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정천하 제 2권 검궁인 저 차례 제10장· 동천목산(東天目山)의 사중기연(死中奇緣) 제11장· 등룡천문(登龍天門), 그리고 출범(出帆) 제12장· 복수극(復讐劇)이 낳은 이면사(裏面史)들 제13장· 화중화(花中花) 제14장· 음모(陰謀)의 주역(主役) 제15장· 천뇌토군(千腦土君)의 죽음 제16장· 화중부(花中府)의 멸망 제17장· 잠입(潛入) 제18장· 사랑의 고뇌(苦惱)는 누구에게나 제 10장 동천목산(東天目山)의 사중기연(死中奇緣) ① 천목산(天目山)은 하늘의 눈이라는 이름 자체가 대변해 주듯 절강제일(浙江第一)의 명산이다. 흔히 동천목(東天目)과 서천목(西天目)으로 나뉘어지기도 하는데, 풍광이 수려하기도 하거니와 산세(山勢)가 험준하기로도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동천목의 영봉이 구름을 뚫고 웅장한 모습의 일부를 보이는 곳, 그 기슭에 하나의 산촌(山村)이 있다. 화전(火田)과 사냥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이룬 부락이다. 이곳에 삼 인이 나타났다. 영호천문과 단정, 노파(?) 등이었다. 영호천문은 두 노소(老少)를 한 모옥에 잠시 맡겼다. "단정, 곧 돌아오겠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라." "어디로 가시려고요?" "흠, 몹시 험한 곳이라 너는 갈 수가 없다. 다녀 오마." 단정은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이에 영호천문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산촌을 떠났다. 동천목의 한 산봉(山峯). 휘이잉--! 때는 칠월, 여전히 하중(夏中)이었으나 그곳은 서늘했다. 아니, 어쩌면 눈과 얼음이 덮혀 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휙--! 영호천문이 산봉에 내려섰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이 무엇을 찾은 듯 반짝 빛을 발했다. "저곳이군!" 그의 눈길이 멈춘 곳에는 불에 타버린 듯한 잔해가 있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그곳에 루(樓)가 세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과 건물의 뼈대 등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예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잔해들을 보며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감회에 빠져 들었다. '이곳에도 역시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존재하는가? 한때 천하를 위진시켰다는 청부살인의 장소가 이렇듯 퇴락하다니.......' 그가 지칭하는 곳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 날 천하인들에게 더없이 공포를 불러 일으켰던 살인루(殺人樓)였다. 영호천문은 잔해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체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그의 눈이 조심스럽게 근역을 훑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여기서 이전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툭! 문득 그의 발끝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금이 가고 함부로 그을려 진 석판(石板)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 있었다. <은자 만 냥이면 팔을 자르고, 오만 냥이면 다리를 자른다. 수급(首 )의 값은 은자 십만 냥부터 계산한다. 그러나 상대에 따라 값이 다르다. 묵단(墨單)은 십만 냥, 적단(赤單)은 백만 냥, 금단(金單)은 황금 만 냥부터.......> 각인된 글씨는 그 부분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석판이 잘려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영호천문은 그것을 보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동노인은 아주 재미있는 살인명부를 만들었군. 사람의 목숨을 두고 묵, 적, 금으로 등급을 구분하여 값을 매겨 놓다니, 대체 어디서 이런 발상이 나왔을까?' 영호천문. 그는 지금 해천일살(海天一煞) 동천목(東天木)의 부탁대로 살인루의 비밀보고(秘密寶庫)를 열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에게는 보고를 여는 열쇠가 있었다. '그 동안 얼마나 긁어 모아 놓았을지......?' 그는 이 점에 대해 욕심이 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궁금했다. 이는 사실상 동천목의 능력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디 한 번 보자!' 영호천문은 입가에 미소를 띄며 점차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스슷! 그의 신형이 번뜩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서 있던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그 뒤를 이은 몇몇 사람들의 부르짖음이었다. "엇! 놈이 사라졌다!" "찾아라--!" 이와 더불어 주위 곳곳에서 난데없는 흑영들이 튀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오 인이었다. 얼굴까지 검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용모는 알아볼 수가 없었으되, 복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안광이 사뭇 심상치 않은 위인들이었다. 한눈에도 몹시 음사(陰邪)하고 악랄하게 느껴졌으며 내공 또한 극(極)에 달한 자들인 것 같았다. "이십 년을 지킨 보람이 있었는가 했더니 감쪽같이 사라졌군." 한 명이 중얼거리자 다른 한 명이 말을 받았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도 말아라. 놈은 틀림없이 비밀통로로 들어갔을 테고, 숨어서 기다리면 결국 나오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잡으면 된다." 그 자는 중앙에 떡 버티고 섰던 키가 큰 인물이었다. 그가 수신호를 하자 그들 일행은 제각기 신형을 날려 그 부근에 있던 한 개의 거대한 암석 뒤로 사라졌다. 한편. 영호천문은 과연 비밀통로 안에 있었다. 한곳에 은밀히 출입구를 대신한 석판이 덮혀 있었고, 그는 모종의 장치를 눌러 그 아래로 소리없이 꺼져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내려서게 된 곳은 지하석실이었다. 주위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비록 칙칙하고 음산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천정에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어 푸르스름한 광휘를 뿌리며 시야가 트이도록 도와 주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줄곧 침착한 기색을 유지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전면(前面)으로는 두 개의 문이 나 있었다. 그 앞에서 영호천문은 동천목의 말을 떠올렸다. - 본래 살인루(殺人樓)가 축조되기 전부터 그곳 지하에는 석부(石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석부의 쓰임새나 내력(內歷)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자면 큰 모험이 따를 것인즉 노부의 지혜(智慧)가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문 중 내가 연 것은 하나 뿐이다. 나머지 하나의 문에는 필시 모종의 내력이 있을 듯 한데, 천문, 너라면....... 두 개의 문은 서로 달라 유사점이 전혀 없었다. 우선 우측의 문은 화려했다. 전체가 황금(黃金)으로 만들어졌는지 누런 빛을 띤 채 번쩍거리고 있었다. 반면에 좌측 문은 석문(石門)으로서 생생한 조각이 눈길을 끌었다.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문양이었는데, 그것은 푸른 이끼가 입혀진 가운데서도 제 모습을 거의 드러내고 있었다. 또 용의 입에는 반쯤 뽑힌 고리가 매달려 있었으며, 석문의 한 귀퉁이에는 고어(古語)로 이런 글귀가 씌여져 있었다. <구전등룡(九轉登龍), 좌생우사(左生右死), 생자필멸(生者必滅), 사중기연(死中奇緣), 불굴유연(不屈有緣).> 영호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가? 아홉 번 돌면 용이 승천하고, 왼쪽이면 죽음이요 오른쪽이면 산다. 그러나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 가운데 기연(奇緣)을 얻는다. 거기에다 굽히지 않은 자에게 연(緣)이 있음이라......?' 그는 약 일각 가량을 그러고 있다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즉시 용의 입에 물려진 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의 손은 도중에서 멈추어졌다. "아니다. 경솔해서는 안되지." 영호천문은 고개를 젓고는 우측의 황금문으로 다가갔다. 그 문에는 예의 석문과는 달리 열쇠구멍이 있었다. '우선 여기부터 살펴 보도록 하자.' 그는 해천일살 동천목이 준 열쇠를 꺼내 구멍 속에 밀어 넣은 다음 요구되는 방향으로 돌렸다. 끼릭! 듣기 거북한 금속성에 이어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위이잉--! 그의 앞에서 황금문이 활짝 열린 것은 그때였다. "웃!" 영호천문은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문 안쪽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엄청난 광휘가 발산되어 나와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야 서서히 눈을 뜬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아!" 그는 눈 앞에 전개된 상황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황금산(黃金山)이랄까? 황금문의 내부는 통로도 없이 막바로 넓은 광장이었는데,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이었다. 아니, 금은(金銀)은 그만 두고 대략 눈에 뜨이는 것만 해도 하나같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옥(寶玉)들 뿐이었다. 비취, 산호, 호박, 유리신주, 야명주, 흑진주, 천년뇌주, 자린옥, 용왕신주, 묘안옥 등등을 위시하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온갖 종류의 보석들까지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경악과 더불어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해천일살 동천목이 아무리 거금을 받고 청부살인을 했다지만 이렇게 많은 보화를 모으지는 못했으리라는 점이었다. 고작해야 금궤상자나 쌓여 있으면 다행일까? 동천목도 살수이기 이전에 엄연한 생활인인데다 살인루를 이끌어 나가려면 아무래도 그에 따른 자금도 지출해야 되었을 테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영호천문은 새삼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거대한 보화의 산을 관찰해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어렵지 않게 한 가지 결론에 봉착했다. '으음, 저것들은 당세의 물건들이 아니다. 최소한 수백 년 전에 이곳에 묻혔던 것 같다.' 이는 보화산의 밑부분에 뒤엉켜 있는 먼지의 두께로 추정해낸 것으로써, 그러고 보니 윗부분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 약간은 정돈되어 있는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후후... 저것은 물론 동노인의 솜씨겠지?' 영호천문은 씨익 웃는 한편,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동천목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은밀한 곳에 이토록 막대한 양의 보화를 은닉해 놓았느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더 둘러 보아도 황금문의 비밀에 관한 단서가 될만한 사항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주인없는 물건이 동천목을 거쳐 다시 영호천문에게 떠맡겨졌다면 맞았다. 졸지에 거부(巨富)가 된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날더러 이것을 어떡하란 말인가? 황금궁전을 짓고, 상아침상에 산호베개, 은이불을 덮고 자기라도 하란 말인가?"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것은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다만......." 그의 눈에 발치께에 있던 조그만 목갑(木匣)이 들어왔다. "무엇인지 모르나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영호천문은 목갑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보기에도 그렇지만 퍽 가벼웠다. 그는 한 번 열어 볼까 하다가 그만 두고 그대로 품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사고는 차분히 정돈되고 있었다. '훗날 이곳에 다시 오리라. 그때에는 이 보화를 세상에 풀어 가치있게 쓰이도록 해야겠지.' 그는 미련 없이 그곳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② 처음에 마주했던 석문 앞. 영호천문은 머리 속으로 석문에 쓰여진 글씨의 뜻을 되새기고 있었다. 마음이 정해지자 그는 손을 뻗어 고리를 잡았다. '동노인은 아마도 이 고리를 잡아 당겼다가 용기가 부족해서 문열기를 포기했던 모양인데.......' 반쯤 뽑힌 고리를 보면 그런 추측쯤은 과히 어렵지 않게 해낼 수가 있었다. "구전등룡(九轉登龍)!" 그의 입에서 낭랑한 부르짖음이 일었다. 그 순간, 절반 가량 뽑혀져 있던 고리가 그의 손에 의해 완전히 빠져 나왔다. '좌생우사요 생자필멸이란, 좌로 돌리면 살고 우로 돌리면 죽으나 곧 삶이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 없지.' 영호천문은 서슴없이 우측 방향으로 고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그긍--! 그러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석실 전체가 갑자기 무너질 듯 흔들렸던 것이다. 우르르르-- 쿠르릉-- 그는 내심 아연해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그긍-- 그렇게 그가 다섯 바퀴 째를 돌렸을 때였다. 쩍-- 쩌억-- 쩍-- 마구 진동을 일으키던 석실의 벽과 천정에 급기야 금이 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영호천문도 어쩔 수 없이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긍--! 다시 고리가 한 바퀴 더 돌아갔다. 쿠쿠쿵! 와르르-- 마침내 천정이 무너져 내려 집채만한 바위들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석실이 주저앉을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럼 내가 잘못 판단했단 말인가?' 쿠쿵--! 콰르르-- 판단이야 어쨌든 때는 이미 늦어 버린 지 오래였다. 꽈르르르릉-- 석실은 거의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며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이를 악물었다. '이왕 내친 걸음이다! 천운(天運)에 맡기는 수밖에.'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계속하여 고리를 힘차게 돌렸다. 그그그긍--! 문고리가 그런 식으로 아홉 바퀴를 다 돌고 난 순간이었다. 쾅! 콰르르릉--! 우려했던 대로 석실은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바위 덩어리들이 떨어지며 천정이 무너지고, 벽이 형체를 잃는가 하면 바닥까지도 들고 일어난 듯 뒤집혀버린 것이었다. 영호천문. 그는 석실의 붕괴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또한 그 엄청난 돌무더기 속에서 그가 살아남을 확률이란 거의 없었다. 시공(時空)의 벽. 그것은 과연 무한(無限)인가, 유한(有限)인가? 아니면 흑(黑)인지, 혹은 백(白)인지....... 무질서와 혼돈의 와중에서라면 몰라도 종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무(無), 그 자체일 뿐이었다. 똑, 똑......! 언제인가부터 규칙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를 그는 듣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아득하여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의 아득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그 소리는 바로 코 앞에서 들리는지도 몰랐다. 불분명한 것은 결국 상황이 아니라 그의 의식이었기에. 이런 경험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 첫번째는 아주 먼 어린 시절, 그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천애(天涯)를 떠돌며 유리걸식할 때였다. 폭우가 그치고 난 어느 날의 아침이다. 잔뜩 허기가 진 채로 그는 남의 집 추녀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음향을 들었다. 발치 끝으로 무심히 떨어져 내리는 낙수(落水)의 소리가 지금의 이 소리와 똑같았다. 똑, 똑....... 그 소리가 하도 아득하게 느껴져 그는 잠깐이나마 아주 편안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그 광경을 떠올리고 보니 사고가 거기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의 한가운데를 점유한 그 소년의 영상은 다음 순간에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 쳇! 이까짓 허기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정말로 참지 못하겠는 것은 모욕과 멸시야! 똑, 또독....... 이후로 그는 천하에서 가장 고독하고 괴퍅한 늙은이들에 의해 거두어졌을 때에 또다시 이 소리를 들었다. 손가락을 펴 코 앞에 들이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공간 속이었다. 그는 그 속에 내팽개쳐진 채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과 더불어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타는 듯한 갈증에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다시피 했다. 그 상태에서 그를 더욱 기진하게 한 것이 바로 저 소리였다. 똑... 또독... 똑....... 절박하게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던 물, 그래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가히 저주스럽기까지 했었다. 더구나 그 소리를 그는 장장 백 일 동안 들어야 했으니....... - 이러다 나는 미치고 말 거야! 우우... 듣기 싫어! 그를 비롯한 십 인의 아이들이 전부 실신했을 때에야 그 소리는 멈추었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그들에게는 비로소 물이 주어졌다. ....... 상념(想念)에서 헤어 나오자 영호천문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으며 어딘가에 반듯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반쯤 헤벌어진 입 속으로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정(天井)으로부터 무엇인가 흰 액체가 끊임없이, 아주 느린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집채만한 바위가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식되는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대체 어찌 된 것일까? 이곳은 천연동부(天然洞府)인 것 같은데 어디서 빛이 들어오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이런 의문은 상황에 걸맞지 않았다. 그의 짐작대로 동부에는 빛이 들어올 만한 틈이라곤 없었다. 단지 어둠이 대낮처럼 보이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그가 미처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천정에는 들쑥날쑥한 종유석(鐘乳石)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희한하게도 투명해 보였는데, 개중 가장 굵은 종유석의 끝에서 줄곧 예의 우유빛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으음, 좋은 향(香)이로군.' 영호천문은 자신이 받아 마시고 있는 액체에서 서늘하고도 그윽한 향기를 느끼며 내심 만족해 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영민한 머리가 회전하여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신비한 액체는 만년공청석유(萬年空淸石乳)가 아닌가?' 지난 날 그는 언젠가 천이지(天異志)라는 책에서 공청석유에 대한 것을 읽은 적이 있었고,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연결지어 본즉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만년공청석유란 그가 불회곡에서 복용했던 영지공령천액보다 수백 배나 더 효력이 높은 영수(靈水)였다. 단 한 방울만 마셔도 십 년의 내공이 증진되므로. 다량을 섭취할 경우에는 그 공효가 상상을 초월한다. 흔히 말하는 무병장수란 그저 일반인의 경우이고, 무림인이 복용할 시에는 능히 탈태환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선도법(仙道法)을 익히면 우화등선(羽化登仙)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까지 생각들이 고리를 이어가자 영호천문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에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오! 내가 지금 희대의 기연(大奇緣)을 만났구나.' 그러는 사이, 공청석유는 분량을 다한 듯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를 느끼며 언뜻 사중기연이란 말을 떠올렸다. '죽음 가운데 기연이라더니,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군.' 그는 어쩔 수 없이 입가에 고소를 매달았다. '대체 이곳에 이런 안배를 해놓은 고인(高人)은 누구일까? 결과는 좋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너무 지독했다.' 그러나 특별히 반감이 일지는 않았다. '그 분은 필경 불세출(不世出)의 기인일 것이다. 어쩌면 무림사를 통틀어 가장 기이한 존재일런지도 모르지.' 영호천문은 곧이어 시험 삼아 몸을 한 번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그의 예상은 딱 들어 맞아 기현상이 연출되었다. 와르르--! 그를 압박하고 있던 바위 덩어리가 놀랍게도 단번에 굴러 떨어지더니 그로 하여금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영호천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정말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군.' 이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그는 난색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목불인견이 따로 없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헤어져 누더기가 된 것이, 한 마디로 입고 있으나마나였다. 게다가 허연 돌가루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어 꼭 밀가루 더미에 빠졌다 나온 듯한 몰골이라면 맞을 것 같았다. 반면에 구겨졌던 그의 미간만은 금세 풀어졌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 있는 피부에는 은은한 광택이 감돌아 그 자신의 눈에도 백옥(白玉)처럼 매끄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은 가슴이 뛰는 것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서서히 공력을 운행해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오......!" ③ 영호천문. 그의 전신 기경락(奇經絡)은 거의 토막토막 끊긴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강호에 재출도한 후로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바, 내력의 십분지 일 밖에는 운용을 하지 못했었다. 원래 그의 본신 내력은 하란산의 낙일애(落日崖)의 추락사건 뒤에 거의 흩어졌으며 주육풍화상(酒肉 和尙), 즉 백현대사(白玄大師)가 죽음으로써 그에게 넘겨 주었던 내력도 그나마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내력 운행은 전신을 통해 한 군데도 막힘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가 도도히 흐르듯 폭포수와 같은 진기(眞氣)가 끊어진 명맥을 뛰어넘어 쾌도난마처럼 체내에서 치달리고 있었다. "오오! 드디어 내력이 회복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잃었던 무공을 되찾게 되었구나." 그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하마터면 눈물을 떨굴 뻔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천지간의 정기를 받아 천 년에 한 방울씩 결집된다는 공청석유, 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통해 그는 이른바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와중에서 그의 뇌리에 가득히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절절한 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늘상 술에 절어 지내던 백현대사의 허허로운 얼굴이었다. "대사! 보시었소? 당신의 비장한 선택이 기어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었단 말이외다." 우우웅--! 흐느낌에 가까운 그의 부르짖음이 그가 머물고 있는 천연동부에 긴 메아리를 남겼다. 그것은 바야흐로 천중일정(天中一鼎)이 새롭게 탄생되는 순간을 만방에 고하는 소리였다. 한편. 그때까지도 산촌(山村)에 남아 있던 소년 단정과 노파는 영호천문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조손(祖孫)에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치고는 황당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헤헤... 누나의 연기도 그 정도면 정말 끝내 주던데?" 이것은 단정의 말이었다. 그러자 그의 하녀라던 노파가 찢어져라 눈을 흘겼다. "못써!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안돼. 만약 그가 눈치채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와 동행할 수가 없단 말야." 그녀의 음성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매우 청신했다. 누가 들어도 이십이 채 못된 소녀 특유의 맑은 음성이었다. 단정은 혀를 쑥 내밀었다. "헹! 누나야말로 그러면 못써. 최소한 친동생인 나한테만은 솔직해야 되는 거 아냐? 사실 속으로는 본 모습으로 돌아가 형님과 다정하게 큰 길을 활보하고 싶을 텐데, 안 그래?" "어머, 얘가......?" 노파로 변장하고 있는 소녀는 발칵 화를 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면 이 또한 연기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눈치 빠른 단정이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그의 야유(?)는 그쳐지기는커녕 점차로 농도를 더해 갔다. "헤헤... 난 누나의 마음을 잘 알아. 누나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예까지 쫓아온 걸 보면 뻔한 걸." "너, 점점......!" 소녀는 얼굴이 새빨개져 씩씩거렸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지. 내가 여자였대도 형님에게는 홀딱 반했을 거야. 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투성이니, 쩝! 불원간 누나를 뺏기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 것 같군." "너 정말, 자꾸 놀릴래?" 소녀는 때릴 듯이 단정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그 동작은 어떤 식으로도 이어지지 못했다. "으음......, 내가 왜 이럴까? 정아, 너도 조심......." 그녀는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을 느끼며 동생에게 경계를 시키려 했으나 그 행동도 채 다하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앗! 누나, 누......!" 푹! 놀라 외치던 단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역시 현기증을 느끼며 누이의 몸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흐흐흐......." 방 밖에서 한 가닥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이윽고 방문이 왈칵 열리더니 마의를 입은 한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모옥의 주인인 사냥꾼이었다. 노인은 막바로 손을 흔들었다. 팍! 탁자 위에 켜져 있던 촛불이 맥없이 꺼져 버렸다. "흐흐... 몽연향(夢煙香)의 위력은 틀림이 없구나." 그는 눈에서 음탕한 빛을 흘려내며 여전히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방 안의 정경은 그런대로 다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 웬 횡재냐? 흐흐... 그 놈을 붙잡기 위해 인질로 삼으려 했는데, 뜻밖에도 할망구가 어린 계집이었다니......."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는 단정을 한구석으로 차 버리고는 노파의 몸을 번쩍 안아 들다. "과연 말랑말랑하구나. 흐으......." 노인은 낡은 침상에 노파를 갖다 눕혔다. "어디 얼굴 좀 보자." 그의 두터운 손바닥이 노파의 얼굴을 스윽 문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매미껍질처럼 얇은 한 장의 인피면구(人皮面具)가 그녀의 안면에서 벗겨져 나왔다. 노인의 눈이 일순 어스름한 가운데서도 번쩍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드러난 소녀의 얼굴은 은은한 달빛 아래서 흡사 선녀(仙女)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나무랄데 없는 용모는 십육, 칠 세 정도의 나이가 주는 싱싱함으로 인해 충격적이도록 아름다웠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열화처럼 들끓고 있던 노인의 색심(色心)은 한 달음에 극을 치달렸다. "흐으, 이렇게 기막힌 미인이었다니......!" 그는 너무도 황홀하여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흥분한 나머지 그는 손이 와들와들 떨리는 것은 고사하고 소녀의 미(美)에서 지체높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고결함이 풍겨 나오는 것마저도 미처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손을 대어도 무방한 여인과 그렇지 않은 여인의 구별이 엄연하련만, 그 순간의 노인은 그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찍--! 노인의 손이 급기야 소녀의 앞섶을 찢어냈다. 불쑥 하고 복숭아빛이 감도는 젖가슴이 무참하게 툭 튀어 나왔다. 정상에 매달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열매까지도. 그리하여 결백한 한 송이 꽃이 막 유린되려는 찰나였다. 소녀의 젖가슴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던 노인이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헉! 이... 이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곧이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본 것은 소녀의 양 쪽 젖가슴 사이에 걸려 있는 하나의 옥패(玉牌)였다. 그 자그마한 물건이 호색한인 노인과 소녀와의 경계를 칼로 베내듯 뚜렷하게 갈라 놓았던 것이다. 노인은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든 듯 새삼스럽게 한 차례 진저리를 쳤다. 그는 소녀의 가슴에 찢어진 옷을 도로 덮어 주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보... 보고해야 한다. 하마터면 큰 일을 낼 뻔 했다. 나로서는 감히 처리할 수 없는 일....... 어서 사자림(獅子林)으로......!" 그는 방 밖으로 나서며 쓴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내 주제에 지나치게 재수가 좋다 했더니, 쩝!" 석비(石碑). 영호천문은 동부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다가 뜻하지 않게 푸른 이끼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는 그 석비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찬 빛을 발했다. 이유는 거기에 적힌 비문(碑文) 때문이었다. <구배(九拜)하라. 먼저 조사지례(祖師之禮)를 치른 후에 등룡천문(登龍天門)에 들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등룡천문에 입문(入門)하게 됨과 동시에 그때부터 천하를 오시하게 되리라. 반대로 예를 치르지 않는다면 겁(劫)을 얻으리라.> 그 내용을 읽고 나자 영호천문의 눈살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그로 말하자면 소위 천중일정이며, 과거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기인 천하십상천(天下十相天)의 전인(傳人)이 아닌가? '절을 하라고?' 그는 내심 오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등룡천문이 무엇인지 모르나 나는 십상천(十相天) 이외에는 인정할 수가 없다. 아마도 고금 이래로 십상천보다 강한 문파는 없으리라. 등룡천문은 나의 절을 받을 자격이 없다.' 실상 존경할 만한 대상이라면 절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만이 넘치는 그 비문이 비위를 건드려 놓자 영호천문으로서도 호락호락하게 응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되려 호기(豪氣)가 크게 일어났다. "우우우우---!" 그는 절을 하기는커녕 흡사 구름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유룡처럼 힘찬 장소성을 발했다. '단언컨대 위협 따위로 내 긍지를 꺾을 자는 없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울러 그는 석비에는 더 이상 일별도 않고 유유히 그 곁으로 지나쳐 버렸다. 다음 순간, 석비는 석비대로 여보란 듯 폭발하고 말았다. 쾅! "웃!" 영호천문은 경악성을 발하는 한편, 재빨리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방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파파파팍--! "으윽!" 석비는 그 편편(片片)이 영호천문의 호신강기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며 그의 몸에 박혀 드는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전신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삽시에 그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야차와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와중에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④ 잠시 후. 그는 벌떡 일어섰다. 중상은 입었으되 죽을 정도는 아닌지라 바닥을 뒹굴고 있을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냉소였다. "후후... 등룡천문이라고? 무릇 인간을 굴복시키는 데는 폭력이 제일이라지만 나 영호천문은 다르다. 이런 식으로 꺾일 것 같았으면 이제까지 살아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그의 과거지사가 한 마디로 함축된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현재를 지탱시켜 주는 저력(底力)이 되어 주었다. 영호천문은 비틀거리면서도 재차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담력과 기백은 약 백여 장쯤 나아갔을 때, 한 번 더 고비를 맞아야 했다. 그곳에서도 하나의 석비가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의 눈썹이 위를 향해 꿈틀 거슬러 올라갔다. <건방진 자! 그대가 구배를 올리지 않은 것은 본 등룡천문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요, 그대의 성품이 지극히 오만하다는 의미이리라.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구배하라! 그러면 등룡천문은 너에게 천하를 줄 것이다.> "어림없는!" 비문을 읽고 난 영호천문은 오히려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등룡천문의 문주, 그대야말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구려. 내가 언제 당신으로부터 천하를 얻겠다고 했소? 그럴 듯한 문구로 나를 현혹시켜 허리를 굽히게 할 생각일랑 아예 버리는 게 좋을 것이외다." 영호천문의 눈빛이 전에 없이 사납고 냉막한 빛을 발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도 양면성(兩面性)을 가진 인물이다. 일편으로 다정다감하며 풍류가 넘치는 성품의 소유자인가 하면, 천하제일인이라는 목표하에 냉혈(冷血)의 수련을 거친 덕에 한 마리 광포한 늑대와 같은 일면도 있다. 이 점에서는 타인에 비해 극단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즉 정(情)과 눈물에 무척이나 약한 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냉혹비정한 철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내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제일인인 천중일정의 참모습이었다. 영호천문은 성큼성큼 석비를 지나쳤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전신에 공력을 포화상태로 끌어올린 채 상황에 대비했는데, 만일 이번에도 석비가 폭발하면 그는 지행토술(地行土術)로써 즉시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각한 계산 착오였다. 십여 보를 전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으음!' 영호천문은 기이하게 여기기에 앞서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그는 끌어올린 공력을 전신에 골고루 퍼뜨리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쉭! 쉬이익--! 불현듯 그의 귀로 듣기 거북한 음향이 들려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이것은......!' 영호천문은 바짝 긴장한 채 사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곧 역겨운 비린내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냄새는 대번에 그로 하여금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독사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접한 것은 분명 독사 특유의 비린내와 그 움직임에 따른 소름끼치는 음향이었다. 영호천문의 입가에 또 한 차례 냉소가 머금어졌다. '까짓 독사쯤이야.......' 그는 실상 백독불침지신으로서 웬만한 독사에 물려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어 그는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전면을 보고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맙소사!" 그가 마주한 것은 끔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거대한 괴망(怪 )이었다. 가장 먼저 그가 본 것은 푸르게 빛나는 두 개의 눈이었는데, 실로 화등잔만하게 큰 그 눈은 도깨비불처럼 음산하고 섬뜩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절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괴망의 머리통은 황소머리만 했으며 날카로운 뿔이 나 있었다. 입은 양 옆으로 쭉 찢어져 금방이라도 그를 집어 삼킬 정도였고, 전신이 남색의 번뜩이는 비늘로 뒤덮혀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저것은 전설에나 나오는 독각철린괴망(獨角鐵鱗怪 )이 아닌가?' 영호천문은 괴망의 정체를 이내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사중왕(蛇中王)이었다. 길이만도 근 십 장여에 달했고, 몸체의 굵기도 한 아름은 되었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비늘은 설사 천고명검일지라도 상처를 낼 수가 없다. 또 괴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무(毒舞)에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만물이 녹아버린다. 그야말로 천지간에 적수가 없는 괴수였던 것이다. '큰일이군. 저 괴물을 어떻게 처치한단 말인가?' 영호천문은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는 등룡천문을 남긴 괴인에 대해 더욱 반감이 일었다. '정녕 철저하고도 독랄한 위인이다. 독각철린괴망까지도 그의 안배에 속했더란 말인가?' 스스슥......! 독각철린괴망이 움직이자 그 몸체가 점점 더 길어졌다. 알고 보니 안쪽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고, 괴망은 그 문으로부터 서서히 빠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영호천문은 이를 악물었다. '저 문으로 들어가려면 필히 괴망의 곁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괴망의 몸이 다 빠져 나온다면 이 좁은 곳에서는 피할 틈조차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다음 순간,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아울러 그는 전광석화같이 괴망에게 덮치며 괴망의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슈슈슉--! 그의 수중에서 암기가 뇌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크르릉! 크아아--! 괴성과 함께 괴망은 입을 딱 벌리더니 붉은 독무를 뿜어냈다. "앗!" 영호천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독무에 닿자 그가 발출해냈던 암기가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뭇거리거나 후퇴할 수는 없었다. 쐐애액---! 이번에는 그의 몸에서 네 개의 검인(劍刃)이 돌출되더니 일종의 검막을 형성하며 괴망에게 부딪쳐 갔다. 콰쾅! 검막이 괴망의 머리통과 정통으로 부딪치자 불꽃이 작렬했다. "으윽!" 영호천문은 짧은 비명과 더불어 절벽에라도 부딪친 듯 무섭게 튕겨져 나갔다. 최소한 한 자루의 검쯤은 괴망의 머리통에 꽂히리라 여겼건만 결과는 불행히도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십장 밖으로 날아가서야 간신히 신형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그 반면에 괴망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날뛰었다. 크르르릉--! 괴망의 거대한 몸뚱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를 공격해왔다. 어디 그뿐인가? 괴망의 입에서 시뻘건 혈무가 뿜어져 나와 그에게 덮쳐 들었다. '위험하다!' 영호천문은 내심 부르짖으며 본신에 강기( 氣)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콰르릉--! 굉렬한 진동이 일더니 동부가 절반쯤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이 일장의 격돌도 전세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영호천문의 호신강기로 말하자면 능히 집채만한 바위도 으스러뜨릴 정도였으나 괴망의 혈무와 부딪치자 양상이 달랐다. 뜻밖에도 그는 기혈이 역류하는 것을 느끼며 그답지 않게 하마터면 혼절할 뻔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독무가 품고 있는 강한 독기(毒氣)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의 형편은 실로 무참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어느 결엔지 맞은편으로 날아가 벽에 반쯤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괴망은 그를 보자 쏜살같이 부딪쳐 왔다. "흑!" 영호천문은 질겁을 하여 얼른 몸을 빼냈다. 괴망과 부딪쳤다간 꼼짝없이 머리가 부숴져 버리게 생겼으므로. 쾅--! 과연 괴망의 머리는 여지 없이 벽을 박았다. 그곳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영호천문이 있던 위치였다. 더구나 놀랍게도 괴망은 머리통으로 근 일장여의 벽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영호천문이 그 괴물을 피한 것은 간일발의 차이였다. 또한 그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다시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때다!' 그는 즉각 신형을 날려 남색 비늘이 밀집되어 있는 괴망의 등에 올라탔다. 크아아아--! 괴망인들 가만히 있을 리 만무였다. 전신을 비틀며 요동을 치는 바람에 그는 자칫 석벽으로 날아가 부딪칠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랬다간 피곤죽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지만. 그가 괴망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손으로 괴망의 뿔을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괴망이 벽에서 머리통을 빼냈다. 그러더니 대노한 듯 아까보다 더욱 거세게 몸부림치며 꼬리를 휘둘렀다. 위이잉--! 번쩍하는 순간, 격타음이 일었다. 퍽! "으윽!" 영호천문의 입에서 절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등을 거대한 쇠뭉치로 얻어맞은들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괴망의 꼬리 공격 한 번에 그는 혹시 자신의 등뼈가 부러지지 않았나 하고 의심이 일 지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등은 삽시에 피투성이가 된 채 살점이 함부로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가 현재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오직 괴물의 뿔을 잡고 놓지 않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극도의 무력감 가운데 언뜻 그는 희망을 보았다. 경황 중에도 의외로 괴망의 뿔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뿔이 급소인지도 모른다!' 절박하게 뇌까린 그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괴물의 뿔을 입으로 덥썩 물었다. 열심히 괴물에게 매달려 있자니 손과 발을 전혀 쓸 수 없는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캐애애액--! 괴망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르게 들리는 포효를 발하며 마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붕괴 역시도 재개되었다. 콰르르르--! 동부의 천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의식하자 영호천문은 더욱 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어쨌든 그 괴물이 제거되어야 자신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의 그는 점차 정신이 흐려져 가고 있었다. 기력을 소진한 탓에 더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도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액체가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콰콰쾅--! 급기야 마지막을 알리는 듯한 폭음이 일었다. 영호천문은 몸 전체가 암석 더미 속으로 파묻히는 것을 느끼며 혼절하고 말았다. 제 11장 등룡천문(登龍天門), 그리고 출범(出帆) ① 영호천문은 전신이 불에 달구어지는 듯 뜨거워져 오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우선적으로 그는 호흡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지를 마구 꿈틀거렸던 탓일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흙과 바윗더미를 겨우 헤치고 나올 수가 있었다. "휴우--!" 그는 주위를 둘러 보더니 전개되어 있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는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반 이상 허물어져 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을 뿐더러 온통 바위투성이였다. 한쪽 구석에는 무려 십 장이나 되는 독각철린괴망의 거대한 몸뚱이가 멋대로 엉긴 채 볼성사납게 축 늘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영호천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내가 이 괴물을 퇴치했다니.......' 그는 자신이 해 놓고도 이 일을 현실로 받아 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긴, 설마 하니 괴망의 최대약점이 가장 단단하고 무섭게 보이는 뿔일 줄이야 누구인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쨌든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그는 문 쪽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그는 몸에서 다시 이상한 징후를 느꼈다. '왜 이렇게 전신이 화끈거리는 것일까?' 영호천문은 마치 자신이 지금 펄펄 끓는 용암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도 뜨겁다 보니 이제는 전신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근질거리기까지 했다. 비정상적인 현상은 비단 외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체내에서 기이한 힘이 넘쳐 흐르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무엇이건 때려 부수고 싶은 묘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영호천문의 영민한 두뇌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리 없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미 현상에 대한 대강의 해답까지도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이 기현상은 괴망의 피를 복용한 탓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놈의 피 속에 있는 열성(熱性) 때문에 말이다.' 그의 추정은 이 부분까지가 한계였다. 그 자신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흡입한 독각철린괴망의 핏속에 엄청난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의 몸은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의복이 남아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와중에서도 그의 몸에는 상처 자국 하나 없었다. 아니, 그의 피부는 예의 광택마저도 거짓말처럼 유지하고 있었다. ....... 약 백 장쯤 앞으로 나아갔을 때던가? 영호천문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또 하나의 석비가 그를 가로 막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네 놈의 오기 및 담력에 탄복한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음은 곧 사나이답다는 뜻이리라. 노부 등천우사(登天羽士)도 그러했다. 그것은 실제로 천하를 둘러보아도 적수를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종내 노부는 광망되이 하늘에 도전하게 되었노라. 이는 어쩌면 노부 최후의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에 불과한 것인지라, 노부는 스스로 실책을 깨닫고 이 자리에 등룡천문을 세웠다. 뜻이 있는 자만이 문을 열리라. 그대 는 세 번 절한 후, 비를 파(破)하라.> 영호천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등천우사, 그대의 오만함도 가히 절세적이오. 끝까지 나를 조롱하며 시험하려 들다니 말이외다. 그러나 그대는 미리 알아야 했소. 나 영호천문은 일단 굽히지 않겠다고 작정하면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오." 그는 차갑게 중얼거린 다음 손바닥을 들었다. 그러자 번쩍 하고 그의 장심에서 시뻘건 광구(光球)가 작렬하더니, 석비는 그만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이 사태에 정작 놀란 것은 영호천문 자신이었다. 장력을 날린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가닥 가공할 열류(熱流)가 손바닥을 뚫고 분출되어 석비를 녹여 버렸던 것이다. '내 능력이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영호천문이 고소를 짓는 그 찰나였다. 꽈르릉--!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폭음과 함께 폭삭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원형(圓形)의 석실. 영호천문이 내려선 곳은 방원 오십 장 넓이의 석실이었다. 중앙부에는 물이 고여 하나의 담(潭)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다가 흠칫했다. 맞은편 좌단 위에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이상한 복색(服色)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도 고대(古代)의 복장인 것 같았다. 반면 노인의 모습만은 살아 숨쉬고 있는 듯 생생했다. 흰 수염이 가슴을 덮었고, 긴 눈썹은 귀밑까지 이르고 있었다. 대춧빛의 얼굴에서는 극히 패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는데, 가장 압권인 것은 눈이었다. 가늘게 반쯤 떠져 있는 노인의 눈에는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빛이 담겨 있었다. '사자(死者)로군.' 영호천문은 천천히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의 우수(右手) 식지가 석실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것을 읽어내려 갔다. <헛헛헛... 네 놈은 정말 노부의 마음에 꼭 드는 녀석이다. 만약 네 놈이 세 번째 관(關)에서 절을 하였다면 동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노부 등천우사는 바로 네 놈같이 기개있는 녀석을 좋아한다.......> 여기까지 읽은 그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기인이라기보다는 괴인(怪人) 쪽이 더 어울릴 위인이시군." 그의 뇌리에는 석문에 새겨져 있던 마지막 귀절이 떠올랐다. 불굴유연(不屈有軟), 즉 굴하지 않는 자가 인연을 얻으리라는. 영호천문은 노인을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만족하시겠구려. 당신은 후대에 베푸는 인연에조차 너무 까다로우셨소이다. 그 점은 저승에서도 반성해야 할 것이오. 결과적으로 나로 하여금 목숨을 걸게 만들었으니까." 그는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다. <노부는 본래 북송(北宋)의 태종(太宗)인 광의(匡義)의 제(弟)로서 혼잡한 전란의 시대에 태어났다. 성장과정 중에 오호십육국(五湖十六國)이 기울어지고 송(宋)이 일어섰을 때, 노부는 과감히 가실(家室)을 박차고 나왔다. 이후로 도가(道家)의 진리에 심취한 노부는 천하를 유랑하며 무학(武學)에 심취했다. 그리하여 한때에는 태정(太淸), 태극(太極), 태을(太乙), 태음(太陰), 태화(太華) 등의 도가오문(道家五門)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만족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노부는 다 시금 천하를 떠돌았고, 종국에는 근원을 포착함으로써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노부는 강(强)을 천공지기(天空之氣)인 뇌(雷)에 두고, 극유(極柔)함을 지중지기(地中之氣)인 수(水)에 두었다...... 중략(中略)...... 만년에 이르러 그 오의마저 깨달으니 어느덧 노부의 나이 이백칠 세, 수명이 다해 버리고 말았다. 은거한 지도 어언 백오십 년이 지났던 것이다. 그러나 강호(江湖)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군웅할거시대로 노부는 죽음을 앞두고 뜻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등룡천문을 남기는 일이었노라.......> 영호천문의 안색이 처음으로 크게 변화를 일으켰다. '세상에 이같은 인물이 존재했었다니, 정말 기막힌 일이로군. 이 분은 황가(皇家)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내던지고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었다.' 생각해 보건대 이 점은 그 자신과 심히 대비되는 면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정해진 운명에 따라 생을 영위해 왔는지도 모른다. 십상천에 의해 거두어진 것이 그러하고, 여인을 만난 것, 무림의 재출도도 역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자칭 등천우사라는 인물은 어떠한가? 인생의 향방을 정한 것도, 세상에 뜻을 펴고자 한 것도, 아니 지독한 방식으로 전인을 고른 것도 모두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였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졌다! 그것도 아주 깨끗이.......' 그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찌기 십상천으로부터 무림사를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는 그였지만 등천우사에 대해서는 거의 깜깜이었다. 기록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 년 전의 인물이나 그런 이름은 후세의 어느 고인의 기억에도 일체 남아 있지 않았으니, 이는 바꾸어 말하면 등천우사가 남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명예에조차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상략(上略)...... 노부의 진학(眞學)을 전부 등룡천문에 남기노라. 후인(後人)이여,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기개를 가진 자이니라. 고로 본문(本門)에 들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만, 금후로 등룡천문은 그대의 것이다. 노부는 그대에게 양경(陽經)과 음경(陰經)을 남기겠노라. 그것은 소위 등룡이서(登龍二書)라는 것으로서 노부 인생의 집대성이니라. 단, 성취하고 못함은 그대의 자질과 노력에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거라. 또 한 가지, 노부가 말년(末年)에 깨달은 바는 천명(天命)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만사가 필경 하늘의 뜻에 매어 있나니, 그대의 홍복을 기대하노라.> 이외에도 다른 글이 있었다. 그것은 등룡천동(登龍天洞)의 다른 안배들과 지리(地理), 곧 들어올 때와는 달리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가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호천문. 그의 표정은 애초와는 반대로 매우 숙연해져 있었다. 등천우사가 종용하는 천명이란 것이 갑작스레 내면에 깊숙이 파고 들어 그로 하여금 때아닌 혼란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위대한 상고기인은 불가해한 인연을 빌어 그에게 음양이서(陰陽二書)를 남겨 주었다. 그것이 무림사에 전무후무한 절대지학이란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영호천문도 마음을 고쳐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좌화(坐化)해 있는 등천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내게 등룡천문에 들라고 명령을 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오. 하지만 그 부분을 내 의사에 맡겨 주었으니, 정말로 내 뜻대로 하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성의를 다해 구배(九拜)를 올렸다. 물론 이 한 마디도 잊지 않았다. "이것은 진심으로 당신을 존경하게 되었기에 드리는 예이오." 그 뒤로 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스스슥....... 영호천문의 절을 받고 난 등천우사의 몸이 느닷없이 한 줌의 가루로 화(化)해 버린 것이었다. 미처 놀랄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는 두 권의 책자만이 덩그렇게 남게 되었다.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흰 그 책자들을 응시하며 영호천문은 입가에 공허한 웃음을 매달았다. '괴퍅한 분....... 필경 이 사태도 미리 정해진 안배려니와,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졌다는 의미이겠지?' 그는 잠시 묵념을 올린 뒤, 흑백이서를 취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흑서는 양경(陽經)이요, 백서는 음경(陰經)이었다. 영호천문은 막바로 그 자리에 앉아 두 권의 등룡천문기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② 시일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 동안 강호의 변화는 어떠했는지......? 세상일이란 수면(水面)과도 같다 하겠다. 바람이 자면 잔잔하지만 일단 폭풍이 불면 거칠고 험한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과연 그것을 걷잡을 수 있는 자 누구련가? 어제에 그러했듯 오늘도 누군가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져 평화를 깨뜨리려 할 것이다. 그러면 잔잔한 수면에는 금세 파문이 일고, 그 파문은 수면 전체로 파급되어 나가리라. 당금의 강호정세를 군웅할거의 시대라 표현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역대를 되돌아 봐도 당세처럼 이 말을 실감하게 되었던 적은 없었다. 이른바 일제(一帝), 쌍효(雙梟), 삼성(三聖), 사기(四奇), 오마(五魔) 육악(六惡), 칠신(七神), 팔잔(八殘), 구정(九鼎), 십살(十煞), 이 기라성같은 기사호웅(奇士濠雄)들이 저마다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해 야망의 눈빛을 번뜩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전륜회(轉輪會)와 사자림(獅子林)이라는 정사쌍천(正邪雙天), 오패(五覇)라 불리우는 젊은 사자들이 점차로 자파의 세력을 부풀려 천중(天中)을 넘보고 있기도 하다. 특히 오패인 대금마성(大禁魔城), 화중부(花中府), 잠마문(潛魔門), 황금전(黃金殿), 화무궁(花舞宮) 등의 활약상이 무림 전역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속칭 무림사대금역(武林四大禁域)과 사대세가(四大世家), 구문일방(九門一幇), 정사십절(正邪十絶) 등등의 제문파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성세를 외부로 노출시키고 있다. 개중 정사십절이라 일컬어지는 세력은 하나같이 신예문파로서 극히 최근에 형성된데 비해 신비에 가려진 채 기존의 문파들을 뛰어넘는 암중(暗中)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위의 사실들이 입증해 주듯 현 무림은 우후죽순과도 같이 일어난 제문파들의 각축전 속에서 점차 무시무시한 혈풍(血風)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파도타기가 일로 정점을 향해 치닫는 때에....... "우우우-- 우--!" 용이 등천하는 듯한 장소성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동천목산(東天目山)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촤아아--! 이곳은 동천목의 최고봉인 대선봉(大仙峯) 중앙부에 고여 있는 호수(湖水)이다. 동, 서 천목산에 천목(天目)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가 기실은 산정에 있는 이 호수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이곳에서 벌어졌다. 놀랍게도 하나의 인영이 빛살같이 빠른 속도로 동천목의 호수로부터 수면 위로 불쑥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다. "우우우우--!" 괴인영은 그 상태에서 대선봉 전체를 한 바퀴 선회하더니 곧장 산 아래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산 기슭에 있는 촌락. 그곳은 단정과 노파(?)가 언젠가 임시로 머물고 있던 사냥꾼과 화전민들의 부락이었다.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약 오십여 명쯤 되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삼개월 전엔가 그들 모두가 철새처럼 마을을 버리고 어디론지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 텅 빈 산촌에 한 명의 괴인(怪人)이 나타났다. 그는 온 얼굴이 수염투성이였고, 행색이 무척이나 괴이했다. 일신에는 의복 대신 나뭇잎 따위를 엮어 걸치고 있었는데, 그나마 간신히 치부 정도를 가렸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얼굴을 뒤덮은 봉두난발로 인해 그는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용모는 어떠한지 도시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주제꼴에도 그는 마을을 둘러 보며 놀란 음성을 발했다.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단정은? 그 노파는......?" 중얼거리는 괴인은 다름 아닌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등룡천동에서 나오자마자 단정 일행을 찾기 위해 이곳 산촌에 달려 왔으나 이처럼 당혹을 금치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황중에도 곧 침착을 되찾았다. '낙심하고 있어 봐야 해결책은 없다. 일단 이곳을 세세히 뒤져 보자. 무슨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스슥--!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한 모옥으로 스며 들었다. 모옥 안. 그곳에서 영호천문을 맞이한 것은 수북히 쌓여 있는 먼지 뿐이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단정남매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으음......." 봉두난발 사이로 보이는 영호천문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그 동안 시일이 꽤 흘러간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계산대로라면 의당 단정남매는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설사 급한 일이 있어 자신들의 의사로 그를 만나지 않고 떠났다 하더라도 그 간의 정리(情理)로 보아 최소한 전언을 기록해 놓은 쪽지 정도는 남아 있어야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니, 영호천문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즉 무슨 변고가 있었다는 얘기다. '으음, 실상 사냥꾼이나 화전민들이 거처를 옮기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일 단정남매의 행방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그의 가슴이 급격히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후회였다. 왜 아니겠는가? 단정남매를 이곳에 맡겨둔 사람이 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경솔했다. 이 마을 거주민들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 보고 일을 저질렀어야 했거늘, 이 무슨 한심한 꼴이란 말인가?' 그러다 그는 한 곳에서 시선을 딱 멈추었다. "저것은......?" 영호천문은 지금 침상의 아랫부분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워 보니 그것은 일종의 노리개였다. 취옥(翠玉)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끝에는 향낭이 달려 있었는데, 이런 물건이란 그가 알기로도 주로 고귀한 신분을 가진 소녀들의 전유물이었다. "흐음!" 영호천문의 눈빛이 기광을 발했다. 그는 애초부터 단정의 하녀라던 노파가 젊은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추측상 이 노리개는 아무래도 그녀의 소유물일 확률이 컸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이곳 산촌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장소다. 내가 어리석어 당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의 심증은 차츰 확증으로 굳어져 갔다. '납치극이 벌어진들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다.' 또 한 차례 그의 눈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방의 한 구석에서 타다 남은 초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안색이 변해 얼른 초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역시 몽연향(夢煙香)이다." 그는 부지중 입술을 질겅 씹었다. 하오문(下午門)에서나 즐겨 사용하는 몽연향촉이 이 방 안에서 타고 있었다면 더 생각해볼 여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그의 결론인즉 이러했다. '그들은 암산을 당했다. 그 상대는 하오문 출신으로 필경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다.' 영호천문의 추리는 거기서부터 비약적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당금 무림에서 하오문을 관장하고 있는 단체를 일일이 떠올려 보았으며, 마침내 크게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사자림(獅子林)!" 사자림이라면 일단 정사쌍천 중 하나로서 사도녹림(邪道綠林)의 총본산이 아닌가? 반대로 규모를 축소시켜 설명하자면 사자림이 녹림, 다시 녹림이 하오문을 총괄하고 있으니 이런 유추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맞다. 이곳은 과거 사자천효의 숙적인 해천일살(海天一煞) 동천목, 그가 세운 살인루(殺人樓)가 있었던 장소이다.' 영호천문의 머릿속이 비로소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정은 사자림에 납치되었다.' 그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사자천효와는 청산해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단지 그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다.' 다음 순간, 그는 신형을 날렸다. 스슷--! 그의 모습은 삽시에 장내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스스스....... 방바닥의 한 귀퉁이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난데없는 하나의 인영이 툭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 자는 전신에 녹색의 가죽옷을 뒤집어 쓰고 있었으며, 얼굴 부분에는 커다란 거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영호천문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석달 전에 사라졌다가 뭘 하러 나타났담?" 뜻밖에도 달콤하고도 여린 음성이었다. 이로 미루어 괴상한 차림새의 인물은 여인, 그것도 묘령의 처녀인 모양이었다. "흥! 어쨌든 상관없어. 그 작자도 동천목과 한 패일 테니까." 슷! 그녀가 손을 뻗자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은사(銀絲)가 전면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흡사 딸려가듯 은사를 쫓아 사라져 갔다. 여인. 그녀는 누구이며, 해천일살 동천목과는 어떤 관계인지? ③ - 말하지 말며,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이것은 당금의 무림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경구로서 팔잔(八殘)을 일컫는 말이었다. 팔잔은 모두가 불구자들이다. 이를테면 팔다리가 없거나, 눈을 잃었거나, 귀머거리, 혹은 벙어리인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만은 엄청난 수위를 자랑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천형(天刑)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남보다 십배 더 노력하여 고수(高手)의 반열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몹시 배타적이었다. 타인(他人)은 무조건 용납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신들을 입에 담거나 함부로 논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잔혹한 수단을 써 죽여 없애곤 했다. 그들은 일명 팔잔회(八殘會)로 불리우기도 했으나 근자에 잔결방(殘缺幇)이라 개칭되었는데, 이들 잔결방은 현 무림의 정사십절(正邪十絶)에 들어 있어 그 누구도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대해 무서운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이었다. 말도 말며, 보지도, 듣지도 말라던 이유도 거기에서 찾으면 답이 나왔다. 시월은 흔히들 풍림지절(風林之節)이라 한다. 이른바 만산홍엽(萬山紅葉), 처처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불붙는 듯한 단풍 뿐이니 말이다. 동백산(桐柏山) 기슭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시당초 산자수명(山紫水明)으로 워낙 이름이 나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산목들 모두가 붉은 색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산로(山路)는 위태위태하게 이어지는데....... 한 사람이 걷고 있었다. 서두르는 법도 없이 유유히 산로를 가로지르고 있는 그는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장강(長江)을 건너 진로를 서북(西北)으로 잡았다. 목적지는 복우산(伏牛山), 이유는 사자림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단정남매의 실종은 그의 마음 속에 내내 꺼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가다 말고 영호천문은 멈칫했다. 귓가로 은은하게 고함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산중에서 누가?' 그는 소리 없이 풍림을 뚫고 날아갔다. 고함성에 섞여 있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풍림 한가운데에는 의외로 널따란 공지(空地)가 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은 아니었고 아름드리 풍림을 마구 쓰러뜨려서 생겨나게 된 터라면 맞았다. 지금 그곳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봐주리만큼 참혹한 혈전(血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ㅋ! 그것 봐라, 방주(幇主)는 이 독안염라(獨眼閻羅)다." "무슨 잡소리를! 어림도 없다. 어느 모로 보나 방주는 나 무족광생(無足狂生)이다." "헷헷헷... 웃기지 마라! 나 파면노군(破面怒君)은 어쩌고?" "다 아니다! 이 독수진인(獨手眞人)이야말로......." 쾅! 콰르르르--! 그 혈전이란 일대 혼전(混戰)이기도 했다. '맙소사!' 방금 도착한 영호천문은 그 광경에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장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나무가 쓰러지고 흙이 파헤쳐진 가운데 팔 인의 괴물들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어우러져 싸우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대상도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불구자들이었다. 팔이 없거나 한 쪽 다리가 뭉턱 잘려나간 자, 심지어는 두 팔이 없거나 두 다리가 전부 없는 자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끔찍하게도 칼로 도려낸 듯 안면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애꾸, 봉사 등 실로 불구치고도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만은 가히 개세적이었다. 꽈릉! 콰콰쾅--! 그들 중 누군가가 장력을 한 번 휘둘렀다 하면 그때마다 여지없이 아름드리 거목이 꺾여 나가고, 땅이 움푹 패였다. 그런데 이렇듯 가공스럽고도 위력적인 공세들이 무섭기보다 오히려 우습게 보여지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그들의 싸움이 괴상한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애초부터 무모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 방식으로 계속 싸웠다간 그들이 소원했던 최강의 인물을 가려 내기도 전에 몰살해 버릴 것이 틀림 없었다. '정말 소문대로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편이 나을 뻔했군. 저렇게 성미들이 괴퍅하고 고지식해서야, 쯧!' 영호천문은 그들이 문제의 팔잔(八殘)이라는 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내심 어이가 없어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현 사태는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저들은 최근 들어 잔결방(殘缺幇)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더니 여기서 거창하게 방주를 선출하고 있었군.' 영호천문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새삼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보아 하니 벌써 수일째 계속 싸우고들 있었던 모양인데, 후후... 정녕 떼죽음을 자청하는 것도 유분수지 저게 무슨 꼴이람? 하긴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은 못할꼬?' 그가 이처럼 비웃음을 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팔잔은 아직까지도 나름대로 심각(?)하기 그지 없었고, 그 덕분에 대개가 중상을 입어 초주검에 이르러 있었다. 피를 뒤집어 쓴데다 몰골이 엉망인 것은 그렇다 치고 진기마저 고갈된 듯 그들은 모두 눈이 흐리멍텅해져 있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여전히 싸움을 진행해 가고 있기는 했으나 짐작컨대 저승의 문턱이 눈 앞에서 오락가락할지도 몰랐다. 영호천문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말려야 한다!' 생각이 정해지자 그의 신형이 번뜩하고 날아 올랐다. 이어 그가 내려선 곳은 팔잔의 곁이었다. "멈추시오!" 영호천문의 낭랑한 외침이 사위를 울리자 팔잔은 일제히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다 보았다. "뭐냐? 어떤 놈이 감히 방해하느냐?"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군!" 말인즉 이렇게 험하게 튀어 나왔지만 팔잔의 얼굴에는 저마다 안도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들에게는 이 방해꾼이 사실상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오기로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긴장에서 놓여나자 그들 중에는 피를 울컥 토해내는 자도 있었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가누는 자도 있었다. 어떻게 된들 아무려면 죽는 것과 비교하겠는가? 그들을 보자 영호천문의 심정은 꼭 반으로 나뉘었다. 한편으로는 감탄을, 다른 한편으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내부에서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짐짓 어깨를 으쓱이며 냉소를 날렸다. "후후...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이 중에서 잔결방의 방주가 될만한 재목은 없는 것 같군." "뭐, 뭐라고......?" 팔잔은 그 한 마디에 모두 안색이 싹 바뀌었다. 몹시도 편격하고 화급한 성정을 가진 그들로서는 그 말이 던져준 충격을 감당해낼 만한 인내력이 전무했던 것이다. "찢어 죽일 놈! 감히 어디서 그 따위 소리를......!" 길길이 날뛰는 그들에게 영호천문이 다시 말했다. "그럼 내 말이 틀렸소? 그대들은 단지 상잔(相殘)을 하고 있었을 뿐, 결말을 내기는 이미 그른 것이 아니오?" "주... 죽일 놈!" "뒈져랏!" 팔잔 중 애꾸눈과 외팔이가 더 듣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죽장(竹杖)과 선인장(仙人掌)을 휘둘러 공격을 가해왔다. 영호천문은 두 사람을 향해 양팔을 가볍게 떨쳐냈다. 슈슉! 꽝! 무형의 진기, 즉 철수진기(鐵袖眞氣)가 그들의 무기를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흑!" "크윽--!" 무기의 주인인 두 괴인 역시도 피를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나머지 육잔들이 어이없는 사태에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그들이 채 어쩌지도 못하고 황망해 하는 그 찰나를 빌어 영호천문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누가 본들 그대들의 싸움은 어리석기 짝이 없소. 계속 이렇게 방주 자리를 두고 다툰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소? 필경 잔결방은 세워지기도 전에 멸망할 것이오." 확실히 그 말에는 효과가 있었다. 팔잔은 그제서야 서로의 몰골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찌 하란 말이냐?" 팔잔 가운데 누군가 묻자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들의 무공은 백중지세요. 아마 평생을 싸워도 승부를 낼 수가 없을 것이외다. 고로 방법은 하나 뿐이오." "그게 무엇이냐?" "당신들 모두를 이기는 자에게 의탁하면 되오." 그 말에 팔잔은 하나같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클클... 그런 자가 있다면야 굴복을 하겠다만, 천하를 통틀어도 우리들의 합공을 받아낼 인물이 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영호천문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 있으니 염려 마시오." "뭐, 뭣이?" "미친 놈!" 팔잔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영호천문은 씨익 웃으며 부언했다. "믿기지 않으면 시험을 해 보면 될 거 아니오?" 그의 호언장담에는 팔잔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단안을 내렸다. "좋다! 어디 한 번 해 보자."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막고 나섰다. "아서라! 최소한 네 놈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전을 벌일 수야 없지 않느냐? 팔잔은 무명소졸과는 싸우지 않는다." '끙! 곧 죽어도 챙길 것은 다 챙기는군.' 영호천문은 입가에 고소를 매달며 물었다. "당신들은 혹시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시오?" 팔잔은 그 말을 대뜸 알아 들었다. "불망객(不忘客)......!" 그들의 얼굴에는 일시지간 놀란 표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호천문은 막바로 그들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되도록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손 쓸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건방진 놈!" "만일 네 놈의 명성이 헛된 것이라면 싸움이 끝난 뒤에 네 놈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 개에게 던져 주겠다." 대노한 팔잔들의 욕설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후후... 저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다. 어쩔 수 없군. 나도 개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 해야지.' ④ 팔잔은 어마어마한 공세를 퍼부어 왔다. 먼저 두 다리가 다 없는 무족광생이 두 팔로 지면을 박차고 솟구쳐 올라 쌍장을 쭉 뻗어냈다. "크ㅋ!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까불다니......." 쉬이잉--! 독안염라도 질세라 그와 함께 쌍장을 뻗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면노군이 번쩍이는 대왕도(大王刀)를 이리저리 휘둘렀으며, 독수진인은 선인장을 쓸어왔다. 나머지 괴인들도 오랫동안 합공에 숙달된 것처럼 일제히 공세를 펼쳐냈다. 콰콰쾅--! 땅바닥이 뒤집혀지고 거목들이 맥없이 쓰러져 갔다. 그 바람에 장내는 강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야가 차단되었다. 영호천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우수(右手)를 천중으로 뻗음과 동시에 좌수(左手)는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려가듯 사방으로 빙글 회전시켜 뿌려냈다. 츠츠츳--! 괴이한 음향과 함께 강풍( 風)이 모조리 한 곳으로 흡수되며 톱니바퀴처럼 회전했다. 영호천문의 손동작에 따라 마치 태풍의 눈인 양 움직였던 것이다. "헉! 이, 이게 대체 무슨 무공이냐?" "놈이 사술(邪術)을 쓴다!" 팔잔은 자신들의 공세가 모두 깊은 우물 속으로 침몰하듯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대경실색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형이 막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 "분강륜(分 輪)!" 쏴아아--! 낭랑한 외침과 함께 강풍의 소용돌이가 여덟 개로 분리되더니 날카로운 륜강(輪 )으로 화해 각기 팔잔에게로 쏘아져 갔다. "이, 이런......!" 팔잔들은 급급히 몸을 날려 그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콰쾅--! "으윽!" "큭--!" 팔잔은 두 팔이 떨어져 나가는 충격을 느끼며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뒤로 칠, 팔보나 밀려 나가고 말았다. 그들에 반해 영호천문은 태연자약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팔잔 중 독수진인이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물었다. "그것이 무슨 무공이냐?" "후후... 그대들의 견식으로는 모를 것이오. 이것은 등룡천문의 천강륜(天 輪)이라는 신공이외다." "등룡천문......?" 의아해하는 그에게 영호천문은 단정짓듯 힘주어 말했다. "등룡천문은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이오." "뭐, 뭐라고?" 팔잔은 어이가 없는지 저마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있다가 무족광생이 괴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무공실력과 자신감, 전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잔결방의 방주가 되려면 최소한 너도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끊어내야 한다. 뭣하면 눈알 하나를 빼내도 좋고, 클클... 이건 규칙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 팔잔은 재미있다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그들을 향해 영호천문은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잔결방에 가입한다고 했소?" "그럼 얘기는 끝났군. 죽을 때까지 네 놈과 싸울 수밖에." 얘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 셈이었다. 사실 팔잔은 몹시 배타적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불구라는 명목하에 정상인에 대한 편견과 불만이 대단해서 누구라도 그들에게 무공만으로 복종을 강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빛이 감도는 그의 눈동자에 언뜻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는 좌측의 관목림을 힐끗 스쳐본 후, 말문을 열었다. "혹시 아시오? 내가 당신들처럼 불구자라는 것을......?" 팔잔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멀쩡한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 무슨 말이냐? 설마 우리를 놀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후후... 내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소?" 영호천문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에는 가끔씩 이해하기 힘든 일도 있는 법이오. 예를 들면 끊어진 팔다리를 붙인다던가 망가진 얼굴을 재생(再生) 시킨다던가 하는 의술(醫術)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팔잔은 각기 안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흥!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빌어먹을! 천하에 그런 의술이 어찌 존재할 수 있느냐?" 영호천문은 씁쓸히 웃으며 답했다. "믿기지 않는다면 나를 보시오. 나도 과거에는 독수독각(獨手獨脚)에다가 파면(破面)이었소이다. 뿐만 아니라 전신 기경락이 토막토막 끊겨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소." "설마......!" "내게 이렇듯 새로운 삶을 부여해 준 그는 귀신같은 의술을 가지고 있소. 아마 당신들도 그를 알 것이오." 영호천문은 팔잔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정색을 해 보였다. "그는 과거 귀화타(鬼華 )라고 불리우던 분이오." "뭐, 뭣이! 귀화타라고?" "아니,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팔잔은 그때까지도 회의를 떨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그렇소. 그는 분명히 생존해 있으며 한 곳에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소. 과거 아들이 지병으로 죽자, 그를 살려내기 위해 산 사람의 장기(臟器)를 꺼내다가 미친 의원으로 몰렸다던가? 지나친 부성애(父性愛)로 인해 파멸의 길에 이른 그 분 말이오." "으음......." 얘기가 심상치 않은 대목에까지 이르게 되자 팔잔도 신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은신처에서 자신의 의술을 완성시켰소." 영호천문은 팔잔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후일에 말이오, 그대들도 어쩌면 그 분에게 혜택을 입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그 한 마디에 팔잔의 눈빛이 모두 크게 흔들렸다. "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장 먼저 무족광생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럼 내 두 다리도 회생이 가능할지......?" 영호천문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 분도 신은 아니오. 하지만 당신에게 다리나 다름 없는 의족(義足)을 달아줄 수는 있을 것 같소." 그는 안색을 펴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있는 곳에는 천하제일의 장인이라는 천병환사(千兵幻死)가 함께 있기 때문이오." "오오!" 무족광생은 말을 잊고 탄성을 발했다. 그것은 나머지 칠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영호천문이 문득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자,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대들이 금후로 어찌 살아 가느냐는 것이오." 그는 다소 차갑게 덧붙였다. "그 동안 팔잔이 무림에서 행한 일이란 온통 살업(殺業) 뿐이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당신들의 행위는 언제든 크게 징계를 당하게 될 것이오." 독안염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더듬거렸다. "그, 그건 네 말이 맞다. 사실... 우리가 팔잔회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 잔결방을 조직하려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나머지 칠잔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칠잔 모두가 승낙을 뜻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독안염라는 안심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얼마 전, 최후의 통첩이란 것을 받았다. 그것이... 전륜회(轉輪會)로부터......." "지금 전륜회라고 했소?" 영호천문의 짙은 눈썹이 위로 불쑥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굳은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 다짐을 받아 두고 싶소. 나를 따르려면 그대들은 우선적으로 이제까지의 편견과 세상에 대한 원한부터 버려야 하오. 그 기한은 삼 년이오. 이후로는 그대들이 어떤 양식을 취하든 상관하지 않겠소. 그리고 그대들이 원한다면 귀화타와 천병환사, 그 두 분에게 데려가 볼 작정이오." "으음......!" 팔잔은 모두 심각한 얼굴이더니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자 서로 의논이라도 있은 듯 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무족광생이 언뜻 꺼림칙한 표정이 되어 토를 달았다. "우리 입장은 그렇다 치고, 자네는 아무래도 우리들의 혈채(血債)가 부담이 될텐데......?" 영호천문은 처음으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그것은 염려 마시오. 이제부터 그대들은 등룡천문의 팔대장로(八大長老)이거늘 누가 감히 건드린단 말이오?" 그의 힘찬 어조는 팔잔으로 하여금 감동을 금치 못하게 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기에 이르렀다. "속하들, 팔장로가 문주께 인사드리오." 영호천문도 더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마주 예를 취했다. 그는 예상외로 팔잔의 성품이 순박한 데에 놀라는 한편, 그들의 진로(進路)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 모색에 들어갔다. '이들은 본성이 악한 자들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뚤어져 있을 뿐. 그렇다면.......' 그는 한동안 팔잔들을 차례로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금후로 그대들은 새롭게 살아야 할 것이오. 천하제일문인 등룡천문의 문하라면 무엇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지 않겠소? 이를 위해서 그대들은 먼저 실추된 개개인의 명예부터 회복시켜야 될 것이오." "우리가 어찌 하면 되겠소이까? 하명(下命)해 주시오."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들에게 첫 임무를 내리겠소. 우선 그대들은 팔방(八方)으로 흩어져 빈민들을 구제하도록 하시오." "어엉?" "빈민구제? 우리가......?" 팔잔은 제각기 괴상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세상과 인간을 저주하는 것으로 일관해 오던 그들에게 있어 그런 명령이란 너무도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의 담담한 음성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내게는 꽤 많은 보화가 있소. 그대들은 그것을 가져다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아끼지 말고 뿌리시오. 그리고......."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일과 겸하여 투자를 하시오. 당금 중원의 상권(商權)은 대부분 황금전이 장악하고 있소. 그대들은 중원 전역에 흩어져 그들과 정면 대결을 벌이시오. 아마도 황금전에 희생된 상인(商人)들을 포섭해 자금을 대 주면 빠를 것이오." 팔잔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문주는 그렇게 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자금이 소요될지 알고나 하는 소리요?" "물론이오. 자금은 써도 써도 못쓸 만큼 충분하니 아무 걱정 마시오." 영호천문은 신비하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가능한 일 년 안에 황금전과 쌍벽을 이룰 정도가 되었으면 하오. 빈민구제사업과 병행하게 되니 필시 민심(民心)을 얻게 될 것인즉, 단기간 내에 황금전을 따라잡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게요." 영호천문.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계획들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이어 그는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다음, 팔잔에게 등룡천문의 보고(寶庫)가 있는 위치를 상세히 알려 주었다. "자! 떠나시오." 그는 흔쾌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주의할 것은 반드시 만통회(萬通會)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벌이는 일이오. 등룡천문에 관한 사항은 오직 그대들과 나만이 아는 비밀로 묻어 두도록 하시오." "알겠소이다!" 팔잔은 만면에 흥분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불구자로서 한 평생을 멸시와 천대 가운데 원한으로 버텨온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비로소 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것도 충분히 보람이 있을 법한 대업(大業)이 아닌가? 팔잔은 깊이 허리를 숙여 복명을 선언한 뒤, 막바로 그곳을 떠났다. 그러한 그들의 신법은 그야말로 바람같이 빨랐다. 이제 강호인들은 보지 않으려 해도 보아야 하고, 듣지 않으려도 들어야 할 것이며, 말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될 것이다. 이들 팔잔의 눈부신 변모를....... 제 12장 복수극(復讐劇)이 낳은 이면사(裏面史)들 ① 팔잔이 모두 떠나고 난 후에도 영호천문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그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친구! 그만 나타나시지 그러오?" "아!" 관목림 속에서 가벼운 탄성이 들려왔다. 이와 동시에 녹영(綠影) 하나가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스슥! 복면에 거미문신을 새긴 자, 동천목산의 촌락에 잠깐 모습을 나타냈던 그 신비의 여인이었다. 영호천문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귀하, 그 동안 나를 따라 다니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녹영은 뜻밖인 듯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그... 그럼 눈치 챘었소?" 음성이 전날과 달랐다. 아마도 일부러 가장한 것인 모양인데, 듣기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음성이었다. 어찌 되었건 영호천문의 응수는 여전히 여유로왔다. "귀하의 추종술에는 나도 탄복하는 바요.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눈을 속이지는 못하니까." 이는 겁을 주기 위한 과장 따위가 아니었다. 이 점은 불망객을 자처하기 전, 그의 별호에 무영(無影)이라는 어휘가 들어갔다는 것을 상기해 낸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녹영은 코웃음쳤다. "그래서 어쩔 셈이오?" "쯧!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외다." "무얼 말이오?" 영호천문은 갑자기 섬뜩한 시선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귀하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았소. 보지 말고, 듣지 도 말아야 할 것을 다 알게 되었단 말이오." "흥! 사내 대장부가 되어 가지고 뭔가 숨기려 든다는 것은 그만치 떳떳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지 않소?" "훗훗...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싸움에도 병법(兵法)이 있듯 말에도 나름대로 순서가 있는 법이오." 녹영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래서?" "후후... 결정하시오." "무슨 결정......?"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오. 나를 따르든가, 아니면......." 영호천문의 눈에 얼핏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보자 녹영은 예리한 비수에 맞은 듯 몸을 세차게 떨었다. 하지만 쏟아내는 음성만은 여전히 냉오했다. "흥! 자신만만하시군?" 영호천문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적어도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전에는 그물을 펼치지 않소." 녹영은 몸을 움츠렸다.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훗훗... 귀하는 내가 결코 자비로운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소. 하긴 당신이 내 과거지사를 안다면 그런 말은 묻지도 않았을 테지만." "당신의 과거지사......?" "귀하가 총명한 사람이라면 그간 미행을 통해 충분히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오." 녹영은 기억을 더듬는 듯 몇 차례인가 눈을 껌뻑이더니 급기야 경악성을 발했다. "악!" 그녀는 학질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 당신이... 황금전을 상대하는 것은... 복수 때문이오?" "그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소." "그... 그럼...... 그 후로는......?" "황금전 말고도 대상은 또 있소." "설마 그들 모두에게......?" 이번에는 영호천문이 녹영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들이 누구지?" "그... 그야...... 구정(九鼎)......!" 영호천문의 입술이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똑똑하군. 후후후......." 녹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일찍부터 무림인들은 황송하게도 내게 천중일정(天中一鼎)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지. 내가 너무 쉽게 죽어 버린다면 그들이 실망할 것 아니오?" 영호천문이 타인 앞에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이처럼 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 의도가 무엇이던 받아들이는 녹영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구나. 이제 남은 것이라곤 죽음 이거나 이 자와 함께 동귀어진하는 일 뿐이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천중일정이 어떤 사람인가? 한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손을 가지고 있으나 살(殺)을 피하지 않는다는 위인, 일단 마음만 먹으면 일체의 정(情)도 두지 않는다는 냉혈한, 이것이 그녀가 알고 있는 천중일정의 진면목이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이 담담하게 물었다. "어떻소? 결정을 내렸소?" 그러자 녹영은 대답 대신 기척도 없이 하얀 손바닥을 꽃잎처럼 뻗었다. 팟--! 유하면서도 날카로운 수강(手 )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음!" 영호천문은 짧은 신음성과 함께 가볍게 소매를 저었다. 슷! 그 순간, 투명한 은사가 그의 등 뒤로 뻗음과 동시에 녹영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만큼 쾌속절륜하게 몸을 빼냈다. 공격을 가장한 채 슬쩍 도주를 시도한 것이었다. "후후... 꽤 머리를 썼군." 영호천문은 빙글 돌아섰다. 그의 눈에 벌써 사, 오십여 장을 앞서 날아가는 녹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울창한 단풍숲 사이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저 정도면 가히 천하제일의 경공이로다!" 영호천문은 진심으로 감탄해마지 않았다. 숲 사이 공터. 슷--! 그곳에 예의 녹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하나의 커다란 암석 위에 내려서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휴우! 간신히 벗어났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스슥! "악!" 그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갑자기 암석 위에서 한 사람이 불쑥 일어선 것이었다. "천중... 일......." 그녀는 턱이 떨려 제대로 말도 이어가지 못했다. 영호천문. 그는 씨익 웃고 있었다. "기대가 어긋나서 안되었지만 그대는 내가 놓아주기 전에는 절대로 내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 악마......!" "호오! 아직 내게 그런 별호를 붙여준 사람은 없었는데?" "복수귀!" "하나가 더 늘었군." "살인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말을 마치자 영호천문은 더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으음!" 녹영의 입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도시 어느 방향으로도 피할 길 없는 부드럽고도 치밀한 경기가 뻗어 와 그녀의 온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종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털썩 꿇게 되고 말았다. 영호천문이 부복한 그녀를 내려다 보며 짓궂게 웃었다. "녹색거미, 나는 그대를 잘 알고 있다. 최근 무림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 ② 녹지주(綠地蛛).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대략 이 년 전부터였다. 소문에 의하면 동해(東海)로부터 건너 왔다고 하는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늙은이인지 젊은이인지조차 불명(不明)이다. 그는 소위 전문살수가 지닌 모든 조건과 자격을 구비하고 있는 위인이다. 늘상 소리 없이 나타나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그의 특이한 경공법은 능히 절기로 불리울만 했다. 그는 많은 살인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죽인 사람이 모두 녹림인(綠林人)이라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었다. 영호천문은 녹지주를 굽어보는 위치에 놓여 있는 한 바위에 가 앉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턱을 손바닥으로 받치며 물었다. "녹지주,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녹지주는 찢어져라 눈을 흘길 뿐 대답하지 않았다. "호오, 입을 열기 싫다 이건가? 그렇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지. 우선은... 후후......." 영호천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얼굴을 확인한 다음......." 그는 말과 함께 손을 뻗어 녹지주의 복면을 잡아채갔다. "안돼!" 혈도를 짚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녹지주는 기겁을 하여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저항은 별무소용이었다. 슥! 복면이 벗겨지더니 그 속에서 출렁 하고 비단결 같이 고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으음, 역시 여자였군." 영호천문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는 녹지주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조그맣고 예쁘장했다. 피부가 지나치리만큼 하얗고 눈 또한 범상치 않은 빛을 발하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 질긴 생명력을 지닌 한 떨기 야생화(野生花)와도 같았다. 영호천문의 입술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훗훗... 그럼 더 잘 되었지 뭔가?" 그는 고개를 바짝 들이대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녹지주, 지금부터 그대를 발가벗겨 번잡한 길거리에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어떨까?" "뭐, 뭣이?" 녹지주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감히, 꺄아악--!" 그녀는 말하다 말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 어느 새 영호천문이 그녀가 입고 있는 피의(皮衣)를 벗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이... 치한......!" 까무러칠 듯 놀라는 그녀를 보면서도 영호천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후후... 아직 잘 모르나 본데, 혹자는 날더러 탐화랑(探花郞)이라고도 하지." 녹색 가죽옷의 앞섶이 열리자 가장 먼저 눈부신 어깨가 드러났다. 영호천문은 그녀의 앞가슴을 노려보며 눈을 반짝였다. "저런!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군?" 녹지주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당장 그만 두지 않으면 내 언제고 네 놈을......." 그녀의 말은 영호천문에 의해 중도에서 끊겼다. "후훗! 그래, 더 앙탈을 부려 보시지. 여자는 의례 화를 내면 더 예뻐 보이게 마련이니까." 그는 가죽옷을 약간 더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러자 체격에 비해 놀랄 만큼 풍만한 유방이 밖으로 밀려나오려 했다. 녹지주. 그녀가 속옷을 입지 않은 것은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그런즉 그녀로서는 꺾이지 않을래야 꺾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흐윽! 말... 말할께요! 제발......."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하는 선까지 가고 말았다. "흠, 진작 그럴 것이지." 영호천문은 손을 떼며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녹지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색마(色魔)! 내 언제고 이 복수를 할 것이다." "후후... 전부터 그와 비슷한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말로 그렇게 한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천중일정, 너는 끝까지 비열하게 나오는구나." "쯧! 지금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릴 처지가 아닐텐데? 정말로 발가벗겨 매달려 보고 싶은가?" "아, 아니예요!" 녹지주는 상황이 워낙 긴급한지라 자신이 반말과 경어 사이를 마구 오가는 것도 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도리질을 해대던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구어졌다. "실은... 한 사람의 행방을 캐내기 위해 당신을 미행했어요." "그가 누구지?" 영호천문의 음성은 어느덧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중원무림 십대살객의 일인이자, 살인루를 세웠던... 해천일살 동천목이에요." 녹지주의 말에 그의 눈썹이 홱 거슬러 올라갔다. "무엇 때문에?" "그 자를 죽이기 위해......!" 영호천문은 녹지주의 눈이 경황중에도 살기를 내뿜는 것을 보며 왠지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으음, 그 이유는?" "그 작자는 나의 사부(師父)를 배신했어요."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녹지주의 표정이나 어투에서 뭔가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질문은 약간 방향을 선회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대가 최근 들어 녹림의 인물들만 골라 죽인 데에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물론이죠. 그것은 사자천효(獅子天梟),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자 때문이에요." "음......." 영호천문은 그제서야 대충 감이 잡혔다. '사자천효 육청풍과 해천일살 동천목은 다 함께 동영(東瀛)에서 무공과 그곳 특유의 인자술(忍者術)을 익힌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나타난 이 여인은.......' 그는 생각한 바를 즉각 말로 옮겼다. "낭자, 그대는 동영에서 왔겠지?" 녹지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걸 어떻게......?" 영호천문의 담담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필경 낭자가 없애려 드는 육청풍과 동천목, 낭자의 사부 등은 동문(同門)이겠고. 맞나?" "으음!" 녹지주는 안면을 일그러뜨린 채 몹시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곧 시인한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상대의 직관력을 보건대 더 이상 아무 것도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체념한 듯 말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동영이란 왜국(倭國)이다. 일각에서는 그곳을 일컬어 부상국(扶桑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해를 거쳐 일만 리를 가면 하나의 작은 섬나라가 나오는데, 중원에 비해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들의 기질은 대개 잔인할 뿐더러 매우 공격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문인지 부상국의 무술은 인자술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쾌도법(快刀法)이 무척 발달되어 있었다. 일정문(日正門). 이는 부상국 제일의 인자문(忍者門)이다. 그들은 누대에 걸쳐 전문살수를 키워 왔으며, 그런 만큼 수백 년의 전통과 더불어 엄중한 밀법(密法)을 자랑하는 문파다. 그리고 그 비법은 극히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해져 왔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일정문에 중원에서 흘러 들어온 두 명의 한인(漢人)이 입문하게 되었다. 전례로 보아 그것은 대단한 파격이었으나 일정문주가 그들의 자질에 반한 나머지 수하들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임의로 단행했던 것이다. 과연 그들 두 사람은 문주의 기대대로 엄청난 시련과 고초 속에서도 초인적인 극기(克己)와 인내로써 끝내 인자수련을 마치고 부상국 최고의 인자들이 되었다. 어떤 일이고 다 그렇듯 문제는 뜻하지 않은 데서 발생했다. 당시 젊었던 그들의 이름은 육청풍과 동천목, 이 혈기방장한 두 청년은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목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그들 두 사람의 관심을 끌만큼 아름답고 총명했던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일정문주의 무남독녀(無男獨女)였다. 불행은 이렇게 발아했고, 점차로 이들의 삼각관계는 파국(破局)을 향해 치달아 갔다. 본래 육청풍은 보기 드문 미남인데 반해 동천목은 키도 작거니와 외모가 정말로 보잘 것이 없었다. 하지만 본하미(本何美)라는 이름을 가진 일정문주의 여식은 육청풍보다 진실한 성품을 지닌 동천목에게 더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 낌새를 눈치 챈 육청풍은 질투를 억누르지 못해 어느 날 밤, 기어이 미혼향(迷魂香)을 써 본하미를 겁탈하고 말았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그날밤에 하필 본하미의 거처 주변을 기웃거리던 동천목이 그들 두 남녀의 정사장면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려 버렸다. 동천목은 분노하기에 앞서 비탄에 사로잡혔다. 진즉부터 외모 때문에 자격지심이 컸던 그는 사랑하는 사매가 자신이 아닌 육청풍을 선택한 것으로 크게 오해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동천목은 그날밤으로 서둘러 동영을 등졌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중원으로 건너가 버렸던 것이다. 사건은 그 선에서도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이들 삼 인을 덮어 누르고 있는 운명은 단지 한 사람만의 희생으로 평탄해질 정도로 간단한 것이 못되었다. 육청풍. 그는 애초 인자술을 익히고자 했던 이유가 그러했듯 야심만만한 위인이었다. 그는 사매를 간(姦)하기는 했으나 막상 그녀를 책임지며 동영에 눌러 앉아 있을 생각이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경위야 어찌 되었건 사매가 자신과의 육체관계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천목을 잊지 못해 결혼하기를 거부하자 그는 핑곗김에 사문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육청풍은 일정문 최고의 비서인 일정신서(日正神書)를 훔쳐 중원으로 달아났다.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최후로 인간성마저 헌신짝처럼 내던졌던 것이다. 이래서 가장 불행해진 사람은 본하미였다. 그녀는 저주의 씨앗인 육청풍의 아이를 잉태했으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아이마저 사산(死産)하게 되자 충격을 받아 미쳐 버렸다. 그 후로 본하미는 오랫동안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혼미(昏迷)의 세월을 살다가 겨우 십 년 전에야 정신을 되찾았다. 이때에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오직 복수의 일념 뿐이었다. 그녀는 육청풍을 죽도록 증오하는 한편, 자신의 진심을 몰라 주고 휭하니 떠나버린 동천목도 역시 동일선상에 두었다. 그리하여 본하미는 중원인을 부모로 둔 한 소녀를 일정문의 제자로 거두고는, 그 소녀로 하여금 인자의 법도마저 초월한 극한의 고통을 겪게 하여 훈련을 쌓아가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일정문에는 또 한 명의 최고 인자가 탄생되었고, 본하미는 그녀를 바다에 띄워 보냈다. - 중원으로 가라! 가서 두 사람을 죽여라. 이것이 사부의 뜻이고 네가 빚을 갚는 길이다. 이로써 너와 나의 관계도 끝난다. ③ 영호천문. 그는 녹지주의 긴 얘기를 듣고 나자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흐음, 정녕 기구하기 짝이 없군.' 그는 한으로 점철된 이국녀(異國女)의 삶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하여 자신도 모르게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곧 현실로 돌아와 냉정을 회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들어 녹지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부의 오랜 비애가 전이된 것처럼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그녀에게 영호천문이 담담히 물었다. "녹지주, 그대는 정말로 동천목을 죽일 작정이었는가?" 녹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부께서 죽이기 전에 한 마디를 꼭 전하라고 했어요. 하미(何美)는 목(木)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노라고." 영호천문은 정색을 지었다. "녹지주, 그대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어차피 그를 죽일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되었으니까." "무슨 뜻이죠?" "그대는 아직 애증(愛憎)을 모른다. 본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녹지주는 발칵 성을 냈다. "흥! 점점 더 어렵게 말하는군요?" 영호천문은 쓸쓸하게 웃었다. "본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란 그렇듯 복잡한 법이지. 분명한 사실은 한 가지 뿐이다. 그대가 죽여야 할 대상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것."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걸 단언하는 거죠?" "궁금하면 가르쳐 줄까?" 그는 고개를 들더니 망망한 하늘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그 정도는 내게도 경험이 있으니까." "으음......." 녹지주는 안면을 씰룩일 뿐 더 이상 덧붙이지 못했다. 해는 어느덧 서편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일몰(日沒)의 비애를 담은 듯한 영호천문의 음성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녹지주, 찾아 다니지 않아도 때가 되면 동천목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그게... 무엇이죠?" 녹지주의 야성미 넘치는 얼굴에서 적의(敵意)가 사라진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건 그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서 말해 보세요." "당분간 그대는 나와 손을 잡는다. 사자천효는 거목(巨木)이자 효웅(梟雄)이지. 그는 과거의 육청풍이 아니다. 백만 녹림의 총수령이며 일신의 무공도 당금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다. 아무리 그대가 철저한 수련을 받았다 해도 사자천효의 근처에 가기도 전에 그의 수하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으음!" 녹지주는 낮게 신음을 흘리는 한편,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이한 시선으로 영호천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영에 있을 적부터 벌써 고아가 된 처지였다. 그러므로 중원이라는 드넓은 대륙은 그녀에게 있어 그저 낯선 땅일 따름이지,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의미를 건지려 한다면 차라리 냉혹무비한 수련을 통해 승냥이처럼 키워졌을망정 사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이 나았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왜 이다지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단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믿고 따라도 좋을 사람이 아닐지......? 사부님의 감정을 쉽게 헤아렸듯 혹 타인의 고독도 그처럼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마음이 장차 화를 부를지 어떨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인생은 언제부터인가 모험의 연속이었으므로. 영호천문이 이 열정적인 여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이제부터 전처럼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 어떤 행동을 하건 상관치 않을 테니까. 단,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 어느 새 녹지주는 자신도 모르게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첫째는 내 신상에 관해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두 번째로는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사자림(獅子林)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녹지주가 눈을 반짝 빛내며 되물었다. "사자림에 들지 말라는 것은 왜죠?" "왜라니?" "혹시라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냐는 거예요." 영호천문은 처음으로 생긋 웃는 그녀가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원한다면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럼 저도 당신 말을 따르겠어요." 선선히 말하는 녹지주에게 그는 덧붙여 지시했다. "그대는 이후로 은밀히 사자림의 동태를 살피고 그들의 허실을 탐지해내야 한다. 그 경과는 수시로 보고하되, 곧 강호상에 만통회라는 조직이 나타날 것이니 그들에게 알리면 된다." 말을 마친 영호천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차후로 일이 있으면 그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스슷--! 그의 신형은 흡사 연기처럼 스러져 버렸다. "이... 이봐요......!" 녹지주는 부르짖다 말고 굳어지고 말았다. 불러 세우려던 대상이 사라지고 없자 제 풀에 허탈감에 빠졌던 것이다. "흥! 거만 떨기는......!" 그녀는 자못 입술을 삐죽였으나 안면에는 섭섭한 기색이 가득 했다. 이어 그녀는 열려진 앞섶을 여미려다 머릿 속에 무엇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은은하게 붉혔다. 그런 느낌은 갑자기 세상이 몹시 신비로와진 듯한 소녀적 감상과도 비슷했다. 동영 최고의 인자 중 하나인 녹지주의 입에서 그녀답지 않게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분과 평생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곧 정신이 수습되었는지 투명한 은사를 뻗어냈다. 그리고는 은사를 따라 가볍게 몸을 날렸다. 스슷--! 그녀의 입가에는 전에 없던 달콤한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나의 사랑이 다시 붉은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인지....... 한 마디로 폭풍기(暴風期)라고 하면 맞았다. 현 무림은 우후죽순과도 같은 신흥문파의 난립과 함께 기존문파 간의 세력다툼, 기사효웅(奇士梟雄)들의 야망으로 인해 일로 각축장으로 화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입동(立冬)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또다른 강한 바람이 중원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여 무림인들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만통회(萬通會). 최근에 느닷없이 출현한 이들은 회주가 누구인지, 조직의 총단이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구성 인원이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그 무엇도 도시 알려진 바가 없었다. 만통회는 나타남과 동시에 대강남북 전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내막적으로는 황금(黃金)의 바람이다. 그들은 막대한 황금을 전 무림에 투입시키면서 등장했던 것이다. 먼저 그들이 손을 쓴 것은 구호사업이었다. 빈민을 구제하고, 병자(病者)를 치료하며 고아(孤兒)들을 양육하는 등 자금성에서도 미처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에서 폭넓은 영향력을 과시했다. 또한 그들은 구호사업과 병행하여 전 중원의 상권(商權)을 장악해 갔다. 자금을 어떻게 대고 있는지는 모르나 그들의 힘은 무림에 황금전쟁(黃金戰爭)을 파생시켰다. 겁도 없이 그들보다 앞서 중원의 상권을 독점하고 있던 황금전(黃金殿)과 불꽃 튀기는 정면대결을 벌였던 것이다. 황금전의 금력(金力)에 도전하는 행위란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인들도 처음에는 이 점을 전혀 회의하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통회가 자멸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황금전에 금력과 사업체를 빼앗기고 망했던 지난 날의 부호들이 대거 만통회에 가입, 짧은 기일 내에 짜임새 있는 조직력을 갖추더니 종내에는 황금전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만통회는 빈민구제사업으로 민심(民心)을 얻어 놓아 그것이 든든한 기반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그들이 불러 일으켜 놓은 황금의 바람은 날로 무섭게 확산되어 갔다. 그들 말고도 무림에 크나큰 충격파를 던진 단체는 또 있었다. 군마맹(君魔盟). 이들이 내건 기치는 놀랍게도 복수였다. 군마맹의 요인(要人)들은 전부 다 과거 천중일정 영호천문에게 패하고 그 자리에서 복종을 맹세했던 자들로서, 그간 잠잠히 있다가 그가 죽었다고 알려지자 즉시로 혈맹(血盟)을 결성하고 봉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맹주인 천안수사(天眼秀士)는 전 무림에 선포했다. - 천중일정은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천하제일정(天下第一亭)이다. 그를 합격하여 시해한 자들은 나머지 구정(九鼎), 그 비열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본 군마맹은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폭탄선언이었다. 역시 무림인들은 믿지 않았다. 군마맹이 아무리 강성하단들 어찌 당금 무림의 최고인들이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구정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단 일정이라도 꺾을 수 있다면 그것만도 대사건이리라. 그때문에 무림사(武林史)를 고쳐 써야 할 테니까. 여기서 정녕 뜻밖인 것은 구정들의 반응이었다. 그처럼 어불성설로 취급되던 군마맹의 선언에 구정은 하나같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나름대로 방어막을 구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에 군마맹은 그 틈바구니에서도 일사불란한 조직의 힘을 빌어 교묘하게 구정을 위협해 갔다. 다만 이 점은 세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행동이 모두 극비에 붙여졌기 때문이었다. 겨울도 점차로 깊어 가고 있었다. 덕분에 중원의 산하는 온통 싸늘하게 얼어 붙어 버렸고, 스산한 소멸의 노래만이 동토(凍土)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기 천하제일의 금력을 과시하는 황금의 신전(神殿)이 있다. 이로 인해 태산(泰山) 일대가 금광(金光)에 휩싸였던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황금전(黃金殿). 이제 이 이름은 누구도 감히 경시하지 못한다. 가진 바 그 위대한 힘을 누를 자가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리라.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거의 성역(聖域)시 되던 이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괴사(怪事)가 연발하고 있었다. ④ 쾅! 황금으로 된 탁자가 대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내리친 주먹이라야 그저 보통 크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손목에는 매우 보기 드문 팔찌가 채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름도 채 알 수 없는 보석들이 잔뜩 박혀 번쩍이고 있었다. 손가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각 손가락마다 일일이 휘황찬란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의 짓이냐?" 격노한 음성이 신전을 뒤흔들었다. 한 사람. 그는 이 시대가 이루어낸 살아있는 황금의 신이다. 그렇지 않고야 그처럼 일신을 보석과 황금으로 두루 치장할 수는 없다. 화복을 입었으며 무척 뚱뚱했다. 전신이 마치 하나의 공(球) 같았고, 안면에도 살이 흘러 내려 눈이 파묻힐 정도였다. 이 사치스럽기 짝이 없고 비대한 인물이 황금전주(黃金殿主)인 금백만(金百萬)이었다. 구정 중 일인이기도 한 그는 과거에 비해 변한 게 없었다. 변화래야 몸이 더 불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는 대노했던지 이마에 푸른 심줄이 돋아 있었다. "그래, 어떤 죽일 놈이 감히 밤마다 황금충(黃金筮) 앞에서 모독행위를 벌인단 말이냐?" 그의 앞은 황금판을 깐 바닥이었다. 지금 그곳에는 네 명의 금삼(金衫)을 입은 중년인들이 코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기색으로 미루어 그들이 어쩔 줄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벌써 열아홉번째이거늘, 아직도 범인의 윤곽을 잡지 못했단 말이냐?" 금백만의 노화는 아무래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밤 여보란 듯이 벌어지고 있는 괴사건은 실로 예삿일이 아니었다. 황금전의 중앙에는 위대한 금력의 신을 상징하는 황금충의 상(像)이 있었다. 높이 일장여에 순금으로 제작된 그 상은 그들이 절대적으로 숭앙해마지 않는, 말 그대로 돈벌레의 조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새벽녘이 되면 의례껏 황금신전은 도저히 맡아줄 수 없는 악취로 가득 차 있곤 했다. 불경스럽게도 누군가 황금충 앞에다 대변을 보아 놓았던 것이다. 이같은 일은 황금전으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성스럽게 떠받들어지는 황금충상을 모독하는 행위란 결과적으로 그들의 정신적 지주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금백만은 급기야 치를 떨며 발을 굴렀다. 쾅--! 그 바람에 황금으로 된 바닥이 무력하게 움푹 꺼져 들어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가느다란 눈이 불을 뿜었다. "잡아라! 사흘간의 여유를 주겠다. 만일 그때까지도 잡지 못하면 너희들을 제물로 삼겠다." "보... 복명(復命)......!" 그로부터 사흘 후. 금백만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비곗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게 정말이렷다?" 네 명의 금의중년인이 한껏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입니다. 놈들에게 오대극형을 가해 자백을 받아낸 바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 분타주들이거나 부분타주들로서 분명히 불망객(不忘客)의 사주를 받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고 실토했습니다." 금백만의 살에 파묻힌 눈에서 푸르스름한 살광이 새어 나왔다. "그 불망객이란 놈의 자취는 알아 보았느냐?" "거... 거기까지는 아직......." "금후로 열흘의 기간을 주겠다. 놈을 잡아 들여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금백만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태사의에 거만하게 버티고 앉은 채 스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만통회의 회주가 누군지는 알아 냈느냐?" 한 중년인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그것은... 백방으로 노력을 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얻은바가 없습니다. 다만 뜻밖의 정보를 한 가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만통회를 움직이는 주역이 팔잔(八殘)이라는......." "뭣이!" 금백만의 반쯤 뽑힌 듯한 눈썹이 홱 곤두섰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태는 심각하다!" "그렇습니다." "황금사령(黃金死令)을 동원해라." "넷?" 중년인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금백만의 기세는 단호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 기회에 만통회를 섬멸시켜 버리겠다." "알... 알겠습니다." "속히 긴급 명령을 발동하라!" "넷!" 금백만은 대답을 듣고 나자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태사의를 빙글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그의 시선은 벽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중원전역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각 지역의 황금전 분타는 모두 묘안석으로 알아보기 쉽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훗훗훗... 나 금백만을 우습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친다. 불망객과 만통회,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본좌에게 도전하는지는 모른다만 곧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그의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후훗! 두고 보아라.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는 황금전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용천후, 너와 나의 사이도 현재와는 무척 달라지겠지? 후후... 협정은 어디까지나 협정일 따름이고, 야망은 별개니까. 때가 이르면 정녕 볼만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구정 중 일정인 황금전주 금백만의 속셈은 그 자신 외에 아직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낙인(落印).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명성이나 위업을 단번에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므로. 그것도 현재에는 아주 그럴싸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위인이 크건, 작건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불명예의 낙인이 찍혀 버린다면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꼭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었다. 세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부르짖었다. 강호무림에 마침내 전무후무한 정풍(整風)이 분다고. 놀랍게도 그 일은 대단히 담이 큰 한 사내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정풍이란 문자 그대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거니와, 그 대상이 속속 밝혀지자 천하가 발칵 뒤집어졌다. 드넓은 중원 대륙에는 무림정의가 뿌리내린 이후로 누대에 걸쳐 수많은 명문세가와 기웅협사, 혹은 대인협들이 탄생되었다. 그들은 대개 때가 무르익으면 지난 날의 업적에 힘입어 문파를 세우고 만인의 존경과 흠모를 한몸에 받기 마련이다. 그런 류의 인물들이 어느 날인가 세인들 앞에 죄인(罪人)으로서 부끄러운 얼굴을 내밀게 되었으니....... 그들이 아성처럼 쌓아 올렸던 찬란한 금자탑도 물론 일시에 와르르 허물어져 버렸다. 이 사태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다. 소위 정파의 협의명숙(俠義名宿)임을 자랑하던 자들이 인륜을 저버린 위선자라니,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청백서(淸白書). 사건의 발단은 그런 이름이 붙은 종이가 중원전역에 배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무림 각처의 내로라 하는 인의대협들의 죄상과 그들의 자인문(自認文)을 포함하여 수인(手印)까지도 명확하게 찍혀 있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위천(僞天), 즉 하늘을 속인 인간군상들이 이제껏 협의명숙이라는 미명하에 범인(凡人)들 위에 버젓이 군림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중원무림의 정신 기반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다. 협의의 가치가 뭉개지고, 인륜과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명예와 인격이 더럽혀진 채 시궁창에 처박힌 마당에야 더 이상은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바가 없어져 버렸다. 수개월 전 천도세가(天都世家)의 황산신협(黃山神俠)이 수치감을 못이겨 자결을 한 것도 작금에는 별 대단한 사건이 못되었다. 그를 필두로 곳곳에서 같은 일이 무수히 벌어졌으므로. 그들 중 굵직굵직한 인물들만 나열해 보아도 대충 이러했다. 청해(靑海)의 성자(聖子)라 불리웠던 천강신군(天剛神君), 감숙(甘肅)의 천라성봉(天羅聖峯), 새북(塞北)의 철수진인(鐵手眞人), 무당(武當)의 천선우사(天仙羽士), 하남(河南)의 선인장공(仙人掌公) 위천성(韋千成), 검문(劍門)의 검문협(劍門俠) 노웅(魯雄), 강남(江南)의 동정어옹(洞庭魚翁), 공동( )의 비검서생(飛劍書生) 전비(全比), 태양곡(太陽谷) 태양신(太陽神) 화동방(火東方), 칠성문(七星門)의 칠성우사(七星羽士) 남당구(南堂九) 등등. 하나같이 쟁쟁한 일대의 인의대협들인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황산신협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모두가 한 문파의 종주이거나 한 지역의 패주들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찍힌 위선자라는 낙인은 크나큰 불행을 가져 왔다. 그들이 이끌던 문파가 문을 닫아 걸었고, 그들의 제자나 혈족들이 전부 무림에서 일체 발을 끊었다. 이런 와중에 당사자들이 어찌 되었는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대개의 경우 치욕을 감당하지 못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자결로써 해결을 보고자 했기에. 중원의 겨울은 정녕 가혹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 종내 인간의 교류에서 없어서는 안될 신뢰감(信賴感)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들은 만나면 서로 말을 건네기에 앞서 눈으로 묻는다. - 당신은? 당신도 혹 가면을 쓴 늑대가 아니오? 그들은 형제를 의심하고 가족을 의심했으며, 친구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런 불신의 풍조는 곧 도래하게 될 봄에 대한 기대마저 그들의 가슴 속에서 모조리 빼앗아가 버렸다. 그들은 제각기 부르짖었다. - 빌어먹을 무림이여......! 제 13장 화중화(花中花) ① 어쨌든 봄은 왔다. 그토록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지난 겨울도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는 밀려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봄은 차라리 인간사의 부침(浮沈)을 조롱하며 멀고 먼 강남으로부터 찾아왔다. 풍광의 수려함이야 기정 사실이다. 시인(詩人)은 이 가절(佳節)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느덧 망각의 강을 건너 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런즉 봄은 꽃, 꽃은 다시 나비를 부를진대 이를 감상하는 미인의 눈에 어찌 영롱한 춘정(春情)인들 어리지 않겠는가? 천아월(千娥月). 그녀는 소주제일미녀(蘇州第一美女)다. 누가 말했던가? 아월(娥月)의 눈은 서호(西湖)와도 같고, 그녀의 멋들어지게 휘어진 눈썹은 아미월이라고. 천아월은 소주의 일문(一門)인 천가보(千家堡)의 금지옥엽이다. 올해로 십팔 세, 한창 나이의 그녀에게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서면 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달조차 구름 속에 숨어 버리노라고 말이다. 자고로 칭송이란 당사자를 환상에 빠지게 한다. 천아월도 예외는 아닌지라 그녀는 항상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선계(仙界)의 인물인 듯한 미청년이 금수레를 타고 나타나 자신의 앞날을 찬란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리라는....... 그런데 그녀의 머리 위로 졸지에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그녀의 연보라빛 꿈이 어느 날 갑자기 한 괴인(怪人)의 발길에 의해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명 화화사자(花花使者). 달리 포화낭군(捕花郎君)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그 자는 이르자면 꽃을 잡는 것이 주된 임무인 위인이었다. 그가 천가보에 찾아온 것은 삼일 전이다. 그것도 당금 천중오패(天中五覇)의 하나인 화중부(花中府)의 사자로서 와 있다. 화중부에서는 매 해마다 봄이 되면 반드시 한 번씩 탐화제(探花祭)를 벌인다. 즉 그들이 임의로 각처에서 미녀들을 선발한 후, 화화사자를 보내 화중부로 데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화중부의 탐화제는 이미 무림 전역에서 유명한 행사였다. 행사의 규모라던가 사람들의 관심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행사가 지니는 강제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화중부의 미녀 선발기준이 워낙 엄격하다 보니 뽑히면 일편 영광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으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입부(入府)해서 대체 무얼 하게 되느냐는 점이었다. 따라서 한때 미녀들은 그곳에 들기를 죽자고 거부했고, 그녀들의 가문에서도 고분고분하게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그 행사가 이후로도 매년 어김없이 시행되어왔다는 것은 곧 그들 모두가 화중부에 꺾였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았으며, 이 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선발된 미녀들은 눈물을 뿌리면서도 화화사자를 따라 화중부로 끌려 가곤 했다. 이번의 화화사자는 미식가(美食家)였다. 삼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아직 젊고 영준한 그는 천가보의 보주인 구환검(九環劍) 천우주(千宇主)에게 화화첩(花花帖)을 전달한 뒤, 벌써 삼일째 객원의 별실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음식만을 축내고 있었다. 그가 먹어대는 음식이란 대부분 직접 주문한 별식들 뿐이었다. 오리 혓바닥 요리에서부터 사슴고기를 재료로 한 오향장육, 진귀한 양념만을 넣은 팔면채, 비둘기 고기로 만든 탕수육 등등 그가 원하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천가보주인 천우주는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화화사자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가문이 몰락할 판국인지라 그는 무슨 요구든 다 받들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다가 딸인 천아월마저도 화중부에는 절대 들지 못하겠노라고 생떼를 쓰니 그는 이중고(二重苦)를 치뤄야 했다. 화중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먹지 않게 구는 화화사자의 시중 들랴, 여식 달래랴, 천우주가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끝에 기진맥진했을 무렵에야 일은 매듭이 지어졌다. 삼일 내내 방구석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고 구슬피 울며 몸부림을 쳐대던 천아월이 꿈에서 깨어난 듯 현실을 받아 들이겠노라고 예쁜 소리를 했던 것이다. 돌덩이가 되어 구를지언정 이승이 낫다는 속언(俗言)이라도 상기해 냈는지 그녀는 그 밤으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목욕재계와 더불어 부지런히 몸치장까지 했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 싶게 매우 담담한 얼굴이었는데, 이는 생존을 위한 그녀의 집념이 그만치 처절하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가서는 가문의 보존까지도 염두에 두었겠지만. 천아월은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정오 쯤에는 화화사자를 따라 얌전하게 마차(馬車)에 올랐다. 흔들리는 마차 안. 그곳에서 천아월은 두려움보다는 한 가닥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아까부터 줄곧 맞은편에 앉아있는 화화사자를 훔쳐 보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해라. 흔히들 화화사자로 온 자들은 몹시 색(色)을 밝힌다고 하던데 이 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았잖아? 정말로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자인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화화사자는 그녀에게 추근거리기는커녕 지금까지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물론 화화사자는 선정된 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온전한 순백지신인 채로 화중부에 데려 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해진 규약일 뿐 그것을 지키는 화화사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문책이 있을테니 감히 최후의 선까지는 이르지 못해도 화중부로 들어가기 전에 미녀들을 마음껏 주무르고 희롱하는 것이 상례라는 일설이 있다. 의혹이 길어지다 보니 감정 자체가 마냥 느슨해진 것인지, 천아월은 화화사자에게 호감이 이는 자신을 느꼈다. '이 사람은 보아 하니 이런 일을 할 인물 같지 않은데, 대체 무슨 연고로 화중부에 속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곧 얼굴을 은은하게 붉히기도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분명히 이 사람에 의해 다시 못올 곳으로 끌려가고 있으면서.' 그녀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푹 떨구어졌다. 부질없는 감상에서 벗어나자 애써 접어 두었던 비감(悲感)이 다시금 가슴을 가득 메워왔기 때문이었다. 냉랭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린 것은 이때였다. "낭자, 화중부에 들어가면 구름같이 많은 미녀들이 모여 있소. 낭자는 자신이 그 중 어느 정도 수준이라 생각하오?" "그, 그야......!" 천아월은 눈치껏 대답하고자 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질문이 너무 가당치 않다보니 머리를 굴려도 걸맞는 답이 있을 리 없었고, 무엇보다 상대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화화사자의 한 마디는 그녀에게 경계심만을 불러 일으켜 놓아 두 남녀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끌던 화화사자는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부주(府主)께서는 이번 탐화제로 일천화(一千花)를 채울 것이라 공포하셨소. 아울러 그 일천화 가운데 제일화인 화중화(花中花)를 뽑겠다는 말씀도 계셨소." 천아월은 은연중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기왕 이렇게 신세가 정해진 바에야 미녀 중의 미녀라는 화중화가 되어 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전... 자신이 없는 걸요......?" 그 말은 언뜻 부정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기실은 여망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화화사자가 이를 알아 차렸는지 빙그레 웃었다. "낭자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네?" "화중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오." "그게 무슨 뜻이죠?" 의아해 하는 천아월의 눈에는 벌써 모종의 욕망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화화사자는 꽤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화중부의 사대화화사자(四大花花使者) 가운데 가장 눈이 밝은 사자요. 내 눈이 틀림없다면 낭자는 화중화가 되기 위한 기본의 조건을 가장 완벽하게 보유하고 있는 여인이오." "아!" 천아월은 탄성을 발하더니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화화사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망울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강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그 말, 정말인가요?" 그녀의 어투가 다소 담대해진데 반해 화화사자는 종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투로 응수했다. "내 이름은 이옥랑(李玉郞)이오." "흐음!" "낭자와 거래를 하고 싶소." 천아월이 아미월 같은 눈썹을 봉긋 치켜 올렸다. "어떤 거래 말인가요?" 이옥랑은 도시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금후로 힘닿는 데까지 낭자로 하여금 화중화가 되도록 밀겠소. 화중화가 되면 낭자는 부주의 사랑을 독차지할 뿐더러 그 분의 제일부인이 되어 화중부의 대권을 수중에 거머쥐게 될 것이오." 천아월의 눈이 영활하게 움직였다. "거기에는 상응하는 조건이 있겠죠?" "내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소만, 낭자는 확실히 나와 잘 통하는 데가 있소. 후후후......." 이옥랑은 의기투합을 정말로 기뻐하는 것인지, 혹은 그녀를 비웃는 것인지, 도시 감을 잡기 어려운 웃음소리를 흘려냈다. 반면에 천아월은 이 점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좋아요!" 그녀의 시원스러운 대답에는 오히려 이옥랑이 놀랄 지경이었다. 그는 잠시 멍하고 있다가 내심 중얼거렸다. '하긴 여인으로서의 생이 포기된 마당에야 권력(權力)에 욕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화중부의 부(富)와 힘은 그 누구라도 탐낼만 하니까.' ② 이윽고 천아월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물어왔다. "어떤 방법으로 제가 화중화가 되는 거죠?" 그녀의 몸에서 야릇한 방향(芳香)이 풍겨 나왔다. 이옥랑은 코로 처녀 특유의 향기를 고스란히 느끼는 한편, 가까이 디밀어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내심 고소했다. '여인이란 이래서 어쩔 수 없이 요물(妖物)인가?' 그는 취한 듯 다소 몽롱한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의 체향(體香)은 아주 훌륭하오. 부주에게 이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빠져 버리고 말겠소." "그것도 혹시 화중화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에 속할 수 있을까요? 호호호......." 천아월은 어느새 두려움이나 슬픔 따위는 모두 잊은 듯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은 듯 앞으로 푹 쓰러졌다. "어멋!" 때마침 덜커덩하고 마차가 몹시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바람에 그녀는 이옥랑의 품에 안긴 꼴이 되고 말았는데, 이에 대처하는 그녀의 반응은 실로 놀라웠다. "미안해요. 호호... 그렇지만 전들 어쩌겠어요? 갑자기 마차가 흔들려서 그런 것을요." 천아월은 이 형식적인 말을 방패 삼아 이옥랑에게서 떨어지기는커녕 되려 팔을 둘러 그의 목에 매달렸다.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닌가요? 이곳에는 지금 우리 두 사람밖에 없고... 우리는 앞으로 뜻을 같이 할......." 그녀의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옥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건 낭자의 말이 맞소. 아니,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낭자를 안고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구려." 천아월은 눈가에 은은히 열기를 담은 채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죠?" "처음 이 마차에 오를 때부터." "흐음, 대단한 자제력이군요. 그러나 난......." 이옥랑은 부딪쳐오는 그녀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잠시 그들 사이에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었다. .......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술을 도로 떼며 나직이 속삭였다. "방금 생각난 건데요, 난 당신이 목석(木石)인 줄 알았어요." "흐음? 그럼 지금은......?" "아니죠. 호호호호......." 천아월은 뜨겁게 달구어진 뺨을 그의 얼굴에 마구 갖다 비벼댔다. 그 기회를 빌어 이옥랑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 움직였다. "아아......!" 그녀의 입술에서 더운 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를 열기로 몰아넣던 손의 율동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왜......?' 라고 그녀의 눈이 묻자 이옥랑은 손을 빼내며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낭자도 잘 알고 있지 않소? 화중화가 되기까지는 청백지신을 지켜야만 되오.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오." "으음......." 천아월은 대답 대신 묘한 신음성을 발했다. 이어 그녀가 자세를 고치며 옷깃을 추스르는 동안 이옥랑의 눈썹이 드러나지 않게 약간 찌푸려졌다. '정녕 놀라운 변신이로구나. 상황이 바뀌었다 싶으니까 권력으로도 모자라 쾌락까지 취하겠다는 것인가? 이 정도의 기질이라면 타고난 요화(妖花)라고 보아도 무방하겠군. 단지 지금까지는 평범한 환경 속에서 살아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가 표면적으로 지어내는 미소만은 여전히 신비로웠다. "후후... 그렇게 애통해할 것 없지 않소? 화중화가 된 다음에도 우리는 수시로 만나게 될텐데." "그래요, 당신이라면 언제든 환영하겠어요. 설사 제 신분이 당신보다 위일지라도 말이에요. 호호호......." 천아월은 흡사 자신이 이미 화중화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꿈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건네다 보았다. 이옥랑이 그녀를 보며 불쑥 한 마디 했다. "미리부터 너무 기죽이지 마시오. 당신은 아직 화중화도 아니며, 현재는 분명히 내 손 안에 있으니까." "호호호... 설마 부주를 상대로 질투하는 것은 아니겠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어쨌든 좋아요. 어떻게 제가 화중화가 된다는 거죠?" "그건 내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되오. 내게 비책(秘策)이 있소." "비책......?" "낭자가 천하제일미녀가 될 수 있는 비책 말이오." "으음!" 천아월의 얼굴에서 요염한 빛이 발산되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벅찬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어서 시작하세요." "알았소. 우선 모처(某處)로......." 무려 수백 종에 이르는 약초(藥草)가 함께 달여졌다. 거기에는 상상을 불허하는 희귀한 약재들이 첨가되었으며 수십 종의 향유(香油)까지도 부어졌다. 언제 준비했는지 그는 모든 안배를 완벽하게 마쳐 놓은 상태였고, 지금은 실제적인 단계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특수하게 배합된 약즙이 욕조의 물에 부어지면서 그의 역할은 일단락이 지어졌다. 욕실(浴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욕조에는 신비한 향이 풍기는 벽옥빛의 물이 넘치도록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호호호... 이 물로 몸을 씻으란 말이죠?" 천아월이 흥분으로 인해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욕실에는 지금 그녀와 이옥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이옥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말로 이 물이 나를 화중화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왠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그러자 이옥랑은 여느 때에 비할 수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지만 나는 그 동안 많은 연구를 했소. 이것은 보통 목욕수가 아니오. 선단비법(仙丹秘法) 중 한 가지인 불로천옥로(不老天玉露)라는 것이오." "으음......." "이 액체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게 되면 평생 동안 피부에 주름이 가는 법이 없소. 항상 백옥같이 희고 광택이 흐르며 탄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지게 되오. 뿐만 아니라......." 이옥랑은 빙긋 웃었다. "이 속에 함유된 향유의 기운은 후각을 통해 사내들을 매혹시키는 마향(魔香)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되어 있소. 낭자는 그 향을 죽을 때까지 지니게 될 것이오." "그게 정말인가요?" 천아월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후후후...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오. 그 하나만으로 어찌 천하제일의 미녀가 되겠소? 목욕을 마치면 다른 방법도 시행해야 하오." "다른 방법이란 어떤 거죠?" "어쩌면 이 편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소. 낭자의 골격구조를 바꾸는 일이니까." "네엣?" 천아월은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 놀랄 것 없소. 내가 진즉 말하지 않았소? 완벽한 미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크지도 적지도 않은 키, 거기에다 갸름하고 곡선을 그리는 어깨, 팔과 다리의 균형, 허리의 선, 손가락 마디 등 신체의 균형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미인이란 만들어내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오." "아무리 그렇다지만......!" 천아월은 넋이 나간 듯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설마... 당신이 저를 그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요?" 이옥랑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천아월이 그를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구죠?" "후후후... 새삼 그걸 묻다니, 분명 이옥랑이라고 하지 않았소?" "아니에요. 왠지......." "왠지 어떻단 말이오?" "당신의 정체는 아직도 신비에 가리워져 있는 것 같아요." "후후후... 자고로 미인은 그처럼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법이오. 당신은 화중화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우선은 자신이 해야 할 일부터 챙기는 것이 순서일텐데?" 천아월은 꽃잎같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흥! 누가 그러지 않는다고 했나요?" "그럼 되었소. 이제 그만 옷을 벗도록 하시오." "네에? 여기서 말인가요......?" "옷을 입고서 목욕을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당신이 보고 있으면 난......." "하하하... 낭자답지 않게 갑자기 왜 이러시오? 그대의 몸을 보아 두어야만 신체골격을 바로 잡을 수 있지 않겠소? 앞으로 곧 알게 되겠지만 그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오. 낭자는 오직 한 가지만 염두에 두도록 하시오. 아까도 말했듯이 화중화가 되어 화중부의 전권을 얻는다는 것 말이오." "아... 알겠어요." 천아월은 판단력을 잃고 만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어 그녀는 체념한 듯 뒤로 돌아서더니 서서히 옷을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③ 소주제일미녀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녀의 육체는 고쳐 놓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왔다. 옷을 벗는 동작 하나하나가 유혹의 선을 그리더니 뿌연 수증기를 품은 채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그녀의 자태는 너무도 요요(妖妖)로와 흡사 선녀가 구름 사이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천아월은 대담하게도 이옥랑을 향해 빙글 돌아섰다. 그 바람에 터질 듯한 육봉이 출렁 하고 그의 코 앞에서 흔들렸다. "흐음?" 이옥랑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에 가 멎었다. 새하얀 육봉의 정상에 오만하게 매달려 있는 두 알의 유실(乳實)이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으음!" 이옥랑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꿈틀거리는 본능이 막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순간의 일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도 사내다. 더구나 그로 말하자면 한때 천하제일의 풍류남아로 불리우던 장본인이기도 했으니 빼어난 여체를 보고 피가 끓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과연......!' 천아월의 그윽한 음성의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어때요? 쓸만 한가요? 제 몸이......." 그녀는 한 손으로는 젖봉오리를,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살짝 가리며 지극히 도발적인 자세를 취해 보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옥랑의 욕념은 일시에 씻은 듯이 가시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체질적으로 야망에 눈이 떠져 있는 여인을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역시 거래관계 뿐이다. 이옥랑은 정신을 되찾자 오히려 침을 꿀꺽 삼키는 연기까지도 불사했다. "정녕 아름답소. 당장 취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워요. 호호호......!" 풍덩! 천아월은 만족한 듯 교소를 터뜨리며 욕탕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에게 이제 부끄러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씻으면서도 이옥랑을 의식하고는 간간이 묘한 웃음과 함께 다분히 유혹적인 자태를 취해 보이고 있었다. 쏴아아......! 벽옥빛 욕수가 미녀의 나신을 흘러내리는 광경이란 여느 사내 같았으면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능히 현혹될 만한 것이었다. 이옥랑. 그는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천아월이 인어(人魚)처럼 욕탕 속에서 유영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러난 그의 표정은 예외없이 그녀의 나신이 발산해내는 매력에 한껏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은은한 회색빛이 감도는 그의 눈은 그 순간에도 완전한 무심(無心), 즉 절대무사유(絶對無思惟)를 내비치고 있었다. 한 개의 돌이나 나무토막을 보고 있는 듯 그의 눈동자에는 일점의 동요도 없었다. 성인(聖人)도 아니거니와, 화중부의 일개 화화사자가 그 정도의 수양을 쌓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아연한 현상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 주요행사, 즉 그녀의 목욕이 끝났다. "아! 정말 날아갈 것 같아요." 욕조 바깥으로 나온 천아월은 목욕 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더운 기운으로 인해 붉게 상기된 얼굴을 비롯하여 물방울이 무수히 매달려 있어 싱싱함을 과시하는 육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옥랑은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낭자의 몸매에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오. 나는 줄곧 선경을 헤매는 것처럼 아찔아찔 했소." "호호호......." 천아월은 세류요를 비틀며 웃었다. 더불어 그녀는 의도적으로 팽팽한 둔부며 젖가슴을 흔들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때요? 내게서 정말 그 마력적이라는 향기가 풍기나요?" "알면서 왜 묻소?" 이옥랑이 짐짓 심술궂게 대꾸하자 그녀는 다시 웃었다. "호호... 당신,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군요. 염려 마세요. 멀지 않아 이 몸이 모든 것을 얻고 난 다음에는 정황이 달라질 테니까요. 그때에는 틀림없이 이 빚을 다 갚겠어요." 천아월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받쳐 올리며 말했다. "이 몸은... 당신 거예요." "낭자......." 이옥랑은 열에 들뜬 듯한 얼굴로 그녀의 유두(乳頭)가 경직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쓴 웃음으로써 사태를 모두 마무리 지어 버렸다. "자! 공과 사는 분명해야 하니, 다음 단계를 시작하겠소." 이윽고 그는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꼭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침상이 놓여 있었다. "저기 누우시오." "좋아요, 무엇이든 명령만 하세요." 천아월은 눈웃음을 치며 침상으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반듯이 누웠다. 호흡에 따라 기복을 보이는 절세미녀의 알몸은 가히 폭발적인 정염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 밤으로 이 세상에 한 명의 요화(妖花)가 탄생되었다. 이른바 인간우물(人間尤物)로 칭한들 전혀 손색이 없는 그녀의 이름은 바로 천아월이었다. 화화사자 이옥랑의 비책이란 과연 무엇인지, 밤새 그들이 투숙했던 객점의 별원에서는 여인의 흐느낌과 신음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인간의 골격구조를 바꾼다는 것인지,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말이기나 한지,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단언할 수가 없었다. 좌우간 사람의 뼈를 마음대로 늘이고 줄이며, 근육까지도 수축과 이완을 조종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제의 화중부는 구화산(九華山)에 있다. 아홉 개의 주봉(主峯)이 꽃잎같은 형상으로 펼쳐져 있다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구화산은 강남의 수려한 풍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구화산의 천인단(天刃壇). 칼날을 거꾸로 세운 듯한 단애(斷崖) 위에 기이하게도 반듯한 평지가 있다. 오르기는 힘들어도 일단 오르고 나면 구름 위에 올라 앉은 것처럼 신비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천인단 위에는 호화로운 부중(府中)이 건립되어 있다. 수 년 전, 부중의 건물이 새로 세워졌을 때 세인들은 그것을 일컬어 신선(神仙)들이 사는 곳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실제적으로도 그 말은 과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시사철 꽃이 만개해 있고, 그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미녀들이 무수히 많음에랴 신선들의 거처에 비해 뒤떨어질 것이 없었다. 어쩌면 신선들이 이 부중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을런지......? 그러나 그 부중이 화중부라는 이름을 갖고 포화(捕花)에 나서게 되매 양상은 달라졌다. 천하에 딸을 가진 부모들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려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화중부주인 옥면사랑(玉面死朗) 도옥기. 그는 일천화를 채우겠다는 야심으로 중원 전역을 뒤져 미녀란 미녀는 모두 다 잡아 들이는 횡포를 서슴치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이제 일천화가 거의 채워졌다고 한다. 이번의 탐화제가 끝나면 더 이상 포화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던가? 그렇게 되면 백안시 하면서도 못내 궁금해 못견디던 화중화(花中花)가 누구인가도 결정이 날 것이었다. 과연 어떤 미녀가 화중부의 제일화가 될지, 그 점은 특히 무림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 들어 화중부로 천하의 이목이 집중된 것도 이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무림의 미녀라면 단연 네 명을 꼽아왔다. 이름하여 천주사대기화(天柱四大奇花). 그녀들은 미색은 물론 일신에 뛰어난 무공과 함께 천부적인 재능까지도 겸비한 기녀(奇女)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사대기화는 좀체로 외부에 그 아리땁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가끔씩 세간을 드나들던 동천설리화(東天雪梨花) 천설화(天雪花)마저도 천도세가가 봉문(封門)한 뒤로는 아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남천백리화(南天百里花) 옥화미(玉花美)는 지난 날 천중일정 영호천문의 아내였다가 그의 죽음과 함께 실종되었고....... 서천대연화(西天大蓮花) 기운(奇雲)과 북천빙매화(北天氷梅花) 빙한지(氷寒芝), 이 두 여인은 거동이 지극히 신비해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강호인들의 관심이 온통 화중부에서 선발된 화중지화(花中之花)에게 쏠리는 것도 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야말로 군중과 함께 하는 우내제일미(宇內第一美)가 될 것이므로. 화중부. 이곳은 공히 지상(地上) 제일의 도화경이다. 화중부는 크게 나누어 삼부(三府)로 이루어져 있다. 화헌부(花軒府), 화화부(花花府), 화왕부(花王府) 등이 그것이다. 개중에서 화헌부라 하면 화중부의 외부(外府)에 해당되며 이곳에는 옥면사랑의 수하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화화부(花花府)는 그 동안 가려 뽑은 일천화가 몸담고 있는 곳이었다. 이르자면 중부(中府)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화왕부(花王府)는 내부(內府), 즉 화중부의 심장부로서 소위 금역(禁域)에 속했다. 이곳에는 옥면사랑의 허락이 없이는 원칙적으로 그 누구라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화중부주인 옥면사랑의 처소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외부인 화헌부에도 언제나 수많은 미녀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녀들은 일천화에는 뽑히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미모를 갖춘 여인들로 화중부 사내들의 위안대 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 쪽으로 본다면 화헌부는 일종의 환락부(歡樂府)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에서는 밤마다 계집의 교성과 풍악 소리, 가무(歌舞) 등이 그치지 않는다. 강호의 풍류귀들이 한결같이 화중부의 제자 되기를 갈망하는 이유도 이 화헌부에 있다면 맞았다. 어찌 되었건 그곳에 들기만 하면 질리도록 꽃밭에서 즐길 수 있을 것이므로. 화헌부의 밤은 낮보다도 더 밝다. 여기저기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고,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초저녁부터 조성되어 있는 뜨거운 분위기는 밤이 깊도록 도시 식을 줄을 모른다. 그 분위기 속에서 찬 물에 기름 돌 듯 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표면적으로야 그런 면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지만 혼자 있는 시각이면 의례 그는 계집을 찾지 않고 몸이 좋지 않다는 등의 구실을 대어 명상에 잠기곤 한다. 이는 분명 그가 지니고 있는 신분상 어울리지 않는 행위다. 왜냐하면 그는 사대화화사자(四大花花使者) 가운데서도 가장 유능하다는 위인이기 때문이다. 그 자의 이름은 이옥랑(李玉郞)이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처소에서 묵묵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실 화화사자들은 화중부 내의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옥면사랑의 총애를 받고 있어 웬만한 규율에는 거의 구애받지 않는다. 마음대로 화화부에 출입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들 뿐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은 과거에 모두 희대의 채화낭군으로서 명성을 날린 전력이 있었으며, 그런 능력을 바탕 삼아 오늘날 화중부의 일천화를 구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옥면사랑의 신임은 대단했다. 이 밤. 이옥랑은 아까부터 은은히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줄곧 창 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천아월을 데리고 화중부로 돌아왔다. 다른 세 명의 화화사자들은 다수의 미녀들을 거느리고 입부한데 반해 유독 그만은 천아월만을 대동하고 왔던 것이다. 세 명의 화화사자가 기이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웃기만 하고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화화사자들 사이에는 원래부터 묘한 알력이 있었다. 그것은 각자 자신이 데려온 일천화 가운데서 화중지화가 나오기를 희망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파생된 경쟁의식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부분은 곧 그들 야망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옥랑은 입가에 기소를 매달았다. '후후... 화중지화의 자리는 천아월이 차지하게 된다. 도옥기, 아느냐? 그 비장의 무기(武器)와 더불어 네 코 앞에 이 영호천문이 와 있다는 것을......?' 그는 다름 아닌 천중일정 영호천문이었다. 그 간에 그는 화중부의 화화사자인 이옥랑을 모처에 잡아다 가두고, 그 자로 변신하여 이곳 화중부로 무사히 잠입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휘황한 불빛이 여전히 이옥랑의 모습인 그의 얼굴에 야릇한 음영(陰影)을 드리워 놓았다. '후후... 내가 없는 동안에 너는 소원대로 환락전을 이루었구나. 애초부터 너는 평생토록 꽃 속에서 황제로 군림하기를 원했었지. 그러나 내가 살아서 돌아온 이상 너의 환락도 끝이다.' 영호천문의 눈에서 언뜻 새파란 섬광이 내비쳤다. '너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렸다만 이제부터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도옥기, 후후... 친구를 배신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④ 영호천문. 그의 심장에서는 뜨거운 피가 들끓고 있었다. 아니, 맹렬한 복수심은 그의 영혼마저도 불살라 버릴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의 복수는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천하가 걸려 있는 중대사인 것이다. 영호천문은 느긋해지려 몸을 뒤로 제껴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의자의 등받이가 등에 와 닿자 한결 기분이 편해졌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 했다. 이후로는 천아월의 몫인데, 그녀도 야심이 큰 만큼 잘 해내겠지.' 불현듯 방문 밖에서 달콤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사자 나으리, 소매 좀 들어가도 되겠지요?" 영호천문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옥랑은 본시 네 명의 화화사자 중에서 가장 유능하기도 하지만 꽃을 따는데 있어서도 따를 자가 없는 귀신이다. 그렇다면 이곳 화헌부 내에서도 다를 바가 없을텐데, 이 계집도 그 가운데 하나일까?' 그는 곧 음성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후후... 물론이지." 문이 살며시 열렸다. 그 뒤로 사뿐거리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의 감각은 등으로 다가드는 기척과 코를 찌르는 여인의 체향(體香)까지를 차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돌아다 보지 않았다. 계집 쪽에서 되려 안달이 난 듯 등 뒤로부터 그의 목에 매달려 왔다. "흥! 강호에 나가시더니 실컷 농화(弄花)하신 모양이죠? 이 도화낭랑(桃花娘郞)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시다니 말이에요." 영호천문은 그답지 않게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끙! 일 났군. 도화낭랑 반옥련(潘玉蓮)이라면 강호에서도 소문난 음녀(淫女)인데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도화낭랑 반옥련. 그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희대의 색녀였다. 과거 방중술의 비전이라는 음양환락경(陰陽歡樂經)을 얻은 이후로 오늘날까지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大家)였다. 영호천문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후... 그럴 리가 있겠소? 그대에 비한다면 다른 꽃들은 설익어 맛이 밋밋할 뿐 아니라 떫기만 했다오." "정말?" 도화낭랑 반옥련은 기쁜 얼굴로 그의 앞으로 와 섰다. "내가 왜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영호천문은 말을 하며 지그시 그녀를 건네다 보았다. 반옥련의 몸을 아래 위로 훑는 그의 눈은 탕기가 철철 흐르는 것이,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채화낭군의 눈이었다. "아! 안아 줘요." "그야 여부가 있나? 후후... 누이, 내가 그 동안 누이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아시오?" 그는 부드러우나 힘있게 반옥련의 몸을 끌어 안았다. 그의 이런 동작은 상황을 급진전시켰다. "흐응......!" 반옥련은 뼈가 없는 연체동물인 양 그에게 감겨 들었다. 그때를 기해 영호천문의 행동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는 반옥련을 방바닥에 쓰러뜨리더니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왜... 침상으로 가지 않고......?" 그녀가 코먹은 소리로 묻자 영호천문은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때로는 방법을 바꾸어 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을텐데?" 그는 키득거리는 반옥련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손바닥 안에 가득 차는 그녀의 유방을 세차게 거머 쥐었다. "학!" 영호천문의 손이 일종의 연동운동을 하기 시작하자 방 안은 금세 여인의 기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하아아......! 그래, 그렇게......." 반옥련의 육체가 보이는 반응은 실로 무서울 정도였다. 간단한 애무만으로도 그녀는 삽시에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탕녀의 본성을 어쩌지 못해 화중부의 사대화화사자 사이를 오가며 그들 모두와 육체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이옥랑과는 각별하다면 각별하달 수 있는 관계였다. 그것은 이옥랑의 재주(?)가 나머지 세 명의 화화사자들에 비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은 눈을 반쯤 뜬 채 마구 요동치는 그녀를 잠시 망연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중에서는 써늘하기 그지없는 중얼거림이 일고 있었다. '역용의 최고수는 뭐니뭐니 해도 철저한 변신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마저 속여야 한다.' 이때부터 그는 정말로 이옥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찢어내듯 급급히 옷을 벗어 제낀 것도, 그 직후에 신체의 한 부분이 무섭게 일어난 것도, 모두 그 상황에서의 이옥랑다운 점들이었다. 이것은 영호천문이 가진 무서운 일면이기도 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런 집념과 집중력 때문에 그가 천중일정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반옥련이 눈을 반짝 떴다. "아아!" 그녀의 이 깊은 한숨소리는 영호천문, 즉 이옥랑의 벌거벗은 몸 어느 한 곳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내쉰 것이었다. 갸름하고 꽤 미인인 그녀의 얼굴에는 즉시로 열화와도 같은 격정이 차올랐다. 그리고....... 이옥랑. 그는 반옥련 위에 몸을 실으려던 애초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옥련은 사내의 양기(陽氣)를 빨아내는데 있어서는 가히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이옥랑은 오히려 한 동안 큰 댓자로 누워서 그녀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를 필두로 두 남녀의 정사(情事)는 숨가쁘다 못해 거의 난잡한 모양새로써 점차 극점을 향해 치달렸다. 요컨대 애정이 배제된 그 방면의 행위는 어차피 동물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탕녀를 상대하는 이옥랑도 새벽이 가깝도록 그에 못지 않게 야수의 근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옥랑이 내심 넌더리를 낼 때에야 반옥련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곯아 떨어졌다. 그 밤은 정녕 황홀감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신물이 나는 환락의 밤이었다. 고된 전투에서 헤어나온 그는 들리지 않게 부르짖었다. '도옥기! 절대 너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 사람. 어찌 보면 천하에서 가장 행운아인 위인이다. 그는 사나이로서 지상 최고의 쾌락과 명예를 맛보았다. 천하의 미녀란 미녀들이 모두 그의 애첩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이처럼 꽃 속에 파묻힌 채 제왕(帝王)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매일 그의 식탁에는 산해진미가 오른다. 무려 칠백 가지 이상의 요리가 한 번도 중복되지 않고 오르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열 번씩 옷을 갈아 입는데, 그때마다 그가 세수를 하거나 목욕하는 물에는 수백 가지의 향료가 첨가된다. 이때문에 일명 사치와 향락의 황제라고도 불리우는 그는 세상에서 도무지 부러운 것이라곤 없는 사나이였다. 다만 한 가지, 그에게도 이루고자 하는 꿈은 있었다. 그에게는 도합 백팔 명의 총희(寵姬)가 있다. 그녀들로 말하자면 일만 명의 중에서 한 명 꼴로 가려뽑은 미녀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의 꿈을 달성시키는데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화중지화(花中之花), 문자 그대로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꽃 중의 꽃이기 때문이었다. 화화부의 일천화도 그런 목적으로 모아 들였거니와, 화제(花帝)가 될 화중지화를 뽑아 제일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자 그가 가진 욕망의 정점이랄 수 있었다. 그런 뒤에는 굳이 손과 머리를 쓰지 않아도 만사가 저절로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여질 테니까 말이다. 그는 허공을 우러러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후후... 용천후, 너에게만 원대한 야망이 있는 줄 알았다간 오산이다. 이 도옥기를 그저 꽃에 파묻힌 영락한 사내로 보는 것은 네 자유이나, 후훗! 아직 나는 잊지 않았다, 우리들 십정이 십상천 사부들을 떠날 때의 목적을. 천하제일정이 되고자 했던 야망은 이 순간에도 내 가슴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단 말이다.' 옥면사랑 도옥기. 이런 이름을 가진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호화롭고 넓은 상아침대에 드러누워 소리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양 옆에 각기 하나씩 미녀들을 끼고 있었다. 전라인 그 미녀들은 백팔총희의 일원들로서 피부가 비단결같이 매끄럽고 방중술의 기교가 대단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의 몸에서는 장미향이 풍긴다. 도옥기는 손을 뻗어 한 총희의 젖가슴을 만졌다. 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넘치는 애욕의 봉오리가 주인(主人)인 그의 손 안에 가득 들어왔다. 그는 다른 손으로는 반대편 총희의 알맞게 구릉진 아랫배를 쓸어 내리다가 그녀의 샘에서 멈추더니 길게 탄식했다. "으음......." "하아아......!" 두 총희가 즉각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이어 그녀들은 제각기 그의 몸에 매달려 아찔한 광경을 연출해내기 시작했다. 도옥기는 점차 격렬해 가는 그녀들의 행위를 통해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아느냐? 천하인들아. 너희들이 제아무리 떠들어댄들 이 도옥기만큼 철저하게 만족을 추구하며 살지는 못할 것이다. 후후... 이제 얼마 후면 화중화가 탄생될 것이고, 그 날에 이 몸은 지상제일의 기남아가 될 것이다.' 옥면사랑 도옥기. 그는 정말로 행복할까? 정녕 모를 일이다. 인생의 의미를 쾌락 속에서 발견하고 그에 따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짓일지......? 그 밤도 시간이 흐르매 역시 깊어 갔고, 야천(夜天)에는 때아닌 유성(流星)이 흐르고 있었다. 인간의 영고성쇠가 성상(星相)에 모두 나타난다고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수많은 성군(星群) 중 어느 성좌가 자신의 것인지조차 미처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저 유성의 의미는 몰(沒)인가, 성(成)인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성좌는 끊임없이 명멸(明滅)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 14장 음모(陰謀)의 주역(主役) ① 미녀(美女)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상 나름의 개성이 있고, 보는 이마다 미의 척도가 다르므로 천하제일의 미녀를 뽑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흔히 미녀와 비견되는 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세상에서 존재하는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꼽으라면 역시 난감할 수 밖에 없다. 모양새도 그렇지만 그 다양한 색채와 향기 중 어느 것을 제일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관건은 완벽에 두어야 하리라. 선정하는 모든 이의 기준에 합당한 대상, 곧 일천 명의 미녀들 중에서 최고의 미녀인 화중화는 그런 여인을 뽑는 일이었다. 마침내 화중부는 전 무림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 일을 시작했다. 화화부. 이곳에는 일천화 외에도 그녀들의 시중을 드는 화모(花母), 와 화시(花時), 화동(花童) 등이 있다. 그들은 개인의 생활이 거의 없다. 오로지 일천화를 가꾸어 주고 그녀들의 몸치장에 전심전력을 바치도록 되어 있을 뿐이다. 일천화는 그들의 시중에 힘입어 매일 장미수(薔薇水)로 목욕을 하고 피부에 좋다는 온갖 종류의 비방을 다 쓰곤 한다. 그녀들의 처지는 모두 비슷하다. 비록 타의(他意)에 의해서 이곳 화중부로 끌려 오기는 했으나 이제는 꼭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화중지화가 되어 화중부의 전권을 수중에 넣는 것, 즉 권력에 대한 욕구였다. 화중부주인 옥면사랑 도옥기는 진즉부터 화중지화가 구비해야할 요건으로 몇 가지를 내세운 바 있었다. 신장, 체중, 피부 색깔, 음성, 이목구비의 조화 정도, 신체의 균형미 등 그가 원하는 요구사항들을 모두 열거했던 것이다. 일천화는 거개가 그 기준에 어느 정도까지는 부합되었다. 문제는 그 중에서도 최고로 빼어난 한 사람을 고른다는데 있었다. 선별의 중임(重任)에서 사대화화사자는 제외되었다. 이는 혹시라도 사적(私的)인 감정이 개입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팔대호화모후(八大護花母后), 사대집화령주(四大集花令主). 화태사(花太師), 화모모(花母母) 등이 그 역할을 맡았다. 오월(五月)이다. 눈부신 햇살이 구화산 전역을 내리 비추매 극에 다다랐다 싶은 풍광이 화려한 색조를 뽐내고 있었다. 화화부도 꽃향기로 가득 찼다. 아니, 꽃향기보다 더 강렬한 것은 일천화들이 발산해내는 농밀한 체향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화중지화를 뽑는 과정이란 어떨 것인가? 한껏 치장한 미녀들이 전시(?)되어 제각기 미색을 견주는 경연대회, 이쯤이면 어떤 사나이라도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나리라. 어차피 아름다움이란 느낌에서 공명하되, 우선 시각(視覺)에서 그 파동이 일어나야 하므로 보는 즐거움이 우선이기 마련이다. 옥면사랑 도옥기는 이 점을 노려 친절하게도 중원전역에 초청장을 발부했다. <귀하(貴下)를 금번 본부에서 열리는 대탐화제(大探花祭)에 초대하며, 참가를 앙망하오이다. 화중부주 배(拜).> 그 초대에 응하지 않을 사내는 없었다. 당장에 군웅들이 구화산으로 구름같이 몰려 들었으며, 그 뒤로도 인파는 계속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일천화를 감상하겠다는 일념으로 만사 제쳐두고 달려왔던 것이다. 옥면사랑 도옥기는 그렇다고 아무나 화중부에 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번 대탐화제를 기해 한 가지 엄청난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공표되었다. - 화중부의 일천화 중 구백구십구화를 초청에 응해 주신 영걸(英傑)들에게 헌상하겠다. 일종의 포고문 형식으로 그런 글귀가 나붙자 그 즉시 전중원이 흥분으로 들끓게 되었다. 젊은 청년들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아내로서든 정부(情婦)로서든 정말로 일천화 중 한 명을 취할 수만 있다면 사내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 보장되는 셈이니까. 그리하여 청년고수들은 그 행운을 따내기 위해 저마다 부푼 꿈을 안은 채 일로 구화산으로 향했는데....... 행운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인단과 마주하게 되자 비로소 이 점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그곳을 오르는 일 자체가 시련이자 난제(難題)였으므로. 그들을 기다리는 꽃이란 모두 합해봐야 구백구십구 송이였다. 때문에 신진(新進)의 고수도 당연히 구백구십구 명만이 요구되었으나 인원은 그 숫자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천인단은 깎아지른 듯한 단애였다. 청년들은 경공술을 써 그곳을 자력(自力)으로 올라야 했으며,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일관(一關)이라 할 수 있었다. 인원이 넘치므로 중도에서 탈락되는 자가 많이 있어야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쩐지 속셈이 엿보이는 독랄한 안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의 청년고수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속속 이 단애에 도전했고, 그들 중에는 능력이 모자라 단애 중간에서 떨어져 피떡이 되어 죽어간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무림은 크게 경동했다. 젊은 제자들을 둔 노고수(老高手)들은 제자들을 말리느라 고심막측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발전되어갈 따름이었다. 쾌락을 향한 인간의 본성이 그렇듯 일단 불이 붙자 미녀를 차지하려는 청년들의 발길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화중화를 선발하는 과정은 한 치도 어김없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화화부의 한가운데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다. 지금 연못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실로 현란하달 수 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려 일천 명에 달하는 미녀들이 제각기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인세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경(秘境)이었다.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그려봄직한 사내들의 이상향(理想鄕)이 그곳에 전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막적으로도 그러할지......? 이 꽃숲(?)에는 시종 예리하게 훑어보는 눈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쌍이 아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삼엄한 눈길의 주인들은 화중지화의 선발자들이었다. 이 행사는 말하자면 대탐화제의 예선(豫選)이라 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는 행사로서 미녀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에 계속 응해야만 했다. 괴로운 것은 날로 그 강도(强度)가 더해간다는 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여인의 참된 가치란 아예 논외(論外)였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하나 일천화들이 겪는 고충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일천화는 이후로도 똑같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선발자들이 지켜 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옷을 모조리 벗어야 했고, 지시하는 바대로 온갖 자세들을 보여 주어야 했으며, 각종의 이름모를 액체를 몸에 바르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화동(花童)들이 다가와 신체 모든 부분의 치수를 재어도 얌전히 응해야 했다. 유방의 둘레, 허리의 굵기, 둔부의 크기, 심지어는 여인만의 중지(重地)까지 검토되어도 견뎌내야만 되었다. 그 과정에는 일체 사감이 허용되지 않아 수치나 곤혹을 표명하면 그만치 점수가 깎인다는 것을 그녀들도 잘 알고 있었다. 또 일천화들은 걸음걸이를 보이기 위해 선이 그어진 대(臺) 위를 알몸으로 걷기도 했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천정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도 했다. - 무엇을 위해서? 이런 회의가 수시로 일어나도 꾹꾹 눌러 참으며 그녀들은 천하제일미로 뽑히기 위해 웃는 낯으로 그 모든 고통들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밤이 되면 그녀들은 대개가 지칠 대로 지쳐 정신없이 잠에 곯아 떨어지곤 했다. 무엇도 생각할래야 생각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어찌 하겠는가? 따라서 그녀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잠든 사이에 알 수 없는 향(香)이 코 속으로 스며 들고 있다는 것을. 화화사자 이옥랑, 즉 영호천문은 탐화제의 예선이 진행되는 동안 가까이서 그 과정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선발에 개입하지는 못해도 외부인이 아니므로 참관은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심사과정의 복잡하고 치밀함에 줄곧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그러다가 팔일째 되는 날, 그는 한 가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말았다. '맙소사! 몽롱한 미녀들의 눈빛....... 저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들 같지 않은가?' 영호천문은 처음 일천화의 눈에서 한결같은 참담함을 읽어낸 바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점차 순응 쪽으로 변해가자 그는 여인들의 자기만족 성향에 고소를 짓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촉수가 감지해낸 것은 한 가닥 불온한 음모의 냄새였다. '으음, 이 점은 필히 조사해볼 여지가 있다.' 이어 그가 떠올린 것은 천아월이었다. 그 간에 그녀는 유력한 화중지화의 후보에 들어 있었다. 영호천문은 화중부에 든 이후로 한 번도 그녀와 단독으로 만나거나 대화를 가지지 못했는데, 이는 제한된 사항 때문이었다. 화화사자들은 화화부의 출입이 자유로왔으나 그들에게도 밤만은 예외였다. 반드시 화헌부로 돌아가서 자야 되었던 것이다. '그녀를 만나면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겠지.' 밤을 기다리는 영호천문의 심정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스스스....... 한 무더기의 연기가 화화부로 날아 들었다. 그것은 막 달이 구름에 숨어드는 찰나에 벌어진 일인지라 아무도 눈치 챈 자가 없었다. 화화부. 그곳은 경비가 꽤 삼엄한 편이었으나 무영(無影)이라는 별호를 달고 있는 영호천문에게는 별로 장애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한 동안 화화부의 지형을 눈여겨 보아 두었으므로 거칠 것이라곤 없었다. 실제로 그것을 입증하듯 연기로 화한 그의 신형은 빠른 속도로 후면의 인공가산을 돌아 아담하게 늘어서 있는 방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스슷......! '천아월, 그녀까지도 해를 입었다면 큰 일인데....... 그렇게 되면 애초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② 일천화는 모두 똑같은 구조의 방사에 처소를 두고 있었다. 그 중 한 방사의 창문께에 하나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스스....... 영호천문이었다. 어느 결엔지 박쥐처럼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그는 현재 귀무환종(鬼舞幻宗)이라는 희대의 신법을 발휘 중이라 절정고수가 아니면 그의 실체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안을 엿보다 흠칫했다. 방 안에는 몇 사람이 있었다. 침상에는 천아월이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있었는데, 잠자는 그녀의 모습은 그가 보기에도 전에 비해 한층 더 요염해져 있었다. 물론 영호천문이 놀란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 결과로 나타났을 뿐이거늘, 무엇이 놀랍겠는가? 한 사람.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자는 기도가 유난히 헌앙했으며 일신에 연남빛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다. 그 자가 나직이 말했다. "흐음, 과연....... 이 여인이 화중지화의 후보에 오른 열두 명 가운데서도 가장 점수가 높단 말이지?" 그 음성이 확인되는 순간, 하마터면 영호천문은 자제력을 잃고 처마 끝에서 밑으로 뚝 떨어질 뻔 했다. '도옥기......!' 뒷모습만으로도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그 자의 음성은 영호천문이 죽어 땅 속에 묻힌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친구의 것이었다. '우우......! 도옥기, 오랫만에 만났어도 네 모습, 그 음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구나.' 격동이 일순 전류처럼 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나머지 계집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녀들에게 무형심인고(無形心人蠱)를 심는 일은 마무리 지었느냐?" 그 말에 억양이 괴이한 음성이 답했다. "물론입죠! 십이화를 제외한 계집들은 모두 수면향에 취해 잠자는 사이에 심인고를 불어 넣었습니다. 오늘부로 그 일을 완전히 끝냈습니다." "후후... 수고했소, 묘강독황(苗彊毒皇). 내 당신의 공은 절대로 잊지 않으리다." "소인도 부주께서 약속을 지켜 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건 염려 마시오. 틀림없을 테니까." 도옥기의 음성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들려왔다. "화태사(花太師), 밖의 상황은 어떻소?" 이번에는 늙수그레한 음성이 대답했다. "천인단을 오른 자의 숫자는 도합 삼천칠백 명입니다. 이제 제이관(二關)을 발동시킬 예정으로 있습니다." "흠! 잔소리 같지만 모쪼록 신중을 기하도록 하시오. 그들 속에 향후로 본좌를 보필하여 천하를 손에 넣게 될 재목들이 있다는 사실을 항시 염두에 두시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번 일만 성공하면 부주께서는 내, 외공이 다 함께 절륜무쌍한 구백구십구 명의 무적화화수(無敵花花隧)를 얻으시게 될 터인데요." "알고 있다니 되었소. 끝까지 잘 부탁하오." "복명! 부주께서는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한편. 영호천문의 놀라움은 거의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는 도옥기를 향해 소리없는 부르짖음을 발했다. '도옥기! 너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감히 만천과해(滿天果海)의 수를 쓰려 들다니, 그렇듯 천하를 기만하고 자신의 기반을 쟁취하려는 음흉한 야심이 이루어질 것 같으냐?' 그의 심중에서 일어난 소리는 냉소로 이어졌다. '후후... 십정(十鼎)은 늘상 누가 천하제일정이 되느냐를 놓고 무시무시한 경쟁을 벌였었지. 그것이 십상천(十相天) 사부들로부터 물려받은 뜻이었으니까. 지금 와서 그 경쟁이 포기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만, 정녕 해도 너무 하는구나. 너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아니, 이 점은 너 뿐만이 아니라 구정 모두가 마찬가지다.' 영호천문은 가슴에 피가 몰려 미친 말(馬)처럼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 쥐었다. '그 과오란 너희들 아홉 명이 나의 생존여부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읊조림이 막 끝나는 찰나였다. "누구냐!" 핑!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한 줄기 눈부신 은광이 번쩍 일더니 창문이 와장창 박살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영호천문이 창문가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후였다. 그는 간일발의 차이로 쏘아져 오는 은검(銀劍)을 튕겨내며 전력으로 신형을 빼낸 것이었다. 그 직후, 방 안에 있던 한 인영이 신형을 솟구치더니 창문 밖으로 나와 지면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슷--!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옥면사랑 도옥기였다. 그의 준미한 눈썹이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방금 전에 그 자신이 날렸던 순은의 소검(小劍)이 놓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검날의 정중앙에 좁쌀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도옥기는 가슴이 써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월인천강공(月印天 孔)......!"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더 연구해볼 여지도 없이 세인들이 전설상의 무학쯤으로 믿고 있는 희대의 지공(指功)이었다. 그의 뒤로 몇 가닥의 인영들이 내려섰다. "부주! 역시 침입자입니까?" 그들은 도옥기와 함께 방 안에 있던 자들로서 그의 신변을 염려해 뒤늦게나마 그를 따라 나온 것이었다. 도옥기는 다소 권태로운 표정이 된 채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오. 내가 잠깐 착각을 일으켰을 뿐이오." 그는 감추듯 재빨리 은검을 품 속에 도로 집어 넣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리는 쉬지 않고 회전했다. '월인천강공을 시전할 줄 아는 자라면 천하에서 오직 두 사람밖에 없다. 그들은.......' 도옥기의 눈이 순간적으로 몹시도 흔들렸다. '영호천문! 그리고 사마운(何馬雲).......' 그는 부지중 얕은 한숨을 흘리더니 씁쓸하게 자위했다. '후후... 내가 지금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영호천문은 이미 사 년 전에 죽었지 않은가?' 도옥기는 안색을 차갑게 굳혔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결국 사망송시군자 사마운 뿐이다.' 그는 주사빛 입술을 질겅 씹으며 서 있던 자리에서 빙글 돌아섰다. 그의 눈에 밤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그 짙은 어둠을 향해 그는 드러나지 않게 조소를 흘렸다. '사마운, 너도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구나. 후후... 어리석게도 감히 나 도옥기를 상대로 말이다.' 영호천문. 그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 방으로 들어서던 그는 흠칫하여 굳어지고 말았다. "호호호... 이 밤중에 밤손님처럼 어딜 다녀오는 거죠?" 추궁에 가까운 이 음성의 주인은 도화낭랑 반옥련이었다. 그녀가 영호천문의 침상에서 떡하니 두 다리를 꼬고는 반쯤 누운 채 그를 맞이했던 것이다.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갔다 오는 길이오."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려 했으나 반옥련의 응수는 그다지 녹녹치가 않았다. "대체 바람이 얼마나 세길래 옷자락까지 찢어졌죠?" '앗차!' 영호천문은 내심 움찔하는 한편, 그제서야 고개를 숙여 자신의 신색을 살피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녀의 말대로 과연 앞섶이 살짝 베어져 나간 것이 그의 눈에도 띄었다. 그는 멋적은 듯 입술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사실대로 고백하면 당신이 웃을텐데......? 산책하다 나뭇가지에 걸려서 이 모양이 되어 버렸소." "호호... 이상도 해라. 나는 몰랐는데, 나뭇가지 중에는 더러 칼처럼 날카로운 것도 있는가 보죠?" 영호천문은 난감해지자 옷을 훌렁 벗어 버렸다. "옥련, 왜 이러는 거요? 공연스레 트집이나 잡고." "흥!" 반옥련의 눈꼬리가 샐쭉 치켜 올라갔다. "요즘 당신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니까 그렇죠!" "거슬리다니, 대관절 무엇이 말이오?" 영호천문은 침상에 가 눕더니 은근슬쩍 그녀를 안았다. "흥! 이 손 치우지 못해요?" "후후... 자꾸 그러면 정말로 치워 버리는 수도 있소. 그럼 아마도 당신이 더 아쉬울텐데?" 영호천문은 달큰한 속삭임과 더불어 손을 점점 더 그녀의 몸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반응인지 꼬여 있던 그녀의 혀가 술술 풀렸다. "흐응... 요즘 난 당신에게 너무 섭섭해요. 내겐 관심도 없고... 으음... 천아월이란 계집에게만 홀딱 빠져 가지고......." 이 말은 영호천문을 더없이 안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휴우, 다행이군. 단지 질투 때문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 그의 공략(?)은 더욱 끈끈해졌다. "누이, 그건 오해요. 당신도 잘 알지 않소? 내겐 오로지 당신 뿐이오. 누이는 내가 천거한 천아월이 화중화가 되면 우리가 어떤 이득을 볼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소?" "우리... 라고요?" "그렇소, 우리는 앞으로도 늘상 이렇게 함께일 거요." "흥! 그걸 어떻게 믿어요? 천아월, 고 얄미운 년이 화중화가 되고 나서 당신을 꼬이면 나는 어찌 되죠? 그때는 필경 당신도 나 따위는 안중에 없게 될텐데?" 영호천문은 짐짓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 말을 부주께서 들으셔야 하는데 유감이군. 당신은 정말로 부주가 그 정도로 허수아비일 거라고 생각하오?" 달구어졌던 반옥련의 몸이 일순 가벼운 떨림을 보였다. "그, 그런 뜻은 아니지만......!" "되었소. 괜한 생각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영호천문은 입술로 그녀의 입을 봉쇄해 버렸다. 대꾸하기가 귀찮을 때는 그 방법이 최고였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이어진 것은 여러 가지 질탕한 소음들이었는데, 자지러지는 중에도 반옥련은 기어이 한 마디를 더 쏟아 놓았다. "정말로 시간이 아쉬워. 하아아... 당신과 같이 있는 밤은 너무도 짧......, 흐윽!" 그에 대한 영호천문의 대답은 심중에서만 이루어졌다. '농담마시오, 나는 밤이 너무 길어 미치겠는 사람이외다.' ④ 반진후(攀振喉).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술(蠱術)의 제일인자로서 묘강(苗彊) 만독림(萬獨林)의 제왕이었다. 묘강인들은 그를 묘강독황(苗彊毒皇)이라 부르며 신처럼 추앙했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반진후의 입장이 확연히 달랐다. 묘강에서처럼 추앙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은근히 경시당하는 처지였는데,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중원무림에서는 대대로 정통무학을 숭상해 왔으므로 독술(毒術)이란 그저 잡학(雜學) 정도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 풍조에 보태 반진후가 변방의 야족이라는 점도 주효했으니, 그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에 묘강독황 반진후는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급기야 그런 감정은 중원무림에 대한 원한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호시탐탐 설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마침내 그 기회가 잡을 수가 있었다. 천중오패의 하나인 화중부에서 도움을 바란다며 그를 초청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옥면사랑 도옥기가 내민 조건은 황홀한 수준이었다. 힘을 빌리는 대신 통천하(統天下)한 이후 운남(雲南), 귀주(貴州), 광동성(廣東省)을 넘겨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파격적이기도 하거니와 중원진출을 꾀하고자 부심해온 반진후에게는 반갑기 짝이 없는 제의였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쾌히 승낙하고는 화중부의 초대에 응했다. 묘강독황 반진후. 그는 화중부가 내어준 자신의 처소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방심한 탓일까? 음모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온 그는 별로 거리낌없이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두고 봐라, 건방진 중원인들이여! 묘강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똑똑히 보여 주마." 하지만 그가 이처럼 야망을 불태우고 있을 때, 불행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반진후, 그대는 생각이 너무 비틀려 있구나. 남의 땅에 와 가지고 그래선 못쓰지. 후후후... 그리고 어느 땅이 되었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정복될 줄 알았다간 큰 오산이다." 싸늘한 그 음성에 반진후는 대경실색했다. "누, 누구냐?" 용수철처럼 벌떡 튀어 일어서는 그에게 예의 음성이 답했다. "듣고도 모르겠느냐? 그대가 이 밤중에 어이없이 넘보고 있는 땅의 필부(匹夫)다." "그... 그럼 모습을 보여라!" 반진후는 외침와 함께 전신에 공력을 일으켰다. 그는 육순이 가까운 나이였다. 다소 비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신에는 채의를 입었으며 독(毒)을 다루는 자라서 그런지 피부가 유난히 검고 눈은 남색을 띠고 있었다. 우웅---!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남청빛 기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최근에 연성한 독강사후공(毒疆邪候功)이라는 것으로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대방은 녹아버리고 만다. 사실 그가 중원으로 건너오면서 가장 믿은 바가 있다면 바로 이 독강사후공이었다. 그러나 이 맹렬한 독공(毒功)도 음성의 주인에게는 비웃음만을 샀을 따름이었다. "후후... 반진후, 그 보잘 것 없는 독공 따위로는 천하를 나누어 갖기는커녕 네 한 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뭐, 뭣이!" 반진후는 대노했으나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웅웅거리는 음성은 어디서 들려 오는지 그때까지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고, 그에 따른 압박감만이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으으......!" 반진후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중원에 건너온 이래 그는 처음으로 크나큰 공포와 만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敵)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없다. 그는 일단 상대의 위치를 알기만 하면 귀신도 모르게 독살시켜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위치 확인이 불가능한 데에야 속수무책이 아닌가? "비... 비겁한 놈! 어서 모습을 보이라지 않았느냐?" "날더러 비겁하다고? 훗훗... 반진후, 표현이 틀렸다. 내가 비겁한 것이 아니라 그대가 무식한 것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은신술은 고차원적인 무학 가운데 하나다. 그대의 독술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지." 그 음성은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고로 그대는 나에게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해야 맞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 즉시 그대는 죽으니까. 한 번 시험해 볼까?" 반진후는 기겁을 했다. "되, 되었다! 나타나지 마라!" "후후후......." 음성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싸늘했으며 공중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반진후는 급기야 기세를 꺾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대... 대체 네 목... 목적이 뭐냐?" 예의 음성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간단하다. 그대가 펼치고 있는 고술에 대해 알고 싶어 왔지. 속히 무형심인고(無形心人蠱)가 어떤 것인지 말해라." 그 말에 반진후는 안색이 일변했다.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훗훗... 나는 그 외에도 그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느냐? 천하정복은 결코 장난이 아니라고." 반진후는 턱을 떨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래도... 말할 수 없다......!" "후훗! 그럴 줄 알았지." 스슷! "헉!" 반진후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목에는 어느새 싸늘한 칼날이 와 닿아 있었다. 그는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은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다. 여차하면 목이 날아갈 판국인 것이다. "으으......." 칼의 임자는 영호천문이었다. "후후후......." 그는 일신에 수많은 살인술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해천일살 동천목으로부터 일천팔백 가지의 인자법(忍者法)을 배운 그는 마음만 먹으면 반진후쯤은 기척도 없이 죽일 수 있었다. "반진후, 그대는 지금쯤 만독림(萬毒林)이 무척 그리울 것이다. 아마도 평생을 통해 이런 느낌은 처음일테지?" "으으으......." 반진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연신 진땀만을 흘렸다. 상대방이 대체 어떤 수단을 써 자신의 처소로 잠입해 들어 오게 되었는지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실 그는 묘강독황이라는 별호답게 독의 대가였다. 그는 자신의 처소 근처에 칠십 가지 이상의 독물(毒物)을 살포해 두었고, 창문과 천정에는 특별히 인면독지주(人面毒蜘蛛)까지 풀어 물샐 틈없는 독망(毒網)을 쳐 놓았다. 뿐만 아니라 방 안에는 무형혈화분(無形血化紛)을 뿌려 놓아 생물체라면 접촉 즉시 핏물로 녹아 버리도록 안배해 두었다. 이르자면 각종의 독안배가 처소를 겹겹이 방어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뚫고 귀신같이 나타나 자신의 뒤통수에 칼을 들이대는 자란 도대체 어떤 괴물이란 말인가? '이 자는 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절대고수다!' 반진후는 비로소 자신이 상대방의 적수가 못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이 순간에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도 알았으며, 일단 판단을 내려지면 쉽게 타협할 줄도 알았다. 물론 그 상태에서도 최후의 비방만은 감추어 둔 채. "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카... 칼은 치우고......." 벌벌 떠는 것은 여전했으나 말투가 애원조로 바뀐 것만은 방금 전과 달랐다. 이에 영호천문은 손을 약간 움직였다. 슥! "크으......." 목덜미가 살짝 그어지자 핏방울이 주르륵 흘려 내려 삽시에 반진후의 등덜미를 붉게 적셨다. "이건 경고다. 허튼 짓을 했다간 정말로 목이 달아날 것이다." 스슷! 영호천문은 여의무형인(如意無形刃)을 거두었다. 그는 이제 여의무형인을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도... 돌아서도 되오?" 그 순간, 영호천문의 얼굴이 급속도로 변화를 일으켰다. 놀랍게도 변해 버린 그 얼굴은 구정(九鼎) 중 일인인 사망송시군자(死亡誦詩君子) 사마운의 그것이었다. 영호천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진후는 몸을 돌렸다. "흐음!" 그의 넓적한 안면에 놀라는 기색이 번졌다. 설마하니 상대방이 이렇게 젊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귀... 귀하는 누구......?" "쓸데없는 말은 않는 게 좋다." 영호천문이 냉혹하게 말을 끊었다. 그는 반진후가 풀이 죽은 척 하면서도 눈알을 좌우로 굴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후후...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대가 뿌린 벌레들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뭐, 뭣이!" 반진후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못 믿겠다면 시험을 해 봐라." "으음......." 반진후는 신음을 흘리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하지만 그가 기대하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사위는 그저 아무일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했기에......?" 안면을 마구 씰룩이는 그에게 영호천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침상에 가 걸터 앉더니 입을 열었다. "자, 본론(本論)으로 들어가자.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으으......." 반진후는 상대방에게서 뭐라 형언할 길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한 차례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먼저 그대를 중원으로 끌어낸 자가 누구냐?" "그야... 화중부주 아니오?" "정말이냐?" "그... 그렇소." 영호천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속이려 해도 소용없다. 좋게 말할 때 전부 털어 놓아라." "무... 무얼 말이오?" "옥면사랑 도옥기는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탐화제를 통해 천하인의 이목을 속이며 대계(大計)를 세울 만큼 총명하지는 않다. 분명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그것이 누구냐?"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나는... 전혀 모르는 소리요." 영호천문의 눈에서 번뜩 살광이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그대는 더 이상 성한 몸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저... 정말 나는, 으악!" 촤아악! 반진후는 말하다 말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 앞에서 번쩍 하고 섬광이 일었다 싶자 왼쪽 어깨가 화끈하더니 팔이 뭉턱 끊어져 나가 버렸던 것이다. "으아아--!" 그는 방바닥에 떨어져 살아 있는 것처럼 펄쩍거리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체신도 잊은 듯 울부짖었다. "후후... 그렇게 외쳐 보아야 소용 없다. 음파(音波)가 모조리 차단되어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테니까." "우우우--! 지독한 놈......." "쓸데없는 소린 관두고 어서 말해라. 누가 너를 불렀느냐?" "화중부주......, 헉!" 반진후는 하마터면 그대로 졸도할 뻔 했다. 상대방의 팔목에서 은광이 번뜩 일어나더니 환상처럼 칼날이 발출되어 자신의 수염을 싹둑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수수....... 잘려진 수염이 그의 발치 끝에서 분분히 흩어졌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반진후는 온 몸이 얼어 붙고 말았다. 이쯤 되면 정말로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 나도 잘은 모르오. 단지......." 영호천문이 풀죽은 그의 음성을 되받았다. "단지?" "복첩(卜帖)을 받았을 뿐......." "복첩!" 영호천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한 가닥 전율에 가까운 진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④ 복첩이란 점괘(占卦)가 적힌 종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으로 서신처럼 통용된 예는 없었다. 굳이 복첩 따위를 발부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할 인물이란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단 한 사람 뿐이다. 의례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수신자의 생명에 관한 점괘다. 그것도 모일 모시에 죽게 되리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이다. 그것을 받으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첩을 보낸 자는 무림에서 신복술(神卜術)의 제일인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점괘는 틀릴래야 틀릴 수가 없었다. 점괘를 맞추기 위해 예시해 놓았던 시각에 그 자신이 나서 상대방의 목숨을 정확하게 끊어 버리므로. 천뇌토군(千腦土君) 공야중(公冶仲). 이것이 그 유명한 복술가의 이름이었다. 그는 일찌기 십정 중에서도 가장 괴이하고 신비한 자로 알려져 있었다. 영호천문은 전신의 피가 요동치듯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랬었다! 구정 중 몇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들은 암중으로 서로 결탁한 채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천하를 쥐고 흔들려 하는 화중부의 음모는 모두 천뇌토군 공야중의 머릿속에서 계획된 것이라는 뜻이고, 위기감도 그만치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이르자면 도옥기는 터를 제공하고 공야중은 계(計)를 쓴다는 얘기가 되는군. 실로 완벽한 합작이다.' 영호천문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반진후를 응시했다. "후후... 그대의 말은 이제야 믿을만 하군." 반진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강독황이라 불리우던 그는 자존심이 너무도 뭉그러져 더 이상 입도 벙긋 하고 싶지 않았다. 화중부에서도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하던 터에 눈 앞의 새파란 애송이에게까지 기도로써 밀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이 입을 열었다. "그럼 도옥기가 그 복첩을 미끼로 그대를 위협했단 말이지?" "그... 그렇소." "얼마간은 회유도 있었겠고? 그는 필경 그대에게 중원의 일부를 떼어 준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반진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것까지......?" 영호천문은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씨익 웃었다. "정녕 어리석군. 그대는 그걸 믿는가?" "으음!" 반진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본시 그는 누구도 믿지 않는 위인이다. 그가 복수의 대상으로 여기는 중원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어지는 영호천문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정곡을 찔렀다. "그는 그대를 실컷 이용하고난 후, 가차없이 저버릴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반진후의 눈가에 언뜻 기묘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영호천문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후후... 그대도 모종의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거저 당해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오! 나는 추호도......." 극구 부인하는 반진후의 말을 영호천문은 차갑게 잘랐다. "듣기 싫다! 나는 거짓말 따위에는 흥미가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무형심인고란 어떤 것이냐?" "우우우......." 반진후의 안색이 잠시 동안에 몇 차례나 변했다. 영호천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위협이자 어떤 수단보다 더 혹독한 고문이었다. 반진후의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것은... 묘강 특산으로 고 중에서도 특출난 고요." "계속해라." "그 고는 영통성(靈通性)을 갖고 있어... 왕고(王蠱)의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소." "왕고라......?" "벌로 치자면 여왕벌과 같은 존재요. 심인고들은 왕고를 복용한 사람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오." "만약 따르지 않으면 어찌 되지?" "만약이란 없소. 왕고를 복용한 자가 임의로 심인고를 발동시키면 체내에 심인고를 가진 자는 즉시로 심장이 터져 죽소." '으음, 실로 사악하기 짝이 없는 고술이로군.' 영호천문은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연이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심인자고(心人子蠱)를 일천화의 몸 속에 주입시킨 다음에는 어떻게 할 셈이었지?" "그건......." 머뭇거리는 반진후의 얼굴에는 두려움 외에 한 가닥 자부심이 피어 올랐다. 이 점은 그의 음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크... 그건 오직 노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오. 아마 중원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게요." "흐음! 어서 말해 보아라." "심인고란 원래부터 왕고 아래 자고(子蠱)로 되어 있는데, 그들끼리 영성이 통해 있소이다. 또한 자고는 자웅쌍고(雌雄雙蠱)로서 암수가 한 쌍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오." 거기까지 듣고 나자 영호천문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음! 알겠군. 일천화의 몸에 자웅쌍고를 넣고 미녀들을 선사한다는 명목하에 무림의 신진고수들로 하여금 그녀들과 관계하도록 하려는 것이었겠지? 그렇게 되면 쌍고 중 하나가 사내의 몸 속으로 옮아 가겠고, 그 뒤로는 일천화와 더불어 신진고수들은 전부 왕고를 가진 자의 꼭두각시가 될 테니까." 그의 음성은 점차로 짙은 분노를 드리워갔다. 놀란 것은 그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던 반진후 쪽이었다. "정녕...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구려. 누군지는 모르나 귀하는... 대단한 사람이오. 하나를 말해도 열을 아니......!" 그 말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탄복이 깃들어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저 피식 웃을 뿐, 질문 공세를 그치지 않았다. "현재 왕고를 복용한 자는 누구지?" 반진후는 거의 체념에 이른 듯 순순히 대답했다. "화중부주요." 영호천문은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반진후,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미리 말했을텐데? 내 앞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고." "속임수라니! 당치도 않소. 나, 나는 진실만을......." 반진후는 말하다 말고 상대의 무서운 눈초리를 대하자 몸을 오싹 떨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영호천문의 입술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후후... 알고 있다. 그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 왜......?" "그것만으로는 안되지. 감추는 바도 없어야 하니까." "대... 대체 무슨 말인지......?" 영호천문은 정색을 지으며 추궁을 거듭했다. "말해라! 그대는 이미 후사(後事)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 그런데 아무 것도 안배해 놓지 않았다면 누가 믿겠느냐? 그 점을 지금 내게 불란 말이다." "아니오! 그건... 당신의 공연한 추측이오." 영호천문은 황망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반진후에게 손바닥을 스윽 내밀어 보였다. "이것을 보아라." 츠츳! "흑! 이럴 수가......?" 반진후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상대의 손바닥에서 거짓말처럼 예리한 칼날이 스며 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목 주위을 한 바퀴 돌고는 흔적도 없이 도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는 요술(妖術)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넋이 빠져 나가 버린 그에게 영호천문이 다시 말했다. "알겠나? 그대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이렇듯 쉬운 일이다." "으으......." "말해라." "사실은......." 반진후는 거의 울부짖듯 두터운 입술을 떼었다. "왕고 역시 자웅 한 쌍이오. 크으....... 이 일만은 화중부주도 까맣게 모르고 있소." "후후... 듣고 보니 무척 재미있군." 영호천문은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읊조렸다. "쯧! 도옥기도 안되었군. 기세등등한 그도 결과적으로는 타인에게 덜미를 내맡기고 있는 셈이 아닌가?" 반진후가 묻지도 않은 소리를 자청하여 내뱉았다. "그렇소. 자웅쌍고가 영성이 통하는 것은 왕고라 해서 다를 바가 없소. 만일 그가 나를 죽이면... 그도 죽소." 영호천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말인즉 그대를 죽이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도옥기까지 처치할 수 있다는 뜻도 되겠지?" 반진후는 안색이 핼쓱해져 황급히 부인했다. "아.... 아니오! 그건 아니오." "어째서?" "그가 복용한 것은 수컷이지만 남은 것은 암컷이오. 그것은 오직 여자만이 복용할 수가 있소." 영호천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흠, 그럼 암컷을 복용시킨 그 여인이 누구지? 그대의 생명을 지켜주는 수호여신 말이다." "그... 그녀는......." 반진후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으아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 느 결엔지 그의 등에는 은편(銀片)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영호천문이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은검폭혈참(銀劍暴血斬)!" 그것은 옥면사랑 도옥기의 독문 암기였다. 밖으로부터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려와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후후후... 사마운, 네가 직접 왕림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후후... 내 앞에서는 꼬리를 감추고 있는 편이 나았다. 가거라!" 슉--! 무엇인가 창문을 뚫고 날아오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영호천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뇌천굉화탄(雷天宏火彈)!' 꽝-- 꽈르르릉---! 폭발음이 사위를 울렸다. 뇌천굉화탄이 터져 거대한 불기둥을 이루며 방원 십 장여를 삽시에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린 것이었다. 이 한밤중의 폭발사건으로 인해 화중부는 발칵 뒤집혔다. 폭음을 듣고 곳곳에서 수많은 인영들이 튀어 나오더니 불길을 잡느라 일대 혼란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화중부주인 옥면사랑 도옥기는 그 사태에 일별도 고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허공을 향해 냉소를 뿌리며 자신의 거처인 화왕부(花王府)로 돌아가고 있었다. '후후... 사마운, 고맙구나. 그저께 밤 월인천강공으로 정체를 드러내 주어 네 명을 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가슴 한 구석에서 은은한 희열이 피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굉화탄의 맹렬한 폭발력에서 살아나기란 불가능하지. 사마운이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라도. 후후후......." 이 밤에 그는 경쟁자 하나를 처치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제 15장 천뇌토군(千腦土君)의 죽음 ① 대탐화제는 막바지로 접어 들었다. 일천화는 갖가지 선별방식에 따라 분류되고 화중지화로는 네 명의 미녀들이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그녀들이야말로 미중미(美中美)를 한 몸에 구비하고 있는 여인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사대화화사자들이 천거한 여인들이었다. 이옥랑이 데려온 천아월(千娥月)을 위시하여 궁아영(宮娥瑛), 이수옥(李水玉), 단혜혜(丹慧慧) 등의 네 명이었다. 그녀들이 최종적으로 화중화를 가리는 시험단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들의 미색으로 말하자면 하나같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인지라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난중난제였고, 설사 차이가 있다해도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그녀들을 상대로 화중화를 가려내기 위한 최종의 시험이란 옥면사랑 도옥기의 직접적인 선택이었다. 최고의 미녀를 취할 사람이 화중부주인 그였으므로. 어찌 보면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희극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이 경연대회는 계속하여 무사히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비무대(比武臺). 이는 따로 목적이 있어 천인단 위에 급조된 것이었다. 이른바 일천화를 얻고자 하는 청년고수들의 대결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비무(比武)만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었다. 연일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속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단순한 비무였으되, 갈수록 사상자가 속출하는 살벌한 전장(戰場)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청년고수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써 유혈극까지도 불사했다. 이런 분위기가 저절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화중부 비무 진행자들의 선동이 주효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청년들을 부추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 핫핫핫... 마음껏 실력들을 발휘하시오. 승자(勝者)는 무림의 후기지수라는 영예와 함께 절세미녀를 얻게 될 것이오. 그렇듯 달콤한 유혹은 비무대 위에서는 더 했다. "되도록 속히 승부를 내도록 하시오. 꽃같은 미녀들이 기다리다 지쳐 목이 빠질지도 모르니까." 대개 이런 말 뒤에 치열한 격돌이 있곤 했다. 꽝! 꽈르릉--!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라도 해서 빠질 리 없었다. 잔인한 유혹은 종내 광적인 열기를 돋구었고, 청년고수들은 하나같이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직 승자 위주의 편파적인 논리에 미녀를 얻게 된다는 감언이설까지 가세되어 정기충만했던 젊은이들의 이성(理性)을 가리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 이것은 살육제(殺戮祭)다! 필히 중지시켜야 한다. 무림인들 중 뜻이 있는 고인들은 비무의 양상이 험해지자 모두 그렇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화중부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도 표면적으로 나서려 하는 자가 없었다. 덕분에 맹목적(盲目的)인 젊은 고수들은 날로 피에 굶주린 사자들로 화해 가고 있었다. "그대가 화중화이니라." 화왕부를 은은히 울리는 그 음성에는 나직하나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음성의 주인은 옥면사랑 도옥기였다. 그는 지금 전면의 한 여인을 바라보며 득의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있는 단(壇) 아래, 칠채대리석으로 된 바닥에는 아까부터 홍의나삼을 입은 여인이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고개를 들라. 화중화, 그대에게는 향후로 무상의 영화와 부귀만이 있을 것이다. 이 옥면사랑의 제일부인이자 우내제일미(宇內第一美)로서 말이다." 그 말에 홍의여인이 비로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전청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물(尤物)도 그런 우물이 없었다. 아름답기가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전신 어느 한 부분일지라도 빠지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누가 보아도 마력(魔力)에 가까운 염기(艶氣)를 발산해내는 여인, 이때문에 꽃 중의 꽃으로 뽑히게 된 그녀의 이름은 천아월(千娥月)이었다. 천아월은 감히 화중부주를 정시하며 생긋 웃었다. "나으리, 정말로 제가 화중화가 된 건가요?" 그녀의 웃음을 대하자 도옥기는 그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흠, 마물(魔物)이군. 단지 가벼운 미소만으로 이 옥면사랑의 심혼을 단번에 뒤흔들어 놓다니.......' 그는 내심 저으기 놀랐으나 미소와 함께 답했다. "물론이다.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도옥기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사실 그는 열두 명의 후보가 정해졌을 때부터 이미 천아월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심사과정을 통해 그도 몇 번을 오가며 천아월을 보았는데, 그때마다 딱히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그녀에게서 늘상 기이한 매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화중화, 그대의 책임은 막중하다. 금후로는 본좌와 더불어 화중부를 빛내는 무림제일녀(武林第一女)가 되어야 한다. 미모 외에도 그에 어울리는 품격이 요구될 것이다." "품격이라 하오시면......?" 천아월의 눈빛이 일순 반짝 빛났다. 그녀의 내심을 알지 못하는 도옥기는 단지 그것을 호기심의 표현으로만 여겼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내일이면 구백구십구 명의 신진고수들이 선출되고, 그들은 모두 일천화와 맺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중부는 공히 천하제일지(天下第一地)가 될 것인즉 그대는 그 상징이 되어야 한다." 말이 좋아 상징이지,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인형(人形)인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자신이 이룰 천하패업(天下 業)을 화려하게 치장해줄 장식물이라면 맞았다. 옥면사랑 도옥기. 그는 애초부터 그런 위인이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여인을 취했으되 한 번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여인이란 머리가 나쁠수록 편리하다는 게 평소 그의 지론이기도 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화중화의 선발기준도 달랐으리라. 그가 학예(學藝)나 무공 정도 같은 것을 일체 배제하고 미모만으로 자신의 제일부인을 선정한 것도 실은 이때문이었다. 화중화 천아월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입을 살짝 가리고 웃을 따름이었다. "천첩은 오직 부주님만을 믿을 뿐입니다." "음, 본좌가 기대하던 말을 해주니 고맙구나. 후후후......." 도옥기는 기소를 흘리며 거듭 강조했다. "그대가 할 일이란 한 가지 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대어 줄테니 언제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도옥기는 정말로 흔쾌했다. 계산이 너무도 척척 맞아 떨어져 주어 잠시 더 바랄 것이 없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운명(運命)이라는 사슬이 보이지 않는 함정을 엮어 놓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그 혼례(婚禮)는 정녕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일생을 결정짓는 만큼 신중한 대사(大事)이겠지만 지금 거행되려 하는 행사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아마도 무림사상 초유라고 한들 부인할 자는 없으리라. 또한 그것은 화중부 대탐화제의 말미를 장식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 동안 사람들은 날을 잡아 일천화를 모두 구경했고, 감격스럽게도 화중지화로 당당히 뽑혔다는 소주제일미(蘇州第一美) 천아월의 눈부신 자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하루를 앞둔 행사, 즉 일천화에 속한 구백구십구 명의 미녀와 비무를 통해 가려진 구백구십구 명의 신진고수들이 전격적으로 치루게 될 혼례식이었다. 이로 인해 강호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 처음에는 예정에도 없었던 듯한 대기사(大奇事)가 사람들 모두에게 너무도 큰 충격파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각양각색의 소문들이 혼란을 야기시키는 가운데서도 밤은 지났으며, 그 거창한 혼례의 날이 도래했다. ② 화중화 천아월. 그녀는 망연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보아도 감탄할 만한 인간우물의 모습이 있었다. '이게 정말 나인가?' 그녀는 거울 속 자신에게 묻고 난 후, 생긋 웃었다. '그래, 천아월! 너는 천하제일녀가 되어 있는 거야.' 천아월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이런 순간이 있게 해 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옥랑, 그는 내게 기적을 만들어 주었어.' 다음 순간, 그녀의 요염한 얼굴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이옥랑을 생각하자 그가 몹시도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옥랑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알게 된 최초의 남자였다. 비록 현재는 모종의 계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어 버렸지만 변함없이 그는 천아월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영롱한 눈이 하릴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는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어떤 연상 작용으로 인해 몸이 후끈 달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뇌리에는 어쩔 수 없이 그와 보낸 시간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전율스럽도록 황홀했던 입맞춤, 그 뜨거웠던 애무....... 이르자면 그녀는 이옥랑이라는 사내에게 심신(心身)을 모두 활짝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라도 그가 달려와 주었으면 하는 야릇한 기대와도 이어지고 있었다. '차후로 반드시 그를 가까이 둘 거야.' 천아월이 이렇게 야무지게 부르짖고 있을 때였다. 스슷--! 그녀의 등 뒤로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거울을 통해 그 광경을 보게 된 그녀는 날카롭게 고함을 쳤다. "누구냐?" 그녀는 침입자를 향해 홱 돌아섰다. "하하... 그리 놀랄 것 없소, 낭자." 천아월은 금세 표정을 바꾸어 반색을 지었다. "옥랑, 당신......!" 과연 면전에서 빙그레 웃고 있는 자는 방금 전까지도 자신의 머릿 속에 그토록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던 이옥랑이었다. "반가워요. 그렇지 않아도......." 천아월은 말하다 말고 제 풀에 입을 꾹 다물었다. 명색이 화중화이다 보니 정말로 품격(?)이라도 의식되었던 걸까? 아니다. 그녀는 왠지 심통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바가 있었으니 이옥랑, 즉 영호천문은 사지(死地)에서 탈출하여 이곳에 와 있었다. 굉화탄이 폭발하던 그날밤, 그는 땅 속으로 파고 들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며 그 타격으로 인해 한동안 모처에서 두문불출하며 스스로 요상을 해야 되었었다. 그런 정도에 죽을 그였다면 천중일정이라는 별호를 내놓아야 했겠지만 그가 겪은 고초란 그리 만만치가 않았고, 그때문에 예정보다 좀 늦게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천아월을 향해 포권했다. "축하하오, 천낭자. 아니, 이젠 화중화겠구려." 천아월은 샐쭉 토라진 음성으로 답했다. "축하는요? 당신 덕분인 걸요." "하하... 꼭 그렇지만도 않소. 본래 가졌던 미모가 출중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 말에 천아월은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정말 자꾸 그렇게 딱딱한 얘기만 할 건가요?" 영호천문은 그녀의 뾰족한 고함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비로소 알아 차렸다. 하지만 그녀가 쓰러지듯 그의 목에 매달려 온 것이 그보다 훨씬 먼저였다. "나쁜 사람! 당신은 나빠요......!" 대체 무엇이 나쁘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의 영호천문은 충격적인 그녀의 체향에 내심 쓴 웃음을 흘려야 했다. '쯧! 내 작품(?)이긴 하나 정말 걸작이군.' 그는 나긋한 천아월의 허리를 쓰다듬듯 끌어 안았다. "으음......." 천아월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영호천문은 이미 그녀의 알몸 구석구석까지 눈을 감고도 훤히 그려낼 수 있었을 뿐더러 그녀 특유의 성감대(性感帶)까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손길이 천아월의 몸을 몇 차례 건드리자 그녀는 이내 뜨겁게 달아 올랐다. "안아줘요!" 격정에 찬 그녀의 음성을 영호천문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안되오. 아직은 때가 아니오. 최소한 아월, 당신이 내 부탁을 이행하기 전까지는 말이오." "흐응,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천아월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후후... 단 한 가지 뿐이오." "그게 무엇인지 어서 말해 봐요." "도옥기의 몸 속에서 양고(陽蠱)를 흡수해 주시오." "뭐라고요?" 그녀의 몸이 일순 찬물을 뒤집어 쓴 듯 경직되어 버렸다. "양고라니... 대체 무슨 말을......?" 천아월은 어느덧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요. 도옥기와 당신은 자웅쌍고를 나누어 각자의 몸 속에 지니고 있소. 그런즉 그에게서 양고를 빼내는 것이 내 부탁이자 그대가 해야 할 일이오." "맙소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그나마 다행인 줄 아시오. 반진후가 살아 있었다면 당신은 지금쯤 아마 그의 금제(禁制)로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을 것이오." "반진후......? 그 자는 또 누구죠?" 황당하여 어쩔 줄 모르는 천아월에게 영호천문은 간략하게 묘강독황 반진후와, 그에게 관련되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끝으로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이곳 화중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같이 단순하지가 않소. 당신의 계산으로는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으음......." 천아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영호천문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일말의 공포감이 어려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하하... 잘 알지 않소? 나는 화화사자 이옥랑이오." "아니에요! 당신은 분명 그 사람이 아닐 거예요." 영호천문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소." "그럼 무엇이 중요하단 거죠?" "나는 낭자를 해칠 마음이 조금도 없소. 단지 처음부터 그랬듯 협조를 구하고자 할 뿐이오." 그제서야 천아월은 약간 침착을 되찾은 듯 했다. 그녀는 몇 차례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 일의 내막은 어떻게 알게 되었죠?"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반진후가 죽기 직전에 알려 주었소." "아!" 천아월은 탄성을 발했다. "그는 도옥기에 의해 죽어 가면서도 글을 남겨 놓았소. 그것은 천(千)이라는 단 한 글자였소." "정말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군요." "후후... 고맙소. 그것이 진심이라면 말이오." 웃고 있는 영호천문에게 천아월이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화중부주와는 원한이 있나요?" "부인하지 않겠소." "그럼... 그를 이길 자신은 있나요?" 이번에는 영호천문이 물었다. "무슨 뜻이오?" "혹시 이런 생각은 안해 보셨나요? 만일 제가 당신을 배반하고 오히려 그와 손을 잡으면 어떻게 할 거죠?" 영호천문은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 웃었다. "거기까지야 당신 소관이니 낸들 어찌 하겠소?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할 것이오." "어째서요?" "그건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이오." 천아월은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자신만만하군요?" "사실 그렇소." 그녀는 안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당신은 누구죠?" 영호천문의 눈에서 신비한 빛이 흘러 나왔다. "알면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건 왜죠?" "후회란 빨라도 늦는 법이니까." "관계 없어요." 딱 잘라 말하는 그녀를 영호천문은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월, 그대는 혹시 무영탐화랑이란 별호를 들은 적이 있소?" "그럼 당신이......!" 천아월은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그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여 놀라움이 진정되자 겨우 입술을 떼었다. "소문으로는 죽었다던데......?" "후후... 소문이란 별로 믿을 바가 못되는 법이오."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자신하셨나요?" "그렇소." 천아월은 일시지간 전신에서 힘이 다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음성은 탄식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겠군요?" "그런 셈이오." "이 시대의 제일인, 그 사람을 일컬어 세인들은 희대의 풍류남아라고 불렀죠. 그러나 이제 보니 그는 꽃을 즐길 뿐 아니라 꽃의 불행까지도 즐기는 잔혹한 사람이었군요." "아월......!" "당신은 제가 화중부주의 몸에서 양고를 흡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죠?" 영호천문은 그만 할 말을 잃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천아월의 커다란 눈망울에 서서히 이슬이 맺혔다. "제 상식으로도 그 정도쯤은 알아요. 아마도 저는 그와 합방(合房)을 해야만 그의 체내에서 무형심인고의 양고를 빼낼 수가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급기야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결국 저같은 여자는 어찌 되어도 좋다는 뜻이겠죠." "아월......." 영호천문의 안면에서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그것을 보았는지 천아월은 우는 가운데서도 씁쓸히 웃었다. "하긴 당신만을 탓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일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누구보다 제 자신에게 더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조건이 있어요." "말해 보시오. 가능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 주겠소."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던 천중일정 무영탐화랑의 본 모습을 보고 싶어요." 영호천문은 길게 탄식했다. "안되었소만 내 얼굴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소." "어떻든 좋아요." "그렇다면......." 스윽! 영호천문이 손으로 한 번 문지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그가 지녔던 제이의 얼굴로 변했다. "과연 탐화랑답군요." 천아월은 경황중에도 은은하게 뺨을 붉혔다. "미안하오, 당신이 원하던 본 모습이 아니라서......." 영호천문은 말끝을 흐리더니 화제를 돌렸다. "밤이 되면 혼례식이 있을 것이오. 그때를 위해 당신도 서서히 준비를 해야 될 것이오." 천아월은 생긋 웃었다. "좋아요. 어차피 내게도 야심이 있었으니까 일단은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하지만 아직 조건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어요." 영호천문의 안면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월......!" "호호호... 그리 대단한 요구는 아니예요. 일이 끝난 후, 당신과 일야(一夜)를 보내고 싶어요. 그 뿐이에요." 그녀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으되, 듣고 있는 영호천문은 가슴이 뭉클했다. 번번이 그랬지만 그는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여인들을 상대로 매몰차게 굴 수 있는 인간은 못되었다. 목적이 있어 접근했다가도 종국에는 그 자신도 모르게 여인들의 본성을 이해하고 연민을 가지게 되니 어쩌겠는가? 지금도 그는 천아월의 심중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이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좋소." "호호호... 영광이군요. 한낱 도구 정도로 취급되던 계집이 천하의 무영탐화랑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니 말이에요." 영호천문은 쓰린 심정이 된 채 몸을 돌렸다. "난 그만 가겠소." "어서 가세요. 당신과는 더 할 말도 없으니까요." 천아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침상 위에 쓰러졌다. 소리 없는 흐느낌과 더불어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들먹이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탄식하며 몸을 날렸다. 스슷! 그가 사라진 직후, 천하월은 소리내어 울었다. "화중화라고? 그까짓 게 다 뭐야. 으흑흑......." ③ 혼례식은 실로 성대했다. 일천쌍이 한꺼번에 맺어지다 보니 일대 장관을 이루었고, 덕분에 천중오패의 하나인 화중부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약간의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초청된 손님들도 다수였고, 비무를 통해 선발된 구백구십구 명의 신진고수들은 각자 나름의 하객들에게 둘러싸인 채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비무대회에서 그들은 제각기 오승을 올린 바 있었다. 그것은 다섯 번 연속으로 승리를 한 자만이 채택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영예를 획득했거니와, 거기에다 화중부가 제공하는 절세미녀까지 선사받게 되자 겹친 행운에 기뻐서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꽝꽝꽝......! 신명나는 꽹과리 소리와 각종의 주악소리가 혼례식의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더욱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혼례식은 시종 흥분 속에서 거행되었고, 그들을 위해 화중부의 일각, 즉 화화부에서는 원앙촉이 밝혀진 구백구십구 개의 침실이 대기 상태로 있었다. 신방(新房). 구백구십구 쌍을 맞는 화촉동방이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연이어 지어진 방사에는 오색등롱이 무수히 걸려 있고, 은은한 주악이 계속 끊이지 않고 그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 가운데 각 방에서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청년들이 모두 절세미녀들의 옷고름을 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국외자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해괴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에 승리로 인한 만족감에 도취되어 꽃같은 미녀를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거늘 무엇을 꺼릴 손가? 그들은 오직 한 가지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밤을 기해 미녀와 마음껏 즐김으로써 그 간에 쌓였던 긴장과 피로를 말끔히 떨쳐내 버리고 싶다는....... 이에 응하는 미녀들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은 마치 오늘 밤을 위해 존재해온 듯 청년들 품에 안기자마자 폭죽을 터뜨리듯 격렬하게 열정을 발산해 내기 시작했다. 정욕(情慾)의 밤. 곳곳에서 젊은 피가 들끓는다. 개중에는 화촉이 꺼진 방도 있고, 그대로 환하게 켜져 있는 방도 있다. 하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는 동일했다. 파과(破瓜)의 신음소리, 환희와 열락에 찬 거친 숨소리....... 다 같이 어우러져 함성처럼 들리는 그 괴이한 음향은 바로 구백구십구 개의 죄악(罪惡)이 잉태되는 소리였다. 그 손은 여인처럼 희고 고왔다. 지금 그 손은 술잔을 쥐고 있었는데, 술잔 속에는 호박빛의 황홀할 정도로 감미로운 합환주(合歡酒)가 담겨 있었다. 손의 임자는 옥면사랑 도옥기였다. "하하핫......! 화중화, 오늘 밤만 지나면 그대는 천하를 굽어 보는 여인이 된다." 그는 스스로 도취된 듯 전에 없이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혼례복을 차려 입은 화중화 천아월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원앙촉 아래 그녀의 자태는 폭발적인 염기를 뿌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윽한 눈길로 도옥기를 지그시 바라보며 꽃잎같은 입술을 열었다. "정녕 천첩이 천하제일녀가 되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그대는 일천화 가운데서 뽑혔으며 우내제일미이기도 한데 어찌 여인지상(女人之上)이 아니겠느냐?" 천아월을 허리를 비틀며 배시시 웃었다. "천첩은 그저 꿈만 같아요." "하하하... 그럴 테지. 어서 합환주를 나누자." 도옥기는 찰랑이는 술잔을 들어 먼저 자신이 반을 마신 후, 그녀게게 넘겼다. 천아월은 섬섬옥수를 공손히 받쳐 올려 잔을 받고는 입술 사이로 호박빛 액체를 흘려 넣었다. 술은 독했다. 그러나 그녀가 술과 함께 꿀꺽 삼켜버린 비애는 그보다 훨씬 더 독했다. 내색할 수 없는 서러움이 그녀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으므로. 같은 시각. 화왕부 내에서도 은밀한 내전(內殿)이다. 이곳은 원래 화중부주인 옥면사랑 도옥기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는 금역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이 머물기 시작했고, 그 자는 현재 황금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바닥에 지도(地圖)를 펼쳐 놓고는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한 가지 이색적인 것은 그 자의 키가 불과 사척(四尺)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난쟁이 청년은 손에 산통(散筒)을 쥐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괴소성이 흘러 나왔다. "히히히... 만사가 뜻대로 되어 간다. 모두들 이 공야중(公冶仲)의 신복술에 놀아나고 있어." 스스로의 입을 통해 밝혀진 그의 정체는 구정 중의 일인인 천뇌토군(千腦土君) 공야중이었다. 그가 화중부의 내전에서 이렇듯 홀로 자족감에 취해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날 비웃지 못해. 아암, 한결같이 나를 난쟁이라고 경멸했지만 어디 두고 봐라. 용천후, 왕영(王永), 금백만(金百萬), 너희들도 곧 이 공야중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것이다." 천뇌토군이라는 별호가 말해 주듯 그가 가진 천(千)의 뇌(腦)는 이 시각에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히히... 도옥기는 멍청한 놈이다. 제 깐에는 최고라는 계집을 옆구리에 달고 그럴싸하게 천하를 호령하고 싶어 하지만 어림없지. 나 공야중의 조종이 없으면 너는 시체나 다름이 없다."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해 뵈는 그의 눈에서 기광이 흘러나왔다. "꺼림직한 존재는 오히려 사마운이다. 도옥기는 그가 죽었다고 했지만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 절그렁! 절그렁....... 공야중은 수중의 산통을 흔들었다. "사마운이 어디 보통 놈인가 말이다. 놈의 야심도 도옥기에 못지 않을진저, 지금쯤 어디선가 조심스럽게 몸을 사리고 있겠지. 히히... 도옥기,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방천(方天)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차가운 음성이 들려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게 정말이냐? 공야중." "누, 누구냐?" 공야중의 안색이 홱 변했다. 동시에 산통을 잡은 그의 주먹에 는 한껏 힘이 가해졌다. "후후... 천뇌도 때에 따라서는 전혀 소용이 없구나. 다정한 옛친구의 음성도 잊어 버리다니." "너... 너는......?" 공야중의 안색이 삽시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대체 너는... 누구냐?" "후후후... 공야중, 그렇게 부정하려 애쓰는 것을 보니 너는 벌써 내가 누군지를 알고 있구나." "너... 너... 정말......." 공야중은 일순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설마... 천문......?" "왜 아니겠느냐? 후훗!" "아니,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공야중의 눈알이 불신과 회의를 담은 채 섬광을 발했다. "모습을 보여라! 천문은 죽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 그는 말하던 도중에 얼어붙은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슥--! 그의 전면에 환영처럼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으음, 귀무환종술(鬼舞幻踪術)......!" 공야중은 이 한 순간에 갑자기 전신이 차디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보자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히힛! 하마터면 속을 뻔 했군. 넌 누구냐?" 영호천문의 얼굴이 과거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야중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점은 영호천문으로 하여금 씁쓸함과 분노라는 두 가지 감정을 한꺼번에 가지게 만들었다. "쯧! 공야중, 차라리 너를 동정하고 싶다. 세월의 흐름이 네 기억을 모조리 흐리멍텅하게 해 놓은 것 같아서 말이다." "무슨 헛소리냐?" 영호천문은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한 짓을 잊지 않았다면 그런 말도 역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야중, 나도 지금의 이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지난 날 낙일애(落日崖)에서 내 본래의 얼굴을 잃었으니 말이다. 후후... 그건 네가 더 잘 알텐데?" "우우... 그럼 너는 정말 천문......?" "유감이겠지만 그렇다." 공야중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재차 섬ㅉ 몸을 떨었다. "그... 그럼 최근에 황금전을 위협한 것도 너......!" 영호천문은 와중에도 공야중이 슬쩍 옆으로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 한 가닥 잔혹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물론이다. 나는 과거를 잊지 않으니까." "으음, 그래서 불망객(不忘客)이었더냐?" "후후... 그건 그렇고, 심히 걱정되는구나. 몸을 빼내는 것을 보니 나와 대적할 모양인데......?" 말을 하며 영호천문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덕분에 그는 황금 태사의와 불과 일 장여의 거리를 두고 서게 되었다. 공야중의 안색이 긴장으로 인해 잔뜩 굳어졌다. 그의 눈알은 여전히 바쁘게 구르고 있었다. "아무튼 난 믿을 수 없다. 그때 넌 도저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몸이었다." "후후... 공야중, 너답지 않은 말이구나. 세상에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벌어지게 마련이지 않느냐?" 영호천문은 또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으으......! 아니다, 아니야." 공야중은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진즉부터 영호천문의 재생을 조금도 회의하지 않았다. 상대의 기도에서 벌써 그 자가 이 시대의 제일인인 천중일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했기에 자꾸 묻고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히히... 오너라. 한 걸음만 더... 옳지!' 마침내 공야중은 들고 있던 산통을 앞으로 기울였다. 슈슈슉--! 산저가 화살처럼 폭사되어 영호천문에게로 날아갔다. 일장도 채 안 되는 지척의 거리에서 이를 피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파파팟! 과연 끝이 비수처럼 날카로운 산저는 삼십육 방위로 퍼져 영호천문의 몸을 관통해 버렸다. "히히히... 넌 당했......!" 공야중은 말하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분명 상대방의 몸에는 삼십육 개의 산저가 고스란히 꽂혀 있거늘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자는 쓰러지기는커녕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공야중, 네 방식은 여전하구나.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 텐데?" "우우... 너의 무공도 역시 여전하구나." 공야중은 감탄스럽다는 뜻인지, 기가 막히다는 뜻인지 어린애처럼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태사의의 손잡이를 툭 쳤다. 영호천문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도 그때였다. "핫핫.. 낡은 수법!" 슈-- 펑! 태사의에서 불덩이가 쏘아졌으나 그것은 속절없이 영호천문의 발 밑을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놈! 영리한 것도 여전하고." 공야중의 안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팔을 쭉 뻗었다. 위잉--! 이름하여 사옥인(死獄引), 그의 성명절학이 전개되었다. 륜(輪), 탈(奪), 도(刀) 등 그 무엇으로도 변화가 가능한 기형의 무기가 마침내 발출되었던 것이다. "핫핫! 그것도 역시 변함이 없군?" 카앙--! 영호천문이 소매를 한 번 젓자 여의무형인이 쏘아져 나가며 불똥을 튕겼다. "히힛!" 공야중은 무엇이 좋은지 키득거리며 두 손을 마구 저었다. ㅆ--! 쐐애액--! 또다시 세 개의 사옥인이 뻗어 나갔다. 그러자 도합 네 개의 사옥인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치더니 방금 전보다 수십 배나 속도를 빨리하여 영호천문을 짓쳐갔다. ④ 영호천문은 탄성을 발했다. "놀랍군! 그 동안 세 개를 더 만들어 냈다니." 동시에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풍차처럼 회전했다. 카카카캉--! 무수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네 개의 사옥인은 모두 다 튕겨나가고 말았다. 영호천문의 팔다리에서 발출된 여의무형인이 그것을 한 개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우우... 그건 대체 뭐라는 무기냐?" 공야중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쐐애애-- 애액--! 그의 공력으로 인해 튕겨져 나갔던 사옥인이 이번에는 탈(奪)로 변해 사면에서 영호천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일순 영호천문의 몸이 허공에서 딱 정지하는가 싶더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일대 장관을 연출해냈다. 파츠츠츳--! 네 개의 검인이 일제히 검강(劍 )을 뻗으며 작렬했던 것이다. 콰웅! 콰츠츠츠츠--! 장내는 검화로 가득 찼으며, 그 바람에 사옥인은 완전히 힘을 잃은 듯 맥없이 되튕겨나가 버렸다. 다음 순간, 영호천문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공야중의 면전에 번뜩하고 내려섰다. "헉!" 공야중은 아찔함을 느꼈다. 상대방의 기세도 놀라웠지만 그의 얼굴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한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엄연히 구정 중 일인이다. 안색을 되찾기가 무섭게 그의 몸이 부풀기 시작하여 평소보다 세 배나 커졌다. 우웅--! "거화신공(巨華神功)!" 영호천문은 짧게 탄성을 발하는 한편, 즉시 쌍장을 뻗었다. 그 짧은 찰나에 그의 손이 천수(千手)로 화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 모두가 눈처럼 하얀 소수(素手)로 변했다. 꽝--! "크헉!" 폭음과 함께 공야중은 피를 뿜으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황금 태사의로 날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위잉--! 그의 엉덩이가 닿자마자 태사의는 쾌속하게 회전했다. 파파파팟--! 태사의에서 뿜어져 나온 암기가 사방으로 빗발치듯 날아갔다. "으윽!" 허공으로 떠오르던 영호천문의 몸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그는 앞으로 엎어지며 사지를 쭉 뻗어 버리고 말았다. 태사의는 그제서야 회전을 멈추었다. 천뇌토군 공야중. 그는 멍한 표정으로 영호천문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천문, 실로 뜻밖이었다. 네가 살아 있었다니......." 그의 얼굴에는 뭐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분명한 것은 생명을 위협하던 강적(强敵)을 처치한 자의 표정치고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툴툴거리는 그의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너는 죽었다. 불운하게도 두 번씩이나 죽은 것이지. 이 공야중에 의해서 말이다." 공야중은 쓴 입맛을 다시며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영호천문에게로 걸어 가더니 발 끝으로 그를 툭 찼다. 영호천문의 몸이 바로 뒤집어졌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공야중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억!" 그는 전신의 털이란 털은 솜털까지도 몽땅 곤두서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영호천문이 눈을 번쩍 뜨더니 그를 향해 씨익 웃었기 때문이었다. "공야중, 너는 두 번 죽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느냐?" 슉! 빨랐다. 필설(筆舌)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천하의 공야중도 단지 상대가 입을 약간 벌리는 찰나, 무엇인가 반짝하는 광채가 자신에게 쏘아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으아아--!"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벌렁 뒤로 넘어갔다. 선연한 핏줄기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화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영호천문이 누웠던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끄으으......." 그는 무감동한 시선으로 고통스러운 듯 바닥을 마구 나뒹굴고 있는 천뇌토군 공야중을 내려다 보았다. "공야중, 적어도 너라면 언제고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생각해 두었어야 했다." 무억양의 그 음성을 들으며 공야중이 얼굴을 가린 손을 떼었다. 이마,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미간(眉間) 한복판에 구멍이 뚫려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구멍 속에는 이촌(二寸) 정도 폭의 은편(銀片)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여섯 개의 여의무형인 가운데 하나로써 영호천문의 입 속에 비장되어 있던 것이었다. "으으... 이건 또 뭐라는 것이냐?" 공야중은 안면이 피범벅이 된 채 물었다. 영호천문은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까 것과 같다. 여의무형인이라고 하지." "그것 참......, 깜찍하군." 공야중의 음성이 다소 잦아 들었다. 영호천문은 태사의로 걸어가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공야중, 우리들이 수련을 받던 때를 기억하나?" "기억하고 말고." "후후... 그때부터도 우리는 서로 죽거나 죽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지." "그래......." "그렇지만 낙일애의 사건은 아무래도 너무 뜻밖이었다. 더구나 내 스스로 은퇴를 선언하는 마당에 말이다." "흘흘... 그건... 맞다." "음, 시인해 주어 고맙구나." "하지만 한 가지...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너의 독주(獨走)를 막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 이유라면 그 당시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히히......." "그래서 나는 결심했지. 낙일애에서 다시 살아 나간다면 내 손으로 구정 모두를 거두겠노라고." "아마도 넌......." 공야중은 오한이 인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죽음이 그에게로 가까이 몰려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 있을 거야. 능히......." "역시 고마운 대답이군." 영호천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마도 가는 길이 그다지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곧 네 뒤를 따를 사람이 있을 테니까." "옥... 옥기(玉奇)......?" "그래." "감사는 내가... 해야겠군. 히히... 그렇지만... 좀 아쉬워. 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그 모자란같은 놈을 이용... 천하를 손에 쥘 수....... 꼭... 자신이 있었는데......." 영호천문은 공야중의 눈자위가 서서히 경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차갑게 잘라 말했다. "아니, 넌 그러지 못했을 게다. 나는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까. 모르고 있었나 본데, 일전에 도옥기와 상면했던 사마운도 나였지." "그랬... 나? 기막히군." "말해 다오." "무... 얼......?" "사마운과 방천에 대해서." "히히... 그 놈들이 다음 차례... 인가......?" "예정은 그렇다." "좋......군. 저승길에... 동무가 많아지게 생겼으니......."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공야중은 팔다리를 꿈틀거렸다. 그것은 그의 눈에서 불현듯 일어난 섬광과 때를 같이 한 현상이었다. '회광반조!' 영호천문은 그렇게 읊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공야중의 음성이 잠시 전과 구별될 정도로 똑똑해졌다. "그들은 비밀리에 많은 준비를 했지. 흘흘... 거기에 관해서는 나만이 알아. 심지어는 그 잘난 천후도 모르고 있다." "으음!" "그들은 잊혀진 기문(奇門)들을 통합했다." "기문?" "혹시 기억하나? 신주사대기문(神州四大奇門)이라고." 영호천문은 흠칫 했다. "그럼 그들 사대기문을......?" "히힛! 사마운은 영리한 놈이야. 오십 년 전 소림의 미친 중놈에 의해 멸망한 벽력방(霹靂幇)을 위시하여 나머지 삼문(三門)까지도 벌써부터 모조리 포섭해 놓았다." "후후... 숨은 실력자로군." "그리고 그것은......." 공야중의 음성이 중간에서 희미하게 부서져 나갔다. 대신 그의 목에서 그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천후... 때문......." "천후?" 영호천문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히히... 그 놈에 비하면... 천문, 너는 아직도... 순진......." 공야중의 음성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냐? 좀더 쉽게 얘기해 봐라!" "그 놈은 음흉... 낙일애 사건도... 그 놈이 조장... 조심... 그... 맹(盟)의 배후에도 놈이......." "맹이라니! 대체 무슨 맹을 말하는 것이냐?" 영호천문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자 진기를 불어넣기 위해 공야중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슉! "흑!" 빛살같은 광채가 뻗어 오더니 공야중의 목을 댕겅 날려 버렸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통은 무력하게 몸체와 분리되어 한 구석으로 굴러갔다. "아뿔싸!" 영호천문은 통탄을 금치 못하며 바닥을 차고 날아갔다. 와장창--! 그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창문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가 없었다. 그가 쫓던 자는 벌써 저 멀리로 밤의 장막을 뚫고 뿌연 그림자로 화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늦었구나!' 영호천문은 발을 굴렀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지체없이 원위치로 되돌아왔다. "으음! 대체 어떤 자일까?" 그는 공야중의 목을 날린 물체를 주워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형암기(奇形暗器)로서 크기가 손바닥 반쪽만 했다. "이것은 월인수라도(月刃修羅刀)가 아닌가?" 영호천문은 신음처럼 내뱉았다. 그것은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치고 십대살객(十大煞客)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이른바 살인의 전문가들이다. 일찌기 저 유명한 천병환사나 사자천효, 해천일살 등도 모두 십대살객의 일원이었다. 영호천문이 들고 있는 기형암기의 주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인수라도를 쓰는 자는 수라무혼(修羅無魂)이다.' 수라무혼. 그는 성(性)도, 이름도 없이 오직 수라무혼이라고 불리운다. 그 역시 최고의 자객이되 한 번도 세력을 가진 적이 없었고, 출신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 자가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영호천문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일이 이렇듯 실타래처럼 엉키니 지금까지의 계획은 필히 수정되어야 했다. '그가 나를 알았다.' 이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영호천문으로서도 전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는 안면을 딱딱하게 굳히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방법은 한 가지, 수라무혼을 잡는 것 외에는 없다." 스슷! 그의 모습이 내전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그곳에 남은 것이라곤 목이 잘리운 천뇌토군 공야중의 시체 뿐이었다. 구정 중 일정의 이름이 허망하게 지상의 명부에서 지워졌으나 밤은 알고도 침묵하고 있었다. 제 16장 화중부(花中府)의 멸망 ① 정사(情事)는 격렬했다. 세상에 이처럼 뜨겁고도 감미로운 일이 또 있을까? 심혼육백(心魂肉魄)이 녹아 흐르는 이 한 순간을 위해 어떤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도 한다. 생식(生息)에 목적을 두는 자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자도 육체의 교접이 가져다 주는 쾌락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사내는 현재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체내의 모든 힘을 한 곳을 통해 분출하고자 할 따름이었다. 그의 등에 손톱을 세운 계집이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하아아......!" 그렇게 밤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음모에 의한 것이든, 청춘의 업(業)이든 간에 사내와 계집은 단단히 한 몸으로 묶이고 말았던 것이다. 화중화 천아월.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계속하여 비릿한 교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황홀경을 헤매다가 까무러치기를 대체 몇 번째인가?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 속에서 잔인하리만큼 끝없이 일어나는 욕구에 발정한 암짐승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옥면사랑 도옥기는 타고난 호색한이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 그것도 절세미녀들과 정사를 치루었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달랐다. 무엇보다 여체가 지닌 탄성(彈性)이 그를 놀라게 했다. 때로는 아교처럼 끈끈하다가도, 때로는 버들가지처럼 휘청이며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는 한없이 깊은 늪에 침몰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천아월은 무서울 정도의 흡인력으로 줄곧 그를 빨아 들였다. 어디 그 뿐인가? 뱀처럼 칭칭 감겨 사정없이 열수(熱水)를 쏟아내는 그녀에게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옥기인들 별 수 없었다. 그는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천아월의 비소(秘所)를 통해 체내 깊숙이 심어 두었던 고충(蠱筮)을 속절없이 몰수당하고 있었다. 이 밤, 옥면사랑 도옥기의 운명은 환락 가운데 아득한 수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여명이 터오기 직전에 옥면사랑 도옥기는 눈을 떴다. 육신은 다소 지쳐 있었으나 정신만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그런 느낌은 아마도 지독하리만치 격렬한 정사 때문이리라. 그는 나른한 쾌감의 여운을 박차고 화중화 천아월의 육체를 벗어났다. 중요한 볼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후후후... 요물(妖物)!' 그의 시선은 잠시 곤히 잠든 천아월에게로 향했다. 흠뻑 땀에 젖었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몇 올쯤 붙어 있었다. 터질 듯 풍만한 젖가슴의 돌기는 아직도 열기를 품은 듯 위로 바짝 치솟아 있었다. 도옥기는 빙긋 웃으며 천아월의 유방을 손으로 한 번 툭 건드린 후, 몸을 돌렸다. 그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그가 막 돌아선 찰나에 화중화 천아월의 눈이 반짝 떠진 것을. 천아월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심이야 어떻든 그것은 처절하리만큼 매혹적인 미소였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요기로운 얼굴에는 점차 야릇한 기운이 번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의미를 동반한 채....... "맙소사! 이건......!" 옥면사랑 도옥기. 그는 일시지간 경악성과 함께 얼어 붙고 말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오직 그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내전 앞이었다. 그런데 그 입구에서부터 벌써 그는 코끝으로 확 끼쳐 오는 역한 피비린내를 맡았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든 것도 잠깐이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간 그는 온몸의 털이란 털은 전부 뻣뻣하게 곤두서고 말았다. 황금 태사의에서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천진난만한 그 얼굴의 주인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공야중!" 도옥기는 넋이 나간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를 맞이한 것은 온전한 천뇌토군 공야중이 아니라 그의 수급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지 밤 사이에 머리가 잘려 의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도옥기는 방금 전까지도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있던 쾌락의 열기가 일시에 차갑게 냉각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공야중이 죽다니! 누가, 어떻게......?' 그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전 안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격전이 벌어졌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아마 공야중의 시체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애초 그의 머리가 놓여 있었던 듯한 자리에도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어 도옥기의 가슴을 더욱 써늘하게 만들었다. "우우... 어찌 이런 일이......"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있어 감히 구정 중 한 명인 천뇌토군 공야중을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문득 도옥기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맞은편 벽에서 핏물로 쓴 글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진 빚을 이제야 돌려 주게 되었노라. 불망객(不忘客)> "불망객이라고......?" 도옥기는 막막한 듯 휘청거렸다. 그 자의 이름은 전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 왔으되 여하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네 놈은 뭐냐? 누구이기에 내 부중에서 이 따위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과거가 어쨌기에, 설사 모종의 사연이 있다 한들 네 놈의 과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도옥기는 흡사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고 있었다. 불망객으로 이르자면 최초로 황금전에 정면도전을 시도한 신비객이다.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며 그 파고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만일 그런 인물과 나쁜 쪽으로 과거가 연결되어 있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목숨을 내놓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옥면사랑 도옥기가 누구인가? 그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히려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크으윽! 놈, 너를 가만 두지 않겠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 일장을 내쳤다. 꽝--! 공야중의 수급과 함께 태사의가 대번에 박살이 나 버렸다. "오라! 불망객이든 누구든 나 도옥기가 상대해 주마." 우웅--! 그의 고함 소리에 대전 전체가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이윽고 옥면사랑 도옥기는 돌아섰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막 떠오르는 태양이 화왕부의 잠을 깨우는 것을 보며 가슴을 쭉 폈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금 그 특유의 오만한 미소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후후후... 이깟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잠시 후면 화중부의 천하가 태동할 테니까." 그는 방금 전에 비해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화중부주인 도옥기에게는 무려 구백구십구 명에 이르는 신진고수들이 있었으므로. ② 천인단의 광장(廣場). 그곳에는 줄잡아도 삼천여 명 이상의 인원이 운집해 있었다. 드넓은 대(臺)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는 비무대를 손보아 개조해 놓은 것이었다. 그 위에는 구백구십구 명의 젊은 청년고수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초야(初夜)를 치른 그들의 표정은 희희낙락이었다. 절세미녀를 품에 안고 황홀한 시간을 보냈으니 왜 안그렇겠는가?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통지를 받았다. 화중부주가 직접 나서서 그들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천중오패 중 일패(一覇)인 화중부에 대해서, 구정 중 일정인 도옥기에 대해서 일종의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이어 해가 중천에 뜨자 화중부의 대문이 활짝 열리며 그곳으로부터 일단의 인물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을 보고는 먼저 나왔던 삼천여 명의 인물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와아아--!" 화군(花群), 문자 그대로 꽃의 무리였다. 보기만 해도 절로 탄성을 발해지는 절색의 미녀들이 줄지어 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와-- 아--!" 청년들의 함성은 갈수록 더욱 더 높아졌다. 한 명이 빠지는 일천화, 즉 그들의 영예를 한껏 치장해 준 꽃이다. 더구나 지난 밤 살을 섞음으로써 그녀들의 확실한 소유주가 되기도 했으니 청년들의 환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호사스러운 차림새를 갖추고 있는 일남일녀(一男一女)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 두 사람의 외모는 그렇듯 가희들 속에 파묻혀 있어도 단연 발군(拔群)이었다. 이들을 알아 보고 청년들이 외쳤다. "와--! 화중화다!" "화중부주가 현신하셨다--!" 두 남녀는 옥면사랑 도옥기와 화중화 천아월이었다. 도옥기는 군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한 후, 거침없이 대(臺) 위로 올랐다. 그의 태도는 군왕(君王)의 그것인 양 당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중인들은 열광적으로 도옥기를 맞이했고, 그 열기로 인해 장내를 휩싸던 들뜬 분위기는 더욱 고조될 따름이었다. 이처럼 일천화가 꽃구름처럼 모여 있고 화중부의 천오백여 고수들이 도열한 가운데 청년고수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인물이 대 중앙에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단지 이 짧은 한 마디로 장내는 삽시에 조용해졌다. 도옥기는 기광이 감도는 눈으로 장내를 쓸어 보았다. 뜨거운 야망이 그의 혈관을 들끓게 만들었다. '후후... 오늘부터 화중부는 무림제일지가 된다.' 그는 청년들을 향해 꽤 위엄있게 말했다. "모두들 초야는 잘 보냈으리라 믿소." 굳이 나서서 답하는 자는 없었으나 청년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감격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기화로 도옥기는 일진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중인들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는 사이,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강한 힘이 깃든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로써 그대들은 본 부의 천화신병(千花神兵)이 되었소. 그대들은 금후로 본 부의 명령만을 따라야 하며 화중천하(花中天下)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 초석(礎石)이 되어 주어야 하오." 그 말이 끝나자 장내에는 이내 소요가 일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뜻하지 않았던 소리를 듣게 되자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안면을 굳힌 채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설마 화중부주께서 우리를 상대로 농담을......?" "터무니 없는 소리! 이건 말도 안된다." 중인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도옥기는 앙천광소 했다. "으하하하핫......! 아직도 모르겠는가? 천화신병들이여, 그대들이 취했던 꽃들은 모두 그대들의 본 부 가입을 기념하기 위해 본좌가 미리 마련해 둔 하사품이었노라." "이... 이럴 수가......?" "그럼 우리가 전부 계획된 각본에 놀아났단 말인가?"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장내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개중에는 벌써 흥분하여 욕설을 퍼붓는 청년들도 있었고, 그 통에 분위기까지도 급전되어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옥면사랑 도옥기는 군중들의 동요가 심각한 것을 뻔히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아무리 떠들어 봐야 소용없다.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본좌의 명에 따라야 할 것이다." 그의 태도는 급기야 중인들 모두의 분노를 샀다. 청년고수들의 혈기(血氣)가 어디로 가겠는가? 꿈에서 깨어난 그들은 여차하면 병기를 뽑을 기색마저 보이고 있었다. "다들 듣거라!" 도옥기가 내력(內力)이 실린 웅후한 음성으로 외쳤다. 이미 그의 안면에서 웃음기는 싹 걷혀 있었다. "내 새삼 말하노니, 자고로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본좌는 너희들을 필요로 했고, 그래서 일천화를 제공해 주었다. 그 정도면 정당한 거래가 아니냐?" 청년들 중 누군가가 그 말에 열띤 항의를 했다. "대체 정당하기는 무엇이 정당하다는 것이오? 그런 복안이 있었으면 당신은 사전에 공지라도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소." 중인들 모두가 이와 생각을 같이 하는 듯 여전히 술렁이면서도 화중부주인 도옥기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변(辯)이란 실로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정녕 어리석구나. 본좌가 원한 것은 굴종(屈從)이거늘, 무엇 때문에 선택의 여지를 둔단 말이냐? 더 말할 것도 없다. 일천화와의 결합으로 인해 벌써 너희들의 몸 속에는 고충(蠱筮)이 흘러 들어가 있다. 본좌의 뜻을 거스르면 당장에라도 너희들은 심장이 파열되어 죽게 될 것이다." "맙소사! 그런 흉계까지 동원했단 말인가?" "우우우... 비열한 놈!" 중인들은 아연실색하는 한편, 분노에 찬 함성을 발했다. 그러자 도옥기는 되려 의기양양하여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못 믿겠다면 직접 보여 주마. 너희들의 체내에 주입된 고충은 왕고(王蠱)에 의해 발동된다. 그리고 왕고는 본좌의 몸 속에 있다. 핫핫핫... 너희들은 곧 지옥에 버금가는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도옥기는 말을 마치자마자 막바로 기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묘강독황 반진후가 일러준 바에 따라 일단 자신의 체내에 머무르고 있을 왕고를 불렀다. 다음 순간, 그는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없었다. 그의 명령을 받들어야 할 왕고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의 등줄기로 한 가닥 써늘한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맙소사! 어찌 이런 변이......!' 도옥기는 그만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사태를 대체 어떤 식으로 돌이켜야 한단 말인가? 한편. 청년고수들은 도옥기가 시간을 끌고 있는데 반해 아무런 이상도 일어나지 않자 의아해진 나머지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때문에 분노가 삭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든 장내의 분위기는 기이한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재차 이변이 일어났다. "호호호호홋......!" 느닷없이 화중화 천아월이 허리가 휘어져라 교소를 터뜨리고 나온 것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천아월은 중인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화중부주의 음모는 분쇄되었으니까요. 그의 왕고는 이 몸이 흡수해 버렸어요. 호호홋! 자웅한쌍이 모두 저의 체내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지요." 그리하여 장내에 다시 한 번 동요가 일어나려는 찰나, 옥면사랑 도옥기의 눈에서 번쩍 하고 섬광이 일었다. "한낱 계집 따위가 대사(大事)를 방해하다니, 네가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는 즉시로 소맷자락을 떨쳤다. 슈슈슉--! 다섯 자루의 은검(銀劍)이 허공을 가르며 전광석화처럼 천아월에게로 날아갔다. "악!" 무공을 모르는 그녀는 죽음의 위기를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수명이 아직 다 하지 않았던지 때맞추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 자가 내려섬과 동시에 요란한 금속성이 사위를 울렸다. 카카캉--! 그에 의해 다섯 자루의 은검은 모두 튕겨나가 버렸다. 천아월을 구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옥랑, 즉 영호천문이었다. 갑작스럽게 그의 방해를 받게 된 옥면사랑 도옥기의 눈이 위로 쭉 찢어졌다. "이옥랑! 너도 함께 죽을테냐?" 영호천문은 입가에 기소를 매달았다. "후후후... 도옥기, 죽어야 할 사람은 너다. 야망에 눈이 어두워 천하를 기만한 죄로 말이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중인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무엇을 망설이시오? 화중부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났거니와, 부주인 옥면사랑 도옥기는 자신의 입으로 공공연히 무림제패를 선언하지 않았소이까? 그에게 무림을 내줄 생각이 아니라면 속히 화중부를 섬멸해야 할 것이오." 그 말은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행동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구백구십구 명의 청년들과 무림군웅들은 흡사 봇물이 터지듯 일제히 도검(刀劍)을 뽑아 들었다. 차차창--! "와아아! 쳐라--!" "오늘부로 화중부를 멸절시켜 버리자!" 꽈르릉-- 꽈꽝--! 노도와도 같은 군웅들의 돌격은 실로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중부주인 도옥기 역시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 만무였다. "막아라! 화중부는 무적(無敵)이다." 그의 내력이 실린 외침이 사위에 놀라운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춤하던 화중부의 고수들도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밀려드는 군웅들을 공격해가기 시작했다. 콰우우웅--! 바야흐로 경천동지할 격전이 천인단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녕 무림사에 기록될 만한 대혈전(大血戰)이었다. 죽고, 죽이며....... 베고, 또 베었다. 어차피 이런 양상을 띤 싸움에 양보란 있을 수 없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데야 어찌 하겠는가? 이 비정한 논법에 의거해 천인단은 삽시에 피로 물들어 갔다. 화중부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막강했다. 그러나 분노한 중원무림 군웅들의 힘은 더욱 강했다. 흩어지면 한낱 모래알에 불과하나 뭉치면 바위가 되듯 군웅들의 힘은 천중오패 중 일패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꽈르르릉-- 꽈꽈꽝--! "크아아악--!" 삶과 죽음이라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극단의 차이는 단지 순간적인 검의 향방에 따라 결정지워졌다. 무림의 근간을 이루는 잔인한 생리가 여기서도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계(四季)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봄, 그 가운데서도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오월(五月)의 어느 날이었다. 화중부가 지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은....... ③ 쿠쿠쿠쿠-- 옥면사랑 도옥기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는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로 전해지는 소리는 이미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으되 그는 지금 스스로의 마음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올렸던 찬란한 금자탑(金字塔)이 일시에 허물어져 내리는 소리였다. - 아니다,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그의 뇌리에서는 계속하여 같은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에게는 모두 환몽(幻夢) 같았다. 대(臺). 도옥기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서 당당히 군웅들을 호령했던 자신을 떠올렸고, 그가 의식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싯점에서 잠시 정지되었다. - 이 대는 분명 내가 수하들에게 명령하여 세웠는데....... - 왜 이런 꼴이 되어 있지? 이 위에서 나는 의당 군림(君臨)의 꿈을 실현해야 마땅하거늘, 대체 왜......? 그는 넋이 나간 듯 망연한 눈을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도 역시 그의 사고 영역을 벗어나 버린 한 폭의 기이한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 저들은 내 수하들인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지? - 나와 더불어 화중천하를 건설해야 할 자들이 어찌 하여 저다지도 무력하게 적들에게 짓밟히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의 정신이 이처럼 부유(浮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옥면사랑 도옥기는 명실공히 구정 중 일인이며, 당금 무림에서 천중오패의 일패를 구축하는 일대 기린아적인 면모를 보인 바 있다. 이는 절대로 아무나 이룰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그가 주관하는 화중부의 힘은 적어도 중원의 오분지 일을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었다. 그런즉 너무도 어이없이 자신의 전부를 잃게 되자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불현듯 도옥기는 오한이 인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에 마침 아끼던 수하 하나가 분노한 군웅들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난도질 당하는 장면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안돼--!" 미몽에서 깨어난 그가 피떡이 되어가는 수하를 향해 막 몸을 날리려 하는 찰나였다. 그의 발작적인 몸짓을 정지시켜 버리는 나직한 음성이 있었다. "쫓아가 봐야 소용없다. 그는 죽었으니까. 도옥기, 네 긴 백일몽(白日夢)도 이로써 끝난 것 같구나." "으음!" 도옥기는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옥랑이 서 있었다. "너는 이옥랑이 아니구나. 누구냐?" 도옥기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상대에게 물었다.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 "그럼 네가 불망객......?" 도옥기는 침착한 어투에 반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이나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이번 일도... 너의 짓이냐?" "물론. 후후... 공야중이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옥기(玉奇), 너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이옥랑, 아니 영호천문은 얼굴을 쓱 문질렀다. 공야중이 그러했듯 도옥기도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의 달라진 어투를 통해 그는 기억의 한 자락이 무섭게 뒤집혀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설마... 네가......?" 영호천문의 무표정한 얼굴에 일말의 허무가 스쳤다. "그래도 옛 친구의 음성만은 잊지 않은 모양이군." "헉!" 도옥기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다시금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회의와 불신, 그리고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너... 너......! 죽지 않았더냐?" 영호천문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 끝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영호천문의 음성은 여전히 무감동하게 울려 나올 따름이었다. "옥기, 나는 쉽게 죽을 수가 없더구나. 너희들 모두에게 진 빚을 갚지 않고는 눈이 감기지 않더라는 말이다." "우우... 어찌 이런 일이......." "쯧! 너도 공야중처럼 믿기가 어려운가 보군." "실은... 그렇다." "나의 다정한 친구 옥기, 세상에는 그처럼 기이한 일이 많다네. 후후... 염라대왕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나를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 주셨지." "그렇지만 넌 분명......." 도옥기는 그때까지도 회의에 차 있던 눈으로 영호천문의 팔다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를 뻔히 알고 있는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끊어진 팔다리도 주인을 잊지 못해 되돌아왔다." 도옥기의 안면이 보기 불편할 정도로 마구 씰룩였다. "그렇군! 진즉 생각했어야 했어. 공야중의 죽음에 대해 좀더 심사숙고 했더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공야중이 말하더군. 널더러 멍청한 놈이라고." "크ㅋ! 그건 놈의 생각일 뿐이다." 촤악--! 도옥기는 소매 속에 있던 무정철선(無情鐵扇)을 꺼냄과 동시에 그것을 앞으로 쭉 뻗었다. 퓨퓨퓨--! 철선은 그냥 쏘아오는 것이 아니라 쇠로 된 부챗살 하나하나를 암기인 양 사위로 폭사시켰다. 그러나 영호천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꽝! 폭음이 터졌으나 지척지간에서도 영호천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챗살이 뻗어나가는 범위는 거리가 멀수록 자연히 넓어지게 마련이고, 반대로 가까울 경우라면 공격 범위가 좁아 즉각적인 대응도 가능해진다. 영호천문은 찰나적으로 이를 파악하고는 오히려 맹렬히 앞으로 다가가 일장을 쳐낸 것이었다. "우욱!" 비명은 도옥기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영호천문의 반격으로 인해 부챗살은 발출되기도 전에 모두 박살이 나 버렸으며, 이와 동시에 그는 정통으로 가슴을 가격 당하고 말았다. 그는 주먹만한 핏덩이를 토해내며 뒤로 날아갔는데, 사실상 이것이야말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즉 그의 후퇴는 충격을 줄이려는 목적과 함께 그만치 시간을 벌어 영호천문의 예기(銳氣)를 누그러뜨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영호천문과 도옥기. 그들은 동문(同門)이었다. 따라서 상대의 버릇, 특징, 장단점에 대해 두 사람은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환히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싸움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이로왔으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일촌(一寸)의 차이가 곧 죽음을 부르는 살벌한 접전이었다. 슷--! 영호천문은 신형을 날려 그림자처럼 도옥기를 추적해 갔다. 그러자 도옥기는 등을 지면으로 향하더니 그 상태로 단번에 삼십여 장이나 미끄러져 갔다. 스슷--! 쫓고, 쫓기는 그들 두 사람의 싸움은 일편 몹시도 괴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그들은 의식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비무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사태에 이르렀다. 슉! 도옥기의 몸이 갑자기 위로 솟아 올랐다. 덕분에 그를 바짝 따르던 영호천문은 자연 하(下) 방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 순간을 빌어 도옥기의 몸에서 막강한 경기가 일었다. 우웅--! 그는 짧게 부르짖었다. "천마낙락세(天魔落落勢)!" 콰츠츠츠--! 태산이 통째로 허물어져 내리듯 강기의 경력이 퍼부어지자 영호천문은 그 범주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엎드린 자세로 빠르게 회전했다. 휘우우웅--! 도옥기가 발출해낸 강기는 그의 회전력에 의해 삽시에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환영이었을까? 팟! 희디 흰 한 개의 손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쾅--! 강기는 폭렬해 버렸고, 도옥기는 호신강기에 구멍이 뻥 뚫린 나머지 온 몸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크윽!" 정신이 아득했다. '끝인가? 이것이.......' 그는 바람을 만난 촛불처럼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무진 애를 쓰며 사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천인단의 끝쪽 벼랑이었다. 그것을 본 영호천문의 눈에서 일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네가 도망을......?" 그는 전신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수(一手)를 들어 허공을 찔러갔으며 나머지 일수는 막 벼랑 아래로 뛰어내리는 도옥기를 향해 뻗었다. 그 거리는 적게 잡아도 십 장여, 대체 무엇을 하자는 행위인가? 누구라도 정신에 이상이 있기 전에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그 먼 거리를 격하여 살수를 펴려 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은 전개되고 말았다. 스팟! 느닷없이 천공(天空)에서 한 가닥 섬광이 일더니, 그것은 허공을 가리키고 있던 영호천문의 손 끝과 즉시로 맞닿았다. 이어 그의 손 끝에 전달된 뇌전(雷電)은 놀랍게도 다시 다른 한 손의 끝을 통해 실처럼 가느다란 강광( 光)을 뻗어냈다. 우르릉-- 쩌저적! 이런 현상을 두고 천지간의 조화가 영호천문이라는 한 인간에 의해 조종된다고 한들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런즉 과연 누가 있어 이를 피해낼 수 있겠는가? 꽝--! '흐윽!' 벼랑에서 하강 중이던 도옥기는 눈부신 광선이 전신을 투과하여 살과 뼈를 모두 모래알처럼 흩어놓는 것을 느꼈다. '아? 이 무력감은.......' 비명도 없었다. 아니, 실은 그럴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믿을 수 없게도 도옥기의 몸은 새까맣게 변하더니 찰나지간에 재처럼 바스러져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인세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신비막측한 무공에 의해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무도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끝났군." 영호천문의 신형이 쓰러질 듯 휘청 했다. 몸이 천근인 양 무거워 그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짙은 허무가 매달렸다. 마침내 옥면사랑 도옥기라는 또 하나의 숙적이 제거되었다. 천뇌토군 공야중에 이은 살인(殺人), 구정 가운데 일정(一鼎)이 다시금 그의 손에 의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편치가 않았다. '빌어먹을! 대체 이게 뭔가?' 그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가슴을 부여안은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복수에 대한 집념으로 피가 펄펄 끓어오를 때만 해도 최소한 이렇지는 않았다. 그의 예상으로는 노리던 대상을 하나씩 처치하면 당연히 환호작약할 줄로 알았건만, 막상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본즉 그게 아니었다. 그에게 강하게 부딪쳐 오는 감정이란 오직 참담함 뿐이었다. '쓰다, 써.' 메마른 웃음이 그의 입술 가장자리를 슬쩍 훑고 지나갔다. 영호천문. 그는 처음으로 등룡천문(登龍天門)의 비학을 사용했다. 이름하여 천통뇌강공(天通雷 功). 이것은 등룡천문의 흑백이서(黑白二書) 중 흑서에 기재된 극양신공(極陽神功)의 하나로서 극강류의 절학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단 일식(一式) 밖에 전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는 체내에 공력이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아 탈진상태에 이르고 만다. '정녕 나 자신도 상상치 못했던 놀라운 위력이었다. 다만 이렇듯 온 몸의 기(氣)가 다 빠져 나가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 영호천문은 정말로 초주검에 가깝도록 지쳐 있는 것이 과연 정신인지, 육체인지를 놓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과거에 독각철린괴망의 피(血)를 복용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열성(熱性)을 띄고 있는 보혈(補血)이므로 공력이 급증되는 것은 물론 그가 극강류의 무공을 익히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본시 음양(陰陽)의 기운은 상생(相生)에 무궁의 조화가 있듯이 그는 흑서 하나만을 익힐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백서에는 극음유화공(極陰柔和功)이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이것을 익히려면 또 한 차례의 기연(奇緣)을 만나 기본적으로 체내의 기를 음양조화지경까지 끌어 올려야 했다. "후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영호천문은 허탈한 듯 툴툴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귀로 천인단을 메우는 함성이 들려 왔다. "와아아아--!" 그것은 화중부의 멸망을 알리는 소리, 즉 화중부의 고수들이 무림군웅들의 노도와도 같은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완전하게 꺾여 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소리였다. 대개의 청년고수들이 주축이 된 그 함성에는 단연 기쁨과 패기가 넘쳐 흘렀으며, 그대로 하늘까지 닿기라도 하려는 듯 끝없이 퍼져 오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영호천문도 반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의 남은 친구들이여, 저 소리가 들리느냐? 곧 너희들도 차례로 오늘과 같은 날을 맞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의 말은 틀림없이 이행되리라. 옥면사랑 도옥기의 화중부가 그러했듯 그들도 불망객이라 불리우는 이 신비의 청년에 의해 스스로의 몰락을 바라보며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④ 어둠이 대체로 사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도 한 무더기의 신비로운 빛이 존재했다. 그것은 지상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여체가 뿜어내는 황홀하고도 요요로운 광채였다. 그때문에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은 한 사내로 하여금 깊은 탄식에 이르게 했다. "그대는 아름다움이란 무기를 남용하려 하는군."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여체가 꿈틀거리며 최후의 헝겊조각을 떼어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스스로 자신의 은밀한 부위로부터 말이다. 이어 여체는 태초(太初)의 모습 그대로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게 되었다. 아니, 영호천문이 앞서 탄식했듯 여체는 지닌 바 완벽함을 그의 면전에서 과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희뿌연 동체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운 선(線)과 질감을 지녔다. 만지면 고스란히 묻어날 듯한....... 그 여체는 화중화(花中花)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출처는 사라져 버렸으나 아름다움 자체가 소멸되지 않는 한 이 이름만은 결코 지워지지 않으리라.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는 한 송이의 요화(妖花), 천아월은 옷을 모두 다 벗고 나자 어둠 속에서 하얗게 웃어 보였다. 영호천문은 내심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찌기 가지게 된 탐화(探花)의 취미가 입증하듯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가 던져주는 충격에 절대 무감한 사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창조해 내었다고 볼 수 있는 작품(?)에 끌리게 되는 일이란 그로서도 정녕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의 탄식은 내내 그칠 줄을 몰랐다. '내가 이러할진대 과연 다른 사내들은 어떨 것인가? 하긴, 천하의 미녀들을 두루 섭렵했던 옥면사랑 도옥기가 분별력을 잃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심정과는 별개로 영호천문의 본능은 그 시각을 기해 한껏 팽배해 갔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던 남성으로서의 욕망이 기어이 창끝을 뻣뻣하게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화중화 천아월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의 눈 앞에서 빙글 돌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나신은 그때부터 춤을 추듯 묘하게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나무(裸舞)는 현란하기 그지 없었다. 흔들리는 중에도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선연한 곡선이 존재했으니, 그것은 넘실거리는 정염(情炎)의 파도를 온전히 그려내는 것 같았다. 출렁 하고 두 개의 유방이 낙과(落果)를 표현하다 슬며시 허공을 밀치는가 하면, 그보다 약간 풍성한 부피감을 가진 동그란 둔부가 뒤로 어둠을 밀어낸다. 이 둘의 중심축을 이루는 세류요는 자못 위태롭고....... "하아아......." 제 풀에 뜨겁게 달구어진 신음성은 또 얼마나 끈끈한가? 천아월은 급기야 두 손으로 자신의 유방을 힘껏 움켜 쥐었다. "으으음!" 그녀는 느꼈던 것이다. 유방을 구성하고 있는 조직 속의 모세혈관 한 올 한 올마다에 격정의 피가 무섭게 차오르는 것을. 천아월은 더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는 폭발하려는 열화를 감당하지 못해 몸을 기이하게 비틀며 침상가로 접근해 왔다. "안아줘요......!" 그녀의 나신은 영호천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의 몸 위로 겹쳐졌다. 때문에 영호천문은 코를 점령해 오는 야릇한 체향(體香)과 더불어 유백색의 육체를 온 몸으로 느껴야 했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리 약속된 행사였으므로 물론 그래서도 아니 되었다. "흐윽......!" 천아월의 입에서 숨이 넘어갈 듯한 기성이 토해져 나왔다. 그러자 뜨겁고 비릿한 숨결이 영호천문의 얼굴로 훅 끼얹어졌다. 그는 뭉클한 여체에 짓눌린 그 상태로 나직이 말했다. "아월, 아마 천하를 다 뒤져도 그대를 원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으음......, 한 번 팔렸던 꽃인데도 말인가요......?" 천아월의 음성은 격정 가운데서도 자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녀를 올려다 보며 싱긋 웃었다. "그대도 잘 알지 않소? 연화(蓮花)는 시궁창 속에서도 화려하고 고결하게 피어 난다는 것을." "아아......!" 천아월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쏟아내더니 뱀같이 매끄러운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영호천문의 강철같은 팔이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조여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자신의 몸에서 끌어 내려 침상에 등이 닿도록 반듯하게 눕혔다. "흐윽!" 탄력이 넘치는 천아월의 나신이 극도의 흥분과 기대감으로 인해 용수철처럼 한 차례 튕겨 올랐다가 도로 가라앉았다. 영호천문의 정복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처음은 정교하다고 느껴지리만큼 섬세하기 그지없는 애무였다. 한껏 달구어진 그의 손이, 입술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다 전족을 하여 아기같이 깜찍한 천아월의 발이 그의 손아귀에 잡힌 순간,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어야 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흐느끼듯 나직이 오열했다. "흐... 흐윽......." 그녀는 내심으로 생각한다. - 어쩌면... 이럴 수가......! 천아월의 사고 범위 안에서의 그는 범인(凡人)이 아니었다. 성교(性交)를 인세에서 가장 화려하고 성스러운 신의 예식으로 탈바꿈시키는, 이른바 대제사장이었다. 그를 두고 이 시대 최고의 풍류남아(風流男我)라 일컬었던 것은 그때문이었던가? 무영탐화랑의 손길 아래서 꽃은 꺾이길 원했고, 그는 스스로 벌나비가 되어 꽃의 번식을 도왔다. 이 제전을 통해 여인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육체 속에 이토록 엄청난 열락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입김이 부어질 때마다, 혹은 그의 손가락 하나가 스칠 때마다 여인은 몸부림을 치다 못해 실신 지경의 절벽에서 몇 번 씩이나 아득하게 굴러 떨어졌다. 밤이 깊었으되 여인은 더욱 깊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었던 것은 사내의 점입이었다. 여인은 목놓아 울고 있었다. 이번 울음은 양태가 사뭇 다르다. 비감(悲感)이 소용돌이처럼 밀려와 그녀의 가슴을 휩쓸었고, 그에 따라 여인은 봇물이 터진 듯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울다울다 지쳐서 더 울 수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그녀는 귓전을 스치는 나직한 공명을 감지했다. "아월, 나는 향후로 그대가 참 여인이 되기를 바라오." 대체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천아월은 눈물로 흥건히 젖은 침상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그 말을 들었으나 언뜻 그 진의(眞意)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여인으로서 일생에 걸쳐 두 번 다시 있을성 싶지 않은 최대의 기쁨을 알았다. 또한 그 기쁨의 끝에서 갑작스레 침범해 온 커다란 슬픔 때문에 그녀는 울었다. 그뿐이었다. 극단의 파고를 그려가는 감정 속에서 그녀는 금후의 일 따위는 생각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더러 참 여인이 되라니, 그녀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자신에게 그럴 만한 가능성도 없는 것 같아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영호천문. 그는 벌써 의복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 있었다. 이어 아직도 침상에 엎어진 채 일어나야 된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천아월을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여인으로서 참되게 사는 방도는 단 한 가지밖에 없소. 그것은 진실한 사나이를 만나 지아비로 섬기는 일이오." 천아월의 매끄러운 등이 흠칫 굳어지는 것을 영호천문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이때문인지 이후로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거의 탄식에 가까웠다. "아월, 그대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겠소." 그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지난 일은 모두 일장(一場)의 꿈으로 돌려 버리시오. 그대가 이제부터 염두에 두어야 할 바는, 미(美)란 결코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오. " 천아월은 그때까지도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찌 보면 수긍하는 것도 같았고, 어찌 보면 강한 반발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호천문의 음성이 다소 굳어졌다. "내 그대와 몸을 나눈 것은 약속을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대의 몸 속에 있는 자웅쌍고를 제거하기 위해서였소. 계속 지니고 있어 봐야 백해무익이니까 말이오." 일순 몹시도 충격을 받은 듯 천아월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영호천문은 입술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이건 단지 내 생각이오만, 후후... 그대는 왕고를 얻게 되자 그것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 같소. 하긴 그들 구백구십구 쌍의 남녀를 뜻대로 부린다는 전제 하에서라면, 능히 여제(女帝)가 되어 보려고 꿈꿀 수도 있었겠지." 그가 가정처럼 말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유감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동안 천아월에게는 옥면사랑 도옥기가 가졌던 야망이 전이(轉移)되었던 것이다. 정녕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만일 영호천문이 이 일을 간과했더라면 향후 무림에는 기변이 일어났을 것이다. 희대의 마녀(魔女)가 탄생하여 전 무림을 휘저어 놓았을 테니까. 영호천문은 말을 맺었다. "본시 헛된 야망이란 종국에 가서는 파멸을 부르는 법이오. 그대는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 보았으면서도 왜 그 전철을 되밟으려 했는지 모르겠구려." 그는 천아월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모습이 그곳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운과도 같은 한 마디를 남긴 채.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대의 고향인 소주(蘇州)로......." 이후로 한동안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 적막을 찢고 천아월이 통곡에 버금가는 오열을 터뜨렸다. "흐흐흐흑--!" 침상보를 움켜 안고 발작이라도 하듯 나뒹구는 그녀의 모습은 전신을 통해 절규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 내심 통렬히 부르짖고 있었다. '바보! 그는 바보야. 끝까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다니.' 대체 무얼 모른다는 것인지도 역시 그녀의 가슴이 말했다. '나는 당신과 자웅쌍고를 하나씩 나누어 갖고 싶었단 말이야. 고의 영성(靈性)을 빌어 내 곁에 묶어 두고자 한 것은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포함되어 있었거늘, 바보 멍청이!' 천아월의 계산은 섬뜩하게도 여기까지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대로 허욕에 눈이 어두웠던 여인이라고 밀어 부칠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해 있는 현재의 입장이 너무도 딱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날더러 뭐라고? 진실한 사내를 만나 지아비로 섬기며 살라고? 맙소사! 농담이라도 나를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 당신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데, 당신으로 인해 그토록 황홀한 세계에 눈을 떠버린 내 육신을 어쩌라고.......' 화중화 천아월. 그녀의 몸부림도 어느덧 잠잠해져 있었다. 그녀는 영호천문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살지 못할 거야. 아무리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라지만 당신이 없는 곳에서는.......' 제 17장 잠입(潛入) ① 만겁전(萬劫殿). 그들로 인해 무림 전역이 흔들리는 변고가 발생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야차(夜叉)였다.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放火)를 비롯하여 살인에 능욕, 약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만행은 일일이 나열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전 무림을 상대로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든지, 혹은 천하를 제패하겠다든지 이유라도 있어야 하건만 그들의 천인공로할 야만적 행각에는 무엇 때문이라는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피가 내를 이루는 것에서 만족을 구가하는 듯 도처에서 혈겁(血劫)을 일으켰으며, 그 마수(魔手)가 뻗는 범위를 일로 확산시켜 가고 있었다. 최근 들어 세인들은 만겁전을 두고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들은 중원 전체를 붕괴시키기로 작정한 것 같다고. 이 무서운 겁화(劫火)는 애초 남(南)으로부터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각기 한 지역을 주름잡던 패주(覇主)들이 여기에 있다. 운남(雲南)의 육씨무가(陸氏武家), 귀주(貴州)의 신도문(神刀門), 광서(廣西)의 구룡천문(九龍天門), 광동(廣東)의 태화보(泰華堡), 강서(江西)의 태극신문(太極神門) 등. 이들은 그 외에도 모두 공통점이 있기에 열거한 것이다. 또 있다. 삼십육천강방(三十六天 幇), 신권장(神拳莊), 신창보(神槍堡), 나부문(羅浮門), 천랑문(天浪門), 삼색교(三色敎)까지도 하나로 묶어서 얘기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문파들이라고 말이다. 그것도 단기간 내에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구한 역사(歷史)도, 전통도, 명예도 모두 겁화에 타서 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꽈르르릉--! 경천동지할 대폭발이 있었다. 형산(衡山). 장강(長江)을 끼고 있으며 풍광이 수려한 그 산에는 육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강남(江南)의 대문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름하여 형산파(衡山派)이다. 이 문파는 당금 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에 당당히 속해 있으며, 무림의 오대검파(五大劍派) 중 하나이기도 하여 달리 형산검파(衡山劍派)고 불리우기도 한다. 형산검파의 검법으로 말하자면 대체로 유화검술(柔和劫術)이 주류(主流)를 이룬다. 개중에서도 원숭이의 동작을 따 만들었다는 백원승천백팔무겁류(百猿昇天百八舞劫流)는 오래 전부터 무림일절로 꼽히고 있다. 그 밖에도 그들이 창안해낸 숱한 검법들은 누대에 걸쳐 중원검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산검파에 대체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콰콰쾅! 콰르르--! 변고 치고도 그런 변고가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형산검파의 웅장한 장원이 폭음과 함께 송두리째 붕괴되고 만 것이었다. 주저앉아 버린 건물들 위로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치는 그 광경이란 수십만 근의 화약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캬아악--! 끄악--! 고막을 찢어 발기는 듯한 새울음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더니, 그 뒤를 이어 수만 마리의 괴조(怪鳥)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붕괴의 현장으로 날아 들었다. 괴조들은 작게는 사람만한 크기에서부터 크게는 거의 집채 만한 놈들까지도 있었다. 그들의 강철같은 부리와 발톱은 단번에 바위라도 박살낼 듯 했다. 이들 괴조의 군단(群團)이 침입자의 전부인가? 아니다. 그들이 하늘을 점유해 버렸다면 아직 땅이 남아 있으므로. 쉬쉬이.... 쓰쓰쓰......! 음향부터가 벌써 심상치 않더니 공군에 뒤질세라 지면을 꽉 메운 채 몰려 드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뱀, 그것도 맹독(猛毒)을 가진 각종의 괴사(怪蛇)들이었다. 그 뿐이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신이 금빛을 띤 성성이의 포효를 필두로 대호(大虎), 흑표범, 늑대 등등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불타고 있는 형산장원을 향해 새까맣게 덮쳐 들고 있었으니....... "크아아악--!"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일어 함성인 양 사위로 번져 나갔다. 거기에는 각종 짐승들의 소리도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형산파에 소속되어 있는 인간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인간대 괴수들의 싸움이란 실로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덕분에 형산검파의 문하(門下)들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면서도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대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운(不運)은 이 상태에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박차를 가해 그들을 위협해 왔다. "크크... 쳐라!" 철커덩! 철컹--! 한 소리 외침이 일자 또 다른 일단(一團)의 무리들이 가세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들은 온 몸에 철갑(鐵甲)을 두른 괴인들로서 연신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내며 공격을 감행해 왔다. "크하하핫......!" 그들과의 접전에서 검은 도무지 소용이 없었다. 카카캉--! 철갑인들의 몸을 쳐 봐야 불꽃을 내며 도로 튕겨 나올 뿐이었고, 그 틈을 노린 철갑인들의 철수(鐵手)가 속속 형산파 인물들의 두개골을 두부처럼 으깨어 놓았다. 퍽! 퍼퍽! "으아아아악--!" 형산인들 중 누군가가 나서서 무섭게 호통을 치고자 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함만 더할 뿐이었다. "네 놈들은 철기(鐵奇), 크헉!" 예외는 없었다. 말하다 말고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뻘건 핏물과 함께 허연 뇌수를 쏟아내며 죽어가야 했다. 그러고도 참혹한 살인의 행진은 그칠 줄을 몰랐다. 퍽! 퍼퍽--! 정녕 한탄스러운 것은 그들이 이렇듯 떼죽음을 당하면서도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저 속절없이 맹목적인 인간사냥의 제물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는 바라야 단 한 가지, 철갑인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이름이 만겁전이라는 것 뿐이었다. 만겁전이 일으키는 겁화는 도저히 묵과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묵과해서도 안되었다.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너무도 커서 그냥 두었다간 무림인들의 씨가 마를테니까. 그리하여 무림은 무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무림인들의 향방을 결정지워줄 전륜첩(轉輪帖)이 발부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곧 정도(正道)의 무림맹(武林盟)이랄 수 있는 전륜회(轉輪會)가 사태 수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얘기도 된다. 전륜대제(轉輪大帝) 백리성우(百里星雨). 그가 각대문파에 전륜첩을 돌린 이유는 영수급에 해당되는 인물들을 불러 모으고자 한 것으로써, 그들과 의논하여 당면한 현안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자는 의도에서였다. 통칭 무림의 일제(一帝)이면서도 백리성우는 독선을 몰랐다. 늘상 자신보다는 타인의 의사를 먼저 존중해 줄줄 아는 대인(大人)적인 면모가 그에게는 있었다. 어떻든 이 일을 두고 무림인들은 막연하게나마 예감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한 바탕의 대혈전이 일어 나리라고. 어지럽고 혼탁(混濁)한 세상(世上)이 싫어 청수(淸水)에 머리감고 발을 씻은 후 신비(神秘)에 묻혔세라 구름을 벗삼고 야학(野鶴)과 어울려 시(詩)를 노래하면 이 아니 선계(仙界)이더냐? 에라, 망할 세상(世上)이여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술에 빠져 만사 잊고 대취(大醉)하여 사는 거다 누가 뭐라더냐?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될 대로 되라지 늘상 이런 시구나 웅얼거리는 위인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취중몽생인(醉中夢生人)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루의 반은 술독에 빠져 있고, 나머지 반은 곤드레가 되어 잠에 곯아 떨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자고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거니와 취기에 의해 거의 매일을 흐릿하고 몽롱하기만한 눈,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뜻밖에도 범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천화루(天和樓). 그를 찾으려면 어디 다른데 가서 헤맬 것이 아니라 이곳으로 오면 된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천화루의 단골손님이 되었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부(?)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하는 짓이란 가관이다. 늘 그랬듯 우선 기본으로 독하기 그지 없다는 백주(白酒)를 열 근이나 퍼마신 후, 주방으로 직접 가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술호로를 내민다. 이곳의 주인은 장항(張恒)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는데, 그 역시도 언제나처럼 군말 없이 술호로에 술을 가득 채워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례껏 불평 한 마디 하는 법이 없다. 장항은 이미 아는 것이다. 썩은 동태눈에 필적할 만한 취중몽생인의 눈 속에 한때 천하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어 놓았던 필살광(必殺光)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흘흘흘... 좋을시고! 제멋대로 재미없게 돌아가는 세상, 취하면 모두 잊을 수 있으리라. 암!" 취중몽생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꼭지가 완전히 돌아가지고 천화루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② 그의 집이란 건 한 마디로 형편무인지경이다. 말이 좋아 집이지, 간신히 햇볕이나 가릴 정도로서 마른 나뭇가지와 풀 등으로 얼기설기 엮은 초옥(草屋) 한 칸이 전부다. 설사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올지언정 여느 고대광실(高大廣室)보다도 제 집이 편하다고 했던가? 그는 사뭇 여유마저 보이며 흥얼흥얼 초옥 안으로 들어간다. 낡아 빠진 나무침상이 하나, 기름이 떨어진 지가 언제인지 도시 더듬어 볼 수조차 없는 등잔이 하나, 게다가 바닥은 그대로 흙바닥,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그가 거처하는 곳의 풍경이다. "흘흘... 좋을시고!" 취중몽생인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상으로 다가가더니 쓰러지듯 벌렁 드러누웠다. 그의 눈은 천정(天井)을 향하고 있었다. 엉성하게 엮어진 나뭇 가지 사이로 숭숭 구멍이 나 있어 그곳으로 하늘이 보였다. 한동안 망연히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 취중몽생인의 눈이 문득 더 없이 허무한 빛을 드리웠다. 그의 나이 오십육 세, 일반인의 기준으로 친다면 손자들의 재롱이나 받아 주며 편히 쉬어야 할 나이였다. 반대로 무인(武人)으로 치자면 젊은 날에 닦아 놓은 기반을 통해 지금쯤은 인생의 완성기(完成期)를 맞이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취중몽생인은 이도저도 아니었다. 그는 일점의 혈육(血肉)도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이렇다할 성과도 없이 그저 나이만 먹어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이제는 고독한 육신마저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몸을 굽히더니 침상 아래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나무토막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의 남은 한 손에는 어느 틈엔가 한 자루의 소도(小刀)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겨우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로서 종잇장 같이 얇았으며 전체가 순백색이었다. 흐리멍텅했던 그의 눈에서 섬ㅉ할 정도로 예리한 광채가 흘러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부터였다. 사각 사각......! 취중몽생인은 묵묵히 나무토막을 깎기 시작했는데, 그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달리 엄숙하기 그지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 심혼을 다 바치는 장인(匠人)의 표정인들 이러할까? 사각... 사각......! 침묵 속에 갇힌 채 그는 조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마 후. 그의 솜씨를 빌어 완성된 것은 놀랍게도 죽어가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타에 의한 모종의 수단으로 지극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조각상을 바라보는 취생몽중인의 눈에 짙은 회의와 연민이 한꺼번에 어우러졌다. 그러더니 급기야 조각도를 잡은 그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중풍을 맞아 수전증에 걸린 환자라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흐... 흘....... 제기랄!" 취중몽생인은 소도를 곁에 휙 던져 버리고는 그때까지도 마구 떨리는 손으로 술호로를 잡았다. 이어 술호로에 입을 갖다대자마자 독한 술은 꿀럭이는 목울대를 거쳐 사정없이 그의 위장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빌어먹을! 이래도 지워지지 않을 작정인가?" 취생몽중인은 자탄하듯 연이어 부르짖었다. "쓰헐, 언제쯤이면 내 손에 죽어간 자들이 내 목줄기를 놓아 줄 것인가? 이젠 정말 지겹다. 그 원귀들의 함성이......." 이는 곧 그의 과거 신분을 드러내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취중몽생인. 과연 그는 한때 살수(殺手)였던 자이다. 그것도 고금(古今)을 통틀어도 그리 흔치 않은 대살객(大殺客)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형위(荊韋).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무명탈혼객(無明奪魂客)이라 불렀으며, 그의 능력을 대변하는 몇 가지 경구도 덧붙여 주었다. - 형위는 사상 최고의 살수다. 그가 죽이겠다고 마음 먹은 자는 미리 삶을 포기해야 한다. - 형위의 살인술은 예술(藝術)의 극치이다. 그의 무명도(無明刀)에는 혼(魂)이 담겨져 있다. 무명탈혼객 형위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은 일찍부터 무림 십대살객 중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이렇게 변해 있다. 예의 손바닥보다도 적으며 종잇장 같은 소도, 즉 무명도 하나 만으로 만방에 명성을 떨치던 그가 취중몽생인이 되어 자신의 지나온 생을 비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흔들리는 음성은 자조로 이어지고 있었다. "흘흘... 이 손, 내 이 손으로 그렇게 많은 생명들을 딴 세상으로 보냈단 말이지? 감히 무슨 자격으로......? 흘흘......." 형위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무명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있는 힘껏 꽉 움켜 쥐었다. 주르륵......! 손아귀가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진득한 피를 쏟아내고 있건만 그는 조금치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큭큭! 형위, 너도 죽어야 해. 큭큭......." 그가 말하던 원귀가 갑자기 그 자신에게 씌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인즉 온 세상이 다 놀랄 말이었다. 자책과 더불어 참회의 기미가 읽혀지는 그 말은 누가 들어도 희대의 살수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문 밖에서 그를 찾는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형선생(荊先生), 안에 계시오?" 형위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가 싶더니 침상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드르렁-- 쿨! 드르렁--!" 그는 심하게 코까지 곯아대며 불청객을 쫓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에 비해 객(客)도 그다지 만만치는 않았다. "허헛! 형선생, 이러지 마시오." 너털웃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자는 한 명의 중년인이었는데, 그 자는 형위의 이런 행각에 익숙해져 있는지 불쾌해 하는 기색이라곤 일점도 내비치지 않았다. 두 손에 궤 하나를 받쳐 들고 있던 그는 들어서자마자 그것부터 일단 바닥에 내려 놓았다. 쿵!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꽤 묵직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는 돌아다 보지도 않고 연방 코만 들입다 곯아대는 형위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황금 일천 관이오. 림주(林主)께서 예물로 보내신 것이외다. 형선생, 이번이 벌써 서른번째가 아니오? 성의를 봐서라도 웬만하면 림주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하다 말고 그는 열쩍은 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형위가 아예 등을 돌려 돌아누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중년인은 제 풀에 쓴 입맛을 다셨다. "나 장항(張恒)이 생각컨대 형선생께서는 아무래도 고집이 너무 지나치신 듯 하오이다." 장항이라면 다름 아닌 천화루주이다. 의당 천화루를 지키고 있어야 할 그가 행색까지 여느 때와는 달리 하고 이곳에 와서 이처럼 형위를 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다소 볼멘 듯한 소리에 이어 부드럽게 말했다. "형선생 같은 대가가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썩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오. 더구나 림주께서는 이 참에 단안을 내려 형선생을 특별히 본 림의 봉공(奉公)으로 모시겠다고 하셨소. 이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서 무상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형선생의 절기를 더욱 빛내는 일이 될 것이오." 역시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드르렁-- 푸우--! 드르르렁--!" 형위의 코고는 소리는 오히려 갈수록 점점 더 높아져 장항의 음성조차 파묻혀 버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장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후에 다시 모시러 오겠소. 그때에는 형선생께서도 필히 승낙하시리라 믿소이다." 그는 형위의 귀에 들어가거나 말거나 자신이 할 말을 다 마친 후에야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장항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려 형위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눈에는 지독한 권태와 허무, 조소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날더러 또 살인을 시작하란 말이지? 큭큭!" 그는 일어나기도 귀찮아졌는지 누운 자세에서 술병을 기울여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왜 아직 살아 있는가? 혹시 나는 저 따위의 파리떼가 꼬이는 것을 은연중에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야흐로 그의 번뇌가 어이없게도 자신을 의심하는 선까지 이르고 있는 그때였다. "형선생, 그들의 제안을 승낙해야 되오." 불현듯 어디선가 낭랑하면서도 무감동한 듯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어찌 들으면 그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우나 지극히 절도 있는 음성이기도 했다. '대체 누가......?' 의문을 갖던 형위는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방 안에는 어느덧 그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유령처럼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실이 그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형위는 일편으로 낙심천만이었다. '내 아무리 칼을 놓은 지가 오래 되었다지만, 이 정도로 망가졌었던가? 설마 하니 내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이는 어쩌면 그가 살수로서 가졌던 최후의 자존심을 표현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자는 의외로 청년(靑年)이었다. 하지만 형위는 그 자의 냉막한 표정과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는 삼엄한 기도를 느끼게 되자 내심 부르짖었다. '고수다!' 신비의 청년. 그는 일신에 자삼(紫衫)을 입고 있었다. 얼굴이 어느 한 곳도 나무랄데 없이 준수했으며, 키가 훌쩍 크고 풍모도 헌앙했다. 이 청년을 두고 형위는 살수 특유의 직감으로써 내력 정도까지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르....... 그의 손이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떨렸다. 두려워서 그런 바는 아니었다. 강적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무명도부터 꺼내드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그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엄연히 존재했던 그 살벌한 의식도 지금은 역시 녹이 슬어 버렸는지, 그답지 않게 극도의 긴장을 감당하지 못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떨리는 그의 손을 보며 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무심하다 못해 비정하게까지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형위, 너무 애쓰지 마시오. 당신은 늙었소이다." 형위의 빗자루 눈썹이 위아래로 마구 꿈틀거렸다. "늙었다고? 내가......?" 청년은 나직막하나 소리내어 웃었다. "훗훗... 그렇소. 현재 당신은 술에 중독이 되어 무명도는커녕 돌멩이 하나도 제대로 던지지 못할 것이오." "뭐, 뭣이?" 형위의 눈에서 일순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모욕치고도 그에게 있어 그 이상 더 참기 어려운 모욕은 없었다. 그는 실로 오랫만에 살수로서의 본능과 조우(遭遇)할 수 있었다. 갑자기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며 내면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무서운 살기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츳! 분명 빛은 아니다. 그가 쏘아낸 무명도는 그렇듯 잠시 시각적으로 착각을 조장할 정도로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너무 느리오. 그런 솜씨로는 멧돼지 한 마리도 못 잡을 것이외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는데, 어느새 무명도는 그의 중지와 약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라 아니할 수 없었다. 본시 무명도란 형위의 독문무기이자 성명절학이었다. 그것은 소리도, 빛도, 심지어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날아가 상대의 목에 정확히 꽂히는 가공할 비도술(飛刀術)이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눈 앞의 자삼청년은 여유있게 손으로 무명도를 척하니 받아낸 것이었다. "이럴 수가......!" 형위는 온 몸의 힘이란 힘은 모두 다 빠져나가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늙었다던 청년의 야유가 정말로 실감이 났다. 아니, 그는 이 한순간을 통해 스스로 한꺼번에 백 년은 더 늙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청년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위, 당신은 지쳐 있소. 정말로 쉬어야 하오." 형위는 그 말을 인정하는 듯 더 이상 화내지 않았다. "그런가 보네. 흘흘......." 씁쓸한 웃음으로 심중을 내보인 그는 공허한 시선으로 청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자네는 누군가?" 청년은 무명도를 그에게 넘겨 주며 짧게 대답했다. "불망객." ③ 팔월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대지를 푹푹 삶아대고 있었다. 이럴 때는 누구고 전신이 축축 늘어져 꼼짝도 하기 싫어지게 마련이다. 젊은이건 늙은이건 그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거나, 냉수에 발을 푹 담그고 부채질이나 하고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이 더위를 무릅쓰고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자가 있었다. 그것도 자의(自意)가 아니라 명령에 의해서다. 그의 입에서 신세 타령이 절로 나왔다. "제기랄! 내가 이 나이에 대체 무슨 꼴이람?" 그는 숨이 차오르는지 연신 헉헉 대며 이마에서 줄줄 흘러 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그의 나이 사십팔 세, 확실히 이런 날에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오르기는 힘든 나이다. 더구나 옆구리에는 언뜻 보기에도 꽤 무게가 나갈 것 같은 궤짝까지 하나 끼워져 있었으니 불평도 나올만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천화루의 주인 장항(張恒)이었다. '빌어먹을! 그깟 술주정뱅이 늙은이가 무에 대단하다고 벌써 황금(黃金)을 일만 관이나 써가며 모셔가려 든단 말인가?' 장항은 투덜거리다 못해 내심 울화가 치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자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너무도 초라해져 있는 위인이었다. 수전증으로 인해 걸핏하면 손을 덜덜 떠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닭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할 듯 했다. 장항은 그런 자에게 황금을 갖다 바치러 가는 중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만이 큰들 그에게는 이 한심한 짓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자신에게 명령한 자를 생각하건대는 폭염(暴炎)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으스스 오한이 일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당도한 곳은 한 채의 초옥이었다. '쓰헐! 미친 늙은이, 아직도 자빠져 자고 있는 건가?' 복중(伏中)에 꼭꼭 닫혀 있는 문이 그로 하여금 더욱 더 열을 받게 만들었다. 사실 상대가 문을 활짝 열고 맞이해 주어도 짜증이 팍팍 날 판국인 그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장항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험! 형선생 계시오? 소생 장(張)......." 그의 말은 여느 때와 달리 도중에서 끊겼다. "들어와!" 방 안으로부터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와 말을 막은 것이었다. 장항은 놀란 나머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체 누가......?' 상대의 음성은 매우 낯설었고 젊었다. 그는 약간 긴장한 채로 한 손을 들어 문을 밀었다. 투투툭......! 문짝은 수명이 다 되었는지 먼지와 함께 그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장항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눈부신 바깥의 정경과는 대조적으로 방 안은 매우 어두컴컴했다. 그 어둠의 장막으로 인해 그는 한동안 시야가 꽉 가로막혀 아무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눈 앞이 트이자마자 장항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그가 이처럼 기겁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방 안에 펼쳐진 상황이 그의 예상과는 너무도 어긋났던 것이다. 침상 위. 장항이 찾고자 했던 형위가 그곳에서 눈을 위로 부릅뜬 채 반듯하게 누워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목 한가운데에는 비수(匕首)가 박혔던 자리인 듯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그곳에서 흘러 내려 굳어버린 피가 침상을 온통 검붉은 색으로 도색해 놓고 있었다. 그 광경에 장항은 넋을 잃는 한편,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어찌 이런 일이! 이 늙은이가 이 꼴로 죽어 있다니.'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명탈혼객 형위. 어떻게 늙어가고 있었던 그는 아직까지 능력을 탐내는 자가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그런즉 아무리 기력이 쇠했단들 적어도 타인의 손에 의해 죽어 갈 위인은 아니었다. 때문에 형위의 처참한 주검이 던져준 충격은 장항에게 잠시 지독한 더위도, 이제까지의 불평도 모두 망각하게 했다. 그가 정신이 든 것은 다른 요인에 의해서였다. "훗훗! 그대가 물주(物主)인가?" 아까 밖에서 들었던 젊은이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예리하게 꽃혀 들어왔던 것이다. 장항은 움찔하여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그는 등줄기에 절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가 예시했듯 과연 상대는 청년이었다. 일신에는 자삼을 입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 그리 비범한 풍도의 소유자는 못되었다. 그저 길을 가다 보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이한 인상착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섬뜩한 것은 그 자의 눈빛이었다. 한 마디로 지독히 차가웠다. 그 눈은 일견하기에도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비정(非情)한 빛을 흘려내고 있어 그가 냉혈(冷血)의 인간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엇다. 나이는 이십사, 오 세쯤 되었을까? 그는 손바닥 위에 종잇장 같이 얇은 소도(小刀)를 올려놓은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 당신... 누구요?" 장항의 음성이 부지중 떨려 나왔다. "나? 후훗!" 청년은 엄지 손가락을 세우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무심도(無心刀) 냉천(冷天)."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닌 눈빛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자 장항은 그 끝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되뇌였다. "무심도 냉천......?" "훗훗! 그래." 청년의 기세에 밀려 풀이 죽어버린 장항은 상대가 자신에게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도 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부지중 한 차례 진저리를 치더니 손가락 끝으로 무명탈혼객 형위의 시체를 가리켰다. "당... 당신이... 죽였소?" "물론." "왜......?" 의아해 하는 그의 면전에 대고 자칭 무심도 냉천이라는 청년은 컥컥 웃어제꼈다. "왜냐고 묻다니, 그대는 정녕 어리석은 자로군. 그렇다면 알려주지. 저것이 살수(殺手)의 자연스런 죽음이다." '자연스런 죽음이라고? 저렇게 죽어있는 것이 말인가?' 장항의 의혹은 도를 더해갈 뿐, 여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냉천은 이른바 형위의 혼(魂)이 담겼다고 할 수 있는 무명도를 새삼스럽게 힐끗 응시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형위는 나의 사부(師父)다." 장항은 대경실색했다. "사부라고?" "음." "그... 그런데도... 죽였단 말이오? 자연스럽게......?" 형위의 뒷말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괴상한 어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훗훗......!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살수는 능력이 감퇴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법, 그럴 때 제자가 나서서 대신 처리해 주는 것은 무상의 영광이지." "아!" 장항은 어느덧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살수들의 법도까지는 알지 못하나 상대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럴 듯 하구려." 그러나 장항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렸다. 상대가 한 말의 진위(眞僞) 여부와는 별개로 일단은 그 자가 너무도 끔찍하고 무서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냉천이 떠나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으악!' 장항의 몸이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뚝 멈추어섰다. 오금이 저린 나머지 왜 불렀느냐는 말은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냉천이 그의 기색을 알아 차린 듯 쿡 웃었다. "그냥 가버리면 되나?" "그, 그럼 날더러 어쩌란 말이오?" "후후... 일이 있기 전에 사부에게서 들었지. 사자림에서 사부를 봉공으로 초빙해 가려 했다면서?" 장항은 무엇에 이끌린 듯 다시 돌아섰다. "그렇소만, 그건... 왜 묻소?" 냉천은 입가에 한 가닥 비웃음을 담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자와 얘기하려니 피곤하군." 그는 사뭇 권태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사자림이 원한 것은 늙어 폐물이 된 형위가 아니라 그가 지닌 솜씨였을 게 아닌가?" "그... 그야 물론......." "그때문에 그대를 불렀다." 냉천은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곳에는 형위 대신 이 냉천이 가겠다." "그, 그것은 내 뜻대로 정할 수 없는 일......!" 장항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후훗! 왜, 내 솜씨가 형위만 못할 것 같다는 건가?" "헉!" 장항은 질겁을 했다. 냉천의 손바닥 위에 있던 무명도가 위로 떠오르더니 그가 뻔히 보는 가운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한 것은 지워지지 않고 기억의 한 켠에 접혀 있던 지난 날의 소문이었다. - 무명도는 살아 있는 혼이다. 소리도, 빛도, 기척도 없이 날아 정확하게 상대의 목을 따 버린다. 아니나 다를까? 장항은 그 찰나를 통해 목젖으로부터 따끔하는 충격을 감지했다. 그 작은 충격은 이내 그의 전신으로 번져가 그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했다. '죽음인가? 이것이.......' 그는 거의 기계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만져 보았다. 그랬더니 짐작대로 시뻘겋고 끈끈한 액체가 손에 묻어 나왔다. '피......!' 장항은 그만 일시에 모든 사고가 정지되어 버려 자신이 바짓가랑이에 오줌을 쌌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 뿐이었다. 냉천이 그에게 조소를 던졌다. "후훗! 이제 보니 형편없는 겁보였군. 안심해라, 그대의 목은 건재하니까. 단지 피부를 조금 그었을 뿐이다." 그는 어느새 무명도를 회수하여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그럼 나는 더 살 수 있는 거요......?" "아직은 그렇지만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속히 나를 사자림으로 안내해라." "조... 좋소!"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장항은 온 몸의 기력을 다 짜내야만 했다. 날씨는 여전히 찌는 듯이 더웠고, 그는 전신이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항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물에 빠졌다 나온 듯이 몸을 흠뻑 적셔 놓은 그 땀이 더위와 무관하다는 것을. ④ 사자림(獅子林)을 두고 세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녹림인(綠林人)이 아니면 절대 그곳에 가입하지 말라고. 이는 사자림이 무림의 사대금역(四大禁域)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나름대로 극심한 텃세를 부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자림은 사자천효(獅子天梟) 육청풍을 림주로 하여 당금 무림의 흑도인들이 쌓아올린 집마부(集魔府)로서, 몹시도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자림은 복우산(伏牛山)에 있다. 산역에는 사시사철 하늘을 가릴 정도로 고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고목림은 여느 평범한 숲이 아니었다. 도저히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각종의 절진(絶陣)을 비롯하여 기관매복 등의 무서운 함정들이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데다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을 입히는 독충(毒筮)마저 득시글거렸다. 이렇다 보니 특별히 초대 받지 않고서는 단 한 발짝도 마음대로 들여 놓을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그 숲의 한가운데에 전체가 칙칙한 흑석(黑石)으로 이루어진 한 채의 거대한 성보(城堡)가 있었다. 이 성보가 그 유명한 사자림이다. 흑도인들을 하나로 규합시켜 종내 정도(正道)의 전륜회와 쌍벽을 이룬, 정사이천(正邪二天) 중 하나인 것이다. 팔월 보름. 한 청년이 사자림을 방문했다. 일신에 자삼을 걸쳤으며 별 특징도 없어 보이는 그는 녹림 출신도 아니면서 오자마자 전격적으로 가입이 되었다. 이에 대해 사자림 내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특히 외인(外人)인 자를 선뜻 받아들이라 해 놓고 그의 신상이나 내력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는 림주의 처사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자에 대해 공표된 사항이라곤 오직 이름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무심도(無心刀) 냉천이라는....... 영호천문. 그는 묵묵히 찻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현재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은 사자림이었다. 그는 무심도 냉천으로서 아무 탈없이 이곳 잠입에 성공했던 것이다. '지금쯤 무명탈혼객 형위는 어딘가 깊은 산곡(山谷)을 헤매며 안주할 장소를 찾고 있겠지.' 그렇다. 무명탈혼객은 장항을 위시하여 세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잠시 연기를 했을 뿐,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형위는 생을 정리하는 마당에서 영호천문과의 대화를 통해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영호천문이 그럴 듯한 신분으로 위장하는데 협조하는 일이었는데, 형위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저지른 죄업(罪業)을 조금이나마 속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영호천문의 수중에는 지금도 형위의 무명도가 들려져 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내심 탄식처럼 읊조렸다. '그는 무명도를 내게 주며 말했다. 이 칼이 이제부터는 다른 용도로 쓰여지기를 원한다고. 그는 나에 의한 새로운 부활을 꿈꾸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서 스스로 지워 버렸다.' 영호천문은 쓴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한때는 나도 그처럼 혈세강호(血洗江湖)에 염증을 느껴 은퇴를 결심하기도 했었다. 비록 얄궂은 운명이 나를 놓아 주지 않아 다시 이렇게 나오게 되었지만.......' 그는 무엇을 향해서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인, 그것은 내게 있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고통일 따름이었다. 아무리 나름의 명분을 주장하려 해도 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나도 종국에 가서는 무명탈혼객 형위와 같이 취생몽중인으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가 이렇듯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사자림에 소속되어 있는 한 시녀가 조용히 다가왔다. "냉공자(冷公子), 림주께서 부르십니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들더니 짤막하게 답했다. "안내해라." 사자림의 총단인 보(堡)는 동장철담이었다. 복잡한 기관지학과 진법 등을 토대로 하여 미로(迷路)처럼 얽혀 있는 건물의 나열이 더없이 중압감을 안겨 주었다.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이곳 저곳을 함부로 나다니려 했다간 언제, 어떤 변을 당하게 될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입을 꾹 다문 채 시녀의 안내를 받아 여러 채의 전청과 중전(中殿), 화원, 대전(大殿)까지를 지나갔다. 물론 그 경로만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 얼마 후. 그는 하나의 화려한 대전(大殿)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얼굴이 다 비쳐보일 정도로 매끄러운 대리석이 드넓은 바닥 전체를 뒤덮듯 깔려 있었다. 시종 무심일색이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은은하게 놀란 표정이 깃들었다. 호화의 극을 이룬 내부 정경도 그렇지만 전청에는 큰 상(床)이 놓여 있었는데, 뜻밖에도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온갖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득하게 차려져 있기도 했다. 대체로 검박한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는 영호천문로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각종의 진귀한 요리들이 무럭무럭 김을 피워올리며 한껏 식욕을 돋구고 있었다. '후후... 이곳의 주인은 꽤 사치를 즐기는 위인인가 보군.' 영호천문이 이처럼 중얼거린 것은 정면으로 건네다 보이는 곳에서 사뭇 근엄한 기색을 띤 채 태사의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한 명의 금의노인(金衣老人)을 향해서였다. 대략 육순쯤 되었을까? 그 자는 턱 밑에 금빛이 감도는 수염이 길게 자라 있는 데다가 호형(虎形)의 얼굴에 호목(虎目)마저 구비한, 한 마디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으음,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영호천문은 첫눈에 그 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당금 흑도의 거물(巨物)인 사자천효 육청풍이라는 것을. 그의 등 뒤로는 두 사람이 그를 호위하고 서 있었다. 그들은 마치 혼(魂)이 없는 인간들 같았다. 몽롱하게 풀어진 동공이 계속하여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희한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색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각기 흑의(黑衣)와 백의(白衣)라는, 지극히 대조적인 옷을 입고 있었으나 얼굴만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음침한 분위기도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똑같았다. 영호천문은 그들이 누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짚어냈다. '저들은 십대살객 중 두 명인 흑백쌍무상(黑白雙無常)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비단 그들의 정체만이 아니라 현재 그들이 취하고 있는 행태였다. '정녕 믿기 어려운 일이구나. 저들 쌍둥이 형제가 이곳에서 사자천효의 호법이나 서고 있다니, 아마도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흑무상과 백무상은 십대살객의 일원이다. 하지만 사자천효도 역시 십대살객 중 일원이고 보면 아무리 그가 쌍효(雙梟)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흑백쌍무상을 개인호법으로 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상식을 넘어선 일이었다. 이로써 영호천문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자천효, 저 자의 위용을 알만 하군.' 그의 상념을 깨며 사자천효가 입을 열었다. "허허허... 냉소협, 왜 그러고 서 있나? 어서 와서 앉게.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이 자리는 자네를 위한 것이라네." 짐짓 친근함을 표방한 그 말에 영호천문은 그저 예의적으로 공수해 보였다. "고맙소이다, 림주." 그는 정해진 자리로 다가가더니 주저없이 털썩 앉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어느 모로 보나 공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천효는 불쾌해 하는 기색 없이 자진하여 술병을 집어 들었다. "허허헛! 잔을 들게. 노부가 한 잔 따르겠네." "사양하지 않겠소." 그리하여 영호천문이 내민 잔에 호박빛 액체가 반쯤 부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안색이 일변했다. '웃!' 족히 천근(千斤)은 됨직한 압력이 뜻밖에도 잔을 짓눌러 와 그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것이다. '흐음, 이 자가 나를 시험하려 하는군.' 그는 심중의 읊조림과 함께 즉시 공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비로소 술잔은 넘치도록 가득 채워졌다. 쪼르륵......! 표면적으로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 음향이야말로 실제로는 짧은 찰나를 빌어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암투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그 직후, 사자천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술잔도 채웠다. 그리고는 껄껄 웃으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허허허헛......! 건배하세나, 우리!" "림주께서 원하신다면......!" 영호천문은 의도적으로 만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현재 그가 무심도 냉천으로 변신해 있었으므로 어느 면에서든 그답게 행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중에서도 욕설이 일어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음흉한 작자 같으니라고!' 아무튼 두 사람은 음식을 들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자천효 육청풍이 입을 떼었다. "내 냉소협에게 궁금한 것이 있네." 영호천문은 다소 냉랭한 투로 잘라 말했다. "말해 보시오. 무엇이든." "냉소협은 언제 형선생의 제자가 되었지? 노부가 알기로 그에게는 제자가 없었는데......?" 육청풍의 의혹을 영호천문은 간단하게 받아쳤다. "사부는 십 년 전에 단 한 번, 내게 일도식(一刀式)을 전수했을 뿐이오. 그 후로는 쭉 혼자 익혔소이다." "호오!" 육청풍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탄성을 발했다. "냉소협의 자질은 정녕 하늘도 놀랄 지경이군." 영호천문은 냉소했다. "후훗! 맘에도 없는 칭찬은 하지 않아도 되오이다.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사부의 절기들을 스스로 깨달아야만 했고, 사부도 그걸 원했소." "아니, 내 말은 진심이었네. 정말 훌륭한 사도로군." "나는 사부를 죽였소." "허헛! 알고 있네. 장항으로부터 대충 얘기를 들었지." 육청풍은 이어 안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을 지었다. "자네의 신상에 관한 것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본론으로 들어 가세. 자네가 본 림에 가입한 진짜 이유는 뭔가?" 영호천문은 히죽 웃었다. "나는 본래 구속받는 것은 싫어하오만, 이 기회에 내 역량이 사부에 비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소이다." "허허... 그 말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 자네는 보기보다 대단한 패기를 가진 듯 하이." 육청풍은 젓가락으로 육포 한 조각을 집으며 말했다. "하지만 본 림의 봉공이란 사실상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이네. 누구라도 실력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수여하기가 곤란하네." 그는 눈짓으로 흑백무상을 가리켰다. "최소한 노부의 좌우호법(左右護法)들을 물리칠 만한 실력은 되어야 할 것이야." 영호천문은 차게 웃었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려?" "허허... 좋도록 생각하게." 사자천효 육청풍. 과연 그는 일대효웅다왔다. 상대가 어찌 굴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심중을 외부로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때문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계산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아 낼 도리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술 한 잔을 단숨에 쭉 들이킨 후, 말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오. 사부의 무명도는 정확성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딱하게도 내 무심도(無心刀)는 눈이 없어 아무에게나 날아가는 결점을 지니고 있소." 그것은 육청풍을 상대로 한, 공공연한 협박이었다. 그 오만무례한 발언에 노한 것은 흑백무상이었다. 그들의 실같이 가느다란 눈에서는 대번에 섬뜩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러나 당사자인 육청풍의 태도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허헛! 나이답게 퍽 혈기왕성하군. 좋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노부가 다 책임질테니 소신껏 임해 주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그의 좌우 양편에서 섬광이 일었다. 쉿! 쉬이익! 흑백무상이 다짜고짜로 공격을 해온 것이었다. 영호천문으로서는 미처 자세를 갖추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그들은 검을 썼다. 번쩍하는 찰나에 흑무상의 검은 영호천문의 미간으로 파고 들었고, 백무상의 검은 그의 심장을 찔러왔다. 영호천문은 그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 검이 코 앞까지 이른들 겁을 집어먹을 그도 아니었지만. "으음!" 관전 중이던 육청풍이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이와 더불어 그의 안색이 몹시도 흔들리던, 바로 그때였다. 상 위의 술잔이 전광석화처럼 위로 떠오르더니 백무상의 검극(劍極)을 막아냈다. 따라서 백무상이 움찔하는 사이, 영호천문의 상반신이 의자 뒤로 벌렁 넘어갔다. 동시에 환각과도 같은 백선이 그로부터 쏘아져 나가더니 두 마디의 다급한 비명을 유발시켰다. "큭!" "허억!" 파아아--! 두 가닥의 핏줄기가 분출되어 허공에서 열 십자로 교차되는 진풍경을 연출해냈다. 그 핏줄기의 근원지는 놀랍게도 흑무상의 왼쪽 어깨와 백무상의 오른쪽 어깨였다. 선제공격을 퍼붓던 그들은 오히려 영호천문의 반격으로 인해 각기 한쪽 팔을 잃을 뻔한 위기상황을 맛보았던 것이다. "후후... 더 공격할 생각이 없는가 보구려?" 영호천문은 웃었다. 어느새 그는 무명도, 아니 무심도로 개칭된 소도를 옷자락으로 스윽 닦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옷자락에는 흑백쌍무상의 피가 묻게 되었으나 그는 이 점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늘 있어온 행사인 양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으음......." 흑백무상은 반쯤 잘려져 나간 어깨를 움켜쥐며 신음을 발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경악과 더불어 짙은 회의가 어려 있었다. 이때였다. "헛헛헛헛......! 멋진 솜씨요. 냉봉공(冷奉公), 노부는 그대로 인해 한층 마음이 든든해졌소." 마침내 육청풍이 영호천문을 사자림의 봉공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어투조차도 이제까지와는 싹 달라져 있었다. 영호천문은 짐짓 거만하게 응수했다. "림주께서는 앞으로도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이외다. 후후... 사자림의 어려운 일은 모두 내게 맡겨 주십시오." 육청풍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쾌한 듯 너털웃음 쳤다. "헛헛헛......! 그야 여부가 있겠소? 자, 오늘은 기쁜 날이니 마음껏 드시게나. 냉봉공." "후후후......." 영호천문의 입에서는 자못 승리를 뽐내는 듯한 냉오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는 육청풍에 의해 다시 술잔이 채워지자 잔을 높이 들어보인 다음, 깨끗이 비워 버렸다. '사자림, 여기까지도 성공이군.' 제 18장 사랑의 고뇌(苦惱)는 누구에게나 ① 영호천문이 사자림에서 봉공의 지위에 오른 지도 십 일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림내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사자림으로 잠입해 들어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기회를 포착해 사자천효 육청풍을 제거하는 것, 두 번째로는 단정(單政)과 노파(?)를 구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 영호천문은 거처에 홀로 앉아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과거 불회십반천 중 해천일살 동천목과의 약속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문에 그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은밀히 준비하고 있기도 했으며, 지난 열흘에 걸쳐 사자림 총단의 내부 사정과 지리를 익히기에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리고 단정 일행을 구출해 내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의 부탁도 없었으나 이미 단안을 내린 상태였다. '오늘 밤에 결행한다.' 영호천문은 무심도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빛냈다. 확실히 사자림의 봉공이라는 신분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특혜와 권한 등이 마구 주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역시 그 신분을 빌면 사자림 내의 어디든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독 한 곳만은 예외였지만. 일명 천우각(天宇閣). 이렇다할 특징이라곤 없는 평범한 곳이다. 그저 별채 형식의 삼층 누각으로서 고작해야 담장과 화원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정도가 다른 곳과 구별되는 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천문은 처음부터 그곳을 눈여겨 보다가 종내에는 심증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틀림없이 단정 일행은 저곳에 감금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하루에 두 번씩 이인분의 식사가 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의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있었다. '사자천효는 계략까지 써 그 둘을 납치해 왔으면서도 음식의 질 등 갖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그들을 매우 특별하게 대접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것은 계속하여 그를 괴롭혀 온 의문이자, 그가 스스로 풀어가고자 마음 먹은 하나의 숙제이기도 했다. 슷--! 하나의 그림자가 쾌속하게 움직였다. 실체를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몽영(夢影)이었다.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천우각의 담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곳은 누구를 막론하고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영호천문은 미리 살펴둔 바가 있었기에 경계망을 뚫고 그리 어렵지 않게 삼층 누각의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이제 보니 여섯 명이나 되는 무서운 감시자들이 달라 붙어서 지키고 있었군.' 그의 의문은 점차 짙어져 갔다. '대체 무엇 때문에 어린 아이 한 명과 그의 종복 한 명을 이처럼 중히 다룬단 말인가?' 스슷--! 불현듯 기왓장 몇 개가 환상처럼 움직이더니 영호천문의 신형이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스며 들었다. 이는 그가 익힌 고도의 인자술(忍者術)이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천정에서 그는 한창 숨을 죽이고 있다. 그 아래 쪽은 곧바로 삼층 누각에 속해 있는 한 방(房)이다. 방 안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마주 앉아 있었는데, 그 중 남자란 그가 찾고자 했던 소년 단정이었다. 그 간에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단정의 치기만만했던 얼굴은 꽤 변해 있었다. 철이 든 듯 제법 의젓해 보인다고나 할까? 하긴 전에도 유달리 영민해 사람을 놀래키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녀석, 다시 보니 반갑군. 그런데 저 여인은......?' 천정에서 단정을 내려다 보던 영호천문의 시선이 소년과 함께 있는 여인에게로 옮겨져 갔다. 그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인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소를 지었다. '후후... 그 노파겠지?' 이때, 단정이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나,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감금되어 있어야 하지?"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아마도 쉽게 풀려나지는 못할 거야. 우리가 전륜회(轉輪會)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듣고 있던 영호천문은 어지간히 놀랐다. '맙소사! 전륜회라고......?' 소녀의 말이 계속되었다. "사자천효는 지금쯤 우리를 미끼로 아버님을 협박하고 있을 거야. 능히 그러고도 남을 작자니까." 단정이 코웃음 쳤다. "헹! 그렇다고 아버님이 호락호락하게 넘어 가실까?" 그와는 달리 여인은 몹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좌우간 우리들로 인해 아버님께서 필생의 힘을 기울여 기반을 닦아 놓으신 전륜회에 누를 끼치게 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할 텐데......." 그 순간, 영호천문의 놀라움은 가히 극을 치달렸다. '오오! 그렇다면 저 아이와 여인이 전륜대제 백리성우의 자식들이었단 말인가?' 실로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즉부터 그들의 신분이 남다를 것은 예상했었지만 설마하니 정도 최고 인물의 혈육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덕에 그가 품고 있던 의혹은 저절로 풀렸다. '그렇군. 이들은 막대한 효과가 기대되는 인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사태는 영호천문이 생각했던 범위를 초월하여 심각한 국면을 형성해 가고 있는 셈이었다. '전륜회는 정도연맹이고 사자림은 사도연맹이다. 정사이천은 세불양립(世不兩立)이거늘,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그는 결국 궤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을 지금 구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놔두고 지켜보는 편이.......' 슷--! 영호천문은 어느덧 천정을 벗어 나기 위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단정과 여인, 즉 백리가(百里家)의 남매에게 당분간은 별 탈이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의 머릿 속에는 이미 다른 계획이 짜여져 있었으니, 그것은....... 밤. 영호천문은 자신의 처소에 들어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내려와라." 언뜻 보면 해괴하기까지한 광경이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대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읊조리니 말이다. 그런데 있었다. 슷--! 천정에서 그의 말에 따라 거미 한 마리가 내려왔던 것이다. 푸른 거미,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전신에 푸른 가죽을 뒤집어 쓴 채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 한 인간이었다. 녹지주(錄蜘蛛). 영호천문과는 매우 특별한 교분을 맺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를 대하는 영호천문의 기색은 달가워하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꽤 오랫만에 만났건만 그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 일어나 보지도 않고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지? 분명 사자림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녹지주는 복면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흘려내며 항의했다. "그건 어차피 당신의 일방적인 요구 중 하나가 아니었나요? 그 따위를 따르려다간 내 일은 까맣게 잊혀지고 말 거예요." "그렇지는 않다.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흥! 언제요?" "때가 되면 내가 부를 것이다." 그 말도 녹지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이 그때예요. 그러니 더 이상은 말리지 말아요." 이어 그녀는 원망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이런 식으로 맞이해선 안돼요. 그 동안 이 녹지주가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아나요? 그 병신 늙은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그만, 굳이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사실상 영호천문은 녹지주의 행적을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팔잔(八殘)은 변함없이 만통회(萬通會)를 훌륭하게 이끌어 오고 있었는데, 녹지주 역시도 그들과 함께 숱한 일을 해치웠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자림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이 그녀가 빼낸 것이었다. 녹지주는 영호천문에게 말까지 가로막히자 복장이 터져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정말 더는 못참아! 당신이 뭔데 나만 보면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나 하고 말야. 그러면서도 내 입장은 눈꼽만치도 헤아릴 줄 모르다니, 당신은 정말 사람도 아니야." ② 영호천문은 쓴 웃음을 지었다. "녹지주, 왜 내가 그대의 입장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흥!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안다면 어떻게 그처럼 나한테 무정할 수가 있죠?" "무정......? 그럼 내게 유정(有情)이라도 기대했단 말인가?" 녹지주의 기세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솔직히 그런 기대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당신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을 수가 있었겠어요?" 열이 받아 마구 쏘아대다 보니 내심을 죄다 털려 버린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 "멍청이! 바보! 당신과는 상대도 않겠어요." 슷--! 그녀의 수중에서 거미줄이 뻗어 나갔다. 정말로 이 방에서, 아니 영호천문에게서 떠나려 하는 것이었다. "돌아와라, 녹지주." 영호천문의 침착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녹지주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 사랑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인가? 그녀의 몸이 가늘게 경련하는 것을 영호천문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냉랭하게 느껴질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멋대로 행동하면 용서치 않겠다." "흥! 그럼 나를 죽이기라도 할 참인가?" 녹지주는 코웃음을 치며 영호천문을 향해 돌아섰다. 해볼테면 해 보라는 듯 한껏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 들고 있는 그녀의 눈은 그 순간 놀랍게도 물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녀의 눈물을 대하자 되려 빙긋 웃었다. "녹지주,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대는 아직 경험이 모자랄 뿐더러, 중원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다. 열악한 조건은 다 가지고 있는 셈이지." 녹지주는 울면서 웃었다. "호호... 미안하지만 그 중 한 가지는 틀렸어요." "흐음?" "나는 중원에서 이미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강해요. 내가 부러질 위험성이 높다면 아마도 그는 나보다 더 할 걸요?" "뭐라고......?" 난데없이 정곡을 찔린 영호천문은 그답지 않게 가슴이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가 되묻자 녹지주의 섬세한 몸이 한 차례 심하게 흔들렸다. "물론이에요. 아무렴 나도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겨우 그 정도도 모를까봐요?" "으음, 녹지주, 정녕 뜻밖이다. 그대가 나에 대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영호천문은 말끝을 흐리며 안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휙--! 녹지주가 그에게 무자비한 돌격(?)을 감행해 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 바람에 영호천문이 침상으로 벌렁 쓰러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나를... 나를 피하지 말아 줘요." "녹지주, 이러면......." 영호천문은 실제로 그녀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느 틈엔지 복면을 벗어 던지고 타는 듯한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짓눌러왔기 때문이었다. "음......." 졸지에 입술을 도난당한 영호천문은 신음을 흘렸다. 이는 그녀에게 휩쓸린 바가 아니라 탄식을 대신한 것이었다. 잠시 후. 영호천문은 녹지주의 격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그녀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미안하다, 녹지주. 어쩌면 그대가 본 내가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그대도 한 가지는 틀렸다. 내 마음 속에는 여인을 받아들일 만한 공간이 남아있지 않다." 녹지주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었다. "그건... 왜죠?" "마음이 죽어 버렸으니까." 영호천문은 툴툴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녹지주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싶더니 느닷없이 꽤나 앙칼지게 물어왔다. "정말 그 뿐인가요?"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요? 흑......!" 녹지주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더니 거미줄을 뽑아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창문을 뚫고 뛰쳐 나갔다. "난 알아! 당신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는 거야. 크흐흑......! 두고 봐, 당신을 따르는 계집은 모두 죽여 버릴 거야." "녹지주......!" 심각한 오해에 따른 그녀의 발작에 영호천문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뭐라고 말을 전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디론가 벌써 사라져 버린 후였으므로. 멍청히 서 있던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쯧! 내겐 너무 벅찬 여인이군." 영호천문은 침상에서 부스스 일어나더니 탁자 앞으로 옮겨 가 앉았다. 이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면 의례껏 행해지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녹지주에 대해 천천히 연구해 보았다. '그녀는 인자술을 배우고 무림을 종횡하는 동안 나름의 연륜을 쌓아가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성격 형성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직선적인 면이야 본성일 수도 있지만 보기 드물게 괴퍅한 것은 아무래도 환경의 영향인 듯 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은근히 불안해졌다. '혹시 그녀가 흥분한 김에 무슨 일을 벌이지나 않을지......?' 다음 순간, 영호천문은 안색이 홱 변하더니 앉았던 자리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설마......!" 슷--! 그의 신형이 나는 듯 창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슥--! 거미줄, 즉 은사(銀絲)가 뻗어 나가고 있는 방향은 사자전(獅子殿) 쪽이었다. 그곳은 사자천효 육청풍의 거처다. 당금 흑도의 최고 지주라 일컬어지는 사자림주가 기거하는 만큼 사자전은 림내에서도 금역에 속했다. 그런데 달이 기울어가고 있는 것을 기화로 녹지주가 가느다란 은사를 따라 푸른 선을 그리며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동작은 유능한 인자답게 꽤 치밀했지만 평소에 비한다면 그다지 신중한 편이 못되었다. '이제부터는 사부의 복수든, 뭐든 전부 내 뜻대로 할 거야.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어.' 녹지주은 연신 심중으로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여 부르짖고 있었는데, 그녀의 복면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먼저 육청풍을 없애버린 후, 모두 죽일 거야. 모두......!' 그녀의 뇌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원망, 분노, 독기 등 모조리 아름답지 못한 감정들 뿐이었다. 편격한 그녀의 성격은 영호천문의 애정거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을 안겨다 줄지도 모르는 채....... 사자천효 육청풍. 인간 관계에 관한 한 그의 철학은 매우 독특했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수만 명에 이르는 수하들이 따르고 있었으나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심지어 그에게는 자손도 없었다. 애첩들은 다수 있었지만 철저하게 산아(産兒)를 금해 왔으며, 이따금씩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외에는 개중 한 명도 측근에 두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그의 신변만은 흑백무상을 비롯한 수하들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는데, 이것도 외부에 대한 경계일 뿐이지 따지고 보면 그들 자체가 육청풍의 경계 대상이었다. 그는 호법도, 자신의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매복자들도 달갑지가 않았다. 그가 심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차라리 도처에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설치해 놓은 진식이나 기관장치였다. 거의 병적으로 느껴지는 육청풍의 이런 면모에는 따로 연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지독한 기회주의자라는 점이었다. 즉 이권(利權)으로 인해 타인을 쉽게 배신하곤 했던 그는 결국 타인들도 모두 자신과 같으리라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년에 이르도록 고독(孤獨)이 곧 혈육이자 벗이 되어버린 이 불운한 위인은 지금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불현듯 평이롭던 그의 안색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탁자 앞에는 여러 개의 구슬이 박혀 있었고, 그 중 하나에 불이 켜진 것이었다. '침입자!' 육청풍의 흰 눈썹이 위로 불쑥 곤두섰다. 한편. 녹지주는 막상 사자전에 들게 되자 더럭 겁이 났다. 그녀는 오랫동안 사자림을 탐지하고 다닌 장본인으로서, 사자천효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일시적인 감정으로 뛰어들기는 했으나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더구나 인자(忍者) 특유의 직감덕에 그녀는 사자전이 안팎을 불문하고 모조리 험악한 매복과 각종의 무서운 안배 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추녀 밑에 바짝 달라붙은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왕에 내친 걸음이야. 이제 와서 되돌아 가지도 못하고. 어쩌겠어? 일단은 맞닥뜨려 보는 게 상책이지.' 다음 순간, 녹지주는 한 가닥 연기로 화하더니 아무 기척도 없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③ '일정문(日正門)은 동영제일의 인자문(忍者門)이야. 나는 그곳에서 훈련받은 최고의 살수이고. 일정문은 동영제일의.......' 이런 주문을 대체 몇 번이나 외웠던가? 이제는 그 숫자마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열심히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녹지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허헉!" 그녀는 급기야 숨이 턱에까지 차 오르자 살수답지 않게 외부로 토해내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사자전이 이토록 삼엄하고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벌써 삼각 이상을 쉬지 않고 전진했으나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당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신이 땀에 푹 젖은 채 중얼거렸다. '대체 이 작자는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 거지? 무려 서른세 개의 기관함정을 지나도록 코빼기도 볼 수가 없으니.' 녹지주는 진기가 다 빠져버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그녀가 일정문의 진전을 이어받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필경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온몸이 벌집이 되었거나, 칼숲에 떨어져 즉사를 면치 못했거나, 혹은 독연으로 인해 한 줌의 피고름으로 녹아 버렸을테니까. 그녀는 자신이 거쳐온 그 행로를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몸서리가 쳐졌다. '아! 이곳에 수비병들이 없는 이유를 알겠어. 기관매복만으로도 얼마든지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이야.' 그녀가 탄식과 함께 한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덜컹! "헉!" 갑자기 바닥이 푹 꺼져 그녀의 신형은 그대로 침몰되고 말았다. 그녀는 비명을 토해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한 발로 다른쪽의 발등을 차 위로 반쯤 솟구쳤다. 그러나 그 찰나였다. 쉬잉--! 양쪽 벽에서 섬뜩하도록 예리한 날을 가진 창(槍)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에게로 날아왔다. "악!" 녹지주는 하마터면 덧없이 산적꽂이가 될 뻔 했으나 본능적인 반동으로 창날 위로 뛰어 올랐다. 동시에 그녀는 그것을 발끝으로 차며 전면으로 약간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싶은 순간, 일은 또 터졌다. 슈슈슈슉--! 전면의 벽이 불현듯 빙글 돌더니 무수한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을 통해 비침(飛針)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맙소사!" 녹지주는 기겁을 했으나 이번에도 대응만은 신속했다. 펑! 폭음과 함께 그녀에게 쏘아져 오던 비침들은 한 개도 남김없이 모두 튕겨져 나갔다. 어느 틈에 꺼냈는지 그녀가 천잠사로 짠 천에 공력을 주입시켜 전신을 감싸 버렸기 때문이었다. "휴우--!" 녹지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전진을 시도했다. 그녀의 동작은 지독히도 조심스럽고 민첩하여 흡사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한 마리의 고양이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감이라곤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갈 따름이었다. "제육십사관까지 왔단 말이지?" 육청풍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한 투로 묻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음산한 음성이 들려와 그 말에 답했다. "그렇습니다, 림주." "흠! 예상 밖이군." "필사관(必死關)을 작동시킬까요?" 육청풍은 그제서야 보고 있던 책장을 덮었다. "아니다. 각을 열어 줘라. 전 기관을 해제하고 말이다." "림주......?" "명령이다. 유혼(幽魂)." "복명!" 이후로 그 음산한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육청풍은 조용히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고 보니 오십 년만이군. 누군가 이런 식으로 나를 찾아온 것은. 대체 누굴까? 혹시 그녀가 보낸 사람......?' 그의 안면에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정서가 얽혀 들었다. '기관에 대응하는 수법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일정문의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여 내게로 오고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는 앉아서 이미 녹지주의 정체를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까맣게 잊고 지나온 세월이었다. 동영에서 잔뼈가 굵었건만. 후후... 그래서 그곳에서 자객을 보내기라도 한 것인가?'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한 가닥 회한이 어렸다. '아! 이게 갑자기 어찌 된 영문이지?' 휘휙--! 녹지주는 몸을 날리면서도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육십사번째의 기관을 통과하는 순간에 장치가 스스로 해제되었고,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를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속히 전진해 나갔다. 쾅--! 하나의 문을 맹렬히 밀어 젖히며 녹지주는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곳은 한 밀전(密殿)이었는데, 의외의 사태가 기다리고 있어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사자천효 육청풍. 그가 태사의에 오연하게 앉은 채 녹지주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는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알고 있었구나! 내 존재를.' 그녀에게 육청풍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허허... 동문(同門)인 손님이 찾아와 주니 몹시 반갑군." 녹지주는 언제 겁을 냈냐 싶게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동문? 반역자가 감히 그 따위 소리를 입에 올리다니......."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건만 육청풍의 어조는 여전했다. "허헛!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일정문은 노부에게 있어 제 이의 고향이라네." "뻔뻔한! 하미(何美), 그 분 앞에서도 그렇게 지껄여 보아라." 육청풍의 안색이 그답지 않게 일변했다. "하미......? 그대는 그녀를 잘 아는가?" 녹지주는 한껏 경멸이 담긴 어조로 대꾸했다. "그야 이르다 뿐이겠느냐? 그 분은 나의 사부시다. 나는 그 분의 명으로 네 목을 따러 왔다." 그녀의 양손이 합쳐지더니 섬광처럼 흰 빛을 뻗어냈다. 슈욱--! 사자천효 육청풍이 누구인가? 심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했으나 명실공히 사도제일인이다. 그가 슬쩍 손을 쳐들자 그의 팔목에 채워져 있던 환(環)이 쏘아져오는 흰 빛을 정확히 튕겨냈다. 캉--! 그러자 녹지주가 이번에는 양손을 저었다. 쌔애액--! 그녀의 손동작에 따라 흰 빛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허공에서 호선을 그리며 다시 육청풍에게로 날아갔다. 육청풍의 얼굴에 일순 놀란 빛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손가락 두 개를 세우더니 전면을 향해 튕겨냈다. 땅! 따당--! 흰 빛은 또 한 차례 격렬하게 되튕겨져 나갔다. 알고 보니 그것은 한 자루의 비도였고, 투명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상태에서 육청풍이 소매를 저었다. 우우웅--! "아악!" 거대한 압력이 가슴을 짓눌러 오자 녹지주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항거하지 못할 놀라운 힘이었다. "이리 오너라." "흐윽!" 육청풍이 손을 당기니 녹지주는 막강한 흡인력에 의해 꼼짝없이 딸려 갔다. 이어 그녀는 일시에 칠대요혈을 짚히고는 의지와는 달리 육청풍의 발치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녹지주는 비로소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사자천효라는 거물을 감히 혼자 힘으로 해치우겠다고 뛰어 들었으니, 만용의 대가는 지독히도 썼다. 다소 떨리는 듯한 육청풍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그녀가... 보내서 왔느냐?" 녹지주의 대답은 독살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 더러운 배신자, ㅌ!" 그녀가 뱉아낸 침이 육청풍의 얼굴에 가 맞았다. "으음!" 육청풍은 안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더니 손을 뻗었다. 찌익--! 복면이 찢어지며 녹지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순순히 말해라! 예쁜 아가씨. 그래, 하미는 잘 있느냐?" 위협이 담겨 있는 그 음성에도 녹지주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잘 있느냐고? 너같은 음적(淫賊)은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 복수를 열망하는 여인이 어찌 잘 있을 수가 있느냐?" 그녀의 노한 부르짖음은 폭발하듯 이어졌다. "그 분은 네 놈의 더러운 씨앗을 낳고, 그나마 그 씨가 죽어버린 후로는 사십 년 동안이나 미쳐 있었다. 너는 지금까지 천하의 반을 놓고 호령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나 있었느냐?" 육청풍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 그게 정말이렷다?" "흥! 그럼 없는 사실을 날조하고 있단 말이냐?" 좀체로 움직이는 일이 없던 그의 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내 아이를 낳았었다고? 사십 년씩이나 미쳐 있었다고......?" "퉤! 꼴 같잖은!" "허허헛... 흐하하핫......." 육청풍은 또다시 침세례를 받고도 노하기는커녕 미친 듯이 웃어 제꼈다. 오히려 그를 상대로 열기를 확확 뿜어 올리던 녹지주가 아연하여 그를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육청풍은 허공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것이 야망의 대가란 말이더냐? 사랑했던 여인이 미쳐 버리고, 자식이 죽어가는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크흑!" 그는 녹지주의 어깨를 움켜 잡더니 세차게 흔들어댔다. "대답해라! 하미, 하미는 아직 살아 있느냐?" "흥! 살아 있으면 네가 무엇, 악!" 녹지주는 앙칼지게 쏘아부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육청풍의 손에 의해 호되게 뺨을 얻어 맞았던 것이다. 그는 이어 자신의 뒤쪽을 돌아 보며 외쳤다. "유혼(幽魂)!" "넷!" "이 계집을 고문하여 일정문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림주!" 한 인영이 유령처럼 방 안에 나타났다. 그 자는 일신에 회의를 입었으며 낯빛이 시체와도 같이 푸르스름한 위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독심마영(毒心魔影) 무유혼(無幽魂), 그 역시도 십대살객 중 일인으로서 널리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사자천효의 측근에는 무유혼을 포함하여 십대살객 가운데 삼 인씩이나 포섭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사자천효의 무서운 용병술(用兵術)은 또 한 번 입증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일대 효웅은 그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읊조림을 토해냈다. "하미, 하미....... 그녀만 살아만 있다면......." 그는 무유혼이 녹지주를 데리고 나가자 혼자 남은 방에서 죽음을 앞두고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허위적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통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우선 그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언 오십여 년... 후후후.......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배덕(背德)까지 감행하며 사자림을 일으켜 놓았건만, 그것마저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으니....... 우후후후... 어리석은 육청풍아, 이 모두가 다 업보(業報)란 것을 왜 미처 몰랐느냐?" 육청풍의 탄식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사자림의 기반을 탈취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정사이천의 일천(一天)이자 쌍효 중 일효(一梟)로서 하늘 아래서 적수를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그도 현재는 그저 어떤 자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된다. 육청풍은 절망의 와중에서 구원을 찾듯 중얼거렸다. "내 이제라도 하미만 살아 있다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그녀가 있는 동영으로 돌아가겠다." 그런데 이때였다. 한 가닥 무심하고도 냉막한 음성이 그의 심혼을 울려왔다. "후후후... 안되었지만 당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소." 냉혈(冷血)적인 음성이다. 그 소리를 접한 순간, 육청풍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