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권 1장 潛龍院의 暗計 산장의 규모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일면일 뿐이다. 실은 산장은 소림사에서 떨어진 태실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고, 산기슭을 등지고 있어 부분적인 모습만 이 보였다. 장원 안으로 따라 들어간 낙성혼은 장원이 적막하다는 것에 일단 마음이 들었다. 그는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었던 것이다. 화원이 나타났다. 잘 가꾸어진 화원이었다. 갖가지 수목과 꽃들이 조화 를 이루고 있었다. 나한승은 그를 힐끗 돌아 보더니 위협하듯 말 한다. "시주, 이곳에는 갖가지 기관매복이 있소. 그러니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마시오." 낙성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가라 해도 가지 않는다.' 화원은 여러 채의 전각이나 건물 사이에 각양각색의 배치로 펼쳐 져 있고, 건축물은 아름답고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후 그는 한 대전으로 안내된다. 대전의 넓은 방에는 한 명의 중년인 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의신군, 종리무연. 바로 이곳 잠룡 원의 책임자인 화산 장문인이었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낙성 혼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눈빛을 번뜩였다. 이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은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갈 젊은 영재를 키우는 곳이네. 현 무림은 타세력에 의해 빛을 잃어가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도 힘 을 함께 하여 이 일에 적극 협조해 주는 것이 어떤가?" "......" 낙성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창밖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백일홍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한 청년이군.' 왠지 종리무연은 낙성혼에게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허나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곳에 있다보면 자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네. 젊은 사람은 젊 은 사람끼리 있어야 호연지기가 길러지는 법..." 종리무연은 손을 들어 언정에 매달린 줄을 잡아 당겼다. 멀리 종 소리가 울리고 잠시후 한 명의 백색무복을 입은 삼십대의 장한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음, 이분을 비룡각으로 안내하게." 장한은 공손히 대답했다. 이어, 낙성혼은 안내자를 따라 걸었다. 기나긴 회랑을 걸었고, 몇개의 화원과 인공가산을 지나갔다. 그 는 다소 놀랐을 뿐이다. 겉에서 보기보다는 건물의 규모가 몹시 컸다. 안내자는 그가 말없이 따라오자 호기심이 난듯 먼저 자신 의 소개를 했다. "이 사람은 잠룡원의 의전단 소속으로 진삼랑이라고 합니다. 형 장께서는?" 허나 낙성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사랑은 끈질겼다. "하하... 본래 말이 없으신 분이구려. 성함을 알 수 없을까요?" 그는 의전산에 있었으므로 손님을 대하는 데 숙달된 듯 화를 내 지 않았다. 낙성혼은 귀찮아졌다. "환무영이오." 그뿐, 입을 닫았다. "아하! 환소협이셨군요." 사실, 그는 이미 의전단에서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환무영이라는 것과, 만병보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 다. 비룡각에는 이십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따. 하나같이 영기발랄하고 비범하여, 용모가 출중한 것으로 미루어 각파의 후가지수들로 보였다. 진삼랑과 함께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청년들은 일제히 낙성혼을 바라보았다. 진삼랑 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에게 소개했다. "이번에 새로 입문하신 분입니다." 그러자 청년들과, 아름다운 낭자들의 시선이 낙성혼에게 쏠렸다. 누군가가 물었다. "어느 문파 출신이오?" 그러나 낙성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삼랑은 이미 그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대신 대답했다. "문파는 없습니다. 다만 만병보에서 일하던 분입니다." 순간 중인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이번에는 다른 말소리가 들렸다. "만병보라면.... 대장장이 출신이란 말이오?" 진삼랑은 어리둥절하더니 대답했다. "이를테면 그렇습니다." 그때 화복을 입은 준수한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 다. "아하! 마침 잘 오셨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검이 무 뎌져 꼭 만병보의 명검을 가지고 싶었는데..." 진삼랑은 난색으로 부인했다. "이분은 여러분들의 병장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 다. 여러분과 같이 무림을 새로 일으키는데 동참하실 분이시오." 그 말에 화복청년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만병보 검방 출신인이 할 일은 검을 만드는 일이 아니란 말이오?" 진삼랑은 급히 말했다. "이분은 검방 출신이 아니시오." ".....?" "농방출신입니다." 화복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농방이라면 농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그말에 중인들은 웅성거린다. 이때, 다른 청년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섰다. "아니, 이곳에서 농기구를 만들어 어디다 쓰겠단 말이오?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구려." 진삼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지금 소인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 하지만 이분은 농기구를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과 같이...." 예의 화복청년이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그분도 무공을 익히셨단 말이오?" 진삼랑은 흠칫하더니 시인한다. "이를테면 그렇소이다." 화복청년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아까부터 이를테면을 연발하시는데 한 마디를 해도 똑바로 합시 다. 저분은 무공을 지니고 계시고 그것때문에 이곳으로 오셨단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저분이 익힌 무공이 어느 파의 어떤 무 공이오?" 청년들과 소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낙성혼과 진삼랑을 번갈아 바 라보았다. 모두의 눈에는 잔뜩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사...사실... 그건 소인도 모르오." 진삼랑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자 질 비범한 청년남녀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무공 못지 않게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만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사전에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또다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 러나 청년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려. 만병보 출신인데 검을 만들 줄 모르고, 무공을 지녔는데 어떤 무공인지도 모르고... 우 리에게 지금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요? 뭐요?" 진삼랑은 이것 큰일났다 싶어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아.. 자꾸 말이 길어지니 그만 물어보십시오. 이분과 함께 생 활을 하다 보면 자연 아실 일인데 나중에 천천히 알아도 되지 않 소이까? 우선은 이분의 거처를 정해야 하니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만있자... 그렇자. 마침 유성비검 선우소협이 혼자 방을 쓰고 게시니 이분과 함께 방을 사용하면 되겠구려." 그는 상대방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가만히 서있는 낙성혼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분이 화산파의 유성비검 선우제인이란 분이시오. 그러니 저분과 함께 방을 쓰시오." 낙성혼은 담담히 말했다. "방이 어디요?" "아마 저분이 나중에 안내해 드릴 것이오. 그러니 잠시 이곳에 여러분들과 함께 환담이나 나누시오." 진삼랑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곧 도망치듯 밖으로 사 라져 버렸다. 낙성혼은 담담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년남녀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전에는 기다란 탁자가 있었고, 그 주위로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앉을 자리 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사람 수에 맞게 의자를 갖다 놓은 모양이었다. 이때였다. "가만계세요. 의자를 가지고 올테니까요." 문득 해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연자색의 경장을 걸 치고 있는 갸름한 얼굴의 미인이었다. 긴 수발을 하나로 묶어 허 리춤까지 늘어뜨려 날렵하고 미태로와 보인다. 그러나 낙성혼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구석지 곳으로 가 벽에 기대며 바닥에 앉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것이다. 잠시후 그의 곁에서 예 의 여인의 상냥한 음성이 들렸다. "자리를 준비했어요. 앉으세요." "....." 낙성혼은 자는지 반응이 없었다. "주무세요? 자리를 준비했다니까요?" 여인의 음성이 약간 높아졌다. 그녀는 고운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이 자리가 좋소." 뜻밖에도 낙성혼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녀의 성의를 무시하는 그 런 말이었다. 여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했 다. 그러나 천성이 고운 탓인지 화를 내지 않고 다시 부드럽게 말한다. "잠시 후면 식사시간이에요. 설마 이곳에 주저앉아 드시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낙성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청 년들이 얼굴에 분노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미인의 관심을 얻고 싶어한다. 이곳 잠룡원에는 청년들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더욱이 그 중에서 가 자아 빼어난 미인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자가 낙성혼이었고, 반면 그가 의외로 여인에게 무뚝뚝하자 청년들은 은근히 분노하 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소저, 그냥 놔두시오. 그자는 원래 개밥을 먹던 버릇이 있는 모양이오. 그러니 그곳이 편한 모양이오." "와하하하하!" "핫핫핫!" 그 말에 모두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허나 낙성혼은 여전히 눈 을 감고 말이 없었다. 당소저. 그녀의 이름은 당수린이었다. 사천 당가 출신이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갔 다. 사나이가 상대해 주지 않는데 자신이 자꾸 나선다는 것은 여 인으로서 자니친 관심 표현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으로는 왠지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녀는 원래 처음부터 말이 고독해 보이는 사나이에 대하여 관심이 동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꼬집어도 끄떡도 하지 않 는 그가 또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이었다. 헌데... 호의 를 무시도 유분수지. 너무했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x x x 집무실. 이곳은 잠룡원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화산 장문인 종리무연의 거실이기도 하다. "........" 종리무연은 어떤 서류를 읽고 있었다. 서류를 세밀히 검토하고 넘기는 그의 안색은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의 눈에서는 이따금씩 이상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심기가 깊은 위인에 게서 보이는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 빛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시 선을 허공으로 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기이하게 예리한 빛이 쏘아져 나오곤 했다. 문득,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냐?" "제자 장항입니다." 종리무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들어오너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삼십 가량의 눈빛이 차가운 청년이었 다. "그자는?" 종리무연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장항은 알고 있었다. 그는 화산파의 칠대제자 가운데 대제자였다.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지도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방안 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음...." "각 파의 제자들은 연무시간에 진력을 다하여 훈련에 임합니다. 그것은 각파를 초월하여 각문파의 비기를 전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많은 무공을 익혀 두각을 나타낼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 다. 헌데 그자는 연무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종리무연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현재 비룡,백호,신응,천붕 사대각에는 도합 백이십 명의 각파에 서 선발된 자질이 최상급의 제자들이 훈련받고 있다. 앞으로도 좀더 많은 인원이 선발되어 올 것이다. 본문에서도 잠룡원에 너 를 포함한 7대제자가 모두 입문해있다." 종리무연의 말에 장항은 눈빛을 번쩍이며 듣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지면 안된다. 너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익히고, 또한 각 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장차 영도자의 위치에 설 발판을 구축해야 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음... 듣기에 너는 신응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제인이다." 장항의 눈에 어떤 질투의 빛이 어렸다. "막내사제는 너무 마음이 약합니다. 제자가 보기에는..." 허나 종리무연의 얼굴에 차가움이 어린다. "너는 모른다. 실상 노부의 일곱 제자 가운데 가장 자질이 뛰어 난 놈은 바로 제인이다. 다만 심약하고 회의적인 성격이 흠일 뿐 이다." "......" "하지만 조만간에 제인의 성격도 바뀔 것이다." 장항은 고개를 떨구었다. 바닥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강한 질 투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때 종리무연의 질문이 들렸다. "본부에서는 회의소식은 없느냐?" 장항은 즉시 대답했다. "예. 각파 지존들의 연석회의는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무당 하진 자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종리무연의 얼굴에 강한 불만과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 "알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장항이 물러가지 종리무연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상해 있었따. 그것은 소림사에서의 소식때문이었다. 자신이 출타 중이거나 잠룡원의 일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여도 회의는 언 제나 변함없이 열린다. 그러나 무당의 하진자나 소림의 천장선 사, 또는 아미 복호상인 정도의 인물이 하나라도 부재중이면 회 의느느 연기된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자신은 힘이 없 는 문파의 주인인 것이다. 화산은 대원제국과의 싸움으로 사실상 거의 멸문상태였다. 중원의 각파가 원기가 크게 상해 있다고 하 나 그중에서 화산이 가장 심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대 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잠룡원은 중원무림의 정기를 고양하기 위한 각대문파의 고육계였 다. 각파는 장차 무림을 부흥시킬 인물은 후기지수라고 보고, 그 들을 집중으로 훈련시키기로 합의보았다. 그래서 잠룡원이 생겼 다. 잠룡원에는 각대문파의 자질이 출중한 청년들이 입문한다. 그리고 각파에서 내놓은 비전의 무학을 다함께 익히게 하고 훈련 시킨다. 그것은 무림을 한꺼번에 되살리기 위한 계획이었다. 잠 룡원의 원주는 다른 권한을 갖지 못한다. 다만 젊은이들을 통솔 하고 관리하는 일만 맡는다. 그래서 최소한 한 문파의 지존급이 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 실권도 없는 원주를 맡을 사람이 없었 고, 화산 장문인이 나서게 되자 모두 찬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감히 상상인들 했겠는가? 종리무연이 잠룡원을 떠맡은 이면에 실로 무시무시하고 치밀한 하나의 암계가 깔려 있었다는 사실을.... 2장 飛龍閣의 怪物 낙성혼. 그의 존재는 잠룡원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 다. 그의 행동은 특이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홀로 방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 아니, 식사시간이라 해도 남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있 었다. 더더욱이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잠룡원, 특히 그가 소속되어 있는 비룡각의 젊은이들은 그를 비 웃고 험담하고 있었다. 식물인간이라느니, 벙어리라는니, 혹은 백치라고까지 불렀다. 사실, 그들은 모두 자격도 없는 일개 농기 구 제작하는 놈이 각 파의 영재들만 입문하는 곳에 함께 섞여 있 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한결같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운 자는 모든 것이 미운 법이다. 그러지 않아도 미운 털이 박힌 자가 행동 또한 괴벽하니 더욱 경원시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말없이 식사하고 있었다. 하나의 탁자에 네 개의 의 자가 놓여 있다. 사람 수에 꼭 맞게 의자가 놓여 있었으므로 어 절 수 없이 의자는 차게 마련이었다. 지금 낙성혼이 앉아 있는 탁자도 사람이 꽉 찼다. 그런데... 낙성혼을 제외하고는 세사람 모두 잔뜩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고된 훈련 중에 식사를 하는 시간은 유일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인 것이 다. 그런데, 하필이면 불쾌한 놈과 마주 앉았다는 사실이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공통적인 것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누구나 낙성혼과 같이 앉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다. "젠장... 밥맛 떨어지네! 아무리 타지에서 남의 밥을 먹는다 할 지라도 개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다니... 이거 원...." 지금 낙성혼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청년은 청성의 유문도라는 청 년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낙성혼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습성처럼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문도는 그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 "이 견공은 잡종에다 벙어리까지 겹쳤구만... 골고루 병신이라더 니..." "....." 그래도 낙성혼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주위에 있던 청년 들의 시선은 모두 그 탁자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중지 하고 일제히 낙성혼을 주시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공통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남이 보여주 지 않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강하다. 실상 처음 그들의 낙 성혼에 대한 호기심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낙성혼 은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지 않았다. 그들이 낙성혼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고독과 무감정, 그 리고 은연중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괴리감 따위였다. 그런데... 이따금씩 마주치는 낙성혼의 눈빛은 이상하게 무서웠 다. 어떤 자를 막론하고 낙성혼의 눈빛을 대하게 되면 자신도 모 르게 급히 피해 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낙성혼은 그들에게 있어 미운 존재가 되 어 버린 것이다. 이때, 유문도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벌려놓은 일 이었다. 더욱이 시선들 중에는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는 아리따 운 소녀들의 빛나는 시선들도 있었다. 그런데 낙성혼이 아무런 반응도 없다면 그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더 욱 거칠게 말했다. "좋아! 어차피 먹을 것만 주면 꼬리를 흔드는 놈일테니 내가 특 별히 내몫까지 주지!" 그는 자신이 먹던 음식을 들어 낙성혼의 그릇에 부어버렸다. ".....!" 낙성혼의 동작이 멈추어졌다.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던 손이 멈춘 것이다. "....." 장내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무엇인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계획되어 반복되어 지고 있는 일상에 대한 작은 반역이며, 또한 흥분을 동반한 자극이었다.이때 중인 들의 시선에서 낙성혼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상대방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순간 유문도는 볼 수 있었다. 낙성혼의 텅 비어버린듯한 동공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처절한 인내와 한. 그것은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선 상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무한한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으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허나 그에 대한 반작 용이 일었다. 그는 자존심이 무참히 유린되어 견딜 수 없었던 것 이다. 쾅!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섰 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문득 듣기에 청아하고 고혹적이며 부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 다. 연자색의 경장을 입은 소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당수린이었다. 이곳 비룡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청년들의 선망과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 를 가로막으며 꾸짖듯이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우리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와서 훈련을 받고 있는가를 벌써 잊으셨단 말인가요?" 그녀는 섬섬옥수로 가만히 유문도의 가슴을 밀었다. 유문도는 그녀의 향긋한 체취를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아.... 난 단지...." 그녀는 돌아섰다. 그리고 낙성혼을 향해서 나긋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이분의 뜻은 원래 나쁜 뜻이 아니었어요. 다만 훈련 에 지치고 신경이 예민해진 것에 불과해요. 그러니 당신이 이해 하세요." 낙성혼은 여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없이 일 어서고 있었다. 이미 주위에는 청년들 이십 수명이 그들을 에워 싸고 있었다. 한바탕 활극이라도 일어날 줄로 알았던 것이다. 낙 성혼은 그들에게 걸아갔다. 둘러싸고 있던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 게 그가 나가는 길을 터주었다. 낙성혼은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사라졌다. "......" 당수린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 도 그녀가 나서서 낙성혼의 위기를 구해준 것이다. 그런데도 또 다시 그녀는 무시를 당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편협한 마음을 가 지고 있었다면 도저히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볍 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x x x 밤이다. 낙성혼은 혼자 침상에 앉아 있었다. 낙성혼은 혼자 침상 에 앉아 있었다.그는 언제나 같은 자세였다. 이때 문이 열리고 한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유성비검 선우제인이었다. 방금 훈련을 마친 듯 그의 몸은 땀투성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입문해 있는 젊은이들은 훈련에 임하여 처절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 런 기회는 평생에 두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다른 문파의 무 공도 배울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다. 이곳에서는 각파의 다양한 절기를 익힐 수 있었고, 이곳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장차 무림에서의 주역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훈련 에 임하는 청년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비장한 것이었다. "휴....." 선우제인은 한숨을 쉬며 침상에 앉았다. 그의 침상은 낙성혼의 침상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자연히 상대에게 향했다. 사실 그는 방으로 돌아오기가 싫으면서도 좋았다. 싫은 것은 지 겹고 어색한 침묵을 견디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을 가야 상대방 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좋은 것은 상대의 고적하 고 절대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선우제인은 그런 낙성혼이 좋았다. 그에게서 풍겨지는 완벽한 침묵, 완벽한 고독, 완벽한 냉담 같은 것.... 선우제인은 화산파의 제자였다. 화산 장문인 종리무연의 7대제자 가운데 막내제자였다. 화산파.... 지금은 사실 이름뿐인 명문이 었다. 그래서 그는 소위 명문의 제자로 불리우면서도 항상 군중 속의 고독감같은 것을 느낀다. 슬픔과 아픔... 그것은 소림과 무 당같은 강대한 문파인들과 섞일 때 더욱 절감하는 것이다. 그들 의 문파와 달리 자신의 사문은 등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이나 다 름없었다. 오직 일곱 명의 사형들과 한 명의 사부. 그것이 화산 의 전부가 아니던가. 그래서 명문도들과 어울리면서도 선우제인 은 항상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 마음 속으로 강인 해져서 언젠가 화산을 자신의 손으로 부흥시키고 싶은 열망이 가 득차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회의하고 심약한 자신이 싫었다. 강인해야 한다... 강인해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나타나지 않는 그런 강인한 기질이 사나이에게서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분위기가 좋은 것이다. 반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 현하지도 이야기를 건넬 수도 없었다. 낙성혼에게서 막연한 거리 감이 너무나 확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기 어인 한달 여가 지나간다. 그동안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고작 한 번뿐이다. 그것도 처음 연무시간이 되어 함께 나가자고 할 때 들은 것이다. .....싫소. 그 한마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도 그는 그가 벙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다행이라고 여기 고 있었다. 가만히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낙성혼을 바라보던 선우 제인은 문득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아깐 미안했소. 내가 나서서 도와주지 못해서..." "...." "하지만 그도 그렇게 나쁜 친구는 아니오." "....." 낙성혼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선우제인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형장, 난 형장에 대해 잘 모르오. 하지만 형장에 대한 싫은 감 정은 갖고 있지 않소. 오히려 좋아하고 있는 편이오. 그렇지만 형장이 가진 그 침묵은 부담스럽소. 아마 아까 그 친구는 그때문 에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오." "...." 여전히 낙성혼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휴우... 형장. 난 형장이 남의 충고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는다 는 것을 짐작하고 있소. 그러나 이 한마디만은 꼭 해야겠소. 이 곳은 단체요. 나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개념을 지닌 것이오. 그 러니 기왕 이곳에 오신 김에 친구를 사귀어 보기라도 하시오. 절 대로 해롭지는 않을 것이오. 아니... 그것이 어려우면 나라도 친 구로 삼으시오. 사실 난... 형장과 친구가 되기를 무척 바라는 사람이오." 그의 말은 무척 하기가 힘든 말이었다. 자신의 내심을 보인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런데 그는 자존심까지도 버리고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제야 낙성혼은 눈을 떴다. 그는 묵 묵히 선우제인을 바라보더니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난 이곳에 오고싶어 온 사람이 아니오. 그리고 친구역시 원하지 않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쪽으로 걸어나갔다. ".....!" 선우제인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막 문을 나서려던 낙성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한다. "충고 고마웠소. 그리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오." ".....!" 선우제인의 가슴이 동요했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뭉개졌으나 웬 일인지 상대방의 마지막 한 마다이에 모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그 한 마디에 많은 보상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선우제 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다니... 그러니 항상 사부님께 걱정 을 시켜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선우제인은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대로 쓰러지지는 않아. 언제고 기필고 본문을 부 흥...." 한편, 낙성혼은 화원에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선 우제인이 자꾸만 말을 거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더욱이 약간은 바람을 쐬고 싶은 기분도 들고도 있었다. 밤은 적막하다. 달빛이 화원에 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었 다. 소슬한 추풍이 불어 옷자락을 날리게 하고 있었다. 그는 화 원의 꽃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의 숱한 상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나도 복잡한 상념들은 하나를 정리하면 하나 가 헝클어지고 하나를 억누르면 또하나가 뒤엉킨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달빛을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째서죠?"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말소리에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여인이 었다. 달빛을 받고 서있는 여인은 당수린이었다. 연자색의 경장 과 기다란 흑발... 갸름한 얼굴의 미색은 화원의 꽃향기, 달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미태를 자아내고 있었따. 특히나 성숙한 여인 을 밤에 대하니 더더욱 요요함이 느껴졌다. 문득 낙성혼은 그녀 의 모습에서 다른 여인을 떠올렸다. 사마자연.... 허나 그것도 잠시 뿐. 그는 도로 몸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수린의 음성이 그의 몸을 멈추게 했다. "어째서 그렇게 항상 세상의 번민을 혼자 짊어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나요? 세상의 고통과 고뇌를 모두... 당신 혼자만 가지고 있나요? 왜 그렇게 살죠?" 당수린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따지는 듯한 추궁이 깃들어 있었 다. 낙성혼은 그녀를 향해 걸었다. 당수린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 는 그를 보고 흠칫했다. 어쩌자고...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올 수록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헌데.. 거의 닿을 듯이 가까워 졌을 때, 상대방은 그녀의 곁을 지나쳐 숙소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수린은 왠지 가슴이 텅 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인 듯 낙성혼을 향 해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만 괴로운가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당신 못지 않은 고통과 괴로움을 지니고 있어요. 자신의 부모를 눈앞에서 잃은 사람... 자신의 문파를 송두리째 잃은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만 그렇죠? 당신은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예요. 아니... 오 히려 누구보다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에요....!" 낙성혼은 멀어지고 있었다. 뒤에서 당수린의 원망에 찬 소리가 들렸다. "바보... 병신... 목석...." 달빛이 눈부시다. 눈부신 달빛을 받고 서있는 당수린의 눈 속에는 어떤 갈등이 안 개처럼 서리고 있었다. 3장 神秘의 空空大師 시간은 말없이 흐른다. 잠룡원에서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낙성 혼은 여전했다. 그는 잠룡원에서 섬같은 존재였으며 여전히 타인 과 어울리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행동을 유심히 주시할 수 있다면 그의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들어 가끔씩 대낮에 산책을 한다던가.... 혹은 방안에 있을 때 유성비검 선우제인에게 간혹 관심어린 눈을 던진다던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어젯밤만 해도 그렇다. 선우제인은 술을 잔뜩 마셨다. 이곳에서 원래 술을 마시는 것은 금해져 있다. 그 러나 젊음이라는 것은 통제할 수는 있으되 묶어둘 수는 없는 법 이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이따금 몰래 밖으로 빠져나가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모험을 즐기곤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묵인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다만 지나치게 많이 마시지 않으면 되는 것이 다. 선우제인은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좀체로 그의 성격으로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와 술주정을 부렸다. 그의 술주정 은 자신의 설움이라든가 아니면 바로 낙성혼에 관한 원망같은 것 이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사람이라도 일단 술에 취해 이성을 잃 게 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선우제인이 바로 그랬다. 그는 밤새도록 낙성혼을 향해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더 댔던 것이다. 헌데..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그는 깜짝 놀랐다. 취해서 아 무렇게나 엎어잔 그가 이불을 곱게 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 은 바로 누군가 잠자는 사이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는 뜻이다. 그 러나 그의 처소에서 이불을 덮어줄 만한 사람이라고는 오직 낙성 혼밖에 없었다. '그가....' 선우제인은 멍하니 상념에 빠졌다. 낙성혼은 지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유문도와의 일이 있고부터 더이상 그에게 시비를 거는 자가 없었다. 모두들 더이 상은 그를 정면으로 비웃지 않게 된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노래라기 보다는 차라리 악을 쓰는 소리에 볍...' 낙성혼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노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랫소리가 가까와지더니 노승의 수다스럽고 주책스러운 음성이 떠들썩하게 울렸다. "얼씨구.... 이놈들 봐라! 가량이에 솜털도 돋지 않은 녀석들이 연애하고 자빠졌네? 얘끼! 이놈들... 연애할 시간이 있으면 도덕 공부나 좀 할 노릇이지... 할아비가 오셨는데 어느 한 놈 일어나 인사하는 놈이 없고 밥만 쳐먹기 바빠! 이놈들아! 안 뺏아먹는다 안 뺏아 먹어....!" 듣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험구가 시작되었다. "......" 중인들은 애써 나타난 노인을 외면하고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술병을 움켜쥐고 갈지자 걸음을 걷는 노승이었다. 즉, 소림 의 괴승 공공대사였다. 이때, 그나마 일어나 인사하는 것은 소림 출신의 한 젊은 중뿐이었다. 처음 노승이 이곳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에게 호되게 당한 이 루로는 아예 상대를 하려들지 않았다. 그저 노망한 늙은이라고 여기며 외면하는 것이다. 이때, 소림출신의 젊은 중이 노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또 날벼락이었다. "얘끼! 이놈아! 그렇지 않아도 냄새나는 중놈들이 싫어서 이리로 도망왔는데 네놈 자리에 앉으라니... 차라리 날보고 죽으라고 그 래라!" 기함을 할 일이었다. 그 자신은 그럼 중이 아니란 말인가? "태사숙조...." 소림의 중은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었다. 이때 한가닥 상냥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선사님. 이곳에 앉으시죠." 그녀는 바로 당수린이었다. 노승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간다. 그 는 게슴츠레한 눈을 껌뻑이더니 입을 헤벌쭉 벌렸다. "어쭈! 또 네년이구나. 아이고.. 기특한 것. 그래도 네년 밖에는 없다." 노승은 당수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 하 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 의 눈알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아니... 이 년이 벌써 이렇게 컸나? 젖통도 튀어나오고 제법 엉 덩짝도 삼삼한 것이 사내놈들 침깨나 흘리게 자랐구만...!" 실로 입에 담지 못할 험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에잉... 안되겠다. 이년아. 비록 네 성의는 고맙지만 나도 아직 은 사내인지라 네년 엉더짝만 봐도 양물이 동하는 데 네년이 엉 덩짝 비빈 곳에 걸터앉았다간 기껏 오늘 염불 왼 것만 헛것 되겠 다." "노....노선사님..." 당수린은 도무지 얼굴이 화끈해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평소부 터 그의 입이 험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오늘처럼 이런 무안 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처녀였다. 처녀로서 그런 말을 어찌 더 듣겠는가? 그녀는 귀를 막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달려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노승의 짓궂다 못해 가공한(?)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년아, 잘 들어라. 이만큼 컸으면 좀 자중해야지. 그 놈의 무공인가 뭔가 익힌답시고 찰싹 달라붙은 옷을 입고 다리를 짝짝 벌린다면 네년 그곳에 바람 들어가... 그리고 나중에 네 서 방한테 헐렁하다고 소박맞기 일쑤일 게야!" "제발...." 당수린은 귀를 틀어막고 애원했다. 다행(?)히도 노승은 더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이번에는 슬쩍 주위를 돌아다본다. 어디 또 걸리는 자가 있을까. 그 자는 필시 또 한번 곤욕을 치르리라. 헌데, 노승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어! 저놈이 왜 여기 있어?" 그는 낙성혼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낙성혼에게 고 개까지 기울여 가며 자세히 뜯어보는 것이 아닌가! "네놈 꼴상을 보아하니 좀 나아지긴 나아졌다만..." "....." 낙성혼은 가만히 있었다. "이놈아! 네 놈에게 눈을 뜨게 해주신 부처님이 오셨는데 왜 멍 하니 앉아있어? 얼른 일어나 자리 비키지 않고!" 낙성혼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인들은 그 광경에 모두 놀랐다. 그가 노승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낙성혼은 노승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허나 노승의 말이 그를 잡았다. "잠깐 기다리거라. 네놈의 방을 잠시 빌려야 겠으니 말이다." 노인은 게걸스럽게 낙성혼이 먹다 남긴 음식을 입안으로 쳐넣으 며 그렇게 말했다. 음식을 사방으로 퉁기고 난리다. "이 놈아... 할아비가 극락갔다와서 피곤하면 방으로 안내해서 안마라도 해주고 아양도 떨고 해서 할아비의 심신을 풀어 주어야 할 게 아니냐? 그런데 그냥 도망치려고 해...?"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허나 중인들이 보기에는 재미 있기만 했다. 이 괴물이나 저 괴물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두 괴물 의 하는 짓거리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를 내거나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고 나가 버 릴 줄 알았던 낙성혼이 조용히 문앞에 선 채 노인이 밥을 다 먹 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 다. 노인은 밥을 다 먹고 일어섰다. "어험... 이놈. 어서 안내해라. 한 잠 자야겠다." "....." 낙성혼은 묵묵히 노승의 앞장을 섰다. 그 광경은 실로 중인들이 보기에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기야 그들은 이 제까지 두 사람에 대해 납득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어느 쪽이 네놈 침상이냐?" 방으로 들어서자 노승은 다짜고짜 물었다. 낙성혼이 눈짓으로 가 르키자 그는 벌렁 침상 위에 신발도 벗지 않고 드러누웠다. "......" 낙성혼이 멍하니 서있자 그는 버럭 소리 지른다. "뭐해? 안마하지 않고?" 낙성혼은 흠칫하더니 그의 옆에 앉아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노 승은 눈을 게름치레하게 감으며 중얼거린다. "아이고 좋다.. 아이고 좋아. 비록 계집 손길만은 못하지만 그래 도 제법 꼴상에 비해 안마기술을 제법 가지고 있구나." "......" 낙성혼은 그가 뭐라고 하든 말없이 안마를 계속했다. 얼마나 시 간이 흘렀을까? 문득 잠을 자는 듯 하던 노승의 입에서 흥얼거리 는 듯한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부처님 해탈한다기에 옷자락 붙들고 쫓아가니 부처님만 극락가고 나만 홀로 남았구나. 혼자 남은 쓸쓸함에 눈을 돌려 세상 보니 선한 놈은 간 데 없고 악귀들만 끓는구나. 극락문은 닫혀 있고 이 내 몸은 갈 데 없고 이리저리 방황하니 백발 혼자 느는구나 헛된 인생 섭섭하여 어린 중생 계도하니 망망대해 메꾸기요, 쇠구에 경 읽기라. 아서라, 덧 없도다. 세상만사 덧 없도다. 노인의 잠꼬대인지 노래인지 모를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헌데 낙성혼은 그 소리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의 눈은 점차로 어떤 빛을 띄어 가고 있었다. 노승의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극락 계신 부처님이 중생 계도 한다지만 극락 살아 편한 몸이 중생 슬픔 어이 알리. 눈 감으면 피안이요, 돌아서면 저승이라 지옥문이 열렸으니 이 내 몸은 가면 그뿐 어이 하리 어이 하리 남은 중생 어이 하리 이 내 몸이 가고 나면 남은 중생 어이 하리. ".....!" 노승의 노랫소리는 마치 어떤 가락을 지닌 채, 영혼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귀에는 그저 술취한 주정으로 들릴 지 몰라도 낙성혼에게는 진하디 진한 슬픔을 주고 있었다. 낙성혼의 얼굴이 점차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ㅁ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순간 노승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쩐긴 뭘 어째? 어차피 살기 싫은 놈이 뒈져 버리면 그만이지! 어서 부처님 안마나 계속해!" 낙성혼은 흠칫 하더니 다시 안마를 계속했다. 헌데 이번에는 노승이 짜증을 부린다. "관둬, 이놈아! 네놈 안마 계속 받다간 뼈마디 다 부러지겠다. 어찌 네놈이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이냐? 이 놈아, 안마도 기술이 있고 절도가 있는 것이야." 이말에 낙성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안마에 기술과 절도라니... "안되겠다. 네놈한테 안마기술이나 가르쳐야지. 그래야 다음에 내가 편하겠다." 점점 가관이라니... 그럼 나중에는 아예 낙성혼을 자신의 개인 안마사로 만들겠다는 뜻인가? 허나 어쩐지 낙성혼은 노승이 밉지 않았다. 이때 노승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그를 바라본다. 낙성혼 은 멍하니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귀 씻고 들어라. 이놈아. 안마란 어깨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너 의 내장에서 나오는 거야. 그래야 가볍게 손끝으로 주무르기만 해도 뼈 속까지 시원해지는 법이야. 그러려면 손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장부터 훈련시켜야 돼."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장을 훈련시키다니. 노인은 자신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 너도 이렇게 가부좌를 틀어." 낙성혼은 마치 기계처럼 그가 하라는 대로 따라 했다. 그는 맞은 편 침상에 앉아 노승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노승은 그를 바라보 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최대한으로 들이마셔. 공기가 단전까지 가야 비로 소 내장이 시원해지는게야. 그리고 턱을 바짝 끌어당기고 혀를 이렇게 입의 천정에 붙인 후...." 낙성혼은 노승이 하라는 대로 한다. 그는 정말 노승의 안마기술 을 배우고 싶었다. 세상일에 흥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 나 노승의 말에는 흥미가 있었다. 그는 남들이 다 싫어하는 노승 과 함께 있으면 어쩐지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노승이 원하 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침상 에 앉아 안마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그 안마기술이라는 것은 일종의 단전호흡법, 즉 내가 토납지술이었다. 그러나 낙성혼만이 그것을 까맣게 모를 뿐이었 다. 노승은 그가 어느 정도 자세가 잡히고 흡기를 자유롭게 하게 될 때까지 잔소리를 하다가 사라졌다. "이놈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부지런히 반복해서 익혀둬! 게으 름을 피우고 연습하지 않으면 부처님은 금방 안단 말이다. 알겠 느냐?" 낙성혼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날짜는 물 흐르 듯 흘러가고 있었다. 그동안 노승은 간간히 찾아왔다. 그리고 자 세가 틀어졌느니, 호흡이 잘못 되었느니 하면서 잔소리를 늘어 놓다가 사라졌다. 날짜가 흘러감에 따라.... 낙성혼은 차츰 그 자세와 호흡에 자연스럽게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안마기 술.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하던 것이 차츰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머리가 맑아지고 온 몸에 신비한 기 운이 충만해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 따. 그것이야 말로 신비하기 그지 없는 무림계 최상승의 전설적 기공이라는 것을. x x x 밤이다. 가을이 깊어졌다. 모처럼 만에 낙성혼은 산책을 하고 있 었다. 그는 화원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헌데, "......" 누군가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이었다. 달빛을 받은 여인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와 보였다. 당수린이었다. 낙성 혼은 　지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그 가 가장 꺼려하는 것이었다. 당수린은 비스듬히 옆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욱 여인의 신비로운 미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막 돌아 서려는 데, "잠깐만요...." 당수린은 안타까움이 배인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4장 姦殺의 陋名 낙성혼은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당수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으나 정작 그가 자신의 말에 멈추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녀는 문득 잰 걸음으로 낙성혼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은 행여나 그가 다시 가버리지 않을까 자신 스스로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낙성혼은 가지 않았다. ".....!" 그녀는 낙성혼의 앞에 멈추었다. 문득 당혹감이 앞선다. 막상 이 렇게 되고 보니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작 무슨 용건이 있어서 그를 부른 것도 아니었고, 급히 달려온 것도 어떤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헌데, 상대방은 야속하게도 묻는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냐구? 여인은 순간 기쁨과 당혹감을 함께 느꼈다. 기쁜 것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준 때문이었고, 당혹감을 느낀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여인, 당 수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대하기가 두려웠 던 것이다. 아니, 두렵기 보다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왜 자신이 그 앞에서 두려워 하고 민망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릴 없이 그녀는 손가락만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가겠소." 사나이는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렇게 말했다. 다시 들려온 두 번째의 말에 여인은 깜짝 놀랐다. 안돼, 가다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이름이 뭐죠?" 낙성혼은 흠칫했다. 허나 곧 담담히 답한다. "환무영." 그는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걸어갔다. 여인, 당수린은 꿈꾸는 듯 한 눈동자로 저만치 걸어가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그를 부르지 않았따. 대신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환무영... 환무영... 환무영...' 달빛이 저홀로 밝다. x x x 종리무연은 장항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부님. 비룡각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니?" "두 파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두 파?" "그게 무슨 소리냐?" 장항은 고개 숙이며 말했다. "문제는 환무영이란 자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 "환무영은 본래 비룡각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놈인데 최근에 그 를 둘러싸고 비방하는 자들과 옹호하는 자들로 파류가 생기고 있 습니다. 대부분 소림이나 무당등은 그를 비방하고 질시하며...군 소방파 출신들은 그를 은연중 옹호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라." 종리무연의 눈이 괴이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네. 그 파벌은 점점 더 심해져 막내 사제가 자신의 맡은 일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막내가 차지해야할 비룡각의 영수 자리는 그 바람에 흐트러지고 파벌만 생긴 것입니다. 환무영이란 자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그곳에서 약자들의 보이지 않는 구심 점 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문제인 것은...." 장항은 사부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은 그가 사부의 심기가 좋지 않을 일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냐? 모두 말해라." "그건... 막내 사제조차도 그자의 분위기에 빠져 들고 있다는 것 입니다." ".....!" "만일 그대로 둔다면 막내사제는 어쩌면 그자의 심복이 될 것 같 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장항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제자의 생각으로는 그대로 두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으음....!" 무엇을 느낀 듯 종리무연의 눈빛도 날카롭게 변한다. 그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침음성을 발한다. "너에게 무슨 방법이 있느냐?" 그 말에 장항의 눈에서 간지가 흘렀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음... 말해봐라." "그것은..." 장항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처음에는 흠칫하 는 종리무연이었으나 차츰 그의 안면에는 괴이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좋다. 그럼 그 일은 네가 알아서 추진해라. 허나 명심할 것은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장항은 자신있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럼 가거라." "예." 장항은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종리무연은 눈 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한가닥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못난 놈.... 내 그렇게 녀석에게 기대를 걸었건만 고작... 그따 위 놈에게 빠져 제 몫을 다하지 못하다니... 에이...." 종리무연은 눈을 감아 버렸다. x x x 실제로 비룡각은 두 파로 갈라지고 있었다. 원인은 낙성혼 때문 이었다. 처음에는 낙성혼을 모두 싫어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 에 따라 이상스럽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문파를 잃었거나 세력이 약한 청년드은 은연중 설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 자들은 은연중 낙성혼을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입장에 놓인 자들은 더욱 더 낙성혼을 미워하게 되었다. 실상 낙성혼이 개입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내재되어온 내부의 불만이 빌미를 빌 어 발화한 것 뿐이었다. 정작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당사자인 낙성혼뿐이었다. 이제는 식사를 할 때조차 두 파로 갈려지는 것이 비룡각의 풍경이 되었 다. 낙성혼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어떤 삶의 관념에 심한 부대낌을 느끼 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일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 다. 헌데... 한번 곪기 시작한 종기는 언제고 터지는 법. 바야흐 로 문제는 하나의 놀라운 사건을 통해 한꺼번에 터지게 된다. x x x 요즘들어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낙성혼은 오늘 밤도 화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가 산책하는 길은 정해져 있었다. 비룡각의 화원을 한 바퀴 돌고는 밖으로 나가는 소로를 걸어 신응각의 경 계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달이 밝았다. 그는 달빛 아 래 묵묵히 상념에 젖어 걷고 있었다. 헌데, "아악....!" 환청이었을까? 문득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의 귓전에 울렸 다. '.....?' 그는 마침 노승에 대해 생각하느라 땅만 보며 걷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흠칫하던 그는 다시 걸었다. "아아악...." 비명은 다시 울렸다.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한 방향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어 떤 일이라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 심경이 다소 변하고 있었따. 더욱이 여인의 비명에는 절박한 느낌이 담겨 있 지 아니한가. 그는 비명이 들려온 쪽으로 몸을 날렸다. "......!" 달빛. 그 달빛 아래 눈부시게 흰 여체가 쓰러져 있었다. 화원의 뒤쪽이었다. 인공가산이 막 시작되는 곳으로 다소 안쪽으로 들어 가 있어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여인은 그도 아는 소녀였다. 종남파의 여제자라고 하던가. 이름이 남옥상이라던가. 거짓말처럼 비현실적으로 그녀는 알몸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희디 흰 알몸은 멋대로 사지를 벌리고 있었고,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허벅지 사이로 달빛이 무참하게 유린된 비부를 비추고 있 었다. 피...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젖가슴은 복숭아 같은 느낌을 준다. 헌데 그 젖가슴 한 쪽 에 한 자루 검이 박혀 있었다. 남옥상은 눈을 하얗게 치뜨고 있 었으며, 근처에는 갈가리 찢어진 옷자락이 흩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강제로 유린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낙성혼은 멍하니 시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온다. "비명소리가 들렸어....!" "저쪽인 것 같은데..." "남사매의 음성이었어요!" 휙휙휙! 옷자락을 날리는 소리가 가까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낙 성혼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자리를 떠나다가 발 각된다면 그는 영락없는 오해를 받을 것이다. 그의 눈은 소녀의 왼쪽 젖가슴에 박혀 있는 한 자루 검을 보고 있었다. 몹시 회의 스러운 눈이었다. 이때, "저기다!" "엇! 저 자는....?" 이옥고 청년들과 소녀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도 여인의 비명소리 를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앗...! 이럴 수가...!" "아니....!" 웅성거리는 소음을 낙성혼은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와는 아주 무관한 듯했다. 그의 시선은 계속 멍하니 소녀의 심장에 박 힌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이 자가 범인이오" "저걸 보시오! 저 검은 이 자의 것이 아니오!" 누구인지 소리쳤다. 중인들의 눈은 일제히 남옥상의 가슴에 꽂혀 있는 검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청년들에게는 한 자루 씩의 검이 지급되었따. 그리고 그 검에는 표식이 되어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소녀를 죽인 것은 낙성혼의 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낙성혼은 한번도 그 검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연무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검을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언제나 방안 한 구석에 놓아 두던 검이었다. 헌데 그것이 지금 소녀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이다. 문득 어디선가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더러운 놈! 이곳에서 간살을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나서는 자는 바로 장항이었다. 그는 신응각에 소 속되어 있었따. 이 인공가산은 신응각과 비룡각 사이에 있었으므 로 모여든 젊은이들도 반반씩었다. 장항은 두 눈에 분노의 빛을 띄우며 낙성혼에게 다가왔다. "순순히 심판을 받겠느냐? 아니면 반항을 하겠느냐?" 장항은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을 기세였다. "......" 그러나 낙성혼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묵묵부답이었다. 이 때였다. "잠깐만요. 꼭 이분이 범인이라는 법은 없잖아요!" 청아한 음성과 함께 나서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당수린 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당수린은 차분한 표 정으로 말한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분은 그동안 한번도 검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지금 시신에서 그의 검이 꽂혀 있다고 해서 꼭 그가 살인을 했따고 볼 수는 없잖아요." 그 말에 비룡각의 몇몇 인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공감 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낙성혼이 비록 자신들과 어울리지는 않으 나 그가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후후... 하지만 이자는 현장에 있었소!" 장항이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는 이미 낙성혼을 범인으로 단정하는 듯했다. "현장에 있다고 다 범인은 아니예요." 당수린은 강하게 변론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먼저 달려 왔을 수도 있잖아요. 안그런가요? 환소협?" 그녀의 물음에 일제히 중인들의 시선이 환무명에게 향했다. 그들 은 이제야 그가 환씨임을 알았다. 허나 낙성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흐흐흐...그것보시오. 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소?" 장항은 검을 뽑았다. "놈은 범인임이 틀리없소! 어서 놈이 달아나기 전에 잡읍시다." 그 말에 십여 명이 일제히 병기를 뽑았다. 그들은 낙성혼을 포위 해 들어갔다. 허나 당수린은 날카롭게 외쳤다. "단정지어선 곤란해요! 확실한 증거도 없이..." "확실한 증거야 저 자의 검이 있고, 또 현장에 있는 것이 증거가 아니고 뭐요?" 그러나 비룡각에서 파벌을 달리하고 있는 청년들도 맞장구친다. "맞소! 저자는 은근히 남여협을 노리고 있었소! 저자의 눈빛은 언제나 음탕하였소." 웅성웅성... 이윽고 낙성혼은 고립되었다. 그러나 당수린은 애가 타고 있었 다. 그녀는 낙성혼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목을 걸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정작 당사자인 낙성혼은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낙성혼은 그 저 멍하니 소녀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하나의 바위나 나무등걸을 보는 듯이. 마침내 그녀는 화가 났다. "이봐요! 대체 당신은 뭐하는 거예요? 정말 당신이 범인이란 말 인가요?" 낙성혼은 정신차렸다.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이십여명 가까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 그를 못마 땅하게 생각해 오던 자들이 이 기회에 손을 쓰려는 의도였다. 그 의 입에서 무거운 한 마디가 나왔다. "나는 아니오." 허나 그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쐐애액. 문득 무당출신 유문도가 검을 날렸다. 그러지 않아도 감 정이 있던 그는 제일 먼저 공격한 것이다. 낙성혼은 그를 바라보 았다. 이때 보랏빛의 인영이 번쩍 하더니 향긋한 체취가 풍겼다. 어느새 당수린이 그를 막아선 것이다. "함부로 손을 쓰지 말아요! 이 일은 공정하게 처리해야 되요."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나선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 이었다. 그녀는 창피를 무릅쓰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낙성혼은 무표정했다. 그는 남의 일 보듯 하는 것이었다. "당소저! 비키시오. 저자가 가만히 있는데 소저가 왜 나서는 것 이오?" 유문도가 검을 흔들며 말했다. 당수린은 분하고 창피했다. 그 고 격이 낙성혼에게 향한다. "이봐요! 이 바보같은 사람!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낙성혼은 홀연히 마음이 움직였다. 장내에는 그를 옹호하는 인물 들이 십여 명쯤 된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안타까움이 어 려 있었다. 그러나 세력이 약한데다가 장항,유문도 등의 기세에 눌려 그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는 눈길을 선우제 인에게 향했다. 그의 얼굴에도 낭패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때, "죽일 놈! 너같은 파렴치한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쐐애애액! 문득 세 명의 청년이 그를 공격했다. 그들은 검을 날려 단숨에 그의 목숨을 취할 작정인 듯 했다. 서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 다. 낙성혼은 문득 움직였다. 그는 몸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런데 기묘하게도 그는 삼인의 검 사이를 뚫고 나갔다. 찰라적으 로 그의 신형은 느릿느릿하면서도 전광석화처럼 움직인 것이다. "아니...." 당수린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허리춤에 차고 있 던 검이 그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휙휙! 따다땅! 불꽃이 퉁겼다. 무림고수의 싸움에서는 검과 검을 부딪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삼인의 검은 어찌된 셈인지 낙성혼이 휘두른 검 과 부딪쳤다. 결과, 그들의 검은 저만큼 날아갔다. 낙성혼은 아 주 유치한 수법으로 그들과 검을 부딪친 후 두 다리를 묘하게 움 직였다. 그의 신법도 강호의 일반적인 보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년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차란 몇차례의 쇳소리가 나고 장검이 땅에 떨어졌다. "헉!" "윽!" "크윽...." 아무도 믿지 못했다. 낙성혼의 엉성하고 구태의연한 검법에 오륙 명이 피를 뿜으며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이상 가 지 않았다. 낙성혼의 검법은 바로 전장에서의 싸움법인 것이다. 처음에는 통했어도 무림계의 청년고수들에게 더이상 통할 리가 없었다. 무당의 유문도는 그의 검법이 엉터리라는 것을 발견했 다. "색적! 받아라!" 위이잉! 그는 검법대신 신형을 구구현현보법으로 밟으며 접근한 뒤 무당 의 현천파옥수라는 장법으로 공격했다. "......!" 낙성혼은 눈앞이 흐릿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옆구리가 으스러지 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펑!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은 부웅 뜨더니 저만치 삼장이나 날아가 꽃 밭 위에 떨어졌다. . 그가 오륙 명의 청년고 수들을 검으로 상처입힐 때는 꽤나 신비한 무공을 가진 줄 알았 는데 유문도의 장력 한번에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 당수린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중인들은 어리둥절하고 곤혹했다. 허나 낙성혼은 한번 나가 떨어진 후에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중인들 가운데 장항이 나서더니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놈을 본부로 보내 심문합시다! 놈은 분명 범인이오." 그는 꽃밭으로 뛰어들더니 발끝으로 낙성혼의 혈도를 연달아 걷 어찼다. 악랄무비한 발길질이었다. 그는 낙성혼의 열두개 요혈을 중수법으로 걷어찬 것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그 발길질에 뼈란 뼈가 다 으스러질 정도였다. 낙성혼은 의식을 잃고 있는 상태에 서도 몸이 몇 번이나 퉁기듯 떠올랐다. ......... 5장 少林守護神門 지하뇌옥. 소림사 내에도 뇌옥이란 것이 있다. 그곳은 소림 내의 반도나 무 림의 중조인을 가두는 곳이다. "....." 낙성혼은 차가운 돌바닥으로 된 뇌옥에 쓰러져 있었다. 지금 그 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니 었다. 다만 유문도의 무당장법에 맞아 운신을 하지 못할 뿐이었 다. 무림인이 아닌 그가 내가장력에 맞은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그는 심문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답해야 할 말도, 또 대답할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그는 간살을 하지 않았 고, 그러기에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곳 에 오게 되었는지조차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내부 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관념만을 명확히 깨닫고 그 해답을 갖 고 싶을 뿐이었다. 벌써 십여 일... 그는 다만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어 렴풋이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 변하고 있었다. 예전 에 자신을 괴롭히던 눈동자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새로이 떠오 르는 눈동자들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문득, "으음..." 그는 장력에 맞은 옆구리와 장항에서 발길질을 당한 여러곳이 다 시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이 아픔 은 그가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류의 아픔이었다. 그 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무공이라는 것이구나.' 사실 그는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가 이제까지 지닌 것은 다만 전장에서 본능으로 익힌 살살능력이었을 뿐이었다. 전 장의 살상법과 무림의 무공은 분명 그 차원이 틀린 것이다. 순간 적으로 그의 살상능력도 빛을 발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기습을 하거나 일대 일의 단검대결일 때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일급고 수를 만난다면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문득, 그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반대쪽의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스르륵.... "....?"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기이한 광격을 보게 되었다. 돌로 쌓아 만들어진 벽에서 하나의 네모진 돌이 차츠미 밀려나오는 것이 아 닌가? 곧이어 그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돌은 완전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뻥 뚫린 구멍으로부터 하나의 얼굴이 들 이밀어지는 것이었다. '아니....' 그는 놀라 마지 않았었다. 구멍으로부터 튀어나온 머리는 바로 노승, 즉 공공대사인 것이다. "히히... 꼴좋다. 이놈아, 네놈이 개나발같은 무게잡고 돌아다니 는 것이 눈꼴시더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벌 주신 거다. 요 놈아." 불난데 부채질이라더니. 그러나 낙성혼은 그의 출현이 왠지 반가웠다. "뭘해? 빨리 나오지 않고. 세상천지에 어떤 보살도 그곳에서는 득도하지 못하는 법이야." 낙성혼은 망설이고 있었다. 공공대사가 눈알을 부라렸다. "그래도 저 놈이... 어서 빨리 나오지 못해!" 낙성혼은 그 말에 구멍 쪽으로 기어갔다. 그 광경에 공공대사는 고소하다는 듯 킬킬거렸다. "히히.. 다치긴 많이 다쳤구나. 꼴같지 않은 칼장난 가지고 까불 더니만... 에잉... 내가 언제고 네놈이 그 꼴날 줄 알았지." 공공대사는 손을 내밀어 낙성혼의 손목을 잡았다. 헌데 이게 어 찌된 일인가? 낙성혼은 그가 잡은 손으로부터 한가닥 열류가 전 해지더니 곧 내부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가닥의 열류가 손목을 뚫고 들어와 전신을 돌면서 아픔과 고통을 말끔히 씻어간 것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는 돌벽의 구멍으로 몸 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공공대사가 몸을 잡아당겨 눈깜짝할 사이 에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애초의 구멍은 다시 메꾸 어졌다. ...... 돌벽 뒤쪽에는 하나의 긴 통로가 있었다. 그 통로는 장구한 세월 이전에 만들어진 듯 벽에는 잔뜩 이끼가 끼어 있었으며 습기가 차 있었다. 어두침침한 통로를 공공대사를 따라 한참을 가자 곧 하나의 넓은 석실이 나왔다. 대략 삼십평 쯤 되는 석실이었다. 석실 사방 벽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 낙성혼은 어리둥절했다. 맞은편 벽 쪽에는 길다란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는 이삼십 개의 작은 납골 항아리, 그리고 위패들이 가 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위패마다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 었다. 그 이름은 하나같이 법호인 걸로 미루어보아 중들의 유골 을 모신 곳임이 분명했다. 이때였다. "이놈아. 뭘 멀뚱히 서 있느냐? 부처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공공대사의 음성은 약간 달라져 있었다. ".....?" "저기 저분들이 모두 부처님들이시다. 비록 극락을 가지 못하고 사바세계를 떠돌다 쓸쓸히 이승을 하직하신 분들이시지만 적어도 죽은 부처보다는 수백배 뛰어나신 분들이다." 이상스럽게도 공공의 말투에는 이제까지 없던 위엄과 숙연함이 서리고 있었다. 낙성혼은 자신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어 위 패들을 향해 장읍했다. 그때 공공대사는 위패에 합장하며 엄숙히 중얼거렸다. "덧없는 이승을 악귀와 같이 떠돌다 가신 보살님... 여기 소림 수호신문 제 이십육대 문주 공공이 문안드립니다." 낙성혼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소림수호신문?' 그는 비록 무림인은 아닐 지라도 명성이 자자한 소림사에 대해서 는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소림사면 소림사지, 무슨 수호 신문이라는 것이 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소림 수호신문은 과연 무엇인가? ...... 그것은 소림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일맥의 유파였다. 수호신문은 달마대사의 제 5대제자인 능가(能伽)에 의해서 탄생된다. 소림은 본래 선종으로 참선을 하고 수야을 하는 것이 본래의 직무이다. 헌데 역근세수경으로 인해 소림에 무승이 생겨나고 천하무학의 본산으로 되자 무공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소림사는 무공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따라서 문하 승려들을 강호에 내보내는 것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거기에 문제가 생긴다. 즉, 기왕 무림의 본산이면서도 구태의연한 선만 을 고집하여 정작 소림무학의 진정한 강함이 발전되지 못하고 사 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에는 때때로 위기가 닥친다. 그것은 희대의 대마두나 무림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림의 첫번째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 마다 소림은 누란의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소림은 극적으 로 부활했다. 허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소림무학, 즉 소림무승 들의 힘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와는 달랐다. 소림수호신문. 바로 단 일맥으로만 전해지는 그들의 숨어있는 힘 이 소림을 지킨 것이었다. 이것은 소림의 역대 장문인들도 모르 는 극비사항이었다. 소림 수호신문은 단 일인에게만 전해지고... 다시 그는 후대에 일인만을 선정하여 맥을 잇는다. 그들은 역근 세수경을 실전살상무학으로 이해하고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소 림사의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극비의 소림 수호신 문. 바로 당대의 수호신문의 문주가 바로 공공대사였던 것이다. ....... "따라와라." 공공대사는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까지의 익살스러복 품위없던 그의 모습과는 전연 딴 사람이 된 것 같다. 낙성혼은 경악을 금 치 못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공공이 석벽의 귀퉁이를 누르자 또 다른 석실이 나타났다. 그곳은 아담하고 깨끗한 정실로 돌로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앉거라." 낙성혼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자 공공은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깨달음이 있었느냐?" 낙성혼은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휴우... 하긴 쉽지는 않겠지." 공공대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잔잔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듣거라. 세상에는 과거를 잊지싶은 사람이 여럿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더욱 과거를 잊지 못해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과거 를 이기려면 미래를 발견해야 한다. 미래를 발견하려면 인생의 목적을 개달아야 한다." ".....!" 공공대사의 말은 한없는 위엄이 풍기고 있었고, 끝없는 현기를 담고 있었다. 낙성혼은 그저 경건한 마음으로 들을 뿐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바세곙에 묻혀 살아가는 육십 년을 인생 이라 가정한다면 그처럼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삶이란 과정에 불과한 것... 인생사란 허상일 뿐이다. 그래서 네가 평생 인 줄 알았던 것도 한바탕 꿈과도 같은 것이다. 또 꿈을 깨고 난 다음의 허탈함은 눈을 감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겪는 일이다." "....." "인생이 싫거나 덧 없으면 남에게 주어 버리면 그 뿐... 죽어 흙 한 줌 가져가지 못하고 인생을 저 홀로 또아리 틀고 숨어있다 지 나간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냐? 아이야. 네 고통이 무엇인 지, 또 너의 허무함이 어떤 원인에서인지 내 비록 모르나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야, 뒤돌아 걸어가지 말고 앞을 보아라. 세상에는 너의 손길 한번으로 피어나는 꽃이 수두룩하고, 너의 눈길 한번으로 고통을 감수하는 이들 또한 수두룩하다. 그런 너 의 손길,눈길을 가지고도 손을 묶고 눈을 감는다면 이런 죄악이 또한 악귀에 못지 않는 것.... 그 잘못은 구천지옥에 가도 씻기 어려운 것이다." 기나긴 말이었다. 낙성혼의 가슴은 부르르! 와르르! 요동치고 있었다.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낙성혼의 모습은 어느새 경건하고 엄숙하게 변해 있었다. 공공대사는 인자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백정이 할 일은 소를 잡는 것이고, 의인이 할 일은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다." ".....!" "지금 세상은 온통 난세로 뒤덮여 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이야 잡으면 그뿐이지만 잃은 사람이야 어찌 그냥 있겠느냐? 정작 피 를 토하고 고통 받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 뿐... 지금 주 원장이 나라를 세우고 기반을 다져 비록 튼튼히 보이나 이것 역 시 폭풍우 앞에 선 조각배와 같은 것, 쫓겨난 자인 원이 가만 있 을 리 없고 주원장의 독선으로 인하여 버림받은 자 또한 그냥있 을 리 없다. 하지만 더욱더 큰 문제는 주원장 자신에게 있는 것 이다." ".....!" 주원장.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낙성혼의 마음 속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공대사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눈을 감고 있다. 사물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본래 튼튼한 성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 야 하는 법, 자신의 대가 아니면 다음 대로... 또 다음 대로 쌓 다보면 언젠가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튼튼한 성을 쌓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자신의 공명심에 취해 너무나 서두르고 있다. 세상의 틀에 자신의 뜻을 맞춰 나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거 늘 자신의 틀에 세상을 맞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되는 인물을 죽이거나 버리고, 또 지금도 죽이려 하고 있는 것 이다." "......!" 낙성혼의 충격은 거듭되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대명의 황제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공 공대사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은 그렇게 또한 작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 점이 그로 하여금 강한 충격에 정신이 얼얼하게 만드 는 이유이기도 했다. "휴... 아미타불...! 그는 무림을 없애려 하고 있다." 낙성혼의 충격은 더욱 커졌다. 그랬던가...? "무림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잠재되어 있는 힘이 자신보다 강한 무림에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 거시다. 허나 그것은 진정으 로 잘못된 것이다. 본시 세상에는 음과 양이 있어 서로 공존하는 상황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무림에도 음과 양이 있다. 그래서 서 로 대치하는 것이다." "......" "그런데 주원장이 없애려고 하는 무림은 오직 한 쪽뿐이다. 그렇 다면 무림의 균형이 깨질 것이요, 세상은 더없는 혼란으로 빠질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그것을 못 느끼고 있다. 무림인이 아니 면 누구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낙성혼도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림이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의 세상이란 뜻이다. 무림이 생겨 나게 된 동기는 무공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본래 무공을 남을 해 치기 위한 수단으로 생겨났다. 그런데 해치려는 쪽이 있다면 반 드시 방어하려는 쪽이 있는 것, 그래서 무공은 점점 발달하게 되 고 급기야는 일반인과는 다른 세상으로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공공대사의 말은 낙성혼에게는 개안이었다. 그역시 무림이란 세 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별다른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해치려는 쪽과 방 어라하려는 쪽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해치려는 쪽을 막고 있는 구파일방이 무너진다면 누가 있어 그들을 막겠는가?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도 탄에 빠지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러니 아이야, 이 일은 네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낙성혼은 의아한 듯 물었다. "하지만 구대문파가 있지 않습니까?" 공공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이미 힘을 잃고 있다. 내부가 썩어 들어가는 지도 모르 고 우왕좌왕할 뿐이다. 그러니 이 구대문파를 네가 살려야 한 다." "하... 하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힘은 내가 준다." x x x 힘. 과연 공공대사는 낙성혼에게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공이 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 무공이 아니라 소림 수호신문만이 아깆고 있는 특별한 무공이었다. 역근세수경을 기본으로 하고 수 호신문만이 계승발전시켜 온 실전살상무학의 비결...과연 그것이 무엇이길래...? 낙성혼은 이날부터 공공대사에게 무공을 전수받 기 시작했다. 6장 草原의 血星은 뜨고... 中原의 巨星은 지고... 大草原. 이곳은 대원제국을 세웠던 초원민족의 땅이다. 만리장성 너머 아 득한 사막 등격리를 지나면 몽고족의 영토가 나온다. 대명제국의 탄생과 함께 장성 너머로 쫓겨난 초원민족은 또 다시 대륙을 정 복한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빠오 군(群). 수 많은 빠오들이 초원에 헤아릴 수 없이 밀집되어 있다. 그러나 무질서한 듯이 보이느 빠오의 진형은 자세히 보면 일정한 진식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와아아....!" 둥둥둥...! 둥! 둥....! 대초원에 자욱한 먼지를 휘날리며 치달리는 군마들... 전차(戰 車).... 학익진(鶴翼陣)에서 사진(蛇陣)으로 변형되어 가며 일사 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초원의 군막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는 군사들의 연무광경이 한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실로 장관을 이룬 풍경이다. 지금은 전시(戰時)도 아니건만. 그 러나 대원이 명에 쫓겨 장성 밖으로 달아난 것은 몽고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인 것이다. x x x 벌판에서 자욱한 황사를 휘날리며 훈련하는 군사들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지휘대, 그 위에는 우뚝 선 채 팔짱을 끼고 바라 보는 젊은이가 있다. "....." 그는 눈썹이 빗자루처럼 뻗치고 이마가 넓은 27,8세 가량의 우람 한 체격의 젊은이었다. 일신에는 양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 었다. 갑주와 군모를 쓰지 않았으나 그의 가슴에는 푸른 이리의 문양이 살아 도약하는 듯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불타고 있었다. 그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이따금씩 수중의 군기를 번쩍번 쩍 치켜들곤 했다. 붉은기, 푸른 기, 검은 기, 깃발이 올라갈 때 마다 군사들의 대열과 진형은 순식간에 바뀌곤 한다. 청년은 시 선을 한 시도 초원의 연무광경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이때, "장군님!" 문득 지휘대 아래에서 음성이 들렸다. 청년은 힐끗 돌아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한다. "절대 훈련 중에는 어떤 용무가 있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 았느냐?" 그의 눈에는 사나운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막 그에게 말을 던졌던 인물은 사순 가량의 부관이었따. 나이는 청년보다 많았으 나 그는 이 청년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언제나 두려워하 고 있었다. 부관은 황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그게... 지금 대원수님께서 찾으십니다." 그 말에 청년은 흠칫했다. 그리고 부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곧 가겠다고 전해라." 부관은 한숨을 쉬고 사라졌다. 청년은 깃발을 연달아 흔들었다. 그것은 훈련을 자신이 없는 동안 쉬지 말고 계속하라는 지시였 다. 그는 깃발로 앞으로 두 시진 이상의 훈련내용을 지시한 후에 야 지휘소에서 내려왔다. ...... 청년이 들어간 곳은 빠오 안이었다. 보통 빠오와는 달리 군락을 이룬 빠오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웬만한 장원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군막 안에는 여러가지 시설이 있었고, 한꺼 번에 백여명이 회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빠오 안의 탁자 에는 중원의 전도가 펼쳐져 있다. 안쪽으로 휘장이 쳐져 있고, 침상이 있었다. 침상이 있는 곳에서도 달리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산더미같은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 탁자 앞에는 한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거대한 체격의 인 물, 야율종대 바로 그였다. 그는 막 빠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장 쪽에서는 밖이 보이고 밖에는 안 이 보이지 않는다. "속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청년은 우렁찬 음성으로 말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야율종대는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들어 오너라." 청년이 휘장 안으로 들어오자 야율종대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청년은 그가 일평생 가장 존경하던 뇌륭대의 독자였 다. 뇌강륜. 야율종대의 희망은 그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대원의 대원수라는 높은 직책에 올랐으나 모든 것 을 자신의 대에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희망 은 뇌강륜이었다. "그렇다. 너를 부른 것은 임무 하나를 내리기 위해서이다." 야율종대의 말에 뇌강륜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눈은 바위라 도 녹일 듯이 강하다. 야율종대는 그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혁련노숙을 아느냐?" 혁련노숙. 청년이 알기에 그는 백련회(白蓮會)의 회주다. "예. 압니다." "중원으로 가 그를 만나라." ".....!" 중원으로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뇌강륜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중 원... 그가 얼마나 가고 싶어하던 곳인가? 그의 운명이 뼈를 묻 어야 할 곳이 바로 중원이기에. 그의 눈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중원으로 가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오직 그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 이제까지 피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눈썹이 푸르르 떨리는 것을 야율종대는 보지 못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얼마전 혁련노숙으로부터 밀사가 왔다. 지금 그의 입장은 사면 초가에 놓여 있다. 주원장이 그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 리와의 교류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서도 바라는 일이다. 어쩌면 그로인해 우리에겐 훨씬 기회가 빨리 올지도 모르는 일이 다." "....." "나는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자니 너를 보낼 수밖에 없다. 네가 대신 가서 그를 만나라." "....." "그는 어차피 우리와는 입장이 다른 위인이다. 지금은 우리의 힘 을 필요로 하고 있으나 결국은 중원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너 는 그와 만나서 우리의 취할 바를 잊지 말고 소신있게 행동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뇌강륜은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그의 마음 속은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몽고의 아들이다. 그러나 몽고를 위해서보다도 그 는 중원으로 가서 할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만나 서 해결할 일이 있는 것이다. 지금 그의 가슴은 무섭게 뛰고 있 었다. "명심해라. 너는 대원의 사신으로 가는 것이다. 그 밖의 일은 사 적인 것일 뿐이다. 너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 뇌강륜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공손히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x x x 뇌강륜. 그는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는 오랫동안 혼자서 멍하니 생 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이 눈은 사자안이다. 그는 대초원민족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어떤 야망보다도 더한 한이 있다. 그것은 그의 내부에 깊숙히 숨어 있으며, 이 세상에 서 그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야율종대조차 모르는 비밀이었다. 문득, 그는 부관을 불렀다. "혈루대(血淚隊)를 불러와라." "예?" 부관은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불러오라고 했다." 뇌강륜의 음성이 가라앉자 부관은 부르르 떨더니 밖으로 나갔다. 잠시후, 막사 안에는 6인의 인물이 무릎 꿇었다. 혈루대. 그들은 뇌강륜이 직접 훈련시킨 인물들이었다. 개개인의 능력은 능히 일 천명 군사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특수한 방법으로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도합 6인밖에 되지 않았으나 뇌강륜에게는 어떤 천군만마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수하 들이었다. 그는 혈루대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 다. "떠날 준비를 하라. 내일 아침 중원으로 떠난다." x x x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다. 낙성혼이 수호신문의 비밀석실에서 무 공을 익히기 시작한지도 어언 한 달여, 그 동안 그는 참다운 무 공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가 전장에서 익힌 것은 고작 살상법에 불과했다. 아니, 그것은 그저 소나 돼 지를 잡는 수법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소림의 역근세수경을 중 심으로 발전되어온 수호신문의 무공이 실로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근세수경의 요체는 공(空)이다. 공이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 었다. 무림에도 수많은 류파의 무공이 있었고, 그 무공들은 저마 다의 내력을 바탕으로 펼쳐 지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 나눈다면 대략 정도(正道)의 공이 있고, 사도(邪道)의 공이 있다. 정도란 기초를 튼튼히 하면서 오랜 세월을 닦아야 빛을 발한다. 허나 사 도의 공은 편격괴이함을 중시하여 익히기가 수월한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사도의 공은 그 발전 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 나 결국 무학의 원리는 만류귀원하는 데 있었다. 사도의 공은 속 성인 반면 그 한계가 있고, 정도의 공은 진보가 느린 반면 심후 함에 장기가 있는 것이다. 소림수호신문은 그 양자의 장점을 합쳤다. 일반적으로 역근세수 경은 그 진보가 무림에서 가장 느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림 의 고승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역근경을 익힌다. 그러나 역근경의 요체를 깨닫고 실용하기까지에는 무려 30년이나 40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다. 낙성혼은 그런 무공을 익히기에는 너무 늦었다. 물론 공공대사도 그에게 삼사십년 후에야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무학을 가르칠 생 각은 없었다. 그는 수호신문의 대를 이어야 할 후계자를 찾지 못 했다. 그리고 불가와는 아무런 연분도 없는 낙성혼을 택한 것이 다. 그는 극심할 정도로 혹독하게 낙성혼을 재촉했다. 낙성혼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날은 처음이었 다. 그는 전장에서 수 없는 고초를 겪었으나 무공을 익히는 것이 이렇게 어려우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온몸의 혈류가 역 행하는 고통과 혈맥이 제멋대로 뒤틀리는 고통... 그리고 근육 전혀 반대방향으로 뒤엉키는 고통을 하루에도 수십 차레나 겪어 야 했다. 공공대사는 그의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그를 지도했 다. 그럴 때의 그의 눈빛은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엄숙하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 낙성혼은 석실 바닥에서 거꾸로 서 있었다. 다리는 가부좌를 튼 자세였으나 머리를 바닥에, 다리를 공중으로 향한 기묘한 자세 다. 그런 상태로 견딘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머리가 깨 어질듯이 아팠을 뿐더러 체내의 기운이 역행하면서 일으키는 고 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 이었다. 그는 차츰 단전에서 어떤 강한 무형의 단이 형성되는 것 을 느끼고 있었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삼단전을 모두 활 용하는 것이 역근세수경의 올바른 요결이었다. 문득, 그르릉! 석 면이 밀려나가며 공공대사가 들어섰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사태가 급해졌다." ".....?" 낙성혼은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자, "생각보다 위기가 빨리 닥쳤다. 혁련노숙이 활동을 시작했다." "혁련노숙?" 낙성혼은 혁련노숙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안 색이 변했다. 공공대사는 그의 반응이야 아랑곳 없이 말을 이었 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혼란이 가까워 졌다는 뜻이 다. 아아....! 어리석은 주원장이 일을 너무 노출시켰다. 스스로 화를 초래한 것이다." "......" 낙성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주원장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빨리 네가 움직여야 한다." 낙성혼은 흠칫했다. "하지만 어떻게....?" "앉아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라." 공공대사의 손은 다짜고짜로 낙성혼의 머리위로 올라갔다. "아니... 대사님...?" 그가 깜짝 놀라자, "시끄럽다! 같이 죽고 싶으냐? 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납의 기운을 도인(導引)하라!" ".....!" 낙성혼은 대경했다. 허나 그가 뭐라고 말할 여유도 없이 이미 그 는 정수리로부터 엄청나게 뜨거운 열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 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하고, 혈관이 터질듯이 부푼 것을 느꼈다. 만일... 그가 그 기운을 제대로 이 끌어 들이지 않는다면 그 기운은 제멋대로 각혈맥으로 파고들어 가 온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공공조차도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대사님... 어찌하여 이런....'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할 수 없이 구결을 암송하면서 정수리 로부터 밀려오는 기운을 도인하기 시작했다. 혈맥 각 곳을 미친 듯이 쑤시던 기운이 그에 의해 인도되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콰르르르...! 대륙과 천공을 하나로 관류하기 위해 뇌전이 떨어졌다. 그 뇌전 은 한 인간의 일평생의 무공을 또 다른 인간에게 이전하는 사상 초유의 엄청난 희생에 의해 생성된 것이었다. ........ 낙성혼은 정신을 차렸다. 정수리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열리고 온몸이 우주의 무한 공간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뜨니 온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눈이 시원하 며, 시력이 이전보다 천배 이상 좋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공기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입자나, 바닥의 미세한 돌가루들까지 보였 다. 그는 시선을 돌리다가 한쪽 벽에 기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공공대사를 발견했다. "대.... 대사님....!"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며 다가갔다. 공공대사. 그는 한순간 에 수십년을 늙어버린 모습이었다. 얼굴의 주름살은 마치 고목나 무 껍질처럼 쭈그러들어 있었으며, 허리를 완전히 꺽여졌다. 어 디 그뿐이랴, 두 눈에서 빛히 흐려져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낙성혼은 부르르 떨면서 공공을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이전과는 달리 갈대처럼 나약하고 가벼웠다. 눈물이 솟구친다. 낙성혼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공공은 꺼져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듣거라.. 지금 천하에는 암운이 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구파일방은 내분에 휩 싸여 지리멸렬하고.... 심지어는 분란을 조장하는 불씨가 되려하 고 있다. 그러니 지금은 오직 혈겁을 막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가거라. 내 비록 우매하여 천하를 다 볼 수는 없어도 세상 이치 란 한결같은 것... 그러나 하나하나 풀어보며 언젠가는 길이 보 일 것이다." 낙성혼은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했다. 그는 이 지경이 되고서도 오직 천하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는 공공대 사의 드넓은 흉금과 뜻에 감격하고 감읍했다. 자신은 그동안 무 엇을 하였던가? 오직 황제에 의한 배신만을 생각하며 의기를 잃 고 생의 의미마저 상실한 채 스스로 암흑에 빠져 자학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을 암흑에서 건져 주고... 대신 자신을 망가 뜨린 공공대사가 아니던가? "대사님..." 낙성혼은 공공대사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허나 공공은 까칠한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자신의 사 랑스러운 손자의 머리르 쓰다듬듯이. "아이야. 슬퍼하지 마라. 인생이란 어차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이니라. 내 비록 공수거로 떠나나 나의 분신이 남아 있으니 이것 처럼 보람있는 삶이 또 어디 있겠느냐? 허허... 살아생전 큰 뜻 한번 세워보지 못하다가 지옥문이 열리려니 하였는데... 허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모두가 부처님의 크나큰 은덕일지 니...." 일대의 신승 공공대사의 음성이 잦아들고 있었다. "대사님....!" "부디... 앞으로 다시는 미명에 빠지지 말고... 밝은 길을 걸어 라...아미타불... 아미타불... 명심... 너는 소림수호신문 제 이 십칠대 문주...." "대사님!" 낙성혼은 급격히 신승의 몸에서 온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허나... 공공대사의 몸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거성은 이렇게 졌다. 그는 대륙에 한 그루의 묘목을 심어 놓고는 결국 이렇게 사라져 간 것이다. 위대한 인간.... 그는 외부에 알 려지지 않았으나 진정으로 위대한 이름을 하나 남기고 생을 마감 한 것이다. 낙성혼은 오래도록 흐느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인물. 또 한 그의 삶의 방향을 일러주고 간 거인.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 주고 아낌없이 훌훌 털고 이승을 떠난 신승. 낙성혼은 오래도록 몸을 안고 흐느꼈다. 7장 돌아온 皇宮 천하에서 가장 은밀한 곳... 중원의 역사가 생성된 이래... 가장 오래도록 교세를 유지하여 온 곳이 있다. 이름하여 백련회(白蓮會).... 백련회는 본래 페르시아 정교로부터 유래되었으나 중원에 흘러와 중원의 성교로 정착했다. 본래의 백련교의 교리는 담백하고 검약 하며 충정한 것으로 민중신앙으로 파고들어 많은 사람들을 교도 로 확보해 왔다. 그러나 정정이 바뀔 때마다 그들은 배척을 받았 다. 그것은 백련교도들이 지나치게 의를 고집하여 탐관오리나 폭 정에 항거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황조는 백련교를 이교나 사교로 몰았다. 따라서 백련교는 중원에서 사교, 또는 마교로까 지 몰려 수백 년동안 많은 오해를 받아 왔다. 그러나 한가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대원제국을 몰아내고 이 땅에 대명제국을 건설하는 데 가장 큰 힘을 쓴 이들이 바로 백련교라는 사실이다. 대명의 황제 주원장 도 한때는 백련교도가 아니었던가. 주원장은 백련교의 힘을 업고 대명을 세웠다. 헌데... 그는 변했다. 그는 황제의 보위에 오른 후 백련교를 탄 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시 백련교를 사교로 몰아 중원에서 내몰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 한 정략적 차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백련교는 그로인해 또다시 지하 깊이 숨었다. 백련교의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아직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백련교도들 가운데 서도 극히 핵심적인 인물들만이 알고 있는 극비의 사실이었다. x x x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서녘으로 피처럼 낭자하게 물들어오는 황혼을 바라보면서... 그는 활짝 열린 전각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육순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많아 보이기도 한 다. 일신에는 검박한 마의를 입고 있었다. 청수한 얼굴에 턱에는 수염을 길렀다. 수염은 반백이다. 두눈은 깊숙한 혜안이었으며, 전신에서는 은은한 기품과 위엄이 서리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전각의 규모는 컸으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평생의 그의 신조는 항상 검박한 것이었으며, 그가 이끄는 수십만의 교 도들도 검박함을 교리로 알고 따르고 있었다. 의와 충.... 그것 이 노인이 한평생 유지하여온 관념이다. 허나 지금, 그는 인생의 황혼에 서서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회의에 젖고 있는 것이다. '주원장... 네가 나를...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자고 맹세한 것이 바로 어제와 같거늘... 입장이 달라졌다고 이제와서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 치다니... 아아! 내한몸 같으면 또 모른다.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따르는 수십만의 교도들은 어쩌란 말인가!' 노인. 혁련노숙. 백련교주. 그렇다. 그는 바로 백련교의 교주다. 지금 그는 가슴을 관류하는 어떤 슬픔과 비애, 그리고 배신감에 떨고 있었다. 주원장과 손을 잡고 대륙을 질타하여 이땅에 몽고의 오랑캐를 몰아내려고 얼마 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헌데... 이제와서 결맹을 하고 피를 나 누었던 주원장, 그가 자신을 척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 니... 그것까지는 좋다고 치자. 그는 백련교 자체를 없애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니될 일...! 용납할 수 없다.' 문득 혁련노숙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안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 다. 이때였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교주님. 담적입니다." 담적이라면 평생 그를 모셔온 인물이다. "들어 오너라." 사순 가량의 중년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아뢰었다.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음." "먼저 소림에서 날아온 소식입니다. 소림에서는 연일 각파의 장 문인들의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정작 연합맹의 결맹은 지연 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각파의 이견이 있고, 또한 각자 개인적 인 점을 주장하고 있어 결맹이 순조롭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으음, 종리무연이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군." 오오! 이 무슨 소리인가? 종리무연이 잘 해내고 있다니....? 그 럼 종리무연과 백련회 간에 모종의 관련이 있단 말인가? "흠... 그럼 그들 쪽에서는....?" "예. 사람을 파견하였다는 연략을 보내왔습니다. 그동안의 경과 된 시간으로 볼 때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사료됩니다 만..." 담적의 말에 혁련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된 일이야. 마침 때를 맞추었으니... 알았다. 너는 일단 황궁 쪽의 일부터 추진해라. 그리고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 다. 우리들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뿐만 아니라 수십만 교도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교주님." 담적은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주원장 그 놈은 배은망덕..." "시끄럽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문득 혁련노숙이 일갈하는 바람에 담적은 부르르 떨더니 밖으로 나갔다. 허나 밖에서 담적의 분노와 한에 찬 장소가 들리고 있었 다. 그것을 들은 혁련노숙은 수염을 만지고 있었으나 그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허나 그는 교주답게 한숨을 쉬고 의자째 몸을 돌렸다. 창밖, 황혼이 더욱 붉게 타고 있었다. "아...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혁련노숙의 얼굴에 석양의 붉은 기운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수십만 교도를 책임지고 있는 몸이다. 절대로 나 약해져서는 안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엘 가랴...' 그의 상념은 점점 더 깊어진다. 만일, 이때 문밖에서 들려온 수 하의 보고가 아니었다면 그의 상념은 밤새 계속되었는지도 모른 다. "교주님. 새외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새외라면... "어서 모시어라." 혁련노숙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x x x 혁련노숙은 눈앞의 청년을 보고 있었다. '너무 젊군.' 그가 느낀 것은 그런 것이다. 실제로 상상하던 이상으로 기대가 어긋난 것이다. 비록 눈앞의 청년의 기도가 범상치는 않아 보였 으되 대사를 논의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다소 기분이 언짢아졌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색을 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먼길에 고생 많으셨소이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고생으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답한다. 혁련노숙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법...?' 고생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은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고 있 는 것이다. "허허... 그거야 선생이 하기에 달린 일이지요." 그 역시 의미를 담은 말을 한다. "동감입니다." 청년이 입을 연 것은 지극히 간단한 몇마디 뿐이다. 그러나 이 몇마디의 대화에서 혁련노숙의 관념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누구의 자제일까?' 그는 청년이 온 쪽의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묻는 수 밖에 없었다. "실례지만 선생, 지금 귀국에서의 선생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 요?" 그는 일부러 흘리듯이 물었따. 헌데, 그가 의도적으로 흘려 묻는만큼 빠른 대답이 왔다. "교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치지요." '허허... 점점...' "그렇다면 성함이 어찌되시는지?" "뇌강륜이라고 합니다." 순간 혁련노숙의 뇌리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따. 그를 떠 올린 순간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귀국의 사람 중 가장 존경하는 분이 계신데... 뇌륭대 장 군이라고.. 혹시 그분과는...?" "선친이십니다." 뇌강륜의 대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허나 혁련노숙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설마 했더니.. 오오... 역시 용의 자식은 용이라더니...' 이제 그의 인식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허허헛... 이거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오." "별 말씀을...." 뇌강륜은 여전히 처음 그 자세, 그 말투 그래로였다. "자... 여정에 피곤하실테니 우선 쉬는 것이 좋겠소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합시다." 그 말에 뇌강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다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의 율법을 따라야 하는 법, 그러면 그 렇게 하지요." "......!" 순간 혁련노숙은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너희들은 육체가 피곤하 면 아무 일도 못하는 모양이다마는 나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 의를 보아 너희들이 하는 식대로 따르겠다. 하는 의미가 담긴 말 이었기 때문이다. 혁련노숙은 내심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렇다고 한번 한 말을 줏어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허... 그리고 쉬시는 동안 혹 불편한 일이 있거나 다른 부탁 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구려." 그러자 뇌강륜의 눈이 번쩍 빛난다. "그렇다면 한가지 외람된 부탁을 드려도 될려는지?" "허허허.. 얼마든지." "내가 알기로는 교주님의 교도가 전 중원에 퍼져 있는 것으로 아 는 바입니다만." "그렇소만....?" "그렇다면 한 사람의 행방을 알아보는 것쯤은 쉽겠군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예. 마침 제가 그자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왔으니 보시지요." 뇌강륜은 품속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더니 두 손으로 올렸다. 어디까지나 정중한 자세요, 그러나 비굴해 보이지는 않는 모습이 었다. 혁련노숙은 그 자리에서 읽지는 않고 일단 서류를 받았다. "알겠소이다. 되든 안되든 최선을 다해 보겠소이다." 뇌강륜의 눈은 더욱 빛난ㄷ. "하하.. 겸양의 말씀입니다. 교주님의 능력이야 하늘과 땅을 통 해 있는데 되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반드시 찾을 수 있으리라 믿고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 실로 교묘한 말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부탁한다는 뜻이었으나 결 국 자세를 낮추지 않고 청부한 것이었다. 혁련노숙의 마음은 더 욱 씁쓸해질 뿐이었다. 그는 밖을 향해 말했다. "귀빈을 모시어라!" ....... 뇌강륜이 나가자 혁련노숙은 그가 건네 준 자료를 펼쳤다. 그 자 료에는 한 인물의 상세한 내력과 신상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문득 혁련노숙의 눈썹이 위로 한껏 치겨 올라간다. "으응? 낙성혼...?" 그의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x x x 황성. 이곳은 대명제국이 터를 잡은 중원의 황도 금릉. 황성은 그름의 중심부를 거대한 성역으로 만들고 있었따. 낮이면 온갖 마차와 군마들이 들라거리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곳. 대명의 권력이 행사되고 수만의 생사여탈권이 취급되는 곳이다. 홍무제 주원장 은 황궁 깊숙한 곳의 보좌에 앉아 천하를 질타하고 있다. 헌데.... 야심한 밤. 삼경이 넘었다. 이 시각이면 웬만한 곳에서 도 불이 꺼진다. 지금 황궁의 서쪽 담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그루의 나무 위에 한 사나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 낙성혼! 바로 그였따. 그는 소림을 떠나 곧장 이리로 달려온 것 이다. 공공대사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로인 해 그의 인생관은 한꺼번에 뒤바뀐 것이다. 그는 공공대사의 위 패를 만들어 모신 후 곧장 소림을 떠났다.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잠룡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공공대사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 이상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막막했다. 백련회 가 어디 있는지, 또는 원의 움직임이 어떠한지 도무지 실오라기 만한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황궁으로 오게 된 것 이다. 어찌 되었건 모든 사건의 흐름 중에서 종착지는 황궁이다. 시작 또한 황궁이었으므로. 헌데 지금 나무 위에 앉아 거대한 황성을 바라보는 낙성혼 본인 에게 문제가 생겼다. 황궁 근처에 오자마자 그의 내면에서 수많 은 상념들이 황궁잠입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과거가 없는 사람이다. 내 이름은 환무영.... 나의 출신은 소림... 나의 목적은 도탄에 빠진 중원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가 없다... 나는 환무영....' 비록 마음 속으로 수없이 외쳐대고 있었지만 그의 어두운 과거와 의 싸움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아득한 과거의 감정에 휩싸여 좌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버림받은 인물이었다. 눈동자들... 여러 쌍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황제시여... 황제시여....! 문득 신음을 흘리며 눈동자에서 빛을 잃어가도 있던 낙성혼의 머 리 속에는 한 풍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정신의 계곡 저편으로부 터 누군가가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환상이었다. 정신의 구불거리는 계곡으로부터 걸어나오는 사람... 그는 공공 대사였다. 공공대사는 온 얼굴에 고목나무 껍질같은 주름이 져 있었으며 허리를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계곡으로부터 걸어나오 더니 그를 향해 외쳤다. ".... 고연 놈! 무얼 하고 있는 거냐? 너는 소림 수호신문의 제 이십칠대문주니라!" 낙성혼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나뭇가지가 흔들려 하마터면 떨어 질 뻔했다. 한순간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나는 환무영이다!' 순간, 스파앗-----! 그는 신형을 유령처럼 황궁 안으로 날리고 있었다. 비쾌하기 짝이 없는 신법이었다. 8장 어둠 속의 그림자들 스스스... 연기인가, 환영인가? 한 가닥의 흑영은 소리없이 황궁을 가로지 르고 있었다. 낙성혼이었다. 그는 일단 황궁으로 들어선 이상 망 설임 없이 쏘아져 나갔다. 현재 그가 펼치고 있는 경공은 무림에 서 전설로 전해지는 현허답비(玄虛踏飛)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미 목표가 정해진 듯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에게 있어 황궁이 란 곳은 손바닥처럼 환하고 알고 있는 곳이다. 황궁의 경비는 삼엄하다. 만에 하나 약간의 실수라도 한다면 즉 각 수천 명의 병사들에게 포위된다. 이곳에는 군사들 뿐만 아니 라 황궁 비밀경호인들이 있고, 그들의 무공은 무림의 절정고수와 비견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스스스... 낙성혼은 현허답비술을 시전하여 처마와 처마 사이를 연기처럼 이동했다. 박쥐라 한들 그의 신법을 흉내낼 수는 없으리라. 헌 데, 그가 막 어떤 누각을 가로지르려는데 눈에 무엇인가가 비쳤 다.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질 뻔했다. 누각의 창문 안쪽, 창문을 열어 놓고 뒷짐을 진 채 하늘을 바라보는 인물. '폐...폐하....!' 그는 바로 당금의 황제, 주원장이었다. 야심한 밤에 설마하니 창 문을 열어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를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낙성혼은 간 신히 처마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의 가슴은 마구 뛰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린다. '나는 과거가 없다. 나는 환무영이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만일 주원장이 창문을 닫고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다. 그만큼 주원장의 위치는 그에게 절대적인 것이다. 잠시후.. 낙성혼은 다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온몸은 식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그는 황궁의 깊은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부터 이미 목표하고 있던 것이었다. "......" 그는 요즈음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창문을 열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바람을 쏘였으나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도로 내전으로 들어왔다. 의심이 많은 그는 한 자리를 침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은 많은 원수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 어 느 때 암살자가 잠입할 지 몰랐다. 그래서 수시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는 태사의에 깊숙히 몸을 묻었다. 이곳에는 현재 오직 그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 때문이었다. 이따금 그는 홀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했다. 그 시간에는 언제나 놀라 운 생각을 하고, 정책결정을 내린다. 그는 눈을 감았다. 언뜻 그의 용안에 그늘이 어린다. '아아... 차라리 황제가 되지 않았던들...' 주원장, 그는 바로 당금의 황제 홍무제였다. 그는 차라리 평야를 달리며 원과 싸우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득 한 옛날 일이 되고 있었다. 중원에 원을 몰아내고 대명제국을 세 우던 호탕한 세월... 그날의 추억과 환상이 그로 하여금 감상적 인 기분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명의 설립자... 천년의 반석 위에 이 나라를 올려 놓아 야 한다.' 실상, 그가 대명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 는 진정한 황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공신들과 장군들이 대명건국의 공을 지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결코 그는 혼자의 힘으로 대명을 세운 것이 아니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구파일방을 비롯한 무림의 인물들... 백련 회... 강호의 많은 기인들... 그들은 암중으로 그를 도왔으며,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대명제국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어야 했다. 그를 도왔던 모든 이들은 무엇인가 돌 아오기를 기다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그것은 권력이 었따. 그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어떤 자들은 당당 히 그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될 일이다. 천년을 이어갈 대명의 기반은 반석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혈의 보좌를 만들어야 한다. 주원장은 황제의 권위야 말로 대명제국을 천년 이상 이끌 수 있는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굳혔으 며 급기야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생전에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공을 세웠던 공신들... 장수 들... 기인들... 그는 한자루의 서슬퍼런 황제의 칼로 그들을 치 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혈의 법이었고, 황제로서의 권한이었다. 그에게는 친구도 필요없었고, 동료도 필요치 않았다. 그에게 필 요한 것은 충성스러운 신하였고, 언제나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 고 목을 바쳐야 할 자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단호히 잔인했 다. 그러나 그도 인간, 어찌 번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요즘 들 어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했 던 신하나, 장수들을 죽였을 때, 그들의 망령이 꿈속에서 나타나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주원장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추진하면 천 년을 끄덕없을 대명제국의 반석이 구축된다. 천년... 천년... 천년...' 주원장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황제라 해도 가슴 속에 자꾸만 피어 오르는 번민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이러다 나는 반드시 지옥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해 야 한다.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 자신의 후손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준다 해도 그 이전에 해결할 것은 모두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그의 후손은 결코 황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였 따. 문밖에서 한가닥 음성이 전달되었다. "폐하! 동창(東廠) 대영반이 뵙기를 요청했습니다." 황제는 빠른 속도록 위엄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태사의에 똑바로 앉으며 입을 열었다. "들라 이르라." 잠시후, 누군가가 들어와 부복했다. 그는 금의를 입었으며, 나이 는 사십 가량이었다. 위원화. 그는 황실의 특별감시조직인 동창 의 책임자다. 주원장은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해도 그만은 믿었다. 왜냐면 위원화는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환관을 중용한다. 그것은 남자를 거세했기 때문이다. 남성을 잃은 자가 야심을 품 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원장의 버릇이었다. 그래서 가 장 중요한 요직인 동창의 영반에도 환관을 쓰는 것이 대명의 전 통이 되고 있었다. "폐하...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위원화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음성은 가늘다. 그것은 그가 이미 남자의 힘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얕보면 안 된다. 황제 앞에서야 항상 땀을 흘리고 떠는 그였으나 다른 곳에 서의 그의 권력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굴 정도인 것이다. 심지 어는 황족이나 황궁의 어떤 고관대작이라도 그는 임의로 체포구 금, 또는 고문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유독 황제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꼴이 될 뿐이다. "말하라." 황제의 말은 언제나 간단했다. 위원화는 진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 원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는 힐끗 황제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나 주원장의 얼굴에는 일 말의 동요나 표정도 없었다. 언제, 어느 때나 황제는 그의 목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황제의 성격으로 볼 때 예고도 없이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고, 어느날 갑자기 역모의 누 명을 씌워 구족을 멸하던 일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잠시전... 원에 밀파한 첩자로부터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런 데 원의 차기 대원감이라는 뇌강륜이란 자가 비밀리에 그의 수하 들을 대동하고 중원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 주원장은 말이 없다. 위원화는 다시 황제의 눈치를 살핀다. 허나 그는 역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따.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다. "그... 뇌강륜이란 자는 나이는 젊으나 원에서 촉망받는 장수로 서... 지난 날 뇌륭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주원장은 흠칫한다. "뇌륭대의 아들?" 허나 그의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뇌륭대라면 원의 마지막 명장이 아니던가?' 아직도 그는 기억이 생생했다. 뇌륭대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지 사들이 쓰러졌던가? 이때 위원화는 더이상 황제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 보고했다. "신이 짐작컨대 아마도 그자는 백련회와 결탁을 도모하기 위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원장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허나 위원화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습니다. 백련회와의 연계 를 갖는 대신들이 몇 있다고 사료되며 그들 중 핵심인물도 몇 떠 올랐습니다" "....." "병부와 호부의 요직에 있는 중신들입니다. 신은 이미 특별한 감 시체계를 세워두고 있습니다." "....." "구파일방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무림은 본래 황궁과는 무관했으나 이번만은 그들의 움직임이 전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 됩니다. 그들이 숭산소림사에 모여 연합맹을 결성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주원장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쯤되면 위원화는 미칠 지경이 었다. 그는 애써 모든 정보를 수집했고, 또한 수많은 수하들의 목숨을 버리면서 이제까지 일을 추진해온 것이다. 헌데,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보고하는 데도 황제는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다. 가타부타간에... 수고했다던가, 아니면 다른 지시를 내린다던가 해야 도리가 아닌가 말이다. 실상, 이제 그의 보고는 끝난 것이다. 그는 물러가든가, 아니면 새로운 명을 받든가 해야 했다. 헌데도 주원장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다. 그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꿇어 앉아 있 는 무릎도 아프다 못해 마비되고 있었다. 이때였다. 드디어 황제 의 입이 열렸다.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나 한꺼번에 해결해야 한다." 그뿐이었다. 결국 그는 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애매한 명 을 받고도 위원화는 질식할 것만 같은 호흡이 트이는 기분이었 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의 전신은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 위원화가 사라지고 한참 동안 주원장은 침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백련회라..." 그 중얼거림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청수한 얼굴에 두 눈이 깊은 인물. 수염을 기른 사람이었다. '친구여. 기어이 자네와 내가 피를 뿌려야 하나...?' 황제의 번민. 그것은 아주 깊고 고뇌스러운 것이었다. 대륙의 주 인이 된 자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나 실은 그 누구보다 도 많은 번민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그의 고뇌를 알지 못한다. 다만 부귀영화만이 권력자에게 주어진 혜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선 황제의 고민은 일반인들의 천배만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밤은 깊어 가건만... 주원장은 잠 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x x x 자금성 내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 있다. 이곳이 황제의 직속 이며, 무한한 권력을 은밀히 행사하고 있는 동차의 본부라는 것 을 아는 자는 드물다. 전작. 어둠에 휩싸여 있으며 불빛 한 점 흘러나오지 않는 곳이다. ".....!" 낙성혼은 전각의 맞은편 지붕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이곳까지 오 는 동안 그는 수많이 매복을 발견했다. 만일 그가 공공대사로부 터 소림 수호신문의 무학을 이어받지 않았다면 그는 이곳까지 들 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는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가 목표하는 것을 취하기에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 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처음 황궁으로 들어올 때만 하여도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감에 휩쓸려 있었다. 아 마... 주원장을 만나고 그가 뭐라고 말을 하였다면 그는 그 자리 에서 무릎을 꿇었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주원장은 그를 발견 하지 못했다. 낙성혼은 지붕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야공은 검다. 그는 여러가 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여러쌍 의 눈동자들이었다. 그 눈동자들은 죽어가면서 그를 원망했다. 그는 눈동자들의 색을 잊지 못하고 그 눈동자가 하염없이 바라보 았떤 하늘의 색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을 날아 떨어져 내리 던 비둘기... 그 비둘기의 멀뚱한 눈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절망 만을 안겨 주었었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잊어야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어떤 음향이 울렸다. 그는 천이 통, 천안통을 닦았다. 그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맞은 편 동창본 부의 건물에 지붕이 열리는 소리였다. 지붕이 열리더니... 문득, 푸드드드득....! 날개소리와 함께 지붕 어디에선가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야심한 밤에 비둘기가 날다니... '저것이다.' 헌데 비둘기는 한 마리가 아니라 수백마리였다. 수백 마리의 비 둘기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일제히 야공으로 솟아오른 것이다. 모두 오백 마리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낙성혼은 바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 은 단 한마리의 비둘기일 뿐이었다. 그는 천안통을 발휘하여 비 둘기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신형을 솟구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연기처럼 솟아오른 것이다. 아무리 오백 마리의 비둘기 가운데 한마리만 진짜 전서구로 위장하고 있 어도 그것은 이미 낙성혼에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과거 그 비밀 전서구를 무수히 받아 보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의 손 에는 한 마리의 전서구가 잡혀 있었다. 그는 전서구의 발목에 묶 여 있는 서신을 떼어 읽고 있었다. 서신에는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 병무좌시랑 이원형을 철저히 감시보고하라. "병부좌시랑이라면....?" 낙성혼은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 그 글을 읽었다. 그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전서구의 다리에 서신을 원래대로 묶은 후 날려 주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신형을 날렸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황궁을 오고가는 것은 이미 문제가 아닌 것이다. 9장 惡人의 장난감 대륙은 넓다. 중원대륙의 동서남북... 대명천지의 어느 곳을 둘 러보아도 인간이 살지 않는 곳은 없는데, 황궁의 주인이자 천하 의 주인인 황제가 번민의 눈으로 달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 대륙의 또 다른 일각에서 인고와 집념의 눈으로 같은 달을 바라 보는 사나이가 있다. 뇌강륜. 그의 마음은 지금 분노와 열망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버님... 드디어 중원에 왔습니다. 그 자를 찾아서... 그자... 낙성혼....' 뇌강륜의 기억은 멀리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그가 목이 없이 돌아온 부친의 시신을 대했을 때는 반쯤 돌아버릴 심정이었 다. 그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부친을 존경했다. 부친은 그에 게 신이었고, 주인이었다. 대원의 아들이라는 인식보다도 뇌륭대 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의 삶의 기쁨이었고, 자랑이었다. 헌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뇌륭대의 목없는 시신이었다. 만일 야율종대의 만류가 없었다면 그는 그 날로 중원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율종대의 꾸지람을 듣고 그는 통곡으로 대신해 야만 했다. 야율종대는 부친 뇌륭대의 죽는 모습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부친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날 이후... 뇌강륜의 인생의 목표는 정해져 버렸다. 그는 본시 패퇴한 대원을 부활시켜 중원을 재정복하기 위해 생의 목표를 걸 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의 목표는 수정되었다. 대원제국 을 부활하는 일보다 더욱 그의 운명에 명제를 부여한 것은 바로 한 사나이에 대한 복수였다. 목표가 바뀌면 생활도 바뀐다. 전략 과 병법을 익히던 그는 당장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는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원에도 무학이라는 것이 있다. 중원에서는 그 것을 변황무학이라고 부르며, 그 기원은 천축으로부터 파생한 것 이다. 라마교로부터도 일맥이 닿고 있었으며, 중원무학과는 양상 이 확연히 틀렸다. 외문기공으로부터 편격괴이한 살상전법들... 유가술에서 출발한 기문둔법 따위... 그러나 뇌강륜이 주력한 것은 도법이었다. 그의 도법은 오직 필 살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그는 그 무학을 익히기 위해 곤륜의 라마성지에 뛰어 들었고, 그곳에서 한 명의 라마스을 만나 무학 을 익혔다. 그 무학은 너무나도 패도적이어서 일단 펼치게 되면 꼭 피를 보는 것이었다. 라마가 익힌 무학은 천축의 소뢰음사로 부터 흘러나온 악마의 무학인 것이다. 뇌강륜은 이를 갈고 있었다. 그는 도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하나 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연상하고 있었다. 그 목은 바로 낙성혼이 라는 사나이의 목이다. 수없이 많은 낙성혼의 목을 베었다. 그리 고 그는 미친듯한 광소를 터뜨리곤 하였다. 이제... 그는 원수를 찾아 중원으로 온 것이다. 현재 그는 무공의 달인이 되어 있따. 허나 그것을 아는 자는 없었다. 야율종대조차 그가 가슴 깊이 이 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선생. 교주께서 부르심이 계셨습니다." 문득 하나의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깬다. 막 낙성혼의 목을 베는 상상을 하고 있던 그의 즐거움을 깨는 소리였다. 뇌강륜의 고개 가 돌아간다. 문 밖에 한 사나이가 서있는 것이 느껴진다. 뇌강 륜의 입술이 움직였다.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따. "부르신 것이오? 청하는 것이오?" 순간 그림자진 사나이의 몸이 흠칫 떨린다. "처...청하신 것이오." "안내하시오." 비로소 뇌강륜은 일어서고 있었다. x x x 의자에 앉아있던 혁련노숙은 뇌강륜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일어 나 반겼다. "어서오시오, 선생. 그래 그동안 불편한 점이 없으셨는지 모르겠 소이다." 혁련노숙은 누구에게나 겸손했다. 그의 나이로 보나, 인생 경륜 으로 보나, 또는 영향력으로 보나.... 아무에게나 하대를 한다고 해도 뭐랄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겸양스러운 태도 를 유지해 왔다. 뇌강륜은 담담히 말한다. "마음이 불편할 따름이지요." 혁련노숙은 의아하여 묻는다. "어째서 마음이 불편하신지?" 뇌강륜은 여전히 담담히 말한다. "하루에 나라 두개 쯤 세울 수 있는 장수가 이틀을 할 일 없이 보냈으니 불편한 따름이오." 혁련노숙은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허허... 내가 그렇다면 큰 실수를 했구려. 여독에 지친 옥체를 보충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인데." 허나 뇌강륜의 어조는 여전히 똑같다. "대원의 장수는 피곤함을 모르오." 혁련노숙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그렇다면 빨리 일을 시작해야 겠구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 는 법, 우선 차 한잔 하면서 천천히 의논합시다." 그의 말이 끝나자 때를 맞춘듯이 차가 들어왔다. 뇌강륜은 흠칫 했다. 그는 백련회의 회주쯤 되면 필히 시중을 드는 사람이 아름 다운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을 벗어났 다. 차를 가지고 온 자는 한 명의 중년인이었던 것이다. 혁련노 숙은 차를 마시며 뇌강륜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약간 의 실망이 어리고 있었다. 그것은 뇌강륜의 지나치게 강직한 성 격ㄷ때문이었다. 그는 내심 혀를 차고 있었다. '쯔....기재는 기재이나 심기가 비뚤어져 있군. 호랑이인 줄 알 았는데..." 그의 머리에는 뇌륭대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보다는 뒤져...' 뇌강륜은 단숨에 차를 비워버렸다. 그의 눈빛은 강하고 안색은 굳어져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집념을 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었다. 차를 천천히 마신 후 혁련노숙은 입을 열었다. "선생. 피차 시간이 없을테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시다." 뇌강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길을 열겠소. 귀국에서는 그곳을 통해 군사를 움직이시 오." 뇌강륜은 무겁게 말한다. "조건은?" 그렇다. 이같이 엄청난 일에 아무 조건이 없을 리 없는 것이다. "본교를 차후 주교(主敎)로 인정해주시오. 그리고 절대 교의 일 은 간섭을 하지 마시오." "그것뿐이오?" 뇌강륜은 눈을 빛내며 묻는다. 혁련노숙은 허허! 웃으며 말한다. "나라를 드리는 일인데 어찌 그것뿐이겠소? 하북(河北)을 우리에 게 영지로 주시오. 그리고 우리의 영토를 국가로 예우해 달라는 것이오." 뇌강륜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것은 나로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일이오." 혁련노숙의 얼굴에 기이한 기운이 어린다. "흐흠... 내가 기억하기로는 처음 대하였을 때 분명히 나와 면담 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물론 면담할 자격은 있소. 하지만 결정할 권한은 없소. 그러니 본국에 보고 후 알려드리리다. 그러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원 은 그다지 인색하지 않다는 것이오." 혁련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소이다. 그렇다면 일단 내가 하는 일을 계속 추진하겠 소. 그러나 선생께서도 빠른 결과를 통보해 주시기 바라오." "알겠소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중요한 상담을 끝낸 뒤로 가벼운 대화를 하는 것이 순서껬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왠 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가 이틀 전 부탁한 일은...?" 혁련노숙은 눈을 가늘게 뜬다. "무슨...?" "한 사람을 찾아 달라는..." "아하! 그 말씀이구려. 그것은 이미 조사가 끝났소이다." 순간 뇌강륜의 눈에서 전광같은 빛이 번뜩였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하늘에 있소." "하늘?" 뇌강륜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오른다. "장난을 하는 것이오? 하늘에 있다니....?" "허허... 진정하시오. 하늘에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이 세상 사 람이 아니라는 뜻이외다." "그... 그럴 리가...!" 뇌강륜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실이오. 사형당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것도 모든 기록이 삭제되어 더이상은 알 수 없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추적으로 보아 그가 사형당했다는 것은 확실하오." 뇌강륜은 갑자기 발작하듯 외쳤다. "그럴 리가 없소! 그는 반드시 살이있소!" "으응? 하지만...." "아니오! 그는 살아있소!" 혁련노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선생께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무슨 까닭이라도 있소?" 뇌강륜은 이를 갈았다. "느낌이오." "느낌?" 언뜻 혁련노숙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린다.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 렇게 우기는 것이 우습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느낌... 그것은 틀림없는 육감이오! 나의 혈관 구석구석까지... 아니, 실핏줄 한올까지도 남아 있소. 그 자는 죽지 않았소. 어딘 가에 살아 있소!" "......!" 혁련노숙은 문득 살기를 느꼈다. 뇌강륜의 두 눈에서 폭사하는 빛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신음하며 말했ㄷ. "으음... 알겠소. 다시 한번 조사를 해보도록 지시하겠소." 뇌강륜은 절박하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혁련노숙의 눈이 다시 가늘어진다. "최선을 다할 것이오. 헌데 선생, 나도 사실 선생께 한가지 부탁 이 있소이다." 뇌강륜은 흠칫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교활한 작자... 결국 교환조건으로 하자는 건가?'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중원인 것이다. "말씀하십시오." "반드시 제거해야 할 사람이 있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쓰기 곤란한 점이 있어 선생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것이오." "그가 누구요?" x x x 금릉. 황도 금릉은 기라성같은 관부의 인물들이 있는 곳이다. 황제가 사는 황궁을 차치하고라도 이곳에는 고래등같은 저택이 즐비하게 처마를 맞대고 있다. 이곳의 저택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쟁쟁한 대인들이 살고 있다. 지금... 달빛이 그믐으로 어두운 데 오래전부터 저택을 바라보며 한 그루 나무 위에 앉아있는 인물이 있었다. 낙성혼이었다. 그는 수일 째 이곳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저택은 병부의 좌시 랑 이원형의 대택이다. 그의 권력은 병부의 제 이인자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정도이다. "....." 기다리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낙성혼에게 있어 기다리는 일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아마 일년을 그 자리 에 있으라고 해도 해낼 것이다. ........ 화려한 침전. 인간의 향락은 그 발전한계가 없다고 한다. 사치와 향락은 탐구 하면 할 수록 그 도를 더해가는 법이다. 지금 이 침전의 주인만 해도 그렇다. 그는 대명의 병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력 으로 사치와 향락을 마음대로 즐기고 있었다. 침전을 장식한 자 재만 해도 그렇다. 천축이나 페르시아, 남만, 색목국 등에서 날 라온 온갖 사치스런 기물들을 사용하여 꾸몄다. 침상만 해도 상 아로 된 기둥을 둘렀으며, 한꺼번에 사오인이 사용할 만큼 넓은 것이다. "....." 그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일신에는 비단으로 된 잠옷 을 입고 있었는데, 매미 날개처럼 얇아 입지 않은 것처럼 가볍 다. 이원형. 중년의 나이는 권태를 불러일으키는 나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권태를 메꾸어줄 좋은 자극제를 대하고 있었다. 15,6세나 되었을까? 한 명의 소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굴 은 막 피어오르기 직전의 난초같다.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미소녀였다. 일신에는 비단 교의를 걸쳤으나 어쩐지 어색해 보이 고 있었다. 이원형. 그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나이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것이 다. 그에게는 한 명의 정실 부인과 여덟 명의 후실들이 있으나 해가 갈수록 그는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들어 개발 (?)한 것이 나이어린 소녀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것도 반 드시 순결한 처녀여만 했다. "신발."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 마디가 떨어졌다. 순간 소녀는 몸을 떨었 다. 신발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을 구부리더니 비단신발을 벗었다. 앙증스러운 발이 드 러났다. 그녀의 발은 전족을 하여 마치 꽃잎처럼 작다. 남자가 한손에 쥘 수 있는 크기였다. 분홍빛에 가까운 발이었다. 이원형 의 눈은 그녀의 발가락에 떨어져 있다. 그의 눈에는 더욱 열기가 짙어지고 있었다. "저고리." 이번에는 상의다. 소녀는 가늘게 경련했다. 그러나 항거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저고리를 벗어나갔다. "늦다." 차가운 한 마디가 떨어진다. 목소리가 약간 짜증을 내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옷을 후다닥 벗었다. 만일 상대방의 비위 를 거슬리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 문이었다. 소녀.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이미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한 명의 관인에 의해 어떤 지하밀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본 것은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각종의 형구가 있었고, 그 형구 마다에는 발가벗기운 여인들이 도무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형태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사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대인의 명에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대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는 이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될 것 이다. 이원형의 말은 계속 떨어진다. "치마." 소녀는 이미 자신의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계처럼 옷을 벗 고 있었다. 한 치의 자존심이나 망설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백설처럼 흰 피부... 알몸을 가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장의 젖가리 개와 소녀의 비부를 가린 작은 고의 뿐인 것이다. "후후... 제법이군." 이원형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징그러운 시선으로 소녀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그는 소녀의 나신을 마 치 쓰다듬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떨어질 때마다 징그러운 뱀이 혓바닥으로 햝아대는 듯한 엄 청난 모멸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젖가리개." 드디어.. 소녀는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념하고 있었 다. 이곳에서는... 모든 걸 버려야 해. 자기 자신 하나면 또 모 른다. 허나 그녀가 대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다면 자신의 뒤에 있는 부모형재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절박 하게 외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이었다. 만일 자신이 대인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이 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공교롭게도 등청을 하느라 밖으로 나가던 이원형의 눈에 그녀가 띄임으로써 이 일이 벌어진 것이 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는 이리었다. 툭.... 젖가리개가 떨어졌다. 그리고 막 솟아로는 달덩이인 양 뽀오얀 젖가슴이 튀어나왔다. 아직 여물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은 젖가슴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젖가슴을 가리려 했으나 그 순간 이원형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급히 내렸다. 이원형의 눈은 달라 붙듯이 그녀의 작은 가슴에 떨어졌다. 바들 바들.... 오디의 열매만큼이나 작은 유실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 원형의 눈은 더욱 열기를 띠어 가고 있었다. "고의를 내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소녀는 눈을 감았다. 체념. 그녀는 두 손으로 고의를 잡았다. 그 리고 시키는대로 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금씩 고의자락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너무 빨라." 간단한 한 마디였으나 소녀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이원형 의 얼굴에는 짜증이 어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 었다. 이제 겨우 반쯤 내렸을 뿐인데 너무 빠르다니.... 사실 맞 을 매라면 빨리 맞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인 것이다. 그녀는 반쯤은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는 동작으로 고의를 내렸다. 그녀의 삼각비역을 반쯤 노출이 된 채... "멈춰."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다가 멈추었다. 소녀는 아주 우스운 꼴이 되고 있었다. 두 손으로 고의를 잡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 것이 다. 이원형의 시선은 실눈을 한 채 소녀의 치모를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보일듯 말듯... 그녀의 비부는 꼭 반만큼 노출된 것이다. 그의 눈은 게슴츠레해졌다. "다시..." 그런 말이 떨어진 것은 팔다리가 저릴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였 다. 소녀의 감긴 눈으로 눈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런 광경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형에게는 광기에 가까운 즐거움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소녀의 손이 조금씩 아 래로 고의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멈춰." 이번에는 삼각부위가 완전히 노출된 때였다. 붉은 고의와 맞붙은 검은 치모의 부분은 폭발적인 유혹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원형의 시선을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고의와 검은 치모.... 대조적인 풍경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또다시 지리할 만큼의 시간이 흘 렀다. "다시 내려." 소녀는 알몸이 되었다. 소녀는 태연히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기 다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이제는 그녀의 몸을 가려줄 물건이 없 었다. 그녀가 벗어버린 옷자락들이 발치 아래 쌓여 있을 뿐, 이 제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어서 빨리 지나가거라. 시간이여... 밤이여... 어서....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좌측으로 걸어." 또다시 이원형의 주문이 시작된 것이다. 소녀는 시키는대로 했 다. 좌측으로 걸으라 함녀 좌측으로 걷고 우측으로 가라면 우측 으로 간다. 몸을 구부리라면 구부렸으며, 똑바로 누우라면 누워 주었다. 때로는 개가 되어 방바닥을 기어다니기도 했으며.... 어 떨 때는 술잔이 되어 이원형의 목을 축여 주기도 했다. 밤은 너무도 길었다. 그 긴밤내내 소녀는 이원형의 장난감이 되 었다. 색다른 취미를 가진 이원형의 노리개가 되어 그녀의 성숙 하지 않은 몸은 밤새 혹사당하고 있었다. 결국 아침나절이 되어 서야 그녀는 최종적으로 이원형의 양물을 목욕시켜주는 욕조가 되어 긴 고통을 마감할 수 있었다. 10장 쫓고... 쫓기고 벌써 9일째.... 낙성혼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안으로 뛰어 들어서는 안된다. 그는 한번에 모든 기회를 걸머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문득,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대택의 어두운 그늘을 스치는 인 영이 있었다. 그것을 본 낙성혼은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병부좌시랑 이원형을 감시하라 는 전서를 읽었기 때문에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끈기있게 장원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헌데, 문득 낙성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어둠 속에 장원의 담장을 넘는 검은 인영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인영의 신법은 가공 할 정도로 빨랐다. 그래서 동창의 비밀위사들까지도 발견하지 못 했던 것이다. 만일 낙성혼도 주의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시작인가?' 낙성혼은 자신이 움직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그보다 빨랐다. 스스! 그의 모습은 이미 나무에서 떠나고 없었다. 흑색경장에 흑색복면을 한 자는 소리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밤고양이처럼 가벼운 신법을 소유하고 있었다. 기둥을 타고 오르 는 신법과 처마 사이의 그늘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장소를 이동해 가는 신법은 잠입술의 대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그 뒤를 따르는 낙성혼조차도 감탄할 지경이었따. 상대방은 일점 의 소리도 내지않고 있었다. 이윽고 사나이는 중심부에 있는 어 떤 전각의 지붕 속으로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상아로 된 네 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는 침상. 침상 위에는 이원 형이 누워 있었다. 그는 알몸이었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엎드 려 있는 여인도 알몸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인은 실 로 엄청난(?)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혀로 사나이의 온몸을 애무하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혀... 그 감촉을 즐기는 이원형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어리고 있었다. 헌데, '.....!' 문득 이원형의 안색이 변한다. 그의 눈은 천정으로 향했다. "나가." 여인은 흠칫한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있었다. 무슨 뜻 인지 모르는 듯. 허나 여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자신의 봉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 해한 듯 그녀의 고개는 이원형의 하체로 깊숙히 들어가고 있었 다. 그러나, "나가란 말이다." 짜증스러운 음성이 떨어졌다. 여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돼.... 이대로 쫓겨나갔다가는 여인의 인생은 끝장이 난다. 그녀는 필사 적으로 사내에게 매달렸다. 퍽! "아악!" 마침내 여인은 이원형의 발길에 채여 저만치 침상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푹 떨 군채 밖으로 나갔다. "내려오시오." 이원형은 몸을 일으켜 적당히 옷을 걸쳤다. 그의 잠옷은 가단히 입을 수 있도록 앞이 터져 있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천정이 갈 라지면서 검은 인영 하나가 떨어졌다. 바로 얼마전 장원으로 침 투해 들어왔던 흑의복면인이었다. 이원형의 얼굴에는 차가움이 어렸다. "당신네들은 도무지 예의가 없군." 복면인ㅇ의 보이지 않는 입에서는 억양이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 다. "예의 따위를 일일히 따질 시간이 우리에겐 없소."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이오?" 복면인은 차갑게 말했다. "원에서 사람이 왔소." 이원형은 놀란다.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드디어...." 복면인은 예의 음성으로 말한다. "그러니 귀하께서도 일을 시작하여야 겠소이다." 이원형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감시 당하는 기분이라..." 복면인은 차갑게 응수했다. "교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오. 그 점은 우리가 처리할테니 걱 정마시오." 이원형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렇다면 믿겠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무엇이오?" "국경수비대와 황궁의 병사를 움직이는 것이야 나의 능력으로 어 떻게든 할 수 있으나 무림만은..." 복면인은 염려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귀하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우리에게 모든 대책 이 서 있소." 이원형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무슨 대책 말이오?" "귀하. 그것은 귀하의 소관이 아니니 신경쓸 것 없소. 우리가 알 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소." "으음.. 그 말은 무척 섭섭하게 들리는구려. 같은 배를 탄 운명 인데 서로간에 비밀이라니... 그럼 나도 역시 당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구려." 복면인은 흠칫하더니 약간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한다. "아니...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오." 허나 이원형은 집요했다. "허허허... 오히려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더욱 신경이 쓰이오." 복면인은 드러난 복면사이의 두 눈이 어떤 망설임으로 노출되었 다. "허허허... 나는 이번 일에 목을 걸었소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나에게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나는 대체 누굴 믿으란 말이 오. 가뜩이나 불안하고 초조한데 무얼 믿고 따르란 말이오?" 복면인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럼... 내가 아는 것만 조금 말씀드리겠소이다. 사실 나도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소이다." "허허허... 그렇게 해준다면 성의로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에서는 구파일방이 연합맹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소." 이원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쯤이야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연판장을 손에 넣고자 하였소." "그걸 무엇에 쓰시려고?" 이원형의 눈에는 의문이 어렸다. "답답하시구려. 그만한 일에서 눈치를 못채시다니..." 두 사람은 묘한 관게였다. 함께 일을 추친하는 입장이면서 또한 서로에게 묘한 적대감과 질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허허.. 그저 가르침을 바랄 뿐이오." "음, 연판장을 넣어 황궁으로 흘릴 작정이었소. 그럼 어떤 사태 가 벌어지겠소?" 이원형의 얼굴에 어떤 감이 오는 것 같았다. "흐흠... 그래 연판장은 손에 넣었소?" "말을 끝까지 들으시오. 그런데 그 일을 추진하다가 그만 게획이 도중에서 바뀌었소." "....?" "구파일방 내에 우리의 동조자가 생긴 것이오." 이원형의 눈이 반짝 빛났다. "누구요?" 복면인의 복면이 들썩였다. 그는 신중을 기한다는 입장이었는지 전음으로 말한 것이었다. 듣고 있던 이원형의 안색이 크게 변했 다. "아니... 그가....!" 복면인은 말을 이었다. "그렇소이다. 그래서 단순히 황궁이나 무림과의 싸움을 붙이는 것보다 더 나은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오." "그 계획은 어떤 것이오?" 복면인은 다시 전음으로 말했다. 이원형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그의 눈빛은 수시로 달라지고 있었다. 이 윽고, "아아! 정말 훌륭한 게획이오. 정말 감탄했소이다." 복면인은 이원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귀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이쪽의 일이나 신경 써 주시오. 만약 한치라도 어긋난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이원형이 문득 웃었다. "허허헛... 여부가 있겠소? 내 일은 걱정마시고 당신네 일이나 잘 하시오." 복면인의 눈에 분노의 빛이 드러났다. "걱정마시오. 그럼..." 그는 애초에 나타났던 천정의 구멍을 통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이원형은 침상에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건방진 놈..." 그역시 복면인이 지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머리 속이 약간 복잡해지고 있었다. 문득 그는 입을 열었다. "곡소, 들었느냐?" 그러자 놀랍게도 바닥으로부터 한가닥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 "즉시 폐하께 보고하라. 그리고 이 말도 함께..." 이원형은 입술을 달싹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병부의 좌시랑이란 관직인인 것이다. 그런데 무림인들만이 사용하는 전음지술을 그 도 시전한 것이다. 바닥에서 한참후에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x x x 복면인은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장원을 빠져나와 야음을 타고 동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얼마후, 그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 에 올라탔다. 마차는 그가 올라타자마자 급속히 질주하기 시작했 다. 한밤중이라 길에는 행인들도 없었다. 헌데, 막 질주해 가는 마차를 소리없이 뒤따르는 인영이 있지 않 은가? 그들은 도합 다섯 명이었다. 헌데... 그들의 뒤를 다시 다 섯 명의 복면이 뒤쫓았다. 쫓고 쫓기는... 기묘한 행진이었다. 그러나 그런 형국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후 한적한 곳에 이르 자 복면인들이 앞쪽의 인영들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의 싸움은 잔랄한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 이에 사상자가 생겨났다. 무공으로 볼 대 앞서의 추적자들은 상 대가 되지 않았다. 불과 십여 초만에 복면인에 의해 다섯명의 추 적자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복면인들은 이미 계획이 세 워진 듯 시신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차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 도 모르리라. 마차의 바닥에 은밀히 또 하나의 인물이 숨어 있다 는 것을. x x x 하진자. 그는 무당파의 제 삼십대 장문인이다. 그는 무당산을 출발하여 소림사로 향하는 중이다. 이번의 소림행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중원연합무림맹이라는 획기적인 모임에 참관하기 위함이 다. 대강의 무림맹 결맹의 기안은 선 상태다. 지금 그가 무당으 로 갔다가 소림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함이었다. 무림맹의 주관처는 임시로 소림사로 정해졌다. 그는 그 점에 불 만이었다. 당금무림은 소림과 무당이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국한되어 있었다. 무림맹의 초대맹주는 소림 의 천장선사로 내정되고 있었다. 하진자는 겉으로는 반대하지 않 았으나 은연중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무당산에서 문하제자 48인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그것은 무림맹의 요원을 만들기 위함 이었다. ----- 무당 7검. 그들은 이대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이다. 그들이 펼치는 칠성검진은 무림의 일절로 소림 소나한진과 비견되는 검진이었 다. 지금 그는 북상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십여 명의 제자들은 따로 몇 조로 나누어 출발토록 했다. 그것은 외부의 눈길 집중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어찌 알았으랴? 복우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으으... 이... 이럴 수가!" 하진자의 눈은 앞으로 튀어나올 듯이 부릅 떠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따. 막 모퉁이를 틀 무렵. 하나의 나무장대에 무 엇인가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수급! 그것은 바로 사람의 목이었 다. 그것도 도인의 목이었다. "앗... 현진!" 무당칠검의 한 명이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 목은 바로 무당의 이대제자의 하나인 현진의 목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무더 기로 여러 개의 목이 바위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저쪽이다!" 문득 무당칠검의 두 명이 소리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하진자도 보았다. 숲 속에서 검은 인영이 번쩍 사라지는 것을 본 것이다. 두 명의 제자가 숲 속으로 추적해 들어간 것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악....!" "큭!" 숲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그것은 분명 무당칠검의 비명 이었다. 나머지 오검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들은 신형을 날 렸다. 허나, "무량수불....! 돌아와라!" 하진자의 명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숲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장문 인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그들은 신형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 러자 숲으로부터 한가닥 음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알고보니 무당의 도사들은 겁장이었군..." 하진자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네놈들은 누구냐?" "흐흐흐... 허명만 얻은 것이 중원의 대문파라더니... 역시 맞는 말이었군.." 바위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게 숲속으로부터 걸어나온 것은 도합 6인의 흑포괴인이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이었고, 얼굴에는 표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무량수불....! 그대들은 누구길래 본문의 제자들을 시해했는 가?" 하진자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목은 바로 각 조로 나누어 출발했던 무당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알 필요는 없다. 굳이 알고 싶다면 저승에 가서 알아보 아라." "무량... 무엄하다." "죽일 놈들...!" 무당오검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하진자도 평소 성격이 급 한 편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나서려는 것을 허용했다. 그가 손을 들자, 휙! 휘휘휙! 무당오검이 일제히 6인의 흑포인들을 공격해갔다. 헌데...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흑포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그 들이 사용하는 것은 검이었으나 중원의 검과는 모양이 틀린 괴검 으로 허리춤에 연검처럼 휘두르는 것이었다. 번쩍! 슈욱! 파파팟....! 본래 무당 칠검은 칠성검진을 이루어야 제대로 위력을 발휘한다. 헌데 검진에 구멍이 뚫린 이상 각자의 검법으로 승부를 낼 수 밖 에 없었다. 흑포인들은 괴이무쌍하고 잔랄무비한 검법을 사용하 였다. 그들의 검법은 변화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고 쾌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검은 인영과 백색의 도포가 뒤엉키는 듯 하더니, "으악!" "으아아악!" 연이어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 잠시후 하진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신이 그렇 게 믿고 있었던 무당오검이 일제히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것이다. 그들의 목은 어깨에서 분리되어 땅에 나뒹군 것이다. "크흐흐흐..." "푸후후훗...! 이것이 중원의 검법인가?" 흑포인들의 입에서는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진자는 부르르 떨 었다. 사실 무당파의 무학은 원과의 전쟁 이후 많이 끊어지고 맥 이 흐트러졌다. 그것은 그 싸움에서 수많은 고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무당의 무학이 도가제일이라고 믿 고 있었다. 헌데... 지금 그의 눈앞에 벌어진 사실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었다. "무량수불....!" 하진자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합장 불호를 외우더니 수중의 불진을 떨쳤다. 우우우웅....! 휘리리리링! 괴이한 음향과 함께 일진 선풍강기가 일어났다. 흑포인들은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는 것을 느끼며 크게 놀랐다. 그들은 하진자를 동시에 공격하기 작했으나 번번히 불진의 강기에 검이 엉뚱한 방 향으로 빗나가는 것을 느끼며 크게 놀랐다. '여...역시... 중원의 늙은 노물은 다르구나....!' 6인의 흑포인들은 계속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엉뚱한 방향으로 몸 이 쏠리면서 도리어 상호간에 검을 맞대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였다. "물러나라." 문득어디선가 한가닥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그러자 6인의 흑 포인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 하진자는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숲으로부터 서서히 걸어나 오는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일신에는 회색의 경장을 입었고, 눈 썹이 빗자루같은 청년이었다. 냉막하기가 얼음장이요, 두눈에서 는 거의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에는 한 자 루의 도를 차고 있었다. "무량수불... 그대는 누군가?" 허나 사나이는 아무 말없이 다가와 도를 뽑았다. "내 이름은 저승에 가서 물으시오." "......!" "다만 한가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그대의 목을 요구하는 자가 있었고, 나는 그의 부탁을 받았다는 것 뿐이오." 하진자의 노기는 거의 폭발직전이었다. "으음...! 무례한 젊은이로군!" 쏴아아! 그는 장문인이라는 체신도 망각하고 선공했다. 허나.. 그는 상대 방의 무공수준을 너무나 생각하지 않았다. 흑포인들을 수하로 부 릴만한 인물이라면 좀 더 신중해야 했따. 더욱이 상대방은 기회 를 놓칠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청년은 불진이 부챗살처럼 퍼지 며 청년의 전신 백팔 개 요혈을 찔러오는 순간 도를 뻗었다. 도 는 여지없이 불진을 잘라버렸다. "헉!" 불진이 가닥가닥 끊어지자 하진자는 경악했다. 동시에 불진을 끊 은 도는 그대로 그의 목으로 파고 들었다. 하진자는 일순 수많은 방어법을 생각했다. 허나... 생각은 아무리 짧아도 도가 찔러드 는 순간 만큼 짧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이 아래에서 위로 치켜오 르는 순간,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도는 그의 목을 여지없이 뚫 어버렸다. "음....!" 청년도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하진자가 전개한 현천수라십삼세의 조공 이 그의 아랫배 단전을 약간 비껴난 곳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만일... 목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에 힘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 의 단전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생겼으리라. 청년은 신음을 중얼 거렸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기는 맵구나..." 그의 안색은 희게 변해 있었다. 허나 그는 도를 수습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혁련노숙의 부탁은 이행한 셈인가?" 아! 그렇다면 그는... 뇌강륜. 바로 뇌강륜이었다. 그에 의해 중원의 양대산맥이라는 무당파의 장문인이 쓰러진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강호의 폭풍을 예고하는 시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