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영탑(無影塔) - 검궁인 著 쓰라린 인고의 나날이었다. 패자의 하늘로 영원히 숨어버렸던 은자들의 한을 과연 풀 수 있을 것인가? - 넌 내사랑이야. 널 위해서라면 날 죽일 수도 있다! 무혼처럼 살 수도 있지만.... -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으리라! 추락한 용으로 살진 않겠다! 그가... 일어섰다!!! 왠지 침울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소설! 인간의 오묘한 심리의 묘사가 백미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무영탑 제1권 -차례- 책머리에 부쳐 서막(序幕)·1 서막(序幕)·2 제1장 무영탑(無影塔)의 인연(因緣) 제2장 친구(親舊)와 적(敵) 제3장 변신(變身)을 위하여 제4장 흔들리는 청춘(靑春) 제5장 거듭되는 이별(離別) 제6장 재회(再會), 그러나...... 제7장 정해진 길로 접어들다 제8장 완성(完成)을 향하여 제9장 그림자 내기 제10장 돌풍(突風) 속으로 ■ 무영탑 책머리에 부쳐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 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을 상 상해 보자. 이것 역시 유전이라 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인간이 어찌 다람쥐와 비견될 수 있겠는가? 다람쥐는 끝없이 회전하는 쳇바퀴에 매달려 있지만 인 간은 인생의 그물을 스스로 짜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물을 성기게 짜면 작은 고기는 빠져나가게 된다. 성긴 그물이 필요할 때도 물론 있다. 큰 고기를 잡기 위해서라면. 그물은 튼튼하게 짜야 한다. 그래야 오래도록 쓸 수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은 잘 찢어진다. 고기만 걸려야 할 그물에 때로 예상치 않은 잡동사니가 걸리고, 날카로운 바위나 장애물에 걸려 찢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부는 그물 손질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출어(出漁)를 위한 그물 손질은 필수적인 것으로 어획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의 그물은 어떤 것일까? 어떤 고기를 잡을 것인가를 결정하고 있는가? 멸치를 잡으려면 그 물을 조밀하게 짜고, 농어를 잡으려면 성기되 단단하게 짜야 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물이 있다. 물려받은 그물은 너무나 잘 짜여져 있다. 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그물이기에 어부는 소중하게 사용하려 했다. 찢어지지 않게 조심 하고 또 조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암초에 걸려 찢어 지고 말았다. 그물을 손질하면서 어부는 눈물을 흘린다. 과거 어느 날인가 똑같 은 장소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젊은 어부의 모습이 떠올랐기 에. 그건 또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기에. 또 하나의 졸저를 바친다. 무협소설이 대중소설로 자리매김한 90년대가 지나가고 있다. 밀레 니엄의 역사가 새 눈금 하나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소설의 화 두가 필요한 때다. 자오정에서 검궁인 배상. ■ 무영탑 서막(序幕)·1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은 뿌리가 없는 자다. 들판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잡초들에게도 뿌리가 있게 마련이 거늘, 하물며 인간으로 태어나서 뿌리가 없다면 얼마나 허무하겠 는가? 그에게는 과거가 없다. 과거란 곧 그림자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밟고 서 있는 그림자가 자신의 것인지를 늘상 반문하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은 뿌리가 없는 자다. 들판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잡초들에게도 뿌리가 있게 마련이 거늘, 하물며 인간으로 태어나서 뿌리가 없다면 얼마나 허무하겠 는가? 그에게는 과거가 없다. 과거란 곧 그림자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밟고 서 있는 그림자가 자신의 것인지를 늘상 반문하곤 한다. 눈이 내린다. 잿빛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난분분 흩어지는 눈발은 대지를 온통 하 얗게 뒤덮어 버린다. 그 아득한 설지(雪地)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다본다. 없었다. 잃어버린, 아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그의 그림자는 전인미 답(前人未踏)의 설지 위에 흔적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림자가 사라진 땅에서 그는 붉은 통곡을 뿌린다. 당신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신의 그림자를 훔쳐갈지도 모르니까! 그는 벌써 그림자를 취하기 위해 구중(九重)의 하늘을 뚫고 솟구치고 있지 않은가? 흔히 그를 일컬어 그림자 없는 인간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스스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언제, 어 디서 태어났는지, 심지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몰랐다. 무영(無影).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장(戰場)일는지도 모른다. 조심하라! 당신이 지기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거나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칼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을 지도 모 른다. - 북궁현리(北宮玄里). 그는 한마디로 야망의 화신체(化身 )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믿 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철저히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랑조차 불신한다. 그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신의 야망의 달 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따름이다. 그런 그가 천하를 발 아래에 두려 하고 있다. 오만한 눈으로 천하 를 굽어보며 그는 광오하게 말했다. "나는 언제고 발검하기 좋도록 검자루에 손을 대고 있다. 나의 환 광검(幻光劍)이 검집을 빠져나간다면 세상의 어떤 작자도 결코 죽 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왕장후(王將侯). 그는 황실(皇室)의 친척뻘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담 스런 일일 뿐이었다. 그는 한때 황실의 친족이라는 점을 빌어 황금을 물쓰듯하기도 했 지만 따지고 보면 헛되이 낭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황 금은 그에게 있어 야망을 낚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를 두고 항간에는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어느날 갑자기 재신(財神)이 다가올 때, 황금은 네 인생을 담보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 등천륭(燈天隆). 자신에 관한 한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는 사내. 그의 모든 것은 일체 비밀에 싸여 있다. 지금까지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해 그 는 천하의 이목(耳目)을 완전히 속였으며,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속이고 살아온 위인이다. 그는 결코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손해보 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입은 화(禍)를 부른다. 혹여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다면 영원히 가슴에 품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옥의 초대장을 받을 테니까." 삼 인(三人). 그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동시대의 풍운아(風雲 兒)들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결같 이 원대한 야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야망과 더불어 성장했으며, 야망을 위해 살았고, 야망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 또한 그럴 만한 자격도 충분히 갖추고 있 었다. 그들은 각자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야망의 칼을 갈아왔 다. 그런데 그들에게 도전한 자가 있었으니....... 또 다른 야망의 화신체인가? 아니면 야망의 덧없음을 경고하기 위 해 나선 인물인가? ■ 무영탑 서막(序幕)·2 하늘과 땅. 이 두 물상(物象)은 태초이래 줄곧 공존해 왔다. 아홉 겹이나 된다는 하늘과 십팔층 무간지옥으로 일컬어지는 땅 사이에서 형성되어 온 인간계는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일궈내 왔다. - 천중천(天中天) 대라천부(大羅天府). - 지중지(地中地) 만겁종(萬 宗). 그들은 무(武)의 하늘과 땅에 비견되어 왔다. 대라천부와 만겁종이 열림으로써 무림계는 피의 윤회(輪廻)가 시 작되었으며 대혈륜(大血輪)이 구르기 시작했다. 대라천부는 영원한 정(正)의 하늘이요, 만겁종은 만사만악만겁(萬 邪萬惡萬 )의 조종(祖宗)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림계에는 기라성 같은 기인효웅들이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처럼 스쳐갔으나 그 연원을 따져보면 결국은 대라천부와 만겁종 으로부터 기인한다 할 수 있었다. 오늘도 대라천부의 후예들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검을 닦아왔으 며, 만겁종에 그 뿌리를 둔 악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 해 음모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 결국 끝없이 공전하는 선악지로(善惡之路)의 사이에서 천하를 거 머쥘 패자(覇者)는 누가 될 것인가? - 은자천(隱者天). 전설은 말한다. 은자천은 패자(敗者)의 하늘이라고. 모순되기 그지없는 이 말은 바꾸어 말해 그들이 한때 패업(覇業) 을 달성했던 최강자였다는 뜻도 될 것이다. 한때 그들은 적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전의 눈길을 위대한 하늘, 천중천 대라천부로 돌렸다. 정의 하늘이라는 대라천부는 영원한 무의 조종이다. 은자천의 패 자(覇者)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대라천부 에 도전했다. 그 결과는 너무도 어이없는 패배(敗北)로 나타났다. 그들은 처음 으로 패배의 쓴잔을 들이킨 것이다. 그들은 통한의 피눈물을 뿌리 며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리라! 다시 돌아올 때는 영원히 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 뒤로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났다. 그러나 대라천부에 패했던 당대최강의 고수들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아는 자 가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하늘 저편에 숨어버린 자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은밀히 입에서 입 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패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선가 숨어 불패기학 (不敗奇學)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 암흑마전(暗黑魔殿). 누군가 말했다. 흑과 백은 영원히 공존할 수 없다고. 구파일방(九派一 )의 영도 아래 정이 승(昇)하자 마(魔)는 한때 지하 깊이 숨어버렸다. 그러나 인간사란 새옹지마(塞翁之馬)와도 같은 법, 기나긴 평화와 정도의 방심은 화(禍)를 부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대마역(八大魔域)으로 불리는 흑도세력의 준동(蠢動)이 그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정도세력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흑도인들이 일어선 것이다. "암흑마전(暗黑魔殿)을 여노라! 천하 마도인들은 경배하라! 위선 과 가식에 찬 정도인의 피로 축제(祝祭)를 벌이리라!" 이로써 수백 년간의 무림평화는 깨졌다. 팔대마역을 주축으로 암흑마전이 일으킨 혈풍(血風)은 중원 전역 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마침내 정도가 철저히 궤멸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오만과 방종으 로 스스로를 망쳤던 정도인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투혼(鬪魂)을 불사르며 암흑마전과 대치했다. 세칭 오대가문(五大家門)을 위시하여 구파일방과 일문삼곡오방(一 門三谷五 )이 가세하면서 정도사상 최강의 연맹이 결성되었다. 생사평정사구일대전(生死坪正邪九日大戰). 이렇게 명명된 대회전 이후! 암흑마전은 패퇴하고 말았다. 굳게 뭉친 정도의 연맹에 의해 궤멸 된 그들은 무서운 저주만을 남긴 채 변방(邊防)으로, 새외(塞外) 로 달아나 버렸다. 그 일은 하나의 신화(神話)를 만들어 냈다. - 천금성(天禁城). 하늘조차 가둘 수 있다는 무림사상 최강의 정도 연맹체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천금성은 무림의 다섯 하늘, 즉 오대가문을 가신(家臣)으로 거느 렸다. 그러니 어찌 하늘을 가둔다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세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천금성이 존재하는 한 정도무림은 영 원할 것이라고. 다시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던가? 꽃은 십 일을 붉지 못하고, 권세(權勢)는 십 년을 지탱하지 못한 다는 말이 있다. 과연 천금성의 영화(榮華)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미 천금 성의 구중지처(九重之處)로부터 균열이 일기 시작했을까? 아니면 보다 뿌리깊은 독아(毒牙)가 자라나고 있지나 않을까? ■ 무영탑 1권 제1장 무영탑(無影塔)의 인연(因緣) ① 흰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한 해의 끝을 장식하듯 쏟아지 는 눈은 세상을 맑고 깨끗한 빛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거리가 온통 백색으로 도포(塗布)된 세상,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의 표정은 꽤 밝아 보였다. 휘이이잉! 이따금 살을 에이는 설풍(雪風)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했으나 겨울 풍경은 그래도 삭막하지만은 않았다. 흰눈으로 인해 사람들 의 마음이 동심(童心)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날이었다. 하남성(河南省) 개봉부(開封府). 남문 밖이다. 신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단지일(元旦之日)이 며칠 남지 않아서 인지 폭설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쁘게 입성하는 행인들 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성문으 로 향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는 하나의 탑이 세워져 있다. 전체가 혈흑색(血黑色)을 띠고 있는 거대한 구층석탑이었다. 그 탑은 잔뜩 찌푸린 회색의 하늘을 떠받친 채 눈송이를 맞고 있었 다. 무영탑(無影塔). 사람들은 그 탑을 그렇게 불렀다. 무영탑에는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담겨 있다. 한 장인(匠人)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백 일 동안 물 한 모금 마 시지 않고 탑을 쌓았다던가? 덕분에 탑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탈 진하여 그만 죽고 말았다. 사랑을 위한 희생의 대가치고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그때문인지 탑에는 이상하게도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두고 장인의 영혼이 원통한 나머지 탑의 그림자를 거두 어 가버렸다고 했다. 아무튼 무영탑은 그 이후로 선남선녀들이 사랑의 맹세를 하는 장 소로 유명해졌다. 연인들은 탑신(塔身)에 서로의 이름을 새기고 백년가약을 빌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믿 으며. 휘잉... 휘류류륭! 차디찬 설풍이 무영탑을 휘감고 분다. 칙칙한 혈흑색의 탑신은 눈 에 덮여 본래의 색채를 숨기고 있었다. "콜록, 콜록......!" 심한 기침소리와 함께 무영탑이 바라다 보이는 길목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흰눈을 맞으며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일노일소(一老一少)로, 한쪽 소매가 헐렁하게 빈 외팔이 노인과 이제 육칠 세 남짓해 보 이는 소년이었다. 노인은 일신에 낡아빠진 옷을 걸쳤으며 만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 였다. 초라한 행색에 용모마저 볼품이 없다보니 나이마저 추측하 기 힘들어 보였다. 다만 젊은이 못지않게 예리한 빛을 발하는 눈만 아니었다면 영락 없이 여느 집의 하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눈발 속에서 몹시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인은 소년을 업은 채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기침할 때마다 간간히 피가 토해져 나와 바닥의 눈밭에 점점이 붉은 얼룩을 만들 고 있었다. "추워 죽겠어.... 배도 고프고... 아복(阿福). 으응?" 소년은 꽁꽁 언 손을 입에 대고 불며 칭얼댔다. 소년의 얼굴은 추 위와 허기로 인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콜록, 콜록......! 공자... 조금만 더 가면... 곧... 성(城)에 당도......." 노인의 음성이 점차 잦아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희다 못해 잿빛 이 되어 있었다. 실상 그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기 힘든 상황인 듯했다. 문득 노인은 비틀하더니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복! 아복, 일어나! 여기서 넘어지면 어떡해? 그러게 내가 뭐랬 어? 처음부터 업히기 싫다니깐." 소년은 노인의 등에서 떨어진 채 울먹였다. 비록 파리하고 초췌하긴 했으나 소년은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영 민해 보였다. 총기가 담긴 눈망울과 다부진 입매는 제법 야무진 성품을 엿보이게 했다. 특히 소년의 눈빛은 유별났다. 눈동자는 분명 먹빛이되 기이하게 도 은은한 벽록색의 광채를 흘려내고 있었다. 이 벽안(碧眼)의 소년은 왼손에 백옥(白玉)으로 된 미인상(美人 像)을 쥐고 있었는데 행여나 놓칠세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소년 에게 있어 미인상은 목숨보다 소중한 듯했다. ② 노인은 죽은 듯이 꿈쩍도 않고 있다가 소년이 마구 몸을 흔들자 힘겹게 눈을 떴다. "공자... 이 늙은이는... 틀렸나 봅니다... 그 전에 할 말 이......." "아복......!" 소년의 안색이 더욱 파랗게 질렸다. 죽음을 알기에는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예사롭지 않은 노인의 상태를 보면서 무엇 인가를 느낀 듯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겁먹은 눈으로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복, 정말... 나 혼자 두고... 떠나려는 거야?" 노인은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언 뜻 연민의 빛이 떠올랐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숙연한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 눈물은... 아무 때나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구?" 어이없어 하는 소년에게 노인은 말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공자님은 앞으로 천하의 어느 누구 에게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콜록......!" "왜지? 그건 왜지?" 소년은 납득이 안가는 듯 눈물이 담뿍 담긴 벽안을 반짝였는데 단 순히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항변하듯 했다. 노인의 눈빛이 더욱 냉연한 빛을 띠었다. "그건... 훗날 아시게 될... 터인즉 절대 긍지를 잃으셔서는... 안됩니다. 공자께는... 능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요. 또 한 가지... 공자의 이름은 검악(劍嶽)... 이것도 잊으셔서는 안됩 니다. 한 번도 불린 적은... 없지만 분명 공자의 이름은......." 소년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알겠어. 그럼 내 성은 뭐야?"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 용서하십시오, 콜록! 그리 고... 꼭... 간직하셔야 합니다. 백옥미인상(白玉美人像)이 있어 야만... 공자께선 어머님을 만나실 수가......." "어머님......." 소년 검악의 눈에 핑하고 물기가 돌았다.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했 던 어휘가 생경하기도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다. 그는 모친이 없이 자랐으므로 어머니란 말을 입에 담아본 경험이 없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었고, 언젠가 만날 날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휘잉... 휘이잉....... 눈보라가 차츰 노소를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관도(官道)에서 조금 떨어진 곳, 눈 속에서 얼어가고 있는 그들에 게 관심을 두는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설사 본 사람들이 있다 해도 모두 냉정하게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 인심을 노인은 한탄으로 대신했다. "한때는... 이 늙은이도... 천하를 호령하던... 대장군(大將軍)이 었습니다........ 이 몸의 호령 한마디면... 콜록, 콜록......." 그의 기침은 강도를 더해갔고 각혈도 아까보다 심각해져 바닥을 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흰눈 위에 쏟아진 핏물이 선연한 빛 깔의 대조로 인해 묘한 아름다움을 일궈냈다. "공자......." 노인은 못내 착잡한 표정으로 소년의 손을 잡았다. 가슴의 기복이 거세게 변하고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것을 그 자신도 느낀 것일까? 애써 올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지만 노인은 눈길을 소 년에게서 조금도 떼려하지 않았다. 그는 안간힘을 쓰듯 입술을 움 직여 생애의 마지막 말을 토해내기에 이르렀다. "아아... 공자는 위대한 후예... 부디... 부디......." "아복, 그만 말해! 그깟 것이 다 뭐야?" 소년이 울먹이며 노인의 말을 막았다. 노인이 말할 때마다 피가 토해져 나오니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공자... 부디... 꿋꿋하게... 사셔야... 검악 공자......." 툭! 노인의 고개가 모로 꺾여 눈 위에 처박혔다. 동시에 소년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외팔도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복......? 아복? 아복!" 소년은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노인을 흔들 어 대다가 마침내는 와락 시신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소년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점점 더 거세지는 눈보라 속에서 점차 잦아 들어갔다. 너무나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탓으로 마침내 소년도 의식이 가물거리며 노인의 시신 위로 쓰러져버린 것이다. 위이이잉....... 눈보라는 세상을 온통 백설천지로 가두어버리고 있었다. ③ 염라대왕의 명부(名簿)에 오르기에는 너무나 어렸음인가? "......!" 소년은 반짝 눈을 떴다.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한 쌍의 아 름다운 눈이었다. 그것도 선량하고 해맑은 소녀의 눈이었다. 여덟 살? 아니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 는 그가 눈을 뜨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누구지?" "너?" 소녀는 입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호호... 꼬마야, 누님이라 불러. 이래봬도 너에 비하면 나는 어 른이니까." 소년은 피식 웃었다. "왜 웃니?" "네가 어른이라면 나는 할아버지니까." "뭐? 호호호! 말도 안돼." 소녀는 까르르 웃더니 곧 심각하게 물었다. "너, 그래도 참 다행이야." "뭐가?" "난 또 네가 깨어나자마자 울면 어쩌나 했지. 네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거든." 소년은 비로소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의 천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주먹으로 눈가를 슥 문지르며 애써 미소지어 보였다. "난 울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난 울면 안 되는 사람이랬거든." "네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응." 소년은 짧게 대답한 후 은은한 벽광이 감도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침침한 곳으로 사면의 벽이 돌벽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긴 어디지?" 소녀는 불현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무영탑 속이야." "무영탑?" "무영탑엔 아름다운 전설이 있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곤 하지." "어떤 전설인데?" "음, 아주 슬픈 얘기야." 소녀는 자못 감상에 젖어 무영탑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말하는 그 녀나, 듣고 있는 소년이나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물론 알 리 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특히 소녀는 감성이 풍부한지 말하면서 커다란 눈에 뿌연 습막을 보였다. "어때, 정말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지?" 얘기를 마친 소녀가 물었다. "아니." "응? 어째서?" 소녀는 의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은 내가 더 슬프니까." 소년의 시선은 벌써 소녀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들에게 서 약간 떨어진 벽쪽에 등이 굽은 장님노인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말채찍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부(馬夫) 같았으나 노인의 얼굴은 마치 나무처럼 표정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 었다. 노인은 모닥불 옆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동도 않고 있었 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도 하지. 장님노인이 어떻게 마부가 되었을까? 앞이 안보여 도 말을 몰 수 있을까?' 이때 소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난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어." "후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내가 내색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내 가 슬프다는 걸 모를 테니까." 소녀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너 이제 보니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후후......." 소년은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듯 자조 의 느낌이 묻어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년은 또래보다도 훨씬 조 숙한 느낌을 주었다. "얘, 그런데 어떻게 눈 속에 쓰러지게 됐니?" 소녀의 질문에 소년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는 대답 대신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피이! 내 말은 무시하네." 소녀는 토라지는 시늉을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난 천리단옥(千里壇玉)이야. 너는?" "나는......."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 짧게 대답했다. "무영(無影)." 천리단옥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무영? 이상한 이름이네." "응. 나는 본래 이름이 없어. 방금 생각한 건데 이곳이 무영탑이 라니 그냥 무영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아, 내친 김에 성도 지어 야겠어. 하늘 천자를 써 천무영이라 하면 어떨까?" "어머! 기가 막혀." 천리단옥은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잠시 소년을 노려보았 으나 소년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하여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천무영(天無影). 운명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일곱 살 짜리 소년이 스스로 지은 이름. 어쩌면 그의 운명을 스스 로 정한 것일지도 몰랐다. 소년 천무영은 비로소 인사말을 했다. "고마워, 네가 날 몰라라 했다면 난 아마 죽었을 거야." 소녀도 생긋 웃었다. "응, 사실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④ 천리단옥의 정성 어린 간호 덕분에 천무영은 한 나절이 지나자 어 느 정도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었다. 장님노인은 모닥불을 이용 해 뜨거운 죽을 끓여 그의 원기회복을 도와주었다. 천무영은 아복의 죽음에 한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서서히 충 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천리단옥이 따뜻한 시선으로 지 켜보아 주어서인지 그의 메마른 가슴에서 조금씩 훈기가 생기고 있었다. 눈이 그치자 소년소녀는 무영탑을 빠져나왔다. 무영탑은 내부가 비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 지 않았다. 북쪽에 면한 바닥의 석판을 들추면 무영탑의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영탑은 위로 오를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석실이 있었는데 석 실은 늘 비어 있었다. "야아, 멋지다!" "호호호! 온 세상이 모두 은가루로 덮힌 것 같아." 아이들은 천진하다. 눈이 그친 세상은 온통 백설천지였다. 하얗게 변한 들판을 천무영 과 천리단옥은 즐겁게 뛰어 놀았다. 어찌나 정신없이 놀았는지 밤 이 오는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 달이 뜨자 그들은 손을 마주 잡은 채 무영탑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연인들이 하듯 탑돌이를 하고 놀았다. 장차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그 순간에 싹이 텄다는 것을 정 작 나이어린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가야 해." 천리단옥은 장님노인의 재촉으로 마차에 오르며 서운한 듯 말했 다. "그래... 가야지." 천무영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 다. 단지 마차에 오른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을 뿐이었다. 천리단옥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사이에 그들은 서로에게 정이 듬뿍 들어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똑 같이 이별의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 "어떻게... 만나지?" 천리단옥은 작은 손가락으로 무영탑을 가리켰다. "여기 무영탑에서." 천리단옥의 그 한마디를 끝으로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차 속에서 고개를 내밀어 천무영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단옥......." 천무영은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입 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록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 순간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너......!" 그는 작은 점으로 화한 마차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중얼거렸다. "내가 어른이 되면... 널 반드시 색시로 삼을 거야. 그때까지 기 다려야 해. 알겠지?" ⑤ 세월여류(歲月如流). 천무영과 천리단옥은 그날 이후로도 꾸준히 만날 수 있었다. 천무영은 줄곧 개봉부를 떠나지 않았다. 아복이 죽은 후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천리단옥 때문이었 다. 그는 천애고아(天涯孤兒)나 다름없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혼자 사 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개봉부의 저자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해가며 생계를 연명했 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수시로 무영탑에서 천리단옥을 만났다. 무영탑은 두 사람의 만남의 장소였다. 개봉부의 선남선녀들처럼, 미래를 언약하는 연인들처럼 그들은 무영탑에서 만나 서로의 삶과 꿈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즐거웠다. 두 사람의 마음을 연결시켜준 무영탑이었기에, 어느 날인가 그들 은 탑신에 서로의 이름을 나란히 새겨놓기까지 했다. <천무영(天無影)> <천리단옥(千里壇玉)> 아직은 사랑의 언약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치기 어린 서툰 서체에는 이미 이성(異性)을 향한 설레임 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세월은 물처럼 흘러갔다. 그동안 두 사람이 무영탑에서 만난 회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 았다. 차츰 어린아이의 티를 벗어가면서부터 그들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싹터가고 있었다. 그것은 무영탑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한 쌍의 신비한 눈이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세월이 가져다 준 연륜과 오뇌를 담고 있는 듯한 그 눈은 무영탑의 구층 꼭대기 에서 두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끈질기게 그들을 좇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는지 는 알 수 없었다. 그 눈은 천리단옥보다 천무영에게 집요하게 따 라붙고 있었다. ⑥ 천무영은 어느덧 십오 세가 되었다. 과거에 비해서는 몸과 마음이 훌쩍 성장했으나 아직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다. 그런데 가혹한 운명의 시련이 그를 혹독하 게 몰아쳤다. 퍽! 퍽! 퍽......!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무영탑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주먹이 까 져 피가 배어 나왔으나 그는 터질 것 같은 분노로 인해 조금도 아 픔을 느끼지 못했다. "왜... 만날 수 없다는 거야? 무엇 때문에!" 천무영은 아득한 절망을 느끼며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에 대고, 땅에 대고, 심지어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던 신(神)에게 조차 항의했다.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절규를 토했다. "단옥, 넌 내 거야! 애초부터 내 여자였어! 그런데 어째서 만나선 안 된다는 거지?" 천무영은 무영탑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다. 천리단옥과 함께 했 던 나날들이 꿈결인 듯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 무영... 넌 너무도 신비한 눈을 가졌어. 네 눈을 보면 마치 벽 해(碧海)에 잠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천리단옥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종알거리곤 했었다. 한동 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까르 르! 웃음을 터뜨리며 달아나곤 했었다. - 단옥, 넌 내 거야. 넌... 이 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아름답고 좋은 여자야. 두고 봐. 장차 넌 내 색시가 될 테니까! 천무영은 달아나는 천리단옥의 뒤를 쫓아가며 그렇게 외치곤 했었 다. 그것은 그의 꿈이었고, 희망이었고, 인생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이었다. 무영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통고가 전해진 것은! 열일곱 꽃다운 처녀로 성장한 그녀의 모습 대신 장님노인이 혼자 나타나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갔던 것이다. - 공자, 소꿉놀이는 그만 끝내도록 하시오. 아가씨에게는 정혼자 (定婚者)가 있소. 쿵! 천무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장님노 인의 말은 그의 가슴에 못을 박아버렸다. 그날 이후로 천리단옥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단옥! 넌... 나타날 거야, 날 보러 반드시 이곳 에 올 거야!' 천무영은 매일같이 무영탑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수없 이 그녀가 나타날 것이라 믿고 또 믿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천리단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육 개월이 지나도 그녀는 편지 한 장, 소식 한 번 전해오지 않았다. 천무영은 말이 없어졌다. 그는 텅 빈 무영탑 속에 홀로 들어가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 속에서 그는 고독과 자기혐오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목각인형(木刻人形)을 깎기 시작했 다. 인형은 다름 아닌 천리단옥이었다. 사각사각......! 나무조각이 그의 손 안에서 깎여져 나가며 차츰 천리단옥의 모습 으로 변해갔다. 목각인형이 완성되면 그는 다시 처음부터 나무를 깎았다. 목각인 형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열 개가 되었으나... 천리단옥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인형을 깎는 천무영의 눈에서는 점점 더 강한 집념만 타오를 뿐이었다. - 단옥! 너는 내 여자다. 절대로 널 포기하지 않는다. 기다리마! 목각인형이 천 개가 될 때까지 널 기다릴 것이다! ⑦ 토지묘(土地廟). 개봉부의 서문 밖에는 퇴락할 대로 퇴락하여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묘당이 한 채 있었다. 말이 묘당이지 오래 전에 사람들의 발 길이 끊긴 곳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다. 원단(元旦)을 보름 앞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해를 맞이하 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때다.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눈이 내린다. 올해도 개봉부 전체가 눈에 덮혀 멀리 보이는 대운산(台雲山)의 고봉까지도 온통 백설천지였다. 토지묘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화(香火)가 끊긴 지 오래이건만 어쩐 일인지 연기가 피어올랐 다. 묘당 안은 겉모양과 다름없이 을씨년스러웠다. 바닥에는 오랫동안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탓에 먼지가 두텁게 앉아 있는 데다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에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다. 천장으로부터 철사가 내려와 있고, 그 끝에는 무쇠솥이 걸려 있었 다. 모닥불이 솥 안의 음식물을 끓게 하고 있었다. 모닥불 옆. 일신에 검박한 마의(麻衣)를 걸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니, 소 년이라기에는 성숙했고, 그렇다고 청년이라기에는 아직은 어린 인 물이었다. 십팔구 세쯤 되어보였다. 타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며 일렁일 때마다 그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진 다. 무척이나 단아한 용모였으나 고독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얼굴 이었다. 그의 눈은 먹빛이었으나 은은한 벽광을 띠고 있었다. 사각, 사각......! 마의소년은 작은 손칼로 나무조각을 깎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몹시 정교했다. 한 켜씩 나무가 깎여져 나가다 보 니 점차 목인형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여인의 입상(立像)이었다. 그것도 살아 숨쉬는 듯 아름다운 여인상이었다. 툭! 문득 손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 완성된 여인상을 넋 잃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것으로써 구백구십 개째.......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 가? 정작 너는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데......." 여인상은 바로 천리단옥이었다. 마의소년은 천무영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신단을 모시고 있던 벽으로 다가갔다. 휘장 을 휙 걷자 놀라운 광경이 드러났다. 휘장 안쪽에 수백 개, 아니 천여 개에 달하는 목상(木像)들이 가 지런히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결같이 천리단옥의 입상(立像)이었다. "후후......." 천무영은 공허한 웃음을 흘리며 막 완성한 여인상을 맨 끝에 올려 놓았다. 이로써 여인상은 구백구십 개가 되었다. 천무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단옥, 천 개의 목상이 완성되는 날까지 널 만날 수 없다면 이곳 을 떠날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 머지 않은 것 같구나." 그는 복잡한 감회에 눈빛이 흔들렸다. "삼 년... 내게는 긴 나날이었다. 그동안 단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그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그는 무영탑에서 천리단옥에 의해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지금까 지 줄곧 혼자였다. 지난 십여 년간 홀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물론 가끔 천리단옥을 만날 수는 있었으나 두 사람의 만남은 지극 히 짧았었다. "후후... 혼자 사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어." 그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천무영은 휘장을 본래대로 해 놓고는 돌아섰다. 솥뚜껑을 열고 음식이 익은 것은 확인한 그는 아무 의미없이 그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사하기 시작했다. 휘이잉! 토지묘 밖에서는 엄동의 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강추위가 엄습한 해였다. 겨울나기는 늘 힘들었다. 추운 만큼 옷을 두텁게 입어야 하듯 외 로움도 그만큼 더해지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번 겨울이 마지막 겨울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묘당 한쪽에 양식을 쌓아 두고 있었다. 한겨울을 보내기 위 한 것이었다. 토지묘 뒷편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었고, 몇 마리의 닭과 가 축도 기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혼자 살아가기 위한 터전이었 다. '세상은 참으로 이상한 것...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하여 그토록 사는 양식이 다르단 말인가?' 그는 개봉부 외곽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언제나 주린 배를 움켜쥔 채 퀭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된 셈인지 매일같이 뼈가 휘도록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끼니조차 마 련하기가 힘든 것이다. '모두들 너무 선량한 탓이다.' 천무영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내에 사는 부유한 상인들과 관리들 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아마 그들의 하룻밤 유흥비만으로도 가난한 자들은 일 년을 배불 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꺼져가는 모닥불에 나무토막을 던졌다. 화르륵! 불꽃이 확 일어났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그는 품속에서 두 권의 책자를 꺼냈다. 한 권은 황석공현기보(黃石公玄機譜)였으며, 또 한 권은 영대비범서 (靈台秘范書)란 책으로 난해하기 그지없는 도학서(道學書)였다. "오늘은 장(藏) 어른을 찾아가 책을 바꿔와야겠구나." 천무영의 벽안이 유난히 빛을 발했다. "만장서가(萬藏書架)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까지도 까막 눈으로 살고 있었겠지." 그는 몸을 일으키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는 이상한 매력이 담겨 있었다. 덜컹! 휘이이잉! 묘당의 문을 열자 눈보라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좋군. 오늘따라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져......." ■ 무영탑 1권 제2장 친구(親舊)와 적(敵) ① 개봉성내의 풍경은 성밖과는 대조적이었다. 원단이 다가오자 거리에는 인파가 넘쳤다. 때가 때이니만큼 사람 들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는 듯했다. 눈보라를 맞고 까르르 웃으며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활기가 느껴졌다. 거리의 상점이나 주루에는 손님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 해 상점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번져 있었다. 이따금 화려한 마차가 거리를 달렸고, 칼을 찬 채 어깨를 들먹이 며 지나가는 무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천무영은 성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후후!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한쪽에서는 허기에 허덕이는가 하 면 한쪽에서는 배를 두드리며 웃고 있으니.......' 천무영은 상념이 많았다. 그렇다고 불만으로 인해 세상을 비뚤게 보지는 않았다. 그는 모순 된 세상구조에 대해 아쉬워할 뿐이었다. "......!" 문득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인파 속에서 한 사나이가 부유해 보이는 뚱보상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진사유(陣斯有)가 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나이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사나이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상인의 허리춤으 로 파고들고 있었다. 막 손을 빼내려는 순간, 천무영의 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엇?" 사나이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 바람에 세모꼴인 그의 눈 이 사팔뜨기가 되었고, 눈썹은 역팔자가 되고 말았다. "너... 또 이 사부의 일을 방해할 셈이냐?" 사나이는 만면에 노기를 띤 채 외쳤다. "어? 무슨 일이오?" 느닷없는 고함에 뚱보상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나이를 돌아 다보았다. "아, 아무 것도 아니오. 빌어먹을!" 사나이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뚱보상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 를 바라보다 뒤뚱거리며 갈길로 가버렸다. 하마터면 품안의 은자를 모조리 털릴 뻔했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 게 모르는 듯했다. 천무영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사나이의 손목을 놓아주었 다. "당신은 아직 손을 씻지 못했소?" 사나이, 진사유는 눈알을 부라렸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봤나? 기껏 기술을 가르쳐 주었더니 사부를 배신하고도 모자라 훼방을 놓아?" 천무영은 담담히 말했다. "왜, 억울하오?" "놈! 다 된 밥에 코 빠뜨려 놓고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난 단지 당신이 그 좋은 기술로 인해 신세 망칠까봐 우려했을 뿐 이오." 진사유는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난들 이 짓이 하고 싶어 하는 줄 아느냐? 목구멍에 풀 칠을 하자면 이 짓밖에 할 게 더 있느냐?" 천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되오. 당신이 정말로 호구지책이 막연하다면 나와 함께 지낼 수도 있었소." "빌어먹을! 대체 너란 놈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진사유는 시종 욕설로 일관하고 있었으나 악의를 드러내지는 않았 다. 천무영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듯 연신 웃을 뿐이었다. "자, 진사유, 난 갈 길이 바빠 이만 가 보겠소." "ㅌ! 가든지 말든지." 진사유가 가래침을 뱉어냈다. 천무영은 빙긋 웃어보인 후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진형을 만난 지도 사 년이나 흘렀구나. 그는 날 작은 도둑으로 만들려고 소매치기 기술을 가르쳐 주었었지.' 혼잡한 거리를 가로지르며 천무영은 상념을 이어갔다. '하지만 당신은 실패했소. 난 한 번도 그 기술을 써먹지 않았고 당신은 번번이 나로 인해 영업방해를 받았으니 말이오.' 천무영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낸 후 생각을 이었다. '사실 당신의 그 기술은 너무나 탁월해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언젠가는 크게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오.' 이때 그의 귓전으로 걸걸한 음성이 울려왔다. "자아! 남만산(南蠻産) 묘안옥(苗眼玉)에 천축산(天竺産) 비단이 오! 세상에 없는 것만 빼고 모두 다 있소! 어서 와 구경해 보시 오! 말만 잘하면 거저 줄 수도 있소!" 저자에서 우렁찬 음성으로 호객 행위를 하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그로 인해 정작 상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무영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울타리를 헤치고 들어가니 오만 가지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선전하는 오척 단구의 난쟁이 상인이 보였다. 개봉부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자가 없다. 그는 점포 하나 갖고 있지 않았으나 아는 사람은 그가 거상(巨商) 에 버금가는 장사꾼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점포를 갖지 않는 것이오, 둘째는 점원을 쓰지 않는 것이 다. 셋째는 어떤 상거래든 두 배 이상은 남긴다는 것이었다. 이런 원칙으로 인해 그는 막대한 부(富)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푼도 쓰지 않았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자에 나와 노점를 벌였다. 그는 비록 난쟁이였으나 여러 나라의 언어에 능통했다. 서하국(西霞國)을 비롯하여 왜국(矮國), 천축(天竺), 남만(南蠻), 색목국(色目國)의 말까지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때문에 그가 취급하는 물품은 희귀한 것들이 대부분으로 비싼 값 을 받고 팔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모은 재산이 엄청나 개봉제일의 부자라고도 했 다.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② 그의 이름은 금노적(金老摘)이었다. 천무영이 그를 알게 된 것은 불과 일 년 전이었다. 당시 금노적은 골동품을 하나 사들였는데 진품(眞品)인지의 여부 를 가리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마침 그의 앞을 지나치던 천무영이 그것이 남송(南宋) 때 황제가 쓰던 어배(御杯)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친 해지게 되었다. 남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는 금노적이었다. 그러나 유독 천무영에게만은 예외였다. 철저한 구두쇠인 그가 천 무영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었다. "금형, 장사는 어떻소?" 천무영이 인파 사이에서 모습을 보이며 묻자, "무영이구나!" 금노적은 어린애처럼 반색을 하더니 급히 물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무엇인가를 찾았다. "잠깐 기다려라, 선물이 있다." "선물?" 금노적은 물품 아래에서 한 자루의 낡아빠진 섭선(攝扇)을 꺼내더 니 불쑥 내밀었다. "가져가라. 신년 선물이다." 천무영은 얼떨결에 섭선을 받기는 했으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 다. "이 엄동설한에 무슨......?"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섭선을 받아쥐자 따뜻한 기운이 금세 손을 통해 전해 들어와 온몸에 훈훈히 번져간 것이다. 그는 섭선을 잠시 살펴본 후 안색이 변했다. '이건...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든 부채가 아닌가? 겨울에는 온기를, 여름에는 청량한 기운을 전해준다는 희세의 보물이 아닌 가?' 천무영은 그만 콧등이 시큰해져 금노적을 바라보았다. '천하의 수전노가 이런 보물을 내놓다니.......' 누가 봐도 그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장사에 혈안이 된 금노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금노적은 벌써 고개를 돌려 호객에 열중이었다. 그는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그냥 지나치면 천 년을 두고 후회할 거요! 여기 있는 물건들 은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오! 천상의 선녀가 사용하던 빗에 진시황이 베고 자던 베개... 용왕님이 마시던 술잔... 없는 게 없소이다! 자자, 어서 가져가시오! 신년운수 대통하는 부적(符 籍)도 있소!" '고맙소, 금형.......' 천무영은 금노적이 준 섭선을 꾹 움켜쥔 채 돌아섰다. ③ 땅! 땅! 땅......!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대장간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보통 대장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오직 병기(兵器)만을 생산했다. 이 병기점은 개봉부에서 명물로 꼽히는 곳이기도 했다. 개봉부중 의 관병들의 병기는 모두가 이곳에서 생산되었으며, 부호나 관리 들이 특별주문하는 패검(佩劍)도 모두가 이곳에서 만든 것이었다. "......." 천무영의 발길은 병기점 앞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한겨울임에도 웃통을 벗어젖힌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벌건 쇠붙이 를 두드리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비록 늙었으나 오랜 세월 쇠를 다루어서인지 근육이 잘 발 달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장인(匠人)만이 지닌 날카로운 눈빛이 있었다. 그는 절 대 함부로 쇠를 다루지 않는다. 하루에 한 자루의 검을 만들어도 정성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혼(婚)을 담아왔다. 천무영은 노인이 잠시 허리를 펼 때를 기다려 인사를 건넸다. "오랫만이오. 철노인(鐵老人), 사람이 온 것도 모르고 신검(神劍) 제작에 빠져 있는 모습은 여전하군요?" "음?"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달아오른 쇠처럼 벌건 눈이 천무영을 직시했다. 오순이 훨씬 넘었 으나 그의 눈은 두 개의 불덩이였다. 이내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천공자였군." "그렇습니다. 철노인. 진척은 있나요?"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쯧, 틀린 것 같소, 아무래도 이 철자구(鐵子仇)는 신검을 벼를 재능이 없는 것 같네." 천무영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철노인.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소. 내가 보기에 철 노인은 반드시 신검을 벼를 수 있습니다." 철자구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지요." 철자구는 그의 말에 크게 용기를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망치를 불끈 움켜쥐며 힘차게 말했다. "고맙네, 천공자. 내 사력을 다해 보겠네." 땅! 불꽃이 튕겨 오르는 것을 보며 천무영은 병기점을 등졌다. 그의 뒷모습이 오늘만큼은 그다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성내에서 만나는 각별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있었기에 그는 지금까지 고독한 생활을 견뎌내었는 지도 몰랐다. 소매치기 진사유, 장사꾼 금노적, 병기점의 장인 철자구를 차례로 만난 그는 네번째 친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④ 금모란(金牡丹). 그녀는 개봉제일의 기녀(妓女)다. 그녀가 있는 곳은 천일야화원 (千日夜花院)으로 개봉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루였다. 서문통에서 중문로로 가다보면 개봉부중(開封府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자리잡은 곳이었다. 풍류를 웬만큼 아는 자라면 천일야화원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왜 냐면 그곳에서는 지상 최고의 환락을 즐길 수 있으며 무수히 많은 미녀들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미녀 중에서도 으뜸은 금모란이었다. 천일야화원의 제일화(第一花)인 그녀를 천무영이 알게 된 것은 일 년 전이었다. 금모란은 기예(技藝)를 사랑했다. 시(詩), 서(書), 화(畵), 음(音), 가(歌), 무(舞), 기(棋) 등.... 모든 예술 방면에 재능을 갖추고 있어 내로라하는 풍류객들도 그 녀에게는 두 손을 들 정도였다. 천무영은 개봉부 북쪽을 흐르는 탄강(彈江)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 다. 장강의 지류인 그곳에서 금모란이 선상(船上)에서 타는 금음 (琴音)에 끌린 천무영은 화답(和答)으로 소(簫)를 불었는데 그것 이 인연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세상사를 초월하여 갖가 지 기예와 학문에 대한 토론을 나누는 지기가 된 것이다. "오늘도 천일야화원은 붐비는군." 천무영은 오색등롱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천일야화원의 문루를 지 나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란을 만난 지도 한 달이 넘었구나.' 천무영의 얼굴에 감상이 스쳤다. 비록 금모란과 애정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천리단옥과 헤어 진 후 텅 빈 가슴을 그녀가 어느 정도 채워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금모란에게서 지기(知己) 이상의 감정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오직 천리단옥에게 향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일야화원을 지나며 내심 중얼거렸다. '모란, 늘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소.' 천무영은 중문로를 향해 걸어갔다. '개봉사우(開封四友)....... 당신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오.' 개봉사우. 그가 개봉에서 사귄 네 사람. 그들은 연령이나 성별마저 달랐다. 그래도 한결같은 것은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천무영은 고독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만장서가(萬藏書家). 개봉 사람치고 중문로에 위치한 이 책방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 것은 이곳이 천하에서 가장 많은 서책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 었다. 만장서가는 말이 서점이지 실상 개봉부중과 천일야화원을 제외한 다면 개봉에서 가장 큰 장원이었다. 그 큰 장원의 모든 건물에 서 가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책의 종류도 다양하여 고서에서 작금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이국의 서적에서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佛 經)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장노인(藏老人). 사람들은 만장서가의 주인을 그렇게 불렀다. 만장서가는 규모에 비해 역사는 깊은 편이 아니었다. 세워진 지 불과 삼십 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노인이 한때 황궁의 집서관(集書官)이었다는 말 도 있으나 근거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장서가를 언제나 직접 관 리했다. 그는 두 눈썹이 길게 자라 귀밑까지 뻗쳐 있어 장미노인 (長眉老人)이란 애칭을 갖고 있기도 했다. ⑤ 천무영이 만장서가에 도착했다. 정작 밖에서 보는 점포는 조촐하여 내부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끝없이 이어진 서가로 인해 혀를 내두 르게 된다. 서점의 계산대에 화복(華服)을 입은 노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 다. 유난히 눈썹이 길어 귀밑까지 뻗쳐있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 상적이었다. 이 장미의 노인이야말로 만장서가의 주인인 장노인이었다. '후후... 언제나처럼 졸고 계시군.' 천무영은 금노적으로부터 선사받은 낡은 섭선을 흔들며 서점으로 들어섰다. 그가 계산대 앞에 서자 장노인은 인기척을 느낀 듯 고 개를 들다 이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어서 오... 엇? 너였구나." 장노인은 늘 그랬듯이 반갑게 천무영을 맞이했다. 순간적으로 그 의 주름진 눈에서 번뜩 광망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천무영은 빙긋이 웃으며 포권했다. 그의 웃음은 묘하게 사람의 마 음을 끄는 면이 있었다. 장노인도 예외가 아닌 듯 그의 웃음을 대 하자 흔쾌히 말했다. "헛헛... 먼젓번 책을 다 읽은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조손지간처럼 보였다. 실상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 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벌써 삼 년 전의 일이지만 천무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천리단옥 과의 생이별로 그가 실의에 잠겨있을 때, 장노인이 다가와 그를 위로했던 것이다. 결국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이곳에서 책정리 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인생이 달라지게 되었다. 천무영은 그 점에 대하여 늘 고마움을 금치 못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으니 장노인이야말로 내 삶의 스승인 셈이다.' 사실이었다. 장노인이 아니라면 그는 학문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만장서가의 수많은 장서를 마음껏 읽을 수 있었으며 그로 인 해 누구보다도 박대정심한 학문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천무영이 일방적으로 신세만 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 연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따라서 학문을 배우는 대신 만장서 가의 책정리와 청소, 고본의 목록을 만들고 진본과 복사본을 분류 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었다. 장노인이 문득 손가락질을 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헛! 무영, 대체 그 꼴이 뭐냐? 엄동에 부채를 부치다니 네 모습이 얼마나 해괴한지 알기나 하느냐?" 천무영이 흔들고 있는 섭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무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남들이야 뭐라든 상관없습니다. 이 부채에서는 온풍(溫風)이 나 오니 말입니다." "온풍?" "신년선물로 금노적이 주었지요." 장노인의 긴 눈썹이 꿈틀했다. "그 수전노가 말이지?" 천무영은 정색을 했다. "저에게만은 수전노가 아닙니다. 아니, 이전부터 황감할 정도로 선심을 쓰곤 했지요." "헛헛... 그런가?" 장노인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서랍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 건네 주었다. "자, 오늘은 구백구십 번 서고를 정리해 다오. 물론 읽고 싶은 책 이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 천무영은 열쇠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장노인." 그는 미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언제나 그렇듯 어둠 속에서 한 줄 기 광명처럼 느껴지게 하는 미소였다. 천무영은 서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사 라지자 장노인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폭출되었다. 그러나 그 신 광은 사라졌다. 그는 천무영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십 년이다. 그동안 끊임없이 널 지켜보았다. 이제 때가 온 것 같 구나......." 무슨 뜻인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는 이내 계산대에 주저앉더니 꾸벅꾸 벅 졸기 시작했다. 만장서가를 지나던 행인들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장노인은 점차 기력이 쇠해 가는 모양이야." "그러게 말일세. 아무튼 나이는 못 속이는 법이라니까." ⑥ 구백구십 번 서고는 한 건물의 지하에 있었다. 천무영은 호패가 붙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곳에는 일천 개의 서고가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살펴보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고작 남은 것은 열 개 정도밖에 없다.' 그의 얼굴에 감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목각인형도 앞으로 열 개만 채우면 천 개가 되는구 나. 우연의 일치치고는 묘하구나.' 천무영은 열쇠꾸러미를 어루만지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천 개....... 목각인형의 숫자를 채우고, 서가까지 전부 정리하 고 나면 더 이상 개봉에 머무를 일은 없겠구나.' 열쇠를 구멍에 맞추고 돌리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 다. 천무영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퀴퀴한 책의 곰팡내가 후각을 찔렀다. 그에게는 더할 수 없 이 친숙한 냄새였다. 지하 서고 안에는 서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는 서고 안 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두 시진이면 되겠군." 구백구십 번 서고의 책들은 대략 만 권 정도 되어 보였다. 그 많 은 책들을 두 시진 만에 정리하여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보통 사 람이라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천무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곧 바로 일을 시작했다. 목록을 기재할 장부를 든 채 첫번째 서가로 걸어간 그는 가장 윗 부분부터 아래로 서가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았다. "......." 그의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책을 살펴보며 한 손으로 먹 을 듬뿍 찍은 붓으로 장부에 기재하기 시작했다. 슥슥....... 그의 손은 한 시도 쉬지 않았다. 장부를 보지도 않고 붓을 놀렸으 나 장부에 적힌 글씨는 정확히 칸을 채웠으며 서체(書體) 또한 일 필휘지(一筆揮之)요, 용사비등(龍蛇飛騰)했다. 탁! 일 각이 채 못 되어 한 권의 장부가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는 세 번째 서가의 정리를 마쳤다. 천무영은 두 권째 장부를 열어 목록을 정리해 나갔다. '이것도 능력인지 모르지만 내게는 한 가지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것은 한 번 본 것은 오랫동안 잊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해가 빠르다는 점이다.' 천무영의 암기력과 오성(悟性)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만장서가에 비치되어 있는 방대한 책들을 거의 모두 읽었다. 그 많은 책을 읽고도 기억에 담아두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일 것 이다. 그런데 그는 거의 모두를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동서고금의 모 든 학문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져 있었다. 그가 금노적의 골동품 을 판별해 주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얼마 후, 그는 구백구십 번 서가에서 빠져나왔다. 두 시진이 조금 넘어서였다. 그것은 서가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하였기 대문이었다. 때문에 의복에 먼지가 잔뜩 묻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더구나 그의 수중에는 여러 장의 목판경(木版經)이 들려져 있었 다. 그것으로 인해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이들은 모두가 진귀한 것들이다. 서하국(西霞國)에서 온 것으로 과두문( �뗙�)으로 새겨져 있다. 해독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만 반드시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목판경은 열 장이었다. 그는 목판경을 안고 걸어나왔다. "어르신, 목록 정리를 끝냈습니다." "허허, 역시 빠르군. 오늘은 뭘 가지고... 엇? 그건......?" 천무영이 웃으며 점포로 나오자 너털웃음 치던 노인은 갑자기 눈 을 부릅떴다. 천무영은 그의 반응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목판경을 내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빌려가면 안 되는 것인가요?" 장노인은 금세 안색을 바꾸었다. "허허! 그럴 리가. 이제와 안 될 게 뭐 있겠느냐? 다만 좀 기이하 단 느낌이 들 뿐이지." 천무영은 더욱 의아했다. "무엇이 그리도 기이하단 말씀입니까?" "험, 자네가 가지고 나온 목판경은 촉(蜀) 때 서하국을 정벌할 당 시 전리품(戰利品)으로 가져온 것일세. 판본이 과두문으로 되어 있어 지금까지 누구도 손을 못 댄 것인데 자네가 그것을 가지고 나왔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천무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전 다만 심심해서 가지고나왔을 뿐입니다." "심심해서라고?" 장노인의 눈썹이 꿈틀 치솟았다. "흠, 하긴 과두문을 해독하려면 골머리 깨나 아플 테니 심심할 겨 를도 없어지겠지." "후후, 그렇습니다. 장노인." 천무영은 히죽 웃어보인 후, 그에게 포권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목판경을 안고 서점을 나섰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장노인의 긴 눈썹이 꿈틀거리며 두 눈 에 신광이 솟아 나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마침내 개천(開天)할 날이 다가왔구나. 아홉째의 안배를 그가 스스로 선택할 줄이야.... 결국 때가 도래 한 게 아닌가?" 기이한 일이었다. 장노인의 말은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의미심 장한 것이었다. "어쩌면 원단이 되기 전에 일천 개의 서고를 모두 정리할지도 모 르겠구나.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장노인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스스....... 문득 장노인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졌다. 마치 허공에서 그의 몸 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⑦ 개봉에는 거지가 많다. 그것은 개봉부에 천하제일의 방파인 개방( )의 총단이 있기 때 문이었다. 천무영은 목판경을 안은 채 걷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줄곧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뒤를 따라붙는 눈길이 있다는 것을. 그 눈은 이미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그의 일 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다. 줄곧 날 감시하던 눈길들이 최근 들어서는 묘한 압박감을 띠고 있는 것 같다.' 천무영은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날 감시하는 눈길은 모두 세 부류다. 그 눈길은 각각 틀린 의미 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오래 전부터 누군가 자신을 줄기차게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전혀 표시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능력으로 그 눈길을 떨쳐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그렇다면 모른 척하는 것이 상수였다. '저들은......!' 문득 그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명의 거지를 발견하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겉보기에 그들은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해 보이 는 중년거지들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어깨에 마 대를 메고 있었는데 마대에는 매듭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듭은 아홉 개나 되었다. 구결(九結)이면 십결(十結)인 개방방주의 바로 다음 서열을 말하 는 것이다. 개방의 구결제자는 전 중원을 털어도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들이 두 명씩이나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다. 아무튼 중년거지들은 생김새가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한 명은 왼쪽 눈썹에, 다른 한 명은 오른쪽 눈썹에 점이 있다는 정도였다. 그들은 용모만 닮은 것이 아니라 행색도 꼭 같았다. 둘 다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옷에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얼굴로 전형적인 걸인의 모습이었다. 두 중년거지는 천무영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천 무영을 지나친 후 나직이 말을 주고 받았다. "보았나? 영(影)." "물론이다, 월(月)." "어떤가?" "흠, 본 그대로야. 헌원방주(軒猿 主)의 말이 맞았어." "음, 동감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몇마디 대화는 천무영의 귓전에도 전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두 중년거지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나도 당신들을 알아보았소. 당신들이야말로 그동안 날 지켜보았 던 세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을 말이오.' 천무영은 고개를 들어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발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무영탑에도 그런 눈길이 하나 있지.' 날이 저물자 추위는 더 기승을 부렸다. 그는 빙판으로 화해 가는 거리를 걸으며 상념에 잠겨들었다. 그는 무영탑 꼭대기에서 오래 전부터 그를 지켜보던 눈길에 대해 늘 궁금했었다. 그래서 어느날 직접 조사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는 무영탑 내부로 들어가 최상층의 석실까지 모두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탑은 구층이건만 석실은 팔층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면밀히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금까지 구층의 비밀을 풀지 못한 채 자신을 지켜보는 눈길 의 정체도 알아내지 못했다. '구층 석실이 숨겨져 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드나들 수 있었을 까?' 얼마쯤 갔을까?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앞을 바라보던 그는 흠칫했다. 저 멀리 관병(官兵)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 라 백여 기가 넘은 병마(兵馬)였다. '아! 또 그 눈길이다.' 그가 놀란 것은 병마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집요하게 주시 하던 세 부류의 눈길 중 하나가 병마 속에서 느껴진 것이다. 병마는 이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가 지나쳐갔다. '그럼 그자는 저들 가운데 있단 말인가?' 천무영은 급히 병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눈빛을 거두 었는지 이번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천무영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지난 날 아복이 죽기 직전 한 말이 있다. 자신도 한때 만병을 호 령하던 대장군(大將軍)이었다고.... 그렇다면 나 역시 관(官)과 연관이 있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떠냐? 내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으니 언젠 가 알게 될 날이 있으리라.'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서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⑧ 휘이잉! 서문을 벗어나자 황량한 풍경이 나타났다. 게딱지처럼 성벽 아래 다닥다닥 붙어있는 빈민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유독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았다. 빈민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천무영의 모습은 쓸쓸해 보 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정작 그는 뿌듯한 마음이었다. '오늘밤은 심심하지 않겠군. 이 목판경이 있으니.' 그는 목판경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쓰다듬었다. 고독도 체 질화되자 이제 열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만 있으면 견뎌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따각, 따각......!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으로부터 한 마리의 말이 달려오고 있 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설리총(雪 裏 )이었다. 마상에는 기도가 출중한 청년이 오만하게 앉은 채 말채찍을 가볍 게 손에 감아쥐고 있었다. 백색의 장삼에 흰 가죽신을 신은 그는 명가(名家)의 후손인 듯 그 기세가 당당해 보였다. 머리에는 영웅건(英雄巾)을 쓰고 있었는데 영웅건 한가운데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값비싼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 보검(寶劍)까지 비스듬히 차고 있어 청년의 모 습은 더욱 돋보였다. 그는 자신의 당당함을 과시하려는 양 턱을 치켜든 채 오만하게 앞 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년은 이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이 여인의 눈썹처럼 고왔으나 그 끝이 바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천하를 오시할 뿐더러 약자를 멸시하는 기미가 역력해 보였다. 다소 얄핏한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묘하게 다문 채 조소와 도 같은 웃음기를 습관처럼 물고 있었다. 천무영은 청년의 모습이 다가오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놀라운 기도를 가진 자로구나!' 기이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서 천무영은 이상하게 가슴이 쿵, 하고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것은 직감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청년과 그에게서 벌어질지 모를 향후의 운명에 대한 경고(警告)였 는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은 넓다. 기껏해야 개봉성을 떠나본 적이 없는 처음 보는 저 자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그런데 그의 앞까지 말을 달려오던 청년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가슴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이건... 안 좋은데.' 아니나 다를까? 백삼청년은 느닷없이 말을 멈춘 후 그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렸 다. "쯧! 눈보라가 날리는 야밤에 홀로 사색하는 서생이라, 이거 개봉 부에서 도착한 이래 첫번째 만남 치곤 실망이로군." 청년의 말투에는 경멸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것은 천무영의 문약 (文弱)함에 대한 노골적인 조소였다. "이봐, 책벌레! 말 좀 묻겠다." 청년은 거침없이 하대했다. 천무영은 서서히 고개를 들며 반문했 다. "무엇을 묻고 싶소?" "하하하! 냄새나는 책벌레 주제에 목소리 하난 낭랑하군?" 천무영은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확실히 소생은 책이나 읽는 서생이오. 그러니 귀하는 어서 묻고 싶은 것이나 물어보시오." "호오! 제법 골기가 있군? 이거 뜻밖인걸?" 백삼청년의 응대는 점입가경이었다. 마치 일부러 시비를 걸려는 듯했다. 천무영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기가 싫었다. "그럼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가겠소." "뭐, 간다고?" 청년은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감히 내 앞에서 멋대로 입을 놀리다니! 만일 평소 같았다면 네 주둥이는 벌써 찢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밤 은 개봉에 온 첫날이니 내 용서해 주마." 그는 선심이라도 쓰듯 호탕하게 말했다. 천무영은 역겨움을 참기 가 힘들었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작자! 당신 같은 위인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 으니 온통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가슴속으로 한 것이었다. 천무영은 대꾸조차 하기 싫어 이내 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책벌레!" 위이잉!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울렸다. 천무영의 눈앞으로 채찍이 떨어 졌고, 그의 발아래 꽁꽁 언 땅이 채찍질 한 번에 한 뼘도 넘게 패 여 버렸다. ⑨ 천무영은 그만 가슴 한귀퉁이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핫핫핫......! 한 걸음만 더 나갔어도 땅바닥이 아니라 네놈의 정수리가 그 꼴이 되었을 것이다." 백삼청년은 통쾌한 듯 대소를 터뜨린 후 오만하게 물었다. "책벌레, 천문세가(天文世家)가 어디 있느냐?" 천무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곳은... 왜 찾소?" "건방진 놈!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백삼청년은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천무영은 불길한 예감 에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청년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뻗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 슴이 섬뜩했다. '내가 무슨 바보짓을! 이자와 대치해 얻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급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서문으로 가시오. 곧장 중문로로 가다보면 큰 장원이 나올 것이 오. 그곳이 바로 천문세가요." 백삼청년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차를 가했다. "핫핫핫......! 고맙다, 책벌레!" 히히힝! 설리총은 힘차게 울음을 울더니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가 발굽을 놓기가 무섭게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설리총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천무영은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청년의 음성이 웅웅거리며 메아리쳐 왔다. "건방진 놈! 오늘은 본 공자가 많이 참았다. 네놈이 그토록 궁금 해 하니 알려주마.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정혼녀(定婚女)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녀가 과연 나와 어울릴 자격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조심해라! 다시 만날 때에도 오늘처럼 굴면 그때 는 네놈의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으핫핫핫......!" 밤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청년의 음성은 무림계에서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천리회음술(千里廻音術)이란 것이었 다. 그것은 내공이 최소한 이 갑자는 되야 펼칠 수 있는 것이었 다. 천무영은 무림인이 아니었으므로 물론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 러나 청년이 남긴 말은 그의 가슴에 회오리쳤다. "정혼녀를 만나러 왔다고......?"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와당탕! 목판경이 땅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으나 그는 조금도 느끼 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그럼... 그자가 바로 단옥의 정혼자였단 말인가?" 그가 이처럼 침착을 잃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설사 칼이 목 에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가 아니던가? 휘잉... 휘이이이잉! 눈보라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천무영은 얼 어붙은 듯이 굳어져 있었다. ■ 무영탑 1권 제3장 변신(變身)을 위하여 ① 토지묘 안으로 들어서던 천무영은 흠칫 놀랐다. 한 명의 청수한 노인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칠순 가량 되어 보였지만 그다지 늙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 는 정정한 노인이었다. 그는 일신에 낡았으나 깨끗이 손질된 마의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 는 짚으로 된 띠에 죽편(竹片)을 걸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매듭이 열 개 엮어진 마대를 둘러메고 있었다. "오랫만일세, 무영공자." 마의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찾아온 손님을 맞아들이는 주인처럼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천무영은 목판경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노인장께서 오셨군요." 그들은 이미 구면(舊面)이었던 것이다. 마의노인은 눈을 가늘게 한 채 천무영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자네는 나날이 기도가 헌앙해지는 것 같군."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천무영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이네. 노부는 십 년 넘도록 자네를 보아왔고, 또 기다렸으니 까. 그래, 생각해 보았나?"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삼 년 전에 벌써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누구에게도 일신을 의탁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의지는 확고했고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그의 귀에 는 아복이 죽어가면서 한 소리가 생생하게 맴돌고 있었다. - 명심하십시오. 공자님은 천하의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됩니다. 마의노인은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열 개의 죽편을 매만졌다. "자네에게 고개를 숙이란 뜻이 아닐세. 다만 자네의 힘을 빌리고 자 할 뿐이네." 그의 얼굴에 진중한 빛이 어렸다. "자네가 본방에 가입한다 해도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을 수 있네. 심지어는 방주인 노부 헌원유광(軒猿流光)조차도 자네에게 명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네." 실로 놀라운 일이다. 헌원유광이라면? 중원천지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는 바로 천하제일방회 인 개방( )의 방주인 동심천유개(同心天儒 )였던 것이다. 실상 개방은 무림에서 가장 뿌리가 깊은 방파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방대한 인원과 천하 도처에 흩어져 있는 조직의 특성 상 그 힘이 집결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특히 근래 들어서 개방은 상당히 쇠락해져 있는 상태였다. 당금의 개방방주인 헌원유광은 개방이 배출해낸 마지막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방주가 된 이후로 개방은 눈부신 변혁을 이루 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탁월한 영도력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개방의 조직을 일 원화(一元化)시켰으며, 백만이 넘는 방도들의 절기를 일일이 분류 하여 그 장단점을 보충한 후 꾸준히 연마하도록 분위기를 쇄신했 다. 그 결과 개방은 과거의 힘과 조직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 다. 뿐만 아니라 동심천유개도 무림의 명숙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 었다. 그런데 문제는 헌원유광이 늙었다는 사실이었다. 불행히도 그에게 는 이렇다 할만한 후계자가 없었다. 천무영이 놀라 반문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씀입니까?" 헌원유광은 지대한 관심이 깃든 눈으로 그에게 죽편을 들어 보였 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나?" "십절죽편(十節竹片)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네. 하지만 개방방주의 영부는 구절죽부(九節竹符)라네. 이것 을 한 번 자세히 보게." 헌원유광에게서 십절죽편을 넘겨받은 천무영은 시키는 대로 면밀 히 살펴보았다. 십절죽편은 열 개의 죽편이 천잠사로 연결되어 있었고, 죽편마다 에는 각기 다른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天), 지(地), 풍(風), 화(火), 수(水), 뢰(雷), 우(雨), 일 (日), 월(月), 성(星) 등이었다. ② "이것이 장문 영부가 아니었습니까?" 천무영의 질문에 헌원유광은 엄숙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렇네. 이것은 개방에서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십절죽령(十 絶竹令)이라네." "......." "이것의 권위는 구절죽부를 능가하는 것이네. 다시 말해 개방 역 사상 한 번도 탄생하지 않았던 십절존사(十絶尊師)를 상징하는 영 부이지." 천무영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그럴 걸세. 이 일은 본방의 제자들도 아는 자가 거의 없으니까." 헌원유광의 음성은 다소 떨려 나오고 있었다. "받아 주게. 이쯤이면... 내 뜻을 알 것이네. 즉 개방의 제자가 아니라 십절존사가 되어 개방을 영도해 달라는 말이네. 방금 전에 도 말했듯이 십절존사는 방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네. 그것은 개방의 조사이신 개신( 神)께서 안배해 놓은 각 별한 신분일세." "......!" 천무영은 놀라움이 지나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네가 승낙만 한다면 개방의 십절존사가 되는 것은 물론, 향후 일 년 이내에 자네는 천하를 진동시키는 무학의 종사(宗師)가 될 수 있다네." 헌원유광이 이처럼 진지하게 설득작전을 펴고 있을 때였다. "흥! 어림없는 소리!" 문득 빈정거리는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파팟! 헌원유광이 소매를 떨치자 눈부신 금광이 밖으로 쏘아나갔다. 그 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의 공세는 모래알이 바다에 빠진 듯 아무 런 반응도 없었다. "이럴 수가?" 헌원유광의 안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그는 신형을 날려 밖으로 사라졌다. "......?" 천무영은 갑작스런 사태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밖으로 나가보았다. 밖에는 실로 기이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토지묘의 마당과 지붕 위였다. 그곳에 천무영이 얼마전 보았던 쌍 둥이 중년거지가 각각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큰 충격을 받고 굳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으며, 막 밖으 로 뛰쳐나온 헌원유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땅바닥을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 고 있는 지면에는 금전(金錢)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금전 이 떨어져 있는 곳에는 발자국으로 찍어 만든 글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 소(笑). 한마디로 가소롭다는 뜻이 아닌가? "으으음!" 헌원유광은 무거운 신음을 발하더니 소매를 저었다. 그러자 금전 은 소리없이 떠올라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어떤 고인(高人)이......?" 헌원유광의 안색은 더없이 어두웠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으로 만 든 글자. 어쩌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방금 전 헌원유광은 금전탈명(金錢奪命)이란 개방 독문의 암기술 을 펼쳤다. 그것은 강호의 초절정 고수도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금전이 날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 발자국으로 글 자를 새기고 유유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같은 신법은 고금을 통해 들어보지도 못한 불가사의한 것이었 다. 헌원유광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월, 영! 그대들은 보았나?" 쌍둥이 중년거지는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송구하오이다, 방주." "저희들은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소이다. 다만 순간적으로 혈도 를 찔렸는데 그자는 사라지면서 다시 해혈(解穴)까지 해주었습니 다." 월과 영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수치감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헌원유광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월영쌍개(月影雙 )라면 강호에서도 손가락 꼽힐 뿐더러 개방의 장로급이거늘 상대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당하다니......." 그는 한숨을 내쉬며 천무영을 돌아보았다. 천무영의 손에는 십절 죽령이 들려 있었다. "공자, 며칠 후에 다시 오겠네. 그때 마음이 정해지면... 아니 꼭 수락하기 바라네." 그는 월과 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세!" 스슷! 세 명의 거지는 일순간에 암흑을 뚫고 사라졌다. 천무영은 그제서 야 정신이 번쩍 들어 외쳤다. "노인장!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멀리서 헌원유광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안될 말이네. 십절죽령은 누구에게든 한 번 건네지면 회수 할 수가 없는 것이라네." 헌원유광의 음성은 점점 더 멀어졌다. 천무영은 그만 고개를 저으 며 죽부를 품에 넣고 말았다. "순 억지로군." 그의 뇌리에 삼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만장서가에서 일을 마치고 토지묘로 돌아왔는데 솥단지에서 구수 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솥단지 안에는 먹음직한 닭이 삶아지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했 다. 토지묘는 비록 주인이 없었으나 그가 오랫동안 살아왔으므로 실질 적인 주인이랄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없는 곳에 누가 함부로 들어와 닭을 삶고 있단 말인 가? 그것이 바로 헌원유광과의 첫만남이었다. ③ 헌원유광은 그때부터 수시로 찾아왔으며 올 때마다 닭이나 오리, 심지어는 황구(黃狗)를 잡아왔다. 천무영은 어쩔 수 없이 그가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그는 자신의 제자가 되어줄 것을 조르곤 했다. 세상에 사부가 제자될 사람에게 입문(入門)하라고 조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거꾸로 되도 단단히 거꾸로 된 일이었다. 물론 천무영은 정중히 사절했다. 그러자 헌원유광은 작정을 하고 전법(?)을 바꾼 모양이 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뜻밖의 방해자들로 인해 그의 뜻은 좌절되고 말 았다. "용서하십시오, 노인장. 소생은 머지않아 이곳을 떠납니다." 천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토지묘 안으로 들어갔다. 천무영이 토지묘 안으로 들어간 직후.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듯한 두 그루의 나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스스스......! 나뭇가지는 머리와 팔로, 둥치는 몸통이 되는가 싶더니 나무의 아 랫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며 사람의 다리 모양으로 변했다. 놀랍게 도 두 그루의 나무는 인간의 형상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은은한 안개가 휘감고 있어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알아볼 수가 없 었다. "천강(天剛), 이제 때가 된 것 같지 않나?"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너무 심했어. 제자 아이들에게 말이야." "흘흘, 도천(刀天). 그럼 저 아이를 고작 십절존사로 묶어두란 말 인가?" "쩝....... 그야 그렇긴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천강과 도천!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한편. 천무영은 모닥불 앞에 앉아 목판경을 읽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목판경에 새겨져 있는 과두문을 해독하는데 온통 몰입되어 있었 다. "아! 이것은......." 천무영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대환이심경(大幻移心經)> 목판경에 새겨진 이 긴 이름은 뜻밖에도 밀종(密宗)의 비경이었 다. 일찌기 천무영은 만장서가에서 수백만 권의 경서를 읽었다. 그중 에는 불도유속(佛道儒俗)을 망라한 세상의 모든 경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환이심경은 유별났다. 분명 교서(敎書)이긴 하되 불가 (佛家)와 도교(道敎)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었다. 그런 점이 천무 영의 마음을 묘하게 잡아끌었다. 경문(經文)은 과두문이라 해독이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천무영은 새로운 학문에 도전하는 심정으로 경서에 몰입되어 갔다. 처음에는 밀종의 법문인 줄 알고 경문에 접근하여 갔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했다. 아무리 거듭 해독해보아도 이치가 맞지 않는 것 이다. 그렇다고 경문이 가짜일 리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습관처 럼 경문을 거꾸로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많은 책을 읽으며 생긴 버릇이었다.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후 거꾸로 암송해 나가면 더욱 확실히 암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문을 한 차례 거꾸로 암 송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 이제 보니 이건......!" 천무영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금치 못했다. 알고 보니 경문은 일종 의 무학(武學)을 담은 비급(秘 )이었던 것이다. - 환법육십사결(幻法六十四訣). - 밀오진강결(密奧眞 訣). - 대환이무보(大幻移武譜). 대환이심경은 그렇게 삼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천무영은 어느덧 목판경의 구결에 빠져 들어갔다. 읽으면 읽을수 록 경이롭기만 한 구결이었다. 무학이라곤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 던 그였기에 난생 처음 대하는 무학구결에 자신도 모르게 심취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대환이심경은 어떤 것인가? 아득한 과거, 중원에 불교가 전파되기도 전의 일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보다 한 발 앞서 불교를 전파하던 고승이 있었 으니 유마법사(儒磨法師)란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서하국에서 포 교하고 있었다. 그는 도교(道敎)와 유학(儒學)에도 뛰어난 성취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불교에 심취한 후에 사상초유의 시도를 하게 되었으니, 자 신이 익힌 세 가지 방면의 사상을 혼합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이끌 어낸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환이문(大幻移門)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환이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수 명이 다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남긴 경서도 서하국의 황실비고에 파묻히고 말았다.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잊혀졌던 대환이경에는 독특한 무학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중원과 천축, 새외를 끝없이 유랑했던 유마법사가 평생 동안 수집한 무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④ "으음......." 환법육십사결을 암송하던 천무영은 신음을 흘렸다. 환술이란 본시 은형술(隱形術)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발전되면서 기환술(奇幻術)로 변화했다. 대환이경에 수록되어 있는 환법육십사결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환술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은형술(隱形術), 지둔술(地遁術), 기문둔갑(奇門遁甲), 천문기상 (天文氣象), 기문진학(奇門陣學)....... 천무영의 가슴은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이었던가? 사람들이 저마다 무인이 되고자 그토록 날뛰던 이 유가......?"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에는 학문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학의 세계도 학문 에 못지않은 심오함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천무영은 점차 무아경(無我境)에 빠져들어갔다. 그때였다. 그의 머리 위, 천장의 서까래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기척도 없이 밖으로 날아갔다. 괴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며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네놈이 이 환요비자(幻妖秘子)의 밀전(密典)을 읽기 시작했구나. 흐흐... 과연 네가 밀오진강(密奧眞 )을 깨우 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환요비자라면? 그는 백이십 년 전,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희대의 마인(魔人)이었다. 신출귀몰(神出鬼沒)! 그것이 환요비자를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표 현이었다. 왜냐면 수많은 혈겁을 저질렀으면서도 한 번도 그의 진 면목이 노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천부를 찾아 떠난 후 지금까지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 관한 소식의 전부일 뿐이었다. ⑤ 천문세가(天文世家).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개봉부의 중문통에 자리잡은 이 장원이 중원을 떠받드는 다섯 하 늘, 즉 오대가문(五大家門) 중 하나라는 것은 삼척동자일지라도 다 안다. 그들은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천금성(天禁城)의 오대가 신(五大家臣)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백 년 전, 암흑마전(暗黑魔殿)을 비롯한 팔대마역(八大魔域)을 물 리친 천금성의 신화가 살아있는 한 천문세가의 위명 또한 영원하 리라는 것이 무림의 속설이었다. 한마디로 천문세가는 당금의 무림을 오분(五分)하고 있다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천문신기협(天文神機俠) 천리중문(天里重文). 그가 바로 당금 천문세가의 가주였다. 천문세가는 문(文)과 지(智), 검(劍)으로 대변되는 가문으로 그는 학문의 귀재이자 진법기관학(陳法機關學)의 대가, 게다가 검에 관 한한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는 나이 육십이 넘어서야 얻은 금지옥엽이 있었다. 우담화(優曇華) 천리단옥(千里壇玉). 삼천 년만에 한 번씩 핀다는 전설의 꽃을 별호로 사용하고 있는 절세가인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에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강호의 수 많은 청년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무엇때문인지 우담화 천리단옥은 근자 들어 두문불출, 모 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천문세가의 후원. 겨울의 매화는 유난히 곱다. 화원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는데 흰눈 사이로 설중매(雪中梅)가 피처럼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 었다. 화원 한가운데 정자가 있었다. 지금 정자 안에는 한 미녀가 설중 매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설중매처럼 고결함과 뜨거운 정열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듯한 미인이었다. 늘씬한 몸매를 흰 나삼으로 감싼 채 윤기 도는 흑발을 등뒤로 늘 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도무지 인간계가 아닌 천상의 우물(尤物)인 듯했다. 그런데 이 절세미녀의 얼굴에는 한 가닥 우수(憂愁)가 드리워져 있었다. "설중매는 찬 눈 속에도 여전히 단심(丹心)을 피워내고 있건만 어 찌하여 나 단옥은......." 자책감으로 인해 상심하고 있는 이 여인은 우담화 천리단옥이었 다. 천무영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무영(無影)...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듣기로는 여전히 혼자 산다고 하던데......." 보석처럼 영롱한 그녀의 눈망울에 뿌연 안개가 덮였다. "아아!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어. 무영에게 내가 전부이듯 나 역시 그가 전부였는데......." 천리단옥은 섬섬옥수를 뻗어 정자 안으로 가지를 뻗고 있는 설중 매를 툭 꺾었다. "신분의 차이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사랑의 언약을 바람처럼 날려버릴 정도로..... 출신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그녀는 설중매를 코끝에 갖다대기는 했으나 조금도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까풀이 살풋이 감기며 반짝 이슬이 맺혔 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무영탑에는 아직 그와 나의 이름이 나란 히 새겨져 있을 텐데 어찌하여......." 쓰라린 고통이 그녀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무리 잊으려 애를 써도 잊혀지기는커녕 더욱 더 떠오르는 이름. 지울 수 없는 얼굴 이 그녀를 밤마다 몸부림치게 하고 있었다. "핫핫핫......! 단옥,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오?" 문득 낭랑한 웃음소리가 다가왔다. "......!" 천리단옥은 가녀린 몸을 경련했다. 그녀는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 군지 알았다. 화원 사이로 유유히 걸어오는 미청년이 있었다. 천리단옥은 가늘 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청년은 빼어난 인물이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 함을 갖추기도 했다. 백색장삼도 그의 수려한 용모와 잘 어울리고 있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보검을 차고 있었는데 영웅의 기풍을 더해주고 있었다. ⑥ "혹 이 북궁현리를 생각하는 게 아니었소?" 청년은 천리단옥에게로 다가오며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북궁현리! 그는 얼마전 천무영과 만난 적이 있는 청년이었다. 천리단옥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는 속마음을 감추는 성 품이 아니었다. "북궁공자께서 이곳엔 어인 일이시죠?" 다소 쌀쌀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반응에 북궁현리는 호탕한 웃음으 로 대했다. "핫핫... 정혼녀를 방문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된단 말이오, 소저?"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그대와 나의 혼인이 성약(成約)되었을 때, 마침 나는 무쌍별부 (無雙別府)의 제자로 간택되었을 때요. 때문에 그대를 볼 수가 없 었소. 하지만 혼례를 앞두고 얼굴조차 몰라서야 쓰겠소? 다망한 중에도 일부러 그대와 정을 쌓기 위해 찾아온 것이오." 북궁현리는 빛나는 눈으로 천리단옥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소문대로 그대는 아름답소. 우담화(優曇華)란 별호가 썩 잘 어울리오. 그러나......." 말꼬리를 늘이던 북궁현리의 안색이 도도하게 변했다. "나는 무쌍별부의 세번째 제자요. 다시 말해 아무 것도 아쉬울 것 이 없다는 것이오. 천하에 여인은 얼마든지 널려 있소. 따라서 그 대의 마음이 나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면 이 혼인은 파기될 수도 있소." "뭐...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천리단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북궁현리는 괴소를 흘렸다. "후후... 내 말이 지나쳤다면 사과하겠소. 하지만 명심하시오. 내 게 마음을 바칠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고백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천리단옥은 곧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절 시험하는 건가요? 설사 당신이 무쌍별부의 대제자라 해도 이 런 식의 핍박은 받아들일 수가 없군요." "하하핫... 역시 천하제일의 재녀인 우담화답구려. 핫핫핫!" 북궁현리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웃음을 뚝 그친 그는 천리단옥의 섬섬옥수를 잡으며 말했다. "두고 보시오. 그대는 이 북궁현리의 아내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황후가 부럽지 않는 신분마저 거머쥐게 될 테니." 천리단옥은 아연해졌다. "그럼... 당신은 장차 천금성의......." "핫핫! 되었소. 더 이상 말하지 마오. 야망은 그리 쉽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오." 갑자기 그는 천리단옥의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어멋!" 불의의 기습에 천리단옥은 질겁했다. 그녀의 귓전에 뜨거운 사나 이의 입김이 다가왔다. "취하고 싶소, 지금 그대를." 북궁현리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치켜들었다. 눈앞이 환해질 정도 로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이었다. 북궁현리는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의 입술 이 내려왔다. "안돼요!" 천리단옥은 앙칼지게 외치며 그를 밀쳤다. "흐흐흑......!"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교구를 날렸다. 그녀의 신형은 한 마리 백호접인 양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후훗! 내 그럴 줄 알았지." 북궁현리는 괴소를 흘렸다. 그는 찌를 듯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 며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감히 날 기만하려 들다니. 마음이 이미 다른 데 기울었으면서 이 북궁현리의 아내가 되겠다고?" 그는 정자의 난간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푸스스! 놀랍게도 난간이 그의 손길이 지나가는 대로 가루로 화해 흘러 내 렸다. 실로 상상도 못할 무서운 공력이었다. "훗훗! 착각하지 마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널 얻기 위함이 아니 라 버리기 위함이니까. 왜냐고? 내가 얻어야 할 여인은 네가 아니 라 꽃중의 꽃 천중화(天中花)이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그 역시 마음 속에 다른 여인을 두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네 마음을 빼앗은 작자가 누군지는 알아야겠다. 그래야 파혼(破婚)할 구실이 생길 테니 말이다." 스슷! 북궁현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⑦ '아아!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천리단옥은 별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넋 잃은 표정이었다. '무영... 당신을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한 난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 그녀의 호수 같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우니? 왜 우니?" 문득 청아한 음성이 천리단옥을 일깨웠다. "녹앵(綠鸚)......!"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은빛의 새장이 있었다. 새장 안에서 취록색 털의 앵무새가 빨간 눈알을 또르륵 굴리고 있었다. "이를 거야! 이를 거야! 또 그 사람 생각한다고." 신기하게도 앵무새는 천리단옥의 심중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천 리단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녹앵,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 그녀도 사람 대하듯 말했다. 사실 앵무새란 기껏해야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 고작이지만 녹앵은 달랐다. 녹앵은 오래 전부터 천리단옥과 마음이 통하고 있 었다. "흥! 왜 몰라? 자나깨나 무영공자만 생각하고 있는걸!" "녹앵......." 천리단옥의 표정이 일변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는 한결 밝 아진 얼굴로 말을 꺼냈다. "녹앵, 심부름을 좀 해 줘야겠어." 그녀는 품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더니 급히 붓으로 글을 적었 다. "그분께 전해 주겠니?" 그녀는 새장을 열어 녹앵의 발목에 비단 손수건을 단단히 묶었다. 녹앵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종알댔다. "알았다, 알았다! 둘이 만날 거지?" "녹앵, 그만 입 다물고 어서......!" 천리단옥은 조급하게 재촉했다. "그래, 그래! 난 간다." 포르르릉....... 녹앵은 녹색의 날개를 저으며 창밖으로 날아갔다. 그 광경을 천리 단옥은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향후의 일이야 어찌 되든 한 번만 더 그를 만나고 싶어. 그도 날 거절하진 않을 거야." 그녀는 창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녀가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누군가 그녀와 녹앵의 대화를 모두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별원의 담장 아래서 낮은 괴소가 흘러나왔다.. "훗훗... 예상대로군. 좋아, 그 작자를 만나야겠군. 아주 훌륭한 구실을 찾았어." 스슷!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인영은 바로 북궁현리였다. 그는 녹앵이 날아간 방향으로 빛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⑧ <뇌문비서(雷門秘書)> 전자체로 그같은 제목이 쓰여진 검은 책자는 구백구십일번째 서고 의 마지막 서가에 꽂혀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천무영의 눈이 빛을 발했다. <......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은 뇌(雷)의 힘이다. 뇌정지기 (雷霆之氣)를 모아 정기신(精氣神)과 일체를 이룬다면 능히 산을 가르고 대해를 엎을 수 있으리라. 뇌정만균섬(雷霆萬鈞閃), 천뇌 합정(天雷合頂), 천화교병(天火交兵), 낙뇌대정(落雷大 霆).......> 천무영은 도서목록을 작성하다 말고 그 책을 발견했다. 그는 책장 을 넘기다 그만 자신도 모르게 구결(口訣)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구결을 모두 읽은 후에야 책에서 눈길을 떼며 중얼거렸다. "이것도 무공비급이었다니......." 그는 뇌문비서를 갖고 서고를 빠져나왔다. "허허, 오늘도 어김없이 책을 들고 나왔구나." 장노인은 천무영이 들고 있는 뇌문비서를 보며 너털웃음 쳤다. "그렇습니다. 목판경은 다 보았으니까요." "벌써 다 봤단 말이냐? 허허! 갈수록 학문이 깊어진단 뜻이겠지?" "웬걸요, 아직 멀었습니다." 천무영이 떠난 뒤 장노인의 눈에서 신광이 일어났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벌써 여덟번째 비학을 스스로 취했으니....... 이렇게 되면 입천(入天)의 절차만 남겨둔 셈이 군."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천무영이 서고에서 발견한 책자들이야말 로 모두가 그의 안배였던 말인가? 원단이 임박하자 개봉부의 거리는 눈에 띄게 흥청거렸다. 건물마 다 축등이 걸리는가 하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한결 더 분주해 졌 다. 주루나 기루(妓樓), 도박장 등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천일야화원은 연일 몰려드는 풍류객들로 인해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오늘밤에는 기필코 교화( 花) 고년을......." "이런 한심한 친구 봤나? 아니 아직도 뜸만 들이고 있단 말인가? 날 보게, 옥향(玉香)이가 내 말이라면 설설 기지 않던가? 자고로 계집이란 일단 꺾고 봐야 한다니까." "허허! 이 친구야, 쉬 꺾이는 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란 걸 모 르나?"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어젯밤에 장가(張哥)가 옥향이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네." "뭐, 뭐야?" "아무렴, 내가 없는 말을 만들어 내겠나?" "빌어먹을! 노류장화(路柳墻花)라더니......." "낄낄! 방금 전까지도 기고만장이더니 왜 죽상을 짓는 건가?"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작자들. 소위 풍류객을 자부하는 사내들 로 천일야화원은 연일 북적대고 있었다. 대문은 며칠째 활짝 열려 있었고, 문루에 걸려있는 오색의 축등은 밤이 되면 더욱 눈부시게 불이 밝혀진다. 천일야화원의 문앞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야화원을 드나드는 풍류객들과 대조적인 차림으로 일신에 검 박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흥청거리는 야화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단하군. 환락을 좇아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 니......." 천무영은 문루를 바라보며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모란, 그대도 지금쯤 손님을 위해 단장하고 있겠지?' 머리에 금색의 모란 꽃송이를 꽂고 있는 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대는 아름답다. 미색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그대가 있으 므로 내 삶은 외롭지 않았었지.' 금모란을 떠올리자 그는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는 그였다. '하지만 그대와 나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 서로의 길이 너무도 틀리지 않은가?' 천무영의 얼굴에 허탈한 빛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청아한 소녀의 음성이 들린 것은. "어머,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다고요?" "......." 천무영은 몸을 돌렸다. 시비인 듯한 청의소녀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십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보조개가 패인 뺨이 유난히 귀여워보이 는 소녀였다. "청란(靑蘭)이구나. 날 찾았다니 무슨 일로?" 청란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씨께서... 공자님을 찾고 계셔요." 천무영은 흠칫했다. "모란이?" "네, 토지묘에도 가 봤지만 허탕쳤어요. 여기저기 공자님께서 가 실만한 곳을 헤매다 돌아오는 중이었어요." "왜 날 찾지?" 청란은 눈을 살짝 흘겼다. "몰라서 묻나요? 아씨께서 공자를 찾으시는 건 뻔한 거 아녜요?" "흠, 난 정말 모르겠는데?" "정말 이러실 거예요? 아씨는 날마다 공자가 보고 싶어 안달이신 데 공자님은 어쩜 그리 무심하실 수가 있죠?" 천무영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나 같은 가난뱅이 책벌레가 보고 싶을 리가 있겠느냐?" "흥, 고만 하고 어서 가요." 청란은 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알았다, 알았어. 천천히 가자꾸나." 천무영은 소매를 잡힌 채 청란을 따라 야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걷는 동안 그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치뤄야 할 일... 이 참에 이별인사를 하는 것도 좋 겠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고 천색은 어두워지고 있었 다. 다만 천일야화원만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⑨ 천향각(天香閣). 천일야화원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별각으로 이곳의 최고 미녀인 금모란이 거처하고 있는 곳이었다. 천향각에서 하루를 기숙하려면 웬만한 부호라도 재산의 반쯤은 털 어내야 했다. 그만큼 금모란은 비싼 여인이었다. 아니, 재물이 있 다고 해서 아무나 그녀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녀를 상면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은자 만 냥은 써야하는 것은 상식이었으나 지금까지 그녀를 안아봤다는 풍류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천향각의 내실. 의외로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요란한 장식이나 치장이 일체 눈 에 띄지 않았다. "......." 담담한 단향 냄새가 감도는 방안에 남녀가 마주보고 있었다. 궁장으로 틀어올린 머리에 황금으로 정교하게 만든 모란꽃을 꽂은 야화원의 제일화 금모란과 천무영이었다. 금모란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천무영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에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무영." "그렇구려." 천무영은 담담히 대꾸했다. 금모란의 흑진주 같은 눈에서 반짝하는 빛이 일어났다. 너무나 고 대했던 만남이었기 때문일까? "앉으세요." "고맙소." 두 사람은 단향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방안 한구석에는 상아로 만든 금(琴)이 놓여있을 뿐, 실내에는 이 렇다할 장식물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야화원 제일의 기녀가 거 처하는 방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천무영은 감정이 배제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를 만나니 기쁘오." 금모란은 미소지었다. "그 말씀 진정인가요?" "나 같은 위인에게는 황송한 일이 아니겠소?" "그만 두세요, 그런 소리... 섭섭해요." 금모란의 눈에 원망의 빛이 떠올랐다. 천무영은 빙긋 웃었다. "화내지 마시오, 농담이었소." 그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날 찾았다던데?" 금모란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매료되게 만드는 뇌쇄적인 미소였다. "보고 싶어서요." "......." 천무영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보고 싶어서. 너무나 간단한 이유였다. 그는 눈길을 거두었다. 금모란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영, 저곳을 보세요." "......?" 천무영의 시선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창밖으로 향했다. ■ 무영탑 1권 제4장 흔들리는 청춘(靑春) ① 전각의 처마에 걸린 등롱 빛을 받으며 한 사람이 석상처럼 서 있 다. 화원의 꽃나무 사이에 서 있는 그는 석상으로 착각할 정도로 오래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 세가 채 안되어 보였다. 그러나 무심(無心)한 표정 탓인지 그보다는 더 들어 보이는 듯도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흑삼을 걸치고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 기였다. 안색은 대조적으로 창백했으며 표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 았다. 꽤 영준한 용모였으나 콧날이 굵고 입술이 한 일자로 다물려져 있 어 강한 집념의 소유자인 듯했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목검(木劍) 을 차고 있었다. 그는 우뚝 선 채 전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모란과 천무영이 있는 방 쪽이었다. 그러나 워낙 무심한 표정으로 인해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 천무영은 흑삼청년을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전신에 처 절한 정도로 진하게 배어있는 고독의 냄새를. 그것은 어쩌면 자신 과 동질(同質)의 것이었기에 단번에 파악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저 사람을 보라고 했소?" 금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무엇인가를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무영, 한 가지만 묻겠어요." "무엇이오?" "절... 사랑하나요?" 천무영은 흠칫했다.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 다. 그의 얼굴에 난색이 어렸다. "그건......." 금모란은 문득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알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여인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말이에요, 최소한 저에게도 마음 한 귀퉁이는 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음." 천무영은 신음을 발한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모란, 조만간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 금모란의 안색이 변했다. "떠난다고요?" "이별을 고하려던 참이었소." "그... 그랬군요." 금모란은 갑자기 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붉은 입 술을 씹더니 고개 돌려 창밖에 석상처럼 서 있는 흑삼청년을 바라 보았다. "저 사람의 이름은 무흔(無痕)이에요. 남해(南海)에서 왔다는데 그곳에서 독자적인 쾌검류(快劍流)란 검법을 익힌 후 중원으로 왔 다고 했어요. 그는 지금까지 삼백구십회를 싸웠는데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대요." 천무영은 눈썹을 흔들었다. "내게 왜 그런 말을 하오?" 그녀는 계속 말했다. "무흔은 고독에 길들여진 사람이에요. 그 누구에게도 정을 준 적 이 없어요. 어쩌면 그랬기에 스승도 없이 스스로 검법을 익힐 수 있었을 거예요."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소."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강자가 아니에요. 왠지 아세요?" 천무영은 안색이 변했다. 가슴에 쿵! 하는 울림이 있었다. "아마 그는... 모란을 좋아하게 되었나 보구려. 검객의 생명은 집 중력인데 정(情)으로 인해 집중력이 분산되면 쾌(快)를 잃을 것이 오. 그렇게 된 것이오?" 금모란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는 절 사랑해요.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축하하오." "축하한다고요?" 금모란의 눈썹이 올라갔다. 갑자기 그녀는 요사스러울 정도로 교 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호호호호홋......!" 그녀의 웃음은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웃음을 뚝 그치 더니 천무영을 직시했다. "무영." "말하시오." "무흔은 말했어요. 자신의 전부를 맡기겠노라고 말이에요. 그는 내 그림자가 될 것이며 내 말이라면 끓는 가마솥이나 타오르는 불 속이라도 뛰어든다고 했어요. 오직 저만을 위해 살 것이며, 죽음 조차 저를 위해서 담보하겠다고 맹세했어요." 금모란은 격정으로 인해 눈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녀 의 뜨거운 눈빛을 피했다. "그를 이해하오. 그대라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여인이니까." "절 비웃는 건가요?" 금모란의 음성에 노기가 어렸다. 천무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그러겠소?" 금모란은 갑자기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도와줘요, 무영." 천무영은 놀라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금모란의 얼굴에는 처연한 빛이 어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② "저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자격이 없어요. 그건... 혈해(血海)와도 같은 원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실상 제가 기녀가 된 것도 복수를 위함이었어요." 천무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소......?" 그는 금모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에게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소. 하지만 내가 뭘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내겐 가진 것도 없고 무예 또한 익히지 못 했소." 금모란의 타는 듯한 눈이 그를 마주 보았다. "정말 당신은 자신을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나요?" "아니면 내게 또 무엇이 있단 말이오?" 금모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보통 분이 아니에요. 무한한 능력을 갖춘 분이에요. 제게 는 그 힘이 필요해요." 천무영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모란, 날 잘못 보았소. 나는......." 금모란은 그의 말을 끊었다. "아뇨, 당신에게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요. 마음만 먹는다면 당 신은 삼 년 이내에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도 있어요." 천무영은 눈을 크게 떴다. "모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금모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고백할 게 있어요. 처음부터 당신에게 접근한 것도 바로 그 때문 이었어요. 당신의 자질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것 만은 믿어주세요." 천무영은 기가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랬었소...? 날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접근했단 말이오?" "용서해 줘요, 무영. 누구라도 내 입장이 되면 어쩔 수 없었을 거 예요."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놀랐을 뿐이오." "그럼 제 청을 들어주시겠어요?" 금모란은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영은 탄식하며 말했다. "우선 당신의 계획부터 들어봐야겠소." "이미 계획은 완벽하게 세워져 있어요. 당신만 승낙한다면 고금제 일인의 문하(門下)에 입문하여......." "미안하오, 모란." 천무영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나는 그 누구의 제자도 될 수 없는 몸이오." 금모란의 안색이 굳어졌다. "거절... 인가요?" "미안하오." "이토록 제가 애원하는데도 말인가요?" "모란, 이해해 주시오. 나도 무학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오. 하 지만 결코 누구의 제자가 될 수는 없는 몸이오." "어째서... 어째서죠?" "그건 나도 모르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천무영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상하게 들릴 것이오. 하지만 나 역시 나 자신에 대하 여 아는 것이 없소.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 어떤 자의 문하에 도 들어갈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이오." "아아!" 금모란은 그만 탄식을 발했다. 그녀는 몹시 실망한 듯 중심을 잃 고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결국... 저는 일어설 땅조차 없게 되었군요." "미안하오." "호호호!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어차피 저 혼자 벌인 일이니까요. 차라리 잘됐어요. 그동안은 당신때문에 망설였지만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 "보세요, 무흔이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는 날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예요. 믿지 못하나요?" "......." "호호호! 무흔! 듣고 있나요?" 갑자기 그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창밖에 서 있던 무흔이 다가왔 다. "날 불렀소?" "보여줘요. 무흔의 마음을." 금모란의 안색이 잔인하게 변했다. 그녀는 무흔을 쏘아보며 차갑 게 말했다. "당신의 손가락이 필요해요. 내 앞에서 끊어줄 수 있나요?" "무슨 짓이오? 모란!" 천무영이 깜짝 놀라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슉! 파공성이 이는가 싶더니 핏줄기가 허공에 치솟았다. 눈 깜짝할 사 이에 목검을 뽑은 무흔이 스스로 왼손 무명지를 끊어낸 것이다. '이럴 수가......!' 천무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사랑의 맹세를 했거늘 자신의 손가락을 이토록 거침없이 끊어낼 수 있는 자가 또 있을까? ③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무흔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자 세 그대로 서 있었다. 금모란은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홋......! 보았죠? 똑똑히 보았죠? 무흔은 설사 내가 목을 달라고 해도 말없이 내줄 거예요." 그녀의 자신에 찬 웃음은 천무영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호호호! 이처럼 날 사랑하는 사람도 있단 말예요." "가겠소." 천무영은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가세요, 가!" 금모란의 절규가 그의 가슴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그는 금모란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원한에 치가 떨리는 느낌이었다. '이건 아니다! 원한에 몸부림치는 저 여인은 단지 그녀의 이기심 때문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운명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천무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어찌 그녀만 탓 한단 말인가?' 그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만일 내가 그녀의 희망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 을 것이다.' 천무영은 심한 자책감에 전신을 떨었다. "무영......." 문득 금모란이 다가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그는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모란... 꼭 이렇게 해야만 하오?" "흐흐흑!" 금모란은 울음을 터뜨렸다. 천무영이 돌아서자 그녀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당신을 내게서 떠나게 할 순 없어!" 이별주(離別酒)가 아니라 이별의 마지막 찻잔을 마주하고 두 사람 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처음 그대가 내게 끓여 주었던 용정차(龍井茶) 맛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소." "고마워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금모란은 배시시 웃음을 보였 다. 천무영은 그녀의 미소 속에 가려진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중대한 결심을 했다는 것을. 그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무흔이 어둠의 일부인 양 서 있었다. 방안에 다정스럽게 앉아 차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과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천무영은 가슴이 아팠다. 잘못된 만남. 엇갈린 운명이 무흔과 금모란의 사이에 그 자신을 세워 두었다. 그것으로 인해 청춘의 영락(零落)이 끝없이 회전하 고 있지 아니한가! "아! 오늘로 우리들의 만남은 마지막이 되겠죠?" 금모란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디로 갈 건가요?" "글쎄, 날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왜... 떠나려는 거죠?" "날 찾기 위해서요." 천무영의 눈에 은은한 벽광이 번졌다. "세상에서 자신을 모르는 자만큼 불행한 자는 없소. 내 이름이 무 영(無影)인 것도 그때문이오. 내게는 남들에게 다 있는 그림자가 없소. 실체 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이오." "그럼...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기 위해 떠난단 말인가요?" "후후, 그런 셈이오." 금모란의 눈에 반짝 이채가 떠올랐다. 천무영은 흠칫했다. 지금까 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강 렬한 색감(色感)이었다. 그는 갑자기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금모란은 남자라 면 누구라도 안고 싶어하는 희대의 우물(尤物)이었다. 그는 그 사 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천무영은 망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형용키 어려운 교태가 배어나오는 여인. 그 녀의 몸뚱이는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으되, 이해할 수 없는 유혹을 풍기고 있었다. 만일 그에게 천리단옥이란 여인이 없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무너 지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기회가 없었겠는가? 지난 삼 년 동안 그는 많은 나날을 금모란과 함께 보냈다. 바둑을 두며, 금(琴)을 타면서, 때로는 시구(詩句)를 주고받으며... 그녀 와 하얗게 밤을 새운 적이 몇 번이던가? 그러나 그때마다 그의 가슴을 메운 것은 천리단옥일 뿐이었다. 그 의 눈앞에서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옥음으로 속삭여대던 금모란 의 모습은 천리단옥의 영상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음!' 그는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뿌연 안개가 어리는 것 같았다. 안개 저편으로 금모란이 웃는 얼굴이 흔들렸 다. 동시에 단전어림이 후끈 달아오르며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온몸 이 저려왔다. 욕화(欲火)였다. 쨍그랑! 천무영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지며 깨져버렸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금모란을 노려보았다. "모란... 차 속에 무엇을... 탔소?" 금모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의 눈꼬리에 염기(鹽氣)가 더욱 짙어졌을 뿐이었다. 천무영은 벌떡 일어났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욕화로 인해 온몸의 혈관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미안해요, 무영." 금모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 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 그녀가 걸치고 있던 능라적삼이 소리없이 떨어졌다. 그에 따라 뽀얀 어깨가 노출되었고, 터질 듯한 젖가슴을 간신히 가리고 있는 젖가리개가 나타났다. ④ 천무영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풍류객들이 천만금을 바치면서도 안아보지 못했다는 천상천하의 우물 금모란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옷을 벗은 것이다. 백설보다 흰 피부, 한줌밖에 안되는 허리, 만지면 툭 터져버릴 듯 한 젖가슴이 그의 시선을 무섭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무슨... 짓이오?" 그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의 양물은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금모란은 상체를 드러낸 후 허리띠를 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동작은 하나하나가 무서울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다. 천무영은 그녀의 옷벗는 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했다. "모란......!" "용서해 줘요. 무영... 당신을 사랑해요. 그건... 무흔이 절 사랑 하는 것과도 같은 거예요." 금모란은 치마의 끈을 풀었다. 치마가 흘러내리고 매끄러운 하체가 드러났다. 겉보기에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퍼 보이던 그녀의 육체는 의외로 풍성해 보 였다. 손가락 하나만 대도 툭 터져 버릴 듯 그녀의 육체는 무르익어 있 었다. 가히 폭발적인 느낌이었다. 이제 그녀가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한 장의 젖가리개와 둔부에 아 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고의뿐이었다. 그런 모습은 전라(全裸)보다 더 유혹적이었다. 천무영은 인내의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고, 입과 코로 뜨거운 숨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가 마신 차 속에는 이성으로는 제어 할 수 없는 강한 음약(淫藥)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소? 모란... 그대는 참으로 어 리석소......." 금모란은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전 당신을 알아요. 걱정 마세요. 어리석은 희망 따위는 품고 있 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젖가리개를 떼어냈다. 마치 생고무와도 같은 두 개의 유방이 튀어나왔다. 만지면 터져버 릴 듯, 아니 녹아버릴 듯 완벽하게 무르익은 유방이었다. "으으......!" 천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금모란이 말했다. "어차피 저에게 삶은 없어요. 복수를 위해 모두 버린 걸요. 하지 만 저에게도 첫번째 남자를 선택할 권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건 어쩌면 제가 부릴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욕심일 거예요." 툭. 마침내 여체에 남아있던 마지막 천이 떨어졌다. 이제 그녀는 실오 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나신이 되었다. "당신과 맺어짐으로 해서 전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이후로 금모란은 없어질 거예요." 금모란이 허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천무영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기이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충혈된 그의 눈이 금모란의 젖가슴에서 복부를 거쳐 대리석처럼 뻗어내린 다리 사이까지 내려갔다. "안아줘요." 금모란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기녀였다. 어떻게 하면 남자의 욕망을 이끌어내는지 잘 알 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더운 입김을 천무영의 목밑에 불어넣으며 섬섬옥수를 뻗어 그의 가슴속으로 밀어넣었다. 실상 그런 동작은 불필요했다. 천무영은 이미 이성의 끊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란!" 한 번 무너진 이성은 철저히 와해된 후에라야 돌아올 수 있는 것 이다. 돌아오기까지 그의 심신은 오직 욕망이란 이름의 노예(奴 隸)에 귀속될 뿐이었다. 그는 금모란을 거칠게 껴안았다. 손안에 비단처럼 매끄러운 감촉이 왔고 생고무와 같은 탄력이 접 촉되었다.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급하기만 했지, 그의 행동은 서툴렀으며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평소의 침착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아......!" 금모란의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분명 사랑하는 사내의 입김이요 손길이건만 그녀는 천무영의 입술 과 손이 전신을 거칠게 파고들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었나?' 생각 밖이었다. 달콤하고 뜨거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애 정이 떫은감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어쩌겠어? 내가 원했는데.......' 그녀의 몸이 사내의 거친 손에 밀려 탁자 위에 쓰러졌다. 차가운 탁자의 감촉이 둔부에, 등에 느껴졌다. 너무도 생소한 느낌이었 다. "허억." 천무영은 답답한 신음을 발하며 몸부림쳤다. 그는 찢다시피 옷을 벗어 던지며 달려들었다. 순수(純粹)와 이성(理性)이 실종된 그는 한 마리 야수(野獸)일 뿐이었다. '악!' 금모란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천무영이 그녀의 한쪽 젖 가슴을 깨물었던 것이다. 너무도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사 정없이 그녀의 유두를 씹고 빨면서 허덕이고 있었다. 마치 목마른 늑대가 벌판의 말라버린 샘을 파헤치는 듯했다. ⑤ 그녀는 번쩍 다리가 벌려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 행위를 천무영은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깊은 곳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왔다. "학!" 금모란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맨살을 칼로 도려내는 듯 극렬한 고통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천무영은 그녀를 정복한 채 거칠게 움직였 다. 그에 따라 탁자가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여체는 맥없이 상하 좌우로 흐느적거렸다. '아아! 이것으로.......' 금모란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뺨으로 뜨거운 눈물 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통만 있을 뿐, 절망과 포기 속에 싸늘하게 죽 었던 그녀의 몸에서 미세한 불씨가 일어나더니 급기야는 무서운 속도로 혈관을 달구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짜릿한 쾌감이 체내 깊은 곳으로부터 번져나갔다. 온몸이 흔들리며 짓이겨지면서, 사내의 몸에서 떨어지는 진득한 땀으로 미끈거리는 육체가 갑자기 부활이라도 한 듯 뜨겁게 달아오르며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욕망의 불길에 확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녀의 육체는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사내가 내뿜는 불길과, 여 체가 내뿜는 불길이 합쳐지며 혹한의 얼음조차 단숨에 녹여버릴 기세가 되고 말았다. "하학!" 그녀의 입술에서 불김이 토해져 나왔다. 사지를 벌려 사내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 건 그 누구에게도 배운 바가 아니다. 손톱을 세워 사내의 등을 찌르는 것 또한 배운 바가 아니다. 복부를 팽팽히 긴장시켰다가 자신의 깊은 곳을 무시로 드 나드는 사내의 양물을 무섭게 포획했다 가두고, 다시 밀어부치는 영악한 놀이를 뻔뻔하게 해내는 것 또한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구름을 타고 둥둥 떠올랐다. 무산(巫山)의 운우(雲雨)라고 했던 가? 방중(房中)의 즐거움을 빗대어 뼈마디까지 녹아내리는 쾌락이라 했거늘, 두 사람은 쾌락의 정상을 향해 합주(合奏)의 가락을 점점 더 올리고 있었다. 마침내 천지가 관통되는 듯한 마지막 순간이 왔다. 두 사람은 열 락(悅樂)의 정상으로 동시에 떠올랐다. 밤은... 그렇게 타버렸다. ⑥ 여전히 석상처럼 서 있는 한 사람. 무흔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창문에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있다는 것뿐 이다. 그래도 창문 안의 상황이 그려졌다. 그의 귀에 끊임없이 흘 러드는 남과 여의 자지러질 듯하는 교성과 신음이 그의 가슴을 천 만 조각으로 찢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도 인간이다.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증오와 분노, 절망이 어우 러진 눈빛이었다. '으으......!' 움켜쥔 그의 주먹에서 우두둑! 하고 뼈마디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 가 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슉! 그의 손이 한 차례 움직이자 피가 확 솟구쳤다. "헉!" 놀랍게도 무흔은 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한쪽 눈을 파버 린 것이다. 안구를 잃은 채 뻥 뚫려버린 눈구멍에서는 피가 분수 처럼 솟아나오고 있었다. "끄으윽......!" 그는 짐승과 같은 기성을 발하면서도 지혈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 다. 그의 한쪽 눈에서는 핏물이, 다른 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무흔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에게 형벌을 가함으로 써 고통을 잊고자 했다. "무흔, 너는 죽었다. 이제부터 너는 네 자신이 아니다." 그는 최대한으로 감정이 절제된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와 몸을 섞는 저자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그를 선 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기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허용할 수 있는 것. 그것 이 무흔의 사고방식이었다. 애꾸가 되버린 무흔의 눈은 정말로 죽어 버렸다. 그 무엇도 보기를 원치 않았기에 완전히 그 빛을 상실해버린 것이 다. 무흔은 수중의 목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한다. 네 선택을 이해하기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너와 관련된 모두를 지켜주마. 나... 나는 그저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족해.' 상처받은 무흔의 영혼은 끝내 아무 보상도 원하지 않았다. 무흔. 그의 영혼은 완벽한 무심함으로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 새벽. 겨울 새벽은 시리고 투명한 기운으로 가득차 있었다. 뿌옇게 안개가 깔려있는 중문통을 비틀거리며 걷는 인물이 있었 다. 천무영이었다. "내가...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그는 심한 자책에 빠져 있었다. 그의 발길은 무겁기 그지없었고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천향각에서의 하룻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금모란과의 정사는 상상도 해본 적도 없는 그였다. 변명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가 비통해 하는 것 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마음속의 영원한 연인에 대한 죄책감이었고, 둘째는 지기(知己) 하나를 잃었다는 점이다. - 무영, 미안해요. 난 이기적인 여자에 불과해요. 당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내 욕심만 챙겼어요. 금모란의 애소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 울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끝까지 우정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는 것을. 새벽에야 정신이 든 천무영은 또 한 번 충격을 느껴야 했다. 그것 은 탁자 위에 떨어진 한 점의 앵혈때문이 아니었다. 밤사이 애꾸가 되버린 사내때문이었다. 하나 남은 눈마저 생기를 잃은 채 무심히 껌벅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정말 미쳐버릴 지 경이었다. 경위야 어쨌든 자신이 금모란과 짐승처럼 뒹굴고 있을 때 무흔은 화석처럼 창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흔, 차라리 날 욕하고 때렸다면 내 심정이 이토록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는 천향각을 빠져나올 때 무흔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눈물이 얼어버린 것 이었다. 인간의 고통이 얼마나 크다면 그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후후후......." 천무영은 자조의 웃음을 흘리며 텅빈 거리를 걸어갔다. 그때였다. "찾았다, 찾았어! 여기 있었구나." 문득 허공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귀에 익은 음성에 천무영 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푸드드득! 날개짓 소리와 함께 녹색의 앵무새가 날아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무영! 반갑다, 반갑다구." 녹앵이었다. 삼 년만에 만난 녹앵은 무척이나 기쁜 듯 그의 어깨에 부리를 마 구 비벼대고 있었다. "녹앵.......!" 천무영은 격정이 치밀어 올라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은 녹앵 의 주인때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천리단옥이 주인이 아니던가. ⑦ 한참만에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손을 들어 녹앵의 깃털 을 쓰다듬어 주었다. "웬일이냐? 여기까지." "반갑다, 반갑다. 무영!" 녹앵의 수다는 무척이나 정겨웠다. "그래, 나도 반갑다." 천무영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녹앵을 대하자 마치 천리단옥 을 보는 듯했던 것이다. "보고 싶대. 보고 싶댔어, 단옥이가! 정말이야." 녹앵은 날개를 파닥이며 조잘거렸다. 천무영은 가슴이 쓰렸다. 그 때 녹앵의 발목에 묶여져 있는 손수건이 보였다. "이걸 전하기 위해 왔느냐?" "끌러 봐. 끌러 봐, 어서!" 녹앵의 재촉을 받으며 그는 천을 끌렀다. 그는 그것이 천리단옥이 늘 소지하고 다니던 비단 손수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옥.......' 손수건을 펴니 그윽하게 전해져오는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원단전야(元旦前夜) 무영탑재회(無影塔再會).> 미려한 필체로 쓰여진 글귀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말이냐, 단옥? 나와 만날 수 있단 말이지?' 천무영은 자못 흥분하여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여명이 걷히며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영상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 속 에 들어차 있는 영상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천무영은 격동에 젖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단옥... 그 안에 천 개의 인형을 완성시켜야겠다." ■ 무영탑 1권 제5장 거듭되는 이별(離別) ① 땅... 땅... 땅......! 이른 아침부터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 다. 서문로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병기점에서였다. 쇳소리는 대 기를 뚫고 날카로운 여운을 널리 전하고 있었다. 천무영은 병기점 앞에 섰다. 여전히 철자구(鐵子仇)가 시뻘건 쇠붙이를 부지런히 두드리고 있 었다. 그의 근육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달라 보였다. 천무영은 오늘따라 철자구의 기세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이 불덩이처럼 무섭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땅땅땅......! 힘껏 두드려대는 쇳소리에도 흡사 그의 혼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이는 장인(丈人)에게 있어 당연한 현상이겠으나 그의 일신에 흐르 는 광기(狂氣)를 염두에 둔다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철자구는 심지어 천무영이 가까이 다가섰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척 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신검을 만들어야 한다. 영원히 부러지지 않는 무적신검(無敵神 劍)을. 크흐흐... 그래야 운생(雲生)이 기뻐하리라." 천무영은 그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는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내가 만 들어낸 신검은 능히 천하제일검으로 불리우게 될 테니까." 땅- - 따앙! 따당―! 망치질에는 점차 더 신명이 들어갔으며 그에 따라 쇳소리도 더욱 요란해졌다. 천무영은 문득 탄식을 하며 돌아섰다. '철노인에게도 한(恨)이 내재되어 있다. 아마도 운생이라는 인물 은 그의 아들이거나 가까운 혈족이겠지. 그가 신검을 만드는 이유 는 그 인물때문일테고.' 천무영은 광기에 휩싸인 채 일에 열중하고 있는 철자구를 한 번 힐끗 돌아보았다. '조짐이 좋지 않군. 저런 상태라면 신검이 아니라 광검(狂劍)이 탄생될 것 같은 예감이 드니.......' 천무영의 우려는 훗날 현실화된다. 그러나 그는 말리지 못했다. 다만 그가 휘두르는 망치소리만이 오래도록 그의 귓전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② 토지묘로 발걸음을 옮기던 천무영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땅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핏자국은 길게 이어져 서문 밖 들판을 가로지르며 네 줄기의 흔적 을 만들고 있었다. 이는 네 발 달린 짐승이 발이 잘린 채 기어간 듯한 형상이었다. 혈흔을 살피던 천무영은 눈을 크게 떴다. 혈흔은 유감스럽게도 그 의 거처인 토지묘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누가......?" 그는 불길한 예감에 안면을 굳혔다. 핏물은 지면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토록 다량의 출혈을 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살아 있을 확률이 거의 없을 것이다. '왜 하필 토지묘로 향한단 말인가?' 천무영은 의혹을 느끼며 걸어갔다. 혈흔은 토지묘 안으로 향해져 있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천무영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여러 가지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졌으나 그 무엇도 원만한 것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앗!" 천무영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정 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육괴(肉怪)였다. 인간이라기 보다 는 그저 피범벅이 된 살덩이라고 하는 편이 맞았다. 사지가 모두 잘려져 나가고 머리와 몸통만 남은 육괴가 토지묘 안 에 뒹굴어져 있었던 것이다. 천무영은 태어나서 그토록 참혹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자는 먼길을 기어왔는지 절단된 사지에 흙과 모래가 뭉쳐져 있 어 바라보는 것만도 힘들 지경이었다. "으으... 무영......." 육괴가 신음을 발하며 부른 것은 천무영이었다. 그는 벼락을 맞은 듯 떨며 부르짖었다. "진형(陣兄)!" 그 육괴는 뜻밖에도 소매치기 친구인 진사유였던 것이다. "이럴 수가! 당신이었다니......!" 천무영은 진사유를 와락 껴안았다. 그 바람에 피와 흙모래로 그의 의복이 더럽혀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무영......" 진사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뭉개진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그의 음성도 격동때문인지, 아니면 극심한 고통 탓인지 떨려 나오 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사팔뜨기 눈이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딴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무영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말해 보시오, 진형!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소?" 그는 미친 듯이 진사유를 흔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그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것은 비단 진사유가 친구라서가 아니었다. 진사유는 극한의 고통을 겪은 탓인지 도리어 담담해져 있었다. 그 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천무영을 잠시 바라보더니 서서히 입을 열 었다. "무영... 그동안... 즐거웠다. 널 만난 이후... 처음으로 인간의 정이란 것을 알았으니까......." "바보 같으니!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말하시오, 어서!" "소용없다, 무영. 언젠가 네가 그랬듯... 내 기술이... 신세를 망 쳐놓은 것뿐......." 천무영은 언뜻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훔치다 걸렸단 말이오?" "아니야......." 진사유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이리 되었소?" "내... 옛날 얘기 하나... 해줄까?" 그는 천무영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오래 전... 그러니까... 수십 년 전이지. 그때만 해도... 천하제 일투(天下第一偸)라 불리던... 한 괴인이 있었다." 흐릿하던 진사유의 동공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천무영은 그것이 죽기 직전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아보고는 가슴 이 철렁 했다. "그분의 이름은... 진형우(陳形雨)... 천하은밀투(天下隱密偸)라 는... 영예로운 별호를... 가지고 계셨지." '영예?' 천무영은 와중에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껏해야 남 의 것을 훔치는 행위를 놓고 영예 운운하다니. 그러나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진사유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진 지함에서 나름대로 한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려는 자긍심을 엿보았 던 것이다. "천하은밀투 진형우... 그분은 천하삼은밀(天下三隱密) 중 한 분 으로... 내 부친이셨지." "으음." 천무영은 낮은 신음을 발하고는 심중으로만 말했다. '부친을 매우 존경했던 모양이군.' ③ 천무영은 몰랐으나 천하삼은밀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인 들이었다. 천하은밀색(天下隱密色), 천하은밀살(天下隱密殺)과 함께 천하은 밀투로 불리는 삼 인은 백년래 최대의 기인으로 일컬어진 위인들 이었다. 당시 강호에서는 그들 삼 인을 놓고 소문이 풍성하게 떠돌았다. 본래 소문이란 믿을 게 못되었으나 그들에 관한 한 그렇지가 않았 다. - 아내를 믿지 마라. 어느날 침상에서 네 목을 따갈지도 모른다. 거리의 여인이 아름답다고 함부로 눈길을 주지 마라. 그녀의 어여 쁜 미소 속에 칼이 숨겨져 있으니. - 안심하지 마라. 아무리 방비해도 은밀살(隱密殺)의 검은 언제든 네 목을 파고들 수 있다. - 황금을 자랑 마라. 마음만 먹으면 천하의 보물은 그의 것이나 다름없다. 훔치기로 마음만 먹으면 그는 모든 것을 가져간다. 이것은 천하삼은밀을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 삼 인이 모두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다 는 것이었다. 진사유가 그중 천하은밀투의 아들이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사유는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분은... 투도의 일인자였지. 언젠가 말씀하셨지. 마음만 먹으 면 황제의 고의까지 벗겨낼 수 있노라고......." 그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어렸다. "어느날... 천하삼은밀을 비웃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 은......." - 천하삼은밀이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천금성주(天禁城主)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천하은밀색의 미심술(媚心術)도, 천하은밀살 의 살인술(殺人術)도, 천하은밀투의 공공절기(空空絶技)도 천금성 주에게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그 소문때문에... 아버님께서는... 처참하게 돌아가시고 말았 지." 진사유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나왔다. 천무영은 짚히는 바가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천금성주에게 도전했다가......?" 진사유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미안하오. 난 그저......." "흐흐... 아버님께서는 멋지게... 해치우셨다. 묘수공공법(妙手空 空法)을 사용해... 천금성주의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감쪽같 이... 훔쳐내셨단... 말이다." "그렇다면 타계하신 이유는?" "그야 뻔하지 않느냐? 신물(信物)을 잃은 천금성주가... 가만히 있었겠느냐?" "으음." "아버님께는... 아니, 공공문(空空門)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 다. 일단 훔친 물건은 절대 되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지." "......." "흐으... 아버님은 나처럼 팔다리가 끊기고... 안구마저 뽑힌 후... 칠대혹형(七大酷形)까지... 당하셨다." 천무영은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렇게 당하시고도 신물을 돌려주지 않았단 말이오?" "아버님은 최후까지... 굴하지 않으셨지." "으음, 대단한 분이셨구려." 이것은 진심이었다. 천무영은 비로소 천하은밀투가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일대의 기인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으나 진사유의 눈빛은 급격히 꺼 져 들어가고 있었다. "부... 부탁이 있다. 무영......." "말하시오, 무엇이든 힘 닿는 데까지 돕겠소." 천무영은 진사유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천하제일투가 되려 했으나... 자 질이 미치지 못했다. 개봉에서 도둑질을 한 것은... 공공절기를 연성하기 위한 것....... 아버님이 남기신... 현령공공진경(玄靈 空空眞經)을 익히려......." 진사유는 굳어져 가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그러나... 끝내 그 십분지 일도... 익히지 못했다....... 무 영... 네가... 네가......." 그의 음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공공문의... 맥을 이어다오. 도둑이... 되라는 게 아니라... 언 제고 적절한 후인(後人)을 찾아... 계승시켜......." 진사유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든 모양이었 다. "현령공공진경은... 품속에... 천금성주로부터 아버님이 훔친 것 은... 그것은......." 급기야 그의 눈이 뒤집어졌다. "진형!" 천무영은 그를 흔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함이었다. "내... 이빨 속에......." "말하시오! 진형!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요?" 진사유의 얼굴에 언뜻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자는... 북궁(北宮)......." 그것이 마지막으로 그가 쏟아낸 말이었다. "진형......!" 천무영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진형, 당신이 죽다니...... 그것도 내 앞에서......." 죽음은 허무한 것이다. 오래 전에 아복의 죽음을 통해 느꼈던 허무감을 그는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어찌 이런 일이....... 이대에 걸친 신투가(神偸家)의 비극을 내 눈으로 봐야 했단 말인가?" 천무영은 굳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밤이 깊 어도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진사유의 죽음으로 천무영은 마치 한쪽 팔을 잃은 듯한 충격을 떨 칠 수가 없었다. ④ 토지묘 앞에 초라한 봉분이 하나 생겼다. 비문조차 없는 봉분이었 다. 천무영은 무덤과 마주했다. '묘비는 훗날 세워 주겠소. 공공문의 후계자를 찾은 다음 그로 하 여금 세우도록 하리다.' 그는 무덤에 대고 약속한 후, 수중의 두 가지 물건을 내려보았다. 하나는 피로 물들어 온통 붉게 된 책자였다. 그것은 바로 공공문 의 비급인 현령공공진경(玄靈空空眞經)이었다. 또 하나는 금시(金匙:금열쇠)였는데 정교한 세공으로 금시의 앞뒷 면에 천룡(天龍)이 새겨져 있었다. 천무영은 금시를 움켜쥐었다. "이 열쇠 하나때문에 신투가의 이대가 멸절하다니......." 사위는 아직 어두웠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 이 숫자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구백구십구 개의 목각인 형을 완성시킨 날 그는 구백구십구번째 서고에서 열권 째의 무학 비급을 가져온 것이다. '어쩌면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군.' 천무영은 묘한 감회를 느끼며 수중의 비급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는 매일 만장서가에 들러 서고를 정리해 왔다. 그런데 서고마다 어김없이 한 권의 무학비급들을 발견했고 그것을 가져온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이런 식으로 읽은 비급은 이번에 꼭 열권 째였다. 먼저 대환이심경(大幻移心經)을 비롯하여 뇌문비서(雷門秘書), 복 마진결(伏魔眞訣), 무정도급(無情刀 ), 독황경(毒皇經), 조화신 경(造化神經), 축융천결(祝融天訣), 현음진경(玄陰眞經), 마마심 경(魔魔心經), 마지막은 광한무록(廣寒武錄)이었다. 만일 무림에 몸담고 있는 자가 그 이름들을 들었다면 놀라서 까무 러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열권의 비급이야말로 지난 날 무림을 독패했던 패자(覇者)들의 독문 무학비급이었던 것이다. 중원 전역을 휩쓸며 적수를 찾지 못했던 십 인의 개세고수들이 남 긴 유급이 모두 천무영의 손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전설의 천부에 도전하기 위해 떠났으나 그 이후 소식이 끊 어졌었다. - 그들은 천부에 패한 뒤 은자천에 숨어 버렸다. 이후 복수의 칼 을 갈며 영원히 패하지 않을 불패기학(不敗奇學)을 연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십 인의 패자(覇者)들은 다음과 같았다. 환요비자(幻妖秘子), 천뇌마군(天雷魔君), 복마신개(伏魔神 ), 도천성(刀天聖), 천독모후(天毒母后), 조화신기옹(造化神機翁), 축융대제(祝融大帝), 현음곤월신마(玄陰坤月神魔), 마마대불사(魔 魔大佛師), 광한상인(廣寒上人). ⑤ 그들은 비록 천부의 도전에 실패했을지언정 개개인은 무신지경(武 神之境)에 올라 중원십팔만리를 질타한 바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그들의 비학 중 한 가지만이라도 얻기를 꿈에서도 소원하는 터였 다. 그러나 천무영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무서들을 읽는 동안 감탄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의혹이 더 강했다. '서고에 무학비급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 면......?' 그는 장노인을 떠올렸다. 그를 볼 때마다 인자하게 웃는 노인이었 다. '겉모습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장어르신은 내력 을 숨기고 있는 고인일지도 모른다.' 천무영은 그 선에서 추측을 접었다. 사실 그는 열권의 무서를 모두 읽으면서도 자신의 관념만은 철저 히 지켜 나갔다. 그는 여하한 무공도 인격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 면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무영은 무공구결을 머리에 새겨 두었을 뿐 아직 익히지는 않았 다. 아직 무학을 익혀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사 무인이 되더라도 칼을 수단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북궁현리......!' 그와의 만남 이후로 내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대는 모든 면에서 날 능가할지 모르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인 생의 승부는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장(市場)은 삶의 현장이다. 북적대는 시장통에서 사람들은 저마 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판다. 천무영은 시장통을 걷고 있었다. 그곳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즐겁다. 억세다 싶을 만큼 열심히 살 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순박한 이들의 땀냄새에서 갓 잡아올린 생선이 그러하듯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천무영의 입가에는 특유의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진 사유가 죽은 후로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웃음이었다. '금형은 오늘도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겠지?' 그는 수중의 낡은 섭선을 흔들어 본다. 그 부채는 얼마 전 금노적 에게 원단을 기념하는 선물로 미리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금노적을 생각하며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천무영은 어느 순간 흠칫하여 멈추어 섰다. 의당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금노적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 왔듯 오 척의 단구를 흔들며 째지는 음성으로 외쳐대고 있어야 할 그가 어찌된 일인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주인을 잃고 텅 빈 자리가 천무영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 기서 그는 또 가슴이 비워지는 듯한 허전함을 느낀다. '그도... 떠났단 말인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이 천무영을 사 로잡았다. 그리하여 넋을 잃은 채 망연히 서 있는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허리를 툭 쳤다. "당신, 무영공자 맞죠?" 천무영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섰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돌도록 때가 낀 새까만 손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예닐곱 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한 명의 거지소년이었다. 행색은 꾀죄죄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제법 또렷한 오관과 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소년이다. 세파를 거친 탓인지 나이보다 영악해 보 이기는 했으나 귀여운 일면도 있기는 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악 동(惡童)의 모습이랄까? "나를 왜 찾았느냐?" "난쟁이 아저씨가 서신을 전하라고 했어요." "서신?" 천무영은 왈칵 반가움이 치밀었다. "이리 다오." 그가 손을 내밀자 거지소년은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헤헤... 거저는 안돼요."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꼬마, 너는 너무 일찍 장사법을 배웠구나." 거지소년은 얼마나 오랫동안 감지 않았는지 머리칼이 제멋대로 엉 겨붙어 엉망이 된 뒷통수를 슬쩍 긁었다. "난쟁이 아저씨가 장사하는 걸 죽 보아온 걸요?" 민망한 시늉을 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며 천무 영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미안한 말이다만 난 가진 게 없구나." 거지소년은 혀를 쑥 내밀어 보이더니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줄 수가 없는데요." 그 기세로 미루어 뭔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천무영이 서신을 건네받기란 영 틀린 일 같았다. "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잠시 고심하던 그는 궁여지책으로 품 속에서 소도(小刀)를 꺼냈 다. 그것을 본 거지소년이 반짝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걸로 뭘 하게요? 설마 나를 위협하지는......?" 천무영이 웃으며 소년의 말을 끊었다. "하하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염려 말아라. 꼬마, 나는 꽤 괜찮은 조각 솜씨를 가지고 있다. 네게 수고한 대가로 미인상 (美人像) 하나를 깎아주려고 하는데, 어떠냐?" 거지소년은 대번에 환한 얼굴이 되어 손뼉을 딱 쳤다. "좋아요!" 천무영은 빙긋 웃고는 소매 속에서 나무토막을 꺼냈다. 사각사각......! 소도를 놀리는 그의 손길은 섬세하기 그지 없었다. 푸른 빛이 감 도는 그의 눈길도 오직 조각상에만 몰입되어 있어 예인(藝人)들만 이 가지는 외곬수적인 집중력까지도 느끼게 했다. 그의 손끝을 따라 나무토막은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궁장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얼굴은 물론 전신이 모두 아 름다움으로만 이루어진 듯한 미녀의 형상이었다. '어머님......!' 목미인상을 바라보는 천무영의 눈이 몹시도 일렁였다. 그 눈에 뿌 옇게 차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그 조각품은 그가 지니고 있는 모친의 유물, 즉 옥미인상(玉美人 像)과 닮아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조각을 하며 잠시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모친의 영상을 그려 보았던 것이다. ⑥ 이윽고 목미인상이 완성되자 거지소년은 뛸 듯이 기뻐했다. "야! 정말 예쁘다." 시장통을 함부로 굴러다녔어도 어린 아이인지라 아직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소년은 특별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 목미인상 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천무영은 좋아라 하는 거지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가 에는 일말의 연민이 깃들기도 했다. "자! 여기 있어요." 거지소년은 지저분한 가슴을 들추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던지고 는 잽싸게 인파 속으로 달려갔다. 천무영은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그의 벽안은 쓸쓸함으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당신도... 내 곁을 떠났구려." 금노적이 남긴 글은 이러한 내용이었다. <무영 보아라. 나는 개봉을 떠난다. 애초 목표했던 황금 천만 냥을 모았으니까. 내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돈을 모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밝힐 수가 없지만 언젠가 너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즐거웠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작별을 고해야겠구 나. 어쩌면 훗날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그때에는 이 금노적 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겠다. 무영, 너는 좋은 녀석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의 친구였다. 내 심중의 한(恨)이 풀리는 날, 감추어 두었던 오백 년 묵은 천산설 련주(天山雪蓮酒)를 뜯어 실컷 마시자꾸나. 금노적 서(書).> 마침내 원단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날은 저무는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천무영에게 는 유난히 뜻깊은 날이었다. 토지묘 안. "단옥... 이로써 네 모습을 새긴 목인형은 천 개가 되었다." 기대로 인해 흥분한 탓일까?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그의 음성은 어쩔 수 없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밖에는 새벽부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천무영은 방금 완성된 천 개째의 목인형을 손에 든 채 눈이 내리 는 광경을 내다보았다. 짧지 않은 세월을 기다림으로 일관해 온 그로서는 감회가 여간 깊은 것이 아니었다. '너는 기뻐해 줄까? 그동안 너를 보듯 내가 천 개나 되는 네 분신 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알면.' 일면 불안감도 없지 않은 그는 신단 앞으로 와 휘장을 걷었다. 그 위에는 그가 깎은 목인형들이 전날과 다름없이 가지런히 놓여 있 었고, 한 개가 더 보태지자 말마따나 천 개가 채워졌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조금씩 틀렸다. 점차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렸다고나 할까? 소녀에서 여인 으로 변해가는 천리단옥의 모습이 전부 모여 있었다. 특히 천무영이 마지막으로 올려놓은 목인형은 여인으로서 가장 아 름답고 화려하게 피어난 그녀를 보여주고 있었다. '후후... 오랜 나의 염원이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스스로도 어리 석다고 여겨져 이 조각품이 일천 개가 되는 날에는 너 모르게 이 곳을 훌쩍 떠나버리리라 마음 먹었거늘.......' 천리단옥을 만나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실로 꿈만 같은 일이었 다. 그런데 단지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무영의 깊고 푸른 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어 려 있었다. 그는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단옥, 네가 나의 연 인(戀人)이라는......." 아울러 그는 마음을 굳게 다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역시 떠날 것이다. 그래야 네가 행복해질 테니까.' 천무영은 휘장을 내리고 돌아섰다. "만장서가의 서고를 정리하는 일도 오늘로써 마지막이 되겠군. 미 리부터 계획이라도 세워 두었던 듯. 후후후....... 이번 서고에도 무서가 비치되어 있을지?" 그의 뇌리에는 문득 장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 천 개의 서고가 모두 정리되는 날, 만장서가는 문을 닫는다. 더 이상 문을 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허허헛......! 그 말에서 천무영은 진사유의 죽음이나 금노적과의 이별이 가져다 주었던 것과 동일한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허탈한 심경이 되어 토지묘를 나섰다. '장어르신도 그렇게 내 곁에서 떠나가시려는 것이겠지.' 흐린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천무영은 눈을 가 늘게 뜬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눈은... 내가 개봉부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날에도 내렸었다. 그 리고 떠나려고 하는 지금에도......." 그는 천천히 눈 속으로 걸어갔다. 쓸쓸한 그의 어깨 위로 눈은 금 방 수북하게 덮여갔다. 언제부터인가 한 쌍의 눈이 멀어져 가는 천무영을 지켜보고 있었 다. 그 눈은 오랫동안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욱한 눈보라에 가리워져 그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천 무영을 주시하고 있는 그 눈이 몹시도 착잡한 빛을 띠고 있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눈의 주인이 눈보라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영공자, 당신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소. 왜냐하면 당 신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오." 그런 말을 한 그는 어디론가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스스스……. 눈발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⑦ 만장서가에 당도한 천무영은 흠칫 놀랐다. 웬 처음 보는 꼽추노인 이 막 점포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영문을 몰라 잠시 멍하니 섰다가 꼽추노인을 불렀다. "이보시오, 노인장!" "왜 그러슈?" 꼽추노인이 천무영을 돌아다 보았다. 그자는 애꾸눈에다가 얼굴에 칼자국까지 나 있어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누구라도 선뜻 말을 붙이기가 힘든 위인이라는 얘기다. "장어르신께선... 어디 출타하셨소?" 천무영이 묻자 꼽추노인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은 떠났수다." "떠나시다니, 내겐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 꼽추노인은 귀찮다는 듯 애꾸눈으로 천무영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자네가 무영이라는 청년인가?" "그렇소이다만." "음, 마침 잘 왔네. 장노인이 자네를 만나면 이 열쇠를 넘겨 주라 고 하더군. 장사를 그만 집어치울 모양이야." "그랬었구려." 천무영은 굳어진 얼굴로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시일이 앞당 겨진 이별은 그를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서운하게 만들었다. 그의 심정을 알 리 없는 꼽추노인이 물었다. "뭐 더 궁금한 게 있나?" "혹시 장어르신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시오?" "그야 본인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낸들 어찌 알겠나? 인생처처상 봉이란 말도 있으니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게야." 꼽추노인은 상스러운 언행 중에도 제법 문자를 섞어 내뱉고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려 들지도 않았다. 천무영은 멍하니 열쇠꾸러미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그가 매일 만지던 일천서고의 열쇠들이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져와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쉽지 않구나. 모든 헤어짐이 다.......' 그는 공허감이 엄습해 왔으나 애써 기운을 냈다. "약속했던 일이니 서고 정리나 마치자." 천무영은 문을 따고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⑧ 천번째의 서고. 내부는 매캐한 먼지와 곰팡이로 가득 차 있었다. 예외없이 천장까 지 닿도록 숱한 서가들이 세워져 있었고, 각 서가마다 다양한 종 류의 장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천무영은 그 속에서 장부를 들고 서책들의 목록을 정리해 나갔다.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힘들어 한 적이 없었거니와 마지막이라 고 생각하자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달리 말하면 그로서는 더 읽을 책이 없어지는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상 서책들은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고뇌를 덜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목록정리를 거의 다 마친 천무영의 눈길은 한 권의 책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번 것은 어떤 것일까?' 그의 눈에 반짝 빛이 일어났다. 그는 손을 뻗어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책자를 꺼내 들었 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은 무공비급이 아니었다. 두툼한 책자는 빛바랜 양피지로 엮어져 있었으며, 표지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은자지서(隱者之書)> 그것을 보는 천무영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숨은 자의 책이라... 제목 치곤 꽤 희안하군." 그런데 실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한 가닥 무형의 기운이 뻗어와 그를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이 현상은......!' 놀라는 사이에 벌써 천무영은 그 조종에 따라 책장을 열고 있었 다. 지극히 패도적인 서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패했다. 수치스런 일이다. 천하무적(天下無敵)을 자랑하며 사해오악, 구주 팔황을 활보하며 군림했던 우리들이 처음으로 패한 것이다. 오오!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늘 위에 하늘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 도다.......> '대체 무슨 소리지?' 천무영은 황당한 느낌이었으나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책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우리는 패자(敗者)들이다. 백 년의 영화가 모두 헛된 꿈 으로 돌아갔다. 대라천부(大羅天府)가 그토록 강할 줄은 몰랐거니 와 패자가 된 이상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우리는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으며 대명천지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어 숨어 버리기로 작정했다. 패자들끼리 영원히 무림에서 사라 지는 편이 나았기에. 그러나 이곳을 은자천(隱者天)이라 명명한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 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패했지만 역사 속에서 영원한 패자로 남 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곳에 전 무학을 집대성하여 묻어둘 것이다. 언제고 후 인이 나타나 그것을 익힌다면 패자지학(敗者之學)이 아니라 불패 기학(不敗奇學)으로 완성시키길 바라며.......> "으음!"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그의 가슴에는 어느 덧 의혹을 대신하여 연민지심이 깃들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구구절 절이 패자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해 놓은 문구 탓이리라. 그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대라천부에 도전했던 역대의 강자들이 숨어 들었다는 은자천의 실상이었다. 무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근거가 없어 그저 전설쯤으로 여겨지던 그 일들이 이렇듯 실체가 되어 무림과는 연관도 없는 천 무영의 뇌리에 속속 주입되고 있었다. 그들의 시조(始祖)는 구천환무대제(九天 武大帝), 무우광생자(無 憂狂生子), 천마서생(天魔書生), 숭양철적초자(嵩陽鐵笛蕉子), 현 우비도(玄雨秘道) 등으로 불리우는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무림사에 기록될 만한 초강자들로 대라천부에 도전했다가 패하여 강호상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은자(隱者)들이 었다. 결국 양피지로 된 그 낡은 책자는 모든 은자들의 비원을 적 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사라졌던 은자들이 이런 글을 남겼을 줄 뉘라서 알 수 있었겠는가? 은자지서에는 이미 죽어서 뼈조차도 흙이 되었을 자들과 근세 백 여 년내 패자들의 절규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로써 운명의 화살이 가슴 깊이 박혀들고 있었으되 정작 천무영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다만 선 채로 은자지서를 읽으며 많은 부분에 공감했을 따름이었다. 거기에는 도합 구십구 인의 글이 담겨 있었는데 내용은 한결 같았 다. 저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통한 을 기록한 것인데, 놀라운 사실은 와중에도 그들 전원이 한 사람 도 예외없이 친필로 썼다는 점이었다. 필경 그들 구십구 인의 패자들은 패배를 더없는 수치로 여기기는 했으나 그만치 절치부심, 각오를 다지려 했으리라. 천무영은 과연 그들과 어떤 운명으로 묶여져 있을지? ■ 무영탑 1권 제6장 재회(再會), 그러나...... ① 설야(雪夜). 천하만물이 잠들고 사위가 적막에 휩싸이자 그 풍경은 평화라는 어휘를 연상시켰다. 순백의 대지 위로 천공에 비스듬히 걸린 편월 (片月)만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으니 말이다. 달빛은 무영탑 위에도 내리고 있었다. 비록 이름처럼 그림자는 없 을지언정 그 주변은 연인들의 밀회장소로는 제격이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은즉 굳이 숨을 필요도 없거니와 눈밭에서 반 사되는 시린 빛까지 더해지니 운치도 그만이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새해가 도래한다. 멀리서 폭죽이 터져 밤하 늘에 휘황한 불빛으로 수를 놓는 것은 그때문이다. 아마도 지금쯤 개봉성 내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으리라. 거리로 뛰어나와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염원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과 무관한 자도 있다. 무영탑 아래서 설지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사내, 그는 천무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두근대는 그의 가슴 한 켠에는 착잡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무영탑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단옥, 지난 삼 년 동안 너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정말이지 미치 도록 보고 싶다. 그러나.......' 달빛 탓인지 신비로울 만큼 푸른 빛이 짙어진 그의 눈이 마치 자 석에라도 이끌린 듯 탑신의 한 부분에 고정되었다. 그는 일시지간 격동으로 인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천무영(天無影)> <천리단옥(千里壇玉)> 서투르게 새겨진 그 이름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 천무영 을 잊지 못할 추억의 세계로 잡아끈 것이었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서 잔 물결을 일으켰다.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저 글자들을 새겨넣던 날을.......' 천무영은 잠시 굳은 듯 서 있다가 탑신을 돌아갔다. 탑의 내부로 이르는 문 앞에 멈추어 선 그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심 중에서 왈칵 치밀어오른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녀가 와 있을까? 녹앵을 보내 이곳에서 만나자고는 했지만 과 연 상황이 허락되었을지......?'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가누며 낡은 문을 밀었다. 끼이익! 문은 귀에 익은 마찰음을 내며 곧바로 열렸다. 천무영은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곳은 달빛도 채 닿지 않아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는 어둠에 익숙하지 않아 아무것도 볼 수가 없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처럼 부르짖고 있었다. 지레 포기함으로써 닥쳐올 절망으로부터 일찌감치 도망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자격지심에 불과했다. "무영." 한가닥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부딪쳐 왔다. 절망을 일소시키 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고뇌를 잊게 만드는. "단옥......!" 천무영도 실로 오랫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는 한편, 벅찬 감회 를 이기지 못해 어둠에 싸인 허공을 마구 휘저었다. "어디 있어? 어디 있는 거야?" 여전히 나직한 천리단옥의 음성이 답했다. "여기." 천무영은 일시지간 몸을 흠칫 떨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손끝에 믿을 수 없게도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고 있었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손을 덥썩 잡았다. "단옥!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로서는 이 재회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분명 만나야 하면서도 또한 그래서는 안될 사이였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았을 뿐 뜨거운 격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잠시 시간이 지체된 후, 그는 비로소 몸을 움직여 열린 문앞으로 천리단옥을 이끌어 갔다. 그것은 흘러드는 달빛을 빌어 상대방의 모습을 새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② "아! 역시 너로구나, 단옥." 천무영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앞에 는 눈처럼 흰 백의를 입은 청초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이전에 비해 한결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지긴 했으나 그 모습은 그 가 지금까지 상상해온 천리단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굳어진 듯한 그녀의 기색만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단옥, 왜......?' 천무영이 내심으로 묻고 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야, 무영." "그래, 아주 오랫만에 만났지. 우린." 그는 가슴에 깃드는 한 가닥 염려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네 정혼자가 알면......." "그만!" 천무영의 말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왜냐하면 천리단옥이 갑 작스레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후, 그녀는 천무영에게 살포시 몸을 기대왔다. "지금은 그 누구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 사람도, 내게 혼인을 강요하는 아버님도......." "단옥, 안돼. 그는... 빼어난 인물이야." 천리단옥이 그의 코 아래서 얼굴을 반짝 치켜들었다. "그를 알아?" "음, 우연히 한 번 스친 적이 있지. 멋진 풍모를 지녔더군. 나 같 은 위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영!" "외양에 비해 인품은 다소 떨어지는 듯했지만 너를 내조자로 두게 되면 그도 틀림없이 달라질 거야." 천리단옥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잔인해! 무영, 너는 어쩌면 내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삼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단옥......." "흐흐흑......!" 그녀는 기어이 오열을 터뜨렸고, 천무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대 로 서 있어야 했다. 고통은 이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몫 까지 겹쳐 그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애초부터 이별을 위한 만남이었던지라 예상을 못한 바는 아니었 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우는 모습을 대하고 보니 천무영은 자신 이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들먹이는 천리단옥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단옥, 이러면 안돼.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잖아? 각자 갈 길에 대해 신중히 생각을 해야 될 때야." 그의 음성은 잔잔히 이어졌다. "이처럼 너를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어 차피 여기를 떠날 거니까." "떠난다고......?" 천리단옥은 흐느끼는 중에도 전신을 떨었다. "음, 그동안 너를 생각하면서... 네 모습을 닮은 목각인형을 깎았 지. 후후... 우습게도 천 개나 돼지. 아마도 너에 대한 그리움으 로 보낸 나날들은 평생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거야." "좋은 기억? 천 개나 되는 목각인형을 깎았다고......?" "그래, 삶이란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그리고 장담하건대 추억이 란 지나고 나면 모두 아름다울 테고." "말도 안돼!" 천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너는 나의... 좋은 친구였는걸." "친구......?" 천리단옥은 그의 말을 되받더니 다시금 눈물을 주르르 쏟았다. 그 들은 분명 친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은 그녀가 알 듯 그도 알고 있겠건만 실제와는 다르게 규정지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니야, 무영. 난 너의... 흐흑......!" 그녀는 더 말하지 못하고 흐느낌으로 대신했다. 자신을 그의 연인 이라고 당당히 부르짖고 싶건만 그것은 이 마지막 순간에조차 차 마 말이 되어 나와 주지를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에서 마주 하고 있으되, 그들 사이의 거리 는 멀기만 했다. 천리단옥이 문득 눈물을 소매로 훔치더니 한껏 용기를 낸 듯 입술을 떼었다. "부탁이 있어, 무영." "무슨?" "거절하면 안돼?" "음." "한 번만 안아 줘. 꼭 한 번만......." 억지로나마 웃음을 짓고 있던 천무영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 것은 그의 자제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의 일이었다. "단옥!"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천무영의 눈에도 비로소 눈물이 차 올랐다. "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무엇도." "무영!" 그들은 눈물 젖은 뺨을 서로 부벼댔다. 그것은 두 사람이 표현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몸부림이었다. 피부가 맞닿은들 달콤하고 황 홀하기는커녕 상대의 절절한 아픔만이 확인되어지는. 그나마 그 행위는 그리 오래 가지도 못했다. 달이 구름에 숨었는지 그들을 비추던 빛이 슬며시 사라졌다. 아 니, 실은 누군가 나타남에 따라 달빛이 가려진 것이었다. 그 뒤로 싸늘한 웃음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후후... 보기 좋은 풍경이군." ③ '그다!' 천무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상대 가 정말 두려웠는데, 그것은 자신을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천리 단옥의 처지가 걱정되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는 천무영의 짐작 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후훗... 놀랍군. 오대가문 중 하나인 천문세가의 금지옥엽이 이 런 곳에서 뭇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애를 즐기다니." 천무영은 천리단옥의 몸이 싸늘하게 굳어진 것을 느끼며 그녀를 한쪽으로 떼어 놓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 간의 일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지탄받아 마땅한 것이었으므로. 그 객관성에 의거하여 비난은 가일층 심화되었다. "이러고도 멀쩡하게 나와 결혼을 하려고 했나? 정혼자가 있는 계 집이면 의당 정숙해야 하거늘,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외간남자 와 정을 통해? 후후... 간이 부어도 한참 부었지." 천무영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나섰다. "이보시오, 실은......." "닥쳐라!" 음성은 살기등등하여 외쳤다. "남의 계집을 꼬여내고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게냐?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목을 날려 버리겠다." 이번에는 천리단옥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북궁공자......!" 그녀는 불러놓고 아무 할 말이 없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 쩌겠는가? 그자는 자신의 정혼자인 북궁현리인 것을. 문앞을 가로막았던 그림자가 움직이자 다시 달빛이 비춰졌다. 그 아래서 북궁현리는 잔인할 정도로 빈정거렸다. "훗훗...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보군.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 더라면 더 좋은 구경을 했을텐데. 아닌가?" 그의 영준한 얼굴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눈 에서 야수와도 같은 살기를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호오! 이제 보니 너는 나와 안면이 있는 자였군. 바로 그 냄새나 는 책벌레가 아닌가?" 북궁현리의 얼굴에는 경멸의 기색이 짙게 나타났다. 아울러 그는 노골적으로 천무영을 비웃었다. "이건 너무도 실망인 걸? 본인의 정혼녀이자 천하절색인 우담화와 통정할 정도의 사내라면 대단할 줄 알았는데 고작 거지나 다름없 는 작자라니 말이야." "으음!" 천무영은 뭔가 가슴으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으나 스스로를 억누르기 위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지금 그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사 태를 원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로서는 현 재의 처지가 상대보다 못한즉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진정하고 내 말을 좀......." 그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북궁현리는 호통을 쳤다. "너는 닥치고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네 구차한 변명까지 듣게 되 면 네놈은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천무영은 말이 통하지 않자 눈을 내리 감았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나를 베시오. 그렇게 하여 당신의 마음이 조 금이라도 풀릴 수 있다면." 펑! "크윽!"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은 그대로 붕 떠오르더니 허공으로 날아가 한 귀퉁이에 처박히고 말았다. 쿵! 그는 가슴이 터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 힘을 썼다. 그의 입과 코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건방진 놈! 그럼 네놈을 살려둘 줄 알았느냐?" 북궁현리는 거칠게 내뱉고는 몸을 날렸다. "윽!" 천무영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북궁현리가 손 등을 밟아버렸기 때문으로, 어찌나 세게 밟았던지 대번에 으적 하 고 뼈마디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놈!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겠다." 북궁현리는 이어 발끝으로 천무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크윽!" 천무영은 허리가 절단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또 한 차례 붕 떠 날아갔다. 그는 걸레쪽처럼 벽에 가 부딪쳐 떨어졌으며, 그 바람 에 전신을 피로 물들이게 되었다. "그만 해요!" 휙! 천리단옥이 몸을 날려 천무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거침없이 그를 끌어안더니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미안해, 무영! 나때문에......!" 그녀는 백의가 시뻘겋게 물들었으나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무영의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무영! 정신차려, 무영!" 그 광경을 보며 북궁현리는 입술 끝을 기이하게 말아올렸다. "후후... 불륜(不倫)에도 감정이 존재한다는 건가?" 천무영은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가운데 더듬더듬 말했다. "그건... 지나친 비약...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소." "시끄럽다!" 채찍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뻗어왔다. 취릿― 파팍! "크윽!" 그것은 천무영에게 전신이 갈라터지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천 리단옥이 기겁을 하여 외쳤다. "안돼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 그녀는 울부짖으며 필사적인 기세로 천무영을 가로막았다. "후후... 대신 죽겠다는 소리 같은데 그렇게는 안되지. 그래도 당 신은 한때나마 이 북궁현리의 정혼녀였으니까." 촤악―! 예의 채찍이 한 차례 더 허공을 갈랐고, 그 뒤를 이은 비명은 천 리단옥의 것이었다. "악!" 채찍은 교묘하게 그녀를 피해 실신해 있는 천무영에게로 날아갔으 나 그녀가 몸을 틀어 스스로 방패가 되었던 것이다. ④ 그녀의 백의가 칼로 벤 듯 찢겨 나가며 눈부신 피부를 노출시켰 다. 그 피부에는 채찍에 의해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흐흐흑......! 날 죽여줘요." 천리단옥은 오열을 터뜨리며 북궁현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녀로서는 자신이 당하는 치욕이나 고통보다 천무영이 치루어야 하 는 것들이 더욱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북궁현리의 눈빛은 비정하게 변했다. 두 남녀를 향한 질투 따위는 일 점도 없는 그였다. 단지 자존심의 회복과 모 종의 목적달성을 위해 그는 이래야만 되었던 것이다. "말했지 않은가? 그럴 순 없다고." 파악! 채찍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 천무영을 휘어 감았다. 그의 입에서 는 더 이상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선혈을 사방으로 뿌리며 몸을 한 번 크게 들썩였을 뿐이었다. 채찍질은 이후로도 수없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옷은 벌써 갈기갈기 찢겨 나갔으며 천무영의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변해갔다. 그야말로 온 몸에서 성한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아! 차라리......." 절망에 빠진 천리단옥은 품 속에서 한 자루의 날카로운 비수를 꺼 내더니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함께 죽으리라." 슉! 손이 움직이는가 싶자 그녀의 목에서는 피가 튀었다. 그러나 비수는 깊이 파고들어가지는 못했다. 북궁현리의 채찍이 뻗어와 찰나적으로 비수를 나꿔챘던 것이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수는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자결에도 실패 한 천리단옥은 엎드려 통곡하며 절규를 토해냈다. "흐흐흑... 냉혈한......!" "냉혈한이라고, 내가 말인가?" 북궁현리는 자신의 발 아래 엎드려 있는 천리단옥을 싸늘한 시선 으로 노려 보았다. "그럼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마땅한 것이지?" 이죽거리는 그의 입술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울러 그 의 눈에는 서서히 잔인한 욕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후후... 당신은 저놈을 살리고 싶은 건가?" 흐느끼던 천리단옥은 정신이 번쩍 든 듯 몸을 일으켰다. "무... 물론이에요. 제게 원하는 게 뭐죠?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그 말, 진심인가?" "진심이고 말고요! 부디......." "그렇다면 벗어라." 천리단옥은 북궁현리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곧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설마... 옷을......?" 북궁현리의 입언저리가 비정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 도 없이 그녀에게 아랫 사람 대하듯 명령을 했다. "맞다. 네 스스로 옷을 벗어라." "그... 그건......!" "후후... 싫다는 거냐?"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듯 북궁현리의 손바닥이 즉각 쇳소리를 냈다. 위잉― 펑! 이어지는 폭음과 함께 피떡이 되다시피한 천무영의 육신은 또 한 번 붕 떠올랐다가 벽에 부딪치며 떨어졌다. "천강참(天 斬)을 한 차례 더 전개하면 저놈은 두 동강이 나 죽 게 될 것이다." "벗겠어요!" 천리단옥이 다급히 외쳤다. 그녀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채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깨물며 손을 올렸다. ⑤ 찌익―!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피로 물든 백의는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찢 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 자신의 손에 의해. 그로 인해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경이 되어 있는 그녀의 머리 위 로 북궁현리의 냉혹무비한 음성이 쏟아 부어졌다. "전부 벗어 버려라. 실오라기 한 올도 네 더러운 육체에 남아 있 어서는 안된다." '아아! 하늘이여, 이 수모가 그를 사랑한 대가인가?' 천문세가의 금지옥엽인 우담화 천리단옥. 그녀는 탄식조차 안으로 삼키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몸에서 젖 가리개는 물론 고의마저도 모두 떼어낸 것이었다. 알몸이 된 그녀의 표정은 흡사 죽은 사람처럼 굳어져 있었다. 하 지만 참혹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도 그녀의 벗은 몸은 충격적이리만치 아름다웠다. 게다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자 그녀를 짓밟으려는 북궁현리의 눈 에는 유감스럽게도 더없이 색정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녀의 몸은 가녀린 편이었다. 성숙한 여인인지라 농익 은 과일 향기를 풍기면서도 전체적으로 유약하고 섬세한 느낌을 주어 북궁현리의 취향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혹시 오해를 하고 있을까봐 말이다만 나는 너의 털끝 하나도 건 드리지 않을 것이다. 이 북궁현리는 다른 사내의 손길이 먼저 닿 은 계집에게는 취미가 없으니까." 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기어라." "흐윽!" 천리단옥은 눈을 휩뜨며 자지러질 듯한 신음을 발했다. 그 순간 그녀의 빙결 같은 나신에 소름이 잔뜩 돋아난 것은 단지 추위때문 만은 아니었으리라. "후후... 명심해라. 그것만이 놈을 살리는 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흐흐흑......!" 천리단옥은 그대로 엎어지더니 북궁현리가 시키는 대로 그 자리에 서 기기 시작했다. 무릎을 세운 채 양 팔꿈치로 거친 바닥을 기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개인적인 명예는 둘째 치고 무림 오대가문 중 하나인 천문세가 소가주의 위상이 이 처럼 처참하게 곤두박질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봉긋한 두 개의 젖무덤과 희고 둥그스름한 둔부도 계속하여 함께 출렁거렸다. "후후후......!" 북궁현리는 그녀에게 시선을 던진 채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도착적 성향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는 귀찮은 존재를 확실히 떼어냈다는데 대한 안도감과 상한 자존심을 만회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그였다. 요컨대 북궁현리가 짓밟고자 마음 먹은 것은 그녀의 육체가 아니 라 정신이었다. 그래야 후환도 없을 터이므로. 그의 삶에 가장 우 선하는 것은 여인이 아니라 야망이었다. 그러나 북궁현리와는 인생관이나 가치기준이 전혀 다른 위인이 있 었으니, 그는 천무영이었다. "크으윽......!" 천무영의 입에서 고통으로 인해 폐부가 찢겨나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는 어느새 깨어나 있었고, 천리단옥이 알몸으로 바 닥을 기어가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다. "단옥, 안돼... 크윽!" 그는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려던 말도 맺지 못한 채 한 사 발이 넘는 피를 토하고는 다시금 혼절해 버렸다. 그 광경을 본 북궁현리는 앙천광소 했다. "으핫핫핫핫......!" 이윽고 웃음을 그친 그는 당당히 선언하기에 이른다. "너, 천리단옥! 이로써 본인과의 혼약은 없었던 걸로 하겠다. 이 의는 없겠지?" 천리단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걸 보면 파혼이란 당연한 절차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후회나 미련도 물론 없었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자신의 처지보다 기식이 엄엄해져 있는 천무영이 더 걱정스러웠다. "핫핫핫핫......!" 북궁현리는 일진의 광소로써 두 사람을 한꺼번에 싸잡아 비웃어준 후, 문 밖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휙! 그의 모습은 삽시에 사라져 버렸으나 그가 남기고 간 웃음소리의 여운은 오랫동안 탑 내부에 남아 웅웅거렸다. "흐흐흑......!" 천리단옥은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이 밤의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가지고 있는 전부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뭉개진 자존심은 고사하고 순결의 상실이나 실 추된 명예는 어찌 회복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천리단옥에게는 마냥 울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녀 는 비틀리고 찢긴 옷을 찾아 대충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손등으 로 눈물을 닦으며 천무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 었다. 전신을 난타당한 그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는 보아줄 수 없 을 정도로 처참해져 있는 상태였다. "무영... 내가 너에게 정말로 못할 짓을 했어." 이번에는 자책이 천리단옥의 상처입은 가슴을 가득 메웠다. "단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널 불러내어... 흑! 이를 악물고라도 참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손을 뻗어 천무영의 맥을 짚어 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아 직 죽지는 않았는지 가늘게나마 맥이 뛰고 있었다. 천리단옥은 어두컴컴한 바닥을 더듬어 자신의 품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하나의 옥병을 찾아냈다. 마개를 따자 그 즉시 청량한 향기 가 탑 내부에 그윽하게 퍼졌다. 그녀는 세 알의 황색 단약을 꺼내더니 입 속에 넣고 씹었다. "처절하리만치 억제해 왔던 너와의 입맞춤... 더는 회피하지 않을 거야. 이런 식으로 나누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자의든, 타의든 명예라는 틀에서 벗어나서인지 천리단옥의 언행에 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술로 무참하게 갈라져 있는 천무영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 그의 입 안에 타액 으로 녹인 영약을 흘려넣어 주었다. 그러는 사이, 천리단옥의 눈물이 의식불명인 천무영의 얼굴로 주 르르 흘러내렸다. 달콤하고 향기로워야 할 입맞춤에서 그녀는 가 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⑥ 천리단옥은 입술을 뗀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영... 살아야 해, 어떻게든. 나로 인해 죽으면 절대 안돼." 천무영은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뻔히 알 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닮은 목인형을 천 개나 깎았다고 했지? 그래, 무영.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너밖에 없을 거야. 그토록 나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천리단옥은 섬섬옥수를 들어 죽은 듯 굳어져 있는 그의 얼굴을 가 만히 쓰다듬었다. "너를 향한 내 사랑도 마찬가지야.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의 사랑 은 순수했고, 난 그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그녀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안녕, 무영... 이제 정말로 이별이야." 스슷! 가볍게 몸을 한 번 움직였다 싶자 그녀의 모습은 환영처럼 그 자 리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실로 신묘한 경공술이었다. 우담화 천리단옥이라면 공히 무림의 다섯 하늘인 천문세가 출신이 다. 그녀의 무학은 이미 입신의 경지에 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온갖 치욕과 고통을 다 당하면서도 끝 내 북궁현리와 맞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대세가와 그가 가진 묘한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천무영. 그는 텅 빈 무영탑 안에 홀로 누워 있었다. 그의 동공은 그저 멍하니 열려 있을 뿐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무 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처럼 시공(時 空)마저 잊은 듯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어디선가 한 가닥 은은한 음성이 들려왔다. 미동도 없던 천무영의 몸이 그나마 기력을 잃고 다시 축 늘어졌을 때이다. "무영, 때가 되었구나. 너의 시련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너도 어쩔 수 없이 입천하게 되겠지. 은자천은 패자의 고통을 아는 자 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까." 그자는 누구길래 천무영을 두고 은자천을 거론하는 것일까? 정황 으로 미루어 그는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향후로 벌어지게 될 일까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너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오늘 내로 모두 정리가 될 것이 다. 과연 네가 끝까지 잘 견뎌낼지 궁금하구나." 그의 염려는 희망과 기대로 전환되기도 했다. "아니, 너라면 해내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너는 은자천이 오랫동 안 지켜보며 점찍어 두었던 재목이기 때문이다." 그자는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천무영을 향해 신비감 을 품은 중얼거림만을 흘려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사라져 버렸 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에 휩싸이게 된 무영탑 안에는 심신(心身)이 다 함께 만신창 이가 된 천무영이 여전히 혼절한 채 누워 있고....... ■ 무영탑 1권 제7장 정해진 길로 접어들다 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인물이 있었 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균형을 잃어버린 걸음걸이가 보기에도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전신이 피투성이에다 깊은 상처가 가득한 자, 그는 천무영이었다. 그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정신을 되찾았는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온몸이 부서져 나갈 듯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와중에도 그의 정신만은 기이할 정도로 또렷또렷하게 회복 되었다. 그것은 그의 뇌리에 알몸으로 바닥을 기던 천리단옥의 굴 욕적인 모습이 파편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은 그녀를 향해 냉혹비정한 웃음을 흘리던 북궁현리의 모습 을 떠올리며 부지중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간이 어찌하면 그다지도 악(惡)할 수가 있을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았다. 그런 자에게는 절대로 단옥을 맡 길 수 없다.' 천무영은 휘청거리며 눈밭 위를 걸어갔다. '천문세가에서는 그가 어떤 위인인지 알기나 할까? 혹시 아직도 단옥에게 그자와 결혼할 것을 종용하지는 않는지?' 북궁현리가 파혼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천리단옥에 대 한 걱정으로 머리 속이 몹시 복잡해졌다. 우연이었을까? 그 순간 때를 맞춘 듯 한마디의 말이 퍼뜩 생각난 것은. - 그자의 이름은 북궁(北宮)....... 그것은 처참하게 팔다리가 끊기고 피범벅이 된 진사유가 숨을 거 두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아! 왜 그때는 몰랐었지?' 천무영은 그 이름을 다 듣지는 못했지만 이제까지의 정황으로 미 루어 진사유가 지칭한 인물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또 한 차례 격류가 그의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북궁현리, 그자는 틀림없이 진사유를 죽게 한 장본인이다. 이래 저래 나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된.' 본시 남을 의심하거나 미워할 줄을 모르던 그였다. 그의 주변에는 그럴 만한 위인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건 오래 지나다 보면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북궁현리만이 예외였다. 천무영 같은 무골(無骨)의 인물이 생각하 기에도 그자는 충분히 징계의 대상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무력했다. 개인적인 원한에서건, 악에 대한 증오때문 이건 뭔가 뜻을 이루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건만 천무영에게 는 그 힘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고심이 감각을 둔화시킨 것일까? 그는 갑자기 무엇엔가 부딪치며 맥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헉!"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단지 넘어져서가 아니 라 그 순간을 기해 어두운 하늘에서 천만 갈래의 번갯불이 자신을 덮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파츠츠츳―! 그 번갯불의 실체란 놀랍게도 도기(刀氣)였다. "으아악!"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발했다. 도기는 결국 난도 질이라도 하듯 그에게 쇄도해 왔고, 그 바람에 그의 일신에서는 선연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촤아아― 상대는 중년의 나이쯤으로 보이는 자로 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를 들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자가 누구인지, 왜 느닷없이 자신 에게 공격을 가해 왔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월광을 통해 보여진 중년인의 눈빛이었다. '오오, 저 눈빛은 바로 관(官)......!' 천무영은 뇌리에 그런 생각이 잡히는 순간 자신의 몸에서 분출된 피보라가 시야를 차단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빠르게 의식 을 잃어갔는데, 그 짧은 찰나를 빌어 중년인의 음울하면서도 회의 에 찬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용서하시오, 당신은 잘못 태어났소. 그분들을 위해서는 제거되어 야 했단 말이오. 이는......." 그뒤로도 중년인의 음성은 더 이어졌지만 천무영이 들은 것은 겨 우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그는 마침내 영육이 분리되는 듯한 고통 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부언하자면 신비한 중년도객(中年刀客)의 눈빛은 오랜 세월에 걸 쳐 천무영이 줄곧 느껴왔던 감시의 눈길과 똑같았다. 예전에 관부 (官府)의 인물들 속에 섞여 있던. ② 천일야화원. 밤이 깊어짐에 따라 주흥도 점차 무르익어간다. 이곳은 여느 때보 다 흐드러진 분위기 속에서 원단전야를 보내고 있어 초저녁부터 노래가락과 주악소리 등이 끊이지 않았다.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밤이다 보니 손님들도 저마다 묘한 감회에 사로잡혀 한 잔 술에 거나하게 취하고 싶어 했다. 아마도 거기다 가 미녀라도 품게 된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이름난 풍류객들은 진즉부터 빠짐없이 기녀를 옆 에 낀 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제 멋에 취함으 로써 해가 바뀌는 밤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천일야화원의 가장 깊은 별각인 천향각의 내실이다. 한 청년이 비스듬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여타의 풍류객들과 마찬가지로 미녀를 안고자 와 있는 그는 북궁현리였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를 향한 그의 눈은 욕망의 불씨를 담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사내 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금모란이었다. 천일야화원의 제일화인 그녀는 일신에 속살이 은은히 내비치는 나 의를 입고 있었다. 지분을 바르는 등 정성껏 얼굴을 매만진 금모란은 긴 머리를 풀어 빗기 시작했다. 탐스럽고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머리칼은 폭포수 처럼 흘러내려 둔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을 잃을 만큼 매혹적인 자태이다. 더구나 그녀의 눈꼬리에는 전율이 일 만큼 요염한 기운마저 흐르고 있었다. 흉중에 담겨 있는 말만이 색채가 달랐다. '시작해야지. 금모란, 어제의 너는 죽었다. 오늘밤 너는 복수의 화신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될 테니까.' 금모란은 내심을 감쪽같이 숨긴 채 거울을 통해 이 밤을 함께 보 내게 될 북궁현리를 슬쩍 건네다 보았다. 그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금모란의 몸을 핥듯이 쏘아보고 있었 다. 흡사 먹이를 노리는 야수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금모란은 더욱 결심을 굳히기에 이른다. '저자는 대어(大魚)다. 어떤 그물을 치던 반드시 사로잡아야 해. 천금성의 셋째 제자로 얼마 전에 무쌍별부(無雙別府)에서 출부했 다고 했지? 나는 색을 제공하는 대신 저자의 끝없는 야망을 이용 해 뜻을 이루어야 돼.' 그녀는 거울 속에서 북궁현리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도 않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무서운 칼날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북궁현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금모란, 듣자하니 너는 손님들에게 꽤 까다롭게 군다면서? 잠자 리 수청에는 잘 응하지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금모란은 움찔했으나 곧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본 기원의 제일화이니까요." "흠, 그 자부심이 마음에 드는군. 하긴 너 정도의 미모라면 그럴 만도 하다. 함부로 몸을 굴리는 계집은 매력이 없지."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금모란의 등뒤로 다가가 섰다. "본인에게는 왜 허용하는 것이냐?" 금모란은 빗질을 멈추며 그를 그윽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어떤 기녀이건 대천금성의 고제자(高弟子)를 모시는 일은 금생의 영광일 거예요.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요." "후후... 솔직해서 좋다만 내가 아닌 배경 때문이겠지." 묘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부인하진 않겠어요. 다만......." "다만?" "공자의 기도가 이토록 출중하시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또 달라졌 을 거예요. 소녀에게도 약간의 안목은 있습니다." "핫핫핫핫......!" 북궁현리는 흡족한 듯 크게 웃어 제꼈다. "금모란, 이제 보니 너는 미색뿐만이 아니라 말재간도 아주 빼어 나구나. 핫핫핫......." "그 말씀은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공자." 금모란은 생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에게 북궁 현리가 인심이라도 쓰듯 덧붙여 말했다. "본인은 네가 마음에 든다. 내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훗날 너를 제이부인(第二婦人)으로 삼으리라." 그는 금모란의 등뒤에서 양손을 뻗어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두 개 의 육봉을 거머쥐었다. "아!" 금모란은 나직한 탄성에 이어 자못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그 약속... 꼭 지켜주시는 거죠?" 동시에 그녀는 몸을 약간 틀었다. 그것은 북궁현리의 손이 나의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그의 동작을 돕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의도는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후후... 아무려면 내가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겠느냐?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얼마 안 가 천하를 굽어보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아아! 공자......." 금모란은 보랏빛 꿈에 잠겨 황홀경을 헤매는 시늉을 했고, 그 사 이에 북궁현리는 그녀의 몸에서 나의를 벗겨내고 있었다. 노출된 그녀의 어깨에 사내의 입술이 와 닿았다. 이를 느끼자 그 녀는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리며 짐짓 몸을 움츠렸다. "술은... 안드실... 건가요?" 금모란은 실상 북궁현리가 자연스럽게 옷을 벗겨내도록 유도하면 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수줍음을 표방하면 자신의 줏가가 좀 더 올라가리라는 냉철한 계산에서였다. "술이 없어도 무방하다. 너에게 취했으니까." "그렇지만......!" "흐음! 이 살결... 빙옥(氷玉) 같구나." 북궁현리는 몹시 만족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금모란의 목덜미에서 시작하여 매끄러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그의 손은 점 차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아!" 금모란은 당혹성에 가까운 신음을 발하며 두 다리를 꼭 마주 붙이 고 있었다. 북궁현리의 집요한 공략을 예상한 채.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다지 서두르지는 않았으되 그녀가 성문을 열 때까지 농밀하고도 끈질긴 애무를 퍼부었다. 금모란의 신음성이 점점 고조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에 이르자 마침내 석류가 벌어지듯 그녀의 허벅지가 열렸다. 그 사이로 북궁 현리의 손이 능란하게 헤집고 들어갔다. ③ 금모란은 급기야 더운 입김을 토해내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들 두 남녀의 자세가 바뀐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를 돌려앉힌 북궁현리는 그녀의 동그랗고 매끄러운 무릎에 입 술을 갖다댔다. 그는 한동안 혀끝으로 그녀의 무릎을 핥고는 그 안쪽으로 깊숙이 진입해 들어갔다. "으음......!" 금모란은 상반신을 뒤로 활처럼 휘었다. 그에 따라 터져나갈 듯이 팽창한 젖가슴이 천정을 향해 솟구치며 출렁였다. 그 위에 얹힌 두 개의 유실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은밀한 부분에서 사내의 격정적인 호흡을 느끼고 충격을 받음으로써 빚어진 현상이었다. 쾅!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방문이 부서져 나갔다. 동시에 하나의 괴영 (怪影)이 안으로 무섭게 뛰어들었다. "악!" 느닷없는 난변에 금모란이 뾰족한 비명을 발했다. 북궁현리도 그 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안면을 싸늘하게 굳혔다. "무엇이냐?" 그것은 두 남녀의 행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금모 란은 괴영의 정체를 알게 되자 너무도 놀란 나머지 미처 알몸을 가릴 생각도 못한 채 넋을 잃고 말았다. "무흔......!" 늘상 허리에 목검을 차고 있는 사내, 용모는 꽤 영준한 편이나 애 꾸눈인 데다가 무표정하기까지 하여 도시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 던 그가 냉엄한 어조로 그녀를 꾸짖었다. "안되오, 이건!" 그것은 금모란으로서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젖가슴과 하반신을 가리며 쏘듯이 물었다. "무흔, 대체 이게 무슨 엉뚱한 짓이에요? 설마... 나와의 맹세를 잊은 건 아니겠죠? 당신은 분명 이 금모란이 죽으라고 하면 죽어 줄 수도 있다고 했어요." 하나뿐인 무흔의 눈이 새파란 불꽃을 뿜어냈다. "그 맹세라면 한시도 망각한 적이 없소만, 이런 상황까지 묵인한 다고는 말한 기억이 없소." 곁에서 듣고 있던 북궁현리가 나섰다. "쯧! 하인 치고는 주제가 넘는군." 경멸이 담긴 그 말에 무흔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북궁현리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낭자! 정녕 모르겠소? 내가 이러는 건 그만치 그대를 아끼기 때 문이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대가 자신을 버리는 일만은 절 대 용납할 수가 없소." "뭐... 뭐라구요?" 금모란이 북궁현리의 눈치를 보며 그의 말을 막으려 했다. "미쳤군요! 감히 누구 앞인데 함부로 지껄이는 거죠?" 무흔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왜,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소? 이전에도 그랬듯 나는 당신이 차라 리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참아줄 수가 있소." "닥쳐요!" 금모란은 가히 발작적으로 부르짖었다. "한낱 기녀 따위에게 무슨 사랑이에요? 호호호... 그리고 내가 혹 시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이분 공자가 될 거예요. 난 무 엇보다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 좋아요." 그녀는 무흔을 정시한 채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무흔, 더 이상 내 일에 상관하지 말아요." 잠자코 있던 북궁현리가 한마디 거들었다. "못 들었느냐? 네 아름다운 여주인께서 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경을 치기 전에 속히 여기서 나가라." 무흔이 비로소 눈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난 그녀 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소." "뭣이? 건방진......!" 북궁현리의 가느다란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동시에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무흔을 향해 일 장을 날렸다. 윙―!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으되 무흔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틈엔지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목검이 기척도 없이 발출되었 던 것이다. 실로 눈부신 쾌검이었다. ④ 카캉- - ! "윽!" 요란한 격돌음과 함께 나직한 신음성이 울렸다. 무흔은 뒤로 세 걸음 정도 밀려나 있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며 목검도 중간부위가 부러져 있었다. "호오, 제법 대담하다 했더니 한몫 하는 놈이었군. 좋다! 그렇다 면 내 네놈에게 뼈저린 교훈을 내리겠다." 북궁현리가 안면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만요!" 금모란이 몸을 움츠린 채 황급히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공자, 부디 소녀를 봐서라도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해 주세요. 무 흔은 뒤에 제가 따로 혼을 낼 터이니......." "왜 저자를 감싸는 거지?" 북궁현리의 추궁에 그녀는 아무 망설임없이 대꾸했다. "그는 저에게 둘도 없이 충직한 하인이니까요." 이어 금모란은 그가 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무흔을 향해 매섭게 쏘아부쳤다. "뭘하고 있어요?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요!" "낭자......!" 무흔은 일순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으나 이내 목검을 거두 며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부서진 방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귀로 짤막한 금모란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해요, 용서해 줘요. 무흔.......) 그에 따라 무흔의 어깨가 또다른 의미로 격렬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고, 그의 모습은 북궁현리나 금모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직후, 북궁현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저자를 그냥 보내 주었는지 아느냐?" 금모란은 지극히 민망해 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야 공자의 도량이......." "후후... 그건 아니다." "그럼 왜......?" "본인은 하인 따위와 경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 "자, 일어나거라." 북궁현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 일으킨 뒤 침상으로 이끌어 갔다. 그는 고개를 약간 치켜 든 채 말했다. "내 옷을 벗겨다오." "네?" "후후... 하인은 이렇게 다루는 것이다.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시 켜 자신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만들어야 되는 법이지." 금모란의 눈이 경황중에도 샐쭉 치켜 올라갔다. "소녀가 공자의 하녀란 말인가요?" "후후... 그렇진 않지. 너는 앞으로 많은 하인을 거느리게 될 것 인즉 미리 배워두란 뜻이다." "좋아요! 그런 이유에서라면." "허,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마라." "호호호......!" 두 남녀의 지분거리는 음성이 점차 농탕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천 향각의 내실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 상이몽(同床異夢)의 밤은 격정 속에서 깊어갔다. ⑤ 원단 전야에 일각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듯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철노인(鐵老人)이 미쳤다!" "피... 피해라! 아악―!" 다급한 외침성들이 잇달아 터지는 와중에서도 사태는 점점 더 걷 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크크크... 죽인다! 모조리 죽이리라. 내 앞길을 방해하는 놈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베어버릴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밤거리는 온통 쑥밭이 되어 있었다. 행인들은 저마다 겁을 집어먹고 사방으로 분분히 달아났다. 그것은 한 노인의 발작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광기(狂氣)에 휩싸인 채 섬뜩한 광채를 뿌리는 검으로 밤공기를 마구 휘젓는 그 는 병기점의 주인인 철자구였다. "크악!" 미처 도망가지 못한 한 사내가 날아든 검에 의해 몸이 두 쪽 나 즉사했다. 그러나 검의 주인인 철자구는 그렇듯 끔찍한 살인을 해 놓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크크크... 조금만 더 기다려라, 운생(雲生)! 아비가 너를 대신해 한을 풀어주겠다." 그는 계속하여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금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이끄는 것은 단지 가 슴 속에서 무섭게 끓어오르는 집념일 따름이었다. 아무튼 철자구는 그러다가 길 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었고, 한 인물 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의 앞을 가로막은 꼴이 된 상대방은 애꾸눈의 검수 무흔이었다. "미안하오, 노인장." 무흔은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말하며 얼른 비켜섰다. 그 순간 철 자구의 검이 번쩍 들리더니 그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헉!" 방심하고 있던 무흔은 대경했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는 것은 보 았으나 설마하니 자신을 베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으므로. 물론 무흔은 방금 전의 평범한 행인들처럼 그 검에 당하지는 않았 다. 그는 재빨리 검세를 피해내고는 노성을 발했다. "당신은 누구요? 대체 왜 나를 공격하는 것이오?" 그 두 가지 질문은 답변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마구잡 이로 휘둘러대는 검만이 다시금 그를 짓쳐왔다. 위이이잉―! 예리하기 그지 없는 파공음이 무흔의 침잠해 있는 혼을 일깨웠고, 그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그의 손이 육안으로는 도저히 확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으니....... 아무런 음향도 일지 않은 가운데 어느덧 무흔의 부러진 목검이 철 자구의 가슴 한복판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끄으윽......!" 철자구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놀라운 것 은 그러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광기를 흘리던 그의 눈이 점차 제 빛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쯤 되자 무흔도 무심할 수만은 없었던지 나직이 말했다. "보아하니 뭔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인데,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 오. 노인장에게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까." "알고... 있네." "그럼 되었소." 돌아서려는 그를 철자구가 불러 세웠다. "부... 부탁이... 있네, 소협......." "무엇이오?" 철자구는 치켜들었던 검을 떨구며 서서히 주저앉았다. "이 검을... 부숴 주게. 나는... 신검을 만들고자 했지만... 이 검은... 신검이 아니라......." 무흔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철자구의 말은 언뜻 이해가 되는 면도 있었지만 금모란으로부터 크게 상처를 입은 그의 마음은 초 면인 자를 위해 열리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의 냉담함 앞에서 철자구의 눈이 허옇게 뒤집어졌다. "이것은... 단지 피를 부르는 광검(狂劍)....... 나는 실패... 내 아들... 운생의 원혼이 기어이......." 무흔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는 기색이 어렸다. "운생이라면, 독행마검(獨行魔劍) 철운생을 말하는 것이오? 그가 노인장의 아들이었소?" "끄으... 그렇네. 그놈은... 가업을 잇지 않고... 검도를 익혔... 호승심에 등천륭(燈天隆)에게 도전... 검이 부러져 죽고 말 았....... 그래서 나는... 한이 맺혀 절대... 부러지지 않는 신검 을 만들고자 했는데....... 불행히도... 광... 검을, 끄르륵!" 쿵! 철자구는 마침내 숨이 끊어져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며 무흔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는 입가에 쓰디 쓴 웃음을 매달았다. "오늘밤에는 별 일을 다 겪게 되는군. 수모로도 모자라 뜻하지 않 은 살인에 남의 유언까지 들어주게 생겼으니......." 철자구의 시신을 향한 그의 눈길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듯 죽으면 그만인 것을, 인간은 왜 각기 비원을 안고 살아야 하는가? 후후... 독행마검 철운생은 파천류(破天流) 검법의 일인 자였으면서도 부친에게는 끝까지 못할 짓만 시킨 셈이군." 무흔은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었다. 우웅― 웅―! 검은 그의 수중에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울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무흔은 순간적으로 기이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베고 싶다! 누구든 닥치는 대로.......' 채 무너지지 않은 그의 이성이 전율하며 부르짖었다. "오오! 이래서 광검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무흔은 검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뜨거운 피가 전 신에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며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어쩌 면 짜릿한 희열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이었기에. 그의 무심이 유심(有心)으로 바뀌었다. 그는 참기 힘든 흥분과 살 기를 고스란히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휙―! 무흔은 몸을 날려 광검을 안은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눈에 가득 담긴 기괴한 열기로 모종의 위험을 예고하며....... ⑥ 그는 절박한 심경이 되어 부르짖고 있었다. - 무영! 너도 칼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외침으로 그가 생의 깊은 수렁 속에서 오랜 갈등 끝에 건진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제 털끝만치도 회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칼은 없었고, 막막해져 있는 그의 귀로 북궁현리의 싸늘한 음성만이 전해져 왔다. - 후후후... 책벌레, 천리단옥은 나의 색노(色奴)다. 네놈에게는 그 계집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차지할 자격이 없겠지만. 그 소리를 듣자 천무영은 그야말로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더욱 한스러운 것은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이어 북궁현리의 면전에서 벌거벗은 채 바닥을 기 던 천리단옥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그 곁에 있으면서도 아 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와 함께였다. 그리하여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그를 누군가 불렀다. - 무영, 나다. 진사유....... 천무영은 일순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는 진사유가 단지 그 한마디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책을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춤거리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섰다. 파아아아― 무시무시한 도세가 그의 일신으로 밀려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 다. 상대는 뜻밖에도 진사유가 아니라 중년의 도객이었다. 얼굴은 알지 못했으되 눈빛이 낯설지 않은. - 으아아악―! 천무영은 처절한 비명을 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이 내지른 소리를 타인의 입에서 나 온 것처럼 생생하게 귀로 전해 들을 수 있었으며, 그 찰나를 기해 부지중 눈을 번쩍 떴다. '악몽(惡夢)......?' 잔뜩 의혹이 일 뿐 그때까지도 그는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 가 현실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한 가닥 유현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야, 가만 있거라. 아직 움직이면 안된다." '아! 이건 분명한 현실인 것 같군.' 천무영은 그제서야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희뿌연 여명을 느 낄 수가 있었다. 그 창문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한 사람 의 모습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명이 신비한 광휘를 두르고 있어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확실히 는 알 수 없었다. 양 어깨를 뒤덮고 있는 흰 머리카락으로 미루어 보아 고령의 노인인 것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천무영은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깜짝 놀랐다. 아무런 말 도 소리가 되어 나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벙어리라도 되었단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때, 귀에 익은 너털웃 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헛... 무영, 공연히 애쓰지 말아라. 너는 말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천무영은 대뜸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장(藏)어르신......!' 뜻밖에도 그는 만장서가를 운영하던 장노인이었다. 천무영은 저으기 놀라는 한편, 영영 헤어지는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자 왈칵 반가움이 치밀었다. 장노인 말고도 이곳에는 침상에 누워 있는 천무영을 둘러싸고 여 러 명의 인물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 명으로 개중에는 노 인과 중년인, 여인까지도 있었다. 그들은 나이는 물론 부류도 각기 달라 보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눈빛이었다. 천무영을 지켜보는 그들의 눈에서는 무서울 정도의 투지가 엿보이 는가 하면 오랜 인고(忍苦), 혹은 절망이나 기대감 등 이루 헤아 릴 수도 없이 복잡한 감정들이 어려 있었다. '이곳은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의 궁금증을 읽어낸 듯 장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긴 네가 잘 아는 곳이다. 무영탑의 꼭대기지. 우리들은 소위 은자십천(隱者十天)으로 불린다." '아! 그렇다면.......' 천무영은 크게 놀라 안색을 굳혔다. "우리들은 오래도록 너를 지켜보았다. 널 은자천주(隱者天主)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장노인의 담담한 음성을 들으며 천무영은 만장서가의 마지막 서고 에서 읽었던 은자지서(隱者之書)를 떠올렸다. 장노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은자지서를 읽었을테니 우리들의 내력에 관해서는 더 말하지 않 으마. 간단히 소개하자면 우리들은 은자구십구천(隱者九十九天) 중 살아있는 마지막 은자들이다." 천무영은 기억을 더듬어 은자지서의 끝부분에 기재되어 있던 열 명의 은자들을 한 사람씩 생각해냈다. '그들은 환요비자, 천뇌마군, 복마신개.... 음... 도천성, 천독모 후, 조화신기옹, 축융대제, 현음곤월신마, 그리고 마마대불사와 광한상인 등이었다.' 하나같이 놀라운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무림인이 아닌 천무영으로 서는 실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⑦ 장노인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너는 개봉부에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줄곧 우리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너만이 유일하게 수백 년에 걸친 은자지한(隱者之恨)을 풀 어줄 수 있겠기에. 허허... 왜냐고?" 장노인은 묻고 나서 스스로 답했다. "그건 천부적인 자질때문이다. 정작 네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너 는 무공을 익히기에 최상이라는 십천지맥(十天之脈) 중에서도 천 지인삼태지교(天地人三太之交)의 맥을 지니고 있다." 정말로 천무영은 알지 못하는 얘기였다. 그의 기색에서 의혹을 읽 어낸 장노인이 부언, 설명해 주었다. "십천지맥은 아주 오랜 전설이다. 무림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기라성 같은 기인이사들이 배출되었거니와 그들 대부분이 거기에 해당된다고들 하지." '음, 그런 비사가 있었군.' "그러나 노부는 지금으로부터 십이 년 전에야 그 맥을 지닌 자를 실제로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너였다." 천무영도 그 말에는 이해가 갔다. '십이 년 전이라면 내가 개봉에 첫발을 디뎠을 때다.' "당시 너는 떠돌이 소년이었고, 노부 조화신기옹(造化神奇翁)은 막 만장서가를 열고 은자천을 이을 기재를 찾던 중이었다." '정녕 믿기가 힘들군. 평범을 가장한 채 통상 장노인으로 불리우 던 어르신이 조화신기옹이었다니.' 실상 조화신기옹이라면 무림사를 통해 가장 뛰어난 지다성(智多 星)이었다. 성복지학(星卜之學), 기문역리(奇門易理), 기관지학 (機關之學)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재로서 일명 만사무불 통서(萬事無不通書)라고도 지칭되던 인물이다. 장노인, 아니 조화신기옹이 연이어 말했다. "이후로 노부는 기회를 엿보다가 너를 만장서가로 데려왔지. 더구 나 어느 시기엔가 우연히 네 등뒤, 명문혈(命門穴) 주위에 삼태성 점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뛸 듯이 기뻤다." '후후... 그랬었군.' 천무영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삼태성점은 천지인삼태지교의 상징이지. 허허허......." 그 뒷얘기는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는 그동안 내게 수 차례나 양자(養子)가 될 생 각이 없느냐고 물으셨었소? 결국 서고정리를 맡긴 것을 비롯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오늘을 위한 안배였겠구려.' 천무영은 일면 배신감과 유사한 류의 감정을 느꼈다. 그것을 알아 차렸는지 조화신기옹이 다소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영, 너는 현명하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우리의 권유를 거절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 너는 고독하게 자라왔고 남다른 고초도 무수히 겪었다. 이건 노부의 생각이다만 그 과정을 통해 너는 변했다." 천무영이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르신.' 조화신기옹은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헛헛... 무도(武道)를 통해 거듭나고 싶어하게 되었지." 자신의 심중을 정확히 알아맞추는 그 말을 듣자 천무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 부르짖었다. '당신들은 잔인하오! 내가 완전히 무너져 당신들처럼 패자(敗者) 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뜻이 아니오? 그래서 당신들의 제안에 꼼짝 없이 응하도록......!' 그의 자아의식은 강한 불만처럼 표출되었다. 이에 조화신기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전히 창문 쪽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백 발의 신비인을 향해 말했다. "상인, 이 아이는 아직도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백발의 신비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게요. 패자의 심리란 어떤 상황에고 민감하 게 반응하기 마련이니까. 우리도 경험이 있지 않소?" 담백한 그 음성에서는 달관자로서의 포용력이 느껴졌고, 천무영은 그를 열심히 부정했다. '싫소, 그런 말은! 어떤 식으로 나오건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의 사 육에 부응하지 않을 것이오.' 백발신비인이 말했다. "아이야, 부디 맺힌 마음을 풀어라. 현재까지는 은자천이라는 명 칭을 피할 도리가 없다만 네가 작정하기에 따라 금후로는 우리 모 두가 불패천(不敗天)을 이룩할 수 있다." '불패천?' "차제에 네 삶을 한 번 되돌아 보거라. 우리는 단지 너를 지켜보 며 염원을 심어왔을 뿐 네 운명이 정해지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한 바는 없다. 안 그렇느냐?" '난 그것이 싫소! 내가 무슨 구경거리라도 된단 말이오?' "그렇다고 우리 은자들이 무감했다고는 여기지 마라. 우리들은 패 배의 쓴맛을 아는 만큼 비록 나서서 돕지는 못했다만 네가 고초를 겪을 때마다 남의 일처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설마......?' "그 동류의식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신념을 가지게 되었지. 은자 천에는 천부와 상대했건, 아니건 패배한 인물들 수천 명의 비기 (秘技)가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은자지서의 명 부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당대의 기인들이며 너나 우리와 입장이 한 치도 다르지 않다." ⑧ 천무영. 그는 비로소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하긴 이들은 내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 나로 하여금 학문 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준 것도, 이론적으로나마 무학을 접하고 그 가치를 깨닫게 해준 것도 이들의 영향력이었다.' "허허... 아이야, 소개가 늦었구나. 노부는 광한상인(廣寒上人)이 라 한다. 백 년 전에는 호기방장하여 구주팔황의 최강자를 자처했 었지. 심지어 중원무학의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 서역(西域), 북해 (北海), 남만(南蠻), 색목국(色目國), 파라국(破羅國), 왜국(矮 國) 등까지도 전전한 바 있다. 그 결과 만팔천 번의 승리를 거두 었다면 믿겠느냐?" 천무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는 말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가 최 대한으로 감탄을 표현한 것이었다. 광한상인. 백 년 전만 해도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는 황족(皇族) 출신으로 일찌감치 황궁무고의 무공에 달통했는데, 승부욕이 지나 치게 강한 나머지 이후로 황궁을 뛰쳐나와 천애를 유랑하며 자신 의 무학 성취를 입증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오십여 년만에 세인들로부터 천하제일고수라는 무상의 칭호를 받았다. 평생동안 만팔천 번을 싸워 모두 이겼으니 이 천 부적인 무인에게는 타당한 영예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의 패배로 그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전설의 대라천부에 도전했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올린 화려한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었다. 그후로 그는 은자천을 찾아들었고, 언제부터인가 은자천의 천주 (天主) 역할을 해왔다. 광한상인은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패자의 고충이란 단 하룻밤도 편한 잠을 잘 수 없 게 만들지. 매일 연속되는 악몽에 시달리며, 그러다 보면 종국에 는 흐르는 세월을 통탄하게 된다." 움직일 수도 없는 천무영의 일신이 가느다란 떨림을 보였다. 이는 지독한 공감때문이었다. "은자들은 그렇게 지내면서 불패기학을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여왔 다. 너는... 그들의 염원을 외면할 수 있겠느냐?" 천무영은 격정이 담긴 눈으로 창문을 향해 돌아 앉아있는 광한상 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수척한 그 등에서 읽어낸 것은 고통 이나 비원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 거기서 일탈해 있는 한 인간의 무한한 의지와 집념을 그는 보았다. 그것은 천무영이 처음으로 인간 자체를 두고 느낀 감동이었다. 광 한상인이 그가 누워있는 쪽으로 천천히 돌아 앉았다. "아이야, 보아라. 노부의 눈을." '아!' 천무영은 내심 탄성을 발했다. 광한상인의 눈을 보는 순간 전율이 그의 가슴에 굵은 선을 긋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의 앞에는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장구한 세월의 흔적인 양 오 래도록 풍상에 닳고닳은 바위를 연상시키는 얼굴이다. 주름살은 더 이상 겹쳐질 수 없으리 만큼 빽빽했다. 게다가 천무영에게 충격을 전해준 그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광한 상인의 눈에는 놀랍게도 동공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때문에 전체 적으로 음울한 회백색을 띠고 있었다. "허허... 패자들이 남긴 비급을 읽으며 결점과 패인(敗因)을 찾는 동안 일백 년의 세월이 내게서 시력마저 앗아갔다." '오오, 맙소사! 그래서 눈이.......' 천무영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초인(超人)을 향한 경외 감이 일시지간 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또한 광한상인의 회백색 눈이 뿜어내는 기오한 눈빛은 그에게 있 어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눈빛은 무영탑의 꼭대기에서 줄곧 나를 지켜보던 그 의문의......!' 광한상인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야, 이래도 은자천에 들기를 거부하겠느냐?" 천무영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크게 외치고 싶었다. '아니오! 나는 당신들을 존경하오. 당신들과 더불어 은자천을 불 패천으로 만드는데 신명을 다 바치리다.' 그가 부르짖고자 한 말은 그런 것이었다. 그의 심중을 어찌 읽어 냈는지 광한상인이 껄껄 웃었다. "고맙구나, 아이야." 그러나 천무영은 일면 입맛이 쓰기도 했다. '쯧! 내 생각들을 모두 알고 나오니 의사소통이 잘 되어 좋기는 하지만 내 자존심은 형편없이 구겨지는군.' 광한상인의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어렸다. 아마도 그 같은 생각까지도 읽어낸 모양이다. "아이야,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아다오. 믿어지지 않겠지만 노부는 시력을 잃은 후로 다른 눈을 얻었다." '다른 눈?' "일명 섭령통심안(攝靈通心眼)이라고 하지. 이르자면 상대의 마음 을 꿰뚫어 보는 안공(眼功)이다. 너의 마음 속을 대략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때문이었다." '졌다!' 천무영은 광한상인을 포함한 은자십천에게 더 당해낼 재간이 없음 을 시인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실내에 있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살펴 보았다. 장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먼저 맨 좌측에는 일신에 회의(灰衣)를 입었으며 흐릿한 안개에 휩싸여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는 한 인물이 있었다. ⑨ 광한상인이 담담한 어조로 그자를 소개했다. "환요비자(幻妖秘子)시다." '으음.......' 천무영은 침음성과 함께 시선을 다음 사람에게 돌렸다. 몹시도 위맹해 보이는 금포노인이었다. 그는 턱밑에 푸른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천무영과 눈길이 마주치자 종이 치듯 우렁찬 음 성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혔다. "노부는 천뇌마군(天雷魔君) 구양수(歐陽修)다." 그의 옆에는 복마신장(伏魔神杖)을 든 천왕상(天王像)을 방불케 하는 거지노인이 앉아 있었다. "핫핫... 이 노화자는 복마신개(伏魔神 )일세." 다시 그 옆으로는 얼굴이 길쭉하고 깡마른 인물이 있었다. 손에는 도신(刀身)이 넓은 도를 안고 있었다. 그 탓인지 몸 전체가 흡사 한 자루의 거대한 도처럼 느껴지는 중년인이었다. 그의 봉안(鳳眼)이 흘려내는 눈빛만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허허... 노부는 도천성(刀天聖) 황무(黃武)라고 하지." 그 옆의 인물은 일신을 시커먼 흑색의 장포로 휘감고 있었는데, 정작 얼굴은 백지장처럼 핏기라곤 한 점도 없어 보였다. 은자십천 중 유일한 여인으로 용모도 특이했다. 눈썹은 짙은 자색 (紫色)이었고, 눈동자는 그와 대비가 되는 투명한 초록색을 띠고 있어 매우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미색의 소유자여서 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창백한 피부나 자색의 눈썹, 초록색의 눈동자 등은 일종의 매력적 인 요소로 비춰질 수도 있을 듯했다. "호호호... 얘야, 나는 천독모후(天毒母后)란다. 한때는 천하만독 의 조종이라고 했지." 그녀의 옆에는 조화신기옹이 있었고, 다시 그 옆에 붉은 장포를 입은 오순 가량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가슴에 화(火)자를 새겨넣고 있었으며 의복은 물론 얼굴색 도, 수염까지도 모두 붉었다. 심지어 눈알조차도 붉었다. "허허허... 반갑구나. 노부로 말하자면 불을 다스리는 신으로 불 리던 축융대제(祝融大帝)니라." 그 말은 곧 옆의 백의노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크ㅋ, 잘난 척은! 아이야, 그따위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노부에 게 잘 보이도록 해라. 천하에서 차갑고 음(陰)한 것들은 전부 나 현음곤월신마(玄陰坤月神魔)의 관할하에 있으니까." 이 악의 없는 농담의 주인공은 안색이 섬뜩하도록 푸르스름한데다 전신에 얼음장 같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열상 광한상인의 다음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중원인이 아니었다. 흑색 곤룡포를 걸친 그는 유독 콧날이 높고 눈이 깊숙이 패여 있었다. 이국적인 용모에 장신(長身)으로 언뜻 보기에도 구 척이 넘어 보 였다. "노부는 천축의 마마대융찰(魔魔大戎刹)의 주인인 마마대불사(魔 魔大佛師)다. 사(邪)와 악(惡)에 대해서라면 날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다." 마마대융찰은 천축의 소뇌음사(小雷音寺)가 멸망한 이후 세워진 이교(異敎)였다. 마마대불사는 마마대융찰이 배출해낸 서역 제일 의 기재였다. 그는 중원을 정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천부에 패해 은자천에 들게 된 것이었다. 천무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들이 불패기학을 연성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겠구나. 천부 에 패했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된 모습이 아닌 걸 보면.' 그의 생각은 이어졌다. '이들의 패자 진리는 정말 대단하구나. 어쩌면 내 운명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광한상인의 담담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아이야, 지나친 상념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법이다. 일단 마 음을 정했으면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문(文)과 무 (武)의 차이점이기도 하지." "......." "우리는 너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우리들의 제 자가 아니다. 은자천을 대표하는 천주의 신분으로 초빙된 것이 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한상인의 회백색 눈이 묘한 빛을 번 뜩였다. "은자천에 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현재 너는 삼백육십 개의 기 경맥락(奇經脈絡)이 모두 끊겨 그 상태로는 무공을 익히는 건 고 사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고치는 방법이 개방에 있지. 따라서 너는 십절존사(十絶尊師)가 되어야 한다." 듣고 있던 복마신개가 괴소를 흘렸다. "크ㅋ! 새파란 꼬마놈이 그럴 듯한 신분은 죄다 차지하는군." 현음곤월신마의 독설이 이어졌다. "웃기고 자빠졌군. 까짓 거지들 틈에 끼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 해?" "신마, 어디 네가 이 꼬마를 맡아 볼테냐?" "제길! 그럴 능력이 있으면 벌써 나섰지." "그럼 입 닥쳐. 이 꼬마를 개방의 조사동(祖師洞)으로 보낼 생각 이니까." 두 은자의 말다툼 끝에 천무영은 무형의 진기가 전신으로 밀려 들 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 무영탑 1권 제8장 완성(完成)을 향하여 ① 청풍명월(淸風明月). 사위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무척이나 싱그러웠다. 바람에 실려오 는 꽃향기는 그윽하기만 했고, 그 위로 교교한 달빛마저 찰랑거리 자 정취는 한껏 고조되었다. 절로 시 한 수가 읊어질 듯한 봄날의 밤이다. 쿠쿠쿠쿠― 힘찬 물보라와 함께 폭포의 둔중한 굉음이 철목산(鐵木山) 기슭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일명 구룡폭(九龍瀑)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닮 아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던가? 개봉부에서 남쪽으로 삼십여 리 정도 가면 철목산이 나온다. 그곳 의 한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구룡폭은 자못 웅장하다. 달빛을 배 경으로 한 그 풍경은 차라리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런데 구룡폭 아래에는 신체의 주요부분만을 가린 채 거의 알몸 이 되어 폭포수를 맞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쿠쿠쿠- - 콰르르르― 아홉 줄기의 물기둥은 중간부에서 합쳐져 하나의 반석 위에 쏟아 져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그 위에 반듯이 누워 일만 근은 됨직한 폭포수의 압력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청년은 기이하게도 푸른 빛이 도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빼어난 용모는 아니었으되 깊은 호심(湖心)을 연상시키는 그 눈빛으로 인 해 그는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이는 약관에 이르렀거나, 혹은 그보다 약간 어린 듯했다. "이러고 있는 지도 백 일째다. 이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 늘로써 개방십로( 十老)의 만타통령개혈대법(萬打通靈開穴大 法)도 끝이 나겠지." 지축을 울리는 폭포의 굉음 속에서도 그의 음성은 또렷하게 들려 왔다. 그것은 담담하되 만족감이 엿보이는 음성이었다. 이윽고 청년이 몸을 일으키자 벌거벗은 그의 등이 보였다. 아울러 등 한폭판에 품자형(品字形)으로 박혀 있는 세 개의 점도 유감없 이 드러났다. 그 점이 소위 말하는 삼태성점이었다. 삼태성점의 주인인 청년은 천무영이다. "과연 가능할까? 오늘밤만 넘기면 내 몸 속에는 삼 갑자의 공력이 충만해진다고 그랬는데......." 그는 이어 폭포수를 뚫고 들어갔다. 특별한 신법을 쓴 것 같지도 않건만 그의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쏴아아아― 쿠쿠쿠― 폭포수 안쪽에는 하나의 동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항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구룡폭 속에는 틀림없이 동굴 이 존재했고, 입구가 폭포수의 물줄기로 장막을 이루고 있는 덕분 에 그 안은 몹시 어두웠다. 그러나 천무영은 어둠에 장애를 느끼지 않는 듯 익숙하게 걸어 들 어갔다. 그는 지난 백 일간의 일을 더듬어 생각해 본다. '그동안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복마신개 어르 신은 개방의 현 방주인 동심천유개 헌원유광의 사백조(師伯祖) 뻘 이 되신다. 헌원방주는 그 어르신의 제의를 받아들여 나를 조사동 에 들게 했지. 하긴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그는 나를 거부하 지 않았겠지만.' 천무영은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천 년의 동굴을 평지걷 듯 걸으며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십절존사가 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삼백육십기 경락을 타통시키는 것은 물론 숱한 이득을 취하게 되지. 그 결과 로 겨우 백 일 사이에 일개 서생에 불과했던 내가 능히 바위를 부 수고, 일만 근의 압력을 견디는 내력과 밤에도 대낮처럼 사물을 볼 수 있는 안력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그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간 내가 복용한 영약만 해도 무려 팔천 종에 이르지 않는가?' 천무영은 종전보다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런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못되거늘, 거저 받지는 않 으리라. 훗날 개방에 위해 뭔가 응분의 보상을 해야지.' 그는 변해 있었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확연히 달라 져 말마따나 백 일 사이에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르자면 새롭게 탄생한 그는 체격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였다. 약간 수척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했으나 알맞게 균형이 잡혀 있었으며 근육은 쇳덩이처럼 완강해 보였다. 피부도 남자 치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희어진데다가 은은한 광 택이 감돌아 그를 한층 더 귀골(貴骨)로 만들어 놓았다. "후후... 거듭 나고자 하는 염원이 이루어져 가고 있으니 그 마무 리도 잘 지어야지." 천무영은 언뜻 그답지 않은 자신감마저 내비치며 한 칸의 원형석 실로 뛰어 들어갔다. ② 석실 안에는 십 인의 인물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저기 기운데다 낡아빠 진 마의를 걸치고 있으며, 적어도 나이가 고희(古稀)는 넘긴 듯 등이 활처럼 굽어 있다는 점 등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가부좌를 튼 채 원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빼곡한 주름살 탓인지 그들의 인상은 모두 똑같아 보였다. 천무영은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내심 중얼거렸다. '개방십로, 당신들께는 뭐라 할 말이 없구려. 내게 만타통령개혈 대법을 펼치느라 백 일 사이에 부쩍 늙어 버렸으니.......' 그가 원진의 한가운데에 서자 개방십로는 동시에 감았던 눈을 번 쩍 떴다. 그것은 전광과도 같은 열 가닥의 안광이 천무영의 전신 을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이를 몸으로 느끼면서도 천무영은 의연하게 말했다. "시작하십시오, 여러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좌하고 있던 개방십로가 일제히 앉 은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은 천무영을 향해 전력으로 공격을 펼쳤다. 슈슈슈슉―! 정확히 백 줄기에 달하는 지력이 비수처럼 뻗어나와 천무영의 전 신요혈을 파고들었다. "윽!" 천무영은 백 군데 경혈을 통해 창날에 찔리우는 듯한 고통을 느끼 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위이이잉―퍼펑! 놀랍게도 장권지각(掌拳指脚)이 총동원 되어 무차별로 천무영을 난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윽!" 천무영의 입에서 연이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공격에는 하나같이 백 년 이상의 내력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그는 신형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의지와 는 상관없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무참하게 패대기쳐 지기를 수없이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나 뜻밖인 것은 맞으면 맞을수록 그의 표정이 밝아진다는 점 이었다. 그 이유는 고통의 이면에서 기혈이 장강대하처럼 막힘없 이 흐르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시원하다. 이 느낌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죽도록 얻어 맞으면서도 그는 허공에 떠오를 때마다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것은 전신이 깃털처럼 가벼 워진데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런 연후, 상황은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우우우웅― ! 괴이한 진동음과 함께 개방십로가 쌍장을 뻗어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무형의 기류가 발출되어 천무영의 전신경혈에 침투했고, 그 의 육신은 점차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천무영은 전신의 혈맥이 최고조로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아! 이것이 마지막 단계인가 보구나.'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그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만타통령개혈대법. 이는 백 일에 걸쳐 열 명의 내가고수가 충만한 진기로 각각 일만 번씩 혈을 때려주는 것이었다. 이 대법을 시술받은 자는 개정대법 보다도 탁월한 효과를 얻게 된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의 타통은 물론 일신의 공력이 무섭도록 급증하므로. 반대로 시술자 열 명은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내력 소 모 역시도 개정대법과는 비교 차원이 못되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전신경락에 노도 같은 경기가 좌충우돌함으로써 천무영의 신체는 가죽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반면에 개방십로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이마에서 구슬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쾅! 한순간, 천무영은 정수리로부터 양쪽 발바닥의 용천혈까지 벼락이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으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우욱!" 개방십로 또한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내며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 이 전부 뒤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쿵! 이는 허공에 떠 있던 천무영이 아래로 떨어져 석실 바닥에 처박히 면서 낸 소리였다. 놀랍게도 그 여파로 돌바닥이 움푹 꺼져 있었 으나 의식을 잃은 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모르는 사실은 비단 그뿐이 아니었으니, 그의 전신경혈에는 이제 무궁무진한 경기가 골고루 퍼져 있었던 것이다. ③ 구룡폭 후면의 동굴은 개방 창건 이후로 계속 내려오는 조사동이 었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석부가 있었으며, 개중에는 십만 권에 달하는 고서가 비치된 서고도 있었다. 천무영은 벌써 사십일째 서고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었다. 원래 그는 백 일 동안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었으나 사십 일째 되는 날 십만 권의 고서를 모두 읽었다. 그는 일찌기 만장서고에서 수많은 책을 섭렵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책들은 또 달랐다. 일명 주유서고(周遊書庫)라고 불리우는 이 서고에는 일반의 경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 그대 로 수백만에 달하는 개방의 방도들이 천하를 주유하며 보고, 듣 고, 경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서적들이 있었다. 기담록에서부터 지리서(地理書), 인물록(人物錄), 기물서(奇物 書), 만병록(萬兵錄) 등 온갖 체험서들이 다 모여 있었다. 따라서 주유서고의 책을 통독한다면 그야말로 앉아서 천하를 손바 닥 들여다보듯 훤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탁! 천무영은 마지막 책을 덮었다. 그의 푸른 눈은 여느 때보다 한층 더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개방을 천하제일방파라 한 말은 틀림이 없구나. 이곳 주유서고의 책들이 그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는 감탄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심신이 더 할 나 위없이 가뿐했고, 그 덕에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어렸다. "성장이란 이런 것일까? 아니, 재탄생이라고 해야 맞겠군." 천무영은 사십 일간이나 독서에 몰두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변화에 따른 현상이라 여기며 흡족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주유무고(周遊武庫)에 들 차례다." 주유무고. 그곳도 주유서고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고서들로 꽉 차 있었다. 단 지 꽂혀있는 책들이 모두 무공비급이라는 점만이 달랐다. 더구나 그 책들로 말하자면 개방의 고수들이 치뤄온 싸움의 결과 를 적은 것으로 일종의 무공논술서(武功論術書)였다. 범위만 해도 중원은 물론 변방이나 새외, 왜국 등에 두루 미쳐 있 었으며, 전대 고수들의 격전기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좌도방문의 이공사술(異功邪術)까지도 자세히 논술되어 있었다. 특히 타문파 무공의 장단점과 파해방법을 세밀하게 분석해 놓고 있어 주유무고의 가치란 억만금에도 비할 수 없었다. 천무영은 오십 일만에 주유무고의 무론서를 다 읽었다. 그 결과로 천하제파(天下諸派)의 무학을 전부 머리 속에 담게 된 그는 이제 어떤 무공이고 일단 초식 한 가지만 보면 그것에 대해 줄줄이 줏어꿸 정도가 되어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만 따진다 면 그는 가히 무학종사(武學宗師)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동심천유개 헌원유광. 개방의 방주인 그는 당대 개방의 세력을 수백 년 이래 최고로 끌 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전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탐스런 수염과 청수한 용모로 인해 누구나 첫눈에 호감을 가지게 되는 그였다. 의복이야 여러 군데를 기운 허름한 마의차림이었지 만 그에게는 일문의 종사다운 위엄과 기품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는 나직한 탄식을 불어 내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본방이 제대로 명맥을 잇고 부흥을 도모하려면 십절존사의 존재 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건만, 그를 내주어야 하다니......." 아쉬움으로 인해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복마신개 사백조께서 이르는 말씀인즉 따르지 않을 수도 없지 않 은가? 쯧, 내 보기에 그분은 본방보다 은자천의 일에 더 비중을 두고 계시는 것 같았다." 대전의 한쪽에서 문득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헌원노선배." 헌원유광은 흠칫하여 돌아서는 한편,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앞으 로 훤칠한 키의 한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벌써......?" 나타난 청년은 천무영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 을 바라보고 있는 헌원유광을 향해 빙긋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지시하신 대로 주유서고와 주유무고를 거쳐서 왔 으니까요. 다음으로는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원래 이백 일을 작정하지 않았었소?" 헌원유광의 어투는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천무영이 새로 갖게 된 십절존사라는 신분 탓이었다. "후후... 어찌 하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헌원노선배께서는 잊 으셨습니까? 이전까지는 제가 책벌레였다는 사실을." "으음, 그렇다 해도 정녕 놀랍도록 빠른 성취외다." 헌원유광은 굳이 내심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에게 천무영 역시 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 모두가 노선배의 심심한 배려가 있은 덕분입니다. 소생은 평 생 그 공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 개방이 저를 필요로 한다 면 불원천리하고 달려올 용의가 있습니다." "오오! 그 말씀, 믿어도 되겠소?" 헌원유광은 자신도 모르게 천무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물론입니다. 제가 아무려면 노선배께 허언을 하겠습니까?" "고맙소! 내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 같았거늘......." 천무영은 그에게 손을 내맡긴 채 물었다. "이제 어떤 일을 더 해야 합니까?" "존사께서는 일서(一書)와 십절(十絶)을 취하셔야 하오." "인도해 주십시오. 따르겠습니다." "그럼......." 헌원유광은 비로소 그의 손을 놓더니 앞장을 섰다. ④ 용호풍운진해(龍虎風雲眞解). 이는 개방에 비장되어온 금서(禁書)였다. 조사령에 의해 방주조차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십절존사만이 익힐 수가 있었다. 이른바 일서에 해당되는 그 책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천무영의 수 중에 들어왔다. 그것은 개방의 조사이자 전설적 인물로 평가되는 개신( 神)이 직접 기록해 놓은 무서였다. 천무영은 헌원유광의 권유에 따라 그간의 피로를 풀기 위해 십 일 동안 정양한 후, 용호풍운진해를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용, 호, 풍, 운 등의 네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개중 용편(龍篇)은 내공편에 해당되었다. 천룡승후제령심법(天龍昇候制靈心法). 이는 개신도 창안은 했으되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개세의 신 공이었다. 잠을 잘 때나 중상을 입었을 때, 혹은 수중(水中)이나 땅 속에서도 연마할 수 있는 기오한 내공법이었다. 무엇보다 천룡승후제령심법은 속성이 가능하여 여타의 심법에 비 해 네 배나 빠르게 성취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호편(虎篇)에는 강기신공( 氣神功)이 수록되어 있었다. 탄월신강(彈月神 ), 선형금강파뢰인(仙形金剛破雷印), 여의태양 천력(如意太陽天力), 일원강살(一元 煞), 대천륜(大天倫). 이들 오대강기류(五大 氣流)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나같 이 무서운 위력을 갖춘 무적의 신공들이었다. 풍편(風篇)에는 권장지각술(拳掌指脚術), 즉 개방비전의 권법, 장 법, 지법, 각법 등이 일목요연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천무영은 풍편을 읽자 크게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천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개방의 권장지각술은 줄곧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작 정화(精華)가 빠져 있었으니, 제 위력을 발휘했을 리가 없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다짐으로 이어졌다. '기회만 닿으면 내 풍편의 무학들을 전 개방도에게 전하리라. 조 사이신 개신의 취지야 어떻든.......' 다음으로 운편(雲篇)에는 개방 특유의 경공법(輕功法)이 수록되어 있었다. 보법(步法)에서 시작하여 신법(身法), 그리고 어기제공법 (御氣制空法)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실로 다양했다. 예로부터 개방은 특히 경공술이 발달해 있었다. 다만 육지신법이 나 어풍천(御風天) 같은 전설상의 경공술도 개방의 조사가 남긴 이들 경공법에 비하면 뒤진다고 할 수 있었다. 천무영은 용호풍운진해를 모두 머리 속에 새겨 두면서도 익히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은자십천과의 약정때문이었다. 그들은 십절존사가 되더라도 은자천에 들기 전까지는 무공연마를 보류해 달라고 그에게 미리 요청한 바 있었다. ⑤ 천무영에게는 반드시 치루고 넘어가야 할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 었다.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방원 오십여 장에 달하는 광장에 천여 명의 인물들이 도열해 있었 다. 그들은 십대(十隊)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각 대의 선두에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들이 서 있었다. 모두 거지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우두머리들은 가슴에 저마다 하 나씩의 글자를 새겨달고 있어 나름의 위용이 느껴졌다. 그 글자들은 제각기 달라 천(天), 지(地), 풍(風), 화(火), 수 (水), 뢰(雷), 우(雨), 일(日), 월(月), 성(星) 등이었다. 그들의 맞은편으로는 높은 단(壇)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하 나의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십절존사에 대한 예우 덕에 천무영은 그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이들이 무림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는 십절단(十絶團)이다. 개방 내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열 명의 우두머리, 즉 십절영주를 차례로 응시했다. '십절영주의 경우에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인 다고 했다. 이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사령(祖師令)과 십절존사가 지니는 십절죽령 뿐이라고.' 그러나 천무영은 자신을 마주보는 십절영주의 눈빛이 한결같이 곱 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헌원노선배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자부심이 강하여 나를 쉽 게 인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쯧! 기도로써 내쪽에서 먼저 이 들을 제압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말문을 열었다. "그대들이 십절영주요?" 열 명의 영주들 중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알면서 뭘 묻냐는 듯 계속하여 천무영을 빤히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긴 이들을 움직이기에 내가 너무 젊기는 하다.' 십절영주의 구성원은 다양하여 노인에서 중년인, 여인까지도 섞여 있었다. 개방에 여인이 있다는 건 의외였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 은 모두 천무영보다 연상이라는 점이었다. 천무영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잊은 모양인데, 내게는 십절죽령이 있소." 역시 응답은 없었다. "후후후... 놀랍군. 십절존사령이 이런 식으로 묵살되다니." 그 말에 천절영주(天絶令主)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그것은 존사의 자격유무에 달린 일이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오. 개방의 위엄이 살아있는 한." "고맙소. 우리의 뜻을 알아주어서." "하면, 내가 어찌 하기를 원하오?" "간단하외다. 우리들의 합공을 백 초까지만 버티면 되오." 쉽게 나온 그의 말에 천무영도 아주 쉽게 대꾸했다. "기꺼이 그 시험에 응하리다. 건방지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대들 의 합공을 나는 일합(一合)에 격파해 보이겠소." "뭐, 뭣?" "정신 나간......!" 십절영주들은 분개했다. 아마도 그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상식으로는 천무영의 말이 너무도 가당치 않은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그들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시험은 하지 않을 작정이오? 시간이 가고 있소이다." 십절영주들은 이를 악물었다. "좋소! 어디 한번 그대의 실력을 구경해 봅시다." 장내에는 삽시에 냉기가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십절영주들은 천 무영이 앉아있는 태사의를 서서히 포위해갔다. 천무영은 여전히 태사의에 앉은 채로 말했다. "자! 펼쳐 보시오. 본인도 그대들의 실력을 견식해 보리다." "차앗!" 십절영주들은 흡사 분노를 발산시키듯 쌍장을 뻗어냈다. 우르르르- - 꽈릉- - ! 굉음과 함께 벼락 같은 장력이 천무영에게 쇄도해왔다. 그 순간 천무영은 묘하게도 빙긋 웃었다. 그는 장력이 태산을 뭉 갤 듯한 기세로 전신을 뒤덮어 오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깐의 짬을 두고 다시 막강한 장세가 그를 덮쳐왔다. "핫핫핫핫......!" 천무영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일순 장내에 울려 퍼졌다. 꽝! 꽈르르릉―! "억! 크윽......!" 십절영주들은 폭음에 이어 비명과 함께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직후, 신형을 바로잡은 그들은 안색이 핼쑥해진 채 서로를 마 주 보더니 털썩털썩 무릎을 꿇어왔다. "존사를 뵈오이다." "치죄를......!" 천무영은 그들을 향한 채 재차 크게 웃어제꼈다. "하하하핫... 존사령을 인정하는 것이오?" 기이하게도 그에게는 타격을 입은 흔적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서 십절영주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허허... 축하하오이다, 존사." 한쪽에서 동심천유개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걸어나왔다. 그는 가까 이 다가오더니 천무영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자 했다. "이 무슨......!" 천무영이 급히 일어나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방주, 소생을 모르십니까? 지금의 절차도 필요하기에 거친 것 뿐 이지 존사의 예를 고집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잘 아오이다. 하지만......." "소생의 부탁이라 해도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럼... 감히 응하리다." 동심천유개 헌원유광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⑥ 이어 그는 방금 전의 상황이 저으기 궁금했던 터라 천무영에게 물 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물리치셨소?" 천무영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솔직히 그건 저들의 충성심 덕분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은 필경 소생의 무공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기질이 어떤가를 알고 싶었을 겁니다. 합공으로 위협을 가하기는 했지만 저들은 처음부터 존사를 해할 마음이 없었지요." "요컨대 기질상의 싸움이었단 말씀이시오?" "그런 셈입니다. 저는 단지 끝까지 기다렸다가 저들이 진기를 급 격히 회수하는 틈을 타 슬쩍 손을 썼을 뿐입니다." "손을 쓰셨다면......?" "별것도 아닙니다. 저들이 장법을 펼치는 순간에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하고, 차경미기현공(借勁彌氣玄功)으로 저들의 진기가 극성일 때 서로 연결시켜 부딪치게 했지요." "오오!" 헌원유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는 경이감이 담긴 눈 으로 천무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명은 간단하게 하셨으나 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으로 사료되오 이다. 그 짧은 찰나에 열 명의 무공내력을 간파해 낸다는 것도 그 렇거니와, 저들의 내력이 극성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 그것을 연결 시키셨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오." "별 말씀을! 너무 추켜세우면 소생은......." "아니오. 존사의 능력은 천하의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오. 십절영주들이 아무에게나 굴복을 할 것 같소이까?" "이런 난감할 데가......." 천무영은 고개를 젓더니 십절영주들을 응시했다. "무엇보다 그대들에게 감사하오. 방주와 더불어 그대들의 충심으 로 인해 개방의 오늘이 있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소." "존사......!" "자, 모두들 일어서시오. 그리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각자 돌아가 대기하도록 하시오." 그 말에 십절영주들은 저마다 대례를 올린 후 사라졌다. 광장이 텅 비게 되자 천무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까?" 헌원유광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외다. 정말 훌륭하게 치루어 내셨소." 그는 몹시 흡족해 하는 중에도 눈가에 서운한 빛을 띠었다. 천무 영이 그의 심경을 헤아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십절존사로서의 과정들을 다 마쳤으니 일단 떠나기는 하겠지 만... 마음만은 이곳에 두고 갑니다." "존사......." "방주께서 베푸신 은전은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헌원유광은 감격한 탓인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눈이 부신 듯 천무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불과 반 년 사이에 이토록 변해 있다니, 나는 지금 장차 무림을 주름잡을 대기협(大奇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그의 예측이 들어맞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떻든 천무 영은 그렇게 또다른 일보(一步)를 내딛고 있었다. ⑦ 천문세가. 이른바 중원의 다섯 하늘 가운데서도 당당히 중천(中天)에 해당되 는 유수의 가문이다. 정오 무렵. 막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는 날씨 탓에 태양은 불을 뿜듯이 뜨거 웠다. 봄이 지났는가 싶었는데 벌써 칠월이고 보면 더위가 있는대 로 기승을 부릴 만도 했다. 일신에 깨끗한 백삼을 걸친 한 청년이 천문세가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시종 더위를 느끼지 않는 듯 담담한 안색이었다. 그것은 기질 탓인 듯했다. 폭양(曝陽) 아래서도 그렇듯 잔잔하고 도 고요한 기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으니까. 그의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신비롭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은은한 푸른 색을 띤 그의 눈은 깊이를 잴 수 없는 창해(蒼海)를 닮아 있었다. 청년은 푸른 물이 일렁이는 듯한 눈을 들어 천문세가라 씌여진 휘 황찬란한 편액을 바라보았다. 윤곽이 선명한 그의 입술이 낮은 중 얼거림을 흘려냈다. "단옥(壇玉), 널 만나야겠다. 널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큼성큼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서려 있었다. "누구냐?" "게 섰거라!" 문앞에서 장비를 연상시키는 무사 두 명이 지키고 있다가 청년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 다 키가 적어도 칠 척은 되어 보였으며, 어 깨가 딱 벌어진 장한들이었다. 백삼청년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기색 에 되려 움찔한 두 장한은 말투를 바꾸어 물었다. "공자는 뉘시오? 성명과 방문 목적을 대시오." 백삼청년은 이의없이 그 두 가지를 다 말해 주었다. "내 이름은 천무영이며 천리단옥 소저를 만나러 왔소." "아니, 지금 뭐라고 하셨소?" 놀란 얼굴로 묻는 한 장한에게 천무영은 변함없는 어조로 했던 말 을 반복했다. "천리단옥 소저를 만나러 왔다고 했소." 두 장한은 기가 막히다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한 사람씩 말했다. "귀하는 소식도 듣지 못했소?" "아가씨께서는 반 년 전에 타계하셨소. 그런데 어찌?" "뭐, 뭣?" 천무영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신도 모 르게 한 장한의 어깨를 덥썩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그게 사실이오? 천리단옥 소저가 죽었 다는 것이......!" "이... 이거 놓으시오, 으윽!" 장한은 어깨가 부서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옆에 있던 다른 장한이 보다 못해 감산도를 뽑아 들었다. "멈추시오! 귀하는 행패를 부리러 천문세가를 찾아왔소?" 신랄한 고함성에 천무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오, 본의 아니게 그만......." 그는 손을 내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녀가 죽었소?" 어깨를 잡혔던 장한이 인상을 쓰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길! 그렇소. 북궁공자와의 혼약이 파기된 후, 충격 때문에 자 결을 하셨소. 그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거늘." "그럴 수가!" 천무영은 일시지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야말로 천지가 빙글 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무영탑에서 있었던 일로?' 천무영의 안면근육이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 치욕을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자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 천무영은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천문세가의 황금빛 편액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이 눈부시게 열려 있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의 얼굴과 만났다. 눈물로 얼룩이 진 채 자신을 향해 사랑을 호소해 오던....... 그녀가 학같이 가녀린 목에 스스로 비수를 들이대는 일이란 사실 그로서는 연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오오, 단옥! 네가 결국... 나때문에 그리 되었구나.' 천무영은 고개를 돌려 두 장한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만년빙굴을 거친 것처럼 차디 찼다. "북궁현리는 어디로 갔소?" 그 이름이 언급되자 장한들은 몸을 움츠렸다. "그분이야 물론 천금성에......." 천무영은 더 들을 필요가 없는지라 홱 돌아섰다. 그는 수렁을 헤 쳐가듯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으나 어느덧 피가 흐르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있기도 했다. '북궁현리! 만족하는가? 그대로 인해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던 한 여인이 무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그대는 사랑을 모르는 자다. 만일 그대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사 랑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천무영의 모습은 이내 일륜 속으로 사라져갔다. "쯧!" 그가 시야를 벗어나자 두 장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안됐군, 모르긴 몰라도 아가씨를 꽤 흠모했던 모양인데." "혹시 아가씨가 자결을 하신 것도 저자와 연관이 있었던 게 아닐 까? 보아하니 평범한 인물 같지는 않아." "글쎄, 가능성이 있는 얘기야." "쩝! 그렇다면 애초부터 서로 잘못 만난 게지. 천하의 누가 감히 북궁공자와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하긴......!" 천무영과 천리단옥의 끈질기고도 절실했던 사랑은 끝내 그들 두 명의 장한에게서까지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생각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여댔으며, 하찮은 동 정으로써 정오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따름이었다. ■ 무영탑 1권 제9장 그림자 내기 ① 춘삼월(春三月). 북방의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에도 봄은 찾아왔다. 바람은 아직도 차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절을 속일 수는 없는지 방 향을 바꾸고 있었다. 남으로부터 단단한 과일 껍질이 벗겨지며 속 살이 드러나듯 조금씩 훈풍이 전해지고 있었다. 옥문관은 무수한 망향의 애환이 담겨있는 곳이다.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아내, 자식들을 떠나 이역만리(異域萬里)의 국경수비대에 몸담고 있는 병사들은 오늘도 찬 이슬을 맞으며 월 광(月光) 아래 창검을 비껴들고 서 있다. 그들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중에도 어김없이 세월은 가고 계 절도 바뀐다. 그리하여 쓰라린 향수와 고독감으로 인해 남방의 하 늘을 보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오곤 한다. 그러한 옥문관의 한 곡구(谷口)이다. 험준하기 그지 없는 이곳에도 예외없이 봄은 찾아왔다. 먼 강남의 버들피리 소리와 동정호(洞庭湖)의 유선에서 흐르던 노랫소리가 여기까지도 전해져 올 듯하다. 이리원상초(離離原上草), 일세일고영(一歲一枯榮), 야화소불진(野火燒不盡),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 원방침고도(遠芳侵古道), 청취접황성(晴翠接荒城), 우송옥손거(又送玉孫去), 위위만별정(葦葦滿別情). 우거진 들판의 풀이여 일 년에 한 번씩 났다가 시들어버려 그 생명력은 들불도 태우지 못하여 봄바람 불면 또 다시 소생하누나 무성히 자란 들꽃은 옛골을 덮고 청명한 날풀은 옛성터까지 뻗었구나 이제 그대와 이곳에서 작별하게 되니 잡초처럼 이별하는 슬픔이 가슴에 차오르네 낭랑한 시음(詩音)이 바람결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것은 호리병같 이 생긴 곡 너머 북쪽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소리였다. 옥문관을 경계로 하여 그 북방으로는 끝없는 사해(沙海)가 펼쳐져 있었다. 인적이라곤 있을 수 없건만 시음은 분명 그곳으로부터 들 려오고 있었다. 스스스......! 황원(荒原)에는 잡초들만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건듯 부는 바람 에도 모로 쓰러져 누우며 스산한 음향을 내곤 했다. 슥! 흡사 땅에서 솟아나듯 하나의 고영(孤影)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입었으며 키가 훤칠한 청년이었다. 수중에는 낡은 섭선을 쥐었으며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나이는 약관이 좀 넘어 보였는데, 젊은이 특유의 열정보다는 차분 하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은은한 벽록색을 띤 눈에서도 엿보이는 것은 냉철한 이지(理智)였다. 백삼청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섰다. 그의 벽해 같은 눈이 아련한 기억을 더듬듯 옥문관의 북방을 바라본다. "열 분 은자시여! 천무영이 마침내 당신들의 기대를 등에 업은 채 중원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무영이었다. 그가 중원을 떠난 것은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그것은 은자십천을 따라 패자의 비지(秘地)인 은자천에 들기 위해서였다. 그후로 삼 년이라는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고, 그는 은자들이 원하 는 전 과정을 거쳐 귀로(歸路)에 오른 것이었다. "광한 어르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부디 평안하십시오. 다른 아홉 분들께서도 역시......." 천무영은 결의를 다지듯 낮게 읊조렸다. "앞으로 은자천이라는 명칭이 사용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머 지않아 불패천의 위업이 달성될 테니까." 과연 그가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은자지한을 풀 수 있을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 일신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오늘이 있게 해주신 열 분 은자들의 은자지념(隱者之念)이 함께 숨쉬고 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스스스......! 그의 발바닥은 땅바닥에 닿지 않고 있었다. 잡초 위에 한 치 가량 뜬 채 기척도 없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면 초상 비(草上飛)의 경공으로 보였으나 아니었다. '개방 용호풍운진해의 운편은 천하제일의 경공술을 다루고 있지. 이 부운표행보(浮雲飄行步)도 마찬가지이고.' 천무영은 바람에 날리는 구름처럼 가볍게 옥문관을 넘어서 남쪽으 로 향하고 있었다. 삼 년의 세월에 걸쳐 그는 무엇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 다. 앞길에 어떤 장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 의 운명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잃어버린 자신의 그림자를 찾고자 하는 부분도 포함되 어 있었다. 천하가 그를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이다. ② 감주성(甘州城). 청해(靑海)는 술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주천(酒泉)에 인접해 있 다. 때문에 연일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기묘한 방(榜)이 하나 붙어 있었다. 방문 앞에 여러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헛 참! 괴이한 작자로군. 저런 술내기를 제안하다니. 이기면 황 금 천 냥이요, 지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고?" "클클... 정신 나간 소리지." "쩝! 이 장두구(張斗口)도 술이라면 한 가닥 하는데 한 번 응해 볼까? 황금 천 냥이 어디 장난인가?" "이 사람, 농담하지 말게. 내 듣기로는 벌써 서른 명 이상이 그 작자와 술내기를 하다가 목이 댕강 잘렸다던데." "엉?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고 하네. 부디 몸 사리게. 황금 천 냥이면 갑부가 되겠지 만 그 전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 이렇듯 극단적인 유혹과 협박이 함께 존재하는 방문의 내용이란 다음과 같았다. <본인과 술시합을 하고 싶은 자는 대명루(大命樓)로 오라. 이기면 황금 천 냥을 주겠다. 대신 지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천인혈(天刃血)> 천무영도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것을 보았다. 그는 변용을 하고 있어 본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특징이던 눈빛도 푸른 색이 지워져 버려 평범한 것이 되어 있었다. 뭐랄까? 아무리 보아도 이렇다할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 리를 걷다 보면 흔히 마주칠 듯한 용모로 바뀌어 있었다. "목숨을 건 술내기라, 그거 정말 재미있는 발상이군."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세상에서 자신의 전부를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는 상대란 드문 법이다. 더구나 승부가 개입되어 있을 시엔 매우 신중하게 대처해 야 하지. 상대를 파악하기 전에 스스로를 파악당하게 되면 십중팔 구는 패배하게 된다. 이것은 천무영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광한상인의 당부였다. '맞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패해서는 안되니까요.' 그는 짐짓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세상사를 쉽게 해석하고 아무런 갈등도 가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처럼. ③ 문제의 대명루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가벼운 소요 를 보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루 앞에는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끔찍하게도 목이 잘리운 시체들이 무려 삼 십여 구나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그 바람에 근역은 진즉부터 피바다로 화해 있었고, 역한 피비린내 가 바람결을 따라 사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사태를 저지시키려고 나서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만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으며 공포에 질린 시선을 주 루의 이층으로 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섬뜩한 냉기마저 흐르는 장내에 한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정확히 몇 명째요?" 질문을 받은 사순 가량의 중년장한이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 로 대꾸했다. "삼십사 명째요." "또 시합에 도전하려는 자가 있소?" "쉿! 조용히 하시오." 장한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더니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이 일대에서 술고래로 이름난 관대모(關大母)가 시합 중이란 말 이오. 연 사흘째 저러고 있소이다." "고맙소, 알려주어서." 질문했던 자는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는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중년장한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깜짝 놀라며 그를 잡았다. "이보시오! 당신, 설마......?" 그러나 장한이 움켜 쥐었다고 믿고 있던 소맷자락의 주인은 어느 새 주루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이층으로 향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자일까? 그리고 목적은?' 그는 이 괴이무쌍한 사건을 통해 호기심과 더불어 크게 의혹을 느 꼈다. 뭔가 내막이 있지 않고서야 술내기를 빙자하여 이처럼 사람 들의 생명을 뺏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막 주루의 이층에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둔중한 물체가 이층 창문을 뚫고 날 아갔다. 그것은 대로상에 떨어졌는지 듣기 거북한 음향을 전했으 며, 사람들의 경악성이 그 뒤를 이었다. "앗! 관대모도 당했다." "이럴 수가! 천인혈이란 자는 술귀신, 아니 살인귀다." 천무영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살인귀라는 표현은 아주 적절한 것 같군. 누구라도 나서서 징계 를 가해야 할 작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이층에 올라섰다. '이것은......!' 천무영은 부지중 흠칫 굳어졌다. 그곳에는 실로 공포스럽다고밖에 는 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넓은 장소에 비해 주탁(酒卓)이라야 단 한 개뿐이었다. 아마도 이 술시합을 위해 이층 전체를 전세 낸 모양으로, 흑삼을 입은 한 사 내가 그 위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었다. 사내의 주위로는 수백 개에 달하는 술단지가 함부로 나뒹굴고 있 었으나 그가 얼마나 취한 상태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떻든 문제는 바닥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머리통들이었 다. 몸뚱이를 잃은 그 머리통들은 하나같이 대취한 듯 안면이 시 뻘겋게 달아오른 데다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르자면 시합의 정황과 죽음의 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습들 이었다. 어떤 것은 막 토한 직후인지 배설물이 잔뜩 엉겨붙어 있 어 역겨운 느낌마저도 종용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반쯤 넋을 잃고 있는 천무영의 귀로 사내의 것인 듯한 흔들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제길! 모두... 쓸모 없는 밥통들 뿐이로군. 술만이 인생을 지탱 시켜 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작자들은... 다 죽어야 해." 그렇게 나름의 변을 늘어놓는 사내의 모습에서는 왠지 짙은 자조 가 묻어 나왔다. 그가 천무영의 존재에 관심을 내비친 것은 그로 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너도냐?" 사내는 여전히 주탁에 엎드린 채 물었다. "대체 무엇을 추궁하는 건가?" 천무영은 반문한 후, 그자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난 모르겠군. 죽어 주기 위해 왔느냐고 묻는지, 아니면 그대가 주장하는 술의 의미를 역시 모르느냐고 묻는 것인지." "크크크... 이제야 제법 한 수 읊을 줄 아는 놈이 걸렸군." 흑삼의 사내는 탁한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본 천무영은 너무도 뜻밖인지라 아연실색했다. '맙소사! 어찌 이런.......' 사내의 모습은 그의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 있었다. 일단 그자는 사내라고 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입고 있는 흑의와는 대조적으로 얼굴이 배꽃같이 희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지 일시지간 눈앞이 다 환해질 정도였다. 엎어져 있는 바람에 주탁을 수북히 덮고 있던 머리칼도 막상 아래 로 길게 늘어뜨려지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듯했다. 천무영은 그자의 미려하기 그지없는 오관에서 어느 화가의 예술품 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충격을 접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구나! 흔히 말하는 절세의 미녀라 해도 이자처럼 아름 답지는 못할 것이다.' 흑삼의 사내, 이제 십칠 세쯤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그 아름다운 소년이 천무영을 향해 당돌하게 물어왔다. "나와 대작해 볼 테냐?" 방금 전과 다를 바 없이 반말 그대로였다. 천무영은 그 어투는 고사하고 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잔인성이라고 는 도무지 엿볼 수 없는, 해맑고 초롱초롱한 소년의 눈을 마주 대 하자 차라리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더구나 아미월같이 섬세한 눈썹에 매달린 낡아빠진 우수며, 주사 를 바른 듯 붉고 육감적인 입술에서 느껴지는 퇴폐적인 기운 등은 아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천무영은 할 말을 잃은 채 심중으로 부르짖었다. '이 미소년은 대체 무엇때문에 이다지도 망가져 있단 말인가? 한 창 미래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 있을 연령이거늘.' 그는 자신을 되돌아 보기도 했으나 정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왜냐 하면 그는 남들이 겪지 못한 온갖 고초 속에서도 나름대로 삶의 의지를 굳건히 지켜온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향해 통한을 쏟아낼지언정 그는 이 소년처럼 쉬지 않고 한 달 열흘 동안 술을 마시는 일 따위는 절대로 벌일 위인이 못되었 으며, 살인에 대해서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었다. ④ 천무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소년의 앞에 마주앉았다. 그러자 소년 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은은한 분노였다. "감히! 너는 천인혈이란 명호도 못들어 보았느냐?" 그 명호는 소년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았는데 실상 당금 무림에서 그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는 희대의 살수(殺手), 즉 전문적인 살인청부업자였던 것이다. 소년의 소매 속에는 실제로 천인혈(天刃血)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 비수가 번뜩였을 때, 목이 온전히 제 자리에 붙어있는 자는 없 었다. 최소한 그가 출도한 이 일 년 안에는 말이다. 그는 성도, 이름도 없으며 출신도 알려지지 않았다. 직업이 살수 라는 것 외에 한 번 겨냥한 상대는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는다는 그의 철칙만이 항간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천하제일살수라고도 불리웠던 천인혈이 이 주루 에서 안주 삼아 살인을 즐기고 있었다. 천무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되었지만 나는 천인혈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사정이 있어 오랫동안 중원을 떠나 먼 곳에 가 있었거든." 그 말에 천인혈은 화를 내다 말고 쿡쿡 웃었다. "하기야 무식(無識)은 죄라고 볼 수 없지. 그 덕분에 네 목을 내 놓아야 되는 것이 유감이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다, 꼬마." "뭐, 뭣! 날더러 꼬마라고?" "후후...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흥! 정말 겁이 없는 작자로군.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도 여유를 부리고 있다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반문하는 천인혈을 향해 천무영은 문득 정색을 했다. "너도 네 자신에게 좀 솔직해 보는 것이 어떠냐?" "뭣이?" 오만하게 내리깔렸던 천인혈의 눈이 위로 번쩍 뜨였다. 그것은 상 대로부터 정곡을 찔렸기 때문으로, 그는 비로소 애초부터 천무영 의 기도에 경계심을 느꼈던 자신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자고로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기 마련이다. 그는 상대가 어떤 인물 인가를 예견했으면서도 습성인 양 굳어버린 말투나 태도를 원칙처 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방진......!" 천인혈은 재삼 노기를 드러내는 것으로써 심경을 감추려 했다. 그 에 반해 천무영은 뭔가 작정을 한 듯 무표정이었다. "자, 말은 그만 하고 술을 들어야지." 그는 손을 뻗어 천인혈이 마시다 남긴 술병을 집어들었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천하의 주객(酒客)들이 모두 네 손 에 죽게 될테니 모조리 마셔서 치워야겠다." 천무영은 병째로 입에 가져가더니 목울대를 울컥이며 잠시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한 근이나 되는 술을 단숨에 다 마시고난 그는 소 맷자락으로 입술을 쓱 훔치며 말했다. "원래 나는 술을 좋아하여 네가 써 붙인 방문을 보고 호감을 느꼈 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네 취미는 술 자체가 아니더구나. 그것을 통한 살인 등의 자기파괴였지." "닥쳐! 네가 무얼 안다고?" "후후... 어떤 방면에서건 너보다는 나을 것이다. 내가 좀더 오래 살았으니까. 나이 차란 아무 것도 아닌 듯하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아. 단 하루 중에도 인간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가를 감안 한다면 말이야. 안 그런가?" "집어 치워라, 누가 너에게 충고나 듣겠다고 했느냐?" 천무영은 새 술병을 집었다. "호오! 너무 흥분하는군. 진정해라, 본의는 아니었지만 충고로 여 겨졌다면 사과하지. 그보다 내 쪽에도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 어 보겠느냐? 어쩌면 살인보다 재미있을 게야." "무슨 헛소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천인혈의 눈에는 강한 호기심이 나타나 고 있었다. 아직은 일면에 순진함이 남아 있는 듯. 천무영의 말은 계속되었다. "황금 천 냥이면 적은 액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목과 바꾸기 에는 상당히 억울한 액수다." "큭!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군." "그럴지도 모르지. 좌우간 어떻겠느냐, 황금 대신 서로의 그림자 를 놓고 내기를 하는 것이?" "그림자를?" 천인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영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무영은 손을 들어 세웠다. "보아라, 이 그림자를." 그는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보다시피 이 그림자는 내 의사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자를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건 어떤 의미이겠느냐?" 천인혈의 까만 눈동자에 당혹스런 빛이 어렸다. "자유의지를 저당잡히는 것......?" "맞다, 그거야." 천무영은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어떠냐? 술로 승부를 짓되, 이기는 쪽이 상대의 그림자를 차지하 기로 하자는 거다. 기한은 삼 년이면 적당하겠고." "으음!" 천인혈의 섬세한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또렷한 눈 망울로 한동안 매섭게 천무영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대략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천인 혈은 마음을 정했는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건 목을 거는 것보다도 훨씬 심한 내기로군." "후후... 그 말은 수락한다는 뜻으로 듣겠다." "좋아, 크ㅋ! 그림자 내기라... 한번 덤벼볼만 할 것 같다." 합의를 보게 된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하하하하......!" "후후후......." 웃음을 나누는 그들은 무척이나 다정한 사이처럼 보였다. 각자 심 중에 감추고 있는 살벌한 의지는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조금도 드 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변방의 한 시진에서 우연히 만난 두 괴인들간에 그 림자 내기는 시작되었다. ⑤ 비가 내린다. 명색이 봄비라고는 하나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북방을 내 리덮는 빗줄기는 차갑고 음산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날에는 그저 따뜻한 내실에 드러누워 계집의 엉덩이를 주무 르거나 시름을 잊고 늘어지게 자 두는 것이 상책이리라. 혹자는 도박에 미치는 게 제일이라고도 하지만. 비는 끊임없이 추적추적 내렸다. 화사한 봄기운이 돌려면 아직도 멀었는지 잔뜩 찌푸린 하늘은 영 개일 줄을 몰랐다. 하루 이틀 사흘....... 궂은 날은 십 일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십 일 동안, 감주성 주당(酒堂)들의 눈길은 대명루에 집 중되어 있었다. 진작부터 있은 현상이기는 했으나 특히 열흘 전부 터는 더욱 크게 관심들을 쏟고 있었다. 그것은 대명루의 이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희대의 술내기 때문이었 다. 비가 내려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아예 그 내기의 결과에 또 내기를 걸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들은 이 지역 출신이 아닌, 소위 뜨내기였다. 그런 자들이 지난 열흘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그 두 사람으로 인해 소비된 술만 해도 벌써 삼백 동이가 넘고 있 었으니, 대명루가 문을 연 이래로 이토록 많은 술을 마셨던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결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내기의 결과를 궁금해 하던 감주성의 주 당들도 종내 지루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반면에 당사자들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건,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 건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현재도 오직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목구멍에 술을 쏟아 붓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명루 이층은 거지반 술창고로 화해 있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 이 빈 술단지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그 내용물이 다 어디로 들 어갔는지를 생각하면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만일 그들 두 사람더러 술이 아니라 물을 그만큼 마시라고 했다면 이 사건의 결과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일찌감치 내기 자체를 사 양하고 각자 제 갈 길로 떠나버렸을 테니까. 주탁에도 어김없이 술단지가 층층으로 쌓여 있었다. 그것을 사이 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앉아 있었다. 이들이 바로 대명루의 역사 에 길이 남게 될 두 명의 술귀신들이었다. "끄윽, 난 당신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재수가 없다구. 잘 난 척은 혼자 다 하고, 끄윽! 당신 정체가 뭐야?" 급기야 딸꾹질을 해대며 술주정을 하듯 읊조리게 된 자는 천인혈 이었다. 그는 혀가 꼬부라졌는지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을 뿐더러 눈빛도 더 이상 초롱초롱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함부로 구는 듯해도 어투만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는 술기운에 심히 혼탁해진 눈으로 천무영을 응시했다. 그 눈 속에서 천무영의 얼굴이 몽롱하게 이지러졌다. "얄미운 작자 같으니, 끄윽! 난... 당신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혐 오해. 내가 못가진 것을... 가졌으니까." "후후... 내가 무엇을 가졌는데?" "왜 흔히 말하는 거 있잖아, 인품이라던가? 크큭! 그런 자들은 대 체로 생기는 것이 없어도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하지." 천무영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아니, 그건 소형제가 잘못 생각했네. 나는 이번 내기를 통해 꼭 얻고 싶은 것이 있거든." "푸흐흐... 내 그림자 말인가?" "그렇네." "그걸 가져다... 무엇에 쓰게? 끄윽, 난 살인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왜냐면... 난 살수거든." "짐작은 했었지." "쳇! 역시 당신은... 재수가 없어." 천인혈은 주절거리면서도 채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평생 토록 쏟아낸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 말고도 그가 모르는 점은 또 있었으니, 그는 어느덧 술 한 단지 중 반 이상을 앞섶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천무영에게서는 취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천 인혈과 똑같은 양의 술을 마셨건만 어찌된 셈인지 그는 애초의 담 담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셔댄 술은 독하기로 이름난 죽난청(竹蘭靑)으로 천인 혈은 점차 눈에 띌 만치 그 술에 꺾여가고 있었다. "끅! 그래도 당신에게는 편한 구석이 있어... 다행이야. 무슨 소 리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거든? 멸시당하는 기분도 들지 않 고. 난... 살인을 밥먹듯 해 왔어. 그것도 천 번 이상이지. 어때, 내가 소악마처럼 보이지 않나? 크크큭......!" "후후...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네는 실제로 소악마 야. 타성에 젖어 살인을 취미로 즐기기도 하니까." "큭큭... 솔직해서 좋군. 그래서... 삼 년 동안 나를 곁에 묶어 두고 교화라도 시키려고 했었나?" "하하하... 술이 취했어도 정신은 멀쩡한 것 같군. 맞네, 그리고 난 반드시 자네의 그림자를 가질 것이네." "헛소리......! 누구 맘대로......." 천인혈은 더 말하지 못하고 탁자 위로 엎어졌다. 그의 입과 코로 술이 세차게 뿜어져 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촤아악―! 내공이 실린 술화살은 마주 앉아 있던 천무영에게 정통으로 뿜어 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모조리 기체로 화하더니 곧 바로 증발해 버렸다. "지독하군! 의식을 잃는 찰나에도 살수를 뻗다니." 천무영은 쓴 입맛을 다시며 신색을 정비했다. "천강노선배께 광음통기대법(狂飮通氣大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내가 이 아이보다 훨씬 더 취해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꼼짝없이 그림자를 내주어야 했을테고." 그는 착잡한 시선으로 천인혈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징계보다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다. 대체 어 떤 내력으로 살수가 되었는지......." 천무영은 앉았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아......! 불현듯 빗소리가 그의 청각으로 밀려 들었다. 밖에는 아직도 끈질 기게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의 시작을 알지 못했던 천 무영은 가벼운 감흥에 젖었다. "봄비라... 왠지 희망이라는 어휘를 떠올리게 하는군." 그는 엉망으로 취해버린 천인혈을 옆구리에 끼었다. 체구가 작은 편이라서 그런지 천인혈의 몸은 가벼웠다. "소형제, 그대는 역시 소년에 불과하다네." 천무영은 탄식처럼 중얼거리며 창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는 한 가닥 선이 되어 가는 빗속을 가로질러 갔다. ⑥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난 듯 어설프나마 봄햇살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마부 외에 그 마차에는 두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마차 안. 길게 놓인 의자에 천인혈이 누워 있었다. 긴 흑발을 묶지 않고 늘 어뜨린 그의 모습은 작금에도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천무영은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천인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철저한 방어본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가슴 부분에는 어쩌다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무서운 살기를 내뿜는다.' 천인혈은 그렇게 삼 일간을 꼬박 혼수상태였다. 그 위험스러운 소 년을 마차에 싣고 천무영은 남하(南下)하는 중이었다. "으음, 여독이란 게 장난이 아니군. 나도 피곤하니." 그는 갑자기 기지개를 한 번 쭈욱 켜더니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리고는 자연스럽게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그는 방금 전에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여인처럼 긴 천인혈의 속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이 감기기가 무섭게 반대로 천인혈은 눈을 반짝 떴다. 예전과 같은 총기를 회복한 눈이었다. 천인혈은 티없이 맑은 눈망울로 천무영을 쏘아보았다. 믿을 수 없 게도 그 눈에 어려 있는 것은 살기였다. 그의 소매가 번뜩하고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 끝에서 하나의 예리 한 칼날이 뻗어 나왔다. 슉!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흰 소도로 무방비 상태인 천무영의 목을 가 르고 있었다. 비좁은 마차 안에서는 누구라도 도저히 피해낼 수 없는 급공이었다. 그러나 천무영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무반응이었고, 반 척 남짓 한 칼날은 파르르 떨리다 그의 목울대에서 딱 멈추었다. 천인혈은 소도를 힘껏 움켜쥔 채 몇 번인가 눈을 깜박였다. 아마 도 그답지 않은 갈등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아!" 망설이던 그는 종내 탄식을 발하며 칼날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귀로 천무영의 나직한 음성이 전해져 왔다. "뜻밖이네. 살수도 예외를 두는가?" "웃!" 천인혈은 움찔하더니 상처입은 늑대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 천 무영은 눈을 뜨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아, 자네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네." 천인혈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를 책망할 마 음이 없는지라 천무영은 부드럽게 말했다. "약속을 어기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지. 이제부터 삼 년간 자네 의 그림자는 내 것이네." 천인혈의 치렁치렁한 흑발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격 정에 사로잡힌 그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걱정 말게. 그렇다고 굴욕스럽게 만들지는 않을테니." 천무영은 언제 준비했는지 하나의 술병을 불쑥 내밀었다. "자, 마시게. 술 깨는 데는 술이 최고일세."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 둘의 색채는 엄연히 달랐다. 한쪽은 여러 가지 격한 감정들이 뒤섞여 매섭게 타고 있 었으며, 다른 한쪽은 물처럼 담백했다. ⑦ 천인혈은 천무영에게서 빼앗듯이 술병을 나꿔채더니 기갈 들린 사 람처럼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마부에게 물어보게. 미리 일러두었으니." "나를 어쩔 셈이오?" "거기에 대해서는 진즉 대답을 한 걸로 아는데?" "나는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오. 게다가 나는 알다시피 하나의 칼날이오. 나를 잡아두면 필경 당신이 찔리고 말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몰래 새어나가던가." "나는 잘 드는 칼일수록 마땅한 칼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네. 자네를 가둘 칼집이 내겐 있어." "당신이 죽는데도?" 천인혈의 눈에서 번쩍 하고 살기가 튀었다. 그러나 천무영은 개의 치 않고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비가 그쳤군. 어떤가? 봄기운이 완연하네. 저 초목들을 보게. 푸 른 순이 돋고 있지 않은가?" 그의 엉뚱한 말에 천인혈의 눈에 차 올랐던 살기가 다소나마 엷어 졌다. "당신...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오." "그럼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림자 없는 인간, 언젠가 내 스스로 그렇게 규정지었지. 그 때 부터는 남들도 무영(無影)이라고 불러주었고." "성은?" "천(天)." "그것도 당신이 지었소?" "음." "천무영......!" 천인혈의 눈빛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몹시도 흔들렸다. "후후... 지나친 관심은 사양하겠네. 어쩌면 내게는 본래부터 그 림자가 없었는지도 모르네. 그래서 중원천지를 돌아다니며 그림자 를 찾고 있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다면......." 천무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남의 그림자라도 빌려야지. 아니면 천하를 다 훔치겠네." "아!" 천인혈은 크게 충격을 받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부인하듯 잘라 말했다. "내게도 나름대로 갈 길이 있소!" 천무영은 손을 뻗어 길가의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물론 알지. 그렇지만 자신 있는가?" "무엇이... 말이오?" 천인혈은 그가 묻는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천무영은 부러 진 나뭇가지를 다듬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보아하니 이번 건은 위험부담이 큰 것 같아서." 천인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이 스쳤다. "그... 그걸 어떻게......?" "함께 있는 동안 열심히 추리를 거듭한 결과이지. 자네가 술을 퍼 마시고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른 것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서가 아니었나?" "우우......!" 신음을 발하는 그를 향해 천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염려 말게. 자네는 나를 섬뜩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내게는 적의 라곤 없네. 다만 내 그림자를 잃고 싶지 않을 뿐." 천인혈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하듯 말했다. "나는 꼭 성공할 것이오." "그러길 빌겠네만 이걸 좀 봐주겠나?" 스슷! 천무영은 다듬어진 나뭇가지를 파리라도 잡듯이 가볍게 흔들어 보 였다. 그 광경에 천인혈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 그건!" 천무영은 나뭇가지를 툭 꺾어 버렸다. "느낀 게 있다면 다행이네. 자네는 지나치게 맹목적이야. 그 점이 쾌(快)를 키웠지만 때로는 완(緩)이 보충되어야 더욱 완벽해질 수 가 있는 것이네." "당신은 대체......?" 천무영은 마차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가게. 불원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빌겠네." "나... 나는......." 천인혈이 새삼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주춤거렸다. "하하... 이러는 건 자네답지 않아. 늦었지만 내 솔직하게 고백하 겠네. 자네와의 만남을 통해 실은 나도 한 수 배웠다네. 요컨대 살인에도 미학(美學)이 있다는 걸 말이야."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아니야, 자네로 인해 나의 살인 절대불가론이 깨졌어. 후후... 인간의 만남이란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가 보이." 천인혈의 눈에 일시지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머리를 흔들자 폭포수 같은 머리칼이 그의 절미한 얼굴을 덮었다.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휙! 그는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한참 후에야 감정의 동요를 감추 지 못하는 그의 음성이 멀리로부터 들려왔다. "돌아오겠소. 어제까지만 해도 심경이 비참했으나 당신 덕에 자신 이 섰소. 내 그림자는... 확실히 당신 것이오." 천무영은 마차의 문을 닫으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 앉았다. "후후... 귀여운 데가 있어. 도천성 노선배의 화운십이류(和雲十 二流)는 그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그는 매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중원에 발을 들여놓자마 자 천인혈이라는 마음에 드는 인물을 만났고, 그로 인해 또다른 사고(思考)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고 하는 것일까?" 천무영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홀로 중얼거렸다. 두두두두―! 네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발굽을 놓았다. "이럇!" 마차의 일부인 양 잠잠하던 마부도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마 차는 종전과는 속도를 달리하여 무섭게 내닫기 시작했다. 천무영은 잠을 청했다. 만족감이 가슴을 채우니 얼마쯤은 자 두어 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 무영탑 1권 제10장 돌풍(突風) 속으로 ①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다. 중원의 남방에서는 배를 타야 하고 북방에서는 말을 타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형의 특성 탓이었다. 사월이었다. 봄기운은 처처에 골고루 퍼져 따사롭고 평온한 빛을 뿌리고 있었 다. 하북평원(河北平原)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 들었다. 중원의 중심이랄 수 있는 이곳 하북평원은 완연한 봄기운으로 인 해 농부들의 힘찬 괭이질 소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들면 하늘을 덮는 것은 뿌연 황진이다. 이맘 때가 되면 중원은 대막으로부터 날아든 황사(黃砂)에 뒤덮이 게 되며, 그 현상은 어디고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를 끓여 마신다. 수질(水質)이 그리 좋지 않은 즉 차를 마시는 중원인의 습관은 뿌리깊은 것이었다. 다원(茶園). 대평원의 한가운데에 푸른 죽림(竹林)이 우거져 있고, 그 속에는 다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행객(行客)들이 쉬어가는 장소로 음식류도 팔기는 했지만 본업은 어디까지나 차를 파는 일이었다. 죽림의 입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입었으며 손에는 낡은 섭선을 쥐고 있었다. 용모는 평범하여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인상이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홀가분하게 한 마리의 말을 타고 이곳에 나타났다. 본래 그는 남행하려 했으나 도중에 뜻을 바꾸었다. 일종의 귀소본능이랄까? 인간이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듯 그는 지 난 삼 년 동안에도 줄곧 무영탑이 있는 개봉부를 잊지 못했고, 결 국 마음이 변해 북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었다. 천무영은 죽림을 가로지르는 소로로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다원의 입구에 이른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흠칫 놀라는 듯했으나 그런 표정은 또 금세 스러지고 말았다. 다원은 운치 있게 전체가 대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면으로는 대청이 보였으며, 그 뒤로 죽사(竹舍)가 늘어서 있었다. 대청의 옆쪽에는 마굿간이 있어 대여섯 필의 말이 긴 끈으로 묶인 채 한가롭게 여물을 먹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척이나 아늑하 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천무영은 말을 탄 채로 다원의 문앞에 가 섰다. 길 옆으로는 작은 밭이 있었는데 한 노인이 그곳에 앉아 무엇을 심는지 열심히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촌로(村老)답게 그 자세에 서도 유난히 등이 굽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농부들이 흔히 입는 허름한 마의였다. 천무영은 말에서 내린 후, 말 옆으로 붙어 노인의 곁을 지나쳤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우선 마굿간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구! 손님이 오셨네? 어서 오세요." 듣기 거북한 음성과 함께 죽사로부터 한 노파가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천무영의 면전에 이른 노파는 말고삐를 가로채듯 받아들 더니 다른 말들처럼 마굿간의 기둥에 묶었다. "자! 대청으로 오르세요. 점잖으신 문사시구려." 천무영은 빙긋 웃으며 인사에 대한 답례를 건넸다. "오늘 같은 날의 차맛은 일품일 것이오. 그렇지 않소?" "아이, 그야 물론입지요." 노파는 수선스럽게 서둘러 천무영을 안내했다. 대청에 마련되어 있는 죽탁과 죽의자는 모두 편안한 감을 주었다. 그가 앉기를 기다려 노파는 날 듯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는 죽기(竹器)라고 할 수 있는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차 (香茶) 한 잔을 받쳐들고 나왔다. "저희 다원의 자랑인 용정태화차(龍井太華茶)랍니다." "고맙소." 천무영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상냥한 노파의 태도에 씨익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코로 스며드는 그윽한 향기가 그간의 여독을 말끔히 씻어내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차향을 음미하다가 여유있게 마시기 시작했다. 노파 는 웃음 띤 얼굴로 그 곁에 바짝 붙어서서 그가 차마시는 것을 끝 까지 지켜본 연후에야 입을 열었다. "문사 나으리, 차맛이 어떤가요?" "그것은... 으음!" 천무영은 말을 꺼내다 말고 신음과 함께 탁자에 엎어졌다. "호호호호......! 또 한 마리 낚았어." 노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요사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을 기해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던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우두둑 하고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잔뜩 굽어 있던 노인의 허리가 거짓말처럼 쭉 펴졌다. "축하해야겠군, 요화랑(妖花娘). 또 성과를 올려서." 돌아선 노인의 얼굴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름살 투 성이였다. 하지만 그 음성만은 분명 청년의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흥! 화화공자(花花公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난 당신 일에 쓸데없이 간섭한 적이 없어요." 노파의 음성도 요염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노인(?) 이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요화랑, 네 색탐(色貪)이야 누가 탓하겠느냐? 그러나 잊지 마라. 상품만큼은 절대로 싱싱해야 한다. 너무 진이 빠지면 제 값을 받 을 수 없으니까." "쳇! 당신이나 명심해요." 요화랑은 불쾌한 듯 투덜거리더니 탁자에 엎어져 있는 천무영을 힘도 들이지 않고 덥썩 안아 들었다. 그 상태로 그녀는 뒤켠의 죽 사 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죽사 안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실로 해괴했다. 별다른 집기류는 눈에 띄지도 않았으며 대여섯 명이 뒹굴어도 넉 넉할 정도의 커다란 침상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그 넓은 침상 위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알몸으로 누워 있었는데 개중 두 명은 청년이고, 두 명은 중년인이었다.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그들은 민망하게스리 축 늘어진 남성의 상 징마저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큰 댓자로 뻗어 있었다. "요번 물건은 이 작자들에 비해 품질이 어떨까 몰라?" 요화랑은 침상 위의 사내들을 밀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린 후, 천무 영을 눕혔다. 그녀는 사뭇 색정이 깃든 눈길로 죽은 듯 아무 기척 도 없는 그의 신체를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주름살을 벗겨 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의 얼굴은 노파에서 순식간에 탕기(蕩 氣)가 줄줄 흐르는 삼십대의 여인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요화랑의 공세는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천무영 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② "흐응, 귀여운 것!" 그녀는 천무영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더니 묘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런데... 그것도 쓸만 할까?" 그녀의 손이 뱀처럼 천무영의 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 고 한참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체격은 이 정도면 되었고......!" 요화랑은 어느덧 눈에서 흐르는 욕정의 빛이 강해진 만큼 뺨도 도 화처럼 붉게 타올라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더니 대담 하게도 천무영의 허리춤을 끄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부끄러움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런 일에 아주 익숙한 듯 거리낌이라곤 없었다. "너무 진을 빼놓지 말라고? 흥! 저는 어쨌기에? 돈은 차후 문제 야. 인생에 있어 이 방면의 재미가 최고지." 하지만 요화랑은 원하는 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천무영의 아랫도 리로 막 손을 밀어 넣으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그만 얼굴이 하얗 게 질린 채 굳어지고 말았다. "흑! 어... 어떻게......?" 어느 틈에 서슬 퍼런 칼날이 그녀의 콧등을 겨누고 있었다. 크기 라야 겨우 손바닥만했으나 그 칼날이 주는 충격은 지대했다. 그녀 는 숨이 멎어 버리기라도 한 듯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뿐 아무 소 리도 내지 못했다. 칼을 들이댄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천무영이었다. 그는 목인 형을 깎던 그 소도로 요화랑의 콧등을 살짝 그었다. 몇 방울의 피가 칼날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우......!" 요화랑의 얼굴에는 금세 공포가 깃들었다. "궁금하겠지? 어떻게 미약(迷藥)에 당하지 않았는지." 천무영은 침상에 누워 히죽 웃었다. 그를 보는 요화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요염해 보이는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너희들의 연극은 너무 서툴렀다. 마굿간에는 분명 여섯 필의 말 이 묶여 있었는데 손님은 아무도 없더군." "아!" "변장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얼굴을 늙은이로 만들었으면 의당 손등이나 목덜미에도 신경을 썼어야지." 숨을 죽인 채 천무영의 말을 듣고 있던 요화랑의 표정이 불현 듯 미묘해졌다. 현재도 그녀는 손을 천무영의 바지춤에 올려놓고 있 는 상태로 그의 호흡을 지척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천생의 탕부(蕩婦)인 그녀는 목숨을 놓고 협박당하고 있는 처지에도 피가 뜨거워졌다.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급기야 그녀는 붉은 입술을 벌려 더운 입김을 토해냈다. "하아아......!" 아울러 재빠른 동작으로 천무영의 하의 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흐으응! 함께 즐겨, 악!" 곧 닥쳐올 즐거움을 연상하던 요화랑은 뾰족한 비명을 발했다. 사 내의 그것에 근접해 감에 따라 몸이 달아오르던 순간, 느닷없이 눈앞이 침침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은 붉고 끈적한 액체, 즉 핏물이었다. 천무영 이 기척도 없이 소도로 그녀의 이마를 그어 피가 눈자위로 흘러내 린 것이었다. 설마했던 요화랑은 그제서야 비로소 천무영이 자신의 상대가 아님 을 깨닫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잘못 판단했어. 이렇게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가슴을 쳤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천무영이 그녀 를 향해 역겹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들과 취향이 다르다. 최소한 금전이라던가 이 방면의 일에 인생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지는 않지." 부욱! 비단폭 찢기는 듯한 음향과 함께 요화랑의 앞섶이 갈라졌다. 천무 영이 소도로 그녀의 옷을 그어버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놀랍도록 거대한 두 개의 육봉이 툭 튀어나왔다. 천무영은 칼끝으로 자줏빛을 띤 젖꼭지를 툭 건드렸다. "무, 무슨 짓을......!" 요화랑은 견디기 어려운 공포로 인해 턱을 덜덜 떨었다. 차라리 단번에 죽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③ 정말이지 이런 사내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아직 무기로 내세울 만한 미모가 있는 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사내는 아직껏 없었다. 사내를 다루는 솜씨도 워낙 능숙하다 보니 그녀로서는 이렇듯 어 이없게 실패를 본 경험이라곤 기억에도 없었다. 천무영이 물었다. "후후... 이 살덩이를 갈라보면 무엇이 나올까?" 그는 칼등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툭툭 치고 있었다. "흐으윽!" "뭐가 나오지?" 요화랑은 얼굴이 새파래진 채 내심 부르짖었다. '이자는 고문에도 대가(大家)급이다.' 최소한 이 순간 그녀의 눈에 비친 천무영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 이 잔인해 보였다. 그것도 시종 나직한 어조에 은은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으니 절로 심금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묻게 할건가?" 그녀는 울부짖듯 대꾸했다. "피... 피가 나와요......!" 천무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네에......?" "따라 해라. 구정물이 나온다." "그, 그것은......!" 요화랑이 차마 말을 못하고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칼끝을 앞으로 약간 밀었다. "악!" "구정물이 나온다." "네... 네! 구... 구정물이 나와요." 그녀는 젖가슴을 파고드는 섬뜩한 느낌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허 겁지겁 대답했다. 자존심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번에는 천무영의 칼끝이 그녀의 유두를 건드렸다. "네!"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제발......!" 요화랑은 애원하던 중, 천무영이 소도를 번뜩이자 그만 눈물을 왈 칵 쏟으며 오줌을 싸고 말았다. "후후후......!" 천무영은 그녀를 밀치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뒤로 벌렁 넘어간 요화랑은 감히 몸을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했 다. 어쨌든 쓰러지는 바람에 치마가 걷혀 올라가 그녀는 허벅지 안쪽을 환히 노출시켜야 했다. 치마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다 보 니 무참한 사태가 연출된 것이다. 천무영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혐오감이 일었던 것이다. 그는 내뱉듯 말했다. "요화랑(妖花娘), 나이는 삼십이 세, 산동성(山東省) 출신이며 화 유현의 타락한 여승집단인 쾌활암에서 잡기(雜技)를 익혔음. 수많 은 청년들을 농락, 무공은 이류(二流) 정도." "맙소사!" 요화랑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상대의 능력에 관한 한 더 이상 회 의할 여지도 없었으나 설마하니 자신에 대해서 그처럼 상세히 알 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천무영이 그녀에 대해 어찌 알게 되었는지는 간단하다. 그것은 개방의 주유서고(周遊書庫)를 통해서였다. 그 안에는 무림 사 전반에 걸친 사항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전대의 기인에서부터 작금의 무림인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 가 들어있어 지난 삼 년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천무영의 머릿 속으 로 옮겨와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요화랑의 정체를 알아보고 내력을 간파해내는 것쯤은 그에 게 있어 식은죽 먹기라 할 수 있었다. 천무영은 신색을 정비하며 입을 열었다. "요화랑, 그대는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지?" "그건......." 요화랑은 입을 열려다 말고 멈칫했다. 반쯤 열려진 문틈으로 낯익 은 얼굴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자는 여인처럼 얼굴이 곱상했는데 눈꼬리가 가늘고 눈빛이 음침 해 그다지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화화(花花)!' 노인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진면목을 드러낸 화화공자다. 그도 요화랑처럼 천성적으로 음탕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두 사람 은 내내 죽이 잘 맞는 동료(?)이기도 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함께 어울려 별별 음행을 다 저지르고 다녔 다. 필요할 때는 협력하되 색(色)을 취하는데 있어서는 개별행동 을 하자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협의사항이었다. 두 사람은 무언중에 서로 뜻이 통하고 있었다. 화화공자는 조용히 품에서 한 자루의 필(筆)을 꺼냈다. 그것은 길 이가 한 자 반에 필모(筆毛)는 철련사로 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 좌우로 벌어진 요화랑의 두 다리가 보였다.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깊은 계곡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화화공자는 그쪽에는 일체 무심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잔 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는 무방비 상태인 천무영의 등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④ 요화랑이 한결 느긋해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별 것 아니에요. 저희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란 이른바 인신매매 (人身賣買)라고 할 수 있죠."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린 그 말은 정녕 충격적인 것이었 다. 천무영이 대뜸 안면에 노기를 띠었다. "인신매매라면......?" "인육(人肉)은 의외로 쓰이는 데가 많죠." "뭣이?" "저희들이 직접 요리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주로 필요로 하 는 곳에 내다 팔곤 하니까요." "기막히군!" 천무영이 질려버린 나머지 탄식하며 그 말도 안되는 상행위의 경 로를 캐고자 할 때였다. 슈슈슉! 그의 등뒤에 있던 화화공자가 독문의 절기로서 자랑해마지 않던 화화유정필(花花有情筆)을 빠르게 뻗어왔다. 단번에 다섯 송이의 필점이 펼쳐진 그 공세는 천무영의 오대사혈 (五大死穴)을 동시에 찔렀다. 그것은 일면 신쾌하면서도 화화공자 의 성품처럼 악랄무비한 수법이었다. 화화공자의 음침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놈! 알고 싶은 것도 많군." 원래 그 같은 부류의 인간은 절대로 공격에 앞서 경고하는 법이 없다. 비겁한 암습(暗襲)은 그들의 상식이었으므로. 파파팟- - ! 화화유정필은 천무영의 등을 꿰뚫었다. "크크... 건방진 놈!" 공격이 성공했다고 믿으며 득의하던 화화공자는 다음 순간이 되자 떫은 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필이 뚫은 것은 상대방의 등 이 아니라 텅 빈 옷자락에 불과했기에. 독랄하던 그의 기세도 따라서 주춤했다. "이럴 수가......!" 그는 도시 믿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 그는 상대가 언제, 어떻게 공격을 피하고 사라졌는지 느끼지도 못했던 것이다. "후후... 뭘 하고 있나? 화화공자." 그의 뒷통수라도 치듯 바로 옆에서 천무영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화공자는 눈이 홱 뒤집혀 부르짖었다. "죽엇!" 쐐애애액―! 그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전력으로 필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안 면을 참담하게 일그러뜨렸다. 툭! 이는 누군가 황당해 있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는 소리였다. "어이쿠!" 화화공자는 두 다리에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의지와 는 상관없이 해괴한 몰골로 엎어지고 말았다. 콰당탕! 설명하자면 그는 무릎을 꺾고 앞으로 쓰러졌는데 공교롭게도 얼굴 이 요화랑의 가랑이 사이에 처박혔던 것이다. "악!" 그 불상사에 의해 요화랑은 비명과 함께 혼절해 버렸다. 아마 그 녀에게도 쾌감과 아픔은 별개인 모양이었다. 천무영도 그들 한 쌍의 남녀가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는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그는 발끝으로 다시금 툭 걷어차 화화공자의 마혈을 점하고는 죽 사를 등졌다. 천무영. 그는 나머지 죽사들을 전부 뒤진 끝에 요화랑과 화화공자가 그간 에 벌여왔던 행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죽사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전대나 보퉁이 등 모두가 여행자들이 가지고 다님직한 물건들이었으며, 그 수효 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것은 이 다원의 주인인 두 남녀가 행객들을 끌어들여 미약을 탄 차를 마시게 한 후, 그들의 소지품을 턴 결과였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색욕(色慾)을 실컷 채우고 다른 곳에 팔아 넘 겨 또 수입을 챙긴다......?' 천무영은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최후로 발견한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였다. 하나의 죽사에서였다. 그는 거기서 온몸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두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은 여주인과 하녀의 사이로 보였는데 두 명 다 나이는 이제 십팔, 구 세쯤 될 듯했다. 어떻든 두 여인은 똑같이 사내에게 난행을 당한 듯했다. 의식을 잃은 채 하반신이 온통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반항을 한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머리카락이 몇 웅큼씩 뽑혀 있다던가, 벌거벗은 몸에 멍자국이 숱하게 나 있는 등이었다. '처참하군! 짐작컨대 필경 화화공자는 이 여인들의 몸부림까지도 철저히 즐겼을 것이다.' 이는 화화공자에게 변태적 성향이 있으리라는 얘기다. 그렇지 않 았다면 여인들은 그에게 미리 혈도를 짚혔을테고, 적어도 이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화해 있지는 않았으리라. 두 여인은 앞서 말한 주종관계를 입증하듯 본모습에서는 큰 차이 를 보이고 있었다. 한 명은 평범해 보였으나 한 명에게서는 그 와 중에도 고귀한 기품이 엿보였다. 하지만 불행에는 정도 차가 없었고, 천무영은 그 두 여인을 내려 다보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쯧! 벗어놓은 옷가지로 미루어 관(官)과 연관이 있는 듯 한데 둘 다 정말 안되었군.' 그는 요화랑의 거처에 있던 알몸의 네 사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 여인의 호위병들이었겠지?' 천무영은 두 여인에게 옷을 덮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참견하게 된 이상 끝까지 가 보자. 어쩌면 뜻밖의 내막을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화화공자와 요화랑은 고작해야 녹림의 도 적에 불과한 위인들로 특별한 배경이 없고는 이렇듯 겁없이 만행 을 저지르지 못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여인을 향해 지력을 날렸다. '앞으로 한 시진 후면 깨어나리라. 부디 육신은 망가졌어도 정신 만은 온전한 채로 살아가기를.' 한 가닥 비애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자 그는 서둘러 죽사를 빠져 나왔다. 그것은 그 자신이 무수한 고초를 겪어 보았은즉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죽림으로 둘러싸인 아담하고 운치있는 다원을 둘러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런 다원이 흑점(黑店)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그는 화화공자와 요화랑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스....... 자욱한 황사가 바람에 날려와 그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⑤ 혈붕성(血鵬城). 하남 복우산(伏牛山)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이 웅장한 성채는 성벽의 둘레만도 장장 십 리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즉 가시적인 위용에 대해서는 굳이 필설로 형용할 필요조차 없는데, 실제적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 근역으로 방원 수백 리가 모두 혈붕성의 관할이었다. 그들의 세력은 북무림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어 제문파들은 물론 상업이건, 해운(海運)이건 사업장을 가진 자들은 혈붕성의 비위를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암암리에 직접, 혹은 간접적 으로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혈붕성은 남무림의 잠룡부(潛龍府)와 더불어 무림을 암 중에서 남북으로 분할하고 있는 집단이었다. 하여 이 두 세력을 두고 항간에서는 남북이패(南北二覇)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그러한 혈붕성과 잠룡부도 당금 무림의 천상천(天上天)이 라 일컬어지는 천금성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천금성은 말없는 거인이었다. 그 거대한 존재로 인해 혈붕성과 잠 룡부는 야망을 표면화시키지 못했다. 더구나 천금성의 가신 격인 무림오천(武林五天)의 영향력도 만만 치 않아 무림의 화평은 줄곧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이 세력판도에 변화가 일었다. - 남북이패가 드디어 세력기반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알면서 도 천금성은 손을 쓰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다. - 천금성주는 폐관수련 중 주화입마(走火入魔) 했다. 그래서 남북 이패가 마음놓고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소문들이 무림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는가 하면, 도처에서 그 것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빈번히 발생했던 것이다. 적어도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혈붕성과 잠룡부가 드러내 놓고 세력 을 늘려가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천금성과 오대세가의 위세에 눌려 활동을 한대야 거의 암약(暗躍)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의 흐름 탓인지 이제는 양상을 크게 달리하고 있 었다. 혈붕성은 북무림에서, 잠룡부는 남무림에서 보다 더 확실하 게 발판을 굳혀가고 있는 것이었다. 무림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군소방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천 금성이 이렇다하게 나서지를 않아서인지 명문대파들도 그저 사태 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혈붕왕(血鵬王) 사공무기(司公武基). 이 인물이 당대의 혈붕성주였다. 비록 최근의 일이기는 하지만 북 무림을 장악하여 어엿한 패주(覇主)로 부상된. 범호(凡虎). 그는 마부다. 이전에는 농부였으며, 또 그 전에는 이름도 없는 작 은 표국에서 표사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남달리 큰 체격과 힘밖에 없었고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대야 머무는 수준은 항상 비슷했다. 그래도 그는 불평을 몰랐다. 워낙 우직하고 순박하여 무엇을 하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냈으며 밑바닥 인생인 자신의 처지에도 대 체로 순응하며 살아왔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란 의당 없었고, 손재간을 몇 수 익혀 남 에게 얻어맞거나 피해를 당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이르자면 세상에 속해 있되 별 의미없는 구성원이라고나 할까? 그 것이 범호라는 한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어떤 인간에게든 평생 세 번의 기회는 주어진다고 했듯 범 호의 인생에도 믿기 어려운 첫 도약기가 왔다. 그것은 십 년 전, 그가 복우산 기슭에서 화전(火田)을 가꾸고 있을 때였다. 당시 범호는 그곳을 지나가던 한 여인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처지 로는 꿈속에서조차 만나기 힘든 절세의 미녀였다. 그때에 그는 밭의 한귀퉁이에서 걸리적거리는 고목의 둥치를 뽑아 내던 중이었다. 불볕 더위로 인해 옷통은 벗어던진 상태였고 전신 이 땀에 푹 절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하여 근육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사용하던 그는 여인의 눈길 을 받자 그만 일손을 멈추어 버렸다. 반면에 범호의 눈에 천상옥녀같이 보이던 그 아름다운 여인은 관 찰하듯 범호를 아래 위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가 얼굴을 붉히고 민망해하자 아무 말 없이 그곳을 지나가 버렸다. 뜻밖의 일이 범호에게 일어난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그는 안면도 없는 한 명의 중년인에게 이끌려 평소에 그저 경외심 만을 품고 있던 혈붕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날부터 범호는 손에 괭이 대신 말고삐를 쥘 수가 있었다. 그것 도 천하무림을 뒤흔든다는 혈붕성의 마부로서 말이다. 그는 신명이 났다. 하게 된 일이라야 열 필의 말을 매일 목욕시키 고 관리하는 천박한 것에 불과했으나 거친 일이라고는 안해 본 것 이 없는 그로서는 그나마도 황감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다른 마부들에 비하면 무척 편했다. 그들은 대개 하루에 수십 필, 심한 경우에는 수백 필의 말들을 관리해야 했지만 범호 는 앞서 말한 열 필만을 배당받았을 따름이었다. 그 정도의 일쯤은 그가 이전까지 해오던 고된 일들에 비하면 놀고 먹는 것이나 진배 없었다. 어쨌든 범호가 이처럼 안락(?)을 누리게 된 배경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혈붕성 내에서 지고한 신분을 지닌 어떤 여인의 눈 에 들었고, 오직 그 여인의 개인 소유인 희귀한 명마(名馬) 열 필 만 잘 관리해 주면 되었다. 한마디로 범호는 팔자가 늘어졌다. 일만 쉬운 것이 아니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잠도 실컷 잘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에게 는 한 달에 은 이십 냥이라는 급여도 내려졌다. 범호는 천애고아였다. 부모형제는 고사하고 일가붙이 하나 없는 자가 그였다. 따라서 언제고 자신만 돌보면 그만이었으니 그로서 는 더 이상 바라는 바가 없었다. 그는 혈붕성 내에서의 생활이 아주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생각이 이러하니 혹시 도로 밀려나지 않을까 하여 불안에 떨 때를 제외하 면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범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혈붕성을 빠져나왔다. 그는 성문을 지키는 위풍당당한 무사들에게도 기분 좋게 절을 했다. 한 무사가 물었다. "자넨 어딜 가나?" "헤헤... 말안장을 바꾸러 가오." 범호는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혈붕성을 나오긴 했다. 그는 다시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곧장 시진 쪽으로 향했다. ⑥ 시진은 몹시 번화했다. 혈붕성의 지척에 있다는 이유로 크게 번창했으며 온갖 화려한 물 품에서부터 싸구려 물건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곳에는 유흥이나 도락을 위한 상점들도 줄을 잇고 있었다. 주루 는 물론 기루, 도박장 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 눈요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해지는 곳이었다. "헤헤... 정말 오랜만에 내려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범호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분명 말안 장을 사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목표지점을 마구점(馬具店)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잡고 있었다. 홍루(紅樓), 범호가 가고자 하는 곳은 싼 값으로도 여인을 품을 수 있는 장소였다. 체격이 건장한 만큼 정력이 넘쳐 시진에 내려 올 때면 그는 의례 홍루에 먼저 들르곤 했다. 그에게는 진즉부터 단골로 찾는 계집도 정해져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홍란(紅蘭)이라 했다. 쿵쿵쿵......! 범호는 의기양양하여 홍루의 작은 목문(木門)을 두드렸다. 잠시 후. 목문이 빠꼼히 열리며 얼굴이 얽은 노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어떤 손님인가 했더니 범호가 왔구먼!" 노파가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반색을 했다. 범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대문 안쪽을 기웃거렸다. "홍란은......?" 노파는 혀를 끌끌 찼다. "홍란은 떠났네." "넷?" 범호의 얼굴에는 대뜸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 어디로......!" "그야 낸들 알 수 있나? 워낙 이리저리 떠돌던 아이니 제 맘 내키 는 대로 갔겠지. 여기서는 그래도 오래 있은 편이지." "쩝!" 범호는 풀이 죽어 쓴 입맛을 다셨다. 모처럼 몸 좀 풀어볼까 싶어 잔뜩 기대를 하고 왔건만 일이 틀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파가 손뼉을 딱 쳤다. "아! 마침 좋은 애가 있기는 한데......." "그, 그게 누구요?" 귀가 번쩍 뜨인 범호가 다그치듯 물었다. 노파는 그의 눈치를 살 피며 약간 더 뜸을 들인 후에 말했다. "그것이... 좀 비싸서......!" 범호는 졸지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기분과는 달리 주머 니 사정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혹시... 모자라는 금액은... 외상으로 달아 놓으면 안되겠소? 내 다음에 내려올 때 반드시......." "글쎄......." 노파는 망설이다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단골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좋아, 내 오늘은 특 별히 인심을 쓰겠네." "고... 고맙소, 할멈!" 범호의 입이 대번에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는 신바람이 나 엉덩이 를 들썩이며 노파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가 안내된 곳은 별채였다. 침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방 한쪽에 쳐져 있 는 분홍빛 휘장만 보아도 벌써 흥분이 되었던 것이다. 범호는 한 차례의 심호흡 뒤에 휘장을 들추어 보았다.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럴 수가......!' 충격을 받아 그의 눈은 한껏 크게 치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은은한 분홍색의 휘장 속에는 그로서는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환상적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침상 위. 그곳에는 전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풍염한 육체를 가진 그녀는 양 손으로 터질 듯한 젖가슴을 움켜 쥔 채 기름진 허벅지를 꼬고 있었다. 그 자태란 적어도 범호가 보기에는 가히 신비경이었다. "흐으......!" 그의 입에서 괴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방면에서 제법 많은 경험을 거쳤노라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눈앞의 여인은 이제껏 그가 상대해온 여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최근까지 아주 흡족하게 여겼던 홍란도 이 여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선 광택이 도는 새하얀 피부가 그러했으며 알맞은 살집 에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팽팽한 탄력 등이 우직한 청년 범호의 넋을 빼놓고 말았다. 그 바람에 불이 붙듯 전신이 급격히 달아오른 그는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휘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의복을 거의 찢다시피 벗어던지고는 여인을 덮쳐갔다. "하아!" 뭉클한 감촉을 가진 여체는 그의 무게를 싣게 되자 즉각적으로 반 응을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신음성을 발하며 배암처럼 그 의 일신을 휘감아 왔던 것이다. 여인의 젖무덤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은 범호는 그야말로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갈구하는 만큼 상대도 자신을 원한다 고 생각하니 그는 본격적인 행위에 이르기도 전에 일찌감치 황홀 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흐으... 그래, 널 죽여주마." 범호는 여인을 무자비하게 찍어누르는 한편, 입을 맞추기 위해 처 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오오, 이건......!' 놀라웠다. 여인은 몸매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얼굴까지도 눈이 번 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꿈에서도 볼 수 없을 미녀가 믿을 수 없게도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범호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육체가 주는 쾌감도 여느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으헉!" 침상이 요란하게 삐그덕 거리는가 싶더니 뒤엉켜 싸우는(?) 두 남 녀로 인해 방 안은 금세 열기에 휩싸여 버렸다. 무산(巫山)의 운우(雲雨)인들 이보다 더 격렬하지는 못할 듯 했 다. 범호는 여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거듭 생각했다. 지금 까지 상대해 본 여인들을 모조리 합친다 해도 이 여인만큼 기교에 능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여인의 풍만하면서도 농밀한 육체를 안고 뒹굴며 내심 수백 번도 더 외쳤다.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도 좋다고.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열기로 메워진 방 안의 풍경을 조용히 주시 하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뜻밖에도 그 눈에는 단 일 점의 호기 심도, 장난기도 들어 있지 않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그 눈은 시종 조금치의 흔들림도 없이 벼라별 작태를 다 연출해내는 정사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그 눈이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대상은 범호였다. 땀으 로 흠뻑 젖어있는 상태에서 구릿빛을 띤 채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 리는 그의 근육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⑦ 범호는 지극히 만족한 기분이 되어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이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으으... 나는 행복하다." 그 말에 답하는 한 가닥 음성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 범호. 너는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누, 누구냐?" 범호는 대경하여 벗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어 주위를 두리번거 렸으나 방 안에 그 말고는 여인밖에 없었다. 아연해 있는 그의 귀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여인은 네 능력으로는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못한다. 알고 있 겠지만 그녀의 값은 무척 비싸지.' "하, 하지만 외상으로는......!" '후후... 어리석구나. 넌 그 외상값을 갚지 못한다. 왜냐하면 네 가 예상한 화대보다 백배는 더 치루어야 할 테니까.' "에엑? 그렇게나 많이?" 범호는 기절할 듯 놀랐다. 아울러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울상이 되어 있는 그에게 음성은 다시 전해져 왔다. '괜찮다. 그녀의 화대는 너 대신 내가 지불했다. 그리고 마음먹기 에 따라 너는 매일 그녀를 안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아내로 삼아 곁에 둘 수도 있다.' "어... 어떻게 하면......?" 우직한 만큼 계산이 어두운 범호가 혹하여 물었다. "으응... 누구와 얘기하고 있는 거죠?" 여인이 잠에서 깨어난 듯 몸을 뒤척이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 아니오!" 범호는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옆에 도로 누웠다. "흐응, 당신은 정말 멋진 사내야." 여인이 콧소리를 내며 물컹한 젖가슴을 부벼왔다. 범호의 온 몸이 재차 후끈 달아올랐다. 그에게 신비한 음성이 말했다. '듣기만 해라. 네가 승낙만 한다면 나는 너에게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을 주겠다. 그렇다고 무리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너는 그 돈의 일부로 그녀를 산 뒤 잠시 숨어 있거라.' 범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로서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심 따위는 갖지 않는 게 좋다. 후후... 나는 이런 일이 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사람일 뿐이다. 참, 그 전에 너는 나에게 몇 가 지 알려줘야 될 것이 있다.' '무엇을?' 범호의 눈이 이끌리듯 그렇게 묻고 있었다. '네 경력은 대충 알고 있으니 현재에 관한 부분만 알려 주면 된 다. 그것도 고작 혈붕성 내의 상황과 자네가 매일 하는 일의 순 서, 자네와 접촉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나 버릇 따위 등이지.' '우우우......!' 범호는 일시지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강하게 두드려왔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신비한 음성의 주인은 그의 심리상태조차도 훤히 파악하고 있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겁먹을 것 없다. 내 필히 보장하지. 너를 아무 탈없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 너는 약정한 기간 동안 그 여인과 즐겁게 지 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범호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그의 명석하지 못한 두뇌로도 이 일이 모종의 음모라는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하게 일어나는 유혹은 불안심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흐응......." 때마침 여인의 다리가 그를 휘감아왔다. 범호는 아랫도리가 빠릿 하게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긴 마부로 늙어봐야 이렇듯 고운 여인을 내 평생 몇 번이나 품 어 볼 수 있을까? 차라리......!' 음성이 그의 상념을 자르며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후후... 잘 생각했다. 별 것도 아니야. 내게 십 일만 빌려 다오. 긴긴 인생에서 십 일이란 매우 짧지. 미녀와 속삭이다 보면 너도 실감을 하게 되겠지만.' '그건 맞다!' 범호는 내심 외치듯 부르짖었다. 신비한 음성이 한 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가 손해볼 일이란 아 무 것도 없었다. 손해는커녕 그로서는 일생을 통틀어 한 번 있을 까 말까한 행운을 건지게 되는 셈이었다. '열흘......! 이 여인과 말이지? 게다가 평생 먹고 살만한 거금까 지 내 손에 쥐어 준다고?' 그는 실감이 나지 않아 중얼거려 보다가 문득 갈등에 휩싸였다. 그것은 눈앞에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천상의 선녀 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서릿발같이 차가운 여인....... 범호는 애초 그 여인으로 인해 혈붕성으로 들어간 위인이다. 그녀 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은인이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 얼굴을 뇌리에서 지워 버렸다. 표 사생활을 할 때 장영감이 누차 들려 주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 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그래, 그 말이 백 번 옳아.' 마침내 범호는 마음을 정하며 눈으로 말했다. '좋소! 당신 말대로 따르겠소.' '후후후... 좋아. 탁월한 선택이다, 범호.' 음성이 호탕한 투로 변하는 그 순간에 범호는 미친 듯이 여인을 끌어안았다. 여인의 동체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매끄럽게 안 겨 들었고, 그는 말할 수 없이 난폭해졌다. "아아!" 여인은 그가 어떤 식으로 요구하건 거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전 자에도 그랬듯 그녀는 남자에 길이 잘 들여져 있는 듯 범호와 똑 같은 속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허헉......!" 그는 성난 맹수처럼 여인을 탐했다. 이로써 골치 아픈 일들에 대 해 모두 다 잊고 싶었다면 맞았다. '도박이다! 이건.......' 와중에서 범호는 그렇게 부르짖었다. 이 한 번의 도박이 어쩌면 파멸을 부를 수도, 어쩌면 횡재를 가져다줄 수도 있겠기에. 아무튼 결과가 판가름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으며, 그 동안 그는 최대한 쾌락을 즐기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⑧ 환요비자(幻妖秘子)는 평상시에도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법 이 없었다. 은자십천의 한 명인 그는 심지어 뜻을 같이 하는 은자 구천들에게조차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에게 천무영은 여러 가지를 전수받았는데, 아무래도 대환이심경 (大幻移心經)을 비롯하여 그의 독문비기인 환술(幻術)을 중점적으 로 배운 바 있다. 그 기간 중에도 천무영은 무수히 곤혹을 겪었다. 환요비자는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도 단지 외양 만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성별이나 나이까지도 초월하여 어떤 때 는 생각지도 않게 여자로, 어떤 때는 노인으로, 또 어떤 때는 어 린아이로 변해 나타났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도 번번이 골탕을 먹어야만 했던 천무영은 환요비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주야로 열심히 그의 환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환술이라는 표현 그대로 그가 부리는 재주는 변성술, 변체환용술, 변역골지술, 변환술 등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 타인으로 위장하려 들지 마라. 요체는 바로 그 자신이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일반적인 역용술은 얼굴만 닮아 보이게 할 뿐이나 나 환요비자는 골격, 피부색, 음성, 걸음걸이, 눈동자의 색깔, 치 아의 배열, 성격까지도 변장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환요비자가 내세우는 지론이었다. 천무영은 그 방면에서도 재능을 보여 일 년쯤 배우자 환요비자의 입에서 소위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멀쩡하게 은자십천 중 한 명으로 환신해 있거나 혹은 나무, 돌, 짐승 따위가 되어 환요비자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곤 했다. 이때부터 삼 개월간이나 천무영을 뒤쫓던 환요비자는 마침내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며 자진하여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거울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범호였다. 딱 벌어진 체격에 누가 보더라도 부러움을 살만치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사내, 얼굴도 못생기지는 않았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워서였을까? 범호는 거울을 마주한 채 씨익 웃어본다. "멋진 체격이야. 헤헤......." 그는 계속하여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옷을 입었다. '이쯤이면 누구보다 범호가 가장 놀랄 것이다. 세상에 또 하나의 자신이 존재하는가고.' 이 중얼거림은 그가 범호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단지 범호라는 사내로 변장한 천무영일 따름이었고, 그렇다 보니 그의 심중에 담 겨 있는 말도 내용이 전혀 달랐다. '정녕 의외였다. 요화랑과 화화공자, 그 두 사람이 설마하니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할 줄이야......!' 천무영은 간악한 두 남녀의 요추혈(要椎穴)을 짚어놓아 다시는 악 업을 쌓지 말라는 교훈을 내리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딴판으로 그들은 미친 듯 울다 웃기를 거듭하더니 종내 머리를 스 스로 벽에다 부딪쳤던 것이다. 그는 새삼 요화랑과 화화공자의 처참한 주검을 떠올리며 쓴 입맛 을 다시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성적(性的)인 능력을 없애 버리는 것... 이는 아마도 무인이 내력을 깡그리 잃는 일이나 진배없으리라.' 그 두 남녀는 죽기 직전에 천무영에게 놀라운 정보 하나를 제공해 주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개과천선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이 판사판이니 감출 것이 없어져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다원을 통해 사로잡은 사람들 중 쓸만한 자들 을 골라 극비리에 혈붕성으로 보내왔노라고 했다. 또한 자신들 말고도 흑점을 내고 있는 자들은 부지기수이며 한결 같이 혈붕성과 끈이 닿아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들은 혈붕성의 끄나풀이었다. 인육 운운했던 것은 배후를 감추 기 위해 지어낸 소리일 뿐이다. 혈붕성이 그런 해괴한 수단까지 동원해 은밀히 사람들을 모아들인 데는 목적이 있겠지.' 이렇게 되자 천무영으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심증이 확증 으로 화하자 그는 혈붕성에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범호는 그가 내사 끝에 선택하게 된 하나의 발판이었다. - 2권으로 이어집니다 - ■ 무영탑 제1권이 끝났습니다. ■ 무영탑 제2권 -차례- 제11장 음모(陰謀) 대 음모 제12장 패자(敗者)의 철학(哲學) 제13장 귀향(歸鄕) 제14장 진실(眞實)은 어디서도 통한다 제15장 그는 단지 은공(恩公)이었다 제16장 불운한 남매(男妹) 제17장 그를 위한 사육제(謝肉祭) 제18장 잔혈맹주(殘血盟主)가 원하는 것 제19장 왜 무승부(無勝負)인가? ■ 무영탑 2권 제11장 음모(陰謀) 대 음모 ① 범호가 혈붕성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쏴아아―! 그는 한 필의 한혈마(汗血馬)에게 물을 끼얹었다. 대완산인 그 말은 털빛이 눈처럼 희고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았다. 일단 달렸다 하면 쉬지 않고 천 리를 한 달음에 내달린다고 하며 붉은 땀을 흘려 털빛이 붉게 물든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한혈마는 여주인이 끔찍히도 아끼는 말이었다. 범호는 웃통을 벗어젖힌 채 말의 몸에 솔질을 해주고 있었다. 언 제나 그렇듯이 그는 자신의 일이 즐겁기만 했다. "헤헤... 혈설(血雪), 너는 참 행복하겠다. 매일 그렇게 아름다우 신 주인님을 등에 태우니 말이다." 그는 바보스러워 보이는 웃음마저 흘리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범호는 천무영의 변신으로써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지난 사흘 동안 그는 혈붕성의 사정에 대해 표면적인 것은 거의 전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내성(內城)에 해당되었다. 정작 수천 필의 말들이 상주하는 마굿간은 외성(外城)에 있었지만 그는 특별히 내성에 근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관리하는 말 이 모두 지체높은 한 여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유월설(六月雪) 매강월(梅江月). 이런 이름을 가진 그 여인은 적어도 혈붕성 내에서는 누구도 건드 릴 수 없는 확고부동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혈붕성주인 혈붕왕 (血鵬王) 사공무기의 양녀였던 것이다. 혈붕왕에게는 두 명의 후계자가 있다. 유월설 매강월과 또 한 사 람, 즉 사해서생(四海書生) 독강비(獨 飛)라는 인물이다. 본래 혈붕왕은 독신으로 소생이 없었다. 그는 두 명의 제자를 거 두어 그들을 각기 양자와 양녀로 삼았다. 결국 유월설과 사해서생은 제각기 혈붕성의 제 이인자들로서 막강 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범호를 발탁하여 마부로 만든 사람은 유월설 매강월이었다. 그녀는 별호 그대로 유월에도 녹지 않는 눈처럼 성품이 차갑기 짝 이 없는 여인이었다. 얼굴에도 늘상 서릿발 같은 기운이 어려 있 어 누구를 막론하고 좀체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사해서생 독강비는 풍류남아로서 처음 본 사람과도 금세 친해지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 호탕함 이면에는 만만치 않은 야 심과 함께 냉혹한 일면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무튼 범호, 즉 천무영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한혈마 혈설의 손질을 계속했다. "으흐흠... 좋을씨고, 세월은 태평하여......!" 와중에서 그는 등뒤로부터 인기척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경미하 여 낙엽 한 장이 떨어져 내리는 정도였다. '왔군!' 천무영은 내심 중얼거리면서도 여전히 노랫소리나 솔질을 하는 손 만은 멈추지 않았다. "에헤야, 아가씨는 천상의 선녀와 같으셔서 감히 눈에 담았다간 내 눈이 짓무르고 말지. 만일에 한 번 살짝 웃으시기라도 하면 어 쩌누, 이 몸은 당장 녹아버릴 걸. 흐으응......!" 그의 뒤쪽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일신에 피처럼 붉은 옷을 입은 한 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일종의 상징성을 띤 그 노래를 모두 듣 고 있었으되 안면을 싸늘히 굳히고 있었다. 아름답기로 치자면 인세에 보기 드문 미녀였으나 기질 탓인지 그 녀의 얼굴에서는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것만 같았다. 눈빛만이 예외였다. 그녀는 시종 홀린 듯 천무영, 아니 범호의 우 람한 근육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마치 훌륭 한 조각품을 감상하듯 감탄이 배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호는 열심히 솔질을 해댔다. 쓱! 쓱쓱―! 동작에 따라 그의 동체가 힘찬 꿈틀거림을 보였다. 일체의 사고력 이 배제된 채 동물적인 본성만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흐음! 과연.......' 범호를 응시하는 혈의미녀의 눈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녀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가 빚어낸 현상이었다. 이윽고 솔질을 끝낸 범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헤헤... 무척 덥구나. 혈설, 네놈은 시원하겠지만 말이다. 이젠 이 어르신도 목욕 좀 하셔야겠다." 그는 서슴없이 아랫도리를 벗었다. '이... 이런!' 그를 지켜보던 여인은 움찔하여 근처의 나무 뒤로 소리없이 이동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으며 범호를 바라보 던 눈가에 더욱 열기를 피워 올렸다. 그 사이, 범호는 몸에 물을 쏟아 부었다. 쏴아아―! 한 통이나 되는 물이 시원한 물줄기를 이루며 구릿빛 근육의 골짜 기를 타고 세차게 흘러내렸다. 이렇게 되자 몸에 겨우 걸려 있던 한 장의 고의도 그나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버려 안 입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착각이었을까? 범호는 등뒤에서 흡사 신음과도 같은 가느다란 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슥!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음향은 그 다음 순간에 울렸다. 이와 동시 에 혈의여인은 유령처럼 그곳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② 수욕을 마친 범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을 주워 입었다. "헤헤... 시원하군." 그는 바보처럼 웃으며 무의식을 가장하여 지붕 위를 슬쩍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 한 가닥 황영(黃影)이 잡혔다. 지금까지 은잠 해 있다가 어디론가 몸을 빼내는 듯한. 범호의 입술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후후... 유월설과 사해서생, 그대들은 오누이나 다름이 없는 관 계인데도 서로 몹시 경계하고 있군.' 혈의미녀란 다름 아닌 유월설 매강월이었고, 지붕 위에 숨어 그녀 를 지켜보던 황영은 사해서생 독강비였던 것이다. 범호, 아니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이 맞았다. 범호를 가까이 둔 이유는.......' 그는 유월설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도 본능을 가진 인간이니 그 점은 탓할 바가 못된다. 오히려 인간다운 면모를 발견했다고 해야 할지? 거칠고 비정한 승부의 세 계에서 나름대로 고독에 시달려 왔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머물던 웃음기가 스르르 걷혔다. '유월설은 정녕 불행한 여인이다. 끝을 모르는 야심과 그에 위배 되는 정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이중적인 심리로 인해 그녀 자 신이 겪는 고통도 그만치 클진저......!' 천무영은 쓴 입맛을 다셨다. '왜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껴안고 살게 되는 것일까?' 그는 사해서생이 몸을 감추고 있던 지붕 위를 새삼스레 힐끗 바라 보았다. '사해서생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유월설을 의식한 나머지 그녀의 뒤꽁무니나 쫓는 짓은 그에게도 즐거울 리가 없다.' 천무영은 천천히 마굿간을 등졌다. '오늘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혈붕성은 와호잠룡지세다. 처처에 야심에 찬 인물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누구도 혈붕왕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그자는 한 마리 거 붕(巨鵬)이다. 놀랍게도 수하들의 특성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십오야(十五夜). 만월이 떠올라 혈붕성 전역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천공 에는 유독 구름 한 점 없었다. 범호는 소변이라도 마려웠는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제낀 그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오늘로 혈붕성에 잠입한 지 오 일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 적인 내막은 알아내지 못했다. 이들은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보안 유지가 너무도 철저하다.' 그의 눈이 반짝하고 이채를 발한 것은 그때였다. 탁! 그는 창문을 닫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침상에 도로 드러누웠다. 그 순간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스스스......! 드러누운 범호의 코에서 뿌우연 기체가 흘러나와 허공에서 뭉쳐지 며 또 하나의 인영을 형성시킨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천무영이었다. 그는 침상에 범호로 화해 곤히 잠들어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후후... 환법 중 제사법인 의이화영분체술(意以化影分體術)을 처 음으로 사용해 보는군." 그의 모습은 창문의 미세한 틈을 통해 한 가닥 연기처럼 빠져 나 가고 있었다. ③ 사해각(四海閣). 이곳은 사해서생 독강비의 거처였다. 천무영은 사해각의 처마 밑에 유령처럼 달라 붙었다. 그의 곁으로 는 불이 환하게 켜진 하나의 창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으음! 아직 자지 않고 있구나.' 그는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투시통안술(透視通眼 術)이라는 환요비자의 독문공부를 익히고 있는 그였지만 그것까지 는 굳이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방 안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침상을 비롯한 가구는 물론 장 식물들도 모두 최고급품으로 호화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거기서 사해서생 독강비가 뒷짐을 진 채 홀로 서성이고 있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는 일신에 황색 수사의를 입었으며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삼십 세 안팎의 청년이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령활시대법(恐靈活屍大法)은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다. 열 두 명의 공령활시녀(恐靈活屍女)와 마지막 단계인 음양통령대법(陰陽 通靈大法)만 거치면 끝이다." 그의 눈에 언뜻 살기가 어렸다. "문제는 매강월도 나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 계집도 공령활시 인들과......!" 사해서생은 불현듯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나의 영원한 호적수! 어떻게 해서라도 꺾어놓아야 한다." 엿듣고 있던 천무영은 충격때문에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정체를 노출시킬 뻔 했다. '맙소사! 공령활시대법이라면 전설적인 마문비전(魔門秘傳)의 무 시무시한 대법이 아닌가?'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알고는 있으되 기억의 한편에 접어 두었던 사항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 공령활시대법을 연단하기 위해서는 도합 이천 명의 남녀가 필요 하다. 그들의 생혈(生血)로 각각 십이 명씩의 공령활시지체(恐靈 活屍之體)를 가진 남녀가 탄생하게 된다. 이들 십이공령활시인과 십이공령활시녀는 구십구 단계의 연단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부리게 될 공령활시령주(恐靈活屍靈主) 와 몸을 섞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육신이 가루가 될 때 까지 영주의 지배를 받게끔 된다. 공령활시들은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궁무진한 위 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신체가 금강불괴인 데다가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는 내력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공령활시대법은 하늘을 거스르는 대법이다. 소위 악마의 대법이라 고까지 불리우는 이 대법의 연원은....... 천무영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공령활시대법은 사라진 암흑마전(暗黑魔殿)의 비전이거늘, 그렇 다면 혈붕성이 암흑마전의 후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두렵고 섬뜩한 일이었다. 오죽 하면 암흑마전이라는 어휘 자체에서 벌써 그는 피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듯한 소리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때, 사해서생이 의자에 가 앉았다. 그의 눈에서는 예리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이 순간 모종의 결단을 내리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괴이 쩍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크ㅋ! 매강월, 네 소원은 이 오라버니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것 이다. 자고로 원하는 상대와 맺어지는 것이야말로 여인에게 있어 서는 최대의 행복이 아니더냐?" 비웃음은 아예 노골적인 것으로 화하기도 했다. "어리석은 계집, 그따위 하찮은 놈에게 넋을 뺏기다니! 그로써 내 게는 다시 없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지만. 후후... 그놈을 이용해 너의 순음을 깨면, 후후훗! 만사휴의가 될 것이다." 사해서생의 음성은 그 뒤로도 더 이어졌다. 하지만 천무영은 그곳 에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슷! 처마 끝에 붙어 있는 그의 신형이 어딘가로 이동해 갔다. ④ 매화원(梅花院). 유월설 매강월의 거처이다. 이름처럼 매화를 좋아해서일까? 그녀가 기거하는 전각의 주변은 매화나무가 빙 둘러싸여 숲을 이루고 있었다. 스슷! 하나의 인영이 희뿌연 그림자로 화해 매화원 안으로 날아 들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사해각에서도 그랬듯 아무런 망설임없이 막바 로 매강월의 침소로 향했다. 그런데 여인의 규방답게 아늑하고 우아하게 치장된 침전에서는 뜻 밖의 음향이 울려나왔다. "하아아......!" 그것은 어찌 들어도 열에 달뜬 여인의 신음성이었다. '으음!' 이쯤 되고 본즉 꺼려지는 면도 없지 않았으나 천무영은 마음을 굳 게 먹고 방 안을 슬며시 엿보았다. 방 한쪽에는 은은한 분홍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안에는 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한 여인이 거기 누워 연신 신음 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유월설 매강월이었다. 침의를 입은 그녀는 침상에 엎드린 채 전신을 비비꼬고 있었다. 게다가 한손으로는 자신의 젖가슴을, 다른 한손으로는 허벅지 안 쪽을 쉴새 없이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음(手淫)만으로는 아무래도 내부에서 타오르는 격정이 다 해소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흐으... 윽......!" 그녀가 흘려내는 신음성에는 뭐라 형언키 어려운 안타까움이 깃들 어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낯뜨거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지 만 또 어찌 보면 비애를 품고 있는 듯도 했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있는 유월설에게 이렇듯 뜨거운 욕망이 내재해 있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급기야 그녀의 입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한 사람의 이 름마저도 튀어나왔다. "범... 호......!" 운명은 어찌하여 유월설의 상대로 범호를 배정해 놓은 것일까? 그 녀는 가진 것이라곤 오직 몸뿐인 그 우직한 사내에게 마음이 기울 때, 스스로 환멸과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범호를 혈붕성으로 맞아들이기까지 겪었던 심적갈등은 그녀가 평 생 경험한 것을 모두 합쳐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더구나 가까이에 두고 있다 보니 이제는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매 일 밤을 시달려야만 하고....... 유월설은 문득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안돼, 이래선! 공령활시대법을 이루기 전에 순음을 깨면 모든 것 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녀가 꿈꾸고 있던 것은 혈붕성 최고의 권좌, 그리고 더 나아가 서는 호령 한마디로 천하를 주름잡는 여제(女帝)였다. 여망이 달성되기만 하면 범호쯤은 색노(色奴)로 거느려도 무방할 터였다. 적어도 그녀의 냉정한 계산상으로는. 하지만 이성(異性)을 그리워하는 육체는 무시로 불이 붙었고, 그 때마다 그녀는 불길을 끄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유월설 매강월. 그녀는 작금에도 부르짖는다. "범호, 너... 사흘 뒤엔... 그때에는 필히......!"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밖으로 내뱉으며 그녀는 일신을 한 차례 부 르르 떨었다. 슷! 방 안으로 스며들었던 기체가 창 밖으로 날아갔다. 천무영이다. 그는 달 속으로 스며들며 쓴 입맛을 다셨다. '쯧! 사해서생의 말이 맞는 구석도 있다. 대체로 여인에겐 야심보 다 사랑이 우선이지.' 그는 방향을 돌렸는데, 그 목적지란 혈붕성 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그의 귓전으로 탄식과도 같은 매강월의 한숨소리가 아 주 멀게 전해지고 있었다. ⑤ 혈붕전(血鵬殿). 이곳은 일명 군림전(群臨殿)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여기의 주인인 혈붕왕의 뜻이 군림천하에 있기 때문이 다. 혈붕왕은 항시 이곳 혈붕전에 기거하며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전각 밖으로 모습을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이는 그만치 자신의 안위를 중시한다는 얘기다. 그런 반면 그는 자부심이 무척이나 강한 위인이었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측근에 사람 두기를 싫어했다. 그 결과로 혈붕전에는 매복자가 수없이 깔려 있어 특별한 용무가 있기 전에는 아무도 발을 들이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랬다가 는 필시 귀신도 모르게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십오야의 만월은 혈붕전에도 풍성한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는 괴괴하고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의당 있음직한 호 위무사들도 이곳에만은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혈붕전 특유의 풍경이다. 매복이라는 속성이 원래 그렇듯 일체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법이므로. 이르자면 이 고요 는 완벽한 함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스....... 한 줄기 미풍이 불어 초목의 잎새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무엇인가 혈붕전의 주변을 뒤덮고 있는 교목림 사이를 가로지르며 일으킨 바람이었다. 슥! 분명 움직임은 있으되 형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나뭇 잎 한 장이 바람을 타듯 날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의혹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깊숙한 대전 안이다. 혈붕왕 사공무기. 그는 항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매우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인물 이었다. 넓은 대전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었고, 그는 거기에 앉아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탁! 탁......! 혼자 두는 바둑이 취미인지 벌써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그 의 얼굴에서는 지루한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사공무기는 얼굴이 길고 눈매가 부드러워 웬만한 일에는 동요되지 않을 듯한 느긋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턱밑에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금삼(錦 衫)이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듯 가슴 부분에 한 마리의 혈 붕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칠순쯤 되어 보였으며 이렇다하게 특징적인 요소 가 없이 그저 평범에 가까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손에 흑(黑)을 쥔 채 백(白)의 대마(大馬)를 따라잡고 있었 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가 흑을 놓기가 무섭게 백이 맞상대하 듯이 절로 놓여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허허... 낭패로군. 대마를 잡자니 대세를 그르치겠고, 대세를 굳 히자면 대마를 포기해야 할 판국이니 말이야. 이럴 땐 대체 어떻 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는 마치 상대에게 묻듯 말하고 있었다. 탁! 다시 백돌이 놓여지자 혈붕왕은 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장고 (長考)에 들어간 듯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역시 안되겠군. 문성공(文聖公), 자네의 묘수(妙手)에는 못당하 겠네. 불계패(不計敗)일세." 혈붕왕은 흑돌을 내려놓으며 짐짓 손을 털어 보였다. 과연 국면으로 보아 그의 패배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대국자, 즉 이제껏 실체를 보이지 않고 그로부터 문성공이라 불리운 자는 어떤 인물일지? ⑥ 은은하고도 창노한 음성만이 대전을 울렸다. "헛헛... 혈붕왕, 자네는 앞으로도 영원히 노부를 이기지 못할 걸 세. 왠지 아나?" "글쎄?" 혈붕왕은 고개를 갸웃하며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자네가 너무 많은 것에 욕심을 내고 있어서야. 획일성이 없다는 뜻이네." "내가 말인가?" 혈붕왕이 되묻자 예의 음성은 나무라듯 말했다. "자네는 일개 인간으로서 하늘의 뜻까지 거슬렀네. 적어도 도는 넘지 말았어야 했거늘, 자네는 그렇지 못했어." 혈붕왕의 눈에서 일순 그답지 않게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의 음성도 어느덧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 "당치 않은 소리! 이것저것 따지다가 망하면, 그때 가서 주저앉아 하늘이나 원망하고 있으란 말인가?" 앞서의 음성이 나직이 탄식했다. "어떻게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 고, 또 그 위에 악업(惡業)을 쌓고......." 혈붕왕이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적어도 자네가 나의 동지라면 그리 말해선 안되네. 내가 이루려 는 것은 이마제마(以魔制魔)의 방식이니 문제가 따르지 않을 수 없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은 불가피했네." 확고한 신념이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반해 대응하는 음성은 딱하 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자네는 아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를? 만일 성공하 지 못할 시엔......." 혈붕왕에 의해 그 음성은 한 차례 더 가로막혔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강월(江月)과 강비( 飛), 두 아이는 바탕이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그런 면을 철저히 역이용할 셈이네. 마전(魔殿)에 그들을 넘겨준 것도 실은 그때문이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아이들은 명색이 자네의 후계자들이 아닌가? 양자와 양녀이기도 하고."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들도 말이 양부(養父)이지, 내게 기대 는 이유는 따로 있네. 그 정도는 자네도 알텐데?" "쯧! 비정한 논리로군." "맞아. 그리고 그들은 내 계획대로 잘 움직여 주고 있네. 향후로 는 천금성의 준동을 막는데 크게 기여할 걸세." "하여간 재주는 비상하이. 늑대새끼를 키워 호랑이를 잡는다? 허 허... 부디 마전의 혈풍이 재현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게. 현존하는 마전은 단지 지난 날의 잔당 들에 불과할 뿐이네. 거사가 끝나면 즉시 제거될테고." "무시무시하군. 헛허허......." 혈붕왕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자넨 끝까지 나를 비웃는군. 좋아, 어디 두고 보게." 그는 태사의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최소한 자네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무슨 뜻인가?" "사흘 뒤면 강월과 강비가 대법을 완성하네. 자네의 말마따나 그 것을 위해 적지 않은 인명을 희생시켰지만 이후로 수만 명을 살릴 수 있다면 하늘도 내 편이 되어 줄 걸세." "으음! 일단 화살이 시위를 떠났으니 그래야겠지." 침중하게 느껴지는 문성공의 음성에 혈붕왕은 묘한 웃음으로 답한 후, 화제를 돌렸다. "잠룡부(潛龍府)는 여전히 조용하던데, 별 기미는 없는가?" 그에 상응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은. 그렇지만 잠룡천자(潛龍天子)는 꼬리를 드러내지 않는 거룡(巨龍)이지. 하수(下手)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네." 혈붕왕이 재차 물었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해주게. 자네는 필경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허허... 추측이 지나치군. 단지 나는......." "뭔가?" "이건 내 짐작이네만, 왠지 그들이 북경(北京)과 연이 닿고 있다 는 느낌이 드는군." 혈붕왕의 안색이 일시지간 침중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인가?" "확신할 수는 없대도." "난 기억하고 있네. 자네는 설사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은 늘 그렇게 한다는 것을." "허허허... 좋도록 생각하게나." 휘이잉―! 바람이 종전보다 강하게 불었다. 그로 인해 커다란 나뭇잎 한 장 이 바람결에 휩쓸려 혈붕전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하게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 나뭇잎을 보며 뭔가 를 선뜻 감지해내는 인물이 있었다. "놀랍군! 환요비자의 환술을 쓰는 자가 있다니. 허허......." 한 가닥 너털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장내에 백삼을 입은 백발의 노 인이 내려섰다. 동시에 그는 손을 슬쩍 앞으로 뻗었다. 콰르르―! 놀랍게도 가벼운 한 번의 손짓에 의해 그의 소매로부터 막강한 강 기가 해일처럼 폭사되어 나갔다. "흑!" 짤막한 신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바람에 나뒹구는 나뭇 잎이라 믿었던 물체가 강기에 부딪치자 갑자기 뿌얘지더니 하나의 인영으로 변했던 것이다. 졸지에 본연의 형체를 드러내게 된 그자는 천무영이었다. 다만 그 때까지도 그의 일신은 뿌연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백발노인이 감탄의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용케 이곳까지 숨어 들었군. 자네는 누군가?" 천무영도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문성공!' 눈앞의 백발노인은 바로 보이지 않는 대국자였다. 어쨌든 천무영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일각 내로 돌아가지 않으 면 의이환영분체술이 깨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영(無影)이오." 의미있는 한마디를 던진 그는 전광석화와도 같이 상대를 덮쳐갔 다. 그 속도란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헉!" ⑦ 쾅! 굉렬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그대로 격돌했다. 덕분에 백발노인은 옷자락이 찢어진 채 주르르 뒤로 밀려났으며, 천무영은 기혈이 역류한 나머지 핏물을 왈칵 토해냈다. 그러나 경황중에도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는 탄력을 이용해 눈깜짝할 사이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단지 그 순간에 몸을 감싸고 있던 기류가 잠시 흩어졌던 것이나, 자신을 바라보던 백발노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번갯불 같은 안광 이 번쩍 일어났던 것만은 그도 알지 못했다. 요는 백발노인이 천무영의 본모습을 보았다는 말이다. 노인은 신 형을 바로세우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으음! 광한상인의 광한대강인(廣寒大 印)까지도 사용하다니, 의심의 여지가 없구나. 은자천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기재를 결 국 찾아낸 모양이로고." 문성공이라 불리운 노인은 대번에 천무영의 내력을 간파해내고 있 었다. 그는 잠시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그렇고, 기이한 일이군. 분명 초면이긴 한데 그 청년의 모 습이 왜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어디선가 한 번 쯤 본 듯한 얼굴이야."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뚜렷하게 잡히는 바가 없자 그는 일단 의혹을 접어두기로 작정했다. "정녕 대단한 무위였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인상을 보건대 그 청년이 마(魔)에 물든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성공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같다면 언제고 다시 만나지겠지." 스슷! 그도 또한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아침이다. 범호는 눈을 뜨자마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방 안 공기가 전날과는 다르다고 여겨진 것이었다. "뭐지? 이런 기분은......?" 그는 겁이 난 듯 몸을 잔뜩 움츠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착 가라앉았으면서도 음산무비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두드렸다. "범호, 내 말을 들어라." "누, 누구요? 당신은." 질겁을 하는 범호에게 음성이 물었다. "네 주인은 누구냐?" "주인......? 그야 매(梅)... 아가씨입죠." 그는 얼이 빠진 채 알고 있는 대로 더듬더듬 대답했고, 전해져 오 는 음성은 그런 그를 가차없이 몰아붙였다. "틀렸다! 너는 혈붕성의 수하가 아니더냐?" "그... 그렇기도 합죠." "그렇다면 네 주인도 당연히 혈붕성주여야 할텐데?" 범호는 갈등이 생긴 듯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하... 하지만 여기로 소인을 데려온 분은......." 그의 말은 도중에서 끊겼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너는 내 명령에 따르게 될 테 니까. 그러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주... 죽는다고요?" "그렇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나는 장차 혈붕성주가 될 사람이다." "흡! 그럼......?" 범호의 순진한 눈이 화등잔만하게 떠지는 순간, 음성은 그의 귀에 강한 진동을 울리며 퍼부어졌다. "지금부터 네 주인은 사해서생 독강비다!" 우웅......! 범호는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소리로 인해 그는 고막이 파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진동이 뇌리에서 다시 반복되듯 크게 공명을 울리더란 사실이었다. - 네 주인은 사해서생 독강비......! 그것은 마법을 거는 신비한 주문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하 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상대가 단순한 위인이라서 그랬는지 대번에 나타났다. ⑧ "우우......!" 범호는 안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채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 러더니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 나의 주인은 사해서생 독강비다." "후후... 명심해라. 잠깐이라도 그 사실을 잊었다간 너는 즉시 칠 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게 될 것이다." 음성이 전하는 위협에 범호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기계처 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 무엇이듯 하명하십시오. 주인님......." 예의 음성이 문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변했다. "음, 기쁘구나. 그처럼 말을 잘 들으니. 좋아! 내 너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범호는 상대에게서 뜻하지 않았던 소리도 들었다. "너는 아주 훌륭한 몸매를 가졌구나. 근육도 쓸만하고." "벼... 별 말씀을." "매강월이 너를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설마......!" "설마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은밀하게 매강월의 소원을 이루어주려 한다." 범호의 얼굴에는 언뜻 의혹이 떠올랐다. 도무지 술수를 모르고 우 직하기만한 이 위인은 음성의 주인이 내뱉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 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답답한! 후후후......." 그 웃음소리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말 그대로 답답해 하기도 했지만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역력히 엿보였다. 그자는 어리둥절해 있는 범호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매화원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극심한 복통으로 앓아눕 게 될 것이다." "흐음?" 범호는 더욱 더 미궁을 헤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매강월은 아침마다 목욕을 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행사다." 음성은 툴툴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목욕물을 덥히기 위해 필시 너를 부를 것이야." "소... 소인을 말입니까요......?" 범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너는 대기하고 있다가 그때에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 주어야겠다. 그것은 네게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어... 어떤 일인뎁쇼?" "꽃을 꺾는 일." "넷?" 범호. 그는 여인의 매끄럽고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지난 팔 일 동안을 그는 매우 만족스럽게 지냈다. 아니, 꿈인양 행복하게 지냈다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난화(蘭花). 이 여인은 항주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기(名妓)였다. 그녀와 지낸 기간 중 범호는 한 발자욱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환락경에 취해 오늘만 해도 새벽이 다 되도록 난화와 격렬한 씨름(?)을 치르고 난 후에야 곯아 떨어진 바 있었다. 그렇건만 범호는 잠이 깨자마자 또 생각이 달라져 산처럼 솟은 그 녀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그는 난화의 도드라진 유두로 입술을 가져가며 손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열기가 그의 전신으로 번져갈 때였다. ⑨ (범호.) 한 가닥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와 그를 놀라게 했다. "엉?" 범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 가 싶어 주변의 정황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때를 맞춘 듯 음성이 다시 전해져 왔다. (미안하다만 일정에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너는 오늘 해 뜨기 전 에 혈붕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시... 싫소!" 범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로서는 지금 누 리고 있는 이 안락함과 더 바랄 나위 없는 행복감을 깨고 싶은 마 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즉각적인 반응에 음성은 한결 부드럽게 응해왔다. (네 심정은 충분히 알겠다만 내 말에 따른들 후회는 없을 것이다. 혈붕성에서는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더 좋은 일......?" 범호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아 되물었고, 음성은 나직한 웃음과 더불어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던져왔다. (후후... 범호, 너는 유월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 어떻게 생각하다니......?" (매력이 있지 않느냐 말이다.) 범호의 우직한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짙게 깔렸다. "마... 말도 안되는....... 하늘 같은 아가씨를 내 어찌......!" 음성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하늘 같은 아가씨가 너를 좋아한다면?) "우우... 그럴 리가!" (이해가 잘 안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좀더 확실하게 말해 주지. 그녀는 너와 자고 싶어한다.) "넷?" 범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튕겨져 일어날 뻔 했다. 그는 턱을 덜덜 떨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저를 하찮게 여기실......." (믿기지 않겠지만 혈붕성으로 돌아가 보면 안다. 그녀가 너를 침 실로 불러들일 것이다.) "맙소사!" 범호는 아연실색하여 입을 딱 벌렸다. 언감생심 꿈조차 꾸어본 적 이 없는 일이 이처럼 태연스레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도 진즉 부터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 (또 한 가지, 그녀는 보기보다 맹목적이며 뜨거운 여인이다. 그래 서 너를 좋아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 너는 단 한 번이라도 그녀와 의 잠자리를 상상해 보았느냐?) "모... 못해... 봤습니다. 겁이 나서......." 범호는 솔직하게 시인을 하는 한편, 그 말을 듣게 됨으로써 처음 으로 금단의 영역을 넘어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것은 물론 이제까지 한사코 부정 해 왔던 욕망을 용인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자 범호의 눈에는 때아닌 열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곁에 난화가 있다는 사실은 깡그리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오직 유월설의 환상적이도록 아름다운 자태만을 떠올리며 벅 찬 기대와 흥분으로 인해 몸을 떨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음성이 그의 귀에 또 한 번의 자극제를 불어 넣었다. (매강월은 너의 품을 애타게 그리워 했다. 그녀가 네 생각때문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믿겠느냐?) "흐으으......." 어디선가 약병 하나가 날아와 호흡을 조절하지 못해 기를 쓰고 있 는 범호의 앞에 떨어졌다. 툭! (그것을 그녀의 목욕물에 풀어라. 일종의 방향제로 그녀가 평소에 즐겨 쓰는 것이다.) 허겁지겁 약병을 주워드는 그에게 음성은 또 말했다. (너는 즉시 말 채찍 한 벌을 사 가지고 돌아가거라.) "넷!" (걱정은 하지 말아라. 절대 안전할 테니까.) ■ 무영탑 2권 제12장 패자(敗者)의 철학(哲學) ① 말 채찍을 사러 나갔던 범호가 혈붕성으로 돌아왔다. 이는 흔히 있는 일로써 누구도 그의 출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 다. 성내의 사람들은 그가 팔 일 동안이나 외부에 나가 있다가 복 귀했다는 사실도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따라서 범호가 성문을 통과할 때 그의 그림자나 관찰하고 있을 자 도 역시 없었는데, 그는 일출(日出)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안 하게 발치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입성했다. 그 그림자는 또 하나의 범호로 변신했던 천무영이었다. 즉 범호의 그림자로 화한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매강월은 독강 비의 간계에 빠져들어 여태까지 공들여 왔던 공령활시대법을 완성 시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천무영은 깊은 탄식을 안으로 삼켰다. '어쨌든 그간의 경위로 미루어 사해서생은 매강월보다 한 수 높은 자다. 내가 중도에 끼어들었건, 그렇지 않건 그는 무슨 수단을 써 서라도 종내에는 매강월을 눌렀으리라.' 사실 혈붕성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암투(暗鬪)는 여러 면에서 시 사하는 바가 컸다. 특히 혈붕전에서 엿들었던 대화들은 그로 하여 금 많은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다. 천무영은 여기서 문성공의 정체에 호기심을 가지는 일면, 그 노인 의 관점이 매우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다만 입장의 차이만은 명백하여 그는 냉소하지도, 관망하지도 않 았다. 여하한 일이건 무림의 앞날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한 직접 나서서 해결을 보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게다가 천무영의 방식은 철저하리만큼 인간적이었다. 그는 작금에 도 유월설을 떠올리며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정열의 여인이여! 나는 그대의 공령활시대법을 깨뜨리는데 일조 하고 있소만 회의하지 않소. 왜냐하면 그것을 이룬들 그대는 행복 해질 수가 없기에. 혹시 아시오? 남녀의 관계에서는 육체적 관심 도 사랑의 일부라는 것을.' 천무영은 범호가 무사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아 무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신형을 이동시켰다. 환요비자의 환술은 시종 그에게 기대치 이상의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유월설. 이 별호만큼 그녀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는 매강월이 단단히 작심을 해서이지 본성이 그처럼 차 가워서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녀도 현재와는 달리 봄날씨처럼 따스하고 다정다감한 소녀였었다. 그녀의 심적변화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날은 유일한 혈육이자 친 오라비인 매검영(梅劍英)이 죽던 날이었다. 그녀는 졸지에 천애고 아가 되고 말았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원래 독강비와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하던 사람은 매강월이 아니 라 매검영이었다. 그 역시 혈붕왕의 제자로서 독강비와 마찬가지 로 성내 인물들의 기대가 집중되던 젊은이였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게 경쟁심도 자리잡고 있 었지만 매검영 쪽은 어디까지나 선의(善意)에서였다. 반면에 독강비는 지독하리만치 위선으로 무장된 위인이었다. 그는 호탕한 기질을 내세워 둘도 없는 친구를 자처하면서도 매검영을 질시하던 끝에 제거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독강비의 속셈이 표면화되는 날이 왔다. 그것은 매검영이 사 냥을 나갔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친 그 다음 날이었다. 독강비는 상대의 용태를 뻔히 알면서도 비검(比劍)을 요청했다. 그날따라 마침 혈붕왕도 출타하고 성내에 없었으므로. 매검영은 본시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위인이었다. 독강비는 처음부터 그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 였으며 나아가서는 진검(眞劍) 승부를 고집하기도 했다. 매검영이 이때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두 사람은 비검을 하게 되었고, 승리는 독강비에게로 돌아갔다.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매검영은 연속 밀리다가 절벽 끝에 이 르게 되자 검을 내리며 말했다. - 강비, 내가 졌다. 날 쉬게 해다오.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매달렸다. 독강비의 지나친 승부근 성을 나무라면서도 일편으로는 이해한다는 듯. 그런데 그가 보여준 우정의 답례는 놀랍고도 잔혹했다. 독강비가 친구의 가슴에 곧장 검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 광경은 당시 열 살이던 매강월의 눈에 남김없이 담겼다. 적지 않은 나이차로 인해 부친이나 다름없던 오라비가 비명과 함께 절 벽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도 그녀는 보았다. 이후로 독강비는 혈붕왕에게 불려가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며 제자 로서 최초로 면벽백일이라는 수치스러운 벌도 받았다. 하지만 매강월의 찢겨진 마음은 그 정도로는 보상되지 않았다. 오 라비를 잃은 데다가 타인에 대해 불신까지 갖게 되어버린 그녀는 끝내 그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오늘날까지 무서운 결심만을 거듭 다져왔다. - 독강비! 내 언제고 네놈을 직접 처단하리라. ② 아침이다. 유월설 매강월은 여느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그녀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날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가 슴 속에서는 벌써부터 모종의 기대와 은은한 두려움, 착잡한 감회 까지도 복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오늘이야말로 천 일 동안 준비해 왔던 공령활시대법이 드디어 완성되는 날이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그녀가 이십 년간이나 고이 간직해 온 순 결을 스스로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도 열두 명의 혼(魂)이 없는 사내들을 상대로 말이다. 정녕 피치 못할 노릇이었다. 공령활시인들과 정사(情事)를 치루는 것은 하나의 정해진 절차였다. 그래야만 상호간에 영이 통하고 마 음이 연결되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니까. 비장한 각오도 서 있었다. 그 일은 분명 겁이 나고 공포스러운 것 이었으나 복수에 대한 집념과 한껏 팽배해진 야망이 그녀로 하여 금 여성마저도 쉽사리 포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눈앞에 우람한 체격을 지닌 한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범호.......' 그 이름의 주인공은 일개 마부일 뿐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색정 에 이끌리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유월설 매강월이 범호라는 인물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안다면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못하리라. 맨 처음 화전(火田)에서 그를 보게 되었을 때, 매강월은 소스라치 게 놀랐다. 심지어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범호의 모습인즉 죽은 오라비인 매검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것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흡사하여 그녀로서는 죽은 오라 비가 살아돌아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매강월은 우선 기뻤다.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해 버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 매검영의 모습을 그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범호를 데려오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본의 아니게 타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독강비의 존재를 의식하 다보니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단안을 내려 그를 개인마부로 삼았다. 그리고 그를 내성에 머무르게 하며 틈만 나면 찾아가 은밀히 지켜보곤 했는데, 그 일은 불안하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그녀의 삶에 유일한 즐거움 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차츰 그녀의 마음에는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깃들기 시작 했다. 그것은 범호의 특징이자 전 재산이나 진배없는 훌륭한 근육 에서 남성을 느끼고부터였다. 본능적인 욕구는 일단 불붙게 되자 무섭게 타올랐고, 그녀가 지녔 던 냉정한 이지(理智)를 무참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현재도 매강월은 거기에서 파생된 감정에 대해서는 일체 무시하는 편이었다. 육친에 대한 그리움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녀는 내심 부르짖는다. '범호! 오늘밤만 지나면... 너는 완전한 내 소유다.' 매강월은 스스로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범호의 존재만 떠올리면 습관처럼 있어왔던 현상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 리감으며 슬며시 가슴과 허벅지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눈이 갑작스레 본연의 차 가운 빛을 회복했다. '독강비도 지금쯤 나와 똑같이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녀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연이어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독강비! 너의 대법은 실패할 것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태도는 매우 자 신만만해 보였다. "천천, 네가 잘 해내리라고 믿어." 매강월은 나직이 읊조린 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몸 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미끈하면서도 농염한 육체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문 밖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방옥(芳玉), 화아(花兒), 목욕물을 준비해라." ③ 사방이 밀폐된 밀실(密室)이다. 넓이는 방원 십 장쯤 되어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음침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언뜻 피비린내가 풍기는 듯도 했으나 정확한 출처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천정에는 벽록색을 띤 한 알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있었다. 그 것은 분명 조명효과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실내의 묘한 분 위기에 일조하고 있다면 맞았다. 밀실 안에는 여러 개의 흑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그 침상은 숫자가 도합 열두 개였으며 그 위에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들로 하나같이 죽 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소녀들의 나신이란 사뭇 기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하늘 을 향해 있는 위태롭게 솟아오른 육봉이나 유지처럼 매끈한 아랫 배, 쭉 뻗은 두 다리 등이 모두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 를 공포감을 자아냈던 것이다. 그 앞에서 한 명의 흑의소녀가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일이란 시체나 다름없는 열두 명 소녀들의 몸에 향유(香 由)를 바르는 것이었다. 향유는 뽀얀 젖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방향을 실내에 전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얼굴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얇은 면사가 덮혀 있어 용 모를 알아볼 길이 없었다. 몸매나 피부로 미루어 전부가 절세의 미녀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았지만. 쓱쓱......! 흑의소녀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나녀들의 몸 구석구석에 젖빛 향유를 발랐다. 향유는 발라지는 즉시 그녀들의 피부 속으로 침투 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한참 후. 흑의소녀는 마지막, 즉 입구에서 첫번째 나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추했다. 무엇때문인지 형편없이 망가져 있어 인간으로서 과연 이토록 끔찍한 얼굴을 소 유할 수 있을까고 의심이 갈 정도였다. 코와 입은 아예 존재를 잃었으며 눈은 각각 좌우로 문드러진 듯 괴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안면도 심하게 얽어 누구라도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볼만한 용기는 나지 않을 듯했다. 이 추한 용모를 가진 흑의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오늘이야말로 이 천천이 매아가씨의 은혜를 갚을 날이다." 그녀는 감회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천. 그녀가 하는 일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비록 얼굴은 추 하기 짝이 없었지만 몸매만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가히 빙기옥골(氷肌玉骨)이랄 수 있는 맑은 피부에 은은한 수줍음 이 묻어 있는 그녀의 육신은 일견하기에도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 는 처녀지신임을 짐작케 했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소담스럽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그랬고, 꼭 오무려진 허벅지와 위로 바짝 당겨진 탄력있는 둔부도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천천은 자신의 옷을 한 나녀에게 입혔다. 이어 그녀는 아무런 갈 등도 없이 나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세게 문질렀다. 파스슷―! 나녀의 얼굴은 금세 묵사발(?)이 되었다. 이르자면 천천과 형태가 같은 추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천천은 나녀의 얼굴에서 벗겨낸 면사를 스스로 덮어썼다. 그리고 는 향유를 자신의 몸에 골고루 바르는 것이 아마도 십이공령활시 녀 중 한 명으로 위장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변장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에 가까운 공령활시녀가 되어 흑침상에 드러누웠다. 툭! 까닭 모를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귓볼로 떨어졌다. 그그긍―! 돌이 마찰되는 음향과 함께 한쪽 석벽이 열리더니 두 가닥의 흑영 이 안으로 들어왔다. "엇! 천천이 죽었다." 개중 한 명이 벽에 기대서 있는 여인을 보고는 경악성을 발했다. 다른 한 명이 안되었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동안 계속 독을 만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군. 그나마 다 행이야. 일을 다 마쳐놓고 죽었으니." 그들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빈 향유병을 발견하고는 나름대로 그 렇게 추측을 했던 것이다. "빨리 가서 보고하세." "그래야지." 두 사람은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에게 천천은 이처럼 죽은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연 히 살아 숨쉬고 있었고, 모종의 목적을 품은 채 멀쩡하게 공령활 시녀들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또 그녀와 매강월의 관계가 어 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의 행동이야말로 사해서생 독강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리라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물고 물리는 무 서운 놀음 속에서 그녀는 희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y 와중에도 시간은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다. 혈붕성 내에서 어떤 류 의 동상이몽이 연출되던....... ④ 범호. 그도 인간이다. 나름대로 사고력이 있는지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음성만 전해오는 자에 대해 줄곧 생각했다. '누굴까? 그는.' 하지만 이면에서는 그 인물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 다. 그의 음성만 들으면 오금이 저리고 웬지는 모르나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느낌까지 드니 어쩌겠는가? 범호가 알 리 없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이심통령제혼술(以心通靈 制魂術)이라는 술법에 깊이 걸려들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은자십천 중 일 인인 마마대불사의 마마천심장경(魔魔千心 藏經)에 기재된 사공(邪功)이었다. 시전자의 뜻대로 인간의 마음 을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실전된 암흑마전의 섭령유혼마법(攝靈 幽魂魔法)과 쌍벽을 이루는 술법이었다. 범호의 어설픈 고심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한 가닥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성이 그를 불렀던 것이다. "범호! 매화원으로 오너라." "네... 넷!" 그는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듯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앉았던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이유는 음성의 주인이 다름 아닌 유월설 매강월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인물의 말대로 일이 이루어지려는 건가?'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허겁지겁 매화원으로 달려갔다. 범호를 보자마자 매강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옥과 화아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드러누웠다. 내 목욕물은 네가 좀 준비해 주어야겠다." 이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네, 네! 아가씨." 범호는 대답과 함께 재빨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심리는 정확히 둘로 나뉘어 양극을 치닫고 있었다. 마음 한 귀퉁이에 도사린 불안때문에 숨이 막히는가 하면 일편으로는 달착 지근한 기대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 매강월은 너를 좋아하고 있다. 신비한 음성의 주인이 넌즈시 던져 주었던 그 말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마하는 의구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 만 그로서는 밑져야 본전인 것이다. 워낙 어마어마한 일이고 보니 성사가 되지 않은들 이전과 같은 체 념 상태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자위하는 그였다. 반대로 달성이 된다면야 필생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되겠지만. '아가씨.......' 심중으로 혼자 뇌까리는 범호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그 러는 가운데 목욕통 속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그는 품 속에서 신비인물로부터 받은 옥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마 개를 열어 내용물을 물 속에 쏟아 부었다. 주르륵! 옥병 속의 액체는 뜨거운 물과 섞이며 말할 수 없이 그윽한 향기 를 냈다. 그 향기가 코에 와 닿자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욕실은 매강월의 침실 안쪽에 있었다. 범호는 목욕물을 욕실로 옮겨 주고 난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서 있었다. 매강월은 싸늘한 눈길로 그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아무말도 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난감해 있는 그의 귀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쏴아아아― 범호는 일시지간 머리가 어지러워져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연상이 되는 풍경 때문이었다. 매강월은 별호대로 유월의 눈처럼 차갑기 그지 없는 여인이다. 그 러나 그녀의 몸도 그렇게 차가울지는 모를 노릇이다. 그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상태로 몸에 물을 끼얹고 있 다. 물줄기는 그녀의 학같이 우아한 목에 부어질 것이며, 우뚝 솟 은 가슴 사이로 폭포수인 양 급격히 쏟아져 내릴 것이다. 아마도 그 아랫부분의 평평하고 부드러운 평원을 지나면 물은 곧 장 어둡고 은밀한 계곡으로 모이리라. 그리하여 다시 옥주와도 같 은 다리를 지나....... '으으......!' 범호는 죽어라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이빨 사이로 신음 성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때였다. "아아!" 불현듯 욕실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음향이 들려왔다. '혹시?' 범호는 막연했던 기대가 현실화 되는 듯하자 짜릿한 전류가 전신 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쏴아아아―! "으으음......." 물소리에 섞여 전해져 오는 야릇한 소리에서는 점점 더 끈적끈적 한 열기가 묻어 나왔다. "끄윽!" 범호의 목울대에서 은연중 괴상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배운 것이 없고 단순한 만큼 본능적인 욕구에 충실한 이 사내는 마침내 욕구 를 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범호, 범호... 게 있느냐?" 욕실에서 숨이 차 헐떡이는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급기 야 매강월이 그를 찾았던 것이다. "넷!" 범호는 하마터면 욕실로 뛰어들 뻔 했으나 그때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일말의 두려움 때문에 간신히 참고 서 있었다. "들어와라. 등을... 밀어다오." '아!' 매강월의 놀라운 요구는 마음 밑바닥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꺼리낌 들을 거짓말처럼 일소시켜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가 절실하게 기다린 것이 이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범호는 무엇에 홀린 듯 욕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황홀한 여인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매강 월은 등을 보인 채 욕통에 기대 서 있었다. 아무 저항없이 노출된 그녀의 지체는 가히 뇌쇄적인 염기를 발하고 있었다. ⑤ "이리로 가까이......." 그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매강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방울 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그녀의 몸은 전체가 유지같이 기름졌으며 우유빛으로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범호의 떨리는 손이 매강월의 등에 가 닿았다. "흑!"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일신을 바르르 떨었다. 범호도 떨기는 마찬가지였으되 서서히 매강월의 등을 밀기 시작했 다. 그 동작은 등을 민다기보다는 쓰다듬는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의 손은 그렇게 매끄럽고 부드러운 등판을 훑어내려와 잘록한 허리까지 문질러가고 있었다. "하아아......." 매강월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이때에 범호의 손은 놀랍도록 풍만한 그녀의 둔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희고 둥그런 둔부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그의 입에서는 풀무질에 버금가는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흐으... 흐으으......!" 그러기를 한참여. 용기를 짜낸 듯 그의 손이 매강월의 둔부로부터 미끄러져 내려가 더니 허벅지를 지나 깊은 계곡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아흑!" 더 참을 수 없었던 듯 매강월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발하며 휘 청 하고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 허용의 의미를 알아차린 범호의 눈이 화로처럼 시뻘겋게 달구어졌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과감하게 매강월의 허리를 움켜잡은 그는 자신의 몸을 뒤에서 그대로 밀어붙였다. "허억!" 그 순간, 매강월의 눈이 소리없이 화등잔만하게 부릅떠졌다. 하지만 범호도 거기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미 여인을 수없이 다루어 본 그는 그때부터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쾌락을 위해 격렬한 율동을 보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두 남녀의 입에서 똑같은 기성이 흘러나왔다. 비로소 그들은 신분 의 차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질에서 일탈하여 가장 인간적이고 원 초적인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실 바닥으로 쓰러져 나뒹 굴게 되었다. 그들의 뇌리에서 주인과 마부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한 덩어리로 얽혀 희열을 추구하는 것만이 전부가 되어 버렸으니....... 유월설 매강월. 그녀는 범호의 우람한 신체에 깔려 급속도로 열락의 나락으로 떨 어지고 있었다. 과연 범호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평소 그녀가 상상했던 선보다 훨씬 더 짜릿하 고 경이로운 체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그녀의 지체는 범호의 우악스런 힘에 의해 무수히 자세 가 바뀌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지러질 듯한 교성을 발 했다. 대개 약간의 고통이 수반되기도 했지만 그 고통은 금세 걷 잡을 수 없는 쾌감으로 변해 그녀를 사로잡곤 했다. 범호는 미친 듯이 매강월을 탐하고 있었다. 어떤 여인을 안아도 최대치의 쾌락을 누려온 그였으나 이토록 열정적이고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은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매강월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 다. 욕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증기 속에는 지독한 미약(媚藥)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두 남녀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아아아......!" "허헉!" 두 남녀의 호흡성은 높아만 갔다. 그들은 가진 바 모든 힘을 쏟아 부으며 현재의 행위를 즐겼고, 그로 인한 희열과 쾌감을 서로에게 숨기려 들지 않았다. 범호는 끝까지 훌륭한 종마(種馬)였다. 미약의 효력까지 덧입혀지 자 그의 육체는 도시 지칠 줄을 모르는 듯 치달렸다. 덕분에 넓은 등판이 여인의 손톱에 의해 숱하게 할퀴어지고 있었 으나 그는 이 점은 채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슷! 욕실 창문에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두 남녀의 격 전(?) 현장을 지켜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이로써 천하에 위협이 될 뻔했던 매강월의 공령활시대법은 와해되었다. 모두가 범호, 그대의 공로다.' 몽영(夢影)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천무영이었다. 사실상 그가 혈붕성에 잠입한 것은 우연을 빌어서였다. 하지만 그 가 한 일들은 일개인은 물론 장차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도 누군가 꼭 했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마무리 단계를 남겨 놓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그에게 는 진즉부터 복안이 서 있었다. 천무영은 늘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한때 밑바닥까지 이른 패 자(敗者)였으며, 패자들에 의해 키워졌다는 것을. 때문에 불패천의 여망을 달성하고자 하되 그 기저에는 그가 신념 처럼 지켜온 철학들이 깔려 있었다. 어떤 의미로든 패자를 부활 (復活)시키려 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범호, 그대는 이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림자가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⑥ 범호는 멍청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난 며칠간을 통해 자신이 범호라는 사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틀 전 유월설 매강월과의 정사가 있은 뒤로는 더 그랬다. 그는 예전처럼 아무 때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인생이 더 이상 즐거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범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사 직후에 매강월은 그를 쳐죽 이려고 몇 번이나 손을 들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를 죽이 지는 못했는데, 대신 서럽게 울며 그를 내쫓았다. 그 이후로 범호는 성내에서 매강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해 서생 독강비도 때를 같이 하여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들이 어디 로 잠적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범호의 인생은 색채를 달리 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일개 마부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매(梅)아가씨.......' 그는 하릴없이 계속 그 이름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침상도 아니고 욕실 바닥에서 벌였던 그 질탕한 정사는 작금에도 그로 하여금 숨이 넘어가게 한다. 타인의 관점에서야 어찌 해석되 든 그에게는 평생을 두고 가장 황홀한 기억이었기에. 그 일은 새삼 떠올려 보면 꿈인 듯도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고, 당시 그의 품에 뱀처럼 감겨 들었던 뜨거운 여체는 틀림없이 그가 동경해마지 않은 여인의 그것이었다. 또한 생애 최고의 쾌감을 선사해 준 매강월은 그에게 인생의 새로 운 일면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수천 번도 더 그 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쳤지 않았는가 말이다. 자신이 그러했듯 상대도 자신을 원했으며,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맺어졌으니 이는 의당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호는 너무도 슬프고 불행했다. 그는 매강월 에게서 돈을 주고 여자를 샀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꼈던 바, 이처럼 넋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이른바 사랑을 알게 된 범호의 마음 속에는 매강월의 존재가 영원 히 지울 수 없는 영상이 되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매강월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밤이 되어도 범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강월을 향한 그리움으로 목이 탈 지경이니 잠이 올 리가 없었 다. 잠시라도 그녀의 곁에 갈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지 싶 은 것이 솔직한 그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한낱 헛된 열망에 불과했고, 이 점을 스스로 도 아는 그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소리내어 앓았다. "으응......!" 그의 증세를 두고 상사병이라한들 틀리지는 않으리라. 범호는 이처럼 이불자락을 붙들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것 외에도 여느 때의 그답지 않게 연 이틀간을 제대로 음식조차 들지 못했 다. 허기가 배를 쥐어뜯어도 도무지 무엇도 먹히지 않는데야 도리 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전신에서 진땀이 솟기 시작한 그의 귀로 낯설 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범호, 괴로우냐?' "으어어......!" 범호는 대답을 대신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건 매강월을 사랑하게 되어서겠지?' "그... 그렇습니다요." 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음성이 물었다. '그녀의 마음이 너처럼 순수하지 못해도 말이냐?' 범호의 안면이 뚝 굳어졌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그녀는 애초부터 너와는 다른 부류에 속해 있었지만 향후로도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갈 소지가 다분하다. 너에게 무수히 상처를 입히 게 될 것이란 뜻이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범호는 힘주어 부르짖으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가씨가 어떻게 해도 소인은 끝까지 사랑할 겁니다." '범호, 그게 정말이냐?'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가씨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저는 무슨 짓이고 사양치 않고 할 겁니다." 예의 신비한 음성의 주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탄식과 함께 다시 말을 해왔다. '음, 그녀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정녕 깊구나. 내가 너를 도와 주 겠다.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다.' "나으리!" 범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상대가 누군 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으나 최소한 자신의 꿈을 이룩하게 해줄 구 세주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매강월을 얻고 싶다면 우선 그녀만큼 강해져야 한다.'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엄숙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내 너에게 개세의 절학을 전수해 주겠다. 이것은 일명 뇌문비학 (雷門秘學)이라 부르는 것으로 천지간에 가장 양강한 무학이다. 네 체질에 아주 적합하지.' "이렇게 감사할 데가......!" 범호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을 연성하면 머지않아 너는 강호상에서도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요, 나으리!" '자, 이 책자를 줄테니 외운 후에는 태워 버려라.' 툭! 과연 한 권의 책자가 범호의 앞에 떨어졌다. ⑦ <뇌문비서(雷門秘書)> 책의 표지에는 그런 제목이 씌여 있었다. 뇌문비서라면 은자십천 중 천뇌마군의 독문비급이다. 그밖에도 범 호에게는 또 하나의 진귀한 선물이 주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옥병 으로 음성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소림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천양신단(天陽 神丹)이다. 세 알을 백 일 간격으로 하나씩 복용해라. 그리고 열 심히 벽력뇌강심법을 운공하면 네 노력 여하에 따라 삼갑자의 내 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으어어... 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비록 우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범호가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 순간 희대의 기연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기연으로 인해 대변신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범호, 언제고 내 너를 다시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완 성된 너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범호가 급히 물었다. "자, 잠깐! 주... 주공(主公)의 존함은......?" 음성의 주인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주공은 무슨, 그저 무영(無影)이라고만 기억하면 된 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주, 주공......!" 상대가 사양해도 범호의 호칭은 바뀌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튕기 듯 벌떡 일어나 사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 했다. 창밖 은 여전히 어두웠고 아직도 깊은 밤이었다. 범호는 이 밤에 자신이 한바탕 꿈을 꾼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꿈치고는 너무 엄청나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는 수중의 뇌문비서와 천양신단이 든 옥병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르자면 절세의 복연을 얻은 그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우우... 주공, 존함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범호는 울부짖듯 읊조리며 창문을 향해 큰절을 했다. 그것은 범호 라는, 일개 마부에 불과했던 평범한 사내가 대변신을 예고하는 경 건한 의식이었다. ■ 무영탑 2권 제13장 귀향(歸鄕) ① 춘면불각효(春眼不覺曉),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봄은 졸린 것, 날 밝은 줄을 몰랐네. 어디에서 새 소리만 지저귀는가? 밤새 비가 오더니, 꽃이 얼마나 졌을까? 과목이 울창한 숲 속으로부터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와 함 께 한 청년이 눈을 부비며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걸쳤고 손에는 낡은 섭선을 들었다. 이 이상의 특징은 없었다. 청년은 여하한 개성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평이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야숙(野宿)을 한 듯 얼굴이 다소 부석부석해져 있었다. 복우산의 혈붕성을 떠나 북행(北行)중인 그는 개봉성으로 목적지 를 잡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 었다. 다만 옛 추억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그의 발길을 무작정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는 과거에 연연해 하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봉성에서 만큼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바, 은연중 그것에의 치유를 스 스로에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확인을 통해 또다른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지만. "후후... 무영탑은 건재할까? 그리고 철(鐵)노인은......?" 천무영은 아직 철자구 노인이 죽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는 짐짓 유유자적 걷기 시작했다. 간밤에는 큰비가 한바탕 쏟아 져 커다란 고목 속에서 잠을 잤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산기슭은 지금까지도 습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한낱 잡초에도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맺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천천히 걷는 듯했지만 그는 행운유수 같은 신법으 로 일 다경도 못되어 산을 두 개나 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신발에는 물기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천무영은 묘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개봉부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기이할 정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꼭 지난 날에 대한 아픔과 회한만이 전부가 아니다. 일종의 자기 확인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설레임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모름지기 과거가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천무영은 시 련과 고통의 극복으로 점철되었으되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불투명 한 것들 투성이인 과거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스스슥! 그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복잡한 제반 의 감정들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으리라. 그는 더 이상 도피자가 될 수 없었으므로. 산기슭에는 몇 채의 초옥(草屋)이 그림같이 서 있었다. 조촐한 띠 집이 서로 처마를 맞댄 채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이다. 산중의 대기는 투명하게 깨어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 지 초옥의 주변만은 살벌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십여 명의 거지들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외벽에 기대앉아 이를 잡고 있는 중년의 거지가 있는가 하면, 싸 리문 좌우에서 낮잠을 즐기는 자들, 혹 몇몇이 모여 가벼운 농담 을 지껄이는 등 하고 있는 모양새도 가지가지였다. 초옥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다른 몇 명의 거지들이 모닥 불에 솥을 걸고 무엇인가를 계속 끓이고 있기도 했다. 필경 단체 (?)로 먹을 식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이리라. 일견하기에 그것은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정경이었다. 그러나 거지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 들의 미간에 알게 모르게 서려 있는 긴장감은 초옥을 둘러싸고 있 는 팽팽한 살기와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삐익! 한곳으로부터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거지들은 순간적으로 눈빛을 무섭게 번쩍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나름대로 하던 일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② 스스스....... 커다란 송목(松木) 위에서 하나의 백삼인영이 어른거렸다. 그 위 치로 이르자면 초옥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그저 지나다 우연히 초옥을 발견하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껴 관망중이었다. '복장으로 미루어 저들은 개방의 제자들이다. 그것도 칠결(七結) 이상의 인물들인데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워낙 인연을 깊이 맺고 있는지라 개방의 일이라면 절대 무심할 수 없는 입장인 그였다. 삐익! 삑! 호각소리가 또 들려왔다. '흠! 이번에는 십 장 밖이다.' 소리는 방금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거지들은 여전히 의 식은 하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호탕한 웃음으로 그들을 비웃는 자가 있었다. "으핫핫핫......! 최근 들어 개방이 대단한 성세를 누린다더니 명 불허전이로군. 이토록 제자들의 담이 커진 걸 보면." 웃음소리의 뒤를 잇는 것은 예리한 파공성이었다. 슈욱! 슉―! 그에 따라 네마디의 비명이 꼬리를 물듯 터졌다. "크헉! 컥―!" 와당탕! 끓는 솥단지가 뒤엎어지고 요리를 담당하던 네 명의 중년거지들이 모두 튕겨지듯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십여 명의 인영이 옷깃을 펄럭이며 그 자리에 날아내렸다. 휙! 휘휙―! 앞장 선 자는 일신에 금의를 입은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둥글넙적한 그자는 살이 과다하게 찐 탓에 눈이 파묻혀 거 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그 눈에서 쏟아져 나오 는 안광만은 비수와도 같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자의 뒤에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삼십 세 가량의 청년이 서 있었다.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한 위인이다. 그는 흑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체구에 비해 너무 커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 속에 파묻혀 있는 것쯤으로 보였다. 그들 두 사람의 뒤로는 여덟 명의 은의검수(銀衣劍手)들이 만면에 살기를 드리운 채 험악한 기세로 서 있었다. 싸리문가에서 서성이던 두 명의 중년거지가 금의인을 향해 히죽 웃더니 허리를 굽혔다. "위명이 쟁쟁하신 천금성의 전단주(全壇主)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시오?" 금의인이 실처럼 죽 그어진 눈을 치뜨며 마주 웃었다. "후후! 중주쌍개(中州雙 ), 내 앞에서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다 알고 왔으니까." "엉? 허튼 수작이라니, 거 무슨 섭한 말씀을......!" "닥쳐라! 그대들은 알량한 위세를 믿고 본성에 대적하려 죄인을 옹호하고 있다." 중주쌍개라 불리운 두 거지 중 대개(大 )가 펄쩍 뛰었다. "아이쿠! 당치도 않소이다. 죄인을 옹호하다뇨?" 대개는 큰 몸집에 익살스러운 인상이었고, 그에 반해 소개(小 ) 는 체구가 작고 생김새도 거지답지 않게 곱상했다. 전단주가 여러 채의 초옥들 중 중심부에 위치한 한 채의 초옥을 쏘아보며 말했다. "저 안에 필시 일진풍(一進風)이라는 애송이 거지가 숨어 있을진 저, 끝까지 아니라고 발뺌할테냐?" 직선적인 그의 추궁은 협박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개는 물론 연약해 보이는 소개조차 딴청이었다. "헤헤... 전단주께서는 천금성의 추명단주(追命壇主)가 되시더니 신수가 더 훤해지셨습니다그려." "동감이야, 하긴 추풍사신(追風死神) 전황(全黃) 어르신의 존명이 야 일로 하늘을 찌르지 않던가?" 두 사람의 너스레에 전황은 실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긴 말은 필요없다. 죄인이나 내놓아라." 대개가 그 말을 받았다. "허! 일진풍이라면 본방의 방주께서 근자에 맞아들이신 제자인데, 어째서 천금성의 죄인인지 모르겠구려." 그는 짐짓 눈을 껌벅이며 소개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 이유를 아나?" "글쎄, 그걸 낸들 알겠는가?" 소개는 어깨를 으쓱했고, 전황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육천풍(陸天風)!" "네." 부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흑의청년이 무심히 대답했다. "문을 열라." 슈슈슈슉―! 육천풍이라는 청년의 몸에서 일순 수백 종의 암기가 폭사되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익! 과연 암기의 명인인 천수독객(千手毒客) 육천풍답군." "이크크......!" 암기세례를 받은 중주쌍개는 호들갑을 떨며 펄쩍펄쩍 뛰었다. 하 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 그들의 수선스러운 동작에 는 각기 절묘한 비기들이 숨어 있었다. 따땅... 땅......! 수백 종의 암기는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모두 퉁겨져 나가고 말았 다. 그 광경을 본 육천풍은 냉소했다. "흥! 나 육천풍에게 실수란 없다." 그의 소매가 재차 허공을 젓는 순간이다. 슈슈슈슉―! 이른바 만천화우(滿天化雨), 비가 쏟아져 내리듯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암기들이 중주쌍개를 휩쓸어갔다. "흑! 허억!" 중주쌍개는 질겁을 하며 급히 바닥을 뒹굴었다. 팍! 파팍......! 덕분에 암기는 모조리 땅바닥에 박힌 바 되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놀랍게도 암기들은 도로 튀어나와 종전보다 훨 씬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쏘아져 갔다. ③ "헉!" 중주쌍개는 급기야 타구봉을 꺼내 휘두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검은 빛이 흐르는 묵철의 타구봉이었다. 타타타― 타앙―! 암기의 우박도 타구봉에는 못 견딘 듯 전부 퉁겨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속셈인지 육천풍은 입가에 조소를 매달고 있었다. 그가 한 차례 탕 하고 발을 굴렀다. 파팟! "컥! 크헉!" 중주쌍개의 입에서 기어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뜻하지 않게 땅 속 에서 은성표(銀星 )가 솟구치더니 그들의 몸에 들어가 박혔던 것 이다. 미리 땅 속에 묻어두기라도 한 듯. 쿵! 털썩....... 두 사람의 저항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쓰러진 그들의 곁에서 육천 풍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툭툭 털고 있었다. 전황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들어가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기중이던 여덟 명의 은의검수들이 초옥 안으로 번개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휘리리릭―! 중주쌍개의 저지가 실패로 돌아가자 초옥 안으로 뛰어들었던 칠, 팔 명의 거지들은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그들 은의검수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은의검수들의 공세는 신속하면서도 악랄무비했다. 그들은 각기 한 사람씩의 거지를 맡아 무섭게 검을 휘둘렀다. 츄아아악―! "큭! 어억―!" 한편. 송목 위에서 상황을 엿보던 천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완전히 무뢰배들이로군!' 그는 자신이 이 사태에 개입하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렇지 않았으면 중주쌍개는 물론 단 일 초에 어이없이 쓰러져버린 거지들이 정말로 목숨을 잃고 말았을 터이므로. 짐작컨대 은의검수들은 개방의 무공에 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 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콰쾅! 전황이 초옥에 딸린 방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갔다. 걸리적거리 는 것이 없어져서인지 사뭇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를 응시하는 천무영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어디 그대가 계속 그렇게 느긋할 수 있는지 보겠다!' 스슷! 그의 신형이 초옥의 지붕 사이로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초옥의 방 안이다. 한 명의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아! 저 아이는.......' 천무영은 소년을 보자 크게 놀랐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 다. 그의 뇌리에는 불현듯 삼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금노적이 떠난 직후였던가? 천무영에게 그의 서신을 전해주며 대 가를 요구하던 맹랑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천무영은 그때 소년에게 금전을 지불하는 대신 목미인상(木美人 像) 한 개를 깎아준 기억이 있었다. '소풍(蘇馮)... 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소년의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리고 있었다. 죽은 듯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소풍의 입술은 한 일 자로 꽉 다물려 있었다. 과거에 비해 제법 성숙해 지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강인한 기개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그의 왼팔이 어깨서부터 뭉턱 잘려져 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방에 이른 전황과 육천풍이 소풍의 면전에서 음산한 표정 을 짓고 서 있었다. "일진풍,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사람은 없다. 모조리 죽었으니까. 좋게 말할 때 본성으로 가자." 그들의 위협에 소풍은 눈도 떠보지 않고 말했다. "당신들이 아무리 핍박을 해도 내 뜻에는 변함이 없소. 그건 설사 나를 데려간다 해도 마찬가지일 게요." 소년의 입가에는 오히려 엷은 비웃음까지 어렸다. 그것을 느낀 전 황의 반응도 못지 않았다. "건방진! 너는 노부가 왜 추풍사신이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지 아느냐? 그것은 목표물이 정해지면 지옥까지라도 쫓아가 뜻을 관 철시키기 때문이다." 소풍은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어찌 해 석했는지 전황은 어투를 바꾸어 회유하기 시작했다. "너는 생각을 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작 개방 따위에 의탁하느 니 본성에 충성을 바치면 많은 것을 얻게 될테니까." "크크크......!" 소풍은 괴이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날 어린애로 취급하는 모양인데, 잘 들어두시오. 나도 뜻을 한 번 정하면 영원불변이외다." 전황의 가느다란 눈이 위로 홱 치켜 올라갔다. "못된 것! 본성은 무림화평의 지주다. 어째서 너는 그것을 알면서 도 반항을 하려 드느냐?" "듣기 싫소. 난 그저 자고 싶을 뿐이니 데려가든 말든 당신들 마 음대로 하시오." 소풍은 그 말을 끝으로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음, 말로 해서는 안될 아이로군." 전황이 턱을 까딱하자 두 명의 은의검수가 앞으로 나서서 소풍의 몸을 나꿔채갔다. 하지만 그 동작은 중도에서 멈추었다. ④ 펑! "흑! 으헉!" 그들 두 사람은 똑같이 무형의 반탄력으로 인해 뒤로 벌렁 나가떨 어지고 말았다. 극심한 충격을 입은 듯 그들의 입과 코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누, 누구냐?" 전황이 대로하여 외쳤다. 대답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풍이 처음으로 눈을 뜨며 그 를 힐끔 보더니 개방의 인물답게 빈정거렸다. "히힛! 본방의 조사(祖師) 귀신님이 이 제자를 지켜주시나 보군. 이제 당신들은 죽었다." "놈!" 전황의 살찐 안면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반면, 천정에 숨어 있던 천무영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대단하다, 소풍. 그 지경이 되고서도 절정의 고수인 상대를 놀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보이는구나.' 그 직후, 전황의 노성이 들려왔다. "애송이 놈이 감히 본좌를 능멸하다니,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어 린 놈을 끌어내라!" 쐐액―! 다른 두 명의 검수가 쾌검을 전개해왔다. 전자의 실패가 있었는지 라 그들은 소풍의 몸 일부를 또 끊어내려는 모양이었다. 소풍도 이쯤 되자 각오한 듯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동시에 그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갖다 붙였다. "조사 귀신님, 부디 이자들의 손목이나 댕강......!"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으악! 억!" 쨍강! 투툭......!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선혈이 뿜어졌다. 그것은 두 명의 은의검수가 양 손목이 잘리움으로써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들은 검을 떨구고는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 이럴 수가!" "으으......!" 전황과 육천풍, 그리고 나머지 은의검수들은 믿어지지 않는 상황 에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소풍도 어지간히 놀란 듯했으나 날랜 입을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크크... 그것 보시오, 본방의 조사님은 무심치 않으시오. 이번에 는 당신들에게 훈계를 내리기 위해 따귀를 치실 게요." 그 말은 지체없이 실현되었다. 철썩! 짜아악―! 전황을 위시한 그 일행들은 정말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차례로 뺨을 얻어맞고 있었다. "허억! 컥―!" "어찌 이런 일이......!" 졸지에 봉변을 당한 그들은 뺨을 움켜쥔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것도 어찌나 세차게 맞았는지 한결같이 코피가 터진 것은 물론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몸을 휘청거리며 만면에 공포감을 나타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금 무림에서 내로라 하는 고수인 전황도 예외 가 아니었다. 귀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의 차원을 떠나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경외감이 들 지경이었다. "으으......!"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그의 신음성을 들으며 소풍이 자못 의기양 양하게 내뱉았다. "조사님, 이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리 못했나 봅니다. 청컨대 금 번에는 이자들의 불알을 뽑아......!" 콰당탕! 휘휙―! 끝까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황 일행은 꼬리에 불이 붙은 듯 눈깜짝할 사이에 전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발휘한 눈부신 경공 덕에 부서진 문짝만이 형편없이 짓밟혀 납작해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소풍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진짜로 조사님의 귀신이라도 나타나신 것일까?" 아무리 기개가 높아도 소년은 소년인지라 사태 파악은 느렸다. 읊 조리는 그의 음성에도 은연중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허공에서 한 가닥 괴이한 음성이 울려와 그 말을 받았다. "맞다, 소풍. 노부는 개신( 神)이니라." "맙소사!" 소풍은 전신에 피칠을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데구르르 침상에서 굴러떨어지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사시여! 제자 소풍은 본방의 제삼십칠대 제자로서......." 울먹이는 소년을 괴음성이 부드럽게 달랬다. "그래, 내 너를 보니 안심이 된다. 본방의 유구한 전통이 와해되 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흑......!" 소풍은 기어이 오열을 터뜨렸다. 한쪽 팔을 잃고도 굳건히 지켜오 던 기세가 처음으로 뒤바뀐 것이었다. "쯧!" 음성의 주인은 혀를 차더니 한층 더 차분하게 물어왔다. "진정해라. 내 기왕 천계(天界)에서 내려왔으니 이번 일의 경위나 알아야겠구나. 천금성이 너를 쫓은 까닭은 무엇이냐?" 소풍은 계속 울먹이며 대답했다. "제자는... 오래 전부터 목미인상 하나를 가지고 있사온데, 저들 은 그것을 깎아준 인물이 누구냐고 추궁을 했더랬습니다." 괴음성이 약간의 떨림을 보였다. "목미인상......?" "그... 그렇습니다." 소풍은 더듬거리면서도 있는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 그는 삼 년 전부터 천무영이 준 목미인상을 지니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한 조각수집가에게 은자 열 냥에 팔아 넘겼다. 그 뒤로는 소풍도 그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방주인 동심천유개의 눈에 띄어 개방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미인상은 천금성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때를 기해 소풍은 추적자들을 달고 다녀야 했는데 이유는 앞서 도 말했듯 조각을 한 인물, 즉 천무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휘말려 소풍은 어린 나이에 왼팔을 잃는 불상 사를 당했으며, 작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⑤ 천무영은 내심 크나큰 의문에 봉착했다. '그 목미인상은 내가 가지고 있던 백옥미인상을 본떠서 조각한 것 이거늘, 천금성이 왜 그 주인을 찾아 나섰을까?' 그는 곧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혹시 내 어머님이 천금성과 관련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하지만 심증이 확증이 될 수는 없었다. 툭! 소풍의 앞에 한 권의 책자가 떨어졌다. "받아라, 그것은 개방의 실전비기를 기록한 비급이니라. 열심히 연마하여 개방을 빛내되 다시는 패하지 않도록 해라." "네! 조사님." 소풍은 하나밖에 없는 팔로 비급을 소중히 껴안더니 코가 땅에 닿 도록 절을 했다. 그를 남겨두고 천무영은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천 정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스스스....... 그 뒤로도 한참을 엎드려 있던 소풍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는 힘겹게 신색을 추스르면서도 눈을 빛냈다. "정녕 멋진 일이다. 조사께서 현신하셨으니 이제 누구도 감히 개 방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일진풍(一進風) 소풍. 그로 말하자면 개방에 떠오른 신성(新星)이었다. 동심천유개의 마 지막 제자로서 그의 자질은 사형제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소풍은 자못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어 히죽 웃었다. "제자는 조사님의 정체도 압니다. 실전비급을 전해주고 불패를 당 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십절존사(十絶尊師)이실테니. 크크... 속히 사부께 이 사실을 알려야지." 소풍은 일신의 고통도 잊은 듯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급한 걸음으로 휑하게 뚫린 방문을 나섰다. 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그 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초옥의 마당에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거지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 었다. 그들은 저마다 피에 젖은 채 수치감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 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아아! 이런 일도......." 재삼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거지들이 말했다. "쯧! 자상(刺傷)을 완전히 모면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 적도들의 검을 비껴나가게 하여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네." 역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중주쌍개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사형들께서도 살아 계셨군요!" 소풍이 반색을 하자 그들은 동시에 답했다. "클클... 그렇게 되었네, 소사제. 은성표가 사혈로 날아드는 찰 나, 솔잎이 날아와 공격을 한 치 정도 벗어나게 했지." "아! 조사님(?)의 은덕은 정말......!" "조사어르신? 그럼 우리를 구하고 타혈수법으로 깨어나게 하신 그 분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지들을 향해 소풍은 씨익 웃었다. "다들 의식을 잃고 계셔서 모르는 모양인데 그동안에 아주 재미있 는 일이 벌어졌었지요." 그는 몸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자! 어서 방주께로 가 봐야지요. 가면서 얘기하겠어요." 그를 따라 신형을 뽑아올리는 거지들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 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꾀죄죄한 얼굴에는 일말의 희망이 깃들고 있었다. ⑥ 무영탑은 오늘도 변함없이 칙칙한 검은 빛을 띤 채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들이 묻혀 있건만....... 탑신에는 무수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대개가 사랑의 증표로 남아있는 이름들이다. 그것이 세월의 흐름 속에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의 정화인 양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이런 이름도 있었다. 천무영(天無影). 천리단옥(千里壇玉). 푸른 빛이 감도는 한 쌍의 눈이 그 유치한 필체의 이름들을 바라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천무영이었다.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거늘......!' 무영탑과 마주한 그의 가슴은 어쩔 수 없이 암울한 상념에 젖어들 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불러보았다. "단옥......." 그것은 아무리 외쳐 부른들 되돌아오지 않을 이름이었다. 그는 잠시 목구멍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어 망 연히 서 있었다. 그를 미칠 듯한 심정으로 몰고가는 그 뜨거운 느 낌의 정체는 역시 그리움이었다. 다만 자신을 살리고자 바닥을 알몸으로 기던 천리단옥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가슴은 불꽃으로 지지는 듯 아파왔다. '살아 있기라도 했으면......!' 천무영은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램인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읊조리 고 있었다. 사실 그로서는 천리단옥이 설사 그 자리에서 북궁현리 에게 직접적으로 능욕을 당했다 해도 그녀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죽음으로써 천무영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고, 그 로 인해 그의 눈언저리가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단옥, 너는 고결하다. 어떤 이유로 자진을 했건.' 그의 어깨가 일순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분노가 내부에서 거세게 타오른 것도 그때였다. 악다문 그의 이빨 사이로 짧은 부르짖음이 새어나왔다. "북궁현리!" 팍! 가벼운 음향과 함께 탑신의 한귀퉁이가 움푹 꺼져 들어갔다. 천무 영이 부지중 공력을 주입해 일 장을 내뻗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단단하기 그지없는 석탑에 선명한 장인이 새겨 졌다. 그 깊이는 무려 다섯 치에 이르고 있었다. "빚은 갚겠다, 언제고!" 천무영의 눈은 어느덧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는 어딘가로 섬전처럼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 직후, 그 자리에는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칠흑 같은 흑삼을 걸친 청년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이란 것이 없어 보였다. 냉막하달지, 무정(無情)하달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감한 표정의 소유자였다. 용모는 평범했다. 이렇다할 개성이라곤 없어 하루에도 수없이 스 쳐지날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누굴까? 저자는." 흑삼청년은 천무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음성마저도 억양이 없어 무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의 얼굴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던 그의 표정이 몹시도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 현상은 가느다란 신음성으로 이어졌다. "으음!" 흑삼청년의 시선은 탑신에 찍힌 장인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눈에 경악과 회의를 담은 채 나직이 읊조렸다. "이렇듯 높은 공력을 지닌 자가 있다니......." 그의 미간에는 언뜻 두려움이 스치기도 했다. 철자구가 경영하던 병기점(兵器店) 앞이다. 그곳에서 천무영은 또 다시 멍해지고 말았다. 병기점은 이미 헐려서 자취가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고, 거기에는 대신 엉뚱하게도 잡화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는 잡화점의 주인으로부터 철자구가 한때 미쳤었으며, 그 바람 에 자신이 만든 검을 들고 뛰쳐나가 사람들을 마구 베었다는 것, 그러다 애꾸눈의 사내에게 죽음을 당하고 검을 빼앗겼다는 사실 등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천무영은 대번에 애꾸눈의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 무흔(無痕)일 것이다.' 그는 가슴 한곳에서 써늘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일이 그리 되었다면 철노인이 만든 검은 신검이 아닐 것이다. 예 전에도 얼핏 느꼈었지만 그 검은 필경 귀검(鬼劍)이나 광검(狂劍) 이리라. 그리고 무흔은......!' 불안한 그의 뇌리에 그려지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통한을 되씹 으며 미친 듯이 괴검을 휘두르는 무흔의 모습이었다. '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한 번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 천일야 화원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 금모란이 아직도 있다면 그도 떠나 지는 않았을텐데.' 천무영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스읏....... 천일야화원의 담을 넘어 소리없이 빠져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그 는 몹시도 허탈한 심정으로 그곳을 나와야만 했다. '없다. 그녀도, 무흔도!' 세월의 흐름은 천무영의 주위에 아무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금모란이 기거하던 곳에서 본 것은 단지 이름 모를 한 기녀 가 사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사를 나누는 장면일 따름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금모란과 무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무영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이로써 최소한 개봉부에서의 과거는 지워져 버렸다. 아름다운 추억도, 쓰디 쓴 절망도 가슴 속에서만 존재할 뿐 주체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밖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짙은 어둠이 텅 빈 그의 내면에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스슷! 밤하늘을 가르면서도 천무영은 마음 둘 곳이 없어진 자신의 처지 가 너무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뼈저린 고독감과 함께 그의 심경에 찾아든 것은 일말의 회의였다. '나는...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는가?' 그는 내심 후회를 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장원으로 날아가고 있 었다. 은연중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스스스....... 그의 모습이 달무리처럼 뿌얘지더니 곧장 장원의 담장을 타넘고 있었다. 이어 수십 채의 전각 위를 스쳐지나며 그는 다시금 가슴 이 뭉클해져야만 했다. '후후... 이곳에서도 단옥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겠지?' 그가 옛사랑의 상처를 껴안은 채 잠입한 그곳은 천리단옥이 태어 나고 자랐던 천문세가(天文勢家)였다. ⑦ 별원(別院). 천문세가의 후원에 호젓하게 자리잡은 이 별원은 아담하면서도 정 취를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막 고개를 내민 달빛이 내리 비춰서 인지 전체적으로 그윽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다. 중앙부에 인공의 호수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影亭)이 그림처럼 잠겨 있었다. 둥그런 월교(月橋)로 이어지는 정자 곁으 로는 비단 잉어들이 조용히 유영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호수의 주변에는 도화림이 형성되어 있었으니, 외 부와 따로 독립된 이 별원은 그야말로 도원경이었다. 월영정 안이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자는 그저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을 듯 평범한 용모의 청년으로 무표정하기까지 해 호감을 갖기는 힘든 인상이었다. 그는 말없이 호면(湖面)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무영탑에 나타났던 흑삼청년의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문득 몽롱하게 변했다. "어디에 있을까? 그는."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뜻밖에도 매우 애잔한 기운을 품 고 있었다. 무정해 보이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벌써 삼 년이 지났건만 생사(生死)조차 알 수 없으니......." 길게 울리는 음성의 여운 뒤로 경미한 파공성이 일었다. 슷! 그 소리를 감지한 흑삼청년은 흠칫 놀랐다. 그의 눈에 별원 안으 로 스며드는 한 가닥 인영이 들어왔다. '이 밤중에 누가?' 그의 신형이 불시의 침입자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내당(內堂). 본래 빈청이었으나 용도를 변경시킨 듯했다. 그 안에서는 향연이 가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앞쪽으로 제단 (祭壇)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위패도 놓여 있었다. <천리단옥위패지신(千里壇玉位牌之身)> 위패에는 그렇게 씌여 있었다. 스슷! 천정에서 하나의 흐릿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백삼을 걸친 청년으로 위패를 보자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단옥......!" 떨리는 음성을 쏟아내는 그는 천무영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 자신 도 어쩌지 못하는 듯 뿌연 물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정말로 그대는 죽었군. 후후후......." 이는 몰랐던 사실이 아니건만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슬픔은 그의 영혼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단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그대......." 천무영은 손을 뻗어 위패를 잡았다. 차가왔다. 그리고 그 생경한 감촉은 그를 감상으로부터 깨어나 현 실로 되돌아오게 했다.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죽었듯 너와 함께 했던 나도 죽었다. 나는 예전의 내 가 아니다. 참담한 좌절의 끝에서 불패자(不敗者)가 되어야 하는 거대한 운명의 굴레를 지고 새로 태어났지." 그는 위패에서 손을 떼었다. "과거는 지나갔어, 단옥.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 들이 어서 이곳을 떠나라고 종용하고 있지." 천무영은 빙글 몸을 돌리다 말고 흠칫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 의 앞에는 한 명의 흑삼청년이 목석처럼 우뚝 서 있었다. ⑧ 그자의 냉막한 인상을 대하자 천무영은 퍼뜩 정신이 드는 한편, 자신을 꾸짖기에 이르렀다. '이 무슨 못난 꼴인가? 감상에 이끌려 어리석게도 지각조차 둔해 져 있었다니.' 그는 입술 끝을 일그러뜨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누구요? 친구는." 천무영의 물음에 흑삼청년이 억양없이 되물어 왔다. "그러는 친구는 누구요?" "내가 먼저 물었소이다." "객(客)이 무례하군. 허락도 없이 찾아들었으면 그쪽에서 먼저 신 분을 밝히는 것이 도리일텐데?" 천무영은 상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반문했다. "그럼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단 말이오?" 흑삼청년이 흰이를 약간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곳에 있겠소?" 천무영의 얼굴에는 은은한 노기가 드리워졌다. "당치도 않은! 내 알기로 그대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오." 흑삼청년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호오, 친구는 장담할 수 있소?" "그렇소. 천문세가의 소가주(少家主)라면 의당......." "후후... 저 위패의 주인을 말하는 것이오?" 흑삼청년은 무심히 물었으되, 천무영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맞소. 그녀는......." 그 말을 흑삼청년이 잘랐다. "그녀는 나의 의매(義妹)요." "흐음?" 천무영의 놀란 얼굴을 보며 흑삼청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못 믿겠다는 게요?" "못 믿겠다고는 하지 않았소. 의외였을 뿐." "당신은 내 의매에 대해 잘 아오?" 표정에 비해 역시 별다른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천무 영은 낮게 탄식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었소." 흑삼청년의 무감하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후후... 솔직히 말하리다. 그녀와 나는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깊이 사랑하던 사이였소." 천무영의 말은 흑삼청년을 꽤 놀라게 한 것 같았다. 약간 왜소해 보이는 그의 체구가 일시지간 가느다란 떨림을 보였다. "혹시... 친구의 성함은... 천무영이 아니오?" "나를 아시오?" "그렇소. 당신에 관해서라면... 내 의매에게서 몇 마디 들은 바가 있었소만... 당신의 모습은......!" 안면에 그늘이 깃든 천무영이 애써 담담히 대꾸했다. "삼 년의 세월은 짧지 않은 것이었소. 그동안 몇 가지 재주를 터 득하여 본 모습을 감추고 있을 따름이외다." "으음! 미처 몰랐소이다." 침음성을 흘리는 흑삼청년에게 그는 물었다. "이제는 귀하가 밝힐 차례요.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의오라버니 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천무영이 의혹을 내비치자 흑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을 게요. 나는 오래 전부터 천문세가에 몸담고 있기 는 했지만 그녀가 죽고 나서야 양부님의 결정에 따라 천리가(千里 家)의 양자가 되었소. 성도 그때에 바뀌었소이다. 천리단검(千里 壇劍)이라 불러주시오." "천리단검......." 천무영은 낮게 그 이름을 되뇌이더니 불쑥 물었다. "그녀의 무덤은 어디에 있소?" 천리단검은 난감한 듯 쓴 입맛을 다셨다. "없소." "없다니?" "의매의 유언에 따라 그리 된 것이오. 자신의 시신을 화장(火葬) 하여 황하(黃河)에 뿌려달라고 했었소." 천무영은 일순 전신에 힘이란 힘은 모조리 빠져버리는 듯한 느낌 이 들었다. 그는 탄식하듯 혼잣말로 읊조렸다. "철저하군.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일이라곤 없으니." 천리단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가 않소." '왜......?' 천무영이 눈으로 묻자 그는 종전과는 비교가 될 만큼 확고한 음성 으로 답했다. "내 옛날에 들은 기억이 나오. 의매는 당신이 꿈에라도 천하제일 인(天下第一人)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소." 천무영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천리단검의 말이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쑤셔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극단의 모욕에 대한 자위수단만은 아니었을 터인 즉, 친구는 필히 그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게요." "우우......." 천무영은 낮게 울리는 천리단검의 음성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그의 뇌리에 확연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문관 넘어 대과벽(大戈壁)이었다. 곳곳에 웅대한 모래벽을 이룬 대사막,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 불의 혓바닥인 양 전신을 휘감아 오던 뜨거운 열기....... 그 가운데서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야 했다. 버려진 땅, 패배자들만이 모여있는 혹서(酷暑)의 오지에서 그는 불패의 초강자가 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쌓았던 것이다. 당시 그가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 뿐이었다. ⑨ - 태양을 베어라, 대과벽을 점령해야 하느니! - 네 일신에 관한 것들은 전부 잊어라. 너의 어깨에는 은자(隱者) 들의 여망을 달성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지워져 있다. 천무영은 온통 모래뿐인 대과벽에서 시시때때로 엄습해오는 자기 연민과도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 왜 꼭 나여야 했는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버린 고통들로 인해 그 질문은 끊임없이 뇌 리를 맴돌았고, 그때마다 그는 무너지려는 자신을 붙들어 세우고 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곤 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강자가 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며 자신을 포함한 은자들의 숙원을 걸머지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명제가 놓여 있었다. 아니, 다 른 것 같으나 실은 그의 운명과 일맥상통하는. 하여 그 명제에 대해 그는 새롭게 정의했다. '단옥, 그간의 고통은 결과적으로 너와도 무관하지 않구나. 내 너 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천하제일인에 도전해 보겠다.' 천무영은 씨익 웃더니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 시대의 최강자가 누구요?" 천리단검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그의 등을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오? 그건." "말 그대로요. 천리형은 정말로 이 시대의 최강자가 누구라고 생 각하시오?" 거듭되는 물음에 천리단검은 눈썹을 모았다. "글쎄, 그것이......." 그가 대답을 망설이자 천무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천금성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소?" "맞소. 천금성주 외에는 달리 거론할 사람이 없소이다." 천무영은 돌아보지도 않고 간단히 말했다. "내가 그를 꺾겠소." "귀하......!" 천리단검은 몹시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천무영은 그의 표정을 짐작했는지 낮게 웃었다. "후후후... 지금은 무모하게 들리겠지만 두고 보시오. 내 반드시 그를 꺾어 단옥의 혼백을 위로하겠소." "그... 그런 만용은......." 천무영은 담담한 음성으로 상대의 말을 가로챘다. "만용이 아니외다. 사실 내 목표는 그 이상이니까." "그럼?" 천리단검의 무심한 얼굴이 급기야 하얗게 질렸다. "천리형은 무림고래(武林古來)의 최강자를 기억하시오?" "맙소사! 천부......?" "그렇소, 나의 최후 대적자는 천부외다." 천리단검은 할 말을 잃은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전해오는 느낌으로 그의 반응을 감지한 천무영이 부언했다. "이건 단지 천리형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대서가 아니라 내 운명이 기도 하오. 처절한 패배로 인해 일생을 좌절과 기다림으로 보낸 분들이 계시오. 그분들의 염원이 천부를 꺾는 것이었소. 나는 그 분들에 의해 재탄생되어 무림에 나왔소이다." 천리단검의 눈이 한껏 크게 치떠졌다. "그... 그렇다면......!" 천무영은 여전히 담담하게 그 말을 받았다. "이제야 내 뜻이 천리형에게 전달된 것 같구려. 어쨌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내게 또 하나의 명제를 안겨주어서." "으음!" 천리단검은 신음을 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뜻밖 의 말을 들어서인지 그는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었다. '커 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무영. 그는 빈청을 나서서 인공호수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는 조금치의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아 자신의 집 안을 거 닐고 있는 듯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처음 와보지만 이곳의 지리를 꽤 잘 알고 있소. 혹시 그 까 닭을 아시오?" 천리단검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천무영은 애 초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상대의 반응은 개의치 않고 혼 자서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단옥으로부터 이곳에 관한 얘기를 백 번도 넘게 들었기 때문이오. 그녀와 나는 무척 많은 얘기를 나누었소." 천무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언젠가 그녀는 나를 초대하겠다고도 했었소. 후후후......." "......!" "지금은 다 소용이 없는 얘기가 되어 버렸소만 나는 아직도 그녀 가 여기서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오. 그것도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오이다." 천리단검의 일신이 문득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떨림을 보였다. 그 러나 꾹 다물린 그의 입은 좀체로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월교를 건너고 있었다. 천무영이 달빛에 비치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불쑥 말했다. "이상하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천리형에게는 낯설다는 생 각이 들지 않소. 흡사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하외다." 그는 빙글 돌아서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렇지만 공사(公私)는 분명한 법, 잊지 마시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차후로 적이 될지도 모르겠소이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천리단검이 그제서야 입을 뗐다. "맞는 말이오. 나는 천문세가의 소가주요. 천금성 오대가신(五大 家臣) 중 하나에 속해있단 얘기외다." 천무영은 입술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되었소, 뜻이 금방 통해서." "여부가 있겠소?" "후후... 그건 내가 단옥을 사랑한 것과도 무관한 일이오. 어차피 나는 그녀와 가문을 별개로 취급해 왔으니까." "그 점은 진즉부터 의매에게 들어 알고 있소이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덧붙여 말했다. "내 언제고 천문세가에 두 번은 양보하겠소. 이는 나로 인해 천금 성의 셋째 제자를 사위로 맞이하지 못한 것과 단옥이 목숨을 잃게 된데 대해 미안한 마음때문이오." 천리단검은 이의없이 수긍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럼 또 봅시다." 천무영은 말을 마치자 수직으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슈욱! 그는 달빛 한가운데로 까만 점이 되어 스며드는 듯하더니 그나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천리단검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 세차게 몸을 떨었다.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억눌렀던 격정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천무영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는 불현듯 눈물 한 방울을 발치께로 뚝 떨구었다. 그가 무엇때문에 우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감정의 파고가 그만큼 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천리단검은 곧 특유의 무표정으로 되 돌아갔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섰다. 천문세가의 양자로 들어왔다는 청년 천리단검, 그에게는 과연 어 떤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정확한 정체는 무엇인지? 밤은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배처럼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 무영탑 2권 제14장 진실(眞實)은 어디서도 통한다 ① 북빙남화(北氷南火). 언제부터인지 남북으로 중원을 벗어난 오지(奧地)에 무학 방면에 서 상극(相極)에 해당되는 두 문파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들 전설적인 양대 문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북해의 관음빙모곡(觀音氷母谷)과 남해의 화룡도(火龍島). 이 두 문파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물과 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양립(兩立)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관음빙모곡과 화룡도는 천 년간을 불공대천의 원수 사이였다. 중원을 가운데 두고 극과 극인 위치에 있어 서로 의식할 필요도 없어 보이건만 그들은 그처럼 세불양립을 주장했고, 그 이유로는 무학의 길이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이른바 극음빙한지기(極陰氷寒之氣)와 극양열화지기(極陽熱火之 氣), 이는 피차에 치명적이리만큼 상극이었으므로. 때문에 관음빙모곡과 화룡도의 제자들은 대대로 숙적이었다. 그들 은 상대를 경원하기도 했지만 일편으론 몹시 두려워하여 각기 중 원 땅을 경계로 삼은 채 한 발도 나서지 않았다. 휘이이잉―! 바람이 마구 불어댄다. 살을 에일 듯한 한풍(寒風)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빙천설지(氷天雪地),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막막한 지평선과 눈, 그리고 얼음뿐이었다. 이곳을 일컬어 사람들은 통상 북해(北海)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 로 눈과 얼음의 바다였기에. 황량한 북해의 얼음벌판에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났다. 약관을 다소 벗어난 듯 보이는 그는 일신에 얇은 백삼 한 벌만을 입고 있었다. 뼈를 저미는 이 혹한에 달랑 홑겹으로 된 백삼이라 니, 보는 이가 차라리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백삼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다는 듯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여유있게 지나쳐가고 있었다. 휘이잉― 윙―! 설지를 할퀴는 한풍에는 얼음가루가 섞여 있어 자욱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쯤이면 추위도 보통 기세가 아니련만 청년의 손에는 뜻밖에도 한 자루의 섭선이 쥐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혹한의 빙천설지에서 섭선을 들고 있는 그를 보았다면 필시 정신이 온전한가고 의심부터 할 것이다. 백삼청년이 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내 이제야 북해의 광활함을 실감하겠구나. 아무리 달려도 도무지 끝이란 것이 나오지 않으니." 그는 천무영이었다. "찰극관음파미륵대산(察克觀音破彌勒大山)은 아직도 멀었을까? 한 참 오기는 왔는데." 천무영은 아득하게 펼쳐진 눈과 얼음의 바다를 바라보며 사뭇 막 막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스스로 말한 바대로 그는 관음빙모 곡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예로부터 관음빙모곡에는 남자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 만 그렇다고 얕보아서는 안된다. 여인들로만 이루어졌다는 그 문 파에는 무서운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 관음빙모곡은 금남(禁男)의 세계다. 그곳에서는 십 년에 한 번 씩 자질이 우수한 청년들을 납치해 갔는데, 빙모곡의 여인들과 관 계를 갖게 한 뒤 모조리 죽였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이도 사내 아이면 빙담(氷潭)에 던져버리고 여아만을 거둔다. 그것은 실로 냉혹비정한 전통이었다. 그러한 곳을 천무영이 찾아 가는 데는 달리 까닭이 있었다. '현음(玄陰) 노선배는 내게 부탁하셨다. 자신의 절기로 빙모곡을 꺾어 달라고. 빙모곡의 지보인 만년지정금란화(萬年地精金蘭花)의 빙정(氷精)을 취하라고도 하셨지.' 그는 눈을 들어 드넓은 빙원을 둘러보았다. 만년지정금란화. 천지간에서 극음(極陰)의 꽃으로 북해의 빙모담(氷母潭)에서만 자 생하며, 만 년이 지나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를 빙정(氷精)이라 하는데 만년지정금란화는 그 자체가 극 음무학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무상의 지보였다. 천무영은 계속 인내를 가지고 설지를 걸었다. 그의 뇌리에는 은자 십천 중 한 명인 현음곤월신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은 사도의 인물이었지만 실은 정사를 가리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평생을 통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극음무학만을 익혀 오셨지. 그때문에 최강자가 되시기도 했고.' 천무영은 관음빙모곡의 고수들과 겨뤄보지 못해 크게 유감인 외곬 수의 인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분께선 극음지체로 빙정을 복용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 - 무영, 네가 만일 빙모곡을 꺾어 준다면 현음문(玄陰門)으로서는 무한한 영광이다. 그런즉 내 빙정을 양보하지. 장담한다만 그것을 복용하면 너는 최소한 극음무학에서는 고금제일인이 될 것이다. 그럼 행운을 빌겠다. 크크크....... ② 천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염려마십시오, 현음노선배. 당신은 평생토록 오직 한 번, 천부에 패했을 뿐입니다. 더 이상 패배의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상대가 빙모곡이든, 그 외의 다른 어느 곳이든.' 마음을 굳게 다지며 다시 발길을 옮겼으되, 이따금씩 눈발 섞인 한풍이 모질게 휘몰아쳐 그의 방향감각을 위협했다. 화경에 이른 내공 덕에 칼날처럼 매서운 한파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으나 그런 류의 위협에는 그도 흔들렸다. 우선은 시야가 자꾸 가로막히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전진이 다소 더디어졌을 때였다. 두두두두......! 느닷없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천무영도 그 소리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적없는 이 설원에 갑자기 웬......?' 그는 내심 의아했으나 그대로 말없이 걸었다. 그 사이, 말발굽소 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그의 등뒤까지 이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교갈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뭣하는 놈이냐?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며 채찍이 날았다. 천무영은 그 기척을 알면 서도 불쾌감이 들어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았다. 파앗! 채찍은 급기야 그의 목을 휘감았고, 여인의 놀란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앗!" 투두둑......! 놀랍게도 가죽으로 만들어진 말채찍이 썩은 새끼줄처럼 토막토막 끊겨져 나갔던 것이다. "호호호... 제법 하는 놈이었군. 얘들아! 이 작자도 잡아가자. 필 경 좋은 재목일 것이다." 여인의 요란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마차가 멈추어섰다. 덜컹! 그 뒤로 옷자락 스치는 음향도 들려왔다. 휙! 휘휙―! 몇몇의 인영들이 천무영의 주위로 분분히 날아내리고 있었다. 그 인영들은 네 명으로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기세도 당당했 거니와 삽시에 그를 네 방위에서 포위해 버렸다. 천무영은 네 여인을 차례로 힐끗 둘러보았다. 뜻밖에도 그녀들은 하나같이 앳된 소녀들이었다. 기껏해야 십오, 륙 세 남짓해 보였 으며 저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연한 것은 그녀들의 차림새였다. 그녀들은 팔다리를 다 드러낸 채 겨우 가슴과 엉덩이 부분만을 흰 가죽으로 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차림으로 어찌 뼈를 저미는 혹한을 견딜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천무영은 짚히는 바가 있어 중얼거렸다. '이 여인들은 틀림없이 빙모곡 출신일 것이다. 선천적인 체질과 극음무공을 익힌 탓에 추위를 타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비로소 빙글 돌아섰다. 그러자 전면에 두 대의 대형마차가 멈추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서 삼십 세 가량 된 한 여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는 터질 듯한 몸매를 착 달라붙는 가죽옷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손 에는 여러 조각으로 끊어진 채찍이 들려 있었다. 마차는 한 대당 다섯 명씩의 여인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그것 은 일반적인 개념의 마차가 아니었다. 죄인을 호송하듯 굵고 단단 한 철책(鐵柵)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철책 안에는 십여 명의 청년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멀 쩡한 허우대에 얼굴도 미끈하게 생긴 위인들이었다. 짐승처럼 웅 크리고 있는 그들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천무영은 청년들의 그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음, 소문은 사실이었군. 저들은 생산을 위해 십 년에 한 번씩 납 치되어 간다는 도구들이겠지. 빙모곡의 여인들로 하여금 아이를 잉태하게 만드는.' 여기까지 생각한 천무영은 재삼 설원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는 계획을 수 정했는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때마침 아슬아슬한 옷차림을 한 네 명의 소녀들이 그를 향해 다가 섰다. 그녀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쳇! 생긴 건 너무 평범하군." "그래도 누가 아니? 그 방면에서는 끝내줄지." "호호호... 그 말은 맞아. 그림이 좋다고 꼭 제 구실을 다 하는 건 아니더라구." 그녀들을 향해 채찍을 들고 있던 여인이 명을 내렸다. "얘들아, 그만 떠들고 속히 그자를 처리해라. 다른 자들과 마찬가 지로 다치지 않게 사로잡아야 한다." "네!" "호호호호......." 네 명의 소녀들은 대답과 함께 깔깔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분위기 에 반해 그녀들의 동작만은 눈이 부시도록 민첩했다. 쐐애액! 파파파팟―! 소녀들은 팔다리를 쾌속하게 휘두르며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왔다. 네 개의 채찍이 영활한 뱀처럼 꿈틀거려 각각 천무영의 요혈을 노 리며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천무영도 쥐고 있던 섭선을 휘둘렀다. 팍! 파파팍! 연이은 격타음과 함께 소녀들이 휘두른 채찍은 일제히 튕겨져 나 가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냉소하 며 괴이한 수법으로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윙! 위잉―! 네 개의 채찍이 풍차처럼 휘돌며 천무영을 몰아붙였다. 그 바람에 그의 수비는 금세 무력하게 와해되었다. "으음......!" 천무영은 힘에 겨웠는지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소녀들 은 그때를 놓칠세라 더욱 무서운 기세로 덤벼 들었다. "좋다! 그 상태에서 쳐라." 우두머리 여인의 일갈이 떨어지는 찰나, 네 개의 채찍이 그물과도 같은 환영을 그리며 천무영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③ 파파팍―! "크윽!" 두 개의 채찍은 가까스로 튕겨냈으나 다른 두 개의 채찍은 여지없 이 천무영의 다리와 목을 휘감고 있었다. 결국 그는 빙판 위에 맥 없이 푹 쓰러지고 말았다. "호호호... 한 가닥 하는 줄 알았더니 쑥맥이었군. 얘들아, 뭣들 하느냐? 어서 싣고 가자." "넷!" 득의양양한 우두머리 여인의 외침이 있은 후, 소녀들은 즉시 쓰러 진 천무영을 향해 다가들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소녀가 허리를 굽혀 자신을 안아드는 것을 보았다. 불룩하게 솟은 두 개의 젖가슴이 가죽옷을 경계로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로 인해 그는 좋은 구경까지 했다. 어쩌겠는가? 안보려 해도 가죽옷이 터질까 불안할 만큼 팽팽한 젖 가슴과 그 사이의 계곡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후후... 내가 복이 많은가 보군.' 천무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뭉클하고 탄력이 넘치는 소녀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바 되 어 마차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우리에 갇힌 채 설원을 달리게 되었다. '북해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주위는 온통 자욱한 수증기로 차 있었다. 이른바 천연의 온천(溫泉)이다. 지하로부터 쉴새 없이 뜨거운 물 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천무영은 그 거대한 온천욕탕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다른 십여 명 의 청년들과 함께 억지로(?) 끌려온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바라던 대로 관음빙모곡에 무사히 입곡하게 되었으며 물에 몸을 푹 담근 채 주변 상황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십여 명의 청년들도 연신 겁먹은 눈초리로 사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혈도가 찍혔는지 손가 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교소성과 함께 십여 명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호호호호......!" 그녀들은 무방비 상태로 끌려온 청년들을 차례로 주욱 훑어보더니 눈가에 야릇한 빛을 띠었다. "시작하자." 한 여인의 말에 따라 그녀들은 각기 한 청년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호호... 귀여운 사람......!" "자, 괜찮으니 놀라지 말아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천무영은 당황해 마지 않았다. 설마하니 여인들이 여기서부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상대는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녀였고 와닿는 손길도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천무영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느낌이로군. 이대로 가봐야 주어 지는 것은 죽음뿐이거늘.' 그는 시선을 움직여 다른 청년들을 보았으며, 그들의 얼굴에서도 자신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사이, 여인은 재빠른 솜씨로 그의 옷을 전부 벗겨냈다. "아아!"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기에는 언뜻 듣기에도 안 타까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은 여인이 남자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사내의 탄탄한 몸을 마주 대하게 되자 일종의 연상작용이 일었던 것이다. 그녀는 흥분으로 인해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천무영의 가슴을 더 듬어갔다. 상대가 어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인의 그런 행동은 천무영을 더 할 수 없이 난감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와의 나이차를 감안하건대 그로서는 도저히 고분고 분하게 응해 주고 있을 입장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제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본색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므로. '쯧! 사람 바보되는 건 잠깐이군.' 천무영은 기가 막혀 혀를 차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으응......." 여인이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천무영의 가슴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은 서서히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점입가경이로군!' 중얼거리던 그는 일시지간 눈을 크게 휩떴다. '윽!' 우려하던 일은 마침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천무영은 낯이 뜨거워 져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여인을 내치고 싶은 그였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그는 극도의 인내를 발휘해 얼이 빠진 사람인양 표정 관리까지도 철저히 하고 있어야만 했다. '추잡한......!' 그가 더 참지 못하고 부르짖을 때, 여인이 그의 몸에 물을 끼얹었 다. 그녀는 씻어준다는 핑계로 그의 몸 구석구석을 한곳도 빼놓지 않고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각기 한 명씩 맡게 된 사 내의 알몸을 신나게 주무르고 있었다. "호호호... 너희들은 운이 좋았어." "그러게 말이야. 너희들은 본곡의 십대빙녀(十大氷女)와 일야(一 夜)를 보내게 되니까." "그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호호... 상상도 못할 게야. 본곡의 대표격인 미녀들이니까."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음성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어머, 어머! 이것 좀 봐. 대단하지 않아?" "정말, 흐응......!" 여인들은 저마다 달뜬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비 꼬기도 했다. 그 녀들은 접촉에 의한 자극으로 사내의 몸에서 일어나게 된 현상을 그런 식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빙모곡의 여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생 동안 단 한 번밖 에는 사내를 접하지 못한다. 그 한 번의 관계로 임신을 하고 아이 를 낳으면 그뿐이며, 그런 연후에는 영원히 사내라는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아야 한다. 현재 깔깔거리며 청년들을 목욕시키고 있는 미녀들은 작게는 이십 대 초반에서 많게는 삼십 세 정도까지도 있었으나 모두가 이미 한 번씩 생산(生産)의 경험이 있는 여인들이었다. 따라서 성(性)에 눈이 떠져 있는 그녀들로서는 건장한 사내의 몸 을 매만지다 보니 흥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녀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빙모곡의 지엄하고도 냉 혹한 규칙에 얽매여야만 한다. 그런즉 가능한 한 온천탕 속에서 최대치의 만족을 건지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④ 와중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여인들은 언제 떠들었냐 싶게 조용해져 있었다. 그녀들은 입을 열 었으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격렬한 숨결을 내뿜으 며 청년들을 애무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들에게 허용된 쾌락은 차라리 약소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야 고작 혼자 달아올 라 씨근덕거리는 데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천무영. 그는 어느덧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여인들이 제공하는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매우 우울한 기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를 담당한 여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녀도 다른 여인들과 똑같이 뜨거워진 몸을 그에게 밀착시킨 채 종전보다 더욱 부지런 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여인은 천무영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주위 를 둘러보며 짧게 외쳤다. "그만!" 어느 틈에 열이 식었는지 의외로 싸늘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아까와는 달리 찬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여타의 여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녀들도 한결같이 안면 을 차갑게 굳힌 채 청년들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시약실(施藥室)로 옮겨라." 여인의 명이 있자 청년들은 각기 몸을 씻겨주던 여인들의 품에 안 겨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시약실은 꽤 넓었다. 청년들은 알몸 그대로인 상태에서 돌침상에 눕혀졌다. 그런 연후, 담당하는 여인들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사십대 쯤의 노련해 보이는 여인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약실의 내부는 뭐라 형용키 어려운 기이한 약내음으로 가득 차 있 었다. 그곳에서 이른바 약물요법이 실시되었다. 청년들의 몸에는 유백색의 진득한 액체가 발라졌다. 그것은 성분 이 무엇인지 피부에 닿자마자 금세 체내로 흡수되었다. 다음으로 청년들은 여인들의 입을 통해 또다른 액체를 삼켜야 했 다. 전달방식도 그렇지만 그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천무 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것은.......' 그의 뇌리에는 은자천에서 천독모후(天毒母后)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독(毒)이 있다. 그것을 굳이 헤아리자면 팔만사천 종이나 된다. 개중에는 살을 썩게 하는 부시독(腐屍毒) 이 있는가 하면 뼈를 녹이는 식골독(蝕骨毒), 창자를 끊는 단장독 (斷腸毒) 등이 있는데 이런 류는 일차원적인 독이지. 그밖에도 미 혼독(迷魂毒)이나 사고(思考)를 마비시키는 마뇌독(麻腦毒), 최음 제로 쓰이는 춘독(春毒) 등도 있으니까. 독문의 고수인 천독모후는 적어도 그 방면에 있어서는 중원제일인 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천무영은 용독(用毒), 해독(解 毒), 활독(活毒) 등의 독술을 두루 익혔다. 심지어 그는 직접 수만 종에 달하는 독을 먹어본 적도 있어 이제 는 대충 맛만 보아도 독의 종류를 식별해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필요에 따라 그는 체내의 독을 한곳으로 몰아넣을 수도, 쉽사리 중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은 독의 대가인 천독모후가 자신의 전 독술을 아낌없이 천무 영에게 전수해 준 덕이었다. '이 독은 대막(大漠)의 전갈에게서 분비되는 정액분이다. 이것을 복용하면 전신의 기력이 다 소모될 때까지 정욕을 쏟아 붓다가 나 중에는 껍데기만 남은 채 죽게 된다.' 그는 빙모곡 여인들의 악랄함에 생각이 미치자 절로 심금이 떨려 왔다. 그리하여 마음을 굳게 먹는 한편, 체내에 들어와 있는 독을 모두 몸의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이어 그가 한 가지 묘안을 짜내고 있는 사이, 약물요법을 시행하 던 중년여인들이 할 일을 마친 듯 모두 밖으로 나갔다. 천무영의 신형이 번뜩 하고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그는 누워있는 청년들을 향해 십지(十指)를 튕겨냈다. 파파파팟―! 그의 지력은 즉시 청년들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그 직후, 약실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천무영은 태연하게 도로 자리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후후... 이들의 체내로 유입된 독을 모조리 기해혈(氣海穴)에 모 아 두었다. 독기는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할테니 적어도 이들이 복 상사(腹上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점혈만으로 그런 안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니 그것은 기이한 노릇 이었다. 어쨌든 천무영을 비롯한 열 명의 청년들은 또 한 번 여인 들에 의해 다른 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⑤ 방 안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신방(新房)이다. 화촉동방이라던가? 원앙촉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데다가 붉은 휘장이 바닥에 닿 도록 길게 늘어져 있다. 게다가 비단금침까지 깔려 있는 그 방은 여염집의 신방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천무영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초로(初老)에 접어든 듯 한 한 여인이 그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던 것이다.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저 막연히 이후의 사태를 기다리고 있던 천무영은 일순 쓴 웃음을 지었다. '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후후... 이러다간 정말로 신 부와 하룻밤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우습게 여겨져 그만 생각을 달리 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때마침 침상 머리맡의 원앙촉이 일렁이더니 방 안에 누군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아아!" 나타난 인영은 무엇때문인지 안타까운 한숨을 흘려냈다. 그 인영은 일신에 백의를 걸친 미녀였다. 나이는 십팔, 구 세 가 량 되어 보였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미녀들 중에서도 특별히 돋보이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피부가 얼음처럼 맑아 크고 까만 눈동자와 선명한 대조를 이 루었다. 또한 흑진주 같은 그 눈동자가 뿜어내는 빛은 정결한 심 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설지(雪地)랄지, 그녀에게서는 일견하기에도 티 한 점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읽혀졌다. 그런데 유리꽃인 양 투명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여인이 시름에 잠 긴 채 읊조리고 있었다. "정녕... 나도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단 말인가? 더러운 사내와 몸 을 섞고, 그로 인해 아이를 낳는......." 여인의 이름은 빙옥지(氷玉芝)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처음 부터 천무영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본곡의 규칙은 도무지 이해가 안돼. 제자야 외부에서 어린 계집 애를 영입시켜도 되는 일이거늘 왜 꼭 이래야 하지?" 빙옥지의 음성은 한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행동에 대해 극도의 회의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탓인지 그녀의 옆 얼굴은 얼음을 깎아 만든 듯 비정할 정도로 차가와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 지 갑자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렇게 육신을 더럽힐 바에야 차라리......!" 그녀의 눈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그녀는 희디 흰 소수(素手)를 치 켜 들더니 서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내 이자를 죽이고 죄를 빌리라. 빙모동에서의 폐관 십 년도 사양 치 않겠다." 우우우웅―! 그녀의 장심에 계란만한 반흔(半痕)이 생기는가 싶은 순간, 방 안 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팟! 소수는 그 상태로 거침없이 천무영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맞았다 간 전신이 얼음덩이가 되어 즉사하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후... 첫날밤의 신랑접대 치곤 너무 후하군." 천무영이 웃으며 침상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런......!" 빙옥지는 뜻밖의 사태에 경악성을 발했다. 더우기 상대가 발가벗 고 있다 보니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민망하여 눈을 질끈 감았으되, 관음빙혼신공(觀音氷魂神 功)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인지라 공력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소수는 여지없이 천무영의 가슴을 내리쳤다. 펑! 폭음이 울렸으나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소수가 상 대에게 적중되는 것은 그녀도 틀림없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솜덩이를 친 것 같은 느낌은 어쩌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신부, 후후... 어디 얼굴이나 좀 봅시다." 한 가닥 웃음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흡!" 그녀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완강하고 억센 사내의 팔이 자신의 몸을 당겨 안았기 때문이었다. "놓아라! 놔―!" 그녀는 가히 발악에 가깝도록 몸부림을 쳤으나 의지와는 별개로 사내의 품에 파묻히게 되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천무영은 짐짓 빙옥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호오! 기세에 비해 얼굴은 무척 아름답군. 난 또 하도 사납게 굴 기에 박박 얽고 험상궂을 줄 알았지." 그는 자세를 바꾸어 상대를 넘어뜨리고는 그 위로 올랐다. "주... 죽일 놈! 감히......!" 빙옥지는 분노하여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더 말을 잇지는 못 했다. 천무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던 것이다. "으읍... 읍!"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도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수록 그녀의 입술은 더 욱 더 깊숙이 함락되어 갈 따름이었으니까. 생경한 사내의 체취와 더불어 뭉클하고 뜨거운 그 무엇이 그녀의 입 안을 꽉 채우며 밀려들었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빙옥지는 일시지간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당하는 그 일은 수치감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녀는 가 히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 독랄하게 부르짖었다. '너!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야. 기필코......!' 반면에 천무영은 나름대로 계산이 서 있었다. 지금 그의 뇌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마마대불사의 잠언(?)이었다. - 사람을 굴복시키려면 몸과 마음을 모두 점령해야 한다. ⑥ 마마대불사로 말하자면 천축의 마공과 아울러 좌도방문의 음양방 중비기(陰陽房中秘技)에도 달통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불법의 해석에도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 색(色)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술과 고기도 일체 가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는 숱한 마도병책(魔道兵策)들이 담겨 있었다. 살아있 는 마병서(魔兵書)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 친구를 사귀되 마음의 삼분(三分)은 항상 감추어라. 특히 적에 대해 알지 못할 시엔 실력을 반만 내보이도록 하라. 그러나 일단 틈을 발견하게 되면 무조건 짓밟아라. 그 가운데는 여정론(女征論)도 포함되어 있었다. - 여인은 함락되어야 다루기가 쉬워진다. 그쯤 되면 사정없이 학 대해도 무방하다. 대개의 여인들이 오히려 그것을 즐기니까. 콧대 가 높은 여인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하다. '후후... 그 희안한 명언들을 한 번 시험해 보리다.' 천무영은 내심 짓궂게 웃는 한편, 우선적으로 마마대불사에게서 배운 기술부터 한 가지씩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빙옥지의 입술을 타고 넘어가 구석구석을 뜨겁게 우롱 했는가 하면, 그의 한손은 어느새 빙옥지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가 봉긋한 융기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은 그녀의 하의 속으로 침범하여 허벅지 어림을 더듬더듬....... "흑......!" 긴 입맞춤이 끝나자 빙옥지는 애써 억눌렀던 오열을 터뜨렸다. 하 지만 그녀의 흐느낌에 열기가 묻어 있는 것을 느낀 천무영은 그녀 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여체를 점령해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호흡과 함께 가 볍게 시작한 그의 애무는 점차 농밀하고 섬세한 것으로 발전하여 빙옥지의 일신에 불꽃을 당겨놓고 있었다. "흐윽!" 급기야 빙옥지의 울음소리가 야릇한 기성으로 화했다. 그러는 사 이에 반나(半裸)가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천무영의 목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고무공처럼 팽팽한 그녀의 젖가슴이 천무영의 가슴팍에 눌려 모양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활짝 열어 뱀 처럼 천무영을 휘감아간 것은 그때였다. 빙옥지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마저도 망각해가고 있었다. 단지 열 망을 주체하지 못해 몸부림을 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바도 없건만 무공을 익히는 것 외에 육체가 원하 는 행위를 일시에 깨달아버린 그녀는 온몸이 짜릿해지는 희열과 쾌감으로 인해 정신까지 몽롱해져 있었다. "하아아아......!"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숨가쁜 신음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창 달아올라 있는 그 녀의 귀로 흡사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훗! 고결한 척 하더니 그대도 별 수 없군." 두마디도 필요 없었다. 빙옥지는 충격을 입고 싸늘하게 굳어지더 니 정신이 들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으흐흐흑―!" 황홀경에서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그녀는 연신 눈물 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감이 그녀의 가 슴에 거센 회오리를 일으켜 놓았던 것이다. 천무영은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 여자가 울 때는 실컷 울도록 놔 두어라. 울음이 멎은 후에 부드 럽게 대해 주어라. 그러면 그녀는 너의 것이 된다. 마마대법사는 확실히 연구대상이었다. 그처럼 장대한 체구의 인물 이 어떻게 여인에 대해 그다지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 천무영 으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울러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키만 해도 구 척이 넘는 분이... 후후.......' ⑦ 한참 후에야 빙옥지의 울음은 잦아 들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 렸던 천무영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빙옥지는 그의 손길이 와닿자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움츠러 들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천무영의 얼굴 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 뭣하는 사람이죠?"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그걸 몰라서 묻소? 빙모곡에 씨를 제공하는 도구." 빙옥지의 얼굴이 은연중 스르르 붉어졌다. "당신은 본곡의 행위를 비판하고 있군요." "너무 잔혹하니까. 그건 이곳의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요. 그런 식으로 아이나 생산하는 건 불행한 일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이곳에 들어왔느냐고 묻는 것이오?" 빙옥지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스스로 잠입해온 것 같아요. 분명 약을 먹었을텐 데 아무렇지도 않고, 혈도도 풀려 있잖아요." "후후......." 천무영은 웃음 뒤로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이곳의 제자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오?" 빙옥지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삼백 명 정도예요." "흠, 그녀들은 모두 과부이거나 아니면 처녀들이겠지?" 천무영은 난감해 있는 빙옥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소." 빙옥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까만 보석과도 같은 그녀의 눈동자 가 기쁨으로 인해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말, 정말인가요?" "그렇소. 그리고 이렇듯 아름다운 처녀가 독신으로 늙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라 생각하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빙옥지는 고개를 젓더니 자못 심각하게 덧붙였다. "소녀만 해도 본곡의 법칙에 익숙해져 있어요. 아이를 생산해야 하는 부담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천무영이 그 말을 가로챘다. "아닐텐데?" "네?" "얼마 전까지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향후로는 아닐 게요. 그래, 지 금도 빙소저는 남자라면 무조건 더럽다고 느껴지오?" "그... 그건....... 몰라욧!" 빙옥지는 할 말을 잃어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만 두 손으로 얼굴 을 감싸쥐고 말았다. 그녀를 향해 천무영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바로 그것이오. 그게 인간의 본성이오. 남자건 여자건 서로를 배척하는 건 천리(天理)를 역행하는 짓이오." "으음!" 신음을 흘리는 빙옥지에게 그는 말했다. "빙소저, 나를 좀 도와주시오." "무엇을?" "내가 빙모곡의 금법(禁法)을 한 번 풀어보겠소." "네엣?" 빙옥지는 놀란 나머지 커다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에 천무영 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신있는 어조로 부언했다. "소위 금남지처(禁男之處)인 이곳에 남자들이 들어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겠단 말이오." "그... 그건 불가능해요." 빙옥지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 되어 도리질을 해댔다. "후후... 그럼 빙소저는 역시 평생을 혼자 살겠단 말이오?" 천무영은 손을 들어 빙옥지의 젖가슴을 가만히 쓸었다. 그의 손가 락이 도드라진 유실을 건드리자 빙옥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꿈 틀하며 낮은 신음을 발했다. "왜 말을 못하오?" 재차 물어도 그녀는 한숨을 내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빙모곡의 금법은 누가 세운 것이오?" "그건... 조사이신 빙천모모(氷天母母)께서 정하셨어요." "조사의 금법을 깨는 방법은 없소?" "한 가지가 있기는 한데......." "그게 무엇이오?" 빙옥지는 타오르는 뺨을 천무영의 가슴에 살며시 기댔다. "쉽지 않을 거예요. 그 일은 본곡의 세 관문을 꺾어야 가능하니까 요. 물론 그렇게만 되면 금법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곡을 뜻대로 움직일 수도 있지요." 천무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그 삼관(三關)에 대해 내게 말해 주겠소?" "그러죠. 첫번째는 빙모동의 만년빙혼굴(萬年氷魂窟)을 통과하는 것이에요." "두번째는?" "빙모구장로(氷母九長老)를 격파해야 해요." "그녀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요?" "무척 높아요. 그분들은 내공만 해도 저마다 이 갑자가 넘어요. 본곡에서 최고령인 기인들이세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천무영은 빙옥지의 둔부를 어루만져 주려다 관두었다. 의도한 바 가 있으니 의당 마마대불사의 지론에 따라야겠지만 그녀를 상대로 더 이상의 희롱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곡주를 쓰러뜨리는 일이에요." "거기까지가 전부요?" 그 말에 빙옥지가 정색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절대 가볍게 생각해선 안돼요. 곡주님의 무학은 가히 입신지경에 이르러 있어요. 본곡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분을 하늘처럼 여기 며 섬겨 왔지요. 소녀도 예외는 아니구요." "고맙소, 얘기해 주어서." 천무영도 남자다. 그 자신도 앞서 말한 천리에 따라 빙옥지가 가 진 친화력(親和力)에 이끌리고 있었다. 더구나 알몸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로써 여체에 바짝 밀착이 되어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능히 빙옥지를 취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 런 충동도 없지는 않았다. 아마도 손만 뻗으면 그대로 나긋하고 부드러운 여체가 저항없이 품 안에 안겨올 것이다. 그러나 천무영은 마음을 다스려 욕망을 억제했다. 그는 지금 두 은자의 말을 함께 뇌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 지배자가 되려면 여인보다 먼저 달아올라서는 안되며, 끌려가서 도 안된다. 자신은 항상 얼음같이 차가워야 하지. ⑧ 이는 마마대법사의 마병법 중 또다른 여정론이나 천무영에게는 부 합되지 않는 논리였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연민지심을 발견 하고는 빙옥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빙소저, 그만 일어납시다. 기왕에 작정한 일이니 시간을 지체해 서 좋을 건 없을 듯하오." "네." 빙옥지는 얼굴을 붉히며 신색을 추스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일 말의 두려움이 깃든 음성으로 물어왔다. "과연 제가 하는 일이 옳은 걸까요?" "아직도 확신이 안서오?" 천무영은 되묻더니 생각한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소저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그대는 외인(外 人)과 결탁하여 사문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사문을 옳은 길로 이끌려 하고 있소." "으음!" "낭자가 아무 남자에게나 살의(殺意)를 품던 습관이 고쳐진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 빙옥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정녕 저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드시는군요." 천무영은 빙그레 웃었다. "자, 마음을 굳게 먹고 내게 옷을 갖다 주시오." "네." 빙옥지도 어설프게나마 미소를 보이며 일어섰다. 그녀를 보며 천 무영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마대법사의 마병법이 아니라도 이심통령제혼술(以心通靈制 魂術)을 전개하면 빙옥지 쯤은 얼마든지 뜻대로 부릴 수가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쉬운 방법을 마다했으며 그나마도 중 도에서 노선을 바꾸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광한상인의 말때문이었다. - 기계(奇計)가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항상 진실을 동경하지. 따 라서 진정한 지인(知人)을 얻으려면 술수를 쓰지 말고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천무영은 빙옥지를 향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대는 마음이 바르고 현명한 여인이오. 빙모곡의 여인들이 더 이상 불행을 겪지 않으려면 그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부 디 나를 도와 주시오." 담담한 그의 음성은 빙옥지의 가슴에 아무런 여과없이 스며들었 다. 그녀는 옷을 내밀며 천무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에 종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차 올랐다. "왜... 이제야 나타나셨죠?" "후후......." 천무영은 옷을 몸에 걸치며 쓰게 웃었다. "정말로 사랑을 하고, 인생을 배우느라 그랬소." "아!" 빙옥지는 탄성을 발하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 물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죠?" 천무영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보다 상대를 더 사랑하는 것." "으음, 그럼...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겠군요?" 의외로 예리한 질문에 그는 비감을 웃음으로 풀어냈다. "물론이오. 상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지." "아아! 아름다운 거군요. 사랑이란......!" 빙옥지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은 채 꿈꾸듯 몽롱해 졌다. 그 광경을 본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아주... 고통스럽기도 한 거라오." 빙옥지가 정신이 번쩍 든 듯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왜 그렇죠?" "후후후......." 천무영은 또 웃었으나 답변에는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음, 상대가 내 마음과 같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먼저 죽어버 려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 "안돼요!" 빙옥지는 비명처럼 외치며 펄쩍 뛰듯 그에게 안겨왔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요. 무서워요, 너무......!" 그녀는 정말로 그의 품에서 몸을 으스스 떨고 있었다. '일 났군!' 천무영은 비로소 자신이 난감한 처지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천리단옥이 아닌 다른 여인을 맞아들일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빙소저." 천무영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는 한편, 그녀를 몸으로부터 떼어 냈다. 그는 한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랑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오. 육체적인 수단이 란 그저 그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고 말이오." 빙옥지가 처음으로 그의 말에 반발을 보였다. "그건 틀려요!" "흐음?" 그녀는 이상하게도 다음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 가 한 짓이란 돌아서서 심중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난 당신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당신이 좋단 말이에요. 이런 것도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랬다. 사랑은 학습(學習)이 아니었다. 일상처럼 자연스레 알아 가고 느낌으로 확인하게 되는 미묘한 것이므로. ⑨ 예측도 불가하다. 그녀가 잠깐 사이에 천무영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노라고 스스로를 향해 부 르짖게 될 줄을 과연 누가 알았겠는가? 빙옥지는 눈에서 재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분 말은 다 맞나 봐. 사랑은 고통스러운 거라더니.' 그녀는 이십여 년 동안 무감했던 빙심을 여지없이 녹여낸 한 사람 에 대해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물을 씻고 돌아서는 빙옥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 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야무지게 결심한다. '난 꼭... 이분을 얻고 말 거야.' 그녀는 문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참! 당신의 성함은요?"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무영(無影), 천무영이오." 스슷! 빙옥지는 문을 나서자 가볍게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천무영은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천정에 매달린 궁등에 시선을 둔 채 자문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사실 그가 빙모곡에 온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다. 현음곤월신마의 부탁을 받은 그는 극음무학을 인증하고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을 탈취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런데 그는 원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엉뚱하게도 빙모곡의 금법 을 뜯어 고치려 하고 있었다. 그런즉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절로 실소가 터져나올 노릇이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시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이왕 내친 걸음인데 어쩌겠는가? 빙모곡이 늙은 과부들의 무덤이 되는 건 현음 노선배도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게야." 어떤 연유에서든 시작을 했으니 마땅히 끝을 봐야만 했다. 천무영은 짐짓 맥이 빠지는 듯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지만 팔다리를 쭉 뻗고 누운 그에게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전신 구석구석에 죽을 때까지 써도 못다 쓸 만큼 무궁무진한 잠력 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것이다. ■ 무영탑 2권 제15장 그는 단지 은공(恩公)이었다 ① 관음빙모곡(觀音氷母谷)은 찰극관음파미륵대산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곡내의 기후는 따스했다. 특이한 지세가 직접 적으로 영향을 미쳐 항상 봄날씨처럼 포근했던 것이다. 덕분에 푸른 초지(草地)가 형성된 빙모곡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궁(宮)들이 여러 채 세워져 있었다. 스슷! 두 개의 인영이 북쪽의 빙벽(氷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천무영과 빙옥지였다. 그들은 의논이 있었던 바대로 빙모동(氷母 洞)의 만년빙혼굴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빙옥지는 가면서 빙모곡의 내부사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빙모곡의 여인들은 대부분이 곡 주위의 분지에서 생활했다. 그러 나 곡주를 위시하여 구장로 등 배분이 높은 여인들은 곡내에서 따 로 기거하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치솟은 빙벽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아래쪽에 빙모동의 입구가 있었다. 슷! 빙옥지가 먼저 동구 앞에 내려섰다. "무슨 일이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두 여인이 그녀를 막아섰다. 아마도 그녀들 은 동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여인들인 모양이었다. 빙옥지는 웃는 얼굴로 두 여인에게 접근해 갔다. "무슨 일은요? 곡주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왔죠." "네가 뭔데 사전통고도 없이... 음!" "너......!" 두 여인은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빙옥지가 재빨리 손을 써 그녀들의 연마혈(軟魔 穴)을 찔러버렸던 것이다. "수고했소, 빙소저." 그녀의 옆으로 천무영이 기척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를 보며 빙옥지는 불안을 감추지 못해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이제 소녀는 꼼짝없이 빙모곡의 반역자가 되었어요. 만일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전......." 천무영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염려 마시오. 그대는 빙모곡의 은인이 될 테니까." 빙옥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앞장 섰다. "방해자가 없어졌으니 어서 들어가죠. 만년빙혼굴은 항상 열려 있 으니까요.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발각되겠지만." "후후후... 두려운가 보구려?"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왜 그리도 표정이 굳어 있소?" "솔직히 말해도 돼요?" "물론." "당신이 걱정되어서예요."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오히려 천무영 쪽이었다. 그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의식했는지 빙옥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금쯤 저를 제외한 구대빙녀들이 뜻을 모으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큰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들은 자질도 워낙 우수하지만 근래 들어 눈부신 활약을 한 바 있어요. 본곡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에요. 그 녀들도 모두 저와 생각이 같아요. 더구나 각자 배필을 얻었으니까 전력을 다해 곡내의 중지를 모으려 할 거예요." 천무영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빙모동 안의 인물들만 굴복시키면 되겠구려." "그런 셈이죠." 빙옥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도 왠지 자신이 없는 듯한 표정 을 지었다. 천무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자, 그만 들어갑시다." 이번에는 그가 앞서 신형을 날렸다. 빙모동은 미로(迷路)였다. 도무지 끝이 없는 것처럼 긴 데다가 길 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복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빙옥지는 그곳 지리에 익숙해 있는 듯 이리저리 꺾어지며 망설임 없이 전진해 갔다. 그러기를 한참여. 두 사람은 정면에서 오싹하는 한기가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 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기세를 더해 가더니 잠시 후에는 내공을 끌 어올려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 왔어요." 빙옥지는 안색이 창백할 뿐만 아니라 입술마저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는 비단 추위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음, 아무래도 심적부담이 크겠지.' 천무영은 곁눈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뭐 라 한들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는 태연을 가장한 채 걸음을 옮기며 전면을 보았다. 이제 동굴은 얼음 통로였으며 칠흑같이 어두웠다. 예까지 이르는 동안에는 그래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야명주(夜明珠)가 밝혀져 있 었으나 이 지점부터는 완전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천정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본 그 광경이란 마치 악마의 입 속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휘우우― 휘우우웅―! 귀음(鬼音)을 동반한 한풍이 혹독하게 몰아쳐 와 그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천무영은 발길을 옮기며 필경 지옥의 입구로 들어가는 기분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동부의 길이는 어느 정도요?" 그가 묻자 빙옥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몰... 라요. 얼마나 긴지는......." 그녀는 이빨이 딱딱 마주치는 가운데 겨우 대답하고 있었다. 이를 느끼자 천무영은 음성이 다소 가라앉았다. "우리 말고도 이곳을 통과한 사람이 있소?" "곡주님... 한 분뿐이에요." 그는 빙옥지의 눈치를 살피며 넌즈시 물었다. "함께 들어가겠소?" "아... 아뇨, 전 자신... 없어요." 빙옥지는 공포를 느낀 듯 잔뜩 움츠러 들었다. 천무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은 추운 만큼 극음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일 게요. 만일 이곳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내력은 상 상도 못할 정도로 크게 증진될 것이오." "그... 그렇지만......." 빙옥지는 여전히 그의 권유에 선뜻 응하지 못했다. 빙모곡의 여인들은 선천적으로 추위에 강한 체질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하나같이 관음빙혼신공을 익히고 있어 웬만한 냉기쯤은 끄 떡도 않고 견뎌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만년빙혼굴만은 차원이 달랐다. 그곳에는 지하의 극음빙맥 (極陰氷脈)에서 흐르는 한빙지기가 뭉쳐 있었다. 이르자면 여하한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하는 죽음의 장소로서 빙옥 지가 공포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② "내가 도와주어도 안되겠소?" 천무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후후... 그대에게도 뭔가 혜택이 돌아가야 되지 않겠소? 구대빙 녀는 낭군을 얻는다지만 모험을 시도한 당신은 정작.......' 빙옥지에게 인간적인 선 외에 마음을 열어주지 못하는 그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반면에 빙옥지는 그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가 슴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따뜻하다고 느꼈다. 침상에서 경험했던 열정과는 다른 의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천무영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열류(熱流)가 그녀에게 슬며시 전도된 것은 그때였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옥지는 몸이 훈훈하게 덥혀지자 탄성을 발했다. "아! 이제 살 것 같아요." 빙옥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육신이 금세 나른하도록 기분좋게 풀려 버렸으니 말이다. 천무영은 그녀에게서 약간 물러서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는 걸로 알겠소." 휙! 그의 신형은 곧바로 만년빙혼굴 안으로 쏘아져 갔다. '과연!' 천무영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눈앞에 내민 자신의 손가락이 보이 지 않을 정도의 캄캄한 어둠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사방이 자욱한 빙무(氷霧)로 꽉 차 있기도 했다. 따라서 도처에 솟아있는 날카로운 얼음기둥이나 천정에 매달린 고 드름 등을 피해가는 일이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아차하면 여지없이 몸이 꿰뚫릴 판국이었으므로. 천무영은 빙옥지가 염려되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당긴 채 전진 하고 있었다. 방심은 단 한순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안력(眼 力)이 통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저항에 의 존한 채 그녀를 인도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만년빙혼굴은 점점 더 아래쪽으로 깊숙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려 갈수록 빙한지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으음... 너무 추워요. 전... 못 견디겠어요......." 빙옥지는 천무영에게서 열기를 계속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중되어가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고통을 호소해 왔다. "잠시 기다리시오." 천무영은 침착하게 말한 후, 일신에 공력을 일으켰다. 그는 축융대제의 독문심법이자 여하한 음한지기도 물리칠 수 있는 대축융건양진결(大祝融乾陽眞訣)을 운용하는 한편, 공력을 팔성까 지 끌어올린 다음 전진을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빙옥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 부터인가 천무영이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 었으며, 그때문에 지금은 그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다. '쯧! 조용히 참고 있을 것을.' 그녀는 내심 자책하며 천무영에게 몸을 기댄 채 따라갔다. 얼마쯤 더 내려갔을까? 휘류류륭―! 괴이한 음향과 함께 빙무가 두 사람의 앞에서 요란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웃! 이 정도였던가?' 천무영은 전신의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부르짖었 다. 어디 그뿐인가? 곧이어 손발이 뻣뻣하게 굳고 등골까지 섬뜩 해 오자 그로서도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급히 대축융건양진결을 십성으로 끌어올려 한기에 대응했다. 그러자 방금 전에 비해 추위가 한결 가셨지만 그것은 빙옥지에게 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쓰러지듯 안겨드는 그녀의 몸은 거 의 얼음덩이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군! 잘 견디더니.' 그는 차디찬 빙옥지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지닌 바 열력을 최 대한으로 주입해 보았다. 하지만 무반응이었다. 빙무의 소용돌이가 전하는 한파로 굳어져버 린 그녀의 몸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곳만 통과하면 될텐데......!' 그는 역시 공기의 저항을 통해 주변상황을 가늠해 보며 중얼거렸 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빙무의 소용돌이는 일 각 이내에 틀림없 이 빠져나갈 수 있을 듯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빙옥지였다. 그녀는 현 상태로라면 빙무를 통과하기는커녕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다 간 정말로 얼음덩이가 되어버릴 테니까. 천무영의 고심은 길지 않았다. 빙옥지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은 그 자신이다. 때문에 그녀를 탓하기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나름대로 방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서슴없이 빙옥지와 입을 맞추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입술이 느껴지자 그는 즉시 체내의 순양진력을 끌어올려 그녀의 입 속으로 깊숙하게 불어넣었다. 잠시 후. "음......." 낮은 신음성과 더불어 빙옥지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를 감지 한 천무영이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빙소저, 나를 힘껏 끌어안되 일체의 잡념을 버리시오. 정신이 흐 뜨러지면 그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오." "네." 빙옥지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와중에도 그녀의 의식은 가물가 물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공력으로는 이곳까지 이른 것만 해 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무영의 손이 그녀의 가슴과 둔부를 더듬어갔다. "으음!" 빙옥지는 경황중에도 부지불식간 묘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극도로 억제하고는 있지만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도 그녀로서는 어쩌 지 못하는 현상이었다. 그 순간을 빌어 천무영은 그녀를 안고 몸을 날렸다. 스읏―! 두 사람의 신형은 한 덩어리가 된 채 소용돌이치는 빙무의 중심부 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고오오오― "악!" 빙옥지는 그 찰나,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 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천무영은 빙무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보게 되었다. 빙무 가 뭉쳐져 있는 곳에서 하나의 연못, 즉 빙담(氷潭)을. '아! 저것은.......' 그는 그것이야말로 전설의 빙모담(氷母潭)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방원 십 장 정도인 그 투명한 연못에서 뼈를 얼릴 듯한 빙무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빙모담 위를 스쳐지나며 그의 눈은 번쩍 빛을 발했다. '오오, 있다! 만년지정금란화(萬年地精金蘭花)가.' 연못의 한가운데에서는 금빛찬란한 난이 자라고 있었고, 그 광경 은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신비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로써 현음 노선배의 말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천무영은 감탄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빙담의 건너편에 내려섰 다. 그리고는 새삼 뒤를 돌아보았으나 관찰 각도가 달라지자 자욱 한 빙무가 앞을 가려 더는 무엇도 볼 수가 없었다. 우드득......! 그의 몸에서 뼈마디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일어났다. '아차!' 천무영은 그제서야 빙옥지를 의식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몸 이 그런 반응을 나타낼진대 그녀의 연약한 육신이 어떤 상태가 되 어 있을지는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더 버틴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지.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그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신형을 뽑아올렸다. ③ 통로는 위로 향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냉기도 점차 둔화되어 갔으나 천무영은 품에 안긴 빙옥 지의 맥을 짚어 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쯧! 내가 만년빙혼굴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군.' 빙옥지의 맥은 거지반 정지되어 있었다.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편편한 암석이 눈에 띄었는 데, 그것은 얇은 얼음이 덮혀 있는 빙대(氷臺)였다. 천무영은 빙옥지를 조심스럽게 그 위에 눕혔다. 그는 거침없이 빙옥지의 옷을 벗겨냈다. 그녀의 몸에 대해서라면 보지 않고도 환하게 그려낼 수 있는 그였다. 더구나 상황이 상황이고 보니 이렇다할 동요는 일지 않았다. 보기 좋게 상향으로 치솟은 젖가슴을 비롯하여 군살이라고는 없는 매끈 한 여체가 그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다만 그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녀가 되살아날 수 있느냐는 문제였 고, 그는 최선을 다해 그 일에 임하고자 할 뿐이었다. 천무영은 운공에 들어갔다. 스스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은 희뿌연 백무에 휩싸였다. 그것은 그 가 현음곤월신마의 독문절기인 현음빙백신공(玄陰氷魄神功)을 완 전하게 터득하고 있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윽고 천무영은 두 손을 내리더니 한 손은 빙옥지의 양 젖가슴 사이의 옥당혈(玉堂穴)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아랫배 부근인 단 전혈(丹田穴)에 올려놓고 지그시 눌렀다. 우우웅―! 그가 손에 공력을 주입하자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무가 빙옥지의 체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천무영은 애초 빙옥지를 보자마자 그녀의 자질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를 만년빙혼굴로 데려와 내공을 증진시켜 주려는 마음도 먹지 않았을 테니까. 현음빙백진기는 서서히 그녀의 양대혈을 거쳐 사지백해로 스며 들 어가고 있었다. 그는 손을 이동하여 이번에는 그녀의 백회혈(百會 穴)과 발바닥의 용천혈에 갖다 붙였다. 우우우웅― 그로부터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빙옥지의 전신 곳곳으로 장 심을 옮기며 막힌 혈맥을 연속적으로 터주었다. 천무영이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뗀 것은 대략 한 식경쯤 지났을 때 였다. 덕분에 그는 많은 공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체내에는 여전히 장강대하와 같은 공력이 흐르고 있 어 일주천(一周天)의 운공이면 능히 보충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빙옥지의 나신이 투명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며 안도하는 기 색과 더불어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 천무영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빙옥지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왜......?' 그가 눈으로 묻자 빙옥지는 고개를 꺾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녀의 어투가 바뀌어 있는 것을 느낀 천무영은 약간 당황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이를 급격히 벌려놓았기에. 그 상태로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기경팔맥이 막힘없이 흐르고 태음경락이 훤히 뚫렸어요. 짐작이 긴 하지만 이로써 소녀의 내력은 최소한 일백 년 수위까지 도달해 있지 않나 싶어요." 천무영은 지나치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마 그럴 것이오." "이 모두가... 은공(恩公)의 덕분이에요." '은공이라......?' 천무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빙옥지는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진즉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소녀, 시인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어 요. 그건 은공께서 저와 격이 다른 분이라는 점이지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아니에요, 소녀가 욕심을 부렸던 거예요." "허어, 참!" 헛웃음을 터뜨린 천무영은 문득 그녀를 정시했다. "빙소저, 혹시 아시오?" "무엇을......?" 빙옥지의 반짝이는 눈이 그를 조심스레 응시했다. "지나친 배려는 되려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말이오." "그 점이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흐음?" "은공께서도 제게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빙소저......." 천무영은 상대의 마음이 읽히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빙옥지 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순간 얼마나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심이 그러했듯 빙옥지의 번뇌나 고충도 결국은 그 녀 스스로가 감당해 나가야 할 몫이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까지가 한계였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의 무거운 입이 떨어졌다. "나는 무엇보다 빙소저가 전 무림에 위명을 떨치는 여협(女俠)이 되기를 희망하오. 빙모곡의 제자로서 말이오." "아!"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도 갖추어져 있소." "저는 아직... 한 번도 그런 생각은......." 당혹해 하는 빙옥지에게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어떤 일이건 하고자 굳게 마음을 먹으면 반 이상 달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으음......." 그녀는 신음을 발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의 얼굴에 나타난 기색으로 미루어 뭔가 중대한 결심이 이루어지 고 있다는 것쯤은 천무영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자, 다음 관문으로 안내를 부탁하리다." "네." 빙옥지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고, 두 사람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동부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때에 천무영의 뇌리에 불현듯 한 사람의 영상이 선연하 게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단옥......!'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이 그의 가슴에 시린 별빛이 되어 박혀 들 었다. 언제고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 이름은 현재까지도 그에게 있 어 떨칠 수 없는 하나의 이상(理想)이었다. 천무영은 그 이름을 그대로 품은 채 입을 떼었다. "빙소저는 참으로 좋은 여인이오. 후일 무림에서 다시 만나게 되 면 그때는 내 술 한 잔 사리다." "네, 은공." 심중이 다른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④ 제이의 관문은 만년빙혼굴을 벗어나자마자 자동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듣기 거북한 욕설로 시작되었다. "고약한 것들이로다!" "클클... 죽지 못해 환장을 한 연놈들이지." 거창한 환영식(?)에 천무영은 신형을 멈추었다. 그가 당도해 있는 곳은 지하의 광장으로 흰 빛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여러 개의 인 영이 기척도 없이 그를 포위했던 것이다. '음, 이들이 내가 격파해야 할 구장로들인 게로군.' 천무영은 그처럼 짚히는 바가 있는지라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그 인영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과연 그들은 아홉 명의 노파들로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얗게 센 데 다가 안면이 주름투성이여서 모두 구순이 넘어 보였다. 노파들은 하나같이 투명한 죽장(竹杖)을 짚고 있었다. 그것은 얼 음으로 만들어진 지팡이로서 그녀들의 꼬부라진 허리를 지탱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정도로 늙은 노파들에게서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한기가 발산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 노파의 입에서 빙옥지를 향해 추상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몹쓸 것! 네년이 감히 본곡에 외인을 끌어들이다니, 법규가 무섭 지도 않으냐?" 빙옥지는 질린 듯 몸을 가늘게 떨었으나 침착을 잃지 않으려 애쓰 며 대꾸했다. "장로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분은 벌써 첫번째 관문을 돌파하셨어요. 그러니......." 예의 노파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닥쳐라! 네년은 간덩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구나. 그 따위 소리는 빙옥(氷獄)에 가서나 해라." 빙옥이란 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 낱말이 주는 공포감은 빙옥 지의 안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어 놓았다. 천무영이 듣다 못해 나섰다. "청컨대 빙소저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시오. 이곳에 들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뜻에 의해서였소이다." 그의 태도는 담담하면서도 자신감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이에 노 파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빙죽장으로 바닥을 찍었다. 쾅! "더러운 꼬마 놈! 누가 네놈에게 물었느냐?" 연이은 욕설에도 천무영은 여유있게 응수해 갔다. "듣고 보니 그건 맞는 말이구려. 본인은 그저 아홉 명의 노과부들 과 싸워서 이기면 그뿐이었는데." "뭐, 뭐라고?" 슈욱! 노파는 대노했고, 그에 따라 빙죽장이 수십 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천무영을 덮쳐 왔다. 활동범위가 좁은 탓이겠으나 그녀로서는 여 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모욕은 처음 당했던 것이다. "후후... 무리하지 마시오, 흥분하면 몸에 해롭소." 천무영은 짐짓 웃음을 흘리며 수중의 섭선을 갈라쳤다. 차르륵― 퍽! "흑!" 노파는 질겁을 했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빙죽장이 막강한 반탄 지기에 의해 튕겨나갔기 때문이었다. "너, 너......!" 씩씩거리는 노파에게 천무영은 정색을 하며 선언했다. "자! 전부 덤비시오. 내 정면승부로 당신들을 꺾고 나서 빙모곡주 와 담판을 짓겠소." 말을 마치자 그는 신형을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쉬이익―! 펼쳐졌던 섭선이 도로 접히며 빙모구장로에게 뻗어갔다. 그 순간, 놀랍게도 부채의 길이는 일 장도 넘어 보였다. 그의 기세는 빙모구장로의 분노를 극도로 부추겼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 "뒈져랏!" 슉! 슈슈슉―! 빙모구장로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은 앞서 빙옥지 가 말했듯 곡내의 최고령자들로 각기 이 갑자가 넘는 공력을 지니 고 있었으며 연수합격에도 달통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홉 자루의 빙죽장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천무 영을 그물처럼 옭아매가고 있었다. 하지만 감탄스러운 것은 그 가 운데서 보여주는 천무영의 신기막측한 동작들이었다. 쉬이익―! 쉬쉭! 부채는 연신 접혔다 펼쳐지기를 거듭하며 빙죽장들을 밀어내고 있 었다. 뿐만 아니라 단번에 칠, 팔 초가 전개되어 기습적으로 노파 들의 목밑으로 파고들곤 했다. 그 바람에 노파들은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그녀들의 시각은 천무영의 신형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무영은 지금 무림 최고랄 수 있는 개방의 실전 보법을 운용하며 환요비자의 환신술에다 도천성(刀天聖)의 유화환 도술(柔花幻刀術)까지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싸움은 치열했으며 백여 초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관전중이던 빙옥지가 들리지 않게 탄성을 발했다. '아! 그토록 불안해 했건만 저분은 구 대 일의 싸움을 여유있게 이끌어 나가고 계시구나.' 그녀의 얼굴에는 비로소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빙모구장로라면 빙옥지에게 있어서는 감히 올려다 보기도 힘든 존 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단 한 사람을 상대하면서 믿을 수 없게도 허둥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빙옥지는 생애 최초로 무해(武海)라는 것이 얼마나 넓 은지를 실감하는 한편, 천무영의 말마따나 드넓은 강호무림에 나 가 활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때마침 천무영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부딪쳐왔다. "후후후... 이만하면 빙모곡의 절기는 충분히 견식한 것 같소. 자, 본인의 미천한 솜씨도 한 번 구경해 보시오." 그는 빙죽장의 끝을 밟고 허공으로 차 올랐다. "단혼일척(斷魂一擲)!" 그의 신형이 일순 허공에서 뚝 정지하는 듯 싶었다. 그러자 아홉 자루의 빙죽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무섭게 쓸어 갔 으나 그 결과는 추측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사위를 점령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정 반대로 암흑의 세계로 돌변했다. 그러한 현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⑤ 쾅! 콰르르르― 굉렬한 폭음 뒤로 몇 마디 비명이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악―! 아아악!" 곧이어 암흑의 장막이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맙소사!" 빙옥지가 넋이 나간 듯 부르짖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단단하기 이를데 없는 아홉 자루의 빙죽장이 모조리 두 동강이 났는가 하면 빙모구장로는 한결같이 안색이 검 게 변색된 채 뒤로 물러나 있으니 말이다. 그녀들이 물러난 자리 에는 세 치 깊이의 족흔(足痕)이 찍혀 있었다. 잠시 장내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노파들은 부러진 빙 죽장을 움켜쥔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녀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 순간부터였다. 쿵! 쿠쿵......! 빙모구장로는 모두 가슴 부위가 정확히 베어져 나가 있었다. 그녀 들은 바닥에 쓰러지자 검붉은 핏물을 토해냈다. 천무영은 서서히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그 광경은 빙옥지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은공......!"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 천무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빙모구장로의 무공은 정녕 대단했소. 평생에 걸쳐 신념과 긍지를 지켜온 인물들답게 말이오." 이 일전은 그에게도 강호에 출도 이후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빙 모구장로의 합격술에는 천 년 공력에 육박하는 잠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허를 찔러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빙옥지가 물었다. "설마 저분들... 타계하신 건 아니겠죠?" 빙모구장로가 움직이지를 않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염려 마시오. 난 본래 살인에는 취미가 없으니까." 천무영은 씨익 웃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날아올랐다. 스읏! 빙전(氷殿). 이름 그대로 그곳은 기둥은 물론 천정이나 바닥, 심지어는 대개의 기물들까지도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규모 또한 빠지지 않아 신비감 외에도 웅장함이 느껴지는 대전이다. 천무영은 빙옥지와 함께 빙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곳은 빙옥지로서도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었다. 그녀는 빙모구 장로를 대할 때와는 또다른 불안함을 내비치며 말했다. "궁주께서는... 틀림없이 여기 어딘가에 계실 거예요." 떨리는 그녀의 음성 뒤로 웬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옥지, 너는 멋진 배필을 골랐구나." 꿈결인 듯 그윽하고 청아한 음성이다. '빙모곡주......?' 천무영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빙글 돌아섰다. 그의 눈에 얼음벽이 회전하더니 그 안으로부터 일단의 여인들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고... 곡주를 뵈옵니다." 빙옥지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애초의 의도 와는 달리 두려워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천무영은 일편으로 그녀의 태도를 이해하면서도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쯧! 서열이란 것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군.' 그는 여인들을 침착하게 살펴보았다. 앞장 선 여인은 일신에 연화(蓮花) 무늬가 수놓인 나삼을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세쯤 되어 보였는데 천상우물(天上尤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농염한 자태로 이르자면 건드리기만 해도 짙은 꽃물이 흐를 듯했 으며, 여인으로서의 완성을 느끼게 해서인지 향기로움으로 전신을 둘렀다 싶을 정도로 눈부신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백설같이 흰 피부나 우아하게 이루어진 선(線) 에서는 고귀한 기품마저 느껴져 한눈에도 일문(一門)의 종주다운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네 명의 소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빙모곡주보다는 못해도 매우 아름다웠다. 더구나 팔 다리를 드러낸 반나(半裸)의 차림새로 인해 적어도 시선을 끌어당 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⑥ 천무영이 빙모곡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소이다, 곡주." 정중한 그의 음성을 접하자 여인의 서늘한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 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응수해 왔다. "음, 안으로 기도를 감추신 공자시군요. 본 곡주는 관음빙모후(觀 音氷母后) 빙천려(氷天麗)라고 해요. 공자께서는......?" "천무영이라 하오." 천무영은 그녀에게서 읽혀지는 자신감이나, 그녀가 자신의 변용을 알아본 것에 대해 약간은 당혹을 느꼈다. 관음빙모후 빙천려는 빙옥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옥지, 너는 더 이상 본 곡주에게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부드러우나 냉엄한 힐책이 깃들어 있는 그 말에 빙옥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곡... 주님......!" "본 곡주는 그동안 너를 지극히 총애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지금 나에게 반기(反旗)를 들고 있지 않느냐?" "반기... 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란 말이냐?" "물론 아닙니다." 빙옥지는 작심을 한 듯 안색을 굳히더니 말을 이었다. "외견상으로는 그리 되었으나... 실제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소녀 또한 누구보다 곡주를 존경하고 따랐으되, 그 마음은 금후로 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빙천려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덧붙였다. "저분은... 소녀의 배필이 아니라 은인이십니다. 나아가서는 본곡 의 은인이 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흐음! 그렇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빙천려의 음성이 한층 더 강경해졌다. "너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인물은 전대에도, 그 웃대에도 없지 않 았다. 하지만 명심해라. 옳든 그르든 본곡의 전통은 누대에 걸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곡주, 흑......!" 빙옥지는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했다. 그녀는 빙천려가 어떤 생각 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숭앙해마지 않던 곡주가 끝까지 본분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리라는 점이었고, 그때문에 흐르는 눈 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닥 은밀한 경기가 빙옥지의 몸을 떠받쳐 일으켰다. 천무영이 그녀를 향해 소매를 저었던 것이다. "빙소저, 그만 물러나 계시오. 내 그대의 믿음이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리다." 그는 빙천려를 응시하며 말했다. "곡주,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는 세 가지요." 빙천려가 신비한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무엇이죠, 그건?" "첫째는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氷精)을 얻는 것이오." 빙천려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녀는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쏘는 듯 한 시선으로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째서 구하시려는 건가요?" 천무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번째로는 당신을 꺾는 것이오." 빙천려는 태도를 바꾸어 생긋 웃었다. "이유를 물은들 답하지 않으실테니 관두기로 하죠. 좌우간 본 곡 주는 공자의 용기에 감탄했어요. 감히 본곡에 단신으로 들어와 그 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천무영도 마주 웃었다. "고맙소, 그 말씀은 칭찬으로 알겠소이다." "호호호... 맞아요. 세번째 이유는 무엇이죠?" "그건 이곳에 와서야 품게 된 뜻이오. 곡주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미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오." 빙천려의 입술 끝이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옥지가 말하던 그 얘긴가 보군요?" "그렇소." "안된 말씀이나 전 외인이 본곡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아 요. 공자께서는 공연한 참견을 하고 계세요." "그렇게 느껴졌다면 본인의 신념쯤으로 해 둡시다. 언제, 어느 곳 에서고 안타까운 일을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라 서 말이오." "감히!" 빙천려의 고운 얼굴에 처음으로 노기가 드리워졌다. "더 이상의 설전(舌戰)은 무용해요. 서로 뜻이 다르니 관철시키자 면 속히 일 장을 나누는 편이 낫겠어요." "본인도 원하던 바요." "대전장소는 관례에 따라 빙모담으로 하겠어요." 말을 마치자 빙천려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홱 돌아섰다. 그 광경을 보며 천무영은 쓰게 웃었다. "좋소. 후후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수행하던 미소녀들과 빙옥지를 향해 엄중하게 명했다.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아무도 그 근처에 접 근해서는 안된다." "네, 곡주." 대답을 듣고 난 그녀는 즉시 앞장 서 신형을 날렸다. 휙! 천무영도 빙옥지에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가볍게 눈짓을 해 보인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스읏! 빙옥지는 사라져가는 천무영과 빙천려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과 두 려움이 뒤섞인 어조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발......!" ⑦ 우우우웅―! 방원 십여 장에 이르는 빙모담은 극음빙맥(極陰氷脈)의 정화답게 굉음과 더불어 줄곧 한기의 회오리를 이루고 있었다. 천무영과 관음빙모후 빙천려. 두 사람은 빙모담을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우우우― 우우우웅―! 빙무가 그들 사이에서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칫 정신을 흐뜨리면 두 사람은 즉각 얼음덩이로 화하고 만다. 빙천려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먼저 공자의 진면목을 보여주세요. 신념 운운하던 분이니 거절은 하지 않으시리라 사료되는군요." "좋소이다." 천무영은 그녀의 요구에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역 용술을 풀어 본 모습을 회복했다. "으음!" 빙천려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묘한 신음을 발했다. 한참 후에 야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생각보다 미남은 아니시군요." "맞소. 후후후......." 천무영의 웃음 뒤로 그녀는 진솔하게 덧붙였다. "감탄스러운 것은 공자의 풍모예요. 혹시 아세요? 본 곡주가 공자 의 담백한 기도에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농담이겠지만 그리 듣기 싫은 말씀은 아니구려." 그의 눈이 심해(深海)와도 같이 깊고 푸른 빛을 뿌리며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 기오한 눈빛을 대하자 빙천려는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간단히 말했다. "벽안(碧眼)이 특히 압권이로군요." "고맙소." 천무영은 짧게 응수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승부는 어떤 방법으로 가릴 작정이시오?" 빙천려가 얼굴을 굳히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빙모담에서 피어오르는 빙무의 덩어리를 내력으로 받아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에요." "흐음?" 천무영의 눈이 크게 휩떠졌다. "그것은 필살(必殺)의 수법이 아니오?" 그랬다. 빙천려가 택한 대결방법은 필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 어야만 승부가 가능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어이없어 하는 그에게 빙천려는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이유는 분명해요. 빙모곡의 금법이 깨진다는 건 곧 곡주의 죽음 을 의미하니까요." '이런 말도 안되는......!' 천무영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그러나 빙천려의 완고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먼저 손을 뻗어왔다. "자, 시작해요!" 우우우웅―! 그녀의 장심이 투명해지는가 싶자 두 가닥 백기가 사출되었다. 그 광경을 본 천무영은 낮게 부르짖었다. "관음빙혼신강(觀音氷魂神 )......!" 콰르르르― 굉음과 함께 소용돌이치던 빙무가 그를 향해 몰아쳐 왔다. 천무영은 일시지간 전신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체 없이 공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손을 들어 허공에 크게 원을 그리 더니 곧장 앞으로 내뻗었다. 콰우우우! 두 종류의 상반된 힘을 받은 빙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원최강의 극음지학(極陰之學)들이 격돌한 것이었다. 우우우웅―! 새하얀 빙무덩이가 무시무시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빙모담 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한랭한 경기가 계속 쏟아부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츠으으으― 두 가닥의 경기는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빙무를 점차 압축시켜 하 나의 형체를 갖춘 덩어리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천무영과 빙천려의 공력은 백중지세였다. 덕분에 빙무의 덩어리는 어느쪽으로도 밀리지 않고 정확히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천무영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보다 높은 공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는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빙모곡주라지만 일개 여인인 빙천려가 뜻밖에도 자 신과 평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콰르르르―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경력을 발출해 냈다. 그에 따라 빙무덩이는 더욱 단단하게 뭉쳐져 회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급기야 두 사람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빙무의 덩어리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른 회전력 을 보였으며 종내에는 하나의 빙구(氷球)로 화했다. 와중에서 천무영은 문득 다리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신의 공력을 양 팔에만 집중시킴으로써 빙모담에서 솟아오르는 빙한지기를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윽!' 그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맞은편의 빙천려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마 그녀 역 시도 그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웅― 우우웅―! 두 사람은 각기 공력을 극한대까지 끌어올렸다. 어차피 공력을 거둘래야 거둘 입장도 못되었다. 약간만 힘을 줄여 도 빙무덩이에 얻어맞고 전신이 얼음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 라질 판국이었으므로. 천무영의 눈썹이 마구 꿈틀거렸다. '승리가 문제인가? 아니면.......' 그의 내부에는 어느덧 크나큰 갈등이 일고 있었다. 사실 그는 현음곤월신마의 무공으로 빙천려와 겨루며 한계를 느끼 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패배하면 그것은 현음곤월신마에게 패 (敗)의 기록을 추가시켜 주는 셈이 된다. 그런즉 축융건양대진력을 운용하기만 하면 그는 즉시로 현 상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가 다른 무공을 사용하면 빙천려를 이겨봐야 그 승부가 현음곤 월신마의 염원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는 점이었다. ⑧ 천무영의 갈등은 부피에 비해 쉽게 접혔다. '쯧! 역시 이대로 밀고 나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음 순간, 그의 이마 위로 뿌연 기체가 피어올랐다. "하압!"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빙무의 덩어리는 회전하는 상태에서 급속히 빙천려에게로 날아갔다. 우우우웅―! "우웃!" 빙천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투명한 장심을 빙글 돌림과 동시에 왼팔로 오른 팔꿈치를 받쳤다. 고오오오― 그녀를 향해 짓쳐가던 빙구가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방 향을 바꾸어 반대편의 천무영에게로 쏘아져 갔다. 그는 지체없이 쌍수를 마주쳐 앞으로 쭉 뻗어냈다. 콰우우웅―! 빙구는 다시 떼밀려 빙천려 쪽으로 날아갔다. "흑!" 그녀는 비명을 발하더니 매서운 기세로 재빨리 손가락을 구부렸다 가 폈다. 슈슈슈슉―!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그녀의 오지(五指)에서 다섯 가닥의 눈부신 지력이 발출되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빙구 는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꽈꽝꽝―! 폭발의 잔해가 무섭게 천무영을 덮쳐왔다. 파아아아― 하지만 그의 대응은 침착했다. 그는 현음빙백신공을 극으로 끌어 올리고는 손바닥을 접었다 펴며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흩어졌던 빙무는 다시 한 덩이로 모이더니 그에게서 튕겨 져 나가듯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이런!" 빙천려가 다급성과 함께 공력을 재차 끌어올렸다. 그녀의 머리카 락이 일제히 곤두서고 나삼마저도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천무영을 향해 쌍장을 내쳤다. "어딜!" 천무영도 지지 않고 막바로 양수를 마주쳐 갔고, 두 가닥 장력은 허공에서 무섭게 격돌했다. 콰쾅! 콰르르르― 굉렬한 폭음이 일더니 그 여파로 빙모담에 고여있던 물이 거꾸로 흐르는 폭포수인 양 위로 솟구쳐 올랐다. 촤아아아― "아악!" "큭!" 두 마디의 참담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휘류류륭―! 빙한지기가 회오리치며 장내의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으음!" 천무영은 육중한 물체에 눌린 듯한 압박감을 전신으로 느끼며 신 음을 흘렸다. 어찌된 셈인지 그는 몸을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어 그가 눈을 뜨자 괴이한 음향이 울렸다. 빠지직......! 그것은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설명하자면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림에 따라 얼음의 일부가 부서졌던 것이다. '맙소사!' 천무영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깨닫고는 아연실색했다. 놀랍 게도 그는 커다란 얼음덩어리 속에 갇혀 있었고, 그 두께는 어림 잡아도 한 자는 될 듯했다. 그는 빙천려와 최후의 일격을 나눈 뒤 정신을 잃었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천무영은 즉시 운공부터 해보았다. '된다!' 그는 저으기 안도했다. 비록 전신이 마비된 듯 감각이라고는 없었 으나 느릿하게나마 기혈의 운행만은 가능했다. 그로부터 약 일 다경이 흐른 후였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일신의 공력을 완전에 가깝도록 회복한 천무영 은 축융건양대진력을 일으켰다. 화르르릉―! 그의 몸에서 시뻘건 불꽃이 일어났다. 파지지직....... 그를 둘러싸고 있던 얼음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삽시에 녹아버렸 다. 그는 재빨리 팔다리를 비롯한 신체의 각 부위를 놀려보았는데 다행히도 곳곳이 약간 뻐근할 뿐 별 이상은 없었다. 천무영은 빙천려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 저기......." 그의 시야에 잡힌 빙모곡주 빙천려의 모습은 얼마 전 그의 모습이 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도 그와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 에서 얼음덩이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가 알몸이 되어 있다는 정도였다. 입고 있던 옷은 아마도 격전 중에 바스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천무영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얼음 속에 갇힌 알몸의 미녀라......!' 확실히 그녀의 모습은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뭐랄까? 마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조각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빙천려의 나신이 그만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아름다움 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무영에게는 그런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목숨을 내걸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빙천 려에게 유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 과정을 치르고 나 니 그녀가 오랜 지기(知己)처럼 여겨지는 그였다. ⑨ 천무영은 빙천려를 향해 쌍장을 뻗었다. 츠츳! 화르르르― 얼음덩이는 화염에 뒤덮이는 듯 싶더니 이내 녹아내렸고, 그는 얼 음에서 놓여난 빙천려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았다. '죽다니!' 그는 충격을 입은 나머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뜻밖에도 그녀의 맥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잠잠했던 것이다. 천무영은 맥이 탁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이런 것은 아니었거늘.......' 그는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빙천려를 응시하며 가히 넋을 잃 었다. 공력의 수위가 자신과 엇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방금 전까지 도 그녀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럼 결국 내가 이 여인을 죽인 것인가?' 천무영은 다른 것은 몰라도 살인에 관한 한 철저히 명분을 따지는 위인이었다. 그런 고로 그는 빙천려의 죽음을 대하게 되자 극도의 회의와 자기혐오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기를 한참여. 천무영의 눈이 언뜻 푸른 광채를 발했다. "혹시?" 그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빙천려를 다시금 면밀히 관찰해 보 았다. 그러다 곧 그의 생각은 그녀의 살결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광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미쳤다. '그렇다! 완전히 죽어버린 시신이라면 피부가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천무영은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었다. '오오! 이건 아직 피는 얼지 않았다는 징조다.' 그는 급히 굳어져 있는 빙천려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천무영은 빙천려를 자신과 마주보도록 하여 무릎에 앉혔다. 알몸 의 여인과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만일 누가 보았다면 망측하 다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천무영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 신에 축융건양대진력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천무영의 일신은 금세 은은한 자홍광(紫紅光)에 휩싸였다. 그 상 태에서 양 손을 뻗자 그의 장심은 붉게 달아올랐다. 치치직......! 그는 장심을 빙천려의 양 젖가슴 밑 유근혈(乳根穴)에 밀착시키고 는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자홍빛 기류가 흘러나왔다. 스으으....... 그는 주저하지 않고 빙천려와 입술을 맞붙였다. 휘류류류― 자홍빛 기류는 두 사람을 모두 휘감았다. 천무영은 극음무학의 극성인 축융건양대진력을 그녀의 체내로 밀 어넣었다. 이는 내공소모가 극심한 요상법이었다. 그런 채로 시간은 말없이 흘러갔다. "으음!" 어느 순간인가 빙천려가 신음을 흘리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천무영은 희색을 보이며 그녀의 체내에 주입된 축융건양대진력을 임의로 유도했다. 그에 따라 뜨거운 진력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돌며 막혀 있던 혈맥을 차례로 타통시켜 나갔다. 잠시 후. 빙천려의 차갑고 창백했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런 반응은 몸에도 전반적으로 나타나 부드럽게 풀려가는 것을 촉 감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되었다, 이 정도면.' 천무영은 그녀로부터 입술과 손을 다 함께 떼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바닥에 뉘고는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빙천려. 빙모곡주인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급급히 신색을 추스르더니 침중 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왜 저를... 구해 주었죠?"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추궁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내건 싸움의 규정까지 어기면서 직접적으로 천무영에게 살의(殺意)가 깃든 일장을 내쳤었다. 설사 그의 손에 죽었다 한들 억울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천무영의 도움을 빌어 사경(死境)에서 헤어나오 게 된즉 자책을 그런 식으로 표명하고 있었다. 천무영이 그녀의 심리를 눈치채고는 정색을 했다. "생명은 귀중한 것이외다, 곡주. 당신은 진즉부터 그것을 너무도 소홀히 여기고 있었소." "공자께 신념이 중요하듯 제게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빙천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공자께 비겁 한 수를 쓰고도 완패했는 걸요." "정녕 그리 생각하오?" 천무영의 물음에 그녀는 체념한 듯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요, 저는 이제 빙모곡주도 아니에요." "그럼 당신을 꺾은 본인은 무엇이 되어 있는 게요?" 빙천려는 움찔하더니 씁쓸히 웃었다. "앞서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마지막 관문인 저까지도 무너뜨리 셨으니 의당......." 천무영이 그녀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 "곡주에 버금가는 자격이 주어지겠구려? 이곳의 금법을 뜻대로 조 정할 수 있으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고?" "맞아요." 빙천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향 해 천무영은 선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내 지금부터 수정된 법규를 말하리다. 빙모곡의 곡주에게는 목숨 을 바쳐 금법을 수호할 의무가 없소." "아!" "그리고 빙모곡에는 남자들의 출입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원한다면 결혼을 하여 곡내에서 살아도 무방하오. 그것은 곡주에게도 당연 히 해당되는 사항이오." "공자......!" 빙천려는 충격으로 인해 잔뜩 굳어져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에 게 천무영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모곡주께 본인이 드리는 선물이 외다. 물론 당신이 거느린 모든 여인들에게도." "우우......." 빙천려는 괴상한 신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천무영이 반쯤 넋이 나가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 어서 이곳을 나갑시다. 밖에서 눈이 빠지게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소?" ⑩ 희고 아름다운 한 쌍의 손이 투명한 열매를 받쳐들고 있었다. 그 래서일까? 여인의 손마저도 투명해 보이는 것 같다. 손은 공손히 받쳐졌다. "공자께 이것을 드리겠어요." 천무영은 줄곧 열매보다는 그것을 올려놓고 있는 아름다운 손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마음이 굳건하다 해서 미를 느끼는 감각 까지 둔화된 것은 아니므로. 손의 주인은 얼굴도 환상처럼 아름다웠는데, 천무영이 감탄을 한 것은 그쪽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씀씀이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빙모곡주 빙천려였다. "본래는 화룡도(火龍島)를 꺾기 위해 제가 복용하려고 했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혹시 조건부로 이러는 건 아니오? 이를테면 나로 하여금 곡주를 대신하여 화룡도주와 맞붙게 한다던가......." "설마요?" 빙천려는 질겁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최소한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다." "아! 본인이 크게 실수를 했구려. 곡주께서 얼마나 기개가 높고 고집이 센 분인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소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공자께는 제가 번번이 지는군요." "얘기가 그렇게 되는 것이었소? 하하하......." 두 사람은 어느 덧 격의없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해져 있 었다. 그 뒤로 빙천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은 공자께 드리고 싶어요. 극음무 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더없는 보물이지요." 천무영이 물었다. "화룡도와의 대결은 어찌 하시려고?" 빙천려는 불안을 내비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어떤 일에고 최선을 다 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지요. 승패도 중요하겠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이니까요." "으음!" 천무영은 신음을 발했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두 사람의 관념은 한 차례 더 엇갈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 는 은자들의 여망을 빌지 않더라도 더 이상 패배를 해서는 안되는 위인이었으며 그 사실을 항시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천무영이라는 일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무인(武人) 특유의 자부심이나 긍지와도 통하는 얘기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그는 처음으로 빙천려에게서 아쉬움을 느꼈다. '쯧! 이 여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필경 안목이 좁아서 이리라. 하긴 그동안 드높은 기개를 고작해야 빙모곡에 눌러앉아 금법을 고수하는 데나 사용하고 있었으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천무영은 잘라 말했다.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은 곡주께서 드시오." "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얘기요." "공자!" "그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들도록 하시오." "갑자기 왜......?" 천무영은 짐짓 정색을 지으며 빙천려를 응시했다. "모름지기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법이오. 패자로서의 치 욕감이 어떤 것인지 곡주께서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하오. 곡주와 나 사이의 일전에서는 명예고, 이권이고 따질 필요가 없었으나 화 룡도를 상대로는 무척 다를 것이외다." "아!" 빙천려는 뭔가 강한 깨달음이 있는 듯 탄성을 발했다. 그런 모습 을 보고 나서야 천무영은 안색을 풀었다. "내 말뜻을 아셨으면 속히 빙정을 복용하시오."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손을 들어올려 빙 정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런데 그녀가 느닷없이 천무영의 입술 을 덮어누른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읍!" 천무영은 그녀의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해마지 않는 한편, 서늘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급히 그것을 밀어냈으나 그때는 이미 반 이상 삼켜진 후였다. '어찌 이렇듯 어리석은 짓을......!' 그는 내심 탄식하며 남은 빙정지액(氷精之液)이나마 성의를 가지 고 빙천려의 목 안으로 흘려넣어 주었다. 이윽고 입술은 서로 떨어졌으되,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특히 천무영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쯧! 이 상황에서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침묵을 깬 사람은 빙천려였다. "결례를 용서하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는......." "되었소." 천무영은 그녀의 말을 자르더니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 빙모곡에 와서 느낀 점이 실로 많소이다." "어떤......?" "빙모곡의 여인들이 하나같이 정열가라는 것, 그처럼 불꽃 같은 정열을 품고 있으면서도 놀라우리 만큼 자제력이 강하다는 것, 그 외에도 더 있소." 그는 손을 내밀어 빙천려의 턱을 가만히 받쳐 들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 그녀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하지만 저는... 늙었는 걸요." "후후... 당신이 말이오?" 천무영은 되묻더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빙천려는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으나 그렇다고 거부하지는 않았 다.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은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천무영의 입 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혀가 빙천려의 입 안을 유영하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달콤 한 느낌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가슴이 텅 비어오는 것만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지만. 금법이 파해된 관음빙모곡은 마침내 천 년의 껍질을 벗어던졌다. 그로 인해 찰극관음파미륵대산의 일부인 빙모곡은 그 풍경이 완전 히 뒤바뀌어 버렸다. 곡구는 활짝 개방되었으며 그 사이로 예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남 자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구대빙녀는 곡주의 축복 아래 성대한 혼인예식을 올릴 수 있었다. 원래는 생산의 도구로서 억울하게 납치되어온 아홉 명의 청년들이 그녀들의 어엿한 신랑이 되었던 것이다. 관음빙모곡은 더 이상 냉혹비정한 얼음세계가 아니었다. 주변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야 여전했지만 그 안은 따스한 기후와 마 찬가지로 훈기가 봄빛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선부(仙府)라 한들 틀리지는 않으리라. 종일토록 행복 에 겨운 웃음이 그치지 않고, 그들을 흉내내듯 벌과 나비가 곡내 에 핀 화목(花木) 위를 분주히 날고 있으니 말이다. 관음빙모곡의 전설은 금후로 크게 수정될 것이다. 이 시대에 등장 한 한 사내에 의해 기나긴 동면으로부터 깨어났다고. 그러나 주인공 격인 그 사내는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며시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이다. 관음빙모곡주인 빙천려와 십대빙녀 중 한 명이었던 빙옥지가 뒤늦 게야 그 사실을 알고 몹시 섭섭해 했다. 의외인 것은 그 사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죽기살기로 격돌했던 빙모구장로까 지도 아쉬워서 끌탕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들은 천무영이라는 그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더러 는 그가 남겨 놓고 간 흔적들을 기억할테고. 아니, 어쩌면 강호주 유를 핑계삼아 그를 찾아 나설지도......? ■ 무영탑 2권 제16장 불운한 남매(男妹) ① 휘이이잉―! 추풍(秋風)이 대지를 스산하게 훑고 지나간다. 이를 느끼는 세인들의 마음은 더욱 써늘했다. 그것은 중원대륙을 질타하는 대혈풍이 주원인이었다. 사분오열(四分五裂) 된 채 도저에서 혈육이 난비하자 사람들은 자 신이 그 피해자가 될까봐 하루하루 가슴을 졸여야 했다. - 혈붕잠룡(血鵬潛龍)의 이패(二覇)가 남북의 경계를 긋고, 지옥 잔혈(地獄殘血)이 동서를 피로 물들이다. 항간에 떠도는 이 경구는 현 무림의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 다. 실제로 혈붕성(血鵬城)과 잠룡부(潛龍府), 그리고 지옥성(地 獄城)과 잔혈맹(殘血盟)이 제각기 동서남북에서 무시무시한 혈풍 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혈붕성과 잠룡부가 중원을 장악하려 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 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준비를 거쳐 점차로 세력을 키워왔으되 그 과정에서 이미 실체를 드러낸 바 있었다. 거기에 보태 최근 들어 새롭게 준동한 마의 세력이 바로 지옥성이 었다. 그들은 중원의 서쪽 끝에서 발원하여 믿을 수 없을만치 빠 른 속도로 영향권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살수를 펼쳐 전 무림을 피로 씻고 있었다. 오죽 하면 다음과 같은 경구가 나돌 정도였다. - 지옥성의 사자(使者)들을 만나지 마라. 그들과 마주친다는 것은 염라대왕을 알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중원의 동쪽에도 신흥(新興) 세력이 있었으니, 이른 바 잔혈맹이라 불리우는 단체가 그것이었다. 그들의 출발연원은 그저 단순한 살객(殺客)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동태산(東泰山)을 거점으로 하여 그곳에 상징성을 띤 거대 한 탑을 세웠을 때, 무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살수집단(殺手集團)! 이것은 애초 그들이 내건 기치였으되, 현재는 아예 그들 자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여타의 단체들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목적이 따로 없었다. 단지 그 들은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살인을 즐길 따름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적포적건(赤袍赤巾)을 두르고 있었는데 출신이나 나이는 물론 성별까지도 철저히 숨기고 행동했다. 자연의 법칙이 다 그렇듯 계절변화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 가을은 본시 짧거니와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산을 울긋 불긋하게 물들였던 단풍도 그 사이에 벌써 낙엽이 되어 흙 속으로 회귀(回歸)하고 있었다. 대지를 흥건하게 적셨던 혈흔도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몰아쳐 오는 한풍에 못이겨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으니 말이다. 무영(無影)이라는 이름이 무림에 던져준 충격파는 컸다. 도의에 어긋나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그 는 죄를 묻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심판자였으므로. 그는 말한다. - 너는 네 그림자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말에 따른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 다. 그는 중원 전역을 누비며 죄인들을 징벌했으되 살인만은 극도 로 자제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치죄는 대부분 상대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는 선에서 그 치곤 했는데 이 점에 대해 세인들은 각기 상반된 두 가지의 견해 를 가지고 있었다. - 차라리 죽이느니만 못하다. 악의 씨앗이란 완전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발아(發芽)하게 마련이므로. - 무영, 그 같은 존재는 꼭 필요하다. 그의 독특한 철학은 종내 세상을 두루 밝혀 줄 것이다. 어쨌거나 장본인은 그런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여전히 자신이 정해놓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적(敵)도 무수히 많았다. 그를 증오하며 치를 떠는 자들은 거개가 혈붕성 등의 동서남북 사 패에 소속된 위인들이었다. 그의 존재로 인해 행하려던 일이 번번 이 저지되곤 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그가 향후로 어떻게 더 활동을 벌여 나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시세(時勢)에 영합하는 불상사를 연출해 내지야 않겠지만, 보보(步步)에 위기가 중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닌즉 언제까지 건재할른지 의문인 것이다. ② 인생의 끝은 어디매뇨? 터벅터벅 걷노라면 언젠가는 다다르겠지 살며 사랑하며 즐거운 날들이 또 와주려는지 그대여 울지 말게나 저무는 석양도 내일이면 다시 떠오르리니 그대여 죽음도 두려워할 것 없다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거니 차라리 하늘을 향해 웃을진저, 세상은 어찌 저리도 아름다운가고...... 황혼이 깃든 들판에 한 가닥 낭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위 에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보다 그림자는 더 검었다. 주인의 낙천적 인 인생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림자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림 자의 주인은 고독을 사랑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평범하게 생겼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백의도 그 범주에서 튀지 못한다. 약간 남다른 점이 있다면 기후를 무시하고 오른손에 낡은 섭선 하나를 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동태산(東泰山)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림인 치고 동태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산세가 거창하지도, 그렇다고 경관이 특별히 빼어난 것도 아닌 이 산이 그토록 유명해 진 이유라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금 무림을 피로 물들이는 잔혈맹의 근거지, 즉 혈혈마탑 (血血魔塔)이 이 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탑신에 피를 발라놓은 듯 짙붉은 빛을 띠고 있는 그 탑은 동태산 의 낙일애(落日涯)에 우뚝 솟아 있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협성(俠星)들이 잔혈맹이 일으키는 혈겁을 종식 시키기 위해 이곳을 찾아 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덧없이 피를 뿌리며 사라져 갔다. 그 뒤로 동태산역에는 자연히 뭇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게 되었 다. 혈혈마탑에 속해 있는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누구고 그 근처에 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명의 인물이 오고 있었다. 무엇때문에 그가 자청하 여 이 험한 곳에 뛰어들려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자에 그러했 듯 그도 동태산에 뼈를 묻으려는지......? 산기슭은 초입부터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범인(凡人) 같아서는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험난한 곳이었다. 백삼청년만은 예외였다. 그는 별로 아름다울 것도 없는 주변의 풍 광을 감상하며 미끄러지듯 산을 오르고 있었다. 청년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청색 을 띠고 있던 천공은 벌써 칠흑같이 캄캄해져 있었다. "쯧! 목적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날이 저물고 말았군. 어차피 이렇 게 된 것, 일단 아무 곳에서나 쉬어야겠다." 그는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야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쓸쓸한 시선을 어두운 허공으로 옮겨갔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무(無)였다. 달은 구름에 가렸는지 빛을 발하 지 않았고, 몇 개의 가물거리는 별빛에 의존하여 건네다 본 세상 은 그저 적막한 암흑의 공간일 따름이었다. 그는 천무영이었다. 일시지간 그의 눈이 본래의 색채인 푸른 빛을 내비쳤다. 그에게도 분명 자신이 의식되는 순간이 존재했으므로. 한동안 천무영은 마음이 동하는 곳이면 어디고 서슴치 않고 그 땅 을 밟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중원 각처를 주유하게 되었는데 아무 때고 진면목을 드러내는 일은 회피해 왔다. 그는 산정(山頂)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는 잔혈맹의 살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천무영은 뇌리에 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그것은 그가 상대의 독특한 살인수법을 통 해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그랬듯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어떤 연유로 혈혈마탑 을 찾아오게 되었건 우선은 밤이슬을 피해야 했고, 현 상황에서의 그는 이 일을 가장 중시했다. 주위를 살피던 그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떠올랐다. 검은 흑암의 덩어리가 뭉쳐져 있는 듯한 숲 속으로부터 가물거리는 작은 불빛 을 발견했던 것이다. '음, 인가(人家)일 리는 없고.......' 스슷! 신형을 날린 그는 검은 숲으로 스며들었다. ③ 사당(司堂). 숲 속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것은 한 채의 사당이었다. 흔해 빠진 산신묘로서 향화는 끊긴 지 오래인 듯했다. 지붕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으며 인적이 닿지 않아 그런지 여기 저기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후후... 짐승들의 거처로도 쓰기가 어렵겠군.' 이것이 사당의 주위를 둘러본 천무영의 소감이었다. 그래도 바깥 에 비하면 내부는 별세계라 할 수 있었다. 타닥... 타다닥......! 장작 타는 소리가 고적한 사당 안을 울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한 가운데에서 모닥불이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곁으로는 두 명의 소년소녀가 불을 쬐고 있는 것도 보였다. 둘 다 일신에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행색이나 분위기로 미 루어 아마도 근처 화전민의 자식들인 모양이었다. 소년은 겨우 칠, 팔 세 남짓해 보였으나 그에 반해 소녀는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것이 십오, 륙 세쯤은 된 듯했다. 휘이이잉―!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소년이 몸을 잔뜩 움츠리며 소녀에게 물었다. "누나, 추워?" "난 괜찮아. 걸아(乞兒), 네가 추운가 보구나." 소녀는 물을 것도 없이 그대로 어린 동생에게로 다가가더니 어머 니를 대신하듯 다정하게 품어안아 주었다. 사실 사당 안은 그리 춥지 않았고, 이로 미루어 그녀는 일찌감치 여인 특유의 모성본능에 눈이 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용모도 꽤 반듯했다. 산골에 사는 소녀답지 않게 피부가 하얗고 깨끗했으며 한 쌍의 눈은 봉목(鳳目)이었다. 서늘한 그 눈 속에서 모닥불의 불빛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친 마의에 감싸인 채 봉긋 솟아있는 가슴이나 잡초를 깔고 앉은 펑퍼짐한 둔부에서는 성숙한 여인의 냄새도 풍겼다. 그 정겨운 분위기를 깨고 하나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휙! 그는 인상이 무척이나 험상궂은 자였다. 야풍(夜風)에 흑의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장한의 모습을 보자 오누 이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휴우! 마침 불을 피워 놓았군. 얘들아, 이 아저씨도 불을 좀 쪼 일 수 있겠느냐?" 흑의장한은 의사를 물어보기는 했으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거침없이 모닥불의 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년이 불안한 표정이 되어 누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것은 어 찌 보아도 거절하기를 종용하는 몸짓이었다. 흑의장한도 이를 눈치채고는 소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설마 이 아저씨가 불을 쬐는 게 싫은 건 아니겠지?" 기세에 눌려 소녀가 얼른 갖다붙였다. "그... 그럴 리가요? 거... 걸아는 착한 아이예요." "음, 당연히 그래야지." 흑의장한은 흡족한 미소와 더불어 모닥불에 손을 녹이기 시작했 다. 와중에 그는 이따금씩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소녀의 몸을 훑어 보기도 했으나 다행히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거북한 시간이 그들 세 사람의 곁을 말없이 흘러갔다. 화르륵! 타닥....... 모닥불은 불똥을 튕겨내며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사당 안도 종전보다 한층 더 훈훈해져 있었다. 따라서 긴장도 대충 풀렸는지 오누이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는 서로 몸을 기댄 채 모로 쓰러져 누웠다. 을씨년스러운 바람결을 뚫고 어디선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처량 맞게 들려왔다. 산신묘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으음, 뜨거워......!" 소녀가 문득 낮게 읊조리며 몸을 뒤척였다. 잠결에도 불기운이 너 무 바짝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도 뜨지 않고 팔꿈치로 기 어가 동생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약간 걷혀 올라가 뽀얀 종아리를 드 러냈다. 흑의장한의 표정이 일변한 것은 그때였다. "흐흐흐......." 그는 괴이쩍은 웃음을 흘리며 소녀의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모닥불의 붉은 빛이 투영되자 그녀의 종아리는 위 험스러울 정도로 육감적인 색감을 띠고 있었다. 장한은 슬며시 손을 뻗어 소녀의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꿈틀했을 뿐 깊은 잠에 빠진 듯 깨어나지는 않았다. "쩝! 귀여운 것." 흑의장한은 입맛을 다시며 소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 에는 벌써 욕정의 불길이 당겨져 있었다. 그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소녀의 치마 속에 손을 밀어 넣 더니 허벅지 어림까지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응?" 급기야 소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 "뭐... 뭐하는, 읍!" 그녀는 기겁을 한 나머지 냅다 소리를 질렀으나 사내의 커다란 손 에 입이 틀어막혀 중도에서 그쳐야 했다. "더 고함을 쳤다간 너는 물론 네 동생도 죽을 줄 알아라." "으으......!" 소녀가 공포에 질려 눈으로 긍정의 뜻을 표하자 흑의장한은 그제 서야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뜨겁고 거친 숨을 몰아쉬 며 소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얌전히만 있으면 된다, 넌." "아!" 소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보면서도 흑의장한은 탐욕 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소녀는 추위를 막기 위한 방편인 듯 치마 속에 두툼한 속바지를 껴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내의 무지막지한 손길에 따라 단 번에 훌러덩 벗겨져 나갔다. ④ "사... 살려 주... 세요!" 그녀는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 더듬거리며 애원했다. "누가 너를 죽인다고 했느냐? 나는 다만 너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할 뿐이다. 흐흐흐......." 흑의장한은 여리고 흰 소녀의 속살을 주물러대며 지극히 만족스러 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소녀의 치마를 허리까지 뒤집어 올리더니 무명으로 된 고의 하나만을 달랑 걸치고 있는 그녀의 하반신을 잡 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흐으! 정말 죽여 주는구나." 잠깐의 감상(?) 뒤로 흑의장한의 손은 소녀의 고의 속으로 파고들 어갔다. 졸지에 가장 은밀한 곳까지 허용하게 된 그녀는 안색이 흑빛이 된 채 입술을 떨며 부르짖었다.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흑의장한은 그녀의 어떤 반응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남은 한 손을 움직여 소 녀의 가슴에서 옷고름을 풀어내고 있었다. "여기도 잘 익어 있겠지?" 흑의장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의 목적도 달성했다. 소녀의 꽃 봉오리 같은 육봉을 덥썩 움켜쥐었으니 말이다. "악!" 소녀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너무도 충격이 큰 탓이었다. 그 소리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소 년을 깨워 놓았다. "으음......." 소년은 주먹으로 눈을 부비며 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엉?" 그는 멀뚱해진 채 몇 번인가 눈을 껌벅거렸다. 누이가 거의 발가 벗은 채로 바닥에 누워 있다던가, 사내가 그녀의 몸을 떡주무르듯 하고 있는 등의 아연한 행태를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흑의장한은 손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년 이 깨어난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기어이 소녀의 고의를 뜯어냈다. 부욱! "아아......!" 소녀의 입에서 절망에 찬 탄식성이 새어나왔다. 이후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곁에서 흑의장한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아랫도리를 노려보며 바지춤을 후다닥 까내리고 있었다. "자! 기대해라, 이 어르신이 너를 황홀경으로 인도해 주마." 그는 음충맞은 웃음과 함께 난폭하게 소녀를 덮쳐갔다. "아악!" 소녀의 입에서 급기야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그 찰나였다. 시뻘건 불꽃이 이글거리는 장작 하나가 막 행위에 돌입하려는 흑의장한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츠읏! "죽엇! 나쁜 놈." 소년이었다. 그가 마침내 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죽기살기로 덤벼든 것이었다. '앗차!' 흑의장한은 장작개비가 날아오는 것보다 소년의 외침을 먼저 듣고 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그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팍! "으헉!" 흑의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눈을 움켜쥐며 소녀의 몸에서 튕 겨져나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불붙은 장작이 재수없게 하필 그의 한쪽 눈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이 죽일 놈......!" 그는 벌떡 일어나 소년을 향해 일 장을 후려쳤다. 펑! 소년은 그의 장력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소년은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갔다. 그의 어린 육신은 사당의 한귀퉁이에 무참하게 처박혔다. 퍽! "걸아야―!" 소녀는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으나 흑의장한의 기세가 워낙 험하다 보니 공포로 인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크으으! 내 너희 연놈들을 죽여 포를 뜨리라." 그는 살기가 번뜩이는 한쪽 눈으로 차디찬 땅바닥에 누운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 주세요! 흐으윽......!" 하지만 흑의장한의 눈에서 떠오른 것은 일말의 가학성까지 겸한 무서운 욕정일 따름이었다. "악!" 소녀가 눈을 휩뜨며 비명을 발했다. 흑의장한이 종전보다 훨씬 더 흉험한 기세로 그녀를 찍어 눌렀던 것이다. "완전히 짓밟은 후에 죽여주마. 내 네년은 특별히 가랑이를 찢고 가슴을 도려낼 테다. 흐흐......!" 그가 웃자 불길이 닿아 일그러져 버린 한쪽 눈이 춤을 추듯 마구 씰룩였다. 공포감을 자아내는 그 섬뜩한 눈짓은 다행히도 그리 오 래 가지는 못했다. "쯧! 망측해서 못봐주겠군." 한 가닥 음성이 사당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헉!" 흑의장한은 질겁을 하며 튕겨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웬 놈이냐?" 그는 문쪽으로 뛰어가더니 무작정 수중의 도를 떨쳐냈다. 따당! 그의 도가 무엇엔가 부딪혀 금속성을 울렸다. 그러나 그 뒤를 이 은 것은 그 자신의 비명이었다. "으악!" 흑의장한은 맥없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가 계획했던 겁간(劫 姦)이나 잔혹한 살인행위도 실행될 전망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순간 무공이 전폐(全廢)되었으므로. 그가 누구에게, 어떤 수법으로 당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는 금후로 남은 힘이 있다면 오직 생을 영위하는데 써야 하리 라.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만한 능력은 되지 못할 것이기에. ⑤ 끼익―! 듣기 거북한 음향이 울리며 사당의 문이 빼꼼히 열렸다. 그 사이 로 일신에 백삼을 입은 한 청년이 들어섰다. 손에 섭선을 들고 있는 그의 기색은 전자의 일과는 무관한 것 같 았다. 그는 담담한 눈으로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쯧, 처참지경이로군." 청년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그처럼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 며 흑의장한을 향해 조용히 일지(一指)를 뻗었다. "어엉?" 눈을 번쩍 뜨는 그에게 백삼청년은 일갈했다. "죽기 싫으면 썩 사라져라!" "우우우......!" 흑의장한은 두려움에 질린 채 비칠비칠 일어나더니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들고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옷도 채 걸치지 못하고 달아나는 그 모습이란 말 그대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위인의 전형이었다. "저런 자는 길게 상대할 가치도 없다."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백삼청년은 천무영이었다. 흑의장한에게 능욕을 당할 뻔한 소녀는 어느 틈엔지 혼절해 있었 다. 그는 무심히 소녀를 바라보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 도 그녀는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천무영은 바닥에 떨어져 불꽃이 사그라든 장작을 집어들었다. 어 린 소년이 용감하게 휘둘렀던 그 장작이다. 그것을 보자 그는 앞서 보았던 흑의장한의 찌그러진 눈과 연결시 켜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심한 작자! 어린애에게 못보일 꼴까지 보였던 게로군." 천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장작을 모닥불 속으로 던졌다. 그는 그다 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소녀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타닥... 화르륵―! 모닥불의 기세는 여전했다. 천무영은 그 옆에 소년을 눕혀 놓고 상세를 돌보는 중이었다. 소년은 중상을 입고 있었다. 가슴이 짓이겨져 뼈와 살이 뒤엉켜 있었던 것이다. 하긴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내공이 실린 일 장을 얻어맞았으니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제 동생은... 살아날 수 있을까요?" 마의를 단정히 입은 소녀가 그의 뒤켠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 었다. 천무영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위로했다. "소(少)낭자, 안심해라. 피부가 상하고 늑골이 몇 대 부러지긴 했 으나 심맥은 끊어지지 않았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감사해요, 정말 공자가 아니셨다면 저희 남매는......." 소녀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설움에 겨워 눈물을 떨구었다. 그 러더니 그녀는 한참 후에야 떨리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소녀의 이름은 아란(阿蘭)이에요. 동생은 아걸이구요. 저희들은 부모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y외삼촌 댁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읊조리게 된 데에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기대 고 싶은 심정이 작용했으리라.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은 흑의장한 과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절박했던 것이다. "으음, 그랬었군." 천무영은 탄식과 더불어 소년의 혈도를 몇 군데 짚었다. 그런 연 후에야 그는 소녀 아란을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도 위로는 아니었다. "자, 이리 와서 동생의 몸을 좀 지탱시켜다오." "네." 아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시키 는 대로 아걸을 일으켜 앉히고는 어깨를 잡았다. 천무영은 아걸의 뒤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낭자는 그 자세에서 약간 옆으로 물러서야겠군. 동생에게 진기를 불어넣어야 하니까." 그는 아걸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갖다 붙였다. 이어 그는 체내에 일으킨 진기를 장심에 모아 서서히 주입시켜 주었다. 그런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란의 눈이 순 간적으로 천무영을 향해 독랄한 빛을 띠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은밀히 중지를 창날처럼 꼿꼿하게 세우 더니 천무영의 머리 뒷부분 옥침혈을 찔러갔다. 스읏! 그것은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누구고 진기를 운행하던 중에 급소를 공격당하게 되면 주화입마하거나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상례였다. ⑥ 그러나 우연이었을까? "소낭자, 수건 있나?" 때마침 천무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그로 인 해 아란의 중지는 파르르 떨더니 그의 옥침혈 한 치 앞에서 딱 멈 추었다. 그녀의 얼굴이 되려 핼쑥해졌다. "네... 여기......!" 아란은 전신에서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으나 태연을 가장하느라 급히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참, 잊었었군. 낭자도 기력이 많이 쇠했을텐데 내가 무리한 부탁 을 한 것이나 아닌지?" "아... 아니에요." 천무영은 받아든 손수건으로 아걸의 가슴에 엉켜붙은 피를 닦아냈 다. 아걸은 의식을 회복한 듯 비명을 터뜨렸다. "으윽! 아파......." 천무영은 그를 향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소형제, 조금만 참아라." 아걸은 눈을 반쯤 뜨고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몹시도 천진해 보였다. 그는 작금의 상황도 납득이 잘 안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나쁜 아저씨는......?" "이분 공자님께서 쫓아 버리셨단다." 아란이 동생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를 외삼촌 댁에도 데려다 주신댔어. 그렇죠?" 그녀는 일단 말을 해놓고 나서 간절한 눈으로 천무영을 바라보았 다. 그는 의외인 듯했으나 선선히 응해 주었다. "그렇다, 아걸. 이젠 안심하거라." "그 말 정말이죠? 아저씨는 좋은, 아앗!" 아걸은 신이 나서 손뼉을 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아직까지는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는 상태인 듯 그는 손을 움직이자 가슴이 결렸던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천무영은 빙그레 웃었다. "나이에 비해 영리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헤헤... 가끔씩은 바보짓도 해요." 아걸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야지, 자고로 어린애는 어린애다와야 하는 법이니까." 천무영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좀 있으면 날이 밝을 것이다. 너희 두 명 다 그때까지만이라도 눈을 붙이도록 해라." "알겠어요." 두 남매는 그의 말대로 각기 자리를 잡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 만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당혹을 그는 보았다. 천무영은 내심 착잡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된 것일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어쨌든 그러는 사이에 두 남매는 벌써 잠들어 있었다. 잠시 그들 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무엇인가 나름대로 깊 은 생각에 빠져드는 듯. ⑦ 아침은 언제나 신선하게 마련이다. 대개 눈부신 햇살과 함께 열리 는 아침은 싱그러운 느낌과 함께 희망을 안겨준다. 그러나 겨울에는 다르다. 그것도 뼈가 시릴 만큼 추운 날씨라면 긴 밤이 끝나고 찾아온 새빛도 별로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경물이 꽁꽁 얼어버린 숲 속. 그 가운데 자욱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천무영은 아걸을 등에 업은 채 숲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지르고 있 었다. 그의 발걸음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옆에서는 아란이 불편 한 듯 다리를 절룩이며 걷고 있었다. 그는 아란남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삼촌이 산다는 곳 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그곳은 혈혈마탑이 있다는 단장애 와 가까운 위치이기도 했다. 아걸이 그의 등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 아걸은 이 다음에 커서 꼭 아저씨처럼 훌륭한 무사가 될 거예요." 천무영이 고개를 약간 뒤로 돌리며 담담히 물었다. "어째서 내가 무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아걸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저씨가 그 나쁜 놈을 물리친 수법......!" 그는 말하다 말고 제풀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는 그때 깨어 있었느냐?" 천진하던 소년은 물음에도 움찔할 뿐 답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아란이 그를 대신하듯 재빨리 얼버무렸다. "그렇게 짐작을 한 것이겠지요."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무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만은 아니란다." "왜요?" 잠시 움츠리고 있던 아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천무영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인의 삶이란 칼끝에 서 있는 것과도 같단다." 그는 아걸의 이해도를 감안해서인지 그 뒤에 덧붙여 간단한 설명 도 해주었다. "무릇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고, 남을 해치려던 자는 반드시 해침을 당하게 되어 있다. 어쩌면 땅을 벗삼아 사는 농부 처럼 단순한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지." 아걸도, 그의 누이인 아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안색이 굳어져 있는 것만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멀었느냐?" 천무영이 심각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다 왔어요. 저기 보이는 산 하나만 넘으면......." 그의 옆에서 아란이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음, 길을 잘 알고 있어 다행이구나. 아주 어릴 때 한 번밖에 가 본 적이 없다면서." 아란은 뭐라 변명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옆얼굴이 울긋불 긋한 것으로 미루어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와중에서도 그녀의 눈만은 섬뜩하도록 예리한 광채를 발했으나 그 것은 너무도 짧은 찰나인지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어색한 침묵은 작은 사고로 인해 깨졌다. "어맛!" 아란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졌던 것이다. "저런......!" 천무영이 막 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할 때였다. 슉! 한 줄기 파공성이 긴장된 공기를 갈랐다. 아걸이 어느 틈엔지 비 수를 뽑아들고 그의 뒷통수를 내리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악랄한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순간에 천무영은 쓰러져 있는 아란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그는 이미 고개를 틀어 공격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파팍! 목표물을 잃은 비수는 길 가장자리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 하나를 자르는 데서 움직임을 그치고 말았다. "쯧! 조심할 것이지." 말을 하는 중에도 아란을 부축했던 천무영의 손은 눈부신 속도로 그 소나무 가지를 잡아채고 있었다. 단, 그의 소매 속에서 한 마 리의 검은 뱀이 딸려나온 것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슬며시 손을 펴자 잘려진 나뭇 가지와 함께 뱀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때에 아걸은 그의 등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상 대가 자신의 암습을 교묘하게 피해내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태 연하게 업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겁을 먹고 비칠비칠 물러서는 아걸에 게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뱀을 툭 차 보였다. "고맙구나. 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겨울에도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놈이라면 필시 독종(毒種)일텐데 말이다." '맙소사! 대체 언제 뱀까지 동원했단 말인가?' 아걸은 질려버린 듯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영악하기 짝이 없는 소년이었다. 그는 금세 안면 가득 천진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렇게 응수해 왔다. "헤헤... 뭘요, 뱀이 아저씨를 노리기에 다급해서......."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너는 칼을 제법 쓰는구나." 그 말은 아란이 받았다. "아걸은 늘상 비수를 가지고 놀곤 했어요. 위험하다고 부모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었는데 이런 때엔 도움이 되는군요." 그녀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대고 천무영이 말했다. "알겠다. 갈 길이 바쁘니 서두르도록 하자꾸나." 그는 아걸을 향해 등을 내밀었다. "자, 어서 업히도록 해라." 천무영은 아걸을 업더니 아란의 손목을 잡고 몸을 날렸다. 휘익―! 세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아침 안개가 자욱이 낀 숲을 가르고 있었다. 기쾌무비하게 날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신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야아!" 아걸은 신명이 난 듯 고함을 지르며 팔을 내저었다. 그런 그의 손 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아란은 아란대로 계속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 신호에 따 라 아걸은 수도 없이 비수로 천무영의 요혈을 찌르려 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괜히 팔을 내젓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걸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려 서른네 번이나 비 수를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천무영은 우연을 가장하여 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던 것이다. 확실히 그들 남매는 불운했다. 그토록 머리를 굴리고 수를 써도 한 사람을 놓고 어쩌지를 못하니 말이다. ■ 무영탑 2권 제17장 그를 위한 사육제(謝肉祭) ① 아란, 아걸 남매와 함께 천무영이 당도한 마을은 단장애에서 약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분지로서 거기서부터는 관목림이 우거져 있었다. 입구에서 본즉 좌측으로 엉성하게 지어진 띠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것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사냥꾼 부락이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빼쪼롬이 내리쬐는 한 줌 햇살은 그래도 얼마간의 포근함을 가져다 주었고,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 가 인간 세상의 온정(溫情)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에 반해 미심쩍은 구석도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십여 채의 가호가 있는 부락 치고는 너무도 조용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의례 있음직한 소음들이 여기에는 일체 없었다. 하긴 사람 자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으니 그것은 어쩌면 논할 바 가 못되는지도 몰랐다. 그 근처에는 어찌된 셈인지 눈을 씻고 보 아도 사람은커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영은 줄곧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침 묵에 감염이 된 듯 아란남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 삼 인이 빚어내던 어색한 공기는 마을 안으로 깊숙이 접어든 후에야 해소되었다. 아걸이 외쳤던 것이다. "야! 드디어 다 왔나봐요." 아란도 손가락을 내밀며 탄식하듯 한마디 거들었다. "저 가운데 있는... 집이에요." 천무영은 눈썹을 꿈틀 했다. 그들이 가리키는 띠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규모가 약간 컸는데, 문제는 나머지 이십여 채의 집이 그 집 을 은연중 포위한 형세라는 점이었다. 그는 아란 남매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이집 저집의 창문들이 빠꼼히 열리더니 그 사이로 다수 의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들은 저마다 기이한 눈으로 그를 관찰하듯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들 시선의 벽을 뚫고 띠집 앞에 당도했다. 아란이 재 빨리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오순 정도 되 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인물이었다. 아란이 그를 보자마자 뛰어들듯 안겼다. "외삼촌, 저희들이에요. 흐흐흑......!" "아란!" 그녀가 울음부터 터뜨려서인지 노인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 시 후에야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가 여기에는 웬일이냐?" "그... 그것이... 흐흑! 호환을 당하는 바람에......." "뭣이?" 노인은 대경하여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그럼 설마... 네 부모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걸이 천무영의 등에서 내려와 그에게 달려들었다. "무서워요, 외삼촌. 어머님과 아버님은 호랑이에게......!"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있나?" 노인은 조카들을 양 팔로 품어안으며 넋을 잃었다. "그래... 잘들 왔다. 내 바빠서 한동안 찾아가 보지도 못했거늘, 그런 기막힌 일까지 일어나고 말았구나." 그의 얼굴에도 어느덧 짙은 비감이 떠올라 있었다. ② 방 안은 매우 조촐했다. 사냥꾼의 거처답게 바닥에는 손질이 덜된 모피가 깔려 있었다. 탁 자를 비롯한 가구들도 모두 원목으로 된 것이었으며 직접 제작한 듯 짜임새가 잘 맞지 않아 어설퍼 보였다. 아란 남매의 모친과 한 핏줄인 이 노인의 이름은 장자유(張子柔) 라고 했다. 그는 조카들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며 천무영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내 공자를 위해 밤에는 크게 잔치를 벌일까 하네. 마침 오늘은 사냥 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는 날이니 함께 어울려 주시게 나. 그들도 공자를 보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게야." 천무영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노인장." "고맙다니,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을? 우리가 입은 은덕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네." 장자유는 치하를 거듭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따라 오시겠나?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내 쉴만한 곳으로 모시겠네. " 그는 천무영을 다른 정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원목으로 만들어 졌으되, 커다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푹신한 모피가 덮혀 있어 의자는 더없이 편안했다. 천무영은 그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 마을의 촌장(村長) 직을 맡고 있다는 장자유 노인... 그는 내 내 평범을 가장하고 있으나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여타의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뇌리에는 낮에 창문을 통해 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 게 떠올랐다. 눈빛으로 미루어 그는 결코 그들을 일반적인 사냥꾼 들로 여기고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야성(野性) 외에 별도의 색채가 느껴졌었다. 엄격한 훈련을 거쳐 극도로 절제된 듯한.' 그는 생각의 연결고리를 아란남매에게로 돌렸다. '그들 남매는 나이에 비해 너무도 영악하다. 나에게 무수히 암습 을 가하고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했었다.' 천무영은 도로 눈을 뜨더니 천정을 응시했다. 무슨 작정을 했는지 그의 입은 더욱 굳게 다물려졌다. 그 순간에 그의 머릿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잠시 후면 날이 저물고 잔치가 벌어지겠지. 표면상으로는 나를 위한다는 명목이나 그것은.......' 둥! 둥! 둥―! 연속해서 울리는 북소리가 산중의 밤을 점차 가열시켰다. 횃불들 이 도처에서 부락 전체를 환하게 밝히우고 있었다. 축제는 거창했다. 넓은 마당의 한가운데에서는 거대한 짐승이 통 째로 불에 구워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줄잡아도 백여 명 에 이르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개중 몇몇 사람은 신명이 오른 듯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그간의 회포를 풀기 위 해 토주(土酒)를 마구 퍼마시기도 했다. 천무영은 그 광경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장 자유와 함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축 제의 주인공이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헛허... 공자, 시끄럽기만 했지 준비한 것은 별로 없네. 그저 성 의로 알고 마음껏 드시게나." 장자유가 얼굴이 붉어진 채 연신 술을 권해 왔다. 천무영도 사양 하지 않고 그가 따라주는 대로 계속 받아 마셨다. 아란남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두두둥둥......! 북소리가 문득 가슴이 진동할 정도로 빨라졌다. 그것을 계기로 사 냥꾼들은 너도 나도 일어나 괴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감산도에서 귀두도(鬼頭刀), 장창(長槍), 탄궁(彈 弓) 등 각종의 무기가 들려져 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그들은 안색 은 물론 눈까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저마다 팔다리를 휘젓고 몸을 흔들어 대고 있으니 그것은 일편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광경이었다. "헛헛... 어떤가? 저들은 비록 비천하다는 수렵에 의존해 살아가 고 있지만 나름대로 충직하기 이를데 없는 자들이지." 장자유는 유쾌한 듯 들뜬 음성으로 말했고, 그에 반해 천무영은 술을 들이키며 담담히 응수했다. "본인의 소감을 이르자면 약간 다르오이다. 범의 용맹에 늑대의 영활함이 겸비된 인물들 같다고나 할까? 후후후......." "그렇게 보아 준다니 고맙군." 장자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자, 우리가 귀빈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선물이 있네." 그는 장내의 한가운데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에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장한이 통째로 구워진 예의 짐승을 떠메고 천무영에게로 다가왔다. 쿵! 거대한 짐승구이가 그의 앞에 있는 제단(祭壇) 위에 놓여졌다. 곁 에서 장자유가 자랑스러운 듯 말을 건네왔다. "이것은 황상께서도 맛보지 못한 진품요리일세. 겉의 고기는 동태 산의 신령이라는 백호(白虎)를 구운 것이지." "호오! 호랑이 고기도 먹소이까?" 천무영은 신기했던 나머지 고개를 움직여 백호구이를 이리저리 훑 어 보았다. 그 모습에 장자유는 껄껄 웃었다. "그 속에 곰이 한 마리 들어 있다면 믿겠는가?" "설마......?" "실은 곰의 뱃속에도 뭔가 들어 있다네. 그게 무엇인지 한 번 알 아맞춰 보겠는가?" "글쎄올씨다?" 천무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충 갖다붙이듯 말했다. "혹 늑대가 아닐런지......?" "헛헛... 바로 맞추었네. 늑대의 뱃속에는 산양이 들어 있지. 또 그 속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장자유는 일순 안색을 굳히며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 제까지와는 달리 자못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 속은 공자가 직접 열어보도록 하시게. 이 의식이야말로 귀빈 께 대한 최대한의 예우일세." 천무영은 빙긋 웃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너무 황송한 느낌이외다." "부디 사양치 마시게. 여기 목도(木刀)가 있네." "흐음?" "왜 목도냐고 묻는 거겠지? 안심하게. 푹 익어 쉽게 갈라질 뿐만 아니라 쇠 성분이 닿지 않아야 제맛이 나는 법이네." "음, 알겠소이다." 목도를 받아든 천무영은 몸을 일으켰다. ③ 둥둥둥둥―! 북소리는 더욱 더 강하고 빨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모 든 사람들이 일어나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기도 했다. 그 행태란 광란에 가깝다면 맞을 듯했다. 천무영은 목도를 들어 짐승구이에 갖다댔다. 그에 따라 북소리가 급촉해지고 사냥꾼들의 눈에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스스슥! 마침내 백호의 배가 갈라졌고, 향육(香肉) 내음과 함께 과연 그 속에서는 한 마리 거대한 곰이 나타났다. "와아아아―!" 사냥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그들을 향해 천무영은 빙긋 웃 어 보인 뒤, 곰의 배를 갈랐다. 툭! 장자유의 말대로 이번에는 늑대가 나왔다. 두두두둥―! 계속해서 울리는 북소리는 전장에서 적들을 격살하라는 신호음과 도 같았다. 그런 느낌 가운데서 천무영은 늑대 배를 갈랐으며, 그 속에서 잘 익은 산양(山羊)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문득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곧이어 땀방울은 그의 볼을 타고 목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치칙......! 경미한 음향과 함께 땀방울은 기이하게도 목도에 닿자마자 기체가 되어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이 뜻밖의 광경을 본 사람은 천무영 외에 아무도 없었다. 목도가 아주 천천히, 산양의 배를 갈라갔다. 두두두두둥―! 북소리가 드높아지며 백여 명에 이르는 장한들 모두가 천무영에게 로 번뜩이는 시선을 모았다. 그런데 산양의 배가 막 갈라지던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놀랍게도 한 자루의 검이 그 속에서 번쩍 하며 솟구쳐 올라와 천 무영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놈! 네가 바로 이 사육제의 제물이었다." 파앗! 때맞추어 목도 또한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그어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한 올을 움켜잡듯 지 극히 허망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진검(眞劍)과 목도의 대결이라면 어차피 승부는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파팍! 격돌음과 함께 진검과 목도가 맞부딪쳤다. "와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사위에서 광기에 찬 함성이 일어났다. "으아악!" 고막을 찢을 듯 처절한 비명이 인 것은 그 직후였다. 동시에 피분 수가 뿜어져 허공을 시뻘겋게 수놓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냥꾼들의 눈에 광적인 희열이 떠올랐다. 적 어도 그들의 생각으로는 천무영의 육신이 머리끝서부터 가랑이까 지 정확히 쪼개져 있으리라 여겼으므로. 그러나 취중에도 그들은 곧 볼 수 있었다. 쿠쿵! 두 쪽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자는 천무영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의 사육제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살수였다는 것을. 키라야 사, 오 척밖에 되지 않는 그들의 살수는 목도와 진검이 부 딪치는 순간 검과 함께 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난쟁이 살수의 처참한 주검은 부락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 격을 가져다 주었다. 오죽하면 그들은 눈으로 뻔히 보고 있으면서 도 그 일을 선뜻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장자유의 살벌한 외침이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뭣들 하느냐? 쳐라―!" 춤추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갖가지 무기들이 본래의 용도로 쓰이 고자 분연히 떨쳐졌다. 쉬쉭! 차차창―! 백여 명에 달하는 사냥꾼들이 천무영 한 사람을 노리고 일제히 공 격해온 것이었다. 스읏! 천무영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바야흐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그의 수중에 들려진 목도였다. 휘류류륭―! 목도의 도기(刀氣)는 대번에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바람 에 그를 향해 일차적으로 발출되었던 탄궁(彈弓), 강전(强箭), 비 도(飛刀) 등의 암기들은 남김없이 튕겨져 나갔다. "으악! 컥......!" 사냥꾼들 중 다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휘청거렸다. 불행 하게도 암기들은 눈이 없는 고로 본래의 주인에게도 발출 시와 마 찬가지로 무섭게 쏘아가 틀어박혔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공세가 약화되지는 않았다. 재수없이 그 참에 정신을 잃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내 기세를 회복한 듯 살벌하게 재공격을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어느덧 지면으로 내려서서 취팔선대나이보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물 흐르듯 유연하게 사냥꾼들 사이를 누볐다. 그들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제각기 전력으로 천무영을 향 해 병장기를 휘두르며 짓쳐들고 있었다. 쉬쉭―! 츠츠으― "크헉! 큭―!" 천무영의 취무(醉舞)는 연신 장한들의 비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신으로 날아든 도검이 살갗과 불과 머리털 한 올 차이로 근접했을 때에야 몸을 틀곤 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영락없이 오류 에 빠지고 만다. 그를 찔렀다고 믿는 순간 섬전처럼 뻗어온 목도 에 자신들의 목을 허용해야 되었기에. 그런 식으로 천무영은 삽시에 사십여 명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더 이상 장내에 피를 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장한들의 목을 베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 었다. 그저 그들의 혈도만을 찔렀을 뿐이었다. 아무튼 시종 일방적이던 전세는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때를 기해 또다른 사태가 야기되었다. ④ 파파팟―! 천무영의 발밑 땅이 솟구치며 비장의 무기인 듯한 칠 인의 살수가 솟아 올라왔던 것이다. "하하... 환영한다, 잔혈맹의 엽살수들!" 천무영은 대소와 함께 수중의 목도를 휘저었다. 탓탓탓타― 전법이 바뀌어 요란한 격타음이 일었다. 그의 목도는 기막히게도 일곱 명의 엽살수들을 개패듯 두들겨 패고 있었다. "크윽! 컥......!" 그것은 개방과의 인연 탓이었다. 그 타격법은 바로 복마신개의 복 마칠십이로(伏魔七十二路)였다. 그런 연후, 천무영은 신형을 움직여 유희라도 즐기듯 엽살수들을 비롯한 장한들의 혈도를 차례로 짚어갔다. 관전중이던 장자유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부르짖었다. "저... 저럴 수가......!" 슈슉! "큭!" 마지막 장한이 거꾸러지는 것도 그는 보았다. 그 앞에서 천무영이 목도를 세워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 고 있었다. 그는 무려 백여 명의 장한들을 혼자 요리했건만 어찌 된 셈인지 숨결 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그가 장자유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으음!" 장자유는 목상처럼 굳어진 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일 보 앞까지 이른 천무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사육제는 끝났소. 제물이 바뀌어 유감이오만." "그건 나도 심히 유감이네." "그렇겠지. 내 이름이 잔혈맹 살인명부에 올라 있었소?" 장자유는 만면에 체념을 떠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네." "아란과 아걸은 친남매가 맞소?" "물론." 천무영이 재차 물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도 알고 있소?" 장자유는 질문의 요지를 깨닫고는 입이 달라붙은 듯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그래서는 아니되는 일이었소. 고육계(苦肉計)도 좋지만 그들은 아직 배워나갈 것이 많은 어린 아이들이오." 천무영의 엄중한 질책에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더 듣고 싶지 않으니 어서 나를 죽이게." "쯧!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소. 어차피 당신의 존 재란 잔혈맹 내에서는 미미하니까." 장자유의 눈이 도로 뜨였다. "내게 모욕을 주면 달라질 게 있는가? 아서게. 잔혈맹인들에게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신조가 있다네." "후후... 본인이 당신을 징계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실은 그때문이 외다. 그 대단한 신조를 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 그럼......?" 천무영은 목검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장자유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갖고 가 전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혈혈마탑에 오를 참이었으니 애쓰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고 말이오." 낮았으나 그 음성에는 천 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를 느낀 장 자유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천무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내 목적은 단 두 가지뿐이오." 그는 자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장자유의 시선을 느끼며 미소 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첫째는 당신들의 살인청부업을 중지시키는 것, 또 한 가지는 잔 혈맹주를 만나 겨루는 것이오." 장자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말도 안되는......! 그것도 단신으로 그 두 가지 일을 해결하러 가겠단 말인가?" "후후... 본인에 대한 염려를 해 주는 것이라면 사양하겠소. 난 언제고 혼자 움직여왔으니까." 장자유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가 생각하기로 도 상대는 나이와는 별개로 무공에서든, 신념에서든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천무영이 말했다. "잔치도 파장난 것 같으니 그만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 어떻겠소? 이곳 사람들을 관장하고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당신 본연의 임무일 텐데, 아니었소?" 장자유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그렇다면 저들은......?" "그렇소. 제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아 있소." "오오!" "본인은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혈혈마탑에 오를 것이니 이 말도 함께 전해주시오." 장자유는 감격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오늘밤에는 어디서... 지낼 작정이신가?" "나는 원래 이곳의 귀빈이었지 않소? 주인이 쫓아내지 않는 한 여 기서 유할 것이외다." 천무영은 어느덧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우선은 술을 마시고 싶구려." ⑤ 그는 선 채로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 곁에서 물끄러미 서 있던 장자유가 물었다. "이곳이 불편하지 않은가?" 천무영은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지 않소." "적진(敵陣)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말인가?" "그리 생각하자면 나는 사해가 두루 적진인 사람이외다." 장자유는 쓴 입맛을 다셨다. "도시 이해할 수가 없군." "무엇이 말이오?" "자네라는 사람을 말일세." "후후후......." 천무영은 낮게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내 한 가지 청이 있소." "무엇인가? 말하게." 그 말에는 어떤 것이든 거절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 다. 천무영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해 보인 뒤 말했다. "아란과 아걸이 시중을 좀 들어주었으면 하오." "흐음?" 장자유는 의외라는 듯 눈을 치떴다. 일시지간 그의 안색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천무영에 대한 호감과 적대감이 반 반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의 고개는 끄덕여졌다. "알겠네, 공자. 그러나 그 전에......." 슈슈슉―! 빙그르르 도는 장자유의 몸에서 백팔 종에 이르는 암기가 우박처 럼 발사되었다. 그것은 너무도 지척간에서 벌어진 사태인지라 인 간의 경공술로 어떻게도 피할 수 없었다. "미안하네만 이것이 잔혈맹의 규칙일세. 일단 목표한 자는 절대 놓쳐서는 안되......!" 장자유의 말은 중도에서 그쳤다. 천무영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따라서 백팔 종의 암기는 모조리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 장자유가 굳어진 것은 그러고도 그가 빙그레 웃었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옷이 한 벌밖에 없소. 그런데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으니 아무래도 변상을 요구해야 되겠구려." 이어 그가 옷을 툭툭 털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우수수....... 그의 몸에 빽빽히 꽂혔던 암기들이 모래알처럼 가루로 화해 쏟아 져 내렸던 것이다. "장노인, 본인은 당신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이것 이 당신의 본업이니 말이오." "공자......!" 장자유의 노안에 언뜻 뿌연 안개가 서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휙―! 그의 모습은 관목이 우거진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천 무영의 귓전으로 그의 전음성만이 전해져 왔다. (조심하시게나. 그 두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인종들이니. 금후로 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습을 하려 들 걸세.) 천무영은 숲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후후... 아무려면 내가 그걸 몰라서 그들을 초빙했겠소?" 웃음 뒤로 그는 빙글 돌아섰다. "나오너라, 숨어서 엿보지 말고." 그 말에 따라 과연 한 그루의 나무 뒤에서 아란과 아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나타났다. 그들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고삐를 잡힌 송아지와도 같은 모습들 이었다. 그들의 죄를 묻자면 암습만이 아니었다. 천무영을 유인(?)해 이곳 까지 오게 한 것도 역시 그들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천무영의 태도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 었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을 건넸다. "낭자, 고기가 식었다. 자리를 빈청으로 옮겼으면 하는데, 상을 다시 보아주지 않겠는가?" 아란은 대답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 았다. 그것은 그녀와 나란히 선 아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난 먼저 가 있겠다." 천무영이 돌아서자 그들은 그때서야 불맞은 새처럼 부산을 떨며 고기와 술을 챙겨 주방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⑥ 빈청 안이다. 원목으로 된 둥그런 탁자를 사이에 두고 삼 인의 인물이 앉아 있 었다. 그들은 천무영과 아란, 아걸 등이었다. "음! 호랑이 고기도, 곰의 고기도 처음 먹어보지만 맛이 썩 괜찮 군. 이건... 늑대의 고긴가?" 천무영은 술과 더불어 고깃점을 들며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아란 남매는 그의 좌우에 무릎 꿇고 앉아 연신 눈치만 을 살피고 있을 뿐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너희들도 들어라.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천무영이 권했으나 두 남매로서는 고기를 들기는커녕 물 한 모금 조차 마실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아! 배가 불러 더는 못먹겠군." 마침내 그가 젓가락을 상에 내려놓을 때였다. "저어......."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아란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무엇이냐?" "왜 저희들을... 죽이지 않죠?" 천무영이 오히려 반문했다. "내가 너희들을 왜 죽여야 하지?" "죽어야 마땅하니까......." 아란은 고개를 푹 떨구며 말끝을 흐렸다. "하하... 내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남을 해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도 당하게 되어 있다고. 내가 이렇듯 건재할 수 있었 던 것은 너희들을 해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자못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어찌 해석했는 지 아란 남매는 종전보다 더욱 움츠러 들었다. 그 기색을 알아본 천무영이 별 수 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안심해라. 너희들을 어찌해 볼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의 진심은 통하지 않았다. 슷! 아걸이 품 속에서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의 천진한 얼굴에는 어 느새 새파란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야." 쉬이익! 비수는 기어이 허공을 가르며 천무영에게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 는 자세를 원상태대로 유지한 채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비수는 천무영의 미간으로 정확히 파고들었다. 앗차하 면 미간이 꿰뚫려 즉사를 면치 못할 판국이었다. 그런데 비수는 막 살갗에 닿으려는 찰나, 급격히 멈추었다. 아걸 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발작적으로 외쳤다. "왜, 왜 피하지 않는 거야?" 천무영은 빙긋 웃었다. "넌 왜 찌르지 않았지?" "그... 그야 당신이 멍청하게 피하지 않으니까......." 더듬거리는 아걸이 천무영의 눈에는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그 는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후... 정정당당하고 싶었단 말이지?" 아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부르짖듯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그런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니, 그렇지 않다." 천무영은 자르듯 강경하게 말하고는 다시 부언했다. "잘 들어라, 아걸. 너는 내게 한 번도 비겁했던 적이 없었다. 다 만 나름대로의 목적에 충실했을 따름이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아걸의 안면이 제멋대로 마구 씰룩였다. "요는 목적 그 자체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 으면 네 바탕이 아무리 선량해도 소용이 없지. 이 점은 아마 너도 그간에 갈등을 겪으면서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우우......!" 아걸은 눈에 띌 정도로 일신을 떨었다. 어린애이면서도 어린애답 지 않은 소년은 천무영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본심까지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쁜 사람이야, 당신은......!" ⑦ 쨍그랑! 아걸의 수중에 들려 있던 비수가 맥없이 접시 위로 떨어졌다. 동 시에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천무영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그에게 다가가 가만히 어깨를 다 독여 주었다. "쯧!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건 없다. 그것이야말로 네 나이 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니까." "어어엉......! 그럼 이제 와서 무얼 어떻게 해요?" 급기야 소년은 목놓아 울었고, 천무영은 이렇게 달랬다. "지금부터라도 목적을 달리 하면 된다. 일개 살수가 아닌, 진정한 무사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아걸이 눈물로 흠씬 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진정한 무사... 요?" "그래, 너는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찌 하면......?" 천무영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살인에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면." "아!" "청부살인이란 야비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걸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낸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소년은 누이를 지그시 건네다보았는데, 누이는 누이 대로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무언의 답을 보내 주었다. 이후로 두 남매는 밤이 새도록 천무영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얻게 된 결론이란 역시 참된 무사의 도(道)였다. 그들은 또한 천무영이라는 희안한 인물로부터 뜻하지 않게 조화신 기옹(造化神機翁)의 절전절예를 전수받기도 했다. 태극십팔산(太極十八散)을 비롯하여 조화삼십육해(造化三十六解), 조화검법(造化劍法) 등. 그것은 은자십예(隱者十藝) 중에서도 제일예에 해당되는 무학으로 그중 일 초만 익혀도 능히 한 지역을 군림하고도 남을 만큼 극상 승의 절예였다. 반면에 천무영은 그들 남매의 입을 통해 잔혈맹의 내력을 일부나 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꼭 그가 무엇을 베풀어 주었 다 해서 그 대가로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란과 아걸은 의외로 의리가 깊었으며, 그 일환으로 잔혈맹도 자 신들처럼 뭔가 변화의 계기가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잔혈맹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집단이었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자, 타인에게 멸시를 당하던 자, 단지 약하 다는 이유로 강자에게 억압받던 자, 하늘을 찌를 듯한 원한을 가 진 자,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다 자신을 포기했던 자 등등이 잔혈 맹의 구성원이었다. 때문에 잔혈맹의 인물들은 세상을 철저히 불신했고, 자신들을 버 린 세상에 대해 엄청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正)도 사(邪)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단지 자체적 인 결속력만이 그들을 지탱시켜 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그들을 관장하는 잔혈맹주(殘血盟主)는 그들에게 있어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지상 최대의 살수집단을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신비에 묻혀 있었다. 얼굴이나 나이는 고사하고 성별조차 아무 도 알지 못한다. 잔혈맹의 인물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그의 명을 따르되 그에 관해 서는 알려고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그 신비를 지켜주는 것 마저도 충성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살인의 대가로 그들은 많은 것을 누리기도 했다. 금전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술, 여자, 도박 등 원하기만 하면 그 무엇이라도 마음 껏 즐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상최대의 환락에 취해 있다가도 명을 받으면 즉 시 출동한다. 살인명부에 오른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그것이 그들의 철학이자 인생이었다. ■ 무영탑 2권 제18장 잔혈맹주(殘血盟主)가 원하는 것 ① 혈혈마탑(血血魔塔). 단혼애 위에 우뚝 서 있는 이 혈흑색의 탑은 워낙 거대하기도 했 지만 연원이나 상징성 탓인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힐 정도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칙칙하고 암울한 빛의 탑신을 정면으로 대 하게 되면 가히 공포감마저 갖게 된다. 항간에 알려졌다시피 그동안 수많은 협골간담을 지닌 인물들이 혈 혈마탑을 찾았으나 개중 살아나간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탑신이 원래는 검었는데 그들이 흘린 피가 뿌려지 는 바람에 현재와 같은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도 한다. 스슷! 한 가닥 백영이 혈혈마탑의 앞에 나타났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혈혈마탑을 올려다보았으되, 구층의 아득한 높이는 오연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휘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탑신을 휘감고 있었다. 천무영은 일층의 탑문(塔門)을 바라보았다. 단아하게 만들어진 목 문이었는데 이도 피를 발라놓은 듯 검붉은 색이었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문앞에 다가섰다. -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린 자만 들라! 목문에 새겨진 그 글은 들어오면 죽는다는 경고문이었다. 천무영 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꽤 자신만만한 글귀로군. 하긴 전력으로 미루어 볼 때 저 문구가 주는 위협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끼익! 의외로 문은 쉽사리 열렸고,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조차 없는 암흑의 공간이 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둠이란 본시 인간에게 공포를 심어주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 은 적어도 천무영과는 무관한 사항이었다. 쿵! 그가 서너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혔 다. 이와 동시에 한 가닥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우우우웅― 음성이 주는 위협은 그 내용보다는 사방의 벽에 반사되어 고막을 파열시킬 듯 울려오는 메아리 쪽이 훨씬 더 컸다. 천무영이 물었다. "질문은 그뿐이오?" 그의 음성은 진동 없이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어떤 질문을 더 바라느냐?" 다시 울려오는 메아리에 천무영은 비로소 대답했다. "승자와 패자 중 어느 쪽을 원하는가 물어주시오." 그 말은 잠시 동안의 답답한 침묵을 가져왔다. 그러다 이어진 것 은 소름이 오싹 끼칠 듯한 괴소성이었다. "크크크... 승자를 원하느냐, 패자를 원하느냐?" "승자외다." 천무영의 음성은 사뭇 단호하게 울려나왔다. 이는 신념에 관한 부 분이므로 당연한 노릇이었다. 팟! 어둠의 한귀퉁이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등 불로서 춤을 추듯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크크......!" 등불 뒤에서 한 명의 괴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움푹움푹 패인 주름살 위로 무수한 칼자국까지 겹쳐져 있 어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체도 그랬다. 등이 활처럼 굽은 데다가 다리까지 심하게 절고 있는 등 멀쩡한 구석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꼽추괴인은 천무영의 면전에 함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킬킬... 이 속에는 두 개의 목패가 있다. 원래는 각기 생과 사,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 막 승과 패로 바꾸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뽑아라. 네 운을 시험해 보겠다." 가까이에서 보게 된 괴인의 모습은 더욱 끔찍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더 많은 주름이 잡힌 것은 물론 입가에서 볼 언저리까지 이어진 칼자국들이 마구 꿈틀거렸는데, 그 형상이란 실로 인간의 것이라고는 보아줄 수가 없었다. '쯧! 차라리 지옥의 야차를 대면하는 게 낫겠군.' 천무영은 내심 고소를 짓는 한편, 상대의 얼굴에 비추어 한 인물 을 떠올리고 있었다. - 사십 년 전, 뇌주(雷州)에 한 복사(卜師)가 있었다. 그도 다른 점쟁이들처럼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흉조가 뽑히면 무슨 수를 쓰든 자신의 점괘대로 상대방을 죽인다. 그러다 결국 강호인 들의 공분을 사 협살을 당했다. 그것은 개방의 주유서고에서 읽었던 책의 한 대목으로 천무영은 그자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복(死卜) 우문추(于文秋), 이처럼 멀쩡히 살아 있었군.' ② 그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매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승패를 잡으면 오늘의 승자가 되고, 패자(敗字)가 쓰여 있는 패 를 잡으면 패자가 된다는 말이겠구려?" "그렇다." "좋소." 천무영은 짧게 대답한 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함 속에 손을 집 어넣었다. 과연 그 속에는 두 개의 목패가 들어 있었다. 그는 개중 먼저 집히는 패를 꺼내 상대에게 내밀었다. "너는 패를 잘못 골랐다. 크크크......." 사복 우문추는 패를 확인해 볼 생각도 않고 그렇게 단정지으며 비 웃음을 흘렸다. 그를 바라보며 천무영도 웃었다. "후후... 천만에! 나는 승패를 골랐소." 패를 쥔 손이 활짝 펴졌다. <승(勝)> 선명하게 새겨진 그 글자를 보자 우문추는 대경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천무영이 빙글거리듯 그 말을 받았다. "흠, 두 개에 다 패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어찌 승자를 집어낼 수 있느냐, 뭐 그런 말이오?" "놈! 감히 노부를 우롱하다니......." 우문추가 뱀가죽을 방불케 하는 안면에 노기를 떠올리며 어깨를 반쯤 틀었다. 그 광경을 보며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안되지!" 동시에 그는 부채를 뻗어 상대의 목을 찔렀다. "크윽!" 쿵! 사복 우문추는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져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천 무영이 그의 손에서 재빨리 등불을 가로채며 읊조렸다. "나는 당신이 그 함을 무기로 쓴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등불은 그때까지도 꺼지지 않고 건재해 있었다. 천무영은 그것을 이리저리 비추며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분명 어딘가에 길이 있을텐데?' 지나고 보니 일층은 그저 밋밋한 공간으로 우측 벽의 끝쪽에 달랑 위로 오르는 계단이 하나 있을 따름이었다. 천무영은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리하여 이층에 오르자 그를 맞이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낡은 목문이었다. '일층에서는 점쟁이가 가로막았었는데 여기서는 어떤 위인이 대기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문을 밀었다. 끼익......! 사람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듯 이번의 문은 처음과는 달리 듣 기 거북한 음향을 내며 힘겹게 움직였다. '흡!' 문이 열리자마자 천무영은 우선적으로 호흡부터 멈추어야 했다. 도저히 맡아줄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돌아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 물론 그런 이유로 경거망동할 그는 아니었지만. '괴롭군!' 천무영은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문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뒤에서 문은 자동적으로 닫혔다. 쿵! 둔중한 음향에 이어 그가 듣게 된 것은 실로 상상을 절하는 소리 들이었다. "끼아악―!" "끄윽, 끅! 살려 줘." 사방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성과 비명이 울려왔던 것이 다. 아연하여 주변을 둘러본 천무영은 아연실색했다. '저럴 수가!' 그의 눈은 통로의 좌우를 번갈아 보며 한껏 치떠져 있었다. 그곳에는 시체나 다름 없는 자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처지는 시체보다 못할지도 몰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나마 어떤 자는 안구가 빠져나가 휑한 눈에서 누런 고름을 흘리고 있었고, 또 어떤 자는 몸에 구멍이 뚫려 창자가 비어져 나와 있는 등 목불 인견의 참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개중 팔 다리가 잘려져 나간 사람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으리라. 그들이 눈에서 광기를 번뜩이며 천무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들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끄아아... 나를, 나를 내보내다오!" "차라리 죽여라! 크으윽......." 천무영이 지나가자 신체를 결박당한 그들은 철그렁거리며 온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그 기세로 보아서는 쇠사슬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 나갈 것 같았다. '끔찍하군. 어찌 인세에서 이런 일이......?' 천무영이 경악 반, 탄식 반인 심정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철컹, 철컹―! 정말로 쇠사슬이 풀어지는 듯한 음향이 울렸다. '설마!'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현실로 화했다. "키키키......!" "크크... 죽여 버리겠다!" 벽에 매달려 있던 자들이 일제히 풀려나와 천무영에게 덤벼들었 다. 그들은 아수라귀들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쉬쉭! 천무영은 그들을 향해 수중의 섭선을 떨쳐냈다. 펑! "끄아악!" 두 명의 괴인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전신이 피고름 투성이인 그들은 섭선에 격중당했음에도 불 구하고 쓰러졌다가 이내 벌떡 일어섰다. 휘류류륭―! 그들은 아예 쇠사슬까지 휘두르며 덮쳐오고 있었는데, 그 공격법 이란 방어라고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이었다. ③ 천무영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들과 같이 죽어줄 수는 없지.' 스스스....... 그는 취팔선대나이보를 전개하여 교묘하게 그들 사이를 헤치고 나 아갔다. 하지만 이성이 마비되어 본능적인 감각을 앞세우고 있는 괴인들은 오히려 그를 쉽게 따라잡고 있었다. "크크크......!" 그들의 집요한 육탄공세에는 실로 대책이 없었다. 특히 천무영의 경우에는 살수를 자제하자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백의는 어느 덧 괴인들의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쯤 되자 천무영도 마음을 고쳐 먹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안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혈도를 찌른들 통하 지 않으니.' 그의 읊조림이 뜻하는 것은 살생(殺生)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 저히 이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으므로. 파파파팟―! 그의 섭선이 방금 전과는 달리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으악! 카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물듯 연이어 울려퍼졌다. 이와 더 불어 괴인들은 피분수를 뿜으며 차례로 쓰러져갔다. 그 뒤로는 다 시 일어서지도, 덤비지도 않았다. "비켜라!" 천무영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나왔다. 딱히 뭐라 형언키 어려운 감정이 그를 휩싸 버렸던 것이다. 그 자신도 그것이 분노인지, 혹 은 자책인지 끝내 규정짓지 못했다. 취리리릿―! 그의 신형은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괴인들 사이를 누비고 있 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주변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우박처럼 쏟 아져 바닥에 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콰쾅! 와지직....... 세번째의 문은 부서져 나갔다. 삼층으로 뛰어오른 천무영이 그답 지 않게 일 장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는 극도의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사육제에 이어 이번이 두번 째였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잔혈맹의 냉혹비정한 논리에 그가 부응하게 된 것은. 난쟁이 살수를 벨 때에는 그래도 처단(處斷)의 의미가 강하게 내 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괴인들을 상대로는 아니었다. 그런 류의 살인은 특히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그였다. 천무영은 허공을 향해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잔혈맹주! 어디 숨어 있는 것이냐? 속히 모습을 드러내라. 더 이 상 헛된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 우우우웅―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삼층을 진동시켰다. 잠시 후. 스스스스―! 그의 앞에 일단의 인물들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의 숫자는 도 합 삼십육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적포를 걸치고 이마에 혈건을 두른 자들이었다. 손에 도 모양이 같은 파풍도(波風刀)를 들고 있었다. 그들 삼십육 인의 도수(刀手)들은 수중의 파풍도를 곧추세운 채 천무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진을 형성해 갔다. "으음!" 천무영은 타오르는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반면에 그들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모두 맹인이었던 것이다. 츠으으으― 맹인도수들은 원진(圓陳)을 유지한 채 천무영의 주위를 서서히 맴 돌기 시작했다. 그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그대들과는 싸우지 않겠다. 어서 맹주를 불러라." 그 말은 무고한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들 중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회전 속도를 배가시킴으로써 말을 대신하고 있었고, 그 바람에 긴장된 공기를 가르며 살벌한 도기가 전해져왔다. 츠츠츠츳―! 천무영은 전신을 통해 섬뜩한 예기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도세로 미루어 이들은 최소한 오십 년 이상 도법을, 그것도 전문 적인 살초(殺招)만을 익힌 자들이다.' 츠파앗! 정면에서 문득 여섯 자루의 도가 가공할 도기와 더불어 포물선을 그리며 그를 베어왔다. "어딜!" 천무영도 때를 같이 하여 섭선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그의 섭선이 여섯 줄기의 가공할 암경을 뿌려냈으며, 그에 따라 고막을 파열시킬 듯한 금속성이 사위를 울렸다. 쩡! 쩌정―! 믿을 수 없게도 그 순간 도수들의 도는 맥없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천무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섭선의 방 향을 틀어 그들의 목을 찔러갔다. 쉬쉬쉿! 그러나 그 공격은 의외로 실패였다. 맹인도수들은 섭선의 끝이 목 부분에 이르기 직전, 하나같이 그 공세를 피해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천무영이 내심 놀라 부르짖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그의 등 뒤에 서 예의 막강한 도기가 뻗어왔다. "웃!" 그는 다급성과 함께 취팔선대나이보를 전개했다. 스스슷!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그 일은 그다지 여의치 않았다. 맹인도수들의 칼날은 눈이라도 달린 듯 영 활하게 그를 따라붙고 있었다. 이 상황은 천무영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이자들도 앞서의 괴인들과 마찬가지로군.' 그랬다. 이층의 괴인물들이 본능적인 감각을 활용했듯 도수들도 앞이 보이지 않다보니 주로 청각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람 소리만으로도 능히 방향을 판단해내는 그들에게는 여하한 보법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④ 슈슈슈욱―! 열여덟 자루의 파풍도가 허공에서 그물 같은 도기를 형성시키더니 천무영에게로 떨어져내렸다. 그는 재빨리 섭선을 접어 그들의 공 세에 맞닥뜨려갔다. 파츠츠츳―! 그 순간 그의 섭선은 도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천성(刀 天聖)의 도법이었다. "헉!" 맹인도수들은 도망(刀網)을 찢고 쇄도하는 가공할 도세에 경악성 을 터뜨리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하지만 이때를 기해 나머지 열여덟 명의 도수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슈슈욱― 천무영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그 새로운 공세를 맞받았다. 그러는 동안 싸움은 벌써 오십여 초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줄곧 혼신의 힘을 다해 섭선을 뻗어내고 있었으되 그때까지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맹인도수들이 이루고 있는 도진의 위력은 실로 막강했다. 그들의 원진은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한 가운데 차륜전법으로써 그에 게 무시무시한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천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안되겠군! 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 그의 전법이 전환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휘이이이......!" 그는 입을 오므리더니 기이한 음향을 토해내 사위의 모든 음파(音 波)를 차단했다. 그것은 청각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간파해내는 맹 인도수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 방도는 주효했다. 맹인도수들이 혼란을 느껴 주춤하는 찰 나, 천무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십지(十指)를 튕겨냈다. 무형무풍의 지력은 여지없이 그들의 혈도를 점해 버렸다. 쿠쿵! 털썩....... 맹인도수들은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나무토막처럼 쓰러지 고 말았다. 그들을 보며 천무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힘겨운 일전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마저도 떠오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어서.' 천무영은 그들을 뒤로 하고 사층을 향해 몸을 날렸다. ⑤ 문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천무영은 애써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삼층에서 있은 맹인도수들과의 싸움은 그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어 주었 고, 그때문에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는 호전적(好戰的)인 인물이 아니었다. 예정된 운명을 따르고는 있었으나 그 나름의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천무영은 발길을 멈추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은 적포에 적건을 둘렀 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중 우측에 서 있는 자는 말라 비틀어진 고목을 연상시키는 인물 이었다. 삐쩍 마른 그의 몸은 마치 뼈대에 껍질만을 씌워 놓은 듯 했으며 안색도 밀납처럼 창백했다. 반면에 좌측의 인물은 어찌나 비대한지 전신이 하나의 거대한 공 같았다. 눈은 두터운 볼에 짓눌려 단추구멍이나 진배없었고, 뱃살 은 숨을 쉴 때마다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네놈이 무영이라는 애송이냐?" 뚱뚱이의 실낱 같은 눈에서 횃불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 광경에 천무영은 입술 끝을 기묘하게 말아올렸다. "알면서 왜 묻소?" 이번에는 홀쭉한 자가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본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천무영은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굳이 생각하고 말고도 없소. 당신들은 신비를 가장한 채 특별한 명분도 없이 도처에서 혈풍을 일으켜 왔소. 그것이 어디 어제 오 늘의 일이오?" "뭣이?" 뚱뚱이와 홀쭉이는 대노했다. 그 말인즉 자신들의 집단을 삼류로 취급하고 아주 하찮게 여기는 투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 찢어죽일 놈!" 두 사람은 욕설을 퍼부으며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덮쳐들려 했다. 천무영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켰다. "잠깐! 나는 당신들과 대적하고 싶지 않소. 당신들의 주인을 만나 일을 해결하면 그뿐이외다." 뚱뚱이가 살찐 안면을 씰룩이며 기소를 발했다. "크크... 멍청한 놈! 맹주를 만나려면 먼저 우리를 꺾어야 하는데 도 말이냐?" 천무영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나는 머리가 나쁜가 보오. 도무지 이해가 안되니 말 이오. 천지쌍괴(天地雙怪)가 어찌하여 고작 남을 지키는 하인 따 위로 전락했는지." "뭐, 뭣......!" "감히!" 두 괴인은 종전보다 더욱 노한 듯했으나 각기 전신을 한 차례 부 르르 떨었을 뿐, 뭐라고 더 말하지는 못했다. 천무영의 비양거림은 계속되었다. "후후... 내 기억이 잘못 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오십 년 전만 해도 마도서열 백위 내에 들던 고수들이었소. 아니오?" "닥쳐라! 건방진 꼬마 놈." 뚱뚱이, 즉 천괴(天怪)가 위맹한 일 장을 뻗어왔다. 꽈르릉―! 거창한 벽력성과 함께 태산 같은 장경이 밀려왔다. 이에 천무영은 그저 가볍게 주먹을 내미는 것으로써 맞부딪쳐 갔다. 꽈꽝! 폭음이 장내에 거센 진동을 울렸다. "그... 그것은 풍뢰마권(風雷魔拳)......!" 천괴는 놀란 음성을 발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광경을 본 지괴 역시도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물었다. "꼬마! 너는 천뇌마군(天雷魔君)과 어떤 사이냐?" 천무영은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손바닥을 흔들었다. 스스스......! 경미한 음풍이 지괴의 면전으로 밀려들었다. 이를 느끼자 한껏 치 떠져 있던 지괴의 눈에 일말의 공포가 어렸다. "우우... 현음진유공(玄陰眞柔功)까지......?" 동시에 그는 번뜩 신형을 날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쾅! 폭음에 이어 그는 입에서 피화살을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일 대 일, 그것도 전면전일 경우라면 천하에서 천무영을 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있어서도 안되었다. 운명의 안배에 의 해 은자십천의 불패기학들을 모두 섭렵한 그였으므로. 천무영은 천지쌍괴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금후로 산자수명한 곳을 찾아가 조용히 쉬도록 하시오. 부디 나와 다시 마주치게 되지 않기를 바라오." 그것은 이르자면 일종의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말을 마치 자마자 돌아서더니 오층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천지쌍괴는 추격할 생각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 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풍부한 강호견식을 통해 그들에게도 진즉 부터 짚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 저자가 은자(隱者)들의 절기를 쓰다니....... 그럼 은자 천이 열렸단 말인가?" ⑥ 오층 안으로 들어선 천무영은 멈칫 했다. 그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백 개의 철인상(鐵人像)이었다. 질서정연하게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그들은 각각 창(槍), 검(劍), 도(刀), 륜(輪), 부(斧), 추(錐), 봉(棒), 선인장(仙人掌), 괴장 (拐杖) 등의 열 가지 중병기(重兵器)로 무장하고 있었다. 끼끼끼끼―! 철인들은 천무영을 보자 듣기 거북한 음향과 함께 움직임을 개시 했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그들을 응시했다. "후후... 기관까지 동원했을 줄은 몰랐군." 그아앙―! 우측의 전면에 서 있던 열 개의 철인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미끄 러져 오며 장창을 휘둘렀다. 천무영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쌍장을 합쳤다가 뻗었다. 콰르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쇳가루가 자욱하게 휘날렸다. 놀 랍게도 천무영에게로 쇄도해 오던 열 개의 철인상은 반 이상 으스 러져 있었다. 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철인들은 인간보다 강하되 감정이 없다. 그들은 단지 정해진대로 상대를 죽이고자 할 뿐 요령을 부릴 줄은 몰랐다. 따라서 이번 싸 움의 주도권은 당연히 처음부터 천무영의 몫이었다. 쐐애애액―! 다시 허공을 갈라온 것은 열 자루의 검이었다. 그는 신형을 팽이 처럼 회전시키며 연달아 십권(十拳)을 뻗었다. 꽈꽝! 꽝―! 검수인 철인들도 예외없이 으스러져 박살이 나는 순간이다. 그 뒤 부터는 천무영이 선제공격을 가했다. "고철들! 너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없구나." 그는 전신에 공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재공격을 시도하려는 철인 들 사이를 눈부시게 누비고 다녔다. 꽈꽈꽈꽝―! 폭음이 울림에 따라 압도적인 기세로 정렬해 있던 철인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차례로 무너져 갔다. '더 이상 이들과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천무영의 일신이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러 더니 그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이로 화하여 나머지 철인들을 무섭 게 휩쓸어 갔다. 화르르륵―! 얼마 남지도 않았던 철인들은 한순간에 모두 형태를 잃고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끝났군!" 천무영은 산뜻하게 읊조리며 다음 층으로 날아올랐다. 그 직후, 오층의 벽면에서는 한 가닥 괴이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으음, 정녕 예상밖이로구나. 설마하니 저 아이가 이 정도의 전력 손실을 가져올 줄이야......." 음성은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어쩌면 저 아이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도.......?" 끝을 맺지 않은 그 음성의 여운은 길었다. 천무영은 단숨에 육층에 당도했다. 그런데 한결 더 치밀한 안배가 마련되어 있으리라 여겼던 그 곳은 뜻밖에도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의도인가? 이 현상은.' 천무영은 무척 의아했으나 그렇다고 전진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는 칠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여기도!' 그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칠층도 육층과 마찬가지로 텅 빈 공간이었던 것이다. '설마하니 그들이 벌써 포기했을 리는 없고?' 천무영은 안색이 다소 굳어진 채 팔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석문이 진로를 막고 있었다. 천무영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석문의 곳곳을 살펴 보았다. 하지 만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그 문에는 손잡이는 고사하고 문을 열만 한 기관장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가운데가 세로로 가늘게 패인 것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석벽과도 같았다. 뚜벅, 뚜벅....... 마침내 문앞에 당도한 천무영은 부지중 긴장을 다졌는데, 의외의 사태는 그 순간에 다시 일어났다. 스르릉! 석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동적으로 열렸던 것이다. '이것이 과연 다행스런 조짐일지?' 천무영은 내심 중얼거리며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웃!" 그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코끝으로 한 가닥 기향 이 스쳐왔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천무영은 일시지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 향을 언젠가도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금모란이 가져다 준 차 속에......!' 그가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향기의 정체가 미혼향이 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자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그 때문에 파 생되었던 일까지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의 상황은 재현되었다. 천무영은 금모란의 영상에 사로잡힌 바 되어 단전어림이 후끈해지 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테면 상상의 세계를 빌어 내부에서 걷잡을 수 없는 욕구가 치밀었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천무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본능 은 순간적으로 그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당장에 시급한 것은 아무래도 전신을 확확 달구어가는 욕 망을 억누르는 일이었다. '으음, 일단은 독성을 체외로 몰아내야 한다.' 천무영은 즉시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시작했다. '이럴 수가!' 진즉부터 벌겋게 변해 있던 그의 안면이 더욱 무참하게 일그러졌 다. 그것은 맹렬한 약성이 이미 전신에 골고루 퍼져 있어 손을 쓰 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으음! 당해도 철저히 당했구나." 그는 참담한 신음과 함께 천독모후의 말을 떠올렸다. - 명심해라, 아이야. 세상에서 내가 해독시키지 못할 독은 거의 없었다만 단 두 가지만은 예외였다. 바로 광음환락산(狂淫歡樂散) 과 천황지독(天荒之毒)이었지. ⑦ 천무영은 낙심천만이었다. 하필 미혼향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다는 광음환락산에 중독되었은즉 향후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헤쳐나갈 전망이란 불투명했으므로. 그의 이마에 진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였다. 띵... 띠잉......! 어디선가 불현듯 은은한 주악소리가 울려나왔다. 동시에 그의 주 변에는 홍등이 무수히 밝혀졌다. 천무영은 경황중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팔층이 이렇듯 화려한 곳이었던가?'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의 벽에는 갖가지 장식물 외에도 분홍빛 휘 장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발등이 푹 덮힐 정도로 푹 신한 천축산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연이어 천정을 올려다보던 천무영은 흠칫 했다. 그곳에는 단지 보 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춘화도(春畵圖)가 잔뜩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추잡한......!" 시선을 돌리는 그의 귀로 이번에는 기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사륵... 사르륵....... 그것은 다름 아닌 옷자락 끌리는 소리였고, 곧 휘장 뒤편으로부터 일단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을 본 순간 천무영은 전신의 피가 급격히 흐르는 듯한 느낌 을 받았다. 현 상태에서 그런 반응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일신에 잠자리 날개 같은 나삼만을 걸치고 있 었다. 덕분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나 그 위에 얹힌 연 분홍빛 유실까지도 환히 내비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위태로와 보이는 세류요나 펑퍼짐한 둔부 등은 가 히 폭발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크으으......!" 천무영의 입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이것은 욕념과 싸 우느라 빚어진 극단의 고통을 대변한 것이었다. "호호호호호......!" 여인들은 교소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주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맷자락이 황홀하게 너울거리며 희디흰 팔을 간간이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치마폭이 빙그르르 돌 때마다 탄력이 넘치는 허벅지 가 유감없이 노출되고....... 연이어지는 그녀들의 율동은 점차로 천무영의 고통을 가중시켰건 만 불행히도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으으음......!" 여인들은 이제 웃음이 아닌, 야릇한 비음을 발하며 저마다 터질 듯한 젖가슴을 스스로 쓰다듬고 있었다. "으윽!" 천무영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이 툭 터지며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느덧 그의 전신 혈맥은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피부표면으로까지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는 공력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호흡조차도 흐트려서는 아니되었다. 그랬다간 봇물 터지듯 발산되는 욕망으로 인해 그는 대번에 한 마 리의 수컷으로 화하고 말테니까. 띠잉! 띠디디딩―! 주악소리는 종전에 비해 더욱 현란해져 있었고, 그에 따라 여인들 의 춤도 가일층 노골화 되어갔다. 사르륵......! 급기야 그녀들은 몸에 걸쳤던 나삼마저도 벗어던졌다. 그러더니 서로 뒤엉켜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으흑... 흑......!" 나녀들이 행하고 있는 짓은 일종의 애무로서 동성(同姓)간에는 불 가한 행위였다. 따라서 역겨움도 배제할 수 없으련만 지금의 천무 영으로서는 그럴 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함께 어울리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느라 그의 이마에는 굵은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우... 안된다!' 가쁜 숨을 훅훅 몰아쉬던 천무영의 눈이 일순 푸른 섬광을 발했 다. 동시에 그는 사력을 다해 부르짖었다. "멈추어라!" 쏴아아아―! 그의 일신에서 폭풍 같은 진기가 일어나 사위를 휩쓸었다. "아아아악―!" 나녀들은 제각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무력하게 사방으로 나가떨 어지고 말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으되 그 결 과는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쓰러진 나녀들은 칠공으로 피를 뿜고 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무영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입과 코에서도 검붉은 선혈이 쉴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그렇게 부르짖으며 구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가 사라지자 한 가닥 탄성이 들려왔다. "놀랍구나! 천하은밀색(天下隱密色)의 광음환락산을 견뎌내며 파 천마무(破天魔舞)를 깨뜨리다니......." 이는 오층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나 벽면에서 은 은히 울려나온 음성이었다. 쾅! 천무영은 구층의 문을 몸으로 부딪쳐 열어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 다. 그것은 일신에 밀어닥친 위기를 의식해서였다. 구층은 사면이 다 흑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흑색 을 띤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 위에는 백포로 전신을 감싼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천무영은 그자를 보는 순간 안면을 굳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인 간이라면 의당 있어야 할 사지(四肢)가 없었으므로. 놀라운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 얼굴은 물론 전신을 뒤덮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이란 한 마 리의 흰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천무영의 시선은 언뜻 보기에도 휑하니 뚫려 구멍만 남아있는 듯 한 상대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광음환락산의 독성으로 본신 의 기혈이 뒤틀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반갑소이다, 이렇게 상면하게 되어서." 털썩!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⑧ 한 쌍의 맑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무영은 깨어나자마자 그 눈과 마주했으며 몹시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독 깨끗하고 맑은 눈빛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의 눈과는 확연히 달라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천무영은 몸을 일으키면서 매우 놀랐다. 그것은 일신이 언 제 죽을 고비를 넘겼나 싶게 가뿐해져 있어서였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자는 잔혈맹 소속인지 적포를 입었는데 여느 인물들과는 달리 적건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자의 투명한 눈빛과 왜소한 체구를 보자 분명 어디서 한 번은 보았지 싶었으나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내가 쓰러졌던 그 자리로군.' 전면에 의자가 놓여 있는 것도 여전했고, 그 위에는 변함없이 머 리통과 몸통만 남은 괴인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적건인이 입을 열었다. "귀공의 체내에 퍼져 있던 광음환락산은 해독시켰소." 천무영은 움찔하여 적건인을 바라보았다. '이 음성은......!'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적건인은 뒤로 물러나더니 그림자처럼 괴 인의 의자 뒤로 가 섰다. 그 모습은 한 자루의 예리한 검이 괴인 을 보필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로 미루어 천무영은 적건인이 자신과 대화를 나눌 의사가 없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괴인을 향해 물었다. "왜 본인을 살려 놓으셨소이까? 잔혈맹주." 괴인은 듣기가 역겨울 정도로 기이한 음성을 냈다. "크크... 나는 본맹의 맹주가 아니다." "무슨 뜻이오?" 천무영이 묻자 괴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창건자라 해서 꼭 맹주가 되라는 법이 있느냐? 노부는 잔혈맹을 세우기는 했지만 맹주 자리는 비워 두었다." "쯧! 그건 의외구려." 천무영도 별 관심 없다는 듯이 간단히 덧붙여 말했다. 어찌 표현 이 되든 그는 원하던 바대로 잔혈맹을 관장하는 대표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이므로. 괴인은 묘한 웃음을 떠올리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꼬마야, 우리는 현재 맹주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천무영은 그제서야 본의 아닌 참견을 하게 되었다. 맹주가 새로운 인물로 정해졌다면 문제는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찾기는 했소?" "크크... 찾았지." "그게 누구요?" "너!" 천무영은 흠칫 놀랐으나 곧 눈살을 지푸렸다. "이보시오, 나는 당신과 농담이나 하러 온 사람이 아니외다. 내가 예까지 온 이유는 당신들의 혈행을 막기 위해서요." 괴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머리 카락이 헤쳐지며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맙소사!' 천무영은 목젖까지 차 오르는 비명을 애써 눌러야 했다. 괴인의 얼굴은 꿈에 볼까 싶을 만큼 끔찍하여 일층에서 보았던 사 복 우문추도 그에 비하면 미남이다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안면에도 길고 짧은 칼자국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득했는 데, 정도가 우문추보다도 훨씬 지나쳐 이목구비조차 사라져 버리 고 그 잔흔만이 대충 존재할 따름이었다. "꼬마, 너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보느냐?" 괴인의 얼굴 어딘가에서 울려나와 스산한 음파를 전하는 그 음성 은 부지중 전신에 소름이 돋게 했다. 그리하여 천무영은 신색을 가다듬은 후에야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⑨ "하면, 본인이 잔혈맹주가 되는 일은 가능할 것 같소?" "크크... 그야 당연하지. 나에게 꺾이면 너는 무조건 내 말을 들 어야 하니까." 천무영은 정색을 하며 괴인을 응시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 말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냐?"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또 있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나 는 패해서는 안되는 사람이외다." 괴인의 흉측한 안면이 충격을 받은 듯 마구 씰룩거렸다. "그렇다면... 너는 역시 은자천에서 나왔느냐?" 천무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떻든 나는 당신과 싸울 작정이오. 내가 이기면 당신도 필히 내 뜻에 따라주리라 믿소." "크크큭......!" 괴인은 크게 웃더니 물었다. "꼬마, 너는 노부가 두렵지 않느냐?" 천무영도 마주 웃었다. "그건 당신의 외양을 두고 하는 말이오?" "뭐, 뭣?" "나는 당신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소. 그런데 대체 무엇 때 문에 두려워해야 한단 말이오?" 괴인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벌컥 화를 냈다가 그렇지 않 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굳어졌던 안면을 풀었다. "크크...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면 그때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생각일 뿐이오." 동공이 뽑혀나간 괴인의 눈이 하릴없이 껌벅였다. "헛소리가 아니다. 설사 은자천의 은자들이 모두 나타난다 해도 노부의 이름을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천무영은 도시 믿어지지 않는 심경이 되어 중얼거렸다. '정말로 과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이 괴인은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호언장담을 한단 말인가?' 괴인은 종전에 비해 사뭇 진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꼬마야, 무림에는 네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팔대마역(八大魔 域)이란 것이 있었다." 천무영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팔대마역은 이름 그대로 제각기 강대한 마세(魔勢)를 형성하고 있는 여덟 개의 집단이었다. 또한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정도(正 道)에 짓눌려온 나머지 그 한을 풀기 위해 칼을 갈며 호시탐탐 기 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괴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때에 마침 꿈을 실현시켜줄 대마주(大魔主)가 나타나자 그들은 하나로 뭉쳤다. 모두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천하무림을 갖다 바치겠노라는 혈서를 쓰기도 했지."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인의 말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에 반해 괴인의 음성은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팔대마역을 통일시킨 대마주는 그들을 중심으로 가공할 단체를 세웠다. 세칭 암흑마전(暗黑魔殿)이 그것이다." 듣고 있던 천무영의 눈에 거센 파랑이 일었다. '암흑마전......!' 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 인물이... 암흑마전주라도 된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암흑마전주는 백 년 전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위인이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가 이렇듯 버젓하게 살아 있으니 향후로 어떤 사 태가 야기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천무영은 결국 괴인으로부터 우려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노부의 이름은 사마천홍(司馬天洪)이라고 한다. 짐작했겠지만 당 년의 암흑마전주였었지." "으음!" 천무영은 신음을 발하더니 침중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아직 살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소." 그 말에 암흑마전주 사마천홍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큭......! 그래서 유감인 자는 많지. 특히 천금성주(天禁 城主) 모용천우(慕容天宇)라면 더할 것이다. 그의 천왕겁(天王劫) 은 내 심장을 정확히 찌르지 못했으니까. 당시 나는 단지 늑골 두 개를 잃었을 뿐이다." 태연하게 읊조리고 있었지만 그 내용인즉 천무영에게는 온통 충격 적인 것들뿐이었다. "꼬마, 이래도 노부에게 도전하겠느냐?" 천무영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당신이 누구이든 내 뜻에는 변함이 없소." "크크크... 크카카캇......!" 사마천홍의 입에서는 아예 광소가 터져나왔다. 우웅― 소성에 깃든 공력으로 사방의 벽이 무섭게 진동했다. 천무영은 그 소리에 가슴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혼(魂)이 마 구 뛰노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그는 도전을 청했던 바, 이제 와 서 의지를 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패배였다. '은자들의 염원이 식지 않는 한 그것은 이 싸움에서도 끝까지 나 를 받쳐줄 것이다!' 확고한 신념을 다지는 그의 뇌리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 의 주인은 은자천의 대천주인 광한상인이었다. 천무영은 전신에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사마전주, 얘기는 끝났소." ■ 무영탑 2권 제19장 왜 무승부(無勝負)인가? ① 두 사람의 대치는 현장에서 막바로 이루어졌다. 천무영은 사마천홍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 했다. 비록 눈동자는 없었으나 사마천홍이 뿜어내는 안광은 그에 게 동공이 파열될 듯한 충격을 전했던 것이다. "크크크... 가소롭다만 꼬마, 너는 미워할 수가 없구나." 한 덩이의 육괴나 다름없는 사마천홍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 더니 그로부터 가공할 무형의 강기가 폭사되었다. 우우우웅―! "대단하구려! 정녕." 천무영은 그 막강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경탄성을 발했다. 아울 러 그는 전신을 통해 눈부신 백강을 피워올렸다. 츠으으― 그 광경을 본 사마천홍도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오, 놀랍구나! 너로 인해 광한상인의 광한여의천강(廣寒如意天 )을 보게 되다니." "별 말씀을!" 천무영은 말과 함께 일신을 눈부신 속도로 회전시켰다. 슈우우웅―! 그를 휩싸고 있던 백강이 무섭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그 여파 로 사방의 기물들이 차례로 으스러졌다. 심지어는 벽이나 천정, 바닥의 철판 등도 무사하지 못했다. 모두 가 진동을 일으키며 잘게 바수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허공에서 한 가닥 음산한 외침이 일었다. "무형살인마척(無形殺人魔拓)!" 사마천홍이었다. 그의 몸 주위로도 천무영이 발출시킨 백강에 버 금가는 거대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휘류류륭―! 두 사람의 공세는 마침내 격돌했다. 꽈꽈꽝! 천번지복의 벽력음이 사위를 뒤흔드는가 싶더니 태초의 혼돈인 듯 한 암흑이 그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말았다. 그 속에서 두마디의 참담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크윽!" "이럴 수가......!" 잠시 후. 격류와도 같던 소용돌이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장내의 전경을 드러 냈다.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인간 대 인간의 격돌이 빚어 놓은 결 과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혈혈마탑의 구층이 날아가 버렸다. 천정은 아예 흔적조 차 없어졌으며,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벽도 허물어졌으되 그 잔해 마저 일부만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천무영은 백치가 되어 버린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창 백하게 질려 백지장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암흑마전주 사마천홍은 의자가 아닌 맨바닥에 있었는 데,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포가 핏물로 인해 시뻘겋게 젖어 있 었다. 긴 백발 또한 적발(赤髮)이 되어 있었다. 쿠웅! 천무영의 신형이 급기야 모로 쓰러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자 욱한 혈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전신 팔만사천 개의 모공에서 미 세한 핏줄기가 뿜어짐으로써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사마천홍은 낮게 부르짖었다. "과연 너는 노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그 이 상이었다. 쿨룩, 쿨록......!" 심한 기침을 한 뒤로 그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놈... 감히 노부를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네가 멀쩡했다면 따 귀를 한 대 갈겨주었을 것이다." 사마천홍은 애초에 보여 주었던 태도와는 달리 승부에는 도시 관 심도 없는 듯했다. 한때 암흑마전주로 불리우던 인물치고는 기이 할 정도로 만사에 초탈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지면의 하부로 쑥 꺼져 들어갔다. "연홍(蓮紅), 그를 돌보아 주어라." 그가 쏟아낸 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스슷! 쓰러져 있는 천무영의 앞에 한 인영이 내려섰다. 그는 시종 사마천홍의 곁을 지키던 왜소한 적건인이었다. 그 덕분 에 그의 적건과 적포도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싸움의 여파는 그 에게도 이런 식으로 미쳤던 것이다. 그는 천무영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였고, 그로 인 해 찢어진 적건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나의 조각품인 양 준미하기 이를데 없는 얼굴을 그는 가지고 있 었다. 아마 천무영이 혼절해 있지 않았다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워 손이라도 덥썩 잡았으리라. 적건인은 천인혈(千刃血)이었다. 예전에 천무영과 술내기를 하여 진 바 있는 그 괴벽한 인물이다. 사실 천무영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도 당금 제일의 살수라는 천인 혈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잔혈맹에 당했다는 시신 들을 통해 미리 천인혈의 수법을 탐지해냈던 것이다. 사마천홍과의 일전이 있기 전에 벌써 그는 기도나 음성을 통해 천 인혈의 존재를 알아보았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묻고 확인 하는 절차를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휘이이잉―! 한 가닥 세찬 바람이 붕괴된 혈혈마탑의 구층을 무심히 휩쓸고 지 나갔다. 그 탓인지 가뜩이나 맥없이 덜렁거리던 천인혈의 머리끈 이 기어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그의 어깨 위로 칠흑 같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그 러자 그 머리칼이 지닌 검은 색조와의 대비로 인해 희디 흰 그의 얼굴이 발산해내는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천인혈, 아니 연홍(蓮紅)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그런 것 따위에는 일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근심이 깃든 눈으로 천 무영을 지그시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뿌연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당신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곧이어 창백한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저는 마음 속으로 약속했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림자를 잃 은 이후, 당신의 사람이 되겠노라고." 의식을 잃은 천무영이 알아들을 리 만무였으나 천인혈 연홍은 읊 조림을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당신의 지적으로 검법에 진전을 얻고 벅찬 상대를 무사 히 벨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손을 뻗어 천무영을 안아들었다. "어쩌면 당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꼭 그 렇게 되었으면......." 슷! 그는 천무영을 안은 채 앞서의 사마천홍과 마찬가지로 밑으로 쑥 꺼져 들어갔다. 휘이이― 휘이이잉―! 바람은 혈혈마탑을 휘감으며 어두워지는 암천으로 휘말려 올라가 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달빛은커녕 별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암천 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②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언제부터인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잠든 영혼을 일깨우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그 소리가 천무영 을 무의식 속에서 이끌어낸 것이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유 감스럽게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지? 이곳은 어디......?' 천무영은 자못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데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무엇보다 몸상태가 어떨지 심히 걱정되는 그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신을 움직여 보았다. "윽!" 그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우려했던 바대로 그는 멀쩡하지 못해 그저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도 전신이 부서져 나갈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아마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천무영은 이를 악물고 다시 움직임을 시도해 보았다. 무인으로서 만일 이대로 몸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살아 있은들 죽 은 것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따라서 그는 고통으로 인해 주저앉기 보다는 차라리 고통과 싸우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자에도 무수히 많은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대과벽에서의 혹독한 무공수련 과정을 이름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이렇듯 운신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똑... 또독......!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이 순간에도 계속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몸이 젖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무영은 이번에는 시험 삼아 안력을 돋구어 보았다. '아! 보인다.' 그의 심중에서 탄성이 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말 그대로 시력이 점차 회복되며 뿌옇게나마 주위의 정경을 볼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무죽죽한 담(潭) 위에 떠 있었다. 물방울은 천정에 매달려 있는 종유석(鐘乳石)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으음!" 천무영은 부지중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으면서 물방울 소리 나 듣고 있자니 그에게는 심적고통까지 겹쳐왔다. 요컨대 그 소리 는 더할 나위 없는 무력감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을 가히 초인적인 인내 로 이겨내야만 했고, 그러는 사이에 삼 일이라는 시간은 삼 년과 도 같이 지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③ "어떠냐, 꼬마. 견딜만 하느냐?" 삼 일 내내 들려오던 물방울 소리도 지겨웠지만 암흑마전주 사마 천홍의 빈정거리는 음성은 더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천무영은 차라리 툴툴 웃었다. "그렇게도 재미있소? 내 이런 꼴이." "크크...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궁금하면 너도 나중에 한 번 해 보아라. 네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설사 기회가 주어져도 나는 그따위 짓은 하지 않소. 타인의 고통 을 보며 즐기는 행위는 내 적성이 아니외다." 사마천홍의 음성은 더욱 비릿해졌다. "힘들겠구나, 크ㅋ! 그 지경이 되고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면. 나 야말로 너처럼 구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아 못한다." "그만 하시오, 더 듣고 싶지 않소." 천무영은 낮은 음성으로 잘라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에게 일 장을 날렸을 것이나 현재로선 그저 눌러 참는 수밖에는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 그래도 오기는 살아가지고, 크크큭......!" 반응도가 떨어지자 흥미를 잃어서였을까? 다행히도 사마천홍의 조 소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열흘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천무영은 전신을 옥죄이던 고통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던 그는 낙 심한 나머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틀렸다! 이 상태로는.......' 사마천홍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꼬마야, 그만 항복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여라. 너는 분명 나에게 패하지 않았느냐?" "시끄럽소." "크크크큭......!" 두 사람의 대화에도 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열흘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에도 낮과 밤은 어김없이 바뀌었고, 천무영은 운신을 못하 는 부자유스러움 속에서 똑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마천홍이 언제나처럼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끈질기 고도 집요한 설득이 반복되었다. "어때, 생각 좀 해보았느냐? 네가 잔혈맹주의 자리를 맡아 준다면 천하를 독패하게끔 도와줄 수도 있다."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내게 그런 욕심 따위는 없다고." 천무영의 음성도 예외없이 무감동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그의 어감에서 적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 는다는 점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마천홍은 큭큭거리며 웃더니 더 이상 길 게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이십오 일이 지났다. 천무영은 팔다리를 약간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모조리 소실되 어버린 공력은 여전히 한 올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사마천홍이 말했다. "이젠 지겨우니 고집을 꺾어라, 꼬마 놈! 기회라는 게 어디 항상 있을 줄 아느냐?" 천무영은 웃었다. "그건 나도 아오." "그런데 왜 노부의 말을 듣지 않는 게냐? 원한다면 나는 본신의 공력을 너에게 이전시켜 줄 수도 있다." "후후... 그래도 싫소." 천무영은 사마천홍과 말을 나누면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몸의 변화에 따른 현상 이라는 사실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십여 일만에 천무영은 정말로 웃을 수가 있었다. "후후후후......!" 마침내 길고 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더욱 더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운공을 해보면 그때마다 약간씩이나마 단전 에 공력이 모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사마천홍이 와 그를 을렀다. "크크크... 꼬마야, 나는 너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내 인내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전에 맘이 변하면 말해라." 천무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슬슬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조소가 섞인 추궁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 외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백일째 되는 날이다. 꽝! 꽈르르릉―! 굉렬한 폭음에 이어 담(潭)에서 무엇인가 날아나왔다. 천무영. 자욱한 흙먼지 속에 우뚝 선 그는 사지백해에 믿을 수 없으리만큼 강한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느낌 같아선 이 정도라면 일 장에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으음! 공력이 이전보다 오히려 증진된 듯하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엇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그 상태로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④ 지하광장(地下廣場). 천무영은 담의 측면을 따라 십여 장쯤을 걸었고, 그 결과로 이곳 에 당도해 있었다. 끼익......! 쇠를 긁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앞으로 바퀴 달린 의자 하나가 천천히 굴러왔다. "으음!"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발했다. 의자 위에는 암흑마 전주 사마천홍이 사뭇 거만하게 버티고 앉아 있었다. "크크... 꼬마, 너는 또 노부와 싸우고 싶겠지?" 사마천홍이 파면(破面)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천무영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왜 나의 몸을 회복시켜 주었소?" 그는 지난 백 일 동안 아무 생각없이 지낸 게 아니었다. 중상이 완치되고 공력까지도 증진되었으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이 모 두 사마천홍의 안배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사마천홍은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ㅋ! 그렇다고 너무 감격해 할 건 없다. 노부는 단지 공평한 대 결을 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어찌 하면 공평한 대결이오?" "전번의 싸움에서 노부가 이긴 것은 공력의 우세 탓이었다. 내가 공력이 우위인 것은 나이로 보아 당연한 노릇이고. 그러니까 이젠 초식으로도 굴복을 시켜보겠단 말이다." 천무영은 일시지간 마음이 크게 흔들려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이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사마천홍의 모습이란 마객(魔客)이 아니라 대협객(大俠客)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겁이 나면 거절해도 좋다. 내 너와의 승부라면 그 결과에 대해 일체 비밀로 붙여줄 용의도 있다." 천무영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건 당신의 취미요?" "크ㅋ! 맞다. 특히 삼태성체(三太星體)인 꼬마놈을 가지고 노는 일은 아주 재미있거든." "끙!" 천무영의 입에서 그답지 않게 괴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더 니 사마천홍을 응시하며 내심 투덜거리기에 이르렀다. '빌어먹을! 가지가지로군. 내 등에 찍힌 삼태성점(三太星點)은 언 제 또 보았지?' 자존심이 구겨진 가운데서도 그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 리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당신은... 정말로 초식대결이 가능하오?" 그 말에 사마천홍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다. 노부가 불구자가 된 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충분히 극복을 했다는 얘기지." 쨍! 쨍......!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놀랍게도 그의 어깨와 다리 부분에서 검 인(劍刃)이 튀어나왔다. "음!" 천무영은 사마천홍에 대해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이든 적어도 좌절을 모르는 기질만큼은 능히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너도 검을 쓰겠느냐?" 슉! 한 자루의 보검이 날아왔다. 천무영은 그 검을 받으며 자신도 모 르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상대에게 예를 표했다. "고맙소." "크크... 고마울 것 없다. 자, 간다!" 파츠츳―! 예리한 검강이 일직선으로 뻗어오자 천무영은 일순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차앗!" 그는 검신합일(劍身合一)되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사마천홍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그는 처음부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카카카캉―! 불꽃이 사방으로 찬연하게 퍼져나갔다. 그 광경은 눈앞이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변화무쌍한 검과 검의 대결은 무림사상 일찌기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장면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콰쾅! 콰르르르― 지하광장의 천정과 벽이 검기의 소용돌이에 의해 폭발음과 함께 마구 깎여나가고 있었다. 천무영. 그는 전신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지닌 바 절학들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은자십천은 물론이고 은자구십구천의 절세비학까지도 그 를 통해 무수히 발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마천홍을 제압할 수 없었으며 사마천홍 또한 천무영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대결은 벌써 일천 초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끝에 천무영은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그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절학들을 전부 다 펼쳤으나 종내 사마천 홍을 이길 수 없었다. 그때마다 괴공마초(怪功魔招)를 전개해 그 의 공격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니 어쩌겠는가? 이로써 천무영에게는 더 이상 펼칠 무학이 남아있지 않았고, 싸움 은 어느덧 삼천 초도 넘게 흘러가고 있었다. 파츠츠츳―! 전세는 갈수록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크크크......." 사마천홍은 사지를 대신한 검인을 마구 휘두르며 쉴새 없이 공격 을 가해왔다. 그 기세란 시종 굳건하면서도 막강했다. 반면에 천무영은 백의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악전고투를 면 치 못하고 있었다. 물심양면에 걸쳐 상처를 입고 운신을 못해 담 위에 떠 있을 때보다 손톱만큼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는 언뜻 두통을 느끼기도 했다. 이는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사마 천홍의 공격에 숨이 막힐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체념 탓인지 천무영의 답답했던 가슴은 곧 가라앉 기 시작했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밀려드는 공세를 막아내며 상대의 동작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는 사이, 천무영의 눈은 크게 떠졌다. 그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사마천홍의 공격에 일 점의 살기도 담겨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완만한 가운데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세들을 보며 막아내기에 바빴 던 천무영은 그 내용을 간파해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일천여 초수가 흘렀을 때 그는 사마천홍이 발출해낸 초식들을 대강이나마 모두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종내 천무영은 이를 악물고 상대의 초식을 역으로 받아쳤다. 파팟! 콰쾅―! "윽!" "크큭......!" 한 바탕의 격돌을 거친 두 사람은 각기 피를 뿜으며 허공으로 튕 겨져 나갔다. 그것으로써 일대 격전도 종(終)을 고했다. ⑤ 지글지글....... 지옥불과도 같은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으으윽!" 천무영은 심신을 송두리째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불길이 정수리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대과벽. 중천의 일륜은 대열사(大熱砂)의 사막을 가루로 태워버리고도 모 자라 아주 녹여버리려는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래는 너무도 뜨거워 맨살을 대면 살익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천무영은 벌거벗은 채 일륜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벌써 구십구 일이 지났으나 그동안에 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 상황은 급변한다. 삼라만상을 다 태워버릴 듯한 폭양은 거짓말처럼 서쪽 사구(砂丘)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대신 암흑과 함께 뼈를 에일 듯한 한기가 엄습해 온다. 천무영은 그런 극과 극의 고통 속에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 다. 그는 신지가 마비된 가운데 낮에는 가히 잿더미로 바스러졌고 밤에는 반대로 얼음덩이처럼 굳어 버리곤 했다. 죽기는 더 힘들었다. 일신의 기력이 모조리 쇠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으면 그때마다 예외없이 은자십천 중 누군가가 찾아와 그의 정 수리에 전신내력을 주입해 주고 사라졌으므로. 그런 식으로 백 일이 되던 날, 천무영은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쏴아아아―! 천무영은 전신 사지백해에 노도와도 같은 경기가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미친 듯한 경기의 흐름은 어떻게 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십이 경락과 삼십육 중추는 물론 칠십이 경맥과 백팔 요혈, 삼백 육십 경혈소로 흐르는 경기가 두루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언뜻 천무영은 일신이 구름이 된 듯 둥둥 떠오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의식이 가물가물하여 그것이 꿈인 지, 생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귀에 익은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 꼬마야, 기분이 어떠냐? 천무영은 충격을 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음성을 통해 그는 환각의 세계로부터 현실로 튕겨져 나왔던 것이다. '사마전주......!' 그 음성의 주인은 암흑마전주인 사마천홍이었다. 천무영은 도로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상대를 향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오오! 다... 당신, 내게 무슨 짓을......." 그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고, 이를 눈치챈 사마천홍도 굳이 내심을 숨기지 않고 광소를 터뜨렸다. "크허허헛......! 꼬마야, 너는 나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노부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다. 이제껏 이런 몸으로 버텨온 것만도 천행이 었지. 앞으로는 채 일 년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천무영은 격정이 치밀어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는 온 갖 만행을 일삼는가 싶어 사마천홍을 무척이나 혐오했으되, 그런 마음은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사마천홍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노부가 잔혈맹의 맹주 자리를 비워둔 것도, 줄곧 이끌어 나갈만한 새로운 인재를 찾았던 것도 모두 그때문이었다. 죽음은 다정한 벗인 양 늘 내 곁에 가까이 있었지." "우우......!" 천무영의 입에서는 비명과도 같은 기이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 는 희망을 잃어 체념으로 일관된 삶 속에서도 극기(克己)에 성공 한 한 인물에 대해 경외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장자유로부터 너에 관한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노부는 반신반 의 했었다. 그런데 네놈이 혈혈마탑을 한 층씩 정복해 가는 것을 보면서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크크큭......!" 사마천홍의 음성은 시종 음침하기 그지 없었으나 천무영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크크... 네놈의 자질은 고금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하다. 하지만 노부가 자청하여 삼백 년에 달하는 내공을 전수 하려는 이유는 네게 따로 부탁이 있어서이다." "저, 으윽!" 뭐라 말을 꺼내려던 천무영은 비명으로 대신해야 했다. 체내에서 무섭게 휘돌던 진기가 입을 벙긋 열자마자 거대한 힘으로 그의 전 신을 압박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크ㅋ! 입은 꽉 닫고 있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아까운 진기가 밖으로 유출되어 버리는 불운한 사태가 빚어진다." 사마천홍은 천무영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환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하여 담담하게 말했다. "네놈은 영리하니까 노부와의 비무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너와 나는 싸운 게 아니다." 천무영이 심중으로 답했다. '그렇소, 나는 당신에게 시험을 당했을 따름이외다.' 사마천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기쁘다. 네놈이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네놈으로 하 여금 노부의 무학을 습득하게 만들었으므로." '역시......!' 천무영의 가슴은 또 한 차례 들끓듯 진탕되었다. 그의 머리 꼭대 기에 앉아 있는 듯한 사마천홍이 이렇게 덧붙였다. "크크... 은자천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전설의 정사양대지맥(政 邪兩大之脈)의 무학에는 비할 수 없느니, 크크......." 그 말에 천무영은 눈을 크게 치떴다. '오오, 정사양대지맥이라면......!' "그들 대라천부(大羅天府)와 만겁종(萬劫宗)의 무학만이 진정한 무종(武宗)이라고 할 수 있다. 노부의 무학은 그중 만겁종에서 유 래된 것이지." '아!' 천무영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노부는... 크크...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암흑마전 을 세운 것은 그 불행을 증오했기 때문이고." 사마천홍의 음성은 차츰 가라앉았다. 그는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지사를 털어놓고 있었다. ⑥ 사마천홍. 그는 본래 중원제일의 명가라는 사마세가(司魔勢家) 출신이었다. 대대로 일곱 번이나 승상(丞相)이 나온 사마세가는 삼대에 걸쳐 구문제독(九門提督)과 금군통령(禁軍統領)까지도 배출해낸 유수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사마천홍은 분명 사마세가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되 그에 따 른 혜택을 누리기는커녕 성장하는 동안 내내 고초만을 겪어야 했 다. 이유는 그가 적자가 아닌 서자이기 때문이었다. 대장군인 사마대운(司魔大運)이 어느날 밤 술이 잔뜩 취해 사마세 가의 하녀를 건드림으로써 생긴 씨앗이 그였다. 어떻든 그는 허울만은 사마세가의 팔공자 중 막내로 적출(嫡出)인 일곱 명의 형들보다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불행은 전부 거기에서 야기되었다. 그는 자라면서 부친에게는 매우 사랑을 받았는데 일곱 형들에게는 종종 까닭도 없이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하곤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마세가를 떠나라는 강요도 수태 받았다. 하지만 사마천홍으로서는 형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우애를 믿었던 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떠올리며 형들의 질시를 묵묵히 참아냈다. 그런 그릇의 차이는 칠공자의 노여움을 더욱 부추겼다. 그들은 사 마천홍이 굴복하지 않자 급기야 그의 모친에게 손을 썼다. 힘깨나 쓰는 불한당을 사 겁간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사마천홍의 모친은 한 장의 혈서를 남긴 채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혈서에는 아들에게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살라는 처절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모친의 권고야말로 사마천홍을 더 없이 자극시켰다. 그는 모친을 잃고도 도피나 해야 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처음으로 깊 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 원인을 규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마천홍은 복수지검을 잡았다. 그는 편월이 뜨던 어느날 밤, 일곱 형 중 여섯 명의 목을 베고 그 길로 사마세가와 이별했 다. 그리고 폭발할 듯한 분노를 천하를 향해 돌렸으니....... 그것이 바로 암흑마전이 천하를 혈세하게 된 동기였다. "그로부터 근 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크크......." 사마천홍은 쓴 웃음 뒤로 짧게 부언했다. "노부는 지난 인생을 후회한다." '아!' 천무영의 눈이 휩떠지는 순간이다. 그는 그 상태에서 새삼 사마천 홍을 바라보았으며 그제서야 그간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두 사람 간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이분은 진정으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인생 기 록을 고쳐 쓰기 위해......!' 천무영의 눈에서 물기가 내비쳤다. 그로서는 기질상 상대가 백여 년에 걸쳐 절대마존으로 군림했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처절한 동기 와 본연의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몸부림에 더욱 마음이 기울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에 사마천홍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천무영을 응시하고 있었 다. 비록 실제의 눈은 없었지만 마음의 눈이 열려진 만큼 그 퀭한 구멍에서 쏘아져 나오는 빛은 강렬하기 그지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하고 있었다. 천무영은 어느덧 정신이 회복된 만큼 진기의 압력에서도 놓여나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입을 열어 물었다. "내게 하려는 부탁이... 무엇이었소?" ⑦ 잔혈맹의 한 내실이다. 그곳에서 지극히 대조적인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젊고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청년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 은 사지가 없고 얼굴이 뭉개진 추악한 노인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무영과 사마천홍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는 네가 삼태성, 즉 천지인삼태지교(天地人三太之交)의 체질 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척 놀랐었다. 일편으로는 의외의 수확이 다 싶어 뛸 듯이 기뻤던 것도 사실이고. 크크......." 웃음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기괴한 음색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에 응하는 천무영의 어투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건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 못됩니다." "크ㅋ! 그렇겠지. 어찌 보면 세상 이치는 공평한 게야. 뛰어난 자 질을 타고난 자는 필히 그만큼의 불운도 따르게 마련이니까. 은자 들이 너를 괜히 선택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맞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 점을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 "왜입니까?" 천무영이 묻자 사마천홍은 정말로 허심탄회하게 답했다. "무엇보다 노부의 마음에 드는 것은 은자천이 정사지간(正邪之間) 의 집단이라는 점이다. 네가 정도 출신이었거나 혹은 사도에서 배 출해낸 자였다면 노부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으음!" "노부는 체질적으로 정도를 혐오한다. 그들은 늘상 도의를 앞세우 는데 그러다 보면 위선이 되곤 하지. 인간은 누구고 완벽하게 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악에도 나름의 사유가 있은즉 헤아릴 아량 이 필요하거늘, 그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럼 악을 모두 허용해야 된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크크큭......!" 사마천홍은 과장되이 웃더니 불쑥 물었다. "당돌한 꼬마 놈, 너는 지금 노부가 스스로를 용납하고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죄송합니다, 노선배." "쓰헐! 하여간 너는 감탄스러운 놈이다. 노부의 생각을 뻔히 알면 서도 굳이 짚고 넘어가야 하는 그 성정까지도 말이다. 자신의 관 념과 조금이라도 부합되지 않으면 절대 굽히지 않는. 크크... 그 런 면에서라면 너는 노부와 꽤 닮았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노선배께서 제게 베푸신 집요한 추궁과 시험 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텐데요?" "크크크크......!" 사마천홍은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 너는 천하제일의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 라 노부의 뒤를 이어 만겁종의 전인(傳人)이 될 테고." "으음!" 천무영의 안면에서 웃음기가 걷혀나갔다. 되도록 밝은 얼굴을 보 이려 했으나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인 모양이었다. 사마천홍은 현재 일신의 내공을 거의 다 천무영에게 쏟아부어주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이나마 생명줄을 잇고 있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대화의 시간을 가 지기 위해서였는데, 자신의 일은 젖혀두고 주로 잠언에 가까운 얘 기만을 하여 종내 심금을 울려놓은 것이다. 천무영은 침착하려 무진 애를 쓰며 요지를 상기시켰다. "노선배께선... 아직 부탁 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 셨습니다." "그랬었나? 크크크......." 사마천홍은 기소를 발했으나 말을 돌리지는 않았다. "노부는 네가 잔혈맹을 발판으로 삼아 천하를 얻기를 원한다. 물 론 그 방식은 노부가 고수해온 것이 아닌 네 것이어야 한다. 하지 만 단 한 명에게만은 예외를 두었으면 한다." "무슨 뜻입니까?" "그자를 죽여다오." "그게 누구입니까?" "크크... 노부를 배신한 제자 놈!" "아!" 천무영은 의외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암흑마전주에게 제 자가 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 역시도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와 증오를 대변하듯 사마천홍의 음성은 다소 격앙되어 흘러나왔다. "놈은... 한마디로 존재가치가 없다. 필요에 따라서는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이니까. 아마 제 부모라도 걸리적거리면 가차없이 처단할 것이다." 천무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상에 그런 자가 있었습니까?" "그렇다. 천하에서 가장 잔인한 놈이지. 게다가 치밀한 두뇌와 엄 청난 무공까지도 겸비하고 있다." "그가 대체 누굽니까?" "놈의 이름은 등천륭(登天隆), 현재 지옥성주(地獄城主)다." "으음!"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지옥성이라면 잔혈맹와 더불어 당금 무림에 대혈풍을 일으키고 있 는 신비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성주가 암흑마전주와 그런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실로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크크... 등천륭, 그놈은......." 사마천홍의 입에서 또 하나의 비사(秘史)가 흘러나왔다. ⑧ 암흑마전주 사마천홍. 그는 백여 년 전 천금성주인 모용천우에게 패한 이후 절치부심했 다. 그는 팔대 마역을 수중에 넣는 한편, 암중으로 각처에 흩어져 있는 마도의 고수들을 끌어모으기에 이르렀다. 이르자면 제이의 혈세를 이루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 던 셈인데, 그 와중에 사마천홍은 평소부터 탐내던 천지쌍괴를 포 섭하고자 직접 길을 나선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근 삼십 년이나 지난 일로서 그는 당시 낭산(狼山)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사마천홍은 그곳에서 이리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사내아이를 보게 되었다. 아이는 이리의 먹이가 되기 직전으로 얼굴이 벌써 반 이상 뜯겨나간 상태였다. 어쨌든 그러고도 살아 있는 끈질긴 생명력은 사마천홍을 감동시켰 고, 그로 인해 아이는 이리떼들로부터 구출되었다. 더구나 아이는 무공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자질을 천부적으로 갖추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등천륭이었다. 사마천홍은 아이를 근처의 동굴에서 요상시켜 주었으며 그러는 동 안 본래의 목적도 잊고 무한한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끼니는 주로 아이를 습격했던 늑대로 해결했은즉 그것은 희대의 대마왕다운 발상이었다. 그 괴행을 통해 그는 뜻하지 않게 일생일 대의 기연과 만나게 된다. 저녁식사 감이었던 늑대의 뱃속에서 놀 랍게도 한 장의 지도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만겁지중별부비도(萬劫地中別府秘圖). 이는 소위 만사만악(萬邪萬惡)의 근원이라는 만겁종의 마공지학이 묻혀 있는, 구천만겁지중별부(九天萬劫地中別府)의 위치가 그려진 비도였다. 사마천홍은 이 모든 안배를 하늘의 뜻이라 여겨 아이를 유일한 직 전제자로 삼았다. 등천륭이라는 이름도 그때 지어졌다. 이후로도 등천륭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자질만 해도 예 상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으니, 그는 대견하 게 생각해 자신의 절학을 모조리 전수해 주었다. 반면에 등천륭은 성격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남 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은인이자 사부인 사마천홍에게도 그 점에서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사마천홍은 등천륭의 그 면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남을 믿었다간 언제고 실수를 범하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므로. 등천륭은 그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나날이 변화해갔다. 그리고 그 동안에 사마천홍은 만겁지종별부비도를 꾸준히 연구, 분석해 마침 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등천륭이 이십 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사마천홍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는 만겁종의 무학만 익히면 천금성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며 뒷일 을 등천륭에게 맡기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구천만겁지중별부는 천하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곳을 찾아낸 사마천홍은 전설의 만겁종이 남긴 마공절학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일명 마공구천구백구십구예(魔功九千九百九十九藝), 이것은 가히 상상을 절하는 기상천외한 마공기학이었다. 사마천홍은 천하일통을 확신하며 암흑마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반사를 다시 등천륭에게 일임하고는 막바로 폐관수련에 들 어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등천륭이 반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등천륭은 사마천홍이 폐관해 있는 동안 암흑마전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고, 급기야 사부가 먹을 음식에 독을 넣었다. "크크... 빈사상태에서 백 일만에야 깨어나고 보니 기가 막히더구 나. 놈에 의해 사지가 끊기고 눈이 뽑혀 나갔는가 하면... 전신의 심줄마저 가닥가닥 끊겨 있었지......." "으음!" "여하튼... 만겁마종 중 불사대마천공(不死大魔天功)을 익히고 있 었던 덕에 노부는 되살아났다. 그것은 육신이 아무리 망가져도 숨 만 붙어 있으면 회생할 수 있는 기적의 마공비예다." 말을 이어가는 사마천홍의 음성은 계속 떨려 나왔다. "놈은... 그런 나를... 천장단애 아래로 내던졌다." "그럴 수가......!" 천무영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크크... 노부는 그래도 죽지 않았고, 후일을 도모했다. 불사대마 천공 외에도 내 머릿 속에는 놈이 미처 익히지 못한 만겁마학(萬 劫魔學)은 절반 이상 들어있었으니까 말이다." "음....... 그랬었군요." "당시 노부는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 천하은밀색(天下隱密色) 과 천하은밀살(天下隱密殺)이 그들이다." "천하삼은밀 중 두 사람 말씀입니까?" "그렇다. 크크... 당시 그들은 천금성주에게 원한을 품고 천금성 에 잠입했다가 중상을 입고 패주하던 중이었다. 그들이 노부를 이 곳으로 데려왔다." 사마천홍은 옛일을 회상하듯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그후로 그들은 상세를 이기지 못하고 나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 다. 쌍둥이 딸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천무영은 거기까지 듣자 짚히는 바가 있었다. '그럼 잔혈맹의 살수들이나 혈혈마탑의 팔층에서 만난 요녀들은 천하은밀살과 은밀색이 키웠겠군.' 사마천홍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 두 계집아이도 복수에 혈안이 되어 있다. 현재는 잔혈맹의 일 급 살수들이지. 물론 노부의 영향이다." "그녀들도 세상에 대해 증오를 품고 있습니까?" "크크... 아직은 아니야. 개정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으음......." "그 계집아이들도 네놈에게 맡기겠다. 크크.... 다루기는 좀 힘들 겠지만 본성만은 선량한 아이들이니 잘 이끌어 주어라."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노선배." 사마천홍은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말을 그에게 했다. "노부는... 너를 믿는다." "노선배......." 천무영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⑨ 혈혈마탑의 구층이다. 사마천홍이 앉아 있던 흑색의 의자에는 천무영이 앉아 있었다. 결 국 그는 잔혈맹의 맹주 위(位)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의 전면에는 천인혈이 부복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그대가 여인이었다니." 천무영의 말에 천인혈은 일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더니 곧 고개 를 반짝 들며 또렷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래서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흐음?" 천무영은 놀란 듯 눈썹을 불쑥 치켜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상대 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실은 천인혈이 여인이고, 게다 가 빼어난 미인이어서 부담스럽던 그였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맹주." 천인혈의 인사에 천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직은 맹주라 부르지 말게. 잔혈맹 내에서 내 소신을 펴 기 전까지는 사양하겠네."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은."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사마맹주와 본인 사이에 있 었던 약조의 일환이니까." 천무영은 상대가 원하는즉 그대로 남자로 대하고 있었다. 그는 내 친 김이라 여겼는지 과거의 일까지 들추어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 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인혈, 그대가 말했듯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그대와 나 사이도 마찬가지다. 잊지는 않았겠지? 그대의 그림자가 내 것이라 는 사실을."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 년 동안이라는 것도?" 천인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맹주... 아니, 주공(主公)께서는 이제 부터 영원히 저의 주인이십니다." "쯧! 그렇게 되나?" 천무영은 쓴 입맛을 다신 후,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어찌 되는가?" "금연홍(金蓮紅)이라 합니다만 천인혈로 불러 주십시오." "음, 알겠네. 그럼 그대와 쌍둥이 자매인 처자는?" 금연홍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금모란입니다." "뭐, 뭣이?" 천무영은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지금... 금모란이라고 했는가?" "그녀를 아십니까?" "그녀는... 개봉성 천일야화원의 제일화가 아니었는가?" "맞습니다." "어찌 이런 우연이......!" 천무영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용모는 어찌된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것 같은데." "닮지 않았습니다, 기이하게도." "음....... 그녀는 어디 있는가?" "천금성에 있습니다." "천금성......!" 금연홍은 놀라는 그에 반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천금성 내에서도 가장 무서운 실력자인 북궁현리의 애첩으로서 잠입해 있습니다." '맙소사!' 천무영은 기절할 듯 놀라는 한편, 심중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해 보게." 금연홍은 돌연한 그의 태도에 다소 당혹을 내비쳤으나 품 속에서 두터운 책자를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여기에... 본맹의 조직과 활동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으음!" 천무영은 책자를 받아든 후, 굳은 얼굴로 첫장을 열었다. - 제일살(第一煞) 금모란(金牡丹). 천금성 잠입에 성공. 북궁현리로부터 지극한 총애와 신임을 얻고 있음. 목적은 천금성주의 천금성 내의 동태를 살피는 것. 현재까 지 많은 보고를 해 왔음. - 제이살(第二煞) 금연홍(金蓮紅). 잔혈맹 내부의 일을 관장함. 모든 조직의 총 지휘책. 지옥성에 첩 자를 집어넣는 일을 추진중임. - 제삼살(第三煞) 무흔(無痕). 역시 천금성에 잠입해 있음. 제일살의 방수( 手)로 맹활약 중. 광혈살인조(狂血殺人組)의 영반임. 책자에는 이 삼 인 외에도 숱한 이름들과 더불어 그들의 세밀한 활동내역까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천무영은 대충 그 부분만 가지 고도 크게 충격을 받았다. "무흔... 그도 천금성에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무흔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금모란의 곁에서 배회하며 그림자처럼 그녀를 지켰던 사내, 사랑 의 부피가 너무도 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들었던 그 고독한 영상은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있었다. 천무영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혈살인조란 무엇인가?" 금연홍은 대답했다. "그들은 본맹의 선봉격인 행동조입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짧게 덧붙였다. "살인 자체를 즐기는 자들이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러실 겁니다. 전 맹주께서도 그들을 부리기는 하셨지만 종내에 는 주공과 같은 생각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그대는 보기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그런 편입니다." 금연홍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무영은 그녀에게서 시선 을 옮겨 책장을 넘겨 보았다. 그것은 책자 속에 적힌 구십구살까지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과 활동 내역을 머리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읽어 나갈수록 그 는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천금성, 지옥성, 혈붕성, 잠룡부(潛龍府), 심지어는 각대문파와 황궁에 이르도록 안 들어간 곳이 없구나.' 눈으로 확인되는 잔혈맹의 세력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 었다. 구십구살은 천하은밀살이 직접 단련시키고 사마천홍의 무공 까지 체질에 맞게 전수시킨 최정예 고수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일야화원을 중심으로 중원의 숱한 기루들이 잔혈맹 산하의 옥혈화화조(玉血花花組)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영 반은 제일살인 금모란이 맡고 있었으며 정탐 외에도 미모를 무기 로 고수들을 영입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천무영. 그는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열흘이라는 기간에 걸쳐 잔혈맹의 전 부를 파악한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라면 능히 천하를 장악할 수도 있으리라.' 이는 곧 그가 손댈 부분도 그만치 많다는 의미였다. '너무하시다, 그분은! 이것들을 모두 내게 떠맡기다니.' 하지만 그 투덜거림은 역설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 순간 그의 뇌 리에는 사지와 눈을 잃었으되 결코 불행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는 일대기인, 사마천홍의 모습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열흘 전 사마천홍은 그곳을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거두었 던 천지쌍괴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천무영은 알고 있었다. 사마천홍이 이후로 다시는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심중에 차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노선배, 당신이 남기고 가신 말씀들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금 후로 이 무영의 삶 중 절반은 당신의 것이외다.' - 3권으로 이어집니다 - ■ 무영탑 제2권이 끝났습니다. ━━━━━━━━━━━━━━━━━━━━━━━━━━━━━━━━━ ■ 무영탑 제3권 -차례- 제20장 해후(邂逅), 그리고 접견(接見) 제21장 암중(暗中) 혈전(血戰) 제22장 화강지옥대전(火江地獄大戰) 제23장 천금성(天禁城)에서 제24장 역전(逆轉)의 서(序) 제25장 그림자를 되찾아도 제26장 노기인(老奇人)들에게 휴식(休息)을 제27장 천하에 무영(無影)하니...... 제28장 아름다운 그림자 ■ 무영탑 2권 제20장 해후(邂逅), 그리고 접견(接見) ① 쏴아아아―! 때아닌 폭우가 삼라만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춘삼월에 접어들었으나 꽃들은 채 봉우리를 피워 보지도 못한 채 폭우의 질타에 힘없이 꺾여지고 있었다. 삐걱, 삐걱......! 질퍽질퍽한 강남의 관도를 타고 짐을 실은 마차의 행렬이 이어지 고 있었다. 마차는 모두 열 대였다. 폭우를 피하기 위해 한결같이 검은 휘장 으로 단단히 덮혀 있었으며 무척이나 무거운 물건을 싣고 있는 듯 바닥에 깊은 홈을 파놓고 있었다. 각 마차마다 두 명씩의 마부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검은 색의 우장을 걸친 탓인지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철썩! 히이이잉― 마부들은 뭔가 중요한 물건을 실어나르는 듯 연신 말의 옆구리에 채찍질을 가하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본래 중원에서는 특별한 물건을 나를 때면 표국을 이용하거나 무 사들을 동원해 호송을 의탁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 이하게도 단 한 명의 호위무사도 없이 그저 묵묵히 폭우 속에 강 행군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선두의 마부석에도 두 명의 마부들이 타고 있었다. 그중 한 인물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느다란 눈 을 가진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초립을 깊숙이 눌러 써 용모를 알아볼 길이 없는 청년이었다. 청년이 노인을 힐끗 보며 물었다. "화노(火老), 약속장소는 아직 멀었소?" 나이답지 않게 굵직하고 위엄이 배어있는 음성이었다. 화노라 불 리운 노인이 예의 실눈을 들어 전방을 응시하며 답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곳에서 잠룡부(潛龍府)의 마차가 대기 중일 것입니다, 소도주(少島主)." 잠룡부라면 당금 무림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사패 중 하나다. 아 마도 모처에서 그들과의 접선이 있으려는 모양이었다. "대가는 어김없겠지?" 소도주라는 청년은 다짐이라도 하듯 물었다. "물론입니다. 잠룡부의 재력이라면 중원의 반을 사고도 남을 정도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그런데 그들은 거금을 들여 본도의 화기(火器)를 사다가 대 체 어디다 쓰려는 것이지?" "달리 무슨 용도가 있겠습니까? 패권 다툼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 려는 것이겠지요." 죽립 밑으로 드러난 청년의 입술이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흐흣! 나는 이번 행차에 정말 실망했소. 이곳에 오는 동안 우리 앞을 가로막은 자들의 실력은 형편 없었잖소? 고작 그런 놈들을 상대하려 본도의 화기를 사들이다니." 비릿한 조소와 더불어 그는 고개를 들어 암천을 응시했다. 쏴아아아― 암천으로부터 뿌려지는 빗줄기는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더욱 더 굵고 거세어져 있었다. "중원의 무학이 그 정도 수준이라면 본도의 중원진출 계획은 앞당 겨도 되리라 여겨지오." 청년이 보여주는 자신감에 비해 화노의 얼굴에는 일말의 걱정스러 운 표정이 떠올랐다. "소도주, 외람된 말씀이나 그동안에 마주친 자들은 녹림의 도적무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원무학을 그들과 견주어 평가한다는 것 은 어불성설이라 사료......." 그의 말을 청년이 중도에서 가로챘다. "화노의 문제는 늘상 너무 소심하다는 것이오. 본도가 천 년 이상 중원에 발을 내딛지 않은 것이 어디 실력이 부족해서였소? 그것은 다만 빙모곡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소이다." 청년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본도는 그간에 최상승의 대공을 이루어 빙모곡을 두려워하지 않 게 되었소. 그러니 그밖에 무엇이 더 두려워 꼭꼭 숨어 있어야 한 단 말이오?" 그의 어투에는 호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 노는 염려의 빛을 떨치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긴 도주께서 출관하시고 소도주께서 대공을 성취하셨으니 본도 가 위업을 달성할 때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핫핫핫......! 그만 하시오, 화노. 우리는 예까지 오는 동안 벌 써 백 번이 넘는 싸움을 치루었소. 그리고 본도의 화룡십팔절은 적들을 아주 가볍게 물리쳤소이다. 그렇지 않소?" 청년은 말을 마치자 뒤따라 오는 마차의 마부석을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십팔 명에 이르는 마부들은 저마다 자부심과 호기가 가득 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맞받아 주었다. 쏴아아―! 폭우는 줄곧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건만 그들의 눈빛에는 한 점 의 동요도 없었다. 그런 그들의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음 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②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너무 심했군. 소나 잡을 실력으로 범을 잡을 수 있노라고 호언장담이니. 후후후......." 별로 크지도 않은 그 소리는 빗줄기가 빚어내는 소음을 뚫고 마부 들의 귓전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웬 놈이냐?" "감히......!" 삐그덕, 히이잉―! 마부들이 각기 동요를 보이자 몰고 있던 말들이 지레 겁을 먹고는 일제히 울부짖으며 멈추어섰다. 청년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 키며 묵중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냐? 그대는." "안녕하시오? 화룡도(火龍島)의 소도주 나으리." 가볍게 응수해오는 그 음성에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일편 냉오함이 묻어 있었다. 말 그대로 화룡도의 소도주인 청년의 이름은 화옥상(火玉相)이라 고 했다. 다른 마부들은 그의 휘하에서 온갖 충성을 아끼지 않는 화룡도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불을 숭상했으며, 화력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무공 은 매우 고강했다. 화룡도주인 화룡왕(火龍王)을 부친으로 두고 있는 화옥상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일명 태양공자(太陽公子)라는 별호로 불리우는 그는 적어도 화룡 도 내에서는 화룡왕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스스스....... 그들의 전면에 하나의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자는 흑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빗물에 흠씬 젖어 민망하리 만큼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에 푹 눌러쓰고 있는 삿갓도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화옥상이 아까와는 다르게 다소 경멸이 깃든 투로 말했다. "이렇듯 불시에 나타났으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흠, 그 말은 맞는군." 흑포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삿갓을 약간 들어올렸다. 그에 따라 벽광을 담은 한 쌍의 서늘한 눈이 화옥상을 정시했다. 그는 천무영이었다. "무림에서는 날 천마무영(天魔無影)이라고 부르오." "천마무영! 그대가......?" 화옥상의 음성에는 어느덧 은근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화노는 약간 더 정도가 심했다. "그, 그렇다면... 최근 들어 잔혈맹을 재규합하여 무림천하를 종 횡무진한다는 그 인물......!"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근자에 이르러 잔혈맹의 살검풍과 함께 천마무영이라는 명호는 무 림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잔혈맹은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 은 짧은 시간 내에 크게 세력을 확장시켰을 뿐더러 한 가지 괄목 할만한 변화를 전 무림에 제시한 바 있다. - 죽일 자는 스스로 선택한다. 이는 잔혈맹이 새롭게 내건 기치였다. 그들은 천마무영이 맹주로 즉위하고 나서 청부살인에서는 일체 손을 떼었던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혈혈마탑으로 달려가 살인을 의뢰하려는 어리석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대신 한층 더 막강해진 조직력과 침투력 을 바탕으로 잔혈맹은 현재도 일로 성장세였다. 그들의 살수를 피해낼 자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일단 목표로 삼은 대상은 땅끝까지라도 쫓아가 척살했으므로. 잔혈맹의 살인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 죽일만 하니까 죽인다. 이것은 어쩌면 의미가 모호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잔혈맹에 의해 피를 뿌리며 죽어간 자들에게는 한결같이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즉 뚜렷한 이유도 없이 타의 공분을 살만한 악행을 저질렀다거나, 지닌 바 힘만 믿고 양민들로부터 약 탈을 일삼았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세인들은 그 상황에 의혹을 금치 못했다. 대가만 지불하면 정사의 구별도 없이 언제고 잔혹한 살수를 내뻗던 잔혈맹이 어이없게도 뒤늦게 협도(俠道)를 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따른 천마무영의 변인즉 더욱 아연한 것이었다. - 무릇 마(魔)에도 법이 있고 도(道)가 있다. 마의 이름을 더럽히 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 그랬다. 그는 협도가 아닌 마도(魔道)을 부르짖었으되 진정한 마 도, 즉 냉혹한 심판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강대 세력들의 각축전으로 인해 황폐할 대로 황폐해 진 중원무림에서 하나의 필요악(必要惡)인지도 몰랐다. ③ 쏴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폭우는 장내의 긴 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화옥상이 작심을 한 듯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다! 그대가 유명인물인 것은 내게 있어 매우 반가운 일이다. 지금까지 조무래기들만 상대하느라 갑갑했었다."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안되었지만 그 생각은 조금 후면 바뀔 것이오. 필경 나를 만난 사실에 대해 후회하게 될 테니까." 화옥상의 음성이 대번에 노기를 띠었다. "후회한다고, 내가 말인가?" "후후... 그렇소. 그대는 이제라도 속히 수하들을 데리고 화룡도 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게요." 화옥상은 앙천광소 했다. "크하하핫......! 그 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물론." 계속 비양거리는 천무영에게 그는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내 분명히 다짐해 둔다만 돌아갈 생각이 있었다면 애당초 중원땅 을 밟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오! 대단한 기세로군." 천무영은 손끝으로 마차들을 가리켰다. "문제는 저 속에 든 화기외다. 내가 당신을 허용하면 이후로 중원 인들 몇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오. 안 그렇소?" 화옥상은 사뭇 비정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흘렸다. "ㅋㅋ... 그런 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단지 대가를 받고 팔면 그뿐이다." "결과적으로 그 대가가 인명이 되는 데도 말이오?" "아무튼." 천무영이 물었다. "그래, 얼마나 받기로 했소?" "왜 묻지? 그대가 대신 지불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천무영은 수중에 들린 부채를 흔들었다. "그렇소. 다만 내가 치르려는 것은 황금이 아니외다." "그럼 무엇으로?" "목숨값이니까 역시 목숨으로." 간단한 그의 대답은 적지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뭐, 뭣이?" 화옥상이 초립을 들추더니 노기 띤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말... 다 했는가?" "쯧! 그래도 공정한 거래라고는 할 수 없소. 아까도 말했듯 우리 측은 몇만인데 그대들은 겨우 이십 명 아니오?" "마치 우리들의 목숨을 맡아놓은 것 같은 말투로군?" 천무영은 멀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천무영의 태도는 털끝만큼의 적의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으나 화 옥상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미친 작자로군! 그대는 이 시각부로 함부로 놀린 입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뒤를 향해 외쳤다. "쳐라! 화룡십팔절......." 그의 고함성은 그 부분에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의당 분 연히 일어서 주어야 할 화룡십팔절이 연속적으로 처절한 비명이나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악! 크아악―!"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되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토록 위세가 당당하던 화룡십팔절이 순식간에 모두 마상에서 땅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화옥상은 너무도 기가 막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화룡십팔절이 앉아 있던 마부석은 언제 나타났는지 적포적건인(赤 袍赤巾人)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검에서 시뻘건 선혈이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그들은 마차 밑에 은밀히 달라붙어 있다가 그곳으로부터 화룡십팔 절을 찌르며 차고 올라 선 것이었다. 천무영이 부채를 흔들며 여유있게 말했다. "이 정도는 그저 경고일 뿐이외다. 돌아가시오, 화룡도로.y 만일 다시 나온다면 그때는......." 그는 말끝을 흐리며 우수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맙소사! 그것은......!" 화옥상의 일신이 가늘게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천무영의 우수 는 얼음덩어리인 양 투명해져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십 장 가량에 걸쳐 빗물이 단단한 얼음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화옥상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천무영이 펼쳐낸 무공이 관음빙모 곡 최강의 절예인 빙백신강(氷魄神 )이라는 것을. "그대는... 빙모곡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가 더듬거리며 묻자 천무영은 고소를 지었다. "소도주께선 그게 왜 궁금하오?" 화옥상은 잠시 멈칫했으나 수긍의 뜻을 표했다. "그렇군.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는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어떻든 우리 화룡도에도 굉천열화살강(宏天熱火煞 )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화옥상은 급기야 마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츠츠츠......! 그의 일신이 순간적으로 거대한 빛무리를 토해내는가 싶더니 하나 의 불덩이로 화했다. "잠깐만! 소도주......." 화노가 대경실색하여 그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화옥상의 동작은 너무도 빨랐던 것이다. 슈욱! 그의 쌍장이 두 가닥의 붉은 기류를 뻗어냈다. 화르르륵―! 비가 내리퍼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기류가 스치자 그의 주 변은 삽시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실로 막강한 위력을 지닌 극 양의 신공이었다. ④ 스읏! 천무영은 우수를 들어 가볍게 원을 그렸다. 그 순간 그의 심중에 는 일말의 연민이 차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려는 그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오르지 못할 산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는 법이외다.' 꽈꽝―! 천지가 무너질 듯한 폭음이 사위를 울렸다. "크헉!" 처절한 비명과 함께 화옥상은 온몸이 산산조각나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소도주―!" 화노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화옥상을 향해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을 향해 천무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그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경고하거니와 본인이 손속에 인정 을 두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외다." 그는 신형을 돌리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가서 화룡왕에게 전하시오. 화룡옥결(火龍玉結)을 녹일 만한 화 공을 익히지 못한 이상 절대 중원으로 나오지 말라고." 화노는 내심 절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부르짖었다. '아! 저자는 대체 우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도주의 화 공이 경지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화룡옥결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하 거늘, 저자가 어떻게 그 사실을......?' 그는 전신에 살얼음이 덮혀 있는 화옥상을 안고 남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 길은 방금 전에만 해도 분명 자신들이 기세 좋게 말옆 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지나왔던 길이었다. '우우......! 이런 꼴로 되돌아가게 되다니.' 화노의 노안에서 눈물이 배어나왔다. 가슴에 무한한 희망을 품은 채 천 년의 봉도(封島)를 풀고 중원에 첫발을 내딛었던 그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관음빙모곡 쯤은 충분 히 꺾을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화노는 그 모두를 부인하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건... 우리가 너무 무지(無知)했던 탓이다.' 한편. 천무영은 선두의 마차에 올라타고는 채찍을 잡았다. "가자!" 철썩! 히이이잉― 그 뒤를 이어 열 대의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폭우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천무영은 삿갓 끝으로 굴러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동안 그가 이룬 성과란 대단한 것이었다. 잔혈맹을 십 배 이상 키워놓았으며 대강남북에서 사해오악에 이르 기까지 빠짐없이 그들의 세력을 심어둔 바 있다. 그 이면에서 천무영 자신도 과거와는 무척 달라져 있었다. 보다 냉철하고 굳건해졌다고나 할까? 이는 가치판단에 대한 기준이 달 라진 것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자연스럽게 한 괴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게 불 멸의 유산(遺産)을 남겨주고 간 인물, 즉 사마천홍이었다. '고금제일의 대마황... 그분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그 분 덕에 은자천에서 쌓은 바탕 위에 확실한 생의 지표를 세울 수 가 있었으니까.' 이것이 사마천홍에 대한 그의 정의였다. 천무영은 잔혈맹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빠르 고 정확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일찍부터 관념만으로는 아무 일도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 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요즘처럼 절실하 게 피부에 와 닿았던 적도 없었다. 직접적으로 뛰어들고 보니 인세에 존재하는 악(惡)은 그가 추측했 던 것보다 훨씬 더 뿌리가 깊고 범위도 넓었다. 따라서 가장 깨끗 하고 완벽한 징계란 살(殺) 외에는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붙어 있는 천마무영(天魔無影)이라는 별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짤막한 어휘 하나가 흡사 자신의 전부를 대변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어 그는 또 한 인물을 떠올렸다. '등천륭, 그자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천하제일의 지략가 이며 내게도 가장 무서운 적수이다.' 천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처단할 때가 되었다. 치밀한 방법으로, 신속하게 그가 쌓아 올린 마성(魔城)을 무너뜨려야 한다.' ⑤ 따스한 햇살이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거센 폭우를 이겨낸 꽃들이 더욱 눈부시게 봉우리를 틔우고 있었다. 호화롭기 그지 없는 정자 안이다. 이곳에는 거창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술은 오십 년이나 묵은 것으로 백 가지의 꽃을 모아 담구었다는 백화주였으며, 상다리가 부러질 듯 상 위에 가득 차려져 있는 요 리는 그야말로 산해진미(山海珍味)였다. 수십 가지에 이르는 나물류에서부터 제비집 요리까지, 세상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모두 다 갖다놓은 것 같았다. 스읏! 일신에 백포를 걸친 한 청년이 정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모를 가리기 위해서인지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그 청년은 천무 영이었다. 그리고 이 정자는 화룡도가 화기를 잠룡부에 넘겨주고 자 지정해 놓았던 접선지였다. 천무영은 이곳에서 대략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마차를 대기시킨 후, 단신으로 왔다. 그는 상 위에 차려진 요리를 보고도 흠칫 했 지만 그 앞에 있는 인물을 보고는 한층 더 놀랐다. '금노적(金老摘)......!' 그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입 밖으로 낼 뻔했다. 산해진미를 차려놓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전 날의 개봉사우 중 한 명인 금노적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금형, 당신이 어찌........' 금노적.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오 척도 되지 않는 단구도, 만면에 떠올린 미소를 통해 느껴지는 영활한 기질도. 단지 전에 비해 신수가 훤해졌다거나 그 체격에 우스꽝스럽게도 화복(華服)을 걸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는 짐짓 반가운 기색으로 천무영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겠소이다." "환대에 감사하오." 천무영은 애써 담담히 말하며 정자에 올랐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금적산이 음식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변변치는 않소만 많이 드시오." "별 말씀을. 그저 놀라울 뿐이외다. 간단한 접견을 위해 이토록 많은 요리들을 준비해 놓았다니." 금노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이 정도는 약소한 것이오. 시간만 넉넉했더라면 좀더 후히 대접을 해드릴 수도 있었을텐데." "후후... 그 말씀은 어째 잠룡부의 재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들리 는구려? 본인이 잘못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금적산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부인하지는 않겠소. 사실 본부의 재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백사 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무궁무진하오." 천무영도 마주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후후... 그 돈이면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요?" "그렇소." "어찌하여 수행자가 바뀌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소?" 금노적은 그제서야 십 장 밖에 세워진 마차들을 힐끗 바라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상관 없소이다. 원하던 물건이 저렇듯 무사히 도착해 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안 그렇소?" 천무영은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물건이 무사한지는 어떻게 아시오?" 금노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화기는 본시 중기(重器)가 아니오? 마차의 바퀴가 저처럼 땅에 깊이 박혀 있으니 틀림 없으리라 믿소." "후후... 대단한 안목이구려." "과찬이외다." 금노적은 안면에서 미소를 거두며 눈을 희번득였다. "또 한 가지, 화기운송을 담당한 자는 태양공자였소. 그가 오는 도중에 마차를 탈취당했으니 당신의 실력을 알만 하오." "호오!" "본부는 항상 실력자를 존중하오. 물건을 당신이 가져왔으니 대가 도 당신에게 지불될 것이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잠룡부답구려. 그러나 사람이 바뀐 이상 필요로 하는 대가 도 다르오. 내가 받고 싶은 것은 황금이 아니외다." "그럼......?" 그를 바라보는 금노적의 눈이 둥그레졌다. "잠룡부주를 만나게 해 주시오." 천무영은 말을 마치자 긴장을 가라앉히려는 듯 술 한 잔을 들이켰 다. 금노적이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때문에?" "후후... 자고로 강자는 강자를 존중하는 법이외다. 그가 강하다 니 일단은 꺾고 싶은 것이 진심이오만, 반대로 내가 꺾인다면 그 를 위해 일하고 싶소." "음! 몹시 어려운 제안이구려. 내 선에서 함부로 결정지을 문제도 아닌 듯하고." 금노적은 잠시 침음하더니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어찌 되오?" 천무영은 대답 대신 낡은 부채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이것을 아시오?" "오오! 그것은......." 금노적은 일시지간 뚝 굳어지더니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에서는 기대와 흥분, 반대로 불안한 빛까지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⑥ "그... 그 부채를 어디서 얻었소?" 더듬거리며 묻는 그에게 천무영은 담담히 말했다. "어떤 상인에게서 얻었소이다." "......!" 금노적은 부릅뜬 눈을 삿갓 아래로 드러나 보이는 천무영의 입술 에 고정시켰다. 천무영은 그의 시선이 몹시 따갑다고 느끼며 입가 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 그와 나는 서로 몹시 좋아했었소. 내 마음은 전과 같거 니와 지금의 그는 어떤지 모르겠소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삿갓을 벗었다. "무... 무영......!" 금노적은 떨리는 음성으로 그 이름을 부르더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덥썩 잡아왔다. 격동은 천무영의 가슴에도 밀려들었다. 그는 은연중 코끝이 시큰 해지는 것을 느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랜만이오, 금형." "무영!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더구나 네가 무림인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금노적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천무영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전날에도 그랬듯 상대를 감동시키는 인간적인 매력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황금을 끌어모으더니 그건 결국 잠룡부에 가입 하기 위해서였나 보구려?" "그런 셈이지." 금노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못 엄숙하게 덧붙였다. "잠룡부주께서는... 신인(神人)이시다. 나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황금으로 그분을 매수하여 힘과 권세를 얻으려 했으나 얼마 지나 지 않아 입장이 달라졌다." "어떻게 말이오?" 금노적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천하를 구하려는 큰 뜻을 품게 되었지." "흐음!" 천무영이 침음성에 이어 물었다. "잠룡부주가 누구요?" "그분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부중에도 단지 제후(諸侯) 출신이시라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야." "이름은?" "왕장후(王將侯)라는 존함을 가지고 계시지." 천무영은 술 한 잔을 더 비우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금형,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소." "무엇을?"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금노적을 향해 그는 새삼 확고한 신념이 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힘을 써서 나를 잠룡부로 좀 데려다 주시오." "네... 뜻은......?" 의혹과 함께 무슨 영문인지를 묻는 금노적에게 천무영은 빙긋 웃 음을 지어 보였다. "금형은 혹 그림자를 훔치는 사내의 소문을 듣지 못했소?" 금노적의 동공에 일순 거센 파랑이 일었다. "네가... 천마무영... 이냐?" "그렇소." 그는 재차 천무영의 손을 잡았다. "그게 너였다니! 그 명호를 들을 때마다 네 생각에 가슴 한 귀퉁 이가 아리면서도 늘상 설마 했는데......." "후후...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소이다." "좌우간 대단하다, 무영. 이렇게 커 있을 줄이야." 대견한 듯 천무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친형(親 兄)의 그것과 같았다. 이에 천무영도 싱긋 웃으며 스스럼없는 태 도로 자신의 수하들을 가리켰다. "금형, 저들은 먼 길을 온 터라 배가 무척 고플 것이오. 이 음식 을 좀 나누어 먹여도 되겠소?" "물론이지." 금노적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뒤로 천무영이 손짓을 해보이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인물들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분분히 신형을 날려왔다. 세상에 무서울 것 이 없는 고수이자 살수인 그들이었지만 배가 고픈 이상 먹는 자리 를 사양치는 않았던 것이다. 천무영과 금노적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역시 인간은 먹어야 산다니까. 하하하......!" 하지만 그들이 유쾌하게 웃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해후의 기쁨때문이었다. 금노적. 그는 본래 비천한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생활은 늘 가난에 찌들어 있었고, 이때 문에 그의 마음은 아주 일찍부터 병이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선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았던 터전에서 몰래 도주를 감행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워낙 치밀한 성격이다 보니 그의 도주는 무사히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금노적은 변방과 외국을 자유롭게 떠돌며 장사 를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장사 수완을 타고 났는지 무엇을 갖다 팔건 반드 시 열 배 이상의 이익을 남겼으며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꾸준히 재산을 모으는 데만 열중했다. 이것이 바로 예전에 그가 개봉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이다. 금노적에게는 나름대로 야망이 있었다. 그는 항상 황금이면 천하 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위인으로 장차 자신이 모은 황금으로 큰일을 벌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든 뛰어난 실력자를 찾아 자신의 황금으로 천하를 장 악하게 만든 후, 그 힘과 권세를 빌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서 보겠노라는 야무진 각오였다. 금노적은 그 길만이 가슴 속에 묻힌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도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수단으로써 잠룡부주인 왕장 후(王將侯)를 지목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막상 왕장후를 접견하게 되었을 때, 한껏 팽배해 있던 그 의 야망은 일시에 물거품처럼 녹아내렸다. 심지어 그는 이제까지 의 계획도, 목표도 모조리 부질없다 여기며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 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잠룡부의 관사(管使)로 눌러앉게 되었는데 그 배 경에는 왕장후의 깊은 심기와 넓은 도량이 있었다. 또한 왕장후는 금노적을 받아들인 후로 그가 기탁한 황금을 한 푼 도 축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수 년 사이에 배 이상으로 불려 놓았다. 알고 본즉 대인(大人)이기도 했지만 재물을 다루는 수완 에 있어서도 금노적을 능가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금노적은 현재 잠룡부주인 왕장후에게 흠뻑 빠져있는 상태였다. ⑦ 주거니 받거니....... 천무영과 금노적은 날이 저물도록 술을 마셔댔다. 금노적은 취중에 묻지도 않은 말을 숱하게 꺼내 놓았다. 거기에는 잠룡부에 관한 사항도 더러 섞여 있었지만 주된 골자는 왕장후 일 개인을 놓고 칭찬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줄곧 묵묵히 듣고 있던 천무영은 왕장후라는 인물에 대해 경이로 움을 금치 못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금형처럼 까다롭고 배타적인 사람이 이토록 빠져있을 정도라면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의 생각은 정확히 둘로 나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 인의대협일지도?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천하를 위협할 대효웅(大梟雄)이겠고.' 그러는 동안 금노적은 대취하여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의식마저도 혼미해졌는지 뭐라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을 웅얼거리는 그에게 천무영은 빙긋 웃어 보였다. "자! 금형, 어서 잠룡부로 갑시다. 당신이 이러는 건 내 뜻을 수 용한다는 의미로 알겠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일행과 더불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잠룡부가 위치한 쪽이었다. 강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세력, 신비에 가려진 잠 룡부를 향한 천무영의 일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구화산(九華山). 이는 산을 이루고 있는 아홉 개의 연봉(連峯)이 서기로운 꽃잎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때문에 예로부터 구화산은 절승명산이자 성산(聖山)으로 일컬어 져 왔고,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그 신비경을 감상하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시가(詩歌)들을 남기기도 했다. 태화봉(太華峯). 아홉 개의 연봉 중에서도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이 봉우리야말 로 강남무림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에 잠룡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용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잠룡부는 적어도 강남무림 인들에게 있어서는 근거지이자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강남에 춘색이 짙어지자 구화산에도 녹음이 우거져가는 이 때에 잠룡부에는 일로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과 강북 혈붕성(血鵬城) 간의 오랜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서무림을 제패한 지옥성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지옥성의 지옥사사(地獄死使)들은 그 사이에도 잠룡부의 세력들을 하나 둘씩 잠식해 갔고, 이를 보다 못한 잠룡부가 봉기하여 최초 이자 최후의 반격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춘광(春光)이 영롱히 꽃잎을 비추이니 벌나비는 짝을 찾아 이꽃 저꽃 옮겨 앉는데 어허, 인간들아 무엇이 아쉬워 밝음을 피해 어둠을 찾는가? 개화(開花)에도 아픔이 따를진저, 아무려면 지는 슬픔에야 비할손가?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화심(花心) 앞에 마음을 비추어 보게나 진정 부끄럽지 않은가? ⑧ 잠룡부 내의 화원이다. 한 중년인이 시가를 읊조리며 병든 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군왕(君王)의 풍도가 이러할까? 주위를 화사하게 물들이는 춘광도 그에게서 발산되는 광휘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는 일신에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흑발 은 단정히 묶인 채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물론 손짓 하나에도 기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 쌍의 눈은 흡사 억 년의 호수와도 같은 잔잔함을 담고 있다. 게다가 그의 근골로 이르자면 천생의 용골(龍骨)이었다. 잠룡부 내에서 이렇듯 압도적인 풍모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외엔 없다. 바로 잠룡부주인 왕장후이다. 이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 왕장후는 의외로 꽃을 좋아했다. 그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꽃을 가꾸는 일만큼은 한 번도 소홀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삭! 그는 한 송이의 목련(木蓮)을 베어내 코끝에 갖다댔다. "흠......!" 꽃향기를 음미하는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마 도 노력의 결실을 거두게 되어서이리라. 슷! 왕장후는 목련꽃을 손에 쥔 채 몸을 돌렸다. 장대한 체격은 아니 건만 그의 등은 하나의 산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고정시킨 곳은 북쪽의 하늘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뭐라 형용키 힘든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옥체는 평안하신지......?" 왕장후는 계속하여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그동안 완전한 무림인이 되었소이다. 당신을 보필하는 길은 무림을 평정하는 것......." 그의 눈에서 일순 섬광이 번뜩였다. "그러나 어찌 하오리까? 근자에 이르러서는 심기가 고르지 못하고 자꾸만 욕념이 생기니 말이외다." 왕장후의 입가에는 쓴 웃음이 어렸다. "후후... 아마도 이런 것을 일컬어 야망이라고 하는가 보오이다. 스스로 제어하기가 불가능한." 그는 북쪽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용서하십시오. 어쩌면 향후로 이 사람은 당신께 엄청난 죄를 지 을지도 모르겠소이다." 그 읊조림을 마지막으로 왕장후는 다시 몸을 돌리더니 무거운 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스슷! 그의 등뒤에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전하, 금노적이 돌아왔습니다." 왕장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엄하게 말했다. "지위(地衛), 그런 호칭은 삼가하라고 했었다." "속하, 죽을 죄를......!" 흑의차림에 다소 마른 듯한 체격의 사내, 무표정하나 예리한 눈빛 을 지닌 지위는 즉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결과는?" 지위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지극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도중에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왕장후가 물었다. "태양공자가 아니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소식에 의하면 화룡십팔절은 모두 죽고, 태양공자와 화노는 화룡도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으음, 그건 바뀌어 온 자가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로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왕장후는 여전히 그를 등뒤에 둔 채 묻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유룡전(遊龍殿)에서 부주를 기다리고 있는 줄로 압니다." "목적을 말했다더냐?" "네, 감히... 용이 약하면 꺾고, 강하면 뜻을 따르겠노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왕장후는 그제서야 비로소 돌아섰다. "가서 전해라. 내 친히 그를 만나보겠다." "네, 그리 알리겠습니다." 스스....... 지위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유룡전. 이곳은 잠룡부 내에 빈객의 접대를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천무영은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금노적의 안내로 이곳까지 오 게 된 그는 왕장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⑨ 그는 잠룡부의 정문을 넘어선 이후부터 지금껏 부중의 화려함에 사뭇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잠룡부의 사치란 가히 황궁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바닥에는 어느 곳이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일곱 가지 빛깔을 띤 칠 채 대리석이 깔려 있었으며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에는 모두 황금물이 두텁게 입혀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천정과 벽면에는 의례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심혈 을 기울인 듯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어떤 곳을 둘러보아도 천하제일의 재력을 소유한 잠룡부답다.' 천무영은 내심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찻잔을 응시했다. 그 속에 담긴 차는 설백용골차(雪白龍骨茶)라는 것으로 황제가 즐겨 마신 다는 귀한 차였다. 물론 맛도 일품이었다.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인가? 제후의 후손은.' 문득 차맛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이었다. "그대인가? 나를 시험하겠다던 자가." 한 가닥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척도 없이 다가들다니!' 천무영은 몹시 놀라며 유룡전의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화려한 용포를 입은 한 명의 중년인이 소리없이 대전 안으 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왕장후였다. '아! 이런 느낌은.......' 천무영은 그를 보자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기이하게도 상대에 게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분명 두 사람은 피차에 초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 게 낯설지 않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여겨지 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지? 그 기이한 감정에 이끌려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포권지례로써 왕장후를 맞이했다. "부주를 뵙습니다." 왕장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내가 부주인 줄 어찌 알았나?" "직감이지요." "용은 용을 알아본다, 이 말인가?" 천무영도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위명이 쟁쟁하신 잠룡부주께서 용이신 건 확실하나 소생도 그러 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흠, 말재간이 무척 좋은 친구로군."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왕장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듣자하니 화룡도의 고수들을 되돌려보냈다고?" "그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왜지?" 왕장후의 눈에서 일순 섬광이 번뜩 일었다. 이를 느끼면서도 천무 영은 변함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중원에도 인재는 많습니다. 외람된 말씀이나 소생은 부주께서 변 방으로까지 손을 뻗으신 이유가 매우 궁금합니다." "흐음! 당돌하군. 내게 그런 걸 묻다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불꽃을 튕겼다. 그것은 각 기 주관이 다른 두 사람의 첫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심경이 작용을 했는지 눈길을 먼저 거둔 사람은 천무영이었 다. 그는 다소 굳어진 얼굴로 상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불초는 천무영이라 합니다." "뭐, 뭣......!" 왕장후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몸을 휘청했다. 천마무영의 존재라면 진즉부터 익히 알고 있었건만 그가 왜 이토록 놀라는지 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인사를 받았다. "반갑군. 본인의 이름은 왕장후라고 하네." "존명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운반해 온 화기들은 예물로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천무영과 왕장후는 눈에서 각기 색채가 다른 빛을 내비치며 서로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눈빛이 교환됨에 따라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사실 그들에게는 별다른 대화가 필요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둘 다 만방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터라 상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고 있었다. 남은 것은 흉중에 들어있는 신념인데, 그것 도 눈빛을 통해 이렇듯 쉽사리 파악해내고 있었다. 단지 이 순간에도 한 가지 걸리적거리는 점이 있다면 이는 천무영 이 품고 있는 왕장후에 대한 묘한 친근감이었다. 앞서도 말했듯 도시 터무니없기 짝이 없는. ■ 무영탑 3권 제21장 암중(暗中) 혈전(血戰) ① 이 화원에는 사시사철 꽃이 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뛰어난 솜 씨를 지닌 화원의 주인이 정성껏 가꾸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이란 왕장후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꽃을 가꾸며 많은 이 치들, 특히 이재(理財)의 원리까지도 깨닫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곳에서 자라서인지 그는 돈을 물 쓰듯 써왔다. 심지어는 하룻밤 사이에 황금 십만 냥을 써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탕진이 아니었다. 가지를 잘 쳐주면 꽃이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나듯이 그는 황금이 필요한 곳과 써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그 스스로도 이 점 을 모르지 않았다. 따라서 천하를 삼킨다 해도 다 채워지지 않을 만큼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 인물로 인해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그치 고 말았다. 그자는 단지 왕장후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의 모든 희망을 선점해 버렸다. 그래도 왕장후는 차라리 야망을 포기했으면 포기했지, 그자에게는 어떤 짓도 할 수 없었다. 최소한 미워하지도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자는 자신의 친형(親兄)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형을 피해 야망을 꽃피울 제이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했으며 그곳이 이른바 강호무림이었다. 그곳으로 진출하는데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 우선 고귀한 신 분이 그러했으며 가문의 이해도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말하자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도 못하는 거대한 울타리가 그 를 가두어 놓았던 셈으로써 이에 반발한 그는 강호로 나가기 위해 급기야 한 가지 묘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 묘책이란 가문의 기대를 완전히 떨쳐버리는 일이었고, 이 때부 터 왕장후는 사람이 달라진 듯 주색잡기에 빠져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거금을 기원이나 도박장에 마구 뿌려댔다. 이 일은 거듭되다 보니 부친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부친에게 불려가 치도곤에 버금가도록 혼쭐이 났지만 작심하고 나선 터인지 라 끝내 도박이나 엽색행각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가문에서 축출을 당하게 된다. 기어이 야망의 첫 단계인 강호진출에의 목표를 달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성을 나서려고 하자 가장 고통스러워한 사람은 의외 로 그의 형이었다. 왕장후는 그때에 들었던 형의 일언(一言)을 아 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이 형만은 안다. 아우, 네가 어떤 인물인가를. 너는 어디서건 진정한 대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형은 문약했으나 심지가 깊고 자애로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왕장후는 형의 존재를 떠올리면 항시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한 아픔을 느끼곤 한다. 아무튼 그는 일신에 딸린 모든 것을 버렸던 그날 이후로 야생마처 럼 광활한 중원대륙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종내에는 이곳 구화 산에 잠룡부라는 단체를 세우게 되었다. 무릇 재물은 써본 자만이 그 특성을 아는 법이다. 그는 불가사의 할 정도의 이재능력으로 서서히 강남의 상권을 장악하더니 현재는 야망의 일차적인 초석을 다져놓은 상태였다. 왕장후는 감회 깊은 표정으로 매화가지를 쓰다듬었다. 그는 화목 만지기를 좋아했다. 다소 억지스러울지는 몰라도 꽃을 피워내려는 일념이야말로 그에게는 여하한 상황에서도 목적을 이 루고자 하는 강인한 열정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슥! 그는 소매 속에서 소도 하나를 꺼내 매화가지를 아무렇게나 잘라 냈다. 그리고는 소도를 옆으로 내밀며 말했다. "자네도 가지를 하나 잘라내게." 소도를 건네받은 인물은 천무영이었다.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가슴 속에는 묘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매화가지가 잘라져 나갈 때에 왕장후의 소도가 내 뿜는 예리한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은 진중한 기색으로 매화가지를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지체된 후에야 그는 소도를 매화가지로 가져갔다. 슷! 매화가지가 본체인 나무로부터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묵묵히 그것을 주워 왕장후에게로 넘겼다. 왕장후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 이 두 개의 가지로 자네와 나의 서열이 가 름된다는 것을."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뭇가지들을 품 속에 갈무리하더니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② 잠룡부중의 한 정자(亭子). 잠룡부의 내원에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연못이 있었으며 정 자는 이 연못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깥 쪽에서 정자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한껏 운치를 자아낸다. 그것은 전체가 매끈하게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주위풍경 과 함께 그림 같은 광경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정자 안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주안상의 한복판에는 기이하게도 두 개의 화병이 놓여 있 었다. 모양은 물론 크기까지 똑같은 이 화병에는 같은 양의 물이 담겨 있었으며 각기 매화가지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주안상을 놓고 마주앉은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천무영과 잠룡부주인 왕장후였으며 화병에 담긴 두 개의 매화가지는 사흘 전에 그들이 베었던 그것이었다.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 받으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자백가(諸者百家)를 비롯하여 풍수지리(風水地理), 게다가 천문 역리(天門易理)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포괄적인 담론이 그들 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낮에는 따스 한 봄햇살을 받으며 연신 백화주를 들이켰고, 밤이 되면 달빛을 벗삼아 죽엽청을 비워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십 일이 지났다. 하지만 천무영과 왕장후는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들 은 말투나 태도 등 모든 것이 처음과 똑같았다. 대화의 내용만이 약간 달라져 두 사람은 병법과 처세술에 대해 각 자 한바탕의 열변을 토하고는 목을 축이려는 듯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의 호방한 웃음소리는 심중이야 어떻든 사나이 특유의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멈추어졌다. 그들은 상의 중앙에 놓인 화병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측 화병에 꽂혀 있던 매화가 시들고 말았던 것이다. 반면에 좌측의 매화는 그대로 싱싱한 생명력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천무영은 왕장후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시들어 버린 우측의 매화가 그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꽃의 생기가 오래 유지되려면 무엇보다 잘라져 나갈 시에 그 기 (氣)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소도를 쥔 자 의 내력이 얼마나 정순하느냐가 관건인 셈이었다. 천무영으로서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정말 기쁘군. 자네 같은 동지를 얻다니." 이것은 왕장후의 진심이었다. 그는 천무영을 곁에 두게 됨으로써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儀式)은 경건했다. 왕장후와 천무영.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팔목을 칼로 긋고 있었다. 슷! 스슷! 그에 따라 흘러나온 더운 피는 하나의 술잔에서 합쳐졌으며 그들 은 엄숙한 신색으로 그것을 절반씩 나누어 마셨다. 이로써 두 사람 간에는 혈맹(血盟)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 피의 맹세가 영원토록 지켜질 것을 다짐하며 손을 맞잡았다. "아우!" "형님......."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신 피는 확실히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천무영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일말의 회의는 그때 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의식을 요구한 사람은 왕장후였는데 천무영은 당시 그에게서 두 가지 상이한 면을 느낄 수 있었다. 개중 하나는 자신에 대한 절대적 호감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의심이었다. 천무영은 왕장후의 요구에 따랐으며 상대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렇듯 이중적인 심리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역시 왕장후 를 좋아하면서도 경계심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혈맹을 맺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의식을 종용한 왕장후도, 거기에 부응한 천무영도 일생일대의 모 험을 감행하고 있다면 맞았다. 천무영은 술을 거나하게 마신 채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은 그는 습관인 양 착잡한 기분으로 자신과 손을 잡 던 순간의 왕장후를 떠올렸다. '왕장후... 그를 대하면 왠지 나도 모르게 끈끈한 감정에 이끌리 게 된다. 그가 걸출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 다고 이렇게 마음이 쏠릴 이유까지야......?' 그가 잠룡부에 들어온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왕장후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할라치면 천무영은 늘상 번뇌 를 배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그는 왕장후를 깊이 알 지 못했으며, 그런 반면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끌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상대를 분석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일단 당면해 있는 과제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거기에는 나름의 자위도 없지는 않았다. 일찌기 은자십천이나 암 흑마전주인 사마천홍 등 주로 당대에 이르러서도 거물급인 인물들 과 인연이 닿았던 그였으되, 그 인연도 쉽고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다행인 건 그와 내가 현재까지 목적이 같다는 점이다. 그 가 가진 야망이 어떤 종류이든 나와 같은 노선을 달리고 있으니 협력(協力)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테고.' 천무영은 가능한 한 기분을 가볍게 가지려 애쓰며 금후로 해나가 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설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가 상기해낸 것은 화룡도의 화기였다. '준비된 것을 썩힐 필요야 없지.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그 화기들 은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화기들은 소유권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애초에는 왕 장후에게 선물했었지만 그 휘하에 들게 된즉 천무영의 수중에 도 로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들은 화기제조가 전문인 화룡도에서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 든 것인지라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마따나 성질을 알고 잘만 사용한다면 제아무리 천험의 요새일지 라도 간단히 공략할 수 있었으며, 적들과의 전면전에서도 대량 살 상이 가능하여 대승(大勝)을 거둘 수 있었다. 잠시 후. 천무영은 대강의 구상을 마친 듯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 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정자의 상에 놓여 있던 두 개의 화병이 나 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화병들을 그는 왕장후로부터 기념으로 받았던 것이다. 천무영은 손을 뻗어 시든 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단지 그 가지 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 시들었던 매화가지에 푸른 색의 은은한 기류가 어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 죽음에서 삶을 되찾고 있는 것이었다. ③ "후후......." 천무영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매화가지의 푸른 잎과 싱 싱하게 피어난 꽃망울을 응시했다. "생명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한 번 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향기를 선사할 수 있으니." 그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매화가지를 꽃병에 꽂아 두고는 창 밖 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창 무르익어 가는 봄기운이 그의 마음 속 에 큰 부피로 상쾌함을 가져다 주었다. "으음, 좋군!" 천무영은 그 현상을 하나의 징조로 해석하며 한 번 숨을 깊이 들 이켜 봄의 향기를 맡았다. "이제 슬슬 일을 벌여봐야겠지?" 그는 신형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에서 새 생명을 얻은 매 화는 예전보다 더욱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삶이 주어진 데 대해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천무영의 신형은 점차 어두운 밤의 그늘로 파묻혀 가고 있었다. 그 방향은 왕장후의 처소인 잠룡각 쪽이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혈맹이 이루어진 이상 적어도 왕장후에게 해 가 될만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는. 호남(湖南)의 서쪽이다. 사천(四川)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최대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잠룡부와 지옥성은 이곳에서 격돌했다. 그러나 계속하여 일진일퇴 (一進一退)만이 거듭될 뿐 뚜렷한 승부는 나지 않았고, 그 가운데 서 벌써 수만이 넘는 인명이 덧없이 희생되었다. 사천 무협(巫峽)을 거쳐 흘러내려오는 장강(長江)의 지류는 연일 제 빛을 잃고 선혈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어 있곤 했다. 그만큼 치 열한 혈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서무림에서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지옥성의 야심은 꺾일 줄을 몰랐 으며, 그것은 이를 저지하려는 잠룡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세는 날이 갈수록 지옥성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처음에 는 팽팽한 공방으로 시작된 싸움이었으나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잠룡부는 차츰 패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혈성표화도(血星飄花刀) 냉군기(冷君奇). 그는 사십팔 세의 나이로 잠룡부의 사대군자(四大君子)에 당당히 끼이게 된 인물이었다. 이것은 그의 무위를 대변하는 말로서 실제 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류고수였다. 혈성전(血星箭)을 이용한 암기술은 가히 독보적이었으며 도법(刀 法)에 있어서도 적수를 찾아보기가 힘든 그였다. 냉군기는 그 실력들을 바탕으로 현재 강남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호남성을 수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잠룡부의 고수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육 개월째 지속되어온 혈전은 그들의 육신을 황폐하게 만들어 놓 음으로써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본래 호남성에는 잠룡부의 분단이 십팔 개나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고도 지옥성의 공세는 조금도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으니 냉 군기 등으로서는 자칫 전의마저도 상실할 지경이었다. 그는 잠룡부의 본단으로 그동안 아홉 차례나 사자를 보낸 바 있는 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본단에서는 원군을 보내오기는커녕 이렇다 할 회답조차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호남성 자체내의 고수들끼리 뭉 쳐 죽기를 작정하고 지옥성의 공세를 막아낼 수밖에는. ④ 냉군기는 사뭇 비장한 눈빛으로 혈성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최후의 일전을 대비하며 각오도 다질겸 자신의 독문암기인 혈성전의 장치들을 면밀히 점검하고 있는 중이었다. 혈성전은 양쪽 소매에 하나씩 넣고 발출하는 것으로 지척간에서 쏘아내면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피할 수 없는 살상 전문용 암기였 다. 더욱이 촉이 문자 그대로 별 모양을 하고 있어 여간해서는 잘 뽑혀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굳은 얼굴로 혈성전을 소매 속에 도로 집어넣더니 이번에는 명주천으로 표화도(飄花刀)의 도신을 닦기 시작했다. 슥, 스슥......! 냉군기는 그 단순한 동작과 더불어 심중으로 읊조렸다. '이제 믿는 것이라고는 네놈뿐이다.' 그에게 희망 따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표화도에 붙 이는 그 말은 사실상 죽음을 함께 하자는 의미였다. 잘 닦여진 표화도의 도신에서 일순 섬뜩한 도광이 일었다가 스러 졌다. 그 빛은 주인의 심경을 재빨리 눈치채고 뭐라 응답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냉군기의 도식은 빠르고 신랄한 쾌도(快刀)로서 오래 전부터 무림 의 일절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함께 명성을 누렸던 표화도는 길 이가 세 자 두 치에 종잇장처럼 얇았다. 반달처럼 굽어 있는 도신 에는 여덟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불현듯 냉군기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으음!' 그는 새어나오려는 신음을 꿀꺽 안으로 삼키며 표화도의 도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은 침중하게 굳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 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나타났는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흑영 (黑影)의 존재를 확인해 보고자 해서였다. 곧이어 냉군기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후... 세월이 가도 표화도의 예리함에는 변함이 없구나.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그는 도신 위에 명주천을 올려 놓았다. 슥! 경미한 음향과 함께 천은 거짓말처럼 반으로 잘라졌다. 하지만 더 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타핫!" 명주천을 잘라낸 표화도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그것은 냉군기의 뒤편을 향해서였다. 츠읏! 무엇인가 베어져 나가는 듯한 음향이 적막을 깨뜨렸다. 냉군기의 입가에 조소가 어린 것은 그때였다. 그는 느긋한 심정이 되어 불청객의 비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후후... 과연 표화도는 예리하구려." 등뒤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이와 동시에 냉군기의 입 에서는 다급성이 터져나왔다. "헉!" 그는 일편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도 일었었 다. 적어도 그의 상식 선에서는 그런 사태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거니와, 일어나서도 안되었으므로. 현실을 인정하는 냉군기의 안면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떫 은 감 씹은 표정이 되어 신형을 빙글 돌렸다. 그의 앞에는 흑의를 입은 한 청년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덕분에 냉군기의 자존심은 더 구겨지고 말았다. '내가 이토록 젊은 자에게......?'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는 일류고수답게 경황중에도 벌써 흑 의청년을 향해 양 소매를 떨쳐내고 있었다. 슈슉―! 두 가닥 혈광이 뻗어나갔다. 거리라야 불과 삼 척 정도, 따라서 그 붉은 기류는 곧장 상대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파팍! 이 음향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혈성전이 적중되는 소리였다. "후후... 침입자를 허용할 수는......!" 냉군기의 음성은 자못 여유있게 흘러나왔으되 유감스럽게도 끝을 맺지 못했다. 그의 눈에 두 자루의 혈성전을 양 손에 나누어 쥐고 있는 흑의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져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너... 너는 누구냐?" 청년은 담담한 어조로 짧게 대답했다. "그림자 없는 인간." "그럼... 천마무영......?" 냉군기의 안색은 빠른 속도로 제 빛깔을 회복해 갔다. 그도 상대 가 자신이 속한 잠룡부와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 는 전해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⑤ 천무영은 두 자루의 혈성전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혈성전은 훌륭한 암기이나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소. 그것 은 발출시에 나타나는 붉은 빛이오. 암기의 관건은 무형 중에 적 을 격살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었소?" "옳은 말이외다." 냉군기는 고소를 지으면서도 상대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문제라면 그도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으되 보완책이 마련 되지 않아 고심해 오던 터였다. '쯧! 어쩌겠는가? 그것이 내 한계인데.' 그는 내심 쓴 입맛을 다시며 지그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가 생 각하기에도 설마하니 천무영이 혈성전의 약점이나 추궁하기 위해 전장(戰場)의 한복판에 왕림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아닌 게 아니라 천무영의 입이 열리기는 했다. "후후... 냉총령(冷總令), 손님 접대가 너무 소홀하구려. 상의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늘." "아! 죄송하외다." 냉군기는 허둥지둥 의자를 내어 권했다. "어서 앉으시오, 그렇잖아도 본단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 게 기다렸소이다. 만일 아무 연락이 없으면 이대로 자폭(自爆)이 라도 불사하려는 각오를......." 천무영이 미소로써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일은 없소. 다만 시간이 좀 늦어졌을 뿐이외다. 대신 다방 면에 걸쳐 진용이 갖추어지게 될테니 안심하시오." "오오!" 냉군기는 감격한 나머지 부지중 탄성을 발했다. 그는 언제 침울했 냐 싶게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귀맹도 이번 싸움에 합류하게 되오?" "아마도." "으음......." 냉군기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세가 불리하게 기울어 있다고는 하나 총단의 지원이 있는 데다가 잔혈맹까지 가세한다니 더 이상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천무영이 그를 향해 말했다. "본인이 맹주로 있는 이상 절대로 살인청부는 받지 않는다는 방침 이었소. 하지만 본맹도 이번만큼은 관례를 깨고 청부를 받았소이 다. 잠룡부주에게서 말이오." "아! 부주께서 그렇게까지......." 냉군기는 감읍하여 더 말을 잇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밤을 새워 긴 대화를 나누었다. 천무영은 냉군기에게서 그간의 전황은 물론 상대측의 전력에 관해 서도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총단에서 파견된 방수 에게 대만족을 느껴 알고 있는 바를 조금도 남김없이 타 털어 놓 았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자, 이들이 내 수하들이오." 천무영은 아홉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있는 마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이곳에 올 때 잔혈맹의 살수 열여덟 명과 함께 화룡 도의 화기를 준비해 가지고 왔었다. 냉군기는 그들을 보게 되자 대번에 가슴 한구석이 써늘해지는 듯 한 충격적인 느낌과 만났다. '과연! 기세를 보아하니 잔혈맹의 고수들답구나.'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살수들은 눈빛이 벌써 일반인들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본능인 양 날카롭고 야수적인 빛을 발하면서도 일 편으로는 정제된 듯 안정감을 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냉군기는 그들에게서 두려움에 앞서 강한 신뢰감을 가지게 되었 다.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의 능력은 가히 일당백(一當百)일 것이다. 이 제 우리의 승리는 목전에 와 있다.' 천무영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냉총령,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냉군기의 고개가 절로 꺾였다. "하명(下命)하시오. 무엇이든 따르리다." "다름이 아니라 잠룡부의 수하들 중 근력이 좋은 자들로 백 명만 차출해 주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소?" 냉군기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물론이외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당장 한 명의 수하를 불러 천무영의 요청대로 명을 내렸다. 그 직후에는 천무영으로부터 당부에 해당 되는 사항을 전해 듣기도 했다. - 이 일은 절대적으로 기밀을 요하는 것이오. 만에 하나 우리의 계획이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호남성은 되찾기 어렵소. ⑥ 냉군기.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난 열흘 동안 차출된 백 명의 수하 들을 관내에서 볼 수가 없었는데 그들이 대체 어디로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놓고 물어볼 처지도 못되었다. 미리 다짐을 받은 바가 있는지라 무엇도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되었으므로. 하도 궁금하여 냉군기는 급기야 열여덟 명의 살수들이 묵는 방에 가 보았으나 수확은 없었다. 도통 두문불출이던 그들의 방에서는 음식 썩는 냄새만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한 마디 말도 없 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던 것이다. 냉군기로 말하자면 호남지역을 도맡아 관장하던 총령이다. 그런즉 그는 비밀유지도 좋지만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도 불쾌하고 서운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들끓는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천무영의 행동을 주시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가장 속이 터지는 것은 실은 천무영의 행태였다. 애초에는 그리도 무게를 잡더니만 연일 하는 일 없이 그저 빈둥거 리는 것이 일과였다. 심심해서인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는 건 예사였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바둑을 두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심각한 중대사인 것 같았다. 밉게 보자면 의례 그런 법이다. 냉군기는 상대가 어떤 복안을 세 워놓았으리라는 짐작도 안해본 바는 아니었지만 갈수록 정나미가 떨어지고 짜증이 나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흉중에 무슨 거창한 계획을 품고 있건 매일같이 보아야 하는 천무 영의 나태함에는 그야말로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탓하고 나설 입장도 못되는 그는 마침내 스스로의 호기심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에잉!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천무영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총공세를 준비하시오, 냉총령." 냉군기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굳이 부언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는 체신도 잊은 듯 멍청한 모습이 된 채 몇 번인가 눈을 껌뻑이 더니 내심 중얼거렸다. '이자가 그 게으름뱅이 맞나?' 동해수룡(東海水龍) 동방구(東方丘). 이자는 과거 암흑마전에 속했던 팔대천마의 일 인이다. 공포의 팔 대마역 중 동해 십이금문도(十二金門島)의 도주였다. 따라서 동방구의 수공(水功)은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동해수룡 외 에도 해천신(海天神)이라는 별호가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는 장강의 물줄기에 배를 띄워놓고 여유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 었다.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한가했던 것이다. 비록 지난 날의 정사구일대혈전(正邪九日大血戰)에서 네 명의 천 마가 죽기는 했으나 그만은 이처럼 여전히 건재했다. 또한 나머지 삼대천마는 지옥성의 본성에서 계속 장로 자리나 지 키고 있었지만 동방구는 자청하여 잠룡부의 호남성 분타를 궤멸시 키는 임무를 맡고 이곳에 와 있었다. 그가 굳이 잠룡부와의 대전에 선봉으로 나선 것은 장강의 수전을 통해 왕년의 추억을 더듬어 보겠노라는 생각에서였으니, 이는 실 로 왕년의 마두다운 발상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 모든 일을 관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대소사는 대개 그의 제자인 해룡제(海龍帝)가 맡아서 관리 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슬슬 적의 동태나 살피며 앞으로 있을 싸 움에 대해 전략을 짜는 일만 감당하면 되었다. 혈성표화도 냉군기를 떠올릴 때면 동방구는 언제고 냉소를 짓는 다. 냉군기가 나이에 비해 뛰어난 인재라는 점은 인정했으나 자신 에 비하면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번 싸움을 서둘러 끝마치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오월 단오까지는 아직 시일이 남아 있었으므로 아주 서서히 호남 권에 속해 있는 적의 씨를 말리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뇌리에는 진즉부터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구 상까지도 세워져 있었다. - 잠룡부를 무너뜨리는 일은 첫 단계일 따름이다. 그후에는 동 (東)의 잔혈맹을 쳐서 무릎을 꿇리고, 그들 모두를 재규합하여 마 지막으로 천금성을 피로 물들이리라. 그랬다. 동방구가 장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이유는 단지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그만큼 그가 여러 모로 자신만만하다는 얘기다. "으음! 좋군." 주변정황을 살피고자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그의 마음은 더없이 뿌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잠룡부의 영토였으나 이제는 자신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사월의 햇살은 미흡하기는 해도 제법 포근했다. 그는 전신에 햇살 을 가득 받으며 사뭇 느긋한 기분이 되어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의 눈이 건너편의 갈대숲을 향할 때였다. 띠딩......! 낚싯줄 끝에 팽팽한 감촉이 전해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도 처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갈대숲이 흔들리며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또!' 동방구의 주름진 얼굴에는 뜻밖에도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일말의 흥분과 기대가 담긴 웃음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안력을 돋구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십오, 륙 세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불시에 출현한 괴인영의 정체란 그 소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일신에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있을 뿐 별 치장도 하지 않 았으나 나름대로 꽤 예쁘장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소녀는 물가로 내려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음흉한 눈동자의 주인은 발견해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동방구가 그녀가 있는 곳에 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어쨌거나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소녀는 수영을 하려는지 그때부터 입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위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직 물에 들어가 자맥 질을 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긴 했지만 강변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겐 흔히 있을 법한 일이었으므로. 마침내 환히 드러나게 된 소녀의 나신은 하나의 꽃봉오리를 연상 시켰다. 어린애 티를 막 벗어나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피 부는 만지면 묻어날 듯 부드러워 보였다. 봉긋 솟아나기 시작한 한 쌍의 육봉도 마찬가지로 풋풋한 아름다 움을 전했다. 그 위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는 분홍빛 유실은 차라 리 기이한 감동마저 유발시키고 있었다. 그에 비한다면 둔부는 꽤 성숙해 있는 편이었다. 둥그런 호선을 그리며 펑퍼짐하게 퍼져 세류요와는 심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그 아래로 허벅지에까지 팽팽한 탄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소녀는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린 채 강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 어 그녀는 흐르는 강물에 발끝을 살며시 밀어넣었는데, 아마도 물 이 얼마나 차가운지를 알아보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단순한 동작이야말로 보는 이에 따라서는 깜찍하고 귀여운 정 도를 지나쳐 도발적으로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⑦ "으음!" 동방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이미 백삼십을 넘긴 나이였다. 여자를 품에 안기에는 늙어도 한참 늙어 있는 것이다. 여인과 합방(合房)을 한 것이 대체 언제 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틀렸다. 어찌된 일인지 소녀의 티없이 깨끗한 나신을 보는 순간 잊혀졌던 육욕에의 본능이 하복부에서부터 어슴 프레하게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면에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소녀는 스스로 젖가슴을 손으로 살며시 쥐었다가 놓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소녀는 섬섬옥수로 물을 퍼담아 전신에 골고루 묻히기 시작했다. 젖가슴에 물기가 닿자 손톱만한 유실은 대번에 발딱 고 개를 들고 일어났다. '흐읍!' 동방구는 내심 비명을 발하며 계속해서 그녀를 응시했다. 소녀가 이번에는 물로 동그란 아랫배를 적셨다. 물기 묻은 그녀의 손길은 매끈한 허벅지 사이로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으으......!" 동방구는 전신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괴상한 신음 을 토해냈다. 그 순간을 기해 그의 하반신에 달린 물건은 장장 삼 십여 년만에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첨벙―! 소녀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저런......!' 동방구는 매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물 속에서 인어처럼 솟았다 꺼졌다 하며 유영하고 있는 소녀의 나신 에서 잠시도 떠나지를 않았다. 소녀는 애초 겁을 내던 것과는 달리 일단 물에 들어가자 신이 난 듯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쭉 빠진 목선에 이어 봉긋한 젖가슴이 드러나는가 하면, 잘록한 허리가 구부러지며 물 속으로 파고들자 풍만한 엉덩이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가 물 속으로 사라기도 한다. "으으...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동방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런데 바로 이때였다. "악!" 쥐라도 난 것인지 소녀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물 속으 로 쑥 꺼져버렸다. "엇!"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동해수룡이자 해천신이라는 동 방구의 늙은 육신이 번개처럼 뱃전을 떠났다. 슉! 과연 그는 바다의 신이라 불리우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솜씨 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노구는 장강의 수면에 닿는가 싶더니 물방울 하나 튀기지 않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동방구도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쏴아―! 그가 물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물 속에서 누군가 불쑥 솟구치더니 배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그자는 놀랍게도 불과 십 세도 안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후후...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소년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매달며 배의 후미에 매달렸다. 그로부터 일 각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파앗! 동방구의 신형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때까지도 그의 의 복에는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그의 품에는 예의 나체소녀 가 안겨 있었다. "쯧! 큰일 날 뻔했군." 평생 처음으로 인명을 구출해 본 동방구는 갑판 위에 올라서더니 소녀를 내려놓았다. 가까이서 대하는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몸매도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으음!" 동방구는 눈까풀을 파르르 떨며 소녀의 나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 다. 이윽고 그는 모종의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 물을 향해 손바닥을 흔들었다. 쏴아아아......! 동방구와 소녀를 태운 배, 아니 후미에 한 소년까지 달고 있는 배 가 수면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배가 하나의 점으로 화했을 즈음이다. 슥! 하나의 흑영이 수면에서 솟아 올라왔다. "부탁한다. 아란, 그리고 아걸......." 눈가에 일말의 연민을 매달고 있는 그는 천무영이었다. 사실 아란과 아걸은 이번 일을 맡겠노라며 무수히 졸라댔고, 그때 마다 그는 안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잔혈 맹의 일원임을 주장하고 나서며 자긍심까지 운운하자 그도 종국에 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천무영은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배를 바라보며 씁쓸한 어조로 중얼 거렸다. "어차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했지만 하필 그 짐을 어린 너희들이 떠맡게 되다니......." 이것은 그가 정말로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인간에게는 누구고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편이 정해져 있게 마련이 고, 추구하는 바도 각기 다르다. 아란과 아걸 같은 경우에는 그런 류의 모험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이들이었다. 아무튼 천무영도 그들의 능력만은 회의하지 않았다. "해천신, 당신이 안되었구려. 당신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편이 나았소. 그 어린 아이들로 인해 바다도 아닌 장강에 수장(水葬)되 게 생겼으니 말이오." 그는 낮은 음성의 여운만을 남긴 채 신형을 날려 갈대숲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⑧ 익수룡(翼水龍) 조구(朝九). 십이금문도의 십이금룡(十二金龍) 중 일 인인 그는 수중 경공의 일인자였다. 옆구리에 달고 있는 지느러미 모양의 날개를 펼쳐 물 속을 휘젓는 그의 신법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물 속에서의 전투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술이었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 다. 오죽하면 물 대신에 술을 마실 정도였으니까. 조구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하를 시켜 술을 사오게 했다. 삼 일 전 에 사 놓았던 죽엽청 열 항아리는 모두 바닥이 나버려 그로 하여 금 갈증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막 술병을 가지고 나타난 수하에게 물었다. "핫핫핫... 오늘은 무슨 술이냐?" 눈이 쭉 째진 수하는 자랑스러운 듯 술병을 어루만졌다. "백 년 묵은 설홍주(雪紅酒)입니다. 헤헤... 구하기가 아주 힘든 술입지요." "그래? 어디......." 조구는 입맛을 쩍 다시며 술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무엇이 그 리 급했는지 잔도 없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동작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푸우! 도... 독을......."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왈칵 쏟아내는 그의 안색은 벌써 먹빛이 되어 있었다. "감히......!" 조구는 눈을 한껏 부릅뜨며 수하에게 술병을 집어던졌다. 와장창―! 그러나 수하를 자처하던 자는 그의 공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피했고, 그 바람에 술병은 벽에 가 부딪히고 말았다. 핏물 과도 같은 설홍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조구가 꺼져 들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나 말이오?" 수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얼굴을 쓱 문질렀다. "헉!" 얼마나 놀랐던지 조구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하지 만 그뿐이었다. 독이 그새 전신으로 퍼졌는지 그는 입과 코에서 검은 핏물을 주르르 쏟아내며 옆으로 픽 쓰러졌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조구(朝九)다." 수하였던 자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조구를 바라보 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놀랍게도 방금 전에 죽어 나자빠진 조구 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후후... 조구가 둘이어서는 안되지." 그는 품 속에서 손가락 크기만한 흰 옥병을 꺼내더니 그 속에 든 분홍색 가루를 조구의 시신 위에 뿌렸다. 치지지직......! 역겨운 냄새와 함께 시신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해구신(海狗神) 패륵(貝勒). 그도 익수룡 조구와 마찬가지로 십이금룡 중 일 인이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는 조구와는 달리 여색을 극도로 밝히는 위인이 었다. 이력을 뒤져보면 하룻밤에 열 명의 여인들을 나가 떨어지게 한 적도 있을 만큼 그는 놀라운 정력의 소유자였다. 특히 그는 남자 경험이 없는 숫처녀를 좋아해 이곳 호남성 일대에 서도 많은 처녀들의 신세를 망쳐놓은 바 있었다. 오늘밤에도 그는 예외없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또 한 명의 숫 처녀를 자신의 방에 끌어다 놓게 했다. "이리 오라. 겁내지 말고." 패륵은 침상에 알몸으로 누운 채 머뭇거리고 있는 처녀를 향해 말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오들오들 떨며 옷고름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보 같으니......!" 패륵은 짐짓 힐책하듯 말은 해도 내심으로는 그런 처녀의 모습이 예쁘고 귀여워 홀딱 삼키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참다 못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털이 수 북히 돋아 있는 가슴은 물론 불쑥 솟아오른 남성의 그것까지도 적 나라하게 드러났다. "크ㅋ! 쓸만한 물건이로고." 패륵은 기소를 발하며 처녀를 덥썩 끌어안았다. 희희낙락이던 그의 표정이 뚝 굳어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무엇인 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처녀의 몸은 여인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 다. 근육으로 뭉쳐진 남성의 몸보다 더 단단하여 닿아오는 감촉이 마치 나무토막을 안은 듯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향취가 없었다. 이 점은 평소 처녀 특유의 새 콤한 향을 즐기던 그에게는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찾아보자면 이상한 면은 많이 있겠으나 거기까지가 패륵 이 느낄 수 있는 한계였다. "윽!" 그는 비명과 함께 모든 감각을 접어야 했다. 그것은 처녀의 가슴 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와 그의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푸욱! 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 날에 이어 칼자루까지 그의 가슴팍을 깊숙이 쑤시고 들어가더니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너... 컥!" 뭐라 말하려 입을 열던 그는 눈을 까뒤집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처녀가 입을 딱 벌리자 또 한 자루의 비수가 튀어나와 그의 입에서 뒤통수까지 관통해 버렸던 것이다. 쿵! 패륵은 쓰러지면서도 그때까지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또한 그 는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채 눈을 감아야 했다. 치지지직......! 그의 몸에도 조구처럼 분홍색 가루가 뿌려졌다. 이로써 패륵이라 는 인간 역시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끝났군." 처녀는 일을 마치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신형을 빙글 돌렸다. 그 찰나지간을 빌어 그녀의 모습은 패륵으로 변해 있었다. "안되었다만 우리 십팔무영살(十八無影煞)의 손에 걸린 이상 아무 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십팔무영살이란 천마무영이 직접 키운 잔혈맹 최고의 행동조를 이름이었다. 제이의 패륵은 침상에 눕더니 피곤한지 눈을 내리감았다. ⑨ 혈혈수사(血血水蛇) 공무기(空武起). 항상 핏빛 장삼을 걸치고 다니며 뱀대가리같이 뾰족한 얼굴을 가 지고 있는 그도 십이금룡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의 주변에서 기이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 살기는 그가 어디를 가건 늘상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런 느낌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도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어지간히 시달려야 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에 게도 목숨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은 점차 오기로 바뀌어갔다. - 좋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나 도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다. 잠이 들면 누군가 심 장에 비수를 박아올 것 같은 공포감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그자를 잡겠다는 일념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그는 독이 들었는지 일일이 검사를 하며 신경을 곤두세웠고, 측근에 있는 어떤 사람도 믿지 않았다. 수하 들 중 누군가가 암수(暗手)를 뻗어올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이처럼 사소한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자니 여간 피곤한 노릇이 아 니었다. 따라서 불과 며칠 사이에 삐쩍삐쩍 말라갔지만 그는 결코 이 대결을 포기하지 않았다. '클클... 이 혈혈수사를 잘못 봤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불 원간 네놈은 먼저 꼬리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공무기는 다짐과 더불어 하시라도 발출할 수 있도록 자신의 무기 인 낭아도(狼牙刀)를 아예 허리춤에 매어 두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그는 선실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이는 잠도 쫓을겸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근자에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쿵, 쿵, 쿵―! 누군가 선실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누구냐?" 외쳐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공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며 다시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역시 대답은 없었다. 공무기는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그럼 그렇지. ㅋㅋ... 너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말이지?' 그는 낭아도의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 켜 조심스럽게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채 문앞에 닿기도 전, 살수의 공세는 시작되었다. 꽝! 폭음과 함께 선실의 문이 박살나며 무엇인가 확 덮쳐왔다. "어딜!" 츠읏! "으악!" 피가 튀더니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에게 덮쳐들었던 자는 정확히 몸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헉!" 공무기는 시체를 본 순간 눈을 크게 부릅떴다. 뜻밖에도 그 시체 는 자신의 심복인 전황(田黃)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넋을 잃고 전황의 시신을 바라보던 그는 눈썹을 꿈틀 했다. '천정!' 그의 눈알이 급격히 위로 쏠렸다. "탓!" 짧은 기합성과 함께 그의 수중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파츳! '성공이다!' 공무기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천정을 향해 일 장을 내쳤다. 와지직― 쿵―! 천정이 무너지며 시체 한 구가 떨어져 내렸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그 시체는 그도 생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크흐훗... 놈! 내가 이겼다." 길고 지리한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그는 득의만면하여 읊 조렸다. 만일 그가 현 상황에 약간만 더 신경을 썼다면 이렇게 웃 고 있지만은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틀림없이 시체의 목 피부가 얼 굴과 틀리다는 점을 간파해냈을 테니까. 그가 놓친 부분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체는 미리부터 목 뒷부분 에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그로 인해 낭아도로 찔렀을 때 한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던 것이다. "휴우!" 공무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낭아도를 허리춤에 꽂았다. 비 로소 마음이 푹 놓이며 지난 며칠간 팽배해 있던 긴장이 봄눈 녹 듯 스르르 녹아내렸으므로. 그래서일까? 공무기는 갑자기 배가 쌀쌀 아파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일주일이 넘도록 화장실을 가지 못했었다. "후후... 쓸데없는 일로 시달리느라......!" 실소를 흘리며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바지를 까내리고 앉아 나직 하게 중얼거렸다. "흠, 내가 누군데 당해?" 자신감이 충일한 그 말에 답하는 음성이 있었다. "누구긴? 천치바보지." 푸욱! "으악!" 공무기의 입에서 급기야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밑에 서부터 찔러온 검이 찰나적으로 그의 사타구니로부터 정수리까지 관통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공무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배설도 다 마치지 못하고 검에 꿰뚫린 그의 육신은 무참하게 똥통 속으로 처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는 또다른 혈혈수사 공무기가 바지춤을 추스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 무영탑 3권 제22장 화강지옥대전(火江地獄大戰) ① 열흘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매일 이전과 다름없이 해가 뜨고 달이 졌으나 지옥성의 공격대 내 에는 잇달아 소리없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잔혈맹의 살수들이 지옥성의 공격대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살인수법은 가히 예술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닐 만큼 정묘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의 살수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인지라 단 한 치의 오차 도 없이 모두 성공했다. 목표물로 지정된 자는 하나같이 왜 죽는 지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갔고, 이를 예감하여 촉각을 곤두세웠던 자들은 그보다 더 어이없이 죽었다. 개중에는 믿었던 수하의 손에 머리가 으깨어진 자도 있었으며, 수 공을 자신했으되 물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은 자도 있었다. 심지어 는 자신의 검에 찔려 죽은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이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중 누구의 시체도 타인의 눈에 발견되 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죽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 으니, 그것은 잔혈맹의 살수들이 그들을 대신해 즉각적으로 지옥 성의 인물로 둔갑했기 때문이었다. 해룡제(海龍帝) 철목진(鐵木眞). 지옥성 전초 공격대의 총수령인 그는 장강수로의 공격선단을 이끌 고 있었다. 선박의 수는 근 백여 척에 이르렀으며 모두 그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남 지역을 탈취하고자 공격하는 데는 육로보다 수로가 유리했 고, 철목진은 그 점을 최대한 잘 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해룡제 철목진은 요즘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한 소녀 때문이었다. 그의 사부인 해천신이 어디서 데려왔 는지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를 끌어다놓고는 늘상 함께 붙어 있으 면서 공무는 뒤로 제껴놓았던 것이다. 며칠 전의 일만 해도 그렇다. 그는 공격일자와 전법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해천신이 머무르고 있 는 선실로 들어갔다가 그만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해천신은 푹신한 침상에 누워 있었으며, 그 옆에서는 거의 나체나 진배없는 소녀가 그의 전신을 마구 주물러대고 있었다. 철목진은 어이가 없었으나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기로 해천신은 본시 여색을 탐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백주에 이런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안쓰러운 생각마저 얼핏 드는 그였다. '사부도 이제 늙으신 겐가?' 그는 자신의 사부가 슬하에 일 점 혈육도 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찌푸렸던 안색을 펴며 곱게 물러나왔다. '저러셔도 곧 정신을 차리시겠지.' 마땅치 않은 기분을 억누르고 이해심을 발휘하는 그의 귀로 한 가 닥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 저 좀 봐요." 막 선실을 나와 갑판 쪽으로 향하던 그는 몸을 돌려 음성의 주인 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의 뒤에서 고혹적인 웃음을 띤 채 서 있는 그녀는 방금 전까지 도 사부의 몸을 주무르던 그 소녀였다. 더구나 풀어헤쳐진 앞섶을 다 여미지도 않아 젖가슴이 반쯤 노출되어 있는. '이 계집이?' 해룡제 철목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직감적으로 소녀가 자신 에게 꼬리를 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해천신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로 서는 소녀를 함부로 대할 입장이 못되었다. 하여 그는 애써 표정 을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낭자." "호호... 나으리께선 소녀를 어찌 생각하시나요?" 소녀는 몸을 살짝 비틀더니 손을 들어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동작은 단순한 듯 보였지만 지극히 유혹적이었다. 철목진의 안면이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절로 씰룩였다. "어떻게 생각하다니?" "제가... 쓸만 한가구요." 질척하고도 끈끈한 소녀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그는 칼로 자르 듯 차갑게 말했다. "대체 용건이 뭐냐?" "아이, 나으린 왜 그렇게 무뚝뚝하죠?" 소녀가 급기야 도발적인 몸짓으로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이어 그 녀는 스스럼없이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흐응... 늙은 사람은 정말 싫어. 힘도 제대로 못쓰면서 하루종일 주무르라고만 하니, 흐응... 안아줘요." 소녀는 더워진 몸을 그에게 은근슬쩍 비벼왔다. "치워라!" 철목진은 거칠게 외치며 그녀를 떠밀었다. 비록 사도 출신이기는 했지만 누구보다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는 그였으므로. "이 무슨 망측한 수작이냐? 감히......." 분노하는 그를 보며 소녀는 코웃음쳤다. "내가 싫단 말이죠? 흥! 그렇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어요." 그녀는 성난 암코양이처럼 사납게 그를 노려보더니 그 앞에서 실 로 상상치도 못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찌익― 북―! 스스로 몸에 걸쳤던 옷을 마구 찢어냈던 것이다. "미... 미쳤구나!" "흥! 미치긴 누가 미쳐?" 소녀의 눈에서는 어느덧 싸늘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와 때를 같이 하여 갑판에는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 어른거렸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안돼요, 할아버지께 혼나요. 흐흑!" 철목진의 안색이 일변했다. 소녀의 느닷없는 외침에도 놀랐지만 그보다는 그 인영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해구신 패륵......!' 정녕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인영은 벌써 사라졌지 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기에. 그 정도면 소녀의 복수(?)는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호호호호......!"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철목진은 혼자 남게 되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우 같은 계집이로고! 그러나 저러나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 라도 하면 어쩐다?' 고심하던 그는 문득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사부가 오해라도 하면......?' 그의 걱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화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로 그를 보는 해천신의 눈이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② 선실 안. 밤이 늦어 삼경(三更)을 넘어선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 직도 황촉불이 은은하게 밝혀져 있었다. 해천신 동방구. 그는 몸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얇은 천 한 장만을 덮은 채 침상 에 누워 있었다. 기분이 매우 좋았는지 그의 입가에서는 연신 흡 족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흐흐... 얼마만인가? 이 여유라니......." 그는 기분이 좋은 정도라 아니라 너무도 행복했다. 요즘 같아서는 매일을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했으므로. 백백(白白). 이런 이름을 가진 소녀가 밤낮없이 곁에서 그의 시중을 들어 주고 있었다. 장강의 수로에서 쥐가 올라 죽을 뻔했다가 그의 구출로 인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그녀였다. 해천신 동방구의 행복은 이 소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의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손길이 닿아올 때면 그는 예외없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황홀경을 헤매곤 했다. - 소녀는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요. 이렇듯 기특한 말까지 수시로 종알거려 그를 들뜨게 하는 소녀는 언제부터인가 그의 앞에서는 거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물론 잠도 당연스레 그와 한 침상에서 잤다. 동방구는 의외로 그녀를 깊숙이 타고 누르지는 못했다. 아니, 그 보다는 소녀의 탄력 넘치는 촉감을 즐겼다면 맞았다. 그녀는 종종 자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젊음이, 인생이 소생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는 하루도 백백이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그녀야말로 하 늘이 노년의 자신에게 내려준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눈 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 백백은 어 느새 동방구의 소중한 보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행복은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흐흑......!" 백백이 눈물로 얼굴을 흠씬 적신 채 선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옷은 길게 두 군데나 찢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백백." 동방구는 놀란 표정이 되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흑흑... 할아버지......!" 백백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었다. "어찌 된 게냐? 이 옷은, 누가 이랬느냐?" 동방구는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녀의 모습만 보아 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으므로. 그는 상대가 누구이든 당장에 때려죽이리라 다짐했지만 막상 백백 의 말을 듣자 심장이 뚝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철아저씨예요. 흑흑... 제게 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말을 듣지 않 자 저를....... 전 간신히 도망쳐 나왔어요." "우우... 그놈이......!" 동방구는 분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그날부터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두텁게 쌓이기 시작한 것은. ③ 휘이이잉......! 대륙의 남서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제법 거세긴 했지만 계 절이 봄인지라 습기를 머금은 훈풍이었다. 장강수로의 한 어귀이다. 한 명의 흑의인이 바람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서 있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의 그 사내는 천마무영, 즉 천무영이었다. 그는 바람결을 일신으로 느끼며 홀로 중얼거렸다. "기다렸던 남서풍이 드디어 부는구나. 하늘도 나를 도우시니 이제 시작해야겠군." 사월 중의 남서풍이란 흔하게 만나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에겐 아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바람과 불, 후후... 상생(相生)이다." 천무영의 무심한 눈에서 언뜻 기광이 흘러나왔다. "준비는 완료되었다. 남은 부분은 그들이 잘해 주겠지." 말을 마치자 그의 모습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스스스....... 혈성표화도 냉군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수로의 양안에 포진하라니, 무엇때문에......?"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요."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냉군기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거듭 물어보았다. "어떤 식으로 그들을 파해하려고 그러는 것이외까?" "뭐, 간추려 얘기하자면 불붙은 짐승들을 때려 잡는다고나 할까?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소?"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시오." 냉군기가 안면을 굳히자 천무영은 정색을 했다. "미안한 얘기오만 냉총령께는 직관력이 부족하오. 사실 그 쯤 얘 기하면 개요는 다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거늘." "으음!" "지금 수로에는 남서풍이 불고 있소. 그리고 사월 이십일이면 가 장 강하게 불 것이오." "아! 그럼......?" "수로 연안에 궁노수를 일천 명씩을 매복시켰다가 불붙은 물개들 이 견디지 못하고 헤엄쳐 나오면 쏘도록 명하시오. 그래도 살아나 오는 물개들은 때려잡아야 하오." 냉군기는 자존심이 상해 가만히 있으려다 불현듯 어디론가 사라졌 던 백 명의 수하들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차출해간 수하들은 어디에 있소이까?" "그들은 불을 놓으려고 대기중이오." "음! 정녕 대단하구려."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상대방이 말한 전략은 냉군기 자신 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구상이 불가능했기에. 그는 내심 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과연... 젊은 나이에 잔혈맹의 맹주가 되어 천하를 경동시킨 것 은 우연이 아니로구나. 대할수록 감탄스러울 뿐이다.' 동시에 냉군기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 라 마음 먹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최소한 면박을 당해 망신 살이 뻗치는 일만은 없을 것 같았으므로. 해천신 동방구는 요 며칠 사이 매우 우울했다. 어찌 된 셈인지 부 쩍부쩍 기운이 쇠해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어, 이게 늙는 것인가? 하루하루가 달라지는군.' 무인(武人)에게 있어 기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생명이 다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쓰려왔다. 바다를 호령했던 기상과 패 기도 부질없는 한때의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쓸쓸함과 허무로 대변되는 노년의 느낌이 그를 사로잡고는 놓아주 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이는 단연코 한 소녀였다. '백백.......' 그가 이름을 읊조리는 이 소녀는 정말이지 귀엽고 깜찍했다. 그녀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데 있어서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녀만 곁에 오면 우울했다가도 시름을 잊고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게 되니까. 그런데 이 즈음에 그녀는 계속하여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다름 이 아니라 배멀미를 호소해 온 것이었다. - 할아버지, 자꾸만 어지러워요. 배 안에만 너무 오랫동안 있었나 봐요. 그녀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음식을 거의 들지 못했고 가끔씩 은 구역질을 하며 몹시 괴로워 하기도 했다. - 할아버지, 더 못 참겠어요. 그만 뭍으로 돌아갈래요. 백백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동방구는 절망감을 느낀 나머지 아득 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건 안돼!' 그는 내심 부르짖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백백이 어떤 요 구를 해도 다 들어줄 수 있었지만 그것만은 예외였다. '만일 그 아이가 내 곁을 떠난다면......?' 자문을 던져본 그는 일시지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로서는 백백 이 차지했던 부분을 다른 것으로 메워갈 자신이 도통 없었다. 대 체 무엇으로, 어떻게 그녀를 대신한단 말인가? 특히 그녀의 흔적이 빠져나가 버림으로써 텅 비게 될 마음자리를 의식하게 되자 그는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현재 그에게 있어 백백의 가치란 자신의 목 숨에 버금갈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없는 삶이란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 주지 못할 터이므로. 하여 동방구는 백백을 자신의 옆에 붙들어 두기 위해 어지간히 고 심을 했고, 그 결과로 비장의 수단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④ "어떠냐? 백백, 내가 네 배멀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동방구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백백은 그의 가슴에 엎드린 채 심드 렁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요?" "허허... 배멀미란 배가 흔들리기에 생기는 것이 아니냐?" "그야 그렇죠." "그럼 배를 고정시키면 될 것이 아니냐?" "배를요?" 순진하게 되묻는 백백의 눈 속에서 일섬의 광채가 번뜩인 것을 동 방구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 문제 해결시 가장 완벽한 길은 상대로 하여금 직접 방도를 생각 해 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녀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그 말을 늘상 마음 속 에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기다 린 결과란 과연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말을 동방구에게서 듣게 된 그녀는 짐짓 신 이 난 듯 발딱 일어나더니 동방구의 목에 매달렸다. "역시 할아버지가 최고라니깐! 그래, 어떻게 말이에요?" 그녀가 가슴 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더듬어오자 동방구는 기분이 유쾌해져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 선단의 모든 배를 판자로 연결하면 될 게 아니냐? 그러 면 아무리 파도가 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백백은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손뼉을 딱 마주쳤다. "아! 정말 그렇군요. 호호호... 아이 좋아!" "허허허... 백백,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네가 원하는 거라 면 무엇이든 다 해줄 수가 있지." 동방구는 그녀의 향기로운 머리카락에 코를 대며 웃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백백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도 좋 았다. 늘 그랬지만 그녀의 기쁨은 금세 그의 것이 되어 가슴을 훈 훈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다음날이다. 동방구는 해룡제 철목진을 불러 자신의 뜻을 얘기했다. "안됩니다! 그건." 철목진은 크게 놀라며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동방구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을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 도 백백을 위한 일이라 한 치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왜 안된단 말이냐?" 철목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사부께서는 저 유명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적벽대전(赤壁大戰) 도 잊으셨습니까?" 동방구의 안색이 일변했다. "네가 지금 노부를 어리석다고 비웃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연일 남서풍(南西風)이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 만일 모든 배를 연결시킨 후에 놈들이 화공(火攻)이라도 가해 온 다면 선단은 일시에 몰살해 버릴 것입니다." 철목진의 논조는 누가 들어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동방구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제 자의 충언을 무시하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너는 이 사부가 늙었다고 그 정도도 생각이 없는 줄 아느냐? 본 도(本島)에서 특별히 제작한 화룡신포(火龍神砲)는 두었다 어디에 쓴단 말이냐? 설사 불을 놓고자 접근해오는 배가 있다해도 백 장 밖에서 박살이 나게 될 것이다." "그... 그렇지만......." "시끄럽다! 네놈은 감히 사부의 말을 거역할 참이냐?" 동방구는 분노가 깃든 눈으로 철목진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 도 백백의 문제로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였다. 철목진은 사부의 내심을 눈치채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 구석에 서 있는 백백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사부, 어찌 한낱 계집때문에......." 말을 하다 말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곁눈으로 언뜻 동방구의 눈 에 살기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냉큼 시행하라, 어서!" 동방구는 노기를 참지 못한 듯 버럭 고함까지 질러댔다. 이쯤 되 면 철목진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부." 그의 고개가 무력하게 푹 떨구어졌다. '아아! 일이 어찌 돌아가려고.......' 소리없는 탄식이 철목진의 심중에서 발해지고 있었다. ⑤ 하루만에 오백여 척에 달하는 대선단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나무 판자와 쇠사슬이 배와 배를 모두 연결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과연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지옥성의 공격대는 판자를 통해 자유롭게 이 배에서 저 배 로 넘나들 수 있게 되었고, 이런 변화는 그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 다 주었다. 한창 지루하고 따분해 미칠 것 같던 판국에 권태의 돌 파구가 마련되었으니 말이다. 단 해룡제 철목진만은 그들과 술을 마시는 등 모처럼의 여유를 즐 기면서도 내내 불안한 심경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이 되었건 그로서는 사부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보이는 위험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매사에 치밀하고 빈틈이 없는 그의 성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 된다고 생각한 철목진은 비밀리에 각 조(組)의 기수격인 십이금룡을 전부 소집했다. 그는 자신의 뜻 을 밝힌 후, 그들 전원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사항이란 개요가 이랬다. 즉, 각 조에서 수공이 유달리 뛰 어난 자를 십 인씩 차출하여 선단 주변으로 백오십 장 이내에 든 든한 감시망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또한 세부적으로 이르자면 조별로 다시 다섯 명씩 이 개 조를 편 성하여 낮과 밤에 교대로 수중매복을 시킨다. 그리고 적들의 배가 접근해 올 시에는 그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침투자를 소리 없이 죽인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 정도면 작전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월 이십일. 휘이이― 휘이이잉―! 확실히 남서풍은 최고조로 거세어져 있었다. 그에 반해 단단히 연 결된 선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날, 철목진은 유난히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자 그는 습관인 양 계속 사방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동방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굴었다. 그는 침 상에 길게 누운 채 백백과의 유희에 여념이 없었다. "헛헛... 허어, 이 녀석! 간지럽다니까......." 그는 백백이 가슴팍에 입술을 갖다붙이고 장난을 쳐대자 몸을 움 찔거리면서도 그 상황을 무척이나 즐겼다. 동방구는 이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며 언제까지고 이렇게 아무런 근심도 없이 유쾌한 기분으로 지내고 싶었다. 백백이라는 어린 소녀에게서 받는 정신적인 충족감이란 도시 어떻 게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기에. 한편. 수중에서는 육십 명의 십이금문도 고수들이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 고 있었다. 다만 감시해야 되는 반경이 워낙 넓다 보니 그들은 서 로를 볼 수가 없었다. 황삼(黃三). 그는 혼자 떨어져 수중을 휘돌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흠칫 놀랐다. 한 인영이 물살을 헤치며 자신에 게로 접근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으나 곧 마음을 놓았다. 다가오는 자는 적이 아 니라 그의 옆 방향을 지키던 관어(官魚)였던 것이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한 자도 안되게 좁혀지자 황삼은 비로소 손 짓을 하여 관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관어도 수중인지라 대답을 대신해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그의 손 짓은 황삼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츠읏! 섬광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황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되어 나오지도 못하는 비명을 발해야 했다. '억!' 미처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그는 관어의 소매 속에서 튀 어나온 날카로운 분수도(分水刀)에 의해 면상이 두 쪽으로 갈라져 죽고 말았다. 그 끔찍한 사건은 단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잠복해 있던 십이금문도의 고수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친구라고 여겼던 자들에 의해 수중 고혼이 되고 말았다. 휘이이잉― 위이이― 남서풍의 세찬 흐름을 느끼며 철목진의 불안감은 점점 더 가중되 었다. 참다 못한 그는 급히 십이금룡을 소집했다. 그것은 수중 매 복조의 활동상황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시가 전달되었을텐데도 십이금룡은 끝내 한 명도 오지 않았고, 그제서야 철목진은 뭔가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결국......!' ⑥ 선실 안. "허허허... 이 녀석!" 동방구는 백백이 안마를 해주자 눈을 감고 있었다. 요즘 들어 그는 어찌된 셈인지 진기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아니, 원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예전에 비하면 거지반 십분의 일 정도로 줄어 있다면 맞았다. 그는 그것을 너무 쉽게 노쇠현상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백백에 게 마음을 죄다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렸으련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백백은 동방구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탄력 있는 젖가슴으로 그의 등을 지그시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감촉을 그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기에. '으음, 내가 삼십 년만 더 젊었어도.......' 동방구는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며 젊은 날을 회상했다. 젊었을 때 의 그는 대단한 호색가(好色家)였다. 하룻밤에 수십 명의 여자들 을 다루고도 지칠 줄 모르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씁쓸한 표정이 되어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 이처럼 회상으로 인해 우울에 잠겨가던 그가 갑자기 눈을 치떴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목덜미가 뻣뻣해졌기 때문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그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윽!" 동방구는 생각과는 달리 꼼짝도 못하고는 극심한 통증을 느껴 비 명을 발했다. 바로 그때였다. "호호홋! 늙은이, 너는 당했다." 백백이 날카로운 교성을 터뜨리며 연쇄적으로 그의 등뒤 열여덟 군데의 혈도를 찍어온 것은. "아... 아니......!" 졸지에 온몸이 마비되어버린 동방구는 뒤로 벌렁 쓰러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왜......?" 그를 향해 백백은 득의양양하여 깔깔거렸다. "늙은이! 너는 속았다. 이 몸이 누구신지 아느냐? 놀라지 마라, 난 잔혈맹 십팔무영살의 일원이시다. 호호호......!" 그녀는 말과 함께 품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더니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각오해라! 오늘이 너의 제삿날이 될테니." 슉! 비수가 거침없이 동방구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그의 노안이 붉게 충혈되었다. 동시에 분노와 실망, 회의 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주름진 그의 눈꼬 리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푹! 비수는 정확히 그의 심장을 찔렀다. 적어도 백백이 알기로는. 하 지만 그것은 단지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으며, 그녀는 더 이상 기 뻐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백, 차라리 아무말도 말고 노부를 죽이지 그랬느냐?" 동방구가 나직한 탄식과 함께 손을 저었다. 쨍! 비수는 그의 손짓에 의해 멀리로 날아갔다. 이와 더불어 그가 뻗 어낸 수강(手 )은 백백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위잉! "악!" 뜻밖의 공세에 백백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아무리 상 대가 동방구라지만 설마하니 혈도를 열여덟 군데나 찍히고도 멀쩡 하게 반격을 가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내심 절망이라는 어휘를 떠올렸다. 그녀의 재빠른 계산으 로도 동방구의 일격을 피해낼 길이란 없었으므로. 그리하여 가슴에 막 구멍이 뚫리려는 찰나, 백백은 기적처럼 죽음 의 문턱에서 이승으로 되돌아왔다.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으되 그것은 그녀가 아니라 동방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어 침상이 시뻘겋게 젖더니 그의 머리통이 몸체 에서 분리되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 그제서야 비로소 백백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눈에 침 상 밑에서 칼을 들고 나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누나, 괜찮아? 이 늙은이는 정말 대단하군. 그렇게 많은 독약을 꾸준히 먹고도 내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가 하면 혈도를 찍히 고도 반격을 가하다니 말이야." "아복......!" 백백이 울부짖으며 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들은 아란과 아걸 남매였다.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하게 된 아란은 동생에게 의지한 채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무서워... 솔직히 그간에도 줄곧 그랬지만." 아걸이 누이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주공께서 한사코 말리신 것 아냐? 원래부터 우리에게 착 한 본성이 남아 있다고 믿어준 사람은 그분뿐이지만." "좌우간 그분의 말씀이 맞았어. 절대로 방심하지 말라던... 특히 승리를 확신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그래, 아걸도 깜짝 놀랐어. 영락없이 이대로 누나를 잃는 줄 알 았지 뭐야?" "음! 네 덕에 살아났구나. 어찌 되었건 맡은 일을 완벽하게 마무 리지을 수 있어 다행이야." "그야 물론이지." 아란이 먼저 신색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가자, 아걸. 공격이 시작될 거야." "응! 이 큰 배가 모두 타버리게 된다니 좀 아쉬운 걸? 그동안 꽤 정이 들었는데." "우우... 난 싫어!" 휙! 휘휙―! 두 남매는 신형을 날려 그곳에서 사라졌다. ⑦ 해룡제 철목진. 그는 절규하듯 부르짖고 있었다. "누구 없느냐? 누구―!" 하지만 아무리 고함을 쳐도 도무지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며 달려 오는 자 역시 한 명도 없었다. 쾅! 그는 문짝을 일 장에 박살내며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헉!" 철목진은 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갑판 위에는 놀랍게도 수하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는데 모두 목이 댕강 잘려져 죽어 있었다. "이럴 수가......!" 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도저히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으므로. 그때를 기해 그의 뇌리에는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부 의 신지를 흐리게 만들어 작금의 사태를 유발시키고 그 자신마저 유혹하던 한 소녀의 요악한 얼굴이었다. '사부가 위험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휘익―! 쾅! 선실의 문도 철목진의 손에 부서져 나갔다. "느... 늦었다!" 그는 거센 충격으로 인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해천신, 문자 그대로 바다의 신이라던 동방구가 목과 몸통이 분리 된 채 죽어 있었다. 그것도 몸은 침상 위에, 목은 바닥에 떨어져 시뻘건 핏물을 질펀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사부의 참혹한 주검을 목도한 철목진은 충격에서 깨어나자마자 무 섭도록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크으윽! 찢어죽이고 말겠다. 요망한 계집......!"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기습이다―!" "잠룡부 놈들이 나타났다!" 우선적으로 다급한 고함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던 것이다. 철목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기어이 올 것이 왔군! 하지만 어림도 없다.' 이어 날 듯이 밖으로 뛰쳐나온 그는 수십 척의 배가 몰려오고 있 는 것을 보았다. 과연 배의 선두에는 잠룡부의 상징인 검은 바탕 에 용이 수놓아진 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크ㅋ!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비들." 해룡제 철목진의 눈이 더욱 더 무섭게 번쩍였다. "해룡신포를 쏴라―!" 그는 일갈하며 갑판의 한귀퉁이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깃발을 들 더니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쿠쿠쿵......! 그의 명을 기다렸던 듯 지옥성 선박들의 선수(船首) 부분에서 뚜 껑이 열리며 거무칙칙한 철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 직후, 천지개벽을 알리는 듯한 폭음이 터졌다. 콰콰콰쾅! 콰르릉― 오백여 척에 달하는 선박이 일제히 화탄을 터뜨려 불을 뿜어내는 광경이란 일대 장관이었다. 화룡(火龍)과도 같은 불기둥이 잠룡부 의 선박들을 향해 줄기줄기 날아가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콰우웅―! 연이은 폭음과 함께 잠룡부의 수십 척 배들은 삽시에 불덩이가 되 고 말았다. 선단의 백 장 이내로는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산산조 각이 나거나 화염에 휩싸여 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장강 수로는 아예 불바다로 화하는 듯했다. 이것은 한 식경도 채 안되는 사이에 벌어진 사태로 수십 척 배들은 모두 검 은 연기를 토하며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크하하핫......! 꼴 좋구나, 감히 지옥성에 도전하더니." 철목진은 심중에 쌓인 울분을 털어내듯 앙천광소 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촤아아아― 지옥성의 대선단을 향해 백여 가닥의 물줄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나 철목진은 그 상황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지옥성의 고수들도 마 찬가지로 장관을 이루며 타오르는 잠룡부의 선박들을 바라보느라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윽고 십 장에서 오 장... 그리고 일 장....... 점차 가까워진 물줄기는 마침내 몇몇 척의 배에 가 부딪쳤고, 기 상천외한 이변이 발생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꽈꽈꽝! 꽈르르릉― 어마어마한 불기둥이 솟구쳐 오르며 잇단 폭음을 일으켰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 선단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던 배들이 대폭발을 일으켜 날아가며 빚어진 현상이었다. 콰우우웅―! 거창한 굉음 속에서 지옥성의 고수들은 아우성을 치며 저마다 어 쩔 줄을 몰라 했다. 더러는 전신에 불이 붙어 당황한 나머지 펄펄 뛰거나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자도 있었다. "크아악! 크아아아―" 산 채로 숯덩이가 되어가는 그들의 형상이란 실로 목불인견이었 다. 보다 못한 철목진이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탈출하라! 모두 배를 떠나라―!" 그는 금시라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충격에 사로잡혀 눈에 잔뜩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천 명의 고수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휘이이익! 첨벙, 첨벙―!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 분전하고자 했던 그들의 마지막 바램조차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물에도 그들을 맞이하기 위 한 방편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크악! 부... 불이다!" "크아아아―!" 해룡제 철목진은 대노하여 전신을 무섭게 떨었다. "으으... 저것은 화룡도의 화기(火器)......!" 하지만 그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눈앞에서 수많은 수하들 이 목숨을 잃어가는 광경을 그저 멀거니 구경할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정은 그야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어쩌겠는가? 선단은 모두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일단 불이 붙기 시작하자 무서운 속도로 번져갔다. 그 덕에 오백여 척의 대선단은 금세 시뻘건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⑧ 화아악! 화르르르― 그가 예감했듯 계속 불어제끼는 남서풍도 물론 일조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크으윽!" 철목진이 탄 주선(主船)에도 급기야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그는 참담한 눈으로 주변의 물 속에서 백여 명의 검 은 가죽옷을 뒤집어 쓴 자들이 검은 철통(鐵筒)을 겨누고 시뻘건 화탄을 마구 쏘아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기름을 부었다......!" 철목진은 맥이 빠진 듯 신음하듯 읊조렸다. 강상(江上)에는 어느덧 기름이 쫙 깔려 있었고, 그에 따라 강물로 뛰어들었던 자들마저도 불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 이나 살아남을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장강수로는 또 한 번 불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아니, 이번에는 남서풍에 힘입은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라 잠룡부의 선단 이 괴멸시킬 때와는 양상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흡사 악마의 거대한 혓바닥같이 넘실거리는 그 죽음의 불꽃은 언 제까지라도 사그러들지 않을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수로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슈슈슉! 슉슉―! "크악! 켁! 크아아악―!" 죽을 힘을 다해 강안으로 헤엄쳐 간 지옥성의 인물들은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살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대개 고슴도 치가 되어 강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개중에 무공이 뛰어난 자들은 그래도 어찌어찌 화살군단을 통과할 수 있었는데 종국에는 그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왜냐하면 이른 바 물에서 살아나온 물개들을 때려잡기 위해 잠룡부의 매복조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맹활약을 보인 사람은 호남성의 총령 인 혈성표화도 냉군기였다. "가랏! 지옥성의 잔당들, 어디 네놈들에게 호남성을 그렇게 호락 호락 내줄 줄 알았느냐?" 훗날 무림에서는 이날의 싸움을 가리켜 일명 화강지옥대전(火江地 獄大戰)이라고 불렀다. 지옥성의 대선단에 붙었던 불은 장장 삼주야 동안을 쉬지 않고 타 올랐다. 그러다 마침내 그들 대선단은 본래의 위용은 어디로 갔는 지 잿더미가 되어 흔적도 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그동안 시커먼 연기와 그을음이 하늘을 가릴 듯 솟아올랐고, 사람 의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는 사방 백여 리까지 퍼졌다. 그나마 형 태가 멀쩡한 시신들은 강물을 따라 정처없이 떠내려 가다가 도중 에 물고기밥이 되어 버렸다. 결국 잠룡부와 손을 잡고 잔혈맹이 주도하여 압승으로 막을 내린 이 싸움은 무림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지옥성이 맞이 한 최초의 대참패라는. ■ 무영탑 3권 제23장 천금성(天禁城)에서 ① 천마무영이라는 명호가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장강에서 소위 화강지옥대전이 있은 이후로 그 이름을 모르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삼척동자라 해도 알 정도였으니 그는 이 시대, 이 땅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세상이 마치 진통을 맞이한 산모처럼 온통 붉은 빛에 잠겨 신음하 고 있었다. 밤을 낳기 위한 힘겨운 산고(産苦)에 산자락이 조금씩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진통으로 인한 열기의 중심부, 그 석양 속으로 한 청년이 걸어가 고 있었다. 핏물이 번진 붉은 땅 위에 기다란 그림자를 끌면서 걷 고 있는 그가 바로 세인들로부터 천마무영(天魔無影)이라는 이름 을 부여받은 사내였다. 그는 줄곧 왕장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항시 갈등을 보이고 있었다. 불타는 야망과 대인으로 서의 의지가 교차되곤 했었지.' 천무영은 장강의 수전이 끝난 후, 잠룡부를 나왔다. 떠나오기 직전 왕장후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을 마셨는데 그때에 도 그는 눈을 통해 두 가지의 상반된 빛을 내비쳤다. 그중 하나는 진한 정감(情感)이고, 또 하나는 숨길 수 없는 질투 의 빛이었다. 그 두 가지는 앞서 언급한 그 나름의 인간적 고뇌나 야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다만 자신을 상대로도 그런 감정들을 노출시키니 천무영은 그때마 다 예외없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후후... 아마도 내가 과민한 탓이겠지.' 그는 애써 마음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왕장후, 당신이 나를 어떤 식으로 취급하든 나는 당신을 강호에 서 얻은 최고의 지기(知己)로 생각할 것이오.' 이는 천무영의 진심이었다. 그는 노을을 등진 채 북상(北上)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가는 곳은 이름하여 천상천(天上天)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지상에 그런 곳이라면 달리 또 있겠는가? '천금성(天禁城), 마침내 찾아가게 되는구나.' 천무영의 눈이 일순 형형한 광채를 발했다. 잠룡부에 있을 때 그는 한 장의 밀서(密書)를 받았다. 그것은 잔 혈맹만의 독특한 연락방법으로 일살로부터 온 것이었다. '금모란... 그대는 많이 변했겠지?' 천무영이 기억하는 그녀는 천일야화원의 제일화였다. 하지만 현재 는 잔혈맹의 제일살로서의 그녀를 만나야 하는 그였다. 휘익―! 석양을 향해 일직선으로 몸을 솟구친 그는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또다른 풍운을 이끌기 위해 힘찬 날개를 펼치려는지? 북궁현리. 그에 관해서라면 천하가 다 안다. 그가 천상천이라는 천금성의 셋째 제자이면서도 서열이 위인 두 사형을 물리치고 당당히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북궁현리는 천금성의 세 제자 가운데 가장 늦게 입문(入門)했다. 그러나 무쌍별부(無雙別府)에서 무공수련을 마치고 나온지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그는 사형들을 눌렀다. 두 마리의 맹룡도 그 에게는 어쩔 수 없이 꺾였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를 천금성의 후계자로 공인되게 한 계기는 천금성주 가 총애하는 의손녀 천중화(天中花) 모용운화(慕容雲花)였다. 그 것은 북궁현리가 그녀와 정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천중화는 문자 그대로 하늘의 꽃으로서 그녀를 얻는 자는 곧 하늘 을 얻게 된다고들 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 자는 천금성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 면에서 먼저 입문한 두 마리의 용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의외로 그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룬 사람이 북궁현리였다. 그는 어쩌면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인지도 몰랐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짓도 불사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자 신마저도 철저히 내던질 줄 알았으니까. 어쨌든 북궁현리는 현재 천금성 전체를 총괄하여 움직일 수 있는 절대적인 지위, 즉 천금총사(天禁總師)가 되어 있었다. 그 자리는 특별지시가 없는 한 천금성주를 대행할 수 있을 뿐 아 니라 오대가문을 지휘하고, 더 나아가서는 구파일방마저도 영도할 수 있는 막중한 위치였다. ② 천금전(天禁殿). 이곳이야말로 천금성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다. 천금성의 영향력 하에 있는 각 분야를 통솔하고, 일만여에 이르는 성내 고수들의 생사여탈이 좌우되는 장소이기에. 그러한 천금전의 한 방(房)이다. 금빛찬란한 태사의에 금삼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영준미 려하되 그 탓인지 꽤 오만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북궁현리였다. 당연히 천금성주가 앉아야 할 자리건만 그는 이처럼 당당히 앉아 있었으며 입술 꼬리에 미소까지 베어물고 있었다. 그의 심중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제 조용해졌다. 내 위치는 확고해졌고 반대자는 전부 처리되었 다. 남은 것은 운화(雲花)와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성주의 위(位)를 인계받는 것뿐이다.' 북궁현리의 눈빛은 한성(寒星)과도 같았다. 천금성이 이 시대 최고이자 최강의 단체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 실이다. 이곳에는 영웅효사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다. '후후... 그들 군룡(群龍)을 누르고 올라온 나다.' 북궁현리는 스스로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손에 한 자 길이의 오색영롱한 옥봉(玉峯)을 든 그의 입에서는 미 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일명 천금총사령이라는 것으로 천금 성 내에서도 무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비록 동서남북의 사패(四覇)들이 날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본 성은 건재하다. 단지 발톱을 안으로 오무리고 있을 뿐. 당장에라 도 날아오르면 누가 그 용비(龍飛)를 막을 수 있으랴?' 그는 제 기분에 취해 마음껏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더 혼란해지거라! 중원이 반쯤 무너졌을 때 나 북궁현리가 나설 것이다. 그리고 깨끗이 쓸어 버리리라. 후후후......!' 그러나 그는 생각을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스르륵......! 청각에 문득 옷자락 끌리는 음향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오는군.' 북궁현리의 입가에는 또다른 의미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으나 그는 눈에서 욕정의 빛을 내 비치기도 했다. 잠시 후. 음향은 발자국 소리로 이어지더니 문이 열렸다. "모란." 북궁현리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문 앞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 다. 한때 천일야화원의 제일화였던 금모란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비해 한결 농염한 색감을 발하고 있었다. 천생의 미모에 성숙도마저 더해지니 여인으로서 절정에 이르렀다 고나 할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찔 한 매력이 그녀의 몸 곳곳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금모란은 북궁현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살며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씬 꽃향기가 묻어나는 그런 미소였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했었나요?" "하하하...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 야망의 나래를 한 번 펼쳐 보 았지. 때가 도래하고 있다. 그때가 오면 너도 천하제일인의 이부 인(二婦人)이 될 것이다." 금모란은 갑자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흥! 그래봐야 이부인인 걸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북궁현리의 앞에 가 무릎을 꿇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에 따라 얇은 비단옷이 좌우로 벌어지며 아무 것도 입 지 않은 하체의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실상 그녀의 희고 투명한 피부는 노출된 허벅지 뿐만이 아니라 신 체의 어느 부위건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그 매끄러운 광택이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북궁현리는 어느덧 금모란의 허벅지에 타는 듯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울러 손으로는 그녀의 구름결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후후... 네가 불만을 가진 것은 안다만 천중화가 제일부인이라는 사실만은 불변이다. 자고로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눈에 보이는 형 식도 무시해서는 안되는 법이니까." 그는 손을 한 번 슬쩍 저었다. 스윽! 그의 손바람에 비단옷이 뒤로 확 젖혀졌다. 그로 인해 금모란은 터질 듯 팽만한 나신을 전부 드러내 보이게 되었다. 금시라도 아래로 뚝 떨어져내릴 듯한 두 개의 육봉이 놀라우리만 큼 도발적으로 내밀어져 있고, 그 아래로 급격히 좁아지는 허리와 기름진 하반신이 그의 욕망을 한껏 부채질 했다.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는 계집이다, 너는." 북궁현리는 탐스러운 그녀의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의 손바닥에 꼿꼿이 곤두선 유두의 감촉이 닿아왔다. 빠른 속도로 팽창되는 욕정과 비례하듯 그의 호흡도 방금 전과는 비할 수 없이 거칠어졌다. 이를 느낀 금모란이 살짝 상체를 비틀 어 그의 손길을 제지시켰다. "안돼요, 지금은." "왜......?" "당신께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어요." 뜻밖의 말에 북궁현리는 적지아니 의혹을 느꼈다. 그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 금모란은 손뼉을 한 차례 마주쳤다. 짝! 허공에서 솟아나듯 하나의 흑영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 광경 에 북궁현리의 준미한 눈썹이 불쑥 곤두섰다. "언제 이렇듯 가까운 곳에......!"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흑영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의 앞에서 서슴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구냐, 저자는?" 금모란은 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않고 말했다. "중용하면 큰 재목이 될 것이나 멀리 하면 후에 무서운 적수로 등 장할 만한 인물이죠." "흐음!" "호호... 이 땅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고수예요. 제가 당신 을 돕기 위해 그를 불러들였어요." "상의도 없이 말이냐?" 북궁현리의 눈빛이 번갯불처럼 흑의인의 전신을 훑었다. "호호...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이제부터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어차피 선택은 당신의 몫이니까요." "그건 그렇군." "저 사람은 무종(無踪)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죠. 쓰시기만 하면 당신 곁에서 천 명 고수의 몫을 해낼 거예요." 금모란의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권유에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네." 무종이라는 흑의인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천무영이었다. 그가 천금성의 심장부, 그것도 북궁현리의 앞에 이 렇듯 변용을 하여 진면목을 숨긴 채 나타난 것이었다. ③ 천무영의 모습은 북궁현리를 안도하게 했다. 금모란의 적극적인 권유가 오히려 신경에 거슬리던 그였다. 만일 상대가 빼어난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면 문제는 또 달라졌으리라. 남녀관계란 본시 긴장을 요하게 마련이므로. "내 밑에 있고 싶다고?" 북궁현리는 그새 여유를 되찾고 담담하게 물었다. 이에 천무영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이다." "흠, 무엇때문이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면서." "그건 본인이 시대를 알기 때문이오. 일위가 되지 못할 바에야 제 이인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소." "핫핫핫... 마음에 든다, 그대의 호기가!" 슉! 광소성과 함께 북궁현리의 수중에 있던 옥봉이 번뜩 휘둘러졌다. 이와 동시에 천무영의 손바닥도 춤을 추었다. 꽈꽝―! 폭음이 터지며 천정이 한 차례 무섭게 들썩였다. "윽!" 천무영은 앉은 채 뒤로 벌렁 넘어갔으나 튕겨지듯 곧바로 벌떡 몸 을 일으켜 세웠다. 반면에 어깨만을 약간 들썩인 북궁현리는 그의 거동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좋다! 무종, 너를 기용하겠다." 최절정 고수이자 천금성의 제일인자답게 북궁현리는 그 한 순간을 통해 상대의 기백과 자질을 모두 간파해냈던 것이다. 천무영은 그 말에도 이렇다할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주먹을 마주잡고 말했을 뿐이었다. "반드시 총사께 이득이 되어드리도록 하겠소." 현 시점에서 천무영의 마음이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는 그 자신 외 에 아무도 모른다. 북궁현리와의 대면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그 에게 있어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슴의 피를 기름으로 삼아 심지를 태웠다고 한들 그의 심리를 대 변하지는 못하리라. 몇 년 전에 있었던 무영탑에서의 사건을 그는 오늘까지도 내내 잊지 않았고, 그 장본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일종의 신념으로 화해 있었다. 하지만 천무영은 경솔함으로 대사를 그르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 는 언제고 지독하리만큼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거머쥐기 위해. '북궁현리! 잠시만 더 기다리시오.' 그는 되려 상대를 향해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④ 그믐밤. 달빛도 구름에 가리워져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천금성의 밤만은 달랐다. 도처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어 성 전 체가 대낮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노라면 불야성(不夜 城)이라는 어휘가 실감이 날 정도였다. 천금성에서의 첫밤이다. 천무영은 자신에게 배정된 처소에 들기는 했으나 아직 잠자리에는 들지 않고 있었다. 열려진 창문으로 별빛 한 점 없는 암흑의 천공 이, 그리고 그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대낮처럼 환한 천금성의 처 처중루가 바라다보였다. '북궁현리와의 일은 내 개인적인 것일 따름이다. 내게는 천금성에 와야만 했던 이유가 따로 있다.' 사실이었다. 은자들의 염원을 등에 업고 있는 그로서는 무엇보다 당금 천금성주인 모용천우를 만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 일을 생각하자 천무영은 어쩔 수 없이 내부에서 피가 끓는 것 을 느꼈다. 이르자면 호승심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는 현 무림의 최고 기린아라 불리우는 천금성 주를 꺾어 굴복시켜야만 하는 사명을 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곳의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까?' 천무영은 말뿐이 아니라 어느새 북궁현리를 뇌리에서 깨끗이 몰아 내고는 아직 일면식도 없는 거성(巨星)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위인이었다. 문 밖에서 한 가닥 음성이 들려와 그의 상념을 끊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천무영은 조심스러운 그 음성이 금모란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쪽으로 등을 돌린 채로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로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는 기 척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천무영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잠시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로 부터 한참 뒤에 이어진 것은 낮은 흐느낌이었다. "주공(主公)께서는... 저를 상대하지도 않으려 하시는군요? 천한 계집이라고......." 볼 것, 못볼 것 다 보인 여인의 자탄이 천무영으로 하여금 말을 꺼내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이전 같았으면 어떨지 모르되 적어도 지금 의 나는 당신의 생존방식을 탓하지 않소.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세상에는 별의별 유형의 삶이 다 존재하더군." "흐흐흑......." 여인은 진한 오열로써 말을 대신했다. 천무영은 여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앞에서 무릎 꿇은 채 어깨 를 들먹이며 울고 있는 그녀는 금모란이었다.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모양새는 온전하지 못했다. 윤기있 는 머리카락은 함부로 헝클어져 있었고, 옷차림도 채 정돈되지 않 아 단정한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필경 방금 전에 질탕한 정사(情事)라도 치른 듯 했는데 그 모습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는 바로 미루어 그녀의 심리가 자포자기에 이 르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천무영은 그런 금모란에 대해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비난의 차원이 아니라 연민지심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이해를 동원하여 입을 떼었다. "천하은밀색(天下隱密色)과 은밀살, 양 인에 관해서는 이곳에 오 기 전에 충분히 들었소." 금모란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천녀의 모친과 부친은... 천금성주에게 죽었어요." "강조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소. 그대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원하지 않는 삶을 택했다는 것도." "흐흐흐흑.......!"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서일까? 금모란은 부끄러움도 잊은 듯 종전보다 더 크게 울어제꼈다. 천무영은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하여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그에게 금모란이 물음을 던져왔다. "주공께서는... 개봉부에서의 일을... 어찌 생각하시나요?" "어찌 생각하다니?"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해 천무영은 반문했고, 금모란은 와중 에서도 얼굴에 은은한 홍조를 피워올리며 물었다. "혹시... 꺼림칙한 기억은 아니신지......?" 그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심중에서 한탄이 크게 일 어났기 때문이었다. '아아, 여인이여! 그대는 대체.......' 천무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답해 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대는 내게 최초로 여인을 알게 해준 사람이 었소. 그 일은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분이오." "아!" 금모란은 비맞은 새처럼 일신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기쁨이 천무영의 가슴을 아프게 할퀴었다.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첫 여인이었듯 금모란에게도 자신이 최초의 사내였다는 것을. 문제는 그때가 지금이 아니듯 이후로 모 든 것이 너무도 변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금모란도 누구 못지 않게 영악하니만치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눈물은 흘리고 있으되 더 이상의 슬픈 기색은 내비치지 않 았다. 그리고는 사뭇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 염려되는 바가 있어요." "무엇이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소." "그것은... 제 동생에 관한 문제예요." "어째서?" 천무영이 묻자 그녀는 씁쓸하게 말을 이어갔다. "연홍(蓮紅)과 천녀는 친자매 간이므로 결과적으로 똑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으음!" "그애는 제 방식을 혐오해요. 그래서 아예 남자가 되어버리겠노라 했고, 공적인 일 말고는 저와 얘기도 잘 안해요." 천무영은 새어나오는 탄식을 감추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도 남장의 살수인 천인혈(天刃血)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선까지 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살인을 담보로 한 술내기를 벌일 만큼 대담하며 어투조차 사내처 럼 굳어져 누구에게도 본심을 내보이지 않는 여인이다. 그녀는 최 소한 천무영에게도 충성 이외에는 언급한 바가 없었다. 말하자면 금연홍은 철저한 잔혈맹의 제이살(第二煞)일 따름이었 고, 금모란은 동생의 그런 면을 염려하고 있었다. ⑤ 금모란은 물기 어린 눈으로 천무영을 정시했다. "천녀는 연홍이 여인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래요. 그애는 손은 피로 물들였을망정 몸은 더럽히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을... 왜 내게 하오?" "여인이 가장 여인다울 수 있는 건 남자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일 이니까요. 그건 천녀의 경험으로 미루어도......." "모란......!" 천무영은 그녀의 마음이 읽혀지자 가슴이 더욱더 쓰려와 견디기가 힘들었다. 요컨대 금모란은 그를 사랑하고 신뢰했으며 그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맡기려 하는 것이었다. 천무영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좋소, 잔혈맹주로서 그대의 청부를 접수하리다." "주공......!" 그는 금모란의 격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화제를 돌렸다. "삼살(三煞)은 근황이 어떻소?" 금모란의 젖은 눈에서 새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무흔(無痕)도 천녀만큼이나 망가져 있지요. 아직도 저 같은 계집 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흐흑!" 그녀는 오열과 더불어 말을 이었다. "그는... 광혈검(狂血劍)을 얻은 이후로 살인광(殺人狂)이 되어 있어요. 절더러 여보란 듯이......." 천무영은 탄식을 불어내야 했다. "사랑이 너무 깊으면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는 법이오." "그런가... 봐요. 정말......." "그는 어디 있소?" "예전처럼 항상 제 곁에서 맴돌고 있지요." "으음......." 천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움직였다. 창 밖이다. 어두운 담 아래 한 그루 고목인 양 무심히 서 있는 자 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늘상 허리에 매달려 있던 목검(木劍) 대 신 진검을 비껴 찬 그 모습에서는 일견하기에도 자학에서 비롯된 허무가 물씬 배어 나왔다. 천무영은 눈을 들어 암천을 바라보았다. 일점의 빛도 없는 캄캄한 하늘이 그의 심경을 암울하게 짓눌러왔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시선을 다시 금모란에게 주었다. "그 외에 다른 용무는 없었소?" 금모란은 그제서야 앗차 싶었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주공께서는 북궁현리를 어떻게 보셨는지요?" 천무영의 미간에 절로 깊은 주름이 패였다. "한마디로 놀랐다고 밖에는. 그의 무공 수준은 가히 천하무적이라 고 할 수 있을 정도요. 나로서는 그가 단기간 내에 어떻게 그토록 강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바로 그 점이 관건이에요." "흐음?" 금모란은 어두운 안색이 되어 설명했다. "그동안 천금성은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떨어졌어요. 양원삼각오 전십단(兩院三閣五殿十壇)이 전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오대 가문도 마찬가지예요." 천무영이 물었다. "천금성주의 대제자(大弟子)와 이제자(二弟子)는 그러는 동안 무 엇을 하고 있었소? 후계자의 자리는 양보했어도 최소한 나름의 세 력기반을 다져 놓았어야 말이 되지 않을지?" "그들 이양천(李羊天)과 적문공(赤文公)은 틀렸어요. 두 사람은 이제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니까요." "흠, 애초부터 그랬던 건 아니란 말 같은데?" "맞아요. 과거라면 대제자 이양천의 경우에는 소수혈전룡(素手血 電龍)이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막강한 고수였고, 적문공도 천지생 사교(天地生死橋)라 불리울 정도로 대단했었어요. 그렇지만 현재 는 주색(酒色)에 빠진 탕아가 되어 있지요." "그리 된 연유는?" "그것은......." 금모란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천무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짚히는 바가 있었다. "모란, 그대구려?" 금모란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네, 북궁현리의 사주를 받아 그들을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뜨 린 것은 천녀였어요." 천무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완전히 몰락해버린 것이오?"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금모란이 머뭇머뭇 답했다. "어쩌면... 소생이 가능할지도......." 천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고, 그의 안색을 살피며 금모란은 조심스레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북궁현리는 어떤 방도를 썼는지 일신에 가공할 무학을 소 유하고 있어요. 그의 내공은 사 갑자가 넘을 거예요." 천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그의 내공은 육 갑자를 넘고 있소." "설마......!" "그와 일 장을 겨루어 봄으로써 알 수 있었소." "그렇다면 제 느낌은 더욱 확실해지는군요. 그는 틀림없이 비책 (秘策)을 썼을 거예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 지요. 게다가 나날이 무공이 강해지고 있는 걸요." 천무영은 침중한 안색이 되어 금모란을 바라보았다. "근간에 천금성주의 동태는 어떻소?" 금모란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답답하지만 그 점은 알지 못해요. 성주는 무쌍별부에 기거 하고 있다는데 십여 년 이래 아무도 본 자가 없어요." "으음......." 천무영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금모란의 말을 듣고 나자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음모의 기미를 느꼈다. 그의 눈길은 어두 운 암천으로 향해졌다. 암천의 한가운데로 유성(流星) 하나가 소리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시각 천무영에게 있어서는 일종 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어떤 일에고 음모가 게재되어 있다면 의당 파헤쳐야겠지. 그래야 정당한 승부도 거둘 수 있을테니까.' 그의 입술꼬리가 순간적으로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금모란은 언제부터인가 천무영의 모습을 취한 듯 바라보고 있었 다. 하지만 어찌 살아왔든 최소한 그의 앞에서만은 인간 본연의 도리를 무시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심중을 꽉 메우고 있던 안타까움을 접으며 하나의 기원을 그에게 바쳤다. '나의 사랑! 나와의 인연은 한순간으로 그쳤지만 부디 연홍에게만 은 영원한 우상이자 정인이 되어 주시기를.......' ⑥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천무영은 천금성의 내부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는 북궁현리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는데, 그것 은 그가 대체로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해왔기 때문이었다. 북궁현리는 그를 항상 가까이 두고 싶어했다. 이는 천무영에게 있 어서는 매우 유리한 점으로 작용되었다. 덕분에 그는 천금성 내의 어떤 곳이든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있었으므로. 그로 인해 천무영은 적지 않은 기밀도 알아낸 상태였다. 첫째로 천금성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백 년간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개편이 되는 것은 물론 노고수들이 점진적으로 교체되고 있었다. 즉 노성주 휘하의 많은 원로(元老) 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어 천금성의 전 체적인 힘의 균형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둘째, 천금성은 대전(大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드디어 오랜 침묵을 깨고 본격적으로 강호무림에 나서려 하고 있었다.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인지 하루도 빠짐없이 오대 세가로부터 전서구가 분주하게 날아들고 있었다. 셋째로 북궁현리는 사병(私兵)을 키우고 있었다. 숫자는 일천 정도였는데 한결같이 자질이 출중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냉혹하고 엄격한 지휘하에 훈련을 쌓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학이 일반적인 상식을 초 월하는 편격무공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무공 지도는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북궁현리가 직접 관장했다. 그는 자신의 사병들을 가리켜 일천군림대(一千群臨隊)라고 불렀으 며 그들에게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달이 휘영청하게 떠올라 있었다. 천무영은 화원에서 홀로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화초들은 밤이슬에 촉촉히 젖은 채 달빛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가 벼운 밤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의 향기로움은 예외없이 코끝으로 스며들어 감동과도 같은 느낌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진한 향기를 음미하며 걷던 천무영은 멈칫했다. 맞은편에 한 인영이 목상처럼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흔......!"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나 다름없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화원의 한귀퉁이에 쓸쓸하게 서 있는 그림자, 그 주인은 삼년 전 과 변함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무흔이었다. 무흔의 존재는 눈에 띄자마자 천무영의 가슴에 여지없이 파문을 일으켜 놓았다. 또한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무흔의 눈물이었 다. 한쪽을 스스로 파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소리없이 눈물 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무영은 언제나 냉막하고 무심한 무흔이 눈물을 보이면 충격을 받곤 한다. 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무흔, 왜......?" 무흔은 대답도 없이 건너편의 불이 켜진 창문으로 시선을 가져갔 다. 거기에는 하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형태로 미루어 그림자는 옷을 벗은 여인이 분명했다. 천무영은 안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쯧! 저곳은 북궁현리의 방이다. 여인은 금모란이겠고.' 그 정도면 무흔이 우는 이유란 더 연구할 필요도 없었다. 금모란은 북궁현리의 앞에서 벗은 몸으로 서 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무흔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처 럼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무흔." 천무영은 낮게 부르며 무흔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무흔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녀를......." 무흔의 날카로운 시선이 천무영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는 하나뿐 인 눈에 기이한 감정을 담은 채 말문을 열었다. "이 무흔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말해보게." "북궁현리를 죽이는 것!"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아니었다. 천무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무흔 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어쩌면 자네에게 그 기회가 올지도 모르네." 그는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섬뜩하도록 푸르다고 생각했다. 그 러면서 그는 화원을 가로질러 갔다. ⑦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일신에 아무 장식도 없는 백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하고 평범한 옷도 여인이 걸침으로 해서 눈부시게 빛 나 보였다. 이는 여인이 지닌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나이는 이십 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녀의 용모는 미(美), 그 자 체보다는 정결해 보이는 분위기로 인해 더욱 압권이었다. 대개 여인이 지나치게 아름답다 보면 아무래도 요기(妖氣)가 느껴 지기 마련이거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한 떨기의 백합인 양 너무도 청초하고 순수해 보였던 것이다. 백의미녀는 난간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원을 걷다가 그녀를 발견한 천무영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천중화(天中花) 모용운화, 오늘도 나왔군.' 그 백의미녀가 천금성주인 모용천우가 그토록 애지중지한다는 의 손녀였다. 그녀의 배필이 천금성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정사실로 되어온 바였다. 천무영은 그동안 산책길에 매일밤 그녀를 보았다. 모용운화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듯 습관적으로 이 시각이 면 정자에 나와 하염없이 달을 응시하곤 했기에. 그런데 오늘밤은 그녀의 기색이 약간 달라 보였다. 분명 달을 보 고는 있으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편치 않은 자세로 은 연중 계속 주변을 의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무영은 한동안 묵묵히 지켜보다가 그녀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아차렸다. '나를......!'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진즉부터 모용운 화에게 접근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암암리에 자신의 존재를 인 식시키느라 신경을 쓴 것도 사실이었다. 사삭! 이번에도 그는 의도적으로 실수를 가장하여 소리를 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로부터 반응이 전해져 왔다. 그것도 이제까지 와는 달리 작심을 한 듯 직접적으로 말이다. "귀하, 그만 모습을 보이시지요?" 모용운화는 소리내어 말을 건네온 것은 물론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리기까지 했다. 슷! 천무영의 신형이 곧 그녀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는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했고, 모용운화는 서늘한 봉목을 들 어 그를 아래위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투명하리만큼 아름다운 그 녀의 얼굴에는 다소 놀라는 듯한 빛이 어렸다. 그녀는 감정을 갈무리한 채 담백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당신이 천하의 제이인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는 그분인가요? 무 종(無踪)이시라는." "그렇습니다." 모용운화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하필이면 왜 이인자인가요?" 천무영은 그녀의 미모에 혹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으되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게 말했다. "자신을 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모용소저." "당신은 그럼 자신이 이인자로서의 자격밖에 갖추지 못했다고 생 각하시는 건가요?" "사실이 그러하니까요." 모용운화는 생긋 웃더니 상황과 별개인 말을 불쑥 꺼냈다. "오늘밤은 달빛이 참 곱군요." "네?" "저에게 이런 밤에 마시기 좋은 야래향(夜來香)이라는 차가 있어 요. 어때요, 함께 드시겠어요?" 천무영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제가... 어찌 감히......!" "따라오세요." 모용운화는 몸을 돌렸고, 천무영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때에 그는 일신에 사이한 기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은자십천 중 마마대불사(魔魔大佛師)에게서 배운 것으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종의 미심공(媚心功)이었다. 모용운화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무영도 여기에 대해서만은 일체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모용운화라면 공식적으로 알려진 북궁현리의 정혼녀이다. 이르자면 천리단옥에 이어 두번째로 그와 정혼을 한 셈으로, 이 여인의 지위나 배경이 천문세가의 소가주보다 훨씬 높다는 점에서 천무영은 또다른 음모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⑧ 모용운화의 방이다. 이곳에는 정갈한 가운데 은은한 기품이 어려 있었다. 천중화란 여인은 차림새에서 나타내 주었듯 별호와는 대조적으로 검박함에 매우 익숙해 있는 듯했다. 방 안에도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워 보이는 물건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그렇다고 초라한 것은 아니었다. 주인의 품격을 닮은 듯 이렇다하 게 꾸민 흔적은 엿보이지 않아도 소기의 장식물 덕에 전체적으로 단아하고도 격조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차맛이 어떤가요? 무종." 모용운화가 잔을 들어 한 모금의 차를 음미하며 물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야래향이란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차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지요." 그녀는 운을 뗀 후, 잔잔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래 전, 주(周)의 황제께서 여염의 한 아낙에게 미혹되셨더랍니 다. 황궁 가까이에 여인의 집이 있다 보니 그리된 모양인데, 황제 는 밤마다 변복을 하고 그녀를 찾으셨다죠." "으음." "점점 정이 깊이 들게 되자 황제는 여인의 부군을 신하로 삼아 변 방의 수비대로 파견했더래요. 이후로 여인은 매일밤 찾아오는 황 제를 위해 차를 끓였고......." 천무영이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가로챘다. "외람되나 별로 아름다운 얘기는 아니라 사료되오이다." "호호호... 그래도 더 들어보세요. 인륜에 어긋나는 애정 행각으 로만 판단하기에는 애틋한 일면도 있으니까요." "흠!" "어느 날인가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소식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 던 그녀의 부군은 마침 황제와 아내의 정사 장면을 목도했다지요. 그 길로 그는 조용히 자결을 했대요." "그럼 그 여인은......?" "자책을 이기지 못한 그녀도 눈물을 뿌리며 곧바로 부군의 뒤를 따랐답니다. 황제만 남게 된 것이지요." 천무영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황제는 그 신하에게 지극히 미안해 하면서도 끝내 여인을 잊지 못해 밤만 되면 그녀가 자신을 위해 끓여내오던 차를 시녀에게 끓 이게 하여 마셨대요. 밤에 찾아온 정인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한 차라 하여 황제는 그때부터 그 차에 야래향(夜來香)이라는 이름을 붙이셨다는군요." 그는 약간은 마땅치 않은 어조로 물었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같은 전설을.......?" 그 말인즉 왜 자신을 불러다놓고 놀리냐는 투였다. "왜, 황당무계하게 들렸나요?" 모용운화는 반문하더니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천무영은 와중 에도 눈이 부신 듯 그녀의 시선을 맞받지 못하고 얼굴을 스르르 붉히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런 그를 향해 모용운화는 간단하게 덧붙였다. "권좌란 한 번쯤 누려볼 만한 것이에요. 설사 부당하다 해도 원하 는 바가 있으면 무엇이든 취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말하려는 요 지는 그것이에요." "그...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묻겠어요. 무종, 당신은 정말 평생을 이인자로서 만 족할 수 있나요?" 천무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충분 히 일인자가 될 수 있는 재목이에요." "으음......!" 그의 입에서는 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어 그는 한껏 용기를 낸 듯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은 혹하는 심경은 표명하되 멍청한 척 상대로 하여금 방도를 모색하게 만드는 그 특유의 수단이었다. 모용운화가 섬섬옥수를 뻗어 그의 손을 잡아온 것은 그때였다. ⑨ 천무영은 불맞은 짐승처럼 일신을 부르르 떨었다. "소저......!" "당신은, 그를 두려워 하나요?" "이... 이건 의미가 다릅니다. 이 무종... 이제껏 아무도 두려워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망설이는 거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쥐어짜듯 말했다. "모용소저께서는... 그분의 정혼녀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찌 저에게 그런 권유를......." 모용운화는 듣고 있다가 문득 날카롭게 물었다. "내가 어떤 존재죠?" "네?"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발판." "아!" "그래요, 나에게 주어진 혼인의 의미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요. 그리고 나는 지금 선택을 바꾸려고 하는 중이에요." "모용소저......." "아니, 처음부터 나는 한 번도 선택을 했던 기억이 없군요. 그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을 따름이니까." 모용운화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상대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무종, 당신은 혹 나를 원하지 않나요?" "감히 어찌......?" "호호호... 한 번 솔직하게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봐요. 거기에 정 답이 있을 테니까요." 그 순간 그녀는 천무영의 내부에 정말로 어떤 말이 담겨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쓰디 쓰게 읊조리고 있었다. '후후... 모용소저, 당신의 속을 먼저 들여다 보시오. 북궁현리에 대한 혐오감 외에도 이 시각에 나를 은밀히 불러다놓고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이 분명히 적혀 있을 게요.' 그런 연후, 천무영은 심각하게 앞뒤를 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더니 이 여인은 북궁현리와의 정혼을 인정 하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점때문에......?' 그의 침묵을 어찌 해석했는지 모용운화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이 방에는 현재 음파(音波)를 차단하는 장치 가 되어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엿듣는 자가 있다는 얘기죠." 천무영은 정말로 놀라서 물었다. "소저께 감시자가 따른다는 뜻......?" "그래요, 조금이라도 의심을 덜 사려면 장치를 속히 풀어야 해요. 이제부턴 그의 귀를 달콤하게 해줄 말만 해야 돼요." '맙소사!' 천무영은 기가 막힌 나머지 내심 부르짖었다. '북궁현리, 그대가 상처를 안겨준 여인은 비단 단옥만이 아니었 군. 쟁쟁한 천금성주의 의손녀인 이 여인까지도 농락을!' 그것은 그가 모용운화의 고운 안면에서 자조 외에도 타는 듯한 분 노를 발견하고 나서 읊조린 말이었다. '뭔가 사연이 많다! 절대적으로 규명을 요하는.' 천무영의 가슴 속에서는 애초부터 품고 있었으되 점차 구체화되어 가는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날, 그 시각 이후로 천무영은 수시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모용운화의 주변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이 그림자처 럼 따라다녔다. 그들은 물론 북궁현리의 심복들이었다. 천무영은 자신의 주위에서도 그들의 호흡과 촉각을 느꼈는데 다행 히도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혹은 말 한 마디라도 빠짐없이 북궁현리에게 전달될 것을 감안하여 그는 철저 히 제이인자로 행동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보름여가 지나자 천무영은 그때부터 따라붙던 감시자 들에게서 놓여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북궁현리의 눈에 서 신뢰의 빛이 회복된 것과 동시의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천무영으로서는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마침 내 생각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했다. 천무영은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밤에 산책을 즐기는 그의 습관은 천금성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 었다. 그러므로 그가 밤공기를 맞으며 성중의 이곳저곳을 돌아다 닌들 그것을 이상히 여길 자도 없었다. 그는 천중화 모용운화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랫만이오, 천형." 어둠 속에서 불현듯 들려온 음성에 천무영은 뚝 굳어졌다. 동시에 그는 전신이 무섭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 누군가? 내 정체를 아는 이자는.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서는 살인도 불사할 판국이다. 천무영은 한 손에 진기를 모은 채 빙글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이 내 심각한 갈등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내가 왜 그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이내 알아차렸다. 단지 그자가 호의로 아 는 체를 해온 것? 适?, 아니면 그 반대 입장에서인지를 아직도 결 정짓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천무영의 앞에 서 있는 왜소한 체격을 가진 흑삼인, 그자는 다름 아닌 천문세가의 양자 천리단검(千里壇劍)이었다. 어쨌든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다른 인물로의 위장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천무영은 끌어올린 공력을 거두지 않은 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천리형이 이곳엔 어인 일이오?" 그를 향해 천리단검은 의외로 선뜻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이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천무영도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공력을 풀며 상대의 손을 마주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뭉클하고 솜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져 왔다. 이 와 더불어 천무영은 은연중 경계심마저 풀어야 했다. 자고로 손을 곧이 곧대로 내맡기는 자는 악의가 없는 법이므로. ⑩ 착각이었을까? 천리단검은 어둠 속에서도 눈가에 안개와도 같은 뿌연 빛을 흘리며 말하고 있었다. "실은 그동안 천형 생각을 많이 했었소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처럼 우연을 빌어 만나게 될 줄이야......." 그의 음성조차도 기이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의 반 응이 의외였지만 애써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뿐이오? 나를 부른 이유는." "하면,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이오?" "흐음?" 격의 없는 그 말에 천무영은 급기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실 그들 사이에 그럴 만한 교분은 쌓이지 못했던 것이다. 천리단검이 그의 심중을 눈치챘는지 빙긋 웃었다. "결례였다면 용서하시오. 의매로 인해 나로서는 당신이 도무지 남 처럼 여겨지지 않아서. 게다가......." "또 있소?" "천형은 죽은 누이의 당부대로 천하를 주름잡는 인물이 되어 계시 지 않소? 이 시대 최고의 살수집단인 잔혈맹의 맹주이자 천마무영 으로 불리우는 사내, 아니오?" "으음!" 천무영은 짧은 신음과 함께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에게 천 리단검은 역시 스스럼없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마시오. 천형이야 그간에 내 존재를 까맣 게 잊었을 수도 있겠으나 내 쪽에서는 그렇지 않소." "그건 왜 그렇소?" "워낙 당신이 유명하다 보니 늘 소식을 접하는 데다가 가끔씩은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도 있었으니까." "청부를 뜻하는 것이오?" 천리단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소." 천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요. 천리형, 당신은 공히 오대세가의 일원 이 아니오? 아울러 천금성의......." 그의 말을 천리단검이 중도에서 가로챘다. "맞소. 여전히 오대세가에 속해 있기는 하오만 과거와는 입장이 매우 틀리오. 이 점은 오대세가 모두가 마찬가지......!" 천무영은 문득 손을 들어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한편, 급히 전 신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따라 무형의 강기가 일어나 주위 공기의 흐름을 일체 차단시켰다. "감시자요. 후후... 종종 있는 일이외다. 이젠 말을 해도 좋소. 음파가 더 이상 새어나가지 않을 테니까." 천리단검은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전설의 무성단음이형강(無聲斷音以形 )을......?" "이곳에서는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수단이외다. 그렇지 않으면 같 은 구실을 하는 장치라도 있어야 하고. 후후후......." "으음!" 천무영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오대세가의 입지 가 달라진 건 통솔자가 바뀌었기 때문이오?" "그렇소." "어째서? 북궁현리의 능력이 전 성주만 못하오?" 천리단검은 쓴 웃음을 지었다. "천형은 꽤 짓궂구려. 뻔한 것까지 왜 묻소? 더구나 그자가 어떤 위인인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텐데." 천무영은 그제서야 모든 의문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천리형의 뜻을 알 듯 하오이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좀더 이어졌다. 그것은 양측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천무영과 천리단검에게는 현 시점에서 서로 도움이 될만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일종의 정보교환이랄까? 두 사람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다. 천무영은 모용운화와 관련된 일을 중점적으로 얘기했는데, 이때문 에 받은 천리단검의 충격이란 이루 다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가히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오오, 이럴 수가! 그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소. 내 의매로 하여금 자책에 빠져 자결까지 하게 만든 것도 결국은 의도적이었 다는 말이 아니오?" "그렇소. 그는 단옥과 나와의 관계를 하나의 빌미로서 철저하게 이용했소. 그것도 정당성으로 무장을 한 채." "우우우......!" 천무영은 상대가 지나치게 흥분을 한다 싶었으나 의매의 죽음을 비롯하여 그간 천문세가가 겪어온 고충들 때문이려니 하고 굳이 깊게 관여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천리단옥의 죽음에 관한 한 자신의 심적고통도 만만치 않기 에 어쩌면 일부러 회피하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시급 히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므로. 어쨌든 재개된 대화는 천무영과 천리단검에게 공감할 수 있는 부 분들을 가지게 해주었고, 그때문에 거리도 좁혀졌다. 북궁현리는 많은 적을 만들고 있었으되 천무영은 반대로 주변의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포섭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잔혈맹 고유의 연락체계를 수시로 이용했는데 그 일은 뒤에 서 금모란이 도맡아 완벽하게 처리해 주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천무영은 광혈살인조(狂血殺人組)도 동원할 생각이었 다. 그들은 그가 명을 내리면 무조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천무영은 살인, 그 자체를 즐기며 살인을 밥먹듯 한다는 그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룰 작정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들 의 영반인 무흔을 의식해서였다. 무흔은 강하다. 그는 내공의 유무를 논할 수가 없는 사람으로 오직 한 가지 밖에 는 모른다. 베는 것, 그 행위만이 그의 전부다. 그의 검은 언제나 변함없이 빠르고 정확했으며, 광혈살인조의 영 반이라는 지위와도 너무 잘 어울린다. 천무영은 무흔에게 최근 한 가지 기학(奇學)을 전수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을 오래 지속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화무혈공(造化無穴功). 그것은 인체의 혈도를 마음대로 옮기는 기공이었다. 심지어는 심 장의 위치까지도 순간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었다. 무흔은 놀랍게도 조화무혈공을 단 하루만에 습득했고, 이 일을 기 화로 그를 보는 천무영의 시각은 또 달라졌다. 하여 그를 위한 구 상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가지가 더 세워졌다. 천무영의 계산이지만 그 두 가지 일은 장차 무흔의 죽어버린 마음 을 구원해 줄 일말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천무영은 끊임없이 천금성의 조직과 인물들을 세부적 으로 파악해 나가며 대계(大計)를 세우고 있었다. '천금성이 북궁현리에게 넘어가서는 절대 안된다.' 이것이 천무영의 생각이었다. 애초부터도 그는 천금성을 붕괴시키 려고 온 것이 아닌 바, 무림에서 차지하는 천금성의 비중을 생각 할 때 작금의 사태를 결코 좌시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의 목표는 여기까지가 전부는 아니다. 지옥성 같으면 정말 로 무너뜨려야 하며 나아가서 최후에는 은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라천부(大羅天府)에 도전해야 한다. 그의 이런 계획도 인간이 가지는 야망(野望)의 일환일지? ■ 무영탑 3권 제24장 역전(逆轉)의 서(序) 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남자이고, 한 사람은 여인이었다. 이 간단한 정의 외에 그들에게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남자는 이 시대가 배출한 희안한 살수였으며, 여인은 천하에서 가장 지혜롭 고 아름답다하여 하늘의 꽃이라 불리웠다. 천마무영 천무영과 천중화 모용운화였다. 모용운화의 방은 현재 음파가 모두 차단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장 치가 아닌 무성단음이형강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물론 올 때도 아무도 모르게 움직였겠지요?" 거듭 확인해 오는 그녀에게 천무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환술(幻術)은 두었다 무엇에 쓰겠소?" 그의 어투는 전에 비해 편해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제 그녀 앞 에서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당신의 환술은 어느 정도 수준인데요?" "아마도 감시자들은 나를 짐승이나 초목으로 보았을 게요. 혹은 스쳐지나는 바람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고." "당신은 생각보다 재주가 많군요?" "과찬이오." 천무영은 짧게 답한 후,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심문만 할 거요?" "호호... 불쾌했다면 사과드릴께요. 당신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어 쩔 수가 없었어요." "쯧! 이미 알고 있으면서 웬 시치미요?" 모용운화는 혀를 쏙 내밀었다. "실은 그래요, 천마무영 나으리." 천무영은 쓴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그동안 꽤 여러 번 만났소. 그대가 나에 관해 꾸준히 조 사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러는 당신은요? 일부러 틈을 보인 적도 있었잖아요." 너무도 맹랑한 그녀가 부담스러워 천무영은 자르듯 말했다. "서론은 이쯤에서 접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모용운화는 눈썹 끝을 약간 치켜올렸다. "어떤 것이 본론인데요?" "천금성주의 근황을 알고 싶소." "그건 나중 일이에요." "그럼 앞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그녀의 안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싹 걷혀 나갔다. "두 분 사형(師兄)을 건져 주세요." "흐음?" "그분들은 수렁에 빠져 있어요. 원래는 두 마리의 용에 비견되는 분들이었는데....... 그 두 분을 건져 주신다면 그때 궁금해하시 는 바를 모두 알려 드리겠어요." "후후... 교환조건인 셈이군." 천무영이 쓰게 웃자 모용운화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야 승산이 커지기 때문이에요." "음, 듣고 보니 일리있는 말이구려." "하여간 참 좋아요." "뭐가 말이오?" 대화의 형국은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모용운화가 또다시 만면에 화사하게 웃음꽃을 피워 올렸던 것이다. "호호... 당신과 얘기하면 막히는 바 없이 잘 통해서요." "고맙소." "당신은 어떤데요?" "나도 당신에게서 마음에 드는 점은 있소." "그게 뭐죠?" "불필요한 위선이나 가식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경우에 따라서 침묵이나 위장은 가능하겠지만 말이오." "호호호... 당신처럼요?" 천무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듣 고 나서야 처음 느낀 것이지만 그는 자신이 모용운화라는 여인과 매우 닮은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도면밀한 성격이 그랬으며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남과 여라는 차이가 두 사람을 구분짓고 있을 뿐. 결국 그는 모용운화를 상대로 미심공을 펼쳤던 점에 대해 뼈저리 게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 수단이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연결시 켜 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이처럼 수다쟁이가 된듯 헤실헤 실 웃으며 말을 자꾸 붙여오니 말이다.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말하시오." "당신의 진면목을 보고 싶어요." 천무영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왜 꼭 그래야 하오?" "저는 원래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요. 그건 이번 일의 성패와도 관련이 있어요. 왜냐하면 천금성은 그저 무림의 일각이나 차지하 는 소규모의 단체가 아니니까요. 적어도 당신의 기상이 우리가 상 대하려는 그자보다는 월등히 나아야죠." "끙! 할 말 없군." 천무영의 입에서 급기야 괴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문제라면 당신은 필경 실망하게 될 것이오." 스스스....... 그의 얼굴이 변화를 일으키더니 진면목을 회복했다. "으음!" 모용운화는 탄성도 신음도 아닌 묘한 음성을 발했다. 그녀는 천무 영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참 매력있어요!" "엉?" "내 마음에 꼭 드는 모습이에요. 남다른 분위기도 그렇지만 푸른 광채가 도는 당신의 그 눈이 더요. 호호호......." '미치겠군!' 천무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모용운화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사 실을 알아차렸다. 어쩌겠는가? 그에게도 전담하여 요리해줄 임자 (?)가 따로 있었던 것을. ② 욕지(浴池). 오색찬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지는 더할 나위 없이 거창해 보였다. 천하를 다 뒤진들 몸을 씻는 장소 치고 이보다 더 화려하 게 꾸며진 곳은 없을 것이다. 그 넓이만도 무려 이십여 장에 달했는데, 거기다 초호화판이니 언 뜻 사용자의 신분이 무엇인가고 궁금해질 정도였다. 욕지에는 알맞게 덥혀진 물이 수증기를 피워올리며 찰랑이고 있었 다. 향료를 탔는지 그윽한 향기도 풍겨 나오고 있다. 한쪽에는 거대한 상아침상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두 명 의 인물이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한때 천하를 떨어 울리던 위인들이었다. 소수혈전룡(素手血電龍) 이양천(李羊天)과 천지생사교(天地生死 橋) 적문공(赤文公), 이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중 한 명이 향 후 무림의 운명을 걸머지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그 쟁쟁하던 위명은 흘러간 옛것에 불과했고 그들은 심신이 극도로 타락해 버렸다. 그들은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 상태로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달콤한 육체의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옆에는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십여 명의 나녀 들이 있어 그들의 몸을 연신 주물러대는 중이었다. 여인들은 안마(?)에 일신을 전부 다 사용했다. 손이야 더 말할 것 도 없고, 혀를 위시하여 탄력이 넘치는 젖가슴과 둔부까지 총동원 되어 두 사내의 욕구를 자극하는데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율동은 더욱 장난이 아니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나 신의 군무(群舞)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능히 사내들의 정염에 불을 싸지를만 했으며 개중에서도 기름진 허벅지와 물에 젖어 착 달라붙어 있는 숲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더구나 나녀들은 이런 일이 일상화된 듯 수치감을 느끼기는 커녕 능숙하게 행위를 주도하며 스스로도 즐기고 있었다. 이쯤이면 두 사내가 녹아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으음... 소소(少少), 좀더......." "헉! 화화(花花)... 너......!" 그들은 그 짜릿짜릿한 희열에 자신을 온통 내맡기고는 계속하여 황홀경을 헤매는 듯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들의 눈자위가 시커멓게 변색된 채 움푹 꺼져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녀들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들은 두 사내의 목숨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자신들이 벌이는 행동에만 도취되어 있을 뿐. "호호호... 여전하군." 어디선가 한 가닥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주술(呪術)이라도 되는 양 이양천과 적문공은 눈을 번 쩍 뜨더니 튕기듯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한 여인이 욕지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탐스러운 흑발을 어깨가 뒤덮이도록 길게 늘어뜨린 그 여인은 금 모란이었다. 그녀는 일신에 속이 환히 비쳐보이는 얇은 망사의 하 나만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출현에 이양천과 적문공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으으... 모란......!" 그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뭔가 갈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전신을 경련했다. 그러더니 날듯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풋! 벌레만도 못한 작자들, 아직도 살아 있었느냐?" 금모란은 두 사내가 자신의 발밑에 엎드리자 눈을 아래로 내리깔 며 잔뜩 경멸이 담긴 어조로 내뱉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 점도 노기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각각 금모란의 다리를 하나씩 붙들고 애원했다. "오오, 모란! 한 번만......." "으... 제발 안게 해줘!" 그들의 눈에는 믿을 수 없게도 욕정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 다. 그에 반해 금모란의 태도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흥! 너희들은 수치도 모르느냐? 두 놈이 한꺼번에 매달려 가지곤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녀의 한마디는 제이의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똑같 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던 것이다. "비켜라! 내가 먼저다." "천만에, 어림도 없다. 내가 먼저야." "할 수 없다. 그럼 싸워야지." "크크... 이제라도 양보하면 살려 주겠, 큭!" 쿠당탕! 쿠당―! "커억! 억!" 두 사람의 설전은 비명으로 화했고, 그들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무섭게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알몸인 채로 상대를 마구 물어뜯고 할퀴면서 말이다. 그것은 실로 눈뜨고는 봐주지 못할 추한 광경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밑바닥까지 전락할 수 있는 것인가 하 는 의문이 절로 제기되는. 그런 그들을 가리켜 과거 천금성의 두 제자였었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꼴 좋군." 금모란은 냉혹하게 그들을 비웃었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망사의 를 벗어제끼더니 눈부신 팔을 들어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호호호... 내 몸이 탐나거든 이리 와서 발을 핥아라." 휙!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같이 두 사람의 몸이 날았다. 그들은 금모란에게 달려들어 정말로 그녀의 발을 핥았다. "구제불능인 버러지들......!" 그녀는 욕설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멸시가 깃든 그녀 의 눈은 눈꼬리를 따라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휙―! 금모란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돼! 가지 마." "제발... 모란......!" 이양천과 적문공은 바닥을 기며 울부짖었다. 그 추태를 보며 십여 명의 나녀들은 재미있다는 듯 허리를 잡고 웃었다. "호호......! 훗훗호호......." 하지만 도저히 재미있어 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아! 어찌 저렇게까지......." 나녀들의 요란한 웃음소리 가운데 들리지 않게 탄식하는 그는 천 무영이었다. 그는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잠시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천무영은 정신이 돌아와 그 자리를 떴다. ③ 이양천과 적문공. 두 사람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그들에 게는 잇달아 괴이한 사건들이 터졌다. 그들은 여인과 술이 없으면 하루는 고사하고 한 시도 지탱하지 못 한다. 그것은 그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중독현상이었다. 잠이 들었을 때를 제외하면 맨 정신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고는 도무 지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늘상 몽롱하게 술기운이 오른 상태에서 여자를 품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마음이 안정되었으므로.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벌겋게 주기(酒氣)가 올라 계집과 정사를 벌이는데....... "아아악!" 그의 밑에 깔린 채 몸부림을 쳐대던 계집이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에 따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붙어있던 계집 의 목이 댕겅 잘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헉!" 아무리 주색에 눈이 멀었다고 한들 목없는 시신과 계속하여 방사 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일은 두 사람의 주변에서 수태 일어났으며, 그럴 때마다 그들 은 기겁을 하여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곤 했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확 들며 잔뜩 팽창해 있던 혈관마저도 급격히 오그 라드는 것이었다. 괴사건은 비단 그 방면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상 습관처럼 퍼마셔온 술을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보통 술도 아니고 독주를 매일같이 목에 들이붓다시피 하던 그들 로서는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술잔을 들기만 하면 구역질이 나니 어쩌겠는가? "윽!" 잔 속에는 예외없이 구더기가 득시글거려 그들 술주정뱅이에게 술 마실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째 그 같은 일이 반복되자 그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그들은 실제로 반미치광이가 되어버려 낮이고 밤이고 가릴 것 없 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하지만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일명 환락전 (歡樂殿)이라는 곳으로 특별히 설계된 데다가 북궁현리의 명에 의 해 외부와 엄격히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이양천과 적문공은 그런 식으로 열흘이 지나자 피골이 상 접해 탈진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는 정사고, 술이고 가까이 할래야 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들은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장이 전부 쏟 아져 나오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정도가 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정신이 들었다. 얼마만인지 꼽을 수도 없 었지만 좌우간 그들은 예전의 신지가 회복되어 있었다. 그날 그들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천마무영이라고 불리우며 줄곧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 던 자였다. ④ 천금성의 후계자인 북궁현리. 그는 근자에 들어 아무 때고 등골이 써늘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 다. 왜 그런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위인이었다. 지금껏 천하에서 자신 을 위협할 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강하다!' 정말로 그랬다. 따라서 그는 누구도 두려워 하지 않았는데 가끔씩 가슴이 턱 내려앉거나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내가 신경과민인가?' 자문도 해보았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북궁현리는 강한 것과는 별개로 결코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 격이 치밀하기도 했지만 놀랄 만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다. 그는 곧 자신이 느끼는 불안의 요인을 분석해 보았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먼저 언제부터 자신이 그런 증세에 시달리기 시작했는지를 곰곰히 따져 보았다. 그러다 그의 안색이 뚝 굳어졌다. '그자!' 북궁현리의 뇌리에는 하나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너무 평범하 여 아무런 특징도 찾아볼 수 없었던 자, 어쩌면 그 평범함 자체를 놓고 개성이라고 말해야 마땅할 인물이다. '무종이다! 그가 온 이후로 내 불안이 시작되었다.' 북궁현리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하지만 그자는.......' 그는 판단에 회의가 생긴 듯 잠시 갈등을 내비쳤다. 사실 그는 한동안 무종을 철저히 감시한 적이 있었고, 그 결과로 무종에게 딴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그는 믿을 만한 자 같았다. 그렇지만 또 모르지.' 두 가지 생각을 놓고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던 북궁현리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좋다! 감시만 할 게 아니라 그를 시험해 보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일단 의식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무종의 존재가 그에게 압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북궁현리는 입가에 얼핏 쓴 웃음을 매달았다. '후후... 내가 믿을 것은 이 검뿐이다.' 그는 옆구리에 항시 붙어 있다시피하는 애검 환광검(幻光劍)을 내 려다 보더니 한 번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윽고 북궁현리는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미소에는 방 금 전과는 달리 그 특유의 자신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는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천지양원(天地兩院)의 원주들을 대령시키라!" 천무영은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천금성의 실권을 쥐고 있는 천원(天院)과 지원(地院), 양대 원주 들이 느닷없이 대접을 하겠노라며 그를 부른 것이었다. 천지양원은 이원삼각오전십단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소지 한 곳이었다. 원주도 이 년 전에 원로(元老)들이 추천한 자로 바 뀌어 현재의 원주는 바로 원로원주의 제자들이었다. 천무영이 그들에게 초대받은 것에는 큰 의의가 있었다. 이는 천 금성 내에서 그의 비중이 그만치 높아졌다는 뜻이다. 숭양철검(嵩陽鐵劍) 하유종(夏兪鍾)과 낙성신수(落星神手) 구여풍 (丘如風), 이들 두 사람이 각기 천원주와 지원주였다. "헛헛헛......!" "핫핫.. 무종, 자네는 전도가 양양한 인재이네." 술잔이 벌써 수십 순배는 돌았고, 그때를 기해 하유종과 구여풍은 앞다투어 천무영을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흠, 사실 무소협은 아까운 인물이지." "그야 이를 말씀이오? 그러니까......." 천원주 하유종은 주변을 힐끗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총사께서도 은근히 무소협을 경계하는 게 아니외까?" "지원주도 그 점을 느끼셨소?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람의 감정이란 저마다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실은 대동소이하 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북궁총사는 너그러운 인물이 못되오. 성 격이 몹시 편협한데다가......." 천무영이 나서서 그들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그만 하시오, 두 분께선 너무 취하셨소이다." 구여풍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취한 것으로 보이나? 아닐세. 우리는 무소협과 더불어 진 지한 얘기를 나누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다네." 하유종이 곁에서 거들었다. "이보게, 잘 듣게. 북궁총사는 매사에 지나치게 독단적이라 따르 는 자들이 별로 없네. 설사 따른다 해도 진심인 경우는 거의 없 지. 두 사형의 몰락까지도 혹시 그가 획책한 음모의 일부가 아닌 가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네." 천무영은 잘라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총사야말로 진 정한 영웅이라는 사실이오." "허허... 무소협은 억지를 쓰고 있군. 난 다 아네. 말은 그렇게 해도 심중은 그와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말이네만 우리 그만 터놓고 얘기함세." 구여풍과 하유종은 번갈아가며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중 하유 종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실상... 성내의 뜻있는 사람들이 큰일을 도모하고 있네." "큰일?" "그렇네. 총사를 몰아내자는 것이지." 꽝! "닥치시오!" 천무영은 대로하여 주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나더니 두 사람을 향해 호령을 했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게요? 당신들이 감히 그처럼 흉악한 음 모를 꾸미다니,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소?" "무... 무소협......!" "내 그따위 더러운 말을 들은 대가로 총사께 고하기 전에 일차적 으로 당신들에게 징계를 내리겠소." 위이이잉―! 위맹한 두 가닥의 장력이 그의 양손에서 각각 뻗어나갔다. "억!" "잠깐......!" 무방비 상태로 있던 하유종과 구여풍이 대경하여 외쳤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⑤ 퍼펑―! "으윽! 컥!" 두 사람은 볼썽사납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천무영은 재차 쌍장을 번뜩였다. 꽝! 꽈르르르― "으음......!" 두 사람은 연이은 격타로 인해 비명도 더 지르지 못한 채 혼절을 하고 말았다. 그들에게 공격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상황은 또 달랐 겠으나 각본의 한계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에 천무영은 그때까지도 노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쓰러져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총사께 보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보고는 뒤에 해도 된다. 내 이 자리에서 쓰레기 같은 자들을......!" 그의 쌍장이 다시 두 사람에게 날아가려는 찰나였다. "되었다! 그만 해라, 무종." "총사......?" 번쩍 들려졌던 천무영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추어졌다. "왜입니까? 이들은......." 그의 의문에 소리없이 나타난 금삼인이 대답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다." "아!" 때맞추어 그 자리에 등장한 자는 북궁현리였다. 그를 바라보는 천 무영의 평범한 안면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하면?" "불쾌히 여기지 마라. 내 잠깐 그대를 떠본 것뿐이다." "으음......." 이번에는 북궁현리가 그에게 물었다. "무종, 너는 나를 어찌 생각하느냐?" "이 일과 연관지어서 말씀입니까?" "그렇다." 천무영은 신색을 추스르며 일어나더니 공수했다. "속하, 총사의 그 치밀함에 대해 존경스러울 따름이외다." "그것은 제이인자로서 후회가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좋다! 핫핫핫... 핫핫핫핫......!" 북궁현리의 광소성이 빈청 안을 오랫동안 울렸다. ⑥ "약속을 해두지 않으면 안돼요." 어둠 속에서 그녀가 은밀한 음성으로 속삭여왔다. 어쩌면 그녀는 천하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지도 몰랐다. 천무영이 그녀의 맑고 깊은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모용운화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술 언저리를 살짝 쓸 었다. 그것은 단순하나 매우 자극적인 동작이었다. '으음!' 천무영은 한 차례 짜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새 어나오려는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두 사람의 관계는 벌써 이만큼이나 발전해 있었고, 그는 갈수록 모용운화에게 매료되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손짓을 피하거 나 거부하지 않는 이유도 실은 그때문이었다. "준비는 끝났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어떤 식으로 말이오?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요." "호호호... 염려 마세요. 비밀이 풀리면 그때부터 해결의 열쇠도 당신이 쥐게 될테니까."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를......?"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의혹을 안고 있는 천무영의 입술 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어쨌든 나는 아무런 약속도 없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할 수는 없군요." "그 약속이란 어찌 하면 되는 것이오?" 그는 더워지는 가슴을 억누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두 사람은 불이 꺼진 방 안에 있었으나 서로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모용운화가 얼굴이 약간 상기된 채 말했다. "저는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이라는 남자를 선택했어요. 그 의미는 동지(同志) 이상의 것이죠." 천무영의 마음이 가벼운 흥분과 함께 몹시도 흔들렸다.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목을 끌어안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당신은 천금성을 얻음과 동시에 나를 책임져야 해요." "천금성을 얻는다고, 내가 말이오?" 모용운화는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그의 귓전에 가져갔다. "그래요, 북궁현리도 그것을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저에게 회유와 협박을 거듭해 왔지요." "그는 그고, 나는 나요." 와중에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잘라 말하는 천무영에게 그녀는 고개 를 살래살래 저어 보였다. "저를 비웃는군요. 부디 그러지 말아요. 제가 얼마나 절박한 입장 에 놓여 있는지 당신은 다 알지 못해요." 모용운화는 그녀답지 않게 서글픈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북궁현리는 저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요. 아니, 그자는 언 제까지고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야망을 달성하고 욕정 을 채우면 그뿐일 테니까요."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그가 저를 차지하려 드는 이유도 알겠네요? 저를 얻어 천금성의 차기성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자 하는." "으음!" "문제는 그것을 위해 그가 벌인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이 에요. 저에 관한 사항은 지극히 일부분일 따름이죠." "짐작은 하고 있었소." "아무튼 그 일들은 전부 저와 연관이 있고, 저는 그것들을 당신께 일임한 셈이라면 맞을 거예요." "그래서 날더러 어쩌란 얘기요?" "으음......." 천무영은 그녀가 자신의 귓볼을 잘근잘근 무는 것을 느꼈다. 그 대담함은 그로 하여금 오히려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날... 안아줘요." 천무영은 크게 놀랐다. '이것이었나? 이 여인이 원하는 약속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뒤로 약간 밀어냈다. 그리고는 심중에 차오르는 격정과는 반대의 말을 그녀에게 전했다. "이러지 마시오. 당신이 내게 의지하려 한다는 것도, 이를 위해 맹약(盟約)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하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중도에서 끊겼다. 그것은 모용운화가 몸을 날려와 꽃 잎 같은 입술로 그의 입술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녀의 영활한 혀끝을 느끼며 더욱 당혹을 금치 못했다. '어찌 이런 짓을......!' 그의 입술을 빼앗은(?) 모용운화가 말했다. "당신, 이제 보니 머리가 무척 나쁘군요?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맹약의 기본은 사랑이에요. 알겠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구요." "그... 그렇지만......!" "왜요, 당신은 제가 싫은가요?" "끙!" 그녀의 적극적인 공세는 기어이 천무영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 는 품으로 달려드는 그녀를 받아안으며 고소를 지었다. "내가 감히 어떻게 당신 같은 여인을 싫어하겠소?" 두 사람의 입술이 깊숙이 얽혀 들었다. 천무영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는데, 이때 에 느낀 것은 아릿한 아픔과 더불어 놀랍게도 해방감이었다. 그는 줄곧 자신의 곁에서 머무르며 떠나지 않던 한 여인의 영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오, 단옥........' 천무영은 그 영상을 지우기 위해 눈앞의 여인을 거칠게 덮어 눌렀 다. 이어 그의 손이 몇 차례 움직이자 모용운화의 몸을 가리고 있 던 백의는 껍질처럼 전부 떨어져 나갔다. 천무영은 그녀가 매우 훌륭한 젖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 음으로 확인했다. 동시에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우아한 곡선을 지닌 그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하고 보드랍다!' 그렇게 은은한 갈증을 토로한 그는 점차 뜨거워져가는 여인의 체 온을 느끼며 자신의 옷도 모조리 몸에서 떼어내 버렸다. 그는 급속도로 여체에 몰입해 갔다. 그의 손과 입술이, 혀가 여인 의 몸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점령해 가고 있었다. 여인은 젖가슴 외에도 일신에서 도무지 아름답지 않은 곳이라곤 없었다. 또한 그 잘록하게 패인 허리선이며, 풍염한 둔부는 물론 활짝 열려 있는 기름진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그를 받 아들이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⑦ 천무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오랫동안 억제로 일관해온 그의 욕망은 충분히 분출의 권리가 있으리라. 마침내 그는 자신을 여인의 몸 속으로 깊이 밀어넣었다. "으으윽......!" 고통에 겨운 듯한 모용운화의 신음을 귀로 들으며 그는 격렬하게 율동하기 시작했다. 그간에 켜켜로 쌓였던 고독감과 한탄스러운 심경들을 일시에 떨쳐내 버리려는 듯. 그러는 사이, 그녀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몸을 마구 경련하는가 싶더니 종국에는 그의 넓은 등판에 손톱을 세워왔다. 천무영은 그녀의 손톱이 상처가 나도록 자신의 등을 할퀴어대도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폭발을 위한 비등점을 향 해 정신없이 치달리며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희열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허억!" "하아아아......!" 의기가 상통하는 두 사람은 동시에 화려하게 폭발했다. 무쌍별부(無雙別府). 이는 천금성 내의 최대 중지(重地)이자 금지(禁地)였다. 바로 천 금성주인 모용천우가 기거하는 곳이다. 모용천우는 무쌍별부에서 두문불출인 채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 지 않았는데, 그런 세월이 벌써 십 년째 지나고 있었다. 무쌍별부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모용운화와 북궁현리였다. 어쨌든 무쌍별부 안에서 어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스슷! 한 인영이 천금성의 금역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죽림(竹林)이 울울창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며, 나타난 인 영이란 천무영이었다. 그는 한동안 묵묵히 죽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때문 에 죽림은 음산한 사역(死域)처럼 보였다. '음, 역시 운화의 말대로군. 이곳에는 건곤역지반오행진(乾坤逆地 反五行陣)이 펼져져 있다.' 그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죽림이 교묘하고도 무서운 절진(絶陣)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일말의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물론 그를 가로막을 진법이란 천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찌기 만 장서가에서 수많은 서책들을 섭렵한 그는 기문진학 방면에서도 가 히 무불통지(無不通知)였던 것이다. 스스스....... 그의 모습이 일시지간 뿌우연 연기로 화하는 듯 싶더니 빨려들듯 죽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죽림 한가운데에는 한 채의 석전이 세워져 있었다. 언뜻 보아선 그저 평범해 보이는 그 석전이야말로 무수한 기관과 함정을 악마 의 발톱처럼 안으로 숨기고 있는 무쌍별부였다. 죽림의 절진을 거친 천무영은 어느덧 석전 앞에 이르러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석전 안은 온통 기관매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총 삼백육 십 가지의 매복이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다고......!' 그 정도의 기관장치라면 누구고 실정을 모르고 진입했다간 한 발 자국도 걷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천무영이 우려하는 것은 그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모용운 화로부터 이곳 사정을 대부분 들어 알고 있었다. 한 그루의 대나무 옆에 붙어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은형술을 사용 하고 있는지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 '석전 주위로 북궁현리가 수하들을 매복시켜 놓았다고 했었지? 무 엇보다 그들의 눈을 피해 잠입하는 것이 큰일이다.' 그랬다. 매복자들은 북궁현리가 가장 신뢰하는 자들로 그 수효만 해도 백 명 이상이었다. '그들을 모두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타초경사(打草驚 蛇)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천무영은 그 근방을 이리저리 면밀하게 관찰한 끝에 대충 매복자 들이 숨어 있는 곳을 간파해내기에 이르렀다. 낙엽이 두텁게 깔린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있는 자가 십칠 인, 석전 계단 양쪽의 석사자(石獅子) 속에 이 인, 지붕 위에서 기왓장으로 위장을 한 자가 이십팔 인....... 그밖에도 다수의 인물들이 모습을 감추고 은잠해 있었다. 천무영은 짧은 시간에 걸쳐 무려 서른여덟 가지 이상의 침투 방법 을 뇌리에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환법이나 은 형술을 이용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하나같이 최종적으 로는 실패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어찌한다?' 고심하는 그 사이에도 시간은 쉴새없이 흘렀고, 그에 따라 천무영 이 점차 초조감에 휩싸여 갈 때였다. 휘이이―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죽림의 죽엽들을 뒤흔들었다. '아! 이것이다.' 천무영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즉시 공력을 일으켰다. 휘류류륭......! 바람이 모이더니 그를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돌풍 은 수많은 낙엽을 끌어모으며 회오리 기둥을 형성시켰다. 휘류류류― 회오리바람은 계속하여 주위의 낙엽을 말아올리면서 앞으로 나아 갔다. 물론 그 속에는 이미 환법을 일으킨 상태인 천무영의 일신 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전의 주변에는 늘 그랬듯 이상한 긴장감이 감돈다. 회오리를 이 룬 바람이 그곳을 가로지르며 석전의 입구로 향했다. 바람은 이내 가라앉았고 그 덕에 허공을 맴돌던 낙엽들도 우수수 흩어져 버렸다. 개중 한 장의 낙엽이 석전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해서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성공이다!' 그것은 낙엽(?)의 읊조림이었다. ⑧ 미로(迷路). 석전 내 통로는 워낙 구불구불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방으로 아 무렇게나 이어져 있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잘 안되었다. 바닥에는 네모반듯한 대리석들이 깔려 있었는데 모두 색깔이 틀려 언뜻 보기에도 복잡한 배합을 이루고 있었다. 천무영은 개중 황색의 돌만을 골라 밟았다. 아무 색이나 밟았다간 크게 낭패를 당하며, 그 일곱 가지 색의 돌 가운데 매일 같은 색 돌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천무영은 그때까지 아무런 제재없이 자유롭게 진입해 갈 수 있었다. 그러다 하나의 벽이 시야를 가로막자 그는 잠시 멈추 었다가 그 앞에서 다섯 개의 돌을 차례로 밟았다. 그르르릉―! 묵중한 굉음이 일며 갑자기 밑바닥이 쑥 꺼졌다. "웃!" 짧은 신음과 함께 그의 몸은 그대로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무영. 그는 이후로도 각기 방식이 다른 아홉 개의 비밀문을 열어야 했 고, 그때마다 그에게는 크고 작은 위협이 닥쳐왔다. 그래도 그는 끝내 별 탈 없이 한 석실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정작 그곳에서는 의외의 사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놈! 왜 또 왔느냐?" 난데없이 분노에 찬 고함성이 귓전을 울려왔던 것이다. '설마 날더러......?' 석실 안에서 한 노인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노인은 단정한 자세로 포단 위에 앉아 있었으며 일신에는 백삼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다소 마른 편이었으나 청수했다. 안색이 몹시 창백하여 중병을 앓고 있는 듯했지만 흰 수염이 가슴 까지 늘어져 있어 또 아주 인상적이기도 했다. 머리도 눈이 내린 듯 새하얀 백발이었은즉 백발백염(白髮銀髥)의 그는 일견하기에도 범상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뭐랄까? 그대 로 한 사람의 선인(仙人)을 놓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뛰어난 풍도를 지닌 노인은 자유스러운 몸이 아니었다. 그 는 묶여 있었다. 양 어깨의 견갑골(肩甲骨)을 관통하여 두 줄의 은빛 사슬이 석벽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은빛의 사슬은 허리 아래의 비파골에도 관통되어 지면의 대리석에 단단하게 못박혀 있었다. 이렇고 보니 천무영의 충격은 각도를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노 인의 처지는 그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럴 수가! 인간을 상대로 누가 이토록 잔인한 짓을.......' 게다가 노인의 얼굴이나 눈빛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이 나진 않았으나 분명 어디서 본 듯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면부지의 노인을 보고 온몸의 피가 미친 듯이 돌고 심장의 고동이 빨라질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한편. 노성을 발했던 노인은 천무영의 모습을 확인하자 멍한 표정을 지 었다. 그는 확실히 자신이 생각했던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노인이 먼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천무영은 그제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는 격정으로 뛰노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정중히 포권했다. "노선배께서 천금성주십니까?" 노인의 눈썹이 위로 홱 곤두섰다. "누구냐고 물었다." 천무영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이의없이 대답했다. "소생 천무영이라고 합니다." 그는 상대가 천금성주 모용천우라는 것을 확신했다. 노인의 인상 이나 언행이 모용운화의 말과 모두 일치했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내심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쯧! 운화는 다른 말은 하면서도 의조부가 이런 상태로 감금되어 있다는 것만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날더러 천금성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한 뜻을 이제야 알겠군.' 그로서는 천금성주에게 적대감을 품어야 마땅했다. 천금성주라면 암흑마전주와 천하삼은밀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며 그 자신 과의 관계도 여러 모로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그러나 천무영은 현재 전의(戰意)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 기이한 심정마저 들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에게서 스스로도 이해 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으로, 이는 연민지심과는 본질적 으로 다른 것이었다. ⑨ 노인, 즉 천금성주 모용천우가 물어왔다. "놈이 보내서 왔느냐?" 처음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음성이되 그의 눈에서는 분노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천무영은 말없이 품 속에서 하나의 자옥패 (紫玉牌)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보자 모용천우의 안색이 일변했다. "오오! 운화... 그 아이가 보냈더냐?" 그는 격동으로 인해 일신을 가늘게 떨기까지 했다. "그렇습니다." "어디 보자!" 천무영은 흠칫 놀랐다. 우웅웅―! 모용천우의 전신에서 불현듯 강한 흡인력이 일어나 자신을 끌어당 겼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은 진기를 끌어올려 대항하려다 포기하고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쩔그럭, 쩔꺽....... 모용천우는 은사슬을 부딪치며 나무처럼 비쩍 마른 손으로 천무영 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서부터 시작하여 전신의 골격을 전 부 더듬고 난 그는 자못 흥분하여 부르짖었다. "훌륭하다! 운화가 기어이... 적임자를 찾아냈구나." 그의 노안에는 어느덧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일세의 거웅(巨雄)이었던 천금성주 모용천우, 그의 눈물은 천무영 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무엇보다 날개 잃은 노영웅(老英雄)의 눈물이 가지는 그 의미가 그러했던 것이다. 천무영은 또한 자신을 끌어안다시피한 모용천우의 손길을 거부하 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편으로 모용천우의 품을 통해 평온함을 느끼며 스스로도 무척이나 놀라야 했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딱히 정의할 수 없었 지만 강시에 버금가는 노인의 품이 흡사 대해(大海)인양 넓게 느 껴지는 것만은 부인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두 사람 사이를 격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천금성주 모용천우는 보다시피 금제(禁制)된 상태다. 네 가닥의 은사슬이 그의 몸을 철저하게 구속하고 있으므로. 그 은사슬은 만년한은삭(萬年寒銀索)이라는 것으로 천하의 어떤 보검으로도 끊을 수가 없었다. 빠져나갈 방법이라야 양쪽 견갑골 과 비파골이 부숴지는 것 외에는 무엇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결국 살아남지 못하는즉 영원히 이대로 사슬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금성주는 무려 칠백 종 이상의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독은 반 드시 하루에 여섯 번, 두 시진마다 한 번씩 어김없이 발작을 일으 켜 그를 혹독한 고통 속에 몰아넣곤 했다. 그 고통은 천만 마리의 개미가 심장을 물어뜯고, 온몸의 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찢겨져 나가며, 심줄마저도 오그라드는 듯한, 그야 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천금성주 모용천 우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는 죽을 수가 없었다. 평생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고 금제일의 성역(聖域) 천금성을 최소한 다른 사람도 아닌 역도(逆 徒)에게 내줄 수는 없었으므로. 모용천우는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가 현재의 이 모습이 된 이유는 총애하던 제자에게 암습을 당했 기 때문이었다. 일생동안 무림평화에 기여하여 무림의 성인(聖人) 으로까지 일컬어지는 그에게는 그런 이력이 있었다. 천무영은 모용천우에게서 그 전말을 전해 듣게 되자 실로 묘한 감 회에 젖어 들었다. 천금성주와 암흑마전주. 이들 양대 거두(巨頭)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대숙적이자 원수지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그들은 똑같은 불행을 겪고 비슷한 유형의 말년(末年)을 맞이하고 있었다. 절대의 패자(覇者)이자 정과 마의 최고봉에 올랐던 그들이 각기 애제자에게 암격을 당한 점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 다 통한의 세월 을 보내다 천무영에게 후사를 당부해 온 것이다. 게다가 내용은 달랐지만 천무영이 그들 두 사람에게 가지게 된 감 정만 해도 차이를 논할 수 없는 호감이었으니....... 모용천우는 비교적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 지금부터는 구체적인 방안을 논하기로 하자." 천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어떤 기색을 읽어 냈는 지 모용천우는 껄껄 웃었다. "내 비록 이 지경이 되어 있기는 하다만 아직 얼마간의 힘은 남아 있느니. 헛헛... 너의 협조만 긴밀히 이루어진다면 대세를 역전시 키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천무영은 그 말이 허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놀라울 따름이다. 힘도 힘이지만 여태까지 저런 패기를 잃지 않 았다니, 과연 천금성주답구나.' 여전히 잠자코 있는 그에게 모용천우가 물었다. "너는 노부를 믿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천무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왜 예를 취하지 않는 게냐?" 모용천우의 추궁에 그는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노선배, 후배는 누구에게 선택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이 곳에 왔습니다. 그런즉 노선배의 제자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모용천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흰 수염이 가볍게 떨리 는 것으로 미루어 적지 아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천무영은 그에 동요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소생에게는 따로 목적이 있습니다. 천금성이 그자의 손에 넘어가 는 것을 저지하려 했던 이유도 실은 그때문이었지요." "감히......!" 모용천우는 안면에 은은한 노기를 드리웠다. "그렇다면 이제껏 너는 나를 우롱한 것이렸다?" 동시에 그는 천무영을 향해 일 장을 내쳤다. 츳―! ■ 무영탑 3권 제25장 그림자를 되찾아도 ① 쾅! 콰르르르― 태산 같은 경력이 밀어닥쳤으되 천무영은 그것을 피했고, 그 바람 에 애꿎은 석벽의 일각이 부서져 나갔다. 잠시 후. 분진이 가라앉자 모용천우가 입을 열었다. "왜 받아치지 않았느냐?" 천무영은 심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 "지금은 노선배와 손을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 가 노선배를 찾게 된 진정한 목적이기는 합니다만." "무슨 연유로?" "영원한 불패(不敗)라는, 신화에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용천우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너는 은자지천에서 나왔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천무영은 음성을 한결 가라앉혀 침착하게 말했다. "노선배께서 어찌 들으실지는 모르나 소생은 암흑마전과 매우 깊 은 인연이 닿아 있습니다." "뭣이?" 모용천우는 크게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운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편의상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으음......." 그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천무영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싸우려는 의지가 발견되지 않자 입을 떼었다. "너는 보기보다 복잡한 내력을 지니고 있구나. 하면, 평소에도 그 것을 숨기기 위해 지금처럼 역용을 하고 다니느냐?" "그렇습니다." 모용천우는 일말의 체념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좋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어라. 십 년 전만 해도 내 앞에서 감히 진면목을 속이고 나타난 자는 없었다." 천무영은 오해의 소지가 될 듯 하자 즉시 변환술을 풀었다. "노선배, 소생은 처음부터 노선배를 우롱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제가 노선배께 도전을 청한다 해도 그것은 북궁현리로부터 천금성 을 되찾으신 후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물론입니다." 모용천우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천무영을 응시 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점차로 커지기 시작했다. "너는... 너는 누구냐?" 새삼스러운 질문에 천무영은 오히려 반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소생의 이름은 천무영이라고......." "네 그 이름은... 본명(本名)이냐?" "그, 그건......." 천무영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로서도 이런 의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모용천우는 격동이 실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 눈... 내가 아는 두 사람이 너처럼 푸른 빛이 도는 눈을 가지 고 있었다. 그리고 네 얼굴은... 그중 한 사람과 꼭 닮았다. 혹시 네 모친은... 설화(雪花)가 아니더냐?" 천무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소생은 모친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모용천우는 그답지 않게 일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내 짐작이 맞다면... 네 이름은 분명... 검악(劍嶽)일 테니까." 쾅! 천무영은 뇌리에서 벽력음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과 흡사했다. "그... 그걸... 노선배께서는 어찌 아십니까?" 검악이란 천무영의 본명이었다. 누구에게도 불리워본 기억이 없는 그 이름을 모용천우가 알고 있는 것이다. "오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네가... 네가 내 앞에 이처럼 나타나줄 줄이야......." 모용천우는 급기야 노안에서 눈물을 주르르 쏟아냈다. 그러더니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상의를... 벗어 보아라. 어서......!" 천무영은 그 순간 머릿 속이 죄다 뒤죽박죽이 되어 아무것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모용천우 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어제끼고 있었다. "등을... 등을 보여다오." 천무영은 역시 그의 말대로 따랐다. "저... 저 삼태성점(三太星點)......! 틀림없도다. 검악, 너는... 너는 나의 외손자니라." "우우......!" 천무영은 또 한 번의 거센 충격에 휩싸여 전신을 떨었다. 줄곧 모 용천우에게서 기이한 친근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그의 혈육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었기에. 모용천우가 그 앞에서 허공을 향해 부르짖고 있었다. "오오! 하늘이여, 진정으로 감사하오이다. 이 죄인 모용천우에게 도 이런 날이 오다니......!" 경황중에도 천무영은 품을 뒤져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이전 부터 그가 지니고 있던 백옥미인상(白玉美人像)이었다. "이것을... 아십니까?" "네가... 벽운(碧雲)의 신물(信物)까지......!" 모용천우는 천무영이 내민 백옥미인상을 바라보며 계속 눈물을 흘 렸다. 이어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회한과 번민, 애정 등이 복잡하게 뒤엉킨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아이야... 말했다시피 나는 네 외할애비이다. 그러나 지은 죄가 너무 많아 그렇게 불리울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천무영은 격동으로 인해 뒷말은 잘 듣지도 못했다. 단지 그의 뇌 리에 들어가 박힌 것은 한마디뿐이었다. - 아이야, 나는 네 외할애비이다....... ②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크으윽......!" 그는 이제껏 억눌러왔던 고독과 한이 일시에 모두 폭발해 버린 듯 모용천우의 무릎에 엎어져 진한 오열을 터뜨렸다. 모용천우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아하니... 내 너에게 긴 얘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 같구나. 아 이야, 아느냐? 네 부친은... 당금 황제(皇帝)시니라." '오오, 맙소사!' 충격이 너무 크다 보니 천무영은 일시지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 다. 방금 전에 들은 그 말을 그는 도저히 자신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모용천우는 본래 전설의 문파인 대라천부의 제자였다. 대라천부에서는 전통적으로 사 인의 후계자를 두었는데 그는 당년 의 네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를 제외한 삼 인은 황보천기(皇甫天起), 마황전(摩黃典), 기벽 운(奇碧雲) 등이었다. 그들 중 기벽운은 유일한 여인이자 일찍부 터 중원에 귀화한 바 있는 천축인(天竺人)의 여식이었다. 아무튼 그들 사형제(師兄弟)는 모두 천부의 제자로서 사명감을 가 지고 암중으로 무림평화를 위해 꾸준히 선전(宣戰)했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암흑마전이 발호하자 모용천우 와 기벽운은 비로소 대명천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당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팔 대마역을 위시한 암흑마전의 세력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정도의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으며 무수한 축복 속에 서로 결합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오대세가의 옹위를 받아 고금제일의 천상천인 천금성을 세웠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결실도 태어났다. 모용설화(慕容雪花). 천지간에 존재하는 미의 정화를 한몸에 받은 듯 어여쁜 딸이었다. 그녀를 얻은 두 사람의 기쁨도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모용설화가 자라나면서 모용천우는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 다. 그의 심중에서 거대한 야망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하의 주인이 되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종국에는 무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모용설화를 빌미로 황 제를 움직여 보자는 구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용천우는 소문을 통해 황제가 이따금씩 변복을 하고 강호로 나 들이를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회를 엿보아 의도적으 로 모용설화를 황제에게 접근시켰다. 그의 예상대로 황제는 모용설화를 보자 한눈에 반해 취하게 되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황제의 핏줄을 잉태한다. 그 뒤로 황제는 후일을 기약하며 자금성으로 복귀했고, 모용설화 는 부친이 기다리고 있는 천금성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열 달 후, 그녀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등에 전설의 삼태성점을 타고난 기맥으로 모용천우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이에게 검악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주검악(朱劍嶽). 이 이름은 출생시에 벌써 비운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분이 든, 자질이든 특출했으되 그것들은 하나같이 모용천우라는 한 인 물의 야망에 바쳐질 수단에 불과했으므로. 모용천우의 계획이란 이러했다. 외손자인 주검악으로 하여금 훗날 황궁을 장악하게 만든 다음, 자신이 병탄한 무림계와 합쳐 완벽한 군림천하를 이루어 볼 속셈이었다. 그 음모를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기벽운이었다. 그가 아내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고백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벽운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펄쩍 뛰며 반대를 하고 나섰다. 적자가 아닌 주검악이 황권을 계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서열이 위인 황태자 및 왕자 들을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이르자면 역천(逆天) 의 대음모라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었다. 기벽운은 가문의 혈통이야 어떻든 천부의 제자인 만큼 체질적으로 악을 증오했다. 그녀는 모용천우에게도 천부의 계율을 어길 뿐 아 니라 고금의 대죄인이 되려 한다며 공박을 가했다. 그러나 싸움도, 눈물로의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정해진 모 용천우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남편에게 실망한 기벽운은 최후의 수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모용천우의 앞으로 장문의 혈 서를 써 놓고는 심맥을 끊어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망의 화신이 되어버린 모용천우는 끝내 뜻을 꺾지 않았고, 이 일에 가장 크게 충격을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 두 사람의 딸 모용설화였다. 모용설화는 피눈물을 뿌리며 아기를 안은 채 천금성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는 그 길로 황제가 있는 자금성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무려 수천 리 길에 달하는, 몸을 푼 지 삼 일도 채 못된 산부(産婦)에게는 너무도 무리한 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용설화는 황제를 만나기는 했지만 부친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병고로 인해 그만 죽고 말았다. 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보며 개탄을 금치 못했다. 더우기 딱한 것 은 주검악을 인정하되 맞아들이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분명 자신의 핏줄이긴 하나 무서운 음모의 불씨를 안고 있는 이상 궁내에 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다 못한 황제는 젊은 날 충성을 다하고 일선에서 은퇴한 노장 군(老將軍)을 불렀다. 그에게 주검악을 맡기며 신분을 감추고 모 용천우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살라고 명했다. 노장군은 핏덩이 적부터 주검악을 안고 천애(天涯)를 유랑하다가 안타깝게도 비참하기 그지 없는 최후를 마쳤다. 천금성주인 모용 천우의 눈을 피하는 길이란 그것밖에 없었기에. 덕분에 주검악은 소위 무림제일인과 황제의 핏줄을 이어받고도 천 애고야인 양 그림자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으며, 겨우 일곱 살때 유일한 보호자마저도 잃는 불운을 겪어야 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관(官)의 인물에게 피습을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황제만이 그를 아꼈을 뿐, 여타의 혈족들은 한결같이 그를 흉적으 로 간주하며 두려워했다. 개중 누군가는 도객을 밀파하여 제거하 지 않으면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③ 외조손(外祖孫) 간인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검악, 아니 천무영의 눈에는 모용천우의 짐작처럼 원망이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공허한 눈으로 한때 야망에 눈이 멀었던 자신의 외조부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아이야, 이 못난 할애비를... 죽여다오." 모용천우의 노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손에 죽게 되면...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 같구나." 그 말에는 함축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업(罪業)이 용서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때문에 천무영의 손에 죽음으로써 죄를 청산하고 싶었던 것이다. 천무영은 눈길을 돌려 백옥미인상을 내려다 보았다. '이것이 외조모님의 신물이라고?' 그는 과거 이것과 똑같이 깎은 목각인형으로 인해 개방의 작은 거 지가 죽을 뻔한 일을 상기했다. '그 일은 그럼 할아버님의 명을 빙자하여 북궁현리가......?' 천무영은 그 사건을 물어 확인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서 심정을 대신한 말이 흘러나왔다. "잊으십시오, 과거는 흘러 갔습니다. 소손(小孫)은 이제까지 그래 왔듯 금후로도 소신껏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의 결심이 단단하게 그의 마음을 잡아묶고 있었다. - 나는 이대로 주검악이 아닌 천무영으로 남으리라. 그때문인지 그는 모용천우를 향해 별로 어렵지 않게 자신이 살아 온 과정들을 얘기할 수 있었다. 무영탑 속에서 죽을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이며, 은자 지천에 들게 된 경위, 잔혈맹의 혈혈마탑에서 암흑마전주를 만나 그의 진전을 이어받게 된 일 등등....... 긴 얘기가 끝나자 모용천우는 장탄식 했다. "그게 다 내 죄다......." 그는 자책과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는 천무영이 겪은 일들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역경에 관한 부 분들이 들어왔고, 이로 인해 무척이나 가슴이 쓰렸다. 천무영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어떤 고난이든 소손은 그것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처 럼 무너지지 않고 서 있으니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손자의 입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일세의 효웅(梟雄)인 모 용천우에게 크나큰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정녕 뜻밖이로구나. 암흑마전주가 나와 같은 경우를 당했다 니....... 결국 이 모두가 하늘의 뜻이련가?" 그의 눈에는 눈물 외에 짙은 회한의 빛마저도 어렸다. 잠시 후. 모용천우는 신색을 단정하게 가다듬으며 천무영을 정시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영락없는 당금 천금성주의 그것이었다. "아이야, 너는 천부를 열어야 한다. 만겁종(萬劫宗)을 이어 받았 다는 지옥성의 그 아이를 상대하려면 말이다." 천무영이 물었다. "왜 꼭 그래야 합니까? 제게도 만겁종의 비예가 있습니다." 모용천우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아니다. 만겁종의 마학을 꺾으려면 필히 천부의 기학을 익혀야 한다. 너는 그 아이와 단순히 실력 겨룸이나 하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 아이는 지금쯤 과거에 비해 엄청난 진보를 보았을 터, 암흑마전주가 남긴 무공만으로는 안된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짐작컨대 등천륭이라는 그 아이는 나나 나의 두 사형이 나선다 해도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천무영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세 분 모두가 천부의 비학을 익히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용천우는 입술 끝에 쓴 웃음을 매달았다. "아직 세상에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얘기다만, 우리 네 제자는 천부 기학의 지류(支流)만을 얻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경 우에는 천하제패의 꿈을 키울 수가 있었지만." "으음......." 신음을 흘리는 천무영에게 그는 자애로운 음성을 전했다. "낙심할 건 없다. 천부를 열기 위해서는 대라사금시(大羅四禁 ) 가 필요한데 그중 두 개는 네가 가지고 있다." "네?" 천무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모용천우를 응시했다. "소손에게 두 개가 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과거 천하은밀투가 내게서 훔쳐간 물건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느 냐?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한 개의 금시였다." "아!" 천무영의 눈이 충격으로 인해 크게 휩떠졌다. 설명하자면 개봉부의 소매치기 진사유가 죽기 직전에 그에게 맡긴 문제의 열쇠, 즉 천하은밀투 부자(父子)가 목숨과 바꾸었던 그 열 쇠가 천부를 여는 대라금시 중 하나였다. "또 한 개는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모용천우는 백옥미인상을 가리켰다. "벽운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지." 천무영은 참담한 기분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대 의녀(義女)이자 그의 외조모인 기벽운도, 천하은 밀투와 그 아들인 진사유도 모용천우의 야망에 의해 희생된 예에 속했다. 접어 두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 사자(死者)들이 남 기고 간 신물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개중 진사유는 북궁현리의 손에 죽기는 했지만 그도 전날에 모용 천우가 천하은밀투를 상대로 저지른 행위를 답습한데 불과했다. 사지를 끊는 등 육신을 망가뜨려 처참하게 죽이는....... ④ 천무영은 들리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는 그만큼 마 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 차라리 모용천우를 증오하 고 경원할 수 있는 처지라면 좀 나았을지 모르나 엄연한 핏줄인 이상 그것마저도 불가능했기에. 모용천우가 말했다. "너는 지옥성과 일전을 치르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다." 천무영은 잠시 듣기만 했다. "혈붕성(血鵬城)으로 가거라." "......?" "너는 혈붕왕(血鵬王)이 누군지 아느냐?" 모용천우는 자신이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마황전(摩黃典), 노부의 둘째 사형이다." "아!" "아주 오래 전 얘기다만 사형은 네 외조모인 벽운을 사랑했었다. 그것은 황보천기 대사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녀와 결혼하자 두 사형은 우리의 곁을 떠나버렸다." "음, 그런 일이......." "마사형은 나 같은 위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다. 그는 내 야망을 눈치채고는 혈붕성을 세워 은밀히 견제해왔다. 끝까지 천 부의 제자로서 소명을 다한 것이지." 모용천우는 어두운 얼굴로 덧붙였다. "아마도 마사형은... 나를 무척 혐오할 것이다." "으음!" "혈붕성으로 가 그에게 열쇠를 얻어라. 너에게라면 필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황보사형도 그곳에 있다. 그들은 문성공(文聖公), 무성공(武聖公)이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지." 천무영은 비로소 과거 혈붕성에서의 일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로막았던 백발노인, 즉 문성공 황 보천기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해내고 있었다. "흑!" 그의 입에서 갑자기 당혹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순간적으 로 온몸이 굳어졌기 때문으로, 모용천우가 느닷없이 그의 천추혈 을 짚어버렸던 것이다. 천무영은 굳이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대신 모용천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은연중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모용천우 역시도 노안에 눈물을 담으며 말했다. "그래, 아이야. 받아들이거라. 내게도 조금치나마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다오." 스스스.......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일신에는 금황빛 서기가 어렸다. 천무영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오오! 내게 이 무슨 형벌인가......?' 그는 몸이 붕 떠서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 속에서도 생애 최초 로 운명을 탓하며 통탄해마지 않았다. 그는 외조부인 모용천우가 지금 어떤 짓을 하려 하는지도,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르르르― 쿠쿠쿠―! 그의 정수리로 가공할 진력이, 아니 실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운명 의 해일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모용천우의 착 가라앉은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미안하구나 검악, 아니 무영(無影). 이제까지 네 그림자를 빼앗 고도 고작 백 년 상당의 내공밖에는 줄 것이 없어서......." '할아버님......!' "북궁현리의 처리는 네게 맡긴다. 내게도 지은 죄가 많은즉 그 아 이에게 사감(私感)은 없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전의 내가 그러했 듯 지나치게 야망이 크고 음흉하다. 나를 대신해 징계해다오. 살 아남아야 세상에 이로울 것이 없으니까." 더 이상 천무영은 모용천우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할아버님, 결국... 이것이 당신과 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 입니까? 정녕 이래야......?' 그런 읊조림과 더불어 혼미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쿠쿠쿠쿠― 폭음이 그의 내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고금 이래 최강의 내공이 형성되는 음향이었다. 은자십천 을 필두로 암흑마전주, 게다가 천금성주의 내력까지도 그의 한몸 에서 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쾅! 마침내 천무영은 뇌리에서 천지가 붕괴되는 듯한 대폭발음을 느끼 며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할아버님! 나의.......' ⑤ 또 다시 지옥의 밤이 도래했다.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을 찾아왔다. 도무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수(死手)가 목을 조여올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벌써 수백 명째였다. 밤만 되면 처절한 비명이 천금성의 곳곳에서 동시에 울렸다. 그것 은 예방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피한다는 요행도 기대할 수 없 었다. 그저 그들은 어김없이 죽어 주어야 했다. 천금성의 사람들은 밤이 싫었다. 특히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 은 더욱 싫었다. 그런 날이면 죽음의 공포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 서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악― 으아아악―!" 오늘밤도 예외는 아니다. 천금성에서는 목이 잘리우거나 심장이 도려내진 채 처참하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천하를 움켜쥐려는 거대한 야망의 손이다. 그 손의 주인은 매끄럽고 육감적인 여인의 알몸을 애무하고 있었 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밑에 깔린 채 뱀처럼 꿈틀거리는 여체를 무 섭게 공략해 가고 있었다. "하악... 아......!" 그의 손은 여인의 육봉을 터져라 비틀어 쥐고 있었다. 가슴 속에 한을 품고 있으되 그 한을 풀기 위해 육신을 미련없이 내던진 여인, 사내의 상대는 금모란이었다. 잔혈맹의 제일살인 그녀는 북궁현리의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얽 어맨 채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의 허리가 아래로 숙여질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는 숨가쁜 신음성이 토해져 나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똑같이 황홀한 절정의 고지로 막 올라서려 할 때 였다. "으아악!" 한 차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또......!" 급격히 상하운동을 보이던 북궁현리의 몸이 뚝 굳어졌다. "하아아... 어서......!" 금모란이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호소하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는 절정의 고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북궁현리도 이대로는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슨 일이 든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다시금 금모란의 육체를 세 차게 찍어 눌러갔다. "크악!" 또 한 번의 비명이 울린 것과 거의 동시였다. "하아악―!" "헉!" 두 남녀는 화려한 분출과 함께 절정의 세계로 치솟아 오르며 그 거센 충격에 전신을 경직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쾌감의 여운을 음미하던 북궁현리가 몸을 일으켰다. "끄으윽!" 소름끼치는 비명이 이번에는 바로 문 밖에서 들려왔다. "감히!" 콰다당―! 북궁현리는 옷도 다 걸치지 않고 날아가 문을 걷어찼다. "아니, 이럴 수가......!" 그는 눈을 크게 휩뜬 채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문 밖에는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쓴 한 명의 혈인(血人)이 서 있었 다. 놀랍게도 그자는 목이 댕겅 잘려져 나가고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두 팔도 제 자리에 붙어있지 않았고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상태로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 이 차라리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형상이 참혹한 것도 그러려니와 북궁현리는 그 목없는 시체의 주 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여풍(丘如風)......!" 피에 절긴 했으나 걸치고 있는 의복으로 보아 그자는 틀림없는 지 원주(地院主) 구여풍이었다. "어떤 놈이냐?" 대노한 북궁현리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부르짖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번뜩 빛났다. 전면에 보이는 한 그루의 나 무 아래 언제 나타났는지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이다. "무흔." 북궁현리는 흡사 앓는 소리를 내듯 중얼거렸다. 무흔은 언제나 금모란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인물이다. 그는 심지 어 그녀가 방사를 치를 때도 예외없이 문 밖을 지켰다. '기분 나쁜 놈!' 북궁현리는 침을 탁 뱉은 후, 물었다. "보았느냐?" 그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에 반해 무흔은 일점의 감정 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못보았소." "왜, 무얼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미 목이 잘린 채로 떨어졌소." "떨어지다니?" 무흔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으로 지붕 위를 가리켰다. "저곳에서 말이외다." 그 말에 따라 시선을 돌린 북궁현리는 안색이 일변했다. 지붕의 처마 끝에 구여풍의 목이 무참하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 다. 그 상태에서도 한껏 부릅떠진 그의 눈에는 죽음에 대한 경악 과 공포가 가득 어려 있었다. "으으... 대체 어떤 놈의 짓이냐?" 북궁현리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버럭 고함쳤다. 이어 그는 무엇에 생각이 미쳤는지 전광석화와도 같이 신형을 날렸다. 휘익―! 한편. 방 안에서는 방금 전 격렬한 정사를 치룬 금모란이 알몸으로 누운 채 미친 듯이 웃어제끼고 있었다. "호호호...... 훗훗!"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연신 쏟아져 나와 열기가 미처 가 지지 않은 그녀의 도화빛 뺨을 적시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어쩌면 발작에 가까운 것이었고, 내용을 뻔히 알면서 도 그저 무력하게 그 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했던 무흔은 종내 참 담한 듯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팍! 그가 잡고 있던 나무등걸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⑥ 천원주(天院主) 하유종. 그는 문을 꼭 닫아 건 채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의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서인지 타오르는 촛불 을 계속하여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진득한 땀방울이 솟아 나왔다. 긴장과 공포로 인한 식은땀이다. 주르르....... 땀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흘러내렸다. 툭! 눈썹 끝에 매달려 있던 땀방울은 기어이 눈 속으로 떨어졌다. 하 유종이 다급성을 발한 것은 그때였다. "헉!" 뿌얘진 망막 속에 갑작스런 촛불의 움직임이 잡혔던 것이다. "누구냐?" 그는 앉았던 자리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나며 검을 잡았다. "들어 보았소? 광혈살인조(狂血殺人組)라고." 파앗! 파공음이 울리며 촛대가 그의 가슴으로 날아왔다. 상대는 피처럼 붉은 적의(赤衣)에 적건(赤巾)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떤 위인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감히!" 츠으― 퍽! 촛대는 하유종이 휘두른 검에 의해 박살이 났다. 연이어 그의 검 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려갈 때였다. 촤아악―! 내전의 밑바닥이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하나의 혈영(血影) 이 솟구쳐 나왔다. "크아악!" 하유종의 두 다리가 그자에 의해 뭉턱 잘라져 나갔다. 그 바람에 그가 몸의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그 순간이었다. 우지끈! 천정이 무너지며 또 하나의 혈영이 떨어져 내렸다. 츠읏! 눈부신 검광이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크억!" 이번에는 그의 두 팔이 날아갔다. 그러더니 등뒤에 나타난 또 한 인영은 급기야 그의 목을 날렸다. "으아아악―!" 실로 단시간 내에 이루어진 참혹한 죽음이었다. 천금성 천원의 원 주였던 그가 어이없게도 팔과 다리, 머리통 등이 따로따로 분리된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네 명의 적포적건인들이 그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잔혹한 도살자들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치루어야 할 행사를 끝마친 듯. 도합 이십 인이었다. 시체조차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어간 그들은 하나같 이 이원삼각오전십단을 관장하던 우두머리들이었다. 그 외에도 죽은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북궁현리의 추종 자들이 차례로 사지가 절단나거나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혹는 머리가 몸뚱이에서 분리되어 죽어갔던 것이다. 그 피의 축제로 인해 불과 십오야(十五夜)만에 천금성은 무림의 성지가 아니라 귀역(鬼域)으로 화하고 말았다. 악마보다도 잔인한 살인귀들의 행각에 성내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을 사리며 불안과 공포로 매일밤을 지새워야 했다. 여전히 피냄새가 바람에 물씬 실려온다. 그것은 아직도 피의 축제 가 끝나지 않았다는 예고였다. "으으윽......!" 북궁현리가 태사의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전의 오만하고 당당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경멸과 자신감에 찬 눈초리, 냉혹한 심성을 드러냈던 그 예리한 눈빛도 더 이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산발이 된 것은 물론 몇날을 뜬 눈으로 지새운 덕에 눈까지도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가히 미치기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를 위풍당당하게 보이도록 했던 화려한 금삼도 마구 구겨진 채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지금 그의 심정은 허탈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모두를 잃었다. 그가 천금성을 장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끌어들인 실력자들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부 죽었다. 그것도 거개가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가장 기가 막혔던 것은 일천군림대(一千群臨隊)의 괴멸이었다. 그 가 직접 키운 이 일천의 세력이야말로 그에게는 최대이자 마지막 보루였거늘, 그들마저도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들 일천군림대를 천금성 전역에 배치시킬 때만 해도 그는 희망 을 잃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를 비웃듯 살인은 계속 일어 났고, 이로써 그의 심복들은 모조리 제거되었다. "으으... 대체... 대체 어떤 놈이 내게 이런 짓을......!" 북궁현리는 현재까지도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적어도 그가 생각 하기로는 천금성 내에서라면 그처럼 자신에게 정면도전을 감행하 여 성공을 거둘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작에 가깝던 그의 몸짓이 뚝 굳어졌다. 불현듯 오래 전부터 보 이지 않았던 한 사람을 뇌리에 떠올린 것이다. '무종! 그도 죽었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즉시 외쳤다. "무종을 불러라!" 스슷! "여기 있습니다." 착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문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⑦ 언제 보아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이 순간 북궁현리에게는 그 평범함이 설사 태산이 무너진 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든든함으로 비추어졌다. "오오! 무종, 너는 그래도 무사하구나?" 반색을 보이는 그에게 무종은 늘 그랬듯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너는... 너는 알겠지? 흉수가 누군지." 북궁현리의 달라진 태도나 어투를 의식해서일까? 무종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서 있었다. 그때를 기해 무심하던 그 의 눈에는 한 가닥 동정의 빛이 드리워졌다. "뭐냐, 그 눈빛은?" 눈치 빠른 북궁현리가 노성을 질렀다. "네놈도 나를 비웃는 것이냐?" 무종은 짧게 말했다. "흉수를 찾아냈소이다." "뭐... 뭣이?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누구냐?" 무종은 눈을 들어 입구 쪽을 가리켰다. "저들이 알고 있습니다." 북궁현리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돌린 순간이다. 문이 열리며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정확히 다섯 명이 었다. 그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한 미녀가 들어왔으니까. 그들을 본 북궁현리는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무... 무슨 일이냐?" 그의 음성은 모종의 예감을 품은 듯 다소 떨려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금모란과 무흔, 소수혈전룡(素手血電龍) 이양천과 천지생사교(天地生死橋) 적문공, 게다가 마지막에 들어 선 미녀는 천중화 모용운화였기 때문이다. 무종이 거듭 같은 말을 했다. "자, 물어보십시오. 저들은 흉수를 알고 있소이다." 북궁현리는 선뜻 말하지 못하고 두 사형, 즉 이양천과 적문공을 바라보았다. "사형들은......?" "허허... 사제, 불쑥 나타나 미안하네." 이양천이 너털웃음에 이어 잔잔하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네가 가장 보고 싶더군. 지난 날의 어리석 음이 뼈저리게 후회되기도 하고 말이야." 의미심장한 그 말에 적문공도 한마디 거들었다. "하하하... 나도 대사형과 동감일세. 너무 많은 시간을 헛되이 낭 비한 게 아닌가 싶어 한이 되기는 하네만." "으음......." 신음을 흘리는 북궁현리에게 이양천이 입을 열었다. "여하튼 너무 걱정 말게. 흉수는 먼 곳에 있지 않네." 북궁현리는 묘한 어감이 느껴지는 상대의 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래, 흉수는... 누구오이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모용운화가 처음으로 나섰다. "누구긴요? 그건 당신 자신이에요." 쿵! 북궁현리는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를 스스로 들었다. 그 뒤로도 귀 에 전해져 온 것은 모용운화의 싸늘한 음성이었다. "북궁현리! 당신은 그동안 너무도 많은 죄업을 쌓았어요. 당신을 둘러싼 대살인극은 바로 그 대가이구요." "그럼... 후후... 업보란 말인가......?" 북궁현리는 충격이 컸던 듯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그는 무종을 힐끗 돌아다보며 물었다. "무종,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무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말과 함께 그는 안면을 한 차례 쓰윽 문질렀다. 그에 따라 드러난 그의 얼굴은 북궁현리가 익히 잘 아는 자의 것이었다. "너... 너는......!" 북궁현리는 두뇌가 영민한 만큼 기억력도 좋았다. 그는 무종, 아 니 천무영의 얼굴을 대하게 되자 예전에 무영탑 안에서 있었던 일 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으음! 감히 나를 속였다니......." 천무영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당신이 어째서 화를 내오, 당한 쪽은 내가 아니었소?" "그래서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냐?" "아니, 그때문은 아니었소. 당신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본 인 말고도 다수가 있었소." "크큭! 여기 있는 모두를 말하는 것이겠지?" "물론 이분들도 포함되오." "흐흐흐... 흐핫핫핫......!" 북궁현리는 더 말하지 않고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그 직후, 그는 신형을 날려 빛살처럼 허공을 갈라갔다. 스읏―!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서 애검인 환광검이 불을 뿜었다. 파츳―! "용케도 살아났다만 이젠 어림없다!" ⑧ 카캉! 요란한 금속성이 울렸다. 천무영이 어느덧 휘황찬란한 검광 속에 서 그의 검을 쳐냈던 것이다. 이어 그의 오른손이 눈부신 금광을 띤 채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커억!" 한 가닥 비명 소리가 광휘 속에서 울려나와 중인들의 귀에 전해졌 다. 북궁현리였다. 그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있었는데 입과 코로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음... 사부를 만났었군?" 천무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금후로는 그분에 관해서 입에 올리지 마시오. 당신에게는 더 이 상 그분을 사부라 부를 자격이 없소." "감히! 네가 뭔데 그런 말까지 하는 게냐?" "난 그분의 외손자요." "뭐, 뭣? 그... 그럴 리가......?" 천무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뒤로 스윽 물러났다. "무흔, 이 친구를 처리하게." 스읏! 무흔이 앞으로 다가들자 북궁현리는 고소를 지었다. "후후... 이렇게... 되는 것이었군." 그는 한쪽 구석에서 떨고 서 있는 한 여인을 응시했다. "모란, 너도 내가 이자의 손에 죽어주기를 바라느냐?" 금모란. 그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천무영에게 물었다. "천금성주가... 정말로 당신의 외조부인가요?" "그렇소." "이...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천무영은 고통스러운 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는 금모란이 무엇을 추궁해 오는 것인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설마 당신이 저를 기만하지는......?" 금모란은 그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스스로 두려운 듯 부들부들 떨 었다. 이에 천무영은 솔직해질 필요를 느꼈다. 그래야만 인생이 망가져버린 한 여인에게 죄를 덜 짓게 될 것이므로. "모란, 나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분이 내 외조부시라는 사 실을 알지 못했었소. 심지어 그분을 꺾는 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신념의 일부분이었으니까." "아아......!" "그분은 차마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셨소. 세월이 점차로 그 분을 변모시켜 놓았던 게요. 결국 그분은......." 그가 말끝을 흐리자 금모란은 발작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래, 어찌 되었나요? 그 악마 같은 작자는......!" "자진하셨소. 참회와 더불어." "자진? 참회? 그것 참 편리한 말이군요? 오호호호홋......!" 미친 듯이 웃어제끼는 그녀를 천무영은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도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모란, 당신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소. 내 깊이 감사하는 바 요. 당신은... 악(惡)을 선(善)으로 갚았소." 그러나 그 말은 금모란을 무너지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으흐흐흑......!" 그녀의 웃음소리는 어느덧 통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도 바보 가 아닌 이상 모르지 않았다. 천무영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고통을 삼켜야 했는지를. 천무영은 금모란으로부터 돌아섰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더 는 몸부림치는 그녀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의 귀로 한 가닥 경미한 파공성이 전해져 왔다. 슷! 그것은 북궁현리의 환광검이 발검(拔劍)하는 음향이었다. 그 외에 도 또 있었다. ⑨ 취릿! '무흔의 광혈검(狂血劍)!' 다음 순간, 그 음향들은 예기를 동반하며 허공을 갈랐다. 츠팟! 쉬익―! 은빛 광채와 섬뜩한 혈광이 사위를 메운다 싶을 때, 천무영은 이 미 문을 통과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으아악!" '쯧! 북궁현리로군.' 그는 쓴 입맛을 다시더니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다행이다, 늦었지만 무흔이라도 한을 풀 수 있어서.' 심중의 탄식은 기어이 입 밖으로도 새어나오고 만다. "후후... 이로써 정리가 끝났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 말에 답하는 음성이 있었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 천무영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음성은 너무도 귀에 익은 것일 뿐더러 그간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한 그루의 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왜소한 체격의 인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무영. 나예요." 천무영은 일순 머리 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랬었던 것을......!"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새삼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나무 아래 서 있는 인영은 천리단검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그는 만면에 격동을 담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서 천무영은 실로 뒤늦게 야 또 하나의 얼굴을 발견해낼 수가 있었다. "그대......!" 천무영이 간신히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자 천리단검은 눈물을 주 르륵 떨구더니 천천히 머리에 두른 띠를 풀었다. 그 바람에 윤기도는 흑발이 폭포수처럼 좌르르 흘러내렸다. 이는 천리단검의 얼굴에서 종잇장 같이 얇은 면구(面具)가 벗겨져 나간 것과 거의 동시에 있은 일이었다. "단옥(壇玉)......." 천무영은 그 이름을 부르고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극도의 격정 에 사로잡히자 오히려 무엇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영." 그것은 천리단검, 아니 천리단옥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녀로서는 그늘에 숨은 채 오래도록 이 한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면 곧장 뛰어가 안기리라던 그 녀의 생각은 쉽게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천무영. 그는 달빛이 너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 빛은 살인과 공포로 얼룩진 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몇 년의 세월을 각기 다 른 모습으로 살아온 연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기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기쁘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믿어지지가 않 아. 그대가 이처럼 살아 있었다니......." 천리단옥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 틀려. 그동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어. 나는 죽었다 가 지금에야 되살아난 거예요." "단옥.......!" 그리고는 또 침묵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때부터 두 사람 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 지만 눈물을 떨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담화 천리단옥. 말마따나 재생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천무영이 어깨를 안아오 자 움찔했다. 그러나 곧 그에게로 몸을 기댔고, 그런 그녀의 얼굴 에는 실로 오랫만에 휴식과 평온이 깃들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만의 일이었다. 그들 의 입맞춤은 뜨겁기보다는 깊고 축축했다. 이는 해후의 기쁨 이면 에 각자 내면에서 아픔이 출렁였기 때문이었다. 몇 년간의 이별이 가져다 준 상처가 회복되는 대신 그들의 가슴 속에는 상대에 대한 연민 또한 강하게 자리잡았다. 물론 그것도 불원간 해소되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말이다. ■ 무영탑 3권 제26장 노기인(老奇人)들에게 휴식(休息)을 ① 혈붕왕(血鵬王). 그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곳은 혈붕전(血鵬殿)으로 넓은 대전 에는 그 한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탁! 그가 바둑판에 흑(黑)을 놓자 즉시 백돌 하나가 진로(進路)를 가 로막았다. "흐음!" 혈붕왕은 고민스러운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디선가 그를 향해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성공(武聖公), 자네는 언제고 노부를 이길 수 없네." 혈붕왕의 음성이 한결 더 가라앉았다. "또 잡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가?" "허허... 잘 아는군." "문성공(文聖公), 어떻게 하면 잡법을 끊을 수 있겠나?" "왜, 생각이 바뀌었나?" "맞아. 세상일이 그다지 뜻대로 되지 않는군." 혈붕왕의 안면에는 한 가닥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의 귓전에 문성 공의 음성이 다시 부딪쳐왔다. "그렇다고 낙심하지는 말게.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놀리는 겐가?" "천만에. 노부는 처음부터 자네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의기(義氣)만은 결코 부정하지 못하네." "위로해 주어 고맙군." "쯧! 속도 상할 게야. 자네의 양자와 양녀는 가히 소마귀(小魔鬼) 들이 되어 이제는 드러내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지. 이 게 다 동맹(同盟)을 맺었다는 지옥성에 혈붕성이 반 이상이나 먹 혀들어간 탓이네." "할 말 없네." "애초 지옥성주를 가볍게 본 탓이야. 그자는 나이는 어리나 상상 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한 존재였지. 어쩌면 출신이......." 문성공의 음성은 끝부분에 가서 흐려졌다. 혈붕왕은 쓴 입맛을 다 시며 눈썹을 슬며시 찌푸렸다. "짐작가는 데라도 있는가?" "음, 확실치는 않네만 만겁종의 후예가 아닐까 싶으이." "자네도 역시......?" "그렇네. 처음에는 단순히 암흑마전의 잔당쯤으로 알았는데 그를 자세히 관찰하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 그가 쓰는 무공은 한결같이 절세의 마학(魔學)이었네." "으음!" 혈붕왕은 답답한 심정을 대신하여 짧은 신음을 발했다. 여전히 모 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문성공이 탄식을 불어냈다. "정녕 통탄할 노릇이지. 정작 견제대상이었던 모용천우는 죽었는 지 살았는지 모습도 보이지 않고,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했던 지옥 성이 되려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졌으니......." "다 내 탓이야." "아닐세, 방임한 내게도 책임은 있네." 혈붕왕의 청수한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모습 을 보인다면 문성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무성공, 우리는 늙었나 보이. 한때는 벽운(碧雲)을 놓고 세 사람 이 사랑다툼을 하던 시절도 있었거늘." "허허... 늙은 거야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혈붕왕은 다소나마 표정을 풀고 껄껄 웃었다. "하긴 그걸 진즉부터 인정하고 있었으면서도 자네나 나나 은퇴를 못하고 있네그려. 천우는 어떨지 모르겠군. 그간 세월도 많이 흘 렀는데 아직도 야망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이겠지?" "그야 알 수 없지. 그는 우리와 유형이 다른 인간이니까." "쯧! 언제쯤이나 우리를 쉬게 해주려는지......." 한탄으로 이어지던 두 노기인의 대화는 흐름을 바꾸었다. 그것은 혈붕왕이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쉬기는 이르네." "왜?" "몰라서 묻나?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나는 혈붕성을 아예 내 손 으로 무너뜨려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중이네." 문성공이 물었다. "그래서 어쩌려고?" 혈붕왕은 격앙된 어조로 답했다. "듣자하니 천금성은 천우의 셋째 제자인 북궁현리란 자가 관장하 고 있다더군. 그래서 알아본즉 그 아이도 천우에 못지않은 효웅 (梟雄)이라네. 대단한 야심가이지." "절망적이군." "방법은 한 가지뿐인 것 같네." "무슨......?" "천우를 만나 마지막으로 담판을 짓겠네." "맙소사!" 경악성에 이어 문성공이 신음하듯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나보군." "그러는 문성공, 자넨 그를 언제 싫어했었나?" "쯧! 할 말 없으이." "그럼 되었네. 노부도 기대는 별로 하지 않지만 일단 시행해 봐야 지. 그에게 우리가 모두 늙었다는 것과 작금의 사태를 알려야지. 사실 지금이라도 그가 야심을 버리고 진정한 정도(正道)의 횃불이 되어준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과연 그가 들으려 할까?" 그런데 이때였다. 어디선가 한 가닥 침중한 음성이 들려와 그들 두 노기인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그분은 듣지 못하십니다. 백조부(伯祖父)." "흐음?" 놀라는 혈붕왕의 앞에 한 인영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오, 자네는......?" 문성공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도 먼저 알아보고는 탄성 을 발했다. 그는 다름 아닌 천무영이었으므로. ② 혈붕왕이 무엇을 느꼈는지 약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군가? 자네는. 노부가 왜 자네의 백조부인가?" 천무영은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일배를 올린 후, 답했다. "소손의 이름은 주검악(朱劍嶽)이라고 하며, 천금성주께서 저의 외조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오!" "이런 일이......!" 스슷! 충격이 컸는지 천무영에게 낯설지 않은 백발노인, 즉 문성공 황보 천기까지도 스스로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혈붕왕과 마찬가지로 인자해 보이는 얼굴에 백발을 뒤로 단정하게 묶고 있는 그는 안면에 주름이 가득 잡혀 있는 것도, 그럼에도 불 구하고 정정한 것까지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천무영을 바라보며 격동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천우와 벽운의 외손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공무기, 아니 마황전이라는 본명을 가진 혈붕왕은 길게 탄식했 다. 아울러 그는 천무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우는 훌륭한 손자를 두었군." 곁에서 문성공 황보천기가 물었다. "무슨 뜻이냐, 그가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의미는?" 천무영은 심정을 가누기가 힘들어 짤막하게 답했다. "외조부께서는 타계하셨습니다." "무엇이?" 두 사람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굳어져버린 채 더 이상 아 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그들 사형제의 얼굴에는 주름 살이 몇 개는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그들을 응시하는 천무영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두 분 백조부께선 그분을 혐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받는 황보천기의 음성이 몹시도 떨려 나왔다. "그가... 그렇게 말... 하더냐?" "네, 당신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노라고......." "으음......." 황보천기는 괴로운 듯 눈을 내리감았다. 감겨진 그의 눈꼬리에 스 르르 물기가 배이는 것을 천무영은 볼 수 있었다. 그 옆에 있는 혈붕왕 마황전은 시종 어둡고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아예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여. 세 사람 가운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천무영이었다. "우선 두 분 백조부께 그간의 정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일단 운을 뗀 그는 자신의 출신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 지 오게 된 경위를 남김없이 주욱 얘기했다. 물론 그 안에는 천금 성 내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얘기는 비교적 담담한 가운데서 끝을 맺었다. ③ 문성공 황보천기가 크게 감탄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오오! 놀랍구나, 천금성이 그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정비가 되다 니....... 아이야, 훌륭하다. 너는 우리가 몇십 년에 걸쳐 고심을 해도 이룩하지 못한 일을 혼자서 해냈구나." 마황전도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남다른 고난을 헤쳐나온 것만도 대단하거늘, 게다가 너는 암흑마 전주와의 조우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지 않았더냐?" 천무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아직은 해결해야 할 커다란 난제가 있은즉 나름대로 자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야 더 이를 말이겠느냐? 지옥성주 등천륭, 아니 그 패륜아(悖 倫兒)를 속히 처단해야지." 마황전의 말에 황보천기가 뒤를 이었다. "네가 우리 두 늙은이를 아득한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 주었다. 결 과적으로 모든 사태가 하나로 집약되었으니 해결도 그만큼 용이해 진 것이 아니냐?" "맞는 말씀입니다만 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음, 그건 그렇다. 등천륭이 만겁종의 후예라는 사실이 확인된 이 상 절대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된다." 황보천기는 말을 하며 마황전을 힐끗 건네다 보았다. "자네가 일차적으로 손을 써 주어야 할 것 같군." "무슨 말인지 알겠네." 마황전은 눈을 빛내며 한결 패기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직접 나서서 본성을 정리하겠네. 조속한 시일 내 에 지옥성과의 연계를 완전히 끊어 놓겠네." 듣고 있던 천무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일을... 소손에게 맡겨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네가?" "제게 방안이 서 있습니다.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오나 이전부터 성 내에 약간의 포석을 깔아 두었는지라......." 혈붕왕 마황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고얀 놈이로고! 그런 짓은 언제 또 했느냐?" 그를 따라 황보천기도 크게 웃었다. "헛헛헛......!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시게나. 검악이 알아 서 자네의 짐을 덜어주려는 모양인데." "헛참, 오래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로군.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 다니. 더구나 저 아이의 무공이 오히려 우리 늙은이들을 능가하고 있으니 염려할 바도 없지." "맞아. 자네와 나는 허깨비일세. 저 아이가 이곳에 와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는가?" "허허허......!" 마황전은 사뭇 흔연하게 웃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안심이 되는 것은 저 아이가 우리 세 사람 모두의 손자라는 점일세. 그렇지 않았으면 저 아이의 출신 때문에 우리는 차례로 도전을 받았을 걸세." "어이쿠! 그러고 보니 큰일 날 뻔했군. 허허허......." "자, 그만 웃고 어서 대라금시나 내놓게." 마황전은 젊은 날의 호쾌했던 성품을 여기서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황보천기도 이의를 달지 않고 부응했다. "여부가 있겠나? 이 일을 알면 아마도 은자십천(隱者十天)이 우리 보다 더욱 기뻐할 걸세." 그는 시선을 돌려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너에게서 희망을 느꼈었다. 그러더니 너는 결국 전대(前代)의 숙원을 모두 해결해 주는구나. 허허...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정녕 몰랐느니라." 천무영은 더욱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오늘의 소손은 스스로 이루어온 것이 아닙니다. 배후에 여러 어 르신들의 은덕이 계셨기에 가능했지요. 두 분 백조부께서도 물론 예외가 아니십니다." "허허허허......!" "헛헛헛!" 두 기인은 크게 웃으며 대견한 듯 천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런 그들의 눈에는 무한한 사랑과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④ 밀서(密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유월설 매강월. 명령 제 구호를 전(傳)한다. 구월 초일 사해서생(四海書生) 독강 비와 이체합환(二體合歡)하라. 속히 본성 혈붕단(血鵬壇)의 완성 을 꾀해야 하느니, 십이공령활시녀(十二恐靈活屍女)와 공령활시인 (恐靈活屍人)도 당일에 공령합원대법(恐靈合元大法)을 시행하여 공령활시체(恐靈活屍體)를 이루도록 하라. -지옥성주(地獄城主).> 유월설 매강월. 그녀는 밀서를 든 자신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미처 의식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이글거렸다. '나보고 독강비와 결합하라고, 그 원수와? 말도 안돼! 절대로 그 럴 수는 없어.' 매강월은 독기를 뿜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나 곧 그 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만일 명령을 위반하면......!' 그녀는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른바 십팔잔혼독형(十八殘魂毒形), 이는 배신자들을 고문하는 지옥성의 열여덟 가지 극형을 말한다. 그 하나하나를 떠올리자 매 강월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라버니의 원수와 살을 섞어야 하다니......!' 그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사해서생 독강비 역시도 같은 시각에 똑같은 밀서를 받아 펼쳐 읽 고 있었다. 하지만 매강월과는 사뭇 대조적인 반응을 내비치고 있 는 그였다. "후후후......!"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그가 이런 계산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강월, 아무리 버텨봐야 너도 일개 계집에 불과할 뿐이다. 일단 살을 섞고 나면 나를 따르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충분히 요리해줄 테니까.'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다시 없는 기회다! 지난 번의 실수로 인해 실추된 내 위상을 확 실하게 회복시켜 놓아야지. 결과적으로 공령활시체들은 모두가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것이므로.' 독강비는 득의만면하여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도 눈이 있는 이상 매강월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에는 자신과 연관지어 생각할 일이 없다 보니 그녀의 매력에 무관심했을 따름이다. 그는 의자에 가 앉더니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으음......!" 그의 눈 앞에는 벌써부터 매강월의 농염한 나신이 그림처럼 선명 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얼마 후면 그가 차지하게 될. 이 날은 팔월 이십 구일이었다. ⑤ 범호. 이 사내는 아직도 마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혈붕성 내의 누구도 그의 변모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직업 은 이전과 동일했지만 그는 과거의 범호가 아니었다. 그의 근육에서 비롯되는 힘이야 어디로 갈까마는 그보다 수천 배 는 더 무서운 내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년 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은 이후로 범호는 신비인이 준 천양신단(天陽神丹)을 복용했다. 그리고 뇌문비학을 밤낮없이 연 마한 결과, 현재의 그는 체내에서 넘쳐 흐르는 막강한 잠력을 스 스로 다스릴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대략 일 년쯤 전부터인가 혈붕성 뒤쪽 야산의 잣나무 숲은 나날이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밤마다 섬광이 번뜩이고 낙 뢰가 떨어져 그곳을 쑥밭으로 만들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범호의 짓이었다. 그는 그곳을 자신의 수련장으 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죽어라고 맹연습을 했었다. 아무튼 범호는 언제고 일편단심(一片丹心)이었다. 줄곧 우직스럽 게도 유월설 매강월에게만 마음이 붙들려 있었다. 유월설 매강월은 한동안 어디론가 잠적하여 그로 하여금 애를 태 우게 했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위치로 복귀했다. 단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별로 거리낌없이 그를 침실로 불러들이더 라는 것 정도였다. 덕분에 범호는 황송하게도 수없이 매강월과 운우(雲雨)를 즐길 수 있었으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매강월을 아내로 맞고 싶었다. 사랑이 절실하다 보니 소유욕 도 그만치 범위가 넓어져 이제는 그녀를 영원한 삶의 동반자로서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일개 마부에 불과했다. 어떻게 하면 매강월에 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킬까고 수도 없이 고민했으나 그 둔한 머 리로는 지금껏 아무런 방도도 연구해내지 못했다. 밤. 범호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매강월이 부르지 않아 자신의 거처에서 혼자 자야 했는데,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연신 뒤척이는 중이었다. '아가씨는 나와 결혼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나 를 아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끙끙 앓던 그는 급기야 야무진 구상도 해본다. '이대로 그냥 납치를 해버릴까? 정신을 잃게 하여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데리고 가면......!' 그런데 이때였다. (범호, 오랫만이구나.) "헉!"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꿈을 꾼 것은 아니건만 믿을 수 없게도 이 년 전 그를 찾아 들었던 그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주공(主公)......!" 범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런 호칭이 튀어나왔다. 그 당시에 작정한 바 있었거니와 비록 얼굴도 모르지만 음성의 주인은 자신 에게 막대한 은전을 베풀어 주었던 대상이다. (하하하... 호칭은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다행이구나. 아직 내 음 성을 잊지 않은 것 같아서.)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이 어찌 감히......." (어쨌든 좋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째서 아직도 매강월을 차지하 지 못하고 그 주변만 배회하는 것이냐?) 범호는 얼굴을 붉혔다. "소... 소인이 워낙 못나다 보니......." (더 늦으면 너는 그녀를 영영 잃게 된다.) "넷?" (그녀는 지금 독강비와 맺어지려 하는 참이니까.) "맙소사!" 그는 거의 울부짖었다. "그... 그건 안돼......!" 예의 음성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범호, 너는 그동안 너무 어리석었다. 일신에 막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특히 그녀에게 도움이 되 어준 바는 전혀 없지를 않느냐?) "저... 저도 이렇게 멍청히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가씨는 소인 을 그저 마부로만 취급하여 무엇도 요청한 적이......." (음, 그렇다면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다. 그녀는 정말로 너의 힘 이 필요한 여인이다.) "그... 그렇지만 어떻게......?" (내일 밤, 매강월과 독강비는 합방(合房)할 것이다. 그때 뛰어들 어 독강비를 처단해라.) "에엑? 그럼 아가씨가 어찌 생각하라고......!" 음성은 안도감을 주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 아무려면 내가 너와 매강월 사이에 해가 되는 일을 지시 하겠느냐? 염려하지 말고 시행해라. 그것이야말로 원래부터 매강 월이 소원해 온 일이었다.) "그렇다면... 하겠소!" 범호는 주먹을 와락 움켜쥐며 대답했다. 그로서는 망설이고 말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매강월이 원하는 일이라는데야 무얼 더 따지고 들 게 있겠는가? (기억해라, 범호. 혹시라도 그 일에서 실패하면 너는 물론 매강월 도 살아남지 못한다.) "우우... 알겠습니다. 명심합지요." ⑥ 또다른 밤이 찾아왔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매강월은 침상 위에 혼자 누워 있었다. 눈부신 달빛을 향하고 있 으되 그녀의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기만 했다. 눈에서는 진즉부터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할 수 없다. 그놈과 맺어지지 않으면 지옥성에서 나를 가만 두려 하지 않을 거야. 일단 명령을 따른 후.......' 그녀는 작심을 한 듯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감았다. "하하하핫......! 사매, 내가 왔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해서생 독강비가 방문을 열며 나타났 다. 그의 준수한 안면에는 자못 득의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거침없이 침상으로 다가갔다. "사매, 이제 우리는 명실공히 하나가 되는 거야. 실은 오래 전부 터 이렇게 되었어야 했지." 그는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윽고 독강비의 벗은 몸이 드러나자 매강월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새하얘졌다. 그녀로 말하자면 복수의 일념으로 오늘까지 살아왔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원수로 여기던 위인과 살을 섞어 야만 하는 것이다. "후후... 설마 사매의 몸도 유월설(六月雪)은 아니겠지?" 독강비는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침상으로 파고들었다. 그도 전라 가 되어 있었지만 금침 속에 파묻혀 있는 매강월도 준비차 그랬는 지 일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알몸이 맞닿자 그의 욕구는 당연히 배가되었다. "으음, 감촉이 훌륭하군......!" 독강비는 매강월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는 공령활시체의 영주가 되기 위해 꾸준히 동정을 지키기도 했 지만 대법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로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품었 었다. 따라서 그녀를 안자마자 대뜸 최상급의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애무가 깊어짐에 따라 매강월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미 사내를 알고 있는 그녀의 육체 역 시도 이성을 누르며 빠른 속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막 어우러지려는 찰나였다. 쾅! 폭음과 함께 문짝이 산산조각 나며 한 거한이 침실 안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헉! 누구......?" 독강비가 말을 제대로 잇기도 전이었다. 꽈르릉―! 뇌전과도 같은 장력이 그의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커억!" 졸지에 급습을 당한 독강비는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거한은 범호였다. 그를 확인한 매강월이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범호!" 독강비 또한 너무도 아연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네놈이......?" 그러나 기세가 잔뜩 올라있는 범호는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그는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을 내뿜으며 외쳤다. "각오해라! 너 같은 작자는 살려두지 않겠다." 콰르르―! 범호의 우수가 재차 휘둘러졌고, 그 순간에 독강비는 작렬하는 뇌 전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 위력을 실감하지 못한 그는 얼떨 결에 쌍장을 뻗어내 그것을 맞받았다. 콰콰쾅―! 결국 그의 예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사태가 빚어졌다. "으아악!" 독강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두 팔 이 시커멓게 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가거라!" 범호의 십지(十指)가 그를 향해 뻗었다. 쩌저적―! 그것은 열 줄기의 번개가 뻗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크아아악!" 독강비는 전신에 열 개의 구멍이 뚫린 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혈붕성 내에서는 물론 지옥성에까지 위명을 날리던 사해 서생의 죽음치곤 너무도 어이없고 간단한 죽음이었다. ⑦ 범호. 그는 독강비의 주검을 보며 안면을 마구 씰룩거렸다. "매(梅)아가씨가 어떤 분이라고 감히......!" 매강월은 그때까지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일신을 가늘게 떨 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범호! 무슨 맘을 먹고 이렇듯 정신 나간 짓을 벌였지? 뒷일을 어 찌 감당하려고......." 범호는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이 든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 니 그는 한껏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 아가씨... 아직도 모르시오? 소인... 범호는......!"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 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범호......!" 매강월은 신음하듯 부르더니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안색은 수십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잠시 후. 그녀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범호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이리와요, 범호." "아가씨......?" "괜찮으니 이리와요." 범호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더듬더듬 말했다. "죽을 죄를....... 소인은 그저... 아가씨가 이자를 싫어하여 죽 이고 싶어하시는 줄 알고......." "맞아요." "그럼......?" "너무 뜻밖이라 당혹스럽긴 했지만 당신은 십여 년에 걸친 내 소 원을 풀어 주었어요. 그자는 내 원수였어요." "아가씨!" "범호......."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려 서로를 부둥켜안았 다. 이는 매강월과 범호라는 사내가 숱한 제약을 뛰어넘어 최초로 진실되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매강월은 오늘따라 유난히 상대의 가슴이 넓게 느껴졌다. 아울러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평화가 아닐까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이 사람이야. 천하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며, 나로 하여 금 안도하고 깃들게 할 수 있는 남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범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당신, 정말 멋지더군. 언제 그렇게 고강한 무공은 익히고 있었 지? 나는 상상도 못했었는... 읍!" 매강월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범호의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을 뒤덮어 버렸으므로. 이어 그녀는 범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어오는 것을 느끼며 재 빨리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안돼! 지금은." "왜 안되오?" 매강월은 기가 막힌 듯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봐요, 저런 시체를 놓고 그 옆에서 어떻게......?" 그녀는 말하다 말고 제풀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파츠츳! 치지지직....... 범호가 양 손을 쳐드는가 싶자 뇌전이 발출되어 독강비의 시신을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볼 일을 마치자 그는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이젠 되었소?" "맙소사!" 매강월은 기가 막혀 부르짖었으나 다가드는 범호를 피하지는 않았 다. 아니, 그의 육중한 몸이 자신을 덮어눌러 오자 그녀는 어느덧 허벅지를 활짝 열고 있었다. "하아아......!" ....... 그날밤 그녀는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것은 목적이 이루 어진 이상 현재의 생활을 청산해 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범호의 품에서 전신을 불태우며 지금까지 품어왔던 오기 도, 야심도 일체 내던지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⑧ 출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밀폐된 밀실이다. 그곳에 십이활시녀와 십이활시인, 즉 여태까지도 완성을 보지 못 한 공령활강시들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스슷! 밀실 안에 두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범호와 매강월이었다. 매강월이 십이활시녀에게로 다가가 더니 그중 한 명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천천, 독강비는 죽었다.) (아! 그럼......?) 천천이라 불리운 활시녀는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그녀도 매강월 을 따라 전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 마침내 복수에 성공하셨군요.) (음, 그렇게 되었구나.) 매강월은 자신과 감정을 함께 하는 듯 기쁨에 몸을 떠는 천천을 보더니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영주(靈主)가 없으면 활시녀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천천은 얼굴에 쓰고 있던 면구를 벗으며 대답했다. (이들은 소녀가 조종할 수 있어요. 어차피 대법이 깨진 상태인지 라 영주도 특별한 역할은 못했었는 걸요.) (하긴, 십이활시인도 비슷했었다. 그래서 독강비와 나는 지옥성으 로 불려가 오랜 기간 동안 엄중한 문책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합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 음양상생의 원리로 서로의 결점을 보 완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가씨......!) 절세의 추녀인 천천의 얼굴이 몹시도 흔들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 서 매강월은 작정을 한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내 지금부터 공령활강시들을 전부 소멸시켜 버리겠다.) (네? 어째서.......) (사실 그동안 이들을 완성시켜 놓지 못한 죄로 신임을 잃어 암암 리에 별의별 짓을 다 해야 되었었다. 애써 다져놓은 기반이 무너 질까봐 전전긍긍.......) (아가씨.......) 천천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강월이 그 간에 세력유지를 위해 내키지 않으면서도 요직(要職)에 있는 사내 들을 숱하게 침실로 끌어들였었다는 것을. 그녀는 흠씬 젖은 눈을 들어 매강월을 응시했다. (그래서 모두 포기하시려구요?) (맞아. 이들은 위해서도 그 편이 나을 게야. 이미 죽었으면서도 타의에 의해 욕된 삶을 연장해 가느니.......) 천천은 이해가 가는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강월이 애써 표정을 바꾸어 생긋 웃더니 곁에서 눈을 멀뚱멀뚱 하게 뜨고 있는 범호의 팔을 잡았다. "난 이제 어떤 욕심도 없어. 이분과 함께 무림을 떠나 조용한 곳 에 가서 살 생각이란다." 그녀는 무엇을 의식했는지 범호를 향해 덧붙여 말했다. "나... 끝까지 사랑해줄 거죠?" "물론이오." "고마워요......." 매강월의 음성이 그녀답지 않게 떨려 나왔다. 이어 그녀는 천천에 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자, 보았지? 천천. 이분은 어쩌면 나에 대해 다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나를 영원히 사랑해 주신다지 않아?) (아가씨.......) 천천은 그로부터 한참을 더 울었다. 그러더니 울음이 진정되자 그 녀 역시도 결심이 선 듯 꽤 야무진 음성으로 말했다. "다 좋은데 한 가지가 빠졌어요." "으응?" "천천도 데려가 주셔야지요. 아가씨의 시중 들 사람이 없어지는 셈이니 제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될 걸요?" "천천......!" "제발 허락해 주세요, 아가씨. 이 추한 세상이 제 추한 용모나 비 웃는 것을 저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요." "오오!" 주종(主從) 관계인 두 여인도 급기야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래, 같이 가자. 가서 우리들만의 천국을 이루자꾸나." "감사해요, 아가씨......." "자! 이만 나가자. 너와 내가 동시에 통령술(通靈術)을 전개하면 저들은 전부 신체가 썩어 사라질 것이다." "네, 아가씨." 그들 세 사람이 밀실을 등지고 한결 밝은 얼굴로 나온 것은 그때 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 밤, 혈붕성의 각처에 사신(死神)이 찾아들었다. "아아아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은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혈붕성 내의 급진주의자들, 정확히 말하면 지옥성 쪽에 발을 깊숙 이 밀어넣고 있는 자들이 차례로 사신의 방문을 받아 사지가 잘리 우거나 목이 날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밤 사이에 모두 전멸되고 말았는데, 이는 마세(魔勢) 자체 가 붕괴되는 사태와는 그 내용이 엄연히 달랐다. 그 살인극을 주도한 자의 견해인즉 이러했다. - 극마극사(極魔極邪)를 제외하면 마(魔)도 인정되어야 한다. 왜 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정(正)의 오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 단이 되어줄 터이므로. 그는 대개의 인간이 완벽하게 선하지도, 또는 완벽하게 악하지도 않다는 점을 오래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명령 하에 광혈살인조(狂血殺人組)라 불리우는 살인귀들은 한 번 더 맹활약을 벌였으며, 몹시 만족해 했다. 본성대로 살인을 즐기면서도 그들은 어느덧 뚜렷한 명분을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혈붕성에 여명이 찾아들었다. 비명은 그쳐 있었다. 대숙청의 살벌한 살인극도 어둠이 걷힘과 동 시에 막을 내린 것이었다. ⑨ 사랑의 깊이를 꼭 그 역사(歷史)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또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 지 끈길기도록 길게 이어져 온 사랑이었으니까. 통상 죽음이라든가, 절망 등의 거대한 벽은 애정에도 단절을 가져 오게 마련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애 틋한 감정을 끝내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기다림이 아무리 지루해도, 망각이 유혹의 손짓을 보내와도 그것 은 마찬가지였다. 때때로 기다림을 포기하거나 잊고자 마음 먹으 면 그에 따른 고통이 더 무섭게 찾아들었기에. 그들은 정의한다. 사랑은 장난처럼 시작되어지나 결국은 생애에 죽음보다 더 선명한 자국을 남기는 것이라고. 남과 여. 그들은 서로를 안은 채 그런 말을 나누고 있었다. 천무영과 천리단옥이었다. 그 두 사람이 와 있는 곳은 다름이 아 니라 그들 나름의 숱한 애환이 담겨 있는 무영탑이었다. 애초에 예상치 않았던 인연이 맺어지기도 한. 어디 그뿐인가? 그곳에는 그들의 이름이 아직도 새겨져 있듯 두 사람의 추억도 퇴색하지 않고 변함없이 깃들어 있었다. 때는 십일월이다. 대륙은 겨울을 몰고 오는 북풍에 의해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거무칙칙한 무영탑은 회색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었다. 천무영은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는 천리단옥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코끝에 갖다 대었다. "이 향기... 다시는 못 맡을 줄 알았는데......." 천리단옥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영, 난 늘 확신하고 있었어. 당신이 언제고 내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주리라고." "그래, 단옥." 천무영은 그녀를 굳게 끌어안았다. 휘이잉― 위잉―!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음 을 옮겨 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의 내부는 옛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것도, 을씨년스러워 절로 황량한 기분이 드는 것도. 하지만 그런 풍경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더없이 정감이 넘치는 것들 이었다. 언제고 그랬듯 두 사람에게는 상대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 혀줄 온정과 아량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발전하여 어느 때부터인가 사랑이 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그들은 감회 깊은 표정으로 천천히 탑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천무영은 천리단옥을 데리고 계단을 밟아 위층으로 계속 올라갔 다. 그렇게 하여 맨 꼭대기 층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 여기가 마지막인 팔층이지." 그가 말하자 천리단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밖에서 보기에는 분명 구층이었는데?" "후후... 이상하지?" 천무영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벽에 금을 그었다. 스르릉―! 기이한 음향과 함께 벽면이 양 옆으로 좌악 갈라지며 또 다른 계 단이 나타났다. 그 계단을 오르자 비로소 두 사람은 탑의 최상층 부인 구층에 이를 수 있었다. 천리단옥이 그를 보며 탄성을 발했다. "아! 정말 신기하네? 난 몰랐어." 그곳은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몹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천무영은 재삼 깊은 감회에 빠져 들었다. 별세계인 이 공간은 그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는 여기서 은자십천과 만났던 것이다. 그들을 떠올리자 그의 기억은 먼 대막으로 치달렸다. 대과벽의 오지, 그곳에는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가 하 나 있었다. 일명 사해리(死海里)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거기에는 죽음을 부르는 유사(流砂)가 흐르고 있었다. 가벼운 새의 깃털이 하나 떨어져도 눈깜짝할 사이에 삼켜버리는 사역(死域)이었다. 그 공포의 사해리 밑에는 신비하기 그지없는 지하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래로부터 당세에 이르기까지 은자(隱者)들이 세상을 피해 숨어 살던 은자천(隱者之天)이 바로 그곳이었다. 은자십천은 지금도 그곳에서 천무영이 불패군림지존이 되어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스스로의 맹세를 지 키기 위해 세상으로 다시 나오지는 않으리라. 그들의 존재는 천무영으로 하여금 콧등이 시큰하게 했다. '그립구나, 그 어르신들이......!' 그는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사실 그의 인생을 논하자면 은자십 천을 제외시키고는 무엇도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들로 인해 제이의 탄생을 한 바, 출발지점에서부터 그들과의 연 계는 어디에도 적용되었다. 숱한 인물들을 만났으되 그 배후에 은 자들의 염원이 개입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천무영은 내심 부르짖듯 읊조렸다. '은자들이시여, 아시오이까? 당신들의 신념과 철학이 모든 승부에 서 전승(全勝)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향후로 있을 최후의 일전(一戰)에서야말로 당신들의 불패기학이 정말로 빛을 발하게 될 것이외다.' 이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자 나아가서는 현 무림의 대세(大 勢)를 가름하는 중대한 일언이었다. 무영탑의 구층에는 과거 천무영이 몸을 뉘었던 침상이 그대로 남 아 있었는데, 그 위에는 지금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천무영과 천리단옥이었다. 두 사람은 바야흐로 벗은 몸을 단단히 밀착시킨 채 오랜 숙제를 풀어나가듯 서로를 탐닉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진즉부터 이 순간을 열렬히 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 지 제약들로 인해 철저하리만큼 육체를 배제했고, 각기 상대를 위 하는 마음으로 타는 듯한 갈증을 눌러 참아야 했다.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은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무영은 자신을 향해 열려진 그녀의 육신으로 거침없이 파고들며 그녀의 뜨거운 호흡을 귀로 전해 들었다. "아아! 사랑해요, 무영......." 그도 천리단옥의 귀에 불어넣는다. "단옥... 넌 내 여자다, 언제까지고......!" 심중에서 부피를 더해가는 격정은 행위에도 반영된다. 천무영은 흡사 성난 파도처럼 힘차고 거센 율동으로 그녀를 거듭 하여 몰아 부쳤고, 그에 따라 천리단옥은 태초의 고고성과도 같은 기성을 발하며 그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허억!" "하아아악......!" 두 사람의 몸짓은 얼마나 격렬했는지 침상이 연신 삐걱거리며 비 명을 질러댔다. 그들은 이제 소년소녀가 아니었다. 육체라는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해묵은 한을 풀어낼 줄도 알았 으며, 그 행위가 사랑에의 확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는 희열에 자신을 내맡긴 채 끝없이 얽히고 또 얽혀 들었다. 뜻깊은 날, 그들의 청춘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황홀 한 추억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개방에 십절존사령(十絶尊師令)이 떨어졌다. 그것은 십일 월 그믐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 인해 중원천하에 흩어져 있던 개방의 거지들이 모두 개봉부로 모였다. 그들은 그곳 에서 처음으로 십절존사를 볼 수가 있었다. 십절존사란 개방에서는 하나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거지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명을 받은 수많은 거지들이 다시금 중원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남은 자들은 무 엇때문인지 천금성으로 향했다. 그때로부터 천금성에는 대대적인 공사(工事)가 벌어졌다. 오대세 가의 하나인 천문세가에서 우선적으로 토목 부분의 설계를 하고, 개방도 수만여 명이 그들을 도와 공사를 착수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겨울이 깊어갔다. 중원은 기이할 정도로 정적 속에 잠겨 있어 동면하는 짐승의 군단처럼 여하한 움직임도 없었다. 혈 붕성, 잔혈맹, 잠룡부, 심지어는 지옥성마저도 잠잠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이 무거운 침묵이야말로 죽음의 전조로써 대사풍(大死風)의 준동 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이를 일컬어 사람들은 폭풍전야(暴風前夜)라 불렀다. 어쨌든 그해 겨울도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 한 사내가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없이 중원을 떠나갔다. 그를 배웅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의와 기대, 그리고 희망을 안 은 채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천무영이었다. ■ 무영탑 3권 제27장 천하에 무영(無影)하니...... ① 봄이다. 잔인한 사월, 따사로움과 함께 찾아든 것은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그림자였다. 바야흐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혈겁이 대륙 전역 을 뒤덮고 있었다. 무림정의(武林正義)가 무참히 짓밟혔으며, 고귀한 인명이 초개처 럼 나뒹구는 피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지옥성(地獄城). 이들 집마부(集魔府)가 일으킨 지옥대혈겁(地獄大血 )은 중원을 온통 혈해(血海)로 뒤덮기 시작했다. 맨 처음 지옥사사(地獄死使) 들의 발길 아래 짓밟힌 것은 강남무림이었다. "크아아― 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고, 피안개가 구화산(九華山)을 뒤덮었 다. 강남무림의 패주인 잠룡부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강지옥대전 이후, 지옥성은 제일의 공격목표를 잠룡부로 정했 다. 그러다 사월이 되자 그들은 대공세를 감행해 왔다. 무수한 그들의 선단이 지옥혈기(地獄血旗)를 휘날리며 장강의 수 로를 가득 메운 광경이란 실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잠룡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팔대마역(八大魔域)의 노마들과 지옥성의 지옥사사들을 앞세운 그 들의 막강한 기세에는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며, 그 덕분에 수많은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가장 먼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인물은 호남성의 총책임 자인 혈성표화도 냉군기였다. 그는 전신에 열여덟 자루의 검이 꽂 힌 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 위로 지옥성의 군마들이 지나갔다던가? 결국 그는 한을 품은 채 혈육조각으로 화해 여기저기 흩어졌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잠룡부의 지단은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그리고 마침 내 오월 초하루가 되자 마운(魔雲)은 급기야 총단이 자리잡고 있 는 구화산 일대를 뒤덮어 오기에 이른 것이었다. 잠룡천자(潛龍天子) 왕장후. 그는 한 채의 누각 안에서 굳어진 듯 우뚝 서 있었다. 누각은 황금(黃金)으로 칠갑을 한 듯 화려하기 그지 없었으나 그 따위는 현재의 급박한 상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왕장후는 홀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어디고 모조리 불지옥이었다. 그처럼 잠룡 부의 총단은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아 아비 규환의 지옥도를 이루고 있었다. 연이어 터지는 처절한 비명 속에서 지옥사사들의 신형이 쉴새 없 이 번뜩이며 날뛰고 있었다. "크으아아악―!" 비명은 이제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죽는 자들은 대개 비 슷한 소리들을 내질렀으며, 그 죽음의 행진은 시작된 이후로 중단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왕장후는 시종 무표정인 채 한 일자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폭이 넓은 한 자루의 도가 움켜쥐어져 있었 다. 그것은 그가 강호에 뛰어들 때 유일하게 지니고 나왔던, 자신 의 분신과도 같은 애도(愛刀)였다. 일명 척천명왕도(斥天明王刀). 그 도는 이르자면 그의 생명이자 혼(魂)이었다. 왕장후는 서서히 도를 뽑아들었다. 우우웅―! 도신이 드러나자 웅후한 울음소리가 사위로 퍼져나갔다. "명왕(明王), 너와 운명을 같이할 때가 왔다." 왕장후는 눈부신 금광을 띠고 있는 도신을 뺨에 갖다댔다. 피할 길은 없었다. 아니, 작금의 사태는 피하려 한다고 해서 그리 되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그에게는 피할 생각조차 없다. 그간에 총 칠십이 개의 기단이 붕괴되어 버렸고, 수만 명에 달하 던 그의 수하들이 모두 지옥사사들에 의해 죽어갔다.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상황들은 엄연한 현실로서 종내 명 왕과 그 주인인 잠룡천자 왕장후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차앗!" 쐐애액―! 기합성과 함께 왕장후는 척천명왕도와 하나가 되어 누각을 빠져나 갔다.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 속으로 한 줄기 금빛 광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뻗어가고 있었다. "크아아― 아―악!" 지옥사사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금빛 광채가 눈앞으로 덮쳐 든다고 느낀 순간, 하나같이 풀잎 베어지듯 넘어갔다. 무림사 이래 이런 무학이 또 존재했었는지는 모른다. 단언컨대 왕 장후의 도법은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츠츠츠―! 금빛 광채란 이른바 도신합일체(刀神合一體)로 천군만마 속에 단 신으로 뛰어든 그는 가히 천장(天將)과도 같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신 이 들린 듯 앞으로 계속 질주해갈 따름이었다. 그때마다 속출하는 비명성이 하늘을 찔렀으며, 자욱한 피보라가 허공에 수도 없이 선홍빛 무지개를 그렸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주검들이 대초원(大草原)을 주름잡던 이족(異 族)의 병사들로 보인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인가? 왕장후는 문득 인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궁(宮)에서 보던 석양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 느 날엔가 그는 한 노장수(老將帥)가 미소지으며 내밀었던 피묻은 갑옷을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그의 뇌리에도 변방에서 오랑캐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맹렬히 도를 휘두르는 명장(名將)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환상은 곧 깨졌다. 그것은 더운 핏물이 그의 얼굴에 확 끼얹어지면서 비롯된 일이었다. 핏물은 그의 얼굴을 뒤덮고도 모자라 목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크아아아악......!" 끊임없이 토해져 나오는 인간들의 비명이 그의 귓전으로도 전해져 왔다. 어느덧 핏물은 그의 전신을 시뻘겋게 물들여 놓았으며, 그 는 흡사 피 속을 헤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석양이 지고 있다!' 그는 석양 속으로 미련없이 뛰어들었다. 그 순간을 기해 눈 앞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위엄이 서린 그 얼굴의 주인은 천하를 수중에 쥐고 있는 천자(天 子)였다. 그의 곤룡포에 새겨진 용문(龍紋)이 갑자기 살아서 꿈틀 거리며 비천(飛天)하는 것을 왕장후는 보았다. '폐하......!' 그 얼굴에 이어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누구도 따르지 못할 지혜로써 깊은 눈 속에 진즉부터 천하를 담고 있었던 중년의 인물, 가만히 앉아서도 명(明)의 내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를 사람들은 태자(太子)라 불렀다. ② '대형(大兄)!' 제삼의 얼굴도 빠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푸른 빛이 도는 신비한 눈을 가지고 있는 한 청년의 얼굴이었다. 왕장후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처럼 읊조렸다. '검악(劍嶽), 나의 아우.......' 그는 형을 기피했듯 아우도 경계한 인물이었다. 천무영이 누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그 사 실을 함구했고, 의형제를 맺는 희극을 연출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천무영에 대한 견제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용서해라, 후후후.......' 왕장후는 비록 심중에서지만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태어나자 마자 버려져야 했던 자신의 친아우 주검악을 향해. 일순 왕장후는 노을이 새카매졌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아름답던 피무지개도 그의 시야에서 싹 사라져 버렸다. 이와 동시에 그는 명왕도를 든 자신의 팔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안된다, 아직은 더 베어야 하거늘.......' 그가 이렇듯 참담한 심경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이제껏 한 번 도 들어본 일이 없는 음산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건명왕자(建明王子), 그만 쉬셔야 할 듯하오." "으음......." 왕장후는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힘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느끼 며 신형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상태에 이르러 있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몸은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어깨는 물론 허리 부근에도 길다란 검상들이 깊숙이 그어져 그곳 으로부터 연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복부에는 이물질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다 름이 아니라 무참하게도 토막이 난 내장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허벅지도 갈라져 쩍쩍 벌어져 있었고, 등판 역시 만 신창이였다. 각종의 암기가 빽빽히 꽂혀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왕장후의 모습은 핏물 속에 온몸을 푹 담구었다가 나온 사 람 같았다. 그러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 스스로도 기적처럼 여겨질 지경이었다. 어두워진 그의 시야에 하나의 흑영이 어렴풋이 잡혔다. "대단하시오! 과연 대명의 이왕자(二王子)답소." 여전히 음산했으되 그 음성에는 경의가 담겨 있었다. "그대는......?" 왕장후는 자신의 신분까지도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 내심으로 무 척 놀라며 눈썹을 모았다. "등천륭이라는 일개 천민이외다." "지옥성주?" "그렇소이다." 왕장후는 쿡쿡 웃었다. "아깝군, 아깝워......!" "무엇이 말이오?" "그대 같은 희대의 마웅(魔雄)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상대, 즉 지옥성주 등천륭은 침음성에 이어 물었다. "눈이 보이지 않소?" "그렇다. 하지만......." 왕장후는 수중의 척천명왕도를 똑바로 곧추세웠다. "아직 최후의 일도는 펼칠 수 있다." 고금제일의 대마인(大魔人)이라고 일컬어지는 등천륭은 낮으나 감 탄의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혈통은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외다. 이 등천륭이야말로 아쉽소. 당신처럼 용기 있는 인물을 베어야 하다니." 왕장후는 상대의 말을 듣자 오히려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핫......!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어차피 그릇된 시 각으로 세상을 보아온 위인이니까. 바로 그대처럼." "무슨 뜻이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나나 그대나 가 지지 못한 덕(德)이었지. 이만 하면 알아듣겠는가?" 등천륭은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음....... 안되었지만 그것은 최후의 깨달음이 될 것이며, 왕자 전하 혼자서 지고 가셔야 되겠소. 본인과는 무관하외다." "무관하다?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확신하오. 이 등천륭은 향후로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룩하여 그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오." 우우우웅―! 왕장후, 아니 이왕자인 그는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척천명왕도 를 앞으로 내뻗었다. "나는 그대가 이곳에 오기 직전, 아름다운 세상을 본 바 있다. 이 일도는... 그 세상을 향한 내 마지막 애정의 표시다." "어떻든 좋소!" 등천륭은 말을 마치자 귓전을 울리는 용후음을 들었다. 우우우웅―! 이와 더불어 그는 눈부신 금빛 도광이 찰나적으로 사위를 가득 메 우는 것도 보았다. 그 광휘는 너무도 찬란하여 그대로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등천륭이 누구인가?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으며 그 눈 부신 금광 속으로 가볍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때에 그의 손바닥 은 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베었다!' 왕장후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윤곽이 흐릿한 흑영을 향해 척천명왕도를 휘둘렀고, 분명 둘 로 쪼개지는 광경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사위가 전부 암흑처럼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허억―!" 한 가닥 참담한 비명이 울려 붉은 노을을 뒤흔들었다. 이는 줄곧 야망과 대의(大義) 사이에서 무섭게 갈등하다가 종내 후회하며 스러져간 한 왕족(王族)의 것이었다. ③ 장하(長夏). 문자 그대로 여름은 길었다. 그것은 산하가 온통 피냄새와 시신 썩는 냄새로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름에 인간의 육신은 곳곳 에 지천으로 널려 폭양 아래 부패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름은 쉽게 물러날 줄을 몰랐다. 또 어느 곳에서 그 무시 무시한 혈풍이 몰아치려는 것인지....... 강남무림이 지옥성에 철저히 유린되었을 때, 중원무림인들은 혈운 (血雲)이 더욱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피구름은 장강을 넘어 북상하더니 중원전역을 뒤덮어갔다. 후 세인들이 지옥대혈사(地獄大血史)라고 명명한 그 참혹한 대혈겁은 장하의 중원을 모조리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로 뭉쳤다. 더는 당할 수가 없기에, 더는 무고한 피를 폭양의 황토 위에 뿌릴 수가 없기에 그들이 굳게 손을 잡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서로 뜻이 통하는 인간들이었다. 중원의 생기(生氣)를 수 호해야 한다고 똑같이 생각했고, 더 이상은 한 방울의 피도 흘려 서는 안된다며 입을 모아 부르짖었다. - 모두 모이라! 천금성으로. 천금성의 위명은 오래 전에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현재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위대한 의혼으로 일백 년 무 림지기를 수호했던 천상천(天上天)이었으므로. 각처에서 협사들이 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대세가는 물론 잔혈맹과 구파일방, 혈붕성, 게다가 전설의 북빙 (北氷) 관음빙모곡도 부응해 왔으며 그밖의 무수한 군소방파(群小 派)들까지도 천금성을 중심으로 뭉쳤다. 하지만 장하의 폭양 아래 대혈풍을 일으키며 북상을 거듭하는 지 옥성의 마세는 그들 연합체의 세력을 훨씬 더 능가했다. 원래 정(正)보다는 마(魔)가 따르기 쉽고, 설법(說法)보다는 칼의 힘이 더 강하다지 않는가? 혈란의 와중에서 지옥성에 동조하는 무 리들도 엄청나게 불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로 화북대평원(華北大平原)에 위치한 천금성 일대는 무림 사에 전무후무한 대혈전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반경 일천여 리의 광대한 대평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사대혈전 (正邪大血戰)은 흡사 지난 날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정사구주야대 혈전을 방불케 했다. 쿠쿠쿠― 콰콰콰쾅―! 굉렬한 대폭음이 화북대평원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도처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이는 대 지가 한창 뜨겁게 달구어진 팔월 오일에 있은 일로서, 그야말로 지진에 버금가는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천금성의 주위에는 도합 삼십육 개의 절진(絶陣)이 설치되어 있었 다. 그것은 정도무림의 지자(智者)들이 총동원되어 설치한 방어진 이었건만 무참할 지경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모두가 가공할 화력(火力)에 의해서 말이다. 천금성의 높다란 누각이다. 주변상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그곳에는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평원을 잠식해 들어가는 거대한 불기둥의 제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성공 황보천기와 혈붕왕 마황전이 그들의 수뇌역을 맡고 있었 다. 은거하여 쉬고자 했던 그들이 무림에 재등장하여, 그것도 천 금성으로 달려와 막대한 고심을 떠안고 있었다. 천중화 모용운화가 이들 연합체의 군사(軍師)를 담당하고 있었다. 지혜에서라면 천하에서 그녀를 따를 자가 없었으므로. 또한 잔혈맹의 제일살과 이살로 숱한 상처들을 가슴 속에 끌어안 고 있는 금모란, 금연홍 자매를 포함하여 관음빙모곡의 곡주와 구 파일방의 수뇌들도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누구고 가릴 것 없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천중화 모용운화의 암울한 음성이 침묵을 깼다. "음, 지금 막 열여덟 개째의 관문이 깨졌어요." 관음빙모곡의 빙천모후(氷天母后)가 빙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증 오를 가득 떠올리며 말했다. "남화(南火) 화룡도(火龍島)가 지옥성의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어 요. 괘씸하게도 저들이 그동안 자랑해 마지 않던 화기(火器)를 총 동원해 관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있군요." "으음......!" 중인들은 저마다 침음성을 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을 향해 모용운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큰일이에요. 이대로 가다간 열흘도 채 못되어 모든 관문이 깨지고 말 거예요." 잠자코 있던 혈붕왕 마황전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럼 우리가 나서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멀뚱멀뚱하 게 지켜보며 당해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문성공 황보천기가 설득력 있는 어조로 뒤를 이었다. "아닐세. 우린 좀더 기다려 볼 필요가 있네." "그 아이는... 대체 어찌 되었지?" 마황전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중인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무림 의 장래를 책임져 줄 사람이자 운명의 안배에 의해 이 시대 최고 의 영웅으로 부상된 인물이었다. "그분은 오실 거예요, 반드시! 이 근역에 관문을 설치하고 우리가 모이게 된 것도 다 그분의 복안이 아니었나요?" 모용운화는 중인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그 인물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해요. 꼭지옥성의 전 력(戰力)이 두려워서가 아니에요. 만일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면 무림은 회복이 불가능한 희생을 치뤄야 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확실히 호소력이 있었다. 중인들은 답답한 심경에 도 불구하고 다시 침묵으로 접어들었으며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 해 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사실상 모용운화의 생각은 옳았다. 지옥성과 천금성의 본진(本陣) 이 정면충돌에 이른다면 그 결과란 너무도 뻔했다. 승부를 가리기 이전에 중원무림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수천 년에 걸쳐 이룩된 무림정기가 쇠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문파들이 멸절될 것이며, 그에 따라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 려오던 고유의 절기들도 남김없이 소실될 터이므로. 누군가 탄식하듯 부르짖었다. "오오! 부디 때가 늦는 따위의 일은 없기를......." ④ 꽈꽈꽈꽝―! 대평원에 또 하나의 불기둥이 솟구쳤다. 우르르르....... 지반이 함몰되어버릴 듯 진동을 일으키자 자욱한 분진이 구름처럼 일어나 일대 회오리를 이루었다. 고금제일의 대마웅. 이 시대가 빚어낸 저주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묵묵 히 평원에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옥성주 등천륭이었다. 엄청난 사태를 목도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어떤 색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그가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도 지극히 담담했다. "더 뚫어야 할 관문은 열 곳뿐이다. 이 정도면 며칠 후에는 천금 성을 열 수 있겠군. 나 등천륭의 입성(入城)은 곧 마도천하, 아니 지옥천하(地獄天下)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낭산(狼山)에서 이리떼들에게 얼굴을 반쯤 뜯어 먹히고도 끈질기 게 살아 남았으며, 사부이자 생명의 은인인 암흑마전주를 살해하 고 만겁종의 후계자가 된 그였다. 그런만큼 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일까? 그에게 서는 한 올의 인성(人性)조차 엿보이지 않는다. 자고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건만 그의 눈을 보아서는 그가 무 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가 없다. 심지어 말을 하면서도 야망 의 빛깔조차 내색치 않는 인물이 그다. 필경 그가 완벽하게 극마(極魔)를 승계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서 찾으면 틀리지 않으리라. 쿠쿠쿠쿵― 콰웅! 다시 한 번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폭음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성내의 지반이 우 르르르 하며 뒤흔들릴 정도였으니까. 천금성에 모여있던 군웅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는 한편,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내면에 도사린 불안이 급기 야 참을 수 없는 굴욕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가슴이 온통 뒤집어질 지경이었으니 계속하여 폭음이 울리고, 그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과격파가 늘어나기 시 작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 일부의 과격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혈기를 가누지 못한 나 머지 당장에라도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지옥성의 마인들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모용운화는 그때까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분은 필시 때를 넘기지 않고 돌아올 거예요. 그렇게 약속했으 니까요. 우리는 신념을 가지고 기다려야 해요. 어차피 그 분이 없 으면 우리 측의 승리는 기대할 수 없어요." 그녀의 완곡한 설득은 물론 만류의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크고 아름다운 눈에는 왜 물기가 반짝이는지? "흠, 앞으로 삼 일이면 충분하겠군." 등천륭은 어렴풋이 바라다보이는 천금성의 웅자를 향해 그처럼 중 얼거리고 있었다. 이는 그때쯤이면 걸리적거리는 관문을 모조리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명한 것이었다. 콰웅! 콰우우우― 그가 뻔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또 한 차례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등천륭은 빙글 돌아섰다. 그의 가슴이 처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도 그 현상을 느끼며 내심 읊조렸다. '그래, 삼 일 후에는 정리된다. 그때에는 이 땅에 살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 등천륭의 발 아래 무릎을 꿇으리라.' 확실히 여인들은 다른 면은 몰라도 지독함에 있어서는 사내들을 능가한다. 세 여인이 그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었다. 살아 오면서 남다른 고초를 겪다보니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나 좌 우간 천리단옥과 금모란, 금연홍 자매는 못말렸다. 세 사람은 결의라도 다지는 듯 천금성의 한 내전에 들어와 있었는 데, 그중 천리단옥이 묻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제때에 못올 수도 있어요. 그럴 시에 당신들 두 사 람은 어찌할 건가요?" 금모란은 가슴에 품었던 서슬 퍼런 비수(匕首)를 내보였다. "저는 그 직전에 아무도 모르게 지옥성주를 찾아갈 작정이에요. 그자도 북궁현리처럼 쉽게 넘어가 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남장(男裝)인 금연홍, 즉 천인혈이 말했다. "쯧! 그 아름답지 못한 방도도 이럴 땐 꽤 쓸만 하군. 그런 마음 을 먹었다면 나도 동행을 하도록 하지." "정말? 너는......." "후후후... 우리는 자매간이 아니었나?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다 가 언니가 실패하면 내가 그자의 목을 따겠어." 그녀는 어투도 예전과 조금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천리단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가 두 사람을 두고 자신의 양팔 노릇을 해주었다고 자랑 하더니, 잔혈맹의 양대 살수들답군요. 나는......." 천문세가의 소가주인 이 여인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말을 끊 더니 의외로 한층 더 다부진 음성으로 이어갔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최선봉에 설 생각이에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싸우게 되니 힘도 배가될 것이구요." "두 사람......?" "맙소사!" 금모란은 물론 감정표현이 적은 금연홍도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천리단옥은 그녀들을 향해 생긋 웃었다. "그래요, 나 그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 그럼 어떻게든 낳아서 잘 키워야......!" 천리단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마세가 이곳을 뒤엎으면 살아남기조차 어려워요, 더렵혀지거나. 그럴 바엔......." "끙!" 천인혈 금연홍이 괴상한 신음을 발하더니 말을 받았다. "차라리 우리 자매더러 주공(主公)이 현신할 때까지 곁에서 있어 달라고 명령을 내리시오. 그러면 최소한 목숨이 다 하는 순간까지 는 지켜드릴 테니까." 약간은 어이없는 흐름이었으되, 세 여인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삶 이나 죽음까지도 일체 염두에 두지 않는 맹렬함이 엿보이고 있었 다. 그녀들은 바로 그런 여인들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관문은 또 무너지고 있었다. 콰쾅! 콰르르르― ⑤ "으아악!" 폐부를 도려내는 듯 참혹한 비명이 밤공기를 찢었다. "헉!" 등천륭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누었던 자리가 땀으로 흥 건히 젖어 있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죽었다! 나의 분신이. 그리고 이건 분명 꿈이 아니다.' 그는 본래 아무도 신임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불신한 나머지 주변에 무수한 분신들을 만들 어둔 바 있다. 따라서 지옥성의 수뇌인물들조차 여태까지 진정한 지옥성주가 누구인지 모른다. 등천륭은 절대 한 자리에서 두 번 자는 법이 없다. 매일밤 처소를 옮기는데, 이는 수십 명의 가짜 등천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즉 진짜가 누군지는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날밤 그는 침상에 누우며 승리를 확신했다. 정확히 삼 일 후면 천금성에 입성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여느 날보다 느긋 하게 마음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런데 심야의 정적을 뚫고 난데없이 들려온 비명소리가 그의 잠 을 깨워 놓았던 것이다. '대체......?' 더구나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미루어 그 주인은 자신이 내세운 가짜 등천륭 중 한 명이 틀림없었다. "크악!" 비명은 한 차례 더 들려왔다. '또!' 등천륭은 더 이상 침상 위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팽팽한 긴장감에 사로잡힌 그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하지만 그를 동요하게 만든 두번째의 비명이 들려온 지 채 일 다 경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으헉!" 이번에는 좀더 가까운 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이럴 수가!' 등천륭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축축히 배이는 것을 느꼈다. 스스슷! 그는 한 줄기 연기로 화해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과연 시체는 등천륭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죽어 있었다. 그의 눈은 잔뜩 부릅떠져 있었 는데, 무엇때문인지 회의와 경악의 빛을 담고 있었다. 등천륭은 눈썹을 모으며 시체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의외로 시체는 조금도 손상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미간에 보일 듯 말 듯한 금빛 반흔(半痕)이 남아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담담 한 단향(檀香) 내음을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등천륭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실로 놀라운 자다. 이 금빛 반흔으로 보아 그 자는 이미 무공조화가 반선지경(半仙之境)에 이르러 있을 확률이 크다. 게다가.......' 그의 입술꼬리가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자는 나에게 경고하고 있다. 내 분신을 차례로 죽이면서 그는 나의 진가(眞假)를 똑똑히 구별하고 있노라는 암시와 더불어 내 심기를 흐트려 놓으려 하고 있다.' 초조감에 이어 그는 불현듯 투지(鬪志)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 다. 이제껏 적수다운 적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 온 그에게 처음으로 그 진정한 적수가 발견된 것이다. 그는 가슴에 차오르는 흥분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오냐! 오너라. 네가 누구인지 나도 궁금하다.' "으아악!" 다시 귓전으로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나 등천륭은 더는 놀라지도, 당혹해 하지도 않았다. 스읏! 그는 단지 비명이 들린 곳으로 신형을 날렸을 뿐이었다. ⑥ 그곳에 있는 것도 역시 등천륭의 시체였다. 이번의 시체는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사인(死 因)은 양 미간에 나 있는 금빛 반흔이었다. 침상 머리맡에는 반나의 여인이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 다. 그녀를 보자 등천륭은 정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멍청한 놈, 구호(九號)! 내 금명을 어기고 계집을 품다니.' 그러나 그는 분노를 일 푼도 내색하지 않았다. 지나간 일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으므로. 그는 여인에게 물었다. "보았느냐?" 여인은 젖가슴이 다 드러나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겨우 대답했다. "보... 보았어요." "어떤 자더냐?" "그... 그것이... 그림자 뿐... 이었어요." "흐음?" "그... 그래요. 그림자가 나타났었고... 금세 없어졌는데... 그 순간... 죽... 죽었어요......." 더듬거리는 여인의 음성을 뒤로 한 채 등천륭은 돌아섰다. '분명 그림자랬지?' 그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눈썹을 곧추세웠다. 그런데 그가 막 막사 를 빠져나오던 그 순간이었다. "커억!" 비명 소리가 그의 고막을 자극시켰다. 그는 무감각이 된 듯 그 소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가보아야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소득없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또한 그의 철칙이니까. 그 밤이 다 지나갔을 때, 화북대평원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막 사에서 한 군데도 예외없이 경악성이 일었다. 지옥성의 군마(群魔)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밤 사이 도합 삼십육 명의 인물이 죽었는데, 그들은 지옥성주와 판에 박았다 싶을 만큼 똑같은 용모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것은 누구의 짓인지 추측할 길이 없었다. 특히 그들을 전율케 한 것은 그 시체들 속에 진짜 지옥성주 등천륭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들은 신비에 가리워진 지옥성주에게 일말의 경외감을 품고 있었 으되 이처럼 그와 똑같이 닮은 서른여덟 구의 시체를 대하자 보이 지 않는 먹구름이 가슴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과연 누구인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자는.......?' 화룡왕(火龍王). 화룡도의 도주인 그는 이번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있었 다. 그가 주위에 설치된 절진을 계속 파괴시켜 줌으로써 난공불락 이던 천금성이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으므로. 사실 화룡도의 강력한 화기들이 아니었다면 지옥성이 아무리 막강 한 전력을 갖추었다 해도 그토록 쉽게 천금성의 관문들을 뚫고나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크크... 본 도주로 말하자면 일등공신이다. 우리 화룡도가 중원 무림에서 큰 소리칠 날도 멀지 않았다.' 그 같은 생각에 절로 득의만면해지는 화룡도주였다. 중원이 일통되면 그는 지옥성주로부터 운남성(雲南省)을 넘겨받기 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보태 그는 숙적인 북빙 관음빙모 곡의 여인들까지 포상으로 달라고 요구할 참이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꺼림직한 것이 있기는 했다. '화룡옥결을 녹이지 못하면 중원에 발을 내밀지 말라던 그 자... 천마무영이라 했던가?' 하지만 화룡왕은 이내 얼굴을 폈다. '후후... 받쳐 주는 배경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랴? 그놈이 아무리 뛰어난들 설마하니 지옥성주를 능가하겠는가?' 이런 느긋함 때문인지 여명이 막사 안으로 비쳐들고 있었지만 그 는 침상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을 뻗자 뭉클 하고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간밤 에 그가 실컷 주무르고 탐닉했던 여인의 알몸이었다. 화룡왕은 본래 지나치다 싶을 만큼 호색가였다. 하여 그는 전장에 서도 침실에 계집들을 숨겨놓고 몰래 즐기고 있었다. '흐흐... 빙모곡의 계집들은 한결같이 빼어난 미색들이라지? 얼마 후면 그 계집들은 모두 내 차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화룡왕은 슬그머니 욕정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삼 여체 위에 올라탔다. "으음......." 계집은 너무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그러 거나 말거나 화룡왕은 계집을 세차게 찍어 눌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화룡왕." 한 가닥 귀에 익은 음성이 그의 움직임을 딱 멈추게 했다. 착 가 라앉은 그 음성을 그는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한다. '성주(城主)!' 욕정은 순간적으로 확 달아나 버린다. 화룡왕은 굴러 떨어지다시피 침상 아래로 내려와 즉시 무릎을 꿇 었다. 그러고도 그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웬... 웬일이십니까?" 과연 나타난 자는 지옥성주인 등천륭이었다. 등천륭은 화룡왕의 벌거벗은 몸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늙긴 했으되 살집이 꽤 좋고 정력도 왕성해 보인다. 등천륭은 특유의 억양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관문은 몇 개가 남았는가?" "다... 다섯 개가 남았습니다." "음, 언제쯤이면 모두 격파할 수 있지?" 화룡왕도 그제서야 약간은 자신있는 어투로 대답했다. "이틀 후면... 모조리 깨끗하게 제거될 것입니다." "음!" 등천륭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을 발하더니 뒷짐을 지고 서성거 렸다. 그의 그런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는 것이었다. ⑦ 반면에 화룡왕은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알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급히 운신하느라 옷을 걸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아둔한 계집이 침상 위에서 알몸으로 사지를 활짝 열어젖힌 채 자빠져 자 고 있으니 수치스럽고 민망해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 상대는 일체 말이 없었다. 얼마나 난감한 지경에 놓여 있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룡왕의 개인사정일 뿐으 로, 말하자면 그는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지옥성주 등천륭은 괴벽에 가까울 정도로 여인을 기피하는 인물이 었다. 그는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여색을 탐하는 화룡왕에게 이 런 식으로 일부러 무안을 종용하는지도 몰랐다. 분명히 그에게 그럴 권리까지는 없었다. 요컨대 상대를 우습게 보 지 않으면 말이다. "화룡도의 화기는 명불허전이더군. 훌륭했다." "고맙습니다, 성주." 화룡왕은 심중이야 어떻든 고개를 꺾어 예를 표했다. "내 그대에게 은밀히 지시할 것이 있다." 등천륭의 음성이 다시 가라앉자 그는 바짝 긴장했다. "화룡도의 화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인가?" 화룡왕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부심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굉천뇌화신주(轟天雷火神珠)입니다." "화력은 어느 정도인가?" "한 알이면 능히 백 장을 초토화 시킬 수 있습니다. 화약과 비교 하자면 일만 근 정도의 위력과 맞먹을 것입니다." 등천륭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 올렸다. "몇 알이나 있지?" 화룡왕은 기탄없이 대답했다. "제작이 워낙 까다로와 열 개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등천륭의 음성이 갑작스레 단호하게 변했다. "굉천뇌화신주를 사용해야겠다! 일시에 전부." "어... 어디에......?"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는가?" "으음!" "그대는 빠른 시간 내에 그 화기들을 내가 지정하는 곳에 설치해 두어라. 그곳은......." 등천륭의 음성은 종전보다 훨씬 낮아졌다. 그의 말을 다 듣고나자 화룡왕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등천륭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본좌는 한 번도 명령을 번복해 본 적이 없다." "아... 알겠습니다!" 화룡왕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상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설사 당장 이 자리에 서 죽으라는 명을 받는다 해도 따라야 할 판국이었다. "실수없이 해내리라고 믿는다." "염려... 마십시오. 틀림없을... 것입니다." 화룡왕의 음성은 다소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를 향해 등천륭은 다짐이라도 하듯 덧붙여 말했다. "지난 밤 연쇄살인이 있었다. 진영 내에 첩자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즉 금후로 본좌가 다시 나타나 명령을 뒤집는다 해도 그대는 절대 그 명을 따르면 안된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화룡왕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것은 다름 이 아니라 가짜 지옥성주를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실상 지옥성주의 본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그는 공포의 상징이기 도 했지만 정녕 신비하기 그지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무시로 예고도 없이 출현하여 수하들을 당혹하게 만들며 특 별한 신물을 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연중 타인을 압 도하는 마력(魔力)이 배어나와 가짜와 구별되곤 했다. 그러나 화룡왕은 그 구별에 아직도 서툴렀고, 등천륭은 이 점을 상기시켜 경계하도록 주의를 준 것이었다. 스슷! 한 가닥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화룡왕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등천륭은 그곳에서 사라져버린 후였다. "휴우......!" 화룡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가 벌렁 드러누웠다. 문득 회의가 몰려 들었다. 그래도 화룡도에 있을 때의 그는 절대 자였다. 현재의 지옥성주가 그러하듯 왕(王)이었다. 그런데 작금에는 어떠한가? 지옥성주의 힘에 의존하다 보니 절대 자에서 일개 마졸(魔卒)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화룡왕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쯧! 역시 봉도(封島)를 푸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 천마무영 이라는 자의 말을 들었더라면......." 후회란 항시 빨라도 늦는 법이다. 그는 화룡도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만일 그쪽으로 발길을 돌이켰다간 십 리도 채 못 가서 지 옥사사들에 의해 개죽음을 당할 터이므로. ■ 무영탑 3권 제28장 아름다운 그림자 ① 콰우우웅―!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구쳤다. 금번의 대폭발은 천금성 전체를 무섭게 뒤흔들었으며, 불기둥으로 부터 전해지는 열기마저도 실감이 될 정도였다. 천금성의 군웅들은 가슴에 균열이 이는 것을 느껴야 했다. 마침내 무림 종말의 암흑시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여인들은 저마다 비장한 각오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손 길은 다소 떨렸지만 그녀들이 지닌 무인(武人)으로서의 긍지와 기 개만은 남자들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더 이상 고운 단장은 필요없었다.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여인 특유의 열망 따위는 이 순간 눈꼽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 들도 바야흐로 결전(決戰)을 준비해야 했기에. 그런 그녀들의 앞에 각기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한 장씩의 서신 이 날아들었다. 내용은 모두 동일했다. <그대들의 용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 먼 길로부터 돌아온 자, 배상(拜上).> 그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인들은 감격한 나머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한편, 군웅 들에게 달려가 그 서신들을 보여 주었다. 군웅들도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더없이 기뻐했다. 그런데 개중 대라천부 출신의 근엄한 두 노기인, 즉 혈붕왕 마황 전과 문성공 황보천기가 목을 놓아 울어버린 작은 사건은 훗날에 까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손자 가 드디어 무림의 구성(救星)으로서 돌아왔다고. 지옥성주 등천륭. 그는 호피의자(虎皮椅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이틀 밤에 걸쳐 그의 분신이 계속 살해되었다. 모두 칠십이 명으 로 이제 그의 분신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홀로 남게 된 등천륭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일찌기 이런 기분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 을 놓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는 얘기다. 언제나 그는 죽음을 내리는 위치에 서 있었지, 그 반대인 경우는 없었다. 확실히 그는 최고의 강자였다. 따라서 패(敗)와는 일체 무관했으며 남은 것은 영원한 군림뿐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칠십이 명이나 되는 분신들이 죽고난 후부터 죽음이라는 문제에 꽤 심각하게 매달렸으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뿌리 깊은 불신으로 인해 늘상 완벽주의를 추구해온 인물, 그의 분신들도 어쩌면 그런 성격의 소산인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등천륭은 마음이 결코 가볍지 못했다. 이는 그 분신 들 중 아무도 죽음을 피해낸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의미는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죽음이 닥쳐들 것이며, 분신들이 그랬듯 그 자신도 허망하게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과연 죽음이란 어떤 경험일지 일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공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표정은 등천 륭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란 그토록 두려운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문득 실소를 발했다. "후후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그는 어이없다는 투로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그는 분명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렵기는커녕 흉수의 손길이 한 시라도 빨리 뻗쳐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등천륭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다운 일이기에. 그는 긴 시간 동안 가졌던 회의와 갈등을 한순간에 죄다 떨쳐내 버리며 스스로 내면에 강한 투지를 심었다. 적수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고독한 일인가? 그는 신비의 적수에게 서 한 가닥 신선한 충격을 전해받고 있었다. '그래, 적기에 잘 나타나 주었다. 그대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나 의 이 뼈저린 외로움을 덜어준 것만으로도 그대는 큰 몫을 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내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등천륭은 그 끝에 자문해 보았다. '천하를 얻으면 나는 기쁠 것인가?' 그는 쿡쿡 웃었다. '천하라....... 천하가 뭔데?' 물었으되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그였다. '필경 천하를 수중에 넣으면 더 고독해지리라. 그러면서도 굳이 거머쥐고자 하는 이유는 아직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천 하를 얻은 후엔 나 자신과 싸우게 되겠지. 나라는 놈은 끊임없이 무엇과 싸우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놈이니까.' 등천륭은 이때에 요란한 폭발음을 들었다. 콰우우우― 땅이 마구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내심 읊조렸다. '내가 이대로 스러진다 해도 저들은 서로 싸울 것이다. 피를 흘리 면서 최후의 일 인이 남을 때까지. ㅋㅋ! 그것이 세상이다. 강자 는 약자를 누르고, 피는 피를 부르지. 그 가운데 나는 보다 적극 적이어야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등천륭은 불현듯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부......!' 과거 암흑마전주였던 사마천홍의 영상은 곧바로 그의 입가를 야릇 하게 일그러뜨려 놓았다. '그는 죽었다. 그것도 제자인 내 손에.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후회 하지 않는다. 내가 언제 그에게 이리떼들로부터 구해달라고 했던 가? 당시 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은 그였으니 그 운명에 대한 책임도 그 자신이 져야 한다.' 어찌 들으면 궤변 같았지만 등천륭은 자신의 판단에 일 점의 회의 도 가지지 않았다. 이상한 건 사부의 얼굴이 뇌리를 가득 메우자 그때부터 초조해지더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는 자신의 내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낯선 감정을 확인하게 되자 고개를 좌우로 저어 그것을 맹렬히 부정했다. '천만에! 나는 초조하지 않아.' 반면에 그의 내부에서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소리가 들 려오고 있었다. - 거짓말 마라. 너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네가 언제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느냐? 단연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강했었지. 하지만 지금 너는 아주 복잡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네가 초조해 한다는 증거이다. ② 등천륭은 자신의 믿음을 철저하게 허물어뜨리려는, 그 내부의 소 리를 향해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속히 그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 그와 가슴 벅찬 일전(一戰)을 벌이고 싶다. 이렇듯 그가 나 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그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의 손은 왼쪽 얼굴에 가 닿자 가벼운 떨림을 보였다. '이 반쪽의 얼굴... 여기는 이리떼들에게 뜯어 먹혀 엉망진창이 지. 나는 아직 한 번도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 왜 냐고? 나 자신이 보아도 끔찍할 정도로 추악하니까.' 그의 손이 이번에는 오른쪽 얼굴을 만졌다. '이 나머지 반쪽은 절세미남의 얼굴이다. 크크... 절세의 미(美) 와 추(醜)... 이 둘을 동시에 가진 것이 나의 진면목이다. 면구 (面具)를 쓴 이 모습은 가짜야.' 등천륭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너무 좋았다. 거의 매일을 그녀 생각만 하며 보냈지. 그 녀도 나를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 그의 눈에는 한 가닥 엷은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나는 결심했지. 나의 본 얼굴을 보이기로. 그래도 나를 좋아해 준다면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일생을 살 작정이었다. 반대로 그녀 가 나를 싫어하면... 그때는 이 세상을 증오하고 피보라로 뒤덮어 버리겠노라고 다짐했었다.' 다시 그의 눈이 깊고 무섭게 침잠되었다. '크크크...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내 얼굴을 본 그 계집은 놀라서 아예 자지러지더군. 내 얼굴 위로 침을 뱉고 도망 갔어. 큭큭...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대뜸 쫓아가 그 계집 을 강간한 뒤 갈기갈기 찢어죽였지.' 등천륭은 주먹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결정된 거야. 향방이 뚜렷하게 정해진 이상 더 갈등할 이유도 없었다.' 지옥성주 등천륭. 그에게는 그렇듯 처절한 과거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판단일 뿐 지난 일을 회상하던 등천륭은 짜증스러울 만큼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었 던지 호피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변의 정황을 알고 싶었던 그는 곧장 막사를 나섰다. 우르르르― 콰콰쾅! 폭음과 함께 그 순간 또 한 차례 지축이 흔들렸다. '하나가 더 뚫렸군.' 그는 무감하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막사들의 한가운데였다. "성주!" "종사(宗師)!" 그를 발견한 수하들이 지체없이 신색을 정비하며 부복했다. 등천륭은 말없이 그들을 가로질러 화룡도의 진영으로 들어섰다. 화약냄새가 코를 찔러오자 그는 내심 읊조렸다. '일이 끝나면 화룡도주를 중용해야겠군. 큰 공을 세운 것도 그렇 지만 그에게 화기제작을 더 의뢰해야 될 테니까.' 그는 개중 가장 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화룡도의 군졸들이 통 보하려는 것을 제지하고 막바로 발을 들이밀었는데, 덕분에 그는 지난 번에 이어 두번째로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③ 넓고 화려한 막사 안. 바닥에는 변함없이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고 한쪽에 대형침상이 놓여 있는 것도 여전했다. 그 위에서 화룡왕은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나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더구나 이번 경우에는 먼젓 번보다 정도가 훨씬 심하여 알몸뚱이 인 여인이, 그것도 네 명씩이나 화룡왕의 살집 좋은 몸뚱이에 찰 싹 달라붙어 있었다. 등천륭은 대노했다. "이 무슨 짓인가?" 그는 눈썹마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호통을 들은 화룡왕은 선불맞은 멧돼지인 양 펄쩍 뛰어 일어났다. "서... 성주......!" 아연실색했으되 사태는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했다. 하여 화룡왕은 곧 입가에 어색하나마 웃음기를 피워 올렸다. "언제 왕림......." 그런 식으로 당혹감을 얼버무리려던 그는 그만 제풀에 입을 다물 어야 했다. 그것은 그 찰나 등천륭의 눈에서 번뜩하고 묵광(墨光) 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화룡왕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알기로 등천륭의 눈에 나타난 묵광은 살인에의 예고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 주......?" 화룡왕이 불안하여 막 뭐라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아악! 켁―!" 연이어 네 마디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언제, 어떻게 손을 썼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네 명의 여인들은 비 명과 함께 모두 눈을 까뒤집으며 널브러졌고, 그녀들의 이마 한복 판에는 어김없이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희안하게도 그 구멍에서는 핏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방금 전까 지만 해도 색정적인 몸짓으로 열기를 발산해내던 육체를 순식간에 싸늘한 시신으로 만들어 버렸을 뿐이었다. 화룡왕은 전신이 마비된 듯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 금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 와중에 그는 등천륭의 음산무비한 음성을 들었다. "금법(禁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던가?" "알... 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 그건... 저어... 용... 용서해 주십시오......!" 등천륭은 무심한 시선으로 화룡왕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그였다. 이대로 화룡왕의 골통을 바수어 버리고 싶은 충동도 그는 가히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등천륭은 아직도 천금성의 관문이 다 돌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자신의 공을 깎아 먹었다. 그런 줄 알라." 화룡왕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가운데서도 크나큰 의혹에 사로잡혔 다. 분명 하루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지옥성주는 그가 여인 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묵인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왜 분노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 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강한 불만이 심중에서 고개를 쳐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내색하지는 못했다. "관문은 몇 개나 남았는가?" "마... 마지막 하나입니다." "언제 뚫리는가?" "내... 내일 새벽......."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슷! 등천륭은 찬 바람을 일으키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가 사라지 고 난 뒤, 화룡왕은 탄식하듯 부르짖었다. "왜 나를 못살게 군단 말인가? 대체 왜......!" 그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후회와 더불어 자신의 신세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지옥성주 등천륭, 그자는 왜 이랬다 저랬다 하며 자신의 생존수단 이나 다름없는 낙(樂)까지도 빼앗는가 말이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한 화룡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침상의 모 서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쾅! 우수수....... 가격을 당한 침상 모서리는 놀랍게도 대번에 시커멓게 타는가 싶 더니 재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멍하니 시체로 화해 버린 네 여인을 바라보았다. 지옥성주의 눈치를 보느라 어렵사리 구해온 그녀들이건만 이제는 그에게 어떤 즐거움도 제공해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찌 내게 이런 일이......!' ④ 운명의 순간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등천륭은 자신의 막사가 가까워지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 것은 본능적인 예감과도 통하는 현상이었다. '왔군!' 그는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라 형언키 어려운 벅찬 감 정이 그의 전신 혈관을 미쳐 날뛰게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못박혔다. 자신이 앉았던 호피의자였다. 그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 른바 운명의 상대가 그 인물임을 등천륭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 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 역시도 그를 기다린 듯 빙글 의자를 돌려 앉았다. 덕분에 그 인물의 모습을 보게 된 등천륭은 안색이 일변했다. 가 장 먼저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에 대한 놀라움 이었으며, 그것은 분노와 실망으로 이어졌다. "너는 누구냐?" 그의 음성이 발해지자 상대방도 똑같은 말을 물어왔다. "너는 누구냐?" 믿을 수 없게도 똑같은 억양에, 진가(眞假)를 구별할 수 없는 똑 같은 음성이었다. 등천륭은 안면을 굳혔다. "나는 지옥성주 등천륭이다." "나는 지옥성주 등천륭이다." 상대방은 이번에도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에 등천륭의 가슴 속에서는 분노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대가 이런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대가 이런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호피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는 인물, 그자는 거울인 양 등천 륭의 모든 것을 완벽하리 만큼 똑같이 흉내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등천륭은 일순 착각에 빠져 들기도 했다. 혹시 눈 앞에 앉아있는 자가 진짜이고, 자신이 그 분신이 아닐까 하는. 그러나 등천륭이 어떤 위인인가? 이내 그는 본연의 기세를 회복하 며 눈에서 무서운 광망을 폭사시켰다. "그따위 유치한 연극으로 만남의 자리를 더럽히다니!" 그 말에는 답변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일까? 비로소 상대방은 빙긋 웃더니 제대로 응대해 왔다. "등천륭, 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시오?" "왜지?" 그자는 손가락으로 등천륭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마따나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이 행동은 당신의 그림자를 훔 친다는 것을 의미하오." "으음, 그랬었군." 등천륭은 그제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나직이 신음을 발했다. 그러더니 그는 한결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내가 잠시 판단이 흐려져 그대가 천마무영(天魔無影)이라는 사실 을 잊었었다. 그림자를 흘리고 다닌 덕에 진즉부터 그대가 누구인 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그건 약간은 의도적이었소. 당신의 직관을 믿었으니까." "고맙군." 등천륭과 또 한 사람의 등천륭, 아니 천무영의 대화는 그렇게 이 어지고 있었다. 곁에서 누가 보았던들 그들이 일 장의 격돌을 앞 두고 있는 자들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천무영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동안 당신이 나를 기다려온 것을 알고 있소." "음." "당신이 고독해 한다는 것도." 등천륭의 입술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호오! 거기까지 안다니 나도 솔직히 말하지. 천마무영, 나는 그 대의 출현에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였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원래 강자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는 법이지 않소? 있어 봐야 모두가 적수들일 뿐." "맞다. 그래서 나는 기왕이면 최고의 적수를 원했었지." 등천륭의 말에 그는 잔잔히 웃었다. "후후... 하지만 강자도 강자 나름이외다. 만일 지금이라도 세상 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수많은 지기(知 己)들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오." "그 비슷한 소리를 예전에도 한 번 들은 기억이 있다." "흐음?" "잠룡부주 왕장후에게서." 뜻하지 않게 그 이름이 언급되자 물처럼 담담했던 천무영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그분이... 그런 말을......?" "그렇다. 아울러 그는 내게 진정한 용기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도 알려주고 나서 죽어갔다." "으음......!" 천무영은 장탄식을 대신한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그 자신도 어찌 설명할 수 없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이 한 차례 등줄기를 훑 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가 잠자코 있자 등천륭이 말했다. "천마무영,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달라질 것 같았으면 왕장후의 말을 들었을 때 벌써 그리 했을 테니까." "그분은... 훌륭한 인물이외다." "맞아. 내가 보기로도 그의 언행에는 확실히 감동적인 구석이 많 았지. 대명의 이왕자(二王子)답게 말이다." "뭐, 뭣?" 천무영은 놀란 외침과 더불어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떨 었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이런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분이... 그분이 그럼......? 오오, 맙소사!" 돌변한 그의 반응에 등천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지? 천마무영." "알 것... 없소. 그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천무영은 격정을 억누르며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는 계속하여 절규와도 같은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분이 나의 친형님이셨다니.......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던 그 끈끈한 감정은 결국......!' 그는 그야말로 피라도 토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천무영은 와중에서 한 가지 전설을 떠올렸다. 현재 이 자리에는 정의 근원인 대라천부(大羅天府)와 마의 조종이 라는 만겁종(萬 宗)의 후예들이 마주하고 서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아득한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마침내 대라천 부와 만겁종이 다시 마주쳤다고도 할 수 있었다. ⑤ 그는 지난 시간 속에서 천산(天山)의 천부를 열었다. 그리고 그때 에 보았던 그 눈부시고 장엄한 빛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라사금시(大羅四禁 )를 그에게 주어 천부를 열도록 한 것은 어쩌면 조종(祖宗)의 안배였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만겁종의 후예도 마찬가지일진저! 천무영은 생각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래저래 격돌은 피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등천륭을 향해 불쑥 물었다. "그대는 혹시 형제간의 우의에 대해 아오?" 등천륭은 쓴 웃음을 지었다. "난 아주 어릴 적부터 고아였다." "되었소. 더 할 말이 없구려." 천무영이 말하자 등천륭도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일 새벽이면 천금성의 마지막 관문이 뚫린다. 어떤가? 그 전에 우리끼리 먼저 승부를 내는 것이." "장소를 옮깁시다." 등천륭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소중한 대결의 순간을 주변의 머저리 같은 작자들에게 구경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천무영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럼......." 슷!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꺼졌다. 팟―! 마찬가지로 등천륭의 모습도 사라졌다. ⑥ 그들의 격돌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각기 고금을 통틀어 최강을 구가하던 두 인물이 화북대평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정(山頂)에서 맞붙고 있었다. 콰우우우...... 소위 경천동지(驚天動地)라는 어휘조차 무색하리 만큼 그들은 가 공할 신위를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산이 깎 여 나가고 천공이 울부짖었다. 콰콰콰쾅―! 무(武)의 신(神)이라 한들 과언이 아니리라. 대라천부와 만겁종. 고래로부터 당세에 이르까지도 정사의 근원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극강의 무학들이 대하처럼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천마폭혈참(天魔爆血斬)!" 등천륭은 계속하여 허공에 신형을 띄운 채 일신에 지닌 만겁종의 무공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콰쾅! 콰르르르― 천인혈옥수(天刃血玉手)에 유마살인벽(幽魔殺人壁), 개천벽지멸강 (開天壁地滅 ), 인혼혈혈부(引魂血血符) 등 그 숫자만 해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천무영이라 해서 어찌 다르겠는가? 태허도룡장(太虛屠龍掌), 양의동심인(兩義同心印), 선형금강류(仙 形金剛流), 구화천풍잔(九花天風殘), 복마수지권(伏魔首枝拳) 등 이름만 들어도 그 내용이나 위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라천부 의 무학들을 유감없이 발출해 냈다. 격돌의 여파로 산정은 벌써 반 이상이 날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체로 승부는 나지 않았다. 두 마리의 호랑이 가 사투를 벌이듯 공전절후의 대결을 벌이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다할 치명타는 입히지 못했다. 그것은 인정을 두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열조차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시종일관 동수(同手)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덧 석양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천마무영과 지옥성주의 싸움이 일만 초를 넘기던 그 시각에 화북 대평원에는 서서히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물론 싸움은 조금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콰우우우― 쿠쿠쿠쿵―! 굉렬한 폭음 속에서 산정은 더욱 낮아져가고 있었다. '십오야(十五夜)!' 천무영은 끊임없이 천고의 기학들을 떨쳐내는 가운데 문득 중얼거 렸다. 그러고 보니 중추야(仲秋夜)였다. 덕분에 휘황한 달빛이 산 정과 화북대평원을 모두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달빛은 은물결인 양 부드럽고 풍성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것을 감상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저 달이 떴을 뿐으로 그 아래서 무려 오만 초라는 믿어지지 않는 초수를 나누었다. 그나마 시간이 더 지나 달도 기울기 시작하자 하늘은 점차 암청빛 을 띠어갔다. 개벽(開壁)이 이루어지려 하는 것이다. 콰우우우웅―! 마침내 폭음과 함께 산정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 속에서 한 가닥 다급한 신음성이 울려 나왔다. "헉!" 천무영이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알고 있는 바 천부 의 무학을 그는 다 썼으며 초식이 딸리는 것을 느꼈다. 반면에 등천륭은 신들린 듯 아직도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콰콰쾅―! "으윽!" 천무영은 뒤로 주르륵 삼 장이나 물러났다. 그에 따라 기혈이 역 류하는 바람에 그의 입에서는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전세로 미루어 그는 패색(敗色)을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기다려온 그때였으므로. 그의 귀로 등천륭의 여유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친구여, 아쉽지만 잘 가게!" 동시에 시커먼 묵강(墨 )이 무서운 기세로 그를 덮쳐왔다. 꽈르르릉―! '아니, 난 그럴 수 없소!' 들리지 않는 이 읊조림은 천무영의 것이었다. 이때에 그는 쌍수를 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하늘을, 하나는 땅을 향해. 이와 함께 그는 일신의 공력을 모조리 쏟아냈다. "광한대천초극수라천(廣寒大天超極修羅穿)―!" 고오오오....... 기이한 음향과 더불어 사위가 암흑으로 뒤덮히는 찰나였다. 그 속 에서 각기 하늘과 땅으로부터 뻗어나온 두 가닥의 뇌전(雷電)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일직선으로 묵강을 꿰뚫었다. 쩌저적―! "크허억!" 그것은 극사극마를 추종하던 이 시대의 마종(魔宗)이 마지막으로 토해낸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 비명소리는 구천(九泉)으로 침잠하 듯 이내 여운마저도 스르르 소진되어 갔다. 싸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천무영이 최 후에 떨쳐낸 초식은 대라천부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천부의 무학만으로는 만겁종을 꺾을 수 없다고 판 단했었다. 그것은 천부의 무공이 만겁종에 뒤져서가 아니라 그가 등천륭보다 수련연한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부의 무학을 익히되 거기에 은자구십구천의 불패기 학을 가미시켜 새로운 일초식을 창안해냈던 것이다. 존경해 마지 않는 광한상인의 명호도 슬쩍 빌려서 말이다. ⑦ 천무영은 북쪽 하늘을 향해 크게 일배(一拜)를 올렸다. '은자들이시여! 당신들은 끝내 승리를 거두셨소이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등천륭이 말하던 그 아 쉬움이 거꾸로 그의 몫이 되었기에. 그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한 바위에 몸을 의지했다. 극단의 내 공 소모로 인해 그의 얼굴은 백지장보다 더 희었다. 그는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땅 위에는 마세로 천하를 웅 패하려던 야망도, 그 야망의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등천륭은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무(無)로 귀안(歸雁)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뜻하지 않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등형......." 천무영은 나직이 읊조리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리다. 쓸데없는 연민지심 따위를 갖는다면 당신이 저승에 서도 무척 화를 낼테니 말이오. 당신은 강자니까." ....... 콰콰쾅―! 화북대평원에 거창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구쳤다. 이는 동 녘 하늘에 막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의 일이었다. '아! 마지막 관문이 무너졌다." 천무영은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휙―! 그는 이내 하나의 점이 되어 화북대평원으로 쏘아져 갔다. 그것은 실로 인간의 경공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신법이었다. "와아아아―!" "출진(出陣)이다―!" 바야흐로 천금성의 최후 관문이 무너졌고, 이때를 기해 수만을 헤 아리는 지옥성의 마도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광기(狂氣)가 흘렀다. 그들은 평원을 밀물처럼 가로지르며 다가올 내일을 그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당 당하게 활개칠 수 있는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와아아아아―!"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안돼! 가면 안돼―!" 장대한 체구를 지닌 한 인물이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고함을 치 고 있었다. 그는 화룡도주인 화룡왕이었다. "안된다! 그곳에는 굉천뇌화신주가 묻혀 있다―!" 그는 육성과 내공을 초월하여 있는 힘껏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절박한 외침도 이성을 잃은 군마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 았을 뿐더러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크으으윽...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 군마들을 떠나보낸 화룡왕은 실성해 버린 듯 체면도 잊고 마 구 울부짖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사태 가 그를 참담한 절망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그의 귓전에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화룡왕, 구경하게. 저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화룡왕은 대번에 펄쩍 뛰었다. "성주! 대체 왜, 왜 이렇게 한 것이외까? 왜......?" 그는 등천륭을 향해 통곡이라도 하듯 부르짖었다. 자신이 보고 있 는 자가 등천륭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우르르― 르르르릉―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러더니 뒤를 이 어 대평원에는 무섭도록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꽈르르― 꽈꽈꽈꽝―! 마침내 그 일각에서 이제까지 들렸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폭발음이 울렸다. 그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땅에 무림계가 형성되고, 또 정과 사가 뿌리를 내린 이래로 이런 극단의 참사는 없었다. 천금성이라는 단체가 차지하고 있던 드넓은 땅덩이가 순식간에 송 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흙더미와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한꺼 번에 솟구쳐 오르는 그 광경이란 실로 대장관이었다. 그 위를 치달리던 군마들도 걸레쪽처럼 찢겨 날아올랐다. 뒤미처 맹렬하게 치솟아오른 거대한 불기둥은 그 흔적마저도 용납 할 수 없었는지, 일대 회오리를 몰아 처참지경에 이른 그들을 모 조리 휩쓸어 버렸으니....... "으으으... 으아아아......!" 종내 미쳐버린 것일까? 화룡왕은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더 니 몸을 날려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천무영은 상대를 붙잡지 않았다. 비록 회의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 져 있기는 해도 그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화룡왕! 그것이 바로 당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요. 내가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다시 중원에 나와서는 안된다고.' 그가 괜히 잔혈맹의 맹주인가 말이다. ⑧ 천금성의 붕괴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도 보았다. 그들은 원래 그 안에 있어야 했을 인물들이었는데, 천무영의 지시 로 미리 대피하여 단지 그 상황을 구경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종내 불의 회오리가 일어나자 그들은 승리의 함성을 발했 다. 그로써 염원하던 척마(斥魔)가 이루어졌으므로. ....... 그들의 앞에 천무영이 다가왔다. 그것은 불의 폭풍이나 그에 따른 분진 등까지도 모두 잠잠하게 가라앉은 후였다. 그는 군웅들을 향해 한 송이의 야화(野花)를 들어보였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사지(死地) 위에 꽃을 심으면. 화북대평 원을 방대한 화원으로 만들어 보면 말이외다." 내공이 실린 그의 음성은 멀리로 잔잔하게 퍼져 나갔고, 이 때에 군웅들은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을 보았다. 야화처럼 생기있고 신선한 그 웃음은 삽시에 군웅들에게도 감염이 되었다. 문성공 황보천기가 그에게 한마디 했다. "그렇다면 아이야, 천금성이라는 이름도 이 차제에 아예 화중성 (花中城)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백조부. 이곳에는 더 이상 누구의 권위나 지배도 존재 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천리단옥은 곁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는지라 하고 싶은 말을 심중으로만 읊조렸다. '무영, 그 화원에서 당신과 나의 아이가 자라게 될 거야. 당신처 럼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 大 尾 - ■ 무영탑 전3권이 모두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