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보 강 호 제1장 내 이름은 노팔룡(魯八龍) 1 “으아- 아아아아- 아아악--!” 한 사나이가 미친듯이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곳은 황룡산(黃龍山)의 한 이름 없는 산곡. 이십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일신에는 낡디 낡은 베옷을 입고 있어 한눈에도 그가 초부(樵夫)나 한촌의 시골뜨기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데 그는 지금 아무렇게나 잘라 만든 나무막대기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휘두 르며 산곡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그같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아니, 저 놈이 또 미쳤네?” 산곡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하나의 동혈(洞穴)이 뚫려 있는 바, 지금 막 그 동굴 입구에서 초라한 노인이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청년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급기야 노인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쉴 새 없이 고함을 질러대는 청년을 향해 소리 쳤다. “이놈! 팔룡아! 제발 잠 좀 자자!” 팔룡(八龍)? 그것이 괴청년의 이름이었던가?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며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연속 질러대고 있었다. 노인은 화를 벌컥 냈다. “이놈--! 이젠 사부의 말도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청년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나 볼이 잔뜩 부어 오른 채 한껏 불만스런 음성 으로 툴툴거리는 것이었다. “사부님! 오늘만은 제발 제자를 가만 놔두십시오.” “뭐. 뭐라고?” 노인이 기가 막혀 역 팔자(八字)의 빗자루 눈썹을 치키는데,“전 죽어도 오늘밤 안에 사부님이 전수해 주신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震宇宙 天上天下 唯我獨尊劍法)의 진수를 깨닫고야 말겠습니다!”진우주… 뭐라는 검법인가? 기절초풍할 정도로 거창하고 긴 이름인데…! 노인은 한 방 얻어맞은 듯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고 있 었다. “아이고! 한 며칠 조용하더니만 저 놈이 기어이 미친 병이 도졌구나.”노인이 한탄하 며 비틀거리는 데도 불구하고 청년은 또다시 목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휙! 휙! 휘리릭--! 그러나 도무지 그의 목검 휘두르는 솜씨는 두서가 없었다. 아니, 두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구잡이식이었다. 아래 위로, 좌로 우로 무질서하게 그어대는 것이 고작인 것 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세도 우수꽝스럽기 그지없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어떨 때는 자기 발길에 엉켜 우당탕 자빠지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던 노인은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허나 그렇다고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지 노인은 급기야 사정조로 애원하고 있었다. “팔룡아. 제발 사부 좀 살려 다오. 넌 늙어 꼬부라진 사부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에 구… 늙은 것도 서러운데 벌써 삼 년째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하다니…….”노인은 문득 웃옷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의 옆 구리에는 애처롭게도 갈빗대가 앙상하니 드러나 있었다. “이 놈아. 너도 눈이 있으면 이걸 보아라. 네놈을 만나기 전에는 그토록 포동포동하 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이 가슴이 겨우 육 년 만에 뼈와 가죽이 상봉하더니 헤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지 않느냐?” 노인의 한탄은 줄줄이 이어졌다. “이런 상태로 계속되다간 올해도 못 넘기고 강시 신세가 되고 말겠다. 에구, 내 팔자 야! 어쩌다 너같은 놈을 만나서… 조상 팔 대(八代)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노씨 족보에 나같이 불행한 자는 없을 것이다.” “…….” 청년은 그 말에 동작을 멈추고 물끄러미 노인의 드러난 가슴과 옆구리를 바라본다. ‘옳지! 됐다.’ 노인의 얼굴에는 희색이 어렸다. 청년이 비로소 마음을 돌리려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욱 더 사정조로 은근히 말했다. “팔룡아, 나 좀 봐 주라. 응?” 그 말에 청년은 피식 웃었다. ‘헥! 저 놈이 또.’ 청년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노인의 역 팔자 눈썹은 이상하게 비틀린다. 청년의 입이 열렸다. “사부님. 벌써 잊으셨습니까?” “뭘 말이냐?” “왜, 제자에게 처음 무공을 전수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차.’ 노인의 안색이 누렇게 변해 버렸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놈이라도 나의 절기를 완전히 소화시키려면 밤 을 낮 삼아야 하며, 또 고통을 유흥으로 알아야 한다구요.” “끙, 이 놈아. 그건…….” 청년은 노인의 말을 가로 막으며 다시 결연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오늘만은 반드시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의 숨겨진 진수를 깨닫고 말겠으니 그리 아십시오.”휙-- 휙휙--! 청년은 더 얘기할 것도 없다는 듯 다시 막대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비록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으나 그의 표정만은 엄숙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은 그만 우는 듯, 웃는 듯 묘해졌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심 이 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자승자박이라더니 내가 누구를 탓하랴. 다 이 놈의 방정맞은 주둥아리 탓이 지!’노인은 힘없이 돌아섰다. 그가 동굴 안으로 어기적거리며 들어서는 순간,“으아아-- 아아아아-- 아아악!” 또다시 비명에 가까운 청년의 고함이 산곡을 울리고 있었다. 노인은 동굴 속으로 들 어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지랄발광해 봐야 없는 진수가 어디서 기어 나오겠느냐? 끙, 실없이 나 온 농담 한 마디가 이런 사태를 만들다니…….”노인의 얼굴에는 허탈과 가책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피식 웃어 버린다. “내가 진짜 뇌진자(雷震子)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사실 너만한 제자를 얻는 것도 그 리 쉽지는 않을 텐데…….” 노인의 모습은 동굴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2 청년은 목검을 떨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한탄하고 있었다. ‘아아! 내 자질은 왜 이다지도 아둔하단 말인가?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분명 이 검법 의 오의(奧意)를 달통하면 천지에 풍운이 일고 승천한 용이 내려와 검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춤을 춘다 하셨거늘.’ 청년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 보며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 하여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아무리 기를 써도 풍운은커녕 소슬바람 한 점 불 생각을 하 지 않고, 용은커녕 미꾸라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청년의 얼굴은 온통 비관으로 일그러졌다. 이 괴청년- 자세히 보면 그는 매우 우직한 얼굴이긴 했으나 신색만은 아주 밝았다. 붓으로 아무렇게나 그은 듯한 눈썹은 송충이처럼 진했고, 두 눈은 초롱초롱한 별빛 을 연상시켰다. 이마는 넓고 반듯하여 사나이 영웅기질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입술 은 한 일자였으며, 코는 태산준령인 듯 우뚝 솟아 있었다. 비록 반안이나 송옥과 같은 일세미남자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당당한 장부의 면모는 갖추고 있었다. 문득 청년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아니야. 사부님은 천하제일고수 뇌진자, 그 분의 절기를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단 말 인가? 노력하자! 자질이 부족한 것은 노력하면 그뿐 아니냐?’청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팔룡아, 너는 범인들이 꿈 속에서도 얻지 못하는 이런 엄청난 행운을 어찌 그렇게 쉽게 포기하려 드느냐? 기운을 내라, 팔룡아!’청년은 벌떡 일어나더니 목검을 주워들 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호흡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었다. 두 발은 역 팔자로 놓고 잠시 후 막대기를 힘껏 앞으로 찔러댔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썩은 배추잎처럼 일그러지는 것이 아 닌가? “우욱!” 그는 입술을 불룩하게 내밀었다. ‘아니, 또?’ 그는 지극히 당혹해 하는 표정이었다. 이는 악물고 있었는데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벌겋게 타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는 오장육부가 불 붙어 타는 듯하고 걷잡을 수 없는 고통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단전(丹田)에서는 무엇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뜨겁고 거대한 기운이 폭발할 듯 한 기세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노오래지고 있었다. 동시에 허공으로 붕 날 듯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으아아… 아아아…….” 실제로 그는 이미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몸이 붕 떠오르더니 쏜살같이 어딘가를 향해 쏘아져가는 것이 아닌가? “아, 안 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은 통제 능력을 잃고 있었다. 귓가에 바람 소리만 휙휙! 들리고 흐릿한 그의 시야에는 어느새 절벽의 벽면이 벼락처럼 다가들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몸은 쏜살같이 퉁겨져 벼랑을 향해 부딪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쑤아아아앙--! 그는 섬전처럼 벼랑을 향해 부딪쳐 갔다. ‘으이구, 또 사부님이 놀라시겠구나.’ 그것은 청년이 막 암벽에 부딪치는 순간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3 막 달콤한 잠에 스물스물 빠져들던 노인은 동굴이 온통 진동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얼굴을 잔뜩 이그러뜨렸다. ‘아니, 저 놈이 또?’ 노인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피로감에 일어나서도 현기증에 못 이겨 비틀거리 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벽을 짚으며 비실비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계곡의 여기저기를 살피던 노인의 표정은 부시시하기만 했다. 그러나 곧 시선이 한쪽 으로 향하는 순간 그의 눈은 동그랗게 부릅떠지고 있었다. 암벽 한 곳.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청년의 몸뚱이가 절벽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박혀 있는 암벽 주위에는 여기저기 일부러 쌓아놓은 듯한 짚 단더미가 놓여 있었다. “아이고, 이 놈아!” 노인은 자지러질 듯 비명을 발했다. 그는 청년에게 다가서며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다. “발작이 일어나 못 참겠으면 이리로 뛰어들라고 기껏 힘들여 짚단을 쌓아놨더니 번 번이 엉뚱한 곳으로 달려드느냐? 어찌 네가 하는 일들은 그 모양이냐?” 그렇다면 그 짚단은 일부러 노인이 쌓아놓은 것이었단 말인가? 노인은 낑낑거리며 암벽에 박혀 있는 청년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워낙 깊숙이 박혀 있어 노인의 힘으로는 잘 되지 않았다. 노인은 관자놀이에 잔뜩 심줄을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겨냥이 이토록 서투르니 장래 계집 구멍이나 제대로 찾을런지. 쯧쯧……!” 근 반 시진(한 시진=두 시간) 여를 걸려서야 노인은 청년의 몸을 암벽에서 빼낼 수 있었다. 청년은 혼절을 한 듯 맥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커다란 덩치를 큰 대자로 벌린 채 기 식이 엄엄한 것이었다. 노인은 청년의 맥을 짚어 보았다. 인간의 몸이 암벽에 그렇게 세차게 부딪쳤다면 보 통 사람은 뼈도 추리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맥박은 여전히 힘차게 뛰고 있었다. ‘대체 이 놈의 몸은 뭘로 만들어졌길래 이 모양이지? 응당 뼈마디가 박살나고 혼이 구천을 헤매야 정상이거늘. 번번이 애꿋은 바위들만 박살나곤 하니.’ 노인은 혼절해 버린 청년을 질질 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벌써 수십번째 일어나고 있는 청년의 발작인 것이다.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청년은 허공을 날아 어디에건 부딪쳐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암벽에 가볍게 부딪치는 정도였으나 얼마 전부터는 아예 암벽에 틀어박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 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이 놈이 무슨 기연(奇緣)을 만나기는 만난 모양인데.’ 노인은 가재미같은 눈을 가늘게 하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그게 아마 일 년쯤 전이었지?’ 4 청년은 3일 밤낮 동안 행방불명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다시 나타난 청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이란 옷은 거의 다 찢어져 걸레 가 되다시피한 낭패한 꼬락서니로 나타난 것이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질책하는 노인에게 청년은 이렇게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괴수(怪獸)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다 늦었다는 둥, 과일 몇 알을 따 먹고 졸 음이 와서 잠시 눈을 붙였더니 사흘이 지났다는 둥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횡 설수설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노인은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저 그가 수련하는 것이 힘들어 잠시 꾀를 피 웠거니 생각하고 호통을 치고 그 벌로 통나무를 들고 서 있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청년의 발작이 시작된 것이었다. 노인은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어 나중에 다시 그때 일어난 일을 자세히 물어보 았다. 그는 나무하러 산중 깊숙이 들어 갔다가 갑자기 괴성을 들었다고 했다. 다가가 보니 두 마리의 희고 검은 용(龍)이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신기한 마음이 들 어 다가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인지 벼랑 중간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에 걸려 살아난 것이었다. 마침 나무에 이상한 과일이 열려 있길래 그는 배가 고픈 김에 아무 생각없이 따 먹 었는데 그후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노인은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예전 선인(仙人)들이 말하던 기연(奇緣)이라는 것이 자신의 제자(?)에게 찾아와 인연을 맺은 것이라고. 밤이 오고 있었다. 노인은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주름 진 얼굴에는 감회가 짙게 어리고 있었다. 그가 청년을 처음 만났을 때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은 약초를 캐러 이산 저산 헤매다 한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약초 캐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으므로 중원 천지 안 가본 산이 없었는데 그 날은 별 이름도 없는 황룡산(黃龍山)에 오르고 있었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우연히 그 산 곡에서 소년을 만난 것이었다. 당시 그 아이는 불과 십여 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 으로 떼도 입혀지지 않은 초라한 흙무덤 앞에 앉아 울고 있었다. 노인은 의아했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산곡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라니, 그런데 사정을 들은 노인은 그만 동정심을 금치 못했다. 본래 소년은 부친과 단 둘이 산속에서 나무를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만 아버지가 호 환(虎患)을 당해 비참하게 죽는 바람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사연을 알게 된 노인은 점차 소년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이 조그맣고 어린 소년은 도 무지 세상 물정에 대해 깜깜했던 것이다. 소년이 아는 것이라고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고작이었다. 세상 물정이라던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는 것 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노인이 소년에게 장차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소년은 가냘픈 어깨를 으 쓱하며 확신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었다. “장차 무공을 익혀 천하제일의 협객(俠客)이 되겠어요!” 무공이란 말은 어디서 들었는지, 협객이란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노 인은 소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운명적인 거짓말을 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약초 팔러 저자에 나갔다가 당대 무림의 천하제일 고수가 뇌진자(雷震 子)란 인물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무심코 자신이 뇌진자라고 거짓말을 해 버린 것이었다. 운명의 족쇄란 묘하게 채워지는 모양이었다. 한낱 약초 캐는 심마니에 불과한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노인이 한 즉흥적인 거짓말 이 한 소년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천하제일고수 뇌진자란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의 눈은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에 찬란한 빛을 띄우며 갑자기 그 자리에 덮석 엎드려 절을 하 는 것이었다. “사부님! 절 제자로 삼아 주세요!” 노인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심코 농담 삼아 한 거짓말을 소년은 철석같 이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겁도 나고 당황하기도 하여 그만 손을 좌우로 마구 내저었다. “안 돼! 천하제일고수 뇌진자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이다.” 그러나 소년은 끈질겼다. 아니 생사를 걸다시피 그에게 매달렸다. 노인이 가는 곳은 산이든 강 이든 죽자고 쫓아다녔다. 어떨 땐 몰래 밤중에 소년을 토지묘에 놔두고 도망을 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흘 후 토지묘로 다가갔을 때 그는 귀신을 보는 듯 기절초풍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은 토지묘 안에서 굻어앉은 채 사흘 동안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다. 그가 나타나자 소년은 큰 절을 올린 후 기절해 버렸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 던 것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어언 육 년여. 세월은 유성처럼 흘렀고 노인과 소년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부와 제자가 되어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노인의 이름은 노칠룡(魯七龍). 소년에게는 제대로 된 성명이 없었다. 노인이 자신의 성(姓)인 노(魯氏)를 따고, 일주야 동안이나 끙끙 앓다가 간신히 지어준 이름이 바로 팔룡(八龍)이었다. 그리하여 소년의 이름은 노팔룡(魯八龍)이 되었다. 노칠룡과 노팔룡. 한 명은 늙은 심마니에 한 명은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소년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노팔룡을 제자로 받아들인 노인은 그날부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본래 그는 하찮은 떠돌이 약초꾼이 아닌가. 그런데 노팔룡은 그를 천하제일고수 뇌진자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런대로 거짓말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노팔룡은 차츰 노인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졸라대는 노팔룡의 간청에 노인은 다시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엉터리 검법을 소년에게 전수했다. 그런데… 노팔룡은 그 검법을 천하제일검법이라 굳게 믿으며 지난 육 년간을 침식을 잊어가며 구슬땀을 흘리며 익히는 것이 아닌가.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震宇宙 天上天下 唯我獨尊劍法)!그것은 이렇게 해서 탄 생한 것이었다. 노인 스스로도 모르는 검법. 그저 동네 개를 쫓는 데나 어느 정도 쓸모가 있을지 모 를 막대기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팔룡에게는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세월 여류(歲月如流). 육여 개 성상이 흘러가는 사이 노인은 어느덧 노팔룡을 친손자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오늘처럼 노팔룡이 엉터리 검법을 익히다 혼절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죄책감은 점점 더해가기만 했다. 심마니 노인 노칠룡(魯七龍)의 눈에는 어느덧 그렁그렁한 눈물이 어렸다. ‘으이그, 이 불쌍한 것아. 미련하게 내 말을 믿다니.’그는 노팔룡의 머리를 쓰다듬 으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게다가 그 피비린내 나는 강호(江湖)란 곳이 어디라고 자꾸 무공을 익혀 나가겠다 는 거냐? 그저 이 할애비와 함께 약초나 캐면서 오손도손 살면 좀 좋겠느냐?” 노팔룡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심한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노칠룡은 소매로 진무른 눈을 닦으며 신세 한탄을 늘어 놓았다. “쯧, 다 이 죽지 못한 늙은이의 죄지. 철없는 어린것에게 헛바람을 집어넣지만 않았 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심마니 노인 노칠룡의 비탄과 자책은 점점 깊어만 갔다. 어느덧 동굴 입구로 여명이 밀려들고 있었다. 혼절한 노팔룡 앞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노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세상에 나갈 아이라면 더 이상 허 송세월하게 하느니 하루빨리 세상을 접하여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것이 낫지 않 을까?’노인의 얼굴에는 한가닥 처연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다 혹시 진짜 무림의 선인들과 인연을 맺어 그 무공이라는 것을 익힐 수 있을 지도.’노인의 결심. 그것은 오직 노팔룡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사실 그는 영원히 노팔 룡과 함께 살고 싶었다. 더구나 이제 자신은 늙어 얼마 살지도 못할 게 아닌가. 남은 여생을 노팔룡과 함께 보낸다면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젊은 노팔룡의 장래를 위해 과감하게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이었다. 노인은 결심을 굳혔다. 그는 아쉬운 듯 서글픈 듯 노팔룡의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느릿느릿 동굴 한 귀퉁이 장작불을 지피던 곳으로 가더니 숯검정 하나를 집어 벽면에다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제2장 가자, 강호(江湖)로! 1 노팔룡은 부시시 정신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온통 눈앞이 침침하기만 했다. 머리가 무겁고 전신이 욱신거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차츰 시야가 뿌옇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간신히 몸 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먼저 손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비로소 동굴 안의 사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또 사부님께 고생을 안겨 드렸구나.’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덮 어놓고 부복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어리석은 제자가 또….” 노팔룡은 말을 중단했다. 환한 햇살이 동굴 안을 낱낱이 비추고 있었다. 동굴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잡동사니들만 눈에 띌 뿐 그의 사부 노칠룡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으응? 어디로 가셨지?’ 그가 알기로 사부 노칠룡은 가끔씩 산책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산곡을 떠나는 법 이 없었다. 벌써 몇 해 전부터 약초 캐는 일을 그만두고 거의 종일을 동굴 안에 누워서 지내는 편이었다.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머물러 돌 한 개, 나무 하나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는 산곡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우주 천상천자 유아독존검법을 익혀온 것이다. 그러나 산곡을 한 바퀴 돌았을 때도 노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사부님! 어디 계십니까?” 돌아오는 것은 절벽에 부딛쳤다 돌아오는 공허한 메아리 뿐, 그 어디에도 노인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 노팔룡은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그는 동굴 안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벽면에서 사부 뇌진자가 남긴 글 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룡아, 보아라. 사부는 선인의 경지에 들어 신선경으로 떠난다. 너를 혼자 남겨두어 마음이 놓이지 않으 나 너도 이제 성인이 되어 혼자서도 세파를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비록 너의 무 공은 아직 미숙 하 다 하겠으나 그것은 실전경험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니 그 점은 강호 로 나가 협객행을 하는 동안 보충하도록 하여라. 아울러 너는 나의 제자임을 명심하여 언제 어느 때나 의(義)와 예(禮) 를 숭상하고 불의(不義)를 보면 용서하지 않는 의협이 되 기를 바란다. 그럼 너의 무운을 빌면서 사부 뇌진자(雷震子). “……!” 노팔룡은 사부가 남긴 글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떠난 것이다. 그가 구주팔황(九州八荒)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사부 뇌진자는 그의 곁을 떠난 것 이다. “사부니-- 임--!” 갑자기 노팔룡은 크게 고함치면서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미친 듯이 산곡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목이 터져라 외 쳐 부르며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뇌진자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떠나간 뇌진자가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사부님…….” 마침내 그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단순한 생각으로도 이제는 영영 뇌진자의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온 것이었다. 그는 동굴로 다시 돌아왔다. 동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 치 그 자리에서 돌부처로 화신해 버리려는 듯. 2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 노팔룡은 끈질기게 사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은 우직한 미련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미련함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어릴적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노칠룡밖에 없 었으므로. 노칠룡이 떠난 후 그에게 남겨진 것은 넓고 험난한 세상에 홀홀단신으로 부딪쳐 가 야한다는 뼈저린 외로움이었다. 마침내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사부님께선 정말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신 모양이다.” 그는 어릴적 아버지에게 들었던 신선들의 세계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를 오래 닦으면 신선의 경지에 들어서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떠오른 것 이었다. ‘사부님께서 신선이 되셨다면 축하해야 할 일인데 제자된 도리로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노팔룡은 이제는 희미해진 벽면의 글씨를 다시 읽었다. 숯검정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씨였지만 자자구구에 정이 화인(火印)처럼 배어 있는 글씨였다. 노칠룡이 남긴 다정한 글씨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 사부님 말씀대로 강호에 나가 협행을 하자.’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노팔룡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먹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내 실력으로?’ 그렇다. 그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아직 그 어떤 무술의 경지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또다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지웠다. ‘내가 누구인가? 누가 뭐라 해도 천하제일고수인 뇌진자의 직계제자다. 비록 진수를 얻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육 년간 익힌 무공만으로 능히 큰소리치며 행세할 수 있을 게 아니냐?’그렇게 생각하고 자신감을 되찾은 노팔룡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성큼성큼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눈부신 태양은 그의 전도를 축복하는 듯이 뜨겁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문득 노팔 룡은 태양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천하제일고수 뇌진자의 제자다! 그러므로 사부께서 우화등선하신 지금 내가 바로 천하제일고수인 것이다!” 노팔룡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계곡을 뒤흔들었다. “으하하하하--! 내가 천하제일고수다! 천하의 악당들아, 목을 씻고 기다려라! 사부님 의명에 따라 내가 너희들을 벌하러 가리니……!” 청년 노팔룡의 외침은 산곡을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비록 아무도 듣는 이 없었으나 이 순간 그의 가슴은 온통 호연지기 (浩然之氣)로 들끓고 있었다. 가슴이 후련해지도록 외친 그는 즉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봇짐을 쌌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봇짐이라야 고기를 말려놓은 비상식 건량과 헌 옷가지 몇 벌뿐이었다. 봇짐을 싸는 청년 노팔룡의 뇌리에는 이미 천하를 질타하며 협행하는 자신의 영웅적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무막대기를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단단한 박달나무를 골라 일주일간 깎고 깎아 완성한 목검이었다. 비록 손때가 묻어 꾀죄죄했지만 그에게는 정이 들대로 든 검이었다. 그는 나무막대기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천(震天)아. 나와 함께 가자꾸나. 비록 나무로 만들어진 검이나 내 손에 들린 이상 너야말로 천하제일의 명검(名劍)이 아니겠느냐?” 진천검(震天劍). 그것은 노팔룡이 직접 지은 명검(?)의 이름이었다. 과연 명검의 중간 부분에는 서투르 지만 분명한 글씨로 진천검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휙휙!’ 그는 진천검을 몇 번 휘둘러보더니 소중한 듯이 보자기로 감싼 후 봇짐을 거는 막 대기를 대신해 어깨에 걸쳐맸다. “가자! 강호(江湖)로!” 노팔룡은 보무도 당당하게 육 년간 정들었던 황룡산의 산곡을 떠나고 있었다. 제3장 철천지 원수(?) 1 황룡산은 섬서성(陝西省)의 남쪽에 있었다. 험준한 산맥이 남쪽으로 그 줄기를 뻗고 있었는데 그 끝에 황룡산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천하 명산은 아니라 해도 함부로 얕볼 낮은 산은 아니었다. 곳곳에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이 산재하고 있어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가자, 강호로! 악당들을 쳐부수러.” 이렇게 중얼거리며 황룡산 중턱을 내려오는 인영은 다름아닌 노팔룡이었다. “아차.” 문득 그는 무엇을 잊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백(小白)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잖아.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 는데…….” 노팔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홱 몸을 돌려 어디론가 냅다 내달렸다. 아주 어릴적부터 산 속에서 자랐으므로 그는 거칠은 계곡을 평지처럼 달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대략 한 식경(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을 말함)쯤 후에 그는 황룡산에서도 가장 깊 고 험한 장소에 당도했다. 차창! “이야아압!” 요란한 금속음과 날카로운 기합성이 울렸다. 막 험한 절곡 안으로 들어서던 노팔룡은 깜짝 놀랐다. ‘으응? 이게 무슨 소리지?’ 그가 알기에 이 절곡 부근은 일체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워낙 험하고 은밀 한 곳이려니와 또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한데 분명 방금 전의 기합성은 사람의 음성인 것이다. 그의 걸음이 다급한 마음과 함 께 빨라졌다. ‘휙휙……!’ 날카로운 바위 끝을 밟고 날 듯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의 천랑(天狼:이리)과 흡사했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계곡은 더욱 깊어졌다. 울퉁불퉁한 기암괴석이 난립한 가운데 음침한 기운이 자욱한 운무(雲霧)와 함께 짙게 깔려 있어 온통 괴괴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쿠쿠쿵……!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린다. 그것은 엄청난 높이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였 다. 계곡을 가득 메웠던 자욱한 운무는 바로 폭포의 포말이 안개로 화해 이룬 것이었다. 거대한 폭포수는 계곡 끝에 있었는데 절벽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마치 은빛 의 용이 꿈틀거리는 듯이 보였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자욱한 물보라로 인해 장관을 이 루고 있는 곳, 그 폭포 아래에는 거대한 담(潭)이 있었다.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검푸른 담이었다. 우르릉거리며 쏟아져 내 리는 폭포수의 압력으로 수 장(丈:일丈은 삼미터) 이상의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는 것 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막 폭포수의 담 앞에 당도한 노팔룡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아니……?’ 담 바로 옆에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길이가 3장(丈)이 넘는 거대한 백색의 교룡(蛟龍) 한 마리가 작은 흑점(黑点)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자세히 보니 흑점이란 다름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었다. 워낙 교룡이 거대하여 한낱 점으로 보인 것이었다. 교룡의 모습은 몹시 특이해 보였다. 즉, 머리는 항아리만한 용머리(龍首)의 형상을 하 고 있었으되 머리 아래로는 용 특유의 번쩍이는 비늘이 없이 그저 미끈한 이무기의 형 상을 하고 있었다. 용도 이무기도 아닌 그 중간의 잡종과 같은 모양이었다. 캬아아악! 번쩍…! 쐐애애액! 차아아앙!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푸른 검광(劍光)을 번뜩이며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며 교룡을 공격하고 있었다. 수중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수 장 여의 청광이 뻗어져 나오곤 했다. 그 같은 광경은 가히 검선(劍仙)의 경지에 능히 이른 것이었다. 푸르른 검광이 줄기줄 기 뻗쳐 교룡을 위협하고 폭포수의 굉음과 위세조차 압도하는 듯했다. 교룡도 만만치는 않았다. 교룡은 똬리를 틀 듯이 잔뜩 움츠렸다가도 섬광처럼 뻗으며 머리로 공격했다. 간간이 그 큰 입을 떠억 벌렸는데 그때마다 입에서는 희뿌연 백색의 기류(氣流)가 뿜어져 나와 주위 수 장을 뒤덮었다. 검은 인영은 그 흰 기류를 두려워 하는 듯 날렵하게 신형을 날리며 피하곤 하였다. 그러나 피하는 것도 잠시, 물러나다가는 번뜩 섬광처럼 날아 검광의 무지개를 그려내곤 했다. 그 바람에 교룡은 괴로운 듯 고개를 이리저리 휙휙 내두르고 있었다. “……!” 노팔룡은 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그는 검은 인영이 펼치는 검술을 보면서 절로 흥에 겨워 어깨를 움직이곤 했다. “햐, 누군지 몰라도 제법인데.” 시간이 감에 따라서 싸움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역시 인간의 힘이란 한계가 있 는지 차츰 교룡의 입에서 뿜어지는 기류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검은 인영의 검광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마침내 푸른 검광은 희뿌연 교 룡의 기류 속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검은 인영도 교룡의 그림자에 완전히 파묻혀 버 렸다. “아악!” 단말마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은 인영은 중심을 잃고 허공에서 추락하고 있 었다. 어찌 호기(好期)를 놓치랴! 교룡은 입을 따악 벌려 냉큼 검은 인영을 삼키려 들었다. “소백! 그만둬!” 그것은 이제껏 싸움을 구경하던 노팔룡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교룡은 거짓 말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아니 도리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마냥 고개를 푹 숙 이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몸을 던졌다. 바위 위에 서 있다 몸을 날려 교룡의 앞에 떨어져 내린 것이 었다. 그는 거대한 교룡 앞에 떡하니 버티어 선 후 소리쳤다. “소백. 벌써 잊었느냐? 약한 동물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느냐!” 약한 동물이라니? 그럼 검은 인영이 동물이란 말인가? 그러나 더욱 가관인 것은 교룡의 태도였다. 교룡은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꼬리를 스르르 마는 것이 아닌가? “관둬, 소백. 너는 항상 사고를 치고 난 다음 발뺌을 하는구나.” 노팔룡의 꾸짓음에 교룡은 꼬리를 흔들며 짐짓 아양을 떨었다. 엄청나게 큰 덩치를 비비 꼬는 것이 실로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었다. 교룡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긴 혀를 빼더니 살살 노팔룡의 얼굴을 핥아대는 것이었다. “으엑, 그만둬!” 노팔룡은 질색을 하여 팔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그의 온몸은 교룡 의 혀 끝에서 나온 타액으로 완전히 목욕을 하고 난 후였다. 노팔룡은 투덜거렸다. “이 놈! 이게 무슨 짓이야! 얼마 전에 새옷으로 갈아입었는데…….” 하긴 그렇다. 노팔룡은 강호 출도를 하기 위해 동굴을 나오기 전에 그나마 약간은 나은 편인 베옷으로 갈아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교룡의 타액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온통 끈적한 교룡의 타액 으로 뒤집어쓰다시피 했으니 새옷이고 뭐고가 없었다. 교룡은 쑥스러운 듯 약간 뒤로 물러났다. 노팔룡도 더는 탓하지 않고 돌아섰다. 저만 치 바위 위에 쓰러져 있는 검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노팔룡은 다가서더니 그를 살펴보았다. 가슴이 약간씩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그는 혀를 찼다. “흠! 꽤 센 줄 알았더니 약골이로군. 겨우 소백의 하품 한 번에 정신을 잃다니.” 만일 누군가 그의 말을 들었다면 그야말로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교룡의 하품 한 번이라 니? 기실 노팔룡이 까맣게 모르는 사실은 바로 교룡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교룡의 독기를 정면으로 맞고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흑의인의 무공은 실로 신비막측한 것이었다. 노팔룡으로서는 자신이 교룡의 독기가 어린 타액을 뒤집어써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고작 입김 따위에 나가떨어진 것을 보고 약골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노팔룡은 흑의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정신차려. 정신차리라구.” 그러나 흑의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심한 중상을 입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전신이 축 늘어져 있었다. “쯧, 이런 형편없는 친구같으니.” 노팔룡은 흑의인을 바위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 데려가 눕혔다. 그런 후 비로소 흑의 인을 자세히 내려다 보았다. 흑의인은 얼굴에 면사(面紗)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상한 걸 쓰고 있군.’ 노팔룡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면사를 걷어올렸다. 면사 속에 숨어 있던 얼굴이 드러나자 그는 멍해지고 말았다. 실로 아름답고 청아한 얼굴이었다. 희고 아름다운 피부와 이목구비는 명공의 화필로 정성껏 그려낸 미인도를 보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희고 섬세하지만 않다면 천하의 미 남자임에 틀림없는 용모였다. “허, 굉장히 예쁘게 생겼는데!” 노팔룡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사실 감탄하고 말고도 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대하는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서 오직 아버지와 자신을 키 워준 사부 밖에는 다른 사람을 접촉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 노팔룡은 멍하니 흑의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다소 찬 듯하면서 이상하게 신비한 매력이 있는 고운 얼굴에 그는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으음” 문득 흑의인이 신음을 흘려내며 괴로운 듯 가슴을 들먹거렸다. “응? 어디가 아픈 거지?” 흑의인은 여전히 신음만 발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실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 고 있는 것이었다. 가냘픈 신음을 발하며 가슴을 크게 들먹일 뿐이었다. 노팔룡의 시선은 흑의인의 들먹이는 가슴에 머물렀다. ‘가슴이 아픈 모양이구나.’ 그는 즉시 흑의인의 웃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일단 상처를 봐야 치료를 할 수 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엇? 이건 또 뭐야?” 옷을 벗겨내자 가슴 부분이 또 하나의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여져 있는 것이었다. 그 천은 가슴을 힘껏 조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꽤 부풀어올라 있는 것이었다. ‘거 이상도 하군. 왜 이런 걸 가슴에 둘렀지?’ 노팔룡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어쨋든 상처를 보기 위해 그 천 마저 풀기로 했다. 워 낙 단단히 조여 매놓은 것이라 한참을 애쓴 끝에 천을 걷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니, 이건?” 이번에는 더욱 더 이상한 것이 드러났다. 노팔룡은 놀라 부르짖었다. “이 친구 가슴이 왜 이렇게 부풀어올랐지?” 흑의인의 가슴은 한껏 팽팽하게 솟아오른 여인의 유방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남장 여인이었던 셈이었다. 노팔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평생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산중 깊은 곳에서 아 버지와 단 둘이 살았었고 그후에는 육 년 동안 오직 노칠룡과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도 그에게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두 부 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 적이 없었으므로 처음 보는 흑의여인의 풍만한 가슴을 보 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만히 흑의녀의 가슴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쓰 다듬어 보았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촉감이 손에 묻어나는 듯 했다. ‘…….’ 그는 자꾸만 쓰다듬었다. 쓰다듬으면 쓰다듬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여인은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한동안 여인의 가슴 아닌 유방을 쓰다듬던 노팔 룡은 정신이 들었다. 도무지 흑의녀의 어디가 아픈지 짐작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가슴이 이상하게 부풀 어 있긴 했지만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거지?’ 실상 여인의 상세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교룡의 독기를 쐬여 중 독(中毒)된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비록 겉으로는 혼절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지 금 교룡의 독기를 신체의 한 부분으로 몰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무림의 신비한 내력(來歷)을 지니고 있는 흑의녀는 그녀가 익힌 운공요상의 수법으로 한창 독기와 싸우고 있어 겉으로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 없을 뿐이었다. 노팔룡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여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문득 여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온몸이 불같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여인의 몸 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고 고운 살결에서는 진득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땀이 배출되면서 고약한 냄새가 풍겨났다. 그것은 체내에 침투한 독기운이 여인의 내력에 의해 체외로 배출되는 현상이었다. 실로 이같은 운공요상법은 무림계의 불가사의한 내공(內功) 수법으로 탁월한 공력을 지닌 내가고수(內家高手)들만 펼칠 수 있는 절학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의 몸에서는 땀이 계속 흘러 나왔지만 좀체로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며 이궁리 저궁리하던 노팔룡은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옳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는 지난날 사부인 노칠룡이 자신이 상처 입었을 때 해 주던 치료법을 어렵게 생각 해낸 것이었다. 일단 생각이 나자 그는 다짜고짜로 여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땀을 많이 흘린다는 것은 몸에 열이 많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그가 부엽독(腐葉毒)에 걸려 온몸이 고열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그때 사부는 자신의 옷을 모두 벗겨낸 후 찬 물로 온몸을 닦아내며 열을 식혔던 것이다. 흑의녀도 온몸에 땀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역시 옷을 벗겨 열을 식혀야겠다고 생각 한 것이었다. 남은 옷가지를 벗기는 일은 쉬웠다. 그는 여인의 검은 바지를 벗겨 버렸다. 그러자 또 한 장의 얇은 천이 여인의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거 참, 별 걸 다 칭칭 감구 있네.’ 그는 그 천마저 벗겨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에 벌어졌다. 노팔룡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는 넋을 잃고 만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곳에 달려있어야할 것이 흑의녀에겐 없었다. 분명 어떤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엔 짙은 밀림(?)만 우거져 있을 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노팔룡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소백 이 놈!” 그는 단숨에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가 교룡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가 화가 머리 끝 까지 난 채 계속 뭐라고 추궁하자 교룡은 어쩔줄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팔룡의 추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소백!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걸 먹어? 어서 뱉지 못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먹을 게 없어 그걸 먹다니? 교룡은 그저 눈만 꿈뻑거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노팔룡은 교룡이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 생각하고 더욱 더 음성을 높였다. “이 놈아!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가장 중요히 여겨야 할 것은 머리와 그 물건이라 하셨는데 네놈이 저 사람의 물건을 먹어치웠으니 저 사람은 어디로 소변 을 보란 말이냐?” 그야말로 포복절도할 일이었다. 만일 지나가는 행인이 그 말을 들었 다면 배꼽을 움켜쥐고 사흘 밤낮을 뒹굴었을 것이다. 교룡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교룡은 삼천 년이나 묵은 영물로 이미 사람의 말 귀를 알아듣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먹지도 않은 물건을 내놓으라니 이게 말이나 되 는 소리인가? 갈수록 펄펄 뛰는 노팔룡을 바라보는 교룡은 그만 뒤로 질질 물러서기 시 작했다. “아니, 이 놈아! 내놓으라는 물건을 내놓지 않고 어딜 도망치려구? 거기 안 서?” 그러나 교룡은 이제 막 돋기 시작한 겨드랑이의 날개를 펄럭이며 폭포를 훌쩍 타 넘어 달아나 버렸다. 이럴 땐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듯이. 교룡이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자 노팔룡은 길길이 뛰며 소리쳤다. “이 놈 소백. 어디 두고보자! 내 반드시 네놈을 잡아 혼을 내고 말테니.!”사실 따지 고 보면 교룡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도 그는 노팔룡 때문에 신 세를 망친 적이 있었다. 2 본래 교룡은 삼천 년이나 묵은 이무기로서 오직 용이 되어 승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이 되기 위한 삼천 년의 수양을 마쳤으므로 이젠 마지막 관문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만년금령선과(萬年金靈仙果)라는 영과(靈果)를 먹는 일이었다. 그 천지간의 영 과만 복용하면 바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선과를 발견하여 막 따먹으려는데 방해자가 나타났다. 역시 같 은 목적으로 흑령오공(黑靈蜈蚣)이란 놈이 선과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교룡은 흑령오공과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마침내 흑령오공은 그에게 패해 달 아났다. 그러나 교룡도 상처가 중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교룡은 기진맥진하여 절벽 중간에 달려있는 선과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 었다. 이제 잠시 휴식만 취한 후 선과를 먹고 승천하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 찌 알았으랴. 교룡의 눈 아래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웬 거지같은 놈이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자신이 몽매에도 그리던 선과를 마치 과자 따먹듯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중상을 입어 꼼짝할 수 없는 교룡은 그저 복장이 터지는 분노를 삭이며 멍하니 그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떨거지 같은 놈이 그를 발견한 듯 위쪽을 올려다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었다. “너도 먹고 싶으냐?” 교룡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얻어먹지 않으면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 다려 그 선과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여 교룡은 간신히 두 알의 선과를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그것도 동냥받듯 이 말이다. 그러나 용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금령선과 다섯 알이었다. 그런 귀중한 금령선과를 거지같은 놈이 여덟 알이나 먹어 버리는 바람에 교룡은 삼 천 년이나 꾸어온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용이 되지 못하고 겨우 머리만 용이 되는 괴상한 잡종이 된 것이었다. 그 이후 교룡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금령선과가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 세였다. 그런 사연으로 인해 노팔룡은 교룡의 입장에서 보면 철천지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노팔룡은 두 알의 선과를 준 은인 아닌 은인이기도 했다. 그 후 교룡은 그 은혜(?) 덕분에 노팔룡을 깎듯이 모셔온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같은 경우는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억울한 누명마저 뒤집어 쓰고 달아나 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줄이야. 제4장 여자? 그게 무슨 뜻? 1 교룡이 달아나는 바람에 맥이 빠져 버린 노팔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다?’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걸음으로는 절대 교룡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는 투덜거리며 다시 흑의녀에게 돌아왔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살짝 어딘가에 부딪치기만 해도 펄쩍 뛸 만큼 아픈 그 부분을 통째로 뽑혀(?) 버렸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노팔룡은 동정심을 금치 못한 채 혀를 찼다. ‘알 만하다. 알 만해. 나라도 기절해 버렸을 거야.’ 그는 흑의녀의 사타구니 사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다.’ 그는 한숨을 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그 부분에 손을 대었다. 물론 상처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흑의녀의 그 부분을 곱게 덮고 있는 방초를 젖히고 살펴보자 아래 위로 갈라진 틈바 구니가 있었다. 상처치곤 매우 큰 상처인 것 같아 다시 혀를 차면서 살짝 손가락으로 벌려 보았다. 갈라진 틈 사이로 불그스레한 부분이 보였다. ‘이크. 피가 고였구나.’ 노팔용은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대로 놔두었다간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화농이라도 하는 날이면 정 말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그는 급히 봇짐을 열었다. 봇짐 속에는 잘 건조된 약초들이 소중히 갈무리되어 있었 는데 그것은 사부가 상처를 치료할 때 쓰는 것이라며 말려 보관하던 것이었다. 그는 사부 뇌진자가 의술(醫術)에도 도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쿵쿵……. 노팔룡은 대여섯 가지의 약초를 꺼내 돌로 찧었다. 그런대로 보고 들은 풍월이 있는 지라 그의 솜씨는 능숙했다. 잠시 후 곱게 빻아진 약초분을 폭포수의 물을 떠다 반죽했다. 약초분은 곧 고약(膏藥)처럼 끈적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을 외상(外傷)에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됐어. 이걸 바르면…….’ 노팔룡의 입가에는 만족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지체없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치료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고약을 흑의녀의 상처(?) 안 깊숙이 바르는 것이었다. 그는 만일을 우려하여 안쪽까지 골고루 발라지게 하기 위해 상처 틈 사이를 벌려 꼭 꼭 고약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 보니 꽤 많은 고약이 소모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아까와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상처가 메꾸어졌다. 노팔룡은 이마에 밴 땀을 소매로 슥 문지른 다 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성약(聖藥)을 꽤 많이 낭비하긴 했지만 강호에 나온 이래 첫번째 협행을 이루 었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구나.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해야 하는 법이야.’그러나 협행은 노팔룡의 뜻대로 잘 되어 주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성약을 발라 주었음 에도 불구하고 흑의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기왕 협행하기로 결심했으므로 정성을 다해 흑의녀를 간호하고 있었다. 고 약을 발라주었는데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자 곁에 붙어앉아 쉴 새 없이 천을 물에 적셔 흑의녀의 온몸을 닦아 주었다. 물론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노팔룡은 그녀의 나신을 천으로 닦아주는 동안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자신의 피부와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 낀 것이었다. 비단결처럼 곱고 매끄러웠고 눈처럼 흰 피부였다. 그는 종종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묻어날 듯이 고운 피부의 촉감을 음미하곤 했다. 그런데 중상은 중상인 모양이었다. 하루 낮 하루 밤이 지났는데도 흑의녀는 깨어날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그는 두 번이나 고약을 새로 갈아 붙여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도 별 효험이 없자 천하의 협객 노팔룡도 마침내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한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에게 투철한 협의지심(?)이 없었 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시 이틀이 지났을 때 그는 참지 못하고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흑의녀를 눕혀 놓은 바위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고 만 것이었다. 2 인간은 무엇엔가 끊임없이 놀라곤 한다. 길을 가다가도 놀라고,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가도 불현듯 놀랄 때가 있다. 또한 방심 한 채 멍하니 있다 옆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때로는 꿈을 꾸다가 놀라는 수도 있다. 그것을 두고 가위에 눌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앗!” 흑의녀는 무엇에 놀랐는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깨어남과 동시에 거의 본능적으로 퉁기듯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지중 벌떡 일어나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의복이 주르르 흘러내려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녀는 기절초풍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처음 의식이 돌아온 직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감이 잡 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퍼뜩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것이었다. ‘세상에!’ 그녀는 얼른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있는 곳은 움푹 패인 바위 아래로 비바람을 그런 대로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문득 그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옆에서 웬 청년이 잠에 곯아떨 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혹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예감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급히 살 펴보았다. 순간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비로소 하체에 어떤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하체를 살펴보고는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여인에게서 가장 소중한 그곳에 무엇인가 잔뜩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흑의녀는 아찔한 느낌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얼른 땅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고는 신형을 날렸다. 번뜩! 하는 순간 그녀 는 단숨에 폭포 아래의 푸른 담 속에 풍덩 떨어졌다. 그녀는 담 속에 몸을 담그고 씻기 시작했다. 씻는 순간에도 그녀의 얼굴은 이미 싸늘 하게 굳어져 있었고 입술은 분노와 수치감으로 파랗게 질린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략 일 다경(一茶經=차 한 잔 마실 시간) 후, 흑의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살기가 번쩍이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날 희롱하다니…….’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이가 갈리고 심장이 푸들푸들 떨렸다. 흑의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뜸 섬섬옥수를 쳐들었다. 그녀의 손은 마치 잘 다듬어진 한 자루의 칼날처 럼 빳빳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를 에일 것 같은 냉기마저 흘려내고 있었다. 이제 아래로 내려치기만 하면 노팔룡의 두개골은 박살날 것이다. 휙! 바람을 가르며 흑의녀의 수도가 노팔룡의 천령개를 향해 떨어졌다. 절대절명의 순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카락 한 올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손이 딱 멈추었다. ‘아니야. 이런 놈은 쉽게 죽이는 것이 오히려 적선이야.’그녀는 손을 거두는 대신 발길로 노팔룡을 냅다 걷어찼다. “아이쿠!” 자다가 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단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노팔룡은 느닷없는 충격에 비 명을 지르며 저만큼 삼 장여나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잠이 만 리나 달아날 정도로 아팠다. 머리가 흔들흔들할 뿐 아니라 온몸이 부서질 듯 욱신거렸다. 그는 고개를 몇 번 돌려보다가 흑의녀를 발견했다. 흑의녀는 잘룩한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린 채 두 눈에 독기를 뿜고 그를 잡아먹을 듯 이 노려보고 있었다. “형씨! 깨어나셨구려!” 상황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는 것은 물론 일단 그토록 고생을 시킨 상대방이 멀쩡하 게 서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날 듯 반가운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흑의녀의 차가운 말이 그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죽고 싶으냐?” “응?” 노팔룡은 멍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그는 눈만 껌뻑이며 흑의녀를 바라 보았다. 흑의녀는 더욱 으스스한 음성으로 반복했다. “어떻게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물론 그만한 각오는 하고 날 희롱하였겠지?” “……?” 한동안 멍청하게 흑의녀를 바라보던 노팔룡은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아하! 그것 때문에 형씨가…….” 흑의녀의 눈에서 더욱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노팔룡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씨, 그 일이라면 나도 무척 걱정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오. 소백이 어쩌자고 형씨 의 물건을… 하지만 형씨,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을 어쩌겠소? 하찮은 미물이 실수로 그런 일이니…….” 그의 변명을 듣는 동안 흑의녀의 표정은 더욱 차디차게 굳어지고 있 었다. 안면은 백지장이다 못해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릴 지경이었다. “허허. 무척 화가 나신 모양이구려. 하긴 나라도 못 참을 터이니…….” 노팔룡은 주섬주섬 다가오더니 행낭에서 약초를 꺼냈다. 그는 몇 가지 약초를 손에 쥔 채 빙긋이 웃으며 타일렀다. “하지만 형씨, 지금 급한 것은 상처를 완전히 치료하는 일이오. 놔두면 흉터가 남는 단 말이오.” 노팔룡은 그렇게 말하며 겁도 없이 흑의녀에게 다가갔다. “안심하시오. 내가 책임지고 치료할 테니. 자, 어서 바지나 벗으…….” 펑! 폭음이 일었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노팔룡은 거센 장력에 맞아 붕 날아갔다. 너무나 화가 난 흑의녀가 냅다 그의 가슴을 갈겨 버린 것이었다. 노팔룡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사 장여나 날아가 암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아차, 내가 너무 쉽게 죽여 버렸구나.’ 흑의녀는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자신이 당했던 일에 비한다면 그렇게 쉽게 죽여 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암벽에 부딪쳐 떨어진 노팔룡의 머리 위로 부서진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정도면 두개골이 박살나거나 등골이 가루가 나 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상대방은 머리를 좌우로 몇 번 흔들더니 부시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아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흑의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장력이 어디 보통 장력인가?강호에서도 손꼽 히는 희대절학의 하나가 아니던가. 문득 그녀는 중상 때문에 자신의 내력이 약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팔룡은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먼지를 툭툭 털었다. “아이고… 형씨의 손매가 왜 그렇게 맵소?” 그는 뒤통수와 허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참아야지.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일말의 책임은 있으니까…….” 노팔룡은 다시 흑의녀에게 다가왔다. 흑의녀는 그만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거침없 이 자신의 하반신을 향해 손을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꽝! 이번에는 큰 종이라도 깬 듯한 음향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흑의녀의 혼신을 다한 장력이 정통으로 노팔룡을 가격한 것이다. 노팔룡도 더욱 처절 한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그때였다. “윽…….” 장력을 날린 흑의녀도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며 안색이 핼쑥해져 버렸다. 교룡의 독기를 쏘인 상세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리하게 공력을 운행하기까지 하여 그만 상세가 도지 고 만 것이었다. 흑의녀는 눈앞이 노래지면서 별똥이 튕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 렸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노팔룡의 음성이 들렸다. “그것 보시오. 안 되겠소.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겠소.” 어느새 다가왔는지 먼지투성이가 된 노팔룡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고 있었다. ‘이럴 수가.’ 흑의녀는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공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몇 장씩이나 날아가 바위에 부딪친 사람이 어찌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눈에는 도무지 그가 사람으로 비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모멸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애검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검을 잡고 진기(眞氣)를 끌어 올리는 순간 그만 아찔한 느낌과 함께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바닥에 부딪치지 는 않았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받쳐 준 것이었다. 물론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흑의녀는 기를 쓰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 일 수가 없었다. 이미 기혈이 뒤집혀 버린 것이었다. 그때 노팔룡의 음성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잠시만 참으시오. 이 약초는 인세에 드문 성약으로써 효험이 대단하다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동안 들려온 그 음성에 흑의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가락은 물론 입술 열 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체가 서늘해졌다. 노팔룡이 그녀의 바지를 벗겨 버린 것이다. ‘아악!’ 그야말로 기절을 하다 못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비록 운신할 수 없는 처지 긴 해도 정신만은 멀쩡한 상태였다. 그런데 눈 번연히 뜬 채 이런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자신의 두 다리가 노팔룡에 의해 좌우로 쩌억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악! 드디어 음적에게…….’ 아무리 무림의 여걸(女傑)로 중원 천지가 좁다하고 주유한 그녀였으나 너무나 놀랍고 분한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사실 기절한 것은 그녀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맨정신으 로 노팔룡이 성약(?)을 바르는 광경을 보았다면 필시 혀를 물고 죽었거나 충격으로 사 망했을 것이다. 3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물거리는 의식의 끄나풀을 어렵게 잡는 순간 눈 앞이 밝아졌다. 흑의녀는 한껏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치켜들려 했다. 그때 예의 그 지긋지긋한 노팔 룡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정신이 드오. 형씨?” 힘겹게 눈꺼풀이 들려지고 바로 앞에서 능글맞게 미소짓고 있는 노팔룡의 모습이 시 야에 들어왔다.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고, 벌떡 일어나려 했는데도 몸이 말을 듣 지 않았다. “아직 상태가 좋지 않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노팔룡은 점잖게 타이르듯 말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흑의녀도 별 수 없었다. 그저 사나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만 기다리시오. 다시 약초를 갈아야 하니…….” 노팔룡의 말이 끝나는 순간 흑의녀는 아랫도리가 다시 허전해 지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시선을 내려보니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던 옷자락이 치워져 있었다. 허연 허벅 지가 그대로 노출된 채 벌려져 있었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악… 무슨 짓이야!” 이제는 아예 비명 반 울음 반 섞인 단말마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낯 선 사내 앞에서 여인의 중지(重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어이 없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이젠 비참하다 못해 혀를 물고 죽 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보면 모르오? 상처에 약을 바르려는 거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후 흑의녀의 다리를 손으로 잡아 당겼다. “아악……!” 흑의녀의 입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오자 노팔룡은 안됐다는 듯이 물었다. “많이 아프시오?” 물론 흑의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혼은 구천지옥을 떠돌고 있었으니까. “하긴 상처가 무척 깊으니.” 흑의녀는 자신의 가장 깊숙한 비부(秘府)에 타인의 손가락이 닿는 감촉을 느꼈다. 그 야말로 혼비백산할 일이었다. 그곳은 이제껏 타인은 물론 그녀 자신조차도 손을 댄 적이 없는 성역이 아니었던가. 노팔룡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쯧쯧, 상처가 심해 도무지 차도가 없군. 여러번 약을 갈았는데도 아직 기별이 없으 니 말야.” “앗… 자, 자, 잠깐…….” 여인의 소중한 중지로 노팔룡의 손가락이 약을 바르느라 멋대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 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흑의녀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왜 그러시오?” 노팔룡은 물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협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멀뚱한 표정을 보고 흑의녀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입만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노팔룡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 제발… 그만둬요……!” 마침내 흑의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팔룡의 말은 더욱 가 관이었다. “아파서 그러는 모양인데 참으시오. 그래야 빨리 회복될 수 있으니까.” “그, 그게… 아핫… 아니라…….” “……?” “그, 그건 상처가 아니에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며, 무슨 설득이 필요하겠는가? 흑의녀는 비명에 가까운 외 침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요지부동이었다. “글쎄 아파도 참으라니까. 쯧쯧… 대장부가 엄살은.” 마침내 흑의녀는 부르짖었다. “나, 난 여자란 말이에요!” 노팔룡의 손 움직임이 멈췄다. “여자? 그게 무슨 뜻이오?” 맙소사.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흑의녀는 어쩔줄 모르고 허둥댔다. 도대체 눈 앞의 이 인간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만 같았다. 다시 노팔룡의 치료가 계속되었다. 그는 꼼꼼하고 세심하게 성약을 발라댔다. 결국 완 전히 치료를 끝내고서야 그는 손을 떼고 옷자락으로 그녀의 하반신을 덮어주었다. 노팔룡은 안색이 붉다 못해 검어져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내가 형씨의 상처 때문에 생각한 건데 아무래도 용변은 앉아서 보아야겠소이다. 아니면 바지를 버릴 테니 말이오.” “…….” 흑의녀는 이제 체념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불편하시겠지만 어쩌겠소? 이것도 다 운명이라 생각하시오.” 흑의녀는 듣고 있지 않았다. “이 바보야! 그건 상처가 아니라니까!” 그야말로 피를 토할 듯한 항변이었다. 제5장 지긋지긋한 심마(心魔) 1 우이독경(牛耳讀經)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쇠귀에 대고 이 정도 혀가 닳도록 설득했다면 최소한도의 성의표시로 꼬리라도 흔들 게 아닌가. 그러나 소가 아니라 바위에 대고 반나절을 떠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흑의녀는 지칠대로 지쳤다. 내상이 낫지 않은데다 쉴 새 없이 말을 한 까닭인지 거의 탈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노팔룡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눈만 꿈뻑거리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그가 한다는 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형씨는 본래부터 앉아서 오줌누는 족속이었단 말이오?” 흑의녀는 기함을 하고 자빠질 지경이었다. 앉아서 오줌누는 족속이라니! 그런 상스런 말에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 그렇단 말예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하는 흑의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노팔룡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그녀의 아래 위를 노려보더니 도리어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예끼, 여보슈. 내 비록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사람이오. 세상에 속일 것이 없어서 그래 그걸 말이라고 하슈? 사람이면 다 서서 소변보는 것이 원칙이지, 그리고 그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 아니겠소? 형씨는 치료가 겁나 그러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안심하시오. 이제 회복 단계니 고통도 멀지 않았단 말이오.” 흑의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만일 내상을 입지만 않아 진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면 벌써 요절을 내도 삼천 번은 더 요절을 내었으리라. 분노를 참지 못해 그녀의 안색은 수 차례에 걸쳐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이때 노팔룡은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흑의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겁먹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또 치료하려고?” 노팔룡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렇소. 빨리 당신이 쾌유되어야 나도 협행에 나설 것이 아니오?” 그는 행낭을 뒤져 주섬주섬 약초를 꺼내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추호의 회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흑의녀의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발 그만둬요! 제에발!”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치료는 시작되고 있었다. 옷이 벗겨지고 다리가 벌려지고 노팔룡의 약을 듬뿍 찍은 손가락이 서슴없이……. 흑의녀는 또 다시 기절하고 만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래야 해볼 도리가 없었다. 2 지옥(地獄). 그렇다. 흑의녀에게 있어 지난 삼 일간은 지옥,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하루가 죽음만도 못한 지옥같은 나날들이었다. 자존심과 영명함, 의연함과 기개(氣慨)가 박살나고 가장 기본적인 수치심마져 유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고통은 상대방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니. 그런 것 모두 다 참을 수는 있었다. 삼일이 지난 후 그녀가 가장 못견디게 된 것은 그런 내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하루에 세 번씩이나 갈아대는 성약의 공세에 그녀의 가장 소중한 그 부분은 이제 몸살이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상처(?)가 아물기는 커녕 도리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에게 있어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이 독한 약초의 기운으로 인해 충혈된 채 화끈화끈 열이 나고 있었다. 흑의녀는 하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열기와 따끔거리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치는 않았던가. 노팔룡도 차츰 회의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다시피한 끈질긴 흑의녀의 설득이 먹혀들었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치료하는 속도가 느려지며 멈칫멈칫하는 것이었다. 흑의녀는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즉 여인이란 존재가 남자와 어떻게 틀린가 하는 점에 대하여서였다. 그녀는 그 일에 자신의 생사가 걸린 듯이 전심전력으로 설명했다.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또 남과 여는 서로 다른 신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음양화합(陰陽和合)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설득이 통하는 기미가 보이자 흑의녀는 이제 수치심이고 뭐고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가리키며 남자와 어떤 면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녀는 노팔룡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한 후 다시 노팔룡의 가슴을 가리키며 남녀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했다. 만일, 평소의 그녀를 아는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대체 그녀가 누구였던가. 무정랑자 일점홍(無情浪子 一點紅)! 당금 강호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무정랑자 일점홍이 바로 그녀의 별호였다. 별호가 그러하듯 그녀는 무림에 신비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절세고수의 일원이었다. 그런 그녀가 노팔룡과 같은 천치인간을 만나 입술이 부르트도록 어이없는 교육을 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짐작인들 했겠는가?무정랑자 일점홍은 손 속에 한 푼의 인정을 두지 않는 차갑고 무심한 인물이었다. 일단 그녀의 손에 걸리면 어떤 자를 막론하고 살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나마 천분지 일의 생존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다. 일점홍은 검(劍)에 관한 한 천하무적의 고수였다. 일점홍이란 이름은 그녀가 살검(殺劍)을 떨칠 때 상대방의 몸에 다만 홍점(紅點) 하나만 남기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당금 강호에서는 그녀의 별호만 들어도 상하인을 막론하고 벌벌 떨며 달아날 궁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바람처럼 혜성처럼 나타난 그녀의 출신은 검각(劍閣)이었다. 검각(劍閣). 무림의 희대신비지문(稀代神秘之門)으로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어온 공포와 죽음의 문파. 세인들은 검각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금하고 있었다. 그만큼 검각의 영향력은 무림계에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점홍은 검각 일문에 몸을 바친 이래 스스로 여자임을 부정하고 천하제일고수가 되기로 결심한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져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사람이 생겨나고 또 소변도 눈다 이 말이오?” 그것은 노팔룡이 여인의 신비지문을 열심히 내려다 보며 묻는 말이었다. “그렇다니까요……!” 일점홍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나 곧 그의 비위를 거스르면 큰일이라는 듯 얼른 고개를 떨구고 만다. 노팔룡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난 믿을 수 없소. 세상에 이곳으로 어떻게 인간이 나온단 말이오?”노팔룡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 내뱉으며 일점홍의 방초 우거진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만지지 말아요!” 일점홍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노팔룡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나와 좀 다르기는 한데?” 일점홍의 얼굴에 일말의 희색이 떠올랐다. ‘옳지. 이제 좀 알아듣는구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희망의 끄나풀을 잡아당기듯 급히 말했다. “그것 봐요. 확실히 당신과 나는 틀린 점이 많…… 아니! 당신 뭐하는 거예요?” 그녀의 표정이 무참하게 뭉게지고 있었다. 노팔룡은 등을 돌린 채 다시 약초를 개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치료를 계속해야 하지 않겠소?” 일점홍은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를 느꼈다. “야, 이 바보같은 놈아아!” 그 순간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내부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지나친 흥분으로 인하여 막혔던 혈맥이 뚫린 것이다. “웩!” 일점홍은 시커먼 어혈을 한 모금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혈맥을 타통하고 기경팔맥을 치닫는 진기의 힘이 폭포처럼 백회혈(百會穴)로 솟구치는 바람에 혼절하고 말았다. “쯧쯧! 그것 보시오. 빨리 치료해야 된다니까.” 노팔룡은 혀를 차며 물로 반죽한 약초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실 일점홍의 상세는 극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급격히 뚫린 혈맥의 충격으로 잠시 혼절했을 뿐이었다. 3 사위가 적막에 잠겼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소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조차 심야의 정적에 숨을 죽이는 듯했다. 바위 아래 움푹 패인 곳에 일점홍은 여전히 누워있었다. 이 며칠 동안 그녀가 당한 고난은 전 생애를 다 합쳐도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귀한 자존심과 명예에 먹칠을 했음은 물론 스스로의 입이 부끄러운 말도 수없이 했던 것이다. 문득 일점홍의 손이 움직였다. 이어 다리가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이 반짝 뜨여졌다. 눈이 떠진 순간 어둠 속에서도 야광주처럼 빛나는 안광이 흘러 나왔다. “……!” 일점홍은 온몸이 날아갈 듯 가뿐함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온 전신이 자유롭게 움직여지고 있었다. 은밀히 진기를 운행하니 기경팔맥은 물론 전신 삼백육십대혈이 대하처럼 도도하게 흘렀다. 일주천을 운행하자 금새라도 십여 장을 솟구칠 정도로 몸이 가뿐해지고 힘이 넘쳐흘렀다. ‘아아!’ 그녀는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내상이 완치되고 공력을 되찾은 것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천치인간 노팔룡은 바로 옆에서 세상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빠드득……!’ 어둠 속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섬칫하게 들렸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오겠는가. 일점홍의 손이 소리없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이제 한 번 내려치기만 하면 바위를 두부처럼 갈라버리는 그녀의 절기에 천하없는 노팔룡이라도 즉사할 판국이었다. “앗!” 문득 나직한 비명이 들렸다. 일점홍은 당황하여 얼른 주저앉았다. 알고보니 느슨하게 허리춤에 걸려있던 바지가 하필 그때 흘러내린 것이었다.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하반신이 노출되었다. ‘오냐. 일단 공력을 회복한 이상 서두를 건 없지.’ 일점홍은 급히 옷을 주워들고 휙 신형을 날렸다. 그저 번뜩 섬광이 일었을 뿐인데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첨벙! 폭포의 담이 출렁거렸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천치인간 노팔룡의 손이 온통 떡주무르듯 전신을 마음대로 더듬어대지 않았던가. 아니다. 그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은밀한 곳은 화끈화끈하고 따갑기조차 했다. 일점홍은 담 속에 들어간 후 피부가 벗겨지도록 전신을 문지르고 닦아내야만 했다. 빠드드득… 빠드득! 쉴 새 없이 들리는 이가는 소리. 그것은 일점홍의 맺히고 맺힌 한이었다. “으아악!” 노팔룡의 몸이 사정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느닷없이 엄청난 고통과 함께 그의 몸은 이리 날아가고 저리 메다꽂혔다. 벌써 수십 번째 그의 몸뚱이는 날아가 암벽에 처박혔다. 이미 잠이 달아난 지는 오래였다. 그는 바닥을 구르며 부르짖고 있었다. “왜 이러시오? 도대체 왜……?” 그러나 일점홍은 서릿발같은 얼굴로 그를 쫓아다니며 사정없이 장력을 날리고 있었다. 장력뿐이 아니었다. 손과 발길로 인정사정없이 그의 전신을 구타하고 있었다. “자, 잠깐. 으악!” 노팔룡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점홍의 손이 어찌나 빠른지, 발길이 어찌나 눈부시고 변화무쌍한지 그는 하나도 피할 수가 없었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으악!” 그는 다시 발길에 채여 이번에는 담 속으로 풍덩 빠졌다. 일단 담 속에 빠지자 일점홍의 마수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물 속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어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기어나왔다. 그러나 고개를 드니 일점홍이 차가운 시선으로, 아니 증오가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내가 너에게 당한 수모를 모두 돌려주려면 네놈의 목숨이 천 개라도 부족해.” “아니오, 난… 난 충분하오.” 노팔룡은 다급히 손을 저었다. 무쇠로 만든 인간이라도 이런 무지막지한 구타에는 견디어낼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제발 그만 참으시오…….” 일점홍의 손은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노팔룡은 다급히 말했다. “자, 잠깐!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이유나 알고 맞읍시다.”일점홍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냐?” 노팔룡은 멍해졌다. “아니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란 말이오?” 일점홍이 같잖다는 듯 대꾸조차 하지 않자 노팔룡은 짐짓 흥분한 표정으로 따지고 들었다. “세상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기껏 힘들여 살려냈더니 다짜고짜 잠자는 사람을 개 패듯하니 이것이 어찌 도리에 맞는 행동이란 말이오?” 일점홍은 입이 턱 막혔다. 그의 말이 일리있어서가 아니었다. 정말 끝까지 천치 행세를 하는 노팔룡이 어이가 없어서였다. 일점홍이 침묵하자 노팔룡은 아예 훈계조로 말했다. “인정이란 주고 받는 것이 원칙이거늘 어찌하여 당신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단…….” 뻥! 노팔룡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일점홍이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발길로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그는 허공으로 붕 떠서 좌측의 바위 아래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바퀴쯤 구른 다음 퉁기듯 벌떡 일어섰다. 옷이 찢기고 여기저기 피가 흘러나와 엉망이었으나 안색을 무겁게 굳힌 채 노성을 발했다. “자꾸 이러면 더 이상 참지 않겠소!” 일점홍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의 노성 때문이 아니라 이제껏 수없이 장력을 날리고 걷어찼는데도 멀쩡한 노팔룡의 불가사의한 체력 때문이었다. ‘저 인간의 몸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얼마전에도 그녀는 암벽에 처박히고도 무사한 것을 보았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의 숨통을 끊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십이성(十二成)의 전력을 다한 장력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일수일퇴는 가히 바위라도 부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의 무방비로 수십 차례나 얻어맞고도 그는 멀쩡하지 않는가. 일점홍은 이제 자신의 무공 수위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팔룡은 그녀를 노려보며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비록 당신에게 이유없이 폭행당했으나 더 이상 따지지는 않겠소. 졸지에 불행을 당한 당신의 심정을 헤아리기 때문이오.” 노팔룡은 흙투성이가 된 옷을 툭툭 털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시오.” 일점홍은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멍하니 노팔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울리는 폭포수의 굉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상대방이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이 변신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노팔룡은 그녀가 아무 말도 않고 서 있자 씩 웃더니 성큼성큼 바위 아래로 걸어갔다. 일점홍은 그가 또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쳐다보고만 있었다. 노팔룡은 무엇인가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대나무통이 쥐어져 있었다. “이걸 가져 가시오. 내가 주는 선물이니 그리 알고.” “그, 그게 뭐지?” 일점홍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엉겁결에 받고 보니 보통 대나무가 아니라 앞과 뒤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었다. 피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팡이로 쓰기에는 짧았다. 노팔룡은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당신은 앞으로 앉아서 용변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생각해 보니 그건 참 불편할 것 같았소. 그러니 이걸 꽂고 일을 보면 한결 편할 것 같아서…….”노팔룡은 설명을 다 하지 못했다. 일점홍이 발작하듯 날린 혼신을 다한 장력에 정통으로 적중된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이번에는 워낙 엄청난 장력이라서 노팔룡은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오륙 장이나 날아가 버렸다. 잠시 후 그는 암벽 중간에 쿵하고 부딪친 후 떨어졌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떨어진 후 축 늘어져 버렸다. 4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일점홍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투영되고 있었다. 그녀는 턱을 고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가슴 부분의 옷자락이 걸레조각 처럼 찢긴 채 피가 흥건히 배어있는 노팔룡이 죽은 듯 널브러져 있었다. 노팔룡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봉두난발에 옷은 넝마처럼 찢겨 있었고 얼굴과 온몸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일점홍은 고개를 들어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는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내가 미친 게 아닐까? 뭣 때문에 저런 자를……?’ 얼마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날린 장력은 매우 강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너무나 화가 나 온몸의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노팔룡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그녀는 한동안 생각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원수같은 노팔룡을 옮겨다 정성껏 간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모순된 감정은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 번을 죽여도 시원치 않고 만 번을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작자를 무엇 때문에……? “…….” 일점홍은 멍하니 노팔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불현듯 잠들어 있는 노팔룡의 얼굴이 왠지 밉지 않게 느껴졌다. 문득 노팔룡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일점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휭하니 돌아섰다. 그녀는 폭포수가 떨어져내리고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 짙푸른 담을 내려다 보았다. 폭포수의 굉음과 물방울이 전신을 적시자 서서히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진 후 담 속으로 뛰어들었다. 담은 워낙 차가워 알몸으로 들어가자 뼛속까지 얼리는 듯했다. 그 냉기가 차라리 그녀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담 속에 몸을 담근 채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무정랑자 일점홍이다! 나는 천하제일을 목표로 살아가는 무인이다. 무인에게 감정이란 스스로를 지옥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 나는 무정랑자 일점홍. 나는…….’ 일점홍. 그녀는 태어나서 오늘까지 오직 하나의 길만 걸어왔다. 검의 길이요 천하제일의 무인이되는 길이었다. 그 하나의 목표만을 지향한 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이나 낮이나 지옥의 고통을 감내하며 검도(劍道)를 익혀왔다. 그런 그녀가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이없는 감정에 휩싸여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의 그녀 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그녀가 경멸하고 비웃는 어리석다 못해 바보같은 감정이 아닌가. 반 식경이 지났다. 일점홍은 더 이상 숨을 참기 어려울 만큼 담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떠올랐다. 차가운 담수로 인해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지만 정신은 도리어 냉냉하게 맑아져 있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점홍은 담 속에서 빠져나와 바위 위에 우뚝 섰다. 굉음을 울리는 폭포음과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을 휘감고 있었다. 탄탄하고 아름다운 나신이었다. 유방은 알맞게 부풀어 있었으며 허리는 한 줌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는 세류요(細柳腰)다. 그 좁디좁은 허리에서 흘러내리는 엉덩이의 곡선은 또 놀랄 만큼 급격히 풍성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두 다리는 사슴처럼 강하고 날씬했다. 기다란 머리칼은 풀어헤쳐진 채 두 개의 유방 사이를 흘러내리며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칼은 배꼽 아래 그녀의 하초까지 늘어져 살짝 그 부분을 감추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은 물에 젖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가히 천상의 선녀가 부끄러워 돌아서 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나신이었다. 일점홍은 오랫동안 선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순간 그녀는 자신에 대해 커다란 회의에 잠겨 있었다. 일점홍은 몸을 돌려 가뿐한 걸음으로 바위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여전히 알몸이었지만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노팔룡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일점홍의 섬섬옥수가 한 장의 나뭇잎이 떨어지듯 그의 이마를 덮었다. 열은 없었다. 맥박도 정상이었다. 노팔룡은 다만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진 듯이 보였다. 일점홍은 한동안 노팔룡을 바라보다가 옆에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녀의 모습이 기묘해 보였다. 완벽한 절세미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남자 옆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일점홍의 뇌리에는 자신을 가르친 사부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道)를 추구하는 무인에겐 언젠가 반드시 심마(心魔)가 찾아온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나 무인에게는 치명적이며 견디기 힘든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제자야, 결코 피하지 말라. 진정한 무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고비에 불과할진저, 심마를 피해 달아나면 더욱 큰 심마가 찾아 오는 법이다. 네가 진정 천하제일의 무인이 되려면 심마를 두려워 말고 과감히 부딪쳐 극복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일점홍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심마일지 몰라.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흔들릴 리가…….’ 일점홍은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평화롭게 잠든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다시 뇌리를 반복해서 스쳐가는 것이었다. 지옥같은 일들이었다. 천치인간에게 당한 뼈저린 모멸과 고통, 말도 통하지 않는 그에게 자신이 한 어이없다 못해 비참한 애원들…… 결국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여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존심마저 짓밟힌 채 당한 고통의 기억들이 일점홍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그러나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더 크게 그녀의 정심(定心)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토록 죽이고 싶도록 증오한 천치인간에 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느껴지는 이 묘한 감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 감정은 무인의 길을 걷는 그녀에게 치명적이었다.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만 했다. '피하지 않겠어. 이 자를 죽이거나 버리고 도망쳐 버리면 그건 심마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여기까지 생각한 일점홍은 문득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참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저렇게 미련한 심마(心魔)를 만날게 뭐야.’ 5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창천(蒼天)으로부터 따가운 햇살이 황룡산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조차 없는데 어디선가 놀란 듯한 청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협행에 나서겠다는 거요?” 황룡산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두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기묘한(?) 인연으로 맺어지게 된 노팔룡과 흑의녀 일점홍이었던 것이다. 일점홍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노팔룡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마구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요. 이유없이 구타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동행을 하자니. 난 목숨이 하나라 안 되겠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 바쁘게 걸어갔다. 행여 일점홍이 따라올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떨쳐 버리려 해도 일점홍은 그의 뒤를 똑같은 간격을 두고 그림자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저만치 앞서 가던 노팔룡은 여전히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일점홍을 보고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한동안 열심히 걷던 그가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일점홍은 여전히 똑같은 간격을 유지하고 따라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상대쪽은 전혀 걸음을 빨리 하거나 뛰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같은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팔룡의 눈썹이 잔뜩 찌푸러졌다. ‘저런 귀신과 동행하다가는 뼈도 못 추리지.’ 마침내 그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릴적부터 산속에서 자란 데다 지난 육 년간은 사부와 함께 황룡산에 틀여박혀 계곡 구석구석을 누비지 않았던가. 최소한 달리는 데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슬며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억!’ 그는 크게 놀랐다. 일점홍은 여전히 뒤쪽 불과 일 장여 거리를 두고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평생을 달아나도 떼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도대체 왜?” 문득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일점홍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이제까지 일점홍은 중상을 입어 누워있거나 그를 공격하는 사나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주 대낮에 가까운 거리에서 새삼 발견되는 모습은 전혀 달리 보이는 것이었다. 일점홍은 흑색 무복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으나 물찬 제비를 연상케 하는 늘씬한 몸매였다. 더구나 등 뒤에 멘 장검은 전체적으로 썩 잘 조화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노팔룡이 꿈에 그리던 협객의 모습이었다. ‘음. 멋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것, 동행도 나쁠거야 없지 않을까? 아니지, 저러다 또 미치면?’ 노팔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전 일점홍에게 당해 죽을 뻔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다시 휙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부지런히 걸었다. 풍진강호에 출사표를 던진 영웅인 양 한껏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일점홍이야 뒤를 따라오던 말던 상관없다는 듯 휘적휘적 앞만 보며 걸어가는 노팔룡의 모습은 어쩐지 잔뜩 부풀어있는 모습이었다. 낡은 사당(祠堂)으로부터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당인 듯 흙바닥에는 제기도 제상도 없었다. 그 사당 안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주변의 어둠은 모닥불이 지펴짐으로서 제법 아늑한 공간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 “…….” “…….” 노팔룡과 일점홍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보이는 일점홍의 얼굴은 신비롭기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면사를 쓰고 있지 않았다. 냉막한 분위기만 제외한다면 이를데 없는 미인이었다. 노팔룡의 눈길은 흘깃흘깃 그녀의 얼굴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약간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눈길을 피했다. 문득 노팔룡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형씨.” “……?” “이름이 뭐요?” 일점홍은 순간 당황했다. 지금껏 자신의 이름을 타인에게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여령(霞如玲).” 노팔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좀 간지러운 듯하오?” 그말에 일점홍 하여령은 얼굴을 붉혔다. 처음으로 이름을, 그것도 남자에게 밝힌 터라 냉막한 여류고수인 그녀도 어쩐지 수줍음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불빛이 어두워 그런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당신은?” 그녀는 의례적으로 물었다. “하하하! 나는 노팔룡이라 하오.” 노팔룡은 가슴을 펴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천하제일고수 뇌진자 사부가 지어준 이름이니 당연히 영웅의 기상이 느껴지는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일점홍 하여령처럼 간지러운 이름은 아닐 것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하여령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중얼거렸다. ‘하긴 위인이 바보같으니 이름도 바보스러울 수밖에.’ 두 사람 사이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팔룡이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연 것이다. “험. 내 형씨에 대해서 생각해 봤소.” “……?” “사실 하형이 불행을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내 도의적 책임이 있소. 그래서 하형이 원하는 대로 동행을 승낙할까 하오. 하지만 거기에는 선결조건이 있소.” 하여령은 눈길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그럼에도 그녀의 눈빛은 불빛을 받은 탓인지 그윽한 기운을 띄우고 있었다. 그 눈빛에 노팔룡은 감전이라고 된 듯 부르르 떨었다. ‘익. 무슨 눈빛이 저렇게 요사스럽지? 꼭 사람을 홀릴 듯하니…….’ 그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조건이란 간단하오. 첫째, 나를 절대 구타하지 말 것. 둘째, 보아하니 나보다 어린 듯하니, 음 나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이오.” 노팔룡은 말을 끝내고 하여령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것뿐인가요?” “그, 그렇소.” “좋아요. 수락하죠.” 너무나 선선히 승낙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노팔룡이 도리어 멍청해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이 기묘한 협행의 동지는 탄생하게 되었다. 일점홍 하여령이 대체 무슨 마음으로 노팔룡의 조건을 수락했는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것이다. 노팔룡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이제 아침이 밝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계에 보기드문 이상한 동행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강호에 회오리를 일으킬 것인지 두고 볼 일이 아니겠는가. 제6장 침상 위의 전쟁(戰爭) 1 한성진(寒城津). 이곳은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륙의 동서를 가르는 황하(黃河)가 연해 있는 곳으로 내륙 교통의 요충지이므로 언제나 많은 행려객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곳은 객점이나 주루 등이 번창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신선반점(神仙飯店)도 그중 하나였다. 강백(姜白)은 이곳의 점소이로 그는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나빴다. 손님을 시중들다 보면 온갖 궂은 일을 당하기 마련이지만 대체로 상냥하고 친철하다는 평을 듣는 그가 온종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었다. 원인은 어제 저녁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조앵(趙櫻)은 주방 하녀로 평소 그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하녀치곤 얼굴이 예쁘장하고 성품도 온순하여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조앵을 장차의 아내로 점찍어 두었다는 것이다. 하루가 아무리 고생스럽고 피곤하여도 조앵과 살림을 꾸려 나갈 미래를 생각하면 어느새 용기가 나고 어깨춤이 날 정도로 신바람이 난다. 이렇게 하나의 희망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기에 강백은 늘 웃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어젯밤 일을 끝낸 후 뒷간으로 가다가 그만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주방장 화곤과 조앵이 뒤켠의 헛간에서 야합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마침 열린 창문으로 조앵이 발가벗고 주방장과 함께 뒤엉켜있는 것을 본 것이다. 강백은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점소이 생활 칠 년 만에 꽤 많은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제 일 년 만 더 고생하면 그 돈으로 조앵에게 구혼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젯밤 사건으로 그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만 것이다. 지금도 강백은 음식을 주문받으면서도 마음 속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조앵… 겉으로는 얌전한 척 내숭 떨더니만 털북숭이 유부남 주방장 품에서 아양을 떠는 꼴이라니!’그때였다. 쨍그렁! 그의 손에 들렸던 음식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박살이 나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다. “아니, 이 놈이 오늘 왜 이래?” 소리를 듣고 뚱뚱한 주인이 달려왔다. 오늘로 강백의 실수는 벌써 다섯번째인 것이다. 막 들어온 손님 앞에서 음식 그릇을 떨어뜨려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뚱보 주인 우노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요. 손님.”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식탁에는 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 중 낡은 베옷을 입고 있는 청년은 시종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또 한 명의 흑삼청년은 냉랭한 눈빛으로 창밖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에는 별종의 인간도 많다. 객점 주인 삼십 년째인 우노는 그런 점에서 경험이 풍부했지만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역시 그는 노련한 객점 주인이었다. 우노는 더욱 조심스럽게 손을 모았다. “저어… 손님.” 그제서야 베옷 차림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응? 무슨 일이오?” 그는 아직까지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우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얼른 강백에게 깨어진 그릇을 치우라고 눈짓을 한 다음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 음식 주문을.” “주문? 그게 뭔데?” 청년이 멍청하게 반문하자 옆에서 흑의청년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음식을 시키라고요.” “아! 음식!” 베옷청년은 곧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거나 주시오.” 우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뭔가 시키셔야.” 이번에는 흑의청년이 먼저 차갑게 말했다. “이 집에서 제일 자신있는 걸로 갖고 오시오.” “아, 예예!” 우노는 굽신굽신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그는 저만치 물러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몹시 이상한 동행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한 명은 영락없는 시골뜨기인데 반해 다른 한 명은 또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차갑고 오만하니 말이다. ‘정말이지 세상 사람이란 천차만별인 게야.’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노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이때 흑의청년은 여전히 한눈을 팔고 있는 베옷청년을 바라보며 물어보고 있었다. “팔룡형, 신기한가요?” 그렇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얼마 전 황룡산에서 기묘한 인연으로 만나 동행하게 된 노팔룡과 무정랑자 일점홍 하여령인 것이다.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여긴 도무지 복잡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단 말야.” 딴에는 점잔을 빼며 말했지만 노팔룡의 얼굴은 반쯤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산에서 한 걸음도 나와보지 않은 그가 저자거리에 나섰으니 눈알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점홍 하여령은 피식 웃었다. 왠지 그가 하는 짓이 점점 밉지가 않고 도리어 정겹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여령, 저길 좀 봐!” 갑자기 노팔룡이 손가락을 뻗으며 반점 입구를 가리켰다. 그의 음성은 놀람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점 입구로는 막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들어서고 있었다. 하여령은 그 두 사람을 보았지만 노팔룡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뭘 보라는 거예요?” 노팔룡은 완전히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두 남녀를 가르키며 중얼거렸다. “저기 두 친구 중 오른쪽에 있는 자는 여령과 너무 닮았어. 정말이지 꼭 닮았는데…….” 막 반점으로 들어선 일남일녀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십칠팔 세 정도로 보이는 묘령의 아가씨였다. 노팔룡이 지금 가리키고 있는 쪽은 묘령의 아가씨 쪽이었다. 하여령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뇌까렸다. “여자니까 그렇죠.” “여자라고?”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노팔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네 말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사실 그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여인을 보았다. 개중에는 늙은 여자도 있었고 젊은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공통점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팔룡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틀리다는 것이었다. 점차 그는 하여령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노팔룡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어디 가는 거죠?”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겠어.” “……?” 하여령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말리기엔 늦어 있었다. 하여령은 그저 가슴 졸이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빌었다. 노팔룡은 남녀의 자리 앞에 멈추더니 정중하게 포권하고 있었다. 얼결에 인사를 받은 남녀도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마주 포권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노팔룡이 뭐라고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남자의 폭갈소리가 들렸다. 노팔룡이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이었다. “이, 이런 미친놈!” 뒤이어 청년은 격분을 못 이겨 장력을 날렸고 노팔룡은 정통으로 맞아 비명과 함께 저만치 날아가 식탁과 의자를 부수며 떨어졌다. 그런데 그것으로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청년은 등에 멘 장검을 뽑아든 채 신형을 날려 노팔룡에게 덮쳐갔다. 단숨에 노팔룡을 두 토막낼 기세였다. “잠깐!” 어디선가 맑고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거의 동시에 청년은 눈앞에 흑영이 막아서는 것을 느꼈다. 전광석화처럼 흑영이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흔들었다. “음!” 청년은 검을 든 손이 항거할 수 없는 무서운 잠력에 묶인 듯 옴쭉할 수 없는 것을 느끼며 안색이 대변했다. 흑영은 일점홍 하여령이었다. 청년은 내심 가슴이 섬뜩했지만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비키시오! 이런 미친놈은 당장에 요절을 내야 하오!” 하여령은 담담히 청년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이 분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분이오. 형장께서 이해해 주시오.” 나 청년의 화는 좀체로 억눌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 물정이 어둡기로서니 백주 반점에서 아녀자를 희롱한단 말이오?” 하여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의 일점홍이라면 이렇게 설득하지도 않았다. 벌써 상대방의 목은 어깨를 떠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청년과 동행인 아가씨가 나섰다. “사형, 그만둬요. 그런 미친놈을 상대해서 무엇하겠어요?” 그 말에 하여령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왠지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노팔룡이 미친 놈이면 함께 있는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그러나 이때, “아이고, 허리야!” 뒤에서 노팔룡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고 말았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그렇게 물은 후 그녀는 스스로에 대하여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걱정하다니!’ 노팔룡은 여전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지껄이고 있었다. “아이고, 그나저나 왜 만나는 사람마다 날 때리는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노팔룡은 툭툭 털고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하여령이 돌아보니 어느새 남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더 있어봐야 음식맛만 떨어질 것 같아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대체 아까 무슨 소리를 한 거예요?” 궁금한 것을 하여령은 물어야만 했다. “응, 여령의 말을 확인하려고 했지.” “뭘 확인해요?” “그 여자에게 물었지. 당신도 본래부터 앉아서 용변보는 족속이냐고.” 하여령은 그만 귀를 틀어막아 버린 채 자신을 저주했다. ‘맙소사. 내가 왜 그걸 물었을까!’ 2 밤이다. 인간이라면 잠을 자야할 시간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두 사람은 객점에 들었다. “왜 그래, 자지 않고?” 노팔룡의 물음에 하여령은 대답을 못 했다. 하여령은 두 개의 방을 얻으려 했지만 노팔룡이 우기는 바람에 하나밖에 못 얻은 것이다. 그러니 침상 역시 하나밖에 없었다. 방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하여령의 가슴은 온통 불안으로 조여들기만 했다. 한 방에서 동숙해야 할 일에 눈 앞이 캄캄했던 것이다. 노팔룡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주섬주섬 옷을 벗고 있었다. 하여령은 비명을 질렀다. “뭐하는 거예요!” “난 잘 땐 옷을 벗어야만 된다구.” 노팔룡은 웃통을 훌렁 벗어던지더니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하태평의 사나이. 천치인간 노팔룡으로서는 지극히 당연지사요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하여령 쪽이었다. 하여령은 입술을 잘질끈 깨물었다. ‘그래. 나는 여인이 아니야. 나는 일개 무인일 뿐이야.’ 그녀는 눈을 꾹 감고 침상에 누웠다. 물론 옷은 입은 채로였다. 막상 자리에 눕기는 누웠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아니 올 리가 없었다. 순결한 처녀가 한 방 것도 한 침상에서 남자와 나란히 누워있으니 잠이 온다면 도리어 비정상일 것이다. 한편 노팔룡도 뒤척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우직한 그는 벌써 곯아떨어져야 정상이었다. 잠자리가 낯설어서인지 아니면 초출강호의 감회 때문인지 몰라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하여령은 얼마간 뒤척이던 끝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사실 그 동안의 고초(?)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던 것이다. 그런데…… “꺄악! 무슨 짓이얏!” 하여령은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퉁기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 어디다 손을 넣어……?” 그녀는 분노로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잠결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져 깨어보니 자신의 하체 깊숙한 곳으로 노팔룡의 손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음. 그냥 좀 신기한 느낌이 들어서 말야.” 노팔룡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변명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여령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잡아먹을 듯이 그를 쏘아볼 뿐이었다. 그런데 노팔룡은 갑자기 정색하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네 말이 옳은 것 같아. 아무래도 아우와 나는 좀 틀려.” “……?” “살결의 감촉도 훨씬 부드럽고 그리고 게다가…….” 문득 노팔룡의 음성이 이상해졌다. 뿐만 아니라 눈빛까지도 야릇하게 변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널 만지고 있으니까 여기가 좀 이상해졌단 말야.” 노팔룡은 턱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르켰다. 하여령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았다. 노팔룡은 웃통을 벗은 채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바지 앞부분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하여령은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다음순간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이 바보! 그만두지 못해!” “알았어, 그만 두지. 뭘…… 어서 자자구.” 노팔룡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침상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하여령은 가슴이 쿵쾅거리고 열이 확확 나고 있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번엔 가능한 멀리 떨어져 누웠다. 이미 자긴 다 틀린 일이었다. 애써 등을 돌리고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귓전으로 노팔룡의 조심스런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여령. 부탁이 하나 있는데.” 하여령의 눈썹이 잔뜩 곤두섰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좀 만져 볼까 하는데 말야…….” 그 순간 하여령은 벌떡 일어나면서 아랫도리를 가렸다. “아니야. 거기가 아니고.” 노팔룡은 하여령의 가슴을 가리켰다. “네 이상하게 생긴 가슴 말이야.” 하여령의 눈이 독기를 품었다. 당장이라도 노팔룡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노팔룡도 기가 질리는 듯 움찔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돌아눕고 있었다. “알았어. 그만두면 될 것 아냐.” 그는 곧 코를 골며 잠에 떨어지고 있었다. 노팔룡은 쉽게 잠들었지만 하여령은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실로 지긋지긋한 밤이었다. 아침이 되었다. 노팔룡은 깨어나자마자 하여령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기 시작했다. “어서 갈아입어요!” 그녀의 손에는 깨끗한 연남빛의 옷이 한 벌 들려져 있었다. “도무지 냄새가 나 못견디겠단 말야. 어서 갈아입고 그 머리… 그 얼굴… 빨리 씻어요!” 노팔룡은 정신이 없었다. 아직 잠이 덜 깨기도 했으려니와 옷을 갈아입거나 씻는 것은 딱 질색인 것이었다. 그러나 잔소리를 듣기보다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나았다. 처음 고개를 흔들었을 때부터 무려 한 시진동안 그는 하여령의 잔소리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목욕을 하고 연남의로 갈아입었다. 머리도 빗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까지의 촌티나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의젓해 보이는 청년이 된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하여령은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여우처럼 홀리는 눈빛인데.’ 하여령의 눈빛에 그는 이상하게 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의 그런 심정을 하여령이 알 리가. 제7장 칠룡삼봉(七龍三鳳) 1 평상시 관도(官道)상에는 사람들이 다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가는 것은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게 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노팔룡과 하여령도 관도를 가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걷던 노팔룡은 하여령의 안색이 아까부터 찌푸러져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어젯밤의 일로 아직…….” “이상해요.” “뭐가?” “본래 이 길은 다소 한적한 편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지나치게 붐벼요.” “그런가? 난 원래 그런 줄 알았지.” 하여령은 피식 웃다가 다시 정색을 한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노팔룡은 도리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오히려 잘 된 일이지.” 하여령은 워낙 엉뚱한 그인지라 단단히 마음을 먹으며 물었다. “뭐가 잘 됐단 거죠?” “내가 뜻을 품고 산을 내려온 지 벌써 며칠이야? 그런데 아직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요?” “난세(亂世)가 있어야 영웅이 빛을 발하는 법. 그러니 잘 된 일일 수밖에.”기가 막혔다. 난세가 뭐 어쨌다구? 그녀가 막 핀잔을 주려는데 노팔룡은 갑자기 환성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이봐! 저길 좀 봐!”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강물이 보이고 있었다. 노팔룡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떠들어대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바다로구나!” 그 말에 하여령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에게 한참을 설명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하하하! 노형. 아마 노형께선 강을 처음 보시는 모양이구려.” 노팔룡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십대 초반을 넘어 보이는 청년문사였다. 그는 손에 한 자루의 섭선을 들고 있었는데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의 미남자였다. 두 눈은 빛나고 있었으며 어딘가 모르게 출중한 기상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럼 바다가 아니란 말이오?” 청년문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저 강은 황하(黃河)라 불리우는데 중원에서 가장 큰 강이지요.” “황하라.” 노팔룡은 그저 넋을 잃고 도도히 흘러내리는 황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서는 세상에서 이렇게 큰 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고작해야 그가 본 강은 황룡산의 계류가 모여 흐르는 작은 개울뿐이었던 것이다. 이때 하여령은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척 준미하게 생긴 인물이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입꼬리가 약간 처져 다소 간교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기실 그녀의 눈에 들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청년문사는 여전히 황하를 바라보고 있는 노팔룡에게 말했다. “하하! 그만 보시오. 눈 빠지겠소이다.” 노팔룡은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 이거 내가 실례를 했소.” 그는 사부의 당부대로 예(禮)를 생각한 것이었다. “원 별말씀을. 저는 사천당가(泗川唐家) 출신으로 당립(唐立)이라 합니다. 강호 선배들이 귀엽게 봐 주셔서 비천일룡(飛天一龍)이란 별호를 주셨소이다.” 이때 청년의 말을 귓전으로 듣고 있던 하여령은 눈빛을 반짝였다. ‘비천일룡이라면?’ 그렇다. 비천일룡은 당금 무림의 십대후기지수(十大後期之秀)에 드는 인물이었다. 일곱 용과 세 마리 봉황, 즉 칠룡삼봉(七龍三鳳)이 바로 십대후기지수였는데 비천일룡은 그중 한 마리 용이었던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십 인의 젊고 빼어난 남녀고수의 반열에 든 인물이기에 일점홍 하여령은 대뜸 알아본 것이었다. 한편, 비천일룡 당립은 자기소개를 해놓고서 은근히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노팔룡은 그저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당립은 실망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는 가슴이 뜨끔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체 이 놈들은 누구기에 나의 이름을 듣고도 놀라지 않는 것일까?’ 그는 슬며시 오기가 났다. “실례지만 형씨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노팔룡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정중히 포권지례하였다. 그 바람에 나란히 걷던 당립도 엉거주춤 선 채 포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팔룡이라 하오.” “오, 알고 보니 노대협이셨구료.” 노팔룡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한다. “당형은 날 아시오?” 당립은 어이가 없어 내심 욕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노팔룡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인사치례로 응대할 뿐이었던 것이다. “하하! 불초가 식견이 짧아서 그만. 그런데 노대협의 별호는 어찌 되시오?” 이번에는 노팔룡이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구원을 청하듯 고개를 돌려 하여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여령은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노팔룡은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곧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震宇宙 天上天下 唯我獨尊客)이라 하오.” “……!” 이번에는 당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가 머리에 털나고 처음 듣는 별호였던 것이다. 아니다. 그 점은 제껴두고 이렇듯 광오한 별호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상대방에 대해 현깃증마저 일어났다. 그러나 당립은 명문 출신답게 재빨리 손을 모은다. 의례적인 예의에 밝은 사나이였던 것이다. “아예, 그러셨군요.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노팔룡은 얼떨결에 같이 포권하며 중얼거렸다. “별말씀을.” 당립은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상대방이 어리숙한 척하며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생각된 것이다. 그는 정색을 한 뒤 물었다. “그런데 노대협의 사문(師門)은 어찌 되시는지요?” 노팔룡은 어리둥절했다. “사, 사문이요?” 그때 귓전으로 하여령의 가느다란 전음지성(傳音之聲)이 들렬다. (사부가 누구인지를 묻는 거예요.) 노팔룡은 그제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소했다. “하하! 사부님의 함자를 묻고 계신 모양이군요. 사부님께서는 천하제일고수이신 뇌진자(雷震子)이십니다.” 순간 당립의 표정이 홱 변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을 한껏 크게 뜨고 있었다. 그때 하여령도 바람소리가 나도록 휙! 몸을 돌리며 노팔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후 당립은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있었다. “뇌진자시라면, 바로 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신 뇌령대협(雷靈大俠) 뇌진자 어르신을 말씀… 하시는 겁니까?” 노팔룡은 고개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그렇소. 천하에 그 분 말고 또 뇌진자란 분이 있소?” ‘세, 세상에… 설마?’ 당립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반쯤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노팔룡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그, 그런데 정말 놀랍습니다. 뇌진자 어르신은 지난 백 년간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셔서 혹시 승천하신 게 아닌가 했는데…… 아마 노대협같은 제자를 거두시느라 그러셨던 모양이군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 뇌진자 노선배님께선 어디에 계신지요?” 그 말에 노팔룡의 안색은 시무룩하게 변했다. “선사께선 신선경으로 드셨소이다.” 당립은 깜짝 놀랐다. “신선경이라면, 그럼 우화등선하셨다는 것입니까?” 당립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상대방이 미덥지가 않았다. 도무지 바보같기만 하고 조금도 영민한 데가 없어보이는 작자가 천하제일고수 뇌진자의 제자라니. 문득 그는 눈에 이상한 빛을 내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소제는 오래 전부터 뇌진자 노선배님의 뇌령일식(雷靈一式)을 일견하기를 소원으로 삼았는데 다행히 그분의 진전을 이어받은 노대협을 만났으니 하늘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신 모양입니다. 하하하…….” 노팔룡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을 의심하고 추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드디어 당립의 얼굴에는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빛이 떠올랐다. “설마 노형께서 뇌령일식을 전수받지 못하셨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의 말투는 자꾸 바뀌고 있었다. 형씨에서 대협으로, 다시 노형으로. 노팔룡은 의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사부님께 전수받은 검법은 오직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뿐이오.” “진우주…… 뭐라구요?” 이름이 너무나 길어 당립은 그만 따라 뇌이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사부님께선 분명 내게 말씀하셨소. 이 검법이야말로 천하에서 제일가는 무공이라고.” 당립은 여전히 미심쩍었다. “하, 하지만 잠시 펼쳐보이는 거야…….” 이때 저만치에서 하여령의 음성이 들렸다. “팔룡형! 배가 왔어요.” 과연 막 나룻터로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황하를 건너가는 나룻터로 온 것이었다. 노팔룡은 당립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형씨, 전 이만 실례하겠소.” “…….” 당립은 얼떨결에 같이 포권했다. 그러나 그는 배 위로 올라가고 있는 노팔룡을 바라보며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꽥 소리치면서 몸을 날렸다. “노대협! 나도 그 배를 타야 하오!” 많은 사람들이 배 위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당립은 간신히 인파 속에 섞인 채 뱃전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는 뱃전에 오른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노팔룡은 보이지 않았다. 당립은 그만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별 미친놈을 다 만나 나까지 헷갈리고 있으니!’ 2 선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대부분이 무림인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휴대한 병장기나 복장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노팔룡과 하여령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하여령 왈. “대체 뭣땜에 그런 허풍을 떨어요?” 노팔룡 왈. “내가 뭘?” 하여령의 목소리가 뾰족해진다. “그럼 당신이 정말 뇌진자의 제자란 말이에요?” “그야 물론이지.” 하여령의 안색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사실일지도 몰라. 아무리 맞아도 끄덕없는 괴력(怪力)하며 만년교룡을 아이 다루듯 하는 걸 보면.’ 그녀가 혼자서 자신 없는(?)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여령, 저길 좀 봐.” 노팔룡이 가리키는 곳은 배의 선수 쪽이었는데 그곳에는 얼마전 반점에서 만났던 남녀와 당립,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청년이 함께 있는 광경이 보였다. 마침 당립과 이쪽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립은 안색이 변하더니 손을 번쩍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여어! 노대협! 이리 오시구려.” 노팔룡은 손을 흔들며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는데 하여령의 신경질적인 전음이 들렸다. (어딜 가려고 해요?) 노팔룡은 반문한다. “어딜 가긴? 친구들과 만나러 가야지. 여령도 따라오라구.” 그는 하여령의 반응은 무시하고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여령은 한숨을 푹 쉰 후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따라갔다. 당립은 노팔룡이 다가오자 얼른 자리를 권했다. 마침 선상에는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앉자 당립의 옆에 있던 청년이 물었다. “당형, 대체 이분들은 누구신데?” “하하하! 진형(陣兄)의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려. 잠깐 기다리시구려. 내 금방 소개해 올릴 테니.” 그때였다. 신선반점에서 노팔룡과 상면한 적이 있었던 남녀 중 남자가 차가운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필요없소이다. 이미 구면이니.” 당립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서로 아는 사이요?” 청년은 냉랭하게 말했다. “알다 뿐이오? 저 작자의 더러운 행위까지 속속들이 경험한 바 있소.” 어리둥절해 버린 당립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옆에 앉아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만두세요, 사형. 보아하니 당사형과는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허나 청년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흥! 설마하니 저런 불한당과 칠룡(七龍)중 일인인 당형과 아는 사이일 리가 있겠소?” 이때였다. 하여령의 차디찬 냉소가 들렸다. 비록 가벼운 냉소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역력히 청년을 비웃는 냉소였다. 청년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막 발작을 하려는 듯 어깨를 움직였다. 당립이 재빨리 나서며 중재했다. “이거 왜 이러시오?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화해하시구려.”그 말에 진가 성을 가진 청년이 동조하고 나섰다. “당형의 말이 옳소. 사해(四海)의 사람은 모두 친구인데 서로 조그마한 오해를 가지고 얼굴을 붉혀서야 되겠소?”그제야 중인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지 청년은 슬그머니 물러섰다. “하하! 정말 고맙소. 덕분에 체면이 살았소이다.” 당립은 낭랑하게 웃으며 포권했다. 명문대가 출신이자 칠룡삼봉의 일인다운 당당하고 품위있는 모습이었다. 이때 진가 성의 청년이 재촉했다. “그나저나 당형, 이제 소개를 시켜 주어야 할 것이 아니오? 소제는 궁금해 죽겠소이다.” 당립은 재빨리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다 보니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구려. 자, 그럼 소개를 올리지요.” 그는 노팔룡을 가리키며 음성을 가다듬어 말했다. “이분은 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뇌진자 대협의 전인이신 진, 진…… 으음.” 당립은 말을 중단하고 곤혹스런 표정으로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그만 노팔룡의 별호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이때 노팔룡의 조용한 음성이 중인들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이오.” 당립은 얼굴을 활짝 폈다. “맞소! 이분이 바로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이신 노팔룡대협이시오.” 그러나 애써 부언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중인들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내에는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세 명의 청춘남녀들은 멍하니 노팔룡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 회의, 불신, 혹은 혼란스러움같은 복잡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진가 성의 청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지금 분명 뇌진자대협의 전인이라 하시었소?” 당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 중인들은 하나같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대방도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일제히 노팔룡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노팔룡이 장내의 기묘한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형, 이분들의 소개도 해 주셔야 하지 않소?” 당립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진가 청년을 가리켰다. “이분은 무당파(武當派) 장문인이신 패엽도장(貝葉道場)의 수제자이자 무당 제일의 기재(奇才)로 명성을 날리시는 무당출룡(武當出龍) 진금표(陳金標) 대협이시오.” 무당출룡이라면 역시 칠룡삼봉의 일인이었다. 백도무림에 있어서 무당파의 위치는 무림의 태산북두 숭산 소실봉 소림사(少林寺)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대파였다. 진금표는 사문의 광영에 자부심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립은 계속하여 하나하나 청년들을 소개해 나갔다. “이분은 점창파(點蒼派) 출신으로 역시 제일기재이신 전광일도(電光一刀) 장무기(張武基) 대협이시오.”그 역시 칠룡 중의 하나였다. 얼굴이 약간 검었는데 이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신중한 성격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반점에서 만났던 일남일녀는 둘 다 화산파(華山派)의 제자로 신기일화검(神氣日火劍) 낙혼성(駱渾星)과 채화옥녀(彩花玉女) 여운설이었다. 놀랍게도 한 자리에 칠룡삼봉 중 다섯 명이 모인 것이었다. 배는 계속 황하를 도강하고 있었다. 제8장 금륜맹(金輪盟) 1 선상의 젊은이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인 양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믿겨지지 않은 시선으로 노팔룡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노팔룡에게서 아무런 해답도 나오지 않자 시선은 다시 당립에게 향했다. 당립은 이마를 소매로 문질렀다. 어쨌든 그가 소개한 이상 뭔가 결말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저것 노팔룡에 대하여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했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당립도 노팔룡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자꾸만 이마를 닦자 채화옥녀 여운설이 나섰다. “좋아요. 일단 저 사람은 뇌대협의 전인이라 치고, 그럼 저분은 누구죠?” 그녀가 가리킨 사람은 하여령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하여령에게 향했다. 당립은 당황했다. 그 역시 하여령의 정체에 대해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던 참이었다. 결국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노팔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노대협께서 직접 소개시켜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팔룡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따지고 보면 그도 하여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저는 이분의 서동(書童)이에요.” 노팔룡은 흠칫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 서동이오.” 노팔룡은 하여령이 자신의 아우이니 그런 칭호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령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아연 놀라고 말았다. 사실 은연중에 풍기는 하여령의 기도에 그들은 암암리에 대단한 내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고작 바보같은 노팔룡의 서동이라니. 그러나 어찌하랴. 본인의 입에서 서동이란 말이 나왔으니 아니 믿을 도리가 없었다. 그 바람에 중인들은 노팔룡의 정체에 대하여 더욱 더 헷갈릴 뿐이었다. 노팔룡은 장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셨소?” 그 말에 당립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노대협은 아직 그것도 모르고 계셨단 말이오?” “뭘 말이오?” “원 세상에, 그럼 내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리다.” 사단의 시점은 금륜맹(金輪盟)이란 문파 때문이었다. 금륜맹은 곤륜산(崑崙山) 인근에서 개파(開派)를 선언했는데 문제는 금륜맹이 강호의 정식 인정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명문대파임을 선언한 것에서부터 비롯됐다. 무림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는 법이다. 수많은 방회와 문파가 우후죽순처럼 탄생하지만 그들이 명문대파로 성장하는 데는 수많은 고초와 시련, 그리고 많은 세월을 거쳐야 한다. 특히 기존의 무림명문들은 신예문파의 출범을 그다지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견제하게 된다. 그러한 시련을 딛고 명문으로 성장하려면 명백한 실력과 조직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금륜맹은 시작부터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먼저 주위에 있는 군소문파와 방회가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금륜맹은 가차없는 혈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소문파와 방회들의 반발을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평정해나간 것이다. 24개의 군소문파와 육 개의 방회가 피비린내나는 격전 속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금륜맹은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뿌리를 남기면 이듬해 봄에 다시 싹을 틔운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듯 자신을 반대하는 문파와 방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철저히 분쇄해 버린 것이다. 특히, 강호의 대명문인 곤륜파(崑崙派)가 불과 삼 일 만에 무너진 것은 무림에 경악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금륜맹은 여세를 몰아 북방 무림을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 또한 변방무림을 정복하고 세외의 힘을 자신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불과 3년 전에 발호한 금륜맹이 이렇게 갑자기 무림패자로 부상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륜맹의 등장은 조용하던 무림에 일대 혼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아직은 그들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중원무림도 그들의 출현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금륜맹의 야심이 어디까지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곤륜파를 멸문시킨 그들이 변방과 강북을 제패했다면 다음 차례는 바로 중원무림이 될 것이다. 이에 중원의 구대문파 등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금륜맹을 저지하지 못하면 중원 무림의 생사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급기야 무림이 뭉치기 시작했다. 특히 중원무림이 합세되면서 이제까지 문파간의 반목이나 갈등을 접어두고 하나의 힘으로 뭉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결국 소림(少林)을 중심으로 한 중원무림의 연합맹이 결성되면서 금륜맹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급진전되고 말았다. 놀랍게도 금륜맹이 얼마전 맹주의 자리를 놓고 중원 무림과의 대전(對戰)을 선포한 것이었다. 명백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평소에는 자파의 이익에 급급하여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던 중원 무림인들도 마침내 위기의식을 느끼고 무언의 합의에 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무림 각처에서 영웅대회(英雄大會)가 개최되었다. 각처의 영웅대회를 통해 금륜맹과 대결할 고수들을 선발하게 된 것이었다. 영웅대회는 순조롭게 거행되었고 이제 최종적으로 각지 영웅대회를 통해 선발된 영웅들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곳은 비룡방(飛龍幇)이란 곳이었다. 비룡방은 사자림(獅子林)에 속한 한 방파였으나 이제 전 중원 무림의 운명이 걸린 곳으로 천하무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중원천하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사문의 명예와 일신의 영명을 날리기에 더 없는 기회로 보고 야심에 찬 청년고수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풍운의 장소로 변한 것이다. 2 선상의 젊은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며 때때로 눈빛을 번쩍이며 젊은 혈기가 끓는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곤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노팔룡은 계속 눈살을 찌푸리다가 질문했다. “금륜맹이란 대체 어떤 집단이오?” 사실 그는 강호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이런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오.” “어서 얘기해 주시오. 당형.” 당립의 말에 노팔룡은 무척 흥미있는 얼굴이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이야기에 빠져있는 모습은 바보스럽기까지 했다. 젊은이들, 즉 사룡일봉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하여 의심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천하제일의 고수 뇌진자가 아무려면 저 따위 바보같은 작자를 제자로 삼겠는가. 무엇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당립은 기왕 내친 김에 얘기를 이어 나갔다. “백 년 전 무림을 주름잡던 분은 바로 형장의 사부님이신 뇌진자 노선배님이셨소이다. 당시 그분에게는 거의 적수가 없었소.” “흠. 물론 그렇지요.” 노팔룡은 당연하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당립은 약간 아니꼬웠으나 꾹 참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 뒤로 일승(一僧)과 일패(一覇)가 나타났소. 일승이란 소림의 전대고인이신 천광선사(天光禪師)이시고, 일패란 지난 날의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 패천일도(覇天一刀) 하후람(霞後濫)이었소.” “…….” 노팔룡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들었다. 몹시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옆에서 보는 하여령은 왠지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꾹 참느라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분들 이후로 당대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기라성같은 고인으로는 칠기(七奇)를 꼽을 수 있소.” “칠기?” “설명할 테니 잠자코 들으시오. 먼저 그중 사 인을 설명하자면 개방 출신의 전대고수인 개왕(沔王) 도지연(陶智演), 현 사자림의 총수인 무영존자(無影尊子) 호연광(好燕光), 분광쾌검(分光快劍) 막도(莫刀), 무당파 전대고인이신 환상검수(幻像劍手) 진우자(震宇子)이시오.” 노팔룡은 머리를 빨리 굴려야 했다. 한꺼번에 네 사람의 별호와 출신, 이름을 외우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립은 일단 말문이 풀리자 줄줄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삼 인은 정체를 알 수 없어 삼비(三秘)라고도 불리우고 있소. 바로 소혼령(召魂鈴), 실심객(失心客), 탈명령주(奪命令主)라 불리는 자들이오.”노팔룡은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한편 그가 듣는 자세가 워낙 진지하므로 당립은 자연 열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사람이란 듣는 청중이 열심이면 덩달아 신을 내기 마련이었다. “일승일패와 칠기는 각자 최고의 절학과 세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 위에는 항상 뇌진자란 분이 계셨소. 그로 인해 무림은 평화를 유지해왔던 것이오.” “…….” “그러나 백 년 전 뇌진자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후 일은 벌어졌소이다. 그 이후 무림을 양분하고 있던 일승과 일패가 서로 천하제일이라고 자칭하며 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오.” “…….” “결국 두 파는 피비린내나는 패권다툼으로 무수한 인명피해를 냈고, 일승 일패도 숭산의 격돌 이후 영원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소이다. 일설에는 그들이 양패구상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오.” 노팔룡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당립은 신이 오른 듯 음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 사건은 무림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소. 그후 오늘까지 정파와 사파는 과거의 상처를 다스리는 입장이었소.” “그런데 그게 금륜맹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노팔룡은 궁금한 듯 질문했다. 당립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막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소. 물론 관계가 있소. 바로 수 년 전 스스로 일패(一覇)의 전인이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 금륜맹을 세우고 무림을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오.” “아!” 노팔룡은 입을 벌렸다. “그뿐 아니오. 때맞추어 일승(一僧)의 전인도 나타났소.” “아.” 노팔룡은 바보처럼 또 다시 입을 벌렸다. “그 분이 바로 중원무림을 규합하여 영웅대회를 개최했고, 흩어진 중원무림을 단합시킨 것이오. 이번 영웅대회도 그분의 영향력이 빚어낸 것이오.” 당립의 열변은 끝났다. 그는 어떠냐는 듯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노팔룡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제까지 열심히 듣고 있던 노팔룡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기껏 그 일 때문에 전 무림이 움직인단 말이오?” “……?” 당립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기가 막혀 반문했다. “아니? 그럼 노대협께서는 무슨 묘안이라도 있단 말이오?” 노팔룡은 거침없이 말했다. “묘안이 따로 있소? 원흉이 일패의 전인이라면 그 놈을 때려잡고 금륜맹인지 뭔지는 해체하면 될 것 아니오?” “……!” 과연 그렇다. 노팔룡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그 말에 당립을 비롯한 사룡일봉은 아연한 표정들이었다. 당립은 간신히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야, 틀린 말은 아니오. 하지만 그 놈의 무공이 워낙 출중하고 또 세력이 만만치 않은지라." 노팔룡은 손을 휘휘 저으며 거침없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봐야 일패의 제자가 아니오? 그렇다면 그 사부에 그 제자겠지. 일이란 어렵게 생각하면 할수록 꼬이는 법이오.” “……?” 사룡일봉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말하는 노팔룡이란 작자. 그들은 똑같이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들의 귀에 노팔룡의 자신만만한 말이 흘러들었다. “내 이번에 무림에 나온 김에 그 놈을 찾아가 단단히 훈계할 테니 여러분은 그리 아시고 마음 푹 놓으시구려.” 노팔룡의 말에 사룡일봉은 그야말로 똥밟은 표정들이었다. 마치 자기들을 하나로 싸잡아 바지저고리로 만드는 꼴이니 썩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것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신기일화검 낙혼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가락으로 노팔룡을 가리켰다.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였고, 입술이 벌어지며 금방 욕이 튀어나려고 했다. 가득이나 불쾌감을 참고 있느라 애를 썼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이 개똥같은…….” 이때였다. 당립이 슬쩍 낙혼성의 소매를 잡아 당기더니 중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배가 당도했소. 일단 대회장으로 가서 말씀하십시다!” “흥!” 낙혼성은 코웃음을 치며 홱 몸을 돌렸다. 당립의 체면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사매 여운설도 따라 몸을 일으켰고 나머지 삼룡도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쯤은 노팔룡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여령은 한심하다는 듯이 아예 고개를 저만치 돌려 버린 지 오래였다. ‘참 나, 도저히 구제불능이야.’ 대회장이 있는 비룡방은 육로로도 꽤 떨어진 곳으로 숭산과 화산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건천산(乾天山)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룡일봉은 행선지가 같으므로 배에서 내린 후에도 함께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물론 노팔룡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함께 대회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하하! 마침 잘 됐소.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겠소.” 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그와 감정이 안 좋은 신기일화검 등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하하!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는 것 같소. 저기 저 친구도 그런 것 같은데.” 노팔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연도에는 많은 무림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번 영웅대회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번 기회에 평생 닦은 무예를 떨쳐 이름을 날리려는 자도 있었고, 또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가는 자도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전무후무한 영웅대회이므로 전 무림이 떠들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제9장 영웅대회(英雄大會) 1 비룡방(飛龍幇)의 위세를 과시하듯 건천산 기슭에서부터 날으는 용이 수놓인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또한 영웅대회를 알리는 황금빛 깃발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대회장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용문양을 수놓은 백색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군웅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예리하고 근골이 비범해 보였다. 이미 대회장에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무사들의 긴장된 모습과 질서정연한 태도에 도리어 대회장으로 가는 군웅들이 기가 질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림인이라고 다 대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견문이나 넓혀 보려고 찾아왔던 자들은 중도에 임시로 세워진 목책(木柵)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목책 앞에 다다른 당립은 문득 노팔룡을 돌아보며 물었다. “참, 노대협께서는 배첩을 소지하고 계시오?” “배첩이라니?”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이것 참 낭패로군. 이곳은 배첩을 소지하지 않으면 통과하기가 불편한데.” “그게 무슨 말씀이오?” “다름이 아니라 워낙 참관하고자 하는 인원이 많은지라 배첩을 소지하지 않으면 일련의 시험을 거쳐야 통과가 허용이 되기 때문이오.” “시험?” 노팔룡은 여전히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렇소이다. 저 우측에 시험대가 마련되어 있으니 노대협께서는 불편하시더라도 한 번쯤 신기(神技)를 발휘하셔야겠소이다.” 과연 목책 우측으로 무림인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노팔룡은 흔쾌히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규칙이라면 지켜야지.” 당립은 입가에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시험이래야 하급무사들에게나 어렵지 뇌진자의 진전을 이어받으신 노대협한테야 장난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러니 몸도 푸실 겸 겸사겸사…….”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성큼성큼 무림인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당립의 입가에는 교활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사실 시험같은 것은 애당초 필요없었다. 당립이나 사룡일봉 중의 어느 한 명만 서명해 주어도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심 의구심을 갖고 있는 그는 이번 기회에 노팔룡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당립의 진의를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룡일봉은 즉시 노팔룡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과연 노팔룡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시험은 아주 간단한 것으로 대 위에는 삼천 근 무게의 쇠종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쇠종을 근력이나 내공의 힘으로 옮기기만 하면 통과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쇠종을 다만 한치라도 옮기는 사람은 몇 되지 않고 있었다. 노팔룡이 보고 있는 앞에서 관문을 통과한 자는 단 두 명으로 그들은 쇠종을 힘겹게 약간 들었다 놓았을 뿐이었다. 차례가 되자 노팔룡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여령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시험대에 탁자를 두고 앉아 있던 중년인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방명록에 서명하시오. 그리고 단 한 번에 성공하여야 하오.”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붓을 들어 쓱쓱 써 갈겼다. 그의 필체는 엉망이었으나 그런데로 글자의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뒤이어 하여령도 서명을 끝냈다. 중년인은 힐끗 서명을 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아니…… 여보시오! 지금 장난을 하는 거요?” -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震宇宙 天上天下 唯我獨尊客). - 서동(書童) 하빈(霞彬). 방명록에 쓰여진 서명. 그야말로 그런 이름은 금시초문인 중년인은 비룡방의 중진급 인물이었다. 그는 눈알을 부라리며 분노에 찬 시선으로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멍청한 모습을 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관두시오. 어서 시작하시오.” 기실 그는 무작정 대회를 관람하려고 몰려드는 무림인들을 다루는 데 이미 진력이 나 있었다. 따라서 의례히 노팔룡도 그런 인물이거니 생각해 버린 것이었다. 노팔룡은 쇠종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문득 하여령이 가로막으며 빙그레 웃었다. “잠깐,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겠습니까? 주인께서 직접 나서시기 민망하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녀는 중년인을 바라보며 어떠냐고 눈으로 물었다. 중년인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심으로야 도무지 같잖은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할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하여령은 쇠종에 손도 전혀 대지 않은 채 다만 종 앞에서 가볍게 두 손을 밀어낸 것 뿐이다. 우우웅……. 문득 귀청을 울리는 진동음과 함께 거대한 쇠종이 떠오른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쇠종이 서서히 떠올랐다. 마치 보이지 않은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쇠종은 바닥에서 삼 척 가량 떠올랐으며 하여령이 장심을 곧바로 밀자 수평으로 다시 삼척 가량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격… 격공진력…!’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년인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쇠종은 공중에 떠 있었다. 하여령은 소매를 휙 흔들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쇠종은 소리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사뿐히 내려앉는 것이었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소?” “토… 토… 통과…!” 중년인은 엉겁결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험!” 노팔룡은 마치 자신이 한 일이라도 되는 양 헛기침을 요란하게 내면서 앞장서 목책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사룡일봉은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그들의 가슴 속에는 경악과 의구,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일고 있었다. 2 대회장은 비룡방의 연무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회장 안에는 수많은 인파가 들어차 있었다. 입추의 여지없이 대회장을 메운 인사들은 한결같이 중원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으며 명문대파의 제자들이기도 했다. 비룡방은 비록 한 지역을 관장하는 그다지 크지 않은 방파였으나 칠기(七奇) 중의 하나인 무영존자 호연광이 총수로 있는 사자림 산하였기 때문에 그 기반이 든든했다. 그래서 이번 군웅대회의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이었다. 대회장 한가운데는 비무대(比武臺)가 설치되어 있으며 사방에는 여러 개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천막 마다에는 홍황청백(紅黃靑白)의 색색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천막 속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막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청장을 받은 인물들로 명호만 대면 당장 알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었다. 한편 노팔룡과 하여령은 배첩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천막 밖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노팔룡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군! 여령,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어?” 하여령은 피식 웃었다. “촌스럽게 굴지 말아요.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야, 대단하지 않고. 난 이런 건 처음 본단 말야.” 노팔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눈에 띄는 모든 것은 신기하기만 했고, 무림인들의 복장, 휴대한 무기 등도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하여령은 눈쌀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면박을 주지는 못했다. 그래봤자 입만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후에 당립이 두 사람에게 찾아왔다. “노대협.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이리 오시지요.” 그의 말투는 아까와는 달리 아주 정중하게 변해 있었다. “허허! 뭘 그런 수고를.” 하면서도 노팔룡은 사양하지 않았다. 사실 천막 밖은 몹시 더운데다 혼잡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천막 속은 넓고 시원해 보였고 무척 편안하게 자리가 꾸며져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홍색 깃발이 꽂혀 있는 천막 속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비무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의자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 천막 안에는 사룡일봉이 모두 있었고, 그밖의 인물들도 보통 인물이 아닌 듯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신기일화검 낙혼성은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그의 감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막 착석한 순간 어디선가 둥! 하는 고(鼓) 소리가 들렸다. 고 소리는 연달아 열여섯 번이나 울렸다. 고 소리가 끝나자 장내의 군웅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넓은 대회장이 바늘 한 개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정숙해졌다. 왠지 장중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이제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당립이 옆에 붙어앉아 설명했다. 문득 가벼운 소음이 일어났다. 눈길을 돌려 보니 비무대 위로 여섯 명의 인물이 올라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령인데다 위엄이 어리고 눈빛이 전광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다양하여 중도 있었고, 도사도 있었으며, 속인도 있었다. 당립은 대 위에 나타난 육 인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분들이 누구이신지 아시오?” “누구요?” 노팔룡은 물론 알 리가 없었다. “소림, 무당, 화산, 개방의 장문인들과 본가(本家)의 가주이신 소제의 아버님, 그리고 이번 대회의 주관자이신 사자림의 총수 무영존자 호연광 노선배님이시오. 말하자면 저분들이 이 대회의 공동주관자인 셈이지요.” 과연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일파일문의 지존다운 품위와 위엄을 만인 앞에서 풍기고 있었다. 노팔룡이 보기에도 그들은 썩 그럴 듯해 보였다. 이때 한 명의 노승이 앞으로 약간 나서며 군웅들을 향해 합장했다. “아미타불… 먼 길을 오시느라 모두 수고가 많았소이다. 구파일방을 대신하여 노납이 감사드리는 바이오.” “와아아아!” “와……!” 군웅들의 입에서 일제히 함성이 울렸다. 노승은 방장 스님이었던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숙여야 할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사의 방장 스님을 한 번 보는 것만도 영광으로 알 정도였으니 군웅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노승은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지어보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자, 이제 모두 모이신 듯하니 대회를 시작하겠소이다.” 노승의 말은 잔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의 귀에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명확하게 들렸다. 불문의 선공(禪功)을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노승은 약간 뒤로 물러나더니 갈포를 입은 한 명의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을 가리켰다. 그는 겉으로는 중년으로 보이나 실제 그의 나이가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 대회장의 주인이신 호대협께서 대회를 주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외다.” 호대협. 그는 칠기 중 한 명으로서 명성이 쟁쟁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끄는 사자림(獅子林)이 어떠한 곳인가? 비룡방과 같은 조직을 수십 개 거느리고 있는 무림중도(武林中道)에 속한 집단으로 흑도백도를 망라한 무림최대 조직의 총수인 것이다. 호연광은 앞으로 나서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중원무림을 위해 싸울 대표자를 뽑는 데 있소이다.” 그는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고 곧바로 설명했다. “그러므로 우리끼리 화기를 상할 수는 없는 일이오. 따라서 비무시에 유혈사태가 나지 않도록 서로가 조심하는 것이 옳을 듯 하오. 그래서 본인은 비무를 심사하고 공정한 판정을 내리게 할 분들을 선출하여 이번 대회를 주관케 함이 좋다고 생각하는 바이오.” “옳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울렸다. 호연광은 소림 장문인이나 혹은 같은 칠기의 일원인 무당장문인 패엽도장을 오히려 능가할 정도로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가 명문 출신이 아니면서도 칠기의 서열에 올랐으며, 뿌리없는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사자림이란 독특한 조직을 창안하였기 때문이었다. 함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호연광은 다시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이 동의하신다면 우리 여섯 사람이 비무를 심사하겠소이다. 비무에 임하시는 분들은 언제든 우리들이 결정하는 판정에 순응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또 다시 함성이 터졌다. 물론 호연광의 말에 이의가 없다는 뜻이었다. 호연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한 명의 얼굴이 긴 인물에게 말했다. “비룡신군, 자네가 규칙을 설명하게.” 비룡신군(飛龍神君)은 바로 비룡방의 방주로 호연광의 수하이기도 했다. 비룡신군은 중인들 앞으로 나서 정중히 포권하더니 대회의 규칙 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회의 규칙은 간단한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영웅들 가운데 아무나 나와 비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먼저 3연승을 하게 되면 일단 일차 통과자로 한다. 그리고 일차 통과자들끼리 추첨을 하여 다시 승부를 가리는 것이었다. 최종 승리자가 나오기까지 비무는 계속되며, 최종 우승자가 곧 중원무림맹의 대표자로 선정되는 것이다. 그 대표자는 중원무림의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것으로 지상의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이곳에 모여 있는 영웅들은 여러 지역에서 예비대회를 거쳤거나 아니면 배첩을 받고 특별히 초청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무림의 정예가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 둥! 둥! 둥!……. 힘찬 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비무대회의 개막이 선언된 것이었다. 장내에는 고막을 찢을 듯한 우렁찬 함성이 울렸고 그 함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웅들은 비무대로 비조처럼 뛰어오르는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비무대로 뛰어오른 청년은 30대 정도의 장창(長槍)을 멘 청년이었다. 그는 은삼을 입고 있었는데 비무대로 올라서자마자 포권지례를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생은 진주언가(晋州彦家)에서 온 언무외(彦武畏)라고 하오. 가르침을 바라오.” 한편, 노팔룡은 비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언무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형, 저 사람은 누구요?” 당립은 자신의 강호견식을 뽐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지 거침없이 대답한다. “진주 언가라면 예전에 명성을 날리던 명문무가이오. 그리고 저자는 언가의 장남으로 환영폭뢰창술(幻影爆雷槍術)의 대가입니다.” 그러자 노팔룡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당형과는 누가 위요?” 당립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림인치고 다짜고짜로 이렇게 묻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지만 자칫하면 시비의 불씨가 될 소지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글쎄요.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겠지만…….” 이때 그는 하여령의 눈길이 그에게 머무는 것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저 자를 적수로 생각하진 않고 있지요.” 노팔룡은 대뜸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별볼일이 없는 작자로구만.” 당립의 눈살은 절로 찌푸러졌다. 그 말은 언무외는 물론 자신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때 노팔룡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언무외가 혼자 올라서 있는 비무대 위로 마침내 도전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40대 가량의 중년대한으로 온 얼굴이 털복숭이였으며 허리춤에는 아홉 개의 방울이 달린 구령도(九鈴刀)를 차고 있었다. 그는 언무외에게 포권지례를 치뤘다. “나는 장강십팔채의 오보추혼도(五步追魂刀) 사주강이라 하오. 전부터 언가의 창술을 가르침 받고 싶었소이다. 좋은 가르침을 바라오.” 털북숭이는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예의가 깍듯했다. 노팔룡은 또다시 당립에게 묻고 있었다. “저 사람은 또 누구요?” 당립은 이번에는 내뱉듯이 말한다. “무명잡배외다.” 이번엔 무척 거친 말투였다. 그러나 노팔룡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막 시작된 비무대 위의 결투를 보느라 정신이 팔렸던 것이었다. 비무대 위에는 도광과 창영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창영이 수십 개의 환영을 이루고, 쉴 새 없이 쩔렁이는 구령도의 쇠방울 소리와 함께 도광이 보는 이의 눈을 자극했다. 그것은 눈알이 아찔하도록 현란한 광경이었다. ‘창창창…… 쨍!’ ‘딸랑! 딸랑!’ 구령도에는 아홉 개의 방울이 달려 있어 도를 휘두를 때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방울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노팔룡은 그 같은 싸움을 보고 가슴이 뛰고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창과 도의 그림자 뿐.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지러운 방울소리, 쇳소리에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그를 관찰하고 있던 당립이 은근히 물었다. “어떻소이까?” “뭐가 말이오?” 노팔룡은 여전히 눈을 비무대에서 떼지 못하며 반문했다. “저들의 무공을 말하는 거외다.” “시덥지 않소이다.” “예?” 당립은 멍청해졌다. 비무대의 싸움은 예상보다 치열한 것으로 그가 보기에도 언무외의 창법이 높았고, 또 무명잡배라던 사주강의 도법도 의외로 강하였던 것이다. 한데 시덥지 않다니…… 이때 노팔룡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본래 비무란 정신을 일통한 뒤 전력을 다해 승부를 하는 것이 원칙이오. 한데 저기 두 사람의 싸움은 마치 닭싸움하듯 춤만 추고 있으니…… 쯧쯧!” 가엾고 한심하다는 듯이 노팔룡은 혀를 차대고 있었다. 당립은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노팔룡의 말은 갈수록 자신을 무시하는 듯 했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것이 당립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듯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당립은 꾹 참고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승리할 것 같소?” 노팔룡은 망설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야 뻔하잖소. 창이 기니 창을 쓰는 자가 금방 이길 거요.” “……?” 너무나 어이없는 엉터리 논리였다. 세상에 그따위 판단을 하는 자가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긴 무기를 쓰면 최고가 되지 않겠는가. 당립은 기가 막혀 막 뭐라고 반박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아!” 갑자기 군웅들의 함성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당립은 입을 다물고 재빨리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언무외가 승리한 것이었다. 정말 간단히, 너무나도 싱겁게 싸움이 끝나 버린 것이다. 제10장 서동(書童)의 무공 1 의혹! 그야말로 구름처럼 의혹이 피어올랐다. 당립은 태어난 이후 오늘처럼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진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노팔룡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노팔룡이 천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초출강호의 촌뜨기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바보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작자. 노팔룡이란 존재는 당립의 마음을 온통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일만 해도 과연 운이 좋아서 맞춘 것인지,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안목이 적중시킨 것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이때 비무대 위에는 다시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다. 그는 한 자루의 반월도(半月刀)를 들고 있었는데 언무외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하북(河北) 정도문(正道門)에서 온 성낙천이라 하오. 한 수 지도를 부탁하오.” 노팔룡은 또 당립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당립은 이번에는 음성을 가다듬은 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적성도법(適星刀法)의 대가로 하북에선 꽤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오. 그런데 노대협께서 보기에 이번 승부는 또 어떻게 될 것 같소?” 이어 그는 노팔룡이 대답하기도 전에 앞질러 말했다. “역시 창이 기니 언무외가…….” 언뜻 말을 해놓고도 자신이 우스워져 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 세상에! 내가 이게 또 무슨 꼴이람.’ 노팔룡은 피식 웃는 바람에 그는 가슴이 뜨끔했다. ‘이, 이 자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당립은 노팔룡이 웃자 그만 잔뜩 긴장했다.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물론 이기긴 이길 거외다. 그러나 이번에는 꽤 고전할 거요.” 이때 비무대 위에는 그야말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퉁기고 있었다. 용호상박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노팔룡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언무외가 약간 앞서고는 있지만 그도 역시 고전하는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힘겹게 근소한 차이로 상대방을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하여령의 전음이 그이 귓전에 가늘게 들려왔다. (어째서 고전할 거라고 생각했죠?) 노팔룡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말한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좀 전에 싸우느라 힘이 빠졌으니 고전할밖에.”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일급고수가 한 번을 싸웠다고 힘이 빠지다니? 질문한 하여령도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바보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더욱 우스운 것은 기대를 걸고 노팔룡에게 물었던 자신이었다. 이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무에 신경을 쓰느라 당립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비무대 위의 격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관전하는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채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휙휙거리는 창날의 파공음과 도영이 금방이라도 살벌한 피를 뿌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윽!” “음!” 두 마디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졌다. 상황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언무외는 두 발짝 뒤로 물러났는데 어깨가 약간 찢어졌을 뿐이었으나 상대방은 가슴의 옷이 크게 벌어진 채 선혈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이때 비룡방주가 나서더니 선언했다. “언소협께서 이승을 올렸소!” 그는 장내를 둘러보며 다시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다음 도전자는 나서시오.” 그러나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사실 지금 나서서 승리해 보았자 그다지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언무외가 2승을 거둔 데다 그가 이번 비무로 지친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열을 셀 때까지 나서는 분이 없다면 삼승을 올린 것으로 하겠소이다.” 비룡방주가 수를 세기 시작했다. 열을 다 세도록 나서는 자가 없자 언무외는 3승을 거둔 것으로 인정되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언무외가 군웅들에게 포권한 후 대 아래로 내려갔다. 휘익! 비무대 위에 기다렸다는 듯 한명의 백의청년이 일학충천의 멋진 신법으로 올라섰다. 그는 등에 보검을 멨으며 기상이 출중한 청년이었다. “소생은 종남(終南)의 사도욱(査刀旭)이라 합니다. 여러분의 지도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묻지도 않았는데 당립이 자진해서 설명했다. “저자는 칠룡(七龍) 중의 일인으로 환광검(幻光劒)의 달인입니다. 조금 전 언가보다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소.”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립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상대가 나서지 않을 것이오.” “왜 그렇소?” “어차피 이차에서 만날 상대인데 초반부터 누가 저런 강자와 맞서려 하겠소?” 아니나 다를까? 한참이 지나도록 도전자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윽고 비룡방주가 나서서 다시 열을 세기 시작했다.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칠룡은 당금무림의 후기지수 7인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비룡방주가 열을 거의 다 세었을 때, “잠깐!” 군웅들은 모두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누가 감히 칠룡에게 도전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외침은 노팔룡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웅들이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노팔룡은 군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비무대에 오르신 분을 그냥 내려 보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소? 그래도 한 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을 대접하는게 도리가 아니겠소?” 그 말에 비룡방주가 안광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럼 소협께서 도전하시겠소?” 노팔룡은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나가라.” 하여령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뻥한 표정이었다. 노팔룡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나가 한 수 지도해 드려라.”노팔룡은 고개를 돌려 비룡방주를 향해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서동인데 제법 검을 다룰 줄 아니 섭섭치는 않을 것이오.” 하여령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도대체가 노팔룡이 하는 짓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고 이번에도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기에 그녀는 별 수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비무대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중인들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아니, 더욱 넋이 나간 것은 당사자인 사도욱이었다. 사도욱은 그야 말로 안면을 우거지처럼 찡그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하는 일이었다. 무림의 후기지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에게 한낱 무명청년의, 그것도 일개 서동 따위가 도전을 해오다니.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달랐다. 막상 비무대 위로 하여령이 올라서는 순간 그는 숨이 탁 막힘을 느낀 것이다. ‘이럴 수가.’ 사도욱은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상대는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하나의 절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상대방은 검을 뽑지도 않았고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자꾸만 온몸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검을 뽑고 싶어도 손이 움직여지지 않고 있었다. 이건 어린아이가 거인을 대하는 것이나 같은 이치였다. 사도욱은 안간힘을 쓰며 자세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계속 바람도 없는데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하여령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 중인들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비틀비틀…… 사도욱은 술에 취한 사람마냥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런 모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도욱은 자신을 향해 화를 내며 입술을 깨물은 것이다. ‘오냐, 이판사판이다!’ 그는 억지로 공력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다. “멈추시오, 승부는 이미 끝났소.” 문득 어디선가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군웅들은 모두 그쪽을 바라보았다. 소리친 자는 바로 무영존자 호연광이었다. 사도욱은 그 진기가 실린 음성을 듣자 비로소 자신을 압박하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짐을 느꼈다. “욱!” 그는 비명과 함께 한 모금의 피를 토하더니 곧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휙! 어느새 무영존자 호연광이 대 위로 날아와 쓰러지려는 사도욱을 받쳤다. 그가 사도욱의 등 뒤 명문혈을 한 대 탁! 치자 사도욱은 부르르 떨면서 감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하마터면 주화입마를…….” 그는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감사를 표한 후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아래로 내려갔다. 그 광경에 군웅들은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세상에 칼 한 번 뽑지도 않고 강호의 후기지수 가운데 일인인 사도욱을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 직접 자신이 보지 않았다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호연광은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그대는 누구요?” 하여령은 조용히 말했다.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의 서동일 뿐이오.” 그 말에 호연광의 시선이 번쩍 광망을 발하더니 천막 안에 있는 노팔룡을 바라본다. 노팔룡은 그저 바보같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호연광은 비무의 주관자이자 심사자이므로 더 이상 비무를 참견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신형을 날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데 이때 당립은 귓전으로 쏘아든 전음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당사질, 비무가 끝난 후 본부로 오시게. 할 말이 있네.)그 전음은 호연광의 것으로 오직 당립만이 들을 수가 있었다. 당립은 안색이 변했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한편 하여령은 비무대 위에 서서 다음 도전자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가롭게 구경 나온 사람처럼 뒷짐을 진 채 대 위에서 군웅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몹시 오만한 모습이었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 한 번 뽑지 않고 칠룡 중의 일룡에게 중상을 입게 했는데 감히 누가 나서겠는가. 비룡방주가 나서서 열을 세었지만 도전자가 나서지 않았고 그녀는 일차 통과자로 선포되었다. 결국 하여령은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걸어서 자리로 돌아왔다. 노팔룡은 천막으로 돌아온 하여령을 나무랐다. “내가 너에게 한 수 지도해 주라고 했지, 언제 가만히 서 있다 오라고 했느냐?” 하여령은 다만 잠자코 웃을 뿐 대꾸하지 않고 그의 옆에 앉았다. 2 첫날의 비무는 해질 무렵에 끝났다. 일차 통과자는 육 인이 생겨났다. 그들은 언무외와 하여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칠룡삼봉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통과자들에게는 숙소가 배당되었는데 비룡방의 귀빈실로 아늑한 별원이 딸린 방이었다. 노팔룡과 하여령도 방으로 안내되었다. 노팔룡은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런데 곧 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여령이 척 하니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아니, 왜 또 그래?” “그걸 몰라서 물어요?” 노팔룡은 무엇을 느낀 듯이 말한다. “아! 내가 서동이라고 소개해서 그런 모양인데 그건 네가 먼저…….” “그게 아니고요!” “아니, 그럼 뭣 때문에?” “왜 나를 내세워요? 내가 누군줄이나 알아요? 당신 때문에 어린아이들과 드잡이질하게 생겼잖아요.” “……?” 노팔룡은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여령은 여전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래봬도 난 꽤 항렬이 높은 사람이에요. 최소한 아까 대 위에 있던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해도 섭섭한 판에 당신 때문에…….” 노팔룡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네가 어떤 위치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나의 동생이야. 형님이 동생한테 그만한 일도 못 시켜?” 그의 말은 틀린 것이라곤 없다. 하여령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말다툼해 봐야 벽에 대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노팔룡은 문득 돌아누우며 내뱉았다. “이제 그만 자자구.” 자자는 말에 하여령은 그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저리가 쳐진다. 그녀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재빨리 방안을 둘러보았다. 역시 침상은 또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은 비룡방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장소. 공명등이 밝혀진 가운데 하나의 원탁을 둘러싸고 육 인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칠기의 한 명인 무영존자 호연광을 위시한 오대 장문인들로 그들 중에서 호연광의 나이와 배분이 가장 높았다. 호연광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팔룡이란 자와 하빈이란 자가 수상하오.”그는 굳어진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빈이란 자의 무공은 노부의 무공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것 같으니 정녕 불가사의한 일이오.” “……!”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영존자 호연광이 누구인가? 그는 칠기의 일원으로서 수십 년 래 무림의 기인이지 않은가?그런 그가 한낱 일개 서동에 불과한 소년을 두고 자신의 무공과 맞먹는다고 말을 하다니,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그만한 기도를 지니고 무형공(無形攻)을 떨쳐 내장을 상케 할 인물은 별로 없소이다.” 그 말에 소림 장문인 료공선사(了空禪師)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빈승이 알기로도 칠기를 제외하고는 그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기운이 덮인다. 이 대회는 금륜맹을 상대하기 위한 중요한 대회였다. 비록 구파일방을 비롯한 명문의 문파들이 중원연합맹을 이루었으나 이전에 그랬듯이 물과 기름처럼 겉으로만 뭉치고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되는 시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회를 통해 인재를 찾아 무림맹의 구심점을 만들고 진정한 의미의 연합맹의 힘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끼어든 정체불명의 두 사람으로 인해 대회의 흐름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만의 하나, 그들 두 사람이 금륜맹의 첩자라도 된다면?그것은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중원연합맹은 결성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극심한 혼란과 자체 붕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때 녹의를 입은 노문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립아가 곧 올 것이니 그 아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추림(唐秋林)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비천일룡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밀전 밖에서 누군가의 보고가 들려왔다. “들게 하라!” 당추림의 말에 문이 열리며 당립이 들어섰다. 당립은 기라성같은 선배고인들이 방안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많은 무림의 선배고인들을 뵌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어나라, 립아야.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느니라.” 당추림의 부드러운 말에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중인들의 시선은 그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빛이 그의 폐부를 찌를 듯했다. 당추림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까 보니 너는 노팔룡이란 자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데 그와는 잘 아는 사이냐?” 당립도 이미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즉시 공손히 대답했다. “예, 잘은 모르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흐음, 네가 아는대로 설명해 보아라. 대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당립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얼마 전 도상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의 신분은 정말 놀라운 것이라 저는 지금까지도 긴가민가하고 있습니다.” “……?” “노팔룡이란 자는 자칭 뇌진자 노선배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 “……!” 장내의 고인들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당금무림의 최상위 배분이면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백전노장인 그들도 일시에 할 말을 잃고 경악의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너무도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야 당가의 가주 당추림이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 립아야, 그게 사실이냐?” 그의 떨리는 음성이 장내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당립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저도 아직 확실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그의 서동이란 자의 무공이 그러할진대 아주 거짓말은 아닌 듯도 싶고…….” 그 말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서동 하빈의 무공에는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당립은 자세히 설명했다. 연도에서 어떻게 노팔룡을 만났으며, 그가 어떤 행동들을 하더라는 것과,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까지도 자세히 설명했다. 당립의 말이 끝나자 육 인의 고인들은 더욱 당혹감이 더해질 뿐이었다. 도리어 당립의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았을 때보다도 더 많은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당립의 말에서 그들이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아니, 신비감과 의혹만이 더욱 깊어졌을 뿐이었다. 이때 개방 방주인 개존 임충의 말이 들렸다. “아무래도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소이다.” “……?” “그 노팔룡이란 자가 정말 백 년 전 천하제일고수이셨던 뇌진자의 제자라면 무림을 구원할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고, 아니면 금륜맹의 첩자임이 분명할 것이오.” 이번에는 호연광이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노부의 의견은 그렇지 않소. 서동이란 자의 무공만으로 볼 때도 적의 첩자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소. 그 정도의 인물이 고작 첩자일 리는 만무인 것이오.” 무당 장문인 패엽도장이 나섰다. “무량수불…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추측해 보아야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소림의 료공선사도 찬동의사를 표시했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든든한 원군을 얻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육 인의 고인들은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광경에 당립은 곤혼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가까이서 보아온 노팔룡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사야 할지, 아니면 계속 그를 의심하며 정체를 파악하는 데 전념해야 할지. 마침내 당립은 고개를 젓고 내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사태를 더 두고 볼 수밖에.’ 제11장 시위를 떠난 화살 1 묘한 다툼이 벌어졌다. “한 번만 만져 보자니까?” “안 돼요.” “글쎄, 한 번만.” “안된다니까요?” “딱, 한 번만. 그것도 잠깐… 응?” 어둠 속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높아진다. “미쳤어요? 안 된다면 안 된다는 줄 알아요!” 그 앙칼진 음성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하여령의 음성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한 침상에 나란히 누운 채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어느덧 노팔룡의 음성은 애원조로 바뀌고 있었다. “뭐, 닳는 물건도 아니고 잠깐 만져 보자는데 왜 그렇게 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으응……?” 하여령은 통사정을 하고 있는 노팔룡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보일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귀빈용 숙소의 하나밖에 없는 침상에 나란히 눕자마자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자는 척하던 노팔룡이 갑자기 더듬거리며 하여령의 젖가슴으로 손을 뻗어온 것이다. 그것도 딱 한 번만이란 토를 달며 요구해온 것이다. 도시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겠다니, 이건 어불성설도 유분수지. 부탁할 것을 부탁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평소의 하여령 같았다면 벌써 상대의 머리를 부숴도 백번은 부쉈을 것이다. 노팔룡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치근대고 있었다. 마침내 하여령은 홱 돌아누우며 그의 뺨을 갈기려 했다. 그만 인내의 한계를 느낀 것이다. ‘……!’ 문득 그녀는 마주 누운 노팔룡의 얼굴을 본 순간 흠칫 했다. 왠지 묘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노팔룡의 무지한 요구와 줄기차게 애원하는 그의 표정이 갑자기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불현듯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 도시 세상의 때라고는 터럭 한 올만큼도 묻어 있지 않은 사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심지어는 선악(善惡)에 대한 구별 능력도 없는 인간…… 노팔룡이란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여령의 가슴에 깊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코와 코가, 이마와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안 하여령의 가슴에는 뭉클한 느낌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하여령은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이마를 맞댄 채 노팔룡이 입술을 열었다. “딱 한 번만. 응……?” 어이없는 일이었다. 짧은 순간 하여령이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팔룡은 오직 하나만 생각한 것이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졸라댔다. 그만 하여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끼얏호!” 노팔룡은 괴성을 발하며 달려들었다. ‘아차!’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막 뭐라고 거절을 하려는데 이미 그녀의 몸은 아래로 깔리고 노팔룡의 손이 거침없이 순결한 처녀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2 온몸이 바르르 떨린다. 어찌하랴! 아무리 담대한 무림의 여걸이요, 천하제일인을 지향하는 신비의 여고수라지만 그녀 역시 처녀임에 틀림없었다. 사내의 거친 손이 옷 속으로 뚫고 들어와 전인미답의 젖가슴을 더듬어대는 데야 아무리 이빨을 악다물어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막 올리려던 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체념하고 만 것이었다.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허락할 것을 허락해야지, 노팔룡의 손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꼼지락거리며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하여령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야, 정말 신기한데?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따스하지?”노팔룡은 아예 그녀의 상의를 벗겨 버리고 유방을 꼭 동여매고 있던 젖가리개를 풀어 버렸다. 젖가리개가 떨어져 나가자 퉁기듯이 불룩 솟은 유방이 솟아올랐다. 노팔룡의 손이 덥썩 유방을 거머쥐었다. 그는 아무런 조심스러움도 없이 그녀의 유방을 마구 주물럭거렸다. 전인미답의 두 육봉이 그의 손 안에서 이지러지고 뭉게지면서 유린당하고 있었다. 하여령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말문이 막힌다. 하여령은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고, 어이없이 허락한 자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엎지러진 물이요 깨어진 사발이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문 채로 시간아, 빨리 흘러가 다오! 하며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노팔룡은 신바람이 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분홍빛의 작은 유두를 만지고 비틀고 꼭꼭 누르기도 하면서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방은 어두웠으나 그는 야안(夜眼)을 지닌 듯 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하여령은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느낌을 전달받고 있었다. 노팔룡이 만지는 유두를 중심으로 하여 찌르르 하는 전율감이 온몸으로 급속히 퍼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며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때 노팔룡도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유두를 누를 때마다 하여령의 몸이 퉁기는 듯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유두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여령의 몸은 위로 퉁겼다. ‘헤, 신기한데? 마치 말을 타는 것 같은데?’ 아닌게 아니라 어느새 그는 하여령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런데 하여령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허리를 비틀어 올리자 자연히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어느새 하여령의 유두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성이 난 듯 딱딱해진 유두를 살짝 퉁겨본다. “음… 제발 그만해요…….” 신음같은 하여령의 애원이 뒤따랐다. 하지만 노팔룡이 그만둘 리가 없었다. ‘하하, 이 재미있는 걸 왜 그만 둬?’ 그는 집요하고 짖궂게 손가락으로 그녀의 딱딱해진 유두를 계속 여러 번 퉁겨 보았다. “으… 으음!” 하여령은 신음소리와 함께 심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녀는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고, 민감한 여인의 성감대가 연속적으로 자극받으니 이런 현상이 나오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새 노팔룡의 왼손은 그녀의 하체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성역을 완전히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여령은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노팔룡은 그녀의 바지를 반쯤 내리고 여인의 방초 무성한 곳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계속되자 꼭 붙여져 있던 허벅지가 살며시 벌어졌다. 바지가 다리에 걸려 더 이상 벌어지지 않자 노팔룡은 슬쩍 자신의 발끝으로 그녀의 바지를 완전히 아래로 내려 버렸다. 속곳도 어느 사이엔가 제거되어 있었다. 그의 손은 익숙하게(?) 길이 들어져 있는 과거의 상처(?)를 찾아 더듬어 들어갔다. 이제는 그도 믿고 있었다. 그곳이 본래 그렇게 생겨먹은 곳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 사실을 안 이후로는 더욱 더 호기심이 많아졌다. 호기심은 끝없는 탐구심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런 좋은 기회는 그다지 흔치 않을 게 뻔했다. 노팔룡은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다급히 탐험을 시작했다. 도대체가 자신의 그것과는 너무나 틀리게 생겨먹은 물건이었다. “으으음… 학!” 손가락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하여령은 연신 신음을 흘리고 난리다. 그녀는 허리를 마구 뒤틀더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갑작스럽게 노팔룡의 목을 휘어감았다. 그녀의 몸은 경련하듯이 떨고 있었다. ‘하하, 이거 점점 재미있는데?’ 노팔룡은 신바람이 났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이번에는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하여령의 몸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퉁겨 올랐다. 그녀의 몸은 활처럼 휘어졌고 그의 목을 감은 손에 더욱 힘이 주어지고 있었다. 워낙 세게 그의 목을 끌어안는 바람에 노팔룡은 숨이 막혔다. 그래도 전혀 싫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노팔룡은 그녀의 나신 위에 엎드린 채 계속 탐험을 행했다. 왠지 그녀가 그렇게 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고!’ 하여령이 워낙 세차게 목을 휘어감는 바람에 그는 목이 부러지는 줄 알고 내심 비명을 질렀다. 이때,“아앗.” 하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발하더니 하여령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그녀는 사지를 아무렇게나 벌린 채 온몸이 솜처럼 풀어져 있었다. 웃옷은 풀어져 있었고, 하반신은 아무것도 가린 것이 없는 채 부끄러움도 의식 못 하고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노팔룡은 슬며시 손을 떼었다. 그는 손끝이 약간 젖은 것을 느꼈지만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여령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노팔룡은 그만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녀의 가슴과 아랫배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러다가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하여령의 늘어져 있던 몸이 또다시 꿈틀하는 것이 아닌가? ‘이크, 또.’ 그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다시 그녀가 자신의 목을 잡아당기면 이번에는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는 얼른 손을 떼면서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알몸에 덮어 주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목이 뻐근한 상태인 것이다. 노팔룡은 벌렁 드러누웠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는 온몸이 기이한 신열로 뜨거워진 채 기분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얼굴을 하여령의 따뜻한 유방 사이에 묻었다. 그러니 잠이 스르르 온다. 그는 뜨거운 유방 사이에 얼굴을 묻고 곧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천진한 어린애처럼 유방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든 지 얼마 안 되어, 가만히 하나의 손이 뻗어와 그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고 있었다. 하여령이었다. 그녀는 곤히 잠든 노팔룡의 목을 끌어 안으며 바싹 그의 품으로 안겨들고 있었다. 노팔룡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코를 골며 잘 뿐이었다. “휴…… 내가 왜 이러지. 여령아, 정신 차려라. 여령아…….” 하여령의 안타까운 긴 한숨이 방안에 여운을 남겼다. 3 “일어나요. 지금 해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이런 잠꾸러기 같으니.” 노팔룡은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하여령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생생해 보였다. 또한 전날과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 노팔룡은 그런 그녀를 보자 기분이 좋아져 히죽 웃었다. 아닌게 아니라 창문이 부유스름해지고 있었다. “으응, 벌써 아침인가?” 노팔룡은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하여령의 뜨거운 눈빛과 마주치자 움찔했다. 하여령의 시선은 이상한 달콤함과 애정이 담긴 것이었다. 그 눈빛을 받자 노팔룡은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침 하여령은 옷을 갈아입고 침상 가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여령…….” 그는 들쩍지근한 음성으로 부르며 그녀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노대협,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당립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야말로 산통을 깨는 순간이었다. 노팔룡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대답했다. “예! 지금 막 일어났소이다. 그런데 당형께서는 어인 일이오?” 그는 좀 더 뭉기적거리고 싶었다. 웬만하면 당립을 돌려보내고 하여령과 함께 더 누워 있을 생각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예, 다름 아니라 노대협을 만나뵙고자 하는 분들이 있어서…….” 노팔룡은 어리둥절했다. 당립의 음성이 이어졌다. “본가의 가주님을 비롯하여 이곳의 대회 주관자이신 노선배님들께서 노대협을 꼭 뵙고자 하십니다.” 노팔룡은 눈을 굴렸다. “아니, 무엇 때문이오?” 당립의 음성에는 약간 짜증이 어리고 있었다. “글쎄, 그건 가 보시면 알 것 아니오?” 아무리 우둔한 노팔룡이라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노팔룡이 안내된 곳은 넓은 대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대전 한가운데 기다란 탁자가 있었고 육 인의 인물들이 둘러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노팔룡이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운 일이었다. 강호의 한 젊은이를 위해 그들같은 고인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노팔룡이 뇌진자의 전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또 당연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배분으로 본다면 대전 안의 육 인이 아무리 고인이라도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서 오시오. 노대협.” 그를 맞이하는 것은 호연광이었다. “이거 노부가 직접 영접을 하여야 하는데 결례가 되었소이다.”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뇌진자에 비한다면 그도 한 배분 이상 아래였던 것이다. 그러니 노팔룡과는 동배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직접 청해야 순서가 옳은 것이었다. 노팔룡은 손을 흔들었다. “원, 별 말씀을.”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중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헌데 무슨 일로 소생을?” 호연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자리에 앉으시구려.”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함께 따라온 하여령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서동이므로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노팔룡의 뒤쪽에 서면서도 그녀는 내심 욕을 퍼붓고 있었다. ‘맙소사, 내 신세가 이 꼴이 될 줄이야.’ 모두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차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역시 하여령의 것은 없었다. 일동은 묵묵히 차를 마셨다. 차는 향기가 강한 용정향(龍井香)으로 값비쌀 뿐 아니라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절반쯤 마셨을 때 호연광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에 노대협을 모신 것은 궁금한 점이 있어서외다.” 노팔룡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제가 듣기로는 노대협께선 뇌진자 선배님의 전인이시라고 하였소만……?” “아, 물론이오. 틀림없는 사실이오.” “……!” 너무나 태연하고 당연한 표정으로 노팔룡이 말하자 육 인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비록 당립에게 말은 들었으나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뇌진자가 누구인가? 까마득한 백 년 전의 이인(異人)이자 무림이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가 아닌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 뇌진자의 전인이 나타난 것은 하나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호연광도 경악한 표정을 짓다가 급히 다시 물었다. “그럼 노선배님께서 선경에 드셨다는 것도?” 노팔룡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장내는 침묵에 빠졌다. 육 인은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진듯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무량수불…… 그런데 노대협께서는 무슨 일로 강호에 나오셨습니까?” 침묵을 깬 것은 무당의 패엽도장이었다. 노팔룡은 문득 어깨를 펴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선사께서 저에게 하명하셨습니다. 강호로 나가서 협행을 하라고 말이오.” 그 말에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노팔룡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림장문 료공선사가 합장하며 말한다. “아미타불…… 노승이 듣기에 대협께선 뇌진자의 뇌령일식 대신 다른 무공을 익히셨다던데?” 노팔룡은 흔쾌히 말했다. “예. 사부께서 창안하신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 말에 전내의 중인들은 전부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요, 그 뜻 또한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호연광이 물었다. “그 진… 우주… 아무튼 그 검법은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이까?” 노팔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일단 검을 뻗으면 풍운이 일고 뇌성이 치며, 승천한 용이 지상으로 내려와 검 끝에서 춤을 춥니다.” “……!” 모두들 입을 딱 벌린다. 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던 하여령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런 허풍을!’ 호연광이 헛기침을 했다. “엇험……!” 그제서야 중인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노팔룡의 말에 모두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묘한 침묵이 흐르다가 당가의 가주 당추림이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노대협께서는 우리에게 그 검법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 순간 노팔룡의 안색이 대뜸 흐려지고 말았다. 중인들은 줄곧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그런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다. 눈치 빠른 당추림이 재빨리 추궁했다. “왜? 혹시 어려운 점이라도 있으신지?” 노팔룡은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호연광은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허허허!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당장 시작합시다. 뇌진자 선배님께서 새로이 창안하신 절학이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 안계를 크게 넓힐 기회가 아니오?” 그 말에 중인들은 다투어 일어서고 있었다. 노팔룡은 우거지상이 되어 하여령을 바라보았다. 구원을 요청하는 애달픈 눈빛을 보내며. 그러나 하여령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되면 그녀가 도와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아니, 기실은 그녀 역시 궁금증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노팔룡은 할 수 없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거 큰일났군. 아직 완전히 검법의 진수를 얻지 못했는데.’ 노팔룡은 순간적으로 검법을 완성하지 않고 강호로 나온 것을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금 상황은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어기적거리며 중인들을 따라 대전을 나서고 있었다. 제12장 십절서생(十絶書生) 1 대전 앞. 약 백여 평 가량의 넓은 공지가 있었다. 이곳은 연무장 겸 정원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었다. 대회의 주관자인 육 인의 고인들이 나란히 선 채 모두 시선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기대 반 의혹 반의 시선으로 노팔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명백하게 진실이 규명될 것이다. 무림 최고수의 서열에 들어있는 육 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노팔룡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가운데 서서 어깨를 폈다. 지금 그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비록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어떠랴? 그래도 사부님의 절기인데 설마 망신이야 당할려구?’ 그는 중인들을 향하여 정중히 포권했다. “아직 미완성이라 진수를 보여드릴 순 없지만, 미약하나마 지난 육 년간 연마한 것을 펼칠 테니 나무라지 마십시오.” 호연광이 수염을 쓰다 듬으며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소? 아무리 그래도 뇌진자 선배님의 절기인데, 필시 경청동지할 위력일 게요. 이 기회에 안목을 넓혀야겠소이다.” 노팔룡은 주위를 둘러본 뒤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끌렀다. 다음 순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봇짐 속에서 무엇이 나올까 궁금했던 그들은 그만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건 막대기 아냐? 설마 저걸로?’ 설마가 적중하고 말았다. 노팔룡은 나무 막대기를 신중하게 움켜쥔 후 하늘 높이 치켜든 것이었다. 꿀꺽! 그것은 중인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였다. 그들은 목울대를 꿀럭거리며 긴장한 채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풍운이 일고 승천한 용이 내려와 검날 아래서 춤을 출런지? 아니면? 중인들의 눈에는 기대 반 의심 반의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그것은 하여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눈을 반짝이며 노팔룡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였다. 뚫어져라 노팔룡의 자세를 지켜보던 소림 장문인 료공선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빈승이 착각하는지는 몰라도 저 동작은 어쩐지 삼재검법(三才劍法)의 기수식 같소.” 무당 장문인 패엽도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얼핏 보아 비슷하지만 훨씬 허점이 많은 것이 좀 틀린 것 같소이다. 아마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묘가 담긴 것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노팔룡이 펼치고 있는 동작은 무척이나 허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인들의 눈에는 그점이 무척이나 신비하게 보이고 있었다. 허(虛)한 가운데 실(實)이 있고, 실한가 하면 허한 무도의 최상승 묘(妙)를 감춘 자세로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노팔룡은 다음 자세로 들어가는 기미가 없었다. 그는 나무 막대기를 하늘 높이 치켜올린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었다. “저, 저것 좀 보시오!” 문득 호연광이 당혹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가 경호성을 발하지 않더라도 이미 중인들은 보고 있었다. 검을 든 노팔룡의 얼굴이 문득 시뻘겋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인가 폭발할 듯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눌렀다. 과연 어떤 무시무시하고 풍운변색할 일이 일어날 것인가. “모두 조용히 합시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였다. 장내에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한편 중인들과 달리 노팔룡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런 제기랄. 하필이면 이때…….’ 잔뜩 긴장을 하노라면 절로 배에 힘이 가는 법이다. 그런데 배에 힘을 주는 순간 갑자기 내부에서 무엇인가 폭발할 듯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그 기운을 누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더욱 더 그 미친 기운은 단전(丹田)에서 용솟음치더니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그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내리쳤다. 엉겁결에 펼친 동작이었다. 그 순간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꽝! 무엇인가 내부에서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트, 틀렸어!’ 노팔룡은 절망의 비명을 내심 질렀다. 그러나 이때 중인들의 눈은 한껏 부릅떠지고 있었다. 중인들이 보기에 노팔룡의 검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번쩍 하고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저럴 수가!” “오오.” 중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노팔룡의 신형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 십 장 밖에 세워져 있는 돌사자상(石獅子像)을 덮쳐간 것이다. 꽈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돌사자상이 박살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바람에 장내가 온통 돌가루와 먼지로 인해 뿌옇게 변해 버렸다. 중인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경악에 휩싸여 버렸다. 한참 후에야 호연광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는 어디 있는지……?” 장내의 어디에도 노팔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저곳이오!” 무당 장문인이 가리키는 곳은 돌사자가 있던 곳에서도 삼십 장 밖에 있는 담장이었다. 놀랍게도 담장 중간에는 사람의 크기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런데 역시 그곳에도 노팔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소림 장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저, 저건 전설로만 들어오던 어기비검술(馭氣飛劒術)인 것 같소이다!” 그는 연신 아미타불을 외치고 있었다. 중인들도 믿어지지 않는 듯 그저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담장 밖에 널브러져 있었다. 돌사자를 온몸으로 들이받아 가루로 만든 후에도 내부에 질타하던 기운이 남아 담장을 뚫고 날아간 것이었다. 담장에 큰 구멍을 만든 후에야 담장 밖에 떨어져 널브러진 것이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찌나 호되게 돌사자에 부딪치고 또 다시 담장에 부딪쳤는지 그의 모습은 과거보다 더욱 말이 아니었다. 만일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벌써 혼절해 있을 것이다. ‘이, 일어나야지…….’ 그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 했다. 애써 몸을 일으키려 땅을 짚는 순간 한 쌍의 작은 발이 보였다. 하여령이었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뭘 해? 어서 부축하지 않고.” 하여령의 부축을 받고 담장을 뛰어넘은 그는 막 그를 향해 신형을 날려오는 육 인의 인물을 보았다. 그는 얼른 하여령을 밀쳤다. 하여령은 갑작스럽게 밀리는 바람에 안색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나 노팔룡의 하는 양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노팔룡은 그녀의 부축을 뿌리친 후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비록 온몸은 돌가루와 먼지 투성이요, 옷자락에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그의 모습에는 당당한 영웅의 기상이 엿보이고 있었다. 비록 속으로는 온몸이 욱신거려 까무라칠 듯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2 대전 안. 8인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노팔룡의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범의 시연을 참관하고 다시 처음의 장소로 돌아간 것이었다. 호연광이 입을 떼었다. “노대협, 방금 시범 보이신 것이 바로 그 진우주…… 란 검법이오?” 노팔룡은 거드름을 피우고 않아 있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어찌 그 정도의 검법이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노팔룡은 아무렇게도 않게 말했다. “그저 처음에 취하는 예비 동작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중인들은 아찔해짐을 느꼈다. ‘세, 세상에! 어검지술이 고작 기수식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번에는 노팔룡이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정말이지 검법의 진수를 보이려면 이 장소에선 곤란하지요. 용이 놀 자리가 좁지 않습니까?” 이쯤 되면 점입가경이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아니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저 얼굴이 제각각 다양하게 변해 있을 뿐이었다. 노팔룡은 그들을 둘러 보더니 점잖게 말했다. “그나저나 저를 부르신 용건이 또 있습니까?” 중인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소림 장문인 료공선사가 입을 떼었다. “아미타불… 사실 대협을 모신 까닭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 료공선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이미 현 무림 정세는 들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한다면 중원무림이 열세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견해입니다. 금륜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지만 우리쪽에서는 불과 얼마전 부터 힘을 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 “그래서 이번 무림대회를 열었소이다. 다행히도 노대협같은 기인이 왕림해 주셔서 중원무림은 구원의 빛을 발견한 셈입니다. 부탁컨데 노대협께서 중원무림의 대표로 나서 주시는 것이 어떠신지?”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로 나서다니요?” “지금 숭산에 위치한 본사에서 십절서생(十絶書生)의 주도 하에 금륜맹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는 중이오. 그러니 노대협께서 그곳으로 가셔서 함께 중원무림을 위해 힘을 써 주시는 것이…….” 십절서생? 노팔룡은 더욱 더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고 료공선사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구료. 십절서생은 일승(一僧)이신 천광선사의 전인인 백선결(白仙缺) 대협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팔룡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가 바로 무림맹주란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니 두 분이 손을 잡고 무림을 위해 나서면 도탄에 빠진 무림을 금륜맹으로부터 구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노팔룡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내가 강호로 나온 이유가 협행을 하기 위한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 “그런 무명 잡배 하나 때문에 전 무림이 회동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 무명 잡배라니……?” 료공선사를 비롯하여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노팔룡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서슴없이 말했다. “금륜맹의 맹주라는 자가 일패의 전인이라면 차라리 나 혼자 가서 그 자를 훈계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이까?” 그 말에 중인들의 안색이 모두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정도가 지나쳐도 유분수지 노팔룡의 말은 광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일세 기인인 뇌진자의 제자라고 해도 장내에 있는 육 인 또한 불세출의 고인들이었다. 노팔룡의 말은 그들 전부까지 하나로 묶어 무시해 버리는 오만불손한 것이었다. 장내엔 갑자기 차갑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육 인의 고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내 무당 장문인 패엽도장이 나섰다. “무량수불… 그건 아직 대협께서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오. 그들의 세력은 워낙 커서 개인의 힘으로는 저지하기가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노팔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좋습니다. 정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 그… 십절…….” “십절서생 백선결 대협이오.” “아, 십절서생. 소림사라고 하셨소?” “무량수불…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출발하겠소이다.” 노팔룡은 말과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중인들은 그가 이렇게 빨리 서두를지 몰랐는지라 모두 뜨악한 표정이었다. 도무지 노팔룡이란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수두룩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지금 그들의 입장에서는 달고 쓰고를 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노팔룡의 괴팍한 행동이나 방자한 태도 따위를 문제 삼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노팔룡은 비룡방에 온 지 불과 이틀 만에 군웅대회의 대표자가 되어 다시 비룡방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마중하려는 고인들을 마다하고 급히 하여령과 함께 비룡방을 등졌다. 3 관도는 올 때와 달리 조용했다. 아직 무림인들이 대부분 군웅대회가 열리는 비룡방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육 인의 고인들에게 대표자의 위탁을 받긴 했지만 대회장의 비무대회는 계속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정예고수들을 한 명이라도 더 뽑기 위함이었다. 어쨌거나 소림사로 향하는 노팔룡에게는 이제 군웅대회 따위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관도를 가는 동안 그는 무엇이 신바람이 나는지 콧노래를 연신 흥얼거리고 있었다. 문득 뒤를 따르던 하여령이 입을 열었다. “아니, 당신은 왜 그렇게 허풍이 심해요?” “뭐가?” 노팔룡이 무슨 헛소리냐는 듯 돌아서며 물었다. “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당신 혼자서 삼만 명이나 되는 자들을 상대하겠다니, 당신이 뭐 무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노팔룡은 눈썹을 움찔했다. “삼만 명? 누가?” “금륜맹 말이에요. 그자들은 삼만이 넘는 조직을 가지고 있단 말예요.” 노팔룡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다는 소리가 더욱 가관이었다. “난 또. 한 삼백 명쯤 되는 줄 알았지.” “세상에, 기가 막혀서!” 하여령은 도무지 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팩 돌려 버린다. “그만둬요, 어서 걷기나 해요. 잘못하면 노숙하게 생겼어요.” 아닌게 아니라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관도는 대륙의 지평선으로 끝없이 뻗어 있었지만 눈 닿는 곳 어디를 보아도 인가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노팔룡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여령은 마지막 잔소리하기를 잊지 않았다. “대체 당신 머리엔 뭐가 들었길래 그 좋은 말과 마차를 마다 하고 굳이 먼지를 뒤집어 쓰며 걸어가려 해요? 소림이 뭐 앞동네 쯤 되는 줄 알아요?” 노팔룡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진짜 알 수 없는 것은 여령 너란 말이야. 이건 어찌된 게 날이 갈수록 말이 많아지니 말이야.’ 사실 노팔룡이 육 인의 고인들이 권하는 말과 마차를 모두 거절한 데에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그는 하여령과 단 둘이 가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말과 마차, 거기다 수행 무사들까지 대동한다면 그로서는 정말 재미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는 슬쩍 하여령을 훔쳐보았다. 하여령은 입술을 삐죽이며 쉴 새 없이 뭐라고 종알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무척 즐거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디차고 냉정했던 그녀의 모습이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팔룡은 그런 그녀와 단 둘만의 여행을 원했던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특별한 속셈이 있었다. 이제 그 속셈은 밤이 되면 밝혀질 것이다. 노팔룡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하여령은 노팔룡의 입가에 흘러나오는 그 응큼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설마 보았다 한들 그녀로서는 꿈에도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서서히 황혼이 지고 있었다. 홍색의 낙조가 차츰 회색으로 암울하게 바뀌며 어둠의 장막이 지평선으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자들에게는 고향이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노팔룡과 하여령. 이 기이한 동행자는 발길을 재촉하며 어둠이 깔린 관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4 숭산(崇山)은 오악(五嶽)의 으뜸이다. 숭산 소실봉에 위치한 사찰 소림사는 천하무림의 최고봉으로 무림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 웅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연중 수많은 향객(鄕客)과 무림인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당대의 소림사는 본원(本院)과 하원(下院)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본원은 선승과 무승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소림사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하원은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는데 그곳은 중원무림맹이 임시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흘러드는 한 채의 별각(別閣)이 있다. 이 별각은 하원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하원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림 본원까지도 시야에 들어오는 요지(要地) 중의 요지였다. "……." 한 명의 수려한 모습의 청년이 달빛을 감상하는 듯 창문가에 서 있었다. 청년의 온몸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일신에는 백색의 문사의(文士衣)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한 자루 옥선(玉扇)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키는 군계일학인 양 늘씬하게 컸고 몸매 또한 유려한 선을 지니고 있었다. 왠지 알 수 없는 기품과 함께 만인을 공깃돌 다루듯 하는 위포가 느껴지는 이십대 가량의 청년이었다. 청년 문사는 창가에 표표히 선 채 옥선을 가슴 앞에 대고 있었다. 그의 임풍옥수와 같은 자태는 그림 속의 신선도를 보는 듯 했고, 수정처럼 맑고도 형형한 눈빛은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지금 백삼 청년문사가 바라보는 것이 달빛인지 소림 하원인지, 아니면 소림 본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년 문사에게서는 깊이를 추측할 수 없는 신비감이 느껴져 감히 접근조차 힘들어 보였다. 뒤에서 한 가닥 음성이 들렸다. “맹주님. 비룡방으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청년 문사는 여전히 달빛을 바라보면서 차분한 음성으로 답한다. “누가 대표로 선발되었느냐?” “저어, 그것이…….” 우물쭈물한 말투에 청년문사는 빙글 돌아섰다.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이미 정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반안이나 송옥이 울다가 돌아가 버릴 만큼의 준수한 용모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별각 바닥에는 흑색 무복의 사나이가 부복하고 있었다. “저, 이것을…….” 사나이는 한 통의 봉서를 두 손으로 바쳤다. 청년문사는 묵묵히 밀봉된 서신을 뜯어 읽기 시작했다. 읽어가는 동안 그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상당한 심적 동요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동요는 진정되었고,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나이는 그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처럼 좋은 달밤이라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는데 그것마저 잘 되지 않는구나. 어지러운 세상사가 내 평온을 허락치 않는군.” 중얼거림을 남긴 청년문사는 어느새 우측으로 난 월동형의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흑색 무복의 사나이는 대례를 올리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백삼 청년 문사야 말로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월동문 안쪽은 한 칸의 정갈한 서실로 꾸며져 있었다. 창문을 제외한 사방 벽면에는 고서와 서화가 가득 차 있었다. 언뜻 보아도 학문일도에 매진하는 문사의 서재로 보이는 곳이었다. 서실 탁자 위에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팔뚝만한 황촉이 켜져 있었는데 방금 흑색 무복 사나이가 건네준 서신이 놓여 있었다. 전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군웅대회의 대표자로 뇌진자의 전인 노팔룡(魯八龍) 대협이 선출. 며칠 내로 소림 하원에 도착할 예정.>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뇌진자의 전인이란 말은 정녕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고요하다 못해 부동의 정심(定心)을 지니고 있는 청년 문사를 충분히 동요케할 만한 사건이었다. 청년문사의 입에서는 신음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노팔룡이라.” 이때 밖에서 한 가닥 차디찬 음성이 울려왔다. “맹주님, 취몽(翠夢), 부르심 받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청년 문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무척이나 예리한 눈매에 일신에는 흑삼을 입었으며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인상의 사나이가 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역시 깍듯한 예의였다. 청년문사는 탁자 위의 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 “예.” 취몽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고 억양이 없었다.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음성이었다. “이 자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해라. 어느 한 구석 소홀함이 없도록. 알겠느냐?” “예.” 취몽은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가 막 등을 돌리는 순간 청년 문사는 문득 흘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하(雲瑕)는?” 취몽은 흠짓하는 듯하더니 역시 똑같은 음성으로 답한다. “여전하십니다.” “알았다.” 취몽은 사라지자 청년문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걸어갔다. 이 서실의 창문은 언제나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청년 문사는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으로는 암천(暗天)이 보이고 있었다. 달빛은 여전히 휘황하기만 하여 숭산의 모든 것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청년은 달빛에 비치는 전경을 바라보며 홀연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하가 좁아 걱정하였더니 한낱 기우에 불과했던가……?” 이 무슨 뜻인가? 그만큼 스스로에 대하여 자존(自尊)하고 있었단 말인가? 제13장 운명의 두 여인 1 용문객점(龍門客店). 숭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한 객점으로 상당히 고급스런 설비를 갖춘 곳이다. 이곳은 소림사를 방문하는 내방객들이 자주 묵는 곳이라 언제나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객점의 안쪽 별채에 일남일녀가 묵고 있었다. 노팔룡과 하여령이었다. 노팔룡의 얼굴은 왠지 잔뜩 부어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엇인가 불만이 가득찬 표정이었고 끊임없이 뭐라고 투덜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심통이 난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편 하여령은 표정이 없는 얼굴로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노팔룡이 심술이 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비룡방을 떠난 지 벌써 이십여 일, 그런대로 처음 며칠 간은 그가 의도한 대로 각별한 재미(?)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는 밤마다 하여령의 나긋나긋한 가슴을 만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사가 시작이 힘들 뿐 일단 길이 닦인 후면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법이다. 하여령은 비룡방에서의 일 이후로 그다지 까다롭지 않게 굴고 있었다. 그러니 노팔룡은 희희낙낙하며 밤마다 재미를 만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태도가 돌변해 버린 것이다. 그가 일체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노팔룡이 잔뜩 심통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밤엔 반드시…….’ 노팔룡은 이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가에 서 있는 하여령을 바라보았다. 비록 서동의 복장으로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몸매는 역시 미려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녀의 구석구석 샅샅이 알고 있는 노팔룡으로서야 뒷모습만 보아도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목청을 가다듬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저어. 여령.” 하여령은 힐끗 그를 돌아다 보았다. ‘됐다. 일 단계는 성공이고.’ 그는 더욱 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여어어령, 어서 자자구.” 하여령은 조용히 몸을 돌려 다가왔다. 노팔룡의 입이 큼지막하게 찢어졌다. ‘우후후… 이 단계 성공.’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줄 알았던 하여령이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노팔룡은 퉁기듯이 발딱 일어나며 하여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이 밤에 어딜 가려고?” 하여령은 그를 슬쩍 피하며 말했다. “바람 좀 쐬고 오겠어요.” “으응? 그, 그럼 같이 가.” 그러나 하여령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팔룡형은 목욕이나 하고 있어요.” 노팔룡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럼 같이 해.” ‘아차!’ 말을 해놓고도 그는 크게 후회했다. 하여령은 반응은 뻔한 것이었다. 자칫 따귀를 맞거나 아니면 더욱 더 냉담해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하여령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좋아요. 하지만 먼저 하고 있어요. 곧 돌아올 테니.” 하여령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사라졌다. “…….” 노팔룡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그의 입이 쭉 째지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하여령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휙! 그는 번개같이 욕탕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신바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 관제묘(關帝廟). 그곳은 용문객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휙! 한 명의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날아내렸다. 그는 서슴없이 관제묘 안으로 들어가더니 바닥에 부복했다. “환영삼호. 보고합니다.” 관제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왠지 귀기가 느껴지는 분위기의 묘 안에 홀로 부복한 흑의인은 부복한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득 관우신상(關羽神像) 뒤쪽으로부터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는 바로 소림 하원 별각에서 청년문사 앞에 모습을 보인 바 있던 취몽이란 자였다. 취몽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보고하라.” 환영삼호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현재 그들은 별다른 동정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워낙 주의를 세심하게 하여 탐지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상태를 종합해 볼 때 두 사람은 추측할 수 없이 깊은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환영 삼호는 숨도 쉬지 않고 보고했다. “바보같은 놈!” “예?” 환영삼호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취몽의 음성에서 질타의 기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행당했잖아!” 동시였다. 말이 떨어진 것과 취몽의 장력이 문짝을 항해 날아간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꽝! 무시무시한 암경(暗勁)에 문짝이 박살나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순식간에 자욱한 먼지가 묘 안을 가득 뒤덮었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자 취몽과 환영삼호는 한 명의 인물이 관제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언제!’ 환영삼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귀기막측한 신법이라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타난 괴인영은 취몽과 대치하고 있었다. 먼지가 절반쯤 가라앉자 형상이 드러났는데 뜻밖에도 일개 서동 차림을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었다. 바로 하여령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최근 며칠간 자신들을 미행하는 자가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노팔룡에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마침 용문객점에서 미행자가 어딘가로 떠나는 걸 보고 은밀히 따라온 것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그 동안 우리를 감시한 자가 당신이겠지?” 취몽은 무척 놀라고 있었다. ‘훅, 엄청난 기도다.’ 그는 무형중에 풍겨나오는 하여령의 기도에 절로 몸이 긴장되고 있었다. 단지 기도 하나만으로 비룡방 비무대회에서 칠룡 중의 한명을 내상케했던 하여령이었다. 하여령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각오는 되어 있겠지?” 그 말에 취몽은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몸을 뻣뻣이 세웠다. 그는 애써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마침 잘 오셨소. 그대에 대해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던 참에 말이오.” 하여령은 말없이 등에 차고 있던 검을 풀었다. “미리 알 필요 없다. 저승에 가면 자연히 알게 될 터이니 말이다.” “……!” 취몽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맹세코 이렇게 두려움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을 대한 순간부터 줄곧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이를 악물고 손을 들었다. 스스슷…… 문득 어디선가 육 인의 인영이 묘 안에 나타났다. 그들은 천장에서, 벽 속에서, 그리고 바닥을 뚫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소리 한 점 없었고, 먼지 하나 일지 않았다.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환영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나타난 위치는 자연스럽게 하여령을 포위한 지세였다. 그들은 미리 관제묘에 매복하고 있던 취몽의 수하들이었다. 일단 숫적으로 우세하게 되자 취몽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하여령의 입가에는 여전히 살기가 어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등에서 풀어낸 검을 안듯이 가슴에 품으며 자세를 취했다. “자, 잠깐!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우리는 피차 적이 아니오.” 하여령의 입에서 냉갈이 터졌다. “적이 아니고 말고는 내가 정할 일이다.” 번쩍! 푸른 검광이 일어났다고 생각되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아주 찰나적으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악!” “끄악!” “큭…….” 여러 마디의 비명이 차례로 이어졌다. 아니, 그 비명은 거의 동시에 울린 것이었다. 취몽은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분명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 것이라고는 그저 푸른 섬광이 몇 가닥 일어났다는 것뿐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하여령을 둘러싸고 있던 육 인의 수하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언제 검을 뽑고…… 아니, 분명 하여령의 검은 애초에 뽑지도 않은 듯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언제 육 인을 베었는지 취몽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으으…….” 그는 진땀을 흘려며 뒷걸음질쳤다. "가긴 어디로 가느냐? 하나는 남겨두고 가야 한다." 하여령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진 순간 그는 왼팔이 화끈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 역시 눈 앞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하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으아악!” 그는 자신의 왼팔이 어깨로부터 깨끗이 절단되어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구슬프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하여령은 여전히 처음의 그 자리에 있었다. 검도 검집째 그녀의 팔짱 사이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열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십절이 보낸 모양인데 가서 전해라. 우리가 직접 찾기 전에 미리 알려 들지 말라고.” 스스슥……! 취몽은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상대방이 사라진 것이다. 이번 역시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마치 유령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왼쪽 어깨에서 타는 듯이 전해지는 통증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럴 수… 가?” 3 수증기가 무럭무럭 나는 욕실. 노팔룡은 터져 나오려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대고 있었다. 벌써 반 시진째 하여령의 말만 믿고 번개처럼 욕실로 뛰어 들어와 그녀가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여령마저 날 속일줄이야…” 노팔룡은 투덜대며 욕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욕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노팔룡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다음 순간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야아!” 욕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하여령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미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이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노팔룡은 퉁겨나듯 일어나더니 다짜고짜로 하여령을 덥썩 끌어안았다. 그는 하여령의 입술에 수없이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하하! 역시, 여령이야! 고마와, 여어령.” 하여령은 생긋 미소지을 뿐, 이번에는 앙탈을 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동안 주위를 맴돌던 감시자를 깨끗이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팔룡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자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는 안정감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살며시 감았다. 노팔룡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이런 기회야말로 천금같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듯 아무 말 없이 번쩍 그녀를 안아들더니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물통 속으로 들어갔다. “가만 있어, 여령. 내가 씻어 줄 테니.” 노팔룡은 정말이지 신바람이 났다. 하여령과 단 둘이, 그것도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고 생각하니 이만저만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지 않느냐 말이다. 4 소림 하원에 위치한 별각은 침통한 분위기였다. 별각의 대전에는 육 구의 시체가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그 앞에는 한쪽 팔이 절단된 사나이 취몽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의자에는 청년문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곳 별각의 주인이었다. 아니, 중원무림맹의 맹주란 신분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십절서생 백선결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백선결은 눈을 감고 있었다. 천 근 같은 중압감이 장내를 짓눌렀다. 취몽은 감히 입을 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만 조용히 하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백선결의 입술이 열리며 한 가닥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취몽.” “예…….” 취몽은 대답해 놓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백선결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이번 일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상대가 생각보다 더 강했을 뿐이다. 그러니 상심 말고 돌아가 치료하도록 해라.” “예…….” 취몽은 감격에 겨워 떨리는 음성을 발하며 몇 번이나 대례를 올렸다. 그가 물러가자 백선결은 침중한 음성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취몽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취몽은 그가 관장하는 조직에서도 삼십 위(三十位) 안에 드는 고수로 중원무림맹의 가장 중요한 비밀조직의 일원이다. 비밀조직은 적의 동향을 파악하거나 탐지해내고, 필요에 따라 밀정을 보내는 일을 맡는 부서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형편없이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문득 백선결은 고개를 들었다. “검옥상(劒玉霜), 있느냐?” “예.” 한가닥 차분한 음성이 들리더니 곧이어 이십 세 가량의 미청년이 나타나 무릎을 꿇는다. 시체들의 상흔을 화폭에 담아라. 알겠습니다. 검옥상이란 청년은 즉시 품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그는 육 구의 시체를 자세히 조사했다. 먼저 옷을 전부 벗겨낸 다음 전신에 난 칼자국들을 면밀히 표시하고 그 위치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그려냈다. 여섯장의 화폭이 완성되어 갔다. 죽은 시체의 몸에 난 상흔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그림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백선결의 머리에는 한 여인의 모습 떠오르고 있었다. 5 모옥(茅屋). 주변 환경이 무척이나 단아한 가운데 싸리 울타리를 끼고 있는 모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윽한 향취를 느끼게 한다. 이곳은 소림 하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죽림을 사이에 두고 있어 무척이나 고요하고 한가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싸리 울타리 안에는 다만 두 채의 모옥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중 한 채의 모옥에서 차(茶)를 끓이는 향기가 은은히 번져나오고 있었다. 남해산(南海産)의 만리향(萬里香)이란 명품차였다. 기이한 것은 모옥의 방안 바닥에 몇 마리의 다람쥐가 놀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또 있었다. 이름 모를 산새 몇 마리도 다람쥐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방안에 짐승이 놀다니…….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마리의 산새가 한 여인의 치마 위에 앉아 부리를 부비며 정답게 놀고 있는 광경이었다. 여인.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피부는 희다 못해 투명할 정도였으며, 얼굴의 오관은 너무나 그윽하여 도무지 인세의 여자같은 느낌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나이는 이십 세가 채 못되어 보이나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고아한 품격으로 인해 그보다 약간 더 들어 보이기도 했다. 여인은 수(繡)를 놓고 있었다. 이따금 수를 놓다 말고 산새의 깃털을 쓰다듬어 주곤 한다. 섬섬옥수가 수 땀을 멈추고 새를 쓰다듬어 주면 새는 고개를 깃에 파묻고 여인의 치마폭에 부리를 문지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새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은 포근했다. 아니 신비할 만큼 깊었다. 그 눈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잠이 들 것만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 마리의 산새는 치마폭에서 꼬박거리기까지 한다. 그때였다. 평화(平和)가 깨어지고 있었다. 포르르르릉! 산새가 무엇에 놀란 듯이 창 밖으로 달아나고 바닥에 놀던 다람쥐들도 후다닥 어딘가로 숨어들어가 버린 것이다. 여인은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마치 이런 평화를 깨뜨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딸각하고 문이 열렸다. 동시에 방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여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너무나 그윽하여 꿈결같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선결. 당신은 여전히 사나운 기(氣)를 감추지 못하고 계시는 군요.” 들어선 자는 십절서생 백선결이었다. 그는 흠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여인의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 그의 표정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이 여인 앞에만 서면 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여인이 조용히 묻는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요?” 백선결은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운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소.” 그 말에 여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이. 그러나 여인의 아미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백선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선결은 그녀의 눈빛에 감전이라도 된 양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쉬더니 품 속에서 한 장의 그림을 꺼내 내밀었다. 벌거벗은 사람을 그린 육 장의 그림이었는데 그것은 얼마 전 검옥상이 시신의 상흔을 옮겨 그린 것이었다. 여인은 대충 그림을 훑어보고 곧 돌려주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옥음이 흘러나왔다. “중원을 통 털어 이런 수법을 쓰는 곳은 오직 한 곳 검각(劒閣) 뿐이에요. 그리고 상흔으로 미루어 보아 검각주 정도의 수준으로 펼친 상흔이에요.” “……!” 백선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안색은 급변하고 있었다. 이때 여인의 왠지 자신없어하는 듯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백선결은 긴장을 느끼며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인은 낮게 이야기했다. “그런 상흔을 낼 만한 인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가…….” 백선결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곤두선다. “그가 누구요?” “무정랑자 일점홍.” “일점홍!” 백선결은 음! 하고 신음을 흘리면 뇌까렸다. 문득 여인의 입에서 한가닥 권태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전 몹시 피곤해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세요.” 백선결은 입술을 씰룩였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끝내 말하지 못하고 가벼운 한숨을 쉬며 일어서고 있었다. “운하.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소.” 그러나 여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할 말을 끝내고 다시 수를 놓기 시작한 것이다. 수 땀을 놓는 그녀의 창백하고 가는 손가락은 왠지 슬퍼 보였다. 백선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밤이다. 뚝뚝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황촉 아래 백선결이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여인을 만나고 온 날이면 반드시 혼자서 술을 마신다. 그것은 벌써 오랫동안 이어진 습관이었다. 백선결. 그는 본시 강한 인간이었다. 또한 그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며 그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인을 만나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지상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을뿐더러 그런 기분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는 홀로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이란 기이한 요물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런 기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이나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그는 술잔을 바라본다. 한데 술잔 속에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얼굴은 바로 방금 전 만나고 온 여인이었다. 쨍그랑! 그는 냅다 술잔을 집어던졌다. “도운하(陶雲瑕)! 네가 무엇이길래 나를 이토록 무기력하게 만드느냐?” 그야말로 돌발적인 발작이었다. 그러나 백선결은 역시 백선결이었다. 그는 당금 무림의 젊은 무림맹주이며 일승의 유일한 전인이었다. 천하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백선결은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마음을 가라둸히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서서히 아주 오래 전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인과 처음 만나던 날이었다. 당시 그는 아주 어렸었고 여인은 그보다 더 어린 소녀였다. 그때 소녀가 자신에게 말하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안녕? 나는 도운하야. 앞으로 오빠의 동생이 될 거야! 백선결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왠지 그의 전신에서는 깊은 고독감이 어둠처럼 고이고 있었다. 천하무림의 운명을 짊어진 인간, 그런 그에게 한 명의 여인이 이토록 고독감을 안겨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촛불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소림 하원의 밤은 촛불과 함께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제14장 알 수 없는 사나이 1 새벽 바람이 제법 차갑게 불기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서리가 내리고 옷깃을 여미게 되면 어느새 겨울이 오게 되는 것이 자연의 끝없는 순환이라 했던가. 이곳은 중원무림의 태산북두로 천년 무림의 발원지로 일컬어지는 숭산(嵩山) 소실봉에 위치한 소림사. 사미승은 졸린 눈을 부비며 산문 밖을 쓸고 있다. 언제나 이 일은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그도 언젠가는 명망 높은 소림사의 승려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공양을 하는 것이다. 사미승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산문 앞 넓은 광장을 반쯤 쓸었을까? 허리를 톡톡 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사미승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른 새벽부터 웬 시주들이? 저만치 산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두 개의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미승은 눈썹을 모으며 그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새벽같이 부처님께 공양드리러 오는 내방객은 흔치가 않은 것이다. 처음엔 검고 흰 두 개의 인영이었는데 가까이 다가오자 두 사람 모두 이십 미만의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미승을 비를 세우며 물었다. “아미타불…… 어인 일로 이리 일찍 본사를 찾으셨습니까?” 제법 점잖게 불호까지 외웠다. 평소에 손님을 맞이하는 지객스님이 하는 양을 잘 봐두었기 때문에 말투까지 그대로 흉내낸 것이었다. 그러나 사미승은 펄쩍 뛸 만큼 놀라고 말았다. 흰 옷 입은 청년이 한 말 때문이었다. “가서 백선결에게 전하게.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 노팔룡이 뵙기를 청한다고.” “옛?” 사미승은 눈을 크게 떴다. 백선결이 누구인가? 당금 중원무림맹의 맹주로서 그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부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오만방자한 내방객의 명호였다. ‘진우주 천상천하… 또 뭐라고…? 맙소사, 나무관세음보살!’ 2 인간은 여러 종류가 있다. 생긴 모양이 각양각색이듯이 그 성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어떤 인간은 깨끗하고 검박한 것을 좋아하며, 또 어떤 류의 인간은 그와는 반대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한다. 여기……. 운명인 듯이 지상에서 무엇이든 최고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나이가 있다. 그가 기거하는 거실(居室)만 하여도 그렇다. 물경 백 평이 넘어보이는 거실이 온통 사치스럽고 값비싼 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의자 하나만 살펴 보도록 하자. 지금 이곳에 놓여있는 의자의 값어치가 일개 성(城)을 살 정도라면 믿겠는가? 믿어야 한다. 의자의 등받이와 팔걸이는 순금으로 주조되어 있었고 현란한 조각 장식 속에는 각종의 보석과 야명주들이 박혀 있었다. 등받이의 좌우로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문채 하늘로 비상하는 듯한 조각이 되어 있었고 그 크기도 황제가 앉는 태사의를 능가할 정도였다. 지금 이 의자 위에는 삼십도 채 되어 보이지 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영준한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은 먹으로 그은 듯 했고 부리부리한 눈매에서는 오만한 기운과 패도적인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청년은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일국의 황제 못지않은 위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 금포 청년은 방금 도착한 전서를 읽고 있었다. 정지된 듯한 동작으로 전서를 읽어 내려가는 사나이의 눈엔 약간의 호기심과 의혹이 떠올랐다. 이윽고 전서를 다 읽은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빈 있느냐?” 스으으……! 마치 바람처럼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그의 발밑에 부복한다. 마치 이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유령같은 신법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금포 청년은 칙칙한 시선으로 한빈을 내려다 보았다. 잠시 한빈을 바라보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전서를 떨어 뜨렸다. “앞으로 이 자에 관한 사항은 네가 직접 처리하라. 단,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것뿐이었다. 금포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한빈은 두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전서를 집었다. 잠시 후 그는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곳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이름하여 금륜맹(金輪盟)이라 불리우는 곳이었다. 3 “누군지는 몰라도 무척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친구로군.” 그것은 별각으로 들어서면서 노팔룡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는 소림 하원으로 안내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별각의 대청은 깨끗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단조롭게 꾸며져 있었다. 대전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의 탁자와 소박한 양식의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고아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한편 하여령은 가슴이 섬뜩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왠지 무형의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곳의 주인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같은 것이었다. ‘생각보다는 뛰어난 인물이군!’ 그녀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이런 취향을 가진 인물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그녀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만난 인물들 또한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한 인물들을 부리는 자가 보통사람일 리는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은 대전의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어린 서동이 차를 받쳐들고 나타났는데 서동의 행동도 절제가 되어 있고 반듯했다. 차 역시 뜻밖이었다. 그것은 맑은 산수(山水)로 끓인 용정차로써 역시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이제 잠시 후면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기다림은 오래 지속되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난후 한참을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짜증이 나고 더 이상 못 견디게 되었을 때였다. “뭐, 이런 작자가 다 있어!” 성질 급한 하여령이 막 발작을 할 순간이었다. 대전 안쪽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여령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에게 조바심을 느끼게 한 후 뒤늦게 나타난 사람, 그는 아무런 장식도 치장도 없는 하얀 백색 문사의에 수중에는 다만 지선(紙扇) 한 자루만을 쥐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듯, 어쩌면 더 들어 보이기도 했다. 얼굴은 한점의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깨끗했다. 그야말로 수려한 인상이었다. 상대의 모습을 훑어보던 하여령은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더욱 더 충격을 받았다. 지순한 눈빛! 아니 아무런 느낌도 담겨져 있지 않은 완전히 투명한 눈이었다. 맹세코 그녀는 이런 눈은 처음이었다. ‘싫어. 저런 눈은 정말 싫어!’ 뜻밖에도 그녀가 느낀 것은 그런 감정이었다. 그녀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듯한 상대방의 투명한 눈에 질식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매우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녀 자신이 바로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고 오욕칠정마저 거부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변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진솔한 인간형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노팔룡을 만난 직후의 일이었다. 인성이 마멸된 듯한 완벽무결한 인간, 이것이 바로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백의문사의 모습이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온 백의문사, 즉 백선결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두 손을 모아 포권하며 말했다. “먼 길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하여령은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서 음성이 들렸다. “원 별말씀을.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이렇게 말을 한 것은 노팔룡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정중하고 무게있게 말한 것이다. 순간 백선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노팔룡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에 놀란 것이다. 백선결은 자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위인이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대면하는 자를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을 더듬거나 위축감을 보여온 것이다. 그런데 눈 앞의 상대는 너무나 담담했다. 그로 인해 도리어 자신이 객이고 상대방이 주인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대청 안으로 들어서면서 백선결은 당혹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여령과 노팔룡 중 누가 주인이고 누가 서동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 중 누가 뇌진자의 전인인가? 처음 그는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노팔룡이 서동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방 얻어맞은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노팔룡을 직시했다. 보통 그의 눈빛을 받은 자는 먼저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한데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먼저 눈을 돌려 버린 것은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기분이 씁쓸해졌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당혹감이 지금 그의 가슴을 무척이나 산란케 하고 있었다. “고맙소이다. 그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상대는 한 술 더 뜨는 것이 아닌가? “백형, 백형의 사부이신 천광선사께서는 안녕하신지요?” 그야말로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다. 백선결은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답하고 있었다. “선사께선… 오래전에 타계하셨소이다.” 노팔룡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쯧쯧… 무림의 큰 별이 지셨구려. 내 미리 알았더라면 문상이라도 오는 건데…….” 백선결은 흐려진 표정으로 마지못해 입술을 떼고 있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찌 그런 노고를…….” 하나 상대방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천광선사께서 선경에 드셨다니 앞으로 무림의 일이 걱정이구려. 허어, 참.” 노팔룡은 천하의 안녕을 근심하는 대인의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백선결은 한 번 잡힌 기선을 좀체로 되찾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예, 그러나 다행히 이렇게 노대협께서 강호에 출두하셨으니 불행중 다행이지요.” “원 별말씀을, 어찌 저 혼자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앞으로 백형이 저를 도와 주셔야지요.” “예, 미력한 힘이나마 돕겠습니다.” 그러자 노팔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실 먼 길을 오느라 몹시 피곤하구려. 그러니 잠시 쉬었다 나중에 얘기하는 것이 좋겠구려.” 백선결은 얼떨결에 함께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당해도 이렇게 철저히 당할 줄은 몰랐다. 그는 이제까지 계속 질질 끌려다니고만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열세에 몰린 것을 만회해 보려고 했으나 상대가 도무지 기회를 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멍청히 일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느닷없이 노팔룡이 대청 밖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흡사 주인이 하인을 부르는 듯한 태도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자가 급히 뛰어들어왔다. 동자 역시 엉겁결에 뛰어들어왔으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백선결과 함께 있던 손님이 자신을 부른 적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부, 부르셨는지요?” 그가 더듬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눈알을 굴려 백선결의 눈치를 살폈다. “음, 몹시 피곤하니 어서 숙소로 안내해다오.” “……?” 동자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님이 숙소를 요구하는 것도 처음이려니와 곁에 서 있는 백선결이 아무 지시도 해 주지 않는 바람에 그만 낭패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는 노팔룡과 백선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노팔룡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엇하고 있느냐? 생긴 것은 또랑또랑하게 생긴 것이 인물값을 못 하느냐?” 동자는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백선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노팔룡은 멍하니 서 있는 백선결을 바라보며 포권했다. “그럼 이만.” 백선결은 얼떨결에 마주 포권할 도리밖에 없었다. “예… 노대협.” 노팔룡은 하여령을 바라보며 팔을 흔들었다. “가자.” 하여령도 반쯤은 얼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 저만치 앞서서 밖으로 나가는 노팔룡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밖으로 사라지자 백선결의 표정은 일시에 이그러지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허탈한 기운이 잔뜩 어려 있었다. 한동안 그는 떫은 감 씹은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느닷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으하핫… 핫핫핫… 핫핫핫……!”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이 그리 우습단 말인가. 그의 웃음은 일 각여나 계속되고 있었다. 문득 웃음을 그친 그는 냉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군.” 한편 동자가 안내한 곳은 별각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정사로 깨끗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본래 백선결은 성격이 담백한 편이 아니라 일종의 결벽증이 있는 위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처소에 다른 사람이 머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 정사도 손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이따금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강적(?)을 만나 그곳을 제공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방안을 둘러본 노팔룡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좀 초라하지만 그런대로 참고 견딜 만하군.” 그러자 그를 안내한 동자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옮겨 드릴까요?” 그는 백선결이 쩔쩔매는 것으로 미루어 노팔룡을 대단한 위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평소 완벽주의자인 백선결이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했겠는가 말이다. 노팔룡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괜찮다. 어차피 거기가 거기일 텐데 그냥 여기 있겠다.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동자는 쩔쩔매며 대례를 올린 후 물러갔다. 그가 물러간 직후, “호호호… 홋홋홋홋……!” 문득 하여령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노팔룡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어리둥절했다. “아니? 왜 웃어?” “호호… 홋홋홋… 아이구, 우스워…….” 하여령은 눈물까지 질금거리며 한참을 웃은 다음에야 간신히 웃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리고 노팔룡을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 정말 호호호… 대단해요!” “뭐가?” 노팔룡은 도대체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호호호! 정말 세상이 놀랄 일이야. 백선결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다니?” 노팔룡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애를 어린애 다루듯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뭘 그걸 갖고 그래.” 그러나 하여령은 쏟아지는 폭소를 금치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 “세상에! 백선결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천하에서 당신뿐일거예요.” 노팔룡은 도리어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 보라구. 그의 사부 천광은 나의 사부님에 대해 반 배분 이상 아래야. 그러니 자연 그도 나에 비해 조카뻘밖에 더 되겠어?” 그 말에 하여령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그 놈이 귀엽더라구.” 노팔룡의 마지막 말에 하여령은 어이가 없었다. “귀, 귀여워요?” “음, 남자같기도 하고 여자같기도 한 놈이 귀엽잖아?” “세, 세상에.” 하여령은 기절을 할 정도였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을 복잡하게 하면 할 수록 더욱 더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었다. 그녀 자신에게는 질식할 것만 같이 압도해 왔던 백선결이 아닌가? 헌데 그런 그가 어떻게 노팔룡에게만은 귀엽게 비쳐진단 말인가?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노팔룡은 등을 벅벅 긁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봐, 여령. 며칠 목욕을 안 했더니 다시 몸이 근질근질해. 그러니 오늘밤 등 좀 밀어 달라구.” “뭐예요?” 하여령은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밉지 않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실상 일부러 등을 긁어대는 그의 흉심을 알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나고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노팔룡은 동경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불편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여령, 어쩐지 어색한데.” 동경 속에는 화의(華衣)를 입고 유생건을 단정히 맨 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백선결이 인편으로 보내준 옷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령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생긋이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사실 옷맵시가 다소 어색해 보여도 노팔룡의 원래 용모는 빼어나지는 않다 해도 그런대로 수준작은 되었다. 그런 그가 유삼을 입으니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노팔룡은 팔을 이리저리 들어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래? 여령이 괜찮다면 그냥 입지 뭐.” 하여령은 가만히 웃었다. 노팔룡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여령은 왜 옷을 갈아입지 않지?” “난 이 옷이 좋아요.” 노팔룡은 하여령의 아래 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아무래도 그 칙칙한 흑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하여령은 고개를 돌려 대답을 회피해 버렸다. 그때 노팔룡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그래요?” 노팔룡의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목각인형도 쌍이 어울려야 그럴듯하게 보이는 법이야. 한 인형은 때때옷을 입고 한 인형은 걸레쪽을 걸치면 둘 다 바보 돼.” “……!” 하여령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녀는 왠지 노팔룡과 함께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 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노팔룡이 한 말도 언뜻 유치한 듯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즘 들어 기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느낌, 바로 자신이 여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노팔룡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 이제 가자구. 백선결인가 뭔가 하는 아이가 몹시 기다릴 테니 말이야.” 4 탁자 위에는 몇 가지 소찬이 놓여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백선결과 노팔룡이었다. 노팔룡의 뒤에는 서동 신분이란 이유로 하여령이 앉지도 못하고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불만도 엿보이지 않았다. 백선결은 젓가락만 만지작거리는 노팔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대협,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려.” 노팔룡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인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또한 걸작이었다. “그렇소이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어디…….” “분위기라니요?” 백선결은 흠칫했다. ‘이 자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닌게 아니라 그는 한 번 당한 이후로 노팔룡에 대하여 크게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노팔룡은 계속 인상을 쓰며 이야기했다. “이거야 어디 썰렁해서 밥맛이 나야지. 모름지기 식사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해야하는 것 아니오." 백선결은 어이가 없었다. “하하하! 노대협, 여긴 소림이요. 설마 절간에 여자를 들여놓자는 이야긴 아니겠지요?”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 그럼 중은 여자를 상대하지 않는단 말이오?” 백선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노팔룡은 입맛을 다셨다. “허어, 그것 참 이상도 하군. 그 재미있는 놀이를 안 하고 사는 인간이 있다니.” “……?” 노팔룡은 크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이곳에 있는 한 여자는 코빼기도 볼 수 없단 말이오? 허허, 거참. 난 여기 오는 동안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호대협이 이곳에 오면 극진한 대접을 한다고 해서 믿었는데…….” 백선결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의미를 깨닫고는 표정이 이그러지고 말았다. 도무지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이 이런가.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이 따위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그는 성질을 내려고 노팔룡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노팔룡은 또 무엇을 생각해 내었는지 눈빛을 유난히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백형,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소이다.” “……?” “백형과 내가 밖으로 나가면 될 것이 아니오?” 노팔룡은 그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자, 말이 나온 김에 당장 시행합시다. 사실 난 여자를 무척 가지고 놀고 싶은데 보다시피 인물이 이 꼴이라서 말이오.” 노팔룡은 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계속 말하고 있었다. 여자란 동물은 참 이상한 동물이라 잘생긴 남자만 좋아 한다는구료. 그런데 백형이 여자 뺨치게 생겼으니 이런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소? 원님 덕에 나팔분다고 나도 이번 기회에 백형 덕 좀 봅시다. 노팔룡은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이미 걸어나가고 있었다. 백선결은 아직도 탁자 앞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그의 인상이 무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은 이만저만 상한 것이 아니었다. 여자 뺨치게 생겼다느니 하는 말을 중원무림맹의 맹주인 자신에게 감히 어느 누가 하겠는가?너무나 기가 막힌 나머니 그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상대는 아예 미친 놈이거나 아니면 간덩어리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놈은…….) 그는 이를 갈고 있었다. 생각 같으면 당장에 요절을 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절대로 계산이 떨어지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주의였다. 그가 뇌진자의 제자라면 결코 일을 감정대로 처리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아직 그는 상대방에 대해 확실한 대책을 세워두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좀 더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밖에서 노팔룡의 재촉하는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백형, 뭐하고 있는 거요? 빨리 나오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던 백선결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인상은 누가 보아도 소태를 씹은 꼴이었다. 5 숭산 아래에는 변변한 기루(妓樓)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천하무림의 태산북두요 선종 불문의 요람인 소림사 인근에 탁세의 온상인 기루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백선결은 꽤 애를 먹어야 했다. 숭산에서 수십여 리 떨어진 곳으로 노팔룡을 안내해야 했던 것이다. 팔자에도 없는 뚜쟁이 노릇을 하는 건 그의 일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고, 또 참는다. 아직까지는 상대방의 면모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취몽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더욱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한 것이다. 밤이다. 기루다. “아이… 흐응…….” “호호홍… 어디를 만져요… 흐응…….” 기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그야말로 기이한 것이다. 방안에는 주안상이 그럴듯하게 차려져 있고 남자라고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남자는 노팔룡과 백선결 이 인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이곳 월향각(月香閣)이라는 기루의 일급기녀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지분을 짙게 바른 노류장화들이었다. 비록 일류미녀는 아니었어도 인근에서는 꽤나 비싸게 팔리는 기녀들이었다. 처음, 이곳에 그녀들이 불려왔을 때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되는 기녀들은 모두 백선결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백선결은 끝내 몸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시종일관 차가운 자세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하여 노팔룡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히히덕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기녀들의 가슴 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유방을 만지기도 하고, 또는 치마 속으로 들어간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기녀들은 이제 아예 그의 주위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한 기녀는 그의 무릎에 올라와 있었다. 거기다가 치마 속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좌우에도 두 명의 기녀들이 기대어 앉아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노팔룡의 손이 쉴 새 없이 그녀들의 가슴 속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이었다. “…….” 백선결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기녀들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신음을 내고 아양을 떨고 있었다. 그것은 백선결의 고결함을 비웃는 듯이 보였다. 노팔룡은 이것저것 가리는 위인이 애당초부터 아니었다. 그는 음식과 술을 먹는 것은 딴전이요, 기녀들의 몸을 만지는 것에 빠져 있었다. “호호… 앗! 그만… 어디를 만져요? 아이.” 무릎에 앉아있던 기녀가 교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마침 눈을 뜨던 백선결의 눈에 치마말기가 걷어 올라가 눈부시게 뽀얀 허벅지가 드러난 계집이 비쳤다. “음.” 그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눈살이 무섭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인내의 깊이를 더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노력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가슴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다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호호호…….” “아이…….” 기녀들의 교성은 더욱 높아갈 뿐이었다. 벌써 세 시진째,노팔룡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를 잊은 듯이 장난에 열중일 뿐이었다. 백선결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 인간의 속셈은 무엇인가? 날 시험하려 들고 있단 말인가?’ 백선결의 마음은 온통 잡다한 생각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노팔룡이란 인간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었다. 한편 기방 밖에서는 또 한 사람이 애를 태우고 있었다. 화원 뜨락을 서성이고 있는 사람, 바로 하여령이었다. 하여령은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죄다 듣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보지 않아도 어떤 광경인지 환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녀들의 자지러지는 신음과 노팔룡의 웃음소리가 이따금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깊은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팔룡의 억지에 이곳까지 끌려온 백선결… 그리고 혼자서 히히덕거리고 있는 노팔룡…….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선결같은 인간이 어찌하여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벌써 세 시진째 저런 고역을 치르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백선결의 지금의 표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더욱 모를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어찌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짐작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가? 문득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런 것이 남자의 세계인가?’ 그녀는 어쩌면 오늘 이후로는 자신이 영원히 여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크게 섭섭하면서도 일면으로는 달짝지근한 느낌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있는 백선결의 귀에 노팔룡의 음성이 들렸다. “백형.” “……?” 백선결은 눈을 떴다. 노팔룡은 정색을 하고 있었다. “백형은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구려?” 순간 백선결은 깨달았다. 그 말은 얼마 전 소림사에서 자신이 그에게 한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백선결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상대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취향에 맞추지 말아라. 이 친구야! 그런 것이다. 하지만 백선결은 지금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노팔룡이란 인간이 그런 감정으로 자신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찌 노팔룡이란 인간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겠는가?그가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지혜에 넘어가고 만 것은 그가 너무나 영악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결코 이런 착각을 범하지 않았으리라. 백선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네가 정녕 그런 뜻으로 날 이렇게 모욕 준다면…….’이때였다. 노팔룡은 갑자기 기녀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또… 당했다. 백선결은 한 발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이 놈은 언제나 날 앞지르는군.’ 그의 안색이 침중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노팔룡은 기녀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떼었다. “자, 이제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백선결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동안 그는 의자에 깊이 묻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찌하면 되겠소? 노팔룡의 질문이었다. 백선결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빈틈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미 노팔룡을 대하기도 전에 그에 대한 준비를 완벽히 끝내놓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 선수를 빼앗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는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장의 지도였다. “이것을 보시오.” 노팔룡은 대충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선과 점이 그려져 있을 뿐 자세히 보아야 그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이게 뭐요?” “보다시피…….” “아, 말로 하시오. 간단히 말이오.” “…….” 백선결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이자의 말투는 거슬리면서도 무어라 반박할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요. 사실은 우리 중원무림으로서는 금륜맹의 발호가 시일이 흐를수록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실정이오. 그래서 본맹이 결성되었으나 오랫동안 패업을 준비해 온 금륜맹측에 비한다면 여러가지 면에서 기우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오.” 노팔룡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런 그의 태도 역시 백선결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사이엔가 백선결은 자신이 그에게 매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 놈을 이용할 때까지는 이용하는 것이 낫다. 적을 만드느니 어떤 면에서 이용가치를 취하는 것이 옳다!’ 그의 항상 불변하는 지론이다. “음, 그래서?” “노대협이 무림을 위해 나서 주시기만 한다면 중원무림을 위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소이다.”노팔룡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겠소?” “무… 물론 그렇지요.” 백선결은 부아가 치밀었다. 또 다시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이번에 소제는 역공(逆攻)을 계획했소이다.” “역공?”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하는 것이오. 금륜맹에서 오랫동안 이쪽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면 일단 불이 붙으면 우리가 불리할 것은 당연지사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쪽에서 선공(先攻)을 하는 것이 낫다는 심산이오.”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법 똑똑한 계산인 것 같소.” 기가 막힌다. 그러나 백선결은 꾹꾹 참았다. 귀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으나 그는 참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군웅대회를 열었고 거기서 발탁된 정예고수를 주축으로 선봉을 삼은 뒤 금륜맹을 공격하는 것이오. 후진으로 물론 중원의 무맹에서 주력부대를 동원할 계획이오.” 노팔룡은 겨자를 씹다 말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무심코 집어 넣었는게 그것이 그렇게 매운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콧등을 몇번이나 찡그렸다. 한데 그가 겨자를 먹고 그런 것인지 백선결은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상대가 신통치 않게 생각하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대협, 왜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응? 무얼 말이오?” “아… 그 계획이… 음.” 백선결은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비로소 그는 무엇 때문에 상대가 오만상을 쓰는지 알게 된 것이다. 노팔룡이 손가락으로 겨자 덩어리를 꺼내 뱉어놓은 것이다. ‘빌어먹을…….’ 그는 상대를 저주했다. 게다가 오늘의 일진이 일평생 중의 최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이 자와 떨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음, 소제는 노대협께서 이번 계획의 선봉을 서 주셨으면 하는 부탁입니다. 전 무림이 노대협의 그런 활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물론이지요. 나같은 사람이 무림을 위해 나서지 않으면 욕을 먹을 것이오. 더욱이 사부님께서도 강호에 나가 협행을 하라고 하셨는데 어찌 거절을 하겠소?”“아! 그럼…….” 노팔룡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오. 너무 심려할 것 없소. 그리고 무슨 주력부대 운운하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그저 내가 가서 그 일패의 전인이라는 자를 훈계하면 될 것이 아니겠소?” ‘미친놈!’ 하마터면 그런 욕이 입 밖에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참는 백선결이었다. 노팔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아니, 어디로……?” 백선결은 그가 또 어딘가로 가자고 할까 봐 흠칫했다. “어디긴 어디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출발하려는 것이오. 이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소?”백선결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하니 지금 당장 떠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는 덩달아 일어서면서 더듬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까지야…….” “하하하! 영웅은 마음 내키는 데 따라 움직이는 법이오. 가는 곳이 집이요, 협행이란 아무리 어려운 경우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영웅본색(英雄本色)이 아니겠소?” 백선결의 입은 꿰메어진 듯 말이 없다. 그는 두 손 다 들 지경이었다. 대체 상대가 바보인지 아니면 교활한 것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다.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평소의 영민하던 두뇌조차 지금은 녹이 꽉 슨 듯이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말은 더듬는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가 말을 더듬은 적이 있었던가?하여간 무척이나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이런 날이 며칠만 거듭되면 그는 정말 머리가 돌아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6 하여령은 기가 막혔다. 그가 하는 일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소림사에 온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다. 한데 기방에서 돌아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대뜸 금륜맹으로 떠나자는 것이 아닌가?“글쎄 다 결정났어. 지금 떠나자구. 이 냄새나는 절간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구.” 노팔룡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다짜고짜 숙소를 나서고 있었다. 하여령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숙소를 나서니 미리 시중들던 동자가 공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에 들고 있던 행장을 바쳤다. “저… 맹주님께서 이것을 드리라고.” 노팔룡은 사양도 하지않고 냉큼 행장을 받더니 어깨에 둘러멨다. 그가 둘러멜 때 하여령은 그 속에 은자가 가득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쇳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동자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맹주님께선 몸이 불편하셔서 배웅을 못 하신다고 말씀을…….” 하여령은 눈쌀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중원무림맹의 맹주가 몸이 아프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회피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았다. 가서 전해라. 몸조리 잘 하라고.” 그는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여령은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꼭 문 채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소림사의 산문을 나서는 동안 소림사의 승려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일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맹주인 백선결이란 자를 그렇게 골탕을 먹였으니 달갑지 않을 수밖에.’하여령의 생각이었다. “아미타불… 안녕히 가십시오. 시주님.” 그래도 인사하는 중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맨 처음 두 사람을 발견했던 빗자루를 든 사미승이었다. “하하! 열심히 불경을 외우게, 그럼 언젠가 큰 스님이 될 거야.” 노팔룡은 호쾌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친 후 당당히 걸어 나갔다. 숭산을 절반 쯤 내려왔을 때 하여령은 노팔룡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정말 단신으로 금륜맹으로 가 그 자를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왜 가겠어?” “기가 막혀!” “빨리 가자구. 금륜맹은 꽤 먼 곳에 있다는데.” 노팔룡은 다시 성큼성큼 앞장서고 있었다. 하여령은 뒤에서 그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가슴이 타는 느낌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걸음을 빨리하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루에서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기루란 곳에 갔었고 그곳의 기녀들과 질탕하게 놀아본 것이다. 기녀들과의 은밀한 수작이며, 그녀들의 육체 곳곳을 마음껏 희롱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구름 위에 둥둥 뜬 듯 무아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또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령만은 못 했어.’ 노팔룡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여령이 저만치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문득 가슴이 뜨거워졌다. ‘음. 요번엔 기필코.’ 기필코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오직 노팔룡만이 알고 있으리라. 노팔룡과 하여령,두 남녀는 다시 먼 길을 여행하게 되었다. 그 행선지는 바로 풍운의 금륜맹이었다. 제15장 동굴 속의 괴노인 1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거실(居室)이 있다면 어떤 곳일까. 대저 화려함이란 일정한 기준이 없는 법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이 그가 좋아하는 취향을 어느 만큼의 돈과 정력을 들여 꾸미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거실은 그런 면에서는 완벽한 점수를 지닌다. 거실의 주인은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떤 투자나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실의 주인, 즉 금포 청년은 곤륜(崑崙)에 터를 잡은 후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구축해 놓았다. 곤륜은 대륙의 북서쪽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그가 구축한 곳은 도리어 남해(南海)의 풍물에 가까운 것들이 더 많다. 열대(熱帶)의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로 꾸민 온갖 가재도구와 집기들, 심지어는 화원의 꽃나무들까지 남해에서 직접 옮겨온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곤륜의 싸늘한 기후 속에서도 잘 자라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 촌스러운 짓이다. 왜냐하면 이곳 주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음식물 또한 그렇다. 지금 그는 식사를 하고 있다. 음식 하나 하나는 값으로 친다면 엄청나게 비싼 것들이다. 그러나 값이 비싸다고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곤륜산에서 바다에 나는 해산물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그밖에 없다. 거실에는 언제나 음악(音樂)이 흐른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명의 악사(樂士)가 그를 위해 항상 음악을 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움직이기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 단적인 증거로 지금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여덟 명의 미녀들이 상아로 된 젓가락을 들고 그가 지명하는 음식을 직접 입에 넣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절세의 미인들로써, 인종(人種) 또한 각양각색이다. 색목국(色目國)에서 온 파란 눈의 미녀가 있는가 하면 남방의 이국미인, 또는 열대의 흑녀(黑女)도 있다. 그 미녀들은 언제나 그를 위해 속에 아무것도 받쳐 입지 않고 환히 속살이 비치는 망사의만을 입는다. 그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다시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적어도 삼백육십 가지 이상의 음식이 올라와야 하는데 매 끼니마다 실제 수십 명의 요리사들이 그런 음식들을 만들어 올리는 것이다. 금포 사나이가 식사를 반쯤 하였을 때, “맹주님, 전서입니다.” 한 여인이 금쟁반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여인은 취록빛 나삼을 입고 있었는데 역시 속이 환히 비쳐 터질 듯한 유방과 여인의 은밀한 부위가 은은히 드러나 보이는 절세미녀였다. 금쟁반 위에는 한통의 전서(傳書)가 놓여 있었다. 여인이 무릎을 꿇고 쟁반을 두 손으로 올리자 사나이는 전서를 읽었다. 전서를 읽어가던 사나이의 안색이 약간 변화를 보였다. “치워라.”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자, 여인들은 바쁘게 상을 치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많은 요리들이 사라지고 거실은 깨끗이 비워졌다. 이윽고 거실에는 그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한빈(寒彬).” 순간 바람처럼 한 명의 사나이가 떨어졌다. 그는 천장에서 떨어진 것도 같고, 아니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바닥에 오체복지한다. 사나이는 들고 있던 전서를 바닥에 떨군다. 전서는 나풀거리며 부복한 한빈의 앞에 떨어졌다. “이 자를 처치하라. 기간은 오일.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바닥에 떨어진 전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뇌진자(雷震子)의 전인 노팔룡, 서동과 함께 북상중(北上中). 목표 예정지는 총단(總團).> 간략한 보고서 형식이었다. 엎드려 있던 한빈은 눈이 번쩍 무섭게 빛났다. 그는 전서를 두 손으로 줍더니 입 속에 넣어 씹어 삼켰다. 그런 행위는 떨어진 임무를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스슷……. 한빈은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사나이는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거실에 혼자 남았다. 그러나 전혀 고독한 표정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크게 행복한 표정도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로 부터 은은하고 아름다운 주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천하무림을 일통하겠다고 선언한 금륜맹(金輪盟)이었다. 금포 사나이, 그가 바로 금륜맹의 맹주였던 것이다. 2 “왜 이래요?” “여령이야말로 왜 이래?” “저리 가란 말이에요. 징그러워요.” “징그럽긴, 언제는 좋아서 난리더니." 객점의 침상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노팔룡과 하여령의 공방전이었다. 마침내 근 한 시진 동안의 피(?)가 튀기는 접전 끝에 노팔룡은 기어이 승리를 취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그의 손은 어느새 하여령의 가슴을 떡주무르듯 하기 시작했다. 하여령은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고 노팔룡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가끔씩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이곳은 북방의 한 마을, 그들은 금륜맹의 총단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역의 밤은 깊어 가고 창밖에는 한풍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나 뜨겁기만 하다. 그것은 언제나 하여령의 몸을 불덩이로 만들어 놓는 노팔룡의 손이 있기 때문이었다. 3 소림 하원. 방안의 모든 것은 검박하기만 하다.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담백한 의자에 앉아 백선결은 한 사나이를 보고 있다. 그 사나이는 우뚝 서 있었는데 마치 한 자루의 검날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엽무검(葉無劒).” 엽무검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답 대신 죽어 있는 듯한 눈빛이 번쩍 빛났다. 백선결은 이런 사나이의 눈빛을 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했다. 그는 엽무검이야말로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수없이 해결하는 자라고 믿고 있었다. “노팔룡을 시험하라. 만약 그가 약한 자라면 죽여도 좋다.”엽무검은 조용히 돌아선다.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엽무검은 가타부타의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실패란 말은 없다. 그것이 바로 그의 대답인 것이다. 문득 등 뒤로 백선결의 음성이 들린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강하다고 해도 너의 배후를 드러나게 해선 안 된다.” 엽무검의 몸이 잠깐 흔들린다. 그는 백선결의 철저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백선결에게 실망을 준 적도 없다. 한데 지금 그는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오늘 명령 받아 상대할 적이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백선결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의 마지막 당부는 실패시 엽무검의 목숨을 버리라는 뜻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 엽무검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신형을 날려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백선결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팔짱을 끼고 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점차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노팔룡이라는 인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눈쌀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언제나 완벽하고 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노팔룡을 만나고부터는 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만일 노팔룡이란 인간이 어느 정도 소양을 갖춘 인간이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노팔룡은 도무지 불한당에다 잡배같은 인간이 아닌가? 그런 노팔룡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를 사지(死地)로 먼저 보내는 데는 성공했다. 과연 그가 큰소리친 대로 금륜맹을 초전박살낼지, 아니면 도중에서 거꾸러질지는 몰라도 어느 쪽이 되건 백선결의 입장으로 보면 손해날 일은 없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믿음직하다고 생각한 수하 엽무검을 보낸 것이다. “허! 내가 이런 고민에 빠질 줄이야.” 백선결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4 서경산(西傾山). 이곳은 청해(靑海)에 인접해 있는 험산이다. 난주(蘭州)를 경유하여 이곳으로 접어든 그들은 서경산에 접어들자 험악절륜한 지형에 갇힐 정도가 되었다. 하늘을 찌르는 기암괴벽과 빽빽히 밀집한 밀림, 가도가도 끝이 없는 천험의 산악지대로만 이루어진 변방 특유의 지형이었다. 길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이름모를 산새들과 짐승들의 울음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봐, 여령. 제발 좀 천천히 가자구.” 노팔룡은 이마에 비오듯 땀을 흘리며 앞서가는 하여령을 불렀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입과 코로는 풀무질을 하듯 거친 숨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여령에게서 돌아온 것은 오직 뾰쪽한 질타뿐이었다. “안 돼요. 만약 두 시진 내로 산을 넘지 못하면 꼼짝없이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구요.” 노팔룡은 기어이 주저앉았다. “여령, 내가 뭐 무쇠로 만든 인간인 줄 알아? 벌써 삼 일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야?” 하여령은 그를 돌아보며 힐난했다. “무슨 남자가 그 모양이에요, 당신 혼자 못 쉬었어요? 그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산은 빨리 밤이 찾아온단 말이에요.” 그 말에 노팔룡은 코웃음을 쳤다. “이봐, 산에 대해서는 내가 할아버지야. 그리고 난 도저히 못 움직이겠어. 그러니 정 가려면 날 업구 가라구.” 하여령의 음성이 더욱 뾰족해진다. “그러게 누가 이리로 오자구 했어요? 나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해 놓구 이제 와서 누굴 탓해요?” 그렇다. 큰소리치며 금륜맹의 총단으로 먼저 가겠다고 한 것이나, 이곳으로 방향을 잡아 떠난 것도 모두 노팔룡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노팔룡은 또다시 잔소리가 터져나올까 봐 마구 손을 저었다. “몰라, 몰라, 몰라… 아무튼 난 더 이상 못 움직여.” 이쯤 되면 별 도리가 없다. 가지 않겠다는 그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새 하여령은 노팔룡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가왔다. “좋아요. 제게 업히세요.” 노팔룡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히죽 웃으며 냉큼 자그마한 하여령의 등에 업혔다. 덩치가 산만한 사나이가 가냘픈 여인의 등에 업히는 것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한데,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하여령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앗! 제발 손 좀 치우지 못해요!” 하여령은 고함을 빽 지르며 냅다 노팔룡을 떨쳐 버렸다. 노팔룡의 몸은 그만 붕 떠올라 저만치 날아갔다. 한데… 아뿔싸! 그가 떨어지고 있는 곳은 경사가 가파른 벼랑이 아닌가? 퍽! 소리와 함께 떨어진 그의 몸은 데굴데굴 구르더니 그만 절벽 아래로 추락해 버리는 것이었다. 자업자득이었다. 그는 등에 업히자마자 손을 하여령의 가슴 속으로 쑥 집어 넣었던 것이다. “이, 봐요……!” 깜짝 놀란 하여령은 당황히 부르짖으며 신형을 날렸다. 하나 어찌하랴! 노팔룡의 몸뚱이는 이미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난 이후였다. “……!”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일순 온몸을 떨었다. 그녀는 설마 아래쪽에 절벽이 있을 줄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절벽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래쪽이 시커멓게 보일 뿐이었다. 마치 지옥의 입구인 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는 하여령의 얼굴이 수십 차례나 변했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후회, 절망, 회의 등의 무한한 감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몸을 던졌다. 노팔룡이 굴러 떨어진 절벽 아래로 함께 뛰어내린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팔룡을 따라 함께 죽을 각오라도 하였단 말인가? 그녀의 몸도 곧 시커먼 절벽 아래 공간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5 암흑(暗黑). 완전한 절대의 암흑 공간. 이러한 태초의 암흑은 오직 저승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은 그 암흑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문득 한 가닥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노팔룡은 필사적으로 한 가닥 빛에 매달렸다. 빛이 있는 곳을 찾아서 다리를 움직여 보려 했다. 그러나 온몸은 철사로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빛은 더 강해졌다. 마침내 그는 눈꺼풀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그때였다. “이 놈, 가만히 있어라. 약 바르는 중이니…….” 문득 귓전에 벼락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고막이 윙윙 울리고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충만한 진기가 담긴 음성이었다. 노팔룡은 눈을 떴다. 시야가 물 속에서처럼 뿌옇게 흐렸지만 차츰 또렷해지며 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백 살도 훨씬 넘어보이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쭈그렁 바가지가 저러할까? 온통 나무껍질같은 피부를 가진 노인이 장작개비처럼 마른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노인장은 누구……?” “허허! 이 놈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이 놈아, 득도하신 도사님께서 선경(仙境)에 드시려는 순간 네놈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노팔룡은 놀랐다. 그는 자신이 살아 생전 본 인물 중에서 가장 늙고 초라한 노인의 목소리가 이제껏 들어본 어떤 소음보다도 훨씬 크게 들린 것이다. 그는 참을 수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 노인의 목소리가 그렇게 크오? 좀 조용조용히 말하시오!” 이번에는 노인이 찔끔했다. “아니, 젖도 채 안 뗀 어린것이 무슨 목소리가 그렇게 커? 노인네 고막 다 터지겠다.” 노팔룡은 귀가 멍멍해졌다. 노인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다섯 배는 더 커진 것이다. 그는 가슴이 울렁울렁해졌고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는 마침내 악을 썼다. “아니, 반쯤 관에 누우신 노인이 무슨 기운이 있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것이오? 그러다 천수도 못 누리고 졸사하시겠소!” 찌르릉… 이번에는 동굴의 벽이 진동했다. 노팔룡이 누워있는 곳은 하나의 동굴 속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젖먹던 힘을 다해 고함친 노팔룡의 음성이 메아리쳐 한동안 웅웅거렸다. “……!” 노인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뜬 채 멍하니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백팔십 년 사는 동안에 나보다 목소리 큰 놈은 처음 보는군.’ 놀라운 일이었다. 백팔십 년 동안 살았다니? 노인의 나이가 그렇게나 많이 먹었단 말인가? 노인의 목소리가 비로소 조용해졌다. “이 놈아, 너는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떨어졌느냐?” 그제야 노팔룡은 자신의 지금 처지를 깨닫고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동굴벽면뿐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것인지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이 이죽이듯 말했다. “아마 그 계집을 찾는가 본데 걱정 말아라. 저쪽에서 자고 있으니.” 노팔룡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자고 있다고?’ 그는 노인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곧 하여령의 등에 업혀 손장난을 치다가 떨쳐져 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비명도 지를 사이 없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하여령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진 것은 자신이지 하여령이 아니지 않은가? “그나저나 이 놈아,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 하지만 그래 고작 계집 때문에 자살하려고 해? 덩치가 아깝다. 덩치가…….” “……?” 노인은 음성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놈아. 내가 보기에도 너희 둘은 안 어울려. 양귀비와 원숭이가 어찌 부부가 되겠느냐?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새출발하는 게 속편할 거다.” 노팔룡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노인의 빈정거림도 빈정거림이려니와 자신을 도대체 뭘로 본단 말인가. “노인장,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의 음성이 높아지자 노인의 음성도 따라 높아졌다. “이 놈아! 몰라서 물어?” 이번에는 노팔룡의 음성도 더욱 높아졌다. “망령난 노인의 헛소리를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소?” 쩡… 하고 동굴이 진동했다. 그 바람에 노인은 귀를 감싸쥐었다. 적어도 음성에만은 그도 노팔룡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제발 이 놈아, 조용조용 말해라.” 노팔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령은 어디 있소?” 노인은 깜짝 놀랐다. “야, 이 놈아! 아직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 하나 노팔룡은 팔다리를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안 되긴 뭐가 안 된단 말이오?” 노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팔룡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노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 놈아, 거기가 아니야.” 그 말에 노팔룡은 돌아보았다. 노인은 동굴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작 말해 주지 그랬소?” 노팔룡은 짐짓 화를 벌컥 내며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모퉁이가 꺾어진 곳을 돌아서자 과연 바닥에 하여령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노팔룡은 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노인은 어느새 뒤따라와 대답했다. “걱정 말아라. 떨어지는 충격으로 기혈이 뒤집혀서 그런 것이니 곧 깨어날 것이다.” 노팔룡은 하여령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한잠 달게 자고 나서 심신이 개운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저 놈의 몸은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하단 말인가?’ 동굴 안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여령은 조금 전에야 깨어났다. 그녀는 초상승의 신법과 내공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었다. 눈길을 돌려보니 괴노인은 흙으로 만든 주전자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불현듯 자신이 노팔룡의 뒤를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 노팔룡의 존재가 생명처럼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매사에 자존심 강하고 스스로 여인임을 부정해 오던 그녀의 평소 태도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멍한 표정으로 부글부글 끓는 찻주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령은 내심 중얼거렸다. ‘천하의 하여령이 어떻게 저런 멍청한 작자 때문에…….’ 이때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이 놈아, 여긴 무엇 때문에 왔느냐?” 노팔룡은 시큰둥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소. 그런데 노인장은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노인은 버럭 소리질렀다. “득도하는 중이라고 했잖느냐!” 노팔룡은 피식 웃으며 코웃음쳤다. “흥! 득도는 아무나 하는 것인 줄 압니까? 천산의 바위는 수천 년을 꼼짝않고 있어도 여전히 승천하지 못하지 않소. 하물며 당신같은 늙은이야 만 년을 추구해도 도가 뭔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노팔룡의 입에서 제법 현오한 말이 나왔다. 노인은 놀란 듯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곧 안색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놈아, 내가 바위와 같으냐?” 그러나 그의 항의는 묵살되어 버렸다. 노팔룡이 화제를 돌려 버린 것이다. “그런데 노인장은 대체 얼마나 도를 닦으셨소?” 도무지 엉망친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괴노인은 노팔룡의 말에 춤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권위나 신비함이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이 놈아, 삼일 후면 꼭 백 년이다.” 노팔룡은 조금도 존경하는 빛이 없이 코웃음쳤다. “흥, 그럼 앞으로 구천구백 년은 더 있어야 선경에 오르시겠구료.”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 화가 나 코와 귀로 연기가 푹푹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노팔룡은 그에게 얘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노려보실 것 없소이다. 사실이 그러니까 말이오. 저희 사부님같은 일세의 고인도 자그마치 팔십 년이나 고생하신 끝에 간신히 선경에 드셨단 말이오." 노인의 눈이 번뜩 빛났다. “네놈의 사부가 도대체 누군데?” 노팔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당당히 답하고 있었다. “바로 천하제일인인 뇌진자이시오.” 순간 노인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그만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뭐, 뭐, 뭐라구?” 그의 쭈그렁바가지 같은 얼굴에는 경악이 아니라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극도의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노팔룡은 덤덤하게 말했다. “하긴 놀랄 만도 할 거외다. 그러니 노인장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손주며느리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상책일 거요.” 괴노인의 얼굴이 시뻘개지고 있었다. 그는 대뜸 벌떡 일어서더니 손가락으로 노팔룡의 면전을 가르키며 고함치듯 말했다. “이 놈아! 어디다 대고 사기를 치는 거냐! 뭐, 네놈 사부가 뇌진자라구?” 노팔룡은 피식 웃었다. “믿지 않으려면 믿지 마시구료. 하긴 노인장같으신 분이 날 만난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니 그걸로 만족하시든가.” 노인은 그저 입을 따악 벌렸다. 그는 한동안 넋 나간 표정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관두자, 관둬. 이러다간 노부마저 돌아 버리겠다.” “그러는 것이 속 편하실 거외다.” 노인은 아예 노팔룡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이번에는 하여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계집애야, 너는 저 놈의 마누라냐?” 하여령은 머뭇거렸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런식으로 말을 하였다면 벌써 두 토막이 나도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무형 중에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의 겉모습이 초라하긴 하지만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노인의 몸에서는 보이지 않은 은은한 광채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득도한 사람이거나 최상승의 무학진경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광채였다. 이때 노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이 계집애까지 말썽이네. 으허허! 오늘 노부의 일진이 최악이구먼.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동굴이 찌르릉! 울렸다. 뿐만 아니라 동굴벽이 부서지며 돌가루가 우수수 휘날리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음공(音攻)의 힘이 담겨 있는 외침이었다. 하여령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얼른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에그, 그저 요즘 계집년들은 뒷전에서 호박씨 까는 것만 늘어서… 쯧쯧!” 하여령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이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녀는 혼수상태일 때 노팔룡의 이름을 부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죽어도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노팔룡은 기분이 좋아져 연신 입을 벙싯거리고 있었다. 하여령이 그만큼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괴노인은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네년 사부는 잘 있느냐?” “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하여령은 어리둥절해졌다. “아, 누군 누구야? 죽지 못해 노망든 네년 사부 할망구지.” “저, 저의 사부님을 아시나요?” 하여령의 얼굴에는 강한 의문이 떠올랐다. “알다마다. 네년 사부가 흔드는 방울소리에 이골이 났는데… 그나저나 네년이 돌아다니는 걸로 봐서 그 노파는 아예 검각에 틀어박힌 모양이구나?” 하여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인의 말은 어느 것은 맞고 어느 것은 틀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부가 소혼령(召魂鈴)이란 방울을 흔드는 것과 검각(劒閣)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실상 그녀의 사부야말로 지난날 칠기의 일 인, 다시 말해 그 중에서 삼비(三秘)에 속한 일대고인인 소혼령주였던 것이다. 또한 검각 각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괴노인의 말대로 그녀의 사부가 할망구라는 것은 전혀 틀린 말이었다. 그녀의 사부는 이제 고작 사십대의 중년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노인이 어떻게 자신이 검각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느냐는 점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나의 검집 속에 있는 소혼령을 보았겠구나!’ “노, 노선배님은 대체 누구신지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노인은 또다시 소리를 버럭 지른다. “계집애야!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네년은 어째 그 노파와 똑 같냐?” “사… 사부님 께선 백년 면벽(百年面壁)에 들어가셨습니다.” “뭐? 백년?” 노인의 얼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황당해지고 있었다. “그럼 노부와 똑같이…? 아니야, 그럼 너는 또 언제 가르치고?” 노인의 말은 마구 헷갈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저어, 노선배님.” “응? 왜 그러느냐?” “저의 사부님께서는 지금 연세가 사십오 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자꾸 할멈이라고……?” “엉? 뭐라구?” 괴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노파가 고작 마흔다섯 살이라구? 헛헛헛! 이거 정말 미칠 노릇이군.” 한데, 무엇을 깨달았는지 노인은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군. 내가 착각을. 허허허! 지난 백 년간 노부가 강호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었군…….” 말 끝에 노인의 얼굴이 쓸쓸해진다. 그 쓸쓸함은 아주 진한 감정으로 순식간에 하여령과 노팔룡에게도 전이되어 갑자기 무거운 감응을 느끼게 했다. 하여령은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괴노인의 음성은 풀이 죽은 채 쓸쓸히 이어졌다. “그래, 그 할망구는 네년의 사부의 사부이거나 아니면 또 그 위의 조상이거나 하겠군. 게다가 이미 벌써 오래 전에 죽었겠지.” 하여령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대체 어르신께서는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누구긴 누구야? 그 이름도 그럴듯한 옥환소수(玉環素手)란 별호를 가진 소심령(召心靈)을 말하는거지.” “……!” 하여령은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당혹한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그 분께서는 저의 사조님이세요…….” “헛허. 험, 그랬군.” 이때였다. 이제까지 아무 말없이 듣고 있던 노팔룡이 물었다. “그런데 노인장은 대체 뉘시오?” 그의 말은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워낙 단순한지라 그렇게 나쁘게 비치지 않는 것 또한 노팔룡의 특징이기도 했다. 노인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차분하고 냉정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알 거 없다. 이제 상처가 치료되었으면 떠나라. 노부의 청수를 방해하지 말고…….” 그 말에 하여령은 머뭇거렸다. 뿐만 아니라 노팔룡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은 화를 벌컥 내는 것이 아닌가? “이 놈아, 거렁뱅이 귀신이 붙었냐? 노인이 혼자 사는 곳에 뭐 얻어먹을 것이 있다구 얼쩡거려? 어서 저 계집애를 데리고 사라져!” 노팔룡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흥! 냉수 한 잔 안 주고 무슨 큰소리요? 노인장이 하루 더 있어 달라 사정해도 못있을 형편이오. 가자, 여령.”그 말을 내뱉고 노팔룡은 터벅터벅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조금치의 미련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하여령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이때 하여령의 귓전에 노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서 쫓아가. 내가 백팔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아직 저만한 신랑감을 보지 못했으니까. 복을 놓치지 말고 쫓아가라, 계집애야.)그러나 하여령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는 무한한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어. 잘못하다간 또 네년 사조 꼴 난다. 어서 따라가라니깐. 노부는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을 거다.)그제서야 하여령은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그럼 옥체보존 하시옵소서. 노선배님…….” 그녀는 노인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노인은 정식으로 절을 받지도 않고 돌아앉아 있었으나 문득 하여령의 귀에는 노인의 전음이 흘러 들어왔다. (명심해라. 정해(情海)란 더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고 또 더없는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은 모두다 네가 하기에 달린 일이니라.)이제까지 괴팍하고 제멋대로였던 괴노인의 말투와는 전혀 틀린 전음이었다. 노인의 말에는 무한한 회한과 번민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지난날을 회오하며 끝없는 한을 품고 있는 듯한 의미 깊은 말이었다. 하여령은 그윽한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입정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설사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이윽고 하여령은 서서히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가슴이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괴노인과의 만남……. 향후 그것이 어떤 인연의 실타래가 되어 돌아오게 될지… 마음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동요가 파도치듯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저만치 동굴 밖을 앞질러 가는 노팔룡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따라 가리라! 이제부터는 그가 어느 곳으로 가든, 어떤 행동을 하든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라! 그것이 지금 이순간부터 정해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하늘이 두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그의 곁에 붙어 있으리라……. 제16장 이상한 장원(莊院) 1 피처럼 붉은 황혼이 서경산을 물들이고 있다. 서경산의 모습은 특이하였는데 문자 그대로 서녘으로 기울어져 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서경산의 산등성이로 떨어지는 석양(夕陽)은 피빛이었는데 왠지 섬뜩한 느낌이었다. 스스스…! 핏빛 황혼을 가로질러 바람처럼 날아가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험악한 서경산의 구릉을 검은 박쥐처럼 넘더니 하나의 커다란 바위 위에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 자가 이곳을 지날 텐데…….” 황혼을 받은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신이 검날같아 보이는 사나이, 그는 바로 엽무검이었다. 소림 하원에서 백선결의 명을 받고 쉬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는 임무에 충실한 사나이다. 아니, 모든 것을 완벽한 계산 하에 두고 빈틈없이 시행하는 사나이다. 그래서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고 백선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엽무검은 미리 서경산을 답사한 후 노팔룡이 이곳을 지나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예측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천기(天機)를 제외하고는. 그는 바위 아래 몸을 기댔다. 그의 모습은 바위의 일부가 된 듯 잠적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바위와 그의 몸을 구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남자의 음성이 적막한 산을 울렸다. “여령, 자고 가자니까……” 뒤이어 흘러나오는 음성은 청아하고 달콤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관둬요. 빨리 가야 한단 말이에요.” 엽무검은 소리가 가까와지자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상대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기습을 하기에는 어딘가 적합치가 않았다. 좀 더 완벽한 지형, 그것은 암습에 있어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는 눈을 굴렸다. 그리고 곧 그곳을 발견했다. ‘저곳이다.’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헉!” 막 땅에 착지한 순간 엽무검은 신음성을 금치 못했다. 바로 자신이 떨어진 곳에서 채 삼 장도 채 되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엽무검은 대경실색했지만 순간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자 상대 역시 자세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엽무검은 검자루에 손을 대었다. ‘……!’ 그러자 상대방 역시 동시에 똑같은 속도로 발검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만일 한 치의 허점이라도 보인다면 끝장이다. 상대방의 무공은 자신보다도 높거나 아니면 막상막하일 것 같았다. 만의 하나 실수가 있다면 당장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맞은편의 인물은 누구인가? 지척의 거리를 두고 발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두 인물은 서로 어딘가 닮아 보였다. 몸 전체가 검으로 보이는 것 하며, 음산한 기운을 흘리는 것도 똑같았다. 심지어는 척살자 특유의 냉혹하며 신중한 일면까지도 닮아 있었다. 한빈. 그렇다. 그는 바로 한빈이었다. 그 역시 노팔룡을 척살하는 임무를 받고 이곳 서경산에 잠복하고 있던 금륜맹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기질의 소유자였다. 철저히 훈련받은 살수로서……. 그들은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노리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이리의 눈빛같이 이글거리는 두 쌍의 눈이 허공을 사이에 두고 불꽃을 튕겼다. 그들은 손을 각각 검자루에 얹은 채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밧줄에 칭칭 묶인 듯이 자세가 굳어 있었다. 지금 그 자세 그대로 화석이 될지라도 두 사람은 먼저 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살수는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기술을 배운다. 일격필살(一擊必殺)! 단 한 번의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음은 자신의 몫이 되고 만다. 특히 살수의 검법은 발검식(發劍式)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대결에서 가장 허점이 많은 부분은 바로 발검식이다. 그러니 상대를 코앞에 두고 어찌 발검을 먼저 할 수 있겠는가? “……!” “……!” 두 사람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누구의 인내심이 강하느냐에 따라 결판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기막힌 일이었다. 그들은 노팔룡을 척살하기 위해 왔다가 엉뚱하게도 똑같은 자객을 만나 이 고역을 치루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산했던 엽무검이나, 역시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던 한빈의 계산에 들어있지 않은 변수였다. 이때였다. “아이고, 여령. 제발 나 좀 살려 줘.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사나이의 음성이 가까이서 들렸다. 그것은 두 자객이 공동 목표로 하고 있는 사나이의 음성이었다. 엽무검과 한빈의 눈빛이 거의 동시에 흔들렸다. 여인의 뾰족한 음성이 뒤이어 들려왔다. “잔소리 말고 따라와요.” ‘으, 으음!’ 거의 같은 순간에 두 자객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하나 어찌하랴? 두 사람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음을! 뿐만 아니라 전신을 포화상태에 가깝도록 긴장하고 있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푸는 날이면 상대의 검에 두 동강이가 날 것이다. 초절정의 공력과 극한의 긴장을 총동원하여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들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 아닌 싸움은 절대로 빠른 시간 안에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빨리 와요.” “아이고, 여어려엉…….” 남녀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빈과 엽무검의 처절한(?) 결투는 언제까지라는 보장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실로 묘한 형국이 아닐 수 없었다. 북방의 황량한 서경산 기슭에 황혼은 검붉게 물들어가고 어둠의 장막이 차츰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데, 두 자객은 어이없이 서로의 살기를 제어하기 위해 혼신을 힘을 기울이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2 청해(靑海). 말이 호수이지 바다처럼 넓은 호수였다. 짙푸른 호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잔잔한 수면에는 하늘의 구름이 군데군데 담겨 있었다. 끝없는 수평선은 왠지 아득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부질없어 보이는 자연의 엄청난 거울이라고나 할까?“뭘 그렇게 넋을 잃고 봐요?” 여인의 청아한 음성이 들린다. 노팔룡은 정신을 차렸다. “와, 되게 넓은데!” 그는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평생 바다를 본 적이 없는 그의 눈앞에 비친 청해는 바다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놀라요? 만일 동정호를 본다면 까무러치겠네요? 그때는 관을 준비하세요. 심장이 멎을 테니 말이에요.” 하여령은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순진하기 그지없는 노팔룡이 밉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내심 언젠가 노팔룡을 데리고 남해 구경을 가리라 생각했다. 3 문득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노팔룡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노팔룡은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숫가 저편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여령은 안력을 돋구어 그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젊은이들로 도합 9인이었다. “어머! 저들은……?” 그녀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느닷없이 청해 변에서 마주친 젊은이들, 그들은 바로 칠룡삼봉(七龍三鳳) 이었던 것이다.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들인 그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여령, 분명 당형(唐兄) 일행들이지?” 노팔룡도 놀랍다는 듯 하여령에게 물었다. “마, 맞아요. 저들이 어떻게 이곳에……?” 그녀가 의혹의 표정을 짓자 노팔룡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쪽에서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당립이 먼저 소리쳤다. “아니, 노대협 아니십니까?” 노팔룡은 반가운 듯 당립의 손을 덥석 잡았다. “허헛! 그렇소. 헌데 당형이 이곳에 웬일이오?” 당립은 일행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저희들이야 대회가 끝난 후 공격 선발대원으로 뽑혔지요. 그래서 먼저 금륜맹으로 가는 길입니다.” 칠룡삼봉은 누가 뭐래도 무림의 젊은 고수들이었다. 비록 종남의 사도욱같은 사람은 과거 하여령에게 패하긴 했지만 역시 젊은 대표로 뽑혔다. 그들은 나름대로 임무를 띠고 먼저 선발대의 일원으로 금륜맹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미 중원에서도 각파의 정예고수들이 각각 정해진 방향에 따라 금륜맹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칠룡삼봉은 서로 의기투합하므로 각파 정예고수들과 떨어져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로 합의를 보고 미리 출발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본래 노팔룡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거 잘 된 일이오. 나도 마침 그곳으로 가던 중이니 말이오.” 당립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말 잘 된 일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노대협께서 말도 없이 비룡방을 떠나셔서 섭섭해하던 중이었습니다.” 노팔룡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백형이 내 말을 안 해 줬소?” “백형이라니요?” “왜 그 백선결인가 뭔가 하는 친구 말이오.” 당립의 표정이 멍해졌다. 당대무림의 맹주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흠, 내가 소림을 떠날 때 백형에게 나 대신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였는데.” 당립은 비로소 무슨 말인지를 깨달았다. “아하, 그 말을 하시는군요? 저희는 백맹주님을 뵙지 못하고 온지라 노대협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당립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이때 하여령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특히 당립의 표정에서 그녀는 뭔가 내막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아, 그렇게 된 것이구료.” 노팔룡은 알겠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간단히 해석해 버린 것이었다. 하여령은 달랐다. 그녀는 내심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 자가? 역시 어딘가 교활한 기운이 있다 했더니.’사실 백선결은 노팔룡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무림에 크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금륜맹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특별히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여령은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흥!”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싸늘한 코웃음을 쳤다. “……?” 칠룡삼봉은 느닷없는 냉소에 안색이 변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여령은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정도를 가장하고 군자(君子) 행세를 하는 어리석은 소인배같으니!” 당립의 표정이 가장 크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다. 이미 비룡방에서 그녀의 신위를 본 터라 마음 깊이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여령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도무림에 대한 깊은 불신이 싹터 칠룡삼봉 그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노팔룡은 아무것도 모른 채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쨌든 슬슬 어두워지고 있으니 쉴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그는 당립을 보며 물었다.” “당형, 혹시 이 근처에 쉴 곳이 없소?” 당립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마침 이곳에 저의 숙부님이 계시니 그곳으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당립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중인들은 당립을 따라가기로 했다. 4 장룡산장(藏龍山莊). 이름으로 보면 용이 숨어 있는 장원이라는 뜻이다. 청해 호수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대략 일천 평이나 되는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야 일행은 그곳에 당도했다. 노팔룡은 산장의 정문에 당도하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니 당형, 이곳이 당형이 말한 곳이오?” 그의 음성은 어쩐지 좋지 않았다. 당립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노대협, 혹시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노팔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거야 없소만 어쩐지 황량한 기분이 들어서.” 아닌게 아니라 장룡산장은 금방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듯이 음산했다. 드넓은 평수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산장은 오랫동안 보수를 안 하여 낡을대로 낡아있는가 하면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날이 어둑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장원 안에는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일행은 인가 한 채 발견하지 못해 가뜩이나 이상한 느낌을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장원의 황폐한 모습을 보자 더욱 아연한 느낌이었다. 채화옥녀 여운설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당사형, 기분이 이상해요.” 당립은 일부러 크게 웃었다. “하하! 여사매의 감정은 이해하오. 하긴 나도 처음 왔을 때 마치 귀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본래 숙부님께서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셔서 이곳을 이런 환경으로 꾸미셨다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르니 어서 들어갑시다.” 그는 서둘러 나서더니 문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린다. 그가 열대여섯 번이나 두드렸을 때에야 문이 열리며 한 중년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중년인은 당립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아이구, 당도련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당립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천집사(千執事), 잘 있었소?” “허허! 저야 항상 그렇지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당립은 주춤거리며 물었다. “숙부님께서는?” 순간 집사의 안색이 흐려졌다. “여전하십니다.” 집사의 말에는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당립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중인들에게 말했다. “자, 안으로 드십시다.” 중인들은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다. 그것은 중년인의 인상이 의외로 깨끗하였기 때문이었다. 중인들은 천집사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던 것처럼 대문 안쪽의 뜰도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뜰에는 무릎까지 올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여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뜰을 가로질러 일행은 한 건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하나의 대전처럼 된 건물이었다. 한데 처음 당립의 말과는 달리 대전 안도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었으며 조금도 안락한 느낌을 주지 않는 곳이었다. 왠지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줄 뿐이었다. 등불도 공명등이나 궁등이 아니라 팔뚝만한 황촉 몇 개가 전부여서 음산한 바람이 불자 음영이 벽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유령의 흐느적거리는 그림자를 보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특히 여운설을 비롯한 삼봉은 이곳저곳을 동그란 눈으로 둘러보면서 가볍게 몸을 떨곤 하였다. 아무리 무림녀라도 해도 마음 약한 여인의 기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거실에 있는 것이라고 해야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일행이 의자에 앉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음식을 올리겠습니다.” 집사는 중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갔다. 일행은 침묵에 잠겼다. 나름대로 바삐 이 괴이한 장원과 당립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노팔룡이 물었다. “아니, 당형의 숙부란 분은 어디에 계시오? 인사를 드려야 할 것이 아니오?” 하나 당립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숙부님께서는 원래 외인을 만나기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본가를 떠나 이런 궁벽한 곳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대협께서는 양해하시기를.” 그러자 신기일화검 낙혼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형, 당형의 숙부란 분은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내가 알기론 사천 당가의 식솔 중 당형의 숙부뻘되는 분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당가는 무림의 명문이었으므로 무림인들치고 그 구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당립은 어색하게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건…… 먼 친척뻘이기 때문이오.” 중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의혹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그러나 당사자인 당립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추궁할 수도 없는 일이라 더 묻지 않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음식을 집사가 직접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로 미루어 이 장룡산장에는 기거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한편 중인들은 차려온 음식을 보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음식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산채와 소면 등, 너무나 간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중인들은 배가 몹시 고픈 참이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 온통 푸성귀뿐이라 실망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당립은 미안한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하하! 맛있어 보이는데.” 중인들과 달리 노팔룡은 음식을 보자 환성을 발했다. 노팔룡은 도리어 이런 음식에 길이 들어 있었다. 사실 황룡산에 있을 때 늘상 그가 먹는 음식이 이런 류의 것이었으므로. 여인들은 특히 울상이었다.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어 다만 젓가락을 드는 시늉만을 할 뿐이었다. 하여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저 먹는 시늉만 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는 사람은 노팔룡 혼자일 정도였다. 식사가 끝났으나 음식은 거의 모두 남아 있었다. 중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런 곳으로 데려온 당립을 은근히 원망하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 밤이 깊었으니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비록 누추한 곳이긴 하지만 여러분들은 흉하지 마십시오.” 집사가 일행을 숙소로 안내했다. 중인들은 장룡산장의 첫인상과 음식물로 인해 이젠 모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식사를 마쳤어도 뱃속은 허전하기만 했으므로 그저 잠을 자는 것이 최상의 휴식이라는 심정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 않고 집사가 안내하는 숙소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제17장 공포의 그림자 1 분명 평범한 밤은 아니었다. 장룡산장의 밤은 적막하고 칙칙한 가운데 왠지 음산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이러한 기분은 방문객 모두에게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그들은 비록 젊은 혈기와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쩐지 으스스하고 위축되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각자 그런 기분을 표면적으로 노출시키지는 못했다. 젊은 영걸의 자부심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립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그런 느낌을 입밖에 낼 수는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난 후 일행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각각 잠자리로 들어갔다. 노팔룡과 하여령은 한 채의 별각으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당립의 안배로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별각은 그런대로 다른 곳에 비해서는 깨끗한 편이었으나 방이라야 덩그러니 침상 하나만 놓여 있는 단조로운 구조였다. “…….” 노팔룡과 하여령은 침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사위는 적막하고 어디선가 기분 나쁜 짐승의 울음소리만 소름끼치게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여령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무슨 장원이 이 모양이죠?” 그녀 역시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노팔룡은 느물스럽게 말했다. “뭘? 난 좋기만 한데.” 하여령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뭐가 좋다는 거예요?” 노팔룡은 기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몰라도 돼.” “……?” 하여령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노팔룡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보야, 그것도 몰라? 이곳은 우리 두 사람만 있는 데다가 침상도 하나밖에 없으니 후후! 이거야말로 신나는 밤이 아니겠어?’ 그야말로 노팔룡다운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그 한 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장룡산장에 용이 숨어 있건 미꾸라지가 숨어 있건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자연히 그것이 얼굴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여령은 그를 쳐다보며 의아스럽게 물었다. “아니, 왜 혼자 응큼하게 웃어요?” 노팔룡은 와락 하여령에게 달려들면서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어머나…….” 갑작스러운 기습에 하여령은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악! 야만인…….”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이어지지 못했다. 노팔룡의 육중한 몸무게에 숨이 콱 막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노팔룡의 야심! 그것이 표출된 것이다. 하여령은 기선을 제압당한 채 잠시 정신이 없었다. 미처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몸에 깔린 채 버둥거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노팔룡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여체에 대한 그의 탐구심이 발동된 것이다. “읍! 그만두지 못…….” 하나 하여령의 입은 커다랗고 두툼한 노팔룡의 입술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니, 설사 자유롭다고 한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곳에서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그야말로 공개적으로 망신살이 뻗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한 장룡산장이라 조그만 소리라도 나면 당장에 일행이 눈치챌 우려가 있었다. 노팔룡은 하여령의 그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지 분주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몇 차례 손을 놀리지 않아 하여령의 옷자락은 침상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마침내 매끄럽고 탄력 넘치는 그녀의 성지는 노팔룡의 두툼한 손바닥 아래 점령되고 있었다. 남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노팔룡에게는 신나는 달밤이 아닐 수 없었다. 2 세평 남짓밖에 되지 않는 초라한 방이었다. 역시 방안에는 침상 하나만이 덩그랗게 놓여 있었는데 침상에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채화옥녀 여운설,화산파의 여제자이자 삼봉 중에 일원인 무림의 재녀(才女).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빛은 불안해 보였다. “…….” 방안을 밝히는 것은 오직 한 자루의 황촉이었으나 촛불은 허름한 창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깜박이고 있었다. 비록 명문 출신으로 무공을 익혔고 강호의 여협으로 간이 큰 편이었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자꾸만 공포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장원이 이리 음산하지? 꼭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여인은 역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침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았는지 침구도 더럽기 짝이 없었고 삐그덕거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어쩌면 밤을 꼬박 새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득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있었다.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흘러들었다. 그녀는 우연히 시선을 돌리다가 그것을 보았고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헉! 누구?” 그때다. 낭랑한 말소리가 들렸다. “하하! 나야, 사매.” 황촉 아래 인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여운설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사형,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나타난 자는 그녀의 사형인 신기일화검 낙혼성이었다. 낙혼성은 가까이 다가오며 웃었다. “하하! 뭘 그리 놀래?” “놀랄밖에요. 무슨 산장이 유령 소굴 같아요. 무서워 죽겠어요.”여운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짐짓 투정을 부렸다. 동시에 사형이 나타난 사실에 반가움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낙혼성도 그녀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무 음산해. 나도 기분이 이상하더군.” “정말 그래요. 아무래도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아요.” 낙혼성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슬쩍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래서 이렇게 사매에게 왔잖아.” 여운설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아이! 누가 보면 어쩌려구?” 낙혼성은 손을 여운설의 가슴 속으로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보긴 누가 봐, 또 보면 어때? 어차피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 그는 손 안에 잡히는 여운설의 탄력있는 유방을 주물렀다. “그래두…….” 여운설은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집요한 낙혼성의 손길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둘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이가 아닌가? 낙혼성은 여유를 주지 않고 더욱 깊숙이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미끄러뜨리고 있었다. 그는 슬쩍 옆에 앉으며 다른 손을 그녀의 치마 밑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스륵……. 낙혼성의 익숙한 손놀림에 의해 어느새 속바지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의가 그의 손에 의해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그녀의 치마 속은 완전 알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으음…….” 여운설은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에게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이미 그녀의 육체는 낙혼성의 교묘한 기술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낙혼성의 손가락이 그녀의 깊은 곳을 더듬어 왔다. 부드러운 해초의 능선을 쓰다듬어 오던 손은 더욱 깊은 계곡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에 따라 그녀의 허벅지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예민한 반응이 오는 것을 확인한 낙혼성은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 그는 아예 그녀의 상의마저 풀어헤친 것이다. 이미 남자를 경험하여 익을 대로 익어 있는 두쪽의 유방이 툭 튀어나왔다. 아름답고 풍만한 유방이었다. 낙혼성은 손으로 그녀의 유방을 애무하다가 서서히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그는 자신있게 그녀의 숲을 쓰다듬다가 허벅지로 내려갔다. 여운설은 애써 신음을 삼키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집요한 낙혼성의 애무에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침상에 반쯤 누운 채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그녀의 소중한 그곳은 완전히 개방되고 말았다. 낙혼성은 재빨리 어떤 문호를 향해 진입하고 있었다. “아…….” 여운설은 다급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의 몸은 거의 완전히 침상에 눕혀진 상태가 되었다. 몸의 반은 침상 위에, 다리는 아래쪽에 걸쳐지게 된 것이다. 낙혼성은 그녀의 다리 하나를 침상 위에 올리고 그녀로 하여금 침상 기둥을 잡게 했다. 그러니 자연 아주 음요한 자세가 되었다. 어느새 치마는 그녀의 허리 위로 올라가 있어 눈부시고 뽀오얀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여운설의 아래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말하자면 여인의 다리 사이에 그가 들어가 있는 형국이었다. “시…… 싫어요, 부끄러워요.” 여운설은 작게 저항하며 다리를 오무리려 했으나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낙혼성이 재빨리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으므로 그녀는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어.” 그의 음성은 약간의 신경질을 띠고 있었다. 여운설은 눈을 감아 버렸다. 내심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던 그녀로서는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낙혼성과의 관계는 이것으로 다섯번째였다. 그런데 갈수록 낙혼성의 행동이 거칠어지고 자신을 마구 다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운설은 그것이 섭섭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이미 자신을 책임져 줄 장래의 부군인 것이다. 여운설은 이점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쉽게 자신의 몸을 허락한 것이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처음에는 그토록 자상하고 예의 바르던 낙혼성이 점점 무섭게 변해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갈수록 변태적인 행동으로 일관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 대한 조심성과 최소한의 예의마져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후후!” 낙혼성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여운설의 모독적이고 변태적인 자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의 비부가 활짝 개방되고 치욕스러운 자세로 자신을 향해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는 그 어디에도 고귀하거나 우아한 모습은 없었다. 그저 하나의 싸구려 창부와 같은 모습이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여운설의 여체는 슬펐다. 물론 그런 감정을 낙혼성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손으로 그녀를 쓰다듬었다. 다리를… 허벅지를… 그리고 여인의 비지 안으로 그의 손이 흘러들었을때, 여운설의 몸이 퉁겨지고 있었다. 슬픈 것이 여체의 운명이런가? 그녀는 치욕과 슬픔이 어우러진 감정 속에서도 자신의 육체 깊숙한 곳으로부터 잔인하게 피어오르는 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몸 속 깊이 낙혼성의 손이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입술이 벌어지고… 허리와 엉덩이가 그녀의 의사와는 반대로 절로 들썩여졌다. 그녀는 고통과 희열이 범벅이 된 채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낙혼성은 틀림없이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설은 점차 수치심과 서글픈 감정을 잃어버린 채 육체의 열락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고 있었다. 낙혼성의 손이 더욱 빨리 움직여지며 여운설의 반응도 뚜렷이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이윽고……. “아, 안 돼요. 아파요…….” 여운설은 낙혼성의 악마적 희롱의 손길에 온몸이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낙혼성은 그녀의 애원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미 여운설은 그의 노리개에 불과한 것이었다. 낙혼성과 여운설. 이들 두 사형사매지간은 실상 독특한 내면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여운설은 화산파 장문인의 딸이었으나 낙혼성은 일개 하급무사의 아들로 화산에 입문했다. 낙혼성은 비천한 출신으로 화산에 입문할 당시 세상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 증오심이 오늘날의 그를 만든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가 무공을 익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멸시와 무시를 당해왔던가?특히 어릴적에 여운설로부터 받은 모욕과 놀림은 한(恨)이 되어 지금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 한을 잊지 않았다. 그가 여운설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했다. 그는 이제 화산의 후기지수로 떠올랐으며 장문인의 딸인 여운설도 그의 것이 되었다. 지금 고귀함과 권력의 상징이었던 여운설은 그의 눈 아래 누워 몸부림치고 있지 않은가. 그의 손놀림에 온몸을 비틀어대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는 한없는 위안을 느꼈다. 아니 강한 승리감에 도취되는 것이었다. 지금 낙혼성의 입가에는 음침하고도 만족스런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는 더욱 더 그녀를 공격했다. 그의 손놀림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제, 제발. 사형…….” 여운설은 펄쩍 뛰고 있었다. 그러나 낙혼성의 입가에는 더욱 음침한 미소가 번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더, 더 흔들어라. 그리고 애원해라. 이것이 너의 모습이다. 너도 역시 한낱 싸구려 창부에 불과한 계집이야!’ 그는 여운설의 허벅지를 더욱 벌렸다. 그리고 손을 강하게 움직였다. “앗!” 여운설은 비명과 함께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또다시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행동을 계속했다. ‘흐흐흐! 아직 멀었다. 지금부터가 진짜지.’ 그는 손을 거두어낸 후 이번에는 그녀를 꿇어앉게 했다. 여운설은 우뚝 서 있는 낙혼성의 발 아래 꿇어앉게 되었다. “사형.” 여운설의 얼굴에는 애처로운 빛이 어렸다. 그러나 낙혼성의 눈빛이 무섭게 번쩍이는 것을 본 그녀는 포기하고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지가 흘러내리고 그녀의 눈 앞에 어떤 물체가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공포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유린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파괴의 힘, 그 상징이었다. “…….” 낙혼성은 몇번이나 까무러치려는 여운설의 얼굴 표정을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배 아래 깔려 신음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무섭도록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나 얼굴은 조금도 흥분되지 않았고 도리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육체의 쾌락보다는 정신적인 학대,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출신에 대한 열등감, 모욕 받던 시절에 대한 한이 쌓이고 쌓여 그로 하여금 이런 비정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만든 것이다. 여운설은 그 악마의 덫에 걸린 한 가련한 여인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사이 좋은 화산의 사남매이자 장래가 행복해 보이는 한쌍의 연인이었으나 기실은 속으로 이렇게 썩고 곪아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많은 인간들이 이런 추악한 면을 위장하고 사는지도 모르지만……. “하아, 하!” 여운설의 신음은 더욱 높아만 갔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혼성은 계속 운동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괴기로운 광경일 뿐 조금도 낭만적이거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괴수에게 겁탈당하는 한 애처로운 미녀의 모습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방자한 것들.” 문득 어디선가 얼음장같은 음성이 조용히 울리는 것이 아닌가?낙혼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환청?’ 그렇다. 환청이 아니고서야 어찌 단 둘이 있는 방안에 그런 음성이 들리겠는가?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그러나 환청은 아니었다. 뒤이어 그 음성이 또 들렸으므로. 낙혼성은 벌떡 일어서려 했다. “아아, 사형.” 그러나 아래에 깔려 있던 여운설이 그의 허리를 꽉 잡고 있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낙혼성은 매정하게 여운설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악!” 그 바람에 여운설은 저만치 나가 떨어져야 했다. 그녀의 열에 들뜬 눈동자는 잔뜩 풀린 채 볼썽사납게 구석에 나동그라졌다. 낙혼성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소리지르는 대신 신형을 날려 한쪽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검을 잡아간 것이다. “!” 검을 움켜쥐자 약간 안심이 되었다. 비로소 그는 촛불의 그늘 속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다만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촛불의 그늘 속에서 스산히 빛나는 눈동자……. 낙혼성은 그 눈동자를 대하는 순간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섰다. 마치 지옥의 악귀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누, 누구요?” 그는 웃옷은 입고 있었으나 아랫도리는 발가숭이었다. 볼썽 사나운 꼴이었으나 옷을 입을 기력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가슴 가득 찬바람이 밀려드는 듯한 공포감만이 그가 느끼는 전부였다. 한편 여운설 역시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육체의 쾌락으로 온몸이 나른한 가운데 들려온 음성에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그늘 속에 스산하게 떠올라 있는 한쌍의 눈동자를! 순간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기분에 빠져 버렸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음성이 되어 나오지를 못했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낙혼성의 등 뒤로 가 숨었다. 옷을 입지도 못한 그녀는 여전히 알몸이었으나 부끄러움 따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채 전신을 가늘게 떨 뿐이었다. 낙혼성은 낙혼성대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누, 누구냐니까?” 그러자 비로소 그늘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칠 척(七尺)의 키, 전신은 나무처럼 비쩍 말랐으며 갈색의 장포를 포대기처럼 걸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안색은 횟빛에 가까울 정도로 창백한 대략 오순 가량으로 보이는 위인이었다. “…….” 그는 말없이 다가왔다. 아니 걸어왔다기보다는 미끄러져 온다는 표현이 옳았다. 낙혼성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빠졌다. 그러나 공포가 극에 이르면 도리어 용기가 나는 법이다. “으와아악!” 그는 갑자기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갈포인을 향해 뿌렸다. 쐐애애액! 검광이 푸르게 뿌려지며 갈포인을 덮어 씌웠다. 순간 갈포인의 손이 슬쩍 움직였다. 그렇다. 그저 슬쩍 들어올렸을 뿐이었다. 땅! 귀청을 찢는 음향이 울렸다. 갈포인의 손이 그대로 검을 쳐낸 것이다. “악!” 낙혼성은 검을 놓치며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손아귀가 크게 찢어져 버린 것이다. 호구가 찢어져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의 검은 저만치 나가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낙혼성은 호구가 찢긴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장이 멎을 듯한 경악으로 인해 그의 눈이 한껏 크게 부릅떠지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맨손으로 검을 날려 버리는 무공이 있다니.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꿈에도 이런 무공을 들은 적이 없었고, 또 눈앞의 위인이 누구인지, 왜 이런 상황이 도래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는 이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고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갈포인의 손이 다시 환상처럼 호선을 그렸다. “으윽!” 낙혼성의 입에서 참담한 비명이 터졌다. 그의 몸은 뒤로 날아갔다. 와장창-- 우지끈! 침대 위에 떨어진 순간 침상이 박살났다. 그러나 갈포인은 아무런 말없이 다시 그에게 미끄러져 갔다. 집요하고도 무자비한 살의를 물씬 풍기면서. 한편 여운설은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두면 장래의 자신의 부군이 될 낙혼성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무작정 갈포인의 등을 향해 날렸다. 동시에 화산의 벽공장력을 젖먹던 힘을 다 내어 뻗어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악!” 갈포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뒤로 흔들었다. 여운설은 비명과 함께 구석으로 처박혔다. 무시무시한 경기(勁氣)가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강타한 것이다. ‘쿵!’ 여운설은 볼썽 사납게 다리를 벌리며 벽에 처박혔다.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그녀는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갈포인은 다시 낙혼성에게 유령처럼 미끄러져 갔다. 낙혼성은 침상을 피로 적신 채 쓰러져 있었다. “……!” 그는 죽음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미 깊은 내상을 입고 있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니 다가오는 갈포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갈포인은 드디어 그의 가까이까지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히 손을 들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는 푸르스름한 청철빛이 흐르고 있었다. 보검을 맨손으로 날려 버린 손이다. 만일 그대로 내리쳐진다면 온몸이 양단날 것이다. 갈포인의 손이 완전히 올라갔다. 갈포인의 눈동자에는 죽음의 살기가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갈포인은 움찔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여운설이 어느새 기어와 그의 발목을 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갈포인은 발로 그녀를 걷어찼다. 휘익! 여운설은 공중으로 날아가 다시 처박혔다. “꺼져라.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 말은 여운설에게 한 것이었다. 물론 다시 한 번 덤벼들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여운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갈포인은 자신만은 죽일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그에게 대들었으나 실제 그녀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면 천만다행한 일이었으나, 그녀의 눈에는 다시 올라가는 괴인의 사수(死手)가 보이고 있었다. ‘아… 안 돼!’ 아무리 뭐래도 낙혼성은 자신의 남편감이다. 그가 죽는다면 여운설은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내심 안 돼!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아혈(啞穴)이 제압된 모양이었다. 갈포인의 손은 완전히 허공에 치켜졌다. 이제는 내리쳐지기만 하면 낙혼성의 목숨은 끝장나는 것이다. ‘아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눈 뜨고 장래의 부군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와장창--! “멈추시오!”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짐과 동시에 방안으로 누군가 날아든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낙혼성의 일생이 마감하는 그 극적인 순간에 방안으로 뛰어든 사람은 두 명이었다. 노팔룡과 하여령.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이 이곳으로 오게 된 내막은 이러했다. 3 “그만…….” “아냐, 조금만 더.” “글쎄 그만 하라니까요.” “왜 이래, 여령도 좋으면서.” 두 사람이 침상 위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벌이는 장난은 끊임없는 다툼의 연속이었다. 물론 노팔룡으로서는 신나는 달밤이었지만 하여령으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조용한 장원이라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자니 노팔룡의 탐구심은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아예 자신의 온몸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으며 해부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설득 작전을 펴기로 했다. “당신은 협객이죠?” “으응?” 갑작스런 엉뚱한 질문에 노팔룡은 고개를 들었다. 한참 그녀의 앙징맞은 배꼽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이지!”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럼 우리 밖으로 나가요.” “아니 그건 왜?” “아까 올 때 보지 못했어요?” “뭘?” “이 장원은 정말 이상해요. 마치 유령 소굴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새 노팔룡은 그녀의 말에 끌려들고 있었다. 하여령은 옳다구나 하고 재빨리 입술을 놀렸다. 동작을 멈춰준 노팔룡에 대해 눈물이 나게 고마와하면서. “이런 곳은 반드시 문제가 있어요. 어쩌면 아주 위험한 곳인지도 몰라요. 모두 각자의 방으로 갔지만 만일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어쩌죠?” “…….” 노팔룡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멀뚱한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하여령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얘기했다. “그러니 당신과 내가 밖으로 나가 이곳을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위험을 미리 방지하는 것은 협객이 할 도리라고 생각해요.” 노팔룡은 입맛을 다셨다. 속으로는 싫다고 하고 싶었지만 협객 운운하는데야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틈만 나면 협행을 하기 위해 강호에 나왔다고 큰소리 치지 않았던가. 이렇게 되어 할 수 없이 그녀에게 이끌려 때아닌 밤산책을 하게 된 것이다. 암흑과 적막에 싸인 괴괴한 장룡산장을 한바퀴 돌았다. 왠지 소름이 끼치게 음산한 곳이라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하며 곳곳을 살펴보던 차에 우연히 여운설의 방에서 나는 비명을 듣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갈포인의 동작이 중지된 채 돌아섰다. 그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들려진 채였다. 그러나 갈포인의 눈은 한광을 뿜은 채 노팔룡의 전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팔룡은 가슴을 펴며 말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길래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치려 하는 것이오?” 그는 이순간 하여령의 말이 옳다고 느끼고 있었다. 과연 장룡산장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마침내 협객의 도리를 하게 된 것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이때 하여령은 여운설의 알몸을 옷자락으로 덮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여운설이 알몸인 것과 낙혼성의 볼썽 사나운 몰골에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심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갈포인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서서히 팔을 노팔룡에게 겨누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날카롭게 뻗었다. 그것은 마치 한 자루의 칼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때 그쪽을 보고있던 하여령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저건!” 노팔룡은 멈칫거리며 하여령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때 갈포인의 손이 내려졌다. 츄아악! 푸른 기운이 노팔룡에게 쏘아갔다. “피해요! 녹수마장(綠手魔掌)이에요!” 하여령의 다급하고 뾰족한 외침과 함께 흰 기류가 뿜어졌다. 그녀도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갈포인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파팟……! 검에서 흘러나온 백기와 갈포인의 푸른 기운이 한 데 부딪쳤다. 달구어진 쇠가 물 속에 들어갈 때 나는 듯한 음향이 남과 동시 두 사람의 몸이 반대방향으로 튕겨나갔다. 쿵. 하여령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후 정신없이 몸을 비틀거렸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그녀는 한동안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그러나 갈포인은 안정된 동작으로 내려섰을 뿐더러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두 사람의 공력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하여령은 온통 놀란 표정이었다. ‘강해. 너무 강해!’ 그녀는 공포스런 눈으로 상대방을 보고 있었다. 사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그녀는 큰 손해를 보았다. 내장이 흔들린 것이다. 그녀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의 공력은 자신보다 분명 위였다. 강호에 나온 이래 그녀는 이런 강적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 한기가 치솟아오름을 어쩔수가 없었다. 하나 그에 못지않게 오기가 발동했다. 그녀는 공력을 끌어모아 보았다. ‘음…….’ 그러나 내장의 은은하던 아픔이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놀랍게도 단 한 번의 대결로 인해 어느새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녀는 체념한 채 상대방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상대방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때 노팔룡이 나섰다. 그는 하여령의 앞을 가로막고는 손을 들어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 보시오, 형씨. 미쳤으면 곱게라도 행동해야 동정을 받는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째 가망이 없는 것 같소?”가관이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상황에 이런 말을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팔룡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갈포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친듯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하여령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갈포인의 녹수마공에 피를 뿌리고 죽어가는 노팔룡을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괴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하여령을 노려볼 뿐이었다. 더구나 노팔룡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때 노팔룡은 하여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허허! 저 작자는 미친 것뿐 아니라 벙어리로군? 정말 골고루 병든 위인일세!” 순간 갈포인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는 누구냐?” 억양이 전혀 없는 음성이었다. “나는 노팔룡이란 협객이오!” 노팔룡은 늠연히 말하였으나 갈포인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냐?” 노팔룡이 다시 떠들려 할 때 뒤에서 하여령이 나섰다. “비키세요. 저 자는 나에게 물은 것이에요.” 노팔룡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랬었군. 어쩐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누구시죠?” 하여령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러나 갈포인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하는 것이었다. “너는 하숙하와 어떤 관계냐?” 순간 하여령의 몸이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떨렸다. “당, 당신은 누구세요?” 그러나 여전히 갈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더욱 더 암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깊은 담(潭)처럼. “어, 어떻게 저의 사부님을?” 갈포인이 막 입을 열려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청년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칠룡삼봉 등의 젊은이들이었다. 방안의 소란을 듣고 뒤늦게 몰려온 것이었다. 문득 당립이 앞으로 나서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 사숙님……!” 그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놀랐다. 그렇다면 갈포인이 바로 당가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동시에 이 장원의 주인인 셈이 아닌가? 중인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갈포인은 몸을 돌렸다. 그는 당립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에게도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말없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그들은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비로소 방 안을 둘러 보았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방이었다. 침상은 박살이 나 있고, 신기일화검 낙혼성은 아직도 널브러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가관인 것은 그의 하반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는 알몸이라는 것이었다. “어맛!” “에그머니나!” 삼봉 중 이봉인 여인들은 무엇을 보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리 무림의 여협들인 그녀들이라도 이런 광경에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대충 겉옷만 걸치고 있는 여운설과 아랫도리가 알몸인 낙혼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연중 짐작이 가는 터라 더욱 더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들이었다. 칠룡에 속한 청년들도 몹시 어색한 표정들이었다. 다만 당립만은 일행을 이곳에 이끌고 온 장본인이라 언제까지 침묵할 수는 없는지 바닥에 떨어진 옷을 들어 낙혼성의 하반신을 덮어주며 헛기침을 발했다. “험, 낙형께서 무척 놀라신 모양입니다.” 물론 그의 말에 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여령, 왜 그래?” 팔룡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여령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아무것도 아녜요.” 하여령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듯한 방 안에서 젊은이들은 왠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잠을 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둘 방을 떠나고 있었다. 4 아침이다. 괴장원의 아침은 더욱 스산했다. 밤에는 몰랐으나 아침에 보니 장원은 넓고 황량했으며 화원이나 동산 등도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아 그야말로 흉가(凶家)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지난 밤의 소동으로 인해 견용絹湧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 푸석한 얼굴로 대청에 모여들었다. “…….”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서로가 입을 열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특히 신기일화검 낙혼성과 채화옥녀 여운설은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중인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하여령은 시종 무엇을 생각하는지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저 신나게 배를 채우고 있는 사람은 노팔룡뿐이었다. 그는 언제 어느 환경에서도 늘상 잘 적응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가요.) “응? 어디로?” (갈 데가 있어요.) 하여령은 전음으로 말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노팔룡은 자신에게 배당된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중인들은 그들이 먼저 자리를 떴어도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산책을 하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여령이 찾아간 곳은 장원 깊은 곳에 위치한 후전이었다. 후전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예의 중년인이 나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들어가면 안 되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장주님께서는 외인을 만나지 않습니다.” 하여령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꼭 만나야겠어요.” 중년 집사의 안색이 변했다. “낭자. 이러시면…….” 그때 문득 안쪽으로부터 한가닥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여보내게.” 집사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어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난 이십여 년간 그의 주인은 한 번도 외인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두 명의, 그것도 젊은 남녀를 만나겠다니 그야말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들어가시오.” 그가 길을 열어주자 하여령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노팔룡은 그저 그녀의 뒤를 따르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후전은 다른 곳과는 달리 꽤 손질이 되어 있어 비록 황량한 느낌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집사에 의해 하나의 내전으로 안내되었다. 그곳 역시 황량한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의 갈포괴인이 창가에 면한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여령은 다짜고짜 물었다. “선배님은 대체 누구시죠?” 순간 갈포인은 대답 대신 엉뚱하게 물었다. “숙하는 잘 있느냐?” 하여령은 망설이다 기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포인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서글픈 듯도 싶고 안타까운 듯도 싶은 그런 착잡한 눈빛이었다. “인연이란 정말 질기고도 질긴 것이로구나.” “……?”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령은 갈포인이 왠지 그다지 멀지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녀 자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예감마저 들고 있었다. 한편 노팔룡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대방은 하여령의 질문에는 하나도 대답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여보시오, 대화란 피차 예의를 지켜야 하는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당신 말만 하니 너무하지 않소?” 하여령은 깜짝 놀라 얼른 그를 제지시켰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왜 그래? 난.” 노팔룡은 항의하려다 하여령의 눈빛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여령의 눈에는 애원의 빛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험. 내가 참아야지.” 이때 갈포인의 음성이 들렸다. “앉거라.” 그런데 방 안에 마침 의자는 한 개뿐이었다. 당연한 듯이 노팔룡이 앉으려 하자 갈포인이 눈을 번쩍이며 차갑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 노팔룡은 멀쑥해졌다. 그래도 그는 투덜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 참, 의자 하나 갖고 꽤 생색이네. 기왕이면 하나를 더 장만할 것이지.” 뭐라고 더 투덜대려 했으나 하여령이 눈짓을 하는 바람에 꾹 참는 노팔룡이었다. 하여령은 얌전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 갈포인은 다시 침묵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사부님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하나 갈포인은 말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의 입에서 무거운 음성이 떨어졌다. “이제 그만 떠나라.” 단지 그뿐이었다. 그리곤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순간 이제껏 화를 꾹 참고 있던 노팔룡이 펄쩍 뛰었다. “아니? 이 양반이 누굴 흉내내네. 며칠 전에도 웬 노인이 그러는 바람에 아직도 속이 뒤집혀져 있는 판국에?” 그 말에 갈포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어떤 의문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눈길을 돌려 하여령을 보며 묻는다. “누구를 만났느냐?” 하여령은 왠지 갈포인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며칠 전 절벽에서 떨어져 괴노인을 만난 것을 이야기했다. 갈포인은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무거운 신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으으음. 그분이.” 분명 갈포인은 괴노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령은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었다. “그분이 누군가요?” 그러나 갈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분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알려 줄 순 없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노팔룡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갈포인의 태도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하여령이 그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공손히 대하는 것까지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하여령을 재촉했다. “여령, 빨리 가자. 더 이상 있다간 나까지 돌겠어.” 하여령은 눈짓으로 노팔룡을 나무란 뒤 다시 물었다. “노선배님께서 어젯밤 쓰신 무공은 분명 녹수마공이죠?” 갈포인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다시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러나 하여령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대답을 듣지 못했으나 또 다시 묻고 있었다. “선배님은 실심객(失心客)이시죠?” “…….” 또 다시 침묵. 하여령으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럼 후배는 이만 물러가겠어요.”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돌아서려 하자, “이걸 가져가라.” “……?” 그것은 하나의 옥비녀였다. 여인들이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인 것이다. 하여령이 그것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해 하자 갈포인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너와 인연이 있는 물건이니 가져가거라.” 하여령은 옥비녀를 멍하니 보고, 또 갈포인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 속에는 많은 의문이 있었으나 조금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노팔룡은 이미 밖으로 나가 그녀를 기다리며 서성대고 있었다. 그는 짜증이 나도 많이 나 있었던 것이다. 제18장 상상 밖의 무위(武威) 1 소림사(少林寺). 중원무림의 성지 소림사는 언제나 신성한 기운을 풍긴다. 이곳을 찾는 향객들이나 무림인들은 소림사 인근에만 와도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어 행동을 조심하곤 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 산문 밖을 쓸던 소사미는 멀리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는 빗자루를 세운 채 다가오는 인영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점점 가까워지자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웬 노인이 새벽부터 이곳을……?’ 소사미는 다가오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곧 쓰러질 듯하는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노인을 부축해 주기 위해 비를 버려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곧 그는 자신이 착각을 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노인이 아니었다. 단지 허리가 굽어지고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하얗게 새어있을 뿐, 얼굴은 젊디 젊은 청년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팔순 노인처럼 허리가 구부정할 뿐더러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청년 아닌 청년, 그는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눈동자는 정기를 잃고 흐리멍텅할뿐더러 온 얼굴에 허탈함과 탈진된 기운이 흘러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이 허약해져 있었다. 한데 누가 알랴? 그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소사미는 그에게서 꺼져가는 음성을 들었다. “날 소림 하원으로…….” 소림하원에 위치한 별각. 검박한 실내는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착 가라앉은 인상을 준다. 이곳은 주인은 늘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고 그를 찾는 방문객들은 또 이곳의 주인과 이 실내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백선결은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째서 아직 엽무검에게서 소식이 없을까? 혹시 그에게 당한 것이…….’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설사 그 자가 강하다고 해도 엽무검이라면 능히 도주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아직?’ 생각에 생각이 이어진다. 요즘 들어 그는 매사에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현상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있게 모든 일을 처리해왔고 그런 자신의 능력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상황이 달라졌다. 그렇다. 바로 노팔룡이란 인간을 만나게 된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런 것을 인식할 때마다 급히 고개를 젓곤 하는 그였다. 그는 그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득 밖에서 한가닥 보고가 들어왔다. “맹주님, 어떤 자가 급히 맹주님을 뵙자고 합니다.” 백선결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른 새벽이다. 이 시간은 언제나 그가 좋아하는 시간으로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하들도 알고 있었다. 웬만한 일들은 이 시간을 피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도 보고를 했다면 필시 보통 일은 아닌 것이다. “누가 나를 찾느냐?” “예, 그것이 자신을 엽무검이라 하온데….” 순간 백선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엽무검은 자신의 비밀병기이자 오른팔이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심한 혼란에 빠졌다. 엽무검은 자신만의 직속 수하로 무림맹에서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직접 자신에게 보고토록 되어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자신이고, 하나는 도운하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엽무검이 이런 절차를 통해 자신에게 오다니. 언뜻 백선결은 불길함을 느끼며 언성을 높였다. “들라 하라!” 잠시 후,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는 순간 백선결은 다시 한 번 혼란을 느꼈다. “넌…… 누구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흐흐흑!” 그는 오열하고 있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백선결은 부르르 떨었다. “고개…… 고개를 들어라.”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 백선결은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이 이 세상에서 그를 그토록 놀라게 할 수 있겠는가? 설사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백선결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얼굴은 분명 자신의 비밀병기인 엽무검이다. 헌데! 머리가 백발이 되었으며…… 눈빛은 혼탁하게 정기를 잃고 있었다. 도저히 그가 얼마전 전신에서 칼같은 기운을 풍기던 일급의 수하 엽무검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과거가 있었던가 싶을 절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백선결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흐흐흐…….” 엽무검의 눈과 코로 진물같은 액이 흘러나온다. 그는 추해졌다. 과거의 영활함은 간 곳이 없고, 정말 한순간에 육십 년이나 늙어버린 것이다. 엽무검! 그렇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한 명의 그와 똑같은 살수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팔룡을 기습하기 위해 자리를 고르다가 하필이면 재수없게 한빈을 만났던 것이다. 재수가 없었긴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엽무검을 만남으로 인해 신세를 망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운에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대치 상황은 무려 일주야를 지속되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뿐더러 지닌 바의 모든 정력(精力)과 기운을 소모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상대방이 두려워서였다. 만일 먼저 움직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그런 똑같은 생각 때문에 엽무검은 온 정력을 소모해 버렸다. 만일 일주일째 되는 날 한 마리의 노루가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두 사람의 대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필시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노루가 그들 사이에 뛰어든 순간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서로 상대방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그길로 죽어라 달려간 것이었다. 단 일주야 사이에 엽무검은 살수로서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그는 이제 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웃지 못할 희극이었다. “허…… 허어. 허허! 이런 일이!” 백선결은 그저 그런 허탈한 웃음을 흘릴 도리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천기를 헤아리는 천하무림맹의 맹주라도 이런 사태 앞에서는 그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팔룡 그자에게 언제 그런 초고수의 수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엽무검이 만났다는 인물이 노팔룡의 수하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그는 노팔룡이란 존재에 대해 더욱 더 거대한 의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으흐흐…….” 엽무검은 진물을 흘리며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이제 살수로서의 모든 것이 끝난 그에게 남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 백선결은 그의 오열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입술을 무섭게 깨물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거실을 꾸며놓고 사는 인간.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화려하고 최상급에 해당되는 물건으로 꾸며 놓았다. 그가 걸친 의상은 물론 집기나 일용품까지도 당금의 황제조차 부러워할 것들임에 틀림없었다. 2 금륜맹(金輪盟). 무림천하를 공포와 피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는 패도단체가 아니던가. 지금 금륜맹의 맹주인 그가 반쯤 미칠 지경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한빈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앞으로 왔을 때는 두명의 부축을 받고 왔을 지경이었다. 한빈은 이제 완전히 기력이 쇠잔하여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부축을 받고 와 엎드린 채 꺼져가는 음성으로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역시 엽무검과 마찬가지의 말이었지만… 금륜맹주는 서서히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시선을 허공에 돌리고 있었다. “내가 그자를 너무 얕보았군.” 그도 역시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엽무검을 노팔룡의 수하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문득 고개를 번쩍 들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사자대장(獅子隊將)을 들라 하라!” 3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완벽한 인간이 누구냐고.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야 물론 인의대협(仁義大俠) 백선결이오.” 이번에는 당사자인 백선결에게 물어보자.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나요. 만약 내가 아니라면 나는 더욱 노력하여 내가 될 것이오.” 백선결이…… 그런 백선결이 말이다. 지금 한 사나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을 샌다면 세인들이 믿겠는가? 백선결, 그는 지금 삼 경이 훨씬 넘은 시각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별각 밖에서 계속 뒷짐을 지고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초조함으로 얼룩진 표정을 짓고 있어 그를 아는 인간이라면 이런 그를 보고 놀랄 것이다. 왜, 왜인가? 그는 그렇게도 자신이 없단 말인가? 사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끝없이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때때로 자신마저도 속이는 그런 성품이기에. 문득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교교한 가운데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달빛을 받으며 달빛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걸어오는 여인이란 하나밖에 없다. 도운하. 바로 그녀인 것이다. 도운하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없이 백선결의 곁에 서서 달빛을 감상한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물론 달빛을 감상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게다. 그녀의 모옥에서도 달빛은 얼마든지 감상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분명 이유가 있어 백선결을 찾아왔을 것이다. 문득 혼잣말인 듯 도운하의 그윽한 음성이 들린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자는 제가 맡겠어요. 그리 아세요.” 순간 백선결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수없이 그것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나만으로 충분하오. 그는 그만한 가치가 없소.” 도운하는 그를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예요.” “……!” 달빛 속으로 걸아가는 도운하의 모습은 마치 달무리가 둘러싸고 있는 듯한 기분을 준다. 백선결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의 말을 한 번도 반박할 수가 없고 또한 그녀에게 언성을 높여본 적도 없다. 그는 도운하를 향해 입술을 열었으나 그저 입술만 달싹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백선결은 한숨을 쉬었다. 다만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운하… 어찌하면 그대의 마음을 내게 열어 주겠소? 어찌하면 그대가 과거의 일을 망각하여 주겠소?’ 백선결은 오늘처럼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는 하염없이 달빛을 바라보며 오늘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도운하는 자신의 모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방은 언제나 정적이었다. 그녀가 있으면 언제나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변하는 방이었다. 산새를 부르면 산새가 날아들어 치마폭에 앉아 놀고, 다람쥐를 부르면 언제든지 방안 가득 다람쥐가 모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밖을 향해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계시면 모두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들은 육 인의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육순에서 오순 사이의 노인들로 어쩐지 표정이나 눈빛이 한결같이 닮아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일신에 걸친 의복도 한결같은 마의였다. “떠날 준비를 하세요. 여행을 가야할 거예요. 내일쯤이요.” 4 독고완(獨孤完). 그는 금륜맹 내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는 항상 하는 일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 소일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 해야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장기를 두는 정도였다. 그래도 아무도 그를 간섭하는 자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금륜맹의 어느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분이 높지도 않았다. 그는 아무런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간혹 가다가 그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그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궁금해했지만 금륜맹 내의 그 누구에게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에 대하여 관심이 흐려졌고 종내는 아주 무심해져 버리게 되었다. 독고완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나오면서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가 금색륜이 수놓아져 있는 무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인들은 아연하여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옷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금륜맹 내에서 부맹주급 이상만이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는 맹내에서도 극히 비밀스러운 어떤 보직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때가 되지 않아 그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한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그의 소매 끝에는 작은 사자(獅子)의 문형이 작게 수놓아져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금륜맹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오두막집에서 나오는 순간 자신들의 주위에 있던 극히 평범했던 사람들이 다수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5 노팔룡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 놈의 장룡산장이 문제였다. 문제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내심 수도 없이 산장과 산장의 주인을 향해 욕을 하고 있었다. 사정은 바로 이렇다. 그들이 산장을 떠난 직후부터 하여령이 변해 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눈에 띄게 변해 버렸다. 그녀는 계속 침울할 뿐만 아니라 뭔가를 깊이 생각하느라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하나 낮에는 괜찮았다. 정작 문제는 밤에도 그 태도가 계속된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은 노팔룡이라고 해도 약간의 눈치는 있는 법이다. 만일 이런 상태의 그녀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벼락이 떨어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그였다. 그래서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저 오늘 밤만은, 오늘 밤만은, 하면서. 그는 냉담하게 돌아누워 있는 하여령을 바라보며 끝없는 상상 만으로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동행이 많다는 점 정도였다. 더군다나 꼴보기도 싫던 신기일화검이 그날의 사건 이후로는 잔뜩 풀이 죽어 버려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그에게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그가 벌써 육 일째 여령을 굶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 여령 고파!’ 갈미목(葛彌木). 청해를 지나 서쪽으로 삼백여 리쯤 가면 갈미목이 나온다. 이곳은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숲은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고, 계곡에는 맑은 물이 기운차게 흐르며 숲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푸른 하늘은 눈이 시리게 맑아 보였다. 이름모를 산봉은 갖가지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고송의 자태는 기기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탈속하고 신선경에 든 것처럼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이 갈미목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폭포였다. 이름하여 선녀폭(仙女瀑)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전설이 어려 있었다. 선녀가 인세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이 폭포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었다. 꽈르르르릉……. 굉음을 울리며 쏟아져 내리는 선녀폭. 높이가 삼십여 장이나 되는 웅장한 폭포이되 아주 섬세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폭포의 비말과 자욱한 물안개가 마치 선녀의 옷자락처럼 휘날리는 곳이었다. 언제부턴가 선녀폭을 마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바위 위에는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 사나이는 백의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금빛의 륜이 새겨져 있어 몹시 기이한 느낌을 준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 사나이의 눈빛은 아주 담백하게 가라앉아 있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말없이 폭포수를 바라보던 사나이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어느새 뒤에는 한 사람이 부복하고 있었다. 사나이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들이 도착했느냐?” “예, 지금 막 갈미목의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준비는?” “모든 인원이 잠복을 끝냈습니다. 이젠 대주(隊主)의 명령만 떨어지면…….” 그 말에 금륜복을 입은 사나이는 손을 흔들었다. “알았다.” 그는 짤막히 말을 마친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려 묵묵히 폭포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심각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맹주께서 직접 나를 불러 이 일을?’ 그는 금륜맹 내에서도 극히 몇몇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독고완, 사자대(獅子隊) 라는 특수조직의 대주이기도 하다. 사자대는 금륜맹의 극비조직으로 웬만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별동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사자대에 속한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평소 맹내에서 각기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다가 일이 있으면 나서는 자들이었다. 지금 독고완은 금륜맹주의 특별명령을 받고 출동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은 맹의 안위가 달린 일이 아니고서는 나서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인간이었다. 말하자면 금륜맹의 최후 보루이자 무기인 것이다. 한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번의 출동을 맹주가 직접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전 사자대원을 총동원케 한 일이었다. 그것도 기껏 단 한 명을 척살키 위해서 말이다. 만일 그 대상이 중원무림맹주 백선결이라면 또 모른다. 놀랍게도 이름도 못 들어본 한 명의 무명잡배를 처치하는 것이 금륜맹주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상황은 명백해진다. 그는 맹주를 믿는다. 상대방은 분명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독고완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폭포수를 바라보며 안정을 다지는 것이었다. 맹주께서는 나를 믿는다……. 그 믿음은 절대로 깰 수 없다……. 설사 이번 일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고 말리라……. 독고완의 담백하던 눈빛이 무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먼저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띠를 매만졌다. 허리띠는 그의 애검(愛劒)으로 일종의 연검(軟劒)이었다. 연검을 만지자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좋다. 준비는 끝났다. 이젠 승부다.’ 6 노팔룡은 눈알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기가 막힌 경치가 연속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절경을 대하자 더욱 자신의 고향인 황룡산이 떠올라 기분마져 묘해지고 있었다. 일행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자연 서로간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 장, 이 장, 삼 장……. 차츰 간격이 벌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울창한 수림과 험한 지세를 헤쳐나가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척에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는지는 까맣게 모르는 채. 펑! 문득 뒤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하늘을 쪼갤 듯한 함성이 터졌다. “쳐라!” “모조리 죽여 버려라!” 쐐애액! 꽈르르릉! 갑자기 사방으로부터 폭음과 성난 고함, 살벌한 경호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숲을 뒤흔들었다. 일행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여령도 안색이 변해 부르짖었다. “기습이에요!” 그러나 노팔룡은 여전히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는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하여령은 다급한 마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리 뛰고 저리 날으는 인영들만 보일 뿐 상황을 알 도리가 없었다. “빨리 빨리……! 뭐하는 거예요?” 차창! 꽈르릉! 폭음과 쇳소리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뒤쪽에 쳐져있던 일행들이 낭패한 표정으로 다급히 쫓겨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부터 암기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일행을 습격하는 자들은 언뜻 보이는 숫자만으로도 수백 명이 넘고 있었다. 한편 노팔룡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문득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십여 명의 금륜맹 무사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쇄애애액! 차창! 하여령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노팔룡이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그를 보호하랴, 자신에게 덤벼드는 무사들을 물리치랴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당신 뭐하고 있는 거에요?” 빼액! 고함을 치는 바람에 노팔룡은 더욱 허둥거렸다. 일행은 쫓기고 쫓겨 분지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사지(死地)로 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밀림 속에 있으면 적은 수로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지로 쫓겨나면 포위되어 집중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는 것이었다. 즉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차창--! 꽈르릉! 금륜맹의 사자대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막강한 공격력으로 칠룡삼봉 등을 공격했다. 그들은 엄청난 양의 암기를 쏘아대면서 질풍처럼 산발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노팔룡은 노팔룡대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본래 그는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을 달통(?)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사방에서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정신없이 암기가 쏟아지고 있으니 정신을 집중할래야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계속 바보처럼 굴 거예요? 이러다 다 죽는다고요!” 하여령은 비오듯 쏟아지는 암기를 쳐내며 고함을 빽 질렀다. “여, 여령, 잠시만 기다리라구…… 내 금방 저 놈들을 요절내 버리고 말 테니.” 마침내 노팔룡은 그렇게 말하고 억지로 배에 힘을 잔뜩 주었다. 소중히 보자기로 감싸놓았던 진천검을 뽑아든 채. 다급한 가운데서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그의 묘한 자세 때문이었다. 더구나 하여령으로서는 지난날 이 우스꽝스런 검법의 위력을 경험한 바 있지 않은가. 그녀는 계속 검을 휘둘러 암기를 막아내며 곁눈으로 노팔룡을 바라보았다. 노팔룡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하여령은 침을 삼켰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악! 이게 아닌데.’ 기어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노팔룡의 내부에서 또 다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니 단전 어림에 뜨거운 진기가 한꺼번에 폭발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안 돼!” 그는 허둥대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여령은 그를 힐끗 보고는 눈을 크게 뜰 뿐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괴상한 모습인데……?’ 그렇다. 노팔룡은 진천검을 잔뜩 움켜쥔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요상한 모습으로, 마치 측간에 막 주저앉으려는 듯한 모습인 것이다. 이 급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입가에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쳐라!” 호통이 들리며 수십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숲을 가로지르며 날아왔다.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일류급들이었다. 하늘을 까맣게 덮는가 싶더니 무시무시한 검풍과 장력이 바위를 부수고 대지를 으깰듯이 짓눌러 왔다. 일행은 사색이 된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지는 뒤쪽이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데다가 금륜맹 사자대의 무공은 경천동지할 지경이었다. 칠룡삼봉도 중원무림에서는 내로라하는 신진고수들이었으나 사자대의 기세에는 심장이 오그라들 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 풋내기에 불과했다. 실전경험이 태부족이었고 이미 그들 중 반 이상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실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더 이상 몰릴 곳도 없는 분지의 막바지에 몰린 채 그저 이를 악물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아아아아--!” 돌연 계곡을 온통 뒤흔드는 듯한 괴성이 울려퍼졌다. 칠룡삼봉은 물론이려니와 하여령까지도 깜짝 놀라 소리가 울린 곳을 돌아보았다. “저, 저럴 수가……!” 노팔룡이었다. 그는 진천검을 휘두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아니 날아간다기보다는 전광처럼 쏘아가고 있었다. 실로 섬광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쏘아간 것이다. “드, 드디어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을……!” 하여령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라! 과연 그녀의 감격에 보답이라도 하듯 상황은 백팔십도로 변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아우성과 단말마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사자대의 무사들은 노팔룡에 의해 작살이 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섬광처럼 쏘아오는 것을 보았을 뿐, 방어하려 했을 때는 이미 추풍낙엽처럼 사지가 잘려 날아가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자대는 그저 번쩍 하는 섬광을 보는 순간 팔과 다리가, 목과 허리가 분리된 채로 구천지옥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한편 노팔룡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의 내부에서 진기가 역류하여 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지 무슨 절학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공력은 가히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그 공력이 검끝으로 뻗쳐나와 가공할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수백명의 무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사이로 날아들어간 그는 의식이 혼미한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마구 진천검을 휘둘렀다. 진천검에서는 폭죽과도 같은 검기가 뻗어나가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비규환! 아니 아수라지옥이 재현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수백 명의 사자대는 믿을 수 없게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팔룡은 벌써 칠 팔십 명을 일검으로 도륙내면서 계속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신형은 멈추고 싶어도 도무지 멈출 도리가 없었다. 한편 독고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저… 저럴 수가?’ 자신의 수하들이 누군가? 천 명에 하나 고르고 고른 용자들이며, 금륜맹의 일급고수들이 아닌가.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무더기로 노팔룡에 의해 도륙나고 있으니 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십 인 이상이면 한 문파의 장문지존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단련되고 정예화된 수하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앞에서 수하들은 맥을 못추고 허수아비처럼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방의 단 일초로 말이다. 독고완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저, 저 자는 사람도 아니다. 귀…… 귀신이야!” 독고완은 문득 악을 쓰듯 외치고 있었다. “모두 후퇴하라! 빨리 후퇴하라……!” 그는 미칠 것 같았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도망치는 것만이 상수라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다가는 단 한 명의 수하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독고완은 식은땀을 흘리고 손을 마구 내저으며 퇴각을 명령했다. 불행중 다행인지 노팔룡은 검광을 뿜으며 그의 수하들 사이를 관통하여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사자대는 이미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그들은 독고완의 명령이 떨어지자 걸음아 나 살려라는 식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바닥에 즐비한 시신들만 남기고 살아 있는 사자대는 퇴각하고 말았다. “…….” 분지는 죽음같은 적막에 싸였다. 방금 전에 벌어졌던 경천동지할 사태는 거짓말처럼 침묵 속에 잠긴 것이었다. 칠룡삼봉과 하여령은 넋을 잃은 채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노팔룡의 신위! 그것은 무림개사 이래 들은 적도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여령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이가!’ 그녀는 비로소 노팔룡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자대를 일검에 도륙내고 사라졌던 노팔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 어디로 가셨을까?’ 하여령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노팔룡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제19장 진짜 뇌진자(雷震子)를 만나다 1 벌써 반 시진째 노팔룡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힐끔 노인을 바라보다 눈길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리곤 했다. “……!” 노인은 매서운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직 한쪽 눈으로 말이다. 외눈 하나를 부릅뜬 채 노팔룡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게속되는 침묵이 점점 답답해져 왔다. ‘젠장. 좋다. 어차피 매도 일찍 맞는 것이 낫지. 사실 당신의 눈에 멍이 든 것이 어째서 내 책임이란 말인가? 뻔히 보고도 피하지 않은 당신이 잘못이지!’ 그는 노인의 눈치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노인은 여전히 퉁퉁 부은 한쪽 눈을 감싼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노인장.” 그러나 노팔룡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곧이어 노인의 벼락치는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야, 이 놈아! 네놈은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내가 무슨 종이라도 되고 네놈이 공이라도 된단 말이냐? 들이받게?” “하, 하지만.” 뭐라 변명을 하려했으나 노인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기만 했다. “저, 저 놈이 또 무슨 할 말이 남아서. 이 놈아! 내가 무슨 전생의 원한이 많아서 만날 때마다 이 고생이냐?” 노인은 일단 입을 열자 생각할 수록 화가 난다는 듯 폭포처럼 줄줄이 말을 쏟아 놓았다. “이 놈! 저번에는 느닷없이 절벽에서 떨어져 득도 일보직전에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지를 않나, 이번에는 모처럼 시간을 내 유람차 절경을 감상하는데 다짜고짜 남의 눈탱이를 박살내? 이 놈아! 너도 눈이 있으면 이걸 봐!” 노인은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운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눈은 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올라 거의 감겨 있는 실정이었다. 노팔룡은 재빨리 눈을 돌려 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무척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니 눈 뜨고 노인의 퉁퉁 부운 눈두덩이를 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노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노팔룡은 장장 네 시진 동안이나 설법아닌 설법을 들어야 했다. 노팔룡으로서는 그저 나 죽었소!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노인의 한도 끝도 없는 설법을 꾹꾹 참으며 들어야만 했다. 물론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워낙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설법은 끝이 없었다. 아무리 참을성 강한 노팔룡이었지만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할 만큼 완전히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이 놈아, 이제 너의 잘못을 알겠느냐?”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수십 번이나 말이다. 그제서야 노인은 화가 어느 정도 풀린 듯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는다. “그나저나 네놈은 어쩐 일로 이리로 날아왔느냐? 혹시 그 계집한테 채이기라도 한 것 아니냐?” “아, 아닙니다.” 노팔룡은 손을 저었다. 이어 그는 두서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글쎄 악당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막 검법을 펼치려는데…….” 그는 뒤죽박죽이 되어 그간 일어났던 일의 앞과 뒤를 섞어가면서 대충 설명했다. “……?” 노인은 도시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더우기 노팔룡은 빨리 그와 헤어지기 위해 아주 빨리 말했으므로 더욱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이 놈아! 천천히 말해. 그러니까 그 진우주… 어쩌구 하는 검법의 기수식을 펼치다가 이쪽으로 날아왔단 말이냐?” “그, 그런 셈이죠.”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인이 자신의 말을 금방 알아들은 것이 만족스러워 빙긋 웃기까지 했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휙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엇? 무슨 짓이오?” “가만 있어, 이 바보같은 놈아.” 노인은 호통치더니 갈쿠리같은 손가락으로 노팔룡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노팔룡은 몹시 기분이 나빠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의 손목은 마치 단단한 쇠갈쿠리에라도 꿰인 듯이 움쩍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노인장이 무슨 힘이 이리 세?’ 노팔룡은 내심 투덜대며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노인이 특별히 그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노인은 그의 맥문을 잡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지긋이 눈마저 감고 있는 것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도록 노인은 맥문을 잡고 있었다. 마침내 노팔룡은 짜증이 났다. “대체 뭘 하는 거요?” 그러나 노인은 그의 맥문을 잡은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노인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여러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엔 의혹의 표정이었다가 나중엔 몹시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는 손목을 놓아 주고 물었다. “이 놈아, 너는 전에 어떤 신기한 영약같은 것을 먹은 적이 있느냐?” “영약이요?” 어리둥절해 하는 노팔룡을 보던 노인은 질문을 바꾸었다. “과일이나 무슨 나무 뿌리 같은 것 말이다.” 노팔룡은 히죽 웃었다. “그런 것이라면 숱하게 먹었지요. 황룡산에서는 그런 것이 내 식사가 되었으니까요.” 노인의 얼굴에 은근히 짜증이 어리고 있었다. “이 녀석아, 그런 것 말고 특별한 것 말이다. 혹시 어떤 이상한 과일을 먹고 잠이 들었거나 몸에서 열이 난 적이 없었느냐?” 노팔룡은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알았소?” 이어 그는 자신이 먹은 금령선과 이야기를 했다. 교룡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금령선과를 우연히 따먹은 얘기를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 노인은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경악하고 있었다. ‘세상에! 금령선과를 여덟 알이나 먹었단 말인가? 어쩐지… 그래서 이 놈의 내공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높았구나. 다만 내력으로 융화되지 못하고 또한 기를 풀어주지 않아 제멋대로 치달렸었군!’ 노인의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묘한 신색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노팔룡의 관상(觀相)을 살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은 곧 마음의 거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모저모로 노팔룡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 보더니 내심 뇌까리고 있었다. ‘분명 심지가 밝고 고른 녀석이기는 한데.’ 노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결정하기 힘든 중대한 사항을 놓고 번민하는 표정이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이따금 흰 눈썹을 가늘게 떠는 것이 좀체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편 노팔룡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어떻게 하면 노인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만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는 얼른 다시 돌아가 하여령을 만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강호에 나온 이래 단 한시도 그녀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문득 노인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났다. ‘좋다. 어차피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전수해야 할 무공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도 인연인데 차라리 이 녀석에게…….’ 노인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 놈아, 혹 나의 무공을 익혀볼 생각이 없느냐?” 노팔룡은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코웃음을 쳤다. “노인장, 혹시 노망 드신 것이 아니오?” “뭐, 뭐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내가 도대체 누구요? 바로 천하제일고수 뇌진자를 사부로 둔 사람이란 말이오. 즉 당대의 천하제일 고수인 셈이란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노인의 잡술을 배우려 하겠습니까? 노인이 나의 무공을 배운다면 모를까?” 그 말에 노인의 안색은 붉으락 푸르락해진다. 도무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 이 놈! 고연 놈… 네놈이 노부에게 감히 사기를… 으음!” 하나 노인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노팔룡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깨우쳐 주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실을 밝힐 수야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사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천하의 천치같은 노팔룡이 그 사실을 곧이 곧대로 믿어 줄 리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도리어 그를 미친 노인 취급을 할 것이 분명한 노릇이었다. 마침내 얼굴이 수십 번이나 변해가던 노인은 생각을 바꿔 먹은 듯 했다. 노인은 급기야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 놈아, 무공이란 꼭 최상승의 절기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무공도 쓸모가 있는 법이다.”“…….” “한 번 생각해 봐라. 방금 전만 해도 그렇지. 소위 천하제일이라는 작자가 조무라기 몇을 상대하는데 그 진우주… 라는 당대제일의 검법을 사용한 것은 조금 우습지 않냐?” “…….” 노팔룡은 문득 그럴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은 아무때나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약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노인은 더욱 음성을 간드러지게 하며 그를 유혹했다. “세상 일이란 크고 작은 도리가 있는 법이다. 닭을 잡는 데는 닭잡는 칼을 쓰고 소를 잡는 데는 소잡는 칼을 써야 제격인 것이다.” 노인의 설득은 끝이 없었다. 노인은 세상의 이치가 어떠니, 규범이 어떠니, 진리가 어떠니 하면서 노팔룡의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도록 설명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무공을 노팔룡이 배우도록 하기 위한 애처로운 수작(?)인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팔룡은 마침내 귀찮아졌다. “좋소. 그럼 한 번 배워 보겠소. 그런데 노인의 그 닭잡는 무공이란 어떤 것이오?” “뭐…… 닭!” 노인은 기가 막혔다. 그가 누구인가. 노인이야말로 진짜 천하제일고수인 뇌진자(雷震子)였던 것이다. 한데 그런 그가 기껏 닭잡는 무공을 가진 보잘것 없는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통탄할 노릇이라! 그러나 뇌진자는 감지덕지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어쩌다 내 신세가 이 모양이 되었을꼬?’ 뇌진자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좋… 다. 그럼 무공을 전수해 주마. 이 검법의 이름은 뇌령일식(雷靈一式)이라는 것으로…….” “뇌령일식…? 어디서 들어본 듯한 것인데?” 노팔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전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뇌진자의 뇌령일식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뇌진자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것을 완전히 익힐려면 너같이 아둔한 놈으로서는 한 반 년쯤 익혀야 할 것이다.” “흥.” 노팔룡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사실, 뇌령일식은 뇌진자의 성명절기로 제대로 배우려면 육십년을 익혀도 그 기초밖에는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에게 천하제일의 내공이 있고, 또 뇌진자는 그가 남다른 무공(武功)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였으므로 반 년 정도 걸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어쨌든 한 번 펼쳐 보시오.” 뇌진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노부가 펼치면 큰일난다.” “……?” “노부가 너에게 운기법(運氣法)과 발검술(發劍術), 그리고 검식(劍式)을 일러줄 터이니 혼자서 열심히 연마해 보거라.”노팔룡은 공연히 노인이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아 내심 불만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으니 어서 전수해 주시오. 난 시간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끙!’ 뇌진자는 내심 신음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으므로 먼저 호흡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일종의 내공법으로 체내의 기를 운행하는 무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었다. “잘 들어라, 인체는 상단전(上丹田), 중단전, 하단전이 있는데 각각 기(氣)를 모으고 운행하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극히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기란 형체가 없으나 그 힘이 우주(宇宙)와 같이 넓고 무량(無量)한 것으로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에 따라 심후하고 무한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으며…….” 노인의 말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뇌진자 독문의 심법(心法)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이는 무림인이라면 목숨을 내걸고라도 배우려 드는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상승절학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다만 짜증날 뿐이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뇌진자의 강론이 재미없고 지리할 뿐더러 하등 쓸모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정기신(精氣神)이 일체될 때 심백(心白)하므로…….”뇌진자는 최종적으로 호흡하는 법, 즉 내가토납지술(內家吐納之術)을 설명했다. 노팔룡은 듣는 둥 마는 둥 딴전이었다. (쳇, 검법을 펼치는데 무슨 호흡을 따로 배운다는 말인가?)하나 그는 무공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므로 호흡의 운기법이 상승의 검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리가 없었다. 이어 뇌진자는 발검법, 그리고 검식을 손짓해 가면서 자세히 설명했다. 노팔룡은 도무지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 머리를 긁적이거나 딴전을 부리며 통 성의가 없는 모습이었다. 뇌진자는 속으로 울화가 끓어 올랐다. 그가 누구인가. 만일 자신의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 천하의 수만 명 무인들이 벌떼처럼 달려와 자신을 신주처럼 모시려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노팔룡에게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길고 긴 강론이 끝났다. 뇌진자는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오마.” 그는 걸음을 옮겼다. “……?” 노팔룡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분명 뇌진자는 몇 보 걸어가지 않았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론 알 리가 없었다. 뇌진자가 이미 득도하여 축지성촌(縮地星寸)이라는 도가 최상승의 공부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노팔룡은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보았겠지.’ 그는 문득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였다.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매끄러운 절벽을 기어 올라가야만 한다. 만일 그 점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벌써 도망갔을 것이다. 그는 절벽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노인이 나가는 길을 아는 것 같으니 일단 그에게 잘 보여야겠군.” 2 하여령은 당황하고 있었다. 도무지 아무리 찾아 보아도 노팔룡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죽음의 위기는 넘겼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노팔룡의 행방을 잃었으므로 그녀는 조금도 기쁜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편 칠룡삼봉은 아직도 심혼이 반쯤 달아나 있었다. 만일 노팔룡 대협이 아니었더라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그것은 생각하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 그들은 금륜맹 사자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중원무림에서는 후기지수로서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험으로 자신들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들은 이제껏 의심했던 노팔룡에 대해서도 인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은 한결같이 노팔룡에 대한 강한 신뢰와 존경심이 싹트고 있었다. “대체 그 분은 어디 가셨을까?” 하여령은 벌써 반나절이나 노팔룡을 찾아 헤맸지만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상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노팔룡은 정신없이 날아가다가 뇌진자와 부딪친 후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하여령의 얼굴에 초조함이 짙게 어리자 보다못한 듯 당립이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노대협같은 천하제일고수를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먼저 떠나셨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일단 예정지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하여령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럴 겁니다.” “아, 제발 그랬으면.” 하여령은 두 손 모아 부처에게라도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놀랍게도 지금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못견뎌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긋지긋한 노팔룡이었는데 막상 떨어지고 보니 옆구리가 허전할 뿐 아니라 온통 쓸쓸한 심정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당립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갈미목은 워낙 험한 곳으로 이곳을 모두 뒤지려면 한 달은 걸릴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곳에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사 그럴 수 있다 해도 이곳에서 꼭 노팔룡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마침내 하여령은 마음 속으로 자신을 달랬다. ‘그래. 그 분이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능히 빠져나오실 수 있을거야. 어쩌면 당립의 말대로 먼저 떠나셨는지도 몰라. 그 분께서는 길을 잃고 무작정 앞으로 가셨을지도. 그럼 곧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빨리 떠나요.” 하여령과 칠룡삼봉 일행이 떠난 직후에 갈미목에는 일단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절세미인과 여섯 명의 마의노인들로 바로 숭산을 떠난 도운하와 그녀의 노신(老臣)들이었다. 도운하는 갈미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신을 보았다. 그녀의 지혜로운 눈은 계속 이채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천하의 모든 학문과 지식이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천하의 어떤 무공이라도 그녀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 그런데 그녀는 시신들의 상처를 둘러보고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도대체가 어떤 무공에 당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는 금륜맹 사자대원들의 시신을 보고 그들이 노팔룡에게 당했다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무림천하에 대체 누가 이런 무공을 떨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마음 깊이 떠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의혹으로 인해 도운하는 시종 고운 아미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뇌진자의 뇌령일식은 아닌데?’ 도운하는 한참을 생각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여섯 명의 노인들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신중을 기해야겠어요. 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해요. 지금부터는 철저히 저의 명령에 따라야 해요.” 여섯 명의 노인들의 안색도 함께 신중해 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흔적을 더듬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3 ‘꽈르르릉!’ ‘번-- 쩍!’ ‘우르르릉!’ 밤새도록 울린 벽력음은 멀리서도 들을 수가 있었다. 분명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으나……. 마침내 아침이 되었다. 어디를 갔다왔는지 뇌진자는 바람처럼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축지성촌술로 하룻밤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어젯밤 내내 절벽 아래에서 울린 벽력소리를 듣지 못했다. 뇌진자는 절벽 아래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노팔룡. 그는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어려 있었다. 뇌진자가 놀란 것은 그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팔룡의 주위 풍경 때문이었다. 그의 주변 오십여 장 방원의 나무들이 모두 새까맣게 타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근처의 암석이나 바위까지도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단 하루만에 뇌령일식을 깨우쳤단 말인가?’ 노진자는 그만 입을 따악 벌렸다. 그는 한눈에 알아 본 것이다. 주변의 상황은 바로 뇌령일식을 펼쳤을 때의 상황인 것이다. 그의 성명절기인 뇌령일식을 펼치면 천지간의 가장 강한 기운인 뇌정(雷霆)이 떨어져 만물을 태워버리는 것이다. 한편 노팔룡은 비로소 뇌진자를 발견하고 짜증스럽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노인장, 정말 이것도 무공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오? 도통 시끄러워서 어디 써먹을 수나 있겠소?” 뇌진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놀라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애당초 노인이 보잘것 없는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내참, 이것도 검법이라니! 차라리 발을 닦고 자는 것이 낫겠소!” “…….” 실로 광오한 노팔룡의 넋두리에 뇌진자는 기가 막혔다. 지금 노팔룡이 연마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로 볼 때 그는 이미 완벽한 뇌령일식을 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을 시끄럽다느니 쓸모없다느니 하며 투덜거리다니. “자, 잠깐!” 그는 다급히 노팔룡을 불렀다. 노팔룡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시오?” “노… 노부에게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무공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주마.” 노팔룡은 코웃음을 쳤다. “흥! 배우나 마나요.” 그가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뇌진자는 다급해 졌다. “제발…… 이 늙은이의 소망을 들어다오.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검법이다.” 노팔룡은 흠칫했다. 뇌진자의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간절히 애원하는 빛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입맛을 다셨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란 말이야.” 맙소사……. 천하제일기인의 무공을 전수받는 것을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쓰는 양 하다니, 뇌진자는 그만 귓구멍과 콧구멍으로 연기가 날 것같은 심정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 앞의 멍청한 놈이야말로 바로 그가 바라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행여 노팔룡의 생각이 변할까봐 급급히 달려가 또 하나의 검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이번 것은 무형일식(無形一式)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제 것과는 아주 틀린 것이다.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부가 지난 백 년간을 참오하여 창안한 것으로…….” 노팔룡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아, 잔소리 말고 빨리 말해 보시오.” “…….” 뇌진자의 입이 다물려진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화도 나지 않을 정도로 노팔룡에게 휘말려 들고 만 셈이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날 그가 백 년간 무림에서 은퇴하였던 이유는 바로 이 무형일식을 창안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끄응…….’ 그는 한숨을 쉬고 무형일식에 대하여 강론하기 시작했다. 노팔룡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도대체 그의 강론을 듣는지 안 듣는지 알 수 없는 불성실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가 뇌령일식을 하루만에 깨우치는 것을 본 뇌진자는 안심하고 무형일식을 전수했다. 이번에는 뇌령일식을 전수할 때의 절반도 안되는 시간에 전수가 끝났다. 노팔룡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면서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조용한 검법이죠?” 제20장 탈명령(奪命令) 1 ‘이번에는 설마 하루만에 익힐 수는 없겠지.’ 다음날 아침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뇌진자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형일식이야말로 어검술(馭劒術)의 단계를 다섯 단계나 뛰어넘은 극상승의 절학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뇌령일식을 하루만에 익혔다고 해도 무형일식만은 그렇게 빨리 익힐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이란 왕왕 깨어지는 법. 그는 노팔룡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문득 자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를 만났다. 그런데 노팔룡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펄펄 뛰는 것이 아닌가? “마침 잘 왔소. 대체 어디서 그런 엉터리 잡술만 가져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오? 내 참 기가 막혀서! 그것도 검술이라고 할 수 있소?” “……?” 뇌진자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그가 무엇때문에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는 재빨리 그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해졌다. ‘저, 저럴 수가!’ 그렇다. 노팔룡의 뒤쪽은 울창한 숲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숲은 얼마전의 무성하던 잎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잃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형일식을 완벽히 펼쳤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무형일식이 뭐 어쨌다고……?” 뇌진자가 어눌하게 묻자 노팔룡은 속았다는 듯이 더욱 펄펄 뛰며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검법이 아무런 소리도 안 난단 말이오? 이렇게 조용한 것이 어째서 검술이란 말이오?” “……?” 뇌진자는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검법이 조용해서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펄펄 뛰며 흥분하는 노팔룡을 바라 보았다. 노팔룡은 삿대질까지 해대며 말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상승의 검술이라면 적당히 빛도 나고 소리가 위풍스러워야 모양이 그럴 듯한 법이오. 영웅이 사용하는 검법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어디 체통이 서겠소?” “…….” 뇌진자는 또 다시 입이 봉해지고 말았다. 입이 백 개가 아니라 천 개 만 개가 있어도 이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난 가겠소.” 노팔룡은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자아암깐!” 또다시 불러대는 바람에 노팔룡은 짜증을 냈다. “또요?” “이번에는…… 정말 네가 만족할 만한 검법을 배워주마.”노팔룡은 손을 저었다. “난 싫소.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야 당신같은 꼬부랑 노인네가 만든 검법이 오죽하겠소?”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뇌진자도 끈질겼다. “이 녀석아! 이번만은 정말이란 말이다.” 그는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노팔룡이 듣던말던 검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풍십팔해(神風十八解)라는 것으로 네놈이 원하는 바로 그런 검법이다.” 휙휙휙-- 번쩍-- 번쩍--! 비록 뇌진자는 맨손으로 휘두른 것이기는 했으나 노팔룡은 눈앞이 어찔어찔했다. 그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정말 그럴 듯한 것 같았다. 검풍이 웅웅거리고, 흰빛이 번쩍이는 것이 아주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건 쓸만한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신풍십팔해라는 것은 뇌진자가 태극십팔해(太極十八解)라는 무당파의 검법을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그가 알고 있는 검법 가운데에 가장 형편없는 것에 불과했다. 한데 뜻밖에도 그것이 노팔룡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노팔룡은 노인의 손동작을 보더니 즉시 흉내내었다. 휙휙-- 번쩍--! “……!” 뇌진자는 아연실색하였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즉석에서 똑같은 검법을 펼쳐내는 것이 아닌가. 비록 몇 군데가 비었으나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뇌진자는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이 놈이야말로 무(武)의 신골(神骨)이다!’ 그는 자신이 재수가 무척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제대로 된 제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잔뜩 흥분했지만 간신히 그런 감정을 감추면서 노팔룡의 잘못된 점 몇가지를 시정해 주었다. 노팔룡은 그것도 척척 맞추어 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뇌진자의 눈에는 진물이 아닌 어떤 눈물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2 하여령과 칠룡삼봉은 갈미목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 사정에 그다지 밝지 못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상당히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하여령은 답답하고 짜증이 났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하여령은 문득 일행 가운데 당립이 없어진 것을 느꼈다. “당대협은 어디로 갔죠?” “……?” 그제서야 일행도 당립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험준하고 낯설은 이곳에서 당립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지만 아무도 나서서 그를 찾아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얼마 전 금륜맹 사자대에게 당한 기억이 아직도 끔찍한 터라 새삼 당립으로 인해 되돌아가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어? 저기 당형 아니오?”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일행은 일제히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좌측 바위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리고 있었다. 바로 당립이었다. “아니 당형, 어디 갔다 오셨소?” 사도욱이 묻자 당립은 하하 하고 웃었다. “먼저 앞길로 달려가 보았소. 길이 너무 복잡해 지름길을 찾으려고 말이오.”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당립이 이제까지 길잡이가 되어온 것은 사실이었다. 당립은 앞장서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길이 있소. 그리로 갑시다.” 만일 이때 하여령이 조금만 주의를 하였다면 당립의 표정이 보통 때와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온통 노팔룡만을 생각하느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은 당립을 앞세운 채 부지런히 울창한 밀림 속을 헤쳐 나갔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길은 더욱 험해지고 있었다. 숲은 울창하다못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요, 게다가 발을 딛는 곳도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형, 이 길이……?” 사도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려 할 때였다. ‘슉슉!’ 문득 파공성이 울림과 동시에 비명이 들렸다. “악!” “억……!” 하여령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칠룡 가운데 두 명이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신속히 신형을 움직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기습한 것이었다. 공격자는 마의를 입은 노인들이었는데 그들의 무공은 놀라울 정도였다. 두 청년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상처를 입은 채 뒹굴었고 나머지 청년들이 즉각 노인을 상대했지만 두 명의 칠룡이 각각 상대함에도 한 명의 노인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리고 있었다. ‘쐐애액!’ 하여령은 흠칫했다. 어느새 그녀에게도 한 명의 마의노인이 공격해온 것이었다. 마의노인은 소맷자락을 날렸는데 한낱 마의에 불과한 천이 칼날처럼 빳빳한 채 그녀를 양단낼 듯 쇄도해 왔다. 하여령은 검을 사납게 뿌리며 외쳤다. “당신들은 누구요?” 위잉! 그녀의 검이 전광같은 불을 뿜으며 뻗어갔다. 차창! 노인의 무공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의 검공은 중간에서 차단되고 있었다. 노인의 소맷자락을 부딪치며 불꽃을 튕겨낸 것이다. ‘놀라운 철수비(鐵袖匕)다!’ 그렇다. 철수비란 무공은 소매를 이용한 강호상에 보기 드문 절학이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잠깐 출현한 적이 있었던 무공으로 이후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독특한 무공이 재현된 것이었다. 하여령은 손목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노인의 내공 또한 놀랍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좌측으로부터 위맹한 경기가 몰아쳐 왔다. 우우웅--! 신형을 빙글 돌려 피하고 보니 또 한 명의 노인이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그 노인도 마의를 입고 있어 언뜻 보기에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몸의 중심을 잡고 빙글 돌면서 검을 뿌렸다. ‘차앙!’ 그녀는 부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노인 역시 한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들이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공력이 강할까?’ 그녀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타난 노인은 모두 육 인으로 하나같이 높은 무공을 소유하고 있으며 쓰는 수법이 다양했다. 그들은 구파일방의 다양한 무공을 쓰기도 했고, 또는 마도의 수법을 병행하기도 했다. 칠룡삼봉은 그들에 의해 쩔쩔 매고 있었다. 도무지 노인들의 상대가 못되는 것 같았다. 간신히 버티기만 할 뿐 조금도 승산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하여령은 이를 악물고 염두를 굴렸다. 만일 그녀가 전력을 다한다면 이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두 합세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없었다. 펑펑--! 그녀는 두 명의 마의노인이 번갈아 공격하는 바람에 자연히 일행에게서 떨어지게 되었다. 두 노인은 교묘히 수법을 배합하면서 그것도 차륜전(車輪戰)으로 공격했으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치는 쪽은 하여령 쪽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약 사십 장쯤 장소를 이동하면서 싸우는데 갑자기 두 명의 마의노인이 다시 합세하는 것이 아닌가?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모두… 당했단 말인가?’ 그들은 칠룡삼봉을 상대하던 노인들이었다. 그들이 몸을 빼 그녀와의 싸움에 합세했다면 칠룡삼봉 쪽이 위험해 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더욱 사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일다경도 못되어 다시 두 명의 마의노인이 합세한 것이었다. 일대 육의 대결! 아무리 무정랑자 일점홍이라 해도 이런 싸움은 벅찬 것이었다. 차차앙--! 그녀는 연신 뒤로 쫓길 수 밖에 없었다. 벌써 몇군데 그들의 장력을 맞아 옷자락이 찢기고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진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점점 눈 앞이 캄캄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그녀 역시 쓰러지고 말게 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던 그녀는 문득 희망이 솟았다. 오른쪽에 울창한 숲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숲 속에서 당립이 나타나더니 그녀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휘익!’ 그녀는 당립이 손짓하는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비록 당립의 무공을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 어느 정도 위험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마의노인들은 그녀를 뒤쫓아 신형을 날렸으나 하여령은 한 발 앞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은 울창하여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단 숲 속에 들어서자 그녀는 약간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쪽이오.” 문득 좌측에서 당립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당립은 하나의 동혈(洞穴) 입구에 선 채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한 김이라 이것저것 가릴 틈도 없이 바로 동혈로 뛰어들어 갔다. 동혈은 상당히 좁았지만 어느 정도 몸을 숨길 정도는 되었다. 그녀가 막 동혈로 몸을 숨겼을 때 마의노인들의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스쳐 지나갔다. ‘아아. 정말 무서운 고수들이다!’ 그녀는 옷자락 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을 들으며 긴장이 풀렸다. 또한 일단 긴장이 풀리자 비로소 옆에 당립이 바짝 붙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립에게서는 남자 특유의 체취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 싫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아, 빨리 흘러가다오.’ 그녀가 이런 생각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정말 뜻밖의,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허리가 뜨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아득하게 멀어져 간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당립이 그녀의 연마혈(軟魔穴)을 짚은 것이었다. “흐흐! 미안하네. 하빈.” 기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행동으로 그는 은밀히 명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받은 명은 노팔룡의 서동인 하빈(?)을 사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명을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도운하였다. 그가 일행에게서 잠시 떨어졌을 때, 지름길을 살피러 간 것이 아니라 바로 도운하를 만난 것이었다. 도운하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지혜롭다는 것은 매사에 치밀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가 비록 소림 하원의 모옥에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었으나 앉아서 천하를 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각파에 자신의 심지를 심어 놓고 있었다. 당립도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립은 의식을 잃은 하여령을 안았다. 이제 도운하에게 데려가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으응?” 그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하여령을 안은 순간 의외로 뭉클하고 부드럽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감촉이 아니었다. ‘혹시?’ 그는 하여령을 내려놓고 재빨리 가슴을 풀어 헤쳤다. “여, 역시.” 그의 눈이 번뜩 빛났다. 하여령의 풀어 헤쳐진 가슴 속에는 한 장의 젖가리개가 동여 매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립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눈이 이상한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명문대파의 제자였지만 근본이 광명정대한 위인은 아니었다. 당립은 이대로 그녀를 도운하에게 넘기기가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후! 죽사발에서 한 국자를 떠낸다고 표날 것은 없지 않은가?’그는 음심이 발동했다. 청춘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한적한 숲이었다. 게다가 눈 앞에는 의식을 잃고 있는 여인이 있다. 하빈은 평소 서동이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꽤나 미동(美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가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그의 음심은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후후! 이건 뜻하지 않는 복인데.” 그는 서슴없이 손을 놀렸다. 사르륵, 스륵! 그의 손 끝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몇 차례 일어난 후 하여령은 눈 깜빡할 사이에 알몸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의식을 잃은 그녀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 당립의 눈 앞에는 눈부신 여체가 놓여 있었다. 하여령의 알몸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열배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더우기 그 동안 노팔룡에게 단련된(?) 몸은 완연히 무르익은 여체가 되어 있었다. 당립은 흥분됨을 느꼈다. 그의 남성은 무섭게 팽창한 채 오직 여체를 탐하고 싶은 열망으로 끓어 올랐다. 이건 횡재도 보통 횡재가 아니었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여색을 굶어도 한참을 굶지 않았던가? 평소에도 당립은 여자 관계가 복잡한 편이었다. 비록 겉으로는 인의대협의 행세를 하는 정파의 청년 협객이었으나 그가 은밀히 행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잡한 것들이었다. 그는 명문의 청년 협객을 사모하는 무림의 숱한 여인들을 농락했으며 그때마다 뒷탈을 염려해 악랄한 수법으로 떼어내곤 했다. 그가 자신과 관계한 여인들을 떼어내는 수법은 실로 잔인하고 패륜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강호의 패륜아들을 여러 명 사귀고 있었다. 그들을 이용해 한 번 관계한 여인들을 떠넘기는 수법을 주로 썼다. 파락호나 다름없는 작자들이 여인을 범하는 순간에 나타나서는 여인을 무섭게 비웃는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여인은 수치감을 못이겨 자살해 버리거나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그와 관계한 여인은 수없이 많았으나 강호상에 소문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립은 바로 그런 위인이었던 것이다. “흐흐…… 정말 기막힌 육체야.” 당립은 하여령의 알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침을 삼켰다. 그는 터질 듯한 하여령의 유방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놓았다. 그의 손자국이 백옥같은 젖가슴에 뚜렷이 남는 것을 보고 입가에 음충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 다가올 아찔한 쾌감을 상상하면서 하여령의 몸을 덮쳤다. 바로 그때였다. 딸랑! 문득 한 가닥 청아한 방울소리가 울렸다. 막 하여령의 몸 위에 엎드리던 그의 코 앞에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목패(木牌)였다. - 탈명령(奪命令). 목패에는 그같은 글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헉!” 욕정이고 뭐고 싹 달아났다. 그는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섰다. “타…… 타, 탈명령!” 당립은 혼백이 구천으로 달아나는 듯한 공포가 전신을 휩쓰는 것을 느꼈다. 탈명령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것은 바로 지난날 칠기(七奇)의 일원이자 삼비(三秘)의 하나인 탈명령주의 신물이었다. - 탈명령이 떨어지면 아무도 살지 못한다! 그 말은 수십년래의 무림의 율법이었다. 한 번도 그 불문율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든 탈명령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죽음이 뒤따랐던 것이다. 당립은 후다닥 일어섰다. 그리고 옷을 걸치지도 못한 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려가고 있는 그의 혼은 이미 구천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스륵--! 그가 사라진 직후,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하여령의 옆에 한 인영이 떨어졌다. 그 인영은 한 명의 여인이었는데 일신에 자의(紫衣)를 입고 얼굴에는 한 장의 면사를 드리우고 있었다. 여인은 하여령을 바라보고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여인은 하여령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옷을 모두 입힌 후 면사 여인은 그녀를 옆구리에 끼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하여령에게는 절대절명의 위기가 그 자신은 까맣게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 것이다. 제21장 신룡육협(神龍六俠)과 무림비사(武林秘史) 1 ‘이곳이 어디일까?’ 하여령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의식이 명료하지 못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득 퉁기듯이 일어났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뜻밖에도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은 하나의 푹신한 침상이었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별 다른 이상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쓴 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한낱 아녀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여인으로서의 어떤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다. 어쨌든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하여령은 주변을 면밀히 살펴 보았다. 무정랑자 일점홍이란 별호는 장난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주변 정세를 판단했다. 침상에서는 여인의 체취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여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여인이 머무는 내실이었는데 방 안의 장식은 화려하거나 사치스런 면모는 조금도 없었다. 침상도 단조로왔으며 벽의 장식은 차라리 담백하기까지 했다. 장식이라야 한 폭의 고풍스런 산수화도(山水畵圖)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점차 궁금증이 일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어떻게 하여 이곳에 와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구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녀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당립이 자신을 습격하였다는 것 뿐이었다. 그 일만 해도 온통 의혹투성이인 것이다. 왜? 같은 편인 당립이 자신을 습격하였는지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막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어디선가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야.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좀더 누워 있으렴.” “……!” 하여령은 멈칫했다. 그 음성에 유난히 애정이 스며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중년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일신에 자의를 입고 있었고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비록 세월의 풍파를 숨길 수 없는 얼굴이 나이를 말하고 있었으나 만일 그녀가 젊었을 때라면 틀림없이 일세를 풍미했을 절세 가인이었을 것이다. “선배님은 누구시죠?” 하여령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처음 본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중년미부는 인자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야. 우선 내가 물어야 겠다. 너는 숙하의 제자가 맞느냐?” 하여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걸 어떻게?” 그녀는 유령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은 어찌된 셈인지 자신의 사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부는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황하지 마라. 나는 네 사부와는 친구 사이니 말이다.”하여령은 더욱 더 의문에 빠졌다. 자신이 사부에게 고아의 입장으로부터 발탁되어 무공을 익혀온 지 어언 십육 년. 그동안 단 한명의 친구도 발견한 바가 없었다. 아니, 심지어 사부가 친구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두 번씩이나 사부를 아는 듯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부는 그런 하여령의 표정을 보면서 탄식하며 말했다. “하긴 궁금도 할테지. 하지만 너의 궁금증은 곧 풀리게 될 거다. 그 점은 차후로 넘기고 우선은 너의 사부에 관한 소식을 듣고 싶구나.” 하여령은 머뭇거렸다. 사부의 동태를 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러나 그녀는 여인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숨김없이 말하기로 했다. “사부님께서는 얼마전 백 년 면벽에 들어가셨습니다.” 순간 미부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그 말에 몹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여령은 그녀가 곧 쓰러질 것 같자 얼른 부축했다. 미부는 애처롭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미부는 침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또다시 중얼거린다. “세월이 회한을 덮어준다 했거늘 어찌 그대만은 아직도 만장의 고통에 시달리는가?” “……?” 하여령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미부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고 눈동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한이 배어 있었다. 하여령은 감히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미부가 먼저 입을 떼기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느낄 뿐이었다. 한참 후 미부는 하여령을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앉으렴.” 그녀의 말투는 마치 친 자식에게 하듯 다정다감한 것이었다. 하여령은 뭉클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미부는 눈을 감는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 상태로 있었다. 이윽고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게 된 하여령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선배님. 무슨 일이온지?” 미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아, 지나간 일은 덮어두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너도 당사자일테니 말해주마.” 미부는 품 속에서 하나의 비녀를 꺼냈다. 그것은 하여령이 실심객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아이야. 이걸 알겠지? 그리고 이 물건의 주인도 알테고……?”하여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얼마전의 일이니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바로 그 사람이 내 정혼자였단다.” “……!” 하여령은 흠칫 놀랐다. ‘그렇게 음산하게 생긴 사람이 이 분의 정혼자였다니…….’ 정녕 뜻밖의 말이었다. “후우……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부의 얼굴에는 과거를 회억하는 듯 일말의 달콤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강호에 신룡육협(神龍六俠)이라 불리우는 친구들이 있었지. 그들은 하나같이 영준하고 무공이 강했단다. 더우기 일승일패가 양패구상하여 강호에 강자가 공백상태인 때라 그들의 무공을 당할 자가 천하에 아무도 없을 지경이었단다.” “…….” 하여령은 침을 삼키며 말을 듣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미부로부터 전대비사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2 개방 출신의 후기지수 도지연(陶地然). 무당 출신의 환상검수(幻像劍手) 진우자(塵羽子). 낭인(浪人) 출신 분광쾌검(分光快劍) 막도(莫島). 소림 출신 우담화(優曇花) 옥가영(玉佳瑛). 검각 출신 만화비녀(萬花秘女) 하숙하(霞淑荷). 사천당가 출신 추혼만리표(追魂萬里豹) 당정환(唐晶環). 그들 육 인을 일컫어 신룡육협이라 부르던 시절. 무림의 내일은 오직 그들 육 인에게만 있는 듯 싶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 육 인이 거의 동시에 강호에 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한 산(山)에 양호(兩虎)가 살 수 없다는 옛말이 있듯 동시대에 육 인의 신진고수들이 출현했다면 일대풍운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결같이 젊고 아름다운 청춘남녀들이었으니 명리와 경쟁심리가 치열하게 부딪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신룡육협도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무림천하를 무대로 활약하며 여러차례 부딪쳤다. 과연 누가 더 강자인가를 가리기 위해 열흘 낮 열흘 밤을 황산에서 명예와 목숨을 놓고 혈전을 치른 자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신룡육협이란 이름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운명, 그렇다. 운명은 그들을 동시대에 만나게 했으며 차츰 의협과 청춘이란 이름으로 의기투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들 사이에는 애정이 싹트게 되었다. 남자 넷에 여자 둘이었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어느쪽이건 간에 사랑의 실의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것은 장차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예고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그 점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 6인의 사이는 골육이상이었던 것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청춘남녀들 사이에는 두 쌍의 연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옥가영과 당정환, 그리고 하숙하와 도지연이 맺어진 것이다. 남은 두 명, 즉 무당의 진우자와 분광쾌검 막도는 그들 두 쌍의 결합을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두 쌍의 앞 날을 축복하는 대인의 풍모를 보임으로서 신룡육협의 의기가 깨질지 모른다는 무림의 우려를 씻어내 버린 것이다. 일단 애정의 혼선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는 듯 싶었다. 물론 그사이에 벌어졌던 사랑의 혼전은 그들의 마음 속에 많은 굴곡을 만들긴 했지만 어쨌든 정식으로 그들 두 쌍이 출범하게 됨으로써 일단의 막은 내린 셈이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정작 비극의 사건은 악마의 보이지 않는 치밀한 안배 속에 준비되고 있었을 줄이야! 분광쾌검 막도가 보낸 편지는 신룡육협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평소 중원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신룡육협이 함께 모이는 일은 연중 하루, 구구중양일(九九重陽日)의 모임 때 뿐이었다. 편지를 받은 6인은 중양일의 만남을 한 달 여 앞둔 팔월십일 태산(泰山) 동자암(童子庵)에 모였다. “여! 오랜만이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인 걸 보니 신룡육협의 이름이 아직은 쟁쟁하다는 뜻이겠지?” 개방의 후기지수 도지연이 특유의 미소를 띄며 반색했다. 그는 정혼녀 하숙하와 나란히 나타났는데 한 쌍의 용봉을 보는 듯 눈부시게 아름답고 영기발랄해 보였다. “핫핫! 도형과 숙하 누이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는 걸 보니 머지 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미리 귀뜸해 줄 수 없소?”당정환이 낭소를 터뜨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숙하는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고 얼굴을 붉혔으나 반격하기를 잊지 않았다. “당오라버니는 언제나 옥소매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데 그 질문은 제가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녜요?” “하하하하……!” “호호호……!” 신룡육협은 박장대소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더욱 반갑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도지연과 하숙하, 당정환과 옥가영이 부부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무당의 진우자는 얼굴이 한층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당파의 진전을 거의 이어받은 데다 애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도교무학에 정진한 탓으로 탈속한 기품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농담이 오고 가는 데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따금 도호를 외울 뿐 차분한 표정이었다. 도지연이 물었다. “그런데 막형께서 부르신 이유는?” 아닌게 아니라 신룡육협을 소집한 한 통의 편지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팔월십일 태산 동자암에서 만나자는 간략한 문귀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분광쾌검 막도에게 향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내 손에 한 장의 비도(秘圖)가 들어왔소. 워낙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물건이라 여러분의 의견을 묻고 싶어 불렀소.” “비도……?” “……?”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분광쾌검 막도는 평소 무척이나 신중한 인물로 가볍게 움직이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신룡육협을 동시에 소집했다면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막도는 눈을 가늘게 했다. 이어 품 속에서 한 장의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그것은 일종의 지도와 같은 것으로 무척 오래된 듯 귀퉁이가 낡아 떨어진 것이었다. “이 비도는 놀랍게도 수십 년 전에 사라진 일패(一覇), 즉 녹림대종사 패천일도 하후람의 무공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가리키는 것일세.” “아!” “오오……!” 중인들은 해연히 놀라마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도야 말로 엄청난 풍운을 일으킬 소지를 담고 있었다. 패천일도 하후람! 지난 날 일승일패로 불리우던 정사양도 중 사도제일의 위인이 아니던가. 막도는 육 인에게 말했다. “만일 이 비도가 무림으로 흘러나가게 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벌어질 것이오. 사도는 물론 정도 쪽에서도 하후람의 무공을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 뻔하오.”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그들의 뇌리에는 그같은 상황이 명료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런대로 화평을 유지해 오던 무림이 한 장의 비도로 인해 아비규환에 빠지고, 가는 곳마다 시산혈해를 이루는 광경이 그려져 절로 간담이 써늘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부른 것이오. 함께 이 비도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여 뒷탈이 없게 하기 위해서요.”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마음 속으로 분광쾌검 막도의 공명정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실상 그 누구인들 천하제일의 무공에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만일 하후람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신룡육협 중 어느 누구도 발군의 일인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도는 비도를 공동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과연, 막형답소. 막형의 정대함은 후세에 길이 남을 거요!” 도지연이 감동의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막도는 그저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별 말씀을. 우리들 중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오.” 그러나 과연, 신룡오협은 자신들이 막도와 같이 행동했을까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호승심 강한 청년고수들이었던 것이다. 각설하고,신룡육협은 비도의 처리문제를 놓고 신중히 논의한 결과 함께 비도에 적혀 있는 장소로 가 패천일도 하후람의 무공비급을 찾은 후 영원히 폐기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도사린 강한 호기심에 대해서는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공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이었다. 특히 정도의 무공을 익힌 그들로서는 패도(覇道)의 무공에 대한 궁금증도 도사리고 있어 과연 비급을 찾은 후 바로 폐기해버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가 따로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육 인은 하후람의 비급이 숨겨져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비도가 가리키는 장소는 기련산(祁蓮山)으로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이었다. 비도는 상당히 자세히 그려져 있어 비급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한 달 후, 그들은 기련산에 도착하여 비급이 숨겨져 있다는 한 관제묘를 찾을 수 있었다. 비도에 기재된 바로는 관제묘 지하에 거대한 석부(石府)가 있고 그 석부 어딘가에 하후람의 비장무공이 적혀있는 비급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비급이 숨겨진 석부의 장소가 명기된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신룡육협은 자신만만했다. 그들 6인의 힘과 지략을 합친다면 천하에서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관제묘의 관우상 아래 나 있는 지하석부의 통로를 발견한 후 서슴없이 석부로 뛰어 내렸다. 석부의 통로는 거미줄처럼 갈라져 미로(迷路)로 얽혀져 있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 봉착하자 그들 육 인은 효과적인 탐색을 위해 두 갈래로 갈라지기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당정환과 옥가영, 막도가 한 조가 되고 도지연, 하숙하, 진우자가 한 조가 되어 그들은 지하 암도의 갈라진 곳에서 각각 헤어지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암도였으나 당정환은 사천 당가의 가전지보인 야광피독주(夜光避毒珠)를 지니고 있어 전진하는 데는 별 불편함이 없었다. 그는 옥가영과 나란히 앞장서 암도를 걷고 있었다. 그 뒤로는 막도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당형은 기관지학(機關之學)의 대가니 소제가 안심이오.” 당정환은 당가의 독암기나 기관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특히 사랑하는 옥가영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막도가 칭찬하자 내심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뭘요, 그런데 이 암도는 어쩐지 이상한 데가 있소.” “뭐가 말이오?” 일행은 막다른 곳에 가로막혀 있었다. 당정환은 가로막은 암벽의 한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용머리 모양의 돌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문을 여는 장치가 아닐까요?” 막도의 질문에 당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거요. 한데 좀 이해가 안 가는데…….” 막도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지만 뒤쪽에 있는데다 야명주의 빛이 미치지 않아 당정환과 옥가영은 발견하지 못했다. 당정환은 암벽을 손으로 더듬어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지하 석부는 최소한 수백 년 전에 축조된 것이오. 아마 고대의 어떤 왕조(王朝)가 전란을 피해 만든 것인 듯 한데… 그러나 이 암벽을 보시오. 이건 별로 오래된 것 같지가…….” 아닌게 아니라 암도의 통로벽은 이끼가 잔뜩 앉아 있어 한눈에도 무척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암벽은 매끈했을 뿐더러 이끼가 전혀 없었다. “그럴 리가?” 막도는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당정환은 온통 암벽에 정신을 파느라 그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손을 뻗어 암벽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앗! 무슨 짓…….” 옥가영의 입에서 뾰족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막도의 손이 소매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무엇인가 시퍼런 청광이 쭉 뻗어나와 당정환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을 찌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당정환은 옥가영의 외침을 듣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등쪽으로 싸늘한 기운이 쇄도하는 것을 느꼈다. ‘앗!’ 추혼만리표란 이름은 아무렇게나 얻은 것이 아니었다. 특히 경신술에 조예가 깊었던 당정환은 찰라적으로 신형을 틀었다. “윽!” 간발의 차이로 명문혈은 피했으나 왼쪽 허리가 화끈했다. “이 악당!” 옥가영의 노성과 함께 흰꽃이 떨쳐지듯 우담화 옥가영의 장영(掌影)이 막도를 뒤덮었다. “흐흐…….” 막도는 미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옆으로 미끌어지며 다시 분광쾌검을 날렸다. “쐐애액-!” 푸른 섬광이 번갯불처럼 날아갔다. 막 허리에 일도를 맞고 비틀거리던 당정환의 가슴 부분이 비었다. 막도는 치명적 일격으로 당정환의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막도! 이게 무슨……!” 당정환의 노성과 함께 그의 소매가 떨쳐지며 무엇인가 발산되었다. ‘슈슈슉-!’ 그것은 당가 독문의 탈혼망(奪魂網)이란 암기였다. 막도는 재빨리 도를 휘둘렀다. ‘땅! 따앙- 땅!’ 금속음과 함께 탈혼망이 후두둑 땅에 떨어졌다. 그때 옥가영의 날카로운 장력이 그의 등을 갈겼다. 막도는 코웃음치며 번뜩 신형을 날려 벽쪽으로 날아갔다. 그가 무엇을 건드렸는가 싶자, 암도가 진동했다. 우르르르릉-! “앗! 당오빠…….” 옥가영의 당황한 비명이 울렸다. 옥가영은 갑자기 발밑이 쑥, 빠지더니 깊이를 모를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이 간악한 놈!” 당정환은 이를 갈며 당가의 무서운 암기 비천화폭(飛天火爆)을 꺼냈다. 그것은 일종의 화약암기로 한 번 발사하면 방원 십여장이 불바다로 화하는 무서운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당가에서조차 사용하기를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흐흐흐…….” 그러나 음침한 괴소와 함께 막도의 모습이 스며들듯 암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교묘한 기관장치를 이용해 탈출해 버린 것이었다. 그르르르-- 기묘하고 육중한 음향과 함께 암도가 움직였다. 놀랍게도 암도의 양쪽 벽면이 좁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당정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차하면 암벽 사이에 끼여 핏물이 될 판국이었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탈출로를 찾을 수 없었다. 있다면 오던 길로 최대한 달아나는 것 밖에 없었다. 신형을 날린 그는 간신히 암벽 사이에 끼여죽는 참사는 모면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옥가영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기관이 작동하는 바람에 암도의 상황이 제멋대로 바뀌어 있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복잡한 미로 중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도 암담해져 버렸다. 한편, 도지연과 하숙하, 진우자 삼 인에게도 위기가 닥치고 있었다. 그르르르릉-- 돌연 돌 구르는 음향과 함께 암도가 진동하더니 통로가 움직이고 있었다. “엇?” “기관이 움직이고 있어요!” 눈 앞에 세 갈래로 나 있던 암도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뒤쪽의 통로 천장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가? “빨리 빨리!” 도지연은 하숙하의 손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하나로 합쳐진 통로 쪽으로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계속 우르릉 거리는 소리가 커졌으며 통로를 달리는 삼 인의 이마에서는 비오듯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후 그들은 갇히게 되었다. 전진할 곳도, 물러날 곳도 없는 한 칸의 석실 속에 갇힌 것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하숙하는 불안한 듯 물었다. “으음,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군.” 도지연의 말에 진우자도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우리가 속은 것 같소.” “속다니요? 누구에게요?” 하숙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도지연과 진우자가 답하지 않아도 그녀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녀는 의혹에 싸인 채 석벽에 힘없이 기댔다. 그때였다. 천장에 수십 개에 구멍이 뚫리더니 희뿌연 연기가 슉슉, 뿜어지는 것이 아닌가? “독(毒)! 호흡을 막으시오!” 도지연이 경악성을 발했다. 그러나 사방이 밀폐된 곳에서 독연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호흡을 차단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삼 인은 최대한으로 호흡을 억제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독연을 들이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꿈엔들 상상하였으랴! 그 독연은 바로 강렬한 최음제였던 것이다. 삼 인은 처음에는 별다른 체내의 이상을 느끼지 못하다가 차츰 기혈이 들끓으며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 “수……숙하…….” 도지연이 하숙하의 손을 덥썩 잡아 끌어 당겼다. 하숙하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스르르 그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대뜸 도지연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도지연은 황홀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세차게 끌어안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는 진우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우자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으며 그의 가슴은 쉴새없이 들먹거리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지연과 하숙하의 행위!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렬한 최음향에 중독된 두 사람은 진우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몇 차례 바닥에 뒹구는 동안 서로의 의복을 찢어버리고 알몸이 되어 엉킨것이었다. “으, 으음…….” 진우자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의 입술은 너무나 강하게 물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찢어질 듯 부릅뜬 눈은 곧 터질 듯이 충혈된 채 숨가쁜 정사를 벌이고 있는 하숙하와 도지연을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도지연은 막 하숙하의 몸을 범하기 직전이었다. 하숙하의 허리가 반월처럼 휘어지며 두 손으로 허공을 긁고 있었고 도지연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맹수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으아아아-!” ‘펑!’ 괴성과 함께 폭음이 일었다. 진우자의 장력이 도지연의 등을 쳤다. 도지연은 갑작스런 위맹한 장력을 맞고 피를 울컥 토하며 저만치 굴러갔다. 그 사이에 진우자는 미친 듯이 하숙하를 덮쳤다. 그는 자신의 도복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하숙하의 나신을 부둥켜 안았다. 하숙하도 몽롱한 상황에서 그가 누구인지 상관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로 하늘도 노할 난륜(亂倫)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제22장 비극의 소용돌이 1 한편 암도의 바닥이 꺼져 추락한 옥가영은 고립된 채 한 칸의 석실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방원 오 장 여의 석실로 벽면에 팔뚝 굵기의 황촉이 타오르고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방 어느곳을 둘러 보아도 출구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아! 막도가 그럴 줄이야.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정혼자 당정환의 안위가 걱정 되었다. 막도에게 당한 일도의 상세가 어찌되었는지, 아니 자신이 떨어진 후 혹시 죽음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출구를 찾기 위해 사방 벽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틈새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그녀가 떨어져 내린 천장 쪽이 유일한 출구일 것 같았으나 역시 그곳도 완전히 막혀 있어 나갈 가망은 없어 보였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황촉이 일렁거렸다. ‘……!’ 그녀는 빙글 돌아섰다.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게도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다, 당신은!” 막도였다. 그는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유령처럼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러운 자!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죠?” 날카롭게 힐문했지만 막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벽에 걸린 황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욕으로 기괴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옥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막도가 다가왔다. “가영,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었소. 오늘같은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다, 다가오지 마!” 옥가영은 내력을 끌어 모으며 외쳤다. 그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닌가?‘독…….’ 그뿐이었다. 그녀의 의지와 사고력은 급격히 중심을 잃고 있었다. 다가오고 있는 막도가 여러 겹으로 흔들려 보였다. 막도는 그녀를 향해 손을 벌리고 있었다. “사랑하오. 가영, 날 거부하지 마시오….” 옥가영은 안간힘을 쓰며 눈을 크게 떴다. 막도의 모습은 더욱 뿌얘지고 있었다. 아니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그는 막도가 아니라 자신이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는 당정환이었던 것이다. “아, 당오빠…….” 급격히 힘이 빠져 나갔다. 그녀는 무너지듯 상대의 품에 안겼다. 막도는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 안았다. 막도는 미리 황촉 속에 최음향을 장치해 놓아 모르는 가운데 옥가영을 중독시킨 것이었다. 석실 안은 강렬한 최음제가 살포되어 두 남녀를 미친 듯한 욕망의 포로로 만들고 있었다. 거칠은 신음 소리, 육체와 육체가 부딪치는 소음이 음탕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옥가영은 상대방을 당정환으로 착각한 채 끝없는 욕망의 나락으로 육체를 불태우고 있었다. 2 “안돼!” 돌연 진우자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는 무당파 장삼봉 진인의 도가심법을 정순하게 연마한 사람이었다. 비록 일시적으로 최음제에 중독되긴 했어도 그는 강인한 정력(定力)의 소유자였다. “흐윽…… 안아줘요…….” 그러나 하숙하는 그가 몸을 떼자 전신을 비틀며 다가왔다. “수, 숙하 누이…… 정신 차리시오!” 진우자는 끓는 욕망을 억누르며 사자후를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숙하는 전라가 된 채 그를 향해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터질 듯한 젖가슴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녀를 보자 진우자는 다시 정력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돼… 무량수불!’ 눈을 질끈 감았지만 머릿 속에는 흔들리는 여체가 떠올랐다. 눈부시게 흰 여체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터질 듯한 가슴과 풍만한 둔부를 흔들며, 해초같이 부드러운 육체로 그를 휘감을 듯이……. 펑! “아악!” 진우자의 장력이 하숙하를 날려 버렸다. 그의 손이 뭉클하는 감촉과 함께 그녀의 젖가슴에 닿았다. 비록 강한 내공이 실리진 않았으나 하숙하는 붕 떠서 저만치 날아갔다. 그녀는 석벽에 부딪쳤다. 바로 그 순간 기관장치를 건드렸는지 석벽이 갈라지며 그녀를 삼켜 버렸다. “숙하…….” 하숙하는 어렴풋이 진우자의 음성을 들었으나 어딘가 모를 곳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3 ‘내 생각이 맞다면 이 용수(龍首)를 좌로 세 번 돌리는 것이…….’당정환은 석벽에 돌출된 용머리 모양의 청동장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푸른 녹이 잔뜩 끼여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지하석부가 축조될 당시에 만들어진 장치임이 분명했다. 기관지학에 밝은 그는 용수를 잡고 좌로 세 번 돌려 보았다. 끼이이익-- 기묘한 음향과 함께 용수가 돌아갔다.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석벽이 갈라졌다. 당정환은 희색을 띠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살아나갈 희망으로 허리의 상처도 잊은 채 야광피독주로 안쪽을 비춰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무엇인가 매끄럽고 뭉클한 것이 그의 품 안으로 뛰어 들었다. “흐윽…….” 여체였다. 창황중에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않은 전라의 여체가 안겨든 것을 깨달았다. 당정환은 기겁했으나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품에 안겨든 여체를 바라보았다. “아니? 수, 숙하누이……!” 그는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신룡육협의 일원인 하숙하였던 것이다. 하숙하는 전라의 모습으로 그에게 매달려 신음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시오, 숙하!”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하숙하는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육체를 그에게 문지르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녀는 뜨거운 입술로 그의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읍…….” 창황간에 입술을 맞댄 당정환은 순간적으로 기이한 향을 느꼈다. 그것을 느낀 순간 머리가 핑 돌며 강한 욕망이 일어났다. ‘최음제!’ 찰라적으로 원인을 깨달았으나 하숙하의 저돌적인 육탄공세는 그의 이성을 흐리게 했다. 하숙하의 손이 그의 품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왔던 것이다. 당정환은 크게 놀랐으나 최음제에 깊이 중독된 하숙하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는 당가의 인물로 그녀가 중독된 최음제가 얼마나 무서운 작용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단 중독되면 정사를 치르기 전에는 해독되지 않는 것이었다. 만일 정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면 혈맥이 터져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좌도방문의 극랄한 최음제였던 것이다. ‘아아! 어찌하여 이런 일이…….’ 당정환은 엄청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숙하는 도지연의 정혼녀였다. 만일 그가 그녀와 정사를 벌인다면 이후에 일어날 일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나 어찌하랴! 방법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윽고 석실 안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흐윽…….” 하숙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당정환도 그녀의 호흡을 통해 최음제에 중독된 상태였다. 두 남녀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서서히 전신을 불사르는 욕망에 영혼과 육체를 내던지고 있었다. 4 중년미부, 즉 우담화 옥가영의 말은 여기서 잠시 멈추어졌다. 실로 전무후무한 전대비사가 그녀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 하여령은 너무나 큰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 앞의 미부가 과거의 신룡육협중 우담화 옥가영이었고, 그녀의 이야기 속에 자신의 사부 하숙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아!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하여령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사부에게 쓰라린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그래서…… 그 뒤 어떻게 되었나요?” 하여령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옥가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휴우…… 정녕 약한 것은 여인의 마음이다. 처음에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던 막도였건만…… 나는 끝내 그를 미워하지 못하게 되었단다.” “아.” 하여령은 어렴풋이나마 옥가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여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옥가영의 눈에서도 어느덧 이슬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내게 부여된 운명을 체념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막도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지. 더욱이 나중에 임신까지 하게 되어 더욱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단다.”하여령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같은 여인으로서 충분히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임신까지 하였다면 오죽했으랴. 옥가영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 여섯 사람은 정말로 비참한 경우에 빠지고 말았단다.” 옥가영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무리 친한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지. 더욱이 자신들의 짝을 잃어버린 두 남자의 심정이 어떻겠니?” “아…….” 하여령은 눈을 감고 말았다. 자신은 비록 처녀였으나 충분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너의 사부인 하숙하에게서 였단다.” 하여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사부에게서 문제가 일어나다니, 절로 긴장됨을 금치 못했다. “너의 사부는 비록 어쩔 수 없는 관계였다고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 하여령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사부 하숙하의 늘 우울해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사부의 비참했던 과거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첫째는 당정환 때문이었지. 그는 막도에 대한 분노도 분노려니와 나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했단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도 숙하를 받아들이지 않았단다.”하여령은 부르르 떨었다. 당시 사부님의 심정이 어떠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눈 앞에 보일 듯 했다. 옥가영의 말은 계속되었다. “둘째는 그보다 더 큰 문제였지. 숙하 본인이 이미 도지연과 깊은 관계가 있는 상태에서 당정환과 관계를 맺은 터라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란다.” 하여령의 눈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아! 사부님…….” 그녀는 급기야 오열을 터뜨렸다. 옥가영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주었다. “울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아무튼 너의 사부 숙하는 대단한 여자였단다. 평소 자존심이 강하고 꿋꿋한 여인이었는데 그런 이중의 모욕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견딜 수가 있겠느냐? 그녀는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후로는 막도를 죽이기 위한 일념만으로 살게 되었단다.” 하숙하는 옥가영의 품에서 한없이 울고 난 후에도 가슴 한구석이 도려내어진 듯한 아픔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옥가영은 깊이 감추어 두었던 과거지사를 밝혀서인지 다소 허탈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막도 그 사람은 이미 일패의 진전을 이은 사람이었단다. 우리 모두는 그의 출신이 비밀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바로 일패의 전인이었을 줄은 모르고 있었지.” “……!” 하여령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신룡육협에 속한 채 자신의 야망을 은밀히 키우고 있었던 것이란다.” 옥가영의 눈빛이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그날의 음모는 사실 그의 야망도 야망이지만 애증이 빚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단다. 숙하와 내가 짝을 찾게 되자 그는 외로움을 느꼈고 마침내 그런 무서운 일을 꾸미게 된 것이었지.” 하여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춘남녀. 그들 중 애정에 소외된 자가 막도였다면 능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의 은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더욱 더 무섭고 비극적인 일들이 꼬리를 물고 우리들 사이에 일어나고 말았단다…….” 하여령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기서 또 무슨 비극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녀는 안색이 변한 채 옥가영을 올려다 보았다. ‘또 무슨 일이……?’ 5 분광쾌검 막도. 그는 일패의 전인으로서 실상 오래 전부터 천하제패를 꿈꾸고 있었다. 그가 일패의 전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언제고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쟁취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 먹은 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첫번째 깨어진 것이 바로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막도는 평소 옥가영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옥가영은 그를 선택하지 않고 당정환을 택했다. 그로인한 상처는 막도의 마음 속에 무서운 음모를 꿈꾸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신룡육협을 유인하여 악마적인 유희를 벌인 것이다. 그 사건 이후 그는 더 이상 애정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그가 자리잡은 곳은 곤륜산(崑崙山)이었다. 중원에서 떨어진 곤륜의 한 장소에 거대한 보(堡)를 축성하고 천하제패를 위한 야망의 초석을 닦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일패의 전인답게 흩어졌던 마도(魔道)의 고수들을 끌어 모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작업을 치밀하게 실행해 나갔다. 곤륜산은 천하마도의 복마전(伏魔殿)으로 화했다. 내로라하는 중원무림의 마도인물들은 마도천하의 기치 아래 하나 둘 막도의 수하로 모여 들었고 그 성세는 점차 중원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방문객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실심객(失心客)이라고만 밝힌 채 다짜고짜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인 막도는 그를 맞이하여 오백 합(合) 이상을 싸우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막도는 실심객의 무공에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신룡육협의 일원인 당정환이었던 것이다. 당정환은 원한을 풀기 위해 그를 죽이려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당정환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막도가 일패의 전인으로서 이미 일패의 진전을 모두 얻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싸움은 당정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백 합이 넘었을 때 그는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실로 막도의 무공은 상상이상으로 지난 날 그는 자신의 무공을 완전히 노출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당정환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막도는 내심 이번 기회에 그를 죽여 화근을 뿌리뽑으려는 듯 무시무시한 살공을 펼쳤다. “흐흐…… 당정환. 날 원망마라. 하늘은 막도를 선택했다.” 꽈르릉! 막도의 장세가 급변하더니 시커먼 묵연(墨煙)이 그의 장심으로부터 쏘아 나왔다. 그것은 패천일도 하후람의 암흑마장(暗黑魔掌)이란 가공할 패도지학이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당정환은 입에서 피를 뿜으며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 장내로 뛰어든 두 사람이 있었다. “멈춰라!” “무량수불……!” ‘펑!’ 두 그림자가 뛰어들어 막도의 암흑마장을 가로 막았다. 그들은 신룡육협의 일원으로 도지연과 무당의 진우자였던 것이다. 일단 신룡육협의 삼 인이 가세하자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아무리 가공할 패천지학을 익힌 막도라 해도 삼 인을 상대하는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우르릉-!’ ‘콰앙!’ 경천동지할 폭음과 검광, 장영이 난무하는 가운데 점차 막도는 패색이 짙어졌다. 더구나 실심객 당정환이나 도지연은 막도에 대해 뼈저린 원한을 품고 있어 초식마다 살수요, 손속에 추호도 인정을 두지 않아 막도의 목숨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쐐애액! “헉!” 도지연의 청옥수라장(靑玉修羅杖)이 막도의 중부혈(中府穴)을 강타했고 비틀거리는 막도의 왼쪽 어깨에는 당정환의 사망정(死亡釘)이 박혔다. 막도는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일곱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눈에는 악독한 광채가 이글거렸으나 이미 사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천하의 마두 막도의 최후가 도래한 순간이었다. “무량수불! 부디 내세에 가서는 선한 인간이 되게나…….” 진우자가 불진을 휘두르며 막도의 천령개를 향해 내리쳤다. “아악! 안돼요……!” 문득 한 가닥 구슬픈 여인의 애원과 함께 자색인영이 장내에 떨어졌다. ‘꽝!’ 자색인영은 진우자의 불진을 막아내고 힘에 못이겨 피를 울컥 토해냈다. “아니, 가영!” 당정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분노성을 내질렀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옥가영이었던 것이다. 그의 정혼녀였던 옥가영이 나타나 막도의 생명을 구할 줄은 아무도 상상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옥가영은 가슴에 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흑흑… 제가 죽일 년이에요. 하지만… 이 분을 용서해 주세요.” 옥가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세 사람은 옥가영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를 보고 모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아이가 바로 막도의 혈육일 것이라는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한결같이 탄식하며 하늘을 원망하는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운명은 이다지도 잔인하단 말인가!세 사람이 피눈물을 흘리며 망설이고 있을 때, “하하하핫!” 문득 앙천광소가 주위를 진동했다. 삼 인이 경각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중상을 입고 물러나 있던 막도가 무시무시한 공격을 펼친 것이었다. 옥가영의 출현으로 방심하고 있던 삼 인은 그의 기습을 받고 어이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막도는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던 일패의 최후비공을 사용한 것이었다. 꽈릉! “으아악!” 막도의 마공은 가장 가까이 있던 진우자의 단전을 가격했고 진우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아악! 안돼요!” 옥가영이 울부짖었으나 한 번 빗나가버린 비극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크하하하하! 모두 죽여 버리겠다!” 막도는 마성이 폭발하여 진우자를 죽인 후 가공할 위력으로 당정환과 도지연을 공격했다. 두 사람은 간신이 방어에 급급할 뿐이었다. 한편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당정환이었다. 그는 본래 옥가영과 연인사이로 정혼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옥가영이 막도의 편을 들고 나서는 것을 본 후 마음 속에 들끓는 분노와 실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눈 앞에서 진우자가 죽자 그는 거의 실성할 지경이었다. “으아아아아-!” 마침내 그는 비통한 장소를 울부짖으며 훌쩍 날아 올랐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도지연도 혼자 몸으로는 막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장탄식을 터뜨린 후 역시 사라져 버렸다. 일장의 경천동지할 대결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장내에는 마성이 폭발한 막도가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자신으로 인해 진우자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 옥가영은 몸부림치며 오열을 터뜨릴 뿐……. 그러나 옥가영은 더욱 더 비참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막도가 그녀에게서 어린아이를 빼앗아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안돼요! 내 아기를 돌려 줘요……!” 그러나 막도는 어린아이를 탈취한 채 그녀의 눈 앞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실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6 옥가영의 긴 이야기는 끝났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회한의 눈물로 젖어 있었다. 실로 한 여인에게 이토록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직접 듣지 않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령은 심금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짧은 시간에 그녀가 들은 이야기는 너무도 엄청난 것으로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강한 의혹이 일어났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혹시 지금의 금륜맹주는?” 그렇다. 금륜맹주가 일패의 전인이니 어쩌면……. 옥가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생각이 맞단다. 그 아이가 바로 나의 아들이란다.” “아!” 하여령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금륜맹주- 그는 바로 막도와 옥가영 사이에서 태어난 불륜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실로 경악할 사실이었다. 하여령은 가슴이 섬뜩한 채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실로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지사인 것 같았다. 어찌하여 운명의 실타래는 이다지도 공교로울 수 있단 말인가. 옥가영의 말이 이어졌다. “아아…… 그러나 이야기는 또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란다.” “……!” 하여령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정도만 하여도 가슴이 터질 듯 하거늘 또 무슨 이야기가 남아 있단 말인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곤륜산을 떠난 후 당정환은 복우산(伏牛山)에서 기어이 숙하를 만났단다.” “아!” 하여령은 탄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당정환, 즉 실심객의 모습을 떠올렸다. 장룡산장에서 만났던 그는 마치 영혼을 상실한 인간같은 모습이었다. 사부와 만났다면 왜 함께 생활하지 않았던 것일까. 의문은 곧 풀렸다. “그 분은 숙하와 맺어지기를 바랬던 것이지. 비록 막도의 음모로 인해 불의에 맺어지긴 했어도 그녀를 잊지 못했던 것이지. 그런데…… 다짜고짜로 숙하는 그를 공격했단다.” “……?” 하여령은 곤혹스러웠다. ‘어째서 사부께서……?’ “사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단다. 본래 숙하는 도지연과의 연인 관계에서 임신을 하고 있었단다. 임신중에 그런 불행한 일을 당했던 것이지.” “아!” 하여령은 또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나 기막힌 일이었다. 신룡육협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악마가 그들을 질투하여 훼방이라도 놓은 듯 했기 때문이었다. “숙하는 딸을 낳았지. 그런데…… 그녀가 딸을 낳은 후 실의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아기를 납치해 갔던 것이란다. 숙하는 마침 찾아온 당정환이 범인이라 생각하고 그를 공격한 것이었단다.” 하여령은 놀라 부르짖었다. “정말 당선배님이 납치해 갔나요!” 옥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물론 아니었지. 그 분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단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날 크게 다투었지.” “…….” “당정환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지. 숙하의 공격에 자꾸만 위기에 몰리던 그는 반격을 하게 되었고 그것에 더욱 충격을 느낀 숙하는 그를 이기지 못하자 그만 저주를 퍼붓고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란다.” 하여령은 가슴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럼…… 그 딸은 누가 납치해 간 것인가요?” 옥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그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란다.” 하여령은 더욱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이 슬프고 비참한 사건들이 사부에게 얽혀 있는 것을 알고 그간 사부께서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을 겪어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해 보았으나 도저히 이 일의 실마리를 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때문에 하여령의 안색은 갈수록 어두워 질 뿐이었다. 옥가영은 이런 하여령의 마음을 짐작한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야.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란다. 일은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으니 끈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하는 법이란다. 그러니 너는 너의 사부를 더욱 사랑하고 모시어라. 그것만이 네가 할 일이란다.” 하여령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 옥가영은 한숨을 쉬었다. “아아…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허탈한 표정을 짓으며 중얼거렸다. “더구나 어쩌다 무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만일 당시 우리 신룡육협 사이에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어도.”언뜻 그녀의 얼굴에는 지난 날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빛이 떠올랐다. 신룡육협!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이름은 당시의 청춘남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고강한 무공과 아름다운 젊음을 소유하고 있던 육 인의 협객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흘러간 과거의 일이 된 것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지금의 금륜맹의 사태는 바로 그들에게 연원된 것일 수도 있었다. 옥가영의 안색은 다시 회한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때 하여령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입술을 꼬옥 깨물며 물었다. “선배님, 제가 혹 도울 일이라도?” 그 말에 옥가영은 자애로운 시선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한동안 하여령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와 같이 갈 곳이 있단다.” 제23장 백선결의 분노 1 멀리 기련산 구릉으로 떨어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다. 이곳 변방의 객점(客店)은 중원에 비해 초라하기는 하였으되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었다. 황량한 변방의 여행객들이 잠시 머물어 여독을 달래며 고향을 생각하며 감상에 젖는다면 누구나 시인(詩人)이 될 수도 있을 법 하지 않은가. 아닌게 아니라 객점의 술청 벽면에는 언제 누가 남겼는지도 모를 고향을 그리는 시문(詩文)이 몇 줄 적혀 있는 것이 더러 눈에 띄곤 했다. 여인, 하지만 이 여인은 이곳 객점이 아니라 어느 장소에 있다한들 말할 수 없이 그윽한 운치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 붉어가는 석양을 받은 여인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소슬바람에 가볍게 나부끼고 있었다. 필설로는 여인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여인 도운하였다. 지금 그녀는 기련산을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석양보다 더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석양처럼 생명의 빛이 소멸되가던 한 쌍의 붉은 눈동자. “아아…… 아버님…….” 그랬던가? 그녀가 떠올리던 충혈된 눈동자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의 것이었던가?해가 진다. 이젠 어제의 해가 죽은 것이다. 여인의 마음 속을 온통 흔들어놓던 붉은 눈동자도 사라지고 있었다. 한참을 기련산 너머로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던 여인, 도운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를.”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가슴에 깊은 한을 심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운하는 섬섬옥수를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산새를 부르고 다람쥐를 불러 마치 동무에게 하듯 다정하게 속삭이던 여리디 여린 그녀의 가슴에 과연 어떤 한이 서려있단 말인가. “아가씨.” 문득 가라앉은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일깨웠다. 마치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를 엿본 듯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도운하의 눈 앞에 한 명의 마의노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한다.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도운하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아직 그 자의 소식은 없나요?” 이제까지 감상에 젖어있던 도운하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로움이 후광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냉엄한 현실로 돌아온 그녀였다. “예, 아직은. 하지만 전 정보망을 총 동원하였으니 곧 소식이 올 것입니다.” 도운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묻는다. “그 서동(書童)은?” “그것이.” 노인의 얼굴에는 약간 난처한 기색이 어린다. 도운하는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예, 당립이란 자가 그만 다른 마음을 먹어 다 잡았다가 놓쳤습니다.” “……?” “알고 보니 그 서동은 남장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립이 불측한 마음을 먹고 엉뚱한 행동을 하다가 뜻밖의 적이 나타나는 바람에…….” 도운하는 가볍게 아미를 찡그렸다. 노인의 말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한 것이었다. “뜻밖의 적이라니요?” “탈명령주가 나타났습니다.” 도운하의 몸이 약간 떨렸다. “탈명령주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이한 오뇌가 어리고 있었다. 그것은 흔히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보이는 표정으로 무엇인가 풀 수 없는 숙제를 만났을 때 이런 모습으로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시간이 그다지 길게 가지 않았다. 그녀의 지혜로 풀지 못할 일은 전무했던 것이다. “당립을 어떻게 할까요?” 도운하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놓아 주어요. 그런 자를 처리하는 문제로 머리를 쓰고 싶지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노인은 허리를 깊이 숙인 후 물러서려 했다. “백노(白老).” 노인이 멈추었다. 그를 바라보는 도운하의 눈빛이 이상한 빛을 띄고 있었다.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백노는 돌아섰으나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물고 있었다. “그거야 아가씨께서도 이미…….”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것이에요.” “…….” 백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함구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설사 무덤 속에 들어간다 해도 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도운하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다못해 두 분의 사랑에 대해서만이라도…….” 백노는 탄식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소인이 아는 것은 다만 주인께서 개방의 전대 태상방주이셨고… 정혼녀가 있었다는 것 밖에는.” 도운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분은 누구죠?” 노인 백노, 그는 물론 개방의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빛이 어른거린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으나 그는 갈등하는 듯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방주께서 돌아가셨고… 이제는 아가씨께서도 아실 나이가 되셨으니.’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화비녀 하숙하란 분이었습니다.” “……!” 도운하는 부르르 떨었다. 강한 충격이 좀체로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이성을 건드린 것이다. ‘만화비녀라면? 과거 아버님과 함께 이름을 날렸던 신룡육협의 일인이 아닌가.’ 그녀는 눈을 들어 백노를 바라다 본다. 그녀의 눈은 이상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럼, 저의 어머님은 물론 그 분이 아니시겠죠?” 도운하 다운 질문이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곤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데도 남다른 면이 있는 여인이었다. “…….” “그렇다는 건가요?” “그건…….” 백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는 듯 하더니 다시 다물려 진다.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인 듯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도운하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백노와의 대화에서 모처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정말로 알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진전이 없는 것이었다. 백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는 객점 그늘로 사라졌다. 도운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분명 내게 숨기는 것이 있어.’ 그녀의 머리 속에는 다시 충혈된 눈동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 속에 박혀있는 눈동자는 언제나 원한이 쌓인 충혈된 눈이었다. ‘개방의 태상방주이셨던 아버님, 도지연이란 이름은 천하칠기의 하나이면서도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무엇엔가 괴로와 하셨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일패의 전인으로부터 받은 중상때문이라 하셨는데… 그 이면에는 어떤 다른 내막이 있어. 분명히!’ 도운하의 입술, 꽃잎같은 입술이 꼬옥 다물려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것은 금륜맹을 무너뜨리면 알 수 있겠지!’ 2 지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남자.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 스스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을 인간, 남들이 항상 인정하고 자신조차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나이. 그는 지금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 인의대협 백선결의 눈에는 별이 떠올라 있었다. 평소에는 그 별빛보다 훨씬 밝고 총기로운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의 눈동자는 다소 힘을 잃고 있었다. 예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몇개의 이름들이 수없이 떠오르며 교차하고 있었다. 도운하…… 노팔룡…… 막비(莫丕)…… 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백선결의 눈빛은 시시때때로 바뀌며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도운하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룰 수 없는 애정으로 인해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이번에는 얼굴이 바뀐다. 막비의 야망과 패기에 찬 자신만만한 얼굴이 떠올라 온 것이다. 막비의 얼굴을 떠올린 백선결의 눈동자 속에는 강한 승부욕이 불탄다. 그러면서 어딘가 자신과 닮아있는 듯한 묘한 친근감도 함께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의 눈동자에 강한 분노와 살기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팔룡이란 한 엉뚱한 인간의 얼굴이다. 노팔룡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의 마음 속에는 미움과 살기, 멸시와 격분의 격랑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어느 면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 그런데도 알 수 없는 것은 그 인간에게 자신이 처음으로 눌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백선결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하인들이 존경하고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칭송하는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노팔룡이란 인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언제나 그의 마음은 흥분되고 강한 질투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막비는 그와 양립할 수 없는 적수이면서도 도리어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반하여 노팔룡은 도리어 원한을 갖지 않은 대상이면서도 왠지 강한 증오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점을 백선결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더욱 더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이었다. “…….” 별이 지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비쳐지던 별빛이 가물거리며 힘을 잃어갔다. 백선결은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을 느꼈다.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검옥상(劒玉霜)!” 순간 튀어나오듯이 한 인간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애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했다. “준비해라. 금륜맹으로 간다.” 드디어…… 인의대협, 천하의 중원무림맹주인 그가 움직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제24장 기녀(奇女)와 괴협(怪俠)의 만남 1 파악! 순은(純銀)의 술잔이 일직선으로 날아가 꽂힌 곳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정통으로 술잔을 맞은 사람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했다. 감히, 뉘앞이라서 아픈 내색을 할 수 있으랴, 그는 표정 하나 구기지 못한 채 술잔을 맞았고 또 술방울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거실을 사용하는 인간, 금륜맹의 맹주, 막비(莫丕)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사나이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최고의 인간이라는 것을 믿고 실행해 왔다. 또한 자신의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하거나 번복한 적도 없다. 그는 지금 무섭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던진 것이다. “…….” 술잔을 맞은 사나이의 얼굴엔 술이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마와 콧등이 깨어져 피가 흐른다. 술과 피가 범벅이 되어 흘러도 그는 신음 한 마디 흘려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세조차 흐트러 뜨리지 않은 것이다. 그는 처음 그대로 부복하고 있었는데 다만 고개를 조금 더 숙였을 뿐이다. “이 바보같은 놈아! 그래…… 단 한 명을 당하지 못하고 부하를 백여 명이나 잃고 도망쳐 와? 그러고도 네놈이 금륜맹의 비밀병기라는 사자대(獅子隊)의 대주냐?” 그러나 술잔을 맞은 사나이, 독고완(獨孤完)은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용서를 빌지도, 혹은 변명을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위인이다.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는 사람 또한 아니다. 그의 이름은 독고완. 그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금륜맹주 막비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그가, 지금 욕설을 얻어 먹고 그것도 모자라 술잔까지 얼굴에 맞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섭섭하다거나 아니면 억울한 기색이 없었다. 또한 조금의 죄지은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막비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병을 집어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술은 그의 목젖을 움직이며 넘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지금 독고완의 모습을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흥분되고 분노했던 방금 전의 모습과는 전혀 틀린 기이한 눈빛이었다. 사실, 그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독고완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독고완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독고완이 수하들을 대거 잃고도 후퇴한 것에는 반드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지금 그가 화를 내면서 독고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얼마나 그 이유가 심각한 것이냐를 측정하는 것 뿐이었다. 그는 독고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독고완은 그의 무서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막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으음… 그 자가 그토록 강하다는 말인가?’ 막비는 알 수 있었다. 독고완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음은 그의 마음 속에 조그마한 부끄러움도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상대가 도저히 어쩔 수 없을만큼 강하고, 또한 후퇴하지 않으면 가치없이 수하들을 희생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막비는 조용히 술병을 내리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나가라. 그리고 이번 싸움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라.”독고완은 비로소 일어선다. 그리고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역시 그의 자세는 불변이었다. 문득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뒤에서 음성이 들렸다. “독고완.” “……?” “오늘 이후 맹의 활동을 전부 중지시켜라. 아울러 네가 당분간 나의 일을 대리하도록.” 독고완은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강한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의 말에서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당분간 폐관 수련에 들어간다.” 지하석부. 금륜맹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금륜맹주 막비, 오직 그 한 사람 뿐이었다. 지금 그는 석부의 밀실에 와 있다. 밀실 한 가운데의 석탁(石卓)에는 한 권의 낡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 패천신경(覇天神經). 그런 제목의 책자로 겉표지가 흑색으로 장정된 두터운 것이었는데 책자의 표지는 많이 바래어 있었다. “…….” 막비의 눈동자는 패천신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책자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의 마음은 과거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울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비아(丕兒)야. 세상에서 패천신경의 무학이 가장 강한 것은 아니다. 천하는 넓고도 넓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인이 있고 무학도 마찬가지다. 비록 일패(一覇)의 무학이 지난 수십년간을 지배했다고는 하나 너는 명심해야 한다. 오직 한 사람…… 네가 만약 뇌진자의 뇌령일식을 만나게 된다면 철저히 신중을 기하도록 하라.” 막비는 패천신경을 펼쳤다. 책자 안에는 빽빽한 무공구결과 도해가 적혀 있었다. 책장을 넘겨가는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문득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무공이든 시전자에 의해 위력이 달라지는 법, 저는 믿고 있습니다. 천하에서 누구도 나 막비의 능력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울러 천하를 제패하려던 아버님의 소원도 저의 대(代)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막비. 그는 정말 광오한 인간인 듯 했다. 그러나 앞뒤를 가리지 않는 무모한 인간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가 단지 사자대장 독고완의 패배 소식만을 듣고 상대를 의식하여 모든 것을 제쳐두고 폐관하기로 한 것만 보아도 그는 지극히 신중한 인간인 것이다. 다만 그는 오기가 강할 뿐이었다. 그 오기는 패도(覇道)를 걷는 그의 인생에 어쩌면 적합한 성격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생각한 모든 일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공고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서서히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야망의 인간 막비, 그는 곧 무념무상무아지경(無念無常無我之境)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 “저, 저것 좀 봐!” 관도를 걷고 있던 장삼(張三)은 갑자기 동료가 지르는 비명에 깜짝 놀랐다. 동시에 왈칵 짜증이 났다. 장삼은 본래 장삿꾼으로 그의 직업은 좀 특이했다. 그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나는 인삼(人蔘)을 가지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척 많은 길을 걷기 마련이다. 어떨 때는 며칠간을 계속 걸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일이 반복되면 자연 고통이 따랐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 다리가 아픈 고통 쯤이야 이골이 난 일이니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일이다. 정작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었다. 무료함,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종일 기계처럼 걸어야 하는데 따르는 무료함이 정작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장삼은 그 무료함을 견딜 수 있는 비책(?)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방법은 간단했다. 여행 도중 큰 시진이 나오면 여인을 찾는 것이다. 물론 기루에 있는 창부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지겹도록 여체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 다음 다시 여행을 하는 도중에 무료함이 찾아들면 바로 그 여체를 즐기던 생각을 하거나 공상을 하는 일이었다. 하루종일 걷는 동안 여러가지 체위를 상상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 그의 색다르다면 색다른 취미였던 것이다. 그럴때면 의외로 시간이 빨리 가고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방금 전에도 막 상상에 들어가 있던 참이었다. 그것도 이번 상상은 좀더 특별한 것이 아니던가?평상시처럼 기루에 있는 싸구려 창부가 아니었다. 며칠 전 우연히 객점에서 본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상대로……. 당시 그 여인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선녀가 현신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날 밤부터 장삼은 오직 그 여인만을 생각했다. 그는 여인을 풀밭에 눕혀 놓고 막 하나하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온통 신경을 집중하여 마치 소중한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여인의 옷을 벗기는 공상을 하던 중이었다. 이윽고 여인의 마지막 고의를 벗겨내는 순간이었다. 전신이 긴장되고 아랫도리가 일어서는 쾌감에 젖어있던 바로 그 순간에 하필이면 산통을 깨는 동료의 비명이 울린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짜증 정도가 아니라 무척 화가 났다. 그래서 막 눈알을 부라리고 동료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는 동료에게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동료가 잔뜩 공포에 질린 채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응……?’ 장삼은 동료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그의 입에서는 절로 헛바람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저, 저럴 수가!” 관도 옆.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쪽으로부터 무엇인가 푸른 빛이 미친 듯이 난무하는 것이 아닌가?푸른 빛은 둥그렇게 퍼졌다가 오므라 들었다가 하면서 미친듯이 번쩍이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어떨 때는 무려 십 장여나 치뻗기도 했다. 때는 비록 대낮이었으나 실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장삼은 부르르 떨었다. ‘대, 대낮에 웬 도깨비불이?’ 이때 옆에서 동료의 떨리는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사, 사람이야!” 그렇다. 장삼은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몸 주위로 푸른 빛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삼은 더듬거리며 외쳤다. “귀, 귀, 귀신이닷!” 외침과 동시에 그는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료도 어느새 그의 옆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한데 정신없이 도망치면서도 장삼은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벌건 대낮에 어째서 귀신이 나오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따지기에는 너무나 공포스러웠기에 우선은 달아나고 보는 것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신바람이 난 상태였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며 관도가 보이는 산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수중의 진천검(?)을 휘두르며 걷고 있었다. 휙휙--! 검을 휘두를 때마다 파공음과 함께 푸른 검기가 허공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동시에 이제까지 자신의 뱃속에서 울렁거리던 그 미친 기운도 지금은 완전히 안정되어 진천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 밖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짜릿한 쾌감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무공다운 무공 한 번 시전하지 못했던 그가 비로소 내력과 검식이 일통(一統)된 일치감을 맛보았으니 무리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휘파람을 불며 뇌진자에게 배운 검식을 시전하며 산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마침 관도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관도상에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팔룡은 슬며시 검을 거두었다. 공연히 멋적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두 사람이 미친 것처럼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자신들이 지고 있던 봇짐까지 팽개치고 말이다. 노팔룡은 어리둥절하여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되게 바쁜 사람들이군?’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그를 귀신으로, 그것도 대낮 귀신으로 보고 달아나는 중이라는 것을……. 3 여인은 식사를 중지했다. 특히나 그녀가 좋아하던 요리 연미탐어는 어이없게도 여인에게 버림을 받고 있었다. “그를 찾았다고요?” 여인의 눈에 반짝 이채가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눈이거늘, 이럴 때의 여인의 눈은 마치 한 쌍의 보석을 보는 것 같았다. “예.” 여인에게 보고하는 사람은 마의를 입은 노인이었다. “가요.”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연미탐어는 멍하니 여인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채 반도 먹어주지 않고 일어서는 여인을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인에게 있어 연미탐어를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마의노인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여인은 태산이 무너진다 한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을 그런 여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른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어느새 여인, 도운하가 방을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가 그 자에게 이런 집념을 보이다니…….’ 4 노팔룡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몰랐다. 처음 그가 살고 있던 산에서 내려올 때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았었다. 그것은 동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갈미목의 산에서 내려오자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항상 같이 붙어다니던 하여령이 없는 것이다. 그는 하여령이 있다가 없는 것이 이렇게 막막한 것인지 미처 몰랐다. 그는 갑자기 천지가 넓다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령을 어디로 가서 찾지?’ 오직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것 뿐이었다. 하여령이 없는 노팔룡은 왠지 팔 하나가 없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청해(靑海) 지방의 그다지 작지 않는 시진이었다. 비록 중원에 비해서는 작은 도시였으나 그래도 있을 것은 모두 있었다. 더구나 방향도 없이 두리번거리며 걷던 노팔룡은 어느새 이곳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은 중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이곳은 만리장성을 끼고 있어 멀리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隊商)들로부터 변경 성(城)의 수비대, 또는 관문(關門)을 넘나드는 여행객들이 제법 북적대는 곳이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있었고 건축 양식도 다소 뒤섞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물론 세상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노팔룡에게 그런 것은 별로 이상한 느낌을 주지 못하긴 했다. 그는 의례 세상이란 그런 것이려니 하는 심정인 것이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번화한 시진을 걷는 그는 잠시 하여령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온통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호기심 돋는 것 뿐이었다. ‘야아! 거 희안한 동물인데?’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는 곳을 잔뜩 고개를 내밀어 보니 웃통을 벗어젖힌 장삿꾼이 원숭이 두 마리와 함께 묘기를 벌이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황룡산은 섬서 지역으로 원숭이가 없는 곳이었다. 사람을 닮은 두 마리의 원숭이가 피우는 재주는 넋을 잃게 할만 했다. ‘거 참! 어허, 고놈들! 어어? 저, 저런!’ 한동안 넋을 잃고 감탄을 발하는 노팔룡이었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아주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 장삿꾼은 문득 묘기를 중단하더니 여러 개의 작은 비단 주머니를 집어 드는 것이 아닌가? “험, 이것이 뭔고 하니, 밤이면 식은 땀을 흘리는 분, 올라갔다 볼 일 못보고 도로 내려오는 분,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시는 분, 에에, 명색이 사내 대장부가 큰 소리 한 번 못치고 마누라만 보면 쩔쩔 매는 그런 분들에게 직효가 되는 신비의 성약(聖藥)이라 이 말씀이야…….” 장삿꾼은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원숭이의 묘기를 보며 담장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뒤로 물러나더니 죄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그곳에는 노팔룡 혼자만이 멀뚱한 눈망울을 굴리며 서 있게 되었다. “젠장! 이젠 약아 빠져서 이 짓도 못해 먹겠군!” 장삿꾼은 화가 나는지 들고 있던 비단 주머니들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 노팔룡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왜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장삿꾼은 멍청히 서 있는 노팔룡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노팔룡의 아래위를 훑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색을 보아하니 별 도움될 위인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는 주섬주섬 기물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노팔룡은 그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원숭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볼 수록 신기한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보쇼, 원숭이 첨 봤소?” 장삿꾼이 말을 걸었다. “저 놈이….. 원숭이란 놈이오?” “이런, 다 큰 어른이 그것도 모르쇼?” “하두 사람처럼 생겨서…… 털만 없다면 똑같겠는데?” 장삿꾼은 문득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노팔룡이 무척 어리숙한 것을 느끼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여보쇼, 혹 약이 필요친 않소? 싸게 주겠소.” “약?”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약이라니? 그는 눈만 껌뻑거렸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약이라면 내게도 많이 있소.” “……?” 이번에는 장삿꾼이 어리둥절해 했다. 노팔룡은 바닥에 주저앉더니 보자기를 끌렀다. 그의 보자기 속에서는 약초 말린 것, 가루로 빻은 것, 고약처럼 으깬 것 등 꽤 여러가지 약들이 나타났다. “그게…… 다 뭐요?” “이건 상처난 데 바르는 것이고…… 이건 곪은 데 바르는 것, 그리고 이건 배탈난 데 먹는 것…….” 장삿꾼은 혀를 내둘렀다. “허, 당신도 약장수요?” 노팔룡이 지니고 있는 것은 심마니 노인 노칠룡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강호에 출도할 당시 필요할 것 같아 챙겨온 것들이었다. “장사꾼은 아니지만…….” 약장수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더니 수중의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 약으로 말하면 말씀이야…….” 그가 뭐라고 노팔룡의 귀에 대고 속삭였는지 몰라도 노팔룡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고 말고! 내 목을 걸고 장담하겠소.” “그, 그게 얼만데?” “까짓거 은자 두 냥만 주쇼. 내 형씨가 맘에 들어서 그렇지 본래는 닷냥은 받아야 하는 거요.” 노팔룡은 소매 속을 뒤적였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은자 덩어리가 두 개 나왔다. 그것을 보자 약장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적어도 하나에 은자 열 냥은 충분한 크기였던 것이다. “이거면 되겠소?” “무, 물론이오!” 약장수는 누가 볼세라 홱 은자 두 덩이를 나꿔채고는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나 버렸다. 노팔룡은 비단 주머니를 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게 정말 그런 효과가 있단 말이지….” 노팔룡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는 비단 주머니를 소중하게 품에 간직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빨리 여령을 찾아야 시험해 볼텐데….’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시험해 보다니? 대체 비단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어있단 말인가? 노팔룡은 복잡한 저자거리를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인파 속을 헤매면서도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는데 물론 하여령을 찾느라 그런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장삿꾼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거리도 한산해져 가고 있었다. 문득 그는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화려한 대문이었는데 그 대문으로 사나이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보았는지 노팔룡의 눈이 번쩍 뜨여지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여우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들이 사나이들의 팔에 매달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자?’ 노팔룡의 병(?)이 도졌다. 그는 여자라고는 오직 하여령 밖에 몰랐다. 그런데 그 대문 안에는 여자들이 온통 득실거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몇 명의 예쁜 여자들이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내들을 억지로 잡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허…….’ 노팔룡은 그 대문 안의 집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문득 숭산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지! 기루, 기루다.’ 그는 숭산에서 백선결과 난생 처음으로 가 본 기루를 떠올렸다. 그 동안은 워낙 바쁘기도 했으려니와 늘 하여령과 붙어 다녔기 때문에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는 몹시 고팠다. 여자를 굶은 지 그 얼마만인가? 노팔룡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기루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대문 안쪽을 기웃거리자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한 명의 기녀가 대뜸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서 오세요. 공자님, 호호! 어서 안으로…….” 노팔룡은 여인의 진한 화장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하여령과는 다른 냄새였다. 그 바람에 노팔룡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는 여인이 잡아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일들은 그의 생각 안에 없었다. 그저 눈 앞의 일들이 잔뜩 기대되어 그는 기녀가 이끄는 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 순간에는 하여령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25장 전문가에게 배운 비법(?) 1 노팔룡이 기루로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문 앞에 칠 인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남육녀였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일신에 마의를 걸친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었다. 아름다운 여인, 즉 도운하는 대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곳인가요?” 한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하는 미간에 의혹의 기운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지금 눈 앞에 펼쳐질 미지의 일이 결코 달갑지 않은 기분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평범하고 속된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러했다. 그때 노인의 음성이 들린다. “어떡할까요?” 도운하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뱉듯이 말했다. “기다려야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고 있었다. 눈 앞의 기루는 자신의 영역이 아닌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시간이 다소 걸리는 한이 있어도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저기 다루(茶樓=찻집)가 있군요. 거기 가서 기다리도록 해요.” 도운하는 그렇게 말하고 앞장 서 기루에서 마주보이는 다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2 노팔룡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기루에 온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백선결과 함께 왔고, 또 상황이 지금과는 달랐다. 이곳 북방의 기루는 중원의 기루와는 또 틀리다. 이곳은 주로 여행객이 많고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상인, 그리고 이방인들이 많이 찾는다. 따라서 기루의 풍정도 중원보다 더욱 노골적인 것이다. 노팔룡은 기루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쁘장한 기녀 하나를 불러놓고 갖가지 시험을 하는 것이었다. 즉 여체에 대한 시험, 조사(?) 그리고 장난이었다. 그런데 이 기루는 좀 각별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본래 기루란 몸을 파는 기루와 재주를 파는 기루로 나뉘어져 있는 법이지만 이곳 변방의 기루는 말이 기루지 유곽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 노팔룡은 한 방 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작은 사각 모양의 창(窓)이 나 있었다. 지금 이 시각 창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온통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분홍빛의 은은한 휘장이 쳐져 있는 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휘장은 투명하여 속이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침상 위에는 일남일녀가 행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모두 중원인이 아니었다. 여인은 놀랄만큼 커다란 젖퉁이를 가진 금발의 이국녀였으며, 남자는 피부가 검은 이상한 족속이었다. 흑(黑)과 백(白)! 그것은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특히 인간의 피부빛이 그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단한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 노팔룡은 처음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어렴풋이 생각하기로는 바로 자신처럼 여체에 관심이 많은 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분명 자신도 하여령을 상대로 그런 놀음을 해본 적이 있지만 이건 차원이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노팔룡의 입이 떠억떠억 벌어지고 있었다. ‘저럴 수가…… 아하…… 그래서…… 허어…… 그렇군…….’ 흑인(黑人)의 정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엎치락 뒤치락하기를 그 몇 번째던가, 아니 그보다도 노팔룡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든 것은 흑인이 백인녀를 다루는 능수능란한 솜씨에 있었다. 그는 벌써 몇 차례나 색목 금발여인과 교합(交合)하면서도 조금도 지치지 않았을 뿐더러 보는 이를 감탄케 할 정도로 온갖 기기묘묘한 기법을 연출하고 있었다. 구멍을 통해 들리는 여인의 기성(奇聲) 또한 그렇게 일품일 수가 없었다. 다만 그 기성만 듣고도 혼백이 구천으로 달아날 지경으로 매혹적이었다. 노팔룡은 여인의 숨 넘어가는 기성을 들으며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곤 했다. 이 기루의 공연장(?) 사방에는 바로 노팔룡과 같은 구조의 방이 둘러싸고 있어 역시 작은 사각의 창으로 그 광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팔룡처럼 넋으로 잃고 구멍을 들여다보는 고객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이런 공연장은 변방 특유의 것으로 이 지방을 지나는 여행객들은 한 번은 이곳에 들르는 것을 낙을 삼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자랑거리로 떠벌이는 것이었다. ‘어허… 그렇군, 바로… 저렇게!’ 노팔룡은 구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흥미진진한 실연공연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가 한 놀이는 그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노팔룡은 연신 입을 벌리고 감탄하면서 흑백의 두 남녀가 벌이는 장면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비로소 이제까지 아리송하던 모든 것들이 안개가 걷히듯이 드러나고 있었다. 여자의 그 비밀의 문(門)은 어떻게 써먹는 것이며, 여자와는 다른 남자의 물건이 또 어떤 용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마침내 노팔룡은 온몸이 후끈 달아 올랐다. ‘옳지… 저렇게… 음… 아하… 저… 저런…….’ 어느새 그는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목을 감는 것이 아닌가? “어? 누구야?” 그러다 그는 흠칫했다. 지분 냄새를 풍기면 마치 해파리처럼 달라붙어 그의 목을 휘어감는 것은 여자였던 것이다. 어느새 한 명의 기녀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눈이 똥그래진다. 기녀는 애초부터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기막히게 예뻤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물론 노팔룡의 여자 보는 눈이 어떻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분으로 한 겹 씌운 여자는 모두가 선녀같은 법이지만 말이다. 한편 기녀는 오늘 무척 몸이 달아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투전 놀이를 하느라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날려버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되도록 많은 손님을 받아 만회하여야만 했다. 그 때문에 다짜고짜 덤벼들어 빨리 해치우려는 것이었다. 기녀 월병(月騈)의 손이 문어처럼 뻗더니 금세 노팔룡의 하반신 속으로 파고 들었다. “허…….” 노팔룡의 입에서는 감탄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는 정신이 멍해졌다. 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하여령과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그가 주로 장난을 쳤지 하여령이 그에게 적극적인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가 된 것이다. 그 기분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온몸이 이상하게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월병을 바라보았다. 월병은 잽싸게 익숙한 몸놀림으로 그의 옷을 모두 벗겼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노팔룡은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런데 월병은 생각이 달라졌다. 막상 벗겨놓고 보니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훌륭한 몸과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좀 멍청해 보였으나 물건만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기녀 월병의 눈이 반짝 빛났다. “흐응…… 당신 참 쓸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군요.” 월병의 손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노팔룡은 등줄기로 한 줄기 전류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그의 몸 한곳이 잔뜩 성을 내고 있었다. 월병은 귀여운 듯이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호호, 아이… 귀여워.” 노팔룡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월병의 남자 다루는 솜씨는 이력이 나 있었다. 그녀는 냉큼 노팔룡을 드러눕게 하더니 그 위로 올라탔다. “어, 엇!” 노팔룡은 기겁을 했다. 자신의 어떤 것이 여인의 그 요상한 곳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더럭 겁이 났다. 마치 물건을 도둑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 앞에서 여인의 몸이 흔들리고 아래 위로 율동을 하는데……. ‘허어! 으음, 좋은데?’ 그의 입이 벌어졌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세상에 이런 재미가 있다니?그는 비로소 알아버린 것이다. 인생의 진리를 말이다. 청춘의 기쁨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어딘가 답답했던 최후의 비밀을 말이다. 전문가(?)를 만나서 그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달통하게 된 것이다. 3 밤은 너무도 짧았다. 기막힌 인생의 진리를 알아버린 노팔룡에게 있어 아침은 섭섭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붙잡아 매둘 능력은 없었다. 그는 기루를 나서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며 걸어나오는 그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입맛을 다시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노팔룡이었다. 너무나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여체를 떠올리자 그는 문득 하여령이 떠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든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고 신기한 것을 겨우… 하고 혀를 차는 노팔룡이었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바람도 그의 달아 있는 몸을 달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걸었다. ‘빨리 여령을 찾아야지. 그리고…….’ 하여령을 생각하면서 그의 눈빛이 요상해진다.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는지 능히 알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밤새도록 기루의 정문을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기루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미행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진을 벗어나 쭉 뻗은 관도를 걸어가는 노팔룡은 여전히 상상에 젖어 있었다. 그의 상상은 온통 하여령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하여령과 행했던 일들이 시시해졌다. 그리고 하여령을 만나면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를 구상중인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 그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관도를 따라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는 그림자가 막아서는 것을 느꼈다. 마치 땅에서 솟은 듯, 아니면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한 모습으로 한 명의 마의노인이 그의 앞을 가고막고 서 있었다. “누구요?” 노팔룡은 그렇게 물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노인이 비켜서지 않으면 지나갈 수가 없었다.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왠지 그는 노인이 마음에 안들었다. 뭐랄까, 노인의 죽어 있는 듯한 눈빛하며 전혀 움직이지 않을 듯한 모습은 마치 목상을 보는 듯 하였기 때문이었다. 노팔룡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방향을 바꾸어 노인의 옆으로 비껴 걸었다. 상상을 중단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두번째는 말라비틀어진 늙은이와 시비를 벌인다는 것이 영웅의 도리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었다. 노팔룡은 의아하여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어찌된 셈인지 뒤의 노인은 세 사람으로 늘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다시 고개를 돌리자 역시 두 사람이었던 노인이 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여섯 명의 노인에게 포위된 형국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모습과 자세를 하고 있었다. 급기야 노팔룡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가 빠져 나가려면 노인과 노인의 사이를 걸어나가야만 했다. 그것은 어깨를 닿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빠져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멈추시오.” 육 인의 노인이 똑같이 입을 열었다. 노팔룡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목소리까지 생기가 없는 것이다. 노팔룡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깐 같이 가주셔야 겠소이다.” 그러나 노팔룡은 눈썹을 찌푸렸을 뿐 대꾸하지 않고 걸어갔다. 노인들은 똑같이 물러나며 역시 포위 상태를 유지했다. “그대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오.” 노팔룡은 멈추지 않았다. 실상, 보통 때의 노팔룡이었다면 이런 상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평소의 그였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노인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틀렸다. 그의 머리 속은 오직 하여령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능한한 빨리 만나야겠다는 초조감으로 마음이 급한 실정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모든 것이 귀찮은 상태였다. 그가 대꾸도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자 휙! 한 노인이 움직였다. 움직인 정도가 아니라 전광석화처럼 공격했다. 어느새 노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이 들려 있었고 섭선은 노팔룡의 어깨를 벼락같이 찍었다. ‘파팟!’ 노인은 움찔 놀랐다. 섭선이 너무도 쉽게 노팔룡의 어깨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어이쿠!” 노팔룡은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 아프자 비명을 질렀다. 이제 그는 정말로 화가 났다. “아니? 왜 때리는 것이오?” “…….” 노인은 기가 막혔다. 때리다니? 적어도 이번 섭선의 위력은 바위를 가를 정도다. 그런데 노팔룡의 어깨는 옷이 찢어졌을 뿐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이 아닌가?“쳐라!” 노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노팔룡은 눈알이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삽시간에 부채 그림자의 그물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눈에는 노인들의 부채 수법이 확연히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마저 얻어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손을 움직였다. ‘파파팍-!’ 그의 손이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듯 했으나 노인들은 강한 압력이 쏘아오는 것을 느끼며 물러났다가 다시 공격했다. 그들의 수법은 실로 다양하고 눈부신 것이었다. 노팔룡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 손발을 어지럽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모습은 꼴불견일 뿐 조금도 정묘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로 그는 처음으로 무공을 초연(初演)하는 것이었다. 뇌진자에게 수학받은 이후 그는 무공에 대해 최초로 눈이 뜬 것이다. 그는 노인들의 공세에 갇힌 상태였으나 어쩐지 여유가 있었으며 노인들의 섭선 공격을 여유있게 받아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동작이 어색하고 서툴 뿐이었다. 싸움이 얼마나 계속 되었을까? 노인들은 차츰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공격해도 노팔룡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오십여 합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들의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휘휘휙-- 파라라라락! 노팔룡의 손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은 육 인이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육 인이 똑같은 육 인을 상대하는 듯함을 느낀 것이다. 노팔룡은 한 명이었으나 이미 그들 하나하나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노인들은 아연실색했다. 한편 노팔룡은 신이 났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뻗어나가 내부가 시원할 뿐더러 손을 흔들면 흔들 수록 동작이 물 흐르듯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연신 벙긋거리며 손발을 놀렸다. 단전에서 울렁거리던 기운도 안정되어 손 끝으로 줄기줄기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요, 몹시 상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노인들은 연신 막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몇 초가 가지 않아 그들은 모두 쓰러질 것 같았다. 이때였다. “잠깐만 손을 멈추세요.” 문득 어디선가 아름답고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 노팔룡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멍해졌다. ‘아름답다.’ 그렇다. 관도 옆의 한 그루 나무 아래 한 명의 여인이 기대 서 있었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노팔룡은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도운하였다. 노팔룡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빤히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이런 태도는 무척 무례해 보이는 것이었다. “무엄한 것!” 두 명의 노인이 노성을 지르며 그를 향해 섭선을 휘둘렀다. “그만 두세요.” 도운하가 그들을 제지시켰다. 노인들이 흠칫하자 그녀는 약간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모르시나요? 여러분은 이 분의 적수가 못되요. 만약 저분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벌써 승부가 났을 거예요.”그 말에 노인들의 얼굴에는 불만의 기색이 어렸다. 그들은 비록 몰리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무슨 신통한 절학을 쓰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운하의 다음 말은 그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세요. 저 분이 무슨 수법으로 여러분을 상대했는가를.” 순간, 노인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제까지 노팔룡이 자신들을 상대한 수법은 어딘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펼쳤던 수법이었던 것이다. 결국 상대방은 자신들의 무공을 한 번 보고 그것을 그대로 펼쳐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노인들의 안색은 흙빛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도운하는 노팔룡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분명 제가 공자님을 정중히 모셔오라고 당부했는데 그만. 아무쪼록 너그러운 양해를…….” 노팔룡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아아, 걱정 마시오.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으니.” 노팔룡은 멍하니 서 있는 여섯 명의 노인들을 바라보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니, 어째서 여자가 나를 만나려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소?” “……?” 여섯 명의 마의노인들은 어리둥절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그럼 여자가 만나려 한다고 했다면 순순히 응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이 노팔룡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만일 알았다면 그들은 결코 도운하와 노팔룡을 만나게 하는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어진 사발이었다. 제26장 기녀(奇女)는 괴협에게 휘말리고 1 최고급의 요리를 앞에 두고 한 사람은 게걸스레 먹어대고 있었고 한 사람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가장 알아준다는 고급 반점, 게다가 특별한 손님만 받는 별실에 두 남녀가 요리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도운하와 노팔룡이었다. 노팔룡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것은 도운하가 특별히 시킨 것들로 거의 대부분이 노팔룡으로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그는 하여령과 함께 강호를 주유하면서 물론 여러 지방의 음식을 먹었다. 그것만 하여도 신기한 것들이 많았으나 하여령 역시 음식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다. 반면 도운하는 달랐다. 그녀는 식성이 까다로운 여인으로 아주 정갈한 음식이거나 혹은 특별한 고급요리가 아니면 먹지 않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시킨 음식들은 전부가 값 비싼 것들 뿐이었다. 노팔룡은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음식물이 튀거나 흩어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몹시 배가 고팠던 것이다. 뇌진자의 무공을 익히느라고 이틀을 굶었고, 또 어제는 심한 육체적 격전(?)을 치르느라 또 굶었던 것이다. 도합 사흘을 굶었으니 고급 요리가 아니라 바윗덩어리를 먹으라고 해도 먹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 도운하는 갈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처음 자신을 보고 침을 흘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막상 그녀를 앞에 두고 음식을 먹는데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아예 그녀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살이 찌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도운하란 존재가 이렇게 철저히 무시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존심도 상하고 상대방의 경박한 태도는 더욱 더 그녀의 취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후 노팔룡은 비로소 음식을 거덜내고 나서 포만감을 느낀 듯 의자 뒤로 기댄다. 그는 느긋이 여유를 즐기는 듯 하다가 도운하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눈빛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도운하는 다시금 혼란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이 비록 요상하기는 해도 음침하거나 음탕한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도리어 어찌된 셈인지 몸이 근질거리기까지 했다. 상대방은 분명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기분을 평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느꼈다면 당장 그자의 목이 어깨로부터 분리될 것은 극명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나른한 기분 속에 빠져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에게서는 신비감만 짙어질 뿐이었다. 노팔룡은 입술을 쓱 소매로 문지르더니 물었다. “왜 나를 만나려 했소?” 도운하는 자신도 모르게 할 말을 잊어 버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 그냥.” 도운하는 놀랐다. 그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여태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신이 아닌가? 그녀는 급히 마음을 가다듬고 정색을 한 뒤 입술을 움직였다. “사실은 대협께 부탁이 있어서…….” 문득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노팔룡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운하는 당황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거나 노팔룡이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일인가?다만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더욱 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어…… 대협……?” 그러나 노팔룡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그녀의 앞가슴만 바라본다. 도운하는 더욱 당황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무지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노팔룡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좀 만져봐도 되겠소?” “뭐, 뭘……?” 노팔룡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한다. “당신 가슴 말이오.” ‘세, 세상에!’ 도운하는 아찔한 기분이었다. 도무지 말도 안된다. 이런 말을 하다니! 2 밤이다. 세외의 밤은 별다른 느낌을 준다. 어쩐지 고독한 것 같고, 또 마음이 기이하게 가라앉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 도운하의 마음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멍하니 방 안에 앉아 있었다. 혼란된 마음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인, 도운하는 자신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평범스런 인간으로서 후한 점수를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비속한 인간일수록 그녀는 더욱 경멸하고 무시했다. 그녀는 스스로 천지조화와 우주의 이치를 통달했다고 믿고 있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까지도 두루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그녀는 조금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고 있었다. 시종일관 두서없이 횡설수설로 일관했으며, 지금은 자신이 혹시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근 한시진 동안 흘린 땀으로 인해 속옷이 축축했다. 그녀는 간신히 노팔룡을 그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지금은 아마 옆방에서 자고 있으리라. 특히 그녀는 자신이 노팔룡에게 자고 가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저어, 밤이 늦었으니 일단 잠자리에 드시는 게 어떨까요? 대협?” 물론,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은 도무지 흩어지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일단 날이 밝은 후 노팔룡을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한 말이었다. “저, 정말, 그 말이 진심이오?” 노팔룡은 갑자기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의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악, 무, 무슨 짓이에요!” 도운하는 기절초풍했다. 그러나 노팔룡은 재빨리 옷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번쩍 벌리는 것이 아닌가? “자, 이리 와, 우리 재미있게 놀자구.” “……!” 도운하. 그녀가 어떤 여자인가? 한 방에서 남자를, 그것도 훌러덩 옷을 벗어던진 전라의 남자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 그런 뜻이 아니예요. 우, 우선 옷이나 입어요.” 도운하는 눈을 질끈 감고 간신히 그 말을 했다. “뭐? 옷을 입으라구? 아니, 어차피 벗을 건데 왜 그래?”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도운하는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서요! 안 서면 소릴 지르겠어요!” 노팔룡은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잔뜩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피차 즐거운 일을 하자는 건데.” “드, 듣기 싫어요! 그런 천박한 말을 하다니…….” 도운하는 진저리를 쳤다. 그로부터 무려 반시진에 걸쳐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야만 했다. 3 ‘세상에, 남녀간의 교합이야말로 선경에 드는 지름길이라니?’ 도운하는 자신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를 느끼고는 다시 치를 떨었다. ‘안돼.’ 도운하의 마음에는 각기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팔룡이란 인간을 생각할 때 벌어지는 것이었다. 따스한 느낌과 당장 죽이고 싶을 정도의 분오와 증오심이었다. 만물의 이치를 다 안다고 자부하는 도운하로서도 어째서 한 인간에 대한 느낌이 판이한 두 가지의 색깔로 전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본래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수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지략으로 인해 노팔룡은 분명히 넘어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명령이라면 그가 장차 물불을 가리지 않고 듣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거둔 수하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게 뭔가? 한 가지의 지략도, 애써 준비한 말 한 마디도 해보지 못하고 줄곧 허둥거리기만 한 자신……. 도운하는 거울을 본다.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얼굴이 아주 평범한 아낙네로 변해 있는 듯하다. 도운하는 또 다시 분노를 느꼈다. ‘이건 안돼.’ 그녀는 결심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이겨야 한다. 또 자신은 분명 이긴다. 가서 다시 부딪치자! 도운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고 있었다. “…….” 도운하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노팔룡의 방문을 두드리려는 손이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는 안돼.’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야무진 마음을 먹고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안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가?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또 생각해 두지 않은 자신을 나무랐다. “누구요?” 뚜벅거리며 방문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도운하는 급급히 말했다. “저…… 저예요.”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드러나는 노팔룡의 모습을 보는 순간 도운하는 깜짝 놀랐다. 노팔룡이 놀랍게도 나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전라의 몸으로 당당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도운하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로 그때 노팔룡의 약간 들뜬 음성이 들렸다. “내 반드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 “세상에 누가 그 재미있는 놀이를 마다하겠느냔 말이야.” 노팔룡의 음성은 신이 나 있었다. 순간 도운하는 자신의 몸이 하나의 굵은 팔에 의해 들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 뭐라고 말을 해야 겠는데…… 뭐라고 소리를 질러야 겠는데……. 그러나 그게 되지 않았다. 어느새인가 그녀는 머리 속이 온통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고, 곧이어 자신의 몸이 침상으로 던져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뿐이라면 말도 안한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으로 노팔룡의 손이 눌려오는 것을 느꼈다. 만일 보통 여인이었다면 이런 위기 쯤은 간단히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저 간단히 따귀나 한 번 올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도운하는 달랐다. 그녀의 행동은 본래 하나하나의 준비된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규범이 되었고,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규범에서 어긋나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변화나 심리까지도 완벽히 파악하고 그에 따른 준비나 말까지 계획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운하는 백치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대체 어찌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단연 행동도 할 수가 없다. 다만 고작 그녀가 취한 것이라고는, “나…… 나는, 난…… 그게 아니라…….” 몇 차례 그녀가 더듬거리는 말을 할 때마다 그것은 노팔룡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다. “글쎄 그렇다니까. 당신이라고 별 수 없잖아. 이런 재미를 싫어할 리가 말이야.” 도운하는 자신이 백치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백치보다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악이다. 최악! 그녀는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하나의 투박한 손이 그녀의 가슴 속으로 쑥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 손은 처음에는 투박한 느낌이 들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놀랄만큼 영민하였다. 몇 차례 꼼지락거리는가 싶자 그녀의 웃옷이 훌렁 벗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안돼.’ 그녀는 헛소리를 발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저 입 안에서만 뱅뱅 맴도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노팔룡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어느새 도운하의 옷자락은 침상 아래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주 알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런 가운데 육중한 사내의 몸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태는 도운하란 여인이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겪는,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4 눈(眼)은 마음의 창(窓)이다. 그러므로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눈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멍하니 바라보는 도운하의 눈에는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운하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저 멍한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노팔룡의 코고는 소리 뿐이었다. “…….” 도운하는 계속 넋을 잃은 듯 천장을 바라본다. 시간이 정지된 듯 우주가 운행을 멈춘 듯 그녀의 의식도 정지되어 있었다. 문득 노팔룡의 손이 가슴 위로 올라온다. 도운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노팔룡의 손은 쉬지를 않았다. 그의 손은 도운하의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운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얼른 그의 손을 가슴에서 떼어 놓았다. 재빨리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상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껏 한 번도 타인에게 보인 적이 없을 뿐더러 누군가가 만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가슴이었다. 그런데 노팔룡의 의해 닳도록 만져지고, 또 그뿐인가?그녀는 노팔룡의 입술로 흔적이 남도록 빨리기도 했고, 또 이빨로 가볍게 물어 뜯기기까지 했다. 그 자국으로 지금까지도 은은히 아픈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가? 문득 도운하는 잠든 노팔룡의 얼굴을 바라본다. 잠든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가슴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으응?” 문득 뒤척이던 노팔룡이 눈을 뜨더니 그녀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자?” 그가 한 말이었다. 도운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노팔룡은 그녀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허리를 팔로 감고 눕혔다. 도운하는 그의 팔을 빼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노팔룡은 왠일인지 순순히 그녀를 놓아준다. 도운하는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노팔룡이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홍조를 띄웠다. 그녀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노팔룡은 지긋이 눈을 감는 것이었다. 지금 그는 다른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으음… 여령.) 정말 못말리는 노팔룡이었다. 한바탕 운우지락을 나눈 직후에 또 다시 하여령을 떠올리는 그의 욕심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27장 두번째 서동(書童)이 되다 1 창문을 열자 새벽의 찬바람이 방 안으로 하나 가득 밀려든다. 뼈까지 시려드는 찬 바람이었다. “…….” 도운하는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가슴만은 여전히 답답할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비참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이상스러운 패배감으로 가슴이 납덩이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내가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도리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한 것인가? 겨우 일면만을 보고 세상 이치를 다 안다고 오만과 방종을 떨어왔던가?' 도운하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바람이 밀려들자 다시 한 차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꼭 찬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안돼. 이래서는 안돼…….’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야 해……. 이대로는…… 이대로는 안돼! 도운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였다. ‘이겨야 한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녀는 내심 몇번이나 다짐하며 밖으로 나갔다. “백노, 알아 들었겠지요?” 백노는 육 인 중의 우두머리다. 과거 그는 개방의 육신개(六神 )라 불리우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그건 안될 말씀입니다. 아가씨.” “이미 결정한 일이에요.” “하지만 아가씨…….” 백노는 도시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다니?하지만 그는 도운하를 안다. 그녀가 한 번 마음 먹은 일이라면 도저히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백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저희들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도운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되요. 혼자 가겠어요.” “아가씨…….” 도운하의 목소리가 문득 가라 앉는다. “백노.” 백노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언젠가 제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죠?” “예. 그건…….” “그렇다면 말리지 마세요.” 백노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더 이상 말려야 소용이 없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침묵하고 만다. 도운하는 담담히 말했다. “그럼 결정된 일로 하겠어요.” 그 말에 백노는 그녀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나란히 뒤에 서 있던 오로도 절을 하고 있었다. 돌아서는 도운하의 눈에서는 언뜻 진주같은 눈물방울이 비치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2 노팔룡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피곤하였던 것은 최근에야 깨달은 인생의 비법(?)을 너무 무리하게 탐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세요. 하루종일 주무실 거예요?” 노팔룡은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눈을 떴다. 눈 앞에 도운하의 예쁜 얼굴이 보였다. “식사 준비해 놓았어요.” 도운하는 한껏(?)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그 음성과 어조는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백 번 가량이나 연습한 것이었다. 한데 노팔룡은 다짜고짜 그녀의 허리를 감는 것이 아닌가? 아차하는 사이에 그의 손은 도운하의 가슴으로 쑥 들어갔다. 또 아차하는 사이에 이미 속곳을 헤집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기술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하여령을 상대로 갈고 닦은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도운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은…….’ 그녀는 자신의 옷자락이 하나하나 제거되는 것을 느끼며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노팔룡의 입술이 가슴을 훑고, 손은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를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도운하는 진저리가 쳐졌으나 이를 악물고 있었다. “뭐? 나랑 같이 가겠다고?” 노팔룡은 하마터면 씹고 있던 음식을 모두 튀길 뻔 했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도운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왜 안되나요?” 노팔룡은 한참 동안이나 도운하를 바라보더니 문득 이상한 말을 한다. “일어서 봐.” “……?” 도운하는 어리둥절했다. “일어서 보라니까.” 도운하는 일어섰다. “…….” 노팔룡은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흐흠. 좋아. 일단 합격이야. 그러나 조건이 있어.” “……?” “내 서동(書童)의 자격으로 나를 대해야 돼.” 도운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서동이라고? 내가?’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천하의 재녀 도운하가 서동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요.” 노팔룡의 입이 째지고 있었다. ‘흐흐흐! 서동, 서동… 이렇게 신나는 달밤이 있나?’ 도운하는 알지 못했다. 노팔룡이 의미하는 서동이 어떤 것인가를 말이다. ‘오늘밤부터는 심심치 않겠구나.’ 다시 음식을 먹으며 노팔룡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노팔룡을 바라보던 도운하는 문득 이상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좋아하죠?” 노팔룡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무 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야?” 3 성숙해(星宿海). 중원에서는 신비의 땅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으로, 청해와 기련산(祁連山)을 사이에 두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지와 구릉 등이 흡사 바다처럼 막막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의 풍물은 자못 신비한 감이 있었다. 구릉이 이어지는 곳에는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는가 하면 어느새 초지가 나타나고 곳곳에 호수가 고여 있어 천변만화하는 지형이었다. 그야말로 인간만사의 풍운을 대비케 하는 곳이었다. 휙휙-- 마치 새처럼 구릉지대를 날아가는 인영이 있었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로 볼 때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영은 대여섯 개의 구릉을 단숨에 넘더니 문득 한 산등성이에서 멈추었다. 한 명의 자의 중년미부와 꽃같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바로 우담화 옥가영과 하여령이었다. 그들은 다정한 모습으로 손을 잡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시야에는 아득히 깔린 지평선이 보이고 있었다. 그 저편으로 보일 듯 말 듯한 산이 보였다. 곤륜산(崑崙山)이었다. “힘들지 않느냐?” 옥가영이 자애스러운 음성으로 묻자 하여령은 생긋 미소지었다. “선배님께서 잡아 주셨는 걸요 뭘.” 옥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너를 도와 줄 필요도 없었다. 너의 몸 속에 진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니 너의 사부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 것 같구나.” 하여령은 고개를 숙였다. 새삼 사부의 은덕이 생각났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사부의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좀 쉬었다 가자꾸나.” 옥가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알맞은 바위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앉았다. 석양(夕陽)이 밀려들고 있었다. 구릉과 초원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변방의 신비한 풍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두 여인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상(哀想)으로 가득찬 채 오랫동안 넋을 잃고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옥가영은 문득 입을 열었다. “너를 데려갈 남자가 누구인지 무척 행운아일 것이다. 노팔룡이라고 했느냐?” 석양 탓만은 아니었다. 하여령의 얼굴엔 붉은 노을빛이 곱게 물들었다. “예.” 옥가영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그 아이 이야기 좀 해주렴. 난 무척 궁금하단다.” 여인은 여인이었다. 옥가영은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지난날 자신에게도 청춘의 시절이 있었고, 가슴을 앓던 사랑 이야기를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그로 인해 평생 씻지 못할 쓰라린 상처를 안았지만 말이다. 하여령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그, 그저 그런 사람이에요.”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노팔룡. 대체 그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옥가영은 웃으며 말했다. “못써. 어른을 속이려 하면.” 그래도 하여령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할 것인가?노팔룡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꺼내면 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노팔룡의 가치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것이었다. 옥가영은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여 말했다. “어떤 사람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사람이니 어디 보통 사람이겠느냐?” 그 말에 하여령은 속으로 혼자 웃고 있었다. (그래요. 노선배님. 그야말로 보통 사람은 아니지요.) 옥가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어쩌면 그녀는 지난 날의 화려하고 아름다왔던 시절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석양에 피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형언키 어려운 회한이 어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옥가영은 그리움이 담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여령은 그녀의 눈에서 솟아나오는 그리움에 가슴이 뭉클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옥가영이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금륜맹주 막비. 희대의 패도인이 된 막비야말로 옥가영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불륜의 씨앗인 막비. 그는 옥가영이 원치 않는 소생이었지만 핏줄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옥가영은 자신의 몸 속에서 나온 막비를 만나기 위해 지금 금륜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여령은 불안을 금치 못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의 패도인 막비, 그가 친모인 옥가영을 어떻게 대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하여령은 그동안 금륜맹이 행했던 일과 중원무림맹이 그를 응징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자 옥가영은 아들을 만나 유혈극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정(母情)으로 호소해 보려는 것이었다. 멀리 곤륜산이 바라다 보이고 있었다. “…….” 두 여인은 각각 다른 생각에 잠긴 채 곤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령의 가슴 속에는 불안이, 옥가영의 가슴 속에는 진한 모성애가 각각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4 눈(眼). 마치 천산의 계곡 사이에서 은밀히 흐르는 옥수처럼 투명한 눈이 지금 한 사나이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 여인의 눈이었다. 운명이 도운하란 이름을 선사한 여인, 그녀는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아련한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했다. 보아도 보아도 알 수 없는 사람, 이 자와 함께 여행을 한 것은 불과 사흘 밖에 안되었다. 한 인간을 아는데 사흘이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인간인 도운하에게 있어 사흘이란 기간은 너무나도 긴 것이다. 그 사흘의 기간 동안에 그녀가 알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체 누구길래 단순히 등을 돌리는 한 동작만으로도 나를 이렇게 허전하게 하는가?불과 세 평 남짓한 공간 속에 그녀는 존재하고 있었다. 초라한 침상 하나가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해 버린 허름한 객점의 방이었다. 그러나 도운하란 여인이 있음으로서 세상에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객방이었다. 하지만 정작 여인 도운하는 쓸쓸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함께 침상에 누워있는 사나이, 노팔룡이 등을 돌리고 있음으로 해서 그녀는 지금 가슴이 온통 텅 비고 허전함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놀랍고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 도운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사나이의 등을 쓸었다.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쓸어본다. 사나이가 덮고 있는 이불이 올라간다. 일부러 이불을 끌어올린 것이다. 여인의 가슴은 더욱 허전해졌다. “대체 왜 그러세요?” 도운하는 애원하듯 물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니에요?” 가녀린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비로소 노팔룡은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불만에 가득찬 소리를 내뱉은 것이었다. “약속이 틀리잖아.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제일 싫어!” 여인, 도운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더욱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제가 언제 약속을 어겼다고 그래요?” 그 말에 도리어 노팔룡이 눈을 크게 떴다. 한 마디로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세, 세상에… 이렇게 오리발을 내밀 수가! 관둬. 관두란 말이야.”노팔룡은 다시 침상에 눕더니 등을 돌려 버렸다. “말, 말씀을 해주셔야 알죠.” 도운하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노팔룡은 다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번 분명히 나와 약속했잖아? 나의 서동이 되어 주겠다고!” “……?” “그런데 왜 내가 같이 목욕하자니까 싫다는 거야?” “예에?” 도운하는 멍청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말이다. “아니? 그거와 서동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이번에는 노팔룡이 입을 딱 벌렸다. 정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급기야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도로 돌아 누워 버렸다. “듣기 싫어! 말도 하기 싫다구!” “…….” 도운하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지만 왠지 그가 자꾸만 등을 보이고 눕자 그만 절벽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어…….” “…….” “저어…….” “…….” 노팔룡은 정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대단히(?) 실망을 한 모양이었다. 아니, 실망을 하다못해 크게 배신을 당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도운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 목욕하면 될 거 아니에요.” 어렵게 떨어진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노팔룡은 마치 용수철이 퉁겨지듯 일어나고 있었다. “저, 정말?” 수증기가 자욱히 일어나는 욕실(浴室) 안이다. 욕실은 비좁았다. 그 속에 두 남녀의 몸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 갇혀 있는 남과 여는 각기 너무나 틀린 심정이었다. 도운하는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 남녀가 함께 있다는 것만 하여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것도 부족하여 지금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발가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혼욕(混浴)을 허락한 자신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약과다. 처음 그녀가 주문(?)에 응해 노팔룡의 등을 밀어줄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노팔룡이 자신의 등을 밀어주겠다고 할 땐 차라리 죽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일단 내린 결론이요, 엎질러진 찻물이요, 쏘아진 화살이었다. 그녀는 꾹 참고 등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때부터 난리가 난 것이다. 노팔룡은 자신의 뒤에서 아무데나 손을 쑥쑥 뻗어 유방이고, 여인의 은밀한 비부이건 할 것 없이 문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물론 도운하의 몸에 때가 있을 리 없었다. “목욕을 하려면 깨끗이 해야 개운한 법이라구.” 어쩌구 하면서 그는 자신의 몸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것이 아닌가? “어맛! 그건…… 아니, 거기는…….” 도운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절망이었다. 체념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손이 들어올 때마다 피하고 몸을 틀고 했지만 이미 하여령을 통하여 갈고 닦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 노팔룡의 솜씨를 어찌 당할 수 있으랴?마침내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이미 그에게 몸을 빼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순결까지도 주었는데 이제 와서 아낀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침내 도운하는 그의 손에 자신을 떠맡기고 말았다. 그녀의 저항이 없어지자 노팔룡은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그는 소중한 보물단지를 이제 마음껏 감상하고 어루만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의 알몸을 공깃돌 다루듯이 이리저리 애무하고 있었다. “어때 좋지…? 내가 뭐랬어? 쉽게 선경에 드는 길은 남녀간의 교합이 제일이라니까.” 이렇게 떠들어대는 노팔룡의 입심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문득 도운하는 자신의 몸 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이상야릇하고 뜨거운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팔룡의 행동은 처음에는 손에서 시작되었으나 차츰 대담해 졌다. 그것은 물론 기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우연히 기어 들어간 기루에서 만난 기녀 월병,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인생의 비법을 체득한 것이다. 노팔룡으로서는 그 비법을 써먹을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어찌 그냥 두겠는가. 그는 도운하가 놀라고 당황하여 까무라치건 말건 최대한으로 그 비법을 시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도운하는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남녀간의 행위- 그것도 온갖 기기묘묘한 백태(百態)를 요구하는 노팔룡의 끈질긴 요구에 처음에는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성숙한 여인의 육체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혀까지 동원되고 있었다. 노팔룡의 손과 혀가 자신의 온몸에 닿을 때마다…… 처음에는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고 전율스러웠던 것들이 차츰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뒤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의 혀가 가슴을 핥고 더욱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도운하는 발가락을 한껏 안으로 오므리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마침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깊은 곳이 뜨겁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혀가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입술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팔룡의 혀가 춤을 출 때마다 그녀의 몸도 퉁기어 올리며 따라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좁은 욕실 안은 온통 춘풍이 불고 있었다. 도운하는 설마 자신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경멸하고 있던 것…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경멸하고 있던 자신의 관념이 한순간에 뒤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고 저주하던 것들이 자신의 몸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흐흐흑…….” 그녀는 문득 어느 사이엔가 두 손으로 노팔룡의 목을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그가 떨어져 나갈까봐 두려운 심정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과 육체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의 영육은 하나가 되고 있었다. 점점 두 사람의 몸은 욕조 안의 물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하나의 음침한 눈이, 한 쌍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들의 그런 행위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두 사람은 열에 들떠 욕조 안을 뒹굴며 까맣게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눈동자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을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5 ‘쨍강!’ 떨어졌다. 들고 있던 호박으로 만든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좀체로 실수를 하지 않는 인간, 백선결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잔이었다. 요즘 들어 자주 술을 마시는 백선결이었다. 그런 그가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술잔을 놓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 정말이냐?” 그의 앞에는 검옥상이 서 있었다. 검옥상의 보고가 그를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항상 심해와 같이 깊고, 유리같이 투명하던 백선결의 눈동자는 검옥상의 보고에 의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검옥상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것은 웬만하면 말을 하지 않는 인간 검옥상의 긍정을 뜻한다. 몇 번, 아니 몇백 번을 물어 보아야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쿵.’ 이번에는 일으켰던 몸이 의자에 주저 앉는다. 백선결은 태어나서 이렇게 허탈해 본 적이 없었다. “…….” 잠시 답답할 정도로 지리한 침묵이 흘러갔다. 의자에 주저앉은 백선결은 넋이 나간 듯 침묵에 잠겼다. 그의 눈은 허공에 꽂혀 있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 곳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허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검옥상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가 아는 한, 적어도 그가 백선결에 대해서 아는 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한참 후에야 백선결의 입술이 떨어졌다. “알았다. 나가 있거라.” 간신히 쥐어 짜는 듯한 음성을 듣고서야 검옥상은 몸을 움직였다. 그는 최대한 백선결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신속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검옥상은 밖으로 나온 후 멍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는 백선결의 기분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런 적은 없었다. 그는 오직 명령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그 외에는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는 인간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거울과 같은 인간이었다. 항상 주인이 명하는 대로 반사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람이 컸다. 사나이 백선결- 그가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정녕 뜻밖이었다. 검옥상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저 분도 인간이구나.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신을 인간으로 만들다니…….’ 밖으로 걸어나가는 검옥상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도 한 여인을 사랑해 보았으면…….’ 6 인간, 특히나 백선결같은 특별한 인간이 겪는 괴로움이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 패배감. 그렇다. 그는 자신이 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강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깨어졌을 경우 이렇게 괴로움에 빠진다. 자신이 그토록 목 메이게 원하던 것, 그것은 한 여인의 사랑을 얻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원하는 천하제일인이라는 자리 만큼이나 비중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도운하는 그의 인생의 목표가 되다시피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른 사나이의 품에 안겨 희열과 환락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고결하게 보았고, 그토록 존경까지 하다시피 했던 여인이 말이다. 그것도 전혀 상대가 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인간의 품에서…. 거기까지만 해도 참을 수는 있다. 그런데 검옥상의 보고에 의하면 그녀가 노팔룡이라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과 전라로 욕실 속에 들어가 희열에 몸부림치고 있다지 않은가?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를 갈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을 정도로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금 백선결이 감내하고 있는 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그는 이 밤이 어서 지나갔으면 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더디오는 법이다. 날이 밝기까지는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그의 뇌리에 아득한 과거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늘 어딘가로 떠나곤 했다. “이번엔 언제 돌아 오세요?” 아버지는 어린 백선결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글쎄, 아마 석 달쯤 걸릴 거다.” “또요……? 씨이, 그럼 결아는 또 외톨이가 되잖아요?” “미안하다. 대신 할아버지가 잘 돌봐주실 거다.” “싫어요! 할아버진 아프잖아요! 결아는 엄마도 없는데 왜 아버진 맨날 여행만 떠나는 거예요!” 결아는 항상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표국의 표사(*화물 및 사람을 보호하여 운송해 주는 직업)였으므로 한 번 표물을 맡으면 적게는 한 달, 길면 육개월 이상을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에 죽었으므로 병든 할아버지만이 그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그런 아버지의 직업을 그는 경멸했고, 늘 외로움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것도 아버지가 표행 중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어린 소년은 할아버지의 시신 옆에서 꼬박 한 달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돌아 오실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 오시지 않았다. 표행 중 태행산(太行山)에서 도적을 만나 싸우다가 죽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썩어가는 노인의 시신 옆에서 실신한 상태로 함께 죽어가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동정했지만 아무도 나서서 직접적으로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적어도 천애고아인 한 소년의 입장으로 볼 때 그것은 분명 기적임이 분명했다. 우연히도 한 명의 기인이 근처를 지나다 그를 거두게 된 것이었다. 소년 결아는 그 기인에게 선택되어 무림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 기인은 바로 개왕( 王) 도지연(陶地然)이었다. 즉 강호칠기(江湖七奇)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백선결. 그의 인생은 그로부터 엄청나게 변화했다. 그는 사부 개왕 도지연으로부터 절정의 무학을 익혔을 뿐 아니라 무림의 전설로까지 불리워지는 일승(一僧) 천광선사가 남긴 유학까지 익히게 된 것이었다. 개왕 도지연. 그는 지난 날 신룡육협의 일원이다. 그는 일패의 전인인 막도에 의해 기련산에서 참담하게 당한 이후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에 몸부림 쳤다. 특히 정혼녀를 잃은 분노는 그를 미치광이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그는 오직 복수만을 일념으로 살게 된 것이었다. 더욱이 막도에게 당한 상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거의 폐인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한데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도지연은 우연히 개방의 무고(武庫)에서 한 권의 낡은 불경(佛經)을 발견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일승 천광선사가 남긴 유급(遺 )이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도지연은 복수를 꿈꾸었다. 그의 복수의 염원을 이루어 줄 사람은 그의 딸 도운하였다. 도운하는 바로 하숙하가 낳은 아이였다. 비록 기련산의 밀부에서 하숙하는 뜻밖의 음모에 걸려 당정환과 불륜의 관계를 맺기는 하였으되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딸이 자신의 핏줄이기를 믿고 있었다. 그런 집념 아닌 집념으로 도운하를 납치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복수를 하여 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하였다. 그가 천광선사의 유학을 발견하고 미칠 듯이 기뻐하였을 때, 거의 동시에 그는 도운하의 체질이 그 무학을 익히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도운하는 여인으로 순음의 지체를 가진 여인은 천광선사의 무학을 익힐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리로 선택된 것이 바로 백선결이었다. 비록 우연히 백선결을 거두었으나 그의 자질이 뛰어남을 보고 복수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운하의 보조자로서였다. 백선결은 한참 훗날에야 사부가 진심으로 자신을 제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수의 도구로써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린 그의 가슴에 커다란 못을 박았다. 아닌게 아니라 개왕은 그의 사부이긴 했으나 그에게 한 점의 정도 주지 않았다. 그는 복수의 도구로써 다만 도운하의 수족같은 존재여야만 했다. 백선결은 그 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개왕에게 가 따졌다. 어찌하여 자신이 도운하의 수족이 되어야 하느냐고. 그는 자신은 자신일 뿐 개왕의 복수심의 도구도, 도운하의 수족도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비극은 그날밤 일어난 것이다. 개왕은 막도와의 싸움으로 인한 상세가 깊은 상태로 백선결의 뜻밖의 저항에 크게 상심한 나머지 그만 기혈이 역류하고 만 것이었다. 개왕은 끝내 한 모금의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개왕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도운하가 지켜본 것이었다. 도운하의 눈에 비친 백선결, 그 느낌이 어떠했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백선결은 사부의 은덕을 저버린 야망의 화신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 백선결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이 밤이 어쩌면 평생의 밤을 모두 합친 것 이상으로 길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밤새 잠을 한 잠도 자지 못했다. 아! 어찌된 일인가! 백선결의 머리칼이 마침 창문을 타고 비쳐들어온 햇살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가?그렇다. 그의 머리칼은 하룻밤 사이에 은발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한 인간의 고뇌가 단 하룻밤 사이에 머리칼을 변색시킬 정도였단 말인가.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천하가 인정하고 그 스스로도 자부했었건만 그는 결국 자신의 고뇌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맹세코 도운하 밖에 없다. 그런데 도운하는 끝내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고 그를 항상 멀리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이라도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언제고 그의 진심을 그녀가 알아주기만 한다면, 설사 무덤에 들어가는 그날까지라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파랑새는 저만치, 아주 멀리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노팔룡이란 무식하고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괴물에게로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그의 자존심을 엉망으로 만들고, 비탄에 잠기게 한 것이다. 그리고 꼬박 새운 하룻밤이 그의 머리칼을 완전히 탈색하게 만든 것이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백선결의 눈에는 점차 이상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급기야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28장 사라진 무림맹주(武林盟主) 1 아침을 싫어하는 인간. 노팔룡은 오늘따라 섭섭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갈면서 어찌하여 밤이 이토록 짧고, 또 아침은 매일같이 찾아오는가를 입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빨리…… 해가 중천에 떴단 말이에요.” 도운하의 재촉이 귀를 쟁쟁하게 울린다. 어쩌면 여자란 짐승은 이렇게 똑같을까? 하여령도 매일같이 아침이면 잔소리를 늘어 놓던데……. 도운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팔룡은 진저리를 치면서 침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젯밤의 황홀했던 놀이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였다. ‘쩝…….’ 그는 도운하가 어느새 옷을 단정히 입고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빨리빨리 서둘러요.” 도운하는 화급하게 재촉했다. 그러나 노팔룡은 뭉기적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니 알몸이 드러난다. 도운하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아직까지 남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그녀에게 무리였다. 노팔룡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면서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참. 자기도 좋아서 난리를 치더니만 꼭 아침이면 딴 사람이 된단 말이야.’ 그는 어기적거리며 옷을 입었다. 그리고 도운하에게 이끌리다시피 객점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저녁을 먹어야 할텐데… 그래야 또.’ 하지만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으니 그가 생각하기에도 참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들은 반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요기를 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막 객점을 빠져나가던 도운하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부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으응? 무슨 일이야?” 노팔룡은 의아하여 물었다. 그는 도운하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객점 밖. 한 그루의 백양목이 서 있었다. 그 나무 아래를 바라보던 노팔룡은 흠칫 놀랐다. “아니 저 자는?” 나무 아래 언제부터인가 본래 그곳에 있었던 듯 싶은 사나이가 서 있다. 그는 바로 백선결이었다. “아니 백…….” 노팔룡은 반가운 마음에 막 소리를 치려는데 도운하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말을 막았다. “먼저 가세요. 곧 따라 갈테니.” “아니 왜? 나도…….” “저 혼자 가겠어요.” 도운하는 잘라 말하고 앞으로 걸어간다. “…….” 노팔룡은 멍하니 도운하의 쌀쌀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전에 기녀가 여자란 알 수 없는 동물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군. 저렇게 싹 달라질 수가.’그렇다. 도운하의 이런 모습은 그에게 몹시 낯설게 비치는 것이었다. 뭐라 할까? 몹시 큰 듯도 싶고, 또는 아주 얼음장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고개를 흔들고 옆쪽으로 보이는 반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2 다원(茶院). 마침 그 찻집에는 밀실이 있었다. 그 밀실에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눈길이 팽팽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왜지? 어째서지?” 백선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 앉은 도운하의 눈길은 지금 멀리 가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길섶의 바람에 지는 낙엽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잎을 잃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도운하의 옆 얼굴은 아주 쓸쓸해 보인다. 또……. 백선결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런 도운하의 옆모습이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좋았다. 쓸쓸한 여인. 그것은 백선결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고 있는 영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어디가 그 자보다 못한가? 왜 하필이면 그 놈과?” 백선결의 음성은 갈수록 더욱 떨리고 있었다. 문득 도운하의 눈길이 그를 향한다. 그녀의 텅 비어 있는 듯한 눈동자를 본 순간 백선결의 마음은 위축되고 있었다. 도운하는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 놈이 아니라 그 분이겠죠.”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주는 충격은 대단했다. 백선결은 쇠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눈 속에는 고통의 빛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 도운하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그만 가겠어요.” 일어서는 도운하. 그녀를 바라보는 백선결의 얼굴이 무참히 이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다. 불과 하루사이에 머리칼이 은발로 변해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그 점에 대해서 도운하는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관심이 백선결에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선결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더러운 계집! 겉으로는 언제나 고결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더럽고 음탕한 생각에 젖어 있는 계집,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한낱 창부에 불과한 계집이다! 후후후……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할 수가 있을까?” “…….” 도운하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버렸다. 백선결의 감정은 미친 말처럼 뛰고 있었다.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울분! 실망! 증오가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다. “그 놈과 함께 욕실에서 벌인 일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지! 이 더러운 창부야!”부르르……. 떨린다. 도운하의 몸이 폭풍을 맞은 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백선결의 입에서 이런 폭언이 나오리라고는 천만뜻밖이었다. 그녀는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언제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있었는가? 언제 백선결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리라고 상상인들 해 보았던가?그녀는 무수한 창과 칼이 자신을 발가벗긴 채 난도질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백선결은 정작 폭언을 해놓고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두려움. 그녀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성역에 침을 뱉은 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정녕코 도운하는 그에게 있어 성역이었다. 뜻밖이었다. 엄청난 폭언을 들은 도운하가 예상과 달리 문득 몸을 돌리더니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실린 미소가 어리는 것이 아닌가?보기만 하여도 황홀해지는 그런 달콤한 미소가 입가에 살짝 흘러내리는 것이다. 멍해져 있는 백선결의 귓가에 도운하의 달콤한 음성이 흘러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제야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아요.” 이어 도운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련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 백선결은 막 일어서려다 털썩 주저 앉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본 도운하는 이렇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도운하의 얼굴에 그런 달콤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폭언을 퍼부었음에도 그런 미소가 흘러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백선결의 얼굴은 참담하게 이그러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중얼거리는 백선결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3 아미금산(峨嵋金山)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미금산을 넘으면 대곤륜(大崑崙)의 광활한 산역이 다가 온다. 산림은 울창하고, 높은 지형에는 간간이 만년설(萬年雪)이 쌓여 있는 광경이야말로 장관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그야말로 부질없다는 것은 이런 대자연의 신비한 장관을 대할 때 속속들이 느껴진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은 초라하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한 점의 분진(粉塵)에 불과하게 여겨질 것이다. 때때로 인간은 그가 속한 싯점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는 오만에 빠진다. 그러나 눈을 돌려 보면 저 멀리 웅대한 산이나 억겁을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태양, 태초 이래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는 대해(大海)를 보면 그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 모든 자연의 조화 속에 찰라적으로 머무는 미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노팔룡은 그런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도운하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노팔룡의 눈빛은 몹시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여자로군.’ 불과 오늘 아침만 하여도 우울해 보이던 그녀였다. 한데 갑자기 너무나도 활달해진 것이 아닌가? 그녀는 몹시 기분이 좋아진 듯이 자신의 팔짱을 끼기도 하고 곧잘 재잘거리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아까 그가 슬쩍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더니 도리어 목을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입맞춤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어쨌든 노팔룡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원인이 바로 백선결에 있었다는 것 따위는 그의 생각 밖이었다. 어쨌든 앞길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느낌만이 즐거울 따름이었다. 마침 인적이 드문 산길이 나오고 있었다. “헤헤! 이보라구.” 그는 슬쩍 도운하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수작을 걸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산길이었다. 이런 곳에서라면 좀더 색다른 맛이 날 것 같았다. “아이…….” 도운하는 완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옳지, 됐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침 길옆에 푹신해 보이는 풀이 깔려 있었다. 그는 도운하의 허리를 안고 그곳으로 슬며시 쓰러진다. 한 번 배운 짓이라 좀체로 욕심이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안돼요. 이런 곳에서 어찌, 음…….” 도운하는 짐짓 반항하는 듯 하더니 몸에서 힘을 풀었다. 또 다시 노팔룡의 숙련된 기술이 들어간 것이다. 그의 손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깊은 곳으로 파고든 것이다. 노팔룡은 히히덕거리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안돼요.” 문득 그녀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힘껏 그를 뿌리치면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 그가 멍해져 올려보고 있는데 도운하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치며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노팔룡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길 저편으로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제길. 방해자가 있었군.’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은 바로 백선결 일행이었다. 백선결과 검옥상, 그리고 노팔룡이 모르는 두 명의 인물이 대동하고 있었다. “…….” 도운하는 반듯이 서서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백선결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도운하는 차갑게 물었다. 백선결은 평소에 지니고 다니지 않던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검끝을 들어 노팔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와의 대결을 원하오!” 도운하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는 자르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허락할 수 없어요.” 노팔룡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왜 백선결이 자신에게 도전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때 백선결의 싸늘한 말이 들렸다. “허락은 필요치 않다. 도운하.”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한 번도 도운하의 뜻을 역행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도운하는 여전히 도도했다. “당신은 허락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어요.” 백선결은 아무 말없이 검을 뽑았다.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는 듯이. “……!” 그는 막 앞으로 나서려다 동작을 정지했다. 그리고 놀란 듯이 입을 열었다. “옥상…… 네가?” 그의 눈썹이 거꾸로 치솟고 있었다. 그의 눈은 검옥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까지 그를 따르던 검옥상이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다. 검옥상과 함께 지난 십여 년간 그의 수족처럼 움직여졌던 다른 두 명도 함께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누는 것이 아닌가?이 돌발적인 사태는 그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이럴 수가…….’ 그러나 백선결은 백선결이었다. 그는 입술 굳게 다물며 움직였다. 여차직하면 검옥상 등도 한꺼번에 베어버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때다. 그의 귓전에 차분한 도운하의 음성이 흘러 들었다. “어리석어요. 옥상이 당신의 허리를 신룡출해(神龍出海)의 초식으로 노리고 표린(票麟)이 태산압정(泰山壓頂)으로 당신의 머리를 노릴 꺼예요. 뿐만 아니라 목상(木常)이 당신의 두 다리를 출어잠룡(出於潛龍)으로 동시에 공격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죠?” “으으……!” 백선결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도운하의 말이 거짓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도운하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여인이다. 자신의 무공 수위와 능력을 아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는 틀림없이 피를 뿌리고 몇 개의 토막이 되어 뒹굴게 된다. 그는 잠시동안 그 삼 인의 합격을 생각해 보았으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공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미리 뽑은 검 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의 마음과 같이. 만일 억지로 공격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는 일 초도 펼치지 못하고 즉사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설혹 죽을지라도 그것만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차디찬 냉소가 어렸다. 그가 막 결심을 굳히고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모두 물러서!” 느닷없이 고함을 지른 것은 바로 노팔룡이었다. “……?” 놀란 것은 도운하였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물러서라니까!” 노팔룡은 거듭 화를 벌컥 내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래요?” 노팔룡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저 자는 무인이다. 무인에게는 예의를 차려야 한다. 도전이 오면 받는 것이 무인의 원칙, 그러니 어서 모두 물러나라. 나는 도전을 받겠다.” “……!” 도운하는 해연히 놀랐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정말 뜻밖이었다. 그가 나서지 않더라도 그녀는 백선결을 처리할 수 있었다. 백선결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노팔룡이 그의 도전을 받겠다니. “무엇 하는 거냐? 어서 물러서!” 노팔룡은 그들이 꿈쩍도 않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정말 노기가 잔뜩 실린 음성이었다. “당신…… 조, 좋아요.” 도운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의 말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검옥상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말대로 해요.” 검옥상 일행은 일제히 검을 거두었다. 동시에 그들의 눈에는 의아로움이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도운하가 키운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평소에 백선결의 일을 맡아 하고 있었으나 엄밀히 이야기한다면 도운하의 수하들이다. 그러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백선결에게 검을 겨눈 것이다. 한데 지금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도운하가 노팔룡의 외침을 들은 순간 꼼짝을 하지 못하는지를. 한편 백선결은 표정이 몇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설마 노팔룡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 밖이었다. 하기야 그는 언제나 그의 생각 밖의 인물이기는 했다. 백선결은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오로지 그의 심정은 노팔룡을 일검에 베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노팔룡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나섰다. “백형. 당신이 원한다면 상대해 주겠소. 도전에 응하지 않는 것은 무인이 아니니까.” 노팔룡은 등 뒤의 봇짐에서 목검을 꺼냈다. 바로 그 진천검이라는 나무 막대기다. “……!” “…….” 두 사람은 대치했다. 서로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들은 필살의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 바람도 정지하고 대기도 그 숨결을 멈추는 듯 했다. 뿐만 아니라 관전하고 있는 도운하, 검옥상 등도 호흡을 멈추었다. 아니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이 달랐지만 지금 이 순간 천하 중원무림의 맹주인 백선결과 온통 의문 투성이인 괴협(怪俠) 노팔룡의 일전이 어떤 승부를 가리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일전은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른다.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파르르 파동쳤다. 한 순간의 긴장의 흩어짐, 그것은 곧 어떤 중대한 결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흔들림은 뜻밖에도 백선결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백선결의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동요의 눈으로 노팔룡의 자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자세라면 눈을 감고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물론 과거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는 불가사의한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서 의혹을 느끼고 있을 뿐더러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조차 패배하고 있었다. 노팔룡의 눈! 그것마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노팔룡의 눈을 대하는 순간 그는 투지가 삭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의 눈은 싸움을 앞둔 전사의 눈이 아니었다. 천진하기까지 한 맑은 눈이었다. 노팔룡은 도무지 싸움을 앞둔 사람이 아니라 눈 앞의 어떤 물건을 보는 듯한 담담한 눈이 아닌가. ‘으윽.’ 백선결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그도 덩달아 투지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돼! 안돼…….’ 마음 속으로 수없이 부르짖으며 긴장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노팔룡의 눈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그는 나무막대기를 아무렇게나 든 채 한가롭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선결은 알 수 있었다. 승부 이전에 이미 자신은 패한 것이다. 그는 비로소 또 한 가지를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도운하가 자신을 택하지 않고 노팔룡을 택했는지를. 백선결의 검 끝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상단부를 가리키던 검극이 땅으로 완전히 떨어졌다. “……?” 바라보던 중인들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백선결의 이런 자세를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의 무공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는 도운하로써는 더욱 더 이해 밖이었다. ‘저런 무공은 없었는데……?’ 문득 백선결은 한 소리 비참한 탄식을 발하더니 돌아섰다. 그의 어깨는 아래로 축 늘어지고 있었다. “내가…… 졌다.” 그뿐이었다. 백선결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걸어가고 있었다. 휘청휘청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매우 처량했고 고독해 보였다. 마치 하늘 아래 그가 닿을 곳은 없는데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 가야만 하는 자신의 존재를 한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노팔룡의 우렁찬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아니요. 당신은 지지 않았소. 이번의 승부는 정당한 것이 아니오. 서로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오. 하지만 기다리겠소. 당신이 자신을 다스리고 나를 찾아오는 그 순간을 말이오.” 백선결은 들었다. 그리고 그는 더욱 더 비참해졌다. ‘졌다. 완벽하게 졌다.’ 그는 대꾸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작정 앞을 보고 걸어가고 있는 그는 이제까지 쌓았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 순간부터 인의대협 백선결의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무림맹의 맹주라는 직위도, 인간 백선결도, 아니 무인으로서의 백선결도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팔룡의 말이 맞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렇소. 나는 나 자신에게 이미 졌소. 내가 나를 극복하지 않는 한은.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될 것이오.’ 백선결. 그는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무림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도운하를 비롯한 중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이후 무림에서 인의대협 백선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인가 그가 자신을 극복하고 다시 나오는 날이 되기까지는 역시 천하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 도운하는 멍하니 노팔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경이와 찬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뭘 해?” 노팔룡이 이상하는 듯이 물었다. “아, 아니에요.” 도운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 어서 가자구.” 노팔룡은 멀쩡하게 말했다. “풋! 당신은 정말…….” 도운하의 눈에는 사랑스런 빛이 따스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팔룡은 문득 검옥상 일행을 쓱 둘러보더니 내뱉듯이 말하고 있었다. “저 친구들 좀 없애버릴 수 없어?” 그 말에 검옥상을 비롯한 몇 사람의 안색이 핼쓱해 졌다. 도운하는 깔깔 웃더니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들었죠? 당신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야 겠어요.” “……!” 검옥상 일행은 돌아섰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겠는가. 비록 가슴 속에는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눈으로 본 일전, 그로인해 이제 그들은 노팔룡에 대해 신(神)과도 같은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4 금륜맹주 막비가 놀라고 있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단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막비의 입에서 나온 말. 그것은 몹시도 회의적인 것이었다. 독고완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대답해야 될지 몰랐다. “정말이냐고 물었다.” “네. 물론…….” “그럴 수가.” 막비는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지금 그의 앞에 엎드려 보고하는 인간, 독고완은 그가 가장 믿는 수하 중의 하나다. 그런 그가 올린 보고가 잘못되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선결이 은퇴를 선언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런 보고였다. “노팔룡이란 자와의 대결에서 일 초도 안되어 패배를 자인했습니다.” 뒤이은 보고였다. 독고완은 거미줄같은 정보망을 치고 있었고, 이미 사방 수천 리에 걸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백선결과 노팔룡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 막비는 눈을 감았다. 이제까지 그가 천하에서 유일한 적수라고 생각했던 위인, 백선결이 사라졌다. 그 사실은 허탈감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치기 위해 곤륜으로 온다는 사실은 그의 투지를 불러 일으켰고, 향후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온 정열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노팔룡이란 수수께끼같은 인간이 뜻밖에 부상했지만 자신의 최종 적수는 변함없이 백선결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막비의 허탈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냉정한 인간인 것이다. 그는 이 사건의 원인을 생각했다. ‘그 작자의 곁에 도운하가 붙어있다고?’ 도운하. 어쩌면 백선결 이상으로 그가 두려워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백선결이 중원 무림맹주라면 도운하는 암중으로 백선결을 조종하는 여인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을 꼽는다면 바로 도운하가 그런 여인이다. 중원 무림맹이 결성된 것도 따지고 보면 도운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막비였다. ‘모두 백선결이 중원 무림의 기둥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도운하가 있다. 그녀는 백선결의 머리이고, 중원 무림의 지낭(智囊=꾀 주머니)이다. 그런 도운하가 노팔룡에게 빠져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독고완.” “예. 맹주님.” “네게 기회를 주겠다. 노팔룡이란 자를 죽여라.” “……!” 독고완의 표정이 변한다. 그는 노팔룡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상상할 수 없는 신위를 직접 접했다. 그에 대한 공포는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 속에 깊은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었다. 막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바보같은! 머리를 써라, 머리를.” 독고완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막비를 바라본다. 막비의 뜻을 탐색하려는 듯이. “최대한 탐색이라도 해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자의 진실한 정체다.” 독고완은 뿌옇기만 했던 가슴 속의 답답했던 느낌이 걷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그는 노팔룡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를 죽일 자신은 솔직이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비의 주문이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선명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간을 아껴라.” “옛.” 독고완이 사라진 후, 막비는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부르셨습니까?” 속살이 환하게 비치는 망사의를 입은 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막비를 바라보았다. 막비가 앉은 곳에서 볼 때 그녀의 깊게 패인 가슴 속이 그대로 들여다 보인다. 풍염한 젖가슴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 정도로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인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막비에게는 일상적인 느낌 밖에 없었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그것도 항상 최상의 것만을 취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미녀를 내려다 보며 무심히 입술을 달싹였다. “영천빙과(永川氷菓)를 먹고 싶다.” “준비하겠습니다.” 영천빙과, 그것은 천산에서만 나는 특수한 과실이다. 그것을 얼려두고 먹는 것이다. 맛도 맛이려니와 희소성으로 따지면 황제조차 맛보기 힘들 만큼 귀한 것이었다. 잠시 후, 두 명의 나삼미녀가 접시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접시에는 물감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붉은 과실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투명하게 얼어 있었다. 한 미녀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접시를 받쳐 들었고 한 미녀가 옥저로 영천빙과를 집어 막비의 입으로 받쳐 올렸다. ‘노팔룡이라…….’ 입 안으로 영천빙과가 들어왔을 때 사르르 녹으며 뼈골까지 시리디 시린 느낌과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막비는 그 순간에 노팔룡이란 이름을 몇 번인가 뇌이고 있었다. 제29장 함정 (1) 1 도운하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렇게 밖에 못 만들어요?”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왜 그래, 대충 먹지.” 노팔룡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그에 비해 도운하의 식성은 정말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벌써 다섯번째 음식을 되돌려 보낸 것이다. 하기사 이런 변방의 반점에서 그녀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있기는 있었다. 노팔룡은 다섯번째 나온 요리 접시를 보고 무심코 젓가락을 들어 한 점 입에 넣어 보았다. “어? 왜 이리 쓰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그의 입맛에도 그 음식은 분명 맛이 이상했다. 마침내 도운하가 참을 수 없는지 주인을 불렀다. “주방장은 어딨죠?” “그, 그게…….” 뚱뚱한 반점 주인은 난색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날씨가 서늘한데도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도운하는 문제의 핵심을 알아냈다. “주방장이 없군요?” “그, 그렇습니다요. 갑자기 그만 두는 바람에…….” 도운하의 고운 얼굴이 다시 찌푸러 졌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반점이 또 어딨죠?” “한 이십 리 쯤 가면 동천반점(東喘飯店)이라고…….” “가요. 우리.” 도운하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일어섰다. 노팔룡은 입맛을 다시며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도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어서 빨리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 그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고 싶었지만 일단 배부터 채우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2 벌써 열다섯번째 반점을 전전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두 사람은 음식을 시켰지만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서야만 했다. 하나같이 나오는 음식들이 도저히 먹을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원인은 간단했다. 주방장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주방장 없는 음식점이야말로 허울 좋는 빈껍데기였다. 게다가 다섯번째 반점에서 시킨 버섯볶음 요리에서는 벌레까지 들어 있어 도운하는 참지 못하고 토해야만 했다. “배 고파. 아무 거라도 먹자구…….” 노팔룡은 애원했다. 그러나 도운하는 오기가 치미는지 고개를 강하게 내저으며 또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그녀의 의지도 점점 꺾이고 있었다. 도도하기만 한 그녀의 위장도 이젠 허기에 시달려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의 심리는 이상하다. 평소라면 무예를 익힌 고수는 적어도 삼 일은 굶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날따라 도운하는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끼고 있다. 간단했다. 그것은 열다섯 차례나 반점을 전전하는 동안 심리적으로 음식에 대한 기갈이 들려버린 것이었다. 이제 지혜롭고 오만한 그녀조차도 머릿 속에는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제발…….” “…….” “제발 운하아…….” 노팔룡은 입술을 악물고 걸어가는 도운하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도운하는 말없이 걸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향기로운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것이 아닌가? “운하!” 노팔룡은 눈이 번쩍 뜨였다. 냄새는 도운하의 후각에도 전달되었다. 그녀의 눈도 반짝 이채를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냄새가 흘러오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토지묘 앞에 대여섯 명의 거지들이 둘러 앉아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는 커다란 고깃덩이가 걸린 채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고, 거지들은 키들거리며 맛있게 고깃덩이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꿀꺽.’ 노팔룡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거지들에게 고기 한 덩이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치가 보여 자신도 모르게 흘낏 도운하를 바라 보았다. ‘옳지.’ 도운하 역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 역시 더 이상 허기를 참지 못하는지 모닥불 위에 익어가고 있는 고깃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팔룡은 성큼성큼 다가가 입을 열었다. “여어, 형씨들. 고기 좀 팔 수 없소?” 거지들이 돌아다 본다. 노팔룡은 잽싸게 소매 속에서 은자 두 덩이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순간 거지들이 다투어 그에게 덮쳤다. “내 거야!” “미친 놈, 내가 먼저 봤잖아!” 싸움이 벌어졌다. 거지들은 은자 두 덩이를 놓고 땅바닥에 뒹굴며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하기야 그만한 돈이면 황소 두 마리는 살 수 있는 거금이 아닌가 말이다. “헤헤…… 정말 맛있겠는 걸? 자, 어서 먹자구.” 커다란 고깃덩이를 취한 노팔룡은 그 중 한 토막을 떼어 도운하에게 내밀었다. 도운하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어서 먹어. 보기는 이래도 훨씬 깨끗한 거야.” “그럼 어디…….” 놀랍게도 도운하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노팔룡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고기 토막을 건네준 후 입을 딱 벌렸다. 그때였다. “헤헷! 여기도 있는데 혹시 살 생각 있소?” 거지 한 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엇인가 시뻘건 것을 내밀었다. 고기를 입에 넣다가 무심코 그것을 본 순간 도운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3 노팔룡은 잔뜩 볼이 부운 채 투덜대고 있었다. “글쎄 개고기면 어떻고 노루고기면 어때, 맛만 있으면 되지…….” “제발……! 제발 그 얘기 좀 그만 둘 수 없어요!” 도운하가 소리를 빽 지른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서서 우웩! 하고 토한다. 먹은 것도 없으니 당연히 나올 것도 없다. 그런데도 나무둥치를 부여 잡은 채 한참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거지들이 먹던 고기는 바로 개고기였던 것이다. 도운하는 그것을 안 순간 들고 있던 고기 토막을 냅다 내던졌고 심지어는 노팔룡이 막 입으로 가져가던 고기까지도 빼앗아 내팽개쳤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도운하는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녀의 기민한 두뇌는 더 이상 정지해 있지는 않았다. 차츰 그녀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굶었죠?” “제길, 몰라서 물어? 벌써 이틀 째라구.” “이틀 동안 서른네 군데 반점을 지나왔어요. 게다가 인가에 들러 봤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는 전혀 먹을 게 없었다는 것이죠.” 노팔룡은 우거지상을 했다. “누가 그걸 몰라? 이러다간 굶어 죽겠다구.” “이상해요.” “……?” “누군가 계획적으로 장난을 치는 거예요.” 노팔룡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둔한 머리로도 이런 상황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금륜맹의 짓이에요.” 노팔룡은 입을 벌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거 참, 그럴 듯해. 하지만…….” “하지만 뭐죠?” “그렇다고 놈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우릴 굶긴 다음 공격하겠죠.” “하하!” “왜 웃어요!” 갑자기 노팔룡이 웃는 바람에 도운하는 짜증 섞인 외침을 외쳤다. “저길 봐.” 노팔룡은 활짝 웃으며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기던 도운하의 눈이 커졌다. “저건…….” 그녀의 눈에 의혹이 짙게 어렸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음식을 가득 담은 커다란 쟁반을 두 손에 받쳐든 채 줄지어 가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쟁반 위의 음식은 군침이 도는 맛있는 요리들이었다. “하하! 어서 가자구! 구세주가 나타났어.” 노팔룡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서둘러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도운하가 그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잠깐만요.” 잠시 후 그들은 나무 위에서 한 채의 낡은 사당을 내려 보고 있었다. 사당 앞에는 수십 개의 요리 접시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실로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대체 무슨 도깨비 놀음이지?” 노팔룡의 말에 도운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리를 날라온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요리를 늘어놓고는 일제히 부복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이 누군지 알았어요.” “엉? 누군데?” “바로 주방장들이에요.” 도운하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팔룡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주방장들이 왜?” “이제 그것을 알아내야죠.” 순간 도운하의 모습이 사라졌다. 노팔룡은 뭐라 물어보려 했으나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방장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당 앞에는 수십 종류의 요리만이 남게 되었다. 도운하가 돌아왔다. 그녀는 사당 앞에 내려서는 순간 깜짝 놀라 외쳤다. “먹지 말아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니 늦어도 한참을 늦어 버린 것이다. 노팔룡은 이미 열일곱 개 째의 접시를 비우고 있는 참이었다. “아아!” 도운하는 절망의 탄성을 발했다. “왜 그래? 맛있는데.” 노팔룡은 바닥에 주저앉아 닭발을 뜯으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도운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괜찮아요?” “뭐가?” “이 음식들엔 독이 들어있단 말예요!” “독?” 노팔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리고는 웃기지 말라는 듯이 이번에는 용봉탕 접시를 들더니 보라는 듯 후루룩 소리를 내어 마신다. “독이라구? 나 원 참…….” 갑자기 노팔룡의 인상이 이상해 졌다. 그는 입을 불룩하게 내밀더니 눈동자가 빙그르르 돈다. “그러게 내가 뭐랬…….” 도운하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덮였다. 그녀는 노팔룡의 온 몸이 새까맣게 타죽는 것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휴우! 말 시키는 바람에 목에 뭐가 걸렸잖아.” 노팔룡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배를 탕탕 쳤다. 그리고 요리 접시 하나를 번쩍 들어 도운하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먹어. 정말 맛있다구.” “…….” 도운하는 멍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 앞의 요리 접시를 의혹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음식에 독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방장 하나를 잡아 문초한 결과 그들이 금륜맹의 협박을 받아 이런 괴이한 짓을 한 것을 밝혀냈던 것이다. 비록 그 이유를 알 순 없어도 주방장들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 자신들이 가장 자신있는 요리를 해서 갖다 놓으라는 주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금륜맹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음식에 분명 독을 탔을 거야. 우릴 죽이려고.’ 그런데 아니었다. 노팔룡은 포식을 한 후 늘어지게 하품하고 있었다. “아함! 배 부르니 졸린데. 우리 한숨 자고 갈까?” 그것이 끝이었다. 노팔룡은 벌렁 드러눕더니 금방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이 드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아무리 단순하다지만 이 판국에 잠을 자다니…….’도운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보다도 더한 고통이 굶주림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게다가 눈 앞에는 온갖 요리가 아직도 태반 이상 남아 그녀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정말 내가 착각을 한 걸까?’ 그녀는 요리 접시를 바라 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이 빛난다. 요리를 향해 길게 줄을 이으며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개미였다. 개미들은 산중에 웬 음식이냐는 듯 무리를 지어 요리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 도운하는 그것을 지켜 보았다. 개미들이 요리 접시를 뒤덮었다. 까맣게 요리를 덮은 개미들은 부지런히 요리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 도운하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역시!' 개미들이 요리 접시 위에서 죽어갔다. 까맣게 몰려오던 개미들은 요리 접시 위에서 독에 중독되어 죽어버린 것이다. 문득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빙빙 도는 것이 보였다. 도운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잠 든 노팔룡을 안더니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까마귀들은 요리 접시로 몰려 들었다. 그러나 까마귀도 개미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요리를 먹는 순간 구슬픈 비명과 함께 몸을 뒤틀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간 것이다. ‘왜?’ 도운하는 여전히 옆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노팔룡을 바라보며 의문을 느꼈다. 분명 독이 든 음식을 먹었는데 어째서 그는 멀쩡한가 말이다. 그는 무쇠로 만든 위장이라도 지녔단 말인가? 도운하가 그 의문을 푸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그랬었군요.” 잠에서 깨어난 노팔룡을 추궁한 끝에 마침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노팔룡이 과거 복용했던 금령선과- 그 정체를 도운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금령선과를 복용한 사람은 만독불침의 신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혀를 찼다. “쯧쯧! 그럼 넌 아직 배가 고프겠군.” 노팔룡의 동정 아닌 동정에 도운하는 약이 바짝 오르고 있었다. 아니 독기마저 피어나고 있었다. “금륜맹이 이런 하급의 수법을 쓸 줄은 몰랐어요!” 노팔룡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꽤 쓸만한 수법인 것 같은데? 어쨌든 넌 계속 굶어야 되잖아.”아닌게 아니라 그게 문제였다. 제 아무리 고귀한 여인 도운하라도 안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로부터 다시 하루가 지나도록 도운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이제 금륜맹의 독공(毒攻)은 노골적이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마을에는 우물물은 물론 개울물까지도 온통 독 투성이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먹을 수 있는 것에 독을 타놓은 것이다. 도운하는 연속 삼 일을 굶어야만 했다. 물론 노팔룡이야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마음 놓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4 독고완은 첫번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자가 만독불침일 줄이야…….’ 그는 두번째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독공은 그만 둔다. 모희령(毛姬鈴)은 어디 있느냐?”그의 앞에 등이 구부정한 꼽추노인이 나타났다. 꼽추는 추면(醜面)이었는데 얼굴마저 박박 얽은 곰보였다. “부르셨습니까? 대주?” 독고완은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설 때다. 자신 있느냐?” 추면 꼽추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얼굴이 바뀌어져 있었다. 어느새 아름답기 그지없는 처녀의 얼굴로 변한 것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폈다. 나긋나긋하게 가는 허리를 가진 아가씨가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호호호호! 모희령이 못할 일은 없지요!” “아가씨. 늦어서 죄송합니다.” 검옥상은 검은 보자기로 싼 상자를 내려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백 리 밖에서 마련한 음식입니다. 안심하고 드셔도 좋습니다.”도운하는 한숨을 쉬었다. “한낱 굶주림이 이렇게 견디기 힘든 것인 줄 몰랐어. 수고했다. 옥상.” 검옥상은 미소 지었다. 그가 아는 한, 도운하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쩐지 그런 도운하를 보는 순간 비로소 그녀가 아름다운 한 여인으로 보인 것이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검옥상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정말 오백 리 밖까지 나가서 음식을 장만해 온 것이었다. 그것도 도운하가 좋아하는 음식을 맞추어 오느라고 시간이 걸렸던 것이었다. 한편 도운하는 상자 속에 든 음식을 보는 순간 절로 침이 넘어갔다. “당신도 들어요.” 노팔룡은 느끼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난 배 불러. 운하나 많이 먹으라구.” 도운하는 자신도 모르게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얼굴이 빨개졌다. “뭘 봐요?” “으응?” 노팔룡은 멍한 표정을 짓는다. 도운하가 침을 삼키며 급히 음식을 먹는 것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내 참, 보면 어때서.” “어서 나가요, 안 나가면 먹지 않겠어요.” “알았어, 알았다구!” 노팔룡은 투덜거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제30장 함정 (2) 1 “거기서 뭘하고 있는 거예요?” 도운하가 다가오고 있었다. 노팔룡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음성이 이상한데?” 도운하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아하, 알았다.” “……?” “혼자서 몰래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거야.” 아닌게 아니라 도운하는 그를 쫓아내고 검옥상이 마련해온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노팔룡은 히쭉 웃었다. “그래, 맛있었어? 좀 남겨 두지 않았어?” “피, 당신은 많이 먹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노팔룡은 섭섭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도운하는 그에게 다가와 팔장을 낀다. “이제 떠나요. 너무 많이 지체했어요.” “흠흠…… 이게 무슨 냄새지?” 노팔룡이 도운하의 머리에 대고 코를 킁킁거린다. 도운하는 안색이 변했다. “냄새라니요?” “아냐, 저번과 틀린 냄새야. 돌아서 봐.” 노팔룡은 도운하의 몸을 돌려 세우고 갑자기 가슴을 헤치는 것이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그러나 어찌 노팔룡의 숙달된 솜씨를 당할 수 있겠는가. 도운하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앞섶이 벌어지고 그녀의 팽팽한 유방이 노출되었다. “헤, 아무 것도 안 입었잖아!” 노팔룡은 입을 쩍 벌렸다. 수밀도같은 젖가슴이 하얗게 드러난 것이다. 도운하는 본래 또 하나의 천으로 가슴을 꽁꽁 동여매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던 것이다. “답답…… 해서요.” 도운하는 변명했다. 그러나 노팔룡은 입을 헤 벌린 채 그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뭉클한 감촉을 즐기며 지긋이 눈마저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의 냄새 어쩌구하는 것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슬슬 움직인다. 그는 도운하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다가 이젠 손가락으로 유두를 살살 만지고 있었다. 도운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손 끝에 힘이 쥐어졌다. 그녀는 가슴을 내맡긴 채 서서히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이봐.” 도운하는 깜짝 놀랐다. “왜, 왜요?” “들어 가자구.” 노팔룡은 다짜고짜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객점 안으로 끌고 가려 했다. 도운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안돼요, 지금 떠나야 해요.” “그러지 말고 우리…….” 하지만 도운하는 완강했다. 그녀는 도리어 노팔룡의 팔을 잡아 당기며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 지체했어요. 어서 가요.” 2 코 앞에 있는 것 같던 곤륜산이었는데 이상하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노팔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왜 자꾸 멀어지는 거지.” 도운하가 말했다. “본래 멀리 보이는 산이지만 꽤 먼 거예요. 게다가 길이 구부러져서 그래요.” “그런가?” 어쨌든 좋다. 노팔룡은 도운하가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주는 것이 더 없이 좋았다. 행여나 마음이 변할까봐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뭐 좀 돌아간들 어떠랴 싶은 마음이었다. 길을 가면서도 그의 손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는 도운하의 가슴이며 옆구리며 쉴 새 없이 더듬어 대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무 아래 잠시 쉴 때는 치맛 속까지 더듬어 대고 있었다. 도운하는 그때마다 가벼운 신음을 발하며 몸을 떨곤 했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열에 들뜬 듯 호흡마저 거칠어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면 밤이 된다. “이봐, 우리 어디 가서…….” “조금만 가면 돼요. 인가가 나올 거예요.” 도운하는 길을 재촉한다. 그녀의 호흡은 무척 가빠 있었다. 쉴 새 없이 집적대는 노팔룡의 손길에 이미 그녀의 무르익은 육체는 충분히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달아올라 더 이상 참기 힘든 상태이기도 했다.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빛나는 한 점의 불빛을 발견한 순간 노팔룡은 환성을 내질렀다. “인가야!” 다가가 보니 한 채의 허름한 장원이었다. 장원은 쇠락할 대로 쇠락해 있었는데 그곳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한 노인이 부서질 듯한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요?” “길 가던 과객인데 하룻밤만 쉬고 갑시다.” 노팔룡이 거침없이 말했다. 노인은 두 사람의 아래 위를 훑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오시오. 누추하지만 자고 갈만은 할 거요.” 잠시 후 노인은 뒷채의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 방은 비록 허름했지만 그런대로 하룻밤을 유할 수는 있었다. 적어도 노팔룡이 보기에는 말이다. 노인이 사라지자 노팔룡은 다짜고짜로 도운하를 번쩍 안았다. 느닷없는 공격(?)에 도운하는 깜짝 놀라 버둥거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출렁하는 느낌과 함께 침상에 던져졌고 금세 묵직한 노팔룡의 무게가 그녀를 짓누른 것이다. “참느라고 혼났단 말이야. 며칠을 굶었는지 알어?” “……?” 도운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팔룡이 굶었다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노팔룡은 지난 사흘 동안 음식 때문에 도운하를 취할 수 없었다. 비록 그는 배불리 먹었지만 도운하는 쫄쫄 굶었으므로 차마 그녀와 그 짓을 하자고 덤빌 수 없었던 것이다. 노팔룡의 손길이 몇 차례 왕복하는가 했더니 침상 아래로 그녀의 옷이 연달아 떨어졌다. 삽시간이 그녀는 알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노팔룡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니 손 뿐만 아니라 혀까지도 연신 움직였다. 월병이란 기녀에게 배운 비법을 두번째로 써먹는 것이다. “아.” 도운하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아아.” 두번째 신음은 더 컸다. “아아아.” 세번째는 더욱 더 컸다. 노팔룡의 기술은 완벽하게 먹혀드는 듯 했다. 도운하는 황홀감에 몸부림쳤다. 그녀의 풍만한 나신은 물고기처럼 퍼드득 댔고, 노팔룡의 비술이 몸 곳곳을 스칠 때마다 허리를 활처럼 휘며 신음을 내지르곤 했다. ‘안되는데. 이래선 안되는데… 안되는….’ 그녀는 마음 속으로 수 없이 다짐하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전신은 온통 후끈후끈 달아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튕겨 올리며 다리를 저어대고 있었다. 이윽고 노팔룡의 몸이 힘차게 그녀를 눌렀다. 한편……. 장원의 뒷채에는 수십 개의 인영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번뜩이는 무기를 옆에 낀 채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라고는 온통 환희에 찬 기성이 아닌가?“아아아아아.” 인영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들이었다. 문을 열어 주었던 노인이 옆의 괴인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천면인요(千面人妖)의 음성 같은데…….” “그럴 리가…….” 그들의 대화- 천면인요라면 저 유명한 음녀(淫女)가 아닌가. 강호상에서 천면인요 모희령이라면 숱한 청년고수들을 희롱하고 망쳐버린 것으로 유명했다. 천면인요 모희령의 특기는 역용술(易容術)과 방중술(房中術)이었다. 그녀는 천(千)의 얼굴로 변장할 수 있었으므로 때로는 요조숙녀로, 때로는 유부녀로, 때로는 기녀로 변장하며 강호의 기남자들을 유혹해 왔다. 더구나 그녀의 방중술은 지난날 색술로 한때 무림을 혼란에 빠뜨렸던 만화교(万花敎)의 진전을 이어 받아 제 아무리 부처님같은 도덕군자라 해도 치마 아래의 노예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신음은 모희령의 음성이 아닌가. 당연히 들려야 할 상대방의 신음이 아니고 뚜렷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점점 더 도를 더해가는 환희에 찬 신음이야말로 천면인요 모희령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뒷채에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사자대는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 모희령의 방중술에 상대가 넘어가야 했다. 그래서 모희령의 신호만 떨어지면 당장 방으로 뛰쳐 들어가 상대방을 난자하기로 사전에 꾸며져 있었다. 3 “뭐라고? 모희령이 넘어가?” 독고완은 기가 막혔다. 그는 수하의 보고를 접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희령이 누구인가? 남녀간의 교합(交合)이야말로 신물이 나도록 터득한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새삼스럽게 이 중요한 계획에 스스로 넘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수하의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그만…… 제발 그마안…….”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진맥진한 음성, 분명 천면인요 모희령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이제 도운하의 음성으로 변성하는 것까지도 잊어 버리고 있었다. ‘맙소사!’ 독고완은 탄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같은 남자로서 노팔룡의 능력(?)에 깊은 존경이 우러나오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모두 물러나라. 오늘은 틀렸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인영들이 삽시에 철수했다. 노팔룡의 신위를 알고 있는 독고완으로서는 오늘밤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방 안에서는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운하, 즉 천면인요 모희령은 벌거벗은 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서 굴러 떨어진 채 기어가고 있었다. “제발…….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노팔룡은 하품을 했다. “그래. 오늘은 그만 하지. 그럼…….” 노팔룡은 침상에 벌렁 드러 누워 버렸다. 그의 건장한 가슴에는 땀이 가득 나 있었다. 방금 전 그는 격전을 치루었다. 이전의 도운하와의 격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태어난 이래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룬 것이었다. 만일 진짜 도운하와 그런 일전을 벌였다면 필시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면인요 모희령이기에 그나마 감당했던 것이다. “…….” 모희령은 멍하니 노팔룡을 바라 보았다. 벌거벗은 채 코를 드르렁거리고 있는 노팔룡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녀의 나이 삼십. 그 동안 겪은 남성 편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진짜 남자를 만났다. 평생을 통해 한 번도 이런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아! 역시 세상은 넓고도 넓어.’ 그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얏.” 하반신 어느 부분이 찌르듯이 아파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온 몸이 멍이 든 듯 저렸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전문가 중의 전문가인 그녀가 이 지경인가.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모희령은 침상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 속에서 한 자루의 빛나는 단검을 꺼냈다. ‘남자 중의 남자.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수를 번쩍 치켜 들었다. 그대로 내리 꽂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그녀는 푸짐한 포상을 받을 것이다. 파르르 손이 떨린다. 노팔룡의 심장을 겨눈 비수 끝도 떨렸다. 처음에는 조금씩 떨리던 비수가 와들와들 심하게 흔들렸다. ‘찔러. 찔러야 해.’ 그녀는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그럴 수록 손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꼭 기운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왠지 잠든 노팔룡의 지극히 순수한 모습이 그녀의 심금을 치고 있었다. 꿈을 꾸는지 노팔룡의 얼굴에는 이따금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모희령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리고 비수를 내리 꽂았다. 푹! 눈을 질끈 감고 비수를 꽂은 순간 그녀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아무 것도 없는 침상 바닥에 비수가 꽂혀 있었다. 잠결에 노팔룡이 돌아 누운 모양이었다. 모희령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행여 그가 자신이 목숨을 노리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이 아닐까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노팔룡은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그가 돌아 누웠다. 다시 천장을 향한 자세로 누운 것이었다. ‘아아.’ 그녀는 내심 한숨을 몰아 쉬었다. 건장한 노팔룡의 가슴과 전신을 내려다 보는 모희령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얼마전 그와 벌인 치열했던 육탄전을 생각하니 절로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이었다. 모희령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여 노팔룡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녀는 탄탄한 사나이의 가슴을 쓰다 듬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젖가슴이 들먹거렸다. 전신이 짜릿해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좋아…….’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이 덧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헛살았는지도 모른다. 잠든 노팔룡의 가슴을 더듬던 손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녀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노팔룡이 잠결인 듯 돌아 누우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쨍. 침상 아래로 비수가 떨어졌다. 선명한 소리였지만 노팔룡은 듣지 못했다. 그는 모희령을 품 안에 끌어 안고 여전히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모희령은 그의 듬직한 품에 안긴 채 새처럼 몸을 떨었다. 포근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해도 이런 기분과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노팔룡의 뜨겁고 넓은 가슴에 파묻힌 채 영원히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4 쏴아아-- 시원한 물줄기가 바위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폭포수라고 하기엔 작았지만 제법 기세좋게 쏟아지고 있었다. 노팔룡은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고개를 돌려 저만치 바위 아래 찬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여인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도운하 아니, 천면인요 모희령이었다. 그녀는 찬물 속에 몸을 식히고 있었다. 어젯밤 치룬 격전이 예상 외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것이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그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끈거리고 쑤시는 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 찬물에 몸을 담근 것이다. 바위 위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을 노팔룡이 그냥 보낼 리가 없었다. 그는 담 속에 잠겨있는 모희령- 적어도 그가 도운하라 믿고 있는- 의 알몸을 상상하면서 이미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옆자리의 도운하를 더듬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은 안돼요. 정말…….” “왜 그래 운하아…….” “글쎄 정말이지 오늘은…….” 그리고 그녀는 이곳 산중으로 그를 끌고 오더니 찬물 속에 몸을 담근 지 한 시진, 아직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에겐 묘방이 있었다. 지금 그는 손 안의 비단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저자거리에서 만난 약장사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흠, 운하. 이것만 먹으면 끝내 준다고 했어.’ “아직도 멀었어?” 그는 고개를 길게 빼며 묻는다. 마침 도운하 아닌 모희령은 옷을 입는 참이었다. “다 됐어요.” 모희령은 물에 젖은 머리칼을 털며 다가왔다. 방금 수욕을 끝낸 탓인지 그녀는 유난히 요염해 보였다. 노팔룡은 히죽 웃으며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 “……?” 모희령은 의혹의 눈으로 노팔룡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환약을 바라본다. 무엇에 쓰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글쎄 먹으라니까. 몸에 좋은 거야.” 노팔룡은 진지하게 말한다. 모희령은 여전히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뭔데요?” “보약이야. 먹으면 힘이 난데. 비싸게 주고 구입한 거라구.” 모희령은 무심코 환약을 받아 냄새를 맡아 본다. 그녀는 어느 정도 독에 대해서는 지식이 있었다. ‘독은 아닌데.’ 그녀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이 계속 독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입 안에 털어넣고 말았다. “어때? 느낌이 오지 않아?” 길을 가며 벌써 세번째 하는 질문이다. 노팔룡은 모희령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자꾸 그렇게 묻고 있었다. “무슨 느낌이요?” “아냐, 아무 것도…….” 노팔룡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또 얼마 가지 않아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정말 아무 느낌도 없어?” “……?” 모희령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비록 천하제일의 고수일지는 몰라도 성격만은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한 위인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런 그가 무슨 계략을 썼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자꾸 묻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퍼득 떠오르는 점이 있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혹시 아까 그 약…….” 거기까지 말한 모희령의 안색이 갑자기 우그러졌다. 그녀는 읍, 하고 입을 다물더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다, 당신…….” 노팔룡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희희덕거리며 모희령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모희령은 그의 가슴을 밀어 버리며 악을 썼다. “대체 내게 무슨 수작을…….”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갑자기 아랫배에서 우르릉 꽝…… 하는 뇌성이 울리더니 그녀의 안색이 핼쓱해지고 만다. 휙! 사라졌다. 모희령은 젖먹던 힘을 다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운하! 어딜 가는 거야!” 노팔룡은 냅다 외치며 그녀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의 경신술은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도리어 모희령보다 빨랐다. 그는 모희령이 숲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을 보고 함께 몸을 날렸다. “저, 저리 가! 다가 오지 말란 말야……!” 모희령은 악을 썼다. 그녀는 바위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말씀이 아니었다. “헤헤, 뭘 그래. 다 알고 있다구. 어서 이리 와.” 노팔룡은 웃으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묘한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무엇인가 방출되는 소리였다. 동시에 노팔룡의 후각을 찌르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 노팔룡은 코를 감싸쥐고 멈췄다. 모희령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고함쳤다. “어서 가라니까!” 노팔룡은 비로소 사태를 짐작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비실비실 웃는다. “아, 알았어. 알았다구. 난 또…….” 그는 돌아섰다. 알고보니 모희령은 급한 용변을 보는 모양이었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하였다. 그가 준 환약을 먹었다면 당연히 옷을 활활 벗어 던지며 그에게 안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로부터 열일곱 번 씩이나 모희령은 숲 속으로 뛰쳐 들어가야만 했다. 그녀는 노팔룡이 준 환약을 먹고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는 변의에 시달리면서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방금 볼 일을 보았는데도 여지없이 일각도 안되어 그녀는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곤 했다. 이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아랫배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사실인즉 이렇다. 노팔룡이 저자의 약장수에게 얻은 약은 바로 설사약이었던 것이다.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그에게 약장수는 회춘의 성약이라고 속이고 설사약을 안겨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모희령의 정체를 벗기게 될 줄이야……. 모희령은 허리를 안고 벌벌 기다시피 숲에서 기어 나왔다. 노팔룡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묘했다. “어? 넌 누구지?” “……?” 모희령은 흠칫했다. 노팔룡의 눈이 둥그렇게 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느껴지는 것이 있어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앗. 역용이……!’ 그렇다. 모희령은 역골화변술(易骨化變術)이란 역용술로 본래의 모습을 바꾸어 도운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골화변술은 일반적인 분장술과 달리 내력으로 뼈의 형태와 근육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상승의 역용술이었다. 그런데 잦은 설사로 인해 탈진한 나머지 그만 역골화변술이 풀려 버린 것이었다. 본래의 모희령의 얼굴로 돌아온 것이었다. “운하는 어디로 가고……? 당신은 누구지?” 노팔룡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모희령은 가슴이 섬뜩하여 뒷걸음질 쳤다. 이젠 계획이고 뭐고가 없었다. 아차하면 목숨이 달아날 판국이었다. 사자대장 독고완으로부터 상대방이 얼마나 초절한 무공을 지닌 위인인지 귀가 아프게 듣지 않았던가. “나, 난 몰라요!” 그 말을 끝으로 모희령은 젖먹던 힘을 다내어 신형을 날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그녀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고약한 냄새만을 남긴 채. “……?” 노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숲으로 다가갔다. “크, 냄새…….” 그는 코를 감싸쥐고 나왔다. 숲 속에는 모희령이 남긴 그 무엇인가가 질펀하게 쏟아져 있었던 것이다. 노팔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 참, 어떻게 된 거지? 여우에 홀린 것도 아니고…… 운하가 어떻게 딴 사람이 됐지?” 5 독고완은 얼굴이 반쪽이 된 모희령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우르릉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쥔 채 사색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희령.” “그것이…… 그것이…….” 모희령은 갑자기 퉁겨나듯이 발딱 일어선다. 그리고 독고완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냅다 밖으로 뛰쳐 나가는 것이었다. 독고완은 안색이 변했다. “감히…….” 문득 그는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은 물론 참을 수 없는 냄새에 코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대체 이것이……?’ 일각이 흐른 후에야 모희령은 그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죽여 주세요. 대주…….” “상세히 얘기해 보아라.” 독고완은 화를 눌러 참으며 물었다. 모희령은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당한 수모, 그리고 참담한 일의 결과를 얘기하는 동안에도 세 번이나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허, 허허…….” 기가 막혔다. 독고완은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모희령의 얘기를 들으며 너무나 어이가 없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대주는 대주였다. “네 죄를 알겠지?” “대주…….” 모희령은 애처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 보았다. 다음 순간 독고완의 손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퍽! 섬찍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천면요희 모희령의 두개골이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비명 한 마디 지르지도 못하고 세상과 작별해 버렸다. “치워라. 깨끗이 말이다.” 피 냄새보다 더 고약한 어떤 냄새를 느끼며 독고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금륜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막비에게 자신의 능력으로는 노팔룡을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할 생각이었다. 제31장 나에게 어머니란 없소 1 대곤륜(大崑崙). 하늘과 맞닿는 산맥을 이루고 있는 곤륜산은 중원의 지붕으로 불리워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달목분지(紫達木盆地)가 끝나며 북으로 아미금산(阿彌金山), 천산(天山)을 마주본 채 그 웅대한 준령을 대중원을 향해 길게 뻗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곤륜은 도가의 성지로 불렸다. 이곳에서 수많은 도인들이 득도하여 도교(道敎)의 발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곤륜의 광명정이 세워진 것도 도교성지임을 증명하는 실례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곤륜의 광대한 산역은 하나의 패도집단이 군림하고 있다. 야망의 눈을 번뜩이며 중원산하를 넘보고 있는 군마부(群魔府) 금륜맹이 그것이다. 금륜맹은 곤륜산 동북방, 이른바 대공릉이라 불리우는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금륜맹 총단의 입구에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옥가영과 하여령이었다. 옥가영은 부푼 가슴을 안고 아들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비록 패도집단의 영수라 해도 그녀는 막비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모정(母情)이 그녀로 하여금 이곳까지 찾아오게 만든 것이었다. 또 한 가지 그녀가 막비를 찾아온 이유는 그를 설득하여 마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오색의 깃발이 수백 개 꽂혀 나부끼고 있는 금륜맹의 성보(城堡)가 눈에 들어오자 옥가영은 자신도 모르게 긴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옥가영의 얼굴에는 회한과 감회가 어려 있었다. 지금 그녀는 이십 년 이상이나 보지 못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함께 온 하여령은 그녀의 심중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누구냐?” 금륜맹의 성보 위에서 한소리 일갈이 들렸다. 그들은 보루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느닷없는 두 여인 방문객을 날카롭게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옥가영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옥가영이란 사람이오. 내 아들 막비를 만나러 왔소.” 그 말에 보문을 지키는 인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막비라는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금륜맹의 맹주는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측근조차도 그의 신상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막비를 만나러 왔다니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냐? 막비가 누구냐?” 옥가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막비를 모르다니? 너희들은 금륜맹의 수하들이 아니란 말이냐?” 보루 위의 인물들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두 여인의 방문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금륜맹 인근의 백여 리에는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져 있으므로 개미 한 마리라도 그들의 감시를 피해서 이곳까지 접근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시망을 기척도 없이 뚫고 두 여인이 금륜맹의 지척에까지 찾아왔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었다. “잠시 기다려 보시오!” 보루 위에서 누군가 음침하게 외쳤다. 옥가영, 하여령의 방문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일단 안으로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육중한 보문이 열렸다. 보문으로부터 한 명의 중년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이미 보루의 수비무사로부터 보고를 들은 터라 신중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금륜맹의 내삼당(內三堂)중 천혼당주(天魂堂主)의 직을 맡고 있는 혼천일검(混天一劍) 여륵륵(余勒勒)이란 자였다. 여륵륵은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으음, 보통 계집들이 아니군. 적어도 나의 하수는 아니다.’ 재빨리 판단한 그는 짐짓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두 분은 어떤 분이며 누구를 찾아온 것이오?” 옥가영은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막비가 지나치게 신비를 가장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하들조차도 그 이름을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옥가영은 마음 깊이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혈연(血緣)의 감정 호소로 막비와 상봉하려는 모정의 여망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짙어졌다. 그러나 아직 속단은 금물이었다. “이 몸은 옥가영이란 사람이오. 막비가 이 금륜맹의 맹주이거늘 그대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요?” “……!” 여륵륵은 흠칫했다. 실상 그도 맹주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옥가영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호, 혹시 지난 날 강호육협이셨던?” “바로 그렇소. 이 몸이 바로 우담화 옥가영이오.” “아…….” 여륵륵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마음 속으로 거대한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맹주께서 바로 이 여인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여륵륵은 잠깐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로서는 이 사실이 정말이건 아니건 권한 밖의 일이었다. “아, 아무튼 안으로 드십시오. 곧 맹주께 아뢰겠습니다.” 여륵륵은 얼른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두 여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자신의 목 하나 쯤은 간단히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옥가영은 여륵륵의 태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태도는 어딘가 교활하고 음침한 면이 있었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고 했듯이 수하의 태도에서 그 수뇌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과연 듣던 바대로 금륜맹의 분위기는 결코 광명정대한 것이 아니었다. 옥가영은 마음 속으로 탄식이 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보문을 통과하여 금륜맹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삼엄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전각과 대전 등이 질서정연하게 건축되어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예가 상승에 이른 무인이라면 직감적으로 곳곳에서 찌르는 듯한 살기가 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륵륵이 안내한 곳은 한 채의 별원이었다. 그곳은 꽤 안쪽으로 들어간 곳으로 외부 손님을 맞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별실이 딸려 있었다. 여륵륵은 두 여인을 별실로 안내한 후 정중히 품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맹주께 알리겠습니다.” 그가 사라진 후, 하여령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저어, 아무래도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옥가영은 미소했다. “그는 내 아들이다. 설마하니 아들이 어머니를 어떻게야 하겠느냐?” 하여령은 겉으로는 수긍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두 여인은 이미 호랑이굴 속에 들어와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불허였다. 별실은 상당히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어 마치 고관대작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장소로 느껴졌다. 둥근 월창으로는 연못이 보였고 연못 위로는 이따금 금잉어가 뛰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여령은 멍하니 연못을 내다보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의 모습이 불현듯이 떠오른 것이다. ‘팔룡…….’ 노팔룡의 모습이 떠오르자 문득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불안감이나 초조감이 없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와 떨어져 있는 지금 한없이 불안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2 딸랑딸랑……! 석실 안에 비밀리에 설치된 금령(金鈴)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밀석부 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막비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웬만큼 화급한 일 아니면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수하들에게 신신당부했었다. 폐관에 들어간 만큼 일체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폐관수련에 들어가면서 맹내의 모든 일은 독고완에게 일임해 놓고 있었다. ‘금령이 울리다니…….’ 막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탁자 모서리를 눌렀다. 기이이잉! 석판이 움직이는 음향이 울리며 한쪽 석벽이 돌아갔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독고완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독고완은 무릎을 꿇었다. “방문객이 있습니다.” 막비는 차갑게 말했다. “너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이번 방문객은 맹주님께서 아셔야 할 분입니다.” 막비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독고완이 그런 말을 할 양이면 방문객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혹시 그 자가?’ 언뜻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노팔룡이었다. 얼마전 독고완에게 그를 처치하란 명을 내렸었고, 곧이어 실패했다는 보고를 들은 이후로는 점점 노팔룡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던 참이었다. 대체 그가 아니라면 폐관에 들어간 자신을 경동시킬 인물이란 존재치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맹주님의 모친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막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 앞에서 태산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막비가 이번엔 크게 경동했다. 그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뭐라고 했느냐?” “모친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막비는 어이가 없었다. “내 어머니라고……? 허허…….” 막비는 너털웃음을 쳤다. 이어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웃기지 마라. 나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독고완은 흠칫했다. “못 들었느냐? 나에게는 애당초 어머니란 존재는 없다. 알았으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막비는 돌아섰다. 그리고 제자리로 가 앉는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또 그 문제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독고완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더 머뭇거리다가는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물러서자 석벽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막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자세로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3 “돌아가라고?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옥가영의 아미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거센 폭풍우를 맞은 파초잎처럼 그녀는 경련을 일으켰다. 독고완은 무정하게 말했다. “그렇소. 맹주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소. 그 분에게는 어머니가 없다고 하셨소.” 독고완은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시오.” 옥가영의 얼굴이 이그러지고 있었다. 세상에 어머니를 부정하는 아들이 있다니! 그러나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다! 나는 그 아이의 어미임을 증명할 수 있다! 어서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내가 직접 만나보아야겠다!” 차라리 절규였다. 독고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옥가영은 벌떡 일어서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멈추시오!” 독고완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아들을 보겠다는 어미를 감히 누가 막느냐?” 동시에 옥가영의 옥수(玉手)가 떨쳐지며 쩌르릉 하는 쇳소리가 났다. 그녀의 옥수 끝에서 투명한 백색기류가 뻗어 곧장 독고완의 가슴으로 쏘아나갔다. 우담화 옥가영의 과거의 명성은 허명만은 아니었다. 한때 무림을 풍미했던 강호육협의 무공은 절대 약한 것이 아니었다. 백색기류가 섬광처럼 뻗자 독고완은 금세 혈관이 수축하는 것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감히!” 독고왕은 쌍장을 들었다. 동시에 그의 쌍장에서도 강맹한 경기가 뻗어 나갔다. 쾅! 일성 폭음이 울리며 별실 안의 기물들이 소용돌이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두 고수의 막강한 진력이 별실을 진동시켰다. “음!” 독고완은 무겁고 탁한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나 옥가영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을 뿐 곧 그의 곁을 스쳐 화원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놀라운 무공과 신법은 함께 있던 하여령으로서도 놀랄 지경이었다. 하여령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스파앗! 하는 파공성과 함께 그녀의 날씬한 교구도 창문을 통해 밖으로 쏘아나갔다. 한편 독고완은 정신이 혼란해졌다. 비록 찰라적인 방어였으나 그도 실력을 다한 일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가영의 내력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선 그의 가슴으로 은은한 통증이 전해지고 있었다. “막아라!” 하여령이 창 밖으로 날아가는 순간 독고완은 날카롭게 외쳤다. 독고완의 신호가 있지 않아도 이미 별실 주위는 물 샐 틈 없는 경비가 삼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옥가영과 하여령은 화원에 내려선 순간 사방으로부터 압도할 듯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인공가산과 숲, 화원, 바위 뒤에서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두 분은 아무데도 갈 수 없소.” 두 여인의 앞으로 나선 것은 천혼당주 여륵륵이었다. 말투는 공손한 듯 했지만 이미 그의 두 눈에서는 음산한 살기가 뻗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독고완의 얼음장같은 음성이 들렸다. “보통이 아니다. 주의하라!” 그 말에 여륵륵이 흠칫하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크아악!” “으악!” 삽시에 벌어진 유혈참극이었다. 옥가영의 가슴 속에는 무한한 한과 증오가 넘치고 있었다. 아들을 찾아 온 어머니의 모성애가 친골육인 아들에게서 거절당한 것이다. ‘어머니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없다고!’ 옥가영의 마음은 칼로 난도질 당한 듯 상처입고 있었다. 여인의 한이란 무서운 것이다. 아들에게서 자신을 부정받은 모정은 표독스럽게 변해 버린 것이다. “호호호호호호……! 세상에 어미없이 태어난 아들이 있다더냐?” 쩌르릉! 쐐애액! 그녀의 옥수가 이리 번뜩 저리 번뜩 할 때마다 피보라가 난무했다. 옥가영의 일신무학은 정녕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의 소수옥영살장(素手玉影殺掌)은 무림의 일절로 오랫동안 실전된 기학이었다. 아무리 금륜맹의 고수들이 강하다 해도 그녀의 분노에 찬 살수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삽시간에 화원은 피비린내로 가득 찼고 시신들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한편 하여령도 만만치 않았다. 강호랑자 일점홍이라는 별호도 공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쐐애액-- 파츠츳--! 그녀의 검이 백선을 그을 때마다 상대방이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죽어가는 자들의 공통점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으며 상처도 그저 미간에 붉은 혈선 하나만 생기고 있었다. 말하자면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었다. 두 여인의 무공은 하나같이 일류였다. 금륜맹의 수하들이 비록 절정고수라고 해도 그녀들을 상대하는 데는 많은 희생을 피할 길이 없었다. 독고완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사자대!” 그의 입에서 일갈이 떨어졌다. 그러자 상황이 일변했다. 사자대는 그의 직속수하들로 금륜맹 내의 일종의 정예부대에 속한다. 슈슈슉!-- 휙휙! 어디선가 흑영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그들은 도합 칠십이 명이나 되었는데 몸놀림이 비상했다. 옥가영과 하여령은 서로 등을 붙이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발 아래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옥가영은 반쯤 실성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호호호호홋…… 어미가 없다고? 홋홋홋……!” 쐐애액! 번쩍번쩍! 그녀의 소매가 펄럭일 때마다 빛살같은 광채가 날아갔다. 연이어지는 것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사자대도 속수무책이었다. 비록 그들은 금륜맹의 일반고수들보다 출중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에 사무친 옥가영의 살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독고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것도 금륜맹의 중심부 안에서가 아닌가? 그의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번뜩였다. 그가 막 최종 결심을 하는 순간, “멈춰라!” 문득 어디선가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맹주……!” 그는 부르르 떨었다. 뜻밖에도 금륜맹주 막비가 나타난 것이다. 막비는 금륜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무심했다. 도무지 인간의 표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무심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자대는 즉각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한편 옥가영은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막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이 그녀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하고 있었다. 하여령도 막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는 막비를 처음 보았다. 그를 본 순간 그녀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만큼 막비는 압도하는 패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옥가영의 입에서 처연할 정도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비…… 너는 막비가 아니냐?” 옥가영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니, 설사 죽어 흙이 된다 해도 자신의 아들을 몰라보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막비를 보는 순간 이미 알아버린 것이다. “그렇소. 내가 막비요.” “넌…… 이 어미를 모르겠느냐?” 허나 막비의 다음 대답은 그녀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에게 어머니란 없소.” 그뿐이었다. 막비는 소매 속에 넣고 있던 손을 꺼냈다. 순간 그의 손 전체가 금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황마라수(金皇魔羅手)!” 지켜보던 하여령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막비가 시전한 것은 과거 일패의 전설적인 신공이었던 금황마라수였던 것이다. 슈슈슈우우우……!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막비의 황금수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뻗었다. 그 금빛 수영은 곧장 옥가영의 가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러나 옥가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멍한 눈으로 막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악! 피해요!” 소용이 없었다. 이미 막비의 금황마라수가 옥가영의 가슴을 강타한 것이다. 펑!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옥가영은 입으로 피를 뿜으며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실로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여령은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분노했다. “이, 이 짐승……! 넌 사람도 아니다!” 쐐애애액! 하여령은 노성을 발하며 검신합일이 되어 곧장 막비에게로 쏘아갔다. 그것은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비의 무공은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후후후! 괜찮은 계집이로군.” 슈우웅……! 황금빛 손 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었다. 순간 하여령은 자신의 검이 소용돌이 속에서 바다에 빠진 바늘처럼 실종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짐과 동시에 의식을 잃고 있었다. 제32장 피로 얻은 사랑(愛) 1 독고완은 수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천혼당주 여륵륵이 잔뜩 긴장한 채 일일이 보고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인의대협 백선결이 은퇴선언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원무맹의 정예부대는 계속 본맹으로 북상중이라는 것입니다.” “…….” “놈들은 각 방면으로 나뉘어 북상중인데 누군가의 치밀한 지시를 받는 듯 백선결의 은퇴에도 불구하고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륵륵은 땀을 흘렸다.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자대나 사자대주 독고완의 존재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금륜맹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라진 것이다. 독고완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내외삼당의 당주들은 그의 수하에 불과한 처지가 된 것이었다. 폐관수련에 들어간 막비의 명령 때문이었다. 여륵륵의 보고를 들으며 독고완은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백선결이 빠진 중원무맹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듯 하다고?’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누굴까?’ 어렴풋이 결론이 났다. ‘도운하다!’ 도운하의 존재는 중원무림맹에서도 신비에 속하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백선결의 배후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고 중원무림맹이 탄생하고 금륜맹과의 일전을 결하게 된 것도 도운하의 머리 속에서 나온 전략이라는 것 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인의대협 백선결은 그녀의 꼭두각시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언제쯤 본맹에 당도할 것 같으냐?” 여륵륵은 급히 말했다. “예, 앞으로 보름 후면 본맹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선발부대는?” “현재로선 중원의 후기지수라는 칠룡삼봉이 본맹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로 접근해 있는 상태입니다.” “칠룡삼봉이라?” 독고완의 입가에 번지는 것은 한 가닥 비웃음이었다.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중원의 후기지수라는 칠룡삼봉의 실력을 그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금륜맹이 중원정복을 꿈꾸며 많은 시간을 들여 중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칠룡삼봉의 실력은 그다지 대수로울 것이 못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위치는?” “현재 백혈애(百穴崖) 근처에 와 있습니다.” “백혈애라고?” 독고완은 반문한 뒤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 절로 죽음의 혈거로 찾아들었군. 놈들에게 금륜맹이 얼마나 무서운지 미리 보여줘야 겠다. 여봐라, 신기당주를 불러라!” 2 노팔룡의 이상한 행동에 도운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노팔룡은 대꾸 대신 도운하의 주위를 빙빙 돌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맞아, 이 냄새가 맞아. 너한테 나는 냄새는 이게 맞는데.” 우소간(于疏間)이란 작은 마을의 객점 뒷채. 가짜 도운하와 헤어진(?) 후 노팔룡은 방향감각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 우소간의 객점에 들러 음식을 먹던 중이었다. 도운하는 개방육신개의 보고를 받고 노팔룡을 찾아왔다. 그런데 노팔룡이 하는 짓이라니 무조건 방으로 끌고 가자마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여우에 홀린 건가?” 도운하는 비로소 영문을 알 수 있었다. “바보같은 사람, 당신은 가짜한테 속은 거예요.” “가짜?” “첫번째는 독공으로 우릴 괴롭히더니 당신이 만독불침인 걸 알자 다른 수법을 쓴 거예요.” 도운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캐물었다. 노팔룡은 숨김없이 모두 이야기했다. “그, 그럴 수가…… 그래서…… 세상에 정말 그랬단 말이죠? 으음. 그게…….” 도운하는 몇번이나 안색이 변했다. 노팔룡은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가짜 도운하와 이렇고 저런 행위를 했었다는 것까지 모두 말하는 것이었다. 도운하는 치를 떨었다. 특히 그가 가짜를 그녀로 알고 온갖 짓을 다 했다는 대목에 들어서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호호……호호호홋……! 정말…… 그랬단 말이죠?” 마지막에는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노팔룡이 설사약을 춘약으로 잘못 알고 먹였던 대목에 들어서서는 이제까지의 모욕감도 깨끗이 잊은 듯 한참 동안을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것이었다. “운하아…….” 노팔룡의 음성이 은근해졌다. 눈빛 또한 게슴츠레해지는 것을 보고 도운하는 쌀쌀하게 말했다. “듣기 싫어요, 어서 떠나요.” 그러나 노팔룡이 응할 리가 없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잠깐만…….” “글쎄 안 된다니까……으음.” 도운하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팔룡이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혼자 가. 난 안 가.” ‘맙소사.’ 억지도 유분수지 노팔룡의 고집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도운하는 어린아이처럼 부운 채 토라져 사지를 뻗고 누워있는 노팔룡을 내려다 보았다. 문득 가슴 속이 훈훈해졌다. ‘사람은 바보같지만 이상하게 인간적인 면이 있어…….’ 도운하. 그녀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성적인 방면만을 중시해 왔었다. 감정이라던가 즉흥적인 면 따위는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일은 치밀한 사고 끝에 행해졌으며 매사에 신중을 기해왔었다. 그러나 노팔룡을 만난 이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노선이 달라졌다. 백 가지 지혜를 짜보아도 한 가지만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노팔룡이란 인간은 매사가 즉흥적이며 감정적이었다. 그에게는 계산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오직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원시적인 면만이 두드러졌다. 과거의 그녀같았으면 이런 인간은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이봐요…….” 도운하는 침상 곁에 앉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떡하든 설득할 생각이었다. “어머멋!” 느닷없는 공격이었다. 노팔룡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더니 다짜고짜로 깔아 눕혀버린 것이었다. 노팔룡의 육중한 무게가 그녀의 가냘픈 몸을 눌렀다. 도운하는 버둥거렸지만 곧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노팔룡의 익숙한 손놀림이 어느새 그녀의 저항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창 밖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도운하는 노팔룡의 품에서 서서히 뜨거워져 가는 육체를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바로 행복인지도….’ 3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본래 칠룡삼봉은 스스로 중원무림의 후기지수로 자부심이 강한 청춘남녀들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 자부심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처음 금륜맹을 치러 떠날 때만 해도 각자 야심이 있었다. 하루라도 먼저 당도하여 중원무림에 공을 세움으로서 영명을 떨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꺾이기만 했던 것이다. 눈 앞에 온통 괴기한 지형이 펼쳐지고 있었다. 석회질로 된 계곡이 나타나면서 주위의 풍경은 일변하여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어째 으스스한데.” 누군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계곡은 죽은 듯이 적막했고 어쩐지 죽음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았다. 황량하게 기암괴석이 흩어져 있는 곡구(谷口)만이 입을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룡삼봉은 망설이고 있었다. “대체 이곳으로 가면 어디로 나오는 것이오?” 누군가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한편 당립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탈명령주의 사건 이후 크게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역시 신기일화검 낙혼성과 채화옥녀 여운설도 예전같지 않았다. “당형.” 이번에는 사도욱이 큰소리로 외쳤다. “예?” “이 길이 맞기는 맞는 것이오?” 당립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안색이 변했다. “아니 이곳은……? 길을 잘못 들었소!” 그는 당황하여 부르짖었다. 그러자 중인들은 어이가 없는 듯 모두 입을 벌렸다. “아니, 그럴 수가! 길은 당형이 안내하겠다고 하지 않았소?”“글쎄 그것이…….” 당립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비록 그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전혀 엉뚱한 길로 들어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4 곡구에서 칠룡삼봉이 망설이고 있는 동안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흐흐…… 이미 늦었다. 너희들은 무덤으로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염소수염의 중년인이 곡구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우뚝 서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금륜맹의 신기당주(神機堂主)란 직위를 가지고 있는 흑수사(黑修士) 제갈묘란 위인이었다. 과거 마도에서 활약하던 인물로 특히 진법(陣法)에 뛰어난 위인이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본좌가 펼친 암암미궁진(暗暗迷宮陣)에 걸린 거다. 흐흐… 이제 백혈애로 들어선 이상 다시는 하늘을 볼 생각은 말아야 할 것이다.’ 흑수사 제갈묘는 번쩍 검은 깃발을 들어 올렸다. 5 점창 출신의 전광일도 장무기가 동요하는 중인들을 선동하고 나섰다. “더 생각할 것 뭐 있소? 기왕 들어선 길이니 뚫고 나갑시다.” 일행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느니 곧장 헤쳐나가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젊은 혈기가 되돌아간다는 일을 용납치 않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중원의 후기지수들이 아닌가. 일행은 곡안으로 들어섰다. 사위를 경계하면서 공력을 한껏 일으켜 언제라도 적의 기습에 대비할 만반의 자세를 갖춘 채 회색의 계곡 안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갔다. “……!” 얼마후 그들은 놀라운 장관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곡 양 옆이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동혈이 뻥뻥 뚫려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은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막 곡의 중앙 쯤에 들어섰을 때,문득 곡 안에 희뿌연 운무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안개로 보였는데 일단 안개가 덮인다 싶자 눈깜짝할 사이에 주위를 가득 뒤덮어 버린 것이었다. “조심하시오!”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소!” 불안을 참을 수 없는 듯 누군가 외쳤다. 일행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런 상태라면 적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아군조차도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갑자기 기습이라도 받으면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쳐라!” 불안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냉랭하고 음산한 일갈이 들리고, 슈슈슉……! 쐐애애애액!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사방으로부터 일제히 무수한 암기가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앗!” “기습이오!” 칠룡삼봉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운무로 시야가 차단된 가운데 암기세례가 퍼부어지다니! 그들은 파공성을 듣는 순간 경악하면서 재빨리 병기를 꺼내 휘둘렀다. 그들도 중원무림의 정예고수들이었다.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빗발치는 암기를 막으며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 곡을 벗어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절박한 심정들이었다. “으하하하하하……!” “킬킬킬킬……!” 사방으로부터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욱한 운무 속에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는 그들을 비웃는 귀곡성이었다. 게다가 끝없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암기들은 칠룡삼봉으로 하여금 혼백이 달아나게 할 지경이었다. “악!” 문득 짤막한 비명이 들리는 순간 누군가 쓰러졌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경황이 없었다. 쓰러진 사람은 화산의 채화옥녀 여운설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신기일화검 낙혼성은 자신의 사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모르는 척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형……!” 뒤쪽에서 처절한 여운설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낙혼성은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달리고만 있었다. 낙혼성의 마음에서 이미 여운설은 떠나고 없었던 것이다. 특히 괴장원에서의 망신스러운 사건이 있고 난 이후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칠룡삼봉은 빗발치는 암기세례를 피해 은연중 서로 흩어지고 있었다. 계곡 안쪽으로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빠져 나가야 평원으로 빠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로마다 이미 금륜맹의 매복이 있었다. 창창창……! “으아악!” 칠룡삼봉은 정신없이 혈전을 벌이며 혈로를 뚫고 있었다. 운무 속에서 그들은 상대를 볼 수 없었으나 암기를 날리며 공격하는 자들은 그들을 훤히 보는 듯 악랄한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이 인, 또는 혼자서, 또는 셋이서 의지한 채 간신히 혈로를 뚫고 전진하고 있었다. 한편 여운설의 구조 요청을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가던 신기일화검 낙혼성은 갑자기 부르르 떨었다. “아아악……!” 느닷없이 뒤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매 여운설의 비명이었다. ‘……!’ 그의 얼굴에는 무수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으리라는 것 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무지막지한 금륜맹의 무뢰한들에게 윤간(輪姦)당하는 여운설의 몸부림치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낙혼성의 얼굴 근육이 보기 흉하게 이그러졌다. 짧은 순간 무수한 갈등이 그의 내심을 어지럽게 물들였다. 살기 위해서는 혼자서 달아나야 했다. 만일 사매를 구하기 위해 돌아간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나 일편 그의 양심은 발을 묶어 두고 있었다. “키키키! 죽어라!” 쐐애액! 운무 속에서 음침한 소리와 함께 싸늘한 검기가 날아왔다. 검기는 그의 정신을 퍼뜩 일깨워 주었다. 낙혼성도 약골은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신형을 솟구쳤다가 검을 날렸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비릿하고 뜨거운 혈우(血雨)! 그 혈우가 그의 안면에도 튀었다. 그 순간 비장한 결심이 섰다. “사매-!” 그는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 나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기일화검 낙혼성은 몸을 돌려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이제 그의 뇌리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매 여운설을 구한다는 것! 그 한 가지 일념만이 그를 달리게 하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적들, 무수히 빗발치는 암기도 전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암기가 튕겨나갔고, 때때로 우박과 같은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흐흐흐! 죽으려고 돌아오느냐?” 음침한 소리가 귓전을 윙윙거렸다. 하나인지 둘인지 셋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일진광성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사문의 검법을 전개했다. 검 끝에서 살덩이를 베는 섬뜻한 느낌이 닿았다. 이어지는 단말마의 비명!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기다려라 사매-! 내가 간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낙혼성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피와 범벅이 되어 흐르는 눈물! 그것은 비로소 사랑을 깨달은 한 사나이의 철심이었다. 위잉! 그의 검끝에서는 놀라운 검기가 뻗어 나갔다. 평소보다도 훨씬 위맹한 검기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앞을 가로막는 금륜맹의 무사들은 그를 막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비켜라! 막는 자는 죽는다!” 검광이 작렬했다. 낙혼성의 화산검학은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었다. 검광이 수십 갈래를 이루는 가운데 선혈이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그는 비로소 참다운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여운설을 한때는 이용물로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육체를 정복한 이후로는 다만 쾌락의 도구로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크하하하하! 막는 자는 죽는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그를 막을 자는 없었다. 화산파의 검법은 본래 중원의 사대검문의 하나로 일컫어질 만큼 정묘한 것이다. 그는 이십여 명의 인물을 짚단처럼 베며 날아갔다. “아악! 사형…….” 문득 우측 동혈로부터 여운설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렸다. “기다려라 사매-!” 그는 신형을 솟구쳤다. 운무 사이로 뻥 뚫린 동혈이 보였다. 그는 다짜고짜 사매의 비명이 들려온 동혈로 날아갔다. 쐐액! “윽!” 그는 누군가의 급습을 받았다. 왼쪽 어깨가 선뜻한 느낌이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보았다. 없었다. 왼팔이 어깻죽지부터 뭉턱 떨어져 나간 것이다. “으아아아악!” 무서운 괴력이었다. 낙혼성은 괴성을 발하며 수중의 검을 뿌렸다. 따다당……! 어지러운 금속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그의 앞을 막고 있던 오 인의 무사들이 토막나 쓰러졌다. 낙혼성은 지혈시킬 생각도 하지 않고 동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상황은 그의 눈을 뒤집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막 다섯 명의 사나이들이 한 명의 여인을 바닥에 눕혀놓고 범하려는 모습이었다. 여운설의 옷은 거의 걸레쪽처럼 찢겨나가 있었다. 그리고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막 한 사내에게 겁간당하려는 순간이었다. “죽일 놈들!” 검광이 동혈 안을 환하게 밝혔다. “크아악!”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두 명의 사나이가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그들은 그저 번쩍하는 검광을 보았을 뿐이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크게 놀라 일제히 낙혼성을 공격했다. 낙혼성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무거운 신음을 터뜨렸다. 허리와 다리, 등에 각각 삼검(三劍)이 떨어졌다. 그는 비틀거렸다. 눈 앞이 노래지고 별똥이 퉁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문 채 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하나 그것은 이미 아무런 위력도 담겨 있지 않은 것이었다. “죽으려고 용쓰는 놈이로군!” “헤헤헤! 계집년의 애인인 모양인데 아주 함께 황천으로 보내주마!” 쐐애액! 세 자루의 검이 그의 몸을 난도질하듯 떨어졌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낙혼성은 탈진한 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삼 인의 금륜맹도들은 눈 앞에 무엇이 번쩍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따다당……! 손아귀가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수중의 검이 모두 날아갔다. 뿐만 아니라 통증으로 어깨까지 축 늘어지고 말았다. 너무나 놀라운 공력이었다. “……!”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언제 나타났는지 눈 앞에는 허름한 마의를 입은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어이없게도 한 자루의 목검이 들려 있었다. 아니 목검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하나의 나뭇가지같은 것이었다. ‘설마 저 목검으로?’ 그들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나뭇가지와 같은 목검이 한차례 빙글 돌아간 순간 이미 그들의 목이 반쯤 잘렸기 때문이었다. 털썩, 털썩! 쿵! 그들은 나란히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얼굴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낱 나뭇가지에 의해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황천객이 될 줄이야. 나타난 사람은 바로 노팔룡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듣던 대로 금륜맹의 무리들은 몹쓸 자들이군. 셋이서 하나를 상대하다니.”그는 고개를 돌리다 마침 엉거주춤 일어서며 찢어진 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여운설을 발견했다. “아니 낭자는?” 다시 그는 한 가닥 신음을 들었다. 그것은 벽에 기댄 신기일화검 낙혼성의 신음이었다. “어? 이제보니 당신도?” 휙! 하는 파공성이 희미하게 일더니 동혈 입구에 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놀랐어요! 당신의 경공이 이렇게 뛰어나다니.” 내려선 인영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노팔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운하였다. 문득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동혈 안의 참혹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그녀는 혀를 찼다.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여운설의 모습이나 한쪽 팔이 무처럼 떨어져 나간 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는 낙혼성의 모습, 한눈에도 이곳에서 얼마나 처절한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노팔룡은 헛기침을 했다. “험, 우리가 좀 늦은 모양이야.” 그 말에 도운하는 탄식했다. “맞아요. 좀더 빨리 왔어야 했어요.” 그들은 백혈애를 지나다 마침 혈전의 아우성을 들었던 것이다. 비록 늦긴 했어도 극적으로 두 남녀를 구하게 된 셈이었다. 노팔룡은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낙혼성이 그를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하, 이거 원 이런 데서 만나다니. 음, 많이 다쳤소?”노팔룡은 어색하게 웃으며 낙혼성을 바라보았다. 낙혼성은 잘려나간 왼쪽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신음만 발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고통을 느낀 것이었다. “별 것…… 아니오. 그나저나 고맙소.” 간신히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노팔룡은 씨익 웃었다. “원 별말씀을. 무인으로서 당연한 협행이 아니오?” 평소같으면 노팔룡의 그런 능청스러움이 역겹게 느껴졌을 낙혼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혼성은 또 다시 정신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로 쓰러지면서 말했다. “부탁이오. 나의 사매를, 음…….” “낙형!” 노팔룡은 쓰러지려는 그를 붙잡았다. 이때 여운설의 상세를 보살피고 있던 도운하가 소리쳤다. “여봐요. 이곳은 저에게 맡기고 어서 가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요.”노팔룡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도 그리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칠룡삼봉의 대부분이 극도의 위험에 빠졌으리라는 것 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알았소!” 휘익! 그는 진천검과 하나가 된 채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취한 신법이었으나 도운하가 보기에는 신검합일의 어검비행술처럼 보였다. 그녀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아아! 저 분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제33장 오오! 신(神)이여! 1 미나찰(美羅刹) 남궁옥(南宮玉). 그녀는 삼봉 중의 일 인이었다. 강남무림의 명문 남궁세가 출신으로 미모와 무공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미명도 과거지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왼쪽 다리에 검상을 입고 가슴에도 장상(掌傷)을 입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만일 옆에서 당립이 그녀를 돕지 않았다면 벌써 황천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칠룡삼봉은 철저히 낭패를 당했다. 그녀가 알기로도 벌써 두 명이 눈 앞에서 죽은 것이다. 종남의 사도욱이 전신이 토막나 쓰러지는 것을 보았으며, 아미의 유철승도 등과 가슴이 여러 자루의 창에 관통당해 죽었다. 지금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당형?” 당립은 그녀의 손을 잡고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개중 당립이 가장 나은 편이었다. 그는 비교적 곤륜의 지리를 잘 알기 때문에 가장 빨리 금륜맹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매, 이 길로 나가면 살 수 있소.” 남궁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뒤에 남아 있는 분들은?” 당립은 짜증스런 음성으로 답했다. “지금 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것이 급선무요.” “하지만…….” 당립은 힐끗 돌아보았다. “남궁 사매. 내가 아니었다면 사매는 벌써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것이오.” 남궁옥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립이 당가비전의 암기술로 금륜맹의 고수들을 쓰러뜨렸고, 그가 길을 열지 않았다면 벌써 그녀는 비참한 경우를 당했을 것이다. “아…….” 갑자기 그녀는 앞으로 푹 쓰러졌다. 가슴이 콱 막히는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더, 더 못가겠어요.” 그녀는 주저앉을 듯 했다. 당립은 당황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아직은 안전하지 않소. 더 가야….” 그는 흠칫했다. 남궁옥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쓰러진 남궁옥을 살피다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남궁옥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앞가슴의 옷이 너덜거리고 있었고, 왼쪽 다리도 피에 젖어 있었다. “이런…….” 그는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침 오른쪽으로 숲이 우거진 것이 보이자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남궁옥을 안고 신형을 날렸다. 숲은 꽤 울창했다. 밖으로부터 시야가 차단되어 있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립은 바닥에 남궁옥을 눕히고 숨을 가다듬었다. ‘중상을 입은 것 같은데.’ 과연 남궁옥의 앞가슴은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즉시 옆에 앉아 그녀의 가슴을 풀어 헤쳤다. 속옷까지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에 젖은 속옷을 젖히자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음…….” 당립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두 개의 팽팽한 유방 사이에는 검은 장인(掌印)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세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다리의 검상으로 피를 많이 흘린데다 기진하여 잠시 기절한 것 뿐이었다. ‘이 정도면…….’ 그는 막 그녀의 명문혈에 진기를 불어넣으려다 멈추었다. 마침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진 달빛이 그녀의 뽀오얀 젖가슴에 비치고 있었다. 남궁옥은 무림삼봉 중의 한 명인 만큼 그녀의 미색은 강호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강호의 젊은 청년이라면 누구나 애정을 품을 만한 미색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남궁옥은 평소 무당출룡 장무기와 연인 사이였다. 당립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 당립은 무림삼봉 중의 한 명을 자신의 반려로 만들려는 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희망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여운설은 신기일화검과 깊은 사이였으며, 공동 출신의 담수련(澹秀憐)은 또 청성의 악능소(岳能素)와 연인 사이였다. 남궁옥의 달빛을 받은 얼굴은 창백했다. 그러나 그 점이 더욱 묘한 미태를 발산하고 있었다. 문득 당립의 눈빛에 욕망이 일어났다. “후후…… 먼저 취하는 자가 임자지.” 놀라운 일이었다. 당당한 명문 출신의 당립이 이런 음흉한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말이다. 당립은 손을 뻗어 남궁옥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묻어날 듯이 부드럽고 탄력이 넘치는 가슴이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음침해졌다. 그의 음심은 더욱 무섭게 자극받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얼마전 하여령을 취하기 일보 직전 좌절된 후 그는 더욱 여체에 대한 갈증이 이는 참이었다. ‘이번에는…….’ 당립은 결심한 듯 눈빛을 번들거리며 신속히 남궁옥의 옷을 벗겨 나갔다. 남궁옥의 찢어진 옷은 몇번 손이 가지 않아 허물 벗듯 벗겨져 나갔다. 잠시 후 달빛 아래 희고 늘씬한 여체가 드러났다. 비록 상처를 입긴 했으나 황량한 산역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그 모습은 도리어 폭발적인 육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유방은 알맞게 부풀어 있었고 여인의 그 부분에도 짙은 숲이 그늘을 이룬 채 당립을 유혹하고 있었다. 당립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급히 옷을 벗었다. 우물거리다가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양물은 이미 성이 날대로 나 있었다. 잠시 주위를 불안한 눈으로 둘러본 당립은 의식을 잃고 있는 남궁옥의 나신 위에 몸을 실었다. “악!” 남궁옥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실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신은 발가벗고 있었으며 당립이 그녀의 옥체를 유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악몽이었다. 이것은 결코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안돼……! 흑흑!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어진 그릇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 깊숙이 당립의 육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흐흐…… 난 널, 오래 전부터…….” 당립은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였다. 그의 격렬한 동작이 더욱 남궁옥의 절망을 자극했다. “아, 안돼!” 그녀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더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당립에게는 쾌감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당립의 비웃는 듯한 표정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후후! 남궁 사매…… 이제 우린.” “흑흑! 이 나쁜…….” 남궁옥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남궁옥은 경련했다. 당립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도리어 그는 더욱 큰 쾌감을 얻기 위해 남궁옥을 자극하고 있었다. 남궁옥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육중한 사나이의 체중도 체중이려니와 중상을 입고 진기가 탈진한 상태였던 것이다. 달빛이 슬프도록 흰 남궁옥의 허벅지를 비추었다. 그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주르르…….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당립은 아랑곳 없이 그녀의 유방에 얼굴을 묻으며 더욱 거칠게 행동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원망과 회한의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어떤 그림자가 비쳤다. 그것은 처음에는 유령인가 했다. 한 명의 포대같은 옷을 걸친 장신의 괴인이 우뚝 서서 그녀와 당립을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닌가? “악! 귀……귀신!” 그녀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달빛을 가리는 괴인의 몸이 움직였다. 괴인이 손을 번쩍 든 것이다. 이어 지옥의 유부에서 흘러나옴직한 스산한 음성이 괴인의 입으로부터 뱉아져 나왔다. “쓸모 없는 놈. 당가(唐家)에 너같은 놈은 없어지는 것이 났다.” 퍽! “으아악!” 당립의 몸이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남궁옥은 당립의 몸이 더욱 무거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흐흐흐……당가도 끝이구나. 너같은 놈이 당가를 더럽히다니…….” 괴인의 입에서 회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남궁옥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괴인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는 당가의 먼 친척 뻘이 된다는 괴장원의 장주였던 것이다. 괴인은 바로 실심객 당정환이었다. 그는 금륜맹으로 가던 중 우연히 당립의 비행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당립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비록 자신은 당가에서 은퇴한 것이나 진배 없으나 그래도 당가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립의 비행은 그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실망을 안겨 주었다. 당립 그는 이렇게 어이없이 죽었다. 한때는 무림을 호령하는 대영웅을 꿈꾸었으며 누구보다도 자신의 지혜를 믿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는 이토록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그것도 당가의 인물에 의해서. 실심객 당정환의 일수에 그는 뇌수가 터진 채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아랫도리를 흉하게 드러낸 채 죽어있는 그의 모습은 음산한 숲 속에 더욱 더 괴이한 공포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라. 그리고 이 일은 잊는 것이 좋다.” 당정환은 무심하게 말했다. 전혀 억양이 없는 음성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무한 느낌이 배어 있기도 했다. 문득 남궁옥은 등 뒤 명문혈로 한가닥 뜨거운 진기가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몸 속에 새로운 힘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정환이 격공진력의 수법으로 그녀의 원기를 회복시켜준 것이었다. 잠시 후 남궁옥은 급히 일어나며 우선 몸매부터 가다듬었다. 찢어진 옷자락으로 대충 몸을 가다듬고 막 인사를 하려는데,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급히 돌아보다가 멍해졌다. 어느새 당정환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흑……!”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비록 자신을 더럽힌 당립은 응분의 대가를 치루고 비명횡사했지만 그렇다고 더럽혀진 청결이 보상받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옥은 절망에 싸인 채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2 “여봐라! 노팔룡 대협이 나가신다!” 파츠츠츠츳! 그것은 검광이라기보다는 한 덩어리의 빛무리 같았다. 빛살같은 인영이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숲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노팔룡은 칠룡삼봉이 위기에 몰리는 것을 발견했다. 막다른 절곡 어귀에서 우왕좌왕하면서 금륜맹도들에게 협공을 당하고 있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 특유(?)의 협기가 발동된 것이었다. 그는 진천검을 휘두르며 전권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펼치는 것은 바로 뇌진자로부터 전수받은 마지막 검식으로 무당의 검법 태극십팔해를 변형시킨 것이었다. 노팔룡이 보기에는 가장 그럴 듯한 검법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태극십팔해의 위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전신이 한 덩어리의 검막으로 둘러싸인 채 금륜맹도들에게 뛰어드는 순간, “으아악!” “크아악!” “캐애액……!”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노팔룡은 신바람이 났다. 검식을 전개하면 할수록 진기가 샘솟듯이 솟아 단전에서 검극으로 뻗쳐나가고 있었다. 한 번 뻗어나간 진기는 마치 번갯불같은 검기로 화해 주변 수장을 현란하게 뒤덮었다. 노팔룡은 신들린 듯 검을 휘둘렀다. 쐐애애-- 쐐애액--!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그의 진천검에서는 푸른 검기가 수장 여나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어검연기술(馭劒煙氣術)의 경지에 달한 것이었다. “아아! 노대협이오!” “오! 과연 뇌진자 노선배님의 제자답소!” 위기의 막바지에 몰려 있던 칠룡등은 감탄성을 발했다. 그들은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노팔룡의 신기에 가까운 검법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때 바닥에는 두 명의 청년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고 두 명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이미 두 명은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도합 십 인이었던 칠룡삼봉이 이제는 고작 두 명만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사마외도들은 물러가라!” 노팔룡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후, 후퇴다!” 이미 삼사십 명이 쓰러지고 나자 금륜맹도들은 원기를 잃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아귀같은 자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곡 안을 자욱히 뒤덮었던 괴이한 운무도 서서히 걷혀지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그 자리에 무수히 뒹굴고 있는 시체와 노팔룡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노팔룡은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검을 거두며 돌아섰다. “어디 다친 데는? 어? 중상이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청년을 바라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3 눈(眼). 한 쌍의 눈이 건물을 노려보고 있다. 그 눈에는 허무와 고통이 쓰라린 세월의 영욕을 건너뛰어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포대같은 갈포를 걸친 인물이었다. 그는 금륜맹의 한 채의 전각 지붕 위에 기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에 보이는 한 채의 석옥은 금륜맹의 뇌옥으로 중죄인이나 중원무림인들을 가두고 있는 곳이었다. “…….” 뇌옥을 노려보고 있는 괴인은 바로 실심객 당정환이었다. 그는 장룡장원에 칠룡삼봉이 다녀간 이후로 금륜맹과 중원무림 사이에 전운이 무르익은 것을 느끼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며칠 동안 그는 금륜맹을 탐색했다. 금륜맹의 실력이나 비밀을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옥가영과 하여령이 뇌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금륜맹의 힘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막비의 무공이 추측할 길이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연 그는 내심 한스런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막도, 너는 악마의 피를 받은 아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원한을 이제 대(代)를 물려 이전시킬 셈이냐?’ 실심객 당정환. 그는 과거 육협의 일 인이었고 막도에 의해 일생을 망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을 느끼며 치를 떨고 있었다. 지붕 위에 엎드려 있는 그를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금륜맹의 경비가 아무리 삼엄하다 해도 그 역시 과거의 무림고수였던 것이다. 당가에는 특수한 은신법(隱身法)이 비전하고 있었는데 당가 최고의 고수인 당정환이 그 은신법을 펼치면 실상 무림에서 눈치챌 자는 몇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문득, 그의 스산한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뇌옥으로 누군가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 자는 뇌옥에 갇힌 자들에게 음식을 날라주는 위인인 듯 했다. 스슷-- 실심객의 신형이 연기처럼 흐려졌다. 당가 독문의 은형비(隱形飛)라는 경신술이었다. 은형비가 최상승에 이르면 인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특정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도 상대방은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는 특수한 신법이었다. 만일 고도의 안력을 지닌 고수가 본다면 지금 음식을 날아가는 위인의 뒤에 흐릿한 연기와 같은 인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심객의 감추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금륜맹도의 뒤를 지척으로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기기깅-- 육중한 뇌옥의 철문이 열렸다. 금륜맹도는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같은 순간 그의 그림자와 함께 실심객도 뇌옥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4 뇌옥 안. 오리알 굵기의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는 뇌옥 속에 두 여인이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아들이 어미를 부인하다니…….” 창자가 끊어질 듯이 고통과 한으로 점철된 듯한 한탄이었다. 한탄을 뇌까리는 옥가영의 얼굴은 반쯤 실성한 듯이 보였다. 하여령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막비는 자신에게 어머니가 없다고 말했다. ‘세상에 어머니 없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사람도 아니야.’ 그녀는 옥가영의 분노와 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 마디 천 마디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될 수 없었다. 하여령은 다만 깊은 한숨을 쉴 뿐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으악!” “캐애액! 적이다!” 문득 밖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여령은 벌떡 일어났다. 한 가닥 희망의 빛이 그녀의 눈에서 반짝였다. ‘혹시……?’ 그녀의 뇌리에는 노팔룡이 퍼뜩 떠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번뜩하는 느낌과 함께 한 인영이 나타났다. 순간 하여령은 눈을 크게 떴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실심객이었던 것이다. “앗, 선배님은……?” 실심객은 대답없이 철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녹광(綠光)이 번쩍 일어났다. 쩡! 철창이 마치 예리한 칼로 잘린 듯이 베어져 나가고 나갈 길이 열렸다. “나오시구려. 옥매(玉妹).” 실심객의 음성은 비록 억양이 없었지만 깊은 오뇌와 한이 깃들어 있었다. 일부러 떨리는 심금을 억제하는 듯 했다. “다, 당신은?” 옥가영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녀도 한눈에 실심객 당정환을 알아 본 것이다. 당정환은 비로소 탄식했다. “아아! 지난 일을 이야기해서 뭣하겠소?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 급선무요.” “당 오라버니…….” 옥가영은 눈물을 금치 못했다. 하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가지 않겠어요. 어미를 부정하는 아들을 가진 죄많은 계집이 달아나 무엇을 하겠어요?” “누이!” 실심객은 다급히 말했다. “조금 있으면 놈들이 몰려들 것이오. 어서…….” 옥가영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실상 그녀는 이미 중상이 깊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망을 하고 있었으므로 달아날 의향이 없었다. “오라버니께서는 이 아이나 데리고 가세요.” “아아, 할 수 없군.” 슉! 실심객의 손이 뻗었다. 순간 옥가영의 몸이 축 늘어졌다. 혈도를 짚힌 것이었다. 실심객은 그녀를 업었다. “빨리 가자. 아이야.” “예, 선배님.” 두 사람은 어두운 뇌옥 사이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뇌옥을 나갈 때까지 아무도 그들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뇌옥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주변이 겹겹으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수십 명의 금륜맹도들이 눈빛을 번쩍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심객은 미리 예상한 듯 차갑게 외쳤다. “막는 자는 죽는다.” 우우우웅! 그의 손바닥이 뻗어나가자 녹광이 일어났다. 그 녹광은 회오리치며 전면의 금륜맹도들을 향해 날아갔다. 꽈우웅!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일어났다. 재수없게도 제일 먼저 장력을 맞은 금륜맹도 네 명이 피떡이 되어 날아간 것이다. 하여령도 가만히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자마자 매섭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얍!” 마음 속의 분노와 증오가 서리서리 검기로 화해 사출되었다. 검각의 후계자답게 일점홍의 살인검술이 빛을 발했다. 그녀가 날리는 검기에 휘말리는 금륜맹도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혈로(血路)를 뚫기 위한 혈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금륜맹을 탈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륜맹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정예인물들이었다. 아무리 실심객과 하여령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그들을 뚫고 탈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처음에는 실심객과 하여령의 공격에 절반 가량이 쓰러졌으나 갑자기 그들의 방어태도가 바뀌었다. 차륜전(車輪戰)의 진법을 취한 것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상대하니 실심객과 하여령은 수십 명의 고수들을 상대로 제 자리를 맴돌 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사오십 명의 금륜맹도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실심객과 하여령도 숨결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는데…….’ 하여령은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쓰러지면 뒤에 서 있던 자가 나서고, 그 자를 물리치면 또 다른 자가 나섰다. 차륜전은 상대의 공력을 소진시킬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결국 두 사람은 진기가 탈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하나는 남기고 가라.” 문득 어디에선가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 실심객은 흠칫했다. 음성만으로 상대방이 자신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대열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한 사나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막비였다. 금륜맹의 맹주 막비가 직접 나타난 것이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금륜맹도들은 좌우로 갈라지며 일제히 바닥에 부복했다. 놀라운 신위였다. 금륜맹도들에게 막비는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실심객의 눈이 지글거렸다. 그는 원한에 찬 시선으로 마의 화신이자 악마의 씨앗인 막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막비는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차갑고 무심한 시선이 그의 곁에 서 있는 하여령에게 갔다. 그는 하여령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를 훑어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남아라.” 하여령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막비의 눈빛에서 그가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실상 막비는 이제까지 어떤 특정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여령을 보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최고를 구가하는 위인으로 여인을 보는 눈도 최고수준에 속한다. 일점홍 하여령은 그런 기준으로 볼 때 그가 취할 만한 여인이었다. “후후후… 네가 누군지는 묻지 않겠다. 다만 그 계집만 두고 간다면 막지 않겠다.” 막비의 말은 실심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무림의 대선배인 실심객은 분노를 느꼈다. 막비의 부친인 막도와 동배의 인물인 자신을 이렇게 철저히 무시하다니…. 게다가 그는 존칭을 사용치 않았다. “크흐흐… 건방지고 무례한 놈이구나.” 막비는 태연했다. “쓸모 없이 늙었다고 위세를 부리려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본좌는 금륜맹의 맹주일 뿐이다.” “고연 놈!” 쑤아앙! 녹수마장이 날아갔다. 분노를 띤 실심객의 혼신을 다한 일격이었다. “후후후훗! 낡은 수법이다. 늙은이.” 스스스……! 놀라운 일이었다. 막비의 신형이 순식간에 대여섯 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여러 명으로 환신한 막비가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서다가 실심객의 좌우로 연기처럼 지나갔다. “헉!” 실심객은 우측 갈빗대가 부러지는 것을 느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막비가 언제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차 경고다. 그 어린 계집을 두고 가면 용서한다고 했다.” 실심객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일장의 대결에서 막비의 무공이 상상이상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옥가영을 내려놓으며 전음으로 하여령에게 말했다. (놈은 아직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 너는 어서 옥매를 데리고 탈출해라. 네가 옥매를 안고 가는 이상 놈은 살수를 펴지 못할 것이다.)하여령도 그 말에 공감했다. 비록 막비는 옥가영을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차마 옥가영에게 살수를 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 남아 있는다면 실심객이 옥가영을 데리고 가는 것은 허락하겠다고 한 말로 미루어 볼 때 능히 짐작되는 일이었다. 하여령은 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비켜라! 막는 자는 죽는닷!” 파츠츳--! 검광이 뻗어나갔다. 하여령은 옥가영을 업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후후후… 어딜 가느냐? 너는 남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막비의 신형이 날아갔다. “크흐흐흐! 어린애야, 너는 노부를 상대해야 한다.” 실심객이 가로막았다. 그는 즉각 막비의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녹수마장을 전개했다. 아무리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인 막비라 해도 죽음을 각오한 실심객의 공격은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내의 싸움은 험악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여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오직 탈출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호에 출도한 이래 이토록 처참한 싸움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검과 몸이 한덩이가 되어 무작정 앞으로 쏘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가로막으면 베었고, 쓰러진 자의 시체를 밟고 다시 도약했다. 이미 그녀의 전신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단말마의 아우성이 지옥에서인 듯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포위망을 뚫고 날아 올랐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성보를 뛰어 넘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성보를 뛰어 넘을 무렵에 들린 비명은 그녀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악!” 그것은 바로 실심객의 비명이었기 때문이다. ‘오오! 신이여!’ 하여령의 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그저 앞을 향해 죽어라 달릴 뿐이었다. 그것만이 실심객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보답이었기 때문이다. 제34장 용납되지 않는 실수 1 산신묘(山神廟). 금륜맹의 총단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곳이다. 산신묘는 황량했으나 지금 산신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결코 황량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뜨겁기 이를데 없었다. “아니 또?” “음양조화를 이루어 신선경에 드는데 장소가 무슨 문제야?”“하지만…… 으음.” 도운하는 대책이 없었다. 끝없는 탐구정신을 발휘하는 노팔룡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손에 완전히 길이 들리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팔룡의 손은 이미 그녀의 깊은 곳으로 들어와 있었다. 산신묘의 바닥에는 풀섶을 깔아 놓았다. 임시거처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일생동안을 고결하게 살아왔던 도운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에게는 어디나 천국이었다. 그는 도운하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이제는 많이 진전된 기술(?)로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퉁겨지곤 하는 도운하의 육체의 반응에 그는 몹시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또 하여령과는 달랐다. 사실 어떤 경우라도 그는 좋았다. 이제 여체의 신비를 완전히 알게 된 그는 두번째 서동인 도운하의 육체를 끊임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도운하의 가벼운 저항이 무너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노팔룡의 목을 끌어 안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입술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때였다. “잠깐…….” “아니 왜?” 갑자기 도운하의 몸이 굳어지더니 눈을 반짝 뜨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노팔룡은 이게 무슨 산통깨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어 버렸다. 그는 도운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관할 것 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도운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히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안돼요. 밖에 누가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도운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일어섰다. 황급히 옷을 주워입은 그녀는 쓴 입맛을 다시고 있는 노팔룡을 재촉했다. “빨리 가보아요.” “싫어!” 노팔룡은 고집을 부렸다. 그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이런 핑게 저런 핑게로 자꾸 빠져나가려는 도운하의 수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도운하는 이제 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경우 도리어 부드럽게 설득해야 되는 것이다. 그녀는 나긋한 음성으로 달짝지근하게 속삭였다. “아이, 서두를 것 없잖아요.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협행을 하셔야지요.” “음.” 협행(俠行)이란 말은 노팔룡의 약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사부의 유명이 요즘 들어 다시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제법 그럴 듯한 협행이라고는 별로 한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좋아.” 그는 심기일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과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쇳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손을 잡고 날아갔다. 얼마쯤 갔을까? 하나의 공지가 나타나고 이리뛰고 저리뛰는 인영들이 보였다. 그들은 수십 명이 한 명을 협공하고 있었다. “엇? 여령!” 노팔룡은 깜짝 놀랐다. 지금 수십 명의 인물들에게 둘러싸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고전하고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하여령이 아닌가?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도운하는 흠칫했다. “아는 여자인가요?” 그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노팔룡에게 달리 아는 여자가 있는 것은 뜻밖에도 그녀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이었다. “그럼! 내 서동이야.” 노팔룡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 마리의 붕조인 양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갔다. 한편, 하여령은 간신히 금륜맹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추적을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었다. 특히 사자대가 그녀를 쫓고 있었기에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게다가 등에 옥가영을 업고 있었으므로 더욱 더 제 실력을 발휘하기가 벅찼다. 이제는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절망에 싸여 있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막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던 그녀의 앞에 인영 하나가 뛰어든 것이다. 동시에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내 서동을 괴롭히다니. 여령, 내가 왔어. 노팔룡이 왔다구!” 꿈이 아닌가 했다. 하여령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순간 그녀의 몸이 감동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아아! 꾸, 꿈은 아니겠지…….” 그녀는 노팔룡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절로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한편 노팔룡은 이미 진천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위이이잉!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나가며 검기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크아악!” 추풍낙엽, 바로 그것이었다. 금륜맹도들은 검기에 휘말리며 비명횡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판단하지도 못한 채 그저 번쩍번쩍하는 검광을 보는 순간 사지가 절단나고 있었다. 이때 사자대를 지휘하고 있던 자의 눈에 노팔룡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바로 사자대장인 독고완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가 결국 노팔룡인 것을 발견했다.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 자는!’ 그는 부르르 떨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독고완에게는 얼마 전의 가공스런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독고완의 가슴 속에 공포가 가득 찼다. 다음 순간 그는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쥐어짜듯이 외치고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그의 외침이 떨어진 순간 사자대는 급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집요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자대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독고완은 냉정한 인간이었다. 노팔룡을 보는 순간 그는 백여 명의 수하들을 잃은 악몽을 떠올렸고, 자신의 힘으로 역부족인 이상 후퇴하는 것만이 금륜맹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나 어찌 알았으랴. 그것은 그의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으니. 세상사란 반드시 정석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2 비극은 인간사에 하나의 장을 형성한다. 지금 그 비극의 장이 또 하나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하여령은 극적으로 구출되었으나 그녀의 등 뒤에 업혀 있던 옥가영은 이미 회생 가망이 없었던 것이다. 탈출하는 동안 옥가영은 등에 일곱 종류의 암기를 맞은 것이다. 그것도 극독이 묻혀진 암기여서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였다. “틀렸어요. 너무 늦었어요.” 상세를 돌보던 도운하가 고개를 저였다. 의술에 신묘한 조화를 지니고 있는 그녀는 한눈에도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아! 선배님 흐흑……!” 하여령은 의식이 들어오자마자 옥가영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옥가영은 떨어지지 않는 눈까플을 간신히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하여령이 울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옥가영은 이미 자신의 명이 다한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 하여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지 마라 아이야…… 인간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법이란다.”옥가영은 회광반조(廻光返照)의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말을 하는 동안 잿빛이었던 안색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이런 현상은 죽음을 앞두고 잠시 명정한 상태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도운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옥가영은 정신이 맑아지자 한쪽에 서 있는 노팔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젊은이는 누구냐?” 하여령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흑흑…… 바로 제가 말씀드린 사람이에요.” “오. 바로 노팔룡이란 아이 말이냐?” “네…….” 옥가영은 잠시 노팔룡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역시 너의 신랑감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구나. 정말 기쁘다. 아이야.” 노팔룡은 그저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옥가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내심 하여령과 몹시 가까운 사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이때 옥가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창백할 정도가 아니라 거의 횟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옥가영은 자신의 최후를 느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얘야. 그 아이…… 그는…… 사람도 아니다. 악마의 아들…… 넌…….” 점점 더 음성이 가늘어 졌다. 하여령은 터지려는 오열을 참으며 그녀의 최후의 유언을 듣기 위해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옥가영의 음성은 점점 더 흐려지기만 했다. “너는… 나를 위해… 그를 죽여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 끝이었다. 그것으로 옥가영은 한많은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선배님!” 하여령은 그만 크게 울부짖고는 혼절하고 말았다. 이렇게 옥가영의 일생이 끝날 줄은 몰랐다. 같은 여인이기에 하여령은 충분히 옥가영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극의 여인 옥가영, 그녀는 이렇게 한많은 생애를 마감하고 만 것이다. “여령!.” 노팔룡은 어쩔 줄을 몰랐다. 하여령이 혼절해 버리자 그는 크게 당황했다. 이때 도운하가 나섰다. “당분간 그냥 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충격이 너무 컸으니까요.”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잘 알지는 못해도 옥가영의 죽음에 마음이 착잡했던 것이다. 3 아침이다. 여명을 느끼며 차츰 의식을 되찾아 가던 하여령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몽롱한 가운데 그곳이 한 채의 사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옆에서 이상한 기척이 들려온 것이다. ‘……?’ 기척이 들리는 쪽을 돌아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노팔룡이 웬 여인과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구는 것이 아닌가? ‘저럴 수가?’ 마치 커다란 쇠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리워 했던 사람이었던가. 그런데 그가 자신을 바로 곁에 둔 채 다른 여자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지 않아도 노팔룡의 손이 어디로 들어가 있고 어떤 짓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옷깃 스치는 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 왔다. 마침내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이 더러운 연놈들……!” 한 덩어리로 엉켜 있던 남녀가 화들짝 떨어졌다. 얼른 돌아 눕는 여인 도운하의 뽀얀 젖가슴이 살짝 비쳐 보였다. “아! 여령, 깨어났구나.” 노팔룡은 반가운 소리를 발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덮썩 그녀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조금도 자신의 행동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여령!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나는 그 동안… 억!” 철썩! 그의 뺨에서 불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여령이 그의 뺨을 친 것이다. “아니 왜 그래? 여령?” 하여령은 기가 막혔다. 그녀는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이 이런 의리없는 사내를 위해 생각하고 그리워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뭐? 왜 그러느냐구? 그걸 몰라서 물어? 이 더러운 인간…….” 짜악! 또 한차례 노팔룡의 뺨에서 불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거푸 두 번씩이나 따귀를 맞은 것이었다. 노팔룡은 그야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고 나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 아닌가? “흥! 나 없는 사이에 계집이나 끼고 다니고. 흥! 흥! 흥! 잘하는 짓이다!” 하여령의 분노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제야 노팔룡은 이유를 알았다. “아아 그거 말이야? 하하! 그건 여령과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노팔룡은 한쪽에서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는 도운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서동이야. 서동. 뭐 서동을 둘 쯤 갖는 것이 나빠?” “끼야악…….” 괴성을 지르며 또 따귀를 치려는 하여령을 피해 노팔룡은 냅다 밖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4 금륜맹의 화려한 밀전. 금륜맹주 막비는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는 폐관수련을 마친 상태였다. 그의 표정은 물처럼 담담히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도 이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만일 내가공부의 수련단계를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그는 내공의 최상승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반박귀진(反撲歸眞)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내공이 최상승에 이르면 태양혈이 가라앉고 눈빛도 안으로 갈무리 된다. 무림개사 이래 숱한 고인들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이는 드물었다. 보통의 고수들은 태양혈이 불룩하고 눈빛에 신광이 감도는 정도에 따라 내공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평범한 신색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반박귀진의 경지를 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막비는 폐관수련을 마친 상태였다. 따라서 이제 세상에 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패천신경을 완벽하게 익힌 이상 자신이 천하제일고수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독고완이 서 있었다. “그 계집은?” 그가 묻는 것은 하여령에 관해서 였다. 하여령이 달아나자 사자대의 대주인 독고완이 쫓아갔던 것이다. 그는 하여령을 보는 순간 자신의 여인으로 삼아야 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당연히 하여령을 잡아 왔으리라. 폐관이 끝난 그는 하여령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고 일단 그녀를 만나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독고완의 다음 말은 그로 하여금 분노를 금치 못하게 했다. “놓쳤습니다.” “뭐 놓쳐?” 막비의 눈이 한껏 거꾸로 일어선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독고완은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그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을 뿐더러 하여령을 놓친 일에 대해서도 조금의 자책의 빛도 띠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음. 이번에는 무슨 변명인가?” 막비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독고완은 흠칫했다. 막비의 음성이 이렇게 낮게 깔린다는 것은 그가 극도의 분노를 참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대답했다. “그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후후…… 후후후홧홧홧……!” 문득 막비의 입에서 앙청광소가 터져나왔다. “……?” 독고완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무슨 연유로 그러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막비는 광소를 뚝 그치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 자가 또 나타났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독고완은 추호도 위축되지 않고 대답했다. “흐흐흐. 그래…… 그 자가 그렇게 두렵단 말이지? 그리고 내 앞에서 이렇게 당당해 질 수 있는 것도 그 자가 두렵기 때문이란 말이지?” “그건…….” 독고완은 일이 이상하게 빗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는 항상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에 한해서 최선을 다했지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냉정한 판단을 내려 왔다. 그리고 그 점이 막비가 그를 신뢰하는 이유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므로 이번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내린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록 하여령을 놓쳤지만 부하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지 않은 것은 자신이 내린 현명한 결단인 것이다. 한편 막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르고 있었다. 대체 그 자가 뭔데 이렇게 나의 수하로 하여금 나보다 더 두려움을 주게 한단 말인가? 이건 나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때 독고완은 더듬거리며 입술을 열고 있었다. “그 자야말로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 일검으로 사자대 사십 명을 죽이고…… 정말로 그같은 무위는 속하 처음 보았습니다. 맹세코 그런 무학을 지닌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독고완은 엄청난 누를 범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어떠한 성품을 갖고 있는 위인인가를 깜빡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 앞에서 남을 칭찬하는 어이없는 실책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를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 단 한 번의 실수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갈(喝)!” “으아아아아아악!” 막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과는 정녕코 비참한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그의 충복이자 오른팔이었던 독고완. 그는 막비의 일장에 그만 머리가 으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황천으로 떨어지면서 아마도 독고완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단 한 번의 용납되지 않는 실수가 그로 하여금 천추의 한을 남기게 한 것이다. 제35장 대혈전(大血戰)의 서막(序幕) 1 천단객점(天壇客占). 곤륜산 어귀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객점이다. 객점은 야음에 젖어 있었고 한 조각 푸른 달이 객점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휴우우.” 마당을 서성이며 달을 바라보고 또 바닥을 내려다 보며 연신 한숨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금 두 개의 방 사이에 있는 화원을 서성이면서 쉴 새 없이 한숨을 내리쉬고 있었다. 노팔룡이었다. 그는 하여령을 만난 후 산신묘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그것은 도운하의 제안이었다. 금륜맹에서 다소 떨어진 외진 곳으로 금륜맹의 또다른 공격을 잠시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도 당장 첫날 저녁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객점을 잡을 때 도운하와 하여령은 각각 방을 따로 잡은 것이다. 노팔룡은 따로 방을 잡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예로 보아 서동과 함께 방을 쓰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돌변하여 그는 어느 방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처음 그는 도대체 어느 쪽 서동을 찾아가 함께 잠을 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먼저 하여령을 찾았다. 오랫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하여령은 대뜸 그를 보자마자 따지는 것이었다. “대체 그 계집과는 어떤 사이죠?” “어떤 사이긴, 서동이지.” “서동? 흥! 어서 솔직히 털어 놓아요! 둘이서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를…….” 노팔룡은 느물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덥썩 하여령을 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왜 그래? 너에게 후배 서동이 생겼는데. 그건 그렇고 그동안 내가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했는데 말이야…… 어억!” 와장창! 그는 하여령으로부터 일장을 가슴에 얻어맞고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얼마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에서 끝났으면 말도 안한다. 그는 내심 투덜거리며 도운하의 방으로 찾아간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도운하의 방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운하는 이제까지와는 싹 달라져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싶게 그녀는 쌀쌀하게 굴었다. 그녀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끈덕지게 추근거리며 접근하자 아예 금침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서 물러설 노팔룡이 아니었다. 그는 슬며시 금침 속으로 파고 들어 평소처럼 도운하의 가슴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아이쿠!” 그는 도운하의 발길질에 사타구니를 걷어채여 날아간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나가 떨어진 것이다노팔룡은 화단을 왔다갔다 하며 두 개의 방을 향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야! 치사하다! 치사해!” 그러나 두 개의 방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을 떠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그로서도 별 도리가 없었다. 그저 속으로 분을 삭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젠장, 언제는 남의 목을 부러뜨릴 듯이 잡아당기며 좋아하더니 이제와서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두 개의 방에다 대고 그렇게 항의하기도 했다. “둘이서 해도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셋이서 하면 좀 재미가 있겠느냔 말이야? 여령! 운하! 내 말 좀 들어보라구. 응?” 나중에는 협박에 설득까지 별의별 수단을 다 부려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마침내 노팔룡은 지치고 말았다. 그래서 마당을 서성이며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잠자리가 걱정이었다. 그는 두 개의 방문 앞을 왔다갔다 하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여령, 아무것도 안할테니 잠이나 좀 재워 달라구……응?” “운하. 제발.” 여전히 방문에서는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 두 여인은 단단히 짜기라도 한 듯 대꾸가 없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아니? 노대협 아니십니까?” 문득 들려온 소리에 노팔룡은 돌아섰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의 인물들이 그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막 객방으로 들어오기 위해 중문을 넘어 오다가 마당을 서성이는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략 사오십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자들이었다. “……?” 그가 이상한 표정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자 한 명의 중년인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아, 대협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저번 비룡방에서 노대협의 신기를 뵙고 흠모해 왔습니다. 불초는 중원맹의 선발부대로 다른 영웅제협들과 금륜맹으로 가던 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노대협을 만나게 될 줄이야.” “아. 그렇소?” 노팔룡은 건성으로 반문했다. 사실 그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보다는 당장의 잠자리가 시급한 것이었다. 중년인은 만면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노대협을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대협께서 그동안 벌이신 눈부신 활약은 모두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 노팔룡은 그저 듣기만 했다. 실상 이미 그가 금륜맹을 상대한 한 몇 차례의 싸움은 중원무림인들에게 속속 전해지고 있었다. 발없는 말이 하룻밤 사이에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금륜맹을 향해 쳐들어 오던 무림인들 사이에 노팔룡이란 이름은 이미 하나의 신화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원무림맹의 맹주였던 백선결마저 그에게 패해 은퇴를 선언하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 더욱 노팔룡의 위명을 진동케 한 것이다. 무림인들은 노팔룡을 둘러싼 채 서로 다투어 인사했다. “저는 강남의 삼도회(三道會)에서 온…….” “저는 유주의 권문(拳門) 출신으로…….” “저는 태극문(太極門)의 팔괘신장 진청삼으로…….” 노팔룡은 정신이 없었다.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잘보이기 위해 자신의 명호와 출신을 말하고 있었으나 경호경험이 없는 그가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겠는가.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은 객방으로 들어갈 생각도 않고 각각 노팔룡의 신위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가 벌인 활극은 한껏 과장된 채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하늘을 훨훨 날아서 일장에 오백 명의 금륜맹도를 죽였다느니, 한 번 소매를 떨치자 집채만한 바위가 가루가 되었다느니, 또는 손가락 하나로 한꺼번에 백 명의 가슴을 관통시켰다느니 하는 황당무계한 소문들을 떠들어 댔다. 문득 노팔룡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것이다. 그는 군웅들을 바라보다가 나란히 붙어있는 두 개의 객방을 바라 보았다. “아, 알겠소. 하지만 난 잠을 좀 자야겠소.” 그는 군웅들에게 대충 인사를 한 후 입가에 괴상한 미소를 지으며 도운하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헛기침을 한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운하, 저번에 나와 함께 욕실에 들었을 때…….” 그의 말이 거기까지 나왔을 때였다. “드, 들어와요!” 비명에 가까운 도운하의 음성이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하하하하! 진작 그럴 것이지.” 노팔룡은 껄껄 웃으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군웅들은 그의 그런 모습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방 안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더욱 더 모르고 있었다. 노팔룡이 모습을 감추자 예의 중년인은 일행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여러분. 이곳에서 노대협을 만났으니 우리 이곳에 일단 걸음을 멈추고 노대협의 지시를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옳소!” “그렇게 합시다!” 군웅들 중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천하제일고수 뇌진자의 제자인 노팔룡대협이야말로 진정한 영도자의 자격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2 다음날 아침. 객점의 넓은 객청에 군웅들이 모였다. 그들은 시선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노팔룡이었다. 그의 곁에는 도운하와 하여령이 각각 좌우로 앉아 있었다. 지금 노팔룡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군웅들의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예의 중년인- 무극서생(無極書生) 감청운이 군웅들의 대표 자격으로 말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무림맹의 선발대 중 한 대열로 금륜맹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그것은 무림맹의 맹주였던 백선결의 은퇴 소식이었다. 노팔룡에게 도전했다 패배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무림을 떠난 것이다. 이 사실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무림맹의 지도자가 빠진 이상 큰 혼란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누가 무림의 영수로 금륜맹과의 싸움을 통솔한단 말인가? 다행히도 군웅들 사이에선 새로운 지도자로 노팔룡을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론은 각 대로 연락이 취해지면서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 것이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전 중원의 정예부대들은 각로(各路)로 나뉘어 금륜맹을 향해 북상중이었다. 전서구를 통해 상호 수시로 연락이 취해지고 있었다. 최후의 결전을 대비하기 위한 비장한 각오는 곤륜산이 가까와 올수록 초긴장의 상태를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무극서생 감청운은 기타 군웅들의 숫자며 현재 사기가 충천하고 있다는 것 등을 보고 했다. “마침 노대협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면 큰 차질이 일어날 뻔 했습니다. 저희들은 노대협의 지시를 받아야 총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노팔룡은 가슴을 펴며 말하고 있었다. “걱정 마시오. 본인이 있는 한 여러분은 아무 걱정도 할 필요없소. 금륜맹의 막비인가 하는 자는 내가 맡겠소.” 호언장담이었다. 만일 노팔룡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미친 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무림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의 말에 군웅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침 백혈곡에서 낭패를 당하고 간신히 살아남았던 칠룡삼봉의 일원이 객점에 함께 있었기에 일행들에게 그동안의 노팔룡의 놀라운 무위를 얘기해준 것이었다. 그들에게 노팔룡의 무용담을 전해들은 후라 군웅들은 노팔룡을 당대제일의 기협으로 우러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노팔룡과는 달리 두 여인, 하여령과 도운하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하여령은 막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직접 뼈저리게 느꼈으며, 도운하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으로서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장내의 분위기가 적지 않게 고민 되었다. 만약 노팔룡이 장담한 것처럼 섣불리 금륜맹과의 결전을 서두른다면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회의가 끝났다. 군웅들은 모두 밝은 표정으로 흩어져 식사를 하거나 휴식에 들어갔다. 도운하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비밀리에 군웅들의 수뇌격인 감청운을 만났다.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해요.” 감청운은 도운하를 알고 있었다. 무림제일의 기녀(奇女)로서 실질적으로 중원무림맹을 결성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차분하게 입을 떼자 자신도 모르게 신중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노대협께서 있는데…….” “물론.” 도운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도 노팔룡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 그의 무공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륜맹주 막비도 무서운 존재예요.” “그렇습니다. 한데 무슨……?” 감청운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노대협의 무예는 신기에 가깝지만 이번 일전은 중원무림의 생사가 걸려 있어요. 결코 경동해서는 안되요.” “네, 물론.” “노대협께서 자신감을 보이지만 전면전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뻔해요. 수많은 사상자가 날 거예요.” “그야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만한 희생 쯤이야…….” “기다려야 해요. 아직 우린 준비가 안됐어요.” 도운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녀의 입장으로서는 노팔룡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천하무림의 대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감청운에게 당부했다. “설사 노대협께서 나서더라도 감대협은 좀더 시간을 지체하도록 해보세요.” “……?” “다시 말해 주력부대를 기다리자는 것이에요.” 감청운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승산은 반반이야. 이쪽의 힘과 금륜맹의 힘은 한 번 부딪쳐 볼만 해. 그러나 아직 무림의 주력부대는 당도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올 때까지는 이쪽에서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돼.'그녀는 이번에는 노팔룡을 만나 설득하기로 했다. “기다려야 해요.” 도운하의 말에 노팔룡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한시라도 빨리 그 놈을 죽여야지! 여령이 당한 것을 듣지도 못했어? 세상에 그런 악마의 자식은 일찍 죽여 버릴 수록 좋다구.”도 운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아니에요.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에요. 그러니 주력부대가 당도한 다음에 전면전을 벌여도 충분…….” 노팔룡의 고집은 막무가내였다. “난 기다릴 수 없어. 당장이라도 놈을 요절내 버려야 해!” 도운하는 어이가 없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상큼 치뜨며 날카롭게 추궁했다. “아니 그럼 당신 혼자서 해치우겠단 말이에요?” 노팔룡은 가슴을 두드렸다. “물론이지, 천하제일의 협객 노팔룡이 무엇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마침내 도운하는 역부족을 느꼈다. 그녀의 눈은 옆에 있는 하여령에게 향했다. 하여령은 눈길을 천장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일부러 그녀의 말에 딴전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도운하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아니, 당신은 왜 가만히 있죠? 정말 이분으로 하여금 호랑이 굴로 혼자 들어가게 할 참인가요?” 하여령은 비로소 돌아보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녀는 도운하보다는 한 살이 많았기에 말을 낮추었다. “동생, 이 분의 고집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동생이 안되면 나의 힘으로도 안되는 거야.” 도운하는 더욱 기가 막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도운하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리는 것을 본 하여령의 눈에 신비한 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동생,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 “네? 그게 뭐죠?” 도운하의 귀가 번쩍 뜨여지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하여령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음성을 낮추었다. “그러려면 동생의 힘이 필요해. 오직 그 방법만이 저 분을 설득시킬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무엇인가 말하기가 무척 곤란하다는 투였다. 그러니 도운하는 더욱 애가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방법이길래…….” 한편 노팔룡은 잔뜩 호기가 만장한 상태였다. 그는 두 여인을 남겨둔 채 밖으로 걸어 나가며 호탕하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결정했다구. 내일 아침 놈을 잡으러 갈 거야.” 하여령은 결심을 굳힌 듯 도운하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말을 듣는 순간 도운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어…… 어찌 그럴 수가.” 하여령은 한숨을 푹 쉬며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외에는 없어.” “…….” 도운하의 두 눈이 빛났다. 마치 방법이 그것 밖에 없다면…… 하는 표정이었다. 3 ‘이게 대체 꿈인가? 생신가?’ 노팔룡은 어리둥절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하여령이 그에게 냄새가 난다고 욕실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어젯밤엔 도운하의 방에서 잤으니 오늘밤은 하여령 차례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느닷없이 욕실을 처넣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시큰둥하게 혼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여러 날 목욕을 하지 못한 탓에 깨끗이 하여둘 필요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혼자서 하는 목욕이라 도무지 신통한 기분이 아니었다. 똑똑……. 문득 욕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하는 기대를 했으나 자신은 없는 터였다. 무슨 용무라도 있거니 했지 방금까지도 쌀쌀맞게 대하던 하여령이 함께 목욕하자고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의 입은 딱 벌어지고 말았다. 문 앞에는 하여령이 완전 나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 뿐이 아니라 그 뒤에는 도운하 역시 나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웬 떡이냐?’ 노팔룡의 입이 찢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복이 터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니, 이것이…… 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어서 들어와!” 신나는 달밤이었다. 노팔룡은 생전 이같이 즐거운 일은 처음이었다. 두 명의 천하절색의 미인들이 목욕시중을 들어주니 이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연신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아무 곳에나 두 여인의 알몸을 만질 수가 있었으니 그는 신바람이 난 채 연신 벙긋벙긋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무르익고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거의 동시에 두 여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응? 뭔데.” 노팔룡은 흠칫했다. 동시에 그의 눈이 작아졌다. 그는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식으로 나올 리가 없지.’ 그는 능청을 떨었다. “부탁은 무슨. 우선 즐거운 놀이를 하고 나서.”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도운하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그러나 도운하는 뱀처럼 그의 손에서 미끌어져 나가더니 느닷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하여령도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이건 천하무림의 장래가 달린 중요한 일이에요.” “당금 무림의 위기를 건질 분은 오직 당신 뿐이랍니다.” 두 여인이 무릎 꿇은 채 한 마디씩 했다. 그것도 절박한 음성이었다.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천하의 두 재녀, 노팔룡의 눈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한쪽도 빠지지 않는 기가 막힌 미인들이다. 그는 정신없이 두 여인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의 눈은 두 쌍의 옥같이 아름답고 육감적인 유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코 한때의 만용이나 어리석음으로 일을 망쳐서는 안되요. 그러니 주력부대가 온 다음 서서히…….” 도운하의 말에 이어,“얼마 후면 주력부대가 당도할 거예요. 그때 동시에 금륜맹과 일전을 결해도 늦지는 않아요.” 하여령도 뒤따라 설득의 말을 펼쳤다. 그녀들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결코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녀들이 귓속말로 주고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작전이었다. 여색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노팔룡에게 자신들의 육체를 한꺼번에 제공하여 정신을 뺀 다음 목적을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노팔룡은 희희낙낙했다. 그러나 갑자기 노팔룡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돌연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물론 그 말도 틀리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전무림이 동원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희생자가 많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천하가 도탄에 빠져있는 이때 나 하나의 목숨이 두렵다고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있다는 것은 대협으로서 취할 바가 아니오!” “……!” 두 여인은 벙어리가 된 듯 일제히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노팔룡의 엄숙한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일은 나에게 맡기시오. 나에게도 생각이 있소. 그까짓 사마외도의 잡졸들 쯤이야 손가락 하나로도 상대할 수 있단 말이오!”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물론 그녀들은 노팔룡의 말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은 그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여령과 도운하는 서로의 얼굴에서 똑같은 체념의 표정을 발견했다. 이쯤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갑자기 그녀들은 자신들이 한없이 연약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노팔룡이 껄껄 웃으며 그녀들을 동시에 양팔로 안았다. “걱정 마시오. 나 노팔룡이 이렇게 건재하지 않소!” “아!” “아이.” 힘차게 끌어안는 바람에 두 여인은 하나씩 노팔룡의 품으로 안겨들고 말았다. 한없이 넓고 뜨거운 가슴이었다.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포근하며 믿음직스러운 대지(大地)이기도 했다. 두 여인은 그 대지에 온몸을 내맡긴 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김이 나는 욕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림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한 여인과 평생 검도만을 추구했던 여검객이 아주 평범한 여자로 돌아간 채 사나이의 가슴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4 “가소로운 것들!” 막비는 보고서를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양피지로 만들어진 보고서는 그의 손아귀 안에서 가루로 화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막 보고서를 접수했다. 보고에 의하면 노팔룡 일행이 금륜맹을 향해 쳐들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불과 오십여 인 밖에 안되는 소수의 인원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분기탱천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해도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 막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인원으로 금륜맹을 상대하겠다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독고완을 죽인 후에도 분이 가라 앉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에 화가 더 보태지고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새로운 사자대의 대주로 임명된 인물이 부복하고 있었다. 막비는 명을 내렸다. “앞으로 그들이 이곳까지 당도할 예상 시간은?” “아마…….” “아마란 없다. 정확히!” “반 시진입니다.”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사자대원은?” “도합 이백팔십칠 인입니다.” “좋다. 혈명대(血命隊) 전원과 금륜대 전원, 그리고 일천패왕단(一千覇王團)을 모두 동원해라.” 사자대주 철비환(鐵飛環)의 눈이 한껏 커졌다. “모두 말입니까?” “그렇다. 이번에 씨를 말리겠다.” “이곳까지 오도록 기다릴 것도 없다. 놈들을 악마(惡魔)의 곡으로 유인해라! 본좌는 놈들이 한 놈도 남지 않았다는 보고를 기다리겠다.” 철비환은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복명.” 드디어 혈전의 서막은 열렸다. 무림의 운명을 판가름할 시각이 다가온 것이다. 철비환은 무거운 가슴을 안은 채 혈명대 전원과 사자대 전원을 동원하기 위해 대전을 나서고 있었다. 제36장 악마지곡(惡魔之谷) 1 삘리리리리-- 두웅! 둥둥- 꽹꽹꽹--! 귀청을 찢는 듯안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노팔룡 일행이 막 난석이 밀집되어 있는 곡구(谷口)로 들어섰을 때 사방으로부터 기괴한 음향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팔룡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이같은 시끄러운 소리는 처음이었다. 문득 도무지 이해못할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윽!” “으으윽…….” 갑자기 그의 뒤를 따르던 중원무림의 군웅들이 고막을 감싸쥐고 괴로운 신음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었다. 내공이 약한 인물들은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지?” 도운하가 아미를 찌푸리며 다급히 말했다. “적의 교란작전이에요. 그러나 이 음률은 보통 음률이 아니에요.” “보통 음률이 아니라니?” “음공(音功)이에요. 음파(音波)로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손상케 하여 약한 자는 음파만으로도 죽을 수 있어요. 이걸 막지 못한다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반쯤 멸절할 거예요.” 노팔룡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도운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아. 이곳에 음공의 전문가가 있다면 모를까. 방법이 없어요.” 그녀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무공내력을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음공에 대해서만은 이 순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상대는 한 사람이 음공을 발하는 게 아니라 수십 인 이상이 마도의 음공으로 합벽공세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사 음공의 전문가가 있어도 한두 명으로 합벽음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아아악!” 여기저기서 군웅들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절반 이상이 희생될 게 뻔했다. 순간 노팔룡의 눈이 번쩍 빛났다. “만일 저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낸다면?” 도운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제압할 수 있어요. 도리어 저들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죽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노팔룡의 얼굴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소리를 내는 것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지. 하지만 이건 좀.” 그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하여령이 독촉했다. “있다면 어서 그 수법을 쓰세요. 그렇지 않으면 희생자가 더 늘어날 거예요.” 아닌게 아니라 군웅들의 삼분지 일쯤이 이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두 손으로 고막을 감싸고 있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음파는 고막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혈맥을 진동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지.” 노팔룡은 봇짐을 끌렀다. “아니 뭐하는 거예요?” 노팔룡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진천검을 꺼내는 거야.” 하여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검을.” “글쎄 두고 보면 알아.” 이윽고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천하의 명검 진천검이 그의 손에 들려졌다. 하여령과 도운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검을 잔뜩 움켜쥔 노팔룡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번-- 쩍! 노팔룡이 진천검을 천공 높이 들었다가 뻗었다. 다음 순간 가공할 일이 벌어졌다. 우르르르-- 꽈아앙! 돌연 천공에 먹구름이 몰리는 듯 하더니 일직선으로 뇌전(雷電)이 떨어졌다. 그 뇌전은 천지간의 가장 강한 뇌정균이었다. 뇌정균이 천공으로부터 진천검을 따라 무섭게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꽈아아아아앙--! 곡 전체가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오오! 저럴 수가!” “세상에…….” 일행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보라, 눈 앞의 난석들은 온통 가루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벼락을 맞은 듯 시커멓게 타들어가 있었다. 단 한 번의 검세로 인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때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오오! 저건 뇌진자님의 천하제일검식 뇌령일식(雷靈一式)이오!” “맞소…… 오오! 과연 천하제일검법이오!” 군웅들은 사기충천했다. 드디어 그들은 뇌진자의 성명절학인 뇌령일식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한편 노팔룡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방긋 웃으며 다가오고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젠장. 이래서 좀체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단 말이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도운하가 의아스러운 듯이 말하며 손가락을 뻗었다. “저것 좀 보세요! 모두 처치되었잖아요.” 아닌게 아니라 난석 사이사이에 시커멓게 타 죽은 수백 명의 금륜맹 인물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하여령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아니 왜 진작 뇌령일식을 쓰지 않았죠?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에요.”노팔룡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 검법은 도무지 신통치가 않아. 만약 이 자리에 노약자나 임산부라도 있었어봐 필시 큰일이 났을 거야.” “호호호호호호홋……!” 두 여인은 그만 폭소를 금치 못했다. 노팔룡의 걱정이야말로 기우가 아닌가? 아무튼 그녀들은 노팔룡을 다시 보게 되었다. 과연 큰소리 칠만 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웅들도 한결 마음이 든든한 기분이었다. “갑시다!” 누군가가 호기롭게 외쳤고, 군웅들은 사기충천하여 다시 곡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곡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들은 전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금륜맹의 인물들이 시커멓게 타죽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야말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노팔룡의 무공이 신인(神人)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2 “뭐라고! 벌써 첫번째 관문을 돌파했다고?” 막비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노팔룡을 위시한 중원무림의 인물들이 몰살했다는 보고였다. 그러나 정작 들려온 보고의 내용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노팔룡이란 위인이 뇌진자의 뇌령일식을 펼쳐 너무나도 간단히 일관을 통과해 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으음. 역시 보통 놈은 아니군. 그럼 두번째 관문을 움직인다!” 그의 명이 떨어졌다. 두번째 관문. 그것은 지형지물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 두번째 관문이야말로 최소한 군웅들에게 지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일행은 악마지곡(惡魔之谷)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쩐지 으스스해요.” 도운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무림의 재녀였다. 과거 같으면 절대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나약한 말이 나올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녀는 무림의 여인이 아니라 일개 나약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노팔룡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계곡 양쪽으로 기괴하게 형성되어 있는 동혈과 같은 것들을 보고 있었다. 그같은 상황은 하여령도 마찬가지였다. 악마지곡은 백혈곡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계곡의 양 옆으로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으며, 그 모양이 마치 수많은 악귀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곤륜산에서 악마지곡을 모르는 인물은 없었다. 이곳에서 고함을 지르면 그 메아리가 울려 마치 귀신의 호곡성과 같은 반향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악마의 계곡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군웅들은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슈슈슈슈슈--! 퍼엉! 펑! 펑! 돌연 수백 개의 동혈로부터 무수한 종류의 암기가 빗발치듯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우박과도 같았다. 도무지 인간의 두 개밖에 되지 않는 팔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더구나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우박처럼 쏘아져 나오는 암기는 공중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유황연과 함께 사방을 뒤덮었다. “으악!” “으아악!” 군웅들은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이 비열한 놈들! 뱀처럼 꼬리를 사르고 싸움을 걸겠다는 거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노팔룡은 분노하여 고함쳤다. 이때 도운하가 옆에서 속삭였다. “뭐하는 거예요? 어서 그 검법을 시전해요!” 노팔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고래고래 악을 써보았자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그는 즉각 진천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뇌(雷)- 령(靈)- 일(一)- 식(式)!” 번-- 쩍! 꽈아아아앙--! 한데 이번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천공에서 뇌전이 줄기줄기 떨어졌으나 악마지곡의 지형이 불가사의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의 뇌령일식의 위력은 양쪽 절벽의 기괴한 형상에 부딪치면서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노팔룡은 낭패감을 느꼈다. ‘역시 이 검법은 쓸모가 없다니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노인의 음성이 전음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 놈아! 기껏 가르친 무형일식(無形一式)은 왜 안써먹는 것이냐? 에구, 이 답답한 돌대가리 좀 보겠나?)노팔룡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안 것이다. 바로 쓸모없는 검법만을 잔뜩 가르쳐 준 그 보잘것 없는 영감태기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다급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영감. 이번에도 효력이 없다면 나중에 나에게 혼날 줄 아시오.’ 그는 검을 움직였다. 스스-- 마치 먹장구름이 소리없는 바람에 밀려가듯이 그의 수중의 검이 움직였다. 군웅들은 분명히 보았다. 그의 진천검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육안으로 분명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런 특이한 점도, 그리고 아무런 위력도 없어 보이는 검식이었다. 아니, 말이 검식이지 그것은 한 번 느리게 막대기를 휘두른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느꼈다. 엄청난 무형의 검기(劒氣)가 계곡 전체를 뒤덮은 것을!그리고… 뚝! 멈추었다. 이제껏 그토록 빗발치듯 퍼부어졌던 암기가 뚝 그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죽음같은 정적이 계곡을 감돌았다. 대체 동혈 속에서 쏘아나오던 폭죽같은 암기가 어떻게 그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한 번 가보겠소!” “나도!” 몇 명의 군웅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신형을 날려 몇 개의 동혈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그들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앗!” “모두 죽었소……!” 군웅들은 잠시 후 바닥으로 던져지는 시신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시신들은 바로 금륜맹의 사자대 소속의 무인들이었다. 한결같이 숨이 끊어져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의 몸에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전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 점의 상흔도 나 있지 않았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웅들의 감탄과 의혹에 찬 시선이 일제히 노팔룡에게 집중되었다. 이때 그 궁금증을 대변이라도 하는 양 도운하가 물었다. “이건 또 무슨 검법이죠?” “시시한 검법이야. 무형일식이라고.” 그 순간 노팔룡의 고막을 때리는 분노성이 있었다. (뭐라고! 이…… 이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 그것은 뇌진자의 음성이었다. 너무나 화가 나 아마 코와 귀로 연기가 풀풀 나오고 있을 것 같은 분노성이었지만 전음으로 전해진 것이라 장내에서는 오직 노팔룡만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노팔룡은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자, 갑시다.” 3 쾅! 막비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뻗었다. 그가 발을 구르자 청석으로 된 단단한 바닥에 그의 족인(足印)이 무려 세 치 깊이로 찍혀들고 있었다. “놈이, 악마지곡을 넘었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보고자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자는… 단 일검으로 아무런 소리도, 검광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모두 죽었습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아아악!” 보고자의 머리가 으깨어지고 있었다. 분노에 찬 막비의 일장이 내뻗어진 것이었다. 막비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무서운 신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분노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으드득!” 이를 갈며 막비는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벽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산수화가 걸려있는 곳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화폭을 걷었다. 그러자 그 속에 구멍이 있었다. 구멍 안에는 한 자루의 보검(寶劒)이 들어 있었다. 그는 보검을 움켜쥐었다. 보검을 쥔 순간 그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하고 있었다. “놈! 기다려라.” 제37장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객(震宇宙天上天下唯我獨尊客) 1 군웅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악마지곡을 지나고 숲을 가로 질렀다. 그들은 숲 속에 또 다른 매복이 있리라고 짐작했으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의혹은 곧 풀렸다. “아니……?” “모두 죽어 있소!” 그렇다. 숲 속에는 무수한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륜맹의 맹도들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해치웠는가? 군웅들은 의혹에 휩싸인 채 웅성거렸다. 그러나 노팔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영감의 짓이로군.” 하여령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노팔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죽어 있는 시신들을 보고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바로 그 영감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때 시신을 살펴보던 도운하가 경악성을 발했다. “이건…… 필시 뇌진자 선배님의 작품이에요!” 그녀의 상흔 감식에 대한 식별능력은 정확한 것이었다. 과거 하여령이 백선결의 수하들을 죽였을 때도 다만 상흔의 그림만 보고도 수법을 알아낸 그녀였다. 군웅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노팔룡이 반박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소리야? 나의 사부님께서 한 일이라니.” “틀림없어요. 이 수법은 분명 천하제일고수이신 뇌진자 노선배님만이.” “아아, 틀렸어. 사부님께서는 오래전에 선경에 드셨다니까.” 노팔룡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영감이 꽤 능력이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군웅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숲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숲 속에 죽어 있는 금륜맹의 고수들은 이미 생명이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노팔룡은 군웅들을 대동하고 의기양양하게 전진했다. 몇 군데의 구릉을 지났다. 역시 아무런 방해자도 없었다. 그들은 대략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 마침내 금륜맹의 거대한 성보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2 막비는 성루에 우뚝 서서 군웅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은 한껏 크게 떠지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군웅들이 거의 아무도 손상되지 않고 설마 금륜맹의 코 앞까지 당도하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현상이 그의 눈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군웅들이 추호도 위축된 기색이 없이 성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막비의 얼굴이 무섭게 이그러지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그의 입에서 차갑고 무심한 명령이 떨어졌다. 수하들은 즉각 성문을 여는 기관장치를 가동했다. 거대한 철문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막비는 성문을 통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직도 금륜맹에는 오백여 명 이상의 정예고수들이 있었다. 그의 수하들은 그를 호위하는 형세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러기의 형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집단 싸움을 하자는 건가?” 옆에서 도운하가 초조한 듯 말했다. “만일 일제히 혈전이 벌어진다면 우리측은 중과부적이에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해요.” 노팔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일대 일(一對一)로 하면 될 거 아니오?” “일대 일?” 도운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팔룡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과연……?이때 노팔룡은 손을 번쩍 들어 군웅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혼자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막비도 군웅들이 한 마장 앞으로 접근하자 손을 들었다. 이제 그의 손이 떨어지기만 하면 일제히 그의 수하들의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이번의 싸움은 그의 일생이 걸린 일이었다. 문득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군웅들을 뒤에 두고 홀로 걸어오고 있는 한 사나이를 발견한 것이다. ‘저 놈?’ 그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때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음성이 들렸다. “막비! 네가 진정 사나이라면 나와 단둘이 승부를 결하자!” 노팔룡의 제안이었다. 막비는 입가에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승산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러니 쓸데없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후후! 웃기지 마라. 내가 왜?’ 한데 다시 고막을 때리는 음성이 있었다. “막비. 우물거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너의 그 물건이 신통치 않은 모양이구나! 그런 작자라면 나도 상대하기 싫다!” ‘……!’ 막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상대의 격동 방법이 너무나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하여령과 도운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어이가 없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런 중대한 국면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저 분은…….’ 그런데 뜻밖의 현상이 벌어졌다. 문득 막비의 시선이 하여령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하여령 옆에 서 있는 또 한 명의 절세미인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는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노팔룡이란 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놈이 자신의 양물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봐라! 내 물건이 최고니 저런 미녀들이 따르지 않느냐! 하는 것 같았다. 막비도 사내였다. 그것도 피가 끓는 젊은 사내였다. 그에게도 패기가 있고 비록 금륜맹주라는 직위이기는 하여도 호승심이 남달리 강한 위인이었다. 그는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좋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후후! 보란 듯이 널 꺾고 너의 그 두 계집을 나의 첩으로 삼으마!’막비의 머리 속에서 이런 생각이 나올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천하의 효웅인 그도 순간적으로 노팔룡의 격동에 휘말리고 만 것이었다. 타인이 보기에 막비같은 위인이 노팔룡의 이런 유치한 격동에 모험을 건다는 것은 실로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란 항상 논리적으로 해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막비는 자신의 운명을 이성이 아닌 감정의 길로 이끌고 말았다. 막비의 번뜩이는 눈이 전면을 응시했다. “……!” “……!” 부딪쳤다. 그의 눈이 노팔룡의 아무런 빛도, 느낌도 없어 보이는 눈과 부딪친 것이다. 그런데 당연히 불꽃이 퉁겨야 할 두 사람의 눈싸움은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적의가 없어 보이는 순수한 노팔룡의 눈을 더 이상 직시할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으음. 좋다! 너와 천하를 놓고 승부를 결하겠다!” 막비는 그같이 최종선언을 한 뒤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뜻밖의 선언에 오백여 금륜맹도들과 중원군웅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들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선언이 막비의 입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도운하와 하여령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을 느꼈다. 대치 상태에 들어서자 무형의 기운이 태산같은 압력으로 정수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그는 진천검을 들었다. 두 사람의 공간은 고작 삼 장여에 불과했다. 단지 한 차례의 움직임만으로도 상대방을 벨 수 있는 거리였다. 찌이이이잉……! 보검을 뽑자 괴이한 검명(劒鳴)이 운다. 막비도 보검을 뽑은 것이다. 그것은 과거 일패가 사용하던 패왕검(覇王劒)으로 마도의 보물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다시 부딪친 순간,“손을 써라!” 막비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노팔룡은 흠칫하더니 검을 휘둘렀다. 이때만은 그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소리는 쳐놓았으니 절대로 패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가 전개한 것은 그가 보기에 가장 그럴 듯해 보였던 검식, 무당의 태극십팔해였다. 번쩍번쩍! 쏴아아아! 푸른 검기가 줄기줄기 뻗으며 날아갔다. 그것은 일반고수들이 보기에는 현란무쌍한 검법이었다. 일단 검식이 전개되자 눈부신 검광이 줄기줄기 뻗으며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으음. 고작?’ 검식은 현란하게 전개되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막비가 보기에는 시시하기 이를데 없는 검법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으며 패왕검으로 일패의 독패군림식(獨覇君臨式)이란 절정마검을 펼쳤다.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교차하면서 반대방향으로 떨어져 내렸다. 군웅들이 보기에는 그저 번쩍 하고 두 사람이 스쳤을 뿐이었다. “아아앗!” 하여령과 도운하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들은 보았다.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을 스쳐 반대쪽으로 떨어진 순간 노팔룡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는 것을. 그의 전신은 이미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전신에 열아홉 군데의 검상을 입은 것이다. 그가 그토록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태극십팔해 검법은 결코 독패군림식을 상대할 수 없었다. “크후후후! 고작 그 정도였더냐?” 막비의 비웃음이 들렸다. 노팔룡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무엇이 어찌된지도 모르고 허공에서 스친 순간 전신이 상대의 패왕검에 난자당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과거 금령선과를 복용한 몸이 아니었다면 벌써 수십 토막이 나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노팔룡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의 진천검이 곧장 천공을 가리켰다. 그것은 바로 뇌령일식의 자세였다. ‘……!’ 막비는 긴장했다. 이번은 보통 수준의 검법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잔뜩 긴장하는 순간 노팔룡이 진천검을 뻗는 것이 보였다. 번-- 쩍! 새파란 뇌전이 하늘에서 곧장 떨어졌다. 그 뇌전은 바로 노팔룡의 검극으로 이어지며 그가 검을 전개함에 따라 벼락같이 떨어졌다.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막비의 진력을 크게 진탕시켰다. 그는 즉각 독패군림식을 전개했다. “크으윽!” 막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앞가슴이 갈라졌다. 그것도 불에 탄 뇌흔(雷痕)으로 옷이 타 버린 것이다. 막비는 혼비백산할 지경으로 놀라고 있었다. 다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전신을 가늘게 경련하면서 간신히 땅을 딛고 있었다. 한편 노팔룡은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그만 기가 죽었다.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럼 이번에는 무형일식으로…….’ 그의 몸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십여 장을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극한으로 공력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그것을 본 막비도 신형을 차올렸다. “독패군왕식(獨覇君王式)!” “무형일식(無形一式)!” 아무런 소리도 광채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인들이 보기에는 그저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반대방향으로 교차하는 것만이 보였을 따름이었다. 두 사람은 반대쪽으로 떨어졌다. 노팔룡이나 막비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 “……?” 중인들은 도무지 승부의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 봐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편 노팔룡은 정말 자신이 없어졌다. 뇌진자가 가르쳐 준 세 가지 검법을 모두 써 보았으나 결과는 신통치가 않은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힘없이 움직였다.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막비는 잡아 먹을 듯이 그를 노려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야수의 눈빛이었고 악마의 눈빛처럼 벌겋게 타고 있었다. 노팔룡은 난생 처음으로 마음 속에 한 가닥 공포심을 느꼈다. 바로 이때였다. 뒤쪽에서 하여령의 외침이 들렸다. “뭐하는 거예요? 그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震宇宙天上天下唯我獨尊劒法)은 왜 안쓰는 거예요!” “……?” 노팔룡은 어리둥절했다. 물론 스스로도 그것이 최고의 검법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펼쳐본 바에 의하면 결과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아직 그 검법의 오의를 깨닫지 못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반면 막비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는 거의 삼혼육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의 세 번에 걸친 검법을 감당하는데만 해도 그는 이미 탈진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방금 전의 무형일식이란 검법은 이미 그의 내장을 반쯤 결단 내지 않았던가?그도 역시 일패의 마지막 초식 독패파천식(獨覇破天式)이란 검법을 하나 남기고 있었으나 지금 상태로 그것을 사용하기에는 거의 불가능 했다. 왜냐면 독패파천식은 내공이 적어도 삼갑자는 넘어야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부족한 내공으로 펼친다면 주화입마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 무… 무서운 검법인 것 같은데…….’ 그는 부르르 떨었다. 두려움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전신에 식은 땀이 죽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문득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막 노팔룡이 괴이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자세는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노팔룡은 노팔룡대로 잔뜩 고민에 싸여 있었다. ‘그 검법은 아직 완전히 진수를 터득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마침내 그는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억! 또, 또… 그 미친 기운이…….’ 그렇다. 이제까지 노인의 세 가지 검법을 익힌 뒤로는 한 번도 발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중요한 순간에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을 펼치려는데 갑자기 단전히 확 달아오르더니 미친 듯한 기운이 위로 치미는 것이 아닌가? ‘어, 어억.’ 그의 신형이 붕 떠올랐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의 신형은 마치 회오리 바람에 휘말린 듯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본래 검도(劒道)란 반드시 심오한 구결과 호흡에 맞추어 오랜 기간 숙련시켜야 진수가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노팔룡이 익힌(?)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은 도저히 상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검법을 펼치게 되면 호흡이 엉키고 자세가 불균형을 이루어 체내의 공력이 멋대로 단전으로 몰려 발작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의 신형은 전광석화처럼 허공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으으…….’ 전광석화처럼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노팔룡을 본 막비는 대경실색했다. 다음 순간 그는 최후의 독패파천황식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갈!”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노팔룡을 향해 날아갔다. 그에게 남아있는 공력은 이제 겨우 몇 방울 밖에 없었다. 천하제일인 뇌진자가 백년 고련 끝에 창안한 무형일식을 상대하느라 거의 소모해 버린 것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노팔룡은 허우적거리며 어설프게 일검을 내려쳤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그의 고막을 때리고 중인들의 가슴을 부르르 경련으로 몰아 넣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허공 중에서 두 사람이 맞닿기 직전, 돌연 막비의 전신에서 분수같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막비는 허공에서 산산조각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칠공을 비롯한 그의 전신 모공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더니…… 종내에는 전신이 그대로 폭발하듯 분리되며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노팔룡은 허공을 한 번 긋고는 땅으로 처박혔다. 쿵! 얼굴을 땅에 처박은 그는 한참 동안이나 일어날 수 없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현기증이 났던 것이다. 그는 어기적거리며 한참만에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아아아……!” “노대협 만세!” 문득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함성이 울렸다. 노팔룡은 그 함성이 어째서 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일어나 고개를 돌려 보았다. 달려오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군웅들을 비롯하여 하여령, 도운하가 환희의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 오고 있었다. 그제야 노팔룡은 자신이 막비를 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얼른 자신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꼴이 말씀이 아니었다. 옷은 조각조각 찢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는 얼른 옷을 털고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막 그의 품으로 뛰어드는 두 명의 절세미인을 향해 팔을 벌렸다. 쿵! 그는 또 다시 쓰러졌다. 그것은 하여령과 도운하가 너무 세게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노팔룡은 그만 두 미녀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벌렁 쓰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노팔룡은 역시 노팔룡이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두 미녀의 이마에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추는 것이었다. 3 천하의 효웅 막비는 시신의 형태조차도 찾을 길 없이 산화하고 말았다. 무림을 제패하기 위해 금륜맹을 세웠던 그는 이제 어디에서도 존재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무리한 공력운행과 채 완성치 못한 독패파천황식이란 검법을 잘못 펼쳐 그만 자멸(自滅)하고 만 것이었다. 즉, 노팔룡의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이 채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주화입마하여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실로 한 인간의 야망은 그렇게 덧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쯧! 그래도 놈은 사내다웠는데.” 시신도 찾을 길 없이 피로 얼룩진 대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린 사람은 바로 노팔룡이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뇌진자였다. 뇌진자는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흐흐… 그래도 노부가 선경에 들기 직전 제자 놈 하나는 똑바로 만들어 낸 셈이야.’ 이렇게 회심의 중얼거림을 발하며 다가오고 있는 뇌진자를 바라보고 있던 노팔룡은 그가 가까이 오자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노인장, 어째 노인장이 가르쳐 준 검법은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소?” 그 말을 들은 순간 뇌진자의 주름진 얼굴이 완전히 짓이겨진 만두조각이 되어 버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팔룡은 뇌진자가 울상을 짓거나 말거나 양 옆에 하여령, 도운하 두 절세미인을 끼고 막 떨어지는 석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진우주 천상천하 유아독존객의 신화(神話)를 곤륜산에 남긴 채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