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정천하 제 1권 검궁인 저 차례 제1장· 그들의 재회(再會) 제2장· 혈월(血月)이 뜨고 그가 진 날 제3장· 다시 태어나다 제4장· 기인(奇人)을 완성시킨 사람들 제5장· 독보강호행(獨步江湖行) 제6장· 비싼 숙박료(宿泊料) 제7장· 첫번째 사냥 제8장· 인연(因緣)의 맥(脈)을 따라서 제9장· 씁쓸한 인과응보(因果應報) 서문(序文) 인류사는 끊임없는 투쟁의 기록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사가(史家)들은 되도록 충실한 사실적 기록을 남기려 애썼다. 후세인들은 그들이 남긴 사서를 읽으며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교훈만을 취하지 않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전대인들의 투쟁의 기록 속에서 병법(兵法)이 파생되었다. 병법이란 무엇인가? 곧 이기기 위한 계략에 다름 아니다. 이긴다는 것. 그것은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야 죽건 말건, 아니 반드시 상대를 제거해야만 자신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의 동정은 그야말로 값싼 낭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피가 흐른다. 전쟁을 일으킨 이들의 가슴에는 뜨거운 야망이 지펴졌다. 그것은 곧 정복자가 되기 위한 야망의 결과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거꾸러 뜨리기 위해 그들은 독아(毒牙)를 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열 개의 하늘을 나누어 가졌지만 그들은 만족할 줄 몰랐다. 그 중의 한 명이 너무도 강했기에, 설사 열 하늘을 공평하게 나눈 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의 불안감이 한 명을 용납치 못했다. 음모가 진행되었다. 꿈에도 믿을 수 없는 음모 속에 한 명은 무너졌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을까? 아홉 하늘은 서로를 용인하며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십정천하(十鼎天下)>를 바친다. 열 하늘의 이야기 속에 오늘 날 적어도 한 부분을 차지한 이들이 어찌하여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분란(紛亂)를 자초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지, 작금의 세태를 어느 정도 담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오정(子午停)에서 검궁인 배상. 서(序) 캄캄한 암흑 속이다. 지하인 것만은 확실하나 대체 몇백 장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지는 짐작할 수도 없다. 이른바 삶과 죽음의 교차지점, 공기가 희박하여 도시 숨쉬기조차 불편하다. 이곳에 십 인(十人)의 소년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은 똑같은 조건 하에서 벌써 백일째 굶고 있었다. 이제 굶주림은 차라리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실로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혹독한 갈증이었다. 벽, 천정, 바닥이 모두 돌로 된 공간 속에는 물 한 방울 없었다. 벽을 긁고, 바닥을 할퀴고, 천정을 머리로 박아 보았으나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절망을 넘어선 허탈감....... 와중에 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우우... 꼭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신음인지 절규인지 모를 음성에 다른 소년이 답했다. "우리는 강자가 된다. 강자가 되어 천하를 군림하게 된다면 지금의 고통쯤은 깨끗이 잊혀질 것이다." 앞서의 소년이 회의에 찬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넌 아직도 버틸 여력이 남아있나 보구나.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참아야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그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어야 해." 그 소리에 힘입은 것일까? 이번에는 또 다른 음성이 악다문 이빨 사이로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음향을 흘려냈다. "ㅋㅋㅋ... 두 말하면 잔소리다. 어디 두고 봐라. 나는 기어이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어 이 날을 복수하고 말겠다." 이에 응수하는 음성도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 좋지! 후후후... 어차피 제이인자는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후후...... 그렇게 모르는 척 잡아뗄 거냐?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함께 고통을 나누는 척 하고 있지만 후일에는 결국 서로를 죽여야 한다." "우우우... 그것 말고는 방도가 없단 말이냐?" "방도? 우리에게 그런 것도 있었나? 후후... 꿈 깨라. 우리는 단지 그들에게 사육되고 있었을 뿐이다." "으음......." "애시당초 우리는 우의(友誼)나 상호 신뢰 따위에서는 제외된 인간들이다. 모르겠나? 여기서 나가게 되면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자들이 누구인가를 말이다." 한 소리 호통이 대화를 중단시켰다. "닥쳐! 빌어먹을, 그렇게 너도 나도 마구 지껄여 대니까 공기만 더 혼탁해졌다." 그 음성은 곧 기진하여 참담히 읊조렸다. "제기랄, 당장 물 한 모금을 얻을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다. 누구를 죽이냐는 것은 이미 논외(論外)다. 공연히 결정지어진 사항을 번복하며 힘을 낭비하다니......." 십 인의 소년들. 그들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무릇 사나운 맹수는 자식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스스로 살아나온 놈을 후계자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십 인 모두가 지옥의 고통을 이기고 살아났으며, 후계자가 되기를 오히려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벌써부터 승계(承繼)에 일점도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천하를 향해 제각기 손을 벌리며 나아가기를 희망했다. 사실상 그들을 키운 자들도 한때는 천하쟁패를 넘보던 대야심가들이었으나 소년들은 그 이상을 원했던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똑같이 강했기에 십분(十分)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해 손을 잡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기에는 운명과 생명을 건 한 판의 무시무시한 도박이 개입된다. 소위 목적을 위해 살모사(殺母蛇)의 새끼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소년들, 세인들은 그들을 다 알지 못했다. 다만 이후로 그들이 주관하는 세상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다. 십정천하(十鼎天下)라고.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신화를 창출해 낸 자들, 단연코 최강이라 명명되는 인간들이 있다. 즉 높은 뜻과 진한 향기를 뿌려 고금미증유의 업(業)을 이룩한 자들이다. 이름하여 천하십상천. 바로 그들이다. 누대에 걸쳐 면면히 이루어진 무림사(武林史)에 있어 중원사해오악(中原四海五嶽)과 구주팔황(九州八荒)에 걸쳐 십팔만리천하(十八萬里天下)에 군림한 자는 몇 되지 않는다. 그것도 한 시대에 최강자가 십 인이나 출현한 예는 일찌기 없었다. 모름지기 한 산에 양호(兩虎)가 살 수 없다고 했건만 그들이 동시대에 태어난 것은 어쩌면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그들에 관해서는 이렇게 구전되어지곤 했다. 각자 일수(一手)를 들면 대해가 갈라지고, 일보(一步)를 옮기면 산악이 무너지는 무공조화를 갖고 있다던가?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도 저마다 일각의 패주로 만족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천하를 십분한 상태로 머물며 웅심(雄心)을 가슴 한구석에 처박은 채 포효를 그쳐야 했다는 것이다. 천하를 족히 가릴 만한 손바닥이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 십상천이 충돌하면 천하가 붕괴된다. 이런 항간의 우려가 기정사실이고 보면 그들로서도 달리 대책이 있을 리 만무였다. 그들 천하십상천은 정(正)도, 사(邪)도, 심지어는 마(魔)도 초월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무림이 만들어낸 힘의 최고봉이었으며, 무의 종(宗)으로서 관념을 일탈한 열 개의 하늘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루어낸 고금제일의 위대한 업을 꼽으라면 단연코 입을 모아 말해야 하리라. 우내십정(宇內十鼎)이라는, 열 개의 또 다른 하늘을 키워낸 것이라고. 우내십정의 탄생은 곧 무림계의 새로운 개천(開天)을 의미한다. 그들은 천하십상천이 심혈을 기울여 깎고 다듬은 재목으로서 가히 천동(天童)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소년들이었다. 이들 십 인의 소년이 나타났을 때 무림은 일제히 숨을 죽여야 했다. 십상천을 그대로 빼어다 박은 듯한, 아니 되려 십상천을 능가하는 그들은 무림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던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이 일편의 경구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들은 일수에 바다를 마르게 했고, 일보에 구주(九州)를 침몰시켰다. 더구나 그들은 출도(出道) 당시 겨우 십사 세에 불과했으니....... - 소년을 조심하라. 특히 천진한 소년일수록 더욱 경계하되 눈빛이 맑은 소년은 될 수 있으면 피해서 지나쳐라. 설사 조사(祖師)를 등질지언정 소년을 노하게 해서는 안된다. 당대에 유행하던 이 노랫 가락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들 십 인 소년들의 위용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 년 후. 바야흐로 십정천하(十鼎天下)가 도래했다. 이를 감히 부인하지도 못하거니와, 천하제일정(天下第一鼎)이 누구인가는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되었다. 그들 십 인 모두가 고금제일정(古今第一鼎)이 되려 천하를 향해 그 무서운 야수의 눈을 번뜩이고 있으므로. 그들이 연출해내는 무궁무진한 기사괴담(奇事怪談), 또한 용쟁호투에 버금가는 그들의 암투에서 바로 얘기는 시작된다. 그 해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던데....... 제1장 그들의 재회(再會) ① 휘류류류륭--! 북천(北天)의 밤은 차다. 겨울의 한가운데라 할 수 있는 정월(正月)이다. 밤이 되자 기온은 급강하하고, 눈까지 한풍(寒風)에 휘말리니 여독에 지친 객인(客人)의 심신은 더욱 황폐해진다. 북원(北原). 가도가도 끝이 없는 황원이 펼쳐져 있다. 더구나 섬서(陝西)의 이 황지는 이미 얼어붙을 대로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일척 이상 내려 쌓여 있는 눈은 황지를 차라리 빙천지옥(氷天地獄)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날, 한밤중에 백간산(白干山) 일대의 오지를 지나가려 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정신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저 화롯불이 지펴진 객점의 별원에서 계집의 엉덩이나 실컷 주무르고 있던가, 그럴 능력이 안되면 독한 화주(火酒)로나마 몸을 녹이고 있는 편이 훨씬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혹시 이승에서 목숨을 더 이어갈 뜻이 있다면 말이다. 휘휙--! 과연 살기가 귀찮아진 자들일까? 야색을 미미하게 밝히는 편월을 벗삼아 눈쌓인 오지를 달리는 두 가닥의 인영이 있었다. 그것도 한 사람은 남자요, 한 사람은 여자였는데, 무슨 배짱에서인지 그들은 일신에 바람막이 피풍조차도 두르지 않고 오직 한 겹 얇은 단삼만을 걸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 일남일녀의 신법을 보건대 놀라움은 금세 반감된다. 양인(兩人) 모두가 가히 조화지경(造化之境)이었으니 객기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법 하다. 다만 속칭 하늘과 땅으로 비견되는 양과 음의 차이만은 끝내 극복되지 않았다. "하아......! 문랑(文郞), 더 이상 못가겠어요. 우리 잠시만 쉬었다 가면......." 여인이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거의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이런 말을 토해냈다. 특기할 사실이 있다면 비록 기진해 있었으나 그녀의 음성이 달콤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뭐랄까? 듣기만 해도 절로 황홀해지는 듯한....... 이는 여인의 외양을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순백의 교의 차림에 삼단같은 머리채를 하나로 묶었는데, 그것은 설풍에 의해 자못 환상적인 각도로 흩날리고 있었다. 편월광(片月光)을 통해 바라본 그녀의 아름다움이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두 눈은 수정을 박아 놓은 듯하고, 코의 선은 마치 신이 빚은 듯 완전무결했다. 어디 그 뿐인가? 피부는 옥결처럼 투명하게 빛났으며 학같이 가녀린 목선에서는 품위마저 물씬 배어 나왔다. 그런데 여인은 배가 불러 있었다. 만삭에 가까운지 작은 동산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배는 임신 중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백의녀는 안색이 쌓인 눈보다 더 창백해진 채 말을 이었다. "배가... 아파와요. 어쩌면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출산을 하게 될지도......." 여인의 말에 동행이던 청년, 아니 소년이라 불러야 옳을까? 이제 십칠 세쯤이나 되어 보이는 인물이 그녀를 응시했다. 달빛에 여인과 함께 나란히 투영된 그 얼굴이란 어떻게 묘사해 놓아도 필설이 오히려 치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현오한 빛을 뿜어내는 서늘한 눈이 그러했으며, 멋들어지게 창공을 차고 나간 천년송(千年松)의 솔잎을 단정히 빗질해 놓은 듯한 눈썹이 또 그러했다. 이마의 골격과 더불어 상서로운 조화를 이룬 코하며, 천하를 오시하는 듯 냉연히 다물린 붉은 입술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천하에서 보기 드문 미랑(美郞)이었다. 그도 역시 설백단삼을 입었다. 허리춤에는 흑색의 편(鞭)을 띠처럼 두르고, 양손목에는 한 쌍의 옥환(玉環)을 차고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의미녀의 손을 잡았다. "화미(花美), 조금만 더 참아줄 수는 없겠소? 근처에 인가가 있을 것 같소만......." 화미라 불리운 여인이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들의 아가는ㅕㅛ성질이 몹시 급한가 봐요. 여기가 어디인 줄도 모르고 자꾸만 나오겠다고 발로 차니 말예요." 소년의 얼굴이 스르르 붉어졌다. "아마도 그건 나를 닮아서일 게요." 헌헌장부의 기도를 갖추고 있었으나 역시 소년은 소년이었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는 아직 수줍은 그가 부인(婦人)과 태어날 아기라는 무거운 짐을 양어깨에 얹고 있는 것이다. 여인은 소년과 동배(同輩)인 듯 하면서도 모성으로 인해 조금은 일찍 철이 들었는지 얼른 어투를 바꾸었다. "호호... 지나친 겸손은 자만이랬어요. 세상에서 그 누가 감히 천중일정(天中一鼎), 무영탐화랑(無影耽花郞), 천수옥환겁(千手玉環劫), 복마엽주(伏魔葉主)를 두고 성격이 화급하다고 말 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 열 개의 하늘이 지상에 군림하나니, 그 중에서 천중일정은 한 개의 잎사귀로 만마(萬魔)를 굴복시키며, 천 개의 손과 한 쌍의 옥환으로 천하를 뒤덮는다. 그러나 더욱 더 무서운 것은 그림자 없는 그의 일신이니, 천하의 딸 가진 자는 조심하라. 꽃을 즐기는 그의 재능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이 시대가 천중일정으로 지정해준 자, 그에게는 무영탐화랑, 천수옥환겁, 복마엽주라는 많은 별호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 몸에 그런 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밖에 없는 그의 이름은 이러했다. 영호천문(令狐天文). 설야를 달리는 두 남녀 중 일인이 바로 당금 우내십정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존재인 천중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기를 가진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의 존재를 알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항간에 떠도는 경구가 이미 그녀를 고스란히 대변해주고 있으니까. - 네 송이의 꽃을 조심하라. 천주사대기화(天柱四大奇花)는 모두 독(毒)을 품고 있나니, 그 중에서도 남천백리화(南天百里花)는 가장 달콤하면서도 무서운 독을 지니고 있다. 남천백리화 옥화미(玉花美). 이것이 만삭인 백의미녀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희대의 탐화랑 영호천문이 마침내 안주하게 된 한 송이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위이잉-- 휘잉--! 바람이 더욱 거세어졌다. 영호천문은 옥화미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후후... 내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지는 화미도 잘 모를 거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결심했었소. 당신을 아내로 맞은 후 무림을 영원히 떠나리라고 말이오." 그 한 마디에 옥화미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황홀할 정도로 이채를 발했다. "그 말,ㅕㅛ 정말인가요? 지금 당신은 이렇게 혹한을 무릅쓰면서까지 그곳으로 가고 있잖아요?" "하하하하... 그 일은 내 결심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오. 다만 옛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데 의의를 둘 뿐이니까." "그럼 꼭 이런 때가 아니라도......." 옥화미의 불만 섞인 음성을 영호천문이 중도에서 끊었다. "화미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그러나 이번의 만남은 미리 삼 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오. 너무도 중대한 의미가 있는 회합인지라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빠져서는 안되오." 그 순간, 옥화미의 눈 속에서 또 다른 빛이 섬광처럼 떠올랐으나 이내 스러져 버려 영호천문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긴 십정(十鼎)들의 모임이니......." "하하... 이해해 주어 고맙소. 나도 화미가 그렇게 나와 주리라고 믿고 있었소." 영호천문은 짐짓 크게 웃고난 후, 한성(寒星)과도 같은 눈을 들어 야천을 응시했다. "곧 눈이 그치고 바람도 잘 것 같소. 화미, 어떻소? 좀 움직여볼 수 있겠소?" 옥화미는 생긋 웃었다. "다행히 아가가 잠잠해졌군요." "하하하... 그럼 그 녀석이 다시 요동치기 전에 어서 갑시다. 사, 오리만 더 가면 틀림없이 인가가 나올 것이오." 번뜩하고 마치 별빛이 명멸하듯 두 남녀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휘이잉-- 휘잉--! 설풍만이 여전히 남아 황원을 휩쓸고 있었다. ② 화로(火爐). 그리 크다 할 수는 없었으나 제법 널찍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객방 한가운데에서 화로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침상에는 막 새로 갈은 듯한 침구가 깔려 있었으며, 그 위에 배가 불룩한 백의미녀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남천백리화 옥화미였다. 그 옆에서 영호천문이 깊은 애정이 담긴 눈길로 지그시 옥화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이따금씩 화로에 머물 때면 다소 복잡한 감정이 눈가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의 뇌리에는 줄곧 한 가닥 상념이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강남....... 그래, 물이 있는 곳이 좋아. 낮은 구릉지대에 도림(桃林)이 우거져 있으면 더욱 좋고, 집은 두세칸 쯤의 띠집이면 족하겠지. 아이는 뭐든 제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할 테다.' 회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아직도 약간은 놀라웠는데,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으음, 녀석이 뛰어 놀 때면 나는 그림을 그리자. 시(詩)는 쓰지 않으리. 삶 자체가 이미 시일 테니까. 그리고 검(劍)은.......' 영호천문의 상상은 어느덧 무한한 기쁨을 동반한 채 점차로 실체가 되어 이어져가고 있었다. '검은 도림에 묻으리라. 아주 깊이....... 혹시 모르지, 아들놈이 검을 배우겠다고 조르면 그때는 도화목(桃花木)을 분질러 가르치리라. 대신 베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검을 가르칠 것이다. 반드시.......' 그의 입가에 언뜻 미묘한 미소가 매달렸다. '아내는 잔소리를 하겠지만 사내라면 약간의 호신술 정도는 익히는 것이 좋아. 그 외의 것은.......' 그는 웃다 말고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버린다! 아무 미련없이 다 내버릴테다.' 타다닥... 타닥......! 불씨가 타오르며 소리를 내자 영호천문은 비로소 공상에서 깨어났다. 이제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신비할 뿐, 방금 전까지도 존재했던 차가운 광채는 다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이름하여 천수(千手). 강호인들은 지금까지 그의 손을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그 손이 냉혹무비한 살수(煞手)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눈빛을 달리 했듯 그의 손도 전해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 민첩함과 예기(銳氣)가 거두어지니 오직 진득한 애정만이 깃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화미.......' 영호천문은 옥화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겉보기에 그녀는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으나 도시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해산일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무리한 것은 아닐까?'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강남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너무 멀었고, 그로 인해 얻은 것은 일말의 후회였다. '쯧! 혼자 올 것을....... 화미 혼자 출산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딱하게도 내가 이처럼 곁에 있어 본즉 아무런 도움이 되어줄 수가 없구나.' 출발 당시에도 그러했듯 치기를 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젊음은 이내 안면에 미소를 드리우게 했다. '후후... 설사 죽을지언정 한시라도 나와 떨어질 수 없다고? 화미, 그대의 그 말에 내가 졌었다. 그래서 위험을 예상하면서도 이곳까지 데리고 오게 되었지.' 영호천문은 그녀의 섬섬옥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조금만 참아라, 화미. 이후로는 정녕 무림을 잊고 그대만을 위해 살테다. 내 나이 불과 십칠 세라지만 그간의 세월은 능히 일갑자(一甲子)를 뛰어넘고도 남을 파란의 세월이었다.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다. 남은 것은 그대를 사랑하는 일뿐.......' 그는 침상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잉....... 삭풍에 문풍지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지잉!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영호천문은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양손목에 채워져 있던 한 쌍의 옥환이 기이한 음향과 함께 심각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만년취정신옥(萬年翠精神玉)으로 만들어져 굳기가 천하에서 으뜸인 태을쌍환(太乙雙環)에 금이 가다니.......' 실제로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와 더불어 영호천문은 피할 길 없는 불길한 예감이 비수로 후비듯 가슴을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기억의 한 편에서는 불현듯 이런 말이 떠올랐다. - 조심하라. 태을쌍환은 영물(靈物)이다. 만일 쌍환에 금이 간다면 그것은 환주(還住)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징조다. "으음......." 영호천문은 양 손목에서 비취빛을 발하고 있는 태을쌍환을 바라보며 눈썹을 가늘게 경련했다. 태을쌍환의 균열은 신중하게 들여다 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이 징조는 이번의 회합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한낱 기우일 뿐, 그들 중 누구도 나를 해치지 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힘의 균형이 깨어지는데 누가 그것을 원하겠는가? 혹시 그들 구 인(九人)이 모두 연합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도저히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영호천문은 이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창가로 걸어갔다. 드드득......! 창문을 열자 눈보라가 휘날리는 야천이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언제 고심했냐 싶게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지난 삼 년간 우리들이 거둔 성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후훗... 누가 감히 당금 무림이 십정의 천하라는 것을 부인하겠는가?' 영호천문의 눈이 일순 무서운 신광을 뿜어냈다. '과연 누가 천하제일정이 될 것인가? 우리 십 인은 약속했었다. 천하제일정에게 모든 것을 영위하기로.......' 그러나 그의 눈은 곧 부드러운 빛을 회복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그것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모는 것을 다 잊기로 결심했지 않은가? 이번의 만남 이후로 어딘가에 조용히 묻히기로 작심했으면서.......' 빙글하고 그는 돌아섰다. 그런 그의 눈길은 옥화미의 배에 가서 머물렀으며 확고한 신념으로 빛나고 있었다. 두두두......! 속도가 다소 늦춰져도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마차를 타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때는 정월하고도 십이일, 사람들이 원단(元旦)의 흥청거리는 분위기에서 다소 벗어나 있을 시기였다. 영호천문은 사랑하는 아내 옥화미와 함께 경신법을 포기한 채 마차를 빌어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옥화미는 이따금씩 진통을 호소하곤 했다. 하지만 약속일은 바로 사흘 후인 정월 보름이었으므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앗!" 두두두두두-- 마차는 그의 채찍질에 따라 동토(凍土) 위를 최대한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하란대산(賀蘭大山). 그곳이 바로 목적지이자 십정을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그것도 낙일애(落日崖)까지 가려면 아무래도 벅찬 일정이었다. "으음... 음......." 마차 안에 신음소리가 번지기 시작한 것은 십삼 일부터였다. 밤을 꼬박 새워 달리다 보니 덜컹거리는 진동을 이기지 못해 산통이 예상보다 빨리 온 듯 했다. 옥화미는 인내를 발휘하느라 입술을 악다물고 있었으나 일견하기에도 신색이 말이 아니었다. 아랫배를 감싸안은 그녀의 몸이 줄곧 심한 경련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시오, 화미. 하란산 기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몸을 풀 수 있을 거요." 영호천문은 초조한 얼굴로 옥화미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일이 정녕 공교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칫하면 산일과 약속일이 겹치게 생겼으니 그로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즉 그는 일신상의 문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태을쌍환에 금이 갔다는 사실은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십사 일의 아침. 두두두....... 마차는 대평원(大平原)에 접어들고 있었다. 눈 덮인 평원의 끄트머리에 웅장무비한 거산이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나마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그 산이 바로 하란산이었다. 중원 북방의 관문이자 하늘이라 불리우는 이 하란산을 두고 사람들은 영웅(英雄)의 기상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다 왔소. 화미, 저기 하란산이......." 영호천문은 말하다 말고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품에 안겨 있던 옥화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급히 말을 몰아갔다. "이럇!" 히히힝--! 옥화미의 보기 좋던 입술이 파랗게 죽어 있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무엇도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두두두두--! 마차는 자욱한 설분을 일으키며 하란산을 향해 무섭게 질주했다. 떠오르는 일출(日出)과 함께 산의 전경이 점차 확실하게 그의 눈 앞에 다가들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과 불안이 큰만치 이와 비슷한 부피로 영호천문의 심중을 차지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얼마 후면 태어나게 될 자신의 분신(分身)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최초로 어버이가 되는 감명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는 경황중에도 자문해 보았다. 드넓은 중원천지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피붙이 하나 없는 천애고아가 바로 그였다. 따라서 어엿한 가(家)를 이루게 된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대변할 수 없는 희열을 그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마차는 어느덧 눈 덮인 평원을 가로질러 하란산의 기슭에 다다르고 있었다. 전면을 열심히 주시하던 영호천문의 눈빛이 일순 번쩍하고 빛났다. "오오! 인가(人家)다." 그는 막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집단을 이루고 있는 산촌(山村)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때마침 조반(朝飯) 짓는 연기가 눈보라 사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는 그를 충분히 안도시키는, 한가롭고 정취가 넘치는 풍경이었다. "됐소, 화미. 이제 안심하시오." 영호천문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옥화미가 마치 듣기라도 하는 양 낮게 속삭였다. 마차는 곧바로 산가(山家)로 들어서고 있었다. ③ "아아악!" 산고(産苦)란 대체 어떤 것일까? 동아줄을 잡은 가녀린 손목에 푸른 힘줄이 돋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침상보는 그 손의 주인이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남천백리화 옥화미. 그녀로 말하자면 고고한 성품을 지닌 무림의 여걸(女傑)이다. 그런 그녀조차 이토록 무력(無力)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는데서 비롯된 고통이었다. "아악-- 흐윽!" 천정에 매달린 굵은 동아줄은 의지할 수는 있으되 고통을 덜어 주지는 않았다. 어찌나 안간힘을 썼던지 입술이 깨물려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를 의식하지도 못했다. 초산(初産)이 힘든다는 것은 인류사뿐 아니라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암컷이 태고적부터 익히 입증해온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출산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산파의 얼굴에서도 땀이 흐르고 있었다. "옳지! 그렇게 힘을, 힘을 더 줘요." 직접 고통을 겪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겠으나 곁에서 지켜보며 격려하는 일만도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나의 생명이 고고성을 울리기까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역경을 수반했고, 그것은 문 밖에서도 과히 다르지 않았다. 영호천문. 그는 뒷짐을 진 채 연신 초조한 기색으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지금 이중고(二重苦)을 겪고 있는 처지였다. 오늘이 약속일인 정월 십오일이다. 벌써 미시(未詩)가 지나 곧 해가 기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가야 한다. 십오야의 달이 떠오르기 전에 낙일애에 당도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발 화미가 그 전에 아이를 낳아 주었으면.......' 소망은 어디까지나 그저 소망에 그치는 법인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흐으윽! 아아......." 진통으로 인한 신음소리만이 여전히 계속될 따름이었다. 그나마 지쳤는지 그 신음은 아까보다 현저하게 낮아져 있었다. 영호천문은 불안한 눈으로 다가오는 야색을 살폈다. '조금 후면 달이 뜬다.' 그는 갑자기 주먹을 와락 움켜 쥐었다. '회합에는 결코 빠질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필히 은퇴의 뜻을 밝혀야 한다.' 영호천문은 여인의 입술처럼 붉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미안하오, 화미. 나는 지금 떠나야겠소.' 생각과 행동은 거의 일치했다. 스슷! 그의 신형은 야음을 타고 그대로 희미한 연기로 화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직후, 한 가닥 처절한 비명이 야공을 갈랐다. "아아악--!" 그것은 물론 옥화미의 것이었다. 한 줄기의 백선(白線)이 달을 이등분하고 있다. 스슷--! 아니, 꼭 그렇게 보였다. 영호천문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낙일애를 향해 쏘아져 가고 있었다. 그곳은 흡사 도끼로 내리찍어 세운 듯 매끈하게 잘려져 나간 벼랑이다. 깊이는 도시 헤아릴 수조차 없다. 마치 구천유부(九泉幽府)까지 통해져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고오오오오-- 마음(魔音)이 연신 근역을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돌풍과 더불어 묵운(墨雲)이 낙일애 아래로 휘몰아치면서 빚어낸 괴현상이다. 그 위로는 약 반 마장쯤 되는 반듯한 공간이 있었다. "왔군." 나직한 읊조림이 일었다. 그것은 낙일애 위에 대좌(對座)하고 있는 구 인(九人) 중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일제히 눈을 들어 천공을 응시했다. 십오야 만월의 정중앙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의 점(點)이 생기더니 점점 크게 확산되었으며, 종내 그 점은 사람의 그림자로 화해가고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흡사 대붕(大鵬)처럼 두 팔을 벌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쏴아-- 허공을 가르는 그의 옷깃에서 바람소리가 일었다. 이를 보고, 또 느끼는 구 인의 얼굴에 동류(同類)로 보이는 감정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 호의는 아니었다. 감탄을 내비치고 있으되 강한 질투의 빛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구 인은 모두 영호천문과 또래의 인물들이었다. 세인들이 만약 그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면 대개는 까무러치고 말았으리라.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연소한 나이로 당금 천하를 주물러 소위 십정천하를 이루고 있는 우내십정이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십분하고 있는 무서운 소년기인들은 약속일에 모두 만났고, 영호천문은 그들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에 사뿐히 내려서고 있었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긍지에 찬 눈길로 먼저 와 있는 아홉 명을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포권의 예를 취했다. "늦어서 미안하네. 정말 반갑군." 그 말에 소년들은 대답 대신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핫......!" 쿠르르르....... 구 인이 합창하듯 토해낸 호기만장한 웃음 소리에 낙일애가 무너질 듯 진동하며 만년설(萬年雪)이 금이 가 흘러내렸다. 일반인들이 근처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으리라. 틀림없이 고막이 터지고 심맥이 파열되었을 테니까. 그들의 웃음에는 가공할 내공(內功)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아홉 인물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과 눈이 부딪치자 그들은 똑같이 상대의 눈에서 피끓는 야망과 집념, 그리고 투혼과 패기 등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다만 아쉽다면 삼 년만에 만났다는 그들 사이에서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개중에서 영호천문만이 약간 다른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내심으로는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저런 눈을 가지고 있었겠지. 저들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심정이었으니까.' 그는 스스로의 말마따나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린 자였다. 때문에 그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되려 산고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을 옥화미의 얼굴일 따름이었다. '이들과 나는 이제 길이 다르다.' 영호천문은 이런 생각을 가지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나머지 구 인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들로 말하자면 자신과 똑같이 천애고아들이며 똑같은 성장과정을 거쳤다. 불과 한 살때부터 만년독지(萬年毒池) 속에 담구어졌고, 불철주야 피나는 수업을 쌓아야 했던 이 시대(時代) 최고의 인고자(忍苦者)들이었다. 대체 전신의 살껍질이 벗겨지기를 그 몇만 번이던가? 초강자(超强者)가 되어 십정천하를 이룬 후 이 자리에 다시 모이니 일편으론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천후(天候), 오랜만이다." 영호천문은 자신의 우측으로 첫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인물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용천후(龍天候). 당금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 이름은 이미 구주를 진동시키고 있었으므로. 심지어는 천마진혼등(天魔鎭魂燈), 혹은 마야(魔爺)라고 불리우는 그를 두고 이런 싯구가 나돌 정도였다. 무림에 하나의 등(燈)이 나타났으니, 그 등롱이 걸리면 군마(群魔)가 호곡한다. 마인(魔人)이라면 등을 만나지 말라. 마야, 그가 오고 있다. 그대 별호에서 마자(魔字)부터 속히 떼어라. 아니하면 마야가 직접 너의 목을 떼리라. 마야 용천후는 일신에 먹빛같은 흑삼(黑衫)을 입고 있었다. 호안(虎顔)에 눈썹이 유난히 짙고 길다. 그 멋들어진 장미(長眉)에서는 숨막히는 매력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용천후는 영호천문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향해 말없이 씨익 웃었을 뿐이었다. 영호천문은 들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 천문(天文), 나도 정말 반갑다. 그 자신이 야망의 늪에서 벗어나 여유로와진 탓일까? 그의 관념은 용천후의 웃음에서 그런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이어 영호천문의 눈길은 용천후를 떠나 일신에 회의(灰衣)를 걸치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에게로 향해졌다. 그 자는 머리에 초립(草笠)을 쓰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초립 밑으로 번뜩이고 있는 눈빛은 가히 비수(匕首)를 감춘 듯 예리하기 그지 없었다. 이외에도 그 자의 특징으로는 도(刀)을 들 수가 있었다. 한 자루의 묵혈도(墨血刀)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자가 잠자는 순간에도 묵혈도를 손에서 절대 떼어놓지 않는다는 것을. "냉무혼(冷無魂), 여전하구나." 영호천문이 말을 건네자 냉무혼은 묵혈도에 올려 놓아진 손가락 하나를 까딱해 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우웅....... 그 가벼운 반응에도 도가 울었다. 냉무혼의 별호는 무혼사도(無魂死刀), 그를 위한 싯구도 물론 있다. 무조건 그와는 만나지 말라. 무혼사도에는 눈이 없으니, 일단 뽑혔다 하면 베인다. 그도 역시 우내십정 중 일정의 자격으로 이곳에 와 있었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그다. 영호천문의 눈길은 다시 그 옆으로 옮겨졌다. "옥기(玉奇), 너의 용모는 갈수록 빛을 발하는구나. 이대로 가다가는 반안(潘安)을 능가할 것 같다." 그 말에 흰 이를 내보이며 화사하게 웃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신에 연남빛 유삼을 입고 있었는데, 웬만한 여인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위인이었다. "하하... 남들도 그렇게 말하기는 한다만, 어찌 감히 무영탐화랑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옥면사랑(玉面死朗) 도옥기(陶玉奇). 그에 대해서 세인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미면(美面)의 사내를 꼽으라면 단연코 옥면사랑이리라. 그는 절세가녀보다 아름다우니. 그러나 그에게 붙어있는 사랑(死郞)의 의미만은 잊지 마라. 그 얼굴에 반하는 순간 그대에게는 사신(死神)이 찾아든다. 영호천문은 싱긋 웃고 나서 또 눈길을 움직였다. 이번에 그의 시계(視界)에 포착된 인물은 인상착의가 매우 특이했다. 일신에 핏빛 적삼(赤衫)을 입었는데, 얼굴까지도 피처럼 붉었다. 그 뿐만 아니라 눈조차도 혈안(血眼)이었다. 더욱 섬뜩한 것은 그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손바닥 위에 약물로 축소시킨 하나의 인두(人頭)를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왕영(王永), 너는 그 고상한 취미를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 영호천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왕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의외로 이목구비가 영준했 으나 혈면으로 인해 전해지는 느낌은 여전히 기괴했다. "크ㅋ... 천문, 나를 비웃는 것이냐? 그래도 계집과 사랑놀이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나는 지금까지 꼭 구백쉰아홉 개의 인두를 모았다. 대단하지 않느냐?" 자랑처럼 내뱉은 이 말의 의미를 뒤집어 보면 결국 그가 구백 오십구 번의 살인을 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 그의 이름은 혈면인도왕(血面人屠王) 왕영(王永), 그의 기록에 걸맞는 싯구가 무림인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오오, 희대의 살인광(殺人狂)! 그는 인육(人肉) 다루는 일을 즐겨 하노니, 이 시대 최고의 인간백정을 꼽으라면 단연 그를 꼽으리. ④ 영호천문. 그는 한결 느슨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마운(司馬雲), 너와 함께 지혜나 시에 대해서 논(論)한 지도 벌써 오래된 것 같군. 안 그렇느냐?" 왕영의 곁에서 미소를 흘리는 인물은 청삼(靑衫)을 입고 있었다. 그 자는 허리춤에 천산(天山) 특산의 만년한옥필(萬年寒玉筆)을 차고 있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낀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사망송시군자(死亡誦詩君子) 사마운(司馬雲). 시를 읊으며 살인하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가 일구(一句) 이상의 시를 읊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마라. 그는 누구를 만나도 친절하게 시를 들려 주거니 그 일구가 끝났을 때, 네 이마에는 구멍이 뚫려 있으리라. 사마운이 다소 비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후후... 천문, 시 한 편 감상하겠느냐? 내 너를 위해서라면 멋진 것으로 선사할 수 있지." 영호천문은 짐짓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사양하겠다. 네 싯구를 듣느니 차라리 장송곡을 듣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후후후....... 하지만 곧 들어야 할 걸?" "흐음? 그건 무슨 뜻......?" 영호천문은 묻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 자리에 있는 아홉 명의 인물들은 친구이면서 친구가 아닌 인물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목적으로 길러졌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영호천문 자신이 거기서 떠나 있다 보니 잠시 그 사실을 잊었을 따름이었다. 그는 문득 한 가닥의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자신도 모르게 손목에 채워져 있는 태을쌍옥환을 응시했다. 옥환에는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더 많은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설마......!' 영호천문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의혹을 애써 부인하며 한 사람의 거인(巨人)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마운의 옆에 앉아 있는 자는 구척이 넘는 거구였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구레나룻이 가득 뒤덮여 있었다. 일신에는 그저 수수한 갈포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손바닥 하나의 크기가 솥뚜껑만 했다. "반갑다! 천문." 웅웅....... 그 자의 음성은 흡사 종(鐘)이 울리듯 진동이 컸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그가 고함을 내지른 것이 아니라 다정하게 속삭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씩 웃어 보였다. "방천(方天), 내 귀가 건재한 것을 실감한다. 적어도 네 음성의 파동을 멀쩡히 견딜 정도면 그리 말해도 될 테니까." 그 자는 거령신장(巨靈神將) 방천(方天)이라 불리웠다. 무림에서 제일 가는 역사(力士)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감히 그와 힘을 겨루고자 하는 자가 없다. 게다가 그는 전신 어느 곳에도 도검(刀劍)이 박혀 들지 않고, 가벼운 일장(一掌)으로 철(鐵)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위인이다. 그의 철사자후(鐵獅子吼)는 산사태를 일으킬 정도다. 영호천문은 이내 방천에게서 시선을 옮겨 그와 너무도 대조적인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키라야 겨우 사척이나 될까? 난장이에 속하는 그 자는 고개를 발딱 젖힌 채 만월과 그 주변의 별을 관측하고 있었다. "쯧쯧! 아깝군, 아까워. 천문성(天文星)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으니. 천문, 너는 저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지?" 난장이의 느닷없는 질문은 영호천문을 아연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라 지금까지와 똑같이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글쎄다. 공야중(公冶仲), 네 귀신같은 신복술(神卜術)에 내가 뭐라고 토를 달겠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야 말없이 감탄하고 있는 게 고작이겠지." "크흣! 천문, 역시 너는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문제는 네가 그 방면에서 나보다 무식하지 않다는 사실이지. 너는 어쩌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영호천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공야중, 네 그 뛰어난 지혜를 모조리 행도(行道)에 투자했더라면 천중일정의 자리도 그리 멀다할 수 없었을 텐데. 너야말로 그것을 알고 있었느냐?" "클클... 그런 건 관심없어." "정말로 그럴까? 후후후......." 영호천문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르게 한 인물, 그 자는 천뇌토군(千腦土君) 공야중이라 했다. 천(千)의 뇌(腦)를 가지고 있으며 천기(天機)를 헤아릴 줄 안다고 자부하는 또다른 일정(一鼎)이 바로 그였다. 그런만치 그는 항상 점(占) 치기를 즐겨했으며 그의 점이 예고하는 것은 바로 상대의 죽음이었다. 천뇌토군의 점궤는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천기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그가 상대의 혼(魂)을 걷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무인(武人)이기보다는 괴인(怪人)이었다. 그 곁에는 화복(華服)을 입은 한 인물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 자는 뚱뚱했다. 마치 작은 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전신이 금시라도 흘러내릴 듯한 거대한 비곗덩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양뺨의 살만 해도 턱 밑까지 늘어져 있다. 눈은 아예 살 속에 푹 파묻혀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 일 지경이다. 그는 둘레를 짐작할 수 없는 허리에 금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있었으며 머리에 금관을, 그리고 손에는 열 개 이상의 이름도 알 수 없는 보석반지를, 팔뚝에는 보옥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팔찌까지 차고 있었다. 손에 잡고 있는 단장도 황금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는 몸 전체를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신발에도 최소한 백 개 이상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에게도 말을 건넸다. "금백만(金百萬), 너는 그 동안 더 부자가 된 것 같군?" 뚱보 금백만은 실눈을 휘며 웃었다. "흘흘... 아직 멀었어. 지금까지 고작해야 황금 팔천만 냥밖에 는 모으지 못했으니까." 영호천문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대체 그 많은 재물은 모아다 어디에 쓸 참이지?" 금백만은 정색을 지으며 엄숙하게 답했다. "쓰다니! 아까와서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 나는 진시황보다도 백배 더 화려한 무덤을 만들어 저승으로 가져갈 생각이다." 그의 농담은 영호천문의 마음을 한결 풀어 주었다. "후훗! 백만, 네 뜻대로 되기를 빌겠다." 그는 느긋해진 안색으로 황금전주(黃金殿主) 금백만을 응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는 자, 태산에 웅장무비한 황금전(黃金殿)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둥, 벽, 천정, 기와에서 화목(花木)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황금으로 조성해 놓았다던가? 한 마디로 살아 있는 황금의 신이다. 쓰고 있는 무기도 다르지 않아 회수가 불가능할 수도 있는 암기류조차 황금과 보석을 사용하는 위인이다. 좌우간 어떤 방편으로든 금백만도 천하패권을 놓고 다투는 우내십정 중 일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십오야의 달이 중천을 향해 소리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문득 영호천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단전(丹田) 어림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과 직결되는 현상이었다. '또......!' 영호천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그는 이런 현상을 종종 경험했고, 이와 더불어 차츰 공력(功力)이 감퇴되어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동안 은밀히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 나름대로 치료에 힘써 보기도 했지만 상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음한한 기운이 무공으로 철저하게 단련된 그의 육신을 서서히 망가뜨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선천적 기병(奇病)에 대해서도 연구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의술에 대해서도 깊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그가 그런 병 따위를 걸머지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몰랐을 리가 없었다. 이처럼 영호천문은 여하한 가능성이나 상식선에도 완전히 벗어난 병을 남몰래 앓고 있었으며, 덕분에 그는 알게 모르게 공력을 어느덧 반 가까이 상실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마지막 일 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홍일점(紅一點). 자의(紫衣)를 입고 있는 그녀는 단순히 앉아 있는 자태만으로도 천하의 남성들을 뇌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름답다 못해 요요로운 기운이 달빛 아래서 그녀의 전신에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얼굴을 자색의 면사로 가리고 있어 용모는 알 길이 없었으나그녀에게서는 가히 폭발적인 염기(艶氣)가 발산되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녀에게도 빼놓지 않고 인사말을 전했다. "무무(舞舞), 오랜만이군." 왠지 그의 음성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탄식이 깃들어 있었다. 이를 느낀 것일까? 자의소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면사가 미미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영호천문의 씁쓸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삼 년 동안의 세월이 그대를 많이 변모시킨 것 같군." 자의소녀는 고개를 한 번 까닥해 보였다. "그럴 거야. 아마도......." 그녀의 음성에서 일종의 회한이 묻어 나오는 것을 영호천문은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바는 없었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짐짓 무감동한 어투로 물었다.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지. 흘러 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무무는 무산(巫山)에 화무궁(花舞宮)을 세웠다던데......?" 자의소녀 역시 한결 정돈된 음성으로 응수했다. "소식이야 나도 끊임없이 듣고 있었지. 최근에는 당신에게 여인이 생겼다고?" 영호천문은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매달았다. "그래. 아주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이야." "우선 축하해야겠군. 그런데 그녀는 왜 같이 오지 않았지?" 자의소녀의 물음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침 해산을 앞두고 있어서 그리 되었어." 상황이 어떻건 태어날 아이에 관한 한 그로서는 미리부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그것은 무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도 단지 그 한 마디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의소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면사를 뚫고 섬광처럼 강렬하게 솟았다가 꺼졌다. 이는 정황으로 보건대 지독한 애증(愛憎)이 빚어 놓은 결과인 것 같았다. 갑자기 싸늘하게 변해 튀어나오는 그녀의 음성이 그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었다. "축하할 일이 겹쳤군. 부디 옥동자이길 바래." "고맙군." 영호천문은 심신을 무수한 바늘로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겨우 이런 말을 했을 따름이었다. 자의소녀는 공히 천하제일의 기녀(奇女)이다. 만천화화(萬天花花) 화무궁주(花舞宮主) 화무무(花舞舞). 이런 이름을 가진 여인에게 그렇듯 진한 감정을 전달받았다면 내용이야 어떻든 그는 행복한 사내임에 틀림없었다. 하늘에 가득 날리는 꽃을 보았는가? 화무궁녀(花舞宮女)를 만나지 말라. 그녀들의 얼굴을 봄으로써 네 혼(魂)은 구천을 헤맬 것이며, 네 육신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니....... 이 싯구가 말해 주듯 그녀가 무산의 신녀봉(神女峯)에 세웠다는 화무궁은 무림금역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수많은 풍류남아들이 그곳으로 꽃을 찾아갔다가 백골로 화해 버려지거나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악명 높은 화무궁주 화무무, 여인천하를 꿈꾸는 그녀 또한 우내십정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달이 마침내 중천에 이르렀다. 음산한 월영(月影)이 낙일애 전체를 고루 비추고 있었다. 휘이이....... 음풍과 함께 눈가루가 그곳을 잠시 자욱한 설무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마치 십정의 만남이 가져올 결과를 예시하듯. 제 2장 혈월(血月)이 뜨고 그가 진 날 ① 중천(中天)에 걸린 달이 휘황한 빛을 뿌렸다. 그러나 한 순간, 그 빛을 뒤덮고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갑자기 피보라를 흩뿌린 듯한 홍무(紅霧)가 소리없이 달을 침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혈월이 사위에 붉은 음영을 선사하고 있었으니, 이는 누가 보아도 분명 길조(吉兆)는 되지 못했다. 그 아래서 한 가닥 밤의 적막을 찢는 음향이 있었다. "으아앙--!" 을씨년스러운 정경 가운데 마침내 한 아이가 태어났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어머니로, 또 풍류남아이자 멋진 승부사(勝負師)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첫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물론 아이의 어머니는 출산 직후 달이 어떤 징조를 보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갓난아이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었다. "아이야, 너는 천하제일인의 아들이다. 따라서 너도 반드시 천하제일인이 되어야 한단다. 무슨 방법을 쓰든......!" 묘한 어감을 풍기는 음성이다. 아이를 얻은데 대한 기쁨이 주(主)였지만 왠지 그 속에는 진한 통한이 배어있기도 했다. 아이가 이를 느꼈을 리 없었다. 그저 의무인 양 앙증맞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연신 자지러지게 울고 있을 뿐이다. "으아아앙--!" 영호천문. 그의 눈썹이 은연중 가벼운 떨림을 보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심중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갈등 때문이었다. 왜 안그렇겠는가? 그의 나이 겨우 십칠 세,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입지(立志)조차 채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을 시기다. 남다른 생(生)을 살게 되는 바람에 그는 자의에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일찌감치 천하를 떨어 울렸으며 그런 능력을 기반 삼아 무엇인가 크게 달성을 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남천백리화 옥화미를 만나기 전까지, 아니 좀 더 정확히 이르자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의 그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태까지의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후후... 여기에 모여 있는 구정(九鼎)이 아마도 내 은퇴선언의 증인들이 되어 주겠지.' 영호천문은 눈을 들어 붉은 달을 올려다 보았다. 비로소 느낀 것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십정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그는 이를 개의치 않고 입을 떼었다.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구정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에서 호기심이라던가 의혹 따위는 거의 엿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냉혹하리만큼 확고한 의지만을 표명하고 있었다. 천중일정이라면 공히 그들의 수장(首將)격이다. 다같이 출발한 행도에서 가장 천하제일정의 위치에 가깝게 가 있었으므로. 천중일정이라는 별호 자체에 어쩌면 그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나머지 구정의 시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세인들이 붙여준 가칭(假稱)이라고나 할까? 사실 누가 있어 천하제일정이 누구라고 딱히 꼬집어 논할 수 있겠는가? 십정 모두가 노리는 자리인 줄을 알면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십중팔구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려우리라. 아무튼 천중일정이자 무영탐화랑, 천수옥환겁, 복마엽주 등 이 시대에 가장 긴 별호를 가지고 있는 영호천문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약정했었다. 우리들 중 천하제일정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모두 그 자에게 굴복하기로 말이다." 주지의 사실에 대해 뭐라 부언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중인들은 한결같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우리들의 승부는 결정나지 않았다. 이것은 역시 서로간에 능력차가 별로 없다는 의미이겠지. 방식만 다를 뿐 저마다 무림사에 일획을 그었다고 본다." 영호천문은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나는 오늘부로 그 경합에서 빠지겠다." 그 한 마디가 던진 충격파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삽시에 주변의 공기가 어떤 무형의 힘에 의해 소용돌이쳤다. 경악으로 인한 탄성, 혹은 한숨 등이 그 뒤로 이어졌으나 영호천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더불어 나는 이 순간부터 무림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뭐, 뭣이......?" 구정은 하나같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그들에게 있어 영호천문의 말은 단순한 개인사로 받아들여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호천문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이별이 서운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우리들 사이에서 감상적인 말은 위선처럼 들릴 테니까. 나는 본래 피비린내 나는 무림의 생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인연을 끊고자 결심한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지. 이는 절대 내 말을 번복하거나 철회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으음......." 마야 용천후가 나직이 신음을 터뜨렸다. 이들 십 인 중 단연 최고의 웅심(雄心)을 가지고 있는 자, 때문에 영호천문과는 내내 호적수였던 그가 입을 열었다. "천문, 너는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하긴 과거에도 너는 항상 나 용천후를 놀라게 했었지."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천후, 너에겐 미안하게 되었다만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냐? 한 명이 빠져 주면 그만큼 득이 될텐데?" 용천후의 장미(長眉)가 일순 꿈틀 했다. "흐음, 뼈가 있는 말이로군." "그럴지도 모르지. 노하지는 말아. 나도 한때는 너와의 승부, 그 자체가 생의 가장 큰 의미였으니까." 용천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붉은 빛이 깃든 달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천문, 너는 지금 우리 앞에서 겸손을 가장하고 있다. 마치 우리 모두가 동격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 자신뿐 아니라 우리도 다 알고 있다." "후후... 그런가?" "그것을 물거품으로 돌리겠다는 거냐? 이렇게 쉽게......?" 영호천문은 정색을 지었다. "나는 영호천문이지, 용천후가 아니다." 이번에는 용천후가 안면을 굳혔다. "말 잘 했다. 나였다면 분명 너처럼 행동하지 않았겠지." "그럼 되었군.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된다." "아니,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용천후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기가 매달리는 것을 보며 영호천문은 눈썹을 불쑥 치켜 올렸다. "그건 무슨 뜻이지?" "너는 결코 네 마음대로 우리들과의 경합에서 빠지지도, 무림에서 은퇴하지도 못한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은 이미 끝난 얘기다.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후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음성은 어감이 틀렸다. 왜냐하면 말한 사람이 용천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음성의 주인은 뜻밖에도 이제껏 잠자코 있던 무혼사도 냉무혼이었다. "왜 그렇지?" 영호천문은 아연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옥면사랑(玉面死朗) 도옥기가 나섰다. "천문, 네 말마따나 천하제일정에게는 우리 모두 굴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히도 굴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이는 상대가 누구이건 마찬가지다." 영호천문의 눈에서 일순 새파란 광망이 일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해라." "그야 어렵지 않지. 너의 독주(獨走)를 지켜 보며 우리는 그 동안 합의를 보았다. 너에게 머리를 숙이느니 차라리 우리들 공동의 적(敵)으로 삼기로 말이다." 왕영(王永)이 괴상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클클... 천문, 나는 말이다. 오래 전부터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과 두상을 가진 남자를 골라 혈인두(血人頭)로 만들어 갖고 싶었다. 그 대상이 바로 너였다." 영호천문의 안면이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만들겠다는 것이냐?" "그래. 클클......." "내가 은퇴를 선언하는 마당에도 말이냐?" "그거야 네 생각이지, 내 생각은 아니지 않느냐?" "허허... 기가 막힐 노릇이군." 거의 할 말을 잃고 있는 그에게 사망송시군자 사마운도 빠질세라 거들었다. "천문, 내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놓은 싯구(詩句)가 있었다. 어디 한 번 들어 보겠느냐?" 사마운은 대답도 듣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黃昏一松葉 葉色靑變赤 丹心胡不變 有罪第一人 황혼녘의 한 그루 소나무 잎도 푸름이 물들어 붉게 변(變)하나니 피처럼 붉은 마음(丹心)인들 어찌 변치 않으랴?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제일인임이리라. 영호천문의 몸에서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군. 평생 한 구 이상의 시를 지어 본 적이 없는 네가 나에게는 무려 네 구나 선사해 주니." 사마운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그만큼 너를 인정하니까. 내 시 짓는 일에 좀 인색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예우를 모르지는 않거든?" 영호천문은 가슴 한구석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응대하지 않고 중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난장이 공야중에게서 뚝 멎었다. "합의를 보았다니 너도 같은 생각이겠지?" 천뇌토군 공야중은 킥킥 웃었다. "아까 벌써 말했지 않느냐?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빛을 잃어가고 있노라 했던 천문성은 바로 너를 뜻하는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쯧! 내가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했었군." 그의 말에 부응하듯 괴음향이 울렸다. 찌이잉......! 그것은 영호천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태을쌍환이 다시금 균열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그는 내심 자조를 금치 못했다. '설마 하며 부인했거늘 하필 그 부분이 사실과 들어 맞았군.' 그는 그때까지도 도시 믿고 싶지가 않았다. 환주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금이 간다는 태을쌍환의 전설이 구정에게서 입증되자 그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쳐 나오며 천중에 우뚝 서기까지 부지불식간 수많은 은원을 맺었던 그였기에 오히려 이런 상황은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었다. 세인들이 내실(內室)에 편안히 앉아 차(茶)를 마시며 달을 구경하고 있을 때에 그는 어느 쪽이 죽던 함께 자라난 인물들과 사생결단을 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눈길을 돌려 용천후를 응시했다. "이 일은 네 제안이냐?" "으음, 구정 모두의 공동의견이기도 하고." 용천후의 말에 그는 입술 꼬리를 기이하게 말아 올렸다. "후후... 시인(是認)은 하면서도 무척이나 야비하게 구는군. 고작 이 정도였느냐? 천후, 너의 기개란 것이?" 용천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지금 당장에는 내가 야비하게 보일지 모르나 훗날에는 그렇지 않을 거야." "힘으로 안되니 계(計)를 쓴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것도 역시 네 맘대로 생각하도록 해. 단, 너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명을 하수인 정도로 만드는 발언은 삼가하는 게 좋을 거야. 그들의 분노를 사면 자네에게 더 해로우니까." "그 충고, 고맙게 받아 들이겠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이랬다. 서로를 무섭게 견제해 왔으며, 그 와중에서 다른 팔 인을 또 경계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힘대 계략으로써 서로 적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두 사람 다 당면해 있는 현실을 심중으로 크게 아파하고 있다는 점이었으니, 이것은 어느 한 쪽의 배신이기보다는 크게 보면 처음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② 영호천문은 새삼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 그를 체념으로 몰고 간 것일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그는 상념에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쯤 화미는 아이를 낳았겠지? 여아일까, 남아일까? 후후... 여아라면 당연히 천하제일의 미녀가 될 것이고, 남아라면.......' 그는 의식 속에서 애시당초 자신이 이루고자 원했던 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인이 아니라 예인(藝人)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이윽고 그는 용천후를 돌아보며 최후의 일언을 던졌다. "내가 은퇴를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네 뜻을 수정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냐?" 용천후는 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하나의 등으로써 저 유명한 천마진혼등(天魔鎭魂燈)이었다. 이른바 마야로 불리우는 그의 신물(信物)이었던 것이다. "이게 내 대답이야. 이제야 말이지만 오늘을 위해 우리는 완벽한 준비를 해 두었다. 지금 와서 뜻을 꺾을 수가 없지. 또한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 시들었던 풀도 소생하는 법, 천중일정이 재출도(再出道)하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분명 내 선언을 번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 딱 잘라 말하는 용천후를 향해 영호천문은 고개를 저었다. "쯧! 내 미처 너를 몰랐나 보구나. 너는 아마도 계책에 능하다 보니 타인을 믿을 줄도 모르게 되었나 본데, 나는 너같은 위인을 심히 동정한다." "뭐, 뭣이......?" 용천후의 안면근육이 일시지간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영호천문은 그런 광경을 보며 자못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멋진 밤이군." "흐음?" "다시 없는 영광이라는 말이다. 나 영호천문이 구정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 다 같이 신나게 춤을 추게 되겠군. 너희들도 이 태을쌍환은 알겠지? 이것으로 나는 무수한 격전을 치루었다." 그 말에 용천후의 눈에서 기괴한 광채가 번뜩였다. "익히 알고 있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네 신마구룡편(神魔九龍鞭)이라는 것까지도 말이야." 영호천문은 허리띠 대신 감고 있던 검은 채찍을 어루만졌다. "그래, 이 신마편도 많은 일을 했어." 용천후가 덧붙였다. "그 뿐이 아니지. 신마편보다 더 강한 무기가 네 천수(千手)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것도 맞아. 겨우 한 쌍 밖에 안되는 내 손을 사람들은 무려 천 개로 보아 주더군." 용천후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 밖에도 너에게는 비밀 병기가 또 있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영호천문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그의 손등에는 굵은 심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자, 이제 시작할 텐가?" 그가 말하자 용천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그리 서둘 것 없지 않느냐?" "또 무슨 말이 남아 있지?" "최소한의 양심선언." 용천후는 큭큭 웃은 뒤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먼저 네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려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간의 정리에 대한 대가라고나 할까?" "좋다! 어디 들어 보도록 하지." 영호천문의 눈썹이 다시금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에 반해 용천후의 어투는 매우 담담한 것이었다. "너를 일대 일로 상대해서 이길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들 중 둘만 힘을 합해도 너를 필히 꺾을 수 있다. 인정하느냐?" "인정해야 되겠지." "솔직해서 좋군.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용천후의 물음에 영호천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훗...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라. 우리는 합격(合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승부는 어디까지나 공평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 듯한 얘기지만 별로 믿기지 않는군." "사실이다. 대결은 일대 일로 한다." 영호천문의 눈이 일말의 의혹을 띄었다. "정말이냐?" "후후훗......! 천문, 그래도 우리들은 명색이 천하를 십분한 우내십정이다. 어찌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겠느냐?" 그것은 영호천문으로 하여금 바늘구멍같은 희망이나마 갖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렇다면 내 혈육의 얼굴을 보게 될 가능성도 있겠구나.' 한순간 그는 가슴의 피가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는 언제고 대전에 임할 때마다 있어온 그의 버릇이었다. 삶이 포기되었던 순간에는 그것마저 잊고 있었지만 용천후의 한 마디에서 다시 본래의 습관이 되찾아진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요동치듯 끓어라. 나의 피여!' 영호천문에게도 목숨은 하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얻게 되자 그는 천하를 웅패하려 할 때보다 되려 자신의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해져 버렸다. 뜻이 아무리 커도 그 근간이 개인의 염원일 때는 사실 무엇도 두렵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남겨질 사람들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덧입고 나니 입장은 확연히 달라졌다. 영호천문은 이를 악물며 내심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베겠다! 너희들 모두를. 내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의 결심은 이제 확고부동한 것이 되어 있었다. 서서히 달이 기울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제일인은 걸음을 옮겨 구 인의 정중앙이 되는 위치에 가 섰다. 달빛이 그의 등을 비추었다. 덕분에 그의 일신을 감싸고 있는 백삼이 불그스름한 혈월광(血月光)에 젖어 들었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되느냐?" 그의 물음에 용천후는 씨익 웃었다. "아니, 그만 되었다. 너 스스로 확인하게 될 테니까." "확인이라니, 무엇을 말이냐?" "후후... 잘 못알아 듣는군. 그럼 말해 주지. 너는 우리들 중 가장 내공이 강한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영호천문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용천후." "틀렸어. 이 마당에도 겸손인가? 역겹군. 네 내공이 나보다 일푼 앞서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애써 폭발하지 않으려 감정을 억제하는 영호천문에게 용천후가 또 물었다. "그건 그렇고, 반대로 우리들 중에서 가장 내공이 약한 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지?" 영호천문의 고개가 절로 움직여졌다. 그것은 바로 옥면사랑 도옥기를 향해서였다. "옥기, 네가 정(情)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공 면에서 일인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인즉 여색을 밝히지 않았다면 크게 내공의 진전을 보았을 것이나 그렇지 못해 내력이 소모되었다는 뜻이었다. 도옥기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영호천문을 정시했다. "그렇게 듣기 좋게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든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지. 그러나 천문,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 대신 나에게는 다른 장점들이 많이 있으니까." "물론 그렇겠지." 영호천문의 뒤를 이어 용천후가 다시 말했다. "천문, 너는 우선 그와 일장(一掌)을 시험해 보아라. 그런 연후에는 오늘의 운세가 어떤지를 알게 될 테니까. 너에게는 실낱 같은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 영호천문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곧 침중한 그늘로 뒤바뀌고 말았다. '설마... 그것도 이들의 안배였단 말인가?' 그의 두뇌는 자신의 내공이 근래 들어 급격히 감퇴되고 있다는 사실과 현재의 상황을 빠르게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 진위를 점검하기라도 하듯 곧바로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빙글하고 허공에서 한 바퀴 원이 그려지는 순간, 그의 손은 놀랍게도 백색의 투명한 것으로 변했다. "옥환소수겁(玉幻素手劫)!" 위잉--! 파공음과 함께 대기가 마치 진공상태를 이루는 과정인 양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그 속에서 희디흰 손바닥이 전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졌다. "하하하핫......!" 옥면사랑 도옥기가 대소를 터뜨리며 장력을 마주 뻗어냈다. 그러자 도화빛을 띈 장영이 그대로 쏘아져 나갔다. 꽝! 격돌음이 일며 주위로 설분이 자욱하게 흩날렸다. "윽!" 영호천문은 짧게 비명을 터뜨리더니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입과 코로 실낱같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런 일이란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호천문은 경악과 동시에 절망을 느껴야 했다. '사실이었군. 한 올의 희망도 가질 수 없다더니.......' 그는 구정 중 일정, 그것도 내공이 가장 떨어지는 도옥기의 가벼운 공격도 받아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용천후가 곁에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핫......! 혹시 궁금하지 않느냐? 네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이다." 영호천문은 그 말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입과 코의 피를 쓱 문질러 닦으며 물었다. "왜지?" 그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뜻밖에도 조소였다. "후후후훗......!" 그것은 비단 용천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정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비웃음을 대하자 냉오하던 영호천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잔뜩 일그러졌다. 용천후가 웃음을 그치며 입을 뗀 것은 그때였다. "안된 얘기다만 너는 네가 가장 믿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했다. 반대로 우리에겐 더 없는 조력자(助力者)였었지." "조력자라고? 대체 누가 말이냐?" 영호천문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용천후는 한 곳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나오시오! 옥(玉)소저." "뭣이? 옥소저라면......!" 영호천문은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흡사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어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찢어질 듯 부릅떠진 그의 눈이 용천후가 가리키는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은 잔인한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거짓이다. 거짓이야......." 바위 뒤로부터 나타나 그의 시야를 점한 것은 다름 아닌 백의의 절세미녀였다. 옥화미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그가 무림을 떠나고자 결심하는데 있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여인....... 남천백리화 옥화미. 그녀는 갓 태어난 듯한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의 그녀가 일점의 후회나 자책도 내비치지 않는 지극히 담담한 표정이라는 점이었다. "화미, 그대가......!" 영호천문은 그저 눈 앞이 캄캄해질 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고 생각하며 내심 한 소리를 부르짖어야 했다. '이럴 수가!' ③ 용천후가 말했다. "천문, 너는 결코 멍청한 놈이 아니다. 그런즉 아마도 옥소저를 만난 이후부터 체력이 급격히 퇴조하는 것을 감지했겠지. 하지만 그 이유만은 너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언(無言)이 곧 답이었다. 영호천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심중으로 홀연히 외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맞다! 그래서 대체 어떻다는 것이지? 이제 와서 달라질 바가 없다면 차라리 내 귀에 아무 소리도 들려 주지 말거라.' 그는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와 함께 자신을 빼다 박은 듯한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달빛을 받으며 내 아이가 웃고 있다. 너는 과연 조금치의 가책도 없이 저 순수한 아이를 대할 수가 있느냐?' 그의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용천후가 말을 이었다. "네가 금강불괴지신이며, 만독불침(萬毒不侵)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지. 때문에 너는 보다 특수한 방법으로 당해야 했다. 아주 서서히, 네가 느끼지도 못하는 가운데 산공무형독(散功無形毒)이 네 몸에 침투했으니까. 후후... 궁금하다면 어떤 방법이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줄까?" 영호천문은 여전히 용천후를 돌아다 보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리 주오." 자르듯 짧게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상은 계속 이죽거리는 용천후가 아니라 바로 아이를 안고 있는 옥화미였다. 옥화미는 부지중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들었으며, 그래서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아이를 달라고? 그건 안돼!' 그녀는 저항했다. 배신의 대가로 자신이 겪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으나 혹여 아이에게 화가 미친다면 이는 충분히 거부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진 때문이었다. 거세되었다고는 해도 용(龍)은 어디까지나 용이다. 아직도 그의 일장(一掌)이면 무력한 갓난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는 흔적도 없이 당장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염려란 옥화미가 그때까지도 영호천문이라는 한 인간을 잘 몰라서 갖게 된, 일종의 기우(杞憂)였다. "화미, 나는 그 아이의 애비요." 영호천문이 되려 그녀를 안심시켰다. 왜일까? 그의 부드러운 음성을 접하자 새삼 옥화미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것은. 그들 사이로 용천후의 잔인한 음성이 파고 들었다. "천문, 옥소저에게 미련을 남기지 말아라. 그녀는 네 몸에 어떻게 독을 침투시켜야 하는가를 제안한 장본인이다." 영호천문은 마치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옥화미를 경계하기는커녕 반대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화미, 시간이 없소. 어서 아이를 내게 주오." 그의 망막에는 더 이상 그 무엇도 담기지 않았다. 단지 초조한 기색으로 혈월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는 갓난아이의 얼굴만을 빨아들일 듯 그득히 담고 있을 뿐이었다. "문(文)......." 옥화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 치고 있었다. 백짓장처럼 창백해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인간다운 표정이 깃들었다. 그래봐야 극도의 갈등에 불과했지만. 이를 느꼈던지 용천후가 다시 말했다. "후후... 너의 유일한 틈은 다름 아닌 생식기관이었다. 여하한 인간도 정사(情事) 중에만은 방심하게 마련이고, 그곳으로 독이 슬며시 흘러드는 것은 더더욱 방비할 수가 없지. 옥소저는 바로 그 점을 노려 너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마다 드러나지 않게 소량의 산공무형독을 썼었다." 영호천문의 동공이 피라도 뿜어낼 듯 갑작스럽게 충혈되었다. 그는 분노와 충격으로 인해 거의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용천후는 자신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새로 태어난 아이의 존재까지 조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말인즉 아이의 생명을 잉태시키는 과정 중에조차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 결과적으로 그 아이는 죄업(罪業) 가운데 잘못 뿌려진 씨앗밖에는 되지 않았다. 영호천문은 이렇게 되자 흥분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앞으로 일보(一步)를 더 내딛으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내 아이는, 아들인가?" 그가 힘주어 똑똑히 발음하는 내 아이라는 말은 곧 생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의미였다. 옥화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점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그래요. 아들이에요." 그녀도 더 이상의 항거를 포기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친부(親父)가 아니고서는 죽음을 앞둔 입장에서조차 아이를 비호하고 나올 사람이란 천하에 다시 없으리라. "다오. 어차피 잠깐 동안 밖에는 안아 보지도 못한다. 또한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 "문......." 옥화미의 눈에서 그제서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황은 결국 영호천문의 승리였다. 용천후도 일이 이쯤 되자 독랄한 야유를 멈추었고, 다른 팔정들도 잠자코 있어 주었다. 아무튼 그들의 참견을 떨쳐 버린 영호천문은 옥화미의 품으로부터 아이를 당당히 건네받을 수 있었다. "오오! 가까이서 보니 더 나를 닮지 않았나? 특히 이 눈과 눈썹은......! 입술과 코는 화미를 닮아 있군." 영호천문은 중지(中指)를 세워 자신과 마주한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무한한 애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그 모습을 통해 옥화미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영호천문이 부정(父情)을 통해 모든 원한을 여과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에서마저 초탈해 버렸다는 것을....... 옥화미는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더니 간신히 신형을 세우며 발작적으로 외쳐 물었다. "왜, 왜 당신은 내게 뭐라 않죠?"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헛! 녀석, 무엇보다 안색이 밝아 좋군." "어서 나를, 나를 추궁하고 비난하란 말이에요! 입이 더러워질까봐 그게 싫거든 한 손에 나를 쳐죽일 수도 있잖아요?" 옥화미의 아름다운 얼굴은 금세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영호천문이 비로소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미, 잘 기억해 두시오. 당신은 내 아내이자 이 아이의 어머니요. 우리 사이에 증오하고 서로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소." 그의 눈이 냉엄한 빛을 띈 채 그녀를 정시하고 있었다. "무릇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했건만, 당신이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했다면 아마도 내 부덕(不德)의 소치일 것이오. 그러나 당부할 것은 이 아이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쳐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점이오. 부디 잊지 마시오. 당신에게는 이 아이를 잘 키워야할 의무가 있을 뿐, 죽을 권리가 없소." "아아!" 옥화미의 신형이 또 한 차례 휘청 했다. "아이의 이름은 내 오래 전부터 정해 둔 바가 있었지. 아마 당신도 알 것이오. 필히 그렇게 부르도록 하시오." 영호천문의 말은 누가 들어도 부탁이 아니라 유언(遺言)의 형식을 갖춘 명령이었다. 옥화미가 감히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침착한 동작으로 아이를 도로 내밀었다. "자, 이제 그만 데려 가시오." 말이 끝나자 영호천문은 추호도 망설임 없이 구정을 향해 돌아섰다. 여한이 없다는 듯 그는 단순한 거동을 통해 일체의 사념과 작별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확고한 그의 기세에 구정은 모두 압도당한 듯 침묵했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용천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천후, 약속해 다오." "말해라." 용천후도 더 이상은 그를 비웃지 못했다. "나는 기꺼이 현재 상황을 받아 들이겠다. 대신 내 아내와 아들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화미가 너희들과 뜻을 합친 이상 내 아들이 아비의 복수를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 아니냐?" 용천후는 일순 움찔했으나 이내 주저없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등을 집어 들었다. "나 마야 용천후, 이 천마진혼등에 걸고 맹세하겠다. 옥소저와 아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맙다. 네 그 말을 믿겠다." 용천후의 입가에 한 가닥 의미 모를 미소가 지나갔지만 그것을 영호천문은 발견하지 못했다. "천문, 정말로 옥소저가 너를 배반한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느냐?" 영호천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양하겠다. 네게 받은 모욕은 그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는 이어 무감한 시선으로 야천을 올려다 보았다. "저 달이 기울기 전에 끝을 내고 싶구나." ④ 천지간에 무시무시한 돌풍이 일었다. 고오오오-- 그것은 바로 구 인이 동시에 일으킨 엄청난 내력(內力)의 효과였다. 일시지간 낙일애는 암흑으로 뒤덮히고 말았다. 시야가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문득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위잉--! 영호천문이 태을쌍환을 날린 것이었다. 땅! 따당......! 타원을 그리며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간 쌍환은 허공에서 아홉 차례나 무엇엔가 부딪쳐 격렬한 음향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무참했다. "으하하핫......!" 일진광소와 함께 폭음이 그것을 간단히 종식시켜 버렸다. 쾅! 막바로 그 뒤를 이은 것은 폐부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신음성이었다. "크윽......!"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태을쌍환이 옥면사랑 도옥기의 무정철선(無情鐵扇)과 혈면인도왕 왕영의 혈혈고루장(血血 �뽱�)에 의해 가루로 부서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신이 불에 타는 듯 화끈거리는 가운데서도 그가 정신을 잃지 않고 이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막강한 공세가 연이어 그를 위협해 왔다. 콰르르릉--! 천번지복할 경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영호천문은 신마구룡편(神魔九龍鞭)을 풀어내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츠츠츠츳--! 그것은 바로 전설의 신마구룡대구식(神魔九龍大九式)이 온통 하늘을 뒤덮는 순간이었다. 콰우우우웅--! 풍뢰가 격돌하듯 폭음과 함께 절벽의 만년빙설이 깨어지며 와르르 허물어져 내렸다. "크하하하핫--!" 뉘 이렇듯 광소를 터뜨리는 것인가? "크으윽!" 난무하는 도광(刀光)과 검영(劍影)을 맞받으며 필성(筆聲)으로 귀를 찢기우는 중에도 영호천문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전신은 난도질을 당해 마치 걸레쪽처럼 찢기우고 말았다. 틀림없이 일대 구는 아니었다. 구정은 약속을 지켰고, 자세히 보면 그들 십 인이 일대 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정 개개인이 각각 다른 시차로 공격을 가했으므로. 그러나 영호천문은 그런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들 모두에게 뛰어들어 합격을 유도해내고 있었다. 푹! 사망송시군자 사마운의 유성사추필(流星死追筆)이 복부를 꿰뚫었을 때 그는 크게 웃었다. "크하하핫......!" 촤아아-- 유성사추필이 빠져 나간 자리에서 피분수가 터져도 그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퍽! 섬뜩한 음향과 함께 혈면인도왕 왕영의 혈혈고루장이 왼쪽 어깨를 짓이기자 그는 자신이 아닌 상대를 동정했다. "그래, 네 공격을 예상하고 기다렸었지." 영호천문은 피떡이 되어 허공으로 퉁겨져 올랐으나 다시 내려 올 때는 흡사 독수리처럼 맹렬하게 쏘아져 내려왔다. 쐐애액--! 그가 두 팔을 휘두르자 산더미 같은 장력이 무혼사도 냉무혼과 천뇌토군 공야중에게로 퍼부어졌다. 콰콰콰콰-- 냉무혼과 공야중은 그의 내력이 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세에만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하고 검고 붉은 도광이 암흑을 베었다. 그것은 어쩌면 부인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를 베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베어져 나간 것은 그들이 가장 꺼려하는 인간, 그의 팔이었다. 영호천문의 오른쪽 팔이 어깨서부터 뭉턱 잘려 까마득한 낙일애 아래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피보라가 다시금 암흑 위로 흩뿌려졌다. 촤아아-- 그렇게 무혼사도가 지나간 직후, 또다른 파공성이 울렸다. 위이잉--! 천뇌토군 공야중의 독문무기였다. 검도, 도도 아닌 기형병기(奇形兵器)가 허공을 갈랐다. 때로는 륜(輪)도 되고, 탈(奪)도 되곤 한다. 일명 사옥인(死獄引)이라 불리우는 무기다. 륜으로 화한 사옥인이 그대로 영호천문의 한쪽 다리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일수일족을 잃은 영호천문은 독수독각인(獨手獨脚人)이 되어서도 포효에 버금가는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핫핫핫......!" 푸슈슈슈슛......! 오색 영롱한 암기들이 그의 소성을 중단시키기 위해 날아갔다. 황금전주 금백만의 무수한 그 보석암기는 단 한 개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의 전신에 들어가 박혔다. 과연 영호천문은 더 웃지 못했다. 아니, 웃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불굴의 혼(魂)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갈가리 찢겨버린 육신을 통해서는 더 이상 누구도 비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는 독각을 바위에 박은 채 다만 간신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도저히 인간이라는 명칭조차 붙일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아아아악!" 옥화미의 입에서 갑자기 찢어질 듯한 비명이 튀어 나와 중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어 충격을 받아 미쳐 버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아기를 안은 채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거령신장 방천이 쓴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나섰다. "천문, 더 못보아 주겠군. 그만 끝내 줄까?" 신력과 어울리게 우렁찬 그의 음성에는 한 가닥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용천후가 그를 제지시키며 날카롭게 외쳤다. "무무! 그대가 먼저 해라." 그러나 용천후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화무무는 교구를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자의면사 역시도 바람을 맞은 듯 마구 펄럭이고 있었다. "난 못해요! 저 지경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난 그만 두겠어요." "안돼!" 용천후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이번 일에서는 구정 모두가 공평해야 한다. 더구나 무무, 너는 천문을 가장 증오했었지 않느냐?" "하지만......." 화무무는 뭐라 항변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 인물들의 기색이 그녀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들은 내가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나마저도 공동의 적으로 삼으려 하겠지. 어쨌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결국 그녀도 용천후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겠어! 나도......." 말을 마친 화무무는 곧장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는 영호천문과 일장 정도의 거리까지 이르게 되자 비로소 그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끔찍하군요." 그녀는 새삼 몸을 가늘게 떨었으나 그렇다고 시선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영호천문. 그는 와중에서도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독각을 바위에 쑤셔 박은 채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그의 입가에는 한 가닥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 미소의 의미가 적어도 화무무에게는 이렇게 보였다. '미안해, 무무. 그대에게만은 내가 빚이 많구나.' '오오! 나의 정랑(情郞).......' 그녀는 들리지 않게 탄식을 터뜨리며 한동안 그를 마주보았다. 마치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리기 전에 그의 모습을 더 많이 눈에 담아 두기라도 하려는 듯. 화무무의 섬섬옥수가 들려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슷! 그녀의 희디흰 손바닥이 영호천문의 심장을 후려쳤다. 팍! 영호천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그의 의지를 떠난 일이었다. 이는 그의 눈동자가 경직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용천후가 그 곁에서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무무의 소수살인강(素手殺人 )은 그 동안 더욱 완벽해졌군.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을 뿐더러 나를 위해 미미한 맥(脈)까지 남겨 두었으니 말이다." 그는 화무무를 밀쳐 내고 유령처럼 움직여 그 자리에 가 섰다. "이제 내 차례군." 용천후는 장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동작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의 손바닥이 영호천문의 가슴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신속히 접촉되었다가 도로 떨어져 나왔을 뿐이었다. 그 일장의 위력은 영호천문의 죽어가는 육신이 무섭게 경련하는 것으로써 입증되었다. 그 광경을 보며 굵직하나 낮게 읊조리는 음성이 있었다. "이 방천이 마무리를 짓겠다." 거령신장 방천이었다. 그의 거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날아왔다. 동시에 산을 뒤엎을 듯한 장력이 영호천문을 내쳤다. 콰우우우--! 한 소리 비명도 없었다. 영호천문은 그의 장력에 휩쓸려 피비(血雨)를 뿌리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 시대 최고의 기남아(奇男兒)는 그렇게 해서 십칠 세의 나이에 생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휘류류륭--! 곧이어 으스러져 버린 그의 몸뚱이는 거대한 악마의 아가리와도 같은 낙일애 아래로 추락해 갔다. 지옥의 유부(幽府)를 연상시키는 흑암의 절벽이 그를 집어삼키고 만 것이다. 휘이이잉--! 한 차례 느닷없는 돌풍이 일어 낙일애 전역을 휘감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필히 기억되리라. 이 날은 혈월이 뜨고 유난히도 적막했던 정월 십오야, 무서운 저주의 씨가 발아한 운명의 날이었다는 것을. 黃昏一松葉 葉色靑變赤 丹心胡不變 有罪第一人 황혼의 한 그루 소나무 잎도, 푸름이 물들어 붉게 변하나니, 피처럼 붉은 마음인들 어찌 변치 않으랴? 죄가 있다면 오직 제일인임이리라. 제 3장 다시 태어나다 ① 때는 영종(英宗) 구년. 천하는 평온했다. 폭풍전야(暴風前夜)일수록 고요하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나 표면상으로는 틀림없이 그랬다. 백설(白雪)이 난분분하여 그 적막을 도왔다. 어허야 디야, 인생무상(人生無常)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더냐? 무릇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생의 진리이나 불나방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제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우자(愚者)들이 판을 치니, 차라리 호수에 비친 달이나 베지, 행자(行者)는 어찌 하여 허망한 검빛에 목숨을 거는가? 꽃이 필 때 시(詩)를 모르고, 넉넉한 인심 가운데 익어가는 주향(酒香)을 알지 못하는 자여, 그대 진정 불행하도다 어허야 디야, 백설이 천하를 뒤덮어도 갈 곳을 근심치 말라 돌을 베고 누우면 가(家)요, 하늘을 지붕삼아 들녘에 잠들면 성월(星月)이 그대와 긴 얘기를 나누게 되리니, 아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당금의 세태는 바로 이러한 풍자로써 인구에 회자되었다. 영웅은 검과 더불어 한(恨)을 갈고, 열사(烈士)는 충정(忠貞)에 피를 뿌리며, 미인은 홍분(紅粉)에 눈물을 흘린다던가? 제각기 길은 다르되 귀일점은 동일하다. 목적이야 어떻건 결과적으로 끝없는 죽음의 윤회를 부르는....... 또 이런 경구도 있었다. 억겁일수유(億劫一須臾), 세월여류(歲月如流)도 틀리지 않네 흘러가면 그만인 세월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고요히 부유하는 낙화(落花)를 보라 햇살 조각 하나가 꽃잎을 비추면 영롱한 광휘에 소우주(小宇宙)의 관념을 느끼나니 오늘도 몽상(夢想) 속에서 하루 해를 보낸다 하지만 세태가 어찌 돌아가건 그것들과 완벽하게 괴리된 자가 있다. 물론 자의에서는 아니었다. 과거사를 뒤지면 그에게는 몹시 화려했던 추억도 있었다. 영화로운 과거란 어쩌면 부채(負債)와도 같은 것, 그는 이 점을 때로 지독하게 실감한다. 천수(千手), 즉 문자 그대로 천 개의 손으로 불리웠던 그의 손을 보면 지나가 버린 날들은 정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저 핏기 잃은 창백한 피부에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할 수가 없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만 그는 아직도 황당할 때가 많다. 의례 꿈에서 깨어나면 부딪쳐 오는 현실감에 어리둥절한 법,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어도 그는 아직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자신을 비웃기도 한다. - 그만 깨어나라. 혼이여! 인정할 것은 속히 인정해 버리고 깨끗이 포기해라. 어리석기 그지없는 집착으로 인해 대체 얼마나 더 망가져야 만족하려느냐? 유곡(幽谷)이라면 맞으리라. 그곳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전부터 까마득하게 잊혀진 장소이며, 빛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이었다. 그나마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기류와 묵운(墨雲)으로 뒤덮여 있어 밖에서 보면 누구도 그런 곳에 인간이 생존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있었다. 그 아스라한 인세(人世)의 최저층에서 놀랍게도 끈질긴 집념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빛도 있다. 더구나 그곳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밝고 따뜻했다. 위로는 뇌음을 동반한 돌풍으로 인해 인간계와 차단되어 있었지만 아래로는 의외로 도원경이었던 것이다. 졸졸졸....... 밑바닥까지 환히 들여다 보이는 옥빛의 계류가 흐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형형색색의 난석들 사이사이로 방향(芳香)을 풍기는 이름모를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앞다투어 피어 있다. 저 멀리 언덕에는 꿈결인가 싶게 초지(草地)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고, 옥류를 가로지르는 그림같은 운교(雲橋)도 보인다. 운교를 건너면 대숲이 나온다. 그 중앙에는 소로(小路)가 길게 트여져 있는데, 바닥 또한 항시 잘 정돈되어 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열심히 가꾸어온 흔적이다. 이런 장소, 즉 하란산의 낙일애 아래에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암흑의 유곡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듯 세외도원경을 이루고 말이다. 죽옥(竹屋)은 실로 멋들어졌다. 대나무로 지어 정취가 물씬 풍기는 몇 채의 작은 집들이 죽림 속에 환상처럼 자리잡고 있다. 시각은 알 수가 없다. 태양을 직접 볼 수 없으니 이곳에서는 시간의 개념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다만 절벽에 수없이 굴절되면서도 반사되어 비쳐 들어오는 태양빛으로 인해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어쨌든 그로 인해 평화가 깨어지는 법은 없었다. 인간의 심리란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 되려 느긋해지기 마련이므로. "호호호......." 소녀의 것인 듯한 티없이 맑고 청아한 웃음이 주변의 적막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한 채의 죽옥으로부터 녹영(綠影) 하나가 빠져 나오더니 쪼르르 죽림 속으로 달려갔다. 이곳의 온묘로운 기운이 모조리 그녀의 녹의에 쏠려 버린 것일까? 그녀는 보기 드물 정도로 밝고 화사한 소녀였다. 이제 나이라야 십오, 륙 세쯤 되었을까? 아직 아름다움을 논하기에는 이른, 막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꽃봉오리였다. 봉긋한 가슴과 팽팽해지기 시작한 둔부 등을 가진 것은 여느 소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녀가 유독 눈길을 끄는 이유는 바로 일신에서 풍기는 봄바람 같은 기운 때문이었다. 해맑은 눈에서는 별빛을 닮은 속삭임이 흘러 나올 듯 했고, 작고 짙붉은 입술에서는 연신 노랫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소녀의 옆구리에는 작은 바구니 하나가 끼어져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몹시도 즐거운 듯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죽림을 헤치고 들어가는 소녀의 동작이 매우 익숙하다. 이 작고 고운 주인(主人)에게 죽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자그마한 소(沼)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암녹색을 띠고 있는 담(潭)이었는데, 그 빛깔이 칙칙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멀리서 보아도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것만은 틀림 없었다. "문(文)오빠!" 소녀가 담을 향해 한껏 들뜬 음성으로 외쳤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담 위로 목만 내민 채 녹수에 몸을 깊숙이 담그고 있는 한 청년을 향해서였다. 청년의 얼굴에는 흰 천이 온통 칭칭 감겨져 있어 용모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편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이 모습도 실상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겨우 주요 부분만을 가린 채 투명한 녹수에 잠겨 있는 그의 전신 각 요혈(要穴)에는 놀랍게도 반짝이는 보옥(寶玉) 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보옥의 가치가 귀중하단들 인간의 생사(生死)를 가늠하는 요혈, 그것도 삼십육대사혈(三十六大死穴)에 박혀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우선은 그러고도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 순서일 테니까 말이다. 청년이 소녀의 음성을 들었는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붕대 사이로 빠끔히 열려 있는 그의 눈은 암울한 회색이었다. 언뜻 보면 그 눈은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약간만 자세히 본다면 그 눈이 가진 생명력을 금세 느낄 수 있다. 그 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엄청난 증오와 집념, 그리고 무한대에 이르는 고통까지도. "화영(華英), 또 왔구나? 오지 말라고 했는데......." 짐짓 무심을 가장하고 있으나 그 음성에도 역시 범인(凡人)이 헤아릴 수 없는 짙은 고뇌가 어려 있었다. 소녀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에게 혀를 내밀어 보였다. "헹! 오빠는 또 그 소리인가요? 미안하지만 이 화영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자유인(自由人)이에요." "자유인?" 청년은 물 속에 잠긴 두 팔을 꺼냈다. 잔잔한 수면을 뒤흔들며 모습을 드러낸 그의 팔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정상이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붕대를 칭칭 감은 대신 짙은 남빛을 띠고 있는 정도라 할까? 청년은 눈으로 자신의 팔을 가리키며 짐짓 심각하게 덧붙였다. "그래, 나도 네 자유를 막을 생각은 없다만 내가 지금 중요한 고비에 이르러 있다는 것만은 좀 알아 주려무나." 그렇듯 보여 주고 들려 주어도 화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반응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 따돌리는 방법도 정말 다양하군요. 염려 말아요, 저도 오빠를 방해할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녀는 못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턱에 두 손을 받치고는 청년의 하는 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류의 다툼(?)은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에서 흔히 있었던 모양이다. 청년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곧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소녀가 어찌 하고 있건 개의치 않고 두 팔을 더 높이 쳐들었다. 그 동작은 매우 느렸다. 기색으로 미루어 마치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듯 무척이나 힘겨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회색 눈에는 일말의 초조감마저 나타났는데, 그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부르짖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움직여 다오, 제발! 그래도 과거에는 이 손이 천지간에 풍운(風雲)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는 전력을 다해 손가락을 움직여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불능(不能)이었다. 조금치도 움직일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그는 그만 실의에 빠져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첨벙! 그의 팔은 주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시 암녹색 물에 잠겨 들어갔다. 화영이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실망하지 말아요, 문오빠. 언젠가는 정상으로 회복될 테니까요. 야(夜) 할아버지가 분명히 장담하셨는 걸요?" 그녀의 위로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는 그녀가 여하한 연민을 일체 배제한 채 여전히 특유의 해사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에서 천천히 몸을 빼냈다. 그의 움직임을 보면 그가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는 것을 담박 알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비단 두 팔을 못 쓸 뿐만 아니라 왼쪽 다리마저도 불구였던 것이다.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을 멈추더니 담가에 주저앉았다. 뜻밖에도 그의 신체근육은 보기 좋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두 팔과 한쪽 다리가 불구이고, 전신 삼십육개 사혈에 보옥을 박고 있는 데다가, 얼굴까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으니, 아무리 미끈한 체격도 별무소용이긴 했지만. 청년은 비참한 육신을 바닥에 뉘였다. 그리고는 텅 빈 허공으로 망연한 시선을 가져갔다. 하늘은 어차피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지금 그가 응시하는 곳은 뿌연 운무가 가로막아 그 위의 정경들을 가리고 있다. '후후... 흡사 내 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군.' 내심 자조적인 읊조림을 발하는 그의 눈가에 고통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오빠." 화영이때맞추어 부르지 않았던들 그는 필경 고통 속에 잠시나마 침몰하고 말았으리라.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팔꽃의 덩굴처럼 부드럽게 손을 뻗어와 감각이 전혀 없는 그의 팔을 어루만져 주었다. "낙심이나 절망은 아직 일러요. 만일 완쾌되지 못하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후후... 그건 네 말이 맞는구나." "모쪼록 제 말을 신용하셔야 해요. 모두 다 오빠를 위해 주야로 고심하시는 혁련(赫連)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니까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도 하셨어요." ② 청년이 물었다. "화영,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묻죠?" 화영은 흠칫하더니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이년이 넘었어요." 청년은 말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가 말한 이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참담하고도 지리했던지를 새삼 의식한 것이었다. 비록 지옥의 형벌에 버금가는 것일지라도 육체의 고통 쯤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배신에서 오는 쓰라림이 가장 컸으며, 증오심이 시도 때도 없이 그의 내부를 쥐어 뜯었다. 자학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나았으련만 그에게는 이제껏 그럴 능력마저 없었다. 심중에서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불길을 그저 지독한 인내로써 고스란히 감당해내야 했었다. 지금도 그는 생각한다. '잃어버린 팔, 다리 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일체의 믿음을 상실한 내 영혼을 대체 어찌 다스려 나가야 한단 말인가?' 삶은 청년에게 있어 그런 고통의 연속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화영의 밝은 웃음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호호... 오빠, 이것이 무엇인지 한 번 알아 맞춰 보세요."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바구니를 뒤로 감추었다. "글쎄......?" 청년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텅 빈 그의 동공에 따스한 온기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쯧! 궁금하기는 하지만 짐작이 잘 안되는 걸?" "호호...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도요?" "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면....... 아! 그렇군. 뱀인가? 아니면 지렁이? 너구리? 그것도 아니면 두꺼비일까?" "끙! 그만 하세요. 제가 졌어요." 화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좌우간 오빠에게는 이길 재간이 없군요." "하하하핫......!" 청년은 실로 오랫만에 크게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향해 화영도 마주 웃으며 바구니를 열어 보였다. "보세요, 이건 오빠가 좋아하는 죽순요리예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속에는 아직도 무럭무럭 김이 피어 올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죽순요리가 들어 있었다. "자, 그만 웃으시고 아, 하세요." 화영은 선뜻 젓가락으로 죽순 한 조각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 아주 스스럼없는 동작이었다. "화영......." 청년의 눈에 언뜻 감격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기실 그는 이년 동안 줄곧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해결해 왔다. 만약 화영이 없었다면 팔을 쓰지 못하는 그에게 산해진미인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녀의 존재는 그의 팔이자 다리였으며, 동시에 어두운 삶을 밝히는 빛이기도 했다. 청년은 그녀가 주는 음식을 묵묵히 받아먹었다. 자존심이나 수치감 등을 벗어버린 만큼 감동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어떤 경우이건 타인을 위한 헌신은 쉽지 않은 법이다. 물론 그 자신도 지금까지 남을 위해 무엇도 해본 적이 없는 위인이다. 그러고 싶었던 적은 꼭 한 번 있었으나 그나마 운명이 허락치 않아 계획으로 그쳤을 뿐, 실행에 옮겨보지 못했었다. '화영, 어린 너에게 배우는 바가 정녕 크구나.' 바로 그것이었다. 청년에게 화영은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의 한 전형을 깨닫게 해 주고 있었다. 더구나 힘든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면 청년은 스스로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부글부글....... 커다란 솥 속에서 무엇인가 검은 액체가 계속 끓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채의 죽옥 중 한 채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신이 늙은 까마귀처럼 비쩍 마른 한 노인이 곁에 서서 솥 속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노인은 일신에 칠흑같은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다. 너무도 말라 뼈만 앙상하다 보니 피부빛도 어지간히 검은 위인이었다. 그러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만은 외양과 사뭇 달랐다. "후후... 두고 봐라. 세상은 이제 노부가 천하제일의 귀의(鬼醫)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증명할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언뜻 자기도취에 빠진 것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그 음성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강한 의지와 신념이었다. 노인의 움푹 꺼진 눈 또한 가히 맹렬한 신광을 발하고 있었다. 노인의 맞은 편에는 예의 청년이 목상인 양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줄곧 노인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눈에서는 희망이던 기대던 도시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심(無心), 그 자체라고나 할까? 노인이 역시 자신감이 배인 어투로 그를 불렀다. "크크... 이제 되었다. 천문(天文), 어서 손을 담구어라." 청년, 영호천문(令狐天文)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가진 그는 노인의 말에 따르기 위해 순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힘겨워 보이는 동작이다. 그가 팔을 적당한 위치까지 가져가는 데만 해도 무려 이각 이상이 걸릴 정도였다. 흑의노인이 그 광경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천문, 기억하느냐? 지금으로부터 이년 반 전, 너는 팔다리가 잘라지고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이 운곡에 떨어졌었다. 크크... 인간이 아니라 거의 육괴였지. 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백육십 기경락이 토막토막 끊기고, 심맥도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였다. 더구나 얼굴은......." "그만 하십시오. 압니다." "아니, 더 들어 두어라. 노부가 그 일을 들추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이다. 첫째는 의술에 관한 나의 자부심 때문이고, 둘째로는 네 자긍심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다." "자긍심...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얼굴마저 짓뭉개져 걸레쪽처럼 찢겨진 육신과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던 인간, 그것이 네가 아니었더냐?" "그건 맞습니다." "어디 그 뿐이냐? 심장도 반 이상 파열되어 너는 설사 화타나 편작이 환생한다 해도 살 수 없는 몸이었다." 영호천문은 대꾸하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경을 잘 안다는 듯 노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크크... 여느 때 같았으면 나도 너를 살리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네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숨도 멎어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너에게는 천운(天運)이 따라 주었다." 노인의 눈에서 다시금 기광이 번쩍 일어났다. "마침 그 날 아침에 노부는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만년석삼왕(萬年石蔘王)과 영지공령천액(靈芝空靈天液)을 빙동 속에서 발견했었다. 그것으로 인해 너는 생명줄을 겨우 붙였지." "으음......!" "그 정도만으로는 너를 살려냈다고 자부할 수가 없었다. 고작 숨만 붙어 있는 것이 어디 살아있는 것이더냐? 너의 그 끊어진 팔다리와 반쯤 생명을 잃어버린 심장은......." 흑의노인은 말하다 말고 광오하게 웃어 제꼈다. "크크크... 크하하핫......!" 그는 가슴을 펴며 부르짖었다. "천하를 통틀어도 노부 야율천(夜栗天)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감히 접합하고 재생시켜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그 정도의 의술은 고금(古今)을 다 뒤져도 언급조차 없었으니, 야율천을 일컬어 고금제일의 신의(神醫)라 한들 무리는 아니리라. "크크크... 사설이 길었구나. 약물(藥物)에 손을 넣어라." 야율천의 지시는 곧 명령이었다. 영호천문은 주저없이 펄펄 끓는 약수에 천천히 자신의 손을 담구었다. 치지직... 치칙......! 섬뜩한 음향과 함께 살이 타는지 고약한 내음이 사위에 퍼졌다. 실제로 그의 손에서는 노오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렇다할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영호천문의 양 팔이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율천의 기괴한 음성이 역시 그의 사고(思考)를 대신했다. "고통을 느끼고 싶겠지? 크크... 염려 마라. 얼마 후면 감각이 돌아와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얼마 후면......." 이런 말을 영호천문은 벌써 이백 일째 반복하여 듣고 있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가 약수에 손담그기를 이백 일 동안 계속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소리없는 신음을 발하게 되었다. '윽!' 아주 서서히, 아득한 망각의 저편에서 미세하게 번져오르는 아픔을 감지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팔을 저미는 듯한 고통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표정을 읽어내던 야율천이 만면에 희색을 띄었다. "오, 그렇지! 느낌이 있느냐?" 영호천문이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렇... 습니다......." "오오! 드디어 성공이다. 으하하핫... 기어이 성공했어!" 오히려 야율천이 더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허공을 우러러 미친 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불현듯 한 소리 차가운 음성이 그의 흥을 깼다. "흥! 야늙은이, 좋아라 날뛰긴 아직 이르다. 그래봐야 고작 손가락을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로 왜그리 호들갑이냐?" 야율천은 김이 샌 듯 웃음을 뚝 그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랭하게 내뱉았다. "빌어먹을! 혁련광(赫連廣), 그것만 해도 어디냐? 내 죽어 저승에 가게 되면 화타나 편작에게 의술을 전수할 생각이다." "크ㅋ! 너를 보면 내가 추구해온 의도에 회의를 느낀다. 왠줄 아나?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네 잘난 척에는 약이 없거든." 비양거림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자의 모습은 야율천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괴이하기 그지 없었다. 스르르......! 그는 우선 바퀴가 달린 철의자(鐵椅子)에 앉아 있었는데, 거기에는 복잡한 기관장치가 달려 있어 그것을 연신 꾹꾹 눌러 대자 전후좌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불구라는 말이되,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마치 그는 전신이 하나의 공 같았다. 철의자에 의지하고 있는 그에게는 몸뚱이 밖에 없었다. 팔은 물론, 다리조차 복부 바로 아래에서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몰골이었다. 대개 이 정도로 부상을 입었다면 이승과 하직하는 것이 당연하련만 그는 둥그스름한 육괴에 삭발을 하고 있는 머리통만을 달랑 얹어 놓고도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의 눈은 녹색을 띄고 있었다. 따라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독사의 그것인 양 섬뜩하기 짝이 없었고, 이 점은 그가 목숨을 연장해온 비방과 무관하지 않을 듯 했다. "흘흘... 천문, 내 너에게 줄 진짜 선물이 있다." 괴인이 바퀴를 굴려 다가오자 영호천문은 묵묵히 솥 속에 담그었던 손을 꺼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눈빛은 동요을 보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토록 무거웠던 두 팔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야늙은이의 재간 좀 구경하자." 철커덩! 쇳소리와 함께 괴인 혁련광은 팔을 내밀었다. 아니, 팔이라야 단지 양 어깨로부터 솟아 나온 두 개의 쇠갈고리일 뿐이었으나 그래도 손 구실을 하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쇠갈고리가 자신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 가도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무심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는 무심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침묵은 신뢰를 대신한 것이었으므로. "흘흘... 과연 많이 회복되었군. 그러나 전같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천문, 노부가 네게 천수(千手)를 대행할 수 있는 무적수(無敵手)를 선사하겠다." "무적수라니요?" 영호천문이 궁금하여 흥미를 보이는 반면, 야율천은 움푹 꺼진 눈을 까뒤집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허튼 소리 말아라, 혁련광! 설마하니 천문에게 네 놈처럼 흉측한 쇠갈고리를 달아 주려는 건 아니겠지?" 혁련광은 피식 웃었다. "걱정일랑 싸잡아매 두어라. 천문으로 말하자면 천하제일의 미남자였는데 어찌 내가 그 점을 감안하지 않았겠느냐? 모름지기 쇠갈고리를 갖고서는 미녀들을 애무해줄 수가 없지. 나야 뭐, 나이도 있고 그 방면에서는 초월해버린 입장이지만 말이다." 그는 성적(性的)으로도 불구였다. 하지만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그의 기색에서는 조금치의 회의나 자조도 엿볼 수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최소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자라는 뜻이다. 혁련광의 녹색 눈에는 오히려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무적수는 노부가 지난 삼십 년 동안 불철주야 연구를 거듭하여 창안해낸 물건이다. 그것을 사용하면 천문은 전신이 무기(武器)로 변할 수 있을 뿐더러 무공이 없이도 능히 절세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 일순 영호천문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솟았다가 사라졌다. 그의 귀로 야율천의 놀란 음성이 전해져 왔다. "그럼 네가 늘상 말하던 그 여의무형인(如意無形刃)이라는 것을 완성했단 말이냐?" 혁련광은 비로소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이토록 큰 소리를 치겠느냐?" "오오!" 야율천은 격동하여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여의무형인이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의 일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일까? 영호천문. 그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고요했던 그의 눈동자가 지금 심한 경련을 보이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으니....... ③ 불회곡(不廻谷). 이 유곡에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나 오래 전부터 그런 이름이 붙어 있었다. 불회곡에는 도합 십이 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살아 숨을 쉰다 해도 그들은 매우 비참했고, 생전에 다시 햇볕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불회십반천(不廻十返天). 그들 중 십 인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그렇게 불렀다. 세상을 극도로 증오하여 되돌아 가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다. 어차피 인세에서 그들이 발을 붙일 만한 땅은 없었다. 그들은 쫓기고 쫓기다 하늘마저 자신들로부터 등을 돌리자 마침내 이곳 불회곡에 숨어 들게 되었다. 개중에는 무림의 공적인 일대 흉마(兇魔)가 끼어 있었으며, 관(官)으로부터 끝없이 추적을 당하던 역신(逆臣)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신투(神偸)로서 한 가지 물건을 잘못 훔쳐 평생토록 쫓기던 자, 여색에 지나치게 몰입하다가 급기야 색마(色魔)로 낙인 찍혀 목숨 부지가 어려웠던 자도 있었다. 또 의술을 잘못 사용해 도망자가 되어 버린 귀의(鬼醫) 등 도무지 대명천지에서는 살 수 없는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결국 종류는 다르되 그들은 나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는데, 개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그들 모두가 세상에 대해 엄청난 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희망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년 반 전이었다. 그들이 보고 있던 회색의 하늘로부터 피범벅이 된 웬 고깃덩이(?)가 뚝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불회십반천은 그 고깃덩이를 요리하여 세상에 내놓을 만한 병기(兵器)로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병기 제작의 목적은 세상을 향한 복수, 그 병기의 이름은 바로 영호천문이었다. 치직... 치지직....... "으음......!" 영호천문은 솥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괴로운 듯 신음을 발했다. 그러나 그 누렇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연기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감동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흰 천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그의 눈에서는 기쁨이 출렁이고 있었다. '오오! 이것이 대체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각인가? 비록 살이 타는 느낌이라 해도 내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끓는 약물 속에 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때문에 통증을 참느라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천은 벌써부터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세상에 나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무수한 고통을 겪어온 영호천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것은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고통을 통해 새로 태어나는 희열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맞은편에 있던 야율천이 입을 열었다. "되었다, 천문. 이제 손을 빼라." 촤아--! 영호천문의 손이 끓는 약물 속으로부터 가뿐하게 빠져 나왔다. 그의 두 팔이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었기 때문이다. "천문, 어떠냐? 제대로 움직이고 있느냐?" 야율천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그의 눈은 이상하게도 엉뚱한 곳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는 장님이었다. 움푹 들어간 눈에서 무섭게 희번뜩이는 안구는 뜻밖에도 그 자신이 만들어낸 의안(義眼)이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대답하기에 앞서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는 각 손가락에 힘을 주어 보았다.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다오.' 그것은 어쩌면 소리 죽인 절규(絶叫)였다. 그의 두뇌가 이를 알아 듣고 손가락에 명령을 내린 것일까? 꿈틀 하고 움직였다. 분명 그가 보고 있는 가운데 그의 십지(十指)가 차례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천문." 야율천이 다그치듯 물었으나 영호천문은 여전히 답하지 못했다. 너무도 격동한 나머지 심중의 말이 소리가 되어 나와 주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한 가닥 환희에 찬 교성이 울리더니 섬세한 녹영이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아닌 화영이었다. "움직였어요! 오빠의 손이 회복되었다구요!" 그녀가 아름다운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영호천문을 대신하여 크게 부르짖고 있었다. "오오!" 야율천은 그대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의 기적을 이루어낸 그의 기쁨은 결코 영호천문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영호천문은 손을 들어 화영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화영, 네가 왜 우느냐?" 기어이 구슬같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피이! 오빤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고맙다. 정말로......." 영호천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격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그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내 인생은!' 감겨진 그의 눈꼬리에서도 눈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야율천이 지팡이로 땅바닥을 세차게 찍으며 말했다. "자! 가자. 혁련노괴가 기다리고 있다." "크크... 걸작품이지. 전에도 말했지만 노부는 이것을 만드느라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바쳤다." 혁련광은 남다른 감회를 가지고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그는 선반 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은쟁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은쟁반에는 금속으로 되어 있으며 거의 투명해 보이는 편(片)이 몇 개 담겨져 있었다. "여의무형인(如意無形刃)이다. 이것을 체내에 이식하면 네 뜻대로 발출과 회수를 할 수가 있지. 예리하기로는 어장(魚臟)을 능가하고 빠르기로는 가히 섬전일순이다. 물론 그 속도란 어디까지나 너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지만 말이다." "어르신......!" 영호천문은 감격에 겨워 감사하단 인사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옆에서는 화영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고, 야율천 역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여섯 개다. 너의 사지(四肢)에 각기 하나씩 장착이 될 것이며 나머지 두 개는......." 혁련광의 음성은 점차 낮아져 뒷부분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하겠다." 그는 녹광이 이는 눈으로 영호천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화영에게로 돌렸다. "너는 잠시 나가 있거라." "네? 왜 그래야 하죠?"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혁련광이 클클 괴소를 터뜨렸다. "너는 처녀의 몸이 아니더냐? 그런데도 천문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구경하겠단 말이지?" "몰라욧! 어쩜 제게 그런 말씀을......." 화영은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크허허헛......!" "크크크......." 두 괴인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어제꼈다. 영호천문. 그는 떨리는 손길로 일신에 걸친 의복을 모두 벗었다. "야늙은이, 네 솜씨를 좀 빌려야겠다." "그야 여부가 있나?" 야율천은 품 속에서 서슬이 시퍼런 비수를 꺼내더니 서슴없이 영호천문의 손바닥을 찢었다. "으음!" 영호천문은 예리한 비수가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 들자 팔꿈치까지 쩌르르 울리는 듯한 아픔에 몸을 떨어야 했다. "다소 괴롭겠지만 어쩌겠느냐? 참아야 하느니라." 하나마나한 혁련광의 위로(?)는 그다지 효과는 없었지만 분위기를 환기시켜 놓았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은쟁반에 담긴 투명한 금속편을 집어 들더니 기이한 수법으로 영호천문의 손바닥에 쑤셔 박았다. "크윽!" 영호천문의 입에서 이번에는 정말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아픈지 그대로 팔 전체가 쪼개져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하여 시술은 극도의 고통을 수반했고, 그에 따라 영호천문의 사지에는 차례로 한 개씩의 무형인(無形刃)이 파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세차게 깨물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통해 은은하게 핏기가 내비치고 있을 때,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래,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천중일정(天中一鼎)은 재탄생을 거쳐 인세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 잊혀진 불회곡에서 극한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정월 하고도 십오야(十五夜). 달은 보이지 않았으나 영호천문의 심중에서는 그 날짜를 명백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붉디 붉은 혈월(血月)의 영상이 쓰라린 상처와 함께 그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는 그가 삼 년 전의 오늘 밤을, 이 땅에 저주가 시작되고 증오의 씨가 발아하기 시작했던 그 밤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은 지금 평평한 반석 위에 누워 있었다. 야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온갖 종류의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흰 천으로 감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두 팔과 다리에도 역시 천이 칭칭 휘감겨 있다. 문득 그의 눈에 뿌연 안개같은 것이 어렸다. '당분간은 잊자. 때가 차지 않았으매 기억한다는 것은 오직 자괴감을 부추킬 따름이다.' 의지란 것은 그에게 늘상 이렇게 속삭인다. 그러나 심적인 고통은 육체가 치유되어감에 따라 더욱 명료해져 갔다. 요컨대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 반대로 치달려가는 현상에 영호천문은 근자에 이르러 종전보다 훨씬 더 시달리고 있었다. "으음......." 그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한숨으로써 괴로움을 삭이고자 했다. 잠룡(潛龍)의 시간이 속히 마무리 되기를 기원하며. 그런데 이때였다. "헛헛헛... 도로아미타불....... 커억! 좋긴 좋구나. 달밤에 마시는 술맛이라니, 이래서 내 파계(破戒)를 했지 않은가 말이다." 한 가닥 야릇한 불호성(?)이 그의 고막으로 파고 들었다. 자칭 술맛을 안다는 중(僧)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비틀비틀하며 갈짓자 걸음을 걷는 모양새가 역시 대취해 있다. "주육풍화상(酒肉風和尙)......!" 영호천문이 그 자를 알아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 자는 과연 중은 중이었다. 일신에 잿빛 가사를 걸치고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하고 있으면 그리 보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목에는 염주 대신 커다란 술호로를 메고, 허리춤에는 번쩍이는 구환도를 차고 있다. 게다가 얼굴은 대추빛이었으며 체격 또한 불도나 행하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우람했다. 그 자를 주육풍화상이라 칭한 것이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나 정녕 알맞는 별호였다. 자칭 파계승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영호천문이 앉아 있는 반석 가까이에 이르렀다. 쿵! 거구가 반석에 부딪치듯 풀썩 주저앉았다. 푸스스....... 그에게 짓눌린 암석은 놀랍게도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덕분에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게 된 그에게서는 고약할 정도로 술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영호천문이 먼저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또 술을 드셨습니까?" 주육풍화상은 곁눈으로 영호천문을 힐끗 응시했다. "크윽! 그렇다. 네 놈은 여기서 줄곧 청승을 떨고 있었겠지?" "후후... 그런 셈입니다." "아서라, 이 놈아. 모름지기 사내 대장부에게는 한숨보다 술이 약이니라. 만사 시름은 술로써 잊어야 하느니, 알겠느냐?" 술화살이 호로병으로부터 쭉 뻗어왔다. 촤아아--!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새도 없었다. 술화살은 그대로 마주 앉아 있는 영호천문의 입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졸지에 급습(?)을 당하게 된 영호천문은 차마 성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몇 번 목젖을 울컥여 술을 받아 마셨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쓰리게 훑으며 내부로 들어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쓴 입맛을 다셨다. 그 광경을 본 주육풍화상이 어찌 해석했는지 자못 의기양양하여 물었다. "크크큭... 어떠냐? 향기가 그만이지?" 영호천문은 픽 웃었다. "호골주(虎骨酒)는 약간 신 것 같습니다. 먼저 마셨던 용각주(龍角酒)가 훨씬 나았지요." "녀석, 술맛에 제법 달통해 있으면서도 뺐었구나?" 주육풍화상은 품 속에서 한 조각의 고깃덩어리를 꺼내더니 으적으적 씹기 시작했다. "놈, 너는 혹시 궁금하지 않느냐? 이 화상의 내력이 말이다." "글쎄요." 영호천문은 짐짓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사실 그는 주육풍화상이 아닌 누구의 신상에도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동안 그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육풍화상이 그의 속셈을 알아 차렸는지 기소를 흘렸다. "클클... 네 놈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그래도 얘기는 해야겠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세이경청(洗耳敬聽) 하겠습니다." "아암, 후배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이 화상으로 말하자면 오십 년 전만 해도 하마터면 소림(少林)의 장문인이 될 뻔한 위인이었으니까 그 정도의 자격은 되고도 남느니라. 그 빌어먹을 사건 때문에 지금은 비록 이 꼴이 되어 있지만......." 영호천문의 눈에 은은한 놀라움이 번졌다. 그는 최소한 주육풍화상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술에 취해 농담처럼 내뱉은 그 말이 지닌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소림의 장문인이 어디 아무나 되는 자리인가 말이다. ④ 주육풍화상. 이 괴인(怪僧)은 불회십반천 중 가장 강한 고수(高手)였다. 이 점은 영호천문도 일찍부터 느끼고 있었다. 또한 이곳에 숨어 살고 있으니 무슨 말못할 사연을 품고 있는 것도 틀림없었다. 그 사연이 지금 주육풍화상 자신의 입을 빌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굳이 묻지도 않았건만 이 밤에 영호천문이라는 후배에게 남김없이 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래 백현(白玄)이라는 법호를 지니고 있었다. 위로 소림 최고의 신승(神僧)이라는 혜원선사(慧元禪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던 그는 백자(白字) 항렬 가운데 수위의 인물로 꼽혔으며, 당연히 소림의 차기 장문감으로 내정되었다. 그런데 그가 조사동(祖師洞)에서 천일면벽(千日面壁)을 마치고 나오던 날, 운명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게 되고 말았다. 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소림에서 파문(破門)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종국에는 소림의 반도가 되어 평생을 쫓겨다녀야 했다. 그 운명의 밤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바야흐로 미려한 월광(月光)이 소림의 장경각(藏經閣)을 비추고 있는 시각, 그는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장경각으로 스며드는 것을 발견했다. 주육풍화상은 말하다 말고 감정에 휩쓸렸는지 일순 몹시도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애초의 신색을 되찾느라 한참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헛헛... 그때 이 화상이 어떻게 행동했겠느냐?" 영호천문이 답했다. "쫓아 가셨겠지요.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흘흘....... 그래, 맞았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지. 그때문에 이 화상은 소림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으음, 뭔가 흑막이 있었나 보군요?" 그 밤. 숨어든 인영을 추적해 장경각으로 따라 들어갔던 백현대사는 상상치도 못할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 인영은 정체가 불분명한 한 계집이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둘째 사제(師弟)이자 장경각의 각주(閣主)를 맡고 있던 백우(白牛)가 그녀와 통간(通姦)을 했던 것이다. 상황을 보아 하니 그것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닌 듯 했고, 벌거벗은 두 남녀가 벌이는 행위란 설사 부부지간이라 해도 낯이 뜨거우리만큼 질탕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백현을 분노하게 한 것은 그들의 야합(野合) 장소가 불문의 최고 성지인 소림의 한복판, 장경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도저히 신성한 불도량을 더럽히는 백우의 행각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러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천년 소림의 위대한 명성도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므로. 백현은 자신이 아끼던 사제를 향해 눈물을 머금고 소림의 최절정 절기인 백공천불강(白空千佛 )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백우의 머리통이 쪼개져 허연 뇌수를 쏟아내는 그 찰나, 약삭 빠른 계집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영호천문의 낮은 중얼거림에 주육풍화상은 정색을 지었다. "놈! 그렇다고 해서 소림을 우습게 보았다간 네 놈도 당장 내 손에 백우같은 꼴로 죽게 될 것이다." "후후... 안심하십시오. 그렇지는 않으니까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잠시 물을 흐려 놓았다 해서 강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볼 수 는 없을 테니까요." "허! 기특한 놈이로고. 이 파계승의 뜻을 미리 헤아리다니." "그야 기본이지요. 비록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저도 인생 편력이 비교적 다채로운 편이라서 말입니다." "흘흘... 그것도 자랑이냐?" "전혀 아닙니다. 그때문에 늘 괴롭고 불편할 따름이지요." 영호천문은 씁쓸히 말한 뒤, 상대를 정시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것이 말이다......." 백현대사. 그를 기다리는 것은 장로회의(長老會議)의 엄중한 문책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백우는 분명 그의 장력에 맞아 즉사했으며, 소림의 경내에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그는 대번에 신망을 잃고 일급 죄인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백현은 그 내막을 도저히 밝힐 수가 없었다. 장로들은 물론 소림의 삼천 명 제자들 앞에서 사문의 치욕을 발설하느니 차라리 죄를 뒤집어 쓰고 함구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전 직위를 박탈당한 채 뇌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야말로 숭고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운은 비단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밤 이후로 장경각에 비장되어 있던 달마진해(達磨眞解) 중 가장 중요한 비본(秘本)이 없어져 소림 전체가 발칵 뒤집혔는데, 그 혐의가 고스란히 백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백현도 극구 부인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소림의 장로회의는 그에게 파문과 함께 종신토록 면벽굴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쯤 되자 그도 인간인 이상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소림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소림은 대내외적으로 백현을 반도로 공표하고는 모든 제자들에게 보는 즉시 그를 잡아 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때, 들을만 하느냐?" 주육풍화상, 아니 백현이 물었다. 그의 입은 술냄새를 풍기며 툴툴 웃고 있으되 그의 눈은 어느덧 축축히 젖어 있었다. 영호천문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녕 몰랐습니다. 그런 한을 품고 계신 줄은......." "흘흘...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여기까지 도망오지도 않았다." "그럼 또 있습니까?" "불행히도 그렇다." "으음......." 백현대사는 도피 중에 마침내 당시 백우와 정을 통했던 계집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필생의 명예를 건 집요한 추적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무림의 명가(名家)의 딸이었다. 감숙(甘肅)을 호령하는 벽력방(霹靂 )의 벽력천제(霹靂天帝) 염증(閻曾)을 부친으로 둔 염백화(閻白花)가 바로 그녀였다. 무림의 사대기문(四大奇門)의 하나인 벽력방은 화기제일문(火器第一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정(正) 쪽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도저히 그런 죄를 저지를 위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염백화를 발견한 백현은 노기충천했다. 따라서 분노한 그에 의해 벽력방은 그 날부로 초토화 되고 말았으며, 그는 염백화를 일장에 쳐죽이고 잃어버린 소림비본을 회수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벽력방이 무너지자 나머지 삼대기문이 들고 일어섰고, 그 시점에 이르도록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림은 백현을 아예 무림공적으로 선포하여 삼대기문과 함께 공동추적을 벌였다. 이때부터 백현은 천하의 어느 곳에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와중에서 죽을 고비도 무수히 넘겼다. 대흉마(大兇魔)로 낙인 찍힌 그에게는 최소한 정황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가는 장소에는 늘상 치열한 격전이 뒤따를 뿐, 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 주려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백현은 살아남기 위해 소림비본 상의 무학을 익히게 되었으며, 본의 아닌 실전의 경력까지 착실히 쌓여지자 나날이 무학의 급증을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자신의 선(善)을 몰라 주는 사문(師門)이 너무도 야속했던 그는 급기야 세상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는 불회곡에 은둔해 버렸다. 얘기를 듣고 나자 영호천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실로 기구하기 짝이 없는 생이로군.' 일면으로 공감이 가능하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에 반해 백현은 여전히 큭큭 웃고 있었다. "이 노화상은 희망을 완전히 잃었었다. 세상은 온통 위선에 가득 차 있는데 유독 나만이 죄인이 되어 벌레처럼 무림의 그늘진 곳으로 쫓겨 다녔고, 쓸데없이 많은 것들을 경험했기 때문이지." 영호천문은 역시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면 내가 염세관(厭世觀)을 가지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여기까지 말한 백현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천문, 이 화상도 최근에는 그런 관념을 버리게 되었다. 어쩌면 잃어버린 생의 의미를 되찾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주기(酒氣)가 싹 걷혀 있었다. 그는 퉁방울 같은 눈으로 영호천문을 직시했다. "그것은 바로 너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네? 어째서 그런......?" "간단하다. 나는 너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작정했다." 영호천문은 쓰게 웃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가능하다. 너라면 충분히 나의 과거를 보상해 줄 것이며 나아가서는 소림에 내 뼈를 묻게 해 줄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백현의 음성은 격정을 숨기지 못해 가늘게 떨려 나왔다. 그것을 느낀 영호천문은 코 끝이 찡해 와 한 마디 했다.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아까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그런 고초를 다 겪고도 끝내 소림을 잊지 못하시는군요." "클클...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아니, 제기랄! 사실은 그렇다. 이 놈아." 백현대사의 눈에 다시금 뿌연 안개가 어렸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코를 헹하고 풀더니 말을 이었다. "공짜로는 바라지 않는다. 이 화상은 진즉부터 네 놈이 여의무형인(如意無形刃)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조만간 네 놈은 강호로 나가게 되겠지. 나도 네 놈에게 두 가지를 전해 주겠다." "으음, 제게는 가부를 결정할 시간도 안주시는군요." "좋을대로 생각해라. 좌우간 그 두 가지 중 하나는 문제가 되었던 소림의 비본서다. 혹 네 놈의 눈에는 차지 않을지도 모르나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익히든 말든 그것은 네 맘이지만 훗날 필히 소림에 돌려 주었으면 한다." "정말 못말리겠군요." "클클...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느냐? 그리고 또 하나는......." 백현대사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더니 합장(合掌)했다. "이 노화상의 이백 년 내력을 너에게 주겠다." 우웅--! 그의 전신이 찰나지간에 금빛 광휘로 휩싸였다. 그 광경을 본 영호천문은 크게 놀라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아, 안됩니다! 저는......." 그러나 상황은 이미 어떻게도 되돌릴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위잉--! 영호천문은 그대로 온 몸이 막강한 무형의 강기 속에 휘말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더니 곧 그의 정수리를 통해 무궁무진한 내력이 대하처럼 체내로 쏟아 부어지는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눈을 내리 감으며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대사께서는 아십니까? 지금 제 기경락은 모두 흩어진 상태외다. 아무리 내력을 불어넣어 봤댔자 고작 십분지 일이나 건질 수 있을런지.......' 이때, 그의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현이 구사해내는 불문의 혜광심어(慧光心語)였다. "아미타불... 네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노납은 잘 알고 있다. 천문, 네가 얻게 되는 이득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노납은 지난 날 업보의 무게로부터 영원히 해탈할 수가 없노라. 아무 말 말고 받아 들이거라." 그것은 평소 주육풍화상의 몰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중함을 담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절로 숙연해져 그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사.......' 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그에게 백현이 다시 말했다. "차후로 네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는 그만치 너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혜광심어의 울림은 뒤로 갈수록 점차 잦아 들어갔다. 그 반면에 영호천문은 자신의 몸을 휩싸고 있는 웅혼한 불광(佛光)이 더욱 더 짙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림이 낳았으되 또한 축출하기도 했던 최고의 기재(奇才), 백현은 이렇게 하여 세상에서 잊혀진 오지의 한 귀퉁이에서 스스로 생과의 연(緣)을 끊고 있었다. 그 날도 십오야였다. 일대의 기승(奇僧)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림을 떠받칠 기둥을 깎았던 밤이다. 그의 죽음이 던진 충격이 너무도 향기로왔던....... 제 4장 기인(奇人)을 완성시킨 사람들 ① 슉! 무형인(無形人)은 발출시 형체가 없고 빠르기가 천하 으뜸이다. 게다가 손목이나 무릎 등에서 불시에 튀어 나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도저히 방어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영호천문. 그는 맞은편 죽림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으적! 쩌저적--! 도합 아홉 그루였다. 굵기가 한 뼘 이상 되는 대나무가 일제히 절단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성공이다!" 몹시 만족한 듯 영호천문의 눈에서 광채가 일어났다. 그는 이어 팔을 들어 보았다. 감겨 있던 천은 풀려 나간 지 오래였고, 어느덧 본래의 흰 피부를 되찾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그가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위치는 다름 아닌 팔목 부근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여의무형인이 감추어진 흔적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과연 천병환사(千兵幻死) 혁련광 노선배가 평생에 걸친 걸작품이라고 자랑하더니, 충분히 그럴만 하구나." 천병환사. 무림인 치고 이 별호를 모르는 자는 드물다. 삼십 년 전만 해도 그는 무림 십대살객(十大煞客) 중 일인이었다. 그는 솜씨도 그렇지만 늘상 일신에 일천 가지의 암기와 병기를 소지하고 다님으로써 천하를 위협한 바 있었다. 더구나 그는 그것들을 스스로 제작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이라고 일컬어 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살생을 저질러 종내에는 무림의 공적으로 전락해 버렸고, 추적의 눈을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여의무형인이라는 일세의 신병을 창안해낸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손을 내리며 회색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이곳에서 나갈 때가 되었구나." 그는 두근거려 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대체 얼마나 이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왔던가? 그의 여망이 현실로 화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땅이 갈라지더니 시커먼 흑영이 불쑥 튀어나와 그를 덮쳐갔다. 파앗--! 영호천문의 몸이 빙글 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그의 발 끝에서 는 예의 여의무형인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슉! "켁! 아이쿠, 나 죽네." 하나의 왜소한 흑영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자는 키가 채 오 척도 되지 않는 난장이 노인이었다. 전신에 검은 가죽옷을 뒤집어 쓰고 있는 그를 보자 영호천문은 무형인을 회수하며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중얼거렸다. "무영공공투(無影空空偸) 나소(羅 ), 당신이구려." 무영공공투. 이 별호는 천하제일의 신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천하에 못 가본 곳이 없었다. 물 속이나 불 속도 거뜬히 가로지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황궁의 보고(寶庫)까지도 마치 자기집 안방 드나들 듯 하는 귀도(鬼盜)였다. 그러다 이십 년 전의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물건을 잘못 훔침으로써 드넓은 세상천지에서 설 땅을 잃고 말았다. 그 물건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 숨어야만 했으니, 그것은....... "헤헷... 천문, 사실은 네게 부탁이 있어 왔다." "당신은 부탁이 있으면 공격부터 하시오?" "아니, 그건 단지 애정 표현이다." "애정 표현......?" "험, 예로부터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쓸 수는 없다고 했거니와 네 무형인이 애꿎은 대나무나 작살내고 있기에 그냥 두고 보기가 안타까워서 그랬다." "끙!" 나소가 침을 튀기며 얘기하기 시작하면 의례 영호천문은 저항을 포기하고 만다. "너는 곧 여기를 떠나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오." "헤헷...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나가 주겠느냐?" 나소가 내민 것은 한 권의 비단책자였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이건 말이다, 연전에 전륜회주(轉輪會主)인 전륜대제(轉輪大帝) 백리성우(百里星雨)의 침실에서 훔친 물건이다. 대단한 비급이라도 되는 줄 알고 헤헤헷......." 영호천문의 눈이 되려 이채를 띄었다. "그럼 아니었단 말이오?" "글쎄, 그게 알고 보니 엄청난 물건이 아니겠느냐? 온갖 파렴치한 작자들의 인명부였으니. ㅌ!" 나소는 재수가 없다는 듯 땅바닥에 침을 뱉았다. "그 책자에는 강호에서 명망을 드날리고 있는, 소위 대인대의(大人大義)한 협객(俠客)들의 이름들도 들어 있지. 당사자들의 자인서에 인(印)까지 멀쩡하게 찍혀 있다." "맙소사!" 영호천문 역시도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륜회라면 강호제일의 협웅지맹(俠雄之盟)이다. 특히 전륜대제는 정도(正道)의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비밀리에 이런 행각을.......' 나소는 입술을 한 번 질겅 씹더니 말했다. "알고 보니 백리성우는 위선자였어. 그 놈은 그 자인서를 미끼로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자들을 협박하여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고 있었던 거야." 영호천문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언젠가 한 번 백리성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호협다운 기질에 탄복했었는데, 그가 위선자였다니.......' 나소의 음성이 아까보다 다소 거칠게 변했다. "문제의 책자를 도난당하자 백리성우, 그 자는 즉각 전륜첩(專輪岾)을 돌렸다. 강호인들을 동원해 노부를 공적으로 몰아세웠던 것이지. 그때문에 노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내 이 두 손, 다 합쳐 봐야 손가락이 두 개밖에 남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이를 부드득 가는 그에게는 확실히 오른손 중지(中指)와 왼손 의 인지(人指)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그가 두 번 다시 독문의 공공절기(空空絶技)를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동안 노부는 너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다. 헤헤......." 나소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다시금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에게 영호천문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알고 있소. 그리고 나는 당신뿐 아니라 불회십반천 모두에게 빚을 진 몸이오. 무엇이든 요구가 있거든 말하시오. 능력만 닿는다면 성심껏 이행하리다." "헤헤... 꼭 거래를 하는 것 같아 찝찝하다만 사양치 않겠다. 뭐 별 것도 아니야. 복수를 해 달라는 것 뿐이니까." "복수라면......?" 영호천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만일 그의 입에서 전륜회주를 없애 달라는 말이라도 튀어 나오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중을 눈치챘는지 나소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 그렇게 심각할 것 없어. 노부는 단지 그 인명록이 강호에 공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과연 놈들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보고 싶거든. 헤헤...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 영호천문은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듣고 보니 그것은 굳이 당신의 부탁이 아니라도 누군가 꼭 행해야 되는 일 같구려." "바로 내 말이 그 말이다." 슥--! 말을 마치자 나소는 아까 튀어 나왔던 땅 속으로 두더지처럼 도로 기어 들어갔다. 그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한 가닥 음성만이 남아 영호천문의 귀에 꽂혔다. "고맙다. 천문......." 그 음성의 여운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진한 정이 깃들어 있었다. 혼자 남게 된 영호천문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불회십반천은 사실상 전부가 선량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그들의 본심을 모르고 쫓아냈을 뿐." 그는 몸을 돌렸다. 문득 그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솟았다가 꺼졌다. 그는 하나의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단 한 사람! 그만은 선하지 않다." 누구를 향해서인지 그는 다소 고조된 음성으로 의미 모를 말을 내뱉으며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슉! 그의 손바닥에서는 예외없이 무형인이 쏘아져 나왔다. "켁! 이 놈아, 노부를 죽일 셈이냐?" 후다닥 하고 바위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사람의 형상으로 화했다. 대략 육순 쯤 되었을까? 바위로 위장하고 있던 그 자는 머리가 벗겨진 늙은이였으며 오른쪽 다리가 없는 불구였다. 일신에는 얼룩덜룩한 채의를 입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왜소한 편이나 왠지 그에게서는 찌르는 듯한 예기가 느껴졌다. 영호천문이 그 노인을 향해 사뭇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동영제일(東瀛第一)의 인자술(忍者術)과 일천팔백 가지의 살인법에 통달한 후, 중원에 건너와 당신이 한 일이 대체 무엇이오? 고작해야 청부살인이 아니었소?" 그 말에 독각노인은 눈을 크게 휩떴다. "천문! 너, 정말로 노부를 처단할 셈이었느냐? 이래뵈도 나 동천목(凍天木)은 살인의 미학(美學)을 추구한 천하제일의 자객으로서 나름대로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영호천문은 힐난을 그치지 않았다. "청부살인에 미학은 무슨 미학? 재물만 얻을 수 있으면 누구라도 죽이는 것이 당신같은 사람들의 생리가 아니오? 모름지기 당신은 한 쪽 다리를 잃은 것만도 감사해야 하오. 당신의 손에 죽어간 원혼들이 겨우 그 정도로 참아 주었으니 말이오." "너... 너, 정말......!" 동천목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다음 순간, 그가 손을 뻗자 진짜 바위 하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펑--! 그 바람에 우박같은 파편이 영호천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그의 신형이 땅 속으로 쑥 꺼져 버린 후였다. 영호천문은 동천목의 등 뒤로 솟구쳐 올라와 그의 등에 가벼운 일장을 날렸다. 파팟! "억! 망할 놈, 내게 배운 수법을 써 먹다니." "후후후... 지금 막 생각한 건데, 당신의 다리가 두 개였으면 좋겠소. 그 하나를 내가 직접 분질러 버리게 말이오." 영호천문의 말투는 어느덧 농담조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도 그의 말 중에 진심을 담은 것은 한 마디도 없었다. 실상 그는 동천목이 어떤 위인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무척 이나 좋아했던 것이다. 이는 불회십반천 모두에게 마찬가지였고, 동천목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아이구, 이젠 나도 늙었나 보구나. 네깟 놈에게도 당해내지 못해 이렇게 쩔쩔 매야 하다니." 동천목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엄살을 떨었다. "네 놈 말마따나 내가 다리만 성했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을....... 휴우! 그저 무심한 세월이 웬수로구나." "그것을 깨달았으면 앞으로는 자숙하시오." 영호천문의 엄숙한(?) 논조에 동천목은 기어이 쿡쿡 웃었다. "이 놈아, 농짓거리도 적당히 해라. 이 후미진 곳에서 자숙이고 나발이고가 어디 있느냐? 되는대로 살면 되는 게지." 그는 방금 전의 기세와는 달리 신형을 번개처럼 날리더니 높은 나뭇가지 위에 척 하니 걸터 앉았다. "천문, 나도 부탁이 있다." 그의 표정도 어느새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해천일살(海天一煞). 이 별호를 들으면 대개의 사람들은 안색이 급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죽음과 직결되는 단어이기 때문이었다. 해천일살 동천목은 앞서 영호천문이 언급했듯 동영(東瀛)에서 고도의 인자술과 살인법을 익혀 가지고 온 일급 자객이었다. 그가 재물을 받고 청부살인에 응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일찍부터 천목산(天目山)에 살인루(殺人樓)라는 단체를 세우고 공개적으로 살인청부업을 했었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그의 생을 논해서는 안된다. 과거 영호천문이 그러했듯 그에게도 나름의 운명이 족쇄처럼 작용을 했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업보가 산적(山積)되자 그는 마침내 무림의 공분을 사게 되었고, 정사의 합공을 받아 다리 하나를 잃고는 이 불회곡으로 추락했던 위인이었다. 그도 역시 무림 십대살객의 일인이다. ② 동천목은 그답지 않게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한 놈을 죽여 다오." 영호천문이 의아하여 반문했다. "해천일살이 못 죽이는 인물도 있었단 말이오?" 동천목은 번쩍이는 반대머리를 손바닥으로 스윽 쓸었다. "그 놈은 동영에서 노부와 함께 수학한 자다. 간악한 흉계로 노부의 살인루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기도 하지." "그 자가 누구이기에......?" "바로 십대살객 중 첫번째로 꼽히는 놈이지. 사자림(獅子林)의 총수인 사자천효(獅子天梟) 육청풍(陸淸風)이 그 놈이다." "사자림......!"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내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자림이라면 당금 녹림(綠林)의 총본산이다. 수십만의 녹림도들이 힘을 모아 이룩해낸 그들만의 천하였던 것이다. 사자림에는 녹림도가 아니면 들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일로 성장을 거듭하여 벌써부터 정도의 연맹인 전륜회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림사대금역(武林四大禁域) 중 한 곳으로 선포되기도 한 곳이다. 그런즉 사자림의 총수인 사자천효 육청풍이 해천일살 동천목과 동문(同門)이라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를 죽여 달라니 영호천문으로서도 선뜻 그러마고 대답할 일이 못되었다. 동천목이 물었다. "왜, 겁이 나느냐?" 영호천문은 피식 웃었다. "당신이 천중일정이라는 인물을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 말에 동천목은 구겨져 있던 안색을 활짝 폈다. "그럼 승낙한다는 말이겠구나?" "단, 조건이 있소." "좋다. 무엇이든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다." "내가 원하는 것은 대가가 아니라 시간이오. 사자천효 같은 거물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그건 염려 마라. 장부의 복수는 언제 해도 늦지 않는 법, 지금까지도 기다렸는데 어디 그 정도쯤이야 못참겠느냐?" "후후... 당신은 마치 떼놓은 당상인 양 쉽게 말하는구려?" "물론이다. 네 놈이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부탁은커녕 아예 처음부터 얘기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동천목은 품 속에서 하나의 열쇠를 꺼내더니 던져 주었다. "자, 받아라. 살인루의 비밀보고(秘密寶庫)를 여는 열쇠다. 그곳의 물건들은 사자림을 깨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으음!" 영호천문은 그 열쇠를 받아 대충 살펴 보았다. 그것은 용(龍)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특이한 열쇠였다. 이윽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동천목의 모습은 벌써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영호천문은 다소 공허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쯧, 떠나는 것이 그저 즐거운 일만은 아니군." 그 역시도 어딘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전에 꼭 만나 보아야 할 사람들이 더 있지." 그는 죽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영호천문은 난데없는 기경(奇景)과 만나야 했다. 갑자기 죽림은 온데간데 없이 소멸되고 첩첩산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부지중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기신유(天機神儒) 단목군(丹木君) 선배의 사해미환오악대진(四海迷幻五嶽大陣)은 가히 고금제일의 절진이로구나." 천기신유. 그로 말하자면 삼십여 년 전, 우내제일학(宇內第一學)으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다. 만사무불통(萬事無不通)의 대유학자로서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그의 앞에서 머리를 숙였었다. 특히 그는 기문진법(奇門陣法)에 있어 달인이었다. 단지 나무 젓가락 몇 개만으로도 그는 능히 천병(千兵)을 거둘 정도의 조화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불회곡에 있다는 것은 실로 뜻밖이었다. 스슷! 영호천문은 기묘한 보법을 시행해 진(陣)을 뚫고 나갔다. 알고보면 사해미환오악대진은 죽림을 이용해 설치된 것이었다. 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절진을 무사히 통과했다. 죽림의 한가운데에 정교하게 지어진 소축이 있었다. 그 앞에는 하나의 인공 연못이 있었는데, 물이 어찌나 투명하고 맑은지 바닥이 환히 다 비쳐보일 정도였다. 연못 위에는 그림같은 수상(水上) 누각이 세워져 있었고, 영호천문이 만나고자 하는 인물들은 거기에 있었다. 먼저 일신에 백색 유삼(儒衫)을 걸친 한 노인. 그는 일견하기에도 단아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용모 또한 청수했다. 턱에는 유난히 희고 탐스러운 수염이 나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도 역시 금의(錦衣)를 입은 한 명의 노인이 대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후자의 노인도 분위기는 앞서의 백의노인과 비슷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묘수(妙手)를 떠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의노인이 먼저 상대방에게 말을 건넸다. "허허... 태사(太師), 대마(大魔)가 잡혔소이다." "흐음!" 금의노인은 눈을 뜨더니 고개를 저었다. "허헛, 내 졌소이다. 하여간 단목노형에게는 못당하겠구려." 그 말에 백의노인은 껄껄 웃었다. "그 무슨 소리요? 황실의 위성공(韋成公)이 국수(國手)라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거늘, 겸손이 지나치시외다." 태사감(太師監) 위성공. 그는 황실의 태자(太子)와 그 이전의 황상(皇上)까지를 직접 가르쳤던 지고한 신분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도 무슨 사연이 있어서인지 이곳 불회곡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한 가닥 청아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호호호... 두 분 할아버지께서는 바둑보다 설전(舌戰)을 벌이느라 더 피곤하시겠어요. 어때요? 설리차(雪梨茶)로 목이라도 좀 추기고 나서 더 싸우시면." 소축으로부터 녹의를 입은 한 소녀가 찻쟁반을 받쳐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영호천문을 보살피던 화영이었다. 화영은 정자로 오르더니 얌전히 찻잔을 내려 놓았다. 언제 보아도 천성적인 밝음이 느껴지는 귀여운 소녀다. 금의노인, 즉 태사감 위성공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영이도 얼마 있으면 시집을 보내야 될 것 같구나." 화영은 얼굴을 스르르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가지 않겠어요. 이곳에서 할아버지들과 살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백의노인이 한 마디 거들었다. "허헛! 오늘 이 단목군은 세상이 인정하는 이대 거짓말 중 한 가지를 들었소이다. 장사치가 이문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말이 바로 그것 아니외까?" "헛헛헛......! 맞소이다. 지금은 저렇게 말하지만 정말로 화영이를 노처녀로 만들었다간 내 저 애에게 수염을 몽땅 뽑히게 될지도 모르오." "아이 참, 두 분께선 너무 하세요. 저만 보면 놀리시고." "허허허허......." 실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어떻게 만났든 그들에게는 어느덧 서로에 대해 두터운 정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죽림의 소로에 서서 줄곧 그들을 지켜 보았고, 오가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내심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저 소탈한 인물들이 바로 이곳에서 나의 정신세계를 다듬어 준 사람들이다. 저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까지 정상적으로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배신과 증오의 그 깊은 수렁에서 헤매고 있을 때, 천기신유 단목군과 태사감 위성공의 은중하고 따뜻한 지침은 그에게 있어 거의 구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망가진 육신을 회복시켜준 것이 귀의 야율천이라면 그를 절망 속에서 건져준 것은 그들 두 사람이었다. 이르자면 단목군과 위성공은 그의 정신적 스승이랄 수 있었다. 영호천문은 이어 두 노인 사이에서 티없이 웃고 있는 화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차디찬 영혼에 온기를 부어 준 소녀.......' 그는 생각한다. 만일 화영이라는 존재가 곁에 없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세상의 모든 여인을 혐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살을 섞고 살던 아내로부터 철저히 기만당한 사내, 그런 불운한 자의 마음에서 얼음덩이를 녹여낸 장본인이 화영이다. 그녀는 식물인간이나 다름 없는 그에게 아무 조건없이 자청하여 눈이 되어 주었으며,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한 통증을 느꼈다. '나는... 저들과 이별을 해야 한다.' 화영이 그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지었다. "어머! 오빠, 언제 오셨어요?" ③ 차(茶)는 더 없이 향기로왔다. 영호천문이 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 화영은 줄곧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서는 이로(二老), 즉 단목군과 위성공이 뭔가 의미가 담긴 듯한 눈길로 그들 두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목군이 입을 열었다. "천문, 얼굴에 감은 천은 언제 풀게 되는가?" 영호천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야노인께서 내일 풀게 된다고 했습니다." "흠, 귀의의 말이니 틀림없겠군." 이번에는 위성공이 흰 눈썹을 움직이며 물었다. "자네는 내일 곧바로 떠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오빠......?" 화영이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위성공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화영아, 누구든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는 법이란다. 설사 미리 알았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단다." 화영은 잔뜩 굳어진 채 항변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다니요? 저는 방금 전까지도 전혀 모르고......." 그녀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그것을 본 단목군이 빙긋 웃으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화영, 너무 슬퍼할 것 없다. 헤어지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역시 상리(常理)이니까 말이다." "정말, 정말 그럴까요?" 화영은 몸을 가늘게 떨며 확인하듯 물었다. "암, 내가 왜 허언을 하겠느냐?" 영호천문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과연 그렇게 될지......?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은 보보(步步)마다 혈해(血海)일진대 어찌 해후를 장담하겠는가?' 위성공의 진중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끊었다. "자네, 나와 약속을 하나 해 주겠는가?" 영호천문은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훗날 화영을 맡아 달라는 것일세." "그, 그건......." 그는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심중에서는 벌써부터 이런 질문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의 앞길을 잘 알고 계신 분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결국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화영은 얼굴이 붉어진 채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런! 성급하기는, 다 들어 보지도 않고......." 단목군은 끌끌 혀를 차더니 다시 말했다. "천문, 자네는 곧 강호로 나갈 것이다. 아마도 그때부터는 끝없는 혈겁행(血劫行)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우리는 믿네. 자네가 무고한 자의 피를 손에 바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지할 것은 우내구정(宇內九鼎)에 관한 사항이네. 그들은 당금 무림의 구천(九天)으로서 정립시켜가고 있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르네." "으음!" "그 말은 곧 구정의 천하가 미래 무림까지도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들은 아직 젊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 여하에 따라 무림의 향배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세." 단목군의 말은 조리있게 이어져 가고 있었다. "이제 자네가 그들 사이로 뛰어듦으로써 한 차례 폭풍시대가 도래하겠지. 어쩌면 자네의 처지는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네." "잘 알고 있습니다." "노부는 역시 믿어 의심치 않네. 그 냉철한 이성(理性)과 판단력이 건재하는 한, 자네는 결코 무림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 말에 영호천문은 가슴이 무섭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목군이 종용하는 웅지(雄志)가 움츠러들어 있던 그의 내면 세계에 불을 당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단, 매사를 서둘러서는 안되네. 현재 자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과거의 무공을 회복하는 일이지. 천병환사 혁련광이 여의무형인을 선사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구정에게는 무용지물일 것이네. 단지 지엽(枝葉)만을 쳐낼 수 있을 뿐......." 단목군의 음성은 시종일관 무섭도록 조용했다. "우선 자네는 머리를 써야 할 것이네. 천 개의 검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 바로 인간이 지닌 한 개의 뇌(腦)이니까 말일세." 영호천문이 담담히 답했다. "노선배의 가르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단목군은 껄껄 웃었다. "허헛... 고맙군. 이것은 여담이네만, 지난 날 노부는 무공을 전혀 모르고도 환우사기( 雨四奇)에 속했었네. 세상은 꼭 힘으로 정복되어지는 것만은 아니지. 안 그런가?" 환우사기. 그들은 정녕 신비무쌍한 위인들이다. 그들에 관해서는 무림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심지어 진정한 신분과 무공내력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비밀에 속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들이 십대살객과 더불어 무림의 건드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단목군은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내 알기로 지략전(智略戰)에도 반드시 조력자가 있어야 하네. 혼자서 많은 적을 상대하기는 벅차지. 고로 노부는 자네가 필히 얻어야 될 몇 사람을 추천하겠네." 그는 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들은 유명하지는 않으나 요인(要人)들이네.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혹 자네를 문전박대할지도 모르네만." 영호천문은 그 말에 되려 호기심을 느꼈다. '으음, 삼고초려(三顧草廬)도 불사하라는 얘기같은데, 대체 어떤 인물들이기에......?' 단목군의 음성은 계속 되었다. "내 자네에게 네 개의 금자(金子)를 주겠네. 그것은 그들의 지인(知人)임을 표시하는 신물일세.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단지 그들을 만날 수 있을 뿐,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안되고는 자네의 수완에 달려 있네." 곁에서 잠자코 있던 위성공이 입을 열었다. "노부는 자네에게 줄 것이 없어 어쩌지? 허허... 워낙 쓸모 없는 늙은이가 되어 놔서......." 영호천문이 급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정녕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태사감께서는 소생에게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저를 지탱시켜 준 정신의 소산이 모두 그렇지요." "허허...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오히려 고맙지." 위성공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이곳에 있는 열 명의 늙은이들은 전부 세상에 나갈 수가 없는 자들이네. 개중 단목노형은 지혜가 죄가 된 나머지, 동도들의 시기로 일족(一族)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었네. 천행으로 그 자신만이 살아 남았을 뿐......." 영호천문의 눈이 일순 예리한 섬광을 발했다. "대체 그들이 누구누구입니까?" 단목군이 고소를 지으며 흰수염을 쓰다듬었다. "다 지난 일이네. 노부는 그 자들에게 충분히 복수를 했고, 조용히 쉬기 위해 스스로 이곳을 찾아 왔다네." 그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자네, 훗날 언제라도 시간이 생기면 십만대산(十萬大山)에 한 번 가 보게나." "십만대산에는 왜......?" "그곳에 가면 아주 재미있는 일을 만나게 될 것이네." 영호천문은 내심 의문이 치밀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단목군이 위성공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본시 위태사는 당금 황상(皇上)의 스승이셨세. 그러다 십사년 전의 어느 날......." 위성공이 나직이 탄식을 불어냈다. "단목형, 그 케케묵은 얘기는 무엇하러 꺼내시오?" "위태사, 말리지 마시오. 진실은 언제고 밝혀야 하는 법이오." 단목군은 정색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위태사가 황궁에서 물러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지. 그것은 주화영(朱華英) 공주(公主)와 밀접한 관련이 있네." 영호천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지금 주화영... 공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자네가 알고 있는 화영은 황상의 따님이시네." "으음!" 영호천문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공주께서는 어찌 하여 이곳에 계시게 되었습니까?" "거기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지." 단목군의 얘기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황제는 태자(太子)였던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과 깊은 인연을 맺어 지금의 주화영 공주를 얻을 정도였는데....... 상황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북방(北方)의 이족(異族)이 심어 놓은 세간(첩자)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인물은 대장군(大將軍)인 위지연림이었고, 그는 곧바로 태자의 스승인 위성공을 찾아가 이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위성공은 고심막측이었다. 당연히 황제에게 품하여 여인을 벌해야 했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태자는 그 여인을 몹시도 총애하는 눈치였고 그녀의 뱃 속에는 황실의 손(孫)이 잉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위성공은 생각을 바꾸어 여인을 스스로 귀화(歸化)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정했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그녀의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설득 작전을 펴 나갔다. 다행히도 그로부터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여인은 심경의 변화를 보였다. 종족이 다르다 해도 역시 여필종부(女必從夫)인 데다가 위성공의 끈질긴 충고에 점차로 감화되어 갔던 것이다.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황제의 측근에 있던 교활한 환관 한 명이 어찌어찌 이 일을 알고는 태자에게 사실과 전혀 다르게 아뢴 것이었다. ④ 단목군은 위성공의 청수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자 말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그 자가 위태사를 어찌 모함했는지는 추잡하여 차마 입에 담지를 못하겠네. 그 비열한 작자의 말에 의거하면 위태사는 인륜(人倫)조차 저버린 위인이었으니까. 허허허......." 듣고 있던 영호천문이 되려 노기 띈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태자, 아니 당금의 황상께서는 그 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셨단 말씀입니까?" 단목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히도 그렇네. 아니, 어쩌면 질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당시의 태자께서는 스승인 위태사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흑심을 품고 빼돌린 것으로 알고 계셨으니까 말이네." "어찌 그런 생각을......?" 영호천문은 너무도 기가 막혀 채 말도 잇지 못했다. 그를 향해 단목군은 오히려 혀를 끌끌 찼다. "자네, 지금 보니 무척 순진하군. 예로부터 환관들의 발호는 그렇게 이루어져 왔네. 어쨌든 그 결과로 위태사는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참수형을 당할 운명에 처해졌네. 그런데 위태사가 형을 피해 도주한 이유는 언제고 환관들의 세력을 몰아내고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울 날이 오리라는 희망 때문이었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저 희망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말을 받아 위성공이 입을 열었다. "천문, 노부의 현재 희망은 그것이 아니네. 언제부터인가 그 쪽은 아예 포기하게 되었지." "그럼 무엇입니까?" 위성공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노부 나이 이제 팔십구 세일세. 살만큼 산 셈이지. 아무리 정의를 추구한다 해도 늦었으며, 또 내가 나선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네. 더구나 이곳에 있다 보니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네." "어찌 그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영호천문의 항변에 위성공은 빙긋 웃었다. "때로 진실이란 밝혀져서 되려 해가 되는 수도 있지." "으음!" "혹시 노부의 명예는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이상은 얻을 게 없다는 얘기일세. 설사 그렇게 된들 환관들의 득세를 막을 길도 없거니와, 화영은 어찌 되지? 그 아이의 모친이 오랑캐의 첩자란 것이 다 알려진 마당에......." 감정이 개입되어서인지 위성공은 중도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주화영 공주를 친손녀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영호천문은 더 대꾸하지 못하고 길게 신음을 흘렸다. 위성공의 고매한 인품이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가진 무한한 인간애(人間愛)에 더욱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위성공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공주라는 신분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네. 자네도 알겠지만 화영은 밝고 지순한 성품을 가진 아이가 아닌가? 그런 아이가 어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자금성에서 버텨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출신 때문에 황상의 총애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끝없는 모함만이 그 아이를 위협할 것이네." 그는 영호천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자네가 지켜 주게. 그 아이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티없이 살아 가도록 말일세." 영호천문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묵묵히 있었다. "그 아이는 자네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네. 아직 연정(戀情)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친오라비 이상이지." 위성공은 시선을 옮겨 허공을 응시했다. "여인이란 지아비를 통해서 생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법, 그 아이의 모친이 그랬듯 그 아이도 반드시 그럴 것이네. 자네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것을 보며 내 이 점을 실감했다네." "하지만 어르신......!" "알고 있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사실 자네의 길흉(吉凶)은 누구도 점칠 수가 없지. 그러나 벌써 화살은 시위를 벗어났네. 그 아이의 운명은 자네와 더불어 시험대에 올랐네. 심판은 자네도, 노부도 아닌 하늘이 하실 것이네." "으음......." 영호천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떨구어 연못 속에서 노니는 비단잉어들을 바라보았다. '갇혀진 물 속에서도 저 생명체들은 저렇게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인간만이 그렇지 못하다. 자꾸만 어딘가로 뛰쳐 나가려고 하니. 미안하구나, 화영.......' 불회곡의 밤은 죽음처럼 적막하다. 그 정적은 나름대로 평화를 상징하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는 자, 그는 바로 이 시대가 빚어낸 불행한 운명의 시금석(試金石)이었으니 말이다. 분명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종국에 가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나 당장으로 보아서는 그 반대라고 보아야 했다. "내일 나는 이곳을 떠난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江湖)로." 그는 착잡한 심정을 안고 천천히 분지를 거닐었다. 일월의 기온으로 치자면 혹심할 정도로 추울 때이나 이곳 불회곡에는 한 번도 그런 추위가 기습해 온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예년에도 마찬가지로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로 일관해 왔다. 그렇지 못한 곳도 있기는 하다. 그곳은 하나의 동굴로서 불회곡의 북쪽 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빙동(氷洞), 문자 그대로 얼음굴이었다. 하란산의 만년빙맥지기(萬年氷脈之氣)가 형성해 놓았다던가? 그 동굴 안에는 늘상 한 걸음만 들어가도 뼛 속까지 침투하는 빙한지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특수한 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채 십보(十步)를 옮기기도 전에 전신이 뻣뻣하게 되어서 죽고 만다. 영호천문. 그는 발걸음을 빙동의 입구에서 멈추었다. 그의 눈이 여느 때에 비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리라. 이곳에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가공할 병기(兵器)들이 숨쉬고 있다는 것은.' 그는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이들이 인생을 나에게 내걸었다. 그들은 세상에 복수를 하기 위해 활강시(活彊屍)가 되기를 자청했지.' 영호천문은 빙동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또한 안으로 접어 들수록 심혼마저 얼려 버릴 듯한 한빙지기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천정으로부터 흘러내려 날카로운 창처럼 보이는 빙주(氷柱)들을 지나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쯤 가자 사위는 다소 밝아졌다. 그것은 빙주들 사이로 희미한 여명이 스며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부터는 뭉클거리는 빙무(氷霧)가 급격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휘류류류륭--! 그 한가운데에는 빙담(氷潭)이 자리잡고 있다. 담 속에는 투명한 물이 가득 고여 있었으며, 영호천문은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얼음보다도 몇 배나 더 차가운 물, 즉살짝 손끝만 담그어도 막바로 뼈골까지 얼려 버린다는 전설의 빙맥지극수(氷脈至極水)였다. 빙담의 정중앙에는 놀랍게도 세 명의 인물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이남일녀(二男一女)로서 두 사내는 중년의 나이쯤으로 보였고, 여인은 이십대 정도의 절세미녀였다. 그들은 일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는데, 그들의 몸에는 얼음이 한 자 이상의 두께로 잔뜩 뒤덮혀 있었다. 이는 마치 얼음관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영호천문은 그들 삼 인을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철사후(鐵師候), 낙성추(落星秋), 연봉봉(燕鳳鳳)....... 내 이제 그대들과 헤어지게 되었소. 후일, 강호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에는 부디 그대들의 공부(工夫)가 완성되어 있기를 바라오." 과연 누가 알겠는가? 철사후와 낙성추, 그리고 연봉봉 등 그들 삼 인의 남녀가 이후로 무림에서 일으키게 될 엄청난 파문을. 그들은 세상에 대해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깊은 한(恨)을 품은 인물들로 한을 풀기 위해 앞날의 삶을 내던졌다. 즉 인간답게 살기를 완전히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영호천문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들 삼 인은 당연히 그에게 후사를 일임했다. 휘류류륭--! 빙무가 그들의 잠든 영육을 한 차례 신비스럽게 휘감아 갔다. 그 광경을 보며 영호천문은 자위하듯 읊조렸다. "후후후... 아마도 얼마 후면 세상이 다 깜짝 놀라게 될 것이오. 철사후, 낙성후, 연봉봉, 그대들로 인해서 말이오." 그것은 하나의 예고였다. 대풍운에 의해 새로 쓰여질 무림사(武林史)에 대한....... 제 5장 독보강호행(獨步江湖行) ① 일곱 쌍의 눈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은 불회곡(不廻谷)의 한 모옥 안이다. 불회십반천 중 귀의 야율천, 천병환사 혁련광, 무영공공투 나소, 해천일살 동천목, 천기신유 단목군, 태사감 위성공, 주화영 공주 등 칠 인이 모두 영호천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로 심각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영호천문이 마침내 얼굴에 감긴 천을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기대가 커서 흥분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초조와 불안으로 인해 칠 인의 눈동자는 잠시도 초점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영호천문의 얼굴에서 천이 모두 제거되었다. 잠시 장내에는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맨 처음 입을 연 것은 천병환사 혁련광이었다. "맙소사! 저 얼굴은......." 영호천문이 태연하려 애쓰며 물었다. "왜,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혁련광이 더듬거리자 나소가 정신이 든 듯 크게 웃었다. "와핫핫핫......!" 그 뒤를 이어 동천목이 야율천의 어깨를 툭 쳤다. "ㅋㅋㅋ... 대체 어쩌자고 너는 저런 작품을 만들어 놓았느냐? 완전히 기생 오라비 같은 몰골이 아니냐?" 어투야 어찌 되었건 그것은 분명한 찬탄이었다. "으하하하핫......!" 야율천은 그제서야 앙천광소 했다. "핫핫핫... 그럼 되었다! 노부의 솜씨가 아직 녹슬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으하하하......." 그의 퀭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손으로 영호천문의 얼굴을 만져 보더니 급기야 어깨를 떨며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오! 이 얼굴....... 아느냐? 천문, 네가 처음 이곳에 떨어져 내렸을 때의 얼굴은 야차였다......!" 그 말은 곧 성형(成形)을 했다는 의미였는데, 영호천문의 얼굴로 보아 그가 이렇듯 감격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완벽한 조형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나무랄데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하다는 점만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막상 당사자인 영호천문의 기분만은 좀 달랐다. 그는 지금 나소가 내밀어 준 거울을 망연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것이 나....... 영호천문이 맞는가?'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자신이라 여기며 받아들여야 했으니, 그로서는 기쁘기에 앞서 그저 착잡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우수에 찬 눈빛이었다. '으음, 이나마 다행이로군. 만일 눈마저 의안이었다면 내가 나와 친숙해지지 못했을 테니까. 후후후.......' 영호천문은 내심 자조적으로 웃었으나 겉으로는 이를 드러내지 않고 한껏 밝은 음성으로 물었다. "여러분, 이만하면 최고 미남이 아닙니까? 소생은 송옥과 반안이 시기할까봐 감히 들고 다니기가 두려울 지경입니다." 그 말에 혁련광이 껄껄 웃었다. "핫핫... 그래도 가능한 한 열심히 들고 다녀라. 아마도 무림의 미녀들을 후려내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날더러 할 일을 잊고 오입장이가 되라는 말씀이시오?" 그 말을 동천목이 받았다. "크크크... 원래 네 놈은 유명한 탐화랑이 아니었느냐?" "그건 맞소이다. 후후후... 내 무림에 나가면 필히 과거의 경력을 밑천 삼아 다시 분투해 보겠소." "핫핫핫핫......!" 그 범상치 않은 농담에 주화영은 얼굴을 몹시 붉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축하해요, 오빠." 영호천문은 얼굴을 손으로 스윽 쓰다듬으며 답했다. "인사는 후에 받지. 아직도 내게는 이 훌륭한 허울이 너무 생소하게 느껴져서 말이야." 그는 손을 내려 야율천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하오. 내 부모님께서 이전의 모습을 만들어 주어 삶을 허락하셨듯 당신도 내게 꼭 그리 해 주셨소. 맹세컨대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천문, 정말로 내게 있어 너는 친혈육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도 당신과 별로 다르지 않소이다." 그것은 맞잡은 손을 통해 진한 정이 교류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연후, 영호천문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소생은 이만 출곡(出谷) 하겠습니다. 그 동안의 후의는 정녕 백골난망입니다. 부탁하신 일들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성심껏 이행할 것입니다." 그 자신 외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말로 대신하기에는 이별의 쓰라림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흑......!" 주화영이 참다 못해 얼굴을 가리며 뛰쳐나갔다. "화영......." 영호천문은 낮게 신음을 발했으나 그 뒤를 쫓지는 않았다. 그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천기신유 단목군이 말했다. "허허... 천문, 본시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일수록 정도, 슬픔도 깊은 법이지."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잠시 만나볼 작정입니다." "잘 생각했네. 꼭 그래 주게. 자칫 화영의 가슴에 한이 남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네." "알겠습니다." 영호천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불회십반천을 향해 깊숙이 일배했다. "그럼 부디 평안하시기를......." 노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그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모옥 밖은 안에 비해 매우 환했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미처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등 뒤로 불회십반천의 소리 죽인 한숨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은 내심 쓰게 읊조렸다. '이별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것이로군.' 옥계류가 흐르는 다리의 난간이다. 주화영이 거기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영호천문이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듯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태어난 이래 밝은 의식만으로 일관되게 자라난 이 소녀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문오빠를 다시는 못볼지도 모른다!' 주화영의 뇌리에는 온통 이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영호천문은 첫 남자다. 그로 인해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이성(異性)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레임에 눈을 뜬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친절로써 대하기는 했지만 그 충격에 가까웠던 열정만은 그녀도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떠나려 하는 것이다. 듣자 하니 그의 향후 운명은 그리 평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툭....... 눈물이 흘러 그녀가 가슴에 안고 있는 작은 보자기 위로 떨어졌다. 시야가 흐려져 있는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지만. 불현듯 귓가에 나직하게 부딪쳐오는 음성이 있었다. "화영." 영호천문이었다. "문오빠......." 주화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나는 그만 가 보아야 될 것 같구나." 크지도 않은 그 한 마디가 그녀의 고막에 부딪쳐 올 때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쓴 웃음을 지으며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참 바보죠? 본심은 이게 아닌데, 사실은 오빠께 몸조심하고 꼭 뜻을 이루시라고 말하고자 했는데...... 흑......!" 주화영은 기어이 안고 있던 보자기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그녀의 어깨가 마구 들썩이는 것을 보며 영호천문이 말했다.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그간에 베풀어 준 온정을 갚기는커녕 상처만 안겨 주고 말았으니......." 주화영이 비로소 눈물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아직도 저를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나요?" "흐음?" "확실히 전 아직 모든 면에서 미숙하고 아는 것도 적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애는 아니란 말이에요." "화영......?" "오빠!" 주화영은 격정을 이기지 못한 듯 그의 품으로 와락 뛰어 들더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마구 흐느꼈다. "흐흐흑......!" 영호천문은 얼떨결에 그녀를 받아 안고는 고소를 지었다. '쯧, 네가 정녕 어린애만은 아니었구나.' 외로움이란 인간을 나이보다 성숙하게 만드는 법인가? 핏덩이때부터 혼자였던 그녀는 불회십반천 사이에서 자라나며 그들 외에 어떤 사람과도 친교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신분이 무엇이라는 것도 그녀는 전혀 모른다. 천품이 워낙 온화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다감(多感)한 그녀의 내면에서는 진즉부터 반란이 일고 있었다. - 나는 누구지? 그리고 내 부모님은......? 이런 의문은 대개 주화영을 감당하기 아려운 고독으로 이끌었으며 그 시기에 알게 된 인물이 바로 영호천문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단지 죽어가는 사람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그 이상의 것을 허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살며시 몸을 빼낸 쪽은 의외로 주화영이었다. "죄송해요. 괜히 심기를 어지럽혀 드린 것 같아서......." 그녀의 겁먹은 듯한 눈망울을 보자 되려 영호천문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희고 깨끗한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너는 정말 아름답다. 화영......." 그가 입술을 떼어내자 주화영은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오빠. 전 이것으로 충분해요." 말하는 그녀의 입매가 너무도 고와서 영호천문은 가슴 한구석이 더욱 쓰려왔다. '화영, 차라리 네가 내 친누이라면 좋겠구나.' 주화영은 그에게 들고 있던 보자기를 내밀었다. "오빠, 이것을......."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덧붙여 말했다. "화영이 밤새 지은 오빠의 옷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잘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성의로 알아 주셨으면......." "화영......!" 영호천문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그저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말을 대신하며 보자기를 받았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다. "우우우-- 우--!" 일진의 장소성이 그가 날아오른 창공으로 널리 울려 퍼졌다. "오빠......!" 처연함이 깃든 주화영의 탄식을 뒤로 한 채 영호천문의 독보강호(獨步江湖)는 이렇게 선포되었다. ② 물안개가 뿌옇게 호상(湖上)을 덮고 있다. 과연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 중 으뜸이 동정호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겨울이 한창이건만 동정호의 벽수는 얼지 않았다. 실제로 새벽의 여명을 받아 뽀얗게 안개를 피워 올리는 동정호의 가이없는 기상은 대해(大海)를 보는 듯 했다. 끼이익-- 끼익-- 기이한 음향과 더불어 수면 위로 잔잔히 번지는 한 가닥 시음(詩音)이 있었다. 湖月林風有興淸 殘尊不馬復同傾 久 野鶴如雙 賓 遮幕 鷄下五更 호상의 달과 임하(林下)의 바람이 다 함께 맑으니, 말에서 내려 나머지 술을 다시 마시자 오랫동안 귀밑 터럭이 학의 털같이 희도록 내버려 두었노라. 옆집 닭이 새벽을 알리거나 말거나 그대로 마셔보자 끼이이익-- 한 척의 목선(木船)이 떠 가고 있다. 배는 한 사람이 겨우 탈 정도의 것으로서 매우 작고 볼품이 없었다. 목선은 노를 젓지 않아도 수류(水流)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지극히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입고 있는 그 자는 방금 전에 읊은 두보(杜甫)의 시와는 별개로 스산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는 술호로를 얹고 있었는데, 거의 다 마셔버린 듯 그의 몸에서는 독한 주향(酒香)이 풍겨나왔다. 끼익-- 끼익-- 작은 목선은 이제까지 그랬듯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속하여 멋대로 이동해 가고 있었다. 자의인은 술병을 들더니 누운 채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술병이 완전히 비게 되자 멀리로 휙 내던졌다. 첨벙! 술병은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 후, 밑으로 가라앉았다. 자의인의 입에서 또다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번에는 시음이 아니라 거지반 넋두리에 가까웠다. 어허이! 인생이, 그대가 무엇이건대 이토록 나를 구속하는가? 저무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떠오르는 편월이 쓸쓸하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어허, 인생아 흐르는 물은 대호(大湖)에 모이되 대호는 다시 바다로 쓸려 가나니 인생아, 짧다고 서러워 마라 길라치면 흉몽(兇夢)도 그만치 오래 꾸게 되는 것을 벼리고 벼린 검(劍), 묵향(墨香)에 취한 필(筆), 유성같은 찰나에 잠깐씩 그려보는 환상의 무지개, 그래, 인생아 너 잠시 사랑하였든 너 잠시 미워하였든 그 세월 만큼이나 감추어 두었던, 마음을 열어 노래하라 병든 시인(詩人)도 타락한 검사(劍士)도 음에 취한 악사(樂士)도 거리의 부랑아도 모두 이유 있음에 태어났나니 석양에 긴 그림자와 함께 실컷 욕을 하며 우리 기나긴 노래를 부르세 어허, 인생아....... 어떻게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음성이다. 꿈결처럼 몽롱한가 하면 약간은 감미롭기도 했고, 어찌 들으면 지독한 허무에 찌든 듯한 음성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아직 그런 류의 시상을 논하기에는 너무 젊다는 사실이었다. 끼익-- 줄곧 수류를 따르는 가운데서도 목선은 어느덧 한 곳을 향해 빨려들 듯 접근해 가고 있었다. 동정호 북쪽에는 늪지대가 있다. 갈대숲이 빽빽하게 우거진 그곳에는 하나의 섬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배는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스슥--! 갈대 사이로는 섬에 닿는 수로(水路)가 은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목선은 그 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갈대가 어찌나 무성하던지 자의인은 누운 상태에서도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작다지만 그 사이로 배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이 일 지경이었다. 자의인은 이곳에 처음 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인지, 넋두리인지를 읊어댈 때보다는 표정이 한결 굳어져 있었으나 딱히 그것을 긴장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때는 이월 말, 날씨는 여전히 혹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큰 흐름을 빌어 채 물이 얼지 않은 수로가 계속하여 그를 얌전히 모셔가고 있었다. 스스스슥--! 얼마나 들어 갔을까? 미로(迷路)처럼 엉킨 수로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다. 갑자기 시야가 더욱 흐려져 버렸는데, 그 현상은 하나의 또다른 호수(湖水)가 토해내고 있는 습막 때문이었다. 실로 묘한 지세였다. 소위 호중호(湖中湖)랄지, 섬 한가운데에 있는 그 호수는 홀로 신비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수면은 거울처럼 투명하고 잔잔했으나 그 정적은 왠지 기이한 감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스르르....... 목선이 소리없이 호수의 중심부로 미끄러져 갔다. 그곳에는 누대가 있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수상(水上)에 세워진 한 채의 목옥(木屋)이라고 해야 맞았다. 일편 몹시 한가로우며 아늑한 풍광을 자아내는....... 배가 목옥에 닿자 그 안에서 한 가닥 음성이 새어 나왔다. "소어(小魚)야, 손님이 오셨다. 어서 맞아 들이거라." 잔뜩 가래라도 낀 것 같은 탁성(濁聲)이다. "네, 할아버지!" 대답하는 소리는 정반대였다. 소년의 것인 듯한 그 맑은 음성은 앞서의 것과 대비가 되어서인지 더없이 청신하게 느껴졌다. 그 소리들에 이어 목옥 안으로부터 한 인영이 번뜩 하고 튀어 나왔다. 연후, 햇살이 막 비추이는 누대 위에는 한 소년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우뚝 서 있게 되었다. 나이는 십이, 삼 세 가량 되어 보였으며 일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마의를 입고 있었다. 누가 본들 전형적인 어부 차림이다. 그러나 그 기세만은 자못 범상치 않았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팔 다리를 둥둥 걷어 부친 소년의 눈에는 씩씩한 성격을 대변하듯 제법 굳강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태도 또한 맹랑하기 짝이 없다. "귀하는 성명을 대시오." 소년은 자의인을 노려보며 대뜸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의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응답은 고사하고 여전히 누운 채 일어나 보지도 않았다. "쳇!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모양이군." 소년이 송충이 눈썹을 불쑥 곤두세울 때, 자의인이 비로소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꼬마야, 미안하구나.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아니라서." "후후... 우선 입을 벌리게 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군." 소년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매달더니 다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지?" 역시 자의인의 입에서 그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가벼운 힐난이었다. "객(客)에게 누군지를 묻기 전에 주인이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게 도리다. 꼬마친구." 소년이 은은히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좋아, 이 나리는 동정해룡왕(洞庭海龍王) 강어(江魚)이시다." 자의인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해룡왕의 시종쯤 되는 모양이군." "뭐라고?" 소년 강어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의인은 누운 자세 그대로 그를 돌아다 보지도 않은 채 빙글거렸다. "꼬마야, 이 몸은 포룡왕(捕龍王) 나리시란다." 포룡을 해석하면 용을 잡는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어의 눈에서 번쩍 하고 불꽃이 튀었다. "에잇, 괘씸한!" 그는 아무 망설임없이 즉각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슈슈슉--! 전면을 향해 푸른 빛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소년의 솜씨답지 않게 전광같은 빠르기를 지닌 공격이었다. 자의인은 태연자약이었다. 그는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저 넓은 소매를 들어 한 번 슬쩍 저었을 따름이었다. 스슷! 그 바람에 강어가 발출해낸 암기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자의인은 그제서야 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 뒤집어 썼는지 초립(草笠)으로 용모를 가리고 있었으나 일견하기에도 심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강어, 어서 해룡왕(海龍王)에게 나를 안내해라." 그 음성에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를......?" 강어는 여전히 적의(敵意)를 보이며 몇 걸음인가 뒤로 물러 났다. 이어 소년은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리더니 두 번의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불어냈다. 삐익! 삐익--! 그러자 실로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퓨퓨퓨퓻--! 수면으로부터 줄기줄기 시뻘건 광채가 솟구치더니 일제히 자의인을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핏빛의 비늘을 가진 유선형의 손바닥만한 고기들이었다. 자의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것은 혈린사망괴어(血鱗死亡怪魚)......?" 남만의 오지에서 서식한다는 식인어를 이곳에서 대하게 되니 그로서도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일단 발동하면 무엇이든 눈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운다는 무서운 괴어가 그것이었다. 더구나 수백 마리가 동시에 쇄도해 와 그의 전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일단 그들에게 걸리면 뼈만 남게 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환각이었을까? 자의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그의 몸 전체에서 희뿌연 광막(光幕)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사지에서 불가사의하게도 검인(劍刃)이 돌출되더니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며 검막을 형성시킨 것이었다. "아!" 강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그런 무공은 생전 보도 듣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후두두둑--! 무수한 핏방울이 허공에 혈무를 그리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역한 피비린내와 함께 수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 직후, 자의인의 신형이 강어의 앞에 내려섰다. 슷! 엄중한 질책이 떨어졌다. "강어! 너는 불필요한 일을 저질렀다." 강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의 싸늘한 기색과 마주했으나 그렇다고 잘못을 시인하지는 않았다. 이 맹랑한 소년은 몸을 떨면서도 이렇게 묻고 있었다. "어... 어디서 대체 검이 나왔죠?" 그는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떻게 검이 발출되고 회수되었는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의인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년의 고집스러운 일면에서 누군가의 영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삼엄한 기세를 풀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 이것을 보아라." "으응?" 강어는 누그러진 그의 음성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휘둥그레진 그 눈은 자의인이 내민 손에 가 머물렀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황금을 소재로 하여 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잎사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잎은 얇기가 종잇장 같았으며 잎맥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실물과 닮아 있었다. 혹시 하늘에 있다는 황금신수(黃金神樹)의 잎이 이런 모양이 아닐지, 강어는 감탄한 나머지 눈이 부신 가운데서도 물었다. "이 금엽(金葉)은 대체 무엇이오?" 자의인은 그저 지나치듯 무감동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과거 사람들이 이것을 복마엽(伏魔葉)이라 불렀지." 바로 그때였다. ③ 콰당탕--! 목옥의 문이 부서져라 열리더니 하나의 인영이 튀어 나왔다. 휙! 그 인영은 전광석화처럼 날아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복마엽주(伏魔葉主)를 뵈옵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체격은 젊은이 못지 않게 건장했으나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갖은 풍상이 담겨 있었다. 대략 칠순 정도 되었을까? 노인은 허리에는 그물을, 등에는 담뱃대를 꽂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어부의 모습이다. 어쨌든 그는 지금 사뭇 경이에 찬 눈으로 자의인의 손바닥에 놓인 금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전신을 무섭게 떨고 있었다. "돌아 오셨군요, 엽주......!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오! 하늘이여,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니기를......!" 격동이 지나쳐 노인은 눈물마저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자의인의 어깨가 언뜻 내면의 격류를 입증하듯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적인 현상일 뿐, 그는 금엽을 다시 품 속에 거두고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해룡왕, 안되었소만 사람을 잘못 보았소. 나는 그가 아니오." "뭐, 뭣이!" 해룡왕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보시오." 자의인은 손을 들어 초립을 벗었다. "아아!" 노인의 안면에서 빠른 속도로 희열의 빛이 걷혀 나갔다. 드러난 얼굴은 확실히 그가 기대하던 자의 것이 아니었다. 완벽에 가깝도록 준수하건만 시체처럼 안색이 창백하고 정감이 없는 그 얼굴은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영호천문. 복마엽을 소지하고 있으되 과거로 돌아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한 인간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해룡왕이 마치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이럴 수가....... 그럼 대체 공(公)은 뉘시기에 엽주의 신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영호천문은 초립을 다시 눌러 쓰며 대답했다. "그는 죽었소." 간단했다. 그 한 마디로써 그는 지난 날과 삼 년이라는 뼈아픈 시간까지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끼친 반향은 결코 그렇지가 못했다. "우우! 역시......." 해룡왕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서 또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호천문의 담담하고도 무정한 음성이 그 위로 부어졌다. "나는 그의 친구요. 그의 부탁을 받고 왔을 뿐이오." 해룡왕은 그 말은 듣는둥 마는둥 하고는 이마를 바닥에 세차게 내리찍었다. 쿵! "크으,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을! 운명이 이 쓸모없는 늙은이를 우롱하는구나." 그 바람에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그는 의식도 하지 못한 듯 했다. "죽으리라! 나도 죽으면 이런 고통과도 이별이리니, 우우......." "할아버지--!" 강어가 곁에서 그를 지켜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죽립 속에 감추어진 영호천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 오르고 있다는 것을. 목옥 안. 훈훈한 기운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것은 방 중앙에 커다란 화로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화로 위에는 철삭이 매여 있었고 그 끝에 솥이 걸려 있어 무엇인가 끓고 있었다. 그 덕분에 향기롭고 구수한 냄새가 넘쳐 흘러 언뜻 느끼기에는 몹시도 평화로운 정경 같았다. 목탁을 사이에 두고 영호천문과 해룡왕이 마주앉아 있었다. 강어는 화롯가에 서서 나무주걱으로 솥 속을 휘젓고 있었다. 영호천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나에게 위임했소. 그의 모든 것을 말이오." 그러자 해룡왕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으셨소?" "있었소. 그는 분명... 형제들이 복수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소." "그... 그럴 리가......!"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영호천문은 무심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격동을 억누르느라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해룡왕의 충의(忠意)가 그의 가슴이 진하게 와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예의 신물인 금엽 한 장이면 당장이라도 해룡왕과 같이 절대적인 지지자들을 무수히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거물급들을 말이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불회곡을 나올 때부터 작정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이들을 다시 피비린내나는 강호로 끌어 들이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해룡왕이 단호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럴 수는 없소! 우리들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엽주를 위해 봉기할 것이오." 그는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꽝! 애꿎은 탁자에 그만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우리가 그 동안 조용히 있었던 것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오. 사실상 그 분께서 정말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자는 거의 없었소. 그런데 이제 그 분의 죽음이 기정사실로 밝혀진 이상 비겁자처럼 숨어 있는 일은 없을 것이오." 영호천문은 벌써부터 초립을 벗은 상태였고, 따라서 꿈틀거리는 그의 안면근육은 더 감출래야 감출 길이 없었다. 그는 겨우 음성을 가라앉혀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었다. "안되오. 재고(再考)해 주시오." "아니, 안되었소만 나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소! 이 일에는 그 분과 우리들의 관계에 따른 신의 문제와 더불어, 우리 모두의 자존심이 달려 있소. 사실 우리들은 그 분에게 최초로 패(敗)했을 뿐, 그 이전까지는 한결같이 무적인들이었소. 그 분의 죽음이란 곧 우리들의 명예와도 통하오." 이쯤 되자 영호천문으로서는 더 만류할 근거가 없었다. 또한 그 자신도 실은 심장의 피가 미쳐 날뛰는 듯한 극도의 흥분에 휩싸여 자제력이 거의 무너져 버린 처지였다. 하지만 역시 무작정 방임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해룡왕을 똑바로 응시하며 보다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은 형제들 모두의 생각이오?" "그렇소. 우리는 그 동안 비밀리에 결사맹(決死盟)을 조직하고 그 분의 소식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소." "결사맹?" 아연해하는 그에게 해룡왕이 설명해 주었다. "엽주는 이 시대의 제일인자이셨소. 그 분은 강하면서도 자만하지 않는 진정한 영웅(英雄)이셨소. 우리는 그 분께 굴복하고도 그것을 한 번도 수치로 여겨 본 적이 없소." "으음!" "그 분과 우리의 결속력은 누구도 함부로 논한 성질이 못되오. 우리는 이제 그 분을 위해 복수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될 것이오. 내 장담하건대 금후로 우리 군마맹(君魔盟)은 그 분을 위한 죽음의 행진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외다." "군마맹이라......!" 영호천문은 다시금 내부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군마맹주는 대체 뉘시오?" 그 말에 해룡왕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정시했다. "정녕 그걸 몰라서 물으시오? 귀공이 엽주의 모든 것을 위임받았다면 당연히 맹주가 되셔야 하거늘......." 영호천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나는 그럴 생각이 없소. 그 일은 내가 그로부터 위임받은 부분에 속하지 않소이다." "으음......." 해룡왕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바람에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해룡왕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구려. 그렇다면 굳이 강요는 않겠소. 현재까지 임시 맹주로서 천안수사(天眼秀士) 제갈형(諸葛形)이 그 분을 대신하고 있었소." 영호천문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랬구려. 나도 그 이름은 사자(死者)로부터 들은 기억이 나오이다." 천안수사 제갈형. 그는 통칭 무림제일지(武林第一智)로도 불리운다. 과거 한때에는 천안장(天眼莊)을 세우고 강남무림(江南武林)들 쥐고 흔드는 배후 조종자로서 크게 활약한 바 있었다. 영호천문. 객으로 온 그는 주인에게 어죽을 얻어 먹게 되었다. 그것은 약간의 쌀에 잉어를 함께 넣고 끓인 훌륭한 죽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냄새를 피우고 있던 그 요리였다. 강어가 그에게 죽을 떠 주며 묘하게 웃었다. "후후... 당신은 겁장이에요." "으음?" "일신에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도 엽주의 친구를 자처하며 어떻게 그렇게 책임을 회피할 수가 있지요?" "책임?" "그래요. 당신에게는 분명 군마맹을 이끌어줄 책임이 있어요." 영호천문은 고개를 저으며 툴툴 웃었다. "강어, 나도 너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무슨 뜻이죠? 그 말은......?" "시간이 흐르면 너도 자연히 알게 될 터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지." 이때, 해룡왕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참, 아직 귀공의 성함도 묻지 않았구려." 영호천문은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히 대꾸했다. "미안하오만 밝힐 수가 없소이다.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본인도 복마엽주 못지 않게 사연이 많은지라....... 그저 불망객(不忘客)이라 불러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불망객......?" 해룡왕의 눈이 번쩍 이채를 발했다. "그럼 무엇을 잊지 못하는지도 물어서는 안되는 것이오?" "그렇소." 해룡왕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노부가 생각하기에도 우문(愚問)이었소. 이름도 숨기려는 인물에게 사연을 알고자 했으니. 허허......." 영호천문은 고소를 지었다.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오." 강어가 재빨리 그 말을 받아 비웃음을 던졌다. "흥! 불망객이 아니라 망아객(忘我客)이겠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해 버린 비겁자가 더 잘 어울리는 걸?" 듣고 있던 해룡왕이 민망한 듯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입닥치지 못하겠느냐? 어린 것이 감히 어디다 대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엽주를 대신하여 오신 분이거늘......." "그만 두십시오, 노인장." 영호천문이 되려 그를 말려야 했다. 잠시 후. 노기를 가라앉힌 해룡왕이 다시 물었다. "귀공이 노부를 찾아온 이유는 단지 그 분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소이까?" 이는 그의 직관이 작용된 질문이었다. 영호천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였다. "물론 아니외다." "그럼......?" "현 강호의 정세를 알고자 왔소." 제 6장 비싼 숙박료(宿泊料) ① 화운루(和雲累). 이곳은 악양(岳陽)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하기로 소문난 객점이다. 그 중에서도 등룡별원(登龍別院)이라면 대부호나 고관대작이 묵는다는 특급의 객실이다. 어젯밤 한 청년이 이 등룡별원에 들었다. 일신에 자의를 입었으며 초립(草笠)을 깊이 눌러쓰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특징이라고는 없는 인물이었다. 화운루의 주인 장량(張亮)은 처음에 그가 특실인 등룡별원에 들겠다고 하자 깨끗이 거절했었다. 하지만 청년의 한 마디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 숙박료는 하루에 은자로 천 냥을 내겠소. 장량의 입이 딱 벌어진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등룡별원의 하루 숙박료는 아무리 비싸다 해도 은자 백 냥에 불과했건만 그 열배를 내겠다니 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다소 이상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자의청년. 그는 줄곧 두문불출이었다. 벌써 아흐레째 이곳에서 묵고 있었으나 일체 바깥 출입을 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술이나 식사마저 일일이 거처로 날라 오게 했으며 시중 들어줄 한 명의 여인만을 원할 따름이었다. 그 동안 장량은 몇 차례나 청년을 만나고자 했으나 매번 헛걸음이었다. 왠지 불안해서 선불(先拂)을 요구하려 했던 것인데, 그때마다 청년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차림새로 술에 곯아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침상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여전히 큰 댓자로 누워 있었다. 몸은 거의 발가벗다시피한 상태였다. 그의 곁에서는 한 여인이 열심히 안마를 해 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팔자가 따로 없었다. 더구나 그의 전신을 훑어가는 여인의 손길은 일견하기에도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섬세하게 근육들을 주물러 나갔으며, 때로는 제법 야무진 힘을 발휘해 뼈마디를 꺾고 매만졌다. 직업적인 안마사일까? 나이가 십, 팔구 세쯤 되어 보이는 그 여인은 꽤 수려하고 깨끗한 용모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눈은 줄곧 훌륭하게 발달된 사내의 상반신에 머물러 있었다. 부지런한 손놀림과는 달리 그녀의 시선은 고정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영호천문은 아까부터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잠이 들어서가 아니라 저으기 긴장이 되어서였다. 사실 그는 여인의 따가운 눈길은 물론 그녀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는 것도 모두 느끼고 있었다. 긴장감이 유발된 것은 다름 아닌 갈등 때문이었다. "으음......." 그의 낮은 한숨소리를 여인은 과연 어찌 들었을까? 여인의 눈썹이 일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영호천문의 가슴으로 손을 미끄러뜨려 색다른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능수능란한 조율사인 양 아주 교묘하게 사내의 성감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의 얼굴이 차츰 노을처럼 붉은 빛을 띄어갔다. 석류알처럼 붉고 탄력이 넘치는 입술마저도 살포시 벌어졌다. 일편으로 회의가 없지는 않았다. '참 이상도 해라. 이 분은 그간에 한 번도 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안마만 시켰어. 아아, 그런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어떤 손님을 상대해도 맹세코 내 쪽에서 몸이 단 적은 없었거늘.......' 백수연(白水娟).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역시 안마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그 수입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사내들의 육체를 만졌고, 그 외에도 그들의 잡다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어 은자를 벌었다. 그러나 백수연은 직업관이 투철한 나머지 일을 할 때에는 사내들을 단지 하나의 상품(商品)으로만 볼 뿐, 그들의 육체를 통해 욕망을 느끼거나 쾌락을 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따금씩 모멸감을 느꼈다면 맞을지....... 이런 그녀로 하여금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한 사내, 그는 한 마디로 무정(無情)했다. 분명 목석은 아닐진대 그는 구일 동안 여인의 손에 맨살을 내맡기면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백수연이 안달이 나게 된 것은 어쩌면 이 점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녀의 손길을 거친 사내치고 단순히 안마만 받고 돌아 간 자는 기력이 쇠한 노인들 빼고는 거의 없었다. 대개가 금전을 미끼로 벼라별 행위를 다 요구했으며, 그녀는 타성(惰性)으로 인해 거기에 부응해 주고 돈을 받았다. 그런데 눈 앞의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무례하지 않았고 심신이 모두 지쳐버린 듯 무척이나 우울해 보였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는 용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허무를 느끼게 하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는 자신이 그를 위로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의 신체는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미끈하게 빠진 데다가 완강해 보이는 그의 몸은 여하한 감탄사로도 형용할 길이 없었다. '아아! 뭘 하세요? 어서 안아 줘요. 나를.......' 백수연은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며시 적셨다. 하지만 사내는 한 소리 신음을 흘린 후로는 계속 잠잠하기만 했다. 급기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 그녀는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스르르....... 풍성하고 윤기 흐르는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영호천문의 얼굴을 감쌌다. 이어 너무도 붉어 혈련화처럼 보이는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벌어지며 역시 아래로 내려갔다. 영호천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축축한 입술이 닿아온 것은 그의 이마였다. 이어 그 입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차 밑으로 내려 오더니 양미간을 가볍게 부비다가 그의 눈두덩이를, 뺨을, 그리고....... 결국 그녀의 입술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사내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덮어갔다. "으음......."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기존의 모든 것들이 일시에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견고하게 무장되어 있던 아성이 아무 소용도 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아......." 가냘프나 열정이 가득 찬 그녀의 몸이 사내의 몸 위에 실렸을 때, 사내는 비로소 눈을 떴다. 눈과 눈이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그러자 영호천문의 눈에서는 신비한 광채가 흘러나와 백수연의 마음을 아득한 환상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했다. "아...... 어떻게 좀 해 줘요......!" 그녀는 눈을 감으며 절망처럼 부르짖었다. 영호천문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다행이군. 그대에게도 뜨거운 피가 끓고 있었다니......." 그때부터 사내의 기세는 돌변했다. 억눌려 있던 그의 정열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하아......!" 백수연은 전신이 갑자기 불구덩이 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는 얇은 나의가 대번에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난생 처음, 아니 이제껏 느낄 수 없었던 난폭하면서도 황홀한 사내의 침범을 경험했다. "흐으윽......." 그녀는 자신이 구름 위로 비상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억은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노라고 열띤 읊조림을 되풀이 하며 그녀는 깊고 깊은 수렁으로 침몰해 갔다. ②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 온다. 여인이 도화처럼 상기된 알몸을 침상에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달고 깊은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영호천문. 그는 여인의 장미빛 나신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엿볼 수가 없었다. "그래, 이제 끝났다. 나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화미(花美)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안마사라는 직업으로 인해 만나게 된 백수연이란 여인, 그녀와의 정사(情事)에는 이런 의미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방금 전까지도 자신의 품에 안겨 몸부림쳐 대던 여인이 그에게는 오직 낯설기만 할 따름이었다. 여인의 몸에서 전해지는 진한 살내음도 마찬가지였다. "자책할 필요는 없겠지. 여인이란 어차피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취하면 그 뿐, 머물 수는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의 눈에 백수연의 가슴에 남겨진 정사의 흔적이 들어왔다. 그는 입가에 비릿한 웃음기를 매달았다. "화미, 너도 이 여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곧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옷을 입으려다 말고 흠칫했다. 왜냐하면 백수연의 분홍빛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은 탄식처럼 나직이 물었다. "깨어 있었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금 무감동한 음성을 흘려냈다. "왜 우는가?" 백수연은 그제서야 눈을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금세 또 눈물이 차 올랐다. "공자, 분명 저는 일시적인 쾌락의 도구에 지나지 않은 계집이에요. 그러나 공자께만은......." 영호천문의 눈꼬리가 일순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야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던....... 제게도 순수한 마음 한 조각은 있어요. 그 마음을 허용한 분은... 아마도 공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백수연은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을 가렸다. "당신이 어찌 여기시건 간에 이 몸은, 흑......!" 그녀는 종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여. 영호천문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진정해라. 그대에게는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의복을 갖추어 입은 그는 그녀의 곁에 가 앉았다. "이것이 피치 못할 일이었다면 혹시 이해하겠느냐? 내게는 반드시 잘라내야만 했던 아픈 기억들이 있었다." 백수연은 이불을 도로 끌어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은요......?" 영호천문은 쓰게 웃었다. "그대 덕분에 꽤 성공한 편이다. 후후... 그 점에 있어선 그대에게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이지." "다행... 이군요." 백수연 역시도 울다 말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울러 그녀는 꽤 차분해진 음성으로 덧붙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공자께서는 재고하실 필요가 있어요. 세상의 여인들이 모두 다 같은 건 아니에요. 현숙하여 훌륭한 내조를 하는 여인들이 더 많지요. 저같이 천한 계집은 예외지만......." 그녀의 뒷말을 영호천문이 끊었다. "아니, 그대는 천하지 않다. 이것은 진심이다." 백수연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감격한 듯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공자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빈 말이라도 기쁘기 그지 없군요.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었나 봐요."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희비(喜悲)가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영호천문은 더 말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 주었다. '가엾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그는 손을 들어 백수연의 머리카락을 쓸며 나직하게 물었다. "수연이라 했던가? 그대같은 여인이 어찌 하여 이 생활을 하게 되었지?" 백수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에게는 많은 빚이 있어요." "장량에게 말인가?" "네......." "이처럼 매일 벌고도 갚지 못하는 빚인가?" 백수연은 씁쓸히 대답했다. "고작 이자(利子)나 메울 정도인 걸요." "대체 어째서 빚을 그렇게 지게 되었지?" 그녀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실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으음! 그랬었군." "어머니는 퇴기(退妓)세요. 한때 명성을 날리기도 했었다는데, 저는 부친이 누군지도 몰라요." 그녀의 자조는 영호천문의 가슴 한구석에 은은한 통증을 유발시켰다. 출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예민한 그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천애고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머니가 기루에서 은퇴하시자 그때부터는 생계조차 막연했었지요.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얻으셔서......." "그래서 화운루에 안마사로 들어오게 되었단 말인가?" "아뇨,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하녀(下女)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그녀에게 영호천문이 물었다. "모두 얼마지?" "그건 왜......?" 백수연의 얼굴에는 일순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얼마냐고 물었다." "그, 그것이 무려 은자 십만 냥이나......." 영호천문은 서슴없이 잘라 말했다. "내가 갚아 주겠다. 그대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네에?" 백수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면, 제게 왜 그런 호의를......?"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그건 편할대로 생각해라." "아아!" 백수연은 미지의 상황에 대한 희망과 기대, 거기다 약간의 공포감마저 떠올리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상 그녀는 철이 들기 전부터 자유에서 제외되었었다. 불과 여덟 살에 이곳 화운루로 팔려와서는 오 년간을 주방에 틀어 박혀 뼈가 휠 정도로 일했으며, 그 뒤로는 전속 안마사가 되어 다시 오 년 동안 봉사해 왔던 것이다. 백수연은 직종이 바뀌던 십삼 세 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기녀인 모친을 닮아 그녀는 남달리 오관이 수려했고 일찍 철이 들어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그것이 화(禍)가 되어 그녀는 채 여물기도 전에 장량에게 순결을 빼앗겼고, 당시의 공포스럽고 수치스러웠던 기억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성 혐오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어쨌든 그 일을 기화로 그녀는 승격(?)하여 주방일 대신 남자의 육체를 안마하게 되었는데, 더불어 남자를 기쁘게 하여 수입을 더욱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방면의 퇴물여인인 모친으로부터 여러 가지 기술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어도 벌어도 한이 없었다. 십 년을 질기게 끈 모친의 병도 그렇거니와 장량의 계산법에 의해 그녀에게 남겨진 빚은 이자에 이자를 더하는 방식이 되어 갚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불어나기만 할 따름이었다. "자유......." 백수연은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아무리 갖다 붙여보려 해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녀에게도 한 가닥 여망은 있었다.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녀는 눈을 들어 구세주나 다름이 없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결심은 확고하게 굳어졌다. '평생 저 분만을 위해 살리라.' 이르자면 그녀가 선택한 자유란 곧 자신의 마음을 점령한 사내를 한껏 사랑하겠노라는 맹세가 되는 셈이었다. 최소한 생모(生母)에게조차 업을 이어받은 것 외에는 온정을 받아보지 못한 그녀였다. 그러니 영호천문의 존재는 지금 그녀에게 있어 세상 전부나 다름이 없었다. 영호천문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수연, 이곳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 어디 있지?" 백수연은 새삼스럽게 젖가슴을 감추며 반문했다. "도박을 하시려구요?"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글쎄, 난생 처음이지만 한 번 해 보고 싶군." 백수연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만류했다. "부탁이니 그것만은 하지 마세요. 저는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 왔어요. 더구나 만상초(萬像草) 늙은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그녀는 말하다 말고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을 본 영호천문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아마도 만상초라는 위인이 이곳 악양 제일의 도박사인 모양이지? 내 말이 맞나?" "그, 그래요." 정곡을 찔린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만상본방(萬像本房)은 악양 최고의 도박장이에요. 만상초는 도왕(賭王)이란 별호가 붙을 만큼 도박귀신이지요. 제발 그와는......." 영호천문은 그녀의 겁먹은 얼굴을 대하게 되자 내심 실소가 터졌으나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알겠다. 내 필히 명심하도록 하지. 그럼 악양 제일의 거부(巨富)는 누구인가?" "그것은 또 왜......?" 백수연의 눈이 의혹을 담은 채 그를 정시했다. "하하... 알려만 다오. 그대를 걱정시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정말 약속할 수 있나요?" 그녀는 거듭 확인을 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악양 제일의 부자는 금노시(金老施)예요. 모두들 금노야(金大爺)라고 부르지요. 그는 중문가에서 대운황금전장(大運黃金錢莊)을 개업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발행한 은표는 중원 어디에서나 통용된다고 들었어요." 영호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수연. 장량이 내 행방을 묻거든 그냥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온다고만 말해 다오. 그럼......." 영호천문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곧 몸을 돌려 사라졌다. 백수연. 홀로 남은 그녀는 넋이 빠진 듯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모든 일이 일장춘몽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게 된 것은 우연히 맞은편에 있는 동경을 통해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특히 가슴에 남아있는 짙푸른 멍자국이 그녀로 하여금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꿈이 아니란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든 자리로 손을 가져갔다. "아아! 그래, 분명 현실이었어. 이곳에서 그 분이 나를 그토록 격렬하게 안아 주셨어." 백수연은 서서히 손을 봉긋한 젖봉오리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것을 감싸 안으며 취한 듯 읊조렸다. "내 몸 어디에도 남아 있어. 그 분의 흔적은......." 부지불식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그녀의 젖가슴 위로 또르르 굴러 내렸다. ③ 정오가 가까와질 무렵이었다. 만상본방(萬像本房)은 때가 일러서인지 아직 한산했다. 그곳의 주인인 만상초는 희희낙락이었다. 어젯밤의 수입이 만족스러웠던 데다가 오늘은 낮부터 큰 건(件)이 있어 그를 몹시 기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한 청년의 출현이었는데, 만상본방에 처음 오는지 만상초를 만나자마자 대뜸 내기도박을 신청했다. 그것도 은자 삼십만 냥이라는 거금(巨金)을 걸고 말이다. 그 바람에 만상초는 입이 쭉 찢어졌다. 상대가 어떤 도박을 제시하던 전자에 그랬듯 자신의 승리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자기 소개를 할 때 그냥 불망객(不忘客)이라고만 밝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순진하게도 선금조로 한 알의 희귀한 보주(寶珠)까지 선뜻 내놓지 않았는가? 만상초는 청년이 돌아가자 배꼽을 싸쥐고 웃었다. "으하하핫... 별 미친 놈 다 보겠군. 그래, 하룻밤 사이에 금노시가 애지중지하는 애첩(愛妾)의 신비지문(神秘之門)을 감상하겠다고? 으핫핫... 본부인이 눈치챌까봐 비밀장소에 꼭꼭 숨겨 놓은 계집을 제가 감히 어디 가서 찾아? 타인이 접근하는 것은 일체 통제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는 비웃음과 더불어 호언장담했다. "크크... 거기다가 그녀의 알몸까지 구경하겠다고 했겠다? 그 놈이 아무래도 우리 만상본방에 삼십만냥을 헌납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이 몸은 돈챙길 준비나 하고 있어야겠군." 어쨌든 불망객이라는 청년이 제시한 내기가 기상천외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과연 그 결과가 어찌 될지......? 황혼(黃昏)이 지고 있었다. 악양 거리는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北風)으로 인해 몹시 추웠다. 거리에 행인들의 자취가 뜸해졌다. 날씨가 고약하다보니 아마도 하나같이 서둘러 일찍 귀가한 모양이다. 대운황금전장(大運黃金錢莊). 이곳은 공히 악양 제일의 전장으로서 그 규모도 그렇지만 신용(信用) 또한 천하에서 손을 꼽아주는 정도였다. 이는 대운은표가 중원 전역은 물론 새외변방에서까지 의심없이 통용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심지어 관(官)에서도 이곳의 은표를 쓰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한파(寒波)만은 대운전장에도 예외없이 미쳐 거창한 대문이 막 닫히려 할 무렵이었다. 한 명의 불청객이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그는 자의차림에 머리에는 초립을 쓴 청년이었다. "이것을 금대야께 전해 주시오." 그는 문을 닫고 있는 한 장한에게 웬 봉서를 내밀었다. 장한은 그를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곧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귀찮아서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초립 사이로 보이는 청년의 눈빛이 가슴을 찌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장한이 들어갈 때와는 달리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어서 안으로 드시라는 말씀이 계셨소." 초립을 쓴 청년, 즉 영호천문은 이내 화려한 객실(客室)로 인도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차 한 잔을 대접받게 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서민층에서나 마시는 싸구려 차였다. '흠, 금노시가 갑부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이렇듯 지독한 구두쇠이니 돈을 모으지 않을 수가 없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너털웃음소리와 함께 안으로부터 풍채좋은 한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헛헛헛... 그대가 불망객이란 친구인가?" 그 자가 대운황금전장의 주인인 금노시였다. '생각보다는 젊군.' 영호천문은 내심 중얼거리며 남에게 베푸는 데에는 인색하면서도 비단옷으로 온 몸을 치장한 사순 정도의 인물을 응시했다. 불룩한 배에 기름이 흐르는 얼굴, 쭉 찢어진 눈과 시도 때도 없이 벌름거리는 코 등이 단연 호색가(好色家)를 연상시켰다. 영호천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소이다." 금노시는 그의 맞은편에 앉더니 꽤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친구가 본 대야와 내기를 하겠다고 온 인물인가?" 그는 지금 영호천문의 손에서 나간 봉서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만상초가 쓴 짧은 편지로써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금대야, 이 청년은 도박을 매우 즐기는 인물이오. 그 간에 입었던 대야의 은덕을 생각하여 그를 보내니 재미삼아 한 번 응해 보십시오. 그럼 꼭 이기시기를 바라며 흥미롭게 그 결과를 기다리겠소이다. 곧바로 연락주시오. 만상초 서(書).> 만상초와 금노시는 원래 아주 친한 사이였다. 특히 금노시는 도박장 운영에도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 이는 돈을 더 벌어 들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 자신도 만상초 만큼이나 도박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소개장은 영호천문이 부탁하여 받아낸 것으로서 만상초는 쾌히 써 주었다. 인심 쓰는 척 하고 승리가 보장되는 재미있는 놀음에 친구도 한 몫 끼워 주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금노시는 눈을 껌벅이며 영호천문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 도박을 하고 싶나?" 영호천문은 초립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그 얼굴에 금노시는 심한 질투를 느꼈다. 평범한 행색에 비해 너무도 잘 생겼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꼭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남자의 준수한 용모였다. 돈을 주고라도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못하니 미남을 대하면 절로 신음이 나오는 그였다. 영호천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별 것도 아니오. 단지 금대야가 아끼는 여향(如香) 낭자의 신비지처에 대한 사항이외다." 여향이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첩의 이름이다. 그리고 상대가 제시하는 문제는 그가 말하듯 별 것 아니지가 못했다. 금노시는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되물었다. "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흥분을 하다 보니 말투까지 완전한 하대(下待)로 바뀌어 있었다. 영호천문은 이를 개의치 않고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했다. "본인이 알기로 여향 낭자의 그곳에는 틀림없이 까만 점(点)이 세 개 있소. 그렇지 않소?" "뭐, 뭐라구?" 금노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넓적한 안면에 극도의 분노를 드리웠으나 거물답게 곧 이성을 되찾았다. '죽일 놈! 여향의 그곳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당장에라도 치도곤을 내고 싶다만... 클클... 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여향이 년의 그곳에는 점이 단 한 개도 없단 말이다.' 영호천문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스스로 뱉아놓은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소. 만일 그 점들이 없다면......." 그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금노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없다면?" "은자 십만 냥을 걸겠소." "뭣이?" 금노시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만큼 부자가 되고도 아직까지 금전에 집착이 강한 그는 분노는 어느새 싹 잊고 오히려 즐거워서 비명이라도 내지를 지경이었다. 그는 저절로 굴러 들어온 행운을 확인하고자 다짐을 받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게 정말이렷다? 후회는 없겠지?" "물론이오." "좋다! 오늘 밤에 당장......." "당장?" 금노시의 음성이 다소 낮아졌다. "빌어먹을! 보여 주겠다." "응해 주어 고맙소. 후훗......." 영호천문은 기소를 흘렸다. ④ 밤. 사위가 싸늘히 얼어 붙어 있건만 대운황금전장의 즐비한 전각들 중 유독 한 곳만은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그곳은 오직 금노시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여향의 처소였다. 그는 너무도 사나워 암호랑이에 버금가는 본처의 눈을 피해 그녀를 여기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여향. 그녀는 지금 무척이나 분주했다. 금노시가 들겠노라고 하는 바람에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네? 오늘은 오시는 날도 아니거늘.......' 어쨌든 좋았다. 그가 안오는 밤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사실 금노시 덕에 온갖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는 하나 외부와 격리된 이곳의 생활이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무엇보다 일찌감치 욕념에 눈을 뜬 육체가 잠을 방해했고, 이때문에 그녀는 금노시가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여향은 하녀에게 목욕물을 데우라 시킨 후, 직접 가서 향정(香情)을 욕조에 풀었다. 달콤한 난향이 금세 후각을 자극했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그렇지만 금노시가 무척 좋아하는 냄새였다. 이윽고 그녀는 스스로 옷을 벗어제꼈다.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서도 그녀의 몸은 팽팽한 탄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터질 듯한 젖가슴과 군살 하나 없는 기름진 아랫배, 게다가 미끈한 허벅지와 호선을 그리는 둔부 등 나무랄데 없이 잘 빠진 몸매였다. 쏴아....... 난향을 풍기는 욕수를 알몸에 들이 부으며 그녀는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손바닥으로 풍만한 가슴을 문지를 때는 흥분이 되어 가볍게 몸을 떨기도 했다. "흐응......."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묘하게 비틀며 콧소리를 흘려냈다. 오늘 밤, 뜻하지 않게 펄펄 끓는 육체를 마음껏 불태울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여향은 몸 구석구석을 정성껏 씻었다. 가슴에 이어 허리를, 아랫배를, 마침내는 모처를 씻기 위해 욕조에 한쪽 발을 비스듬히 걸치며 다리를 벌렸다. 그것은 바로 물에 젖은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꽃잎 벌어지듯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금노시가 낮게 부르짖었다. "어서 보게! 지금이야." 그는 얼른 구멍에서 눈을 떼었다. 그러자 영호천문이 그의 뒤로 재빨리 그가 보고 있던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래, 대체 어디에 점이 있단 말인가?" 영호천문은 금노시의 득의에 찬 음성을 귓전으로 흘리며 내심 고소를 지었다. 뽀얀 수증기 속에서 누가 보는지도 모르고 두 다리를 벌린 채 열심히 몸을 씻고 있는 팔등신 미녀....... 그는 여향에게 동정을 금치 못했다. '정녕 안되었군. 한창 젊은 여인이 이런 작자의 첩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아마 이 구멍도 애초에는 변태적인 취미 때문에 뚫어 놓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용도가 더욱 고약해졌구나.'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물욕에 눈이 어둡기로서니, 첩으로 들일 정도라면 애정도 있으련만 어찌 타인에게 자신의 소유인 여인을 이따위 식으로 공개한단 말인가? 은근히 울화가 치민 영호천문은 짐짓 침을 꿀꺽 삼켰다. 또 일부러 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랜 시간을 버텼다. "아직도 다 못 보았느냐?" 금노시가 곁에서 으르렁거리자 그는 손을 저었다. "좀 기다리시오. 나도 십만 냥이 걸린 일인데 당신의 애첩이 자꾸만 몸을 움직이니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지 않소?" "으음!" 금노시의 안색이 어찌 변했을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노릇이다. 영호천문은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쯧! 아깝군." 아까운 것이 날아가 버린 돈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그의 어조는 꽤나 애매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노시는 언제 불그락푸르락 했냐 싶게 활짝 웃었다. "자! 네가 졌다. 여향의 그곳에 무슨 점이 있단 말이냐?" 영호천문은 멋적은 듯이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소생이 잘못 생각했나 보오이다. 분명 내기에는 내가 졌소." "으핫핫핫... 인정하니 되었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덤빈 모양이네만 끝까지 밀어부치는 기백만은 높이 살만 하더군." 금노시는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말투를 원래대로 환원시키며 그의 어깨까지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내 보기에 자네는 타고난 승부사일세. 앞으로 더 노력하면 이 방면의 대가(大家)가 될 소질이 충분히 있네." 물론 내심으로는 다른 말이 오갔지만. '흐흐... 얼빠진 놈, 정신 나간 놈!' 통쾌해 하는 그에게 영호천문이 구슬 한 개를 내밀었다. "그것이면 은자 십만 냥은 족히 될 것이오. 이번에는 소생이 졌소만 다음에는 다를 것이오." "핫핫... 좋아, 얼마든지 응해 주겠네." 금노시는 얼른 구슬을 소맷 속으로 쑤셔넣으며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그러다 문득 그는 속삭이듯 나직이 물었다. "자네, 여향을 보았다는 말은 비밀로 해 주겠지?" 그는 사뭇 위협적인 기세로 덧붙였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나오?" "헛헛... 별 것도 아니네. 자네가 자신의 목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에 달린 문제니까." 금노시의 협박은 상대의 처음 말투를 그대로 흉내낸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이를 느끼자 되려 목을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아이구, 별 것도 아니긴요?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데다가 나는 아직 앞날이 구만리 같은 놈이오." "헛헛... 그럼 알아서 하게." 금노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미련이 남은 듯 구멍을 흘깃거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실컷 보고 즐겼을 것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그대로 물러서자니 아무래도 아쉬웠던 것이다. '쩝! 여향이 년이 혼자 흥분해서 끙끙거리는 꼴도 실은 볼만한 구경거리인데.......' 이 추잡한 갑부를 향해 영호천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금대야께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흐음?" 금노시는 귀찮은 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밤은 너무 늦었으니 유숙할 곳을 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아시다시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려서......." 난감해하는 그에게 금노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그 쯤이야! 핫핫... 은자 십만 냥의 일박(一泊)이라, 썩 괜찮은 숙박료군." "하룻밤 치곤 너무 비싼 숙박료요." 영호천문은 짐짓 볼이 부어 투덜거렸다. "허허헛... 자네는 좋은 사람이네." "소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허허... 허허헛......." 그날 밤 금노시는 만상초에게 편지를 썼다. 기분이 너무 좋아 붓이 저절로 날아갔다. <오늘 밤은 매우 유쾌했네. 자네가 보내준 그 어리숙한 놈에게 내가 한 판 승을 거두었단 말일세. 놈이 여향이의 그곳을 운운할 때는 약간 당황했네만 점 따위가 없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지. 물론 여향이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네. 목욕할 때 슬쩍 엿보았거든. 어쨌거나 나는 한 순간에 그 놈으로부터 은자 십만 냥을 벌 수 있었네. 후에 사례하지. 금노시.> 만상초. 편지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노화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일편으로 그는 정신이 아찔했다. '깨끗이 당했구나! 그 놈이 설마 하니 그토록 약은 수작을 쓸 줄이야.......' 실로 어이가 없었다. 졸지에 은자 삼십만 냥을 잃은 것은 그렇다치고, 도왕(賭王)이라는 별호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는 눈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쯤 은자 십만 냥을 땄다고 기뻐하고 있을 멍청한 금노시를 떠올리자 그는 울화통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두고 보자!" 만상초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편지를 갖고 온 대운전장의 시종에게 물었다. "그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본 전장에서 하룻밤 묵기로 되어 있습죠." 제 7장 첫번째 사냥 ① 대운황금전장의 객원(客院)은 화려했다. 금노시의 배려(?)로 그곳에 들게 된 영호천문은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회색 빛이 감도는 눈동자에는 아무런 색채도 없었다. 그리하여 언뜻 보기에는 무심으로 무장되었을 듯한 그의 입술 사이로 뜻밖에도 엄청난 말이 흘러 나왔다. "금백만(金百萬), 첫번째 목표는 바로 너다!" 그가 말한 이름은 저 유명한 황금전주(黃金殿主), 즉 당금 무림의 우내십정 중 일인이 아닌가? 일세의 재신(財神)이자 황금충(黃金筮)의 신봉자, 금백만에게 있어 금력이란 곧 신앙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자를 지금 영호천문이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후후... 금백만, 너는 나날이 황금전을 증축한다면서? 해룡왕의 말에 의하면 네 덕분에 태산(泰山) 일대가 온통 황금광으로 뒤덮혔다고 하더구나."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 강렬한 신광이 번뜩였다. "중원 전역에 걸쳐 도박장과 은장(銀莊)을 주름잡으며, 최근에는 해운업(海運業)에까지 손을 뻗었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재산이 자금성(紫禁城)을 능가한다는 소문도 무리는 아니지." 영호천문은 더 소리 내어 읊조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서 싸늘한 미소는 지워질 줄을 몰랐다. '그를 포함하여 구정은 모두가 현 무림의 절대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 년 이래 활동하지 않는 자들은 또 무언가? 필시 여기에는 모종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해룡왕으로부터 전해 들은 구정의 동정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그들은 현재 강호상에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세력들이었다. 그들을 열거해 보면 이러하다. 금마성(禁魔城)을 위시하여 화중부(花中府), 잠마문(潛魔門), 황금전(黃金殿), 화무궁(花舞宮) 등. 세인들은 그들 오대 세력을 한꺼번에 묶어 천중오패(天中五覇)라 불렀다. 그것은 무림의 전체를 총괄하여, 혹은 일각에서 한결같이 독패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금마성. 이들은 가히 마(魔)의 종주(宗主)로 부상되어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곳에는 저주받아 마땅한 마인(魔人)들이 천마진혼등(天魔鎭魂燈) 마야(魔爺)의 이름으로 구금되어 있다고 한다. 수천, 아니 수만의 인물들이 날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이로써 세인들로 하여금 금마성의 성주인 마야 용천후(龍天候)를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마의 대부(代父)로 인식시키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다음으로 화중부. 이곳에는 무림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여인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세외(世外)의 낙원(樂園)이라고나 할까? 달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그녀들의 미색이야말로 어쩌면 천하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敵)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꽃들을 거느린 제왕, 곧 화중부의 부주는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탐미주의자인 옥면사랑(玉面死朗) 도옥기(陶玉奇)였다. 잠마문. '살(煞)은 아름다우며 죽음보다 더 완벽한 종(終)은 없다'는 것이 이들이 주창하는 기치였다. 그들은 벌써부터 천하를 뒤덮을 마의 춤사위로 점차 그 위용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잠마문주는 혈면인도왕(血面人屠王) 왕영(王永)이다. 황금전. 문자 그대로 그들은 황금의 노예들이다. 황금이면 유부(幽府)의 귀신마저도 부린다고 했거니와 기둥이며 주춧돌, 심지어 기와 한 장까지도 모두 황금일진대 그러한 위세로 그들이 천하의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황금전주인 금백만(金百萬)은 그들 황금충의 신봉자들에게 있어 소위 대제사장 격이었다. 화무궁. 이곳은 금남여인지궁(禁男女人之宮)으로서 오로지 여인들만 산다. 어느 때부터인가 무산(巫山)을 완전한 여인천국으로 둔갑시킨 것은 바로 그녀들의 힘이었다. 그 외에 화무궁의 일들은 대개 신비에 싸여 있다. 이따금씩 그 근역에서 남자들의 싸늘한 시신이 발견되곤 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모두 초절정고수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림을 경동시키는 이런 사건들도 역시 진상이 확실하게 규명되어 본 적이 없었다. 이를테면 화무궁은 철저한 불간섭주의로서 외부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대신 여하한 일에도 타의 조사나 심문 따위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들은 무슨 일에건 그저 함구하면 끝이었다.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 한 절대 먼저 나서는 법도 없었다. 화무궁이 무림사대금역(武林四大禁域)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때문이며 궁주는 만천화화(滿天花花) 화무무(花舞舞)였다. 영호천문의 눈썹이 서서히 위로 곤두서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천하를 향해 야망의 발톱을 기르고 있는 맹수들이다. 아직은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언젠가는 그들로 인해 전 무림이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중얼거렸다. "무혼신도(無魂神刀) 냉무혼과 사망송시군자(死亡誦詩君子) 사마운, 천뇌토군(千腦土君) 공야중, 거령신장(巨靈神將) 방천 등이 지금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 숨어 있다. 그러나 그들도 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후후......." 영호천문의 입가에 싸늘한 한기가 맺혔다. "사신(死神)이 너희들을 차례로 방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 다음 순간이다. 스슷--! 그의 신형은 창문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일이다. 화려함의 극을 이룬 침실이다. 바닥과 천정을 비롯하여 벽이나 잡다한 기물들까지도 온통 최고급의 장식들로 뒤덮혀 있었다. 과연 황후인들 이같은 침전에서 잠을 잘까 심히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그 주인의 모습만이 방 안의 풍경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생겨도 어찌 그렇게 생길 수가 있을까? 명색이 여인이긴 하다. 하지만 상아로 만들어진 침상에 누워 있어도 그녀의 추한 외양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 일단 몸 전체가 커다란 절구통을 보는 듯하고, 우람한 주먹코에 거무튀튀한 피부는 그나마 얽어 있었다. 대개 여인이라면 못생겨도 어느 한 군데 쯤은 귀여운 곳도 있건만 그녀는 아니었다.한 마디로 다시 보기도 역겨울 만큼 추녀였다. 여인은 사지를 벌린 채 큰 대자로 누워서 천정을 잔뜩 노려 보고 있었다. 그녀의 쭉 찢어진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그 년을! 찾기만 하면 당장에 주리를 틀고 말테다."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며 증오에 찬 부르짖음을 토해내기도 했다. 이때였다. "당(唐)부인, 긴히 할 말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여인 당소고(唐小故)를 불렀다. "누구냐?"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참이라 그녀의 목소리는 흡사 천둥을 방불케 했다. 벌떡 일어나 앉는 그녀의 덩치 또한 음성에 못지 않은 거구였다. "들어 와서 얘기해라." 세상에 겁날 것이 없는 그녀는 상대가 혹 얄궂은 청탁이라도 해오는 자라면 그 자를 상대로 분풀이나 실컷 할 참이었다. 잠시 후. 한 명의 자의청년이 휘장을 걷으며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를 본 순간, 당소고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외양이야 어떻든 그녀도 시력만은 남들과 다를 바 없어 그가 보기 드문 미남자라는 사실에 해연히 놀란 것이었다. 그 자의인은 영호천문이었다. "고, 공자는 누구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당소고가 더듬거리며 묻자 영호천문은 다짜고짜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생은 부인께 호소를 하러 왔습니다." "호소?" 당소고의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금대야는 여색을 몹시 밝히시는......." 그는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당소고의 안색이 갑자기 암호랑이처럼 변했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금노시의 본처(本妻)였다. 그녀를 향해 영호천문은 짐짓 애절한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소생은 하회(河廻) 출신으로, 비록 낙척문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아리따운 정혼녀가 있었습니다." "흐음!" 당소고는 뭔가 탐색이라도 하듯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녀는 생전 보도 듣도 못한 화려한 마차에 실려 제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 뒤로 소생은 낙심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가 그녀를 찾아 나섰지요. 백방을 다 뒤진 끝에 그녀가 있는 곳을 겨우 알아내기는 했습니다만......." 당소고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 일이 나나 금대야와 무슨 상관이 있지?" 영호천문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정말 모르셔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녀를 데려간 마차의 주인이 금대야이시고 그녀는 이곳에......." 와장창! 영호천문은 채 말을 잇지도 못했다. 당소고가 주먹으로 궁등 하나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 그 계집이 누구지?" 영호천문은 몸을 움츠리며 겁에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그, 그녀에겐 죄가 없습니다. 죄라면 오직... 너무 가난했다는 것 밖에는......." "누구냐고 물었다." "여... 여향......." 와장창 하고 또 하나의 궁등이 애꿎게 작살이 났다. "그래, 그 년이었구나." 당소고는 급기야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 섰다. 그 모습을 보며 영호천문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다... 당부인께선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생각다 못해 부인을 찾아 오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해가 미친다면 소생은......." 그 말에 당소고는 비로소 안색을 약간 누그러뜨렸다. "알겠으니 어서 그 계집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딘지나 대라." "먼저 약속해 주십시오. 여향을 벌하지 않고 소생에게 돌려 주신다고 말입니다." "가자!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흥! 내 이 영감탱이의 다리를 분질러 놓고 말겠어." ② 거친 남자의 호흡과 자지러지는 듯한 여인의 교성이 울려 나와 밤공기를 야릇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그곳은 온통 분홍 일색의, 작지만 아담한 침방이었다. 방의 크기에 비해 널찍한 침상 위에서는 벌거벗은 두 남녀가 서로 뒤엉킨 채 한창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 쌍의 원앙이 곱게 수놓여진 비단금침은 잔뜩 구겨져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금노시와 여향이었다. 금력으로 이루어진 주종관계, 엄밀히 말해 주인과 첩(妾)인 이들의 관계에서는 아무래도 이러한 육체의 향연이 주였다. 여향. 그녀는 살이 디룩디룩하게 찐 금노시의 몸 밑에 깔려 연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성만은 그녀가 정사에 스스로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아아... 대야......." 두 남녀의 행위는 점입가경이었다. 그들은 동물적인 체위도 불사하며 차츰 절정의 고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그들의 알몸이 마치 파도를 타듯 출렁였다. 그 중요한(?) 시기에 불시의 침입자가 있었다. 꽈꽝--!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꼭꼭 걸어 잠갔던 문짝이 강한 충격에 의해 박살이 나면서 여기저기로 파편을 튕겨냈다. 어디 그 뿐인가? 덩치가 엄청나게 큰 여인이 방 안으로 냅다 뛰어 들었다. "죽일 놈의 영감탱이!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다." 그녀의 노호성에 천정이 들썩인 것은 물론이다. "어이쿠!" 금노시는 마치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펄쩍 뛰어 오르더니 미처 알몸을 가릴 사이도 없이 그곳에서 달아나려 했다. "어딜!" 휙--! 믿을 수 없게도 당소고의 솥뚜껑 같은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금노시의 머리카락을 후려 잡았다. "내 이 참에 아예 끝장을 내고 말겠어!" "으악--! 나 죽네......!" 꽈당탕! 우지끈......! 댓바람에 내동댕이 쳐진 금노시는 그만 한쪽 벽에 가 부딪치며 볼썽 사납게 구겨지고 말았다. 당소고. 이 무시무시한 여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지난 날 무림의 일면사를 들추어 보아야 한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한때 그곳에서 추한 용모의 여제자 하나가 뛰쳐 나와 종횡무진으로 강호를 휩쓴 적이 있었다. 무림에서는 그녀를 두고 귀왕모모(鬼王母母)라고 불렀다. 그런 별호를 얻기까지 그녀는 닥치는 대로 쏘다녔고, 비위가 틀리면 정파건 사파건 가릴 것 없이 무작정 살인을 저질렀다. 타고난 성격이 워낙 흉폭한데다 천부적인 신력(身力)을 바탕으로 무공까지도 절정에 이르러 있는 그녀는 사문(師門)인 당문에서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렇듯 맹위를 발휘하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작스레 베필을 만나 짝을 맺었다. 그녀의 배경과 무공을 탐한 녹림(綠林)의 한 도적이 그녀에게 용감하게도 결혼신청을 했던 것이다. 당시 야중흑호신(夜中黑虎神)이라는 명호로 통하던 인물, 즉 오늘 날 금대야(金大爺)로 불리우는 금노시가 그 자였다. 어쨌든 금노시가 당소고에게 죽도록 얻어 맞고 있는 사이에 여향은 한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옷을 입어야 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녀는 발발 떨며 꼼짝도 못하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 이때, 영호천문이 난장판이 된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여향!" 그는 구슬픈 부르짖음을 발하며 달려와 그녀를 끌어 안았다. "내가 왔소. 이제 안심하시오. 당부인께서 당신을 내게 돌려 주겠노라고 약속하셨소." 영호천문의 연기는 누가 보아도 그럴 듯 했다. "당신은 누... 읍!" 황당하여 묻고자 했던 여향의 입은 그의 입술에 의해 꽉 막혀 버렸다. 그녀는 몇 번인가 버둥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 순간에 그녀는 보았던 것이다. 비록 얼떨결이기는 하지만 청년의 얼굴은 그녀가 선망해 오던 미공자의 상이 아닌가? 그것을 의식하자 그녀는 거부감이 일기는커녕 오히려 심신이 금세 달콤하게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찢어 죽일 놈! 네 놈이 감히, 억!" 금노시가 고함을 지르다 말고 비명을 토해냈다. "뭣이 어째?" 귀왕모모 당소고가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 그의 안면을 세차게 후려 갈겼기 때문이었다. 그 찰나를 빌어 영호천문은 잽싸게 여향의 몸을 금침으로 싸안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당부인,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럼 소생은 정혼녀를 찾았으니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당소고가 미처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 나갔다. 밖에는 어느새 경비무사들이 주욱 둘러서 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제지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당소고의 고함소리와 욕설에 워낙 주눅이 들다 보니 따로 명령이 없는 한, 단 한 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휘익--! 영호천문은 여향을 들쳐 메고는 어둠에 싸인 대운전장을 유유히 빠져 나왔다. '후후후... 금노시, 한 방 얻어 맞은 기분이겠지? 하지만 아직 멀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 이어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에도 그의 머리는 눈부시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하찮은 유녀(遊女)에 불과한 여향을 납치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한밤중에 이런 소동을 일으킬 그가 아니었다. 새벽녘의 악양 거리는 무척이나 싸늘했다. 휘이잉--! 삭풍은 뼈골이 저릴 정도였다. 그것이 인간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거센 불길을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침. 해가 뜨자마자 만상본방에 한 청년이 방문했다. 그는 대뜸 만상초에게로 안내되었다. "하하... 어떻소? 이번 내기에는 내가 이겼소." 영호천문이었다. 그의 웃음을 대하는 만상초는 안색이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해 보였다. "인정하겠네. 하지만......." 영호천문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본시 도박의 율법은 엄격한 것이오. 그렇지 않소? 약속한 은자 삼십만 냥을 내놓지 않으면 아마 당신은 오늘부터 만상본방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을 떼어야 할 것이오." "으음......." 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도박사들은 무엇을 걸었던지 도박에 졌으면 반드시 내놓아야 했다. 그것은 철칙이다. 설사 자신의 아내나 딸을 걸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자는 도박 세계에서 낙인이 찍혀 다시는 도박에 손을 대지 못하게 되고 만다. "누가 내놓지 않겠다고 했나? 다만......." 만상초의 음성은 몹시도 껄끄러웠다. 그것은 심기가 편치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간밤에 금노시로부터 받은 편지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영호천문은 느긋하게 되물었다. "다만 무엇이오?" 만상초의 눈에서 일순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귀하가 어젯밤 대운전장에서 저지른 행동은......!" "하하하핫......!" 영호천문은 한 차례 대소를 터뜨렸다. 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만상초는 눈에서 살기를 거두는 대신 만면에 의혹을 드리웠다. "왜 웃는가?" 영호천문은 짐짓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하면, 정혼녀를 찾아간 것도 죄가 된단 말이오?" 그 말에 만상초의 얼굴이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 그것이......." 그는 뭐라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고, 그 이유는 영호천문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내 정혼녀요." "아니다! 그녀는......." "그럼 무엇이오?" "그녀는... 그녀는... 끙......." 만상초는 과연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할 뿐, 시원스럽게 말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매우 유감이겠으나 영호천문은 그의 생각을 너무도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후훗! 당신은 절대로 그녀가 어떤 여인인지 말하지 못할 것이다. 여향은 당신의 양녀(養女)이자 내부적으로는 성적 노리개였으니까. 그러다 주변에 그 사실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자 금노시에게 돈을 받고 떠 넘기지 않았던가?' 여향을 두고 만상초에게는 이렇듯 추한 내막이 있었던 것이다. 영호천문도 지난 밤에 여향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는 어지간히 놀랐었으니까. "하하... 어쨌든 약속한 은자 삼십만 냥을 주시오." "끙!" 만상초는 또 한 차례 무거운 신음을 발했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품 속에서 한 장의 은표를 꺼냈다. "핫핫핫... 고맙소, 만노인." 영호천문은 은표를 받아 들더니 미련없이 몸을 일으켰다. "귀하의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길 빌겠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돌아섰다. "제기랄!" 쾅! 그가 사라지자 만상초는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는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흑도(黑道)의 절기인 금사신공(金獅神功)이었다. 만상초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두고 보자! 절대 무사히 악양을 빠져 나가지는 못할테니." ③ "수연, 이제부터 그대는 자유다." 영호천문의 부드러운 음성에도 불구하고 백수연은 눈에 띌 정도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거의 넋을 잃은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눈 앞에는 한 장의 차용증서가 놓여 있었다. 영호천문이 다시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봐라. 이렇게......." 찌익-- 차용증서는 그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휴지조각으로 화해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백수연의 눈이 흐릿하게 변했다. - 이것이었던가... 이것이었던가......? 저 한 장의 종이 조각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나는 자유를 모르는 채 노예처럼 살아 왔었던가? 그녀는 자신의 심중에서 이는 부르짖음조차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현실감을 되찾아 바닥을 향해 무릎을 꺾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꽤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찢겨진 차용증서를 손으로 움켜 쥐더니 비로소 진하디 진한 오열을 터뜨렸다. "흐흑......!" 소리는 낮았으되 백수연의 울음은 핏빛이었다. 단심(丹心)이 마디마디 응어리진, 장장 십팔 년 세월에 걸쳐 쌓여왔던 한(恨)이 그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불쌍한 여인.......' 영호천문은 뭐라 위로를 건네고 싶었으나 그 말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애상(哀想)이 길게 이어질 것 같자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가야겠군. 내 역할은 이것으로 끝난 것 같으니.......' 영호천문은 그렇게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는 그녀를 방 안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의 발치께에 또다른 은자 십만 냥 짜리 은표를 놓아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인이여! 부디 잘 살아 주시게나.' 백수연. 오랫동안 소리 죽여 흐느끼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 공자......!"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과연 아무리 두리번거려 보아도 방 안에는 그녀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떠나버린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의 존재는 하늘이다. 왜냐하면 그녀로 하여금 생애 최초로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고, 또 그녀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가 사라지다니, 이래도 되는 것인가? "공자님--!" 백수연은 길게 부르짖더니 그만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꿈이 처절하게 절규했다. - 따를 테야. 그 분이 어느 곳으로 가시던, 설사 그곳이 이역만리(異域萬里)일지라도 나는 따를 테야. 발바닥이 부르터도 상관없어. 아니, 차라리 그 분 발치의 흙이 되었으면....... 백수연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석양(夕陽)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시각이었다. "으음......." 정신을 차리게 된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지척에 놓여 있는 은자 십만 냥 짜리 은표였다. "공자님......!" 백수연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의 생을 오직 한 사람, 그를 위해 살겠노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했으므로 나약해져서는 아니되었던 것이다. 백수연은 손목을 걷어 올렸다. 그녀의 희디 흰 팔목에는 하나의 은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번개의 형상과 더불어 봉황(鳳凰)의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어차피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저것만 드리면......." 그녀는 은표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다시 자신의 팔목으로 시선을 옮겨왔다. 그녀의 눈이 어쩔 수 없이 뿌얘졌다. "이 뇌봉환(雷鳳環)의 주인이 내 아버님....... 어머니를 품었던 대가로 이것을 남기고 가셨다고 했지." 백수연은 한결 굳어진 음성으로 읊조림을 이어갔다. "떠나야지. 넓은 세상천지에서 이 뇌봉환 하나만으로 아버님을 만나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내 자신이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계집인지는 확인하고 싶어. 그래야만 내게 새 생명을 주신 그 분께 덜 부끄러울 수 있을 테니까." 파란의 연속인 인생, 그녀는 자유인답게 제 스스로 거기에 뛰어 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지금껏은 타의에 의해 살아 왔지만 이제는 정말로 그러지 않아도 되었기에. 다음 날. 백수연은 정말로 떠났다. 석양을 받으며 지난 세월 동안 학대받으며 짐승처럼 살아왔던 악양을 영원히 등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운명이 그 장을 열었다. 천운객점(天運客店). 이곳은 화운루와 쌍벽을 이루는 악양 최고의 객점이었다. 역시 화운루의 등룡별원에 버금가는 천운객점의 상방(上房)에 두 남녀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영호천문과, 그가 납치(?)해 온 금노시의 애첩 여향이었다. 여향은 요염한 자세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은 아까부터 줄곧 영호천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탁자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향의 존재는 의식하지도 못한 듯 의자에 기댄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도 금노시와 만상초가 합작으로 벌이는 사업체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여기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벌써 그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순간 영호천문의 얼굴은 등빛을 받아 관옥처럼 빛나고 있었다. 덕분에 여향은 눈에 춘정(春情)을 가득 담은 채 도시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영호천문의 심중에서 이런 생각들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금노시는 필시 여향을 되찾으려 할 것이고, 만상초도 역시 은자를 잃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각자 제 발로 이곳을 찾게 되어 있지. 후후.......' 그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이 황금전 악양 분타의 책임자들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즉 그 두 사람을 통해서라면 반드시 황금전의 허실(虛實)을 탐지해낼 수가 있을 것이다.' 황금전의 세력이 중원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지만 깊이 조사하지 않는 한 대운황금전장과 만상본방까지도 그들 산하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좌우간 그 점은 이제까지 영호천문이 행해 왔던 기행(奇行)들의 원인을 한꺼번에 설명해 주는 셈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끈질긴 집념으로 자신이 언급했던 첫번째 목표를 향해 서서히 접근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여향이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눈가장자리를 은은한 도화색으로 물들인 채 그를 불렀다. "이봐요." 그녀의 호흡도 무척이나 가빠져 있었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못들은 척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흐응... 계속 그렇게 우두커니 있기만 할 건가요, 대협......?" 여향은 비음을 말하며 뱀이 또아리를 틀듯 몸을 비비 꼬았다. 확실히 얇은 자리옷에 감싸인 그녀의 몸매는 유혹적이었다. 우선 젖가슴만 해도 금방 옷을 뚫고 툭 튀어 나올 듯 했으니 다른 곳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당신은... 이 여향을 곁에 두고도 계속 목석처럼 굴 작정인가요? 당신이 물은 것은 어제 모두... 말해 줬잖아요?" 여향은 더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스스로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 바람에 출렁 하고 그녀의 젖가슴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영호천문은 여전히 조금치의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다.여향이 원망스러운 듯 눈을 흘기며 다가갔다. "미운 사람......!" 그녀는 이런 여인이었다. 양부인 만상초와의 불륜(不倫) 관계로 인해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망각한 지 오래였다. 오직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르륵....... 침의(寢衣)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놀랍게도 여향은 영호천문의 등 뒤에서 제 손으로 거침없이 옷을 벗고 있었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당하게 알몸을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등불 아래 적나라하게 노출된 그녀의 육체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서... 안아 줘요." 여향의 사고(思考)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런 행동이야말로 영호천문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여인, 껍데기에 불과한 몸뚱이 하나만을 믿고 아무데서나 함부로 옷을 벗어 내리다니....... 그 어이없는 오만이 차라리 불쌍할 지경이군.'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좋은 밤이오." 그 말을 어찌 해석했는지 여향은 뜨겁게 달아 오른 육체를 냉큼 그의 등에 밀착시켰다. "미운 사람... 더 좋은 밤으로 만들어 줘. 당신은......." 그녀의 음성이 뚝 끊겼다. 무심코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공교롭게도 예기치 않았던 현상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저... 저......." 그것은 한 자루의 예리한 칼날에 의해 소리없이 천정 한복판이 갈라지는 광경이었다. 분명 그녀의 더듬거리는 음성을 들었을텐데도 영호천문은 계속하여 차를 마시고 있을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드디어 왔군!' 이 중얼거림은 그가 들고 있는 찻잔 속을 보면 납득할 수가 있었다. 그 속에 천정이 환히 비치고 있었으므로. 번쩍 하고 도광(刀光)이 날아든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아악!" 가뜩이나 말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던 여향은 급기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 찰나, 영호천문은 탁자의 모서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푸슉! "크악!"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어느 틈엔가 탁자로부터 은성(銀星) 하나가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가더니 천정에 숨어 있던 살수(殺手)의 목젖을 정확히 관통해 버린 것이었다. 쿵! 둔중한 음향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자는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영호천문이 그에게 다가가 복면을 벗겼다. "흐음, 첫번째 사냥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쓴 입맛을 다셨다. "쯧! 만상본방의 회계 나으리였군." 어떻든 면식이 있는 자가 시체가 되어 버렸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목에 구멍이 뚫린 채 절명한 만상본방의 회계는 그때까지도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영호천문은 간단히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 자에 대한 연민을 털어 버렸다. 현재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비정(非情)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영호천문은 처음 자세대로 탁자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여향이 알몸으로 쓰러져 누워 있었다. 옆에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영호천문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여향 따위는 처음부터 그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기도 했지만. 그는 다소 짜증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직접 현신할 때도 되었는데......? 그 두 사람이 미적거리는 통에 공연히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구나." 그러던 한 순간,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 창문을 뚫고 날아드는 물체가 있었다. 팍! 그 물체는 방 안에서 산비(散飛)하더니 삽시에 뿌연 연기를 퍼뜨렸다. 그 광경을 본 영호천문은 입가에 조소를 매달았다. "한낱 삼류 재간을 쓰다니, 한심한 작자들이로군." 그것은 다름 아닌 미혼탄(迷魂彈)이었다. 잠시 후. 스르륵....... 창문이 가만히 열리더니 그 사이로 웬 머리통 하나가 서서히 올라왔다. 그 자의 눈은 기광을 발하며 방 안을 살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눈은 이내 빛을 잃고 말았다. 팟! 파팟! "으아악!" 비명과 더불어 창문으로 올라오던 머리통 역시도 자취를 감추었다. 영호천문은 어깨를 으쓱 하며 중얼거렸다. "두번째 사냥감은 너무 싱거웠다." 그는 손가락 하나 정도의 굵기인 가느다란 침동(針 )을 손바닥에 올려 놓은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짬을 빌어 잠깐이나마 그는 천병환사의 얼굴을 떠올려볼 수가 있었다. 천(天)의 병기를 몸에 지녔으며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인 천병환사는 헤어질 때 영호천문에게 아끼던 물건을 몇 개 주었다. 그 중 한 가지를 지금 막 써먹은 것이었다. 밤은 조용히 깊어만 갔다. 사위에서 들려 오던 바람소리조차 이제는 멎어 있었다. 영호천문은 하품을 했다. 기다리다가 지루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슬슬 사냥을 시작해 볼까?" 그는 곧 문을 열고 방을 빠져 나갔다. ⑤ 편월이 밤하늘의 한 귀퉁이에 비스듬히 걸린 채 스산한 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뜰을 한 차례 쓸어 보았다. 지금 그가 머무르고 있는 상방은 독립적인 구조였다. 사방에 높은 담장을 세워 놓아 다른 곳과 구별짓고 있었다. 그 곁으로는 빙 둘러 화원이 있었는데, 상방을 중심으로 교목들이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운치가 아주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운치는 곧 공포로 둔갑하고 말았다. '담 지붕에 둘, 화원 안에 셋, 처마 밑에 둘, 그리고 교목 속에 다섯...... 도합 열두 명이다.' 파악을 마친 영호천문은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파파팟--! 그의 몸에서 눈부신 금광이 뻗어 나왔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처마 밑에 매복해 있던 두 명의 장한이 허공에 피를 뿌리며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쿵......! 그곳은 당장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쳐라!" 파츠츠츠츳--! 담장과 화원, 교목 뒤로부터 여러 명의 인영들이 번개같이 쏘아오며 신랄하게 무기를 휘둘러댔다. 이 살벌한 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인가? 영호천문은 달을 바라보며 장소를 터뜨렸다. "우우우-- 우--!" 그의 장소성은 웅후하면서도 왠지 비장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 어찌 들으면 몹시 구슬프기도 했다. 이어 그가 팔을 한 번 휘젓자 그의 양팔에서 검인(劍刃)이 폭출되었다. 슈슈슉! "크아아악!" 그의 전면으로 달려 들던 두 명의 장한은 번쩍 하는 광채를 눈으로 보자마자 목줄기가 화끈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다. "후후... 인간사냥이나 하고 있기엔 너무도 훌륭한 밤이군." 영호천문은 이번에는 재빨리 신형을 솟구쳐 화원으로부터 덮쳐오는 세 명의 인영들을 발로 걷어찼다. 퍽! 퍼퍽--! "크으윽--!" 대번에 그들 삼 인도 목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들은 죽으면서도 끝내 회의를 떨쳐 버리지 못했다. 설마 하니 상대방의 발끝에서 검이 튀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러운 황금충의 노예들, 내 너희들에게 줄 선물이 있지. 그것은 죽음이다." 영호천문은 수평 방향으로 허공을 날며 소매를 펼쳤다. 피피피핑--! 막 담장 위로 솟구쳐 오르려던 자들이 모두 화살맞은 새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영호천문의 소매 속에서 일촌(一寸) 길이의 세전(細箭)이 발사된 것이었다. "하하핫... 황금전주에게 가서 알려라! 불원간 이 불망객이 직접 찾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스스슥--! 영호천문의 신형은 어느덧 지붕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 어둠을 빌어 도처에 숨어 있다가 속속 일어서는 자들이 보였다. 그 수효는 줄잡아도 족히 오십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들을 향해 날아가며 조소를 흘렸다. "후후후... 오늘밤 이 일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밤의 암흑은 온통 처절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단 한 사람, 영호천문이라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크아아악--!" 그가 벌이는 살육전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 영호천문. 그는 마치 혈지(血池)에서 빠져나온 혈신(血神)인 양 전신에 핏물을 뒤집어 쓴 채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자의자락을 타고 핏방울이 계속 떨어져 내려 지면을 적셨다. 그는 지금 심장에서 미쳐 날뛰고 있는 피가 제 풀에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찬 빛을 발하며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노시와 만상초였다. 그들 이인은 각기 반신(半身)이 피투성이가 되어 영호천문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 목숨만......!" "대협......." 그들은 비굴했다. 강자(强者)에게는 언제라도 고개 숙일 수 있는 그들의 생리가 영호천문을 무척이나 역겹게 만들었다. 그는 그들을 외면하며 달빛 아래 즐비한 시신들을 둘러보았다. 일순 창백한 그의 얼굴에 한 가닥 비감(悲感)이 스쳐갔다. 그는 눈을 들어 달을 응시했다. '이것인가? 살업(殺業)을 베풀고 난 기분이라니, 후후... 시원하기는커녕 되려 막막하기만 하구나.' 세상에는 필요악(必要惡)이란 것이 분명 있었다. 또한 그 자신도 이 점만은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렇다면 결코 회의해서는 아니 되거늘, 그는 이렇듯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지게 될 살행(殺行)에 대해 미리부터 질리고 마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계획했던 바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뚜렷한 대상과 목표가 있는 한 그의 칼은 누군가의 팔과 다리를 차례로 자르고, 종국에 가서는 그 자의 심장까지도 도려내야만 했다. 영호천문은 다시금 금노시와 만상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 두 사람에게는 모두 오른팔이 없었다. 그가 잘라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지극히 무감동한 음성으로 물었다. "살고 싶은가?" "무... 물론 그렇소......." 영호천문은 피식 웃었다. "목숨이란 것이 그토록 아까운가?" "네? 네......." "그럼 내 앞에서 맹세하라." "무엇을 말이오?" 금노시와 만상초가 의문이 담긴 얼굴을 들었다. "황금의 신에게 등을 돌리겠노라고 말이다." 그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그건......." 영호천문의 눈에서 불현듯 섬뜩한 광채가 뻗어나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자, 잠깐!" 금노시가 다급히 부르짖더니 만상초의 눈치를 살폈다. 만상초는 그의 시선을 받자 안면을 몹시도 씰룩거렸으나 결국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우...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영호천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간단하다. 황금전으로 돌아가 너희들이 숭배해마지 않던 황금충 앞에서 대변을 보면 된다." "넷......?" "흐윽!" 두 사람은 대번에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황금충이란 황금전의 상징이었다. 그 앞에서 대변을 보라니,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전부 부정하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영호천문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다시 그들의 고막을 울렸다. "훗훗...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알아서 하기 바란다." 두 사람의 눈알이 음흉하게 돌아갔다. "합지요, 하고 말고요!" 그들의 쉬운 대답에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좋다.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해 둘 것이 있다." "윽!" "으음......!" 두 사람은 차례로 신음을 발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뜻하지 않게 뒤통수가 뜨끔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의 뇌호혈(腦戶血)에는 지금 특수한 침이 박혀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체내 곳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일정 시일이 지난 후에 뽑아내지 않으면 너희들은 아마도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일시지간 핏기가 싹 가셨다. "우우우......." "명심해라. 그것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금노시와 만상초는 절망한 나머지 전신의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영호천문의 말이 계속 되었다. "달이 무척 곱군. 지나간 옛 일이 생각나는 밤이야." 그 한 마디가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말을 끝으로 영호천문은 신형을 날렸다. 스슷! 그는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중에 곧 까만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들은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며 털썩 주저앉았다. "오오! 이럴 수가......." 금노시와 만상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세좋게 날뛰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은 전날의 부귀영화를 완전히 배신한 채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변을 돌아 보았다.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 오자 그들은 새삼스런 공포에 몸을 으스스 떨어야 했다. 제 8장 인연(因緣)의 맥(脈)을 따라서 ① 하룻밤 자고 깨어 보니 유명인이 되어 있다던가? 이 속언(俗言)은 과장을 배제하면 그다지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단시일 내에 한 사람의 이름이 드넓은 중원 천지를 들끓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금 무림에 돌풍을 일으키는 핵(核)이었다. 그로 인해 연속적으로 터지는 사건들이란 대개 엄청난 것들 뿐이었다. 그는 자칭 불망객(不忘客)이라고 했다. 이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불과 삼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천하를 뒤흔들어 놓았으니 왜 안그렇겠는가? 그를 일컬어 세인들은 황금충을 잡는 사냥꾼이라 불렀다. 놀랍게도 그는 혈혈단신으로 당금 무림을 주름잡는 천중오패 중 황금전을 노리고 가히 일대 십만의 전면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는 미친 자가 아니고는 절대 저지를 수 없는 행위였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가 얼마 못가 제 풀에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만용의 대가로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하지만 그런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호남(湖南), 호북(湖北), 안휘(安徽) 등 삼개성의 총 삼십육개 황금전 분타(分舵)가 각기 하룻밤 사이에 풍지박산이 나 버렸을 때,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렇게 부르짖어야 했다. - 오오! 황금충의 신봉자들이여, 그를 만나지 마라. 불망객은 그대들을 염라전으로 인도하는 사신(死神)이다. 실제로 황금전의 인물들은 그때부터 전전긍긍이었다. 언제 어떻게 불망객의 살수가 뻗쳐올지 몰라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러나 경계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후로도 불망객은 여전히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 신비한 존재로만 남아 있었으니 대체 무엇을 어찌 피해간단 말인가? 그런 가운데 계절은 초하(初夏)를 치닫고, 중원의 산하는 푸른 색을 점차 더해 가고 있었다. 유월(六月)이다. 초하에서 막 장하(長夏)로 넘어가는 시기인지라 관도(官道)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벌써부터 뜨겁기 그지 없었다. 열기에 달아 버린 흙먼지가 마거(馬車)들이 지날 때마다 황진을 마치 뭉게구름처럼 피워 올리곤 했다. 이런 날은 대개의 사람들이 갈증에 시달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관도의 어림에는 반드시 시원한 물이나 차(茶)를 갖다 놓고 파는 장삿꾼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휘(安徽)에서 절강성(浙江省)으로 넘어가는 첩경에는 저 유명한 황산(黃山)이 있다. 그리고 그 기슭에는 싯누런 황원(荒原)을 끝없이 가로질러 동서(東西)로 이어지는 관도가 있다. 바로 그 길목, 커다란 백양목(白揚木)이 가지를 휘영청 늘어뜨린 채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어김없이 차를 파는 장사치가 있었다. 아니, 실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쉬어가는 그 길목에는 여러 종류의 장사꾼이 모여 있었다. 변변한 객점 하나 없는 탓에 식사 대용이 될만한 떡이나 육포를 파는 자까지도 있었다. 또 이들 간이적인 장사꾼들 곁에는 점장이도 있었다. 이르자면 구색은 고루 갖춘 셈인데, 점장이는 더운 날씨에 지쳤는지 손님 맞을 생각은 하지 않고 아까부터 백양목 아래에서 산통(散筒)을 무릎에 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무튼 물건을 팔던 재간을 팔던 간에 장사꾼은 도합 네 명이었고, 그들 주위로는 다시 길손으로 보이는 중년인 네 명이 발을 뻗고 앉아 지극히 편한 자세로 쉬고 있었다. 방금 도착한 듯한 노파와, 손자로 보이는 동자(童子)도 한 몫 했다. 그들 역시도 더운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으니 이는 전형적인 유월의 한가한 풍경이랄 수 있었다. 그 백양목 그늘이 있는 곳을 향해 또다른 한 명의 인물이 걸어 오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 낡고 허름한 자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먼 길을 온 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다.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있었으나 너덜너덜해져 있어 햇빛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피로에 절은 듯한 청년이 최근 무림 전역을 경동시키고 있는 영호천문이었다. '잠시 쉬어가야겠군.' 영호천문은 백양목이 보이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인간인지라 더위를 느꼈으며,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 속에서 어울려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떡장수와 차장수를 보니 잊었던 허기와 갈증이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그가 나무 그늘로 선뜻 들어설 때였다. 지금까지 졸고 있던 점장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보게, 젊은이! 정말 큰일 났군." 그는 이빨이 거의 다 빠져 버린 칠순 가량의 영감으로서 일신에는 다 떨어져 걸레쪽이나 다름없는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무슨 큰일이 났다는 말이오?" 영호천문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절거덕....... 영감은 산통을 한 번 흔들어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액운이 끼었어. 젊은이, 조심하게. 오늘은 일진이 사납겠어. 피할 수도 없게 생겼고 말이야." 영호천문은 초립을 벗어 내리며 빙긋 웃었다. "노인장은 항상 자신의 점괘가 맞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물론이네. 맞지 않으면 복채를 받지 않으니까." 영호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자신한다니 내 복채를 드리리다. 얼마요?" 절그럭 절그럭....... 점장이는 다시 산통을 흔들었다. "음, 보자. 옳지! 이건 은자 일만 냥은 내야겠어." "꽤 비싸구려. 후후후......." 사실 갑부가 아니고서야 단지 점을 보겠다고 그런 거액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점장이도 액운 운운하면서 더위나 잊어 보고자 농담을 지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응하는 영호천문의 태도는 의외로 진지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서슴없이 품 속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더니 점장이에게 내던졌다. "점을 봐 주시오." 절그럭... 절그럭....... 점장이는 돈을 받자 신명이 오른 듯 부지런히 산통을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곧 두 개의 죽저를 뽑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보시게나." 영호천문은 묵묵히 죽저를 받아 살펴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각각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다. <수생(水生)> <육사(肉死)> 영호천문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흠, 이 점괘가 틀림없소?" 점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볼 일을 마친 그는 마치 언제 너를 보았냐는 듯 종전대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음냐... 으음......." 잠꼬대까지 곁들이는 그를 보며 영호천문은 피식 웃었다. "내 보기에 노인장은 엉터리 점장이인 것 같소. 왜냐하면 남의 액운은 짚어 내면서도 자신의 일은 전혀 모르니까." 그 말에 점장이가 궁금한 듯 눈을 반쯤 떴다. 영호천문이 짐작한 바대로 그는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관상은 좀 볼 줄 아오. 노인장의 양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있으니 이건 분명 사신이 깃든 징조요. 내 영감을 위해 일구(一句)를 주겠소." "그... 그게 무엇인가?" 점장이의 눈에 언뜻 긴장감이 도는 것을 영호천문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내색하지 않고 짧게 말했다. "아살(我殺)." "아살......!"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면 스스로가 자신을 죽인다는 뜻이다. 점장이가 안면에 어두운 그늘을 만들 때, 영호천문은 벌써 신형을 움직여 육포장수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헤헤... 손님, 이것은 신선한 쇠고기를 말린 것입니다. 보아 하니 시장하신 것 같은데 좀 드릴까요?" 그 자는 나이가 사십쯤 되어 보였는데, 이 장사에 어지간히 이력이 붙었는지 입가에 자연스럽게 아부하는 듯한 웃음을 띄우며 육포 한 조각을 내밀었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당신은 잠시 기다리시오. 먹고는 싶소만 우선 차부터 마셔야겠소. 나는 지금 몹시 목이 마르오." 그는 육포장수를 지나쳐 이번에는 차장수에게로 다가갔다. "흘흘... 젊은이, 이것은 광동산(廣東産) 용정차(龍井茶)라네. 한 잔 들겠는가?" 차장수는 중늙은이에 달하는 여인으로 머리에 거칠거칠한 질감의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하하... 좋소, 어서 주시오." 여인은 커다란 그릇에 찻물을 가득 따라 주었다. 영호천문은 그것을 받아 달게 마신 후, 떡장수에게로 돌아섰다. "한 개 주시오." "저......." 떡장수는 장사치답지 않게 순박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그는 남들보다 더위를 더 타는지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더듬거리는 그에게 영호천문은 빙긋 웃어 보였다. "떡을 달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때였다. 똑 하고 무엇인가 허공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선연한 한 방울의 피였다. 피를 본 젊은이는 그대로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뭐라 입도 떼지 못하는 그를 향해 영호천문이 다시 말했다. "안심하시오, 형장. 내게 묘방이 있으니까." 영호천문은 태연하게 떡 한 개를 입에 집더니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섰는데, 그의 입에서 묘한 음성이 새어나온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어어......!" 그는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으며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영호천문이 쓰러진 곳은 공교롭게도 점장이의 앞이었다. 졸고 있던 점장이가 눈을 번쩍 뜨며 읊조렸다. "글쎄, 내 뭐라 했느냐? 수사(水死), 즉 물을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그 말은 중도에서 뚝 끊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눈 앞에 쓰러져 있던 영호천문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귓전으로 한 가닥 전음성이 들려 왔다. (그럼 육포를 먹으면 산단 말이오?) 점장이의 안면 근육이 마구 씰룩거렸다. (이, 이게 대체.......) 전음은 다시 이어졌다. (당신이 내게 육포를 좀 가져다 주시오. 후후... 조용히 따르는 게 신상이 이로울 것이오. 만일 그렇지 않았다간.......) 점장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공포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최면에라도 걸린 듯 육포장수에게로 가 육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육포장수가 아연실색했다. "반형(半兄)......?" 하지만 점장이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없이 돌아섰다. 그는 육포를 쓰러져 있는 영호천문의 입에 갖다 대었다. 이때, 그의 손가락이 까맣게 썩어 들어 가는 것을 그 자신보다 육포장수가 더 먼저 발견했다. "아니, 반형! 뻔히 알면서 왜 그런 짓을......?" 육포장수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으나 이내 굳어지고 말았다. 시체로 변해 있는 줄 알았던 영호천문이 육포를 으적으적 씹어 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② 점장이의 비명은 그 직후에 터졌다. "으아악--!" 육포에 발라져 있던 독으로 인해 이미 팔까지 썩어 들어가던 점장이는 이 한 소리와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럴 수가......!" 육포장수가 회의에 찬 부르짖음을 발하는 사이, 급기야 차장수도 차통을 집어 던지고 일어섰다. "찢어 죽일 놈! 우리의 계책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멀쩡하게 연극을 했구나." "핫핫핫... 유감이군. 이제야 그것을 깨닫다니." 영호천문이 대소를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연극도 연극 나름이지." 그는 차장수와 육포장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그대들과 나는 무엇보다 목적이 다르다. 그대들은 나를 죽이려 했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방어를 했을 뿐이니까." 영호천문의 야유는 신랄했다. "내 한 마디 충고하겠는데, 앞으로 연극을 하려면 복장부터 잘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대들처럼 이 더운 날 입던 옷 위에 연극 의상을 덧입었다간 본색이 쉽사리 노출되지." 그는 떡장수 젊은이를 가리켰다. "배역도 잘 골라 써야 해. 저 분 형장처럼 연기가 서투른 사람이 끼어 있으면 곤란하지. 더구나 그 위에 방해물까지 얹어 놓았 으니, 쯧쯧......." 그가 백양목 위를 가리키자 사단이 났다. 우두둑하고 나무 가지가 부러지더니 그 위에서 다른 세 명의 인물이 떨어졌다. 쿵! 털썩......! 그들은 속옷만 입은 자들로서 벌써 시체가 되어 있었다. "으으......!" 떡장수 청년은 그들을 보더니 잠시 몸을 떨다가 기어이 혼절하고 말았다. "그러게, 내 뭐랬나? 서투른 배우는 안된다니까." "죽일 놈! 나불거리는 그 주둥이를 뭉게 버리겠다." 육포장수와 차장수가 만면에 살기를 떠올리며 각기 소매 속에서 검(劍)과 도(刀)를 뽑아 냈다. 창! 차창! 그러나 그들이 미처 일식(一式)도 전개하기 전이었다. 푸슈슉-- 펑--! "크아악--!" 영호천문의 소매 속에서 구릿빛 철통이 나오는가 싶더니 남색의 불꽃이 폭사되어 그들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불꽃에 싸인 채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끝내는 잠잠해지고 말았다. 차지직... 지직......! 역한 노린내와 함께 그들의 사체는 금세 시커먼 숯덩이로 화했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누군가 경악에 휩싸인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저, 저것은 오독열화통(五毒熱火筒)이 아닌가?" "호오! 그래도 안목이 있는 자가 있었군." 영호천문이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 쪽에서 쉬고 있던 길손 네 명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를 에워쌌다. "오독열화통은 과거 십대살객 중 한 명인 천병환사(千兵幻死)혁련광의 독문무기다. 불망객, 너는 그의 제자냐?" 그들 중 한 명이 싸늘히 물어 왔다. 영호천문은 그 자들을 한 번 쓰윽 돌아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 분을 잊지 않은 걸 보니 그대들도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오독열화통의 위력도 알겠지?" 예의 인물이 대답했다. "물론 안다. 일단 발사했다 하면 설사 돌이라 해도 태울 수 있을 뿐더러 물을 갖다 들이부어도 꺼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불길에는 다섯 가지의 극독이 함유되어 있어 몸에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크크......." 그 자는 조소를 흘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는 중대한 약점이 있다. 그것은 한 번 쓰면 다시 채우기 전에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지." "후후... 꽤 자세히 알고 있군." 영호천문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금 전에 그는 오독열화통으로 점장이를 위협했고, 그것 하나 때문에 그 자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그럼 더 이상은 이 물건을 겁내지 않겠군?" 영호천문은 갑자기 안색을 굳히며 오독열화통으로 말했던 자를 겨누었다. "물론이다. 허튼......." 그 자는 불행히도 말했던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푸슉! 펑--! "억!" 믿을 수 없게도 오독열화통은 건재했으며, 덕분에 그 자는 몸 전체가 불덩이가 된 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패대기쳐지듯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으아아아--!" 그 자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이럴 수가......!" 나머지 인물들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도 손을 써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후후후... 세월이 흐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거늘, 오독열화통이라고 해서 발전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삼 인은 전광석화처럼 덮쳐 들었다. "놈! 죽어랏......!" 쐐애애액--! 그 기세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속전속결을 단행하려 했는지 동시에 세 방향에서 살벌한 공격을 전개해 왔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오독열화통의 공격권에서 세 명중 두 명은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계산착오였다. "핫핫......! 오독열화통은 그렇게 값싼 물건이 아니다. 너희들을 상대로 더 이상 낭비할 생각이 없다." 슷! 찰나지간, 영호천문의 몸은 땅 속으로 쑥 꺼져 버렸다. 그 바람에 목표물을 잃은 삼 인은 자기네들끼리 너무도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푹! 푸욱--! "크헉!" "큭! 이, 이런......." 그들 사이에 벌어진 것은 다름 아닌 상잔(相殘)의 비극이었다. 전력으로 쇄도해 오던 그들은 갑자기 공세를 멈출 수가 없자 그만 서로의 몸을 찌르고 만 것이었다. "크으으으......." 쿠쿵! 털썩......! 그들은 각기 상대를 향해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쓰러졌다. 원망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안배를 내린 하늘이련만....... 스슥!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황진이 일더니 그곳을 통해 영호천문의 신형이 땅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쓰러져 누운 시체들을 둘러보며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한 가닥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황금충이 드디어 나를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죽어간 자들은 황금전이 밀파한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그 자들의 안쪽 소매 끝에 금색 수실로 황금충 한 마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영호천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원 너머 저 쪽으로 황산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 상태로 그가 앞 일에 대해 뭔가 깊은 상념에 잠겨 들고자 할 때였다. "사... 살려....... 저희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요, 나리." 잔뜩 겁먹은 음성이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돌아다 보니 그곳에서는 노파와 동자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영호천문은 안색을 펴며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걱정마시오, 할멈.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은 당신네 조손(祖孫)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오." "그... 그렇다면 우리를 해치지는 않는 것입니까요?" "해치다니? 후후... 내가 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겠소?" "대개 이런 일이 있으면... 증거를 없앤다 하여......." 영호천문은 입가에 고소를 떠올렸다. "그런 행위는 꺼리는 바가 있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오. 나는 그럴 필요가 조금도 없는 자외다." 그제서야 노파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그럼 살았네. 휴우! 좌우지간 오늘 일은 못본 것으로 하겠습니다요. 백주에 살인이라니, 도무지 몸이 떨려서 설사 누가 오늘 일을 물은들......." 그녀가 청하지도 않은 함구를 맹세하는 사이에도 손자인 동자 아이는 줄곧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영호천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겨우 십이, 삼 세 정도에 불과한 그 아이는 깜찍하게도 노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물어왔다. "아저씨, 저들은 대체 어떤 자들이죠?" 소년을 향한 영호천문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그는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궁금하다면 말해 주지. 그들은 황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무리들이란다." "그럼 아저씨는 그들을 찾아 벌주는 분인가요?" "벌......?"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 방법도 그다지 선한 것은 아니란다. 보다시피 살인을 저질렀으니까." 동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어떻다는 거지?" "아저씨는 정당해요. 누가 하던 세상을 위해 그런 자들은 모조리 제거되어야 마땅해요. 더구나 저들이 먼저 그물을 쳐 놓고 아저씨를 죽이려 했잖아요?" 동자의 의기(義氣)에 영호천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입술 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고맙구나. 너같이 어린 아이가 나를 이해해 준다니 말이다." 소년이 갑자기 고개를 반짝 쳐들고 항의했다. "지금 그 말, 취소하세요." "왜지? 그건......?" "저는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이래뵈도 알 건 다 안다구요." 영호천문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래, 취소하마.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미처 소영웅(少英雄)을 몰라 보아서 말이다. 하하하......." 그런 연후, 그는 만족해 하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蒼空)이 눈에 쏘아져 들어오자 공허한 느낌이 웃는 중에도 그의 가슴으로 옮겨져 왔다. "불문곡직하고, 살인은 어쨌든 죄(罪)란다." 그 말을 받아 노파는 한 소리 기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무관세음보살....... 부디 중생을 용서하소서." 그것이 호의(好意)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영호천문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동자가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후후후... 좋은 사람이라......." "저는 굳게 믿어요. 저도 이담에 크면 아저씨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천하를 주유하며 악인들을 멸절시키는......." 이쯤 되자 영호천문도 마침내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하하... 내가 졌으니 이제 그만 해라. 네가 너무 띄워 주니까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구나." 그는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행선지가 어디냐?" 소년은 침울한 표정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부모님께서는 병으로 일찍 돌아 가셨어요. 여기 있는 이 할멈은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지내온 사람인데, 함께 항주(杭州)에 있다는 친척 집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으음......." 영호천문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너도 고아란 말이지?" "네." 동자는 몸을 움츠리며 그답지 않게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 광경에 영호천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아이에게서 공통분모를 느끼자 여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심금이 자극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무거워진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내 이름은 단정(單政)이에요. 아저씨는요?" "나......?" 영호천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대꾸했다. "내겐 이름이 없단다. 다들 불망객(不忘客)이라고 부르지." "불망객......?" 단정은 초롱한 눈에 의문을 떠올렸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그들 삼 인은 동행(同行)이 되었다. 단정은 영호천문의 소매 끝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여 따라 붙고 있었다. 저 멀리 뒤에서는 노파가 연신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두 사람을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가는 방향이 같았다. 어느덧 그들 일행은 황산의 산역(山域)에 이르고 있었다. 그때는 벌써 석양(夕陽)이 황야를 서서히 진홍빛으로 물들여 가고 있는 시각이었다. 황산은 이른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산세(山勢)는 수려하면서도 무척이나 험했다. 이 산의 제일봉은 단연 천도봉(天都峯)으로서 여기에는 하늘의 신을 섬기는 거대한 제단(祭壇)이 축조되어 있었다. 두 사람, 즉 영호천문과 단정(單政)은 손을 잡고 스치듯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노파가 저만큼 떨어진 채 연신 헐떡이며 이들을 따르고 있었다. "헉헉... 애고, 나 죽네. 좀 천천히들 가시오, 늙은이를 아예 죽일 참이오?" 영호천문은 유유히 산을 오르면서도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특히 저 할멈은 보통 청년들도 오르기 힘들다는 이곳을 힘겨운 척 하지만 줄곧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그 동안에 그는 노파와 단정의 동정을 예리하게 관찰했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특별히 경계를 두지는 않았다. 상대들이 적의를 갖지 않는 이상 그 자신도 그럴 필요를 못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동행자들을 두고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필시 무슨 내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굳이 상관할 것은 없겠지. 이들 스스로가 말하기 전에는.' 단정이 그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형님, 지금 대체 어디로 가는 거죠?" 어느새 소년은 그에 대한 호칭을 아저씨에서 형님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그만치 붙임성이 있다는 얘기다. 영호천문은 소년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시장하지는 않으냐?" 엉뚱한 말에 단정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되물었다. "배가 고프긴 해요. 하지만 그건 무엇하러 물으시죠? 이 첩첩산중에서 어쩌시려고......?" 영호천문은 씨익 웃었다. "곧 진수성찬을 얻어 먹게 될 것이다." "정말요?" 단정은 좋아라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은 지우지 못했다. 영호천문은 소년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다시금 입술 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믿어도 된다. 잠시 후면 알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치자 그는 걸음걸이를 종전보다 더 빨리 했다. 그 바람에 뒤처져 있던 할멈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허우적거렸다. "아이쿠! 젊은이, 제발 나 좀 살려 주구려." 그러나 죽는 시늉에 반해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녀가 비틀거리면서도 한 걸음에 일장씩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호천문은 단정을 보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저 할멈은 나이에 비해 동작이 기민하구나?" "예? 아, 헤헤......." 단정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떠올렸으나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잠시 후. 그들은 산봉우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상부에는 과연 소문대로 천신을 위한 제단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언제 지어졌는지 한 채의 웅장한 장원(莊院)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당금 무림인 치고 천도봉의 정상에 있는 이 장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 장원이야말로 최근 들어 천하에 쟁쟁한 위명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천도세가(天都世家). 일찌기 무림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네 가문, 곧 사대세가(四大世家)가 있었다. 그들은 수백 년에 이르는 동안 누대에 걸쳐 무림과 역사를 함께 지켜온 명가(名家)였다. 그들을 차례로 소개하면 이렇다. 앞서 소개한 천도세가를 포함하여 숭양세가(嵩陽世家), 석문세가(石門世家), 낙성세가(落星世家) 등이 그들 사대세가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구파일방(九派一幇)에 비해도 절대 손색이 없는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당세에 이르러서는 더욱 더 혁혁한 성위를 떨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각설하고, 얘기를 원점으로 되돌려 천도세가로 말하자면 가주는 저 유명한 황산신협(黃酸神俠) 천무웅(天舞雄)이었다. 영호천문의 말을 듣고 난 단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저 곳이 무림 사대세가에 속하는 곳이란 말인가요?" "그렇다. 언제 들어본 적이 있느냐?" "에이, 그 정도야 저도 알지요. 나이는 어려도 귀는 확실하게 뚫려 있는 걸요. 더구나 이렇게 정처없이 떠돈 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라야죠?" "후후... 귀동냥은 충분히 했노라는 말 같구나?" "그럼 셈이죠. 헤헤헤......." 천진한 듯 하면서도 식견이 넓은 소년은 문득 안색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어쨌든 너무 아니꼬와요." "무엇이 말이냐?" "천도봉은 명실공히 성봉(聖峯)이 아닌가요? 그런데 감히 이 꼭대기, 그것도 제단의 옆에다 장원을 지은 심보는 뭐죠? 가주가 성자(聖子)라도 된단 말인가요?" 영호천문의 얼굴에 한 줄기 묘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녀석, 네 속을 알겠다. 너 질투하는 것 맞지?" "헹! 그렇다면요?" "안되었다만 네 말대로지. 그는 성자다." "네?" 단정은 뜻밖이라는 듯 입을 딱 벌렸다. 영호천문은 담담한 음성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는 무림에서 삼성(三聖)으로 일컬어지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대개의 무림인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지." "헉헉...... 에고..... 늙은이 잡네......!" 노파가 그들 곁으로 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에고, 에고... 이제야 이 두 젊은이를 겨우 따라 잡았네. 하마터면 놓칠 뻔 했지만......." 단정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여 물었다. "나머지 이성(二聖)은 누구죠?" 영호천문은 대답보다 먼저 천도세가의 대문을 가리켰다. "저기를 좀 보아라. 만수(萬壽)라고 쓴 축등이 보이지 않느냐? 저것은 황산신협의 칠순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이다." 과연 돌아다 보니 대문의 양 옆으로 오색의 축등과 화환이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거창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단정은 시선을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객(賀客)들은 왜 보이지 않죠?" "생일은 삼 일 후니까." "으음, 그랬었군." 단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꽤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서 나머지 이성에 대해 말해 주세요." 영호천문은 어느덧 정원으로 뻗어 있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청석(靑石)이 깔린 그 길을 걸으며 차분히 말했다. "현 무림에는 일제(一帝), 쌍효(雙梟), 삼성(三聖), 사기(四奇), 오마(五魔), 육악(六惡), 칠신(七神), 팔잔(八殘), 구정(九鼎), 십살(十煞) 등 도합 오십사 인의 기인들이 있다고 한다." 단정은 그 말에 따라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오십오 인이 아니고 오십사 인이죠?" 영호천문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역시 날카로운 면이 있구나. 그래, 그것은 쌍효 중 한 명이 십살에도 들기 때문이다." "아! 그가 누구죠?" "그 인물은 바로 사자림(獅子林)의 림주인 사자천효(獅子天梟) 육청풍이다." "그는 무공이 강한가요?" "그렇단다. 그것도 아주......." 영호천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갔다. "그들 오십사 인은 현 강호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속에 든 인물들 중 최하위도 절정고수이니까." "그들 중에서는 누가 제일 강하죠?" 소년의 끝없는 호기심에 영호천문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만물의 이치에는 반드시 상생상극(相生相剋)이 있는 법이거든? 굳이 논하자면 이렇다. 일제라 불리우는 전륜회주(轉輪會主) 전륜대제(轉輪大帝) 백리성우(百里星雨)는 정도맹(正道盟)의 맹주로서 정도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영호천문의 얼굴에는 일말의 쓴 기색이 드리워졌다. "쌍효의 무공은 괴이막측하며, 신주사기는 신룡(神龍)과 같아 추측하기조차 힘들다. 팔잔은 악랄무비하고, 십살, 즉십대살객들은 살인의 천재들이랄 수 있지." "그래서요?" "그들은 모두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다만 삼성, 오마, 육악, 칠신보다는 한 수 위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구정은요?" "흐음, 구정이라......." 영호천문의 안면이 보이지 않게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떼었다. "원래는 십정이었단다." "하면, 왜 구정이 되었죠?" "후후... 일정이 죽었으니까 그렇지." "왜 죽었는데요?" "글쎄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구정의 합공을 받았다고들 하는데 나도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구나." 단정은 손뼉을 딱 쳤다. "아!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가 제일 세었지 않았나 싶어요." "그럴까? 세인들이 그를 천중일정, 혹은 무영탐화랑, 천수옥환겁, 복마엽주라는 별호로 불렀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와아! 정말 굉장하네요? 한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별호가 붙어 있다니 말예요." 단정은 탄성을 발하더니 단정짓듯 말했다. "그것 보시라니까요? 그런 별호들은 그만치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일 거고, 단명(短命)한 것도 그때문일 거예요." 영호천문이 물었다. "너무 넘겨짚은 것 아니냐? 뛰어난 자가 왜 죽어야 하지?" "왜는요? 적수가 많으니까 그렇죠.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시기나 질투로 인해 모함도 받을 테고요." "후후후... 꼭 눈으로 본 것 같이 말하는구나." "그렇지 않고요? 고사(古史)를 들추어 봐도 그런 얘기는 많이 나오는 걸요." 소년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형님, 단정은 지금 이 순간 결심했어요." "무엇을 말이냐?" "그 천중일정이라는 사람을 존경하기로요." 영호천문은 그 말을 듣자 기쁘기 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아릿해 왔다. 그는 내심 탄식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어쨌든 구정이 된 그들은 무척 강하다. 그들 중 오 인이 세운 세력인 천중오패(天中五覇)를 보아서도 이 점은 충분히 알 수가 있지." ④ 단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가요?" "으음, 그들이 주창하는 것은 천하독패(天下獨覇)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듣자 하니 그들은 어릴 적부터 똑같이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해 동일한 과정을 밟아 맹수처럼 길러졌다고 하더구나. 그들에게 제이인자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던가?" 단정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들은 동문인가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왜요?" "그것은 그들의 사부가 모두 열 명이었기 때문이다." "와아! 그건 정말 대단한 비사(秘史)네요. 형님은 그 사부라는 분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요?" "그래, 대충 들은 기억이 난다." "그 분들도 물론 강하셨겠죠?" 영호천문의 눈이 언뜻 흔들림을 보였다. 아픈 추억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꺼내 보일 때 의례 그러하듯. "그랬다고들 한다. 한때는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고 하지." "아! 놀라워요. 열 분 모두가 그처럼 불리웠다는 말이죠?" 단정의 얼굴에 선망이 깃드는 것을 보며 영호천문은 정색을 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분들은 하나같이 천하제일인이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분들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고도 하지. 결국 당대에 승부를 낼 수가 없자 그 분들은 각기 한 명씩 전인(傳人)들을 키워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승부를 이어가게 하셨다더구나." "으음......." 단정이 신음을 흘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쑥 물었다. "그 분들은 지금도 살아 계신가요?" "그것은......." 영호천문의 안색이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의 얼굴에 깃든 것은 무한한 고통의 빛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이를 느꼈는지 재빨리 몸을 돌려 갈 길을 서둘렀다. "어서 가자,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구나." 단정은 뭐라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으나 영호천문의 신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는 제 풀에 단념하고 말았다. 한편. 뒤를 따르던 노파는 그들의 대화를 내내 주의깊게 듣고 있었는데, 그녀의 짓무른 눈 속에서는 이따금씩 이상할 정도로 맑은 빛이 흘러 나오곤 했다. 아무튼 그들 삼 인은 곧 거대한 대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합 열 명의 수비무사들이 당당하게 버티고 선 채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영호천문 일행이 다가가자 대문의 안쪽으로부터 한 중년인이 걸어 나오며 포권했다. "소협은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영호천문도 마주 포권을 하며 응수했다. "소생은 그저 여기저기 떠도는 강호의 무명소졸입니다. 평소 천노선배의 성망을 흠모하던 중 마침 생신이 도래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이렇게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 왔소이다." 그 말에 중년인은 대뜸 난색을 표명했다. "찾아와 주신 성의는 고마우나 초청장을 소지하지 않으신 분은 곤란하오이다. 장주께서는 원래 시끄러운 것을 기피하시는지라 생신도 가능한 한......." 장황해지려는 그의 논조를 영호천문이 끊었다. "소생이 알기로 장주께서는 일찍부터 전 무림이 추앙해온 성자이셨소. 그런 분이 설마 수천 리 길을 마다 않고 온 사람을 문전박대하시지는 않겠지요?" 정곡을 찔리자 중년인은 움찔했다. "그야......." 그가 이처럼 할 말을 잃고 전전긍긍할 때였다. "누가 오셨지요? 하총관(河總官)." 대문 안쪽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가닥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을 듣자 중년인은 몹시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설화(雪花) 아가씨." 예의 음성이 반박하고 나섰다. "그런데 왜 이리도 시끄럽죠?" 그 말에 이어 대문 안으로부터 날씬한 교영 하나가 날아 나오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이다. 일신에 눈부신 은삼(銀衫)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자 영호천문은 눈 앞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우선 늘씬한 키에 몸매가 쭉 빠졌다. 피부는 눈보다 희고, 특히 커다란 눈망울은 세상을 전부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오연하면서도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구 세쯤 되었을까? 워낙 아름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그녀가 지닌 발랄하고 신선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입가에 박힌 점 하나가 묘한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그녀는 칠흑같은 눈동자를 사르르 굴려 영호천문을 바라보더니 하총관이라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시죠?" 하총관은 허리를 약간 굽히며 대답했다. "네, 방문객인데 초청장이 없기에......." 여인의 선연한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그럼 이대로 돌려 보낼 작정이었단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하총관은 추호도 밀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 융통성 없는 인물을 여인은 사뭇 엄중하게 나무랐다. "내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도 객(客)을 함부로 내모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돼요." "하지만 아가씨......!" 그가 뭐라 덧붙이려 하자 여인의 기세는 더욱 삼엄해졌다. "당신은 꼭 천도세가는 인색하다는 소리를 듣게 할 작정인가요? 어서 이 분들을 초향각(招香閣)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그 말에 하총관은 펄쩍 뛰었다. "아니, 초향각은 귀빈용......." 그는 그만 중도에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인이 듣기 싫다는 듯 찬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싹 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교구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하총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영호천문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귀하는 운이 좋았소. 아가씨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턱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자, 어서 들어 가시오." "고맙소." 영호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위세를 부리며 아가씨로 불리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다. 장주의 금지옥엽이자 천주사대기화(天柱四大奇花) 중 한 명인 동천설리화(東天雪梨花)이지.' 그의 얼굴에는 일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은연 중 과거에 그가 알고 있던 천주사대기화의 또 다른 한 사람, 즉 남천백리화 옥화미(玉花美)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초향각(招香閣)은 과연 귀빈을 위한 곳이었다. 편히 머물 수 있도록 독립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삼층인 아담한 전각 주위로 온갖 기화이목이 다투어 피어 있었고, 인공의 연못과 그 한가운데에는 정자까지 세워져 있었다. 영호천문 일행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초향각에 들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단정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정말 멋지구나." 그도 그럴 것이, 내부의 가구나 기재들도 모두 우아하고 최고급품인 것들로만 장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노파는 단정의 손을 잡은 채 오히려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가 향차(香茶)를 날라다 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식사가 준비될 거예요." 영호천문은 묵묵히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는 흡사 밤하늘의 별처럼 진실되이 빛나던 동천설리화 천설화(天雪花)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불회곡의 기인(奇人)인 무영공공투(無影空空偸) 나소 때문이다. 그는 한 가지 물건을 잘못 훔침으로 해서 천하에 발붙일 곳을 잃고 말았지.' 영호천문은 꺼림직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상 목적을 생각할 때, 그녀의 호의를 선뜻 접수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녕 난감하군.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이다니.......' 식사는 진수성찬이었다. 영호천문은 차마 그것을 맛있게 들 수가 없어 뜨는 둥 마는 등 한 후,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화원을 거닐었다. 화원은 솜씨 좋은 정원사가 꾸며 놓은 듯 배열이 바르고 온갖 종류의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인공 연못도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운치가 그만이었다. 바닥이 환히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한껏 자유를 누리며 유영하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연못가를 배회하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지기는커녕 더욱 더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초향각을 지은 이는 무척이나 섬세한 사람인 듯 하다. 도처에서 애착과 정성이 느껴지니, 누구라도 이런 곳에 들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지난 날에 그토록 염원해마지 않던 평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었다. '만일 그 당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영호천문의 사고는 정말로 아득한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옥화미와 함께 무림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하고는 구정과의 모임을 통해 자신의 의향을 밝히려 했던 그때로.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그것을 부인해야 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고통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의 나는 다만 복수심에 불타는 낭인에 불과할 따름이다.' 영호천문은 연못에 걸쳐져 있는 소교(小橋)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는 앞서 언급했던 정자가 있었다. 그는 달이 떠올라 연못물에 투영된 것을 바라보며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그는 흠칫하여 멈추어 섰다. '아! 저 여인은......?' 제 9장 씁쓸한 인과응보(因果應報) ① 달빛에 투영되어 은색으로 빛나는 인영은 천설화였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자 영호천문은 가볍게 목례했다. "낭자께서 어인 일이시오?" 천설화는 하얗게 웃었다. "이곳은 제가 항상 즐겨 찾는 곳이에요. 제가 직접 화원을 가꾸고 정자를 배치했는 걸요." 영호천문은 당황된 심중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어찌 무명소졸에 불과한 불초 등을 이곳에 머물게 하실 수 있었소이까?" "호호... 전 그 동안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냈어요. 당신은 결코 무명소졸이 아니에요." 영호천문은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천설화가 눈도 돌리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다시금 입술을 놀렸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죠. 하지만 당신같은 사람은 너무도 독보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요. 무림에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영웅들을 더듬어 보면 오래잖아 정체를 짐작해낼 수 있지요." "으음......!" "현 강호의 젊은 고수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은 구정(九鼎)이에요. 그렇지만 그들의 특징은 눈을 감아도 그릴 수가 있기 때문에 당신은 거기에서 제외죠." 영호천문은 입술을 질겅 씹으며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 밖에 신진고수들로서는 최근 들어 활동이 두드러진 무림사영(武林四英)을 들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적어도 당신에 비한다면 말이죠." 천설화는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잠시 뭔가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을 꺼냈다. "당신은 자신의 기질을 철저하리만큼 안으로 감추고 있고, 그런만치 내면에는 숱한 비밀을 지니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눈을 들여다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죠. 당신처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자는 대개 두 부류에 속해요. 한 쪽은 살수(殺手), 다른 한 쪽은 무엇인가 커다란 목적을 품은 사람, 안 그런가요?" 영호천문이 마침내 침묵의 벽을 깨고 물었다. "그래, 나는 어느 쪽에 속할 것 같소?" 천설화는 생긋 웃었다. "양쪽 다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전 무림을 통틀어 그럴 만한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게 누구요?" "근자에 들어 무림을 휘젓고 다니는 불망(不忘)의 인간." "됐소." 영호천문은 침중한 얼굴로 잘라 말했으나 내심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초면에, 그것도 한 여인에게 정체를 들켰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두운 시선으로 연못을 내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비치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천설화가 물었다. "무엇을 염려하시는 거죠?" 의미심장한 질문에 영호천문은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이오?" "간단해요. 이를테면 이곳에 온 목적이라든지, 아니면......." "잠깐!" 그는 손을 들어 천설화의 말을 막았다. "그대는 무척 아름답구려." "갑자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리죠?" 천설화의 동그랗게 떠진 눈이 반짝하고 빛을 뿌려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그녀의 모습은 고혹적이리만치 아름다웠다. 영호천문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불변(不變)은 아니오. 본시 꽃은 십일을 붉지 못하는 법,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오." 그는 말과 함께 몸을 돌리더니 휘적휘적 소교의 위를 걸어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천설화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요?" 영호천문은 탄식처럼 대답했다. "내 마음은 죽었소. 아주 오래 전에 말이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연이어 화원을 가로질렀다. 그의 등 뒤로 한숨을 쉬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삼 일 후. 천도세가는 축제 분위기에 싸여 흥청거렸다. 중원 각처에서 내로라 하는 명사(名士)들이 초청장과 더불어 진귀한 선물을 들고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당대의 거물급 고수들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천도세가와 함께 사대세가(四大世家)로 불리우는 세 명문가에서는 더욱 크게 예를 표해 왔다. 비록 지리적으로 멀어 가주 대신 소가주(小家主)들이 참석하긴 했으나 어떤 무림인이라도 이들에게는 상석(上席)을 양보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숭양세가의 숭양철검생(嵩陽鐵劍生) 하후성(夏候成), 석문세가의 다지선(多智扇) 석장청(石長靑), 천도세가의 환광도(幻光刀) 천환비(天幻飛), 낙성세가의 낙성수재(落星秀才) 낙무영(落無影), 이 네 사람을 일컬어 달리 사공자(四公子)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그만큼 그들이 서로 절친한 사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그 밖에도 각 대문파의 장교(長敎)를 대표한 고수들과 기협들이 속속 도착하여 천도세가의 잔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천도세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 천신을 향한 제단의 반대편으로 널찍한 석대(石台)가 자리잡고 있다. 넓이가 근 십여 장에 달하는 그 석대를 두고 천도세가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영웅대(英雄台)라고 불렀다. 그것은 대대로 그들이 그 석대 위에서 무예를 닦아왔기 때문으로, 이르자면 목적보다 상징성이 더 두드러진다 할 수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영웅대로 모여드는 네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들은 무림사영(武林四英), 즉 사대세가의 소가주들인 사공자였다. 그들은 미리 그곳에서 술자리를 갖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의기가 통하는 젊은이들끼리니만치 인물 구성이 다양한 주연(酒宴)을 벗어나 따로 호젓하게 어울리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사실상 그들은 한결같이 영기발랄하고 비범한 청년들이었고, 그들의 장래는 누구보다도 밝았다. 먼저 주인격인 환광도(幻光刀) 천환비는 삼십을 갓 넘었으며 곰의 허리에 호랑이의 어깨를 가진 늠름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각이 진 호형(虎形)의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이 일품인 그는 언뜻 둔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환광도는 빠르기로 천하일절이었던 것이다. 그의 우측 자리에는 숭양철검생(嵩陽鐵劍生) 하후성이 있었다. 나이는 이십칠, 팔 세 정도였으나 하후성은 은연중 무림사영 가운데 우두머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숭양세가는 비전의 숭양무적검학(嵩陽無敵劍學)으로 중원의 오대검파(五大劍派)를 누르고 검의 조종(祖宗)으로 군림했다. 하후성은 침착하고 끈기있는 성품으로 가전무학을 십이분 이어받은 검의 귀재(鬼才)였는데, 일신에는 늘상 평범한 무복을 입고 다녔으며 얼굴도 준수하나 별 특징이 없어 보였다. 다시 그 옆에 있는 인물은 다지선(多智扇) 석장청이었다. 그 역시도 석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지다성(智多星)이다. 이제 약관인 그의 지혜는 벌써부터 그로 하여금 소제갈(小諸葛)로 불리우게 만들었다. 용모도 이에 못지않았다. 또 그 옆에 있는 낙성수재 낙무영. 그는 말쑥한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전신에서 풍류가 넘쳐 흘렀다. 나이는 이십사, 오 세 정도였으며 경공술로는 무림의 후기지수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외양에서 풍기듯 술과 도박, 그리고 여인을 무척이나 좋아하여 일찍부터 풍류남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좌우간 그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에 따라 분위기도 점차 무르익어 갔다. 그 중에서도 낙무영의 음성이 단연 두드러졌다. "하하하... 천형(天兄), 설마 모른 체 하시지는 않겠지요? 우리는 분명 백부님의 생신축하로 이곳에 왔소이다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관심사가 있소이다." 석장청이 그럴 듯하게 맞장구쳤다. "동천설리화가 대체 어디에 피어 있는지, 궁금해서 애가 탈 지경이오. 부디 감상할 수 있도록 인심 좀 써 주시구려." 숭양철검생 하후성까지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후후... 정말로 천누이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이오?" 천환비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그 애는 요즘 형제들쯤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오. 한 사내에게만 홀딱 빠져 있으니 달리 정신 쓸 시간이나 있겠소?" 그 말에 세 청년은 모두 안색이 일변했다. "누구요? 천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자가?" "허어, 벌써 임자가 있었단 말이오?" 천환비는 껄껄 웃었다. "잠시 후면 함께 올 것이오. 자! 우리는 술이나 듭시다." "좋소이다. 패배자들을 위로해 주신다니 들어야지요." 삼공자도 그와 잔을 맞부딪쳐 갔다. 하지만 그들이 흘리고 있는 말은 꼭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천설화를 아내로 맞고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며, 이는 공공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② 영호천문. 그는 천설화의 방문으로 무척 당황해 하고 있었다. "호호... 저와 함께 갈 곳이 있어요." "어디로 말이오?" "따라와 보시면 알아요." 천설화는 다짜고짜로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지난 사흘 동안 줄곧 그녀는 이런 식이었다.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그와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오늘은 또 어디로......?' 영호천문도 사내다. 천주사대기화에 속하는 절세의 미녀가 이렇듯 따르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끌려가는 그의 표정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천설화가 약간 앞서 가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좀 특별한 곳에 가게 될 거예요. 당신이 너무 적적해 보여 제가 친구들을 소개시켜 드리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친구라고 그랬소, 방금?" 영호천문은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낭자, 사양하겠소. 내게는 친구가 필요 없소." "호호... 마음대로 안될 걸요. 우선 그들을 사귀어 두면 이로운 점이 많을 거예요. 당신은 단신으로 황금전을 상대하느니만큼 방수(幇手)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그렇지 않소." "호호...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날 수 없어요." 천설화는 일방적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처럼 그를 데려간 곳이 바로 영웅대였다. "여어! 저기 천누이가 오는군." "아니, 그새 더 눈부시게 아름다워지지 않았나?" 삼공자는 반색을 하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설화는 생긋 웃으며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이어 그녀는 영호천문을 가리키며 특유의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오라버니들께 소매(少妹)가 오늘은 한 분 영웅을 소개해 드리겠어요." 영호천문을 바라보자 그들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질투만은 어쩔 수가 없었을 뿐더러, 그 외에도 막연한 위압감마저 함께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이 정녕 이상하게 돌아 가는군.' 영호천문은 내심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불초는 불망객이라 하오. 여러분들의 흥을 깨 송구스럽기 그지 없소이다." 일단 그의 이름(?)이 나오자 상황은 급변했다. 그를 대하던 청년들의 기색이 싹 달라졌던 것이다. 그들을 대신하여 주인인 천환비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설화야, 이 분 형장이 정녕 소문으로만 듣던 그 분이시냐?" 천설화는 민망한 듯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렇지 않구요? 오빠는, 너무 실례되는 질문이잖아요." 그녀의 볼멘 소리를 영호천문이 얼른 막았다. "네 분의 명망은 진즉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소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그로서는 이 상황에서 달리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들 사공자와는 아무런 인과가 없었으며 그 자신 또한 성격이 편협되거나 차가운 사람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띄우자 장내의 분위기는 일신되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정말 반갑소이다." "자, 어서 앉으시오. 먼저 술 석 잔을 받으셔야 하니까 말이오. 하하하... 늦게 오신데 대한 벌이외다." "기왕이면 내 곁에 앉아 주시구려. 하하......." 사공자 역시도 이내 심중의 짐들을 털어 버리고는 앞다투듯 자리를 양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영호천문도 일단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가 앉았다. "고맙소. 네 분을 뵈니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이자 영웅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알 것 같소이다." 하후성은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였다. "무슨 겸손의 말씀을! 귀하야말로 이전부터 우리를 감동시켰거니와, 홀로 천중오패 중 하나인 황금전을 상대하던 그 놀라운 기상을 이제야 실감하겠소이다." 그 말이 과장은 아닌 듯 중인들 모두가 신비감과 아울러 호의가 깃든 시선으로 영호천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낙성수재 낙무영이 물었다. "외람된 질문일지는 모르오만, 황금전과는 대체 무슨 일로 대결하게 되었소이까?" 영호천문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황금전주와 개인적인 부채가 있기 때문이오. 그 이상 말할 수가 없으니 부디 용서바라오." "으음......." 중인들은 침음성을 흘릴 뿐, 더 묻지 않았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술좌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이다운 호쾌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권커니 자커니 하는 동안 사감(私感)은 어느덧 끼어들 틈이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천설화는 처음부터 영호천문의 옆에 앉아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그 광경도 분위기에 녹아 들자 새로운 손님에 대한 예의로 해석될 따름이지, 별다른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영호천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공자들이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서 대해 보니 그들은 과연 명문가의 자제들답게 성품이나 기개가 나무랄데 없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그로 하여금 심한 갈등을 느끼게 했다. '실로 난감하구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선의(善意)에서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이들과 이처럼 어울릴 입장이 못된다.' 특히 미안한 것은 천설화에게였다. 그녀는 술기운에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오른 채 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의식하자 그는 내심 탄식해마지 않았다. '내가 이 천도세가에서 행해야 할 일이란 결국 이 여인을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 그의 뇌리에 나소(羅 )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물론 간절한 음성도 함께였다. - 부탁이다. 천문, 꼭 이루어다오. 영호천문은 도저히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엉거추춤 일어섰다. 천환비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아, 왜 벌써 일어 나시오?" 영호천문은 찔리는 바가 있는지라 부지중 얼굴을 붉혔다. "미안하오이다. 갑자기 급한 볼 일이 생각나서......." 이어 그는 네 사람을 향해 자못 정중하게 공수한 후, 서둘러 영웅대를 내려왔다.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요." 천설화도 급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삼공자는 말리지도 못하고 이래저래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총총히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가가(歌歌)......." 천설화의 호칭이 바뀐 것을 의식이나 한 것일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영호천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후로는 그녀도 한 가닥 원망이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 더 이상은 어떻게도 하지 못했다. 그러기를 한참여. 영호천문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낭자." 뾰족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정말로 저를 그렇게 밖에는 부를 수가 없나요?" 영호천문은 긴 탄식을 불어냈다. "전에도 내가 말한 적이 있을 게요. 내 마음은 오래 전에 죽어 버렸노라고." 그 말에 천설화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나 보죠? 그리고 그녀가 당신을 배신했구요?" 영호천문의 등이 움찔하고 움직여졌다. "왜, 제가 아픈 데를 찔렀나요?" 집요하던 천설화의 추궁은 금세 한숨으로 뒤바뀌었다. 그녀는 몸을 기대고 있던 나무등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함부로 말해서.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그만....... 사실 당신이 저를 어찌 생각하시느냐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쓰라린 경험이 있다고 해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려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영호천문은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무심한 해가 서서히 기울며 그를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작해야 한다!' 돌아다 보지 않아도 아주 가까운 곳에 천설화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슬픈 빛이 가득 어려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이 전부를 거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장 그의 가슴을 아릿하게 저며온 것은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그래요, 가세요. 저는 당신보다 더 어리석은 계집이니까요." 이쯤 되자 영호천문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낭자, 지금부터 잘 들어 보시오." 그의 음성은 짙은 절망을 담은 채 흘러 나왔다. "몹시도 야망이 컸던 한 청년이 있었소. 한때 그는 천하가 좁다할 정도로 누비고 다녔으나 적수를 찾지 못하기도 했었소. 그러다 그는 소위 임자를 만나게 되었소." 천설화는 아무 말도 않고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상대는 여인이었소. 그가 평소 접해 보았던 숱한 여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마침내 그는 그 여인을 위해 천하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소.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녀와 함께 무림에서 은퇴하기로 말이오. 그런데......." 영호천문의 어깨가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가 나를 배신하고 타인들에게 내 목숨을 팔았소." 휙--!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장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가......!" 천설화는 애절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을 뿐, 종전처럼 그를 따라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이 순간 지금까지의 비애가 심중에서 말끔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아아! 저 분은 내게 드디어 스스로에 대해 말씀해 주셨어. 그토록 깊이 감추었던 상처자국을 열어 보여 주셨다구......." 그녀의 흑진주같이 커다란 눈망울이 축축히 젖어 들었다. 그것은 슬퍼서가 아니었다. "그랬어, 내 짐작대로 그 분은 결코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었어. 단지 그렇게 단정짓고 싶어할 뿐......." 그녀는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으나 이를 의식하지도 못한 듯 어둠이 깃든 화원에서 하얗게 웃었다. 사랑이란 과연 그렇게 움트고 발화하는 것일까? 천하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여인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일 수밖에 없는 지독한 현실에서 겨우 상대의 진심 한 조각을 발견하고는 기쁨에 몸을 떨고 있으니....... 사랑아, 너 진정 아느냐? 또 얼마나 많은 혈루와 오열 속에 운명이 엇갈린 정인(情人)들을 가두려 하는지......? ③ 황산신협(黃酸神俠) 천무웅의 칠십회 생일연은 대성황이었다. 천도세가의 정청에는 오색궁등이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 가운데 왁자지껄 떠드는 소음, 호탕한 웃음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 등이 어우러져 흥취는 한껏 고조되어갔다. "하하핫... 신협, 정녕 축하하오이다." "무병장수를 기원하오. 천도세가에도 무궁한 화복을......." 군웅들은 모두 거나하게 취했으면서도 거듭 잔을 들어 올렸다. 상석으로부터 한 노인이 일어섰다. "허허허... 여러분, 정말 감사하오이다. 보잘 것 없는 늙은이의 생일에 이렇게 찾아와 축하해 주시다니 말입니다." 그는 일신에 화복(華服)을 입고 있는 건장한 노인이었다. 비록 머리칼과 수염이 허옇게 세어 있었으나 얼굴만은 홍안(紅顔)이었다. 이 노인이 바로 그 유명한 황산신협이다. 숭양세가의 숭양신검(嵩陽神劍) 하후전(夏候典), 곤륜(崑崙)의 장미선옹(長眉仙翁)과 함께 일찍부터 무림인들로부터 삼성(三聖)으로 추앙받아온 명숙이 그였다. 그를 대하자 군웅들은 만면에 흠모와 존경의 표정을 떠올린 채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천무웅은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허허... 세월이 무상하여 노부의 나이도 이제 칠십이외다. 지난 날에 대한 감회가 정녕 새롭구려." 흥청거리던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져 버렸다. 왜 안 그렇겠는가? 무인(武人)으로서 칠순에 이르면 가히 종장(終場)을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마음은 약관의 청년처럼 풍운과 함께 치달리건만, 어느새 이처럼 한 일도 없이 나이만 먹었구려." 그 말에 중인들은 분분히 일어나 한 마디씩 했다. "그건 절대 그렇지 않소이다. 신협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공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이까?" "맞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무림의 성자가 아니십니까?" "그렇소. 신협이 계셨기에 오늘의 평화가 존재하는 것이외다." 황산신협 천무웅은 민망한 듯 손을 저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노부는 단지 늙은 폐물에 불과할 뿐이오." 그의 얼굴에 얼핏 비애와도 같은 기색이 스쳤다. "이 자리를 빌어 노부는 여러분 앞에서 한 가지 결심한 바를 발표하고자 하오." 장내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꽤 소란해졌다. 중인들 모두가 의아함을 금치 못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러분, 잠깐만 조용히 해 주시오." 천무웅의 말이 있자 장내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는 천천히 중인들을 둘러본 뒤, 비교적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오늘을 기해 무림에서 은퇴를 할 작정이외다." 이번에는 무거운 신음과 탄식이 장내를 휘감았다. 실로 의외이자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삼성의 일인인 그가 은퇴를 발표하다니, 나이가 칠순에 이르렀다고 해도 아직 무림은 그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바이며 천도세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됩니다, 아버님!" "아버님!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실 수가......." 각기 다른 사람의 것인 듯한 두 마디의 외침과 더불어 번뜩하고 장내로 날아내리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도세가의 후손들, 즉 환광도 천환비와 천설화였다. 그들 두 남매는 부친의 앞에 이르자 즉시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거두어 주십시오." "정말이지, 안될 말씀이에요." 고개를 한껏 조아리며 간청하는 그들에게 천무웅은 자애로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허허... 비아(飛兒), 그리고 화아(花兒)야, 그만 하면 너희들도 이젠 다 컸지를 않느냐? 내 너희들을 너무 늦게 본 죄로 무림에 오래 머물렀다만, 지금이라면 무림동도들께서도 노부가 쉬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 말인즉 자식들에게 일신의 모든 것을 물려 주겠다는 뜻이거니와, 그의 얼굴에는 자식들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했다. 그러나 이때였다. 얼음장같이 냉막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어림없는 소리! 그대의 은퇴를 천하인들이 다 허락할지라도 나만은 그럴 수 없다. 그대가 위선의 탈을 쓴 채 성자로서 은거하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장내는 흡사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져 버렸다. 당금 무림에서 누가 감히 그렇듯 폭탄선언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무림성자 황산신협을 위선자라 지칭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대는... 누군가?" 노기 탓이었을까? 황산신협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중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장내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릴 정도였다. 천환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대체 어떤 작자냐? 썩 나서라! 감히 뉘 안전에서 그 따위 허언(虛言)을......." 그는 노기충천하여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성은 어찌나 큰지 천정이 다 들먹거릴 정도였다. 예의 차가운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후후... 어리석은 자! 성자의 탈만 쓰고 있으면 성자인 줄 아느냐? 그 성자가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을 만큼 간악한 만행을 저지른 흉인(兇人)이라면 어쩌겠느냐?" "뭐, 뭣이!" "게다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오다니, 땅에 묻힌 진정한 의인(義人)의 넋이 통곡을 할 것이다." "어디서 그렇듯 더러운 모함을......!" 천환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상대를 잡아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그 음성이 들려오는 방향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이른바 음파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뜻밖인 것은 황산신협 천무웅의 반응이었다. 아들인 천환비가 그토록 흥분하고 나서는데도 그는 시종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부터인가 핏기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그 음성이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 천무웅, 그래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양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하긴 친구를 암습하고, 또 그의 아내까지도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했다 해도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지. 아마 이제는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가장 무서운 형벌은 곧 자책이라는 것을." "으으......." 천무웅은 충격을 받았는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천환비는 어떤 말도 믿지 않았다. 그는 울화가 치민 나머지 세차게 발을 굴렀다. 꽝! 그가 서 있던 바닥이 가루가 되어 주저앉았다. "대체 누구냐? 쥐새끼가 아니라면 어서 모습을 보여라!" "후후후... 천환비,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만 그 전에 먼저 네 잘난 아비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아라." 그 말에 천환비 뿐만 아니라 군웅들 전부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천무웅을 바라보았다. 황산신협 천무웅. 그는 망연한 표정이 되어 천정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광경에 군웅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온 무림이 존경해 마지 않는 성자가 이처럼 낙담하여 몸을 떠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성은 계속하여 신랄하게 그를 비판했다. "천무웅, 그대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사십 년 전의 그 일을....... 그때 그대는 절친한 친구가 설산(雪山)에서 설연자실(雪蓮子實)을 얻었다며 기뻐하자 탐심이 일어 그를 죽였다. 그리고 분명 그의 아내인 비운선자(飛雲仙子)마저도." "그만! 그만 해라." 천무웅이 사색이 된 채 더 못듣겠다는 듯 부르짖었다. "왜, 부인하겠다는 것이냐?" 곁에서 천환비가 다시 노성을 질렀다. "나서라! 어서 나와서 떳떳이 얘기해라. 그 정도로 내 아버님을 몰아 세우려면 거기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라." 예의 음성은 냉소했다. "후후... 증거라면 하시라도 내놓을 수 있지. 자, 보아라. 이것은 그가 직접 쓴 자인서다." 위잉--! 무엇인가 허공에서 빳빳하고 흰 물체가 날아왔다. 탁! 그것은 군웅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정청 중앙의 벽에 가 꽂혔다. 알고 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군웅들 중 누군가가 낮은 신음성을 발했다. "우우... 대체 누가 저런 내공을......!"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종이에 적힌 내용이었다. ④ <성조(成祖) 삼년 칠월 열사흘, 본인 천무웅은 평소의 지우(知友)인 하락수사(河樂秀士) 진대명(陣大明)을 암살하고, 그의 처인 비운선자 임하빈(林河彬)을 살해했다. 그 이유는.......> 뒷부분은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에 그 음성이 일러준 바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동일했으므로. 더구나 종이의 맨 아랫 부분에는 황산신협 천무웅의 것인 듯한 장인(掌印)까지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 요지부동의 증거물은 장내에 엄청난 파동을 일으켰다. 소위 협의대명숙으로 알려졌던 인물의 숨겨진 과거지사는 군웅들로 하여금 너무도 큰 충격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대번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중인들은 대개 눈살을 찌푸리거나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개중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충격을 입은 자는 아까까지도 부친의 결백을 주장하며 펄펄 뛰던 천환비였다. "아버님!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말고 속히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흡사 폐부를 쥐어 짜내듯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의 누이동생인 천설화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버님......!" 그녀는 벽을 잡고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서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예의 음성은 여전히 조소를 그치지 않았다. "훗훗훗... 천무웅,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대도 살만큼 살았으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은 알고 있을 것이다." 황산신협 천무웅은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었다. 화색이 감돌던 그의 얼굴은 이 한순간에 수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여러분, 내 스스로 말하겠소."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천무웅의 노안에는 어떤 확고한 신념같은 것이 어렸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구려. 노부도 오랜 세월에 걸쳐 언젠가는 죄과를 치를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소." 천무웅은 탄식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오. 노부는 틀림없이 젊은 날 한때, 지기(知己)를 암살했소. 그의 아내를 죽인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소이다." "아! 어찌 그럴 수가......." 군웅들은 경악한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상황은 완전히 뒤엎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일종의 군중심리를 빌어 이제까지 만면에 드리우고 있던 존경과 흠모의 기색을 거두어 버리고 경멸의 빛을 띄었다. 심지어는 노기를 내비치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그들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었다. "감히 천하인을 우롱하다니......!" "그럼 지금껏 황산신협을 존경해오던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 것도 모른 채 광대놀음을 한 셈이 아닌가?" 그 말들은 물론 천무웅의 귀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는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여러분들께는 오직 죄송할 따름이외다. 그 일로 인해 노부 자신도 무한한 심적 고통을 겪어 왔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여러분들을 기만한 격이 되어 버렸소이다." 그의 입에서는 굳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노부는 오늘 일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고 있소이다. 이처럼 털어 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구려. 약속하오만, 그 응보는 필히 치루겠소이다." 대체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군웅들이 의아함을 금치 못할 때였다. 천무웅이 눈을 들어 그들을 정시하며 말했다. "주제에 걸맞지는 않겠지만 내 여러분들께 한 가지 소원이 있소이다. 이 일은 노부 개인에게 국한된 일이오. 무림동도들께서는 넓으신 아량으로 부디 본가(本家)와 이 늙은이의 자식들에게만은 허물을 두지 말아 주었으면 고맙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그의 입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동시에 그의 장대한 신형이 급격하게 모로 쓰러졌다. 쿵! "아버님!" "악! 아버님--!" 천환비와 천설화 남매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날아갔다. 황산신협 천무웅. 그는 정황을 돌이킬 방도가 없자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해 버렸던 것이다. 그 자신이 말했던 응보를 증명해 보이듯. 이쯤 되자 군웅들도 저마다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들도 설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으음, 한낱 과거의 일로 이렇게까지......." "쯧! 하긴 치욕적인 ㅅ보다야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천환비와 천설화는 몸부림쳤다. "아버님--!" "흐흐흑......! 아버님......." 누가 있어 이 두 사람을 말릴손가? 천하인의 비난을 받을지언정 이들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부친인 것을. 어떻든 흥겨워야 할 고희(古稀)의 축연에서 황산신협 천무웅은 오욕 속에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남겨진 그의 자식들이 부친의 주검 앞에서 끝없이 애통해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인생의 허무함은 여기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놀랍고 허탈한 마음을 안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황산신협의 과거 비행도 그렇지만 그의 죽음이 도무지 현실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도 심정이 참담했기 때문이었다. 군웅들은 황산을 내려가며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내심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던 천도세가의 전통과 명성이 오늘로써 종지부를 찍었다고 단정지었다. 단정(單政). 이 소년도 줄곧 말이 없다가 산을 다 내려와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영호천문이 그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황산신협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았는데......." 영호천문은 나직이 탄식했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도 그런 것 같더구나." "꼭 과거의 일로 인해 그렇게 죽어가야 했을까요?" "어떤 행위던 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이 따르게 마련이다. 넌 혹시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느냐?" 단정은 그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요." "흐음? 그건 왜지?"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그 분은 충분히 대가를 치루었어요. 그것은 지금까지 그 분이 어떻게 살아 왔느냐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으음......." 신음을 발하는 영호천문에게 단정이 다시 물었다. "참, 형님은 아까 어디 가 있었죠? 줄곧 보이지 않던데." 영호천문은 흠칫 놀랐으나 곧 대답해 주었다. "음, 마침 소변이 마려워 잠시 자리를 떴다가 혼잡하길래 그냥 문가에 있었단다." "응, 그랬었구나? 난 또......." "또라니......?" "그 괴객(怪客)이 혹 형님이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헹!" 단정은 혀를 쏙 내밀어 보인 뒤 저만큼 앞서 달아났다. 영호천문은 소년의 재기(才氣)에 일편으로 섬뜩한 기분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일출(日出)의 장관이 연출되는 것을 응시하며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과연 내 행동이 옳았을까?' 그가 이처럼 판단이 서지 않아 회의에 잠겨 들고 있을 때, 노파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뜻밖에도 한 가닥 기향(奇香)이 코끝을 스쳐 그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늙은 할멈께서도 향을 쓰시나?' 그것은 웃자는 읊조림이 아니라 그의 심중에서 일어난 의혹을 대변한 것이었다. "에고고... 젊은이, 도련님이 너무 멀리 달려가신 것 같소. 미안하지만 이 늙은이에게로 좀 모셔다 주구려." 노파는 걱정이 되는 듯 손을 뻗어 단정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이에 영호천문은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보게 되었다. 그 손은 쭈글쭈글 주름살이 잡히고 검버섯까지 돋아 있는 것이 영락없는 노파의 손이었는데, 문제는 손목이었다. 소매 안쪽에 감추어져 있던 손목은 눈처럼 희고 매끄러웠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알겠소, 할멈." 그는 짧게 답한 후, 걸음을 빨리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산모퉁이로 사라지려 하는 단정의 모습이 보였다. "이 녀석! 게 멈추어라." - 다음 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