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淚) 저자: 검궁인 타자: 김 준 上卷 1장 血淚...(1) 하늘, 하늘의 색(色)은 무(無)다. 그러나 인간이 보는 하늘은 늘상 푸르다. 특히나---- 가을이 지나가는 천색의 푸르름은 바라보는 이의 눈동자를 베어 버릴 정도로 섬뜩한 푸르름을 지니고 있다. 푸르르르륵----! 창천을 가르며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가고 있다. 새(鳥) 하늘은 새의 것이다. 그러므로 새는 자유롭게 비상하며 누리를 비행하는 쾌감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새---비둘기는 튼튼한 두 날개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고 싶어하는 곳을 마음대로 날아갈 수 없다. 비둘기는 자신의 소유주가 명령을 내리는 방향을 향하여면 날도록 강요받고, 또한 그런 습성을 운명처럼 부여받았다. 목적지가 가까와 온다. 아득히 보이던 지평선 상의 산이 가까와 오고... 비둘기는 지쳐가던 자신의 날개를 독려하며 마지막으로 힘껏 비상한 뒤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구(九). 아홉. 아홉 쌍의 눈동자. 온갖 허무와 절망, 좌절과 고통으로 점철된 눈동자는 수직으로 쏘아져 내려오는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드드드득. 비둘기는 드디어 착륙점을 찾은 듯이 한 지점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나이. 그는 한쪽 팔을 수평으로 쭉 뻗고 있었다. 이윽고 비둘기는 사나이의 팔뚝 위에 지친 날개를 접고 안착했다. "......!" "......!" 여덟 쌍의 눈동자는 일제히 비둘기를 잡은 사나이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기대가 뒤범범 되어 있었다. 사나이는 각이 진 검은 흑사암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사나이는 비둘기의 깃털을 쓰다듬고 있다. 이십여 세나 되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린듯도 하였으나, 사나이의 약간은 음울하고 냉막해 보이는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지친듯 온몸에 피곤의 기색이 역력했으되, 눈(眼)! 눈만이 살아 펄떡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섬세한 선을 지니고 있으며 다소는 퇴폐적이기 까지했다. 그만큼 영준하다는 뜻이다. 사나이는 천천히 비둘기의 발목에 묶여져 있는 전서를 풀더니 꺼내 펼쳤다. 순간, 제각기 흑사암 주위에 걸터 앉거나, 혹은 드러누워 있거나 혹은 서있던 여덟명의 사나이들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그들의 눈이 사나이에게서 조금도 떨어질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나이가 읽고 있는 한 장의 전서에 그들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금군대도독 위경삼을 척살하라. 기간은 보름. 자료는 추후 전달하겠다. --- 대주(隊主) "......!" 전서를 읽고 있는 사나이의 눈이 암담하게 변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이 굳어져 있었다. 사나이는 시선을 돌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열세 번쩨.... 앞으로 얼마를 더 죽여야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난단 말인가? 아마! 천상이시여. 나의 주인 이시여....' 그는 시선을 돌려 여덟 쌍의 눈동자를 하나 하나 바라본다. 첫번 째 마주친 눈동자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번 째 마주친 눈동자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세번 째 마주친 눈동자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네번 째.... 다섯번 째... 여섯번 째... 일곱번 째... 마지막 여덟번 째의 눈동자를 대하는 순간 사나이의 절규에 찬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장! 또... 입니까?" 소리친 사나이는 울고 있었다. 육체가 고통스러워 우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대명조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대지존 황제의 명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뛸듯이 기뻐하였던가? 하늘이라도 베어버릴 양으로 검을 들어 선택받은 인간으로서 장읍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처음 百人으로 출발했던 동료들이 겨우 九人. 그나마 성한 자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우리가 아닌가? 이제나 저제나 하며 임무가 끝났다는 특명을 기다리며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헌데... 이제 또 다시 날아온 비둘기는 다시 엄청난 살령만을 가지고 날아왔다. 그 비둘기가 너무나 얄밉고 한스러워 사나이는 지금 어깨를 격하게 떨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대장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고 다만 한숨만이 흘러나올 뿐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본다. 하늘은 아홉 사나이들의 마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사나이는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피를 토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일어나라! 황제폐하의 명이시다! 천년을 이어갈 대명제국의 건림자이신 주원장님의 명이시다!" x x x 눈이 내리고 있다. 대명천지, 구천십지의 온 누리에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 지금쯤 저자의 꼬마들은 거리로 뛰어 나와 소리 지르며 눈덩이를 뭉쳐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할 시각이다. 그러나 지금 사나이의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도...겨울도... 심지어는 마음까지도 없다. 지금 지친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사나이에게는 이미 모든 의미가 죽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겨울의 눈은 아득한 환상같은 것이다. 사나이는 눈을 뜨려 해 보았다. 그러나 눈꺼풀이 아교로 칠해진 듯 잘 떠지지 않는다. 손으로 눈을 비벼 본다. 사물이 뿌우연 안개에 가려져 있다.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손바닥만한 좁은 구멍이 보이고 그곳으로부터 빛이 스며 들어온다. 땡....땡.....땡땡땡땡땡... 귀청이 찢어질 정도의 시끄러운 종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온몸의 혈관을 쥐어짜며 울리고 있었다. 또 다시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사나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길다랗게 뻗은 동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은 인공으로 뚫린 것으로 끝없이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다. 탁,탁,탁.... 다다다다다닥.... 사나이의 어깨를 치면서 등을 떠다밀면서, 또는 발길로 걷어차다시피하면서 곁을 스쳐 많은 사람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인생의 목표나 희망이 동굴 저족에 기다리고 있는 양 결사적으로 뛰어가고 있다. 그중 갓샿 사람이 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넘어진 자의 등판을 밟고 뛰어가고 있었다. 넘어진 자는 죽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려고 기를 쓴다. 그러나, 그 위를 다시 수많은 발자국이 문지르고 갔고... 그는 끝내 일어서지 못하고 만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한 것이다. 아무런 놀라움이나 경이가 되지 못한다. 사나이도 쓰러졌다. 그 위를 몇수십 개의 발이 밟고 지나갔을까. 그는 일어서려고 기를 쓰나 잘 되지 않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문득... 누군가가 손을 뻗는다. 사나이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손의 임자를 본다. 팔십도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 낡은 걸레쪽 같은 옷을 걸치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빨리 움직여야 하네. 잘못하면 또 식사를 굶어야 할테니..." 사나이는 노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또 당신이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대명의 장수요. 그러니 절대로 남의 도움은 받지 않을 것이오." 사나이는 말을 마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광장. 거대한 동굴의 중심부에는 대략 삼마장정도 되는 넓이의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수백,아니 천명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낡은 옷에 피폐한 모습들이었다. 두 눈은 움푹 들어가 해골을 보는 듯 하고, 전신에서는 매캐한 죽음의 냄새가 물씬 나는 살아있는 유령과 같은 모습들.... 그러나 그들을 비웃어서는 안된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모습일테니 말이다. 사나이와 노인도 줄을 섰다. 그 줄의 끝에는 거대한 무쇠가마솥이 놓여 있고 무엇인가 끓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이미 급식을 받은 자들이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있다. 사나이는 오늘 운이 좋았다. 그의 차례까지 식사가 돌아간 것이다. 철퍼덕! 지저분한 그릇에 담겨지는 무엇이낙 고약한 냄새가 나는 희멀건 죽을 보며 사나이는 마음 속으로 589라는 숫자를 세었다. 589란 그가 먹은 식사의 횟수다. 이곳에서는 날짜의 감각이 없다. 그래서 사나이는 식사의 횟수를 세어 날짜를 계산하는 것이다. 하루에 두끼 씩 지급되는 식사. 그러니까 사나이가 이곳에 온지 오늘로써 295일째 된 것이다. 사나이는 죽이 담긴 그릇을 들고 안쪽 구석에 앉는다. 그리고 습관처럼 기도를 한다. '음식을 주신 황제폐하께 감사를...' 사나이의 기도하는 광경은 엄숙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사나이 는 한번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사나이는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라고는 하지만 수저조차 없이 그저 그릇을 들고 훌훌 마셔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죽을 조금씩 입에 넣은 후 꼭꼭 씹어먹는 것이다. 물론 건데기라고는 옷을 홀랑 벗고 들어가 찾아도 없는 국물뿐이 지만 언제나 꼭꼭 씹어먹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하루에 두번 뿐인 식사 시간은 사나이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삶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사나이는 철저히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이라고 해도 그 영양분갚믹르 최대한으로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득, 옆에서 누군가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씨팔! 이걸 먹으라고 주는거야?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이런 개죽같은걸 음식이라고 주다니...!" 사나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생각한다.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이곳에 온지 며칠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도 며칠만 지나면 변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이곳에는 무언(無言)의 규칙이 있거든.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만큼 빨리 죽게 되지. 사나이는 아주 조금씩 죽을 입안에 흘려 넣으며 꼭꼭 씹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데에는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백일 이상 지나게 되면 삶과 죽음의 인식마저 흐려진다. 그들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없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말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그저... 그들은 본능이 시키는대로 먹고... 잠을 자고....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있으되 이미 죽어버린 유령과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사나이는 마지막 한방울의 죽을 입에 흘려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혈루(血淚)! 그의 마음 속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무루(無淚)! 그의 죽어버린 눈동자의 눈물은 말라버렸다. 2장 血淚....(2) 또다시 비둘기가 날아내린다. 열 일곱번째... 회색의 눈동자들이 하늘을 향한다. 고작 다섯 쌍의 암울한 눈동자. 비둘기가 날아올때마다 절망만을 맛보았던 눈동자들이었으나 이번에도 여전히 그들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희망이 어려 있었다. 사나이의 수평으로 쳐든 팔뚝에 비둘기가 내린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황제시여... 제발 이번만은...' 사나이의 염원이 담긴 눈은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진 전서를 보며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서를 펼쳐 읽는 사나이는 문득 두 다리에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펄럭....펄럭! 사나이의 손을 벗어나 바람따라 날아가는 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쓰여져 있었다. ----武當 掌門人 霞眞子를 척살하라. 기간은 한달. 자료는 스스로 조달하라. ----- 隊主 "......!" 사나이의 눈동자는 급격히 빛을 잃고 있었다. 그의 한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부르르 경련한다. '무당의 하진자라면... 천하가 다 아는 무림계의 거봉이거늘! 단순한 우리의 능력으로... 더욱이 지금 우리의 상태로... 오! 황제시여! 어쩌자고 이런 명을 내리시는 것이오!' 사나아는 더이상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마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나이의 입에서 힘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가자. 황제의 명이시다." x x x 식사를 마친 사나이는 동굴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 수록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동시에 매캐한 이상한 냄새가 역하게 후각을 비틀고 있다. 얼마나 갔을까? 지정된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은 작은 공간이다. 사나이는 눈이 부셨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에 들어설 때마다 그는 눈이 부셨다. 열평 가량의 공간, 사나이가 방금 들어온 통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길이 없다.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웅덩이가 있었다. 그 웅덩이 속에서... 부글부글....! 무엇이간 쉴 사이없이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누우런 황연이 뭉클뭉클 뿜어져 나온다. 그 황연은 숨이 막힐 지경으로 고통을 준다. 천정을 보면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으로부터 눈이 부시게 한 빛 쏘아져 들어와 수직으로 웅덩이를 비추고 있었다. 3인. 웅덩이를 가운데 두고 삼인의 인물이 영원인 듯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자리에 수십년, 아니 몇백년 전부터 앉아있는 것 같다. 표정도 없으며, 눈빛도 없는 인간들. 바로 이곳의 살아있는 유령들이었다. "......." 사나이도 앉는다. 땡땡땡. 세번의 짧은 종소리가 들리고 천정에서 커다란 두레박같은 것이 내려온다. 사나이는 물론 나머지 삼인도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에 놓인 무쇠바가지를 들어 웅덩이 속에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황색의 액체를 퍼낸다. 그리고 천정으로부터 내려온 두레박에 담는 것이다. 두레박이 채워지면 올라간다. 두레박이 내려온다. 두레박이 올라간다. 두레박이 내려온다. 두레박이 올라간다. 두레박이... 두레박이.... 두레박이....... 사나이는 액체를 퍼담는다. 퍼담는다. 퍼담는다. 퍼담는다. 사개 시진이 지나도록 어느 한사람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은 동작을 쉬거나 다른 용도로 몸을 움직이는 법도없다. 마치 반복되는 자동인형처럼 똑같은 동작, 똑같은 속도로 액체를 퍼담을 뿐이다. "콜록! 콜록....콜록!" 누군가의 기침소리가 들린다. "쿨록! 쿨....록! 쿠울럭!" 기침소리가 커진다. 육체의 죽음이 가까와 온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길을 돌리거나 상관하는 자는 없다. 이곳에서는 오직 자신밖에 없다. 남을 의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자신조차 완전히 망각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옆에 누가 있는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생겼느지 조차 모른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모두가 살아있는 유령들이라는 사실뿐이다. ".......!" 바가지를 움직이는 손이 셋으로 줄어들었다. 한 사람이 동작을 멈춘 것이다. 사나이는 잠깐 눈길을 움직였다. 옆의 사람의 앉은 채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있었다. 비쩍 마른 무릎 사이에 고개가 쳐박혀 있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사나이는 이내 고개를 돌린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동정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인 반복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어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축복인 것이다. 지옥에서의 죽음이란 영원한 해탈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일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갈 때면 시체는 치워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채워지면 그만이다. 문득... 사나이는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가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 다가갔다. 사나이는 눈쌀을 찌푸렸다. '또....' 시체에게 걸어간 사람은 바로 아침에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뭔가 특이한 존재다.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였으나 젊은이 이상으로 건장하였고, 눈빛은 때때로 날카롭게 빛나기까지 한다. 허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에게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엄 함과 기품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만인을 압도할 듯한 기운이었다. 사나이는 그것이 싫었다. 그는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눌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노인은 시체를 안고 구석진 곳으로 가 편안히 눕혔다. 죽은 자의 눈은 감겨져 있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 죽기는 너무나도 억울하다는 듯이. 노인은 손을 뻗어 죽은 자의 눈을 감겨준다. 그리고 손을 잡아 가지런히 가슴에 모아준다. 본래... 사나이는 인간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특별히 미워한다거나 사랑하거나 또는 증오하지도 않는다. 이곳에 들어온 후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노인에게 처음으로 미워하는 감정을 느낀다. 그 이유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다. 사나이는 오래전부터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노인을 죽이기 위해 수년 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었다는 것이 말해준다. '뇌륭대....' 그가 내심 중얼거리는 이름. 그것이 노인의 진명이다. 그러나 이름 외에 뇌륭대의 전력을 말한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대원제국 십팔로만승대군 대원수! 오오! 기억하는가? 18로만승대군이라면 중원을 유린하였던 철혈의, 증오의, 원한의 이름이다. 대원제국이 멸망기의 최후발악으로 창군하였던 악명높은 강군조직. 그 조직은 18로로 나뉘어졌고, 뇌륭대는 그 조직의 대원수였던 것이다. 대명이 일어서면서 18로만승대군은 전멸되다시피 했고, 뇌륭대는 사로잡힌 몸이 된 것이다. 허나 지금도 당시 만승군에 당했던 대명의 장군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파래진다. 헌데.... 그가....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나이가 그를 미워하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나이는 대명의 장수다. 대명의 장수로서 그를 볼 때마다 위축감을 느끼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노인, 뇌륭대는 자리로 돌아온다. 문득, 사나이와 뇌륭대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사나이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순간, "쿨럭... 쿨럭.....!" 다시 누군가의 기침이 들린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사나이 자신의 기침이었다. 사나이는 놀란다. '내가....?' 기침이 나온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뜻한다. 사나이는 눈동자가 급격히 응축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죽음이 임박된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유황굴이다. 저질의 유황을 퍼올려 화약이나 기타의 용도를 위해 유황을 채취하는 곳이다. 유황에는 인체를 좀먹는 독소가 있다. 매케하고 황색의 연기를 뿜어내는 것이 바로 독소다. 이곳에서 먹고,자고,숨을 쉬는 것은 시시각각 내장이 썩고 골수 가 녹아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 바가지를 든 손이 무거워지며 머리가 어질어질해 진다. 순간, 사나이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고통이 다가오거나 생사의 위기가 올 때마다 항상 하는 습관이었다. -----나는 대명의 장수다! 대명의 군사는 적을 만났을 때 물러서지 않고 겁을 내지 않는다! 명이 떨어지면 목을 아끼지 않는다! 나의 몸은 황제폐하의 것! 황상의 명은 곧 나의 의지이며 진리... 나아가 이 일을 하는 것도 황명이다. 단 일각이라도 더, 한번이라도 더... 황제께 충성을! 대명에 영광을....!' 사나이... 그의 내심의 외침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가래끓는 소리가 그렁거리고, 머리는 욱씬거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수천증걸린 노인처럼 떨리고 있었고, 전신에서는 식은 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x x x 칠흑같은 어둠이다. 야산은 황량하다. 산이라고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 이었다. 유황의 독연이 이 땅에 생명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이곳은 하란대산. 북방의 마지막 관문이며, 만리장성을 안고 있는 곳이다. 하란산의 한 유곡을 중심으로 이런 죽음의 언덕이 구비치고 있다. "........!" 4인의 사나이가 야산 언덕에 올라 바람에 흑포를 휘날리고 우뚝 서 있었다. "저곳인가?" 문득 약간 앞서 있던 장대한 체격의 한 사나이가 어둡고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둠이라 잘은 보이지 않으나.... 얼굴의 선이 사각진 사나이였다. "예...." "의외로 경비가 삼엄하진 않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저 곳은 영혼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저곳에 일단 수감되면 한 달 안에 영혼이 죽어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게다가 지하에 유황굴이 미로처럼 깔려 있으며 수천명의 수인들이 뒤섞여 있는지라 외부에서 누군가를 구출하기는 불가능한 지경입니다. 뿐만 아니라...." 흑포의 장대한 사나이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간단히 하라." "옛! 멀지않은 곳에 국경수비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경비가 허술한 이유입니다." "......." 사나이의 눈은 언덕 아래 움푹 꺼져 들어간 유곡 형태의 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모닥불이 보이고 있었다. 분지의 삼면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사장 높의 목책으로 막혀 있었다. "저어... 야율종대님." "....." 뒤쪽에 서 있던 수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어쩌면 이미 대원수님께선 돌아가셨을지도..." "갈! 허튼 소리마라. 대원수님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그분은 설사 18층 무간지옥에 떨어지신대해도 끄덕없을 분이다. 불사신! 아느냐? 그분은 위대한 초원족의 불사신이란 말이다." 수하는 당장 그 자리에 머리를 쪼아대고 있었다. 쿵... 쿵... 쿵... 그의 이마는 터져 순식간에 선혈이 낭자하다. "죄... 죄송합니다." 사나이의 입에서 웅혼한 음성이 터졌다. "서둘러라. 내일 아침이면 저곳의 지휘관이 바뀐다. 그러면 검열이 시작될 것이다. 기회는 그때뿐이다. 모든 수인들이 광장으로 나올 때...대원수님을 구할 기회는 그때뿐이다." "존....존명!" 삼인의 수하들은 무릎을 꿇었다. x x x 목조건물. 원래는 전아한 건물이었으나 유황의 독연으로 인해 군데군데 변색한 음침해 보이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유황뇌옥의 수비대장이 산다. 화려한 방. 이곳에서 가장 인간이 살만한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바닥에는 천축산의 양탄자가 깔려 있다. 침상은 넓다. 한명의 4순가량의 장년인이 홀랑 벗고 잠을 자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역시 전라의 계집들이 팔 하나씩을 베고 누워있다. 이곳에는 겨울이 없다. 때는 막바지의 혹한이었으나 이곳은 항상 덟다. 방안의 공기가 후덥지근한 탓인지 이불도 덮지 않고... 장년인의 가슴에는 짐승처럼 털이 수북하고, 사나이의 우람한 기둥주위에도 밀림이 우거져 있다. 한 계집은 자신의 유방을 장년인의 옆구리에 밀착시킨 채 잠이 들었고. 또 한명의 계집은 손을 장년인의 사타구니께에 얹고 있었다. 둘다 똑같이 농염하고 풍만한 몸매를 지녔다. 어젯밤. 새로 부임한 수비대장을 위해 인근 마을에서 조달된 관기였다. 밤새도록 질탕한 육체의 향연을 치른 탓에 일남이녀는 솜처럼 풀어져 있었다. 문득, "대인...." 방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린다. 허나 방안에서는 반응이 없다. "대인!" 좀 더 음성이 커진다. "대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장년인, 즉 수비대장 황영걸의 곤한 잠을 일깨웠따. "누구냐?" 그는 귀찮다는 듯이 짜증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기침하실 시각입니다. 모든 준비가 되었습니다. 대인께서 직접 광장에 나가 수인들을 검열하셔야 합니다." 순간 황영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꼭 이렇게 새벽부터 설쳐야 하느냐?" 말을 하는동안 두 명의 계집도 깨었다. 계집들은 배암처럼 그의 몸에 감겨들고 있었다. 한 계집은 그의 사타구니께로 기어들고, 한 계집은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거대한 유방을 과시하듯 황영걸의 가슴에 문지르고 있다. 황영걸은 한손으로는 왼쪽 계집의 둔부를, 한 손으로는 오른쪽 계집의 아랫배쪽을 더듬었다. "그것은 한번도 어긴 적이 없는 이곳의 규칙이온지라." 문밖의 수하는 이곳의 수비대 부대장, 지염규란 자다. 그는 신임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이나 게으르고 색만 밝히는 사나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직책상 그는 부하인 것을. "시끄럽다! 규칙이란 지휘관이 바뀌면 따라 바뀌는 법! 내가 이곳에 부임한 이상 나의 규칙이 이곳의 새로운 규칙이다." 황영걸은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는 어젯밤새 즐겼던 정사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다시 또 두 계집의 도발로 서서히 기둥이 힘차게 직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럼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무얼 어떻게... 으음... 좀 기다리라고 해라. 잠시 후에... 허음... 나가마." 그가 중간에 신음한 것은 한명의 계집이 고개를 그의 사타구니에 쳐박았기 때문이었다. 또 한 계집은 더욱 난리다. 아예 그의 가슴에 올라타고 앉은 것이다. 황영걸의 코앞에 계집의 비경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관 지염규는 내샘 욕설을 퍼부으며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환하게 방안의 정경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방안의 두 계집이야말로 어젯밤 이전만 하여도 그에게 똑같은 애교를 떨지 않았던가. 황영걸은 다시 침상에서 전쟁을 치르기 시작한다. 그 일이 없다면 아마 그는 미칠 것이다. 그는 본래 금릉의 고급 무장이었다. 헌데, 권력을 쥐고 있던 장인이 실각한 후 이곳으로 좌천된 것이다. 그러니 심경이 좋을리 없었고, 이렇게 계집이나 주무르면서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3장 血淚....(3) 사나이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침 식사 후 이곳 작업장에 온 지 어느덧 한 시진. 그런데도 천정으로부터 작업 개시의 종이 울리지 않았다. 또한 두레박도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지금, 웅덩이 주위에는 4인이 앉아 있다. 어제 죽은 인물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온 자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 자도, 또한 그 자신도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저. 애당초 이 자리에서 일을 하던 하나의 기게처럼 그는 앉아 있었다. 백일인생 (百日人生). 사나이는 생각한다. 새로 교체된 저자도 백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이다. 간혹 백일을 넘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도 결국은 죽게 마련이고, 이미 반은 죽은 상태였다. 예외가 있었다. 바로 사나이 자신과 노인이었다. 그와 노인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으며, 벌써 300일 가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살아있는 유령들처럼 자신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나이의 이름은 낙성혼(洛星魂). 노인의 이름은 뇌륭대(雷隆大) 그들은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은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 사나이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대명의 황제께서 부르실 날이. 믿음. 그것은 굳건한 하나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사나이는 아직도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뇌륭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눈빛이 이따금씩 무섭게 타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다. 그러기에 서로를 가깝고도 멀게 인식하고 있다. 증오와 연민. 그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감정인지도 모른다. 땅 땅 땅 땅 땅....! 갑자기 귀청을 찢어발길 듯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다르다.' 그렇다. 그것은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는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무엇을 하느냐? 빨리빨리 움직여라! 모두 밖으로 나와라! 검열이다." 천정으로부터 칼칼한 외침이 네명의 회색인간들의 고막을 때렸다. 마치 송곳으로 쑤시듯이. x x x 유황곡.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한쪽 면은 높은 목책으로 둘러싸인 곳. 지금. 이 곳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 명? 아니 이천 명? 아무튼 수많은 인간들이 벌거벗은 채 열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어찌본다면 장관이기도 하나, 자세히 보면 차참을 극하는 목불인견의 광경이었다. 그것은 벌거벗은 나상들의 모습때문이다. 그들은 온통 봉두난발에다 비쩍 말라 있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성치 못한 자들이었다. 때로는 팔다리가 썩어가고, 어떤 자는 눈알이 짓무르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전신이 고름투성이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고환이 썩어가는 자들이었다. 남자라면 고환이야말로 가장 상징적인 징후일진저, 고환이 썩으면 남자구실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생의 의미마저 상실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황의 독기가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수천 명의 나상들은 바로 대명조에 죄를 짓고 이곳에 감금되어 죽음의 노역을 강요당하는 수인들인 것이다. 태양이 중천으로 솟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염규는 폭발직전이었다. 벌써 두 시진이 넘었다. 의례 새로운 수비대장이 오면 전 수인을 모아 검열을 하게 마련인 바, 의례적인 이 행사는 빠짐없이 시행해온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수비대장 황영걸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직 나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보나마나 그 계집들과 자빠져 있겠지." 광장의 상단부에는 목대가 축조되어 있었고, 목대 위에는 이곳의 수비대 무관들이 정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병사들이 수인들을 둘러싸고 감시한다. 목책 위의 초소에도 병사들이 우뚝우뚝 창을 세우고 서 있었다.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새로운 수비 대장이 부임하면 의례껏 누군가가 걸려 시범으로 혼쭐이 나는 것이 상례였고, 자신들이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두시진째. 황영걸이 나오지 않자 이제는 느슨해질대로 느슨해졌다. 병사들은 하품을 하고 있었고 저희들끼리 돌아보며 잡담까지 나눈다. 때로는 끄덕끄덕 조는 자들도 더러 있다. 지염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아직 젊다. 그는 영원히 이런 곳에서 썩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을 세워 황궁이 있는 곳으로 영전을 가려는 것이 그의 야망이었다. 그런데 황영걸이라는 상관을 만나면 그의 전도란 뻔한 것이다. 그는 짜증어린 눈길로 병사들을 둘러 보았다. '빌어먹을.. 죄다 풀어졌군. 쯧쯧... 한심하다. 앞날이 훤하군.' 한편, 수인들도 두 시진 가량 서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앉거나 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유황굴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 이런 것이 백배는 낫다. 헌데 묘한 것이 사람의 심리인 것이라 아무 하는 일 없이 벌거벗고 서 있으면 무료해지는 것이다. 권태. 권태감이 나른하게 유황곡을 지배한다. 마침내 지염규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대인을 깨워라!" 그의 직속 수하 한명의 졸음이 확 달아난다. "하지만 벌써 세번이나 부르러 갔는데...." 뻔한 말이다. 달려가 불러 보아야 호통만 들어테니. "씨발! 다시 한번 갔다오란 말이다!" x x x "큭!" "컥!" 목책의 서쪽 초소를 경비하던 두 명의 병사는 졸다가 횡사한다. 그들의 목젖을 관통한 것은 두자루의 예리한 비도였다. 이어, 초소 위로 검은 옷을 입은 괴인들이 소리없이 밧줄을 타고 올라왔다. 하나... 둘... 열... 수십 명이다. 휙휙! 그들은 은밀히 목책을 뛰어넘는다. 그러고 보니 그 수효는 근 이백명을 넘는다. 누군가가 은밀하게 소리친다. "우선 수비대장의 관사를 친다!" 쏴아아아....! 황영걸은 기분이 상쾌했다. 아침나절 두명의 숙련된 게집과 격한 정사를 치르고나니 그제야 종내 찜찜했던 기분이 풀렸다. 그는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계집들이 그가 손 하나 까딱할 필요 없을 정도로 시중을 들어준다. 그는 그저 욕조에 들어가 있으면 되었다. 구석구석.... 발가락에서, 머리 감기, 심지어는 그의 사타구니에 이르기까지 계집들은 정성껏 닦아 준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흘흘....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썩지야 않겠지. 장인이 다시 복권 하기만 하면 이 몸은 곧 황궁으로 갈테니. 흘흘... 그동안 이곳 에서 푹 쉬는 거야. 문득 계집의 손이 그의 어떤 부분을 만지며 킬킬거린다. 그는 스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꺄악!" 갑자기 한 계집이 비명을 질렀다. 그 계집은 창문을 보며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황영걸은 눈을 크게 떴다. 창문에서 복면을 슨 작자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리둥저랬으나 곧 호통을 쳤다. "죽일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본좌의...." 그는 말을 흐렸다. 복면 속으로 괴인의 눈에서 발하는 인광같은 살광을 느낀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쉬익! 팍! 팍! 괴인이 손을 들었고, "아아악!" "캬악!" 두 계집의 유방 사이에 정확히 비도가 꽂혔다. 금세 욕좌 안의 물이 핏물로 변한다. 비로소 황영걸은 소름이 좌악 끼쳤다. "누... 누구냐? 네 놈은... 허억!" 그는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입을 벌린 사이.... 무엇인가 번뜩이는 것이 날아왔고, 그대로 입속으로 꽂힌 것이다. 그의 입안으로 날아간 것은 비도였다. 첨... 벙....! 욕조의 물이 사방으로 퉁겼다. 황영걸은 절명하여 짐승같이 무성한 하초의 털을 드러내며 욕조위로 떠올랐다. 복면의 얼굴이 사라졌다. 직후, 창밖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신호하라. 공격...." x x x "와아아아!" 함성이 들린다. 처음에는 우측으로부터, "와아아아아!" 좌측으로 이어지고, "와아아아아!" 곧이어 그 함성은 사방으로부터 일제히 울렸다. 도열해 있던 병사들은 어리둥절했다. 잠이 일시에 달아났으나 아직은 영문을 모르는 상태였다. 허나 죽음의 화살이 그들의 정수리와 가슴과 등을 꿰뚫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 "기습이다. 아아....!" 누군가각 죽어가면서 외쳐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사방의 목책너머로 흑의 괴인들이 뛰어들어 왔으며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살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창,도,륜,극은 무자비하게 병사들의 목을 끊고 허파를 찢었다. 눈 깜빡일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수인들을 감시하던 병사들은 아차하는 사이에 대오가 흐트러졌으며, 오랫동안 전투감각을 상실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닥친 기습에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흑의인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한편, 지염규는 등과 가슴, 옆구리에 동시에 다섯 자루의 창을 맞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크으윽! 빌어먹을... 내 이럴 줄 알았... 다니까..." 그는 모로 쓰러지면서 황영걸을 저주했다. 수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불시에 기습한 흑의인들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죽일 뿐 수인들은 해치지 않았다. 그러나 수인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를 누비며 외쳐대고 있었다. "대원수님! 어디 계십니까?" "대원수님....!" 그들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이천여 명의 수인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그들이 찾으려는 인물은 누군가? 문득, "헛헛헛... 나 여기 있네." 창노한 노인의 응답이 들렸다. 수인들 가운데 유유히 걸어나오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다 떨어진 옷을 걸쳐 입은 후 서서히 걸어 나왔다. 바로 뇌륭대였다. 흑의인들은 바로 그를 구하러 온 것이다. 대원의 쫓겨난 병사들.. 뇌륭대는 기뻐했다. 자신의 수하들이 잊지 않고 자신을 구출하러 온 것이다. 헌데, 그의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자네는....?" 사나이. 그는 낙성혼이었다. "왜....?" 뇌륭대는 신음하며 물었다. 낙성혼은 음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황제폐하의 명령으로 이곳에 갇힌 죄인이오. 그러니 황명이 있기까지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소." "......!" 뇌륭대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말도 되지않는 소리인 것이다. 그가 죄인이듯이 사나이 낙성혼도 죄인이 아닌가? 헌데 이 무슨 소린가? 낙성혼은 굳건히 팔을 벌려 그를 막고 있었다. 이때였다. "미친 놈!" 퓨우웃! 한자루 창이 날아와 낙성혼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피가 튄다. 살점 한 웅큼이 떨어져 나간것이다. 낙성혼은 모로 쓰러졌다. 만일 조금만 더 정확했더라면 그대로 심장이 관통되어 죽었을 것이다. 이때...... 기이한 것은 뇌륭대였다. 그는 책망하는 눈빛으로 한 명의 흑의인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의인은 무슨뜻인지 헤아리지도 않고 촉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대원수..." 그는 한쪽 무릎을 꺽어 예를 표한다. 그는 대원의 군사인 것이다. 뇌륭대는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낙성혼을 본다. 낙성혼의 전신은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휴우...." 뇌륭대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어차피 핏줄이 다르고 길이 다르니. 헌데, 그가 막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의 다리를 잡는 것이다. 낙성혼, 그가 쓰러진 채 철철 피를 흘리면서도 다리를 붙잡은 것이다. "이 뒈질 놈이!" 흑의인은 분노하여 창을 세웠다. 단숨에 낙성혼의 가슴에 메다꽂을 기세였다. 하나 뇌륭대는 손을 창을 잡았다. "놔두게." 흑의인이 창을 거두자 그는 낙성혼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름진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보기에 그대 또한 버림을 받은 자. 그런데 어째서 나를 막는가?" 그러나 낙성혼의 비틀어진 입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대명의 군인, 군인의 사명을 다할 뿐이오. 그러니 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시오." 뇌륭대가 뭐라 답변하려 할 때, "이런 미친 놈이 있나? 찢어죽일..." 흑의인, 이미 주변에는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흑의인이 낙성혼을 발로 걷어찼다. 퍽! 이번의 발길질은 황소도 즉사시킬 정도의 대력연환퇴라는 초원민족 특유의 절학이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낙성혼의 몸이 부웅 떴다가 떨어졌다. 그는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대원수님! 시간이 없습니다. 국경수비대가 몰려 오기 전에 어서...." 이번에는 습격대의 총대장 야율종대가 나타나 무릎을 꿇으며 재촉했다. "자네... 였군." 뇌륭대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는 저만치 날아가 움직이지 않는 낙성혼을 아쉬운 눈으로 일별한 뒤 돌아섰다. 그러나, 그는 흑의인들에게 부축되어 가면서도 낙성혼 쪽을 몇번인가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낙성혼이라는 청년을.... x x x 처음에는 손이... 아니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리고 척박한 땅을 긁으며 몸이 움직였다. 사나이, 낙성혼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다. "......" 낙성혼은 어두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시체가 가득 널린 분지였다. 병사들의 시신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수인들은 목책을 뚫고 모두 달아나고 없었다. 낙성혼은 걷기 시작했다. 목책의 활짝 열린 문이 보인다. 그 주변에도 시신이 널려 있었다. 목책 너머로... 아득히 북방으로 이어져 있는 사막이 보인다. 낙성혼은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사막 저쪽으로, 어지럽게 찍혀 있는 말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낙성혼은 문득 허리를 굽히더니 무엇인가를 줍는다. 그것은 검이었다. 한자루의 검을 집어 들었으나 올바로 들 힘도 없는듯 질질 끌고 있었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검으로 기다란 선을 그으며 말발자국이 사라져간 북방의 사막을 향해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낙성혼의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억지로 치뜨곤 하는 그의 눈에는 이상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안돼.... 뇌륭대, 당신은 대명의 죄인.... 하늘 끝까지라도 쫓겠다.... 4장 血淚..... (4) 두 사나이.... 두 쌍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나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칼끝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검봉이 늘어서 있는 산곡. 천하의 명산이자 도가의 성지라는 무당산. 중원구대문파 중 양대산맥인 대무당파가 있는 곳에서 50여리 떨어진 곳이다. 사나이들이 누워 있는 곳은 점점 물들어 가고 있었다. 피.... 그들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주위의 흙을 적셔가고.... 그 반경 은 점점더 넓혀지고 있는 것이다.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가 중얼거린다. "대장. 이것이 포상입니까? 우리가 지금껏 목숨걸고 수행한 임무에 대한 훈장 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피흘린 댓가요....?" 다른 한쌍의 눈동자는 대답이 없다. 다만 깊이 침잠해 버린 음울의 깊이만 더해갈뿐이다. "대장, 우리는 배신당했소. 충견으로 일생을 주인을 섬기다 늙어 버린 개를 버리듯이... 내팽개쳐진 것이오..." 빛을 잃어가는 사나이의 눈동자는 분노로 경련하고 있었다. 음울한 눈동자의 사나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어떤 오해가 있을 지도 모르고. 또는 작전이 변경되었는지도..." 빛이 바래버린 눈동자가 소리친다. 아니, 절규한다. "아직도 모르십니까? 처음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척살대상자가 미리 알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릴 리도 없고.. 또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우리 들을... 크으윽! 관군이... 관군이 그들과 손을 잡고 우릴 쫓을 리가 없지 않소!" 아아... 그랬던가? 그러나 음울한 눈동자는 고개를 흔든다. "아니야. 설사 우리가 처음으로 계획된 입안으로 움직여졌고... 그래서 이 지경이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항거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황제폐하의 명.. 황명인 것, 우리는 대명의 군인이고 황상의 뜻이 그러할 진대 당연히 그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다." "대장... 제발...! 더이상 그놈의 황명이란 소리는 그만하시오. 우리는 황명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오..... 오직 대장의 명... 대장의 뜻이었기에 따랐을 뿐이오. 처음에는 황명을 쫓았으나 지금은 오직 대장이기에 따랐던 것이오. 설사 목숨을 버릴 지라도 웃으며 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장의 명이었기에... 크흐흐흐흐!" 절규하던 사나이는 주먹으로 땅을 친다. 그의 고통과 분노에 찬 절규가 산곡을 메아리 친다. 그러나 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힘겹게 땅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일어나라. 추적자들이 가까와지고 있다." 그렇다. 무당파라는 무림계의 거목.... 그들이 추적대를 편성하여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두 사람을 쫓고 있었다. 죽어가는 눈동자의 사나이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싫습니다. 이대로 죽겠습니다. 어차피 버려진 몸... 이대로의 목숨 연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여기에 누어 차라리... 죽음을 기다리겠소!" 그러나 대장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은 황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우리의 목숨은 오직 황제만이 결정할 수 있다." "크흐흐흑! 또 그 소리... 황제! 황제! 빌어먹을 황명!" x x x 바다. 그대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넓은 바다의 품에 안겨 두려움에 떨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그대는 결코 사막의 한가운데를 홀로 걸어가는 이 사나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직 모래 뿐.... 모래.... 모래.... 모래.... 어느 한 곳 목표를 정할 곳조차 없는 막막한 지평선... 사나이, 낙성혼은 한 자루 이빠진 검을 지팡이 삼아 끝없는 사막을 걸어가고 있다. 벌써 나흘. 애당초 그가 따라 나섰던 바닥에 남아있던 말발자국은 사풍에 날려 흔적조차 없다. 그러나 그는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걸을 뿐이다. 빠오(천막). 사막의 사구 사이에 빠오군이 형성되어 있다. 열 개 이상의 대형빠오와 이십여개의 소형빠오가 일정한 배열에 따라 원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빠오의 모양은 누대를 걸쳐 초원민족인 몽고족만이 가질 수 있는 양식이다. 군기가 바람에 날리는 것으로 미루어, 이 빠오는 과거 중토를 정복했던 원의 군사들이 친듯 하다. 중심에 가까운 빠오 안, "....." 야율종대는 초조하게 뒷짐을 지고 서성이고 있다. 빠오 안은 겉과 달리 아늑한 느낌을 준다. 바닥에는 양털이 푹신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한 명의 가죽옷을 입은 병사가 들어왔다. "어떠시냐?" 병사는 그의 부관 중 하나였다.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오랜 기간동안 유황연 속에서 생활하셔서 내장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아울러 너무 연로하셔서 초인적인 정력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야울종대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아! 좀더 서둘렀어야 하는 일인데...." 부관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리고... 찾아 계십니다." "음? 나를?" 야율종대는 무슨 특명이라도 받은 듯 긴장했다. 또 다른 빠오. 이곳은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시설은 가장 화려했다. 바닥에는 양털 아닌 양탄자가 깔려 있다. 중간에는 백양모로 씌워진 침상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안색이 밀납같이 창백한 백발노인이 누워있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노인의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영원히 떠질 것 같지 않은 눈꺼풀이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야율종대가 들어섰다. 야율종대는 조심스럽게 들어와 침상 위의 노인, 즉 얼마전 천신만고 끝에 구출한 대원의 명장 뇌륭대를 가만히 내려다 본다.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충만해 있었다. 그는 잠시 기다려도 뇌륭대가 눈을 뜨지 않자 한숨을 쉬고 나가려 했다. 헌데 그때 뇌륭대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왔느냐." 돌아섰던 야율종대는 흠칫하고 돌아서면서 공손히 대답했다. "예. 주무시는 듯 해서....!" 뇌륭대는 한숨을 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라를 망하게 한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편히 잠을 자겠는냐....?" 야율종대는 황급히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어째서 대원수님의 잘못입니까? 그토록 대원수님이 국운을 염려하였을 때 황제폐하의 눈과 귀를 가렸던 놈들 때문...." "쓸데없는 소리....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와 황상을 위태롭게 한 것은 장수의 책임, 백번을 죽어도 씻지 못할 죄인 것이다." 그 말에 야율종대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로서는 감히 대원수의 넓은 흉금과 충성심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콜록! 콜록....!" 뇌륭대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야율종대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에게 있어 뇌륭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대원의 군사들 에게 있어 뇌륭대는 한결같이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때로는 호랑이 같고, 때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 뇌륭대는 바로 그런 장수였던 것이다. 오척도 넘는 거검을 휘두르며 천하를 질타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연한데. 지금은 이렇게 죽음을 앞도고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문득 뇌륭대가 기침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말했다. "어서 출발 준비를 서둘러라." "예?" 야율종대는 깜짝 놀랐다. "어서 출발을 서두르라니까." "그건 안됩니다. 지금 원수님의 상태로는 견디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차라리 어느정도 쳬력을 회복하신 다음 움직이는 것이..." 그러나 뇌륭대의 입에서 질책어린 말이 떨어졌다. "어리석인 녀석. 앞으로 대원을 짊어질 녀석이 어쩌면 생각이 그리도 짧으냐? 지금쯤 나의 탈출소식을 알고 명의 국경수비대가 뒤쫓아옴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그럼 앉은 채로 죽음을 기다리겠다는 것이냐?" 야율종대는 고집을 부렸다.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특별타격대를 파견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특별타격대....?" 야율종대는 어깨를 흔들었다. "예, 명의 약졸들을 습격하여 추적을 지연시킬 생각입니다." 순간, "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뜻밖에도 뇌륭대의 입에서는 분노에 찬 호려이 떨어졌다. "예?" 뇌륭대는 문득 깡마른 손을 뻗어 야율종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 종대, 그리고 스스로의 힘을 먼저 길러야 한다. 대원의 국운은 너같은 젊은 장수들이 하는 양에 달려있다. 그러니 너는 절대 쓸데없는 만용은 삼가야 한다." "하지만...." 야율종대가 무어라 말하려는 때, 문밖에서 부관의 보고가 들렸다. "야율장군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야율종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누군가 본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순간 야율종대의 안색이 변했다. "어디냐?" x x x 사막의 사구 위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한 자루의 검에 몸을 의지하고 비틀거리며 빠오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낙성혼이었다. 그의 눈빛은 혼탁하기 그지없다. 다만 그는 어렴풋이 보이는 빠오를 향해 아무 생각없이 다가가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단 하나의 관념만이 솟아있다. 그것은 뇌륭대! 그를 잡아야 한다는 집념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본능이 되어 있었다. 야율종대는 빠오 앞에 우뚝 서서 빠오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낙성혼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리고 있었다. "아니, 저 놈은?" 그는 기가 막혔다. 유황곡에서 죽자고 뇌륭대님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던 사나이인 것이다. 옆에서 부관이 물었다. "아시는 자입니까?" "아... 아니다. 즉시 체포하여 내게 데리고 오라." 야율종대는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빠오안으로 들어갔다. 낙성혼은 그저 눈앞에 누군가 가로막는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휙!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느렸다. 그는 즉각 체포되었다. 그리고 어떤 빠오로 끌려갔다. 빠오 안, 부관은 낙성혼을 무릎꿇게 하려고 어깨를 눌렀다. 그러나 낙성혼은 이를 악물고 무릎 꿇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때로는 힘에 못이겨 털썩 주저 앉았다가도 억지로 일어나곤 하는 것이었다. "이 놈이..." 부관이 주먹을 세워 그의 면상을 후려갈기려는데, "그만 두어라." 보고 있던 야율종대가 만류했다. 그러나 낙성혼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허나...차츰 시야기 트이는지 그는 눈빛을 되차고 있었다. 타는듯한 눈! 야율종대는 그의 눈빛을 접하자 왠지 위축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도 대원의 장수다. 그는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사나이 낙성혼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옆에 있던 부관이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쳤다. 빠악! 낙성혼은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순간 야율종대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냥 뇌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죄....죄송합니다." "너는 잠시 물러가 있거라." 부관이 물러간 뒤 야율종대는 다시 기를 쓰고 일어서고 있는 낙 성혼을 내려보며 말했다. "좋다. 네놈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겠다. 다만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서만은 말해야겠다." 낙성혼의 코와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전신이 말라붙은 피로 얼룩져 있고, 봉두난발이 비쩍 마른 얼굴, 살아있다는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몽롱한 눈으로 야율종대를 노려보며 신음하듯 말했다. "뇌륭대를... 돌려다오." 야율종대는 어이가 없었다. "뭐... 뭐라구? 다시 한번 말해봐라. 지금 뭐라고 했느냐?" 낙성혼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뇌,륭,대, 돌,려,다,오!" 야율종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놈..! 미친 놈이 아닌가?" 야율종대는 정말 화가 났다.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놈을 끌고가서 능지처참해 버려라!" 뇌륭대라면 그의 우상이었다. 아무리 낙성혼의 그의 마음을 끌고 있었어도 뇌륭대를 잡으러 왔다는 말에는 무서운 분노가 치민 것이었다. 이때였다. "잠깐....." 문득 천막 밖에서 귀에 익은 창노한 음성이들렸다. 이어 천막의 장막을 헤치고 한 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뇌륭대였다. "아니.... 몸도 불편하실텐데 어찌...?" 야율종대는 깜짝 놀라 다가가며 부축했다. 뇌륭대는 힐끗 낙성혼을 바라보았다. 낙성혼은 그가 들어온 순간 두 눈에서 빛이 번쩍 일고 있었다. "너는 잠시 물러가 있거라. 내 저자와 할 이야기가 있다." "하... 하지만...." "물러가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뇌륭대가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야율종대는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뇌륭대의 안위가 걱정되었으나 낙성혼또한 지금 상태로서는 닭잡을 힘도 없었던 것이다. 뇌륭대는 호피의자에 앉으며 맞은 편의 의자를 가르켰다. "불편할테니 자리에 앉게." 낙성혼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날 잡으러 왔다구?" 뇌륭대의 음성은 기이하게 정감이 있었다. 반가운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와 낙성혼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한 장소에서 일년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만일 서로의 입장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네가 날 데리고 갈 수 있다고 믿는가?" 낙성혼은 무뚝뚝하게 답한다. "상관없소. 나는 대명의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뇌륭대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그는 비로소 청년을 자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믓에 어떤 감상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젊은 시절... 나도 너처럼 국가에 충성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 충성심은 나 자신의 목보다 수중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지. 문득 뇌륭대는 입을 열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알기로 자네는 대명의 군인이 아닌 대역죄인 일텐데...?" 그러나 낙성혼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답한다. "대역죄인도 군인은 군인이오." 그 말에 뇌륭대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자네가 대명의 군인이듯 나도 원의 장수일세. 그러니 자네가 날 체포해 가고 싶듯이 나역시 자네를 따라 돌아갈 수 없네." 낙성혼은 잠시 침묵하더니 중얼거렸다. "이해하오." 뇌륭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게." 허나 낙성혼은 고개를 저었다. 뇌륭대의 안색이 변했다. "자네가 날 굳이 데려가려 한다면 나는 자네를 죽일 수 밖에 없네. 내 말뜻을 알겠나?" 허나 낙성혼의 신념은 너무나 확고한 것이었다.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오. 그러니 당신의 뜻대로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소." "......!" 뇌륭대는 상념에 빠졌다. 그는 시간이 흐를 수록 낙성혼에 대해 경이로울 뿐이었다. 그는 내심 장탄식하고 있었다. '아아! 저런 장수가 원에 서너명만 있더라도 지금처럼 비참하게 되지 않았을 것을... 어찌하여 대원에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는단 말인가?' 문득 뇌륭대는 밖을 향해 외쳤다. "누구 없느냐?" "부르셨습니까?" 기달고 있던 야율종대가 성큼 들어왔다. 허나 그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뇌륭대의 명령은 뜻밖의 것이었다. "저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라." "넷?" 5장 血淚.....(5) 눈동자. 이제는 한쌍 밖에 남지않은 눈동자. 조금전에 그의 부하이던 또하나의 눈동자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끝없이 푸른 창천도, 다시 한번 날아들지도 모를 비둘기도... 영영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한쌍 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는 벌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 그러나... 그 홀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까아마득한 벌판의 능선을 따라 수천명의 병사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창을 들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들고 있는 것이였다. 병사들은 대명의 군사, 자신도 역시 대명의 군사. 그러니 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해야 할 것인지 그는 아직도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결정을 지어야 했다. 이제 지척지간으로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겨눈채 그에게 좁혀든 것이다.만일 더이상의 접근을 허용한다면 그는 항거 한번 해보지 못하고 창에 산적처럼 꿰인 채 죽고 말 것이다. 츄릿! 그는 검을 뽑았다. 그것은 그가 처음 황궁을 나설 때 황제가 그에게 친히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대명의 국운이 걸린 일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임무를 완수하라. 아울러 너는 누구를 믿지도 말며,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말아라. 오직 짐의 명만을 따라라. 그리고 이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너는 황실의 어영특위대장이 아닌 평민의 신분임을 명심해라! 군사들이 다가온다. 사나이의 눈에는 어떤 결심의 빛이 번뜩인다. 그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황명이 떨어지지 않는 한 함부로 죽어서는 안되는 몸인 것이다. 사나이는 검을 안고 수비가 가장 허술해 보이는 부분의 지점을 향해 막 신형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추어라...." 문득 멀리서 급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병사들은 물론 사나이도 동작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일신에 홍색의 갑주를 입은 관인이 말등에서 뛰어내리더니 당당 한 음성으로 무엇인가 첩지를 펼쳐 읽는다. "황명이시다! 역적 낙성혼은 즉시 검을 버리고 포승을 받으라!" 순간, 사나이, 낙성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황명이라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 관인은 다시 한번 외쳤다. "역적 낙성혼은 황명을 받아라!" 사나이.....낙성혼은 온몽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툭! 그의 손에서 장검이 떨어졌다. 그 순간 군사들이 달려들이 그의 전신을 오랏줄로 칭칭 묶었다. "압송한다!" 낙성혼의 눈은 빛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죽어가던 수하의 눈동자처럼. x x x 사구의 그늘. 빠오 안에 홀로 누워 있는 뇌륭대의 눈은 천정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달리기 어언 칠십년이다. 그의 나이 십여 세 때부터 참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육체가 노쇠해지고 기력도 쇠잔했다. 그는 자신의 명이 얼마남지않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가치있는 죽음을 맞이하는냐가 그의 남아있는 숙원일뿐이다. 문득 바람이 인다. 야율종대가 들어서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야율종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자가 한사코 치료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음식물도 사양하고 있습니다.이대로 가다간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뇌륭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가자." "예?" "그자가 있는 곳으로 가잔 말이다." 낙성혼은 빠오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모습이었다. 그의 몸에는 포승이 묶여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뇌륭대의 지시이기도 했지만 실상 그의 체력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허나 만일, 탈출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결코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달아나지 않을 위인이었다. 그의 시선은 땅을 보고 있었다. 시종일관 같은 자세, 같은 모습이었다. 뇌륭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노안은 곧바로 낙성혼을 바라본다. "굶고 있다고?" 낙성혼의 입이 열렸다. "대명의 군인은 적의 음식을 먹지 않소." 뇌륭대의 시선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다가가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 "자네는 군인일세.군인의 목숨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국가의 것, 그러니 생명인들 자신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군인일세." "....." "자네는 현재 신체가 지극히 나약해져 있네. 죽, 자네는 이곳에서 굶음으로써 국가에 불충하고 있는 것일세. 국가의 재산 하나를 축내고 있다는 애기란 말일세." 순간, 낙성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음식을 주시오." 뇌륭대는 마음 속으로 놀랐다. '자신의 잘못을 저렇듯 쉽께 깨닫고 또 고치다니... 아아! 원이 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구나.' 낙성혼은 음식을 먹는다. 뇌륭대는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음식은 가장 훌륭한 것이다. 그것은 뇌륭대가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낙성혼은 음식물을 꼭꼭 새김질하듯이 씹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그가 음식을 다 먹지 않고 겨우 삼분지 일정도만 먹고 남긴 것이다. 뇌륭대는 다시 한번 놀란다. '이 자는 정말 영리하고 빈틈이 없다. 배가 그렇게 고팠다면 허겁지겁 먹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깨끗이 비웠을텐데, 약간만 취한것은 오랫동안 졸아든 위장을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말 이자는 현명하고 차분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뇌륭대는 어떤 결심이 깊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나의 목숨을 원한다고 했지?" 뇌륭대의 말에 낙성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나는 다만 당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원한다고 했소. 당신의 생명은 대명황제의 것, 나는 당신의 생명에 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소." 뇌륭대는 가볍게 한숨을 쉰다. "휴우... 어쩌겠나? 하지만 내가 가지 않겠다면 나의 수급이라도 들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낙성혼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물론이오." "좋아. 내가 자네를 따라갈 수는 없고 다만 나의 목을 원한다면 주겠네." ".....!" 낙성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의 귀가 잘못 듣지 않았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세상에 순순히 자신의 목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자신이 불리하지도 않은 절대유리의 고지에서 그런 승낙을 하는 자가 있다니! 그는 멍하니 뇌륭대를 바라보았다. 의문의 빛이 가득한 눈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네." "나는 대원의 장수, 장수로서의 예우는 취해주길 바라네." 낙성혼은 급기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어째서 그런 뜻을.....?" "허허허... 그것까지 알 것은 없네. 세월이 흐르면 흥망성쇠도 뒤바뀌는 것... 호랑이는 자신이 죽어야 할 때와 장소를 알아야 하는 법, 그래야 진정한 호랑이지." "....." "잠시 기다리게. 내 작별을 하고 와야 할테니." 뇌륭대는 의혹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낙성혼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안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야율종대는 미친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외침이 빠오 사이를 회오리친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만류하고 있었다. "어찌 그런 일을...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립니다." "갈! 그래도 못 알아 듣는단 말이냐?" 빠오 안에서 뇌륭대의 음성이 진동했다.비록 기진한 노인이었으나 아직도 그의 음성에는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과 힘이 실려 있었다. "흐흐흑... 하지만 대원수님... 어찌 그럴수가...!" "마지막 명령이다. 시키는대로 하라. 그리고 나의 최후를 똑똑히 보아라. 또 그 사나이를 닮아라. 만일 원에 저만한 장수가 둘만 있었더라도 천년 만년 기반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라." "으허허허헝!" 야율종대는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뇌륭대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아들에게 나의 뜻을 알려다오. 그리고 힘을 합쳐라. 시대는 변하는 것... 서두르지 말고 힘을 비축하여 기다려라. 언제고.. 꾸준히 인내하는 자가 승리한다." "대....원....수...!" x x x 빠오 안으로 들어서는 야율종대의 눈은 많이 울어서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준비 되었다고 전하라 하시었소." 낙성혼을 향해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증오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찢어죽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될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군인이 된 것을 이때만큼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군인은 명에 따라 죽는다. 그러기에 뇌륭대의 명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낙성혼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소." ".....?" "목욕물을 준비해 주시오." 건방진 놈.... 허나 야율종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목욕통이 빠오 안으로 들어갔다. 낙성혼은 옷을 모두 벗고 전신을 깨끗이 씻었다. 그가 몸을 씻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뇌륭대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시함이었다. 얼마후 그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 그는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다소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밖에는 수백 명의 원의 군사들이 원진을 그리고 비잉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한가운데 뇌륭대가 흰천을 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모든 군사들의 시선에는 고통과 분노의 빛이 담겨져 있었고, 그들은 원진을 뚫고 한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는 낙성혼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허나 낙성혼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다가갔다. 천위에는 검 한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는 검을 들어 살펴본다. "숫돌을 준비해 주시오. 검날이 너무 무디오." 그 말에 야율종대는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가부좌를 틀고 있는 뇌륭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어리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자는 없었다. 그는 지금 충분히 낙성혼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슥슥슥.... 낙성혼은 숫돌에 검날을 갈았다. 그가 검을 가는 동안 군사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분노의 빛은 더욱더 짙어졌다. 그들의 성난 눈초리는 일거에 낙성혼의 몸뚱이를 갈가리 찢어 놓을 듯 했다. 이윽고 낙성혼은 검날을 손으로 만졌다. "좋군." 그는 검을 들고 뇌륭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그것은 대명의 장수로서 오랑캐인 적장에게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라는 것을 뇌륭대는 알고 있었다. "고맙네." 뇌륭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부디 용서를..." 낙성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들은 자는 오직 가까이 있는 뇌륭대 한 사람 뿐이었다. 번뜩.... 낙성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x x x ..... 장성민(將成民) 스물두살의 젊은 장수는 초조감이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사막. 그 어느 곳에서도 적의 흔적은 보이지않았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아득한 사구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마치 바다에 빠진 구슬 한개를 건지려 몸부림치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는 유황옥에서 뇌륭대가 원의 적도들에게 구출을 받아 달아났 다는 보고를 받고는 오히려 신선한 자극을 느끼고 즐거워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나른하고 지리한 일상에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경수비대의 젊은 대장으로서,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 날아든 급보가 그의 젊음과 패기를 부추긴 것이다. 그는 즉각 수하들로 하여금 추적대를 동원하여 뇌륭대를 잡으러 출발했다. 헌데....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오늘, 그는 점점 다가오는 패배감에 참담해져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출발이 너무 늦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이틀 후에 출발했던 것이다. 그동안 흔적은 다 사라졌고, 사막은 더욱더 그를 괴롭혔다. 이제 그는 물론, 그의 수하들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준비해온 식량과 식수가 떨어져 가는 것이다. 만약 오늘 내로 어떤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포기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뇌륭대는 벌써 사막을 가로질러 몽고의 땅으로 건너갔을 테니 말이다. 장성민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젊은 패기는 사실 적에게 꺽인 것이 아니라 사막에 꺽인 것이었다. 한번 만이라도 시원하게 전투를 치뤄보고 패했다면 몰라도 이런식으로 물러나기는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 보았다.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오는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졌고,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바람과 모래.... 바람... 모래... 모두 형편없이 늘어져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은 그의 날카로운 성미를 알고 있었다. 억지로 말을 독려하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축 처진 창끝이 이미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앞장 서 말을 타고 가던 장성민의 눈에 문득 어떤 흑점이 보인 것이다. 사구의 능선 위에 고물거리며 아주 느리지만 움직이고 있는 흑점이 있었다. 그는 눈을 좁혔다. 사람이다. 능선을 따라 몹시 지친듯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점점 이쪽으로 가까와 오고 있었다. "서라!" 그는 대열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자연히 저자는 이리로 오리라. 시간이 흘렀다. 사나이였다. 그는 백장... 오십장... 삼십 장... 점점 좁혀 지고 있었다. 이윽고, 사나이는 손에 무엇인가를 든 채 접근해 왔다. 기이한 것은 그가 이쪽을 보지 못한 듯 여전히 땅만 보고 비틀거 리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따. "가서 확인해 보아라." 두두둑! 수하 한명이 말을 달려 나갔다. 낙성혼은 점점 멀어져 가려는 의식과 싸우며 걷고 있었다. 손에 쥔 뇌륭대의 수급이 무거워 더이상 들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기필코 이것만은 가지고 가야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걸었고,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방향조차 분명치 않은 노선이었다. 그는 그저 앞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손에 든 수급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분명 사위는 눈이 부실 정도의 대낮인데도 그의 시야는 흐리기만했다. 땀조차 한방울 흘러내릴 수분이 그의 몸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뇌륭대의 군사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저지하지 않았다. 뇌륭대의 마지막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뿌우옇게 안개 속을 헤메는 기분이었다. "아니... 저것은?" 사나이의 손에 들려진 동그란 물건을 바라보던 장성민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사람의 수급이었던 것이다. 그의 의문은 더 하기만 했다. 수하가 사나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기어이 다리가 꺽어진다. 낙성혼은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자신의 얼굴이 모래와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나는 대명의 군인이다. 대명의 군인은 적을 만나면..." 수없이 외운 주문이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 주문조차 외워지지 않았다. 기억력이 감퇴된 것이었다. 그는 모래에 얼굴을 묻은 채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차라리 아주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끝인가....' 이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아득히 어떤 자의 외침이 들어왔다. "대장님! 뇌옥을 탈출한 수인 중의 한 명인 것 같습니다..." x x x 군막. 군막의 지붕에는 대명을 상징하는 군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군막 안에는 국경수비대의 젊은 장수 한 명이 풀 수 없는 난제에 부딪쳐 있었다. 장성민.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그가 뇌륭대의 수급을 들고 올 수 있었을까? 그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그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장성민은 부관을 불렀다. "그자에 대한 수인기록을 찾아오게!" 성명: 낙성혼. 수인번호: 816. 분류: 특급 성분: 하북 천민출신 직위: 철령위 8반 병참담당원. 죄목: 일급 살인죄, 일급항명죄, 일급역모죄. 판결: 영구 중노동에 처함. "......!"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장성민은 의문의 빛을 띄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아."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관이 묻는다. "대장님.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장성민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생각해봐라. 직위가 철령위 8반 병참담당원이라면 졸병에 불과해. 그런데 그런 작자가 일급살인죄, 일급항명죄, 일급역모죄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그렇군요." 부관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 장성민은 서류를 움켜쥐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6장 血淚.....(6) 사나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 속에서 사나이는 갑옷과 투구를 쓰고 검을 든 채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사나이의 검이 허공을 번뜩일 때마다 적도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마치 잡초를 베는 것 같군..... 사나이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며 무수한 적들을 잡초처럼 베고 있었다. 헌데.... 이럴 수가... 문득 그는 자신이 베는 적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자신의 부하들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돼... 안돼.... 안돼.... 그는 허공에 춤추듯 떠올랐다가 떨어지는 부하들의 수급을 받으며 미친듯이 외치고 있었다. 사나이는 화려한 대전에서 황제폐하를 만나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포상을 내리고 있었다. 한자루의 황검을 하사하면서 황제는 말한다. 너는 내 친아우와 같도다. 사나이는 너무나 감격하여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헌데, 황제는 갑자기 황검을 뽑더니 그의 몸을 치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악.... 사나이는 비명을 질렀다. "이제 정신이 드시오? 아마 악몽을 꾸신 모양이구려." "....." 낙성혼은 그런 음성을 들었다. 희미하게 사물이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일까?' "큰일을 해내셨소. 아마 황제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것이오." 뭐라고 계속 말을 하는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흔들리면서 확실하게 잡히지 않고 있었다. 낙성혼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x x x 군막 안. 장성민은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고 있었다. 부관이 들어섰다. 그는 급히 묻는다. "그의 상태는?"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의원들도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 중상을 당한 사람이 이렇게 단시간에 체력을 회복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합니다." "으음. 정말 다행이군." 장성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 며칠간에 시간이 흐를수록 낙성혼이란 수인에 대해 호기심이 짙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지나칠 정도로 강한 정신력... 놀라운 체력... 분명 보통인물은 아닐텐데...' 낙성혼을 구출한 지 열흘. 그가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체취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의 의식이 돌아온 육일 전부터였다. 장성민은 불과 6일만에 자신에게 이렇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사나이 낙성혼이 궁금했다. 그는 누군인가? 그의 수인 기록이 그의 전부인가? 아니면....? 그는 문득 일어섰다. "어디를 가시려고....?" 부관의 물음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를 만나 보아야겠다." 부관은 막사를 나서는장성민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들어 지나치게 신경과민이신것 같은데...' 막사에는 낙성혼이 누워 있었다. 그는 이미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반듯이 누운 채 천정만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아직은 초췌하였으나 처음보다는 확연히 회복되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성민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낙성혼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전혀 그의 존재 따위를 신경쓰지 않는 태도였다. 헌데... 기이한 것은 장성민의 마음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이런 태도가 도리어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은근한 물음에 그제야 낙성혼의 눈길이 그에게로 돌아간다. "좋소." 지극히 딱딱하고 간단한 대답이었다. 장성민은 차라리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 낙성혼 의 태도에 대하여 전혀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마음이 약간 서운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사랑을 고백한 여인이 무심한 사내에게서 느끼는 그런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짧은 대답과 함께 낙성혼의 시선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 장성민은 머뭇거렸다. 그는 뭐라고 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아무런 화제거리도 생각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좋으니 사나이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머리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그만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헌데, 막 막사를 나서는 순간 그는 후회했다. '맞아. 이 말을 했어야 하는건데...' 그런데 그렇다고 다시 막사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왠지 자신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버리는 결과가 될 것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 거렸다. '당신께 곧 황제폐하의 특사명령이 떨어질 것이오. 아울러 어쩌면 포상이라도 내릴지 모르니 기대하시오.' 그렇다. 그는 이미 낙성혼에 관한 보고를 직접 황성으로 전달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분명 공과가 크니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x x x 낙성혼은 점점 회복되어 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 오히려 슬퍼졌다. 멀쩡한 육체가 된다면 육체는 끊임없이 황제의 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번 다시 황제의 작전명령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무당파의 장문인 하진자를 척살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어쩌면 미리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알면서도 불가능한 황명을 따르기 위해 무당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와 부하들을 기다리던 것은 무당의 매복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병사들마저 그들을 죽이기 위해 포진하지 않았던가? 그때... 이미 나의 운명은 결정지어진 거야. 그러나... 지금 육체가 살아나는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x x x 부들부들.... 전서를 읽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런 일이..." 그 손의 임자는 장성민이었다. 그는 지금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황제의 친서를 받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기다리던 내용이 아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답신이 온 것이다. ----- 즉시 낙성혼을 사형시켜라. 낙성혼에 관한 모든 기록을 삭제하라! 아주 간단한 전서였다. 의심할 나위도 없는 황제의 어인이 선명한 가운데... 이 한장의 전서는 장성민을 경악에서... 회의로... 슬픔으로.. 분노로까지 이끌었다. 이때, 장성민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눈만 멀뚱거리던 부관은 의아했다.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어깨 너머로 전서를 훔쳐 보았다. 그도 놀랐다. "아니... 이럴 수가....!" 부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부르르 떨었다. 그의 넋을 잃은 중얼거림 에 비로소 장성민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신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의자에 주저 앉았다. "아니... 대장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어찌 이런 황명이 내릴수가... 이건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장성민의 눈이 문득 번쩍 빛났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무관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지? 잘못된 명이지?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나? 엉?" "대... 대장님..." "으하하하핫! 이건 필시 잘못된 명이야! 그렇지 않은가? 부관?" "대... 대장님. 하지만 분명한 어인이 찍힌..." "허... 헛헛... 아무튼 잘못된 거야." 다시 털썩 주저앉는 장성민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만다. 머리속에 온통 혼돈이 오고 있었다. 왜.... 어떤 이유로....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또 무슨 죄를 졌길래... 그의 어지로운 상념은 근 반시진 가량을 계속되고 있었다. 어쩔줄 모르고 그의 앞에 서 있던 부관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저어.... 대장님..." 부관의 음성이 그를 일깨웠다. 정신이 번쩍 든 장성민은 손을 저었다. "가만.... 일단 내일 의논하자." "......?" "그리고 명심해라.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전서의 내용을 누설해선 안된다. 알겠느냐?" "예... 예." x x x 낙성혼은 막사 안을 걷고 있었다. 어느새 걸을 만큼 회복된 것이다. 그는 조금씩 자신의 녹이 슬고 굳었던 육체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랜 그의 습관... 아니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유황굴에서 녹이 슬고 독이 배었던 육신... 그 육신에 활력을 불러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운채 손가락의 관절부터 꺾었고...그 다음은 손목. 팔에서 어깨의 견갑골, 다시 목을 움직이고.... 허리운동까지는 침상에 누운 채 했다. 처음부터 무리해서는 안된다. 서서히.. 작은 관절에서 큰 관절로. 그는 걸음을 걷는 것도 처음에는 아주 느리게 걸었다. 그러나 차츰 빠르게, 규칙적으로 무릎을 점점 더 움직여 가며. 육체의 기능은 소리를 지르며 살아나고 있었고, 혈관에 머물렀던 피는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그의 이런 운동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았던 그의 육감과 본능의 감각이 가르쳐 준 것이다. 오직 그만의 비결이랄 수도 있었다. 우둑둑... 뚝뚝. 움직일 때마다 그의 전신 관절에서는 소리가 울린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의 육체는 확실히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진한 슬픔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이때, 막사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장성민이었다. 낙성혼은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사실 낙성혼은 스르로도 모르고 있었으나 요 며칠 간에 걸쳐 장성민을 느끼고 있었다. "....." "....."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 부딪쳤다. 순간 낙성혼은 무엇인가 말을 하려하는 장성민을 읽을 수가 있었다. 장성민의 눈은 수없이 흔들리고 망설임으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낙성혼은 어떤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 초조해지고 있는 것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몰랐다. 장성민의 입에서 나올말이 그의 인생을 아주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윽고 장성민의 입술이 떨어졌다. "당신에게 황명이 떨어졌소." 순간, 낙성혼의 온몸의 세포가 발광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가 멍해져 온다. 마치 한개의 쇠뭉치가 세차게 머리를 강타한 듯이. 장성민은 볼 수 있었다. 낙성혼의 눈이 부릅떠지고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금방 쓰러질 것 같던 몸이 강철 처럼 단단해지고 꼿꼿이 부동자세로 서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대체 저자는 누굴까? 누구이기에 저런....' 장성민은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더이상 죄인이 아니오. 그러나 군인 역시 아니오. 오늘부터 당신은 석방이되, 당신이 어느 곳으로 가든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과거와 당신의 가족조차도 영구히 잊어야 하오...!" "......!" 부동자세로 서있던 낙성혼의 몸이 문득 벼락을 맞은 듯이 떨렸다. 그의 동공은 튀어 나올 듯이 부릅떠지고 있었다. .... 오늘부터 당신은 석방이며... 당신의 이름과 과거와 가족조차도..... x x x 사나이는 걷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떠났다. 장성민에게서 황명을 받았다. 그것이 그를 내몰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은 그 자신도 모르는 채.... 그는 무작정 걷고 있었다. 이름도... 과거도... 가족조차도 영구히... 영구히... 잊어야 하오.... 사나이. 그는 생각한다. 나의 이름이.....? x x x 낙성혼이 떠나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장성민은 어떤 숭엄함을 느꼈다. 사나이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 그는 묻지도, 황명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장성민은 자신이 결국 무언가를 해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부관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장님... 대체 어쩌시려고...?" 장성민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의인이다. 그리고 대명의 충신이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죽일 수 없다. 또... 진정한 충신은 아무리 황명일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목숨을 다하여 수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 부관은 그 말에 감명을 받은 듯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눈길도 황혼 속으로 사라져 가는 낙성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어쩌면 대명황실이 썩었는지도 모르지. 저런 충장을 죽이려 하다니..."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명령했다. "너는 적당한 시신을 골라라. 그 시신을 어떤 용도로 쓰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겠지." 부관은 무릎을 꿇었다. "존명." 황혼이 지고 어둠이 밀려든다. 변방의 국경수비대의 밤은 외롭게 처량하다. 어디선가 호가의 노래가 들리는데 변경으로 떠나온 병사는 고향의 상념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7장 桓無影 -----만병보(萬兵堡) 수백년 전부터 무림에 알려져 있는 장인(匠人)의 가문이다. 만병보는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모든 종류의 병장기를 만듦으로써 무림에 알려졌다. 병기라도 보통 병기가 아니었다. 만병보에서 만든 병기는 명검보도로 일세에 위명을 떨치는 것이다. 그것은 만병보가 특수한 연검비법을 지니고 있으며, 천하명검의 산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무림에서는 만병보를 존중하고 있었다. 자파에서 특별히 보검신물로 간직할 보검을 주문제작하려면 만병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인의 가문.... 만병보. 따라서 그들은 특별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오래 전부터 명문무림에서 존중을 받아왔다. 만병보는 섬서성 용문산에 있었다. 용문산에서 나는 질 좋은 철광석을 직접 채취하여 제련하는 병기에는 만병보의 표식이 찍히고 있었다. 물론, 만병에서는 병기만 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기구나 생활필수품에 이르기 까지 철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든다. 따라서 만병보에는 도합 28개소의 철방이 있다. 검방(劍房), 도방(刀房), 창방(槍房),.... 농방(農房)등등... x x x 전각. 만병보의 중심부에 있는 단아한 격조의 건물에 지금 누군가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이고 있다. 야심한 밤... 일신에 화삼의를 입은 중년인으로서 얼굴이 약간 길고 눈빛이 날카로운 위인이었다. 만병보주 사마승. 그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땅... 땅.... 땅.... 어디선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사실 만병보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것 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자정이라는 시각에 철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는 일찌감치 해가 떨어질 때 쯤이면 끝난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아직도 철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마승은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만병보의 오른 쪽 구석진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의 눈썹이 움직였다. '또 그 자로군....' 만병보주 사마승은 쇠를 두드리는 자를 알고 있었다. 그자는 지금으로부터 육개월 전 에 만병보에 들어왔다. 사마승은 아직도 그가 처음 만병보를 찾았을 때를 기억한다. 그자의 눈빛이 워낙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빛은 놀랍게도 아무런 빛도 없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개개인 마다 어떤 형태로든 개인의 빛깔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 그자는 아무런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름이 환... 무영이라고 했던가? 무영... 으음,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겠지.' 환무영. 어떻게 보면 아주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를 한번 보면 곧 이름을 잊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특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머리카락으로 언제나 흐트러지게 가려져 인상에 남지 않는다. 환무영은 도통 어느 자리에 있어도 돌출되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가 있는지도 모를 때가 있었다. 말도 없으며, 나서지도 않는다. 그는 언제나 묵묵히 일을 하고 있을 뿐,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 는지 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사마승은 자신도 모르게 환무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농방이다. 그곳은 28개 철방 가운데 가장 하류의 철방이다. 만병보는 농기구를 만드는 농방을 다만 병기제작을 배우는 제자의 일종의 수련장소의 의미를 두고 설치한 것이다. 헌데... 사나이가 농방에 온 뒤로 사정이 약간 변했다. 그것은 인근의 많은 농부들이 그에게서 농기구를 사기를 희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나쳐 버렸었다. 헌데, 나중에 그가 만든 호미나 낫, 쟁기 따위를 본 사마승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환무영의 손으로 제작된 농기구의 뛰어남을 그는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는 철의 대가였다. 다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기만 하여도 제작기술의 정도를 파악한다. 그런 그가 환무영의 솜씨에 놀란 것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환무영이 처음부터 쇠를 잘 다루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처음 그는 쇠를 어떻게 녹이고, 어떻게 제련하는지조차 모르는 초보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육개월 사이에 그가 놀랄 정도로 고도의 기술을 얻은 것이었다. 사마승은 대단히 기뻐했다. 누구든 자신의 후계자가 뛰어난 인물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듯이, 그는 환무영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마음이 든 것이었다. 그는 환무영을 불러다 승방시키겠다고 했다. 그것은 농기구 따위를 만드는 곳에서 정식으로 병기를 만드는 철방으로 올리겠다는 뜻이다. 헌데 어찌 알았으랴. 그는 깨끗이 거절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농방에 쳐박혀 지금도 저렇게 자정이 넘도록 쇠를 두드리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신비한 젊은이야. 대체 어떤 경력을 가졌을까?' 맨처음 그가 찾아왔을 때 환무영은 다만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일하게 해주시오. 보수는 바라지 않소. 다만 아무 일이든 시켜주시오. 사마승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이곳에 통고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몇사람 없다. 그가 몸을 돌리자 한 명의 각진 얼굴의 제법 준수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나이는 이십 팔구세쯤. 청년을 보는 순간 사마승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후야. 이 밤에 웬일이냐?" 사마후는 그의 아들이다. 그가 장차 만병보를 물려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사마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께서 요즘 심사가 불편한 듯 해서 걱정입니다." 그말에 사마승의 눈빛이 흐려졌다. 사마후는 그것을 놓지지 않았다. "혹시 무슨 걱정되시는 일이라도...?" 허나 사마승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아니다. 본래 사람이 나이가 먹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다. 허허.. 그나저나 후야. 너도 이제 얼른 성가(成家)해서 나의 대를 이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말에 사마후는 안색을 바로 하며 말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버님. 소자가 보기에 아버님은 아직 정정하실 뿐더러 백년은 더 사실 정도로 건강합니다. 헌데 연로라니요?" 그렇다. 사마승은 겉으로 중연으로 보이나 실은 이미 육십을 넘었다. 그가 젊어 보이는 것은 그만큼 기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마승은 미소지으며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허허... 녀석." 그는 하나뿐인 아들이 대견했다. 그러나 할 이야기가 있고 못할 이야기가 있다. 그는 몇번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나서 몸을 돌렸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고, 밤바람은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부친의 모습에서 사마후는 왠지 쓸쓸함을 엿보았다. '무슨 일일까? 아버님께선 본시 명랑하신 분인데...' 그때였다. 잠시 멈추었던 소리가 다시 들렸다. 땅.... 땅.... 땅.... 땅.... "......" 그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사마후는 자신이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깨달았다. "아버님. 저 소리... 저 소리때문에 요즘 소자는 잠을 자지 못합니다. 대체 그 작자가 미치지 않았다면 꼭 이런 한밤중에 저런 난리를 부릴 이유가 뭡니까?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단단히 훈계를...." 허나,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마승이 문득 돌아서면서 성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놈! 잊지 말아라! 우린 본시 장인이다. 진정한 장인이란 쇠를 두드리는 소리를 음악처럼 여겨야 하거늘 듣기 싫다니 그게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냐? 네가 저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그러니 돌아가서 자신을 반성해라." "....." 혹을 떼려다 붙인 꼴이다. 사마후는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말을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소리보다도 실은 그 쇠를 두드리는 환무영이란 존재가 그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 신경이 거슬려 잠을 자지 못한 것이었다. x x x 땅! 땅! 땅.... 사나이는 쇠를 두들기고 있었다. 환무영. 이것이 외부에 알려진 그의 이름이다. 그는 밤이든 낮이든 쇠를 두들긴다. 그것만이 유일한 생의 의미인듯. 그가 있는 농방은 만병보 내의 28개 철방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이고 공간도 제일 좁은 곳이다. 간신히 화로 하나와 쇠를 연마하는 작업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의 주위에는 수북이 호미와 낫, 쇠스랑따위가 쌓여 있다. 그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어느덧 하루 해가 가고 석양이 든다. 열린 문안으로 타오르는 석양의 붉은 빛이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그림자 하나가 성큼 환무영의 땀에 젖은 등에 드리워졌다. 그러나 환무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일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굳이 느낌을 찾자면, 고독... 무심... 고독.... 무념.... 그런 것 뿐이다. 그림자는 섬세해 보인다. 쨍그랑! 그림자가 손을 뻗자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쇳소리를 낸다. 환무영은 쇠를 두들기던 손을 그제야 멈추었다. 그의 시선으로 작고 귀여운 당혜를 신은 발이 보인다. 대님으로 질끈 묶은 발목 위로는 자줏빛의 경의 바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위로는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보았다. 가운데가 부러진 비녀였다. 금과 은을 섞어 만든 봉황잠이었다. 문득 구슬을 굴리는 듯한 소녀의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이거 내일 아침까지 고쳐. 아침 산책 길에 꽂고 나갈거니까 말이야. 잊지 말아야 돼. 꼭 원상태대로 해줘." 그제야 환무영은 무심한 눈을 들었다. 그의 뒤쪽에서 흔들리며 타오르는 화로의 불빛의 여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불빛에 반사된 여인의 얼굴은 아주 요염했다. 나이는 많지 않아 고작 열 여섯, 일곱에 불과하였으되 입술이 도톰하고 몹시 육감적인 성징을 드러내고 있었다. 몸에는 자줏빛의 경장을 걸쳤는데 허리를 질끈 동여매어 잘록한 육체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의 융기는 옷을 뚫고 튀어나올 듯이 발달해 있었다. 타오르는 장미송이랄까? 아무튼 사나이의 욕망을 부추기는 그런 인상이었다. 그러나 여인, 아니 소녀의 두 눈동자에는 치기가 어려 있었다. 환무영은 소녀를 알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만병보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사마자연. 바로 만병보주의 금지옥엽이었다. 환무영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쟁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쳇! 바보같은 사내!" 사마자연은 코웃음을 날리며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환무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봉황잠을 줏었다. 가운데가 부러진 봉황잠. 그것은 일부러 힘을가해 부러뜨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벌써 수십번을 겪은 것이다. 한편, 사마자연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라지는 척 하면서 창문을 통해 사나이 환무영을 훔쳐 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반짝이는 이채가 빛나고 있었다. 문득, 사나이가 비녀를 바닥에 툭 던지고 다시 일을 하자 사마자연은 입술을 짓씹었다. '건방진....!' x x x 휘.... 휘.... 휙.... 휙....! 그림자들. 그들은 쾌속한 신법으로 달빛아래 몸을 솟구치고 있었다. 만병보의 높이 삼장이 넘는 보벽을 가볍게 뛰어넘는 신법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둘... 다섯... 이십 명! 그들은 보루에 올라섰다. 달빛이 평화롭게 잠든 만병보를 그윽하게 비추고 있었다. 만병보는 무림의 세가가 아니다. 다만 무림계에 널리 알려졌을 뿐, 정작 만병보의 보주도 고강한 무공을 지닌 편은 아니다. 그는 다만 호신무학 정도를 익혔을 뿐이었다. 다른 보내의 사람들이야 더욱 무공에는 별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괴인영들은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뿌리는 가운데 누군가가 차갑게 외쳤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반항하지 않는 자는 생포하라. 만일 저항하면 본보기로 죽여라. 대전 앞에 광장으로 한 놈도 빠짐없이 끌고 집합시킨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은 일제히 각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와장창! 우지끈! 퍼엉! 소동이 일어났다. 단꿈에 젖어있던 만병보의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난리를 만났다. 다짜고짜로 복면괴인들이 잠자리로 뛰어들며 닥치는대로 발로 걷어차고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일어나라! 죽기 싫으면 대전 앞으로 나가라!" "크흐흐!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누구요? 당신들은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감... 으아악!" 한 장한이 그대로 목이 달아났다. 그는 복면인들에게 저항을 하다가 한자루 검에 의해 졸지에 목이 날아간 것이다. 공포... 전율... 한밤중에 일어난 소동은 만병보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만병보의 식솔들은 대략 이백 여 명 된다. 그들 중 벌써 이삼십 명이 죽었다. 흑의인들이 행동을 개시한 지 한 식경도 되지 않아... 대전 앞에는 식솔들이 집합하여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으으... 이럴 수가...' 사마승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도 다섯 명의 복면인들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바로 옆에는 자신의 아들 사마후도 고개를 떨구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노스러운 것은 바로 사마자연의 모습이었다. 그는 하나 뿐인 딸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더욱이 아내가 일찍 세상을 뜬 후 유모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욱 안스러워 사랑을 듬뿍 주었다. 비록 그로 인해 다소 버릇이 없고 막무가내인 면도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눈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미모가 출중하여 벌써 사방으로부터 청혼까지 온다. 그런데... 사마자연은 잠자리에서 끌려 나왔는지 잠옷 바람에 머리채를 잡힌 채 한 복면인에 의해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 아닌가! "이놈! 놔라! 내 딸에게서 손을 떼라!" 그가 분성을 내지렀으나, "흐흐흐.. 가만히 있으시오, 보주. 더 떠들면 더욱 사태가 악화될 뿐이니 말이오." 우두머리인 듯한 복면인이 음침하게 말했다. 그가 눈짓을 하자, 자연을 끌고 왔던 복면인이 우왁스럽게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악! 이 나쁜 놈....!" 허나 사마자연은 더 소리칠 수 없었다. 복면인의 손이 불쑥 그녀의 잠옷 아래를 들추었기 때문이었다. "흐흐흐.. 다 보는 앞에서 홀랑 벗겨줄까? 좀 얌전히 굴어!" "......"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 떨 뿐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야말로 벼락이었다. 평화로운 만병보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이때, 우두머리 괴인은 사마승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음성은 아주 작아 오직 사마승의 귀에만 들렸다. "연판장을 내놓으시오, 보주." "......!" 사마승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비로소 알수 있었다. 그것이었구나. 연판장때문에 이들이.... 허나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서서히 좌우로 저어졌다. "안된단 말인가? 그럼 볼만한 구경거리를 펼쳐야 겠군." 복면괴인은 손을 번쩍 들었다. "애들아! 계획대로 시행한다." 순간, 사마승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아야 했다. 그는 대전 위에 있었고, 한 눈에 광장에 모두 끌려 나와 무릎을 꿇고 있는 식솔들을 볼 수 있었다. 문득 한 복면인이 칼을 높이치켜 들었다가 휙 내리쳤고.... "으아아악!" 애꿎은 식솔 하나가 목이 잘려 금세 바닥에 떼구르르 구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아주 비현실적으로 비쳐졌다. "흐흐, 계속 하나씩 목을 베겠다. 네가 연판장을 내놓을 때까지 말이다." 사마승은 그런 말을 들었다. 또다시 칼빛이 번뜩였다. 또 한사람의 목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에 광장에 무릎 꿇고 있던 식솔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으아아아...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아아악! 난... 죽기 싫어..." "꺄아악...." 아수라였다. 이백 여명이 공포에 질려 내지르는 구슬픈 애원과 비명은 사마승의 가슴을 마구 찢는듯 했다. 지금이라도 연판장을 내놓으면 더이상 식솔들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아. 그러나.. 그것은 안될 일이었다. 천하무림을 곤궁으로 몰아넣는 일이 아니던가? "흐흐... 연판장을 내놓는 것이 좋을껄." 귓전에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사마승은 눈을 감았다. "난 모르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흐흐... 그래?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괴인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수하 한명이 음충맞게 사마자연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켰다. "아악.... 아버지!" 8장 천하를 위하여는 싫소! 그는 분명 들었다. 만병보가 온통 겁난에 휩쓸려 아수라장이 된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농방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모든 일은 그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다. "....." 그는 한 자루 완성되지 않은 호미를 들고 어루만졌다. 그리고 망치를 집어 들었다. 땅....! 그가 몇차례인가 망치질을 했을 때였다. 쾅! 문득 문이 부서지면서 뛰어드는 흑의복면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망치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어? 이놈봐라! 아직도 한 놈이 있었군!" 허나 환무영은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망치질을 할 뿐이었다. "이놈! 어서 광장으로 나가지 못하겠느냐?" 두 명의 복면인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시로 마주본 다음 호통쳤다. 그러나 환무영이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듯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 자식이....!" 번쩍! 한 복면인이 검을 날렸다. 그의 검은 환무영의 등을 곧장 내리쳤다. 헌데, 땅! 불꽃이 퉁겼다. 그리고... "아아악.... 내 눈! 눈....!" 복면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환무영은 들고 있던 호미로 검을 막고 그은 것이 아직도 시뻘겋게 단 호미의 열기가 그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 뒈질 놈!" 또 한 명의 복면인은 안색이 변해 구령도를 쾌속하게 전개하며 덤벼들었다. 환무영은 귀찮아졌다. 구령도가 그의 목을 치는 순간 그는 자세를 낮추며 호미로 상대의 복부를 긁었다. "크.... 아아악!" 놀라운 일이었다. 복면인의 복부가 호미에 긁혀 내장을 쏟아낸 것이었다. 눈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명은 눈이 멀고 한 명은 복부가 터져 죽은 것이다. 환무영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때, 비명소리를 들은 듯 다시 두 명의 복면인들이 달려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두 복면인은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두 명은 눈짓을 주고 받더니 일제히 달려드는 것이었다. 환무영은 벽에 세워둔 쇠스랑을 들었다. 좌와 우, 두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쐐애액! 환무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 아득한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전쟁... 전쟁.... 전쟁... 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교묘하게 몸을 비트느순간 이미 상대방의 공격은 그의 몸을 타고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막힌 본능의 신법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그가 들고 있던 쇠스랑이 호선을 그리며 예리하게 회전했다. 퍽! 퍽!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캐액!" "크악!" 두 마디의 비명이 울렸다. 달려들던 복면인들은 날카로운 쇠스랑에 목이 찢기고, 가슴이 구멍 나 즉사하고 만 것이다. "....." 환무영은 수중의 쇠스랑을 내려다 보았다. 어차피 계속 일을 하기는 틀린 것 같았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전 앞 광장. 복면인들은 두 눈에 징그러운 탐욕의 광채를 번들거리며 대전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사나이가 쇠스랑을 안고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워낙 흥미로운 일이 대전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전 위, 중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마자연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 아아...." 그녀는 도망가고 또 도망갔으나 이제는 벽에 막혀 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슥! 슥슥! 검광이 번득였다. 그때마다 입고 있던 침의가 베어졌다. 아무리 손으로 가리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침의는 이미 검날에 조각조각 베어져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흐흑...!" 그녀는 이제 뽀오얀 속살을 거의 노출시키고 있었다. 손으로 간신히 가슴과 아랫도리만을 가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복면인은 두 눈에 탐욕의 광채를 번득이며 다시 검을 뻗었다. "악... 제발...." 검은 그녀의 가슴 사이를 그었다. 피! 핏방울이 백설같은 피부에 맺혔다. 그녀는 손을 떼지 못했다. 손을 떼면 자신의 순결한 가슴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흐흐흐.. 손목이 잘리고 싶다면 가리고 있어도 좋아." 복면인은 검을 아래로 긋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차가운 검날이 닿았다. 이제 손목이 잘릴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큭!" "킥!" "끄윽...." 문득 기이한 음향이 대전 아래 쪽으로부터 연속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사마자연에게 검을 들이밀던 복면인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부릅 떠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어느새... 광장에 서있던 복면인들 중 살아있는 동료는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으으... 저게 어떻게 된 일....' 그는 잠시 후에야 그 원인을 알았다. 한 명의 머리칼이 긴 사나이가 쇠스랑을 들고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쥐고 있는 쇠스랑으로부터 떨어지는 액체! 그것은 바로 핏방울이었다. 이때, "네놈은... 누구냐?"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바로 우두무리 복면인의 음성이었다. 그러고보니 살아남은 복면인은 대전 위에 있떤 두 사람뿐이었따. 사나이, 그는 환무영이었다. 그는 사마자연을 희롱하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복면인들을 모두 죽였다. 그에게 있어 살인이란 아주 쉬운 일인 듯했다. 계단에 올라섰을 때, 눈빛이 매서운 복면이 가로막았다. "네놈이 감히..." 우두머리 복면인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역시 미처 사나이가 자신의 수하들을 죽이는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이다. 환무영은 쇠스랑을 움직였다. 쐐애액.... "흐흐... 그따위 실력으로 감히...." 우두머리는 안심했다. 사나이의 수법이 너무나 단순하고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각 허리춤의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기형검을 뽑아들고 자신이 자랑하는 천잔구검의 검식으로 상대를 베어갔다. 파아아아앗! 분명... 그의 검은 사나이를 벰 수 있었다. 그것도 사나이의 몸뚱이를 최소한도 아홉 토막 낼 수 있었다. 그는 믿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나이의 몸이 자신의 검막을 교묘하게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쇠스랑으로 펼친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법으로 목을 찔러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는 신형을 날렸다. 그런데 그 순간 목이 무자비하게 화끈거렸다. 우드드득... 목줄기가 뜯어지고 있었다. 쇠스랑이 목을 지나간 것이다. '믿을 수... 없어... 끄르륵...' 우두머리 복면인은 눈알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방심한 탓이었을까? 그는 어이없게도 우습기 짝이 없는 사나이의 쇠스랑에 목이 뜯겨 즉사한 것이다. 한편, 하나 남은 복면인은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떤 수법으로 자신의 두령이 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멍청히 서 있었다. 그때 사나이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으으...." 그는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뒤쪽에 거의 전라나 다름없이 서있던 사마자연이 머리에서 무엇인가를 뽑더니 그의 등뒤에 쑤셔 박았다. 푹! "으아아아악!" 그것은 끝이 날카로운 봉황잠이었다. 봉황잠은 복면인의 명문혈에 정확히 박혀들었고, 그로 인해 그는 즉사해 버렸다. "아아...."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사마자연은 갑자기 왁!하고 울음을 터뜨리더니 그대로 대전 안으로 얼굴을 가리며 뛰어 들어갔다. 한편, 만병보의 식솔들이나 보주인 사마승은 눈앞에서 전개된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한결같이 넋을 잃고 있었다. x x x 농방 안. 환무영은 쇠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웬일인지 일을 할 마음이 나지 않고 있었다. '괜한 짓을 했어....' 그는 얼마 전, 그러니까 사흘 전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고 있었다. 복면인들의 기습이 있던 밤. 그가 벌인 활극은 위기에 빠진 만병보를 구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는 평화를 잃고만 것이다. 만병보의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그를 보는 눈이 들려졌다. 하나같이 경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환무영, 그는 멍하기 불이 꺼진 화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아버님께서 부르시오." 그는 사마후였다. 사마후의 눈에는 이상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자신이 이유도 없이 싫어했던 인물, 그는 어색해졌다. 상대방은 그런 자신과 가족을 구해준 것이다. 사마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만병보주의 거실이었다. "잘왔네. 이리 앉게." 사마승은 아들을 물리친 다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환무영은 앉지 않았다. "이대로도 좋소이다." 사마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청년의 성격이 워낙 괴이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침음하다가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의 내력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러자 사마승은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없소." 억양도 없는 음성이었다. 사마승은 한 숨을 쉬었다. "말하기 싫다면 굳이 알려들진 않겠네.다만 자네를 부른 것은 한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이네." ".....?" "잠시 나의 심부름을 하나 해주지 않겠나?" "......" 사마승은 환무영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한가지 중요한 물건이 있네. 그래서 그것때문에 얼마전 그 사건이 난 것일세. 조심했지만 그자들이 눈치챈 모양일세. 비록 자네의 도움으로 그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앞으로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네." "......" "그래서 그 물건을 원래의 임자에게 돌려주려 하네. 지금으로써는 그 방법이 가장 안전한 것이네. 어떤가?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나?" 환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후 그는 억양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전할 곳은 어디오?" 사마승은 반색을 했다. "소림사라네." 순간 환무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내 그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싫소!" "아니... 왜....?" "어쨋든 싫소." 그 바람에 사마승은 당황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승낙을 할듯도 싶다가 소림사라는 말에 갑자기 대토가 돌변한 듯 했다. 그는 한동안 신음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일은 며칠시간을 두고 생각해주게. 다만 한가지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이 일이 천하를 위한 아주 중요한 것이란 걸세." 순간 환무영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천하를 위한 것이라고... 천하를 위한 것...' 순간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강한 분노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수없이 많은 환상과 환청들이 머리 속을 메우는 것을 느꼈다. 어느 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싫소! 싫소! 싫소!" "......!" 사마승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순간 환무영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사마승은 멍한 기분이 되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밖으로 뛰쳐나온 환무영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흥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또 다시 환상처럼 뇌리에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곤룡포를 입은 그의 몸의 수배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 이 일은 천하와 억조창생을 위하는 일이다. 모든 것은 너의 어깨에 달려 있다. 너는 목숨을 내걸고 해내야 한다. 너는 목숨을 내걸고... 너는 목숨을 내걸고... 아니야! 싫어! 싫단 말이다! 싫다! 환무영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농방으로 돌아왔을 때, 농방안에는 한 명의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마자연이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고마웠어요. 구해 주신것... 그리고.. 그동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 환무영은 다만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귀찮게 해드렸던 것은... 그것은... 그것은..." 사마자연의 입술을 자구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입을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환무영은 그녀가 무엇 때문에 말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 지 알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것은 더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끝내, 사마자연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차마 여인인 자신의 입으로는 하지 못할 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화제를 돌렸다. "저어... 방금 전에 아버님과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 환무영은 그녀를 바라본다. 의아한 눈빛이었다. "그 일을... 아버님을 위해서 해 주실순 없나요? 네?" 사마자연은 가까이 다가오며 애원하듯 말했다. 가까이 서있는 그녀의 호흡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손을 뻗으면 가는 허리를 안을 수도 있었고, 그 붉고 육감적인 입술에 입을 맞출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환무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싫소." 한 마디뿐이었다. 사마자연의 얼굴에는 실망이 어렸다. 허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매달렸다. "왜....? 아니, 아버님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천하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안되나요? 당신이 남아라면, 진정한 용기있는 남아대장부라면 천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도 있잖아요?" .... 천하를 위하여 .... 순간 환무영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싫소! 싫다고 하지 않았소?" 그는 부르짖듯이 외친 다음 돌아서 버렸다. 순간 사마자연의 얼굴이 타는 듯이 붉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상대의 등을 노려 보더니 문득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비겁자! 겁쟁이! 당신은 비겁하고 겁많은 위인이예요! 그런 당신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니... 비열한 인간.... 흐흐흑!" 사마자연은 격하게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나... 환무영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미동도 않고 있을 뿐이었다. 9장 女心... 無心 밤. 월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 환무영은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망치를 내려치지 못했다. 일이 되지 않는다. 그는 몇 번이나 마음을 잡고 일을 하려 했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심한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무엇때문일까? 그는 마음이 불안했다. 어떤 눈동자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실망과 분노... 그리고 원망이 뒤썩인 한쌍의 아름다운 여인의 눈이었다. 이제까지 맹세코... 그는 여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애정이라는 사치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라고 감정이 없는 동물이거나 아예 거세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허나 그는 그런 아름답고 애틋한 삶을 즐길만한 여유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자꾸만 뇌리에 떠올라 그를 바라보며 원망하고 실망하고 한숨짓는 눈동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바로... 환무영은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밖은 밤이었다. 그런데도 밤의 어둠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유난히도 달이 밝기 때문이었다. 그는 만병보를 빠져 나왔다. 보를 빠져 나와 우측으로 담장을 따라 돌면 산이 나온다. 그 산으로부터 맑은 계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아는 일이었다. 그는 계류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x x x 쏴아아.... 시원한 물소리. 환무영은 계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달빛이 물결에 반사되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은편은 마치 은가루 같기도 하고 금가루 같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바닥의 돌맹이들까지 보이는 맑은 물이다. "......" 환무영은 옷을 벗었다. 맑고 깨끗한 물에 몸에 묻은 때를 말끔히 벗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인 왜일까? 그는 옷을 모두 벗고 물을 끼얹었다. 쏴아아아... 시원하다. 뼈 속까지 깨끗히 씻기는 기분이다. 가능하다면 어지럽고 혼탁한 머리 속까지 말끔히 헹구어 낼 수 있으면... 문득, 그는 또 다른 물소리를 들었다. '.....?' 그 물소리는 그가 일으킨 물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달빛. 눈부시게 환한 달빛이 그의 전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찍힌 문신을 바라본다. ..... 816 ..... 어깨에는 선명하게 붉은 낙인으로 그와 같은 수인번호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결코 알려져서는 아니될 번호였다. 그는 이름도, 과거도,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영구히 망각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었다. 헌데... 그는 돌아섰다. 물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 그는 이번에는 눈을 크게 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사마자연이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헌데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녀가 실 한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달빛이 그녀의 나신에 떨어져 환상같은 빛무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나신은 눈부시게 희었다. 알맞은 살집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젖가슴은 튀어나와 있었고, 연홍빛의 유두도 똑똑히 보인다. 그 뿐인가. 백옥같은 피부가 고운 능선을 이룬 가운데 동그란 아랫배와 그 아래의 여인만이 간직하고 있는 신비의 비부는... 아슬아슬하게 계류의 수면과 맞닿아 보일락 말락하고 있지 않은가! 환무영, 아니 수인번호 816번을 가진 사나이---- 그런 사나이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낙성혼이었다. 그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낀다. 달빛이 빛 덩어리를 이루어 여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돌아섰다. 그역시 알몸이었고 건장한 사나이와 역시 육체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 물속에서 알몸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첨벙첨벙... 사마자연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자는 것인가. 낙성혼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목욕하고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으며... 아니 우연히 보았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돌아가지 않고역시 알몸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분명 똑같은 수면이었으나, 사마자연의 여인만의 비부는 아슬아슬하게 가려지고 있었으되 그의 남성은 수면 위로 나와 있었다. 문득... 낙성혼은 후끈하는 열기가 단전을 덥히는 것을 느낀다. 무엇때문이지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습게도 노출된 채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이때, 그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창이라도 맞은 듯이 떨었다. 그 부분, 사마자연이 만진 부분은 바로 수인번호가 새겨진 문신이었던 것이다. "이제... 알았어요. 당신이 왜... 그 부탁을 거절했는지... 천하를 위하여 들어달라는 부탁을 말이예요. 당신은 이런 전력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래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나요?" 달콤한 음성이었다. 사마자연은 뒤에서 가만히 낙성혼의 허리를 안았다. 육체와 육체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닿았다. 그리고... 뜨거운 전류와 같은 느낌이 한 순간 두 사람을 똑같이 관통했다. "팔백십육... 아아!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사마자연은 뺨을 그의 수인번호가 새겨진 부분에 대고 비볐다. 문득, 낙성혼은 그 부분이 축축히 젖는 것을 느꼈다. '.....!' 눈물. 눈물이었다. 사마자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이 왜 그렇게 고독하였는지.. 왜 그토록 세상을 냉정하게 보았는지 말이예요..... 당신... 당신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저는 당신이 진정한 죄인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낙성혼은 그저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제가..당신을 못살게 굴었던 것은... 그런 당신의 태도에 관심과...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 "괜찮아요. 당신이 아버님의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말이예요. 당신은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니 말이에요." 사마자연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알몸이 맞닿아 있었으므로 자연 낙성혼의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다. "....왜....?" 낙성혼이 입을 연 것은 그 한자였다. 그러자 사마자연은 입가에 슬픈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랑하니까요." 간단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많은 뜻과 사념으로 녹아 있는 말이던가. 낙성혼은 심장이.... 그동안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훈풍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눈동자. 여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그 눈동자에 빨려드는 것 같았다. 여인의 눈동자에서... 그는 많은 다른 눈들을 본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부하들의 눈... 눈... 눈... 낙성혼의 눈을 바라보는 사마자연의 눈동자가 웃었다. 가져요. 어서요. 낙성혼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여인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허리를 끌어 안고 있었고, 고개가 숙여지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 타인의 입술. 그러나 지금 이순간 두 개의 입술은 하나가 되었다. 입술과 입술이 녹아 흘렀다. 혀와 혀가 하나가 되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그리고 육체와 육체가 하나가 되고 있었다. "아아..." 카칠한 바위였으나, 지금 사마자연의 등을 찌르는 바위의 표면은 까칠했으나, 그녀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사나이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 느낌 어떤 한 부분이, 사나이의 뜨겁고 힘찬 무엇인가가 그녀의 내부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아픔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분이 되면서 그녀는 입술을 더욱 더 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손으로 세차게 사나이의 등을 할켜대고 있었다. 어느 부 깊숙이 무엇인가를 뿌렸다. 화려한 불꽃이 일시에 축포를 올리며 공중에서 터져 밤하늘을 수 놓는 기분과 함께.... x x x 이른 아침이었다. 사마승은 일찍부터 찾아온 환무영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보주, 그 물건을 주십시오." "자.. 자네... 그게 진정인가?" 환무영, 즉 낙성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아! 정말 고맙네!" x x x 보문을 나서는 낙성혼은 일신에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다. 다만 품속에는 사마승으로부터 건네받은 물건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만병보를 바라본다. "......"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주 찰나적으로 어떤 감정이 어렸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 그는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헌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 그녀를 본 순간 낙성혼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마자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이 없는 여인이었으되 그녀의 눈은 수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결심하셨나요? 정말 떠나시는 건가요? 돌아오실 건가요? 날... 잊지는 않겠지요? 언제.... 쯤.... 낙성혼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는 사마자연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번쯤은 걸음을 멈추어 줄 수도 있으련만. 그는 야속하게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사마자연은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낙성혼은 아주 목석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목이 마름을 느낀 것이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고, 그것을 삼키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도 못한 채 그는 억지로 걸음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차츰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사마자연은 그 자리에서 서서히 주저앉고 있었다. 종내 아예 낙성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시선은 그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10장 少林으로 가는 길 관도. 섬서에서 하남으로 향하는 관도는 끝없이 뻗어있다. 인적없는 관도는 숨막히는 성하의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더위 탓인지 한낮인데도 인적은 없다. 낙성혼은 관도를 걷고 있었다. 그는 텅빈 관도상을 혼자 걸으며 문득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렴풋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여인의 눈동자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는 여인을 잊어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없고, 과거조차 잊어야 하는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자격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인이란 사치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의 동요를 부정하고 있었다. 만병보... 두번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결심하고 보를 떠난 것이다. 보에서 나오다 만난 사마자연의 눈동자가 그를 한동안 잡아 당기고 있었다. 벌써 보름이 가까이 되도록 그는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행선지인 소림사에 당도하려면 멀었다. 그가 사마승의 부탁을 들어 소림사에 전달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사마자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곳을 떠나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자신이 자칫 삶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걷고 있었다. 관도는 끝이 없다. 강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큰 강이었다. 황하. 대륙의 역사를 수만년이나 지켜오면서 도도히 흘러내리고 있는 대황하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낙성혼은 문득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황하의 탁류를 굽어보면서 느끼고 있었다. 그는 황하를 건너야 했다. 황하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얼마나 되었을까? 그는 나룻터를 발견했다. 나룻터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걸음은 얼핏 장중해 보인다. 그러나 진실로 그의 걸음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 걸음의 연혁에 숨어있는 사나이의 처절한 고독감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마침 막 떠나려는 배가 있었다. 낙성혼은 그 배 위에 올랐다. 배가 출발했다. 아주 조용한 여름이었다. 한낮의 태양은 불을 뿜듯이 이글거리고 배도 도도히 흘러내리는 황하를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 그는 배 위를 둘러 보았다. 사공을 제외한다면 세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포함해서였다. 한 명의 준수한 얼굴의 이십대 청년과 그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보이는 역시 아름다운 묘령의 소녀가 타고 있었다. 17,8세 가량되었을까? 두 사람 다 경장을 입고 있고 어딘가 모르게 긴장된 모습이었다. 낙성혼은 시선을 돌렸다. 그는 변함없이 뱃전에 부딪쳤다가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 황하의 물을 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일남일녀.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한순간 고개를 들다가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낙성혼은 그들이 어떤 불안과 초조, 그리고 의심으로 뒤엉켜 있는 심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관할 것은 없다. 그는 궁금증 또한 일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조차 무심한 사람이 남의 일에 관심을 둘 리는 없다. 그는 다시 시선을 강물에 던졌다. 물빛은 탁했다. 황하가 탁한 것은 상류의 사막에서 바람에 날려온 황사가 물 속에 섞였기 때문이다. 수만년을 두고 사막의 모래가 황하의 물에 섞이며 흐르고 있었다. 그 양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황하 하류에 거대한 삼각주가 해마다 생성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배는 조금씩 도강하고 있었고, 이윽고 멀리 맞은 편의 선착장이 보이고 있었다. 문득, 그의 귀에 맞은편 남매로 보이는 두 사람의 속삭이는 음성이 들렸다. "오빠... 어떡하죠?" 여인의 불안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는 공포마저 곁들여 있었다. "할 수 없지. 일단 뚫고 나가야지."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말에는 왠지 자신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낙성혼은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십여명의 강호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이쪽을 보면서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한결같이 인상이 좋지 않은 작자들이었다. 낙성혼은 그들이 배 위의 남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관심을 돌렸다. 배는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문득, 옷자락을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닿기도 전에 일남일녀는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선착장에 내리자 마자 무사들과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창창창.....! "으아악!" "큭!" 쇳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몇차례 울렸다. 낙성혼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쪽을 보았다. 선착장에는 몇 명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일남일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대여섯 명을 쓰러뜨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그 뒤를 사나이들이 뒤쫓고 있었다. 눈 깜빡 할 사이 모두 사라졌다. "배를 대시오." 사공이 그 같은 광경에 겁을 집어먹고 배를 선착장에 대지않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시했다. 사공은 덜덜 떨면서 배를 댔다. 그는 품속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던져주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햇볕은 선착장에 쓰러져 있는 다섯구의 시신을 쪼이고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신이었으나 그 위에 벌써부터 파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역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낙성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시신을 지나쳤다. 관도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관도는 섬서관도가 아니라 하남성의 관도였다. 그는 관도를 따라 아까와 똑같은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일정한 보폭, 일정한 속도의 규칙적인 보행이었다. 폭염이 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이마에는 한 방울의 땀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관도 위에 다시 몇 구의 시신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선착장에서 보았던 무사들이었다. 헌데, 그가 시신들 사이를 가로지는데 신음이 들렸다. "으음... 음..." 그는 신음이 들린 쪽을 보았다. 청년이었다. 바로 그와 함께 같은 배를 탔던 일남일녀중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복부에 검을 맞은 듯 갈라져서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온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낙성혼은 다시 걸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으으.. 형장... 잠깐만...." 뒤에서 청년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쥐어짜는 음성으로 낙성혼을 부르고 있었다. 낙성혼은 흠칫했다. ".....!" 아직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였다. 그러자 청년의 절규에 가까운 음성이 처절하게 울렸다. "형장... 제발... 제발... 나의 누이를... 으...." 청년은 더이상 말을 할 기력이 없는 듯 잠잠해진다. 아니, 그의 몸은 한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가 뻣뻣이 굳어지고 있었다. 절명한 것이다. 낙성혼은 여전히 걷고 있었다. 그는 어차피 돌아가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아악... 악... 이.... 짐승들...." 문득 관도 옆 숲속으로부터 귀에 익은 여인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낙성혼은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걸었다. 비명이 들려온 곳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아악... 악... 차라리... 죽여..." 여인의 비명은 더욱더 처참했다. 필시 어떤 최악의 경우를 당한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낙성혼은 또다시 눈썹을 흠칫했다. 그러나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허나 역시 얼마 더 가지는 못했다. "아악... 악... 하악... 천벌을 받을 놈들..." 낙성혼은 기어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번에는 방향이 바뀌었다. 그는 여인의 비명이 들려온 숲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의 비명은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지고 있었고, 때로는 간헐적으로 이상한 흐느낌으로 바뀌곤 하고 있었다. 숲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낙성혼은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대체 여인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얼핏 상상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숲속의 공지. 한 여인이 유린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 두명에게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착장에서 일남일녀를 공격했던 사나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줄잡아 십여 명.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며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여인은 분명 배를 타고온 여인이다. 그녀는 풀밭 위에 발가벗겨진 채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벌리고 싶어 벌린 것이 아니라 세 명의 사나이들이 강제로 그녀의 알몸을 덮어 눌렀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사나이들은 그녀의 가슴과 비부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다른 사나이 두 명은 바지를 추켜 올리고 있었다. 이미 능욕을 당한 것이 분명한 형국이었다. 낙성혼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때는 늦어 있었다. 그는 사나이들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사나이들은 여인이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그 위에 동료들이 강제로 여인을 범하는 것을 즐기느라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낙성혼은 걸어가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그에게는 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사나이들은 그를 발견했다. 허나 이미 늦었다. 낙성혼은 본능적으로 철정하게 살상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전장에서 스스로 체득한 것이었고, 무림의 검법류와는 틀리나 일단 상대를 죽이는데는 가공의 위력이 있는 것이었다. 슉! 슈슈슉! 나뭇가지가 살아있는 물체인양 그의 의지에 따라 쾌속하게 날아갔다. "큭!" "크아악!" "끄르륵!" 빛살이었다. 어느새 사나이들 가까이 접근해 간 낙성혼이 나뭇가지를 휘둘렀고, 그것은 다만 하나의 빛이 움직이는 걸로 비쳐질 정도로 빨랐다.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8인의 사나이들의 목을 정확히 뚫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느끼지 못하고 사나이들은 목 한가운데 바람구멍이 뚫린 채 황천행을 탔다. "헉....!" 마악 여인의 나신에서 일어서려던 마지막 삼인의 사나이들은 경악성을 발했다. 그러나 역시 때는 늦었다. 낙성혼의 무정한 목검은 그들의 목을 차례로 지나갔던 것이다. 그는 깨끗이 사나이들을 죽이고 나뭇가지를 버렸다. ".....!" 여인은 사지를 벌리고 누운 채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비부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퉁기듯 일어서고 있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그녀는 숲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빠... 오빠....!" 낙성혼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다시 관도로 빠져 나왔고,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헌데,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여인이었다. 그녀는 옷을 입을 겨를도 없었는지 여전히 알몸이었다. 다만 옷을 움켜쥐고 그 옷으로 자신의 가슴만을 간신히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만이요... 네? 잠깐만... 소협...." "....." 낙성혼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이것을.... 이걸... 제발 소림사로 전해주세요. 네...? 저의 마지막 소원이예요." 여인은 옷 사이에서 한권의 얇은 책같은 것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 바람에 옷이 땅으로 떨어지며 작나라한 나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를 바라보며 애원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 낙성혼은 흠칫했다. 여인이 내민 물건을 바로 만병보주 사마승에게 받은 물건과 똑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다소 의아스러움을 느꼈다. "제발... 제발... 부탁이예요." 여인은 간절하게 애원한다. 낙성혼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차피 소림으로 가는 길이니 부탁을 들어주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았다. 그리고 즉시 돌아섰다. 비정했다. 이렇게 비정한 인간이 있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낙성혼으로서는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 해도 그의 마음, 이미 무너져 버리고 죽어버린 마음을 잡아당길 것이 없는 것이다. 그가 몇 걸음인가를 걸었을 때, 문득 등뒤에서 털썩하고 무엇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멈칫하고 돌아다 보았다.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혀를 물어 자결한 것이었다. "......" 낙성혼은 멍하니 여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알몸이었고 눈부시게 환한 대낮의 관도상에 누워 있었다. 유린당한 여인... 자결한 여인... 그런 풍경은 낙성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여인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여인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 다시 관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소림이었다. 11장 이상한 손님, 괴상한 스님 숭산 소림사. 중원오악 중 중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중원의 으뜸인 숭산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바로 무림의 총본산이라는 소림사다. 달마선사가 창안한 역근세수경을 바탕으로 숱한 선문절기가 파생하여 오늘날 중원무리의 기본이 되었다. 고래로 소림사는 무림의 영수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무림에 대사가 있을 때마다 무림의 고인들은 소림으로 모인다. x x x 웅장한 소림사의 산문. 산문을 지키는 청년승인은 산문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의 법호는 백현이었다. 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자는 일신에 허름한 마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의를 입어서는 아니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백현은 소림사로 방문하는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차림새를 정갈이 하고 예를 취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나이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를 보고도 아는 척하지 않고 곧장 산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시주. 걸음을 멈추시오." 백현은 불쾌했다. 엄연히 문을 지키는 산문지기인 자신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지나치려 하다니. 사나이는 기계처럼 멈춘다. "아미타불... 용건을 말하시오." 사나이는 음울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 내려 자세한 인상은 알 수 없었으나 백현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사나이는 힐끗 그를 보더니 순순히 말한다. "천장선사(天藏禪師)를 만나러 왔소." ".....!" 백현은 깜짝 놀랐다. 천장선사라면 바로 당금 소림의 장문방장이 아닌가? 그는 금세 낯빛이 엄숙해 지더니 옷자락을 여미며 말했다. "아미타불... 장문인께서는 언제나 다망하시오.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당장 만날 수는 없소이다. 대신 소승에게 전달하시오." 그렇다. 소림의 장문인은 결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일파의 지존일지라도 미리 선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쉽게 만날 자가 없는 것이다. 사나이는 말없이 백현을 바라본다.이때 백현은 그의 눈빛을 접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차가운 눈빛이 심장을 찌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때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천장선사이시오?" "아...아니오." "그럼 자격이 없소." 간단한 말이었다. 백현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사나이가 결코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중년승인 한사람을 대동하고 나왔다. "저 사람입니다. 사숙." 이번에 나온 자는 눈빛이 정명하고 관자놀이가 솟아있는 당당한 체격의 중년 화상이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지객원의 오명이라 하오. 시주께서는 어떤 용건이신지?" 오명이라면 소림의 이대제자의 항렬이다. 그 정도의 신분이라면 각파의 장문인들을 인도할 자격은 주어지고 있었다. 오명이 나온 것만 해도 사나이같은 무명인에게는 대접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천장선사요?" 오명대사는 흠칫했다. "아니오..." "그럼 자격이 없소." ".....!" 오명대사는 분노했다. 감히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니. 허나 그는 참았다. "아미타불.. 어떤 일이신지는 몰라도 적어도 시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빈승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 그는 많이 참고 가능한한 정중히 말했다. 그러나 사나이의 질문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책임질 수 있소?" "책임질 수 있소이다." 이쯤되면 오기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명은 꾀죄죄해 보이는 사나이가 기껏해야 무슨 대단한 용건이 있으랴 싶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를 무시했다. "나는 믿지 않소. 당신은 책임질 수 없소." 그 말에 오명은 분노했다.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책임질 수 있소!" 허나 사나이는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당신의 목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소." "이... 이런 발칙한..." 그러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소림사다. 그리고 오명은 출가인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사질인 백현이 보고 있는 앞이었다. 그는 발작을 하려다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애써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장문방장님을 만나려면 적어도 십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오." 오명은 더이상 사나이를 상대한다면 체면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 홱 돌아서 가버렸다. 사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산문 옆에 털썩 주저 앉는다. 그곳은 산문으로 오르는 계단이었는데 그는 주저앉으며 오명의 등을 향해 말했다. "천장선사에게 내가 기다린다고 전하시오." '미친 놈! 백년을 기다려 봐라....!' 오명은 내심 불호 대신 이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x x x 소림사 젊은 승인들의 화제는 온통 사나이에게 집중되었다. 산문앞의 돌계단에 앉아 있는 사나이. 벌써 4일째나 그는 바위처럼 앉아 꿈적을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소림은 불문이었다. 사나이가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다면 소림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사나이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사나이는 음식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받아 먹고는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사오명의 이대제자들이 사나이를 만나 보았다. 도대체 그가 무슨 용건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것은 한결같은 말 뿐이었다. "당신이 천장선사요?" "자격이 없소." 결국 사나이는 소림사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 소식은 오일 째 되는 날 장문인 천장선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천장선사는 사람을 보냈다. 두 명의 사미승이 사나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문인께서 시주님을 부르십니다." 사나이는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오명의 예연을 무너뜨리고 불과 오일만에 천장선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방장실로 들어서는 사나이를 보고 천장선사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사나이의 모습이 너무나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사나이는 겉으로는 아무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천장선사와 같이 안목이 깊고 눈이 날카로운 고승의 눈에는 그의 내부가 비쳐보이는 것이다. "아미타불.... 시주께선 무슨 일로 나를...?"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을 때, 사나이는 품 속에서 두 개의 책자 비슷한 물건을 꺼내었다. "당신이 천장선사요?" "그렇소이다." 천장선사는 그가 꺼낸 물건을 보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사나이는 책자 두권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께 전하란 것이오." "이... 이걸 대체 어디서...?" 책자를 받은 천장선사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만병보주와 어떤 여인에게서요." 사나이는 자리에 앉지도 않았었다. 그는 책자를 건네주고는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돌아섰다. "잠깐... 시주." 창황한 외침에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천장선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는 없소?" "없소." 사나이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없다는 것이다. 천장선사는 기가 막혔다. 이런 중요한 일을 하고도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다니. 대체 이 작자는... 사나이는 다시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아홉 개의 인영이 있었다. 하나같이 우람한 체격의 중년승인들이었다. 그들은 소림사의 9대나한승들로, 장문인의 호법승인들이었다. "......" 사나이는 그저 아홉 승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그의 등 뒤에서 천장선사의 음성이 들렸다. "미안하지만 시주께선 잠시 이곳에 머물러 주셔야 겠소이다. 일이 일이니 만큼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오.""....." 사나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분노의 빛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너희들은 시주를 정심당으로 정중히 모시거라." 나한승들은 천장의 명에 길을 비켰다. 그러나 그것은 사나이로 하여금 가운데로 가라는 뜻이었고, 사나이가 이윽고 걸어가자 그들은 좌우에서 포위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 나한승들에게 둘러싸여 멀어져 가고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는 천장선사의 두 눈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지고 있었다. 도무지 사나이의 정체나 의도, 진심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그는 불호를 외우고 돌아섰다. 그는 문을 닫았다. 천장선사의 집무실은 넓다란 선방이었다. 선방의 뒤쪽은 아홉 폭의 병풍이 처져 있었다. 그는 병풍 뒤로 돌아갔다. 병풍 뒤에 작은 쪽문이 있었다. 쪽문을 열자 그 안에 밀실이 나타났다. ".....!" "....." 밀실 안은 의외로 넓다. 그리고 기다란 자단목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주위에 십수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으며 눈빛이 심유하고 기도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중도 있었고, 도사도 있었으며, 속인들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기도가 범인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천장선사는 그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들으셨소이까?" 그러자 긴 수염을 기르고 손에는 불진을 든 엉성한 노도인이 말했다. "혹시 상대쪽의 간세가 아닌지요?" 그 말에 천장선사는 침음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감시하라고 일렀으니 조만간에 밝혀 질 것이오." "예의 도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튼 조심하는게 좋을 것이오. 요즘 백련회의 동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소이다." 그 말에 모두들 심각한 표저응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천장선사는 방금 전 사나이에게서 받은 책자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책자의 내용을 읽기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연판장으로,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서명이 피로 쓰여져 있었다. 그 책자는 중인들에게 돌려지며 읽혔다. 도인은 신음하며 말했다. "무량수불.... 일단 화북무림의 결맹은 잘 이루어진 셈이구려." 또 다른 쪽에서 이번에는 거지차림의 노인이 말했다. "사천 쪽 무림도 결맹되었소이다." 중인들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도인은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무량수불! 일단 대부분의 무림이 결속되었으니 일을 추진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러나 천장선사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소이다. 그러니 정면충돌보다는 치밀한 작전으로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나을 듯 하오." 그러나 도인은 불진을 흔들며 반대의사를 표했다. "허허... 답답하시오. 장문인.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소이다. 갈수록 황궁의 입김이 거세어질 뿐더러 백련회조차 설치고 있지 않소? 이대로 가다가는 무림의 힘은 빛을 잃고 정기는 쇠하고 마는 것이오. 쇠는 달구 졌을 때 두드리라는 말이 있소이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는 것이 좋소이다." "옳소....!" "무당 하진자 장문인의 말씀이 맞소." 중인들은 찬동을 하고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도인은 바로 현 무당문파의 장문인인 하진자(霞眞子)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모여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바로 중원무림의 각대문파의 영수들이거나 원로들인 것이다. 기이한 일이었다. 소림에 각파의지존들이 거의 모여 있다니! 이때 좌중의 소란을 저지시키려는 듯 천장선사는 손을 들었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그는 담담히 말했다. "물론 하진도우의 말씀도 일리가 있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회는 한번밖에 없소이다. 그러니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오." 이때 아갓씜의 복호상인(伏虎上人)이 중재하고 나섰다. "아미타불! 어쨌든 아직 삼남무림과 하북무림으로부터 연판장이 당도하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면서 천천히 의논합시다." 그 말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x x x 낙성혼은 정심당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감시 당하고 있었다. 선방의 밖에는 나한승이 고리눈을 부릅 뜨고 그를 감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동안의 그의 생활은 단조로운 것이다. 하루에 세번씩 나오는 소채류의 식사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눈을 감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 하루나 백년이나 결국은 똑같은 비중인 것이다. 허무하고 권태롭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낙성혼은 삶의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였다. 밥을 먹거나 배설을 하는 것 조차 그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처음 그가 나한승의 감시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순순히 이곳으로 따라온 것은 겁이 나서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귀찮음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는 끝없이 귀찮음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싫어 아무 말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준 것 뿐이었다. 지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빨리 가서 이승에 그 자신에게 불필요하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 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젊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그다지 별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낙성혼과 같은 위인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문득, 한가닥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좋아 노래지, 그것은 차라리 악을 쓴다는 표현이 옳았다. 노랫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정심당을 지키는 나한승 오상대사는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맙소사! 또 저분이...'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명의 늙은 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중. 그는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몰골이었다. 신성하기 짝이 없는 소림사의 경내에서 우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본다면 기절할 일이었다. 그는 오른 손에는 술병을, 왼손에는 한 마리의 구운 오리를 움켜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절에서는 음주를 금하고 더더욱 육식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히 술과 고기를 들고 번갈아 마시고 뜯으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이미 잔뜩 취한듯 발걸음까지 비틀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헌데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정심당을 향해 오고 있었다.가까이 오기도 전에 술냄새가 고약하게 코를 찔렀다. 오상은 잔뜩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어... 사숙조님. 이곳은 출입금지가 되어 있는 곳입니다..." 허나 그 말에 늙은 중은 화를 발칵 냈다. 그의 인상은 우습다. 코는 들창코였으며, 얼굴에는 깨소금같은 주근깨가 잔뜩 박혀 있다. 이마는 불룩 튀어나오고 면상은 움푹 꺼졌다. 입술은 뒤집어졌고 키는 왜 또 그리 작은가. 그야말로 품위와는 아주 인연이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우람한 체격의 오상을 바라보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놈! 이곳에 소림이고 내가 소림의 스님이다. 내가 내 집에 들어가겠다는데 누가 막느냐?" 악취가 코를 찔렀다. 목욕을 얼마나 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승복도 원래는 회색이었으나 지금은 먹탕처럼 검었다. 오상은 쩔쩔맸다. "하지만 장문인께서 엄명을...." "그래도 이놈이... 이 어린놈아! 귀를 씻고 들어라. 세상에 삼촌이 위냐? 조카가 위냐? 삼촌이 들어가겠다는데 조카 따위가 이렇게 막을 수 있느냐? 어서 비켜라!" 오만상을 찌푸리던 오상은 그래도 천장선사의 엄명을 기억하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늙은 중은 그를 밀었다. 나한승의 체격은 우람하여 바람만 불어도 날려 갈 듯 비쩍 마른 그의 힘으로는 밀어질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제 풀에 털썩 주저앉는 노승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무리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상놈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세상에 손자 놈이 할아비를 구타하다니... 아이고! 아이고... 억울하고 분해라! 누구 사람 없소!" "사... 사숙조님... 제가 언제...?" 오상은 그만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가 무슨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이렇게 괄시를 하다니. 손자놈이 툭하면 힘이 세다고 구타를 하다니... 소림도 썩었구나! 썩었어!" 그의 통성은 왜 그다지도 우렁찬가! 순식간에 소림삭 경내가 메아리 칠 듯 들썩였다. '에라 모르겠다!' 오상은 더이상 그를 막을 자신이 없었다. "드... 들어 가십시오." 그는 그만 길을 비켜주고 말았다. 나중에 장문인에게 문책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2장 中原武林盟 삐익. 문이 열린다. 낙성혼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탕! 문이 닫힌다. 그리고 노승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렵소? 이건 또 뭐야?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할아비를 보고도 인사도 안해?" 경박하고 품위없는 늙은 중의 말이었다. 낙성혼은 다시 귀찮아짐을 느낀다. "어쭈...? 꼬락서니는 꾀죄죄한 놈이 제법 무게를 잡아?" "....." "애끼! 이놈! 얼니 놈이 할아비보다 먼저 득도하려 들다니...! 보아하니 설법 몇마디 듣고 그걸 가지고 해탈하려고 날뛰는 모양인데, 보리수 나무 밑에서 성불하신 부처님께서도 너처럼 개나발같은 자세를 잡지는 않으셨다! 그러니 이놈아! 어서 눈을 뜨고 자리나 비켜라! 네놈이 방 중앙에 버티고 있으니 이 할아비가 누울 자리가없지 않느냐?" "....." 낙성혼은 짜증이 솟았다.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귀찮은 일들이 따라 다니는가. 늙은 중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래도 이놈아...! 좋다! 정 네놈이 득도하려 든다면 내가 시켜주마. 그러니 할아비 설법 몇마디 듣고 얼른 득도해서 자리나 비켜라. 알겠느냐?" 노승은 제멋대로 지껄이고 나서 아무 자리에나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술병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시고 난 후 슬쩍 낙성혼을 훔쳐본다. "귀 씻고 들어라! 만사가 귀찮고 인생이 허무스러워 득도하려 든다면 제일 빠른 길이 있다.그건 뒈져 버리면 되는 거야. 가령 예를 들어 구체적인 방법으로 말하자면.... 에헴..." 노승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면서 말을 주저리주저리 엮었다. "다리에 바윗돌 하나를 묶고 강물로 뛰어든가 든가, 그게 싫으면 천정에 동아를 묶고 목을 매다는 거야.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지. 히히.. 코와 입에 아교를 잔뜩 쳐바른 다음 숨을 안쉬면 되는 게야. 어때 쉽지?" 기가 막힌다. 이것이 설법인가? 그러나 낙성혼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느집 개가 짖느냐는 듯, 노승의 쥐방울같은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그는 입에서 더러운 침방울을 퉁기며 말했다. "그래도 이놈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좋다. 네놈에게 내 특별히 한가지 설법만 더 가르쳐주마." "....." "세상이 귀찮고 싫으면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만약 죽기조차 귀찮고 싫으면 귀찮음을 없애 버리면 그뿐이고... 너의 정신을 완전히 죽여버리면 귀찮음도 없어지지. 가라하면 가고 아라하면 오면 그뿐인데 귀찮음이 어디 있고 싫은 것이 어디 있어. 허험..." 노인의 말도 되지 않는 설법은 계속된감믹. "그러나 이놈아, 육체가 살아있는데 정신이 죽을 리 없고 정신이 살아있는데 육체가 죽을 리 없다. 정신만이 살아남고 육체를 죽일려면 정신도 따라 죽는다. 육체가 살아있는데 정신을 죽인다면 그 육체도 따라 죽는게야. 그것이 삶의 원칙인데.... 그러니 이놈아! 육체가 멀쩡히 살아있는 놈이 정신만 죽은 척하고 있는 것은 호랑이가 무서워 고개만 땅위 쳐박은 어리석은 사슴의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한 게야." "......." "에헴.... 산 육체를 가진 사람은 산 정신을 가진 사람이요, 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산 미래가 있는 법이다. 과거가 귀찮고 싫으면 과거를 버리면 그뿐... 부처께서 개안하신 참뜻도 새로운 미래를 갖기 위함이 아니더냐?" 노승의 설법은 길고도 길었다. 어찌 들으면 말도 되지 않는 개나발이었고, 또 어찌 들으면 그럴 듯한 논리가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낙성혼의 안색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과거... 미래... 삶.... 죽음....' 그는 머리 속에 복잡한 사념이 한꺼번에 뒤죽박죽이 되면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노승이 한동안 주절대더니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지른다. "이놈아! 이제 깨달았으면 어서 비켜!" 낙성혼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비켜주고 있었다. 노승은 그가 비켜 준 자리에 벌렁 드러 누웠다. 노승의 설법(?)은 게속되고 있었다. "이놈아. 한 없이 좁아 보이는 세상도 넓게 보려면 그처럼 넓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평생을 해매 다녀도 만분지 일조차 보지 못하는 것이 세상일진대, 어린 놈아! 네놈이 조각난 한 귀퉁이를 보고 눈을 가마 버린다면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보다 못한 삶이 되는 게야. 알겠느냐?" "......!" 노승은 실눈을 떠 힐끗 낙성혼의 안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어깨를 두들긴다. "애고고.. 부처님을 마나러 사해팔황을 떠돌아 다녔더니 늙은 몸이 이끼가 끼는구나. 애고고 어깨야..." 톡톡톡... 노승은 자신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다말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이놈아! 쥐새끼 한 마리도 은혜를 갚는 법인데 뭘하고 있는 거냐? 어서 어깨 좀 주물러라!" 낙성혼은 흠칫 하더니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무런 반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다가오더니 노승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노승의 짓무른 눈동자에 문득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이놈봐라.....?' x x x 천장선사는 오상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요즘 그의 동태는 어떠한가?" 오상은 공손히 합장하며 답했다. "여전히 그 상태입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별 다른 움직임도 없습니다. 때때로는 죽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히 정심당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흐흠... 아미타불... 이상한 청년이군." 그렇다. 천장선사는 도무지 사나이 낙성혼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일대의 고승이 한 명의 청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때 오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저어.. 근래 들어 사숙조님께서 그 자를...." "으응? 사숙께서?" 천장선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떠오른다. "예,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계십니다." "흠.. 그자와 단 둘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너는 사숙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아 보았느냐?" 오상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밖에서 들으면 하루 종일 잠을 주무시거나 아니면 술주정을 할 뿐입니다." "......" 천장선사는 눈을 감았다. 그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알았다. 모르는 척 해라. 그분의 뜻이 따로 계실테니. 그리고... 만병보로 보냈던 사람은 돌아왔느냐?" 오상은 공손히 답한다. "예.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알았다. 이만 물러가라." 오상이 물러가자 천장선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사숙 생각을 했다. 소림의 제자이면서도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숙 공공대사(空空大師).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공공대사의 온갖 기이한 기행과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숙의 기행과 괴벽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천장선사는 돌아서고 있었다. 만병보로 갔던 나한승의 하나인 오산이 돌아왔다. "으음, 가보았느냐? 그자에 대한 것을 알아보았겠지?" 오산은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급히 다녀 오느라 무척 많은 고생을 한 듯 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모두 알아 보았습니다. 그자는 정말 만병보에서 온 자랍니다." "흠... 틀림없겠지?" "예. 그자는 만병보의 28개 철방중 농방에 있던 자였습니다." "농방?" 천장은 더욱 아연해 졌다. '농방이란 농기구를 제작하는 곳이 아닌가?' "으음.. 거참 이상한 일이군..." 의문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x x x 정심당에 앉아있는 낙성혼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하루 종일 노승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이었다. 노승이 들어옴으로써 나아진 것이 있다면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소채류만 들어오던 식사가 고기와 술이 더 추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노승때문이었다. 만일 소림사에서 노승에게 술과 고기를 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난다. 노승은 밖으로 나가 살아있는 개를 잡아다 소림사의 대웅전 마당에 장작을 모아 개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다. 이런 일은 한 두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분이 워낙 높고 배분 상으로도 현 장문인의 사숙뻘이 되기에 그가 어떤 일을 하여도 징계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노승은 소림의 골칫거리가 된 것이었다. 말썽을 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림의 주방에서는 일반인이 두 명 상주하고 있었고, 그들로 하여금 노승의 술과 고기 안주를 담당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장선사의 특별배려였다. 낙성혼은 노승이 왜 가지 않고 자신과 함께 선방에 틀어박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노승이 술에 취해 주절거리거나 잠꼬대로 흥얼거리는 헛소리 따위가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후려치고 머리를 때린다는 것이다. 그는 차츰 변해 가고 있었다. 동시에 끝없는 혼란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x x x 방장실 뒤편에 있는 밀실. 회의는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각대문파와 방파들의 영수, 원로들의 숫자는 전보다 더 많이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고, 여러가지 안건과 토의, 설전을 벌였다. 이윽고, 무당 장문인 하진자가 일어서더니 말한다. "아무래도 빨리 무림맹을 결맹해야 겠소이다. 기금까지의 황궁의 동태로 보아 얼마 후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 분명하외다. 그러니 더이상 지체하다가는 선수를 빼앗겨 향후 더욱 곤란한 지경에 처할 것이오. 여러분 빈도의 의견이 어떻소이까?" 무당 장문인의 입김은 대단한 것이었다. 무림에서 소림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것이 무당문파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좌중의 대세는 하진자의 약간은 선동적인 의견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수의 의견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법, 마침내 이 자리의 주최자인 소림 장문인 천장선사는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여러분의 의견이 그러하시니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일단 은밀히 전 강호의 고인들을 한 자리에 초청한 뒤 일시에 중원무림맹의 결맹을 갖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니 장문인께서는 수고스럽지만 각 지역의 연락과 회동을 책임지고 맡아 주셔야 겠소이다." 결론은 떨어졌다. 드디어... 무림사 초유의 중원연합무림맹의 초안이 선 것이다. 실로 가공한 일이었다. 무림전체가 하나의 원동력과 의지로 뭉치는 것! 그것은 무림유사 이래 드문 일이었다. 중인들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장내는 잠시 혼란에 가까운 소란이 일어났다. 이때, 화산의 장문인이 나섰다. "그런데 그 청년은 어찌 되었소이까?" 천장선사는 흠칫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별다른 수상한 점은 없는 것 같소이다. 지금까지 쭉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소. 다만 한가지 의혹스러운 것은 그자의 과거가 불투명하다는 것 정도였소이다." 그 말에 화산 장문인 자의신군(紫衣神君) 종리무연의 눈이 기이하게 번쩍였다. "그럼 장문인께서는 어찌 처리하실 작정이시오?" "글쎄... 아직 별다른 묘안은 없소이다." 그 말에 종리무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정체가 불투명한 자를 계속 무림맹의 중심이랄 수 있는 소림사 내에 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차라리 본인이 관장하는 잠룡원에 잠시 두는 것이 어떠시오?" 그말에 천장선사의 얼굴에는 기쁨이 떠올랐다.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소?" "허허....모두가 무림을 위하는 일인데 본인이 어찌 마다하겠소이까?" 종리무연.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다. 그의 나이 46세. 화산파는 과거 명성을 날렸으나 유독 대원제국과의 싸움에서 가장 많은 손실을 입어 지금은 구대문파 가운데 가장 약화된 이름뿐인 문파였다. 그러나 종리무연의 가슴 속에는 비장한 야망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자의를 즐겨 입어 자의신군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화산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종리무연에게 신경을 쓰는 자는 별로 없었다. "아미타불... 사실 노납도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소. 다만 종리장문인께 누가 될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장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고마운 일이오." 종리무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별 말씀을... 우리는 어차피 한 배를 탄 입장이오. 그런 섭섭한 말씀은 마시오." 그렇게 말하는 종리무연의 눈에는 왠지 그늘이 어리고 있었다. x x x 노승은 어딘가로 나가고 없다. "....." 낙성혼은 홀로 정심당에 앉아 있었다. 그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였다. 문득, 방문이 열리며 나한승이 들어섰다. "시주, 거처를 옮기시라는 지시가 내렸소이다." 낙성혼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는 이미 장소의 의미란 떠나고 없었다. 다만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리 속에 잡힐 듯 말 듯 하는 어떤 진리에 안타까움이 더해갈 뿐이었다. 그는 나한승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 나섰다. 그곳은 의외로 소림의 산문을 벗어난 곳에 있었다. < 上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