라보(美羅寶)는 천향루의 주방에서 일했었는데, 냉공소는 첫눈에 그녀의 자질(?)을 알아보았다. 이후로 그는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천향루에 왔고, 그 때마다 어김없이 그녀를 방으로 대령시키곤 했다. 미라보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풍만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다. 얇은 망사의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나신에서는 마력(魔力)에 가까운 염기가 느껴진다. 또한 사내를 녹이는 강한 힘은 어떠한가? 그것은 냉공소만이 익히 알며 온전하게 즐겨온 비밀 사항이었다. "클클...... 천하의 사내놈들은 다 무지(無知)해. 그깟 얼굴이 무슨 상관이람?" 이것이 홀로 부르짖는 냉공소의 지론이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 곳은 미라보의 수밀도처럼 탐스러운 2개의 유방 사이였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반달모양의 손톱자국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난 상처인 듯 현재는 하나의 흉터로 화해 있었지만 그것을 보자 냉공소는 신음을 흘렸다. "흐음......." 그 흉터는 그의 작품(?)이었고, 그 때문에 언제고 그는 불길 같은 욕망이 치솟곤 하는 것이었다. 미라보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온 이후로 내내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그녀는 백치를 연상하게 한다. 완전한 백치야말로 냉공소가 정말로 원하는 이상형이다. 급기야 그의 회색빛 얼굴에 음탕한 미소가 번졌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에 이른 것이다. 그는 앉은 자세에서 미라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라." 그제야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운몽도박장(雲夢賭博場). 정염산(丁炎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쭉 찢어진 사목(蛇目)을 가진 그는 잔인하고 음독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는 도박의 신(神)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에 의해 패가망신하고 파멸을 당한 사람의 숫자는 일일이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양문요(楊文堯)만 해도 그렇다. 형편없는 몰골로 주사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는 정염산에게 전 재산을 송두리째 날린 위인이다. 게다가 본전 생각이 나 재도전했다가 아내와 딸까지도 잃고 보니 양문요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잃은 것들을 되찾고 말겠다는 야무진 결심과 함께 정염산에 대한 원한만을 곱씹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황금 1000냥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밑천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주위에 빽빽하게 둘러서 있는 중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주사위가 던져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편으로는 멋모르고 도신(賭神)에게 덤볐던 그의 무모함을 비웃으며. 정염산은 이미 주사위를 던진 후였다. 6, 6, 5, 6. 도박판에 펼쳐진 수는 비극적이었다. 결국 양문요가 그에게 이기려면 주사위 네 개에서 전부 6이라는 숫자가 나와 주어야만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양문요의 어설픈 실력으로 볼 때 그의 패배란 기정 사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거나 특별한 수단이라도 쓰지 않는 한 그에게는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양문요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의 두 눈은 기이한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판에서는 이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끝장이야.' 절박한 심정이 기어이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일까? 한 손에 황금 1000냥을 들고, 다른 손에 주사위를 든 채 눈을 희번덕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상이 아닌 듯했다. 마침내 네 개의 주사위가 그의 수중을 벗어나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휘익! 찻잔 속에는 형저(螢 : 개똥벌레)가 새겨져 있었다. 이 커다란 곤충은 몸통이 녹색이며 한가운데에는 노란 띠를 두르고 있다. 날개는 황금빛이다. 배 부분은 따로 노란색이고 까만 줄무늬가 져 있다. 머리에는 길다란 뿔같이 생긴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으며, 그 끝에서 휘황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다.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청금석(靑金石)에 자연적인 색채를 살려 놓은 그 문양은 그대로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찻잔의 주변에는 비취, 마노, 홍옥수(紅玉洙), 공작선, 산호, 형석, 수정 등의 보석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 절단의 정확도 및 가공의 우수성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미세한 부분의 마감 솜씨까지도 대단한 물건이었다. 타왜일수(駝矮一 )는 커다란 돋보기를 들이대고 찻잔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을 관찰해 보아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찻잔은 분명 100년 전에 멸문한 금릉 양가보(梁家堡)의 것이었다. 양가보는 그 당시로서는 중원제일의 상벌로써, 특히 보석들을 무진장 쌓아 놓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값으로는 일일이 환산할 수조차 없는 예술작품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타왜일수는 눈을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을 응시했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을 한 미녀였다. 하지만 일신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있는 것이 처지가 그리 좋지는 못한 듯했다. 어쨌든 찻잔의 감정을 마친 타왜일수는 돋보기를 슬며시 내려놓으며 갈대꽃처럼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자신의 불룩 솟아 나온 등이 욱신욱신 쑤시는 것을 느꼈다. 이는 그가 몹시도 흥분해 있다는 증거였다. '분명 이 찻잔은 금릉 양가보에서 흘러 나온 물건이다. 황금 일만 냥을 준다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가치가 있지.' 그의 눈길이 또 한 차례 여인을 빠르게 훑었다. '이 여인은 양가보의 몇 대 후손쯤 될 것이다. 흥정은 빠르게, 최대한 이익을 남기는 선에서 해야 한다.' 그는 내심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헛, 험!" 여인이 물었다. "값은 어느 정도 쳐주실 수 있죠?"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제법 야무진 그녀의 음성을 접하자 타왜일수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올시다......?" 4 "구우우우......!" 미라보는 비둘기 울음소리 같이 처량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땀에 흠씬 젖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오늘따라 냉공소의 힘은 무자비할 정도로 강하여 시뻘건 부지깽이로 온몸을 마구 지져대는 듯했던 것이다. "꺼억!" 결국 그녀의 입 안에서는 대나무가 쪼개지는 듯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2개의 뽀얀 젖가슴은 파도를 타듯 제멋대로 출렁였다. 그 주위로는 벌써 사내의 힘에 의한 것인 듯한 멍 자국들이 무수히 나 있었다. 아마 투명할 정도로 희고 매끄러운 아랫배도 조금 후면 그렇게 되리라. 지극히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으되, 거친 손에 움켜잡힌 채 마구 비틀리고 있는 상태니까. 냉공소는 정상위가 아닌 기묘한 자세로 미라보의 몸을 타 누르고 있었다. 떡,하니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기세 좋게 율동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었다. "헉! 헉......!" 그는 이런 체위를 무척 선호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격이 낮아 순종적이며 동물처럼 다룰 수 있는 여인이 취향에 맞았는데, 이 점에서 미라보는 최적격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육체는 아름답고 기능 면에서도 우수했으니 그로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토록 마구 주물러 대도 항시 탄력이 넘쳤으며, 심신을 빨아들이는 무서운 흡입력까지도 겸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고통스러워하거나 그녀의 몸이 훼손되는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를 상대하며 이 순간을 흠뻑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냉공소는 일신의 피가 모두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듯 강렬한 쾌감에 자신을 내던진 채 오직 행위에만 몰두했다. "그으으......." 미라보는 손가락으로 침상 위를 긁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정사 중에 그의 몸을 할퀴거나 물어뜯어 흠집을 내놓는 일이 없다. 고통이든, 쾌락이든 그녀로서는 남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으므로. 그래서일까? 냉공소의 무지막지한 공략을 감당해 내면서도 그녀의 샘은 시종 마르지 않고 그를 뜨겁게 녹여 주었다. 그러던 한 순간이다. "허억!" "으버버......!" 냉공소와 미라보의 동작이 거의 동시에 멎었다. 쾌락의 정점에 이른 그들에게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극단의 희열이 유성처럼 찬란하게 쏟아 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찰나였다. 와장창......! 요란한 음향과 함께 사방의 창문이 모조리 박살나며 유리의 파편들이 허공에 난무했다. "이...... 이 무슨......!" 냉공소는 대경하여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나려 했다. 퍼억! 퍽! 마치 잘 익은 수박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허공에 피분수가 솟구쳐 오른 것은 그 때였다. 파아아아....... 핏물은 이내 자욱한 혈무(血霧)가 되어 방 안을 뒤덮었다. 비명이고 뭐고 없었다. 희대의 난봉꾼인 냉공소와 불행한 운명의 여인 미라보는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다. 방금 전에 나누었던 그들 나름의 만족스러웠던 정사는 두 사람에게 있어 생애의 마지막 행위가 된 것이었다. "내...... 내가 이겼어......!" 양문요의 얼굴은 차라리 파랗게 질려 있었다. 놀랍게도 4개의 주사위가 내보인 숫자는 6, 6, 6, 6이었다.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완벽한 점수가 나온 것이다. 주사위를 던진 양문요도 그랬지만 상대인 정염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탁자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정염산은 한 차례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세차게 내리쳤다. 쾅! "이건 속임수야! 인정할 수 없어." 길길이 뛰던 그의 동작이 일순간에 중단되었다. 쾅! 콰르르르릉! 때마침 도박장이 통째로 날아가는 듯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뭐, 뭐냐?" 극도로 신경이 곤두선 정염산이 대로하여 외칠 때였다. "아아악! 크악......!" 도박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끔찍하게도 멀쩡히 서 있던 사람들의 목이 댕겅댕겅 잘려져 수급이 이리저리 날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졸지에 사지가 절단되어 무참하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어, 어찌 이런 변고가......?" 누군가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 주인을 가려낼 수는 없었다. 장내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도박장 안에 있던 인물들은 순식간에 누구의 손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속속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눈 앞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고, 그 순간에 유부의 고혼(孤魂)이 되어 버렸다. 그들 속에는 물론 도신 정염산과 처음으로 그를 이겨 감격해 마지않던 양문요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닥쳐든 죽음은 그들의 승부조차 철저히 비웃는 것 같았다. "황금 이천 냥." 가격을 제시하는 타왜일수는 큰 인심이라도 쓰듯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여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흥! 내 몸뚱이를 파는 편이 낫겠군." "그럼 삼천 냥." "놀고 있네." 여인은 풀풀 웃었다.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내 이 자리에서 찻잔을 가루로 만들어 마셔 버리는 수가 있어요." "아니, 황금 오천 냥!" "쳇!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당신도 기본양심은 있을 테니 최소한 반값은 쳐주어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타왜일수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여우같은 년!' 그러나 그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어 그가 돈을 꺼내고자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다. 쾅! 우당탕......! 수십 명에 달하는 괴인들이 문짝을 깨부수며 느닷없이 골동품점 안으로 난입해 왔다. "무, 무엇이오?" 타왜일수가 외쳐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그의 존재를 무시한 채 폭풍 같은 기세로 밀고 들어온 그들은 한결같이 금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 한복판에는 또한 아홉 마리의 용(龍)이 수놓아져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알 만한 인물들인데, 문제는 그들의 행태였다. 파파파파팟! 그들의 손에서는 눈부신 광채가 번뜩였으며, 그 빛이 스칠 때마다 값진 골동품들은 가루로 화하고 말았다. 타왜일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대체 무슨 짓들이냐? 이게 다 얼마짜린데......!" 절규와도 같은 그의 외침은 중도에서 끊겼다. 퍽!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는 저만큼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다시 일어났다. 몸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되,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타왜일수는 피로 흥건히 젖은 손을 뻗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이제 너희들은 죽었다!' 하지만 줄은 아무리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기대한 구원과는 영 무관했던 것이다. 그 때를 기해 무엇인가 눈 앞에서 번쩍 했다. 푹! 급기야 그의 얼굴 위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이마 한복판에 새파랗게 날이 선 비수가 깊숙이 들어가 박혔기 때문이었다. 한 금삼인의 얼굴이 그의 동공 가득 쏘아져 들어왔다. 그 자는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크크...... 이 곳을 인수하러 왔다. 마지막 선물로 네가 찾는 쓸모 없는 자들을 보여주겠다." 떼구르르....... 그의 앞에서 길게 핏자국을 그으며 바닥을 구르는 물체들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0개의 수급이었다. 타왜일수는 극렬한 고통 가운데서도 순간적으로 숨이 딱 멎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10개의 수급은 그가 특별히 고용한 무사들의 것이었으므로. 그제야 타왜일수는 줄을 잡아당겨도 아무 반응이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끝났군!' 그의 눈이 천천히 내리감겼다. 동시에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의식을 통해 두 종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악! 안돼......!" "크크크크......." 그것은 앞서의 맹랑한 여인이 내지른 비명과 금삼인들의 음충맞은 웃음소리였다. '하긴 저들 모두가 나와는 상관이 없지.' 쿠웅! 타왜일수의 육신도 결국 바닥으로 무너졌다. 제9장 진짜 색골(色骨) 1 개봉부에는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곳곳에 위치하고 있던 내로라 하는 사업체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거나 잿더미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방식은 모두 같았다. 느닷없이 괴인들이 난입하여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수고 파괴해 버렸다. 그들은 살인(殺人)도 거침없이 자행했다.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인 양 도무지 거리낌이라곤 없었다. 덕분에 이전까지 대단한 규모나 화려함을 자랑하던 기루, 전장, 객점, 골동품점 등이 허망하게 스러져 갔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업체들이 모두 만금산장의 산하였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 일련의 사건들은 개봉부가 생겨난 이래 처음 있은 일로 부중의 사람들에게 더 없는 공포감을 선사했다. 만금산장과 직접적인 연고가 있건 없건 간에 그 같은 변고를 목도하고 보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대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바깥 출입을 삼갔으며 공연한 불안에 떨어야 했다. 과연? 만금산장. 현 사태를 놓고 볼 때 돌풍의 중심권이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안전을 기대한다면 차라리 희극이리라. 아닌게아니라 거기서도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만금산장의 입구를 향해 질풍같이 내닫고 있었다. 그 기세란 실로 무시무시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호장무사들은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당연히 제지시키려 했다. "서라! 어...... 엇! 아아아악!" 쾅! 외침은 비명으로 이어졌고 정문은 통째로 부서져 날아갔다. 이 때에 마차는 이미 그들을 지나쳐 간 후였다. 그 뒤에서 호장무사들은 목이 달아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되자 만금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식솔들은 물론 호위무사들까지도 우왕좌왕하며 급습을 감행해 온 적을 추적해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산장 내의 한 전각에서 불길이 일었다. 화르르르륵......! 그 전각은 금세 불덩어리로 화하고 말았다. 4월의 미풍을 타고 불길은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무엇들 하느냐? 불부터 꺼라!" 누군가가 황망히 외치자 식솔들은 되는 대로 물동이를 찾아 들고 허겁지겁 움직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상황의 진전은 그보다 더 빨랐다. 휙! 휘휘휙......! 수백여 명의 금삼인들이 담을 뛰어넘어 쳐들어오는가 싶더니 닥치는 대로 산장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콰쾅! 콰르르르....... 만금산장의 호위무사들이 나서 그들과 맞붙었으나 결과는 너무도 처참한 것이었다. "크악! 으으윽......!" 그들은 대적하자마자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금삼인들에 의해 목이 날아가야만 했다. 고막을 찢을 듯 연이은 비명성이 4월의 청명한 하늘에 끝도 없이 울려 퍼졌다. 도처에서 피분수가 치솟아 오르고 무수히 퉁겨 오르는 인육의 파편들....... 호사를 즐기는 주인을 둔 탓에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던 만금산장은 시산혈해로 화해 가고 있었다. 와중에서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중년인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는 탕왕 서문경이었다. 그는 뱁새눈으로 예리하게 주위를 살펴보더니 만족한 듯 한 차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이어 서문경은 몸소 전면을 향해 돌진해 가는 한편, 의도적인 듯 내공까지 실어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속히 백만호를 대령시켜라. 본 구룡상막(九龍商幕)이 빛을 갚으러 왔노라고." "으아아악......!" 파파팟! 꽈르릉― 그의 손이 한 번씩 뒤집어질 때마다 만금산장의 무사들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러나 서문경은 살인을 당연시하는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매달았다. '흐흐흐...... 백만호, 네놈도 대단한 호색가라지? 어디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상판대기나 한 번 보자꾸나.' 그는 분명 백만호를 불러오라고 했으면서도 묘한 호기심에 이끌려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정확히 백만호가 있는 별채로 향하고 있었다. 2 "헉! 이게 무슨 소리냐?" 백만호는 기겁을 하여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때까지도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밑에 깔려 있는 두 미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은 정사의 여운 탓인지 아직도 황홀경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과연 백만호는 지염의 덕분에 원기(元氣)를 회복했다. 따라서 오늘은 새로 들어온 2명의 미녀를 데리고 한창 질탕한 육체의 향연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밖에서 들려 온 폭음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던 그는 또 하나의 아연한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방문 앞에는 어느 틈엔지 한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는 막 아수라지옥을 뚫고 달려나온 듯 전신이 핏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 역시도 붉게 충혈된 채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백만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놈! 한창 열이 올랐었나보구나." "뭐, 뭣이?" "크크...... 그래선 안 되지. 극락경도 그렇게 아무 때나 오르내리는 게 아니다." "죽일 놈! 넌 대체 뭣 하는 놈이냐?" 백만호는 독설(毒舌)을 듣자 경황 중에도 대노했다. 그것은 상대가 누구인가를 몰라서 한 행동에 불과했다. 그 불시의 침입자는 적어도 여색에 관한 한 백만호보다 몇 수 위인 탕왕 서문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두 나녀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쩝! 꽤 쓸만한 계집들이로군. 하긴 그 정도의 계집들을 품고 있으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몰랐었겠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녀들은 한결같이 몸매가 풍만하고 매력이 넘치는 미녀들이었다. 잔뜩 공포에 질려 있는 그 모습에서조차 사내의 욕정을 부채질하는 염기가 발산되고 있었으니까. 백만호는 이를 갈았다. "네놈은 누구냐?" "크크......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군. 이 어르신은 구룡연의 황금팔상(黃金八相) 중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그...... 그럼......!" 백만호는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오한이 인 듯 일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살찐 목덜미에서는 어느덧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현 상황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서문경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틀렸다!' 백만호는 내심 체념하여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의 가느다란 눈에는 찰나적으로 악독한 빛이 스쳤다. "죽엇!" 슉! 한 자루의 날카로운 비수가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백만호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평소부터 침대 밑에 감춰 두었던 비장의 무기였다. 비수는 그대로 서문경의 왼쪽 가슴에 적중되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비수는 그의 심장에 틀어박히는 대신 퉁겨져 나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이...... 이럴 수가......!" 백만호는 자신의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비책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멍청한 놈! 내게 그 따위 쇠붙이로 장난을 하다니." 서문경은 비웃음을 흘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양 손을 뻗어 백만호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제...... 제발......." 백만호는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워, 원하는 게 뭐요? 모두 줄 테니 모...... 목숨만......."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 웃었다. "정신 나간 놈, 너 같으면 이 와중에 나를 살려 두겠느냐?" 간단한 거절에 이어 그의 두 손은 백만호의 머리를 인정 사정 없이 돌려 버렸다. 우두두둑! "크아악!" 별로 힘도 쓰지 않은 듯하건만 백만호는 두꺼운 목은 뼈가 괴음향과 함께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하여 다시 정면으로 되돌아온 그의 얼굴은 목불인견이었다. 혀가 쑥 빠져 나오고 눈이 허옇게 까뒤집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를 보며 서문경은 태연하게 읊조렸다. "금후로 누구든 구룡상막에 대항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 이번에는 수도(手刀)가 백만호의 머리 위에 작렬했다. 퍽! 그의 두부(頭部)는 폭발하듯 무참하게 으깨지며 희멀건 뇌수와 피분수를 사방으로 퉁겨냈다. 털썩! 뒤늦게 그의 거구는 침상으로 무너져 내렸다. 회춘의 묘용에 힘입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를 올리던 백만호의 몸뚱이는 그저 머리를 잃은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서문경은 두 미녀를 차례로 응시했다. "너희들은 죽이지 않겠다." "으으으......!" 그녀들은 공포로 인해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옷을 홀딱 벗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몸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서문경은 오랜만에 미녀들의 벗은 몸을 대하게 되자 벌써부터 단전부위가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이제부터 너희들의 주인은 저 돼지가 아니라 이 어르신이다." 그는 더 볼 것도 없이 두 미녀를 덮쳐갔다. "악!" "꺄아악!" 미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옆에 처참한 시체가 있고 아직도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데 무슨 감흥이 일어 일을 치른단 말인가? 게다가 새 주인을 자처하는 위인은 살인자다. "못해!" "이......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 여인들은 발작적으로 저항을 했고, 그 바람에 하얗고 날씬한 팔과 다리가 마구 허공을 저으며 요동쳤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은 폭발직전인 서문경의 욕구를 더욱 부채질할 따름이었다. "귀여운 것들! 조금만 기다려라. 네년들은 곧 진짜 극락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될 것이다. 흐흐흐......." 서문경은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한 미녀를 타고 앉아 하지(下肢)를 세차게 밀어붙이는 한편, 다른 여인의 유방을 거머쥐었던 손에 힘을 가해 그녀마저 끌어당겼다. "아악!" "흐흐흐윽......!"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다 못해 울기까지 했다. 그녀들로서는 서문경의 완력을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3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흐으으......." "하아아아!" 여인들의 흐느낌은 색채를 달리 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들은 천성적으로 피가 뜨겁기도 했지만 오래 전부터 사내들에 의해 길들여져 온 여인들이었다. 따라서 일단 몸이 달아오르자 오히려 서로 앞을 다투어 서문경의 품으로 파고드는 실정이었다. 서문경은 실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힘도 힘이었지만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의 기술(?)이었다. 덕분에 느껴지는 강렬한 쾌감이란 그녀들로서는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악......!" "으허헉!" 서문경은 두 미녀를 교대로 안으며 노를 젓듯 허리를 출렁였고, 그녀들은 그와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질 때마다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터뜨리곤 했다. "처음이야! 이런 느낌은........" "흑! 그...... 그것이야. 그렇게 좀더....... " 여인들은 어느새 부끄러움도 잊은 듯 노골적으로 그의 힘과 기술에 찬탄을 보내오고 있었다. 서문경의 기분은 이래저래 최고조에 달했다. 지금 주어진 미녀들은 그에게 일종의 전리품(戰利品)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그는 구룡상막을 떠난 이후 승승장구였다. 황금팔상은 각각 팔로(八路)로 나뉘어 금화성을 공격했으되 아직껏 한 번도 패배를 겪은 적이 없었다. '흐흐...... 이 정도면 밥값은 충분히 했겠지?' 이것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서문경의 계산이자 만족해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향후로 그는 공격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열락의 세계 속에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밖은 이미 조용해져 있었다. 중원 이대거상(二大巨商)의 싸움은 그 범위가 날로 확산되어 갔다. 구룡상막은 강북에 있던 금화성의 36개 지부를 동시에 급습했고, 그대로 싹 쓸어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금화성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짓밟히기만 하던 그들도 시급히 전력을 정비해 구룡상막과 맞섰던 것이다. 그로 인해 도처에서 재삼 무시무시한 혈전이 벌어졌다. 평화를 구가하던 중원의 비옥한 땅은 철저히 짓밟혔고, 곳곳에 위치한 푸르디푸른 강물도 핏물로 화해 갔다. 그러고도 전세는 나날이 치열해지는 추세였으니, 이는 금화성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하고 버텼기 때문이었다. 황금팔상이 이끄는 구룡상막의 전력은 워낙 막강했으며 그들을 움직이는 작전(作戰) 또한 너무도 치밀했던 것이다. 가히 천번지복(天飜地覆)이랄까? 그들 이대 상벌의 싸움으로 인해 중원의 대륙은 한바탕 거창하게 뒤집히고 있었다. - 다음 권에 이어짐 - 구인회 후편 표지 제목: 구인회 후편(전2권) 지은이: 검궁인 - 차 례 - 제10장 탕미인(蕩美人) 제11장 또 하나의 얼굴 제12장 경동천하(警動天下) 제13장 확전(擴戰) 제14장 고해성(苦海城)의 비사(秘事) 제15장 함정(陷穽) 제16장 배신(背信)의 역사 제17장 차도살인(借刀殺人) 제18장 부활(復活) 제19장 흔들리는 불회곡(不廻谷) 제20장 혈루무정지곡(血淚無情之曲) 제10장 탕미인(蕩美人) 1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성(城)은 어디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황제가 사는 자금성(紫禁城)을 꼽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상에서 자금성보다 화려한 성은 없을까? 세상은 넓다. 드넓은 세상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개중에서도 부(富)의 척도로 본다면 자금성을 능가하고도 남는 집단이 있다. 금화성(金華城)이 바로 그곳이다. 금전옥루(金殿玉樓)! 말 그대로 금으로 지은 대전과 옥으로 쌓은 누각이 첩첩이 처마를 맞대고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성이 있다. 5월의 싱그러운 햇살 아래 날렵하게 치솟아 오른 황금빛 지붕이 사방에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다. 붉은색의 기둥들은 위엄을 과시하듯 위풍당당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으며, 곳곳에 솟아 있는 누각에는 금박을 입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는 잘 가꾸어진 화원(花園)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원에 심어져 있는 화목들은 하나같이 중원에서는 보기 드문 희귀종들로 대부분 천축(天竺)이나 동영(東瀛) 등에서 옮겨다 심은 것들이었다. 금화성 내에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비취빛 물결이 미풍에 살랑살랑 춤추는 호수는 인공호수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방대했다. 그 위에 배를 띄우면 건너편까지 가는 데 한 식경이 걸릴 정도로 넓었다. 금화성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은 금화성은 건물 하나하나가 신의 조각품인 양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쪼르릉...... 쭁! 쫑! 어디선가 청아한 새 소리가 들려 온다. 금화성의 아름다움과 잘 어울리는 자연의 소리였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늑하기만 했다. 마치 속세를 초탈한 듯한 고답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누가 알겠는가? 화려한 금화성 내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공할 음모(陰謀)를....... 밤. 흐릿한 달빛이 금화성을 비추고 있다. 금화성 한가운데 있는 7층의 별각으로부터 불빛이 흘러 나오고 있다. 별각의 창가에는 1명의 화복중년인(華服中年人)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큰 키에 약간 마른 체구였으나 강인한 기질이 엿보이는 인상이다. 중년인은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넓은 어깨에서는 대인(大人)의 풍도가 느껴졌다. 방 안은 화려했다. 장식품과 양탄자는 모두 최고급이었다. 중년인의 뒤에는 뚱뚱한 체격의 인물이 부복하고 있었다. 어찌나 뚱뚱한지 마치 공처럼 느껴졌다. 나이는 오순 가량, 일신에는 청삼을 입고 있었다. 중년인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한 달 사이에 삼십육 개 강북지부를 모두 잃은 셈인가?" 청삼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주(城主)." 아! 그렇다면 중년인이 바로 금화성주인 뇌만령(雷萬靈)이었단 말인가? 뇌만령은 문득 너털웃음을 흘렸다. "헛헛! 담(覃) 총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이란 너무 빨랐다고 생각지 않소?" 청삼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놈...... 놈들의 위세는 상상 밖이었습니다." 천수무영(天手無影) 담수문(覃受門). 청삼인의 명호였다. 그는 과거 뛰어난 무공과 지략으로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다. 하지만 너무 뛰어나면 적이 많은 법이다. 그의 주위에는 끊임없이 시비가 일었으며 숱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런 그가 금화성에서 총관으로 있다니......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담수문은 금화성주 뇌만령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구룡상막이 전격적으로 금화성과 대립하기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금화성의 독주(獨走)에는 제동이 걸렸고, 곳곳에서 패퇴를 거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담수문은 밤잠 한 번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다. "우리측 피해는?" "액수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둘 다!" 담수문은 움찔했다. 뇌만령의 음성이 높아진 것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황금 일억 팔천만 냥에 해당하며...... 인명은...... 도합 삼천육백 명 정도가 사상했습니다." 뇌만령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허허....... 그 정도면 복구불능이로군." "......." 담수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굵은 땀방울이 연신 양탄자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뇌만령은 빙글 몸을 돌렸다. 비로소 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희다 못해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에 눈썹은 짙게 뻗어 양쪽 관자놀이까지 힘차게 뻗어 있었고 그 아래 자리잡은 눈은 별처럼 차가웠다. 우뚝 솟은 콧등과 굳게 다물린 입술에서는 치열한 삶을 살아온 자가 투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단정하게 깎은 검은 수염은 곱게 손질되어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냉혹하면서도 비정한 면이 엿보였다. 문득 뇌만령의 눈에서 전광 같은 빛이 뻗어 나왔다. "하지만 천상교(天上敎)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겠지." ".......?" 담수문은 의혹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늘 그렇지만 뇌만령을 정면으로 대할 때마다 그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금화성에 투신한 이후 무수한 공을 세웠다. 뇌만령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는 분명한 선(線)이 그어져 있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담수문은 뇌만령과의 사이에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뇌만령에게는 분명 비밀이 있었다. 총관인 자신조차 모르는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혜라면 강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담수문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뇌만령은 수중의 비단섭선을 저으며 말했다. "물러가라." "네!" 담수문은 공손히 절을 한 후 물러났다. "......." 뇌만령은 창문을 열었다. 창 밖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금화성의 야경(夜景)은 불야성을 이루어 휘황한 불꽃의 축제를 보는 듯 황홀하기까지 했다. 금화성은 강남(江南)을 거점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어언 150년이란 세월을 지상 최고의 상단(商團)으로 군림해 왔다. 그 저력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72개의 지부를 거느리는 막강한 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무수한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따라서 뇌만령의 삶도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는 상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그는 금화성을 승계한 후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각박한 투쟁의 와중에서 삶의 희의를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지금 금화성의 야경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은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난관을 헤쳐왔던 지난 세월 동안의 삶이 밀려와 그의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빛이 뿌예졌다. "본성은...... 뇌가(雷家) 대대로 이루어 놓은 기업이었다."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이때였다. "아버님." 문 밖에서 한가닥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뇌만령은 흠칫하더니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아(翔兒)냐?" 문이 조용히 열렸다. 사르륵! 비단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향긋한 체취가 감돌았다. 이제 17~18세쯤 되었을까? 자의(紫衣)를 입은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아미월(蛾眉月)처럼 우아한 눈썹에 오뚝한 콧날, 꽃잎을 문 듯 붉은 입술, 호수처럼 크고 맑은 눈동자는 바라보는 순간 빨려들 듯 심연을 느끼게 했다. 탈속한 듯 청초하게 느껴지는 소녀였다. 소녀는 자줏빛 궁장을 입고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한 난향(蘭香)이 풍기고 있었다. 이 소녀야말로 뇌만령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아끼는 장중보옥인 뇌현상(雷絢翔)이었다. "웬일이냐? 이 밤중에?" 뇌현상을 바라보는 뇌만령의 눈에는 자애가 흘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수만 명에 달하는 수하들에게 항상 철혈(鐵血)의 인상만을 풍겨왔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고독과 강인함만이 풍기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표정은 지극히 부드럽기만 했다.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대상을 앞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무남독녀인 뇌현상을 유독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5년 전에 죽은 아내의 모습을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뇌현상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아니, 생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를 유일하게 지탱해 주는 신념이자 불꽃과 같은 존재였다. 뇌현상은 그에게 다가오더니 가냘픈 팔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 "너무 상심 마세요. 금화성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그 말에 뇌만령의 텅 비었던 가슴이 일시에 기쁨으로 충만했다. "허허! 그래, 네 말이 맞다. 본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서로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부녀(父女). 그들의 가슴에는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정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뇌현상의 얼굴에 자책감이 떠올랐다. "모두...... 못난 저 때문이에요." 뇌만령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다. 네가 불치병에서 살아난 것만 해도 이 아비는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 뇌현상의 눈에 맑은 이슬이 비쳤다. "아아! 그렇지 않아요. 소녀의 목숨은 아직도 그에게 달려 있어요." 순간 뇌만령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래서 이 아비가 이렇게 참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뇌현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버님......." 뇌만령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 내가 흥분했구나. 네 어미를 잃은 후...... 난 너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는 뇌현상의 좁은 어깨를 토닥였다. "상심하지 마라. 아비는 쓰러지지 않는다. 언제고 그 자에게 복수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였다. "성주,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오." 갑자기 어디선가 차분하고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 뇌현상은 뇌만령의 품에서 물러나며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단아한 인상의 문사로 나이는 대략 27~28세 정도로 보였다.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나 오관이 뚜렷한 용모는 기이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특히 청년문사의 눈은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무궁무진한 지혜가 담겨 있는 듯, 천하를 한눈에 담고 있는 듯 뛰어난 오성과 지성이 느껴졌다. 창백한 낯빛과는 대조적으로 흑색 유삼에 머리에도 검은 유건(儒巾)을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역시 검은색의 섭선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문사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상매(翔妹), 오늘 밤은 유난히 아름다운 것 같군." 순간 뇌현상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문사는 그녀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뇌현상의 고운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아아! 미운 사람...... 꼭 이래야만 하나요?' 문사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녀의 서늘한 두 눈에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표정을 발견한 뇌만령은 흠칫했다. 그의 몸에 가벼운 전율이 스쳤다. '호...... 혹시 이미 저놈이 상아와.......' 흑삼문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성주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 "뇌옥에 가두어 두었던 영호전(令弧典)은 어찌 되었소?" 뇌만령은 흠칫했다. "......" 흑삼문사의 두 눈에 섬뜩한 냉기가 흘렀다. "이미 조사해 보았소. 그 자는 언제부터인가 가짜로 바뀌어져 있었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뇌만령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백치(白痴)가 되었소. 본래 노부는 구룡상막과 화기를 상하고 싶지 않았소. 이미 백치가 된 아이를 더 괴롭혀야 뭐하겠소? 그래서......." 흑삼문사의 얄팍한 입술에 조소가 어렸다. "훗훗! 그래서 밖으로 내보냈단 말이오?" "......." 문득 흑삼문사는 싸늘한 음성으로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라!" "......?" 뇌만령의 안색이 변했다. 문이 열리며 2명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하나의 관을 떠메고 있었다. 그것을 본 뇌만령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열어라." 흑삼문사의 명이 떨어진 순간 관뚜껑이 열렸다. "......!" 뇌만령은 숨을 들이켰다. 관 속에는 한 청년이 누워 있었다. 청년은 시리도록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영호전!" 뇌만령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렇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청년은 영호전이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심장 부위에 한 자루의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그의 죽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흑삼문사는 냉소를 흘렸다. "후후! 영호전은 죽었소. 몇 달 전 성주가 비밀리에 탈출시켰을 때 말이오." 뇌만령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자네는......." "날 악독하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의 신조요." 그는 정색을 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현재 구룡상막에 있는 영호전은 또 누구냐는 것이오." "......?" "후훗....... 당금의 구룡상막을 움직이는 것은 새로운 상주가 된 영호전이란 말이오." 흑삼문사의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내가 이 자의 시신을 가져온 이유는 성주께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라는 것이오." 뇌만령은 한동안 격동의 표정을 짓다가 관으로 다가갔다. 뇌현상은 파랗게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부욱! 잠시 영호전을 내려다보던 뇌만령은 그의 가슴 옷자락을 찢어냈다. 그러자 영호전의 가슴팍 속살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선명이 찍혀 있었다. 뇌만령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트...... 틀림없는 영호전이오." 흑삼문사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그렇다면......." 그의 비상한 두뇌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2 이곳은 구룡연. 영호전은 속속 답지하는 밀서를 읽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화무쌍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호호! 이로써 구룡상막은 지난날의 영지를 모두 되찾았군요." 영호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그는 밀서들을 한 켠으로 치우며 일어섰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화무쌍을 바라보았다. "모두 무쌍 덕분이지." 화무쌍은 배시시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모두 가가의 능력이에요." "과연 그럴까?" "......?" 심상치 않은 영호전의 말에 화무쌍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영호전은 그녀를 지나쳐 창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문득 유성이 꼬리를 태우며 어디론가 떨어져 내렸다. 영호전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무쌍,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생각이 들곤 했다." "......?"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 "가가......?" 화무쌍은 그의 뒤로 다가가 두 손을 벌려 넓은 등을 껴안았다. 영호전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후훗! 나도 모르겠어.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 말이다." 그는 돌아섰다. 화무쌍은 그를 올려보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막 입술을 벌리려는 순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영호전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아!' 화무쌍은 전율을 느끼며 발끝을 올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영호전의 목을 껴안으며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했다. 영호전은 그녀의 입술을 헤집고 혀를 밀어넣고 있었다. 그는 샘물을 찾듯 그녀의 입 안으로 유영해 들어왔다. 혀와 혀가 얽혔다. 두 사람은 서로의 혀를 탐닉하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젊디젊은 남녀의 육체는 쉬 달아오른다. 한없이 깊은 샘을 찾아 유영하던 사내의 혀는 보다 더 궁극의 환희를 찾으려는 듯 몸부림쳤다. 그에 따라 무르익은 여체는 급격히 달아올랐다. 노골적인 입맞춤에 화무쌍은 온몸이 녹아 내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이상해...... 이 분이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그녀는 온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행여 떨어질세라 영호전의 목을 강하게 껴안았다. 짜릿한 흥분이 온몸을 태우는 듯했다. 영호전은 계속 격렬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폭풍처럼 토해지는 그의 입김에 화무쌍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듯한 느낌에 신음을 토하기만 할 뿐이었다. 문득 영호전의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터질 듯 영근 그녀의 젖가슴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듯하더니 강하게 움켜쥔다. "아!" 화무쌍은 신음을 발했다. 그러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거부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목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영호전은 조급한 듯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정열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킨 듯했다. 스르륵....... 마침내 화무쌍의 몸에서 상의가 흘러내렸다. 영호전은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는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젖가슴을 찾아 힘껏 움켜쥐었다. "흑!" 화무쌍은 휘청거렸다. 온몸의 힘이란 힘은 다 빠져 버려 허물어져 내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영호전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어 그의 팔에 몸을 의지하며 간신히 서 있을 수가 있었다. 영호전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에서 허리로, 다시 둔부로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 늘 점잖기만 하던 영호전의 뜨거운 손길을 기다리며 끓는 몸을 다스려야만 했던 날들....... 그녀는 온몸이 해파리처럼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문득 허리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고개가 뒤로 떨어졌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창 밖으로 달이 보였다. 그 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활처럼 휘어진 여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영호전은 그녀를 한 손으로 안은 채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거침없는 그의 입술이 유실(乳實)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달빛이 흔들린다. 들끓는 여체도 마구 흔들렸다. 영호전의 목을 감쌌던 여인의 두 손이 힘없이 풀리며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알 수 없어....... 왜 이렇게 힘이 하나도 없는 거지......? 화무쌍은 나른함을 느꼈다. 어느새 그녀는 반라가 되어 있었다. 영호전의 입술은 그녀의 사슴같이 가냘픈 목을 훑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마치 불덩이 같았다. 불덩이가 목을 타고 내려와 젖가슴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경련을 일으켰다. 허공을 휘젓던 손이 영호전의 머리카락 속으로 틀어박혔다. "아....... 안돼......."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의 손은 더욱 더 영호전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은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난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관능의 화신으로 화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그녀는 열뜬 상태에서 생각했다. 그녀의 몸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호전의 손은 그녀의 둔부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녀의 깊은 곳에 있는 샘에서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 물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하아아!" 그녀는 몸을 활처럼 휘며 허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영호전은 성급하게 그녀의 치마를 벗기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영호전의 귓전에 누군가의 코웃음 소리가 들린 것은! "흥......!" 그것은 여인의 코웃음 소리였다. 영호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이었다. 휘이이이잉! 차가운 밤바람이 방 안으로 가득 밀려들자 화무쌍은 비로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그녀는 황급히 몸을 살펴보았다. 능라의가 거의 벗겨져 다리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옷을 끌어올렸다. 방금 전의 일이 꿈만 갔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분이...... 무공을 알고 있었다니!' 그렇다. 분명 영호전은 놀라운 경신술로 창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던가? 그녀는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교구를 홱 틀더니 창 밖으로 날아갔다. 3 명료한 달빛이 사위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 아래 한 줄기 인영이 밤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영호전이었다. 그는 구룡연을 벗어나 산중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벌써 이백여 리를 쫓아왔는데 결국 놓치고 말았다. 정말 놀라운 신법이다.' 사실이었다. 그는 코웃음 소리를 듣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서쪽을 향해 달아나고 있는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추격하기 시작했다. 인영의 신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산기슭에 이르러서는 그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 그는 한 유곡(幽谷)으로 들어와 있었다. "......!" 유곡에 내려선 순간 그는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계곡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모를 꽃들이 끝없이 깔려 있어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달빛은 꽃 위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꽃들은 마치 사금파리가 햇빛에 반짝이듯 빛나고 있었다. 문득 그는 화향이 너무 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꽃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한 곳이야.' 그는 다발로 늘어져 있는 붉은 꽃을 꺾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한데 그의 손이 꽃에 닿은 순간. 스스스스! 문득 안개가 뿌옇게 서리는가 싶더니 꽃잎이 허공에 휘날렸다. "......!" 그는 깜짝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꽃잎은 허공에서 회오리치더니 여러 개의 형상으로 맺혀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넋을 잃었다. 거짓말처럼 20여 명의 여인들이 꽃밭 사이에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하나같이 고혹적인 미녀들이었다. "호호호호......." 여인들은 그를 향해 다가오며 요염한 웃음을 터뜨렸다. 영호전은 비로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으음! 이제 보니 화진(花陣)에 걸려들었구나. 대체 누가 이곳에 진법이 설치해 두었을까?' 그는 얼마 전 구양무종과 함께 10인의 이인들을 만나러 태행산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절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화진을 보고 금세 느껴지지는 바가 있었다. 세간에 알려지듯 진법은 허(虛)를 실(實)로 위장한 것이 틀림없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허상만은 아니었다. 진법을 경시하다가는 위경에 처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꽃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무나 사실 같구나.' 그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화진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호호호......." "깔깔깔!" 심금을 뒤흔드는 여인들의 교성이 사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더욱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 그는 문득 단전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엉덩이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들고 있는 여인들의 자태가 너무나 요염했던 것이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터질 듯이 풍만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속살이 은은히 비쳐 보이는 망사의를 입고 있어 여체의 굴곡이 완연히 느껴지는 차림이었다. 학처럼 긴 목 아래로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젖가슴, 한 줌이면 쥐어질 듯 가느다란 허리, 그 아래로 급격히 굵어진 둔부와 대리석처럼 쭉 뻗어 내린 다리....... 가히 일국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매혹적인 여인들이었다. '안돼! 모두가 허상일 뿐이다.' 영호전은 내심 부르짖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때였다. 펄럭! 하며 허공에 일제히 흰 천이 나부꼈다. '음!' 그는 신음을 흘렸다. 20여 명의 여인들이 일제히 망사의를 벗어던진 것이다. 달빛이 무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눈부시게 흰 여인들의 살결로 인해 주변은 온통 육향(肉香)이 코를 찌르는 듯했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성숙한 여인들의 나신이 춤추듯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여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호호호호......!" 여인들은 그를 에워싸고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으으......." 영호전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선 채 부릅떠져 있었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젖가슴과 여인들의 허리 아래로 무성하게 우거진 비림(秘林),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입술을 혀로 핥아대는 고혹적인 모습....... 영호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분명 눈을 감았는데도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유곡의 꽃밭에서 맡았던 향기! 그것은 바로 미혼분(迷魂粉)이었던 것이다. 벗어나야 했다. 한시라도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이 악마의 유혹을 뿌리는 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는 얼어붙었고, 혈관 속의 피는 들끓었으며, 마음속에서는 무수한 욕망이 일어나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손을 뻗고 있었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가슴을 내밀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잡으려 했다. "호호호!" 그런데 여인은 까르르 교소를 흘리며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영호전의 눈은 더욱 충혈되었다. 달아나는 여인의 희뿌연 엉덩이가 더욱 욕망을 부채질한 것이다. 여인은 대리석 같은 다리를 흔들며 달아나고 있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달덩이 같은 엉덩이 사이로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으으!" 마침내 영호전은 야수(野獸)처럼 신음을 흘리며 달려갔다. 그는 두 손을 휘저으며 여인들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잡힐 듯 말 듯 여인들은 그의 손아래서 달아나며 더욱 그를 유혹했다. 그는 좀더 빨리 움직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무거웠다. 마치 다리에 납덩이라도 단 듯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너무도 무거웠다. 게다가 목이 타 들어가는 듯 갈증이 일었다. "호호호호......!" "헉헉......." 영호전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는 꽃밭을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환영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한동안 뛰어다녔지만 그는 유곡 안에서 빙빙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더불어 여인들의 머리카락 한 올 잡지 못했다. "......!" 영호전은 숨이 턱이 닿아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는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자 저만치 달아나던 여인들이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그를 향해 손짓하며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영호전은 다시 힘을 내서 여인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제 그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었고, 관자놀이에는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랫도리는 팽창할 대로 팽창해 있었다. 더 이상 참는다면 혈관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으으...... 아아!" 포효하듯 괴성을 발하던 그는 신형을 휙 날려 한 여인을 끌어안았다. 기이하게도 여인은 달아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손 안에 잡힌 여인의 가슴은 녹아 내릴 듯 부드러웠다. "흐으응." 여인은 콧소리를 내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뱀처럼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껴안고 온몸을 비틀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에 횃불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여인의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옥같이 하얀 치아가 보였다. 영호전은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입술이 마주친 순간 수밀도 같은 향기가 더욱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희열에 몸을 떨며 여인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때였다. 퍽! 문득 그의 등에서 둔중한 격타음이 울렸다. "흑!" 영호전은 비명을 발하며 쓰러졌다. 그는 꽃밭에 코를 박은 채 엎어졌다. 요혈을 당해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20여 명의 여인들이 안개처럼 흐려지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환상 같은 일이었다. "......." 언제 나타났는지 영호전의 곁에는 1명의 흑의여인이 서 있었다. 푸른 달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요화(妖花)― 그것이었으니...... 가히 전율이 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흑의여인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반듯한 이마는 옥같이 희고 눈동자는 꿈꾸는 듯 신비롭기만 했다. 꽃 속에 서 있으되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20여 세 정도 되어 보였다. 흑의여인의 붉은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하마터면 잡힐 뻔했어. 경신술이 그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지. 호호...... 하지만 이 탕미인(蕩美人)을 잡을 수야 있나?" 탕미인. 그녀는 바로 영호전에게 쫓겼던 인영이었다. 그녀는 영호전을 이곳으로 유인해 온 것이었다. 탕미인은 그를 안아 들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반듯한 바위 위에 눕혔다. "......." 그녀는 의식을 잃은 영호전을 한동안 내려보았다.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영호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본래가 영준한 외모는 그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탕미인은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기이한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한 가닥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는 것이었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아아....... 모르겠어. 이 자가 과연 그 분이라면...... 하지만 어찌하여 얼굴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발한 탕미인은 섬섬옥수를 뻗어 영호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 코, 입....... 보면 볼수록 준수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영호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영호전은 알몸이 되었다. 달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알몸의 사내를 내려보면서도 탕미인은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요요롭게 빛나는 눈으로 영호전의 나신을 자세히 관찰하기까지 했다. 영호전의 몸에는 알맞게 발달한 근육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나치게 강하지도, 유약하지도 않은 몸매였다. 탕미인의 눈이 한 곳에서 멎었다. 가슴이었다. 그곳에 뚜렷하게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나 있었다. 탕미인의 안색이 흔들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7개의 점을 어루만졌다. 무척이나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그녀는 눈길을 돌려 이번에는 영호전의 하체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이 사내의 상징에 고정되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징. 여인의 몸으로 그 부분을 바라본다는 것은 여간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힘들 것이다. 탕미인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아! 이것으로는 모르겠어......." 그녀는 붉은 입술을 잘끈 씹었다. "할 수 없지. 환상만음묘법(幻想萬音妙法)으로 확인해 볼 수밖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계곡에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4 영호전은 정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일신에는 백의유삼을 입고 손에는 섭선을 가볍게 쥔 그의 모습은 절세의 미공자였다. "......."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간 듯 멍하기만 하다. 지금 정자 주위에는 끝없는 화원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앞으로 다투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득 어디선가 비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딩...... 디디딩...... 디딩! "......!" 몽롱하기만 하던 영호전의 눈에 반짝 이채가 솟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그는 눈을 반쯤 내려 감았다. 마치 비파음을 감상하려는 듯이. 스스! 가볍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원의 꽃이 흔들리더니 한 여인이 꽃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비파가 안겨져 있었다. 눈부신 5월의 햇살이 화원을 비추는 가운데 여인은 화원 한가운데서 비파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띵...... 디디딩....... 섬섬옥수가 현을 퉁길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 나왔다. 비파의 선율은 마치 꽃들이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아니, 꽃밭 사이에서 마주 보고 있는 선남선녀가 사랑의 밀어(蜜語)를 나누는 듯 달콤하게 울려 퍼졌다. "......." 영호전의 반개한 눈빛이 더욱 몽롱해졌다. 비파의 선율은 그의 심연(深淵)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는 아득한 과거로 여행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한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청년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야! 누굴까? 혹시...... 내가 아닐까? 한데 왜 나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단 말인가? 마치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어!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다. 그 청년을 바라보고 있는 또 1명의 청년이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다니? 청년의 얼굴 주위에는 안개가 한 겹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어. 대체 저 자는 누구지? 또 나는? 나란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으으....... 고통스럽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이 고통......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을 빙빙 맴돌기만 하는 어지러운 환상들...... 도무지 실체를 이루어낼 수 없는 환상들이 난마처럼 엉키기만 해....... 디디디딩! 문득 비파음이 높아졌다. 날카로운 고음(高音)이 영호전의 고막을 두들겼다. 영호전은 눈을 번쩍 떴다. 청년이 갑작스럽게 그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는 심장이 터질 듯이 압박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억누른 채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그러나 비파음은 그치기는커녕 더욱 더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고통도 더욱 가중되었다. "으아아아......!" 그는 이제 가슴을 움켜쥔 채 정자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그의 입과 코, 귀로 가느다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화원 한가운데 서서 비파를 탄주하고 있던 여인의 안색도 창백하게 탈색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여인은 입술을 질끈 물더니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한데, 비파의 현을 뜯는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띵! 놀랍게도 현이 끊어지고 말았다. "크으윽!" 비명은 영호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말았다. "아아......." 여인은 절망의 탄식을 발했다. 그녀의 손에서 비파가 떨어져 꽃 사이에 나뒹굴었다. 여인은 온몸의 힘이 모두 빠진 듯 휘청거렸다. ...... 끝이야! 여인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때였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기척도 없이 인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바로 탕미인이었다. "바보 같은 것!" 탕미인의 입에서는 경멸에 찬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사...... 살려주세....... 악!" 비파를 탄주했던 여인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정수리 위에 흰 손이 떨어진 것이다. 퍽! 그녀는 두개골이 으스러진 채 즉사하고 말았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선혈을 뿌리며 꽃 사이로 나뒹굴고 말았다. 방금 전 그녀가 떨어뜨린 비파와 운명을 함께 하고 만 것이다. 탕미인의 눈빛은 비정하기만 했다.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여인의 시신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네 능력이 부족해 죽은 것이니 날 원망 말아라." 그녀는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정자 위에는 영호전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탕미인은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할 수 없이 마지막 방법을 쓸 수밖에." 마지막 방법이라니? 탕미인은 영호전을 안아 들더니 교구를 날렸다. 건장한 사내를 마치 지푸라기처럼 가볍게 안은 그녀는 꽃밭 위를 스치듯 날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11장 또 하나의 얼굴 1 화려하게 장식된 상아침상 위에 두 남녀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영준한 얼굴에 균형 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여인은 가히 폭발적인 미태(美態)를 지닌 절세미녀였다. 윤기나는 긴 머리카락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있었으며, 2개의 젖가슴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피부는 빙결(氷結)처럼 투명했다. 허리는 한줌에 쥘 듯 가늘었으며 그 아래로는 팡파짐하게 퍼진 둔부가 성숙한 여인의 관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귀엽게 패인 배꼽과 가부좌를 튼 미끈한 다리, 그 사이로 삼각주(三角洲)를 이룬 여인의 비문에는 검은 숲이 짙게 우거져 있었다. 탕미인이었다.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사내는 영호전이었다. "......." 그녀의 눈빛은 기이한 열기를 뿜고 있었으나 영호전은 정반대였다.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탕미인은 영호전의 몸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나신을 이토록 거침없이 바라볼 수 있는 여인은 아마도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열기를 띠고 있었으나 반면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기도 했다. 열정(熱情)과 냉정(冷靜)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여인. 역시 탕미인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탕미인의 입에서 한 가닥 요요로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문을 열라....... 마음의 문을......." 영호전의 표정은 여전히 몽롱했다. "모든 것을 벗어 던져라.......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알아야만 한다. 이 지선교주(地仙敎主) 탕미인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미미하게 영호전의 눈빛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라....... 그대에게는 원치 않는 금제(禁制)가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고 있다. 이제 그 빗장을 풀고 자신에게도 돌아가야 한다......." 탕미인의 주술(呪術)은 무서운 흡인력을 보이고 있었다. 영호전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으으......." 영호전은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그에 따라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느낌들이 가슴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둘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편린들을 모아보려고 해도 자꾸만 흩어질 뿐, 제대로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환영처럼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듯했다가는 다시 와르르 허물어져 버리곤 하는 것이다. "으으으...... 안돼......." 영호전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그의 기억을 방해하고 있는 듯했다. 탕미인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뻗어 영호전의 목을 어루만지며 다시 주술을 외웠다. "그대의 목을 조이는 마수(魔手)에서 벗어나라......... 마수로부터 억제된 기억들을 끄집어내라......." 그녀의 눈빛은 더욱 더 차갑고 요요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동안 그녀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영호전의 목에서 가슴으로, 옆구리로, 마치 애무하듯이 어루만져 나갔다. "잠든 혼(魂)을 일깨워라........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깊고 깊은 정으로 그대의 여인을 떠올려 보라....... 그녀의 이름은 탕미인...... 탕미인...... 일어나라........ 그대의 가슴속에 아름답게 깃들여 있던 여인의 이름 탕미인...... 탕미인......." "헉!" 영호전은 입술을 벌렸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뚫어져라 마주 앉아 있는 탕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상한 열기가 가득 퍼지고 있었다. 탕미인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더욱 요요로운 안광을 발산했다. 영호전의 안색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탕미인의 나신을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동자에는 점차 욕정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탕미인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의 전신을 애무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성공이야.......' 탕미인의 입술에 관능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 앞에 있는 여인을 보라........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대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여인이다....... 그대는 날 알고 있다........ 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대의 여인을 맞아들이라......." 영호전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그 사이 탕미인의 손은 그의 허리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영호전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볍게 밀어넣었다. "......!" 영호전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사나이의 상징을 거머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남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그녀의 손길이 닿자 변화를 보였다. 갑자기 무섭게 팽창한 것이다. "헉!" 그는 뜨거운 신음을 발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탕미인의 눈빛이 더욱 요염하게 변했다. 그녀는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며 몸을 기댔다. 매끄러운 여체가 닿자 영호전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탕미인은 더욱 노골적으로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맞아들여요. 그대의 여인을......." 와락! 마침내 영호전은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들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귀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와르르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탕미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 여인, 어디 많이 본 듯한데...... 어디서 보았을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문득 또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다시 얼굴이 흐려지고 말았다. 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으으......." 탕미인의 얼굴을 놓아 버린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을 흘렸다. 탕미인은 더욱 그의 품으로 몸을 던지며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애무는 그의 욕정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그대는 분명 알고 있다....... 그대의 여인...... 그녀와 함께 나누었던 뜨겁고 달콤했던 날들을 기억해요....... 그대는 분명 날 알고 있어요......" "흐윽!" 영호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그는 성급하게 탕미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니, 애무라기보다는 거칠게 그녀의 몸을 움켜쥐며 더듬어대고 있었다. 그의 손이 탕미인의 유방을 움켜쥔 채 힘을 가하고 있었다. 탕미인의 얼굴에 고통과 희열의 빛이 교차했다. 그녀는 영호전을 뒤로 넘어뜨린 뒤 그 위로 올라탔다. 여상위(女上位)의 자세가 된 것이다. 말 타듯 영호전의 몸에 올라탄 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호전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흐으......!" 그는 입을 벌려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전신의 혈관을 부풀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말할 수 없이 혼돈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영상들이 빠르게 스쳐 가고 있었다. 마치 주마등처럼 빙글빙글 도는 영상들은 언제가 한 번씩은 만났던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 기억들이었다. 탕미인은 허리를 움직였다. 부드러운 둔부로 그를 압박하며 온몸으로 그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한 번 불붙은 영호전의 욕망을 놓아 버린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욕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영호전은 온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랫도리로 몰리는 뜨거운 열류는 단전과 혈맥을 파괴시킬 듯했고, 머리로는 수많은 기억들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었다. 그 두 가지 기운이 그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앗!" 탕미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영호전이 그녀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녀는 아래로 깔렸고 영호전의 육중한 몸이 그녀를 눌렀다. 그녀는 입술을 딱 벌렸다. 영호전이 그녀를 짓이길 듯 밀어붙인 것이다.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를 껴안았다. 그녀 역시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돼. 차녀섭혼대법(借女攝魂大法)의 마지막 단계를 끝내기 전에 흔들리면 모든 게 끝장이야. 조금 더 힘을.......' 그녀는 내력을 돋구며 다시 주문을 외웠다. "암흑의 진창 속에 떨어져 버린 이름을 기억하라. 그대의 영혼을 일깨워 주는 이름, 그 이름을 외쳐 보라. 그대가 잃어버린 그 이름...... 용대형(龍大兄)을 외쳐 보라......!" "......!" 영호전의 눈을 부릅떠졌다. 그는 크게 부르짖으며 전신을 부르르 떨어다. 용(龍)...... 대(大)......형(兄)......! 영호전의 내면을 비집고 터져 나온 외침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기억들을 한 순간에 하나로 관통해 버렸다. 그의 몸이 폭풍을 맞은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꽝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경련을 멈추더니 뚫어져라 탕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이번에는 탕미인이 눈을 크게 떴다. 영호전의 눈 속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광채가 솟아 나온 것이다. 그녀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의 물결이 전신을 관류하고 있었다. '됐어! 이제 잠시 후면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때 그녀를 내려다보던 영호전의 입술이 열렸다. "나....... 난......." 탕미인의 눈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영호전은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악!" 탕미인도 비명을 질렀다. 느닷없이 영호전의 몸이 움직였고 그 바람에 그녀의 깊은 비문으로 그의 남성이 입성해 버린 것이다. 그녀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일순간 두 남녀의 몸이 하나로 합쳐졌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연결된 남녀의 몸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 조용했다. 남과 여의 육신은 하나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탕미인의 눈빛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조금씩 영호전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깊고 깊은 내부로 들어와 부드럽게 유영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온몸이 해파리처럼 풀어지더니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이상해. 차녀섭혼대법을 펼칠 때는 결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때였다. "학!" 그녀는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발했다. 갑자기 자신의 몸 깊은 곳으로부터 순음지기(純陰之氣)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실로 가공한 속도로 그녀의 내력과 순음지기가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진원지기는 무섭게 빠져 나갔다. 반면 영호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순음지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기실 그의 체내에는 아직 녹지 않은 내력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탕미인의 순음지기와 합쳐지자 용해되면서 전신의 혈맥을 따라 운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신의 내력과 탕미인에게서 흡수한 순음지기가 용해되면서 무섭게 팽창한 진기는 단전을 거쳐 관원혈(關元穴)을 통과했고 곧이어 임맥을 따라 상승했다. 석문(石門), 기해(氣海), 음교(陰交), 신궐(宸闕)을 거친 진기는 계속 거침없이 혈맥을 따라 돌았다. 수분(水分), 하원(下院), 건리(建里)를 지나 중원(中院), 상원(上院)으로 이른 진기는 점점 더 증폭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몸은 뜨거웠다 차가웠다 수시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순음과 순양의 진기가 교차하기 때문이었다. "하악......!" 탕미인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썰물처럼 본신의 진원지기가 빠져 나가면서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 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불가항력이었다. 그 순간에도 영호전은 그녀와 결합된 채 거칠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진원지기는 더욱 빠르게 흘러 나가고 있었다. 이제 두 가닥의 성질이 틀린 진기는 영호전의 목 부위에 있는 천돌혈(天突穴)을 지나 단기(斷基)를 통과하여 독맥(督脈)으로 흘러들어갔다. 뇌호(腦戶), 풍부(風府)를 거쳐 신주(神株), 영태(靈台), 중추(中樞), 미려(尾閭)까지 단숨에 통과는 진기는 음양의 변화가 더욱 극심해졌다. 영호전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 사이 탕미인은 전신을 축 늘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모습은 끔찍하게 변해 버렸다. 진력이 모두 빠져 나간 탓인지 그토록 아름답고 요염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하얀 은발로 화해 있었고 탄력 있던 피부는 쭈글쭈글하게 변해 버렸다. 그녀의 얼굴도 탄력과 핏기를 잃은 채 퍼석퍼석해져 있었다. 눈동자도 총기를 잃은 채 멍하니 허공을 향해 열려 있었다. 다만 간간이 비명을 지르곤 할 뿐이었다. 문득 영호전은 동작이 격렬해졌다. 체내에서 엄청난 잠력이 끓어오른 것이다. 그는 온몸에 불구덩이에 빠진 듯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급기야 폭발적인 잠력은 곧장 위로 솟구치더니 임독양맥을 한 번에 관통해 버렸다. 그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전신 모공으로부터 뜨거운 김이 피어 올랐다. 그 순간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스르륵....... 갑자기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가 싶더니 얼굴 가죽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 놀랍게도 그것은 인피면구(人皮面具)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가 얼굴에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면구가 벗겨진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영호전의 얼굴은 본래 영준한 미남자였다. 그런데 새롭게 드러난 그의 얼굴은 그보다 훨씬 영준했다. 탈속한 기품은 물론이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하는 미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단아하면서도 강렬한 매혹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다. "......." 영호전은 차츰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진기는 이제 도도히 흘러 12중루를 거쳐 사지백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념무상(無念無常). 완벽히 아무 잡념도 없는 세계로 몰입되어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의 밑에 깔려 있던 탕미인의 눈이 떠졌다. 까칠하고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가가(龍哥哥), 저...... 저는......." 그녀의 입술이 달싹인 순간.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영호전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거대한 쇠뭉치가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탕미인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다시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으나 음성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흐려져 가고 있었다. "용...... 가가......." 마침내 그녀는 억지로 한 마디를 발한 후 몸을 뺐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키며 영호전을 바라보았다. 영호전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탕미인의 얼굴에 안타까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영호전의 얼굴을 향해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닿지 못한 채 중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용 가가......." 그것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의 눈은 한을 품은 채 떠져 있었고 몸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말았다. 한 시진 후. 정신을 차린 영호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이 여인은......?"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그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탕미인은 은발로 화한 초췌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와 침상 위에서 해괴한 정사를 벌였던 장면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으으...... 어찌 된 일인가? 이 여인은 분명 자신을 탕미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날 용가가라 불렀는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용가가(龍哥哥)...... 용대형(龍大兄)....... 그의 기억 속에서 맴도는 이름들. 하지만 어른거리만 할 뿐 도무지 확실한 실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영호전은 오랫동안 넋을 잃은 채 탕미인의 시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렸다. 한쪽 구석에 널려 있던 옷을 주워 입은 그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침실 밖에는 연못이 있었다. 영호전은 무의식중에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그는 크게 놀랐다. 자신의 얼굴이 달라진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턱 부분에 무엇인가가 덜렁거리며 붙어 있었다. 그것은 인피면구였다. "이럴 수가......!" 그는 인피면구를 보며 넋을 잃었다. '그럼...... 지금까지의 내 얼굴이 가짜였단 말인가?'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한동안 인피면구를 들여다보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온통 거짓으로 위장된 듯했다. 그는 휘청거리며 화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 화원 한가운데 여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시비 복장을 한 여인들의 이마에 한결같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여인들의 미간에 은은한 묵색(墨色)의 지흔(指痕)이 또렷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밖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 여인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 당했다. 그것도 똑같은 수법으로...... 대체 누구의 짓일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화원 위에 교교한 달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그는 밤 하늘을 보고 방향을 살핀 후 신형을 날렸다. 2 "......." 화무쌍은 창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달빛이 교교했다. 반딧불이 이따금 밤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뿐 적막한 밤이었다. 그녀는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둥근 만월 속에 하나의 검은 점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것은......?' 점은 급격히 커지며 다가왔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화무쌍은 얼른 창가에서 떨어져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침상 위에 살짝 걸터앉는 순간 방 안에 가벼운 미풍이 이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가가......." 그녀의 눈앞에 영호전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약간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영호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안쪽으로 연결된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해진 그녀는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영호전은 벽에 설치된 검가(劍架)에서 짤막한 검을 꺼내고 있었다. 그것은 한 병기점에서 우연히 얻게 된 천군제왕검이었다. 그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경쾌하면서도 신비한 음향과 함께 검신이 드러났다. 은은한 금광이 방 안을 물들였다. "......!" 화무쌍은 경이에 찬 눈으로 영호전과 천군제왕검을 바라보았다. 영호전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의 얼굴은 인피면구를 쓴 얼굴이었다. 얼마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화무쌍은 왠지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특히 착 가라앉아 있는 무심한 눈빛은 커다란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영호전은 말없이 검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해성(苦海城)...... 고해성......." 느닷없는 중얼거림에 화무쌍은 안색이 변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영호전은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쌍, 고해성이 어디 있지?" "......!" 화무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호전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넌 알고 있지? 어서 말해다오! 고해성은 어디에 있지? 고해성은 어떤 곳이지?" "노...... 놓아줘요....... 아파요......."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의 어깨 속으로 영호전의 손가락이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무...... 무서운 힘이 어디서......!' 그녀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영호전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있었다. "말해다오. 너는 알고 있지?" 그이 눈에서 불길이 토해져 나오는 듯했다. 그녀는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노...... 놓고 얘기해요......." 영호전은 비로소 손에 힘을 뺐다. 화무쌍의 창백했던 안색이 간신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비되었던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고해성을 물으시는지는 몰라도...... 실은 저도 잘 몰라요. 오직 전설의 땅으로 알고 있을 뿐이에요." "전설의 땅?" 영호전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열하(熱河)와 찰합이(察哈爾)를 지나 아홉 개의 죽음의 사막을 지나면 지상의 섬이 나온다는 말이 떠돌고 있어요. 고해성은 그곳 어딘가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겠어요. 그저 전설상의 얘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열하와 찰합이....... 아홉 개의 사막...... 지상도(地上島)......." 영호전은 마치 주술을 외우는 듯이 읊조렸다. 그는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난마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 겪었던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유곡에서 만난 탕미인과 그녀의 괴상한 죽음. 그녀가 말한 용대형이란 호칭. 인피면구로 위장되었던 자신의 또 다른 얼굴....... 그 모든 것들이 극도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일은 고해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고해성이란 이름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쩌면 알 수 없는 운명이 그로 하여금 아득한 기억 속에 잠재해 있던 고해성을 이끌어 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모든 의혹이 고해성에서 연원한 것이란 예감을 받고 있었다. "고해성......." 낮게 중얼거리던 그는 천군제왕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화무쌍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낯설어진 영호전......, 그리고 느닷없이 고해성에 관한 것을 묻는 그의 진의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혈전(血戰)의 막이 내렸다. 금화성의 강남 36개 지부가 완벽하게 궤멸된 것이다. 결국 금화성은 강남지부를 모두 구룡상막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로써 천하의 상권(商權)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제 금화성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한때나마 천하상권을 장악했던 금화성의 위세는 하루 아침에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정작 폭풍의 서막은 다른 곳에서 준비되고 있었으니....... 구룡전(九龍殿). 황금팔상이 마주 보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의기양양했다. 상좌에는 영호전이 앉아 있었다. 그의 신색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의 곁에는 화려하게 성장한 화무쌍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요염한 모습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긴장된 표정이었다. 서문경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상주, 개봉의 만금산장은 쑥밭이 되었소이다. 허허! 놈들은 완전히 백기를 들었소. 개봉 일대의 기루와 전장, 상가는 모두 거래처를 바꾸었으며 앞을 다투어 선물을 보내오고 있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만금산장에 있던 미녀 오백여 명을 모두 데려왔소이다. 흐흐, 강남에서 그만한 미녀들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오. 전리품치곤 최상의 전리품이 아니겠소?" 이번에는 철수한룡 능천강은 보고했다. "호북성(湖北城)도 마찬가지요. 잠강(潛江)에 있던 금화성 지부를 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은 성공적이었소. 내친 김에 선창(宣昌)과 양양(襄陽)까지 거뜬히 굴복시켰으니 말이오. 으하핫핫......!" 능천강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박장대소했다. 이번에는 만화부인 염시분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맡았던 강소성(江蘇城)은 아예 미리부터 손을 들었어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이렇다할 활약을 할 수 없어 손이 근질근질했지 뭐예요. 금릉에서 아군과 합류해 서주(徐州)에 왔을 때야 그럴 듯한 싸움을 벌였을 정도니까요." 그녀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서 삼십 명의 고수가 사상했어요. 하지만 금화성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화성은 최소한 열 배 이상의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그녀의 뒤를 이어 나머지 5인도 차례로 보고를 올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도취된 표정으로 자신들의 공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략 반 시진이 지나서야 보고가 모두 끝났다. 영호전은 그들을 둘러보며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모두 수고했소." 그뿐이었다. 황금팔상은 너무나 간단한 말에 모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영호전은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금을 보고 구룡상막에 들어온 자들이었다. 처음 그들은 구룡상막의 막대한 금력에 흑심을 품고 몰려왔다. 그들의 목적은 대충 일을 처리해 주는 척하면서 이권을 챙기는 것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차츰 양상이 달라졌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구룡상막은 금화성과 중원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격전을 벌였다. 두 단체는 상인들의 단체였다. 그러나 각각 무림인들을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무림인들의 혈전으로 싸움이 진행되었다. 이 싸움은 상인들의 영역다툼이긴 했으나 전 무림이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 결국 생사를 건 혈전이 지속되는 동안 황금팔상은 점차 본래의 목적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치밀하고 완벽한 지략과 탁월한 영도력으로 구룡상막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 온 영호전에게는 경외심마저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영호전은 물처럼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과(過)를 범한 자에게는 벌을, 공(功)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내리는 것이 본좌의 신조요. 따라서 지금부터 금화성을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해낸 그대들에게 상을 내리겠소." "......!" 황금팔상의 안색은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들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영호전의 능력을 충분히 경험했다. 일개 상인집단의 영수가 아니라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상을 내린다면 필시 보통 상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본좌는 이미 그대들에게 내릴 상을 준비해 놓았소." 짝짝! 그가 손뼉을 두 번 치자 대전 안쪽으로부터 8명의 시녀들이 가지런히 들어왔다. 시녀들은 두 손에 똑같은 황금쟁반을 받쳐들고 있었다. "......?" 황금팔상은 호기심과 기대가 어린 시선으로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시녀들은 그들의 앞에 황금쟁반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영호전은 담담히 말했다. "탕왕 서문경, 금갑의 뚜껑을 열어보시오." "네? 넷!" 서문경은 황금쟁반 위에 놓여 있는 금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탐욕의 빛이 서렸다. 그는 침을 삼키며 천천히 금갑을 열었다. 순간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이...... 이것은 유정환(兪精丸)! 어떻게 이것을......?" 서문경은 벅찬 감동에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영호전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마도 그대에게 가장 큰 선물은 유정환일 듯싶어 천축으로부터 사람을 놓아 구해왔소." 서문경은 투명한 빛을 발하는 손톱 크기의 유정환을 든 채 희색이 만면해졌다. '흐흐....... 이 유정환은 천축에서만 나는 전설의 강정약(强精藥)이지. 일 년에 한 알만 먹어도 정력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는 약인데 이렇게나 많이 있다니.......' 금갑 속에는 100여 개가 넘는 환약이 들어 있었다. 그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흐흐....... 이 정도면 평생을 쓰고도 남겠어! 이제 앞으로는 지치지 않고 젊은 계집들을 밤새도록 상대해도.......' 그는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나는 듯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상주....... 정말 고맙소이다. 정말이오. 내 생전 이런 선물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이다." "그럼 모두들 물건을 확인해 보시오." 영호전의 말이 떨어지자 만화부인 염시분이 먼저 금갑을 열었다. "오오......!" 그녀는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에는 사람 형상의 손가락 만한 삼(蔘) 한 뿌리와 작은 옥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이건...... 미인하수오(美人何首烏)와 공청석유(孔淸石乳)......!" 그렇다. 미인하수오는 1000년이 지나 사람의 형상으로 자라는 삼의 일종으로 예로부터 주안술(朱顔術)의 묘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미인하수오의 즙과 공청석유를 희석하여 얼굴에 바르면 주름살이 펴지며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영호전은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그 약을 쓰면 당신은 평생 아름다움을 유지할 것이오. 마음에 드시오?" "아이....... 상주님도......." 염시분은 곱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여인이었다. 여인으로서 늙는다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지금 그녀가 받은 선물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그녀 감격했다. 설마 영호전이 이런 선물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상주, 이 은혜는......." 영호전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서 가서 묘약을 시험해 보시오. 한시도 급할 테니 말이오." 그 말에 염시분은 사양하지도 않고 미인하수오와 공청석유를 품에 넣고는 자리를 떴다. 이어 장내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금갑이 열릴 때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진귀한 물건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철수환룡 능천강은 신병(神兵)으로 알려진 항마금강조(降魔金剛爪)를 받았다. 그것은 명장인으로 알려진 신조옹(神爪翁)이 필생의 정성을 들여 만든 것으로 능천강이 꿈속에서도 얻고 싶어하던 물건이었다. 과거 그는 술자리에서 항마금강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을 선물 받은 것이었다. "오오!" 나머지 인물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금갑에서 나온 것들은 그들에게 꼭 필요하거나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룡전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한편 화무쌍은 전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가가는 확실히 변했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놀랄 만큼 치밀하게 처리하고 있어. 황금팔상에게 내리는 상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서 처리했어. 다른 일도 마찬가지야. 이제 이곳에서 나는 아무 결정권도 없게 되고 말았어. 아아., 왠지 두려워.' 그녀는 살며시 영호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준수하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아득히 먼 타인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12장 경동천하(警動天下) 1 화무쌍은 초조한 모습으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공명등(孔明燈)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문득 천장으로부터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반고였다. 그를 본 순간 화무쌍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스쳤다. 그러나 곧 차가운 표정으로 힐난하듯 물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반고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화무쌍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다. 네 탓이 아니지. 대체 나조차 그 분을 종잡을 수가 없으니 너라고 별 수가 있겠느냐?" "줄곧 그림자처럼 붙어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옛날보다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반고의 말에 화무쌍은 아미를 찡그리며 물었다. "어떤 점이 말이냐?"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기도나 행동에서 절정의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그럴 리가......." 화무쌍의 얼굴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허공을 노려보며 상념에 잠겼다. '하긴 가가의 행동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 과거 그 분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문사였는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초절정의 고수인 것도 같고....... 아니, 그때 보여준 경신술만 해도 분명 가가의 무공이 초절정에 달했음을 알 수 있어.' 화무쌍의 아미는 더욱 좁혀졌다. '그리고 왜 갑자기 고해성에 대해 물은 것일까?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단 말인가?'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평소의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냉정했다. 화려한 외모에 반해 남자 이상으로 활달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나 일 처리에 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것이 그녀의 기질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몹시 불안했다. 이제까지 유지해 온 냉철함과 자신감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감이 흔들려 버린 것이다. 문득 그녀는 반고를 향해 돌아서며 명을 내렸다. "반고! 가라. 오라버니께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빠짐없이 보고해라. 그 분에게서 새로운 지시를 받아와. 이건 극비에 붙여야 해. 특히 그 분이 절대 눈치채게 해서는 안돼. 알았지?" 반고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러나 곧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후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그의 신형이 흐려지는 듯하더니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 화무쌍은 돌아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으로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보였다. 달빛은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산란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가?" "......!" 반고는 주춤했다. 그의 앞에 한 인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막 화무쌍의 명을 받고 구룡연을 떠나려던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영호전이었다. 평소의 영호전은 온화한 성품의 문사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영호전에게서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신비가 느껴졌다. 반고는 영호전의 담담한 눈빛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가 웃는 것 같았다. "반고, 아니 대륙칠호(大陸七號)라 부르는 게 옳겠지." 좀처럼 변화를 보이지 않던 반고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영호전은 그를 바라보며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날 너무 얕보았다." 그는 유유히 다가왔다. 반고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두 번 질문하지 않겠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냐?" "그건...... 말할 수 없소." "그럼 할 수 없지." 반고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담담하기만한 영호전의 음성에서 무서운 살기를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선수를 치는 것이 상수다. 파앗! 돌연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화살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야말로 섬전과 같은 속도였다. 반고는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보다 빠르게 대처하는 것만이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달랐다. 허공에 떠오른 그는 전력으로 선공(先攻)하면서도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의 생각은 오직 그뿐이었다. 어느새 뽑힌 목검이 영호전의 목을 베고 있었다. '찔렀다!' 그는 확신했다. 분명 목검 끝이 상대의 살을 가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어느새 영호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목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의 신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고는 당황했다. '이럴 수가! 귀수탈혼검(鬼手奪魂劍)은 아직껏 그 누구도 피하지 못했는데.......'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인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허탕을 친 반고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목검에 기를 모았다. 슉! 그의 신형이 다시 움직였다. 어둠을 가르며 신형이 흐릿해졌고 두 번째 공격이 가해졌다. 목검은 다시 상대의 목줄기를 끊었다. "......!" 반고는 이번에는 실패했음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영호전의 담담한 음성이 들린 것이다. "그대의 능력은 이 정도였군." 반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적어도 검에 관한 한 그는 누구에게도 비아냥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를 어린애처럼 여기고 있지 않은가? 바람도 없는데 반고의 옷자락이 팔락거렸다. 그의 안면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성을 잃은 듯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리한 위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 자의 신법은 깃털처럼 가볍다. 강하게 공격하면 그만큼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그렇다면 최대한 보폭을 좁히고 부드럽게 공격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스스스! 반고의 신법이 달라졌다. 그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훈풍이 부는 듯 목검을 움켜쥔 채 움직였다. 찰나적으로 그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날아갔다. 그의 목검은 마치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한꺼번에 36개의 방위를 갈라쳤다. 어느 방향으로 피해도 그의 목검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베었다!' 그는 희열을 느꼈다. 분명 목검은 영호전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영호전의 몸이 앞으로 꺾이는 것 같았다. 그는 희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목검을 회수했다. 그때였다. "여기다, 반고." 담담한 음성이 바로 등뒤에서 들렸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회의에 찬 눈으로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정수리가 화끈했다. "흑!" 그것이 끝이었다. 그의 몸은 정확히 두 쪽으로 나뉘어진 채 털썩 쓰러졌다. "......." 영호전은 묵묵히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천군제왕검이 들려 있었다. 지금 그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반고를 벤 순간 천지의 기운이 자신의 육신과 일체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어떤 수법으로 반고를 베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반고는 초절정 검수(劍手)다. 무림에서 그를 일검에 벨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단 일검에 그를 죽일 수 있다니....... 영호전의 눈빛은 곤혹으로 물들고 있었다. 2 쏴아아....... 여인은 수욕(水浴)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수증기가 피어 오르는 욕실에서 화무쌍은 정성껏 몸을 씻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수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전환되곤 했다. 며칠 사이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머리가 복잡했다. 기분도 우울하기만 했다. 그래서 마음먹고 수욕을 한 것이다. 그녀는 물기를 닦은 후 화려하게 성장했다. 궁장을 입고 동경 앞에서 화장까지 했다. 그녀는 화려한 여인이다. 화장을 할 때 많은 공을 들이고 시간을 허비했으나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다. "......." 그녀는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성숙한 여체는 넘치는 탄력을 부드러운 옷자락 속에 감추고 있었으나 고혹적인 매력을 모두 감추지는 못했다. 탐스런 머리칼은 물기에 젖은 채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 맞은 수목처럼 그녀의 몸은 생기로 차 오른 듯했다. 비로소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의 요염한 눈은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그녀는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 빨려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보아도 화려한 모습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그녀와 비견할 정도의 여인은 찾기가 힘들 것이다. 그녀는 그 점을 자신하며 살아왔다. 오만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감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섬섬옥수를 지그시 눌렀다. 그때였다. "......!" 그녀는 보았다. 동경 속에 한 청년의 모습이 비친 것이 아닌가? 단아한 용모에 담담한 표정, 아니 담담하다 못해 냉막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가가......." 그녀는 전신을 가늘게 떨며 돌아섰다. 영호전이었다. 언제 그가 나타났을까? 왜 그가 방 안에 들어오도록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문이 가슴을 오그라지게 했으나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 오셨나요?" 영호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가......."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막연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영호전의 눈빛은 기이한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순간 영호전의 손이 뻗어왔다. "학!"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억센 손길이 그녀의 한쪽 어깨를 잡은 것이다. 그녀는 벗어나기 위해 어깨를 빼려 했으나 어찌 된 셈인지 쇠갈고리에라도 잡힌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공포로 인해 숨이 막힐 듯했다. 영호전은 그녀를 번쩍 안더니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버둥거렸다. 아니, 버둥거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어찌 된 셈인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침상에 던져졌고 영호전의 육중한 몸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안......!"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곧 두터운 손에 입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는 덫에 걸린 새처럼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거친 숨결이 훅훅 와 닿았다. 영호전의 손이 그녀의 옷을 무자비하게 벗기고 있었다. 그녀는 치욕감에 얼굴이 새파래지고 말았다. 왜? 왜 이래야 하는 거야! 그녀는 울부짖고 싶었으나 이미 온몸에 힘이란 힘은 사라지고 없었다. 영호전이 그녀의 혈도를 짚어 버린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버둥거리다 두 손이 자유로운 것을 깨닫고 영호전의 따귀를 치려 했다. 그러나 허공을 쳤을 뿐 그녀의 손은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네가 바라던 것이 아니냐?" 영호전의 그 같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던 것이라고?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천장의 공명등이었다. 공명등 불빛이 그녀의 동공을 비추고 있었다. 갑자기 온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호전의 광폭한 손길이 그녀의 몸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돼.......' 그녀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러나 음성이 되어 나오지를 못했다. 이해할 수 없게도 영호전의 거친 손길에 그녀의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하얀 팔이 뱀처럼 영호전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영호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순간 영호전의 손이 허리가 휘어지도록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아!' 희열인가? 환희인가? 전신의 혈관이 부풀어오르듯 차오르는 이 기쁨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난 무너지고 있어....... 그래...... 이 사람 말처럼 내가 원하고 있었어! 이렇게...... 유린된다 해도 이 사람의 품에 안기기를 고대해 왔던 거야....... 천하의 재녀(才女)라고 자부하던 내가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어.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이 분을 만나는 순간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온몸이 마구 뒤채어지고 있었다. 영호전의 애무는 그녀로 하여금 수치를 느낄 겨를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온몸은 펄펄 끓어올랐다. 여체에 퍼부어지는 영호전의 숨결은 불처럼 뜨거웠다. 그의 손은 인두가 되어 그녀의 몸을 지져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손이 닿는 구석구석마다 불길이 일어나는 듯했다. 갈증........ 혀가 굳어질 정도의 갈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양 아래 서 있는 듯 그녀의 대지(大地)는 비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 모공(毛孔)이 열리고 있었다. 황홀한 도취가 팽팽하게 피부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녀는 혀를 뻗어 입술을 핥았다. 날파와도 같은 육향이 그녀의 후각에 느껴졌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붕 떠오른 듯했다. 그녀는 행여 떨어질세라 영호전의 목을 껴안았다. 두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미칠 듯이 온몸이 끓어올랐다. 처절하게 학대받아도 좋았다. 오직 이 갈증을 채울 수만 있다면! "학!" 그녀의 입술을 벌어졌다. 영호전이 그녀의 끓어오르는 육체의 한 부분을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녀의 허리는 활처럼 휘어졌고 두 손은 사내의 등을 할퀴어 대고 있었다. 크게 떠진 그녀의 눈동자는 희열로 활짝 열려 있었다. 아픔! 대지의 심부로부터 균열되어 퍼지는 아픔이 그녀의 영혼을 산산조각으로 찢어발기는 듯했다. 3 구룡전에 모인 황금팔상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 그들은 영호전의 부름을 받고 모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시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필경 보통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호전은 그들에게 각각 한 통씩의 봉서(封書)를 돌렸다. 봉서는 밀봉되어 있어 그 안의 내용을 뜯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은 봉서에 떨어져 있었으나 아무도 감히 뜯으려 하는 자가 없었다. 영호전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만큼 영호전은 이미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있었다. 처음 황금에 현혹되어 구룡연에 들어왔을 때와는 달라져도 너무도 달라진 모습들이었다. "뜯어보시오." 영호전의 허락이 떨어졌다. 황금팔상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각자의 앞에 놓여 있는 봉서를 뜯어보았다. "......!" 봉서를 읽어 내려가는 황금팔상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경악에 찬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봉서를 모두 읽은 후에는 차츰 표정이 달라졌다. 어느새 비장하고 엄숙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모두 어김없이 시행해야 할 사항들이오. 이의가 있으면 이 자리에서 얘기하시오." "이의 없소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황금팔상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같은 대답이 나온 것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반응에 놀란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영호전의 입가에는 추측할 수 없는 신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즉각 시행토록 하시오." 영호전의 이 한 마디! 그것은 거대한 폭풍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동정호(洞庭湖). 양자강에 걸쳐 방대한 면적으로 형성된 대호(大湖). 동정호의 아름다움은 오래 전부터 중원의 자랑거리였다. 바다를 방불케 하는 넓은 수면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기도 했으며 또한 시인묵객들의 붓끝에서 주옥같은 명문으로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정호가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녹림(綠林)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녹림도는 정(正)도 사(邪)도 개의치 않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오직 이익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동정호를 장악하고 있는 녹림도는 바다의 해적(海賊)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양자강으로 통하는 36개의 수로(水路)를 장악한 채 그곳을 지나는 선박이나 통행자들에게 통과세를 받고 있었다. 말이 통과세지 거의 약탈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따라서 어민이나 상인들의 원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불만을 표하거나 반항하는 자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되곤 했다. 더구나 천하 양대상권(兩大商權)의 치열한 공방이 있은 직후 그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관에서조차 그들의 횡포에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조직적이면서 대규모로 동정호를 장악하고 있는 그들을 견제하는데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세간에서는 녹림도의 횡행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힘만으로 동정호를 장악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의 배후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금화성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내부 재정 및 조직, 행정들을 금화성이 받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금화성과 그들의 관계는 지극히 밀접하여 금화성의 지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묵강(墨强)이다. 매부리처럼 중간이 구부러진 코와 튼튼한 턱,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눈은 호목(虎目)이었다. 그는 동정호 인근의 악양지부(岳陽支部)의 대장이다. 그는 100여 명의 수하들과 함께 동정호의 순시를 나왔다. 그가 타고 있는 배는 범선이었고, 어민들은 그 배만 보면 꽁무니를 사릴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은 한껏 부릅떠져 있었다. 보라! 한 척의 정체불명의 흑선(黑船)이 그가 타고 있는 범선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흑선은 괴이한 모습이었다. 묵강은 수전(水戰)에 경험이 많은 위인이었다. 따라서 흑선이 철갑(鐵甲)을 두르고 있는 특수한 전선(戰船)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런 류의 전선은 함부로 대할 것이 못 되었다. 갑판은 온통 철갑이요, 선수에는 강철이 1장이나 길게 삐어져 나와 있어 어떤 배든 부딪치기만 하면 대파 당하기 일수인 특수한 선박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눅들 묵강이 아니었다. 정작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흑선의 돛대에 걸려 있는 깃발이었다. 황금빛의 깃발에는 아홉 마리의 용(龍)이 수놓아져 있지 아니한가! 그것은 바로 구룡상막의 고유표식이었다. "......!" 묵강은 숨을 들이켰다. 구룡상막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녹림도, 아니 금화성의 영역인 동정호에 구룡상막의 전선이 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쏴아아! 흑선은 이제 지척에 이르고 있었다. 묵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구환도(九環刀)를 뽑으며 수하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전투 준비!" "그...... 그럴 수가? 믿을 수 없다! 증거를 보여라!" 철환비마(鐵丸飛馬) 운강후(云剛候)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부정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대춧빛 얼굴에 은빛 수염을 휘날리는 위풍당당한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바로 황금팔상 중의 1명인 모산붕사 악표붕이었다. 그는 이곳 파양호( 陽湖)에 면해 있는 도창(都昌)을 순식간에 쓸어버리고 말았다. 금화성은 파양호에 5개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4개의 세력이 와해되었고 이곳 도창지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운강후는 도창지부의 총지휘자였다. 그는 침실에서 애첩(愛妾)과 정사를 벌이던 중 구룡상막의 습격을 받았다. 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도창지부는 쑥밭이 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악표붕은 나머지 4개 지부가 와해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악표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증거? 보여주지. 얘들아! 그 쓸모 없는 돌대가리를 가져오너라!" "넷!" 방문이 열리며 1명의 무사가 커다란 목궤를 들고 왔다. "열어라." 목궤 뚜껑이 열린 순간. "헉!" 운강후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보라! 목궤 안에는 4개의 수급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은 수급들은 바로 파양호 일대의 금화성 4개 지부의 책임자들이었다. 운강후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피둥피둥한 그의 얼굴에서는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흐흐! 이제 믿을 수 있나, 친구?" 악표붕은 서서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운강후는 침의 차림이었다. 방금 전 질탕한 정사를 벌였던 애첩은 어딘가로 끌려가고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점점 뒷걸음질을 쳤다. 쿵! 그러다 탁자 모서리에 등을 부딪쳤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렸다. 그의 손에 무엇인가가 만져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의 성명무기인 50개의 철환(鐵丸)이 들어 있는 피낭이었던 것이다. 철환의 크기는 엄지손가락만 했으나 그것이 갖는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이름을 날린 것은 전적으로 철환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뒈져랏!" 돌연 그는 한꺼번에 50개의 철환을 뿌렸다. 철환은 날아가면서 허공에서 폭발했다. "으으으......!" 묵강은 전신에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미 그의 수하들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그나마 모두 섬멸 직전이었다. 범선은 반 동강이가 난 채 화염에 휩싸여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묵강의 앞에는 뾰족한 얼굴에 피부가 검은 자가 우뚝 서 있었다. 야수처럼 음산한 눈빛을 번뜩이는 그는 황금팔상의 일원인 야수제 원공공이었다. 슉! 유성추(流星錐)가 섬광처럼 묵강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묵강은 혼신의 힘을 다해 피해냈다. 쾅! 그의 등뒤에 있던 돛대가 산산조각 나며 꺾여졌다. "흐흐흐! 아무리 발버둥쳐야 고통만 늘어날 뿐이다." "죽일 놈! 헛소리하지 마라!" 묵강은 욕설을 퍼부으며 구환도를 휘둘렀다. 쩔렁! 쩔렁! 구환도에 매달려 있는 9개의 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공할 도기를 뿌렸다. 구환도는 원공공의 한쪽 어깨 위에 떨어졌다. 그런데 원공공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이 아닌가? '......?' 묵강은 어리둥절했다. 피하지 않으면 한쪽 어깨가 날아가는데도 상대는 피할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퍽! "크아아아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유성추가 어느새 되돌아와 그의 뒤통수를 박살낸 것이다. 그는 뇌수가 터진 채 즉사하고 말았다. "크하하하하하!" 원공공의 득의에 찬 광소가 울렸다. 그는 갑판 위를 둘러보며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청소해라!" "와아아아아!" 구룡상단의 고수들은 함성을 지르며 더욱 공격의 강도를 더했다. 우두머리가 죽으면 말단의 인물들은 지리멸렬해지는 법이다. 그들은 허겁지겁 목숨을 건지기 위해 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핫!" 원공공의 웃음이 동정호를 울리고 있었다. 콰콰콰쾅! 50개의 철환은 우박처럼 악표붕의 전신을 향해 날아가며 일제히 터졌다. 아무리 철인(鐵人)이라 해도 그 폭발력을 감당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흐흐흐......." 철환비마 운강후은 득의에 찬 괴소를 터뜨렸다. 퍼퍼퍼퍽! 역시 그의 오늘이 있게 한 철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수많은 파편들이 악표붕의 전신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악표붕은 여전히 우뚝 선 채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하는 것이 아닌가? "으으으? 대...... 대체......?" 투두두둑....... 악표붕의 몸에 박혀 있던 철환의 파편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거라!" 악표붕은 쌍장이 번쩍 날아왔다. 우우우웅! 천붕장(天崩掌)! 하늘조차 쪼갠다는 악표붕의 성명절학이 펼쳐진 것이다. 넋을 잃고 있던 운강후는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스란히 가슴에 천붕장을 맞고 말았다. "......!" 비명조차 없었다. 운강후의 심장부위에 구멍이 뻥 뚫렸다. 악표붕의 장력이 그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불신에 찬 표정으로 악표붕을 바라보았다. ...... 어떻게......? 그는 철환을 맞고도 상대가 멀쩡한데 대해 죽어 가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철환을 견딜 수 있었냐고?" 악표붕은 옷자락을 들추어 보였다. 그러자 옷 속에 번쩍이는 갑주가 보였다. "흐흐, 상주께서 상으로 주신 묵린천사갑(墨鱗天嗣甲) 덕분이었지. 네 무기가 신통치 않아서가 아니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라." "뭣이!" 개비신권(開碑神拳) 형세홍(形世洪)은 그야말로 귀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녹림도의 총표파자(總 把子)로 금화성의 세력을 등에 업고 동정호를 장악한 위인이었다. 한데 방금 들어온 급보에 의하면 동정36채의 수로가 모두 잿더미로 화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태사의에 앉은 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연신 으르렁거리다 눈앞에 부복하고 있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서총관, 우리의 동정36채가 그렇게 한 순간에 궤멸될 정도로 허약했단 말이냐? 대체 어찌 된 거냐? 본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서총관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워낙...... 구룡상막의 힘이 막강한데다 놈들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므로......." "닥쳐라! 본좌가 항상 한 말을 잊었단 말이냐?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냐?" 그러나 총표파자는 총표파자였다. 어느새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던 그는 번쩍 고개를 들며 명을 내렸다. "서총관." "넷!" "지금 당장 금화성으로 가라. 그 분들께 모든 사실을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서총관은 행여나 다시 벼락이 떨어질까봐 서둘러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형세홍은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의 입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두고 봐라. 구룡상막! 결코 네놈들을 가만 두지 않을 테니!" 형세홍의 눈에서는 소름끼치는 살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4 만웅탑(萬雄塔). 이곳은 금화성의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망루(望樓)였다. 강북으로 진출하려는 금화성의 야심을 엿볼 수 있는 탑으로 세워진 지 불과 1여 년밖에 안된 탑이었다. "......." 만웅탑 위에 우뚝 서 있는 흑삼문사가 있었다. 영준한 용모에 두 눈 깊숙이 지혜가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그는 금화성의 대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며 수백 명에 달하는 기마대가 달려나갔다. 그들은 한결같이 먹빛의 갑옷을 입은 위맹한 무사들이었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들은 자욱한 흙먼지를 휘날리며 금화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기세는 가히 가공지경으로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흑삼문사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기마대는 어딘가를 향해 질풍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흑삼문사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시리도록 파란 창공 한가운데로 깃털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흑삼문사의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번진다. "후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두고 봐라. 위대한 철혈독강인(鐵血毒 人)의 위력을!" 제13장 확전(擴戰) 1 "흠! 괜찮군." 방 안에 들어온 소녀는 그 말에 얼굴을 목덜미까지 빨갛게 붉혔다. 송학검객(松鶴劍客) 유진성(柳進星)은 그런 소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청순한 소녀였다. 남자라고는 근처에도 안 가본 듯 수줍어하는 소녀였다. 그런데도 몸매는 놀라울 정도로 풍만했다. 옷을 뚫고 튀어나올 듯이 무르익은 젖가슴과 대조적으로 잘록한 허리, 팡파짐하게 퍼져 나간 둔부, 피부는 만지면 묻어날 듯 뽀얗기만 했다. 유진성은 본래부터 호색(好色)한 위인이었다. 따라서 여자 보는 눈만은 자부하고 있었다. 소녀가 들어선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가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는 금화성의 인물로 3전(三殿), 5당(五堂), 36단(三十六團), 72부(七十二部)로 구성된 조직 중에서 3전의 하나인 자령전(紫靈殿)의 전주(殿主)였다. 따라서 그의 지위는 막강한 것으로 지금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왔다. 그런데 구룡상막과의 대대적인 전투 이후 금화성의 힘은 나날이 위축되고 있었다. 그래서 유진성의 최근 심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그가 맡은 일은 각 지부에서 날아오는 밀서들을 다루는 것으로 금화성의 성세를 그 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몇 달째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업무상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기도 했지만 금화성의 몰락으로 인해 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여색(女色)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일단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자 단 하루도 여자 없이는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 다행히 수하들이 그에게 매일같이 번갈아 가며 새로운 여인들을 붙여주어 여자를 취하는데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 밤 그의 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한눈에 반해 버릴 정도로 청순미와 요염함을 아울러 갖춘 소녀였던 것이다. "허허, 이리 오너라." "네......."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왔다. "옷을 벗어 보아라." "네......." 소녀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아마도 수하들에게 단단히 교육받았음에 틀림없었다. 사르륵! 사륵! 한밤중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야말로 이 세상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 유진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소녀를 주시했다. 옷고름을 끄르자 툭! 하고 2개의 유방이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소녀는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허......." 유진성은 탄성을 발했다. 2개의 수밀도 같은 젖가슴은 한 손으로 다 거머쥘 수 없을 정도로 풍만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두 알의 유실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절로 목울대를 움직이게 했다. 사르르....... 이번에는 치마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유진성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역시 치마 속에도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대리석처럼 곧게 뻗은 허벅지 사이로 짙은 수림이 우거져 있었다. 유진성의 눈은 곧장 소녀의 비문으로 향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소녀의 허리를 안았다. "아이......." 소녀는 수줍은 듯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물씬 풍기는 소녀의 체취는 유진성의 뇌를 마비시킬 듯했다. 마침내 그는 소녀의 나신을 성급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능숙한 손길이 나신을 더듬을 때마다 소녀는 움찔움찔했다. 그러나 조금도 거부하는 몸짓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휘어 감았고 허리를 야릇하게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허헉......." 유진성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거침없이 소녀의 가슴을 물었고 곧이어 그녀의 나신 구석구석을 누볐다. 소녀의 나신은 싱싱했다. 탄력이 넘치는 피부가 그의 손바닥에 팽팽한 실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소녀의 몸을 덮쳐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는 결코 이렇게 빨리 달아오르지 않았는데.......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그의 혈관은 무섭게 팽창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소녀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소녀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순간 유진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소녀의 육체가 조그맣게 녹아드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움, 품안에 안겨 있는 황홀한 나신....... 그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는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을 덮어갔다. 그때였다. "......!" 유진성은 눈을 부릅떴다. 막 소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는 순간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그런데 치아 사이에 가느다란 쇠침이 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경악하며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슈슈슉! 소녀의 이빨에 물려 있는 쇠침이 발사되었다. 쇠침은 영락없이 유진성의 목구멍 속으로 박혀 버렸다. "끄윽!" 유진성은 참담한 비명을 발하며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몸은 급격히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너...... 너.......!" 소녀는 몸을 일으키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유진성, 이것도 너의 복이야. 꽃밭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됐으니 말이야." 그녀의 입술에서 다시 여러 개의 쇠침이 발사되었다. "크으으윽!" 유진성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의 부릅뜬 눈동자에까지 10여 개의 독침이 박혀 버린 것이었다. 그는 동공의 파열감과 함께 세상이 온통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끝이었다. 유진성은 전신을 경직시키며 저승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소녀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득의만면한 미소가 어렸다. "간단하군."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인피면구가 벗겨져 나가고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 얼굴은 바로 만화부인 염시분이었다. "와드득...... 와득!" 탄검노(彈劍老) 위지현(尉遲玄)은 소갈비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육순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식욕(食慾)은 놀라울 정도였다. 적어도 그는 하루에 다섯 끼는 먹는다. 그 중 네 끼는 소갈비로만 먹고 나머지 한 끼는 소화를 돕기 위해 과일만 먹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몸은 부푼 공처럼 비대했다. 너무나 살이 찐 나머지 양 뺨이 축 늘어져 턱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였고, 두 눈 역시 살에 파묻혀 실처럼 가늘었다. 그는 하마처럼 커다란 입을 벌려 소갈비를 맛있게 뜯고 있었다. "와지지지직―!" 때로는 소갈비가 이빨 사이에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이미 그의 식탁 위에는 뼈다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은 몰라도 식사할 때만은 무아지경에 이른다. 세상을 살면서 오직 식사할 때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그는 부쩍 많이 먹게 되었다. 그것은 가슴에 쌓이는 울화를 잊기 위해서였다. 원인은 구룡상막 때문이었다. 동정36채가 와해됐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금화성의 5당에 속하는 당주급 위인이었기에 금화성의 몰락은 직접적으로 그를 휘청거리게 했다. "와드드드득!" 다시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평소에는 갈비 살만 뜯어먹었지만 심화를 풀기 위함인지 그는 뼈째 씹어 삼켰다. 아무리 먹어도 울화는 쉬 풀릴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우람한 체격의 사내가 들어섰다. 앞치마를 두른 사내의 손에는 커다란 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갈비가 가득 들어 있었다. 혈색 좋은 붉은 얼굴에 두 눈은 부리부리했고 턱에는 밤송이 같은 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방금 찐 소갈비입니다요." 사내는 식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위지현은 잔뜩 불러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다시 쟁반으로 향했고, 색깔만으로도 먹음직스런 소갈비를 보자 그의 실눈에 만족스런 빛이 어렸다. 비록 배가 부르긴 했지만 김이 오르는 소갈비를 보자 다시 식욕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쟁반을 향해 손을 뻗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들어온 주방장인가?" "그렇습니다요." "이름이 뭔가?" 주방장의 말투가 변했다. "장왕(掌王) 만시량(萬示亮)이지." 위지현은 대경실색했다. 그때였다. 주방장은 번개같이 쟁반에서 소갈비 하나를 잡더니 그대로 위지현의 입에 틀어넣었다. 퍽! 팔뚝만한 소갈비가 위지현의 입에 처박혔다. "우...... 욱!" 위지현은 숨이 콱 막혔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몸이 무거웠다. 생각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상대를 공격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비틀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왕 만시량이 누구인가? 바로 구룡상막의 선봉장인 황금팔상의 일원이 아니던가? 그가 여기까지 나타나다니! 위지현의 심장은 바짝 오그려 붙고 있었다. 그는 공포감으로 사색이 되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휙! 바람소리와 함께 거대한 주먹이 날아왔다. 퍽! 섬뜩한 격타음과 함께 그의 얼굴은 잘 다져진 고깃덩이처럼 변했다. "우...... 우......." 위지현은 괴성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입에 박혀 있는 소갈비가 상대의 주먹질로 인해 목을 꿰뚫은 것이다. 그는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했다. "크ㅋ! 가거라." 위잉!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주먹보다 먼저 무시무시한 경기가 뻗어왔다. 펑! 가죽북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위지현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의 머리는 두부처럼 으깨어져 사방으로 뇌수를 뿌렸다. 장왕 만시량은 손바닥을 비비며 껄껄 웃었다. "홧홧홧! 이거 주방장도 해볼 만한 노릇이군. 이렇게 맛있는 소갈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말야." 그는 쟁반에서 소갈비를 잡더니 한 입 크게 베어먹고 있었다. 2 흑삼문사. 그는 속속 날아드는 보고서를 읽으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들어온 보고서를 와락 구겨 버리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른다더니 놈들이 정말 끝까지 해보겠단 말인가?" 탁! 그는 수중의 섭선을 소리가 나게 접었다. 영준한 그의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흘렀다. "보자보자 하니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비록 금화성이 와해된다 해도 이 치독(痴毒)이 손해 볼 일은 없다지만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군." 치독(痴毒)? 그것이 그의 명호였던가? 치독은 탁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어 젖힌 그는 잔뜩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검호(劍狐). 용대형(龍大兄)이 죽은 후 네놈이 구인회(九人會)를 장악할 야심을 품고 있다는 걸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돼. 네 뜻대로 놔둘 것 같으냐?" 구인회(九人會)! 치독의 입에서 무림의 절대비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옛!" 누군가 밖에서 즉각 대답했다. "십이호와 십삼호 독응(獨鷹)을 준비해라." "옛!" 잠시 후 한 중년인이 새장 2개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장 안에는 한 마리씩의 털빛이 붉은 독수리가 들어 있었다. 치독은 급히 두 장의 서신을 갈겨 쓴 후 독응의 다리에 단단히 묶었다. "날려 보내라." 중년이는 독응을 창 밖으로 날렸다. 쉬이익! 두 마리의 독응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치독은 낮게 중얼거렸다. "후후! 이번 부탁은 아황(啞皇)이나 음양동자(陰陽童子)로서도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검호의 천상교(天上敎)는 그들의 공동의 적이니 말이야." 치독의 눈에서는 괴이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탁자로 걸어가더니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으로 미루어 고뇌에 잠기는 듯했다. '구룡상막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것은 검호의 천상교다. 하지만 실제로 구룡상막을 통수하는 자는 현재의 상주인 영호전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놈은 분명 이곳에서 죽지 않았는가? 대체 그놈으로 변장한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치독의 고뇌는 더욱 깊어졌다. '천상교의 대륙삼호인 화무쌍이 날렸던 밀서를 가로채 훔쳐본 바에 의하면 그 계집도 영호전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썼는데 그렇다면 대체 놈은 누구란 말인가?' 치독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구인회는 그날 이후 각지로 흩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각자 이교삼곡사사문을 세우고 자신들만의 야망을 불태워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복선만 깔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야 서로를 의식하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천상교의 검호가 나선 것은 더 이상 우리들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흐흐! 그 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검호......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치독은 섭선으로 손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이미 네 행동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그 가짜 영호전이란 놈의 정체다.' 치독. 그는 이교삼곡사사문 중 천독곡(天毒谷)을 세운 장본인이었다. 그는 각종 독술(毒術)에 능통한 인물로 오래 전부터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가 은밀히 금화성에 손을 뻗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가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구룡상막 때문에 제동이 걸려 버린 것이다. 본래 구룡상막과 금화성은 상호 불가침의 원칙을 내세워 중원의 상권을 양분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그가 금화성에 침투하면서부터 급격히 관계가 악화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치독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놈을 제거하자. 놈을 제거하면 숨어 있던 배후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정체만 파악하게 되면 놈들을 제거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치독의 눈에서는 사이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3 철혈독강인(鐵血毒薑人)은 모두 500인이었다. 그들은 금화성의 인물이 아니라 천독곡에서 오래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독인(毒人)들이었다. 그들이 출동하자 양상은 급변했다. 곳곳에서 패퇴를 거듭하던 금화성의 기세가 돌변한 것이다. 구룡상막의 용병 고수들은 철혈독강인들이 나서자 맥을 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입고 있는 갑주가 도검(刀劍)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이 익히고 있는 편격괴이한 독공(毒功) 탓이었다. 강남으로 진출한 구룡상막의 고수들은 철혈독강인들의 공세에 연일 밀리기 시작했다. 독응13호(獨應十三號)가 날아간 곳은 북경(北京) 외곽에 있는 한 장원이었다. 독응은 장원의 중심부에 있는 한 아름다운 누각의 창문에 내려앉았다. 콕콕! 부리로 창문을 쪼자 잠시 후 창문이 열리며 손 하나가 뻗어 나와 독응의 다리에 묶여 있는 서신을 끌렀다. "호오! 치독이 직접 키우는 독응을 내게 보내다니 중대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어디 볼까?" 누각 안에서 흘러 나온 음성은 괴이했다. 그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간쯤의 음성이었다. 이 괴상한 음성의 소유자는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 커다란 상아침상 위에 누운 채 서신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아랫도리만 붉은색 비단천으로 둘렀을 뿐 상체를 벌거벗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동자 1명과 소녀 1명이 무릎을 꿇은 채 그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동남동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알몸이었다. 괴이한 것은 그 사이에 누워 있는 인물이었다. 벌거벗은 그의 상체에는 2개의 살덩이가 솟아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여인의 젖가슴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얼굴의 인물! 그는 놀랍게도 음양인간(陰陽人間)이었다. 키는 5척이 조금 넘은 듯했으며 오관은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젖가슴이 달려 있다니.......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음양인간은 서신을 모두 읽은 후 안색이 변해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호오...... 이것이 사실일까? 용대형의 세력일지도 모른다고?" 한 몸에 남자와 여자의 상징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음양인간인 그는 서신을 와락 움켜쥐며 예의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어쨌든 사실이라면 가만 있을 수야 없지. 일단 애들부터 보내 시험해 봐야지."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얘들아, 장미수(薔薇水)를 데워놨겠지? 어쩐지 오늘은 몸이 찌뿌드드하니 목욕부터 해야겠다." 독응12호가 날아간 곳은 금릉에 있는 한 기루(妓樓)였다. 금릉에서도 손꼽히는 기원의 한 별원으로 날아간 독응은 여인의 가녀린 어깨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치독이...... 널 보냈구나." 여인은 옥지(玉指)를 놀려 독응의 발목에 묶여 있는 서신을 끌러냈다. 여인이 있는 내실은 아주 호사스러웠다. 특이한 것은 방 안에 온갖 종류의 악기(樂器)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금(琴), 비파(琵琶), 소(簫), 적(笛)에서 고(鼓) 등....... 악기들은 언뜻 보아도 보통 악기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명기들이었다. 여인은 절세미인이었다. 유지로 빚은 듯한 흰 피부에 유난히 아미가 짙고 속눈썹이 긴 여인이었다. 나이는 24~25세쯤 되었을까? 비취빛 나삼을 입고 허리에는 구슬 요대를 두른 여인의 용모는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신에서 고귀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여인은 서신을 읽은 후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영호 공자를 죽이라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독이 어지간히 급해졌나보군? 하긴 나 역시 그의 변신이 너무 빨라 놀랄 지경이니......." 여인은 살풋이 눈을 감았다. "지선교(地仙敎)의 탕미인이 죽은 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 아마 그녀가 영호 공자의 내력을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인데......." 여인은 다시 눈을 떴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이었다. "아아! 용대형. 당신의 위용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인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창노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시음(詩音) 낭자, 노부 구양(歐陽)이오." 시음이라 불린 여인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세요. 선생." 방문이 열리며 반백의 노인이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는 구양무종이었다. "이것 좀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선생을 찾을 참이었어요." 구양무종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내미는 서신을 받아 읽었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은 진지하게 변했다. "과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소이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오." 시음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허허허....... 틀림없소. 그는 분명 과거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오. 그래야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오." "그래야...... 겠군요." 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명상에 잠겼다. 그녀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구양무종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 생각으로는 낭자께서 직접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소." 시음은 흠칫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그는 이번 일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오. 한 치의 허점이라도 노출된다면 그 동안의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오.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시음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군요......." 4 영호전은 오악표국의 국주 오악출룡 전해룡과 대좌하고 있었다. 전해룡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수개월 전 영호전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저 비상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영호전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없이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장소는 과거와 같은 구룡연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위치는 과거에 비해 훨씬 낮았다. 구룡연에는 그가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을 정도로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구름처럼 운집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호전은 그를 극진히 대접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룡연의 인물들은 그가 신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세는 고착상태입니다." 전해룡의 말에 영호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보고 받고 있었다.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구룡상막의 고수들은 연일 패전보를 보내오고 있었다. "원인은 철혈독강인(鐵血毒 人)들 때문입니다." "철혈독강인이 그렇게 무섭단 말이오?" 전해룡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들은 도검이 통하지 않는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그들 개개인이 독공(毒功)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측의 희생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 금화성의 배후는......." 전해룡은 문득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공포가 떠올랐다. "말씀해 보시오. 그들에게 어떤 배후가 있단 말이오?" 전해룡은 결심한 듯 털어놓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천독곡(天毒谷)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천독곡?" 영호전은 흠칫했다. 그는 과거 전해룡으로부터 1회, 2교, 3곡, 4사문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비한 문파들로 그 능력을 추측할 길이 없다고 했었다. 천독곡은 바로 3곡 중 하나였던 것이다. 영호전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천독곡주는 어떤 인물이오?" "그 점은 노부만이 아니라 강호에서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영호전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음, 그들이 금화성의 배후라면...... 금화성은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다만 노부의 짐작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질 것입니다." 전해룡은 말을 마친 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평생 표국을 경영해 왔다. 표국업은 이만저만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백도는 물론 흑도와도 암암리에 교분을 이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흑도백도에 걸쳐 많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강호경험이 풍부한 그는 천독곡이 얼마나 무서운 단체인지 잘 알고 있었다. 금화성의 배후에 천독곡이 도사리고 있다면 구룡연으로서는 상대하기가 벅차다고 생각했다. 영호전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천독곡이 그토록 무섭다면 나머지 문파들도 그에 못지 않겠구려?" "......?" 전해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영호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처음 그는 영호전의 목적이 단순히 금화성에 복수하고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태는 예상 밖이었다. 금화성은 패색이 짙어졌으나 구룡연은 여전히 강남으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대로 간다면 그 영향이 전 무림으로 파급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영호전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대체 상주는 겁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어디까지나 일개 상벌(商閥)에 불과할 뿐이다. 무리하게 강호를 건드린다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이나 다름없다.' 영호전은 그의 심중을 환히 꿰뚫는 듯했다. "국주는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소. 이 일은 본인이 책임질 것이오. 설사 문제가 일어난다 해도 국주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오." 전해룡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내심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 상관이 없단 말이오? 본국은 대대로 영호가의 도움을 받고 성장해 왔소. 어려운 일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가질 사이란 말이오.' 하지만 그는 내심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외다." 영호전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알겠소." 전해룡은 화제를 이어갔다. "천독곡을 상대할 만한 집단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이교나 삼곡, 사사문 모두가 그에 필적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소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써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은 한정되어 있소이다." 영호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떤 무리요?" "천상교외다. 북경의 권문가(勸門家)에 뿌리내린 조직으로 그들은 강호와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소이다. 또 한 곳은 불회곡이오. 내방산(內方山)에 위치한 불회곡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소문이 들릴 만큼 신비한 집단이오. 마지막으로는 불사곡(不死谷)이 있소이다. 불사곡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럼 불사곡이 적당하겠군." 전해룡의 안색이 잿빛이 되고 말았다. "불사곡은......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이오?" "불사곡은 이름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강호의 마두들이나 죄를 짓고 쫓기는 자들이 최후의 은신처로 삼고 있는 곳입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를 막론하고 불사곡주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결코...... 그곳에 가시면 안 됩니다." 영호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국주의 의견은 어떻소?" 전해룡은 한참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입장으로 청부(請負)할 수 있는 집단이 있다면 사사문입니다. 그들 중 혈검문(血劍門)과 사망각(死亡閣)은 황금만 제시하면 어떤 청부라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뭐가 또 곤란하단 말이오?" "그들의 신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금화성 쪽에서 먼저 청부했거나 아니면 누군가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기만 하면 그들은 언제든 태도를 돌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흠, 그야말로 파렴치한 작자들이군." 영호전은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정문(無情門)과 낙일애(洛日崖)뿐이구려." "그렇습니다." 영호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눈을 떴다. "국주께서는 이교, 삼곡, 사사문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소? 아는 대로 얘기해 주시오." 전해룡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노부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는 곧 음성을 낮추어 말하기 시작했다. 영호전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설명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이 순간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14장 고해성(苦海城)의 비사(秘事) 1 구룡연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화무쌍은 창가에 기댄 채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은 시시각각 핏빛으로 진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노을 빛에 물들어 고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서늘한 눈에는 짙은 우수가 깃들여 있었다. 그때였다. 한 인영이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영호전이었다. "......." 그는 무심한 눈으로 화무쌍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무쌍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가 다가온 것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을을 바라보며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아아......! 내 마음을 나도 종잡을 수가 없으니...... 오라버님께서는 그를 척살하라고 하지만......." 문득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열했다. "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내 마음은 이미 그 분에게......." 영호전은 그녀의 뒤에 선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화무쌍은 그런 줄도 모르고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마치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영호 가가는 이 몸의 부군이나 다름없는 분이 아닌가? 비록 그 분의 정체가 의심스럽다고는 하지만 난 이미......." 이때 한 가닥 담담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무쌍, 방금 날 척살해야 한다고 했느냐?" "......!" 전신을 부르르 떤 화무쌍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가가......." 영호전은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놀랄 것 없다. 난 이미 네게 달리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가......." 화무쌍은 경악에 휩싸인 채 뒷걸음질쳤다. 영호전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며 차갑게 말했다. "대륙삼호. 그것이 너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까지." 화무쌍의 등이 창문에 닿았다. "가가...... 전......." 영호전의 눈에 조소가 어렸다. "무쌍, 난 허수아비가 아니다. 이곳은 구룡연이지 너희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구룡연이 너희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 그녀의 표정이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 교소를 멈춘 화무쌍의 얼굴에는 예의 그 오만함이 떠올랐다. "가가, 이제 연극은 그만 끝내시지요. 어차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으니 피장파장 아닌가요?" 영호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당신이 영호전이 아니듯 나 역시 화무쌍이 아니에요." "......!" "그럼 진실을 말하죠. 저는 천상교(天上敎)의 금검령주(金劍令主) 환옥화(幻玉花)예요. 더 자세히 말하면 대륙삼호(大陸三號)이자 교주님의 누이동생이죠." 영호전은 경악했다. 화무쌍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이제 당신도 가면을 벗는 것이 어때요? 대체 당신은 누구죠? 혈검문(血劍門)의 인물인가요? 그렇다면 음시음(音詩音) 문주와는 어떤 사이죠? 그녀의 정부(情夫)인가요?" 영호전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천상교? 혈검문? 음시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는 극도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깔깔깔! 당신을 치료한답시고 데려갔던 구양무종을 추적한 결과 그가 혈검문주 음시음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냈지요!" 그녀의 눈에서 이채가 솟구쳤다. "대륙구호. 아니, 위지매령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에요. 그녀는 처절하게 당하면서도 내게 보고했어요." "......!" "그래도 계속 발뺌할 생각인가요?" 영호전은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외쳤다. "모른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우우......!" 급기야 그는 고통의 신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화무쌍은 갑작스런 그의 반응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고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정말 그도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이에 무엇인가를 휘갈겨 썼다. 이어 벽장을 열어 젖혔다. 벽장 안에는 붉은 털을 가진 앵무새 한 마리에 횃대에 앉아 있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녀는 앵무새의 다리에 방금 끈 편지를 묶은 후 말했다. "홍앵(紅鸚)아, 총단에 전해다오." "알았어요. 대륙삼호." 앵무새는 마치 사람처럼 대답하며 횃대를 박차고 날아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창 밖으로 사라졌다. 화무쌍은 휘청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2 휙휙! 영호전은 미친 듯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구룡연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어느덧 그의 전신은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한 가닥 서늘한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그는 신형을 멈추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이름 모를 언덕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사위는 온통 노을 빛에 젖어 있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선가 고기 굽는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던 것이다. 냄새를 맡자 허기가 몰려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덕을 넘어서자 바위 아래에 불빛이 보였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1명의 누더기를 걸친 거지노인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옷은 얼마나 오랫동안 빨지 않았는지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였다. 앙상하게 마른 손등에는 때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봉두난발이었다. 나이는 대략 육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거지노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말이 콧노래지 마치 늙은 수탉의 울음소리 같았다. 잠시 멍하니 거지노인을 바라보던 영호전은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은 모닥불에 걸려 있는 고기로 향했다. 먹음직스런 꿩고기가 꼬챙이 꽂힌 채 알맞게 익어가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거지노인에게 접근하며 말했다. "실례하겠소이다. 지나는 과객인데 신세 좀 져도 되겠소?" 체면 불구하고 그는 노인이 허락하기도 전에 맞은편에 앉았다. 거지노인은 힐끗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누런 이빨이 환히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영호전은 노인의 웃음이 왠지 친근감이 일었다. "흘흘! 사해(四海)가 모두 형제라 하거늘 이리 오시게. 하늘의 선물을 나눠먹는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거지노인은 잘 익은 꿩고기 한쪽을 북 찢어 영호전에게 건네주었다. 영호전은 마다하지 않고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치지지직! 꿩고기는 기름을 흘려 더욱 구수한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걸신들린 듯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문득 거지노인이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흘흘! 술이 빠져서야 되나?" 그는 호리병을 병째로 목에 쑤셔 박고 꿀꺽꿀꺽 삼켰다. "캬아!" 병을 뗀 그는 탄성을 발한 후 불쑥 내밀었다. "자네도 마시겠나?" 영호전은 얼떨결에 호리병을 받았다. 그런데 막 입에 대려는 순간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호리병 입구가 까맣게 때에 찌들어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호리병을 기울였다. 술은 매우 독해서 목에 확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여섯 모금이나 마신 후 그는 호리병을 돌려주었다. 거지노인은 침까지 튀겨가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역시! 구룡상막에 영웅이 한 명 나왔다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영호전은 흠칫했다. "날...... 알고 있었소?" 거지노인은 히죽 웃었다. "흘흘, 이 일대가 온통 구룡연의 땅인데 귀하 같은 영웅이라면 구룡상막의 주인이 아니면 또 누구겠나?" 영호전은 의아했다. '대체 이 자는 누굴까? 평범한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이때 거지노인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어렸다. "인생무상이라더니....... 흐흐, 욕망이란 그야말로 부질없는 것이지. 이럭저럭 떠돌며 한 세상 살다보면 거지나 황제나 마찬가지 인생이라는 걸 알게 된다네." 횡설수설하던 거지노인의 눈꺼풀이 축 늘어지는 듯하더니 모로 픽 쓰러졌다. 그는 곧 코를 드르렁거리며 골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 영호전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한밤중에 산중에서 꿩고기와 술을 먹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자는 노인의 모습에서 그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욕망을 쫓아 날뛰어 봐야 한낱 불나방 같은 인생이 아닌가? 결국은 풍진 속에 스러져 먼지가 되어 버릴 것을. 어쩌면 이 노인처럼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지도 모르지.......' 영호전은 바위에 기댄 채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총총했다. 수많은 별들은 우주를 가득 메운 채 저마다의 운명을 살고 있을 것이다. 지상의 인간들은 별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별의 인생을 누가 알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별보다도 못한 존재지. 최소한 자신의 신세조차 모르니...... 어디서 나고 어디서 자라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나야말로 한심한 존재가 아니던가.' 영호전은 상념에 젖었다. 구룡상막의 젊은 주인. 그러나 세인들이 알고 있는 간단한 사실조차 정작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낯설기만 한 삶 속에서 한 마리 불나방처럼 불길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르렁...... 드르렁......!" 거지노인의 코고는 소리만이 적막한 밤 공기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기묘한 밤이었다. 모닥불은 어느새 잦아들어 가고 찬 이슬이 느껴졌지만 영호전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이슬을 맞으며 이렇게 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한 지도 몰랐다. 이때였다. 거지노인이 몸을 뒤채며 잠꼬대했다. "음냐....... 쥐새끼들이 나타났군." "......?" 영호전은 흠칫했다. 잠꼬대치고는 이상한 잠꼬대였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노인이 잠결인 듯 옆으로 돌아눕는 순간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팍! 암기였다. 노인이 누워 있던 자리에는 수십 개의 비침(飛針)이 적중된 것이었다. 그것도 파랗게 독이 발려져 있는 독침이었다. 슈슈슈슈슉! 영호전은 비로소 파공성을 들었다. 이번에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소리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를 저었다. 비침은 소맷자락에 맞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차갑게 외쳤다. "누구냐!" 휙휙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20여 명의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2개의 눈구멍으로 보이는 눈동자에 예광이 흐르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모두 절정고수들인 듯했다. 가슴에는 고루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영호전은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해골 문양을 발견했다. 가슴이 섬뜩해졌다. '저 표기는 말로만 듣던 신비의 청부집단인 사망각의 독문표기!' 그렇다. 흑의에 복면을 한 위인들이야말로 사사문의 하나인 사망각의 살수들이었다. 가슴에 새겨진 해골 문양은 사망각의 표식이었던 것이다. 대가만 치르면 어떤 종류의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던 정체불명의 살인단체로 한 번도 청부에 실패한 적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영호전은 그들을 보자 짚이는 바가 있었다. "날 죽이러 왔느냐?" 차갑게 질문했지만 복면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눈에서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을 뿐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소매 속에서 길다란 철통을 꺼내더니 영호전과 거지노인을 향해 겨누었다. "......!" 영호전은 단전에 진기를 모았다. 철통의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수백 개의 침이 날아올 것이다. 그는 손쓸 준비를 했다. 이때였다. "음냐....... 안 되지, 안돼....... 고슴도치가 되는 건 옳지가 않아." 잠꼬대처럼 중얼거린 거지노인은 누운 채로 붕 떠올랐다. 복면인들이 놀라는 순간 그는 전광석화처럼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퍼퍼퍼퍽! 가공할 일이었다. 거지노인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는 사이 5명의 복면인들이 머리가 으깨어져 즉사한 것이다. 미처 피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달빛 아래 그들의 터진 뇌수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들이 떨군 철통이 바닥에 나뒹굴기 전 그 중 2개가 무형의 끈에도 붙은 듯 거지노인의 손으로 딸려갔다. 철컥! 철컥! 기묘한 금속음이 두 차례 울렸다. 복면인들이 미처 철통을 겨누기도 전에 거지노인이 먼저 철통의 단추를 눌렀다. "헤헤헤! 가져가라. 너희들의 물건이니까." 슈슈슈슉.......! 퍼펑! 예리한 파공성에 뒤이어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크아아악!" 복면인들의 몸은 화염에 휩싸였다. 그들은 불덩어리가 된 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마구 굴렀다. "......!" 영호전은 넋을 잃었다. 일련의 사태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져 그가 개입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수십 명의 복면인들은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다 죽어 갔고, 개중 몇 명은 불이 붙은 상태로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고 있었다. "헤헤헤헤헤! 감히 어르신네가 단잠 자는데 방해하다니....... 퉤엣! 어른도 몰라보는 후레자식들 같으니라고!" 거지노인은 때가 낀 손등으로 이마를 쓱 문질렀다. "어, 덥다! 하지만 한바탕 땀을 흘리니 개운한데?" "......." 영호전은 거지노인에 대해 경악하고 있었다. 그가 보통 거지가 아닌 줄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절정의 고수였던 것이다. "노인장의 존함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지노인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뭐 존함이랄 것까지 있나? 강호의 친구들이 이 노화자를 만리신풍(萬里神風)이라 부르더군. 하지만 자네는 그저 날 노화자라 불러주면 좋겠네."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개방의 전대 이인으로서 만리신풍개(萬里神風 )란 별호를 지닌 위인이었다. 당금 개방의 방주는 무영신개(無影神 )였다. 서열로 보면 만리신풍개는 그의 사조(師祖)가 되는 것이다. 이미 무림에서 수십 년에 사라졌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실로 기이한 밤이었다. 3 "흘흘, 자네 구인회(九人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호리병의 술을 몇 모금 마신 후 만리신풍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호전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들 바라보았다. "구인회란 아홉 명의 무서운 아이들이 만든 단체를 말한다네." 모닥불은 다시 타올랐다. 사그라지지 않은 재 위에 새 나무를 얹었기 때문이었다. 만리신풍개는 꿩고기 한 점을 안주 삼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과거 전 무림이 구인회로 인해 한바탕 업보를 받은 적이 있었지." 영호전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애초에 구인회는 혈루칠십이자를 척살하기 위해 무림맹이 키운 아이들이었다네. 한데 그 아이들은 칼을 거꾸로 겨누게 되었지." 만리신풍개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그야말로 무림에서 극비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사(秘事)였다. "중원 무림맹이 키운 아홉 명의 아이들은 애초의 목적대로 혈루칠십이자를 척살하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다네." 만리신풍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모든 일은 고해성(苦海城)으로부터 시작되었지." 고해성! 영호전은 가슴이 진탕함을 느꼈다. "지금으로부터 육십 년 전 남해파(南海派)의 고해선사(苦海禪師)의 주창으로 당시 원의 자객집단인 무혈루자(無血淚子)를 척살하기 위해 전 무림이 합심하여 고해성을 만들었네." 만리신풍개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늙고 주름진 그의 얼굴에 아득한 회억(回憶)이 어리는 듯했다. 타다닥....... 모닥불은 기세를 올리며 타고 있었다. "당시 중원무림의 각 문파는 자파의 비전지비(秘傳之 )를 아낌없이 고해성에 내놓았고 고해성에서 칠십이 인의 자질이 비범한 아이들을 훈련시키게 되었네." "......." "각파의 첫 번째 목표는 원의 밀정집단인 무혈루자들을 척살하는 것이었네. 두 번째 목표는 원을 밀어내고 중토를 수복하는 것이었지. 그 계획에는 당금의 명조를 세운 주원장이 은밀히 자금을 댔지." 영호전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만리신풍개의 말을 듣는 사이 그는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헛헛....... 그 극비의 계획은 마침내 성공했네. 칠십이 인의 아이들은 혈루자(血淚子)라 불리게 됐는데 과연 무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네.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전 중원에서 암약하던 악명 높은 무혈루자들을 척살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네." "......." 만리신풍개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짓무른 눈에서 예리한 광채가 폭사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네." "......?" "생각해 보게. 혈루칠십이자 개개인이 지닌 무공은 중원무림의 정화였다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일문일파(一門一派)를 세울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서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를 않나?" 영호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그렇다면 그들이 배신이라도 했단 말이오?" 만리신풍개는 큭큭 웃었다. "자네의 눈치는 꽤 비상하군. 맞았네. 혈루칠십이자는 바보가 아니었지. 더더욱 그들을 키워냈던 무림의 문파들도 바보는 아니었네." "......?" "무림맹은 그들에게 고해성으로 모이라는 명을 내렸네. 무혈루자를 제거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겠다는 내용의 전서를 보낸 것이네. 그런데 그들은 한 명도 고해성으로 모이지 않았네." "......!" "어쩔 수가 없었지. 그 길로 혈루칠십이자는 깊이 숨어 버렸지. 그 후 수십 년이 흘렀네. 무림은 별 탈 없이 평화를 유지해 왔지만 무림의 제파는 한결같이 불안한 마음이었네. 혈루칠십이자가 살아 있는 한 무림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네. 그 와중에 몇 개의 신흥세력(新興勢力)이 발호했는데 그들의 정체가 모호했다네." 영호전은 숨소리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림의 각 문파들은 비밀리에 신흥세력의 정체를 탐지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네. 그 결과......." 만리신풍개의 눈길이 밤 하늘로 향했다. 유성이 붉은 꼬리를 길게 끌며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역시 신흥세력의 배후에는 혈루칠십이자가 있었네. 마침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네." "......!" "고해선사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지. 남해파에 조문객(弔問客)으로 각파의 원로들이 참여한 가운데 그곳에서 극비의 합의가 이루어졌네." 만리신풍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음성은 잦아들고 있었다. "그 계획도 고해성에게 이루어졌네." "......." "그 날 이후 천하 각지에서 아홉 명의 출중한 남녀 기재들이 선발되어 고해성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리고 전문적으로 혈루칠십이자를 척살하기 위한 세부계획이 시행되었네." 영호전은 가슴이 진탕했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배신과 배신의 순환....... 무림이란 이토록 비정한 세계란 말인가? 어찌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이려 든단 말인가?' 그는 무림계에 대해 회의가 일어났다. 만리신풍개의 음성이 들렸다. "물론 이번에는 과거의 불행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저한 계획이 세워졌지. 사전에 그들 구 인의 척살 계획까지 포함된 것이었네. 다시 말해 그들이 혈루칠십이자를 척살하게 되면 이용가치가 소멸된 그들을 제거하도록 완벽한 계획이 작성된 것이네." 영호전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정말 잔인한 계획이로구나.' 그는 소위 명문정파란 존재에 대해 혐오감이 들었다. 만리신풍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구 인은 정말 능력이 뛰어났지. 불과 삼 년만에 전 중원을 뒤져 혈루칠십이자를 찾아냈을 뿐더러 그들을 남김없이 제거해 냈다네. 그런데......." 모닥불이 가물거렸다. "한 가지 중대한 착오가 생겼네. 본래 그들 구인에게는 일종의 만성독약(慢性毒藥)을 복용시켜 일 년에 한 번씩 고해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게끔 안배해 놓았었다네." "아!" 영호전은 탄성을 발했다. 실로 악독한 안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친 후 해약을 받기 위해 고해성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었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네." 만리신풍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한 것이 화근이었지. 그들 가운데는 독의 달인이 있었지. 바로 치독(痴毒)이란 아이였지." '치독.......' 영호전은 내심 그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략이 출중한 만권서각(萬卷書閣)이란 아이가 사전에 모든 것을 눈치챘던 것이네. 결국 그들은 임무를 끝낸 후 자신들이 복용한 만성독단(慢性毒丹)을 만든 구양독성가(歐陽毒聖家)를 찾아가 해약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네." "......!" 영호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이용됐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더러 그 계획까지 분쇄했다니...... 실로 영악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고해성으로 돌아오긴 했네. 하지만 목적은 틀렸지. 그들은 고해성에 매복하고 있던 백팔 인의 각파 고수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금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네." "아!" 영호전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탄성을 발했다. 만리신풍개의 음성도 흥분으로 인해 떨려 나왔다. "그들 중...... 정작 무서운 아이는 치독이나 만권서각이 아니었네. 그는 바로 정신적으로 여덟 명의 아이들을 영도한 용대형(龍大兄)이란 인물이었지." "......!" 영호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용대형....... 그는 몇 차례에 걸쳐 그 이름을 들었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충격이 가슴을 치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용대형이란 인물과 자신과의 관계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만리신풍개는 괴소를 흘렸다. "흘흘, 용대형이란 아이는 훗날 구인회의 회주(會主)가 되었지.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했기 때문이었지." 영호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구인회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구인회는 그 날 이후 깊이 숨어 버렸고 무림에는 신비의 살수문파(殺手門派)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네." "......." "무림인들은 그들을 일컬어 일회(一會), 이교(二敎), 삼곡(三谷), 사사문(四死門)이라고 불렀네." 영호전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엉켰다. 만리신풍개로부터 들은 무림의 비사는 그로 하여금 강호사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지기만 했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무림비사였다. 한데 기이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만리신풍개가 들려준 비사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이제 그만 가야겠오이다." 영호전은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는 구룡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리신풍개는 대답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바위에 기대앉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영호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기인이로군.' 그는 잠든 만리신풍개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노인장 덕분에 불초의 눈이 떴소이다. 그럼 훗날 다시 뵙기를......." 그가 막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음냐....... 피는 피를 부르고 원한은 원한을 낳느니. 음냐....... 구름은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고 강물은 낮은 대로 흐르나니 그저 한 세상 순리대로 사는 것이 제일이라네......." 만리신풍개의 잠꼬대였다. 그는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더니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코를 골았다. 영호전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 그가 한 말이 잠꼬대인지 아니면 의도한 말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만리신풍개가 출현한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일부러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나타나 이런 비사를 들려 주었단 말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쉰 후 여명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제15장 함정(陷穽) 1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물. 그의 안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방금 전 한 장의 보고서를 답지한 바, 그가 세웠던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괴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실종됐던 만리신풍개 때문이었다고? 호호...... 그 늙은이가 별안간 나타나? 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그는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옷이었다. 여자와 남자의 중간 형태의 옷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반쪽 머리는 여인처럼 길게 기르고 반쪽 머리는 묶어서 띠로 졸라맸다. 세상에 이처럼 괴상한 차림을 한 자는 오직 한 명밖에 없다. 음양동자(陰陽童子)!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름을 말하면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사망각주(死亡閣主). 그렇다. 그는 신비의 살인 청부단체인 사망각의 주인인 것이다. 음양동자의 눈동자는 자색의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면 필연이겠지. 하여간 그 늙은이가 나타났다면 사태는 예상보다 심각한 것이지. 호호! 그럼 두 번째 척살령을 내려야겠군." 그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손바닥을 비볐다. 푸시식! 그의 손바닥 사이에서 보고서가 푸른 연기를 내며 타 버렸다. 그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음성을 높였다. "얘들아, 일월령(日月令)을 발동한다. 어서 준비해라." 2 구룡연으로 돌아온 영호전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바로 화무쌍이 아닌 환옥화의 처소로 향했다. 역시 예감은 적중했다. 그녀의 처소는 텅 비어 있었다. "......." 영호전은 가슴 한 구석이 텅 비는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온기가 사라진 환옥화의 침실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길이 다르면 동행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당신과 함께 있는다는 것은 한 순간 한 순간이 고통에 찬 일이랍니다. 소녀는 떠납니다. 항상 주의하세요.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까요.......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영호전은 쓴웃음을 지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이제 다시 혼자가 된 건가?'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줄곧 그 문제에 집착해 왔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관 속에 담긴 채 구룡연으로 오기까지의 과정들 뿐이었다. 그 이후 그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것은 한결같이 기이한 일투성이였다. 특히 구양무종에 의해 10인의 복면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무공을 습득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구양무종은 나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없다. 환옥화의 말에 의하면 그를 미행케 했던 위지매령이 그가 음시음, 즉 혈검문주를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음시음도 내게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해졌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의 커다란 테두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주변에 나타난 세력들을 보면 첫 번째는 천상교(天上敎)였다. 환옥화가 천상교의 대륙삼호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지선교(地仙敎)로, 지선교주인 탕미인은 그에게 괴이한 대법을 시전하려다 죽고 말았다. 세 번째 금화성의 배후세력으로 추측되는 천독곡이었다. 네 번째는 얼마 전 자신을 습격했던 사망각이었다. 결국 2교, 3곡, 4사문에 속한 신비집단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상념에 잠겼다. 만리신풍개가 들려 준 말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고의로 그에게 고해성(苦海城)의 비사를 전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고해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수십 년간에 걸친 비사....... 그것은 당시 고해성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 나 자신의 내력을 알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상주님! 누군가 상주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밖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 왔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정현욱이란 인물이 들어섰다. 그는 구룡상막에 오래 전부터 소속된 가신(家臣) 중의 1명이었다. "누가 이걸 보냈지?" 정현욱이 두 손으로 받쳐 올린 것은 그리 크지 않은 네모진 상자였다. 정현욱은 고개를 저었다. "신분을 밝히라고 했으나 물건을 보면 안다며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현욱은 고개를 떨구며 덧붙였다. "제가 그 자를 붙들려 했을 때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은 듯 얼굴까지 붉혔다. 영호전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를 붙잡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그 자는 마음만 먹으면 구룡연을 드나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최근 들어 구룡연 주위에는 불가사의 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평생을 상인으로 지낸 정현욱이 그 점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선물을 보내온 자의 말대로 상자를 열어 보면 알 것이다. 그는 정현욱을 물리친 후 상자를 열어 보았다. "......!" 상자 속의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는 안색이 변했다. 상자 속에는 한 벌의 옷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여인의 옷이었다. 비취빛의 궁장! 그것은 환옥화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해도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이것은.....?" 영호전은 가슴이 진탕했다. 비록 그녀가 천상교의 인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와 관계를 맺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옷이 상자 속에 들어 있다니....... 그것은 환옥화의 신상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들추었다. 상자 안에 한 통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존경하는 영호상주(令狐商主). 귀하의 여인이 그대를 보고싶어 연연해하고 있으니 한 번 왕림해야겠오이다. 물론 연인을 만나는데 행차는 은밀할수록 좋지 않겠소? 주위를 물리치고 혼자 왕림하기를 충고하는 바이오. 명일(明日) 자시(子時) 봉황묘(鳳凰廟)에서 그대의 연인이 기다릴 것이오.> 서신에는 서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영호전은 와락 서신을 움켜쥐었다. 서신의 내용은 명백히 협박이었다. 상대는 환옥화를 납치해 놓고 그를 유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혼자 나오라는 것은 필경 좋지 않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영호전은 서신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환옥화는 그와 적대관계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죽고 사는 것은 그녀가 속한 천상교의 일인 것이다. 영호전은 생각에 잠겼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흉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차가운 밤 공기가 얼굴에 닿자 끓어오르던 가슴이 차츰 안정되어 왔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기꺼이 초대에 응해 주지......." 달은 구름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봉황묘(鳳凰廟)는 구룡연의 북쪽 한적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그루의 고목이 쓸쓸한 가지를 땅에 비추다 달이 숨어들자 함께 덧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영호전은 낡은 사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단신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과연 사당 안에 환옥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토록 쉽게 내줄 것 같았다면 애당초 그녀를 인질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대문은 거의 부서졌으며 마당에는 키를 넘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구름 속에서 빠져 나온 달빛이 그의 그림자를 잡초 위에 흩뿌렸다. 그는 마당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친구! 약속대로 혼자 왔소. 환 낭자는 어디 있소?" 그러자 어디선가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울렸다. "후후후! 과연 천하를 흔드는 구룡상막주답군. 약속대로 환 소저는 사당 안에서 연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용기가 있다면 직접 만나 보시오." 영호전은 귀를 기울였다. 음성의 주인공은 결코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다. 비록 지척에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천리회천술(千里廻天術)이란 음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음성의 여운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영호전은 내심 불길함을 느끼며 사당을 노려보았다. 사당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안쪽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청력을 기울여 보았다. '누군가 있다.' 누군가의 미약한 호흡이 감지되었다.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여인의 호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드럽고 연약한 것으로 미루어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영호전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말 그녀란 말인가?' 왠지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사당을 노려보다 신형을 날려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돼요!" 문득 여인의 겁에 질린 외침이 고막을 울렸다. 영호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은 사당 안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쌍장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심장을 보호하고 한 손으로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신속하게 뻗었다. 물컹!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잡혔다. 그때였다. 꽈꽝!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영호전은 눈앞이 아득했다. 폭음과 동시에 가공할 폭발력에 의해 사당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피부로 된 인간이 성할 리가 없었다. 그는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3 "으음......!" 피투성이가 된 인영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머리는 온통 산발이었으며 옷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옷 사이로는 온통 살점이 너덜거렸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횃불과도 같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영호전이었다. 그는 사당이 폭발하면서 상처를 입었다. 만일 호신강기가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그의 품에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나체의 여인이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그녀는 바로 사당 안에 묶여 있던 여인이었다. 실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화약이 매설된 사당에 미끼로 이용된 것이다. 폭발과 함께 그녀는 전신이 성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얼굴조차 뭉개져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여인은 모기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 어서 달아나요. 저는......." 그녀는 끝내 말을 다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몸에서 선혈이 뚝뚝 흘러내려 지면을 적셨다. 영호전은 탄식했다. '이 여인은 옥화가 아니다. 누군지 몰라도 가엾구나.' 그는 여인은 내려놓았다. 푸드드득! 갑자기 어디선가 야조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영호전은 몸을 돌렸다. 그는 맞은편 숲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모습을 드러내라! 두더지처럼 숨어 있지만 말고!" 스스스스슷! 숲과는 꽤 떨어진 거리였다. 그 사이에 무성한 갈대가 자라고 있었다. 그 갈대밭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 곳만이 아니었다. 영호전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수십 군데의 갈대밭이 일직선으로 빠르게 갈라지고 있었다. '온다!' 영호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최소한 수십 명이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가공할 살기를 품은 채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허리까지 자라난 갈대밭이 그를 중심으로 무섭게 파도치고 있었다. 환한 달빛이 무색해지도록 살벌한 기운이 사위를 억누르는 가운데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빠르게 갈라지는 갈대밭의 균열이 지척에 닿고 있었다. 영호전의 얼굴은 물처럼 담담하게 변했다. 그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한 자루의 짧은 검이 잡힌다. "갈(喝)!" 문득 그의 신형이 번뜩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3장 높이까지 솟구쳐 오른 그의 눈에 갈대 사이로 수십 개의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병장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증오를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현(玄)...... 음(陰)...... 촉(壻)...... 심(心)...... 수(手)......!" 처음으로 펼친 무공이었다. 그것은 10인의 신비인들이 남긴 비급에서 익힌 검법이었다. 파파파....... 파...... 팍! 시퍼런 섬광이 무서운 속도로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곧이어 엄청난 파열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갈대밭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주위에 있던 바위들조차 산산조각이 나 날아갔다. "캐애애애액!" "크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갈대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쿵! 쿵......! 피를 흠뻑 뒤집어쓴 시신들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적어도 10여 명이 일검에 도륙되었다. 영호전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의 손에는 천군제왕검이 들려 있었다. 달빛을 받은 천군제왕검은 눈부신 검광이 폭사했다. "죽어라!" "뒈져랏!" 파파파팍! 사방으로부터 복면인들이 덮쳐왔다. 그들은 마치 지하에서 솟아 나온 듯 흙덩이들을 날리며 공격했다. 영호전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는 좌수를 뻗어 손가락을 연달아 퉁겨냈다. 슈슈슈슉! 5개의 손가락에서 붉은 혈선(血線)이 줄기줄기 뻗었다. 그것은 역시 10인의 기인들이 남긴 절학으로 혈편수라지(血片修羅指)란 것이었다. 영호전은 유감없이 비급에 수록되어 있는 십대 절기를 발휘한 것이다. "크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울렸다. 그를 향해 덮쳐오던 10여 명의 복면인들이 이마에 구멍이 뻥뻥 뚫리며 날아갔다. 혈편수라지의 가공할 위력에 공격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황천으로 직행한 것이다. 슈욱! 영호전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갈대숲에서 숲을 향해 황급히 달아나는 인영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4인의 복면인이었다. 협공이 실패했음을 느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영호전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며 날았다. "벽력진천검(霹靂震天劍)!" 천군제왕검이 원을 그린 순간 우레와도 같은 뇌성이 울렸다. "크아아악!" 복면인들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듯하더니 사지가 분시(分屍)되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실로 끔찍한 죽음이었다. 영호전은 지면에 내려섰다. 그는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신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토록 강한 무공이었을 줄은 몰랐구나......." 이때다. "현음촉심수, 혈편수라지, 벽력진천검까지 사용하다니 과연 우내십기(宇內十奇)가 움직인 것이 틀림없군." 사당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렸던 음성이 영호전의 귀를 울렸다. 영호전은 반사적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단숨에 20장을 날아 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순간 음침한 음성이 울렸다. "흐흐흐, 애쓸 필요 없다. 애송이놈." 영호전은 방향을 틀었다. 한 그루 소나무 아래 자삼(紫衫)을 입은 인영이 서 있었다. 영호전은 단숨에 그의 앞에 내려섰다. 사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턱 아래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 청수한 용모의 문사(文士)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달빛 아래 그의 모습은 풍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다만 흠이 있다면 눈자위에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호전은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귀하는 누군가?" 중년문사는 수중의 섭선을 멋들어지게 부치며 말했다. "애송이놈, 네가 어린아이일 적에 본좌는 이름을 날렸었지. 혹 천면화랑(千面花郞)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천면화랑.......' 영호전은 눈썹을 꿈틀했다. 전해룡으로부터 흑백 양도의 무림고수들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전해룡은 많은 고수들을 설명하면서 천면화랑에 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천면화랑은 20여 년 전 무림을 횡행했던 희대의 색마(色魔)였다. 풍류 넘치는 자태에 천(千)의 얼굴로 수시로 변장을 하고 다니며 그는 강호의 수많은 여인들을 농락했었다. 그가 농락한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결국 무림의 원성을 산 그는 백도의 공적(公敵)으로 몰려 수많은 무림인들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추적은 1년을 끌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무림에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된 천면화랑이 불회곡(不廻谷)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금역으로 여겨지는 불회곡으로 달아난 그를 백도인들은 더 이상 추적할 수가 없었다. 영호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결국 불회곡까지 모습을 드러낸 셈인가?" 천면화랑은 달빛 아래서 하얗게 웃었다. "후후후! 용케도 알아냈군. 그렇다면 본좌가 불회삼령(不廻三令) 중 동령령주(銅鈴令主)란 사실을 밝혀도 무방하겠군." 영호전은 눈을 반쯤 감고 천면화랑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또 하나의 신비문파가 그의 앞에 출현한 것이다. 그는 점점 더 큰 의혹을 느끼게 되었다. '갈수록 일이 확대되어 간다. 이러다 이교, 삼곡, 사사문이 모두 출현할지도 모르겠구나.' 영호전의 얼굴에는 서서히 살기가 떠올랐다. "귀하가 어떤 신분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느냐?" 천면화랑은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너무 서둘지 말아라. 그 전에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천면화랑은 품속에는 무엇인가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 영호전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붉은색의 고의였다. "흐흐! 본좌가 누군지 알게 됐으니 그 계집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도 알겠지. 노부는 그 방면의 전문가이니 말이다. 흐흐...... 따라서 너와 그 계집의 관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영호전은 미간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물었다. "더 이상 더러운 입을 놀리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느냐?" 영호전은 분노를 눌러 참고 있었다. 천면화랑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환옥화가 입고 있던 고의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천면화랑은 고의를 손가락에 끼고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를 부렸다. "너와 우내십기는 어떤 관계냐?" 영호전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내십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흐흐....... 부인해야 소용없다. 방금 전 너는 우내십기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느냐?" 영호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우내십기가 누군지. 더 이상 헛소리하지 말고 그녀가 있는 곳을 대라." 천면화랑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우내십기는 구파일방의 전대 장문인들이다. 그들은 지난 해 일제히 실종됐지. 한데 네가 그들의 진전을 이었으면서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 영호전은 안색이 변했다. '십기가 전대 장문인들이라고?' 그의 뇌리에 10인의 복면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영호전에게 자신들의 내력을 모두 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절기를 적은 비급까지 내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구파일방의 전대 장문인들이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서 실토해라. 우내십기는 지금 어디 있느냐?" 천면화랑의 말에 영호전은 손을 움직였다. "모른다. 내 대답은 이것이다." 슉! 영호전의 손 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으며 천면화랑을 잡아채 갔다. 천면화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이미 사태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 유연하게 신형을 날려 공격을 피해냈다. 찌익! 영호전은 무엇인가를 잡아챘다. 그것은 환옥화의 고의였다. "흐흐흐흐......!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하지만 곧 다시 오마. 그때는 네놈의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천면화랑의 괴소가 멀리서 울렸다. "서라!" 영호전은 이를 부드득 갈며 신형을 날렸다. 천면화랑은 본래부터 그와 싸울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그의 공격을 이용하여 단숨에 10여 장 밖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영호전은 천면화랑이 달아난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펑! 돌연 폭음과 함께 사위가 깜깜해졌다. 시커먼 흑연(黑煙)이 사위를 순식간에 뒤덮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연막탄이었다. "교활한 놈......!" 영호전은 욕설을 퍼부었다. 흑연이 가라앉았을 때 천면화랑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4 새벽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영호전은 안개 속을 걸으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환옥화는 정말 불회곡에 납치됐을까?' 그는 찢어진 고의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분명 환옥화의 것이었다. 그녀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천면화랑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생각할수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를 둘러싸고 갑자기 신비의 문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나 때문일까? 내가 지닌 본래의 내력과 관련이 있는 일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체 내 내력은 어떠한 것이기에......?'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불붙듯 급해졌다. '더 이상 끌려 다닐 수만은 없다. 이대로 영문도 모른 채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 자신의 내력을 알아내야겠다. 그것만이 오늘의 이 난국을 해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때였다. "사람 살려요! 흐흑....... 살려주세요! 누구 아무도 없어요?" 자욱한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영호전은 그것이 나이 어린 소년의 음성이라는 것을 느끼고 방향을 가늠한 채 신형을 날렸다. "이제 괜찮아질 거다." 영호전은 이마에 밴 땀을 소매로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산기슭에 노파가 누워 있었다. 영호전은 노파의 왼발에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단단히 동여매 주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만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파는 허리가 반쯤 굽어 있었다. 그녀는 손자와 함께 산길을 가다 그만 독사(毒蛇)에 물린 것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영호전은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물론 괜찮지. 독을 빨아내고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조치했으니 앞으로 푹 쉬면 나아질 거다." 그는 눈 앞의 조손이 인근에 사는 농가(農家)의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얼굴은 순박할 뿐더러 밭일을 하는 사람답게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영호전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아이야." 그는 노파가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이 새벽에 어디를 가는 길이냐?" 그 말에 소년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거렸다. "흑...... 할아버지 집에 놀러갔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영호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노파의 얼굴에는 온통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 참 안됐구나. 그래, 집이 어디냐?" 그는 힐끗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여전히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는 않아요. 십 리쯤 가면 누가촌이란 곳이 나와요. 바로 그곳이에요." 영호전은 잠시 생각했다. '이 노파는 나이가 많은데다 충격이 심해 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이 아저씨가 할머니를 업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자." 소년은 펄쩍 뛸 듯이 좋아했다. "정말이요? 아아....... 형님은 정말 좋은 분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갈 길이 막막했던 소년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절을 했다. 영호전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좋은 일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 하는 법이다. 자, 어서 앞장 서라." 그는 서둘러 노파를 등에 업었다. 노파의 몸은 가뿐했다. 마치 지푸라기를 업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뼈와 가죽만 남아 그럴 것이란 생각에 연민이 일어난 영호전은 노파의 엉덩이를 받쳐들었다. 순간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노파의 둔부가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했던 것이다. '무슨 노파의 살이 이리도 부드럽지?' 분명 노파의 얼굴을 주름살투성이였다. 적어도 칠순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그의 손바닥에 닿는 노파의 둔부는 의외로 실팍하면서 탄력이 넘쳤던 것이다. 영호전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으나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 시라도 빨리 노파와 소년을 데려다 주고 구룡연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안개는 여전히 짙었다. 앞서 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는 소년을 놓칠세라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그는 까맣게 몰랐다. 그의 등에 죽은 듯이 업혀 있던 노파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소매 속에서 나온 노파의 손은 나이답지 않게 고왔다.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번쩍 치켜졌다. 놀랍게도 뱅어처럼 매끈한 손가락 사이에는 1개의 길다란 바늘이 끼워져 있었다. 바늘 끝은 남빛으로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한 순간 노파의 손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영호전은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 바늘은 정확히 그의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玉枕穴)을 파고들었다. 목덜미가 따끔 하는 순간 등뒤에서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울렸다. "깔깔깔......! 성공이야!" 영호전은 웃음소리를 들었으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크게 떠보았으나 시야가 온통 침침한 가운데 의식이 흐려져 갈 뿐이었다. 제16장 배신(背信)의 역사 1 영호전은 눈을 떴다. "......!"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궁등(宮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궁등에는 불 대신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어 은은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모양의 궁등은 흔치 않은 것이다. 기이하게도 그는 과거 그 궁등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르륵! 문득 옷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깨어나셨나요? 만리가가(萬里哥哥)?" 마치 꿈속의 선녀가 속삭이는 듯 달콤한 음성이었다. 향풍(香風)이 인다. 꿈결처럼 밀려오는 향기....... 그 향기 또한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맡아보았을까......? 영호전은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는 감탄했다. 아름답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니....... 여인의 피부는 부드러운 상아색이었다.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맑아 차라리 슬퍼 보였고 유난히 속눈썹이 짙었다. 반듯한 콧날에 산호빛의 입술, 귀밑에서 흐르는 목선이 우아하다 못해 청솔 위에 올올(兀兀)히 서 있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케 했다. 여인은 연녹색의 궁장차림이었다. 고결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영호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은 섬섬옥수로 한 자루의 옥소(玉簫)를 가볍게 움켜쥐고 있었다. "만리 가가, 절 기억하겠어요? 시음(詩音)이랍니다. 당신이 음양동자의 수하에게 당하는 것을 제가 구해냈답니다." "만리(萬里)......? 시음(詩音)......?" 영호전은 나직이 중얼거려 보았다. 잡힐 듯 말 듯한 기억이 머릿속에서 가물거렸다. 문득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는 바람에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꿈(夢). 나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지옥(地獄)...... 지옥이다. 쫓기는 노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 왜......? ...... 왜, 우릴 죽이려 하느냐? ...... 크흐흐! 우리들은 오직 네놈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 크으으....... 우리들은 몽고의 자객들을 죽였고 이 땅에 대명제국(大明帝國)을 세우는데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다! ...... 크아아아아악! 왜? 왜......? 노인들은 잿빛 안개 속에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수급이 잘려 바닥에 뒹굴었다. 자욱한 피보라가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피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일신에 순백의 문사의를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비단섭선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전체가 검은 묵검이었다. 뚝뚝....... 검 끝에서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청년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의 발치에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한 노인이었다. 그는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 크흐흐! 너도 언젠가는 그들에게 죽을 것이다. 우리 혈루 칠십이자처럼......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크하하하하......! 스스스......! 잿빛 안개 속에서 하나 둘 나타나는 인영들이 있었다. 하나....... 둘...... 모두 9명이었다. 그들 9인은 하나같이 젊었다. 남자가 일곱, 여인이 둘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 오늘부터 우리는 합심해야 한다. 후후! 천하가 우리를 이용했다. 그들은 이제 우리를 죽이려 한다. 뭉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날 따라라! 나 고신만리(高辛萬里)를 따라라! 훗훗! 그래야만 산다!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비단섭선을 흔들고 있었다. 청년의 음성은 힘이 넘쳤고 절도가 있었다.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모습에 두 여인은 연모의 눈빛을 감추려 들지 않았고 나머지 5인의 청년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 여인은 연녹색 궁장에 옥소를 들고 있었다. 또 한 여인은 그녀는 검은 옷에 전신에서 화려한 탕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살짝 벌려 있었고 이따금 고혹적으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살짝 핥곤 했다. 그녀는......! 그녀는......! 2 딩...... 디디딩...... 디딩! 어디선가 비파음이 울렸다. 여전히 같은 방이다. 방의 사방에는 갖가지 악기(樂器)가 진열되어 있었다. 벽에는 선녀도(仙女圖)가 걸려 있었는데 그림 속의 여인은 연녹색 궁장차림으로 옥소를 불고 있었다. 그림 속의 여인과 똑같은 여인이 방 한가운데 앉아 비파를 탄주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정같이 맑은 눈물이 비파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파음은 흡사 사람이 깊이 탄식하는 듯 비탄스러웠다. 그러다 이내 흐느껴 우는 소리로 변하는가 하면 섬광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듯 변화무쌍하게 이어졌다. 딩딩딩...... 디딩....... 또다시 비파음이 일변했다. 마치 만추의 낙엽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사람의 심금을 애잔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땅! 갑자기 날카로운 음과 함께 비파의 현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아!" 여인은 탄식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영호전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비에 젖은 배꽃처럼 젖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기억나지 않나요? 만리 가가! 아니 용대형(龍大兄)." 용대형....... 그는 기억하려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아우성과 같은 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다가와 천둥처럼 울렸다. ...... 네 이름은 고신만리(高辛萬里)다! ...... 아니다. 내 이름은 영호전(令狐典)이다! 궁장여인은 음시음(音詩音)이었다. 그녀는 영호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고 있었다. "흑흑! 절 용서해 주세요. 가가...... 당신의 패도적인 성품을 고치기 위해 구인회의 음모에 동조했어요. 가가......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그녀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구인회가 천하를 망치고 종국에는 자신들까지 망치고 말 거예요. 이 난세를 구할 사람은 오직 만리 가가 당신뿐이랍니다!"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영호전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등의 박혀 있는 야명주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야명주의 빛을 받은 그의 영준한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난마처럼 엉켜 있었다. 음시음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담담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 음 소저. 너무 다그치지 마시오. 그가 기억을 되찾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의 뒤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초로의 노인은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에는 병색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 그는 수중에 금합을 들고 있었는데 뚜껑을 열고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금침을 차례로 꺼냈다.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는 영호전의 몸에 금침이 꽂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반응이었다. 침이 찔러 들어갈 때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상반신을 벌거벗고 있었는데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나 있었다. 노인은 소도로 그 부분의 피부를 얇게 벗겨냈다. 놀랍게도 점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알고 보니 그것은 정교하게 부착된 또 다른 피부였던 것이다. 노인은 영호전의 몸에서 손을 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모든 것은 운명이오. 이 구양무종의 의술도 한계가 있소. 그는 심적인 충격을 받아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오. 지금으로는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소." 음시음은 황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구양 선생?" 노인은 바로 구양무종이었다. 그는 담담히 설명했다. "그 하나는 소림으로 가 무불대사(無佛大師)를 만나는 것이오. 두 번째는 낙일애(落日崖)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것이오." 순간 충격을 받은 듯 영호전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낙일애...... 낙일애......."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천장을 향해 열려 있는 그의 눈에는 복잡한 빛이 어려 있었다. 음시음과 구양무종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일말의 희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3 소림사(少林寺). 무림의 태산북두로 수백 년간 중원무학의 중추적 존재로 그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표면적으로는 향화를 사르고 독경(讀經)하는 일반적인 승려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으나 실제 그들은 강호의 일반적인 고수들을 훨씬 능가하는 불문무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평소 그들은 산문(山門)을 나서는 법이 거의 없었으나 무림에 분쟁이 발생하거나 환난이 닥치면 선장을 떨치고 강호에 나와 눈부신 활약을 하곤 했다. 결국 소림사는 중원무림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숭산(嵩山) 소실봉(小室峰). 소림사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무림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소실봉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소림의 무승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일반 향화객들이 소림사를 방문하면 정중히 접대했으나 무림인이 찾아오면 병장기를 맡기게 한 후 올려보내곤 했다. 현 소림의 장문방장은 제23대로 허무선사(虛無禪師)였다. 그는 전대 장문방장인 무불선사(無佛禪師)가 수 년 전 면벽에 들어가면서 대통을 물려받게 되었다. 소림사의 후면에 위치한 죽림 한가운데 선방(禪房)이 있었다. "......." 무불선사는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나이 이미 팔순이 넘었으나 겉보기에는 육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얗게 센 백미와 그 아래 자리잡은 노안이 어린아이처럼 맑아 보이는 것은 그의 수양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는 다라니경을 읽다말고 시선을 창 밖으로 향했다. 지금 그가 있는 죽림 속의 작은 암자는 소림에서 금역으로 설정된 곳이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전대 장문방장에 대한 예우로 현 허무선사가 조치해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1년 내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청정지대가 되었다. 무불선사의 백미가 가늘게 떨렸다. 천심(天心), 천이통(天耳通)에 도달한 일대의 고승은 이미 어느 정도 미래에 대한 예지(叡智)를 갖추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그는 한 가닥 암영(暗影)을 느끼고 있었다. "허허...... 이제 노납도 부처님께 귀의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군." 그때였다. 누군가 죽림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무불선사는 눈을 반개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손님이 찾아오다니......."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설사 현 장문방장조차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전갈도 없이 누군가 죽림으로 들어선 것이다. 무불선사는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았다. 천이통(天耳通)이 시전되었다. 그의 귀에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낙엽을 밟되 소리 하나 내지 않는 민첩한 동작이었다. 발자국 소리라 느낀 것은 다만 옷깃이 가볍게 스치는 소리였다. 무불선사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내공이 지고한 자다. 적어도 육 갑자가 넘는...... 아아! 세상에 이렇게 강한 내공을 소유한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아미타불....... 그럼 그 아이가 찾아왔단 말인가?" 이때였다. 그의 귓전에 담담하면서도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왔다. "무불선사님이시오?" 그는 눈을 떴다. 언제 다가왔는지 창 밖에 1명의 백삼청년이 서 있었다. 무불선사는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았다. "허허! 드디어 올 사람이 왔군. 어서 오시게, 고신대협(高辛大俠)." "......!" 청년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백삼청년은 바로 영호전이다. 그는 음시음과 구양무종으로부터 소림의 무불선사를 찾아보라는 말을 듣고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구양무종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 자네가 기억을 되찾고 과거로 돌아가려면 소림의 무불선사를 만나야 하네. 연후 자네는 새로 태어나야 하네. 그 길만이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하는 일이라네....... 그는 구양무종의 말대로 무불선사를 만나러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고신만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머릿속은 난마처럼 엉켜 버렸다. '내 이름이 고신만리라고?' 그는 두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구룡상막주 영호전이었으며 또 하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고신만리란 자의 인생이었다. 그 2개의 인생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인지 그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 나는 누구인가? 구룡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림을 찾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무불선사의 거소인 무심암(無心庵)을 찾아온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래 소림은 강호의 고수들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으나 그의 무공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는 인피면구를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그를 영호전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불선사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고신만리라고 했다. "선사는...... 소생을 알고 있소?" 마침내 그에게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무불선사는 대답 대신 합장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한동안 불호를 외우던 그는 포단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소이다. 고신 대협, 노납을 따라오시오." 무불선사는 앞장 섰다. 영호전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죽림을 나서자 소림의 승려들이 경악에 휩싸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그들은 영호전을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비가 삼엄한 소림 경내에서 어떻게 외인(外人)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서...... 선사님......." 소림 승려들은 무불선사 앞에 일제히 엎드렸다. 생전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고승에 대한 예우였다. 무불선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허허....... 모른 척하라. 노납은 이미 모든 것을 잊었느니라." 무불선사는 승려들의 곁을 지나 경내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소림사를 떠난 한 계곡이었다. "이곳은 조사동(祖師洞)이네." 영호전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소림의 조사동이면 소림제일의 중지(重地)가 아닌가? 특히 외인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소림의 금역인 것이다. "자네가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네. 그들은 벌써부터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 영호전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이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8명의 승려들이 지키고 있는 조사동 입구에 당도했다. "아미타불....... 사조님께서 어인 일로......?" 소림의 팔대금강승(八大金剛僧)이었다. 그들은 무불선사를 보자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아미타불, 노납이 이곳에 왔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오." 무불선사의 당부에 그들은 일제히 길을 터 주었다. 당금 소림의 방장보다 한 배분이 높은 고승의 말에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 들어가세." 무불선사는 앞장 서 조사동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한 석실에 당도했다. "......!" 영호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과거 구양무종에 의해 만난 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의 고질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내공을 불어넣어 주고 자신들의 절학을 비급에 적어 넘겨 준 인물들이었다. 영호전은 심금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아미타불......" 등뒤에서 불호가 울렸다. 무불선사였다. 그는 어느새 9인과 똑같은 복면을 얼굴에 쓴 후 비어 있는 하나의 좌대로 올라가 정좌하고 있었다. 영호전은 비틀거렸다. 충격이었다. '그...... 그렇다면 무불선사를 포함한 이들 십 인이 그때의 기인들이었단 말인가?' 이때 9인의 복면인들의 눈이 그에게서 일제히 무불선사에게 향해졌다. 복면 사이로 뚫린 그들의 눈에서는 의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무불선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고신 대협이 노납을 찾아왔소이다. 이제 천기(天機)를 밝혀야 할 때가 온 것 같소이다." "아......." "으음......." 복면인들은 모두 무거운 신음을 발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불안한 빛이 흐르는 것을 영호전은 감지할 수 있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겠소? 선사?"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허허!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때라 사료되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한낱 인간들의 머리로 어찌 때를 헤아릴 수가 있겠소?" 무불선사는 손을 올려 복면을 벗으며 말했다. "여러분도 이제 복면을 벗으시오. 고신 대협에게 진실을 보일 때가 온 것 같소이다." 그 말에 9인의 복면인들은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 영호전은 거듭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면목을 드러낸 9인의 인물들을 차례로 바라보던 그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놀란 것은 그들이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중도 있었고, 속인도 있었으며, 도인도 있었다. 또한 거지도 1명 있었다. 다양한 신분의 9인은 한결같이 창노한 위인들로 만인을 압도하는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 장문인의 자리를 넘기고 잠적했다는 구파일방의 전대 장문인들이 아닐까?'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무불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신 대협, 이분들은 각파의 전대 장문인들이시오." "으음!" 영호전은 신음을 흘렸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그들의 신분이 밝혀지자 가슴의 의혹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들이 이곳에 있으며 또한 자파도 아닌 내게 왜 자신들의 내력과 무공을 전해 주었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불회곡의 동령령주 천면화랑이 말한 우내십기란 바로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당시만 해도 그는 우내십기가 누군지 몰랐었다. 그가 사용한 무공을 보고 천면화랑이 그렇게 말했을 때도 그저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무불선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십 인은 자네를 무림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고 있다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네에게 모든 것을 불어넣지 않았을 것이네." "......." "아아! 물론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잘못이었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림을 위한 일이었네. 비록 우리의 생각이 짧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들었으나......." 무불선사는 말끝을 흐리고 한동안 합장한 채 불호를 외웠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심한 가책의 빛이 떠올랐다. 영호전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소생에게 속 시원히 말해 주시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이다." 그러자 무당의 전대 장문인인 무장도인(無藏道人)이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고신 대협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단 말이오?" "......." 영호전은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그는 욱하니 치미는 것이 있었다. "기억? 무슨 기억 말이오? 당신들은 내게 자꾸 고신만리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내 이름이 고신만리란 말이오?" 일면 무례하기까지 한 반응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기 때문이었다. 무장도인은 장탄식했다. "아아! 하기는 대협 탓만은 아니오. 그런 중상을 입고 뇌호혈(腦戶穴)마저 파괴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오. 구양독성가(歐陽毒聖家)의 가주인 구양무종 대협조차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으니......." "구양독성가......?" 영호전은 문득 개방의 이인 만리신풍개로부터 구인회의 젊은 고수들이 자신들의 금제를 풀기 위해 구양독성가에서 해약을 구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구양 선생이 바로 구양독성가의 가주란 말인가?' 그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고신만리....... 용대형....... 구인회...... 아아! 도대체 왜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말인가!' 그가 고뇌에 찬 표정을 짓자 옆에서 인자한 불호가 들렸다. "아미타불, 고신 대협. 너무 괴로워할 것 없소이다. 우선은 우리들의 말을 들어보시오. 그럼 생각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오." "......." 이윽고 무불선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고신만리(高辛萬里). 그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름 대신 용대형이라 불렀다. 그는 구인회의 회주였다. 구인회는 고해성의 제2차 비밀계획에 의해 구파일방이 주도한 무림맹에 의해 탄생한 조직이었다. 구인회는 철저히 살수(殺手)로 양성되었다. 그들은 혈루칠십이자(血淚七十二子)를 척살하기 위해 양성된 잔혹무정한 인간병기들로 무림맹의 대표들은 지난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모종의 금제를 가해 놓았다. 그것은 9명의 인간병기의 몸에 일종의 만성독약을 복용시킨 것이었다. 만성독약의 해약은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었다. 다만 독성의 발작을 지연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해약만을 만들어 놓은 채 그들을 억제해 두었다. 그 결과 9인의 인간병기는 1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고해성으로 돌아와 해약을 복용해야 했다. 어쨌든 구인회는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불과 3년만에 천하 각처에 숨어 있던 혈루자 전원을 척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났다. 혈루자를 척살하는 와중에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한낱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혈루칠십이자를 척살한 이후 고해성에서 산화해야 할 운명인 것이었다. 구인회는 결국 자신들의 운명을 거부하기로 했다. 개처럼 부림을 당하다가 죽을 수는 없었다. 용대형은 그 일에 앞장 섰다. 나머지 8인을 규합하여 무림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한 것이 바로 용대형 고신만리였다.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혈루자의 절반 이상을 죽인 인물로 정신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구인회를 영도해 온 인물이었다. 다만 그에게 한 가지 결함이 있다면 성품이 지나치게 패도적이며 잔혹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구인회를 자신의 손안에 장악하여 장차 천하를 거머쥘 야심마저 품게 되었다. 결국 그의 주도하에 구인회는 구양독성가를 습격하여 구양무종을 납치했다. 만성독약을 풀기 위해서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구양무종은 완강히 거부했다. 고신만리는 그의 몸에 총 36가지의 잔혹한 고문(拷問)을 가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혹독한 고문에 구양무종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구인회의 몸에 녹아 있는 만성독약의 해약을 만들어 주고야 말았다. 금제를 푼 구인회는 고해성으로 향했다. 고해성에는 그들을 암살하기 위한 108인의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구인회는 그들을 잔인하게 도륙했다. 그것은 무림맹의 최대의 비극이었다. 그 날 이후, 구인회는 무림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무림 전역에서 9개의 신비한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암살 전문의 청부집단들이었다.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세력들이야말로 구인회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 세운 것이라는 것을. 구인회는 자구지책으로 자신들만의 문파를 세운 것이었다. 구인회는 비록 각자가 떨어져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회주인 용대형의 지시에 따라 회동하곤 했다. 그들의 존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림의 화약고와 같았다. 무림은 숨을 죽였다. 만일 구인회를 척살하려면 전 무림의 절반 이상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히 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이었을까? 정작 문제는 구인회의 내부로부터 파생했다. 그것은 용대형 고신만리의 지나치게 독선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만권서각(萬卷書閣)은 구인회의 두뇌였다. 그의 머리에는 1만 권의 경서가 담겨 있는 바 구인회의 지낭(智囊)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암중에 용대형을 제거할 무서운 음모의 판이 짜여지기 시작했다. 용대형이 지나치게 자신들을 구속할 뿐더러 자신들을 일개 수하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계획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마침내 용대형은 그의 생일인 9월 보름에 함정에 빠지고 만다. 좀더 자유롭고 싶었던 구인회 개개인의 욕망이 빚은 무서운 암살이 결행된 것이다. 그날 용대형은 8인의 합공을 받고 쓰러졌다. 물론 그로 인해 8인이 치른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암살계획은 성공했고 용대형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용대형의 시신이 사라졌다. 그의 시신을 혈검문주 음시음이 은밀히 빼돌린 것이었다. 그녀는 줄곧 용대형을 사랑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패도적인 성품으로 그녀의 사랑을 도외시한 채 야망의 화신이 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암살하는 계획에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8인의 암격을 받고 쓰러졌을 때 그녀는 극비리에 시신을 빼돌렸다. 그 와중에서 우내십기에게 도움을 청했다. 특히 구양독성가의 가주인 구양무종과는 비밀계획을 사전에 진행시켜 놓고 있었다. 그녀가 세운 계획은 용대형을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계획에 대해 그녀는 단신으로 우내십기와 구양무종을 찾아가 호소했었다. ......그 분의 성격이 포악하고 패도적이 된 것은 당신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우리 구인회를 이용한 후 죽이려 했기 때문이에요. 그 분을 살려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인회는 언젠가 무림을 혈겁으로 몰아넣고 말 거예요. 당신들은 그들을 막을 수 없어요. 그들을 막은 자는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 바로 용대형만이 가능한 일이에요. 부탁이에요. 저의 계획에 협조해 주세요! 음시음의 눈물어린 호소는 우내십기와 구양무종을 움직일 수 있었다. 기실 그들도 용대형 한 사람이 제거된다 해도 나머지 8인이 무림을 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계획은 은밀히 시행되었다. 극적으로 빼돌린 용대형의 시신은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그의 몸에 선천태을지기(先天太乙之氣)란 현문 정종내공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구양무종은 가전의 모든 의술을 시전했다. 결국 고신만리를 회생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파괴된 그의 기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부활했을 때 어떻게 나올지도 걱정이었다. 그는 머리를 짰다. 한 인물의 대리인으로 부활시킨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구룡상막의 후계자인 영호전을 대리인으로 만들기로 했다. 당시 영호전은 금화성에 납치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해 백치 상태가 되어 있었다. 마침 금화성주가 구룡상막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그를 빼돌린 사건이 발생했으므로 용대형을 영호전으로 변장시키는 것은 간단한 문제였다. 이 모든 것은 음시음과 구양무종, 우내십기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4 영호전, 아니 고신만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안개에 가려져 있던 과거사를 모두 들었으나 그는 도저히 실감할 수가 없었다. '과연 내가 이들의 말처럼 용대형 고신만리란 위인이란 말인가?' 그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단 말인가? "아아! 모르겠소! 당신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미타불......! 그것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오. 고신 대협! 당신은 이성을 되찾아야 하오. 과거의 업보를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오. 무림을 위해...... 아니 천하의 창생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미지에 다가올 혈겁을 막아 주어야 하오." "무량수불....... 그렇소. 구인회가 일으킬 혈겁을 막을 사람은 당금 무림에서 당신뿐이오. 고신 대협!" "그렇소. 이제는 무림을 위해야 살아야 하오......!" 우내십기의 말에 고신만리는 더욱 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연 장소를 울부짖었다. "우우우우......!" 그는 머리를 흔들며 조사동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내십기는 황급히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무불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를 막지 맙시다. 그는 언제고 되돌아올 것이오. 그저 그가 하늘의 도리를 깨닫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 고신만리는 가공할 경신술로 눈 깜짝할 사이에 조사동을 빠져 나와 어딘가로 달려갔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그는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조사동을 빠져 나갔을 때 숲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그들은 조사동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지켜본 위인들이었다. 고신만리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들로 인해 무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제17장 차도살인(借刀殺人) 1 소림의 조사동(祖師洞)은 절대 금역이다. 하인을 막론하고 이곳에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감시하는 인영이 있었다. "흐흐! 우리의 생각이 맞았다. 그는 용대형이었다." 음침한 음성에 이어 또 다른 음성이 말을 받았다. "으음! 만권서각.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가.......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이냐?" 두 사람. 그들은 숲 속에 서 있었다. 1명은 화복차림의 삼십대 가량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준수한 용모에 문사의를 입은 그는 무한한 지혜를 담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손에는 두터운 고서(古書)를 들고 머리에 문사건을 두른 그는 한운야학(寒雲野鶴)처럼 고고한 기품이 느껴졌다. 또 한 사람. 그는 괴이했다. 그의 주변에는 끊임없이 검은 기류가 감돌고 있어 용모를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청년문사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무(無無). 아마도 그때 용대형의 시신이 사라진 것은 시음(詩音)의 짓일 것이다." 그러자 검은 기류 속에서 한 가닥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시음이 그런 짓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면 그녀는 탕미인과 함께 그를 사랑했었으니까." 청년문사는 수중의 고서(古書)를 펼쳤다. 고서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혜광이 번쩍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선수(先手)를 쳐야 한다." 검은 기류 속의 인물 무무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어떻게 말이냐?" "후후! 방금 전 봤지 않느냐? 다행히 그는 기억을 완전히 찾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 내가 펼친 음혈지공(陰血指功)에 뇌호혈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으음, 그랬었지. 당시 나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뇌호혈이 파괴되고도 살아날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청년문사, 즉 만권서각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선천태을기(先天太乙氣) 때문이다. 사실 우리 구 인 중에서 그의 무공이 가장 강했다." "크으...... 그래서 그를 제거한 것이 아니냐?" 파라라라락! 만권서각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어쨌든 기억을 되찾으면 그는 반드시 복수하려 들 것이다." 무무는 괴성을 발했다. "크으.......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만권서각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과거와는 달라. 그 동안 우리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해 왔다. 그것은 각자 야망이 있기 때문이었지." "......." 만권서각은 싸늘한 시선으로 검은 기류를 쏘아보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각자의 입장이 달라졌다. 그런데 진정으로 합심이 이루어질 것 같으냐?" "......." "후후! 오직 그 한 사람만이 개성이 다른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무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그럼 그가 복수하러 오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만권서각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물론 그럴 순 없지. 우선 그의 숨통을 조여야 한다. 전 무림이 그를 악마로 여기도록 함정을 파야 한다. 그런 다음 내게 계획이 있다." "함정?" 만권서각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후후! 지금 조사동 안에 있는 십기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다." 검은 기류가 흔들렸다. "연후 그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다." 만권서각의 두 눈에 기광이 솟구쳤다. "후후후! 현재 그의 신분은 구룡상막주다. 그가 상인의 신분을 뛰어넘어 무림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십기를 살해한 것이다." 스스스! 검은 기류가 흩어지며 회영(灰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서는 한 점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메마른 피부, 툭 튀어나온 광대뼈, 움푹 들어간 두 눈에서는 도무지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회색을 옷을 걸친 그는 27~28세 정도 되어 보였다. 무무.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삭막한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어려 있었다. "놀랍다.......! 역시 만권서각이다!" "후후! 네가 출동시킨 무정문(無情門) 살수들의 능력을 볼 수 있을까?" 무무의 움푹 패인 눈에 득의의 빛이 어렸다. "ㅋㅋ! 믿어도 좋다. 지금 보여주지." 무무의 소매 속에서 한 가닥 푸른 연기가 뻗어 나와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일 각이나 됐을까? 숲에서 10여 개의 잿빛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조사동이 있는 천불곡(千佛谷)을 향해 쏘아나갔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살기(殺氣)가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피에 굶주린 야수(野獸)와도 같았다. 모두 12인이었다. 그들은 단숨에 조사동에 앞에 떨어져 내렸다. "아미타불......! 뉘신지 몰라도 이곳은 소림의 신성한 장소로......." 조사동을 지키던 팔대금강승은 불길함을 느끼며 계도(戒刀)와 방편산을 일제히 치켜세웠다. 그러나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으으윽!" 12인의 잿빛 인영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고 자욱한 피보라가 뿜어졌다. 소림의 고수인 팔대금강승은 허무하게 사지가 잘린 채 시신이 되어 나뒹굴고 말았다. 금강승을 죽인 회영들은 조사동 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어갔다.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만권서각의 얼굴에는 감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 무정수(無情手)의 실력이 과거보다 훨씬 진보했군." 무무의 눈에서 득의의 빛이 흘러 나왔다. "물론이지. 하지만 너의 불회곡에도 쓸만한 자들이 많지 않느냐?" 탁! 만권서각은 책장을 소리나게 덮으며 말했다. "그들은 그들대로 쓸 곳이 있지." 이때였다. 멀리 조사동으로부터 처절한 비명이 들려 왔다. 전 무림이 분노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우내십기(宇內十奇). 구파일방의 전대 장문인들인 그들은 전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아온 정파의 고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 날 한 시에 모두 살해당한 것이다. 그것도 무림의 성지인 소림사 조사동에서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이 소식에 무림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들은 소림은 물론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흉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대체 누가 십기를 죽였단 말인가? 그 자는 필경 무림을 제패하기 위한 야심으로 십기를 살해했을 것이다. 각파가 집요하게 흉수를 찾은 지 한 달여, 한 가지 소문이 무림을 뒤흔들었다. ...... 우내십기를 살해한 것은 영호전(令狐典)이란 자다! ...... 그 자는 구룡상막의 상주로 얼마 전부터 막대한 황금으로 용병(傭兵)을 부리며 천하무림을 제패할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충격이 무림을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룡상막과 금화성의 싸움은 무림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단순한 상단으로 여겼던 남북의 두 이권단체들의 싸움은 처음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상권다툼 정도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여파가 전 무림으로 번지자 무림인들은 두 상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룡상단이 대대적으로 황금을 풀어 고수들을 사들이는 것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내십기의 살해는 무림을 폭풍으로 몰아넣었다. 구룡상막의 젊은 상주 영호전이 그 사건에 개입됐다는 소문은 곧바로 기정사실로 전해졌으며 무림은 들끓기 시작했다. 전 무림, 특히 정도무림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무림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구룡상막주 영호전. 그는 이제 전무림의 공적(公敵)이 되고 말았다. 서서히 피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정도무림인들의 눈길은 강북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구룡상막으로 향해지고 있었다. 2 난정루(蘭精樓)는 금릉의 번화가에 있는 기루(妓樓)다. 이곳은 금릉에서 가장 크고 호사스런 곳으로 풍류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 보기를 소망하는 곳이었다. 그 이유는 난정루에 있는 108화(百八花) 때문이었다. 난정108화로 불리는 난정루의 기녀들은 천하에서 고르고 고른 절세의 미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들은 미색뿐 아니라 기예(技藝)에도 능통하여 풍류객이라면 누구나 난정루에 가 보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난정루는 표면적으로는 기루였으나 그 실체는 무림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비밀 청부집단이었다. 바로 2교, 3곡, 4사문의 일원인 혈검문(血劍門)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난정루의 후원에 있는 별원에 앉아 옥소(玉簫)를 불고 있었다. 혈검문주 음시음이었다. 삘리리...... 삘리리리....... 그녀는 유난히 음률을 좋아한다. 그래서 주위에는 늘 여러 종류의 악기들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평소 가장 아끼는 천향소(天香簫)을 불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따라 음률이 고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불안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안색도 오늘따라 자꾸만 흔들리곤 했다. 그녀는 천향소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비파를 무릎에 안았다. 디디딩...... 디잉....... 청아한 비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비파음도 흐트러지고 만다. 비파의 현을 오가는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음시음은 비파를 내려놓고 말았다. "아....... 안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그녀는 비파를 거두고 이번에는 타악기인 소고(小鼓)을 잡았다. 소고는 평소 우울할 때 잡는 것으로 단순한 듯한 타음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인 것이었다. 둥....... 가볍게 한 번 쳤으나 어딘가 모르게 탁한 음이 나왔다. "......." 음시음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음시음은 소고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악기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지만 한결같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녀는 탄식했다. "아아! 어찌 된 걸까? 정말 그 분이 십기를 암살했단 말인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들려 왔다. "시음! 역시 너의 짓이었군. 설마 했는데 네가 용대형을 빼돌렸어!" 음시음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 창 쪽으로 달려갔다. 창 밖을 내다본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 당신은 무무(無無)......!" 쏴아아아! 창 밖은 화원이었다. 온갖 꽃이 만발해 있는 화원에 10여 개의 잿빛 인영이 날아오르며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음시음의 눈에서 반짝 분노의 살기가 떠올랐다. "감히 날......." 그녀는 품속에서 황금으로 된 매화가지를 뽑아들었다. 그 순간 12개의 회영이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구룡전의 분위기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로(四老)를 비롯하여 황금팔상, 그 밖의 주요인물들이 빠짐없이 모였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갑작스럽게 소집령이 떨어졌고, 중원 각지에 파견되었던 요인들이 바쁘게 달려와 모인 자리였다. "......." 대전 안에는 침묵만이 깔렸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무림에 나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소문에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인인 영호전이 소림에서 우내십기를 살해했다는 소문은 전 무림에 파다하게 번져 있었다. 그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지 막연하기만 할 뿐이었다. 탕왕 서문경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상주는 분명 야심 있는 분이오. 하지만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분은 결코 아니오! 이번 일은 필경 와전된 것이오!" 그러자 낙운시가 의견을 피력했다. "노부도 그렇게 믿고 싶소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소. 우리는 지금 전 무림의 표적이 되어 있소. 자칫하면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소." 구자경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는 일이오. 무엇보다도 상주를 찾아야 하오. 오직 그 분만이 진실을 알 것이오. 상주께서 직접 나선다면 이번 일은 무사히 처리될 것이라 생각하오." 그 말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먹장구름 같은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3 낙일애(落日崖). 세인들은 이곳을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곳이라 말한다. 그것은 원한이 있되, 능력이 부족하여 복수할 수 없는 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사정하게 되면 개세의 무공을 익혀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부에 대한 해결방법으로는 실로 기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낙일애를 찾았고 그들은 낙일애로부터 무공을 익혀 복수하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낙일애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낙일애주가 누구인지, 그가 왜 그토록 기이한 방법으로 청부를 들어주는지 알려진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낙일애는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곳이며 낙일애주야 말로 천하에서 가장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란 설이 나돌 뿐이었다. 낙일애는 석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령산(鳳靈山)에 위치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이 아득하게 끊긴 곳. 낙일애 위에는 반듯하게 다듬어진 석대(石臺)가 있다. 석대 아래에는 세 푼 깊이의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복수하고자 한다면 이곳에서 자신의 내력과 복수 대상자의 명호를 밝혀야 한다. 단, 비밀을 지켜야 하며 후일 낙일애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받들어야 한다.> 기이한 문구였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 문구에는 깊은 함정이 있는 듯했다. 청부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복수비(復讐碑)가 주는 유혹은 엄청난 것이었다. 복수를 꿈꾸되 능력이 모자란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은전 한 푼 바치지 않아도 되고, 훗날 낙일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도 먼 미래에 관한 일이니 부모나 사문의 원수를 죽일 수만 있다면 이보다 간단한 조건이 없기 때문이었다. "......." 고신만리는 복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격동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복수비에 새겨진 글씨를 보는 그의 눈썹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삼 푼 깊이로 새겨진 금강지력이 남긴 서체(書體) 때문이었다. 사람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고유한 서체다. 그런데 복수비의 서체야말로 그의 서체와 동일했던 것이다. '정말...... 나는 고신만리란 위인이란 말인가?' 그는 신형을 휘청거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들려 온 것은. "흐흐흐! 아직도 찾아오는 놈이 있다니 반가운 일이군. 네놈은 무슨 일로 낙일애를 찾았느냐?" 그 음성은 폐부를 긁는 듯 듣기 거북한 노인의 음성이었다. 고신만리는 그 음성을 듣자 매우 귀에 익다는 것을 느꼈다. "귀하는 누군가?" 그는 몸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더니 반문했다. "건방진 놈이로구나. 먼저 네 내력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고신만리는 고소를 지었다. "나 자신도 내력을 모르는데 어찌 밝히란 말이냐? 너는 혹시 나의 내력을 알고 있느냐?" 순간 상대방은 격동을 일으켰다. "그 음성은...... 오오! 당신은...... 용...... 용대야(龍大爺)가 아니오?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그 음성은?" 스스스! 낙일애의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한 가닥 흑영이 솟구쳐 올라왔다. 인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신만리의 앞에 내려섰다. 일신에 흑의을 입고 등이 낙타처럼 솟아 있는 꼽추노인이었다. 얼굴은 얽었으며 눈썹이 빗자루같이 성긴 추한 용모의 꼽추노인은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채 고신만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경악에 휩싸였다. "오오! 꿈은 아니겠지! 용...... 용대야! 과연 당신이 나타났단 말입니까?" "......." 고신만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분명 꼽추노인은 그를 용대야라 불렀다. 그로 미루어 그가 자신의 충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꼽추노인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당신은......?" 그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꼽추노인은 털썩 주저앉더니 절을 했다. "오오......! 용대야! 어찌하여 지금에야 나타나신 것입니까? 아아! 타노(駝老)는 대야께서 이미 돌아가신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타노를 바라보며 고신만리는 어렴풋이 무엇인가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격동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타노......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타노는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타노가 어찌 주인님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이 타노는 주인님이 쫓아내지 않는 한 영원히 낙일애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타노......." 고신만리는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꼽추노인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있었다. 낙일애 아래는 별유천지(別有天地)였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끝없이 깎여 내려간 유곡(幽谷)에 불과한 곳이었으나 실제로 절벽의 바닥은 아늑한 분지(盆地)로 수많은 수목과 꽃들이 자라고 있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채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축조되어 있었다. "대체 그 동안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이 타노는 기다리다 그만 죽을 뻔했습니다요." 타노는 태사의에 앉아 있는 고신만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신만리는 대전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 크진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단아한 구조의 건물들이 낙일애 아래 잘 배치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이 처음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건물의 견고함이나 분지에 조성되어 있는 화원, 인공연못과 석탑(石塔)이며 여러 가지 장식물들이 그로 하여금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주인님께서 없는 동안 낙일애는 청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간간이 찾아오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 "하긴 주인님께서는 워낙 신룡과도 같은 분이니 곧 돌아오시겠거니 생각하긴 했습죠.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그 동안 서벽(瑞 ) 낭자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셨는지 아십니까?" "서벽?" 고신만리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 타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낭자께서는 주인님이 생일 초대를 받고 구인회의 여러분들을 만나러 가신 후 소식이 끊기자 지금까지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고신만리는 눈을 반쯤 감았다. 서벽(瑞 )....... 누구던가?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과거 그의 곁에 있었던 여인인 듯도 하다. 서벽...... 주(朱)...... 서벽(瑞 )? 문득 그는 주서벽이란 이름 석자를 떠올렸다. 그래...... 맞아. 그녀의 이름이 주서벽이었지! 그는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서벽은 지금 어디 있소?" 주서벽은 오랜만에 수욕(水浴)을 하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분이 오신 것이다. 그 분이....... 1년 반 동안이나 연락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그 분이 오신 것이다. 아아! 꿈만 같은 일이야. 그 분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수증기 자욱한 욕실에서 그녀는 정성껏 몸을 씻었다. 그녀의 육체는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성숙하게 익어 있었다. 1년 반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때는 채 무르익지 않은 소녀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주서벽은 막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스스로의 손으로 어루만지며 얼굴을 붉혔다. 꽃봉오리처럼 활짝 피어 오른 가슴이었다. 손으로 살짝 쓰다듬기만 했는데도 유두(乳頭)는 일어서고 있었다. 연보라의 돌기는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흥분한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한 번도 타인의 손이 닿아본 적이 없는 돌기였다. 그러나 이젠....... '아아......! 만리, 당신은 더 이상 절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으시겠지요? 저도 이제는 어엿한 당신의 여인이 될 자격이 있답니다.' 쏴아아....... 따뜻한 물을 끼얹자 잘 발육한 유방 사이를 지나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 아랫배로 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막 우거지기 시작한 여인의 신비지처로 물은 거침없이 흘러 사라졌다. 주서벽은 얼굴을 붉혔다.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타노에게 연락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체념하고 있던 고신만리가 돌아온 것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환생했다는 것이다. 4 "......!" 방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을 보는 순간 고신만리는 격동을 느꼈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일신에는 노란색의 장의를 입고 있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등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했다. 그는 이제껏 많은 여인을 보아왔다. 환옥화만 해도 절세미인이었다. 음시음 또한 경국지색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나타난 여인은 그녀들과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만지면 손에 묻어날 것 같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연약했다. 18~19세 가량밖에 안 되어 보이는 여인의 홍조 띤 뺨에는 보조개가 패여 있었으며 꽃잎 같은 입술 아래쪽에는 작은 홍점이 찍혀 있었다. "가가(哥哥)......." 여인은 수줍은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 후 고개를 떨구었다. "흐흑......."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고신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한 줌밖에 안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였다. 그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방금 목욕을 끝낸 젊은 여인 특유의 상큼한 체취가 그에게 황홀한 느낌을 주었다. "그 동안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왜 저에게는 한 마디의 말씀도 없었나요? 흑...... 정말 원망스러워요." 고신만리는 여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미안하다, 벽아." "싫어요. 그 한 마디로 벽아의 고통이 씻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주서벽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며 고신만리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꿈꾸듯 몽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신만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구나....... 몰랐었다....... 너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곁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다니....... 그것을 알았다면 벌써 돌아왔을 것을....... 고신만리는 잃어버렸던 기억이 편편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특히 주서벽을 보는 순간 망실되었던 기억의 세포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흔히 한 번 파괴된 뇌세포는 희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왕왕 기적이란 것도 일어나는 법이다. 고신만리는 주서벽으로부터 그 동안 망실되었던 기역 세포들을 하나하나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주서벽은 본래 한 청렴한 문사 집안의 딸이었다. 수 년 전 강호를 주유하던 고신만리는 우연히 흑도인들에게 습격 당해 불타는 장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흑도인들을 쳐죽이고 잿더미가 된 장원에서 울고 있는 한 소녀를 구해냈다. 그녀가 바로 주서벽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너무나 귀엽게 생긴 주서벽을 보고 그는 자신의 곁에 두기로 결심했다. 그 후 주서벽은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문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는 총명했기에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맴돌며 손발이 되어 그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녀 덕분에 패도적인 성품의 고신만리도 점차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는 주서벽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나이가 어려 그녀를 여인으로 대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그는 미래의 자신의 아내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주서벽은 고신만리의 품에서 고개를 들며 애처롭게 말했다. "이젠 제 곁을 떠나지 마세요? 네?" 밤이 됐지만 그녀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알았다, 알았다니까.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벽아." 고신만리는 흠칫했다. 문득 주서벽이 그에게서 떨어지더니 옷고름을 끄르는 것이 아닌가? "무...... 무슨 짓이냐, 벽아!" 주서벽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가가...... 절 여자로 만들어 주세요." 고신만리는 놀랐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에 남아 있는 주서벽은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그에게 여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닌가? 평소의 주서벽은 품행이 방정하고 총명한 소녀였다. 결코 분방하거나 음탕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고신만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벽아,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옷고름이 끌러지며 주서벽의 상의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백옥같이 희고 깨끗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의 눈이 빛났다. 그도 남자였다. 남자라면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위해 옷을 벗는 것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사르륵! 옷깃 스치는 소리처럼 듣기 좋은 소리가 있을까. 이번에는 노란색 치마가 흘러내렸다. 방금 전 수욕을 마친 주서벽은 대담하게도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이미 작심하고 온 것이었다. "......!" 눈부시게 흰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신만리의 눈이 저절로 그녀의 나신을 더듬었다. 그녀의 유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연홍빛의 돌기는 부끄러움 탓인지 작게 움츠러져 있었다. 빙결처럼 매끄러운 아랫배에는 군살이라고 한 점도 없어 보였다. 주서벽은 수줍음으로 인해 손으로 가렸던 하복부를 서서히 떼었다. 촉촉히 물에 젖은 듯한 방림이 드러났다. "제발......! 절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주서벽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아름다운 유방이 환히 보였다. 고신만리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주서벽은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또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서벽, 이리 오너라."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가가......." 주서벽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고신만리는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꽃잎이 그의 입술 아래서 벌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술이 맞닿는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었다. 고신만리는 그녀를 번쩍 안고 침상으로 향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꺼리길 것이 없었다. 그는 주서벽을 침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옷을 벗고 우람한 나신을 드러냈다. 이어 침상에 올랐다. 그의 입술은 주서벽의 나신을 구석구석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 가가......." 주서벽은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화려하게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 여인의 문을 활짝 열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던가.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가가의 여인이 되는 거야. 주서벽은 자신의 중심부로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나이의 한 부분이 가득히 밀려들어옴을 느끼며 온몸을 떨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환희였다. 그녀의 일생이 마침내 화려하게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5 고신만리(高辛萬里). 그는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연공실(練功室)이었다. 과거 자신이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했음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땀에 절은 무복(武服)이 벽에 걸려 있었다. 검가에는 한 자루의 묵검(墨劍)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비단섭선도 있었다. "......!" 그것을 보는 순간 아득하게 기억 저편에 버려져 있는 과거가 하나둘 떠올랐다. 비로소 과거사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아득히 기억 저편에 망실됐던 일들이 빙글빙글 돌며 재생되고 있었다. 용대형 고신만리란 한 인간의 행적이 생생하게 그림처럼 떠올라왔다. 이것이었나....... 이것이 고신만리란 인간의 과거였던가. 그는 땀에 절은 포단 위에 앉아 회오리치는 과거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고신만리는 고아였다. 그가 우내십기에 의해 거두어진 것은 그의 나이 불과 7세 때였다. 어린 나이였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알고 있었다. 만두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비정한 것인지 벌써부터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혈루자를 제거하는 살수로 키워진 후로 잔혹한 인간이 된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요하게 혈루자를 추적하여 인정 사정 없이 그들의 목을 베었다. 어쩌면 그 행위는 자신을 학대한 세상에 대한 복수였는지도 몰랐다. 그의 자질은 천부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구인회 중에서 발군이 되었던 것은 남보다 불행한 과거사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우내십기에 의해 거두어진 후 그는 무공을 익힐 때 피땀을 흘릴 정도가 되어야 수련을 멈추곤 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구인회의 영수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동물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장차 우내십기가 구인회의 이용가치가 끝나면 혈루칠십이자처럼 대할 것이란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구인회를 장악했다. 그리고 고해성에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108인의 고수들을 역으로 처단함으로써 야심을 드러냈다. 그 이후 구인회는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고신만리의 영향 아래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고신만리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신을 멸시한 세상에 대하여 복수를 하려 했다. 구인회를 움직여 전 무림을 흔들기로 한 것이다. 그는 독자적으로 낙일애를 세웠다. 낙일애에 복수비를 세운 것은 그에게 청부한 자들을 수족으로 만들기 위한 복선이었다. 그를 찾아온 무림인들에게 살초를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했던 것이다. 언젠가 그들은 자신이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야망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구인회의 초대를 받았다. 명분인즉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흔쾌히 연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는가! 그것은 죽음의 함정을 파 놓은 소혼연(消魂宴)이었던 것이다. 고신만리는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오만했다. 그래서 꿈에도 구인회가 자신에게 반기(反旗)을 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인회 중 두 여인은 오랫동안 그를 사모하고 있었다. 탕미인과 음시음이 그들이었다. 그 점을 알면서도 그는 두 여인의 사랑을 모른 척해 왔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구인회의 배신의 음모를 그녀들은 사전에 알았으나 그에게 알리지 않았고 도리어 가담하기까지 했다. 탕미인이 그를 배신한 것은 자신의 사랑을 도외시한데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반면 음시음의 배신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전에 그를 구해낼 계책을 생각해 둔 것이었다. 결국 음모로 점철된 소혼연에서 그는 8인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 크아아아! 너희들이 이럴 수가......! ...... 후후후! 용대형, 당신은 지나치게 잔혹한 인간이오. 우리는 당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소. 우리를 원망하지 마시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소. ...... 비열한 죽일 놈들! ...... 호호호홋! 용가가(龍哥哥)! 이 탕미인을 그 동안 잘도 농락했지요? 어리석고 오만한 사람! 당신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에요! ...... 시음(詩音)! 너마저도......? ...... 용서하세요. 당신은 너무도 편벽한 위인이에요. 세상은 당신을 싫어하고 있어요. 내세에서는 좀더 포용력 있는 용 가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랍니다. 눈물. 고신만리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나이가 흘리는 눈물은 뼈아픈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연공실에 틀어박힌 채 눈물을 흘렸다. 그는 비로소 잃어버렸던 과거를 찾았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지난날의 삶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용대형의 일생은 온통 피와 잔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무정인간(無情人間)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성이란 것이 전무했다. 그런 과거를 되살린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었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인생을 생각했다. 그것은 구룡상막의 젊은 주인 영호전의 삶이었다. 그는 원치 않았지만 두 사람의 삶을 살아왔다. 그 두 사람의 삶은 상반된 것이었다. 어느 것이 진짜 그의 삶인지 과연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고신만리의 가슴은 타는 듯이 괴로웠다. 그는 일주야를 연공실에서 보냈다. 그 동안 타노와 주서벽이 몇 차례나 그를 만나려 했으나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일주야가 지났을 때 그는 스스로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타노에게 내린 첫 지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타노, 복수전(復讐典)을 가져오시오." 복수전은 낙일애를 다녀간 청부자들의 신상 내용을 적은 책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언제고 마음먹은 대로 그들의 목숨을 요구할 수 있었다. 타노는 의아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복수전을 가져왔다. 복수전을 모두 읽은 고신만리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 속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의 명호와 내력, 청부 내용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청부 내용 중에는 세상에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악인들이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살인을 자행한 부분이 더 많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청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신만리는 복수전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잔혹한 위인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타노, 이것을 태워버리게." "옛?" "태워버리라고 했네." "그...... 그럴 수가?" "아아! 모두가 내 잘못이네. 자네는 내 말대로 하게. 이 고신만리는 이제 새로운 인간이 되었네. 과거의 추한 기록들을 갖고 있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네." 타노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과거 흑도의 대마두로 고신만리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후 스스로 종복을 자처한 위인이었다. "앞으로 낙일애는 청부를 받지 않을 것이네. 지금 즉시 복수비를 없애 버리게." "......!" 타노는 멍한 표정이었다. 이때였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가가께서는 진작에 그리 하셨어야 했어요." 주서벽이 다가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신만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기쁜 듯 말했다. "가가는 딴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소녀는 정말이지... 기쁘답니다." 고신만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소중한 듯이 쓰다듬었다. "벽아, 나는 확실히 잘못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그 말에 주서벽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설마...... 또 떠나시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야 한다. 벽아, 내 지난 과오를 씻기 위해서라도 떠나야 한다. 하지만 돌아온다. 너의 진정한 남편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가가!" 주서벽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강하게 껴안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신만리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잘못된 인생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가 뿌린 악의 씨를 거두기 위해서도 떠나야만 했다. 제18장 부활(復活) 1 "놈을 죽여야 해......."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상한 음성의 주인은 사망각주 음양동자였다. 그는 며칠째 낙일애 근처에 매복하고 있었다. 수하들이 그를 죽이는 일에 실패한 이후 그는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아직은 과거를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에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가 없어. 용대형...... 그가 살아났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음양동자는 심복인 음양십이동녀(陰陽十二童女)와 함께 낙일애 근처를 며칠째 매복했다. 낙일애 아래로 바로 뛰어들 수도 있었으나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낙일애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고신만리는 무서운 위인이었다. 과거 그를 죽일 때 하마터면 그는 목숨을 잃을 뻔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구인회의 8인이 합공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상을 입어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었다. 그 만큼 고신만리의 무공은 출중했었다. 음양십이동녀는 6명의 동자(童子)와 6명의 동녀(童女)였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을 키웠다. 그들이 동시에 펼치는 살진(殺陣)이라면 고신만리를 죽일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휘류류류륭! 낙일애로부터 음풍이 불었다. 음양동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권서각과 손을 잡을 걸 그랬나? 아니야....... 놈은 워낙 교활해. 자칫하다가는 놈에게 덜미를 잡힐 우려가 있거든.' 그는 눈알을 굴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 그는 불행한 인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체질을 지닌 탓으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자라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체질로 인해 세상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권서각을 믿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음양십이동녀는 낙일애 곳곳에 은신한 채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고신만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놈이 낙일애로부터 나오는 길은 이 곳뿐이지.' 문득 한 가닥 경풍 소리가 낙일애 아래로부터 들려 왔다. "......!" 그는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용대형이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소리만으로도 그것이 천마잠룡풍(天魔潛龍風)이란 고신만리 독문의 경신법이 만들어 내는 소리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쳐라!" 그는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파아아앗! 음양십이동녀는 유령처럼 낙일애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아래보다는 위가 유리한 법이다. 더구나 상대방은 경신법으로 상승하고 있는 터라 진기를 자유롭게 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음양십이동녀는 낙일애 아래서 솟구쳐 오르는 한 인영을 향해 일제히 장력을 전개했다. 콰르르르! 열두 가닥의 부드럽고 음유하며, 잔랄하고 패도적인 경기가 각 방위를 차단한 채 막 낙일애로부터 떠오른 인영을 향해 퍼부어졌다. 아무리 내공이 강하다 해도 12명의 장력을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왕왕 의외의 일은 발생한다. "크아악!" "꺄아악!" 음양십이동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들의 몸이 아래쪽으로 빨려들 듯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아차 하는 사이에 낙일애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흡인력에 중심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한 장력을 뻗은 만큼 빨려 가는 속도도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미처 중심도 잡지 못한 채 떨어진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으으...... 이럴 수가......." 나무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음양동자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설마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음양십이동녀가 이토록 어이없이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음양십이동녀가 고신만리를 죽이지는 못해도 최소한 어느 정도 진기를 소모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린 것이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다...... 달아나야 한다! 놈은 이미 과거로 돌아갔다!' 그는 심장이 오그라지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때였다. "하하하핫......! 음양동자, 어디로 가려는가? 옛 친구도 만나지 않고 가진 않겠지?" "헉!" 음양동자는 헛바람을 들이 마셨다. 그가 달아나려는 방향에 누군가 길을 막고 있었다. 백삼청년이 표표히 옷자락을 날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용대형......!" 그렇다. 백삼청년은 용대형 고신만리였다. 그는 막 출곡하던 참이었다. 낙일애 위에서 장력이 밀려오는 순간 그는 대뜸 그것이 음양동자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후후! 정말 오랜만이군. 하지만 옛 친구를 만난 인사치고는 너무하지 않은가?" "으으......." 음양동자는 낭패한 듯 신음을 흘렸다. 스스슷! 그는 신형을 날렸다.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형을 날림과 동시에 혼력을 다해 전 무공을 뿜어냈다. 자신의 최대 절학이라 자부하는 음양마유신강(陰陽魔幽神 )을 전개하여 쌍장을 뻗으며 고신만리를 향해 덮쳐갔다. 콰아아아아! "......!" 고신만리는 흠칫했다. 설마 그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죽기 살기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상대방은 동귀어진을 할 각오를 한 것이다. "어리석구나, 음양동자." 그의 신형이 빛살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파파파파팟! 수중의 비단섭선이 활짝 펼쳐지더니 눈부신 환영을 사방으로 뿌렸다. 그것은 과거 용대형이 자랑하던 환상무한선법(幻想無限旋法)이었다. 번......쩍! 동시에 허리춤에서는 묵광(墨光)이 폭사해 나갔다. 애검 묵혼(墨魂)이 발검한 것이다. "크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낙일애를 흔들었다. 자욱한 피보라가 허공에 뿌려졌다. 음양동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도 하잘것없다는 것을 느끼며 온몸이 분해되고 말았다. 나른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의 몸은 허공에서 핏방울로 화해 흩어져 버린 것이다. "......." 고신만리는 허무한 눈으로 사방으로 뿌려지는 핏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음양동자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그도 상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쪽의 힘도 따라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잘 가게....... 음양동자."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린 후 신형을 날렸다. 2 강북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구룡상막(大九龍商幕)이 충천하는 화광(火光) 속에서 무너져 가고 있었다. "크핫핫핫핫......!" 난무하는 인영! 처절한 비명!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수라의 지옥도....... 구룡상막의 황금팔상을 비롯하여 주축을 이루던 무림인들은 급습해 온 금화성의 고수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금화성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많은 인원으로 공격해 온 것은 무림의 백도세력이었다. 소림사의 조사동에서 우내십기가 피살된 후 흉수가 영호전이란 소문이 돌자 백도무림에서는 그를 악마로 규정하고 공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결국 소림을 위시한 구파일방이 주축이 되어 전 무림의 백도인들이 구룡상막을 치기에 이른 것이었다. "으아아악......!" "희대의 흉마들......! 너희들은 이 땅에 설 자격이 없다!" "쳐라!" 콰르르르르......! 화염은 구룡상막의 본거지인 구룡연의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을 순식간에 화마로 휩쓸어 버렸다. 그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길을 찾아 헤매던 구룡연의 인물들은 금화성과 백도인들에 의해 도륙되고 말았다. 참극(慘劇)이 일어난 것이다. 150년 이상을 천하제일의 상벌로 존재해 왔던 구룡상막이 하루 아침에 한 줌의 잿더미로 화해 버린 것이다. 화염 속에 무너지는 구룡연을 바라보며 광소를 터뜨리는 인물이 있었다. "후후후......! 용대형, 이제 너의 손발은 모두 잘렸다. 이로써 네놈 하나쯤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흐하하하핫!" 그는 치독이었다. 금화성을 장악하여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망의 발판으로 삼았던 구인회의 1인인 그는 무너져 가는 구룡연을 득의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구룡연은 거대한 잿더미만 남게 되었다. 잿더미가 된 구룡연에 당도한 인영이 있었다. "으음! 한 발 늦었군......." 그는 폐허가 된 구룡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금색 수가 놓아진 관복(官服)차림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관복은 보통 관복이 아니었다. 적어도 황실의 요직에 있는 자만이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이는 삼십대였으며 눈썹은 먹빛처럼 검었고, 각진 얼굴에 정광이 번뜩이는 눈동자에는 만인을 압도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청년관인의 허리춤에는 보석이 박혀 있는 보검이 걸려 있었다. 그는 폐허를 바라보며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강북의 거상(巨商)이 결국 무림의 바람에 휩쓸려 붕괴되고 말았군. 한데 어찌 된 걸까? 오랫동안 옥화의 소식이 끊어졌으니......." 그때였다. 등뒤에서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오랜만이군. 검호(劍狐)." "......!" 청년관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경련했다. 그는 빙글 돌아섰다. 그의 눈이 부릅떠지고 있었다. "용대형......!" 그렇다. 그의 눈 앞에 있는 백삼청년은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왼손에는 비단섭선을 가볍게 쥐고 허리에는 묵검을 차고 있는 인물, 바로 용대형 고신만리였다. 고신만리는 구룡연이 무림고수들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구룡연은 완전히 폐허가 된 모습으로 그를 맞이한 것이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사로는 물론 황금팔상까지 순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격동을 금치 못했다. 비록 구룡연은 일시적으로 변장했던 영호전의 가문이었지만 그와 완전히 무관하다할 수 없었다. 영호전은 그의 또 하나의 분신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자신 때문에 참화를 입은 구룡연에 대해 책임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관복을 입은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검호(劍狐)다. 지난날 구인회의 일원이었던 자로 천상교(天上敎)의 교주였으며 달리 북경 권가(權家)출신으로 현재는 황실의 어영대장(御營隊長)이란 또 하나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검호는 과거 구인회 중에서 고신만리와는 개인적으로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것은 그가 고신만리와 함께 검법(劍法)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무공으로 논한다면 그는 고신만리 다음으로 강한 위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도 고신만리를 암살하는데 동조했다. 그의 의중에는 자신의 경쟁자인 고신만리를 꺼려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살아 있었군. 소문을 믿지 않았었는데......." 검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신만리는 담담히 반문했다. "무슨 소문 말인가?" "자네가 살아 있다는 소문. 그리고 우내십기를 척살했다는 소문 말일세." "우내십기를 척살했다니......?" 고신만리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의아해한 것은 검호였다. "무슨 소리냐고? 자네가 전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되었는데 모른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구룡연이 무너진 것도 무림의 공동합의에 의한 것을 모른단 말인가?" "......!" 고신만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낙일애를 떠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낙일애가 있는 곳은 구룡연이 자리잡은 석문(石門)에서 불과 하루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그 동안 강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문득 그는 기이함을 느꼈다. 그는 지금 영호전이 아닌 고신만리의 본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자신이 구룡상막주 영호전과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그는 필경 사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검호, 과거의 일은 묻지 않겠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검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이름에 호(狐)자가 붙은 것은 그의 성품이 영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영호전과 동일인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겠지?" "......." 검호는 탄식했다.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 자가 있었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이네. 이 세상에서 그럴 만한 자가 또 누가 있겠나?" 고신만리는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만권서각(萬券書閣)이로군." "부인하지 않겠네." 고신만리는 분노를 느꼈다. 과거 그를 척살했던 계획은 모두가 만권서각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데 이제는 자신을 무림의 공적으로 몰아넣기까지 한 것이다. 그는 낙일애를 떠나며 과거에 대한 복수를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오직 구인회로 인한 무림의 혈겁을 막는데만 주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구룡연의 참혹한 광경은 그의 가슴속에 분노의 불씨를 되살리게 하고 있었다. '만권서각...... 너였더냐? 네가 음모를 꾸몄단 말이지? 날 제거하기 위해 우내십기를 죽인 후 날 흉수로 몰아 구룡상막까지 무너뜨렸단 말이지?' 그의 뇌리에 만권서각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서의 책장을 뒤적이며 음소를 흘리는 모습이었다. 검호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용대형, 지난 과거의 일은......." 고신만리는 탄식하며 말했다. "과거의 일은 모두 잊었네." 검호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고신만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좋아, 좋아! 과연 용대형다운 도량일세." 그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한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자네는 옥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고신만리의 안색이 흔들렸다. "옥화는 내 누이동생일세. 난 자네와 그 아이의 관계를 알고 있네." 고신만리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자네의 누이인 줄은 몰랐네." "지금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자네의 생각이네. 그 아이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음......." 고신만리는 신음을 흘렸다. 검호는 그가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말을 돌렸다. "대답은 다음에 듣도록 하지. 지금 그 아이는 사지에 빠져 있네. 만권서각이 납치해 갔지. 최소한 그 아이를 구하는데 도와줄 수는 있겠지?" 검호는 기대에 찬 눈으로 고신만리를 바라보았다. 고신만리는 탄식하며 말했다. "물론이지. 기꺼이 돕겠네." "고맙네, 용대형. 자네가 과거를 탓하지 않으니 도리어 내가 지난 과거가 부끄러워질 지경이네." 고신만리는 담담히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지난 일은 모두 잊었네.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제 이 고신만리는 다시 태어났네. 내가 세상에 나오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 구인회로 인해 세상이 어지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네." 검호의 표정이 야릇해지고 있었다. 그는 영리한 인간이었다. 그는 고신만리가 정말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용대형, 나 역시 과거의 검호가 아닐세. 지금은 천상교주라는 신분보다는 황실의 어영대장이 내가 갈 길이네. 피비린내와 배신이 난무하는 무림은 더 이상 아무 관심도 없네." 고신만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 사실인가?" "믿어주게." 고신만리는 문득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믿고 말고." 그는 검호의 어깨를 치며 흔쾌한 어조로 말했다. "가세!" 3 "아....... 안돼요! 아악......!" 찌익! 북! 여인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옷자락 찢어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이 악마...... 악!" "후후! 더 이상 뜸들일 필요가 없어졌는데 뭘 기다린단 말이냐? 후후...... 너도 이것을 바라지 않았느냐?" 남자는 여인의 옷을 북북 찢어발기고 있었다.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으나 사내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치독(痴毒)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금화성을 장악한 후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 그는 금화성주의 딸 뇌현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뇌현상은 옷이 갈기갈기 찢긴 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흐흑......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뇌현상은 재색(才色)을 겸비한 절색의 미녀였다. 다만 불행히도 어려서부터 고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병을 고친 것은 치독이었다. 그는 독술로 그녀를 치료해 준 후 그것을 빌미로 금화성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연후 치밀하게 독을 풀어 금화성주를 금제했을 뿐 아니라 금화성 전체를 손에 넣기에 이르렀다. 한편 뇌현상은 모순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치독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치독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기울어 버린 여심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치독의 마음을 돌려 보려 했으나 그녀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동안 치독은 그녀를 예우해 주었었다. 구룡상막과 대치하고 있는 금화성의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다짜고짜로 그녀를 취하려 했다. "꼭...... 이래야만 하나요? 아아....... 좀더 부드럽게...... 절 대해줄 순 없나요?" 뇌현상은 애처롭게 애원했지만 치독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벌써부터 뇌현상에게 음심을 품어왔었고 그의 여색 취향 또한 남달랐던 것이다. "후후후...... 이리 오너라. 즐겁게 해 주겠다는데 웬 앙탈이냐?" 휙! 그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뇌현상에게 덮쳐갔다. "악!" 뇌현상은 도저히 그를 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치독의 손에 잡혔고 그나마 남아 있는 옷은 순식간에 뜯겨져 나가고 말았다. "흐으윽!" 그녀는 울부짖었다. 이런 모욕감이 또 있을까? 대부호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그녀는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마음속으로 연심을 품고 있는 상대이긴 했으나 이렇게 강제적으로 겁탈 당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후후후......." 치독은 그녀의 허리를 빙글 돌려 벽에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그녀는 가장 치욕적인 자태가 되고 말았다. 뇌현상은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상아빛이었으며 유방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잘록한 허리 아래로 둥글게 퍼져 나간 둔부는 마치 달덩이와도 같았다. 그 동안 자신의 나신을 동경을 통해 바라보며 얼마나 고대했었던가? 사랑하는 사나이의 품에 안겨 달콤한 밀어를 속삭일 날을 그녀는 손꼽아 기다려 왔었다. "아악!" 뇌현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의 머리는 벽에 세차게 부딪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런 자세로 그녀의 육체는 유린당하고 있었다. 치독은 그녀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억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전희(前戱) 따위는 완전히 생략되었고, 그는 오직 쾌락을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여체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이 그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여인이 반항하면 할수록 더욱 더 신선한 자극을 느끼는 것이 그의 취향이었다. "하악......." 뇌현상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 눈동자 속에서 한때 아름답게 키워왔던 꿈이 파괴되어 갔다. 희망은 짓밟혔으며 절망만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했었다. 언젠가는 치독이 자신을 맞아들여 다정한 부군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틀렸어....... 이 자는 사람이 아니야....... 악마였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치독의 격렬한 움직임에 따라 머리는 벽에 부딪쳐 피가 배었고, 입술은 악다물어 찢겨졌으며 손톱은 벽에 긁혀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반면 치독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과 후련함이 잔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뇌현상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후후......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이 재미를 말이야........ 머지않아 내 발등에 입맞추며 날 경배하게 될 거다! "제발 부탁이에요? 네?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아버님을 뵙게 해 주세요. 어떤 부탁이든 다 듣겠으니....... 네?" 금화성의 뇌옥(牢獄) 입구. 뇌현상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뇌옥 입구에는 2명의 흑의장한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야릇한 시선으로 뇌현상의 아래위를 탐욕스런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마지막이야. 한 번만...... 아버님의 얼굴을 뵌 후에...... 이 더러운 세상을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뇌현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랏빛 꿈과 희망과 산산조각 난 이상 더 욕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는 치독으로부터 겁탈 당한 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치독은 그녀가 원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악마에 불과했다. 그녀는 세상을 버리기로 했다. 모든 희망은 죽어 버렸고 오욕에 찬 삶을 정리하는 것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고 말았다. 그 전에 아버지를 한 번만 보고 싶었다. 그래서 몰래 금화성주가 갇혀 있는 뇌옥으로 온 것이었다. "흐흐! 정말 무슨 짓이든 하겠단 말이냐?" 왼뺨에 칼자국이 나 있는 장한이 음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제발....... 한 번만 아버님을 뵙게 해 주신다면......." 뇌현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나이의 음탕한 눈길이 자신의 온몸을 핥듯이 훑어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장한은 치독의 수하들이었다. 이제 금화성은 본래의 금화성이 아니었다. 금화성은 치독의 수하들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가 금화성의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장한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의 몸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어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해 버린 그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바에야 오욕 덩어리에 불과한 몸뚱어리가 뭐가 그리 소중하단 말인가? "흐흐! 그래......?" 이번에는 쥐눈의 장한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좋아, 그럼 옷을 벗어라." 뇌현상은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며 손으로 치마를 들추었다. 치마 속에서 눈부시게 흰 허벅지가 드러났다. 이곳으로 오기 전 그녀는 속곳을 벗어버렸던 것이다. "흐흐......." "꿀꺽! 대단한 걸?" 장한들은 군침을 연신 삼켜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화성의 금지옥엽이었던 여인이다. 절색의 미녀인 그녀가 신분도 보잘 것 없는 그들의 앞에서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헤헤....... 공짜란 없지. 이리 오너라." "안돼! 내가 먼저야!" 두 장한은 서로 다투었다. 자신들이 먼저 뇌현상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뇌현상은 그들의 다툼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을 너무 끌면 그 나마 위험해진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 아버님을 먼저 뵈면 안 될까요......?" "흐흐....... 그건 안 되지!" 두 장한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서로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쥐눈이 양보했다. "빌어먹을! 그럼 빨리 끝내라구!" "흐흐, 알았어." 칼자국 장한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뇌현상의 손목을 덥석 잡고 좌측의 모퉁이로 끌고 갔다. 장한은 다짜고짜로 그녀를 벽을 향해 세워놓고는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 속곳을 입지 않은 터라 뇌현상은 금세 반라가 되고 말았다. "흐흐......!" 장한은 뒤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유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손안에서 뭉개지는 유방의 감촉을 즐기며 그는 서둘러 바지를 끌어내렸다. "내게도 이런 날이 있다니....... 헤헤! 어젯밤 꿈에 선녀가 발가벗는 걸 봤는데 이런 횡재수가 있었군!" 장한은 한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뇌현상의 깊은 곳을 향해 거칠게 쑤셔 넣었다. "악......." 사나이의 손이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자 뇌현상은 비명을 질렀다. 죽고 싶어! 차라리......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릴까! 그녀는 피눈물을 흘렸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저주스러웠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장한이 뒤에서 그녀를 범한 것이다. 그녀의 몸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육체는 이제 혼을 상실한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대가 바뀐 듯했다. 이번에는 자세가 달라졌다. 쥐눈의 장한은 그를 똑바로 세워놓고 더러운 입술로 그녀의 전신을 마구 핥아대고 있었다. 개 같은 인생....... 개 같은 세상....... 그녀의 눈동자는 텅 비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참자...... 아버님을 뵌 후에는....... 한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음이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상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떴다. 발아래 쥐눈 장한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머리가 으깨어져 있었다. '......?'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옷을 걸쳐 주었다. "낭자, 이젠 안심하시오." 귓전에 사나이의 연민에 찬 음성이 들려 왔다. 그녀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있었다니. 이 분은 누구일까? 마치...... 꿈속의 왕자님 같은 이 분은 누구일까? 백삼청년이 비단섭선을 든 채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연민과 동정의 빛이 가득했다. 뇌현상은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런 분이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왜 이런 분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뇌현상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사나이는 고신만리였다. 그는 금화성에 잠입했다가 우연히 그녀가 겁간 당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흐흐흐흑......!" 뇌현상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녀는 고신만리가 누군지 몰랐다. 다만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해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을 터뜨린 것이다. 고신만리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나 두 파렴치한 놈들을 죽였소. 뇌옥의 문도 따 두었소. 이젠 낭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그럼......." 스스....... 뇌현상은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서 아름다운 사내가 사라졌다. 그녀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뇌현상은 손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마치 사라진 사내의 영상을 붙들어 안으려는 듯이. 그러나 그녀의 손은 허공을 하릴없이 휘저을 뿐이었다. "아아!" 그녀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이 한 번의 거짓말 같은 일은 그녀로 하여금 삶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아름다운 손이었다. 그 손으로 행복을 잡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반짝 빛이 일어났다. 세상은 넓어....... 난 죽지 않아! 악마 같은 그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야 해! 그래....... 살아서 보란 듯이 보여줘야 해! 나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4 치독은 옥배(玉杯)를 들고 있었다. 옥배 속에는 100년 묵은 호박빛 천일취(千日醉)가 담겨 있었다. 그는 천일취의 그윽한 향기를 즐기며 느긋한 표정이었다. 천하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듯했다. "흐흐흐! 이번 일로 무림인들은 금화성을 존중하게 될 거다. 그리고 머지않아 무림은 바로 이 손에......." 그는 옥배를 번쩍 치켜들었다. 막 천일취를 마시려는데. "치독, 그건 속단이 아닐까?" 어디선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왔다. "웬놈이냐?" 치독은 옥배를 탕!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후후! 옛 친구를 벌써 잊었나? 섭섭하군." "헉...... 이 음성은.....?" 치독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맞은편에 유령처럼 나타나는 인영이 있었다. 눈처럼 흰 백삼을 걸치고 왼손에는 비단섭선을 가볍게 움켜쥔 영준한 청년이었다. 허리춤에 걸려 있는 묵검이 몹시 낯익었다. "용...... 용대형!" 치독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격렬하게 떨었다. 고신만리였다. 마침내 그가 나타난 것이다. 고신만리는 무심한 눈으로 치독을 바라보았다. 본래 그는 치독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이 달라졌다. 뇌현상의 비참한 모습을 본 후 치독의 독랄함을 새삼 느낀 것이었다. 무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독 같은 위인이 제거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아직 날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었군. 치독." "으으...... 너는...... 정말 살아 있었군?" 치독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쉴새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으나 암중으로는 이미 모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가 있는 방은 사방이 온통 기관장치와 독암기로 설계된 곳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용대형이라 해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고신만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이미 치독의 심산을 간파하고 있었다. 구인회의 회주였던 그는 구인회의 인물들의 성품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는 것이다. 파라라라락! 그의 수중에서 섭선이 펼쳐졌다. 그는 섭선을 흔들었다. 그러자 눈부신 비단섭선의 환영이 방 안을 가득 뒤덮었다. 번쩍! 그 사이로 한 가닥 묵광(墨光)이 뇌전처럼 뻗어 나갔다. 치독은 절망했다. '틀렸어!' 그는 용대형을 알고 있었다. 일단 그의 손에는 묵혼이 발출됐다면 만사는 끝난 것이다. 쩌어어억! 그의 몸이 갈라지고 있었다. 두 손은 좌우로 균형을 잃은 채 흔들렸고 몸뚱이는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두 쪽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제19장 흔들리는 불회곡(不廻谷) 1 <용대형(龍大兄)이 돌아왔다. 이미 그의 손에 음양동자와 치독, 탕미인이 당했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뭉쳐야 한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그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불사곡(不死谷)의 전 인원을 이끌고 오기 바란다. 무무(無無)도 내 의견에 동조했다.> 전서구를 통해 날아온 서신. 그것은 불회곡(不廻谷)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서신의 겉봉에는 만권서각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 불사곡주는 서신을 몇 번이고 읽었다.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신비의 인간이었다. 구인회의 인물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황(啞皇)이다. 아황은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거대하다기보다는 비대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너무나 살이 쪄서 움직이기도 불편해 보였다. 보통 사람의 5배는 됨직한 체구였다. 그래서 침상도 특별히 제작한 것이 아니면 잘 수가 없었다. 그는 거대한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는 살찐 뺨을 씰룩였다. '용대형이 돌아왔다고? 그가 어떻게?' 그는 말하지 못한다. 그의 이름이 아황인 것은 그가 벙어리이기 때문이었다. 벙어리인 탓으로 사람들은 그를 더욱 무서워한다. 한 마디의 사전 예고도 없이 살인을 하기 때문이다. 대저, 불구자에게는 남다른 오기와 집념이 있는 법이다. 아황은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먹는 것이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식사를 한다. 하루 종일 먹는 것으로 소일했으며 그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살이 쪘다. 과거 구인회 시절만 해도 그의 체구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살덩이로 화해 버렸다. 눈은 눈꺼풀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고, 목은 어깨와 붙어 있었다. 팔다리 역시 몸뚱이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옆구리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아황은 실눈을 움찔거렸다. 한동안 생각하던 그는 침상 모서리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놈이 나타났다면 혼자는 안 된다. 더럽지만...... 퉤엣. 그 역겨운 두 놈과 합작할 수밖에.' 다음 날. 불사곡의 전 인원이 이동했다. 불사곡은 본래 강호에서 죄를 짓고 도망치던 자들이 몸을 의탁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불사곡에는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악명을 떨치는 흉마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이 불사곡을 나섰다. 선두에는 거대한 마차가 앞장 섰다. 마차는 여덟 마리의 말이 아닌 흑우(黑牛)가 끌었다. 마차 바퀴가 노면에 깊이 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미루어 마차에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육중한 물건이 실린 듯했다. 2 내방산(內方山)의 북쪽은 거대한 산림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대낮에도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밀림이 우거져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 숲의 이름은 만겁림(萬劫林)이라 불린다. 오래 전부터 이곳은 천하제일절지(天下第一絶地)라고도 불려왔다. 그것은 만겁림에 자욱히 퍼져 있는 독장(毒 )과 득실거리는 독충(毒蟲)을 비롯하여 수많은 맹수들이 우글거리기 때문이었다. 이 숲을 지나면 불회곡(不廻谷)이 나온다.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기에 불회곡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밀림 안의 공기는 탁했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밀림 속에는 온갖 이름 모를 야생초와 덩굴식물,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사이로 홍색의 연무(煙霧)가 자욱히 퍼져 있었다. 1만 년 이상을 바닥에 쌓여 썩어 들어간 낙엽으로부터 발효된 장독( 毒)이었다. 이 장독은 어떤 생물체를 막론하고 호흡기를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내장을 녹여 버리는 무서운 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욱하게 퍼져 있는 장독의 연무 사이를 유유히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는 두 인영이 있었다. "하하......! 자네가 이렇게 달라질 줄 알았다면 당시 나는 암살계획에 동조하지 않았을 걸세." 낭랑한 웃음소리에 이어 물처럼 담담한 음성이 들려 왔다. "모든 것은 업보일세. 그런 고초를 겪지 않았다면 새 삶을 찾을 수 없었을 걸세." "용대형, 그나저나 누이를 어떻게 할 셈인가? 자네가 그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으음. 그건......." 장독 사이를 유유히 걷고 있는 두 청년은 고신만리와 검호였다. 그들은 장독 속을 마치 산보하러 나온 듯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홍색의 연무가 1장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옷자락 따위는 순식간에 녹여 버릴 정도로 무서운 장독이었다. 그런데 장독은 그들의 주위에 얼씬도 못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울창하던 밀림이 끝나고 그들의 눈 앞에 험준한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은 마치 밀림을 천부(天斧:하늘의 도끼)로 찍어낸 듯 밀림을 좌우고 갈라놓은 채 안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계곡 입구에는 기암괴석이 칙칙한 회색을 띤 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한 음침한 계곡이었다. 용대형은 곡구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환영하는 자가 꽤 많은 것 같군." 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몸을 좀 풀어볼까?" 슈우우욱! 검호는 관복을 펄럭이며 질풍처럼 계곡 안으로 날아갔다. 고신만리도 망설이지 않고 한 가닥 연기가 되어 그의 뒤를 따라 계곡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쳐라!" "죽여라!" 콰아아아아! 그들이 계곡에 진입한 순간 험악하게 치솟아 있는 좌우의 절벽으로부터 함성과 함께 수백 명에 달하는 인영들이 벌떼처럼 공격해 왔다. 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춤(舞). 그것은 아수라(阿修羅)의 춤이었다. 번뜩! 가공할 검기가 사방으로 빛살처럼 뻗어 가면 자욱한 피안개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광란의 검무(劍舞)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처절한 비명과 용천처럼 뿜어지는 피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불꽃을 보고 날아드는 불나방인들 이러할까? 불회곡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수의 우세를 믿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택했다. 그들의 상대는 구인회 중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이었다. 용대형 고신만리와 검호는 구인회의 제일인자와 제이인자였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천지를 양단할 위력이 있었다. 아무리 많은 수효로 덤벼도 그들에게는 한낱 짚단을 베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불회곡에 매복한 자들은 무림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불사곡과 불회곡으로 숨었던 무림의 이단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오랫동안 한을 삭이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은 공을 세우고자 했다. 고신만리와 검호를 죽이면 그들은 다시 얼굴을 들고 무림을 횡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꿈에 불과했다. 검호의 보검은 줄기줄기 가공할 검기를 뿌려댔다. "크아아악!" 참혹한 비명과 함께 한꺼번에 5명이 오체분시되어 날아갔다. 시뻘건 피분수가 땅을 물들였다. 검호는 신형을 이리저리 날리며 눈에 띄는 대로 가차없이 살수를 펼쳤다. 아마도 평생을 통해 이처럼 많은 살인을 한 적은 없을 것이다. 한편, 고신만리는 기이함을 느꼈다. 두 사람을 향해 덤비는 자들의 기세는 가히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동료들이 즐비하게 시신이 되어 나뒹구는 것을 보면서도 시체를 밟고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그들 중 단 1명도 달아나는 자가 없었다. 고신만리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거늘.......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런 단 말인가?' 이윽고 사위가 점차 적막에 휩싸였다. 수백 명의 인물들은 계곡을 메운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고신만리와 검호의 검하에 고혼이 된 것이다. "......." 고신만리의 앞에는 귀두도(鬼頭刀)을 움켜쥔 흑의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악도부(惡屠斧) 서필강(徐必强). 그는 과거 악명 드높던 대마두였다. 육순이 넘은 그의 얼굴은 검었으며 죽 째진 눈에서는 흉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고신만리는 고개 돌려 검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2명의 중년인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수백 명의 고수들이 궤멸되고 남은 것은 3인이었다. 그들은 과거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기도 했다. 고신만리는 여전히 다시 시선을 돌려 서필강을 바라보았다. 서필강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귀도두는 중단을 겨누고 있었고 그의 자세에서는 패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깝군.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대와 술 한 잔 나눌 수도 있었는데." 고신만리는 과거 패도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패기 있는 인물을 좋아했다. 그래서 서필강의 꿋꿋한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흐흐! 노부의 목을 벤 후라면 그럴 용의도 있지." 서필강은 괴소를 흘린 후 귀두도를 번쩍 휘둘렀다. 카카카캉! 고신만리의 섭선이 활짝 펼쳐지며 귀두도를 차단했다. 부드러운 비단섭선이었으나 100근이 넘는 귀두도는 불꽃을 퉁기며 방향이 빗나가고 말았다. 고신만리는 묵검을 발출할 수도 있었다. 섭선과 검을 동시에 전개하는 것은 그만이 지니고 있는 절학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절대절멸의 살초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묵검을 전개하지 않았다. 왠지 일검에 서필강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죽어라!" 위이이잉! 귀두도가 태산을 양단할 듯 떨어졌다. 서필강의 도법은 거항도법(巨項刀法)으로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변식보다는 힘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번쩍! 고신만리의 허리춤에서 묵광이 뻗었다. 묵광은 귀두도의 도광을 뚫고 원을 그렸다. "큭!" 서필강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에 끈끈한 것이 만져졌다. "크크크! 과연...... 용대형답구나......." 그것이 끝이었다. 서필강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미처 느낄 사이도 없이 고신만리의 검이 목을 벤 것이다. "크아악!" "케에엑!" 두 마디 단말마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고신만리는 검호의 앞에서 두 중년인이 각각 가슴과 옆구리를 움켜쥐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3 3인. 과거 구인회에 함께 속했던 자들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품자형으로 앉아 있었다. 만권서각과 무무, 또 한 사람은 비대한 체구의 아황이었다. 그들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방금 전 불회곡의 마지막 저지선이 무너졌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만권서각은 평소에 습관처럼 넘기던 고서조차 손에 뗀 채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이 시시각각 흔들리고 있었다. 무무의 주위에는 검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기류는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심중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만 아황만이 거대한 바위인 양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비곗살로 뭉쳐진 얼굴에서 표정을 찾기는 애당초 무리인지도 몰랐다. 다만 이따금 그의 실눈이 움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무의 탁한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침묵은 깨졌다. 만권서각이 그의 말을 받았다. "기다려야지." 차가운 음성이었다. 무무는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기다리다니? 그럼 놈이 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린단 말이냐?" 만권서각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 나왔다. "후후! 놈의 무공은 우리 삼 인을 능가한다. 정면대결은 어리석은 짓이지." 무무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그럼?" "벌써 잊었느냐? 우리에게 인질이 있다는 것을?" 무무와 아황은 거의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만권서각은 자신 있게 말했다. "놈은 우리의 목을 취하기 전에 먼저 두 계집부터 구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무무가 황급히 물었다. 만권서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너희들은 벌써 잊었느냐? 내가 과거 구인회의 꾀주머니였다는 사실을? 내겐 아직 열어보지 못한 지낭(智囊)이 하나 있다. 너무 겁먹지 마라. 이제 그 지낭을 열어볼 테니." 제20장 혈루무정지곡(血淚無情之曲) 1 휘익! 불회곡 안으로 날아드는 두 인영이 있었다. 그들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용대형 고신만리와 검호였다. 두 사람은 곡구에서 수백 명의 매복을 물리친 후 마침내 죽음의 불회곡에 들어선 것이다. 검호는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훗! 이제 본격적인 춤사위를 벌일 때가 왔군." 고신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풀었으니 자네의 솜씨를 오랜만에 보게 되겠군." "후후... 자네 옷은 따뜻하게 입었겠지?" "물론이지." 기이한 일이었다. 때는 여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더웠다. 그런데 옷을 따뜻하게 입다니? 두 사람은 서로간에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이 막 하나의 언덕을 넘었을 때. "......!" 두 사람은 못박힌 듯 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눈은 전면을 바라본 채 부릅떠져 있었다. 언덕을 넘자 지대가 약간 낮아지며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그 분지 한가운데 커다란 누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대는 통나무로 견고하게 축조된 것이었다. 불회곡의 음산한 풍경과 함께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누대였다. 두 사람이 놀란 것은 누대 위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누대 위에는 펄펄 끓는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그 가마솥 위에 나무판자가 길게 가로놓여 있었고, 그 위에 전라(全裸)의 두 여인이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마솥에서는 수증기가 자욱히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나무판자 위에 누워 있는 두 여인의 나신은 온통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그 중 한 여인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검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옥화......!" "시음......!" 곧이어 흘러 나온 신음에 가까운 외침은 고신만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누대 위의 두 나체 여인은 바로 환옥화와 음시음이었던 것이다. 고신만리의 눈썹의 흔들렸다. 그의 눈은 환옥화의 불러 오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격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 임신했단 말인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환옥화는 일찍이 그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누대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말았다. 그때였다. 누대 위로 두 인영이 뛰어올라갔다. 그들은 상체를 벌거벗은 망나니로 어깨에 커다란 귀두도를 둘러메고 있었다. 고신만리와 검호는 누대로부터 40장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모든 광경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2명의 망나니는 나무판자 위에 앞뒤로 올라서더니 귀두도를 휘두르며 춤추기 시작했다. 위잉! 그들의 귀두도는 여인들의 목에 떨어졌다가 간발의 차이로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여인들의 가슴을 살짝 스치곤 하며 춤추기 시작했다. 오른쪽의 망나니는 귀두도로 환옥화의 부른 배를 향해 휘둘러 대기도 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망무(死亡舞)였다. "으으......! 이런 죽일 놈들......!" 검호는 분노를 금치 못하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급기야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형을 날렸다. 고신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숨에 허공을 날아올라 누대를 향해 날아갔다. 둥! 어디선가 섬뜩한 고(鼓)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뜩! 좌측의 망나니가 귀두도를 내리쳤다. "아아아아악......!" 시뻘건 핏줄기가 뿜어졌다. 음시음의 수급이 잘려지며 펄펄 끓는 가마솥 안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시음......!" 고신만리는 대경했다. 그는 천마잠룡풍(天魔潛龍風)을 시전하여 단숨에 누대를 향해 날아갔다. 그때였다. 뒤에서 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용대형! 속지 말게! 아무래도 수상......."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광석화처럼 누대에 당도한 고신만리의 비단섭선이 두 망나니의 목을 날리고 있었다. "케에에에엑!"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망나니들의 수급이 잘려 가마솥 안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릉......! 돌연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누대가 요동을 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회곡의 분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이게 무슨 일이지?" 고신만리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꽈르르르......릉! 천지를 붕괴시킬 듯한 폭음과 함께 가마솥이 걸려 있는 지점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치며 폭발이 일어났다. 꽈꽈꽈꽝......! 누대를 중심으로 연속적으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누대를 중심으로 폭발은 점차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쩌쩌쩍...... 쩌어어어억! 그로 인해 분지의 바닥이 거북 등처럼 갈라져 나갔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불회곡 전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사방에는 폭죽과도 같은 화염이 치솟고 있었고 폭발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고신만리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콰르르르릉! 고막을 치는 폭음이 일어나면서 지면이 허물어져 내렸다. 뿐만 아니라 사방의 절벽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고신만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신형을 날렸으나 그의 몸은 휘몰아치는 불기둥 속에 휘말리고 말았다. 인위적인 폭약의 매설로 인해 천재지변이 이어진 것이었다. 폭음은 무려 한 시진 이상이나 계속되었고, 불회곡은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 "으하하하하핫!" "크핫핫핫핫핫!"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리는 3인이 있었다. 만권서각, 무무, 아황 등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불회곡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내방산의 한 산정(山頂)이었다. 날아갈 듯한 처마와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된 정자 위에서 그들은 옥배 가득 술을 따른 채 축배를 올리고 있었다. 정자 안에서는 불회곡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불회곡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뭉클거리며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와 움푹 패인 채 폐허가 되어 버린 분지뿐이었다. 매케한 화약 연기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풍겨오고 있었다. 만권서각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용대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득의만면하여 자랑스럽게 말했다. "놈의 약점을 이용했지. 설사 하늘을 나는 실력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무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이제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군." 평소에는 좀처럼 표정을 보이지 않던 아황도 실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들 3인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용대형이 사라진 이상 천하는 그들의 손안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눈엣가시 같은 검호까지 10만 근의 화약과 함께 날아갔으니 거리낄 것이 없는 셈이었다. 무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옥배를 단숨에 기울였다. 옥배를 내리는 순간 그의 눈을 부릅떠졌다. "크으으....... 네놈이 이럴 수가........ 와아아악!" 갑자기 무무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왈칵 선혈을 뿜어냈다. 그는 옥배를 내팽개치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입과 코로는 연신 검은 피가 울컥울컥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색되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만권서각을 가리켰다. "너...... 너...... 네놈이 독주(毒酒)를......." 쿠웅!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무무는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흑색으로 변했고 부릅뜬 눈에서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시신은 쭈글쭈글해지더니 푸른 연기가 피시시! 소리를 내며 피어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은 시커먼 물로 녹아 버리고 그 자리에는 옷자락만 남게 되었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 아황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저 실눈만이 웃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아직 옥배를 마시지 않고 있었다. 만권서각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황, 옛말에도 한 산에 양호(兩虎)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 "후후! 자네의 잔에는 독을 넣지 않았네. 오래 전부터 만독불침지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지." 아황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되 그는 내심 크게 당혹하고 있었다. 무무를 독살한 만권서각이다. 그런데 자신이라고 가만둘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권서각은 옥배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에게는 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지." 그는 옥배를 단숨에 마신 후 등뒤로 던져 버렸다. 그의 손이 의자의 손잡이를 탁! 쳤다. 철컥! 철컥!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아황의 손목은 단단한 강철 고리로 채워지고 말았다. "......!" 아황의 눈이 커졌다. 커져야 간신히 동자가 보일 정도였지만 그는 태어난 이래 이처럼 놀란 적이 없었다. 황급히 손에 힘을 주어보았으나 손목을 채운 고리는 만년한철로 만들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비틀었다. 철컥! 철컥! 다시 금속서이 울렸다. 이번에는 두 발목에 고리가 채워졌으며 뒤이어 목과 허리까지 단단한 고리가 채워지고 말았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할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만권서각은 그가 앉아 있는 의자에 특수한 장치를 해 놓았던 것이다. 아황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살덩이 사이에 파묻혀 있는 실눈은 쉴새없이 움찔거리며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만권서각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잘 가게, 친구. 덩치가 큰 자네를 곱게 화장하기 위해 다량의 유황을 구입해 놓았다네." 그는 발로 정자 바닥을 힘주어 밟았다. 덜컹! 아황의 모습이 아래로 쑥 꺼졌다. 의자와 함께 정자 아래 비밀리에 마련해 둔 지하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아황의 비명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크핫핫핫핫......!" 만권서각의 앙천광소가 하늘 높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3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녀에게서는 공단의 빛깔과 감촉을 느끼게 한다. 눈은 호수처럼 맑았고 입술은 장미처럼 화려했다. 살결은 빛을 반사할 만큼 깨끗하여 도무지 인간세상의 여인 같지가 않았다. 음시음이었다. 그녀는 지금 선녀도가 걸려 있는 자신의 방에 넋을 잃은 듯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에는 비파가 안겨져 있었다. "후후! 시음, 모두 죽었다. 네가 그토록 연연해하던 용대형은 물론 검호와 무무, 아황까지도 모두 저승으로 떠났다. 후후...... 이제 남은 것은 그대와 나뿐이다." 만권서각은 술잔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의 영준한 얼굴에는 탐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면서 음시음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연녹색 궁장을 입고 있는 음시음의 육체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이 완벽해 보였다. 좁은 어깨와 한 손에 쥐어질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 그 아래로 성숙한 여인답게 풍만한 곡선을 그리며 퍼져 있는 둔부, 보이진 않아도 아마도 그 아래로는 대리석처럼 곧게 뻗어 있는 다리가 있을 것이다. 비파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가락은 희고 매끈했다. 천장에 매달린 궁등에는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어 은은한 광채를 실내에 발산하고 있었다. 야명주의 빛을 받은 음시음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만권서각의 눈빛이 욕망으로 타올랐다. "시음, 오랫동안 널 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하지만 너는 오직 용대형만을 사랑했지.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지." 그의 음성에는 질투가 담겨 있었다. 만권서각은 기실 오래 전부터 음시음을 사모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용대형이 음시음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회곡과 함께 용대형이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는 매우 통쾌했다. 천하를 얻는 것만큼이나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차 올랐다. 용대형이 사라짐으로써 오랫동안 품어온 욕망을 실현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다. 그에게는 물론 천하를 경영하고픈 야망이 있었다. 또한 그 야망 못지 않게 강한 욕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음시음에 대한 것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 음시음. 이제 그녀를 완벽하게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술잔을 기울였다. "용대형은 강했다. 모든 방면에서 그는 우리 구인회를 영도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너도 탕미인도 오직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서슴지 않았지." "......." 음시음은 말이 없다. 그녀의 봉황과도 같은 눈동자는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 보았다. 이 만권서각도 결코 그만 못지 않다는 것을 너희들은 몰랐다. 후후...... 진정한 승자는 최후에 웃는 자다. 그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바로 이 만권서각이다. 그와의 승부는 끝났고 진정한 강자가 누군지 가려진 셈이다." 만권서각의 눈에서 욕망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하는 곧 내 수중에 떨어질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가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음시음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그녀의 눈에는 곤혹스런 빛이 떠올라있었다. "음시음, 바로 널 얻는 것이었다." "......!" 음시음의 얼굴이 흔들렸다. 만권서각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음시음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난 강자다. 시음,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네게는 강자만이 어울린다. 따라서 너는 내 여인이 되어야 한다." 음시음의 눈빛이 물처럼 맑게 가라앉았다. "기다려요, 만권서각." 만권서각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에게도 기회를 주어야죠." "......?" "확실히 당신은 대단한 인물이에요." 음시음의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 "시음은 강자를 좋아해요." "후후후......." 만권서각은 득의에 차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였다. 음시음의 눈에 반짝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만권서각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곡(曲) 하나를 기념으로 들려 드리려고 해요." 만권서각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한쪽에 있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좋지. 누이의 음공은 천하일절이지." 그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그는 지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시음의 마음이 돌아선 거야. 날 위해 특별히 곡을 준비해 놓았다지 않았는가? 후후....... 용대형, 그대는 아는가? 한때 그대의 여인이었던 시음이 날 위해 비파를 뜯으려 하고 있어. 그대는 분명 강자였지. 하지만 여자의 마음 하나 제대로 사로잡지 못한 바보다. 더구나 그대는 이 만권서각의 계략에 간단히 넘어가고 말았다. 후후.......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었어. 디디디딩....... 천상의 선율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파음이 울리는 순간 만권서각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욕망과 증오가 부드럽게 녹아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평화롭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몸조차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다. 그의 의식은 물거품으로 화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선경(仙境)이 펼쳐졌다. 비파음에 따라 그의 의식도 한없이 부드럽게 풀려 물결처럼 흘러만 갔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황제가 부럽지 않았다.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평생 시음의 음률을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천하를 경영하고 시음과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고....... 문득 비파음이 날카롭게 변했다. "......!" 만권서각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진기가 난마처럼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시음......! 네가......."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비파음은 송곳처럼 그의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그에 따라 진기가 역류하여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파라라라라락! 돌연 음시음의 머리칼이 휘날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늘 끝처럼 빳빳하게 곤두선 채 사방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혼신의 내력을 다해 살음(殺音)을 시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디디디딩! 비파음은 격렬해졌다. 음시음의 눈은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한 가닥 조소가 떠올랐다. "훗훗훗.....! 이건 너 같은 악마를 위해 지은 곡이야. 혈루무정지곡(血淚無情之曲)라고 이름을 붙였지......." 뚜다당! "헉!" 만권서각은 막 일어서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1000만 개의 예리한 칼날이 전신을 난자하는 듯했다. 가슴속에서 화르륵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의 불길이었다. 온몸이 발기발기 찢기는 듯한 고통보다 음시음에 대한 배신의 고통이 더욱 더 컸다. "크으으....... 시음... 네가 날 배반하다니......!" 그의 안색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기는 이미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임독양맥이 멋대로 뒤틀리고 혈맥이 뒤엉키면서 금방이라도 꽝! 하고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의 이마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부릅뜬 두 눈은 핏물이 고인 듯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크으으으으윽!" 그는 처절한 비명을 발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 것이다. 그 전에 벗어나야 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진기를 단전으로 끌어 모았다. 그때였다. 땅! 돌연 비파의 현이 끊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음시음의 곤두섰던 머리카락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으음......." 그녀는 신음을 발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비파에 지나치게 공력을 주입한 나머지 현이 끊어지면서 음공이 중단되고 만 것이었다. 만권서각은 급격히 진기가 회복됨을 느끼며 대갈성을 터뜨렸다. "죽일 년!" 휙! 그는 빛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만권서각, 이제 자네도 옛 친구들을 따라갈 때가 되었네." 만권서각은 대경실색했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이럴 리가....... 아니야...... 잘못 들은 거야! 그는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 순간 정수리가 화끈해졌다. 촤아아아! 그의 머리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은 피로 목욕을 한 듯 시뻘겋게 젖고 말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두 다리로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한편 음시음은 지나친 내공 소모로 인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욱!" 만권서각은 울컥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는 점차 흐려지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히 어떤 놈이 암습을 한 거냐? 어서...... 나서지 못하겠느냐?" "벌써 날 잊었단 말인가?" 한 가닥 담담한 음성이 허공을 울림과 동시에 백영이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비단섭선을 들고 허리에 묵검을 찬 영준한 청년이었다. 청년의 눈에서는 유현(幽玄)한 빛이 흘렀다.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눈빛이었다. "헉! 넌...... 용대형! 분명...... 분명......." 만권서각의 얼굴이 갈라지고 있었다. 이마에서 한 줄기 혈선(血線)이 생기더니 정확히 얼굴을 반쪽으로 갈랐다. 그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털썩! 만권서각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의 동체는 두 조각을 분리되어 있었다. "......." 백삼청년은 고신만리였다. 그는 만권서각의 시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관복을 입은 삼십대 청년과 아랫배가 눈에 띄게 불러 있는 미녀였다. 그들은 바로 검호와 환옥화 남매였다. 그 동안 모진 고초를 격은 탓인지 환옥화의 얼굴은 핼쑥해 보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성숙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 그녀는 고신만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뽀얀 습막이 어렸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사람인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가!" 그녀는 격동의 외침을 발하며 달려왔다. 고신만리는 두 팔을 벌려 그녀의 몸을 안았다. 환옥화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을 터뜨렸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수만 마디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이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오열할 뿐이었다. 고신만리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옥화, 그 동안 고생 많았다." "흐흐흐흑......." 설움이 복받치는 듯 그녀는 더욱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검호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 고신만리는 그녀를 가만히 떼어낸 후 음시음에게 다가가 가볍게 혈도를 쳤다. "음......." 음시음은 신음을 발하며 눈을 떴다.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처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고신만리를 바라보았다. 차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믿지 않았죠. 가가는 불사신이에요. 그렇게 쉽게 당할 분이 아닌 걸요......." "시음." 고신만리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음시음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했다. 이렇게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인 것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가슴을 가진 사내의 품에서 그녀는 영원히 쉬고 싶었다.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고신만리는 고개를 돌려 만권서각을 바라보았다. 두 동강이가 난 그의 육신은 피바다 속에 엎어져 있었다. 그의 손은 무엇을 움켜쥐려는 듯 뻗어 있었다. 그가 얻으려 했던 것. 사랑과 야망......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친구와의 우정도, 신의(信義)도, 심지어는 최소한의 인간성마저도 욕망을 위해 저버린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고신만리의 눈에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이... 야망의 결과란 말인가? 친구를 배반하고 세상을 기만하고 인간성을 부정했던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그가 얻은 것은 텅 빈 손...... 아무것도 움켜쥘 수 없는 텅 빈 손 끝에 끈적이는 자신의 더러운 피밖에 없지 않은가? 고신만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구인회(九人會)도 끝났어......." 4 화광(火光)이 충천하고 있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은 불회곡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 불회곡을 등지고 걸어나오는 2남2녀가 있었다. 그들은 용대형 일행이었다. 나란히 걷는 4인의 얼굴은 허탈했으며 두 눈에는 공허감이 가득하기만 했다. 진상은 이러했다. 고신만리와 검호는 이미 만권서각이 파둔 함정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 낙일애에 찾아와 청부했던 자가 불회곡의 수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신만리는 그를 통해 만권서각이 함정을 파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역이용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옷 속에 도검은 물론 수화(水火)를 차단할 수 있는 천잠의(天蠶衣)을 입고 불회곡으로 들어갔다. 그로 인해 10만 근의 화약이 폭발하는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결과였다. 결국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불회곡을 등지고 나오는 남녀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다시는 배신이 난무하는 무림계에 발을 들여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딩...... 디디딩....... 음시음이 탄주하는 혈루무정지곡(血淚無情之曲)이 석양의 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석양은 점차 어두운 산등성이 너머로 몰락해 갔다. 그러나 억겁을 변함없이 순환하는 것이 자연(自然)의 이치가 아니던가? 내일이면 또다시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밝힐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