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정천하 제 3권 검궁인 저 차례 제19장· 끊이지 않는 여난(女難) 제20장· 또다른 재회(再會)의 장(章) 제21장· 전륜회주(轉輪會主)의 양면성(兩面性) 제22장· 대계(大計) 제23장· 무서운 덫 제24장· 만통회주(萬通會主) 제25장· 친구를 죽여야 하는 이유(理由) 제26장· 두번째 죽음의 의미(意味) 제27장· 천하제일정(天下第一鼎) 제 19장 끊이지 않는 여난(女難) ① "누구냐?" 육청풍의 음성은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본연의 침착함을 되찾고 있는 그에게는 추호의 흔들림이나 당혹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끼익! 문이 열렸다. "유혼(幽魂)......?" 육청풍이 보게 된 자는 뜻밖에도 독심마영 무유혼이었다. 지금쯤 모처에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어야 할 그가 이렇듯 면전에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육청풍의 의혹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가... 강적(强敵)이......." 쿵! 무유혼이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육청풍은 의혹이고 뭐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독심마영 무유혼으로 말하자면 십대살객 중 일인인 만큼 무림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절정고수였다. 그런데 누가 나타나 그를 죽게 했단 말인가? 어쨌든 무유혼은 틀림없이 죽었다. 엎드려 있는 그의 뒤통수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을 육청풍은 분명히 보았다. "으음......." 사자천효 육청풍의 입에서는 급기야 나직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때, 문 밖에서 한 사람이 또 들어왔다. 역시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그 자를 마주 대한 육청풍의 눈이 이번에는 충격으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그대는 냉봉공! 설마하니......!" 새로 나타난 자는 무심도 냉천이었다. 원래 냉천도 이런 식으로 육청풍과 맞닥뜨릴 생각이 아니었다. 좀더 이것저것 상세히 조사해본 연후에 상황이 완전히 무르익기를 기다려 처단을 가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중도에서 냉천의 계획은 대폭 수정되어야 했다. 그는 녹지주가 반라(半裸)가 된 채 험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때문에 더 이상은 결행을 미룰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만을 슬쩍 빼내 사태를 무마시키는 방법도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여린 살결에 잔혹한 채찍질이 가해지는 것을 보게 되자 그의 판단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살업을 행했으되, 그렇다고 인명(人命)을 함부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살인에는 적어도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그런즉 타인에게도 은연중 이 점을 당연스레 요구하게 되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무서운 징계도 불사했다. 요컨대 녹지주는 고문을 당하다 죽을 수도 있었거니와 그녀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냉천, 즉 영호천문의 음성에서는 조소가 묻어 나왔다. "림주께서는 그 간에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도 한 모양이오만 너무 늦었소. 동영이건 어디건 당신이 돌아갈 곳은 없소." "그대가 어찌 하여 내게 그런 소리를......?" 심적 고통 때문인지 육청풍의 안면이 마구 씰룩였다. 그를 보며 영호천문은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그걸 몰라서 물으시오?" "으음......!" "당신은 살아 오면서 너무도 많은 원한을 샀소. 본하미(本何美)가 당신을 반갑게 맞이해줄 줄로 알았다간 큰 오산이오." 그의 입에서 마음의 짐이자 염원이기도 한 여인의 이름까지 들먹여지자 육청풍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추궁하듯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누구냐? 너는." "후후... 림주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사자림의 봉공이자 무명탈혼객 형위의 제자인 무심도 냉천이외다." "놈! 이제 그 따위 터무니 없는 거짓말은 집어 치워라. 무명탈혼객에게는 제자가 없었다. 내 너의 자질을 아껴 속아주는 척 하고 거두어 들이기는 했다만." 영호천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쯧! 당신이 실리(實理)에 유난히 밝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나도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소. 그러니 너무 자랑하지는 마시오." 그는 약간은 경멸이 깃든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당신이 동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 아니겠소? 쌓아 올렸던 전부를 다 잃게 되자 일종의 도피처내지는 안식처가 필요했겠지. 안 그렇소?" 사자천효 육청풍이 처음으로 만면에 노기를 드러냈다. "놈! 감히 본좌를 모독하다니, 죽고 싶으냐?" "아니, 미안하오만 나는 아직 죽을 수가 없소이다. 그리고 내 말은 당신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당신의 내면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오." "우우우......!" 육청풍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이르는 것을 눈으로 보며 영호천문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당신과 나는 이대로 한 판 붙게 될 듯 하구려.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그는 정색을 짓더니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현재 사자림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는 누구요?" 육청풍의 안색이 분노로 인해 그 이상은 더 하얘질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놈! 끝까지 본좌를 우롱하는구나. 내가 아무려면 네 놈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성 싶으냐?" "믿고 해도 될 것이오. 본인도 아주 무명인은 아니니까." "대체 네 놈은 누구냐?" 영호천문은 얼굴을 쓱 문질러 본래의 용모를 회복시켰다. "불망객(不忘客)." "뭣이? 네가 그럼 천중일정(天中一鼎)이었더냐?" 놀라 부르짖는 육청풍을 향해 영호천문은 어깨를 으쓱 했다. "불망객과 천중일정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강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텐데, 그래도 림주께선 아직까지 대단한 정보망을 가지고 계신 모양이구려." "닥쳐라! 애송이 놈." 그의 이죽거림을 더는 못견디겠는지 육청풍이 장력을 날렸다. 꽈릉--! 영호천문도 질세라 즉시 손바닥을 뒤집어 응수했다. 꽝! "으윽!" "음......."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각기 신음을 발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서도 육청풍은 선수(先手)를 유지하려 했다. 슉! 슈슉--! 그의 손목에서 한 쌍의 환이 쏘아져 갔다. 어느새 환은 소륜(小輪)으로 변해 있었는데, 그것은 전문적으로 상대방의 강기( 氣)를 종잇장처럼 찢어 발기는 음악한 병기였다. 영호천문의 두 손에서는 여의무형인이 날아갔다. 쨍! 째쨍--! 날카로운 금속성과 더불어 불꽃이 작렬하는 찰나, 육청풍은 벽에서 사일도(射日刀)를 취하더니 전광석화처럼 공격해 갔다. "천광사일(天光射日)!" 츠츠츠츳--! 영호천문은 삽시에 눈부신 도광(刀光)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가공할 도법으로서 그 기세로 치자면 하늘을 가리고 땅을 양단해 버릴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자천효 육청풍은 일찍부터 동영의 도법과 중원의 도법을 융합하여 독특한 도법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불행하게 영호천문이었다. 그의 몸이 빙글 도는 순간, 여의무형인이 환상처럼 발출되었다. 슈슈슉--! "헉!" 육청풍은 그물과도 같았던 자신의 도세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가공할 예기를 지닌 검극이 쇄도하는 것을 보았다. 대경한 그는혼신의 힘을 다해 사일도를 내뻗었다. 위이이잉--! 카캉--! 격돌음에 덧붙여진 것은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크아악--!" 이와 더불어 허공 중에 혈우(血雨)가 확 뿜어졌다. 이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사자천효 육청풍의 전신 곳곳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같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목숨이 다한 듯 몹시도 휘청거렸다. 그의 수중에는 무참하게 자루만 남게 된 사일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사일도가 편편이 부서져 그의 본신(本身)에 깊숙히 박혀 들었던 것이다. "끄으으윽....... 과연... 천중일정답구나. 끄윽!" 육청풍은 한스러운 듯 마지막 힘을 다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반면에 영호천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조소도, 경멸도, 최소한 죽어가는 자 앞에서는 삼가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의무형인이 사일도와 부딪치는 순간에 등룡천문의 비학 중 하나인 폭뢰탄강(暴雷彈 )이라는 신공을 사용했다. 그것은 자신의 진기와 상대의 진기가 맞닿는 때, 상대방이 들고 있는 무기를 폭발시키는 기이한 위력을 지닌 신공이었다. 육청풍이 더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을 꺾었다. 쿵! 그러나 무릎을 땅에 대었을 뿐, 그는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 상태에서 그는 영호천문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그... 그대가... 노부를 죽이는 이유는... 무엇... 인가......?" 영호천문은 담담히 말했다. "두 가지외다. 하나는 본하미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 "동천목(東天目) 노인의 부탁을 받았소이다." "그럼... 동사제가 아직... 살아... 있었던... 가......?" 영호천문은 씁쓸하게 말을 받았다. "그도 당신과 동문으로 불리우기를 싫어할 것이오." "그... 그렇군....... 노부에겐 자격이... 없......." 육청풍의 당당했던 체구가 힘없이 뒤로 쓰러져 갔다. "생각해 보면... 모두 부질없는....... 온통 후회 뿐......!" 영호천문은 탄식했다. "당신에게는 안된 말이오만 아마도 당연한 대가일 것이오. 본하미는 아직도 동천목을 사랑하고 있소." 육청풍의 입가에 언뜻 서글픈 미소가 어렸다. "그랬... 었나......? 철저하군. 죄업...의... 대가가......." "그런 셈이오." "지... 금이라도 그들이... 결합되기를......." 상대의 이런 반응은 영호천문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었다. 그는 사뭇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부탁이오, 말해 주시오. 사자림의 배후 인물은 누구요?" 육청풍의 눈자위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 그는... 마(魔)... 마......." "마라니, 그 다음은?" "마... 마......!" 그의 음성이 잦아들더니 뚝 끊기고 말았다. 종내 하려던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죄업을 조금도 청산하지 못하고 가는군. 그 말을 쏟아 놓았더라면 이승에서의 짐이 한층 가벼워졌을텐데." 그는 한 가닥 연민이 어린 눈으로 잠시 사자천효 육청풍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어쨌거나 뜻밖이군. 사자천효 같은 인물이 누군가의 끄나불에 불과했었다니......." ② 영호천문. 그는 지력을 튕겨내 녹지주의 혼혈을 찔렀다. 이르자면 일종의 반타법(反打法)인 셈이었다. "아! 이곳은......?" 녹지주는 깨어나자마자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곳은 그녀가 끌려와 고문을 당하던 장소로서, 깨끗이 정돈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역시 공포의 현장이었다. "으으......." 잔뜩 움츠린 채 부들부들 떨던 그녀의 눈에 구원과도 같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 얼굴의 주인은 물론 영호천문이었다. "당신!" 녹지주는 어느덧 공포도 잊고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히 담았다. 그것을 보며 영호천문은 혀를 끌끌 찼다. "아가씨, 철부지 같이 날뛰더니 벼라별 꼴을 다 보이고 있군. 겁보에 울보까지......?" 녹지주는 뚝 굳어지는가 싶더니 눈물을 떨구면서도 생긋 웃었다. 그녀는 안도해서인지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했다. "진짜로 말 되는군요." 이윽고 그녀는 본능인 양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 보더니, 난감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푸른 가죽옷은 거의 다 찢겨져 알몸이 태반이나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인의 보물인 유방까지 불쑥 튀어나와 있었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뜨끈뜨끈해진 나머지 애꿎은 영호천문을 노려 보며 고함을 빽 질렀다. "뭘 봐욧! 빨리 고개 돌리지 못해요?" "하하하하......!" 영호천문은 크게 웃고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몸을 틀어 안면을 싸악 치워(?) 주었다. "이... 이... 치한, 색한, 무슨 구경거리라고......!" 녹지주는 계속하여 열이 오른 듯 씨근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신색을 추스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영호천문은 등을 돌리고 있어도 음향을 통해 그녀의 동작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입술 가장자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 것도 이때문이었다. '녹지주, 그대에게는 귀여운 면도 있었군. 후후후.......' 사자림(獅子林)은 조용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림주인 사자천효가 죽은 사실은 근 일만여 명에 가까운 사자림의 고수들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자전에는 여전히 육청풍이 버젓이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봉공으로 임명된 무심도 냉천을 유독 가까이 한다는 것 뿐이었다. 사자림의 대부분 고수들은 풋나기에 불과한 냉천이 봉공이라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육청풍이 끼고 도 는 데야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자전의 한 내전(內殿). 사자천효 육청풍은 침상에 묵묵히 걸터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자림의 봉공인 무심도 냉천이 시립하고 있었다. 냉천이 특유의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매사를 계획대로 실수없이 이행해야 되오, 림주."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말은 명령조였고, 육청풍은 순응하듯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다. "소생은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그 두 남매를 데리고 말이오. 이제부터 볼만한 일이 일어날 것이오. 천하가 놀랄 만한 일이. 후후후......." 말을 마치자 영호천문은 육청풍을 향해 포권했다. "그럼, 다시 뵙겠소이다. 림주." 그는 지체없이 돌아서더니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서욧!" 날카로운 외침성이 들려와 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 음성의 주인은 놀랍게도 육청풍이었다. 이어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거의 발작적으로 외쳐댔다. "싫어욧! 이대로는 아무 것도 안하겠어요. 아니, 당신이 그렇게 떠나 버리면 난 모두 폭로하고 말 거예요.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일들을 모조리 망쳐 놓겠어요." 육청풍은 그 정도로도 모자랐는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이내 그의 얼굴은 전혀 딴판으로 변해 버렸다. 일편 무척이나 독살스러워 보이면서도 더 없이 정열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세인들이 일컬어 녹지주라고 부르는 그녀였다. 찌-- 익! 부욱, 북! 그녀는 입고 있던 옷마저도 갈기갈기 찢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따위 연극은 집어 치우겠어요. 흥! 내가 무엇 때문에?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흐흐흑......." 녹지주는 악을 쓰다 말고 제 설움에 겨운 듯 침상에 몸을 던지고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쯧! 난감하군.' 영호천문은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망연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녹지주가 이렇게 나오면 속수무책인 그였다. 그녀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지도 모를 여인이다. 사고무친(四顧無親)에다가 삶 자체도 무게가 만만치 않으니, 동정이나 연민을 가질 만한 여지가 다분히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애타게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문제는 영호천문의 심중에 담겨 있는 자괴감이었다. 그것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여인도 사랑할 수가 없으리라. 그로부터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영호천문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녹지주." "흐흐흑! 나를 건드리지 말아 줘. 당신같은 냉혈동물은 차라리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주는 게 낫단 말이야." 영호천문은 거세게 들먹이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움켜 잡았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마음과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증되었다. 녹지주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어왔던 것이다. "흐흐흑... 당신이 미워, 정말로......." 영호천문도 더 이상은 그녀를 밀어 내지 못했다. 그녀를 안으며 그는 탄식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녹지주,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전에도 말했지 않은가? 나는 마음이 죽어 버렸노라고." "상관없어요, 내 마음이 이렇게 뜨거운 걸......!" "그대는 정말 바보같은 계집이다." 다음 순간, 영호천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이후로 두 사람이 침상 위를 뒹굴게 된 것은 녹지주가 스스로 몸을 뒤로 쓰러뜨렸기 때문이었다. 영호천문. 이른바 사랑의 마법사랄지, 그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모든 여인들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주는 구석이 있었고, 그 자신은 늘상 부정했으나 열정이 넘쳤다. 그와 일단 접하게 되면 여인들은 이를 알아 차린다. 그를 보면서, 혹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단지 교차되는 눈빛과 음성만으로도 대개는 감추어진 실상(實像)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의 사랑, 그 오묘하기 짝이 없는 마법의 힘을....... 밤은 소리없이 깊어만 갔다. 하지만 그 속에 포함된 것들이 다 조용하지는 않았다. 불꽃이란 의례 뜨거운 열기와 음향을 동반한 채 타들어 가므로. 녹지주.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정열가(情熱家)인 그녀는 자신의 몸이 송두리째 재가 되어 버리도록 태우고, 또 태웠다. "하아아아......." 그녀는 자신을 내던져 끊임없이 황홀경을 헤매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야성(野性)의 테두리는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전부 부서져 나갔다. 다만 무한정 깊은 늪이 되어 한 사내의 침몰을 죽도록 부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다. 침몰하고 있는 것은 그녀인지도 몰랐다. 영호천문의 손길이 닿고, 그의 입김이 스치며 뜨거운 욕망을 분출시킬 때마다 녹지주는 전율했으며, 몸부림과 함께 울부짖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는 여인으로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그 찰나에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것은 이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랑해요!" 그 밤은 녹지주에게 천하를 안겨 준 밤이었다. 영호천문이야 고뇌를 하건 말건....... ③ 역사(歷史)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무림의 역사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피의 윤회로 점철되어 있는 까닭에 무림사를 가리켜 흔히들 대혈륜(大血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이란 것도 지나고 보면 역사의 일부이다. 따라서 대혈륜은 오늘도 쉬지 않고 중원의 산하를 가르며 구르고 있었다. 만겁전(萬劫殿). 이는 한 마디로 인성(人性)이라고는 어느 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한 살인마들의 집단이다. 만겁전이 출현한 지는 불과 반 년, 놀랍게도 그들은 반 년만에 남무림(南武林)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남무림 칠백팔십 개 파가 그들에 의해 무너지고 짓밟혔으며, 그 나머지는 멸문(滅門)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진하여 만겁전에 오체투지(五體投肢)하는 불상사까지 연출해냈다. 만겁전은 통상 마(魔)의 하늘로 불리웠다. 남무림의 장악이라는, 그들이 반 년만에 이룬 마의 신화(神話)는 고금을 통틀어도 전무후무한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남무림이 이토록 만겁전의 혈번(血幡) 아래 유린되었어도 감히 누구도 그들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저마다 자파의 안전에 급급한 나머지 몸을 사리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로 무림에는 또 하나의 충격파가 전해졌으니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사천성(四川省) 대파산(大巴山). 그곳은 최근 들어 공공연히 마의 집결지라 불리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주오패(神州五覇)의 하나인 잠마문(潛魔門)이 이 지역을 확실하게 주름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면인도왕(血面人屠王) 왕영(王永). 그가 세운 당금 무림 최대의 마역이다. 여기에는 살인을 밥먹기보다 즐겨 하는 개세의 마두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대파산을 근거지로 한 잠마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산서(山西) 태행대산(太行大山)의 금마성(禁魔城)과 쌍벽을 이룬다. 이르자면 잠마문은 개세마두의 본산이었고, 금마성은 희대의 마인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금마뇌옥(禁魔牢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엎어치나 메어치나 결과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어쨌든 잠마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 위세에 항거할 생각을 하는 자는 없었다. 혈면인도왕 왕영이 저 유명한 구정(九鼎) 중 한 명이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거느리는 구천마마군(九千魔魔軍)은 가공지경의 살인마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출정(出征)을 선언하면 굳이 연루되지 않는 문파들까지도 문을 닫아걸고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는데....... 그 와중에서 놀랍게도 잠마문에 정면으로 도전을 감행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군마맹(君魔盟). 그들이 천중일정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일제히 봉기했다. 마침내 군마맹의 일천여 정예고수들과 구천마마군의 일부인 삼천 명의 군단이 격돌하게 되었고, 이들 양측은 무협(武峽)에서 공전절후의 무시무시한 대혈전(大血戰)을 벌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무협을 가로지르던 탁류가 시뻘겋게 물들어 장장 십 일간이나 그 혈류(血流)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무림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조용히 혈전의 결과를 지켜 보았다. 물론 그들 거개가 하나같이 심중으로는 군마맹의 참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뜻밖에도 정반대였다. - 삼천마마군(三千魔魔軍), 무협에 수장(水葬)되다. 이런 통보가 소문이 되어 전역에 번지자 무림은 충격으로 인해 벌집을 쑤셔 놓은 듯이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소문은 또 전했다. 군마맹에는 천안수사(天眼秀士) 제갈형이라는 유능한 군사(軍師)가 있어 그의 지휘 아래 삼천이나 되는 잠마문의 마마군을 전멸시켰노라고. 아무튼 이를 기점으로 하여 군마맹과 잠마문은 한 차례 더 대격돌이 있었고, 그것은 주천(酒泉)에서 이루어졌다. 드넓은 백리평(百里坪)에서 펼쳐지게 된 이 두번째의 싸움에서도 군마맹은 개가를 올렸다. 역시 천안수사의 완벽하고도 치밀한 병법(兵法)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잠마문의 이천마마군을 섬멸해 버렸으니, 군마맹의 힘은 전 중원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흥문파들인 정사십절(正邪十絶)이 모두 군마맹에 가입되어 있더라는 사실이었다. 이 점은 군마맹의 위상을 보다 신선한 쪽으로 정립시켜 결과적으로 무림에 활력(活力)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월이다. 그들은 남양대로(南陽大路)를 걷고 있었다. 숨이 막히도록 무덥던 날씨도 어느덧 거짓말처럼 서늘한 기후로 바뀌어 인간에게 더 없는 만족감을 선사해 준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사계(四季)가 뚜렷한 것은 축복일진저!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대변되는 가을은 더 하다. 온 산이 불붙는 듯한 단풍으로 물들면 들판의 초목도 그렇고, 농지(農地)까지도 황금빛으로 화해 소슬한 바람에 일렁인다. 그것은 한창 길을 가고 있는 세 사람의 눈에도 모두 보였을 테지만 그들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 북행(北行) 중이었다. 이남일녀(二男一女). 안색이 창백하고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무심한 표정을 지닌 자삼청년을 비롯하여 열 두어살 남짓의 소년, 그리고 아직 이십이 채 안되어 보이는 어엿한(?) 미녀 등이었다. 자삼청년을 제외한 두 사람은 남매지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부단히 걸으면서도 수시로 대화를 나누었으나 청년은 하루 종일을 가도록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의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두 남매를 수행하는 것이 임무라도 되는 듯 보호해 주려는 기색은 역력했지만 함께 어울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년이 가끔씩 누이에게 말을 건네며 청년의 눈치를 보곤 했으나 그의 태도에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여인이 아름다운 눈에 야릇한 빛을 띄우며 바라보아도 예외는 없었다. 청년의 침묵이 못내 부담스럽던 소년이 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끝까지 그렇게 입을 다물고만 있을 건가요? 냉아저씨." 소년의 이름은 단정(單政)이었다. 그는 청년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뒤로는 볼멘 소리로 툴툴 거렸다. "쳇! 미안해요. 아저씨가 벙어리라는 사실을 깜빡했어요." 청년은 벙어리가 아니다. 소년 단정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심술이 나 그렇게 말했을 따름이었다. 청년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꼬마, 잠시 후면 객점이 나온다. 거기서 쉬어갈 것이다." 단정은 손뼉을 요란하게 딱 마주쳤다. "야! 드디어 말을 했네요? 헤헤... 그럼 그렇지, 아저씨처럼 멋진 사람이 벙어리일 리가 있으려고?" 청년은 무심도 냉천으로 행세하고 있는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입가에 쓴 웃음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멋진 사람? 내가 말이냐?" "그래요, 이 단정이 본 사람 중에는 두번째로요." 영호천문은 어느덧 천진한 소년의 말에 이끌려 드는 자신을 느끼며 물어 보았다. "그럼 첫번째는 누구지?" 단정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랑이라도 늘어놓듯 말했다. "내 형님이에요. 천하가 그 분을 다 알지요. 냉아저씨도 아마 불망객이라면 모르지 않을 걸요?" 영호천문은 움찔 했으나 내심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후... 녀석, 여전하군.' 그러나 불망객이 아닌 무심도로서 이 자리에 있는 그에게는 대답할 말에도 제한이 필요한 입장이었다. 그는 내심을 감추고 무뚝뚝하게 잘라 말해 버렸다. "나는 그런 자는 알지 못한다." 이로써 대화는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단정도 이쯤 되자 포기했는지 더 이상 말을 건네오지 않았다. 이때, 여인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제의해 왔다. "저, 죄송하지만 잠깐 쉬어갈 수 없나요? 다리가 아파서......." 영호천문은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객점이다, 낭자. 거기서 쉬어라." 여인은 말을 꺼내기까지는 한껏 정중했으면서 거절을 당하자 의외로 금세 울상이 되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참아라." "난 몰라! 더는 못 가겠단 말이에요." 소녀는 급기야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 버렸다. 그녀를 보는 영호천문의 눈빛이 종전보다 더욱 차가와졌다. "내 새삼 경고하거니와 낭자는 지금 마음대로 할 처지가 아니다. 그것을 잊었다간......." 사뭇 엄숙하기까지 한 그의 어조에 단정이 킥 웃었다. "냉아저씨는 벙어리 흉내만 내는 줄 알았더니 정말 바보로군요? 우리 누나는 지금 쉬가 마려운 거예요." '끙! 졌다. 이 짓도 정녕 못해 먹겠군.' 영호천문은 여인, 즉 단옥(單玉)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게 되자 그 자신이 오히려 민망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헛, 험! 다녀와라, 낭자. 기다리겠다." 짐짓 헛기침을 해 보았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단옥은 단옥대로 소피가 급한 것도 그렇거니와, 수치감 때문에 다람쥐처럼 쌩 하고 내달아 근처의 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영호천문은 고소와 함께 이 작은 사건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는 끝없이 뻗어 있는 대로의 끝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에 아스라히 구름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반드시 달성시켜야 한다는 심적인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침중해져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 속에는 진즉부터 복안이 세워져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전륜회(轉輪會)라는 백도의 거목을 잠시 이용해야 겠지? 후후... 백리성우(白里星雨), 그 자의 가면 뒤에 숨은 얼굴을 밝혀내기 위해서, 그가 구축해 놓은 기반을 말이다.' 그는 지금 복우산(伏牛山)에 있는 정도연맹, 전륜회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계획했던 바를 그답게 하나씩 침착하게 이루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로 상에는 인적이 없지는 않았다. 이따금씩 심심치 않게 상인(商人)들을 비롯한 이런저런 부류의 행인들이 영호천문의 곁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그 상태로 대략 한 식경쯤 지났을까? 어찌 된 영문인지 숲으로 들어간 백리단옥은 종무소식이었다.백리단정이 영호천문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누나는 부끄러움도 몰라. 무슨 볼일을 이렇게 오래 본담?" '아차!' 영호천문의 안색이 급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백리단정에게 명령했다. "네가 가 보아라. 어서!" "왜......?" 단정은 뭐라 물으려다 말고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자 급급히 숲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앗! 냉아저씨, 큰일 났어요! 누나가......!" 외침이 울리자마자 영호천문의 신형이 번뜩 하고 그 방향으로 무섭게 쏘아져 갔다. ④ 숲 속. 그곳에서는 단정이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누나가... 사라졌어요......!" 과연 백리단옥의 모습은 주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창졸지간에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단정의 망연한 시선이 가리킨 곳에는 백리단옥의 것인 듯한 허리띠가 주인을 잃은 채 바닥을 함부로 나뒹굴고 있었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자의(自意)로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누나를, 누나를 찾아줘요! 냉아저씨." 단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매달려 왔다. 영호천문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한편, 안색을 무겁게 굳혔다. "단정,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네 누나는 납치되었다." "역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은 단정의 모습을 보며 영호천문은 차분한 어조로 타일렀다. "너무 염려하지 마라. 아직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에는 이르니까. 내가 가서 곧 찾아 오겠다." "그럼 저는 무얼 도우면......?" 상황이 상황이고 보니 당찬 소년 단정의 음성도 몹시 떨려 나오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빙긋 웃었다. "네가 도울 일은 없다. 너는 이대로 숲을 나서서 가던 길로 오 리(五里)만 더 가도록 해라. 그러면 시진(市鎭)이 나올 것인즉, 그곳에서 가장 큰 객점을 찾아가 기다리고 있거라. 나도 네 누나를 구한 후에 곧바로 가도록 하겠다." 단정은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누나를 꼭 찾아와야 해요, 꼭이요!" "녀석, 염려말라지 않았느냐?" 슷--! 영호천문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그가 자리를 뜨고 나자 기어이 단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역시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소년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다. "쳇! 바보같은 누나." 한편. 영호천문은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사흘 전부터 줄곧 뒤를 따라다니던 눈길이 있었다. 그 눈빛에서는 욕정이 느껴졌었지. 어쩌면 놈들은.......'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언제부터인가 그의 뒤에는 미행자들이 붙었었고, 그 이유란 것도 그가 생각한 바대로 백리단옥의 아름다운 용모에 그들이 탐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호천문이 불안해 하는 원인은 정작 다른데 있었다. '단옥은 명가(名家)의 후예답게 고강한 무공을 소지하고 있지만 현재는 금제를 시켜 놓은 상태다. 만일 그 놈들에게 납치된 것이 확실하다면.......' 그는 보통 다급한 심정이 아니었다. 스슷--! 그의 신형이 쾌속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쉬지않고 번뜩였다. 하다 못해 초목의 가지, 흙의 상태 등 자그마한 흔적에도 그는 세심한 주의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달려 갔을까? '저곳이다!' 영호천문은 부르짖음과 함께 신형을 우뚝 멈추었다. 숲이 끝나고 그의 앞에는 그리 높지 않은 비스듬한 절벽이 나타났는데, 그 아래 쪽으로는 넓다란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분지에서 지금 세 명의 괴인(怪人)들이 한창 무어라고 지껄여 대고 있었던 것이다. "쩝! 아주 쓸만한 재목이야." "물론이지, 우리들의 공동전인(共同傳人)으로는 제격이야." "킬킬... 셋째와 넷째, 다섯째도 곧 꼬마놈을 납치해 오겠지?" "암, 여부가 있나? 그 히끔한 놈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깟 놈이 설마 하니 우리 형제들의 상대가 되겠나?" 웃고 떠드는 그 자들은 대략 오순에서 육순까지의 노인들로서 한결같이 인상이 무척이나 거칠고 흉폭해 보였다. 더구나 움푹 꺼져 들어간 눈에서는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흉흉한 안광이 흐르고 있어 그들의 내력이 절정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그들을 본 순간,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구나. 저들은 칠흉(七兇)이다.' 칠흉. 문자 그대로 그들은 무림이 좁다 하고 멋대로 횡행하는 일곱 명의 흉인(兇人)들이다. 그들을 일컬어 일각에서는 혼세칠흉(混世七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제, 쌍효, 삼성, 사기, 오마, 육악, 칠흉, 팔잔, 구정, 십살 등이 논해질 때 결코 빠지지 않는 무림의 독버섯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성정이 몹시도 포악할 뿐더러 개개인이 각각 익히고 있는 무공마저도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 그 뿐이랴? 그들이 지금까지 무림에 끼쳐 온 독해(毒害)는 가공할 수준이다. 살인이나 약탈은 언제고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그들은 색(色)을 좋아하여 그 방면에서 끔찍한 만행을 무수히 저질러왔다. 본래 그들은 서로 혈연 관계라거나 동문 등의 깊은 인연은 없었다. 단지 사고철학과 행동양식이 비슷하다 보니 의기가 투합되어 종국에는 결의형제를 맺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백리가의 남매를 공동전인으로 점찍었는데, 그 점을 두고 구체적으로 오가는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삼흉 중 한 명이 절벽의 아랫 부분에 뚫려 있는 동굴의 입구를 힐끔거리며 기소를 흘렸다. "흐흣! 대형(大兄)께선 재미를 보시느라 정신이 없으신 모양이군. 우리가 이렇게 떠들어도 잠잠하시니 말이야." 그 말에 다른 한 명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야 당연하지. 그 계집은 얼굴도 곱상하지만 물이 오를 대로 올랐지 않던가? 게다가 영춘방(永春芳)까지 복용을 시켜 놓았으니, 크크... 대형께서는 아마도 얼마 후면 바지춤을 붙들고 벌벌 기어 나오시게 될 걸세." "허어, 거 무슨 소리를! 우리가 있는데 왜 대형께서 무리를 하시겠나? 계집이 너무 미쳐 날뛰어 능력이 딸리시면 필히 우리를 부르실 걸세. 그럼 그때는 우리도 차례로, 흐흐......." "쩝! 그만 하게나. 자네 말을 듣고 있자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와 견딜 수가 없군. 우리가 전인 하나는 잘 골랐지. 고 야들야들한 계집의 살결이야말로 회춘(回春)의 묘약이 아닌가?" "킬킬... 암, 거기다가 무공까지 약간 가르쳐 놓으면 잔심부름은 죄다 시킬 수가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일세." 결국 그들이 원하는 전인이란 색(色)의 도구이자 살업까지 적당히 대행해 줄 하수인이었다. 그것도 공동의 소유로써 말이다. 실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해괴망측한 윤리였다. 영호천문은 그들의 얘기를 듣고 나자 절로 이가 갈렸다. '살 가치라고는 단 일 푼도 없는 자들!' 그의 눈에도 거대한 괴수의 아가리처럼 시커멓게 뚫려 있는 동굴의 입구가 기울어진 각도로 언뜻 내려다 보였다. '저곳에서 대흉(大兇)이 백리단옥을 유린하고 있단 말이지?' 영호천문은 심중에서 그 자신조차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살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전신의 공력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슈슉--! 흰 빛이 쾌속하게 그의 손을 떠났다. "킬킬... 이제 슬슬 대형께서 나오실 시간이, 큭!" 삼흉 중 한 명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아니, 이형(二兄)!" 나머지 두 흉인이 대경하여 쓰러진 이흉을 뒤집었다. "억! 이게 웬......?" 이흉의 목에는 언제 꽂혔는지 한 자루의 종잇장 같이 얇은 소도(小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두 흉인 가운데 한 명이 그것을 알아 보고는 질겁을 하여 부르짖었다. "이... 이건 무명도(無明刀)! 그렇다면 형위......."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있던 또 한 명의 흉인, 즉 육흉(六兇)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읊조렸다. "칠제(七弟)... 뒤......." 그는 눈을 크게 뜰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러시오? 육형, 컥!" 칠흉은 말하다 말고 뒤통수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흉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우......!" 육흉은 신음과 더불어 한 차례 세차게 몸을 떨었다. 한 줄기의 은빛 도광(刀光)이 칠흉의 목덜미에 일직선으로 파고 드는 장면을 불행히도 그는 눈 뜨고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누... 누... 누구냐?" 그는 떠듬거리면서도 허리춤에서 기형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하지만 지나친 공포로 인해 그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지경에 놓여 있었다. 쌔애액--! 그의 귀로 섬ㅉ하도록 예리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한 가닥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어딜......!" 챙--! 그는 경황 중에도 일단은 그 빛을 막아냈다. 이후로 벌어진 상황들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튕겨 나간 줄 알았던 모종의 물체가 공중에서 선회하더니 처음보다 십 배나 빠르게 쏘아져 오는데야 어쩌겠는가? "으아악--!" 최소한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그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알고 보니 그 물체는 정확히 그의 미간으로 파고 들었으며, 이를 느끼자마자 그는 세상에 이별을 고해야 했던 것이다. 쿵! 그의 죄많은 육신이 둔중한 음향을 울리며 지면으로 쓰러졌다. 그때서야 비로소 장내에는 하나의 자영(紫影)이 내려섰다. 스슷! 영호천문이었다. 그는 손을 휘둘러 무심도와 여의무형인 두 자루를 회수하고는 세 구의 시신들로부터 몸을 돌렸다. 극도의 분노와 살기가 중첩된 그의 눈이 동굴을 향했다. "대흉! 각오해라. 만일 일을 벌였다면, 내 너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 주겠다." 그는 동굴 안으로 빛살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스슷--! 제 20장 또다른 재회(再會)의 장(章) ① "흐으으... 흐음......!" 영춘방이라는 춘약의 효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토록 거세던 백리단옥의 반항도 어느덧 욕정을 이기지 못하는 기이한 몸부림으로 화해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발가벗기워진 채 거의 동물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악독한 년, 그것 봐라. 너도 끝에 가서는 그렇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쯧! 괜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군." 대흉(大兇). 그는 혼세칠흉의 우두머리이다. 강호인들은 그를 일컬어 혼세색중마(混世色中魔)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색을 지독히도 밝혀온 그의 전력(前歷)이 한 마디로 대변되는 별호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왜 그리 되었는지 코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괘씸한! 이 어르신을 이렇게 다치게 하다니......." 이 뿐만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즉 그는 얼굴을 비롯하여 벌거벗은 신체에 이르기까지 할퀸 자국 투성이였다. 이 웃지 못할 희극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백리단옥이었다. 그녀는 금제 때문에 무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자 음적을 퇴치하기 위해 사정없이 손톱을 사용했고, 그래도 잘 안되어 급기야는 머리로 상대의 면상을 들이받았던 것이다. 그래봐야 결과는 별 볼일이 없었지만, 어떻든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만은 가상하다 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 점은 대흉의 분노를 사게 되어 그녀가 앞으로 겪어야 할 몫은 몇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눈에서 광포한 빛을 뿜어내며 씨근거리는 그의 기세는 벌써부터 엄청난 불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상실한 백리단옥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단지 타는 듯한 열기에 전신을 내맡긴 채 이를 식혀줄 구원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 바닥에는 마른 짚이 깔려 그런대로 침구 역할을 했다. 백리단옥은 역시 알지 못했다. 등판의 여린 피부가 까슬까슬한 짚에 의해 자잘한 상처를 무수히 입고 있다는 것조차도. "흐으으흑......" 꽉 다물린 그녀의 이빨 사이로는 한층 더 달구어진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에 따라 적나라하게 노출된 그녀의 젖가슴이 심한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팽팽한 탄력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젖가슴이다. 그 위로 번들거리는 대머리가 육박해갔다. 대흉이 그녀를 덮쳐 유방을 덥썩 베어 물었던 것이다. "아흑!" 백리단옥이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발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부신 팔은 반사작용이라도 일으키듯 대흉의 목을 휘감았다. 잘록한 허리 아래로 풍만한 하체가 허공을 허위적거리며 극도의 갈망을 표출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크크... 옳지, 네 년이 이제야 이 사부(師父)를 알아 보고 달라 붙는구나. 염려마라, 내 너를 반쯤 죽여줄 테니까." 대흉, 혼세색중마는 그녀의 육봉을 손으로 거머쥐더니 자신의 우람한 하체를 밀어 붙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하악!" 백리단옥도 본능적으로 사태를 느끼고는 허벅지를 활짝 열었다. 그리하여 막 파과(破瓜)가 이루어지려 하는 찰나였다. "광굉(廣宏)!" "웃! 웬 놈이냐?" 느닷없이 들려온 차가운 음성에 혼세색중마는 최후의 동작에서 급급히 후퇴해야 했다. 광굉이란 그의 이름이다. 그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섰다. 광굉의 시선이 즉시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 한 인영이 언제 나타났는지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만면에 살기를 띄운 채 손바닥에 소도 하나를 올려놓고 있는 자삼의 청년이다. 그 모습이 확인되자 그렇지 않아도 보기 싫게 뒤집어진 광굉의 입술이 가관일 정도로 이지러졌다. "쓰헐! 어떤 고인이신가 했더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놈이 감히 어르신을......." 광굉은 욕설을 지껄이다가 제 풀에 입을 다물었다. 자삼청년, 즉 영호천문의 냉오한 눈빛을 통해 그는 상대가 스스로 말했던 고인이라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이었다. "너... 너는 누구냐?" "추물(醜物), 너는 이것을 아느냐?" 영호천문은 광굉을 향해 무심도를 들어 보였다. "그, 그건 무명도......!" "후후... 잘 아는군." 그는 짧게 말한 후, 백리단옥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욕화를 주체하지 못해 온몸을 비틀며 스스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그의 어투를 더욱 차갑게 했다. "내놓아라." "무... 무얼 말이냐?" "영춘방의 해약." "없, 없다." "목숨과 바꿀 셈이냐?" 광굉은 등에서 절로 진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다. 영춘방의 해약이란 본래부터 없다. 풀 수 있는 방도란 오직... 음양화합 뿐이다." 영호천문은 대노했다. "더러운 자! 가거라, 지옥으로." 슷--! 무심도가 그의 손에서 날아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헉!" 광굉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무명도를 보게 되자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 위력에 대해서는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라 공포감이 더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광굉도 엄연히 내로라 하는 절정의 고수다. 와중에서도 그의 거구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 가더니 자신의 무기인 천파도(天破刀)를 취했다. 위잉! 채 반식이나 전개했을까? 이때를 기해 그다지도 위협적이던 무심도가 그의 면전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공격 대상을 잃게 된 광굉이 아연하여 부르짖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 그의 말은 거기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크헉!" 광굉은 춤이라도 추듯 사지를 허위적대다가 종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무심도가 어느새 명치에 깊숙이 박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기 때문이었다. 혼세색중마는 마지막 숨만은 비교적 조용히 거두었다. 추잡함으로 일관된 인생인지라 도처에서 원성이 그치지 않던 그였다. 때문에 이런 마무리는 차라리 인상적이기까지 했다. 죽는 그 순간에 그는 내심으로 한 마디를 부르짖었을 뿐이다. '무심도, 그렇게 빠를 줄이야.......' "쯧! 난감하게 되었군." 영호천문은 혀를 찼다. 혼혈을 찔린 채 의식을 잃고 있는 백리단옥을 보자 대책이 서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은 이제 혈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혈관이 극도로 팽창되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저대로 두면 일각도 못되어 죽는다.' 영춘방은 주로 흑도의 패륜아들이 애용하는 일종의 최음제로서, 대흉의 말마따나 해약이 따로 없다면 음양교합으로써 체내의 욕화를 배출하여 해독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했다. 영호천문은 점차로 터져버릴 듯이 충혈되어 가는 백리단옥의 몸을 내려다 보며 때아닌 고뇌에 사로잡혔다. '취할 수는 없다. 일반의 여인이라도 그러할진대 전륜회주와의 입장 때문에 더더욱 곤란하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전륜대제의 딸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있을 수가 없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방치하여 백리단옥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을 시에 과연 그는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게 될런지......? 영호천문은 고심 끝에 결국 단안을 내렸다. '이 일은 어차피 나로서는 불가항력이다. 단옥, 미안하다만 네 운명을 탓해라.' 그는 침중하게 읊조린 후, 그녀로부터 돌아섰다. 이렇듯 분명한 그의 태도는 몹시도 비정해 보였다. 사실 때에 따라서 그는 비정객(非情客)을 자처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했다. 무슨 일이든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절대 우유부단하지 않은 사람이 그였던 것이다. - 누나를 꼭 찾아와야 해요, 꼭이요! 머릿 속을 맴도는 단정의 다짐이 고통스러워 영호천문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느덧 그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난데없이 괴성이 들려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때였다. "킬킬... 천문, 바보같은 놈! 굴러 들어온 떡도 차 버리느냐?" 그것은 매우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영호천문은 충격을 받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당신은......?" "혼자 떠돌아다니더니 밥통이 다 되었구나. 이 놈아, 옛날의 그 탐화 기질은 다 어디로 갔느냐? 꽃을 마다하다니." 영호천문의 얼굴에는 곧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 출곡(出谷)했소?" "지금 그게 문제냐? 어서 그녀에게 돌아가. 어서!" 영호천문은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씨익 웃었다. "반갑소, 나소(羅 )." 이윽고 동굴 천정에서 우습게 생긴 머리통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과연 그 자는 무영공공투(無影空空偸) 나소였다. "나소, 당신만 나온 거요? 아니면 모두 나왔소?" 영호천문은 오랫만에 만나고 보니 너무도 반가워 그에게로 한 발짝 선뜻 다가섰다. 그러자 나소가 눈알을 부라렸다. "어딜 가까이 다가오느냐? 네 놈이 관심 가질 일은 따로 있다지 않았느냐? 어서 그 계집부터 구해라." 영호천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소, 당신은 전륜대제와 원수지간이 아니오? 어째서 그의 딸을 구하라고 나를 채근하는 게요?" 나소는 침을 퉤 뱉았다. "멍청한 놈! 이래서 네 놈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백리성우는 백리성우고, 그의 딸은 그의 딸이다. 어때, 이만하면 좀 알아 듣겠느냐?" "그렇지만......." 영호천문이 뭐라 덧붙이려 하자 그는 짐짓 냉정하게 잘랐다. "더 지껄일 것 없다. 빨리 일이나 치루도록 해라." "나소, 당신은 정녕 괴상한 사람이구려." "킬킬... 너 지금 내가 무슨 인간미라도 발휘하는 걸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해하지 마라. 어쩌면 이번 일로 더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서 이러는 거니까." "그럼......?" 표정이 묘하게 변해 버린 영호천문에게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 놈아, 농담도 못하냐?" "끙! 아예 나를 가지고 노는구려." "킬킬... 그렇다고 낙담할 건 없다. 연륜의 차이가 어디로 가겠느냐? 참, 정작 할 말을 잊었군. 모두 다 출곡했다." "그게 정말이오?" "녀석, 좋아하긴. 이따 보자." 슷--! 나소의 머리통이 천정에서 사라졌다. 영호천문은 어느새 그의 말에 따라 발길을 되돌리고 있었다. "연륜의 차이라....... 믿을 만한 거겠지?" ② "하아아......." 여인이 여인으로서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은 불과 한 순간이면 족하다. 그렇게 만들어 줄 한 남자가 있을 경우에 말이다. 파과의 아픔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극도로 팽창되어 있는 욕화 때문에 거의 의식되지도 않았다. 이는 다름 아닌 백리단옥에게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녀는 굳게 닫혀 있던 여인지성(女人之城)의 문을 활짝 열었으며, 그로 인해 완전한 여인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등에 손톱을 세우며 온몸에 차오르는 벅찬 환희와 고통에 전율했다. 여인이 되기 위한 첫 고비를 그처럼 격렬하게 넘어갔던 것이다. 어떻든 백리단옥은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의 미래가 어찌 열릴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영호천문이라는 희대의 풍류남아에 의해 꺾였으니 보나마나 평탄하지는 않을 터이지만, 딱히 뭐라고 단정짓지는 못한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붉디 붉은 단장화가 그러하듯 사랑에 취해 피흘리기를 서슴치 않고 진한 향기를 피워낼지....... 정녕 훈훈하기 그지 없는 만남이었다. 대체 얼마만인가? 불회십반천(不廻十返天). 그들이 영원히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던 불회곡(不廻谷)을 나와 영호천문이 몸담고 있는 광명천지(光明天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허허헛! 천문, 자네는 그 동안 더욱 발전을 보았군." 천기신유(天機神儒) 단목군이었다. 영호천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흠모와 존경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셈입니다." 현재 단목군을 위시하여 무영공공투 나소, 귀의(鬼醫) 야율천, 해천일살(海天一煞) 동천목 등 네 명의 인물들이 영호천문을 둘러싼 채 반가움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이처럼 모여 앉아 있는 곳은 한 객점이었다. 귀의 야율천이 빠질세라 입을 열었다. "천문, 어디 진맥 좀 해 보자.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가 동공이 없는 눈을 껌벅이며 비쩍 마른 손을 내밀어 오자 영호천문은 이의없이 한 팔을 그에게 맡겼다. "네가 대충 기연(奇緣)을 만나 공력을 회복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만......." 진맥 중이던 야율천의 얼굴이 갑작스레 일변했다. "이럴 수가! 열폭반혈성(熱暴反血性)을 띄다니......." 그는 흰자위 뿐인 눈을 크게 치떴다. "속히 말해 보아라, 천문! 너 언제, 무슨 영수(靈獸)의 피라도 복용한 적이 있느냐?"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그렇소. 천목산에서 독각혈린괴망의 피를 마셨소." 야율천은 그제서야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랬었구나." 곁에서 동천목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어왔다. "야늙은이, 그게 뭔 소리냐? 열......?" 궁금하기로 치자면 중인들 모두가 다를 바 없었다. 야율천은 그 기색을 읽어 내고는 만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다들 실망하지 말게. 그것은......." 어렵사리 운을 뗀 그는 중인들로부터 고개를 돌린 후에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 "천지간에서 가장 강한 양성(陽性)을 지닌 영수의 피 속에 녹아있는 기운이네. 그 피를 복용하게 되면 내공이 급증하는 등의 무궁한 조화를 얻을 수가 있지." "그래, 그게 실망할 일이었나?" 키득거리며 참견을 하려던 공공무영투 나소는 곧 뻣뻣하게 굳어진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야율천이 참담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좋은 작용 뿐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럼 뭐냐? 야늙은이." 이번에는 동천목이 나서서 조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을 복용한 자는... 시한부 생명이 된다." "뭐, 뭐라고?" "그럴 수가......!" 중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경악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당사자인 영호천문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랬었소?" 그의 내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벌써 한 번 크게 운명의 좌절을 겪어 본 그는 죽음이든 무엇이든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다. 귀의 야율천이 탄식을 불어냈다. "천문, 너는 앞으로 원한다면 극양(極陽)의 무공을 극한까지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독각철린괴망의 피 덕분에 얻게 되는 최대 이점(利點)이지. 악마의 조롱인 셈이야. 만약 네가 그 괴수의 내단(內丹)을 복용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텐데......." 영호천문은 그를 비롯한 중인들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있는 것을 보며 오히려 씨익 웃었다. "내 생명의 시한은 어찌 되오?" 이 문제만은 그도 경시할 수 있는 바가 못되었다. 어떻게든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할 일을 다 마쳐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귀의 야율천이 다시금 영호천문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몹시도 흔들렸다. "길어야 일 년.......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중상을 입거나 필적할 만한 강적을 만난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열폭반혈성이 발작하여 너는... 전신이 터져 죽게 된다." 영호천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인들도 말은 하지 않았으되, 그들의 입에서는 제각기 울부짖음에 버금가는 신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우우우......." 영호천문은 그들의 얼굴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는 기색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소한 그 전에 계획했던 일들만은 다 끝내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가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 놓은데 반해 뜻하지 않게 천기신유 단목군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천문. 그래, 자네는 무엇을 끝내겠단 말인가?" 영호천문은 다소 아연함이 깃든 어조로 답했다. "그야 물론 복수이지요." 단목군이 그답지 않게 청수한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고작 그것이란 말인가?" "무슨 뜻입니까?" 영호천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고, 그를 바라보는 단목군은 특유의 혜광이 어린 눈에 근엄함을 담았다. "지금부터 잘 듣게나, 천문. 우리 늙은이들이 새삼스럽게 이 혼탁한 무림에 다시 나오게 된 것은 자네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있을 자네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말이네. 혹시 알고 있었는가? 무림이 자네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설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군." "사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저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입니다." "흐음, 그럴 만도 하지. 자네가 살아온 배경이나 인간관계를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소리다. 하지만 당금 무림은 전대미문의 혼란기로 치닫고 있네. 이러한 난세는 영웅(英雄)의 출현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네." 영호천문은 다소 황당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제가 그 영웅이란 말입니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렇다." "굳이 저 아니라도 뛰어난 인재는 많습니다." "허어, 이 사람! 인재도 인재 나름이네. 만일 효웅(梟雄)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 같은가?" "으음......!" 영호천문은 비로소 상대의 말이 심금에 닿아왔다. "주변을 한 번 둘러 보게. 인재들이란 대체로 너나 할 것 없이 야망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 있다. 야망을 갖는 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네만, 그들은 그 궁극을 평정(平定)에 두지 않고 오직 군림(君臨)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 그들이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이유도 거기에 있네." 단목군의 음성은 점점 더 열기를 띄어갔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자네의 복수는 지극히 타당하다. 그 대상들이 하나같이 세상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자들이므로. 이는 바꾸어 말하면 자네가 이미 천하를 평정하는 일에 발을 들여 놓고 있다는 뜻도 된다. 자네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세상 사람들 거개가 알고, 또 인정하고 있다." "단목선배......!" "더 듣게나. 현재로써 가장 큰 문제는 자네의 의식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사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보다 크게 세상을 보라는 얘기일세. 이것이 우리들 불회십반천의 여망이네." 영호천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다음 순간, 그의 뇌리에 엄청난 공명을 울리는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부디 눈을 뜨게, 천문." 개안(開眼)을 종용하는 음성이 커서가 아니다. 그 뜻이 그의 가슴을 저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영호천문. 그의 혼(魂)이 생전 처음으로 무섭게 뛰놀기 시작했다. 하늘이 자신을 향해 열린들 기분이 이러할까? 그는 이제껏 앞을 꽉 막고 있던 답답한 장막이 일시에 걷히며 정말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단목군은 현자(賢者)다. 영호천문의 심경 변화를 알아차린 그는 아까와는 달리 넉넉하고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무림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제삼의 시대를 요구하고 있네. 자네는 필히 새로운 무림사를 창출해내야 하네." 그가 내민 신무림(新武林)의 개천(開川)이라는 명제는 엄청난 파고를 이루어 놓았다. 덕분에 영호천문의 눈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한 신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좌중의 분위기마저도 더 없이 숙연해져 있었다. 이를 느끼며 영호천문은 새삼 무서운 투지(鬪志)를 끓어 올렸다. 그런데 왜일까? 그 순간 뇌리에 잊으려 애썼던 천하십상천(天下十相天) 중 한 명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사부(師父)시여! 용서 하십시오. 어쩌면 애초 당신이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는지도....... 이 제자가 너무 어리석어 그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소이다.' 회한(悔恨)의 물결이 한 차례 영호천문의 가슴을 세차게 휩쓸며 극도의 고통을 유발시켰다. 하지만 이제 그는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의 힘찬 깃발을 들어 올릴 수가 있었다. '사부, 지켜 보아 주십시오! 제자 영호천문이 당신의 유업(遺業)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 주체하기 힘든 격정 탓이었는지, 영호천문의 눈에서는 찰나적으로 반짝 하고 물기가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 자신 외에는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③ 천기신유 단목군. 그의 시선은 야율천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야노제, 한 가지 묻겠네. 노부는 열폭반혈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도가 필히 있으리라 보네만, 아닌가?" 그 말에 나소와 동천목의 얼굴이 대번에 긴장감을 드러냈다. 야율천이 보이지도 않는 눈을 희번뜩이며 말했다. "천하만물에는 항상 상대성(相對性)이 존재하기 마련이오.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듯. 이 점은 의술(醫術)은 물론 무림의 도리나 세상의 이치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요." 나소가 그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야늙은이! 지금 그런 개똥철학이나 논하고 있을 때냐?" "급하긴, 다 연관이 있는 얘기니까 얌전히 들어 두어라." 야율천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험! 천문의 체내에는 양화극기가 채워져 있어 극음천유지기(極陰天柔之氣)로 중화시키야 한다는 소리를 하려고 했었지.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완벽한 음양조화지체가 되어 무공까지도 가히 등천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럼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야율천은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다면 내가 왜 코를 빠뜨리고 있었겠느냐? 천문을 그렇게 만들어 주려면 최소한 십만 년 묵은 천학(天鶴), 즉 학정홍(鶴精紅)이나 바닷가에서 구만 년 동안 정기를 섭취한 한철극음화원정(寒鐵極陰華元精), 혹은 전설의 구엽자령선인초(九葉紫靈仙人草) 중 한 가지가 필요하다." 나소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침을 퉤 뱉았다. "제기랄! 누구 약올리는 거냐? 그런 것을 대체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이냐? 한심하게스리 모두 전설에나 나오는 것들을 줄줄이 줏어 꿰고 자빠졌으니......."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야율천은 영호천문의 병을 고쳐내지 못하는 것이 중죄(重罪)이기라도 한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단목군이 다시 말했다. "야노제, 노부가 듣기로 북해(北海)에는 수십만 년의 빙한지기(氷寒之氣)가 모여 형성된 만빙동(萬氷洞)이 있다던데, 혹시 그곳에서 빙한지기의 정화가 뭉쳐져 피어낸다는 만년빙천연화(萬年氷天蓮花)라면 어떤가?" 야율천은 손뼉을 딱 쳤다. "아! 그걸 왜 몰랐지? 그것이면 충분히 가능하오." 해천일살 동천목이 조심스럽게 끼어 들었다. "그러나 만빙동의 위치는 아는 자가 아무도 없소. 찾았다 해도 만빙동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오." "그건 왜지?" 야율천이 의아한 듯 물었다. 평생에 걸쳐 의술에만 전념해 온 그는 아무래도 대살객으로서 천하를 종횡무진하던 동천목에 비한다면 식견이 딸릴 수밖에 없었다. "만빙동은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반인반수(半人半獸), 즉 설인(雪人)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전해지오." "흐으음......." 중인들은 모두 탄식을 발했으며, 그 바람에 좌중의 분위기는 다시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 나가듯 푹 가라앉았다. 이때, 영호천문이 그들을 향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핫......!" 그의 낭랑한 웃음소리는 중인들을 모조리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어 그는 웃음을 그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들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후의 운명도 하늘에 달렸거니와,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수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정녕 제 마음을 크게 울리는 바는 죽음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따뜻한 후의(厚誼) 올씨다." 단목군이 곁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군, 천문. 필히 자네에게 천운이 닿기를 기원하겠네." 영호천문은 빙긋 웃어 보인 후, 화제를 돌렸다. "참, 단정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말에 해천일살 동천목이 히죽 웃었다. "그 칠흉(七兇)인가 뭔가 하는 세 늙은 뼈다귀들은 지금쯤 땅 속에서 거름이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모두 큰 나무 밑에 파묻어 주었거든. 좋은 일도 한 번쯤 해 보라고." 영호천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다운 처사이구려." "이 놈아, 기왕에 칭찬을 하려거든 솜씨도 빼놓지 마라. 비록 너에게 죄다 뺏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녹이 슬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세 놈을 보자마자 그냥......!" "아! 그렇구려. 하마터면 당신이 얼마나 기개가 높고 쓸모있는 사람인지를 잊을 뻔 했소이다." "하하하하핫......!" "허허허......." 중인들은 저마다 함박 웃음으로 분위기를 일신시키며 그 간의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그들은 밤이 지새는 것도 잊은 듯 화기애애한 가운데 대화를 이어갔다. 영호천문. 그는 중인들에게 그간 자신이 행해 왔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그리고 동천목에게는 녹지주로부터 들은 얘기, 즉 본하미(本何美)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실로 놀랍고도 희한한 것이 해천일살 동천목의 반응이었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살객이, 그것도 다 늙어버린 얼굴을 잔뜩 붉혀 놓으니 보는 사람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였다. 스무 살도 안된 청년처럼 홍안(紅顔)이 되어 있는 그를 향해 공공무영투 나소가 놀려댔다. "헤헷! 못 생긴 늙은이가 장가 가게 생겼군? 그 꼴에 새 신랑이라고 차리고 나서면 아마 삼척동자도 웃을 걸? 제 마누라나 좋다고 입이 헤벌어지겠지." 좌중은 와르르 하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동천목과 본하미의 사랑이 과거지사 따위는 감히 논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깊다는 것을. 그들은 웃는 가운데서도 콧등이 시큰해지도록 감동을 느끼며 장장 오십여 년간의 한을 밀어내고 이루어지게 될 두 남녀의 화합(和合)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영호천문은 단목군으로부터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불회곡의 기인들에 관해서였다. 태사감 위성공을 위시하여 천병환사(千兵幻死) 혁련광과 주화영(朱華英)이 그를 위해 모종의 일을 계획하고 있다 했는데, 특히 반가운 것은 철사후(鐵獅候), 낙성추(落星秋), 연봉봉(燕鳳鳳), 삼 인이 대공(大功)을 마치고 출관했다는 사실이었다. 영호천문으로서는 감읍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향후 행로에 있어 더 없는 조력자(助力者)들이다. 무서운 병기로서 무림에 등장하게 될 테니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나소가 빈정거렸다. "엉큼한 놈, 네 놈은 왜 화영의 소식을 따로 묻지 않는 거냐? 속으로는 그 아이 일이 가장 궁금할텐데."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었다. "거 듣고 보니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구려." "이 놈아, 화영을 옛날처럼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그 계집애와는 이제 나도 장난을 칠 수가 없어졌어. 어엿한 여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살벌한 절정고수가 되어 있거든." "무섭구려. 나도 자칫했다간 뼈도 못추리는 거 아니오?" 나소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히힛 하고 웃었다. "그건 걱정 안해도 된다. 그 계집애는 네가 보고 싶어 지금쯤은 반 미쳐 있을 테니까." "후후후......." 영호천문의 뇌리에는 천진난만했던 소녀 주화영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그토록 그를 따랐으며 그가 가장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따스하게 보살펴 주던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의미는 달리 또 있다. 즉 왕녀(王女)이면서 그 사실도 모른 채 외롭게 자랐던 만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벌써 그의 고독을 이해하고 수용했던 소녀다.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화영, 나도 네가 정말 보고 싶구나.' 단목군. 이 노기인과의 대화란 비단 입지(立志)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다. 영호천문은 그와 더불어 앞날의 대계(大計)에 관해 오랜 시간에 걸쳐 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보다 획기적인 방안을 건지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제 21장 전륜회주(轉輪會主)의 양면성(兩面性) ① 백리단옥. 그녀는 영호천문과 그 일이 있고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본시 말수가 적기도 했으나 지금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웬만해서는 잘 웃지도 않았다. 소년 단정은 이런 누이의 변화를 도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혹을 느껴도 내놓고 묻지는 못했다. 누이의 얼굴이 워낙 굳어 있으니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영호천문은 그들 남매와 함께 북행(北行) 계속 했고, 마침내 그들은 전륜회가 있는 복우산 기슭에 당도했다. 만추의 밤은 스산하다. 복우산 기슭의 객점도 짙은 어둠에 잠긴 채 고요해져 있는 시각, 영호천문은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수한 군성(群星)의 흐름은 그를 잠시 명상에 잠기게 했다. 십사 세 때다. 그는 가슴에 원대한 야망을 품고 성난 이리와도 같은 기세로 무림에 첫 출도(出道)를 했다. '후후... 그때만 해도 한 점의 회의도 없었거늘.......' 사실이었다. 그는 오로지 제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천하가 좁다할 정도로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었다. 그 점을 두고 영호천문은 재삼 생각을 정돈해야 했다. 왜냐하면 현재의 그는 그토록 얻고자 열망했던 천하를 다른 의미로 얻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아니라 세인들을 위해 신기원을 이룩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단목군을 비롯한 불회십반천 인물들과의 대화를 되새겨 보며 더욱 심중에 깊숙이 담아 두었다. '고마운 사람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회의와 허무의 그늘에 파묻힌 채 심적 방황만을 거듭하고 있었겠지.' 영호천문이 이렇듯 무수한 상념을 통해 자성(自省)에 이르고 있을 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 안에 누군가 들어선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를 알았다. "낭자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구려." 백리단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영호천문의 옆으로 걸어 오더니 그의 시선을 쫓아 멍하니 야공을 응시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당신은... 저를 비웃고 있겠지요?" 첫 마디가 이러하니 영호천문으로서는 정말로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선을 밤하늘에 둔 채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말이오?" "흐음, 무엇 때문이냐고요? 몰라서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죠. 당신은 지금도 그렇지만 저를 형편없는 여인으로 보고 계신 거예요. 반면에 저는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무조건 감지덕지해야 되겠구요. 심정이야 어떻든......." 그녀의 음성에는 극도의 자조가 묻어 있었다. 영호천문은 내심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여인은 며칠 사이에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그는 자신이 좀더 솔직해질 필요를 느꼈다. "낭자는 결코 형편 없는 여인이 아니오. 그리고 미안하오만 나는 낭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놓고 굳이 평가해 본 적도 없소." "호호... 겨우 그 뿐인가요?" "흐음?" "하긴 그렇게 무심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편하긴 하겠군요.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을 테니까." 영호천문의 짙은 검미가 위로 불쑥 치켜 올라갔다. "낭자, 그건 좀 심한 비약이 아니오?" "호호홋......! 그랬으면 저도 좋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겐 철벽(鐵壁)이에요. 왜 하필 당신같은 냉혈한이......." 백리단옥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왜 그때 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죠? 제가 언제 당신더러 구해 달라고 했는데요? 그럼 감사할 줄 알았나요?"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그녀를 바라보자 바짝 곤두섰던 영호천문의 눈썹이 슬며시 도로 내려 앉았다. "낭자, 그대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단옥, 대체 내게 무얼 원하오?" 그의 말투가 부드럽게 바뀌자 백리단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영호천문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전의 그대가 아니듯 나도 마찬가지요. 사람은 누구나 계기가 주어지면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죠?" 백리단옥의 창백한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나도 앞으로는 무심한, 냉혈한, 이런 것 등에서 일탈할 작정이오. 그러니 더 이상은 원망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오." "그게 진심... 인가요?" "물론이오." 영호천문은 힘주어 대답한 후, 길게 탄식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인간이 되든 역시 그대와의 인연은 지켜갈 수가 없을 것 같소. 이 점은 내 의사와는 별개이기도 하오." "왜......?" 불안스레 흔들리는 백리단옥의 눈을 보며 그는 잘라 말했다. "그대가 전륜대제의 딸이기 때문에." "아!" 그녀는 쓰러질 듯 휘청 했다. 그 바람에 영호천문에게 잡혀 있던 그녀의 어깨도 자연히 그의 수중을 벗어나고 말았다. 백리단옥은 본능처럼 벽을 의지하여 허물어지려는 신형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온 몸을 세차게 떨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요." 영호천문이 흠칫 놀라 물었다. "내가 누구라는 게요?" "천하를 다 뒤져도... 회색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눈을 가진 사람은 불망객(不忘客), 당신 외엔 없을 거예요." "으음......." 영호천문의 입에서는 다시금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반면에 그를 바라보는 백리단옥의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일어났다. "무심도 냉천......! 정녕 그럴 듯한 변신이었지만 무엇인가 뜻한 바가 없었다면 진면목을 감추지 않았겠죠. 게다가 단정과 저를 사자림으로부터 빼내온 것도 분명 까닭이 따로 있었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영호천문은 가볍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음, 부인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그 일련의 행위들이 모두 제 아버님과 적대관계를 이룰 소재라도 된단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소."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니지, 가능성은 또 뭐죠?" 백리단옥의 질문이 의외로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자 그는 다소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뭔가 감춘 채 되려 탐색하는 듯한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륜대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까." "으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영호천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대체 그대가 무얼 안다는 거요?" 백리단옥은 대답 대신 눈부신 이를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그건 후에 차차 아시게 될 거예요." "점점 미궁을 헤매는 기분이구려." "어쨌든 오늘 대화는 제게 매우 유익했어요. 이젠, 당신께 정말로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 마음 속에 있는 짐들이 다 털려 나가지는 않았지만요." "마음의 짐......?" 백리단옥의 표정이 갑자기 몹시도 처량해졌다. "현재로선 그게 꼭 당신과 연관 지어진 것만은 아니에요. 훗날에는 다시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 끝을 흐리는 그녀의 음성에서는 짙은 우울함이 배어 나왔다. 영호천문이 그녀를 향해 씁쓸하게 말했다. "부디 나 영호천문이 그대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 없기를......." "네? 그럼 당신이......?" 백리단옥은 크게 놀라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받자 영호천문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이 시각부터 나는 불망객도 그 누구도 아니다. 오직 영호천문, 그 자체일 뿐.' "놀랍군요. 당신이 그 유명한 천중일정이었다니 말이에요." 백리단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죽었소." "네?"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두 번에 걸쳐 새로 태어나 있는 영호천문이오." "으음!" 백리단옥은 그의 말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신음성을 흘렸다.영호천문이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더니 말했다. "단옥, 가서 자도록 하시오. 내일은 아침 일찍 전륜회로 들어가 보아야 하니까 말이오." 백리단옥은 일 년여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불쑥 물었다. "단정과 저는 여전히 인질로서 가게 되는 것인가요?"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질이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을." "그럼 아니었나요?" "후후... 단정은 매우 귀여운 소년이오. 내 처음 볼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가 깨기 전에 돌아가도록 하시오." "알겠어요." 백리단옥은 뭔가 아쉬운 듯 그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영호천문은 다시 야공을 응시했다. 명멸하는 수많은 별들과 벗하며 그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전륜회(轉輪會). 그곳은 살아 있는 정도(正道)의 혼(魂)이자 등불이었다.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무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무림명문인 사대세가(四大世家)를 위시하여 정도의 지주인 구파일방(九派一幇), 그 밖의 숱한 정도문파들이 전륜첩(轉輪帖)을 받고 제각기 그들의 대표자와 정예고수들을 선발하여 복우산 전륜회로 보냈다. 이른바 와호잠룡(臥虎潛龍). 전륜회는 봉기하지 않았을 뿐, 어느덧 정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복우산 일대는 자연스럽게 중원 최고이며 유일무이한 정도지(正道地)로 화했다. 실제로도 전륜회는 정도무림의 총체로서 일로 꺼져가는 대의(大義)의 횃불을 눈부시게 밝혀 놓고자 하는 원대한 이상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영호천문은 전륜회에 들어와 있었다. 백리단옥, 단정은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늦게야 본 후사들로서 그들 남매가 돌아오자 전륜회의 전 고수들이 크게 기뻐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일 년 전 도망치듯 몰래 전륜회를 빠져 나간 후, 소식도 없다가 무사히 귀환했으니 말이다. 영호천문은 그들 남매와는 별개로 전륜대제에게 정식으로 명첩(名帖)을 보냈다. 그 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알 요청. - 사자림의 봉공, 무심도(無心刀) 냉천(冷天).> 명첩은 밀봉이 된 채 전달되었다. 때문에 전륜회의 인물들은 그를 단지 단정남매를 호송해 온 무사 정도로 보았다. 영호천문은 광대한 전륜회의 내전(內殿), 영빈관에 안내되어 백리성우의 답신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백리단옥과 단정은 그곳에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각자 예전에 몸담고 있던 자신들의 거처로 가 버렸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백리성우, 그가 진정한 영웅이라면 사자림 봉공과의 면담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명의 청년 무사가 나타나더니 포권하며 공손히 말했다. "소협(少俠), 회주(會主)께서 부르십니다." 영호천문은 담담히 응수했다. "안내하시오." 그러나 뜻밖에도 무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회주께서는 소협께 혼자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그곳이 어디요?" 무사는 손가락으로 가리켜 가며 설명해 주었다. "저쪽 후원(後院)을 가로지르면 하나의 문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문을 지나 쭉 가시면 됩니다." 영호천문은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로 한 방파의 영수나 지존을 만나는데는 복잡한 절차가 따르기 마련이다. 더구나 전륜대제 쯤이면 의당 그 이상이어야 하거늘, 쯧! 예상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는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알겠소." ② 후원을 가로지르니 하나의 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영호천문은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사실상 전륜회의 규모는 대단했다. 정도연맹답게 전체적으로 엄청난 크기와 넓이의 건축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되, 삼각(三閣), 오원(五院), 팔당(八堂), 십이루(十二樓) 삼십육단(三十六壇)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상주 인원만 해도 오천이 넘었으며, 현재는 정도정예를 포함하여 삼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전륜대제가 있다는 곳만은 예외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영호천문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도시 아무 것도 없었다. 화려한 건물을 연상했던 그의 눈 앞에는 그저 텅 빈 초원(草原)의 전경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갈대숲과 초목들이 보이는 바의 전부였다. '이런 곳에 살고 있단 말인가? 전륜대제가......?' 그는 거의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초원 한가운데에 잘 가꾸어진 밭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밭에는 소채류를 위시하여 옥수수 등의 곡류가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마치 부지런하고 솜씨 좋은 농부가 성의를 다 쏟아부어 놓은 듯. "기가 막히는군!" 영호천문은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 밭을 전륜대제가 일구었단 말인가?' 그로부터 다시 일 리(一里)쯤을 더 가자 또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을 발했다. 때는 정오 무렵. 만추의 햇살이 따갑게 황금빛 들녘을 비추고 있다. 그 햇살 아래 평범해 보이는 한 명의 마의(魔衣)노인이 옥수수를 따 광주리에 담고 있었다. 차림새도 그렇거니와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이다. 옥수수는 가지런한 치열을 내보이듯 알알이 차 있었다. "허허... 올해도 잘 익었군." 노인의 소박한 음성이 사위에 나직이 번졌다. 그 음성은 영락없이 작은 수확에 크게 만족하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의 뒤로는 영호천문이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전륜대제 백리성우!' 두 사람은 과거에 일면식이 있었다. 때문에 영호천문은 노인을 보자마자 그가 백리성우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과거에 해당되는 그 당시로 가 보면....... 영호천문의 나이 십오 세. 그는 쟁패(爭覇)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만이 그가 세상에 나서 존재하는 이유였으므로. 따라서 영호천문은 이때에도 하남(河南)의 무가(武家)를 대표하는 철적전무림(鐵笛電武林) 진충산(陣忠山)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화우둔(化雨屯)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근처에 외유를 나왔던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그 사실을 알고는 비무에 참관을 하게 되었다. 그 일전은 당연히 영호천문의 승리였다. 그는 단 이초만에 신마구룡편으로 진충산의 한 팔을 끊어 놓았던 것이다. 이에 백리성우는 승리를 축하한다며 자청하여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었고, 한창 호기에 차 있던 영호천문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선뜻 호의에 응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하지만 술이 삼배가 돌고 나자 영호천문은 상대로부터 뜻밖에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 자네는 한 마리 야수(野手)일세. 허기를 메우기 위해 늘상 전전긍긍해야 하는....... 그 발톱만은 좀 다듬는 것이 어떨까? 언제고 자신의 발톱에 스스로 다칠지도 모르니 말이야. 영호천문은 그 말을 애써 가볍게 흘려 버렸다. 귀에 거슬린다 해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수긍하자니 우선은 자존심이 너무도 상해 차라리 그 편이 나으리라 여겼던 것이었다. 이후로 점차 세상을 깨달아가며 그때의 그 말이 가슴에 닿아올 즈음에야 비로소 영호천문은 예의 청수한 중년인이 당금 정도무림의 기둥인 전륜대제 백리성우라는 사실을 알았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토록 단아하면서도 유현한 기도를 보이던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옥수수나 거두고 있다니.......' 확실히 백리성우는 그 당시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수척해 보이는 어깨, 몸을 기울일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목 밑의 새하얀 터럭 등이 유난히도 영호천문의 시선을 끌었다. "헛허... 손님이 오셨는가?"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그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누가 보아도 무공과는 거리가 먼 농사꾼의 투박한 몸놀림이다. 영호천문은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공수했다. "사자림에서 나왔소이다, 대제." 백리성우는 빙그레 웃었다. "대제라니, 노부에겐 가당치도 않은 호칭이네. 냉(冷)소협이라 했던가? 자, 우리 안으로 들어 가세나." 그는 옥수수가 담긴 광주리를 내밀어 보였다. "마침 자네에게 대접할 것이 있어 다행이군. 올들어 첫 수확인 셈이야. 사실 열매를 맺으면 그저 보는 행위만으로도 즐겁네만, 내 조금 따 보았지." 외양이 그래 보이듯 풋풋하기는 하나 그의 말투만은 역시 농군의 것이 아니었다. 뭐랄까? 한 마디를 해도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한 특유의 화법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뒤늦게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전륜대제 백리성우라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변한 것은 겉모습일 뿐,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벌써부터 기이하게 파동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백리성우의 뒤를 따랐다. 초옥(草屋). 불과 몇 칸 되지 않는 아담한 규모다. 그곳이 전륜회주의 거처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이상 영호천문에게 조금치의 충격도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곧장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자 백리성우가 밖을 향해 말했다. "옥아(玉兒)야, 손님이 오셨다. 차를 좀 내오겠느냐?" 여인의 청아한 음성이 답했다. "네, 아버님." 영호천문이 익히 아는 음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자그마한 쟁반에 얌전히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온 여인인즉 백리단옥이었다. 그녀는 영호천문과 눈길이 마주치자 살짝 얼굴을 붉혔으나 아무 말없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물러갔다. "들게나. 내 그렇잖아도 못된 망아지 같은 아이들을 잘 돌보아주어 자네에게 따로 감사하려던 참이었네." 영호천문은 찻잔을 들어 맛도 모른 채 훌쩍 마셨다. 머리 속이 복잡하여 그런 정서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말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부터......?' 원래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말문이 막혀 잘 나오지 않게 마련이다. 지금 영호천문의 처지가 그러했다. "대제,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는......." 겨우 서두를 잡았으나 그의 말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허허... 이 옥수수 좀 보게나." 라며 백리성우가 엉뚱한 소리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황당함을 꾹 눌러 감추고 있는 영호천문에게 그는 다시 말했다. "알의 굵기가 아주 고르지 않나? 빈 틈이라곤 하나도 없이 실팍하게 잘 자라 주었지." "그렇군요." 꽤나 무뚝뚝한 영호천문의 대답이었다. 분명 이를 못느끼지는 않았으련만 백리성우는 계속 말을 멈추지 않았다. "허허... 무릇 인생이란 것도 그와 같다네. 정성을 들여 가꾸면 그 결실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라네." 영호천문도 더는 참지 못했다. "대제! 나는 당신과 인생사나 논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사자림의 봉공으로서 온 사람이외다." "허허... 인생사나, 천하만사나 다를 바가 무에 있겠나? 성(誠)으로 대하면 모두 안녕할 것이야." 영호천문은 차갑게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은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소. 곡식을 가꾸는 일에는 성을 다했을지 몰라도 그 외에는 계(計)를 앞세웠으니 말이오." 백리성우는 자못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소협은 무엇 때문에 진면목을 감추고 있나? 허허... 노부가 보기에는 그도 역시 계의 일환이라 여겨지는군." "으음! 역시 전륜대제다운 안목이시오." 영호천문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옥수수를 빗대어 내게 충고를 하시었소?" "부인하지 않겠네." 백리성우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얘기할까? 노부는 자네를 잘 알고 있네. 우리는 이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 지금으로부터 칠, 팔 년 전쯤일 게야. 장소는 화우둔, 노부는 그곳에서 한 마리의 야수를 보았네." 쿵! 하는 소리를 영호천문은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그것은 강한 충격으로 인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버리는, 이르자면 관념이 그에게 가져다준 음향이었다. '정녕 놀랍구나! 그때의 일을 이처럼 또렷하게 기억해 내다니. 더구나 지금의 나를 보고서 어찌 그 일을......!' "내 한 가지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네." 백리성우의 안면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당시 노부는 그 야수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었다네. 마치 나 자신의 지난 시절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영호천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당신은... 진정 대단한 인물이외다, 대제." "허허... 그렇게 면전에서 금칠을 하면 못쓰이. 이 늙은이는 민망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군." 이쯤 되면 누구라도 더 버틸 여지가 없으리라. 영호천문은 입술을 질겅 씹더니 손을 들어 얼굴을 스윽 문질렀다. "통하지도 않는 변용은 관두겠소이다. 후후후......."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자 그를 바라보던 백리성우의 눈에 찰나적으로 번뜩하고 이채가 스쳤다. "모습이 많이 변했군, 천중일정 영호천문. 하긴 불사조(不死鳥)같이 일어섰는데, 그만한 사연쯤은 있을 법도 하겠지." 그 말을 듣자 영호천문은 더욱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상대는 그야말로 대기(大器)이다. 그 자는 세상사에 너무도 달관해 있어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을 아주 쉽게 여과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호천문이 그에게 말했다. "대제, 진심으로 말하거니와 당신이 정인(正人)이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을 것 같소. 능히 무림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동량지재(棟樑之材)가 어찌......." 백리성우는 빙긋 웃었다. "음, 자네는 지금 청백서(淸白書)의 일을 말하고 있군." "그렇소이다." 영호천문의 눈이 불을 뿜었다. "그것은 실로 인간으로서는 하지 못할 비열한 행위였소. 타인의 약점을 거머쥐고 그들을 협박, 조종하다니......." 백리성우는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자네는 훌륭한 청년이네." "갑자기 또 무슨 말을......?" "동량지재란 나같은 늙은이가 아니라 자네처럼 젊고 의기있는 사람이라는 말일세. 구인(舊人)의 시대는 가 버렸네. 무림이 원하는 건 보다 참신한 인재이지." 전륜대제 백리성우.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끝내 그것에 대한 말은 변명이든, 합리화이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분명한 점은 그가 내놓은 말이 놀랍게도 신무림의 창조를 역설하던 단목군의 말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었다. 듣고 있던 영호천문의 안색이 굳어진 이유도 이때문이었다. 운명의 끈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두 방향에서 서로 굵직하게 연결을 지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③ 영호천문은 한 정사(亭舍)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곳은 전륜회 내에서도 귀빈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거처로서, 전륜대제의 입김이 작용하여 그리 된 것 같았다.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건 전륜회주인 백리성우의 권위는 전륜회 내에서 변함없이 절대적이었다. 크게 역설해서는 아니다. 단지 자연스럽게 그런 치세(治世)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 영호천문과 백리성우의 공식적인 회견(會見)이 재개된 것은 첫번째 이후로 며칠간의 유예를 둔 다음의 일이었다. 한 장한에게 그의 부름을 전달받고 영호천문은 다시금 채마밭에 둘러 싸여 있는 초옥을 찾아갔다. "노부는 자네와 매우 유사한 자를 알고 있네." 백리성우의 말에 영호천문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가 누구요?" "허허... 과거의 자네 말이네. 야수의 기질 때문에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피냄새가 물씬 풍기곤 하지." 영호천문은 냉소했다. "후후... 그렇다면 그는 지독히 불행한 인간이오. 아직까지도 부질없는 야망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위인일 테니까." "흐음,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당사자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소이다." 영호천문이 다소 기이한 어투로 말했다. 백리성우는 허연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무엇이지?" "대제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꺼내신 것이오?" "허허허허......." 백리성우는 크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의 화법이 자네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군?" "솔직히 그렇소이다." "허허허... 그렇다면 미안하군. 습관이 되어놔서." "으음......!" "이제부턴 노부의 얘기를 좀 하고자 하는데, 들어 주겠나?" 영호천문은 씨익 웃었다. "말씀하시오. 그것이야말로 소생이 원하던 바외다." "다행이군. 관심을 가져 주어서." 백리성우의 긴 회고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에도 말했네만 노부 역시도 한때는 자네처럼 야망을 종용당한 채 그 자체를 무상의 가치로 여기고 살았었네." 그의 노안에는 쓰디 쓴 웃음이 번져 있었다. "노부는 실상 오백여 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백리무가(白里武家)의 후예이네. 백리무가에는 대를 이어져 내려온 염원이 있었는데, 이는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가 되는 것이었네. 달리 말하면 가주는 곧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했지." 영호천문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거기까지만 들어도 벌써 백리성우가 왜 자신더러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현 무림사(武林事) 최고의 비밀, 즉 백리성우가 어떻게 전륜회를 일으키고 정도제일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막이 그 신비의 껍질을 벗고 있었다. "백리가의 후예들은 대대로 천하를 손에 넣고자 분투했었네만, 하나같이 거기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했었지. 그저 무림의 한 세가로서 만족해야 했던 것이네. 그러다 내 아버님 대에 이르러서야 그 꿈은 달성되었네." "으음......!" "그 일은 정상적인 방도를 거친 것이 아니었네. 그 전에 백리가는 백여 년간에 걸쳐 끈질긴 탐사 끝에 중원의 명망있는 대협기인들의 감추어진 사생활과 비리를 들추어 내는데 성공했지. 그들의 명예를 담보로 하여 얻어낸 승리였네." 말을 하던 백리성우의 안면근육이 기이한 떨림을 보였다. "내 아버님은 실로 대단한 분이시네. 그 분은 이른바 청백서로 협의명숙들을 협박하여 종내에는 뜻하신 바대로 중원무림에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셨네. 뿐만 아니라 내게 그 기반을 이양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치밀하셨었지." 그의 음성에는 약간의 자조마저 어려 있었다. "그 분은 나를 정도의 지주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의 공동제자로 만들어 놓으셨네. 거의 임의로 자기 자식을 정도무림의 공동 후계자로 앉혀 놓으신 것일세." "어떻게 그렇게까지......!" "결과적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정도의 그 어떤 문파, 어떤 기인의 무학도 자유롭게 익힐 수 있는 조건을 누리게 되었네. 아버님 덕에 무림사 초유의 인물이 되었던 셈이야." 영호천문은 듣다 못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형평성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일이구려. 단 일 인에게 정도의 수많은 무공을 마음대로 섭렵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다니, 우직하게 한 문파에 속한 채 주야로 열심히 무예를 닦아온 젊은 인재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그래서 그 일은 당시에도 극비리에 행해졌었네." "철저했구려! 무서우리만치......." "허허허... 어쨌거나 그로 인해 소림의 장경각(藏經閣)도, 무당의 천서각(天書閣)도 내게는 모두 개인 연공실이나 다름 없었네. 이면으로는 아버님에게 약점을 잡힌 명숙들이 암중으로 계속 나를 비호해 주었지. 무림의 혈겁을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영호천문은 만면에 은은한 분노를 드리웠다. "소생은 진정 몰랐소이다. 오늘의 대전륜회가 그런 오욕(汚辱)의 역사 위에 세워진 단체인 줄은......." 그의 야유에 백리성우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맞는 말이네. 전륜회는 야심의 부산물이야." 영호천문의 눈이 번쩍 섬광을 발했다. "내게 그 일을 다 털어놓는 이유는?" 백리성우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색을 지으며 말했다. "내 자네에게 아까 말했었지. 과거의 자네와 유사한 인물이 있다고 말이네. 그 자는 지금 마왕이 되어 있네." 그 말은 영호천문의 조소를 면치 못했다. "후훗! 그래서 그 자가 당신의 일에 방해가 된다는 말이겠구려. 혹 당신은 나를 이용해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아니었소?" 백리성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네. 대맥(大脈)은 같지만 방법 상의 차이가 있다면 맞겠군. 소협은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가?" "모르오." "그는 자네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친구일세." "친구......?" 영호천문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리성우는 종전보다 더욱 심각한 안색이 되어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네. 마야(魔爺), 천마진혼등(天魔鎭魂燈), 혹은 대금마성(大禁魔城)의 성주라고 말일세." "용천후(龍天候)!" 영호천문의 입에서 부르짖음에 가까운 음성이 튀어 나왔다. 백리성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말했다. "노부가 더 말하지 않아도 그에 대해서라면 자네가 잘 알 것이네. 실로 굉장한 인물이지." 영호천문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심장의 박동이 그 어느 때보다 도 격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노부가 알기로도 일대 효웅(梟雄)이자 가장 완벽하다고 볼 수 있는 마의 제왕이네." "으음......!" "대금마성은 애초 마두(魔頭)들을 금제시켜 놓은 곳으로 알려 졌었지만 지금은 서서히 그 탈을 자진하여 벗어가고 있네. 그의 목적 달성에 기반이 될 집마부(集魔府)라는 것은 어느새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네." 백리성우의 노안에 어두운 그늘이 덮혔다. "그러나 그는 워낙 용의주도하여 아직껏 허점을 드러내 본 적이 없네. 확고한 승산이 서 있기 전에는 어떤 일에도 덤비지 않는 무서운 침착성을 지니고 있지. 의도적으로 그 스스로가 흘려 내보내는 것 외에는 지금까지 그에 대한 어떤 사항도 외부로 노출된 바가 없었네." "그럴 것이오. 그라면 충분히......." 영호천문은 신음처럼 읊조렸다. 마야 용천후. 그는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영호천문의 호적수였다. 십상천(十相天)에 의해 키워진 인물들 중에서도 어릴 적부터 가장 두드러졌던 두 명이 영호천문과 용천후였다. 두 사람 사이에 우의(友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서로 적(敵)이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싸움에서 영호천문이 처참하게 패했다. 낙일애(落日崖)에서 추락을 경험하던 그 순간에 영호천문은 이 점을 충분히 시인했었다. - 용천후, 너의 승리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터져 오르던 그 부르짖음을 끝으로 그는 정말로 죽었으므로. 영호천문의 상념을 비집고 백리성우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는 현재 무림정복의 계획을 대부분 완성(完成)시켜 놓은 단계이네. 그의 힘은 절대적이며 초극에 이르고 있지."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니 남은 것은 혈륜(血輪)에 박차를 가하는 정도일 것이네. 이는 지금까지 줄곧 노부가 그의 영향력에 대해 조사해 온 결과이네."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에 빠져 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진즉부터 흑도의 거물인 사자천효 육청풍을 포섭해 놓았다는 점이네." "으음!" 영호천문은 크게 놀라는 한편, 육청풍이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남겼던 한 마디를 뇌리에 떠올렸다. - 마(魔)....... 끝내 이어지지 못해 그를 안타깝게 했던 그 말이 지금에 와서야 연결고리를 찾게 된 것이었다. '으음, 그것은 마야였겠지.' 그는 다시 백리성우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뿐만이 아니네. 자네가 죽은 후로 용천후를 제외한 팔정(九鼎)이 심한 반목을 보였는데, 그는 거기에 개입하지 않았지. 당시 상황으로 보아선 그가 나서면 충분히 그들이 정리되었을텐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네. 아마도 그는 팔정이 무림에 혼란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던 것 같네. 그들 중에서 한 명을 자신의 그림자로 만들어 버리긴 했지만." 영호천문이 감정을 억누르며 무겁게 물었다. "그림자란 누구요?" "무혼사도(無魂邪刀) 냉무혼이네." "냉무혼......!" 낮게 읊조리는 그 음성에는 어쩔 수 없이 떨림이 깃들었다. 이와 아울러 그의 기억은 한 번 더 과거로 접어 들었다. - 천문, 나는 우리들의 이 어리석은 경쟁이 싫어. 어차피 우리들 중 가장 강한 자는 너와 천후이니 말야. 나는 기회를 보았다가 너희들 중 하나를 선택하겠다. 나 역시 일인자가 되고 싶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역량이 못미치면 별 수 없지 않겠어? - 후후... 부디 내 선택 대상이 천문, 너이기를 바래. 반대로 천후일지라도 선택을 후회하는 일은 없겠지만. 이것은 아주 오래 전, 어느 때인가 유난히도 훈련이 끔찍했던 날에 냉무혼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렇군. 무혼의 선택은 천후.......' 백리성우의 침중한 음성이 이어졌다. "최근 들어 기세를 올리고 있는 만겁전(萬劫殿)이나 잠마문(潛魔門), 황금전(黃金殿) 등도 모두 마야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는 셈이라네." 영호천문은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만겁전에 관해서도 알고 계셨소?" "허허... 노부 비록 늙기는 했지만 눈과 귀는 여전히 열려 있네. 만겁전은 사대기문(四大奇門)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지. 사망송시군자 사마운(司馬雲)과 거령신장 방천(方天)을 추축으로 해서, 어떤가? 이 정도면 아직 이목이 쇠하지는 않았지?" "음! 그저 놀라울 뿐이외다." 영호천문은 신음을 흘렸다. 그로서는 화중부에서 공야중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항이기 때문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륜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백리성우가 어찌 이렇듯 구정의 족적(足迹)을 낱낱이 훑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백리성우는 정색을 하고 있었다. "마야는 전대미문의 마후(魔候)이네. 대금마성을 세워 절세마두들을 끌어 모은 것이나, 정사이천 중 하나인 사자림을 수중에 넣은 것 등은 실로 역사에도 없었던 계략일세." "듣고 보니 그렇군요." "또 있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정파 각대문파에 은밀히 첩자들을 심어 놓았었지." "그렇다면 전륜회도 예외는 아니겠구려?" "부끄럽네만 그렇네." 백리성우는 솔직히 시인한 연후, 덧붙여 말했다. "자, 노부가 할 말은 다 끝났네. 자네는 내가 이런 얘기들을 왜 했는지 아나?" ④ 영호천문은 차갑게 대꾸했다. "합작(合作)을 제의하고자 하는 것으로 아오만? 피차간에 목적이야 어떻든 무너뜨려야 할 대상은 같으니까 말이오." 백리성우는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어찌 생각하든 그건 자네의 자유이네. 다만 분명한 것은 마야가 그의 천하를 이루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일세." "후후... 그럼 백리가의 천하라야 한단 말이오?" 백리성우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자, 자네가 얘기할 차례이네. 사자림의 봉공(奉公)으로서 말이야. 틀림없이 찾아온 이유가 있을텐데?" "그것 참, 빨리도 묻는구려." 영호천문은 피식 웃었으나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자의 진의(眞意)는 무엇일까? 아직도 왠지 미진한 구석이 있어 효웅인지, 협사인지 판단이 서지를 않으니.......' 그의 결정은 한참 후에야 내려졌다. '좋다! 어차피 이 자가 내 정체는 물론 주변까지 다 알고 있는 이상 손을 잡는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은 없다.' 이윽고 영호천문은 사자림에서 있었던 일들을 백리성우에게 숨김없이 모조리 얘기했다. 그 속에는 현재의 사자림주가 녹지주의 변신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자 백리성우는 탄성을 발했다. "놀랍네! 내 일찍부터 천중일정에 대한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명불허전이로군. 자네의 능력이 그 정도 선에까지 닿고 있다니 무엇보다 고맙기 한량없으이." 그는 더없이 만족스런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멋진 계획이야. 이마제마(以魔制魔)라 이거지? 허허... 사자림과 만겁전을 충돌시키면 필히 마세가 약화될테고, 그러면 마야에게도 큰 타격이 되겠지. 전적으로 자네의 계획에 찬동하네." 영호천문의 어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그 이면에는 전륜회의 희생도 각오해야 할 것이오." "물론이네. 그런데 녹지주라고 했나? 그 낭자가 과연 끝까지 잘 해낼까 걱정이 되는군." 그 점에 있어서는 영호천문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심히 불안을 느낀 나머지 침중한 기색으로 혼자 읊조렸다. '사자림의 배후가 용천후라면 방심할 수가 없다. 그의 예리한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쪼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될텐데....... 녹지주, 그대가 잘 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백리성우와 영호천문. 그들은 이어 뭔가 밀담(密談)을 나누었다. 그것은 곧 천하대계(天下大計)임이 분명했으나 정도의 제일인과 천중일정 사이에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영호천문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의 심중은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일은 잔뜩 벌여 놓았으되 확고한 자신이 서지를 않았던 것이다. '전륜대제, 그를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가?' 이것이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판단과 결정들을 회의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칠, 팔 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작금에도 전륜대제 백리성우의 기질에는 감동을 받을 만한 구석이 많았다. 역시 문제는 그가 가진 배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백리가의 후예라는 사실에 그다지 만족해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처럼 그가 무림의 안녕에만 전념해 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러면 선조들의 뜻을 저버리고 가문을 등져야 하니까 말이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 그의 상념을 깼다. "들어가도 되나요?" 백리단옥의 음성이었다. "좋소, 들어 오시오." 영호천문은 그녀의 옷자락 끌리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빙글 돌아섰다. 그는 백리단옥의 얼굴에서 전과는 종류가 다른 짙은 그늘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소?" 백리단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가(歌歌),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그녀의 이런 물음은 애정을 갈구한다기 보다는 의지할 대상을 요구하는 듯한 기미가 강하게 풍겼다. "음, 좋도록 하시오." 그녀의 눈이 영호천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가께서는 아버님을 만나서 어떻게 하셨나요?" 영호천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예정대로였다고 할 수 있소." "좀 이상한 질문 같겠지만, 제 아버님을 어떻게 보시나요?" 영호천문은 그녀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보았다. "미안하오만 내가 먼저 물읍시다. 그 질문은 그대가 지금 이처럼 초조해하는 것과 상관이 있소?" 백리단옥은 움찔했으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네, 사실은... 그래요." "단옥,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오. 오래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 그에 관해서는 여하한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오." 백리단옥은 다소 절망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하긴, 제가 어리석었어요. 가가에게 그런 것을 묻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게요?" 영호천문이 추궁하듯 묻자 백리단옥은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창문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무척이나 창백해 보이게 만들었다.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무엇을......?" "단정과 저를 지켜 주신다고요." 영호천문은 심중에 차오르는 한 가닥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백리단옥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약속하겠소, 어서 말이나 해 보시오." 백리단옥은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가가께서는 단정과 제가 일 년 전 무엇 때문에 이곳을 뛰쳐나갔었는지 아시나요?" "그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그랬다고 아오만......?" "아니에요!" 단옥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울부짖듯 말했다. "그건 무서워서였어요! 이곳의 사람들이 모두 다요, 특히 그 중에서도 제 아버님이요!" "단옥......?" 영호천문은 너무도 의아하여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소리죽여 오열하는 그녀를 보자 곧 뭔가 심상치 않은 내막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자, 아무 것도 겁내지 말고 어찌 된 영문인지 얘기해 보시오. 이 방에는 그대와 나 외엔 아무도 없지 않소?" 그 말이 위안이 되었는지 백리단옥은 이내 눈물을 훔치며 어색하게나마 웃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흥분해서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군요." "아니, 그렇지 않소. 누구라도 감정이 격해지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니까 말이오." "고마워요, 이해해 주셔서. 제가 말하려 했던 바는 다름이 아니라 제 아버님에 관한 것이에요." "으음." "어쩌면 지금 제가 저지르고 있는 짓은 천륜에 어긋나는 행위가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한 번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기도 해요." 백리단옥은 어느덧 표정뿐 아니라 쏟아내는 음성까지도 무척이나 비장해져 있었다. "아버님은 본시 패업에 뜻을 둔 강한 분이기는 했지만 가족들에게만큼은 한없이 다정하셨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분은 달라지셨어요." "흐음, 대체 무엇을 계기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거처를 내전에서 현재의 초옥으로 옮기신 일에서부터......." 영호천문은 더 말할 수가 없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표면상으로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죠. 그때 아버님께서는 주위에 선언을 하셨어요. 회(會)의 업무를 총관에게 일임하고 그만 쉬고 싶으시다고요. 그리고 아버님은 그 이후, 정말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어요. 아시다시피 그 밭을 전부 직접 가꾸셨지요." 백리단옥의 음성도 비교적 침착하게 이어져 갔다. "그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났었는지는 우리 일가족 외에 아무도 몰라요. 처음에 어머님과 저희 남매는 아버님의 선언이 너무도 기뻤어요. 백리가의 망령(亡靈)들이 비로소 아버님을 놓아 드려 가족의 품으로 귀환하셨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요. 아버님은 오히려 전보다 가족들을 멀리 하시려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요." 그녀의 눈에는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가장 불쌍해진 분은 제 어머님이셨어요. 강남의 평범한 가문 출신인 그 분은 백리가로 시집을 오신 후로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사신 적이 없으셨어요. 그러다 종내에는 아버님의 애정마저 식어버린 듯 하자 그때부터는 눈물로 나날을 보내셨죠." 백리단옥은 모친을 대신한 듯 몹시도 한스러운 기색을 나타내더니 갑자기 어투를 묘하게 바꾸었다. "어쨌든 더욱 이상한 것은 아버님의 생활 태도였어요. 은둔을 표방하시면서도 농사 이외에 항상 뭔가에 열중하시는 듯한 모습이셨거든요. 심지어는 어머님과 저희 남매를 방해자 정도로 여기고 귀찮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녀의 감정에 동화가 되어서일까? 영호천문의 안면근육이 그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 무서운 일은 삼 년 전에 일어 났어요. 그날 밤......." 백리단옥의 창백한 얼굴이 은은한 공포의 기색을 드리웠다. "아버님은 이 년만에 처음으로 어머님의 방에 드셨고, 잠시 후에는 상상치도 못할 일이... 흑!" 그녀는 기어이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호천문이 재빨리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자, 자, 두려워 하지 마시오. 내가 곁에 있지 않소?" 백리단옥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방에서... 어머님의 비명이, 저주에 찬 듯한......!" "저주......?" "그래요. 흑흑... 제가 본 것은... 옷이 찢어진 채 방에서 뛰쳐 나오신 어머님... 그 뒤로는 아버님이 따라 나와 그 분을 마구 구타하셨고......! 흐흐흑... 끝내 어머님은 혼절하셨어요." "으음, 직접 듣고 있으면서도 믿기가 어렵구려. 전륜대제의 집 안에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 났었다니." "그 정도면 다행이게요? 흑... 그 후로 어머님은 미치셔서... 아버님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어요. 치료를 해야 한다고......." 영호천문은 침중히 물었다. "모친께서 어디에 계신지는 아오?" 단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아버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만나 뵐 수도 없었어요." "음, 역시 전륜대제가 못만나게 한 것이오?" "네. 사실 이곳을 빠져 나갔던 이유 중에는... 어머님을 찾아 보자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으음......." 영호천문은 가뜩이나 복잡했던 머리가 이고 있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워지고 말았다. 분명 그녀를 지켜주마고 약속했지만 도무지 대책이 서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한 것들은 그들의 가정사이다. 백리단옥과 육체적인 결합은 이루었다지만 혼례를 치루고 정식부부가 되기 전에는 그가 함부로 가타부타 나설 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믿고 의지해야 할 가장(家長)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가족들의 얘기라면 문제는 달랐다. 그것도 모종의 변화에서 기인된 현상이라며 그 딸이 진상 규명을 요청하고 나온 것이다. 영호천문은 백리단옥이 워낙 겁을 집어먹고 있어 가능한 한 심중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백리성우가 가진 두 개의 얼굴에는 그 자신도 심금이 떨릴 정도였다. '과연 한 인간이 그렇듯 판이한 양면성을 지니게 될 수도 있는 것일까?' 영호천문이 이처럼 심한 회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소협, 들어가도 되겠는가?" 문 밖에서 한 가닥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백리단옥의 창백한 얼굴은 아예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아! 가가......."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며 영호천문에게 매달렸다. 그녀를 받아 안는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안그렇겠는가? 그 음성의 주인은 그들이 화제로 올렸던 전륜대제 백리성우였던 것이다. 제 22장 대계(大計) ① 영호천문은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들어오시오, 대제." "음, 그럼 실례하겠네." 백리성우가 들어섰다. 그는 방 안에 백리단옥이 있는 것을 보자 약간 안색이 변하더니 그녀를 나무랐다. "쯧! 옥아, 네 행동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니냐? 무슨 긴한 용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남의 이목도 생각해야지. 다 큰 처녀애가 이 밤중에......." 그것은 분명 딸의 신상을 걱정하는 힐난이었으되, 어찌 들으면 정곡을 찌르는 말 같아 영호천문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백리단옥은 거지반 사색이 되어 변명했다. "아, 아버님... 전... 전 단지......." 그 말은 백리성우의 탄식에 의해 묻혀 버렸다. "으음....... 무슨 소린지 알겠다. 하긴 영호소협 같은 풍류남아라면 반할만도 하겠지. 그러고 보니 너를 탓할 일이 아니로구나. 이 애비가 진작 생각했어야 되었을 것을......." "아버님......." "그래, 뒷일은 애비가 다 알아서 처리하마. 너는 밤이 깊었으니 이만 돌아가 자도록 하고." 영호천문은 불안한 가운데서도 지극히 냉정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백리성우에게서 딱히 이거다 싶은 문제점은 끝내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전륜대제 백리성우.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영호천문으로 하여금 눈에 안개가 한 겹 씌워진 듯한 상태가 되어 갈등에 빠져 들게 하는....... "소녀는 이만......." 백리단옥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허허허... 그 녀석, 어느새 다 컸군." 백리성우는 대견한 듯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는 담담한 눈으로 영호천문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소협이 옥아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저 단순히 목적이 있어 이곳까지 데려 왔겠거니 했었지." 영호천문은 굳이 부정할 필요를 못느꼈다. "이제야 말씀이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소이다." "허허... 원한다면 젊은 영웅에게 옥아를 드릴 수도 있네." 마치 흥정처럼 들리는 그 말을 영호천문이 차갑게 잘랐다. "대제께서 찾아 오신 용건이나 말해 주시오." 백리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탁자로 걸어가더니 그 앞에 앉았다. "소협도 앉게." "서 있어도 별 불편은 없소." "허어, 갑자기 왜 이러나? 천중일정답지 않군. 노부는 자네와 좀더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 하는 것 뿐이네." "그렇다면 좋소." 영호천문은 그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백리성우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아까 자네와 헤어져 곰곰히 생각해 보았네. 무림은 시시각각 황폐해져 가고, 전륜회는 그 마지막 보루인 셈이지. 문제는 보루를 받치는 기둥이 낡았다는 사실이네." "으음." "현재 전륜회는 정도무림의 총본산이나 다름이 없지. 마야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네만, 그러기에는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네. 이를테면 자네같은......." 영호천문의 입술이 열리며 무감동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소생, 무슨 말인지 어려워서 도통 못알아 듣겠소이다. 대제께서는 좀더 쉽게 말을 해 주시오." "허허... 확실히 좀전에 만났을 때보다 딱딱하군. 원한다면 그럼세. 뭐 간단한 얘기일세. 자네가 전륜회를 맡아 주게. 부회주(副會主)가 되어서 말이네." 영호천문은 흠칫했다. '나더러 전륜회의 부회주가 되라고?'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도 의외이자 파격적인 제안을 받게 되니 일시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 속에서 뒤엉켜 버려 한 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에게 백리성우가 다시 말했다. "원한다면 회주 자리를 내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당면한 문제가 아니네. 우선은 자네가 전륜회와 뜻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자네만 수락한다면 노부가 전력으로 밀겠네." 사실 조건으로 본다면 영호천문은 부회주는커녕 전륜회에 가입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명성이야 부동(不動)의 것이지만 행적이나 출신 등이 정사지간(正邪之間)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륜회의 구성원인 정도인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할 터이거늘,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그 후원까지도 자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영호천문이 물었다.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오? 대제와 소생 간의 합력(合力)은 현재의 위치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소?" 백리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웃었다. "그렇지가 않네. 자고로 바탕이 견고해야 제대로 집이 지어지는 법이라네. 어떤가, 수락하겠는가?" 영호천문은 잠시 침음했다. 와중에서 그의 뇌리에는 천기신유 단목군의 자애로운 얼굴이 떠올랐다. - 천문, 지혜로운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다. 알면서 속는 것은 병법(兵法)이네. 자신을 속이는 것도 이와 다름이 없지. 보다 중요한 바는 직접 부딪치서 얻어내는 일이네. 마침내 영호천문의 입이 떨어졌다. "좋소이다! 대제,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헛헛헛......! 내 그럴 줄 알았네." 백리성우도 유쾌한 듯 크게 웃었다. "그러나 전륜회의 부회주라 해서 구속을 받을 수는 없소. 내 행동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참견하지 말아야 하오." "물론이네. 자네에게는 어떤 제약도 없을 것이네. 어차피 전륜회의 진정한 주인은 노부가 아니라 자네가 될 테니까." 영호천문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져 버렸다. '끙! 대체 이 자는 종잡을 수가 없는 위인이다.' "헛헛헛...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네. 며칠 후에는 내 자네를 위해 전륜회의 기둥들을 소개하겠네." 백리성우는 얼굴을 펴며 웃고 있는 한편, 영호천문은 기분이 들뜨는 것은 고사하고 그 반대로 착잡해져 있었다. 백리성우가 몸을 일으켰다. "자, 노부는 볼 일을 마쳤으니 물러가겠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무엇이 더 남았지?" 영호천문은 물었다. "그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할 생각이오?" 백리성우는 빙긋 웃었다. "무심도 냉천. 자네의 본명이 밝혀져서 이로울 것은 없네. 현 상태대로라면 사자림에서도 더욱 좋아할 것이 아닌가? 마야까지 자네를 이용하려는 생각을 품게 될지 모르네." 영호천문의 반응은 역시 그리 달가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녹지주의 정체가 발각되기 이전의 얘기가 아니오? 그 후로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백리성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고 했네. 그녀가 발각되면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사자림과 자네의 관계는 끝이지. 일단은 더 두고 봄세, 만일 만겁전과의 대결에 사자림이 동원된다면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봐도 될 게야." "실로 무책임한 발상이구려." "허헛, 그럴지도 모르지. 참! 또 한 가지, 마야도 본회가 만겁전과 한 판 벌이기를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우리측이 타격을 입을수록 그에게는 유리하니까 말일세." "으음!" "그렇다고 염려는 말게. 그의 뜻대로만은 되지 않을 걸세." 백리성우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영호천문.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밤이 깊어 가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전륜대제 백리성우의 수완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문제의 청백서가 그를 이렇게까지 받쳐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는 불과 삼, 사일 사이에 중지(衆志)를 모아 거뜬하게 공식적인 자리까지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영호천문이 불려간 그 석상에는 전륜회의 중추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즉 일전, 삼각, 오원, 팔당, 십이루, 삼십육단의 영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배석하고 있었다. 전륜전(轉輪殿). 그 자리에는 구파일방의 대표격인 인물들과 정도의 협의명숙들도 대거 참석해 있었다.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중인들을 향해 공표했다. "이 사람, 무심도(無心刀) 냉천(冷天)은 만장하신 여러분들의 승인을 얻어 오늘 이 시각부터 본회의 부회주로 임명되었소." 그 선언에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다들 사전에 백리성우와의 회견을 거쳤을테니 당연한 노릇이다. 말하자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행사는 단지 기정사실을 좀더 공고히 못박아 두자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심도 냉천이라는 청년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시선에서는 여하한 의혹이나 갈등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냉천으로 소개된 영호천문은 전륜대제 백리성우의 능력에 새삼 경의(?)를 표해야 했다. '졌다! 전륜회를 손바닥에 놓고 주무르시는군.' 이쯤 되니 고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금후로의 일이 심히 걱정되는구나. 저 같은 인물이 나의 적일지도 모르니.......'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으나 은연중 전율이 일어나는 것도 아마 그때문이리라. ② 백리단옥과 단정 남매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영호천문이 전륜대제에게 물었다. "단옥낭자와 단정은 어딜 갔소이까?" "음, 옥아와 정아는 모처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네. 아마도 이, 삼 년 후면 제법 고수급에 오를 것 같으이." 영호천문은 더 묻지 않았다. 물어 보아야 얻을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남매의 모습이 자꾸 눈 앞에서 어른거려 내심 괴롭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현 상태에서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을 뿐더러 그에게는 그 일이 아니라도 처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전륜회의 부회주가 된 이후로 그는 하루하루를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전륜회는 소위 정도연맹이자 전 무림의 중지(重地)였다. 이들은 방대한 조직과 엄청난 인원,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지자들까지 확보해 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호천문의 앞에는 연일 전신(傳信)만 해도 대홍수를 이루었는데, 그는 이것들을 모두 직접 처리했다. 이는 그가 부지런한 인물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일을 통해 이제껏 알 수 없었던 무림 내의 귀중한 정보들을 다량 수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겁전의 동태만 해도 그렇다. 영호천문은 거기에 대해서라면 이제 눈을 감고도 환히 그려낼 수가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그가 팔잔(八殘)을 통해 세운 조직, 즉 만통회(萬通會)의 활동상황까지도 상세하게 보고가 날아 들었다. 만통회는 그 동안 막대한 부(富)를 이용해 전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밀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와 반비례적으로 중원의 상권(商權)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황금전(黃金殿)은 나날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아니, 실은 만통회에 의해 그 찬란한 기업도 점차로 침몰해 가고 있었다. 황금충의 광적인 신봉자들도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개중에는 자진하여 만통회로 흘러 들어가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영호천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금백만, 드디어 너의 최후도 서서히 다가오는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황금전주인 금백만을 파멸시키는 방법을.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에게서 황금을 빼앗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날아 들어오는 소식들 중에는 잠마문(潛魔門)에 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마문 역시도 군마맹(君魔盟)과의 대결을 통해 거의 막바지 단계에 몰려 있었다. 군마맹 측에서 최후의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매일 속보(速報) 형식으로 전해져오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콧등이 찡해지도록 크게 감동을 받았다. '정녕 뜻밖이다. 천안수사 제갈형을 비롯하여 군마맹이 단지 나 한 사람을 위해 이 정도까지 크게 힘을 써줄 줄이야.......' 이쯤 되니 그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조만간 그들을 찾아 가리라.' 실상 그는 자신의 복수극에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졌고, 덕분에 그 자신도 이제는 말에 올라있는 형국이었다. 이르자면 서 있느니 차라리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나 할까? 더구나 복수보다 훨씬 커다란 명제를 끌어 안아버린 그에게 이 점은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바였다. <가가(歌歌), 이곳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누구도 저의 정체를 의심하는 자는 없어요. 사자림은 워낙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수하들이 림주인 사자천효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저는 그저 신비의 인물로 가장하면 되니 역할에 큰 부담이 없어요. 최소한 가가의 계획에 따르는데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고 봐요. 게다가 사자림도 만겁전(萬劫殿)과는 감정이 좋지 않아요. 그것은 만겁전이 강남의 녹림도들을 쓸어 버렸기 때문이 래요. 가가, 보고 싶어요. 녹지주는 가가의 여인이에요. 무엇이든 시키는대로 하겠어요...... 하략(下略).> 이 서신만큼은 영호천문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사자림에서 녹지주가 비밀 전서구를 통해 보내왔는데, 두 가지 사실로 인해 그는 의혹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첫째,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소식을 알려 와서는 안되었다. 그는 위험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해 자신이 직접 그녀를 찾는 것 외에는 상호간의 연락을 일체 금하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전서구라니, 이 판국에......?' 두번째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용이었다. '만사가 순조로우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이건 불같은 그녀의 성격상 구사할 만한 문구가 아니다.' 그런 생각들은 곧 불길한 예감으로 이어져 영호천문은 혀끝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자림으로 달려가 진위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서는 그녀를 보아서나 자신을 보아서나 도저히 그럴 입장이 못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이곳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는 만겁전과의 대전(大戰)을 코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심증만 가지고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륜대제의 말마따나 그때가 되면 자연히 밝혀지겠지. 결국 그녀와 나는 한 배에 타고 있는 셈이 아닌가?' 영호천문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전륜회와 사자림이라는, 정사쌍천(正邪雙天)의 합력을 이용한 대대적인 만겁전 섬멸 작전이었다. 그는 두 주먹을 힘껏 움켜 쥐었다. '두고 보아라! 상황이 어찌 변하든 나 영호천문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 테니까.' 쿠쿠쿠쿵--! 혈륜(血輪)이 구르는 소리가 벌써부터 그의 귓전에 들려오고 있었다. 진정한 정인(正人)의 자격으로서 마의 추종자들을 처단하는 그 순간에 일어날....... 대정혼(大正魂)의 분노는 일로 거세어져 갔다. 지상에서 파생된 악(惡)이 전 무림을 휘몰아쳐 바야흐로 하늘까지도 진동시키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대한 대혈곡의 서막은 열리고 있었다. 만겁전(萬劫殿). 천하를 피로 씻으려는 마의 이름, 그 저주의 이름이 강남무림을 초토화 시킨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급기야 장강(長江)을 건너 혈보(血堡)의 행진을 북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북무림의 긴장도는 터질 듯 팽배해 갔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날로 그들을 그렇게 몰아갔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대전운(大戰雲)은 소리없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무림을 지키기 위한 대의(大義), 즉 밟힐수록 오히려 높아 만가는 정(正)의 기치에 의해서였다. 무림의 일각(一角). 꽝! 꽈르르릉---! 대폭발이 일어나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것은 속된 말로 백주(白晝)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한 광경이었다. 낙성세가(落星世家)라면 하남(河南)의 명문(名門)이요, 무림의 사대세가(四大世家)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히던 가문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아니다. 줄줄이 나열되던 명성들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폭발의 현장으로 화해 있을 따름이었다. 쉬이잉--! 화르르르-- 한 덩어리의 거대한 불기둥이랄까? 낙성세가에서 원래의 형태란 눈씻고 찾아볼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서 요란한 함성과 함께 물밀듯 들이닥치는 무리들이 있었다. "쳐라! 와아아아--!" "크크크ㅋ--! 모조리 짓밟아라!" 그들은 악마의 후예들이었다. 철커덩! 철컹--! 둔중한 음향을 내는 철갑(鐵甲)의 괴인들이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숫자를 과시하며 한꺼번에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크아악--! 우오오오--- 무시무시한 괴수들이 그들의 배후를 장식해 왔는데......! 또 있다. 쓰쓰쓰-- 쉬쉬쉿-- 인세에 존재하는 각종 독물(毒物)들은 다 모인 듯 지면을 꽉 메우는 독벌레가 엄습해 왔는가 하면,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는 무리들도 제 몫에서 빠지지 않았다. 끼-- 아아악--! 그것은 보기에도 섬뜩한 거대한 괴조(怪鳥)의 무리들이었으니, 이 모든 것들을 대변할 수 있는 어휘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곧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을 일거에 쓸어 버리려는 거대한 마의 소용돌이라고. 더 형용할 여지도 없다. 그러한 만겁전(萬劫殿)의 습격에 휩쓸리면 낙성세가가 어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벽력방(霹靂幇)에 철갑문(鐵甲門), 만수곡(萬獸谷), 나찰교(羅刹敎) 등의 사대기문이 합세해 있다. 그 밖의 만겁전에 굴복한 강남의 무가(武家)들도 예외는 아니다. 온갖 흉마의 집단들이 다 모여 일시에 짓쳐 들어온 것이다. 실로 너무도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대공세다. 이로써 낙성세가는 인세에서는 더 이상 그 이름을 불리우지 못하리라. 잠시 기이한 고요함이 있었다. 과연 상상한 바대로 낙성세가는 지리멸렬해 버린 것인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드넓은 공간은 텅 빈 채 오직 악의 무리들만을 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아무도 없다니......." "이건 함정이다--!" 만겁전 괴수들의 부르짖음이 허망한 메아리를 허공에 뿌려대던 그 순간이었다. 고요함을 부르던 침묵이 전복된 것은. 펑! 퍼퍼펑--! 낙성세가 주변 곳곳에서 흙더미들이 일제히 솟아 올랐다. 동시에 날랜 고수들이 그 속에서 속속 신형을 솟구쳤다. 쐐애애-- 슈슈슈슉--! 고수들 모두가 일시에 각종의 병기들을 무섭게 후려쳐냈다. "속았다! 크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절규가 허공 중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기막힌 공성지계(空成之計)이자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전법은 막바로 대혈전으로 이어졌고, 그 바람에 선기(先期)를 놓쳐 버린 만겁전의 고수들은 문자 그대로 추풍낙엽 신세였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의 급전과 가공할 기세의 대공략 앞에서는 그들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철커덩! 철컹--! 철인 군단이 무리를 지어 극력 대항을 시도했다. 그들로 말하자면 철갑문을 대표하는 고수들이자 철갑으로 방어막을 두르고 있어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괴인들이었다. "크크크ㅋ! 어림없다." "철갑문을 얕보다니 각오해랏!" 살기등등한 그들의 철갑수는 곧장 낙성세가의 고수들에게로 뻗어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녕 상상을 절하는 것이었다. 콰콰콰쾅--! "크아아악--!" 정확한 지점에서의 정확한 폭발력이 철인들을 분사시켜 버렸다. 낙성세가 측의 매복 고수들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물에 화탄(火彈)을 명중시켰던 것이다. 그러고도 괴변은 속출했다. 슈우우-- 웅--! 언제 대기하고 있었는지 무수한 철궁(鐵弓)들이 하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끄르륵! 끼아악--! 괴조들은 그 공세로 인해 떼죽음을 면치 못했다. .......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불의 바다에서 함성과 아비규환 가운데 피로 건져 올린 대승전보(大勝戰報)는 날개라도 돋힌 듯 삽시에 무림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 쾌거는 북무림에서 있었던 대정혼의 첫 승리였다. 치밀하고도 완벽한 병계(兵計)가 이루어낸. 이후로 만겁전은 뿌리마저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토록 승승장구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 패퇴만을 거듭할 뿐이었다. 이 현상은 북상(北上)할수록 도를 더 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계속하여 절묘하게 형태가 바뀌는 무서운 함정들이었다. 그런즉 그들로서도 별다른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을 이처럼 송두리째 뒤흔들어 친 세력이란 정사이천, 즉 전륜회와 사자림이었다. 지난 역사를 들추어 본들 정과 사의 합력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전륜회와 사자림은 만겁전을 처단하기 위해 손잡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만겁전. 이들의 야심은 정사이천의 완벽한 합공에 허무하게 스러져가고 있었다. 종말을 향한 혈곡(血曲)만을 남긴 채. 진령산(秦靈山). 휘류류륭--! 산정(山頂)의 바람은 차다. 살을 에이는 듯한 삭풍이 한 사람을 줄곧 가혹하게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풍을 맞이하는 그의 표정은 의외로 무심했다. 일신에 자삼(紫衫)을 걸친 청년이다. 그는 그저 아무데서나 마주칠 듯한 평범한 용모에 냉혹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서 보면 양상은 조금 달랐다. 그의 눈에는 실상 감정이 배어있지 않다. 대신 색채가 있었는데, 그것은 회색이다. 무표정과 함께 그 눈은 대체 청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한다. 다만 이따금씩 강한 광채를 뿜어내기는 했거니와, 그 현상이 그가 지닌 사고의 흐름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만은 추정해낼 수가 있었다. 무심도 냉천. 이것이 그가 현재 천하를 상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불현듯 굳어있던 안면이 약간 움직이더니 그의 입가에 거짓말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독백인 양 중얼거렸다. "때가 도래했다. 후후... 만겁전은 궁지에 몰렸다. 그것도 장강을 넘은 지 불과 사십 일만에."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겁전은 애초 십만의 병력을 지닌 거마(巨魔)의 집단이었으나 지난 사십 일 사이에 곳곳에서 패퇴를 면치 못하더니 형편없이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종내에는 한 곳으로 패주(敗走)했는데, 그들의 은둔지가 이곳 진령산이었다. 무심도 냉천이 여기 오게 된 것도 실은 그때문이었다. 전륜회의 부회주라는 신분으로서 오천의 정예군을 이끌고 만겁전이 뿌린 혈겁을 종식시키러 왔던 것이다. 냉천은 눈을 들어 맞은편 상봉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동(東), 그리고 저쪽의 서(西)로는 녹지주가 이끄는 사자림의 일만 정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입술 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후후후... 사마운과 방천, 기대되는구나. 너희 두 사람이 어떤 얼굴로 나와 만나게 될지......." 무심(無心)에서 유심(有心)으로 전환되기라도 한 것일까? 일순 그의 양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하늘이여! 부디 나를 책망하지 말기를. 내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실제였다. 그의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한 것은. 아울러 혈관 속의 피는 격탕을 일으키며 전신을 치달리고 있었다. 무심도 냉천의 명성은 가히 천하를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자림의 봉공에 전륜회의 부회주이고 보니, 그의 존재는 무림의 신성(神星)으로까지 떠올라 있었다. 근거가 확실치는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그를 전륜회의 후계자로 점찍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 어떤 일에도 별호와 마찬가지로 시종 무심일색(無心一色)으로 반응했다. 무심도 냉천의 감추어져 있던 심중은 이러했다. "후후... 대제, 그대와 나는 지금 서로의 그림자를 쫓고 있소. 각기 상대방의 본체(本體)를 찾기 위해서 말이오."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끝에 그의 눈에는 전에 없던 비장한 각오가 어렸다. "어쩌면 우리는 머지 않아 서로의 심장에 검(劍)를 겨눌지도 모르오. 나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소. 그때가 오기를......." 냉천은 부르짖음에 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녹지주! 이번에야말로 그대의 본격적인 활약을 기대한다." 그는 품 속에서 철관 하나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슈슈슉--! 펑--! 휘황한 불꽃이 폭렬하여 산정을 밝혔다. 그것은 녹지주에게 정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스슷--! 냉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진령산의 밤은 매섭도록 찼다. 휘몰아치는 한풍에는 절로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이다. 휘이이-- 휘이이잉--! 그 속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스산한 기운마저 흐르고 있었으니, 그것은 무서운 살기(殺氣)였다. 휙! 휘휘휙--! 소리없이 내려서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음침하고도 낮은 음성이 울려 나와 밤공기를 갈랐다. "조심해라!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그의 신형은 짙은 어둠의 일부인 양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일신에 새카만 흑의를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얼굴만은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는데, 주름살이 그득한 것으로 미루어 꽤 나이가 지긋한 노인 같았다. 그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려냈다. "흐흐흐... 놈들은 지금쯤 승리에 도취되어 모두 군기(軍氣)가 빠져 있을 것이다." 노인은 옆에 왜소한 체격의 한 복면인을 대동한 채 그리 적지 않은 숫자인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있었다. 역시 흑의를 걸친 그 무리들은 한결같이 야조(夜鳥)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그를 따라 전진해 갔다. 흑의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사망협(死亡峽)이 나타난다. 흐흐... 그곳이 유일한 길이지. 누구라도 필히 그곳을 지나야만 우리가 있는 천마곡(天魔谷)에 이를 수 있다." 일순 그는 섬뜩한 안광을 뿜어냈다. "본문은 너무도 오랫동안 그늘에서 썩어왔다. 그 어떤 자도 우리를 제대로 인정해 준 적이 없었다." 흑의노인의 음성은 낮으나 절규에 가까웠다. "이번 일을 기해 우리는 사대기문, 특히 우리 벽력방의 무서운 능력을 만천하에 널리 알려야 한다." 그를 추종하는 흑의인들도 모두 못지 않게 비장한 결의를 보이며 그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놈들이 지금처럼 한껏 풀어져 있을 때가 우리에게는 기회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놈들의 주력(主力)이 가까이에 있다. 그들을 전멸시키면 승산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쪽에 있다." 그는 추종자들을 둘러보며 낮게 외쳤다. "자! 시작해라." "넷!" 휘휘휘휙--! 추종자들은 야공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흑의노인도 왜소한 복면인과 함께 어딘가로 쏘아져 가더니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이 맞이한 것은 깎아지른 단애와 단애 사이로 나 있는 협로(峽路)였다. 협로 안에 들어서서 보면 하늘이 일편(一片)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단애의 모양에 따라 멋대로 찢겨진 하늘이다. 그 하늘이나마 먹빛이고 지극히 차다. 으스스한 한기는 연신 머리 위로 맴돈다. 양 옆으로 금시라도 무너져 내릴 듯 서 있는 단애가 무섭도록 심장을 조인다. 흑의노인이 앞서 말했던 사망협(死亡峽)이 이곳이다. 왜소한 복면인은 어둠 속에서 기이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사망협을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버님... 정말 그들이 이곳을 지날까요?" 구슬픈 가락인 양 가녀리면서도 애절한 음조를 지닌 그 음성은 누가 들어도 틀림없는 여인의 것이었다. "물론이다. 흐흐흐... 이 길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흑의노인은 득의만만하여 말을 이었다. "이곳 사망협의 절벽은 높이가 무려 삼백 장이 넘는다. 이 절벽에는 십만 근의 화약(火藥)이 고이 잠들어 계시다. 그 정도면 삼백여 장의 절벽이 단번에 폭발하게 되지. 설사 백만대군이라 해도 그런 대폭발에는 몽땅 날아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꼭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요?" 복면여인의 음성에는 공포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물론 그렇다만......." 흑의노인은 음흉하게 눈알을 굴렸다. "사마주군(司馬主君)이 어떤 분이시냐? 그 분의 뛰어난 책략(策略)은 이미 그것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다." "어떻게요?" "흐흐... 설사 놈들이 이곳을 무사히 지난다 해도 천마곡에 들어가면 기절초풍을 하게 될 것이다." "천마곡에는 어떤... 안배가 있는데요?" "우리들은 놈들이 쓴 공성계를 역이용 할 것이다." 여인의 눈이 복면 사이로 놀란 빛을 보였다. "공성계라니요?" 흑의노인은 득의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우리들은 천마곡에 수많은 천막과 채(寨)를 세워 놓았지만 그건 눈속임일 뿐이다. 이를 테면 놈들이 멋모르고 쳐들어오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지." 복면녀의 눈망울이 두려움 때문인지 몹시도 흔들렸다. "아! 정말... 대단한 계획이군요?" "그렇다. 흐흐흐......." 흑의노인의 웃음소리는 그 뒤로도 좀체로 그칠 줄 몰랐다. 휙! 휙--! 각 방향으로 흩어졌던 흑의인 일단이 다시 모여 들었다. "끝났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완벽하게 설치했습니다." 흑의노인은 흡족한 듯 더 묻지 않았다. "좋다! 이만 돌아간다." 그는 이어 복면여인에게 진중한 음성으로 당부했다. "연아(娟兒)야, 이곳은 네게 맡긴다. 놈들의 눈이 날카로우니 잘 숨어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면 즉각 폭약을 터뜨려라." 그 음성에는 결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네." 복면여인은 낮게 대답했다. "그럼 조심해라!" 휙! 휘휘휘휙--! 흑의노인을 필두로 그들 일단의 무리들은 몸을 날렸다. ④ 복면으로 본색(本色)을 가리고 있는 여인. 그녀는 망연히 선 채 사라져 가는 자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자 그녀는 어둠을 배경으로 긴 탄식을 토해냈다. "아! 과연 내 행동이 옳은 것일까? 그토록 그리워 하던 아버님을 만났으니, 그 분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겠건만 내 마음이 왜 이리 편치 않은 것일까?" 그 한스러운 읊조림의 뒤를 잇듯 가녀린 그녀의 어깨를 휘어감는 것은 짙은 고독과 비애였다. "어머님....... 당신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 한 번 정을 주고 결혼에는 뜻이 없노라며 떠나셨다던 아버님이... 새로운 부인(婦人)과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계시군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님이 일종의 자위 수단으로 내게 거짓말을 하셨을지도....... 그래, 그 분은 진즉부터 이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도 몰라. 흑! 나같은 것은 오나가나 짐......." 복면녀는 이미 삶의 조건 중 부모라는 소중한 한 가지를 잃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방향타를 옮겨 잡고자 하는 것일까? 그녀의 눈에는 한 가닥 비장한 기운이 떠올랐다. "이번 일만 마치면 나 혼자라도 그 분을 찾아 나서겠어. 천하에서 그 분만이 내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숱한 인간관계를 통해 얻은 것이라곤 오직 환멸 밖에 없었다. 그것도 자신을 낳아 준 부모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칭하는 한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는 남성적인 매력에 이끌렸으되 종국에는 그녀로 하여금 참다운 인간미로 인해 큰 감동을 느끼게 만든 장본인이다. 아무튼 복면녀가 안타까움을 비롯한 갖가지 상념에 푹 잠겨 있을 때였다. "후후... 벽력방의 야심이 너무 크군." 한 소리 냉랭한 외침이 그녀의 상념에 찬 물을 끼얹었다. "누... 누구냐?" 그녀는 놀란 와중에서도 제법 앙칼지게 외쳤다. "누구긴,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후후... 보아 하니 화기술은 그런 대로 쓸만 하다만, 그렇다고 북무림을 얕보아서야 쓰나?" 스슷--! 협로에 유령처럼 내려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무심도 냉천이었다. 쐐애액--! 모종의 암기가 은빛 선을 그리며 그를 향해 쏘아져 갔다. "서툴다." 냉천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복면녀가 뿌려낸 암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그녀는 기겁을 하여 달아나려 했다. "어림없다!" 냉천의 한 손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나꿔채서 내동댕이쳤다. "악!" 복면여인은 뾰족한 비명과 함께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휙--! 냉천은 몸을 날려 그녀에게로 다가가더니 복면부터 거칠게 벗겨냈다. 동시에 그는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너... 너는 백수연!" 그는 여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할데 없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 한 객점에서 노소 가리지 않고 뭇사내들의 몸을 안마해 주며 연명해 가던 여인....... 백수연이 창백한 얼굴을 그와 마주하고 물었다. "당신... 누구기에 내 이름을......?" "그대가 벽력방에 속해 있을 줄은 정말 몰랐군." 냉천은 탄식하며 자신의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곧 관옥같은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백수연은 그대로 넋을 잃고 말았다. 쌓였던 정한(情恨)이 모조리 눈물로 변한 듯 그녀의 눈에서는 대번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아아! 그토록 애태우며 그려 보던 분....... 기어코 이 천한 계집이 당신을 만나 뵙게 되었군요.' 냉천, 아니 영호천문은 묵묵히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은공(恩公)......." 백수연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즉시 공손하게 절을 했다. "꿈만 같아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그녀는 엎드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영호천문이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는 사뭇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놀랍군, 그대가 벽력방의 사람이었다니." 백수연은 긴 탄식과 함께 대답했다. "천녀, 실은... 부끄러운 말씀이나 은공을 찾아 뵈오려면 우선 입장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야겠길래......."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수소문하여 제 아버님을 먼저 만나 뵙게 되었어요." "아버님......?" 영호천문은 흠칫 놀랐다. "그 분은 벽력방의 방주세요." "그게 정말인가?" "네,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천녀도 몰랐어요. 단지 어머님께 물려 받은 이 뇌봉환(雷鳳環)이 전부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환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증표인 셈이었지요." "으음......." 영호천문은 탄식을 금치 못했으나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 그대는 행복한가?" "그게... 별로 그렇지가 못해요." 백수연은 금세 우울한 낯빛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왜지?" "저는... 저는... 흑......!" 백수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영호천문이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으니 말해 봐라." 백수연은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흑흑... 저는... 아버님께 달갑지 않은 존재......." "왜......?" "아버님께는 부인과 자식이......!"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영호천문은 그녀를 안고 있으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련한 여인...... 대체 네게 주어진 운명은 왜 끝내 이 모양이더냐? 도시 행복이 다가와 주지를 않으니.......' 그는 백수연의 삼단같은 머리결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연민지심(憐憫之心)을 느끼는 한편, 내심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내 이후로는 너의 불행을 간과할 수 없겠구나. 최소한 여기에다 인의(仁義)마저 저버린 꼭두각시로 만들 수는 없다.'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수연, 그대는 나를 도와야 한다." "어떻게......?" 백수연은 눈물로 범벅이 된 눈으로 영호천문을 올려다 보았다. "이것은 나라는 일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다. 대살상(大殺傷)을 막으려는 것이며, 이 땅에 정(正)을 세우는 일이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심중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갔다. '그래요, 돕겠어요. 나는 생각이 짧고 그릇이 너무 작아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여인이에요. 당신의 뜻이라면, 무조건 도울 거예요. 무엇이든......!' 백수연은 눈물을 훔치며 생긋 웃었다. "은공께선 제게 생명과 혼을 부여해 주신 분이에요. 은공이 원하시면 천녀는 어떤 일이라도 따르겠어요." "수연......." 영호천문은 진한 감동으로 가슴이 축축히 젖어 들었다.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여인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이런 자문에 그는 벌써 답을 함께 구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너를 위해서이다, 영호천문.' 그러자 영호천문의 뇌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한 송이 연(蓮)의 영상이었다. 눈 앞의 백수연이야말로 진흙탕 속에서도 고결하게 피어나는 그 꽃을 닮아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심중을 감추지 않고 낮게 속삭여 알려 주었다. "수연, 너는 고결한 여인이다. 누가 뭐라 하든 네가 가진 영혼은 더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다." "아아......!" 백수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탄성만을 흘려낼 따름이었다. 아련히 귓전을 울려온 그의 한 마디로 인해 그녀는 지금까지 겪어 온 불운에 대해 전부 보상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 너는 고결한 여인이다. 이 얼마나 황공한 말인가? 더구나 그 대상인즉 그녀가 몽매에도 그리워 하던 인물이다. "은공......!" 백수연은 또다시 파묻히듯 그의 가슴으로 안겨 들었다. 무섭도록 추운 밤이었다. 하지만 기구하게 살아 온 여인, 백수연은 결코 춥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는 한 사람의 품에 안겨 있기에....... 제 23장 무서운 덫 ① 콰콰쾅! 콰르르릉--! 진령산이 포효했다. 그것은 전례가 없었던 대폭발로 인해서였다. 화산(火山)이라도 분출한 것인가, 아니면 일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한밤중에 충천하는 무시무시한 화광(火光)은 천지를 함몰시키려는 하늘의 조화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쪽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조작에 의한 폭발로써, 사망협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때문에 사망협은 그 날로 붕괴되어 인세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회심의 미소였으되, 그들은 상대의 심중에서 자신과 똑같은 색채의 말을 읽어 내고 있기도 했다. '성공이다! 친구여.' 세인들이 알았다면 저주받아 마땅한 일이겠으나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진령산의 폭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호 의기투합하여 때아닌 괴변(怪變)으로 기억될 그 사건을 획책한 자들이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이 시대는 그들에게 각기 정(鼎)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그들은 저 유명한 구정(九鼎) 중 이 인이었던 것이다. 사망송시군자(死亡誦詩君子) 사마운. 거령신장(巨靈神將) 방천. 그들의 눈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이글이글 타올랐다. "으하하핫--!" "핫핫핫--!" 급기야 그들은 감정에 도취된 나머지 대소를 터뜨리기에 이르렀다. 야공을 시뻘겋게 물들여 가는 화광의 의미가 두 사람의 흥분을 한껏 고조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손을 맞잡으며 통쾌한 음성을 교환했다. "하하......! 드디어 끝났어. 놈들은 모조리 사망협에 묻혀버린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한 설욕이 아니냐?" "그야 두 말할 나위도 없지. 크크크... 우리 두 사람이 무림 사상 가장 큰 무덤을 만든 것이다." 사마운이 득의만면하여 말을 받았다. "후후후... 전륜회의 정예군 오천, 게다가 사자림의 일만 명 인원이 일거에 고혼이 되었다. 남은 것이라곤 껍데기 뿐, 그들에게는 싯구를 읊어 줄 필요도 없다." 거령신장 방천은 허리를 주욱 폈다. "훗훗... 이제부터는 서서히 재기(再起)의 기반을 구축해야겠지. 나는 이전부터 새외(塞外)에 약간의 손을 써 놓았다. 용천후, 그 놈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겠지?" 그 말에 사마운의 얼굴이 소리없이 굳어졌다. 한풍이 쓸고 지나간 듯 그의 표정은 삽시에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그건 나도 몰랐던 일이다.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지?" 심각한 질문에 비해 방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지금 말하고 있지 않느냐?" 이어 시선을 허공으로 옮겨간 그는 조소를 흘렸는데, 그 대상도 역시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용천후, 네 놈은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겠지? 후후후... 나 방천이 필히 너의 그 오만을 꺾어 놓겠다." 방천의 거대한 체구는 어쩌면 하나의 방패였다. 그 덩치에 놀라운 지략(智略)이 숨겨 있을 줄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그에게 뒷통수를 맞은 격이 된 사마운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응큼한 놈!' 하지만 사마운의 무서운 면은 절대 감정으로 인해 기회를 잃는 일 따위는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느 결엔지 그는 벌써 표정을 풀고는 방천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놈은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를 업신여겨 왔다. 비록 이전의 성세와는 비교도 안되지만 이 차제에 놈을 치자 해도 말리지 않겠다. 정면승부야 조금 어렵겠지만." 방천이 그를 향해 불쑥 물었다. "사마운! 이제까지 우리는 좋은 친구였지. 안 그렇느냐?" 사마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암! 좋은 친구였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맙군." 사마운과 방천. 두 사람은 다시금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주고 받은 그들의 시선은 말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너와 나는 적수(敵手)다! 그들에게 변한 것이라곤 없었다. 이십여 개 성상(星霜)을 살아 오면서도 계속 같은 길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아니, 그들은 그러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자! 내려 가자. 놈들의 잔당을 쓸어 버려야 할 게 아니냐? 이후의 일은 차차 논의하기로 하고." "좋지! 으하하핫......!" 그들은 최후 단계를 위해 신호탄을 올렸다. 슉-- 퍼펑! "와-- 아--!" 천마곡(天魔谷) 근역이다. 그곳으로부터 함성이 울려 나와 진령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사마운과 방천의 안배로 그곳에 배치되었던 병력들이 일제히 내지른 것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삼만, 실로 막강한 인원이었다. 그들은 벽력방의 본거지인 천마곡을 에워싼 채 그 주변으로 진즉부터 빽빽한 인간림(人間林)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신호에 따라 일제히 함성을 토해내며 곡내(谷內)로의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휙--! 휘휘휙--! 그러나 일사불란한 그들의 움직임이 채 개시되기도 전이었다. 쩌적--! 흡사 환청인 듯 무시무시한 낙뢰(落雷)의 소리가 들리더니, 실로 놀라운 현상이 도래했다. 우르르르--! 일단은 지축이 뒤흔들려 지진인가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금을 통틀어도 전무후무한 대폭발로써, 사망협에서 있었던 것과는 양상이 또 틀렸다. 꽈꽈꽈꽝--! 꽈르르릉--! 정말로 곳곳에서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게다가 시뻘건 불기둥이 도처에서 치솟는 것은 물론,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들이 연속적으로 밤하늘을 찢었다. 화르르-- 르-- 릉! 거대한 화마의 소용돌이는 걸레쪽처럼 찢긴 시신들을 모두 허공으로 분분히 날려 버렸다. 설사 아수라지옥도를 보여준들 지금의 이 현장보다는 백배, 천배 나으리라. 인간이여! 누구이고 간에 부디 죄업(罪業)일랑 쌓지 말기를. 하늘의 심판은 이다지도 무서운 것이리니....... 슈우우-- 웅--! 노호한 불의 폭풍이 일어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일거에 뒤덮어 버린다. 마치 그것으로써 지옥의 제전(祭典)에 종막(終幕)을 선언하려는 듯 천마곡과 더불어 그 주변까지를 쓸어버렸던 것이다. "크으으......! 이럴 수가!" "우우욱! 믿을 수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폐부까지 토해져 나오는 듯한 절규의 주인은 사마운과 방천이었다. 그들은 전율했다. 아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 거짓말 같은 사실에 아예 미쳐 버리고 말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사마운의 움켜쥔 두 주먹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으아아아--!" 방천의 거구가 이토록 부들부들 경련하는 것은 그가 태어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으리라. 한편. 산정(山頂)에서는 한 여인이 통곡하고 있었다. "흐흐흑......! 부디 용서해 주세요, 아버님....... 소녀는, 소녀는 이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여인 백수연이었다. 울부짖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오는 손길이 있었다. "수연, 자책하지 마라. 하늘이 그대를 가상히 여길 것이다. 그대는 무림의 대은인이다." 그녀의 전부요, 영혼의 지배자인 영호천문이 말하고 있다. "내 미리 말했듯 이는 모두 대의(大義)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으로서는 그대에게 뭐라 할 말이 없구나." "흐흐흐흑......!" 백수연은 흐느껴 울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육신은 연신 비맞은 새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수연......." 영호천문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은공!" 백수연은 결국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격정을 이기지 못해 그의 가슴에 왈칵 안겨 들었다. 그녀를 받아 안으며 영호천문은 못내 탄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잊어라.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그의 손은 그녀의 눈물젖은 뺨으로 옮겨 가 있었다. "그대에게 더 이상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행복해야 되는 여인이니까." "흑... 은공......." 백수연의 진한 눈물은 그칠 줄도 모르고 계속 흘러 내려 영호천문의 앞섶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폭발로 뒤집어진 지면이 가라앉았다. 그 처참한 잔해 위에서 때를 기다렸던 영호천문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슈-- 웅--! 호선을 긋는 한 줄기 불빛은 신호였다. "와아-- 아--!" 함성과 함께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대군단(大軍團)은 북무림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가공할 기세로 그때까지 살아 남은 만겁전의 무리들을 향해 질타해 갔다. 대정혼을 내세운 그들의 돌격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크아아악--!" 전세는 너무도 일방적이었다. 대폭발에서 살아 나온 것만도 천만다행인 만겁전의 인물들은 거개가 성치 못했고, 때문에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무더기로 쓰러지며 만겁전의 최후를 공표하고 있었다. 영호천문. 그는 싸움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그에게는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때가 온 것인가?' 그는 백수연에게 어깨를 다독거려 주며 말을 건넸다. "수연,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 여기서 기다려다오." 슷--!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털썩! 백수연은 혼자 남게 되자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뿌연 시선으로 천마곡 근역을 내려다 보았다. 그곳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지형(地形) 자체가 변해 있었다. "나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중얼거리는 그녀의 음성에서는 격정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독한 역경들을 거치며 해탈(解脫)의 경지에라도 도달한 것일까?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무(無)로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생각과 언어에서만이 아니었다. 곧 행동으로도 옮겨지고 있었다. 쉿! 그녀는 비수로 허공을 역(逆)으로 가르더니 비명도 없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비수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배를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는 시뻘건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기어이 그녀는 복부를 찔러 자결하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이 끔찍한 행위는 그녀가 부친과 길을 달리 하고자 할 때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쓰러져 누워 있는 백수연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굳어져 갔다. 와중에도 그녀는 기억 속에서 하나의 얼굴을 끄집어냈다. 그 얼굴의 주인은 자신에게 비운을 선사해 준 장본인이었다. - 미안해요, 제가 먼저 가서. 어머니....... ② 여기 두 사람의 패장(敗將)이 있다. 사망송시군자 사마운과 거령신장 방천이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툴툴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틀렸다. 모두 다......." "빌어 먹을!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 확실히 두 사람은 여늬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랐다. 그토록 큰 일을 당하고도 더 이상은 놀라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단지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한 분노에 조용히 치를 떨 뿐. 그나마 감정의 여운도 외견상으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사마운이 사뭇 호기롭게 방천의 어깨를 툭 쳤다. "이곳을 뜨자! 새외에 근거가 있다고 했지? 그곳에서 잠시 은둔하고 있다가 다시 때를 엿보도록 하자." 선심쓰듯 말하는 그를 향해 방천은 피식 웃었다. "그건 어렵지 않다만 공짜로는 안된다." "무엇을 원하지?" "중원 내에서 세력을 새로 기르는 일은 네가 맡아라. 나도 전적으로 네게 맡기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호오! 그런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수락할 수 있지." 사마운은 빙그레 웃더니 말을 건네왔다. "그럼 너와 나는 또 손을 잡게 된 거냐?" "물론. 우리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때였다. 한 가닥 싸늘한 음성이 그 말을 되받은 것은. "과연 그럴까?" 두 사람의 귓전을 파고 든 그 음성은 섬뜩할 정도로 냉혹해 심지가 굳은 그들을 아연긴장하게 만들었다. "안되었다만 너희들에게 기회란 없다." "누구냐?" 사마운이 날카롭게 외쳤다. "어떤 놈이냐? 썩 나와라!" 사자의 포효를 방불케 하는 방천의 호통도 빠지지 않았다. 스스슷--! 지옥의 사자인 양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장내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자삼을 걸친 청년이었는데, 사마운과 방천으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군. 사마운, 그리고 너 방천." 준수하나 창백한 그의 안색은 한광을 뿌려내는 듯 했다. 회색 빛이 감도는 그의 눈에는 엷게 조소가 어려 있기도 했다. 사마운이 물었다. "너는 누군데 우리를 알고 있느냐?" "섭섭하구나, 사마운. 후후후... 벌써 내 음성을 잊다니." 그는 사마운을 정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 너에게 들려 줄 만한 싯구가 있다." "뭣이? 네가 어찌 내 행동을 모방......." 사마운의 말을 자삼청년이 차갑게 끊었다. "모방이 아니다. 받은 것을 되돌려 줄 뿐이지." 그는 얼떨떨해 하는 사마운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자, 잘 들어 보아라." 낭랑한 그의 음성이 한 편의 시를 읊었다. 黃昏一松葉 葉色靑變赤 丹心胡不變 有罪第一人 황혼녘의 한 그루 소나무 잎도 푸름이 물들어 붉게 변하나니 피처럼 붉은 마음인들 어찌 변치 않으랴?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제일인임이리라. 사마운은 기절할 듯 놀랐다. "그... 그건......!" 그 시는 그가 지은 것이다. 그는 언젠가 낙일애에서 그것을 직접 읊었으며, 한 친구에게 이런 말과 함께 헌사했다. - 잘 가게, 천문.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나. 평소에 그가 자랑하던 냉정과 침착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새삼 부르르 진저리를 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였구나! 천문......." 곁에서 거령신장 방천이 나섰다. "미... 믿을 수가 없다......!" 그도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고 있었다. "가짜다! 누군지 몰라도 네 놈은 천문일 수가 없다......!" 방천의 말은 극단적인 부정이었으되, 그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영호천문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었다. "크으으......!"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신이 걸레쪽이 된 채 팔과 다리가 하나씩 찢겨 나간, 그리고 미남이던 얼굴이 짓뭉게져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던, 한 불운한 친구가 낙일애로 추락하던 그 장면을....... 그 친구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다. 그의 음성까지도 현실이 되어 귀에 와 꽂힌다. "후후후......! 천중일정이 그리 쉽게 죽는다면 어찌 천중일정으로 불리울 수 있겠느냐?" "말도 안된다! 정신 나간......!" 꽈르릉--! 방천이 발출해낸 태산같은 경기가 영호천문을 덮쳐갔다. "여전하구나, 방천." 영호천문은 그의 공세를 맞받아쳤다. 꽈꽝--! "크윽!" 폭음이 울리는 순간에 방천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그를 향해 영호천문이 다소 침중한 투로 말했다. "너는 예전에도 그랬었다. 내심으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내게 살수를 뻗었었지. 나도 아마 그리 하게 될 것이다. 도옥기나 공야중을 처단할 때처럼......." 곁에서 사마운이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부르짖었다. "설마했더니......! 그럼 화중부(花中府)를 쳤다는 불망객(不忘客)이 너였더냐?" 영호천문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사마운. 나는 너희들 모두를 잊지 않았었으니까." "좋다! 나도 너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불망(不忘)이었으니, 어디 한 번 끝장을 내 보자." 촤라라락--! 무정철선(無情鐵扇)이 영호천문을 향해 무섭게 쇄도해갔다. 카앙--! 한 차례 불꽃이 작렬했다. 그 직후, 영호천문의 여의무형인(如意無形刃)이 반대로 사마운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카캉! 역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튀었고, 각기 한 수씩 공평하게 주고 받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급격히 떨어져 섰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비무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한 치도 양보가 없는 목숨을 건 승부였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그들 운명의 교차지점으로써 양자 중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마지막 길이었다. 여기에 방천도 가세했다. 꽈꽈쾅--! 그는 노도와 같은 기세로 영호천문을 몰아갔으며, 솥뚜껑만한 그의 양손은 어마어마한 경력을 폭출시켰다. 꽈르르릉--! "천문! 너는 또 죽는다. 내 손에 의해......!" 영호천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슷--! 불현듯 그의 신형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러다 도합 십팔 인이 되었을 때, 영호천문들은 각자의 손발에서 네 개씩의 여의무형인을 일제히 쏟아냈다. 쉬이이잉--! 그 광경에 사마운이 대경하여 물었다. "그... 그건 무슨 무공이냐?" 그러나 그의 음성은 곧 흩어져 버렸다. 콰콰쾅--! 굉렬한 폭음이 사위의 모든 소리를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삼 인의 싸움은 공격 자체도 그러려니와 특히 내력(內力)의 대결이 압권이었다. 펑--! 꽈꽈꽈-- 꽝! 연이은 대격돌에 의해 산봉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고 지축이 온통 뒤흔들렸으니....... 그들 삼 인은 동문(同門)이며 어쩌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지기(知己)이다. 그런 그들이 서로 죽느냐, 죽이느냐를 놓고 비극적인 혈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콰르르르-- 태풍이 몰아치며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다. 사마운과 방천.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갔다. 지옥에서부터 살아 나온 영호천문은 불사신(不死身)임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일로 초절한 무위를 떨치고 있었다. 초를 거듭할수록 그의 내력은 가중되었고, 일신에 지닌 무학은 종류나 위력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마운, 방천, 마무리다." 마침내 영호천문은 마지막 일격을 남겨 놓고 있었다. 좌수(左手)를 하늘로 뻗은 채 우수(友手)를 횡(橫)으로 가르는, 그의 최후 심판은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촤아악---! 두 갈래로 갈라치는 섬전이 정확하게 두 사람에게 뻗어갔다. 그것을 본 사마운과 방천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굳어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 방천이 고함치듯 부르짖었다. "오오! 천문, 네가 이 정도였더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꽝! 꽈르르릉--! "으아악--!" "크헉!" 참혹한 비명을 끝으로 그들은 공중에서 폭사(暴死)했다. 후두두둑......! 두 사람이 뿜어낸 피분수가 수천, 아니 수만 조각으로 화해 버린 그들의 육신과 더불어 대지 위에 흩뿌려졌다. 천상의 뇌신(惱神)이 노했는가? 불현듯 번뜩 하는 섬광과 함께 한 줄기 낙뢰(落雷)가 천지를 갈랐다. 쩌저적--! 동시에 그것은 끔찍한 파멸의 현장을 무섭게 강타했다. 콰아앙--! 이로써 그들의 전장(戰場)도 지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나무 한 그루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고 모조리 궤멸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태초 이전의 혼돈으로부터 막 하늘과 땅이 갈라져 나온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 아득한 공간을 창출해 낸 장본인인 영호천문이 그곳에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색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급기야 쥐어짜듯 괴로운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두 친구, 무덤을 없애 버려 미안하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이 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손으로 너희들을 처단했다는 사실이 왜 이토록 혐오스러운지......." 승자(勝者)로서의 통쾌감은 점차로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 남아있는 분노의 찌꺼기까지야 아직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는 구정이 한 사람씩 죽어갈 때마다 심적 고통의 도를 부쩍부쩍 더해가고 있었다. 최소한 명분은 충분했다. 개인적인 복수는 차지하고라도 각기 천하제일정(天下第一鼎)을 목표로 하여 각처에서 무자비한 혈겁을 자행했던 그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영호천문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으며 돌아섰다. 그는 자위라도 하듯 툴툴 웃었다. "후후... 그래도 이 친구가 손을 써 주는 것이 백 번 낫지 않느냐? 사마운, 방천, 너희들의 목숨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거두어진다면 그것은 더욱 더 괴로운 일이 될 테니까." 그는 전신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 비척비척 걸어갔다. 방향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거니와 심지어 그는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잉--! 한 줄기 삭풍이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가슴을 헤쳐 놓았다. "아마도 너희들은 지금쯤... 도옥기, 공야중 등과 해후하고 있겠지. 그곳에서도 여기서처럼... 서로 제일인이 되겠다고 으르렁거리며 싸울텐가......? 후후후......." 그의 음성이 술에 취한 듯 흔들렸다. "너희들은 모두... 모두 잘못 살았다. 나도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는... 다르지 않았었고....... 그런데 말이다, 그것을 깨달아도 내 심정은... 왜 이리 즐겁지가 않지......? 대체 왜......?" 넋두리와도 같은 음성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스읏--! 영호천문은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비상했다. 그리고는 야공(夜空) 속으로 숨어 버리듯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와중에서도 그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울려 퍼지는 함성, 또 함성....... "우와아아---!" "승리다! 만겁전이 무너졌다. 와아아아--!" 전륜회와 사자림의 합공에 의해 만겁전은 완전히 붕괴되고, 대혈곡의 일막(一幕)이 내려진 것이었다. ③ "수연......." 영호천문은 넋을 잃었다. 그 순간에는 심장의 고동조차 조용히 멎는 것 같았으며, 온 몸을 돌던 붉은 피도 역시 그 흐름을 스스로 정지해 버린 듯 했다. 백수연의 싸늘한 주검이 전하는 충격이 바로 그러했다. 그것은 여타의 죽음에서 느낀 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으니, 이를 두고 운명 자체에 대한 환멸이나 회의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가 아는 한, 자연사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죽음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재생(再生)이 그 실증적인 예이므로. 그런데 백리수연의 죽음은 대체 어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운명의 장난에 철저히 농락당해 시종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그녀의 생이 종말마저도 이토록 뼈아프니 말이다. "바보같은......! 그대만은... 그대만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어야 했거늘......." 영호천문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자신도 모르게 손등을 가져 갔다. 그러고 보니 그의 눈은 어느덧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눈물이 그의 창백한 뺨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울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는 크게 웃어제낄 정도로 초연하던 이 사내가 보잘 것 없는 신분인 한 여인의 주검 앞에서 소리 없는 오열을 쏟아내고 있었다. ....... 백수연의 옆에는 단정히 접힌 한 장의 서신이 놓여 있었다. 영호천문은 떨리는 손으로 그 서신을 집어 들었다. 흰 빛깔의 종이에서도 한 여인의 비애와 더불어 피처럼 붉은 단심(丹心)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백수연이 남긴 유서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 죽음은 미리 준비되었던 것, 부디 애통해하지 마세요. 당신을 다시 뵙고부터 저는 소원하는 바가 더 이상 없게 되었으니, 여한도 없습니다. 사실 저를 낳아 주신 분은 어버이시나 저를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한 여인으로서 빛나게 해 주신 분은 당신이십니다. 천문(天文), 감히 이렇게 불러 봅니다. 제 비록 천한 여인이나 당신으로 인해 생(生)의 의미를 알았으니까요. ......중략(中略)...... 아버님은 언제나 제겐 타인(他人), 하지만 저는 결과적으로 패륜(悖倫)을 범했 습니다. 때문에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삶, 중도에서 그친들 용서받을 수 있을지는 저로서도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천문,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했더랬습니다. 천녀(淺女) 백수연 서(書).> "수연......!" 영호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경련했다. 금시라도 심장이 터져 피를 토하고 말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대, 내가 대체 무엇이건대 그토록 마음을 쏟았더란 말이냐? 나는 그저 단 한 번 그대를 취했을 뿐이거늘.......' 그는 탄식을 길게 뿌리며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백수연의 시신을 거두어 주기 위해....... 며칠 후. 영호천문은 무림의 성지(聖地)인 소림사(少林寺)로 한 통의 서신을 들고 찾아갔다. 그것은 백수연이 남긴, 일종의 자술서(自述書)였다. 고결한 마음을 지녔던 그녀는 인세를 떠나기 전, 비록 오래 전의 일이나 부채를 청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現) 소림 장문인(掌門人) 귀하. 소녀 벽력방의 후인 백수연(白水娟)은 오체복지하고 아뢰나이다. 본방은 화기술로 삼백여 년간 맥을 이어 왔으나 무공이 약한 탓에 뜻을 넓게 펴보지 못하던 중.......> 서신에는 영호천문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과거에 그가 불회곡을 나오기 직전, 불회십반천 중 한 명인 주육풍화상으로부터 들은 얘기와 맥이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백수연이 쓴대로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의 일이다. 벽력방은 소림에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당시 벽력방주, 즉 백수연의 외증조부는 자신의 무남독녀를 소림으로 잠입시켜 장경각주였던 백우(白牛)대사를 유혹해 육체관계를 맺게 했다. 그런데 마침 면벽을 마치고 나오던 백현(白玄)대사가 백우의 파계를 목도하고는 분노한 나머지 살계(殺計)를 펼쳤다. 이후로 백현대사는 소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건에 대해 끝내 함구했고, 그 바람에 그는 크게 의혹을 사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달마비서를 훔쳤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백현대사는 소림을 탈출했다. 그는 한 달음에 벽력방으로 쫓아가 그곳을 초토화 시켰는데, 그때부터 그는 이유없이 대살상을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천하의 공적(共敵)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파계승인 백우와 벽력방주의 무남독녀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현 벽력방주이자 백수연의 부친이다. 서신은 오욕의 역사를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았으며, 끝 부분에 가서는 심심한 사과와 함께 하나의 제안도 했다. <...... 무림에 대죄(大罪)를 지었던 부친께선 소녀에 의해 무참히 돌아가셨고, 소녀도 혈육을 배신한 죄과로 자결할 참이니 사대(四代)에 걸친 벽력방의 죄과를 부디 용서하소서. 또한 사제를 죽이는 등 대살계를 범해 무림공적이 되신 백현대사의 무고(無故)함을 인정해 주소서. 아울러 진정한 소림인(少林人)이었던 그 분의 승적(僧籍) 복원을 감히 탄원하노니, 이를 받아 주시면 은혜 한량이 없겠나이다. 대죄인(大罪人) 읍립(泣立).> 영호천문도 소림 장문인의 후의로 그 서신을 읽어볼 수가 있었다. 그는 허공에 무거운 독백을 뿌렸다. "주육풍화상, 아니 백현대사! 당신은 다시 소림인(少林人)이 될 것이오. 당신의 부탁을 받은 내가 아니라 뜻하지도 않았던 한 여인의 산화공덕(散華功德)으로 인해서 말이오." 백수연. 그녀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노라며 자신을 끝없이 비하(卑下)시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였다. 그녀의 삶이야말로 천하의 그 누구보다 고귀한 업(業)을 이룩했다 할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힘이 작용했지만. 만겁전의 멸절이란 크나큰 낭보(朗報)였다. 그로 인해 무림은 감격과 흥분의 물결로 뒤덮혔다. 무림인들은 저마다 대정혼의 승리를 높이 찬양했으며, 이를 계기로 한결같이 천하의 소생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듯 일렁이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그들 모두의 가슴에 선명하게 부각된 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무심도(無心刀) 냉천. 그는 명실공히 무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사(邪)의 하늘이라는 사자림의 봉공이면서도 어느덧 정도의 지주인 전륜회의 후계자로 당당히 지목되었다.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대영웅으로 급부상한 그는 떠오르는 일출(日出)을 향해 나직이 부르짖었다. "다음 차례는 너다. 금백만(金百萬)......."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너로 하여금 더 이상 황금으로써 세상의 가치기준을 타락시키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구나." 전륜회의 한 정사. 영호천문은 만겁전의 붕괴 이후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던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해 놓고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가자, 황금전(黃金殿)으로.' 그 동안 그가 계획했던 일들은 한 가지도 어김없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만통회(萬通會)는 중원의 상권(商權)을 거의 다 장악했으며, 그 결과로 황금전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황금전은 속이 텅 비고 빈 껍데기만 남은 셈이었는데, 그곳에서 황금전주(黃金殿主) 금백만이 아직도 독불장군(獨不將軍)인 양 홀로 우뚝 버티고 있었다. 영호천문은 금백만의 지금 처지를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려볼 수가 있었다. 그는 다소 허망한 심정이 되어 읊조리기도 했다. "금백만, 너도 느끼고 있겠지? 네가 최후를 맞이한 지 이미 오래라는 것을......."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곳. 당금 황제의 거처인 자금성을 능히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호화찬란한 성(城)이다. 놀랍게도 바닥이 전부 천축산(産)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둥과 벽, 천정, 심지어는 기와까지도 눈부신 황금과 보옥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이곳이 황금전이다. 황금대전(黃金大殿). "으으으......!" 너무도 비대하다 못해 오관이 모두 살에 파묻혀 버린 화복청년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한때는 황금의 신이라고까지 지칭되었던 인물이다. 황금전주 금백만. 소위 황금충(黃金蟲)의 열렬하고도 광적인 신봉자였으되, 금력(金力)을 휘둘러 타인에게도 이를 종용해 오던 그였다. 그런데 금백만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떠받들어 모시던 거대한 황금충의 상을 지금은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축 늘어진 뺨의 살을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모두, 모두들 어디 갔느냐?" 찌릉! 찌르르릉--! 금백만은 평소 수하를 부르기 위해 사용했던 신호용 단추를 미친 듯이 눌러댔다. 하지만 그의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나타나 주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황금위사(黃金衛士)! 황금수호밀사대(黃金守護密士隊)! 대금금룡수(大禁金龍手)......! 다들 어디로 갔느냐? 으흐흑! 모두, 모두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외쳐대는 그의 모습이란 반은 미쳐 있는 것 같았다. "크하하핫......! 여기 황금이 있다. 무엇들 하느냐? 귀신도 부린다는 황금이 아직도 무더기로 있단 말이다." 금백만은 허공에 대고 아무렇게나 손을 떨쳤다. 촤르륵--! 그의 손에서 무수한 주옥들이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값어치를 지닌 보화들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하나만을 수용하고 있는 텅 빈 공간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급기야 그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뭐냐? 만통회, 대체 회주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크으! 나 황금전주 금백만을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는 거냐?" 그는 또다시 미쳐 갔고, 아까보다 증세가 훨씬 심각했다. 목표가 확실치 않는 장력이 그의 수중에서 남발되었다. 쾅! 콰르르릉--! 그 광폭한 힘에 의해 애꿎은 벽과 기둥들이 마구 부서지고, 날아갔다.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나와라!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금백만의 몸부림은 실로 뼈아픈 것이었다. 극도의 절망과 실의(失意)가 그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스슷--! 그의 등 뒤로 소리없이 밀려드는 자영(紫影)이 있었다. 동시에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금백만, 힘드느냐?" ④ 부르르....... 금백만의 신형이 심한 경련과 함께 홱 돌아섰다. "너냐? 네 놈이었더냐?" "그래, 내가 만통회주다." "오! 마침 잘 와 주었구나. 크하하핫......!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느니라. 자, 받아랏--!" 파파파팟--! 다짜고짜로 그는 상대에게 손을 뻗었고, 그 덕에 온갖 보화로 된 암기들이 자영을 향해 무수히 쏘아져 갔다. 슷! 자영은 슬쩍 몸을 틀어 그것들을 모두 가볍게 피해 버렸다. "금백만, 헛 힘을 낭비하는구나. 쓸데없는 행동은 관두고 따라 와라.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그 담담한 음성이야말로 금백만에는 더 없이 모욕으로 느껴졌다. 내놓고 조롱을 하거나 핏대를 세우는 편이 그가 받아치기에는 훨씬 더 편했을 테니까. 슷--! 말을 마치자 자영은 밖으로 날아갔다. "서랏!" 금백만은 노호한 외침과 더불어 자영을 쫓았다. 대전 밖. 그곳에는 의외로 그토록 외쳐 불러도 와주지 않던 황금전의 고수들이 모두 도열해 있었다. 금백만은 언뜻 반색을 짓는 한편, 그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무엇들 하느냐? 이 놈이 만통회주다. 쳐랏--!"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뻣뻣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이런......!" 금백만은 그제서야 잠시 잊었던 사실 한 가지를 깨닫고는 굳어져 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황금전의 수하가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변절자들인 것이다. 그의 비위를 거스르는 그들의 눈빛이 말을 하고 있었다. - 우리들이 추종하기에 당신은 너무 무능력하오. 만통회에는 이곳 황금전보다 더 많은 황금이 존재하더이다. 그는 차라리 피식 웃었다. "그렇군. 너희들이 내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지. 만통회로 옮겨간 지 벌써 오래니까." 자영, 아니 자삼청년은 묵묵히 손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인 듯 황금전의 전(前) 수하들이 서 있는 곳, 그 뒤쪽에서 수많은 인영들이 솟구치더니 속속 전면으로 내려섰다. 휘릭! 휘리리릭--! 나타난 인물들은 한결같이 검박한 마의(麻衣)를 걸친 인물들로서, 그들의 소매에는 금실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만통(萬通)> 이는 공히 알려진 만통회 고유의 표기였다. "으으......!" 신음성을 흘리는 금백만은 넋을 잃은 듯 했다. 또 다른 인물들이 그의 앞에 날아내린 것은 이때였다. 휘휙! 휙! 모두가 보기에도 끔찍한 불구자들이었다. 과거 무림에서 팔잔(八殘)으로 일컬어지던 위인들이다. "주군(主君), 황금전은 이제 더 둘러볼 것도 없소이다. 사전에 인원 접수가 끝나 있었으므로 남은 것은 고작해야 전주의 사재(私財) 정도입니다." 일제히 무릎을 꿇어오는 그들에게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팔장로(八長老)께선 수고가 많으셨소." 그들 만통회의 팔장로 중 한 명이 물었다. "그 남은 것들도 접수하오리까?" "그건 안되오." 청년은 딱 잘라 말한 후, 설명했다. "우리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수탈이 아니오. 이 땅에 올바른 상도덕(商道德)을 세우겠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 바, 황금전주의 사재가 아니라도 자금은 넉넉하니까 말이오." 팔장로들은 이의없이 고개를 꺾었다.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소이다, 주군." 이어 그들 중 한 명이 또 물어왔다. "그럼 황금전주의 신병(身柄) 처리 문제는 어찌 하오리까?" 자삼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 일은 내게 맡겨 주시오. 그는 나의 지기(知己)요." 뒷편에서 듣고 있던 금백만이 대로하여 외쳤다. "터무니 없는! 내가 어째서 네 놈의 지기냐?" 그를 향해 자삼청년은 빙글 돌아섰다. "금백만, 너는 나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대체 무슨 헛소리냐?" "후후후... 지금 보여줄 수 없는 게 유감이구나. 내 몸에는 지난 날 영광스럽게도 오색찬란한 보옥들이 박혀 있었지. 그것도 전신 삼십육 개 사혈(死穴)에 전부 말이다." 금백만의 살 속에 묻힌 실눈이 경악으로 인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는 실성한 듯 부르짖었다. "너... 너는 그럼 천문......?" "그래, 자네의 삼십육 용안무적공(龍眼無敵功)을 받을 자격이 이 친구 말고 누가 있겠는가?" "우우......! 그러고도... 살아 있었단 말이지......?" 금백만의 살찐 몸뚱이가 우스우리만큼 휘청거렸다. 그가 지금 들은 말은 모두 그의 기억 속에 얌전히 접혀 있는 것들이었다. 그 옛날 틀림없이 그는 낙일애(落日崖)에서 친구의 사혈을 노리고 삼십육 개의 보옥들을 날렸었다. 그 친구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금백만은 짧은 시간 동안 안색의 변화를 수없이 거듭했다. 그러더니 그는 앙천광소했다. "으하하하핫......!"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몰랐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금백만은 영호천문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는 무슨 속셈에서인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좋다! 천문, 네가 살아난 것을 축하한다." 영호천문도 그의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고맙군." 금백만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띠었다. "너는 아직도 나를 친구로 여기느냐?" "물론." "어째서지? 나는 분명 너를 죽이고자 했는데."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친구라 해서 무조건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불편이나 손해도 감수해야 하지." 금백만은 히죽 웃었다. "여전하군.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너는 우리가 짐승처럼 사육당할 때도, 서로 살벌한 각축전을 벌일 때조차도 항상 그런 식이었다." 영호천문은 어깨를 으쓱 했다. "본성이 어리석다는 말로 들리는데?" "후후... 맞다. 나는 그런 너를 비웃으면서도 무척 좋아했고. 그러다 종국에는 너를 만만히 여기고 너무 심한 짓을 해서 이 꼴이 되었지. 자업자득이다. 오늘날 내가 이처럼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는 것은." "너답지 않은 말이다, 백만." "그럼 나다운 것은 뭘까? 이전에 용천후가 그랬지, 날더러 우리 열 명 중 가장 심약하다고. 천문, 네가 보기엔 어떻지?" "천후의 눈이 정확했던 것 같군." "그래, 아마 그럴 거야. 내가 황금에 그토록 집착하고 의지하려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그렇지 않았다면 그 낙일애의 사건에도 가담하지 않는건데." "후후후......." 영호천문은 씁쓸히 웃었다. "그 일을 제안한 놈은 천후였다. 다른 놈들은 다 사이비야. 그리고 난 내색은 안했었지만 천후가 두려웠었고." "그랬었나......?" "용기있게 그와 정면으로 맞서서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 유일하게 말야. 누군지 알겠느냐?" "글쎄." "화무무(花舞舞)였다." "으음......." "그녀는 너를 연모했었으니까. 화무무는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에게만 유독 애정을 주었지. 그런데 결국 그녀도 승낙했다. 용천후가 옥화미를 빗대어 그녀의 질투를 부추겼거든. 그게 먹혀 들어간 것이다." "그만 해라, 백만!" 영호천문은 입술을 질겅 씹더니 물었다. "백만, 이제 와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금백만은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 그건 나도 모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지." 영호천문이 탄식하듯 말했다. "백만, 그래서 너는 지금 살 기회를 잃었다." 금백만은 다시 히죽 웃었다. "알고 있다. 너는 줄곧 공력을 풀고 있었으니까, 왜였지?" "나도 역시 모른다." 일순 금백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천문, 금후로는 절대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마찬가지, 이건 친구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다." "그런 말은 또 왜......?" 금백만의 입술 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지나친 신뢰나 관용은 항시 위험을 부르니까." "후후... 내게 아직도 배신당할 소지가 있어 보이느냐?" "그야 두 말 하면 잔소리지. 크ㅋ!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그럴 수도 있으니까." "백만!" "으하하핫......! 자! 천문, 받아랏!" 꽈르르릉......! 벽력치듯 장력이 휘몰아쳐 오자 영호천문으로서도 대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금빛찬란한 광채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곧 그의 몸에서 막강한 경력이 발출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실로 예기치 못했던 현상이 벌어졌다. "하하핫! 천문, 지금도 나는 네가 좋다!" 금백만이 자신이 뻗어낸 장력을 회수해 버린 것이었다. "백만!" 영호천문이 대경하여 뒤로 몸을 튕겨냈으나 소용없었다. 콰르르릉--! "크헉!" 폭음과 함께 금백만의 비대한 몸집은 그만 어이없이 뒤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는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너무도 간단한 결말이었다. 영호천문은 넋을 잃은 나머지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오오! 어찌 이런 일이......?" 생사(生死)는 따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황금전주 금백만. 그는 그렇게 죽어갔다. 자신이 죽이려 했던 친구에게 자청하여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무거운 혈채(血債)를 청산한 것이었다. 그가 남긴 한 마디가 영호천문의 뇌리에 계속 맴돌았다. - 천문, 지금도 나는 네가 좋다. 망연히 선 채 친구의 시신을 내려다 보던 영호천문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내저었다. "백만, 네가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 주는구나." 이어 그는 추위를 느낀 사람처럼 옷깃을 추스르며 돌아섰다. 이 순간 그를 따라붙는 것은 허무감이라기 보다는 지독스러우리만큼 절실한 고독감이었다. "팔장로, 뒷처리는 당신들에게 맡기겠소." 지나치게 착 가라앉아 있는 음성이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스슷--!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멀리 사라져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은밀히 숨어 들어와 영호천문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엿보던 사람이 있었다. 특히 영호천문이 장내를 뜨려 할 때에는 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섬광과도 같은 빛이 솟았다가 꺼지기도 했다. 그도 역시 일신에 마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똑같은 옷을 입어도 만통회의 인물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뭐랄까? 언뜻 보기에는 그저 타고난 농부 같았지만 좀더 자세히 보면 지극히 단아하면서도 유현한 풍도가 느껴지는 자였다. 이런 풍도를 지닌 인물은 무림에서 단 한 명밖에 없다. 전륜대제(轉輪大帝) 백리성우. 그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호천문, 너는 과연 천중일정이라는 명호가 부끄럽지 않은 놈이다. 죽어 가면서도 좋다고 말해 주는 적수가 있다니." 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마도 네 능력이라면 너를 배신한 친구들을 모조리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비단 무예에서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백리성우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너는 종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사자도 덫에 걸려 있는 한 제대로 사냥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이 중얼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 24장 만통회주(萬通會主) ① 만겁전이 전륜회와 사자림의 합공으로 무너진 후, 또 한 차례의 충격파가 무림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황금전(黃金殿)의 붕괴 소식이었다. 실상 황금전은 진즉부터 위세가 상당히 축소되긴 했다. 만통회라는 단체가 갑자기 중원의 상권 쟁탈에 뛰어든 후로는 좀체로 기를 펴지 못하고 계속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황금전주 금백만이 건재해 있는 한, 그 누구도 황금전이 무너지는 일까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그는 전대에 천하를 십분(十分)했던 십상천의 후예로서, 당대에는 우내십정(宇內十鼎) 중 일인이다. 본래 규모가 어떻든 장사야 흥할 수도 망할 수도 있는 법, 금백만이 당장에는 만통회에 밀린다 해도 언제든 세(勢)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황금전은 기어이 끝장이 나 버렸으며 전주인 금백만은 죽었다. 세인들은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오히려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보다 충격적인 사실이 앞서의 사건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황금전주 금백만을 몸소 처단하고 그의 전 재산을 양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조처한 사람이 만통회주였으나 여기까지도 그리 경악할 바는 못되었다. 문제는 이제껏 신비에 가리워져 있던 만통회주의 정체였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자 저마다 아연실색했다. 천중일정(天中一鼎) 영호천문(令狐天文).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나타나 무림 일각의 세력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아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무력(武力)에 의해서건, 금력(金力)에 의해서건. 그 일로 인해 천하가 술렁거렸다. 천중일정을 비롯하여 무영탐화랑(無影探花郞), 천수옥환겁(天手玉環劫), 복마엽주(伏魔葉主) 등 가장 길고도 화려한 별호를 지녔던 사내, 그가 살아서 돌아왔노라고. 천하사대금역 중 한 곳, 정사이천의 하나, 흑도무림(黑道武林)의 총본산, 이 세 가지 명칭이 다 통하는 단체가 있다. 사자림(獅子林)이다. 휘-- 이이-- 잉--! 차가운 설풍이 사정없이 휘몰아쳐 사자림을 에워싸고 있는 산역을 모조리 설백천지로 뒤바꾸어 놓았다. 원래 그 근처 일대를 일컬어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마역(魔域)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다 맹렬한 자연현상까지 보태지니 가히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사자림에는 실로 상상을 절하는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그곳은 폐허였다. 평소 그토록 울울창창하던 사자림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죄다 불타 버리고 그 잔재들만이 풍설을 맞으며 썰렁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휘익--! 불현듯 눈보라치는 산정으로부터 하나의 검은 점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이어 폐허 앞에 내려선 그 자는 일신에 자삼을 걸친 청년, 즉 영호천문이었다. "맙소사!" 영호천문은 대경한 나머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현 무림에서 사(邪)의 하늘로 불리우던 사자림에 어찌 이런 변고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도시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부르짖었다. "그럼, 그럼 녹지주는......!" 급박한 그 음성은 채 이어지지도 않았다. 휘익--! 그의 신형이 말보다 더 빠르게 허공을 갈라 시커멓게 타들어간 사자림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럴 수가......!" 영호천문은 숲 속을 치달리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희대의 절진(絶陣)과 기관매복으로 꽉 들어차 있다시피 했던 사자림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고작해야 시커멓게 그을고 제 형태를 잃은 나무들만이 흉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방어체계인들 온전할 리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정신이 아찔했다. '녹지주!' 사자림이 이 지경이 되어 있을진대 사자천효로 변장하고 있던 녹지주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말이다. 휘익--! 그의 신형은 계속하여 나는 듯이 쏘아져 갔다. 잠시 후. 영호천문이 내려선 곳은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사자림의 보(堡), 그 앞이었다. "우우우......!" 그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곳도 역시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갔는지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성보가 아니라 무너지고 그을린 폐허와 그 잔재들일 뿐이었다. "대체 어찌 하여 이런 일이......!" 급기야 영호천문은 맥이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그 순간을 통해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감정 가운데 녹지주라는 여인이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이윽고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사자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없었다. 보 내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휑하니 비어 버린 그 공간에는 흔한 쥐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전멸(全滅)이라도 한 것일까? 휘류류륭--! 삭막한 눈보라가 할퀴듯 한 차례 그곳을 쓸고 지나갔다. 천정이 날아가 거칠 것이 없으니 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덕분에 주위 정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지고 말았다. 영호천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을 지나쳐 사자전으로 향했다. 바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사자천효의 거처였던 장소다. 영호천문은 흠칫 했다. 그리 기대도 안했건만 들어와 보니 유일하게도 사자전 만은 불에 타지 않고 건재했던 것이다. '혹시......?' 휙--! 영호천문은 속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요행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거미줄 같이 복잡한 미로(迷路)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기관장치는 여기도 파괴되었는지 그를 가로막는 것은 전무했다. 그는 곧장 사자천효의 내실로 뛰어 들어갔다. "없구나! 역시......." 영호천문은 텅 빈 내전의 한가운데에 서서 부르짖었다. 그곳의 풍경은 과거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전륜회로 떠나려다가 협박에 못이겨 그녀와 몸을 섞던 침상도 그대로였다. 탁자와 의자 등속도 마찬가지....... 정작 있어야 할 녹지주만이 그곳에 없었다. '녹지주.......' 영호천문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며, 그 두려움 없는 사랑을 바쳐온 대상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는 여복(女福) 하난 타고난 사람이다. 이전에 알던 여인들이 단 한 명만을 빼고는 전부 그랬으니 말이다. 이 점은 한동안 영호천문으로 하여금 오히려 회의를 느끼게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백수연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로 그의 여성관(女性觀)은 크게 달라졌다. 영호천문이 아는 여인들은 거개가 나름대로의 한과 사연을 품고 있는 여인들인지라, 그는 무엇보다 그녀들의 마땅한 의지처(依支處)가 되어 주고자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인 녹지주가 실종된 것이다. 그것도 영호천문이 부탁했던 일을 수행하다가 어떤 위경에 처해 있는지 감히 짐작하기조차 무서운 상태로 말이다. '미안하다, 녹지주. 내 너의 의지가 되어주기는커녕.......' 자책이 가슴을 휩쓸어 더욱 괴로운 그였다. 더불어 그의 눈이 번쩍 빛난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흔적을 찾느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쪽 벽에서 지력(指力)으로 새겨 놓은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영호천문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용천후......!" 그 지력을 발휘해 낸 솜씨란 천하에서 오직 마야(魔爺) 용천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천마지(天魔指)였던 것이다. 영호천문의 눈썹 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천문(天文), 네가 이곳에 오리라 믿고 적는다. 우선 되살아난 것을 축하한다. 그리고 너의 귀여운 여인은 친구의 예로써 정중히 모셔 가겠다. 사자림은 정식으로 대금마성에 병합될 것이고, 머지않아 나 마야는 천하일통(天下一通)을 선포할 것이다. 그 전에 네가 나를 좀 도와야겠다. 왕영(王永)을 제거해 다오. 그러면 여인을 돌려 주겠다.> 의당 있어야 할 서명조차도 없었다. 하기는 그 글이 전하는 것은 명령과 협박 뿐이었으니, 어쩌면 그런 형식이란 희극(喜劇)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우우우......!" 영호천문은 대로했다. 그는 지금까지 옛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가 복수전을 치루었지만 맹세컨대 이처럼 분노했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일말의 양심을 뜻하는 인성(人性)이란 것이 있었다. 용천후만이 예외였다. 가책은 고사하고 역으로 인질을 잡고 영호천문을 이용하려 들고 있다. "좋다! 천후, 네 소원대로 해 주마. 어차피 왕영은 다음 차례였으니까. 그도 너처럼 골수까지 마인(魔人)인지 두고 보겠다." 영호천문의 눈에서는 섬뜩한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스슷....... ② 천년고도(千年古都)인 낙양(洛陽). 늘상 번화한 곳이다. 휘이이잉--! 겨울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행복이란 평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천하의 정세(政勢)가 어찌 돌아가건, 무림의 패권(覇權)을 누가 쥐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저 밝기만 하다. 낙양은 연일 쏟아지는 탐스러운 눈으로 인해 문자 그대로 설국(雪國)이 되어 버렸고 사람들은 그 정취를 즐겼다. 또한 행인들이 그러하듯 장사치는 장사치대로, 장인(匠人)은 장인대로 모두 생업에 열중하며 평범한 가운데 행복을 누리며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낙양성의 중심지에 언제부터인가 한 채의 거대한 장원(莊院)이 생겼다. 일명 만통장(萬通莊). 당금 무림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만통회의 총단이다. 황금전을 붕괴시킨 후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만치 그들의 명성은 중원 전역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다. 만통회는 그 전에도 상업적으로 중원의 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대부호일 듯한 그들이 한결같이 화려한 비단옷이 아닌, 마의를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들은 능숙한 상술(商術)로 중원의 금은보화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지만 수전노는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빈민구제 사업에 적극성을 보였으며 천재지변의 복구사업 등에도 막대한 재화를 투입하곤 했다. 결국 마의를 입은 만통회의 사람들이란 서민들의 구세주였는데, 그러면서도 대로상에서 흔히 서민들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애환을 함께 나누는 등 더불어 사는 체제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이는 황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그들 나름의 독특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재화의 가치를 치부(致富)나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보다 승격시켰다고나 할까? 휘류류류---! 정월로 접어 들자 겨울의 막바지를 장식하듯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북풍에 실린 눈보라는 방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는 만통장도 예외없이 설백으로 뒤덮고 있었다. 한 사내가 이곳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추운 줄도 모르는지 홑겹인 자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초립을 깊숙이 눌러 쓰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눈길을 가로지르더니 거대한 만통장의 대문 앞에 이르자 우뚝 멈추어 섰다. 쿵! 쿵! 쿵......! 그는 대문을 주먹으로 세차게 두드렸다. 지나던 사람들이 저마다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기로 어떤 방문객이 와도 만통장의 대문은 한 번도 열린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하한 인물이라도 만통장을 출입하려면 의례 대문 옆에 조그맣게 나 있는 소문(小門)을 이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과연 소문으로부터 경비무사인 듯한 한 장한이 얼굴을 내밀자 사내는 손을 슬쩍 들더니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것을 본 장한은 뭘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눈덮힌 땅바닥에 오체복지했다. 잠시 후. 대문은 여보란 듯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사내는 말없이 대문 안으로 사라져 갔다. 쿠웅! 대문이 육중한 음향을 내며 다시 닫혔다. 곁에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내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만통회의 정청(政廳). 그곳은 화려하지도, 웅대하지도 않았다.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검박한 가운데 은은한 아취가 배어 있어 무척이나 편안한 분위기였다. 초립을 쓴 사내는 무사의 안내를 받아 정청 안으로 들게 되자 서슴없이 의자에 앉았다. 이어 그는 어깨에 쌓인 눈을 대충 툭툭 털어 내더니 비로소 초립을 벗었다. 얼굴이 드러나고 보니 그는 영호천문이었다. 그가 회주자격으로는 처음으로 만통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가 예의 장한을 향해 말했다. "팔장로(八長老)는 어디 계신가?" 장한의 것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음성이 한꺼번에 답했다. "여기 대령해 있소이다, 주군." 이와 더불어 내전으로부터 여덟 명의 괴인들이 나타났다. 변함없이 불구인 자들, 그러나 낙양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밝게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과거 전 무림에 흉명을 떨치던 팔잔(八殘)이라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주군을 뵙소이다." 그들은 영호천문을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하나 같이 격동이 어린 표정들이었다. "지나친 예는 사양하겠소. 팔장로들께선 어서 일어 서시오." 그들을 대하는 영호천문의 태도도 의외다 싶으리만큼 부드러웠다. 그도 역시 나름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 정말로 노고들이 많으셨소이다. 일일이 치하하지는 못했었지만 늘 여덟 분께 감사하고 있었소." 그 말에 팔장로는 더 없이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을! 감사는 우리 늙은이들이 해야 마땅하오이다. 주군께선 세상에서 버림받다시피 했던 우리에게 최초로 보람있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셨소이다." "하하... 모두들 만족하고 계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오." 영호천문의 얼굴에 오랫만에 밝은 웃음이 피어 났다. 그는 진심으로 기쁘기 그지 없었다. 예전의 팔잔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증오했을 뿐만 아니라 해악(害惡)을 끼치는 것도 불사하던 대살성(大煞星)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만통회가 난세의 구세주로 자리잡기까지 훌륭한 조력자 노릇을 해 왔으며 지금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 즉 그들이 일 자체에 보람을 느낀다면 영호천문은 변모해 있는 그들에게서 보람을 건져 올리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 덕분에 강남북의 수로(水路)를 모두 장악함은 물론, 무림의 군소방파들이 앞다투어 만통회에 가입해오는 뜻밖의 수확까지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영호천문. 그는 파면노군(破面老君)으로부터 만통회의 조직 구성과 분포도, 재력(財力) 등에 관해 자세한 보고를 들었다. 그는 크게 만족했다. 보고에 따르면 만통회는 명실공히 천하대문(天下大門)으로 성장해 있었으므로. "이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힘이셨소."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만통회는 한 마디로 무림정의의 등불로 화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영호천문이라는 한 인간의 삶에도 새로운 희망과 신념(信念)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천중일정 영호천문과 팔장로. 완벽한 의기상통을 이룬 그들은 천하정세를 함께 토론하는 한편, 정감이 교차되는 화기애애한 시간을 나누었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독안괴마가 영호천문에게 외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주군, 어서 후전으로 가 보시오. 흐흐... 주군을 애타게 기다리는 분이 계시오." "애타게 기다리는......?" 영호천문이 짐짓 괴상한 표정으로 말을 되받자 팔장로는 저마다 그들 특유의 짓궂음으로 응수했다. "크흣!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소이다." "킬킬... 아무래도 오늘 밤엔 우리 만통회에 때아닌 춘풍(春風)이 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감히 외람된 말씀이오나 주군께선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심히 걱정이 되어 이러는 것이외다. 크큭큭......!" 그들의 입심 합공(合攻)에는 영호천문으로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느덧 그의 얼굴은 은은히 붉어져 있었다. 적어도 그쯤이면 영호천문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망한 김에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다들 내일 봅시다." 영호천문은 정청을 나와 독안괴마가 알려준 바대로 후전으로 향했다. 그는 가슴에서 이는 야릇한 설레임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몹시 놀라고 있기도 했다. '쯧! 내가 변하기는 변한 모양이군. 새삼스럽게 내 내부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니.......' 후전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어느새 눈도 그쳤고 설경을 배경으로 그윽하게 꾸며진 별원의 분위기는 천외(天外)의 소축을 방불케 했다. 주위로는 나즈막한 담장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었으며, 화원에는 매화(梅花)가 그림인 양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 위로 눈부신 달빛이 부어져 희디흰 눈밭에 매화가지들의 그림자를 신비롭게 교차시키고 있다. "겨울 밤, 월광(月光)이 쏟아지는 매화림(梅花林)이라......." 시라도 한 수 읊어질 듯한 기분이다. 영호천문은 그런 상태로 화원에 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천천히 걷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저 여인은......?' 달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수려해 보이는 한 여인이 거기에 서 있었다. 꼭 일신에 백의(白衣)를 입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닌 여인의 뒷모습은 우아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갓 피어난 매화의 꽃망울을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한 마리의 학(鶴)을 연상시켰다. 그러다 문득 영호천문은 전류와도 같은 기운이 심장을 쩌르르 울리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백의여인이 홀로 이렇게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문(文)오빠, 당신은 대체 언제쯤 만나볼 수 있는 거죠?" 그는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대번에 알아 차렸다. 세월의 흐름조차 정지하고 있었던 듯 친숙하기 짝이 없는....... 영호천문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오오! 저 여인이 정녕 그녀이던가?' 왈칵 치미는 반가움에 되려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척을 느낀 것일까? "누구......?" 백의여인이 이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입에서는 막바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아!" 그 뿐이 아니었다. 백의여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라도 하 듯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급기야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반면에 영호천문은 새삼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주화영(朱華英)!' 그녀는 틀림없이 불회곡의 소녀 화영이었는데, 수 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 그녀를 너무도 변모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과거의 천진난만한 화영이 아니었다. 황녀(皇女)의 품위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성숙한 아름다움 이외에 고고한 기품을 갖춘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한 것도 있기는 했다. 주화영이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살며시 웃음을 건넨다. "문오빠......." 그제서야 영호천문도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너로구나, 화영." 주화영의 정결해 보이는 얼굴에 스르르 파문이 번졌다. "네, 그래요." "오랫만이구나." "그래요, 그토록 그리움에 연연했더니만......." "화영......!" 그녀의 솔직함에 영호천문은 저으기 당황했다. "전... 언제든 오빠에 대한 믿음만은 확고했어요." "믿음?" 주화영의 얼굴이 발갛게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오빠께서 저를......." 그녀는 잠시 우물거린 뒤에야 말을 이었다. "아껴 주실 거라고요." 영호천문의 팔이 활짝 열린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화영, 이리 와라." "오빠!" 두 남녀는 매화림 한가운데서 굳게 포옹을 했다. 이것은 누가 시키거나 혹은 배우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인간 본연의 자연스런 감정이 만들어낸 행위였다. 우수수....... 매화목에 쌓였던 눈송이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차갑다거나 불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현상을 통해 마치 축복을 받는 듯한 기분마저 맛보았다. 특히 영호천문 같은 경우에는 그 순간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친 고통과 고독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주화영이 그의 품 속에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이런 날이 오기를......." "화영." 영호천문은 그녀의 턱을 가볍게 치켜 들었다. 그리고는 희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소중한 보물을 보듯 내려다 보았다. "아름답구나. 이런 성장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말인가요?" 주화영의 얼굴은 이내 작약꽃처럼 붉어졌다. 영호천문의 따스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으음......." 주화영은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달큰한 그의 호흡과 숨결을 통해 그와 한층 더 가까워진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해요.' 비록 심중의 말이긴 하지만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그 말을 주인에게 제대로 전하고 있었다. 한편. 두 남녀 모르게 매화림을 스쳐 지나온 인영들이 있었다. "이제 태사감께서도 걱정에서 놓여날 수 있겠구려. 화영이 원하던 남편감과 해후했으니 말이오." "이게 다 단목형의 덕분이외다." "저 아이들, 혹시 진전이 너무 빠른 것은 아니오?" "나는 정말 몰랐소이다." "무엇을 말이오?" "단목형이 그렇게 꼭꼭 막힌 위인인 줄 말이오. 그래, 당신에게는 젊은 시절이란 것도 없었소?" "난 또 무슨... 허허허......!" 다른 음성이 거들었다. "하여간 천문, 저 놈이 두루 좋은 일은 많이 하고 다니는구려. 두 분께서 이처럼 농담하는 것도 구경할 수가 있으니." "그런가? 헛헛헛헛......."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자들, 불회십반천(不廻十返天)이 흐뭇하게 웃으며 객원(客院)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 편에는 얼음으로 깎아 만든 듯한 이남일녀가 함께 걷고 있었다. 철사후, 낙성후, 연봉봉 등이었다. 그들도 출관하여 확실하게 제 숫자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물론 영호천문의 내부에서 줄곧 함께 하던 힘, 그 본체인 주육풍화상까지 합쳐서 말이다. 좋은 밤이었다. 여러 의미에서....... ③ "천문, 그들을 거두게. 더 망설이지 말고." 천기신유 단목군의 음성은 단호했다. 영호천문. 그는 정실에서 불회십반천 전원에게 둘러싸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망설여서가 아니라 단목군이 무엇인가 더 말할 듯 여겨져 이를 경청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단목군은 눈에서 혜광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벌써 때가 늦은 감이 있네. 천중일정이 살아났다는 사실은 천하인 중 모르는 자가 없는 형편이 아닌가? 군마맹(君魔盟)은 자네의 복수를 위해 일어선 자들이거니와, 상황이 이런데도 자네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을 모독하는 것이 되네." "으음!" "더구나 사천(四川)의 현 정세는 화급지경이네. 군마맹과 잠마문(潛魔門)의 싸움은 진즉 해를 넘긴데다 어찌나 처절한지 그 땅이 시체로 산을 쌓고 피가 내를 이룰 정도라 하네." 단목군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소문대로 천안수사 제갈형은 병략(兵略)의 귀재로서 군마맹으로 하여금 잠마문의 구천마마군(九千魔魔軍) 중 근 육천을 살상하는 개가를 올리게 했네. 그러나 정사십절(正邪十絶)이 가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마맹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네. 그들의 전력도 반 이상 멸소되었다고 전해지네." 듣고 있는 동안 영호천문의 얼굴은 갈수록 굳어졌다. 그는 점차로 뜨겁게 끓어 오르는 심장의 피를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라고 왜 무심하겠는가? 군마맹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미리 작정해둔 바가 있었으되, 단목군으로부터 그들의 처경을 듣게 되자 그는 머뭇거리기는커녕 당장에라도 사천으로 달려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목군이 그 당위성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가게, 즉시 군마맹으로. 전세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네. 자네가 여기서 더 미적거리면 그 사이에 군마맹 전원이 사천에서 덧없이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르네."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란 달리 붙은 칭호가 아니었다. 그는 정세는 물론 상대의 심리 분석에도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자네를 직접 보게 되면 군마맹은 아마도 용기백배하여 이제까지보다 십배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이네." 영호천문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가야지요. 잠마문의 수령인 왕영(王永)의 목은 필히 제가 거두어야 하니까요." 그 말에서 단목군은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으음, 천문은 내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구나. 잠마문주에 관한 입장 정리도 끝낸 듯 하고. 정말로 사감(私感)을 벗어나 대정혼(大正魂)의 기치를 높이려 하고 있었군.' 그는 몹시 만족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자네 얘기를 들으니 우리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실혼인(失魂人)답게 멍하니 앉아 있는 철사후, 낙성후, 연봉봉 등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들을 데려 가게. 큰 힘이 될 테니까." 영호천문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럼 빙혼유라대법(憑魂幽羅大法)은 완성된 것입니까?" "그렇네만 섣부른 동정 따위는 하지 말게. 그건 애초에 저들이 원했던 바가 아니야."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알고 있네. 내 차제에 강조해 두네만, 혼을 잃었을지라도 저들은 현재 금강불괴의 무적고수가 되어 있네. 그런즉 자네가 저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란 그 힘을 마음껏 발산케 하여 저들로 하여금 한을 풀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일세." "으음!"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 자네는 저들을, 저들은 자네를 필요로 하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네." "모쪼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구천마마군이 저들의 첫 제물이 되겠지?" 단목군이 빙긋 웃자 영호천문도 마주 웃었다. "그럴 테지요." 그 대답을 끝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떠나겠습니다." "잠깐만, 천문." 단목군의 눈에 한 가닥 우려의 빛이 나타났다. "한 가지 노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네." "말씀해 보십시오." "그것은 정사십절(正邪十絶)이 어째서 뚜렷한 명분도 없이 군마맹에 가입했느냐는 걸세." "듣고 보니 그렇군요." 영호천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네. 자네는 그 점도 필히 염두에 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이때, 잠자코 있던 주화영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저도 문오빠를 따르겠어요." "화영, 너는......." 영호천문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곁에서 천병환사 혁련광이 껄껄 웃었기 때문이었다. "천문, 네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화영은 옛날의 철부지 계집애가 아니다. 무공이 반박귀진에 이르렀거든? 최소한 너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 거다." "반박귀진......." 영호천문은 신음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주화영의 눈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두고 그녀가 내공을 안으로 갈무리 할 수 있는 초상승지경에 이르렀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였다. 놀라운 것은 주화영 자체라기보다 어쩌면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녀를 이처럼 초절정의 고수로 만들어 놓은 불회십반천의 가공스러운 능력일지도 몰랐다. 영호천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정녕 하늘도 탄복할 만큼 비상한 재주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를 뒤흔드는 것조차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런 재주를 오로지 나 한 사람에게 죄다 쏟아붓고 있다.' 그는 깊은 감명을 받고는 이를 대신한 듯 불회십반천을 향해 깊숙이 포권했다. "그럼......." 그가 돌아서자 주화영과 실혼인이 된 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단목군이 그의 등 뒤에 대고 한 마디를 더 했다. "천문, 자네의 부탁은 잊지 않고 있으니 염려 말게. 전륜회의 일은 노부가 전력을 다해 알아 보겠다." '꼭 부탁합니다, 단목노선배.' 영호천문은 심중으로 답하며 정실을 나섰다. 그가 부탁한 전륜회의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그와 천기신유 단목군만이 아는 극비 사항이다. 대파산(大巴山). 사천의 북쪽 끝에 위치한 산을 이름이다. 산줄기를 이루는 험산준령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매일을 계속되는 잠마문과 군마맹의 혈전으로 인해서였다. 잠마문. 실로 공포스러운 집단이다. 살인을 취미로 삼는다는 희대의 대마인들이 구성요인으로 있어 일찌기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군마맹이 유일무이하게 그 금율을 깬 것이다. 그리고 양자 간의 전쟁은 그들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대파산 남쪽의 이름 없는 산곡(山谷). 언제부터인가 조용했던 이곳은 삼엄한 요새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군마맹이 여기에 진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기치와 천막들....... 오랜 싸움을 통해 산곡 전체가 하나의 병영으로 화해 있다. 그 곳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원형천막에서는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싸움을 끌어도 너무 끌었소, 부맹주(副盟主)." 천막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커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침중한 안색이었다. 개중 상석(上席)에는 청삼을 입은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도 안색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노인이 일어선 채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벌써 일 년이 넘은 지도 오래요. 그 동안 전력 손실도 컸지만 무엇보다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걱정이외다." 은근히 불만이 깃든 어조이다. 청삼중년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표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몹시 특이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의 눈은 보통 사람보다 배나 컸으며, 아무도 마주보려 들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신광을 흘려내고 있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흔치 않다. 바로 천안수사(天眼秀士) 제갈형(諸葛形)이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그를 두고 다른 인물이 왜 군마맹주가 아니고 부맹주라 부르냐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사실상 군마맹을 정신적으로 영도해온 것도, 그들을 통솔하여 싸움을 지휘한 것도 모두 그가 아닌가 말이다. 제갈형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가운데는 군마맹의 영수급 인물들을 포함하여 과거 복마엽주에게 패한 후 그의 기질에 반해 따르기로 맹세한 기인들, 거기에 보태 새롭게 군마맹에 가입한 정사십절의 지존들 등이 전부 모여 있었다. 방금 일어서 말을 한 자는 천우방(天宇幇)의 방주로서, 천우방도 정사십절 중 일절이었다. 제갈형은 천우방주의 말에 가타부타 말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상대방이 뻔한 얘기를 놓고 중인들 앞에서 따지듯 말하고 있으니 달리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와중에서도 풀리지 않는 하나의 의혹이 계속하여 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정사십절은 차례로 본맹에 가입해 오면서도 저마다 약속이나 한 듯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우리와 뜻을 함께 한다고 믿어도 되는 건가?' 정사십절은 뒤늦게 일어난 신흥세력답게 모두가 야심만만한 문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무조건으로 자진하여 가맹해 온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제갈형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으음! 이것이 내 능력의 한계겠지. 저들이 어떤 의도로 다가왔던 거부할 수 없었듯, 어떤 식으로 나를 몰아부치던 현재의 나로서는 거기에 정면 도전하고 나설 만한 뒷심이 없다.' 그는 이어 간절한 심정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텐데.......' 그러는 사이, 중인들은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가장 우선적이고도 큰 문제는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의 명분이 흐려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영호천문이라는 인물의 죽음이 주요 관건이었거늘, 그가 살아 있으니 설사 전의(戰意)가 상실된다 한들 제갈형으로서는 그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어쨌거나 잠마문과의 싸움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군마맹은 달리는 말 잔등에 올라 탄 형세에 놓여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 분의 복수가 목적이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림의 수호자로 의미가 확대되어 이대로 주저앉을 처지가 아니다. 전 무림에 미칠 파급효과를 생각해 보면... 끙!' 골치가 지끈거리던 끝에 그는 중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다들 자숙하시오. 복마엽주께서 생존해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소. 머지않아 그 분께서 현신하실테니 그때까지 버텨 봅시다." 천우방주가 다시 들고 일어섰다. "대체 그게 언제오이까? 그 분은 우리 군마맹의 일보다는 다른 일로 더 분주하신........" "닥치시오! 만사 다 순서가 있는 법, 내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분을 모욕하는 언사만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소." 제갈형은 노호했다. 그것은 그의 본심이기도 했지만 이 순간 그가 내밀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천우방주를 비롯한 중인들도 잠잠해졌다. 풀이 죽은 천우방주가 민망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말을 했다. "하긴, 엽주께서 오신다면야......!" '약삭빠른 놈! 네가 그 분과 일면식이나 있느냐?' 제갈형은 내심 냉소했으나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렇소. 그 분께서 오시면 판도는 대번에 달라질 것이오.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냅시다." 더 이상 이의를 다는 자는 없었다. 이로써 회의는 끝났고, 중인들은 서로 인사를 건네는 등 잠시 동안의 부산을 거친 후에 모두 자리를 떴다. ④ 천안수사 제갈형. 그는 혼자 남게 되자 맥이 빠져버린 듯 호피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물심양면(物心兩面)에 걸친 오랜 소모전 탓인지, 그는 극심한 피로감이 전신으로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허허... 나도 늙었는가?'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무거운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스슷--! 그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제갈형은 언뜻 자신의 주위로 한 가닥 한풍이 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워낙 피로하기도 했거니와 설마하니 삼엄한 진영의 경비를 뚫고 중심부인 이곳까지 침입자가 스며 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믿음은 웬 탄식성에 의해 깨졌다. "제갈형(諸葛兄), 정녕 노고가 많으시구려." "감히!" 제갈형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반응만은 지독히 빨랐다. 파앗--! 그는 호피의자에서 튕겨오름과 동시에 검걸이에서 애검(愛劍)인 백인검(白忍劍)을 뽑아 검집째로 소리난 곳을 갈랐다. 그러나 제갈형이 갈라 친 곳은 단지 허공에 불과했다. 덕분에 몸의 중심이 흔들려 마구 휘청이던 그가 간신히 신형을 바로 잡았을 때였다. "하하... 제갈형, 정말로 나를 몰라 보시겠소?" "아!" 제갈형은 탄성을 발하더니 굳어지고 말았다. 그 음성의 주인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엽주(葉主)......!" 그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생각도 않고 빙글 돌아서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엇인가 가슴에 전해져오는 강한 울림이 있어 그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제갈형!" 그의 앞에서 감격해마지 않는 사람은 복마엽주, 즉 영호천문이었다. 그 뒤로는 주화영과 실혼삼인(失魂三人)이 서 있었는데, 싸늘한 기운은 실혼삼인에게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도... 돌아 오셨군요......!" 천안수사 제갈형은 달라져 있는 영호천문의 얼굴을 보았을텐데도 의혹 따위는 일점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풍도로써 상대의 실체를 느낀 그는 눈에 벌써 눈물까지 담고 있었다. "그렇소, 제갈형. 염려해 주신 덕분에......." 영호천문도 무릎을 마주 꿇으며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손과 손이 서로를 굳게 움켜잡은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사이로는 천하를 질타하는 두 영웅의 피보다 진한 우의와 충절이 흐르고 있었다. "설마 오늘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영호천문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미안하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모쪼록 용서를 바라오." "당치도 않습니다. 용서라니요, 저희 형제들이 애초 무엇 때문에 뭉쳤는데 감히 그런 것을 논하오리까? 더구나 건재하신 엽주의 모습을 뵈니 지금 죽는대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갈형......."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윽고 영호천문은 그에게 일행 중 주화영을 소개했다. "이 낭자는 나의 은인 중 한 분이외다." 그리 말해도 제갈형의 두뇌는 그 두 남녀가 현재 어떤 사이인지 금세 알아 차렸다. 기이한 것은 그의 반응이었다. 그는 왠지 난색을 짓더니 약간은 굳어진 기색으로 포권했다. "제갈형이라고 하오이다." "소녀는 주화영이에요." 주화영도 상대의 기색이 과히 좋지 않으매 어색했는지 꽤 굳어 보였다. 어쩌면 그녀가 당한 것은 푸대접인지도 몰랐다. 영호천문은 철사후, 낙성후, 연봉봉 등은 일부러 소개하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그들을 위해 나을 것이므로. 이어 그는 제갈형의 권유에 따라 호피의자에 앉았다. 그를 향해 먼저 입을 연 것도 제갈형이었다. "주군의 행적에 대한 소문은 계속 들어 왔습니다. 만통회를 세우고, 황금전을 멸절시키셨다고." "그렇소." 영호천문은 만면에 은은한 고통을 떠올렸다. "그것은 다 지난 일일 뿐이오. 그보다 당면한 문제를 얘기합시다. 최근 잠마문의 동태는 어떻소?" 제갈형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동태랄 것도 없습니다. 긴 싸움으로 피차가 다 지쳐 있을 따름입니다. 전력(戰力)으로 친다면 본맹이 훨씬 약세이며 정사십절 덕에 간신히 평수(平手)를 유지해 온 실정입니다." 영호천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그들 십절의 가입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심히 죄송한 말씀이나 그건 속하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 그럼?" 제갈형은 사뭇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십절의 가맹은 군마맹주(君魔盟主)가 주관하신 일입니다." "으음......." 영호천문은 신음성을 흘려 내고는 다시 물었다. "군마맹주란 누구요?" 제갈형은 주화영을 슬쩍 건네다 보더니 답했다.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아마 주군께서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 분은 천하에서 주군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지요." 영호천문은 미간을 모았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실상 그 분은 군마맹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를 만날 수 있소?" 제갈형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잠마문을 무너뜨리게 되면 모든 일을 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굳이 만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는 그 분께서 특별히 저를 통해 당부하신 사항입니다." "으음......!" 영호천문은 다시금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현재로선 군마맹주가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이제부터는 설사 최악이라도 무방하니 전황을 구체적으로 들려 주시오." "그것은......." 제갈형은 그의 요구에 따라 그 간의 전황을 얘기하며 덧붙여 잠마문의 전력과 조직, 대파산의 잠마문 보루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영호천문은 세이경청(洗耳傾聽)하며 들은 바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 속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단안을 내렸다. "제갈형, 나는 내일 밤 잠마문으로 들어 가겠소. 형께선 공격준비를 해 두시오. 신호를 보내면 즉시 따를 수 있도록." "내일 밤이라셨습니까?" 제갈형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안됩니다. 하루 정도로는 준비도 불가능하거니와, 어찌 엽주께서 단신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영호천문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으므로. "후후... 충분하오. 나에게는 일천의 정예군보다도 더 막강한 방수가 있으니까." 영호천문의 말에 제갈형은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주화영에게로 돌렸다. 학처럼 고고해 보이는 이 여인은 몹시도 가녀린 체격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가 한없이 크고 맑았다. '어디로 보나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 문득 제갈형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들이 나타날 때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자신을 깨달은 것이었다. '맙소사! 그럼 이 여인의 무공이 반박귀진에 도달해 있단 말인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는 시선을 돌려 이남일녀(二男一女)를 응시했다. 그들은 무표정하고 창백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신색은 인간같지도 않았다. 으스스한 귀기(鬼氣)와 냉기가 그들로부터 연신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이제 보니 이들은 모두 실혼인들이 아닌가?'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이들의 힘이 있어 충분하다고 한 것이오. 나는 예정대로 내일 밤 잠마성으로 잠입해 들어 가겠소. 이후로 불길이 치솟으면 그 때 총공격하시오." "엽주......!" 영호천문은 몸을 일으켰다. "후후후... 걱정 마시오. 나는 군마맹주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틀림없이 성공할 테니까." 그는 손을 저었다. 스스스....... 그를 위시하여 주화영과 실혼삼인의 모습이 모두 흐려졌다. 그러더니 그들 다섯 명은 동시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 제갈형은 그들의 놀라운 신법에 멍해지고 말았다. 벌써 천막 안에는 자신 밖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엽주의 무공은 과거보다 몇 배나 더 고강해지셨다." 그는 안면에는 어느덧 소리없는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맹주께서도 오늘 이 일을 아시면 몹시 기뻐하시리라. 다만 그 주화영이란 낭자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천안수사 제갈형의 이마에 잠깐 그늘이 드리워졌다. 제 25장 친구를 죽여야 하는 이유(理由) ① 잠마문(潛魔門)은 대파산 선인봉(仙人峯) 정상에 흑석(黑石)으로 침침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휘류류륭--! 산봉을 스치는 북풍(北風)은 살을 도려낼 듯이 차가웠다. 희대의 마역이 선인(仙人)이 하강한다는 선인봉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음산한 귀기와 살기에 싸여있는 잠마문의 성보는 천하를 집어 삼킬 듯 무서운 기세였다. 스스스슷--! 환영인 양 몇 가닥 흑선이 칠흑같은 야공을 가로질러 우중충한 잠마문의 성벽을 뛰어 넘었다. 다음 순간, 실로 놀라운 사태가 발생했다. "크아아악--!" 죽음같은 적막을 찢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곧 굉렬한 폭음과 어우러졌다. 꽈르릉--! 꽈꽝--! 연이어 요란한 병장기들의 마찰음과 고함성 등도 가세했다. 차차창--! "막아라! 적(敵)이닷--! 끄악!" 잠마문의 인물들이라면 통상 인간백정들로 불리우는 자들이다. 그들이 대체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길래 한밤중에 담 밖으로 이런 소란을 전달한단 말인가? 성채를 이룬 담장의 안쪽. 과연 이곳에서는 굉장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차창! 슈우욱-- 펑--!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인영이 다급하게 날뛰고 있었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불시의 기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희대의 마인들이 우글거리는 잠마문에 침입한 자들은 고작해야 오 인(五人)에 불과했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다. 겨우 다섯 명이 용담호혈에 뛰어 들어 혼란을 야기시켜 놓은들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지.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무위(武威)는 섣부른 판단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하핫......! 인간백정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마!" 자삼의 한 청년이 팔다리를 펼치니 번쩍 섬광이 인다. 슈슈슈슉--! 그의 몸에서는 동시에 다섯 갈래의 검광(劍光)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더니 가공할 사태를 불렀다. 파파파팍--! "크아아악--!" 잠마문의 마인들은 눈이 달려 있는 듯 정확히 쏘아져 오는 검인(劍刃)에 격중당하여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져 갔다. 어떤 자는 목이 잘리웠는가 하면, 어떤 자는 복부가 뚫렸으며, 또 어떤 자의 심장을 관통한 무형(無形)의 검인은 그 기세로 다시 다른 마인에게로 쏘아가기도 했다. 그것은 신기(神技)였다. 전설의 이기섬검제인술(以氣閃劍制刃術)조차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절학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핫핫핫......!" 자삼청년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마인들의 귀에는 그야말로 염왕(閻王)의 부르짖음으로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떨쳐낸 다섯 줄기의 무시무시한 무형검기류는 일단 보이지 않으니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호호호호......." 선녀(仙女)의 웃음처럼 청아한 여인의 웃음소리는 더 섬뜩한 위협이었다. 그것은 향기로운 죽음의 유혹과도 같았으므로. 눈부신 백삼을 입었으며 지극히 빼어난 미인이다. 그녀가 섬섬옥수를 꽃잎처럼 살랑살랑 저을 때마다 마인들은 썩은 짚단이 무너지듯 허물어져 갔다. "크으으윽--!" 그녀의 손이 스치는 곳에는 의례 미세한 암기들이 쏟아졌고, 미풍과 같은 장풍은 그들의 심장을 여지없이 으스러뜨렸다. 그러나 이 미녀의 신랄한 공격도 눈에 초점이 없는 괴이한 이남일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양손을 뻗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괴변이 일어났다. 쩌엉! 쩡! 쐐......! 얼음이 쪼개지는 듯한 음향과 더불어 그들의 장력이 스치는 곳에는 의례 허연 얼음의 조각(彫刻)이 생기곤 했다. 미처 비명을 지르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마인들은 그 장력을 받는 순간에 뼈 속까지 얼어 버려, 인간이 아닌 그저 한 덩어리의 얼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장내는 삽시에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다. 잠마문의 마인, 아니 마마군들은 도무지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오 인의 공격에 모두 낯빛이 허옇게 질려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오 인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으하하하핫......!" "호호호......!" 슈슈슉--! 쩡! 쩌엉--! 그것은 끝없이 참혹한 죽음을 불렀다. "으아아악--!" 죽음은 최소한 이곳에서만은 공평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인간도살을 업(業)인 양 즐겨 오던 잠마문의 마마군들이 지금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죽어갔던 자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자신의 것인지, 동료의 것인지 구분이 안되는 비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삼청년이 일순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달빛이 투영시킨 그 창백한 얼굴의 주인은 영호천문이었다. 슈욱--! 그의 소매에서 붉은 광채가 날아갔다. 펑--! 그것은 높은 누각에 적중되어 폭음을 일으키더니 대번에 시뻘건 불기둥으로 화했다. 칠흑같은 야공에 드높이 솟구쳐 오르는 그 불기둥은 수십 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도처에서 함성이 터져 올랐다. "와아아아--!" 언제 매복을 하고 있었는지 성채의 바깥 쪽으로부터 무려 수천에 이르는 군마맹의 고수들이 무서운 기세로 잠마문을 덮쳐오고 있었다. 이른바 최후대전(最後大戰). 그 막은 이렇게 오르고 있었다. 꽝! 꽈르르릉--! 잠마문이 온통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필두로 하여, 잠마문과 군마맹의 사상 최대이자 마지막 격돌이 이루어졌다. 차차차창--! 꽈르릉--! "으아아아악--!" 그것은 일대 난전(難戰)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대혈전이었다. 양측 모두가 승리를 거머쥐려 무섭게 분투했다.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것은 자파의 존망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한 사람. 그는 높다란 성루(城樓)에서 화염에 휩싸인 성보와 아비규환의 혈전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일신에는 피처럼 붉은 혈의(血衣)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 도 의복에 못지 않게 붉은 혈면(血面)이었다. 일찌기 이 시대가 그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 놓았다. 혈면인도왕(血面人屠王) 왕영(王永). 그는 구정(九鼎)의 일인이자 잠마문의 문주(門主)이다. 그의 목에는 핏빛 인두(人頭)로 이루어진 목걸이가 걸려 있으며, 손에는 혈혈고루장(血血 樓杖)이 쥐어져 있다. 왕영은 점차 불바다로 화해 가는 잠마문에 시선을 내맡긴 채 스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후후후...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나 왕영, 그때 네 인두를 취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그러자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파고 들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왕영." "으음, 왔구나!" 왕영은 다소 굳어지긴 했으나 꽤 침착한 태도였다. 이어 그는 전신이 미미하게 떨리는 와중에도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마치 뭔가 중요한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듯. 그의 눈길이 정지된 곳은 한 대전의 지붕 위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영호천문이 서 있었다. "천문." 왕영은 한눈에 상대를 알아 보았다. 비록 얼굴이 달라져 있기는 했지만 그 이외의 다른 친구들도 그러했듯 풍기는 기질에서 옛 친구의 모습을 발견해 낸 것이었다. "별로 변함이 없군." 이것은 왕영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그는 상대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스읏--! 영호천문은 빛살처럼 날아와 왕영의 맞은편에 내려섰다. 그는 오랜 갈등 끝에 얻어낸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왕영, 오랫만이다." 왕영은 붉은 기가 감도는 그 특유의 눈으로 영호천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후후... 살아 있으니 만나게 되는구나." "미안하군. 이렇게 살아 있어서." "입담도 여전하고. 후후후... 그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화중부도, 만겁전도, 황금전도 모두 너의 짓이겠지?" 영호천문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왕영이 혼자 중얼거렸다. "사자림의 봉공이자 전륜회의 부회주인 무심도 냉천, 멋진 변신이었어. 후후... 그 덕분에 만겁전이 송두리째 날아갔지. 아무리 생각해도 넌 대단한 놈이다, 천문." 그는 자책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면 나는 바보였다. 네가 구정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최근 황금전이 무너졌을 때에야 네 존재를 알았다. 그것도 소문을 통해서 말이다." 잠자코 있던 영호천문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일신의 야망에만 너무 집착한 결과다. 대세의 흐름에 눈이 어두우면 얻어지는 것이 없는 법이지." 그는 손을 들어 화광이 충천하는 잠마문을 가리켰다. "자, 이제 잘 보아라. 네 야망이 어떻게 소멸되어 가는지를." ② 왕영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그러더니 그는 목에 걸고 있던 인두목걸이를 벗어 보였다. 절그럭......! "후후훗... 천문,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글쎄." "이 목걸이는 백팔 개의 인두로 되어 있다. 그것도 내가 만난 자들 중 가장 강한 놈들의 인두를 축소시켜 만들었지." 정녕 끔찍하기 그지 없는 소리였다. 한 개의 목걸이에 백팔 인의 수급이 소용되었다니, 그러고도 이를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왕영의 정신상태가 온전한지는 알 길이 없었다. "후후후... 천문, 나는 그 동안 이것으로 비장의 절기를 하나 창안해냈다. 원래는 용천후를 상대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대상이 너로 바뀌었구나." 영호천문은 빙긋 웃었다. "너는 이전에도 여러 가지 괴상한 무공들을 창안해 내곤 했었지. 그래, 이번에 창안했다는 무공은 무엇이라 부르느냐?" "백팔지옥마루(百八地獄魔樓)!" 대답과 함께 왕영은 목걸이를 던졌다. 촤르르륵--! 그러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갑자기 주위가 시뻘건 혈무(血舞)로 휩싸여 버렸으며, 이로 인해 영호천문은 대번에 시야가 꽉 막혀버리는 위급한 사태와 직면해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오오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백팔 개의 인두로 엮어졌다는 목걸이, 그 축소된 인두 밖에 없었는데 그것들이 제각기 흩어지더니 입을 쩍 벌리며 공격태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우우! 지독한 마공(魔功)이군.' 사실이었다. 인두는 그 자체가 무섭다기보다 사악한 마기(魔氣)로써 위협을 가해 왔고, 이때문에 영호천문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신의 공력을 극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크하하핫! 덤벼라, 어서!" 왕영의 저주에 찬 음성이 꿈결인가 싶게 들려 오더니, 그 뒤로 심혼을 뒤흔드는 음산무비한 휘파람소리가 이어졌다. 삐이이-- 익--! 백팔 개의 인두는 급기야 사위에서 가공할 기세로 영호천문을 짓쳐왔다. 자욱한 혈무에 갇힌 가운데 이런 공격을 당한다는 것은 지옥경(地獄境)에 처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쐐애애액--! 영호천문은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슉--! 여지없이 여의무형인이 날아갔다. 동시에 그것은 다섯 개의 인두를 정확히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 도를 더 했다. 다섯 인두는 구멍이 뻥 뚫린 채로 아까보다 더 빠르게 공격해 왔다. '이럴 수가!' 퍼펑! 꽝--! 폭음과 함께 격돌이 있자 영호천문은 전신의 피가 모조리 역류해 버리는 것을 느꼈다. 한 마디로 여의무형인은 왕영의 마공에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호천문은 이를 악무는 한편, 양화진력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금광이 뻗어나온 것은 이때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빠른 속도로 신형을 회전시키며 손바닥을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꽝! 꽈꽈꽝--! 영호천문의 수중에서 무려 수십 갈래에 이르는 뇌전(雷電)이 뻗어 나가 백팔 개의 인두를 모두 날려 버렸다. "으으으! 그건 대체 무슨 무공이냐?" 왕영의 자지러지는 음성이 혈무 속에서 들려 왔다. 왜 아니겠는가? 백팔 개의 인두, 즉 백팔지옥마루는 뇌전을 맞자 하얗게 변하더니 형체도 없이 으스러져 버렸던 것이다. "하하하핫......!" 영호천문이 대소를 터뜨리는 동안 혈무는 그 기세를 잃었는지 씻은 듯 걷히고, 참담해진 왕영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이젠 네 차례다, 왕영." 영호천문은 쌍장을 좌우로 벌렸다. 그러자 하늘의 뇌신(雷神)이 몸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그의 장심에서 뇌전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꽈르르릉--! "크헉!" 연이어 죽음의 적막한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휘류류륭-- 혈면인도왕 왕영. 본래의 혈면이 자주빛으로 변한 그는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으으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백팔지옥마루는 가루가 되어 인세에서 더 이상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그가 필생의 노력을 바쳐 연성했던 마공도 체내에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것들은 왕영의 전부였다. 그의 영(靈)과 함께 전 공력이 바로 거기에 투자되었으므로. 따라서 마공이 깨지면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진배 없었다. "천문, 네가 이겼다." 그는 말을 한 뒤, 검붉은 피를 한 모금 울컥 토했다. "우욱!" 하지만 눈 앞에서 옛 친구가 쏟아낸 선렬한 피도 더 이상 영호천문을 동요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는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눈으로 왕영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만 죽어야겠구나, 왕영." 왕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이니까. 네 손에 죽게 된다는 것만은 조금 예외지만. 후후후......." 왕영에게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호천문은 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잠마문. 그 마역은 바야흐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병장기 부딪는 소리도, 비명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싸움은 끝난 것이다. 화마(火魔)도 거의 잦아 들어 지금은 시커먼 연기를 허공으로 뭉클뭉클 피워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왕영이 말했다. "완벽한 패배로군. 애당초부터 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결과가 이 정도일 줄은......." 영호천문이 그 말을 받았다. "아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다." "후후후... 복수심이 그만치 처절했다는 뜻이냐?" 왕영의 자조적인 웃음에 대해 그는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그런 것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이다. 너는 내가 단지 복수를 하기 위해 이곳에서 싸웠다고 생각했느냐?" "그럼 아니었단 말이냐?" 의아해하는 왕영을 향해 이번에는 영호천문이 웃었다. "후후... 스스로 바보라고 칭하더니 왕영, 너는 아직도 정말 어리석구나. 내 복수심은 어느 때부터인가 기세를 잃었다. 왜냐하면 그래봐야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고작해야 지독한 회의와 환멸 뿐......." "그렇다면 왜......?" "너, 나아가서는 잠마문이 너무도 많은 죄업을 쌓았으니까. 나는 내가 아닌, 전체를 위해 너를 필히 응징해야 되었었다." "크ㅋ!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군."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왕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무기인 혈혈고루장을 들어 올렸다. "큭큭... 야망이란 마약과도 같지. 나는 그 달콤하고도 독한 꿈에 취해 정말로 황홀했던 때도 있었다." "으음!" "후회되는 부분도 있기는 했었다. 옛날 일들......." 그는 영호천문을 힐끔 건네다 보았다. "천문, 기억나느냐? 십상천(十相天) 사부들." "너......!" 영호천문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분들 얘기는 무엇하러......?" "죽을 때가 되니 그 분들이 그리운 모양이다. 빌어먹을!" 왕영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실수는 그때부터였어. 놈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데." 그의 눈에 언뜻 슬픔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를 조심해라, 천문. 용천후는 무서운 놈......." 퍽! 피가 사위로 확 뿜어졌다. 놀랍게도 왕영이 스스로 혈혈고루장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 친 것이었다. 실로 대마인(大魔人)다운 최후라고나 할까? 더구나 그의 신체는 머리가 으스러지고도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왕영......!" 영호천문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왕영의 주검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역시 크나큰 비애와 고통이었고, 이는 그가 아무리 다스리려 해도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정(鼎)이라는 운명의 이름을 가진 또 한 명의 친구를 죽였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고는 하나 동기를 부여했으므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모두 여섯 명을 내가.......' 그는 왕영의 시신을 더 보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 다음 순간, 왕영이 서 있는 성루에 불길이 확 일더니 그의 시신을 뒤덮어 버렸다. 이 시대의 최고의 대마왕이었던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③ 잠마문의 붕괴로써 한 사람의 이름은 무림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부동의 것으로 되었다. 천중일정(天中一鼎) 영호천문. 그 이름은 무림인들의 가슴에 보다 확실한 낙인을 찍어 놓기도 했다. 그가 불사조처럼 어둠 속에서 되살아 나와 오늘의 업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연일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은연중 천하제일정(天下第一征)의 위치를 굳혀가는 것일까? 만통회(萬通會)와 군마맹(君魔盟)이라는 날개를 양쪽 어깨에 달고 있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무림인들 중에는 심지어 그를 두고 존(尊)의 의미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한다. 실상 중원무림은 새롭게 양분(兩分)된 상태였다. 전륜회(轉輪會)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정적인 위치를 지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자림(獅子林)을 대신해 대금마성(大禁魔城)이 서서히 굳건한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점에서 증발되었던 사자림이 대금마성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금마성은 마인들이 감금되어 있는 뇌옥으로써 규모나 세력이 어느 정도이냐를 떠나서 일개인이 주관하는 단체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정사이천 중 하나였던 사자림이 어찌 고개를 꺾고 그들에게 병합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에 무림인들은 모두 불길한 전조를 느끼는 한편, 대금마성의 성주인 천마진혼등 마야(魔爺) 용천후에 대해 은근히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야 용천후는 무림에서 아직껏 신비의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정인(正人)인지, 아니면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는 마인(魔人)인지 아무도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인들은 그가 지녀온 이 신비감을 통해 먹구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오랜 식견과 경험이 벌써부터 대혈겁(大血劫)의 무서운 조짐을 읽어낸 것이었다. 사자림을 병탄하고도 대금마성은 여전히 잠잠했다. 무림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표면적인 평화에 지극히 안도 내지는 의존까지 하면서도 사람들은 못내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그들의 이러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려했던 바대로 마야 용천후로부터 실로 통천경악할 사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 대금마성이 무림제패(武林制覇)를 선포했다. - 대금마성은 스스로 무천대성(武天大城)으로 개칭했다. - 마야 용천후가 무림왕(武林王)을 자처한다. 비로소 마의 탈은 완전히 벗겨졌다. 오랫동안 신비에 가려져 있던 마야 용천후와 그의 배경인 대금마성이 공개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비밀로 감추어졌던 그들의 전력(戰力)은 사상 초강(超强)으로서 마(魔)의 힘이 모두 무천대성에 집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마야 용천후가 지금까지 무림제패(武林制覇), 무천대성(武天大城), 무림왕(武林王) 등의 용어를 코에 걸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해 왔는가를 실증해 주는 예였다. 결국 무림은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전륜회와 만통회, 군마맹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마야 용천후와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인물, 즉 천중일정에게 모든 기대를 쏟았으니....... 바야흐로 무림은 폭풍전야(暴風前夜)였다. 만통장. 밀실(密室)에서 세 명의 인물이 대좌하고 있었다. 정도 세력의 대들보나 다름이 없는 천기신유 단목군과 천안수사 제갈형, 그리고 천중일정 영호천문 등이었다. 단목군이 탄식을 불어냈다. "그래, 혼자 가겠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영호천문의 어조는 결연하기 그지 없었다. 전례로 보아 그가 이렇게 나올 때에는 아무도 그의 뜻을 바꾸어 놓지 못했었다. 단목군은 그의 어떤 면에 대해서든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알겠네. 더 말려 보았댔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는 씁쓸히 웃으면서도 염려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노부는 왠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군." 단목군은 힐끗 천안수사 제갈형을 바라보았다. 제갈형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줄곧 침중한 표정이더니 그의 시선을 받자 바늘에 찔린 듯 움찔 하며 고개를 푹 꺾었다. "단목선배님, 못난 후배를 벌해 주십시오. 이 모두가 다 제 불찰로 인해 비롯된 일입니다. 사태를 되돌이킬 수만 있다면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단목군은 그 말을 부인했다. "아니야. 그건 그렇지가 않네. 이 일의 저변에 깔린 음모는 노부로서도 예측할 수가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네." 제갈형은 고통스러운 듯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아! 애초 정사십절이 본맹에 가입하고자 제안해왔을 때부터 후배는 좀더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맹주에 대한 신뢰가 저를 맹목(盲目)으로 만드는 바람에......." "허허허... 자네의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야. 더구나 지난 일일세. 너무 괴로워하지 말게나." 단목군은 그를 위로하는 한편, 자위도 빼놓지 않았다. "인간사란 인위적으로 어찌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야. 아무리 기를 써도 하늘의 이치를 벗어날 수는 없으이." 이는 바꾸어 말하면 단목군도 방향만 다를 뿐이지, 제갈형 이상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극한 애정과 관심이 깃든 눈으로 혼자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영호천문을 넌즈시 바라보았다. "천문, 노부는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네. 현재 상황에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것이 무에 도움이 될까만, 이번 일에는 분명 흉살(兇殺)이 끼어 있네. 그러나 자네가 단명(短命)의 상이 아닌 것만은 자신할 수 있네." 영호천문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크게 도움이 되는군요. 두 분 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잘 될 것입니다. 어차피 저에게는 그녀를 필히 만나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영호천문은 그 선에서 말을 맺고는 화제를 돌렸다. "녹지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목군이 답해 주었다. "용천후는 효웅이기는 하나 간웅(奸雄)은 아닌가 보이. 약속을 지켰네. 그 아이는 벌써 돌아와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그의 말마따나 녹지주는 영호천문이 왕영을 제거한 후에 돌아왔다. 용천후가 곧바로 만통회로 보냈던 것이다. 영호천문은 그녀를 아직 만나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단목군이 그녀를 어딘가로 다시 보냈기 때문이었다. "허허... 전륜회의 일은 염려 말게. 노부가 알아서 할 테니." 질문과는 잘 연관이 지어지지 않는 엉뚱한 말이었으나 영호천문은 그 뜻을 헤아렸는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영호천문과 단목군. 두 사람 간의 교감(交感)은 완벽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호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일찍부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태사감 위성공과 함께 이 사람, 즉 천기신유 단목군이라는 사실도 물론 작용했다. 각설하고. 시점을 약간 돌려 설명하자면 상황은 이러하다. 영호천문은 사실상 오랫동안 전륜회를 떠나 있었다. 하지만 전륜회에서는 아직 그의 부재(不在)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표면상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영호천문이 직접 나서서 황금전과 잠마문을 괴멸시킨 것은 진즉부터 천하에 공공연히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듯 맹활약을 벌이는 동안에도 그렇고, 심지어 현재까지도 그의 변신인 무심도 냉천은 꼬박 전륜회 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지금 존재하는 무심도 냉천이 가짜(?)라는 말인데,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무슨 속셈인지 그의 정체에 대해 일체 함구 중이었던 것이다. 실상 제이의 무심도 냉천이 전륜회로 투입된 것은 단목군의 안배로써 백리성우는 이를 뻔히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최소한 가까운 수하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으니, 이르자면 서로 속셈이 다른 공범이라고나 할까? 단목군의 눈이 신비롭게 빛났다. "전륜회에는 엄청난 비밀이 감추어져 있더군. 노부는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 전륜대제와 암중으로 심리전(心理戰)을 벌이고 있는 셈이야. 흠, 이제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노부가 반은 이긴 것 같으이. 확증만 잡으면 되는 단계니까." "이래저래 저 때문에 노고가 많으시군요." 영호천문은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가슴이 걷잡기 힘들 정도로 두근거렸다. 대체 그가 특별히 단목군에게 부탁하여 알아 내고자 했던 비밀이 무엇이길래......? 단목군도 빙그레 웃었다. "허허... 노고는 무슨. 공치사는 사양하겠네. 아직 끝을 본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무사히 돌아와야 하네. 그때까지는 노부도 확증을 잡아 놓고 있겠네." 영호천문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 떠나겠습니다." 제갈형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주군, 부디 조심하시기를......."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었다. "염려마시오, 제갈노형." 그는 제갈형의 손을 한 번 굳게 잡아 준 후, 단목군에게 포권했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성큼성큼 밀실을 빠져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단목군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염려의 기색이 가득 찼다. "천문, 자네가 이번의 겁(劫)을 잘 넘길 수 있을까?" 제갈형 역시도 초조감을 이기지 못해 손을 비비고 있었다. 영호천문에 관한 한 이들 두 사람의 감정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서 혈육 이상의 정(情)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 26장 두번째 죽음의 의미(意味) ① 계절은 끝없이 돌고 돈다. 그토록 무섭게 추웠던 겨울도 어느덧 물러가고 산하(山河)는 봄빛으로 물들었다. 끝없는 무림의 혈사(血史)도 화사하고 온묘로운 봄의 햇살에는 무력했다. 피어오르는 꽃망울과 초목(草木)들의 찬란한 초록빛에 도저히 그 피비린내를 감추지 않고는 못견디었으니까. 봄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인간의 추(醜)함도, 비겁함도, 심지어 그들이 만들어낸 배신의 역사까지도 봄빛 아래서는 모두 아름답게 가려지고 만다. 강남(江南). 동정호(洞庭湖)의 푸른 물빛도 춘광을 받아 더욱 푸르다. 자고 이래로 강남을 물의 땅이라 하거니와, 장강(長江)의 수많은 지류(支流)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들이 이곳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운 풍광으로 빛나게 하므로. 어허야 디야 인생이 별거더냐? 어허야 디야 고기 잡아 손자놈의 노리개나 사 주면 인생의 낙(樂)이 아닐쏘냐? 어허야 디야 뱃노래가 들린다. 동정호변은 무척이나 활기를 띠고 있었다. 피로 점철된 무림의 역사는 이곳 사람들과 무관했다. 드넓은 동정호에 생업을 걸고 있는 어부들은 저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물을 손질하건, 혹은 배를 띄우건, 그들의 거친 손마디와 건강한 가슴 속에는 오직 평범한 행복의 의미만이 살아 숨쉬고 있으리라. 영호천문. 그는 언제부터인가 언덕에 올라선 채 넋을 잃은 듯 고기잡이 배들이 출항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의 안위를 한몸에 걸머쥐고 있는 사람, 무림인들은 그를 천중일정이라 부르며 운명을 결정지워 버렸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아 준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일 이제라도 누가 그것을 묻는다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생(生)의 아름다움은 평범 가운데 있소. 거칠거칠한 베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어부들은 종내 돛을 올리더니 힘차게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해동(解冬)과 함께 갖게 된 첫 출조(出漕)인 것 같았다. 영호천문은 그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오랜 세월에 걸쳐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는 물론, 탄탄한 근육에서 펄떡펄떡 뛰고 있는 듯한 살아 있는 자의 기쁨이 말이다. 그들에 비한다면 지금의 그는 고뇌로 인해 영(靈)과 육(肉)을 동시에 잠식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위인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자신이 판단하기로는.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군." 말마따나 영호천문은 마침내 단신(單身)으로 강남까지 왔다. 천기신유 단목군과 천안수사 제갈형의 염려를 물리치고 스스로 운(運)을 시험하기 위해 이곳 땅을 밟게 된 것이었다. 목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군마맹의 맹주(盟主)를 찾아가는 일이다. 그 정체에 대해 영호천문은 이렇게 말한다. "한때 나를 사랑했고, 나를 버렸던 여인......!" 즉 군마맹주가 여인이라는 얘기다. 슷--! 그의 신형이 햇살을 받아 금빛 잔영을 뿌리며 사라져 갔다. 동정호 기슭의 한 언덕. 영호천문은 한 줄기 바람인 양 그 야트막한 언덕을 날아 오르고 있었다. '이 도화둔(挑花屯)에 그녀가 있다고 했다.' 스스슷--! 언덕의 이름이 그러하듯 그의 코 끝으로 무르익은 도화향기가 짙게 전해져 왔다. 그것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느낌이건만 그에게는 달리 받아 들여졌다. 마치 향기에 독(毒)이 배어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아픔으로 걸러지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다 그러할지니....... 이윽고 영호천문의 눈이 반짝하고 이채를 발했다. '저곳이다!' 슷--! 영호천문은 언덕의 중간 지점에서 망연히 서 있었다. 그곳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도림(桃林)이 우거져 있었고, 숲 사이로는 아늑하게 보이는 소로(小路)가 나 있었다. 그는 무엇엔가 홀린 듯이 소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리고 영호천문이 당도한 곳에는......! 졸졸졸....... 도림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물이 청아한 음향을 귓가에 전한다. 무심한 봄볕은 제멋대로 그의 전신에 흩뿌려진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환상을 부여안듯 영호천문은 아스라한 회상의 끄나불을 따라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강남 땅 물이 있는 곳에 도림이 우거져 있으면 더욱 좋겠지 두세 칸 쯤의 띠집이면 그대와 동고동락하리라 시(詩)가 무에 필요 있으랴 삶, 그 자체가 시일 것을 영호천문의 앞에는 당시에 꿈꾸었던 일체의 것이 다 펼쳐져 있었다. 실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설마하니 여기서 이상향(理想鄕)과 만나게 될 줄은 그로서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그가 이곳에 오게 된 목적의 대부분을 차지할지도 모를 한 존재까지도 있었다. "하앗!" 도화목(桃花木)을 검(劍) 삼아 제법 날렵하게 허공을 찔러대고 있는 소년이다. 나이는 대략 오, 륙 세쯤 되었을까? 일신에 걸친 것은 허름한 마의에 불과했으나 소년의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반듯하고 깨끗한 이마가 그러했으며, 소녀를 연상시키는 붉은 입술에 고른 치아가 그러했다. 선명하게 자리잡은 진한 눈썹에서는 제법 사내 특유의 기개도 느껴졌다. 천진난만함이 배인 맑은 눈에서도 언뜻 집념이라던가 투혼 따위의 강인한 기운이 엿보이고 있었다. 소년은 고사리 손에 도화목을 움켜쥔 채 그 끝을 주시하며 기합성을 토해냈다. "야합!" 쉬익! 쉬이익--! 도화목이 소년의 수중에서 춤을 추었다. 그 춤사위는 소년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꽤 현란했다. 찰나지간에 도화목은 허공 삼십육 방위를 정확히 찔러가고 있었다. 소년이 일검식(一劍式)의 전개를 마치고 수중의 도화목을 막 아래로 늘어뜨렸을 때였다. "훌륭하다, 꼬마." 한 소리 낮은 음성이 근역을 은은히 울렸다. "으응?" 소년의 눈망울이 소리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불청객(不請客)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죠?" 그것은 본래 가진 기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편으로는 자신을 응시하는 사내에게 호기심을 느껴서이기도 했다. 사내는 말없이 그저 웃어 보였다. 소년은 너무 어린지라 알지 못했다. 그 사내, 즉 영호천문의 눈에 얼마만큼의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는지를. 소년은 흰 치아를 드러내며 마주 웃었다. "아직은 솜씨가 서툴러요. 어머니께 조금 배웠을 뿐이거든요." 비할데 없이 해맑다. 소년의 미소는 그대로 푸르른 도림을 비추는 한 줄기 환한 햇살이었다. 소년은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여태도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지 않아요. 아마 저를 어린애로만 보시는 것 같아요. 만일 아버님께 배우기만 한다면 이 천아(天兒)도......." 영호천문이 소년의 말을 가로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 테지만 소년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용운천(龍運天)이라고 해요." 그 순간, 영호천문의 전신이 무섭게 경련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운천(運天)이라 짓자. 필부(匹夫)가 되든 무림인이 되든 나는 녀석의 미래를 막지 않으리 어차피 인간은 하늘이 내린 운명에 따라 살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 운천....... 영호천문은 격동으로 인해 거의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아주 좋은 이름이구나. 그럼 네가 무공을 배우고자 열망하는 부친의 성함은 어찌 되시느냐?" 불현듯 소년은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자부심이 가득 찬 음성으로 답했다. "천하제일인." 영호천문은 눈을 내리감아야 했다. 일시지간 그는 머릿 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심중에서 일어나는 부르짖음조차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 결국, 이것이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었나......? 그는 생전 처음으로 목놓아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그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목을 콱 막아 버려 그는 지금 숨쉬기조차 거북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호천문은 그 괴이한 것의 정체가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는 그를 더할 나위 없는 참담함으로 몰고 갔다. '나......! 나는 무엇이냐? 천하안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라던 나, 그러한 내가 정작 쓰여야만 할 작은 곳에서는 존재의 유무(有無)조차 차마 거론되지 못할 처지에 이르러 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들리지 않는 절규를 토해냈다. '오오, 신이여!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희롱하시려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이 나는 대체 무엇이오?' 이 처절한 부르짖음을 통해 영호천문의 뇌리에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파란만장하기 그지 없었던 삶,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위적거려 본 것도 기실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워야 할 무엇이 더 남았는가고 영호천문은 스스로에게 할퀴듯 묻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천아(天兒)야!" 도림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모옥 안이다. 그곳으로부터 부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울려나와 소년을 불렀다. "예, 어머니!" 소년은 모옥을 향해 달려가며 영호천문에게도 손짓을 했다. "저희 어머니세요. 아저씨도 함께 가요." 영호천문은 사양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이끌리기라도 하듯 자신도 모르게 벌써 소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윽고 모옥 앞에 당도하자 영호천문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 여인이 안에서 나와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나란히 있는 소년을 향해서이다. 아무튼 그녀는 영호천문이 짐작한 그 여인이 맞았다. 너무도 사랑했고, 그런 만큼 지독히도 잊고 싶었던 여인이다. 그리고 잊는데 결국 실패하기도 한 여인....... '화미(花美)!' 영호천문은 들끓는 가슴 속에서 그 이름을 캐내고 있었다. 세인들이 일컫는 식으로 제대로 부르자면 이런 이름이다. 남천백리화(南天百里花) 옥화미(玉花美). 그녀는 명호에 걸맞는 화려한 전력(前歷)도 가지고 있다. 즉 무영탐화랑(無影耽花郞) 영호천문을 처음으로 사로잡더니 배신으로써 그를 처참하게 짓밟아 놓은 장본인인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차이라야 이전의 싱싱함이 현재는 완숙미로 대치되었다는 정도였다. 옥화미는 그리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녀는 사뭇 냉랭함이 묻어나는 투로 물었다. "댁은 누구시죠? 무슨 용무로......." 갑자기 그녀는 제 풀에 말을 뚝 멈추었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눈에 띌 정도로 극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는 단지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다른 얼굴이나 눈 앞의 사내가 누구인지를. - 그 사람, 나를 자신보다 더 사랑했으면서 나로 인해 죽어갔던 사람, 그의 향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오오! 그 사람이 온 거야. 내 아들의 아버지인 그가....... 휘청 하고 옥화미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어머니!" 소년 용운천이 깜짝 놀라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 아니다." 어린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옥화미는 간신히 신형을 추스렸다. 반면에 영호천문은 말을 잃은 듯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화미, 오랜만이오." "그래요, 천문." ② 방 안. 정갈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검소함이 느껴지는 방이다. 영호천문이 선호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옥화미와 그는 다탁을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았다. 철모르는 용운천을 밖으로 내보낸 뒤에야 두 사람은 피차간에 대화의 물고를 텄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옥화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인즉 그러했다. 뭐라고 격정적인 말을 할 만도 하건마는, 연륜이 가져다 주는 침착함 이상으로 그녀의 말투는 냉정했다. "그렇소." 영호천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하릴없이 들여다보고 있을 뿐, 자리에 앉은 이후로 그녀에게는 아직껏 일별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 말도 못하듯 감정도 마찬가지인지라 그들 두 남녀는 똑같이 가슴이 경직되어 있었다. 옥화미가 그것을 그녀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세월은 곧 망각이에요. 증오도, 원한도 모두 청산되었지요. 미래라는 것도 조금은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요." 씁쓸히 웃는 그녀는 어이없게도 영호천문이 해야 할 말을 대신 하고 있었다. 어찌 들으면 심각한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소리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낙일애 사건 이후로 저는 과거지사를 전부 잊었어요. 저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옥화미의 얼굴에 언뜻 비애가 스치고 지나갔다. "운천, 그 아이 뿐이에요." 영호천문이 물었다. "그런데 왜 슬퍼하오?" 옥화미의 아미월 같은 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급기야는 심중에 깊이 감추려 했던 듯한 말까지도 울컥 토해져 나왔다. "몰라서 물으세요? 운천의 부(父)가 당신이니까요." "그건 낙일애에서도 마찬가지였소." "호호호호홋......!" 옥화미는 날카롭게 웃어 제꼈다. "실로 교묘한 추궁이군요? 결국 절더러 어미로서 아이의 아버지인 당신에게 왜 배신 행위를 했었느냐고 묻는 거겠죠?" 영호천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틀렸소. 그 연유를 물을 것 같았으면 벌써 그때 당시에 물었을 게요." "하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나도 당신이 그때에 어떤 식으로 나왔었는지 생각이 나요. 하지만 일이 이쯤 되었으니 나도 얘기를 좀 해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기억에서 나는 영원히 몹쓸 여자로 남게 될 테니까요." 옥화미의 기세는 의외로 당당했다. 이를 느낀 영호천문의 안면이 다소 일그러졌다. "그것이 지금 와서 왜 중요해졌소?" 그녀의 눈이 기이한 열기를 띄었다. "역시 운천 때문이에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아이의 어미이고요." 영호천문도 마침내 흥분한 듯 음성이 고조되었다. "호오! 그것 참 가상하구려. 그래서 그 아이가 용씨(龍氏) 성을 달게 된 것이라면 나도 당신의 변명을 듣겠소." 옥화미는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나도 인간이에요. 적어도 아무 까닭도 없이 당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지는 않았어요." 영호천문의 얼굴이 처음으로 노기를 띄었다. "어디 그럼 그 까닭이라는 것을 들어 봅시다." "그래요, 당신은 아마도 까맣게 잊었겠지요. 그러나 그 일을 나는 죽어 귀신이 되어도 잊지 못할 거예요." 옥화미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 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내부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회한과 애증이 어우러진 눈물이었다. "당신은 형주(荊州)의 옥씨무가(玉氏武家)에서 벽라신검(碧羅神劍) 옥궁천(玉宮天)을 어떻게 했지요? 크흐흑......! 그 분은... 나의 아버님이셨어요." "옥... 궁천......?" 영호천문은 찰나지간 정신이 아찔했다. '오오, 맙소사! 옥궁천이라면... 기억난다. 십육 세 때, 야망에 불타던 나는 형주를 지나다 옥씨무가의 명성을 듣고 가주인 벽라신검 옥궁천을 찾아가 비검(比劍)을 청했고.......'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 나갔다. '나는 그를... 베었다.......' 영호천문은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후... 그럼 결과적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 옥화미는 그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속에서 비수가 되어 영호천문을 아프게 찔러 왔다. "그래요, 당신은 내 계획대로 걸려 들었을 뿐이에요." "그랬었군. 후후후......." 이후로 영호천문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소, 그 정도면 당신이 내게 부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소. 지금부터는 정말로 궁금한 점에 대해 답해 주시오." "좋아요." "정확히 당신과 용천후는 어떤 관계요? 이건 비단 내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무림에 의혹을 살만한 일이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영호천문과 용천후가 현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그렇거니와, 그것은 그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능히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옥화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천후는... 내 원한의 배경을 미리 알고 있었죠. 낙일애 사건을 계획한 사람도 그였어요." "으음." "또 있어요. 내게 협조할 방도를 알려 준 사람도 그예요." 그 순간, 부르르 몸을 떤 것은 말을 하는 옥화미가 아니라 듣고 있던 영호천문이었다. '천후, 설마 네가 그렇게까지.....!' 그녀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죽은 후, 운천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했어요.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강한....... 천후가 적임자였죠." 영호천문의 준수한 얼굴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그는 운천에게 잘 대해 주었소?" 옥화미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내 얘기,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더 듣고 싶지 않소!" "들어야 해요. 처음부터 천후는 매사가 다 계획적이었죠. 그래요, 그는 당신보다도 먼저 내가 좋아한 사람이었어요." "우우우......!" 영호천문은 가히 얼이 빠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초 당신에게 접근한 것도 천후의 뜻이었어요. 그가 내게 말했죠. 당신을 제거하게 되면 나는 원수를 갚는 것이고, 그 자신은 숙적이 없어지는 셈이니 일거양득이라고요." "후후... 천후, 네가 고작... 그 정도였더란 말이냐? 나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여인을 앞세우는......?" 경황 중에도 영호천문의 어조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는데, 그에 반해 옥화미는 극심한 자조를 내보이고 있었다. "호호호......! 맞아요, 그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나를 이용했어요. 하지만 나도 그에게 동조했으니 그를 탓할 수만은 없죠. 당시 나로서는 삶의 의미 중 가장 큰 것이 복수였으니까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 쏟아졌다. "그런데 말이죠,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죽은 후로 나는 깨달았어요. 나 역시도 처음부터 필요에 의해 천후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는가 하는....... 왜냐하면 내가 당시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람은 천후가 아니라... 크흐흑!" 옥화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오열을 터뜨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영호천문 역시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의 가슴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군마맹을 이용한 것은 어떤 저의에서였소?" "크흐흑... 그것도 운천을 위해....... 일단 표면상으로나마 부친이니까 천후가 천하제일인이 되어야......." "정녕 어이가 없군. 나의 추종자들이 이룩해 놓은 군마맹을 천후를 돕기 위해 활용했단 말인가? 그것도 한때 내 아내였었다는 구실로 맹주 자리에 앉아서......? 거기에다 천후의 수하들인 정사십절(正邪十絶)까지 끌어 들이고......." 영호천문은 맥이 빠져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남천백리화 옥화미. 이 맹랑한 여인은 영호천문을 교살(絞殺)하고도 그의 죽은 이름을 빌어 군마맹으로 잠마문을 상대해 나갔다. 그녀의 계산은 나름대로 매우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용천후로 말하자면 대효웅(大梟雄)으로서 천하제일정(天下第一鼎)이 될만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천중일정의 죽음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 팔정(八鼎) 모두가 용천후에게는 방해자였으므로. 여기까지가 그녀의 생각이다. 그 이면에 있은 용천후의 계략에는 심금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옥화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각본을 짜 놓고는 그녀를 위시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배경까지도 철저하게 이용해 왔던 것이다. 그는 영호천문이 제거된 후로 팔정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으나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그들을 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럴 경우 나머지 팔정이 연합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군마맹이었다. 그는 은밀히 옥화미를 조종하여 군마맹의 간판이 되게 해 놓은 다음, 그녀를 통해 천중일정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워 팔정을 견제해 왔다. 그 뒤로는 영호천문이 되살아나 자발적으로 팔정을 하나씩 처단해 주니, 암중에서 이를 지켜보며 희희낙락이다가 종내에는 영호천문까지도 이용했던 기막힌 전력이 있다. 영호천문. 그는 멍하니 옥화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내 묻는 말에 대답해 주지 않은 것이 있소." "무엇을......?" "운천은... 천후를 잘 따르오?" 옥화미는 더 이상 회피하지 않았다. "천아는 아직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어요. 다만 자신의 부친이 천하제일인이라는 것만을 굳게 믿고 있어요." "당신을 몹시 닮았더군." 옥화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을... 더 닮았어요." 영호천문은 탄식해마지 않았다. "당신과 나, 우리 두 사람은 그 아이의 부모지만 어차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는 처지는 못되는 듯 하오." 옥화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야......." "내가 한 번 죽어 줌으로써 지난 날의 원한은 청산되었을지 모르나 앞으로도 당신에게 내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을 게요." "으음......." 그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후후... 아마 나를 다시 죽이고 싶을지도 모르겠군." 영호천문의 말에 옥화미는 한 차례 전신을 무섭게 떨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고통에 찬 시선으로 영호천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꼈던 것이다. 영호천문의 회색 눈은 그 순간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나를 죽여다오, 화미. 이미 삶의 의지가 포기된 듯한 그 눈으로 인해 옥화미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호천문은 툴툴 웃었다. "후후... 화미, 지금 막 생각한 건데 나는 몹시 후회가 되오. 내가 낙일애에서 죽어 버려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다 순탄했을지도 모르거늘. 훗훗... 운천, 그 귀여운 녀석 얘기요. 나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대로 천하제일인을 부친으로 둔 행복한 아이가 되었을텐데......." 옥화미는 대답 대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 가닥 결의가 어렸다. - 그래, 맞아. 단안을 내려야 해.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자못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당신을 위해 준비했던 것이 있어요." "무엇을......?" 영호천문이 묻자 그녀는 서슴없이 대꾸했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술." 방향이야 어찌 되었건 생각이 산뜻하게 정리되어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눈이 시리도록 맑게 개어 있었다. 그리고 정녕 예뻤다. 하긴 남천백리화의 명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백일로(百日露) 말이군." 영호천문에게 있어 그녀의 아름다움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말을 받는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음울했다. "그래요, 잊지 않았군요." "내가 어찌 잊겠소?" 영호천문과 옥화미. 이들은 한때 천하인들이 모두 부러워 할 정도로 잘 어울렸던 부부(夫婦)였다. 지금도 이 두 남녀의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행복하고 다정한 부부의 전형적인 예라고. 껍데기 밖에 보지 못하는 타인들이야 어찌 알겠는가? 타다 못해 재가 되고, 그나마 바스라져 버린 이들의 현재 심정을. "잠깐만 기다려요." 옥화미는 몸을 돌려 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두 개의 술잔을 소담한 쟁반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술잔에는 투명해 보이는 맑은 술이 담겨 있었다. 영호천문이 방금 전에 말한 바 있는 백일로이다. 즉 백일 동안 매화꽃잎에 맺히는 순수한 이슬만을 모아 담근다는 술이었다. 챙! 두 개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옥화미의 눈은 영호천문의 회색빛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마셔요, 천문." "고맙군, 화미. 이러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오." 영호천문은 술잔 속에 든 투명한 액체를 내려다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천기신유 단목군의 음성이 들리는 듯도 했다. - 이번 길에는 흉살(兇殺)이 있을 것이네. 영호천문은 고개를 가로저어 부인했다. '이건 흉살이 아니오. 당연한 선택일 뿐.......' 그는 자신이 그 선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뒤의 일들이었다. 모르면 피할 수 있으되, 알고 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들이 그에게는 너무도 많았다. '미안하오, 단목노선배. 그리고 모든 분들이여!' 시야가 흐려진다. 영호천문은 그 현상이 다름 아닌 눈물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백일로가 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천문......." 옥화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끝내 후회도, 만류하려는 기색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백일로는 영호천문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 버렸다. 그는 술잔을 내리며 말했다. "행복하구려, 화미. 운천을 부탁......." 그는 한 순간 자신의 몸이 캄캄한 암흑 속으로 내팽개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천문--!" 옥화미의 처절한 음성도 그저 아스라히 들릴 뿐이었다. '비슷하군. 죽음의 느낌은 언제나.......' 이것이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한 그의 종언(終言)이었다. ③ 죽음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일단 삶을 통해 영위했던 것들과의 단절(斷絶)은 확실한데, 죽는 행위로써 그것들을 회피하려 들어선 안된다. 깊은 암흑(暗黑)의 시공(時空).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한 인간은 이곳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운명이 아직 그를 손아귀에서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그의 책임회피는 허용되지 않았다. 감히 천하를 지키고, 일으켜 세워야 하는 위인이 죽으려 하다니 말도 안되었다. 한 마디로 그에게는 죽을 자격이 없었다. 죽는다는 것, 이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딩딩딩....... 어디에선가 선음(仙音)을 방불케 하는 비파음이 들린다. '그럼 여기는 선계(仙界)......?' 그는 자신에게 물어 보고는 만족한 듯 웃었다. '몰랐었다. 죽음 속에서도 이렇듯 느낄 수 있는 감각과 명료한 의식의 존재가 가능할 줄은.......' 비파음은 때로 아주 가깝게 들렸다가, 반대로 어떤 때에는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지기도 했다. '으음, 내가 눈을 감고 있어 그렇게 들리나 보군.' 그는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냐하면 눈을 뜨는 일이 왠지 조금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눈을 뜨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극락의 궁전(宮殿)인가? 설마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선계에 이토록 화려한 방이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곧 그는 자신이 푹신한 침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향기마저 그윽한 이 방이 장식 등으로 미루어 여인들만이 쓰는 규방이라는 것도 뒤미처 알 수 있었다. 은은히 내비치는 휘장을 통해서는 방의 주인인 듯한 한 여인도 볼 수 있었다. '놀랍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부르짖었는데, 그것은 그 여인의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였다. 그녀는 일신에 유백색 교의를 입고 있었으며 궁장(宮裝)이었다. 가볍게 틀어올린 머리가 그대로 선녀를 연상시킨다. 빙결(氷結)같이 희고 투명한 피부와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눈, 학(鶴)인 양 고결한 자태 등이 의식하고 보니 모두 다 그녀를 선계의 여인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단지 아쉽다면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너무 싸늘하다는 점이었다. 냉요(冷妖)하다고나 할까? 지극히 아름다운 가운데서도 그녀에게는 왠지 서릿발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이 궁장미녀가 의자에 앉은 채 비파를 비스듬히 끌어안고는 섬섬옥수의 빙지(氷指)를 놀려 탄주하고 있었다. 딩딩딩....... 눈에 보이는 장면들이 갑자기 확 현실이 되어 부딪쳐 온 것은 소리가 다시 느껴지던 그 순간이었다. 즉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낭자......!" 딩! 비파음이 뚝 멎었다. 동시에 궁장미녀의 몸이 가볍게 떠는 기색을 그는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 어디오? 그리고 낭자는 뉘시오?" 그는 한꺼번에 두 가지를 물었다. 미녀가 일어서더니 사뿐사뿐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가까이 볼수록 점차로 놀라움이 더해질 정도의 빼어난 미녀였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깨어나셨군요, 영호공자." 조금 냉랭하다 싶긴 했으나 외양처럼 맑고 고운 음성이었다. 이어 그녀는 얼굴을 은은히 붉히면서도 섬섬옥수를 들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이마를 짚었다. "서두르지 마세요. 아직 안정하셔야 되니까요. 이곳은 공자께서 편히 쉬셔도 좋을 만한 곳이니 아무 염려마시구요. 저는 빙한지(氷寒芝)라고 해요." 미녀의 대답은 정말로 그를 안도하게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도 죽음과 삶을 잘 구별하지 못했던 사내, 즉 영호천문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천빙매화(北天氷梅花) 빙한지라면 그 유명한 천주사대기화(天柱四大奇花) 중 한 명이 아닌가 말이다. 이 사실을 기화로 영호천문의 뇌리에는 이내 접혀 있던 의문들이 한 가지씩 차례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옥화미가 건네준 술을 마셨다. 예상했던 바대로 그 속에는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일지라도 대번에 한 줌의 핏물로 녹여 버릴 정도의 극독(極毒)이 들어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죽지 않았단 말인가? - 이 화려한 곳은 어디인가? - 북천빙매화 빙한지, 이 여인은 왜 나를 보살피는가? 빙한지가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당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렸어요. 그 동안 곁에서 쭈욱 당신을 지켜 보았지요." '이 여인이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영호천문의 아연한 표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특이한 분이에요. 단지 지켜 보고만 있었는데도 이 한지는 당신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거든요." 영호천문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들어줄 여유라는 게 없어서도 그랬지만 노골적인 애정고백이 그녀의 상식 수준을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초면에 그런 말을, 그것도 그렇게 쉽사리 내뱉는 여인이 그녀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여인이 정신이 온전하기는 한 것인가?''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었다. "한지는 진즉부터 마음을 정했어요. 평생 이처럼 당신을 보필하며 살겠노라고요." 그 말은 곧 영호천문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뜻이다. 역시 그런 소리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는 빙한지를 보자 영호천문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으음, 이제 보니 이 여인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그는 침착한 투로 한 마디 했다. "낭자, 남녀간의 일이란 본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오." 빙한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른 보석인 양 신비한 빛을 뿌려내며 그를 응시했다. "그건 왜 그렇죠? 그냥 좋아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영호천문은 기가 막힌 나머지 실소를 터뜨렸다. "정말 보기보다 답답한 아가씨구려. 우선 나는 낭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더러......." 빙한지가 생긋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점이라면 더 말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저는 당신을 매일 목욕시키고 시중 들어 왔거든요." "그게 정말이오?" 영호천문이 당황하여 부르짖었다. 무의식 상태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인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을 자신을 상상하자 그는 민망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처녀의 몸으로 그 일을 행한 빙한지는 정작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아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흥! 남자가 째째하기는." '끙! 졌다.' 영호천문은 마침내 심중으로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내로라하는 탐화랑일지라도 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호호호... 어쨌든 당신이 깨어나서 정말 좋아요." '억!' 영호천문은 질겁을 했다. 빙한지가 무방비 상태인 그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았기 때문이었다. 이때였다. "호호호호... 동생, 그 분을 너무 난감하게 하지 말아요." 문 밖에서 한 가닥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영호천문은 대뜸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 차렸다. '화무무(花舞舞)!' 내심의 부르짖음과 더불어 그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심한 경련을 보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녀의 존재를 느끼자마자그녀와 연관된 모든 사건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을. 이윽고 방 안으로 한 명의 궁장여인이 들어섰다. 과연 그녀는화무궁주(花舞宮主)인 만천화화(萬天花花) 화무무였다. 구정 중 유일한 여인이자 그를 시해하는데 가담했던 그녀다. "그대가......!" 영호천문은 넋을 잃은 듯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는 화무무의 배가 정상이 아님을 느꼈다. '임신......?' 그가 이래저래 놀라서 잔뜩 굳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하하핫......! 천중일정이 깨어 났소? 어디 봅시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한 사나이가 들어섰다. 그 자는 키가 칠척이 넘는 훤칠한 사내였다. 일신에는 금삼(金衫)을 입었고, 머리에는 기이한 형태의 관(冠)을 쓰고 있었다. 얼굴은 호형(虎形)이요, 부리부리한 눈에는 천하를 오시할 듯 탕탕한 기류가 넘쳐 흘렀다. 나이는 삼십오, 륙 세쯤 되었을까? 한눈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대 효웅으로 보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습관이라도 되어 있는 양 화무무의 어깨를 다정하게 껴안아 주었다. "참, 당신도! 정말 아무데서나 이럴 건가요?" 화무무도 곱게 눈을 흘기는 것이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내를 가볍게 밀어낸 다음 침상으로 다가왔다. "천문,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무척이나 밝았다. "무무... 사매(師妹)......." 영호천문은 감정이 격해져 또다시 말을 잇는데 실패했다. 실상 그와 화무무 사이에는 천하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문제의 낙일애 사건 중에 이루어졌다. 그때에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화무무의 도움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공격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은 은밀히 강기( 氣)로 영호천문의 심장에 보호막을 만들어 주었다. 만일 그녀가 그런 조치를 취해 놓지 않았더라면 영호천문은 용천후의 악독한 일장에 심장이 으스러져 아무리 귀의 야율천의 의술이 있었다 해도 소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천화화 화무무. 영호천문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애틋한 감정의 부산물이었다. 일찌기 우내십정에 포함되어 사내들과 똑같이 야수가 되어 거친 역사를 헤쳐나온 여인,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릴 적부터 동문(同門)의 인물들 중에서 한 사람을 끊임없이 사모해 왔다. 그 사람이 영호천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종국에는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탐화랑이니 주변에 숱한 여인들이 꼬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으나 영호천문이 자신이 아닌 옥화미를 아내로 맞이하자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사랑이 증오로 변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결국 화무무는 극심한 갈등 끝에 그를 모해하는 거사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느닷없이 마음이 바뀌어 그에게 은밀히 삶의 동기를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화무무.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눈가에 한 가닥 웃음을 떠올리며 곁에 있는 금삼인을 가리켰다. "소개하겠어요. 천문사형(天文師兄), 이 분은 저의 부군(夫君)이세요. 북천신군(北天神君) 빙무군(氷武君)이라고." "북천신군......!" 영호천문은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북천신군이라면 쌍효(雙梟) 중 일효(一梟)로서 이른바 북천(北天)의 제왕이라고 일컬어지는 걸물이 아닌가? "핫핫핫......! 중원제일인인 천중일정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갑소." 빙무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선뜻 손을 내밀었다. 영호천문도 누운 채 그의 패기 넘치는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분명하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다. '이 자는 효웅이라기보다는 호웅(豪雄)이다!' 그는 연이어 화무무를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사매, 정말 좋군. 행복한 것 같아서." 화무무는 그의 시선을 받자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그래요. 제게는 이제 야망이든, 무공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이대로가 가장 좋아요."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었다. "다행이다, 사매. 정녕 축하할 일이야." 그는 지금까지도 계속 열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빙한지를 가리켰다. "이 당돌한 아가씨는 사매와 잘 아는 사이인가?" "호호... 사형은 한지의 그물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어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래, 당신 생각은 어때요?" 화무무가 돌아다 보자 빙무군이 껄껄 웃었다. "핫핫......! 나도 동감이오. 내 동생이지만 이 계집애의 끈질긴 근성에는 세상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테니까." 빙한지는 고개를 모로 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놀리지 말아요. 오라버니는 왜 항상 나만 보면 못마땅해서 야단이세요?" 그러더니 그녀는 여보란 듯이 몸을 기울여 영호천문의 뺨에 붉디 붉은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내 사랑, 잠시만 기다려요. 배고프죠?" 그녀는 곧 쪼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영호천문이 그녀의 뒷모습을 좇다가 괴상한 표정이 되어 읊조렸다. "난 저 아가씨가 천하에서 제일 무섭소." 빙무군과 화무무 부처(夫妻)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호호호호......." ④ 영호천문과 화무무. 그들은 단둘이서 대담(對談)을 나누고 있었다. 화무무가 그에게 물었다. "사형은 옥화미 언니를 미워하시나요?" 영호천문은 고개를 저으며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아니,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 두번째의 죽음은 그녀 탓이 아니다.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 "사형은 혹시 아세요?" "무엇을......?" "언니는 아직도 사형을 사랑하고 있어요." 영호천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 그럴지도.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싶어 하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녀의 삶 안에 내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감이 가득한 화무무의 눈에 눈물이 차 올랐다. "그럼 사형은 그때문에 죽음을 택하신 거로군요?" 영호천문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그러지 않으면, 그 외에 내가 그녀와 아들을 위해 대체 무엇을 해줄 수가 있지?" "아아! 정말이지, 두 분 다 못말리겠군요." 화무무가 난데없는 탄성을 발하자 그는 의아함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지런한 치열을 보이며 웃었다. "그래요, 화미언니는 늘상 당면한 현실에 충실한 여자예요. 그래서 사형에게 두번씩이나 몹쓸 짓을 했죠. 그러나 그 두번째는 첫번째와 목적이 달랐어요." "목적이 다르다......?" "네, 맞아요. 사형을 시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살리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대체 무슨 소린지......." 못내 의혹을 감추지 못하는 영호천문에게 화무무는 한 가지 숨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이는 기구하다면 기구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여인에 관한 것이었다. 옥화미(玉花美). 그녀는 애시당초 영호천문을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와 맺어졌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용천후와 결탁하여 그를 모해하기에 이르렀는데,당시 용천후는 그녀에게 굳게 약속한 바가 있었다. - 천중일정 영호천문을 제거하는 대신 화미, 그대와 아들은 내가 거두겠다. 옥화미는 맹세에 가까웠던 그 말을 단단히 믿었다. 때문에 그녀는 자라고 있는 아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쳤다. - 너의 부친은 천하제일인, 너는 용운천(龍雲天)이란다. 하지만 세월이 무심하게 흐르는 동안 옥화미는 스스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움에 타들어가는 여심(女心),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 얼굴의 주인은 용천후가 아니라 영호천문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이것을 아들의 얼굴을 통해 알게 되었다. 판에 박은 듯 닮아 있는 친부(親父)와 자(子)의 얼굴 모습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통렬하게 깨우쳐 주었다. 반면에 용천후는 의무를 다했고, 약속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옥화미가 원하는 곳에 집을 지어 준 것을 비롯하여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베풀어 주는 것들 중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었다. 옥화미는 절규한다. - 용천후! 당신은 내 아들을 찾아 주지 않았어. 그것도 오, 륙 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모름지기 부정(父情)이란 천륜(天倫)에 속한 부분이므로 친부 외엔 그 누구도 나누어 줄 수 없는 바이거늘, 옥화미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영호천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펑펑 울기도 했다. 영호천문이야말로 실제적 남편이자 유일한 정인(情人)이며, 무엇보다 자신이 낳은 아들의 친부가 아닌가 말이다. - 오오! 님이시여, 여기 내가 있어요. 당신의 아들과 함께 내가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그 이후로 끊임없이 마음 속으로 영호천문을 불렀으며 매 순간순간마다 그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또다시 그를 죽여야만 했다. - 후훗! 당신의 아들은 지금 내 아들, 이는 곧 그 아이가 내 수중에 있다는 뜻도 되오. 그걸 안다면 화미, 당신은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용천후로부터 무시무시한 위협이 가해져 왔다. 이전에는 옥화미를 이용했던 그가 상황이 바뀌자 아직 나이도 어린 그녀의 아들을 협박의 무기로 삼아 온 것이었다. "사형......?" 화무무는 얘기를 마치자 조심스레 영호천문의 안색을 살폈다.그는 무심한 듯 고요히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이 순간 얼마나 무섭게 질탕하고 있는가를. 아마도 고금을 다 뒤진들 그의 분노를 대변할 말은 없으리라. "그것이... 전부인가......?" 영호천문은 어느덧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일단은요." 화무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통의 서신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읽어 보세요, 사형. 이것은 옥화미 언니가 제게 직접 보낸 편지예요." "으음......!" 영호천문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펼쳤다. <화(花) 아우님, 당신도 한때는 그 분을 사랑하셨던 분, 이를 알기에 그 분을 당신께 부탁합니다. 용천후의 종용에 저는 어쩔 수 없이 그 분께 독이 든 술을 드렸어요. 그 분의 죽음을 확인한 천후는 손수 그 분을 땅에 묻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저에게는 그 분을 다시 죽일 이유가 없어요. 과거의 원(怨)이 다 정리된 마당에 사랑하는 분을, 운천의 친부이신 그 분을 제가 왜 해치겠어요? 그 분은 지금 흙 속에 묻혀 계십니다만, 죽지는 않으셨습니다. 용천후는 모릅니다. 제가 술 속에 그가 내어 준 극독 대신 수면독(睡眠毒)을 넣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마시면 중독현상은 유사하나 가사(假死) 상태에 이르렀다가 백일 후에 깨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감시를 받고 있어 움직일 처지가 못됩니다. 화아우님께서 백일이 되기 전에 그 분을 모셔가 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부성(父性)이나 모성(母性)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 분을 통해 알게 되었답니다. 천하에서 나의 아들을 위해 목숨마저도 선뜻 내놓을 분이 그 분 말고 또 누가 있 겠어요? 부디 그 분을 잘 보살펴 주시기를....... 운천지모(雲天之母) 서(書).> "화미, 그대는......!" 영호천문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화무무가 곁에서 눈물을 떨구며 말을 건넸다. "사형, 이래도 화미언니를 교활한 현실주의자로 여기시겠어요? 언니는 과거의 일들로 인해 차마 말을 하지 못할 뿐, 사실은 사형을 간절히 원해요. 물론 그 이유 중 가장 큰 한 가지가 무엇인지는 사형이 더 잘 아시겠죠?" "후후......." "그래요, 그것은 사형의 아들인 운천을 위해서예요." "운천, 나의 아들......!" 영호천문은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심중에서는 천하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찬 울림이 일어났다. - 운천! 내가 가겠다. 더 이상 너를 용천후에게 맡기지도, 이용당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찾은 삶의 새로운 목적을 대신한 말이었다. 아들이라는......! 연공실(燃功室). 그곳은 외부와 차단된 조용한 공간이었다. 영호천문과 화무무가 다시금 대좌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화무무였다. "사형, 십상천(十相天) 사부들 중 저를 가르치신 사부께서는 제게 의술(醫術)도 함께 물려 주셨어요."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자 눈물 많은 그녀의 눈은 금세 뿌얘졌다. 대체 이런 그녀가 어떻게 과거에는 그토록 무림을 휘젓고 다녔는지, 새삼 의문이 일 정도였다. 그녀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 진단에 의하면 사형은 지금 열폭반혈성(熱暴反血性)으로 인해 경력이 체내에서 모두 소진된 상태예요." "으음, 열폭반열성에 대해서라면 나도 대강 알고 있다." 영호천문은 안색이 굳어졌다. 이는 귀의(鬼醫) 야율천(夜栗天)이 했던 우려의 말들을 언뜻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무무가 앞지르듯 물었다. "그렇다면 사형은 자신이 시한부 생명이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겠군요?" "후후...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문에 덕도 보았지. 삶과 죽음에 대해 좀더 초연해질 수 있었다고나 할까?" 영호천문의 웃음에는 자조가 묻어 있었다. 이를 느낀 화무무가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선사했다. "금후로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 시한부 생명이 막을 내릴 때가 되었으니까요. 사형이 잠들어 계시던 백일 동안 수면독으로 인해 열폭반혈성은 극(極)에 이르렀어요." "어째, 그만 죽으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호호호... 그럴 리가 있나요? 용천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면서 사형을 이 화무궁까지 모셔올 때는 다 그만한 방도가 있어서이지요." 화무무는 하나의 옥갑(玉甲)을 내밀었다. "열어 보세요, 사형." 영호천문은 그녀의 말대로 옥갑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으스스한 한기(寒氣)로 인해 그는 온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뼈까지 얼려버릴 듯한 수십만 년의 빙한지기(氷寒之氣)가 그 조그마한 옥갑 속에서 흘러 나온 것이었다. 그 결정체는 한 송이의 신비한 연화(蓮花)였다. 여러 겹으로 곱게 피어 있는 꽃잎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분명 살아 있는 꽃이되, 얼음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꽃이다. "이... 이것은 만년빙천연화(萬年氷天蓮花)......!" 영호천문으로서는 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수십만 년의 빙한지기로 형성된 만빙동(萬氷洞), 그곳에서 빙한지기의 정화로 피어난다는 전설의 꽃을 그가 이렇듯 눈 앞에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드리겠어요. 사형께서 취하세요." "무무, 왜 내게 이렇게까지......?" 영호천문의 안면이 격동으로 인해 마구 씰룩였다. 화무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자신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 보았다. "사실 그것은 저의 부군이신 그 분께서 앞으로 태어날 아가에게 주려고 하셨던, 가보(家寶)였어요. 그렇지만......." 영호천문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럼 더욱 더 안되겠군." "제 부군과 한지도 찬성한 일이에요." 그녀는 영호천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형은 살아 계셔야 해요. 더욱 강해지셔야 하고요. 그 이유는 전 무림이 사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에요." 화무무의 음성에는 그녀답지 않게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작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크게는 아까도 말했듯 무림을 위해 부디 굳건히 일어서세요." "무무......." "사형,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저도 과거에는 무림 십분(十分)에 끼어 있던 여마두(女魔頭)였어요. 호호호... 물론 현재는 아니지만. 제게 무림에 빚을 갚을 기회를 주세요." "무무, 그대는 정녕 예전의 그대가 아니구나." 화무무는 생긋 웃었다. "그럼요, 저도 얼마 안 있어 한 아이의 어미가 될텐데요. 정말로 그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미이고 싶어요." "무무......!" 영호천문는 벅차 오르는 감동으로 인해 무어라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추호도 흐트러짐 없이 의연한 이 여인이 사랑을 우의로 전환시키기 위해 이 순간에도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 천문, 저는 당신의 영원한 친구이자 누이로 남겠어요. 영호천문은 침묵 가운데 그녀의 섬섬옥수를 굳게 부여잡았다. 손과 손을 통해 교차되는 감정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반석(磐石)이 가져다 준 깊은 신뢰(信賴)였다. 제 27장 천하제일정(天下第一鼎) ① 대혈겁(大血劫)의 막이 올랐다. 무천대성(武天大城)을 이루고 무림왕(武林王)을 자처하던 마의 제왕, 마야(魔爺) 용천후가 본격적으로 무림패업을 개시했다. 정파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전륜회(轉輪會)에 다음과 같은 통첩을 보낸 것이다. <고(告)하노라!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에 전륜회주는 항기(隆旗)를 들고 본왕(本王)을 배(拜)하라. 무림은 본 무천대성 예하에 속하리니, 따르면 존속하고 거부하면 멸절을 면치 못하리라. 무림왕 용천후(龍天侯).> 소식을 접하자 전 무림이 경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천대성의 힘은 고금미증유였다. 사자림을 병합시킨 후로 그들의 성세는 더욱 팽창일로를 치달리고 있었다. 중원의 마파(魔派) 수백이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투항해 온즉 무천대성의 힘은 어느 누구도 감히 저지할 수 없는 가공스러운 것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편. 전륜회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전륜대제 백리성우.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정도의 정예군을 재편성하여 좀더 강한 진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으며, 마도 쪽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암중으로 이를 타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도무림을 끝까지 지키겠노라는 대정혼에 입각하여 세워진 이 복안은 뜻밖에도 좌절된다.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유수한 제문파(諸門派)들이 협조는커녕 오히려 전륜회에서 탈퇴하려는 기미까지 은근히 내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중양절에 있을 대혈전에서 자파가 멸절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마야 용천후가 이룩한 무천대성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천대성과 대적하는 것은 일개 단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 끝에 어마어마한 전력(戰力)을 갖춘 마도 전체를 상대하는 일이었으므로. 구월은 더 없이 잔인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구월 일일로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무림은 점차 공포의 장막으로 뒤덮혀 갔으며, 소리 죽였던 우려와 탄식조차 날로 비명처럼 높아가고 있었다 이일, 삼일, 사일....... 기정사실화된 운명의 날은 정도에 속해있는 전 무림인들의 숨통을 조이며 서서히 목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복우산(伏牛山). 자칭 무림왕인 마야 용천후는 수만에 달하는 무천대성의 마인들을 이끌고 전륜회를 에워싼 채 진지(陣地)를 구축했다. 전 마도를 장악한 그에게 남은 것은 느긋하게 앉아 중양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백리성우. 아직까지도 그는 전륜회주이자 천하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정도제일인이다. 그는 자신이 주재한 회의석상에서 침통하기 그지없는 정파고수들의 얼굴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 전륜전(轉輪殿)에는 수백 명에 이르는 정도의 지존과 명숙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개중 누구도 이 자리에서 정도무림의 회생책을 논(論)하는 사람은 없었다. 논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다만 마땅한 방도가 없어서일 따름이다. 이 점은 그들 모두의 얼굴에 어려 있는 짙은 절망의 기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의 날짜는 구월하고도 육일, 최후의 날인 중양절을 불과 삼 일 앞두고 있다. 전륜회주인 백리성우의 입이 떨어졌다. "여러분들! 아시다피시 결전의 날은 임박해 있소이다. 어쩌면 이번 싸움을 끝으로 우리는 마야 용천후의 손에 무림을 통째로 내주게 될지도 모르오." "으음......." 도처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정도의 고수들은 이 시각, 모두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 전륜대제마저도,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현 사태의 심각성을 시인하고 있다. 정도무림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백리성우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부디 용기를 내시기 바라오. 우리들은 누대에 걸쳐 정도의 무맥(武脈)을 이어온 터, 후세에 오명(汚名)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바쳐 분전해야 할 것이오." 조용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의 말인즉은 지극히 타당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중인들은 사전에 백리성우에게 자신들의 비굴한 속셈을 내보인 바 있으므로 그의 어조에 힐난이 깃들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잠자코 묵인해야 했다. 중인들은 그의 이런 고문(?)에 한 번 더 시달려야 했다. "자파의 안위란 대체 무엇이오? 먼저 정도무림이 제대로 서 있어야 그도 가능한 것이었소이다. 내 미리부터 이 점을 강조해야 했건만,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 진정 후회막급이외다." 참다 못한 한 인물이 나서서 항의했다. "회주! 그런 말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입니까?" 용기를 발휘하는 그 자는 무당파에 속한 신진고수로서 아직 나이가 젊어 무공 외에는 혈기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백리성우의 경륜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허허... 본인의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하게. 다 부덕(不德)의 소치이니 협사들께서도 널리 양해해 주시오." 사과의 형식을 빌어 상대의 말은 간단히 무시된다. 군웅들의 가슴 밑바닥에서는 차라리 오기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웅대한 대정지기(大正之氣)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 그렇다! 더 이상 못난 꼴 보이지 말고 나가 싸우자. 까짓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는가? 우리에게도 최소한 의혈(義血)은 남아 있거니와, 단 한 명이라도 마도인을 척살하고 죽으리라. 그리하여 잔뜩 굳어지게 된 그들의 기색은 전륜대제 백리성우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후후... 한심한 정도인들이여, 고작 이것이 너희가 주창해오던 대정혼이었느냐?' 전륜회주의 거처인 정실(淨室).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는 책상과 마주한 채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 예정대로 중양절은 너희들의 제일(祭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한 가닥 부드러우면서도 냉랭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말을 받은 것은. "안되었지만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군중심리를 제멋대로 악용하는 가짜 전륜회주가 사라져 준다면 말이다." "흐음?" 백리성우는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으나 그렇다고 당황해 하지는 않았다. 되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상대를 추궁했다. "누구인가? 근거없는 소리를 하는 그대는?" 말하자면 그의 무서움이 또 한 번 입증되는 순간이다. 끼익! 문이 열리더니 한 명의 자삼청년이 오연하고도 당당한 기세로 걸어 들어왔다. "그대는!" 백리성우의 눈이 비로소 크게 휩떠졌다. "영호천문, 너는 대체......." 그는 흡사 신음처럼 부르짖었는데, 그가 이처럼 반응하는 이유를 화무궁에서 이곳까지 급히 달려온 영호천문은 잘 안다. "하긴, 뜻밖이겠지. 죽었던 자가 두 번씩이나 살아나서." 영호천문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백리성우는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신색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흠, 내가 물으려던 것은 우리의 부회주께서 대체 어디를 갔다가 이제야 나타나셨느냐는 것이었네. 물론 이곳에는 또다른 무심도 냉천이 버티고 앉아 있었지만. 아무튼 반가우이." "미안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별로 반갑지 않군." "흐음?" 영호천문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만 가면을 벗어라, 냉무혼(冷無魂)." "뭐, 뭣이!" 백리성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무혼사도(無魂死刀) 냉무혼, 너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다. 나도 한동안은 깜빡 속았었으니까." 영호천문은 문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들어 오십시오, 백리회주(百里會主)." 다시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들어왔다. 그 덕분에 방 안에는 외견상 두 사람의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서 있게 되었다. 앞서의 백리성우, 즉 무혼사도 냉무혼이 부르짖었다. "으음, 어떻게 이런 사태가......!" 그의 안면이 마구 씰룩이는 것을 바라보며 두번째의 백리성우가 말문을 열었다. "허헛, 나는 자네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네. 내가 지하밀옥(地下密獄)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 한 오 년쯤 되나? 그 동안 자네는 나를 대신해 전륜회를 잘 이끌어 주었네." "우우우......!" "그러나 오늘부터는 사양하겠네." 백리성우의 노안(老眼)에서 새파란 섬광이 일었다. "자네가 드러내 놓고 마야를 돕기 시작했으니까. 듣자 하니 군웅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선동해가고 있다면서?" 무혼사도 냉무혼은 이를 악물었다. "천문! 이 모두가 네 짓이겠지?" 그는 정말로 연기를 포기한 듯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고, 이에 따라 우내십정 중 일인인 무혼사도 냉무혼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창백하기 그지없는. ② 영호천문이 말했다. "냉무혼, 넌 천기신유(天機神儒) 노선배와의 일전에서 깨끗이 졌다. 네가 전륜회에 남아있는 내 분신을 바라보며 밖에서 있을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분은 전륜회의 건물구조가 그려진 설계도면을 입수하여 백리회주를 찾아내셨지." "으음......!" "그 지하의 밀옥에는 네 정체를 진즉부터 알아 차렸던 전륜회주의 부인(婦人)과 자녀분들도 갇혀 계셨다." 냉무혼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경악에 찬 음성이 새어나왔다. "설마 천기신유의 능력이 그 정도일 줄이야!" "그 분은 인세에 보기 드문 지략가이시지. 그 분 말고도 나의 조력자는 또 있다. 지금 있는 무심도 냉천, 그는 동영 최고의 인자다. 그의 암중 활약이 이번 일에도 큰 몫을 했지." "으음,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투로구나? 천문." "물론이다. 용천후의 옆에는 네가 있어 주었으니까. 후후... 너는 그를 선택한 너를 정말로 끝까지 후회하지 않겠느냐?" "으으음......." 무혼사도 냉무혼은 장탄식에 버금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그는 허리춤에서 도(刀)를 꺼냈다. 그것은 그가 한시도 손에서 떼지 않던 애도(愛刀), 묵혈도(默血刀)였다. 그의 입술 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후후... 천문, 내 대답은 이것 뿐이다." 영호천문의 회색빛 눈에 일순 출렁임이 일었다. "너하고도 이런 식으로 맞서게 되는구나, 무혼." 냉무혼이 묵혈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최소한 내 선택을 지키겠다." "꼭 그래야만 되겠느냐?" "천문, 너는 모른다. 제이인자(第二人者)의 비애를." 냉무혼의 창백한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어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나보다 강한 두 사람이 서로 일인자가 되기 위해 싸우는 것을 곁에서 지켜 보아야만 했다." "흐음? 너는 내게 일인자가 될 것을 종용하지 않았느냐? 그럼 따르겠노라고. 천후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후후... 그랬었지. 마치 하루 빨리 이인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그런데 말이다, 그것이 일종의 자학이었다면 믿겠느냐?" "무혼......!" 영호천문은 충격을 받은 듯 굳어지고 말았다. 냉무혼의 입가에는 한 가닥 자조의 웃음이 깃들었다. "후후... 스스로 능력이 모자란 것을 저주하는 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용천후가 낙일애의 음모를 얘기했을 때, 나는 결정을 내렸지. 그를 따르기로." "그랬었군." 영호천문의 얼굴에는 일말의 연민이랄지, 안타까움이랄지, 보는 이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냉무혼이 다시금 읊조렸다. "지금 선택을 후회해 봐야 나는 더 비참해질 뿐이다. 고로 나는 비열한 나의 선택이나마 최후까지 고수할 작정이다." "하지만 무혼......." 영호천문이 뭐라 말하려 하자 그는 노호성을 발했다. "동정 따위는 집어 치워라! 천문." 츠츳--! 묵혈도가 섬뜩한 음향을 내며 뽑혀 나왔다. 그는 도신이 검붉은 자신의 애도를 가슴 앞으로 곤두세웠다. "천문, 대세는 기울었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종국에 가서는 용천후에게 꺾이고 말 것이다. 제일인자는 그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후훗! 그의 전략은 벌써 구분(九分) 이상 달성되었다. 남은 일은 정도의 오합지졸을 거두는 것 뿐." 영호천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무혼, 그렇게 단정짓지 말아라. 네 선택이 잘못된 것도 그 이전까지의 네 판단이 모두 틀렸기 때문이다. 너는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만, 대세를 가름하는 것은 힘만이 아니다." "그럼......?" "불굴(不屈)의 의지와 협의지심(俠義之心), 요약하면 대정혼(大正魂)이겠지. 네겐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문에 죽음 가운데서 두번씩이나 살아났고, 앞으로는 정도무림인들에게 이를 다시 불어 넣어 그들과 함께 싸워 나갈 작정이다." 냉무혼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묵혈도가 울었다. 우우웅--! 그 가운데 서서히 그는 도신합일(刀身合一)을 이루어갔다. 묵혈도에서 맹렬한 도기(刀氣)가 흘러 나와 점차로 그의 전신을 감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 영호천문은 감탄해마지 않았다. "오오! 너의 환우도원강( 宇刀元 )이 완성되었구나." 다음 순간, 냉무혼의 도신합일체가 사위에 가공할 도기를 뿌리며 무섭게 회전했다. 파파파팟--! 방 안 전체가 삽시에 검고 붉은 묵혈도광에 잠겼다. 그것은 실로 웬만해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초유의 도법(刀法)이었다. 관전하고 있던 백리성우의 안색이 급변했다. 동시에 그는 도세에 밀려 자신도 모르게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정도제일인으로서 군림천하를 이루었던 전륜대제가 자신의 무력(無力)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찰나였다. 그는 내심 통렬히 부르짖었다. '이젠 신인(新人)의 시대다!' 이때였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도광이 불현듯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해 한 방향으로 쏘아져 갔다. 파츳--! 냉무혼은 분명히 느꼈다. 혼신의 힘이 깃든 자신의 묵혈도가 영호천문의 몸을 관통했다는 것을. 놀라운 사실은 그러고도 도의 끝에 아무 것도 걸리는 감촉이 없다는 점이었다. 영호천문. 그는 허상(虛像)인 듯 했다. 도에 관통당하고도 그는 멀쩡했을 뿐더러 왠지 슬퍼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혼, 잘 가라." "천문......?" 영호천문이 냉무혼을 가볍게 껴안은 것은 그때였다. "으윽!" 냉무혼은 하나의 예리한 칼날이 자신의 복부로 푸욱 쑤시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수중의 묵혈도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영호천문의 복부에 비장되어 있던 마지막 여섯번째의 여의무형인(如意無形刃)이었다. '끝이군. 이 지겨운 삶도.......' 냉무혼은 의식이 급속도로 혼미해지는 가운데 서서히 주저앉았다. 동시에 그는 짐을 벗듯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최후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천문,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혐오했었다.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단 하나 예외, 그것은 바로... 너......." 쿵! 그는 쓰러지더니 막바로 절명했다. "무혼, 너는......." 영호천문은 냉무혼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넋을 잃어야 했다. 이로써 그는 칠정(七鼎)까지의 죽음을 보았고, 덕분에 또다른 색채의 고통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독백인 양 중얼거렸다. "차라리 부럽구나. 죽을 수 있는 네가......." 이것은 실제로 그 자신 외에 누구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전륜대제 백리성우가 다가와 물었다. "영호소협, 방금 펼친 무공은 무엇이었소?" 영호천문은 상대의 얼굴에서 치하의 뜻과 궁금증을 함께 발견하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혹시 대제께서는 등룡천문(登龍天門)이라고 아시는지......?" 백리성우는 고개를 갸웃 했다. "등룡천문? 글쎄......." "후후... 그 흔한 천하제일을 주장하는 비문(秘門)올씨다." "자네......?" 백리성우가 흠칫하여 뭔가 더 물으려 하자 영호천문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 오십시오, 여러분." 밖으로부터 십여 명의 인물이 들어왔다. 그들은 불회십반천을 위시하여 주화영 등 모두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그 동안 실종되었던 백리단옥과 단정 남매도 끼어 있었다. "형님!" 단정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영호천문은 그를 마주 안더니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고생이 많았겠구나." 이어 그는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발견해냈다. "녹지주." 영호천문의 얼굴이 비로소 펴졌다. 망자(亡者)가 전해주던 우울함을 씻어내 준 것은 역시 살아있는 자들의 호흡이었고, 그는 이를 녹지주의 정감 어린 미소에서 확인한 것이었다. 대정지기(大正之氣)를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천기신유 단목군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밤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하네. 전격적으로 말이야. 여기 명단이 있네." 그는 명부가 적힌 두루마리를 내놓았다. 그것을 응시하는 영호천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이들이 전부 첩자(諜者)들이란 말씀입니까?" 단목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 용천후는 아주 치밀한 위인일세. 그는 무혼사도 냉무혼으로 하여금 오 년간이나 백리성우의 역할을 행하도록 하면서 도 첩자들을 무수히 심어 놓았네." "발본색원(拔本塞源) 해야지요." "물론이네. 용천후는 총공격이 있기 전, 첩자들로 하여금 군웅들을 암습하게 하여 우리측 전력을 미리 소실시킬 셈이었네. 섬ㅉ한 일이지. 만일 그의 생각대로 되었다면 군웅들 태반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시신으로 화해 버렸을 테니까." "정녕 용천후답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영호천문의 말에 단목군은 껄껄 웃었다. "허허헛... 어떻든 상관 있겠는가? 하늘은 자네를 살려냄으로써 용천후에게서 등을 돌렸네. 마(魔)가 정(正)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일세."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단목군은 깊숙한 눈에서 혜광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는 그의 음모를 역으로 이용하세. 오늘 밤 안으로 이 명단에 든 첩자들을 모조리 심판하자는 것이네." "좋습니다." 영호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천대성은 아마도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예정대로 공격해 오겠지. 이 정도면 적은 밝은 곳에 있고, 우리는 어두운 곳에 있는 셈이니 싸움의 승부는 벌써 난 것이나 다름이 없네." 영호천문이 덧붙여 말했다. "후후... 또다른 원군도 있습니다." "원군이라니......?" "내일이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내일? 그럼 내게도 아직은 비밀이란 말인가? 허허허... 그것 참 재미있군." 구월 팔일의 밤. 군웅들은 저마다 비장한 각오로 가족과 자문파에 남아있는 동문들에게 혈서(血書)를 썼다. -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다! 이것이 그들 모두의 생각이었고, 그렇게 되자 그들은 오히려 가라앉은 마음으로 검(劍)을 닦았다. 평생을 의지해 온 무기와 더불어 대정혼을 불사르며 산화하겠노라고. 똑같은 밤. "큭! 우웁......!" 비명은 별반 크지 않았다. 이는 갑자기 검이 등을 꿰뚫은 순간, 하나의 손이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죽어갔다. 도처에서 수많은 인간이, 그것도 영문을 모르는 채. 도리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뻗어온 검이 느닷없이 가슴을 꿰뚫고, 머리를 잘랐으며, 허리를 동강 내는데야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점일 뿐, 그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은 첩자였던 것이다. 그 밤의 연이은 죽음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행진은 거의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이기에......? ③ 산정(山頂). 휘이-- 이-- 잉--! 산풍이 무척이나 거칠다. 억만 년을 두고 불던 바람이었으되, 확실히 오늘의 이 바람은 달랐다. 대풍운(大風雲), 무림의 역사를 뒤바꿀 만한 일대 전기(轉機)를 예고하는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구월 구일, 즉 중양절이다. 전 무림인들이 초긴장 상태에서 날짜를 짚어가던 그 날이 왔던 것이다. 이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 하던 사람도 있기는 하다. "후후후... 드디어 때가 도래했다. 오늘이야말로 나 마야(魔爺)가 무림사 초유의 대업을 이루는 날이다." 산정에 우뚝 선 채 홀로 부르짖는 이 사내가 다름 아닌 마야 용천후였다. 무천대성의 성주이자 천하마도의 지존(至尊)이다. 용천후는 일신에 오직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에 드러난 대야망은 그보다 훨씬 더 그의 오연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로 전륜회가 보였다. 때는 정오(正午).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신호가 오르면 모두가 다 끝난다. 마의 제전이 벌어지고 그 뒤로는... 으하하하핫......!" 그때였다. 슈욱--! 펑! 전륜회 내부로부터 불꽃이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무섭게 작렬했다. 그것이 용천후가 앞서 말한 대혈전의 신호였다. 콰콰콰쾅--! 수천 년 무림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해 왔던 정과 사의 패권다툼이 또다시 막을 연 것이다. "크핫핫핫......! 쳐라!" "무천대성의 천하를 이루라--!" 족히 수만여에 이를 듯한 마인들이 대공세를 펴 왔다. 전륜회도 더 이상은 침묵하지 않았다. 육중한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수많은 군웅들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정(正)과 사(邪)의 제전에 임하기 위해. 차차창--! 꽈르르릉! 콰쾅-- "으아-- 아-- 악--!" 온갖 음향들이 어우러져 천지를 집어 삼켰다. 아울러 피의 군무(群舞)로써 그 무시무시한 제전은 속개되었다. 무림에 일찌기 이같이 끔찍스러운 혈전이 또 있었던가? 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은 찌르고, 베고, 죽고, 죽이는 양상이 실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분명 궁극은 생로(生路)이겠건만, 수십 년을 내려오면서 줄곧 인간이 죽어가며 흘린 피로 산하를 적시곤 했으니....... 마야 용천후. 그는 여전히 산정에 머물면서 전황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한 가닥 의혹이 어려 있었다. "이상하군! 이럴 리가 없는데......?" 애초의 예상대로라면 전륜회의 전력은 지금 반 이상 줄어들어 있어야 했건만,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생각 외로 전륜회의 대항이 거세었던 것이다. "그럼 냉무혼이 실패했단 말인가?" 그는 아수라의 혈전장을 내려다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슷--! 그의 등 뒤로 한 인영이 내려선 것은 이때였다. "누구냐?" 용천후는 외치기가 무섭게 신속히 돌아섰다. 동시에 그의 짙은 눈썹이 위로 홱 거슬러 올라갔다. "무혼, 어찌 된 일이냐? 전륜회는......?"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타난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무혼사도 냉무혼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틀림없는 냉무혼이었으나 기도가 달랐으며, 용천후는 이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던 것이다. 그 자가 씩 웃었다. "오랫만이다. 천후." 용천후의 안색이 일변했다. "너는 누구냐?" "너로 인해 두 번 죽어야 했던 사람." 그 순간, 용천후는 말을 잊고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무림왕을 자처하던 그에게도 충격이 될만한 일은 있는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 역시도 다소 떨려 나왔다. "천문(天文), 설마......?" 그 자는 손을 들더니 자신의 얼굴을 스윽 문질렀다. "알아보니 고맙군, 용천후." 영호천문이었다. "너는... 정말로 불사신이더냐?" 용천후의 준수한 안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것을 바라보며 영호천문은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하늘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 한. 후후후... 세번째 죽음은 자연사(自然死)이고 싶지만 그도 알 수 없지." 용천후는 혈전장을 힐끗 바라본 후, 말했다. "그렇게는 안될 것이다. 천문, 나는 너를 세 번 아니라 네 번, 아니 열 번이라도 죽일 테니까. 그것은 네가 나 마야 용천후와 동시대(同時代)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영호천문은 기이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같은 산에 양호(兩虎)가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인가 본데, 나는 사양하겠다. 인재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무슨 헛소리냐?" "천하제패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용천후는 눈썹을 곤두세웠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보느냐? 인간에게 있어 야망이란 호흡과도 같은 것, 그것이 끊어지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네 호흡이 그렇단 거겠지,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는 않다." "닥쳐라! 듣기 싫으니 너와 나 사이의 일이나 빨리 끝맺자. 이번에는 내가 직접 너의 숨을 끊어 놓겠다." 스스스......! 그의 몸은 곧 가공스러운 사기(邪氣)로 감싸였다. 영호천문은 냉무혼이 애용하던 묵혈도를 움직였다. "좋다, 천후. 나도 언젠가는 너와 이렇게 정면으로 맞서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었지. " 그리하여 두 사람이 자세를 막 잡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느닷없는 함성이 들려와 바라보니 혈전장의 진세가 돌변해 있었다. 어디선가 족히 수천은 됨직한 괴인영들이 나타나 배후에서 무천대성의 마인들을 공격해 갔던 것이다. 그 광경에 용천후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저들은 무엇이냐?" 영호천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나의 친구들이다. 저들은 북천(北天)에서부터 나, 아니 내가 속한 무림을 도우려 먼 길을 마다 않고 이곳까지 왔지." 그의 말마따나 새로 나타난 군단은 북천신군(北天神君) 빙무군의 수하들이었다. 사실 빙무군과 영호천문은 화무궁에 함께 있는 동안 서로 의기투합하여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은 바 있었다. 그 인연으로 인해 빙무군은 중원무림의 위기를 듣자 자진하여 북천에 있는 자신의 수하들을 대거 불러들인 것이었다. 북천무림의 제왕인 그의 힘은 실로 상상 이상이었다. 영호천문. 그는 전세가 정도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만통회(萬通會)가 이 전장에 뛰어 들어 극력 가세했고, 무천대성에 포함되어 있던 일부 군마맹(君魔盟)의 고수들도 거개가 검을 거꾸로 잡았다. 이 시대의 대마인(大魔人), 용천후는 그 모든 것을 다 보았다. 그는 크게 동요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앙천광소하기에 이르렀다. "크핫핫핫......! 천문, 아무래도 좋다. 너만 꺾으면 나는 언제든지 다시 무림제패를 도모할 수 있으니까." 위이이잉--! 그의 전신에서 강기가 소용돌이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히 태산이라도 뒤집어 엎을 듯한 기세였다. 반면 영호천문은 처음 그대로 조용한 자세였다. 그는 묵혈도를 치켜 들고 있었으나 그에게서는 한 점의 살기(殺氣)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무공이라고는 무자도 모르는 선비가 그저 무의미하게 검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잔잔한 눈으로 갈수록 마기(魔氣)가 짙어져가는 용천후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천후, 나는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우리들의 지난 날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 "결과적으로 십상천(十相天) 사부들께서 우리들을 이렇게 만들었지. 그 분들이 키워내신 우내십정 중 칠정이 죽고, 화무무는 회의가 인 나머지 무림 일에서 손을 떼었으며, 너와 나는 서로 검을 맞대고 있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이냐?" "난 최근 들어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혹 사부들의 뜻을 잘못 헤아린 것이 아닌가고." 용천후의 몸은 서서히 검은 흑무(黑舞)에 싸여 갔다. 그의 음성이 그 흑무를 뚫고 들려왔다. "빨리 말을 끝내라. 그렇지 않으면... 크크......." ④ 영호천문은 탄식했다. "우리들은 사부들께 무공을 배우면서 야망도 전수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 분들에게 군림의 도(道)나 목적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아니, 그러기 전에 우리가 그 분들을......." "으으... 그 따위 소리까지 왜 지껄이는 것이냐?" 용천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영호천문은 고통스러운 듯 말을 이어갔다. "십사 세에 불과한 우리 어린 늑대들은 모의 끝에 제각기 자신을 키워준 사부의 가슴에 검(劍)을 꽂았다." "시끄럽다!" 용천후의 몸이 완전히 먹빛 기운에 휩싸인 채 위로 떠올랐다. 흡사 그 지독한 패륜의 업에서 도망이라도 치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천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들은 하나같이 사부를 죽인 패륜아들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후후... 상잔(相殘)은 그 벌일 테고.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다, 갈수록 그 기억은 선명해진다. 내 검에 찔려 운명하시던 사부의 눈빛......." 용천후가 급기야 말을 가로채 저주하듯 부르짖었다. "천문! 넌 그 일이 모두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래, 내가 사부들을 죽이자고 제안했다. 으하하핫......! 그것이 어떻단 말이냐? 그들은 우리들을 천하제일인이 될 재목으로 키웠다. 하면, 그들이 살아있는 한 어찌 그 뜻이 이루어진단 말이냐? 크하하핫......! 그들의 죽음은 그들 스스로가 부른 것이다." 천지가 통곡할 무림비사가 밝혀지는 순간, 영호천문은 보았다. 용천후의 몸이 허공으로 십 장 이상 떠올라 있는 것을. 고오오오오-- 그가 손을 떨쳐내자 가공할 마음(魔音)과 함께 흑선(黑線)이 길게 뻗어 나왔다. 쉬이이익--! 놀랍게도 흑선이 닿는 곳은 그대로 가루로 화해 버렸다. 반면에 영호천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본래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후, 너의 무공은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불행하게도 너에게는 운(運)이 따라주지 않았다. 내가 익힌 등룡천문의 비학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무공이니까." 스스스-- 슷--! 묵혈도를 치켜든 영호천문에게서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갑자기 그의 신형 자체가 뽀얀 안개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허공에서 이를 본 용천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더니 혼신의 힘을 쏟아내며 외쳤다. "만겁파천황(萬劫破天荒)--!" 콰-- 콰콰-- 콰쾅--! 천지가 함몰될 조짐인가? 폭음이 울리는 동안 산정이 일시에 주저앉을 듯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서 용천후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천후, 잘 가라. 나의 친구여!"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인간, 아니 친구의 음성이었다.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자라났으되 우정 이전에 야망을 배우는 바람에 끝내 서로의 가슴에 검을 겨누어야 했던....... 그는 볼 수 있었다. 빛! 아마도 묵광(默光)이라 해야 옳으리라. 묵혈도가 뿜어낸 광휘가 시야를 가득 점하는 순간, 용천후는 지금까지 애써 이룬 것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느꼈다. 무천대성도, 무림왕도, 천하패업의 염원도, 그리고 가장 고귀하게 여겨야 할 생(生)까지도....... 따라서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소리가 되어 나와주지 않아 심중으로 부르짖어야 했다. - 영호천문! 난 너의 친구가 아니다. 사실 나는 친구가 무엇인지도 몰라.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크크... 저기 한 불쌍한 놈이 길목에 서서 나를 부르는군. 묵혈도의 주인인 냉무혼 말야. 저 놈에게 가서 한 번 물어 봐야지, 넌 친구가 무엇인지 혹시 아느냐고....... "으욱!" 이렇게 끝났다. 어쩌면 삶이란 가치를 논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면 누구도 피치 못할 죽음, 바로 그것을 동반하기에 그토록 가벼울 수도 있는 것이리라. 마야 용천후. 가장 고독(孤獨)했던 승부사(勝負師)이자 너무도 철두철미하여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여 마침내 생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남은 것은 없다. "천후." 영호천문. 그는 묵혈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없다. 놀랍게도 용천후는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 괴현상은 다름이 아니라 등룡천문의 흑백이서(黑白二書)에 수록되어 있는 고금 최고의 무학이 연출해낸 상황이었다. 영호천문은 그 무공을 바탕으로 친구이자 최대의 적수였던 용천후를 베었고, 용천후의 육신은 베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허공으로 흩어져 갔던 것이다. 묵혈도의 끝부분에 한 방울의 핏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말하자면 용천후가 세상에 남기고 간 전부였다. 톡! 핏물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 순간, 영호천문의 입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장중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 우우-- 우--!" 동시에 그는 수중의 묵혈도를 가능한 한 최고로 멀리 집어 던졌다. 그야말로 하늘 저 편의 아득한 곳으로....... - 다시는 잡지 않으리라. 피비린내도 다시는 맡지 않으리라. 너, 무림이여! 다시는 돌아다 보지도 않으리라. 영호천문은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걷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은 아수라지옥도를 이루고 있는 혈전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일단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지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랴? 도무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으니 대책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강남땅 물이 있는 곳에는 두어 칸 되는 띠집이 있었지 도림(挑林)이 무성하게 우거져 더욱 좋을시고 검(劍)은 버렸노라 아주, 버렸노라 이 시대의 최고인인 그에게는 숱한 별호가 남겨졌다. 천중일정(天中一鼎), 무영탐화랑(無影耽花郞), 천수옥환겁(千手王環劫), 복마엽주(伏魔葉主), 게다가 불망객(不忘客). 또 있다. 천하제일정(天下第一鼎). 그토록 열망했던 아홉 명을 젖히고 원치 않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달성했다. 전륜회(轉輪會)와 무천대성(武天大城)의 싸움은 전륜회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로써 무림에는 평화가 도래했고, 강호인들은 가슴 속에 하나의 신화를 품게 되었다. 그것은 천하제일정의 탄생이었으나 어쩌면 이는 당사자의 의사는 고려치 않은 괴이한 환상(幻想)인지도 몰랐다. 먼 훗날, 한 사람이 보았다고 전하기는 했다. 강남 땅 어느 곳에서인지 귀인(貴人)을 보았소. 그의 곁에는 선녀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오.선동(仙童)을 연상시키는 동자도 뛰어놀고 있었소. 동자는 귀인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는데, 귀인은 이렇게 말했었소. - 아이야, 베는 검이 아니라 살리는 검을 가르쳐 주마. 귀인은 곧 도화목을 분질러 검식을 전개해 보였거니와, 그것은 정녕 하늘의 검무(劍舞)였다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내심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천하제일정이다! 그는 틀림없이.' 이것이 무림사, 그 길고 긴 대설(大說)의 마지막 장(章)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