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용문 서막(序幕) 동림서원(東林書院)의 비극(悲劇) ━━━━━━━━━━━━━━━━━━━━━━━━━━━━━━━━━━━ 폭설(暴雪)이 내렸다. 대륙은 온통 건곤일색(乾坤一色), 은세계(銀世界)로 화했다. 세모(歲暮)가 가까워질수록 강소인(江蘇人)들은 설레는 마음을 안 고 다가오는 신년(新年)의 기대감과 저물어 가는 한 해의 아쉬움 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강소성(江蘇省) 연운현(連雲縣)은 서쪽으로 서주(徐州), 남으로는 남경(南京)을 두고 있는 곳으로 아담한 규모의 마을이었다. 휘이이잉...... 한밤에 내리는 폭설로 인해 마을은 깊이깊이 가라앉는 듯 했다. 사람들은 창문을 꼭꼭 걸어닫고 따뜻하게 화로를 피운 방 안에 모 여앉아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만력(萬歷) 이십구 년(十九年). 대명천하(大明天下)는 암담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정국(政局)은 날이 갈수록 혼란의 극을 치닫고 탐관오리와 환관들의 부패로 인 해 민심은 흉흉할대로 흉흉해지고 있었다. 청렴한 학자(學者)들은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떼죽음하거나 세상 을 한탄하며 초야(草野)에 묻히고 있었으며 기개있는 관리들은 분 루를 삼키며 하나 둘 북경(北京)을 떠나고 있었다. 암담하기만한 그 시점에 뜻있는 문사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솟아나 고 있었다. 그것은 강소성 무석(無錫)에서 동림서원(東林書院)이 새로 세워졌 다는 낭보(朗報)였다. 동림서원의 부활(復活)! 그것은 꺼져가던 학문의 불씨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썩어빠진 정사(政事)...... 환관의 부패...... 추악한 당쟁(黨 爭)....... 뜻있는 문사들은 일제히 붓을 꺾고 초야에 묻혀 썩어빠진 세상에 대해 한탄만 하던 시대에 동림서원의 부활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침내 대의를 품은 문사들이 하나 둘 동림서원으로 모여들면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고하는 듯 했다. 한때 동림학파(東林學派)로 불리웠던 학자들이 동림서원을 중심으 로 새로운 학문을 열고 재기의 용트림을 하게 된 것은 이제 새로 운 세상이 열리리라는 기대를 만천하들에게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아무튼 동림서원이 다시 열렸다는 소문이 중원천지에 퍼지면서 학 자들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여졌으며, 처박아 두었던 고서(古書) 를 다시 펼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우내제일학(宇內第一學) 천화빈(天華賓). 그는 당대 제일의 석학이었다. 그는 썩어빠진 정국에 회의를 품고 연운현으로 낙향한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연운산(連雲山) 오죽거 (烏竹居)에 은거하여 자신을 감추고 살았다. 동림서원의 열풍이 전중원을 휩쓸자 이 거유(巨儒)도 감았던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한림팔교(寒林八交)라 불리우는 숲에 숨어버린 이름난 학 자 팔 인(八人)이 그를 찾아와 연운에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일으 켜 주기를 간절히 청했다. 그러잖아도 중원 곳곳에서 동림서원이 속속 개원(開院)하고 있었 다. 그런 차에 오죽거에 은거한 우내제일학 천화빈이 동림서원을 연다 면 도리어 무석의 동림대서원보다도 더 많은 문사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천화빈은 본시 명리(名利)에 담백한 위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명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구세제민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마다하겠는가! 마침내 그 는 오죽거(烏竹居)를 개조하여 동림서원을 열기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연운은 물론 인근의 수많은 지사들에게 커다란 자랑거 리요, 자긍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로 인해 엄청난 비극(悲劇)이 일어나게 될 줄이야....... 동림서원의 부활은 명조의 권당(權黨) 세력들에게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그것은 동림서원 출신의 문사들이 대거 정사에 등장함으 로 인해 곳곳에서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력제(萬歷帝)는 향락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정사를 환관들에게 떠맡긴 채 사치와 향락, 주색에 빠져 있 었다. 결국 권당 세력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은밀히 사화(士禍)를 꾸미기 시작했으니....... 그 화(禍)는 마침내 연운산 오죽거의 동림서원에까지 미치게 되었 다. 폭설이 펑펑 내리던 날, 밤새워 달려온 일기의 인마(人馬)가 동림 서원 앞에 쓰러질 듯 당도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질 듯 내려선 그의 입에서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과도 같은 말이 떨어졌다. ...... 아아, 대학사(大學師) 어른! 북경의 환관들이 이곳 동림서 원을 반역도(叛逆徒)로 몰았습니다. 마침내 황제폐하께서도 동림 서원에 속한 학자들의 구족(九族)을 멸하라는 황명을 내리셨습니 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 급보를 전한 사람은 동림서원 출신 으로 입조(入朝)하여 어사대(御史台)의 감찰시랑(監察侍郞)이란 관직에 올랐던 한 젊은 학자였다. 그의 소식을 전해들은 동림서원주 천화빈은 절망했다. 그는 하늘 이 무너지는 천붕지비(天崩之悲)를 맛보아야만 했다. ...... 오오! 하늘도 무심하도다! 이 썩어빠진 세상에 푸른 뜻을 품어 바른 세상을 펼치려 세운 동림서원이건만, 폐하께서는 환관 들의 모사만 믿고 대의를 뿌리 뽑으려 하시다니......! 황명(皇命)은 지엄한 것이다. 더구나 천화빈은 대유학자였다. 그 런 그가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황제의 칙사가 당도하기 전 연운의 동림서원을 해체시키고 말았다. 동림서원이 해체되던 날, 문사들은 한결같이 상복(喪服)을 입고 서원의 앞마당에서 한나절 동안 대성통곡을 하다 산지사방으로 뿔 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텅 빈 오죽거(烏竹居)에서 천화빈은 홀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원한에 사무친 허탈한 웃음이었다. ...... 허허허! 모든 것이 끝났도다. 평생의 학문과 수업이 무슨 소용이랴? 탁류(濁流) 속에서 노느니 차라리 이 세상을 돌아서 버 리리라. 한 시대를 통해 가장 고결했으며 그 학예가 우내제일이었던 대석 학 천화빈의 얼굴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림팔교(寒林八交)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림팔교 는 동림서원을 함께 세운 혈육이나 다름없는 문우들이었다. 그들의 눈도 젖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으흐흐....... 어차피 황제폐하의 칙령이 떨어진 이상 어찌 대명 천하에 살아남아 몸 담을 곳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곳에 남아 더러운 모리배들의 손이 닿기 전에 대학사(大學師)와 함께 자진 (自盡)하겠습니다!" 그 말에 천화빈은 무릎을 끓으며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그 의 눈에는 비장한 결심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허허...... 내 그럴 줄 알았네. 아우님들의 뜻이 곧 내 뜻일세.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네." 이어 그는 고개를 돌렸다. 서원의 앞마당에는 죽림(竹林)이 우거져 있었다. 그 죽림 앞에 한 명의 백삼(白衫)을 입은 소년서생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 겨우 나이 십이삼 세에 불과해 보였으나 소년의 모습에서는 유현무구한 지혜와 오성(悟性), 그리고 기개가 엿보이고 있었다. 천의영(天意影). 사람들은 그를 고금제일신동(古今第一神童)이란 애칭으로 불러왔 다. 아니, 귀동(鬼童)이라고까지 불렀다. 일찌기 그가 삼 세가 되었을 때 이미 동림서원의 수학자들을 경악 케 한 귀재(鬼才)였다. 그는 사서삼경(四書三經), 제자백가(諸子 百家)는 물론 의예기서화음시(醫藝棋書畵音詩) 등, 모든 방면에 무불통지의 초인적인 지혜를 보여 준 소년이었다. 소년은 우내제일학 천화빈의 하나밖에 없는 독자(獨子)였다. "......." 소년은 부친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창천처럼 맑은 눈에는 아 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어린 소년의 가슴 속에 어떤 한 (恨)이 담겨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천화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 그리고......" 그는 한림팔교를 바라보았다.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소. 있다면... 썩어빠진 이 시대와...... 이 시대를 타파하지 못한 무능한 우리들에게 있 는 것이오." "......!" 그 말에 한림팔교는 모두 격동의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아이들 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반역도의 낙인이 찍히면 구족(九族)이 멸하게 된다. 그러나 환관 모리배들의 모함에 걸렸을 뿐, 대명에 반기를 든 것이 아니거늘 어찌 어린아이들까지 희생 당해야 한단 말인가? 한림팔교의 안색이 흔들렸다. 이때 죽림 속으로부터 여덟 명의 아이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이 제 십 세에서 많아야 고작 십오륙 세밖에 되어보이지 않는 남녀 아이들이었다. 어린 소녀가 셋, 그리고 다섯 명은 소년이었다. 그들은 죽림에서 나오자마자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으흐흑...... 아버님!" 아이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나 귀동, 천의영만은 무표정했다. 그는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오직 부친만을 바라보고 있 었다. 천화빈은 다가가 사랑스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영아(影兒), 기특한 녀석, 울지 않는 너의 도도함이 마음에 든다. 너는 이 아비의 뜻을 잘 알겠지? 떠나거라. 헛 헛......! 이 길로 곧장 저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떠나거라. 그리 고 오늘 이후로는......" 천화빈의 주름진 노안에 일말의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다시는 붓을... 잡지 말거라. 어두운 세상.... 빛을 감추고 사는 법을 배우거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학자의 후예가 아니라... 헛 헛....... 무명의 범인(凡人)이 되어야 할테니......." 아아! 그 얼마나 쓰라린 말인가? 그 자신 천하제일의 석학이었고, 아들은 장차 자신보다도 더욱 뛰 어난 대학자가 되리라 믿고 심혈을 기울여 학예를 가르쳤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천의영은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이후로는 학문을 익히지 않을 것이며... 익힌 모든 것도 버릴 것 입니다. 또한......" 반짝......!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내리는 눈송이가 녹아 눈썹 끝에 달렸을까? 천의영은 말을 이었다. "향후... 영아는 다시는... 천가라는 성(姓)도 쓸 수 없겠지요." "녀석......!" 천화빈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써 마음을 감출 필요는 없다. 네 마음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 헛헛... 헛헛....... 눈이 몹시도 오는군. 이제... 떠나거라." "......!" 그 말에 천의영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시는... 뵈올 수 없는 건가요?" "헛헛... 헛헛...... 녀석......." 천화빈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어 야음과 눈에 덮인 오죽거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동안 정들었던 곳... 다시는... 외인이 볼 수 없으리 라......." "아버... 님......." "가라. 떠나거라, 아비의 마지막을 너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다. 어서......." "아버님......." 천의영의 작은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르켰다. "아버님......!" "어엉...... 아버님......!" "흐흐흐흑......!" 여덟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통곡을 터뜨렸다. 그들의 통곡은 핏빛 이었다. 펑펑 내리는 폭설(暴雪)은 온통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아이들의 핏빛 통곡이 동림서원의 최후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보았다. 연운산(連雲山) 오죽거(烏竹居)를 둘러싸고 있던 오죽림(烏竹林) 이 하나의 불덩이가 되어 화광이 충천하는 가운데 타오르는 것 을....... 눈발은 무심하게도 불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강소인 의 자랑이었던 동림서원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잿더미 속에서 아직도 꼿꼿하게 앉아 있는 구 인(九人)의 시체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우내제일학 천화빈과 한림팔교. 그들은 불에 타면서도 꼿꼿한 자 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영원히 잊지 못할 비극의 날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 게 되었다. 실상 황제가 칙령을 내려 동림서원을 토벌하려 했다는 것은 새빨 간 거짓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림서원 출신의 학자가 환관의 매 수를 받아 동림서원을 와해시키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것이다. 실로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연운의 동림서원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아까운 대석학이 불꽃 속에 죽었으며 한림팔교도 영원 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망각(忘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너무나 빨리 망각해 버린 다. 이제 동림서원의 비극도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져 가 게 되었다. 다만 간간이 그때 실종된 천화빈의 독자였던 귀동(鬼童) 천의영과 한림팔교의 여덟 명의 자식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입에 서 입으로 오르내릴 뿐이었다. 한 마리의 어린 용(龍)과 여덟 명의 아이들, 그들의 운명은 과연 거칠기 짝이 없는 대륙풍(大陸風)에 휩쓸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력(萬歷) 이십구 년(二十九年) 세모(歲暮)의 눈오는 밤에 일어 났던 비사(悲事)-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점인지도 몰랐다. ■ 등용문 제1권 제1장 대형(大兄)이라 불리는 아이 ━━━━━━━━━━━━━━━━━━━━━━━━━━━━━━━━━━━ 대형(大兄). 아이들은 항상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여자 아이 셋, 사내아이 다섯, 이렇게 여덟 명의 아이들은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살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형제(兄弟)가 아님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 로 조금도 닮지 않았을 뿐더러 나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여덟 명의 아이들이 대형(大兄)이라 부르는 소년은 그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가 동생처럼 데리고 사는 아이들 중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소 년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대형(大兄)이었다. 왜......? 그 이유를 사람들은 안다. ■ 등용문 제1권 제1장 대형(大兄)이라 불리는 아이 -2 ━━━━━━━━━━━━━━━━━━━━━━━━━━━━━━━━━━━ 퍽! 퍽! 퍽......! 주먹이 난다. 발길질이 난다. 몽둥이가 난다. "개새끼! 꺼져 버렷!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남의 영토에 들어 와!" "죽여버려! 그깐 새끼!" 불한당들이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고 있었다. 이른바 왕호(王虎) 패라고 했다. 그들은 낙양(洛陽)의 후미진 빈 민가를 주름잡는 천하의 불한당들이었다. 그 수효만 해도 근 오십여 명, 그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흉폭할 뿐 더러 제법 손재간도 익히고 있어 심지어는 관(官)에서조차 함부로 건드리질 못했다. 지금 낙양 교외의 야산에서 한 소년이 왕호패에 둘러싸여 뭇매를 맞고 있었다. "새끼...... ! 죽여!" "아예 숨통을 끊어놔야 해!" 퍽! 퍽퍽퍽......! 빗발치는 뭇매에는 설사 금강나한이라해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앗다. 그러나 뭇매를 맞고 있는 소년은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가 찢어 지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비명은 커녕 신음소리 하나 내지르지 않고 있었다. "헉헉......!" "지... 지독한 새끼......!" "뭐 이런 게 다 있어......?" 소년을 구타하던 불한당 청년들이 도리어 탈진하여 어깨를 들먹이 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칵......!" "퉤... 에! 가자, 이 정도면 이제 다른 곳으로 가 버리겠지!" "에이... 재수없는 녀석......!" 십여 명의 불한당들은 침을 뱉고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남긴 어 지러운 발자국으로 패여버린 땅바닥. 꿈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넝마가 되다시피 한 소년이 가냘픈 육신을 벌레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움직이기는 커녕 숨이 붙어 있다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다. "후후... 후후... 훗....... 이제 끝났... 나......?"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은 툴툴 웃고 있었다. 그는 힘겹게 한 손으 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그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 다. 옷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얼굴은 온 통 멍들고 뭉개어져 제 모습을 확인할 길조차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웃고 있었다. "후후후.......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안돼, 우리는... 갈 곳이 없어. 이곳에서 살아야 해......."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저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는 처절한 웃음이었다. 소년은 퉁퉁 부어오는 눈을 간신히 치뜨고 있었다. 소년의 눈(眼), 놀랍게도 그 눈만은 시리도록 맑은 광채를 빛내고 있었다. 무한한 지혜를 감춘 듯한 신비한 눈빛이었다. "후후, 가야지. 동생들이 기다릴 테니까." 소년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대형(大兄), 그가 바로 대형이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이 아버지처럼 따르고, 친형처럼 오빠처럼 따르 는 대형이 바로 그였다. 낙양 사람들은 그 소년의 지독한 인내와 불가사의한 집념에 두 손 을 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 년 쯤 전이었다. 아홉 명의 소년소녀들이 온통 누더기를 걸친 모습으로 낙양 거리 에 나타났다. 그들은 낙양의 빈민가에 나타났다. 이어 그들은 황구산(黃拘山) 기슭의 한 낡은 사당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했다. 그곳은 향화(香 火)가 끊긴 지 오래인 곳이었다. 너무나 낡고 음침하여 심지어 귀 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붙은 폐사당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곳을 집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영락없는 거지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 들은 구걸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묘한 재주가 있어 사람들을 곧잘 감탄시키곤 했다. 그 들은 먹고 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몸을 아끼지 않고 해냈다. 철기점(鐵器店)의 대장장이 조수에서 막노동의 일꾼, 허드레 청소 일, 약포(藥鋪)의 약초 말리는 일, 쓰레기 처리 따위에서 심지어 는 시체를 염(殮)하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일체의 말이 없었다. 모두 묵묵히 아무 일이고 닥치는 대로 했다. 결국 그들은 일을 해서 얻는 대가로 삶을 연명했다. 행색은 거지 나 다름없되 그들은 한 번도 구걸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왕호(王虎) 패거리는 한때 그들을 자기들의 패거리로 끌어들이려 고 온갖 행패를 부려보았으나 번번히 실패를 거듭했다. 그들은 아이들의 재주가 아까와 끈질기게 협박했으며 뭇매를 주기 도 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아이들은 죽으면 죽었지 그들에 게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 왕호패는 폭력으로 그들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 저도 통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들이 대형(大兄)이라 부르는 소 년 때문이었다. 고집스럽고 집념이 강한 그 소년은 아무리 뭇매를 주어도 한결같 이 꿋꿋한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숱한 매질과 협박에도 불 구하고 소년은 항상 툴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훗훗....... 우리는 당신들과는 다르오, 알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훗훗.......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아갈테니." 과연 대형(大兄)다운 말이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대형이라 불리우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 그 소년이 아이들의 오빠고, 형이며, 어버이인지도 알게 된 것 이다. 대형(大兄), 그는 그런 소년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1장 대형(大兄)이라 불리는 아이 -3 ━━━━━━━━━━━━━━━━━━━━━━━━━━━━━━━━━━━ "후후...... 오늘은... 꽤 아픈데......?" 소년은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옆구리를 누른 채였다. 갈빗대가 적어도 네 대는 부러졌으리라.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아 픈 표정을 짓기 않고 있었다. 이런 일은 그에게는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웃었으며 언제나 굳건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너무나 심하게 맞았 다. "후후...... 쿡! 쿨럭! 쿨럭......!" 그는 걷다가 기침을 했으며, 그때마다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참아야지......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냐." 소년은 기다시피 걸어갔다. 그러나 역시 무리였는가? 툭! 돌부리에 발이 걸리더니 그는 여지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는 영 일어설 줄을 몰랐다.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바람이 불고 있 었다. 휘이이잉......!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이었다. "흘흘....... 또 맞았군? 못난 녀석!" 문득 어디선가 탁하고 쉰, 듣기 거북한 노인(老人)의 음성이 들렸 다. 소년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바로 코 앞의 바위 위에 한 늙은 괴인(怪人)이 걸터 앉아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봉두난발(蓬頭亂髮)에 누더기 차림이었다. 게다가 괴노인은 신발 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은 주독(酒毒)에 찌들어 온통 곰보처럼 이지 러져 그야말로 추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었다. 그로 인해 나이 조차 추측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훗....... 광심혈두(狂心血頭) 어르신이군요......? 오늘도 또 술인가요......?" 소년은 억지로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광심혈두(狂心血頭). 이른바 미친 술주정뱅이를 일컫는 말인 것이다. 혈두(血頭)란 말 은 그의 머리칼이 이상하게도 핏빛을 띄었기 때문에 생긴 별호였 다. 광심혈두는 소년과 여덟 명의 아이들이 낙양에 나타났을 때와 거 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다. 미친 중얼거림과 날이면 날마다 술에 빠져 사는 바람에 사람들에 게 외면 당하면서도 그는 괴이하게도 낙양을 떠날 줄을 몰랐다. 특히 대형(大兄)이라 불리우는 소년의 곁을 늘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클클......! 이놈, 오늘도 또 맞았구나. 바보같은 놈, 그러게 내 뭐라 했느냐? 이 늙은이에게 배우면 그깐 놈들이야 한 손가락으로 도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했거늘, 바보 같은 녀석! 끝내 노 부를 사부로 모시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쯧쯧......!" 소년은 빙긋 웃었다. 이제까지의 집념에 찬 모습과는 달리 약간 바보스럽고 멍청한 듯 해보이는 웃음이었다. "헤헤...... 할아버지처럼 술주정뱅이가 되라고요? 헤헤, 나는 그 러긴 싫어요." 그러자 광심혈두는 눈알을 부라렸다. "이놈! 또 위장을 하는구나? 네놈의 속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아 는 노부 앞에서 자꾸만 바보흉내를 낼 참이냐?" "헤헤...... 무슨 말을...... 음......! 웩......!" 소년은 문득 구토를 했다. 그가 토해낸 것은 주먹만한 핏덩이였 다. 그 순간 소년은 그만 안색이 밀납빛이 되어 헐떡였다. "큭큭...... 그것 봐라. 바보같은 놈......." 광심혈두는 바위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왔다. 그는 옆구리에 찬 술호로를 꺼내더니 마개를 땄다. 그러자 독하면서도 기이하게도 청향이 감도는 술내음이 사위를 진 동시켰다. "킬킬! 아픔을 잊는데는 술이 약(藥)이지. 아암, 약이고 말고. 마 셔라, 어서 주욱... 들이키는 거야." 쿨럭쿨럭....... 광심혈두는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가는 소년에게 억지로 술을 들이 부었다. 소년은 손을 내저어 거절하려 했으나 그것은 생각 뿐이었 다. 입 속에 처박혀진 술병으로부터 독주(毒酒)가 뱃 속으로 마구 흘 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광심혈두는 장작개비처럼 마르고 앙상한 한쪽 손으로 소년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고 있었다. "쯧쯧! 엉망이군, 늑골이 네 대나 부러지고... 여기저기 출혈이 있군. 못난 놈......" 우두둑! 두둑! 어디를 어떻게 만졌을가? 광심혈두의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 다. 어디 그뿐인가? 스스...... 불그스레한 담홍빛 기류가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실처럼 흘러나와 소년의 몸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한편, 소년은 의식이 몽롱한 상태엿다. 술(酒) 기운 탓일까?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상태로 광심혈 두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가 마신 술은 독하기 이를 데 없 었다. 따라서 한 번 마시면 연 사흘간은 주기에 못이겨 정신없이 잠을 자야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술을 마신 날은 뱃 속에 불이라도 붙은 듯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지지는 듯 하여 온몸 에 폭포수같은 땀을 흘리곤 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술기운이 깨고 나면 언제 아팠냐 싶게 멀쩡해 지는 것이었다. 물론 상처도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그것만이 아 니었다. 그의 전신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 이었다. 광심혈두의 손은 약손이었다. 그가 전신을 어루만지면 상쾌한 기분이 들고, 부러지고 어긋났던 뼈도 감쪽같이 아물고 제 자리로 맞추어졌다. 소년은 늘 광심혈두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벌써 병신이 되었거나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심혈두의 부탁만은 들어줄 수 가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광심혈두는 말로만 듣던 무림계(武林界)의 기인(奇人)이었다. 그 는 소년을 자신의 제자(弟子)로 거두기 위해 이 년간이나 그의 곁 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거절했다. 그는 세상에 아무런 뜻도 가지지 않으리라 결심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 불타던 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 며 한 맹서(盟誓)이기도 했다. 눈보라 속에서 여덟 명의 아이들과 함께 연운(連雲)을 등지고 떠 나며 그 얼마나 다짐했던가! ...... 아무런 뜻도 품지 않으리라! 그저 이 더럽고 어두운 세상 에서 철저히 뜻을 감춘 채 범인(凡人)이 되어 살아가리라! 그러므로 광심혈두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맹서를 철회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부친 우내제일학의 유시 를 위배하는 일이었다. 대형이라 불리는 소년, 그는 바로 우내제일학 천화빈의 애자(愛 子) 천의영(天意影)이었다. 사당(祠堂). 말이 사당이지 반쯤 기울어져 가는 이 사당은 이미 반 이상 허물 어져 있었다. 지붕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담장은 있으나마나하여 간신히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고 벽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이 속에서 여덟 명의 소년소녀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형(大 兄)을 중심으로 서로를 위안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대형...!" "흑! 오빠아......!" 아이들은 광심혈두의 등에 업혀온 소년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와 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은 황급히 소년을 건네받아 안으로 받들고 들어갔다. 그들 역시 평범한 출신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난 날 한림팔교(寒 林八交)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행하기 그지없는 고아 들일 뿐이었다. 설화(雪花), 비비(秘秘), 진주(眞珠) 등은 여덟 명의 아이들 중 소녀였다. 그 중에서도 설화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 이 세 소녀의 이름은 본 명(本名)이 아니었다. 동림서원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성도 이름 도 버리고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이 세 소녀들은 천의영을 오빠처럼, 어버이처럼 따르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설화는 한시도 천의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리광쟁이였다. 나머지 다섯 명은 사내아이들로 그들은 흑천(黑天), 냉심(冷心), 금장(金藏), 천맹(天盲), 제갈(諸葛)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흑천(黑天)은 거구였다. 그는 이제 십육 세인데도 키가 칠척이 넘 었다. 금장(金藏)은 천성적으로 계산이 밝고, 무엇이든지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면 훗날 거부(巨富)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였 다. 냉심(冷心)은 유독 성격이 차가운 아이였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불같은 정열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특히 손재주가 뛰어나 무엇 이건 만드는데 소질이 있었다. 현재 그는 장공(匠工)의 일을 배우 고 있었다. 천맹(天盲)은 불행히도 앞을 보지 못햇다. 그는 본래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다만 어렸을 적에 중병을 앓은 이후로 시력을 잃은 것 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육감이 있어 예민한 감각으로 사물을 파 악했다. 그러므로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아이였다. 제갈(諸葛)은 비상한 머리를 지닌 아이였다. 그는 과거 귀동 천의영 다음으로 머리가 좋아 이미 만학(萬學)을 닦은 몸이었다. 지금의 그는 학문보다는 병법(兵法)이나 신산지학 (神算之學) 따위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몰래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덟 명 의 아이들에게 금지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형은 그 사실을 알면서 도 모른 척 해주고 있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은 깊은 잠에 빠진 대형의 주위에 둘러 앉아 있 었다. 설화는 쉴 새 없이 훌쩍거리고 있었으며 비비와 진주는 물수건으 로 대형의 터지고 멍든 이마를 자꾸만 닦아주고 있었다. 흑천은 주먹을 불끈 쥔 채 흥분하고 있었다. "제기랄! 대형만 아니라면 왕호놈들의 뼉다귀를 분질러 놓을텐 데......!" 그렇다. 그는 천부적인 거구인데다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왕호패와 한판 붙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형은 그에게 절대로 주먹을 쓰지 말도록 금하고 있었다. "......." 항상 낯빛이 창백하고 얼음장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냉심은 싸늘 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 앞을 보지 못하는 천맹은 늘 지니고 다니는 손칼로 무엇인가 를 깎고 있었다. 사각사각...... 그가 깎고 있는 것은 하나의 목도(木刀)였다. 목도는 점차 뚜렷한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금장은 바닥에 손가락으로 금을 그으며 무엇인가를 계산하고 있었 다. "설흔다섯 냥...... 설흔여섯 냥...... 이제 한 달만 더 고생하면 은자 삼백 냥이 채워진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며 희망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럼 시장에 작은 점포라도 하나 낼 수 있을 거야." 이때 제갈은 눈도 깜빡이지도 않고 대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형,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우리도 이젠 무언가를 해야잖아요.......' 사당의 구석진 곳에서 광심혈두는 새우처럼 등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아홉 명의 아이들과 생활한 지도 어언 이 년여가 지나고 있었다. 그는 자주 어딘가로 떠나가기도 했으나 한 달에 십여 일은 이 사 당을 찾아왔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유심히 아이들을 관찰하 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은 대형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광심혈두가 있건말건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생활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대형이라 불리우는 아이, 그는 지금 술(?) 기운에 못이겨 깊은 잠 에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취해있으면 그는 길면 삼 일 밤낮을 자 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가 이렇게 오래 자는 것에 의아해 하기도 했으나 차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밤이다. 야천에서는 사락사락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왠지 고즈넉하면서도 뭉클한 정(情)이 흐르는 그런 밤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2장 그의 이름은 일검사(一劍士) ━━━━━━━━━━━━━━━━━━━━━━━━━━━━━━━━━━━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추웠다. 게다가 겨울 내내 눈(雪)이 내렸다.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혹한의 계절이 되면 일거리가 별로 없 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더욱 인색해지고 집안에 틀 어 박히기 때문에 대형과 여덟 아이들은 이렇다 할 일감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사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야산에 덫을 놓아 산토끼나 노루 따위를 잡아 근근이 연명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더욱 더 우울했다. 그 이유는 광심혈두(狂心血頭)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아이들과 이 년 내내 함께 지내온 이 괴노인이 이번 겨울 들어서 내내 기침을 했던 것이다. 지난 해와 달리 광심혈두는 겨울 내내 사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 는 하루 종일 구석에서 누워 지냈으며 격한 기침을 했다. 그가 기 침할 때마다 이따금 피가래가 섞여 나오곤 했다. 그는 나날이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결국 대형은 아이들과 함께 사당 내에 짚으로 만든 침상을 따로 마련하여 광심혈두를 그곳에 자도록 했다. 광심혈두 역시 아이들 못지 않게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친 지도 없었을 뿐더러 병(病)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대형 이 그에게 호사스런(?) 짚침상을 만들어 주는 것에 아무도 이상하 게 생각하지 않았다.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다. 광심혈두는 하루가 다르게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말라갔 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는 음식물을 입에 댈 수조차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마침내 아이들은 그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혹천은 사냥을 나갔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짚침상을 바라 보았다. 그의 눈에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광심혈두의 굽은 등이 보였다. 흑천은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젠장, 늙은 사람이 술을 너무 밝혀서 그렇지 뭐야." 그는 무뚝뚝해 보였다. 그러나 실상 인정이 무척 많은 소년이었 다. 그는 돌팔매질로 잡은 토끼를 사당 안에서 잡았다. 모닥불을 피워 토끼를 익힌 그는 그 중 가장 연하고 맛있는 다리 부분을 뚝 잘라내어 광심혈두에게 다가갔다. "노인장, 이거 먹고 힘 좀 내시오." 광심혈두는 흑천이 내민 토끼고기를 힘없는 눈으로 바라 보았다. 그의 얼굴에 언뜻 감격이 빛이 떠올랐다. "허허...... 괜찮아. 너나 먹거라." 그러나 그는 힘없이 너털웃음을 웃었을 뿐 도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약(藥)도 소용이 없었다. 비비(秘秘)가 약포에서 가서 사정사정해 간신히 얻어온 약을 정성 껏 달여 광심혈두에게 먹게 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광심혈두는 나날이 쇠약해져 이제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런 광심혈두의 곁에 늘 대형(大兄)이 붙어 있 다는 사실이었다. 대형은 언제나 광심혈두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이들은 들을 수 없었다. 광심혈두의 음성은 너무나 작아 그의 입에 귀를 가까이 붙여야만 간신히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형의 표정은 수시로 변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광심혈두의 말에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길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아이들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 나 그렇다고 캐물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대형이 워낙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간 히 대형은 하루 종일 구멍 뚫린 천장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기 도 했다. 그럴 때면 설화가 옆에 와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그는 아무런 의식도 하지 못했다. 그 해 겨울이 저물어 갈 때쯤 해서 대형은 어딘가 모르게 변한 듯 했다. 그는 겨울 동안 더욱 나이가 들은 듯이 보였다. 사실 대형의 나이는 이제 겨우 십사오 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 이들은 대형이 더욱 성숙해졌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 등용문 제1권 제2장 그의 이름은 일검사(一劍士) -2 ━━━━━━━━━━━━━━━━━━━━━━━━━━━━━━━━━━━ 광심혈두가 죽었다. 눈(雪)이 펑펑 쏟아지던 날 새벽이었다. 퍽! 퍽....... 아이들은 새벽녘 밖에서 언 땅을 파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비로소 광심혈두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짚침상에 반듯 이 누운 채 광심혈두는 숨을 거둔 것이었다. 대형은 그를 위해 사당의 앞마당에 무덤을 파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울적해졌다. 설화와 비비, 진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대형은 손수 광심혈두의 시신을 묻었다. 이윽고 언 땅에 봉분이 하나 생겼다. 대형은 천맹에게 나무를 하 나 깎으라고 말했다. 천맹은 그 말을 알아 들었다. 그는 손칼로 목비(木碑)를 깎아 만들었다. 목비가 완성되자 대형은 제갈에게 말했다. "제갈, 필묵(筆墨)을 다오." "......!" 제갈은 깜짝 놀랐다. 대형이 어떻게 자기가 필묵을 감추고 있었다 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감추어 두었던 붓과 먹을 벽구멍 속에서 꺼내 주었다. 대형은 붓에 먹을 찍은 후 목비에 다 음과 같이 썼다. <지옥혈문주(地獄血門主) 지옥혈사신(地獄血死神) 반자귀지묘(潘 子歸之墓). 일검사(一劍士) 립(立).> "......!"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목비에 쓴 글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들은 대형이 봉분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의혹 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대형이 어렵게 구한 한 병의 술을 무덤에 뿌리고 나자 참 다 못한 제갈이 물었다. "대형! 광심혈두... 노인이... 지옥혈문이라니... 무슨 뜻이죠?" 대형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는 문득 찌르는 듯한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아우들. 이제 봄이 오겠지? 아마 며칠 후면... 봄이 올 것이다." "......?" 대형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제갈과 아이들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후후, 봄이 되면 우리들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준비를 해야겠다." "대... 형......?" "광심혈두 노인은 본래 무림인이었다. 그는 지옥혈문(地獄血門)이 란 고금무적의 문파의 지존이었지. 그는... 내게 부탁했다. 혈문 (血門)을 이어 달라고." "......?" "혈문은 지금 멸망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는 병이 걸린 게 아니 라 중상 때문에 죽었다. 나는 그에게 승낙했지. 그의 뜻을 반만 들어 주기로." 아이들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내가 혈문을 이어 받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 다고 말했다. 나는 다만 그의 뜻대로 혈문을 부활시키겠다고 했 지. 나는 어디까지나 나일 뿐, 그 무엇도 될 수 없기에." 대형의 얼굴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충만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 다. 아이들은 대형을 바라보며 가슴이 온통 두근거리며 눈부신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제갈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아! 드디어.... 무언가 할 모양이야. 대형은 해낼 거야, 무슨 일이든 대형이라면!' 이때 목비를 바라보던 설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빠, 근데 이 끝의 이름은 뭐야?" 그 말에 대형은 웃었다. "후후훗! 일검사(一劍士) 말이냐? 그건 내 이름이다." "......?" 아이들은 더욱 더 멍청해져 버렸다. 이름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름이란 말인가? 일개(一個) 검사(劍士). 그런 것도 이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대... 형......?" 아이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대형, 즉 소년 일검사(一劍士)는 이렇 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들은 이름을 버렸다. 어떤 이름이든 어떠냐? 후훗, 일개 검사가 되어 이 세상을 나름대로 휘저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운 말이었다. 일개 검사가 되어 세상을 나름대로 휘저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 다! 이런 말이 한 소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만일 누군가 그 말을 들었다면 필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대형.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겨울의 막바지에 서 그는 광심혈두의 무덤 앞에 말뚝을 박고 거기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일검사(一劍士)란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다. "......!" 여덟 명의 아이들은 그를 우러러 보았다. 오늘따라 그들의 대형 (大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대형, 아니 일검사는 사당에 틀어박힌 채 일절 두문불 출했다. 그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였다. 광심혈두는 죽기 직전 그에게 열다섯 권의 책을 남겼다. 일검사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그는 때때로 가부좌(跏趺坐) 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한 번 그런 행동에 들어갈 때마다 그는 거의 반나절을 꼼짝도 하 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의 몸에서 신기하게도 담담한 홍무(紅霧) 가 흘러나와 전신을 감싸곤 했다. 아이들은 감히 그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경이로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일검사는 하루하루 달라졌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이상한 광채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사당 앞마당에 나갈 때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당 마당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가 눈 위를 걸을 때 발자국이 전혀 찍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봄은 왔다. 사당의 지붕과 담장, 마당에 수북히 쌓였던 눈이 녹고 언땅이 풀 렸다. 그 위로 따스한 양광(陽光)이 내리쬐면서 양지바른 곳부터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길고도 지루했던 겨울이 마 침내 물러간 것이다. 아이들은 이상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이상한 것이었다. 일검사는 봄이 되자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 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상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다. 그것은 일을 하거나 사냥을 하거 나 놀이를 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가 있었고 하면 할수록 더욱 신 바람이 나는 것들이었다. 먼저 아이들은 호흡법(呼吸法)부터 배웠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호흡법이었다. 숨을 쉰다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하고 아이들은 마냥 신기함을 금치 못했 다. 복식호흡(腹式呼吸), 흉부호흡(胸部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 등 등....... 숨을 세 번 연속 들이킨 다음 일곱 번에 걸쳐 짧게 끊어 토해내는 법(法), 그리고 들이킨 숨을 흉부에서 복부로, 그리고 단전으로 밀어넣는 법(法), 호흡의 기(氣)를 단전에 모은 뒤 전신의 경맥 (經脈)을 따라 칠주천(七週天) 하는 법(法) 등을 배웠다. 그 뿐 아니라 걷는 법, 뛰는 법도 새로 배웠다. 일검사가 시키는 대로 걸으면 하루 종일 열 개의 산(山)을 넘어가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뛸 때는 한꺼번에 일장(一丈)을 건너뛸 수도 있게 되었다. 뛰는 법을 배우게 된 후로는 사냥이 너무도 쉬워졌다. 달아나는 노루 정도는 가볍게 뛰어가 잡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일검사는 아이들에게 목검(木劍) 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선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갈수록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이었다. 달리게 되면 주위의 풍 경이 휙휙 지나갈 정도로 빨리 달리게 되었다. 단지 가볍게 발을 구르기만 하면 일장 정도는 훌쩍 뛰어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고 신기한 것은 손바닥을 뻗으면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 이 뻗어나와 손을 대지 않고도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수 있게 되었 다는 사실이었다. 일검사는 그밖에도 여러가지 신기한 공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 었다. 거꾸로 매달려 자는 법에서, 돌을 한꺼번에 열두 개를 던져 각각 의 돌이 늦고 빠르게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일정한 모양을 만들어 정확히 목표물에 맞추는 법, 주먹이나 손바닥 쓰는 법, 발차기 하 는 법, 새처럼 날아가는 법....... 아이들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조차도 잊은 채 일검사가 가르 쳐주는 신기한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봄날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대지가 후끈거리는 여름이 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흑천은 맨손으로 바위를 깨 뜨리며 우렁찬 음성으로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두고 봐! 대형만 허락한다면 단숨에 왕호놈의 골통을 부숴 놓겠 어!" ■ 등용문 제1권 제2장 그의 이름은 일검사(一劍士) -3 ━━━━━━━━━━━━━━━━━━━━━━━━━━━━━━━━━━━ 여름이 성큼 다가들고 있었다. 낙양(洛陽)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끈질기게 낙양 사람들을 괴롭혔던 왕호 패가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 동안 낙양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한 수모와 고통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재물의 약탈은 물론이려니와 처녀건 유부녀건 그들 에게 걸렸다 하면 정조를 유린 당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수 밖에 없었 다. 왜냐하면 관에 호소해 보았자 별무소용인데다가 오히려 신고 했던 사람은 그들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 맞았기 때문이었다. 낙양은 그들의 천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왕호 패거리들이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사라지자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시원함 을 느꼈다. 그러나 대체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왕호패가 사라진 이유는 떠벌이 장노삼(張老三)이란 자에 의해서 낙양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다. ...... 아, 글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 왕호(王虎)가 그 왜 있잖아, 낡은 사당에 사는 아이들 말이야. 그 애들이 대형이라 부르는 소년 앞에 무릎 꿇고 빌고 있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니 까! 글쎄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려가며 싹싹 빌더라니까? 그걸로 보아 왕호패는 그 소년이 쫓아낸 게 틀림없다구. 낙양은 장노삼이 퍼뜨린 소문으로 온통 술렁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곧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 문이다. 낙양을 어지럽히던 왕호 패거리들이 소년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놀라 사색이 되어 달아나는 것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 문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 이후 낙양에서는 그 아이들로 인해 거의 매일 재미나는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여름과 함께 낙양 일대에는 예년에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 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검(劍)을 찬 무림인(武林人)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무림인들이 낙양성에 속속 모습 을 드러내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풍운(風雲)의 조짐일지도 몰랐다. - 의백천천하군웅대회(義白天天下群雄大會). 천하무림(天下武林)은 이 사실로 인해 온통 흥분과 격동으로 술렁 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의백천(義白天)이란 단체가 군웅대회를 개 최한다는 선포를 한 것이었다. 의백천은 당금무림의 백도연맹체(白道聯盟體)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금의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의백천이 새로운 맹주를 선출하기 위해 천하군웅대회(天下群雄大會)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백천은 어떠한 단체인가? 의백천은 오백 년전 천외도주(天外島主) 무영천비자(無影天秘子) 가 초대 의백천의 천주에 오른 후 당금에 이르기까지 중원무림을 영도해온 거맹(巨盟)이었다. 역대 의백천주는 무공과 인품, 덕망에 있어 명실상부한 천하제일 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백 년전, 천마이대마벌(天魔二大魔閥)의 발 호를 종식시킨 우내삼현(宇內三賢)을 위시하여 신주사대성가(神州 四大聖家)가 그 공을 내세워 서로 의백천주가 되기 위한 암투(暗 鬪)를 전개하면서 당금에 이르기까지 의백천의 기강과 힘은 나날 이 약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의백천의 무력화(無力化)를 가속화 시킨 것은 근래 들어 한 마도(魔道)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구천마왕교(九天魔王敎)의 발호가 그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 년전 구천마왕교가 무너지고 그들의 총 교(總敎)가 폐허가 되었을 때, 무림인들은 영원히 구천마왕교가 사라진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다시 구천마왕교가 무림에 등장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가공할 혈풍(血風)이곳곳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구천마 왕교가 부활함으로써 무림은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흩어 졌던 천년마맥(天年魔脈)이 구천마왕교의 부활과 함께 속속 뭉치 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정도무림의 연맹체인 의백천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 다. 서로의 이익과 명예욕에만 사로잡힌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표류하기만 했다. 이에 무림의 전통명문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장문인(掌門人)들 은 긴급 첩지를 돌려 비밀리에 상의를 했다. 그 결과 의백천의 정 기를 바로 세우고 백도무림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백천주 를 뽑아야 한다는 안이 나왔다. 결국 그로 인해 천하군웅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었다. 군웅대회의 장소는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사(少林寺) 가 있는 숭산(嵩山)의 태실정(太室頂)으로 결정되었다. 바야흐로 대풍운의 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의백천주를 뽑는 천 하군웅대회 개최를 기화로 사해오악에서 구름 같은 영웅호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의백천(義白天)의 부활! 그것은 백도인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것이 었다. 사실 지난 백여 년간 의백천의 구심점이 흐트러지면서 무림 은 혼탁해졌기 때문이었다. 당금 무림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누구나 서슴없이 이렇게 말한 다. ...... 현 무림은 천하삼정(天下三鼎)에 의해 장악되고 있소. 백도인들은 그 말을 수치로 여겼으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부 정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천하는 정확히 삼분(三分)되어 있었다. 정도(正道)- 의백천(義白天). 사도(邪道)- 불야성(不夜城). 정사중도(正邪中道)- 검황루(劍皇樓). 이른바 천하삼정으로 일컬어지는 세 개의 세력이 중원을 분할한 채 정립되어 있는 것이었다. 먼저 불야성(不夜城)은 강호의 밑바닥 출신들로 이루어진 하오문 (下五門)에서 녹림도(綠林道)에 이르기까지 총집결되어 천하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불야성의 야심은 아직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속 인원 삼십만이 넘는 방대한 세력은 날이 갈수록 팽창 되기만 했다. 불야성주(不夜城主) 천면환사제(千面幻邪帝). 그는 모든 것이 흑막에 가리워진 인물로 이제껏 천(千)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 그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는 그의 측근들조차 그의 본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검황루(劍皇樓)는 정도 사도 아닌 단체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패도(覇道)라고 볼 수 있었다. 검황루는 엄청난 재력(財力)과 치밀한 조직력으로 중원의 상권(商 權)을 장악한 채 이미 지난 백 년 이래 대강남북을 지배해 오고 있었다. 검황루주 황금존사(黃金尊師) 진천사후(震天獅侯)는 달리 검황(劍 皇)이란 별호로 불릴 정도로 검(劍)의 달인(達人)으로 알려져 있 었다. 그는 당금무림에서 가장 무공이 높다는 천하십룡(天下十龍)의 수 위(首位)를 차지하고 있어 그의 무공은 가히 신화경이었다. 그러 나 무공보다도 무서운 것은 그의 지닌 재력과 치밀한 조직력, 그 리고 뛰어난 용병술(用兵術)이었다. 불야성과 검황루는 날이 갈수록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정도무림의 중심인 의백천은 반대로 힘이 약화되기만 했다. 이 싯점에 새로운 의백천주를 뽑기 위한 천하군웅대회가 개최된다 는 소식에 정도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었다. 과연 새로운 맹주가 선출된다면 의백천은 다시 백도천하(白道天 下)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기라성 같은 기인명숙(奇人名宿)들이 숭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위시하여 신주사대성가(神州四大聖家)의 가주들, 심지어는 풍진이인들로 알려진 천하십룡(天下十龍) 마저 참가하리라는 설이 강력히 떠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천하도상(天下道上)은 군웅대회에 참가하려는 무림인들 로 들끓게 되었다. 천하 정세가 이러할진데 군웅대회가 개최되는 숭산으로 가는 길목 에 있는 낙양이 풍운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등용문 제1권 제3장 낙양(洛陽)의 악동(惡童)들 ━━━━━━━━━━━━━━━━━━━━━━━━━━━━━━━━━━━ 낙양의 교외. 서문(西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관도(官道)에 접한 한 그루 나무 아래 꾀죄죄한 모습의 소년이 멀 리 관도 끝을 살펴보고 있었다. '옳지! 이제 오는군.' 소년은 씨익 웃었다. 그는 동글동글한 체격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아이였다. 그러나 소년의 눈만은 쉴새없이 영특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록 일신에 입은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어 낙양 근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지소년으로 보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은 구석을 느끼게 했다. 이때였다. 소년의 시야에 한 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어헝! 엉엉!" 갑자기 소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대성통곡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어느 새 땟물 흐르는 얼굴에 침을 발라 가짜 눈물 을 만들어 내며 통곡하고 있었다.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마치 행운유수와 같은 신법으로 미 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등에는 한 자루의 고색창연한 송문고검(松紋古劍)을 메고 일 신에는 남색의 도포(道袍)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길어 보이 는 얼굴이었고 턱에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도인은 바쁜 일이 있는 듯 통곡하고 있는 소년을 힐끗 보면서도 그의 곁을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빨리 가야 한다. 의백천(義白天)에 내가 가지고 있는 비급(秘급) 을 전달해야 한다. 당금의 무림정세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구천마왕교(九天魔王敎)의 부활로 인해 마도(魔道)가 준동하고 있으니 어쩌면 백 년전의 혈사(血事)보다 백배나 더 무 서운 혈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노인은 소년의 곁을 지나치며 상념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번 행(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에 알려져선 안된다. 비록 오늘날의 의백천은 침체일로를 걷고 있으나 천 명의 기재(奇才)를 극비에 훈련시키고 있는데다 노부가 가지고 가는 비급을 포함하여 일백팔 권의 백도무경(白道武經)이 모이면 일천정영(一天精英)들 에게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광명천(光明天)의 탄생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노도인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슴이 뿌듯하게 차오르고 있었 다. 사실이었다. 의백천은 정도무림의 중흥을 위해 극비리에 일천 명 의 기재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도의 일백팔 개 방회와 기인(奇人)들이 사심없이 무공비급을 모아 일천기재들에게 전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정도무림은 그 동안의 침체를 벗어나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 틀림없었다. 의백천에서는 그 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하면서 광명천(光明天)이란 새로운 무맹(武盟)의 결성을 꾀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서두르자, 하루라도 빨리 당도해야 한다.' 노도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아이고오......!" 느닷없이 귓전에 소년의 방성대곡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엉엉......! 아버님...... 그 원수 놈을 대체 어 디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그 놈은 손으로 바위를 부수는 귀신인 데 어찌 복수를 한단 말입니까?" "......!" 도인은 저만치 소년을 지나치다 말고 흠칫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 며 귀를 기울여 보았다. "엉... 엉......! 그 놈은 비록 꼽추긴 하지만 염라대왕보다 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복수를 한단 말입니까? 엉 엉......! 아이고 분해라!" 소년의 방성대곡은 점점 높아졌다. 듣고 있던 도인의 흰 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혹시...... 꼽추라면 그 자가 아닐까? 으음! 그는 백 년전 낙혼 애(洛魂崖)에서 백의검제(白衣劍帝)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고 소문 이 났었는데... 설마......' 획! 노인은 돌아서는 즉시 천룡회미(天龍廻尾)의 신법으로 소년의 앞에 떨어졌다. 그는 소년을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 "아이야, 혹시 네가 말한 자는 꼽추에 흑의를 입고 머리통이 보통 사람보다 두 배나 큰 그런 놈이 아니냐?" 그의 갑작스런 등장과 느닷없는 질문에 소년은 깜짝 놀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도 잠깐, 소년은 다시 통곡을 터뜨렸다. "맞아요! 할아버지. 엉엉......! 그 놈이 한 달 전에 저의 아버지 를 쳐죽였어요. 엉엉......!" "으... 음!" 순간 도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긴장으로 질려 버렸다. 그는 믿어지 지 않는 듯 탄식을 발했다. "이럴 수가......! 그럼 남북쌍천마(南北雙天魔)가 살아 있었단 말인가? 그들이 살아났다면...... 정말 큰일이로구나."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그렇다면 근자에 들어서 마도들이 각처에서 준 동하고 있는 것도 그 마두들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엉엉엉......!" 소년은 더욱 소리높여 통곡을 터뜨렸다. 도인은 눈을 뜨더니 소년 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아이야, 울지 마라. 그놈들은 희대의 살인마(殺人魔)들이다. 놈 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이 어디 너뿐이겠느냐?" 도인은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노부가 바쁘지만 않다면 널 보살펴 주겠다만......" 이때였다. 그는 문득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소년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군. 아이야, 너는 정녕 복수를 하고 싶으냐?" 소년은 그 말에 땟국물로 온통 더럽혀진 눈두덩이를 쓱 문지르며 말했다. "흑흑......! 물론이에요! 복수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거 예요!" 그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효성이 갸륵하구나. 잘 들어라, 아이야. 뜻이 있는 곳에 길 이 있다고 했다. 네가 복수를 원한다면 내 방법을 일러주마." 소년은 눈을 반짝 뜨며 물었다. "어떤 건데요? 복수할 수만 있다면 끓는 가마솥 속이라도 들어가 겠어요!" "흐음, 그렇다면 숭산(嵩山) 태실정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곤륜 (崑崙)의 천학자(天鶴子)란 사람이 보냈다고 하면 너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 말에 소년은 언제 울었더냐 싶게 눈부시게 흰 이를 드러내며 반문했다. "정말인가요?" "허허허......! 정말이고 말고. 네가 열심히 배운다면 언젠가는 뜻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이어 도인, 즉 천학자는 품에서 누런 금덩이 한 개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주며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어지러운 세상이여, 하지만 하늘은 언제나 의로 운 자를 돕는 법이니라......" 천학자의 어깨가 흔들하는가 싶더니 그는 흡사 용이 승천하듯 허 공 높이 날아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지 고 말았다. 그가 시전한 것은 곤륜의 비학으로 유명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 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천학자가 사라진 직후였다. "히히......! 바보같은 영감쟁이, 뭐 태실정에 가면 남북쌍천마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을 배울 수 있다고? 자기도 그들의 백초 상대도 되지 못하면서 큰소리는. 히힛! 아무튼 수확을 얻었군." 소년는 히쭉 웃으며 소매 속에서 누런 양피책자 한 권을 꺼냈다. <운룡대팔식비전(雲龍大八式秘傳)> 양피책자의 표지에는 그런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소 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야! 역시 틀림없구나. 키킥......! 수확이 큰데? 과연 대형(大 兄)이 가르쳐 준 무형종횡수(無形縱橫手)는 귀신의 고쟁이도 훔칠 수 있단 말야!"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은 연극을 해 천학자의 마음을 분산시킨 다음 그의 품에서 곤 륜의 비전지학인 운룡대팔식을 소매치기해낸 것이었다. 실로 깜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천하 무림의 명숙(名宿) 중 한 명인 곤륜의 천학자가 한낱 거지소년에게 속아 중대한 사문의 비 급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천학자가 속아서 비급을 일어 버린 일은 낙양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깜찍하고도 어이없는 사 건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소년. 그의 이름은 금장(金藏)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3장 낙양(洛陽)의 악동(惡童)들 -2 ━━━━━━━━━━━━━━━━━━━━━━━━━━━━━━━━━━━ 무덤 앞에서 한 소녀가 구슬프게 흐느끼고 있었다. "흑흑......" 애간장이 끊어질 듯 슬프게 울고 있는 소녀의 앞에는 방금 생긴 듯 붉은 흙이 채 마르지도 않은 봉분이 있었다. 이제 겨우 열너덧 살 정도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 린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녀는 아름다왔다. 동그스럼한 얼굴에 선명하고도 커다란 눈망울, 살풋이 다물린 꽃잎 같은 입술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뒷모습을 보면 소녀가 이제 막 성숙한 여인으로 접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줌밖에 안될 정도로 잘록한 허리, 그와는 대조적으로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둔부는 사내라면 군침을 꿀꺽 삼키게 할 정도 로 풍요로운 여인의 면모를 은근히 감추고 있었다. "흑! 흑흑......" 소녀는 섧게 흐느꼈다. 이따금씩 가늘게 들썩이는 가냘픈 어깨는 측은지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소녀가 울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인영이 유심히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사십 쯤 되었을까? 그 자는 눈꼬리가 죽 째져 있었고, 입술은 얄 팍했으며 왠지 모르게 음탕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중년장한이었 다. '흐흐...... 오늘 나 화화태세(花花太歲)가 회춘(回春)의 묘약을 발견했구나.' 그는 내심 군침을 삼키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화태세(花花太歲)라면 무림에서 악명 높은 골칫거리였다. 그는 색마(色魔)였다. 여자라면 무덤에서라도 벌떡 일어설 정도로 색 (色)을 밝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얼굴을 수십 개로 바꾸는 기묘한 변장술을 지니고 있는데다 간교한 머리를 잘 굴리는 위인이었다. 또한 미혼독술 따위로 수많 은 여인들의 정조를 유린해 왔다. 그로 인해 이미 오래전부터 무림의 공적(公敵)으로 낙인찍힌 자였 으나 용케도 지난 수십 년간 잡히지 않은 인물이었다. '흐흐흐, 고것 참 통째로 삼켜도 시원치 않겠는 걸? 이 화화태세 가 어찌 이런 보물을 두고 그냥 지나치랴?' 화화태세는 소녀에게 음심(淫心)을 품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소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그는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상냥하게 물었다. "이보시오, 아가씨. 무엇 때문에 슬피 우는 것이지?" "흑흑...... 죽었어요." 소녀는 연신 슬피 울며 뒤를 돌아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죽다니? 누가 말인가?" 화화태세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소녀가 대답 대신 더욱 서럽게 흐느끼자 다시 음성을 가다 듬으며 물었다. "허엄, 죽은 사람은 아가씨와 대체 어떤 관계인가?" 그러자 소녀는 잠시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 보았 다. '......!' 순간 화화태세는 그만 가슴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동그란 얼굴에 호수처럼 맑고 커다란 눈망울, 빨간 앵두처럼 도드라진 입 술, 게다가 약간 벌린 입술 사이로 은근히 드러나 보이는 희고 가 지런한 상아빛 치아....... 화화태세는 그만 가슴에 불이 확 붙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으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이때 소녀가 그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그러자 눈망울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방긋 웃는 뺨 위로 옥구슬인 양 굴러 떨어져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 들었다. 그 모습에 화화태세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름 위에 둥둥 뜨는 듯한 황홀함을 맛보았다. 이때 소녀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의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라고 불러요." 화화태세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구름 위에 둥둥 떠오 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의 어머니를 아가씨의 어머니가 어머니라 부 른다고......?" 문득 화화태세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은밀히 딴 생각을 품고 있 는 그로서는 소녀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소녀와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의 관계를 규명해 보려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소녀의 솜털이 보송송 한 가냘픈 목과 옷깃 사이로 감싸여 있는 은은한 살결로 시선이 가는 바람에 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 이때 문득 아랫배가 따끔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 았다. 소녀에게 온통 마음을 뺏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보면 그만이 지니고 있는 미혼술(迷魂 術)과 요색미안공(妖色迷眼攻)을 발휘하여 여인을 유혹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그가 소녀에게 빠져버린 것이 었다. "으음......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의 어머니를 어머니가......" 따끔! 또다시 아랫배가 벌에 쏘인 듯 따끔거렸다. 그는 생각했다. '모긴가.......' 이때, 따끔! 따끔! 따끔! 연달아 세 번이나 아랫배가 따끔거렸다. '요즘 모기는 아랫배만 무는 모양이지.' 그러나 이때 다시 두 번씩이나 따끔거리는 바람에 그는 은근히 화 가 치밀었다. '나쁜 놈들, 자꾸만 물다니.' 화화태세는 문득 자신이 무덤 속의 사람과 소녀와의 관계를 놓고 너무 생각에 골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상한 일이 생겼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땅바닥이 갑자기 일어 서며 자기 뺨을 세차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화화태세는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아가씨, 잘 모르겠는데......? 대체 아가씨와 무덤 속 사람은 어 떤 관계지?" 화화태세는 비스듬한 사팔눈이 된 채 다시 물었다. "그리고 아가씨는 왜 옆으로 누워 있는 거지?" 그 말에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 어머니에요. 그리고 제가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옆으 로 누워있는 거예요." 그 말에 화화태세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닌게 아니라 소녀의 머리 위에는 파아란 하늘이 있지 않은가? '맞다. 어머니가.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그렇다면 내가 왜 옆으로 누워 있는 거지?" 그때 다시 이번에는 가슴이 세 번 따끔거렸다. 그는 잔뜩 인상을 구겼다. '이놈의 모기, 또 무는군. 요즘 모기는 옷을 뚫고 문다니까.' 이때였다. 느닷없이 소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 닌가? "호호호호......! 그건 당신이 제 독침(毒針)에 맞았기 때문이에 요!" 순간, 화화태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맞다!" 그는 놀라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 았다. 그의 얼굴은 물론 손도 발도 그 순간 모두 시커멓게 죽어버 렸기 때문이었다. "호호호호......! 바보같은 자식!" 소녀는 무척 즐거운 듯 깔깔거리며 손을 뻗어 이미 황천으로 떠나 버린 화화태세의 품 속을 뒤졌다. 잠시 후 소녀는 그의 품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꺼내더니 눈을 빛내며 열어 보았다. 자루 속에는 주먹만한 금덩이 몇 개와 영롱 한 광채를 발하는 구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밖에도 손가락 크기만한 자기병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속에는 색 핵의 가루 약(藥)들이 있었다. 소녀는 그것을 확인한 후 도로 자 루에 넣은 후 어깨에 둘러맸다. "호호호! 역시 큰오빠에게 배운 섭혼마백안(攝魂魔魄眼)과 최심술 (催心術)은 사람의 혼을 뺏는단 말야. 게다가 냉심(冷心)이 만든 오색독침교(五色毒針巧)는 정말 일품이야. 호호호...... 오늘도 수확이 꽤 컸어!" 이렇게 중얼거린 소녀는 작고 앙증스런 발로 화화태세의 몸뚱이를 툭! 걷어차더니 냅다 앞으로 달려갔다. 실로 요기(妖氣)로운 소녀, 그녀의 이름은 비비(秘秘)였다. 살랑......! 하늬바람이 불어왔다. 열네 살짜리 소녀와 한 무림의 색마 사이에 서 벌어진 작은 사건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묻혀졌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것이 향후 엄청난 풍운(風雲)으로 발전 하게 된다는 것을? ■ 등용문 제1권 제3장 낙양(洛陽)의 악동(惡童)들 -3 ━━━━━━━━━━━━━━━━━━━━━━━━━━━━━━━━━━━ 또 한 명의 소년. 그는 장기를 두고 있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했고 전체적으로 귀엽 게 생긴 용모였다. 소년은 눈빛이 무척이나 지혜롭게 보였다. 그는 지금 쉴새없이 뭐 라 중얼거리며 혼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때, 맞은편에서 한 명의 노인(老人)이 나타났다. 그는 난쟁이 노인이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발목까지 질질 끌리는 오색(五色)의 장삼을 입고 있어 유난히 눈길을 이었다. 난쟁이 노인은 한 손에 커다란 나무궤짝을 들고 뒤뚱거리며 팔자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쉴 새 없이 번뜩이고 있 어 무림고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킥킥!" 문득 장기를 두던 소년이 노인을 보고 웃었다. "......!" 노인의 눈썹이 쭉 째졌다. 필시 자신을 보고 비웃는 것이라고 생 각한 듯 만면에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일순 노인의 인영이 번뜩 움직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소 년의 앞에 떨어졌다. 노인은 다짜고짜로 흥분해 외쳤다. "이놈! 어르신네를 보면 공경하게 인사를 해야지 아는 척도 않고 길을 막고 있느냐?" 생트집이었다. 사실 소년이 자신을 보고 비웃는데 화가 난 것이었 는데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공연히 길을 막는다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귀여운 얼굴을 들며 실실 웃었다. "할아버지, 이 길은 이렇게 넓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왜 공 연히 시비예요?" "뭐라고? 이놈! 말버릇이 그게 뭐냐?" 난쟁이노인은 얼굴이 빨개져 펄펄 뛰었다. "헤헤...... 할아버지는 심심한가 보죠? 저와 놀고 싶으세요?" "뭐... 뭐......?" 난쟁이 노인은 기가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듯 두 눈을 연신 감았다 떴다 했다. 이어 간신히 가슴을 쓸어 흥분을 가라앉 히고는 자신의 턱을 가르키며 말했다. "이놈아!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천하의 오행태태존자(五行太太尊 子)이시다! 너는 그런 존명을 들어보기나 했느냐?" 그 말에 소년은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칭 오행태태존자는 소 년의 표정을 좁쌀만한 눈으로 놓치지 않고 보았다. "으하하하하! 노부가 바로 의백천(義白天)의 초청을 받고 천하군 웅대회를 참관하러 가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오행태태존자란 말이 다." 오행태태존자. 실상 그는 오행살노군(五行殺老君)이란 별호를 갖 고 있는 기인이었다. 그는 독문(獨門)의 오행독행신공(五行獨行神功)으로 무림일절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숙했으나 적을 만나면 반드시 상대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살노군(殺 老君)이란 별호가 붙은 것이었다. 이때 소년의 태도가 싹 변했다. 소년은 만면에 존경의 빛을 드러 내더니 황급히 말했다. "아아, 어르신께서 바로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고, 천하무적이시 라는 오행태태존자시군요?" 소년은 감격한 듯 대뜸 바닥에 엎드리더니 큰절을 넙쭉 했다. "아이구! 몰라뵈었습니다요!" "험.... 험......!" 본래 남에게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오행살노군은 소년의 아부에 하 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허...... 그렇다. 꼬마야." "야아......! 정말 영광입니다요." 이렇게 환성을 올리던 소년은 갑자기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이어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어르신은 이 세상 에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니까요." "......!" "헤헤, 손가락으로 폭포수를 가르고 입김을 불어 물을 얼려버리신 다는 천하제일인이시니까요." 오행살노군은 그만 난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 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알고 말고...... 그것은......"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문득 멀리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 다. "제갈아! 제갈아......!" 그 바람에 소년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오 행살노군은 소년의 손가락이 슬쩍 벌어지며 그 사이로 붉은 수실 이 엿보이는 것을 보았다. '흐흐......!' 오행살노군은 동심(童心)에 젖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때였다. 쿵쿵거리는 진동음과 함께 한 거인이 나타났다. 아니, 그는 덩치가 산만한 한 명의 소년이었다. 키는 장장 칠척(七尺)을 넘어 팔척에 가까웠으며 일신에는 흑의 (黑衣)를 입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몸에 작아서 손목과 정강이가 껑충하니 올라가 있었다. 소년은 얼굴은 까무잡잡했으며 각을 이룬 모습이었다. 비록 장대 한 체구로 인해 산을 보는 듯 했으나 얼굴만은 아직도 소년의 티 가 물씬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옆구리에 커다란 약초바구니를 낀 채 달려오며 헐떡이고 있었다. "헉헉...... 미안해, 제갈아. 조금 늦었다." 소년의 음성은 어찌나 큰지 귀가 웅웅거릴 정도였다. 그러자 제갈 이라 불린 소년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흑천(黑天). 지금 천하제일인이신 오행태태존자 선배님 과 얘기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선배님이 내 손에 든 것도 알아 맞추신 댔어. "정...... 말?" 흑천이란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놀란 듯 오행살노군을 내 려다보며 꾸벅 인사했다. "정말 그 위대하신 오행태태존자 장두이(張頭二)시란 말입니까?" "험험...! 그럼." 오행살노군은 기분이 좋아 헛기침을 했다. '기특한 녀석, 내 이름이 장두이란 것도 알다니, 흐흐! 이런 어린 아이들까지도 알고 있으니 나는 정말 위대해. 암...... 위대하 지.' 착각도 유분수인가? 오행살노군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느긋이 말했다. '그럼 맞춰볼까? 네 손 안에 든 것은 복주머니지? 붉은 비단수실 이 달린 것이지." "와......!" 소년 제갈은 환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활짝 폈다. 당연히 그의 손 안에 든 것은 복주머니였다. 이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거소 년 흑천(黑天)이 불쑥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 건 뭐죠?" "......." 이번에는 오행살노군으로서는 정말 곤란했다. 그러나 체면상 맞추 지 않을 수도 없는 일, 그는 유심히 흑천의 커다란 손을 살펴보았 다. 문득 그의 좁쌀눈이 반짝였다. '흐흐...... 바보 같은 놈, 손가락 사이로 뿌리(根)를 흘리다 니......' "그건 약초가 아니냐?" 순간 흑천은 기겁할 듯 입을 딱 벌렸다. "야! 정말 귀신 같네요!" 역시 그는 약초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두 소년, 제갈과 흑천은 만면에 존경심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거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빨리 의백천으로 가야 되는데.' 오행살노군이 이렇게 생각할 때였다. 딸랑... 딸랑......! 문득 방울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명의 장님 노인이 수중에 조그 만 깃발을 들고 방울을 흔들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萬事不通 天下第一智> 깃발에는 그런 글이 쓰여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제갈은 문득 화 를 냈다. "흥! 천하제일이란 말을 함부로 쓰다니!" 그는 점쟁이노인이 다가오자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봐요! 당신은 정말 만사에 통하지 않는 게 없고 천하제일의 지 혜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요?" "그럼......!" 장님의 음성은 조금 이상했다. 탁한 것도 같고 차가운 것도 같았 다. 제갈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흥! 여기 이분이 천하제일인이신 오행태태존자 장두이 어른이신 데 당신 같은 사람이 천하제일이란 말을 쓰다니 건방지다고 생각 되지 않나요?" 제갈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어이쿠! 오행...... 어르신이라고? 이거...... 소인이 눈이 멀어 몰라 보았니다요!" 장님은 황망히 절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절을 하는 방향은 오행살 노군이 있는 쪽과는 정반대 쪽이었다. 오행살노군은 달리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오늘부터 당장 그 깃발을 떼어버리시오." 그 말에 장님은 대뜸 울상을 지었다. "이건 내 밥줄인데......" 오행살노군은 코웃음쳤다. "흥! 승복할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스스로 떼도록 만 들어 주지." 이어 오행살노군은 만면에 살기(殺氣)를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장 님의 머리통을 바수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이때 제갈이 나섰다. "잠깐만요! 이렇게 하면 어때요?" "......?" 오행살노군이 의아한 듯 쳐다보자 제갈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내기를 하는 거예요." "내기?" "사실 괘씸하긴 하지만 이 노인도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건데 사정 은 봐줘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천하제일지자라고 했으니 내기 를 해서 시험해 본 후 깃발을 사용할지를 가리는 게 어때요?" 오행살노군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장님 점쟁이야 안중에 도 없었다. 그러니 내기고 뭐고 할 의향이 도무지 없었다. 그러나 제갈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자 그만 마음이 약해지 고 말았다. "음, 어떤 내기를 하자는 거냐?" 제갈은 눈알을 사르르 굴리며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는 목궤를 가리켰다. "그것을 장님 할아버지에게 빼앗으라고 하는 거예요. 뺏을 수 있 으면 천하제일이란 말을 사용하게 하고 못뺏으면 당장 깃발을 부 러뜨리는 거에요." 그 말에 오행살노군은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목궤를 바짝 움켜 쥐었다. '이 속에는 내 모든 것이 들어 있는데......' 그러나 곧 그는 생각을 돌렸다. '하기사 저 늙은이는 눈이 먼데다가 무슨 재주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수로 내 궤짝을 뺏아간단 말인가?' "좋다!"' 마침내 그는 승낙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님이 갑자기 울상을 지으 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 늙은이의 밥줄이 떨어졌구나." 이어 그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 늙은 장님이 무슨 수로 궤짝을 뺐는단 말인가?" 그러자 오행살노군은 득의하여 말했다. "빨리빨리 하게. 난 바쁘니까 차 한 잔 식을 시간을 주지. 그 시 간이 지나면 자네가 진 거야." 그는 목궤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점쟁이노인은 손을 마주 비볐 다. 그는 한참을 쩔쩔 매며 무엇인가를 궁리하는 듯 했다. 그러나 마침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휴우......! 이 늙은이가 졌소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신 이 없습니다요." 그러자 제갈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어서 당신은 깃발을 꺾어 버려요!" 그러나 이때 장님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내 저 분의 목궤를 뺏지는 못하겠지만 만일 이 꼬마 손에 궤짝이 있다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뺏을 자신이 있소." 그 말에 오행살노군은 껄껄 웃었다. 그는 장님이 허튼 소리를 한 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고 뺏을 수 있다고? 나도 그런 일은 하지 못하는데 네놈이 무슨 수로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은근히 궁금증이 생겼다. "좋다, 그럼 이 꼬마에게 궤짝을 줄테니 어디 손대지 말고 뺐어봐 라." 오행살노군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목궤를 제갈에게 넘겨주었 다. 제갈이 막 목궤를 받아든 순간이었다. 장님은 별안간 박장대 소를 하는 것이 아닌가? "와하하하하......! 당신이 졌소! 그 궤짝은 특림없이 당신 손에 들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지 않소? 와하하하......!" 그 말에 오행살노군은 너무나도 화가 나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 다. "뭐라고? 이 사기꾼아!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느냐? 너는 분명히 내 손에서 네가 직접 뺏겠다고......" 그러나 그의 말은 중도에서 가로막혔다. "아니? 천하제일인 오행태태존자께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참이 오?" "다... 닥쳐라! 이 사기꾼아! 자꾸 우기면 네 머리통을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 우...... 웅! 정말로 화가 치민 듯 오행살노군이 손을 번쩍 쳐들자 그의 장심 (掌心)에서 홍색의 반점이 나타났다. 그것은 오행혈리수(五行血狸 手)라는 무서운 절기였다. 장님은 두려운 듯 뒤로 주춤 물러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 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다시 궤짝을 가져가오. 그러면 내가 직접 뺏어낼테니 말이오." 장님의 호칭은 이제 당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행살노군 은 그것을 따질 경황이 없었다. "조... 좋다!" 그는 허겁지겁 제갈에게서 다시 목궤를 빼앗았다. "자, 어디 네놈이 직접 빼아......" 순간 그는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와하하하......! 그것 보시오! 이번에도 나는 손도 대지 않고 꼬 마의 손에서 목궤를 벗어나게 하지 않았소? 당신은 또 진 거요!" "이...... 이...... 이......" 오행살노군은 그만 화가 복받쳐 거품을 물 정도가 되고 말았다. 결국 두 번씩이나 당한 것이 아닌가? "뭐... 뭐... 뭣이? 이 사기꾼......" 그는 귀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치밀고 말았다. "으드득......! 더 못 참겠다! 네놈을 때려 죽여 버리겠다! 네놈 이 내 수중에서 뺏아가야 진짜다! 그렇지 않으면 무효다!" 그 말에 장님은 두 손을 흔들며 마지 못한 듯 말했다. "좋소, 좋아. 그렇다면 그 궤짝을 내게 주시오. 당신은 그것을 뺏 을 수 있겠소? 그것도 눈 깜짝할 새 말이오." 그 말에 오행살노군은 그만 멈칫했다. 두 번이나 속고난 지금에 와서 그는 신중을 기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좁쌀 같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장님의 아래위를 살펴 보았다. '저놈...... 장님에다가 보아하니 무공도 익힌 것 같지 않은데 설 마 못 빼앗을라고?' 그는 확신했다. 장님에게서 목궤를 뺏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장님의 옆구리에 날개가 달려있지 않는 한 그에게서 도망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마침내 그는 목궤를 내밀었다. "좋다! 그러나 내가 무공을 쓴다고 후회하지는 말아라." 그 말에 장님은 약간 켕기는 듯 일말의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아! 어서 가져가라!" 오행살노군이 화를 벌컥 내자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내 밀어 궤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장님인데도 앞이 훤히 보이는 듯 정확히 궤짝을 받는 것이었다. 얼마전 그가 엉뚱한 곳에 대고 절을 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 다. 그러나 오행살노군은 미처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헤헤...... 다만 손에 인정을 두기를 바랍니다. 제가 열 걸음 물 러난 뒤에 하시기 바랍니다." 장님은 만면에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때였다. 옆에 있던 흑천과 제갈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뒤로 은밀히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오행살노군은 조금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내심 중얼 거리고 있었다. '흐흐흐! 열 걸음 아니라 백 보를 물러나 봐라. 노부의 오행수라 금나수로 단번에 빼앗을테니.' 이때였다. 열 걸음을 물러난 장님은 별안간 대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와하하하하! 또 졌소! 이번에도 궤짝이 내 수중에 있으니 당신은 설마 세 번씩이나 억지를 부리지는 못할 거요!" "아차!" 오행살노군은 정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그야말로 호되게 쇠 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세 번씩이나 속다니! 그야 말로 천하인의 웃음거리가 될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치에 앞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궤짝 속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결코 잃어서는 안될 물건이었다. "이... 이... 사기꾼! 도둑놈! 어서 내 궤짝을 내놔라! 어...... 엇!" 그는 막 신형을 날리려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펑! 펑... 펑! 돌연 사방으로부터 귀청을 찢는 듯한 폭발음이 울리더니 자욱한 연기가 온통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그 연기는 삽시에 사 방을 온통 암흑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놈! 서라!" 휘... 익!" 오행살노군은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어 찌된 셈인지 연기는 그의 몸에 들어붙은 듯 그가 신형을 날려도 흩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오행살노군은 기가 막혔다. 꽝... 꽈르릉! 화가 치민 나머지 그는 사방을 향해 마구 장력을 날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방 어디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야말 로 깨끗이 당하고 만 것이었다. 제갈(諸葛)과 흑천(黑天), 그리고 장님으로 변장한 냉심(冷心)에 의해 오행살노군은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 린 것이었다. 이날, 낙양성의 곳곳에서 벌어진 희안한 괴사들은 훗날 두고두고 무림야사(武林野史)에 전해져 후세인들의 배꼽을 쥐게 만들었다. ■ 등용문 제1권 제4장 춘야(春夜)의 회의(會議) ━━━━━━━━━━━━━━━━━━━━━━━━━━━━━━━━━━━ 해가 기울고 있었다. 아홉 명의 기이한 소년소녀들이 모여 사는 곳, 이 허름한 사당은 그들만의 소왕국(小王國)이었다. 저녁이 어스름히 밀려들자 차츰 소년소녀들이 보금자리로 모여들 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당의 후원(後園)에서는 구수하고 향기로 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부글부글......! 커다란 무쇠 솥에서는 음식이 끓기 시작했다. 장작불은 기세좋게 타올랐다. 조금 떨어진 마른 장작더미 위에는 일검사(一劍士)가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모두들 올 때가 되었는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문득 한 자그마한 인영이 사당 을 돌아 나타났다. 허름한 옷을 입은 계집아이였다. 그런데 계집아이를 자세히 보면 깜짝 놀랄만큼 예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십삼사 세쯤 되었을까? 피부가 설백(雪白)처럼 희고 얼굴 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눈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소녀 는 댕기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며 다가왔다. 일검사는 소녀를 보자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설화(雪花)야, 형제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그 말에 설화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응! 냉심(冷心)오빠가 좀 늦어요." 그녀는 솥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솥 속에 끓고 있는 음식을 저었 다. 이어 고개를 들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큰오빠, 오늘은 수확이 좋아. 황금 삼만 냥과 무공비급 열두 권 을 모았거든요. 근데......" 일검사는 그녀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자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응, 그게......" 설화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 놓았다. "실은 제갈오빠가 오행살노군이란 영감에게 사기를 치다가 그만 오행늙은이에게 상처을 입었어요. 그래서 흑천(黑天)오빠와 냉심 (冷心)오빠가 복수하러 나갔는데 좀 있으면 들어올 거예요." 그 말에 일검사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그런 얘기를 이제 하느냐?" 이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말했다. "큰일 났구나, 오행살노군이라면 그 녀석들의 상대가 아니야!" 일검사는 그렇게 말하며 앉은 채 장작더미를 손으로 탁! 내리쳤 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은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 나갔다. 이 갑작스런 결과에 설화는 금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큰오빠는...... 흑흑...... 미워......"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일검사가 갑자기 큰소리 친 것이 야속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그녀는 이 세상에서 일검사가 가장 좋았다. 그것은 설화 뿐만 아니라 비비(秘秘)도 그러했고, 진주(珍珠) 또 한 그러했다. 일검사는 그녀들의 오빠였으며, 아버지였고, 또 연인(戀人)이기도 한 것이었다. 한편, 막 사당 밖으로 날아가던 일검사는 흠칫하며 바닥으로 내려 섰다. 막 사당의 쓰러져 가는 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세 명의 소년 이 비틀거리며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일검사의 짙은 눈썹이 꿈틀 거꾸로 치솟았다. "어떻게 된 거냐?" 일검사의 음성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러자 키가 칠척이 넘는 거구의 소년이 두 소년을 양 옆구리에 낀 채 큰소리로 말했다. "대형, 그 오행늙은이의 귀를 잘라 버렸소!" 그는 흑천이었다. 비록 입과 코로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사뭇 위 풍당당한 태도였다. 그 말에 일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늙은이는 무림의 고수인데 너희들이 어떻게 상대했느냐?" 그러자 흑천의 왼쪽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냉심이 말했다. "대형, 이 냉심이 그 영감쟁이의 손가락 두 개를 잘라 버렸소. 그 놈의 영감에게 오행혈리수(五行血狸手)를 한 대 맞긴 했지만 그렇 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오." 아닌게 아니라 냉심의 가슴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흑천의 오른쪽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제갈이 중얼거렸 다. "큰형, 사실 그 영감탱이는 내 계책(計策)에 완전히 속아 넘어 갔 는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만 주점에서 딱 마주 치지 않았겠소? 그렇지 않았다면 감쪽같이 끝나는 일이었다구요." 흑천(黑天), 냉심(冷心), 제갈(諸葛). 이 세 소년들은 바로 얼마 전 오행살노군을 골탕먹인 바 있던 악 동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여 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헤헤! 그래도 그 영감에게서 오행독행신보(五行獨行神譜)를 뺏아 내는 일은 성공했어요." 제갈은 그렇게 말한 후 그만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상처의 고통 이 심해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일검사는 혀를 찼다. "쯧쯧! 철없는 놈들, 너희들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라. 그렇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렇다. 실상 오행살노군의 무공은 무림에서 절정고수에 속했다. 만일 그가 목궤를 잃어 버린 후 화가 치밀어 주점에서 그 독한 천 일취(千日醉)를 열 병이나 마시지 않았다면 귀가 잘리고 손가락이 끊어지는 일은 오히려 세 소년에게서 벌어졌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4장 춘야(春夜)의 회의(會議) -2 ━━━━━━━━━━━━━━━━━━━━━━━━━━━━━━━━━━━ 후원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후르륵...... 쩝쩝!" "와구와구!" 그윽하고 구수한 음식냄새 속에서 아홉 명의 아이들은 커다란 솥 단지를 중심에 놓고 맛있게 음식을 먹어댔다. 누가 보아도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어둠은 고즈넉하게 사당을 휘 어감고 있었으나 활활 기세좋게 타오르는 모닥불은 아이들의 천진 난만한 표정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헤헤헤......!" "호호호......!"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아이들은 음식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실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춥고 배고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동림서 원(東林書院) 출신의 학동들이었던 과거는 이미 오래 전에 지워진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일검사(一劍士)를 중심으로 한데 뭉쳐 그들만의 왕국 을 건설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검사를 하늘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어떤 아이들은 분명 일검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 꺼이 일검사를 대형으로 모셨다. 자신들에게 생의 목표를 심어 주 었으며, 무공과 여러가지 재간을 가르쳐 주었고,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이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검사는 모닥불에 비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어 린 아이는 설화(雪花)였다. 그리고 금장(金藏)과 흑천(黑天)이 열일곱 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 다. "후후후......!" 문득 일검사는 웃음을 흘렸다. "......?" 아이들은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일검사는 소매로 입가를 쓱 문지 른 후 말했다. "이제 너희들도 다 컸다. 그리고 이제 재산도 모일 만큼 모였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겠지?" 그 말에 아이들은 모두 존경의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검사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이제 우리들도 남들처럼 떳떳하게 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곳은 이제 너무 비좁다." 그 말에 아이들은 표정이 환해졌다. "그... 그럼 대형은 이사 가자는 거야?" 제갈이 흥분하여 묻자. "그렇다. 우리가 모은 돈이면 충분히 커다란 장원을 사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야......!" "야호!" 아이들은 기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일검사는 그들의 대형답게 위 엄있게 말했다. "너희들도 아다시피 지금 이곳 낙양에는 무림인들이 구름같이 모 여 있다. 그 이유는 숭산에서 천하군웅대회(天下群雄大會)가 열리 기 때문이다." 그 말에 아이들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잘못하면 그들의 주의를 끌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 은 조금은 피곤하게 될 거야." 일검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나는 강호(江湖)란 것이 어떤 것인가 알아보려 한 다. 그것은 우리들도 언젠가는 넓은 천하로 나가 마음껏 날개를 펼치며 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생각도 그렇지 않 으냐?" "......!" 그 말에 소년소녀들의 얼굴에는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묘한 설레임이었다. 그 순간 야망(野望)의 불꽃이 지글거 리며 가슴에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일검사는 힘차게 말했다. "이제 나는 세상에 나갈 참이다. 비록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무서 운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들이라고 무림에 나가 뜻을 펴지 말 란 법은 없다." 일검사의 두 눈에는 모닥불이 반사되고 있었다. 마치 눈에서 불꽃 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한다." 일검사는 문득 품 속에서 무엇인가 둘둘 만 종이뭉치를 꺼냈다. "이 며칠간 나는 줄곧 이것을 작성했다. 제갈, 이걸 좀 펼쳐봐 라." 그 말에 제갈은 두 손으로 종이뭉치를 받았다. 이어 조심스럽게 종이를 풀어 땅바닥에 펼쳐 놓았다. 아이들의 눈길은 일제히 그곳 으로 쏠렸다. "아......!" "야아!" 종이에 그려진 도면(圖面)을 본 순간 아이들은 모두 입을 크게 벌 리며 감탄과 흥분의 탄성을 발했다. "대형......! 언제 이런 것을......?" 제갈의 음성은 유난히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종이에는 상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 채의 장원(莊院)이었다. 그런데 보통 장원이 아니었다. 장원의 내부구 조는 물론이려니와 주위 삼마장(三馬場)까지의 모든 배치도가 완 벽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주변 환경은 물론이려니와 하다 못해 장원의 수목(樹木) 한 그루 한 그루의 위치까지도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도면을 보고 넋을 잃는 사이에 일검사는 싱긋 웃으며 말 했다. "벌써부터 생각해 두었다. 그 장원은 이곳에서 오십 리 떨어진 이 석촌(理石村)이란 곳에 있는 폐장이다. 본래는 관리가 살던 별장 이었는데 내가 이미 싸게 사두었다." "아......!" 아이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석촌은 본래 장인촌(匠人村)인데다 떠돌이가 많아 우리가 그곳 에 가더라도 별로 눈길을 끌지는 않을 것이다." 일검사는 도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몰두하고 있는 제갈을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장원 주위에는 죽림(竹林)이 있고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또 여 기저기 바위가 산재해 있어 그 주위에 구궁현현팔상대진(九宮玄玄 八相大陣)의 진법을 펼쳐 놓으면 나는 짐승조차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가 될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검사는 진법(陣法)에도 달통하고 있었던 것이 다. "제갈, 네가 관장하여 그곳에 진법을 설치하고 장원을 수리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은 금장(金藏)이 형제들을 통솔하도 록 하고...... 물건 구입하는 일은 냉심(冷心)이 맡도록 해라." "......!" 아이들은 무슨 특명을 부여받은 듯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일검사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눈을 아래로 내려깔 고 있는 흑의소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천맹(天盲)은 아이들이 무공 수련하는 일을 맡도록. 네 무공이 가장 높으니 책임지고 그 동안 모은 비급들을 모두 익히도록 해 라. 알겠느냐?" 장님소년 천맹은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소, 대형." 비록 어투는 차가웠으나 그의 음성 깊은 곳에는 일검사에 대한 신 뢰와 존경이 깃들어 있었다. 이때 설화가 놀란 듯이 물었다. "아니...... 큰오빠! 그럼 큰오빠는 함께 가지 않아?"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곧장 무림에 나갈 생각이다. 그러니 설화, 비비(秘秘), 진 주(珍珠), 너희들은 오빠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싫어! 나도 따라갈 테야......!" 설화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울상을 지으며 와락 일검 사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설화야. 너는 이제 다 컸는데 언제까지 어리광 부릴 셈이 냐? 저 봐라. 비비와 진주는 가만 있지 않느냐?" 비비와 진주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막 방심(芳心)에 눈을 뜨는 시기인 그녀들의 가슴에는 일검사의 존재가 이미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빠로서 그러나 지금 일검사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보다 도 훨씬 깊고 복잡한 것이었다. "자, 자! 울지 마라. 착하지. 내가 돌아올 때면 너에게 좋은 선물 을 많이 갖고 오마." "......." 소년소녀들은 모두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타닥... 화르르륵......! 모닥불은 계속 불꽃을 일렁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사당의 후원은 모닥불로 인해 뜨거운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가슴에는 불꽃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격동(激動)이었다. 아이들이 가슴에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격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림(武林). 일검사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그들의 가슴을 활짝 열리게 했던 것이다. 이제껏 어둠 속에서 묻혀 살던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목 표와 희망을 심어 준 것이었다. 낙양(洛陽)의 악동(惡童)들. 그들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지 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무르익어가는 어느 봄밤에 일 어난 일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4장 춘야(春夜)의 회의(會議) -3 ━━━━━━━━━━━━━━━━━━━━━━━━━━━━━━━━━━━ 대하풍운루(大河風雲樓). 그곳은 낙양의 중심가에 위치한 낙양제일의 주루(酒樓)로 보통 사 람은 근처에 가보지도 못할만큼 화려하고 값비싼 곳이었다. 따라 서 고관대부나 명문가(名門家)의 귀공자들, 아니면 부상(富商)들 만이 출입을 하는 곳이었다. 일검사는 대하풍운루를 향해 걷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은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요즘 대하풍운루에는 무림인들이 붐빈다지. 후후! 저곳으로 가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겠지.' 일검사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하풍운루를 향해 걸어갔다. 기실 그곳에 들어가기에는 그의 차림새가 너무나 허름했다. 아니 나 다를까? 문득 턱! 하고 그의 어깨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이봐! 어린 친구, 충고하겠는데 주루에 들어가면 나처럼 된다." 일검사는 느닷없이 들려온 탁한 음성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의 어깨를 잡은 사람은 그야말로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요, 신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이 자유분방하 게 바람을 쏘이고 있었으며, 때가 덕지덕지 낀 누더기 옷을 걸친 사오순(四五旬) 가량 되어 보이는 거지가 그를 향해 헤벌죽 웃고 있었다. 더구나 그 자의 왼쪽 뺨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시뻘겋게 찍혀 있었다. 필시 누군가에게 뺨을 세차게 얻어맞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히히......! 난 조금 전 너처럼 밥찌꺼기나 얻어먹으려고 들어갔 다가 이렇게 됐단 말이다." 거지노인은 누렁니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일검사는 그를 바라 보며 짐짓 이상한 듯 물었다. "이보시오, 내가 들어가면 왜 당신처럼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 말에 거지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봐라? 너나 나나 다 같은 거지가 아니냐?" 일검사는 입가에 신비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당신은 거지지만 나는 거지가 아니오." 이어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주루로 걸어 들어갔다. "어어? 저런......!" 거지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한편, 점소이(店小二)는 막 들어서는 손님이 남루한 차림의 소년 거지인 것을 보고 대뜸 입을 열어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거지자식아! 이곳이 어디라고...... 어......?" 그는 문득 바보처럼 표정이 변했다. 일검사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 었다. 그러자 그의 태도가 갑자기 싹 바뀌었다. 점소이 전이(田二)는 금세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굽신거렸다. "헤헤......! 난 또 누구시라고. 어서 오십시오, 은공." 점소이 전이. 그가 이러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낙양의 무법자 왕호 패거리에게 걸 려 죽을 뻔하다가 일검사 덕택에 살아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대하풍운루의 주인 허만백(許萬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 니 전이가 마치 생불(生佛)을 보듯 반가와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한 일이었다. "어서... 이리로." 전이는 연신 굽신거리며 그를 곧장 이 층의 가장 좋은 자리로 안 내해 갔다. 이때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거지 노인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어? 이상한데?' 그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용기를 냈다. "에라 모르겠다, 저 녀석이 들어갔는데 나라고...... 어디,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는 곧 가슴을 척 펴며 주루의 계단을 쿵쿵거리며 올라갔다. 그 러나 이때였다. "아니? 이 늙은이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나?" 막 계단으로 나오던 전이는 그를 발견하고는 냅다 달려오더니 두 손으로 확 밀쳐 버렸다. "아이쿠! 나 죽네!" 쿠탕탕! 쿵탕......! 거지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곤두박질치며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계단 아래를 몇 바퀴나 구른 끝에 그만 진 흙탕에 넘어져 온통 구정물 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한편, 비명소리에 돌아보던 일검사는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 다. '.......' 그는 자신 역시 한때 거지 못지 않게 불행한 처지였으므로 이런 광경을 보자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전이를 불렀다. "여보게, 그 사람은 내 친구이니 이리 모셔오도록 하게." 전이는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단번에 얼굴을 바꾸며 공 손히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이런......" 그는 재빨리 달려 내려갔다. 이어 흙탕물 속에서 아직도 어기적거 리고 있는 거지노인을 부축했다. "이거 제가 실례했습니다. 어디 다친 데라도?" 백팔십도로 달라진 전이의 대우에 거지노인은 잠시 어리벙벙한 듯 눈알을 굴리더니 곧 헛기침을 했다. "험험! 어서 안내나 하게." 이윽고 거지도 이 층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 니 일검사를 발견하고는 그의 앞자리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호기롭게 외쳐댔다. "이놈들아, 나도 돈이 있단 말이다. 연자탕(蓮子蕩), 칠보채(七寶 菜), 육포어(肉逋魚), 춘자교(春子嬌)...... 몽땅 가져 와라!" 그는 누렁니를 드러내며 마구 떠들어댔다. 전이는 그만 눈살을 잔 뜩 지푸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주방쪽으로 걸 어갔다. 이때 마침 대하풍운루의 주인 허만백이 나오더니 일검사에게 다가 와 허리를 바닥에 닿도록 구부리며 인사했다. "아이구, 나오셨습니까? 장사어른." "흥! 흥......!" 그러자 누렁니의 거지 노인은 마치 자신이 귀빈이라도 되는 양 연 신 콧방귀를 뀌며 거들먹댔다. 그 바람에 주루 안은 그만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거지노인의 꼴 사나운 태도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로 인해 손 님들이 일제히 코를 감싸쥔 것이었다. "에잇...! 더러워!" "어... 휴! 냄새......!" 마침내 손님들은 자리를 뜨더니 하나 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손님의 절반 쯤이 줄어들어 버렸다. 일이 이쯤 되면 장사 에 이만저만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만백은 조금도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주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요리를 내 오너라!" 이윽고 요리가 나왔다. 요리는 거지노인이 시킨 것 외에도 그야말 로 산해진미(山海珍味)로 대하풍운루가 자랑하는 요리란 요리는 줄줄이 나왔다. 요리가 나오자 거지노인은 체면이고 염치고 마치 아귀(餓鬼)라도 된 양 허겁지겁 두 손을 다 사용해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음... 음...... 좋아, 좋아......" 음식 찌꺼기가 사방으로 튀고, 온통 접시를 엎지르면서 거지노인 은 식사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일검사는 씨익 웃었다. 그는 조금도 역겨운 표정을 짓 지 않고 있었다. "컬컬! 자네는 정말 맘씨가 고운 사람이네...... 쩝쩝! 마음에 들 었어. 그러니 자네가 노부의 마을에 오면 최고의 미녀를 안겨 주 겠네." 그 말에 일검사는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 최고의 미녀란 누구요?" "음....... 우리 마을에서 사십 년간 제일미녀로 손꼽히는 손이랑 (孫二琅)이지. 내 마누란데 정력도 좋아서 대장장이 장대(張大)와 어물전 육춘(陸春)을 삼 일 동안 상대해서 마당으로 기어나가게 만들었다구. 쩝쩝......!" '맙소사!' 일검사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거지노인은 쉴 새 없이 음식을 입 속에 처넣으며 나불거렸다. 그런데 그의 말은 도무지 두서가 없었을 뿐더러 무슨 말이든 음식 과 침을 튀겨가며 했기 때문에 일검사는 연신 웃음을 참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이때, 이층 계단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그 자는 비쩍 마른 중년인이었는데 얼굴이 역삼각형이었으며 눈도 세모꼴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쉴 새 없이 좌우로 돌아가는 눈알 과 푸르스름한 입술 등은 어딘가 모르게 혐오감을 주는 인상이었 다. 그는 입구에 서서 잠시 자리를 둘러보더니 구석진 자리로 가 앉았 다. 그런데 그 자는 걸을 때 왼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가 신고 있는 왼쪽 신발의 밑창이 오른쪽 것보다 약간 높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모꼴 눈의 중년인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움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길이 멎은 곳은 반대편 창가 쪽 자리였다. 그곳에는 한 명 의 농부가 앉아 있었는데 비록 농복이지만 깨끗한 차림이었다. 그가 농부로 보이는 까닭은 탁자 위에 호미와 낫을 담은 바구니를 올려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부는 한 병의 술과 안주로는 화채를 놓고 있었다. 나이는 칠순 쯤 되어 보였는데 언뜻 보면 평범한 농부 같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전신에 은은한 기품이 어려 있었다. 특히 턱수염은 가슴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 청수한 느낌마저 주었다. "......!" 세모꼴 눈의 중년인은 농부를 발견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버렸 다. 이때였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애란(愛蘭)이 고년의 거기를 요렇 게...... 흐흐......" 일검사와 마주앉은 거지노인은 연신 음담패설을 나불거리고 있었 다. 손짓발짓해가며 주위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온통 침을 퉁겨대고 있었다. "헤헤...... 그리고 고년의 그것을 입으로 꽉 깨물었는데 말씀이 야......." ■ 등용문 제1권 제5장 냄새나는 신발 한 짝 ━━━━━━━━━━━━━━━━━━━━━━━━━━━━━━━━━━━ 이때, 이번에는 삼 인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이 층으로 올라왔 다. 그들은 이남일녀였다. 먼저 좌우의 두 사람은 백삼청년(白衫靑年)과 황삼청년(黃衫靑年) 으로, 그들은 얼굴이 준수하고 차림새가 호화스러웠다. 그들은 두 눈에 정광이 번뜩이고 몸매 또한 날렵하여 무림의 신진 고수다운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두 청년의 사이에 있는 여인은 일신에 눈처럼 흰 백의를 입은 미 소녀였는데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주루 안이 온통 환해지는 듯 했 다. 흰색의 바지와 역시 흰색의 피풍을 걸친 경장(輕裝) 차림은 그녀 의 날씬한 몸매에 꼭 맞게 붙어 있었다. 그로인해 한창 물이 오르 는 여체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차림이엇다. 거기다 백설보다 흰 피부와 갓 피어난 모란을 연상케 하는 얼굴은 가히 인세의 우물(尤物)인 듯 했다. 추수(秋水)같이 맑은 눈, 앵 두 같은 입술은 사내라면 누구나 군침을 삼킬 정도로 매혹적이었 다. 나이는 이제 십육칠 세쯤 되었을까? 그녀는 섬섬옥수에 비취선(翡 翠扇)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 그녀가 들어서자 주루 안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부신 듯이 백의 미소녀에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때 주루 안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자리는 무림인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거지노인의 등장으로 비었던 자리도 이제 거의 다 차버린 상태였다. 이남일녀는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으나 빈자리를 발견하지 못하자 황삼청년이 음성을 높여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빈자리가 없느냐?" 전이가 재빨리 달려가 웃으며 말했다. "없는댑쇼, 헤헤...... 괜찮으시다면 저기 저 자리에라도......" 전이는 손가락으로 창가에 자리한 일검사의 자리를 가리켰다. 그 자리는 이 층에서 가장 좋은 상석(上席)이라 자리가 다른 곳보다 넉넉했던 것이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던 황삼청년은 그만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넓다란 자리에 앉아있는 거지노인은 물론이려니와 그 앞 에 앉아있는 소년까지도 거지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더구나 전신에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거지노인은 사방으로 침방울을 튕겨가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아 닌가? "그래서 말이지, 히히...... 그놈은 오쟁이를 질 수밖에 없었지." 거지노인의 음담패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찌나 큰 소리로 얘기 하는지 좌중의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황삼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저 거지놈들과 같이 앉으란 말이냐?" 황삼청년의 말에는 잔뜩 부아가 치밀어 있었다. 그러나 거지노인 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넨 이름이 뭐지?" 일검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검사(一劍士)라고 합니다." 이때였다. 문득 구슬을 굴리는 듯이 예쁜 음성이 들렸다. "오빠, 할 수 없죠, 뭐. 저기라도 앉아 간단히 요기나 하죠." 이때 거지노인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흘흘흘! 거 정말 이름 한 번 괴상하군, 일검사라." 황삼청년은 막 뭐라 화를 내려다가 미소녀가 눈을 찡긋하는 바람 에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침내 이남일녀는 마지못한 듯 다가와 일검사와 같은 탁자에 합 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지노인은 그들을 본척만척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장내에 흘렀다. 한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부류의 인간들 이 합석하게 된 것이었다. 일검사는 미소 지으며 거지노인의 말을 듣고 있었고 거지노인은 연신 침방울을 튕겨가며 잡스런 얘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이남일녀는 음식이 날라왔으나 손도 대지 못한 채 거지 노인이 풍겨내는 냄새와 연신 사방으로 튀는 침방울에 신경을 쓰 느라 울상을 짓고 있었다. 한편,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세모꼴 눈의 중년인은 왠지 안절 부절하는 표정이었다. "흐흐...... 이것봐, 동생, 내 강호얘기 하나 해 줄까?" 거지노인의 말에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노인에게도 들을 말은 있지.' 거지노인은 그가 호응을 보이자 우쭐하며 말을 했다. "흐흐...... 강호에는 별의별 부류의 인간들이 다 있지. 그러나 고결하고 성결한 나으리들도 알고 보면 구린 구석을 하나 둘은 다 가지고 있단 말이야. 헤헷...... 반면에 손가락질 받는 자들 중에 는 의외로 성실하고 정의로운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 그러므로 겉 모습만 번들하다고 해서 다 영웅이 아니요, 겉모습이 더럽고 추하 다고 해서 다 별 볼일 없는 것은 아니라네. 흠......" 거지노인이 폼잡고 말하는 내용이란 은근히 자신을 빗대 말하는 것 같았다. "킥......!" 문득 백의소녀가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거지노인은 전 혀 듣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네. 강호에는 아주 몹쓸 놈이 한 놈 있지. 그놈의 이 름은 지둔서(地遁鼠)라고 하는 놈이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던 세모꼴 눈의 중년 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놈은 땅을 파고 어디든지 들어가지. 그래서 온갖 기진이보를 마음대로 훔치는 놈이네. 그런데 놈은 지난 십 년간 나타나지 않 다가 얼마 전 포양호에서 한 번 모습을 드러냈지. 그런데 마침 손 이랑이 그곳에 놀러갔다가 놈과 눈이 맞아서 하룻밤 운우지락(雲 雨之樂)을 나누었는데......" 여기까지 말했을 때, 세모꼴 눈의 중년인은 몰래 자리에서 일어서 고 있었다. 이때였다. 황삼청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 떡 일어서며 벽력같이 외쳤다. "이보시오! 그 더러운 주둥아리 좀 닥치지 못하겠소!" 그 바람에 주루 안의 시선은 온통 그곳으로 집중되고 말았다. 그 때 세모꼴 중년인은 살금살금 자리를 떠나 계단 아래로 자취을 감 추어 버렸다. 거지노인은 황삼청년의 호통에도 아랑곳 없이 계속 입에 침방울을 퉁겨내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 그놈의 그것이 바로 토끼새끼야! 토 끼...... 그놈은 마누라의 배 위에서 깔짝거리다가......" 세상에......! 거지노인은 자기 부인이 바람을 피운 얘기를 마치 남의 얘기하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때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비명이 터졌다. "아이쿠야! 나 죽는다!" 이제껏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일시에 터뜨린 황삼청년의 주먹이 거 지노인의 면상에 작렬하고야 만 것이었다. "와하하하하......!" "푸하하하......" 주루 안은 그만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아이구! 구야......! 나 죽네......!" 거지노인은 바닥을 뒹굴며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질러대었다. 사람 들은 더욱 배꼽을 움켜쥐며 폭소를 터뜨렸다. 황삼청년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 듯 씩씩거리며 노려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흥!" 문득 어디선가 차가운 코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어린 녀석이 어른을 때리다니 정말 잘하는 짓이로구나!" 그 말에 황삼청년은 흠칫하며 사나운 눈초리로 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 보았다. 그곳은 창가 쪽이었는데 한 명의 농부가 앉아 있었 다. 농부는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면상을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거지노인을 부 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추형(秋兄), 아직도 장난을 치시오? 지난 십삼 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구려?" 그 말에 거지노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당신이 누구요?" "헛헛헛......! 추형! 나요. 이 늙은이를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 요? 남악(南嶽)의 농사군을 잊으시다니 정말 섭섭하오." 그러자 거지노인은 벌떡 일어나며 넙죽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아! 구형(具兄)이시군요. 이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위부인 (魏夫人)께서는 안녕하시오?" 그러자 좌석에 있던 백의소녀를 비롯하여 백삼청년, 황삼청년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황삼청년은 완전히 얼이 빠진 듯 한 표정이었다. 이때, 백의소녀는 얼른 일어나 농부에게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그 유명하신 천하십룡(天下十龍) 중의 남악신농제(南嶽神農帝) 구병산(具兵山) 노선배님이 아니신가요? 후배 인사드리옵니다." 남악신농제(南嶽神農帝) 구병산(具兵山).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당금천하에서 가장 신비하고 배분이 높은 열 명의 기인을 통칭하는 말인 천하십룡(天下十龍)! 백 년래 우내삼현(宇內三賢)과 더불어 가장 걸출하다는 천하십룡의 일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장내는 크게 술렁였다. 이어 모두들 앞을 다투어 달려 나와 인사를 하느라고 바빴다. "허허!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오. 이 늙은이는 초야에 묻힌 몸이라 여러분의 대접을 받을 수가 없구려." 남악신농제 구병산은 겸손하게 손을 저어 중인들을 물리친 다음 거지노인의 앞에 앉았다.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쁜 애야, 너는 누구냐?" 그 말에 백의소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수줍은 듯 미소지었다. 그러자 양 뺨에 보조개를 살짝 나타났다. "소녀는 산동(山東)의 병기만상보(兵器萬像堡)에서 온 을주려려 (乙珠麗麗)라고 합니다." 남악신농제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백의검제(白衣劍帝)의 손녀이겠군?" "그렇사옵니다." 그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병기만상보(兵器萬像堡)라면 이른바 신주사대성가(神州四大聖家) 로 꼽히는 쟁쟁한 가문이 아닌가? 백 년전 천마이대마벌(天魔二大 魔閥)을 물리친 주축이 바로 우내삼현과 신주사대성가였다. 당시 병기만상보의 보주인 백의검제(白衣劍帝) 을주황(乙朱黃)은 가공할 검법으로 남북쌍천마(南北雙天魔)를 베어 일약 신화적 인 물이 된 기인이었다. 백리제천가(百里帝天家), 천벽신도부(天壁神刀府). 병기만상보(兵 器萬像堡), 촉중대당문(蜀中大唐門)을 일컬어 무림의 신주사대성 가라 했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무림의 성가(聖家)였다. 당금에 있어 그들 사 가의 영향력은 구파일방을 능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백 년 이래 그들은 침체일로를 걷고 있었 다. 그 이유는 그들의 초대가주인 신주사성(神州四聖)이 당년의 혈겁을 종식시킨 후 거의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왜 자취를 감추었는지, 실종된 것인지 아니면 폐관에 들어 간 것인지는 그 후로 숱한 추측과 의혹을 낳았으나 지금까지도 무 림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때였다. "킬킬킬...... 이제야 어른을 알아 보는군." 거지노인이 비로소 괴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5장 냄새나는 신발 한 짝 -2 ━━━━━━━━━━━━━━━━━━━━━━━━━━━━━━━━━━━ "허헛! 이 사람아, 왜 내 인사는 안받는 건가? 그래 위부인은 안 녕하시냐고?" "그... 물론이지. 이 사람, 마누라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가?" "헤헤헷! 왜 꺼내는지 모른단 말인가?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된단 말인가?" "아, 알았네, 알았어. 자네... 술 더할텐가?" 남악신농제는 왠일인지 쩔쩔 매고 있었다. 실상 그는 소문난 공처 가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인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황급히 꼬리 를 마는 경향이 있었다. "푸헤헤헤헤! 자넨 여전 하구만." "하하하하핫!"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였다. 백의소녀 을주려려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 다. "아! 그럼...... 이분 노선배님은 천하십룡(天下十龍)의 개신( 神) 추추양(秋秋陽) 노선배님이 아니신지요?" 그 말에 거지노인은 껄껄 웃었다. "으허허헛! 내가 선배님이란 소리를 다 듣다니......" 이때 황삼청년은 그만 안색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라! 천하십룡이면 그의 조사(祖師) 뻘에 해당되는 엄청난 무림의 대고 인이 아닌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낙양의 주루에 천하십룡 가운데 두 명이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들은 수십 년래 구름에 가린 듯이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한 장소에 두 명씩이나 나타난 것이었다. 황삼청년은 그만 전신이 식은 땀으로 푹 젖어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던 차 그는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 "노... 노선배님! 후배가 잘못했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 습니다. 제발 용서를......." 실로 주객(主客)이 전도된 풍경이었다. 이제 대하풍운루의 이 층 상석에는 남악신농제와 개신( 神), 그 리고 일검사가 앉아 있었다. 을주려려와 백삼청년은 옆자리로 옮 겨 앉게 되었다. 다만 황삼청년만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 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는 선배고인을 몰라보고 무례를 범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황하(黃河) 유역에서 유명한 철수방(鐵水幇)의 소방주 철수 비룡(鐵水飛龍) 악웅(岳雄)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개신이 일어서 라고 할 때까지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 남악신농제와 개신 추추양은 서로 전음(傳音)을 주고받고 있었다. (추형(秋兄), 보아하니 이 아이의 근골은 정말 뛰어났소. 광명천 (光明天)의 일천정영에 충분히 들만한 자질을 가졌소. 아니, 어쩌 면 그 이상일런지도 모르오.) (정말 그렇소. 이 노화자도 자세히 관찰했소. 와룡곡(臥龍谷)에 있는 일천 명(一千名)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무림의 최고기재들이 지만 이 아이와 비교하면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이오. 제기랄! 왜 이제야 발견했는지 모르겠소.) 그들의 대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득 남악신농제는 일검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참! 소형제의 이름은 무엇이오?" 일검사는 몸을 일으켜 읍했다. "소생 일검사라고 합니다." "일... 검사......?" 남악신농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이상한 이름이 었기 때문이었다. 두 노기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생각은 서로 비슷한 듯 했다. 그들은 일검사에 대해 궁금 한 점이 무척 많았다. 일검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으나 그 평범한 이면에는 추측할 길 없는 기도와 신비한 기운이 스며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기인은 다시 일검사를 자세히 관찰했다. 잠시 후 그들의 얼굴 에는 똑같이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으음! 범(虎)인 줄 알았더니 용(龍)이로다. 저 침착한 태도하며 안으로 갈무리된 눈빛 속에는 좀체로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느껴지는구나. 이 아이는 오성(悟性)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공을 익히기에 극히 뛰어난 기재(奇才)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대체 누구의 제자일까?'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펑! 하는 가죽북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멱따는 듯한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이쿠!" 뒤이어 한 가닥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흥! 쥐새끼 같은 놈이 이곳이 어디라고 호혈(虎穴)로 들어와 설 치느냐?" "크윽!" 다시 비명과 함께 계단 위로 하나의 인영이 내던져지듯 퉁겨 올라 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알고 보니 그는 얼마 전 몰래 사라졌던 세모꼴 눈의 중년인이 아 닌가? 그는 입과 코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가 떨어 진 곳은 바로 일검사의 옆이었다. 문득 그 자는 눈알을 굴리더니 간교한 빛을 띄었다. 휙! 갑작스런 일이 벌어졌다. 중년인은 번개같이 일어서더니 일검사의 멱살을 덥썩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소매 속에서 칼 을 꺼내 일검사의 목에 바짝 들이대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흐흐...... 움직이면 네 목은 없어질 테 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회풍차(廻風叉)의 신법을 펼치며 장내에 한 명의 거지청년이 떨어졌다. 그는 개신과 마찬가지로 봉두난발에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에는 정광이 흐르고 있었으며 약관의 나이에 자세히 보면 얼굴도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만면에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그는 중년인이 일검사의 목에 독이 발린 듯한 시퍼런 비수를 들이 대고 있는 것을 보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 옆에서 개신과 남악신농제가 태연히 얘기를 주고받 는 것을 보자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중년인을 향해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더 이상 오면 이 꼬마 놈을 죽여 버 리겠다!" 중년인은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칼을 더욱 바짝 들이댔다. "......!" 거지청년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개신을 쳐다보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듯 손가락을 비벼 대었다. 그런 그의 손가락은 절정의 외가기공(外家氣功)을 익힌 듯 두툼할 뿐 아니라 유백색 빛을 띄고 있었다. 이때 개신은 그를 힐끗 보더니 혀를 찼다. "끌끌! 저 놈 소풍개(小風 )는 힘만 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단 말야. 저런 놈을 제자로 두었으니 이 노화자의 앞길이 훤하다, 훤해!" ■ 등용문 제1권 제5장 냄새나는 신발 한 짝 -3 ━━━━━━━━━━━━━━━━━━━━━━━━━━━━━━━━━━━ 소풍개(小風 ). 일명 풍천신개(風天神 )란 별호를 지니고 있는 그는 개신의 제자 였다. 또한 개방( 幇)의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이기도 했다. 이때,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황삼청년, 즉 철수비룡 악웅은 눈을 슬며시 떴다. 그는 마침 세모꼴 눈의 중년인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지. 이때 저놈을 잡아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자.' 이렇게 생각한 악웅은 소리없이 일어서며 중년인의 뒤통수를 향해 벼락 같이 장력을 뻗었다. "뻗어라! 이놈!" 바로 그때였다. 그의 주먹이 막 중년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싶은 순간 도리어 그는 아이쿠! 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갑자기 발목이 무엇엔가 걸려 앞으로 자빠졌기 때문이었다. 그 바 람에 그는 면상을 바닥에 세차게 박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개신 추추양의 작품이었다. 그는 악웅이 벌떡 일어서 는 순간 들고 있던 술주발을 던져 그의 발목을 정확히 맞춘 것이 었다. "쯧쯧......! 철수방의 앞날이 훤하군. 자식 놈을 어떻게 가르쳤 기에 암습 따위나 하는가? 못난 놈......!" "......!" 악웅은 연거푸 대망신을 당한 꼴이었다. 그는 발목을 움켜쥔 채 아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수치감에 쥐구멍에라도 기어들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소동에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힐끗 돌렸다. 그것 이 실수였다. "후훗......!" 일검사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슬쩍 다리를 들어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버렸다. "왁!"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걷어차인 중년인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 다. 그 순간 일검사의 오른 손이 갈쿠리처럼 변해 그의 안면을 움 켜쥐었다. 그야말로 번개같이 빠른 동작이었다. 중년인은 아찔함을 느끼며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 고 말았다. "후훗! 허초(虛招)에 속았다." 한 가닥 비웃음과 함께 일검사의 손은 안면으로 날아가다 직각으 로 구부러지며 중년인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그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묘한 수법이었다. 중년인은 아차하는 순간에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일검사는 살짝 손을 비틀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인의 팔꿈치가 부러지고 말았다. "으아악!" 팔꿈치가 부러지는 고통에 중년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 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에 나무토막처럼 뒹굴자 장내의 사람들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변화였기 때문이었다. "오오......! 절묘한 만묘신각(萬妙神脚)에 변화무쌍한 오금용수 (五擒龍手)로다!" 남악신농제는 감탄성을 터뜨렸다. 만묘신각과 오금용수. 그것은 극히 평범한 재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단 일검사의 손에 서 펼쳐지니 이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절기 중의 절기가 되고 만 것이었다. 이때였다. "이놈! 소풍개(小風 )! 이리 오너라." 문득 개신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자 풍천신개는 고개를 푹 숙 이며 죄지은 듯 다가왔다. "이놈! 쥐새끼 한 마리 못 잡아 이런 소동을 일으키느냐?" 개신이 입에 거품을 물고 꾸짖자 풍천신개는 감히 대꾸조차 못했 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은 꼴이었다. 그 모습이 딱한 듯 남 악신농제가 끼어 들었다. "추형, 하하......! 정말 뛰어난 자질의 제자를 두었소. 일장(一 掌)에 강호에서 교활무비하기로 이름난 지둔서(地遁鼠)를 때려 잡 았으니 말이오." 그는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개방이 저같은 인재를 얻었으니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할 것이 틀 림없소." 그 말에 풍천신개는 비로소 기가 살아난 듯 어깨를 쭉 펴며 싱긋 이 웃었다. 그러나 개신은 도리어 더 크게 호통을 쳤다. "이놈! 뭐가 좋아 웃느냐? 썩 그놈의 쥐새끼를 메고 꺼져 버려 라!" "예! 사부 나으리." 풍천신개는 일대 풍진괴인의 제자답게 히죽 웃더니 중년인의 두 다리를 들어 어깨에 거꾸로 들쳐메었다. 알고보니 중년인은 바로 지둔서란 위인으로 강호제일의 신투(神 偸)였던 것이다. 지둔서는 볼상 사납게 거꾸로 매달린 채 질질 끌 려갔다. "좋아, 좋아! 그놈의 왼쪽 신발은 벗겨 이리 다오." 그 말에 풍천신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개신은 다시 버럭 호 통쳤다. "가져 오라면 가져오지 왜 꾸물거리느냐?" "예, 예......!" 풍천신개는 코를 감싸 쥐며 지둔서의 왼쪽 신발을 벗겨 조심스럽 게 넘겨 주었다. 한편 남악신농제는 일검사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자네, 사문(師門)은 어디인가?" 일검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는 사문이 없습니다. 그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약간의 호신무공을 익혔을 뿐입니다." 이때 백의 미소녀 을주려려는 아까부터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일검사를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일검사에 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멋있는 소년이야.......' 인간의 운명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이 짧은 생각 하나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변하게 될 줄은 꿈 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눈동냥으로 배운 수법으로 강호에서 재빠르기로 유명한 지 둔서를 단 삼초 만에 때려 잡았단 말인가?"' 일검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 것 아닙니다. 그건 그 자가 먼저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남악신농제는 너털웃음치며 말했다. "허허...... 어쨌든 놈은 모두가 어렵게 생각하는 골칫덩어린데 자네가 때려 잡았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야." 남악신농제는 좀체로 일검사에게 미련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는 잠시 눈을 가늘게 하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 "음, 혹시 자네 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나?" 일검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후훗! 소생은 이대로 만족합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 다." 그야말로 다부진 말이었다. 그 말에 주변의 무림인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만일 자신들에게 남악신농제가 그런 제의를 했다면 얼씨구나 하고 바로 엎드려 절을 할텐데 하는 심정이었다. "음, 쩝......." 남악신농제는 무척이나 서운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 신의 왼손 무명지에 끼고 있던 구리반지를 뽑아냈다. "흠! 어쨌든 이것도 인연인데 기념으로 이것을 받게나. 그리고 언 제고 시간이 나는 대로 남악(南嶽)으로 놀러와 주겠는가?" 일검사는 빙그레 웃었다. "호의니 받들겠습니다. 그럼." 그는 반지를 받아 품 속에 갈무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구리반지였다. 그러나 일검사는 그 반지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네 이놈! 아직도 가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이때 개신이 고함쳤다. "예! 예! 히히......" 풍천신개는 고개를 조아리더니 급히 계단으로 뛰어내려 갔다. 그 런 그의 어깨에는 지둔서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풍천신개는 계 단으로 사라지기 전에 힐끗 고개를 돌려 일검사를 향해 찡긋 눈짓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검사도 눈을 찡긋해 주었다. 그들은 은연중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개신은 엉뚱하게도 일검사에게 지둔서에게서 벗겨낸 냄새나 는 신발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것 봐, 동생. 이건 자네 것이니 자네가 갖게." "......?" 일검사는 어이가 없었다. 냄새가 지독한 신발을 받아서 무얼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신발을 받아 소매 속에 갈무리한 후 공손히 말했다. "고맙습니다. 노선배님." "고맙긴, 지둔서를 때려 눕힌 건 아우니 당연한 게 아닌가? 그건 그렇고, 자네 방금 뭐라고 그랬지?" 개신은 눈알을 한껏 부라렸다. 일검사는 어리둥절했다. "노선배님이라고......" "떽! 노부가 자넬 아우라고 부르는데 날더러 노선배라고 부르면 배분이 어찌되는 건가? 당장 호칭을 바꾸지 않으면 앞으론 자넬 쳐다보지도 않겠네!" "......!" 그 말에 주루 안의 무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개신이라면 백 년전에 활동하던 무림의 풍진이인이었다. 배분으로 쳐도 그의 신분은 당금의 구파일방의 장문인보다도 한 배는 높은 인물이었 다. 그런 그가 일개 거지소년에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하자고 하니 사 건도 그런 사건이 없었다. 일검사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곧 흔쾌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노형님." "핫핫핫......! 진작 그럴 것이지." 개신은 만족한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문득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헤헤...... 그 신발을 결코 얕보지 말게. 어쩌면 대단한 선물이 될지도 모르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일검사는 꾸벅 절을 했다. 실로 기가 찰 일이었다. 세상에 남이 신던 냄새나는 신발 한 쪽을 대단한 선물인 양 거들먹거리며 주는 사람이나, 그것을 고맙게 받 는 것이나 모두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냄새나는 한 쪽의 신발이 지니고 있는 깊 은 뜻을? 어쨌든 기인(奇人)에 괴사(怪事)가 연속되는 순간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6장 억세게 재수좋은 봄밤 ━━━━━━━━━━━━━━━━━━━━━━━━━━━━━━━━━━━ 밤이 이슥해졌다. 대하풍운루(大河風雲樓)의 후원에 위치한 한 상방(上房)에 백삼소 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꾀죄죄한 옷을 벗어 던지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게다가 목욕까지 한 뒤라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 었다. 말쑥한 차림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칼을 한데 묶어 어깨 너 머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모습에서는 야성미가 넘쳐 흐르고 있었 다. "......." 지금 그는 탁자 위에 냄새나는 신발 한 짝을 올려 놓은 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신( 神) 추추양으로부터 받은 선물 (?)이었다. 일검사는 신발을 내려다 보며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노형님이 이것을 준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검사는 신발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밑창 부분이 보통 신발보다 두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느껴지는 것이 있어 밑창을 뜯어 보았다. "역시." 밑창을 뜯어내니 과연 그곳에는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는 여러 겹 으로 접은 양피지(羊皮紙)가 감추어져 있었다. 물에 젖지 않도록 여러 번 말린 뒤 기름을 먹인 양피지였다. 그는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이게 무엇이길래 신발 밑바닥에 이토록 은밀히 감추어 두었 을까?' 그는 양피지를 펼쳐 보았다. '이게 뭐지?'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양피지에는 기괴(奇怪)한 문자들 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글자들은 어떤 것은 바로 쓰여져 있었 고, 어떤 것은 거꾸로, 또는 비스듬히 쓰여진 채 복잡하게 양피지 를 메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도저히 글자들을 연결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뜻도 알아 볼 수가 없다. 어찌보면 글씨 연습을 하기 위해 마구 갈겨쓴 낙서 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글자들을 살펴보던 그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온통 뒤죽박죽이로구나. 누가 장난치지 않고서야 이런 글를 쓸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일검사는 보통 소년과 달랐다. 그는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 식경이 지나도록 끈질기게 글자들을 살펴 보 았다. 과거 그는 귀동(鬼童)이란 호칭을 받던 영재였다. 따라서 학문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글자들을 아무리 연결시켜 해독해 보려해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수확은 있었다. 그것은 글자가 도합 일만자(一萬字) 라는 사실이었다. 일검사는 양피지를 내려 놓으며 중얼거렸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일만 개의 글자가 쓰여진 양피지를 이렇게 소중히 숨긴 것으로 보아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장보 도(藏寶圖)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공비급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양피지를 다시 접어 품 속에 갈무리했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연구하면 언젠간 알아낼 수 있겠지." 그는 밤이 깊었음을 느끼고 침상에 몸을 눕혔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그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으으윽......! 또 시작이군......!" 그의 안색은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삽시에 힘줄 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혈관이 팽창하면서 그는 몸을 뒤틀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특히 단전(丹田)으로부터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뭉치더니 혈관을 부풀리게 하면서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무섭게 팽창하는 것을 느겼 다. "으으음......!" 그는 신음을 흘리며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침상 위를 뒹굴었다.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벌써 몇 번씩이나 경험하는 고 통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 증상이 더욱 심했다. 그의 전신은 마치 불덩 이가 된 듯 달아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욕망(慾望) 이 이성(理性)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떻 게든 자신의 전신을 태우고 있는 열기를 풀어놓는 일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우연히 낙양 근교의 백마산(白馬山)에 올라 갔다가 비를 만 난 적이 있었다. 그때 비를 피하기 위해 한 동굴에 들어갔다가 한 쌍의 괴사(怪蛇)를 만난 적이 있었다. 괴사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몸체는 분명 뱀이었 는데 괴사의 머리통은 사람의 얼굴을 한 인면사(人面蛇) 였던 것 이다. 주먹만한 머리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는데 이마에는 육각형의 뿔이 돋아나 있었다. 몸체 또한 검붉은 비늘이 마치 철갑처럼 뒤덮고 있는 괴이무쌍한 뱀이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인면괴사는 교미(交尾) 중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지닌 인면괴사가 서로 교미하는 것을 발견한 일검사는 호 기심이 치민 나머지 돌을 던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 얼굴의 인면괴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 버렸다. 하필이면 정통으로 미간에 돌을 맞은 것이었다. 그러자 남자 얼굴의 인면괴사가 그에게 덤벼 들었다. 인면괴사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번뜩하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그의 목을 휘감아버린 것이었다. 일검사는 눈 앞이 아찔 했다. 그는 인면괴사를 움켜쥔 채 떼어내 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닥을 몇 바퀴나 뒹굴어도 인면 괴사는 더욱 그의 목을 조였던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비수를 꺼내 인면괴사를 찔렀다. 그러나 철갑처럼 단단한 비늘로 인해 상처 하나 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인면괴사의 미간을 찔렀다. 그러자 푹! 하는 소리와 함 께 비수가 꽂혔다. 인면괴사는 카악! 하는 괴성과 함께 입에서 시 커먼 피를 토해냈다. 그 피는 정통으로 일검사의 얼굴로 뿜어졌다. 엉겁결에 그는 인면 괴사의 피를 꿀꺽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 후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이틀이나 지난 후였다. 괴이하게도 인면괴사는 쭈글 쭈글하게 변해 바닥에 죽어 있었다. 나중에야 그는 괴이수리지(怪異獸理誌)란 고서를 통해 인면괴사가 음양독각인두사(陰陽獨角人頭蛇)라 불리는 천고의 영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그는 단전에 괴상한 뜨거운 열류(熱流)가 시 시때때로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약했던 열류 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증폭되며 최근에는 한 번 발작할 때마다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다만 발작이 지나간 후에는 내공(內功)이 크게 증진되는 것을 느 낄 수가 있었다. 다만 갈수록 곤란해지는 것은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욕정(欲情)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이성 으로 억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발작이 거듭될수록 고통의 증가와 함께 욕정도 더욱 강해 지고 있었다. 일검사는 이런 현상에 점차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실상 그가 사당의 아이들과 헤어져 강호로 나가려고 마음 먹은 것도 이런 이 유 때문이기도 했다. 발작이 일어날 때 그는 설화나 비비, 진주에게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 두려웠던 것이다. ■ 등용문 제1권 제6장 억세게 재수좋은 봄밤 -2 ━━━━━━━━━━━━━━━━━━━━━━━━━━━━━━━━━━━ "으으음......!" 일검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침상보를 휘감고 뒹굴었다. 이번의 발작은 이전보다 훨씬 심했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 했으며 그로 인해 코와 입으로는 연신 풀무질하듯 뜨거운 기운이 훅훅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의 아랫도리의 중심부는 터져나갈 듯이 팽창되 고 있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으으......." 그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환상(幻想)에 시달리고 있었다. 뇌리 에 여체의 환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무 여자라도 그의 눈 앞에만 있다면 당장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무서운 욕망이 활활 타 오르고 있었다. '으으... 잘했어... 동생들과 떨어져 있기를......' 그는 사타구니를 붙잡은 채 바닥을 굴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흐 르고 있었다. 이때였다. 똑똑....... 문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일검사는 그 소리를 듣 지 못했다. 똑똑똑....... 다시 두세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여전히 일검사는 듣지 못했다. 그러자 문이 조금씩 열리며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방 안 으로 들어섰다. "공자(公子), 안에 없나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청아한 음성을 발하는 주인은 다름 아닌 병기만상보(兵器萬像保) 출신의 절세미소녀 을주려려였다. "......?" 을주려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웅크리고 있는 일검사를 발견한 것이었다. "으으... 으......." 일검사는 그녀가 들어선 사실도 못느낀 채 여전히 잔뚝 웅크린 채 괴로운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을주려려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살며시 다가갔다. 여인 특유의 모성애가 발동된 것이었다. "공자, 어디 아픈가요......?" 그녀는 일검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 잠이 오지 않자 그와 대화라도 나눌까 하여 용기를 내어 방문한 것이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뻗어 일검사의 어깨를 만지며 다시 물었다. "소공자...... 왜 그러시나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일검사는 혼미중에 솜처럼 보드라운 여인의 손길을 느꼈다. 동시 에 여인 특유의 체향을 맡게 되었다. 그 순간 일검사는 마치 벼락 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홱! 하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 었으며 반쯤 벌린 입으로는 훅훅 뜨거운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 었다. "아......!" 을주려려는 달아오른 소년의 얼굴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주춤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때 일검사의 팔이 번개같이 뻗어 오더니 그녀의 가는 허 리를 낚아채며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앗! 공자......! 왜......?" 그녀는 크게 당황하며 급히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일검사의 팔힘 은 엄청났다. "헉헉......!" 그는 더운 입김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퍼부으며 다짜고짜로 입술을 덮어오는 것이 아닌가? "흡!"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불가항력의 순간에 그녀는 그의 뜨거 운 입술세례를 받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 는 것을 느꼈다. 일검사의 더운 입김을 자신도 모르게 들이켠 순간 정신이 혼미해 지며 힘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아......!" 그녀는 신음을 발하며 일검사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렸다. 혼미한 가운데 알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그녀의 전신을 짜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이 녹아나는 듯한 야릇한 느낌 속에 자신이 어떤 상황 에 놓여있는지 감각이 무뎌지고 말았다. 그 순간 하나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의 앞가슴을 덥썩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아... 안돼......!" 그녀는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가? 그 외침은 그녀의 입속으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뜨거운 물 속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무리 벗어나려 해도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그녀는 상대의 품 속에 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찌이익! 옷자락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일검사가 그녀의 백의를 사납게 찢 어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을주려려의 젖가슴이 막 솟아오른 달덩이인 양 여지없 이 노출되고 말았다. '안돼... 안돼!' 그녀는 마구 외쳐대며 몸부림쳤으나 역시 외침은 입속에만 웅웅거 리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무력해져 버렸 다. "으흡......!" 마침내 그녀는 눈을 꽉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옷은 어느새 발기발기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광폭한 짐승으로 변해버린 일검사는 그녀를 알몸으로 만들더니 거 침없이 덮쳤다. "으으......!" 일검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전신의 혈관이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으며 미칠 듯한 욕정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오직 그 의 뇌리에는 무엇인가 폭발할 듯한 감정을 풀어놔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을주려려는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육중한 무엇에 짓눌리 는 듯한 느낌과 함께 다리가 멋대로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검사는 완전히 한 마리의 야수(野獸)로 변해 버렸다. 어느 새 그는 걸치고 있던 옷을 활활 벗어붙이고 있었다. 그러자 보기보다 완강한 그의 몸이 나타났다. 그의 몸은 탄탄한 근육으로 잘 짜여져 있었다. 그 뿐아니라 그의 중심부는 강철처럼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을주려려의 체내로 파고 들어갔다. "아학......!" 을주려려는 입술을 딱 벌렸다. 뭐라 형언할 길 없는 고통과 파과 (破瓜)의 느낌에 마치 화살맞는 사슴인 양 부르르 전신을 경련하 며 자신도 모르게 온 힘을 다해 손톱으로 상대의 어깨를 할퀴어대 고 있었다. 한 가닥 뜨겁고 무지막지한 기운이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고 있었 다. 이제까지 한 번도 타인의 침범을 받은 적이 없는 내밀한 처녀 (處女)의 성지가 난폭자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으으으......!" 일검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내려는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 때마다 을주려려의 입은 딱딱 벌어졌으며 그녀의 물고기같은 동체 가 파드득거렸다. 을주려려는 때때로 눈을 크게 뜨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려 일검 사의 어깨를 깨물고 말았다. 흡사 괴물에 사로잡힌 듯이 그녀는 일검사의 포로가 되어 종내에는 발버둥 칠 힘마저 잃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이었을까? 처음에는 무서운 고통만을 느끼던 그 녀는 차츰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일검사의 동작 이 격렬해질수록 더해만 가던 고통이 어느 순간에 전신을 짜릿짜 릿하게 하더니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이제 그녀의 입에서는 간헐적인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신 음은 낮게 가라앉으면서 파도치듯 그녀의 전신에 번지는 야릇한 쾌감과 함께 동조를 이루었다. 구름(雲)은 비(雨)를 부르고, 한 마리 용(龍)이 비를 타고 승천 (昇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천상에서는 가락을 띈 노래소리 가 울렸다. 비를 흠뻑 맞은 대지는 이제 해갈의 기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간간히 번개가 치고 대지가 갈라지며 광란(狂亂)의 폭 우가 몰아치기도 했다. 마침내 성인(成人)의 문(門)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광란의 파도가 절정에 치솟은 순간 을주려려는 아득한 느낌을 받 으며 끝없는 침잠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 등용문 제1권 제6장 억세게 재수좋은 봄밤 -3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검사는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경험한 황홀한 꿈 속을 헤매다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이...... 이런......!" 그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그는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바로 아래 발가벗은 여인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크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도 벌거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여인 은 사지를 벌린 채 누워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일검사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다시 여인을 내려 보았다. 여인, 을주려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젖가슴이며 하체가 고스란히 일검사의 눈에 들어왔 다. 을주려려의 하체 은밀한 부위로부터 한 가닥 가느다란 혈흔이 흘 러 백옥같은 허벅지에 꽃잎같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일검사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태어난 이래 여자의 알 몸을 처음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이 큰데다 혈흔을 보자 그는 도무지 지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검사, 그는 아직 어렸던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그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음!" 갑자기 그는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단전이 뿌듯해지며 엄청난 기 운이 사지백해를 통해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이 말할 수 없이 상쾌해 지면서 온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구름 위를 둥둥 뜨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검사는 그 현상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때 갑자기 단전어림 에서 노도와도 같은 진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었다. 이어 그는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두 손을 모으고 운공하기 시작했 다.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연(奇緣)이었다. 기실 그는 무의식중에 음양독각인두사 의 피를 마시게 되었다. 그로인해 천 년을 묵은 음양독각인두사의 내력을 흡수했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완전히 융화되지 않다가 을주려려와의 정사로 인해 완전히 본신의 진기로 흡수된 것이었다. 쏴아아......! 무궁무진한 진력이 사지백해를 돌면서 기경팔맥을 노도처럼 질탕 했다. '......!' 일검사는 정신을 집중하여 진기를 하나로 이끌며 전신의 혈맥을 따라 일주천 시켰다. 그때였다. 갑자기 쾅! 하고 벼락이 치는 듯한 음향에 그는 하마터면 혼절할 뻔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원(天元), 천중(天中), 천정(天頂)이 일시에 확 뚫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밝아지며 가부좌를 튼 자세로 그는 둥실 침 상 위에서 석 자나 떠올랐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 속에서도 달하 고자 하는 생사현관(生死玄關), 임독양맥(任督兩脈)의 타통을 이 룩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천단지교(天丹之交)까지도 그대로 일통해 버렸다.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연을 맞이한 것이었다. "으음!" 일검사는 고승처럼 무상의 법열(法悅)을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 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물처럼 담담하고 유현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흥!" 차가운 코웃음과 함께 그는 뒷통수 옥침혈(玉枕穴)이 뜨끔! 하는 것을 느꼈다. 마침 일검사의 맞은편 벽에는 동경(銅鏡)이 걸려 있 었다. 동경 속으로 온통 눈물로 얼룩이 진 을주려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증오와 고통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비취 장식의 소도(小 刀)를 쥐고 그의 목을 겨눈 채 울고 있었다. 또르륵! 목의 피부가 베어지며 선렬한 핏방울이 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흑......! 치한,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을주려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독하게 내뱉았다. 일검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엇다. "흑흑......! 더러운 놈! 네놈이 색마인 줄도 모르고 호감을 가졌 던 것이 원통하다!" 을주려려는 보도를 쥔 손목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 만 죄책감에 휩싸여 탄식하고 말았다. "아아! 낭자...... 나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그는 당황할 뿐이었다. 뭐라 변명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지 않은가. "닥쳐라, 색마! 날 겁탈하다니...... 죽여버리겠다......!" 을주려려는 표독하게 외치며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것은 실로 괴상한 풍경이었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역시 벌거벗은 소년을 향해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예쁘장하게 솟은 가슴이 좌우로 흔들렸으며 그때마다 작은 젖꼭지가 놀란 듯이 화드득 떨고 있었다. 백옥을 빚은 듯이 아름다운 육체였다. 그러나 을주려려는 그저 애타게 협박만 할 뿐, 실은 어쩔 줄을 모 르고 있었다. 일검사 역시 눈 둘 곳을 몰라했다. 동경을 보면 을 주려려의 젖가슴이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약간 옆으로 비껴나 있는 바람에 눈길을 내리면 그녀의 아랫배와 여인 의 내밀한 그늘마저도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 그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흑흑......!"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만 더욱 서러운 흐느낌 이 귓전을 울릴 뿐이었다. 마침내 일검사는 눈을 떴다. 그러자 침 상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하고 있는 을주려려가 보였 다. 문득 그는 그녀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막 그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쳐...... 쳐다보지 마라......!" 을주려려는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알고 얼른 몸을 웅크 리며 젖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그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보도는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소저......." 일검사는 그저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신이 알몸인지도 모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직도 욕망을 다 채우지 못한 듯 기세가 죽지 않은 그의 한 부분이 그만 을주려려의 눈에 가득 들 어오고 말았다. "오...... 오지 마라......!"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며 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 다가 오지...... 마......" 그러자 문득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야......!" 그녀는 아랫배에 격통을 느끼며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소저......!" 일검사는 깜짝 놀라 체면이고 뭐가 가릴 경황도 없이 그녀를 덥썩 껴안고 말았다. 그는 을주려려의 바들바들 떠는 동체를 감싸안은 채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마시오...... 내가...... 내가 책임지면 되지 않겠 소......?" 그는 간신히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을 뚝 그친 을주려려는 눈물젖은 얼굴을 들었다. "저...... 정말...... 요?" 사실 그녀는 일검사가 싫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한없이 듬직하고 믿음직스런 일검사의 품에 안겨 있으니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며 안정감마저도 느낀 것이었다. 일검사는 내심 중얼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내 잘못이니......'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저만 좋다면...... 어디고 데리고 다니겠소." "그...... 그리 하시겠어요?" 을주려려는 눈물젖은 얼굴에 활짝 함박꽃 같은 웃음을 떠올렸다. 실로 놀라운 반응이었다. 언제 그렇게 울고불고 앙탈했느냐 싶게 그녀의 변화는 확연했다. 일검사는 그만 머리를 긁적이며 내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란 정말 이상한 동물이군. 금방 날 죽일 듯이 날뛰더니 이렇 게 확 변할 줄이야.' 그는 물끄러니 을주려려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선녀같이 아 름다운 여인이었다. 얼마전 음양독각인두사의 독기(毒氣)로 인해 그녀와 불의의 정사 를 맺을 때는 이성을 잃고 있어서 몰랐으나 이제 그녀의 벗은 몸 을 보고 있노라니 그는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려려...... 라고 했었소?" 그는 다시 응큼(?)한 생각이 들어 손을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 리칼을 만지며 물었다. "네....... 공...... 아니...... 사(士)...... 랑(郞)......" 그녀는 수줍은 듯 더듬대더니 그만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고 말 았다. "......!" 일검사는 갑자기 성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가슴이 뿌듯해져 을 주려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말했다. "려려, 걱정마시오. 이제부터는 이 일검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 소." "아...... 사......일랑(一郞)." 그녀는 사(士)란 말이 아무래도 어색하게 여겨졌던지 일랑이라 부 르며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실로 갈대처럼 변덕많은 여 심(女心)이었다. 이제 그녀는 앙칼짐은 어디로 가고 한 마리의 순한 양(羊)에 불과 할 따름이었다. "려려." 은근하게 들리는 일검사의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끈적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네......?" "음, 음......." "......?" 두 사람의 말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 들리는 소 리라고는 입맞추는 듯한 쪽! 하는 소리였다. "아이...... 또...... 음." 을주려려의 당황한 소리가 들리다가 다시 신음을 끝으로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어 살과 살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가쁜 숨소 리가 흘러나왔다. 봄밤은 짧았다. 어느새 동쪽 창문이 부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방 안의 춘사(春事)는 좀처럼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일검사. 천하에서 가장 불행(不幸)했던 과거를 지녔던 소년이 이 제는 천하에서 가장 운(運)이 좋은 소년이 되어 봄밤을 마음껏 즐 기고 있었다. 그는 청춘(靑春)의 마르지 않는 샘을 마음껏 들이 마시고 있었다.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열기를 식히려는지, 아니면 성인의 느낌을 탐닉할대로 탐닉하려는지 창문에 양광(陽光)이 눈부시게 내리쬐일 때까지 나올 줄을 몰랐다. ■ 등용문 제1권 제7장 지옥혈문(地獄血門) ━━━━━━━━━━━━━━━━━━━━━━━━━━━━━━━━━━━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화원의 화초들은 활짝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대하풍운루의 후원에 위치한 상방의 문이 슬며시 열리며 한 소년 이 걸어 나왔다. 아니, 이제는 청년이라 불러도 좋을 운좋은 사나 이 일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춘란(春蘭)과 백매화(白梅花)는 방긋 웃으며 그를 반기고 있었다. "......." 일검사는 뒷짐을 진 채 화원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간밤의 기연 (奇緣) 아닌 기연으로 그는 엄청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최소한 그는 한 순간에 일갑자(一甲子)의 공력이 증진되었다. 음 양독각인두사의 정혈(精血)이 고스란히 체내의 진기로 융화된 것 이었다. 그로 인해 시력과 청력 또한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 바람에 그는 화초 사이 흙 위를 기어다니는 개미의 숫자까지 도, 심지어는 다리까지도 환히 셀 정도였다. 어디 그 뿐인가? 수십 장 떨어진 주루로부터 들려오는 소음과 사 람들의 대화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후후......." 무엇을 생각했는지 일검사는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기소를 흘렸 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남녀 사이의 신비한 쾌락(快樂)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이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절간의 이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 은가? 실상 일검사에게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정력(定力)이 모자 랐다면 그는 벌써 색마(色魔)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으음, 그랬었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오성(悟性)과 지 력(智力)은 하루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생사혈관과 임독양맥, 천단지교까지 타동된 덕분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만자경(萬字經)의 비밀을!' 그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만자경(萬字經). 그것은 바로 일만 개의 글자가 적혀있는 양피지를 말하는 것이었 다. 그는 비로소 만자경의 비밀을 풀게 된 것이었다. '알고보니 만 개의 글자는 각각 사상오행팔괘구궁(四像五行八卦九 宮)의 변화와 정반육합세(正反六合勢)의 배열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니 지둔서가 몰랐을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다. 만 개의 글자가 어지럽게 뒤얽혀 있는 만자경이야 말로 글자를 진세에 따라 배열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을 파진(破陳)하 면 그 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흠흠." 일검사는 화원의 풀밭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나른한 봄이었다. 풀밭에 누워 백매화의 향기를 맡고 있으니 만사가 편안했다. 매화 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한결 더 화창해 보였다. 그러나 누가 보면 한가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였 으나 기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화창한 하늘에 만자경의 진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기억력을 더듬어 만자경의 글자를 하늘에 펼쳐 놓은 후 파진 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사 람들은 글자 수십 개 정도만 나열해도 금방 까먹을 것이다. 그러나 기연으로 인해 기억력과 오성이 좋아진 일검사는 차례로 일만 자의 글자를 나열하면서도 정확히 진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흠! 그렇지. 우주지간(宇宙之間)에서 가장 강한 힘은 뇌 (雷)...... 그리고 가장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힘은 바람 (風)...... 그리고 물(水)과 불(火)의 정반(正反)의 작용, 거기에 다 생명지력(生命之力)과 파멸지력(破滅之力)은 초자연의 법칙에 서 파생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일검사의 뇌리에는 만자경의 신비한 구결이 차츰 확연하게 깨달아 지고 있었다. "우주지기(宇宙之氣)를 흡수하여 인체(人體)의 혈리(穴理)에 따라 유통시키면서 그 힘을 가늘게 뽑아내면 생성(生成)과 파멸(破滅) 의 힘으로 작용시킬 수가 있다......." 일검사의 두 눈에서는 투명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안광이 뻗어 나 왔다. "미세하고 약한 힘을 실같이 뻗어 온갖 조화를 부리니 이것을 만 상지공(萬象之功)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일검사는 염두를 굴렸다. 그는 만자경에서 깨달은 신공의 이름을 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힘은 일종의 자기력(磁氣力)에 가깝다...... 그렇다면 자전기 (磁電氣)라 해야 함이 옳을까?" 문득 그는 무릎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만상자전기(萬象磁電氣)라 부르자." 만상자전기(萬象磁電氣). 그가 우연히 강호의 도적으로부터 얻게 된 무명신공(無名神功)은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훗날 그 신공이 무림사에 그의 존재를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리게 될 줄은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검사는 누운 채 계속 만상자전기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 는 차츰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문득 그는 말라죽은 매화나무 가지를 향 해 슬며시 중지(中指)를 뻗었다. 스슷......! 순간 보일 듯 말 듯한 미세한 금빛 광선이 손가락으로부터 실처럼 뻗었다. 그 광선이 매화가지에 적중한 순간이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그 가지는 말라 죽은 가지였다. 그런데 눈을 의심케 할만한 기적(奇蹟)이 벌어졌다. 죽어버린 매화가지에서 푸른 물이 돋더니 곧 새파란 순이 자라는 것이 아닌가? 방... 싯! 놀랍게도 죽은 가지 끝에서 눈부시게 흰 백매화가 피어났다. 그 순간 일검사는 벌떡 일어섰다. "성공이다!" 그는 희열에 들떠 부르짖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신 공이었다. 세상에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신공은 무수히 많다. 그 러나 이처럼 생명력을 갖고 있는 신공이란 실로 들어본 적이 없었 다.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신공을 일검사는 연성해 낸 것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7장 지옥혈문(地獄血門) -2 ━━━━━━━━━━━━━━━━━━━━━━━━━━━━━━━━━━━ 그들은 누가 보아도 부러움을 살 정도로 기막히게 어울리는 한 쌍 의 남녀였다. 남자는 헌헌미장부였으며 여인은 천계에서 잠시 하 강한 듯한 절세미녀였다. 그들은 정다운 모습으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동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일검사와 을주려려였다. 지금 그들은 숭산(嵩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약속대로 일검사는 을주려려를 데리고 낙양을 떠난 것이었다. 을주려려는 일행이었던 두 청년과 헤어졌다. 실상 그녀 역시 숭산 (嵩山)의 천하 군웅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중이었다. 두 청년은 중 도에서 그녀와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은연중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청년은 하룻밤 사이에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을주려려가 일검 사에게 보내는 뜨겁고 은밀한 눈빛 속에 담긴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남악신농제와 개신은 먼저 길을 떠났기에 두 사람은 오붓하게 단 둘이서 출발하게 된 것이었다. 뾰룡......! 뾰르르......! 호젓한 산로(山路)에는 이름모를 새울음소리가 청아하게 울리고 있었다. 한편 일검사는 길을 가는 동안에도 만상자전기를 계속 연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무공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었다. 다 만 그는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를 뿐이었다. 을주려려는 그에게 정표(情表)로 보도를 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 의 목을 베려던 비취빛의 작은 칼이었다. 취검(翠劍)이란 애칭이 붙어있는 보검은 비록 짧았으나 실상 그녀 의 가문인 병기만상보(兵器萬像堡)에 있는 천병지보(千兵之寶) 중 에서도 서열 십위 내에 드는 보검으로 단금절옥(斷金絶玉)의 신비 한 힘이 있는 것이었다. 취검을 정표로 받은 일검사는 보답으로 그녀에게 혈마사십구장(血 魔四十九掌)을 전수해 주었다. 그것은 십오 권의 지옥혈마비경 가 운데 있는 혈문의 절학이었다. 두 남녀는 즐겁게 밀어를 나누고 무공을 익히기도 하면서 숭산으 로 향했다. 이 며칠 동안 그들은 부부지간처럼 행동했다. 특히 일검사는 음양독각인두사의 정혈로 인해 보통사람보다 십배 이상의 절륜한 정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수시로 을주려려에 게 요구했다. 을주려려는 처음에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괴로웠으나 시간이 흐 르자 차츰 그녀도 여인의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 이곳에서요?" 부드러운 풀이 깔려있는 산로의 언덕에 잠시 쉬던 일검사가 가냘 픈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자 그녀는 귓불까지 붉히며 가늘게 말했 다. "후후...... 어떻소? 이런 곳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지 않소?" 일검사의 손은 슬그머니 탄력 넘치는 을주려려의 가슴 속으로 파 고 들어갔다. "아이......!" 을주려려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어 버렸다. 아무도 없는 산중의 언덕이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새소리 뿐이었 다. 일검사는 옷자락을 풀어헤친 을주려려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묻 고 있었다. 얼마만이던가? 이런 포근한 감정을 느껴본 것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을주려려 와의 인연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기를 이루게 했다. 일검사의 고독하고 야멸찬 인생에 을주려려는 그리운 모성(母性) 의 향기를 맡게 해주었고 야수(野獸)의 기질에 부드러운 인간애 (人間愛)를 되살리게 해준 것이었다. 일검사는 을주려려의 부드럽고 탄력있는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을주려려는 섬섬옥수를 들어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도 있었다. 그녀는 행복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데 문득 일검사가 고개를 번쩍 들며 물었다. "려려, 혹 무슨 소리 듣지 못했소?" "네......? 못...... 들었는데요......" 한참 달콤한 꿈에 젖어있던 을주려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더듬 거렸다. 그러나 일검사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쌍혈마신공(無雙血魔神功)으로 검(劍)을 부숴뜨리는 소 리요." 그는 그렇게 말한 후 그녀의 몸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봐야 겠소! 당신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어느새 일검사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무쌍혈마신공(無雙血魔神功). 그것은 그가 지닌 십오 권 무경에 들어 있는 신공 중의 하나였다. 을주려려가 뭐라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일 검사의 신형은 혈영충광소(血影沖光素)의 신법으로 허공으로 솟구 치더니 곧장 남쪽의 숲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일랑(一郞)....... 빨리 돌아오세요......" 을주려려는 풀어 헤쳐진 옷자락을 여미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 다. 당당한 무림명가의 도도했던 여장부, 그러나 지금 그녀는 사 랑의 노예가 되어버린 연약한 여인에 불과했다. 휙휙! 숲을 가로지르자 언덕이 나타났다. 일검사는 점점 더 확실한 음향 을 들을 수가 있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금속음과 처절한 비명소리 였다. '여러 명이 싸우고 있다. 그런데 무쌍혈마신공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가 언덕을 날아 넘는 순간이었다. 시야에 아늑한 풍경이 들어왔 다. 언덕 아래로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개울물은 맑지가 않았다. 핏물! 온통 시뻘건 핏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동시에 일검사의 후각으로 진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 일검사는 개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약 한 마장쯤 갔을까? 그는 개울가에 엎어져 있는 시체 한 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랍 게도 그 자는 허리가 끊어진 채 두 동강이가 나 있었다. 그 바람 에 내장이 흘러나와 개울물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시체는 일신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옷이었다. 일검사는 눈썹이 곤두섰다. 그의 눈은 시체의 소매 쪽으로 가 닿 으며 번쩍 신광을 발했다. 그곳에는 문양(文樣)이 수놓아져 있었 다. 그것은 다섯 개의 핏방울이 맺힌 듯한 형상으로 혈매화 한 송 이가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지옥혈문(地獄血門)의 사람이다. 그리고...... 오혈(五血)이면 문중에서도 절정고수인데......" 그렇다. 그는 지옥혈문주가 죽기 전 혈문의 조직에 대해 들은 적 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지옥혈검대(地獄血劍隊)의 대장(隊長) 혈수라 (血修羅)란 말인가?" 그는 은연중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른바 천마이대마벌(天魔二大魔閥)로 통하는 구천마왕교(九天魔 王敎)와 지옥혈문(地獄血魔門)은 백 년 전 중원무림에 대혈사(大 血事)를 일으켰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반목함으로 자멸했다. 만일 그들이 합심했더 라면 결코 삼현(三賢)과 사대성자(四大聖子)에게 멸문되는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 의해 구천마왕동(九天魔王洞)과 지옥혈마루(地獄血魔樓)가 무너진 후 양대마벌은 지하에 깊이깊이 숨어 버렸다. 그러나 지난 백 년간 그들은 명맥을 은밀히 유지했으며, 또한 끊 임없이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 구천마왕교는 거 력(巨力)으로 부활하며 마도일통(魔道一統)을 부르짖고 있었다. "지옥혈문의 마지막 충도가 죽었구나." 일검사는 시체의 품 속에서 붉은 빛의 혈옥패를 꺼내며 그렇게 중 얼거렸다. <혈검령(血劍令)> 혈옥패의 앞면에는 그런 글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한 자루 혈 검이 양각되어 있었다. 일검사는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혈마검대의 제이통령(第二統領)인 혈화수(血花手) 는......?" 중얼거린 순간 그는 신형을 번뜩 날렸다. 쉬아앙! 그는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자신도 모르게 피가 끓고 있었다. 그는 지옥혈문이 아직도 강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은연중 알고 있었으나 그들을 만난 적은 없었다. 이제 그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 고 있었다. 지옥혈검대의 제일통령 혈수라(血修羅)의 죽음은 구천마수(九天魔 手)에 의한 것이었다. 한눈에 일검사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구천마왕교와 지옥혈문은 숙적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의 마음 속에는 묘한 흥분과 함께 한 가닥 살의(殺意)가 일어나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7장 지옥혈문(地獄血門) -3 ━━━━━━━━━━━━━━━━━━━━━━━━━━━━━━━━━━━ 오 대 일(五對一). 이 불공평한 혈전(血戰)은 숲 속의 한 공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흑의노인(黑衣老人)은 한결같이 음침한 살기를 풍기며 한 명의 여인을 협공하고 있었다. 여인은 이십 세가 조금 넘었을까? 극히 요염한 인상을 풍기는 여 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날씬한 교구에 잔뜩 피를 뒤집어 쓴 채 악전 고투하고 있었다. 위잉......! 그녀가 연신 뻗어내고 있는 한 쌍의 혈옥수(血玉手)에는 날카로운 위력이 담겨 있었으나 다섯 명의 흑인노인의 합공에 연신 뒤로 밀 릴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마도(魔道)의 이단자들......!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여인은 앙칼지게 외치며 혈옥수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크흐흐흐흐...... 네년은 이제 갈 곳이 없다. 몸뚱아리가 아깝긴 하지만 혈문(血門)의 잔당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다!" 콰르르릉! 삼 인의 흑의노인이 펼치는 합벽장공에 여인은 입으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뒤로 연달아 일곱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그녀의 안색 은 밀납처럼 창백해지고 눈빛은 정기를 잃은 채 풀려 버렸다. "흐흐...... 어서 혈경박(血暻拍)을 내놓아라! 그것만 건네 주면 최소한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다섯 명의 흑의노인은 여인에게 육박해 갔다. "으으......!" 여인은 핏물을 줄줄 흘리며 뒤로 연신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조금도 굴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크크...... 어리석은 계집! 혈문의 마지막 고집통 혈수라도 죽었 는데 네년이 도망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파츠츠츠츳! 이번에는 두 자루의 도(刀)가 가공할 기세로 뻗어갔다. 두 명은 도(刀)를 사용했으며 세 명은 장력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듯 했다. "흥! 죽을지언정 혈문의 제자는 굽히지 않는다! 너희들처럼 표리 부동하지는 않다!" 스스슷! 여인의 신형이 신출귀몰해졌다. 그것은 혈문이 자랑하는 보법(步 法)이었다. 그러나 이미 역부족이었다. 여인은 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 다. "크하하하하하......!" 비웃음소리와 함께 폭음이 울렸다. "아악!" 두 자루의 도는 간신히 피해냈으나 뒤따른 삼 인의 장력을 정통으 로 얻어맞은 여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바로 그때였 다. "으하하하핫......! 혈문의 혈영미리보는 이렇게 해야 제맛이 나 지!" 문득 숲으로부터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흑의인들은 갑자기 한 가닥 광채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누... 누구냐!" 한 가닥 귀영(鬼影)이 파고들자 흑의인들은 아연실색했다. 동시에 낭랑한 빈정거림이 울렸다. "혈옥마라수(血玉魔羅手)의 진정한 위력은 바로 이거다." 돌연 흑의노인들은 눈 앞에서 한 쌍의 핏빛 장영(掌影)이 환영처 럼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숙슉슉......!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나 그것을 보았을 때 이미 그들은 혈장이 가슴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펑! "크... 아... 악!" 흑의인들은 참담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피하고 어쩌고 할 엄 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 은 방금 전 여인이 펼친 위력보다 최소한 수배는 더 강한 것이었 다. "으으으......!" 다섯 명의 흑의노인은 몇 장 밖에서 신형을 간신히 추스렸다. 그 들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스슷......! 한 백삼인영이 그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바로 일검사 였다. 일검사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누...... 누구신지요?" 여인은 나무둥치에 몸을 기댄 채 온통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검사는 그저 싱긋 웃어준 후 다섯 명의 흑의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확실히 밝혀라!" "으으...... 네놈은 누구기에...... 혈문(血門)의 절기를 그토록 능숙히 시전 하느냐?" "훗훗! 혈문절기를 알아보는 걸 보니 필시 구천마왕의 졸개들이겠 군?" 일검사는 비웃듯이 말했다. 동시에 일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여인의 삼십이혈(三十二穴)을 점혈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단 지혈케 하려는 의도였다. 그 광경에 흑의인들은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으으......! 탄...... 탄지혈통(彈指血通)까지 쓰다니......!" 이때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감격한 듯 말했다. "지...... 지존(至尊)! 지존이시군요! 드디어...... 나타나셨군 요!" "......?" 어리둥절한 것은 오히려 일검사였다. 그러나 그는 대꾸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자,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이것을 보고 자신있으면 덤비 고, 그렇지 않으면 달아나라." 우...... 웅......! 순간 그의 손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손바닥으로 좌측 십장(十丈) 밖의 숲을 가리켰다. 순간, 숲 전체가 온통 시뻘 겋게 물드는가 싶었다. 파스스스스......! 놀라운 일이었다. 숲 전체가 온통 시뻘건 혈수(血水)로 화해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헉......! 혈...... 혈마수(血魔手)다!" "으으으......! 혈영신공을 십성(十成) 씩이나 익혔다니?" "우우...... 그럼...... 지옥혈문의 지존(至尊)이 나타났단 말인 가?" 흑의인들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일검사는 피식 웃으며 말했 다. "뭐가 혈마수(血魔手)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이 당장 사 라지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 그러자 흑의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의혹을 느 낀 듯 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둘러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 었다. '보아하니 저 놈은 혈문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두 려워할 게 없다. 제깟 놈이 어미 뱃속으로부터 무공을 익혔다 해 도 우리 흑천오마(黑天五魔)보다는 약할 것이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눈짓을 주고 받은 후 서서히 일검사를 향해 좁혀들기 시작했다. "흐흐...... 애송이 놈! 참견한 게 죄다!" "크흐흐......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그들은 방금 전 일장으로 자신들이 낭패당한 것을 잊고 있었다. 일검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띄며 말했다. "곧 죽을지도 모르고 불을 향해 날아들다니, 너희들의 운명은 불 나방인가 보구나." 그는 손을 들었다. 우...... 웅! 일순 그의 손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어디 그 뿐인가? 땅도, 대기 (大氣)도, 온통 혈해(血海)로 화한 듯 온통 핏빛으로 덮이는 것이 아닌가? "허억! 진짜 혈마수(血魔手)다!" "다...... 달아나자!" 흑천오마는 그만 안색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혈마수(血魔手)! 그것은 오직 지옥혈문주만이 시전할 수 있는 극 마지경에 속한 마공이었다. 과거 구천마왕교주가 시전했던 천마수 (天魔手)와 더불어 이대마공((二大魔功)으로 알려진 개세의 절학 이 아니던가? 마침내 흑천오마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젖먹던 힘을 다 내어 각 각 다섯 방향으로 나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검사는 차 갑게 코웃음쳤다. "흥! 가더라도 빚은 갚고 가야지." 위이잉......! 시뻘건 혈기류(血氣流)가 다섯 방향으로 뻗었다. "크아아아악!" 혈기류가 스친 순간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아......! 피비(血雨)! 놀라운 일이었다. 다섯 명의 흑의인들은 분명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으나 혈기류가 스친 순간 허공 중에서 분시(分屍)되 며 피모래로 화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혈옥마라장의 위력이 이 정도였다니?' 한편, 넋을 잃은 것은 정작 당사자인 일검사였다. 그는 자신이 펼 친 일장의 위력이 설마 이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줄은 꿈 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실수했구나. 내 공력이 급증된 것도 모르고 십성(十成) 씩이나 끌어올려 시전했으니......' 그는 기분이 씁쓸해졌다. 바닥이 온통 시뻘겋게 젖은 것을 보며 그는 가슴이 스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첫번째 살인(殺人)인 것이다. 그는 애당초 흑의인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혈옥마라장의 위력을 잘 헤아리지 못 했기 때문에 피치못한 살인을 한 것이었다. 일검사는 온통 피로 얼룩진 장내를 돌아보며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였다. "으음......." 문득 가냘픈 신음이 들려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예의 여인이 나 무에 기대있다 모로 쓰러지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7장 지옥혈문(地獄血門) -4 ━━━━━━━━━━━━━━━━━━━━━━━━━━━━━━━━━━━ 숲 속에 한 여인이 풀 위에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그런데 여인은 앞가슴 옷자락이 활짝 열려 있어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고스 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지옥혈문의 최후의 인물인 혈옥선자(血玉仙子)였다. 그녀는 혈수라와 더불어 지옥혈문의 마지막 고수였던 것이다. "......." 일검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구 하기 위해 손을 써보았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던 것이다. '무쌍혈마진기(無雙血魔眞氣)를 흘려넣어 주었는데도 깨어나지 않 다니......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인데.......'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혈옥선자의 상세는 중했다. 따라 서 보통 방법으로는 그녀를 회복시키기가 불가능했다. '음양회혼합천술(陰陽回魂合天術)을 쓴다면 회생할 가능성은 있 다. 그러나 그것은......'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음양회혼합천술의 시술방법 때문이었 다. 이때, 혈옥선자의 얼굴에 검은 기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 니라 그녀의 젖가슴 한가운데 점차 검은 반점이 형성되는 것이 아 닌가? 그것은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일검사 는 다급해졌다. '할 수 없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 지 않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이어 혈옥선자 옆에 앉은 그는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옷은 여기저기 찢긴데다 피에 젖어있어 벗기기 가 쉽지 않았다. 찌익! 북! 할 수 없이 그는 그녀의 옷을 되는 대로 찢어 버렸다. 곧 그녀의 눈부신 나신이 눈 앞에 드러났다. 그는 혈옥선자의 하의를 벗기다 가 잠시 망설였으나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저 찢어내 버렸다.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의식을 잃고 있다고는 하나 혈옥선 자는 이십대의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는 여인이라고는 을주려려밖 에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혈옥선자의 육체는 을주려려와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였다. 을주려려는 막 소녀티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혈옥선자는 모든 것이 달랐다. 우선 두 개의 젖가슴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터질 듯이 팽 팽했다.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유실(乳實)도 마치 앵도처럼 뚜렷했 다. 어디 그뿐인가? 피부는 유지(乳脂)인 듯 매끄러웠으며 잘룩한 허리 아래로 확 퍼 진 둔부는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더욱이 배꼽 아래로 짙게 우거져 있는 비림은 그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할 정도로 아 찔한 느낌을 주었다. "......!" 일검사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그러는 그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 렸다. "의원의 마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시술은 실패다." 그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정력(定力)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따르지 못할 만큼 정순한 것이었다. 일단 마음 을 가라앉히자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졌다. 잠시 후 그는 음양회혼합천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혈옥선자를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마주앉게 했다. 마 주 보는 자세로 한 손은 그녀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에, 한 손은 그녀의 두 젖가슴 사이의 단중혈(月亶中穴)에 밀착시켰다. 이렇게 되자 혈옥선자의 알몸을 마주 껴안은 자세가 되었다. 일검사는 두 손을 통해 진기를 흘려 넣으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합쳤다. 그는 꼭 다물린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입으로도 진기를 흘려 넣었다. 가능한 장심을 힘껏 붙인 채 진기를 끌어 올리자 곧 노도와 같은 진원지기가 그녀의 세 군데 혈도를 통해 흘러들어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츰 혈옥선자의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 오기 시작햇다. 그러나 일검사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한 손은 여인의 잘록한 허리에 닿아있고 한 손은 그녀의 풍만하기 그지없는 젖가 슴 한가운데를 빈틈없이 붙이고 있었다. 게다가 입술로는 그녀의 입술을 포개고 있으니 남자인 이상 마음 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전 아래가 뜨겁게 달아오 르며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참자! 여기서 정신이 분산되면 둘 다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다.' 그는 힘껏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키며 진기를 불어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으음......!" 문득 여인은 신음을 발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동시에 차가웠던 몸 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혈옥선자의 손이 움직이더니 일검 사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 일검사는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혈옥선자는 무의식중에 그를 끌 어안은 것이었으나 그로서는 최대한의 인내로 욕념을 억누르고 있 었는데 자칫 평정이 깨지려 하고 있었다. '참자......! 흐트러지면...... 끝장이다.' 그러나 혈옥선자는 그의 고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신을 더욱 꿈 틀대고 있었다. 그것은 노도와 같은 진기가 그녀의 기경팔맥을 누 비며 일으키는 현상이었다. 일검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만상자전기(萬象磁電氣)의 활자결(活字訣)을......!' 그는 즉시 만상자전기의 구결(口訣)을 운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 도 용솟음치던 욕념이 눈녹듯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담담한 금빛의 서기(瑞氣)가 흘러나왔다. 일검사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우수를 움직여 여인의 젖가슴 바로 아래의 유근혈(乳根穴)과 옥당혈(玉堂穴)을 장심으로 마찰했다.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뜨거 운 열류가 흘러나왔다. 그 열류는 그녀의 혈맥을 타고 대하처럼 흘러 들어갔다. 이어 손 바닥을 손가락으로 바꾸어 연속해서 그녀의 요혈(要穴)를 찍기 시 작했다. 파파팟! 만상자전지기(萬象磁電之氣)의 신비무쌍한 활결(活訣)은 죽은 나 무에도 꽃을 피우게 하는 신비한 효능이 있었다. 그의 손은 어느덧 여인의 가장 은밀하고 민감한 회음부(會陰部)를 누르고 있었다. 만상자전기의 신비영험한 기운이 회음부를 통해 스르르 흘러 들어 갔다. "흐윽." 여인은 문득 신음을 발하며 상체를 뒤로 벌렁 젖혔다. 그러자 젖 가슴이 출렁하며 흔들렸다. 일검사는 다시 그녀를 끌어 당기며 입 술을 포갠 채 진기를 주입시켰다. "......." 하늘에는 구름이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이름모를 새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8장 천마삼세(天魔三歲) ━━━━━━━━━━━━━━━━━━━━━━━━━━━━━━━━━━━ "흑흑......! 지옥혈문(地獄血門)을 부흥시킬 지존이 언젠가 나타 나실 거라는 선문주(先門主)의 말씀이 정말이셨군요......!" 여인. 혈옥선자 설옥경(薛玉瓊). 그녀는 감격에 겨운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몰락한 천마 이대마벌(天魔二大魔閥) 중 지옥혈문의 최후까지 남은 전인이었 다. 그녀의 직위는 지옥혈검대의 제이총령(第二銃領)이었다. 지금 그 녀는 자신이 알몸인 것도 잊어버린 채 일검사의 앞에 부복하며 감 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이렇게 지존(至尊)을 뵙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 어요." 설옥경은 희열에 찬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일검사는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요? 나는 당신이 말하는 지존이 아니오." 그러나 설옥경은 고개를 흔들며 여전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흐흑......! 틀림 없사옵니다. 선문주께서 실종되시기 전...... 언제고 혈마수(血魔手)를 사용하는 분이 나타나시면 지존께서 강 림하신 것으로 알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일검사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내심 중얼 거렸다. '어쩔 수 없군. 지옥혈문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 데......' 마침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옷이나 입으시오." 사실 그는 설옥경이 계속 알몸으로 있는 것이 몹시 민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의복이 거의 걸레가 되다시피 했으므로 할 수 없이 자신의 장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러나 설옥경은 감동에 겨워 여전히 흐느낌을 그치지 않았다. "흑흑...... 정녕 본문(本門)의 앙복이옵니다. 이제 지존께서 출 세(出世)하셨으니 움츠러 들었던 혈문(血門) 과거의 영화를 되찾 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옥경은 사실 지옥혈문에 뒤늦게 입문하였으나 집념만큼은 누구 보다 강한 여인이었다. "지존의 성취로 보아 충분히 구천마왕교의 천마삼세(天魔三歲)를 능가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설옥경은 흥분하여 고개를 들고 말하는 바람에 어깨에 살짝 걸쳐 졌던 장포가 흘러내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아름다운 젖가슴과 아랫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도 깨닫지 못하 고 있었다. "천마삼세(天魔三歲)......? 그가 누구요?"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흥분된 분위기에 끌려들어 물었 다. 설옥경은 무한한 존경의 눈으로 그를 우러러보며 말했다. "본래 천마(天魔)와 혈마(血魔)는 일맥(一脈)이었으나 천 년전 반 목하면서부터 갈라졌습니다. 천마삼세는 천마수(天魔手)의 전인 중...... 지난 천 년간 세번째로 강한 위인이었기에 천마삼세라 불리웁니다. 그 자는 흩어진 구천마왕교도를 모아 대군림마맹(大 君林魔盟) 즉, 천마단(天魔團)을 세우고 천하마도를 모으고 있습 니다. 그러나 그 자는 본문의 숙적이기도 합니다." "......!" 일검사는 절로 안면이 경직되는 것을 금치 못했다. 비록 처음 듣 는 말이었으나 어쩐지 가슴에 보이지 않는 격동이 일어나고 있었 다. "그 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저만 아 는 사실로 제가 쫓기던 이유는 그 비밀을 탐지했기 때문입니다." 일검사는 흠칫하여 물었다. "두 개의 얼굴이라니? 무슨 뜻이오?" 설옥경은 문득 만면에 두려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 검사는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두려워할 것 없소. 주위 백장 이내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소. 그러니 마음놓고 말하시오." 설옥경은 그 말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저으이 믿음직스 러운 듯 일검사를 우러러보며 말했다. "실은 당금무림의 후기제일인(後期第一人)으로 칭송받고 있는 신 주제일룡(神州第一龍) 양천월(揚天月)이 바로 천마단의 단주이자 천마삼세(天魔三歲)입니다." "뭣이......!" 일검사는 전신에 스치는 전율과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을주려려를 통해 무림의 정세에 대해 많 은 것을 들었다. 특히 신주제일룡 양천월에 대해서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듣고 있었다.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양천월(楊天月)은 당금 정도무림에서 떠 오르는 태양(太陽)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불과 이십대 후반의 나이로 그는 이미 천하에 무명을 떨쳤으며 그의 인의군협의 기질 은 선배고인들의 위명을 능가하고 있었다. 오 년 전, 그가 수백 년간 골칫덩어리였던 변황사사천(邊荒四死 天)의 일원인 대막(大漠)의 혈사신궁(血砂神宮)과 동해(東海)의 십이군마무영도(十二群魔無影島)를 단신으로 찾아가 풍비박산 내 버린 쾌거는 이미 당세무림의 신화(神話)로 인구에 회자(膾炙)되 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곧 벌어지게 될 천하군웅대회에서 의백천(義白天)의 새로운 맹주로 손꼽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천마삼세(天魔三歲)라고?' 설옥경은 언뜻 공포의 기색을 드러내며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 자는...... 이중(二重) 신분으로 위장하여 백도를 장악한 뒤 천하를 삼키려 하고 있어요." 문득 그녀는 이를 갈았다. "흐흑......! 그 자에게 지난 오 년간 본문의 제자 오백이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아아, 지존의 강림은 너무 늦은 감이 있사옵 니다." 일검사는 잠시 생각하다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알겠소. 하지만 밝혀둘 일이 있소. 나는 분명 지옥혈문의 진 전을 받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혈문의 지존은 아니오. 다만......" 그러나 설옥경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꿇어 엎드린 채 일검 사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선문주께서는 분명 지존께 모든 것을 일 임하셨습니다. 그러니 지존이야말로 혈문의 승계자이자 천년전설 (千年傳說)로 내려오는 절대마통(絶代魔統)의 주인이심이 틀림없 사옵니다." 일검사는 그녀의 일방적인 말에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천년전설? 절대마통이란 또 무엇이오?" 그는 일말의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그것은...... 마맥(魔脈)의 일통(一統)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천 년 전 마왕도(魔王島)의 신화를 이룩하셨던 조사님의 유시에 나타 난 바, 당금에 이르러 양단되어 버린 이대마벌을 통일시키는 절대 마군주(絶代魔君主)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절대마군주(絶代魔君主)! 그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일검사는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는 설옥경의 말에 이제껏 느 끼지 못했던 포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절대마군주라...... 한 번 해볼만한 일이군.' 그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때, 오직 그만을 뚫어져라 우러 러 보던 설옥경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아아! 이제 되었습니다. 선문주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아 아......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지독한 마도의 정신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누선(淚腺)이 고장이라도 난 듯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선문주께서는 제게 혈경박(血暻珀)을 남기셨습니다. 지존께서 나 타나시면 드리라 하셨습니다." 일검사는 의아하여 물었다. "혈경박?" "그것은 한 장의 지도입니다. 그곳에 가시면 완전한 혈마수의 진 전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혈문의 지존이 되며, 또한 그곳에는 천 년 전 조사님께서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과 천 마십삼관(天魔十三關)을 남기셨습니다. 그곳들을 돌파하셔야만 진 정한 혈마수와 천마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만일 천 년 전 조사님께서 좌화하신 후 지옥혈마제(地獄血魔帝) 와 구천마황(九天魔皇) 두 분이 싸워 양패구상하지 않았다면 천하 는 이미 마도천하가 되었을 것입니다." 설옥경은 빨개진 눈으로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천마삼세는 이미...... 천마십삼관을 돌파하였 습니다. 지존께서는 어서...... 지옥십삼관으로 드셔야 합니다." 이때, 문득 그녀는 일검사의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 다. 그녀는 어리둥절하여 그의 눈이 닿는 곳으로 시선을 내려보다 가 깜짝 놀랐다. "......!" 설옥경의 얼굴은 그만 홍시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모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 그녀는 황급히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리고 무릎을 오므렸다. 그러 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더욱 고혹적일 뿐이었다. 일검사는 그만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이때, 설옥경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입가에 한 가닥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지존이시여! 저는 지존의 종이옵니다. 절 어떻게 하셔도 좋습니 다. 마음대로 하셔도 좋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사실 설옥경의 나이 는 이미 여인으로써는 한창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이십대 중반 의 나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청춘(靑春)이 뭔지도 모른 채 오직 혈문의 보존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젊고 출중한 지존의 앞에 있는 그녀의 마음은 뒤늦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존, 저는 그저...... 지존의 곁에만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옵니다.' 설옥경은 전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아직 순결한 처녀였 다. 처녀의 몸으로 그녀는 자신의 뜻을 감히 표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가슴의 떨림을 안고 고개를 푹 떨굴 뿐이었다. 이때 땅에 떨어졌던 장포가 살며시 그녀의 어깨에 얹혀졌다. 일검사는 장포를 덮어주며 몸을 돌리고 있었다. '......!' 설옥경은 왠지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입술을 잘근 물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어 딱! 하고 그녀는 무엇인가를 깨 물었다. 그녀는 하나의 호박색 구슬을 손에 뱉아내며 말했다. "여기...... 혈지도(血地圖)가 있사옵니다. 천녀... 죽음으로 지 킨 것이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혈경박을 바쳐올렸다. 일검사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에는 두 쪽으로 깨어진 호박빛의 구슬이 놓여 있었다. 구슬 속에는 여러 겹으로 접은 얇은 양피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 그것을 받는 순간 일검사의 눈길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장포 속 으로 갔다. 을주려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풍만한 젖가슴 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음." 일검사는 혈경박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때였 다. 고의인지 아니면 기운을 잃었음인지 설옥경은 비틀하면서 그 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아......" "왜 그러시오?" 일검사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끌어 안았다. 설옥경은 그의 품 안에서 살며시 눈을 뜨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지존..... 저는... 지존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젖먹던 용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 일검사의 의지는 그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력 넘치는 여체를 강하게 끌어안고 말았다. "아아......!" 설옥경은 온몸이 녹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사실 일검사는 음양독각인두사의 정혈로 인해 남다르게 뜨거운 피 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보다 십배 이상 절륜한 정력 (精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설옥경에 대해서 치미는 욕망을 벌써 참을 만큼 참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의지도 설옥경의 한 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혈옥선자 설옥경의 뜨겁게 달아오른 여체를 안은 채 넘어졌 다. 그의 얼굴이 탄력 넘치는 젖가슴에 파묻혔다.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오직 펄펄 끓어오르는 정욕을 발산하는데만 몰두할 뿐이었 다. "지... 존......" 천지는 고요했다. 하늘에는 뭉개구름이 둥실 떠가고 있었다. 문득 어디에선가 산새가 푸르륵거리며 날아올랐다. 본의 아니게 혈문(血門)의 지존이 된 일검사, 그리고 그에게 자신 의 모든 것을 바치려는 집념의 여인 설옥경은 한 덩이가 된 채 무 르익어가는 봄의 열기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8장 천마삼세(天魔三歲) -2 ━━━━━━━━━━━━━━━━━━━━━━━━━━━━━━━━━━━ 대천산(大天山). 장엄무비한 산세를 가지고 있는 대천산은 오랜 세월동안 중원(中 原)의 지붕으로 일컬어 졌다. 억만년(億萬年)을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만년빙설이 연봉(連峰)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아스라히 운해 (雲海)가 장엄하게 펼쳐진 풍경은 태고(太古)의 엄숙함을 느끼게 했다. 휘리리리링......! 만년(萬年)의 설풍이 한 빙봉을 스친다. 봉우리의 정상에 일남이 녀(一男二女)가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계(天界)에서 하강한 듯 수려절미한 용모를 지 니고 있었다. 남자는 장대(長大)하고 훤칠한 미장부(美丈夫)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직도 치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소년이었으 되 그에게서는 사나이의 야성적(野性的)인 매력이 물씬 풍겼다. 그는 일신에 백삼(白衫)을 걸쳤으며 특히 진한 눈썹과 강열한 눈 빛이 인상적이었다. 일검사였다. 그의 좌측에 서 있는 백삼미녀는 을주려려였다. 우측 에는 타는 듯이 붉은 홍의(紅衣)를 걸친 이십대 가량의 요염한 미 녀였는데 그녀는 다름아닌 혈옥선자 설옥경이었다. "하하하......! 과연 장엄하구나. 중원천하의 지붕인 대천산맥(大 天山脈)답군." 일검사는 웅후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설옥경의 간곡한 당부 때문에 숭산 천하군웅대회로 가려던 일정을 바꾸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혈경박(血暻拍)에 숨겨진 혈지도를 따라 지옥십삼관(地獄十 三關)에 들기 위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본래 일검사는 단신으로 오려 했다. 그러나 을주려려가 한사코 그 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 여인을 대 동하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파라라라락......! 모진 삭풍에 그들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렸다. 그들은 모두 얇은 홑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 다. "이곳이 틀림없어요!" 설옥경이 말했다. 일검사가 펼치고 있는 혈지도에는 한 폭의 그림 이 그려져 있었다. 천산산맥의 웅자와 함께 붉은 선(線)이 종횡으 로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천산의 한가운데였는데 혈지도에 나타난 지형과 똑같은 곳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봉우리 사이를 휘감고 있는 풍경은 평생에 걸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절경이었다. "바로 저곳이에요." 설옥경은 한 곳을 가리켰다. 두 개의 칼 끝 같은 봉우리가 안개 사이로 아스라히 보였다. 그런데 귀기(鬼氣)스런 운무에 휩싸인 봉우리 양끝으로 하나 가느다란 철삭(鐵索)이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여간 주의해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양쪽 봉우 리 사이는 약 삼백장으로 그 아래는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이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바로 저곳이오."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두 여인을 옆구리에 끼더니 신형을 날렸 다. 슈우욱......! 금리도천파(金鯉倒穿波)에 이어 충소혈영전(沖소血影電)의 절정신 법을 발휘하여 그는 무려 사오십 장씩 날아 올랐다. 잠시 후, 한쪽 산봉우리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들은 도끼로 찍어낸 듯한 절벽 끝에 하나의 철삭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철삭의 굵기는 고작 새끼손가락 정도였다. 그 끝은 허공으로 뻗어나가 자욱한 운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위잉...... 위위잉......! 바람에 진동을 받은 철삭이 기괴한 울음을 토해냈다. 일검사는 가 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혈지도에 의하면 양쪽 봉우리를 연결하는 철삭을 지옥교(地獄 橋), 또는 지옥대로(地獄大路)라고 하였소. 그것은 이 절벽 사이 에 일명 지옥풍(地獄風)이라 불리우는 돌개바람이 불기 때문이 오." 이어 그는 두 여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철삭을 밟고 건너려면 두 가지 절공(絶功)을 동시에 발휘해야 하 오. 첫째는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철삭 이 끊어질 것이오." 일검사의 말에 두 여인은 만면에 공포의 빛을 띄었다. "두번째는 철삭과 몸이 일체가 되도록 중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흡인력으로 철삭을 발바닥으로 빨아들여야 만 하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풍에 날아가 절벽 아래로 떨어 질 것이오." 을주려려와 설옥경은 그 말에 울상을 지었다. 그녀들에게는 그만 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검사는 그녀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 드리며 웃었다. "하하, 안됐지만 이곳에서 기다려야겠군. 나 혼자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오." 그 말에 두 여인은 금세 눈시울이 빨개지고 말았다. 모두 금방 울 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이크...... 이거 꾸물거리다간 일 나겠군.' 일검사는 급히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오. 그동안 그대들은 혈마비전(血魔秘 傳)을 열심히 연마하시오." 일검사는 이미 그녀들에게 혈마비전을 건네준 바가 있었다. "자, 그럼." 두 여인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일검사의 몸이 날아갔다. 그의 신형은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가느다란 철삭 위에 발바닥이 닿을 듯 말 듯 유지하면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안개 사이로 파묻혀 들어갔다. "일랑......!" "지존!" 두 여인은 안타까운 음성으로 부르며 두 뺨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 다. 비록 일검사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앞날이 얼 마나 험난할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두 여인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검사에게 여인으로써의 모든 것 을 바쳐왔다. 이제 그녀들은 일검사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 가 된 것이었다. "제발...... 지옥십삼관을 돌파하고 하루 속히 돌아와 주세요. 그 동안 저희들은 이곳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겠습니다." 설옥경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을주려려도 안타까운 눈으로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 일검사의 모습을 그리며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안은 채 뭐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8장 천마삼세(天魔三歲) -3 ━━━━━━━━━━━━━━━━━━━━━━━━━━━━━━━━━━━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렸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태는 천하군웅대회가 개최된 숭산 태실정 에서 벌어졌다. 중원무림의 정도 세력의 부흥을 위해 만천하의 이목이 집중된 가 운데 벌어진 천하군웅대회가 아니던가? 그런데 실로 믿어지지 않는 대참사가 태실정을 온통 피로 물들이 고 말았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통곡(痛哭)할 만한 비극이었다. 정도무림을 회생시키려는 의백천(義白天)의 꿈이 산산조각나고 만 것이었다. 태실정은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되고 말았다. 뉘 알았겠는가! 애당초부터 의백천의 맹주를 선출하기위한 천하군웅대회는 가공할 음모였던 것이다. 사실 군웅대회는 차기 정도무림의 기둥으로 불리우는 신주제일룡 (神州第一龍) 양천월(揚天月)을 의백천의 맹주로 내정하고 있었 다. 그런데 어찌 알았겠는가? 그가 바로 대음모의 주동자(主動者)였던 것이다. 그의 실제 신분은 마도의 총연합체인 대군림마맹(大君臨 魔盟)의 맹주이자 천마단(天魔團)의 단주(團主)였던 것이다. 이 가공할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태실정이 혈세(血洗)한 후 였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룬 가운데 정도 무림인들 은 몰사하다시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이자 동료로, 사형(師兄)이자 사제(師弟)였 던 기라성 같은 백도무림의 고수들이 느닷없이 검끝을 돌려 의백 천의 무림인들을 쳤던 것이다. 숱한 영웅이 채 대항조차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끊어진 수급들이 무수히 나뒹굴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시체가 되어 뒹굴고 말았다. 천하군웅대회가 끝난 직후, 구파일방(九派一 )이 봉문(封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 가공할 일은 신주사대성가(神州四大聖家)가 잿더미로 화했다 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정도인들은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강호 도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마도천하(魔道天下)! 천 년 이래 이런 치욕은 없었다. 암흑이 있으면 광명이 있고, 그 늘이 있으면 양지(陽地)가 있기 마련이다. 대자연은 음양(陰陽)의 섭리 속에 윤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림은 이제 한 가지 철칙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무림 곳 곳에서 정도무림의 씨를 말리는 도륙의 혈선풍이 일어났다. 남칠 성 북육성의 수백 개 문파가 문을 닫아야 했으며 그들의 문루에는 대군림마기(大君臨魔旗)가 걸리게 되었다. 암흑천하(暗黑天下)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대군림마맹에 항거 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록 아직은 이란타석(以 卵打石)에 불과했으나 그 동안 숨어있던 은자들과 무림기인들이 속속 나타나 흩어진 백도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의 희망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천하십룡(天下十 龍)이었다. 그들은 태실정의 군웅대회 이후 모두 실종된 것이었 다. 그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백도인들은 그들이 생존 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정도무림에 광명을 던진 하나의 혈맹단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동심맹(同心盟)이 그것이었다. 도탄에 빠진 무림정기를 회복하기 위해 동심(同心)으로 뭉친 단체 는 이제 백도무림인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다만 동심맹주(同心盟主)가 누구인지, 동심맹의 중심인물이 누구 인지, 또한 동심맹이 어디에 있는지...... 모든 것은 극비에 싸여 있었다. 어쨌든 동심맹의 등장으로 백도무림의 힘은 하나로 집중되고 있었 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심맹의 힘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결국 동 심맹은 과거 의백천보다 훨씬 강한 단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군림마맹의 마도인들을 보는 대로 주살하기 시작했 다. 동심맹의 힘은 점점 급성장하면서 이제 무림은 대군림마맹과 동심맹의 양대산맥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소식이 심심치 않게 무림에 나돌고 있었다. 그것은 오 백 년 전 천마이대마벌을 평정했던 천외도(天外島)의 인물들이 중 원무림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설이었다. 바야흐로 중원무림은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9장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 ━━━━━━━━━━━━━━━━━━━━━━━━━━━━━━━━━━━ 대천산(大天山). 팔만사천 가닥의 지맥(地脈)이 뻗어 대중원을 형성했다는 고사(古 事)를 갖고 있는 천하대산,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절곡 아래의 지하계에서 참담한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으으......! 혈마신공(血魔神功)을 십성(十成)까지 익혔는데도 십관(十關)을 돌파하지 못하다니......!" 지하 수백 장 밑, 그곳에 긴 동혈(洞穴)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는 열세 개의 석부(石府)가 축조되어 있었다. 인간이 아닌 신(神)이 다듬은 듯한 석부였다. 지금 그곳의 열번째 석부에서 괴로운 음성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 다. 그것은 한계상황과 싸우는 한 인간의 음성이었다. "크으윽......! 지옥제구관(地獄第九關)은 쉽게 통과했는데 십관 (十關)에서 좌절되다니......" 콰르르르르......! 암동으로는 바위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한 무서운 풍력(風力) 을 지닌 한풍(寒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온통 산발한 괴인이 덜덜 떨며 앉아 있었다. 처절한 신음은 그의 얼어터진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육면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빙굴(氷窟)이 었다. 천장은 물론 벽, 바닥까지도 두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얼음이 결빙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골을 쑤시는 듯한 냉풍이 천장의 숭숭 뚫린 구멍으 로부터 불어나오고 있었다. "으으으......" 괴인의 전신에는 살얼음이 덮여 있었다. 머리칼, 수염, 의복까지 모두 얼음으로 씌워져 있었다. 다만 은은한 붉은 기운만이 옅게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붉은 기운은 미약해지고 있었다. "크으, 이제 더이상 버틸 기력이 없다. 조만간 빙백풍마력(氷魄風 魔力)에 의해 얼어터져 죽을 것이다." 괴인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일검사였다. 지금 그는 지옥십삼관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동안 구관은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제십관에 이르러 좌절하고 있는 중이었다. "혈마신공을 연성하기 위해 오늘까지 한시도 잠을 잔 적이 없었건 만...... 이까짓 한기를 견디지 못하다니......" 그는 지옥혈문의 진전을 얻은 후부터는 거의 잠을 잔 적이 없었 다. 혈마신공을 연공하는 것으로 잠을 대신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빙백풍마력은 수백 년의 빙설지기가 뭉쳐 형성된 것으로 그 어떤 신공으로도 대항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차츰 그의 몸을 미약하게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이 스러져 갔다. 반면 일검사의 몸을 뒤덮은 얼음은 점점 더 두꺼워져만 갔다. 만 일 그 상태로 일각만 진행된다면 필시 얼음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 틀림없었다. "아아...... 절대마군주(絶代魔君主)가 되기는 커녕 이곳에서 얼 음덩어리가 되다니......" 일검사는 절망의 탄식을 불어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싸던 혈마진기는 소멸되어 버렸다. 그러자 얼음은 급속도로 두터워졌 다. 그로 인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안돼......!'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가물거리는 의식과 자꾸만 쏟아지는 잠이 그를 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의 뇌리에 번쩍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다. '그렇다! 내가 왜 그걸 생각지 못했을까? 만상자전기(萬象磁電氣) 를 시전하면......!' 다음 순간 일검사는 꺼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되살리며 만상자전기 의 구결(口訣)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기적이었을까? 텅 비었던 단전(丹田)에서 조금씩 따스한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얼어붙던 경혈(經穴)이 해빙되기 시작했다. 만상자전기! 그 오묘불가사의한 힘은 그를 기적적으로 소생시키고 있었다. 단전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은 곧장 사지백해로 퍼지며 얼었던 핏물을 녹이고 임독이맥을 지나고 있었다. 쩌...... 저저...... 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전신에 근 한 자 두께로 얼어붙었던 얼음에 균열이 가는 것이 아닌가? 꽝......! 한소리 굉음과 함께 그의 전신을 둘러쌌던 얼음이 산산조각나 사 방으로 날아갔다. "으하하하하......!" 일검사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천지(天地)가 일통되는 듯한 일체감을 맛보았다. 우두둑...... 두둑......! 일순 그의 전신 뼈마디가 늘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희열을 느꼈다. 그는 전신 피부가 근 질근질해지며 허물을 벗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다. 낡은 피부가 껍질째 벗겨져 나가며 그 속으로 어린아이처럼 맑은 새로운 피부가 드러나고 있 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인(武人)으로서는 꿈에도 갈구하는 경지를 일 검사는 맛보고 있었다. 만상자전기의 신비한 힘이 그의 체내의 잠 력을 격발시켜 일시에 환골탈태의 경지로 이끈 것이었다. 화르르르르......! 그의 내부로 무서운 잠력이 소용돌이쳤다. "으음, 힘이 난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무궁한 힘이......!" 일검사는 두 손을 좌우로 휘저었다. 우르르...... 그의 양손에서 엄청난 무상지기가 뻗어나오는 바람에 석부가 진동 하면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으하하하핫......!" 일검사는 하늘을 오르는 듯한 통쾌함을 느끼며 신형을 날렸다. 그 의 신형은 연기처럼 흐려지며 날아갔다. 석부가 무너지고 있었으 나 그는 낙석(落石) 사이를 뚫고 날아갔다. 마침내 지옥제십관인 빙백풍마관(氷魄風魔關)을 돌파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지옥십관을 거치는 동안 숱한 단련을 받았다. 그 동안 그는 천종(千種)이 넘는 마예(魔藝)를 익힐 수 있었다. 지옥 십관에는 각 관마다 백종(百種) 이상의 가공할 마학이 벽(壁)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일검사는 이미 금강석보다 단단한 정신력과 육체를 지니 게 되었다. 운명은 그를 어느덧 천하제일인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 다. 이제 그는 과거의 일검사가 아니었다. 실상 오백 년 전의 혈마천 존(血魔天尊)조차도 지옥십삼관의 구관(九關)까지 통과하고 십관 에서 포기했었다. 그런데 마(魔)의 십관을 일검사는 마침내 통과한 것이었다. 꽝! 꽈르릉...... 꽝! 일검사는 쌍수(雙手)를 좌우로 뻗으며 신형을 쏘아가고 있었다. 그가 혈광을 뻗을 때마다 만년흑오석(萬年黑烏石)으로 이루어진 석부의 벽은 두부처럼 으깨어져 무너지고 있었다. "으하하하핫......! 혈마신공은 이제 십이성(十二成) 경지에 달했 다!" 일검사의 호쾌한 웃음이 통로 속에서 웅웅거리고 있었다. 사실이 었다. 그는 현재의 실력만으로도 천하십강(天下十强)에 능히 들고 도 남을 경지였다. 머릿 속에는 천종마공(天種魔功)이, 뱃 속에는 금석(金石)도 녹일 만한 가공할 내공(內功)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마문이대절공 (魔門二大絶功) 중의 하나인 혈마수(血魔手)도 이제 극한에 이르 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두려울 게 없었다. "으하하하하하......!" 일검사는 지옥제십일관(地獄第十一關)으로 쏘아가고 있었다. ■ 등용문 제1권 제9장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 -2 ━━━━━━━━━━━━━━━━━━━━━━━━━━━━━━━━━━━ 지옥제십일관(地獄第十一關)은 암흑관(暗黑關)이었다. 열한번째 나타난 석부의 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 백 일(百日)의 기한을 준다. 암흑문(暗黑門)이 닫히면 암흑광 (暗黑光)을 얻기 전에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만일 문을 부수려 한다면 지하의 화맥(火脈)이 터져 죽으리라. 네가 천고기재(千古 奇才)라면 암흑광을 얻어 보전(寶傳)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 면 굶어 죽을 것이다. 석문에 새겨진 서체는 힘차고 웅휘했으며 세상을 내려다 보는 듯 한 오만한 느낌을 주었다. "......." 일검사는 그 글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 며 중얼거렸다. "음, 내 현재의 실력으로도 흑오석에 두 치 깊이밖에 새기지 못하 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다섯 치 깊이로 새겼다. 그렇다면 천년마 종의 내공은 나보다 두 배 반이나 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가? 더구나 나는 이렇게 힘찬 글씨를 흑오석에 새길 수가 없다." 일검사는 지옥십삼관을 세우고 마왕도(魔王島)의 신화를 이룩한 천년전설의 절대마종(絶代魔宗)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이 우러나는 것을 느꼈다. "상상보다...... 거인(巨人)이다."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뇌까리며 숙연한 기분으로 석문을 열었 다. 그그그...... 긍! 굉음과 함께 석문이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장방형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중앙에는 철대(鐵垈)가 있었다. 일검사는 철대 안을 살펴 보았다. 철대 속에는 두 가지 물건이 있 었다. 붉은 색의 옥병 하나, 그리고 한 장의 종이였다. 종이는 보통 종 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 묵은 누에가 토해낸 천잠사로 꼬아 만든 종이였다. 그 천잠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후인(後人)이여, 십관(十關)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더 정진하 여 나머지 삼관(三關)을 통과하라. 그리하면 천하제일인(天下第一 人)이 되어 혈마천하(血魔天下)를 이룰 수 있으리라. 여기에 기재 된 혈마신안공(血魔神眼功)을 십이성(十二成)을 익혀야 한다. 그 럼 자연히 나가는 길을 알게 될 것이다. 성공하면 너는 다시 십삼 종(十三種)의 극마지력(極魔之力)을 얻게 된다.> 글을 읽은 일검사는 생각할 것도 없이 옥병 속에서 용안(龍眼)만 한 붉은 단약(丹藥) 한 개를 꺼내 복용했다. 그것은 혈마신단(血魔神丹)이란 것으로 한 알에 능히 십 년(十年) 의 공력이 증강되며, 백일을 굶어도 살 수 있는 영약이었다. 그는 이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옥십삼관에 설치된 가공할 기관장치에 의해 그 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을 뿐더러 처참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 기 때문이었다. 천잠사로 짠 종이에는 혈마신안공의 구결(口訣)이 적혀 있었다. 일검사는 구결을 읽는 즉시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그가 방금 들어왔던 석문이 떨어지며 입구를 차 단해 버렸다. 석문이 닫히자 사위는 칠흑 같은 암흑(暗黑)이 되고 말았다. 그야 말로 완벽한 암흑이었다. 일검사는 밤에도 대낮같이 볼 수 있는 야안을 갖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찌된 셈인지 손가락을 코 앞에 들이대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름 그대로 암흑관이군. 세상에 이런 지독한 암흑도 있다 니......."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혈마신안공의 구결 을 익히는 것밖에 없었다. 일찌기 절대마종은 천 년 전 암흑대제(暗黑大帝)란 인물에게 크게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후 절대마종은 암흑대제를 패퇴시킨 후 그의 보물인 암흑광(暗黑光)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절대마종은 암흑광을 파해시킬 수 있는 안공(眼功)을 연성하 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혈마신안공이었다. 그것은 안력(眼力)을 극한으로 단련하는 공부였다. 일단 연성하게 되면 신안(神眼)을 얻게 된다. 따라서 한눈에 적의 무공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그 약점 또한 알아낼 수가 있다. 그러나 신묘함은 그 뿐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교한 역용술도 신안 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과거 역용과 환술(幻術)의 조종(祖宗) 이었던 천환마영(天幻魔影)조차 절대마종의 신안에 걸려 황천으로 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혈마신안공은 그야말로 불가사의의 무공이랄 수 있었다. 신안을 얻는다면 본신의 무공에 삼성(三成) 정도는 더 추가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공간. 그 속에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있었다. 그 눈은 실낱같은 빛을 뿌 리며 몇 차례 깜빡였다. 일검사였다. 그는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십 일만에 혈마신안공을 일성(一成) 가량 터득한 것이었다. 문득 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벽에 일장만 가한다 해도 기관장치로 인해 화맥이 터져 이 석실 은 불바다가 된다. 과연 기가 막힌 안배다." 일검사는 일각도 게을리 하지 않고 혈마신안공을 연마하고 있었 다. 따라서 그의 안공은 하루하루 진전되고 있었다. "완전히 연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확고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다시 잠잠해 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안광은 강렬해져 갔다. 그의 눈은 처음보다 최 소한 다섯 배는 강해진 상태였다. 그의 눈에서는 신광(神光)이 뻗어나와 은은히 석벽을 비칠 정도가 되고 있었다. 지금 두 개의 광선이 석벽을 비추고 있었다. "으음. 비밀은 바로 석벽에 있었구나." 문득 탄성이 울렸다. 그렇다. 언뜻 보면 석벽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석벽에는 쌀알 한 톨에 백자(百 字)를 적을 수 있을 적도로 미세한 글이 빽빽이 적혀 있지 않은 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그것을 아직 해독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하나의 실마리를 풀 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도 신안을 익힌 덕분이었다. 이제 일검사의 안광(眼光)은 예전보다 서른 배나 강한 빛을 뿌리 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석벽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볼 수가 있 게 되었다. "오오! 도합 삼만자(三萬字)의 구결(口訣)이 적혀 있구나!" 탄성을 발하는 그의 음성에는 놀라움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것도 열세 가지의 초극마예(超極魔藝)들이다." 구결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점차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그의 눈에서는 더욱 더 강한 신광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 세상에 혈마신공이 가장 무서운 마공인 줄 알았는데 여기 적 혀있는 십삼 종의 마예는 그보다 몇 단계 위다." 그의 입에서 탄성과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실로 무학의 길은 끝이 없었던 것이다. 한참 후 두 개의 안광이 깜빡였다. "석실을 나가는 방법은 십삼 종의 마예를 모두 익힌 후 일시에 삼 만자의 구결을 석벽에서 지워버려야 하는구나! 과연 그럴 수가 있 을까?" 구결을 모두 읽고 난 일검사는 회의에 찬 중얼거림을 발했다. 어쨌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잡념을 떨쳐 버리고 석벽에 적혀있는 십삼 종의 마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음독심수(寒陰毒心手), 광혈수라지(狂血修羅指), 밀살극인(密殺 極刃), 잠영환마보(潛影幻魔步), 쇄금강마후(鎖金剛魔吼), 유명구 인(幽冥九印), 한살강진기(寒殺 眞氣), 사검천뇌십팔식(死劍天雷 十八式), 빙지십살(氷指十煞), 혈전섬뢰백팔도(血電閃雷百八刀), 등의 십대마예(十大魔藝)를 비롯하여 살중살(煞中煞) 월영살(月影 煞),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彈指血通)과 강중패( 中覇) 혈마 일수(血魔一手) 등의 삼대 마종절예(三大魔宗絶藝) 등이었다. 그것은 하나같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초극강의 마예들이었다. "정말 가공하구나. 모두 패도지학들이다. 그런데 이 무공들은 무 쌍혈마신공을 익혀야만 연마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혈마신공은 혈마절학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일검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일명 극마삼수 (極魔三手)라 불리우는 삼대 마종절예에 더욱 관심이 갔다. 살중살(煞中煞) 월영살(月影煞),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彈指血 通), 강중패( 中覇) 혈마일수(血魔一手)! 그 세 가지 마종절예의 구결을 해독한 그는 진정한 마공에 대해 개안하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그는 무공광(武功狂)이 되어 버렸 다. 일검사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십삼 종의 마예를 익히기 시작 했다. 시간도...... 공간도...... 심지어는 자아(自我)마저도 망 각한 채 그는 무공에 몰두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확히 구십구 일째 되는 날이었다. 일검사는 정좌한 자세에서 몸 을 일으키며 장소(長嘯)를 터뜨렸다. "우우우...... 우......!" 그것은 쇄금강마후(鎖金剛魔吼)였다. 우르르릉......! 석실이 무너질 듯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가공할 진력을 담은 쇄금 강마후를 시전한 순간 석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 킨 것이었다. "잠(潛)... 영(影)... 환마보(幻魔步)...!" 낭랑한 외침과 함께 석실 안은 보이지는 않으나 일시에 수천 개에 달하는 그의 분신(分身)으로 메워졌다. "한음독심수(寒陰毒心手)...!" 파파파... 파파...팍!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흑오석의 돌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광혈수라지(狂血修羅指)!" 슈슈슈슝......! 수백 가닥의 지강(指 )이 뻗자 석벽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없 이 많은 미세한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더욱 미세한 구멍이 합쳐져 보이는 것이었다. 연이어 일검사는 십삼종 마예를 전개했다. "사검천뢰십팔식(死劍天雷十八式)...!" 꽈르르릉...... 콰쾅......! 폭음과 돌가루가 날리며 석벽은 파이고, 깎이고, 구멍이 뚫렸다. "탄지혈통(彈指血通)...!" 그의 손가락이 빨갛게 달군 쇠젓가락같이 되며 열 줄기의 지강이 가닥가닥 실로 화해 뻗었다. 파파파... 파파...... 천지가 타버릴 듯한 열기가 퍼지며 석벽이 줄줄이 녹아 내린다. 그 순간 시뻘건 손(手) 하나가 석벽을 뒤덮으며 쓰다듬었다. "혈마(血魔)... 일수(一手) ...!" 츠... 츠츠츠츠... 츳...! 패이고 깎이고 구멍 뚫렸던 석벽은 혈수가 스쳐간 순간 유리알처 럼 매끄럽게 변하고 말았다. 실로 불가사이한 일이었다. "성공이다!"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한 듯한 일검사가 그 말을 토하며 바닥에 털 썩 주저앉았다. 해낸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해내고야 만 것이었 다. ■ 등용문 제1권 제9장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 -3 ━━━━━━━━━━━━━━━━━━━━━━━━━━━━━━━━━━━ 지옥제십이관(地獄第十二關) 금강관(金剛關). 그곳은 수백 개의 구멍이 뻥뻥 뚫린 한 칸의 석실이었다. 역시 중앙에는 철대(鐵垈)가 있었다. 철대 위에 앉아 일검사는 천 잠사와 금강석(金剛石)의 가루로 만든 종이를 읽고 있었다. 그는 지옥십일관을 거치는 동안 도합 열한 개의 혈마신단(血魔神丹)을 복용했다. 그로 인해 그의 내공은 반석과 같이 탄탄히 축적되어 있었다. 특히 십일관을 통과한 이후로는 환골탈태하여 그의 경지 는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십이관(十二關)에 들어 왔다면 천고기재(天古奇才)임을 증명한 것이다. 여기에 혈마만겁공(血魔萬劫功)을 남기니 금강불괴지신 (金剛不壞之身)보다 열 배 뛰어난 혈마불괴신(血魔不壞神)이 되도 록 하라. 혈마만겁공을 십이성(十二成) 익히면 수화도검(水火刀 劍)이 불침이며, 천하이대절독(天下二大絶毒)이 아니면 만독(萬 毒)이 불침이다. 또한 고금오대절기(古今五大絶技)가 아니면 결코 깨뜨릴 수 없는 호갑공(護甲功)이 된다. 부단히 노력하여 혈마불 괴지신이 되도록 하라.> 가히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글이었다. 그것을 읽은 일검사는 자신 도 모르게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에는 쇄금강마후(鎖金剛魔吼)가 담겨져 있기에 흑오석의 석실이 온통 무너질 듯 부르르 떨며 미세한 금이 가고 있었다. 일검사는 다시 한 알의 혈마신단을 복용한 후 혈마만겁공(血魔萬 劫功)의 구결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의 체내에 축적되어 있는 금석조차 녹일 수 있는 불멸의 내공 (內功)을 사지백해로 돌리자 그는 자신의 몸이 쇳덩이가 되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마음마저 단단해지며 강한 자신감과 오만함이 혈 마의 웅풍(雄風)과 함께 온몸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쇠는 두드릴 수록 단단해진다 했던가? 그가 깔고 앉은 철대에는 만년혈사(萬年血砂)라 불리우는 핏빛 모래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정신력을 북돋우고 기(氣)를 길러 주며, 특히 하반신을 강하게 하 는 효력이 있었다. 일검사는 그런 자세로 며칠 동안 정좌한 채 혈마만겁공을 전신에 운행시켰다. 쐐애액...... 문득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있던 일검사의 귓전으로 날카로운 파 공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퍽! "크... 윽!" 그는 무엇인가 단단한 물체가 등 한복판을 강하게 치는 것을 느끼 며 참담한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내고 말았다. 일검 사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급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쐐애액......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그는 급히 허리를 옆으 로 비틀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퍽!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 께 옆구리가 으스러질 듯한 격통이 왔다. "크... 윽!" 그는 다시 한 사발이 넘는 피를 토해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의식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그를 향해 날아오는 물체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익힌 그 어떤 신법을 써도 결코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철대 위에서 내려온다면 어쩌면 그것을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만한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물건은 번개보다도 빨랐으며 금강석보다 단단했다. 쐐액! 슉......! 퍼억! 퍽! 퍽......! 전후좌우에서 연신 파공성이 들렸고, 그는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두둘겨 맞았다. "크윽......!" 그의 신체는 이미 금강불괴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옷이 찢 기고 살점이 튀었다. 피가 솟구치고 뼈가 육신거렸다. 입으로는 연신 피화살이 뿜어지고 정신은 가물가물해졌다. 그의 오만하던 마음은 어느덧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 다. 무공의 길이란 끝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슈슈슉...... 퍽! "크으... 윽!" 마침내 일검사는 뒤통수가 빠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 고 말았다. ......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일은 다시 반복되었다. 쐐애액......! 퍽! 다시 그는 날아드는 물체에 난타 당해야만 했다. 그는 점차 기절 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왜냐하면 날아드는 물체가 더욱 빨라졌고, 그 횟수도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크으으......!" 일검사는 도무지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 르고 있었다. 수없이 기절하고 수없이 피를 토하는 가운데 점점 그의 몸은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무수한 멍이 들었다. 처음에는 멍에서 피도 나고 부 풀어 오르기도 했으나 차츰 멍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부분은 쇠처럼 단단해졌다. 이제는 얻어맞으면 그 자리가 약간 붉어질 뿐 곧 회복되곤 했다. 그 횟수는 더욱 빨라질수록 회복되는 시간도 더욱 빨라졌다. 마침내 일검사는 깨달을 수 있었다. "으으...... 이것이 혈마만겁공을 익히는 속성술이구나." 일검사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더욱 지독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 다. 어느 순간에 그는 진정한 혈마(血魔)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일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는 혈마만겁공의 오의를 깨우치기에 이르렀다. 아무 곳이나 시시때때로 날아와 그를 강타하는 괴물체, 그로 인해 그의 신경은 반사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제는 파공성만 들어도 그의 신경이 즉각적으로 작용했다. 그것 은 무인으로서의 극한 경지를 이루는 것이었다. 항상 긴장할 수만 있다면 어떤 암습도 막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슉......! 퍽! "......" 수없이 날아와 그의 몸을 강타하는 괴물체였다. 그러나 일검사는 맞아도 기절을 하지 않게 되었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의 혈마만겁공은 십성(十成)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혈마불괴신은 팔성(八成) 수위에 이르고 있었다. 수만 번 얻 어맞고 수만 번 피를 토해가는 동안 어느덧 혈마불괴지신이 완성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쌔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그 속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 로 빨랐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는 금강과도 같은 새살이 돋아 있 었고 그의 혈도 부위에는 흑오석보다 더 단단한 살덩이가 만들어 져 있었다. "하하하하......! 만상자전기(萬象磁電氣) 덕분에 연공 속도를 반 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상자전기는 신비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혈마만겁공과 함께 만상자전기를 운공함으로써 새 로운 경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몸은 더 이상 단단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극히 부드 러운(柔), 그러면서도 몹시 질긴 살덩이로 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강타 당하는 순간에 충격을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이젠 몸에 괴물체가 부딪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다. 슉......! 다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흥! 이놈! 이번에는 네놈을 꼭 잡아야겠다." 순간 그의 두 손가락이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보다 백 배나 뛰어 난 밀살극인(密煞極刃)의 수법으로 섬전처럼 뻗었다. 파팍! "음......!" 무엇인가 걸려들었다 싶은 순간 그는 신음을 발했다. 손가락은 물 론, 팔목과 어깨까지도 찌르르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그토록 끈질기게 괴롭혔던 마물(魔物)을 잡아내고야 만 것 이다. "......?" 살펴보니 그것은 아주 기이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칼날처럼 얄팍 하면서도 둥그스름한 모양의 붉은 원형의 쇳덩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타원형의 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다리(橋)였다. 그것도 지옥(地獄)으로 연결된 듯한 끔찍한 풍경화 였다. 다리 아래에는 피의 강(血江)이 흐르고 다리 위에는 마왕(魔王)의 얼굴을 한 산발괴인이 허공에 떠오른 채 피의 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실로 정교하면서도 섬뜩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 한쪽에는 머리카락같이 미세한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혈리마면탈(血裡魔面奪)> "음." 일검사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한눈에 그 물건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오금귀련사(烏金鬼鍊砂)와 백련한정강(百鍊寒精 鋼), 그리고 천하에서 한 조각밖에 없다는 온량귀금쇄(溫凉鬼金 鎖)를 섞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조그만 것이 날 그토록 괴롭혔다니......" 일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혈리마면탈(血裡魔面奪), 또는 일명 죽음의 혈리탈(血裡奪)이라고도 부르는 마의 병기(兵器), 일검사 는 또 하나의 기연을 얻은 셈이었다. "이것은......?" 일검사의 눈은 이미 신안(神眼)이었다. 문득 그는 혈리탈을 살펴 보다가 신광을 번쩍였다. 혈리탈의 뒷면에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 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 혈리비류혈세천하(血裡飛流血洗天下). 혈리탈(血裡奪)이 날면 천하는 피로 씻긴다. - 혈리비행지옥고해(血裡飛行地獄苦海). 혈리탈(血裡奪)이 비행하면 만상(萬象)은 지옥(地獄)의 고해에 잠 긴다. - 혈리탄혈파천황(血裡彈血破天荒). 혈리탈(血裡奪)이 피를 튀기면 천지는 암흑의 혼돈에 휩싸여 소멸 되고 만다. 도합 삼련의 글귀와 그 구결들이 새겨져 있었다. 구결을 해독해 본 일검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가공할 수법들이군!" 혈리마면탈에 기재된 무공은 가히 오갑자에 달하는 내공이 없으면 시전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설의 무학인 어기배검(馭 氣排劍)을 능가하는 전설의 무공이었던 것이다. "정말...... 극강의 초무학이로구나." 일검사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그는 혈리탈에 수록되어 있는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정작 혈리탈의 무서움은 오갑자의 내공으로 던졌을 때 혈리탈 속 에서 발출되는 섭혼마백도(攝魂魔魄刀)에 있었다. 종잇장 같이 얇 고 가벼우며 투명한 섭혼마백도에 맞으면 금강불사지체라 해도 그 대로 양단된다. 얼마 후, 일검사는 혈리탈의 삼초 절기를 완벽히 익힐 수가 있었 다. 그러나 굳히 그것을 시전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왜냐면 제 십삼관의 마지막 관문으로 가는 통로는 벌써 개방되어 있기 때문 이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혈리탈을 전개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공이 완 전히 화후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그 위력을 십분 발휘하지는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혈리탈을 품 속에 갈무리하고 마침내 지옥십삼관의 마지막 관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옥제십삼관(地獄第十三關)은 천 년 이래 전인미답의 관문이었 다. 석문 앞에 당도한 일검사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내공의 구결을 암송해야 할 정도였다. 그그그...... 긍......! 석문은 손을 대자마자 열렸다. <극마관(極魔關)> 웅휘하게 새겨진 글귀를 보자 그는 호승심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 다. 석문도 다른 면이 있었다. 흑오석은 유리알같이 반들반들 다 듬어져 있었다. '극마관이라면 이곳은 마의 끝이란 말인가? 아니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인가?' 일검사는 어깨를 폈다. 다시금 오만한 마음과 배짱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석실과는 달리 천장에 여섯 개의 야명주(夜 明珠)가 박혀 있어 휘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역시 철대(鐵垈)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곳에는 혈마신단(血魔神丹)이 들어있는 약병, 금강석(金剛石)을 가루로 만들어 천년누에의 실과 섞어 만든 종이, 그리고 만년혈사 (萬年血砂)가 가득 들어 있었다. 혈마신단은 수만 종의 영약으로 연단한 것으로 한 번 복용할 때마 다 십 년의 공력이 증강되며, 마음이 단단해져 심마(心魔)에 빠지 지 않게 되며 불굴의 투혼(鬪魂)과 오성(悟性)을 복돋워 주는 신 비한 효능이 있었다. 또한 만년혈사는 정신력의 증강과 하반신을 튼튼하게 길러 주는 효능이 있다. 약병에는 혈마신단이 정확히 열 개 들어 있었다. 일검사는 철대 위에 걸터 앉았다. 이어 금강석으로 갈아 만든 종 이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극마관(極魔關)을 통과하면 진정한 극마지도(極魔之道)를 걸을 수가 있다. 노부는 이곳에 지옥혈마공(地獄血魔功)과 구천마왕공 (九天魔王功)을 남겼두었으나 각각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과 천 마십삼관(天魔十三關)에 나누어 비장(秘藏)해 놓았다. 지옥십삼관 의 극마관에 든 자는 지옥혈마공을 얻고 혈리마면탈(血裡魔面奪) 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천마십삼관의 극마관에 든 자는 구천마 왕공(九天魔王功)과 마왕잠(魔王簪)을 얻을 것이다......> 일검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천마왕공......? 그런 마공이 또 있단 말인가?' 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옥혈마공은 지옥공(地獄功)과 혈마공(血魔功)을 합쳐 만든 것 으로 십이성의 경지에 이르면 지인(至人)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지옥혈마공이나 구천마왕공에는 약점이 있다. 그것은 궁극에 달하 도록 연마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마성(魔性)에 빠져 미쳐 버린 다는 것이다.......> 일검사는 섬뜩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성에 빠져 미쳐 버린다고?' <...... 마성을 극복하는 길은 백 년 동안 쉬지 않고 금강부동신 공(金剛不動神功)을 익혀 최소한 십성(十成)의 경지에 이르는 것 뿐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고금오대절기(古金五大絶技) 중에서도 가장 고절한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萬流歸宗大乘無常深海氣)를 얻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는 인세에서 사 라진 지 이미 오래로 그 행을 아는 자가 없으니 마성을 꺾기 위한 방법은 오직 백 년간 금강부동신공을 부단히 연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백 년간이나 금강부동신공을 익혀야 한다고? 내게 그럴 시간은 없다. 그 동안 무림은 구천마왕교의 천하가 되어있을 것이 아닌 가?' 백 년이라면 한 인간의 전생애였다. 그러니 설사 금강부동신공을 대성한다 해도 어찌 일백 년 세월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라니...... 게다가 고금오대절기(古今五 大絶技)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검사는 고개를 저었다. 고금오대절기(古今五大絶技)는 아득한 상고무림(上古武林)으로부 터 내려오는 다섯 가지의 무공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실전(失傳)되어 당금에 이르러 고금오대절기를 기억 하는 자는 없었다. 이미 전설의 무학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일검사는 고뇌에 빠졌다. 그는 지옥공(地獄功)의 구결을 이미 암 송했으나 과연 그것을 익힐지에 대해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 었다. '구천마왕교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지옥혈마공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성에 빠져 미쳐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천마삼세(天魔三歲)란 자는 이미 천마십삼관을 돌 파했다지 않은가?' 일검사는 심한 갈등을 느꼈다. 이미 그의 가슴에는 웅풍(雄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절대마군주가 되어 양맥으로 갈라진 마도(魔道)를 일통하겠 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사화(士禍)로 인해 무참히 뜻을 꺾어야 했던 그였다. 그의 참담한 과거는 오히려 그로 하여금 불같은 투혼(鬪魂)을 길러 주었다. 그는 본래 무림의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옥혈문주로 부터 열다섯 권의 무경을 얻은 이후 그의 생각은 점차 달라지게 되었다. 그는 무도(武道)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이제는 절대마 군주(絶代魔君主)가 되겠다는 야망이 점차 뇌리에 박히기 시작했 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이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 등용문 제1권 제9장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 -4 ━━━━━━━━━━━━━━━━━━━━━━━━━━━━━━━━━━━ 번쩍! 문득 고뇌에 잠겨있던 일검사의 눈에서 감히 마주 대할 수 없는 신광이 일어났다. '저것은......?' 우연히 십장 밖의 흑오석 벽면을 바라보던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 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 장의 금속편이었다. 종잇장같이 얇은 철 편(鐵片)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벽면에 깊숙이 박혀 있고, 그 끝 부분만 미세하게 남아있는 것이었다. 만일 일검사가 신안(神眼)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슷!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무서운 흡인력이 뻗어나가 철편은 그의 손 으로 들어왔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지?' 그는 의혹을 느끼며 철편을 살펴보았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철편의 표면에는 머리카락이 엉킨 듯한 과두문( 頭 文)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본래 일검사는 학문에 관한한 귀동이란 호칭을 받던 위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과두문을 해석할 수가 있었다. <노부 지옥혈마제(地獄血魔帝)가 남기노라......> 글을 해독해내는 순간 일검사는 격동을 금치 못했다. 지옥혈마제(地獄血魔帝)라니! 천 년 전 마왕도(魔王島)의 신화를 이룩했던 절대마종(絶代魔宗) 해천초자(海天焦子)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절대쌍마(絶 代雙魔)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기 천마종(天魔宗)을 연 구천마라제(九天魔羅帝)와 지옥혈문(地獄血門)을 연 지옥혈마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은 훗날 천마이대마벌의 시조가 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옥혈문의 조종인 지옥혈마제가 남긴 유시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일검사는 심금이 떨려옴을 금치 못하며 다시 철편에 새 겨져 있는 과두문자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노부는 구천마라제(九天魔羅帝)와 삼만초를 겨루었으나 둘 다 치 유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채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말았다. 노 부는 지옥혈마공을 연성하지 못하고 혈마신공밖에 얻지 못하였으 므로 구천마라제를 꺾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 옥공의 마성을 억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고금오대절기 중 하나인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萬流歸宗大乘無 常深海氣)를 찾는데 성공했다.> 여기까지 읽은 일검사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는 희열을 느끼며 다 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읽은 순간 그는 실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무학의 원본(原本)은 아쉽게도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노부에게는 천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노부는 비분 의 마음을 안은 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후인(後人)이여, 그대 가 혈마천하(血魔天下)를 이루려 한다면 나머지 반부의 원본을 찾 은 후 지옥공을 연성하여 완전한 지옥혈마공을 익혀야 한다는 것 을 명심해라. 노부는 혈마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여기 반쪽 의 비결(秘訣)을 전한다.> "......" 일검사의 얼굴에는 낙담의 빛이 깔렸다. 마성에 빠져 광인(狂人)이 된다면 혈마천하를 이룩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스스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일검사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던 중 절대마종 해천초자 가 남긴 글귀를 떠올렸다. <극마인(極魔人)은 마(魔)를 초월하여 정마법(正魔法)으로 산다. 부디 극마정(極魔情)을 얻어 불세영웅이 되거라.> 일검사는 허탈해졌다. '천마삼세는 구천마왕공을 익혔을 것이다. 완전한 지옥혈마공을 익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를 이기겠는가?' 그는 낙담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동안 실의하다가 힘없이 철편으 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곳에는 지옥혈마제가 남긴 만류귀종대승무 상심해기의 반쪽 구결이 적혀 있었다. "......"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기에 그는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속에 서 한 가닥 해결의 실마리나마 찾기 위함이었다. 서서히 그는 구 결의 깊은 오의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념(無念)...... 무상(無常)...... 무아(無我)......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일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극마관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 길이 없었다. 무수한 날들이 지나 갔다. 일검사는 혈마신단으로 허기를 떼울 수 있었으나 그 동안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나 등을 덮었으며, 수염은 더부룩하다 못해 가슴까지 고슴도치처럼 뻗어 있었다. 눈. 다만 횃불같이 빛나는 두 개의 안광만이 형형히 타오르고 있 었다. 일검사는 조금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눈은 철편에서 한 시 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정(精), 기(氣), 신(身)의 정력을 한데 모아 구결의 오의를 참오하고 있었다. 그런 집중의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체력과 진력의 소모를 가 져왔다. 그는 혈마신단 열 개를 모두 복용해야 했다. 열 알이면 능히 천 일을 굶고도 살 수 있었으나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불과 이백여 일만에 진력이 고갈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눈이 쑥 들어가고 깡마른 몸이 되었다. 그로 미루 어 그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따금...... 아주 간간이 그는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이곤 했다. 다시 시일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으음!" 문득 무거운 신음이 그의 굳게 닫혀졌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 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안광이 춤추듯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희열에 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렇다. 그것이다!" 쇄금강마후의 진력이 섞인 탄성으로 인해 엄청난 반진력이 생겨나 석실이 온통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쿠르르르릉...... 검은 돌가루가 회오리바람에 휘날렸다. 그런 가운데 그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그렇다, 만상자전기(萬象磁電氣)가 진정한 대승기(大乘氣)가 되 려면 이 구결과 합쳐져야 한다!" 일검사의 음성에는 온통 희열이 충만되어 있었다. "아아! 그걸 몰랐다니!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 그 반쪽이 야말로 바로 만상자전기였다니! 으핫핫핫핫......!" 꽈르르르...... 쿠쿠쿠쿠...... 석실이 진동을 일으켰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검사의 희열에 충만한 음성은 계속 회오 리 기류 속에서 이어졌다. "지옥혈마제조차 찾아내지 못한 반쪽의 구결이 바로 만상자전기였 을 줄이야!" 해골만 남은 일검사의 얼굴은 기쁨이 넘쳐 흘러 온통 씰룩이고 있 었다. "만상만승(萬象萬乘)의 무상신공...... 거기에 순양일기(純陽一 氣)와 혼천일기(混天一 氣)가 합해져야 비로소 완전한 삼문기본내 공(三門基本內功)이 생겨난다. 또한 삼문기본내공을 완전히 익혀 야 만승(萬乘)의 거력(巨力)을 얻을 수가 있다!" 일검사의 얼굴에는 형언할 길 없는 기쁨과 충족의 표정이 어렸다. 일검사, 그야말로 그는 행운의 인간인지도 몰랐다. 그는 고금오대 절기의 하나를 얻었으며, 혈마의 완전한 대공(大功)을 얻게 된 것 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의 안배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 그에게 서 실현된 것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9장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 -5 ━━━━━━━━━━━━━━━━━━━━━━━━━━━━━━━━━━━ "후... 후우... 훅!" 토납법(吐納法). 일반적으로 강호인들의 운기토납법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지금 일검사는 듣지도 보 지도 못한 기이한 토납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양손바닥, 발바닥의 중심, 그리고 정수리를 오악(五嶽)이라 한다. 조원(祖元)은 오악(五嶽)을 하늘로 향함을 말한다. 지금 일검사는 그와 같은 자세로 진귀한 토납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반본회원지법(返本回元之法), 후천역골지법(後天易骨之法), 선천 양신지법(先天養神之法)...... 일검사는 갖가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세를 바꾸어가며 토납법을 연마해 갔다. 만승(年乘)의 힘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는 천하를 얻기 위해 잠도 자지 않았다. 무공광인이 되어 미친 듯 이 토납법의 연마에 몰두했다. "후... 후욱... 훅!"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氣)는 붉은 기(紅氣)였고...... 코 로 빨려 들어갈 때는 흰 기(白氣)가 되었다. 빨아 들이면 그의 몸 은 공처럼 부풀고, 내뱉으면 그의 몸은 작게 응축되었다. 횟수를 거듭할 수록 그의 몸 주위에는 온통 붉고 흰 두 가지 상반 (相反)의 서기가 가득 감싸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녕 불가사의 한 현상이었다. 애초에 학문의 뜻을 거두고 스스로 일검사라는 이름을 지은 낙양 의 한 거지소년은 이렇게 변신(變身)하고 있었다. 금후 무림사(今 後武林史)에 엄청난 대폭풍을 몰고 올 만고의 절대고수가 탄생하 는 순간이었다. 대천산(大天山)의 한 지하 석실에서 그는 대승만승(大乘萬乘)의 힘을 키우며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터뜨릴 날을 목전에 두고 있었 다. "우우... 우... 우... 우......!" 쇄금강마후(鎖金剛魔吼)가 실린 웅혼무비한 장소가 울려퍼진 순간 이었다. 우르르르... 르르르... 릉!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눈사태가 대천산(大天山)에서 일어나고 있 었다. 콰아아아......! 만년설빙은 쩍쩍 금이 갔으며, 빙봉이 흔들리며 중원의 지붕이요, 등뼈라는 대천산은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우... 우... 우....... 우!" 장소는 천붕(天崩)의 폭음 속에서도 승천의 용후음(龍吼音)처럼 삼라만상을 억누르며 길게 울려퍼졌다. 슈...... 파...... 아! 빛이었을까? 문득 한 빙봉으로부터 세 개의 점이 구만리창천(九萬 里蒼天)을 차고 날아올라갔다. 도무지 인간인지 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하게 고공을 가로 지르는 인영은 대체 누구인가? 콰르르르릉......! 그 가운데 천산은 무서운 산사태를 일으키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하하하......!" 한 가닥 낭랑하고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 인영은 아스라이 중 원(中原)을 향해 점으로 화해 사라져 갔다. 계절은 여름이었다. ■ 등용문 제1권 제10장 모여드는 군마(群魔)들 ━━━━━━━━━━━━━━━━━━━━━━━━━━━━━━━━━━━ 천년고도 낙양은 하일(夏日)의 오수에 잠겨 있는 듯 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가운데 낙양으로 이르는 관 도(官道)에 일남이녀가 나타났다. 남자는 일신에 백삼(白衫)을 걸쳤는데 임풍옥수처럼 산뜻하고 헌 출했다. 피부는 옥(玉)이며, 머리카락과 눈썹은 짙은 먹빛이었다. 절세미남자(絶世美男子)로 알려졌던 반안(潘安)이나 송옥(宋玉)인 들 그에게 견준다면 빛을 잃을 듯이 보였다. 더구나 그는 양 옆에 선녀(仙女)가 하강한 듯 아름다운 두 명의 미녀를 대동하고 있었 다. 백의소녀(白衣少女)는 앳되 보이는 가운데 기품있어 보였다. 반면 홍의미녀(紅衣美女)는 완숙하고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 남자 라면 누구나 침을 삼킬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이들 삼 인은 시종 화기애애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이었다. "하하! 이 년만에 낙양에 돌아오는 셈이군. 어서 빨리 옛날의 사 당을 돌아보고 싶구나." 백삼청년이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천산(天山)을 떠나 중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옥십삼관(地獄十三關)을 돌파하고 지옥혈마공의 마성(魔性)을 극복하고 대성한 그였다. 꼭 이 년만에 그는 중원으로 회귀한 것 이었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랄까? 아니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할까? 여우도 죽으면 자기 고향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고, 새들도 둥지를 고향 쪽으로 틀 듯이 그는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낙양을 택한 것이었다. 낙양에 얽혀있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그로 하여금 이곳으로 발길 을 향하게 한 것이었다. "하하...... 그대들은 모를 것이오. 이 일검사의 과거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했었는지를." 일검사는 웃으며 말했다.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잡초처럼 질기 게 살았던 과거는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는 돌아보고 싶었다. 낙양 빈민가의 성벽이며 대낮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사당, 그 밖의 그의 추억이 서려있는 모든 것들을 돌아 보고 싶었다. 한편 을주려려와 설옥경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의 얼굴에서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들도 이젠 절대고수가 되어 있었 다. 사실 그녀들도 일검사 못지 않게 참담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가 지옥십삼관에 든 이후, 해가 바뀌고 또 바뀌는 동안 수없이 많은 불길한 생각에 시달려 왔다. 돌아오지 않는 일검사를 생각하며 혹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마 음을 다지고 또 다지며 그가 남긴 혈마진전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일구월심 기다란 보람으로 일검사는 대공을 연성하고 돌 아왔다. 그 동안 두 여인의 무학도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오직 기다림의 일념만으로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성취가 대단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검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신이 깨달은 여러 가 지 마예(魔藝)들을 그녀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따라서 을주려려와 설옥경의 무공은 과거와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일검사는 낙양성이 가까와오자 더욱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의 즐거운 공상은 낙양에 당도하기도 전에 깨어졌다. 문득, 길 옆의 숲 속으로부터 한 가닥 음침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흐흐흐흐......! 미친 놈! 군림마건(君臨魔巾)도 없이 함부로 대 로를 활보하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크크크...... 미녀들을 둘씩이나 차고 있는 걸 보면 풍류깨나 즐 기는 놈인 것 같군. 그러나 아쉽게도 이곳에서 불귀객(不歸客)이 되어야 겠구나." 휘휙! 문득 두 개의 검은 인영이 숲 속에서 날아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 았다. 그들은 중년장한이었다. 기이한 것은 머리에 건(巾)을 썼는데 가 운데 마(魔)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행의 앞을 가로막은 채 음탕 한 눈알을 희번뜩이며 을주려려와 설옥경의 몸매를 무례하게 훑어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귀두도(鬼頭刀)와 철선(鐵扇)을 병기로 삼고 있었는 데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두 여인의 몸매를 훑어보고 있었다. "......!" 문득 을주려려의 눈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막 발작하 려고 했다. 그러나 일검사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누구기에 백주에 길을 막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그러자 귀두도를 멘 중년인이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이 책벌레 같은 놈아! 네놈은 귀도 없고 눈도 없느냐? 네놈은 대 군림성(大君臨城)의 표식도 모른단 말이냐? 더구나 이곳이 군림십 검주(君臨十劍主) 중 열번째 어르신인 혈정검주(血情劍主)께서 계 신 곳이라는 사실도 모른단 말이냐?" "......" 일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런 사실을 알 까닭 이 없었다. 이때 철선을 든 중년인이 짐짓 아량을 베푸는 듯 말했 다. "후후...... 애송이 친구, 마건(魔巾)을 쓰지 않고 다니는 건 염 라전에 드는 것이나 같다. 본래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 두 계집을 놓고 간다면 다리뼈 하나만 부러뜨리고 보내줄 용의가 있다." 일검사는 두 여인을 향해 히죽 웃어 보인 후 짐짓 어리둥절한 표 정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요? 이곳에는 낙빈왕(洛賓王)께서 계신 곳 이거늘 대낮에 시비를 걸다니 당신들은 왕법(王法)도 아랑곳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 말에 귀두도를 멘 중년인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이놈아! 우리에겐 왕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천마법(天魔 法)만 있을 뿐이다! 흐흐흐, 천마삼세(天魔三歲)께서 태산(泰山) 마왕도(魔王島)에 군림천마탑(君臨天魔塔)을 세우려 하시는 판에 왕법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일검사는 그 말에 안색이 변했다. '벌써 그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때, 이제껏 분노를 참고 참았던 설옥경은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 는 듯 일장을 뻗었다. "더러운 천마(天魔)의 졸개들! 도저히 봐줄 수가 없구나! 너희들 이야말로 염라전으로 보내주마!" 슷! 순간 새빨간 혈화(血花)와 같은 손바닥이 허공중에 떠올랐다. "크아아악!" 너무나 간단했다. 귀두도를 멘 장한은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도 모 른 채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의 반쪽 얼굴은 부어터져 형태 를 잃어버렸다. 그는 저만치 나가 떨어진 후 코와 입으로 검은 피 를 줄줄 흘렸다. "이...... 이 계집년이......" 철선을 쥔 장한은 대로하며 신형을 날렸다. 슈파파팟...! 철선이 펼쳐지며 열여덟 개의 흑선(黑扇)이 날아왔다. 그러나 혈 옥선자 설옥경이 어떤 여인인가? 과거에는 지옥혈마검대의 제이통 령으로 살인을 밥먹듯 했던 공포의 여살성(女殺星)이었다. "흥! 더러운 밥버러지들, 무공이란 이런 것이다!" 설옥경은 옷소매를 슬쩍 휘둘렀다. "어...... 어......?" 중년인은 흡사 무엇엔가 머리카락을 잡힌 듯 버둥거렸으나 그의 몸은 허공으로 붕 떠올라 사오 장이나 날아가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퍽! 잘 익은 수박이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케... 에엑!" 재수 없게도 그는 바위 위에 떨어져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어지면 서 그 자리에 즉사하고 말았다. "허억!" 그 광경에 막 몸을 일으키려던 귀두도의 중년인은 안색이 그만 흙 빛이 되고 말았다. '잘못 걸렸다...... 맛있는 고긴 줄 알았더니...... 지옥사자일 줄이야......' 그는 즉시 판단을 내렸다. '이럴 땐 달아나는 게 상책이다!' 휘익! 그는 젖먹던 힘을 다 짜내어 신형을 솟구쳤다. 그러나 이때였다. 그토록 만만히 보았던 책벌레의 담담한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 가? "가긴 가되 쓸모 없는 잔 재주는 놓고 가거라." 핑! 환청(幻聽)이었을까? 중년인은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다. 십여 장 밖에서 책벌레가 그를 향해 빨갛게 단 손가락을 퉁기고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지풍을 날리는 것을 알았으나 십장이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안심했다. '설마 여기까지 지풍이 날아오려고......' "너에게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彈指血通)을 가장 먼저 맞보는 행운을 주마." 책벌레의 말이 귓전에 닿은 것과 뒷통수가 화끈해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헉!' 그와 동시에 온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온통 한곳으로 몰려 빠져나 가고 있었다. 쿵......! 그는 볼썽 사납게 벌렁 자빠졌다. '끄... 끝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혼절하고 말았다. 무인에게 있어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평생을 통해 익힌 무공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 다시는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 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것만 발견되었 다. ■ 등용문 제1권 제10장 모여드는 군마(群魔)들 -2 ━━━━━━━━━━━━━━━━━━━━━━━━━━━━━━━━━━━ 무림은 극도의 혼란으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을 이루고 있었다. 대군림성(大君臨城)은 이 년 전 숭산 태실정에서 백도인들을 혈세 한 후 마도천하를 이룩했다. 백도(白道)는 태양을 피해 숨었으며 천하는 마도인들이 장악해 버 렸다. 비록 간간이 백도인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그것은 대군림성 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강남(江南)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온 세상이 마도천하가 되어 버렸다. 다만 동심맹(同心盟)이 정도무림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 기는 했으나 대군림성의 마세를 저지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밖에 독자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단 두 세력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도녹림을 규합한 불야성(不夜城)과 정사중도(正邪 中道)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검황루(劍皇樓)였다. 그들은 철저 히 사태를 관망하면서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결국 군림마건(君臨魔巾), 또는 일명 마왕건(巾魔王)이라 불리우 는 건(巾)을 착용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감히 강호도상을 활보하지 못했다. 대군림마맹이 세운 대군림성은 이미 중원무림의 칠할 이상을 장악 하고 있었다. 낙양 교외의 한 낡은 사당(祠堂). 과거 아홉 명의 소년소녀들이 자신들만의 왕국(王國)을 건설했던 곳이었다. 행운유수와 같은 신법으로 사당으로 다가오는 일남이녀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검사와 을주려려, 설옥경 등이었다. '이 년만이구나......' 일검사는 감회가 깊었다. 그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바로 저곳이오. 내가 삼 년 동안 살아 온 곳이......" 을주려려와 설옥경은 그 말에 눈빛을 반짝였다. 그런데 그들이 막 반쯤 무너진 담장 안으로 접근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듣기 거북한 컬컬한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가라. 너희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어서 여기를 떠나라. 이곳 은 용담호혈이니 잘못하면 귀한 목숨을 잃는다. 어서 떠나라!" "......" 일검사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섰다. 한 그루 고사(枯死)한 나무 위, 가지 위에 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얼굴이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허리에는 검집도 없이 반동강이로 부러진 검을 차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대 롱대롱 매달린 채 그는 좁쌀처럼 작은 눈으로 일검사 일행을 살펴 보고 있었다. 이때 을주려려는 재빨리 일검사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신주삼검(神州三劍) 중 반검추혼(半劍追魂) 구공권(丘 公權)이란 작자예요. 저 자가 있는 걸 보면 이 주위에 나머지 이 검(二劍)도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일검사의 눈꼬리가 성큼 치켜 올라갔다. "경고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곳에서 검을 휘두른다면 평생을 후 회하게 될 것이다." 비록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은은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 다. 그는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려 했던 기 분이 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검사는 이미 특유의 청력을 발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사방 여섯 방향으로부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어디선가 꽤 급 박한 음성이 귓전으로 들려왔다. "시간이 없다. 빨리 달아나라! 잠시 후면 가려해도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육합전성(六合傳聲)......!' 일검사는 상대가 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는 슬쩍 우측의 나무덤불 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설옥경도 그쪽을 바라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웬 쥐새끼가 남의 집에 와서 큰소리냐? 아무리 무례한 손님일지 라도 주인을 억압하지 않는다 했거늘 그것도 모르는 걸 보니 하오 문(下午門)의 쥐새끼로구나!" 그녀의 말은 너무도 당찬 것이었고 비꼬음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엇......!" 놀란 탄성에 이어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흐흠, 날 쉽게 찾아내다니 내가 잘못 봤나?" 그러나 그 자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러나 곧 후회하게 될 걸, 어린 애들아." 이때 일검사는 사방으로부터 매서운 살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 다. '무서운 살기다. 이런 살기는 마공(魔功)을 익힌 자만이 흘릴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즉시 천이통(天耳通)을 일으켜 사방을 살펴보았다. '흠...... 땅 속이군. 숨소리가 들린다. 절정의 은형지둔술(隱形 地遁術)로 몸을 감추고 있구나.' 이때 을주려려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낮게 속삭였다. "가가(哥哥), 이곳에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대체 어찌된 일 이죠?" 일검사는 히죽 웃었다. "오히려 재미있게 되었소. 어디 두고 봅시다." 이때, 사당 안으로부터 한 명의 백의인(白衣人)이 걸어나왔다. 그 자는 등에는 백검(白劍) 한 자루를 걸쳤는데 얼굴이 시체처럼 새 하얀데다 음침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를 보자 일검사는 중얼거렸다. "백무상(白無常)같이 생긴 녀석이군." 그 말에 백의청년은 날카로운 눈으로 일검사를 노려 보았다. 그러 다 문득 일검사의 양 옆에 서 있는 을주려려와 설옥경을 발견하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미녀였던 것이다. 설옥경은 코웃음을 흥! 치더니 말했다. "지존(至尊), 저 자는 흑백쌍무상(黑白雙無常) 중 백무상(白無常) 이기(李奇)라는 자예요. 저 자가 있으니 흑무상(黑無常) 전구(田 仇)란 자도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일검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곳에 예전에는 죽은 귀신들만 있었는데 오늘은 산 귀신도 있구료. 그런데 저 산 귀신이 당신들을 보고 넋이 빠진 듯 하니 공연히 질투가 나는구려." 그 말에 두 여인은 생긋 웃었다. 그러나 백무상은 흥! 하고 코웃 음을 치며 사당의 벽가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아 버렸 다. 그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일검사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는 을주려려와 설옥경을 대동하고 이 년만에 옛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모든 것은 과거와 딴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사당을 중심으로 살풍경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곳에 강호의 내노라 하는 작 자들이 운집했단 말인가?' 그는 잠시 사태를 관망해 보기로 했다. 이상한 침묵이 한동안 장내를 짓눌렀다. 대략 일각 쯤 지났을까? 뎅그렁! 뎅그렁......! 멀리서 괴이한 종(鍾)소리가 침묵을 깨뜨리며 다가왔다. 그 종소 리는 흔히 마차에 매달려 소리를 내는 것인데 이번 종소리는 괴이 하게도 귀에 거슬리며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주었다. 뎅그렁...... 뎅그렁......! 잠시 후, 덜컹 하고 사당 문 밖에서 마차가 멎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당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한 명은 금포중년인(金袍中年人)으로 위맹한 풍체에 사각형의 얼 굴, 텁석부리의 수염을 가지고 있었는데 잔뜩 위엄을 과시하며 들 어서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흑의(黑衣)에 얼굴마저 시커먼 청년이 한 명 따르고 있었다. 그는 옷도 얼굴도 모두 까맣게 보여 흡사 까마귀 같은 인 상이었다. 이때 그들의 출현에 설옥경은 일검사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지존, 저 금포인은 남칠성(南七省)의 칠십육파(七十六派)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금문(金門)의 문주로 금성신협(金星神俠) 호극 천(胡克天)이란 자예요. 그는 평소 성품이 오만하여 좀처럼 강호 출입을 않는데 이상하군요. 그리고 저 검은 얼굴의 못생긴 자는 흑무상(黑無常)인데 흑백쌍무상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인데 도 함께 있다니 이상한 일이군요.) 이때, 장내에 들어선 금문주 호극천과 흑무상은 백무상과 나무에 매달려 있는 반검추혼 구공천과 서로간에 눈짓을 주고 받았다. 백무상도 그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어 그들도 각각 한 곳에 자 리를 잡고 섰다. 그 광경에 일검사는 점점 더 기이한 느낌을 들었 다. '정말 알 수 없군. 더구나 이곳으로 고수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있으니.......' 사당 안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겁고 괴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시 일각이 흐르자 이번에는 삼 인이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일녀이남(一女二男)이었는데 아주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녹의소녀(綠衣少女)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절세미녀였다. 그녀 는 녹의(綠衣)와 잘 어울리는 녹색의 비녀를 머리에 꽂고 있었으 며 나이는 대략 십육칠 세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와 함께 들어온 두 인물은 녹의소녀의 미모와 너무나 심한 대 조를 보이는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들의 한 명은 난쟁이였 으며, 또 한 명은 대나무처럼 키가 훌쩍하니 컸다. 일견하기에도 괴인(怪人)들이었다. 이때, 사당 안의 인물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던 녹의소녀의 흑진 주같은 눈망울이 일검사를 발견하고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의 얼굴이 흔들렸다. 이어 그녀는 일검사의 옆에 바짝 붙어있 는 을주려려와 설옥경을 발견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질 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듯 했다. 그녀는 일검사 를 향해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공자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오셨나요? 소녀는 처음 뵙는 것 같군 요?" 일검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눈길이 마주치자 녹의소녀 는 사르르 옥용을 붉혔다. 일검사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소생은 일검사라 하오." "아! 일검사... 대협이셨군요. 그런데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나 요?" 녹의소녀의 말에 일검사는 도리어 반문했다. "낭자의 말씀은 이상하구려. 대명천지에 오고 가지 못할 곳이 어 디 있단 말이오?" "......!" 녹의소녀는 민망한 듯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였다. "흥!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 놈이군!" 어린아이 정도의 키에 불과한 난쟁이가 코웃음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일검사의 귓전에 설옥경의 전음이 흘러 들어왔다. (지존. 그들은 남북이절(南北二絶)이라 불리는 자들입니다. 난쟁 이가 북권(北券) 뇌전신권(雷電神券)이고 꺽다리가 남장(南掌) 천 화신장(天華神掌)입니다.) 일검사는 남북이절을 힐끗 바라본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녹의소녀가 다시 용기를 낸 듯 살포시 미소지으며 말을 붙였 다. "대협께서는 이곳이 용담호혈인 줄을 모르시나요? 우리들은 동심 맹의 사람으로 군림마맹(君臨魔盟)과 싸우기 위해 이곳에 모인 거 예요. 조금 후면 이곳은 천라지망으로 에워싸여 그때는 나가려 해 도 나갈 수가 없게 된답니다." 그녀는 일검사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일검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염려는 고맙소. 그러나 소생은 어느 정도 재간을 익혀 내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되니 걱정마시오." 그 말에 사당 안의 군웅들은 내심 코웃음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검사는 언뜻 보기에 두 눈에 신광도 보이지 않으며 양쪽 태양혈이 밋밋하여 영락없는 백면서생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들은 모두 각 지방의 패주들로서 절학을 지닌 고수들이었 다. 그러므로 일검사의 말이 가소롭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문득 백무상이 손을 칼자루로 가져가며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외쳤다. "흥! 어딘가 숨기는 게 있는 녀석이군. 뜨거운 맛을 보여주면 사 실을 실토할 것이다." 그가 막 발검하려 할 때였다. 삐이... 익......! 문득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중인들의 귓전을 울렸다. "......!" 중인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일제히 숨을 죽이고 사당 밖으로 고개 를 돌렸다. ■ 등용문 제1권 제10장 모여드는 군마(群魔)들 -3 ━━━━━━━━━━━━━━━━━━━━━━━━━━━━━━━━━━━ 스스스......! 사당 안으로 한 무더기 붉은 구름이 날아들었다. 중인들은 잔뜩 긴장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 가운데 장 내에 한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앞장 선 자는 일신에 붉은 장포를 걸친 삼십대 가량의 청년이었 다. 가늘게 찢어진 독사눈(蛇目)과 끝이 휘어진 코, 종잇장처럼 얄팍한 입술은 음침하고 잔혹한 인상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는 등에 한 자루 붉은 수실이 달린 혈검(血劍)을 메고 있었는데 그의 뒤에는 삼십여 명의 역시 붉은 핏빛 장포를 걸친 자들이 흉 흉한 기세로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살기 등등한 모습이었다. 이때, 혈의청년은 눈을 번뜩이며 중인들을 향해 괴소를 흘려냈다. "크크크...... 동심맹이 겁도 없이 낙양에 몰려오다니...... 이 혈정검주(血情劍主)의 무서움을 모르는군!" 순간 중인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혈정검주(血情劍主)라면 천마십검주(天魔十劍主) 중 일인이 아닌 가? "훗훗! 이미 주위 일리(一里)는 천라지망으로 뒤덮여 있다. 아무 도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혈정검주는 음산한 눈으로 주위의 인물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 다. 그의 얄팍한 입술에는 잔혹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 죽을 놈들이 많이도 모였군." 그러나 그 말이 끝난 순간. "으핫핫핫핫...... 새파란 애송이 놈이 감히 노부들을 얕보다 니...... 어디 네놈의 혈정검(血情劍)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노부 가 시험해 보마!" 앙천광소와 함께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남장북권(南掌北拳) 으로 알려진 남북이절(南北二絶) 중의 북권 뇌전신권(雷電神拳) 공야중이었다. 그는 혈정검주의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다짜고짜로 일권(一拳)을 뻗었다. 짜자작......! 뇌전과도 같은 권경이 혈정검주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가히 놀라 운 기세였다. 그러나 이때였다. 스스......! 문득 한 가닥 미풍이 일며 공야중이 날린 권경이 봄 눈 녹듯 사라 져 버렸다. "하하하, 당신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소. 그러나 이곳에서는 싸움을 허락하지 않겠소." 낭랑한 가운데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든 청년의 음성이 중인들 의 귓전을 울렸다. 그는 다름아닌 일검사였다. "으으음! 네놈은......" 자신의 권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공야중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더듬거렸다. '단지 소맷바람만으로 노부의 뇌전권(雷電拳)을 무력화시켜 버리 다니......' 한편 혈정검주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비로소 눈을 가늘 게 한 채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냐? 동심맹의 일원이 아니더냐?" 일검사는 장내를 둘러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천마(天魔)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천마삼세가 마 중지존(魔中至尊)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천 마천하는 오늘로 끝이다." 그 말에 혈정검주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네놈의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기는 틀렸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폭사하며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이때였다. "호호호호홋......!" 문득 설옥경이 날카로운 교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르르......! 한낱 여인의 음성으로 인해 사당의 지붕이 무너질 듯 흔들리며 먼 지가 우수수 휘날리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중인들은 심장에 찌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은 혈마공(血魔功)이 담긴 음성이었다. "......!"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혈정검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며 부르르 눈썹을 떨었다. "으으, 이런 능력은 혈문(血門)의 인물밖에는 쓸 수 없거늘...... 너...... 너희들은...... 그럼 지옥혈문(地獄血魔門)의......?" 설옥경은 코웃음치며 말을 받았다. "흥!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한 가지 더 알려줄까? 이제 혈마수(血 魔手)의 진전을 얻으신 혈문지존께서 왕림했으니 천마는 세상에 발 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순간 혈정검주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혀... 혈마지존(血魔至尊)! 그... 그게 사실이냐?" 그는 공포의 눈으로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일검사는 신비한 웃음 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는 혈마지존(血魔至尊)이다. 너는 천마와 혈마가 세불양립임 을 알겠지?" 한편, 급변된 사태에 동심맹의 고수들은 한결같이 충격과 당혹을 느꼈다. "오오...... 이럴 수가......!" "천마가 무림을 어지럽히더니 이젠 또 혈마지존마저 나타나다 니......!" 그들은 절망을 느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때, 잠시 겁 을 먹었던 혈정검주는 문득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과거 혈문주가 육십 년간을 고련하고도 혈마수(血魔手)의 진전은 얻지 못했다. 그런데 저놈이 설사 어미 뱃속에서부터 연마했다 한 들 어찌 연성할 수 있단 말인가? 흐흐...... 나 혈정검주는 천마 동(天魔洞)에서 십 년 동안 페관하여 천마의 절기를 십성(十成) 이상 익혔다. 설사 네놈이 혈마지존이라 해도 꿀릴 것은 없다.' 혈정검주는 은밀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그가 운공하자 전신에서 핏빛 혈기가 자욱하게 일어나 전신을 뒤 덮었다. 그러나 일검사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했다. 그는 방심한 듯 허술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혈정검주는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이 헛소리를 했구나.' 그는 천천히 혈검을 뽑으며 말했다. "혈마지존이 아니라 할아버지라 해도 본좌는 네놈에게 승복할 수 없다! 후훗...... 본좌의 만겁수라백검(萬劫修羅白劍)을 받아낸다 면 한 번 재고해 보마." 우웅......! 혈검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눈 깜짝할 사이에 백여 개의 검영 을 이루었다. 마침내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파츠츠츳......! 방심한 모습으로 서 있던 일검사의 전신으로 가공할 검막(劍幕)이 뒤덮였다. 파파팟... 파팍! 주위의 대기가 소용돌이치며 나무와 풀뿌리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실로 무서운 검공(劍功)이었다. 그러나 이때 일검사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따위 잔재주로 설치다니." 그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은 순식간에 피가 뚝 뚝 떨어질 듯 시뻘건 혈수(血手)로 화했다. 그는 가볍게 혈수를 흔들었다. 스스스......! 환상인가? 아지랑이같은 혈기가 중인들의 시야에 가득 피어올랐 다. 그것을 본 혈정검주는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헉! 지...... 진짜 혈마수(血魔手)다!" 그는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그는 검공을 다 전개하기도 전에 급 급히 회수하고 그 여세를 빌어 신형을 휙! 날렸다. 곧바로 도주하 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한편 관전하던 중인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전신에서 식은 땀 을 흘리고 있었다. 마도최강의 인물 혈마지존(血魔至尊)을 상징하는 공포의 혈마수! 그것이 그들의 눈 앞에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일검사는 이미 십장 밖으로 달아나고 있는 혈정검주를 향해 문득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붉은 쇠젓가락같이 달아오른 손가 락 끝에서 슝! 하고 한 줄기 혈선이 섬전처럼 뻗어 나갔다. 혈선은 일직선으로 뻗어 그대로 혈정검주의 뒤통수를 관통시켜 버 렸다. "크아아아악!" 혈정검주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그는 그대 로 즉사하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십검주 중 한 명인 혈정검 주가 변변히 손 한 번 못쓰고 뒷통수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황천으 로 직행해버린 것이었다. 그 광경에 남장(南掌) 천화신장(天華神掌) 왕천(王天)은 침중한 안색으로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구름 속에 숨은 듯 신비하여 운중비(雲中秘) 라 고도 불리우는 혈문의 전설적 지강(指 )인 탄지혈통(彈指血通)이 당대에 나타나다니......!' 한편 북권(北拳) 공야중 역시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단 일초에 천마십검주 중 혈정검주를 죽이다니......!' 이때 일검사는 일진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핫......! 천마천하는 오늘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우르르르......! 그의 웃음소리에 대기(大氣)가 무섭게 흔들렸다. "크으윽......!" 그러자 삼십여 명의 혈의인들은 귀를 감싸쥐고 휘청거렸다. 잠시 후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칠공(七孔)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가공할 쇄금강마후(鎖金剛魔吼)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었다. 다만 동심맹의 인물들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으아아... 달아나자......!" "혈마지존이 나타났다!" 뒤이어 사당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군림마성의 인물들은 혼비백산 하여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하하핫......!" 그러나 다시 심장을 터뜨릴 듯한 대마후(大魔吼)가 펼쳐졌다. "크아아악!" 쇄금강마후의 위력에 그들은 대부분 몇 걸음도 채 나가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일검사는 웃음을 그쳤 다. 동심맹의 고수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가 얽히고 있었다. 문득 그들은 눈짓으로 무언의 교환을 한 듯 일제히 신형을 날리더 니 일검사를 포위했다. 일검사는 그들을 둘러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오?" 그 말에 금포인, 즉 금문주 금성신협(金星神俠) 호극천(胡克天)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혈문의 주구다. 천마보다 나을 게 없는 마인(魔人)이니 넌 백도무림의 적이다." 북권 공야중도 침중한 어조로 외쳤다. "우릴 도왔다는 착각을 하지 마라, 너는 혈정검주를 사로잡아 본 맹의 인질 백 명과 바꾸려던 우리의 계획을 망가뜨렸을 뿐이다." 백무상도 음산하게 한 마디 거들었다. "크크...... 어쨌든 네놈은 마도에 속한 자라면 공적이다." 이때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설옥경이 차갑게 코웃음쳤다. "흥! 자비를 베풀어 살려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드는구 나! 그것이 너희 정도인들의 법도냐?" 츠으으으......! 그녀는 혈마검(血魔劍)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일검사가 손을 저어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담담한 그의 말에 설옥경은 공손히 대답하며 물러났다. 바로 그때 였다. "흥! 마도들은 살려둘 수 없다." 나무덤불로 뒤덮인 담장 그늘에서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중년 검사(中年劍士)들이었는데 신주삼검(神州三劍) 중 칠보추혼검(七 步追魂劍) 우양(羽羊)과 무형환허검(無形幻虛劍) 전비우(田飛雨) 란 인물이었다. 그들은 나타나는 즉시 일검사를 포위했다. 남북이절(南北二絶)과 혹백쌍무상, 금성신협, 신주삼검, 그리고 녹의녀가 각각 구궁(九宮)의 방위를 이룬 채 일검사와 대치하게 되었다. 한편 녹의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내심 탄식하고 있었다. '저런 분이 혈마지존이라니......!' 그녀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일검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구 인을 둘러보았다. 곧 그는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진세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제보니 구궁항마금쇄진(九宮降魔禁碎陣)이로군.' 구궁항마금쇄진(九宮降魔禁碎陣)은 차륜전법과 차력전을 합친 진 세로 그 위력은 무쌍한 것이었다. 일단 진세를 펼치면 구인의 공 력을 합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위이잉......! 구궁항마금쇄진이 발동했다. 구 인은 일검사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은 무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우르르...... 진세가 발동되자 대기가 회오리치며 은은한 뇌성이 울렸다. 그러 나 일검사는 마치 산처럼 우뚝 선 채 냉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이었다. '이 진세는 완벽하지만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세를 거꾸로 밟아 진을 지휘하는 천원(天元)을 찌르면 와해된다.' 그는 염두를 굴리며 구궁항마금쇄진의 천원(天元)에 해당하는 위 치를 찾았다. 다음 순간 그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원은 바로 녹의소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가장 어린 저 소녀가 진세를 지휘하다니......?' 일검사는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였다. 쿠쿠쿠......! 경기가 파도처럼 일어나며 일검사를 뒤덮어 왔다. 파츠츠츳......! 일시에 아홉 자루의 병기가 일검사를 향해 뻗어나왔다. 그야말로 신속하면서도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하하핫......!" 도리어 그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환영처럼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어 놀라운 광경이 벌 어졌다. 그의 신형은 구 인의 병기 끝에서 수백 개의 분신(分身) 으로 화해 무수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군웅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일검사는 여유있게 그들 사이를 누비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것은 비극환마현(秘極幻魔現)이란 혈문의 신법이오." 군웅들은 힘을 배가하며 그를 공격했으나 수백 개의 분신만 하릴 없이 베었을 뿐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스스스슷! 일검사는 진세를 거꾸로 밟으며 천원(天元)의 위치로 덮쳐갔다. 흡사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날렵하고 기쾌하기 그지없는 동작이 었다. "악!" 녹의소녀는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교구를 틀 며 수중의 옥검(玉劍)을 휘둘렀다. 파츠츳......! 옥검 끝에서 눈부신 검화가 무수히 피어나며 일검사의 신형으로 날아갔다. 실로 찬탄을 금할 길이 없는 무상의 검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검법이라도 일검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 었다. 그의 손이 마법(魔法)의 손인 양 뻗어 검을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녹의소녀의 어깨를 미풍인 듯 쓰다듬고 지나갔다. "음......!" 녹의소녀는 신음과 함께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녀 의 교구를 일검사가 가볍게 옆구리에 끼었다. 그 바람에 구궁항마금쇄진은 저절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태였다. "이럴 수가......!" 군웅들은 망연자실하여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심십영(同心十英)의 일인을 가볍게 제압하다니......!"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물들었다. "하하......!" 일검사는 낭랑한 웃음을 흘리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녹의소녀를 군웅들에게 던져주었다. "잘 들으시오. 본인은 그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소. 내 목적은 천 마를 잡는 것 뿐이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허공 십장 높이로 날아올랐다. "......!" 중인들은 가공할 신법에 그만 입을 벌릴 뿐이었다. 이때 허공에 뜬 일검사의 입에서 냉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소로운 천마의 졸개들, 혈마지존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그는 우수(右手)를 지면을 향해 뿌렸다. 번... 쩍! 섬뜩한 핏빛 혈선이 날아갔다. "혈리(血狸)가 날면 천하는 피로 씻긴다." 혈리비류혈세천하(血狸飛流血洗天下)가 펼쳐진 것이다. 이 전설의 절기는 혈리마면탈(血狸魔面奪)을 통해 전개되었다. 번... 쩍! 위이이잉...! 처절할 정도로 붉은 광채가 대기를 온통 핏빛으로 뒤덮으며 사방 으로 날아갔다. ■ 등용문 제1권 제11장 이상한 배첩(拜帖) ━━━━━━━━━━━━━━━━━━━━━━━━━━━━━━━━━━━ 사당 밖은 아수라지옥(阿修羅地獄)의 참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 아... 악!"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 났다. 공포의 혈리탈(血狸奪)이 날고 있었다. 죽음의 저주가 깃든 지옥 의 마병(魔兵) 혈리탈이 허공을 가르며 혈광을 뿌릴 때마다 수십 명의 목이 떠오르고 허리가 양단되고 있었다. "다... 달아나자...... 으악!" 주위는 지옥도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도살(屠殺)이었다. 사방에서 수백 명의 흑영들이 어른거리 며 신형을 날리고 있었으나 무엇이 어찌 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 고 있었다. 파츠츠츠... 츳! 핏빛 광선이 스치는 순간 그들은 썩은 짚단처럼 지면에 드러누웠 다. 실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도살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흑의인들은 머리에 마왕건(魔王巾)을 두른 군림마맹의 무리들이었 다. 그들은 동심맹의 고수들을 죽이기 위해 사당 주위에 천라지망 을 펼쳤던 자들이었다. "크아아악!" 참담한 아우성과 비명이 쉴 새 없이 터져나와 메아리쳤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몇몇의 흑영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 져 달아나고 있었다. 독사눈을 지닌 흑의장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 다. '으으...... 놈은 인간도 아니다, 어서 돌아가 혈마지존의 출현을 알려야 한다!' 그는 순식간에 삼십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반 마장 쯤 벗 어났을까? "헉!" 그는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문득 그의 눈 앞에 안개가 어리는가 싶더니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걸친 미청년이었다. 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말 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흑의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 너는 정말... 혈마지존이냐?"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물었다. 백삼청년, 즉 일검사는 싱긋 웃었다. 그 순간 흑의인은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떨었다. 일검사의 눈에서 가공할 신광이 폭사되었기 때문이다. 그 신광을 접한 순간 흑의인은 눈길을 떼고 싶었으나 불가항력으로 자신의 영혼이 사정없이 빨려가는 것을 느낄 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魔)의 눈빛 속으로 빨려들었다. 동시에 그의 귀에 환상같 은 일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누구냐?" 일검사는 신안(神眼)으로 섭혼마안공(攝魂魔眼功)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최심마음공(催心魔音功)을 펼치고 있었다. "으으...... 으......" 흑의장한은 심령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홀린 듯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천마단(天魔團)의 향주(香主)......." "너의 임무는?" "으으...... 혈정검주를 보좌하면서 암중으로 그를 감시하여 총단 에 보고합니다." 일검사는 염두를 굴렸다. '흠, 천마단은 소속 수하들을 불신하고 있군. 그래서 상호 감시체 계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허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계속하여 흑의장한에게 질문했다.' "천마단의 조직을 아는 대로 말해라." "으으...... 군림성(君臨城)은 십검주(十劍主)를 내세운 채 명목 만 있을 뿐... 실상 모든 것은... 천마사단(天魔四檀)이 주도합니 다." '천마사단(天魔四檀)?' 일검사는 뜻밖의 말에 다시 물었다. "천마사단에 대해서 말해봐라." 흑인은 가공할 광채를 발하는 일검사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공포에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으으...... 모... 모릅니다. 다만...... 네 명의 단주가 극비리 에 활동한다는 것만 알 뿐... 정예고수들은 모두 마왕도(魔王島) 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일검사는 눈썹을 모으며 다 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위장을 하느냐?" "그것은... 동심맹의 비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밀세력?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이냐?" "그것은... 낙양혈세(洛陽血洗) 이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구파 일방과 사대성가(四大聖家)... 십룡(十龍)이 모두 살아 있다는 사 실과... 그들이 백도제파의 무공비급을 모아 광명천(光明天)을 만 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일검사는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음, 정도무림이 붕괴된 줄 알았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천마단의 정예들은 마왕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그것은... 그것은......" 비밀을 실토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듯 흑의장한은 전신을 부르 르 떨며 더듬거렸다. 일검사는 신안을 더욱 끌어올렸다. 가공할 신광이 폭사하자 흑의인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마공(魔功)을 연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완성되 면...... 아무도 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일검사는 가슴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재차 물었다. "마왕도는 어디에 있느냐?" 흑의인은 사색이 된 표정을 지었다. "모... 모릅니다. 그것은 오직 사단주(四檀主)만이......" "그게 정말이냐?" "끄윽... 그렇... 끅......!" 마침내 흑의인은 한 사발이 넘는 피를 웩! 하고 토해내며 그 자리 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심맥이 터져 즉사하고 말았다. "......" 일검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흑의인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마왕도에서 마공을 연마한다고? 그것이 무슨 마공인지는 몰라도 필시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천마삼세(天魔三 歲)란 자는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상대인 것 같구나.' 그는 내심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그의 입술 꼬리가 가 볍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나 네가 강하면 강할 수록 나는 더욱 투지(鬪志)를 느낀다!' 아닌게 아니라 일검사는 활활 타오르는 투지를 느끼고 있었다. 이 미 그에게는 절대마군주(絶代魔君主)를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므로 천마삼세가 강할수록 투지 또한 더욱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일검사는 빙글 신형을 돌렸다. 슷! 그의 신형은 한 줄기 빛살로 화해 사당 안으로 돌아갔다. 사당에 당도하자 군웅들이 녹의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 는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일지(一指)를 날려 녹의소녀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아......!" 녹의소녀는 신음을 발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 한 표정이더니 곧 원망 섞인 시선을 일검사에게 던졌다. 이때 금성신협 호극천이 앞으로 나서며 일검사에게 포권했다. "묻겠소. 그대는 정말 혈마지존이오?" "그렇소." 일검사는 냉오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성신협은 잠시 침음하더니 말했다. "나는 호극천이란 사람이오." "알고 있소." "한 가지 제의하고 싶은 것이 있소." 일검사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말해 보시오." 금성신협은 진중하게 말했다. "그대가 진정한 혈마의 전인이고 영웅이라면 동심맹으로 초대하고 싶소. 이에 응할 수 있소?" 일검사는 오만하게 대꾸했다. "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소." 금성신협은 만족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과연 일대영웅다운 호기요. 그렇다면 당신을 본맹으로 정 식으로 초대하겠소." 일검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좋소. 귀맹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바요." "그럼...... 오늘의 빚은 그때 갚겠소." 금성신협은 다시 한 번 포권한 후 군웅들을 돌아 보았다. 군웅들 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들은 모두 신형을 날렸 다. 휙! 휙! 금성신협 호극천을 필두로 군웅들은 순식간에 사당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은 바로 녹의소녀였다. 그녀는 뭔 가 할 말이 있는 듯 그윽한 눈으로 일검사를 바라보았으나 가늘게 한숨을 쉰 후 교구를 날려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설옥경이 불만을 터뜨렸다. "지존,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는데 왜 놓아 주었죠?" "......" 일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설옥경은 불만스런 표정 으로 말했다. "그들이 펼친 구궁항마금쇄진은 영백팔수(血影百八手)로 간단히 깰 수도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혈영미리보로 그들의 병기도 모두 날릴 수 있었구요. 그런데 왜 그들을 놓아 주셨나요?" 그녀는 흥분하여 음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 지옥혈문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본문의 동도들을 무 참히 살상했어요. 그런데 왜?" 그녀로서는 당연한 항변이었다. 오랫동안 정도무림과 천마이대마 벌은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수백 년간에 걸쳐 세불양립의 관계로 이대마벌, 그 중에서도 혈문의 제자들은 씨가 마르다시피 했었다. 일검사는 그녀의 항변에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며 사당 밖으 로 걸음을 옮겼다. "지존!" 설옥경은 울상을 지으며 그를 불러세웠다. 그러나 이때 을주려려 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을주려려는 설옥경에게 속삭이듯 나직이 말했다. "설언니. 소매의 말 좀 들어 주실래요?" 그녀의 다정다감한 음성에 설옥경은 문득 자책이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존을 유혹한 셈인데.... 자신의 정랑을 빼앗 은 날 려려는 친자매처럼 대해 주었어.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을주려려는 문득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가가(哥哥)께 소매가 그들을 놓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말에 설옥경은 흠칫하며 물었다. "왜지요?" "그건... 소매 역시 신주사대성가(神州四大聖家) 출신이기 때문이 에요. 그러니 절 봐서라도......" "아......!" 설옥경은 나직이 탄성을 발하며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다. 내가 경솔했구나.' 그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편 을주려려의 옥용에는 수 심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강호로 나온 후 그녀는 자신의 가문인 병기만상보가 멸문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혈문의 전인이 된 일검사가 그녀의 가문은 물 론 정도무림과 대적해야 하는 상황에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 다. 이 모든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느끼게 했 다. "흑흑......!" 마침내 을주려려는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설 옥경은 그만 당황을 금치 못했다. "려매...... 내가 잘못했어요." ■ 등용문 제1권 제11장 이상한 배첩(拜帖) -2 ━━━━━━━━━━━━━━━━━━━━━━━━━━━━━━━━━━━ 일검사는 사당 밖 고목나무 아래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금 그의 심정은 착잡했다. 실상 그는 동심맹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다만 혈마지존으로서 그들과 부딪쳤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본래 무림인이 아 니었으므로 정도나 마도인의 입장과 완전히 무관하다 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혈마지존이었으며 그러한 신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도 쪽에 서야 했으며 필연적으로 정도 무림과는 등을 질 수밖에 없었다. '장차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아직은 판단을 내릴 수가 없구 나.' 이때였다. 문득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땅 속에 두더지처럼 숨어있는 친구! 이제 그만 나오시지!" 그는 느닷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파파파팍! 돌연 눈 앞에서 흙덩이가 솟구치며 그 속에서 한 괴영이 불쑥 모 습을 드러냈다. "으하하하하......! 과연 혈마지존답군!" 괴영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 자는 전신에 검은색의 가죽옷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궁금하군. 은형지둔환마공(隱形地遁幻魔功)으로 은신했는데 어떻 게 알아냈소?" 괴인은 가죽옷 사이로 드러난 눈을 번들거리며 탁음으로 물었다. 일견하기에도 내공이 깊은 고수였다. 일검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귀식대법으로 호흡소리는 감추었으나 심장이 뛰는 소리만은 감추 지 못했소." 그 말에 괴인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혈마지존답소. 그런 미약한 소리를 듣다니 말이오." 그는 두 개의 눈구멍을 통해 일검사의 아래 위를 훑어 보며 말했 다. "전설의 혈마수(血魔手)를 얻은 자가 마중지존(魔中至尊)이 된다 는 말이 오랫동안 떠돌았소.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이젠 어느 정도 수긍하겠군." 이어 그는 괴소를 흘려내며 말했다. "흘흘...... 만일 내가 일 년 전에만 귀하를 만났다면 지금의 주 인을 섬기지 않았을 텐테, 후회가 되는군." 가죽옷의 괴인은 아마도 일검사에게 꽤 호감을 느낀 듯 했다. "......" 일검사는 괴인을 주시했다. 비록 용모는 알 수 없었으나 그도 괴 인에게 한 가닥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괴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무인(武人)의 신의는 생명보다 중한 법, 만일 그대가 일 년 동안 천마삼세에게 죽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승부를 결해 패한 다면 기꺼이 그대의 종이 되겠소."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일방적인 제의였다. 하지만 영웅은 영웅 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하게 말했 다. "좋소! 기다리겠소." 괴인은 문득 머리를 긁적였다. "내 바쁘지 않다면 귀하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바쁜 일이 있어 이만 가야겠소. 자, 그럼 이 배첩을 받으시오." 그는 한 장의 종이를 수평으로 던진 후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그 는 다시 땅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일검사는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수법으로 종이를 낚아채며 중 얼거렸다. "대단한 자로군. 지금까지 내가 만난 자 중 가장 강하다. 대체 어 떤 자일까?" 그는 수중의 배첩을 살펴보았다. 배첩은 마치 먹물에 담구었다 꺼 낸 듯 전체적으로 시커먼 흑첩(黑帖)이었다. 겉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만겁불회림(萬劫不廻林)> 일검사는 흠칫했다. '만겁불회림이라면 불야성(不夜城)이 있다는 곳이 아닌가?' 그는 미간을 모으며 배첩을 펼쳐보았다. <이 배첩을 받은 자라면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배첩에 쓰여진 글의 첫머리를 읽는 순간 일검사의 눈썹이 꿈틀했 다. '흠, 오만한 문구로군.' 그는 다시 배첩을 읽어나갔다. <무림은 하루도 피바람 잘 날이 없으니 일찍이 이처럼 난세(亂世) 는 없었노라. 이에 본인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의 뜻을 받들어 조 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개국(開國)을 선언하노니 본국의 십대천 왕(十大天王)의 위(位)를 받으라. 입천(入天)하면 그대에게는 무 상의 광영은 물론 부(富)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얻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입천을 거절한다면 천하에 발붙일 곳이 없 게 될 것이다. - 조화신무국주(造化神武國主) 측천신무제(測天神武帝).> 배첩의 내용을 모두 읽은 일검사는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후후훗......! 세상에는 별난 자들이 다 있군. 난세를 타파하기 위해 조화신무국을 개국한다고? 십대천왕의 위를 준다고?" 일검사는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배첩을 품 속에 갈무리 했다. "좋아! 측천신무제, 귀하가 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군."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을주려려와 설옥경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 다. 흡사 연기처럼 흘러가는 세 인영(人影)이 있었다. 그들은 산을 넘 고 숲을 가로질러 한 산촌(山村)에 이르렀다. 이석촌(理石村). 그곳은 본시 떠돌이들이 모여 형성된 장인촌(匠人村)이었다. 석공(石工), 도공(陶工), 대장장이, 목공(木工) 등등....... 갖가 지 기술을 지닌 자들이 모여 군락을 형성한 이석촌은 사방이 산으 로 둘러싸인 풍치 수려한 곳이었으나 그로인해 외부와는 단절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 이럴 수가......!" 휘청! 이석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백삼 미청년이 몸을 흔들고 있 었다. 그의 양 옆에는 백의와 홍의를 입은 두 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있 었다. 보라! 약 삼백여 호 남짓한 이석촌은 온통 잿더미가 되어있는 것 이 아닌가? 마치 전화(戰禍)가 휩쓸고 지나간 듯 마을의 집집마다 주춧돌과 불에 탄 기왓장만 나뒹굴 뿐 온통 폐허가 되었지 않은 가? 휘익! 미청년, 즉 일검사는 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천마 행공법(天魔行空法)으로 허공 삼십여 장을 단숨에 날아갔다. 그는 의형제인 여덟 명의 아우들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는 폐허가 된 마을의 중심부에 내려섰다. "으으......! 잔인한 도륙(屠戮)이다......! 대체 어떤 자가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일검사의 눈에서는 분노의 살광이 이글거리며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석촌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심 지어는 살아있는 생물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었다. 본래 천여 명에 달하던 이석촌의 장인들은 한 명도 살아있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가 끊어지거나 눈을 부릅뜬 채 머리 통이 부서져 허연 뇌수가 흩어져 있었다. 아니, 어떤 시신은 사지의 짝을 찾을 길조차 없었다. 실로 지옥도 를 보는 기분이었다. 더욱 처참한 것은 개나 돼지, 닭, 소, 양...... 그런 축생들조차 살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일검사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아우들에게도......?' 다음 순간 그는 을주려려와 설옥경에게 뭐라 말조차 하지 않고 전 광석화처럼 신형을 날렸다. 죽림(竹林). 이석촌의 서쪽 구릉을 빽빽하게 뒤덮은 죽림이 있었다. 일검사는 단숨에 죽림 앞에 떨어졌다. "......"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죽림을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훗...... 역시 내 생각대로군. 제갈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곳을 난공불락의 절진(絶陣)으로 탈바꿈시켜 놓았군." 일검사의 뇌리에는 이 년전의 정다웠던 추억이 떠올랐다. 여덟 명의 불운한 아이들, 그들은 일검사에게 있어서는 친 혈육이 나 다름없는 형제들이었다. 그는 이석촌이 도륙당한 것을 보고 죽림으로 달려왔으나 다행히도 죽림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때, 그의 옆에 을주려려와 설옥경이 사뿐이 떨어져 내렸다. 일 검사는 빙긋 웃으며 숲을 가리켰다. "려려, 옥경, 이 숲을 보고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겠소?" "......?" 두 여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이 보기에는 그저 울창한 죽림일 뿐, 아무런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기문둔갑술에 대해서는 깜깜했던 것이다. "후훗...... 이 죽림은 보통 죽림이 아니오. 이곳에는 구궁현현팔 상대진(九宮玄玄八相大陣)이란 상고의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소. 만일 내력을 모르고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평생을 헤매도 결코 길 을 찾지 못하고 굶어죽을 것이오." "아......!" 두 여인은 탄성을 발했다. 일검사는 두 여인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훨훨 날아서 죽림 안 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눈을 감고도 죽림의 진도를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것은 자신이 직접 만든 진도였기 때문이었다. 휙! 휙! 일검사는 죽림 속을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돌아갔다. 두 여인은 처 음에는 눈을 크게 뜨고 진도 속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곧 눈 앞 이 어지럽고 사방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어 단념할 수밖에 없 었다. 어떤 때는 눈 앞에 거대한 절벽이 막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망 망대해(茫茫大海)가 펼쳐지고...... 또 어떤 때는 캄캄한 암흑으 로 풍경이 연달아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죽림 속에 어째서 이런 풍경이 존재할 수 있지?' 두 여인은 한결같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때 그녀들의 귓전에 일검사의 낭랑한 웃음이 들렸다. "하하...... 제갈아우는 더욱 정진한 것 같구나. 구궁현현팔상대 진에 다시 건곤혼천정반세(乾坤混天正反勢)를 혼합시켜 놓다니 말 야......" 그렇다. 본래 그가 도면을 줄 때는 오직 구궁현현팔상대진도밖에 없었다. 그것을 제갈이 다시 손을 본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설사 진법에 정통한 인물이라 해도 진도를 파해한다 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일검사는 죽림을 빠져나왔다. "아!" 두 여인은 그제서야 눈 앞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들의 앞에는 풍경이 일변해 있었다. 울창하던 죽림이 끝나고 하나의 계곡이 나타난 것이다. 계곡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일이... 생겼군!" 문득 일검사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는 한눈에 계곡에 쳐져 있어 야 할 진세에 이상이 생긴 것을 파악한 것이었다. "가가(哥哥)......! 저길 보세요......!" 을주려려가 외쳤다. "......!" 일검사는 안색이 다시 변했다. 을주려려가 가르키는 곳에는 계류 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계류의 물은 온통 시뻘건 빛을 띄고 있 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상류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바닥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였 다. 그런데 온통 핏물로 변했다면 보지 않아도 능히 상류 쪽의 일 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갑시다!" 일검사는 이미 수십장을 날아가고 있었다. 미처 한 마장도 못가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시체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수십 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어떤 시체는 물 속에 처박혀 있었고, 어떤 것은 바위 사이에 엎어 져 있었다. 일검사는 그들은 하나같이 마왕건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째서 군림마맹에서 이곳을 침범했단 말인가?' 일검사는 시체들을 살펴 보았다. 시체에는 쇠털 같이 미세한 암기가 꽂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암 기가 꽂혀 있는 부위의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냉심(冷心)의 암기술은 더욱 발전했군. 이 자들은 우모산우침(牛 毛散雨針)에 당했구나." 냉심은 본래 손재주가 좋아 각종 암기를 스스로 제작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기술이 가히 일품이었다. 일검사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형제들이 아직은 무사한 것 같은데......'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표정은 결코 밝지 못했다. 여기저기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화약(火藥)을 이용해 진세를 파괴한 흔 적이었다. '놈들은 치밀하게 공격했고 그 숫자도 많다. 아우들이 아무리 무 공이 발전했다 해도 군림마맹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좀 더 나아가자 이번에는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쪼개진 시체들 이 나타났다. 그들은 완벽한 도법에 당한 것이었다. 그 시체는 무려 삼십여 구 나 되었다. 일검사는 불안한 가운데서도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꼈 다. "천맹(天盲)의 일자회풍무류도(一字廻風無流刀)는 이미 십이성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그런 데......" 일검사는 눈썹을 흠칫 떨었다. 앞쪽으로 들어갈수록 시체들의 두 조각난 단면이 흐트러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氣)가 흐트러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간히 머리가 으깨어진 시체, 가슴이 박살난 시체들도 발견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거력의 장공(掌功)에 당한 시체들이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흑천(黑天)의 거패신장(巨覇神掌)도 더욱 강해졌구나." 일검사의 얼굴에는 기쁨이 어렸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 했다. 문득 그의 귓전에 은은한 쇳소리, 병장기 다투는 소리가 들 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속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과 누군가의 음탕한 웃음소 리가 섞여 들려왔다. 일검사의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이건 설화(雪花)의 비명......!' 다음 순간 그는 충소혈광(沖消血光)의 신법으로 날아갔다. 그의 피는 무섭게 끓고 있었다. 설하는 그에게 있어 친누이나 다 름 없었다. 비록 헤어진 지 이 년이 지났으나 그는 비명을 듣는 순간 설화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숲 속의 한 공지. "후훗...... 앙탈 부리지 마라. 지금은 이래도 곧 좋아 죽게 될 것이다. 본 무정검주(無情劍主)는 이름은 무정이나 실은 다정검주 (多情劍主)다. 최소한 계집에게만은 말이다." 자색 옷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한 미소녀를 겁간하려는 중이 었다. "훗훗...... 재수가 좋았다. 이곳에 수상한 장원이 있어 수색하던 차에 너같은 계집을 만날 줄이야......" 무정검주는 군림십검주 중 아홉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검주였다. 그는 수하고수 오백 명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했다. 그것은 낙양일 대를 군림마맹의 완전한 예하로 만들기 위해서 였다. 본래 그는 몇 차례 이석촌을 들른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죽림의 절진 때문에 물러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백 명의 수 하들을 이끌고 이석촌을 도륙하면서 공격하게 된 것이었다. "흐으윽! 이 놈아, 차라리 날 죽여라!" 설화는 치를 떨며 외쳤다. 그녀는 혈도를 찔린 상태라 손가락 하 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훗훗...... 죽이다니? 너같이 아름다운 계집을 내 어찌 죽이겠느 냐? 안심해라, 이제 곧 극락(極樂)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줄테니." 무정검주는 설화를 일으켜 세우더니 나무 둥치에 기대게 했다. 이 어 그는 서슴없이 설화의 가슴을 주물렀다. "아악! 치워라, 이놈!" 그러나 무정검주가 그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두 눈에 음탕한 빛을 흘리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설화의 옷자락이 풀어 헤쳐졌다. '아아......!' 설화는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혀를 물고 죽으려 해도 혈도가 찔 린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흐흐......!" 옷자락이 헤쳐지자 박속처럼 하얀 젖가슴이 나타났다. 설화의 나 이는 열일곱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어린애가 아 니었다. 성숙한 여인의 성징(性徵)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허리는 한 줌밖에 안될 정도로 가늘었으나 엉덩이는 이미 실팍하게 벌어져 있었고 특히 두 개의 젖가슴은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흐흐! 과연 기막힌 가슴을 지녔구나. 내 눈은 역시 틀림 없다니 까." 무정검주는 덥썩 설화의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흐윽!" 설화는 입을 딱 벌렸다. 징그러운 사내의 손이 아직 그 누구도 손 댄 적이 없는 젖가슴을 움켜쥔 것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 싶었다. 무정검주는 슬슬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유실을 살 짝 비틀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성급히 설화의 옷을 잡아 당겼다. 그 바람에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설화의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설화의 육체가 환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가슴에서 아랫배에 이르 기까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흐흐...... 느긋이 즐기고 싶다만 시간이 없구나. 일단 맛만 보 여주마." 무정검주는 한 손으로 자신의 하의를 끌러 내리며 한 손으로는 설 화의 남은 옷을 계속 찢어 버렸다. 찌이익! 설화의 알몸이 드러나고 있었다. 간신히 허리춤에 걸려있던 옷자 락이 뜯겨져 나가자 눈부시게 흰 허벅지가 드러났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한 조각의 고의(袴衣) 뿐이었다. 무정검주는 자신의 하의를 내린 후 침을 꿀꺽 삼켰다. 흉물스런 그의 양물은 벌써부터 고개를 세우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흐흐......" 그의 손이 뻗어갔다. 하나 남은 고의를 잡아 내리기 위해서였다. '아아! 하늘이여!' 설화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차디찬 무정검주의 손이 아랫배에 닿았다. 이제 곧 그녀는 무참히 당하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주르륵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의가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파스슷! 흡사 유령처럼 떨어지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일검사였다. 일검사 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고 있었다. '설화다......!' 그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나타난 것을 모르 는 무정검주는 설화의 마지막 남은 고의를 힘껏 잡아 당겼다. 그 의 눈이 한껏 크게 떠진 채 여인의 비부에 못박히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순간에 벼락치는 듯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 다. "죽어라! 이 더러운 놈!" "헉! 누... 누구냐?" 무정검주도 고수였다. 비록 일시적으로 여색에 눈이 멀어 있었으 나 그의 반응은 눈부시게 빨랐다. 그는 한 손으로 하의를 움켜잡 으며 한 손으로는 옆에 놓아 두었던 검을 집어들고 빙글 돌아섰 다. 그러나 그가 채 검을 반쯤 뽑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부릅떠졌다. 그는 보았다. 한 가닥 핏빛 선(線)이 곧장 자신의 미간을 향해 뻗 어오는 것을. 퍽! 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악!" 뒤이어 울린 것은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무정검주의 미간에 동전 만한 구멍이 뻥 뚫렸다. 그 구멍으로부터 피화살이 솟구치고 있었 다. "어.... 어... 어......!" 무정검주는 허둥지둥 검을 장난처럼 휘둘러대다가 앞으로 퍽 넘어 졌다. 그는 사지를 부르르 경련하다가는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 다. "더러운 놈......!" 일검사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불에 단 쇠젓가락처럼 시뻘개졌던 손가락은 어느새 원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彈指血通)의 일지(一指)로 그는 십검주 중 또 한 명을 죽인 것이었다. "설화!" 그는 여전히 혈도를 찍힌 채 나무에 기대서 있는 설화에게 다가갔 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었다. 설화는 민망하게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일시적으로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황급히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 다. 그는 슬쩍 손가락을 튕겨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설화는 아! 하는 신음을 발하더니 다급히 찢어진 옷자락으로 몸을 가렸다. 그 런 그녀의 얼굴에는 수치감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당... 다신은 누구죠......?" 설화는 등을 돌린 일검사를 향해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일검사는 빙글 몸을 돌렸다. 잠시 설화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은 어지럽게 일검사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 운 눈물이 고였다. "오...... 오빠! 오셨군요! 오빠......!" 그녀는 와악 울음을 터뜨리며 일검사의 품 속으로 달려 들었다. 그녀는 일검사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을 터뜨렷다. 온몸을 흔들어대며 그녀는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반갑고 기쁘고 가슴이 벅차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듯 했다. 일검사는 그녀를 안은 채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됐다, 됐어. 설화야, 이제 그만 울어라. 내가 왔지 않느냐?" "흐흑......! 오빠,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후훗...... 그럼. 믿기지 않는냐? 그렇다면......" "아얏!" 설화는 비명을 질렀다. 일검사가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에 함빡 웃음을 담으며 말했 다. "저... 정말...... 오빠가 맞군요." 설화는 아직도 치기가 남아 있었으나 그래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 라져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일검사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둔부를 꼬집었으나 감촉이 옛날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느꼈다. "오빠! 장원이 위험해요!" 문득 설화는 정신이 번쩍 든 듯 다급히 외쳤다. 일검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가자!" 휘... 잉! 그는 설화를 안은 채 신형을 날렸다. 그때 뒤늦게 당도한 을주려 려와 설옥경도 즉시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솟구치고 있었다. 한 채의 장원이 숲 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비록 웅장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누각과 전각은 날아갈 듯 힘차게 처마의 선을 뻗치고 있었고, 건물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 있었다. 장원의 문에는 황금빛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힘찬 달필로 쓰여 있었다. <등용문(登龍門)> 등용문. 그것은 용(龍)이 승천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장원의 편 액에 적혀있는 의미는 바로 도약하려는 청춘의 야망을 말하는 것 이었다. "등...... 용...... 문......!" 장원에 당도한 일검사는 편액을 보는 순간 콧등이 시큰함을 느꼈 다. 그 장원은 그가 사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우들이 붙 인 것이었다. 그는 등용문이란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모두 죽여라......!" 차차차... 창! 장원 안에는 살벌한 외침소리, 병장기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일검사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그는 마치 당겨진 시위에서 화살이 쏘아가듯 쾌속무비하게 장원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는 단숨에 장원의 가장 높은 누각 지붕 위에 떨어졌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자 장원 내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장원 한가 운데에는 연무장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서 한창 치열한 혈 전(血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에는 이녀오남(二女五男)이 서로 등을 대고 의지한 채 싸우고 있었다. 그 중에서 두 명의 미소녀는 중상을 입은 듯 주저앉아 있 었다. 다섯 명의 청년들은 두 미소녀를 호위한 채 분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피로 범벅이 된 도(刀)를 든 맹인(盲人) 청년도 있었고, 솥뚜껑만한 쌍장을 휘두르는 구척거구의 청년도 있었다. "흐흐흐! 쏴라! 놈들은 이제 지쳤다!" 근 삼백여 명에 달하는 마왕건을 두른 흑의인들은 청년들을 향해 일제히 강전(强箭)을 발사했다. 슈슈슈슈슈슉......! 청년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무기를 휘둘러 암기들을 막아내고 있 었다. 그러나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들의 몸에는 군데군데 암기가 박혀들고 있었다. '죽일 놈들......!' 일검사의 분노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비등했다. "우우우우...... 우!"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찬 마후음(魔吼音)이 터져나왔다. 쇄금강마후 (鎖金剛魔吼)를 전개한 것이었다. "크... 아... 아... 악!" 삼백여 명의 흑의인들은 수천 개의 쇠종이 울리는 듯한 장소에 모 두 피를 토하며 벌렁벌렁 넘어갔다. 어떤 자는 심맥이 파열되어 즉사하고, 어떤 자는 바지에 오물을 지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명년 오늘이 너희들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냉소와 함께 일검사의 열 손가락이 불에 단 쇠젓가락처럼 시뻘개 졌다. 다음 순간 열 손가락이 일제히 퉁겨졌다. 피피핑......! 열 줄기의 혈선이 빨랫줄처럼 뻗는 순간 다시 단말마가 꼬리를 물 었다. 장내는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군림마맹의 인물들은 미처 상황판단조차 해내지 못한 채 수급이 끊어지고, 허리가 양단되며 짚단처럼 쓰러져 갔다. "이럴 수가......!" 이때였다. "핫핫핫...... 혈리탈이 피를 튀기면 천지는 혼돈에 잠긴다." 낭랑한 외침과 함께 가공할 광경이 펼쳐졌다. 쐐애애... 애애... 액! 혈리탄혈파천황(血狸彈血破天荒)이 전개된 것이다. 혈리마면탈이 일검사의 손을 떠나가는 순간 천지가 캄캄해졌다. 스으으으으......! 죽음의 적막이 흘렀다. 잠시 후 사위는 환해졌다. 그러나 상황은 일변해 있었다. 마왕건 을 두른 흑의인들은 지면에 서 있는 자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삽시에 모두 전멸한 것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시산혈해 였다. 이제 장내에 서 있는 자는 일곱 명의 청년남녀와 혈옥선자 설옥 경, 을주려려, 설화 뿐이었다. "아아......!" 그들은 너무나 가공할 참사에 넋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문득 미풍과 함께 연무장에 백의인영이 내려섰다. 일검사였다. 그는 두 눈에 천하를 오시하는 오만한 빛을 담은 채 주위를 둘러 보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훈풍과도 같은 미소를 띄우며 팔을 벌렸다. "아우들...... 내가 왔다." "......!" 온통 피에 젖어 있던 이녀오남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혀... 형님!" "대형!" "오빠... 아...!" 피로 뭉쳐지고 혼(魂)으로 엮어지고 굶주림 속에 역경을 함께 나 누며 맺어진 의형제들이었다. 그들은 감격과 환희에 젖어 일제히 달려왔다. "흐흐흑......!"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두 미소녀도 달려와 품에 안겼다. 다섯 명의 청년은 바닥에 꿇어 엎드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오......대형......!"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 년만에 재회한 것이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일검사, 그는 그들에게 친구였으며, 대형(大兄)이었고, 연인이었 고, 아버지였던 것이다. - 다음 권에 계속 - ■ 등용문 제2권 제12장 등용(登龍)의 장(章) ━━━━━━━━━━━━━━━━━━━━━━━━━━━━━━━━━━━ 대전(大殿)의 건축양식은 화려하고 정교했다. 또한 은연중 웅장한 기상을 풍기고 있었다. 대전 입구에 걸려있는 편액에는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필치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등용전(登龍殿)> 그곳은 여덟 명의 남녀들이 피땀 흘려 세운 것이었다. 지금 등용전의 중앙에는 하나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는데 그 곳에 일검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가벼운 흥분의 빛을 띄우고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원탁이 놓 여 있었다. 원탁에는 을주려려와 설옥경, 그리고 여덟 명의 남녀 가 앉아 있었다. "......" 팔 인은 격동의 눈빛으로 일검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들에게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 다. 그의 말을 들으며 여덟 명의 남녀는 때로는 경탄하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일검사가 지옥십삼관을 통과하고 지옥혈마공을 연성했다는 말에는 한결같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이윽고 긴 얘기가 끝났다. 일검사는 감회어린 표정으로 팔 인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갈, 너의 학문과 진법은 진경을 이른 것 같구나. 주변에 펼쳐 져 있는 진법은 정말 훌륭했다." 그의 칭찬에 제갈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뭘요, 모두가 대형의 덕분입니다." 일검사는 이번에는 냉막한 인상의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냉심(冷心), 너의 암기술은 이제 절정에 오른 듯하구나. 내가 보 기에 만천화우(滿天化雨)의 조예에 달한 것 같다." 냉심은 그저 싱긋이 웃기만 했다. 그 웃음마저 차갑게만 느껴졌 다. 그러나 일검사는 안다. 냉심의 속마음은 전혀 차갑지 않은 것이 다. 일검사의 시선은 다시 체구가 월등하게 큰 청년에게 향해졌 다. 그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흑천(黑天), 너의 거패신장(巨覇神掌)은 그 정도면 되었다. 그리고 천맹(天盲)의 일자회풍무류도(一字廻風無流刀)도 완벽하다." 두 청년은 슬쩍 얼굴을 붉혔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 다. "다만 화후가 부족한데 그것은 내공이 약한 탓이다." 그는 이번에는 금삼의 화복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장(金藏), 너의 이재(理財) 능력은 갈수록 발전하는구나 하하! 이 장원을 증축하면서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대체 얼 마나 모았느냐?" 그 말에 금장은 즉시 소매 속에서 금주판을 꺼내 손가락으로 튕기 기 시작했다. 자르락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리더니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대형이 떠나시던 당시의 은자는 정확히 십팔만구천구백 냥이었는 데 지금은 황금(黃金)으로 쳐서 십만 관이 조금 넘습니다." "십만 관......!" 을주려려와 설옥경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황금 십만 관 이라니? 도무지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금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대형께선 모르시겠지만 이미 화북(華北) 일대의 상권(商權)은 등 용회(登龍會)가 완전히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등용회(登龍會)?" 일검사는 뭉클한 감정을 느끼며 뇌까렸다. 제갈이 금장을 대신하 여 설명햇다. "하하, 모두가 금장의 걸작입니다. 화북제일거부(華北第一巨富)인 등용회는 화북일대의 전장(餞莊), 도박장(賭博場), 기루(妓樓), 골동상, 해운업을 모두 흡수했습니다. 그런데 회주(會主)가 누군 지 아십니까?" 그 말에 일검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회주? 금장이 아니냐?"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등용회주는 바로 대형이십니다." 일검사는 흠칫했다가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런가? 후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가 된 셈이로군." 그 말에 팔 인의 남녀들은 모두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호호호......!" 실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갔다. 그러나 이때 유독 세 인만은 이상한 표정으로 가끔 을주려려와 설옥경를 훔쳐보곤 했다. 그녀들은 바로 설화, 비비, 진주 등이었다. 그녀들의 눈에는 질투 의 빛이 떠오르곤 했다. 실상 이 년의 세월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었다. 그 동안 세 소녀는 어린애 티를 완전히 벗고 있었다. 이제는 성숙한 여인 이 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구 인의 재회(再會)는 밤이 이슥하도록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진주와 비비가 다과를 내어 왔으므로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 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느새 며칠이 물 흐르듯 지나가고 있었다. 한 칸의 아담한 정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안에는 은은한 청향이 흐르고 있었다. 그 방에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일검사와 을주려려였다. 을주려려는 웬지 초초한 표정이었 으며 안색도 극히 어두워 보였다. "아아, 가가(哥哥). 아버님의 행방을 알 길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녀는 일검사의 품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강호에 나온 이래 그녀는 안색이 펴질 날이 없었다. 병기만 상보를 비롯한 신주사대성가의 멸망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일검사가 곁에 있었기 때문 이다. 일검사는 을주려려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 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곧 장인어른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 오." "어떻게요?" 을주려려는 물에 젖은 두 눈에 반짝 기대의 빛을 띄우며 일검사를 올려다 보았다. 일검사는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이미 생각한 바가 있소. 조만간 냉심을 강호로 보낼 생각이 오." "아......!" 을주려려는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일검사는 두 눈에 정광을 발산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강호에 새로운 세력(勢力)을 하나 만들 생각이오." "......?" "벌써 이름까지 생각해 두었소." 을주려려는 호기심에 차 눈빛을 반짝였다. "그 단체의 이름은 등용문(登龍門)이오." "아......!" 을주려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일검사는 가라앉은 음 성으로 말했다. "무림은 흑백(黑白)으로 갈라져 끊임없는 암투(暗鬪)를 계속하고 있소. 옛말에도 난세(亂世) 일수록 영웅이 도래한다 하였소. 나는 등용문을 세워 때를 만나지 못한 젊은 용들을 끌어들일 생각이 오." "아......" 을주려려는 흠모가 가득 담긴 눈으로 일검사를 응시했다. 그녀의 가슴은 뿌듯한 희열감으로 벅차오르고 있었다. '이 분은 크다. 마치... 산(山)같은 분이야. 보면 볼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산악같이 커지는 분이야.' 일검사는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을 발산하며 힘주어 말했다. "등용문은 장차 이 혼탁한 세상을 평정하게 될 것이오. 두고 보시 오. 등용문의 젊은 용(龍)들이 어떻게 난세를 평정해가는지 보여 주겠소."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신념이 깃든 음성이었다. 등용문(登龍門). 과연 풍운만변의 무림천하에 등용문은 어떤 모습 으로 등장할 것인가? 어쩌면 무림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2장 등용(登龍)의 장(章) -2 ━━━━━━━━━━━━━━━━━━━━━━━━━━━━━━━━━━━ 등용전(登龍殿). "대형......" "가... 감사합니다!" 두 청년은 부복한 채 온통 희열에 떨리는 음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맹(天盲)과 흑천(黑天)이었다. 지금 두 사람은 일검사로 부터 각각 한 장씩의 두루마리를 받고 만면에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들을 내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후훗...... 너희들은 고수(高手)가 되어야 한다. 왜냐면 너희들 이야말로 등용문의 기둥이 되어야 하니까." "......!" 천맹. 그는 앞을 볼 순 없었으나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더듬어 해 독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더듬던 그의 얼굴에는 벅찬 흥분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아아...... 세상에 이런 도법(刀法)이 존재하다니......"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혈전섬뇌백팔도(血電閃雷百八刀)라고 한다. 그것은 천종마예(千 種魔藝) 중에서도 최강의 도법이지. 그것은 너에게 가장 맞는 무 공이다. 십성 수위에 이르면 능히 천하십강(天下十强) 안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장대한 체구의 흑천도 두루마리를 들쳐보며 연신 탄성을 발 하고 있었다. "아아...... 대형! 이것이 정말... 세상에 있는 무학이란 말입니 까?" "그건 밀살극인(密殺極刃)이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공수입백인 (空手入百刃)과 흡사하나 그보다 최소한 백 배는 강하다. 능히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르는 위력이 있다." "......!" 천맹과 흑천은 감격의 표정으로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 빛 속에는 일검사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 그리고 신뢰의 빛이 가득했다. 일검사는 두 사람을 향해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삼개월의 기간을 주겠다. 그 동안 너희들은 전력으로 무공을 연 마하도록 해라. 다른 형제들에게도 각각 무공을 전해 주겠다. 그 리고 삼개월 후 등용문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될 것이다." "아아......" 천맹과 흑천은 탄성을 토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가슴은 벅찬 격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금장(金藏). 그는 기대의 눈빛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과연 그가 기대한 것 이상의 광세절학이 적혀 있었다. 유명구인(幽冥九印). 광혈수라지(狂血修羅指). 그 두 가지 절학은 금장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오오...... 대형, 정말 고맙습니다." 그의 가느다란 눈에는 강렬한 야망의 빛이 번뜩였다. 천하제일의 이재(利財) 능력을 소유한 금장, 그의 두뇌에는 이미 삼천백육 가 지의 재산을 모으는 방법이 비장되어 있다. 그런데 하물며 절학마저 익힌다면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천 리준마에 날개를 다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냉심(冷心). 그는 언제나 무표정했다. 그러나 지금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흥분의 빛이 역력히 떠오르고 있었다. 잠영환마보(潛影幻魔步). 무영천마공공수(無影天魔空空手). 일검사가 냉심을 위해 안배한 무공은 그 두 가지였다. 냉심은 천 부적으로 몸이 날렵했다. 따라서 신투술(神偸術)은 이미 타의 추 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잠영환마보(潛影幻魔步)로 일시에 백팔 번의 신법 변 화를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는가. 특히 무영천마공공수(無影天魔空空手)는 칠백 년 전에 실전되었던 전설의 인물 마투자(魔偸子)의 독문비기였다. 그가 남긴 무영천마 공공수는 능히 산사람의 간이라도 무형중에 빼낼 수 있는 기예 중 의 기예였다. 한편 설화와 비비, 진주에게도 일검사는 각각 그녀들의 특성에 맞 는 절학을 나누어 주었다. 설화(雪花)에게는 빙지십살(氷指十煞)을, 비비(秘秘)는 한음독심 수(寒陰毒心手)를, 진주(珍珠)에게는 한살강진기(寒殺 眞氣)를 전수해 주었다. 또한, 그녀들에게 만상화예무영보(萬象花藝無影步)를 전수했다. 그것은 최근 일검사가 창안한 것으로 유(柔)한 가운데 경쾌함을 위주로 한 경신술이었다. 만상화예무영보를 펼치면 자신보다 세 배 이상 강하지 않으면 어 떠한 경우에도 몸을 빼낼 수 있는 가히 절묘한 신법이었다. 마침내 등용문(登龍門)은 탄생되었다. 등용문의 남녀들은 아연 활기를 띈 채 각자 새로 배운 무학을 익 히는데 열중했다. 일검사는 그들에게 혈마신단(血魔神丹)을 각각 세 알씩 복용시켰 다. 지옥십삼관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을 모두 그들에게 나누어 준 것 이었다. 그는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친히 형제들의 무공을 지도하며 그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밤이면 제갈과 함께 천하정세를 비롯하여 등용문 출 범 시기와 활동방향 등에 관해 토론했다. 등용문(登龍門)은 이제 서서히 탄생의 막을 올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밀실(密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일검사와 제갈은 벌써 몇 시진 전부터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검사는 제갈을 바라보며 침중하 게 말하고 있었다. "제갈, 무림 정세는 갈수록 혼란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등용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조용하게 모든 일을 추진해야 할 것 이다." "알고 있습니다." 제갈은 신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일검사는 그에게 물었다. "너에게 전수한 사검천뇌십팔식(邪劍天雷十八式)은 어느 정도 수 위에 이르렀지?" 제갈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겸손하게 답했다. "소제는 자질이 미흡하여 아직 십성(十成)의 성취밖에 얻지 못했 습니다." "하하, 아직이라고? 그 정도면 검(劍)에 한한 능히 천하오절(天下 五絶)에 들 수가 있다." 그 말에 제갈은 격동의 표정을 띄우며 반문했다. "정말입니까?"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 허언하는 것을 봤느냐?" "믿어지지 않아서 그럽니다. 대형." "하하, 강호에 나가 시험해보면 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그렇고, 네가 아는 한 군림성에 대해 말해 봐라." 그 말에 제갈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는 정색을 하며 입 을 열었다. "군림성은 중원의 칠할 정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실로 막강한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황산(黃山)의 군림성(君臨城)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천하를 일통하려 하고 있습니다." 일검사는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로 군림성의 천마단(天魔壇)은 그 진정한 실 체를 아직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말에 제갈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습니다. 대형께서 그걸 어떻게......?" "하하, 다 아는 수가 있지." 제갈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다시 설명했다. "천마삼세란 자는 지금까지 장막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 자는 군림성에 없습니다. 소제가 알아낸 바로는 마왕도(魔王島)에 서 가공할 마공을 연공 중인 것으로 압니다. 군림성은 단지 그들 의 전초세력으로 천마십검주(天魔十劍主)가 표면적으로 움직일 뿐 입니다." 일검사는 묵묵히 제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제갈의 안색은 점 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천마사단(天魔四團)이야말로 놈들의 실세입니다. 군림성은 그들 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알고 있다. 천마사단의 위치는 어딘가?" 제갈은 침중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음, 그럼 너는 가능한 빨리 천마사단의 위치와 사정을 파악해 내 야 한다." "알겠습니다." 일검사는 잠시 생각한 후 당부했다. "아울러 금장과 함께 등용회의 상권조직과 자금을 동원하여 최단 시일내에 등용문을 세우고 무림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망을 구축해라." "알겠습니다. 대형." "지금으로써는 군림성과 동심맹, 그리고 최근 나타난 조화신무국 으로 무림은 삼분(三分)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 말에 제갈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조화신무국이라니요?" 일검사는 조화신무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어 검은 가죽옷의 괴인으로부터 받은 흑첩을 내보였다. 흑첩을 살펴본 제갈은 안색 이 변하며 말했다. "불야성(不夜城)이군요, 그 자들이 이런 야망을 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야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 특히 이런 난세(亂世)에는." 일검사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제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불야성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소제는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맹룡(猛龍)이 아니 면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 뭔가 믿는 것이 있다는 뜻도 될 수 있다." 그 말에 제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렇다면 불야성주 천년환사제가 조화신무국주란 말입니까?" "글쎄, 어쨌든 곧 알게 되겠지." 일검사는 잠시 침음하다가 말했다. "나는 곧 군림성으로 가볼 생각이다." 제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대형 혼자 말입니까?" 일검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안됩니다!" 그러나 일검사는 냉오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걱정 말아라. 앞으로 나는 혼자 활동할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빚을 갚기 위해서다." "빚이라니요?"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지옥혈문(地獄血門)의 진전을 받았다. 그것 으로 혈문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혈마지존의 입장으로 천마(天魔)를 꺾어야만 그 빚을 갚게 된다." "아!" 제갈은 수긍이 가는 듯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불 안의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빚을 갚는데 국한된다. 내 꿈은 절대마군주 (絶代魔君主)는 되는 것이 아니다. 제갈, 너는 설마 잊지 않았겠 지?" "......!" 제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일검사의 눈에서 한 가닥 음울한 안개가 흘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과거를 말이다. 우리들의 가문은 하나같이 대학자의 가 문이었다. 그런데 모두 어찌 되었느냐? 썩어빠진 명조에 의해 멸 문되지 않았느냐?" "......!" 제갈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 고 있었다. 그가 어찌 잊었겠는가? 불덩이가 되어 타오르던 동림 서원과 불길 속에서도 꼿꼿하게 앉은 채 죽어가던 부친의 모습 을....... "나는 그때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난 결심했다. 문(文)을 버리 고 무(武)를 택한 이상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리라고. 그것 이 나 일검사의 꿈이요 야망이다. 너는 기억하느냐? 우리들이 이 름을 버리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했던 맹세를 말이다." "아아...... 대형!" 제갈은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일검사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 며 솟구친 것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군림성으로 가겠다. 그 동안 너는 내 가 지시한 대로 등용문을 세워라." 제갈의 본래 이름은 휘(輝)였다. 즉 제갈휘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름을 버렸다. 비단 제갈휘 뿐이겠는가? 무명(無名)으로 살고 있는 일검사를 비 롯한 아홉 명은 모두 가슴에 씻지 못할 한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일검사를 바라보는 제갈의 두 눈에는 무한한 감동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크다. 대형은 이제...... 천하를 내려다 볼 정도로 커졌다.' 그는 일검사에게서 산악과도 같은 거대한 힘을 느끼며 격동을 금 치 못했다. ■ 등용문 제2권 제12장 등용(登龍)의 장(章) -3 ━━━━━━━━━━━━━━━━━━━━━━━━━━━━━━━━━━━ 밤이다. 침상 위에 누운 일검사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을주려려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실상 그녀는 이곳에 온 이후로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비록 혼례는 올리지 않았으나 일검사의 아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해온 것이었다. 아까부터 을주려려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몇번이고 망설이 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저어...... 할 말이 있어요." 을주려려는 수줍은 듯 일검사의 가슴에 살며시 얼굴을 묻으며 말 했다. "무슨 말이오?" 일검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을주려려는 얼굴을 붉히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젠... 방을 따로 써야겠어요." 일검사는 흠칫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소리요? 이제까지 줄곧 한 방을 쓰자고 우긴 건 바로 당신이지 않소?" 사실이 그랬다. 일검사는 본래 등용문에 온 이후로 설화나 비비, 진주를 의식하여 다른 방을 쓰려고 했으나 을주려려가 한사코 우 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한 방을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따로 방을 쓰자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저어......" 을주려려는 귓불까지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모습 에 의아함을 느낀 일검사는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추궁했다. "대체 무엇 때문이오?" "저... 그건......" 우물쭈물 말을 더듬던 을주려려는 갑자기 와락 일검사의 품에 얼 굴을 묻었다. 이어 그녀는 모기같은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아기를...... 가졌어요." 순간 일검사는 눈을 크게 떴다. "뭣이? 그게 사실이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을주려려를 와락 껴안았다. "그...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을주려려는 그 모습에 더욱 낯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 누가 들어요." "들으면 어떻소? 하하하! 정말, 정말 아기를 가졌단 말이오? 나의 아기를......?" "네에......." 을주려려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 기가 무섭게 일검사는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기쁘오! 정말 기쁘오!" 일검사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을주려려를 끌어안고 마구 입맞춤 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자신의 아이를 갖는다는 것, 그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벅찬 감동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대소를 터뜨린 것이었다. 이때, 침실의 창 밖에서는 한 섬세한 인영이 만면에 희비가 엇갈 린 표정을 지은 채 망연히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혈옥선자 설옥 경이었다. '아아, 경하할 일이다. 지존의 이세가 생기시다니......' 그녀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왜 이다지도 가슴이 허전하단 말인가? 그녀는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분에 가슴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실상 그 동안 설옥경은 일검사와 거의 접촉이 없었다. 그것은 을 주려려 때문이었다. 비록 일검사에게 여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바 치긴 했지만 을주려려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같은 여인으로 을주려려의 잉태 소식을 듣자 기쁘기 이전 에 씁쓸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축하 드립니다. 지존.......' 설옥경은 후원의 한 전각으로 향했다. 그곳은 그녀의 침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침실 안으로 들어선 순 간 그녀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 놀랍게도 비어 있어야 할 침상 위에 누군가 누워있는 것이 아닌 가? 그녀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침상 위에 벌렁 누워있는 사나이, 그는 바로 일검사가 아닌가? "지...... 지존......." 설옥경은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하게 맺히고 말았다. 이때 일검사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이리 오시오, 옥경. 오늘부터 나는 잘 곳이 없어졌소." "아......!" 설옥경은 그만 무너지듯 일검사의 품에 안겼다. 벅찬 환희가 그녀 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서운했던 감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가슴 가득 행복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옥경." 일검사는 은근한 음성으로 그녀의 귓전에 입깁을 불어 넣었다. 동 시에 그의 손은 슬며시 설옥경의 풍만한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 있 었다. 그는 정력이 절륜한 사나이였다. 그러므로 을주려려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하루도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녀와 함께 잘 수 없으니 설옥경을 찾게 된 것이었다. 설옥경은 그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의 목에 매 달리며 암고양이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일검사의 손은 뜨겁고 탄력이 넘치는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 쥐었 다.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된 듯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겨 나 갔다. 여인은 벗겨도 벗겨도 완전히 벗겨지지 않는 것 같다. 한 겹 한 겹 옷을 벗겨낼수록 매혹적인 육체는 사나이의 정욕을 자극했다. 이윽고 터질 듯이 팽팽한 젖가슴이 드러나자 일검사는 그곳에 얼 굴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한 입 가득 유실을 담아내고 있었다. 설옥경은 가벼운 신음을 내었으나 짐짓 몸을 비틀며 쏘아 부쳤다. "바람둥이......!" 그러자 일검사는 문득 입술을 떼더니 묻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싫어졌소?" 설옥경은 하얗게 눈을 흘겼다. "몰라요...... 음." 그녀가 신음소리를 낸 것은 일검사의 손이 그녀의 깊은 곳으로 미 끌어져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매끄러운 두 팔로 일검사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알몸이 되어 버렸다. 일검사도 서둘러 옷 을 벗어 던졌다. 이윽고 두 사람 다 나신이 되어 한덩이가 되었다. 입술과 입술이 오가고 뜨거운 입김이 부어지는 가운데 방안에는 열풍이 몰아쳤다. 달디 단 꿀물을 주고 받으며 그들은 긴 밤을 불태우고 있었다.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성숙한 여체는 오랜 갈망으로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퍼득이며 사내를 맞이했다. 천하에서 가장 절륜한 정력 의 소유자인 사내는 지칠 줄을 몰랐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 남녀의 나신이 뒤엉켰다. 흐느끼듯 물결치는 여체는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실로 오랜 만의 단비에 여인의 대지(大地)는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침상을 흔들었다. 두 남녀가 발산하는 열기가 밤을 송두리째 불사르며 무수한 불꽃 을 발하고 있었다. 계절은 가을이었다.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찬바람이 창을 흔들고 지나갔으나 남녀는 서로에게 탐닉하며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 다. "아......!" 방안의 열기와는 상반된 안타까움과 원망, 슬픔에 찬 한숨이 창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설화(雪花)였다. 그녀는 숨가쁜 신음이 흘러 나오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오빠는 이제 멀어졌어. 설화는...... 오빠의 여자가 되려고 했는 데......' 그녀는 가슴이 온통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으로 신형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그녀를 부축하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들은 비비와 진주였다. 두 소녀 또한 상심(傷心)한 표정이었 다. 그녀들은 모두 일검사를 오랫동안 마음 속의 연인으로 간직해 왔었다. 그러나 지금 일검사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그로인해 그녀들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만 생기고 말았다. 비비와 진주는 입술을 깨물며 설화에게 말했다. "설화야, 바람이 차...... 그만 들어 가야지." 세 소녀는 바람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녀들이 사라진 후, 그 곳에 다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제갈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대형은 염복도 많지. 어째서 모든 여인들이 대형만 좋 아할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뇌리에 문득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비비(秘秘)였다. 제갈은 어깨를 으쓱하며 혼잣 말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이번에는 중매쟁이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며칠이 흘렀다. 일검사는 군림성으로 가기 전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 위해 서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문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검사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누구냐?" "제갈입니다." "들어와라." 방문이 열리며 산뜻한 백삼 차림의 제갈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제갈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대형께서 책임지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책임? 무슨 말이냐?" "설화(雪花)를 내버려 두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설화? 무슨 뜻이냐?" 일검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후후...... 정말 모른 척 하시깁니까?" 제갈의 의미있는 웃음에 일검사는 더욱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 었다. "설화는 늘상 대형께 시집가겠다고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대형이 둘 씩이나 되는 형수님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설화 는 충격을 받아 방에 틀어박혀 매일 눈물만 흘리고 있단 말입니 다." "설화가......?" 일검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제갈을 바라보았다. 제갈은 히죽 웃으 며 말했다. "가 보십시오. 대형이 찾아 주지 않으면 어쩌면......" 그는 손으로 목을 쓱 그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일검사는 그만 안 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 정도란 말인가?" 그는 급히 일어섰다. 다급히 밖으로 나가는 그의 등 뒤로 제갈의 익살스런 웃음이 들렸다. "히힛...... 잘 해 보십시오. 참, 그리고......" "......?" "저어......" 일검사는 돌아섰다. 제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소제에도 좋은 연분을 남겨 주셨으면......" 일검사는 그 말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비비?" 제갈은 낯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만 믿겠습니다." "알겠다." 일검사는 빙긋 웃으며 방을 나섰다. 그는 곧장 설화의 처소로 향 했다. "흑흑......!" 설화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문득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설화는 고개를 돌리다 흠칫했다. 일검사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 는 곧 싸늘한 음성으로 쏘아부쳤다. "뭣하러 왔나요?" 일검사는 그녀에게로 다가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설화와 얘기하고 싶어서지." "흥! 오빠에겐 절세미인이 두 명씩이나 있잖아요?" 설화는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말했다. "후후...... 하지만 설화, 너와는 의미가 다르지 않느냐?" "흥! 어떻게요?" "음...... 너는 나의 친동생이나 다름없고...... 또......" "또요?" 설화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한 가닥 기대가 담겨 있었다. "음......" "그 밖엔 아무런 의미가 없나요?" "설화야." 일검사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설화를 응시하며 더욱 다가갔다. 설 화는 눈물 고인 눈으로 울먹거리며 일검사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일검사의 뇌리에는 얼마전 그녀가 무정검주에게 당할 뻔 했던 광경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무정검주를 죽이고 그녀를 구해 주었었다. 당시 그녀는 알몸으로 나무에 기대있었다. 그때 본 설화의 모습은 옛날의 어린애가 아니었다. 이미 성숙할 대로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너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구나.' 일검사는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설화야." 설화는 움찔했다. "이리 오너라." 그 순간 설화는 참고 참았던 설움과 미움의 감정이 일시에 무너짐 을 느꼈다. "흑흑...... 가가(哥哥)......!" "설화야, 안다. 네 마음을." "흑흑...... 보고 싶었어요. 기다렸어요. 가가와 만날 날 을......" 설화는 가슴 속에 맺힌 오열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일검사의 품에 몸을 묻었다. 일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이제 설화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날 밤,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설화는 그에게 고이고이 간직했던 여인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바 쳤던 것이다. ■ 등용문 제2권 제13장 사나이 중의 사나이 ━━━━━━━━━━━━━━━━━━━━━━━━━━━━━━━━━━━ "지금 떠나겠다." 제갈은 깜짝 놀랐다. "아니, 당장 말입니까?" 언제나 일검사는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면을 가지고 있 었다. "그렇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빙긋 웃었다. "어차피 혼자 떠날 생각이니 지금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떠난다는 것을 알면 꽤나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겠느냐?" 그 말에 제갈은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두 분 형수님과 설화...... 아니 세째...... 형 수...... 께서......" 이미 설화가 일검사의 여인이 되어 버린 것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는 유난히 말을 더듬어야만 했다. "하하...... 그러니 지금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제갈은 머리를 긁적였다. "할 수 없군요. 대형의 고집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으 니......" 일검사는 그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거기에 이 일대를 아홉 개의 연환금쇄절진(連環禁鎖絶陣)으로 완 벽하게 보호하는 진도(陣圖)를 그려 놓았네. 내가 떠난 후 바로 설치하도록 해라." 그 말에 제갈은 도면을 받아 펼쳐보았다. 잠시 후 그는 감탄을 금 치 못하며 무릎을 탁 쳤다. "과연 대형이십니다! 어쩌면 모든 생각이 소제를 앞지르십니까?" 일검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지르다니?" "하하! 사실 소제는 이미 이곳 십리(十里) 일대에 새로운 진법을 펼쳐놓았습니다. 하지만 자질이 아둔하여 여덟 개밖에 펼치지 못 했습니다." 그 말에 일검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의 일진(一陣)은 여덟 개의 연환진을 보충하여 연결시키는 진중진(陣中陣)으로 설정했 지. 설사 진법의 달인이 온다해도 그것만은 파해할 수 없을 것이 다." "아......!" 제갈은 탄성을 발했다. "나는 곧장 황산(黃山)으로 가겠다. 군림성(君臨城)을 뒤집어 놓 으면 천마사단(天魔四壇)이 움직이거나 천마삼세(天魔三歲)가 발 동할 테니 그것을 노리는 것이다." 제갈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형 혼자서 말입니까?" 일검사의 두 눈에서 쇠라도 녹일 듯한 신광이 뻗어나왔다. "날 믿지 못한단 말이냐? 천마십검주 쯤은 단 삼초(三招)에 목을 끊을 수 있다." "......!" 제갈은 그의 신광을 접한 순간 전율을 금치 못했다.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동심맹(同心盟)은 최근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형께선 그 점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어떤 동태지?" "오백 년 전 천마이대마벌을 패퇴시킨 천외도주(天外島主)가 동심 맹의 맹주이며...... 그들의 비밀세력인 광명천(光明天)의 천주 (天主)를 겸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광명천의 천주가 천외도주라고?" 일검사는 문득 가슴이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실상 천외일맥 (天外一脈)은 오백 년 전의 사안으로 인해 혈문(血門)의 숙적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검쌍성(刀劍雙星)으로 불리우는 천외일맥의 두 제 자가 요즘 눈부신 활약을 벌이고 있습니다." "도검쌍성, 기억해 두지." 일검사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신형을 날리려다 말고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두고 보라. 얼마 후면 천하는 혈마지존(血魔至尊)으로 인해 한바 탕 흔들릴테니...... 후후후훗......!" 스......스슷! 일검사는 어두운 창 밖을 통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갔다. 그 가 사라지자 제갈은 탄성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아...... 대형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흡사 태산처럼......" ■ 등용문 제2권 제13장 사나이 중의 사나이 -2 ━━━━━━━━━━━━━━━━━━━━━━━━━━━━━━━━━━━ 황산(黃山)은 중원의 성산(聖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중제일지(魔中第一地)로 화해 황산 인근에서는 마왕건(魔王巾)을 두르지 않고는 감히 일보도 걸을 수 없을 지경 이 되고 말았다. 스슷! 한 가닥 백선(白線)이 허공을 가로 지르며 황산 기슭에 내려섰다. 그는 백색유삼을 산뜻하게 입은 미청년이었다. 다름 아닌 일검사 였다. 그는 창천(蒼天)을 바라보며 냉오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천마(天魔)의 하늘이나 조금 후면 빛을 잃게 될 것이다." 구구구....... 문득 허공에서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의 은색 비둘기 가 창천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저놈은 흔히 볼 수 없는 놈이다. 개방( 幇)의 은구신서(銀鳩神 書)가 틀림없구나.' 은구신서는 개방에서 극비문서를 전달하는데 사용하는 은빛 날개 를 지닌 비둘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 그의 손바닥에서 무형의 흡인력이 뻗었다. 그러자 허공을 가로지 르던 비둘기는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의 손바닥으로 끌려왔다. 과연 비둘기의 다리에는 가느다란 철통(鐵筒)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속에는 둘둘 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일검사는 종이를 펼쳐 읽어 보았다. <천마삼세와 버금가는 마도인물인 혈마지존(血魔至尊)이 나타났 음. 현재 그의 행방(行方)을 추적 중. 군림성에 납치된 백리빙(百 里氷) 소저를 속히 구출할 것을 요망함. 동심맹(同心盟)의 백인과 함께 마왕도(魔王島)로 호송할 기미가 보이기 때문임. 최소한 도 검쌍성(刀劍雙星) 이상의 고수들의 파견을 요함......> 일검사의 눈에서 신광이 흘러 나왔다. '동심맹에서 날 의식하기 시작했군. 백리빙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 일까? 도검쌍성까지 출동시키려는 것으로 미루어 꽤나 중요한 존 재인 것 같은데......' 일검사는 밀지를 본래대로 한 후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이거 그 는 몸을 돌려 웅대한 황산 전경을 바라보았다. '군림성은 옛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토성(土城) 자리에 있다. 놈 들은 천하를 오시하여 별다른 매복이나 경비를 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런 오만도 오늘로 끝이 될 것이다.' 스스슷......! 그의 신형이 허공을 타고 훌훌 날아올랐다. 단번에 사십여 장을 날아오르는 그의 신법은 가히 절세적이었다. 토성(土城). 적화둔(赤火屯)이라고도 불리우는 붉은 토성 안쪽에 고루거각(高 樓巨閣)이 즐비하게 솟아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대군림성(大君臨城)이었다. 마도천하를 이룩한 천마단(天魔壇)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군림 성에는 근 팔천(八千)에 달하는 마도인들이 있었다. 남칠성북육성에 삼백 개 이상의 문파를 거느리고 있어 그곳에 파 견된 마도인들을 제외한 숫자만도 그 정도에 달하고 있었다. 군림성의 규모는 가히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제갈무후의 팔진도 (八陣圖)의 배열에 따라 광대한 토성 안쪽에 구축되어 있는 건축 물들은 호화롭기 그지 없었으며 천만금(千萬金)의 자금으로 세상 에 없는 것이 없이 완비되어 있었다. 대군림성은 천하마도들의 본거지이자 향락처 역할도 했다. 이곳에 는 술과 계집, 도박과 인생의 모든 환락이 존재했다. 남칠성북육 성에 산재한 삼백 개 문파의 고수들은 정기적으로 이곳으로 와 보 고를 마친 후 군림성에서 제공하는 향락에 빠지는 것이었다. 군림성을 관장하고 있는 것은 사대검주(四大劍主)로 알려져 있었 다. 사해검주(四海劍主), 폭풍검주(暴風劍主), 사자검주(獅子劍主), 만독검주(萬毒劍主)가 바로 그들이었다. 천마십검주 중 가장 강한 그들 사 인이 군림성을 관장했다. 실상 군림성주는 천마삼세였으나 그가 군림성에 상주하지 않았으 므로 실권은 사대검주가 행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림대루(君臨大樓). 군림성주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지금 그곳은 여덟 명의 괴인(怪 人)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전광(電光)같고 가공할 마기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신태만 보아도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마공(絶頂魔功)을 익히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팔대금강마신(八大金剛魔神)이 그들의 호칭으로 악명(惡名)이 자 자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천마단(天魔壇)에서 직접 파견된 인물들로써 군림성의 여 타 법규에 얽매이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군림대루를 지키다니, 이런 모습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천마삼세(天魔三歲)라도 직접 현신하지 않고는 평소에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경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 팔대금강마신은 군림대루의 입구를 두 줄로 도열한 채 지키고 있 었다. 이때 사 인(四人)이 그들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사순 가량의 중년들이었는데 신분이 매우 높은 듯 일신에 금삼을 입었 으며 보검(寶劍)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군림성을 실제로 영도하고 있는 사대검주(四大劍主) 들이었다. "서시오!" 팔대금강마신 중 혈포를 걸친 거한이 털투성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그러자 사대검주 중 수석인 사해검주(四海劍主)가 말했 다. "급한 전령(傳令)이 떨어졌소. 단주께 전해야 하오." 그러나 혈포거한은 고개를 저으며 탁성으로 말했다. "기다리시오, 지금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소." 사해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간이 없소, 지금 즉시 전달해야 하오." 그러나 혈포거한은 요지부동이었다. "안되오." "왜 안된다는 것이오?" "클클...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소? 얼마 전 총순찰(總巡 察)님이 들어 가셨소." 사해검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쨌단 말이오? 이 일은 화급을 다투는 일로......" 혈포거한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흐흐, 왜 그리 눈치가 없소? 단주님과 총순찰님을 몰라서 묻는 거요?" 그 말에 비로소 사해검주는 무슨 뜻인지 알아 차렸다. 그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한가하게 운우(雲雨)나 나누고 있다니......' 그러나 그는 감히 반박할 처지가 못되었다. 실상 천마십검주는 군 림성에서는 수장이었으나 천마단의 직계인 천마사단주에 비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괘씸한 것은 그들 사검주의 앞을 막고 있는 팔대금강 마신들이었다. '으음, 네놈들은 천마단을 업고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구나.' 마침내 사해검주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러자 혈포거한은 한 술 더 뜨는 것이 아닌가? "클클,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모르나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좋을 거요. 단주께서 침소에 드신 지 이제 겨우 두 시진밖에 안되었단 말이오." '겨우 두 시진이라니?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 인가?' 마침내 사해단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흐흐, 참으시오. 단주님의 기분이 상하면 그 뒷일은 책임질 수 없으니까. 클클클......" 혈포거한은 아예 그를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길을 비켜줄 생각 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태양(太陽)은 중천에 떠 있었다. 이런 시각에도 아직 운우(雲雨)에 빠져 있다면 지독한 색마(色魔)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시진 쯤 흘렀을까? "험......!" 문득 누각 안으로부터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가닥 듣기 거 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들어 오너라!" 사해검주와 나머지 삼검주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들은 곧 팔대금강마신의 곁을 지나쳐 누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 다. 누각 안으로 들어서자 곧장 대전이 나타났다. 넓은 대전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그러나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어 만금 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전 안쪽의 휘장이 펄럭이더니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 사검주는 그를 보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비릿한 육향(肉香)을 물씬 풍기며 나온 인물은 한 마디로 괴인(怪 人)이었다. 그는 전체가 거대한 육괴(肉塊)로 이루어져 있었다. 디룩디룩한 살덩이가 뭉쳐진 인간. 그 밖에는 달리 형용할 길이 없었다. 비곗살이 양 뺨에서 늘어져 어깨까지 닿고, 턱은 아예 가슴에 붙 어있어 목을 볼 수가 없었다. 칠척(七尺)에 달하는 키였으나 배가 동산만큼 불러 흡사 거대한 공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눈은 살덩이에 피묻혀 가느다란 실처럼 보일 뿐이었다. 실로 괴물같은 인간이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그는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상체는 완전히 알몸이었고, 다만 하체에 손 바닥만한 천 한 장만 달랑 두르고 있어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 그 지없는 모습이었다. 지금 비계로 엉겨있는 늘어진 가슴과 배에는 번들거리는 땀이 줄 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가 조금 전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클... 무슨 일이냐?" 그는 단추구멍만한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러자 사대검주는 바닥에 엎드렸다. "회회단주(回回檀主)께 아뢰오, 마왕도(魔王島)에서 온 전신입니 다." 사해검주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나왔다. "클, 그래 뭔가?" 회회단주라 불리운 괴인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물었다. 사해검주 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즉시...... 백리빙(百里氷)을 마왕도(魔王島)로 압송하라시 는 전갈입니다." "뭣이?" 우르르...... 회회단주가 고함치자 누각이 온통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 야말로 엄청난 진기가 실린 노성이었다. "크크...... 아직 노부가 심문(審問)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압송이 라고?" "그... 급한 일이라 합니다. 상황이 위급합니다. 현재...... 천마 십검주(天魔十劍主) 중 이미 오검(五劍)이 죽었습니다." "흥!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회회단주는 그런 것 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코웃음쳤다. 사해 검주는 내심 이를 갈았으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 다. "그 중 삼검(三劍)이 도검쌍성(刀劍雙星)에 당했습니다. 머지않아 그들이 직접 그 계집을 구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크하하하하......!" 쿠르르르르...... 회회단주의 일진광소에 대들보가 흔들거리며 먼지가 자욱히 휘날 렸다. "그 애송이놈들 때문에 본좌가 애써 잡아놓은 계집을 압송해야 한 단 말이냐? 크크...... 공을 가로채려 하다니...... 태상장로(太 上長老)는 천마지존께서 폐관에 드신 후 너무나 멋대로 일을 처리 하려 든단 말이야!" 회회단주의 단추구멍같은 눈에서 무서운 자광(紫光)이 폭사되었 다. "으으......" 사대검주는 그 눈빛을 대한 순간 심혼육맥이 달아남을 느끼며 안 색이 잿빛이 되었다. 회회단주(回回檀主). 그는 실상 백이십 년 전의 노마(老魔)였다. 극중극마(極中極魔) 환희마불존(歡喜魔佛尊). 회회교(回回敎)의 교주이자 과거 중원을 혈세한 바 있으며 천축 (天竺)에서도 한바탕 혈겁을 일으켰던 공포의 대마왕 환희마불존 이 바로 천마단의 회회단주였다. 그의 환희모니금강마공(歡喜牟尼金剛魔功)은 고금제일의 외문마공 (外門魔功)으로 그의 전신에는 창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그 였기에 사실상 천마단 내에서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마왕도에 있지 못하고 천마사단으로 밀려나온 것에 은근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클클......! 태상은 내가 자기보다 강해질 것이 두려워 날 외단 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본존의 공을 가로 채려 한단 말 이냐?" 그는 혓바닥으로 툭 뒤집어진 입술을 핥았다. "더군다나 그 계집의 맛도 보지 못했다. 본좌는 그 계집을 통해 동심맹의 비밀조직인 광명천(光明天)의 위치를 알려는 계획도 가 지고 있다. 그런데 압송이라니?" 그가 막 욕지거리를 지껄이려 할 때 사해검주는 급히 말했다. "죽은 오검주 중 이검주(二劍主)는 최근 등장한 혈마지존(血魔至 尊)에게 당했습니다. 본단에서는 특히 그 자를 유의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크큭큭......! 혈마지존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놈에게 겁을 집어 먹다니, 본존에게 걸리면 그대로 묵사발을 만들어 주지!" 그때였다. "후후후후훗......!" 문득 군마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차가운 웃음소리가 허공의 여러 방향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엇......! 웬놈이냐?" 군마들은 모두 대경했다. 이때 극중극마 환희마불존의 살덩어리로 축 늘어진 볼이 씰룩였다. "이건...... 팔방마라음공(八方魔羅音功)인데? 웬놈이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군마들은 눈 앞에 흰 안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안개가 스르르 뭉쳐지는 듯 하더니 한 청년의 모습 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일검사는 군마들을 죽 둘러보더니 시선을 환희마불존에게 고정시켰다. "돼지같은 늙은이,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본 혈마지존을 어떻게 모시겠다고?" "혀...... 혈마지존?" 군마들은 그만 대경하여 일제히 안색이 푸르게 질리고 말았다. 사 대검주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고 있었다. 환희마불존도 크게 놀란 듯 비계덩어리의 몸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괴소를 흘려내고 있었다. "크크큭......! 잘 되었군. 스스로 찾아 들다니. 네놈의 모가지를 잘라 본존이 직접 마왕도(魔王島)로 가야겠다. 그렇다면 태상도 더 이상 날 무시하지는 못할 거다." 환희마불존은 축 늘어진 뺨을 흔들며 두 눈에서 살광을 뿜었다. 그러나 그는 보기와는 달리 경솔한 위인은 아니었다. 절정의 마공 을 익힌 그는 한눈에 일검사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 다. '놈의 눈빛이 저처럼 담백한 것으로 보아 혹 혈마수(血魔手)를 연 성한 게 아닐까?' 혈마수(血魔手)는 마도인에게는 천마수(天魔手)와 더불어 공포의 마공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환희마불존은 큰 소리와는 달리 마음 한 구석이 켕기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호호호호......! 정말 잘생긴 사내로군?" 문득 염기(艶氣)가 물씬 풍기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환희마불존의 뒤쪽으로부터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녀의 차림이 볼만했다. 그녀는 속이 훤히 비쳐보이는 망사의(網絲衣)만을 걸치고 있지 않 은가? 나이는 이십대 정도로 보였는데 무르익어 터질 듯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3장 사나이 중의 사나이 -3 ━━━━━━━━━━━━━━━━━━━━━━━━━━━━━━━━━━━ 여인은 둔부를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어 대며 앞으로 다가왔다. 두 눈에는 만천하의 사내들을 녹일 듯한 춘광을 가득 담은 채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었다. 터질 듯한 젖가슴이 입으나마나한 망사의를 통해 뚫고 나올 듯이 보였다. 놀랄 만큼 거대한 유방과는 대조적으로 가느다란 허리, 그 아래로 둔부는 다시 거대한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미끈하게 뻗은 두 다리 사이로는 짙은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망사 속으로 묘한 음영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보통 사내라면 단지 그 모습만 보 고도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호호호호......" 요녀는 염기가 뚝뚝 흐르는 웃음을 흘리며 일검사의 앞에 다가와 기둥에 기대섰다. 그녀는 한 손으로 대리석 기둥을 슬쩍 껴안은 채 슬슬 쓰다듬으며 야릇한 눈으로 일검사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 었다. '호호...... 정말 잘 생기고 싱싱한 사내로군. 호호...... 널 품 에 안으면 십주야를 놀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눈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 같은 여인은 무림에서 흔치 않았다. 아니, 흔치 않기는 커녕 강호식견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보는 순간 하나의 가증스런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 다. 그녀는 윤기나는 흑발을 구름처럼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머리칼 속에 옥작약(玉芍藥) 모양의 비녀(簪)를 꽂고 있었다. 그 비녀의 모양만 보아도 그녀의 신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그녀가 바로 천마요희(天魔妖 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마요희는 실상 겉으로 보기에는 이십대 밖에 안되어 보였으나 실상은 이미 백 살이 넘은 여마(女魔)인 것이다. 과거 천마동(天魔洞)의 사대고수 중 하나였던 그녀는 주안술을 익 혀 아직까지도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칼에 꽂고 있는 사망옥잠(死亡玉簪)과 사향냄새 나는 치마폭에 휘감겨 죽은 자가 그 몇이던가? "호호호...... 이 몸은 영웅을 사랑한다. 더구나 이곳이 군림성임 을 안다면 없는 것이 없음도 알겠지? 호호, 원한다면 모든 것을 주지. 동생, 그래 원하는 게 뭐지?" 달콤한 혓바닥이 춤추고 그에 따라 한 줌밖에 안되는 가는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자 거대한 유방이 출렁거리며 폭발적인 유혹을 뿌렸 다. 어디 그 뿐인가? 투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망사의가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은밀한 비부마저 고스란히 투영되어 보이니 그 광 경에 사해검주를 위시하여 대전 안으로 들어와 있는 팔대금강마신 조차 한결같이 마른 침을 꿀꺽! 소리나게 삼키며 넋을 잃고 말았 다. 실상 천마요희는 천마단의 총순찰(總巡察)이란 직위를 지니고 있 었다. 그런 그녀는 타고난 우물(尤物)로 절륜한 색욕(色慾)을 지 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수시로 마음에 드는 사내를 골라 즐기곤 했다. 물 론 사단주(四檀主)를 위시하여 그녀와 황홀한 정사를 나눈 자는 부지기수였다. 비록 그녀의 실제 나이가 이미 백 세가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육체는 이십대에 불과할 정도로 풍만하고 탄력이 넘쳐 군림 마맹의 마도들은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호호호호...... 동생, 원한다면 이 누나가 아낌없이 이 몸도 줄 수 있어. 흐응...... 그래 무슨 일로 이곳에 왔지?" 천마요희는 기둥에 한쪽 다리를 슬쩍 들어 감으며 간드러진 음성 으로 물었다. 그같은 모습은 가히 폭발적인 유혹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마도들 은 모두 침을 흘린 채 눈이 반쯤 풀어져 있었다. 이때였다. 얼음물을 뿌리듯 일검사의 입에서 냉소가 터져나왔다. "흥! 그따위 시시한 미혼독마술(媚魂毒魔術) 따위로 감히 날 유혹 하려 들다니, 어리석고 추잡한 계집이로군!" 일검사의 말은 신랄했다. 보통 여인같으면 그 말에 안색이 변해도 한참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마요희가 어떤 여인인가? 그녀는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여마였다. "호호호! 미혼독마공을 알다니 놀라운데? 그러고보니 가짜 혈마지 존은 아니로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지? 이 누나와 즐 기려고?" 그녀는 뻔뻔스럽게 말하며 이번에는 기둥을 부여 안은 채 몸을 비 비꼬았다. 한쪽 다리를 번쩍 들고 상체를 뒤로 젖히자 망사의가 사르르 걷혀 올라가며 백옥같은 허벅지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상체를 젖히는 바람에 두 개의 풍만한 젖가슴이 야릇 하게 출렁거렸다. "으으......" 마침내 군마들은 이미 참기 힘든 욕정에 신음을 흘려댔다. 실로 가공할 색공(色功)이었다. 사대검주는 얼굴이 붉어진 채 진땀을 흘려내고 있었으며, 팔대금강마신도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일검사는 오만하게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호호, 그래 어서 말해 봐, 이 누나가 뭐든 다 들어 줄테니 말이 야." 일검사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몸뚱이 속에 들어있는 쭈글쭈글한 심장과 더러운 수급인데 지금 줄 수 있겠느냐?" "뭐...... 뭐라고!" 천마요희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그녀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 에 타오르던 열기가 싸늘히 식었을 뿐만 아니라 전신이 경직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까지 그토록 고혹적이던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푸른 심줄이 드러나며 야차(夜叉)와 같은 인상이 떠올랐다. "핫핫핫......! 그렇다. 이제보니 이곳에는 쓸모없는 목이 너무 많다. 모두 거두어 가면 천마삼세도 더 이상 숨어있지 못하고 기 어나올 것이 아니냐? 내가 온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으으......" "크으으! 죽일 놈!" 천마요희는 물론 군마들은 지독한 모욕에 모두 안면을 일그러뜨리 며 외쳤다. "호호호호홋......! 네놈이 군림성을 종이호랑이로 아는 모양이구 나!" 문득 천마요희는 이를 빠드득 갈며 팔대금강마신을 향해 외쳤다. "당장 저 번드르한 놈의 창자를 끄집어 내라! 호호호홋! 오늘밤 그것으로 회를 떠먹자구나!" "크크크......!" "킬킬킬...... 알겠습니다!" 팔대금강마신이 괴소를 흘려냈다. 그들 중에서 두 명이 앞으로 나 서고 있었다. 그들은 생살을 씹어먹고 생혈(生血)을 마신다는 잔 악무도한 마두들이었다. "크크...... 뒈져랏!" 콰츠츠츠츳...! 두 명의 금강마신이 일제히 도(刀)를 떨치며 일검사를 공격했다. 능히 백 년에 달하는 공력이 담긴 엄청난 도세(刀勢)였다. 도기가 하늘을 온통 뒤엎는 순간, "후훗......! 버러지만도 못한 천마의 개들, 너희들에게 혈마수 (血魔手)의 무서움을 일깨워 주마." 오만한 웃음과 함께 일검사는 혈수(血手)를 가볍게 내저었다. 휘류류류륭......! 핏빛 손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자 가공할 파공성이 울렸다. 땅... 따따아앙! 그와 동시에 도편(刀片)이 산산조각으로 나뉘어지며 사방으로 날 아갔다. "케에에... 엑!" 돼지멱 따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들리며 장내에 자욱한 핏물이 뿌 려졌다. 두 명의 금강마신은 전신이 고슴도치가 된 듯 조각난 도편을 맞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끄윽...... 혈포삼(血袍衫)의 외문마공조차 뚫다니......"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차례로 쓰러져 버렸다. "크으으......! 형제들을 죽이다니......!" 나머지 육대금강마신의 눈알이 뒤집혔다. "크으으...... 네놈의 피를 마셔야만 속이 풀리겠다!" 그들은 일제히 무기를 떨치며 일검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일검사 는 태연하기만 했다. 비록 육대 일(六對一)의 대결이었으나 그는 마치 산악(山嶽)처럼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오만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놈! 형제의 복수를 해 주겠다!" 여섯 마두는 시뻘건 눈알을 부라리며 일제히 공세를 펼쳤다. 꽈르르릉...! 그 중 성질이 급한 두 명은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침이 달 린 낭아편과 거치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일검사는 지극히 안정된 자세로 혈수를 뻗어내며 중얼거렸 다. "하나." "케에엑......!" 놀라운 일이었다. 먼저 달려든 자는 머리부터 하체의 순서대로 전 신이 피모래로 화하여 으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둘." 뒤이어 일검사의 수를 헤아리는 음성이 들렸다. 그의 신형이 유성 과 같이 미끄러지더니 막 덮쳐드는 한 명의 머리를 눌렀다. "사해(四海)에 혈룡(血龍)이 난다...!" "크아아악...!" 또 한 명이 혈마수에 의해 납작해지며 즉사했다. "셋!" 일검사의 손가락이 빨갛게 달구어졌다. 순간 그의 일지(一指)가 꼿꼿해지더니 쭉 뻗었다. "운중비(雲中秘)!" 퍽! 둔탁한 음향과 함께 막 장도(長刀)를 휘두르던 자는 장도가 부러 져 나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미간에 구멍이 뻥 뚫렸다. "넷!" 죽음의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너희 두 놈은 한꺼번에 보내주마! 한음독심수(寒陰毒心手)...!" 츠으읏......! 그의 손은 푸른 음영을 실같이 뿌리며 두 마두의 허리를 그었다. "케에에엑!" 여지없이 두 마두는 몸체가 둘로 분리되며 날아갔다. "여섯!" 일검사는 태연하게 마지막 수를 센 후 신형을 멈추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 바닥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퍼렇게 기세가 살아있던 팔대금강 마신이 이리저리 가로누워 있었다. 그들 중 숨을 쉬는 자는 아무 도 없었다. 모두 황천으로 간 것이었다. 장내에는 어느새 마왕건을 두른 군마들이 빽빽히 몰려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만면에 공포의 빛을 띄운 채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천마요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환희마불존도 비로 소 회의에 찬 시선으로 일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대검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일검사의 얼굴은 냉면(冷面)... 그것이었다. 그는 마두들 을 둘러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살인을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천마를 꺾어 누르고 혈문 을 일으키려면 오늘은 살계(殺戒)는 크게 열어야 한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 그의 냉담한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해지자 사대검주는 온몸이 오그 라 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으으......!" "너희들도 먼저 간 오검(五劍)을 따라야 겠다." 일검사는 비정하게 말하며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잘 봐라, 이것이 혈마수다." 촤아아...! 아! 시뻘겋게 물든 손이 문득 피구름을 일으켰다. 콰아아...... 우뢰치는 소리가 울리며 사대검주는 눈 앞이 온통 시뻘겋게 변하 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다급히 검을 뽑아 휘둘렀 다. 생각이고 뭐고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젖먹던 힘을 다 짜내어 검을 휘둘러댔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아니, 아예 그들의 반격은 아무런 소 용이 없었다. 콰르르르......! 대기가 온통 가루로 화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상은 온통 핏빛으 로 화하고 말았다. "......!" 마인들은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 나 핏빛 기운이 걷힌 순간 그 자리에는 의당 있어야 할 사대검주 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편편이 조각난 검조각만이 널려있었으 며 흥건한 선혈이 낭자할 뿐이었다. "무...... 무신(無神)이다......!" "으으으......!" 군마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도 하면서 모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천년숙원을 풀고 마도(魔道)를 일통하려는 것이 본 지존의 꿈이 다. 천마는 혈마지존의 발 아래 무릎 꿇어야 한다!" 웅...... 웅...... 웅...... 쇄금강마후가 섞인 일검사의 음성에 군마들은 귀를 감싸 쥐었으나 그 중 태반이 칠공(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 놈! 죽어랏!" "호호홋! 아깝지만 죽어줘야 겠구나!" 환희마불존과 천마요희는 일제히 공격했다. 그들은 눈짓을 주고 받은 후 합공을 펼친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승산 이 없다고 판단한 듯 했다. 슈우우욱......! 쐐애애... 액! 환희마불존의 극마지(極魔指)와 천마요희의 탄혈마요기(彈血魔妖 氣)가 일검사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어찌된 셈인지 일검사는 피하지 않았다. 펑!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흔들렸다. "크크크......" "호호호호!" 환희마불존과 천마요희는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인 이 상, 그들의 합공에 적중된 이상 결코 살아날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가? 일검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안색조차 일 점 의 변화도 없었다. 그들이 어찌 상상인들 하였겠는가? 일검사가 이미 혈마불괴지신 (血魔不壞之身)이 되었다는 것을. "흐윽! 이럴 수가?" "크으, 이미 금강불괴지신이란 말인가?" 두 마두는 비로소 자신들의 손목은 물론 어깨까지 으스러지는 듯 한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상대에게 숨 돌릴 여유를 줄 순 없다는 듯 그들은 다시 합 공을 펼쳐냈다. 콰츠츠......! 그들은 연달아 마공괴초(魔功怪招)를 쏟아내며 일검사를 공격했 다. "하하하! 시원한데? 고작 그 정도밖에 힘이 없느냐?" 펑펑! 연달아 그들의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도 일검사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으으... 이놈은... 사람도 아니다." 두 마두는 완전히 사색이 다 되었다. 이때 시퍼런 손 한 쌍이 그 들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검사는 마침내 잠영환마보(潛影幻 魔步)에 이어 한음독심수를 펼친 것이었다. "캬아악......!" 천마요희는 목을 휘어잡는 푸른 손을 보자 채 당도하기도 전에 공 포의 비명을 내질렀다. 한편 일검사의 손가락으로부터 빙지십살(氷指十煞)의 열 가닥 지 강이 뻗어 극중극마 환희마불존의 목에 정확히 열 개의 구멍을 만 들었다. 환의마불존은 미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황천으로 가고 말았 다. "악!" 천마요희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목은 일검사의 푸른 손에 단단 히 거머잡혀 버렸다. 그녀는 목이 졸린 채 그만 질식상태로 빠져 들고 말았다. "으아아... 달아나자!" 그 광경에 대전 안에 몰려들었던 마도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끄르...... 륵......" 일검사는 천마요희의 목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의 커다란 유방이 출렁였으나 그에게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천한 계집! 이젠 혈마수의 무서움을 느끼겠느냐?" "캑...... 캑...... 캑......" 목이 막힌 채 천마요희의 눈이 뒤집혔다. "황산은 중원의 성산(聖山)이다. 이런 곳에 더러운 누각이 서있는 것은 옳지 않다." 일검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왼손을 허공으로 세우더니 한 바퀴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붉은 기류가 흘러나오더니 대기를 온통 회오리치게 만들었다. 콰콰콰콰......! 가공할 일이었다. 구 층 높이의 군림대루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먼저 대전의 사방 벽에 쩍쩍 금이 가며 날아갔다. 이어 와르르, 누각 전체가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핫......! 모두 사라져라!" 꽈르르르릉! 거대한 군림대루는 핏빛 선풍에 휘말려 마침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주위의 대전과 전각들도 태반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으아아... 달아나자......!" "놈은 사람도 아니다!" 마침내 군마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가공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중원무림의 칠할을 장악했다는 군림성이 단 한 명에 의해 풍비박 산이 나버린 것이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3장 사나이 중의 사나이 -4 ━━━━━━━━━━━━━━━━━━━━━━━━━━━━━━━━━━━ 한편, 천마요희는 어느새 군림대루를 벗어나 삼십여 장 쯤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누각이 무너지는 순간 일검사가 그곳으로 신형을 이동한 것이었다. '이... 이 놈은 천마삼세와도 맞먹는 무공을 지녔구나, 대체 어떻 게 이다지도 강할 수 있단 말인가?' 천마요희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누각이 무너지면서 발 생한 폭풍으로 인해 그나마 걸치고 있던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망 사의는 거의 찢겨져 나가 그녀는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일검사는 그녀의 목을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형형한 광채가 흘러나와 천마요희의 영혼을 금제하고 있었다. 일단 그의 눈빛을 접한 순간 천마요희는 부르르 경련하더니 몽롱 한 표정을 지었다. "혈마(血魔)의 법(法)을 따르라......" 섭혼마음(攝魂魔音)이 전개되고 있었다. "으흑...... 혈마의 법을... 따르겠습니다." 천마요희는 완전히 실신한 채 나약하게 뇌까리고 있었다. 일검사 는 신안(神眼)으로 사로잡은 후 물었다. "마왕도(魔王島)는 어디 있느냐" "마... 마왕도는... 그곳은......" 그녀는 무엇인가 두려운 듯 좀체로 말을 토해내지 못했다. 본래 천 년 전 무림이 앙복했던 전설의 마중성지 마왕도는 태산(泰山) 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검사는 그 것을 캐묻고 있는 것이다. "마왕도가 어디냐고 물었다. 혈마의 명이다." "마... 왕... 도는... 바로...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 로부터 울려왔다. "아아악......!" 이어 누군가의 음침한 외침이 들려왔다. "혈마지존! 이 계집을 살리고 싶으면 어서 그분을 놓아 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 계집의 목을 베어버리겠다!" 일검사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쯤 허물어져 버린 대전 옆이었다. 기울어진 석탑(石塔) 옆에 한 명의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여인의 목에 검을 대고 위협하고 있었다. 여인은 혈도가 찍힌 듯 축 늘어져 있었는데 일신에는 자의궁장(紫 衣宮裝)을 입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몸매의 유 연함으로 미루어 절세미녀임이 분명했다. 일검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는 이런 비열한 행위를 가장 증오했다. "넌 누구냐? 너는 저 여인으로 날 위협할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이 냐?" 사실 일검사는 그가 자신이 모르는 여인을 내세워 위협하는 행위 에 대해 다소 어이가 없었다. "흐흐, 본인은 천마십검주(天魔十劍主)의 다섯 째인 유혼검주(幽 魂劍主)다. 그리고 이 계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심맹의 맹주(盟 主)인 천외도주(天外島主) 창궁신협(蒼穹神俠) 백리무외(百里武 畏)의 천금같은 딸이다. 이만하면 협상의 가치가 충분히 되지 않 겠느냐?" 일검사는 무심하게 물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으으......!" 뜻밖에도 일검사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바람에 유혼검주는 낭패한 기색으로 더듬거렸다. "내 말은...... 백리빙...... 이 계집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 이다. 이 계집이면 충분히 총순찰과 교환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우스운 놈이군, 내가 그런 흥정에 응할 줄 알았느냐?" 유혼검주의 안색은 그만 흙빛이 되고 말았다. "으으...... 너는 혈마의 후예가 아니냐? 어차피 백도에 속한 동 심맹과는 적이니 이 계집은 이용가치가 충분......" 일검사는 피식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이 추한 계집을 죽인 후 너에게 그 여인을 뺐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유혼검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으! 그럼 그 전에 이 계집을 죽여 버리겠다!" 슥......! 그는 바로 검을 그어 버렸다. 그러자 여인의 목에서 혈선이 생기 며 선혈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악......!" 비로소 공포에 찬 비명이 들렸다. 그 순간 궁장소녀의 얼굴이 드 러났다. 그녀는 절색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십미(十美)의 아 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고나 할까?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안력 이 신안에 이른 일검사는 그녀의 용모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 다. '......!' 그는 마음이 홀연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여인, 즉 백리 빙의 미모에 혹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용모를 지닌 여인은 인세에 흔치 않았다. 그는 그 점에서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때였다. 방 심한 사이에 천마요희는 그의 금제(禁制)에서 풀려났다. 그녀는 바로 일검사의 지척에 있었다. 천마요희가 그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호호홋! 죽어라!" 꽝......! 그녀는 혼신의 공력을 다해 일검사의 가슴을 쳤다. 폭음과 함께 일검사는 뒤로 주루륵 밀려났다. 그 순간 그의 손을 벗어난 천마 요희는 깔깔 웃으며 신형을 허공으로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머리칼 속에 꽂혀 있던 비녀를 뽑아 던졌다. 쐐애액! 사망옥잠은 한 가닥 빛이 되어 날아갔다. 그러나 일검사는 코웃음 치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사망옥잠은 그의 혈마수에 맞아 가루가 되 었다. "호호호홋......! 속았다. 사망백발옥잠(死亡百發玉簪)이 금강불 괴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암기인 줄 몰랐던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천마요희의 득의에 찬 외침과 함께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쏴쏴쏴쏴......! 막 가루가 되었던 사망옥잠이 무수한 독암기(毒暗器)가 되어 일검 사를 덮어 씌우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호신강기만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서 옥잠이 폭발하는 힘을 빌어 가공할 파괴력을 내는 것이었다. "으음!" 호신강기의 막을 뚫고 날아든 무수한 비침을 맞고 일검사는 비틀 거렸다. 그의 전신은 즉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경악한 것은 천마요희였다. "이럴 수가...! 사망백발옥잠에는 극독이 발라져 있어 즉시 핏물 이 되어야 하거늘......" 천마요희는 질겁을 했다. 비록 상대방은 전신이 고슴도치가 되었 으나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천마요희는 재빨리 판단을 내리고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냉혹한 음성이 떨어졌다. "어딜 가느냐?" 이어 지옥의 부름인 양 으시시한 음성이 귓전을 울렀다. "살중살(煞中煞) 월영살(月影煞)!" 순간 일검사의 손에서 달무리와 같이 뿌연 기류가 뻗어나갔다. 그 기류는 막 허공 십 장 위에서 신법을 바꾸려던 천마요희를 휘감고 말았다. 다음 순간 처절하고 구슬픈 비명이 찢어졌다. "카아아아... 악!" 자욱한 피안개가 퍼졌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천마요희의 몸은 허공에서 자욱한 피안개로 화해 사라지고 있었다. 시신조차 온전 히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것이었다. "으으... 저럴 수가......!" 유혼검주는 그만 공포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백리빙을 놓아 버리 고는 신형을 날렸다. 가능한 빨리 달아나는 것만이 생명을 유지하 는 길이었다. 슛! 그러나 일검사의 손가락이 붉은 혈선을 발출하자 그는 자신의 생 명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크아악......!" 그는 뒤통수가 화끈하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만 것이었다.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이라는 마종 기학이 펼쳐진 것이었다. 일검사는 그를 죽이고 난 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의 입가에 는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음, 혈마불괴신을 뚫는 암기가 있었다니......!" 투두둑...... 그의 몸에서 미세한 비침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소매로 입가의 피를 쓱 문질러 닦았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만일 그가 혈마호갑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설사 금강불괴지신이라 해도 전신에 백 개의 구멍이 뚫렸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일검사는 옷자락에 뚫린 백여 개의 구멍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토록 악랄한 암수를 가지고 있으니 천마(天魔)가 무림의 칠할 을 장악한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그는 서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폐허가 된 주변 풍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일검사, 너도 지독했구나."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일검사는 흡사 남의 말처럼 중얼거린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기 울어진 석탑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궁장미녀가 쓰러져 있었 다. ■ 등용문 제2권 제14장 풍운(風雲)의 조짐(兆朕) ━━━━━━━━━━━━━━━━━━━━━━━━━━━━━━━━━━━ 백리빙(百里氷)이란 이름의 미녀. 그녀는 천외도주(天外島主)의 딸이라는 지고무상한 신분 만큼이나 아름답고 고결한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마늘쪽같이 오똑한 코, 지그시 감고 있는 아미월 같은 눈썹만 보 아도 그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천외도주의 딸이라 했던가? 과연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일검사는 의식을 잃은 채 창백하게 질려있는 백리빙의 얼굴을 내 려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백리빙은 과연 천하절색이라 할만 했다. 이른바 경국지색(傾國之 色)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여인의 미모에 혹해 일국(一國)의 왕조차 넋을 잃어 나라가 기운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여인을 만나기는 힘들다. 어디까지나 고사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백리빙이야말로 그런 여인이었다. 십전완미(十全完美). 모 든 것을 두루 갖춘 미녀였던 것이다. 일검사는 백리빙을 내려다보 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미녀로군. 하지만 천외도 출신이라면 나와는 숙적지 간이 아닌가? 나도 정신 나갔군." 그는 바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발길을 붙잡는 소 리가 있었다. "으음......" 백리빙은 신음을 발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사르르 눈을 떴다. 그 순간 일검사는 그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에 매료되어 버린 것이었다. '눈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이때 백리빙은 경황 중에 한 사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자 대뜸 노기를 띄며 앙칼지게 외쳤다. "악적! 차라리 날 죽여라!" 순간 일검사는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백리빙의 앙칼진 말에 어이 없다는 듯이 웃었다. "후후,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도리어 욕을 하다니? 그것이 백도 (白道)의 예법이오?" "......!"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백리빙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만 넋을 잃고 말았다. 주위는 마치 태풍이라도 쓸고간 듯 완전히 폐허가 되버린 게 아닌가? 그녀는 영문을 몰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은 또 다른 백 치미(白痴美)를 풍기고 있었다. "당신이... 구해 주셨나요?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군림성은 대체 어찌된 거죠?" 그녀는 고혹적인 입술을 열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일검사는 빙긋이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렇소. 내가 소저를 구했소. 내 이름은 일검사(一劍士)요. 그리 고 군림성의 마두들은 내가 처치했소." "아......!" 백리빙은 탄성을 발했다. 그녀의 빙결같이 고운 뺨에는 사르르 홍 조가 물들고 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일검사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본 것이었다. 일검사의 영준한 모습에 그녀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아, 이렇게 영준한 분이 계시다니......' 순간적으로 백리빙의 방심이 흔들렸다. 문득 그녀는 아직도 바닥 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느끼고 억지로 일어서려 했다. "소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앗......" 그녀는 가냘픈 비명을 발했다. "쯧쯧, 가만히 있으시오. 상처가 작지 않소." 일검사는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갑자기 듬직한 사나이의 품에 안 기게 되자 백리빙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일검사는 그녀를 안고 신형을 날리며 말했다. "이곳은 불편하니 장소를 옮기겠소." 잠시 후, 그는 군림성 후면의 산기슭에 그녀를 내려 놓았다. 그 곳은 부드러운 풀이 깔려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의 행동이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이 여인과 나는 아무 관련도 없을 뿐 더러 도리어 숙적의 관계이건만......' 이때 백리빙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와요, 소협...... 으음......" 문득 그녀는 신음을 발하더니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일 검사는 급히 그녀의 맥문을 짚어 보았다. "......!"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리빙의 맥박은 느릿하면서 불규칙 하기 짝이 없었다. 만일 그대로 두면 생명을 잃거나 최소한 평생 불구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의도(醫道)를 알고 있었으므로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심맥(心脈)을 다쳤다. 정말 악랄한 놈들이다. 이런 수법을 사용하다니.'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두면 얼마 가지 않아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치료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으나 대부분이 약(藥)을 필요로 하거나 장기간 시술을 요하는 것들이었 다. 현재 그는 그런 시술방법을 택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는 결심을 굳히고 손을 뻗어 백리빙의 가슴에 손을 댔다. 옷자 락 사이로 팽팽한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으나 망설이지 않고 궁장 상의를 풀어헤쳤 다. 그러자 안쪽에 부드러운 명주 내의가 나타났다. 손가락이 닿 자 뭉클한 젖가슴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나 곧 내의마저 젖혀 버렸다. 만지면 터져나갈 듯이 팽팽하게 성숙한 두 개의 육봉이 드러났다. 한 번도 타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순결한 젖가슴이었다. 일검사는 백리빙의 젖가슴 사이에 선명한 홍색장인(紅色掌印)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손바닥으로 그 부분을 눌렀다. 이어 오지(五指)를 사용해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부분에 맺혀있는 울혈(鬱血)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움직이자 본의 아니게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손 안에서 백리빙의 젖가슴이 형태를 잃고 찌부러졌다. 또한 그 감촉은 어떠한가? 이미 여인을 알 만큼 알고 있는 일검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유혹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 앵두알 같은 유두가 스 쳤다. '아서라, 만상자전기!' 일검사는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만상자전기를 끌어 올렸 다. 만상자전기는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에 속한 천하제일의 활 공(活功)이었다. 스스...... 그의 몸 주위로 담담한 금광(金光)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그의 장심과 오지(五指) 끝으로 무상의 기운이 백리빙의 옥당혈을 중심 으로 흘러 들어갔다. "으음......" 백리빙은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녀는 중상 을 입고 있었으나 이 순간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의 무궁한 활법 으로 인해 장독(掌毒)이 말씀히 해소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했던 안색이 발그레하게 화색(和色)이 돌기 시작했다.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고혹적인 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나 있 었다. 그런 모습은 너무도 매혹적인 것이었다. 일검사는 그만 다시 정신 이 산만해지고 말았다. '아름답다......' 일검사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 당기며 입술을 맞추고 말았다. "음......!"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자 백리빙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그 순간 일검사의 혀가 그녀의 입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단 단하게 다물려진 치아를 열고 그의 혀는 여인의 숨어있는 작은 살 덩이를 끌어냈다. 진한 액체와 함께 살과 살이 섞였다. 일검사는 혀를 통해 진기를 흘려넣었다. 비록 일시적인 유혹으로 인해 입을 맞추었으나 그녀 의 내상을 치료하는 일을 잊지는 않은 것이다. 혀와 혀가 오고 갔다. 일검사의 오지는 쉴 새없이 여인의 젖가슴 을 문질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문득 백리빙이 몸을 뒤틀었다. 그 바람에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백리빙의 유방이 손 안에서 짜브라들었 다. "아앗!" 백리빙은 통증을 느낀 듯 비명을 토하며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한껏 커졌다. 자신이 한 사내에게 안긴 채 입술을 맞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상체는 벌거벗겨졌으며 소중한 유방을 사내의 손 이 마음껏 주물러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검사는 그제서야 번쩍 정신을 차리며 그녀를 놓아 주었다. 백리빙은 상세가 거의 회복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당 혹한 나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낯선 사내에게 입술과 가 슴을 내주었으니 명문 출신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 가. "흑흑......!" 마침내 그녀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검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소저......" 일검사는 뭐라 말하려다가 문득 안색을 굳혔다. 그의 영민한 귓전 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감지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른 채 백리빙은 여전히 오열하고 있었다. 일검사 는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귓전에 대고 낮게 말했다. "누가 오고 있소, 오백 장 밖이오. 아니 벌써...... 사백 장 밖이 오." "......!" 그 말에 백리빙은 깜짝 놀라 얼른 떨어지며 옷깃을 여몄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온통 홍시였다. 일검사는 그녀를 안고 신형을 날렸 다. 그는 한 바위 뒤에 그녀를 내려놓은 후 태연히 앞으로 걸어나왔 다. ■ 등용문 제2권 제14장 풍운(風雲)의 조짐(兆朕) -2 ━━━━━━━━━━━━━━━━━━━━━━━━━━━━━━━━━━━ "휘이... 익!" 문득 한 가닥 날카롭고 경쾌한 휘파람소리가 들리고 나서 그의 앞 에 하나의 황영(黃影)이 분광착영의 신법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일신에 황삼(黃衫)을 걸친 이십팔구 세쯤 되어 보이는 위맹 하고 준수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등에는 반월도(半月刀)를 메고 있었으며 송충이같은 눈썹과 호목 (虎目)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눈 앞에 일검사가 팔장을 낀 채 한가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 을 보고 물었다. "너는 군림성의 졸개냐?" 일검사는 그의 건방진 태도에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대체 누가 군림성을 저렇게 만들 었는지 어서 말해라!" 황삼청년의 음성은 웅후했다. 그는 설마 일검사가 군림성을 무너 뜨린 장본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짙은 눈 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사매(師妹)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는데 누군가 먼저 다녀갔구나, 낭궁형인가?" 황삼청년의 태도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눈 앞의 일검 사 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홀로 묻고 홀로 대답하고 있었다. "아니야, 남궁형은 나보다 하루쯤 늦게 도착할텐데......?" 일검사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귀하는 눈이 멀은 모양이오. 눈 앞에 장본인이 있는데 보이지 않 는 모양이구려." "뭣이?" 황삼청년의 얼굴이 씰룩였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 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너 혼자 군림성을 초토화시켰단 말이 냐?" 일검사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둔한 친구군. 천하에 혈마지존 말고 또 누가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혈마지존! 그럼...... 네가......!" 황삼청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일검사를 노려 보았다. 일검사는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 다. 경악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황삼청년은 호탕한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으하하하핫......! 정말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나 도성(刀星) 관산추(關山秋)는 벌써부터 혈마지존을 만날 생각이었다. 기왕 이 렇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서 승부를 가려야 겠다." 도성 관산추라면 도검쌍성(刀劍雙星) 중의 일인이었다. 도검쌍성 은 이 시대 최고의 젊은 기인들로 천외일맥의 후광을 업고 등장한 청년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천마삼검주(天魔三劍主)를 죽여 그 이름을 천하에 떨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명인 도성(刀星)이 나타난 것이 었다. "핫핫! 파천구식(破天九式)으로 네 목을 끊어 천외일맥의 무서움 을 보여주마!" 파아앗......! 그의 등에서 섬뜩한 혈도강(血刀 )이 뻗었다. 그의 도는 길이가 삼척반(三尺半)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끝이 반월형으로 구부러져 있었고, 도신에서는 혈홍빛이 흐르고 있었다. "자, 어서 무기를 뽑아라. 천외일맥은 맨손을 상대하지 않는다." 도성 관산추는 그야말로 호기방장했다. 그러나 일검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그 정도 능력으로 감히 경거망동하다니 살기가 싫어졌나 보군." "뭐, 뭣이?" 이런 지독한 모욕을 감수하는 무인은 없다. 특히 도성 관산추는 연일 승승장구하였으므로 그 말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 놈! 소원대로 죽여주마!" 쐐애애애...... 액...! 일순 반월혈도(半月血刀)가 불쑥 석 자쯤 더 늘어나는가 싶더니 가공할 혈기(血氣)를 뿌렸다. 우우우우... 웅! 도기가 일검사의 몸을 두 쪽 낼 듯 날아갔다. 그러나 그 순간 일 검사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빛이 섬광처럼 쏘아갔다. 슝! 하는 파공음과 함께 귀청을 찢는 파열음이 들렸다. "도... 도강(刀 )을 파괴하다니......!" 관산추의 불신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렸다. 그는 연달아 일곱 걸음 이나 물러선 채 손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또한 그의 손에는 반 동강이가 난 도가 쥐어져 있었다. 어찌나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손아귀가 크게 찢겨져 있었다. "잘 보게, 도(刀)는 이렇게 쓰는 것이네." 일검사의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문득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반동강의 도편(刀片)이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으......!" 관산추의 안색은 온통 납빛이 되고 말았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일검사는 손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츳... 츳... 츳...! 순간 일시에 수십 가닥의 핏빛 도광이 일어나며 관산추를 향해 날 아갔다. 바로 혈마십삼절기(血魔十三絶技) 중 혈전섬뢰백팔도(血 電閃雷百八刀)를 전개한 것이었다. "흐으윽......" 관산추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는 도무지 어떻게 피해야 할지, 어 떻게 막아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막 도광에 에워싸 이는 순간이었다. "죽이지 마세요...... 제발......!" 한 줄기 인영이 다급하게 부르짖으며 전권으로 뛰어들었다. "앗! 사매, 위험해......" 관산추는 대경실색했다. 뛰어든 인영은 바로 백리빙이었다. 그러 나 그가 만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일검사가 전개한 혈전섬뢰백팔도는 그녀에게 고스란히 떨어진 것 이었다. 관산추는 절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그러나 조용했다. 백리빙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백리빙은 멀쩡했다. 그녀의 피부에 떨어지던 도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그것은 펼쳐질 때보다 수 배나 빨리 회수되었 다. 백리빙은 떨리는 음성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이 분은 소녀의 사형이에요...... 그를 살려 주세요, 은 공......" 백리빙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일검사는 그만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둘 사이는 사형제간이었군.' 웬지 그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사... 사매, 살아 있었구료, 나는 사매를 구하려고......" 관산추가 안색이 붉어진 채 말했다. 일검사는 그들을 바라보며 냉 랭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사형제지간인 줄 몰랐군. 좋아, 살려주지." 쐐... 액! 그의 손에서 부러진 도(刀)가 날아갔다. 그것은 무려 백여 장을 날아가 한 바위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어찌나 깊숙이 박혔는지 칼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으으......" 관산추는 그 광경에 진땀을 흘렸다. 일검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형을 날리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 다음에 만날 때는 귀하의 도법이 완전해 졌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일초(一招)를 받아내지 못할테니 말 이다. 명심해 두길... 혈마지존은 일초(一招) 밖에 쓰지 않는다 네......" 일검사의 모습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크으윽......! 피땀 흘려 이십 년 동안이나 천외도(天外島)에서 무공을 익혔는데 고작 혈마지존에게 일초 만에 패하다니......" 관산추는 피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유달리 자존심 강한 그는 난생 처음 맛보는 패배감에 치욕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백리빙은 텅 빈 눈을 일검사가 사라진 곳을 향해 둔 채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어찌해 그냥 가버리는 건가요? 감사의 말도 채 못했는데......' 백리빙의 가슴은 이상하게 허전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일검사의 영상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천외도주(天外島主)의 천금같은 딸인 그녀였다. 그런 백리빙이 마 도 인물인 혈마지존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뺏기고 만 것이었 다. 어쩌면 그것은 또 하나의 야릇한 운명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 등용문 제2권 제15장 등용회(登龍會)의 부상(浮上) ━━━━━━━━━━━━━━━━━━━━━━━━━━━━━━━━━━━ 쾅! 단단하기 그지없다고 알려진 천산(天山)에서만 자생하는 흑철오목 탁(黑鐵烏木卓)이 주먹질 한 번에 박살이 났다. "어떻게 된 거냐? 도대체 황금당(黃金堂)의 황금십순찰(黃金十巡 察察)은 모두 장님에 귀머거리란 말이냐?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 록 수수방관만 했단 말이냐?" 분노에 찬 질타에 화려한 대전(大殿)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이곳은 검황루(劍皇樓), 가장 호사스런 곳이다. 석문(石門)의 천 보산(千寶山)에 자리잡고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 곳이다. 검황루의 중심부에 위치한 황금보전(黃金寶殿)은 지금 찬물을 끼 얹은 듯한 냉랭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나 흑철오목탁을 한 주먹으로 부순 인물은 일신에 곤룡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황금관을 쓰고 있었다. 나이는 육순 쯤 되었을까? 사각형의 단단한 얼굴에 호안(虎眼)을 지니고 머리카락은 자색(紫色)을 띄고 있어 언뜻 보면 사자(獅子) 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검황루주이자 황금존사인 진천사후였다. "대체 네놈들은 꿀먹은 벙어리냐? 보고의 황금이 바닥 나도록 퍼 내기만 했더냐?" 진천사후의 분노에 찬 질책에 황금보전에 모여 엎드려 있는 열 명 의 중년인들은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들은 중원 전역에서 널려있는 사업체를 정기적으로 순찰하며 재 정 상태와 인원을 감독하는 황금당(黃金堂)의 십순찰이었다. 지금 그들은 사색이 된 채 벌벌 떨기만 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박 살난 흑철오목탁과 함께 그들이 올린 보고서가 흩어져 있었다. 흩 어져 있는 보고서에는 빽빽히 글이 적혀 있었다. <사해표국(四海표局) 삼십육 개 분국(分局). 구월(九月) 한 달 사 이에 호송하던 표물(標物) 모두를 분실함. 실표(失標)의 액수는 도합 황금 팔십만 오천 냥......> <광일해운(廣日海運). 장강(長江)에서 여덟 척의 선박으로 화물을 운송하던 중 침몰. 실화물의 액수는 황금 육십만 냥......> <태화도박장(泰和賭博場)을 비롯 총 육십이 개 도박장에서 최근 연속 도박(賭博)에 패배...... 황금 사백만 냥 보상......> <삼십사개기원(三十四個妓院) 수석기녀들이 화류병(花柳病)에 걸 림. 그로 인한 고객의 변상요구에 응해 배상 총액 황금 칠십이만 육천 냥이 지출되고......> <천리대마장(天里大馬場). 대막산(大漠産) 준마 일천두(一千頭)를 매입하여 운송하던 중 병사(病死). 손해 금액 황금 삼십이만 냥......> <만리은장(萬里銀莊)에서 분실사건 발생. 분실 금액 황금 이백사 십만냥......> 보고서의 내용은 하나같이 놀랍기만한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수백 장의 보고서 중 그 일부에 쓰여져 있 는 내용만 해도 실로 거품을 물 정도였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검황루는 천문학적 손실을 입게 되는 것 이었다. 그것도 구월 한 달 사이에 모두 벌어진 사고였다. 그러나 사고로 보기에는 어딘가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어째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최근 들어 검황루의 황금이 바닥난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었 다. 사고로 인한 변상 및 손실 보충으로 탕진을 해 버렸기 때문이 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황금 존사 진천사후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채 자색 수염을 부르르 떨 고 있었다. "그래, 아직도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단 말이냐?" 그러자 십순찰 중 수석순찰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속하들도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나 괴이하여 원인 을 규명해 보려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결국 조사 결과 모두 사고 로 인한 일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조작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우핫핫핫핫......!" 진천사후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수 염과 머리카락을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필히 밝혀내고 말겠다! 이 일은 노부의 기업을 무너뜨리려는 놈 의 술수임이 틀림없다!" "그... 그렇지만 증거가......" "시끄럽다! 분명히 누군가 있다! 노부의 명예를 몽땅 걸고서라도 밝혀내고 말겠다!" "......" 십순찰은 모두 고개를 바닥에 박아버리고 말았다. "우흐흐... 후...... 어떤 놈인지 꼬리를 잡기만 하면 결코 가만 두지 않겠다!" 진천사후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분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동안 감히 검황루를 건드리는 자들은 없지 않았던가. 이때 대전 안으로 한 명의 중년화복인이 들어섰다. 그는 뚱뚱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으나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을 작지만 날카로운 눈빛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총관(總官), 무슨 일인가?" 그가 나타나자 비로소 진천사후는 안색을 회복시키며 맞았다. 금적산공(金積散公) 하후돈.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검황 루의 제이인자로 검황루의 재정(財政)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실상 검황루가 천하제일의 금력을 성취케 된 데에는 그의 공이 반 은 넘었다. 하후돈의 안색은 극히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주, 또 불길한 소식이 날아 들었습니다." 그의 우울한 음성에 진천사후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또 무슨...... 일인가?" 하후돈은 십순찰을 힐끗 본 다음 말했다. "모두 세 군데서 날아든 소식에 의하면......" 그는 좀체로 안색이 변하지 않는 위인이었으나 이번 만큼은 음성 마저 떨리고 있었다. "무엇인지 어서 말하게." 진천사후는 초조한 듯 재촉했다. "아룁기 황송한 말씀이나... 연경(燕京)으로 호송하던 각 성(省) 제후들의 공물이 도중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무...... 무엇이?" 진천사후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소 리인가? 지방 제후들의 공물은 정기적으로 황제(皇帝)에게 바쳐진 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공물을 노리는 화적떼들로 인해 제후들은 공 물 운송에 각별히 신중을 기한다. 실상 공물은 엄청난 양인데다 그 값은 황금으로 계산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 년 전부터 공물호송은 검황루에서 전담하다시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공물이 실종되다니......! "으으...... 대체 어찌된 거냐? 이번 공물 호송에는 본루의 철혈 무적철기대(鐵血無敵鐵騎隊) 백팔 명이 파견되고 게다가 진천 십검(震天十劍) 중 오검(五劍)이 출동했지 않느냐? 그들은 허수아 비란 말이냐?" 진천십검(震天十劍)은 자신이 직접 키운 십 인의 검수(劍手)를 말 했다. 즉, 그의 열 명의 제자인 것이다. 각각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 옥(玉), 은(銀), 철(鐵), 동(銅), 빙(氷)으로 불린다. 그들은 비록 신진이긴 하나 이미 무림에 절정검수들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하물며 진천사후는 이번 공물 운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 중 에서 오검을 딸려 보내지 않았는가? 목검(木劍), 은검(銀劍), 철검(鐵劍), 수검(水劍), 토검(土劍)이 직접 공물 운송길에 나선 것이었다. 그들이라면 그 어떤 강적, 아 니 설사 일개 방파와 부딪친다 해도 능히 깨뜨릴 수 있다고 자신 하고 있었다. 하후돈은 고개를 떨구었다. "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공물은 물론 수레 사십구 거(四十九車)와 구십팔 인의 차부(車夫), 백팔 명의 철혈무적철기대, 그리고 오검 (五劍)이 모두 감쪽같이 실종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진천사후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 그럴 수도 있단 말인가?" "백방으로 행적을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현재까지 아무런 실 마리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그들이 실종된 곳이 낙양에서 오십 리 떨어진 이석촌(理石村) 근 방이라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입니다." "......!" 진천사후의 눈썹이 곤두섰다. "다른 단서는?" "없습니다." "으음......" 진천사후의 얼굴은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흥 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중원 최고의 거부, 그것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이 있기까지 그는 위기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 었다. 그때마다 그는 무한한 인내와 끈기, 그리고 신중한 대처로 타개해 나갔던 것이다. '음, 필시 여기에는 엄청난 흑막(黑幕)이 있다. 자칫하면 당한다. 이럴 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하후총관, 그리고 다른 두 가지 소식이란 무엇인가?" 하후돈은 흠칫했다. 실상 그는 누구보다 루주의 성품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진천사후의 음성만 듣고도 그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가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장백(長白) 특산의 인삼과 약초...... 거래는 본루의 빠뜨릴 수 없는 무역의 한 부분입니다." "음, 그렇지." "그런데 이번에 장백으로부터 사들인 인삼과 각종 약초를 호송해 오던 도중 물건을 모두...... 잃었습니다." "잃다니? 또 도둑 맞았나?" "아닙니다." "그럼?" "흑룡강(黑龍江) 어귀의 객원(客院)에 머무르던 도중 불이 나 몽 땅 타버렸습니다." 진천사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헛......!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 또 다른 소식은?" "......?" 그의 너무나 담담한 태도에 중인들은 어리둥절해졌다. 하후돈은 계속 말했다. "동영으로 무역거래를 하러 갔던 선박이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그만 실종......" "으핫핫핫핫......!" 진천사후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미친 듯한 광소는 근 일각 가량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광소가 끝난 순간 그의 입에서는 차 디찬 한 마디가 떨어졌다. "파산(破産)이군!"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 아무리 황금을 산처럼 갖고 있는 천하제일부호라 해도 어찌 연속적으로 닥쳐온 사고와 실표, 분실, 그리고 사업의 도산을 감당해 내겠는가? 더욱이 이미 검황루의 황금은 바닥이 난 지 오래가 아닌가? "우후후후......! 마침내 검황루는 천하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 되 고 말았군 그래, 연경으로 갈 공물을 변상하려면 본성마저 팔아치 워야겠군. 완벽해, 정말 완벽해!" 진천사후는 연신 무릎을 치며 껄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하후돈을 향해 물었다. "총관, 우리가 변상해야 할 액수는 얼마며, 본성을 팔아치우면 모 두 처리되겠는가?" 그 말에 하후돈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벌렸다. "어림없습니다. 주루, 그러기 위해선 대략 잡아도 황금 십만관(十 萬貫)은 더 있어야 합니다." "황금 십만 관이라...... 허헛...... 끝이군." 진천사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 끝이다. 그토록 막강한 부 를 과시했던 검황루가 이렇게 어이없이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었다. 중인들은 암울한 침묵에 싸인 채 아 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우리가 황금 십만 관을 빌려 드리겠소." 문득 어디선가 젊고 패기에 찬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 중인들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금보전 으로 막 들어서는 청년들이 있었다. 앞장 선 청년은 금의(錦衣)를 입은 약간 뚱뚱해 보이는 이십대 청 년이었고, 그의 뒤에는 백색장삼을 입고 있는 지혜롭게 보이는 청 년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금주판과 섭선(攝扇)을 손에 쥔 채 태연히 들어오고 있었다. "너희들은......?" 진천사후는 눈썹을 찌푸렸다. 외인이 이곳까지 들어 오도록 몰랐 다니...... 그로서는 본통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니었다. "아, 금공자(金公子)......!" 하후돈이 문득 반색을 하며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진천사후는 흠 칫했다. "총관, 아는 자들인가?" 하후돈은 급히 그에게 설명했다. "루주, 저 분들은 그 동안 본루에 자금을 돌려 주신...... 속하가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등용회(登龍會)의 전주(錢主)들입니다." "음!" 진천사후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보름 전 총관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났다. ...... 루주, 이미 자금이 바닥났습니다. 상업에 있어서 가장 중 요한 것은 신용(信用)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객에게 변상을 늦추거나 지불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마침 돈을 빌려 주겠다는 전주(錢主)가 나섰습니다. 최근 황하 일대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상인단체인 등용회의 젊은 전주입니다. 그때 그는 어지러운 심경으로 총관이 알아서 하도록 허락했었다. 그리고 그간 빌려 쓴 돈이 자그마치 황금 삼만 관에 이른다는 것 도 알고 있었다. "허...... 음. 금공자였구료. 이곳엔 무슨 일로......?" 진천사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천하를 굽어보는 그 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으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공자는 금주판을 습관처럼 자르륵거리며 말했다. "하하! 소생은 평소부터 황금존사를 앙모하던 차였습니다. 마침 존사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그간 미력이나마 힘을 드렸는데 사정 이 더욱 딱해지는 것을 보고 점차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금공자의 언변은 유들유들하고 유창했다. "......?" "사실 소생은 존사를 흠모하고는 있지만 장사꾼은 어디까지나 장 사꾼입니다. 만일 존사의 검황루가 파산(破産)한다면 그간 빌려준 돈의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조차 돌려받을 길이 막연하지 않겠습니 까?" "으음......" 진천사후는 그만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심 그는 이를 갈고 있었 다. '대검황루의 루주인 나 진천사후가 이런 애송이 놈들에게 수모를 당하다니......' "하하하......! 그래서 소제는 깊이 생각한 끝에 한 가지 용단을 내렸습니다." 금공자의 자신만만한 웃음에 진천사후는 귓구멍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금공자는 금주판을 자르륵거리며 그의 심정 따위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귀루에 새로이 투자하여 일단 파산을 면하게 한 후 이자 를 배로 쳐서 돌려 받겠다는 것입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당장 급한 황금 십만 관을 돌려 드리고 또 오만 관을 운영자금으 로 내드리겠습니다." "오오......!" 중인들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황금 십오만 관! 그 정도면 나라를 세우고 도 남음이 있는 액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거금을 마치 구 리돈 몇 푼이나 되는 듯이 간단히 빌려 주겠다니.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검황루로서는 기사회생의 기회요, 구세주를 만난 셈이었다. 그러나 진천사후는 떨떠름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 있기에......' 그는 강호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구렁이었다. 그러므로 결 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씀은 고맙소만 무슨 조건이 있을텐데......?" "하하하......! 역시 존인과는 말이 쉽게 통하는군요. 사실 조건 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금공자는 일단 말을 끝맺으며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존사께는 천하쌍미(天下雙美)로 불리워지는 천하절색의 금지옥엽 이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진천사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그의 눈에서 쇠라도 녹일 듯한 분광이 솟아 나왔다. "담보로...... 내 딸 화영(花塋)을 잡겠다는 건가?" 그의 음성은 분노로 인해 떨려나왔다. 금공자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핫......!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게 아니라......" 그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청혼(請婚)을 하려는 것입니다." "......!" 진천사후는 물론 중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중인들은 일제히 진 천사후를 바라보았다. 진천사후의 곤룡포가 바람도 없는데 파드득 떨고 있었다. 금공자 는 싱긋 웃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여유있는 태도였다. "하하,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청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희 회 주(會主)께서 청혼하는 것입니다." "......!" 진천사후는 음찔했다. 등용회주(登龍會主). 그는 온통 신비에 싸인 인물로 황하 일대를 일시에 휘어잡은 상술(商術)의 귀재(鬼才)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불과 이 년 사이에 황하 유역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으며, 완벽에 가까 운 이재(利財) 능력과 수완으로 단시일내에 검황루와 쌍벽을 이루 는 금력을 구축한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청혼을 해온 것이다. 진천사후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 며칠 사이에 닥쳐온 갖가지 사태 가 그로 하여금 눈알이 핑핑 돌게 할 정도로 당혹케 하고 있었다. 그는 스르르 태사의에 주저 앉았다. '이제...... 나도 늙었나 보군.' 그는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뉘였다. 그런 자세로 금공자에게 말했 다. "내게 시간을 좀 주겠소?" 그 말에 금공자는 싱긋 웃으며 포권했다. "그럼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옆의 백삼청년에게 말했다. "제갈 아우, 가세." 그들은 중인들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남긴 후 밖으로 유유히 사라 졌다. ■ 등용문 제2권 제15장 등용회(登龍會)의 부상(浮上) -2 ━━━━━━━━━━━━━━━━━━━━━━━━━━━━━━━━━━━ 국화는 화중지화(花中之花)로 불리운다. 한사(寒士)의 기(氣)랄까? 국화에는 묘한 기품이 있다. "......" 누군가의 손이 국화를 만지고 있다. 국 중에서도 황국(黃菊)이 으뜸이다. 지금 활짝 피어난 황국을 매 만지고 있는 손의 주인은 실로 오랜만에 꽃의 화심(花心)에 취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일검사였다. 그는 황국을 쓰다듬으며 추억에 젖고 있었다. 국화는 그가 이 세 상에서 죽(竹)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었다. '오죽거(烏竹居)에는 국화밭이 있었지. 아버님께서는 유난히 국을 기르기를 좋아하셨고... 나 역시 그런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 가을 이면 국화 곁을 떠나지 않았었지.' 연운(連雲)의 오죽거. 그 얼마나 그리운 추억인가?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아니, 설사 돌아간다 해도 결코 옛날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우내제일학 천화빈...... 그는 학문일도(學問一道)에 평생을 바쳤 던 대학자였다. 그가 일으켜 세웠던 동림서원(東林書院)은 배신한 제자로 인해 잿더미가 되었고, 귀동(鬼童)으로 이름 높았던 천의 영(天意影) 또한 지금은 잊어버린 이름에 불과했다. 일검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후훗, 의영(意影)은 죽었다. 그때 동림서원이 불타버린 날로부 터......" 그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는 검황루(劍皇樓)에 와 있었다. 취월헌(翠月軒). 이곳은 검황루의 귀빈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는 취월헌의 화원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월동문(月洞門)으로부터 두 명의 영 기발랄한 청년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금공자(金公子), 즉 금장(金藏)과 제갈(諸葛)이 나란히 벙글거리 며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황금보전에서 검황루주 진천사 후에게 청혼(請婚)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하하...... 대형(大兄),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습니 다." 금장은 금주판을 기분좋게 짜르륵 흔들며 말했다. 제갈도 한 마디 거들었다. "후후...... 또 한 분의 형수님이 곧 생길 겁니다." 일검사는 피식 웃었다. "제갈, 아무래도 자네는 등룡장(登龍莊)에 들어가면 성치 못할 것 같군. 어쩌자고 자꾸 그녀들의 눈밖에 날 일을 추진하는 거지?" 그 말에 제갈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 중매는 꼭 성공시켜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득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간 흥분하며 말했다. "진천화영(震天花榮) 소저가 네째 형수님이 된다면 그야말로 호박 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격입니다. 검황루 전체가 등용문에 귀속 되는 것이 될 테니까요. 안그렇습니까? 금장형?" 금장은 히죽 웃었다. "그렇고 말고, 아마 진천사후는 거절할 수 없을 걸. 더구나 화영 소저는 대형을 한 번 보면 푹 빠질 게 분명하니 이번 장사야말로 이 금장 일생일대의 가장 큰 성공임이 분명해." 일검사는 어이가 없었다. "장사라고? 검황루의 표물과 공물을 훔치고 사업을 망쳐놓은 게 누군데? 아마 진천사후가 알면 너희들을 갈아 마시려고 할 것이 다." "헤헤헤! 그전에 쌀을 익혀 밥을 만드는 일을 대형께서 해 주신다 면 아마 그 영감도 어쩔 수 없을 걸요?" 제갈의 농담에 일검사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본래 최근 검황루에 닥친 괴변은 모두가 제갈과 금장이 만들어내 작품이었다. 그 동안 검황루가 분실한 물건과 사업의 손해는 몽땅 등용회에 넘어와 있었다. 제갈은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천하의 모든 상권과 막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검황루를 등용문에 끌어들일 대계(大計)였다. 등용문이 무림에 두각을 나타내려면 그 방법이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갈공명을 능가하는 그의 두뇌와 금장의 완벽한 상술(商術)의 합작으로 그의 계획은 구할 이상 성공한 셈이었다. 마지막 단계만이 남았다. 그것은 완벽하게 검황루를 먹어치우는 일이었다. 즉, 검황루주의 천금(千金)이자 후계자인 진천화영을 일검사에게 시집보내는 일이었다. 그것만 성공한다면 검황루는 완전히 등용문에 넘어온 것이나 다름 이 없었다.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일검사는 그저 꽃(花)을 따기만 하면 되 는 것이었다. 일검사는 군림성을 무너뜨린 후 등용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는 특수한 연락방법을 취해 금장과 만났으며 그를 통해 제갈의 계 책을 들었다. 처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제갈의 계책은 옳지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제갈의 간청에 넘어가고 말았다. 사실 제갈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한림팔교(寒林八交)의 후예인 그는 세상에 나서 야망(野望)을 펼 치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은 여덟 명의 형제들 모두의 공통된 이상이기도 했다. 등용문은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야망의 날개를 달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한(恨)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내야만 했다. 다만 그것은 문(文)이 아닌 무(武)에 있었고 황실(皇室)을 통한 출신입세가 아닌 강호무림 쪽으로 방향 이 돌려졌을 뿐이었다. 일검사는 제갈의 마음을 이해했다. 결국 그는 승락을 했고 그런 연유로 인해 이곳 검황루로 오게 된 것이었다. "후후...... 지금쯤 그 영감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 겁니다. 대형은 그저 기다리시면 되는 것입니다." 제갈은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금장은 또 무엇을 계산하는지 주판을 열심히 퉁기고 있었다. 일검사는 황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등용장으로 돌아가면 국화(菊花)를 심도록 해야겠네." ■ 등용문 제2권 제15장 등용회(登龍會)의 부상(浮上) -3 ━━━━━━━━━━━━━━━━━━━━━━━━━━━━━━━━━━━ "그를 만나겠어요." 여인, 당금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인이었다. 이름하여 북천 소중살(北天笑中煞) 진천화영(震天花塋). 그녀는 남천백리화(南天百里花) 백리빙(百里氷)과 함께 천하쌍미 (天下雙美)로 불려지는 절세미인이었다. 일명 여소진(女蘇秦)이라고도 불리우는 그녀는 검황루의 후계자이 기도 했다. 황홀한 미소 속에 칼을 숨긴 여장부이자 소진을 능가하는 지혜와 화술(話術)을 지니고 있다는 그녀는 지금 호기심과 투지(鬪志)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너, 정신 나갔느냐? 그 등용회주(登龍會主)인가 뭔가 하는 늙은 이에게 설마 시집가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진천사후는 분노성을 발했다. 그는 등용회주라는 신비인이 필시 늙은이일 걸로 생각하고 있었 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등용회의 역략 으로 볼 때 결코 약관 정도의 청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 었던 것이다. 그곳은 검황루주의 처소였다. 다른 곳과 달리 놀랄 정도로 검소하고 질박한 곳이었다. 단지 한 칸의 정실로 이루어진 처소였다. 사면 벽에 장식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고, 그저 딱딱한 나무침상과 탁자, 그리고 서가(書架), 한쪽 벽에는 애검(愛劍) 천후신검(天吼 神劍)만이 달랑 걸려 있을 뿐이었다. "호호호, 아버님도. 이 여식이 그렇게 어리석은 계집이라고 생각 하신단 말인가요?" 꿀물이 묻어날 듯 달콤한 웃음을 흘리는 절세미인. 진천화영은 일신에 연홍빛 궁장을 입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유연 한 몸매는 버들가지인 양 하고, 피부는 옥(玉) 가루를 뿌린 듯 그 윽해 보였다. 이목구비는 조화신옹이 빚은 듯 완미(完美) 그 자체였으며 구름 같이 틀어올린 머리카락에서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듯 했다. 그야 말로 월궁항아를 연상케 하는 가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진천사후는 언제나처럼 부신 듯한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며 물었 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그를 끌어 들여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잖 아요." "......" 진천사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어쨌든 급한 불은 꺼야하지 않겠는가? "소녀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어요." "......?" "적어도 그는 본루에 닥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지는 않 을 거라는 게 소녀의 생각이에요." "......!" 진천사후의 안색이 변했다.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계속되는 본루의 자금압박과 실표, 갖가지 사업들의 몰락과 함께 갑자기 부상한 등용회라는 조 직... 뭔가 이상해요." "그... 그렇다면......" 진천사후는 갑자기 머리가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그 모든 것이 등용회의 짓이란 말이냐?" 진천화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요." "증거는 무슨 증거! 생각해 보니 그 놈들의 짓이 확실한 것 같 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껏 상도(商道)를 지켜왔어요. 증거도 없이 그 들을 핍박한다면 천하인이 비웃을 거예요." "......" "호호, 소녀에게 생각이 있어요. 그들이 범인인 것은 십중팔구 틀 림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 대담함으로 미루어 필시 믿는 게 있을 거예요. 그리고...... 소녀는 일말의 호기심도 있어요." "......?" "등용회주의 완벽한 수완과 그 대담성...... 그리고 저에게 청혼 까지 해서 검황루를 통째로 집어 삼키겠다는 야심은 저로 하여금 어떤 매력을 불러 일으키고 있어요." "화영아......?" 진천사후는 깜짝 놀랐다. "호호...... 혹시 알아요. 이번 기회에 정말 대단한 신랑감을 얻 게 될지요? 아버님께는 천하제일의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 아요." "너... 너......!" 진천사후는 그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진천화영은 여전히 생글거리기만 했다. "호호...... 걱정마세요, 아버님. 이 화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는 않으니까요. 어쨌든 그를 만나야겠어요." "으... 음." 진천사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천화영에게는 언제나 두 손 들고 마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일은 재미있게 되어가고 있었다.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여 인 진천화영,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등용회주는 과연 어떤 자일까? 감히 본성에까지 찾아온 것으로 보아 결코 하류배는 아니고...... 호호, 기왕이면 멋진 사람이라 면 좋겠어.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 등용문 제2권 제16장 영웅호색(英雄好色) ━━━━━━━━━━━━━━━━━━━━━━━━━━━━━━━━━━━ "당신이 등용회주(登龍會主)이신가요?"' 진천화영은 대담하게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물었다. 지금 그녀의 눈 앞에는 한 사람의 넓은 등이 있었다. 백색 유삼 (儒衫)을 입은 인영이 창가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렇소, 화영소저." 일검사는 담담히 대꾸였다. "당신이 제게 청혼을 하셨다고요?" "그렇소." 진천화영은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절 보지 않는 건가요? 볼 가치도 없다는 건가 요?" "훗훗, 보나마나요." "......?" "나는 이미 낭자가 천하절색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오." "어... 어떻게요?" 진천화영은 약간 당황했다. "훗훗... 모름지기 사람의 음성에는 그 사람의 지혜나 성격, 체질 등 모든 것이 내포되는 법이오. 낭자의 성격이 활발할 뿐 아니라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지혜로우며 또한 몹시 아름다울 것이오." "......!" 진천화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떻게 내 성격을......?' 사실 그녀의 성격은 일검사가 말한 그대로였다. "당신의 고명(高名)을 알려줄 수 없나요?" "일검사(一劍士)라고 하오." "일... 검사......?" 진천화영은 어리둥절했다.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워 낙 괴상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진천화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가 끝까지 몸을 돌리지 않는 것이 모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계속 등을 돌리고 말한다면 나는 돌아가겠어요!" "후후......!" 일검사는 기소를 흘렸다. "화영소저, 인간에게 얼굴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오? 우리는 이 상 태로도 충분히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소?" 진천화영은 쌀쌀하게 말했다. "맞아요. 할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것에 불과해요. 끝까지 이런 상태로 대화를 한다면 진실은 하나도 나누 지 못할 거예요." "진실이라고? 낭자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시오?" "흥! 인간은 언제나 진실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가식과 허구에 차 있게 될 것이오." "후후, 가식과 허구라... 그렇소. 화영소저, 나는 과거 그것으로 인해 뜻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마저도 잃어버린 사람이오." "......!" 진천화영은 흠칫했다. 그의 말이 웬지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는 뼈아픈 과거가 있군요?" "훗훗...... 그럴지도 모르오." 빙글, 일검사는 신형을 돌렸다. "악!" 진천화영은 짤막한 비명을 터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상대방의 드러난 얼굴! 그것은 실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보게 된 상대방의 얼굴은 도무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양 뺨에는 수없이 칼자욱이 그어져 있었고... 코는 푹 주저앉아 있었으며, 입술은 뭉개져 간신히 그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의 추면살귀랄까? 가히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이었 다. 일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어떻소? 이래도 진실을 나눌 수가 있겠소, 낭자?" "다... 당신...... 어떻게 그런 얼굴을......" 겁에 질린 얼굴로 진천화영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하핫......!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오. 처음에 이 얼굴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호감과 부드러움을 표시하다가는 내 얼굴을 보기만 하면...... 훗훗......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곤 하였소." "......!" 진천화영은 교구를 가늘게 떨었다. '화영아! 화영......! 너도 그런 속된 계집에 불과했단 말이냐? 사람에게 얼굴이란 한낱 껍질에 불과하거늘......' 그녀는 내심 이렇게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간신 히 격동을 짓누르며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두 눈에 동정심과 연민을 듬뿍 담은 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놀란 것은...... 너무나 의외였기 때문이에요.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일검사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대단한 소녀다. 내 마음을 끌어당길 정도로......'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천하쌍미 중의 하나라는 말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나 막상 직접 대하고 보니 진천화영의 미모는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을주려려와 설옥경, 그리고 설화와는 또 다른 활달하면서도 야성 미(野性美) 넘치는 미모는 사나이의 마음을 잡아 끄는 묘한 매력 이 있었던 것이다. "훗훗......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오?" 진천화영은 솔직했다. "아무렇지 않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이 진천화영은 사람의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부류의 계집은 아니 예요." 그녀의 당당한 말에 일검사는 차게 말했다. "훗훗,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이 얼굴에도 불구하고 내게 시집을 올 수 있소?" "......!" 진천화영의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야멸차게 말 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에요. 한 마디로 결정할 수는 없 는 문제예요. 적어도 화영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을 내려요." "후후...... 그렇다면 나는 어떻소?" 진천화영은 지지 않고 일검사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 받았다. "적어도 몇 가지 기준에 들어야 해요." "무엇이오?" "첫째, 능력(能力)이 있어야 해요. 화영은 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 에게 시집갈 순 없어요." "후후...... 무슨 능력을 말하는 것이오?" "무공(武功)과 지혜(智慧), 그리고 천하(天下)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후훗...... 그리고?" "두번째는 그 사람의 인품(人品)이에요." "세번째는?" "나이가 맞아야 해요. 늙은이나 어린애에게 시집갈 수는 없잖아 요?" 그녀는 문득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의 나이는 어떻게 되죠? 삼십이 넘으면 안되요." "후후...... 그 기준에는 들고 있소." "아...... 그럼 됐어요." "그럼 네번째도 또 있소?" "있어요." "무엇이오?" "가장 중요한 문제예요. 설사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맞는다 해도 사랑이 없는 혼인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 네번째 조건은 내가 사 랑할 수 있는 남자라야만 해요." 일검사는 내심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정말 치밀한 여자로군. 이거야말로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것이 아닌가?' 두 남녀 사이의 대화는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일검사와 진천화영은 장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사이 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화제는 대하(大河)처럼 막힘없이 도도하게 흘러나왔다. 학 문에 있어서는 제자백가(諸者百家)는 물론이려니와, 온갖 경전(經 典)에 이르기까지, 음률(音律)이나 시사(詩詞)도 막힘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심지어는 바둑(碁)이나 서화(書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대화는 전문가의 수준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의도(醫道)에 있어 서도 화타의 오금경이나 편작에 이르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의리 (醫理)까지 술술 흘러나왔다. 거기에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주역(周易), 기문둔갑, 성복술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종내에는 원예(園藝)에까지 그들의 대화는 닿지 않는 곳이 없었 다. '과연 여소진(女蘇秦)이라 불리우기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구 나......!' 일검사는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정작 진천화영의 놀라 움은 그보다 몇십 배는 더한 것이었다. '이 사람...... 이제껏 만난 그 누구보다 박식할 뿐더러 만학무불 통지(萬學無不通知)의 만고기재다.' 그녀는 점차 일검사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외모와 는 관계없는 내면의 매력이었다. 그녀는 재녀(才女)였다. 재인(才人)은 재인을 좋아한다. 마침내 그녀는 그와의 대화의 분위기에 심취하고 말았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한나절 가까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뎅...... 어디선가 초경(初更)을 알리는 인경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진천화영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야겠어요." 일검사는 그녀의 발그레 상기된 얼굴을 보았다. 순간 묘한 충동이 일어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낭자는 정말 아름답소." "......!" 진천화영은 그 말에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일검사는 그녀를 똑바 로 주시하며 물었다. "낭자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소?" 그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그렇구나, 그걸 잊을 뻔했어.' 그녀는 정신없이 대화에 끌려들어간 자신을 나무랐다. 그녀는 정 색을 지으며 말했다. "공자(公子), 본루의 실표 및 공물은 어떻게 했나요?" 일검사는 그 말에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말이오?" "시치미 떼지 마세요. 저는 이미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일검사는 히죽 웃었다. "무슨 증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하하! 낭자가 착각을 한 것 같소. 등용회는 장사를 하지 도둑질은 하지 않소." "......" 진천화영의 얼굴이 샐죽해졌다. "정말 계속 시치미 떼긴가요? 천하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일을 해낼 사람은 오직 공자밖에 없어요. 완벽하고 치밀한 계략과 수완 은 오직 공자만이 가능한 일이에요." "하하하...... 정녕 그렇게 생각하오?" "물론이에요!" "후훗......! 그럼 낭자의 남편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구려? 그렇다면 나이와 능력 그 두 가지는 해결된 셈이구려." 진천화영은 깜짝 놀랐다. '아차! 당했구나......!' 그녀는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만 만치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인품은 아직 뭐라 말할 수 없어요. 군자(君子)는 군자되 남의 공물이나 노리는 양상군자(梁上君子)라면 실격이에 요." 일검사는 빙긋 웃었다. "나는 도둑질을 하진 않았소. 단지......" "단지?" "후훗......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을 뿐이오." "호호호홋...... 드디어 걸렸군요. 역시 공자가 범인이군요!" 진천화영 득의의 교소를 터뜨렸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 않겠소. 그간 우리는 검황루의 표물와 공물을 모두 보 관하고 있소." 진천화영의 얼굴에 서릿발이 덮였다. "무슨 뜻이죠? 감히 본루와 대적하겠다는 건가요?" 일검사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지 않았을 것이어." 진천화영의 눈에서 한광이 쏟아져 나왔다. "실력으로 뭉갤 수도 있었다는 말이군요!" "부인하지는 않겠소." 진천화영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것은 엄청난 모욕이었 다. 명실공히 천하삼정(天下三鼎)의 일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검황 루가 아닌가? 그런데 감히 강호에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 명의 상인(商人)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녀는 분노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편 일검사는 그녀의 그런 표정이 무척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었 다. "사실상 검황루가 존재하는 이유는 막대한 금력(金力)과 루주의 고강한 무공 두 가지 때문이었소." "그런데요?" "낭자도 알다시피 전자는 이미 와해되었소. 남은 것은......" "흥! 당신이 아버님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요?" "이길 수 있다고 하지는 않았소. 나는 다만......" 그는 창 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무형의 흡인력이 뻗어 황 국(黃國) 한 송이가 날아왔다. 일검사의 그 일수에 진천화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방에서 화원까지는 적게 잡아도 오장(五丈) 이상의 거리다. 거기 다 어두운 공간을 보지도 않고 정확히 한 송이의 황국을 잘라 허 공섭물진기로 빨아들이다니! 이 사람이 이렇게 무서운 무공을 감 추고 있었을 줄이야......!' 이제서야 그녀는 상대방이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절감했다. 일검 사는 한 송이의 황국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고수(高手)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오." "......" "낭자 또한 중원검왕의 피를 이어 받았으니 능히 검(劍)의 도(道) 를 알 것이오. 검에는 활검(活劍)과 사검(死劍)이 있소. 사검은 단지 살인자의 편격한 검법에 불과할 뿐이오. 진정한 검객이라면 활검(活劍)을 구사하여야 할 것이오." "......" 진천화영의 안색이 흔들렸다. 일검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너 무나 심오한 검도였기 때문이었다. 실상 그녀는 진천사후의 검공을 이미 십일성(十一成) 터득하고 있 었다. 일검사는 품 속에서 취검(翠劍)을 꺼냈다. 그것은 과거 을주려려 가 정표로 준 것이었다. "낭자라면 이 꽃가지를 잘라 며칠까지 살려 놓을 수 있겠소?" "......?" 진천화영은 그린 듯이 고운 아미를 살짝 모았다. 이어 그녀는 진 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라면...... 보름 정도는 기(氣)를 유지시킬 수 있을 거라 고......" "낭자의 부친은?" "아마... 한 달은......" "훗훗......!" 일검사는 기소를 흘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오. 자, 보시오. 이 황국은 지금 시들어 가고 있소. 그러나 줄기에는 아직 움트지 않은 두 개의 어린 눈이 있소." "......?" "잘 보시오." 슷......! 무지개인가? 일검사가 가볍게 취검을 그었다 싶은 순간 비취빛 기 류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황국의 줄기가 떨어졌다. 진천화영은 눈을 크게 뜨고 황국을 살펴보았다. "아......!" 그녀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보라! 스스스......! 시들었던 꽃송이가 활짝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 다. 스스...... 스...... 두 개의 눈에 불과했던 부분이 불거지면서 그 자리에 거짓말처럼 두 개의 꽃송이가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아...... 아......!" 그녀는 아연했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후후훗...... 이것이 진정한 활검(活劍)이라는 것이오." 일검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실상 그는 자전기(磁電氣)의 신비한 힘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진천화영으로서는 경악에 온통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만일 낭자나 낭자의 부친이 이 수법을 똑같이 전개하거나 파해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돌려 주고 깨끗이 물러 가겠소. 그렇지 않으 면......" 일검사의 눈에서는 형형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신광은 이제 까지와는 달리 상대방으로 하여금 질식케할 정도로 오만하고 강렬 한 눈빛이었다. "낭자는 예정대로 나에게 시집와야 할 것이오. 그리고 검황루는 본 등용문(登龍門)에 가입해야 할 것이오." "등... 용... 문?" 진천화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후후...... 그렇소. 현재의 잠룡들은 등용문에서 날아 올라 혼탁 한 천하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오." 진천화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보니 무서운...... 야심(野心)이었어......'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일검사는 몸을 일으켜 다시 창 가로 걸어갔다. "나는 상호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소. 정작 피를 흘려야 할 대상 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오. 후훗...... 등용문은 천하를 제패하 겠다는 헛된 망상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오. 지난 날 날개를 꺾였 던 아홉 마리의 어린 용(龍)이 다시 한 번 날아 보겠다는 의지의 소산일 뿐이오." "......!" 진천화영은 교구를 가늘게 떨었다. 바람도 없는데 그녀의 옷자락 이 떨림은 그녀가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탁자에 놓여 있는 황국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일검사를 바 라보았다. 등. 단지 등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녀는 볼 수 있었 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산...... 산악(山嶽)이야......'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작게 움츠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은 맹세코 난생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럼......"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한 후 몸을 돌렸다. "잠깐." 진천화영은 몸을 다시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 이럴 수가......? 변(變)하고 있었다. 그토록 추악하기만 했던 상 대방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지며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일검사의 얼굴이 본래의 영준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 아니......?" 진천화영은 탄성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한동안 넋을 잃은 듯 일검 사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은 문득 술에 취한 듯 붉어졌 다. 고대의 절세미남(絶世美男)이었던 반안(潘安)이나 송옥(宋玉)이 무색해질 정도의 미장부가 그녀를 바라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던지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험하고 싶었소. 낭자의 마지막 조건에 과연 내가 부응할 수 있 는지를......" 마지막 조건, 그것은 곧 사랑이 아닌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라야 한다고 그녀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적 이 있었다. 사르르...... 진천화영의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아니 내... 내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검사에게 끌려드는 것을 느꼈다. 꿈에 그리던 얼굴! 그토록 막연히 동경하던 이상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훗...... 어떻소, 낭자. 이만하면 낭자의 남편감이 될 수 있겠 소?" 일검사는 빙글거렸다. "모... 몰라요......!" 일순 진천화영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 갔다. "하하하핫......!" 그녀의 등 뒤로 일검사의 낭랑하면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몰라... 몰라... 몰라......' 진천화영은 마음 속으로 수없이 뇌까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하나 자꾸만 준미한 청년의 얼굴이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진천화영.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빠져버린 것이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6장 영웅호색(英雄好色) -2 ━━━━━━━━━━━━━━━━━━━━━━━━━━━━━━━━━━━ "하하핫......! 사위, 자네만 믿겠네. 앞으로 본성(本城)의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중원검왕 진천사후. 그는 자염을 쓰다듬으며 믿음직한 눈길로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한부일 뿐입니다. 삼 년 후 모든 것을 돌려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말에 진천사후는 껄껄 웃었다. "헛헛...... 삼 년 후에는 그럼 손자 놈에게 검황루를 물려 주어 야겠군?" "아이.... 아버님......!" 옆에서 진천화영이 홍당무가 되어 그를 꼬집었다. "허헛...! 이 녀석! 뭘 그리 앙큼떠느냐? 이 애비가 부족한 실력 을 헤아리지도 않고 사위에게 도전하려는 것을 한사코 말린 것이 네놈이 아니냐? 쯧쯧! 벌써부터 신랑에게 푹 빠져 가지고... 아 얏!" 진천사후는 비명을 질렀다. 진천화영은 그만 고개를 푹 떨군 채 그의 어깨를 세게 꼬집은 것 이었다. "하하하......!" "후후훗......!" 장내에 있던 중인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일검사와 금장, 제갈, 그리고 총관 하후돈이 있었다. 방 안에는 지금 푸짐한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진천사후를 설득한 것은 진천화영이었다. 그녀는 일검사의 능력을 알았고, 이미 내심으로 일검사의 아내가 되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진천사후는 딸의 말이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드는 위인이었다. 그는 검황루 전체를 등용문에 넘기겠다고 쾌히 허락했다. 더구나 직접 일검사를 만나본 후 그도 일검사의 매력에 흠뻑 취해 버린 것이었 다. '허허! 전화위복이라더니...... 한 마리 용(龍)이 집안으로 스스 로 찾아온 격이군.' 그는 일검사같은 사위를 맞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성 취된 것이었다. "허허, 그래 언제쯤 혼사를 치르면 좋겠는가?" 진천사후의 말에 일검사는 난처해졌다. "장인어른, 혼사는 차후로 연기했으면 합니다." "아니, 왜?" "......!" 진천화영도 이때는 고개를 들고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저어......" 일검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어찌 등용장에 이미 세 명 씩이나 되는 아내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존심 강한 진천화영이 자신이 네번째 부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겠는가? 이때, 제갈이 재빨리 전음(傳音)으로 진천사후에게 뭐라고 얘기했 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진천사후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러나 곧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우핫핫핫핫......! 역시, 역시 자네는 영웅(英雄)이야...... 핫 핫핫, 이제보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그는 호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진천화영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알겠네, 헛헛...... 그런 고충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지. 그 일이 라면 훗날 이 장인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겠네." 진천사후는 껄껄 웃었다. 일검사는 대충 제갈이 어떤 말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제갈은 필 시 그의 세 부인에 대한 말을 했을 것이다. 실상 진천사후에게도 네 명의 부인과 다섯 명의 첩이 있었다. 그 러므로 그는 영웅이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 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검사에게 전음을 전했다. (헛헛, 걱정 말게. 적당한 기회에 노부가 자네의 부인들을 모아 모두 한꺼번에 혼인식을 치뤄주겠네. 영웅호색이라더니 그 말이야 말로 자네를 두고 한 말이군.) 일검사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이때, 진천화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대체 저만 빼놓고 무슨 말들을 하는 거예욧!" "하하하핫......!" "헛헛헛......!" 좌중은 즉시 폭소로 뒤덮이고 말았다. 실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 다. ■ 등용문 제2권 제16장 영웅호색(英雄好色) -3 ━━━━━━━━━━━━━━━━━━━━━━━━━━━━━━━━━━━ 제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또 대형 혼자 떠나시겠다는 것입니까?"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곳의 일은 자네와 금장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게." '하지만 화영소저... 아니 넷째 형수님이 알면......" "그러기에 몰래 떠난다는 것이 아닌가?" 일검사는 안색을 가다듬었다. "일전에 군림성을 깨뜨렸으나 아직도 천마삼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네. 필시 그 자는 마왕도(魔王島)에서 모종의 무서운 일을 획책하고 있는 게 틀림없네." "......" "현 무림은 정세 판단을 내리기가 무척이나 어렵네. 중원 전역의 천마단의 지부가 광명천(光明天)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대 항을 하지 않고 있는 점만 해도 그렇네." "......" "혹자는 그로 인해 천마단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 못된 생각이네. 천마의 힘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수도 있네." "그렇다면 대형의 생각은......?"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자존심(自尊心)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생각이 네." "자존심을......요?" "훗훗, 천마동(天魔洞)을 무너뜨릴 생각이네. 천마동은 백 년 전 의 구천마라제(九天魔羅帝)가 연공하던 곳이네. 아직도 그들은 천 마의 후예로서 그곳을 신성시하고 있지. 천마사단(天魔四檀) 중에 서 측천단(側天檀)이 그곳에 있는 것만 봐도 능히 알 수 있지 않 은가?" 제갈의 안색이 변했다. 천마동(天魔洞)은 오백 년 전 피로 씻겼을 뿐 아니라 백 년 전에 도 신주사대성가와 우내삼현에 의해 붕괴되었었다. 일검사는 그 동안 천마동을 은밀히 탐지했다. 물론 등용회의 조직 을 이용해서였다. 천마동은 백제성(白帝城)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검사는 단신으로 그곳으로 찾아가 또 한 바탕 혈풍(血風)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과거 두 번씩이나 백도에 의해 철저 히 파괴되었던 천마동이 오늘날 다시 천마단의 한 단(檀)으로 활 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혼자 행동하는 것이 좋네. 홀가분하기 때문이지." 일검사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갈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말게. 이 일검사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 제갈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걸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저는 다만... 넷째 형수님께 추궁당할 생각에 벌써부터 두려워진 단 말입니다." "뭣? 하하하핫......!" "헤헤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친형제 이상 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그것은 일검사가 천마동을 부수러 가고 난 후 제갈이 해야 할 일 에 대해서였다. 이미 제갈은 등용회의 두뇌(頭腦)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서 제갈이라면 일검사는 모든 것을 맡길 수 가 있었다. 그는 제갈의 말을 듣고 몇 가지 사항을 더 추가했다. 제갈이 나간 후, 일검사는 달빛이 부서지는 창가에 기대선 채 야 화(夜花)를 감상했다. 그는 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된 과거의 얘기였다. 연운(連雲)을 떠난 뒤로 그는 한 번도 꽃을 감상해 본 적이 없었 다. 그만큼 삭막하게 살아온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창 밖의 꽃들 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인기척을 느꼈다.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다가온 것이었 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군......." 그러자 한 가닥 달콤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살아 움직이는 꽃은요?" 일검사는 빙글 돌아서며 낭랑하게 말했다. "그야 물론 더욱 아름답지." 그는 돌아서는 순간 팔을 벌려 누군가를 덥썩 껴안았다. 그의 품 에 들어온 것은 마치 뼈가 없는 듯이 부드럽고 뭉클한 여체였다. "어머......!" 짧은 경호성이 들렸다. 그러나 일검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품 안에 가둔 채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럽고 달콤한 여인의 입술을 찰라적으로 점령해버렸다. "아아......" 살아 움직이는 꽃이 바르르 경련했다. 그가 농밀하게 꽃술을 희롱 하자 마침내 꽃봉오리가 살며시 벌어졌다. 그는 꽃술을 헤치고 혀 를 움직였다. 그러자 꽃잎이 파르르 떨더니 적극적으로 응해오기 시작했다. 달 콤하고 끈끈한 꿀이 샘(泉)에서 펑펑 솟아나고 있었다. "아아...... 사랑해요......" 움직이는 꽃은 정열적이었다. 두 개의 기다란 줄기가 뻗어와 일검 사의 목을 휘어 감았다. 일검사는 꽃을 안아 들었다. 그는 침상으로 걸어가 꽃을 곱게 눕혔다. 꽃은 꽃대롱 속에 꿀물 을 채운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숨이 막힐 듯한 교음을 토하는 움직이는 꽃...... 벌은 꽃술을 사 정없이 파헤치고 달디단 샘물을 찾아 들어갔다. 꽃은 벌의 유린을 받아 들였다. 마치 숙명처럼. 밤은 뜨거웠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꽃과 벌의 춤이 있는 밤이었기에. ■ 등용문 제2권 제17장 천마동(天魔洞)의 혈풍(血風) ━━━━━━━━━━━━━━━━━━━━━━━━━━━━━━━━━━━ 백제성(白帝城). 사천(四川)의 백제성에 수년 전 하나의 사찰(寺刹)이 생겼다. 백제성 사람들은 그 사찰을 낙석사(落石寺)라 불렀다. 그것은 사 찰 바로 위에 하늘에서 떨어진 돌이 천 년 전설을 안고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낙석(落石)으로 인해 사찰의 이름이 붙여 진 것이었다. 묘시(卯時). 아직도 미명이 걷히지 않은 뿌연 새벽이었다. 낙석사로 향하는 소 로는 한적하기만 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향화객(香火客)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소로에 한 명의 백삼을 입은 미청년이 새벽 안개 사이 로 나타났다. "과연 천마의 후예답군. 이곳에 절을 짓고 비밀소굴을 만들어 놓 다니...... 아우들이 아니라면 결코 천마동이 이곳에 있는 줄 알 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검황루(劍皇樓)를 떠난 후 곧바로 이 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이천여 리(里)나 떨어진 곳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나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아니, 지치기는커녕 정광을 발하고 있는 두 눈은 더욱 맑아 보였 다. 그의 내공은 날이 갈수록 정순해지고 있었다. 마치 사시사철 고갈되지 않는 샘물처럼 그의 내공은 언제나 무궁 무진하게 생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혈마공(地獄血魔功) 덕분 이었다. 촉촉한 새벽이슬이 깔리는 소로를 걸어 그는 저만치 바라보이는 사찰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스스...... 자세히 보면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끄러지듯 나가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실제로 그는 땅을 밟지 않고 있었다. 마치 얼음판 위를 미 끄러지듯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흙먼지 하나 그의 발에 묻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사찰 문 앞에 당도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서 인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낙석사(落石寺)> 사찰 문루에는 그같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무거운 느낌을 주는 필체였다. "......" 일검사는 현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주먹으로 굳게 닫혀있는 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사찰 주변의 송림에서 아직 잠에서 덜 깬 새들이 후두둑! 날아 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잠하기만 하던 사찰 안으로부터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이어 문 짝이 약간 열리며 그곳으로 소사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작은 키에 둥글납작한 얼굴을 지닌 소사미였다. "뉘시기에 이렇게 이른 새벽에 본사를 찾으셨습니까?" 일검사는 대답 대신 소사미의 아래 위를 살펴 보았다. "아미타불...... 본사가 향화객을 삼일 전부터 받지 않는다는 팻 말을 언덕 아래 세워 놓았는데 보지 못하셨는지요?" 어린 사미승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했다. '축골공(縮骨功)으로 몸뚱이를 축소시켜 작아보일 뿐이다. 이 자 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일검사의 신안(神眼)은 빠르게 사미승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과연 공손한 태도로 합장하고 있는 사미승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 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있었으나 가 늘게 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덥지도 않은데 이마에 송글송글 진땀이 맺혀 있었다. 일검사는 문득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미 내가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천마동의 이목이야말로 감탄할만한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했으나 단도직입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좋다는 판단 을 내렸다. "이곳에 천마의 애첩(愛妾) 한 명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왔 다." 그 말에 사미승은 안색이 홱 변했으나 곧 정색을 하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후훗...... 어서 안내해라. 시간 낭비는 딱 질색이니까." 일검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사미승은 잠시 머뭇거리는 표 정이었다. 그는 일검사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짧은 순간 그의 두 눈에서 번갯불과도 같은 안광이 번쩍이는 것을 일검사는 놓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고수로군.' 이때, 사미승은 마음을 굳힌 듯 공손한 음성로 말했다. "시주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분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오신 듯 하니 일단 들어가셔서 따뜻한 차나 한 잔 마시고 가십시오." 그는 몸을 돌려 일검사를 들어오도록 했다. 일검사는 서슴없이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사미승은 말없 이 그를 안으로 인도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저만치 앞에서 두 명의 승려가 나타나더니 마 주 걸어왔다. "아미타불......" "소승들이 내선원(內禪院)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은 공손한 태도로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 러나 일검사는 그 웃음 뒤에 잔악한 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맙소. 떠날 때는 황금 천 냥을 시주로 남기고 가겠소."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낙석사의 내원은 꽤 넓었다. 이른 새벽이라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다. '......' 그러나 일검사는 내원에 들어선 순간 이미 사방으로부터 전신을 조여오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처에 매복이 있다.' 이윽고, 그는 두 승인을 따라 대웅보전(大雄寶殿) 앞을 지나쳤다. 대웅보전을 지나 다시 일마장 쯤 갔을까? 그곳에 울창한 죽림(竹 林)이 나타났다. 죽림이 가까워질수록 일검사는 더욱 살기가 고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두 승려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공손히 말했다. "죽림 안에 내선원이 있습니다. 시주께서 직접 들어가시면 됩니 다." 그들은 죽림 사이로 난 소로를 가리켰다. 일검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죽림 안으로 성큼 발을 옮겼 다. 그가 막 두세 걸음 걸어갔을 때였다. "쓰러져라, 혈마지존!" 등 뒤에서 음험한 호통과 함께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위이잉...! 두 승려가 악랄한 장력을 날린 것이었다. 장력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력 속에 독침을 함께 쏟아냈다. 그 바람에 무수한 독침 이 대나무잎과 함께 섞여 날아갔다. 그러나 일검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미리 예상하고 있 었다는 듯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미끄러졌다. 백로마현보(百路魔現 步)의 신법이었다. 순간 그의 몸이 수십 개로 환영(幻影)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 로 인해 죽림은 온통 그의 그림자로 가득 차게 되었다. "헉! 사... 사술이다!" 두 승려는 혼비백산하여 부르짖었다. 이때 일검사의 냉랭한 음성 이 그들의 고막을 울렸다. "어리석은 놈들, 신성한 사찰을 표방하여 더러운 음모를 꾸미다 니, 내가 아니라도 부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우웅! 그가 슬쩍 손바닥을 뻗자 수백 개의 핏빛 장영(掌影)이 허공을 가 득 메웠다. 가공할 혈마수가 펼쳐졌다. 두 승려는 그만 눈 앞이 아찔함을 느 꼈을 뿐 감히 방비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처절한 비명을 발했다. "크아아악!" 그들은 피분수를 뿌리며 허공으로 붕 떠 날아가 버렸다. 일검사는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죽림을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천마지존(天魔至尊)의 첩! 네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혈마지 존이 왕림했으니 썩 모습을 드러내라." 우르르르......! 그의 가공할 쇄금강마후에 사위가 진동하며 대나무가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그러자 문득 죽림 안쪽으로부터 화답하듯 한 줄기 요악스런 음성 이 흘러 나왔다. "호호호호홋...... 혈마지존, 잘 왔다. 오백 년 전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던 혈마의 제자가 이제와서 감히 천마지존에게 도전하다니, 담도 크구나." 일순 일검사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마동주(天魔洞主). 네가 천마지존의 애첩이자 측천단주(側天檀 主)라는 걸 알고 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숨어 나오지 않느냐? 내 가 두려워서냐?" 웅웅...... 그의 목소리는 십방(十方)에서 동시에 울려퍼졌다. 동서남북, 상 하좌우, 천지, 그 어느 곳이든 일검사의 음성은 웅혼한 진동음을 일으키며 들려왔다. 그것은 쇄금강마후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신기였다. 이때 예의 요악한 여인의 음성이 다시 죽림 속을 울렸다. "호호호홋! 격장지계를 쓴다마는 내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날 만 나고 싶다면 주저없이 안으로 들어와라. 설마 이제와서 겁을 먹고 있지는 않겠지?" 천마동주는 풍문에 의하면 천마지존의 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녀의 얼굴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천마사단 중 측천단주를 맡고 있으며 천마의 후예들이 가장 신성 시 여기는 천마동을 수호하는 중임을 맡고 있었다. "좋다, 기다려라." 일검사는 차갑게 말하며 죽림 속으로 뻗어있는 소로를 향해 신형 을 날렸다. 그는 한 줄기 백선으로 화해 죽림 속으로 날아갔다. "사신마전(死神魔箭)을 발사해라!" "놈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라!" 여기저기서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사방으로부터 독전이 비오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대략 두 치 가량으로 전체가 칠흑 같은 윤 기를 발하고 있었다. 사신마전은 피부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한 줌의 독수(毒手)로 화 할 정도로 극독을 함유하고 있는 독암기였다. 피이이잉...! 슈슈슉...! 일검사의 주위는 온통 사신마전으로 에워싸이고 말았다. 물샐 틈 도 없을 정도의 강전으로 꽉 찰 정도였다. 그러나 일검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홀연히 낭랑하게 중얼거렸다. "달이 움직이면 꽃 그림자가 따라 움직인다, 월이화영(月移花 影)!" 순간, 그는 유유히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가히 신기였다. 그가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무수한 독전도 함께 하늘로 휘말려 올라갔 다. 마치 강력한 회오리 기류에 휘말린 듯한 광경이었다. "꽃을 따 나무에 접붙인다(移花接木)!" 일검사의 입에서 다시 한 구의 싯구절이 떨어진 순간 그의 신형이 한 바퀴 회전했다. 그러자 허공 가득 휘말려 올라갔던 강전이 사 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강중패(彊中覇) 혈마수를 전개한 것이었다. 그 위력은 가 공했다. 파츠츠츠......! 일검사를 따라붙던 무수한 강전이 날아온 방향으로 모조리 되퉁겨 져 나간 것이었다. 그것도 날아올 때에 비해 십 배나 강한 위력을 담은 채였다. 잠시 후 죽림 속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크아아... 악!" "저...... 전설의 혈마수다!" 참혹무비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방으로부터 선혈이 난무했다. 죽림 속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자신들이 발사한 강전 에 꿰뚫린 채 즉사하고 만 것이었다. 잠시 후 주위는 온통 괴괴한 정적에 휩싸이고 말았다. "으하하하하하......!" 일검사는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앞으로 날렸다. 스스슷......! 그는 죽림 사이를 누비며 앞으며 쏘아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는 신형을 멈추었다. 어느새 죽림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었 다. 지금 그의 눈 앞에는 깎아지른 듯 위태로운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절벽 아래 하나의 동굴이 악마의 입인 양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검사는 서슴없이 동굴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더 이상 방해하는 자는 없었다. '이곳이 천마동이라면 너무 쉽게 찾았군.' 동굴 안은 반듯한 흑오석으로 잘 닦여져 있었다. 대략 한 마장 쯤 들어가자 광장이 하나 나타났다. 그는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 광장 안은 하나의 거대한 대전(大殿)이었다. 그는 대전 안에 들어 서는 순간 삽십육 명의 장한들이 험악한 기세로 일렬로 늘어서 있 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장한들 뒤쪽에 고정되었다. 그곳에 단(壇)이 있었는데 단 위에 태사의가 있고 한 명의 궁장여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궁장여인은 얼굴에 금색면구를 쓰고 있어 용모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거리는 몸매로 미루어 절색(絶色)의 용모를 지니고 있 음을 알 수 있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7장 천마동(天魔洞)의 혈풍(血風) -2 ━━━━━━━━━━━━━━━━━━━━━━━━━━━━━━━━━━━ 과연 일검사가 들어온 곳은 천마의 성지(聖地)인 천마동(天魔洞) 이었다. 그는 형형한 눈길로 금면여인을 주시했다. 태사의에 앉아있던 금면여인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으음... 당신이 바로 혈마지존인가요?" 여인의 음성은 여전히 요악했다. 어찌 들으면 색기(色氣)가 물씬 풍기는 듯도 했고, 어찌 들으면 음산하게도 들렸다. "후후,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천마동으로 단신으로 들어오겠느냐?" 일검사는 오만하게 말하며 장한들을 둘러 보았다. 장한들은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미미하게 안색이 변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 으나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공포심을 느끼는 듯 했다. 혈마지존의 출현(出現)! 그 사실은 그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다만 그들은 목숨으로 천 마동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이를 악문 채 견디 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자 그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공포의 혈마지존이 의외로 약관에 불과했 기 때문이었다. '저 놈... 어미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해도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할 게 아니겠는가?' '겁낼 것 없다, 놈은 혼자일 뿐이다.' 장한들의 얼굴에는 이윽고 음침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검사는 대전 안을 둘러본 후 다시 시선을 금면여인에게 향했다. "네가 바로 천마동주겠군." 천마동주는 손으로 면구를 어루만졌다. 소매 속에서 나온 그녀의 손은 마치 백설처럼 희었다. 섬뜩할 정도로 흰 소수(素手)였기에 더욱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호호호, 그래요. 내가 바로 천마동주에요, 당신은 정말 겁이 없 군요. 여기까지 들어 오다니." 일검사는 오만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대접은 황송할 정도로 융숭했다. 하지만 혈마지존을 맞는 태도로써는 예의가 아니라고 보는데?" 일검사는 천마동을 부수기 위해 왔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패도적 인 자세를 취했다. 천마동을 철저히 깸으로써 천마지존을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지존에게 시간을 주면 줄수록 불리해 진다. 그가 어떤 마공 을 연마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주위를 박살내면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나올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일검사의 전략이었다. 이때 천마동주가 문득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호! 그럼 어떤 대접을 원하나요?" 일검사는 차갑게 웃었다. "후훗! 적어도 오체복지(五體伏地)는 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다 그 보기 흉한 면구를 벗고 본인을 맞이해야 예의라고 보는데?" 모욕이었다. 천마동주의 면구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는 크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호호호호홋! 정말 광오해도 유분수지, 대체 얼마나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지만 오늘 그 말을 지옥에 가서도 할 수 있을 지 궁금하구나!" 그 말에 일검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빙긋 웃었다. "지옥이라면 바로 이곳이 아니겠느냐? 어두운 천마동에 숨어 햇볕 보기를 두려워하는 너희들이야말로 귀졸(鬼卒)들이니 어디 한 번 무슨 재주가 남아있는지 보고 싶군." 천마동주는 이를 갈며 말했다. "호호홋, 좋다! 네가 진정한 혈마수의 주인이라면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하지만 과연 차륜전(車輪戰)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겁 나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된다." 금면여인, 즉 천마동주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검사의 자존 심을 긁어대고 있었다. 격장지계로 그의 이성을 잃게 만들려는 속 셈이었다. "호호, 여기 있는 수하들은 몇 안된다. 하지만 천마동의 정예들이 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일검사는 그녀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천마동주, 과연 충심이 대단하구나. 하지만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지옥혈마공(地獄血魔功)이 구천마왕공 (九天魔王功)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격장지계 를 쓰지 않아도 그 위력을 보여줄 참이다." 순간 천마동주의 금색면구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정말... 지옥혈마공을 익혔단 말이냐?" 지옥혈문과 구천마왕교는 따지고 보면 일맥(一脈)이다. 그러므로 천마동주는 혈문의 최후신공에 대해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후훗, 시험해 보면 알 게 아니냐?" "......!" 천마동주는 일검사의 차디찬 눈빛에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 는 일찍이 이런 눈빛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마삼세(天魔三世)였다. 세상에서 그를 제외하고 또다시 같은 눈빛을 본게 된 것이었다. '아아, 강하다. 정말 이 자는 전설의 지옥혈마공을 익힌 게 아닐 까?' 천마동주는 절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아니, 물러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었다. 그녀는 천마삼세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에게 있어 실패 란 곧 죽음이 아니던가. "호호호홋! 좋다, 그럼 삼십육천살대진(三十六天煞大陣)으로 널 시험해 보겠다. 진법을 파해하면 그때 너와 백초를 겨뤄보겠다!" 그 말에 일검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조소를 흘렸다. "후훗, 천마동주. 본 지존은 일초 이상 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 느냐? 혈마수가 전개되면 아무도 일초 이상 받아내지 못한다."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당당하고 오만한 어투였다. 천마동주는 다시 가슴이 오그라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손을 번쩍 들었다. "천마의 명이다! 놈을 죽여라!" 스스스스! 일검사의 주위로 삼십육 명의 장한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일단 진세를 가동하자 가속도가 붙으며 잠시 후에는 신형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동시에 사방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그 압력 은 삼십육 인의 내공을 모두 합한 것이었다. 삼십육천살대진은 일 종의 합벽진으로 서로의 내공을 연결시키는 묘용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천하제일의 내공을 지닌 자라도 삼십육 명의 합 공(合功)을 당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검사는 안색이 변했다. '과연 대단하구나!'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진세가 완벽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면 방법은 하나, 완전한 위력을 발동하기 전에 선공(先攻)할 수밖 에 없었다. "후후, 제법이다만 내겐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는 차다차게 말하며 즉각 신형을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자 그의 신형은 사라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줄기 백선 뿐이었 다. "받아라!" 꽈르릉! 뇌성이 작렬했다. 가공할 혈마수가 펼쳐진 것이었다. 삼십육천살 은 일제히 장력을 뻗었다. 꽝......! 천번지복(天飜地覆)하는 굉음이 울렸다. 서른여섯 명의 합공과 일 검사의 혈마수가 격돌한 것이었다. 일검사의 몸이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삼십육천살의 얼굴 에는 희색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나 그들이 희희낙락해 하는 순간 일검사는 빛살보다 더 빠르 게 단 위를 향해 쏘아갔다. 그의 목표는 삼십육천살이 아니라 태 사의에 앉아 있는 천마동주였던 것이다. "앗! 막아라!" "놈을 막아라!" 삼십육천살대진이 흔들렸다.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진세가 흐트러 지며 이동했다. 일검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시뻘겋게 달구어졌다. 열 개의 손가락이 뻗은 순간 혈선이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슈슈슈슝! "으악!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정확히 열 명이 벌렁벌렁 쓰러졌다. 그들의 미간에는 한결같이 동전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열 명이 쓰 러지자 진세는 삽시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의 쌍장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콰아아아! 가공할 혈마수의 절기가 전개됐다. 시뻘건 기류가 회오리치며 삼 십육천살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악!"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비명! 비명!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진세가 와해되자 일검사는 종횡무진으로 그들 사이 를 누비며 살수를 뻗었다.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두세 명이 한꺼번에 피를 뿌리며 날아갔 다. 그야말로 가공할 혈겁이 벌어진 것이다. 삼십육천살의 대부분이 쓰러지자 그는 신형을 다시 단 위로 날렸 다. 전광석화같은 신법에 천마동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가 막 신형을 날리려는 찰나 금색면구를 향해 일검사의 손이 벼락처럼 뻗어왔다. 그러자 천마동주는 달아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듯 도로 태사의 에 앉아 버렸다. "하하핫! 곱게 앉아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 일검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흥! 좋아하긴 이르다." 천마동주는 코웃음치며 슬쩍 의자 손잡이의 한 부분을 눌렀다. 순간 쿠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의자째로 바닥으로 쑥 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엇?" 일검사는 경악성을 발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그 순간이었다. 덜 컹!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내딛는 바닥이 통째로 꺼져 버렸다. '아차!' 일검사는 급히 왼발로 오른발등을 치며 위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 러나 이번에는 우르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느닷없이 천장이 통째 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그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천장에는 어느 새 독 이 시퍼렇게 발려진 칼날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장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장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그대로 함께 떨어지면 그는 천장에 압살되어 전신에 수 백 개의 구멍이 뚫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지하로 추락하면서 쌍장으로 천장을 향해 날렸다. 꽈아앙......! 굉음과 함께 천장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비록 위기는 넘겼으나 그는 더 이상 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래로 추 락할 수밖에 없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7장 천마동(天魔洞)의 혈풍(血風) -3 ━━━━━━━━━━━━━━━━━━━━━━━━━━━━━━━━━━━ 일검사는 바닥에 무사히 내려섰다. 비록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낭패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위를 올려다 보니 이미 입구는 무엇인가에 단단히 막혀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속았다, 과연 천마동주답게 교활하기 그지없구나.' 그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자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가 떨어진 곳은 방원 십여 장의 공간이었다. 천장의 잔해(殘骸) 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우측으로부터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불빛이 아니다. 야명주(夜明珠)의 빛인데......' 그는 천마동주의 교활한 책략에 당한 바 있었으므로 절로 신중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걸어갔다. 기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를 따라 십여 장 쯤 들어가자 한 칸 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뇌옥(牢獄)이었다. 사방 삼장 너비 정도 되는 공간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속에 한 여 인이 있었다. 그런데 여인은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철삭(鐵索)에 두 팔이 붙들려 매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여인은 심한 고초를 당한 듯 거 의 반라 차림이었다. 입고 있는 백의(白衣)는 갈기갈기 찢겨져 젖가슴 한쪽이 비어져 나와 있었으며, 하반신도 거의 벌거벗다시피하고 있었다. 눈부신 허벅지가 여인의 아슬아슬한 부위까지 태반 이상 드러나 있는 모 습이었다. "으으음......" 문득 여인은 신음을 발했다. '죽지는 않았구나.' 일검사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가볍게 허공을 격해 진기를 주입하자 여인은 전신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 니 고개를 들었다. '......!' 일검사는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 로 절세우물(絶世尤物)이 아닌가? 여인의 얼굴은 뭐라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투명할 정 도로 흰 피부, 호수같은 눈동자, 신의 솜씨로 빚는 듯한 오관은 가히 숨막힐 듯 아름다웠다. 기이한 것은 여인의 얼굴이 백치(白痴)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었 다. 백치미를 지닌 여인은 사나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그런 점에서는 일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 인에게 다가서며 부드럽게 물었다. "낭자는 누구요? 어째서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것이오?" 여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살려줘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러니 제 발... 살려만 주세요. 네?" 여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일검사는 탄 식하며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난 당신을 해치지 않소.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소?" "다... 다가 오지 마세요!" 여인은 철삭에 두 손이 묶인 채로 몸을 마구 비틀었다. 그 바람에 여인의 앞섶이 벌어지며 백옥같은 젖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 았다. 일검사는 흠칫했다. 음산하기만 한 뇌옥에 청순하고 백치와 같은 여인이 묶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나이의 넋을 뺄 정도로 아 름다웠다.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몸매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젖가 슴은 알맞게 풍만했다. 앞섶이 좌우로 벌어지는 바람에 아랫배까 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귀엽게 패인 배꼽과 그 아래 은은한 여인의 밀지까지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당신을 구해 주겠소." 그는 탄지혈통을 전개했다. 두 가닥 지력이 뻗자 땅땅! 하는 소리 와 함께 철삭이 끊어졌다. "아......" 여인은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듯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 다. 일검사는 애틋한 마음이 들어 얼른 그녀를 안았다. 여인은 그대로 혼절한 듯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 가까이서 보니 여인은 더욱 아름다웠다. 나이는 대략 이십 세 중 반 정도였다. 여인으로서는 익을 대로 익은 나이였다. "흠,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군."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었다. 그의 눈 아래 희고 풍만한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손만 대면 바로 만질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은 다리를 약 간 벌리고 있어 역시 살짝 손만 뻗으면 여인의 모든 것을 어루만 질 수 있었다. '쯧, 내가 무슨 생각을? 정신 차려라, 일검사.' 일검사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손을 뻗어 여인의 유근혈을 가볍게 쳤다. 그 부분은 젖가슴 바로 아래로 진기를 주입하여 건드리며 일시적으로 활력을 얻게 되는 곳이었다. "낭자,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을 뿐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안 고 있던 여인을 바닥에 눕혔다. 이렇게 되면 좀 더 손을 쓸 수밖 에 없었다. 그는 두 손바닥을 여인의 양쪽 젖가슴 밑에 바짝 밀착시킨 채 추 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가볍게 마찰했다. 손바닥에 닿는 뭉클함 감촉이 정신을 산란하게 했으나 그는 진기 를 서서히 주입시켰다. 그러자 여인의 눈까플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눈을 떴다. "당신은......" "안심하시오, 당신을 구하려는 거요." 그는 이단계로 여인을 마주보고 앉게 한 후 역시 손을 뻗어 그녀 의 단중혈로 진기를 밀어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여인의 한 손이 슬며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여 인은 손 안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신중히 여인에게 진기를 밀어넣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여인의 내부로부터 한 가닥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이건......!' 그가 경악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죽어라!" 여인이 꼭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활짝 폈다. 그러자, 번... 쩍! 하는 섬광과 함께 눈을 멀게 만드는 묵광(墨光)이 일검사를 향해 폭사되었다. 그 묵광은 방심하고 있는 일검사의 몸 안으로 그대로 박혀들었다. 파파팍...! "크윽!" 그는 꼼짝없이 심장을 강타당하고 말았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무 엇인가 깊이 박혀버렸다. 일검사는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여 인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요란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너도 별 수 없구나, 색계(色計)에 눈이 멀다니 진정 한 혈마지존이 되기에는 멀었다!" 여인은 손으로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청순하고 백치미를 풍기던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고혹적이었으되 그녀의 인상은 요녀(妖女)의 얼 굴로 변한 것이었다. "너... 넌......?" 일검사는 여전히 벌렁 누운 채 그녀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호호호! 측천단주(側天檀州)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천마동을 맡을 때는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어찌 몰랐느냐?" 일검사는 누운 채 중얼거렸다. "요사스런 계집, 방심했구나." "호호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인, 즉 천마동주는 문득 두 눈에 야릇한 빛을 드러내며 일검사 를 내려다 보았다. "네가 이렇게 미남자인데 인생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지 못하고 죽 이게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일검사는 문득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네 몸은 꽤 쓸만한 것 같 다. 내 품에 안겨보고 싶으냐?" "......!" 천마동주는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일검사가 그 지경이 되고도 태 연히 농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언뜻 회의의 표정을 지었다. "노... 농담할 기운이 남아 있느냐?" "후후훗! 이까짓 비녀 따위가 혈마지존을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고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가소로운 일이다." 문득 일검사의 심장에 깊숙이 박혀있는 검은 색의 비녀가 쑤욱 올 라왔다. "아... 아니? 마왕잠(魔王簪)도 통하지 않다니?" 천마동주는 질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일검사는 누운 채로 벌떡 일어섰다. 허리조차 구부리지 않고 그대 로 일어선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널 안아 줄테니." 일검사는 손을 뻗었다. "하악!" 천마동주는 다급히 뒤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찌익! 하는 소리 와 함께 일검사의 손에 백의가 잡혀 길게 찢겨 나갔다. 그 바람에 천마동주는 그나마 간신히 걸치고 있던 백의가 뜯겨져 나가며 알 몸이나 다름없이 되고 말았다. "하하하! 이젠 마음놓고 즐겨보는 게 어떠냐?" 일검사는 찢어진 옷자락을 손바닥 사이에 넣고 부볐다. 그러자 푸 시시 연기가 솟으며 옷자락이 타서 재가 되어 버렸다. "으으으......" 천마동주는 공포에 질린 채 연신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어찌나 놀 랬는지 알몸을 가릴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풍만한 여체가 야명 주 빛을 받아 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광경에 절로 침을 꿀꺽 삼켰을 것이다. 그 러나 일검사는 이미 천마동주의 교활함에 만정이 떨어진 상태였 다. 그는 앞으로 다가들며 차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천마삼세보다 더 널 즐겁게 해줄테니." "크으으! 두고 보자!" 쿠르르릉! 문득 그녀가 기대고 있던 석벽이 벌어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녀의 모습을 삼켜 버렸다. "아차!" 일검사는 다시 한 번 방심을 탓했다. "서라!" 꽈르르릉! 장력을 날리자 굉음이 일어나며 석벽이 진동했다. 우수수 돌가루 가 떨어져 내렸으나 석벽은 어찌나 두껍던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윽......" 문득 일검사는 고통에 찬 신음을 발하며 비틀거렸다. 그는 급히 손으로 심장 부근을 막았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은 피 가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런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 려 있었다. '으음, 혈마불괴지신을 뚫을 수 있는 물건이 있다니.....' 사실 그는 마왕잠을 완전히 감당한 것이 아니었다. 마왕잠은 전문 적으로 호신강기를 격파하는 천마의 기보였던 것이다. 사실 천마와 혈마는 일맥(一脈)으로 서로의 무공에 대해 그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일검사가 지옥혈마공을 십이성 연성 했다면 마왕잠이 결코 그를 꿰뚫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십성 밖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더러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 에 그는 치명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중상을 위장하고 다시 혈마수를 전개했으므로 상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크윽......!"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비록 오만하게 몸 을 버티고 있기는 하나 실상 그는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다만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천성적인 오만과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나 낯빛은 점차 창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석상(石像)이 된 듯 우뚝 서 있는 일검사의 전신은 서서히 시뻘겋게 선혈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8장 천마동주(天魔洞主) 옥환(玉環) ━━━━━━━━━━━━━━━━━━━━━━━━━━━━━━━━━━━ 일검사(一劍士)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물들고 있었다. "으으......"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안간힘을 쓰며 고통을 눌러 참고 있었다. 지옥혈마공 (地獄血魔功)을 익힌 사람은 사지가 끊어져도 살 수가 있었다. 거기에다 만상자전기의 신비한 힘이 일검사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 기 때문에 그는 즉사할 정도의 중상을 입고도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 다.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호......" 문득 머리 위로부터 한 가닥 요사스런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그러나 일검사는 고개를 들 힘도 없었다. 그는 그 웃음소리가 천 마동주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장에 하나의 구멍이 나타나더니 천마동주가 얼굴을 들이 밀었 다. 그녀는 유심히 일검사를 내려다 보았다. "호호호! 그러면 그렇지, 허세였구나!" 그러나 일검사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실상 그는 방금 전 남아 있는 한 점의 마지막 힘을 다 썼으므로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 일 힘도 없었다. "네놈이 진정한 혈마지존이라면 내 말에 대답해라, 어째서 고개조 차 들지 못하는 것이냐?" "......" 일검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혼이 났으므로 천마동주는 좀체로 안심할 수 없는 듯 했다. "청면수라제(靑面修羅帝), 저 자를 시험해 봐라." 그녀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옛, 동주님." 한 가닥 음침한 대답과 함께 석벽 한쪽이 열리며 입술이 얄팍하고 안색이 푸르스름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십천마(十天魔) 중 일인으로 천마동에서는 천마동주 다음의 서열에 있는 작자였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사십대에 불과했으나 실제 그의 나이는 이 미 구십이 넘고 있었다. "흐흐......" 청면수라제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일검사는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청면수라제는 잔혹한 살광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이놈! 동주님의 명은 곧 천명(天命)이다. 네놈이 감히 동주님을 거역하다니 그 대가를 받게 해주마!" 위이잉! 그는 벼락같이 일검사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그야말로 무 시무시한 기세였다. 펑! 청면수라제의 장력은 정통으로 일검사의 가슴에 떨어졌다. "크윽!" 일검사는 비명을 지르며 붕 떠올랐다. 그는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입으로 피화살을 뿜으며 날아가 맞은편 벽에 부딪치며 떨어졌 다. "흐흐, 완전히 갔군." 청면수라제는 득의의 괴소를 흘리며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일검 사에게 다가갔다. 한편 천마동주는 천장의 구멍을 통해 유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 이놈은 저항불능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동주님?" 청면수라제의 말에 천마동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살기를 드러냈다. "완전히 숨을 끊어라." "흐흣, 알겠습니다." 청면수라제는 천장을 바라보며 큰 대자로 뻗어있는 일검사를 내려 보며 서서히 쌍수를 들어 올렸다. 우웅...... 그의 수도가 시퍼렇게 변했다. 그것은 마치 두 자루의 청강비수처 럼 보였다. "흐흐, 노부의 청살마라수(靑殺魔羅手)로 네 숨통을 완전히 끊어 주마." 슈육! 한 쌍의 시퍼런 수도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퍼퍽!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수도는 일검사의 가슴과 복 부 속으로 깊숙이 박혀들었다. "크크크... 억!" 청면수라제는 득의의 괴소를 흘리다가 비명을 질렀다. 수도를 빼 려 해도 뽑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놈이......" 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때 일검사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는 총기가 없었다. 그러나 으시시한 한기가 감도는 눈빛 이었다. "가도 혼자 가진 않는다." 차디찬 중얼거림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악!" 청면수라제의 양 옆구리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어느새 일검사의 양손이 옆구리를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청면수라제는 입을 딱 벌린 채 옆으로 쿵, 쓰러졌다. 부릅떠진 그 의 눈에서는 회의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지... 지독한 놈!" 천장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쾅! 하고 천장의 구멍이 닫쳐버렸다. ■ 등용문 제2권 제18장 천마동주(天魔洞主) 옥환(玉環) -2 ━━━━━━━━━━━━━━━━━━━━━━━━━━━━━━━━━━━ "호호호... 너는 내 노예다." "너는... 내 노예......" "깔깔! 내가 아니라 네가 노예란 말이다." "내가 아니고 네가......" "이런 바보! 호호, 하지만 그런 네가 좋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으 니까." 여인. 백색의 경장(輕裝)을 터질 듯이 팽팽한 몸에 꽉 조이게 졸 라입은 미녀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위 아래에는 한 사나이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영준한 용모 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방심한 표정이었다. 남삼을 입은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바위 밖으로 내놓은 다리를 흔들었다. 가죽신을 신은 발을 살랑거리며. "이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지. 천마동에서 십리 쯤 떨어진 곳이고 평소에는 사냥을 하는 곳이지만 쉬고 싶을 때 나만 혼자 몰래 오 는 곳이야." 여인은 미청년을 내려다보며 즐거운 듯 종알거렸다. "이곳에 널 데려온 이유를 아느냐?" "......" 미청년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여인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호호홋! 너와 즐기기 위해서다, 이 멍청아." 여인은 발끝으로 미청년의 가슴을 툭툭 걷어찼다. 그러나 미청년 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넌 비록 구천마왕교의 적이지만 출중한 외모를 지녔다. 율법대로 라면 널 마왕도(魔王島)로 보내야 하지만 내 임의로 잠시 보류해 두었지." 여인은 가죽신을 신은 발끝으로 미청년의 목을 간질렀다. 그래도 청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호호, 어쩌면 넌 천마삼세 그 분과 버금갈지도 몰라. 하지만 지 금은 내 명령에 따르는 천마환령(天魔幻靈)에 불과할 따름이지. 천마섭혼대법(天魔攝魂大法)과 천마고(天魔蠱)가 널 이중으로 금 제하고 있으니 내가 놓아주지 않는 한 영원히 날 떠날 수 없는 몸 이 되었다." 여인, 천마동주는 무척 재미있다는 듯이 이번에는 발끝으로 미청 년의 턱을 톡톡 건드렸다. 미청년,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마왕잠과 청면수라제의 청살마라수에 당해 죽음 직전에 이르 렀었다. 천마동주는 그런 그에게 천마섭혼대법을 시전했으며 구천마왕교 비전의 천마고를 복용케 하여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과거의 일검사가 아니었다. 지금 그는 실혼인(失魂 人)으로 천마동주의 괴뢰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핥아라, 신발에 묻은 흙을 말끔히 핥아라!" 천마동주는 교소를 터뜨리며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일검사는 서 슴없이 두 손으로 가죽신을 잡고 혀로 핥기 시작했다. 신발에는 흙이 많이 묻어있지는 않았으나 그는 정성들여 혀로 말 끔히 핥아내고 있었다. 초추(初秋)의 햇살은 아직도 따가웠다. 바위 위에는 송림 가지가 뻗어 햇살을 차양처럼 가려 그늘을 만들 고 있었다. "넌 정말 미끈한 몸을 가지고 있어." 천마동주는 바위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손으로 일검사의 가슴팍 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일검사는 멍하니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 다. "처음 널 보았을 때 반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 지. 하지만 지금은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뜨거워 견딜 수 가 없거든." 천마동주(天魔洞主). 달리 천마사단 중 측천단의 단주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 여인은 천(千)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어떨 때는 청초하고 순수한 얼굴인가 하면 어떨 때는 요악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변했다. 그녀가 측천단주이자 천마동주로 발탁된 것은 바로 그런 타고난 우물(尤物) 기질 때문이었다. 그녀는 십오 세 때 천마삼세의 눈에 띄어 마왕도로 들어갔다. 그 후 천마삼세에게 단 한 번 몸을 바쳤다. 당시 그녀는 마왕면구(魔王面具)를 쓰고 있는 천마삼세 앞에서 공 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 이라고는 마왕면구 사이로 흘러나오는 차디 찬 눈빛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 일검사를 보았을 때 그의 찬 눈빛이 천마삼세와 많이 닮았다는 것을 느꼈었다. '꼭 한 번 뿐이었지. 그 이후로 천마삼세께서는 다시는 날 찾지 않으셨어. 그래서 그날부터 뜨거운 피를 억누르기 위해 밤마다 몸 부림쳐야만 했었지.......' 천마동주의 본래 이름은 옥환(玉環)이었다. 그녀는 자금성의 한 상궁(上宮)이 몰래 사생아를 낳은 후 자금성 밖에서 키워왔었다. 아버지를 모르기에 그녀에게는 성(姓)이 없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미모가 출중하여 타인의 눈에 띄었었다. 결국 상궁은 소문이 나는 것이 두려워 그녀를 서역의 한 노예상인에게 팔아 버렸다. 그런 그녀가 마왕도에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서역상인은 열세 살밖에 안되는 그녀를 겁탈하려 했고, 어린 마음에 공포에 질려 반항하다가 서역상인의 목에 비녀를 꽂아 죽인 후 정신없이 달아나던 그녀를 마침 구천마 왕교의 측천단주가 제자로 거두게 된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악녀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당시 측천단 주는 무척이나 그녀를 귀여워했었다. 측천단주는 천마삼세의 첩실이었는데 훗날 천마삼세의 눈에 옥환 이 들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진상할 수밖에 없었다. ...... 네 소원을 말해 봐라. 천마삼세는 십오 세의 어린 나이에 순결을 바친 옥환에게 그렇게 물었다. ...... 저에게 측천단주의 자리를 주세요. 타고난 악녀였던가? 옥환은 마침내 그녀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키워주었던 스승을 배 반했다. 측천단주의 자리는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천마삼세는 한 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시행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스승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나 그녀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옥환은 그녀에게 독약을 먹여 죽인 것이었다. 스승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후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심을 품고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옥환의 야심은 컸다. 그녀는 천마삼세의 여자가 된 것을 기화로 마왕도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뜻대로 되지는 않 았다. 천마삼세는 그녀의 어린 꽃봉오리를 꺾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던 것이다. "호호, 왜 그 분께서 날 찾지 않는지 적어도 두 가지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천마동주 옥환은 일검사를 눕게 한 후 그 위에 올라탄 채 중얼거 리고 있었다. "하나는 그 분이 지나치게 나이가 많아 여자에게 흥미를 잃었다는 것이고." 옥환은 일검사의 옷을 벗겨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면 그 분이 여색을 멀리해야 할 신공(神功)을 연마하고 있다 는 것이지." 일검사의 근육으로 뭉쳐진 가슴팍이 드러나자 옥환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애무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이 옥환은 더 이상 밤잠을 이루지 못해 몸부림칠 이 유가 없게 되었어. 호홋, 네가 있는 한은 말이야." 옥환의 손은 일검사의 가슴팍을 애무하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 녀는 손에 닿는 사나이의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의 감촉을 즐기 는 듯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있었다. 전신의 피가 더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은 일검사의 사타구니로 깊숙이 파고 들었다. "흐으응......" 절로 콧소리가 났다. 사나이의 불같이 뜨거운 기둥이 느껴진 탓일 까?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일대요화인 그녀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은 입술로 사나이의 가슴팍을 애무했다. 혀끝으로 핥아 나가 는 그녀의 욕망은 끈덕지고도 집요했다. "......" 실혼인인 일검사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나 그의 본능만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침내 옥환은 그의 바지를 벗기려 했 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천마지(天魔池)로 가자!" 휙! 옥환은 신형을 날렸다. 그녀는 일검사의 손을 잡고 날아갔다. 숲속 깊은 곳에 더운 김이 뭉클거리며 솟아 오르고 있었다. 바위 와 바위가 맞물려 있는 협곡이었다. 그 곳에 온천(溫泉)이 솟구치 고 있었다. "호호호... 옷을 벗고 먼저 들어가라, 천마환령." 일검사는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천마섭혼대법에 걸린 이상 옥환 의 명령은 그를 기계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는 옷을 모두 벗었다. 이어 바위 사이의 온천인 천마지로 걸어 들어갔다. "......" 뜨거운 온천수가 펑펑 솟아나는 천마지에 몸을 담근 그는 초점없 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호! 날 똑똑히 봐야 한다, 이 옥환이 얼마나 아름다운 몸을 가 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으니까." 일검사의 눈이 움직였다. 그는 천마동주 옥환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옥환은 그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먼저 요대를 끌렀다. 한줌밖에 안되는 요대를 푼 옥환은 백색경장 의 상의를 하나씩 벗어 던졌다. 속에는 하늘거리는 얇은 비단 속옷을 입고 있었다. 비단 옷을 뚫 고 나올 듯이 풍만한 유방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바지를 벗어내리자 대리석처럼 미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잘 봐두어라, 천마삼세 이후로 옥환은 누구에게도 몸을 주지 않 았다. 호호, 그건 측천단주란 신분 때문이었다." 가죽신발을 벗어던지고... 이윽고 속옷을 벗어 던졌다.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할 절세우물의 나신이 드러났다. 햇살이 바위 에 반사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백옥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여체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온천 바 위 위에 서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배꼽 아래를 살짝 가 리고 있는 한 장의 얇은 내고(內袴)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라졌다. 숨막힐 듯한 정적... 바람도 숨을 죽이 고 햇살도 차마 부끄러운 듯 옥환의 사타구니 사이를 비추지 못했 다. 부드러운 섬모(纖毛)가 그녀의 사타구니를 감싸고 있었다. 군살이 라곤 하나도 없는 아랫배와 움푹 패여있는 배꼽, 간들거리는 허리 아래로 확 퍼져있는 둔부....... "호호호, 보고 있느냐? 너는 행운아다. 이렇게 아름다운 옥환을 마음껏 안게 됐으니 말이다." 웃음소리 따라 흔들린다. 두 개의 유방이 파르르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유방의 정상에 맺혀있는 유실도 흔들렸다. ■ 등용문 제2권 제18장 천마동주(天魔洞主) 옥환(玉環) -3 ━━━━━━━━━━━━━━━━━━━━━━━━━━━━━━━━━━━ 눈(眼). 누군가의 눈이 음침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지금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어른거리는 두 개의 육체를 주시하고 있었다. "좀 더. 좀 더... 흐으윽." 끓고 있었다. 천마지의 온천수보다 더 뜨거운 여체. 그 여체가 나 신을 한껏 뒤로 젖히며 흐느끼고 있었다. 다리를 온천에 담근 채 바위에 앉아 있는 여체가 몸을 활처럼 꺾 을 때마다 그녀의 풍만한 유방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두 손으로 사나이의 머리를 힘껏 껴안고 있었다. "하아아!"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철로 빚은 듯이 단단한 사나이가 여인과 교 접(交接)하고 있었다. 강인한 사내. 그의 힘은 불굴(不屈)이고 지칠 줄 몰랐다. 아마도 그만 두라고 할 때까지 영원이라도 계속할런지도 몰랐다. "하악." 옥환의 눈알이 하얗게 뒤집혀지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강할 줄은...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널...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게 할 거야." 옥환의 몸에서는 폭포수 같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미끈거리는 동 체를 마구 흔들어 대며 그녀는 사나이의 허리를 사납게 잡아채고 있었다. 눈(眼). 음침한 눈에 핏발이 돋았다. 그 눈에 욕정이 가득 일어나고 있었 다. 수증기 사이로 보이는 옥환의 희멀건 육체가 앞으로 뒤로 움 직임에 따라 그의 눈이 더욱 빨갛게 충혈되고 있었다. 옥환의 자지러지는 신음이 울려오고 있었다. "흐윽! 그... 그만!" 비로소 사나이가 옥환의 몸뚱이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건장한 모습으로 멍하니 온천 한가운데 서 있 었다. "아아! 나의 사랑스런 노예." 옥환은 그의 목에 매달린 채 감격에 온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사 나이, 일검사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서 있을 뿐이었 다. 옥환은 온천수로 나신을 씻으며 말하고 있었다. "이 온천은 천마동의 화맥(火脈)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지. 비밀이 지만 오래 전 조상님께서 일부러 천마동을 이곳에 세우면서 언젠 가 강적을 만났을 때 동귀어진하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해놓았다 고 들었다. 호호!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착각이었을까? 초점을 잃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던 일검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난 것은? 눈(眼). 음침한 눈동자가 스르르 굴렀다. 옥환이 바위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녀의 나신은 우윳빛으로 빛나 고 있었다. 더구나 방금 전 만족한 교접을 치룬 탓인지 더욱 싱싱 하고 팽팽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른한 듯 두 팔을 치켜올려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 바람 에 두 개의 유방이 보란 듯이 아래위로 출렁거렸다. '으으......' 음침한 눈에 다시 핏발이 어리고 있었다. 천마동으로 돌아온 옥환은 한시도 일검사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하루 싱싱하게 변하는 듯 했다. 비록 금 색면구로 인해 얼굴은 알 수 없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활기가 느껴 지고 있었다. 방금 목욕을 끝낸 옥환은 젖은 몸에 수건만 두른 채 머리를 일검 사에게 빗기고 있었다. "호호, 이젠 익숙해 졌구나. 네 손길이 무척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동경 속으로 보이는 일검사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만족한 듯 웃었다. 일대우물의 얼굴은 눈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사랑을 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사랑하는 대 상은 하나의 괴뢰에 불과했다. 천마섭혼대법으로 영혼을 금제당한 일검사가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만족했다. 천마삼세에게 의탁한 이후로 마도인(魔道人)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없었다. 비록 천마환령에 불과했으나 지금 그녀는 행복했다. 그는 불평불 만을 하지 않는다. 시키는 일에 한 번도 거절한 적도 없다. 그는 배신을 모르며 다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가 절륜한 정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폭발적인 정력의 소유자였다. "호호, 널 진작 만났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만족한다." 옥환은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아직도 물방울이 맺혀 있는 옥환의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날 안아 침상으로 데려가 다오." 일검사의 손이 옥환의 둔부를 움켜 쥐었다. 터질 듯이 벌어진 둔 부였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옥환은 신음을 발했다. 그녀는 두 팔로 일검사의 목을 껴안았다. 일검사는 번쩍 그녀를 안아들고 내실로 향했다. 옥환은 그에게 안 겨가면서 고양이 같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몸은 더워지고 있었다. 침상에 내려놓자 옥환은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발로 일검사의 목을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호호호, 날 그대로 둘테냐? 이렇게 아름다운 날?" 그러나 일검사는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결정적인 명령 을 내리지 않는 한 그는 언제까지고 목석처럼 서 있을 것 같았다. "바보! 내 뜻을 모른단 말이냐? 흐응, 넌 아무 느낌도 없단 말이 냐?" 문득 옥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최근 들어 그녀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일검사가 꼭두 각시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시키는 일은 무엇이건 하지만 그밖 에는 그저 하나의 목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호호! 하긴... 내 욕심인지도 모르지, 넌 내 노예일 뿐인데 말 야." 옥환은 발로 일검사를 걷어찼다. 일검사는 뒤로 주르륵 서너 걸음 물러나 버렸다. 이때였다. "흐흐, 맞는 말이오. 나무토막같은 그 놈보다야 어느 모로 보나 내가 낫지 않겠소?" 갑자기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옥환은 안색이 변하며 발딱 상체를 일으켰다. 휘장이 걷히며 소사 미 한 명이 들어섰다. 그 자는 다름아닌 낙석사의 문을 지키던 어 린 사미승이었다. 옥환은 놀라운 듯 사미승을 노려 보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들어왔느냐?" "흐흐, 동주. 겁이 없는 건 바로 동주요." "뭐라고?" 옥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미승은 음침한 눈으로 옥환 의 나신을 훑어 보았다. 옥환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있었 으므로 그는 알몸 구석구석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옥환은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기이한 느낌 이 들었다. '이 놈은 한낱 문지기에 불과한데 대체 어쩌자고 감히 여기까지 들어왔을까?' "넌 누구냐?" 옥환은 고작해야 십오륙 세밖에 안되 보이는 사미승을 노려보며 물었다. "후훗, 왜 동주를 만족시키지 못할까봐 그러오?" 사미승은 탐욕어린 눈으로 옥환의 허벅지 사이를 노려보며 음침하 게 말했다. "호호호호홋! 그래, 네 놈이 날 만족시킬 능력이 있단 말이냐? 정 말 가소롭구나." "흐흐, 시험해보면 알 것 아니오." 우두둑....... 두둑. 묘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키가 오척밖에 되지 않던 사미승의 몸이 늘어나고 있었 다. 허리가 펴지고, 팔다리가 늘어나면서 그는 육척의 건장한 몸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손으로 얼굴을 쓱 문지르자 그 의 얼굴은 사십대 중년인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음침한 인상이긴 했으나 그런대로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으로 변한 것이었다. "너... 넌 천면마서생(千面魔書生)!" "흐흐흐! 이제 알았소? 동주를 감시하기 위해 위장했다면 믿겠소? 설마 마왕도의 모든 사람이 철저한 감시체제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잊진 않았을텐데?" "나... 날 감시하고 있었구나!" 옥환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하고 있었다. "안심하시오, 동주. 아직 보고는 올리지 않았소. 모든 건 동주가 마음먹기에 달려있소." 옥환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뜻이냐? 그 말은?" "흐흐, 오래 전부터 동주에게 마음이 있었소. 더구나 천마지에서 의 일 이후론 더욱 더......" "보... 보았느냐?" 옥환의 안색이 여러차례에 걸쳐 변화를 일으켰다. 천면마서생은 힐끗 한쪽 구석에 장승처럼 서 있는 일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나무토막 같은 놈과 동주가 육체를 불태우는 걸 보고 결심했 소. 외로운 동주를 달래 주리라고 말이오." 천면마서생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다가갔다. 침상으로 다가가며 그는 옷을 벗고 있었다.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소. 그것은 삼 일에 한 번씩 전서구(傳書 鳩)로 마왕도에 보고를 한다는 것이오. 내 신상에 일이 생긴다면 삼 일 후 모처에 있는 전서구가 그 동안 일어났던 일을 적은 보고 서를 단 채 마왕도로 날아가게 되어 있소." "......!" 옥환은 안면이 경직되었다. 천면마서생은 이미 철저히 준비해 놓 은 것이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문득 옥환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천면마서생은 우람한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옥환의 살구씨 같 은 눈이 그의 하체로 내려갔다. "호호, 당신이 다 보았다니 내 정력이 얼마나 센지도 알겠군. 날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흐흐, 곧 알게 될 걸." 천면마서생은 괴소를 흘리며 다가갔다. 옥환은 피하지 않았다. 그 녀는 침상에 누운 채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면마서생은 손을 뻗어 옥환의 다리를 잡았다. 그의 손은 매끄러 운 다리를 서서히 쓰다듬었다. "정말 고운 피부요, 언제고 이런 날이 오기를 갈망했지." 그는 서서히 손을 움직여 허벅지까지 쓰다듬어 올라갔다. 옥환은 슬며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은밀한 부위가 훤하게 노출되었다. 천면마서생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마침내 그의 손은 그녀의 삼각 비역으로 향해졌다. 그때였다. 장승처럼 서 있던 일검사의 눈에서 무쇠라도 녹일 듯한 빛이 솟아 나왔다. 그는 천면마서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천면마서생은 마침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옥환의 다리를 들어 올리며 침상으로 올라섰다. "호호, 어디 날 즐겁게 해줘봐요." 옥환은 그의 목을 껴안으며 다리로 상대의 허리를 휘감았다. 실로 마물(魔物)과도 같은 여인이었다. 이윽고 두 남녀가 엉켰다. 한덩이가 된 채 침상 위를 굴렀다. 그 때였다. 옥환의 눈이 한껏 커졌다. 밑에 깔린 그녀의 눈에 일검사 가 다가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그녀는 너무나 놀라 입만 벌린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슈욱! 파공성이 울렸다. "크으윽!" 천면마서생은 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 다. 그의 등 한복판에 일검사의 수도(手刀)가 박힌 것이었다. "끄으으으......" 그의 눈동자가 빙글 돌아갔다. 수도를 뽑아내자 피분수가 터져 나 오며 그의 몸뚱이가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처... 천마환령......" 옥환은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그녀의 알몸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일검사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공 포에 질린 채 일검사를 올려다 보며 명령했다. "머... 멈춰라! 감히... 천마의 주인을 몰라본단 말이냐?" "멈추라고... 천마의 주인... 주인......" 일검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욱씬거 리고 있었다. "물러나라! 천마의 주인이 명하노니... 천마환령은 무릎을 꿇어 라!" 옥환은 몸을 일으키며 주문(呪文)을 외웠다. "천마... 천마... 으아아아......" 일검사는 머리가 깨어질 듯한 고통에 휩싸여 데굴데굴 굴렀다. 옥 환의 얼굴에 요사한 웃음이 번졌다. "그래, 넌 천마의 환령이다. 내 노예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찌 감 히 날 배신하려 하는 거냐?" "으으으......" 일검사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알이 터질 듯이 팽창되고 있었 다. 핏발이 잔뜩 선 눈이었다. "죽... 인다! 죽인다!" 위이잉! 그의 손이 삽시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학! 혈마수!" 꽈르릉! 핏빛 장력이 뻗어나갔다. 가공할 혈마수가 펼쳐진 것이었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옥환의 뒤쪽 벽이 무너졌다. 옥환은 간신히 혈 마수를 피해낸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시퍼래지고 말았다. "주문이... 주문이 듣지 않다니!" "죽인다!" 파츠츠츠츳! 혈마수가 재차 펼쳐졌다. 옥환은 이리저리 신형을 날리며 피해냈 다. 그런던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안돼! 그곳은!" 꽝......! 천붕지열의 폭음이 일어났다. 일검사의 장력은 그녀의 백옥침상을 박살낸 것이었다. 우르르르... 콰르르르르...... 가공할 진동음이 일어났다. "흐윽! 이럴 수가......! 화맥(火脈)을 막아놓은 만년한옥으로 된 침상을 박살내다니......" 옥환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콰르르르르...... 쿠쿠쿠...... 석부가 온통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 뿐이 아니었다. 천장 과 벽, 심지어는 바닥까지 쩍쩍 갈라지며 붕괴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죽인다......!" 꽝! 꽈르릉!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검사는 미친 듯이 사방으로 혈마수를 떨쳐내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가공할 폭음과 함께 석실 천장이 터져 나갔다. 이어 바닥이, 벽이 온통 무시무시한 폭음을 일으키며 날아가고 있었다. 화르르르릉! 동시에 화염이 온통 휩쓸기 시작했다. 천마동의 붕괴가 시작된 것 이었다. 강적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하기 위해 안배했던 화맥을 건 드림으로써 천마동 전체가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캬아아아악!" 가공할 화염이 동부를 휩쓸었다. 그 속에 천마동주 옥환의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꽈... 꽈르르르릉......! 천년 마맥의 성지였던 천마동은 이제 지하화맥의 폭발로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9장 창궁석부(蒼穹石府) ━━━━━━━━━━━━━━━━━━━━━━━━━━━━━━━━━━━ 천마동(天魔洞)의 대폭발은 무림을 경동(驚動)시켰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 혈마지존이 단신으로 천마동으로 쳐들어 가 천마동의 일천 고수(一千高手)를 죽이고 천마동주(天魔洞主)와 동귀어진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일검사가 천마동을 방문한 것은 극소수의 인물들만 아는 사실이었 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흘러나갔는지 그가 천마동으로 들어간 사실은 전무림에 알려졌다. 천마동의 지하화맥이 터져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자 그의 존재는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그로 인해 혈마지존은 당금 무림에서 가장 강한 이인에 포함되게 되었다. 천마삼세와 혈마지존, 그들은 무림인들에게 오백 년 전의 지옥혈 마존(地獄血魔尊)과 구천마라제(九天魔羅帝)를 상기시켰다. 아니, 혹자는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천마동의 붕괴와 함께 그 중 한 명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천마동주와 동귀어진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정도무림인들에게 한 숨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마삼세 한 명만 해도 감당하기 벅차거늘 혈마지존의 등장으로 정도무림은 암담하기만 했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혈마지존이 죽었다고 단정했다. 게다가 천마삼세는 여전히 마왕도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이었다. 곳곳에서 천마단의 지단은 광명천의 고수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 다. 특히, 광명십절(光明十絶)과 도검쌍성(刀劍雙星)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들에 의해 천마사단 중 남은 이단도 무너지고 말았 다. 결국 천마단의 중심세력이었던 천마사단은 모두 궤멸된 셈이었다. 천마단은 이제 유명무실한 집단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부상한 야망의 집단이 있었다.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이 그것이엇다. 만겁불회림의 조화신무국은 천마단의 몰락과 때를 맞추어 강호에 그 존재를 전면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날이 만겁불회림으로 몰려드는 무림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조 화신무국은 무림패업을 선언했고 그 산하로 몰려드는 자들은 무섭 게 불어나고 있었다. 무림에는 또 하나의 태풍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지하세계. "크으으......" 암흑 속에서 참담한 신음이 들리고 있었다. 온통 바위로 메워진 지중(地中), 일검사는 거대한 바위 틈새에 끼여 있었다. 그는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지하화맥의 폭발로 지반이 가라앉은 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 다. "으으음...... 너무 고통스럽다......" 그의 전신은 화염으로 인해 그슬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한 곳 이라고는 단 한 곳도 없을 지경이었다. 폭발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것이었다. 다만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은 혈마불괴지신의 체질과 신비 하기 그지없는 만류귀원대승무상심해기(萬流歸元大乘無常深海氣) 의 잠력이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실상 만류귀원대승무상심해기는 그가 아는 것 이상으로 신비한 묘 용이 있었다. 그는 중상을 입은 후 천마섭혼대법과 천마고에 당했 다. 그 후 천마환령이 되어 옥환의 노예가 되었으나 그의 내부에는 만 류귀원대승무상심해기가 남아있어 그의 생력(生力)을 조금씩 회복 시켜갔던 것이다. 천면마서생이 옥환을 협박할 때 그는 제정신이 돌아왔었다. 그러 나 천마동이 폭발함으로써 그는 지하세계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전신이 만신창이였으나 정신만은 온전한 상태였다. 천마섭혼 대법은 옥환이 죽음으로써 해제되었고, 천마고의 독(毒)은 만류귀 원대승무상심해기에 의해 내부에서 소멸된 지 오래였던 것이다. '으으,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다. 공기가 점점 희박해 지 고 있다.' 일검사는 혼신의 기력을 다 끌어 올렸다. 일순 그는 체내에 남아 있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쌍장을 뻗었다. 꽈르르릉! 폭음과 함께 땅덩이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바꾸는 개벽이 일어났 다. "크윽......!" 일검사는 비명을 발하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등용문 제2권 제19장 창궁석부(蒼穹石府) -2 ━━━━━━━━━━━━━━━━━━━━━━━━━━━━━━━━━━━ 동부(洞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그야말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공간이 지하세계에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양의 풀과 나무가 있었 다. 그곳은 전체가 하나의 분지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사방은 거대한 분화구의 형상이었고...... 천장은 암회색의 칙칙한 암반이 형성 된 곳이었다. 사방 벽에는 물기가 촉촉히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기이한 모양의 버섯이 촘촘히 자라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곳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수만 년 동안 오직 정적밖에 없는 곳에서 한 인간의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다. "으으......" 와르르......! 한곳의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피투성이의 인간이 굴러 떨 어졌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천우신조로 이 기이한 별세계로 굴러 들어온 것이었다. 금강불괴보다도 더 단단한 사내, 그는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었다. "으으...... 이 상태로는...... 이십 년 내내 운공해야 정상을 찾 겠구나......" 그는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살아 있다 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는 이제 본래에 비해 이성(二成) 정도의 내공밖에 남아 있지 않 았다. 그러나 그는 강인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 희미하지만 신광이 흘러나와 칠흑을 꿰뚫었다. 그 나마 신안(神眼) 덕분에 사물을 볼 수가 있었다. "이...... 이런 곳에 석전(石殿)이 있다니......!"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하분지의 중심부에 축조되어 있는 석전(石殿)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나 기다시피 그곳으로 다가갔다. <창궁석부(蒼穹石府)> 석전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진 글이 있었다. 한 획 한 획이 비할 바 없이 웅휘한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창궁석부......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어째서 이런 지하에 있단 말인가......?' 일검사는 석전의 건축양식이 고대(古代)의 것임을 느꼈다. 물론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들어가 보자.' 그는 창궁석부 안으로 들어갔다. 석전 안은 넓은 전청이었는데 사방이 막힌 정사각형의 형태를 이 루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기이한 느낌을 금치 못했 다. "정말 이상한 곳이군......." 석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사방의 벽면에는 부조(浮彫) 가 빽빽히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불상(佛像)들이었다.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 마두보살(馬頭普薩)...... 우두보 살(牛頭普薩)...... 천수보살(千手普薩)...... 천안보살(千眼普 薩).......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불상의 부조가 살아 있는 듯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장에는 엄청나게 큰 네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창궁석전(蒼穹石殿)> 글자 그 자체만 해도 보물이라 할 정도로 잘 쓴 글씨였다. "이곳은 대체 어떤 곳이길래......" 일검사는 석전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고통을 잊고 있었다. 과거 학문에 빠져있을 당시 고대문이나 골동품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그 는 창궁석부의 유래에 대해 몹시 궁금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문득 바닥을 살펴보던 그는 눈빛을 빛냈다. '여기 글이 있군.' 과연 바닥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여간해서 눈에 뜨이지 않은 것이었으나 일검사의 신안에는 확연하게 보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창궁자(蒼穹子)가 적는다. 노부는 본래 천축(天竺)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천축에서 고행하던 중 무도(武道)를 깨우쳤는데 특히 검도(劍道)에 심취했다. 그러던 중 노부는 중원을 동경하여 나이 사십에 이르러 중원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중원에서 참다운 검도(劍道)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부는 실망을 금치 못 했다. 그것은 중원에서 노부가 원하던 바를 조금도 얻을 수 없었 기 때문이었다. 이에 실망한 노부는 중원의 모든 검법(劍法)을 모 았다. 노부가 삼십육 년간 모은 검급(劍 )은 총 일천백팔십 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노부는 다방면의 무학에 관한한 비급들을 모 으게 되었다......> 일검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창궁자란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광 오한 것 같구나. 중원에서 참다운 검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검에 관한한 천하무적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느새 그는 고통도 잊고 글의 내용에 빠져들고 있었다. <......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한 노부는 갖가지 영수(靈獸)들을 기르며 명검(名劍)을 제련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노부 는 백칠십이 세에 이르러 이곳을 발견했다. 당시 노부는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 여 이곳에 창궁석부를 만들고 노부의 안식처로 삼기로 결심했 다......> 일검사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은 본래 천축인이었는데 어째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뼈를 묻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 노부가 천축으로 돌아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본 래 노부는 천축 벌지국(伐地國)의 왕자였다. 그러나 노부가 중원 을 유랑하는 동안 본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노부는 본국을 무너뜨 린 자들을 응징할 수 있었으나 결국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 다. 그래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랬었군.'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도 비슷한 처지로군.' 그렇다. 그가 연운의 오죽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와도 일맥상 통하는 점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 노부는 언젠가 나타날 연자(緣者)를 위해 이곳에 두 가지 선물을 남긴다. 그 하나는 만년지극화룡(萬年地極火龍)의 내단이 요, 다른 하나는 노부가 심혈을 기울여 연단한 창궁검(蒼穹劍)이 니라.> "만년지극화룡......!"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과거 한 고서(古書)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읽은 기억이 떠오 른 것이다. - 만년지극화룡(萬年地極火龍)은 화산의 용암 속에서 산다. 만년 동안 화정(火精)을 흡수해 천하에서 가장 극렬한 양성(陽性)을 띄 며, 화산의 폭발과 함께 승천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만일 인간이 만년지극화룡의 내단을 취할 수 있다면 불로영생할 뿐더러 불사 (不死)의 힘을 얻게 된다. 일검사는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만년지극화룡의 내단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상을 치료함은 물론 더욱 고강한 내공을 성취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기연이었다. <...... 내단을 얻으려면 노부가 남긴 창궁검을 먼저 얻어야 한 다. 다만 뛰어난 자만이 창궁석전의 비밀을 풀어 창궁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검을 얻는 자는 고금오대절기(古今五大絶技)의 하나인 창궁무적일기검(蒼穹無敵一氣劍)과 노부가 남긴 삼대절기 (三大絶技)를 취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노부가 고금사대절기의 주인과 동대(同代)에 태어나지 못해 자웅을 결하지 못하였다는 것 이다. 후인(後人)이여, 그대가 만일 고금사절기의 전인을 만나면 필히 노부의 창궁일기검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강한지를 밝혀 주기 바란다. - 창궁자(蒼穹子) 서 (書)> 글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글로 미루어 창궁자는 온화한 듯 하면서 무척이나 오만한 인물이 었다. 일검사는 이날부터 창궁검을 얻기 위해 창궁석전의 비밀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다만 어렴풋이 느낄 뿐인 시일이 흘러갔다. 이곳에서는 해를 볼 수 없으므로 날짜 가는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배가 고프면 그는 분지에 자생하는 버섯을 뜯어 먹었다. 실상 그 버섯은 일종의 영물이었다. 그는 버섯을 먹을 때마다 피가 맑아지 는 것을 느꼈다. 그로 인해 그의 중상도 서서히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바로 저것이다......!" 일검사는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창 궁석전의 비밀을 풀어낸 것이었다. 그의 눈은 사방 벽면의 부조에 못박혀 있었다. 부조된 불상을 살 펴보던 그는 불상의 눈이 어느 한 방향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 을 깨달은 것이었다. "비밀은 바로 이것이었군!" 그는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불상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 선을 옮겼다. 그곳은 바로 창궁석전이라 쓰여진 천장 쪽이었다. 정확히 말해 궁 (穹)자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글자에 열쇠가 있었다." 그는 지력으로 천장에 새겨진 궁자를 눌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지력으로 궁자의 획(劃)을 따라 그어 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마지막 획을 그은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그르르...... 릉! 그는 흠칫했다. 굉음과 함께 석전이 진동했던 것이다. 문득 그가 서 있는 바닥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하나의 검은 석탁(石卓)이 올라왔다. 석탁 위에는 장방형의 철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일검사는 흥분을 금치 못하며 철상자를 살펴보았다. 철상자의 뚜 껑 위에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칠보중택일(七寶中擇一)> 즉, 일곱 가지 보물 중 오직 한 가지만을 취하라는 뜻이었다. 일 검사는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인색하군. 고작 한 개만 가지라니...... 나머지는 무덤 속 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건가?" 그는 철상자를 열어보았다. 뚜껑은 쉽게 열렸다. 뚜껑이 열리자 눈부신 보광(寶光)이 눈을 부 시게 만들었다. 일검사는 눈을 크게 떴다. 철상자 안에는 과연 일곱 가지의 물건 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옥비파(玉琵琶), 혈옥도(血玉刀), 칠채보광주(七彩寶光珠), 금강 항마홀(金剛降魔笏), 상아탑(象牙塔), 비취선(琵翠扇), 철봉(鐵 棒) 등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일검사는 언뜻 보아도 그 물건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한 지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창궁검을 취해야 내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칠보 중 오직 하 나만 취하라는 것은 이 일곱 가지 보물 중에 하나만이 창궁검과 관계가 있다는 의미할 것이다.' 일검사의 철상자에 손대지 않은 채 일곱 가지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기만 했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창궁검과 관련이 있는 물 건이지 판단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느 것도 인세의 지보일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는 개중에서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철봉에 마음이 끌리 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른 물건들과 달리 보광(寶光)도 없을 뿐 아니라 그저 뭉툭한 쇠몽둥이에 불과했다. 더구나 겉면에는 녹이 잔뜩 슬어있어 칠보 중에서 가장 초라해 보 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웬지 일검사는 철봉에 마음이 끌렸다. "후훗...... 네가 마음에 든다." 그는 기소를 흘리며 철봉을 집어들었다. 탕! 하며 철상자가 저절로 닫혔다. 그와 동시에 석탁이 아래로 쑥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바 닥은 원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실로 교묘한 기관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 등용문 제2권 제19장 창궁석부(蒼穹石府) -3 ━━━━━━━━━━━━━━━━━━━━━━━━━━━━━━━━━━━ 일검사는 수중의 철봉을 관찰했다. 철봉은 놀랍게도 크기에 비해 최소한 열배가 넘게 무거웠다. 자세히 살펴보니 자루 부분에 약간 두드러진 부분이 있었다. 그는 그 부분을 눌러 보았다. 찌잉! 하는 맑은 금속성이 울리더니 철봉으로부터 한 자루의 검(劍)이 발출되었다. 어느새 철봉의 형태는 변해 있었다. 투명한 백옥(白玉)빛의 검신 (劍身)이 나타난 것이었다. 녹슨 철봉은 검의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루를 제외한 한자 여섯치의 검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으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검이 있다니......!" 일검사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동시에 검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으 로 일체가 되는 듯한 짜릿한 전률을 느꼈다. 본래 그는 검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검 을 움켜쥔 순간 우주(宇宙)의 기운이 온통 자신의 몸으로 몰리는 듯한 신비한 감명(感銘)을 받은 것이었다. 검자루는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듯 감촉이 부드러웠으며 따스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검신은 거의 투명할 정도였 다. "이것이 창궁검(蒼穹劍)이구나." 그는 확신을 느꼈다. 웅...... 웅...... 웅...... 검은 기이한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살아 있다......!" 그렇다. 명검(名劍)은 주인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일검사는 수백 년의 시공을 건너뛰어 창궁검이 마치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기 다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이때였다. "......?" 그는 떨어져 나간 철봉 속에 한 장의 양피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양피지에는 극히 미세한 무늬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자세 히 보면 그것이 극히 작은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깨알 한 알에 일천 자(字)를 새길 정도의 작은 글자들로 삼백 년의 내공이 없고서는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일검사는 이미 혈마신안공(血魔神眼功)을 익힌 몸이었다. 그는 글자를 명확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창궁자가 남긴 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창궁무적일기검(蒼穹無敵一氣劍)의 구결을 남긴다. 노부는 천하 의 모든 검법(劍法)을 섭렵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야 궁극적 이치 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것이다. 만 가지 흐름이 하나로 귀일하듯 검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 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노부는 최후로 일식의 검법을 남기게 되었다. 이 검은 단 일식으로 만상(萬象)을 베어버리는 것으로 더 이상의 검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검사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극히 오만한 성품이었다. 따라서 오만한 사람을 좋아했다. "후훗, 정말 대단한 노인이군. 만일 살아 있다면 한 번 겨루어 보 고 싶을 정도로." 일검사는 창궁자에게 호감을 느끼며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갔다. <...... 창궁무적일기검은 백 년 이상 수련해야만 얻을 수 있다. 만일 천고기재가 아니라면 익힐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좋으며, 삼 백 년의 내공을 쌓지 못해도 익힐 수가 없다. 그대가 만일 이 두 가지 조건에 들지 않는다면 따로 삼절기(三絶技)를 남기니 그것만 익혀도 능히 천하를 웅패할 수 있을 것이다......> 양피지에는 깨알같은 구결이 적혀 있었다. 과연 창궁무적일기검을 비롯하여 세 가지 절기도 함께 적혀있었 다. 금단신공(金丹神功). 선천강기(先天 氣). 동금지(銅金指). 바로 이 세 가지였다. 일검사는 구결을 읽어본 후 놀람을 금치 못 했다. 창궁자가 남긴 삼절기야말로 하나같이 통천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 가지 무학이 혈마십삼절기를 능가한다는 것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창궁무적일기검에 있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인간이었다. 따라서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 다. 창궁무적일기검은 그 구결을 해독하는데만도 온 심력(心力)을 다 쏟아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 며칠이 흘렀을까? 일검사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창궁무적일기검...... 과연 광오해 할만 하구나. 단 일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식 속에 총 팔만사천 가지의 변식이 포함되어 잇으 니......"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단 일식의 검초! 그 속에 내포된 변화가 팔만사천 가지라면 천하 의 모든 검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일검사는 그 오의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지옥혈마공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니......" 일검사는 시간이 흐를 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구결을 참오하는 동안 간간이 무릎을 쳤다. 절대마종(絶代魔宗)은 천마와 혈마의 두 이름을 남겼고 그의 무공 은 능히 고금오절기에 속했다. 그런데 창궁자란 무명의 노인이 남긴 무공이 그에 못지않다니 실 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스슷......! 문득 일검사는 두 손으로 양피지를 비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마침내 구결을 파악해낸 것이었다. 만일 창궁자가 살아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필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 을 것이다. 그는 설마 먼 훗날 한 사나이가 이토록 빠른 시간에 그가 전생애를 걸쳐 창안한 무학을 깨우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검사는 몸을 일으켜 한쪽 석벽으로 다가갔다. 천수천안보살(千手千眼普薩)의 부조상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일 검사는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일검(一劍)에 담아야 한다. 후 후...... 내공이 약해 어렵다 여기겠지만 그것은 창궁무적일기검 을 얻기 전의 일이다. 지금 내게는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쉬운 일 이지." 그렇다. 창궁자가 남긴 양피지에는 창궁무적일기검을 연성해야만 만년지극화룡의 내단을 얻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슷! 일검사의 손에서 창궁검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천화만변(千化萬變)을 감추고 있는,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 한 일식(一式)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스스스......!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평범한 일검이 전개된 순간 천수천안보살의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이 가루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구구궁....... 문득 굉음과 함께 석벽에 하나의 문이 생겨났다. 일검사는 창궁검 을 거두었다. 그러자 검은 불과 한 척에 불과한 짧은 단장(短丈) 으로 변했다. "훗훗, 만일 억지로 문을 열려 했다면 이 석전은 통째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혈마불괴신인 나라 해도 영원히 묻혀 버렸을 것이다." 일검사는 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또 하나의 석전. 석전의 한 가운데 붉은 돌로 된 포대가 있었고, 그 포대 위에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기이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는데 중원인의 복장이 아니었 다. 얼굴은 길고 수염이 단전(丹田)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두 손 은 원을 그리듯 모아쥐고 있었으며 피부빛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 럼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 일검사는 흠칫했다. 말할 수 없는 기도가 노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의 앞에는 하나의 주먹만한 붉은 화주(火珠)가 놓여 있었다. 그 화주로부터 신비한 광채와 함께 기향(奇香)이 풍겨 석전 안을 온통 신비한 기운으로 충만케 하고 있었다. '저 노인이 창궁자로군.' 그는 다가갔다. 이어 가볍게 포권했다. "후배 일검사, 창궁자 노선배님을 알현합니다."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인사였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의 눈에 노인이 앉아있는 바닥에 작게 쓰여져 있는 글씨들이 보였다. <내단을 취하면 능히 삼갑자 이상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노부는 이미 무림에서 적수를 찾지 못한 몸, 모든 것을 후인을 위해 남긴 다. 다만 한(恨)이 있다면 고금오절기와 비교할 수 없었다는 점 뿐이다. 그대는 내단을 취한 후 노부가 앉은 자리에 전력으로 일 검(一劍)을 가하라. 그러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훗날 창궁 무적일기검으로 천하를 풍미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노부 의 큰 기쁨이 되겠노라.>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강인한 노인이로군.' 그는 바닥에 놓인 화주, 즉 만년지극화룡의 내단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통해 신령스러운 기운이 전신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내단을 삼켰다. 스르르......! 그 순간 창궁자의 시신이 가루로 화해 흘러내려 버렸다. 일검사가 놀라는 순간 갑자기 안색이 크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크으윽......!" 일검사는 뱃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무섭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으으...... 열기가 내장을 태우는 것 같구나......!" 그는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단 은 천하에서 가장 극렬한 양화지력(陽火之力)이 응결된 것이었다. "크으으......" 설사 눈을 뜬 채로 팔 하나를 떼어내어도 안색 하나 변치 않을 일 검사였건만 그는 근육이 녹아들고 뼈가 재가 되는 듯한 열기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으음......" 마침내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몸에 신비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 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일까? 그의 얼굴에는 온통 황홀한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천상의 선녀들이 춤추는 광경을 구경하는 자의 표정이 그 러할까? 그는 반듯이 누운 채 황홀의 극치를 맛보는 사람처럼 온 얼굴에 현광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무(無)...... 공(空)......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취해 있었고, 반면 육체에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 다. 그의 피부는 끊임없이 탈바꿈을 거듭하고 있었다. 우두둑...... 두둑...... 뼈도 늘어났다, 줄어 들었다 하면서 변하고 있었다. 스스...... 피부의 색도 붉어졌다, 검어졌다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피부는 쩍쩍 갈라져 벗겨져 내렸다. 그 사이로 새살이 돋아 그의 피부는 매끈하고 광택이 감돌았다. 얼굴도 전보다 훨씬 준수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지옥십삼관을 거치며 환골탈태했던 그의 몸은 다시 환골탈태를 이 루게 된 것이었다. 일검사, 그는 가히 전무후무한 대기연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새로 탄생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신안(神顔)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부드럽고 신비한 기운으로 넘치고 있었다. 문득 일검사는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과거와 같은 찌르는 듯한 신광은 보이지 않았다. 안광이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된 채 담담하고 유현한 빛을 흘릴 뿐 이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공이 더욱 강해졌다. 이젠...... 육갑자를 넘어섰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약관에도 못미친 일개 청년의 내공이 육갑 자를 넘어서다니! 과연 무림사 이래 이런 일이 있었던가? 일검사는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 그는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단의 영기가 지옥혈마공으로 인한 대살기(大煞氣)마저 녹여 버 렸다.' 그렇다. 그는 그 대살기로 인해 이따금 강한 살심(殺心)과 마성 (魔性)을 느끼곤 했다. 그로 인해 때로 잔인한 살수를 전개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는 마성을 완전히 지울 수가 있었다. 그의 내공은 초극지경을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 지극화룡의 원정내단은 채 녹지 않은 상태였다. 만일 그것이 모두 녹는다면 그의 내공은 지난 날의 절대마종을 상회하는 무림초유의 내공을 이룰지도 몰랐다. 일검사는 창궁검을 들어 올렸다. "......" 그의 자세는 허술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이런 자세를 취하면 무수한 허점이 생긴다. 따라서 상대는 너무 나 많은 허점 때문에 도리어 공격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일검사는 창궁무적일기검의 자세를 취하며 계속 생각을 굴렸다. '모든 것 앞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가장 완 벽한 자세가 된다.' 그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후후...... 창궁무적일기검은 검법이라기보다는 초자연 무학에 가깝다.' 일검사는 이제 오의를 완전하게 깨닫게 되었다. 창궁무적일기검은 실상 어떤 방식의 제한도 받지 않는 무학이었 다. 팔만사천 가지의 변화를 때에 따라서 장(掌)으로도, 지(指)로 도, 그 무엇으로도 쓸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없는 것...... 흐르는 것...... 멈춘 것...... 그냥 있는 것...... 창궁무적일기검은 그 모든 것을 포 함하고 있다.' 고금(古今)을 통해 유명했던 전설의 검법들이 있다. 일자수미혜검식(一字須彌慧劍式), 태극검식(太極劍式), 벽력진천 검식(霹靂震天劍式), 무상일검식(無常一劍式), 천인제왕검식(天引 帝王劍式), 천수인항룡검식(千手引降龍劍式) 등이 그것이었다. 그들 중 한 가지만이라도 얻는다면 능히 중원십대검수(中原十大劍 手)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환(幻), 허(虛), 탄(憚), 진(震), 쾌(快), 완(緩), 공(空), 절 (折), 유(柔), 휴(休), 지(止)...... 창궁무적일기검에는 이 모든 결(訣)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히 전 율적인 천하최강의 검식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합...!" 문득 일검사의 입에서 현기에 찬 부르짖음이 들렸다. 창궁검이 호 선을 그렸다. 간단해 보이는 검식이었다. 그러나 일식에는 무한의 변화가 내포되어 있었다. 창궁자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하나의 청석판이 깔려 있었다. 츠으으으읏......! 검기가 청석판을 뒤덮었다. 꽝...... 꽈르르르릉...!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일순 주위는 온통 캄캄한 암흑에 휩싸이고 말았다. 천번지복! 땅이 꺼지고 하늘이 뒤집어졌다. 콰르르릉...... 콰르르......! 연이어지는 굉음과 함께 지층(地層)의 구조가 바뀌고 있었다. 솟았던 곳이 꺼지고, 꺼져있던 곳이 지층으로 솟아 올랐다. 실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이변이 벌어진 것이었다. ■ 등용문 제2권 제20장 무혈성승(無血聖僧) ━━━━━━━━━━━━━━━━━━━━━━━━━━━━━━━━━━━ 백제성(白帝城) 일대의 지각이 엄청난 변동을 일으켰다. 산 하나가 순식간에 꺼져 버리고, 호수가 산이 되어 치솟아 올랐 다. 이런 대자연의 놀라운 변화는 극히 짧은 순간에 벌어졌다. 사람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피신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현상은 짧게 끝나고 대지는 다시 안 정을 되찾았다. 스스슷......!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 인이었는데 안광이 번갯불처럼 빛나는 노인들이었 다. 승도속(僧道俗) 등 각색으로 보이는 노인들은 얼마 전 지각변 동을 일으킨 산역(山域)에 내려섰다. "이곳에서 가공할 검광(劍光)이 치솟았소......!" "으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들은 아직도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은 광대한 지역을 둘 러보았다. 이때, 문득 한 줄기 낭랑한 웃음소리가 사방팔방으로부터 동시에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어느 고인(高人)이신지 길을 가르쳐 주지 않겠소?" "......!" 네 노인은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 보았다. 웃음소리가 어느 쪽에 서 들렸는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한 노인이 손가락질을 했다. 그들로부터 십여 장 쯤 떨어진 곳, 거대한 암반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명의 괴청년이 있었다. 그는 일신에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산 발이 되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실로 괴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언뜻 언뜻 드러나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신태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흙투성이에 옷차림은 거지 중의 상거지였으나 옥같이 맑은 피부에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유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마침내 창궁석부로부터 지상으로 빠져나온 것이었다. 네 노인은 한결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한눈에 일검사가 이미 신화경에 접어든 절정고수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이때, 그들 중 한 노인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대변했다. "호... 혹시... 그대는 천마동에서 나오지 않았소?" "......!" 그 말에 나머지 세 노인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럴 리가?" 노인은 일검사를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천마동주를 죽이고 동귀어진했다는...... 혈마지존이 아니오?" 일검사는 그 말에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귀하들은 꽤 명망이 높은 분들이 겠구려." 그것은 노인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으음!" 네 노인은 모두 몸을 떨며 무거운 신음을 발했다. 설마 죽은 줄 알았던 혈마지존이 살아있을 줄이야, 강호의 소문은 와전된 것이었단 말인가? 이때 예의 노인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데 강호의 풍문과 다르다. 저 자의 눈빛은 담담하고 밝아 정 종의 무상신공을 익힌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기도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절대 마공(魔功)을 익힌 자의 눈빛이 아닌데......' 이때 일검사는 그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요?" 그러자 네 노인들은 자신들을 소개했다. 먼저 황색 가사를 입은 노승이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우리들은 광명천의 십대장로(十大長老)들이오. 노납은 정일(靜一)이라 하오." 두번째로는 도인이 말했다. "이 늙은이는 공동( )의 환검우사(幻劍羽士)라 하오." "노부는 황산파(黃山派)의 추운일로(追雲一老)요." "청성(靑城)의 금안산인(金眼山人)이오." 놀라운 이름들이었다. 그들은 구파일방의 전대 장로급 인물들로 현 장문인들보다도 배분이 높은 자들이었다. 광명천의 십대장로를 맡고 있는 그들의 나이는 모두 백여 세가 넘 고 있었으며 무공도 극상승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특히 소림의 정일선사는 오랫동안 폐관해왔던 정도의 기인으로 불 문제일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일검사는 그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백도연맹의 네 분 고인을 보다니 무상의 영광이외다." 그러자 정일선사는 선장을 땅에 짚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귀하가 혈마지존이라면 백도와는 숙적인 셈이 오." 일검사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 셈이오." "아미타불, 노납 등은 백도의 정기(正氣)를 수호하기 위해 천마와 혈마, 두 마세를 결코 용납할 수가 없소이다." 정일선사의 눈빛은 지순했다. "천주(天主)이신 천외도주께서는 일찌기 귀하가 천마동에서 동귀 어진했다는 말을 믿지 않으셨소. 과연 그 분의 혜안이 맞았소. 아 미타불, 정과 사는 세불양립이라...... 시주께서는 노납 등을 따 라가 주셔야겠소이다." 일검사는 약간 안색이 변했다. "그대들을 따라 어디로 가잔 것이오?" 정일선사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맹으로 가 심판을 받는 것이오." 일검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그대들에게 과연 본인을 데려갈 능력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소?" "......!" 그 말에 사 인은 안색이 변했다. 그래도 그들은 일파를 대표하는 절정고수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전에 은거한 고인들 이었다. 그들은 천외도주의 각별한 요청을 받아 재출도했다. 그렇지 않았 다면 청정한 수양(修養)을 계속할 고인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혈마지존이라 해도 아직 약관에 불과한 일검사의 광오한 말에 그들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너무 광오하군 그래!" "헛헛...... 과연 마도로다."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일검사가 차갑게 말했다. "광오한지 아닌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오. 당신들은 어찌 마음대 로 사람을 판단하려 하시오?" "......!"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사 인은 일제히 적의를 드러 내고 있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림의 원로들로 웬만한 일에는 깊 은 수양으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 지 약관에 불과한 일검사와 대하자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한편 일검사는 내심 염두를 굴렀다. '려려는 사대성가 출신이다. 그렇다면 광명천과는 깊은 관계가 있 는 셈이 아닌가. 내가 이들과 다툰다는 것은 려려를 곤란하게 하 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문득 딱딱한 안색을 풀며 부드럽게 말했다. "좋소. 본인은 광명천의 초청에 응하겠소. 그러나 지금은 안되오. 나중에 직접 방문하면 어떻겠소?" 그 말에 청성의 금안산인이 도호를 외웠다. "무량무불...... 그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황산의 추운일노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맞소. 마도인은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무리들이니 필시 이 자리에서 데려가야 하오!" 일검사는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오. 어찌 자신의 척도로 타인을 재려 하시오? 정 그렇다면 상호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일이오." 그 말에 정일선사는 백미를 꿈틀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 말씀이 과한 듯하오." 일검사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과한 것은 당신들이오. 날 못믿는 것은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과연 날 데려갈 능력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소?" 그는 오른쪽 십장 밖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내가 하는대로 똑같이 할 수 있다면 본인은 두 말 않고 따 라가겠소이다." "......?" 사 인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검사가 가리키고 있는 바 위는 높이가 일장이 넘는 거대한 것이었다. 능히 만근(萬斤)은 나 갈 듯 했던 것이다. 일검사는 바위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쩡!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중인들의 고막을 때렸다. "......?" 그러나 아무리 바위를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바위에는 아무런 이상 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들이 저 반 만큼만 해도 소생은 군말없이 따라가겠소." 말을 마친 순간 그는 훌훌 날아올랐다. 어어 허공을 밟듯이 유유 히 올라갔다. 이른바 답공술(踏空術)의 오묘한 신법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고 오르는 듯한 불가사의한 신법이었다. "서라......!" 세 노인이 즉시 그를 쫓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때였다. "아미타불...... 쫓아가야 소용 없소이다." 정일선사의 침중한 불호가 그들을 멈추게 했다. "......?" 세 기인은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저것 보시오." 정일선사는 바위를 가리켰다. 그의 안색은 어둡게 그늘이 져있었 다. "저, 저럴 수가......!" 그제서야 그들은 경악하여 안색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바위의 두께는 근 일장이 넘었다. 그런데 그 바위에 구멍이 뻥 뚫 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이었 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산들바람이 불자 구멍이 더욱 넓어지더니 바 위 전체가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아!" 세 노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미타불...... 혈마지존의 무공은 우리 네 사람을 합친 것보다 도 몇 배나 높소.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소이다." 노인들은 그만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정일선사의 말은 추 호도 틀림이 없었다. 그들 사 인이 모두 합벽한다 해도 결코 그같 은 무공을 펼 수는 없었다. 정일선사는 일검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할 수 없소이다. 어쨌든 그가 신의를 지키기만을 바랄 뿐이오. 어쩌면 그는 정말 광명천을 방문할지도 모르오. 노납이 보기에 그 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인물인 것 같았소. 아미타불, 우리는 한시 라도 빨리 돌아가 그가 오는 것에 대비하여야 겠소." "그럽시다......" 삼 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이 나란히 신형을 날렸 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한 그루 소나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환술(幻術). 장안은형술이라는 일종의 기환술법(奇幻術法)을 사용 한 것이었다. 그는 머리끝서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칭칭 감싸고 오직 두 개의 눈구멍만을 내밀고 있었다. "흘흘! 혈마지존, 안본 사이에 그의 성취가 최소한 세 배는 늘었 구나. 이 상태라면 어쩌면 일 년 전의 약속대로 나는 그의 수하가 되고 말겠는 걸?" 무슨 뜻인가? 일 년 전이라니? "후후...... 아무튼 멋진 녀석이다. 어쩌면 본성이 기대를 걸어도 좋을 정도로......" 괴인, 그러고 보니 그는 과거 낙양에서 일검사의 앞에 나타나 흑 첩을 건네 주었던 괴인이었다. 그는 당시 일 년 동안 천마삼세에 게 죽지 않는다면 일검사와 대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면 일검사의 수하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 런 그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세상에는 기이한 일도 많고 괴인(怪人)도 많다. 그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 등용문 제2권 제20장 무혈성승(無血聖僧) -2 ━━━━━━━━━━━━━━━━━━━━━━━━━━━━━━━━━━━ 숭산(嵩山) 태실정(太室頂). 일반 사람들은 그곳을 태실봉(太室峯)이라고 불렀다. 태실봉의 맞은편에는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少室峯)이 있었다. 그 곳은 중원제일의 불문성지로 알려지고 있었다. 반면 태실봉은 당금 백도무림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태실봉을 향해 하나의 백선(白線)이 유성처럼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대낮에 유성이 떨어지다니....... 그러나 안력이 매우 뛰 어난 사람이 본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태실봉 곳곳에는 삼엄한 매복이 펼쳐져 있었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이 이러할까? 다섯 걸음마다 매복이요, 열 걸 음마다 초소가 있을 정도로 수많은 고수들이 태실봉 일대를 겹겹 히 에워싸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들이었으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평화로운 풍경으로 비칠 뿐이었다. 문득, 허공에서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울렸다. "훗, 대단한 위세로군." 그것은 유성처럼 날아가고 있는 인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 다. 그는 다름아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광명천으로 찾아온 일검사 였다. 그 동안 그는 낙양의 등용장(登龍莊)에 다녀왔다. 등용장의 형제들은 그가 나타나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네 여인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녀들은 비록 혼인은 치루지 않았으나 그의 아내나 다름없는 여 인들이었다. 일검사는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른 뒤 약속대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한편 을주려려는 이미 만삭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그의 이세(二 世)가 태어날 날이 임박한 듯 그녀의 배는 크게 불러 있었다. 일검사는 을주려려의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감개가 무량했었다. 한때 세상에 뜻을 잃고 낙양의 버림받은 소년으로 살았던 시절이 자신도 모르게 떠올랐으며 아울러 앞으로 태어날 이세에 대한 꿈 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할 일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일검사는 허공에서 태실봉 곳곳에 깔려있는 삼엄한 포진을 살피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보통 기세가 아니다. 하나같이 절정고수들이다. 과연 광명천 이 자부심을 가질만 하구나.' 그는 허공에서 신법을 거두며 중턱에 내려섰다. 기왕 방문하겠다 고 약속한 이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당당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그는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유유히 산정을 향해 걸어 올 라갔다. 이따금 그와 마주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승(僧), 도(道), 속 (俗) 등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를 보고 아무 런 저지도 하지 않았다. '흠, 이미 내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군.' 그는 광명천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 도인에게 물 었다. "도장, 광명천주(光明天主)를 만나러 왔소. 어디로 가야 하오." 그러자 푸른색 도복을 입고 있던 중년도인은 손가락을 들어 한 방 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곧장 가보시오." 중년도인은 간단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버렸 다. 일검사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신형을 날 렸다. 대략 오백 장 쯤 가자 하나의 단애(斷崖)가 나타났다. 마치 도끼 로 찍어낸 듯 가파른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 아래 일백팔 명의 중들이 엄숙한 신색을 한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앞에는 한 명의 선비와 노승(老僧)이 서 있었으며, 다시 뒤로 열 명의 승, 도, 속, 개( )의 다양한 복장을 한 노인들이 서 있었다. 일검사는 열 명 중에서 백제성에서 보았던 광명사 장로가 있는 것 을 발견했다. (저 열 명이 광명십장로들인 모양이군.) 그는 소리없이 앞으로 미끌어져 갔다. 보기에는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눈 깜빡할 사이에 두 명의 인물 앞으로 다가갔다. "오오...... 전설의 축지성촌(縮地成寸)이로군, 그대가 바로 혈마 지존인가?" 청삼을 입은 육순 가량의 선비가 유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일검사 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이다. 당신은?" "허허헛...... 노부가 바로 백리무외라네. 자네는 천외일맥에 대 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검사는 흠칫했다. 백리무외라면 당금 백도무림의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천외도주 창 궁신협 백리무외가 아닌가?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미타불......" 문득 은은한 불호성이 울렸다. 그 불호는 일검사의 마음을 흔들리 게 했다. 불호 속에 심후한 사자후(獅子吼)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 다. 그는 황색 가사를 입고 있는 노승으로 눈썹은 온통 잿빛이었다. 다만 기이한 것은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인다는 것이었 다. 그는 백리무외와 나란히 서 있었다. 노승은 인자한 표정으로 일검 사를 바라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까운 일이로다, 아까와... 일대의 영웅이 될 상(相)이건만 악에 빠지다니......" 일검사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엇다. "스님은?" "아미타불, 무혈(無血)이라 하네." "......!" 일검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혈성승(無血聖僧)이라면 불문제일고수로 알려진 전설의 고승이 었다. 그가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이었다. 당시 천마이대마 벌의 발호 때 모습을 드러낸 그는 천마동의 공격에 지대한 공헌을 했었다. 그는 단신으로 구천마왕교의 일백마왕(一百魔王)을 심후한 불공 (佛功)으로 무릎 꿇게한 것이었다. 그는 이대불공(二大佛功)으로 알려진 금강부동신공(金剛不動神功) 과 천강복마공(天강伏魔功) 중 천강복마공을 익힌 소림 역사상 세 번째의 인물이었다. 그는 소림의 현 장문인 혜장(慧藏)보다 삼배(三拜)나 높은 고승으 로 평소에는 소림에 머물지 않고 안탕산의 복마사(伏魔寺)에 거주 해 왔었다. 무혈성승은 소림 고승이면서도 소림의 율법에 따르지 않았다. 그 를 무혈성승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평생 동안 한 번도 살인을 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공은 당금 백도무림에서 최고 수준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광명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창궁신협 백리무외 다음이었다. 이때, 백리무외는 일검사를 주시하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혈마수는 천마수와 함께 절대마종(絶代魔宗)이 남긴 양대마공이 네. 그 두 가지 무공을 익힌 자는 백도와는 양립할 수 없는 숙적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일검사는 그를 주시하며 반문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오?" 일검사는 추호도 위축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 며 조소하듯 말했다. "정말 뜻밖이오. 본인은 귀하들과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어째서 일방적으로 적대관계를 운운하는지 알 수가 없구려." 그렇다. 실상 그는 출도한 이래 백도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뿐 만 아니라 크게 부딪친 적 또한 없었다. 그런데 단지 그가 혈마수의 전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일방적으로 백 도무림의 공적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었다. 창궁신협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백도와 마도의 운명 탓이네. 자네가 길을 잘못 걸었기 때 문에 일어난 일이니 누굴 탓할 수가 없네." "하하하하! 백도니 마도니 하는 규정은 누가 만들었소? 백도에도 악인이 있을 수 있고 마도에도 군자(君子)가 있을 수 있는데 다만 흑백논리로 만사를 규정짓다니, 본인은 어이가 없을 뿐이오." "......!" 처음으로 백리무외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일시적으로 할 말을 잃 은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눈빛을 번쩍이며 선언했다. "어쨌든 오늘 자네는 결코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네." 일검사는 차갑게 웃었다. "훗훗! 글쎄올시다. 하지만 그게 당신들 마음대로 될지 의문이 오." 이때 무혈성승이 합장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오늘 노납이 처음으로 살계를 열려하니 용서하소서. 천강복마공으로 마도를 소 탕하겠나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평생 한 번도 살인한 적이 없다는 그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그 는 당년 천마동의 혈전에서도 마도들의 무공만을 전폐시켰을 뿐, 살인을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살계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일백팔 명의 승인들을 비롯하여 광명십장로의 얼굴에 일제히 놀람이 어리 고 있었다. 무혈성승은 문득 몸을 돌리더니 백리무외에게 깊숙이 읍했다. "천주, 오늘 일은 빈승에게 맡겨 주시오. 설사 이 일로 지옥에 가 는 한이 있더라도 살계를 열려 하오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어린애같이 천진한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불문의 최고 고승이 평생동안 지켜왔던 계율을 깨는데 대 한 회한의 눈물인 듯 했다. 창궁신협 백리무외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성승의 계율을 깨야 하는 당금의 현실이 그저 송구 스러울 뿐이오." 이어 그는 장탄식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편 광명십장로들도 한결같이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광명천주인 천외도주 백리무외보다도 그를 더욱 존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무혈성승의 모습에 깊은 감명 과 비애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일검사는 갑자기 몸을 휘청거렸다. 동시에 그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으음......! 굉장한 마기다. 이런 마기는 오직 구천마왕공(九天 魔王功)을 익힌 자만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자는 천마동주보다 몇 배나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혹시... 천마삼세가 이 근처에 와 있단 말인가?' 일검사는 지옥혈마공을 익혔으므로 육감으로 구천마왕공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전신으로 업습해오는 가공할 마기에 가슴 이 섬뜩했다. 그러나 그 마기가 누구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음 속으로 강한 의혹이 일어나고 있었 다. '설마 광명천 내에 그들의 첩자가 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도무림의 연맹인 광명천에 구천마왕교의 첩자라니........ 이때였다. 무혈성승은 문득 손을 들어 올리며 웅후한 불호를 외쳤 다. "아미타불......! 진(陣)을 쳐라......!" 순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 등용문 제2권 제20장 무혈성승(無血聖僧) -3 ━━━━━━━━━━━━━━━━━━━━━━━━━━━━━━━━━━━ "천지풍운(天地風雲)!" 승려들의 일각에서 우렁한 외침과 함께 그의 앞으로 진세를 벌이 는 것이 아닌가? "용호조사(龍虎鳥蛇)...!" 또다시 외침이 들리며 이번에는 그의 반대편으로 승려들이 달려갔 다. 그것을 시작으로 백팔 명의 승려들이 그를 중심에 두고 진세를 형 성했다. 실로 엄청난 위세요, 가공할 패기가 충천하고 있었다. 우우웅......! 백팔 명의 승려들은 바로 소림의 백팔나한승(百八羅漢僧)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비호와 같았고,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에서는 우 뢰소리가 일어났다. 바람은 폭풍을 일으켰으며, 그들이 뿜어내는 진력은 강기( 氣)의 돌풍을 일으켜 주위의 풍운을 경질케 하였다. 강벽( 璧)이 형성되고 우뢰소리와 함께 회오리바람 속에 갇힌 일 검사의 모습은 밖에서 볼 때 극히 위태로와 보였다. 마치 폭풍우 가 몰아치는 망망대해(茫茫大海) 속에 떠 있는 일엽편주(一葉片 舟)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조금도 동요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는 하늘을 우러러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그는 한가운데 태산처럼 우뚝 선 채 웅후한 진기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년소림이 자랑하는 불패무적의 백팔나한대진(百八 羅漢大陣)이오?" 백팔나한진! 가히 천년소림이 자랑하는 진법이었다. 무림에 누란의 위기가 닥 칠 때마다 소림은 나섰으며 그때마다 백팔나한진은 가공할 위력으 로 마세(魔勢)를 잠재웠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격파된 적이 없었다. 아무 리 가공할 무공을 지닌 자라 해도 백팔나한진 속에 갇히면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일검사는 비록 태연하게 외쳤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과연... 강하다! 이런 엄청난 압력은 느낀 적이 없었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승려들의 수는 분명 백팔 명이었다. 실로 적 지 않은 숫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승려들의 숫자 는 백팔 명이 아니라 가히 천 명 이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진세를 노려 보고 있었다. 일단 백팔나한진이 펼쳐지자 승려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위(方位) 가 완벽하게 보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한 치의 차도 없었다. 모 두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백팔나한승은 모두 일갑자가 넘는 내공력을 소유한 자들이 었다. 따라서 그들이 내공을 일으키자 사방으로부터 우뢰음과 함 께 가공할 압력이 몰아치고 있었다. 백팔나한진은 결코 퇴로(退路)를 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 한 공격과 수비가 일사불란하여 일제히 공격하고 일제히 수비하는 형태였다. 더구나 일종의 차륜전(車輪戰)의 형상을 취하므로 진세에 갇힌 사 람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뿐 더러 얼마 가지 않아 탈진하여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천 년 이래 소림에서 백팔나한진을 펼쳐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일검사를 가운데 두고 펼쳐진 백팔나한진은 불문제일의 성승 이라는 무혈성승에 의해 원형 그대로 시전된 것이었다. 따라서 가 히 경천동지할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우뢰음과 함께 나한대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혈성승은 진세의 바깥 쪽에서 진세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백팔나한승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옷자락이 휘날리 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뻗어 나오는 강기( 氣)도 그 만큼 강해져 갔다. "......!" 일검사는 진법이 수백 차례 바뀌는 것을 느꼈고, 그때마다 사방으 로부터 가중되는 압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 어 그의 입가에는 오만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이 진법은 극강(極强)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특징이 있다. 그 렇다면 반대로 부드러운 가운데 조용함으로 대하는 것이 최상이 다. 후후, 이정제동(以靜制動)이다. 정으로써 동을 제압하면 나한 대진의 위력은 반으로 감소할 것이다.' 이정제동. 그것은 무학의 기본원리였다. 일검사는 조금도 움직이 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그는 육감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콰르르르... 우뢰소리는 점점 더 크게 일어났다. 나한승들은 점점 더 빨리 회 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장(禪杖)과 계도(戒刀), 방편산, 비발 따위에서 일어나는 강기는 갈수록 막강해졌으며 강기의 소용돌이 가 폭풍을 일으켰다. 한편, 중인들은 그 광경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속에 갇혀있다면 결코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지극히 편안한 모습이 아닌가? 쿠쿠쿠......! 강기의 회오리가 천색(天色)조차 시커멓게 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호의 타격도 받지 않고 의연히 서서 도리어 입가에 싸늘한 조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이때, 진세를 지휘하던 무혈성승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으음, 마성(魔性)에 물들지 않은 자다...... 마성에 젖은 자라면 벌써 심마(心魔)에 빠져들어 광분할 텐데...... 정으로 동을 제압 할 줄을 알다니...... 이미 지옥공(地獄功)의 마성을 이겨냈단 말 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백 년의 면벽을 하지 않으면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혈성승은 지옥공의 내력에 대해 훤히 알고 있 는 듯 했다. 이때였다. 돌연 낭랑한 음성이 우뢰 속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하하......! 날 막을 수는 없다. 소림의 시시한 무공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검사는 진세 한가운데 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소매 속에서 하 나의 철봉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창궁검이었다. 그는 철봉의 한 부분을 눌렀다. 찌... 링......! 청아한 탄음(彈音)과 함께 정기로운 백광이 뻗었다. 창궁검의 검 신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광경에 무혈성승의 눈빛은 커다란 동요 를 일으켰다. '검을 쓰다니, 혈마의 전인은 검을 사용하지 않거늘...... 설마 검법으로 나한진을 깨겠단 말인가?' 이때였다. 일검사의 은은한 음성이 들렸다. "날 막기엔 역부족이다. 이제 곧 그대들의 자만심을 꺾어 주겠 다!" 일검사는 창궁검을 흔들었다. 스으으으......! 얼핏 보면 검을 휘두르는 그의 자세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어 적 어도 천 군데 이상의 허점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세이기도 했다. 팟! 파파파......! 창궁검이 백여덟 줄기의 검기(劍氣)를 뿌렸다. 순간 그토록 엄청 난 기세로 움직이던 백팔나한대진의 강벽이 일순 딱 정지되고 말 았다. 아주 간단하게 검기만으로 진세를 저지시켜 버린 것이다. 다음 순 간 일검사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탄결(彈訣)!" 그의 음성보다도 더 빠르게 창궁검은 허공에서 원을 그렸고, 검극 에서는 백팔 개의 검강환(劍 丸)이 퉁겨 나갔다. 파파파파......! 일백팔 개의 검꽃(劍花)인가? 꽃잎같은 검환이 퉁겨져 나갔다. 그 리고...... 그것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백팔 인의 나한승들은 실 상 소림의 장문인보다 일배가 높은 무자(無子) 돌림의 노승들로 장로급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전 신이 마비된 듯, 아니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무기를 세운 채 뻣 뻣이 굳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표정이 떠올 라 있을 뿐이었다. 일 초. 단 일 초만에 백팔 인의 소림고수들을 점혈(點穴)되어 버 린 것이었다. 그것도 검기(劍氣)보다 열배나 뛰어나다는 전설의 검환공(劍丸功)으로 일시에 점혈된 것이었다. "저럴 수가......!" 중인들은 이 가공할 사실에 경악과 전율을 금치 못했다. "미...... 믿을 수 없다......!" 광명십장로는 물론이고, 백리무외까지 옷자락이 심하게 떨리고 있 었다. "으음......" 백리무외는 신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천강복마공(天 伏魔功)...!" 문득 침중한 일성과 함께 엄청난 강기가 일검사의 등을 강타했다. 일검사는 미처 방비하지 못했다. 퍼... 엉! "크으윽!"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그는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암습이었다. 그는 나한승들을 점혈시킨 후 잠시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유령처럼 그의 뒤쪽으로 다가온 무혈성승이 암습을 가한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인이 가장 비열하게 여기는 암습을 무 혈성승이 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아! 탕마(蕩魔)를 위해 노납 평생의 수치스런 일을 했도다... 이제 다시는... 강호로 나오지 않으리라......." 무혈성승은 합장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던 중인들은 탄식을 금치 못 했다. 그들 중 아무도 그의 비열한 행위를 탓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일검사는 십장이나 날아가 지면에 떨어졌다. '으으...... 천강복마공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완벽한 혈마불괴신 임에도 불구하고 무혈성승의 일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실제 천강복마공보다 십배의 위 력을 지닌 무공에 당한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무시 무시한 장력이 쇄도해 왔다. "아미타불......! 오늘 기필코 시주를 죽여 탕마의 계기로 삼겠 다." 콰아아앙......! 일검사는 다시 온몸이 박살나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땅에 뒹굴었 다. 입으로는 사발만한 핏덩이가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벌떡 일어서며 일진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하하하하핫......! 비겁하게 암습을 하다니! 소위 백도무림에 속한 자들은 다 그렇단 말인가?" 스스스! 일검사의 몸이 훌훌 날아 올랐다. 그는 허공에서 창궁검을 전개했 다. 위이이이잉...! 검풍이 일어났다. 실로 가공할 검기(劍氣)가 십장 밖으로 뻗어나가며 주위를 휩쓸었다. "크아아아악!" 참담한 비명이 연달아 들렸다.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의 나한승들이 반동강나며 쓰러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 그러나 이때 일검사는 상황이 변한 것을 느꼈다. 무혈성승도, 백 리무외도, 광명십장로도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다만 장내에는 나한승들만이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를 갈며 내심 중얼거렸다. '소위 정파인이라는 자들이 암습만 할 줄 아는 줄 알았더니 도망 은 더욱 빠르구나!' 일검사는 마음 속으로 치솟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소. 저 자는 살인마이니 어떤 수를 쓴다 해도 죄가 되지 않소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내키지 않아 하는 음성을 무혈성승이 가로채고 있었다. "마도에게는 자비가 필요없소이다. 자, 인광뇌화신탄(燐光雷火神 彈)을 던지시오!" "아아!" 탄식이 들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더 이상 반대하는 음성이 없 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정적은 금세 깨지고 말았다. 슈우우...! 문득 절벽 위로부터 수백 개의 불덩이가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아미타불......! 마도는 지옥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무혈성승의 불호와 함께 천붕지열의 폭음이 연이어 터졌다. 꽝...... 꽈르르르... 실로 가공할 폭발이었다. 일검사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었 다. 그저 눈 앞에 화광(火光)이 번쩍 일어났다 싶은 순간 이미 사 방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꽈꽈꽈꽈꽈꽝...! 고막을 터뜨릴 듯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압력으로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절벽이 폭음을 내며 와르르 무너져 일검사 를 통째로 매몰시켜 버린 것이었다. ■ 등용문 제2권 제21장 이상한 재회(再會) ━━━━━━━━━━━━━━━━━━━━━━━━━━━━━━━━━━━ 항주(杭州). 중원제일의 아름다운 성시(盛市)로 이곳의 풍물은 수많은 서적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색향(色鄕)으로써의 명성은 타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진회하(秦淮河) 강변에 늘어진 수양버들은 풍류객들의 마음을 아 는 듯 흐느적 흐느적 물에 가지 끝을 담그고 회유하고...... 천금 (千金)을 싣고 이곳에 와 미인의 흥분과 치마폭에 몽땅 탕진한 채 빈손으로 돌아가는 풍류공자들이 끊이지 않은 곳. 그래도 그들은 돌아갈 때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 돌이 켜 보아도 후회스럽지 않을 추억을 남기기 때문이었다. 항주의 기녀들은 멋을 알고 풍류를 알고 인생을 안다고 했다. 그 녀들은 때로는 황금조차 마다하고 진정한 풍류를 위해서라면 몸도 마음도 바칠 줄을 알았다. 진화하에 뜬 유람선에서는 밤낮없이 비파소리가 천상의 선율인 듯 울리고...... 선상에는 공자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무녀(舞女)들 의 날리는 옷자락에서는 한껏 항주의 풍류가 묻어나고 있었다. 미서생, 그는 진회하가 내려다 보이는 강변의 언덕 위에 서있었 다. "......" 그는 일신에 눈처럼 흰 백삼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는 단정하게 흰 건으로 묶고 있었다. 용모는 송옥이나 반안을 능가할 정도로 준미 했다. 지금 그는 한 그루 회양목에 기대어 강상의 수경(水景)을 감상하 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부잣집 귀공자거나 아니면 변복을 하고 몰래 나온 왕후장상의 후예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지금 그의 마음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미서생은 다름 아닌 일검사였다. 그는 숭산 태실봉 사건 이후로 커다란 회의에 빠져 있었다. 백도 최고의 성자라는 무혈성승의 암계(暗計)에 당해 절벽에 깔렸 던 그는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로 그는 백도인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무너진 절벽 의 잔해 속에서 빠져나온 그는 복수를 위해 태실봉을 샅샅이 뒤졌 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의례 있으리라 생각했던 광 명천의 본단은 이미 그곳을 떠나 옮겨진 것이었다. 분노를 금치 못한 그는 그 길로 소실봉에 있는 소림사를 찾아갔 다. 그곳에서 그는 난동을 부렸다. 홧김에 소림의 대웅전을 박살낸 것 이었다. 소림의 구원(九院)의 원주가 그에게 덤볐지만 그의 적수가 될 수 는 없었다. 그는 구원주를 적어도 석달은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때려 눕힌 후 소림을 떠났다. 그래도 분은 풀리지가 않았다. 백도무림에 대한 배신감이 그를 지 금까지도 회의지심에 빠지게 하고 있었다. "......" 일검사는 진회하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는 넋을 잃은 채 강물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고...... 그 물 밑에는 바닥이 보였으며 이따금씩 금빛 잉어가 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강가의 버드나무에서 늘어진 가지가 바람따라 하늘거리듯 춤추고 있었다. 이따금씩 유람선에서는 흥겨운 풍악소리도 들린다. 수면에 비친 천색(天色)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가로운 구름 이 무리지어 흘러가는 광경은 흡사 도원경을 보는 듯 했다. '세상은 아름답구나. 눈을 돌리면 이렇듯 도처에 평화로운 풍경이 있는데......' 일검사는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연일 피비린내 가실 날이 없는 강호무림(江湖武林)...... 그곳에서는 평화와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일검사의 입가에 문득 훈풍과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언젠가 형제들과 함께 이곳으로 와 배를 띄우고 즐겨 야 겠구나.' 그는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한가로움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았다. 얼마 동안 걷자 한적한 산 자락과 강어귀가 맞닿고 있었다. 그곳 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저녁을 짓는 듯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강변에는 인적이라곤 없어 적막한 평화로움만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눈에서 신광이 번쩍 일어났다. 한 마장 쯤 앞,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강물을 스치듯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딘가 모르게 인영의 몸매가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력을 돋구는 순간 인영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백색의 경장을 가뿐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녀를 확 인한 순간 일검사는 가슴이 은은히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백리빙이란 여인이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는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군림성에서 만난 천외도주 백리 무외의 딸이 아니던가. 당시 그는 백리빙의 아름다움에 크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실상 백리빙은 진천화영과 함께 천하쌍미(天下雙美)에 속할 정도 로 무림제일의 가녀(佳女)이기도 했다. 일검사는 내심 염두를 굴렸다. '모른 척 하는 것이 좋겠구나. 어차피 저 여인과 나는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이니.' 그는 태실봉에서 백리무외와 있었던 일을 상기하자 어쩐지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백리빙과 그가 부녀간이란 사실이 어쩔 수 없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막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백리빙의 뒤를 추격하고 있는 다섯 명의 괴인들을 발견했다. '저 자들은?' 오 인 중 네 명은 흑의(黑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금의(錦衣)를 입고 있었다. '절정 고수들이군.' 그는 한눈에 그들의 신법이 이미 상승경지에 올라 있음을 간파했 다. 이렇게 되자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녀를 추적한단 말인가?' 마침내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소리없이 그들을 미행하기 시 작했다. 그는 발각되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신형을 날 렸다. ■ 등용문 제2권 제21장 이상한 재회(再會) -2 ━━━━━━━━━━━━━━━━━━━━━━━━━━━━━━━━━━━ 백리빙은 숲 속으로 교구를 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 인의 괴인이 자신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안 듯 일부러 숲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멈춰라!" 괴인들은 험악한 소리를 외치며 쫓아갔다. 휘휙! 마침내 그들은 백리빙을 빙 둘러 포위했다. "......!" 백리빙은 걸음을 멈추고 괴인들을 둘러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별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 인 중 우두머리는 금의중년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기이 하게도 분면(粉面)이었다. 여자처럼 분을 잔뜩 칠한 것이었다. 그 로 인해 어쩐지 음탕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도인들이 사용하는 불진을 쥐고 있었 으며 머리에도 도관을 쓰고 있었다. 나머지 사 인의 흑의인들은 묵검(墨劍)을 메고 있었는데 역시 인 상이 음침한 중년인들이었다. "흐흐...... 계집! 이제는 또 어디로 달아나겠느냐? 이백 리를 도 망쳤지만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이제 얌전히 무릎 꿇는 게 어떠 냐?" 백리빙은 눈썹을 상큼 치떴다. "흥! 그거야말로 내가 할 소리다. 탐화마라도(貪花魔羅盜)! 네 더 러운 목이나 걱정해라!" 탐화마라도(貪花魔羅道). 그 이름은 결코 무명(無名)이 아니었다. 그 자는 이미 오십년 전 무림에 희대의 악명을 떨쳐온 색마(色魔)였다. 그는 무림을 종횡하며 무수한 양가의 부녀자들을 겁탈하여 원성을 크게 산 위인이었다. 그는 과거 주안과를 따먹은 일이 있어 겉으 로 보기에는 아직도 젊었으나 실제 나이는 이미 구순이 넘은 노마 였다. "흐흐...... 계집애야, 긴 말은 않겠다. 우리가 필요한 건 네 야 들야들한 몸뚱이다. 널 잡아두면 네 애비 창궁신협이 다급해서 나 올 것이 아니냐?" 탐화마라도는 침을 삼키며 색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백리빙의 불룩한 앞가슴과 둔부 등을 훑어 보았다. 그의 징그러운 시선에 백리빙은 전신의 털이 가닥가닥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흥! 헛소리 작작해라! 네 망상을 깨뜨려 주마!" 사실 백리빙은 치가 떨리는 심정이었다. 벌써 이백 리에 걸쳐 쫓 고 쫓기는 관계였다. 탐화마라도는 계속 쫓아오며 온갖 음담패설(淫談悖說)을 퍼부어 댔었다. 이제 그녀는 넌덜머리가 날 대로 나 있었다. 그래서 정면 으로 그와 대결하리라 마음먹은 것이었다. 마침내 백리빙은 허리춤으로 섬섬옥수를 가져갔다. 창!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허리띠로 보였던 연검(軟劍)이 꼿꼿이 일어섰다. 그것은 상고기검(上古奇劍)으로 평소에는 요대(腰帶)로 착용하나 일단 진기를 주입하면 날카로운 검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우웅......! 과연 진기를 주입하자 검끝에서 일곱 송이의 검화(劍花)가 피어 올랐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일백 년 이상의 내공수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상 군림성에서 큰 고초를 겪은 이후, 그녀는 각고수련을 했다. 그래서 현재의 무공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고강해져 있었다. "흐흐흐, 제법이다면 반항해봐야 소용없다. 너는 노부와 함께 마 왕도로 가주어야 겠다. 흐흐, 가는 동안 노부가 널 즐겁게 해줄테 니 지루하진 않을 거다." 탐화마라도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는 천마단의 일원으로 백리무외 를 협박하기 위해 그녀를 인질로 삼으려는 중이었다. "닥쳐랏!" 쐐애액! 백리빙의 분노에 찬 교성과 함께 연검이 무지개빛을 그리며 탐화 마라도를 향해 검기를 뿌렸다. 일순 방원 오장여가 온통 검기류에 휘말렸다. 그때였다. 백리빙을 얕보고 있던 탐화마라도의 안색이 흙빛이 되 고 말았다. 그는 강호에서 수십 년간 굴러먹은 늙은 구렁이였다. 따라서 한눈에 그녀의 검법이 이미 초극지경에 접어든 것을 눈치 챈 것이었다. "헉! 피해라......!" 탐화마라도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네 명의 흑의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가볍게 백리빙의 검세를 받아 내고 있었다. "크아아악!" 막 검을 발출하던 흑의인들은 눈 앞에 휘황한 검광(劍光)이 온통 눈부시게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뿐, 일초반식도 전개해 보지 못하 고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그들의 몸뚱이는 정확히 네 동강이 난 채 나뒹굴고 말았던 것이 다. "으으...... 이럴 수가?" 탐화마라도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안면을 구기며 휘청거렸 다. 그의 어깨에서도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방금 전 백리빙이 펼 친 검법에 당한 것이었다. 한편, 백리빙은 백리빙 대로 놀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 는 설마 자신의 일검이 그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부친인 백리무외로부터 천외삼검(天外三劍)을 익혔는데 처 음으로 그 중 일식을 사용해 본 것이었다. 이때, 탐화마라도는 그녀가 넋을 잃고 있자 슬며시 그녀에게 접근 하며 지력(指力)을 날렸다. "어딜......!" 번... 쩍! 검광이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끄악!" 탐화마라도는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켜쥐었 다. 그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치고 있었다. "끄으...... 네...... 년......" 그는 한 손으로는 목을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백리빙을 가리켰 다. 그의 움켜쥔 손아귀 사이로 핏물이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 다. 그는 손가락으로 백리빙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네... 년... 아깝... 다...... 큭......!" 그는 마치 고목이 쓰러지듯 둔중하게 쓰러졌다. 그 순간 그의 어 깨에서 목이 떨어졌다. 실로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아깝다니......?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백리 빙은 고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편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살인을 했으므로 역한 느낌이 들어 급 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수급이 분리된 탐화마라도의 시신을 감히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연검을 허리춤에 두른 후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탄식어린 음성이 숲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아...... 대체 그 분을 어디 가야 뵐 수 있을까? 그때 이후로 늘 그 분을 찾아 헤매었건만......" 백리빙, 그녀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경 신술을 발휘하여 곧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직후, 그 자리에 일검사가 나타났다. 그는 장내의 상황을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동안 놀랍게 발전했구나. 이 정도 무공이면 누구를 만난다 해 도 능히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숲 속에서 백리빙의 활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힐 끗 탐화마라도의 두 동강 난 시신을 바라본 후 신형을 날렸다. 그 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 등용문 제2권 제21장 이상한 재회(再會) -3 ━━━━━━━━━━━━━━━━━━━━━━━━━━━━━━━━━━━ 스스스......! 음습한 바람이 분다. 갈대밭이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초원 가득 이어지고 있었다. 강변의 습기를 품은 축축한 바람이 희디흰 갈대꽃을 쓰다듬고 지 나갔다. 웬지 스산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 갈대밭에 비틀거리며 한 명의 백의미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녀는 지칠대로 지친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고 있었다. 순간 깜 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것 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신에 열이 후끈후끈 하고 현기증이 난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자꾸만 속이 화끈거리고 어지러우니......" 그녀는 탐화마라도를 죽인 후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탐화마라도가 지력을 날릴 때 손톱을 퉁기는 동작이 기억 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지풍에서 이상한 향기를 맡았던 것 같 았다. 그러나 강호 경험이 별로 없는 그녀는 그 속에 무슨 수작이 있는 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이러면 안되는데......" 백리빙은 자꾸만 갈증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갈망(渴望)이 뇌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열기에 온몸이 들떠 있어 걸음을 걸을 때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둥실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밤하늘에는 반월(半月)이 걸려 온통 교교한 월광(月光)을 뿌리고 있었다. 그 달빛이 그녀의 눈에 두 겹, 세 겹으로 겹쳐져 보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매우 아늑한 풍경이었다. 문득 그녀는 마음이 달콤해지 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누군가의 얼굴이 달빛에 겹쳐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 그 분은 대체 어디에 계시길래 쇠신이 닳도록 찾아도 만날 수 없단 말인가?' 이상한 풍경 하나가 그녀의 혼미한 뇌리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한 영준한 청년이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광경이었다. 그는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 었다. "아......" 백리빙은 뜨거운 한숨을 쉬었다. 군림성에서의 일이었다. 그녀의 상세를 치료하기 위해 일검사란 청년이 그녀의 옷을 벗겼었다. 당시는 너무나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으나 지나고 나서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었다. 비록 그와 이렇다 할 감정의 교류를 나눈 적은 없었으나 그 날 이 후 그녀의 마음 속에는 그의 존재가 깊이 박혀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강호를 유랑해 왔던 것이다. 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갈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사위가 음산한 풍경으로 바뀐 듯 했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삭막한 풍경이었다. 이때였다. 삐이익... 삑......! 마치 송곳처럼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갈대밭을 흔들며 울렸다. 이어 사방으로부터 미세하게 갈대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것은 점차 백리빙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殺氣)......!' 백리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혼미해져 오는 머리를 세차 게 흔들며 정신을 집중했다. 안력을 돋구자 달빛 아래로 갈대를 타고 수많은 인영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리빙은 그만 파르르 교구를 떨었다. '아...... 천마단의 추격이 계속되고 있구나.' 챙! 그녀는 본능적으로 연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비틀거리는 교구를 가누며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뒈져라, 계집!"' 거친 욕설과 함께 느닷없이 전면의 갈대잎이 조각조각 잘리며 날 아 올랐다. 파파파팟......! 언제 다가왔는지 열 명의 흑의인들이 각 방향으로부터 백리빙을 공격해 들어왔다. "아......" 백리빙은 눈 앞이 아찔해 졌다. 그녀는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할 지 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본능적으로 수중의 연검을 떨쳐 내 렸다. 파츠츠츳......! 눈부신 섬광이 작렬하며 무수한 검화(劍花)가 피어 올랐다. "크아아악!" 그러자 폐부를 온통 쥐어 짜는 듯한 처참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 다. 비록 본능적으로 전개한 것이었으나 백리빙의 검법은 놀라운 위력 을 담고 있었다. 사방에 자욱한 피무지개가 일어났다. 십여 명의 흑의인들은 팔다리와 목을 잃은 채 사방으로 날아가버 린 것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그것이 시작이었다. 가히 아수라를 방불케 하는 처 참한 혈전이 갈대밭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전개되었다. 츠츠츠츳......! 백리빙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춤(舞) ! 그녀는 죽음의 춤(死舞)을 추었다. 피무지개 속을 이리저리 누비며 쉴 새 없이 춤을 추었다. 어느새 갈대밭은 참혹한 시신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일찍이 백리빙은 자신이 이처럼 많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비록 천외도주의 딸이었으나 천 성이 온순하여 무공을 제대로 시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가공할 대살상을 전 개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만일 온정신이었다면 그녀 는 결코 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전신이 뜨거운 열에 들떠 있는데다 정신마저 혼미했다. '아... 아름다워......" 그녀는 달빛 아래 치솟는 선혈을 보면서 그것이 처절하도록 아름 답다고 느꼈다. 눈 앞에 한 흑의인이 다가왔다가 그녀가 휘두른 연검에 목이 끊겼 다. 그 자는 손을 허위적거리며 비틀거렸다. 목이 달아난 어깨에 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도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백리빙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흐느적거리 며 다가들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츠츠츠츠......! 이제는 비명조차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흑의인들을 향해 뛰어 들었고, 본능적으로 검무(劍舞)를 추었다. 그녀의 검에서 피 어나오는 검기를 따라 선혈이 무지개를 그렸다. 마침내 그녀는 전신이 흠뻑 피로 물들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 앞에 흑영이 다 가오면 베고,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또 베었다. 그 동안 그녀도 흑의인들의 장력을 수 차례나 얻어 맞았다. 그러 나 어찌된 셈인지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이상한 쾌감이 그녀의 혈관을 팽창시킬 뿐이었다. "학... 하아아......" 백리빙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문득 사위가 조용했다. 그녀는 검을 늘어뜨렸다. 이제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를 공격하던 흑의인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누워버린 것이었 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무작정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녀가 쥐고 있는 검 끝으로는 핏방울이 똑똑 떨어져 내리고 있었 다. 지금 그녀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전신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으 며 머리칼마저 산발이 되어 흐트러져 내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만은 여전했다. 아니, 도리어 그녀 는 요화(妖花)처럼 섬뜩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었다. "어지러워......" 백리빙은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문득 그녀는 가슴이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러 자 옷자락이 북 찢겨져 나갔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앞섶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젖가슴이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달빛 아래 하 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유방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리빙은 조금도 자신 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꾸만 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로 인해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상체는 반 이상 벌거벗게 되었 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 분... 그 분을 찾아야 해......" 그녀는 망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거의 무의식 상태였으나 그 음성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심장을 긁는 듯한 음침한 음성이 그녀의 몽롱한 의식을 깨며 울려왔다. "크크...... 어린 계집! 용케도 살아나왔구나." "클클클......!" 백리빙은 혼미하던 와중에서도 아연 긴장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러나 어쩌랴! 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핑그르 도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 등용문 제2권 제21장 이상한 재회(再會) -4 ━━━━━━━━━━━━━━━━━━━━━━━━━━━━━━━━━━━ "피 냄새......" 일검사는 강변을 따라 걷던 중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람에 실려 코끝에 끼쳐오는 비릿한 냄새. 그것은 익숙한 것이었 다. 강호 생활을 하면서 이런 냄새를 무수히 맡아본 그였다. 분명 그 것은 인간의 피 냄새였다. '무슨 일이 났다.' 다음 순간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갈대밭에 당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으음! 지독하군......." 일검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갈대밭이 온통 선혈로 물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갈대 사이로 백여 구가 넘는 시신들이 쓰러 져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바닥에 작은 내를 이루며 흘러내릴 정도였다. 일검사는 미간을 모으며 한 구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 은 참혹하게 가슴이 갈라져 죽은 시체였다. 그는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운 검법이다. 검기(劍氣)만으로 베었다. 사용한 검은 종잇장 같이 얇고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검(軟劍)......?' 순간 일검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그의 뇌리에 백리 빙의 얼굴이 번쩍 떠오른 것이었다. "그녀다!" 다음 순간 그는 다급히 신형을 솟구쳤다.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누군가 지나간 듯한 자리가 갈대밭 사이로 나 있었던 것이다. 갈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가끔가다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갈대밭 끝쪽.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낡고 허름한 사당(祠堂)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향화(香火)가 끊긴 폐사당인 듯 주변에는 온통 무성한 잡초와 갈대가 뒤덮고 있어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곳에 사당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사당 안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침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흐흐...... 인질로 데려오라고 했지 건드리지 말란 명령은 없었 소." "흘흘, 물론이지.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헤헤, 살짝 맛만 보는 게 어떻소?" "좋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 하나같이 음탕한 기운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사당 안. 지금 그곳에는 세 명의 노괴물이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낡 은 제단을 둘러싼 채 무엇이 그리 좋은지 히죽히죽 웃어대고 있었 다. 제단 위에는 전신이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백리빙이었다. 그녀는 세 노괴물에게 납치되어 이곳으로 끌려온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쉴새없는 격전으로 탈진할 대로 탈진한대다 알 수 없는 미약(迷藥)에 중독되어 그녀는 반쯤 정신 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옷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치마는 반쯤 걷혀 올라가 백 옥처럼 뽀얀 허벅지 어림까지 드러나 있었으며, 특히 희고 부드러 운 유방은 반 이상 드러나 있었다. "흐흐...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힌 계집이야." 세 노괴물은 백리빙을 내려보며 연신 침을 삼켜대고 있었다. 그들 은 하나같이 늙은이들이었다. 그러나 보통 늙은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지인삼마(天地人三 魔)라 불리는 전대의 마두들이었다. 따라서 늙었어도 아직까지 음심을 버리지 못한 늙은이들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미녀만 보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납치하여 탐 욕을 채우곤 해왔었다. 그러니 천하쌍미의 하나인 백리빙이야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 침내 첫째인 천마(天魔)가 제단으로 접근해 갔다. "흐흐, 그럼 너희들은 구경이나 하거라." 천마는 심줄이 드러난 더러운 손을 뻗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백리 빙의 치마부터 잡아 당겼다. 찌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치마가 길게 찢겨져 나갔다. 그러자 백리빙의 미끈한 하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의 풍만한 둔부 와 하복부를 가린 한 장의 내고만 남긴 채 모두 벗겨지고 만 것이 었다. "흐흐! 정말 미치게 하는구나." 천마는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는 상의를 잡다 당겼다. 마침내 백 리빙은 전라나 다름없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아랫배를 가린 한 장의 천을 제외하고는 알몸이 된 것이었다. 천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덥썩 손을 뻗어 백리빙의 탐 스런 유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유방은 천마의 손에서 뭉개지고 있었다. "흐흐... 피부가 마치 비단결 같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인마, 지마의 눈알이 시뻘개 졌다. "대형! 빨리 하시오, 제기랄!" 인마가 투덜대며 재촉하자 천마는 사납게 눈알을 부라리며 외쳤 다. "이 놈아, 형님이 즐기는데 방해하지 마라!" 이어 그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슬슬 손으로 백리빙의 풍만한 여 체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유방에서 둔부로, 둔부에서 허벅지로 구석구석 애무해 갔다. 문득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중얼거렸다. "이런, 나무토막 같아서야 재미가 없지." 백리빙은 혈도가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슬쩍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으음......" 나직한 신음과 함께 백리빙은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그러나 그녀 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꿈꾸는 듯 멍한 시선으로 자 신을 애무하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한동안 눈을 깜박이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일이었 다. 의당 소스라칠 듯 놀라야 할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 는 것이었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어 그녀는 묘하게 몸을 비틀며 입술을 열었다. "아아, 은공(恩公)... 마침내 절 찾아오셨군요......" 무슨 소린가? 그녀는 천마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이같은 광경에 천지인삼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백 리빙은 두 손으로 와락 천마의 목을 껴안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 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그의 목을 껴안고 온몸을 비벼대고 있었 다. 천마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절세미녀가 몸을 비벼대는대야 그야 말로 온몸이 둥둥 뜨는 듯 황홀감을 느꼈다. "흐흐...... 이제 보니 이 계집은 탐화마라도의 염라색혼지(閻羅 色魂指)에 당했군. 그야말로 금상첨화로군."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백리빙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아, 은공......" 백리빙은 그가 강하게 껴안자 전신에 억제할 수 없는 욕정이 넘치 는 것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그녀는 천마의 행위를 거부하기는 커 녕 더욱 강하게 그의 목을 껴안으며 온몸을 비틀어 댔다. "......!" 그 광경을 지마와 인마는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구경거리도 이런 구경거리가 없었다. 천마는 정신없이 백리빙의 육체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는 제단 위 에서 엎지락뒤치락하면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둘렀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천하쌍미의 한 명인 백리빙이 무참 하게 꽃봉오리를 꺾이는 순간이었다. "아아......" 백리빙은 환희의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녀 의 가슴에 얼굴을 박은 채 천마는 황급히 자세를 취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사당 안에 미풍이 불었다. 그러나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지마와 인마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연신 침을 삼 켜대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사당 안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흔적을 쫓아온 일검 사였다. 그는 사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행(蠻行)에 무서운 분노를 일 으켰다. "이런 더러운 늙은이들! 지옥으로 가거라!" 쩡! 하고 그의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전광(電光)과도 같은 지력 이 뻗어나갔다. "크아악!" 막 생애 최고의 희열의 경지로 접어들려던 천마는 갑자기 뒤통수 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순간 머리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나가 떨 어지고 말았다. 그는 동금지(銅金指)에 여지없이 황천으로 직행해버린 것이었다. 이 갑작스런 사태에 지마와 인마는 대경실색했다. "누...... 누구냐?" 그들은 당황하여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누군 누구냐? 염라대왕이지!" 한 소리 냉랭한 음성과 함께 쩡! 쩡! 다시 두 줄기 전광같은 지력 이 지마와 인마의 가슴을 꿰뚫었다. "케에엑!" 그들은 참혹한 비명과 함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이었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검사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으나 백리빙을 살피는 것이 급 하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상공......" 갑자기 달콤한 음성과 함께 뭉클한 감촉이 그의 등을 휘감는 것 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돌아섰다.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백리빙이 알몸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그의 목을 껴안고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소저!"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백리빙은 전신이 불덩이가 된 채 그 의 목에 매달려 몸을 밀착시키며 비벼대고 있었다. "나... 날 좀 어떻게......" 그녀의 입에서는 가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검사는 아차 싶 었다. '그러고 보니 강력한 최음약 같은 것에 당한 것 같구나!' 일검사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한편으로 그는 어이가 없기도 했 다. '어째서 이 여인을 만날 때마다 이런 난처한 상황이 생기는 거 지?' 그러나 상황은 급박했다. "으으음......" 백리빙은 이미 억제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은 불덩이 였으며 눈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만일 그녀의 혈관 속에 가 득찬 음성(淫性)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혈맥이 터져 죽을 것이 분 명해 보였다. "할 수 없지. 이것도 운명이라면......" 일검사는 그녀를 옆구리에 끼고 신형을 날렸다. 천지인삼마의 참 혹한 시신이 나뒹굴고 있는 사당에서 그녀를 치료(?)할 수야 없었 기 때문이었다. 일각 후, 그는 강변에 매여져 있는 조각배 한 척을 발견했다. 그 는 훌쩍 배 위로 뛰어 올랐다. 끈을 풀어내자 조각배는 물살을 타 고 서서히 하류로 흘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일검사는 배 위에 백리빙을 눕혔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만일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해도 당신이란 여인 은 모든 사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할만한 여인이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옷을 벗었다. 우람한 육체가 드러나자 그는 손 가락을 퉁겨 백리빙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하아......" 백리빙은 마치 성난 암호랑이인 양 그에게 달려 들었다. 부끄러움 이고 뭐고 없었다. 미약에 중독된 그녀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그것은 온몸을 태우고 있는 욕정을 해소시키겠다는 일념 뿐이었 다. 그녀는 일검사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는 그저 온몸이 달아오를 뿐 안타깝게 몸부림치기만 할 뿐이었다. 일검사는 탄식하며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가 손을 대기만 했을 뿐인데도 백리빙은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뒤틀어 댔다. "미안하오." 마침내 일검사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흐흑흑......" 밤의 진회하(秦淮河)는 아름답다. 잔잔한 수면 위에 달이 떠서 간 간히 부는 바람에 물결이 치면 형태가 흐트러졌다가 다시 모이곤 했다. 조각배 한 척이 수면 위에 떠있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여인. 그녀는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백옥같이 빛나는 하얀 나 신 위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좀체로 흐느낌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사나이가 그녀의 동그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 우시오." 일검사였다. 그는 강철같이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방금 전의 격렬 했던 정사로 인해 그의 온몸에는 손톱자국이 여러 개 나있었다. "흐흑.... 엉엉!" 마침내 백리빙은 통곡을 터뜨렸다. 그녀는 와락 일검사의 가슴에 몸을 던지며 아예 대성통곡을 발했다. 일검사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말이 필요 없었 다. 얼마전 달빛 아래 일어났던 열광적인 행위에 대해 어찌 이야 기할 수 있단 말인가? 요조숙녀이자 명문가의 금지옥엽이었던 백리빙이 교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던 일들을 어찌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흐흐흑! 전... 어쩌면 좋아요? 네?" 백리빙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뇌까렸다. 이미 일은 저질러 졌다. 아무리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게 아닌데.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정말... 이런 게 아니었어! 그녀는 죽고만 싶었다. 광란의 시간이 지나간 후, 차라리 기억이 라도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살아 있었 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천하게 몸부림쳤던 광경을 떠올리면 강물에 몸을 던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일검사는 입을 열었다. "낭자의 잘못이 아니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문득 백리빙이 울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이미 그가 일검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일검사를 찾기 위해 지난 세월 을 그리움을 안고 유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 다. "은공... 절 추한 계집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였 다. 일검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미소를 볼 수 없었다.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오?" "정말 절... 추하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죠?" "하하! 그렇소. 낭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오. 사 실 과거 낭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난 낭자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 을 정도였소." 일검사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백리빙의 충격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인가요?" 백리빙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마치 비맞은 배꽃처럼 청초하면서도 가련하기만 했다. 일검사는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소. 그 날 이후 낭자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 지 않았었소." "아아!" 백리빙은 갑자기 두 손을 뻗어 일검사의 목을 껴안았다. "어어......"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온몸을 던져왔으므로 일검사는 그만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백 리빙이 그의 몸을 타고 누른 꼴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 서로 알몸이었다. 알몸의 남녀가 온몸을 맞대 고 겹쳐져 눕게 된 것이었다. "어머......" 백리빙은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당황성을 발했다. 이어 그녀는 후다닥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 그녀의 둔부를 사나이의 커다란 손이 덥썩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리빙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노... 놓아 주어요!" "하하! 날 넘어뜨린 게 누군데 놓아달란 말인가?" 일검사는 껄껄 웃었다. 백리빙은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눈만 가리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검사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유방, 가느다란 허리, 귀 엽게 패여있는 배꼽... 모든 것을 달빛을 빌어 환하게 그리고 자 세하게 아래쪽에서 감상할 수가 있었다. "......?" 문득 아무런 기척이 없자 백리빙은 의아하여 살며시 손을 내려 보 았다. "어멋! 나... 나빠욧!" 그녀는 비로소 일검사가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의 나신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콩 때렸다. "하하하하......!" 일검사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백리빙은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는 자세가 되고 말았 다. "모... 몰라요!" 그녀는 그만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말았다. 한 가닥 미풍이 불고 있었다. 달빛이 수면 위에 형태를 잃고 흐트 러지고 있었다. 여인의 기쁨에 찬 신음이 수면 위를 흘렀다. 두 젊은 남녀에게는 이 밤이 최고의 아름다운 밤이 될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조각배는 진회하를 따라 정처없이 흘러가고... 밤은 이슥하게 깊 어가고 있었지만 뜨거운 피를 지닌 남녀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혈우성풍(血雨腥風)의 무림천하가 아무리 험난하다고 한들 그들에 게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그저 뜨거운 연풍(戀風)일 뿐인 것이다. - 다음 권에 계속 - ■ 등용문 제3권 제22장 백도신화(白道神話) 만승지존(萬乘至尊) -2 ━━━━━━━━━━━━━━━━━━━━━━━━━━━━━━━━━━━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진회하(秦淮河)의 강상을 온통 희망의 금빛으로 물들이며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남자는 임풍옥수의 절세미장부요, 여인은 경국경성의 미녀였다. 미녀는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바람에 미발을 날리고 있었 다. 일검사와 백리빙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일출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 보시오. 아름답지 않소?" "아...... 정말 아름다와요." "만인을 압도하는 저 기상이야말로 천지(天地)의 조화 중 가장 숭 고한 것이라 생각하오." 일검사는 문득 백리빙을 끌어안고 정열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가겠소." "네......?" 백리빙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옥용이 금광을 받아 한결 성결스러운 빛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녀의 나긋한 허 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게는 혈문에 진 빚이 있소. 그것을 청산한 후 나는 나로 되돌 아 올 것이오. 즉, 그때가 되면 혈마지존이 아닌 일검사로 돌아온 다는 뜻이오." "......!" 희열인가? 백리빙의 옥용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등용문의 형제들은 잠룡(潛龍)들이오. 그들은 비를 만나 승천하 려는 용들이오. 나는 그들과 함께 날아 올라야겠소. 그리고 그 능 력을 시험하기 위해 떠나겠소." "어...... 어디로요?" 백리빙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 끼며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옷깃을 섬섬옥수로 꼬옥 부여잡 고 있었다. "현 무림에 제삼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곳으로." "넷? 그... 그럼......?"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 "안돼요!" 백리빙은 별안간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죽어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야겠소. 그곳에서 날 시험하겠소. 이 일검사의 능력을 따져본 후 과연 내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겠소.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승부이자 운명에 대한 질문인 것이오." 일검사는 백리빙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빙, 당신이 현명한 여인이라면 말리지 않을 것이오." "아......!" 백리빙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망연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저는... 상공에게 한 말을... 어쩌면 후회할런지도 몰라요. 만승 지존이 아니라도 좋아요. 저는 그저 상공과 함께 있기만 하 면......"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일검사의 뜨겁고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러버렸기 때문이었다. 일검사는 그녀의 작은 몸을 흡사 거대한 대지(大地)처럼 가두었 다. 더 이상의 말은 두 사람 사이에서 필요치 않았다. 일출은 강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모 른 채 오랫동안 포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한 마장쯤 떨어진 곳이었다. 검푸른 암석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길....... 부러운 남녀군......" 암석이 말을 하다니? "홀홀, 어쨌든 그가 간다니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그럼 먼 저 가서 기다려야 겠군." 파앗! 바위가 날아가고 있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그러나 그 시각에도 일검사와 백리빙은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른 채 붙어 있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2장 백도신화(白道神話) 만승지존(萬乘至尊) -3 ━━━━━━━━━━━━━━━━━━━━━━━━━━━━━━━━━━━ 막부산(幕阜山). 이곳은 무림에 제삼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곳이었다. 과거에는 흑도사도녹림(黑道邪道綠林)의 총본산이었던 곳으로 불 야성(不夜城)의 근거지가 있는 만겁불회림(萬劫不廻林)이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개국을 선언한 후 엄청 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막부산은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조 화신무국으로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조화신무국에 몸을 던지면 부귀영화(富貴榮華)는 물론 인 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제공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장기를 멘 각양각색의 무림인들이 막부산 일대를 서성거리는 것 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막부산 일대의 마을은 어디고 초만원이었다. 특히 객점이 나 주루, 반점 따위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무림인들로 인해 붐비 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나 원한다고 해서 모두 다 조화신무국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조화신무국은 엄격히 그 자격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공(武功)으로써 관문(關門)을 돌파해야만 입국이 허용되 었다. 객점마다 초만원인 무인들은 모두가 조화신무국에 들기 위해 혈안 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분은 대다수가 백도(白道)에도, 천마단 (天魔團)에도 들지 못한 흑도인이거나 녹림, 그리고 그 밖의 패류 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조화신무국의 산하에 몸을 의탁하여 행세해 보려는 자들이 었다. 두두두......! 일기의 인마(人馬)가 달리고 있었다. 마상에는 백삼(白衫)을 입은 미청년이 타고 있었다. 그가 막부산 아래의 곤촌(昆村)이란 마을에 들어선 것은 오후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는 다름 아닌 일검사였다. 따각따각...... 곤촌으로 들어선 일검사는 마을 어귀부터 무림인들이 득시글거리 는 것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과연 소문대로 폭풍이 일고 있구나.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모 여 있다니......' 그는 곧장 마을 어귀에서 보이는 주루를 향해 말을 몰았다. 인파 를 헤치며 천천히 흑마를 몰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일취루(日醉樓)란 현판이 붙어 있는 주점으로 향했다. 일취루는 임시로 인가를 개조해 지은 주막으로 그 규모도 보잘 것 이 없었다. 그러나 이층으로 지어져 주루의 행색은 다 갖추고 있 었다. 일검사가 말에서 내리자 주점의 사환이 쪼르르 달려나와 말고삐를 쥐고는 일검사의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음......?' 일검사는 그의 경박하고 무례한 태도에 눈썹을 찡그렸다. "헤헤! 소협나리, 일취루에 오르시렵니까?" 사환의 과히 듣기 좋지 않은 질문에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사환은 여전히 일검사의 아래위를 세모꼴 눈으로 살펴 보았다. "헤헤...... 그렇다면 충분한지요?" "뭐가 말이냐?" 일검사는 의아하며 물었다. "헤헤! 역시 모르시는군요. 보시다시피......" 사환은 주위를 서성이고 있는 무림인들을 가리켰다. "이곳 곤촌에는 수많은 손님들이 있습니다요. 그런데 주루라고는 이곳에 오직 두 군데 뿐인지라...... 헤헤...... 아무나 다 받을 수는 없습니다요." "그래서?" 일검사는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일층에는 사람들 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바글바글한데 비해 이층은 한산하기만 했 다. 그저 몇 개의 탁자만이 사람이 드문드문 앉아있을 뿐이었다. "헤헤...... 할 수 없이 본 주루에서는 규칙을 세웠습죠." "무슨 규칙?" "헤헤...... 다름이 아니오라 능력 위주로 손님을 받기로 한 것입 죠." "능력 위주?" "헤헤, 뭐 대단한 건 아니옵고... 뭐 좀... 돈이 든다 이 말입 죠." 사환은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일검사는 그제서야 무슨 뜻인지 깨 달을 수 있었다. "음, 그랬었군, 말하자면 벌 수 있을 때 마구 긁어들인다 이거 군?" "헤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요." "좋아, 그것도 장사수완이니까, 그래, 나는 어떠냐? 고객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헤헤...... 손님은 무난히 본 주점의 귀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 습니다만 글쎄요, 본 주점의 가격이 워낙... 헤헤, 좀 그래놔서 요." "얼마면 되지?" "뭘 말입니까요?" "술과 음식 말이다." "그건 차후문제 입죠." "차후라니?" "헤헷, 우선 말을 마굿간에 두어야 순서가 아니겠습니까요?" "그렇군." "헤헤...... 한 냥입니다요." "그것도 따로 받는단 말이냐?" "그러문입쇼. 마굿간은 그냥 만든지 아십니까요?" "좋다, 옛다!" "허, 이게 아닌뎁쇼." "뭐가 말이냐?" "은자(銀子)가 아니라 금자(金子) 한 냥이라는 걸 미처 말씀드리 지 않았군요." "뭐, 금자......?" 일검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금자 한 냥이면 적어도 한 달 이상 은 먹고 사는데 넉넉할 액수였다. 그런데 고작 마굿간을 빌어쓰는 데 그런 거액을 내야 하다니. 하지만 그는 다투고 싶지 않았다. "여기 있다." 일검사는 금자를 던져주었다. "헤헤! 역시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습니다요. 그런데 말에겐 무얼 먹일 갑쇼?" "콩여물을 듬뿍......" "두 냥 되겠습니다요." "뭐... 그것도?" "헤헤, 당연하지 않습니까요? 콩이란 비싼 곡식입니다요. 더군다 나......" "아, 알았다. 그것도 금자냐......?" "물론 입죠." "옛다." "헤헤, 역시 대협(大俠)이십니다요." 일검사는 정말 속이 짰다. 이런 엉터리 장삿꾼이 없었다. 아니, 장사라기보다는 완전히 강도가 아닌가. 어쨌든 그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일층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비 싼 마굿간 사용료와 여물비를 치룬 후 그는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 다. 그가 계단을 오르자 사환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이층에 당도 하자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헤헤! 어느 자리에 앉으시든 손님의 자유입니다요." "음, 그래도 양심은 있군. 난 저 자리에......" 일검사는 비교적 전망이 좋은 창가의 자리를 가리키려다 입을 다 물었다. 또다시 사환이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열 냥입니다요." "뭐가 말인가?" "헤헤, 그 자리는 특석입니다요. 본래는 열두 냥이었으나 특별히 깎아서 열 냥만 받는 것입니다요." "허, 정말이지 너무 하는군." 일검사는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왜 손님들이 창가에 앉지 않고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정말 가관이군. 어디,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는 다시 금자 열 냥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천신만고(?) 끝에 자리에 앉게 되었다. 사환은 조금은 미안한지 머리를 꾸벅꾸 벅 대며 연신 절을 했다. "목이 마르니 차부터 가져 오게." 그러나 사환은 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차 한 잔도 돈을 받는가? 얼마지? 닷 냥? 여섯 냥? 아니면 열 냥인가?" 일검사는 앞질러 물어 보았다. 사환은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특별히 이층의 특석에 모신 손님 에 한해서는 차만은 무료입니다." "그건 조금은 양심적이군." 일검사는 자리에 앉았다. 과연 잠시 후 차가 날라져 왔다. 차맛은 그런대로 산골치고는 상품이라 그는 다소 마음이 느긋해졌다. 문득 그는 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주머니에는 오직 은자 한 냥 밖 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 나도 슬슬 장사를 해볼까?' 일검사의 얼굴에 기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어...... 뭘 드실 겁니까요?" 사환이 눈치를 보며 달짝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일검사는 거드 름을 피우며 말했다. "몽땅 가져 오게. 이 집에서 최상의 요리로 자랑하는 것들을 말일 세. 그리고 술은 최고급으로 천일취(千日醉)나 여아홍(女兒紅)으 로, 식기는 은기(銀器) 아니면 안되네. 빨리 가져오게. 난 배고픈 걸 못 참으니 말야." 사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 정말입니까?" "빨리 가져 오라니까." "아, 알았습니다요! 특... 특급으로 모시겠습니다요!" 휭! 정말 그는 바람처럼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어 향 한 자루 탈 시간 쯤 지났을까? 줄줄이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최고급 은식기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연이어 날라져 왔다. 그것은 대부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요리들이었다. 잠시 후에는 커다란 식탁이 모자라 두어 개의 식탁을 모아 붙여야 만 했다. 일검사는 상아저를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대체 어느 것부터 먹어 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음식이 대부분 이었던 것이다. 사환은 옆에서 커다란 주판을 열심히 튕겨대고 있었다. "에또... 홍소육이 열한 냥에다, 팔보채가 열세 냥... 어육신채가 일곱 냥... 상어전포가 아홉 냥 두 푼... 완두소육탕이 열다섯 냥...... 잉어삼봉탕이 스물한 냥... 구보화소자가 열일곱 냥 닷 푼... 소면류가 아홉 냥... 광동칠수육이 열세 냥... 에또......" 타닥... 다닥 타탁......! 주판 튕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이때 중인들은 눈이 왕방 울만해져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먹고 마시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는 최고급 술 여아홍을 마시고 음식은 가지대로 오직 한 젓갈씩 만 집어 먹었다. 한 음식에 결코 두 번 젓가락이 가는 일은 없었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벌써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일검사는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끄윽, 잘 먹었다." "헤헤, 대협 선생 대인 나으리, 계산은 총 금자 구백팔십일곱 냥 이 되겠습니다." 사환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이 동그래져 버렸다. 일검사가 갑자 기 아랫배를 움켜쥐더니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대협... 선생... 아니, 대인 나으리. 대체 왜......?" 일검사는 갑자기 아랫배를 움켜쥐고 뒹굴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아이구구... 어떤 놈이 음식에 독(毒)을 넣었나 보 다! 아이구! 나 죽는다아......!"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어... 이럴 수가... 이럴 리가......?" ■ 등용문 제3권 제22장 백도신화(白道神話) 만승지존(萬乘至尊) -4 ━━━━━━━━━━━━━━━━━━━━━━━━━━━━━━━━━━━ 사환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오! 이 놈의 주점은 흑점(黑店)인가 보다......! 사람을 독살해 죽이고 내 돈을 몽땅 뺐으려 한다아... 아이고오......!" 장내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층의 손님들은 물론이 려니와, 아랫층의 손님들까지, 심지어는 길을 가던 행인들까지 몽 땅 모여들어 이 사태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대... 대인나리...... 그럴 리가? 독을 탈 리가 있습니까요?" 사환은 쩔쩔 맸다. 뿐만 아니라 주방장까지 올라오고 일꾼 십여 명까지 올라왔다. "아이고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그렇다면 직접 먹어보면 알 게 아니냐?" 일검사는 이제는 안색이 백납같이 하얘지며 거품을 물었다. "조... 좋습니다, 그럼......" 사환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기 볶음 한 점을 입에 집어 넣었다. 우물우물하다가 꿀꺽 삼킨 순간,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 르 떨었다. "우웩!" 그는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푹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 봐라......! 아이고......! 이놈의 주루는 사람잡는 곳이다 아......" 일검사의 목청이 한껏 높아졌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안색이 대 변했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방장도 일꾼들도 당황하기 시작했 다. 이때였다. "무슨 일이냐!" 문득 천둥치는 듯한 음성이 들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한 우람한 중 년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비단옷을 입었는데 뚱뚱한 체구에 얼굴에는 기름기가 번들거 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주방장이 그의 귓전에다 뭐라고 급히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자는 홱! 고개를 돌려 일검사를 쏘아 보았다. 그 눈빛 은 바위도 녹일 듯한 무서운 안광이었다. "흠......! 나는 일취루의 주인이오만. 귀하는 지금 꾀병을 부려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오? 감히 나... 억!" 그는 거드름 피우며 말을 하다가 비명을 질렀다. 느닷없이 바닥에 뒹굴던 일검사가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움켜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아주 평범한 손동작이었으므로 장내의 무림인들은 그저 단 순한 우격다짐으로 느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뚱보는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그는 내가고 수로 과거 불야성(不夜城)의 외당(外堂) 당주(堂主)의 직위를 맡 던 고수였다. 현재는 조화신무국 소속으로 이곳 지역의 일개 분타를 맡고 있으 며 동시에 일취루를 경영하며 거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무공이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일검사가 멱살을 잡 아오는 순간 그는 뿌리치려 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무릎이 뜨끔하더니 전신에 힘이 쑥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놈......! 사깃꾼아! 너도 한 번 네가 만든 음식을 먹어봐라!" 일검사는 문득 닭다리 하나를 들어 그의 입에 쿡! 박아 버렸다. "우욱......" 억지로 쑤셔넣는 바람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떨결에 씹지도 못하고 삼켜 버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별안간 아랫배를 움켜 쥐더니 데 굴데굴 구르는 것이 아닌가? "어억! 아이구 배야! 아이구구... 사람 살려라......!" 비대한 몸이 데굴데굴 구르니 흡사 공이 구르는 듯 했다. 우당탕! 쿵탕! 와지끈! 그 바람에 탁자건 의자건 기물이 마구 부서져 나갔다. "주인님... 이게 어찌된 일......" 일꾼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때였다. "휴... 우! 살았다!" 일검사는 배를 쓸어 내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약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이마에 밴 땀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만일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구전속명단이 아니었더라면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나." 이때였다. 어떻게 그 말을 들었을까? "허헉, 아이구......! 어... 어떻게 날 좀 살려주시오......" 뚱보는 그의 앞으로 굴러와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사정을 했다. 그러나 일검사는 히죽 웃었다. "안돼요, 이건, 이제 두 알 밖에 없단 말이오. 안됐지만 주인장은 죽을 수밖에 없겠소." 실로 야속한 말이었다. "아욱...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살려... 주시오...... 으악......" 뚱보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사정사정했다. 실상 그는 창자가 끊어 지는 듯한 고통에 숨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래도 일검사는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소. 당신은 돈이 많으니 언제고 병을 고칠 수 있을 거요. 그렇지만 이 친구는......" 그는 이제 얼굴이 꺼멓게 죽어있는 사환을 잡아 일으켰다. "보아하니 이 친구는 고용인에 불과하니 돈도 없을 것이오. 차라 리 이 친구에게 약을 주겠소. 당신은 의원에게 가서 약을 지어 먹 으시오." 일검사는 옥병 속의 환약 한 개를 꺼내 사환에게 먹였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은 은밀하게 사환의 명치를 툭 건드리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우웩!" 사환은 시커먼 어혈을 한 덩이 토해내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고통이 사라지자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사정을 몰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우... 나 살려... 으악... 웩......" 뚱보는 이제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한가하 게 팔장을 낀 채 중얼거렸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안돼, 그래도 이 약은 이제 한 알 밖에 없는데 아껴 두어야지." 그는 뚱보를 내려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주인장. 당신이 설사 죽는다 해도 그건 당신 탓 이니 누굴 원망할 건 없지 않소?" "윽......!" 문득 뚱보는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주인님......!" 사환은 사색이 되어가는 뚱보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뚱보는 띄엄띄엄 말했다. "어... 어서... 약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주고... 사라... 어 서......" 사환은 일검사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으리,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그 약을 파십시오." 일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이건 다시 만드려면 일만 가지 약초를 다시 수집해야 한단 말이다." "제발...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요." 주객이 전도되었다. 일검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연신 고개를 내저 었다. 이윽고 사환은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 "그럼 처...천 냥을 드리겠습니다요!" 그 말에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일검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헉헉... 더... 올려... 라......" 뚱보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하자 사환은 이를 악물고 말했 다. "천이백 냥이오......!" 문득 일검사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었다. "은자냐? 금자냐?" "그... 그건......" 사환은 고개를 돌려 뚱보주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고 묻는 눈치였다. "은... 자... 로......" 뚱보가 꺼져가는 음성으로 말하는 순간이었다. "싫다." "어서... 그럼...... 금자로......" "금자 천이백 냥이오!" "싫다, 기분이 나빠졌다." "그, 그럼...... 천오백 냥......" 뚱보는 사색이 된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환은 입이 딱 벌어졌 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주인이 주겠다는 데야 어쩔 수가 없는 일 이었다. "천오백!" 사환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러나 일검사는 고개를 흔들었 다. "생각없다." "그럼... 이천... 냥......" "이천 냥!" "생각 없대도." 뚱보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해......" 뚱보는 이제는 더 말할 힘도 없는 듯 아예 축 늘어져 버렸다. 사 환은 울상을 지은 채 비오듯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삼천 냥이면...... 되겠습니까?" "허, 글쎄 생각 없대도." "그럼... 사천... 냥." "별로." "오... 천 냥." "싫다." "육천 냥......" "허어, 딱하다. 네가 애쓸 것이 뭐 있느냐?" 사환은 부들부들 떨었다. 뚱보의 입에서는 이제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칠천 냥......!" "흠, 조금 생각이 달라지는데? 하지만......" "팔천 냥!" 중인들은 이 흥미진진한 광경에 넋을 잃었고, 그토록 천연덕스러 운 일검사에 대해 경탄하다 못해 존경스러운 눈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흥정은 막바지였다. "구천 냥!" "구천오백!" "구천구백 냥......!" "구천구백구십 냥......!" 이윽고, 사환의 입에서는 발악적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마... 만 냥!" 마침내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왔다. 그제서야 일검사는 입을 헤벌 쭉 벌렸다. "후훗, 만 냥이면 괜찮은데? 그런데 만 냥을 필히 당장 내놓아야 하네." 사환은 이를 갈았다. 그는 날아가듯 어딘가로 사라졌고 잠시 후 커다란 전대를 메고 돌아왔다. "옛소! 만 냥이오, 세지 않아도 틀림없소!" 그러나 일검사는 어디까지나 유들유들했다. "무슨 소린가? 장사는 철저해야지. 어디, 한 냥... 두 냥... 열아 홉 냥... 오십 냥......" 센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그는 금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사환 을 비롯한 일꾼들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똥이 튕기고 코와 귓구멍 에서는 연기가 확확 솟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일검사는 마지막 금자를 세었다. "만 냥, 맞군." 그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약병을 던져 주었다. "어서 먹이게, 구전속명단은 비약 중의 비약이니 곧 효과가 있을 것이네." 사환은 약병을 열고 약을 꺼냈다. 다음 순간 그는 멍해졌다. 환 약!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밥알을 똘똘 뭉친 것이었다. 손때가 묻어 새카매진 밥알덩어리, 그게 구전구속명단이라니? "후훗...... 어서 먹이게, 안 그러면 늦을테니." 일검사의 말에 사환은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으드득......!' 그는 안다. 자신과 뚱보는 정말로 독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절묘 한 점혈수법에 의해 고통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무림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걸 어떻게 밝히겠 는가? 마침내 그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영약(?)을 먹일 수 밖에 없었다. '으윽... 나도 이걸 먹었단 말이지......' 그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때 일검사의 손가락이 무형 의 경력을 튕겨낸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는 전대를 둘러메 었다. 이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루를 등지고 내려갔다. "......!" 중인들은 무슨 신이나 보는 듯이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검사는 유유자적 사라지고 있었다. 한바탕 멋진 상술(商術)을 보인 채로 말이다. 사실 상술하면 그가 원조격이 아닌가. ■ 등용문 제3권 제23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 ━━━━━━━━━━━━━━━━━━━━━━━━━━━━━━━━━━━ 숲. 그러나 그것은 보통 숲이 아니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숲인 것이다. 이른바 그 숲을 일컬어 만겁불회림(萬劫不廻林)이라 불렀다. 막부산 깊숙한 오지에 자리한 만겁불회림은 천하제일의 험지(險 地)였다. 그곳에는 온갖 기문진법(奇門陣法)과 절독, 그리고 각종 매복으로 에워싸여져 있어 나는 새조차 접근을 꺼리는 죽음의 장 소였다. 야천에 둥실 떠오른 만월(滿月)이 휘영청한 광채를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한 인영이 인적없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입 은 절세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곳은 막부산 하고도 만겁불 회림이었다. 그런데 달밤에 마치 산보라도 하듯 걸어가고 있는 청 년의 모습은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일검사였다. '내게는 그들이 발부한 흑첩이 있다. 그러나 흑첩을 사용할 필요 는 없겠지.' 그에게는 달리 생각이 있었다. 과거 조화신무국에서는 열 장의 흑첩을 발부한 적이 있었다. 그것 은 그들이 일방적으로 천하십강(天下十强)을 선정하여 초청한 것 이었다. 더구나 흑첩에 날짜같은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든 방문 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임의로 천하십강을 정해놓고 그들에게 조화신무국의 십대 봉공(十大奉公) 자리를 하사할 생각이었다. 일검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달빛이 좋군." 어느새 그는 만겁불회림의 입구에 다달아 있었다. 눈 앞은 울창한 숲으로 만겁불회림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숲 양쪽 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천길 단애가 아스라이 뻗어 있었다. 일검사는 망설임없이 만겁불회림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숲으로 들어선 순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이건......?' 만겁불회림 안에는 온통 자욱한 홍무(紅霧)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는 독에 관해서 이미 통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무를 보 는 순간 그것이 무서운 장독( 毒)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리 지독한 독이라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 았다. 그는 유유히 장독이 깔려있는 지대를 통과했다. 얼마나 더 들어갔을까? 이번에는 풍경이 스산해졌다. 전후좌우 어디를 보아도 뚜렷한 방 향을 가늠할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늘도 잿빛으로 변 했다. 우르르르...... 허공에서는 은은한 뇌성이 울리고 있었다. 마치 지옥(地獄)의 유 문(幽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흥! 시시한 쇄혼수라진(碎魂修羅陣)이로군.' 그는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에 진법을 파해하여 통과해 버 렸다. 진세를 빠져 나오니 숲이 끝났다. 그리고 눈 앞에 하나의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 위에는 하나의 커다란 암석이 있었는데 그 위에 흑색의 삼각 깃발이 꽂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통천제일관(通天第一關)> 깃발에는 그와 같은 붉은 글씨가 뚜렷하게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깃발 아래에는 우람한 체격을 지닌 오순 가량의 인물이 마치 철탑 인 양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는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험상궂은 인상을 지닌 거인이었다. 보통 사람의 두배는 되는 키요, 체격이었다. 특히 팔이 한 자나 더 길었다. 그 자는 일신에는 흑색 장포를 걸친 채 팔장을 끼고 서 있다 일검 사가 나타나자 우렁찬 음성으로 외쳤다. "서라!" 일검사는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힐끗 깃발을 바라보았다. "통천제일관이라? 이곳을 통과해야 한단 말이군?" "그렇다." 거인은 부리부리한 안광을 번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검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엔 몇 관까지 있느냐?" 그는 다짜고짜 반말을 썼다. 그 바람에 거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곤두섰다. "건방진 놈이군! 감히 이 철비신종(鐵譬神宗) 하구명(河具命)에게 반말이라니!" "몇 관까지 있느냐고 물었다." 일검사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흘러나오자 철비신종 하구명은 일 순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흐흐...... 좋다. 어차피 네놈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테니까." 그는 멸시 섞인 어조로 내뱉으며 설명했다. "모두 십관(十關)까지 있다. 통과 정도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통과 방법은?" "흐흐...... 백 초만에 날 이 바위 아래로 떨어지게 하면 된다." 그 말에 일검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간 낭비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 "내가 그 바위 위에 앉아 있겠다. 네가 십초를 공격해라. 만일 날 한 치라도 움직이게 하면 내가 패한 것으로 하겠다." "뭐, 뭣이......!" 철비신종은 대로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일검사는 태연하 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억울하면 직접 시험해 보면 될 게 아니냐?" "조... 좋다!" 철비신종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한 채 승락했다. 그는 성질이 급했다. 일단 결정을 내리자 그는 바위에서 내려왔 다. 일검사는 그가 서 있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은 입장이 반대가 된 것이었다. 철비신종은 흉흉한 살기를 폭사하며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놈, 받아라!" 그는 번쩍 두 손을 들어올려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양손이 강철처럼 새파랗게 변하며 요란한 쇳소리를 울렸다. 이어 그의 두 팔이 마치 철봉처럼 길어지며 일검사를 향해 후려쳐 가는 것이 아닌가? 펑! 괴력을 지닌 철비수(鐵臂手)가 일검사의 몸을 강타했다. 그러나 일검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억!" 마치 솜을 때리듯 철비수는 일검사의 가슴 속으로 푹 박혔다가 도 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철비신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 괴이한 사태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며 다시 전력으로 철비수 를 날렸다. "차앗!" 퍼퍼퍼퍽! 그의 철수는 연속 괴력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검 사의 어깨에 박혀들었다. 손목까지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흐흐...... 네놈이라고 별 수 있겠느냐?" 철비신종은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였다. "이것이 마지막 십초라는 걸 알고 있느냐?" 일검사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순간 철비신종은 찬물을 뒤집에 쓴 듯 부르르 거구를 떨었다. "이럴 수가... 끄덕도 없다니......"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자랑하는 철수는 일검사의 어깨에 아직도 박혀 있었다. 그런 데도 일검사는 멀쩡했다. 문득 일검사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 나 왔다. "고작 이 정도 실력이었다니 실망이 큰데?" "으으......." 철비신종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다급히 손을 빼내려 했 다. "크으으...... 이럴 수가......!" 그는 안색이 핼쓱하게 질려 버렸다. 어찌된 셈인지 그의 팔은 빠 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비신종은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랐다. "너는 좀 쉬어야 겠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철비신종은 팔이 쑥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잔뜩 힘을 주고 있다가 갑자기 팔이 빠지자 그는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큭......" 그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순간 일검사의 손가락에서 한 가닥 지력이 뻗어 그의 마혈을 점해 버렸다. 철비신종은 눈을 부릅뜬 채 큰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제서야 일검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늘을 향해 누워버린 철 비신종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언덕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 등용문 제3권 제23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 -2 ━━━━━━━━━━━━━━━━━━━━━━━━━━━━━━━━━━━ 일 리쯤 갔을까? 또다시 작은 구릉이 나타나며 하나의 석대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석대 위에는 왜소한 체구의 인영이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 의 옆에는 역시 흑색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통천제이관(通天第二關)> 일검사는 앞으로 다가섰다. "관등성명을 밝혀라."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던 왜소한 체구의 괴인이 번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는 무릎 위에 한 자루 혈도(血刀)를 올려놓고 있었다. 일검사는 빠르게 괴인의 전신을 훑어 보았다. 키는 불과 오 척, 일신에는 혈삼(血衫)을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카 락조차 핏빛이었다. 다만 얼굴은 둥근데다가 동안(童顔)을 하고 있었다. 일검사는 첫눈에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내심 중얼 거렸다. '체구는 작지만 이미 백 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는 괴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무명검(無名劍)이라 하오." "무명검? 어쨌든 일관을 통과하다니 놀랍군." 괴인은 의외라는 듯 작은 눈으로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순간 노인의 눈에서 신광이 폭사되었다. 일검사는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백년 내공을 지닌 자로구나.' 이때 혈삼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좋아. 무명검이면 어떻고 무명소졸이면 어떤가? 흘흘... 노부의 일초만 받아내면 삼관(三關)으로 갈 수 있다." 말이 끝난 순간, 그의 어린애처럼 작은 손은 전광석화처럼 무릎에 놓인 혈도(血刀)의 자루에 닿고 있었다. 파츠츠츠츳...! 뇌전같은 도광(刀光)이 작렬하며 눈 앞에 무수한 칼그림자가 일어 났다. 하나 둘이 아니라 수십 개의 혈도가 펼쳐진 것이었다. "혈천도강(血天刀 )!" 괴인의 입에서 짤막한 부르짖음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러 나 일검사는 눈썹을 꿈틀하며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이제보니 혈문(血門)의 배신자였군." 가공할 혈도류(血刀流)에 휩싸인 순간 일검사는 냉랭하게 외쳤다. "강중패( 中覇) 혈마수(血魔手)!" 번... 쩍! 일검사의 우수가 달군 쇠같이 시뻘겋게 변하는가 싶더니 가공할 혈광(血光)이 뻗었다. 스스스......! 천공을 뒤덮었던 도광이 거짓말같이 싹 사라졌다. 콰... 쾅...! 마치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사위를 진동시켰다. "케에엑! 혈(血)...... 마(魔)......지(至)...... 존(尊)......!" 괴인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붕 떠올라 오장 밖으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혈도는 이미 무참하게 박살나 날아간 뒤였다. 어디 그 뿐인 가? 괴인의 몸은 가는 핏줄이 그어지더니 종내에는 수십 조각으로 토막나고 말았다. 실로 참혹한 죽음이었다. 일검사는 냉랭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배반한 혈마이노(血魔二老) 중 검노(劍老)가 아직 살아 있었을 줄은 몰랐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과 거 혈옥선자 설옥경으로부터 혈문의 이로(二老)가 배신했다는 것 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팍! 문득 그의 발 아래 하나의 흑색기가 날아와 지면에 꽂혔다. 거기 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통천제삼관(通天第三關)> "흠, 이젠 스스로 나타나는군." 일검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흥!" 문득 싸늘한 코웃음이 귓전을 울리더니 한 가닥 녹색 인영이 번쩍 눈 앞에 나타났다. 그 자는 녹의을 입은 늙은이로 장작처럼 마른 체구에 뱀같이 차디 찬 인상을 지닌 작자였다. 일검사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공(邪功)을 익힌 자로군." 그 말에 녹의노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애송이 녀석, 제법 손이 맵더군." 그는 일검사를 노려보더니 문득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일취루(日醉樓)에서 사기를 친 놈이군." "용케 알았군." 일검사는 빙글거리며 물었다. "통천삼관도 일초만 받아내면 통과할 수 있느냐?" 녹의노인은 은은하게 음흉한 괴소를 발했다. "흐흐, 원래는 그렇다. 그러나 수정해야겠다." "어떻게 말이냐?" 녹의노인의 두 눈에서 쇠라도 녹일 듯한 강렬한 녹광(綠光)이 뻗 어 나왔다. "흐흐! 아예 네놈을 죽여야 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자 검푸 른 권경이 회오리치며 일검사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것은 사공을 익힌 자만이 낼 수 있는 특유의 강력( 力)이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시간이 없으니 역시 일초에 끝내도록 하자." 그의 입에서 냉오한 외침이 터졌다.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 슉! 쇠젓가락같이 달구어진 손가락 끝에서 시뻘건 혈선(血線)이 뻗었 다. "헉! 혈... 혈마지존......!" 녹의노인은 사색이 되어 부르짖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홱 몸을 돌리더니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일검사가 그것을 허용할 리 없었 다. 따... 당! 한 소리 금속성과 함께 참혹한 단말마가 터져나왔다. "케... 에엑!" 녹의노인은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의 뒤통수에는 동전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가 엎어진 순간 일검사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는 훨 훨 날아 앞으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3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 -3 ━━━━━━━━━━━━━━━━━━━━━━━━━━━━━━━━━━━ 말 그대로 불야성(不夜城)이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뒤덮인 화려한 거성(巨城)이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지금 불야성이 한눈에 보이는 산정(山頂) 위에서 밤바람에 옷자락 을 휘날리며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통천십관(通天十關)을 모두 통과했지만 정말 의외였다. 관문을 지키는 자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 는 새외의 이고수(異高手)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렇다. 십관을 통과하는 동안 그가 만난 관주(關主)들의 무공은 관문을 거칠수록 점점 더 강해졌었다. 더욱이 그들 중에는 천축(天竺), 묘강(苗疆), 신강(新疆), 북해 (北海) 출신의 새외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검사는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불야성은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됐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천년환사제의 능력으로 이처럼 거대한 세력을 모은다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흘흘...... 그렇소, 혈마지존." 문득 괴이한 음성이 일검사의 귀를 울렸다. 일검사는 경악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지척에 접근하도록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니......' 그는 청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사방 어디에서도 여전히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심장의 박동소리조차 없다니?' 그는 더욱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때 예의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 려왔다. "흐흐, 설마 벌써 날 잊은 것은 아니겠지?" "......!" 순간 일검사는 번뜩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흑첩(黑帖)의 장본인!" "그렇소. 오랜만이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그런데 그대는 아직도 당시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물론!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 않소?" 괴음성은 즉시 답변해 왔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동안 단점을 보완했군. 심장 뛰는 소리조차 없앴으니 말이오." "흘흘! 나는 그 점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연마했지." 문득 일검사는 빙글 신형을 돌렸다. 이어 그는 한 그루 나무둥치 를 노려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건 먼저 나를 꺾은 다음에 묻는 것이 좋겠소." 괴인의 음성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 오는가 하면, 혹은 지하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일검사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이미 패한 것이나 다름없소." "무슨 소리냐? 나는......" 쩡! 문득 일검사의 손끝에서 동금지(銅金指)가 뻗어 나무둥치에 바람 구멍을 뚫었다. "흘흘흘...... 틀렸다. 나는 바로 여기......" 괴인은 득의의 웃음을 흘렸으나 그 음성은 금방 끊기고 말았다. 일검사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하하......! 그럴 줄 알았지. 방심은 금물이오!" 그의 신형이 일순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잠영환마보(潛影幻魔步) 를 펼친 것이었다. "어엇!" 괴인은 어리둥절 했는지 당황성을 발했다. 그 순간 하나의 암석이 꿈틀 움직였다.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彈指血通)!" ㅆ...! 일검사의 낭랑한 외침과 함께 혈전(血電)이 뻗었다. 팍! 하는 음 향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크윽......!" 예의 암석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암석이 있던 자 리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암석 옆의 지면이 움직였다. "흘흘, 과연 혈마지존답다. 그러나......" 파파파파팍! 돌연 흙덩이가 치솟아 오르며 일검사를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암기와 돌덩이들이 우박처럼 튀어오르며 한꺼번에 일검사를 향해 날아갔다. "하하하핫......" 일검사는 낭랑하게 웃으며 소매를 휘저었다. "강중패( 中覇) 혈마수(血魔手)!" 콰아앙...! 붉은 섬광이 작렬하며 굉음이 일었다. "크으으윽!" 참담한 비명과 함께 분수같은 선혈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자리에 한 명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일검사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 라보며 말했다. "장안은신술은 묘공(妙功)이긴 하지만 결국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 지." 그는 흑의인에게 웬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도리어 친근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졌... 소." 흑의인은 비틀거리는 신형을 가누며 일검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 다. "약속대로 주군(主君)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기이한 것은 그의 음성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젊은 청년의 음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얼굴에 덮어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그 속에 드러 난 얼굴은 뜻밖에도 불과 삼십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청년의 얼 굴이었다. 비록 푸른빛이 도는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꽤 준수한 용 모였다. 일검사는 흑의청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의 정체는?" "속하는 마영자(魔影子)라고 합니다. 본래는 불야성의 소성주였소 이다." "......!" 일검사는 흠칫했다. 마영자(魔影子)라면 불야성의 제이인자였다. 일명 마(魔)의 그림자라 불리우는 귀재로 불야성주 천년환사제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검사에게 무릎을 꿇다니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었다. 일검사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영자, 그대의 저의는 무엇이오?" "그 전에 주군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주군께서 꼭 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마영자는 스 스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일검사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으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말해 보시오." 마영자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속하의 부친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음." 일검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불야성을 내려다 보았다. 잠시 후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당신의 사연을 듣고 싶소." "좋습니다." 이윽고 마영자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 연은 그야말로 놀라운 비사(秘事)였다. ■ 등용문 제3권 제23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 -4 ━━━━━━━━━━━━━━━━━━━━━━━━━━━━━━━━━━━ 본시 불야성주 천년환사제는 흑도사파녹림(黑道邪派綠林)의 대부 (代父)로 만족했을 뿐 별다른 야심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방문한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그 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해쌍마제(四海雙魔帝)라고 했다. 이른바 무림에는 사해(死海)라 불리는 지역 두 곳이 있었다. 그 하나는 혈해(血海)요, 또 하나는 마해(魔海)였다. 혈해는 중원의 화북(華北)에 있다고만 알려졌다. 그리고 마해(魔 海)는 남해 일만리 밖의 해역에 있다는 마벽도(魔壁島)를 가리키 는 것이었다. 그 두 곳은 장구한 세월 동안 무림을 위협해 왔다. 그런데 바로 그 두 곳의 주인인 사해쌍마제가 불야성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들은 천년환사제를 도와 불야성을 무림제일지(武林第一地)로 만 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천년환사제는 그 제의를 거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해쌍마제는 끈질기에 회유했다. 결국 천년환 사제는 그들에게 설득 당해 승낙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들은 불야성을 기점으로 가공할 야망을 펼치기에 이르렀 다. 먼저 그들은 변방의 고수들을 초청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변황사패(邊荒四覇)의 가입으로 불야성은 과거에 비할 바없 이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천년환사제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변방의 고수들이 불야성으로 모여들며 점점 세력이 커져가자 그는 불안을 금치 못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도 중원인(中原人)이었다. 변방 고수들이 중원산하를 짓밟 는 것은 결코 찬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고 말았다. 사해쌍마제는 마침내 본 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천년환사제가 회의하는 기미를 보이자 전격적으로 그 를 제압하고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개국을 선포해버린 것이었 다. 불야성의 주인이었던 천년환사제는 한순간에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 것이었다. "......" 마영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일검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조화신무국은 중원정복을 노리는 변황 세력들이 그 실 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마영자는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검사는 분노를 느 끼며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감히 오랑캐들이 중원을 노리다니...... 용서할 수가 없군!" 그의 눈에서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렬한 신광이 뻗어나왔다. 마 영자는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이런 일을 예상하시지 못했습니다. 부디... 그 분을 용서해 주십시오." 일검사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마영자는 만면에 어두운 기색을 드러내며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일검사는 그제서야 안색을 풀며 싱긋 웃었다. "좋소. 당신을 보아서라도 그의 입장을 최대한 헤아려 보겠소." "고... 고맙습니다, 주군!" 마영자는 감격한 듯 절을 했다. 일검사 몸을 돌려 불야성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입가로 한 줄기 냉막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 조화신무국이라고? 그것이 얼마나 헛된 꿈인지 오늘 밤에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해주마." 그 말에 마영자는 흠칫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주... 주군 혼자서 말입니까?" "후훗! 나는 언제나 혼자였소." "......" 마영자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 으로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눈에는 일검사의 모습이 산 악처럼 거대하게 보이고 있었다. '아아...... 크다. 이제껏 수많은 기인을 보았으나 주군만큼 뛰어 난 기도를 지닌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때 일검사는 마영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조화신무국의 조직에 대해 알고 싶소." "조화신무국은......" 마영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일검사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머리 속에 담아 두었다. 불야성은 본래부터가 천하제일의 요새였다. 곳곳에 각종 기관과 진법이 배치되어 있어 보보마다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불야성은 더욱 무섭게 개조되었다. 아홉 개의 단(檀)이 동심원을 그리며 중앙의 조화신전(造化神殿) 을 감싼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조화구단(造化九 檀)이라고 했다. 조화구단은 다음과 같았다. 만검단(萬劍檀), 만독단(萬毒檀), 강시단( 屍檀), 인자단(忍者 檀)은 이른바 변황사패(邊黃四覇)의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 다. 그들은 천축(天竺)의 만겁마전(萬劫魔殿), 묘강(苗彊)의 만독궁 (萬毒宮), 청해(靑海)의 측천환마교(側天幻魔敎), 동영(東瀛)의 인자문(忍者門)이었다. 그 밖에 측천단(側天檀), 사해단(四海檀)이 있었는 바, 그들은 주 로 조화신무국에 새로 가입한 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만색단(萬色檀)은 삼백 년 전 중원을 색(色)의 요풍(妖風)으 로 뒤흔든 만색아수마궁(萬色阿修魔宮)의 색녀들이 포진되어 있었 다. 만색단은 주로 여색을 동원하여 조화신무궁에 무림인들을 끌어들 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암흑단(暗黑檀)은 전문 살수집단으로 은밀히 활동하며 조화신무국 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녹림단(綠林檀)은 흑도사도인들과 녹림인들이 소속된 집단으로 과 거의 불야성 고수들로 편재되어 있었다. 이렇듯 조화신무국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양대국왕과 그들의 측근을 떠나지 않는 구대봉공(九大奉公)이었다. 구대봉공의 무공은 가히 개세적 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조화궁(造化宮)에 거처하고 있다고 했다. 일검사는 마영자로부터 조화신무궁에 대해 설명을 들고 난 후 담 담히 물었다. "불야성주는 지금 어디에 있소?" "조화신전에 계십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감금상태와 다름이 없습 니다." 마영자는 침통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저 그를 만나야겠소." 마영자는 흠칫 놀랐으나 일검사의 눈에서 발산되는 신광에 그만 온몸이 조여들고 말았다. "마영자. 주군으로서 첫번째 명령을 내리겠소." 마영자는 그 위압적인 음성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복명!" "어느 정도 인원을 이끌 수 있소?" 마영자는 즉시 대답했다. "과거 불야성의 수하들 중 아직 절반은 이끌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오. 그들을 이끌고 즉시 이곳을 떠나시오." "어... 어디로 말입니까?" 마영자는 의아한 눈으로 일검사를 바라보았다. 일검사의 입가에는 추측할 수 없는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등용문(登龍門)으로." "등... 용문?" 마영자는 나직이 뇌까리며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서 는 도무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일검사는 그에게 전음술로 뭐라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마영자의 안색이 차츰 밝아지고 있었다. "속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는 힘차게 외치며 무릎을 꿇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행동을 개시하시오." "옛!" 대답과 함께 마영자는 한 줄기 연기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후 일검사는 천색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날이 새기 전에 시작해야겠군." 슥......! 그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한 마리 야조처럼, 아니 대붕(大鵬)처럼 그는 야천으로 솟아올랐다. 대체 어쩌려는 것일까? 정말로 단신으로 조화신무국 전체를 상대하려 한단 말인가? ■ 등용문 제3권 제24장 불야성주(不夜城主) ━━━━━━━━━━━━━━━━━━━━━━━━━━━━━━━━━━━ 조화신전(造化神殿). 이곳은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불야성의 다른 곳들과는 너무 도 달랐다. 다만 이곳만 어두웠다. 이곳은 철(鐵)로 축조되어 있었는데 주위에는 아홉 개의 동심원 형상으로 다른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건물들은 하나같이 황금대전(黃金大殿)들로 구궁(九宮)의 방위 로 조화신전을 감싸고 있었다. 이른바 조화구단(造化九檀)이라 부 르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수천수백 개의 매복이 처처에 산재되어 있어 한 발만 잘 못 딛어도 죽음의 함정으로 떨어지고 만다. 일보를 옮길 때마다 함정이요, 매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사 이 곳의 내부인이라 해도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한 발자국만 나간다 면 결코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조화신전은 밤이나 낮이나 항상 같았다. 신전 안쪽으로는 대낮에 도 햇볕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각종 기관장치로 차단되어 있는 이곳에 출입이 허용된 사람은 십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그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조화신전으로 침투하려면 반드시 조화구단(造化九檀) 을 지나야만 했다. 조화구단은 은연중 조화신전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스스...... 환영인가? 까마득한 야공 한가운데 인영 하나가 떠 있었다. 그 인 영은 야공에 정지한 채 조화신전을 내려보고 있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인간이 허공에 머무를 수 있다니! 이 불가사의한 신법을 구사하고 있는 자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는 허공 백장 높이에서 조화신전을 살펴보며 내심 뇌까리고 있었다. '먼저 천년환사제를 만나야 겠다. 그는 조화궁의 지리와 이곳의 양대국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천이통(天耳通)과 천안통(天眼通)을 발휘하여 공중에서 조화 신전의 곳곳을 빠르게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한 가닥 연기처럼 하강했다. 그는 조화신전으로 스 며들어 갔으나 아무도 그의 침투를 알아내지 못했다. "음......? 새가 날아갔나?"' 조화신전의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더 이상 기척이 없자 자신들이 착각을 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스스...... 일검사는 무사히 조화신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는 순간 그는 과연 조화신전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절감할 수 있 었다. 주위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완 벽한 정적 속에는 엄청난 살기(殺氣)가 팽배하게 깔려 있는 듯 했 다. 일검사는 잠형은둔술을 사용했다. "......" 지금 그는 철전(鐵殿)의 처마 밑에 유령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 런 상태에서도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주위를 훑고 있었다. '주위에 적어도 삼백 명 이상의 매복자가 있다. 그들은 윤회마륜 진(輪廻魔輪陣)을 펼치고 있다. 어디에도 허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땐 일부러 허(虛)를 만들어 그들이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 다.' 그는 처마 위에서 기왓장 하나를 떼어냈다. 이어 그는 전신에 자 전기(磁電氣)를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몸이 풍선같이 부풀어 오르며 눈에서 금광(金光)이 감돌았 다. 다음 순간 그는 기왓장을 슬쩍 허공으로 내던졌다. 위... 잉! 기왓장은 파공성을 내며 날아갔다. 이어 펑! 하는 폭음과 함께 폭 발하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생각대로 사방으로부터 흑의 복면인들이 어 지럽게 신형을 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침입자다......!" 그들은 분분히 외치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을 쳐라!" 문득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복면인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로 그때 일검사의 신형이 처마 아래서 연기처럼 흐려졌다. 스스스...... 그는 잠영환마보(潛影幻魔步)를 펼쳐 복면인들 사이를 스쳐 지나 갔다. 비록 수많은 복면인들이 있었으나 그의 존재를 눈치채는 자 는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마침내 일검사는 무수한 기관과 매복을 피해 조화신전 안으로 깊 숙이 잠입해 들어갈 수 있었다. '뱀을 잡을 때는 머리를 자르고, 적군과 싸울 때는 장수부터 잡는 법이지.'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계속 조화신전 안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암흑에 둘러싸인 조화신전은 그야말로 미로(迷路)로 얽혀 있었다. 그러나 기문진법에 통달한 그는 정확히 조화신전의 중심부로 접근 해갈 수 있었다. 얼마쯤 전진했을까? 마침내 그는 월동문(月洞門) 하나를 발견했다. 월동문이 나타나자 그의 신형은 박쥐처럼 천장에 달라붙었다. 월 동문 좌우에는 두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칠순 쯤 되어 보였는데 생김새가 거의 비슷한 금의노 인들이었다. 좌측의 노인은 왼손에 무엇인가 암기를 움켜쥐고 오른손에는 원앙 건곤권(鴛鴦乾坤圈)을 들고 있었다. 반면 우측의 노인은 은린탈혼 도(銀鱗奪魂刀)와 거치추혼도(拒齒追魂刀)를 동시에 들고 있었다. "......"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전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 습에 일검사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외문기공(外門奇功)을 익혔구나. 웬만한 도검은 몸에 들 어가지도 않겠구나." 일검사는 짧은 순간에 이미 그들의 내력을 간파해 냈다. '단 일 초에 제압해야 한다.' 일검사는 독하게 마음먹고 손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두 개의 작은 물건이 딸려 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비녀와 둥그스 름한 모양의 붉은색 금속판이었다. '마왕잠(魔王簪)과 혈리표(血狸飇)라면 저들을 일 초에 죽일 수 있다.' 설사 금강불괴지신이라도 박살낼 수 있는 두 개의 마병을 움켜쥔 그는 공력을 끌어 올렸다. 문득 그의 손이 달구어진 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위잉! 검은빛과 붉은빛이 섬전처럼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섬전일순이었 다. 두 노인은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이마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번연히 눈뜨고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들 은 여전히 월동문 좌우에 우뚝 서 있었다. 언뜻 보면 그들이 여전 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단히 두 노인을 해치운 일검사는 암기를 갈무리하고는 월동문을 통과했다. ■ 등용문 제3권 제24장 불야성주(不夜城主) -2 ━━━━━━━━━━━━━━━━━━━━━━━━━━━━━━━━━━━ 대전이 나타났다. 그런데 대전은 텅 비어 있었다. "......" 그러나 일검사는 전신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되는 것을 금치 못했 다. 비록 인영 하나 볼 수 없는 텅빈 대전이었으나 사람이 지키는 것보다 수백 배나 더 무서운 기관이 첩첩이 중복되어 있다는 것을 암중으로 느낀 것이었다. 잠시 대전을 둘러보던 그는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바닥을 밟지 않고 대전을 가로질러 좌측의 벽에 달라 붙었 다. 이어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벌어졌다. 그의 몸이 벽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츠츠 츠, 하는 미세한 음향과 함께 벽면에 미세한 금이 생기더니 곧 두 부같이 으깨어져 떨어져 내렸다. 실로 전대미문의 괴사였다. 일검사는 벽 속으로 파고들어 신형을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또 하나의 대전에 당도했다. 대전 중앙에는 하나의 호피를 씌운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 태 사의에는 흑삼을 걸친 한 명의 노인이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노인의 나이는 대략 육순에서 칠순 정도였으며, 움푹 들어간 눈과 날카로운 콧날, 얄팍한 입술이 음산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범상치 않은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노 인, 그가 바로 불야성주(不夜城主) 천년환사제였다. "......" 천년환사제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앉은 태사의 뒤 쪽 벽에는 금황빛의 여신상(女神像)이 새겨져 있었다. 여신은 천수(千手)를 지니고 있었다. 사방으로 뻗어내리고 있었 다. 그 손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야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손짓은 이제 허무할 뿐이었다. 천년환사제는 조화신무 국의 두 국왕에게 영어된 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 된 것이었다. '......!' 벽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일검사는 대전 안을 투시안으로 살펴 보다가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천년환사제가 있는 옆 벽면에는 서가(書架)가 놓여 있었다. 그 서 가에는 수천 권의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 책들을 살펴본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서책들은 모두가 무공비급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보통 비급이 아니었다. 상고비급에서 당금 무림 각대문파 의 비급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소림사(少林寺) 장경각(藏經閣)에 있어야 할 불문 정종 무학에서 무당(武當) 상청관(上淸觀)에 있어야 할 수백 권의 도가 연단경전(道家煉丹經典)들, 또한 속가(俗家)의 절학이 적힌 수천 권의 비급들이 빽빽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저 많은 비급들을 모았단 말인가?' 일검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불야성주가 문득 분노에 찬 중얼거림을 발하는 것이 들렸다. "날 허수아비로 만든 놈들......!" 그의 음성에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 그는 섬뜩한 광망을 발산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날 이곳에 가두었다고 불야성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고 생 각하면 오산이다. 흐흐... 너희들은 결코 이곳을 지배하지 못한 다." 그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계속 저주어린 중얼거림을 발하고 있었다. "흐흐, 네 놈들이 지금은 설치고 있지만 노부는 언제고 너희들을 모두 죽일 능력을 갖고 있다. 지금이라도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도 쉽다." 문득 그는 괴이한 표정으로 품 속에서 한 권의 붉은색 표지의 책 자를 꺼냈다. "이 책 속에 너희들을 몽땅 날려버릴 안배가 들어 있다는 것은 꿈 속에서도 모를 것이다." 그때였다. 문득 어딘가에서 한 가닥 착 가라앉은 음성이 울려왔 다. "천년환사제. 안됐지만 그 책자는 불초에게 넘겨 주어야겠소." 순간 천년환사제는 안색이 홱 변했다. "누...... 누구냐?" 슉! 벽면에 구멍이 뚫리더니 무형의 지강(指 )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무형의 지력이었으므로 천년환사제는 방비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곧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탁! 하고 그의 손에서 붉은 책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스....... 벽면으로부터 일검사가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천년환사 제를 바라보았다. 천년환사제의 발목에 한쌍의 금쇄(金鎖)가 채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로소 천년환사제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 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책자를 들어 펼쳐 보았다. "음......!" 책자를 읽은 순간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놀랍군! 이곳의 지하에 백만 근의 화약(火藥)을 매장해 놓 았다니......!' 그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리고 방금 전 천년환사제가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천년환사제는 여차하면 자신의 손으로 평생에 걸쳐 이룩한 불야성을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 었던 것이다. 한편 책자에는 화약이 매설된 위치는 물론 불야성 전체의 배치도 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불야성의 곳곳을 마음 대로 드나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일검사는 천년환사제를 힐끗 본 후 중얼거렸다. "과연 당신의 말이 맞소. 이것만 있으면 조화신무국을 한순간에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가 있겠구려." 문득 그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마영자!" "옛!" 스스......! 놀라운 일이었다. 한 소리 힘찬 대답과 함께 천장으로부터 누군가 연기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마영자였다. 일검사는 마영자에게 책자를 넘겨주며 물었다. "모두 들었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리라 믿소." 마영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는 일검사의 눈을 마주 보며 떨리는 음 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시간을 정확히 맞추시오. 모든 건 그대에게 맡기겠소." "알겠...... 습니다." 일검사는 문득 천년환사제를 내려다 보았다. "귀하는 야심을 품어 무림에 풍파를 일으켰지만 이것으로 죄과를 상쇄한 셈이 되었구려." "......" 그 말에 마영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천년환사제는 그의 부친이었다. 그는 다만 일검사의 선처를 바랄 뿐이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든 것은 그대에게 맡기겠소. 일이 끝난 후에는 예정대로 등용 문에 합류하시오." "옛." "그럼......" 스스...... 일검사는 말을 마침과 함께 다시 유령처럼 그곳에서 사라졌다. 마 영자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만면에 경탄의 빛을 떠올렸 다. "아아! 주군은 어쩌면 향후 무림의 지존이 되실지도 모르는 일이 다." ■ 등용문 제3권 제24장 불야성주(不夜城主) -3 ━━━━━━━━━━━━━━━━━━━━━━━━━━━━━━━━━━━ 스슷! 일검사는 한 절벽 아래 유령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깎아지른 듯 위태로운 절벽이 솟아 있었으며 주위에는 흑 무(黑霧)가 짙게 깔려 있었다. 우우웅...... 쿠르르......! 은은한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태양신기(太陽神氣)와 태음신기(太陰神氣)가 서로 어우 러져 있다. 이런 진법(陣法)은 가히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으로 자연지물(自然之物)을 이용했기 때문에 파해방법은 없다. 있다면 정면으로 뚫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일검사의 안색이 침중해지고 있었다. '조화동(造化洞)이 있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백여 군데 매복을 뚫 고 들어왔는데 또다시 이런 관문이 가로막고 있다니......' 그는 미간을 좁히며 자욱한 흑무를 바라보았다. 극성을 지닌 두 가지 기운이 한데 모여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기운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결코 피하지 않겠다.' 일검사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흑무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꽈르르... 릉! 가공할 폭음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그가 흑무 속으로 진입한 순간 사방으로부터 전신을 으깰 듯한 엄청난 압력이 밀려 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만상자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다소 압력이 줄어드는 듯 했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정면돌파밖에는.' 일검사는 온몸이 터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흑무 속을 전진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천만근의 추(錘)를 다리에 달고 있는 듯 이 힘겨웠다. 꽈르르... 릉...! 우르르......! 무시무시한 거력(巨力)이 그의 몸을 강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으으......" 고통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 다. 이곳에서는 경신술이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콰르르...... 엄청난 거력이 그의 전신을 짓누르자 자전기마저 흐트러지려 했 다. 일검사는 이를 악물며 고통에 대항했다. '지... 지독하구나.' 그러나 그는 점차 압력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외부의 압력 에 대항하여 그의 내부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아직 녹지 않고 있던 만년지극화룡(萬年地 極火龍)의 내단이 외부의 압력을 받아 서서히 녹고 있었다. 그로 인해 차츰 고통은 사라지고 상쾌한 기운이 전신에 충만해 갔 다. 일검사는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얼마쯤 전진했을까? 이윽고 압력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마침내 그는 천지조화가 만들어낸 압력을 물리친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하나의 동구(洞口)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없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바깥과는 완 전히 딴판이었다. 천장과 벽면에는 아름다운 석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그 형상은 실로 기기묘묘하여 그야말로 신의 걸 작품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조화동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일검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는 풍 경에 현혹되면서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후두두두둑! 문득 박쥐들이 소스라쳐 날아 오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름모 를 곤충들이 바닥을 기어다니는 것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름모를 거대한 짐승들의 화석(化石)이 여기 저기서 발견되기도 했다. 동굴 벽면에서는 휘황한 빛이 비춰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수정석(水晶石)에서 반사되는 것이었다. 얼마 후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열 갈래가 넘게 길이 나누어 지고 있었다. "......" 일검사는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판단 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문득 한쪽 통로로부터 미약한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왔 다. 만일 그에게 천이통이 없었다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는 숨 소리였다. 그는 오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 잠시 후 그는 경이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뼈를 얼릴 듯한 혹독한 냉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가히 만년빙한지가 뭉쳐있는 듯한 곳으로 벽면은 물론 천장과 바 닥이 온통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혀 있는 곳이었다. 만일 일반 사람이었다면 냉기를 접하는 순간 얼음덩어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검사는 도리어 시원함을 느끼며 안쪽으 로 계속 들어갔다. "정말 기이한 곳이군!" 그는 탄성을 발했다. 사방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힌 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그는 얼음의 광장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광장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커다란 화로였다. 더더욱 기이한 것은 화로 앞에 앉아 있는 한 명의 노파였다. 노파 는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화로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보기 흉하게도 알몸이었다. 노파의 몸은 장작처럼 말라 있었다. 앞가슴은 빈자루처럼 축 처져 있었고 피부는 자흑색을 띄고 있었다. 또한 머리카락은 시뻘건 적 발이었다. 놀라운 것은 노파의 손톱이었다. 그녀는 다섯 자가 넘는 긴 손톱 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검사는 이 괴이하기 그지없는 노파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그야말로 꿈에 볼까 두려운 마녀로군.' 이때, 노파가 인기척을 느낀 듯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노파의 눈에서 시뻘건 광구(光球)가 뻗쳐 나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마 귀에게서나 봄직한 가공할 마안(魔眼)이었다. "클클......! 조화동으로 들어오는 길은 걸어서 오는 길과 가루가 되어서 오는 길 두 가지 뿐인데 가루가 되지 않고 멀쩡히 걸어오 는 자가 있다니......!" 흡사 뻐꾸기 울음소리 같은 괴악한 음성이었다. 노파는 일검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괴소를 흘렸다. "클클... 애송이로군.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잘 왔다. 오랫동안 불덩이 위에 앉아 있기만 해 적적했는데... 클클 클...... 네 놈을 데리고 몇 년간 놀아야겠다." 이어 그녀는 음침한 눈빛으로 일검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주 미끈하게 생긴 쓸만한 아이구나!"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역겨워 일검사는 절로 안색을 찌푸렸다. '고막이 갈라지는 것 같구나. 다만 음성만으로 이런 충격을 주다 니... 결코 중원무학은 아니다.' 이때 노파는 여전히 뻐꾸기가 울부짖는 듯한 괴이한 음성으로 말 했다. "클클클... 노신은 백 년 동안 불사의 신체를 단련시켰다. 또한 천년마로(天年魔爐)에 백 년간 앉아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얻지 못 했던 한 가지 마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 되었지. 그로 인해 조화신무국의 두 국왕에게 초빙되어 구대 봉공(九大奉公)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지." 그녀는 득의의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일검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 한 마디 할까 하오." 노파는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냐? 꼬마놈아?" "후후,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는 것이오. 오직 우물 천장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있을테니 말이오. 바로 당신이 그런 경우요." "뭐... 뭣이?" 노파의 안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주름살 투성 이인 노파의 얼굴은 마치 구겨진 종이처럼 되고 말었다. "꼬마야! 너 미쳤느냐? 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후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소. 하지만 난 같은 말은 반복하지 않소. 한 마디만 더 해주겠소. 당신의 그 같잖은 무공 따위로 천 하십대고수 운운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오." "뭐... 뭐... 뭣?" 노파는 너무나 화가 나 마치 귀에서 연기가 나는 듯 했다. 분노로 인해 전신을 떠는 바람에 자루처럼 늘어진 유방이 심하게 덜렁대 기까지 했다. "너... 너는 노신이 익힌 무공을 알기나 알고 하는 소리냐?" 일검사는 냉오하게 웃었다. "훗훗, 그 알량한 무공 말이오?" "뭣이? 정말 안단 말이냐?" 노파의 갈라지는 음성에는 경악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곧 그 럴 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지 마라! 클클... 정말 알고 있다면 네 놈을 고통없이 죽게 해주마." 일검사는 문득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당신이 익힌 것은 마염화강공(魔焰火 功)으로 청 해(靑海)의 측천환마교의 마공이 아니오?" "......!" 순간 노파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염화강공(魔焰火 功)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마공(魔功)이었다. 그것은 만년오금철도 녹일 수 있다는 천년마로의 불꽃으로 십 년 간 신체를 단련해야 고작 이성(二成)의 성취를 얻을 수 있는 천하 에게 가장 지독한 외문마공이었다. "으으... 꼬마놈의 식견이 보통이 아니군." 푸스스스스! 돌연 노파의 적발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그녀는 흉흉한 살광을 번쩍이며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일검사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당신이 내 신분을 안다면 지금처럼 편안히 앉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오." "뭐라고? 이... 발칙한 놈!" 노파는 눈썹을 부르르 떨며 대노했다. "대체 네 놈은 누구냐? 어서 이실직고해라!" "하하! 혈마지존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학! 네... 네가 혈마지존이라고?" 노파는 경악성을 발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 바람에 위로 곤두선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녀는 일검사를 노려보며 갈가마귀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클클클! 제 발로 잘도 찾아왔구나. 이번 기회에 노신이 네 놈을 죽여 공을 세워야 겠다." 휘류류륭......! 돌연 시뻘건 천년마로의 불꽃이 크게 치솟아 올랐다. 노파가 내공 을 일으킨 것이었다. 노파는 비쩍 마른 양손을 쭉 뻗었다. 화르르르릉! 그러자 시뻘건 불기둥이 일검사를 향해 화룡(火龍)처럼 덮쳐왔다. 일검사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거대한 불기둥이 코 앞까지 다가 오도록 미동도 않다가 가볍게 입술을 벌리더니 훅! 하고 입김을 불어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입김을 받은 불기둥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노파는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그게 무슨 수법이냐?" "후후...... 순양일기공(純陽一氣功)이라는 것이오. 천하에서 가 장 지순한 기운이기에 마화(魔火)를 소멸시켜 버린 것이오." 일검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어 그는 노파를 향해 저벅저 벅 다가갔다. "이... 이......!" 노파는 부르르 전신을 떨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일검사의 태도에 격분을 금치 못했다. 문득 그녀는 다섯 자가 넘는 손톱을 세우더니 일제히 뻗어냈다. 파파파팍......! 날카롭기가 독수리 발톱보다 더한 괴노파의 열 개의 손톱에서는 가공할 묵강(墨 )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일검사는 냉랭하게 웃었다. "훗훗! 제법이지만 혈문(血門)의 한 가지 수법만은 못할 것이오." 그는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며 슬쩍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나 그 위력은 엄청났다. 혈선이 전광처럼 뻗어나간 순간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노파의 참 담한 신음이 울렸다. "으으... 백 년 동안 기른 철지(鐵指)가 다 빠져 버리다니... 으 으......" 노파의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향해 빳빳이 곤두섰다. 일검사의 일지는 운중비(雲中秘) 탄지혈통이었다. 혈문 최강의 무 공이었던 것이다. "으드득... 네 놈을 죽이겠다. 노신의 혈발로 십만 개의 구멍을 뚫어주마!" 그러나 일검사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문득 그의 자세 에 허점이 생겼다. 일시적으로 방심한 것일까? "이 놈! 죽어라!" 노파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혈발(血髮)이 춤추듯 출렁이며 일시에 일검사를 덮쳐갔다. 촤아아아아! 실로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일검사는 어깨를 으 쓱하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살중살(煞中煞) 월영살(月影煞)!" 그의 입에서 짤막한 음성이 떨어진 순간 금광이 둥글게 퍼져 나갔 다. 파파파파팍! 놀라운 일이었다. 허공 가득 뒤덮었던 노파의 혈발이 금광에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하......! 내 보기에 천하십대고수가 되려면 아직 멀었소." 일검사의 낭랑한 웃음과 함께 노파의 혈발은 무참하게 가루로 화 해 흩어지고 말았다. 노파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튕겨 나왔다. "빠드득......!" 그녀는 무섭게 이를 갈아붙이며 쌍수를 한데 합했다. 콰콰콰......! 가공할 묵강(墨 )이 기둥을 형성하더니 일검사를 향해 폭사되어 갔다. 일검사는 눈썹을 꿈틀하며 다섯 손가락을 튕겼다. 쩌정! 쩡......! 하는 요란한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케에엑!" 묵강의 기둥이 도중에서 기세가 꺾이며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놀라운 일이었었다. 노파의 몸뚱이에는 다섯 개의 피구멍이 뻥 뚫 려 있었다. "큭... 이... 이게 무슨 수법이지?" 그녀는 입과 코로 선혈을 줄줄 흘리며 간신히 물었다. "동금지(銅金指)." 스스......! 일검사의 몸이 깃털처럼 둥둥 뜬 채 노파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 다. 쿵! 그가 스쳐간 순간 노파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엎어지고 말 았다. ■ 등용문 제3권 제25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붕괴(崩壞) ━━━━━━━━━━━━━━━━━━━━━━━━━━━━━━━━━━━ 일검사는 조화동의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문득 그는 통로가 다른 곳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 은 인공을 다듬은 곳이었는데 마치 칼로 잘라낸 듯 매끄럽게 닦여 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형을 멈추고 서서히 앞으로 전진해 갔다. 얼마 후 두 갈래 길로 나뉘어지는 지점이 나타났다. 바로 그때였 다. "으음. 청해파파(靑海婆婆)를 간단히 죽이다니... 어린 놈이 보기 보다 강하군."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울려왔다. 이어 통로를 막아서는 인영이 있었다. 그 자는 일신에 황색가사를 걸친 비대한 체구의 라마승이었다. 그의 체구는 보통사람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거구였다. 반면 눈 은 단추구멍만 했으며, 그 사이로 새파란 안광이 비수처럼 번쩍이 고 있었다. 전신에 디룩디룩 살이 찐 라마승은 일견하기에도 중원인이 아니었 다. 그의 벽안(碧眼)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신은 또 어떤 고인이시오?" 일검사는 담담히 물었다. 그러자 라마승은 눈을 반달처럼 가늘게 하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 너는 만겁존자(萬劫尊者)란 고명을 들어본 적이나 있느 냐?" 만겁존자라면 천축제일의 마궁(魔宮)인 만겁마궁(萬劫魔宮)의 궁 주(宮主)였다. 그의 무공은 천축 최고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천하십강(天下 十强)으로 초청받은 후 조화신무국의 구대봉공(九大奉公)이 된 인 물이었다. 그는 천축의 절기인 용형대마인(龍形大魔印)을 십이성 완성한 절 정고수로 조화신무국에 가입한 대가로 얻은 혈마극경(血魔極經)에 서 화력신공(火力神功)과 혈영마강(血影魔 )을 십성 익혀 예전보 다 두 배나 강해진 상태였다. "흐흐, 왜 말이 없느냐? 너무나 놀래 전신이 얼어 버리기라도 했 느냐?" 만겁존자의 비웃음에 일검사는 피식 웃었다. "후훗, 이제보니 구대봉공이란 하나같이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존 재들이구려. 게다가 천하십강이니 십대고수니 하는 부류에 억지로 들려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그러오." "뭣이?" 만겁존자의 실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그러나 부릅떴다고 해야 그 저 약간 눈까풀이 들려졌을 뿐이었다. 지나친 모욕으로 인해 그의 비대하게 살찐 턱살이 푸들푸들 경련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만겁존자는 문득 솥뚜껑같이 거대 한 손바닥으로 번들번들한 대머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정말 간이 큰 놈이군. 흘흘......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 대다니, 내 네 놈의 주둥이를 다시는 열지 못하게 해주마." 그 말에 일검사는 문득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만겁존자, 한 가지만 묻겠소." "무엇이냐?" "당신은 청해파파보다 얼마나 강하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만겁존자는 흠칫하는 듯 했으나 곧 괴소를 흘렸다. "흘흘...... 그 노파는 본 존자에 비한다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어찌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검사는 문득 난처한 표정 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 참 이상하구려. 그렇게 무공이 차이가 난다면 어째서 같은 구대봉공에 들어 있소? 그나저나 당신의 무공이 그렇게 높다니 사 해쌍마제(死海雙魔帝)를 죽이러 왔다가 그만 당신의 손에 죽게 될 지도 모르겠구려." "......!" 그 말에 만겁존자는 처음으로 안색이 변했다. 그는 일검사가 사해 쌍마제를 죽이러 왔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한 느낌이었다. 사해쌍마제가 누구인가? 바로 그를 초빙한 조화신무국의 양대국왕 이 아닌가? 비록 상대의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는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때 일검사는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눈 앞에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그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이... 이 놈이!' 만겁마존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일검사가 다가오자 마치 거대한 바위가 다가오는 듯한 위압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안색이 변한 채 내심 부르짖었다. '으으... 어린 놈이라 별 것 아닐 줄 알았는데... 정말 혈마지존 이란 말인가?' 마침내 만겁존자는 이제까지 경시하던 마음을 버리고 전신을 긴장 시켰다. 그는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으로 자욱한 혈무(血霧)가 피어올라 주위 삼장을 뒤덮었다. 일검사는 문득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시간이 없어 당신과 놀아줄 수가 없소. 그러니 일초 에 승부를 걸어 보겠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일검사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혈마절 학 중 혈영은형신보(血影隱形神步)와 혈영미리보(血影迷離步)를 동시에 펼친 것이었다. 순간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다. 상대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 져버린 것이엇다. "이... 이 놈이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그는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꽈아아앙...! 고금에서 가장 강하다는 지옥혈마공(地獄血魔功)이 가공할 위력으 로 만겁존자를 격중시켰다. "케... 에에... 엑!" 만겁존자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몸뚱이가 으스러 져 버렸다. 그의 몸은 그대로 날아가 석벽 속으로 파고들어 자취를 감추고 말 았다. 대항하고 말고가 없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구대봉공 중 일인인 만겁존자는 너무도 간단하 게 황천길로 가버린 것이었다. "쯧,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당신과 놀아줄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소." 일검사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작 세 걸음 정 도 걸었을 때였다. 떼에앵! 띵...... 띠딩......! 문득 심혼을 뒤흔드는 종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파(琵琶) 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 음은 기이하게도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 다. '음......?' 일검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문득 각각 다른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혈마지존, 너는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호호호! 여기까지 온 것은 가상하다만 우리들이 있는 한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것이다." "......" 일검사는 잠자코 기다렸다. 문득 한 가닥 미풍과 함께 눈 앞에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각각 흑의와 백의를 입고 있었다. 대조적인 옷색깔이었 으나 용모만은 하나같이 절세미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삽십 전후로 보였으며 둘 다 전신에 교태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풍염한 몸매는 가히 폭발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졸라맨 허리는 한 줌밖에 안되었으나 가슴은 터질 듯이 풍만했고 둔부도 확 퍼져 있었다. "호호호호! 이제보니 아주 귀여운 사내로군! 안그래요, 언니?" "호호... 그렇구나, 사로잡아 종으로 삼아야 겠다." 흑의녀와 백의녀. 그녀들은 일검사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허리를 묘하게 비틀어대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녀들의 음성을 듣는 순간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놀라운 섭혼마음(攝魂魔音)이구나. 내공이 약했다면 여지없이 무 릎꿇을 뻔 했구나.' 그는 자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졌 다. 그는 두 여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 분은 또 어떤 분이시오?" 흑의녀는 오른손에 금종(金鐘)을 들고 있었고 백의녀는 비파를 안 고 있었다. "호호, 너는 혼천마종(混天魔鐘)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 "깔깔... 천락비파(天樂琵琶)는?" 일검사는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고보니 두 분은 만색아수마궁(萬色阿修魔宮)의 두 분 궁주이셨 구려? 혼천마녀(混天魔女)와 천마요희(天魔妖姬)의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소이다." 혼천마녀와 천마요희는 만색아수마궁(萬色阿修魔宮)의 궁주들로 색공(色功)과 음공(音功)으로 이미 수십 년 전 천하를 주름잡았던 전설의 여마(女魔)들이었다. 이때 금종을 든 여인, 즉 혼천마녀가 고혹적인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는 우리들을 알면서도 어찌 무릎을 꿇지 않느냐?" "호호! 얘야, 세상의 즐거움을 죽도록 누린 후에 널 고통없이 죽 여줄테니 이만 누님들에게 굴복하는 게 어떠냐?" 천마요희도 교소를 흘려내며 말했다. 그 말에 일검사는 빙긋이 웃 었다. "사실 나도 누님들과 한바탕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소이다." "호호... 그래?" 천마요희가 먼저 꼬리를 치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녀는 앞가슴을 내밀며 흔들어 댔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젖가 슴이 출렁거렸다. "이 누님이 너 하나쯤은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지. 어때? 지금이 라도 누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천마요희는 슬쩍 요대를 끌렀다. 그러자 백의가 사르르 벌어지며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나신이 드러났다. 실로 찬탄할 만한 풍만한 여체였다. 젖가슴은 풍만하다 못해 터질 듯 했으며 잘록한 허리 아래로는 신비의 숲이 짙게 우거져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듯 했다. "흠." 일검사는 천마요희의 나신을 서서히 감상한 다음 이번에는 시선을 혼천마녀에게 옮겼다. "누님의 몸매는 어떨지 모르겠소?" 그 말에 혼천마녀는 양팔을 활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흑의가 활 짝 펼쳐지며 역시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드러났다. 흑의와 대조적으로 눈부시게 흰 여체가 드러났다. 그녀 역시 천마요희에 뒤지지 않는 뇌쇄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었 다. 특히 그녀의 아랫배에는 두 마리의 뱀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뱀은 허리를 휘감은 채 혀를 날름거리며 사타구니 사이로 삼각형 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실로 섬뜩하면서도 아찔할 정도로 충격적인 문신이었다. "호호, 원한다면 우리 둘이 널 극락으로 보내주마." 일검사는 그녀의 몸매를 찬찬히 감상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소이다." "왜 안된다는 것이냐?" 두 마녀는 거의 동시에 물었다. "후훗! 불초가 아무리 여색에 굶주렸다고는 해도 어찌 할망구와 놀아날 수 있겠소? 비록 껍데기는 그럴 듯하나 창자는 백년이 넘 게 묵었으니 반쯤은 썩었을 것이 아니오? 그럴 듯한 가슴도 실은 만지기만 해도 자루처럼 늘어질테니 어디 재미가 나겠소?" "......!" 두 마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련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신랄무비한 모독이었다. 모독도 이런 모독은 평생 처음 듣는 것이었다. 사실 두 마녀의 실 제 나이는 팔순에 달하고 있었다. 다만 채양보음술과 특수한 주안 법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이이......!" "캬아아아악!"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 두 마녀는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 다. 뗑! 뎅......! 띠디딩! 디디디딩! 영혼을 흔드는 듯한 마종음(魔鐘音)과 귀청을 찢는 듯한 비파음이 동시에 울리며 흑의와 백의가 어지럽게 휘날렸다. "찢어 죽이리라!" "네 놈의 몸을 토막내 개먹이로 삼겠다!" 꽈르르르릉! 천번지복하는 굉음(轟音)이 울렸다. 세 개의 인영이 허공에서 찰 나적으로 교차했다. 그 가운데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궁궁을을(弓弓乙乙)...... 팔만사천검(八萬四千劍)......!" 파파파팍...! 허공에 팔만사천 가닥의 눈부신 검기가 가득 퍼져 올랐다. 그것은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참혹한 두 마디의 날카로 운 비명이 울렸다. "캬아아악!" 놀라운 일이었다. 혼천마녀와 천마요희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흔적도 사라진 것이었다. 파아아......! 다만 자욱한 혈무만이 허공에 퍼졌다. 그녀들은 일검사의 검법에 전신이 미세한 핏방울이 되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인영 하나가 비틀거리며 내려섰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으음, 무서운 음공이었다. 방심한 탓도 있지만... 과연 여마들 답구나......." 바로 그때였다. 쐐애애애액! 문득 가공할 파공성이 그의 등 뒤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등이 화끈하게 갈라지는 고통이 일어났다. "큭!" 일검사는 입으로 피를 뿜으며 앞으로 대여섯 걸음이나 밀려나간 후 간신히 신형을 멈추었다. 그는 서서히 뒤로 돌아섰다. 그때 누군가의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럴 수가......! 건곤파천도(乾坤破天刀)를 맞고도 죽지 않다 니......?" 일검사는 그 자를 볼 수 있었다. 통로에 나타난 자는 오른팔이 없 는 독비노인으로 봉두난발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자는 얼굴에 칼자국이 수백 개나 그어져 있어 꿈에 볼까 두려 울 정도로 추악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오...... 오늘을 위해 단 일도(一刀)밖에 익히지 않았는데... 오 십 년 동안...... 단 일도밖에 익히지 않았거늘......" 그자는 회의와 불신으로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기형도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 으로 폭이 한 자나 되며 반면 길이는 고작 한 자 반에 불과한 것 이었다. 일검사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일도는 과연 대단했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등줄기가 반이상 갈라져 있기 때문이었다. 혈마불괴지신을 격파할 정도로 강한 일도의 공격에 그는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오오......! 놀라운 일이었다. 본시 괴인은 동영(東瀛)의 인자 출신이었다. 그는 오십 년 전 마 벽도(魔壁島)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벽도주 해궁랑(海弓郞) 으로부터 단 일식의 도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도법을 위해 그는 오른팔을 잘라내야 했다. 그것은 좌수도(左 手刀)였기 때문이었다. 일도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므로 그는 평생동안 오직 그것만을 익혔다. 그런데 일명 사천일도(死天一刀)라 불리우는 도법을 펼치고도 상 대를 죽일 수 없었다니,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때 일검사는 입가의 피를 손으로 쓱 닦으며 나직이 웃었다. "후훗, 오직 일식밖에 익히지 않았다니 내겐 정말 다행이구려. 하 지만 다시 한 번 견식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그 말에 괴인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두 눈에 강렬한 혈광을 폭사 했다. 괴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대답 대신 건곤파천도를 치켜 세웠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가득했다. 츠으으으......! 대기를 가를 듯한 무시무시한 도기가 일검사의 전신을 파쇄할 듯 밀려 나왔다. 일검사는 내심 긴장했다. '정말 지독한 도기로구나. 이 자야말로 내가 만난 자들 중에서 가 장 강한 고수로구나.' 만일 일반고수였다면 도를 전개하기도 전에 다만 그 기운만으로 피를 토하고 거꾸러졌을 것이다. 일검사도 방심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상대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고 싶었다. 스슷, 하는 음향과 함께 그의 손에 창궁검이 쥐어 져 있었다. 창궁검을 움켜쥔 그의 자세가 기이하게 흐트러졌다. 괴인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는 일평생 도법만을 익힌 인물이었다. 따라서 일 검사의 자세를 통해 허점을 놓치지 않고 본 것이었다. "크크크...... 사천일도!" 파츠츠츠츳...! 건곤파천도가 가공할 도기를 뿜으며 번쩍 일검사의 심장을 향해 파고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일검사의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단검(下斷劍) 허결(虛訣)에서 중단검(中斷劍) 절결(絶訣)이 다!" 그의 낭랑한 음성이 유유하게 장내를 흔들었다. 번쩍! 섬광(閃光)이 작렬했다. 그것은 암천으로부터 한 가닥 뇌전이 떨 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사천일도와 창궁무적일기검이 격돌한 것이었다. 아무런 파열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 괴인이 쥐고 있던 건곤파천도가 끝부분부터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 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 악!" 괴인의 입에서 문득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건곤파천도가 자루까 지 가루가 되고, 그의 손목에서 팔뚝, 어깨까지 그대로 흔적도 없 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잠시 후 괴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하나밖에 없는 왼쪽 팔이 어깨 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두 팔을 잃은 채 앞으로 쓰러졌고 영 원히 일어설 줄을 몰랐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 중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 일검사는 창궁검을 거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등용문 제3권 제25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붕괴(崩壞) -2 ━━━━━━━━━━━━━━━━━━━━━━━━━━━━━━━━━━━ 일검사는 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런데 한 마장 쯤 달렸을 때였다. 웅후한 음성이 그를 가로막았다. "서라! 남마제(南魔帝) 천강대제(天 大帝)다!" "북마제(北摩帝) 건곤마제(乾坤魔帝)도 있다!" "동마제(東魔帝) 무극마제(無極魔帝)를 아느냐?" "서마제(西魔帝) 섬수마제(閃手魔帝)가 널 오랫동안 기다렸다!" "......!" 일검사는 어둠 속에 우뚝 선 채 그들의 향방을 가늠했다. 그러나 사방 어디서도 상대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사방으로부 터 가공할 압력만이 밀려들고 있었다. 우르르르르......! 그 압력은 점차 거세지더니 갑자기 폭발하듯 십 배가 강하게 일어 나며 그를 향해 일시에 쇄도해왔다. 꽈르르르릉! 그야말로 가공할 공격이었다. 일검사는 전신이 터져나갈 듯한 고 통을 느끼며 쌍장을 뻗었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일검사는 허공으로 붕 떠서 날아갔다. 그의 가슴에는 네 개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는 맞은편 석벽에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크크...... 조화신무국의 사대호법의 천년내공에도 몸이 부서지 지 않다니 대단한 놈인데......" "클클...... 아깝기는 하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슷! 네 가닥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잘보아야 십오륙 세를 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백오십 세를 넘긴 전대의 거마들이었다. 각각 청백흑적의 옷을 입은 그들은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들어 선 자들이었다. 이때였다. "훗훗...... 무의 최상승 경지에 들어서고도 도리를 모르다니, 당 신들이야말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이오." "......!" 네 노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눈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일검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때 천장으로부터 한 가닥 웅혼한 음성이 울렸다. "창(蒼)... 궁(穹)... 무(無)... 적(敵)... 일(一)... 기(氣)... 검(劍)...!" 한순간 무시무시한 검강(劍 )이 우박처럼 허공으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파츠츠츠... 츳!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검법이 펼쳐진 것이다. "크아아아악!"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이 부신 검강 속에서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이어졌다. "......." 정적이 깔렸다. 그 자리에 일검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묵묵히 바닥을 내려보 고 있었다. 네 명의 노마들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검사는 몸을 돌렸다. 그가 돌아선 순간 노마들의 몸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들은 눈 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일검사는 비틀거리며 다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가슴에 은은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으음...... 조화신무국의 힘이 이리도 강하다니...... 십만 근 화약의 폭발과 지진 속에서도 끄덕없는 내가 이런 낭패를 당하다 니......'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강한 투지(鬪志)가 끓어 올랐다. 얼마쯤 갔 을가? 문득 음산한 마기(魔氣)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안쪽으로부터 한 줄기 궁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의 야망(野望)을 삼십 년 늦추는 놈이 있다니... 백 년 동안 안배해온 야망을 감히 가로막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 "흐흐... 비록 천하제일의 근골(筋骨)을 지닌 놈이나 길이 다르니 죽일 수밖에 없구나!" 각각 다른 두 가지 음성이었다. 한 음성은 궁량했고, 또 다른 음 성은 가래가 끓는 듯 듣기 거북했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들은 순간 일검사는 기혈이 격탕하는 것을 느꼈다. '구대봉공(九大奉公)은 내 손에 모두 죽었다. 그렇다면......' "누구요? 그대들은?"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누구냐고? 바로 네가 찾는 사람이니라." 궁량한 음성이 그렇게 대답했다. 일검사는 차갑게 말했다. "후훗......! 그렇다면 조화신무국의 양대국왕이겠군." "흐흐흐...... 용기가 있다면 짐이 있는 곳으로 오너라." 일검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기다리시오." 그는 신형을 날렸다. 지독한 흑무(黑霧)였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흑무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일검사의 신안(神眼)으로도 고작 삼보(三步) 앞밖에 투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검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웅...... 웅......! 기이한 진동음이 울려 그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했다. 이때 다시 예의 궁량한 음성이 울렸다. "좌삼우사(左三右四)...... 좌향칠진(左向七進)...... 우향십육진 (右向十六進)......" 일검사는 순간 최면에 걸린 듯 따라 되뇌였다. "좌삼우사...... 좌향칠진......" '몽롱하다...... 마치 내 영혼을 끌어당기는 듯하다...... 무서운 힘이 날 부르고 있다......' 일검사는 느릿느릿 시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흡사 꿈 속에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고 의지가 스러지는 듯했다. 그대로 일각만 지난다면 필시 그는 백치가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때 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신비지력이 가해지며 영성이 떠올랐다. 그것은 언제나 그를 도와주는 자전기(磁電氣)의 기운이었다. 마침 내 그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으으...... 지옥혈마공(地獄血魔功)이 천하제일의 마공(魔功)인 줄 알았는데 더 강한 마공에 제압당하다니......' 일검사는 자전기를 전신에 유도시키자 혼탁해졌던 정신이 다시 맑 아짐을 느꼈다. 그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더 이상 그를 유 혹하는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결국 그는 하나의 문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문은 넓이가 오장(五丈), 높이가 육장(六丈) 쯤 되는 거대한 철문 (鐵門)이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5장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붕괴(崩壞) -3 ━━━━━━━━━━━━━━━━━━━━━━━━━━━━━━━━━━━ 철문 위에는 강철 편액이 걸려 있었고 그곳에 큼직한 전서체가 쓰 여 있었다. <조화신마전(造化神魔殿).> 일검사는 안색을 굳혔다. "이곳이군!" 그는 가슴 속에 더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올 때까지 온 것이었다. 그는 철문을 노려 보았다. 천신만고 끝에 결국 조화신무국의 중심 부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이때 어디선가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허허...... 놀라운 일이로다. 팔성(八成)의 마마윤회만겁공(魔魔 輪廻萬劫功)을 깨고 이곳까지 오다니......!" "흐흐...... 놈은 과연 천하제일의 내공(內功)을 지녔군......" 일검사는 다시 정신이 흐트러지는 느낌을 받으며 눈썹을 잔뜩 찌 푸렸다. 단지 음성만으로도 압도당하다니...... 그는 무림출도 이래 최대 의 적수를 만난 것이었다. 이때, 철문 안으로부터 다시 두 마디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들어와라. 네가 어떤 아이인지 보고 싶다." "크크...... 잘만 하면 우리들의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겠다. 구 대봉공(九大奉公)을 모두 죽였으니 네가 대행해야 한다......" "으으......" 일검사는 진기의 역행을 억누르느라 신음을 흘렸다. 이때였다. 기... 잉...... 그그그... 긍...! 거대한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철문이 열리는 순간 일검사는 몸 안의 기운이 가공할 마기(魔氣)의 영향을 받아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고 휘청거렸다. "우으......!" 그가 참담한 신음을 발하자 부드러운 음성이 그를 인도했다. "오너라." "기다렸다... 만고기재(萬古奇才)... 어서 오너라. 크크크, 역시 생각대로 멋진 놈이구나...!" 철문 안의 두 괴인, 즉 조화신무국의 양대국왕은 한눈에 일검사가 마음에 든 듯 말하고 있었다. 우르... 르... 르... 르......! 그러나 그들의 중얼거림에는 가공할 진력이 포함되어 있어 석부가 온통 무너질 듯 진동했다. 석부 안은 시커먼 암연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검사는 이를 악물고 안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 다. 콰츠츠츠...!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운과 암연이 상충하여 가공할 굉음(轟音) 을 냈다. '이럴 수가......! 지옥혈마공이 밀리다니......'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까지 지옥혈마 공을 누르는 마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그는 간신히 자전기의 신비한 기운으로 인해 버티고 있었다. 콰르르르......! 가공할 기운이 거력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만일 그가 계속 끌려 간다면 그의 몸은 박살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일검사는 자전 기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파팍...... 그의 발이 땅 속으로 박혀들고 있었다. 이때 경이롭다는 듯 중얼 거림이 들려왔다. "제법이군......." "지옥혈마공 따위로는 결코 버틸 수 없을텐데......?" 그 말에 일검사는 분노를 느꼈다. 쿠쿠쿠......! 암연이 일으키는 압력은 더욱 가공할 흡인력을 일으키며 소용돌이 쳤다. "크으윽......" 일검사는 온몸이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피란 피는 온 통 머리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귓속이 윙윙거리고 현기증이 나 곧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끌려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티기 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대로 당할 순 없다. 결코......!' 일검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번에는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흐려져 가던 정신이 돌아오며 온몸을 조여오던 압력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일검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어엇! 놈이 이겨내다니......?" 두 마디의 경악성이 들렸다. 이때 일검사는 신형을 우뚝 멈춘 채 눈을 들어 전면을 살펴보았다. 그의 신안은 과거에 비해 십분지 일밖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그는 어렴풋이 오장 거리에 두 개의 시커먼 구체(球體)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구체는 가공할 암연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회전하고 있었다. 무 서운 흡인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일검사는 가슴을 당당하게 펴며 말했다. "조화신무국주! 이제 힘을 거두는 것이 어떻소? 더 이상 힘을 쓰 다간 탈진하게 될테니 말이오?" "으으......?" "네... 네 놈은 정말 대단하구나." 우웅......! 암연의 회오리가 멈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거마는 구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 로 조화신무국을 창건한 두 명의 개세노마(蓋世老魔)였다. 마벽해주(魔壁海主) 해궁랑(海弓郞)! 혈유해주(血幽海主) 철목궁(鐵木穹)! 그들은 이른바 사해쌍마제(死海雙魔帝)라 불리우는 전설적인 거마 (巨魔)들로 마벽해와 혈유해는 중원의 최남단과 북단에 위치한 바 다였다. 그들의 무학은 패류(覇流)로 중원과는 상반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힘을 합하여 변황사패를 모아 중원정복에 나선 것이 었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일천백 년 전 중원을 침범한 적이 있었 다. 만일 당시 마왕도(魔王島)의 신화를 구축한 절대마종(絶代魔 宗) 해천초자(海天蕉子)가 없었다면 중원은 그들에 의해 유린되었 을 것이다. 그들은 절대마종에게 패한 후 각각 남과 북으로 쫓겨가 그 이후로 는 두문불출했다. 그런데 천백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이 었다. "흐흐...... 꼬마놈, 네 놈은 무슨 무공을 익혔느냐?" 오른쪽의 구체가 물었다. 일검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 왼쪽의 구 체도 물었다. "크크...... 지옥혈마공 따위로는 노부들의 마공을 감당하지 못하 거늘...... 혹시 고금오대절기(古今五大絶技) 중 하나를 익힌 것 이 아니냐?" 일검사는 코웃음쳤다. "흥! 지옥혈마공도 오대절기 중 하나가 아니오?" 그 말에 가소롭다는 조소가 흘러 나왔다. "크크...... 지옥혈마공 따위가 어찌 오대절기에 들겠느냐? 천년 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천외절기(天外絶技)에도 밀린다." "흐흐...... 천 년 전 절대마종의 무공이 지옥혈마공과 구천마왕 공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위력이 반으로 줄은 것이다. 그런데 어 찌 오대절기에 들 수 있겠느냐?" "......!" 일검사는 내심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렇구나. 절대마종 해천초자의 개세마공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 은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마공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 록 강하단 말인가?' 그는 짐짓 기죽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들의 무공은 오대절기에 든단 말이오?" "쿠후후후...... 물론이지. 노부 해궁랑(海弓郞)은 백 년 전 남해 (南海)에서 우연히 반으로 나누어진 철편(鐵片) 하나를 얻었다. 그 후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백 년 동안 고련했다. 그것이 바로 천하제일이자 고금제일의 마공인 마마윤회만겁공(魔魔大輪廻萬劫 功)이다." 철목궁의 음산한 음성도 뒤를 이었다. "크크크......! 노부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각각 반쪽의 철편마 공을 익혔다. 그리고 대성(大成)한 후 서로 영성(靈性)이 통하게 되었다. 그래서 함께 일심이체(一心二體)가 된 것이다." "......!" 일검사는 그들의 말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후후후...... 마마윤회만겁공이야말로 오대절기의 으뜸이다. 그 것은 절대마종보다 더 오래 전 인물인 마마수라대제(魔魔修羅大 帝)가 남긴 마학이다." "크크크......! 우리가 영통(靈通)하여 하나가 된 것만 보아도 절 대마종보다 마마수라제가 더욱 뛰어난 것이 증명된 셈 아니냐? 절 대마종의 마공은 영(靈)으로 합해지지 못하고 도리어 갈라졌지만 마마수라제의 마공은 영으로 합해졌으니 말이다. 크하하하 핫......!" 쩌르르르......! 석부가 뒤흔들렸다. 일검사는 그 말에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 는 최대한으로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천외절학을 제외한 이대절기는 무엇이오?" 천외절학은 바로 천외일맥을 말했다. 절대마종의 절학과 마마수라 대제, 그리고 천외일맥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이절기(二絶技)였 다. "흐흐흐...... 그것은 무림역사상 가장 완벽한 무류(武流)를 이루 었던 만류종(萬流宗)과 천축(天竺)에서 유래하여 무적검(無敵劍) 의 신화를 구축한 무명종(無名宗)이다." 일검사는 그들에게 대항할 전의를 상실한 듯이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순 없겠소?" "흐흐...... 어린애야, 진작 그렇게 얌전하게 굴었다면 노부들도 생각을 달리 했을 것이다." "크크...... 만일 원한다면 천하를 네게 주겠다." "이절기를 알고 싶소. 그 문제는 차후에 생각하겠소." "흐흐...... 그렇다면 말해 주마. 사실 고금오절기에 대해 우리들 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당금 무림에 없을 것이다. 왜냐면 오절기가 이미 천 년 이전에 실전(失傳)됐기 때문이다." 마벽해주(魔壁海主) 해궁랑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남은 이 절기 중 만류종에서 유래된 것은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 기(萬流歸宗大乘無常深海氣)라는 것이다. 사실상 오절기 중의 으 뜸이랄 수 있는 것이지. 흐흐...... 하지만 이미 천 년 이전에 세 상에서 사라졌고 설사 그 절기를 얻는다 해도 익히는데 최소한 백 년 이상이 걸린다. 흐흐...... 그러므로 만류종의 일절(一絶)은 무지개를 따는 것 같이 허망한 절기가 되어 버렸다." 그 말에 일검사는 내심 벅찬 희열을 억누르고 있었다. '자전기...... 그리고 지옥십삼관에서 얻은 반부의 구결(口 訣)...... 그것을 합친 것이 바로 만류종의 일절이라니! 또한 오 절기 중 으뜸이라니 정말 나야말로 일대행운을 만난 셈이로구나.' 그렇다. 이미 그는 만류귀종대승무상심해기를 익히고 있지 않은 가? 일검사는 내심 치솟는 기쁨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남은 일절은 무엇이오?" "흐흐...... 그것은 천축에서 전파된 검식(劍式)이다. 천 년 전 천축의 한 이승(異僧)이 중원으로 건너와 천하에 퍼져 있는 일천 구백팔십일 종의 검법을 연구하여 창안한 창궁무적일기검(無名無 敵一氣劍)이 그것이다. 그것은 고작 일검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무한한 천하만상의 모든 절학을 담고 있다." "......!" 일검사의 안색이 또 한 차례 변했다. '이들이 창궁노인에 대해 알다니......' 그렇다. 그는 창궁석부에서 기연을 만났었다. 그러나 창궁이란 이 름을 비로소 전해듣게 된 것이었다. '기왕이면 더 자세히 알자.' 그는 호기심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창궁무적일기검에 대해서 알고 싶소." "흐흐...... 내친 김이니 가르쳐 주지." 해궁랑은 자신의 해박함에 긍지를 느낀 듯했다. "본래 창궁무적일기검은 천축의 무공으로 일검여의기(一劍如意氣) 라는 것이다. 그것이 훗날 중원의 검학과 합쳐져 변한 것이다. 그 것은 결코 초식에 얽매이면 안되는 것이다. 오직 뜻(意)으로 베는 무극지도(無極至道)의 검이다. 또한 오십 년 내내 고련해야 얻을 수 있으며 정(精), 신(神), 기(氣), 세 가지가 합치되어야 지도 (至道)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한다." 이어 그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오대절기는 모두 천 년 이전부터 다섯 명의 절세기 인이 창안했다. 그러나 그 중 네 명이 사라졌으므로 오직 절대마 종(絶代魔宗)만이 남아 홀로 고금무적이란 허물을 쓰고 있는 것이 다. 가소롭게도 말이다." "으하하하핫......!" 느닷없이 일검사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나왔다. 우우웅......! 쇄금강마후가 실린 웅혼한 웃음이 온통 석부를 흔들었다. "으흐하하핫......! 당신들 덕에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쁘 오!" 일검사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창궁검을 발출했다. "억!" "아니......?" 두 노마는 대경실색했다. 츠...... 츳츳츳......! 창궁검에서 가공할 검파(劍波)가 퍼져 나갔다. 순간 경악성이 들 렸다. "그... 그건 창궁무적일기검! 네 놈이 무명종을 얻었단 말이냐?" "크크으......! 그래서 마마윤회만겁공에 버틸 수 있었구나!" 일검사는 우뚝 선 채 당당하게 말했다. "하하하......! 무적일기검은 방금 그대들이 그 오의를 가르쳐 주 어서 완전히 깨우치게 되었소. 그러나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오." 일검사는 진기를 끌어 올렸다. 순간 몸에서 기이한 금광이 테두리를 이루며 발산되었다. 그러자 자욱하던 암연은 완전히 사라지고 금광으로 인해 주위가 환해졌 다. "헉! 네... 네가 만류대종대승무상심해기마저 알고 있단 말이냐?" "크으으......! 믿을 수 없다!" 해궁랑과 철목궁은 경악성을 외치며 돌연 위로 솟구쳤다. 흡사 두 개의 검은 기둥이 회오리치며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받아라!" "크카카카카! 마마윤회만겁공(魔魔大輪廻萬劫功)은 고금무적이 다!" 우르르르...... 콰콰콰! 엄청난 폭음과 함께 가공할 암연 덩어리가 일검사의 몸을 가루로 만들 듯 휘감았다. 그러나 일검사의 몸은 금빛 테두리에 감싸여 우뚝 서 있었다. 심 지어는 옷자락 하나 나부끼지 않고 있었다. "크으으...... 이...... 이럴 수가!" "방금 전보다 십배나 강해졌다......" 해궁랑과 철목궁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공격은 흡사 바다에 빠진 돌인 양 금빛 광원에 접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 기 때문이었다. 이때였다. "후후후...... 이제 그대들은 돌아갈 때가 되었소." 일검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장엄하게 비쳐졌다. 동시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영무(靈霧)가 전신으로부터 흘러나왔 다. 그것은 천하의 그 어떠한 것이라도 감쌀 수 있는 영기로운 광채였 다. "크하하하......! 뒈져라!" 두 노마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그들의 몸에서 이십 장 길 이의 가공할 묵강(墨 )이 뻗어나왔다. 그것에 닿는 것은 돌이건, 흙이건, 무엇이건 그대로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억검행검무극검(億劍行劍無極劍)...... 만상(萬象)... 자전기(磁 電氣)!" 일검사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번... 쩍! 파츠츠... 츳! 눈부신 백옥검광이 일어났다. 동시에 금빛 광휘가 천지를 뒤엎는 듯 했다. 묵강의 두 줄기 기둥은 검광에 닿는 순간 그대로 흩어졌 고 동시에 금광은 두 노마의 전신을 뒤덮고 말았다. 한 순간 완벽한 태고의 정적이 사위를 삼켜 버렸다. "케에에... 에... 엑!" 두 마디의 단말마의 비명이 대기를 울렸다. 꽈르르르릉! 콰콰콰... 르릉! 천번지복의 폭음이 일어나며 조화동(造化洞)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쿠쿠쿠쿠...... 우르르르르...... 놀랍게도 지면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막부산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번... 쩍! 어디에선가 섬광(閃光)이 암천으로 치솟았다. 콰콰콰... 콰콰쾅! 대폭발이었다. 수천 수만의 불기둥이 조화신무국에서 치솟아 올랐 다. 백만 근 화약이 일시에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화광이 충천하는 허공 백 장 위로 유유히 부유하는 인영이 있었 다. 그는 온통 충천하고 있는 화염천지의 불야성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과연 마영자(魔影子)는 약속을 지켰군. 이것으로써 조화신무국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군." ■ 등용문 제3권 제26장 광명천(光明天) ━━━━━━━━━━━━━━━━━━━━━━━━━━━━━━━━━━━ 강호에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 조화신무국(造化神武國)의 멸망(滅亡)! 그 소식은 전무림을 경동시켰다. 폭풍을 일으키며 중원을 위협했 던 야망의 집단 조화신무국이었다. 오히려 천마단(天魔團)보다 더 욱 무서운 위협을 가해왔던 조화신무국이 흔적도 없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접한 수많은 무림인들이 직접 막부산 만겁불회림으로 가본 후 그들은 그곳의 지세(地勢)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을 알았다. 조화신무국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더욱 놀라운 소문이 전무림에 나돌기 시작했다. ...... 조화신무국을 무너뜨린 것은 백도(白道)의 전설이 현신한 것이다! 만승(萬乘)의 신화가 도래했다! 만승(萬乘)의 신화(神話). 그것은 지난 천 년간 백도인들이 꿈 속에서도 염원했던 신화였다. 그러나 풍문으로만 나돌 뿐 만승신화는 아직 한 번도 이룩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만승신화가 현실로 나 타났다고 백도 무림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화신무국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만승지존(萬乘至尊)의 걸작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만승지존의 출현! 이 사실은 전 무림을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기 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무림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6장 광명천(光明天) -2 ━━━━━━━━━━━━━━━━━━━━━━━━━━━━━━━━━━━ 낙양(洛陽)에서 오십 리 떨어진 곳. 그곳에는 숲으로 둘러싸인 한 채의 아름다운 장원(莊院)이 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으나 사방 십리에 걸쳐 개미 한 마리, 심지어는 나는 새라도 접근치 못할 아홉 개의 연환절진으로 완벽히 보호되고 있는 곳. 장원의 현판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등용문(登龍門)> 바로 아홉 마리의 잠룡(潛龍)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이 장원에는 지금 한창 들뜬 분위기가 일고 있었다. 등용장 깊숙한 곳. 한 채의 별원으로 통하는 월동문 앞에는 백삼미청년이 뒷짐을 진 채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정원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일검사였다. "으음, 아직 멀었단 말인가? 그 놈은 어떻게 생긴 놈일까......? 날 닮았을까? 아니면 려려를......?" 일검사는 연신 월동문 안쪽을 힐끔거리고 있었으나 감히 안으로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천하에서 그가 두려워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도 그는 월동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만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듯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악...... 아아......" 문득 별원으로부터 여인의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 닌가? "......!" 일검사는 그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여인의 비명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들렸던 것이다. 그는 어쩔 줄 을 몰라 하며 만면에 초조한 표정을 지은 채 더욱 잰 걸음으로 정 원을 오락가락했다. "으음... 으음!" 일검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하늘은 푸르기만 했 다. 그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처럼 난감하기는 처음이라고 생각 했다. 무공이나 지혜,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 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 었다. "허...... 그 놈 어지간히 고생시키는군... 대체 어떤 놈이기 에......?" 일검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에 밴 땀을 훔쳤다. 이때였다. "아... 악...!" 돌연 뾰족한 비명이 높게 울려 나왔다. "......!" 일검사는 주먹을 움켜쥐고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다.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로 숨막일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검사에게 있어서 그 순간은 무척이나 길고 답답하기만 했다. 억겁일수유(億劫一袖 惟)라고나 할까? 갑자기 힘찬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으... 아... 앙......!" "오오......!" 일검사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어찌나 발을 세차게 굴렀는지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판에 발자국이 움푹 새겨질 정도였다. 일검사의 얼굴에는 무한한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금시라도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고 있었다. '왜... 왜 안 부를까......?' 그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들어오세요, 상공(相公)." 문득 월동문 안쪽으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검사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몸을 날렸다. 방 안. 세 명의 미녀들이 침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침상에는 안색 이 초췌하지만 성숙한 미를 지니고 있는 여인이 강보를 안은 채 누워 있었다. 문득 방문이 벌컥 열리며 일검사가 뛰어 들었다. "어떻게 됐소?" 그는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러자 세 명의 미녀들이 일제히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직접 보세요......!" "호호호......! 정말 급했군요?" "훗훗......! 저렇게 좋을 수가......?" 미녀들은 바로 설옥경과 진천화영, 설화 등이었다. 침상에 누워있 는 여인은 을주려려였다. 일검사는 얼굴이 뜨뜻해졌으나 개의치 않고 침상으로 다가서더니 을주려려의 품에 안겨있는 강보를 빼앗 듯이 안아 들었다. "오......!" 일검사는 탄성을 흘렸다. 강보 속에는 그와 꼭 닮은 사내아이가 방긋 웃고 있었다. "이... 이 놈이 내 아이란 말인가?" 일검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을주려려가 아이를 낳은 것이었 다. 그가 조화신무국으로 떠날 때 그녀는 만삭이었다. 결국 그가 등용장으로 돌아온 지 열흘만에 그녀는 출산을 한 것이었다. 일검사는 자신을 빼다 박은 듯이 닮은 어린아이를 안고 가슴 깊이 스며드는 감동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내 아들이라니......" 이때 세 명의 여인들은 일검사가 그토록 좋아하는 것을 보자 모두 가슴을 두근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녀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들 역 시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일검사를 바라보며 나름대로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녀들은 서로 은밀히 눈짓하더니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만의 호젓한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모두 다 나가 자 일검사는 비로소 아이를 내려 놓으며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짓 고 있는 을주려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수고했소. 려려." "아이 제가 무슨......" 을주려려는 미소지었다.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며 대견하고도 신기 한 듯 말했다. "당신을 꼭 닮았어요." "아니 그럼 안 닮을 이유라도 있단 말이오?" "네......? 아니... 당신......" 을주려려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일검사는 하하 웃으며 그녀의 머 리칼을 쓰다듬었다. "농담이오, 농담. 려려, 그러고보니 더욱 아름다와졌구려." 일검사는 그녀의 수척해진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당신도요...... 그 동안 천하를 종횡하느라고 얼굴이 많이 상했 어요." 일검사는 그 말에 진한 애정을 느꼈다. 그러나 곧 가슴을 펴며 당 당하게 말했다. "이제 내게도 목표가 생겼소. 이 놈의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기 위 해서라도 뜻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아......." 을주려려는 기쁜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실상 그녀는 일검사가 마도출신인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그러 나 최근 백리빙을 만난 이후 변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내심 기뻐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자꾸 새로운 여인들을 끌어들이는 것만은 도 무지 못마땅했다. 그것은 일검사의 바람둥이 기질 때문이기도 했 지만 상황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녀는 확실히 일검사의 마음이 돌아서고 있다는 것을 느 끼고 있었다. "그러셔야 해요. 우리의 아이들만은 손가락질 받는 마도(魔道)를 걸어서는 안돼요." 일검사는 싱긋 웃었다. "안심하시오. 려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천마삼세만 꺾으면 혈문에 진 빚은 모두 갚는 것이오. 그 후에 나는 나의 길을 걷게 될 것이오." "믿어요." 을주려려는 일검사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보세요. 제 가슴이 이렇게 뜨겁잖아요? 그것은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 말에 일검사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후훗, 내 가슴 역시 뜨겁소. 그것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기 때 문이오." "호호......" 을주려려는 오랜만에 밝은 웃음을 흘렸다. 일검사는 그녀를 가볍 게 껴안았다. 그는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놈의 이름을 생각해 두었소." "어떤 이름인가요?" "이 놈은 날 되찾게 해준 놈이오. 나는 이 아이에게 잃어 버렸던 내 과거를 돌려주고 싶소." "그럼......?" 을주려려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천의영(天意影)이라 부르겠소." "아...... 당신......" 을주려려는 금방 눈물이 글썽해져서 일검사를 꼬옥 끌어 안았다. 천의영이라면 본래 일검사의 본명이 아니던가? 실상 그 이름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인 이름이었다. 그것은 항 상 일검사의 한(恨)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과거를 되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의영, 이 놈은 훌륭하게 클 것이오. 이렇게 현숙한 어머니가 있으니 말이오." "당신......" 일검사는 을주려려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아이의 뺨을 어루 만 졌다. 그의 가슴에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6장 광명천(光明天) -3 ━━━━━━━━━━━━━━━━━━━━━━━━━━━━━━━━━━━ "광명천으로 가시겠다고요......?" 진천화영은 눈을 크게 떴다. 일검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소. 그들과의 오해를 풀어야겠소. 더 이상 그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소." 진천화영은 만면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에게 천마삼세나 다름없는 공적(公敵) 으로 인식되고 있잖아요." 일검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이번 기회에 혈마지존이 백도와는 아무런 원 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소. 무슨 일이 있어도 오해를 풀 생 각이오." 진천화영은 혜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려울 거예요. 그들은... 자신들만 옳다고 믿고 있어요. 말이 통하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그럴 바에는......" 문득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백도의 전설인 만승지존(萬乘至尊)을 이용하는 게 어떨까요? 백 도인들은 조화신무국을 무너뜨린 것이 만승지존의 공적인 줄로 알 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엔 만승지존의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이 어 때요?" 그러나 일검사는 고개를 저었다. "명성으로 그들을 억누르고 싶지는 않소. 나는 나, 이대로 가겠 소." "하지만......" 일검사는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나 일검사의 의지요." "......!" 진천화영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일검사의 생각이 확고 부동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일검사는 진중한 눈빛으로 허공 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는 아들이 생겼소. 후후, 녀석은 날 닮아 고집이 강할 것이 오. 이제부터는 그 놈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될 수는 없소. 물론 이번 길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그래도 가겠소. 이건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오." 마침내 진천화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일검사의 가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의 아버님과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버님 은 천하십룡(天下十龍)의 일원이니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그러나 곧 그녀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 행동하오. 장인어른의 위명이 그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알지만 혼자 가겠소." "상공......" "염려 마시오,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 길은 천외도주 (天外島主)를 만나러 가는 것이오. 그 분은 또한 빙매의 아버님이 자 나의 장인어른이 아니오? 그러니 큰 위험은 없을 것이오." 진천화영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일검사로부터 백리빙과 그의 관계를 들은 바 있었다. 광명천주이자 천외도주 백리무외는 백리빙의 부친이다. 다시 말해 일검사의 장인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웬지 모르지만 진천화영은 불길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생 각 같아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길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 다. 더구나 그녀는 부친인 진천사후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들은 바 있 었다. 황금존사 진천사후는 천하십룡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드는 인물로 최근 광명천의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광명천에서 만든 한 가지 검진(劍陣)의 일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초청이었다. 그 검진은 혈마지존과 천마삼세를 상대하기 위한 검진이라고 했다. 물론 진천사후는 거절했다. 아무리 백도의 명분이 좋다지만 스스 로 사위를 죽이는 일에 가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진천화영은 일검사가 광명천으로 간 다고 말했을 때 마치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느 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시오, 화영. 나는 돌아올 것이오. 이번 길에 그들과 화해 한 후 정식으로 천마삼세에게 도전하겠소." "......" 일검사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 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동안 당신의 할 일이 무척 많소. 의영(意影)을 보살펴 줌은 물론...... 제갈아우와 상의하여 등용문의 전력(戰力)을 재정비해 주시오. 조만간 천마단과의 환우일전에 대비하도록 말이오." "......" "등용문의 현재 전력은 막강하오. 하지만 천마단의 세력이 아직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소. 그러니 전력을 가다듬는 일은 극히 중요하오. 난 오직 당신만 믿겠소." 진천화영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일검사는 그녀가 놀라운 지혜와 치밀한 병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수차 느꼈다. 그러므로 그녀와 제갈이 머리를 합친다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것 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검사는 그 밖에도 여러가지 일을 당부했 다. "걱정 마세요. 상공. 최선을 다할테니까요." 진천화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녀는 일검사가 자신을 믿고 당부하는 것이 좋았다. 그가 믿어주는 한 자신 쯤은 어찌되어도 좋다는 느낌이었다. 게다 가 등용문의 젊은 용들은 그녀가 보기에도 능히 천하경략을 할만 한 인재들이었다. 그런 인재들과 함께라면 어떤 일인들 불가능하겠는가? 밤이 깊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느라 시간가는 줄 을 몰랐던 것이다. 진천화영은 살짝 몸을 일으키며 다소곳하게 말 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지요. 밤이 깊었어요." 일검사는 그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건......" "하하, 이곳엔 내 방이 없지 않소? 당신은 날 밖으로 쫓아낼 작정 이오?" 진천화영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당신은... 이 화영의 사람인 걸요." 진천화영. 지혜롭기로 이름난 그녀는 사랑의 포로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녀는 몸을 던졌다. 한없이 넓은 일검사의 품 속으로. "화영." "아아, 그리웠어요." 두 사람. 젊은 남녀. 그들은 서로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서로 를 부둥켜 안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소용있으랴? 이내 두 사람 은 침상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를 지극히 원했다. 밤은 깊어가는데.... 처소에서는 좀체로 열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 다. 일검사는 절륜무쌍한 정력을 한꺼번에 풀어놓고 있었다. 반면 진천화영은 발가락까지 타오르며 그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기 위 해 온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뜨거운 밤이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6장 광명천(光明天) -4 ━━━━━━━━━━━━━━━━━━━━━━━━━━━━━━━━━━━ 와룡곡(臥龍谷). 왕옥산(王屋山)에 자리잡은 와룡곡은 문자 그대로 용(龍)이 드러 누운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계곡은 결코 평범한 계곡이 아니었다. 당금 무림에서 와룡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광명천(光明天)이 바로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광명천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치솟고 있었다. 특히 천외도주(天外 島主) 백리무외가 무림에 모습을 보인 이래 더욱 기세가 오르고 있었다. 반면 천마단(天魔團)은 침체일로를 걸어 중원 어디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왕도에 몸을 도사린 채 활 동을 일체 중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명천은 무림의 최고봉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러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인 바, 향후 무림에 어 떤 변수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광명천은 비록 무림의 최고세력으로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으 나 언젠가 닥칠지 모를 천마단과의 환우일전을 기다리며 힘을 더 욱 배양하고 있었다. 그들은 치밀한 계획으로 백도무림의 힘을 결집시켜가고 있었다. 그 계획의 정점은 바로 십전회(十全會)의 개최였다. 광명천은 구구중양일(九九重陽日)을 기해 십전지회를 개최한다는 선포를 해놓고 있었다. 마침내 중양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양절은 중원 최대의 명절이 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그 날, 왕옥산 와룡곡도 온통 흥분의 물결이 번지고 있었다. 십전지회는 천하십룡(天下十龍)이 주관하여 백도제일룡(白道第一 龍)을 선출하는 모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 광명십전수(光明十全手). 오래전부터 안배되어 있는 이름. 그것은 천하십룡의 주관하에 백 도제일인을 탄생시킨다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광명십전수가 탄생하면 백도는 하나로 뭉치고, 그의 영도하에 탕 마멸사의 대업을 이룩한다고 했다. 중양전야(重陽前夜)였다. 이 밤에 한 명의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와룡곡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달빛이 교교히 와룡곡을 비추고 있었다. 광명지회를 하루 앞둔 싯 점에 달빛을 가르며 유령처럼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으음, 과연 백도제일지 답구나. 최소한 일만 명 이상의 고수들이 매복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뿜는 기도도 대단하다. 백 도가 갑자기 두 배쯤 강해진 것 같구나.' 달빛에 스치는 인영은 한눈에 와룡곡의 지세를 가늠하며 내심 이 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일검사였다. 등용문을 떠나 곧바로 이곳으로 찾아온 것 이었다. 그는 절정의 경신술을 발휘하여 와룡곡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 했다. 만일 얼마전이었다면 결코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화신무전의 혈전을 겪은 이후 그의 무공은 더욱 정심해 져 있었기에 일만 명에 가까운 매복을 따돌릴 수 있었다. 와룡곡에 당도하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빙매는 지금 어디 있을까? 그녀와 헤어진 후 한 번도 소식을 듣 지 못했는데......' 그의 뇌리를 가득 메운 미녀는 바로 백리빙이었다. 그녀는 그와 헤어져 곧장 와룡곡으로 간다고 했었다. 일검사는 가능한한 그녀를 먼저 만나고 싶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의도를 알리고 싶었다. '빙이 무척 기뻐하겠군.' 그렇다. 백리빙은 그에게 마도를 청산하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그 가 광명천과 화해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하면 그녀는 크게 기뻐 할 것이 틀림없었다. 죽림이 나타났다. 일검사의 신안에는 죽림 속에 한 채의 별부(別府)가 들어왔다. 그 는 직감적으로 그 별부가 중요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저곳으로 가보자.' 그는 한 가닥 안개처럼 죽림을 향해 이동해 갔다. 잠시 후 그는 별원의 담장 아래 당도했다. 별원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그는 담장 그늘에 붙어 잠시 인기척을 살폈다. '빙을 만나기 전에는 신분을 감추는 것이 좋겠다.' 그는 품 속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그는 소리없이 담장을 날아 넘었다. 그가 내려선 곳은 화원(花園) 으로 몸을 숨기기에 알맞는 곳이었다. 그가 막 꽃나무 뒤에 몸을 숨겼을 때였다.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화원 앞 대전으로부터 세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 다. 그들은 한결같이 청년들이었다. 일검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도성(刀星) 관산추(關山秋)로군.' 도성 관산추라면 과거 그에게 패배한 적이 있었던 자로 천외도주 의 두 제자인 도검쌍성 중의 한 명이었다. 관산추는 등에 새로운 반월신도(半月神刀)를 메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서 걸어오고 있는 청년들은 그에게 무척 공손한 태도를 취 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관대협께서 십전수(十全手)가 되실 것입니다."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수가 있다면 오직 한 분, 검성(劍星) 백천기(白天奇) 대협 뿐일 것입니다." 두 청년의 말에 관산추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두 눈에 야망을 드러내며 말했다. "백사형은 최근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뺏기고 있지. 검사(劍士)는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큰 약점을 갖게 되는 법." 관산추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어렸다. "백사형은 빙사매에게 완전히 빠져 있지. 빙사매의 마음은 이미 멀어졌는데 말이오. 백사형은 그것도 모르고 심기가 흐트러지고 있소. 그러니 내일의 승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것이오." 그 말에 두 청년은 맞장구쳤다. "하하, 보나마나입니다." "관대협께서 십전수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때, 일검사는 그들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흠! 저 자는 십전지회에 야심을 갖고 있군. 그런데 백사형이란 자가 빙매에게 마음을 두고 있나 보군.' 일검사는 다소 질투를 느꼈으나 그와 동시에 안도감도 느끼고 있 었다. '아무튼 빙매가 무사한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일검사는 잠시 염두를 굴린 후 결정을 내렸다. '우선 저들을 제압하여 빙매의 소재부터 알아봐야 겠군.' 그는 서서히 손가락에 진력을 돋구었다. 이때였다. 우연인지 관산 추가 힐끗 일검사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밤에는 경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오. 어쩌면 혈마지존이 십전지회를 훼방하기 위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 소." 일검사는 그 말에 흠칫했다. '그랬었군. 어쩐지 와룡곡 전체가 살벌하다고 했더니.' 이때 우측의 청년이 말했다. "아무리 혈마지존이라 해도 이곳까지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곳 에 펼쳐진 천라지망은 나는 새라 해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이렇게 말하던 그는 문득 입을 다물더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좌측의 청년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 청년은 갑자기 나무 토막처럼 뻣뻣해진 것이었다. 관산추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왔 다. "음......!"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청년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채 쓰 러졌다. 그 위로 관산추도 쓰러지고 있었다. 일검사는 바로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이때였다. 막 쓰러 지던 관산추의 손이 허공으로 뻗더니 불꽃이 치솟는 것이 아닌가? 펑! 하늘에 불꽃이 비산(飛散)했다. 일검사는 안색이 변했다. '이런...! 관산추의 내공이 전과 같지 않구나. 혈도를 짚이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그는 좀 더 힘을 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휙! 휙......! 사방으로부터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인영들이 허공 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틀렸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는 비굴하게 모습을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화원으로부터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반월신도를 잡고 있는 관산추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관산추는 살기띈 음성으로 물었다. 일검사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 으로 말했다. "관산추, 네 무공도 꽤 쓸만 하지만 아직 멀었다. 만일 널 죽이려 마음 먹었다면 벌써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천외도주를 불러내 라." 그는 일부러 음성을 변형시켜 말했다. 그러나 이때 관산추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반월신도를 발도하며 외치는 것이 아닌가? "너는...... 혈마지존!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바꾸어도 난 알 수 있다! 후후훗! 잘됐다. 내 지난 날의 빚을 갚겠다!" 쐐애애... 액! 그는 다짜고짜로 도광(刀光)을 눈부시게 뿌리며 공격했다. '일이 고약하게 됐구나.' 일검사는 그가 자신을 한눈에 알아볼 줄은 몰랐다. 어쨌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잠형환마보를 발휘해 피하며 말했다. "나는 이곳에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천외도주를 만나러 왔으니 그 를 만나게 해다오." 그러나 관산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명예욕에 빠 져 있었다. "닥쳐라!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왔느냐?" 위이이이잉! 관산추는 전력을 다해 도세를 펼치고 있었다. 줄기줄기 뻗는 도광 이 주위 오장 여를 뒤덮으며 일검사를 몰아세웠다. 이미 주위에는 수백 명의 고수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는 이번 기 회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려 마음 먹은 듯 했다. 만일 그가 혈마지존을 꺾는다면 일시에 무림의 영웅이 되는 것이 다. 뿐마 아니라 광명십전수의 자리도 고스란히 그의 손에 떨어지 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생각은 좋았으나 그는 계산에 그다지 밝지 못했다. 맹룡 (猛龍)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속담을 그는 잊은 것이었 다. 파파팍......! 손(手). 하나의 시뻘건 혈수(血手)가 그의 도광을 산산히 파괴하 며 뻗어왔다. 그것은 그의 실력으로써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위력이었다. "허억!" 혈수가 목을 향해 바짝 다가들자 그는 비명을 발하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핫...... 아직도 멀었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그는 반월신도를 놓치고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 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반면 일검사는 태연했다. 그는 혈마일수(血魔一手)로 간단히 그를 물리친 후 주위를 냉오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살기가 충천하는 분위기였다. 수백 명의 광명천 고수들의 눈에는 적의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만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때였다. "아미타불......!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더 니, 혈마지존이 제발로 걸어 들어왔으나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것 이오." 한 가닥 무거우면서도 인자한 고승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사 방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고수들이 황급히 길을 터주었다. 군웅들 사이로 한 명의 고승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치 어 린애처럼 해맑은 얼굴을 지니고 있는 노승이었다. "무혈승(無血僧)......!" 일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동시에 그의 내심에는 반감 과 살기가 함께 치밀어 올랐다. 나타난 자는 무혈성승이었다. 무림제일의 신승(神僧)이라 불리우 는 일대기승이었다. 그러나 일검사에게 있어서 그는 교활하고 간악한 간적에 불과했 다. 과거 태실봉에서 하마터면 그의 암계(暗計)에 걸려 산산조각 이 날 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일검사는 입가에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훗훗...... 또 만났구료, 화상?" 그의 말투에는 다분히 반감이 섞여 있었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무혈성승은 악이라곤 한 점도 찾을 길 없는 동안(童顔)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며 합장했다. 이어 그는 탄식하며 물었다. "혈마지존, 또 살인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왕림하셨소?" 일검사는 눈썹을 꿈틀했다. "무혈승, 그대는 진정 자비로운 중이오? 아니면 위선자요? 이번에 는 또 어떤 계략을 세웠소?" 그 말에 군웅들의 얼굴에 일제히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감히 성승께 그런 말을 하다니......!" "혈마지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군웅들의 야유가 들렸다. 그러나 무혈성승은 여전히 만면에 자비 로운 빛을 흘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노납은 부처님 앞에서 혈마와 천마 두 마두를 제거한 뒤 백년면벽에 들기로 결심하였소. 시주, 그런데 어이해 피묻는 발로 다시 이곳으로 왕림하셨소?" 누가 보아도 무혈성승의 모습은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대의 고승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알고 있는 일검사는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분노를 억지 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창궁신협을 만나러 왔소이 다." 그 말에 무혈성승은 눈빛을 번쩍 빛냈다. "아니타불...... 그것이 진정이시오?" "후훗...... 혈마지존은 두 번 말하지 않소. 그를 만나러 오지 않 았다면 와룡곡은 초입부터 피로 물들었을 것이오." 그 말이 끝난 순간, 군웅들은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하게 변했다. 일검사의 말이 군웅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러나 일검 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더욱 오만하게 말했다. "나는 솔직한 것을 좋아하오. 당신들의 허례허식이나 위선은 내게 맞지가 않소. 나는 내 생각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오. 자, 그를 만 날 수 있소, 없소?" 과연 천하에서 그가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요, 행동이었다. 무혈성승은 눈썹을 떨었다. "과연 혈마지존은 소문대로 오만무례하구료. 허허...... 왜 안되 겠소! 그러나 맹주를 만나려면 절차를 거쳐야 하오. 아무리 무례 한 손님이라도 주인을 억압하지 않는 법이니 이쪽의 방식을 따라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그의 말은 부드럽기만 하여 조금도 억지가 섞여 있지 않았다. 명 실공히 광명천의 제이인자로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다왔다. 그러나 일검사는 그의 달콤한 말에 코웃음쳤다. "흥! 혀가 달콤한 자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했거늘, 하지만 다시 한 번 속아 줄 용의는 있소. 어차피 오늘밤 본인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기로 했으니 말이오." 그는 무혈성승을 노려보며 물었다. "좋소. 어떤 방식이오?" 무혈성승은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맹주는 항마림(降魔林) 속에 계시오. 그러니 시 주께서 직접 가 뵙는 것이 옳겠소."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만하게 웃었다. "훗훗...... 좋소. 항마림이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필시 단단히 준비가 되었겠지. 하지만 두려우면 아예 오지도 않았소. 그곳이 어디요?" "아미타불...... 노납을 따라 오시오." 무혈성승은 앞장 섰다. 일검사는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군웅들은 길을 터 주었으나 그를 향해 적의에 찬 시선을 떼지 않 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원을 나서서 한 마장 가량 더 곡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동안 일검사는 주위에 점점 더 살기가 짙어지는 것을 느꼈 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다 왔소." 무혈성승이 걸음을 멈춘 곳은 하나의 울창한 숲 앞이었다. 일검사 는 울창한 숲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살기가 느껴진다...... 가공할 진법(陣法)과 매복이 중첩되어 있 는 곳이다.' 일검사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저곳이오? 날 위해 마련된 곳이?" "아미타불...... 맹주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무혈성승의 음성에는 여전히 자비로움이 서려 있었다. 일검사는 더 이상 그와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훗훗! 좋소, 내 직접 들어가리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한 줄기 화살처럼 숲을 향해 날아 들어 갔다. ■ 등용문 제3권 제27장 무혈성승(無血聖僧)의 간계 ━━━━━━━━━━━━━━━━━━━━━━━━━━━━━━━━━━━ '흠, 항마림(降魔林)이라고? 과연 썩 기분좋은 곳은 아니군.' 숲 속에 들어선 순간 일검사는 사위가 온통 뿌연 안개에 뒤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 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숨막히는 적막만이 숲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이곳이 결코 보통 숲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까지도 치밀한 진세(陣勢) 의 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숲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금쇄진(禁鎖陣)을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일검사는 문득 차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훗훗......! 이까짓 진법 따위로 날 막을 수는 없다." 다음 순간 그는 잠영환마보를 펼쳐 나는 듯이 안쪽으로 이동했다. 약 백여 장을 들어갔을까?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 간이었다. "......!" 그는 사방으로부터 무서운 살기(殺氣)가 전신을 압박하는 것을 느 꼈다.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매복이다. 그것도 무서운 내공을 소유한 자들이다.' 일검사는 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스스....... 그의 주위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 홉 명이었다. 은연중 그들은 일검사를 중앙에 두고 포진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썹이 서리처럼 흰 노인들로 일견하기에도 백 살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일검사는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차라리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광명천이 손님을 맞는 예법이오?" 그는 냉오하게 말하며 노인들을 둘러 보았다. 노인들은 그의 눈빛 을 받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눈빛이 담담하 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행색은 각양각색들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일검사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제보니 이들은 천하십룡(天下十龍)들이었군.' 그는 아홉 명의 노인들 중에서 두 명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개신( 神) 추추양(秋秋陽)과 남악신농제(南嶽神農帝) 구 병산(具兵山)이었다. 그는 과거 낙양의 대하풍운루에서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두 풍진기인들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개신 추추양으로 인해 그는 만상자전기를 얻게된 셈 이었다. 또한 남악신농제는 그를 만난 기념으로 자신의 신물(信 物)인 구리반지를 준 적도 있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었으므로 그쪽에서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천하십룡답구나. 이들은 내가 만난 자들 가운데 최강이라고 할만한 인물들이다.' 일검사는 그들에게서 전해져 오는 무형의 압력을 느끼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천하십룡은 정도무림의 최강의 고수들로 이 루어져 있었다. 개신과 남악신농제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다 음과 같았다. 나부광천신옹(羅浮廣天神翁), 한강조수(寒江釣 ) 서문로(西門 露), 현현신녀(玄玄神女) 나소운(羅素雲), 남악일매랑(南嶽一梅 娘) 구부인(具夫人), 천기우사(天機羽士) 사마우생(司馬羽生), 광 생초자(狂生樵子) 곽운천(郭雲川), 뇌전만붕왕(雷電萬鵬王) 하후 걸(夏侯乞) 등이었다. 그들은 개개인이 모두 일문의 조사(祖師)에 해당하는 풍진기인들 이었다. 그들 중 두 명이 여인으로 남악일매랑 구부인은 남악신농 제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소문난 호랑이 부인으로 남악신농제를 꼼짝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반면 현현신녀는 현현문(玄玄門)의 전대문주였다. "......" 숲 속에서는 질식할 것만 같은 살기가 감돌았다. 구 인은 아홉 방 향에서 일검사를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룬 전세는 실로 오묘했다. 언뜻 보면 구궁(九宮)의 방위 였으나, 자세히 보면 칠살검진(七煞劍陣)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육합(六合)의 기세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상오행팔괘(四象五行八卦)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기기묘묘한 진세였다. 게다가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은 일견하기에도 보통 검이 아니었다. 그것 은 상고신검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때, 나부광천신옹이 입을 열었다. "혈마지존. 탕마멸사대진(蕩魔滅邪大陣)이 막 완성된 순간에 찾아 오다니 정말 운이 없구나." 그러자 한강조수도 껄껄 웃었다. "헛헛헛......! 탕마멸사대진은 천외천(天外天)의 절학으로 천년 전 마왕도(魔王島)를 견제하기 위해 창안된 절대검진이지. 오늘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마왕의 후예가 첫 희생자가 되니 이 어찌 기이한 인연이 아니겠느냐?" 뇌전만붕왕도 한 마디 했다. "껄껄껄......! 탕마멸사대진은 혈마지존과 천마삼세를 위해 천하 구룡이 모두 참가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설사 당년의 절대마종이라 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일검사는 그 말에 안색을 굳혔다. '탕마멸사대진이라, 어쩐지 진세가 보통이 아니라 했더니 그 동안 치밀한 준비를 해놓았군.' 그는 구룡의 손에 들려있는 아홉 자루의 신검을 보았다. 검에서 흘러나오는 예기(銳氣)만으로도 능히 금석을 벨 수 있을 것 같았 다. 일검사는 웬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오늘은 결코 피를 흘리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면 일이 틀렸는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예감은 적중하고 있었다. 탕마멸사대진은 고금 이래로 가장 무서운 절대검진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극히 까다로운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했다. 첫째, 아홉 명의 절대고수가 필요했다. 그것도 내공이 최소 이 갑 자를 상회하는 인물들이어야 했다. 둘째, 아홉 자루의 신검(神劍)이 필요했다. 셋째, 천 년 이상 비장되어 온 절대검록(絶代劍錄)이 있어야만 했 다. 그것은 천외일맥이 비장하고 있는 중보(重寶)였으므로 강호무 림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같이 까다로운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므로 사실상 탕마멸사대진 은 지난 천 년 이래 완전히 실전되었었다. 그런데 그 가공할 검진 이 당대에 이르러 재현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한편, 천만금을 들이고, 또한 하늘도 속일 수 있는 세 치 혓바닥 재간을 총동원하여 이 실전된 고금제일의 검진을 완성시킨 자가 항마림에 숨어 음산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무혈성승(無血聖僧)이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7장 무혈성승(無血聖僧)의 간계(奸計) -2 ━━━━━━━━━━━━━━━━━━━━━━━━━━━━━━━━━━━ 우우웅......! 아홉 자루의 신검이 가공할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검기는 주위를 자욱한 검막으로 휘감고 있었다. 하나같이 상고 의 신검이므로 도합 아홉 자루의 검이 발산하는 기운만으로 풍운 이 변색하고 말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바로 신주사대성가(神州四大聖家) 중 병기만상 보의 무고에 비장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 한편 일검사는 안색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지금 그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내가 만난 어떤 상황보다 위험하다. 일단 검진이 펼쳐지면 죽이 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된다.' 문득 그의 뇌리에는 두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을주려려와 백리 빙이었다. 그녀들은 광명천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일검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용서해 주시오. 내가 살아나려면 피를 볼 수 밖에 없게 되었소.' 우우웅... 우우웅! 단지 아홉 자루의 상고신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검기만으로도 보 통 사람이라면 벌써 오장육부가 으스러져 죽었을 것이다. 상황은 점점 더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껄껄껄......! 혈마지존, 오늘 그대는 최후를 항마림에서 장식하 게 되었네!" "헛헛헛......! 다시 태어나거든 필히 선인(善人)으로 태어나게 나!" 천하구룡은 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다. 그들은 더욱 공력을 끌어 올린 듯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일검사는 신형을 휘청거렸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 다. '음! 혈마불괴지신을 익히지 않았다면 벌써 전신이 갈라져 죽었을 것이다. 백도에게도 이런 패도적인 무공이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문득 일검사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검진은 본격적으로 발동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벌써부터 호흡이 막힐 듯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실로 가공할 위세였다. 만일 검진이 발동되고 아홉 자루의 신병이 일제히 휘둘러진다면 그 위력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비장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 외의 것은...... 없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옷자락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 다. 이때, 장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노승이 나타났다. "아미타불......." 만면에 자비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노승이었다. 바로 무혈성승이 었다. 그는 온통 안타까움이 어린 불안(佛眼)으로 검진 속에 고립되어 있는 일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혈마지존, 지금이라도 시주께서 피 묻은 칼을 버 리고 불도(佛道)에 귀의한다면 노납이 책임지고 생명만은 보장하 겠소이다." 일검사는 역겨움을 느꼈다. 결국 그는 오연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후후......! 무혈, 너의 위선이 언제고 드러날 날이 있을 것이 다. 이까짓 검진 따위로 날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곧 커다 란 오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천하구룡의 얼굴에는 일제히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남악 신농제가 분노성을 터뜨렸다. "구제할 수 없는 악인이로다! 성승은 시간낭비하지 말고 어서 명 을 내리시오." 그 말에 무혈성승은 아타깝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 아까운 일이오. 혈마지존같은 고수가 무림을 위해 힘을 사 용한다면 무림의 홍복이거늘." "껄껄......! 이 자는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릴 작자요. 어서 발 진을 명하시오!" 광생초자도 재촉했다. 마침내 무혈성승은 탄식하며 수중의 염주를 흔들었다. "아미타불...... 발진 하시오!" 불호가 떨어진 순간이엇다. 차아아... 앙...! 일제히 아홉 자루의 신검이 발출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홉 자루의 신검이 일제히 전개된 순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숲이 검기로 인해 온통 가루로 변해 버리며 삽시에 방 원 삼십여 장이 평지로 화해버렸다. 콰르르르...... 천지개벽을 하는 듯한 혼돈이 계속되었다. 휘황찬란한 아홉 줄기 의 검기가 온통 천색을 가려버렸다. 그때였다. "우우우... 우...!" 굉음 속에서 쇄금강마후가 실린 일검사의 장소가 터져 나왔다. 쩌... 엉!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며 백옥검광(白玉劍光)이 치솟았다. 일검사는 광풍을 일으키는 검기의 중심부에 있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창궁검이 쥐어져 있었다. 우르르르......! 검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검사의 몸도 검신합일(劍 身合一)되어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창궁검에서는 섬뜩한 기음이 울려나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불호 가 터졌다. "아미타불......! 살형대진(煞形大陣)으로!"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 다. 콰르르릉... 콰콰쾅...! 마치 하늘과 땅이 무너지듯 검기(劍氣)가 회오리치며 근처의 나 무, 돌, 흙덩이 할 것 없이 온통 가루로 화하며 날아갔다. 아홉 가닥 검기가 폭풍이 되어 지면을 깎아나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일검사는 우뚝 서 있었다. 아홉 가닥의 엄청 난 검기가 그를 압살하듯 조여와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 다. 그는 다만 차분하게 창궁검을 앞으로 서서히 뻗어낼 뿐이었 다. 기이한 일이었다. 일검사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너무나도 허술하 여 천만 군데의 허점이 노출되고 있었다. 그것을 본 구룡은 한결 같이 의혹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들은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하 십룡의 명예를 걸고 혈마지존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이때 일검사의 손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뻗어나갔다. 그에 따라 창궁검이 슥, 원을 그렸다. "창궁무적일기검(蒼穹無敵一氣劍)!" 콰아아아아......! 불과 한 자 여섯 치밖에 되지 않는 짧은 창궁검에서 놀랍게도 삼 장 길이의 가공할 검강(劍 )이 뻗어 나갔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허억......! 저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신기(神氣)......!" 구룡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꽈르르르르릉......! 그 순간 창궁검과 아홉 자루의 신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일순 일검사는 고막이 터질 듯한 파열음을 느꼈고, 수천 수만 가닥의 광편(光片)이 전신으로 파고 드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디 그뿐이랴?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한 괴로움과 함께 엄청 난 거력에 전신이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무서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비켜라......!" 쇄금강마후가 섞인 웅혼한 음성을 외치며 그는 창궁검을 다시 뻗 어냈다. 순간 구룡은 백색 검기가 자신들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듯 한 착각을 느꼈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 러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들의 진세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그 순간을 놓칠 일검사가 아니었다. 그는 천만분지 일의 틈을 발 견해 냈다. 무수한 싸움을 거치고 죽음의 기로를 돌파해 온 그는 눈빛을 번쩍 빛냈다. '됐다. 한 사람만 죽이면 검진을 돌파할 수 있다!' 판단을 내린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궁검을 전개했다. 쐐애애애액......! 다시 삼장 길이의 가공할 검강이 뻗어 나갔다. 공교롭게도 검강이 뻗어나간 곳에는 남악신농제가 있었다. "허억......!" 남악신농제는 검광이 검진을 꿰뚫고 자신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 아오자 아찔함을 느꼈다. 절망이었다.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이로다......' 백수십 년간의 풍진강호를 질타해온 노기인도 이때 만큼 암담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남악신농제는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크윽!" 머리가 두쪽 나 쓰러져야 할 사람은 남악신농제였다. 그러나 그는 멀쩡했다. 어리둥절하여 눈을 떠보니 그의 앞에서 일검사가 칠공 으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남악신농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일검사는 내장이 온통 위치를 이탈한 듯한 고통에 휩싸여 있 었다. 그는 남악신농제를 죽이지 못했다. 그로 인해 도리어 내상 을 입은 것이었다. 막 그를 죽이려는 순간 낙양의 대하풍운루에서 있었던 일이 뇌리 에 떠오른 바람에 차마 손을 쓰지 못한 것이었다. 급격히 공격을 거두는 바람에 그는 진기가 역행하여 그만 내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콰아아아......! 검진은 다시 발동되었다. 잠깐 흐트러졌던 검세가 전보다 세 배나 강해진 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둥근 원은 안으로 바짝 좁혀 들며 일검사를 몰아치고 있었다. 아홉 자루의 신검은 완전한 제 위력을 내며 그를 향해 짓쳐 들어 가고 있었다. "크윽......!" 일검사는 피를 울컥 토했다. 그의 주위의 땅이 가공할 압력을 견 디지 못하고 일장 가량이나 푹 꺼져 버렸다. 일검사는 막대한 암경(暗勁)에 온몸이 박살나는 듯한 괴로움을 느 끼며 술이 취한 듯이 비틀거렸다. 그는 인정(人情) 때문에 진세를 파쇄할 기회를 스스로 잃어 버렸 다. 한 번 기운 전세는 만회하기가 힘든 법이다. 더구나 천하구룡은 오직 이 날을 위해 침식조차 잊고 절차탁마의 노력으로 탕마멸사대진을 익혔다. 그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 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검진의 변화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신검을 어지럽게 휘둘 렀다. 하늘과 땅은 온통 검기에 찢어지고 갈라졌다. 오직 들리는 것이라고는 검이 대기(大氣)를 박멸하는 굉음 뿐이었다. '지독하구나......!' 일검사의 칠공으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일 그가 초극강 의 무예를 익히지 않았더라면 결코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 다. 이때였다. "헉!" 일검사는 문득 등이 파열되는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넘어질 뻔했 다. 누군가의 일검이 그의 등을 가른 것이었다.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만일 그의 몸이 혈마불괴지신이 아니었다면 벌써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중심을 바로 잡았다 이 일검은 그의 정신을 일 깨웠다. 그는 가슴 속에 무서운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구룡은 연신 그를 향해 신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오고 있었다. 기 필코 그를 죽여야겠다는 각오가 그들의 얼굴에 비장하게 떠올라 있었다. 일검사는 문득 차갑게 웃었다. "우후후훗......! 그대들이 날 죽이려 하는데 내가 그대들을 죽이 지 못한다면 말이 안되겠지!" 다음 순간 그는 가공할 검기 속으로 몸을 날렸다. 파츠츠츠츳! 구룡의 아홉 가닥 검기는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러나 자욱한 혈무(血霧)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일검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홉 자루의 신검은 그의 몸에 닿는 즉시 퉁겨나갔고, 그때마다 구룡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불신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금강불괴보다 더하다." "우우...... 저 자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구룡이 누구인 가? 그들은 무림의 전대고인들이며 백전노장들이었다. 비록 놀라기는 했으되 진세를 흐트러뜨리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 어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강공을 퍼붓고 있었다. 일검사는 전신으로 그들의 검공을 받으며 계속 신형을 날렸다. 그 것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가공할 괴력이었다. '으으으......! 이 자는 불사신(不死神)이란 말인가?' 구룡은 경악하다 못해 겁에 질릴 지경이었다. 일검사는 짧은 순간 이미 삼백예순다섯 번의 검을 맞았다. 그의 몸은 온통 피로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입고 있는 백의가 홍의로 보일 정도였다. 마침내 그는 검진의 중심부를 벗어나 일방(一方)에 이르렀다. 그 렇게 되자 그를 중심으로 압박하던 힘이 절반 이상 감소되었다. 그 순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궁검을 전개했다. "창궁(蒼穹)... 무적(無敵)... 일기검(一氣劍)!" 그 소리는 검진의 폭풍을 단번에 압도해 버렸다. 쐐애액......! 한 가닥 백색검기가 아홉 줄기의 검기를 파쇄하며 뻗어나갔다. 위이이... 이... 잉! 빛살보다도 빠른 검기! 그것은 천하에서 오직 창궁무적일기검만이 발휘할 수 있는 개세무적의 검기였다. '내가 죽는다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당신들 을 죽이리라!' 일검사의 눈은 붉은 혈광을 뻗고 있었다. 이때였다. 구룡 중 한 명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창궁검 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검사는 그가 누구인지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막 상대의 정수리를 양단하려는 순간 그의 마음은 크게 흔 들리고 말았다. 그의 창궁검 아래서 비틀거리는 늙은 거지! 그는 다름아닌 개신( 神)이었던 것이다. '아아!...... 하필이면!' 이때 개신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의 찢어진 손아귀에 들려 있는 검은 아래로 처져 있었다. 번쩍! 검광이 작렬했다. 개신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의 손에서 검도 반대쪽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땅에 뒹구는 순간 그는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죽지않은 것이었다. 한편 일검사는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 뜨리고 있었다. 그는 등에 다시 삼검(三劍)을 맞고 있었다. '으으...... 두 번씩이나 천고의 기회를 놓치다니......' 그렇다. 그는 또 한 번 손을 멈춘 것이었다. 개신을 차마 죽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손을 멈추지 않았다면 개신은 이미 두 동강 이 났을 것이다. "아아......!" 일검사는 안타까운 탄식을 터뜨렸다. 이때 개신은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온 통 의혹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일검사가 마지막 순간에 공격을 거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때였다. "아미타불......! 혈마지존, 더 이상 그대를 살려둘 수가 없구려. 빈승이 부처님께 죄를 범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밤 살계(殺戒)를 열어야 겠소이다." 휘익! 개신으로 인해 비어버린 방위에 무혈성승이 떨어져 내렸다. ■ 등용문 제3권 제27장 무혈성승(無血聖僧)의 간계(奸計) -3 ━━━━━━━━━━━━━━━━━━━━━━━━━━━━━━━━━━━ '......!' 일검사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무혈성승이 빈자리를 메운 순간 검진의 위력이 갑자기 두 배나 더 강해진 것을 느낀 것이었 다. '이 자의 무공은 구룡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그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아미타불! 탕마멸사지기(蕩魔滅邪之氣)...... 항마무상대살륜(降 魔無常大煞輪)!"' 무혈성승의 불호가 울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개신이 놓친 신검 이 쥐어진 채 가공할 검기를 발출하고 있었다. 파츠츠츠츳! 검기는 섬광처럼 일검사를 향해 날아왔다. "크윽!" 일검사는 무혈성승의 일검을 가슴에 맞았다. 그의 가슴에서 피분 수가 일어났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뒤로 휘청휘청 물러났 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눈 앞이 번뜩하더니 무혈성승 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때 그는 무혈성승의 인자하던 불안에서 사악(邪惡)하기 그지 없는 마광(魔光)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정 신이 번쩍 들었다. 마공(魔功)을 익힌 사람은 마공을 알아본다. '호... 혹시...... 저 자가 바로......!' 그는 얼마 전 숭산 태실봉에서 감지했던 천마지기를 떠올렸다. 무 혈성승의 눈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은 바로 구천마왕공(九天魔王 功) 특유의 마광이었다. '이... 이 자가 그럼 천마삼세란 말인가!' 실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동시에 구검(九劍)을 얻어맞을 뻔했다. "허억!" 그는 간신히 검세를 피해냈다. '이 자가 천마삼세라면......!'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은 살아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 경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신 에는 적어도 백 군데 이상의 검상이 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여력이 있었다. 그의 단전(丹田) 에는 아직도 채 다 녹지 않은 만년지극화룡의 내단이 불가사의한 효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서서히 녹으며 불사(不死)의 힘 을 보태주고 있었다. 다만 그는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으 므로 정신이 혼미해지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피가 모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인간의 체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비록 혈마불괴지신의 신체 이기는 해도 계속 피를 흘리게 되면 결국은 쓰러질 수밖에 없었 다. '창궁무적일기검은 천하제일검법이다......' 일검사는 혼미해지는 가운데서도 창궁석부에서 본 구결을 떠올렸 다. 구결 한 자 한 자가 생생히 그의 눈 앞에 떠올라왔다. 이윽고 서 서히 그의 수중에서 창궁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으윽! 아무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창궁검이 가공할 고금제일의 검법 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구룡과 무혈성승이 보기에는 그가 기운이 탈진하여 힘겹게 검을 들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무혈성승이 가세한 이후로 검진은 더욱 막강해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일검사의 귓전으로 무혈성승의 전음(傳音)이 전해져 왔 다. (흐흐...... 혈마지존, 이곳이 네 놈이 죽을 자리다. 네 놈은 결 국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 이곳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일검사는 그를 노려보다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무혈성승을 바라보며 역시 전음으 로 물었다. (너는...... 천마삼세냐?) 그 말에 무혈성승은 전음으로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그렇지 않다. 천마삼세께서 이 따위 시시한 광명천 에 와 있을 리 있겠느냐?) (그럼..... 너는 누구냐?) 일검사는 다시 삼검(三劍)을 어깨와 등에 맞으며 물었다. (흐흐...... 천마삼세를 보좌하는 쌍호법으로 마검뇌(魔劍腦)와 마제갈(魔諸葛)이 있다. 흐흐...... 본인이 바로 마검뇌다. 무공 으로는 천마삼세 다음이 나다......) 일검사는 무서운 분노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우후훗......! 천마의 종이...... 백도까지 집어 삼켰단 말이 냐?) 두 사람 다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룡은 전 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을 가리 는 엄청난 음모의 전말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었다. (흐흐... 광명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천마단(天魔團)의 수중에 떨 어졌다면 믿겠느냐? 한 가지 더 알려주지. 어차피 죽게 될테니 말 이다. 사실 광명천이 결성된 것도 천마삼세의 명으로 이루어 졌 다. 물론 나 마검뇌가 직접 계획한 일이었지.) 일검사의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무서운 분광이 솟구쳐 올랐 다. (으으... 네 놈이 백도를 꼭둑각시로 만들어 놓았구나. 그걸 아는 자가 없다니, 천하는 모두 장님 뿐이란 말인가?) (흐흐... 본좌의 대계가 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혈마지존과 백도 가 서로 싸워 자멸하고 나면 천마삼세가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림은 하나로 뭉쳐질 게 아니냐?) 무혈성승, 아니 마검뇌(魔劍腦)는 일검사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안심한 나머지 많은 비밀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일검사는 출혈이 많아 눈 앞이 아찔아찔하고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비록 아직도 내력은 남아 있었으나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속전속결해야 한다. 늦으면 모든 게 끝장이다.' 마침내 그는 최후의 일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흐흐흐...... 너는 죽는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자들도 죽는다. 천마천하(天魔天下)를 위한 예물로 말이다.) 마검뇌의 득의에 찬 전음이 들린 순간, 일검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르르르릉......! 구검합벽(九劍合璧)이 만들어 낸 가공할 위세에 그의 몸은 이제 천참만륙되기 직전이었다. 일검사는 문득 만검뇌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마검뇌,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 마검뇌가 의아해 하는 순간 일검사는 창궁검을 가슴으로 바싹 갖 다댔다. 갑자기 그의 두 눈에서는 이전과는 전연 다른 성광(聖光) 이 발산되었다. 동시에 제왕(帝王)과 같은 기도가 일어났다. (나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하다. 이제 그것을 증명해 주마.) 일검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창궁검을 가슴에 붙인 채 이제껏 방 어하던 동작을 멈추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아홉 줄기의 검기가 그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이때였 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벌어졌다. 일검사의 몸에서 문득 금광 (金光)이 아홉 개의 환을 이루더니 구룡의 검을 막아내는 것이 아 닌가? 그 환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더욱 커졌고, 종내에는 눈부신 광채 를 뿌리며 확산되었다. 스스스......! 일검사의 몸을 박살내려던 구검합벽기는 그만 형체도 없이 스러지 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사술(邪術)이다......" 구룡은 일제히 경악성을 부르짖으며 휘청거렸다. 그들은 갑자기 힘이 쑥 빠지며 허탈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공이 마치 대해(大海)에 빠진 듯 급속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수법을 썼단 말인가? 그들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때 일검사는 가볍게 왼손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 히 밧줄에 묶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고 그 힘이 이끄는 대로 한 쪽으로 신형이 쏠리고 말았다. "만류귀종(萬流歸宗)!" 일검사의 입에서 한 가닥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창궁검을 가볍게 휘젓자 구룡은 일제히 수중의 검이 어딘가로 날 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울컥 피를 토하며 허공으로 붕 떠 날아가고 말 았다. "자전기(磁電氣)!" 일검사는 낭랑하게 외치며 창궁검을 흔들었다. 그러자 구룡은 한 가닥 부드럽고 온유한 기운이 그들의 몸을 떠받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마치 구름 위에 떨어진 듯 무사히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 다. 그러나 이때였다. "허억!" 하는 당혹성이 울렸다. 구룡이 고개를 돌려보니 무혈성승이 허공 으로부터 일검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놀라는 사이, 무혈성승은 일검사에게 완맥을 잡히고 말았다. "큭......!" 무혈성승은 피를 토하며 제압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구룡은 이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마 치 무엇엔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세는 완 전히 반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구룡은 물론 무혈성승마저 상대방 에게 제압되고 만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무혈성승의 한쪽 팔이 어깨서부터 뭉턱 떨 어져 나가며 피보라가 치솟고 있었다. 일검사의 창궁검이 그의 팔 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일검사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는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 진 무혈성승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앞으로 영원히 팔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번뜩! 검광이 일었다. 다시 하나 남은 팔이 마저 잘려져 바닥에 나뒹굴 었다. "크아아아......" 무혈성승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에 구룡은 물론, 주위에 운집했던 광명천의 군웅들이 우르르 몰려 들 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8장 광명십전수(光明十全手) ━━━━━━━━━━━━━━━━━━━━━━━━━━━━━━━━━━━ 일검사는 군웅들을 향해 쇄금강마후가 실린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 다. "멈추시오...! 다가서면 그대들은 영원히 후회할 것이오!" "......!"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들의 눈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눈빛조차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천 수백 명을 헤아리는 백도인들이 일검사 한 사람에게 완전히 압 도당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일검사는 두 팔이 떨어져 나간 마검뇌 의 멱살을 움켜쥐고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고 싶으냐? 살고 싶으냐?" 그 말에 무혈성승은 이제까지의 성승의 기도는 다 어디 가고 사색 이 된 채 만면에 공포의 기색을 떠올리며 말했다. "제... 제발... 목숨만......" 그의 그런 비굴한 모습에 군웅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이어 그들은 이제껏 자신들이 하늘같이 존경하던 그가 이런 추태를 보 이는데 대해 그만 비분을 금치 못했다. 일검사는 마도에 속한 자들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아낀다. 평소 오만하고 패도적 인 그들은 실은 누구보다도 죽음 앞에서 약해지는 것이었다. "사... 살려주시오. 다시는... 무림을 밟지 않을테니... 제 발......" 무혈성승은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벌벌 떨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흥! 어찌 널 살려둘 수 있단 말이냐?" 일검사의 음성에는 스산한 살기가 뒤덮여 있었다. "으으... 제발......" 이윽고 무혈성승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증스러운 놈.......' 일검사는 역겨움을 느꼈다. 그는 일장에 그를 쳐죽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손에 약간의 힘을 가했다. 우두둑!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사... 살려주시오... 제발......"' 마검뇌는 더욱 비굴하게 애걸복걸했다. 그의 이마에는 심줄이 툭 툭 불거지고 있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돌렸다. 주위의 군웅들은 한결같이 벌레씹은 얼굴이었다. 그들의 낭패한 얼굴에서 그는 통쾌함을 맛보았다. 그는 군웅들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이제 그대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겠소! 백도의 허울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를 말이오." 그의 말은 세상을 비웃는 듯 했고, 백도 전체를 통렬히 비꼬는 뜻 도 담겨져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마음의 괴로움에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일검사는 다시 한 차례 앙천광소를 터뜨린 후 무혈성승을 향해 말했다. "자, 이제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라. 너의 정체를 말이다. 네가 한 모든 짓들을 얘기해라." 그 말에 무혈성승, 즉 마검뇌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 며 물었다. "마... 말하면 살려 주겠소......?" "하하...... 살려 주겠다. 나는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마검뇌의 얼굴에는 한 가닥 희망이 솟아 올랐다. 그는 내 심 간계를 굴리고 있었다. '어쨌든 살아가자. 한신(韓信)의 굴욕보다 백배 더한 굴욕이라 도...... 참자. 살아갈 수만 있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다.' 그는 일검사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꿇고 있었는데 그 의 눈에는 일검사가 태산처럼 거대하게 보이고 있었다. "나... 나는...... 무혈(無血)이 아니오...... 무혈은 이미 십 년 전 죽었소......." "뭣이!" "그... 그게 무슨 말이오?" 군웅들은 한결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정신이 다 아득해 질 지경이었다. 그가 무혈성승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군웅들의 시선은 온통 경악과 회의를 품고 일제히 마검뇌에게 집 중되었다. 마검뇌는 군웅들의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말했다. "흐으... 노부는 천마삼세(天魔三歲)의 쌍호법 중 하나인 마검뇌 (魔劍腦)요......" "그, 그럴 수가!" "오오......" 군웅들은 경악과 충격에 휩싸여 넋을 잃고 말았다. 그야말로 청천 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무... 무서운 일이오......!" 군웅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공할 사실에 어찌할 바 를 몰라 했다. 이때 마검뇌의 뻔뻔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이젠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 본인은 천마삼세의 명을 받고 무혈로 변장하여 백도에 파고 들었고 사실상 광명천을 세운 것도 모두 천마삼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마검뇌는 내친 김에 더욱 놀라운 사실을 털어 놓았다. "흐흐... 한 가지 더 알려주지. 광명천 내에는 천마단의 첩자들이 다수 섞여 있다. 흐흐...... 그러니 결국 광명천은 껍데기에 불과 한 것이다." "아아...! 이럴 수가!" 군웅들은 한결같이 분노와 절망의 신음을 터뜨렸다. 이때, 슬금슬 금 자리를 떠나는 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마단의 첩자들 이었다. 상황은 급전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바람에 장내는 갑자기 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와아아......! 저 놈을 죽여라!" "더러운 천마의 주구를 쳐죽여라!" 군웅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군웅들이 달려가기 전에 먼저 구룡이 마검뇌의 앞에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수치감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죽일 놈......!" "너같은 놈은 사라져야 한다!" 그들은 치를 떨며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때였다. 문득 금빛 환이 둥글게 일어나더니 그들의 검은 모두 뒤로 튕겨나 가고 말았다. 구룡은 턱턱, 뒤로 대여섯 걸음씩 물러나고 말았다. 일검사가 그 들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는 구룡을 향해 담담하면서도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 자의 생명은 나의 것이지 그대들의 것 이 아니오." "으음." 구룡은 그만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일검 사는 마검뇌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 얇은 인피면구가 묻어 나왔다. 면구가 벗겨 진 후의 마검뇌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이제껏 인자하기만 하던 무혈성승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드러난 얼굴은 음침하고 교활한 한 늙은이의 얼굴이었다. "아......!" 군웅들은 이제 모든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껏 그들은 천마삼세의 수중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이때 마검뇌는 내심 뇌까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살아날 수만 있으면 지금보다 백배 천배로 복수할 수 있다. 흐흐...... 그때는 네 놈을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이리 라.' 이때였다. 일검사는 그의 등을 탁 때렸다. "가라, 천마의 개, 다시 천마삼세에게 전해라. 조만간 그를 찾아 가겠노라고." "끄으... 네... 네 놈이......." 마검뇌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는 등을 얻어 맞 는 순간 전신의 진기란 진기는 몽땅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것이었 다. 그 한 차례의 타격으로 그는 평생을 쌓아온 내공이 전폐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무인으로써는 최후를 선고받은 것이 다름없는 일이었다. 마검뇌는 증오와 저주의 눈물을 흘리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저만 치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으드득......! 두고 보자, 혈마지존! 조만간 너의 껍질을 벗기고 살점을 도려내 씹고, 뼈를 갈아 마시지 않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 다......!" 일검사는 무표정한 눈으로 두 팔을 잃은 채 사라져 가는 그의 뒷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이윽고 마검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몸을 돌려 구룡을 바라보았다. "......!" 구룡은 물처럼 담담한 그의 시선을 접하자 모두 수치심을 느꼈다. 일검사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창궁신협을 만날 수 있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자, 어디선가 은은하면서도 유현한 음성이 들려 왔다. "만날 수 있고 말고, 하하하...... 노부는 기꺼이 자네를 만나겠 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쪽으로 향했다. 폐허가 된 항마림 안쪽으로부터 삼 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백색 장포(長袍)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는 전신에 만인 을 압도하는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역시 백의를 입은 절색의 미녀(美女)가 다소곳이 서 있었으며 바로 뒤쪽으로는 검을 멘 삼십 세 정도의 준수한 청년이 서 있었다. "맹주(盟主)......!" 군웅들은 일제히 외치며 무인으로써는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수 많은 군웅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그 모습은 장 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삼노인이야말로 충분히 그만한 비중을 지닌 사 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천외도주(天外島主) 백리무외(百里武畏)였다. 광명천의 천주이기도 한 그는 백도의 우상이요, 신적인 존재였다. 그의 옆에 있는 미녀는 천하쌍미이자 그의 금지옥엽인 백리빙이었 으며, 뒤쪽의 청년검사는 검성(劍星) 백천기(白天奇)였다. 그들이 나타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백리무외는 군웅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탄식했다. "허......! 이러지들 마시오. 노부는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소 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의 얼굴에는 대인(大人)의 고뇌와 자책의 빛이 역력했다. 백도 맹주로서, 광명천의 천주로서 마검뇌로 인해 꼭두각시로 놀아난 일을 수치로 여기는 것이었다. "허허...... 그대가 빙아가 말한 일검사(一劍士)란 영웅이신가?" 백리무외는 일검사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 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중한 자세로 포권지례를 취했다. 결코 비굴하지도, 그렇다 고 오만하지도 않은 태도였다. 이때였다. 갑자기 백리빙이 교구를 휙 날리더니 일검사의 품안으 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상공! 오셨군요......!" "빙!" 일검사도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들은 수많은 군 웅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광경에 군웅들은 물론 백리 무외까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검사는 백리빙의 나긋한 몸을 끌어안고 그녀의 향기로운 머리카 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빙, 내가 보고 싶지 않았소?"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당신도 아시잖 아요!" 그녀는 항의하듯 숨가쁘게 말했다. 일검사와 헤어진 이후로 그녀 는 하루하루가 마치 일 년이 지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하루는 온 통 일검사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메워져 왔었다. 그러니 군웅들의 시선 따위야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 랑. 뜨거운 사랑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었다.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하긴 나도 빙매가 보고 싶어서 혼났었소." 그들의 모습은 다정한 연인, 아니 부부지간처럼 아름다와 보였다. "피이, 바람둥이...... 다 알아요. 당신은 그 동안 꽃밭에 파묻혀 있었다는 걸......" "하하! 그건 오해요." 두 사람은 그곳에 마치 자신들밖에 없는 듯이 행동했다. 그런 광 경은 군웅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말들었다. 그들은 방금 전의 살벌했던 혈전을 잊은 듯이 한결같이 부러운 시 선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일검사에 대한 반감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제는 그가 백도무림의 적인 혈마지존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편, 백리무외는 처음에는 놀라 마지 않았으나 곧 흐뭇한 시선으 로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그의 눈에는 음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 한 사람. 백도무림에서 후기제일인이란 별호를 얻고 있는 청년 의 얼굴은 더욱 어두웠다. 그는 검성 백천기였다. 지금 그는 가슴이 천만 조각으로 갈라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는 백리빙이 자신의 여인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험, 혹시......" 이때 개신과 남악신농제가 헛기침을 하며 일검사를 향해 다가왔 다. 일검사는 아직도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피에 젖은 수건을 떼어내며 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두 분 노형님, 그간 안녕하시었소?" "아......!" "자네......! 역시 자네였군!" 개신과 남악신농제는 펄쩍 뛸 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혈마지존이 바로 몇 년 전 주루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일검사란 소년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소년 일검사. 그가 바로 강호를 태풍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혈마지존일 줄이야! "반갑네......!" "헤헤헤! 아우가 바로 혈마지존이었다니?" 남악신농제와 개신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체신조차 잊고 달려와 덥썩 일검사의 손을 잡고 흔들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어린애같이 순수한 데가 있었다. 그들은 이제서야 혈마지존이 그들을 죽이기 직전 손을 거둔 이유 를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더욱 더 큰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 다. 이제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이제까지의 살벌 했던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일검사를 바라보는 군웅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존경심이 드러나 고 있었다. 이때 백리무외가 너털웃음을 치며 말했다. "허허허......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세." "가요, 상공!" 백리빙은 일검사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이때 남악신농제가 물 었다. "자네 아직도 노부가 준 구리반지를 가지고 있나?" 일검사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어른의 선물을 어찌 소중히 하지 않겠습니까?" "오......!" 남악신농제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이어 그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군웅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이 늙은이와 개신 늙은이가 내정해 두었던 광명십전 수(光明十全手)가 바로 이 분 소협이었소! 보시오! 노부의 신물인 동지환(銅指環)을 지니고 있지 않소?"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 말에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일검사의 손가락으로 집중되었다. 과연 일검사의 중지(中指)에는 하나의 구리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군웅들의 입에서 일제히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 십전수는 일검사(一劍士) 소협이시오!" "와아아......!" 군웅들의 함성은 와룡곡을 온통 뒤흔들었다. 일검사는 어리둥절하 여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악신농제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허허헛...... 본래 천하십룡은 각각 광명십전수를 추천하기로 했 었네. 그리고 자신들의 신물을 그 후보에게 주기로 했는데 노부는 애당초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뜻을 정했던 것일세." "......!" 일검사는 이 뜻밖의 말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백리무외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 다. "허허......! 묘한 인연이군. 이렇게 된 이상 자네가 십전수(十全 手)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군, 그래!" 그 말에 군웅들은 다시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이의없다는 듯이 일검사를 광명십전수로 추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검사는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도무지 생각도 해본 일이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때 백리빙이 그의 귓전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들 은 일검사의 얼굴에는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잘됐어요! 정말... 아아, 이제 전 안심할 수 있어요." 백리빙은 기쁨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일검사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거야말로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군." ■ 등용문 제3권 제28장 광명십전수(光明十全手) -2 ━━━━━━━━━━━━━━━━━━━━━━━━━━━━━━━━━━━ 연못가에 그림처럼 아름답게 축조된 정자가 있었다. 지금 그 정자 속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사나이는 여인의 무릎을 베고 한가롭게 누워 있었으며, 여인은 사 나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두 남녀는 지극히 행복한 모습이었다. "......" 일검사는 백리빙의 부드러운 무릎을 베고 누운 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와룡곡에 온 지도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는 광명십전수(光明十全手)로 발탁되었다. 광명십전수는 백도무 림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광명천의 일천 명 청년고수들의 수장(首 長)이었다. 광명십전수가 탄생하는 순간 백도의 내일을 짊어질 젊은 고수들은 무서운 힘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일검사는 더 이상 혈마지존이 아니라 광명천의 떠오르는 태 양(太陽)과 같은 존재로 변신한 것이었다. 그 동안 그는 창궁신협 백리무외와 수차에 걸쳐 논의했다. 그것은 마왕도(魔王島)를 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천마삼세를 제거할 계 획을 상의했다. 천마삼세만 제거하면 무림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 동시에 일검 사는 혈문의 빚을 갚게되는 것이며 백도의 젊은 제왕이 될 수 있 었다. '마치 모든 일이 꿈결과도 같군.' 일검사는 과거를 생각하며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의 행적을 더듬어 보았다. 단 하루라도 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혈전이요, 위기의 길을 걸어오 지 않았는가? 백도무림은 그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죽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 지 않고 괴롭혀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는 백도의 태양이 되어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지 않은가? 이런 놀라운 변화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후후, 삶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로군.' 이때 백리빙이 섬섬옥수로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달콤한 음성으 로 물었다. "상공, 무슨 생각을 하세요?" "음?" 일검사는 상념을 중단하고 눈을 치떴다. 바로 위에 백리빙의 아름 다운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이 그윽한 정감을 품은 채 그 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문득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과거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진회하에 배를 띄우고 흘러가는 배 위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일 들... 달콤하고 격정적이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백리빙은 이제껏 그가 만난 여인들 중에서 가장 여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주장한 적도 없었고 오직 순종밖에 모르는 여인이었다. 일검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어떤 생각이요?" "후후, 장차 빙매가 낳을 아이가 계집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 이오." "어머!" 백리빙은 옥용을 노을처럼 붉혔다. "그리고 기왕이면 빙매를 꼭 닮았으면 하고 말이오." 그 말에 백리빙은 살레살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반대예요." "......?" "저는 사내아이였으면 좋겠어오. 그것도 당신을 꼭 닮은 아이로 말이에요." 일검사는 그녀의 말에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왜 웃죠?" "핫핫...... 웃지 않게 되었소?" "......?" "빙매가 낳은 아이, 그리고 옥경, 설화, 화영 모두들 나를 꼭 닮 은 사내아이를 낳으려 하니 그렇게 되면 똑같이 생긴 아이가 다섯 이나 되니 어떻게 구별을 한단 말이오?" "어머!" 일검사의 장난스러운 말에 백리빙은 그만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깔깔 교소를 터뜨렸다. 두 남녀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실로 행복해 보이는 정경이었다. 일검사는 문득 백리빙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자 백리 빙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호수같이 맑은 눈에 그윽한 기운이 몽롱하게 떠올랐다. 이 윽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과 입술이 닿은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 았다. 정자 안에는 미풍이 불고 있었다. 꽃향기가 가득 실린 미풍이 서 로의 입술을 탐닉하고 있는 남녀를 휘감고 지나갔다. 연못에는 잉어가 뛰어 올랐다가 수면에 파문을 남기며 사라졌다. 조용한 후원이었다. 평화로움만이 잔잔하게 깔려있는 이곳의 풍정 은 두 남녀의 뜨거운 사랑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흠......!" 문득 나직한 기침소리가 그들의 달콤한 꿈을 깨뜨렸다. 그들은 황 급히 서로의 몸에서 떨어졌다. 백리빙은 고개를 돌리다 그만 얼굴 을 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정자로 통하는 월교(月橋) 위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백리빙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형께서 웬일로......." 그는 바로 검성(劍星) 백천기였다. 백리빙의 사형이자 백리무외의 수제자였다. 그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일검사를 노려보며 억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 했다. "사부님께서 소협을 부르시오." 일검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빙매, 다녀오겠소. 아마 장인어른께서 우리들의 혼사일을 잡으려는 모양이오?" 그는 일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 설마......" 백리빙은 부끄러운 듯 낯을 붉혔다. 이윽고 일검사는 월교를 통해 정자를 빠져 나갔다. 그는 다리 중간에서 백천기와 스쳤다. 그 순 간 백천기의 눈에서 한 가닥 살기가 일어났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 지는 않았다. 그가 사라진 후, 백천기는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백리빙은 그만 뒤로 주춤 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난간이 등에 걸리자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사형, 어인 일이에요?" "사매." "네, 사형." "나는......" 백천기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광채가 솟아 나왔다. 백리빙은 움찔 했으나 곧 야무지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하세요. 사형." 백천기는 한동안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물 었다. "너는... 그 자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백리빙은 안색이 변했다. "그건 왜 묻죠?" "이 백천기는 네가 어릴 적부터 너와 줄곧 함께 있었다. 그 자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들이 함께 한 의미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사형!" 백천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그 자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 지만 나는 널 포기할 수 없다." "사... 사형!" 백리빙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천기는 내침 김에 계속 말했 다. "널 사랑하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 자와 어떤 일이 있었 다 해도 마찬가지다. 넌... 영원히 내 여자다." 백리빙은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사형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념이 강한 위인이었다. 따라 서 그가 한 번 선언한 말은 죽을지언정 지킬 것이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만 가슴이 답답해지고 말았다. "빙." 문득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백천기가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놔요, 사형." "빙, 내 마음을 알아다오. 난 널 오랫동안 사랑해 왔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백천기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백리빙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 다. ■ 등용문 제3권 제29장 사랑과과 질투(嫉妬) ━━━━━━━━━━━━━━━━━━━━━━━━━━━━━━━━━━━ 일검사는 대전에 들어선 순간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 텅 빈 대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백천기의 전갈을 받 고 광명천주 백리무외가 있는 광명전으로 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때였다. "후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불러냈소." 문득 우측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검사는 몸을 돌 렸다. 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곳에는 관산추가 서 있었 던 것이다. "천주가 날 불러낸 것이 아니란 말이오?" 관산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미안하지만 당신을 속였소." "무엇 때문에?" 관산추는 그를 노려보며 눈빛을 번쩍 빛냈다. "만일 당신에게 용기가 있다면 날 따라 오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관산추는 신형을 날렸다. 일검사는 잠시 망설이 다가 그를 따라 몸을 날렸다. '어쩌나 두고 보자.' 잠시 후, 관산추가 도착한 곳은 와룡곡 안쪽의 깊숙한 계곡이었 다. 쿠쿠쿠쿵......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 다. 자욱한 물보라가 폭포수 아래의 담(潭) 주변을 감싸고 있었 다. 관산추는 폭포수 아래의 커다란 암반 위에 우뚝 선 뒤 돌아섰다. "이곳은 천외도의 일백팔수(一白八秀)가 피땀 흘려 무공을 연마하 던 곳이오." 일검사는 일백팔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들은 도검쌍성을 위시한 천외도의 젊은 고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구천마 왕교와의 싸움에서 눈부신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광명십전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소!" 일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래서 날 이곳으로 불러내어 어쩌자는 것이오?" 그 말에 관산추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폭포수 안쪽으 로부터 백여 개의 인영이 뚫고 나왔다. 그들은 빛살같은 신법으로 암반 위에 떨어져 내렸다. 모두 일백팔 명이었다. 하나같이 이십대에서 많아야 삼십대를 넘 지 않는 젊은 청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마도인인 혈마지존과 양립할 수 없다! 널 꺾어 백도의 자 존심을 회복하겠다!" 천외도의 일백팔수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일검사는 눈살을 찌 푸렸다. '이들과 싸움을 벌이면 안된다. 어렵게 백도와 화해를 이룩했는데 다시 피를 흘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염두를 굴렸다. 그러나 일백팔수는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으 로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호락호락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다. 이때 관산추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만일 네가 일백팔수를 꺾는다면 두 말 않고 네 명령을 따를 것이 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널 인정할 수 없다!" 일검사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들은 피를 보아야겠단 말인가? 마왕도와의 일전을 남겨두고 이렇게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야 한단 말이오?" 그 말에 일백팔수는 모두 난색을 지었다. 그러나 이때 관산추가 호통을 쳤다. "닥쳐라! 네 놈은 혈마지존이니 결국 마왕도와 일맥이 아니냐? 그 런데 어찌 널 믿으란 말이냐?" 그 말에 일백팔수는 일제히 적의를 드러냈다. 일검사는 문득 깨달 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제보니 이 자가 선동했구나. 일백팔수는 감히 천외도주의 명을 거스릴 수 없을 것이다. 천외도주의 제자인 도검쌍성이 선동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관산추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광명십전수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야망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오직 사형인 검성 백천기 밖에 없었 다. 그러나 뜻밖에도 혈마지존이 나타남으로써 그의 야망은 덧없는 물 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무공으로는 일검사의 적수가 될 수 없 었다. 그러던 차에 백천기가 그에게 협상을 제의해 왔다. 그것은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사제, 자네는 광명십전수가 될 생각이 없나?" "무슨... 말씀이오? 사형?" "솔직히 말해보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이 사형을 도와주기 만 하면 자넬 광명십전수로 밀어 주겠네." 한밤에 찾아온 백천기의 말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관산추는 귀가 솔깃하여 물었다. "어떻게 말이오?" "난 광명십전수에 생각이 없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뿐일 세." "......" "내겐 사매만 있으면 되네. 빙사매와 맺어질 수만 있다면 광명십 전수 자리는 쾌히 자네에게 양보할 수 있네." 관산추는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럼 사형의 생각은......?" 이간계(離間計)였다. 도검쌍성은 결국 마음이 맞았고 그들은 혈마 지존이 광명십전수가 될 수 없다는 설득을 일백팔수에게 했다. 따지고 보면 일백팔수는 천외도의 정영들로 그들 역시 마도 출신 인이 자신들의 수뇌가 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던 참이었다. 결 국 도검쌍성은 이간계를 쓰는 데 성공했고 일검사를 유인하여 그 를 죽이기로 짠 것이었다. 설사 그를 죽일 수는 없다고 해도 그 와중에서 사상자(死傷者)가 난다면 그들은 다시 일검사를 살인을 즐기는 마도로 몰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관산추! 이건 너의 간계냐?" 일검사는 관산추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흥! 넘겨짚지 마라! 어차피 혈마지존과 천외일맥은 양립할 수 없 는 사이다!" 일검사는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관산추가 명을 내렸다. "쳐라! 혈마지존을 이곳에서 살려 보낼 수 없다! 저 자를 죽이고 천외일맥이 무림의 횃불임을 증명하자!" "와아!" 일백팔수는 혈기 방장한 청년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선동에 약했 다. 게다가 다수였으므로 비록 혈마지존의 무공이 개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군중심리에 몰려 마침내 공격을 개시하기 시 작했다. 파츠츠츠츠......! 일백팔수의 무공은 고강했다. 그들은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들 가 운데서는 최상급에 속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으므 로 진세를 형성하고 공격을 가하자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일검사는 한 가운데 우뚝 선 채로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 등용문 제3권 제29장 사랑과 질투(嫉妬) -2 ━━━━━━━━━━━━━━━━━━━━━━━━━━━━━━━━━━━ 짝! 백천기의 뺨에서 날카로운 가격음이 울렸다. "......!" 백리빙은 그의 뺨을 호되게 친 후 야멸차게 말했다. "물러서요! 저로 하여금 사형을 경멸하게 하지 마세요! 우린 이 미...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사이에요. 왜... 그럴 모르 죠?"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백천기는 손바닥 자국이 난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문득 탄식했다. "그렇군. 이미 우린......" 그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 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허 탈한 기색이 가득 어려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가? 사매인 백리빙과 부부가 되어 강 호를 주유하는 꿈은 그의 삶의 목표였고 희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은 남이 되어 멀어져야만 한다니..... 백천기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백리빙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음성 으로 말했다. "결국... 우린 끝장이란 말이오?" "그래요, 전 이미 그 분의 여자가 되었어요." "그의... 여자가 되었다고?" 백천기의 안색이 다시 희게 탈색되었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그 놈이... 그리도 좋단 말인가? 어째서 지난 세월동안 함께한 날 제쳐두고 그런 놈을......" "말 조심해요, 사형!" 백리빙은 차갑게 외쳤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일검사의 존재 만으 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나이가 그녀의 마음에 깃들 공간은 전무했다. "좋아.... 하지만 이별주 정도는 허용할 수 있겠지?" 백천기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매를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보낼 수 밖에 없다면 보내 주겠 소. 하지만 이별주 한 잔은 나눠줄 수 있겠지?" 백리빙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십수 년 동안 그 녀를 보살펴온 그였다.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요.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 사인 끝이에요." 와룡곡 서쪽 절벽에 한 채의 소축(小築)이 있다. 그곳은 한적한 곳으로 평소에는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본래는 명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천외도주가 가끔 머무는 곳으로 아는 사람이 적은 곳이었다. 백천기는 소축의 정자에서 이별주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아! 이 한 잔의 이별주가 망각주(妄覺酒)였으면... 한 잔을 마 시고 모든 것을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백리빙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는 지를 새삼 깨달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 어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사형, 세상에는 저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무수히 많아요. 사형 이라면 얼마든지 새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 러니 저같은 건 잊어 버리세요." 그녀는 잔을 내밀었다. "이 한 잔을 마시고 새출발 하세요, 사형." "그럴 수... 있을까?" 백천기는 술잔을 부딪치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백리빙은 잔을 부딪친 후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가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본 백 천기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사형도 마셔야죠." "그래......" 백천기는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그의 눈은 이상한 광채를 띄운 채 백리빙을 살펴보고 있었다. 백리빙은 빨리 그와 헤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이별주를 두 번에 나누어 마셔버렸다. "이제 그만 가봐야 겠......" 문득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던 그녀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 며 비틀거렸다. "내가 부축해 주지." 백천기는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껴안았다. "괜찮아요. 나 혼자서 얼마든지......" 어찌된 것인가? 백리빙은 갑자기 천지가 빙글 도는 느낌에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니 자연 백천기의 품으로 기댈 수밖에 없었 다. "왜 이리 어지러울까.....?" 그녀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문득 눈 앞의 백천기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졌다. "괜찮아. 사매... 내가 있으니까." 귓전에 백천기의 음성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소스라 치게 놀랐다. "술 속에 무슨 짓을.......!" 너무 늦었다. 그녀가 음모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 녀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백천기의 품으로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몽롱하게 풀려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사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날 이해해 주기 바라 오." 백천기는 품 속에서 축 늘어져 있는 백리빙의 옥용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때였다. "으음... 상공. 안아줘요......." 문득 품 속에서 백리빙이 신음을 발했다. 그녀의 몸은 서서히 뜨 거워지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도화빛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사제가 구해준 약은 효과가 탁월하구나.' 그는 술 속에 탄 미약의 효능이 금방 나타나자 결심을 굳혔다. "잠시 후면 사매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오." 그는 백리빙의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덮어갔다. 뜨거운 입술 이 접하는 순간 백리빙은 갑자기 그의 목을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상공......"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천기는 증오심이 일었으나 그럴수록 더욱 마 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백리빙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 이 가슴에 닿자 뭉클한 감촉이 왔다. 그 순간 백천기의 피가 끓었다. 그는 무공수련만 하느라 여색을 멀리해 왔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안고 있는 이 순간에 참 고 참았던 정욕이 마침내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사매... 사랑하오!" 그는 백리빙의 입술을 탐하며 조급하게 그녀의 옷을 벗겨내려갔 다. 마침내 그의 손끝에 뜨겁고 탄력 넘치는 여인의 유방이 감촉 되었다. 정자 안에는 춘풍이 불기 시작했다. "아아... 상공!" 백리빙은 강렬한 최음제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일검사인 줄로 착각한 채 온몸을 뒤틀어대고 있었다. 백천 기는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며 희열에 떨고 있었다. 도리어 적극적인 것은 백리빙이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머리칼을 끌어안으며 계속 신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몸부림치는 동안 그녀의 옷자락은 태반이 벗겨져 나가고 눈부신 나신이 드러나고 있었다. 백천기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 는 백리빙의 가슴에 엎드린 채 조급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부드러운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가며 그는 목이 타 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의 눈 아래에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여인이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누워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오, 빙......." 그는 터질 듯이 익은 백리빙의 유방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받자 유방은 더욱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 했다. 두 알의 유실 은 손가락 끝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흐윽... 상공......" 백리빙은 허리를 파도치듯 흔들며 신음을 발했다. 그 순간 백천기 는 이를 갈았다. '으으... 널 죽이리라!' 일검사란 사나이를 생각하자 백천기는 증오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 증오는 파괴적인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거칠어지기 시작 했다. "악!" 백리빙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젖가슴을 세게 움켜쥐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고통보다는 쾌감을 더욱 느끼는 듯 백리빙은 더욱 요란하게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흐흐......" 백천기는 음침하게 웃으며 여체를 애무해 나갔다. 그의 손길은 잘 록한 허리에서 뒤로 돌아가 확 퍼진 둔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동 시에 그는 성급하게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정자에서 마침내 거친 숨소리가 높아지고 있었 다. ■ 등용문 제3권 제29장 사랑과 질투(嫉妬) -3 ━━━━━━━━━━━━━━━━━━━━━━━━━━━━━━━━━━━ 꽈르르릉! 폭음이 울렸다. 일백팔수는 일검사의 장력에 일제히 뒤로 밀려 나 갔다. 그들의 안색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럴 수가...... 도대체 이 자의 무공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벌써 한 식경이 지나도록 그들은 진세를 발동했으나 일검사의 옷 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검사는 무림사상 가장 강하다는 탕마멸사대진 을 격파한 몸이었다. 아무리 일백팔수의 공격이 강하다 해도 천하 구룡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일백팔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의 공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었다.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관산추는 점차 불안을 느끼고 있었 다. 그는 일검사의 무공이 상상 이상인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두 려움이 치솟고 있었다. '으으... 만일 놈이 진세를 무너뜨리면 그때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일검사를 노 려 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그렇다, 놈의 심기를 흐트러뜨리면!' 그는 급히 전음으로 외쳤다. (혈마지존! 지금쯤 빙매가 어찌되었는지 아느냐?) 일검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관산추의 얼굴에 음흉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흐흐... 지금쯤 백사형과 한창 운우지락(雲雨之樂)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럴 줄은 몰랐겠지?" "뭣이?" 츠으읏! 선혈이 치솟았다. 일검사는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그만 삼검을 맞 은 것이었다. 그의 어깨와 등에서 피가 튀었다. "흐흐흐! 이미 늦었다. 지금쯤 사매는 백사형의 품에 안겨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야아아아아!" 일검사의 입에서 쇄금강마후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장내의 상황 은 급변하고 말았다. "으으윽!" "크으으......!" 일백팔수는 고막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내공이 약한 그들로서는 도저히 쇄금강마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꽈르르릉! 뇌음이 일었다. 일검사를 에워싸고 있던 십팔 명의 청년들이 비명 과 함께 날아갔다. 그들은 그대로 폭포수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 다. "이... 더러운 놈!" 섬전인들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 눈 앞에 무엇인가 번뜩했다고 느낀 순간 관산추는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앞 에는 일검사가 떨어져 있었다. 일검사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혈 광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어디 있느냐?" 무시무시한 음성이었다. 관산추는 숨이 막히는 바람에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심장이 바짝 오그라붙어 있었다. 설마 상대가 이렇게 무서운 무공을 소유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말해라! 빙은 어디 있느냐!" 일검사는 관산추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제 손을 가볍게 떨치기만 해도 관산추는 전신이 피모래가 되어 사라질 판국이었다. "으으... 손을......" 관산추의 얼굴이 시꺼매졌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제껏 상대를 과소평가했던 것을 그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일검사는 비로소 손을 느슨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여 전히 으시시하기만 했다. "말해라. 빙은 어디 있느냐?" 관산추는 좌절을 느꼈다. '틀렸다. 이 자는... 내 적수가 아니다.' 마침내 그는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와룡곡 서쪽 끝에 있는 소축(小築)......"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폭포수 속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 순간 일검사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신형을 날려 사라진 것이었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일백팔수는 마치 한 바탕 악몽이라도 꾼 듯 멍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 등용문 제3권 제29장 사랑과 질투(嫉妬) -4 ━━━━━━━━━━━━━━━━━━━━━━━━━━━━━━━━━━━ "하아......" 백리빙은 입을 딱 벌리며 신음을 발했다. 백천기의 우람한 몸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가 벌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도리어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더러운 놈!" 문득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이 정자를 울렸다. "헉!" 백천기는 막 입성하려는 찰라 전신의 피란 피가 모두 얼어붙는 것 을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바로 등 뒤. 언제 나타났는지 일검사가 만면에 살기를 띈 채 우뚝 서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어떻게 나타났느냐?" 일검사는 싸늘하게 말했다. "소위 백도무림의 기수라는 너희들이 이렇게 비열한 족속인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러고도 백도의 고귀함을 내세울 테냐?" "으으... 난......" 백천기는 진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 다. 옷은 거의 흘러내려와 있었으며 낭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 었다. "손 한 번 들면 널 간단히 죽일 수가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일검사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생각 같 아서는 단숨에 그를 쳐죽이고만 싶었으나 그는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고 있었다. 만일 몇 개월 전이었다면 벌써 그를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러나 그는 과거와 달랐다. 특히 아들 천의영을 본 이후로는 완전 히 달라져 있었다. "나... 난 사매를 사랑했었다." 백천기를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러나... 널 만난 이후 사매는 변했다. 난... 모든 것을 잃어도 사매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일검사는 코웃음쳤다. "그래서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빙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단 말 이냐?" 백천기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어 그는 주섬주섬 옷을 걸치더 니 힘없이 말했다. "뭐라 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는 증오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일검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언젠간 널 죽이고... 사매를 되찾겠다!" 휙! 백천기는 신형을 날렸다. 일검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탄지 혈통을 날려 그의 뒷통수에 구멍을 뚫고만 싶었으나 억지로 참아 야만 했다. "어리석은 놈! 네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냉랭한 음성을 들으며 백천기는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증오심에 찬 음성이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기다려라... 기필코 언젠가는 널... 죽이고 말테니까......" 일검사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어찌하여 백도라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이란 말인가? 잘못 을 뉘우칠 줄을 모르니......" 그는 시선을 백리빙에게로 향하다가 흠칫 놀랐다. "빙!" 백리빙은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마구 긁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로 인해 그녀의 백옥지신에 손톱자국이 그어지고 있었 다. "흐으윽... 날... 안아줘요......" '지독한 춘약에 당했구나!' 일검사는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백리빙을 옆구리에 끼고는 신형을 날렸다. "잠시만 참으시오, 빙......" 그는 백리빙을 안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혈도 를 풀어주는 순간 펄펄 끓는 육체가 그의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 꼈다. "상공......" 여인은 사나이를 필요로 했고 사나이는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 었다. 이윽고 두 남녀는 한덩이가 되어 서로의 몸을 섞기 시작했 다. 비록 음모에 의한 정사였으나 사랑하는 남녀였으므로 아무런 거리 낌없이 그들은 뜨거운 정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짹짹짹...... 청아한 새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창문이 훤히 밝아올 무렵에야 백 리빙은 제정신을 찾았다. "사... 상공!" 그녀는 자지러지고 말았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채 일검사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어찌된 거죠?" 일검사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쪽! 소리나게 맞추었다. "아무 일도 없었소. 우린 그저 행복한 밤을 보냈을 뿐이오." 백리빙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제게... 무슨 일이 있었죠? 네? 그래요! 사형... 백사형 이......" 거기까지 말하곤 그녀는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어렴풋이 어제의 일이 생각난 것이다. 이별주를 함께 마시곤... 그 후에 일어났던 일들이 토막토막 그녀의 뇌리에 되살아나고 있 었다. "흐흑......!" 마침내 그녀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술 속에 무엇인가 들었음 이 틀림없었다. 그로 인해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소. 정말이오. 내가 왔을 때 빙에겐 아무 일도 일 어나지 않았소." "저... 정말인가요?" 백리빙은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배꽃처럼 애처롭기만 했다. 일검사는 그런 그녀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는 백리빙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사랑스런 여인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켜낼 것 이오." "아아, 상공......" 백리빙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일검사는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던 손이 점차 아 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동그란 둔부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러 자 백리빙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고양이같은 신음을 내었다. "으응... 그만 해요." "후후, 그만할 수 없다면?" "아이......." 백리빙은 그만 부끄러운 듯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일검 사는 그녀를 몸을 담쑥 안아 자신의 배 위로 올려놓고는 중얼거렸 다. "이거 참 큰일 났군." "뭐... 가요?" "당신과 함께 있기만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단 말이오." "모... 몰라욧!" "하하하하핫......" 두 남녀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방 안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로 인해 일검사를 부르러 왔던 시종 한 명은 거의 반나절이나 밖에서 왔다갔다 해야만 했었다. ■ 등용문 제3권 제30장 무저갱(武低坑)의 괴인(怪人)들 ━━━━━━━━━━━━━━━━━━━━━━━━━━━━━━━━━━━ 광명천주의 전갈을 받은 일검사는 광명전으로 들어섰다. 그가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 대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들을 둘러본 후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그렇다. 대전 안에 모인 사람들은 당금 백도무림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었다. 먼저 천하구룡(天下九龍)을 비롯하여 구파일방의 장문인(掌門人) 들이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성가(四大聖家)의 가주(家主)를 비롯하여 광명십장로(光明十長老)에 이르기까지 모 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물론 대전 중앙의 태사의에는 천외도주이자 광명천주인 백리무외 가 앉아 있었다. 지금 백리무외의 앞 자단목 탁자 위에는 한 통의 흑첩(黑帖)이 놓 여 있었다. "어서 오게." 백리무외는 침중한 음성으로 일검사를 맞이했다. 일검사가 들어서자 중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연중 일 검사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검사는 정중히 중인들을 향해 포권한 후 백리무외를 향해 다가 갔다. 백리무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탁자 위의 흑첩을 가리켰다. "자네가 직접 보게. 천마삼세가 보낸 것이네." "......!" 일검사는 눈썹을 꿈틀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천마삼세가 보낸 첩 지라니....... 그는 내심 긴장을 느끼며 흑첩을 들어 펼쳐 보았 다. 흑첩에는 간단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본도에서는 혼탁하기 그지없는 당금무림의 대세를 논의코자 하오 니 광명천의 명숙들께서는 초청을 수락하여 일차 왕림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제현들께서 왕림 후 본도는 항구적인 무림평화를 위해 천마율법(天魔律法)을 선포하고자 하니 함께 자리를 빛내 주 리라 믿는 바이오. - 천마삼세(天魔三歲)> 첩지의 내용은 광명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의 뜻을 담고 있었다. 동시에 마왕도가 천하무림의 패권을 장악하겠노라는 의지를 분명 히 표현하고 있었다. 일검사의 짙은 눈썹을 꿈틀 곤두섰다. 문득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냉오한 웃음이 어렸다. "드디어 천마삼세가 나타났군요. 기다리던 바입니다. 이번 기회에 마종(魔宗)의 숙원을 풀겠습니다." 일검사의 전신에서 가공할 혈마기(血魔氣)가 일어났다. 그 광경에 중인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감을 느 낀 것이었다. 이때 백리무외가 침중한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마왕도(魔王島)가 노골적으로 야망을 드러낸 셈일세." 일검사는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그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합 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네. 천마삼세는 무서운 인물이네." 백리무외는 자못 염려스럽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가슴 을 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홍수가 나면 흙으로 막고, 싸움이 나면 장수로 막는다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백리무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과연 젊은 패기는 이 늙은이를 놀라게 하는군." 이어 그는 중인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침내 때가 왔소. 천마삼세는 한 달 후 태산 마왕도(魔王島)에 서의 일전을 요청했소. 이제 우리도 그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오." "......!" 중인들은 숙연한 신색으로 백리무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 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격동이 일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끌어오던 싸움이던가? 이제 바야흐로 그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백도무림의 전력은 사상 최고였다. 특히 혈마지존이 광명천에 가세하였으므로 그들은 마왕 도에 대해 과거처럼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 백리무외는 유현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광명천의 전력은 재정비 되었소. 거기에 등용문(登龍門)의 세력 을 합치면 이번 일전의 승산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오." 그 말에 중인들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매사는 완벽해야 하오. 마왕도로 가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하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무외의 말은 모두가 지당했 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좌중의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대책 상의 에 들어갔다. 백리무외가 주도하는 가운데 광명천의 조직을 재편 하는 문제에서 마왕도로 출발하는 일정과 대오 등을 하나하나 차 분히 상의해 나가고 있었다.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대책회의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무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승부수는 던져진 셈이었다. "자, 이제 모두 가서 일전을 대비하시기 바라오." 백리무외가 회의의 종결을 알리자 중인들은 분분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처리하기 위해 대전 을 나섰다. "......" 넓은 대전에는 이제 일검사와 백리무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백리무외는 기이한 눈빛으로 일검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었 다. "이제 무림의 장래는 자네에게 달렸네." 그 말에 일검사는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생은 경륜이 부족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 다." "아닐세. 노부는 이제 늙었네. 앞으로는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길 생각이네." 일검사는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인 어른께서는 아직도 건재하십니 다." 장인 어른이란 말에 백리무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러나 그 는 곧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허허...... 아니야. 노부는 이제 쉬고 싶네." "하지만 장인 어른은 아직 충분히......" "허허,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노부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 네." 일검사는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백리무외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왕도의 일전으로 무림의 운명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네. 아니 분명 그리 될 것이네. 만일 우리가 패한다면 무림은 암흑 속에 떨어지고 마네. 그러니 이 중요한 일전을 어찌 노부 같 은 늙은이가 떠맡을 수 있겠나?" "......" 일검사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쩐지 마음 속으로 의 혹이 고개를 처들고 있었으나 당장은 백리무외의 말을 경청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노부는 이미 마음을 굳혔네. 그러니 자네는 노부의 말을 따라 주 어야 하네." "물론입니다. 어떤 명을 내리신다 해도 따르겠습니다." 일검사가 공손히 말하자 백리무외는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허허, 그래야지. 자네가 곁에 있으니 이 늙은이의 마음이 든든하 네." 문득 그는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네. 노부가 자네를 위해 안 배해 둔 것이 있네." 일검사가 의아한 눈으로 백리무외를 바라보자 그는 턱 밑의 수염 을 쓰다듬으며 갑자기 껄껄 웃었다. "자네는 고금오대절기(古今五大絶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가?" 일검사는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본 천외일맥(天外一脈)도 그 속에 포함됨을 알겠지?" "압니다." "헛헛...... 노부는 자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네. 이렇게 된 이상 천외도는 자네의 것이나 다름없는 셈일세." "......" 일검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천외절기를 굳이 익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백리빙과의 관계로 인해 차마 입 밖에 내어 거절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이윽고 백리무외는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게. 이젠 모든 것을 넘기고 쉬고 싶네." 앞장 서 걷는 백리무외의 뒷모습은 웬지 쓸쓸해 보였다. 한 시대 를 풍미한 기인 백리무외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게도 나약해 보이 기도 했다. ■ 등용문 제3권 제30장 무저갱(武低坑)의 괴인(怪人)들 -2 ━━━━━━━━━━━━━━━━━━━━━━━━━━━━━━━━━━━ 철옥(鐵屋). 그곳은 전체가 온통 묵옥강석(墨玉剛石)으로 된 집으로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백리무외는 철옥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곳에 천외천(天外天)의 모든 것이 비장되어 있네." "......" 일검사는 웬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천외도의 절학이 이곳으로 옮겨졌단 말인가?' 이때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백리무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걸세. 하지만 알고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 이 아니네. 자네는 천외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천외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강호상에서도 천외도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검사가 고개를 젓자 백리무외는 쓸쓸하게 웃었다. "허허...... 천외도는 이제 영원히 지상에서 볼 수가 없게 되었 네." "......!" 일검사는 안색이 변했다. 백리무외는 과거의 추억을 더듬는 듯 한 동안 허공을 바라보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천외도는 과거에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네. 하지만 지금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어졌다네." 일검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됐습니까?" "본래 천외도는 등격리사막 한가운데 있는 사중도(砂中島)를 일컫 는 것이네. 그곳은 사막 한가운데 있으나 물이 있을 뿐더러 울창 한 숲이 우거져 있고 온갖 희귀한 짐승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네." 일검사는 고사를 통해 사막 한가운데 초지(草地)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랬었군. 천외도는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막 한가운데 있 는 섬이었군.' 백리무외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천외일맥은 대대로 그곳에서 살며 평화롭게 살아왔지. 그런데 어 느 날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네. 그것은 천외도의 사저(沙低)를 흐 르고 있던 유사(流沙)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천외도가 점차 모래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것일세." "아!" "기실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노부의 대에 이르러 그 진행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네. 뿐만 아니 라 물이 고갈되는 바람에 숲마저 말라죽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으로 변하고 말았네." 백리무외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빛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백방으로 천외도가 가라앉는 것을 방지하려 했지만 대자연의 순 리를 인간이 막을 수는 없었네. 결국 얼마전 천외도는 완전히 모 래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네." 일검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됐군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천외일맥은 천외도의 모든 것을 중원으로 옮 겨왔다네.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는 중원에서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네." 비로소 일검사는 납득할 수 있었다. 백리무외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을 자네에게 넘길 생각이네." 그는 문득 철옥의 문에 손을 갖다 댔다. 어디를 어떻게 눌렀는지, 그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기관이 작동하며 철문이 열렸다. 철문 안쪽은 어두웠다. 다만 천장에 박힌 야명주가 푸르스름한 빛 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오게." 백리무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일검사는 그의 뒤를 따라 철옥 안으로 들어갔다. 철옥 안은 장방형의 형태였는데 창문 하나 없는 단순한 구조로 되 어 있었다. 기물이라고는 방 한가운데 놓여있는 검은 철탁(鐵卓) 하나가 전부였다. 이때 일검사는 바닥에 무수한 선이 종횡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발 견했다. 그는 선을 바라보며 내심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곳이 아니다. 아마도 무서운 기관진식이 안배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설사 외인이 이곳에 들어왔다 해도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딛으면 천하의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는 곳이네. 자네는 노부의 발을 잘 보게. 한 발도 잘못 딛으면 안되네." 백리무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 한가운데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 다. 그는 극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좌로 삼보(三步), 다시 우로 오보(五步)...... 그는 똑바로 걸어 갔다가 때로는 오른쪽으로 돌았고, 또는 뒤로 후퇴하기도 했다. 방 가운데까지의 거리는 불과 이십여 보 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곳에 도달하기까지는 최소한 백보 이상을 걸어야 했 다. 이윽고 두 사람은 철탁 앞에 무사히 이르렀다. "......" 일검사는 철탁 위에 하나의 검은 상자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칙칙한 빛을 내는 상자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백리무외는 복잡한 표정으로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상자 속에 천외도의 모든 것이 들어있네." "......!" 일검사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긴장이 그 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자네가 직접 열어보게." 백리무외는 일검사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가 손을 뻗지 않고 망설이자 백리무외는 빙긋이 웃으며 재촉했 다. "뭘 망설이나? 자네는 이제 천외도의 주인이 되는 것일세." 마침내 일검사는 철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백리무 외의 표정이 변했다. 착각이었을까? 그의 눈빛 속에 한 가닥 갈등이 어리는 것 같았다. 일검사는 그것을 보았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내심 중얼거렸 다.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럴까?' 그러나 그는 별 생각없이 철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다 시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때 그의 귓전에 백리무외의 너털웃음 이 들렸다. "허허...... 이제 천외일맥은 자네에 의해 다시 꽃이 피게 될 걸 세." "......" 일검사는 철상자를 향해 뻗은 손을 잠시 멈추었다. 갑자기 한 가 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리무외를 돌아보며 빙긋 이 웃었다. "장인 어른께 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얼마 후면 장인 어른의 수염을 잡아당길 무례한 놈이 태어날 것 입니다." 일검사는 그 말을 한 후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그는 백리무외 의 안색이 크게 변한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는 검은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철컥! 하는 기분나쁜 금속성이 귓전을 울렸다. 바로 그때였다. "안돼......!" 백리무외가 황급히 외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꽝! 갑자기 고막을 터뜨릴 듯한 폭음과 함께 상자로부터 무엇인가 터 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다. 일검사는 상자를 여는 순간 눈 앞에 무 수한 광채가 비산하는 것을 느꼈다. 그 뿐이었다. 그는 눈 앞이 캄캄해짐과 동시에 전신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느낌도 찰나적이었다. 그는 완전한 암흑 속으로 떨어 지고 말았다. 상자가 폭발하는 순간 바닥이 갈라지면서 그의 몸은 무저갱(無低 坑)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만 것이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는가......?" 백리무외의 처절한 음성이 울렸다. 그러나 일검사는 이미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 등용문 제3권 제30장 무저갱(武低坑)의 괴인(怪人)들 -3 ━━━━━━━━━━━━━━━━━━━━━━━━━━━━━━━━━━━ 빛도 없고 시간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세계. 인간은 끊임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삶을 확인하는 존재다. 그 런데 빛과 시간이 없는 곳이라면 인간이란 존재 역시 무의미한 것 이 아닐까? 완전한 암흑에 파묻힌 채 시간도 없고 느낌도 없이 그는 부유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이승을 떠나 저승세계로 여행을 하고 있는지 도 몰랐다. 어디선가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공명(共鳴)처럼 웅웅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차츰 소리가 명료해 지고 있었다. 창노한 음성이었다. 목이 심하게 쉰 듯 하기도 했고 가래 끓는 듯 한 음성이기도 했다. "어떻소? 이 아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우리들은 이 제 지쳤소. 너무나 늙었단 말이오......" "헐헐헐....... 하기야 이 나이에 세상에 다시 나간다 해도 뭘 할 수 있겠소?" "흘흘흘....... 그건 그렇고, 이 아이는 대체 어찌된 놈이기에 금 강불괴지신을 익혔단 말이오?" "크큭...... 정말 놀라운 일이오. 전신에 금강석보다도 단단한 삼 백육십 개의 만년강모철사(萬年剛母鐵砂)가 깊숙이 박힌 상태로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금강불괴가 아니라 불사지체 (不死之體)가 아니고 뭐겠소?" 귓전을 울리는 음성들은 한결같이 늙어빠진 음성이었다. 그러나 창노한 그 음성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실려있기도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오. 이 아이는 적어도 세 가지의 고금오절기(古今五絶技)를 익히고 있소. 대체 이럴 수도 있단 말 이오?" "흘흘...... 아무튼 이 아이가 당한 것을 보면 필시 그 가증스런 늙은이의 적이 분명하지 않겠소? 그러니 이 아이에게 모험을 걸어 보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하오." "크크...... 좋소. 그럼 결정합시다. 우리들도 이제 더 이상 숨을 쉬는 것조차 지루해 졌소. 모든 운명을 이 아이에게 맡겨 버립시 다." 갑론을박하던 늙은이들의 대화는 곧 중단되었다. 이어 퍽! 퍼퍽! 하는 격타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근 한 시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허억.... 이젠 늙었어. 고작 이 정도에 기운을 잃다니......" "크크......! 늙은이, 아끼지 말고 몽땅 쏟아 버려. 젠장할...... 무덤 속까지 지고 갈 건 아니니까......" 펑! 퍼엉! 슈팍! 슈파팍......! 연속적인 격타음이 들리고 뒤어어 숨가쁜 호흡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 기침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 의식이 돌아왔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무의식 상태를 부유하고 있 었다.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신체의 감각이 아주 둔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멍하니 누운 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구나......' 그렇다. 그는 팔, 다리, 머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나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누워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보였다. 허공 높이 검은 철판이 천장 전체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오십 장 높이는 되겠군.' 일검사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손가락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움직 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공력을 운기해 보았다.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그의 체내의 진기는 마치 장강대하처럼 막힘없이 콸콸 사지백해로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진기가 이상이 없는데 꼼짝할 수가 없다니?' 그는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이때 어디선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가래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야. 묻는 말에 대답해 주어야 겠다......" 일검사는 흠칫했다. 그것은 매우 낯선 음성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비로소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철옥(鐵屋) 속에서 상자의 뚜껑을 연 순간 폭음이 들리 고 정신을 잃었었지......' 일검사는 비로소 얼마 전의 일이 환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얼마 전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의 개념에는 놀랄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노인장은...... 뉘시오?" 그는 그렇게 물었다. "흘흘......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아이야." 창노한 음성은 일방적이었다. 일검사는 그만 기분이 나빠졌다. "흥......!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겠소." "흘흘...... 네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야......" "윽......!" 일검사는 비명을 질렀다. 한 가닥 암경(暗勁)이 뻗어오자 그는 하 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낀 것이 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충격은 처음이었다. 혈마불괴지신을 이루고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흘흘...... 어떠냐? 그래도 대답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일검사는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후후... 고통으로 날 굴복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것이오. 이래뵈도 소생은 뼈 하나만은 튼튼한 편이 오. 내 뼈를 분지르려면 노인장의 늙은 뼈가 먼저 부러질지도 모 르는 일이오." 그 말에는 일검사 특유의 오기와 고집이 어려 있었다. "......." 괴노인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에야 긴 탄식이 들려왔다. "아......! 노부도 이제 늙었구나, 너같은 아이를 보니 자꾸만 지 난 일이 생각나는구나...... 노부도 젊었을 적에는 너처럼 강골 (强骨)이었지." 노인은 과거의 일이 떠오른 듯 연신 탄식을 발했다. "아아...... 백 년 전 노부가 천마동(天魔洞)에서 남북쌍천마(南 北雙天魔)를 죽일 때만 해도 너처럼 패기만만했거늘...... 지금은 아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구나." 그 말에 일검사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고 말았다. "백 년 전...... 남북쌍천마를 죽였다고요? 그...... 그렇다면 노 인장은 신주사대성가(神州四大聖家)의 병기만상보의 노가주이 신...... 백의검제(白衣劍帝)가 아니십니까?" 괴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노부의 옛이름을 알고 있다니, 허허... 세월은 무심해도 무림에서는 아직 노부를 기억하고 있구나." "이... 이럴 수가......!" 일검사는 흡사 쇠뭉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백의검제(白衣劍帝)가 살아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 다. 당시 백의검제는 무림삼현(武林三賢), 사대성자(四大聖子)와 함께 홀연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혹자는 그들이 죽었다고도 했고, 혹자는 그들이 폐관했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사대성자의 하나인 백의검제가 이런 곳에 서 살아 있었다니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검사는 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백의검제 을주황(乙朱黃) 노선배님이라면... 후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말에 괴노인, 즉 백의검제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 "네가 노부와 관계가 있다니? 허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 나. 노부가 무림에서 사라질 적에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일검사는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허허... 그래, 무슨 관계라는 거냐?" "어른의 손녀인 을주려려와 후배는 부부지간입니다." "뭐라고......? 노부의... 손녀라고......?" 백의검제의 음성이 격동으로 인해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어른께서 실종되신 이후 태어난 손녀는 후배의 아내 입니다." 문득 백의검제의 음성이 날카로와졌다. "무엇으로 그 사실을 증명을 한단 말이냐? 노부는 믿지 못하겠 다." 그 말에 일검사는 난감해졌다. 백의검제가 믿지 못하는 것은 어쩌 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백여 년간이나 실종되어 세상과 연을 끊었던 그가 어찌 그 말 한 마디에 자신의 손녀와 부부지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단 말인 가? 그런데 이때 일검사는 번쩍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증거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려려로부터 한 가지 정표(情表)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어른신께 서는 필시 그것을 알아보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게 뭔지 어서 보여봐라!" 백의검제는 오랫동안 세상에서 괴리되어서인지 성격이 화급해져 있었다. 일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후배의 품 속에 한 자루의 소검이 있습니다. 그것은 병기만상보 의 보물로 취검(翠劍)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취검!" 백의검제는 놀라 부르짖었다. 그 순간 일검사는 품 속의 물건이 기이한 흡인력에 의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의 눈 앞이 밝아졌다. 푸르스름한 검광(劍光)이 주위를 밝 게 비춘 것이었다. "오오! 취검이다. 맞다, 이것은 본보의 보검임에 틀림이 없구 나......!" 격동에 찬 부르짖음이 울린 순간 일검사는 마치 전류와도 같은 기 운이 옥당혈(玉堂穴)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직후 그는 전신의 감 각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마비되었던 몸이 자유로와진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 앉 았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그만 전신을 부르르 떨고 말았 다. "......!" 그는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놀랐다. 아니, 하마터면 소리를 지 를 뻔했으나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거대한 우물의 바닥과 같은 곳으로 그를 중 심으로 일곱 군데에 석대(石坮)가 있었다. 그것은 칠성(七星)의 방위였다. 석대 위에는 각각 한 명씩의 괴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석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하반신이 시커멓 게 타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살점이라곤 한 점도 붙어있지 않은 채 뼈만 남은 그들은 해골처럼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다리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은 퀭 하니 들어갔으며, 뺨에도 살이라곤 한 점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 다. 마치 살아있는 해골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일곱 명의 괴인들은 눈에서 귀화(鬼火)와도 같은 인광을 흘 리며 일검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검사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주위의 괴 인들을 둘러보며 공손히 물었다. "어느 분이 백의검제이십니까?" "노부일세." 오른쪽 석대에 앉아있는 다소 키가 커보이는 괴인이 대답했다. 과 연 그의 수중에는 취검이 들려 있었다. 일검사는 한동안 그를 멍 하니 바라보다 절을 했다. "소손 일검사, 조부께 인사 드립니다." "허허... 조부라고......?" 괴노인, 즉 백의검제의 퀭한 눈에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는 격동을 느끼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난 백 년간 사람 이라고는 본 적이 없었다. 암흑 속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갇혀 있던 그가 백 년의 시공을 지나 손자사위를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이때 그 뿐 아니라 주위의 괴노인들도 감격을 금치 못하는 듯 한 결같이 퀭한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들은 일검사와 백의검 제의 상봉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듯 했다. 일검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조부님. 이 분들은 뉘신지?" 그 말에 백의검제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모두 어리석게 한 위선자에게 당한 친구들이지. 이 늙은 이들은 과거 무림삼현(武林三賢)과 사대성자(四大聖子)로 불리워 졌다네." "아......!" 일검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들이 모두 살아 이곳에서 참혹한 삶을 유지하고 있 을 줄이야 꿈엔들 상상했겠는가? 백 년 전 이대마벌인 구천마왕교와 지옥혈마문이 발호했을 때 그 들이 아니었던들 어찌 무림이 회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들의 모습은? 대체 왜 이런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일검사는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일검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백의검제는 문득 이를 부드득 갈 았다. "모두가 그 위선자에게 속아 당한 것이다. 아아! 그가 그런 야심 을 지니고 있을 줄을 어찌 알았겠느냐?"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리장흠(百里藏欽)!" 백의검제는 이를 갈며 외쳤다. 일검사는 의아했다. 그런 이름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크흐흐...... 놈은 천하를 기만하고, 무림을 속였으며... 심지어 는 자신의 조상마저 배신한 놈이다! 놈이 무림대의를 상의하자고 노부들을 초청한 후... 차 속에 독(毒)을 타 우리들을 암산할 줄 이야... 결국 놈의 계략에 걸려 우리들은 무저옥 속에서 백 년 간 이나 죽음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었다." 일검사는 일곱 명의 기인들이 그 말에 한결같이 무서운 분노를 일 으키며 전신을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의아하 기만 했다. "백리장흠이란 자는 대체 어떤 자입니까?" 그 말에 백의검제는 노성을 터뜨렸다. "바로 백도의 성인으로 통하는 천외도주(天外島主)다!" "넷? 그... 그럴 수가......!" 일검사는 뒤통수를 한 차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그만 머리가 빙 글빙글 도는 듯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천외도주가 무림삼현과 사대성자를 암산했다니? 백 년 전의 천외 도주라면 당금의 천외도주 백리무외의 부친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검사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그가 왜 그런 짓을......?" "흐흐......! 놈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는데 우리들이 방해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놈은 한 가지 절세마공을 얻었는 데 그것을 익히는 동안 우리들이 백도를 장악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일검사는 더욱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그가 무슨 마공을 얻었기에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그 마공이 천외일맥의 절학보다도 강하단 말입니까?" "너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구나."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놈이 얻은 마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 놈이 얻은 마공은 바로 구천마왕공(九天魔 王功)이란 것이다." "그... 그럴 수가......!" 일검사는 다시 한 차례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듯한 충격을 느꼈 다. 그는 차라리 그같은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로소 그는 모든 의문이 하나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백리무외가 그를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은 이유도 해명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혈문과 구천마왕교는 일맥이면서도 숙적이지 않는 가? '그... 그렇다면 천마삼세는?' 일검사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안개에 가려져 있던 모든 비 밀들이 한순간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 렸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머릿 속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어지럽게 엉키고 있었다. "마왕도도... 그렇다면 하나의 음모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아! 이 럴 수가......!" 이때 백의검제는 물론 다른 기인들도 모두 일검사를 주시하고 있 었다. 그들은 일검사가 너무나 큰 반응을 보이자 모두 의아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백의검제가 물었다. "얘야, 대체 지금 무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우리들 은 백 년간 바깥 세상을 보지 못했으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구 나." 일검사는 간신히 격동을 가라앉힌 후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후 그는 이제까지 무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의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기인들은 어떤 때는 분노를 일으 키고, 어떤 때는 장탄식을 발했다. 이윽고 설명이 끝나자 백의검 제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으으... 결국 놈은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 기 시작했구나!" "흘흘... 가증스런 일이야, 놈은 우리를 속였을 뿐더러 천하인들 의 이목마저 속였구나!" "교활한 놈! 마도의 흉심간계를 감추고 백도로 행세했다니... 과 연 간웅(奸雄)답구나!" 기인들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 등용문 제3권 제31장 마왕도(魔王島) ━━━━━━━━━━━━━━━━━━━━━━━━━━━━━━━━━━━ 전대 천외도주 백리장흠. 그는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천마단 을 세워 먼저 무림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었다. 반면 백도무림에서는 광명천(光明天)을 창설하여 천마단과 싸움을 붙이도록 했다. 이로써 무림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질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백 도와 마도 양쪽의 전력을 동시에 약화시킴으로써 무림패업의 길에 한 발 더 다가서려 한 것이었다. 동시에 그 자신은 천마삼세와 광명천의 주인으로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함으로써 언제든지 편리할 대로 행동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 이었다. 이같은 음모는 실로 놀랍고 무서운 것이었다, 무림개사 이래로 가 장 독랄한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백리장흠의 음모는 모두 밝혀진 셈이었다. 일검사는 비록 그 에게 당한 셈이었으나 안개에 가려졌던 비밀을 알게 되자 마음만 은 후련했다. 이때 백의검제가 한맺힌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이야, 너는 왜 우리 늙은이들이 백 년 동안이나 무저옥에서 벗 어나지 못했는지 알겠느냐?" "......?" 일검사는 의아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그 점이 이해가 안갔다. 그들은 아직도 모두 무공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지 이상한 일이었다. 백의검제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 칠성방위(七星方位)로 박혀있는 이 석대(石坮) 위에 앉 아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후후... 이 석대는 이곳 지하에서 분 출되려는 화맥(火脈)을 막고 있는 강령흑빙석(剛靈黑氷石)이란 것 이다." "아!" 일검사는 그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이 석대는 임시로 분화구를 막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수시로 지 하에서 화맥이 끓어 오르고 있어 잠시라도 석대를 누르고 있지 않 으면 이곳은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 일검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중 하나만 석대를 떠나도 화맥은 폭발할 것이고 결 국 우리들도 불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흐흐... 백리장흠 그 놈이 얼마나 악독한 놈인지 이제 알겠느냐?" 일검사는 그만 전율을 금치 못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할 치밀한 악계였다. 그는 비로소 철옥(鐵屋)이 왜 와룡곡에 세워져 있는지 를 깨달았다. 그것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화맥이 폭발한다 해도 철옥으로 어 느 정도 화맥의 분출을 억제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저옥에 일단 갇히게 되면 아무리 천하제일고수라 해도 결코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백의검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장(千丈) 깊이에 이르는 무저옥에는 두께가 한 자가 넘는 만년 한철(萬年寒鐵)이 열두 겹이나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일검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나도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이때 백의검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낙심하지 마라. 우리게게는 최후의 방도가 마련되어 있 으니까. 그러나 그 전에 네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 백의검제는 나머지 육 인을 둘러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기인들의 얼굴에는 온통 비장한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백의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난 백 년간 우리 늙은이들은 오직 백리장흠에 대한 복수의 일 념만으로 생명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래서 우리들은 놈을 죽일 수 있는 한 가지 절대패류(絶對覇類) 의 신공을 하나 창안했다. 그것을 백 년간 다듬고 허점을 보완하 며 복수심을 키워온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신공에는 우리 일곱 늙은이들의 모든 무학이 집대성되어 있기도 하다." 일검사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신공(神功)이지만 검법(劍法)이나 여타의 무공으 로도 시전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들은 네가 그것을 익히기 바란 다. 그리고 백리장흠 그 교활한 놈에게 우리들을 대표하여 빚을 갚아주기를 원한다." "......" 일검사는 칠 인의 기인들이 한결같이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 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림에 나온 이래 무 릎을 꿇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혈문주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으며, 지옥혈마존에게도 무릎 꿇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필히 간적을 제거하여 노선배님들의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오오......!" "오! 고맙다......!" "크흐흐.... 고맙군......!" 칠 인의 노기인들은 한결같이 몸을 부르르 떨며 감격의 눈물을 흘 렸다. 백리검제도 낙루하며 떨리는 격동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야, 정말 고맙다......" 일곱 명의 가장 불운했던 노기인들. 그들은 가슴 속에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한을 지니고 있었다. 일검사는 그 한을 풀어 주리라고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는 일곱 기인이 창안한 극패류의 신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 장한벽일(長恨璧一). 칠인의 기인이 공동으로 창안한 신공은 바로 그런 이름을 갖고 있 었다. 그것은 절대필살의 무학이었다. 일검사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장한벽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절학을 익혔다. 만일 그가 초범한 재질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그 많은 고금절기를 절대로 익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한벽일을 익히는 데에는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더 구나 칠 인의 기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는 순조롭게 장한벽일을 체득해 나갈 수가 있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비록 밤와 낮을 알 수 없는 무저옥 속이었지만 일검사는 망아지경 에 빠져 오직 무공을 익히는 데에만 혼신의 힘을 다했다. ■ 등용문 제3권 제31장 마왕도(魔王島) -2 ━━━━━━━━━━━━━━━━━━━━━━━━━━━━━━━━━━━ 마침내 그 날이 도래했다. 중원무림의 사활(死活)이 걸린 마왕도와 광명천의 환우대전( 宇 大戰)의 날이 도래한 것이다. 시월 보름. 태산(泰山) 일대에는 구름같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왕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천마삼세는 단지 태산으로 초청했을 뿐 마왕도의 위치는 명기하지 않았던 것 이다. 군웅들은 그 동안 태산 전역을 이잡듯이 뒤졌으나 마왕도를 찾지 못했다.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광명천의 수뇌들도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월 보름 을 하루 앞두었을 때였다. "혹시... 천원평(天元坪)이 아닐까?"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말이 제기되었다. 태산 천원평은 태산의 중심부에 위치한 하나의 거대한 분지(盆地) 로 일만 평이 넘는 반듯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군웅들은 천원평에 집결하게 되었다. 그것은 천원평 전체가 자욱 한 안개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알 수 없는 기진(奇 陣)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군웅들이 천원평을 의심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천하십 룡이 천원평의 자욱한 안개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았지만 그들은 곧 낭패한 기색으로 퉁겨져 나와야만 했다. 그들의 말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으음! 십장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소이다. 가공할 압력이 우리들 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소." 십룡의 말에 광명천주, 즉 천외도주 백리무외는 침중한 표정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기다려 봅시다. 그들이 우리를 초청한 이상 언젠가는 스스로 모 습을 드러낼 것이오. 아마도 이곳 천원평이 그들의 본거지일 것이 오." 백리무외의 말은 맞아 떨어졌다. 마침내 시월 보름이 되었을 때였다. 군웅들은 믿어지지 않는 현상 을 목도하게 되었다. "안개가 걷힌다!" "우우... 저... 저것은?" 군웅들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고 있었다. 그들은 천원평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천원평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오! 저것은?" "마왕도(魔王島)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천원평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 지자 군웅들의 눈에 나타난 것은 마치 섬처럼 우뚝 솟아있는 거대 한 구조물이었다. 마치 산봉우리를 중간에서 잘라낸 듯한 높이 백장 여의 거대한 단 애가 우뚝 솟아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 는 섬을 보는 것과 같았다. "으으음!" 천외도주는 신음을 흘렸다. 십룡도 한결같이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였다. 마왕도를 향해 길이 형성되었다. 마왕도를 향해 곧게 뻗어있는 길 에는 청석이 반듯하게 깔려 있었다. 그밖의 다른 지면은 온통 흑 색 일색이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검은 풀이 잔뜩 깔려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소?"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개신이 갑자기 무엇인가를 휙 던졌다. 그것은 한 마리의 다 람쥐였다. 다람쥐는 검은 풀밭 위에 떨어졌다. 후다닥 자세를 잡던 다람쥐는 몇 발자국 걷더니 그만 전신을 파르르 떨며 쭉 뻗어 버렸다. 그러 나 놀라운 것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다람쥐는 전신이 쭈글쭈글하게 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흑수로 녹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저... 저절 수가!" "우우......!" 군웅들은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청석으로 깔려있는 길 외의 모든 초지는 가공할 독지대였던 것이다. 백리무외는 군웅들을 둘러보더니 침중한 음성으로 외쳤다. "자, 초대 받았으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말을 마치고 앞장 서서 청석판이 깔려있는 길로 걸어 들어갔 다. 그가 움직이자 십룡을 필두로 하여 오천여 명에 달하는 군웅 들은 일제히 마왕도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등용문 제3권 제32장 만승지존(萬乘至尊)의 신화(神話) ━━━━━━━━━━━━━━━━━━━━━━━━━━━━━━━━━━━ 전설의 마왕도(魔王島)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군웅들의 안색은 납 빛처럼 굳어져 있었다. 천 년 이래 전설로만 내려오던 마왕도가 아닌가? 마도사상 가장 강했던 인물 절대마종(絶代魔宗)의 신화를 만들었던 마왕도의 실 체를 바라보는 그들의 가슴 속에는 격동이 일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환우대전으로 무림의 앞날은 결정될 것이고 그 일 전에서 설사 죽음을 얻게 된다고 해도 그들은 정도무림을 위해서 라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헤헤헤! 정말 놀라운데? 노부 생전에 마왕도를 볼 수 있게 되었 으니, 이거야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 아닌가? 안그렇소, 여러분?" 개신의 개살궂은 웃음에 군웅들의 굳어졌던 안색이 펴졌다. "하하핫! 그렇습니다. 노선배님!" "으하하하...! 과연 마왕도의 마두들이 얼마나 강한지 오늘 한 번 봐야겠습니다!" 군웅들은 가슴을 활짝 펴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웅후한 기상 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윽고 청석대로는 마왕도의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 다. 그들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면서 올랐으나 가로막는 자가 없자 더욱 당당한 자세로 마왕도의 정상을 향해 이동했다. 이윽고, 군웅들은 마왕도의 정상에 당도했다. "......!" 군웅들은 눈을 크게 떴다. 마왕도의 정상에는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던 것 이다. 칼로 갈라낸 듯한 마왕도의 정상에는 이미 만 명을 헤아리는 마왕 도의 인물들이 군웅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북쪽에 포진하 고 있었다. 반면 군웅들이 오른 남쪽에는 미리 천막과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북쪽과 남쪽으로 정확히 나누어 모든 시설물이 완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한가운데는 공지(空地)로 비워두고 있었다. 백리무외는 군웅들에게 말했다. "저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 같소. 모두들 침착하 시오." 군웅들은 시설물들을 둘러 보았다. 오천여 명을 헤어리는 광명천 의 인물들이 모두 들어갈 정도로 수십 개의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 다. 이윽고 군웅들은 자연스럽게 소속과 신분에 따라 천막 속으로 들 어갔다. 북쪽에는 일만 명의 천마단(天魔團) 소속의 마인들이 포진하고 있 었으며 남쪽에는 광명천과 등용문의 인물들이 대치하는 형국을 이 루게 되었다. "......!" 만오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대치하고 있었으나 극도의 긴장감 탓인 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림개사 이래 전무후무한 환우대전이 임박했다. 바야흐로 피의 대제전이 다가온 것이었다. 정오 쯤 되었을까? 둥둥둥......! 문득 북쪽 진영으로부터 북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환우대전의 시 작을 재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남쪽 진영에서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와아아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것은 기세를 돋구기 위한 함성 이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한가운데 공지로 걸어 나갔다 한 명은 청수 한 인상의 백의노인이었으며 한 명은 영준하기 그지없는 역시 백 삼을 입은 미청년이었다. 군웅들은 그 두 사람을 하늘같이 믿고 있었다. 백의노인은 바로 광명천주이자 천외도주인 창궁신협 백리무외였다. 또한 미청년이 야말로 최근 광명십전수(光明十全手)로 발탁된 백도무림의 태양인 일검사였던 것이다. 백도무림에서 가장 존경받는 두 영웅이 앞으로 나서자 군웅들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금치 못한 채 마왕도를 뒤흔들 듯한 함성을 발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문득 백리무외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오늘이 무림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 되겠군. 자 네는 지금 어떤 기분이 드는가?" 백리무외의 현기 어린 음성은 군웅들의 귓전에 똑똑히 들려왔다. 비록 멀리 떨어진 거리를 격하고 있었으나 바로 옆에서 얘기하듯 전달되었다. 군웅들은 곧 일검사의 담담하면서도 패기에 찬 음성도 들을 수가 있었다. "하하하! 이 시대에 태어났음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오 늘은 소생의 생애 최고의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 말에 군웅들은 가슴 속에서 무한한 투지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검사는 광명십전수로 백도무림의 내일을 책임 지고 있는 후기지수 가운데 최고의 고수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혈마지존의 신분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는 근래 들어 혜성처럼 등장한 신비문파 등용 문의 문주(門主)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만만한 대답은 군웅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음은 물론 이번 환우일전에 대한 승리의 확약을 해주 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헛헛헛......! 역시 자네다운 생각일세. 아암! 그렇고 말고 오늘 은 바로 자네같은 젊은 사자를 위해 준비된 것이나 다름 없네. 허 허허! 또한 천마삼세 최후의 날이며 이 땅에 마도(魔道)가 영원히 사라지는 날이기도 하네." "핫핫핫......! 물론입니다." 일검사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였다. 둥! 둥! 둥! 다시 세 번의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천마단에서 일제히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 "천마지존이시여......!" "와아아......! 천마현현(天魔現現)...!" 천마단의 마인들이 내지르는 함성에는 가공할 마기가 내포되어 있 었다. 군웅들은 안색이 변하며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시켰다. 이때 천마단의 군마들이 썰물처럼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나의 교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실로 거대한 교자였다. 무려 백팔 명의 가마꾼들이 교자를 둘러메고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우......!" 군웅들은 교자를 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교자를 메고 있는 백팔 인은 놀랍게도 한결같이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장한들이었는데 마치 철탑(鐵 塔)처럼 강인한 근육을 지닌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교자를 멘 채 쿵쿵, 지면을 울리며 공지 한가운데 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교자 위의 풍경이 었다. 교자 위에는 삼십육 명의 미녀들이 또 하나의 가마를 메고 있었 다. 그녀들 역시 전라(全裸)였다. 하나같이 절색의 미녀들이었는 데 몸매 또한 아찔할 정도로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전라미녀들은 무릎을 꿇은 채 하나의 황금으로 휘황한 빛을 발하 고 있는 가마를 떠받들고 있었다. 황금가마의 사면에는 역시 황금의 악마상(惡魔像)이 부착되어 있 었다. 그 악마상은 입을 쩍 벌리고 인두(人頭)를 씹어 먹는 정교 한 조각으로 새겨져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써늘하게 만들고 있 었다. "......!" 군웅들은 가슴 밑마닥으로부터 공포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백팔 명의 철탑과도 같은 장한들, 삼십육 명의 전라미녀들, 그리 고 황금가마와 악마상....... 가히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문득 한 가닥 마후음(魔吼音)이 황금가마 안에서 흘러 나왔다. "우후후후후훗......! 모두 모였느냐? 마왕도에 경배하여 영원히 신하(臣下)가 되기 위해 모였겠다?" 놀라운 일이었다. 가마 안으로부터 흘러나온 음성.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군웅들은 피가 거꾸로 치솟고 심혼육백이 자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크하하하핫...! 모두 잘왔다. 본 천마삼세는 오늘로 천마일통(天 魔一統)를 선포하노니 너희들은 구배지례를 취하고 천마의 율법 (律法)을 따르라!" 우우우... 웅......! 가공할 마후음에 마왕도의 지반이 진동을 일으키고, 대기가 온통 회오리쳤다. 실로 가공할 기세였다. 이때, 그에 맞서듯 한 가닥 유현하면서도 준엄한 음성이 들렸다. "천마삼세! 헛된 망상을 버릴 때가 왔소! 중원의 대정지기는 영원 불멸하거늘 어찌 한낱 사마외도가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날뛰 는가?" 실로 추상같은 꾸짖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창궁신협 백리무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웅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답답하던 가 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크흐흐흐흐... 그대가 백리무외라는 어리석은 작자인가? 그렇다 면 마왕도에서 피의 제전을 벌여야만 본 천마삼세의 군림을 앙복 하겠단 말인가?" 천마삼세의 음성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리무외는 탄식했다. "천마삼세, 그대 역시 무림인이 아니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한낱 부질없는 개인의 야망으로 무림천추의 죄인이 되려 한단 말이오?" "크크크크...... 헛소리! 천마삼세를 따르는 자는 살고 거부하는 자는 죽는다! 그것이 천마의 율법이다! 오늘 너희들의 시신으로 탑(塔)을 쌓고, 그 피로 혈지를 만들어 영세군림을 기념하겠다!" 그 말에 군웅들은 치를 떨었다. 백리무외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 다. "천마삼세, 그대가 진정 천하제일의 강자라면 그 무위를 보여 주 시오. 이곳이 피로 물든다면 우리 뿐만 아니라 그대의 수하들의 피도 반은 섞이게 될 것이오. 쌍방이 피를 흘리는 일은 너무도 어 리석은 일이 아니겠소?" "......" 그 말에 주렴 속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백리무외는 웅후한 음 성으로 제의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무고한 피를 흘리느니 귀측의 대표자 와 우리의 대표자가 나와 일전을 결함으로써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오." 그 말에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비록 말은 그럴 듯 했으나 만 일 그 일전에서 패한다면? 그렇게 되면 백도무림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천마삼세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군웅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리무외의 말 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만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설사 승리한다 해도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이 아닌가? 그로 인한 손상된 무림정기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 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가마 안으로부터 천마삼세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흐......!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 그러나 과연 네 말이 전 중원을 대표할 수 있을까?" 백리무외는 군웅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정광이 번쩍이는 시선 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노부는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소. 만일 이곳에서 전면전이 벌 어진다면 설사 승리한다 해도 무림정기는 크게 손상될 것이오. 차 라리 후일을 기약하느니만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여러분의 고견 은 어떻소?" 그의 말은 군웅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면 서 술렁대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백리무외의 인품과 덕망을 믿 자는 것으로 귀일되고 있었다. "좋습니다!" "맹주님의 의견대로 따르겠소이다!" 군웅들은 여기저기서 찬동의 의사를 표명해 왔다. 백리무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동의한 것으로 알겠소이다." 이어 그는 돌아서며 물었다. "천마삼세, 이젠 되었소?" 주렴 속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다, 좋아. 그대의 일편 충정을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본제를 상대하겠느냐?" 백리무외는 고개를 돌려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군웅들은 모두 가 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내심 백리무외가 직접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백리무외에게 일임했으므로 그의 의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백리무외의 시선은 일검사에게 향했다. 그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 다. "노부는 결정했네. 무림의 운명을 자네에게 맡기기로." 일검사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찌 후배가......" "허허! 노부는 이제 늙었네. 자네같은 패기만만한 젊은이에 비한 다면 이젠 힘없는 늙은이에 다름없네. 그러니 자네가 백도무림을 대표하여 나서주기 바라네." 군웅들은 다시 한 차례 술렁거렸다. 그들은 백리무외의 판단에 각 양각색의 반응을 나타냈다. 한쪽에서는 찬동하는가 하면 한쪽에서 는 불안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검사는 광명십전수였다. 그러므로 광명천의 대표자 자격으로는 충분했다. 더구나 그는 혈마지존이란 또 하나의 신분을 지니고 있 었다. 그러므로 그의 무공을 믿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나이가 젊으므로 아무래도 백리무외 보다 는 한 수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튼 결정은 내려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맹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일검사는 정중히 포권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는 천마삼세가 타고 있는 교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제 무림의 희망은 오직 그 한 몸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 등용문 제3권 제32장 만승지존(萬乘至尊)의 신화(神話) -2 ━━━━━━━━━━━━━━━━━━━━━━━━━━━━━━━━━━━ "와아아아아...!" "와아아......!" 마왕도를 온통 무너뜨릴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검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안정된 자세에 군웅들은 마치 그가 하나의 산악처럼 우러러 보였다. 한편, 불안한 눈으로 일검사를 지켜보는 아름다운 다섯 명의 여인 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꽃같이 아름다운 절세미녀들이었 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여인은 을주려려였다. 그녀는 태어난지 수 개월밖에 되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들 천의영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일검사를 보아야 한다고 우겼다. 설사 그가 승리하 던 패배하던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일검사는 그녀에게 있어 삶 그 자체요, 믿음이며, 희망이었다. 만 일 그가 죽는다면 그녀는 자신도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안고 이곳에 나온 것이었다. '아가야! 보아야 한다. 저 분이 바로 너의 아버지란다. 보렴! 너 의 아버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시란다.' 을주려려는 지극히 마음이 편안한 상태였다. 그것은 일검사가 죽 으면 따라 죽으리라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설화(雪花)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일검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진천화영이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 는데 입 속으로는 쉴새없이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설옥경이 있었다. 그녀 역시 떨리는 가슴을 안은 채 일검사에게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한 여인. 그녀는 바로 백리빙이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만면에 의 혹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아, 상공은 달라지셨어...... 아버님의 말씀으로는 천외절학을 익히기 위해 한 달간 폐관에 들었다고 했는데...... 어찌된 것일 까? 지금은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 하니......' 여인의 감정은 섬세한 것이다. 특히나 몸과 마음을 바쳤던 정인에 대한 느낌은 더욱 더 섬세한 것이다. 그녀는 일검사의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 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가슴 속에는 거대한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조각 하나, 일거수 일투족에서도 여인은 의 미를 발견하곤 한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일검사는 어쩐지 낯설 기만 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백리빙은 몇 번씩이나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 속은 의혹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사실 일검사가 천외절학을 익히기 위해 철옥(鐵屋)으로 들어간 이 후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백리무외가 방 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녀를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일검사를 본 것은 불과 하루 전이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 나 반가와 그의 품으로 뛰어 들었었다. 그러나 그때 일검사의 반응은 몹시 이상한 것이었다. 그는 몹시 어색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나마도 백리무외가 옆에서 지키 고 있다가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그것은 결전을 대비하기 위해 서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 백리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때였다. 문득 교자로부터 한 덩이 묵운(墨雲) 덩어리가 둥실 뜬 채 나왔다. "크하하하하핫......!" 묵운에서 천마삼세의 일진광소가 흘러 나왔다. 묵운은 허공에 둥 둥 뜬 채 잠시 머무르다 서서히 이동하여 일검사의 앞에 떨어졌 다. "가소롭구나......! 어린 놈이 본좌와 맞서려 하다니!" "......" 일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묵묵히 한 자루의 검 을 들어올렸다. 그 검을 본 군웅들은 모두 탄성을 발했다. "천외신검(天外神劍)이다......!" "천외도의 진산지보다......!" 그렇다. 푸른 보광이 감도는 장검은 바로 천외도주 백리무외가 사 용하는 천외신검이었다. 군웅들 중 아무도 일검사가 천외신검을 사용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다섯 명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안 색이 변하고 있었다. '아아......! 왜 창궁검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걸까?' 여인들 중에서도 특히 백리빙의 불안은 더욱 더 컸다. "크후후훗......! 공격해라. 본좌가 먼저 손을 쓰면 너는 다시는 손 쓸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천마삼세의 비웃음이 들렸다. 일검사는 서서히 천외신검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마치 용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검명이 울렸다. 동시에 새파란 검광 이 주위를 물들었다. 일검사의 자세는 누가 보아도 완벽했다. 가슴 높이에서 검을 수평 으로 세운 그의 자세는 최소한 백 년 이상 검을 사용해온 달인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경지였다. "어서 공격해라. 일검을 전개하는 순간 너는 천마절학이 어떤 것 인지 알게 될 것이다." 스스스스...... 묵운이 꿈틀거렸다. 이때였다. "앗... 저...... 저 자세는......?" 일검사를 지켜보던 백리빙은 하마터면 앞으로 달려나갈 뻔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비애가 온통 얽혀 있었다. 그녀는 온통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이때 그녀의 몸을 부 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그는 바로 백리무외였다. "아버... 님......? 대체......?" 그러나 백리무외는 그녀가 더 말하려는 것을 제지했다. 아니 그는 번개같이 손을 움직여 그녀의 연마혈을 짚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가련한 녀석...... 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워낙 낮아 오직 그의 품에 안긴 백리빙에게만 들렸다. 백리빙의 큰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어렸 다. 그녀는 말을 할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으나 그 순간 가 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천마삼세! 받아라...!" 슈파파아아! 사람들은 보았다. 검이 전개된 순간 일검사의 몸이 스르르 검 자 체에 흡수되어 버린 것을. 그것은 완벽한 어검이기만기술(馭劍以 氣萬氣術)이라는 검도의 도를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상의 경지 였다. 빛! 그것은 단지 빛살에 불과했다. 그 빠르기는 섬광을 일천분지 일로 쪼갠 빠르기였으며, 그 속에서 변식(變式) 따위는 도리어 무 용하기만 했다. 팍! 군웅들은 분명히 보았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빛살로 화해 천 마삼세를 두르고 있는 묵운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을! 군웅들은 확신했다. "크아아아아... 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오자 군웅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 다. 천마삼세, 결국 그는 야망을 펴지도 못하고 대정(大正)의 일 격에 최후를 맞고야 만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만면에 희열의 웃음을 떠올리는 순간이었 다. "크하하하핫... 크하하하핫핫......!" 귀청을 찢고, 가슴을 온통 파열시킬 듯한 마소(魔笑)가 울려퍼지 는 것이 아닌가? 군웅들은 보아야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사실 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으아아아... 아아악...!" 참담한 비명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인영! 그는 바로 중원의 희망으 로 백도무림의 사활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일검사가 아닌가? 그는 가루가 된 천외신검의 자루만 움켜쥔 채로 십장 높이로 떠올 랐다. 어디 그 뿐인가? 허공에서 그의 몸은 갈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허리가 양단되더 니 두번째는 다시 팔다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종내에는 수십 조각 으로 분시된 채 자욱한 혈우와 함께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그가 죽다니! 군웅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일검사가 허무하게 죽자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옆으로 쓰 러지는 여인들이 있었다. 바로 을주려려, 설옥경, 설화, 진천화영 등이었다. 그녀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만 실신하고 만 것이었 다. "......!" 군웅들은 그만 넋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목석(木石)이 된 듯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대체 무엇을 말하겠는가? 중원대 정혼(中原大正魂)은 죽었다. 이제 그들에게 희망은 없어지고 만 것이다. "크하하하핫......!" 천마삼세의 미친 듯한 광소만이 마왕도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가 터뜨린 가공할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고막을 틀어막으며 쓰러지는 자,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며 거꾸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그것은 천마삼세가 천마멸멸마혼후(天魔滅滅魔魂吼)라는 멸절된 천마음공을 펼쳤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크하하하하핫핫......!" 마소는 점점 더 가공할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군웅들은 삼분지 일 이상 쓰러지고 말았다. 반면 천마단의 마인들은 미친 듯이 승리의 환성을 발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마침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실성한 표정으로 멍하니 천마삼세를 두르고 있는 묵운을 바라볼 뿐이었 다. 이때였다. "우우우우우......!" 문득 어디선가 창룡(倉龍)의 맑은 울부짖음이 울리는 것이 아닌 가? 그 장소가 울리는 순간 군웅들은 정신이 충일해지며 마공에 억눌렸던 패기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장강(長江)의 잉어들이 용이 되어 승천하며 울부짖는 소리 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오십 리 밖으로부터 들려왔던 장소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척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져 있던 군웅들조차 전신에 힘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 끼며 벌떡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상대편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아아... 악!" "크... 웨엑...!" 그것은 천마단의 군마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껏 승리의 도취감에 젖어 함성을 지르고 있던 그들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속속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우우우... 우... 우...!" 장소는 마침내 군웅들의 지척에까지 이르렀다. "크으으윽......! 누......누구냐?" 묵운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어렴풋이 묵운에 가려져 있 던 천마삼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일신에 검은색의 곤룡포(袞 龍袍)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마왕탈을 쓴 인물이었다. "크크크크......! 누구냐? 어서 모습을 보여라!" 천마삼세는 허공을 향해 마소를 터뜨렸다. 그때였다. 마왕도의 십팔방(十八方)으로부터 동시에 낭랑하면서도 장엄한 음성이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천마삼세, 이제 너의 악마행에도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우...... 우...... 웅......! 십팔방으로부터 동시에 들려온 그 음성을 들은 순간 천마삼세는 가공할 마기를 폭사시켰다. "크카카카......!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네 놈에게 천마의 힘을 보여주마!" "하하하하...... 좋소! 천마삼세." 일순 마왕도에 운집해 있던 군마들과 군웅들은 눈을 감아야만 했 다. 허공으로부터 눈부신 금광(金光)이 사방으로 폭사했기 때문이 었다. 태양(太陽)! 하늘에 또 하나의 태양이 떴다. 분명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나 란히 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또 하나의 태양이 서서히 마왕도로 내려왔다. 완전히 바닥에 내려섰을 때 군웅들 쪽에서 온통 경악과 감동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오......! 두 개의 태양(太陽)... 이건 만승지존(萬乘至尊)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화가 재현된 것이오!" "맞소! 만승지존의 신화가 마침내 실현되었소!" ■ 등용문 제3권 제32장 만승지존(萬乘至尊)의 신화(神話) -3 ━━━━━━━━━━━━━━━━━━━━━━━━━━━━━━━━━━━ - 만승지존(萬乘至尊)! 그것은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인구에 회자(膾炙)되어온 백도의 신화 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신화가 현실로 나타났단 말인가? 군웅들은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눈부 신 광채를 뿜고 있는 금빛 광원을 향해 경배했다. 그것은 무인으 로써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스스스......! 금빛 광원이 서서히 스러졌다.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인물! 그를 보는 순간 군웅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일검사였던 것이다.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방금 전 천마삼세에 의해 죽은 일검사는 또 누구란 말인가? 군웅들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 다. "크크크......! 용케도 살아 나왔구나......!" 문득 천마삼세의 입에서 그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일검사는 담담 히 말했다. "그렇소. 무저옥은 비록 깊었으나 일곱 분의 의인(義人)이 있어 이 일검사는 다시 빛을 볼 수가 있게 되었소." "크크크......! 그 늙은이들이 아직 살아 있었더냐?" 천마삼세의 입에서는 여전히 마기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후...... 그대같은 희대의 간웅(奸雄)이 살아있는데 어찌 그 분들이 눈을 감겠소? 자, 이제 나는 그대에게 그 분들의 빚을 받 아야 겠소." 일검사는 담담히 말하며 창궁검을 손에 쥐었다. "크크크......! 가소로운 놈! 네가 감히 본좌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천마삼세의 눈에서는 사람의 눈빛이라고 할 수 없는 지독한 마광 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마광은 웬만한 고수는 마주 보기만 해도 동공이 터지고 심장이 짓눌릴 것 같은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일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주보며 늠연하게 가슴을 폈다. "그대에게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오. 장흠(藏欽)......" 그 말은 오직 천마삼세에게만 들렸다. 그렇다. 천마삼세는 바로 전대 천외도주인 백리장흠이었던 것이 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전무림을 통해 일검사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한편, 백리장흠은 이미 인성(人性)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는 구천마왕공(九天魔王功)을 익힌 후로 마성을 억누르는데 실패했었 다. 그리하여 마성으로 깊이 빠지고 만 것이었다. "크카카카카...... 건방진 애송이 놈......! 기회는 두 번이 없다 고? 좋다! 네 놈의 소원을 들어주마!" 우우웅......! 일순 군웅들은 대기가 컴컴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천마삼세 의 전신에서 가공할 묵기류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가 펼친 무공은 이미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악마의 춤, 바로 그것이었다. 천색(天色)이 빛을 잃고 태양이 암흑 속에 삼켜진 채...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 뿐이었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천마 삼세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마소였다. "크카카카카...... 크캇캇캇캇......!" 군웅들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심장이 짓눌려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수십 장 뒤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처 뒤늦게 움직였던 사람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피 로 뭉개지고 있었다.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콰아아아아...! 쾅! 천번지복하는 폭음이 들리고 마왕도가 수장여나 풀썩 주저앉아 버 렸다. 가공할 압력에 마왕도 전체가 지면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보았다. 암흑을 헤치고 수십 개의 금색 동그라미가 생겨나고, 그 동그라미 는 합쳐졌다 떨어졌다 하면서 점점 커져 종내에는 암흑을 완전히 뒤덮어 버리는 것을! 그것은 황홀한 빛의 춤이었고, 광명이 암흑을 이겨내는 숭엄한 순 간이기도 했다. "크으으으윽...... 이럴 수가......?" 천마삼세의 참담한 신음이 들렸다. 뒤이어 일검사의 낭랑한 음성 이 들렸다. "일곱 분 고인의 한으로 뭉쳐진 빚을 돌려주겠소. 장(長)... 한 (恨)... 벽(璧)... 일(一)!" 번... 쩍! 빛! 태초의 어둠을 가른 것이 섬광이었다면.... 필시 이번에 찰나 적으로 보였던 빛이야말로 태초의 그것이었노라고 군웅들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었다. "크아아아악......!" 한 가닥 처절한 비명이 군웅들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암흑 광도 금광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 군웅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천마삼세는 반듯이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한 자루의 백옥검(白玉劍)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손잡이만 남은 채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면에 깊숙히 박혀버린 것이었다. "......" 일검사는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기이한 표정으로 무엇 인가 할 말을 다하지 못한 듯 음울한 시선으로 천마삼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만승(萬乘)의 지존(至尊) 만세!" 마왕도가 온통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나와 태산 일대를 뒤흔들 었다. 그것은 감격과 흥분에 젖은 군웅들의 함성이었다. 마침내 백도의 전설은 실현된 것이었다. 무림개사 이래 인구에 회 자되어온 만승지존의 전설이 눈 앞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때 일검사는 서서히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다. 천마삼세, 아니 백리장흠의 시신 옆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그는 채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부...... 당신은 이 일검사가 손녀사위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 소이까......?" 그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니, 들었다면 막 저승 문턱으로 넘어가고 있을 백리장흠만이 들었을 것이다. 이때 한 가닥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백리장흠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마왕탈에 금이 가더니 쩌억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마왕탈은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천마삼세의 얼굴이 드러 났다. 그것은 청수하게 생긴 한 노인의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일검사는 말없이 손바닥으로 백리장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한 차례 쓰다듬고 지나가자 백리장흠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는 내공을 일으켜 백리장흠의 얼굴 근육을 바꾸어 버린 것이었 다. 손바닥이 떨어지자 백리장흠의 얼굴은 음침한 노인의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였다. 일검사의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 다. "고맙...... 네......." 일검사는 돌아서며 빙긋이 웃었다. "장인 어른, 평안하셨습니까.?" 그의 옆에 나타난 자는 바로 백리무외였다. 백리무외의 얼굴에는 온통 부끄러운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아아, 노부는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네. 사위를 죽 이려 한 날... 어찌 장인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일검사는 그저 담담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리무외는 온통 자책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장탄식했다. "아아, 아버님께서 마공(魔功)을 익힌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마 성에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 편승한 노부가 어 찌... 무림에 얼굴을 들 낯이 있겠는가?" 그 말에 일검사는 고개를 저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천마삼세는 죽었습니다.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장인 어른." 백리무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노부를 위해 부친의 과오를 덮어 주었지만... 아아! 노부 의 죄과가 어찌 사라지겠는가? 노부는 이후로 다시는 무림에 나서 지 않겠네. 모쪼록...... 빙아(氷兒)를 부탁하네......" 백리무외는 온통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는 문득 허공을 우러러보 며 구슬프게 말했다. "더구나 천기(天奇) 그 아이를 희생시킨 죄만으로도 노부는... 평 생을 참회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 천기라면 검성(劍星) 백천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 일검사 로 변장해 천마삼세에게 죽은 것은 바로 백천기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나 결국 천마삼세의 야망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난 떠나겠네. 한많은 무림으로부터... 영원히...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겠네......" 창궁신협 백리무외. 그는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 습은 온통 허무하기만 했다. "......" 일검사는 뭐라 말하려 했으나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쩌면 그 것이 백리무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다섯 명의 아름다운 미녀들을 보았기 때 문이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하하하하핫......!" 그의 입에서는 낭랑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군웅들은 먹구름이 활짝 걷히고 찬란한 태양빛이 대지를 비 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군웅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 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명의 미녀들과 만승지존 일검사 가 서로를 힘껏 부둥켜 안는 장면을. "으아앙!" 문득 어린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을주려려가 안 고 있던 강보에서 나온 것이었다. 피와 죽음만이 지배했던 무림(武林)! 그 암흑의 세계를 타파하는 듯한 해맑은 아이의 울음소리는 마치 미래의 평화를 예고하는 듯 했다. 돌아서고 있었다. 일검사는 다섯 명의 아내와 한 명의 아이를 대 동한 채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만승지존이란 무림의 신화(神話)를 남긴 채 그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