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가행 제3권 
검궁인 저

20장 우내삼기(宇內三奇)
 
담담한 눈.
비월궁주 하수진은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딸과 진일문의 사이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런 어머니의 시선을 받은 옥가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진일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심해서가 아니라 어색해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실상 두 젊은 남녀는 분위기로 미루어 그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이윽고 하수진은 그들에게 축복의 의미가 담긴 말을 전했다.
"너희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나는 이제야 소원하던 바를 이룬 셈이다." 
딸을 가진 어머니로써의 그녀는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 비록 무림에 몸을 내맡기고는 있었으나 역시 훌륭한 사윗감을 골라 옥가려와 맺어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수진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이 어미는 단지 흘러간 세대일 뿐이다. 앞으로는 너희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두 사람을 굳게 믿는다." 
"어머니......."
옥가려는 숙연한 표정이 되어 모친을 응시했다. 
하수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매사에 적극적이며 활발해 일반적인 소녀들과는 사뭇 달랐던 옥가려였다. 특히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렸었다.
'녀석, 이번에도 어느 선까지는 네가 손을 썼겠지. 그러나 남녀 간의 일은 절대 일방적인 것이 아닐진대, 다행히도 너는 이 어미의 걱정을 덜어 주었구나.' 
하수진은 내심 흡족하기 그지 없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딸이 자신과는 달리 기어이 사랑을 쟁취해 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진일문은 이제 하수진에게도 의미를 달리 하여 다가가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언가 부담을 느껴야 했던 대상이 가장 소중한 존재로 부상된 것이었다. 
하수진은 진일문을 향해 물었다. 
"문아(文兒), 너는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느냐?"
진일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운명의 그늘에 가리워지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최고의 스승들을 만났던 그였다. 비취암주인 절정사태가 그랬고 무당의 현고자가 그러했다. 
하수진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네게 기이한 인연들이 닿았었구나. 그런 과정이란 아무나 얻지 못하는 것이지. 정녕 복이 따랐다 할 수 있다."
그녀는 이어 진일문의 손목을 잡더니 내공을 흘려 보냈다. 
진일문은 손목을 통해 한 가닥 유현한 기운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녀가 하는대로 응했다. 
잠시 후.
하수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놀랍구나.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현 강호에서도 흔치 않은 수준이다. 지금도 웬만한 고수들은 능히 상대하겠구나."
그녀는 매우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일문의 체내에 잠재해 있는 내력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던 것이다.
하수진은 잠시 침음한 끝에 말을 이었다.
"내공만으로 치자면 너는 이미 일류고수가 되어 있구나. 그러나 진정한 고수가 되려면 반드시 내외공을 겸비해야 한단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너는 두 가지의 다른 심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해 그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비취암에서 익힌 만만신공은 정통이 아니라 밀종(密宗)에 속하는 공부(工夫)로써 성취가 무척 빠르지. 진경에는 한계가 있지만. 또한 현고자로부터 익힌 태극환허심법은 도가(道家)의 상승절예로써 네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공효가 무궁하다 할 수 있겠구나."
진일문은 열심히 하수진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의 말을 듣자 그는 그 동안의 모든 숙제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수진은 당금 무림의 구대성군 중 한 명으로써 가히 적수를 찾기 힘든 여고수였다. 그녀는 한 눈에 진일문의 무공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네가 현고자 선배의 지고무상한 무예를 부분적으로 밖에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일 그 분의 절기를 제대로 이어 받았다면 너는 지금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진일문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늘 그 점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고자에 대해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얼마 전 강호 견식이 풍부한 환우오사로부터 모두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수진도 진일문의 말에 동조했다.
"현고자 선배가 정신만 멀쩡했더라면 그런 아쉬움은 남기지 않으셨을텐데....... 그 분으로 말하자면 무당파가 배출시킨 최강의 고수가 아니냐? 특히 그 분의 검술을 온전히 습득했더라면 천하에서 적수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을......."
"그래도 저는 만족합니다. 비록 정식으로 사도지례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사실상 그 어르신은 제 사부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자도 아닌 제게 그렇듯 기회를 나누어 주셨으므로 저는 지금도 무당파에 빚을 진 기분입니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사실 그는 현고자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게 된 이후로 한층 더 자신감과 긍지를 갖을 수 있었으며, 마음 속으로 현고자를 지극히 숭앙하고 있던 터였다. 
그의 내심을 짐작한듯 하수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은 네 말이 맞다. 인간이 금수(禽獸)와 다른 이유는 바로 은혜를 알고 그것을 갚으려 하기 때문이지. 네가 그 분께 배운 태극환허공과 태극십삼세는 강호상에서도 전무후무한 기공이다. 즉 태극환허공은 내공심법 중 가장 깊고 유현한 것이며, 태극십삼세는 공격은 몰라도 수비로는 천하에서 으뜸이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 점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거듭할수록 신기할 정도로 묘용이 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진일문을 향해 당부하듯 말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연마해야 한다. 그것은 장삼봉진인이 남긴 무공으로써 네 미래를 개척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수진은 그 말을 끝으로 한 동안 침묵했다. 무엇인가 골똘히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녀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문아야, 원래 나는 너에게 내 일신상의 무공을 전해 주려고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바꾸었다."
"그건 왜......?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닌가요?"
나서서 물은 것은 진일문이 아니라 옥가려였다. 하수진이 딸의 탐욕(?)을 눈치 채고는 한 마디 했다.
"쯧! 그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네가 괜스리 몸이 다는 모양이다만 결정은 이 어미가 알아서 하겠다." 
옥가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릇 사랑하는 이에게는 무엇이든 주지 못해 안달인 것이 여심(女心)이다. 그녀가 모친에게 핀잔을 듣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수진은 자애로운 눈으로 다시 진일문을 응시했다.
"우선 내 보잘 것 없는 무공이 어찌 현고자 노선배의 무학을 따르겠느냐? 추후로도 너라는 대기(大器)에는 좀 더 훌륭한 무학이 담겨야 한다."
진일문으로서는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저는 숙모(叔母)님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 말은 결코 입에 발리운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이 순간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부친의 얼굴조차 모르는 가운데 어머니까지도 일찌기 여의어 버린 그는 하수진의 이런저런 관심에 실제로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내 무공은 자체 만으로는 그런대로 쓸모가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네 내공과 부합되지 않는다. 게다가 당면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전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진일문은 그녀가 덧붙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무공이란 다름 아닌 삼천공의 무학이었다. 그러므로 현재 그의 신분으로서는 익힐 바가 못되었다.
특히 화개악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와 다른 무학을 사용해야 했다. 자칫 하다간 일개인의 복수가 광명궁과 비월궁의 전쟁으로까지 비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하수진이 그런 말을 하기까지 적지아니 고심을 거쳤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굳굳한 어조로 말했다.
"숙모님께선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뜻이 있으므로 해서 그 길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스스로 그 길을 열어가도록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 말에 하수진은 빙긋 웃었다.
"너는 자존심이 강한 것까지도 사형을 닮았구나. 하지만 얘야,자고로 무해(武海)란 끝없이 넓단다. 나는 너에게 두 사람을 추천하고 싶구나."
"두 사람이라면 누구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후후... 그들의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너는 삼천공의 절예와도 능히 자웅을 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진일문은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무림에 나선 이후로 그는 소위 중원 무학의 최고봉을 이룬다는 삼천공의 무공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공동전인이 곧 자신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심적인 부담감만 가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수진의 말은 곧 한 줄기 서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문아, 너도 잘 아는 인물들이다. 호호...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분들은 바로 우내삼기(宇內三奇)란다."
"아!"
진일문은 탄성을 발했다.
 
우내삼기란 다음의 세 기인을 일컫는 말이다. 
취화상(醉和尙).
현고자(玄古子).
만박노개(萬博老 ).
그들 삼인은 어쩌면 중원무림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삼천공과 더불어 같은 선상에서 거론될 수 있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다면 오직 그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수십년 전에 무림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내력과 함께 이름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전대 기인들이었다.
하수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내삼기는 사실 중원무림의 진정한 무학종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옛날 삼천공께서도 그들의 무학에 한해서는 극구 칭찬하신 바가 있었다."
문득 옥가려가 조심스럽게 끼어 들었다.
"그럼 우내삼기와 삼천공은 어느 쪽이 더 강한가요?"
하수진은 딸을 향해 미소지었다.
"얘야, 무공의 강하고 약함은 상대적인 것이라 때로 단정지을 수 없기도 하단다. 지금까지 삼천공께서는 우내삼기와 한 번도 손을 나누신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논외겠군요?"
"그런 셈이지. 하지만 그 분들이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중원무학의 정수를 성취한 분들은 오직 삼기 뿐이라고 하셨다. 다만 이상한 괴벽이 있어 무림에 나서기를 영 꺼려 했고, 덕분에 세간에서는 삼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단다."
"그렇지만 삼기 중 한 분은 이미 타계하셨고 나머지 두 분인즉 삼십여년 전에 실종되셨지 않나요? 그런데 그 분들이 아직 살아 계시기나 할까요?"
"호호호... 아까부터 걱정은 어찌 문아보다 네가 더 하는구나."
하수진은 또한번 옥가려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만든 뒤, 그녀답지 않게 은근슬쩍 돌려 말했다.
"그 분들이 생존해 있다면 아마 백세 가까이 되셨을 것이다. 세 분 중에서는 현고자 선배가 가장 나이가 적었었지."
"그럼 살아 계실 가능성은 더 희박하잖아요?"
옥가려는 괜스리 볼멘 소리를 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진일문의 무공 성취가 현재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별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자 제 풀에 울화가 치민 것이었다.
진일문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고소를 지었다.
'쯧! 옥누이가 나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애를 쓰고 있구나.'
그는 옥가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일 뿐더러 절로 가슴 속이 따뜻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취화상은 본래 소림(少林)의 승려였는데 술을 너무 즐기는 바람에 파문되신 분이다. 하지만 그 분의 무공은 곧 소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단다."
옥가려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아니, 그럼 그 분은 소림사의 파계승이란 말씀인가요?"
"호호호호......."
하수진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까지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 취화상을 그렇듯 단순하게 치부해 버릴 수 있겠느냐? 그 분이 소림에 계실 때였단다. 어느 날인가 그 분은 술을 잔뜩 퍼마시고 장경각에 틀어 박히신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때에 소림의 비전인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을 비롯해 소림 칠십이종절예가 수록된 비경을 몽땅 외우셨다면... 호호호... 그래도 너는 파계승 운운할 수 있겠느냐?"
"쳇! 대체로 종잡을 수 없는 분이로군요?"
묵묵히 그들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일문 역시도 입가에 한 가닥 묘한 웃음을 드리웠다. 
아닌 게 아니라 희대의 기인이란 사람이 불가(佛家)에 속해 있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화상으로써 폭주(暴酒)를 하는 것, 또한 그로 인해 파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림사상 제일 가는 고수가 되었다는 사실 등은 충분히 웃음을 유발시킬 요소들이었다. 
하수진은 이번에는 만박노개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덧 그녀의 음성은 차분하게 되돌아가 있었다.
"그 분은 별호가 말해주듯 개방( 幇)의 인물이시다. 배분상으로는 현 개방의 장문인인 낙척서생(落拓書生) 주휘경(朱輝京)의 사숙조가 되신단다."
"아! 방주의 사숙조라면......." 
진일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수진을 바라보았다. 
"음, 엄청난 배분이시지. 그리고 천성적으로 떠돌기를 좋아해잠시도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단다."
옥가려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꼭 괴인열전(怪人列傳)을 듣고 있는 것 같군요."
"그래, 그 분도 취화상 만큼이나 괴벽하시지. 하지만 천하의 어떤 것에도 달통해 있다 해서 만박(萬博)이라 불리우는데, 무공이라면 밥 먹기보다 좋아해 각파의 무학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하게 알고 계시단다. 게다가 한 번 본 무학은 즉시 시전할 수 있으며 이후로는 그 파해법까지 창안해낸다고 전해지지. 굳이 이르자면 무학의 달인이자 타고난 무공광이라고나 할까? 천하의 각종 무학을 두루 섭렵하는데 있어서는 그 분을 따라 갈 사람이 없단다."
진일문은 내심 부르짖듯 중얼거렸다.
'아! 이래서 숙모님께서는 무해가 넓다 하셨구나. 그런 분들에 비하면 이제껏 나는 한낱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 같다.'
하수진의 말은 계속 되었다.
"애초 그들 삼기는 상호 간에 아무런 친분도 없었단다. 언제부터인가 만박노개로 인해 가장 가까우면서도 또 가장 먼 사이가 되어 버렸지."
"가까우면서 먼 사이라뇨? 그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옥가려의 물음에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 말을 이어갔다.
"무공에 대한 탐구열이 거의 광인에 가까운 만박노개는 단지 자신의 무학을 입증하기 위해 천하를 유랑했지. 그러다 적수를 찾지 못하게 되자 그 분은 마지막으로 취화상과 현고자를 찾아가셨단다." 
"그래서요......?"
옥가려의 눈이 비로소 호기심을 띄었다.
만박노개와 취화상, 그리고 현고자.
그들은 실로 고금에 보기 드문 괴인들이었다.
사실 무림에서 무공 수준이 엇비슷한 인물들끼리는 특별한 원한이나 이권(利權)이 개입되지 않는 한 대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자신은 물론 상대의 명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웬만하면 부딪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그 세 기인들은 하나 같이 이 범주에서 벗어난 인물들들이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대뜸 상대를 호적수로 여기고 비무를 벌이게 되었다. 
비무를 청했던 만박노개도 그렇지만 취화상이나 현고자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도 무림의 양대산맥인 소림과 무당의 대표격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세 사람의 무공 인증이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승부를 내지 못했다. 각기 하늘을 쪼개고 땅을 뒤엎은 무학들을 줄줄이 쏟아냈으나 그 결과는 무승부였다. 
그러자 마침내 그들은 고심 끝에 중지를 모아 한 가지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정기적으로 만나 상호 간에 무학을 비교하기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세 기인들이 무림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원인도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무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두문불출하고 무공을 연단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현고자.
그가 도인(道人)으로써 종내 도를 이루지 못한 것도, 중도에서 광인이 되었다가 불행한 최후를 마친 것도 역시 여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기괴한 발상에서 출발한 삼기비무(三奇比武)에 정신을 팔지 않았던들 어찌 사제에게 그토록 쉽게 암살을 당했겠는가? 
하수진은 계속하여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고자 노선배께서는 이승을 떠나셨지만 다른 두 분은 아직 살아 계실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생존해 계신 한은 지금까지도 비무를 포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일문이 물었다.
"그럼 숙모님의 말씀은 그 분들이 쉬지 않고 꾸준히 무공을 연마해 더욱 진전을 이루셨을 것이라는 의미입니까?" 
"의사전달이 쉬워서 좋구나. 그것이 바로 내가 그 분들을 탐내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란다." 
옥가려가 곁에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어디서 비무를 하는지도 모르시잖아요?"
하수진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려면 이 어미가 그 정도로 대책없이 얘기를 꺼냈겠느냐? 과거 천검(天劍) 사부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으음!" 
"삼기는 십년에 한 번씩 만나 비무를 하는데, 그 분도 삼기를 만나기 위해 그 장소로 가셨었단다. 비록 시기가 맞지 않아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장소만은 틀림없이 확인을 하셨다더구나. 그 곳에 삼기의 격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 곳은 어디예요?"
"호호호호......."
하수진은 또 다시 크게 웃었다. 당금 무림의 여걸인 그녀도 기인괴사를 논하자니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모양이었다.
"아주 괴상한 곳이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랬겠지만 너희들도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그런 장소란다. 호호호......."
"대체 어디이길래......?"
궁금해하는 옥가려를 향해 하수진은 짧게 대꾸했다.
"북망산(北邙山)."
"맙소사!"
진일문과 옥가려는 다 함께 입을 딱 벌렸다. 
북망산이라면 바로 낙약성 밖에 있는 공동묘지가 아닌가? 아무리 괴이한 성품을 지닌 인물들일지언정 비무까지 그런 곳에서 치룬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옥가려가 기가 막힌듯 한 마디 덧붙였다.
"세상에....... 정말 사건 치고도 기상천외한 대사건이군요."
"호호호... 다행히 올해가 그 분들이 만나 비무를 하는 그 십 년의 주기에 해당하는 해란다. 그 분들은 중추절에 만나시지."
진일문은 즉시 그녀의 말뜻을 알아 차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더러 중추절에 북망산으로 가라는 의미였다.
"기일에 맞추어 한 번 그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자 하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운이 꼭 그 분들과 닿았으면 좋겠구나. 만약 그 분들의 절기를 이어 받을 수만 있다면 너는 천하를 굽어보며 날개를 활짝 펼칠 수가 있을 것이다."
"으음......."
진일문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진동을 이기지 못해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하수진의 말마따나 삼기의 무학을 얻는다면 그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듯 싶었다.
물론 아직껏 그것은 단지 한 가닥의 염원일 따름이었다. 취화상과 만박노개가 반드시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설사 살아 있다해도 그의 청을 들어줄지는 알 수 없었다.
진일문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되든 안되든 일단 부딪쳐 보는 거다. 이것은 어차피 탁상공론 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수진의 뒷말이 그의 신념에 일조했다.
"문아, 너는 이미 그들 중 한 분과 인연을 맺고 있는 상태다. 어쩌면 그것이 네게 큰 밑천이 되어줄지도 모르겠구나."
진일문은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취화상과 만박노개. 
마치 그들과의 일전(?)에 대비라도 하려는듯.......
 
낙양(落陽).
이 곳은 한고조(漢高祖) 유방(劉邦)이 제위에 오르고 초도(初都)로 삼은 이래, 숱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야말로 천하제패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그리하여 그 유적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르자면 낙양은 한족 문화의 요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작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십만호가 넘는 즐비한 가택들이 처마와 처마를 잇는가 하면 대로에는 청석이 깔려 있어 공히 대도(大都)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는 부침을 거듭해 왔으면서도 이렇듯 건재한 낙양, 천하를 웅패하려면 이 곳을 거두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일설도 있다. 
그것은 그만큼 이 낙양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염천(焰天).
팔월로 접어들어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낙양성의 거리는 예외없이 몹시도 붐볐다. 그러나 지독한 더위 탓인지 사람들은 한결같이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사람들은 의례 조금만 비위가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싸움을 벌인다. 인내란 이미 더위를 견디느라고 다 써 버려서 남의 사정을 이해할 몫으로는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성내 곳곳에서는 최근 들어 크건 작건 다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상점과 주루가 밀집되어 있는 이 번화가는 한시도 조용할 때가 없었다.
천하각지에서 몰려온 장사치들 중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다는 아니지만 혹 가다 떠벌이 약장수도 있었으며 점을 쳐주고 복채를 챙기는 점장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이들이 손님을 부르는 소리, 혹은 물건을 사거나 팔면서 흥정을 하는 소리 등은 여기저기서 내뱉는 악다구니와 더불어 모조리 더운 날의 끔찍한 소음일 뿐이었다. 
대흥루(大興樓).
낙양에서는 제법 이름난 술집이다.
지금 주루로 오르는 계단 어귀에서는 점소이가 한 명의 늙은 거지를 상대로 소리를 마구 질러 대고 있었다.
"꺼져! 꺼지란 말이야. 쳇! 거지 주제에 먹다남은 찌꺼기를 주었으면 됐지, 뭐? 술이 있어야겠다고?"
점소이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추레하기 그지없는 거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거지는 이런 일에는 이력이 붙은 탓인지 유들유들하게 응수했다.
"허허... 이렇게 훌륭한 안주가 있는데 어찌 술을 청하지 않겠는가? 이보게,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주게. 허허... 이 늙은이도 과거에는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네. 이제 늙어 아무 일도 못하게 되다보니 빌어먹고 다니는 게지."
점소이로서는 거지의 신세 한탄이나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재수없다는 듯 가래침을 칵 뱉아 내더니 안으로 잽싸게 달려 들어갔다. 이어 그는 금새 다시 나왔는데 손에 무엇인가 들려져 있었다.
거지노인이 그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해 입을 헤 벌리려는 찰나였다.
촤악!
"에퉤퉤! 아이쿠......!"
갑자기 거지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점소이가 들고 나와 그에게 끼얹은 것은 주방에서 나온 구정물이었다.
"크헤헤헷! 늙인이야, 어서 꺼지지 않으면 이번에는 아예 똥물을 퍼다가 부어버릴 테다."
점소이는 사뭇 득의양양하여 외치고 있었다. 이렇게 무더운 날, 그는 안 그래도 은근히 짜증이 났던 터라 화풀이 할 대상이 생겨 시원하게 울화증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반면에 거지노인인 어찌 된 영문인지 구정물을 잔뜩 뒤집어 쓰고도 오히려 히죽 웃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음식찌꺼기도 다 젖어 버려서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거지는 허옇게 센 봉두난발의 머리를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자네가 내 안주를 못쓰게 만들었으니 보상을 해야겠네. 헤헤... 기왕이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말이야."
"뭐야? 이 늙은이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점소이는 대뜸 팔뚝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는 거지가 신나게 두들겨 팰 명분을 제공했다 싶어 속으로는 은근히 기뻤다. 
사실 이런 대도의 점소이들이란 대개 주먹질깨나 할 줄 아는 위인들이었다. 더러 손님들 중에는 술이 취해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작자들을 처리하는 것 또한 점소이들의 주된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점소이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거지노인의 지저분한 면상에 날아가 박혔다.
딱!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괴음향이 울렸다.
"아이쿠!"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마침 주위에는 구경거리를 만났다는듯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즉 거지노인의 얼굴이 성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동정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뜻밖에도 비명을 지른 것은 점소이였다. 그가 주먹을 움켜쥔 채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아구구, 내 주먹이 부서졌다. 아이구......."
이 때, 거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쯧! 안되었네. 자네가 오늘 운이 없군 그래. 이 늙은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빨 하나만은 튼튼한데 하필이면 재수없이 이빨을 때릴 게 무언가?"
거지의 익살에 사람들은 와그르르 폭소를 터뜨렸다.
점소이는 대노했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 것은 그렇다치고 손목이 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을 뿐더러 마구 시큰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단단히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늙은이! 죽여 버리겠다--!"
그는 비명에 버금가는 고함을 내지르며 이번에는 거지를 발로 세차게 걷어찼다. 그의 몸놀림은 범상하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내노라하는 건달들 사이에는 일명 대차각(大叉脚)이라는 발재간이 유행했는데 점소이가 바로 그것을 구사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으로 붕 떠서 두 발을 동시에 날리는 수법으로써 무림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치한 수준일지 몰라도 이제껏 취객들을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아주 그만이었다.
"저, 저런......!"
"아이쿠! 이제 저 노인은 죽었구나."
구경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 마음이 약한 자들은 거지노인이 피를 뿜으며 날아갈 것을 상상하고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의 또 빗나가고 말았다. 
퍼퍽! 
"으악--!"
그들이 듣게 된 것은 역시 거지노인의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연이어 그들은 무엇인가 털썩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둔중한 음향과 괴이쩍은 신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끄응......."
사람들로부터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와아! 핫핫핫......!"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점소이에게 향해 있었다. 더러는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가며 배꼽을 틀어쥐기도 했다.
점소이는 어느덧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대차각으로 멋지게 떠올라 발을 휘두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목표물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이었다.
거지노인은 발길질이 날아오자 다만 겁을 잔뜩 집어 먹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그 자리에 엎드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의 뒤에는 돌로 된 사자상이 떡 버티고 있었고, 점소이는 그만 그것을 걷어차고 말았다. 그 석사자는 평소 대흥루의 계단 좌우에 있던 것으로써 점소이는 미처 이를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화강암과 인간의 발은 그 단단함에 있어 잔인할 정도로 우열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점소이는 다리가 부러지는 충격과 더불어 정신을 잃고 뻗어버리는 불상사까지 당하게 되었다.
한편. 
거지는 비실거리며 일어서더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점소이를 보고는 어리둥절해진듯 눈을 껌벅거렸다.
그 순간, 대흥루 안으로부터 다른 점소이들이 우르르 뛰쳐 나왔다. 그들은 진즉부터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자신의 동료가 어이없게 당하자 참지 못해 달려나온 것이었다.
"쯧! 이번 만큼은 행운도 기대할 수 없게 생겼군." 
주위에 둘러선 자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 점소이들은 삽시에 거지노인을 빙 둘러쌌다. 
사람들은 모두 거지 노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으나 그렇다고 정면으로 나서서 그들을 제지하지는 못했다. 공연히 남의 일에, 그것도 한낱 거지의 일에 끼어 들어 같이 봉변을 당해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점소이들 중 한 명이 막 거지노인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할 때였다.
 
  
"멈추시오!"
어디선가 한 가닥 차분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놈이냐?"
점소이들은 대뜸 눈알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연로하신 분을 상대로 젊은 사람들이 폭력을 쓰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사람들 틈에서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점소이들은 그의 모습을 보자 막바로 경멸의 기색을 드러냈다.
청년은 낙방서생과도 같이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일신에 입고 있는 것은 분명 문사의였으나 어깨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소매와 백삼자락에도 역시 때가 묻어 있었다.
짙은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뻗어 있는 데다가 매우 준수한 용모였지만 아쉽게도 행색이 영 귀공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점소이들 중 유독 험상ㄱ은 장한이 나서더니 그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삿대질을 했다.
"뭐냐, 너는? 이 거지와 친척이라도 된단 말이냐?"
청년서생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에게도 부모는 있을 것이오. 만일 당신의 부모가 이런 경우를 당해도 좋다고 말한다면 나도 참견하지 않겠소."
장한의 눈알이 홱 뒤집어졌다.
"뭐, 뭣이? 이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휘익! 
솥뚜껑 만한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 주먹에 맞는다면 문약해 보이는 청년서생이 어찌 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바야흐로 의기를 지닌 한 인물이 피투성이가 되어 뒹구는 것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종전보다 더욱 놀라운 반전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장한의 주먹은 청년의 얼굴을 가격하지 못했다. 
어찌 된 셈인지 공중에서 몇 번인가 춤추듯 허우적거리더니 반대로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이었다.
퍽! 
"헉! 이, 이럴 수가......."
졸지에 스스로에게 주먹을 한 대 갈긴 장한은 아연실색했다. 아픈 것은 고사하고 무엇엔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나 사태의 추이를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점소이들도 예외 없었다.
"마삼(馬三)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그들은 면상이 괴상하게 일그러진 채 비틀거리는 장한을 향해 물었다. 마삼은 어느덧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듯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 놈이 내게 마술을 썼다! 찢어 죽일......."
장한의 고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이 언제 이렇게 위력이 강했더냐고 회의하며 픽 쓰러지고 말았다. 
그 광경에 점소이들은 하나같이 안색을 굳혔다.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로써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었다. 
주루를 찾은 손님 중에는 건드려도 좋을 사람과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부류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일반인이고 후자에 속한 자들이라면 주로 부호나 사대부들이었다.
부호와 사대부들은 대개 금전이나 권력을 믿고 함부로 굴지만 신세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 요구대로 응해주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다. 더욱 건드릴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무림에 속해 있는 자들이었다. 
'으으... 무림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하다니.......' 
점소이들은 저마다 오금이 저려와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알기로 무림인들이란 손속이 잔인할 뿐더러 인명을 해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무리들이었다.
"아이쿠! 나으리......."
점소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흐음?' 
청년문사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삼이 벌인 웃지못할 희극은 그가 관계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마삼의 주먹이 얼굴에 닿기 전에 슬쩍 피하려 했을 뿐이었다.
'대체 어떤 고인(高人)이......?'
궁금해 하고 있던 쪽은 오히려 청년문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제일 먼저 거지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지노인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상하군. 그럼 누가 손을 썼단 말인가?'
그는 내심 의혹을 가지는 한편, 다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점소이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정녕 한심하구나. 약자에게는 강하면서도 강자에게는 오히려 약한 자들....... 이런 자들이 세태를 오염시키고 있다.'
점소이들은 그를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나, 나으리....... 소... 소인들이 눈이 멀어 고인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부디 용서를......."
그들은 급기야 이마를 땅에 부딪치며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기가 꺾이면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내던져 버리는 비열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청년문사는 그들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밝힐 것이 아니라 이들의 못된 버릇부터 고쳐 놓아야겠구나.'
그리하여 그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점잖게 말문을 열었다.
"용서를 구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저 노인장이오. 그대들은 저 분께 무례했던 것을 어떻게 보상 하겠소?"
점소이들은 잠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어 고개를 드니 거지노인이 자신들을 향해 히죽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우리가 저런 거지에게 꼭 사과를 해야한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죽상을 지었다. 도저히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이니 그보다 더한 짓도 해야할 터였지만 막상 입이 떨어져 줄지는 그들 자신도 의문이었다.
청년문사는 곧 그들의 심중을 읽은듯 담담히 말했다.
"노인께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면 그만 두시오. 사실 마음이 따르지 않는 한 그런 것은 형식에 불과하니까. 대신 저 분께 따뜻한 음식과 술을 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점소이들은 내심 살았구나 싶었다. 까짓 거지를 대접한대야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와 싸구려 술 한 주담자면 끝날 것이 아닌가? 그들은 황송한듯 머리를 조아렸다.
"알아 모시겠습니다요, 나으리."
그로부터 대략 한 시진 후.
점소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좁았던 것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했다. 정녕 후회 막급이었다.
'아! 차라리 사과를 하고 말 것을....... 사과는 최소한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구겨진 자존심인데 어쩌자고 버텼을까? 저 늙은 거지놈이 지금 우리들의 한 달치 품삯을 몽땅 먹어 치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이러한 비애(?)는 거지노인의 고급한 미각과 왕성한 식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무려 다섯 가지의 진귀한 요리들을 주문해 차례로 뱃속에 털어 넣었으며 술만 해도 점소이들로서는 맛도 보지 못한 명주(名酒)를 벌써 다섯 주담자째 비우고 있었다.
'찢어 죽일 늙은이......!' 
점소이들은 줄곧 이를 갈았으나 그 옆에 청년문사가 앉아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음식과 술을 날라야만 했다.
"허허... 네 놈들은 여전히 볼따구니가 부어 있구나. 존장을 공경하지 않은 대가로 이렇게 되었으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신을 차리려면 아직 멀었구나."
거지노인은 사슴의 넓적다리살을 저며 만든 값진 요리를 우적우적 씹으며 짐짓 거만하게 말했다. 
청년문사는 그 광경을 보며 흥미롭다는듯 빙그레 웃었다. 그의 서늘한 눈이 순간적으로 의미심장한 빛을 발한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바로 진일문이었다. 이기(二奇)를 만나기 위해 북망산으로 가던 중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이 곳에 들른 것이었다. 
사실 항주에서 여기까지만 해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무려 수천 리에 달하다 보니 출발 당시에 옥가려가 정성껏 지어 입힌 백삼문사의도 지금은 이렇듯 낡아 있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굳이 옷을 갈아 입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남들의 눈에야 어찌 보이던 먼지가 배인 그 옷에서 그녀의 따스한 정성과 애정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는 뇌리에 환우오사를 떠올렸다. 
'오사는 지금쯤 무슨 수확이라도 있는지? 그들에게 외조부님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부탁을 해놓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 잠깐이었으나 우울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이런 면을 제외한다면 강호를 주유하는 일이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지난 날 유랑극단을 따라 다닐 때나 추적자들을 의식해 어두운 곳으로 숨어다닐 때와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그러는 동안 진일문은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곳을 가나 천편일률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누르더라는 것이었다. 
무예를 지니고 있는 자들일수록 그것은 더 했다.
'결코 힘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덕(德)으로써 다스려지되 힘이란 단지 그 수단이 되어져야 한다.'
애초부터 진일문의 관념은 이러했다. 따라서 이번에 있은 일처럼 의분을 느껴 스스로 나서기도 해 보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는 제멋대로 강호를 횡행하는 녹림의 무리들이나 흑도의 인물들과 간간이 부딪치면서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모두가 무림의 정도문파인 칠대문파가 협의지도를 주관하지 않고 자파의 이익만을 위해 두문불출한 탓이다. 그들이 단합하여 일어서지 않는 한 세상은 바로잡을 수가 없다.'
진일문은 연이어 삼성림을 떠올리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삼성림은 오래 전부터 무림에 그들의 세력기반을 다져놓아 이제는 절대적인 존재로까지 부상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는 극히 소수의 인물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삼천공의 폐관 이후, 구대천궁이 내분으로 인해 둘로 갈라진 사실조차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그들의 어떤 면을 시사해주는 것인가?'
그는 암울해진 시선으로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이층의 창가였으므로 바깥의 정경이 훤하게 보였다.
해가 조금 기울었으나 아직도 대지에서 뿜어지는 열기는 여전했다. 그 탓인지 행인들은 잠시 더위를 피해 그늘에 들어가 있거나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문득 주루 앞에 한 대의 낡은 마차가 당도했다. 
마차는 지붕 위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어 먼 길을 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떠돌이 예인(藝人)으로 보이는 일노일소(一老一少)가 내렸다.
21장 마교(魔敎)의 출현(出現)
 
진일문의 눈이 언뜻 이채를 발했다. 
'저들도 이 곳에서 식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다 문득 옆자리가 조용한 것 같아 시선을 돌려보니 거지노인은 한껏 포식을 하고는 머리를 탁자에 박은 채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마침 무료해지려는 참이었는데 잘 되었군.' 
그는 이어 짖ㄱ은 표정이 되어 주루의 점소이들을 스윽 둘러 보기도 했다. 부아를 참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되어 눈에 들어왔다. 
'후후... 저들은 이 노인이 빨리 나가주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잠까지 자고 있으니.......'
이때였다. 은은한 비파소리가 귓전에 부딪쳐온 것은.
띵! 띠딩.......
진일문을 위시하여 식사를 하고 있던 몇몇 손님들이 모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단이었다. 그 곳을 통해 한 명의 꼽추노인과 십팔구 세쯤 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올라왔다.
'으음, 역시 아까 보았던 그들이로군.'
진일문은 안면에 한 가닥 호기심을 드리운 채 그들을 살펴 보았다. 꼽추노인은 나이가 육순이 넘어 보였는데 애꾸였다. 
반면에 여인은 일신에 검박한 마의(麻衣)를 걸치고 있었으나 비교적 선연한 몸매와 빼어난 용모를 가진 미인이었다. 
품에는 낡은 비파를 안고 있었는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얼굴이 약간 까무잡잡하다는 것 정도였다.
딩-- 디딩--!
여인은 곧 손님들이 앉아있는 좌석들 사이를 천천히 누비며 비파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주 솜씨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줄곧 넋을 잃은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러 들었다.
'과연 적선을 받기 위해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꼽추노인이 모자를 벗어 들고는 사람들에게 계속 굽신거리며 그들이 던져 주는 구리돈 따위를 걷어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인이 하는 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인은 날아갈 듯 사뿐한 걸음걸이로 주루 안을 두루두루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빙어같이 매끈한 손으로 비파를 퉁기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상의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여인은 걸을 때마다 허리를 묘하게 비틀며 연주에 맞춰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어디 그 뿐인가? 때로는 젖가슴을 앞으로 불쑥 불쑥 내밀어 음탕한 자세를 보여 주기도 했다. 
"아!"
손님들의 입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어느 덧 모두 눈이 충혈된 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눈이 빠져라고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인의 행동은 엄연한 유혹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간드러진 노랫 소리가 이를 충분히 밑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 노래의 내용이란 다음과 같았다.
소첩은 본래 양가의 외동딸로 태어났거늘,
어찌 하다가 이렇게 굴러 떨어졌는지?
사람들 앞에서는 온갖 교태와 아양을 다 하지만,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은 천만갈래여라.
봄날 남쪽 지방에서 가련히 떠돌아,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네.
슬픔만 더 한다네, 어디에 진주(珍珠) 열 말이 있다면
뜨내기 계집 신세를 청산할 수가 있으련만.
그것은 삼성곡(三醒曲)의 사(詞)를 풀어 노래한 것으로 원대(元代)의 한 기녀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여 읊은 것이었다.
하지만 비파를 타는 여인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눈에 띄게 추파를 던지며 그런 노래를 부르니 본래의 의미는 완전히 무색해지고 말았다. 즉 돈을 주면 몸을 팔겠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탈바꿈해 버렸다.
진일문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졌다고는 하지만 백주에 몸을 팔기 위해 가무를 하는 여인이 있다니.......'
그런데 이때였다. 
고개를 돌리려던 그는 흠칫했다. 꼽추노인의 손이 표면상의 목적과는 달리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소매치기! 이제 보니 저들은 겸업을 하고 있었군.' 
꼽추는 바로 사람들이 여인에게 정신을 뺏기고 있는 사이를 이용해 그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도 생각했으나 잠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여인이 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둔부를 밀착시켰다. 그러자 그 자는 당장 입을 헤 벌리며 군침을 흘렸다.
"헤헤... 얼마면 되겠느냐? 하룻밤에."
그는 이런 일에 꽤 익숙한듯 노골적으로 묻고 있었다. 
"흐응, 그것까지는 말고......."
여인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콧소리를 냈다. 
그순간, 베옷을 뚫고 터져나오기라도 할듯 팽팽한 젖가슴이 그 자의 코앞에서 한 번 출렁 했다. 중년의 나이에 부유한 상인 쯤으로 보이는 그 자는 대뜸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헤헤... 싱싱한 물건에는 가벼운 손장난도 나름대로 맛이 있지. 옛다!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는 은자 서너 개를 꺼내 그것을 여인의 품안으로 깊숙히 쑤셔 넣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재빠르게 들어갔던 것에 비해 도무지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
중년인의 손이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는 동안 여인은 콧소리를 내며 몸을 묘하게 비틀어댔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에 은자를 들고는 앞다투어 그녀를 청했다.
"자자, 이제 그만 이리로......."
하지만 예의 중년인은 여인을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와락 끌어다가 자신의 무릎에 올려 놓더니 이번에는 둔부 쪽을 공략하려 했다. 
"안돼요, 거긴 더 비싸요. 흐응... 그리고 낮장사는 이 이상 하면 아버지께 혼나요."
여인은 꼽추노인을 지칭하여 둘러대고는 중년인의 손을 피하는 대신 그와 몇 번인가 적극적으로 몸을 마찰시켰다. 
이윽고 여인은 중년인의 품에서 폴짝 뛰어 내리더니 다른 좌석에 앉은 손님에게로 갔다. 계속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을 거치자 그녀는 단 시간 내에 적지 않은 수입을 챙겼다.
 
한편. 
진일문은 낯이 뜨거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삼자가 나서서 뭐라고 떠들 일이 못되었다. 
일테면 소매치기 같으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니 누구라도 징계를 할 수 있지만 여인이 하는 짓은 당사자의 도덕심에 호소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생각과는 별개로 진일문에게도 차례(?)가 주어졌다. 여인이 스스로 마지막 고객을 찾아 그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호호... 문사 나으리, 동행이신 분께선 주무시는군요?"
여인은 돈을 벌어들일 명분을 이렇게 끄집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역겨운 느낌이 일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여인은 더욱 대담하게 나왔다.
"아이, 점잖은 척 빼시기는......."
그녀는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진일문은 부드럽고 탄력있는 그녀의 몸을 느끼게 되자 오히려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소생은 그런 방면에 취미가 없으니 다른 곳에나 가 보시오."
그 말에 여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호호...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죠. 그렇지만 종국에 가서는 다 똑같은 게 남자 아닌가요?"
진일문은 응대하고 싶은 심정이 못되는지라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호호... 어디, 그럼 고상하신 문사님께선 여자와 소인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공자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행하시는지 볼까요?"
그것은 곧 육탄돌격이라도 감행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쯤 되자 진일문도 더 이상은 대답을 기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토가 치밀어 오르려는 것을 참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소생은 고상한 사람은 못되오. 그러나 최소한 낭자처럼 철면피는 아니오. 낭자가 계속 귀찮게 군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소. 후후......."
그는 눈짓으로 넌즈시 꼽추노인을 가리켰다. 여인의 눈길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흠칫 하고 멈추었다. 때마침 꼽추노인은 또 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물건을 훔쳐내고 있었다. 
여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알고 있었군요? 당신은......."
진일문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더욱 낮게 속삭였다.
"낭자가 이대로 조용히 사라져 준다면 나도 저 노인의 일에 일체 참견하지 않겠소."
그는 이제 징계고 뭐고 여인을 빨리 떼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인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눈은 꼬리가 약간 치켜올라가 있어 몹시 관능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어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한층 더 그에게 몸을 밀착시켜 왔다.
'헉!'
진일문은 대경했다. 뜻밖에도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격을 입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탁자 밑에서 벌어진 상황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감히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얼굴이 달아오른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놀랍게도 여인이 손을 뻗어온 곳은 남성의 주요 부위였다. 진일문은 다급히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아빼려 했다. 그러자 여인은 오히려 그의 품으로 쓰러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 이러시면 어떡 해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진일문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가 여인의 손을 끌어간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괘씸한!'
그는 분노가 치민 나머지 여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잡게 된 것은 천만뜻밖에도 그녀의 어깨가 아니라 뭉클한 그녀의 젖가슴이었다. 설마하니 그녀가 어깨와 젖가슴의 위치를 슬쩍 뒤바꿀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여인은 오히려 여유있게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서 떼어냈다. 
"호호호! 은자가 한 푼도 없다면서요? 어쩜 그러면서 엉큼하기는....... 쳇! 얼굴만 반반하면 뭐 한담? 사내라면 의당 재력(財力)이 있어야지."
여인은 짐짓 야멸차게 내뱉고는 발딱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무 미련 없다는듯 훌훌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너무도 기가 막혀 이제는 자신이 화가 났는지 어쨌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과연 공자 말씀은 지당하군. 자고로 여자와 소인은 상대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이야.'
그가 내심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는 사이, 꼽추노인과 여인은 벌써 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였다. 
그들과는 반대로 막 계단 위로 올라오는 몇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의 청의중년인과 그의 수하들인 듯한 다섯 명의 장한이 었는데, 모두가 양쪽 태양혈이 불쑥 치솟아 있어 일견하기에도 절정에 이른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중년인은 눈매가 날카롭게 그어졌으며 안색이 파르스름해 몹시도 냉혹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손에는 한 자 길이의 철필(鐵筆)을 쥐고 있었다. 
예로부터 무림에는 병기의 길이가 한 치 짧으면 그 만큼 목숨이 위험하다는 일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그것은 병기란 길수록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중년인의 철로 된 판관필은 그 끝이 둥그스름하여 전문적으로 혈도를 짚게 되어 있는 병기였다. 하지만 그 길이가 이처럼 짧은 것은 그만큼 그가 무예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꼽추노인과 여인은 그 중년인 일행과 마주치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내 길을 터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여 중년인도 처음에는 무심하게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그의 생각이 뒤바뀐 것은 여인이 잰 걸음으로 그의 곁을 스쳐 막 계단을 내려 가려고 할 때했다.
"잠깐!"
중년인은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차갑게 내뱉았다. 
그 소리에 여인의 몸이 일순 뻣뻣하게 굳어졌다. 꼽추노인이 몸을 가늘게 떠는 것도 눈에 띄었다.
"부, 부르셨습니까요?"
꼽추노인은 즉시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중년인은 그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날카로운 안광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저 계집은 늙은이와 어떤 사이인가?"
"소인의 딸년입지요, 나으리."
"흠, 제법 반반한 것이 아비와는 전혀 닮지 않는 것 같군. 어디 얼굴을 한 번 이 쪽으로 돌려 보라고 하게."
꼽추노인의 얼굴에 언뜻 불안감이 스쳤다. 그러나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는지 마지 못해 여인을 불렀다.
"진진(眞眞)아."
진진이라 불리운 여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으나 웬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중년인은 그녀를 향해 이번에는 직접 명령했다.
"이리 가까이 오도록."
여인의 눈꼬리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중년인은 판관필로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렸다. 그는 사뭇 거만한 어투로 물었다.
"제법 쓸 만하군. 너는 비파를 연주할 줄 아느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중년인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는 손을 내리더니 수하들을 향해 고개짓을 했다. 그러자 수하 중에 얼굴이 말상인 자가 나서며 대신 뜻을 전달했다.
"영주께서는 네 연주를 듣고 싶어 하신다. 마음에 드시면 크게 상을 내리실 것이다."
그 사이, 다른 네 명의 수하들은 계단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지금부터 임의로 나갈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여인은 입술을 깨물더니 꼽추노인을 건네다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꼽추는 할 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침내 여인은 단지 중년인 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비파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그녀의 비파 솜씨는 대단치 않았으나 긴장한 탓인지 더욱 형편 없었다.
중년인은 술을 마시면서 계속 여인을 쏘아 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은 마치 여인의 내부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인도 감히 그를 상대로는 추파를 던지거나 교태를 피우지 못했다.
문득 중년인이 위협이 깃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겨우 그런 실력으로 비파를 연주해 돈을 벌었다니 믿기 어렵구나. 혹시 네 재주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냐?
여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손님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들은 애시당초 중년인 일행이 무림인들이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혹시라도 무슨 불똥이 튈까 두려워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다. 
어떤 자는 소리없이 일어나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일찌감치 빠져 나가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듯.
그런데 아래 층에서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 돈! 내 돈이 없어졌다!"
바로 계산을 하고 나가려던 자들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자신의 품을 뒤져 보았다. 그들의 안면이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내 것도 없어졌다--!"
여기저기서 경악과 분노가 섞인 음성들이 연이어 튀어 나왔다.
그 바람에 주루는 일시에 소란스러워지고 말았다. 때 아닌 일대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꼽추노인와 여인.
그들의 안면은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저지른 죄가 들통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중년인이 가느다란 눈에서 섬뜩한 광망을 뿜어냈다. 그의 얄팍한 입술에는 스산한 미소가 어렸다.
"역시 내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내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만하다."
그가 미간을 좁히자 그의 눈은 더욱 모로 째졌다.
"그 동안 꼬리를 잡지 못해 고민이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 고민이 해결되었다. 이제 더 이상은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너희들에게 당한 본궁의 형제들이 대체 몇 명인 줄 알기나 하느냐? 내 그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필히 너희들을 징계하겠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요? 저희들은 다만......."
꼽추노인이 짐짓 더듬거리며 손을 비볐다.
"어딜!"
다섯 명의 장한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날렸다. 
취리릭--! 
수십개의 빛줄기가 꼽추를 향해 무섭게 뻗어갔다. 그것은 은빛의 철삭이었다. 그러나 꼽추의 반응도 이에 못지 않았다.
그가 마주 모았던 손을 떨쳐내자 일시에 사오십개에 이르는 자오정(子午釘)이 날아갔다. 
쐐애애액--!
장한들은 우선적으로 이 암기부터 피해야 했다. 그들은 급급히 손을 거둠과 동시에 몸을 뒤로 빼냈다. 
그 순간, 여인이 창문을 향해 쏜살같이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창가에 채 이르기도 전에 그녀는 뾰족한 비명을 발했다.
"악!"
어느 새 중년인이 재빠르게 손을 쓴 것이었다.
털썩!
여인은 그만 바닥으로 맥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등 한복판에는 하나의 젓가락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혈도를 찍혔을 뿐, 죽지는 않았다. 
장한들은 꼽추노인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꼽추노인은 더 이상 꼽추가 아니었다. 굽었던 허리가 말짱하게 펴졌으며 키도 한 자 이상 더 커져 있었다.
그는 수중의 검으로 눈부신 검화(劍花)를 피워내며 다섯 명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조금도 밀리는 형국이 아니었다.
중년인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관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취릭! 취리리릭--!
장한들은 계속 은삭을 휘두르며 꼽추 아닌 꼽추를 밀어 부쳤다. 은삭은 한 사람당 다섯 가닥씩 쥐어져 있었으나 적절히 배합을 이루어 물샐틈 없이 가짜 꼽추를 몰아가고 있었다.
와중에서 꼽추는 종횡무진으로 검을 휘둘러댔는데 그의 검예(劍藝)란 가히 감탄을 불러 일으킬 만한 수준이었다. 
송이송이 피어나는 검화는 장한들에게 충분히 위협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일 일대 일의 대결이었다면 그들로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실력이었다.
중년인은 양측이 이렇 듯 백중지세를 이루자 눈살을 찌푸렸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여인을 힐끗 바라보더니 살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시간 끌 필요 없다. 하나를 잡았으니 그 놈은 죽여도 좋다."
그 말에 장한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검은 색의 원통이었다. 
그것을 꼽추에게 겨누자 꼽추의 눈에는 공포의 기색이 어렸다.
"아... 안돼......!"
그는 신형을 날렸으나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펑! 
다섯 개의 철통에서 일제히 화염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화염은 고스란히 꼽추의 몸에 격중되었다. 
"으악--!"
전신에 불이 옮겨 붙은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한 동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그는 잠시 후가 되자 하나의 숯덩이가 된 채 잠잠해져 버렸다. 
주검치고도 정녕 참혹한 주검이었다. 그 공포스런 광경에 주루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안색이 흙빛이 되어 밖으로 달아났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진일문과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거지노인 뿐이었다. 중년인은 언뜻 시선을 그 두 사람에게 돌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계집을 데려 와라."
한 명의 장한이 쓰러져 있는 여인을 끌고 왔다. 
중년인의 앞, 여인은 반듯이 천정을 향해 눕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는 비장함과 함께 일말의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당선(唐扇)! 나를 추궁해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호호호... 차라리 단칼에 죽이는 것이 현명할 걸?"
거친 말에도 불구하고 당선이라 불리운 중년인은 여전히 무심한 투로 말했다.
"흑수선(黑水仙), 너희 마교(魔敎)의 잔당들을 처단하는 것은 내 임무다. 너는 아무런 행운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는 너희들을 다루는 방법이 따로 있다."
진일문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라고? 저 여인이 그럼 마교의 잔당이란 말인가?'
마교라면 수십 년 전에 삼천공에 의해 토벌되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출현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이 때, 흑수선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흥! 너희들의 간교한 수작을 모를 것 같으냐? 호호호... 마교라니, 터무니 없는 말로 덮어 씌우려 하지 마라. 어리석은 자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삼성림이 천하인의 이목을 속이고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당선은 수중의 철필을 만지작거렸다.
"너는 삼성림을 모욕했다. 그 죄만으로도 능히 구천마옥에 들어갈 명분이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네게 물어볼 말이 있다."
"호호호... 삼성림이 무슨 하늘이라도 된단 말이냐? 날 구천마옥에 가두겠다고? 호호호... 구천마옥에 의인들이 갇혀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 이 흑수선을 그 곳에 가두겠다니, 다시 없는 영광이로군 그래? 호호홋!"
당선은 초지일관 무표정이었다.
"크ㅋ... 근거없는 소리를 함부로 지껄여 삼성림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바로 마교 잔당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지."
"뭣이!"
"흑수선, 너는 마교에 가담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다. 다시 돌아선다면 목숨만은 보장해 주겠다."
"ㅌ!"
흑수선은 대답 대신 침을 뱉았다. 그것은 당선의 얼굴로 날아갔으나 맞지는 않았다. 그가 재빨리 고개를 틀어 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더욱 싸늘하게 굳어졌다.
"으음! 권주는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당선은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저 계집의 옷을 벗겨라!"
"옛!"
두 명의 장한이 즉시 대답하고 나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런 일이 몹시 재미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진일문은 갈등이 사로잡혔다.
'과연 어느 쪽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구나. 당선의 말대로 저 여인은 정말 마교의 인물일까?' 
찌익! 찍--! 
옷자락 찢기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흑수선에게 다가간 두 명의 장한이 사정없이 그녀의 옷을 찢어버린 것이었다.
어느덧 상의가 달아나 풍만한 젖가슴이 노출되어 있었다. 비록 얼굴과 마찬가지로 가무잡잡하긴 했으나 출렁이는 흑수선의 유방에는 탄력이 넘쳐 흘렸다.
"이... 이... 비열한! 명색이 사대신가(四大神家)의 일원이면서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괜찮단 말이냐?"
그녀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진일문은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당선이란 자가 사대신가의 사람이라고?'
당선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마교의 잔당들을 상대하는데는 도의를 따질 필요가 없다. 우리 당가(唐家)와 사가보(査家堡), 전광세가(電光世家)와 대리단가(大里段家)라면 삼성림에 속해 있거니와 무림정의의 수호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즉 너를 약간 혹독하게 대접한다 해도 대의명분이 뚜렷한 이상 강호의 고인들도 이해할 것이다."
당선의 태도는 비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했다.
"나는 최근 들어 마교의 잔당들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그리고 그 핵심인물이자 주동자가 바로 천하의 대악인인 왕중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쨍그렁!
갑자기 무엇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조용하던 주루의 공기를 찢으며 중인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진일문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은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발 밑에는 깨어진 잔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흐음?"
당선이 문득 의혹이 담긴 시선으로 진일문을 쏘아 보았다. 그의 곁에서 곯아떨어져 있는 거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선은 절대 성급하거나 경솔하게 구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본래의 목적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흑수선을 바라보았다. 
흑수선이 째지는 듯한 음성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 따위 터무니 없는 소리로 그 분을 모함하지 마라. 그 분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원하실 대인대의지협(大仁大義之俠)이거늘,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분을 모함한단 말이냐?"
"크크... 흑수선, 왕가가 천하를 어지럽힌 대마왕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열심히 비호하다니, 너는 벌써 마교의 술수에 깊이 빠져 버린 모양이구나."
흑수선은 코웃음치더니 사뭇 당당하게 말했다.
"웃기지 마라. 너희 사가(四家)야말로 훗날 무림 역사서에 대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삼성림의 흉악한 음모에 가담한 것 자체가 용서받지 못할 대죄(大罪)다."
"닥쳐! 더러운 계집."
짝!
흑수선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입과 코로 피를 뿜어냈다. 그녀의 상의를 벗겼던 장한이 무지막지한 힘을 실어 그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이 때, 다른 장한이 달려 들어 그녀의 허리에 걸려 있는 치마를 잡아당겼다. 
부욱--!
그녀의 치마가 무참하게 찢겨져 나갔다. 안에 짧은 속옷을 입기는 했으나 나신(裸身)보다 더 색정적이었다.
"호호호호......! 이것이 삼성림의 방법이냐? 호호호... 지난 날의 마교 교주였던 동방절호도 이런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았다. 호호호... 광명정대함을 부르짖던 삼성림의 위선과 기만책을 내 오늘에야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되었구나."
흑수선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도저히 이런 식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진일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처음 보았을 때와는 영 딴판이로군. 웬만한 남자들 같아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기개를 가진 여인이다.' 
그 사이, 흑수선은 거의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이라곤 이제 아랫배를 가린 한 장의 천 뿐이었다.
다섯 명 장한들의 눈은 그녀의 풍만한 유방과 기름진 아랫배에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떤 자는 목울대가 울리도록 침을 꿀꺽 삼키는 자도 있었다. 
그에 반해 당선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흑수선, 네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구천마옥에는 그런 일의 전문가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우리 당가에도 나름의 색다른 방법이 있지. 내 지금부터 그것을 알려 주겠다."
그는 소매 속에서 짤막한 대통을 꺼냈다. 뚜껑이 막혀 있었으며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통이었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놓고 만지작거리는 그의 눈에는 잔인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당가는 암기나 폭약 외에도 유명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천하의 어떤 독물도 다룰 수 있다는 점이지."
그는 가느다란 눈으로 통을 가리켰다.
"이 속에는 현재 극렬한 독성을 가진 뱀이 한 마리 들어 있다. 이 놈에게 물리면 채 일각도 못되어 전신에 종기가 난다. 그리고 곧 진물이 흘러내리며 피부가 문드러지게 되는데 그 때부터는 몹시 가려워져 자신도 모르게 마구 긁게 되지. 자신의 손톱에 의해 피부가 벗겨져 나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연후에는 서서히 썩기 시작하고 종내......."
흑수선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너... 너는... 정말 잔혹한 놈이구나!"
"그러나 이 뱀의 가장 큰 묘용은 정작 다른데 있다. 이 뱀의 이름은 음양독각사(陰陽獨脚蛇), 그 중 수컷이 이 속에 들어 있다. 이 놈을 네 어떤 부분에 놓아 주면......."
그는 계속하여 고의적으로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럴 때마다 흑수선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이 놈은 춘성(春性)이 강한 놈이라 암내를 매우 좋아한다. 아마도 네 그 곳으로 사정없이 파고 들어가 진액을 발산해 놓을 것이다. 후후... 그렇게 되면 너는 곧 이성을 잃게 되고, 욕정에 몸부림치며 아무하고나 그 짓을......."
"그만! 이 더러운 놈, 네 놈이 그러고도 정도의 인물이라고 자처할 수 있단 말이냐?"
흑수선은 분노 때문인지, 공포감 때문인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까지 꿋꿋하기만 하던 기세도 어느 정도 꺾인 듯 했다. 그녀의 입술은 추위를 느낄 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흑수선, 나 역시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네가 한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해 준다면 말이다."
흑수선은 눈을 내리 감았다.
"살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더 이상 모욕하지 말고 깨끗하게 죽여 다오. 그래, 어떤 것을 알고 싶으냐?"
"왕중헌의 행방.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당선의 말에 그녀는 다시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모른다. 그 분이 계신 곳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그 분을 만난 것도 딱한번뿐이다. 이것은 추호도 거짓이 아니......."
흑수선은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번쩍 떠 졌고, 막 몸을 일으키는 당선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금새 사색이 되었다. 어느덧 당선이 다가와 대통을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 갖다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은 뚜껑이 막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유방을 문지르는 당선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너... 넌......."
흑수선은 금방이라도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와중에도 당선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대통은 점차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매끄러운 아랫배 부근에서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대통이 그녀의 배꼽을 푹 찔렀다.
"학!"
흑수선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비단 아파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공포와 더불어 모멸감이 극에 이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얼굴은 어느 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한 어찌된 셈인지 이는 그녀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당선의 가느다란 눈도 마찬가지였다.
진일문.
그는 당선의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위 명문이라는 당가의 고수가 저런 일을 자행하다니....... 삼성림도 비록 변질이 되었다고는 하나 중인환시리에 저런 짓을 하는 것까지는 방관하지 않을텐데......?'
사실 당선이 벌이고 있는 행위는 흑도의 인물들조차 꺼려하는 짓이었다. 더우기 백주에, 여인을 상대로 이런 고문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하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흐으음......."
당선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대통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 여인의 은밀한 부위를 덮은 천을 들추고 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다섯 장한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눈알이 충혈된 채 당선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꼬마야. 음냐......."
진일문은 멈칫 했다. 
'아! 이 노인이.......'
그는 놀란 나머지 얼른 돌아 보았으나 노인은 여전히 머리를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 홍곤히 자고 있었다.
'설마... 잠꼬대는 아니겠지?'
이 때 흑수선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하아....... 내... 내게 무슨 수작을......? 미... 미혼분(迷魂紛)을 쓰다니....... 하아... 나쁜... 놈......."
진일문은 충격을 입고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미혼분이라면 하오문의 잡배들이나 사용하는 것으로써 주로 강제로 여인을 욕보일 때 사용하는 춘약의 일종이었다.
그 약을 쓰면 아무리 지조가 굳은 여인이라도 삽시에 이성을 잃고 동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정도 무림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하나의 금기로 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런 수단을 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무림의 공도로 취급하여 처단한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
당가의 제삼가주(第三家主) 당선.
그는 역시 특수하게 제조된 미혼분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대통에 든 것은 음양독각사라는 뱀 따위가 아니라 춘성이 지독히도 강한 미혼분이었던 것이다. 
당가 내에서 서열 삼위인 그는 평소 여색에 관한 한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약으로 여인을 혼미하게 한 뒤, 그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당선의 이런 취미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대통을 문지르는 척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혼분을 슬그머니 흑수선의 코 속으로 흘려넣은 것이었다.
"아아! 하아......."
효과는 백발백중이었다. 흑수선은 격렬한 신음을 발하며 몸을 마구 비틀어 대고 있었다. 대통이 아랫배에서 움직여질 때마다 그녀는 흥분을 이기지 못한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으으... 으음.......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쉴새없이 젖가슴을 비벼대고 있었다.
당선은 그녀의 모습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광기에 가까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광경에 진일문은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슬며시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거지노인의 음성이 다시 귓전으로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일격에 해치워야 하네. 흐흐... 저 다섯 멍청이들은 별 것 아니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쓰러뜨리지 않으면 골치가 아프지. 쯧!저 당선이란 놈은 변태로군. 제 조부인 당욱광(唐旭光)도 그러더니만 손자 놈도 별 수 없군."
그것은 소위 전음지술(傳音之術)로써 모기소리만 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전해준 충격이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으음, 애초부터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었지만 내가 암기를 사용하려 한다는 것은 또 언제 알아 차렸을까?'
진일문은 품 속에서 기사 백불범으로부터 얻은 유성호접을 만지작거리며 고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 괴이한 거지노인의 상황 판단은 정확했다.
'저 당선이란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이 곳에 우리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것은 그만치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필시 저 자는 놀라운 무공과 더불어 특별한 수단까지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노인의 말마따나 수하들을 단번에 해치우지 않으면 되려 저 자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유성호접이라면 천하 사대암기 중 하나로써 그 위력이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진일문은 그것을 소지하고 있으면서도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역시 노인을 향해 전음으로 말했다.
"노인께서는 후배를 좀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거지노인의 전음이 그 말을 받았다.
"밥값을 하라는 건가?"
진일문은 멈칫했으나 곧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흐흐흐... 하긴, 이 늙은이는 남의 신세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 좋다, 너를 돕겠다. 그럼 네 놈에게는 이제 아무런 빚도 없는 셈이다. 그렇지 않느냐?"
진일문은 노인이 무척이나 괴퍅한 위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더 이상 따질 시간이 없었다. 흑수선이 전신을 땀으로 적신 채 정신을 잃을듯 헐떡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전음으로 노인에게 지시한 후, 품 속에서 유성호접을 꺼내 던졌다.
22장 남양(南洋)에서 건너 온 화사(花蛇)
 
팔랑팔랑.......
유성호접은 마치 살아 있는 나비인양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섯 장한은 흑수선이 몸을 뒤트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윽고 유성호접은 장한들의 머리 위까지 날아갔다. 그것을 본 진일문은 한 가닥의 진기를 가늘게 뽑아 날렸다.
스슷! 
허공 중에서 유성호접이 비산(飛散)했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장한들은 수십 개의 조각으로 화해버린 유성호접의 세례를 피하지 못하고 모조리 쓰러져 버렸다.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찰나, 진일문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당선을 덮쳤다. 그의 장력이 당선의 등을 맹렬하게 가격했다. 
펑!
그러나 장력이 부딪친 것은 당선의 등이 아니라 소매자락이었다. 그가 재빨리 소매를 휘둘러 이를 막아낸 것이었다. 
그 여파가 되려 무시무시했다. 주변의 탁자와 의자 등이 진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여기저기로 날아가 처박혔다. 
하지만 진일문은 순간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느꼈다.
'이 당선이라는 자는 내공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 같군.'
실제로 그는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데 그친 반면 당선은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다. 
원래 당가는 정통의 무학 방면에서는 그다지 내놓을 바가 없었다. 그들이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암기술 때문이었다. 
당가의 삼가주인 당선은 뛰어난 자파의 암기술과 더불어 치밀한 심계(心計)로 한 몫을 하던 위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선은 처음 주루에 올라왔을 때부터 거지노인과 청년문사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서도 내내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다시 공격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이 유운비해(流雲飛海)라는 수법으로 당선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러자 당선은 재빨리 이를 피하며 수중의 철필을 흔들었다.
그것은 실상 당가 비전의 독문암기가 내장되어 있는 일종의 병기였다. 그 짧은 철필 속에는 무려 열 두 가지에 이르는 무서운 장치들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는 그저 단순하게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 철필을 막았을 뿐이었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린 그 찰나였다. 
슈슈슈슉--!
뜻밖에도 미세한 파공성이 일더니 철필로부터 수십대의 우모침(牛毛針)이 쏟아져 나왔다. 진일문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런!'
더구나 지척간인지라 그것은 미처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진일문은 우모침이 얼굴과 가슴으로 쏟아 부어지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수중의 단검을 휘저었다. 
싸라락....... 
기이한 음향에 이어 득의에 찬 당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 어리석은 놈."
진일문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를 응시했다.
본시 우모침은 쇠털같이 가늘고 가벼워 피하기가 힘들었을 뿐더러 일단 몸에 적중되면 열이면 열, 모두 죽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곧장 혈관 속으로 파고 들어 피를 따라 돌다가는 결국 심장에 도달해 그 움직임을 멎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 악독무비한 암기를 일컬어 무림에서는 오보추혼사(五步追魂絲)라고 부른다.
진일문은 상대가 웃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싱긋 웃었다.
"흐흐... 괴상한 놈이군. 너는 죽는 것이 즐거우냐?"
당선은 조롱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아차 싶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놈이 쓰러질 때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서 있지 않은가?'
당선의 눈에는 곧 진일문의 수중에 들려진 단검이 들어왔다.
진일문.
그가 단검을 상대의 눈 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표면에는 쇠털 같은 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선의 오보추혼사였다. 
"헉!"
당선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 어찌 이런 일이......."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모침들이 검신에 달라 붙어 버렸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그 경위는 이러 했다.
진일문의 단검은 바로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의 것으로써 자성(磁性)이 있었다. 즉 특수한 철로 만들어져 암기 종류를 흡수하는 각별한 묘용이 있었던 것이다.
위기를 넘기게 된 진일문이 담담히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물건이니 돌려 주겠소."
번뜩! 
단검이 빛을 뿜자 검신에 붙어 있던 오보추혼사가 전면을 향해 일제히 날아갔다. 
"안돼--!"
당선은 기겁을 하여 급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 암기가 얼마나 지독한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이 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거지노인이 흑수선을 안고 사라진 것도 벌써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는 당선이 몸을 바닥에 굴리는 사이에 재빨리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긴 웃음소리의 여운만을 남긴 채.
"핫핫핫핫......."
"서라--!"
당선이 길길이 뛰며 고함을 질렀으나 진일문은 벌써 자취를 감추어 버린 후였다. 
그는 대로하여 창문을 향해 수중의 철필을 뻗었다. 
촤악--!
기괴한 음향과 함께 철필로부터 시커먼 독수가 쏘아져 나갔다.그것이 창문에 닿자 시커먼 연기가 피어 올랐다.
푸시시시....... 
닿기만 해도 만물을 태워 버린다는 무서운 부시독물이 애ㄲ은 창문을 작살낸 것이었다.
 
진일문은 그간 여래객점(如來客店)에서 묵고 있었다.
정확히 팔월 보름이 되어야 취화상과 만박노개가 비무를 하므로 그 사이에 며칠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흥루에서 막바로 객점으로 돌아왔다. 거지노인이 흑수선을 구해 갔으므로 달리 걱정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진일문은 자신의 객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날이 저물지는 않았으나 당선에게 또 다른 일행이 있다면 밖에서 어슬렁 거려 봐야 이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운기조식을 한 후, 일찌감치 자리에 들어야겠군.'
그러나 막상 방에 들어오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이런저런 상념들로 인해 바쁘게 회전했고, 그 바람에 휴식을 취하려던 계획은 그의 뇌리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진일문은 탁자에 앉아 먼저 잠시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처음부터 더듬어 보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들이 있었다.
우선 가장 수상쩍은 것은 흑수선에 관해서였다. 
추잡한 행각을 벌여 돈을 벌어들이는 여인 치고는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정녕 놀라운 기개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사실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도 따지고 보면 그녀를 비난하려다가 자신이 되당한 꼴이었다. 방식이야 어쨌건 그녀의 기지만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일문은 고소를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흑수선은 정말로 마교의 잔당일까?' 
그는 흑수선과 당선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당시 당선은 분명 왕중헌을 마교의 수뇌라고 말했었다.
진일문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당선의 말은 믿을 바가 못된다. 그는 명색은 정도의 인물이면서도 정작 도의와는 무관하니, 필요에 따라서는 어떤 말도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배경이 삼성림이라면 그 따위 말은 염두에 둘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는 문득 답답한 심경이 되어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왕사부님은 어찌 하여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이렇듯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그 분의 수하를 자처하면서 아무 때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소매치기였으니 마교의 잔당이라는 오명(汚名)은 도무지 피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진일문은 탁자에서 몸을 일으켜 방 안을 서성거렸다.
'하숙모님의 말씀을 빌자면 광명궁주인 탐랑성군 화개악은 삼천공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영달이나 채우려는 인물이다. 그런데 왕사부는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을 마교로 간주해 버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내 입장은 사실 왕사부와 별로 다르지 않다. 화개악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그 위선의 껍질을 벗겨 그를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러나 나는 왕사부와 같은 방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진일문은 무의식을 빌어 침상가로 걸어갔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무엇인가 확연히 쏘아져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뜻밖에도 침상 위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있었으나 그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진일문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어서 나오시오! 귀하는 누구길래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온 것이오?"
그는 내심 경계를 취하는 한편, 거칠게 이불자락을 젖혔다.
"아니......?"
진일문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대신 그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침상 위.
그 곳에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전라의 여인이 반 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흑수선이었다.
다음 순간, 진일문의 안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이런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이내 알 수가 있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거지노인의 짓이었다.
"정녕 괘씸한 노인이로구나!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이런 엉뚱한 짓을 저지르다니, 대체 나를 어찌 보고......."
진일문은 불쾌감이 일어 견딜 수가 없었다. 흑수선이 최소한 남자 문제에서는 어떤 여인인지를 익히 알고 있는 그였다. 
그 점을 생각하면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런데 거지노인은 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그녀를 그의 침상에 밀어넣었단 말인가?
진일문은 젖혔던 이불을 다시 그녀의 몸에 내던지듯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낭자."
하지만 흑수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감고 있었는데, 얼굴이 그야말로 도화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거친 호흡으로 인해 이불이 마구 들썩이고 있었다.
'아뿔싸! 미혼분.......' 
진일문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말았다. 보아 하니 아직도 그녀는 당선에게 당한 미혼분에서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 노인의 뜻은......?'
충격을 받아 머리를 감싸쥐는 그의 귓전에 어디선가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헤헤헤... 사람을 구하려면 끝까지 구해내야 하는 법, 하물며 사람을 구하고 재미까지 보게 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오늘 밤 이 늙은이가 월하노인(月下老人)을 하마. 너희 두 사람의 행복을 축원해 줄 것인즉 사양하지 마라."
"이 고약한!"
진일문은 대뜸 발을 굴러 창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붕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서도 이미 거지노인의 모습은 모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방 안으로 되돌아온 그는 낭패감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 뾰족한 수는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순간 진일문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역시 갈등이었다.
'대체 이 노릇을 어쩐단 말이냐? 이대로 놔두면 이 여인은 죽는다. 그러니 방관만 할 수도 없고.......' 
그의 안색은 수시로 변화를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일어났다 앉았다를 거듭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떤 난제에도 굽히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그였으나 이번 일만은 경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미혼분에 대해서라면 과거 오사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독문의 해약이 있으면 가볍게 풀 수 있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쯧!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선을 찾아가 그 해약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그가 해약을 가지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
진즉부터 그는 음양화합(陰陽化合)이라는 차선책이 있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그 차선책이야말로 우선책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죽기보다 싫으니 어찌 하랴?
진일문은 언뜻 흑수선과 벌여야 할 일이 연상되자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생명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녀를 상대로 그런 인심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새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진일문은 여전히 안절부절이었다. 아니, 이제는 감히 침상 곁으로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방 안을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이경 쯤 되었을까?'
초조한 그의 귀로 거칠고 탁한 숨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그 호흡소리에는 어떤 위기감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으로 다가갔다.
'으음.......'
그는 내심 신음을 발했다. 
흑수선의 얼굴은 보기조차 섬뜩할 정도로 빨갛게 달아 있었다. 그것은 혈관이 팽창하여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끈다면 이 여인은 전신의 혈관이 터져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는 이불을 들춰 보았다.
"아!" 
흑수선은 이미 몸에도 죽음의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하고 아름다운 나신 곳곳에 흡사 지렁이 같은 심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이불이 타버릴 정도의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흑수선은 지금 아혈이 짚혀 있었다. 그것도 물론 거지노인의 짓이었다. 진일문은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가벼운 경련과 함께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여기는......?"
벌겋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는 일순 의아한 빛이 어렸다. 그녀는 사방을 살펴보고 난 후, 진일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일문은 침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안심하시오. 이 곳은 안전한 곳이오. 그리고 나는 절대로 낭자를 해칠 사람이 아니오."
흑수선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으음, 그런데 내가 왜 당신과......?"
그러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신음을 토해냈다.
"학!"
이어 진일문을 다시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강한 욕정의 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낭자......."
진일문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흑수선은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홱 걷어찼다.
"나... 날... 어떻게 좀... 흐으윽!"
흑수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풍만하기 그지 없는 그녀의 유방이 마구 요동쳤다. 그녀는 두 손을 뻗더니 다짜고짜로 진일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안되오!"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밀어 버렸다. 그의 의식이 여태까지도 그녀를 허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수선은 뒤로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그런데 침상 위에 넘어진 그녀의 몸뚱이가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일문을 덮쳐왔다.
"억!"
진일문은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혈도를 찍힌 채 꼼짝도 못하게 된 뒤에야 겨우 방심을 후회했다.
'끝장이군.......'
 
흑수선.
그녀의 정염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진일문을 침상으로 끌어다 눕힌 후, 그녀는 미친 듯이 입술을 부벼왔다. 뿐만 아니라 양손도 쉬지 않고 움직여 순식간에 그의 옷을 모조리 벗겨내 버렸다. 
진일문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서는 분노가 무섭게 끓어 올랐다. 
'내가 이런 여인과.......'
흑수선은 행위 자체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었다. 진일문이 그나마 그녀를 저주하지 않는 것은 여하한 행동을 하건 그것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흑수선은 격렬하게 그의 몸을 애무했다. 그런데 그 애무란 것은 너무도 농도가 진해 그로서는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진일문의 신체 중 그녀의 입술과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의 전신에 온통 타액을 발라 놓았다.
'우우... 한 순간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가져 오다니.......'
진일문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몸 위에서 율동하고 있는 흑수선을 당장에 끌어내려 팽개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본능은 그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흑수선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그는 전신의 피가 한 곳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무심결에 눈을 뜬 그는 흑수선이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드는 것을 보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채가 흡사 말갈기처럼 휘날렸다. 동시에 그녀의 유방 또한 파도를 타듯 출렁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흑수선은 입술을 크게 벌리고 연신 신음을 토해냈다.
'으음.......' 
진일문은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모두 충동적인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어느덧 흑수선의 율동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비등점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안돼!'
마침내 그는 폭발했다. 그것은 상황이야 어쨌든 마치 내부에서 천만 개의 불꽃이 일시에 터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에 따라 여체가 춤을 추었다. 아니, 그것은 춤이라고 하기보다는 절정을 향한 광란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이윽고 우주가 그 운행을 정지한 것 같은 순간이 도래했다. 그것은 흡사 전신이 이상한 진공상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일문의 얼굴 위로 또 하나의 얼굴이 겹쳐졌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축하고 무거운 흑수선의 나신이 그의 몸 위로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허탈한 순간이었다. 
진일문은 천정을 응시한 채 멍하니 누워 있었다. 결국 그는 그토록 꺼려하던 일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매우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그러나 귓전에 들려오는 음성은 다정하기만 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진일문은 물론 그 음성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소리가 들린 쪽을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문득 부드러운 천이 그의 몸에 닿아왔다. 흑수선이 혈도는 풀어줄 생각도 않고 몸을 닦아 준답시고 천을 들이민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알몸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옷은 흑수선이 입었기 때문이었다.
흑수선은 정성껏 그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진일문은 때로 그녀의 손길이 하반신으로 갔으나 신경을 꺼 버린지라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그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준 후 친절하게도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지금 그 얼굴은 후회한다는 뜻인가요? 저 같이 천한 계집과 몸을 섞었다고?"
그녀의 말투는 여전했다. 진일문은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본의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오."
흑수선은 생긋 웃었다.
"호호... 나빠요, 자신을 속이면. 당신은 제가 죽도록 내버려 둘 위인이 못돼요. 저는 그것을 감히 확신할 수 있는 걸요?"
진일문은 그답지 않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치시오! 듣기 싫소."
하지만 흑수선은 오히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공자는 제게 한 수 밀리는 분이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언제부터 날 알았다고 그런 소리를 하시오?" 
"어머, 그걸 모르세요? 주루에서부터잖아요?" 
진일문은 대책이 없어지자 눈을 돌려 그녀를 쏘아 보았다. 
흑수선은 침상 모서리에 앉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긴 머리는 아직도 땀에 젖어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헐렁한 그의 옷을 통해 되려 기이한 매력을 발산해내고 있었다. 뭐랄까? 종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장난스럽고 천진해 보였다.
진일문은 더 보고 싶지 않은듯 다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왜 혈도는 풀어 주지 않는 것이오?"
"그것은 먼저 공자께 물어볼 말이 있기 때문이에요."
"뻔뻔스럽군."
그러나 흑수선은 그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은 계속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호호호... 공자의 정체예요."
진일문으로서는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나를 심문하는 것이오?"
"심문이라뇨? 당연한 질문이 아닌가요? 우리는 이미 한 몸이 되었는데 서로에 대해 아직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진일문은 기가 막혔다.
"제멋대로군."
그가 한 말이라곤 겨우 이것 뿐이었다. 아니, 더 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흑수선의 나긋한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또 무슨 짓을......?'
그는 거부감이 들어 입술을 완강하게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흑수선은 더욱 집요하게 공략해 왔다. 그녀의 혀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교묘한 움직임을 통해 이내 그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진일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여인이 다 있었다니.......'
그 동안에도 흑수선의 혀는 그의 입 안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했다. 그녀는 실컷 즐기고 난 후에야 입술을 떼었다.
진일문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음탕해질 수도 있소?"
그 말에 흑수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저를 음탕하다고 말하는 거죠?"
"그럼 아니란 말이오? 돈을 받고 매매 행위를 할 때가 차라리 나았소. 지금 같은 경우는 당신 자신은 물론 나까지도 모독하는 것이 아니오? 수치도 모르는 채."
"뭐, 뭐라고요?"
흑수선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문득 움츠러 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요? 정말......?"
뜻밖에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요?"
진일문이 오히려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흑수선의 얼굴은 볼수록 독특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 피부가 다소 검었는데 그 점은 하나의 개성으로 작용했다. 
그런가 하면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정열적인 성격을 느끼게 했고,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아 두툼한 편에 속하는 입술에서는 싱싱한 탄력이 묻어 나왔다.
아무튼 그녀의 눈물은 진일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는 방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 말이 심했다면 용서하시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닐 거요."
흑수선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저는 몸을 팔았던 게 아니에요.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작자들을 놀려준 거죠. 저는 그런 자들을 경멸해요."
"당신은 분명 돈을 받고......."
그의 말을 흑수선이 끊었다.
"그럼 공짜로 그렇게 하란 말인가요?"
"마찬가지 얘기가 아니오?"
"아뇨, 전혀 달라요. 제게 가르침을 주신 분께서는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자만이 뜻을 세울 수 있다고 하셨어요."
'끙!' 
진일문은 내심 괴상한 신음을 발했다. 그는 흑수선이 말하는 그 가르침의 연원을 금새 알아차리고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난감한 심경에 이르고 있었다.
'왕사부다. 매사에 냉소적이던 그 분의 관념이 이 여인에게 이런 식으로 굴절되어서 전해진 것이로구나.'
흑수선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또 입장이 달라요. 첫 낭군에게 좀 스스럼없이 대했기로서니 어쩜 그럴 수가 있나요?"
'첫낭군이라고?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진일문은 울화가 치밀었으나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낭자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던 그것까지는 상관하지 않겠소. 하지만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삼가해 주시오."
그러자 흑수선의 얼굴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서릿발 같은 냉기가 어렸다. 이어 그녀는 부스럭 대며 이불을 제끼더니 한 자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것을 보고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진일문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코 앞에 들이민 이불 자락에는 선명한 혈흔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순결의 징표였다.
"으음......."
진일문은 신음을 흘렸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한 가진 분명한 것은 흑수선이란 여인이 자신의 사고(思考)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이 때, 흑수선의 몸이 나긋하게 안겨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 울었냐 싶게 말짱하게 개어 있었다.
"제가 당신과 앞으로 짝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틀림없이 제 첫 낭군이고, 저는 평생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진일문은 그녀가 하는 말은 이제 알아 들을 수조차 없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온통 기상천외한 것들 뿐이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혹시......?'
 
진일문은 담담한 투로 생각하는 바를 물었다.
"낭자는 어디에서 태어 났소?"
흑수선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이제야 제게 관심을 보이시는군요. 그래요, 저는 아주 먼 곳에서 태어났어요. 남해에서도 수천리나 떨어진 한 섬이죠. 중원에서는 그 곳을 태평도(太平島)라고 불러요."
흑수선은 즐거운 일이라도 생각하는 듯 밝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일문은 관심이 동한 것인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보조개를 발견해낼 수가 있었다.
'귀엽군.' 
진일문은 내심 중얼거려 놓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이 여인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무척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웠다.
"그 곳 사람들은 중원처럼 옷을 많이 입지 않아요. 너무 덥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곳처럼 까다로운 예절 같은 것도 없고요. 다만 모두 선량하고 매사에 태평하지요."
진일문은 흑수선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었다.
'태평도란 해남도(海南島)에서 어느 정도나 떨어져 있을까?'
그는 남양의 한 섬을 두고 사뭇 신비감에 사로 잡혔다. 이어 그는 다시 물어 보았다.
"그렇게 이질적인 곳이라면 이 곳과 말도 틀릴 텐데......?"
흑수선은 생긋 웃었다.
"저는 일찍부터 스승님께 한어를 배웠어요. 저의 스승님께서 는 한인이셨거든요."
"당신의 스승? 그 분은 어떤 분이오?"
진일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그 바람에 헐거운 옷깃이 벌어져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나 그녀는 그다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진일문은 누워 있었으므로 그녀의 젖가슴을 고스란히 볼 수가 있었다. 무안하여 얼굴을 돌린 쪽은 바로 그였다.
"저의 스승님은 여인이에요. 하지만 굉장히 무서운 분이죠. 우리 사남매(師男妹)들은 모두 일곱 명인데 그 분에게 매를 맞으며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어요."
"기술?"
"호호... 제가 실수 했군요. 중원 식으로 말하자면 무공이죠."
"그래, 어떤 것들을 배웠소?"
흑수선은 그가 자꾸만 묻는 것이 오히려 기쁜 모양이었다. 계속 방긋거리며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음, 먼저 수중(水中)에서의 공부가 있고, 잠행(潛行)하는 방법, 땅 속에 숨는 법, 소리없이 마른 풀 위를 걷는 법, 그리고 수리검 쓰는 법 외에도 살인법이 모두 칠십이 개는 되는데......."
"그런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중에서 반 밖에 익히지 못했어요."
"흐음......."
진일문은 침음성을 흘렸다. 세상에 그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녀가 익혔다는 삼십여 가지의 살인술이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여인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병기다. 왕사부가 그래서 휘하에 거두었던 것일까?'
흑수선은 계속 조잘거렸다. 
"그러나 허무영(虛無影) 사형은 스승님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배웠어요. 아마 어제도 허무영 사형이 곁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진일문은 내심을 감추며 다시 물었다.
"어제 함께 있던 꼽추, 아니 꼽추로 변장했던 사람은 누구요?"
그 말에 흑수선은 금새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여섯째 사형인 추안(秋安)이에요. 그런데 아아....... 너무도 비참하게 죽었어요."
진일문은 그녀가 감정에 치우쳐 있는 동안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것이 기회가 되어 그의 뇌리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 여인이 배운 것은 물론 중원의 정통 무학은 아니리라. 혹 왜국의 인자술(忍者術)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스승은 분명 한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 인자술의 달인이 무슨 목적으로 중원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한 섬에서 제자들을 키워냈단 말인가?'
풀어낼 수 없는 의문들이 그로 하여금 다시 묻게 했다.
"낭자가 중원에 온 것은 언제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삼성림과 대적하는 것이오?"
흑수선은 이 말이 나오자 또렷하게 대답했다.
"스승님과 함께 중원으로 온 것은 삼년 전이었어요. 스승님께서는 삼성림이 어떤 단체인가를 제게 알려 주셨죠. 그러나 그 분도, 저도 모두 왕회주(王會主)님의 지시에 따르고 있어요."
진일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왕회주라고 했소? 그 분의 함자는 물론 왕중헌이겠고?"
흑수선은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신도 회주님을 아나요?"
진일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비로소 윤곽이 잡히는구나. 역시 그 분이 벌여 놓으신 일들이었다.'
흑수선은 꽤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당선이란 자가 우리들을 마교라고 했죠?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진정한 마교는 바로 삼성림이에요."
진일문은 미간을 좁혔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회주께서 그 내막을 전부 알려 주셨어요. 화개악이라는 천하의 악적이 바로 마교의 끄나풀이라고요."
"뭐, 뭣!"
진일문은 흡사 뒷머리를 둔기로 얻어 맞은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그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개악이 마교와 결탁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천하는 그야말로 대음모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진일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당신들의... 그... 회란 어떤 것이오?"
그가 물은 이유는 빠른 시일 내에 왕중헌과 만나 그 말의 진위를 가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흑수선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 다만 우리들은 스승님의 명을 따를 뿐이에요. 그리고 지시는 오직, 아! 큰일 났어요."
그녀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러시오?"
"추안 사형이 다음 명을 받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죽었으니 연락을 할 수가 없잖아요."
진일문의 짙은 눈썹이 가볍게 위로 치솟았다.
"그럼 낭자는 스승이나 왕회주와 직접적으로 연락을 할 수가 없단 말이오?"
"네, 저는 사형만 따라 다녔을 뿐이에요."
그녀는 한 동안 침음하더니 곧 안색이 밝아졌다.
"호호...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일문은 그녀의 하는 양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왕사부는 매사를 지나칠 정도로 극비리에 행하고 있구나. 심지어는 수하들과의 연락조차 이렇게 신중하게 하다니.......'
"만일 연락이 끊어질 경우에는 삼개월에 한번씩 황학루(黃鶴樓)에서 새로운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흑수선은 안도에서인지, 조갑증에서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불쑥 물었다.
"참! 아직 저는 당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어요."
진일문은 경계심이 풀린지라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내 이름은 진일문이오."
"진일문......?"
"후후... 그저 강호의 무명소졸일 뿐이오."
그가 무심하게 말하고 있는 반면, 흑수선의 안색은 기이한 변화를 보였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부르짖었다.
"들어 봤어요! 당신의 이름 말이에요."
진일문의 눈이 번쩍 이채를 발했다.
"내 이름을 어디서......?"
"그래요, 언젠가 왕회주님께서 그 이름을 말하신 적이 있어요. 우리 사형제가 모두 들었는 걸요?"
"아!"
"그런 사람을 만나면 연락을....... 호호... 맞아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즉시 연락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진일문은 웬지 콧등이 시큰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왕사부께서도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더구나 그 분은 나를 찾고 계셨다.'
그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기쁨은 어느덧 그의 뇌리에 담겨있던 복잡한 상념들을 모두 지워 버렸다. 비로소 그는 은사를 그리워하는 한 청년의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 때, 흑수선이 확인하듯 그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 왕회주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이 맞나요?"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분은 내 은사이시오."
"아! 멋진 일이에요."
흑수선은 환성을 질렀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가 한 편이라니......!"
진일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흑수선을 보며 내심 고소를 지어야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후... 그러고 보니 중원의 미녀들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군.'
흑수선은 그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진일문은 담담한 투로 자연스럽게 둘러 댔다.
"대체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잡아 둘 작정이오?"
"호호호......."
흑수선은 크게 웃더니 느닷없이 이불을 활짝 걷어 버렸다.
"엇!"
진일문은 깜짝 놀라 비명을 발했다. 하지만 그녀는 못들은 척 연신 깔깔거리며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이게 무슨 짓이오?"
"호호호... 우리는 같은 편이니까 자주 만나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지는 알 수 없잖아요? 난 당신 하고 이러는 게 너무 좋아요."
흑수선은 그를 끌어안더니 입술을 비비며 그렇게 말했다.
진일문은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격렬한 공세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매끄러운 그녀의 살결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느끼자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으음......."
그는 부지 중 신음을 발했다. 흑수선의 손이 몸 속 깊숙히 와닿자 전신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느꼈던 모욕감이나 분노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느낌이었다.
흑수선.
그녀는 중원의 여인들이 예절에 치중하듯 자신의 감정에 절대적이리만큼 충실한 여인이었다. 과연 그녀는 걸치고 있던 헐렁한 옷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진일문의 몸에 배암처럼 감겨 들었다.
그 순간, 진일문은 혈도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행동은 정녕 의외의 것이었다. 그는 억센 팔로 흑수선의 나신을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그대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침상이 두 사람의 격렬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하고 흡사 비명과도 같은 소음을 마구 토해내고 있었다. 와중에서 진일문은 흑수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찬사(?)를 떠올렸다.
'남양에서 건너 온 요악한 화사(花蛇), 으음.......'
23장 고분(古墳) 속에서의 무림비화(武林秘話)
 
북망산(北邙山).
낙양성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역대 제후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북문을 나서면 어쩐지 스산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저승길이 북문을 통해 나 있다는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중추(仲秋).
즉 팔월 보름이면 중원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것은 이 날이 중원에서는 가장 큰 명절이기 때문이었다.
낙양성이 온통 술렁거렸다.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룬 가운데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밖에서는 불놀이를, 집 안에서는 가무를 즐겼다. 그리고 주루에서는 주객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북망산만이 예외였다. 
이 곳은 늘 그렇듯 스산하고 음침했다. 죽은 자에게는 명절이 있을 리 없다. 성내와는 달리 이 곳은 유부(幽府)의 인간들이 귀화(鬼火)로 화해 떠돌고 있었고, 사자의 원혼이 바람소리와 함께 울부짖고 있었다.
중추의 보름달도 유독 여기에서는 검은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다. 음침한 가운데 여기저기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무덤 뿐이요,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은 무덤 앞에 서 있는 석상이나 장승들 뿐이었다.
어디에선가 간간이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더욱 섬뜩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부엉이와 여우의 울음소리까지도 어울려 그들만의 또 다른 세계를 이루기도 한다.
이런 날 북망산에, 그것도 한밤중에 오르려는 사람은 없으리라.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은 필시 미친 사람이거나 지옥을 찾아가는 망객(亡客)일 것이다.
그러나 있었다.
더우기 그는 미치지도 않았으며 망객도 아니었다. 단지 한 가닥의 가능성만을 끌어 안은 채 희대의 무림기인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황폐한 무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이 아무리 화려한들 무엇하리....... 죽으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이렇게 한 줌의 부토가 되어 땅에 귀속되는 것을......."
그는 마치 시라도 읊듯 계속 중얼거렸다.
"따지고 보면 나 또한 다를 바 없으리....... 무부(武夫)의 한 평생 덧없이 흘러가고 나면 갈 곳이 어디랴......?" 
그러다 문득 그는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회의에 찬 음성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무언가? 내가 이 곳을 오르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 아닌가? 고강한 무공을 배워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가? 복수? 그것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단 말인가?"
그는 진일문이었다. 이기(二奇)를 만나기 위해 이 북망산에 오기는 했으나 이렇듯 심경이 꼬여버린 것이었다.
오늘은 중추, 그들이 십 년마다 한 번씩 만나 비무를 하는 그 날이다. 그러나 막상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데다가 만남의 결과 또한 예상 밖인지라 드느니 한심한 기분 뿐이었다. 
진일문은 성내에서 흑수선과 작별하고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 그녀 역시 다망(多忙)해서 피차에 동행은 무리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덤들이 속속 그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기분은 더욱 참담해졌다. 
'훗! 취미 치고는 유별나기도 하군. 하필 이런 곳에서 비무를 하다니, 잠자던 사자(死者)의 망혼들이 시끄러워서 곤욕을 치르지나 않는지 모르겠구나.'
진일문은 끝없이 펼쳐진 무덤군을 바라보자 한 가닥 막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대체 이 넓은 곳 어디에서 그들을 찾는단 말인가?'
그만큼 북망산은 넓었다. 그러므로 설사 그들이 이 곳에 온다해도 만나지리라는 장담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또 다시 고개를 쳐들려는 회의를 막무가내로 눌러 버렸다.
"어차피 이것은 하나의 시험이다! 내 운명과 연관된......." 
부르짖고 나자 진일문은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어 그는 마음을 아주 다잡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볼 일이다."
그 상태로 얼마나 들어갔을까? 
진일문은 꽤 깊숙히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거의 반 시진 이상을 살펴 보았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 분들은 아마 이 곳에 오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백세가 넘은 분들이니 이미 타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는 거의 단념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더 찾기를 포기한듯 거대한 봉분의 제단 위에 걸터 앉았다. 그 제단은 매우 커서 웬만한 침상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돌로 된 제단의 싸늘한 감촉을 느끼며 손으로 그것을 쓸어 보았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보아 하니 과거에는 대단한 권세를 누린 사람인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무덤은 큰 규모도 그렇거니와 주변에 갖가지 상(像)들이 도열해 있었다. 십이지신은 물론 만조백관의 형상을 한 석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석상의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어 일말의 아쉬움을 자아낼 따름이었다. 어떤 것은 머리가 떨어져 나갔고, 어떤 것은 허리가 동강 났으며 어떤 것은 벌렁 넘어져 있기도 했다.
진일문은 그것들을 주욱 둘러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왕(王)이신가? 아니면 장상(將相)이신가......?"
그의 시선은 곧 비바람에 의해 글씨가 씻겨 나가버린 비석에서 멈추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여기서 더 오래 있다가는 이대로 날이 새겠군. 성내로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진일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때였다.
'음?'
그는 흠칫 했다. 불현듯 뭔가 미세한 음향이 귓전에 느껴진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귀를 기울여 보니 그 이상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내가 잘못 들었나?'
그의 청력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발전되어 있었다. 적어도 사오십보 밖의 낙엽 지는 소리 정도는 감지해낼 수 있었다. 최소한 잘못 들을 염려는 없다고 봐야 했다. 
진일문은 이번에는 안력을 집중하여 주변을 살펴 보았다. 
역시 시각적으로도 별다른 상황 변화는 없었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단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무덤들 뿐이었다.
'이상하군.' 
진일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채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다시 멈추어야 했다.
'또 소리가......!' 
그는 내심 부르짖으며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이어 그는 귀를 땅에 대 보더니 빙긋 웃었다.
'지하였군.'
그것은 정녕 의외의 발견이었다. 그는 계속 귀를 땅에 댄 채 소리의 정확한 위치를 탐지해 내려 청력을 집중시켰다. 
간간이 쿵쿵거리는 둔중한 음향이 울리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 소리를 따라 엎드린 상태에서 몸을 조금씩 이동해 갔다. 
잠시 후.
진일문이 움직임을 멈춘 곳은 뜻밖에도 방금 전에 앉았던 제단이었다. 거기에 귀를 대자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이 아래 쪽이었구나. 그런데 이 속에는 대체 누가 들어 있을까? 설마 유부의 유령......?'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상황이 상황인즉 유치하게 읊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래에 누군가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무덤 속에는 공간이 있다는 말이 된다.'
진일문은 순장(殉葬)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으로 지하에 유실(幽室)을 만들어 사자가 생전에 살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유품들은 물론 드물게는 하인들까지 함께 묻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대개 왕후장상의 무덤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고, 그 무덤들은 도굴꾼에 의해 다시 파헤쳐지곤 했다. 
진일문은 무덤 주위를 살피며 한 바퀴 돌아 보았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무덤 속으로 통하는 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문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낙심한 그는 다시 제단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그나마 이번에는 한참을 기다려도 예의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을 들어올려 보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그 제단의 무게는 적게 잡아도 족히 오천근은 될 것 같았다. 
진일문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 속에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제단을 들어 올리고 출입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주위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과연 이동 흔적이 보였다. 제단과 맞닿은 땅의 흙이 밀려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진일문의 눈길이 희색을 띈 채 그 앞에 있는 향로에 머물렀다. 그것은 석 자 정도의 높이로써 청동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향로 앞으로 다가갔다. 
청동향로의 전면에는 무시무시한 귀왕면(鬼王面)이 새겨져 있었는데, 귀왕은 입을 딱 벌린 채 하나의 구슬을 물고 있었다.
한 동안 그 구슬을 살펴보던 진일문은 곧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향로의 다른 곳은 모두 푸른 녹이 슬어 있었으나 구슬만은 눈에 띌 정도로 윤이 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 이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닳은 흔적이다.' 
진일문은 즉시 구슬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종내 구슬은 한 쪽 방향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돌릴 수 있는 한 힘껏 돌려 보았다.
그그긍--!
굉음이 울리더니 제단이 회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이것이다!'
계단은 꼭 반 바퀴를 돌고 멈추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입구로 보이는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후후... 성공이군.'
진일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무덤의 입구를 통해 날듯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를 통과시키고 나자 제단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그긍--!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계단은 그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진일문은 자못 호기심을 느끼며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비록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으나 그는 안력과 더불어 감각에 의존해 그렇게 몇 굽이를 돌았다. 
문득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비추어 왔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불(火), 그 자체가 아니라 벽에 박혀 있는 야명주(明珠夜)가 스스로 뿜어내는 빛이었다. 
야명주의 푸르스름한 빛은 사뭇 음산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계단은 바로 그 곳에서 끝이 났다. 
지금 진일문이 서 있는 곳은 작은 광장처럼 보이는 하나의 석부(石府)였다. 사방은 물론 바닥과 천정 등이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야명주가 박혀 있는 벽에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그것을 읽어 본 진일문은 갑자기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 천입자사(擅入者死)!
이렇듯 거창한 문구의 아래 쪽에는 이보다 약간 작은 글씨로 협박하는 내용의 글이 씌어져 있기도 했다. 
그 뜻인즉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온다면 열 걸음도 가지 못해 천참만륙(千斬萬戮) 되리라는 섬뜩한 글귀였다.
그러나 마치 모순인양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방향으로는 한 줄기 통로가 뻗어 있었고, 통로의 벽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야명주가 박혀 있어 안쪽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다만 통로는 우측으로 심하게 꺾여져 있어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는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저 곳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진일문은 의문을 가지는 한편 경계를 취하며 통로로 접어 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 덧 여취벽의 단검이 들려져 있었다.
바닥은 줄곧 단단한 청석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친 탓인지 벽과 마찬가지로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진일문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여차하면 단검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암기나 그 밖의 위험이 닥친다 해도 그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경고문에 씌여진대로 십보를 전진했으나 외외로 진일문에게는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약간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 글은 아마도 무덤의 주인이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써놓은 모양이구나. 후후... 협박치고는.......'
그의 생각은 도중에서 끊기고 말았다. 막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놀라운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곳에는 대략 이삼십여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전부 시체들이었다. 
'아! 이럴 수가.......'
진일문은 잠시 굳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시체들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중도 있고 도사도 있었다. 어쨌든 남녀 구분 없이 한데 섞여 있는 그 시체들은 백골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성별을 가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옷을 통해서였다. 
그 백골들은 싸움을 한 흔적이 일체 없었다. 서로 겹쳐지거나 가로누운 채 단지 죽어 있을 따름이었다. 진일문은 놀라움이 어느 정도 가시자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았다.
'이들은 옷이 멀쩡한 것으로 보아 죽은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살점이 모두 썩어 백골이 되었다면.......'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렇다. 이들은 모두 독(毒)에 당한 것이다.'
그는 새삼 관심을 가지고 통로의 좌우 벽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과연 이상한 점이 있긴 있었다. 이끼가 잔뜩 낀 그 벽에는 무수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저 곳으로 독연(毒煙)이 흘러 나왔거나 어떤 독물(毒物)이 기어나와 사람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고문은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즉 이 곳에는 죽음의 함정이 안배되어 있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언뜻 의문이 일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 곳에 들어왔을까? 보아 하니 무림인들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쓰러져 있는 백골들은 거개가 병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 고분(古墳) 속에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내막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분에 보물이나 보화가 있는 것은 그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무림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적어도 그들을 현혹시켰다면 무엇인가 다른 비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진일문은 호흡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나 있는 구멍들에 한껏 주의를 기울였으나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맙소사!" 
진일문은 또 다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의 상황보다 훨씬 더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십오, 륙명의 시체들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도 산적처럼 기다란 창에 꿰인 채. 그들의 몸을 관통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창 끝에는 검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어떤 자는 머리가 꿰인 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한꺼번에 두 사람이 하나의 창에 꿰인 예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곤 하나같이 비참하고 끔찍한 모습이라는 것 뿐이었다.
진일문은 도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제 죽은 자들은 그렇다 치고 대체 어떤 인물이, 무슨 이유로 이처럼 무림인들을 끌어 들여 처참한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운 광경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통로는 한 번씩 꺾일 때마다 새로운 형태의 주검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천정에서 창날이 솟아 있는 철판이 떨어져 거기에 눌려 죽은 사람, 양쪽 벽이 마주쳐 그 사이에 끼어 육포가 되어 있는 자, 불에 타 시커먼 숯덩이로 화해 버린 시체 등. 
그야말로 갖가지 방법이 다 동원 되어 참경을 이루고 있었다.그 시체들은 숫자만도 무려 수백 구에 달했다. 
그런가 하면 바닥이 갑자기 움푹 꺼져 버려 칠흑 같은 암흑의 공간을 드러낸 곳도 있었는데,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진일문은 이런 식으로 꺾어진 모퉁이를 아홉 번 돌아서야 하나의 넓다란 석전(石殿)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이럴 수가! 지옥인들 이보다는 나으리라."
진일문은 아예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석전의 넓이는 족히 오십여장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곳에는 한꺼번에 수백명이 넘는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더구나 시체들은 피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어이없게도 상잔(相殘)을 벌였던 것이다.
상대의 심장에 검은 꽂은 자는 뒤에서 날아온 칼에 허리가 동강나 있었고, 다시 그 칼을 날린 자는 또 다른 자의 철추에 의해 머리가 으깨어져 있었다.
이른바 죽고 죽이는 이 처참한 혈전은 아마도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된 싸움인듯 했다. 석전의 바닥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는데 그 두께가 세 치는 될 것 같았다. 
진일문은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지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오게 된 이 고분 속에서 설마하니 이토록 많은 무림인들의 시체를 구경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덤 속의 무덤, 즉 이 넓은 석전은 또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시체들은 입고 있는 옷이나 병장기로 미루어 천하무림을 대신한듯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역시 중과 도사의 숫자가 가장 많았고 더러는 거지들도 섞여 있었다. 
거지들은 하나같이 매듭이 지어진 마대를 두르고 있어 그들이 개방( 幇)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진일문은 그 거지들 가운데 괴이한 용모로 인해 유독 눈에 띄는 한 거지를 발견해냈다. 그 자는 오순 가량의 위맹해 보이는 인물로 여덟 개의 매듭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는 눈이 세 개였다. 미간 사이에 반점이라도 찍힌양 또 하나의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삼목(三目)의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모르긴 몰라도 이 사람은 이 때문에 더 유명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진일문은 수많은 시신들을 둘러보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한 마디로 전 무림의 고수들이 이 곳에서 떼죽음을 한 것이었다. 
그가 석전의 안쪽으로 통하는 회랑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 나타나는 풍경에는 아연한 나머지 입을 딱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또 웬 선경(仙境)인가?'
도저히 무덤 속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풍경이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처참경과는 대조적으로 인공연못과 가산, 정자와 화원 등이 차례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더우기 연못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었으며 가산에는 풀이 무성했다. 어디 그 뿐인가? 화원에는 온갖 기화요초들과 쭉쭉 뻗어난 수목들이 제각기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물 속에서 노니는 황금빛 물고기를 보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움직이지를 않다니......?'
알고 보니 물고기는 유영하는 것처럼 보일 뿐, 정작 그 한 가지의 형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즉 그것은 가짜였다.
이 외에 나무와 꽃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두가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진짜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진일문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깜빡 속았었군. 하지만 정말 훌륭한 솜씨다.'
그는 화원을 지나 더 안 쪽으로 접어 들어갔다.
 
한 채의 별원(別院).
유리기와가 얹혀진 그 별원은 화려하기가 마치 황궁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문까지도 순은으로 되어 있었다.
진일문이 밀자 문은 의외로 가볍게 열렸다. 그리고 그 안은 막바로 하나의 대청이었다.
그 곳에는 일곱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정한 모습으로 포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모두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무엇 때문인지 한결같이 경악과 분노, 회의 등이 어려 있었다.
진일문은 대청 안에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다. 더구나 일곱 명이나 되는 노인이 일제히 자신을 쏘아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 굳어지고 말았다.
"여러분들은......!"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곧 그들이 모두 죽어 있는 시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린 것이다. 표정이 생생하고 눈빛이 강렬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포단은 원래 열 개였다. 앉아 있는 일곱 명의 노인 외에 세 개가 비어 있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그들 일곱 노인의 사인(死因)이었다. 상처를 입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독에 중독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거의 동시에 숨을 거둔 것만은 확실했다. 
또한 그들은 죽기 직전 자신들을 해한 사람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것 같았다. 그들이 나타내고 있는 표정이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일곱 명의 노인들은 하나같이 위엄이 있어 보였으며 눈빛이 형형하여 일견하기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고수들인듯 했다. 
그들을 살펴보던 진일문은 분노에 찬 그들의 시선이 모두 한 방향으로 쏠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방향이 바로 비어 있는 세 개의 포단이었다.
진일문은 나름대로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으음, 바로 저 자리에 앉아 있던 삼 인이 저들을 해한 모양이구나, 정황으로 보아 그것이 거의 틀림없을 것 같다.'
그는 대청의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히 노인들의 사이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은연 중 열 개의 포단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렇구나. 이들은 안쪽에 있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이 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절로 궁금증이 치밀었다.
'대체 안에 누가 있기에......?'
노인들 사이를 지나가며 그는 웬지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만일 노인들이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었다면 자신의 무공으로는 그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노인들이 취하고 있는 진세는 완벽했다. 비록 시체에 불과했으나 그들에게서는 기이한 압력이 전해져 오는듯 했다.
'휴우... 겨우 빠져 나왔군.' 
진일문은 고소를 지으며 대청을 벗어나고 있었다.
밀전(密殿). 
대청을 빠져 나오자 그 곳은 하나의 밀전이었다. 
그런데 그 곳은 흡사 황제의 어전과도 같았다. 바닥에는 중앙을 가로질러 금빛의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고 벽 쪽으로 문무 대신들이 서 있음직한 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가장 안쪽 상단부는 특별히 높게 단층이 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주홍빛의 휘장이 쳐져 있었다. 휘장 사이로는 은은하게 용상(龍床)이 비춰 보이고 있었다.
진일문은 이 같은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고분은 아마도 고대의 왕릉(王陵)이었던가 보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런 배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밀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를 확인한 진일문은 조심스럽게 휘장을 젖히고는 예의 단층 위로 올라섰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텅 빈 용상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 역시 시체였다.
한 사람은 홍의를, 다른 한 사람은 청의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이는 삼십 가량 되어 보였으며 영준한 용모였다.
그들은 정면을 향한 가운데 눈동자가 굳어 있었다. 마치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용상은 비어 있는 대신 한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한 권의 두툼한 책(冊)이었는데, 그 표지에는 전서체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광화비전(光化秘傳)>
진일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공기서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취할 마음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괴이한 곳,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중에 놓여 있는 비급이라면 이로움을 줄 리 없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곧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제 더 이상 나아갈 곳은 없는듯 했다. 그러자 그는 한 가닥 의혹이 일었다.
'그렇다면 아까 밖에서 들었던 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분명 여러 번 들렸었는데......?'
바로 이 때였다.
"아미타불... 이번에도 무승부다. 쯧! 아쉽다만 이 쯤에서 손을 거두는 게 어떠냐?"
어디선가 창노한 불호성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그 뒤를 이어 빈정거리는 듯한 노인의 음성이 대꾸하고 있었다.
"헤헤헤... 무슨 소리냐? 땡중아, 아직도 이 노개는 사용하지 않은 초식이 남아 있다. 노부가 얼마 전에 새로 창안해 냈느니라. 자, 받아 보아라."
쿠쿠쿠쿠.......
밀전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듯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이것이다! 아까 지상에서 들었던 소리는.......'
진일문은 충격을 받은듯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음성이었다.
'오오! 저 음성은.......'
 
신비와 공포가 어우러져 있는 무덤.
진일문은 이 곳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거지 노인이다! 그리고 그는......."
그는 가슴이 격하게 뛰노는 것을 느꼈다. 거칠고 탁한 음성은 바로 주루에서 만났던 그 거지노인의 음성이었다. 아울러 그 음성의 주인은 그가 그토록 찾기를 열망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쿠쿵--!
굉음이 울리며 이번에는 천정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역시 밀전이 무너질듯 뒤흔들렸다. 
그런 가운데 진일문은 용상을 살펴 보았다. 용상의 손잡이 부분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저것이다!'
진일문은 자신 있게 여의주를 잡아 우측으로 돌렸다. 그러자 용상이 빙글 회전하더니 아래로 통하는 입구가 드러났다. 그것은 맨 처음 이 고분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진일문은 서슴없이 통로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소리없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아! 그가 바로 만박노개였을 줄이야.......'
그는 흥분을 금치 못하는 한편, 새삼 그 거지노인이 벌였던 행각들을 상기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천하에서 그런 괴행들을 벌일 사람이 만박노개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진일문이 들어선 곳은 바로 고분의 중심부였다. 
유실(幽室)인 듯한 넓은 석실의 벽과 천정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하나의 황금관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황금관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괴인이 서로 마주선 채 양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한 명은 머리칼이 없는 노승(老僧)으로 일신에 누더기처럼 기운 승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이 둥글고 머리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커서 몹시 기괴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그 맞은 편에 있는 자는 바로 진일문이 알고 있는 예의 거지노인이었다. 그는 화상을 향해 손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에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 화상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퉁방울 같은 눈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누더기 승복은 바람도 없는데 쉴 새 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문득 거지노인이 손가락을 가위처럼 만들더니 가로 세로 마구 그었다. 진일문은 그런 모습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저것도 무공이란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쿠쿠쿠쿵--! 
"으윽!"
진일문은 고막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과 함께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금새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목에서는 때 아니게 달큰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럴 수가!'
그는 눈 앞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현기증이 일었으나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상은 가위질 하듯이 질러대는 거지노인의 공격을 막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의 승포는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으며 대머리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쿠르르르.......
사면의 벽과 천정에서 돌가루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 괴인이 발출해낸 진기의 여파로 석벽의 표면이 잘게 깎여 나가며 벌어진 현상이었다.
"우우우......."
진일문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공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기를 운행하려 해도 이미 곳곳에서 기혈이 막혀 있어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안되겠군. 이러다간 저 분들과 미처 수인사도 나누기 전에 서로 유명을 달리 하게 생겼지 않은가?' 
그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이번에는 태극환허심법을 전개해 보았다. 그러자 비로소 조금씩이나마 체내의 진기가 기혈을 따라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진일문은 귀가 멍멍한 증상이 없어지고 현기증도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 속도 그야말로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그는 두 사람이 싸우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지노인은 머리칼이 온통 천정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또한 그 상태로 그는 미친 듯이 손을 휘젓고 있었다. 
손가락, 손바닥, 심지어는 주먹 등으로 형태를 쉴새 없이 바꾸어가며 화상을 향해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어댔다.
휘류류류류--!
그의 주위로 어마어마한 회오리가 일어났다. 돌가루는 이제 그 회오리 기류를 따라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 반해 화상은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승복의 태반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비대한 살집이 여기저기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줄곧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그의 자세였다. 거창한 회오리 기류에 휩쓸려 있으면서도 그는 일신은 물론 눈빛조차 일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따금씩 합장한 손을 앞으로 밀어내곤 했는데 그 때마다 마치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둔중한 음향이 울렸다.
쿠쿵--!
한편.
진일문은 이제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심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기(二奇)의 무공이 왜 당대 최고로 불리우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태극환허공을 운공하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내장이 파열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새삼 감개무량한 시선으로 눈 앞의 두 괴인을 응시했다.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내삼기 중 이인이었다.
취화상과 만박노개.
진일문의 관점에서 이 두 노기인의 비무는 실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초식은 모두가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내공 또한 여하한 추측도 불허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감정상으로야 어쨌든 계속하여 눈한번 깜짝이지 않고 그들의 비무를 지켜 보았다. 그로서는 한 초식 한 초식이 모두 일종의 영감으로 통하는 귀중한 기회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알고 있던 무학의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게 만드는,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한 기연이나 다름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하하핫... 땡초야! 우리 그만 하자."
"아미타불... 더러운 노화자, 이젠 너도 지친 모양이로구나."
손을 멈추자 두 사람은 언제 싸웠더냐 싶게 똑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만박노개는 침을 퉤 뱉더니 눈알을 부라렸다.
"지치다니? 누가 지쳤단 말이냐? 지금이라도 다시 싸우면 앞으로 백 일(百日)은 더 버틸 수 있다."
"허허허... 노화자가 싸울 수 있다면 이 화상인들 어찌 사양하겠느냐?"
만박노개는 발끈 하려다 말고 웬지 태도를 고쳐 말했다.
"땡초, 혹시 너는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싸웠는지 알고 있느냐? 이번이 몇 번째인지......?"
취화상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글쎄....... 네 번? 아니면 다섯 번?"
"이런 멍텅구리 같으니라구! 이번이 여섯 번째다. 우리들은 꼭 육십년을 싸웠단 말이다."
그 말에 취화상은 우둔해 보일 정도의 대두(大頭)를 스스로 주먹으로 가볍게 때렸다.
"그런가? 허허허... 요즘 이 머리가 도통 말을 들어야지. 이젠 정말 부처님 곁으로 갈 때가 되었나 보이."
만박노개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도 벌써 살만큼 살아 버렸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제기랄, 아무 것도 해놓은 일은 없고 나이만 먹었으니 저승에 간들 염라대왕과 마주 할 면목이나 있겠느냐? 평생을 바쳐 연마한 무공을 가지고 간다 해서 염라대왕이 좋아라 날뛸 것도 아니고......." 
취화상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꿈벅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럼 너, 늙은거지는 더 이상 싸우지 말자는 거냐?"
"그럼 죽을 때까지 싸우잔 말이냐?"
"허허... 거 이해가 안 되는군. 원래 승부를 낼 때까지 싸우자고 한 것이 누구였더라......?"
만박노개는 약간은 침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때는 그 때고....... 땡초야, 농담이 아니다. 죽을 때가 되고 보니 웬지 허전하고 후회스럽고... 뭐 그렇구나."
취화상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아미타불... 너 노화자가 비로소 철이 든 것 같구나. 그래서 너는 저 어린 아이를 여기로 데려 왔느냐?"
만박노개는 힐끗 진일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저 녀석은 내가 불러 들인 게 아니야. 하지만 인연이 꽤나 있는 녀석인 것은 틀림없다."
진일문은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른 일어나 예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만박노개가 다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너 화상의 의견은 어떠냐? 그 돼지신공을 죽을 때까지도 가지고 갈 셈이냐?"
취화상은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클클... 돼지신공을 익히게 되면 너무도 뚱뚱해져 나중에는 제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게 된다. 그런 비극은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거늘, 세상에 또 비극의 씨를 남기란 말이냐?"
만박노개의 안색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해졌다.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들이 일갑자를 까먹고 있는 동안 세상이 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단 말이다, 빌어먹을! 지금이야말로 한 마리의 착한 돼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취화상도 눈을 빛내더니 고개를 진일문에게로 돌렸다.
"그럼 저 아이가 바로......?"
만박노개는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우선 내가 하는 말부터 대답해야 되지 않느냐? 빌어먹을... 하라는 소리는 않고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도 많으냐?"
취화상은 그 특유의 커다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지야, 이건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자칫하면......."
만박노개가 이번에는 빽 고함을 질렀다.
"밥통 같은 화상아! 너는 그 흔한 관상도 볼 줄 모르느냐? 소림의 땡초들이 우직하게 틀어 박혀서 경문(經文) 외울 때 너는 뭘 했느냐? 차라리 산통(算筒)이라도 흔들 줄 알았더다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렇게 감도 못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라질! 뱃 속에는 똥만 가득하고 그 큰 대갈통에는 쓰레기만 꽉 찼으니 알 게 무어람?"
실로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욕설이었다. 곁에 있던 진일문의 눈이 오히려 휘둥그레졌다.
'우우... 과연 저 소리를 듣고 취화상이 가만히 있을까?'
하지만 그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취화상은 의외로 히죽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지야, 내가 그런 것에 다 신경을 썼었다면 안그래도 나쁜 머리로 어떻게 너와 육십년을 싸우고도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허허... 공연히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이 화상이 알아 듣기 쉽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세사를 초탈한 일대 고승(高僧)처럼 보이기도 했다. 진일문이 그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동심(童心)이었다.
'취화상은 백세에 이르면서도 아직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성정을 가지고 있구나. 아마도 그래서 평생을 무공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무공 외에 잡념(雜念)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토록 고절한 무학의 종사는 될 수 없었으리라.'
이 때, 취화상과 만박노개는 서로 얼굴을 마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기 상대의 눈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따금씩 취화상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곤 했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 분들은 지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군. 무엇인지는 몰라도 극히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유실의 내부를 둘러 보았다.
24장 우내쌍기(宇內雙奇)의 절예(絶藝)
 
유실은 철저히 밀폐되어 있었다. 
그 유일한 출입구가 바로 진일문이 들어왔던 상층부의 용상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중앙에 있는 황금관은 표면에 고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또한 벽에 그려져 있는 사신도로 말할 것 같으면 애초에는 정교하게 그려진듯 했으나 지금은 매우 퇴색해 있었다.
진일문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 오기까지는 실로 무서운 기관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아무도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무척이나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고분 안에는 엄청난 보물이라도 있어야 하거늘, 오는 동안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우기 이 유실은 무덤의 핵심부인듯 한데 이 곳에도 역시 소장되어 있는 것이라야 고작 관 하나가 전부이지 않은가?'
그의 추리는 꼬리를 물듯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이제까지 보았던 수많은 시체들은 또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무림인들이었다. 그런데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백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얻으려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 단순한 보화 정도는 아닐테고.......' 
진일문의 눈이 갑자기 번쩍 이채를 발했다.
'아! 혹시 아까 본 그 광화비전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광화비전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라면 소홀하게 보관할 리가 없다. 더구나 이 은밀한 유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금방 눈에 띄는 곳에 두지 않았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황금관에 고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황금관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유실의 풍경은 웬지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상념은 거기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꼬마야! 그 계집과의 신방(新房)은 어찌 되었느냐?"
뜻밖에도 만박노개의 음성이 귓전에 부딪쳐 왔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흠칫 놀라는 한편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노선배님......."
"헤헤헤... 어땠느냐? 그 계집애는 꽤 쓸만한 것 같았는데......? 그 정도면 이 월하노인의 중매솜씨도 보통은 넘지 않느냐?" 
그 말에 진일문은 역시 예를 취하려다 그만 두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였지만 만박노개의 질박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미루어 예의 따위는 잠시 접어두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단지 제게 고난을 하나 더 얹어 주셨을 따름입니다. 그 일이 아니라도 골치가 아팠었는데 이제는 이중, 아니 삼중고를 겪게 되어 버렸습니다. 노선배께서는 과연 그 책임을 어떻게 지시겠습니까?"
"헷! 이 녀석 보게? 자고로 열 계집인들 마다하는 사내를 노부는 보지 못했느니라. 우리 농담하지 말고 분명히 하자. 노부는 틀림없이 네게 큰 은혜를 베풀었단 말이다."
진일문은 짐짓 완강하게 맞섰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본인이 전혀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물건을 강제로 맡기고도 노선배께서는 어찌 은혜 운운하실 수가 있습니까?"
"뭐, 뭣!"
"그것은 비단 억지일 뿐만 아니라 노선배께서 소생에게 빚을 지신 것에 불과합니다."
"뭣이? 노부가 네게 빚을 졌다고?"
이 때, 옆에서 취화상이 박수를 땅땅 쳤다.
"옳거니! 너, 냄새 나는 거지놈아. 망신살이 뻗쳐도 유만부득이지, 이제 보니 새까만 후배 아이에게 신세나 지고 다녔었구나."
그는 마치 꼬투리라도 잡은듯 신명이 나서 떠벌이고 있었다. 만박노개는 대번에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채 눈알을 무섭게 부라렸다.
"너... 너... 이 노옴! 감히 노부에게......."
진일문은 그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빚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위인이 바로 만박노개가 아닌가? 사실상 진일문은 공략은 애초부터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노선배께서 제게 빚을 지게 되신 것은 그 월하노인의 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막중한 은혜로 바꾸실 수 있는 기회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만박노개는 입맛을 쩍 다셨다.
"역을 제대로 하다니? 어떻게 말이냐?"
"무릇 인명을 구하는 일도 그렇지만 중매라는 것도 실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법입니다."
"어이쿠!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군."
만박노개는 괴상한 표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냐하면 진일문의 말인즉 전날에 자신이 쏟아놓았던 말을 그대로 되받아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일문의 뜻에 부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약삭 빠른 꼬마 놈, 그래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어냐?"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본시 중매장이란 맺어질 사람들의 신분이나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보증을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엉?"
만박노개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그만 입이 달라붙어 버리고 말았다. 진일문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진일문이나 흑수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무했다.
"예외인 경우도 있긴 하지요. 양가의 가문이 실하지 않으면 중매하기도 곤란하므로 이럴 때는 통상 한 가지 방법을 씁니다."
"어떤 방법이냐?"
진일문은 여전히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예물을 듬뿍 주는 것입니다."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취화상이 박장대소 했다.
"와하핫... 옳다, 옳아! 백 번 지당한 말이로고."
"빌어먹을!"
만박노개는 울상을 지으며 진일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여우 같은 꼬마놈, 내 언젠가는 네 놈의 나불거리는 그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말겠다."
그러나 앞으로 그럴 일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느덧 진일문이 정중한 태도로 그들의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후배 진일문, 두 분 노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우내(宇內)에서 오직 두 분 밖에 계시지 않는 무학종사를 뵈오니 금생의 다시 없는 영광입니다."
그의 돌변한 모습에 취화상과 만박노개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안색이 싹 변했다. 취화상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아이야, 말해라. 너는 왜 방금 두 사람이라고 했느냐?"
진일문은 탄식하며 대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내삼기란 이름이 존재 했으나 지금은 우내쌍기(宇內雙奇)가 계실 뿐입니다."
"뭐, 뭣이?"
만박노개는 경악성을 발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그의 멱살을 와락 움켜 잡았다.
"무슨 뜻이냐? 우리가 쌍기로 불리워야 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진일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삼기 중 한 분이신 현고자께서 우화등선하셨으니 남아 계신 두 분은 당연히 쌍기로 불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멱살을 잡았던 만박노개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려 나갔다. 취화상의 노안에는 눈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그랬었구나. 어쩐지 오늘까지 세 번이나 비무회에 참가하지 않더라니....... 우리는 그가 새로운 무공이라도 연마하는 줄 알았는데......."
만박노개는 침음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안색은 여러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이윽고 그는 괴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죽음을 보았느냐? 그래, 어떻게 죽었더냐? 너는 그 말코와는 어떤 사이냐?"
만박노개는 한꺼번에 세 가지 씩이나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심정이 혼란해져 있다는 의미였다.
그에 반해 진일문은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소생의 눈으로 직접 그 분의 죽음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 분은 이십여년 간이나 한 동굴 속에 갇혀 지내시다가 종내 한을 품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소생에게는 사부님이나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는 비교적 간단하게 세 가지 질문에 모두 답해 주었다. 
만박노개와 취화상, 두 기인은 몹시도 충격을 받은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읊조렸다.
"이십년 간이나 갇혀 있었다고?" 
"어찌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가......?"
두 사람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진일문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만박노개가 이번에는 그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거칠게 물었다.
"꼬마야! 어서 자세히 말을 해 보아라. 추호라도 거짓이 있을시에는 내 네 놈을 가루로 만들고 말겠다."
진일문은 그의 비통한 음성을 통해 우내삼기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경쟁 상대를 표방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두터운 우의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소생이 그 분을 처음 뵈온 것은 무당산의 불회곡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조용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취화상과 만박노개는 줄곧 침중한 안색으로 듣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진일문은 현고자를 만나게 된 경위와 그의 죽음, 그 밖에도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를 모두 숨김없이 얘기했다.
"그럴 수가!"
"아미타불......."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취화상은 수중에서 염주를 빠르게 굴리고 있었고, 만박노개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진일문은 그들이 비록 말은 하지 않으나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상 그들 두 사람은 일세의 기인이자 평생지기인 현고자의 죽음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더구나 어이없게도 동문의 사제에게 암산을 당했었다는 말을 듣자 죽은 당사자보다도 오히려 더 격분하고 있었다.
납덩이와도 같은 침묵이 장내에 흘렀다. 
진일문은 그 침묵이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두 사람과 똑같은 비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보다 더할지도 몰랐다. 현고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갔던 시간들이 이후로는 그의 가슴 속에 질긴 회한을 심어 놓았던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만박노개였다.
"그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인 말코도사가 기어이 스스로 들어 갈 함정을 파고 말았군."
그 말에 취화상은 대두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그의 사제인 현청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나?"
만박노개가 그를 향해 짐짓 눈을 부라렸다.
"닥치게! 사람의 마음 속을 어찌 안단 말인가? 한 때 충직했어도 그 후로 반심을 품었다면 능히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아미타불... 이 일에는 필시 흑막이 있을 걸세."
진일문은 그 말을 듣자 취화상이라는 이 기인에 대해 새삼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음, 이 분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구나. 오히려 남이 따를 수 없는 깊은 통찰력을 소유하고 계시니.......'
취화상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어쩌면 그 일의 배후에는 무당의 반도인 현진이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르네."
만박노개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뭣이? 현진이라면 동방절호, 그 노적의 아우놈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보다 더 놀라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맙소사! 동방절호라면 바로 지난 날의 마교 교주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진이 그의 아우였다니.......'
취화상은 심각한 얼굴로 두터운 입술을 움직였다.
"동방불후(東方不朽)는 오히려 제 형인 동방절호보다 수배나 간악한 위인이 아닌가? 늙은 거지도 그 점은 잊지 않았겠지? 그 자가 무당에 입문하여 수십년 간이나 신분을 감춘 채 무당장문인 자리를 넘본 것만 보아도 알 만하지 않은가? 그 자의 치밀한 간계는 실로 천하절금한 것이었지."
만박노개는 좀체로 수긍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몇 가닥 되지도 않는 수염을 비비 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자는 삼십년 전 천의봉(天衣峯) 대전에서......."
취화상은 염주를 따르락 굴려 그의 말을 잘랐다.
"그 자의 죽음을 확인한 것은 아니란 말이네. 당시 천의봉 아래를 샅샅이 뒤졌어도 그 자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었네."
만박노개는 수염 꼬던 손을 아래로 툭 떨어 뜨렸다.
"그렇다면 그 자가 살아있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빌어먹을!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놈은 한 번 실패했으니 두 번 다시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더 기를 쓰겠군."
만박노개는 연신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제기랄, 그래서 여태껏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나?" 
취화상은 눈을 껌벅거렸다.
"내가 부처님이 아닌 이상 거기까지야 어찌 알겠나? 어쩌면... 그것은 광화비전 때문인지도 모르지."
만박노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럼 놈이 지금 광화비전을 익히고 있을 거란 말인가?"
"동방절호가 죽은 것도 실은 광화비전을 완벽하게 연마하지 못해서이지. 동방불후는 당년의 동방절호를 능가하지 않는 한 절대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걸세."
"흐흐흐... 그렇지만 광화비전은 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취화상은 대두를 슬쩍 쓰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가느다랗게 떠진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신광이 어른거렸다.
"자네는 그들 세 늙은이가 폐관한지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만박노개는 움찔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 우리로서는 다만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기를 빌 도리 밖에 없네."
두 사람 사이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편. 
진일문은 잠자코 듣고 있었으나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실상 두 기인의 대화에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역시 충격을 받은 것은 현진자가 동방절호의 동생이라는 부분이었다. 
본래 현진자는 현고자의 사형으로써 단지 무당파에서 축출된 것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설마하니 그의 이면에 이렇듯 많은 비사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득 만박노개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입을 열었다.
"현청이 과거를 후회하여 물러난 것은 그렇다치고, 왜 하필이면 광무(廣武) 같은 후레자식에게 대통을 맡겼단 말인가?"
광무라면 현재의 무당 장문인이다. 진일문도 그의 인품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쯤은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취화상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거기에도 역시 흑막이 있을지 모르네."
만박노개는 답답한지 뒷짐을 지고 연신 황금관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진일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뻗어 나왔다.
"꼬마야, 이젠 네 얘기를 해라. 너는 누구의 제자이며, 이 곳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
진일문은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 두 분은 괴퍅하기는 해도 성품만은 지극히 곧은 분들이다. 게다가 무공은 차치하고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지혜를 지닌 분들이거늘, 내 이런 분들께 굳이 무엇을 감추랴?'
그는 가슴을 활짝 펴며 입을 열었다.
"후배는 공식적으로는 사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후배가 이 곳에 온 것은 바로 두 분 노선배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들을......?"
취화상과 만박노개는 다같이 그를 바라보았다.
본시 내면에 응어리져 있는 한이란 감추고 있을수록 더욱 고통을 가져다 주는 법이다. 
진일문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조금도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그러자 그는 맺혀 있던 응어리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며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실상 그는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는 얘기한 적이 없었다. 주로 상대가 물으니 대답하는 형식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요점만 간추려 말하는 정도였다. 
만박노개와 취화상.
두 사람은 진일문의 얘기를 전해 듣는 동안 수도 없이 탄성과 한숨을 쏟아냈다. 그만치 그의 과거행적은 무림의 두 기인에게 있어서도 경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들 삼인의 사이를 무심하게 흘러 갔다. 
마침내 진일문은 얘기는 끝을 맺었고, 두 기인은 약속이나 한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잠시 눈을 통해 무엇인가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이윽고 만박노개가 입을 열었다.
"땡초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꼬마놈이 우리 두 늙은이의 재간을 배우겠다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취화상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엉뚱한 거지 늙은이야, 네 놈이 먼저 제안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딴청이냐?"
만박노개는 지저분한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그건....... 아까는 그저 이 놈의 근골이 쓸만하길래 몇 수 나눠주자는 것이었지, 별 다른 의도는 없었거든. 그러나 지금은......."
골치를 앓는 듯한 그에 비해 취화상은 자못 엄숙해져 있었다. 
"아미타불... 이건 정말로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다. 함부로 취급했다간 어떤 후환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는 말을 마치자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형언키 어려운 고뇌가 엿보였다. 
반면에 만박노개는 천정을 보았다, 바닥을 보았다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각자 방식은 다를지언정 그 역시도 취화상과 똑같이 고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취화상이 눈을 번쩍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네가 상승의 무학을 익히는 것은 훌륭한 근골로 보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두 늙은이의 무공을 네게 전수하는 것만은 가볍게 실행할 문제가 아니다."
진일문은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그러나 그 뒤로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성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두 분의 무예가 중원의 정화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배우고자 앙망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두 분께서 후배와의 인연을 원치 않으신다면 감히 어쩌겠습니까? 후배,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깨끗이 잊고 돌아가겠습니다."
취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너는 정녕 신지가 굳은 아이로구나. 나는 그런 네가 무척 마음에 든다. 사실 우리가 망설이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다른 이유라시면......?"
"아이야, 그것은 너에게 달렸구나." 
진일문은 흠칫 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후배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네가 우리 두 늙은이에게 무공을 배우려는 목적은 삼성림과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진일문은 약간은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화개악을 상대하려면 오직 두 분의 무학이어야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그런데 만약 그가 네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면?"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어찌 할 것이냐?"
진일문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처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설사 그렇다 한들 그것이 쌍기의 무학을 배우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취화상이 그를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성림의 세 늙은이는 모두 아홉 명의 제자를 키웠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반목하여 분열 되었다고는 하지만 누가 옳고 그른지는 아직 확실히 판명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진일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취화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더듬거렸다.
"설마... 후배의 부친께서......."
취화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수중의 염주만을 굴렸다. 그러자 그를 대신하듯 만박노개가 뒤를 이었다.
"꼬마야, 너는 한 번도 네 부친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네 부친은 현재로서는 죽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아!"
"너는 당연히 그가 선자(善者)일 것이라고 믿겠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너는 어찌 하겠느냐? 네 부친을 도와 악을 행하겠느냐, 아니면 부친과는 별개로 대의를 따르겠느냐?"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그 별개(別個)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대의를 따른다는 의미는 부친일지라도 악인이라면 제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일문.
그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부친이 악인이리라는 가정은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의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부르짖음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두 기인을 바라보다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취화상과 만박노개의 얼굴에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장엄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목숨쯤은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꿋꿋한 기개가 그들에게서 엿보였다.
진일문은 그들의 위엄에 압도당한 나머지 감히 우러러 볼 수 조차 없는 심정이 되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침묵은 역시 고통스러웠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에 그의 뇌리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일문은 사실상 부친의 얼굴을 본 적이 없을 뿐더러 부친에 대해 한 가지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어쩌면 내부에서 커다란 환상을 키워 왔는지도 모른다.
더없이 인자한 성품에 정인군자(正人君子)로서 세상에서 가장 충랑한 사람....... 이것이 바로 진일문이 늘상 염두에 두고 그리워하던 부친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환상을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상황에 따라서는 서로 무기를 맞댄 채 피를 뿌려야 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지 않는가?
와르르르.......
진일문은 천정이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그 뒤를 이어 하늘이 붕괴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심상(心想)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불현듯 진일문의 안면이 격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번쩍 치켜 올리더니 절규하듯 외쳤다.
"그만 두십시오! 후배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두 기인의 눈은 두 개의 창(創)이 되어 그의 얼굴에 꽂혔다. 이어 불문(佛門)의 사자후(獅子吼)가 깃든 취화상의 음성이 그의 고막으로 파고 들었다.
"이 노옴! 이성을 되찾아라--!"
진일문의 기색이 순간적으로 어느 정도의 평정을 회복했다. 사자후신공이 그의 격앙된 심정을 가라앉혀 주었던 것이다.
그는 기혈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꽤 침착하게 말했다.
"맹세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맹세코......."
그러나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 그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그리고는 혼절해 버렸다. 극단에 이른 심적 고통이 그의 심장에 무서운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취화상이 사자후를 외친 것은 그의 심중에 담겨 있는 진실을 쏟아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취화상으로 하여금 참담함을 금치 못하게 했다.
"아미타불! 이 아이는 정녕 무섭도록 고집이 세고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군. 이 늙은 중의 항마대불력과 사자후의 합력이 알아낸 것이 고작 이것이었다니......." 
만박노개.
그는 말없이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취화상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듯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연신 형형한 안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득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늙은 거지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면 한 번 모험이라도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취화상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늙은 거지야! 그게 무슨 말이냐?"
"헤헤헤... 땡초야, 대저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 두 늙은이가 이번에 파사국(波斯國)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뿐더러 그 곳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거늘,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
취화상은 어이가 없다는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넘기잔 말인가?"
"헤헤... 이 녀석의 성정은 썩 괜찮단 말이야. 너무 고지식하고 직선적인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후사를 맡기기에는 나을지도 모르지."
취화상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만박노개는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땡초, 너는 네 맘대로 해라. 이 노화자는 결정을 내렸다. 자네가 뭐라 해도 나는 나야."
취화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두 손을 합장한 채 조용히 명상의 세계로 빠져 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이마 위에 백색 서기가 어리더니 그것은 신비하기 그지 없는 성광(聖光)으로 화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것을 본 만박노개는 언뜻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저 땡초가......."
그러나 막상 방해할 의도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곧바로 뒤로 물러나더니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취화상은 합장한 손을 풀더니 한 손으로는 이마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호결(弧訣)을 쥔 채 가슴 앞으로 올렸다. 
그 상태로 시간은 다시 흘렀다.
"아미타불......."
기진한 불호소리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취화상은 술에 취한양 얼굴이 매우 붉어져 있었다.
만박노개는 알고 있었다. 그가 별로 길지도 않았던 이 시간을 위해 최소한 사, 오년의 불공(佛功)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쯧쯧! 출가한 땡중들이 되려 더 사람을 못믿는단 말이야. 그래, 그토록 진력을 소모해 가며 무엇을 보았나?"
취화상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열심히 불호를 외웠다. 그의 살찐 얼굴에서는 줄곧 땀이 흘러나왔다.
만박노개가 무엇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취화상이 웬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미타불... 천기는 누설할 수 없는 걸세.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천기를 엿보았으니 이로써 열반정토에 들기는 틀렸네. 아미타불... 업보로다! 돌아서면 곧 고해가 끝나고 피안이거늘, 인간들은 어찌 하여 그토록 번뇌를 떠나지 못한단 말인가?"
만박노개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거야? 빌어먹을, 열반이고 정토고 빨리 ㄸ초가 알아낸 것이나 털어놓게."
취화상은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서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의 말이 옳아. 이 아이는 우리와 인연이 있다네."
만박노개는 영 찜찜한 표정이었다.
"뭔가 숨기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미타불... 넘겨 짚으려 하지 말라니까? 그저 부처님이 하라시는 대로만 따르면 되는 것일세."
"흥! 부처님이 밥 먹여주나? 빌어먹을....... 어쨌거나 이 노화자는 더 이상 이 답답한 곳에서 견딜 수가 없으니 빨리 밖으로 나가세."
취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가진 연(緣)이 특별하니 우리는 각기 한 가지씩만 전하면 되네. 시간은 칠주야(七晝夜)면 족할 것이네."
만박노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한 가지씩?"
"이 엉터리 중은 불문의 개정대법(開項大法)으로 이 아이의 몸속에 산재되어 있는 어지러운 기운을 다스리고, 덤으로 돼지신공을 전수할 생각이네. 자네는 그저 만박해초결(萬博解招訣)만 내놓으면 되네."
만박노개는 펄쩍 뛰었다.
"뭐라구? 만박해초결? 화상,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겨우 칠일 동안에 만박해초결을 어떻게......?"
취화상은 대두를 흔들거리며 웃었다.
"우리 두 늙은이는 다만 길을 닦는데 불과하네.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저 아이란 말일세."
그 한 마디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만박노개도 그 이상은 뭐라 토를 달지 못했다. 그러나 입속으로 계속 꿍얼거리고 있었다. 습관이 그러하니까.
칠주야.
그것은 말이 주(晝)와 야(夜)일 뿐이지, 유실 속에서는 전혀 밤과 낮이 구별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일곱 번의 밤과 낮 동안 진일문은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두 기인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 열두 시진 중 여섯 개 시진은 취화상으로부터 개정대법을 전수 받았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손바닥을 통해 정수리로 뜨거운 불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일문의 체내에는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각기 다른 경락에 흩어진 채 그 운행조차 제멋대로 달리 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들어 태극환허공으로 그 진기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지닌 바 진기에 비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취화상은 바로 이 부분에 역점을 두었다. 즉, 개정대법을 통해 진일문의 흩어져 있는 진기를 하나로 녹이고 있었다.
실상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불문에서 금기로 여기고 있는 대법 중 하나로써 소림사 내에서도 장로회의를 거치지 않는 한 절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불문의 무상선공(無上禪功)은 일반적인 내공심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웅후하면서도 가히 무궁무진한 잠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속인이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 진보 속도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느려서 성격이 화급하거나 잡념이 많은 불자들은 익힐 수가 없었다. 
취화상.
그는 소림이 배출해낸 가장 뛰어난 기인으로서 소림의 달마 칠십이종 절예를 한 몸에 모두 익히고 있는 인물이었다.
과연 그는 대법력(大法力)을 이용해 진일문의 어지럽고 탁한 진기를 하나로 녹여 주었다. 그것은 화로에서 지순한 열로 온갖 물질을 녹이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이른바 노화순청(爐火純靑)이랄까? 불력을 빌어 혼탁한 기운들이 하나의 거대한 힘으로 응집되도록 단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법을 시행하는 데에는 엄청난 위험부담이 따를 뿐더러 의례껏 시행자의 공력이 크게 소모되기 마련이다. 
진일문은 대법이 시행되는 동안 취화상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못내 감격해마지 않았으나 막상 자신의 심정을 전달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취화상은 늘상 대법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가 다음 날에야 만날 수 있었는데, 또 같은 목적으로 마주쳐야 했으므로 대화 같은 것은 나눌 겨를조차 없었다.
대법 시행이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진일문은 자신의 공력이 급증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깨끗하기 그지없는 순양지기(純陽之氣)로 승화된 것이었다. 
그는 대법이 끝나자 즉시 운기를 해보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따라 전신 혈맥 속에 깊이 고여 있던 순양지력이 마치 노도와 같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만박해초결(萬博解招訣).
진일문은 하루 중 나머지 여섯 개 시진은 만박노개로부터 꼬박 이를 전수받았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무공초식이나 신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만박노개가 일백여 성상(星霜)을 거쳐 깨우치고 다듬어 놓은 독창적인 무학일 따름이었다.
만박노개는 원래 개방 출신으로 심한 유랑벽이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떠돌며 천하 제파의 무공을 사양치 않고 두루 익혔고, 그들과 비무하는 것을 즐겨했다. 무공광(武功狂)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천하 각파의 무공을 집대성 시켰고, 이와 더불어 그 무학의 파해 방법을 연구하는데 수십 년을 소비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예의 만박해초결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획기적인 무학이론이었다. 그는 일거수 일투족을 사용하는데 특별한 도식이나 무공을 쓰지 않는다. 상대의 공격 내용에 따라 그때 그때 대처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즉 그의 만박해초결이란 천하의 어떤 무학이라도 그 장단점을 파악해 즉석에서 파해시켜 버리는 고금무쌍의 절학이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만박노개는 개방의 독문기학인 타구봉법(打狗棒法) 외에는 다른 무학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타구봉법이란 개방 최고의 무학이었다. 그것은 삼십육초로 이루어진 봉법으로 개방의 장문인에게만 이어지는 비법이었다.
어쨌든 만박해초결은 그가 백여 년에 걸쳐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진일문에게는 단 칠일만에 전수해야 했다. 만박노개가 애초에 펄쩍 뛰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그 구결(口訣)만을 전수하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었고, 진일문은 하루에 여섯 시진씩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그것을 암기해내야 했다. 
만박해초결은 총 육천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구결로써 그것을 모조리 암기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하루에 천자 가까이 외워야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실상 어릴 시절 서원에서 학문을 익힐 때에도 암기라면 어지간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였다.
이것은 읽는 족족 이해가 되는 기초학문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개 깊은 오의가 숨어 있어 연구를 병행해야 했으며 때로는 만박노개로부터 그에 따른 설명을 필히 듣고 넘어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일문은 마치 종이가 먹을 빨아들이듯 서서히 만박해초결을 습득해 나갔다. 
만박노개는 이렇듯 빠른 진전에 입을 딱 벌렸다. 그가 쉽게 흥분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내색을 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더구나 그는 설사 해초결을 완벽하게 암기했다 해도 그 실용에 다시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만박노개는 육일째 되는 날, 육천여자의 구결전수가 끝나자 추가로 한 가지를 더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이 늙은 거지가 동냥을 하다가 깨우친 잡학으로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법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아마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원판보다 훨씬 탁월할 걸? 헤헤... 일전에 왜 대흥루에서 점소이가 자신의 면상을 주먹으로 갈겼지 않느냐?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수법이다."
"아!"
진일문은 탄성을 발했다. 당시에도 찬탄을 금치 못했던 명쾌한 수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는 못된 점소이가 스스로 얼굴을 때리던 장면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헤헤... 아직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크ㅋ! 이런 이름은 어떠냐? 마치 미친개가 자신을 물어뜯는 듯한 형국이니 광견수(狂犬手)라고 할까?"
진일문고 더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광견수라고 하셨습니까? 그런 무공 이름은 듣느니 처음이지만, 정녕 노선배님다운 발상이십니다."
광견수는 간단한 혈류 운행으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수법이었으나 만박노개의 말마따나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상대방의 장력이나 검, 심지어는 암기까지도 모두 튕겨내 역공을 가하게 되는 믿지 못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취화상이 빈정거렸다.
"괘씸한 늙은 거지 같으니라구! 이제 보니 엉큼하게도 묘수를 하나 꿍치고 있었군. 설마 하니 그 엉터리 수법으로 이 화상의 뺨을 칠 생각은 아니었겠지?"
그 말에 만박노개는 히죽 웃었다.
"땡중도 이 아이에게 뭔가 하나 더 얹어 주려 하는데 나라고 질수야 있나? 그건 그렇고, 헤헤... 절친한 친구 사이에 어찌 뺨을 치겠나? 차라리 그 대머리를 한 방 먹인다면 몰라도."
"뭐, 뭣!"
"하하하하......."
두 사람의 싸움(?)은 진일문의 가가대소로 끝을 맺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진일문은 문제의 돼지신공을 배웠다. 그것은 취화상이 스스로 깨우친 전대미문의 괴공(怪功)이었다.
불문의 모든 신공을 다 알고 있는 취화상이었다. 그러나 본시 불문신공이란 익히기가 까다로울 뿐더러 지나치게 광명정대하여 실전에 응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상대방의 내력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기상천외의 기공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돼지신공이었다. 그 희한한 이름의 연원은 만박노개의 광견수나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비무시에 이 돼지신공을 사용하면 상대방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기가 흩어지게 되고, 종내 바람 빠진 공처럼 탈진하게 된다. 이것은 상대방의 공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위력이 더욱 커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금기(禁忌)가 있었다. 취화상은 이 점을 두고 진일문에게 신신당부 했다. 
"필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느니라. 그것은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체내로 흡수한 진력이 소화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의 공력이 강할수록 그 시간은 길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진력이 본신의 진기와 융화되지 않으면 되려 주화입마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약정된 칠일이 모두 지나갔다.
쌍기는 진일문을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이것으로써 너와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다 했다. 더 이상 전할 것이 없구나. 앞으로의 일은 오직 부처님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이다."
취화상은 말을 마치자 눈을 내리 감았다.
진일문은 두 사람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도의 예를 취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거절당했다. 사도의 인연까지는 없다는 것이 바로 그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너는 세 가지를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만일 한 가지라도 어긴다면 그 때에는......."
취화상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전광과도 같은 빛이 뻗어 나왔다.
"우리 두 늙은이가 모든 것을 거두어 갈 것이다."
진일문은 내심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더 듣지 않아도 충분히 두 사람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 두 분은 지금 내가 약속을 위반한다면 몸소 나를 제거하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전혀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잠자코 있자 취화상이 엄숙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첫째, 너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어야 한다.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아라. 꼭 죽여야 할 인물이 아니면 살수(煞手)를 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킬 수 있겠느냐?"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둘째, 이것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情)과 의(義), 이 두 가지가 앞으로 너를 꾸준히 괴롭히게 될 것이다. 과연 너는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을 굳혔다. 그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덧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정(私情)이라면 대의(大義)를 따르겠습니다."
만박노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취화상은 눈을 감은 채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네가 부디 그 약속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일문은 가슴이 흡사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취화상의 말은 그를 매우 당혹시켰다.
"셋째로는 네 상을 보니 여난(女難)이 가로세로 겹쳐져 있다. 여색을 되도록 가까이 하지 마라. 그러나 그것이 피치 못할 경우라면... 아미타불... 절대 한(恨)을 심지 않도록 해라."
진일문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역시 수긍을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취화상이 말한 세 가지를 평생의 계율로 삼으리라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의 운명이 결정할 문제였으나.......
25장 북망산(北邙山)에서 벌어진 일
 
'허전하다.'
진일문은 눈을 뜬 순간 유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쌍기는 그가 운공을 하는 사이에 떠나 버린 것이었다. 
그의 앞, 바닥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운명(運命)을 정(定)한 것이 하늘(天)이라면 인간의 도리는 최선을다 하는 것.......>
<무운(武運)을 빈다>
단 두 줄뿐이었다.
그것도 지력(指力)을 이용해 땅바닥에 휘갈기듯 새겨 놓은.......
그러나 진일문은 서명이 없어도 그것이 각각 취화상과 만박노개가 남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두 분께 정녕 두터운 은전을 입었구나. 평생을 갚은들 그 천만분지 일이나 갚을 수 있을지.......'
취화상은 과연 그답게 심상치 않은 잠언을 남기고 갔다. 
진일문은 그 뜻을 헤아려 보며 새삼 깊은 감회에 빠져들었다. 왜 모르겠는가? 과거에는 운명을 한탄했으되 언제부터인가 전심전력을 다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가 아닌가?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내심 부르짖었다.
'후배, 반드시 어르신의 뜻에 부응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만박노개는 단지 짧고 소탈한 글을 남겼을 따름이나 거기에는 실상 일세를 풍미한 노기인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가 담겨 있었다. 이 또한 모르지 않는 진일문이었다.
'두 분의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훗날 반드시 재회하게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는 급기야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두 기인을 향해 구배(九拜)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비록 사도의 연이 없다 하여 거부당하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현고자와 더불어 두 기인을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적막한 유실.
혼자 남게 된 진일문은 공허감에서 일탈하여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렸다. 개중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해 낸 것은 이 고분으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숱한 주검들이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벌써부터 만박노개에게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빌자면 고분의 참극은 오십여 년 전 마교(魔敎)와 중원동맹(中原同盟)의 대혈전이 빚어놓은 결과라고 했다.
지난 날 마교의 교주인 동방절호가 중도에서 변심한 나머지 원(元)의 황실과 손을 잡고 중원을 정복하려 흑심을 품었던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마교의 위세만도 천하를 뒤엎을 정도였는데 이역의 고수들까지 끌어들이는 바람에 중원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동방절호는 야망을 채 펴기도 전 무극단(無極斷)에서 비명횡사했다. 그것도 그 자신이 흡사 분신인양 신뢰했던 삼인의 수하에게 배신을 당한 나머지 그렇게 죽어 갔던 것이다.
이른바 십대천왕(十代天王).
그들은 마교의 조직 내에서 교주 한 사람을 제외한 서열 제 이위의 인물들이었다. 일신의 무공도 교주인 동방절호와 경미한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 십대천왕 가운데 삼인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동방절호를 제거했다. 그들이 훗날 삼천공(三天公)으로 불리우게 된 삼성림의 세 기인이었다.
천하도인(天下道人), 천검불패(天劍不敗), 만상군자(萬象君子).
이들 삼인은 먼저 동방절호를 천산의 무극단으로 유인해 추락시켰다. 그리고 마교의 세력을 이 고분에 몰아넣은 후, 중원무림동맹을 구성해 이 곳에서 마교의 최후를 장식하게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공전절후의 대혈전이었다.
원래 이 곳은 송대(宋代) 한 제왕의 무덤으로써 갖가지 기관장치가 매복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조건하에서 마교와 중원동맹이 환우대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양측 모두가 거의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 마교를 몰살 시켰다고는 하나 그만큼 중원동맹의 피해도 지대한 것이었다.
각파의 장교는 물론이거니와 무수한 무림의 최정예 고수들이 모두 이 곳에서 뼈를 묻었다. 이후로 각파의 최고 절기들이 실전되는 불상사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싸움에서 가장 난적(亂賊)은 역시 십대천왕 중 삼인을 제외한 칠대천왕이었다. 동방절호가 제거되었다고는 하나 그 때까지도 그들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요행이랄까? 칠대천왕은 삼천공의 배신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삼천공의 계획된 암습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일전에 진일문이 고분의 대청에서 보았던 일곱 명의 노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고분은 마교가 삼천공의 권유에 따라 한 때 그들의 본궁(本宮)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싸움이 끝난 후 고분은 자연스럽게 폐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내삼기가 하필 이 곳을 비무장소로 선택한 데에는 한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현고자를 포함한 그들 우내삼기는 당년에 고분 내에서 벌어졌던 대혈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때에 그들은 일만 리나 떨어진 곤륜산(崑崙山)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이 벌어지기 직전 곤륜산의 한 기인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었다. 그리하여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갔는데, 막상 그 곳에서 그들이 본 것은 그 기인의 싸늘한 시체가 전부였다.
의혹을 품고 그들이 다시 중원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고분의 혈전은 막을 내린 뒤였다. 살아남은 자라야 극소수.......
우내삼기는 통탄을 금치 못하는 한편, 고분을 둘러보고는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치를 떨어야 했다. 
그들은 마교 비전 무공의 무서움을 비로소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고분에서 광화비전(光化秘傳)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그들은 실로 경악해마지 않았다.
광화비전상의 무학은 가히 인간의 무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 아니 악마(惡魔)의 무공이었다. 인세를 모조리 멸절시키는.
우내삼기는 한 가지 묵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 광화비전을 상대하기 위해 여생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십 년에 한 번씩 비무를 하게 된 것도 나중에는 이 때문이 되어 버렸다. 그 간의 성취를 비교하며 서로를 고무시키는데 그 본연의 뜻을 두게 된 것이다.
우내삼기가 광화비전을 그토록 의식하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광화비전이 마교의 멸망과 함께 제 삼의 인물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광화비전은 원본(原本)과 필사본(筆寫本), 두 권이 있었다. 그 중 필사본은 삼천공이 회수했으나 원본이 싸움의 와중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마교의 부교주(副敎主)였던 동방불후가 그 장본인이었다. 그는 광화비전과 함께 격전장에서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고, 그 사실은 대단한 우려를 자아냈다.
이 때문에 삼천공은 삼성림에 들어간 이후로 강호에 발을 끊게 되었다. 광화비전의 신비를 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뒤로 동방불후가 행적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이십 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는 무당파 내에서 현진자라는 신분으로 숨어 있었다. 그것이 알려지자 또 한 번의 무시무시한 격돌이 있었다.
천하에서 단 육인(六人)만이 아는 비밀은 이 때 파생되었다.
동방불후.
그가 현진자라는 이름으로 감히 대무당파의 대통을 이어받으려고 한 음모는 뜻밖에도 한 여인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사공(邪功)을 연마하기 위해 여인의 순음지체를 이용하다 실수로 그 여인을 놓치게 되었고, 여인으로부터 그의 정체를 알게 된 현고자는 곧바로 취화상과 만박노개에게 연락을 취했다.
두 사람은 다시 삼천공과의 은밀한 상의를 거친 끝에 마교의 잔재를 근절시켜 버리기로 중지를 모았다. 
결국 동방불후는 천의봉(天衣峯)에서 우내삼기와 삼천공이라는 육인의 개세 고수들에게 합공을 받게 되었다.
실로 의외인 것은 그 싸움의 결말이었다. 
천하에서 그들 육인의 합공을 당해낼 자란 있을 리 만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방불후는 무려 천여 초를 버텨냈다. 
그도 시간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수세에 몰려 천의봉 아래로 떨어지긴 했으나 그 시체가 종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육인, 즉 우내삼기와 삼천공은 더욱 더 광화비전 상의 무공에 대해 경각심을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육인의 합격이 단 일인을 제압하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들은 모두 참담한 심경과 더불어 맡은 바 각자의 임무에 박차를 가하기로 맹약하고 서로 헤어졌다.
우내삼기가 무림의 일에 거의 등을 진 것은 사실상 이 천의봉 대전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삼천공은 광화비전을 연구하기 위해 그로부터 십 년 뒤에는 아예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문제의 광화비전.
이는 본시 중원무학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멀리 파사국에서 발원한 그들 정교(正敎)의 무학이었다. 또 이 무학을 사용하는 마교 역시도 파사국에서 전래된 지파였다.
 
진일문은 쓴웃음을 지었다.
'쌍기 두 어르신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려 했는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다시금 취화상과 만박노개로 되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관념상의 회귀현상은 다름 아닌 그들에 대한 염려 탓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들 두 기인은 현재 노구를 이끌고 일로 파사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정황도 그렇거니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그들로서는 정기적인 비무 외에 뭔가 색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했고, 그 일환으로 광화비전의 원류를 직접 찾아 나선 것이었다.
두 기인은 또한 어쩌면 이번 길이 마지막 길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일문이라는 젊은 기재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신해 후사를 도모하게 했던 것이다.
진일문의 미간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설마 그 분들께 무슨 변고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는 곧 불안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당면해 있는 문제들로 생각을 전환시켰다.
'구대성군, 그들은 공히 삼천공의 제자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천하를 쟁패하려는 야심 아래 각기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만일 이 일을 폐관 중인 삼천공이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진일문.
확실히 그는 변해 있었다. 어느 덧 그는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을 벗어나 중원 무림의 안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만박노개와 취화상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광화비전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무서운 덫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도 이상을 익히게 되면 심성이 변해 마성(魔性)에 빠져든다는 점이었다.
삼천공을 떠올리던 그는 흠칫 굳어지고 말았다.
'혹 그 분들께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광화비전을 연마하다 마성에 빠졌다거나 주화입마 하여 무천비동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또... 아! 그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무서운 일이다.'
진일문은 생각의 연결 고리를 따라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돼!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이제 이 곳을 떠야겠군.'
진일문은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황금관에 가서 뚝 멎은 것은 그 때였다.
그는 격해져 있는 와중에서도 한 가닥 의혹을 느꼈다.
'저 관에는 누가 들어 있을까? 이 고분의 주인인 송대 제왕의 시신? 아니면.......'
어떤 상황이건 호기심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치 진일문이 젊고 열정적이라는 증거다. 과연 그는 어느 결인지 벌써 황금관으로 다가가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관이라?'
진일문은 그 엄청난 사치의 주인공이 더욱 궁금해졌다.
'어디 과연 누가 들어 있는지 한 번 볼까?'
그 때까지도 관은 철저하리만큼 밀폐되어 있었다. 어디에도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두 분께선 아마도 재물에 담백한 분들이라 이 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겠지?'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누가 보면 내가 마치 황금관 자체가 탐이 나서 이러는 줄 알겠군.'
곧 그의 눈에 쏘아져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아니, 이건 열쇠구멍이 아닌가?'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황금관은 정중앙 부분에 꼭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녕 상식 밖의 일이었다.
시신을 보관하는데 무슨 열쇠가 필요하단 말인가? 한 번 닫았으면 되었지, 다시 열어볼 일이라곤 도통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이 새로운 발견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이끌리듯 품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혹시?'
내심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으나 그의 손은 이미 하나의 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이 그에게 정표로 준 신물이었다.
진일문은 약간은 바보가 된 듯한 심정이 되어 그 열쇠를 황금관의 구멍에 밀어 넣어 보았다. 
'아! 이럴 수가.......'
그는 절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뜻밖에도 열쇠는 구멍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는 들어간 열쇠를 돌려 보았다. 
왼쪽으로는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고,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리자 열쇠는 세 바퀴나 돌아갔다.
철컥! 
금속성이 들렸다.
'놀랍구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열쇠가 마침내 황금관을 열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관의 틈이 크게 벌어져 있는 것을 보며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이 이 고분의 황금관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니, 아무리 꿰어 맞추려 해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황금관은 의외로 가볍게 열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전혀 상상치도 않았던 것이 들어 있었다. 썩어가는 시신을 연상하고 있던 진일문은 다소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후후... 내가 쓸데없이 긴장을 했었군.' 
관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개중 가장 먼저 그의눈에 들어온 것은 한 자 높이의 백옥미인상(白玉美人像)이었다.
두번째로는 다섯 조각의 검은 철권(鐵拳), 마지막 것은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하나의 목갑이었다.
백옥미인상에 눈길을 던지던 진일문은 언뜻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깎아놓은 솜씨가 매우 정교했는데,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비록 생명을 지니지 않았다고는 하나 적나라한 여체가 주는 묘한 충격은 실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곧게 뻗은 사지에서는 마치 피가 통하고 있는듯 온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유방은 알맞게 부풀어 복숭아를 연상시켰으며 두 개의 유실은 만지면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 같았다.
어디 그 뿐인가? 미끈하게 다듬어진 허벅지 사이에는 비지(秘地)가 수줍고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누구인지 이것을 조각한 자는 꽤 짓궂군.'
진일문은 실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백옥미인상은 오관이 아주 뚜렷했고 반쯤 내리 감은 눈으로는 사람을 매료시킬 듯한 신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더 보았다가는 빨려들 것 같아 외면해 버렸다. 더구나 재질이 백옥이다 보니 투명하다 못해 뼈까지 드러낼 듯한, 이른바 빙기옥골의 여인으로 보였지 않은가?
다섯 개의 철권.
거기에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섯 권에 가득히 새겨져 있는 그 문자들을 보며 진일문은 무척이나 의아해졌다.
'이것은 갑골문(甲骨文)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두문( �文)도 아니다. 변방의 돌궐이나 그 밖의 이족들이 사용하는 문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런 형태의 문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문자일까?'
모르는 것이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해서 알아지지는 않는다. 진일문은 이내 철권으로부터 목갑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갑은 크기가 작아 겨우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였다. 관심을 갖게 되어서일까? 그것은 가까이 놓고 보니 전체적으로 은은한 품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진일문은 목갑의 재질이 혹 보리수(菩提樹)가 아닐까고 생각했다. 목갑을 열자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한 개의 반지였다. 
그것은 검은 빛을 띈 가운데 팔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정중앙에는 큼직한 흑석이 박혀 있었다. 
'묵지환(默指環)!'
진일문은 내심 읊조리며 그 반지를 무명지에 끼워 보았다. 신기하게도 묵지환은 맞춤인 듯 그의 손가락에 꼭 들어맞았다. 
그는 그것을 낀 순간 은연 중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웬지 다시 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일지 않았다.
'이것이 전대의 보물이라면 통상 그렇듯 인연이 있어 이 관을 여는 사람이 곧 여기에 담겨 있는 물건들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열쇠의 본래 임자가 여취벽이었으니 후일 그녀를 만나면 이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구나.'
진일문은 철권이나 백옥미인상은 부피가 있어 지닐 수가 없으므로 반지만을 일단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관 뚜껑을 닫으려다 말고 문득 백옥미인상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백옥으로 구성된 피부 속으로 가느다란 혈선이 비치는 기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옥미인상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따뜻한 기운이 손을 통해 혈관으로 흘러들었다.
진일문은 아연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으음, 이것은......."
 
백옥미인상.
그것은 전설의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온옥이란 본시 지정(地精)의 온기를 흡수하여 늘상 따스한 기운을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진일문은 백옥미인상이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인 데다가 인체와 마찬가지로 온기마저 품고 있자 일면 야릇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인상의 몸에서 혈선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이것은 인체의 경락(經絡)이 아닌가?'
아무리 만년온옥이라 해도 돌은 돌이었다. 그런데 그 돌 속에 이처럼 경락이 형성되어 있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진일문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수중에서 백옥미인상은 점점 뜨거워지더니 종내에는 불처럼 달구어졌다.
'웃!'
그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로 인해 하마터면 그것을 떨어뜨릴 뻔했다. 재빨리 공력을 일으켜 손이 데이는 것을 방지하기까지, 짧은 찰나에 그는 무척이나 당황해야 했다.
이윽고 진일문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혈선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혈선은 어떤 경락의 흐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인체의 각 혈도와 경맥의 위치가 일목요연하게 표시된 가운데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한 개의 검은 점(點)이었다. 바로 그 점이 경락을 따라 움직이며 운행의 과정을 낱낱이 제시해 주고 있었다.
'아! 이것은.......'
진일문은 비로소 그것이 모종의 내공운기법을 가르쳐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결을 알지 못하니 이렇다할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는 검은 점이 백옥미인의 경락을 연달아 세 바퀴 돌았을 때, 마침내 그 운기요령을 기억 속에 담아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운기법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것과도 크게 틀렸다. 
진일문은 자신의 내공을 가지고 백옥미인상이 나신을 통해 보여주는 요령대로 운행해 보면 어떨까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맙소사! 이것은 곧 자살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이대로 행한다면 전신의 경혈이 상궤를 벗어나 모조리 뒤틀리거나 파열되고 말 것이다.'
진일문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공연한 일로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인상을 도로 황금관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쿵!
관이 닫히자 열쇠는 저절로 튀어 나왔다.
'후후... 아무튼 귀여운 공주님께 감사해야겠군. 여취벽, 그녀와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나는 황금관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끝내 알 수 없었을 테니까.'
진일문.
그는 미처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 황금관이 품고 있는 엄청난 신비에 대해서....... 그것은 무림인들이 듣는다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마교 최대의 비밀이기도 했다.
그는 다만 연원도 모르는 묵지환 하나를 취한 것으로 몹시 만족해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유실을 향해 일별을 고했다.
'언제고 이 곳을 다시 찾으리라. 후후후... 백옥미인상과 다섯 개의 철권이 내 안부를 궁금해 할 것이므로. 여취벽도 역시 마찬가지이겠고.'
스스스--!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그의 신형은 흡사 안개가 흩어지듯 소리 없이 유실에서 사라졌다.
가히 환상적인 신법이었다. 이 고분에 들어오기 전과 비한다면 진일문은 무공도 그렇지만 신법에서도 실로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달빛도 어스름한 시각.
음산한 어둠이 천지를 휘감고 있었다. 바야흐로 삼경(三更)을 넘긴 사위에는 줄곧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사자의 원혼인양 무덤 속으로부터 간간이 튀어 오르는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은 이 곳 북망산의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곳에는 귀화보다도 더 으스스한 한 개의 불빛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등(燈)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흡사 춤을 추듯 전진해 오던 그 등은 어느 한 곳에 이르자 뚝 멈추었다.
'무엇일까? 저것은.'
진일문은 예의 등을 주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유혼들만의 세계인 이 북망산에 갑자기 등이 출현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쉽게 납득할 일은 아니리라.
그가 막 고분으로부터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이 바로 멀리서부터 다가오던 이 등이었다. 그는 이로 인해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써늘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등롱은 인광과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등을 씌운 누런 종이에는 귀두왕상(鬼頭王像)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푸른 빛에 휩싸인 채 무서운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귀두왕상. 
그것은 확실히 이러한 장소에서, 그것도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마주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진일문은 놀랐던 자신을 떠올리며 새삼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체 놀랄 게 무언가? 설사 귀신이 나타난들, 후후후.......'
지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호기심뿐이었다. 그는 간혹 강호상에서 습관처럼 벌어지던 괴사건들을 부단히 접해온 덕분에 이내 충격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진일문은 고분의 비석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제단도 그렇지만 그 비석 또한 거대한 크기여서 능히 두 사람도 은신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 상태에서 날카롭게 전면을 주시했다.
어느 이름 모를 봉분의 비석.
비바람에 마모되고 금이 간 그 비석 위에 예의 귀왕등이 놓여 있었다.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귀왕등은 줄곧 비석 위에서 칙칙한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이다경 쯤 지났을까?
휙! 휘휙!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비석 앞에 한 무리의 인영들이 속속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일제히 등을 향해 부복했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빼꼼히 드러난 눈에서는 한결같이 예리한 안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내력이 강한 고수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각기 등에 하나씩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런데 자루가 보여주는 형상인즉 그 속에는 아마도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숨막히는 침묵이 그들 위로 무겁게 내려 앉았다. 하지만 복면인들 중 누구도 입을 열려 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그들이 왔던 반대방향으로부터 다시 두 개의 자루를 멘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휙--!
그들 역시 당도하자마자 등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로부터 대략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흐른 뒤. 
이들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네 명의 복면인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앞서의 인물들과는 달리 작은 보따리를 두 개 들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복면인, 그가 출현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만은 예외적으로 빈손이었다. 그는 먼저 도착한 복면인들을 돌아보고는 자신이 빈손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 손을 내려보며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이들 복면인들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부터 나타났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복면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귀왕등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복면인들은 귀왕등의 주인을 기다리는 듯 계속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들로 인해 반쯤 허물어진 무덤 앞은 정적과 더불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으로 일변되었다.
문득 귀왕등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러자 복면인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가(四家)는 임무를 이행했소?"
홀연히 들려온 그 음성은 마치 밤부엉이의 울음 소리처럼 귀를 거슬리게 했다. 어디서 들려 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말에 복면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유독 마지막으로 이 곳에 날아내린 한 사람, 즉 남쪽에서 온 복면인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덧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다시 예의 거슬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접수하겠소."
마치 유부에서 흘러나온 듯한 그 음성이 끝나는 순간, 무덤 뒤로부터 한 대의 마차가 굴러 나왔다.
마차는 온통 검은 색 일색이었다. 마차 자체도 그랬지만 말도 흑마였고, 마차의 휘장도 전부 검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마부석에 앉아있는 마부들 역시도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괴이한 것은 그들의 얼굴에 귀왕탈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북망산 묘역에 나타난 이 행차는 마치 지옥에서 죽음을 접수하러 온 사자(使者)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부는 두 명이었다. 
똑같은 차림새에 두 명이 다 귀왕탈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복면인들은 일제히 굳어졌다.
이윽고 오른쪽의 마부가 입을 열었다.
"먼저 물건을 확인해야겠소."
바로 방금 전에 들려왔던 음성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맨 처음 당도한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재빨리 자신들이 메고 온 자루를 열었다.
과연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전부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의식을 잃고 있었으되 일견하기에도 무공을 모르는 서생들 같았다. 
그들은 혼절한 가운데서도 공포의 기색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약관을 넘지 않았고 얼굴이 영준했다.
복면인들이 무엇 때문에 닭 잡을 힘도 없는 백면서생들을 잡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가지고 온 물건(?)들을 내놓은 후, 마부의 입에서 뭐라고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음, 당신네 사가(査家)는 과연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했소. 가도 좋소."
그 말이 떨어지자 복면인 중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사자(使者), 사매는......?"
마부가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안심하시오, 잘 있으니까. 앞으로 두 가지 일만 마치면 당신들에게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오."
마부는 자못 위협적인 분위기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귀왕의 총애를 받고 있소. 당신네 사가에서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있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그럼......."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신형을 날렸다.
스슷--!
이번에는 두 번째로 등장한 다섯 복면인들이 자루를 끌렀다.
자루 속에서 나온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두 명의 노인으로 그 중 한 사람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진 칠순의 인물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눈썹이 어찌나 두터운지 마치 헝겊이라도 오려 붙여 놓은 것 같은 특이한 인상이었다.
이들도 서생들처럼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꽤나 중상을 입은 듯 옷자락에는 피가 군데군데 배어 있었다.
"우리도 사자의 명을 헛되게 하지는 않았소이다."
나이가 많은 듯 복면인의 음성은 탁하고 힘이 없었다. 마부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당신네 팽가(彭家)의 도법(刀法)은 천하제일이라고 뽐내지 않았었소? 그러더니 어째서 강남사우(江南四友)를 다 잡아오지 못하고 저들 두 명 뿐이오?"
예의 복면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강남사우는 환우오사, 신주팔괴(神州八怪), 동해쌍선(東海雙仙)과 함께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오. 우리 팽가도 이번 일에 희생이 적지 않았소이다. 비록 사우 중 두 사람밖에 잡아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화음기(書畵音 ) 중 서우와 화우를 인계하니 사자는 살펴주기 바라오."
놀라운 일이었다. 
강남사우라면 무림 내에서도 극히 신비한 고인들이다. 
그들은 각각 서화음기로 불리우며 한 방면의 대가(大家)였다.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대쪽 같이 곧아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들이다. 
무공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납치되어 오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마부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어쨌든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약속대로 한 사람을 남겨 두시오."
그 말에 복면인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기어이 그럴 셈이오?"
그러나 마부의 기세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귀왕께서는 한 번 내놓은 말은 절대 철회하지 않는 분이오."
"으음......."
복면인은 몹시 분노한듯 했으나 반면에 억지로 이를 눌러 삼키고 있었다. 이 때, 그의 뒤에 엎드려 있던 한 명의 복면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비분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숙부님! 조카가 남겠습니다."
먼저의 복면인은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아아! 어쩌다 본가가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우(雨)야, 다 이 숙부가 무능한 탓이로구나."
그는 앞으로 나선 복면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눈빛이 감정의 동요로 인해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나머지 세 명의 복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자!"
그들은 왔던 곳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그 직후, 그들의 일행이었다가 혼자 남게 된 복면인은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자신의 천령개를 힘껏 내리쳤다.
퍽!
섬뜩한 소리와 더불어 그는 머리가 으깨어진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볼모역을 자청했으나 막상 끌려가기는 싫었는지 스스로 머리를 쳐 자결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끔찍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검은 마차 위에 앉아있는 마부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들은 무감동한 시선을 다시 네 명의 복면인들에게 돌렸다.
네 복면인은 자루 아닌, 두 개의 작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놀랍게도 수급이 나왔다. 그것은 중년의 나이쯤에 이른 두 남녀의 수급으로 죽은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직껏 한과 증오의 빛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행히 명을 완수했소이다."
개중 한 복면인이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산동악가(山東岳家)의 삼십육식 전광검법(電光劍法)은 명불허전이오. 화산파의 음양쌍검(陰陽雙劍)을 처리한 것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겠구려."
그러나 복면인은 그 말이 조금도 기쁘지 않은 듯 역시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로써 본가는 화산파와 불공대천지수가 되었소이다. 본가의 소가주를 언제 풀어줄 것인지나 말씀해 주시오."
"귀왕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오. 돌아가 기다리시오. 차후로 연락이 갈 것이오."
네 명의 복면인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휙--! 
그들마저 몸을 날려 사라져 버리자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제 빈손으로 왔던 한 명의 복면인 뿐이었다. 그는 몹시 불안한 듯 벌써부터 계속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마부의 시선이 닿아오자 그는 스스로 입을 열었다.
"본인이 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뜻밖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러나 조금만 더 시간을 준다면......."
마부는 스산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당신에 관한 일은 벌써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의 말은 대흥루에서 일어났던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그... 그렇소. 그 일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로써......."
"후후... 당선(唐扇), 착각하지 마시오. 귀왕께서 그런 구구한 변명을 들어주실 것 같소?"
그 말에 당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눈이 급하게 움직이더니 자살을 한 복면인의 시신에 가 멎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번뜩 움직였다. 당가의 인물답게 암기를 쏘아내려는 것이었다.
"흐흐흐... 당선, 늦다!"
이제껏 잠자코 있던 또 한 명의 마부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당선보다 먼저 무엇인가를 던졌다.
휙--!
"헉! 아... 안돼--!"
당선은 공포에 질린 외침과 더불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마부의 말대로 때는 늦어 있었다. 무언가 그의 발치께에 떨어졌고, 그것은 그가 막 공중에 떠오르려는 순간에 터졌다.
콰쾅--!
"크아아악!"
폭음이 일자 당선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실로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폭음이 가라앉고 주위가 잠잠해졌으나 그가 뿌려낸 피와 살점들은 여기저기 분산된 채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을 듯 역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당선으로 말하자면 암기의 명가인 사천의 당가에서도 당당히 세번째 서열에 올라있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이렇듯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두 명의 마부는 그의 죽음에도 역시 무심했다.
그들은 마차 위에서 내려와 다섯 명의 서생과 강남이우, 두 덩이의 수급 등을 마차 안에 실었다. 이어 마차의 검은 휘장을 내린 그들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비석 위에 놓여 있던 귀왕등도 어느 결엔가 마차 안으로 옮겨진 후였다.
이윽고 잠시 전에 일어났던 괴사건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검은 마차는 무덤들이 밀집해 있는 북망산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편.
진일문은 내심 탄식해마지 않았다.
'아! 사대신가가 이처럼 전락해 있을 줄이야.......'
비석 뒤로부터 나오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까지 지켜보았던 광경이 도시 현실의 일 같이 여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선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마차를 뒤쫓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이내 포기했다. 
사실 진일문이 이처럼 빨리 유실 안으로부터 나온 것은 달리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북망산(北邙山).
이른바 사자들의 귀역(鬼域),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귀왕등과 사대신가의 역학적인 관계는?
마침내 잔잔하던 무림에 서서히 피바람이 불어 오려는지....... 
26장 천의회(天意會)의 혈풍(血風)
 
옛 사람은 이미 황학(黃鶴)을 타고 떠났고
이 곳에는 황학루만 남아 있네.
황학은 한 번 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하늘에는 백운(白雲)만이 천년이나 맴돌고 있네.
맑은 강 건너 한양의 나무숲이 역력히 바라보이고
향기로운 풀은 앵무주(鸚鵡洲)에 무성히 덮였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내 갈 고향은 어디인가
안개 낀 양자강(揚子江) 언덕에서 바라보니 근심만 더 하네.
(譯註: 최호(崔顥)가 지은 황학루.)
황학루에 얽힌 고사(古事)를 책으로 엮는다면 능히 수백 권은 될 것이다.
무창부(武昌府)의 서남(西南) 쪽, 양자강을 마주보고 있는 황학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며 시인묵객들을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비록 엄동(嚴冬)이긴 해도 황학루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누각에 오른 사람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강에 면한 난간에 자리잡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유난히 중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남자는 일신에 눈부시도록 깨끗한 백의단삼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영웅건(英雄巾)을 둘렀으며 어깨에서는 바람막이 피풍이 자연스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보였는데, 서늘한 눈과 우뚝한 콧날에서 절로 영웅의 기상이 느껴지는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반면 여인은 나긋한 몸매를 지닌 미인이었다.
얼굴이 다른 여인들에 비해 약간 가무잡잡하기는 했으나 큰 눈과 도톰한 입술은 그녀가 빼어난 미녀라는데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날씬한 허리를 조여맨 허리띠는 녹색이었고, 어깨 위에는 붉은 기가 도는 여우털이 얹혀져 있었다. 이런 색감의 대비는 다소 이질적인 그녀의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들 남녀는 누가 보더라도 부러움을 느낄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로 다정하게 어깨를 기댄 채 양자강의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녕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인이 남자의 팔을 잡으며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정말 아름다워요. 과연 황학루가 드넓은 중원에서 왜 그토록 이름을 떨쳤는지 알겠어요. 가가(哥哥)."
백의청년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사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오. 황학루의 경치는 봄에 더욱 절경을 이루지. 얼마 후면 그 아름다운 경치를 직접 볼 수 있게 될 것이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다.
백의청년은 주로 황학루과 연관된 고사나 이 곳을 다녀간 뒤 주옥 같은 시(詩)를 남긴 대시인에 대해 얘기를 했다. 
여인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의 눈에는 상대를 향한 무한한 관심과 열정이 담겨져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안쪽으로 옮겨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 곳에서는 술과 간단한 안주 등을 팔고 있었다.
진일문과 흑수선,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낙양에서 다시 만나 이 곳 황학루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그것은 흑수선이 왕중헌과 새로운 연락을 취해야했기 때문으로 그 안에는 진일문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진일문은 그로 인해 졸지에 몇 달간을 그녀와 동고동락(?)했다. 그리고 흑수선은 그 동안 그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았다. 측간에 가는 일 외에는 늘상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녔다.
태평도에서 중원과는 판이한 풍습을 익히며 자라난 그녀는 확실히 여느 여인들과는 달랐다. 지조가 굳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순간의 정열에 혼신을 불사르는 그런 여인이었다.
이 때문에 진일문은 곤욕을 치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이야 그렇다치고 그녀는 벌건 대낮에도 심심치 않게 무리한 요구(?)를 해와 그를 난감하게 만들곤 했다. 
날씨가 추웠으므로 그들은 독한 백주(白酒)를 시켰다.
진일문은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시선을 양자강으로 돌렸다.
솜처럼 푸근한 눈이 혹한에 얼어버린 강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땅도 하늘도 온통 눈부신 백색이었다.
그는 다시 정면을 향하며 말했다.
"벌써 사흘째인데 어찌 된 일이지?"
흑수선은 그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연락이 있을 거예요. 아마도 오늘쯤은 틀림없이......."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그 위에는 매화가지 하나가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암호로 약정된 표식이었던 것이다.
그녀와 진일문이 황학루에서 머문지도 벌써 사흘, 그들은 줄곧 이런 식으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저녁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진일문에 비해 흑수선은 굳게 믿는 바가 있는 듯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객방에 들었다.
그들은 따로 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흑수선의 고집 때문이었지만 설사 두 개의 방을 얻는다 해도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보나마나 밤이면 진일문의 침상으로 기어들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진일문이 좌공(坐功)을 마치고 자리에 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으로 냉큼 파고들었다.
"또......."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흑수선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뜨거웠다. 마치 지칠 줄 모르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이와 같았다. 진일문도 그런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헐떡이며 감겨드는 흑수선을 안으면서도 가끔씩은 다른 여인을 떠올리곤 했다. 그 대상은 수시로 바뀌었다.
때로는 옥가려가 되기도 했다가, 또 때로는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비취암의 백하련이 되기도 했다. 의외로 황룡보의 사영화도 그 중 하나였다.
진일문은 그럴 때마다 취화상이 말했던 여난(女難)이라는 어휘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학!"
흑수선이 그의 어깨를 물어 뜯으며 격한 신음을 발했다.
진일문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애무하며 뜨거운 여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아아......."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두 사람은 천정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잠이 든 것일까? 진일문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흑수선이 옆으로 누우며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왔다. 그리고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근 들어 저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진일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무슨......?"
"태평도로 돌아가고 싶어요, 가가와 함께."
이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말이었다. 진일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 곳은 물론 따뜻한 곳이겠지?"
"그럼요, 일년 내내 옷을 입을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더구나 먹을 것이 어디에나 널려 있을 뿐더러 속이 그대로 들여다 보이는 바닷물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이......."
그는 흑수선의 말을 들으며 사뭇 나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으나 남국의 아름다운 섬이 절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 곳이라면 아무 것도 필요 없을 것이다. 복수니, 야망하니, 명예니 하는 것도 일체 요구되지 않는 곳....... 어차피 인간이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무림에서의 삶은 늘 피비린내 나는 혈전의 와중에서 상대를 죽이거나 스스로가 죽어가야만 한다.'
진일문은 깊은 탄식을 지나 남국의 푸르른 바다를 헤엄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의 곁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깔깔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그는 배가 고파 오자 야자를 따먹었다. 그리고 싱싱한 여인들의 체취에 파묻힌 채 오수(午睡)를 청했다.......
팍!
소리가 꿈을 깨웠다. 
진일문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맞은 편 족자 위에 꽂혀 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는 화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왔어요!"
옆에 누워 있던 흑수선이 탄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알몸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화살을 뽑았다. 화살 중간에는 종이가 묶여 있었는데, 그것을 끌러내는 그녀의 얼굴에는 희열이 번졌다.
진일문은 그녀의 벗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끈한 등과 잘록한 허리, 갑자기 굵어지는 엉덩이의 선 등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남국의 정열을 마음껏 발산해내고 있었다.
서신을 펼쳐 읽으며 돌아서는 그녀의 유방이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그는 문득 갈증을 느꼈다. 
그녀의 유방 끝에 매달린 유실이 그의 체내에 새삼 불길을 당기고 있었다. 
진일문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어머!"
그녀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것 좀 읽고요."
진일문은 그런 그녀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녀를 정복하고 싶다는 느낌만이 이 순간 그의 뇌리를 가득 메운 것이었다.
흑수선은 편지를 허공으로 들어올리며 허우적거렸다. 진일문이 그녀의 몸을 안으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거친 힘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어느 덧 편지는 침상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그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곧 그녀의 손톱이 꼿꼿이 세워져 사내의 목으로부터 등을 따라 내려갔다. 
 
"다섯째 사형 율가(栗可)예요. 호호... 잠시 후면 율사형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무창부에서 동쪽으로 가면 구릉이 나타난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었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계곡이 깊어지고 숲이 울창해지는 그런 곳이다.
마침내 연락이 이루어졌고 진일문과 흑수선, 두 남녀는 그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일문은 웬지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은 흑수선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딱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는 흑수선이 전에 없이 어두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는 몹시 즐거워하며 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화살에 매달린 서신에는 해뜨기 직전, 공소곡(空沼谷)이라는 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공소곡이 바로 그들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이었다.
서신의 말미에는 진일문으로서는 알아 볼 수 없는 기호가 씌여 있었고, 다시 천의(天意)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왕중헌이 회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조직의 명칭인 것이다.
'천의회(天意會)라.......'
진일문은 왕중헌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보아 온 왕사부는 오만하고 냉소적이기는 해도 분명 고아들을 모아 은천서원을 만들었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 왕중헌이 언제 천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단 말인가?
당시 왕중헌은 이따금씩 출타를 하곤 했는데 어떤 때에는 한달 이상 외유하고 돌아올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여러 번 있다 보니 이상하게 보여진 적은 없었다. 
'그 때 그것이 바로 천의회의 일 때문이었던가?'
진일문은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신비에 가리워져 있는 문사, 그것이 바로 그 시절의 내가 보아왔던 왕사부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 분은 내 우상이었지. 어쩌면 나는 그 분께 부정(父情)을 갈구했는지도.......'
그의 눈에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 덧 동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공소곡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왕사부가 비밀리에 조직한 천의회, 그 곳은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집단일까? 삼성림의 화개악을 상대하기 위하여......? 그 분은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진일문은 이 점을 두고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름 아닌 이런 이유가 있었다.
'생전에 부친은 왕사부와 손을 잡고 화개악을 쳤다. 비록 역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결국 두 분은 뜻을 같이 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애당초부터 왕사부는 내가 진가(眞家)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로 그 분이 나를 어찌 대했어야 하는가? 누구든 이 정도의 연(緣)이라면 왕사부와 같은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서운함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으로는 달리 요구되는 것이 있었다.
'왕사부는 당연히 내게 부친의 일을 알리고 함께 복수를 도모하게 했어야 했다. 그 분은 당시에도 벌써 그 일을 추진하고 계셨으면서 내게 은연 중 거리감을 둠으로써 자신을 철저히 은폐하려고만 했다. 마치 그 모든 것이 나와는 무관한 현상인양....... 일편으로 나를 아껴주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확실히 그 분에게는 모호한 점이 많다.'
요컨대 진일문에게 있어 왕중헌은 작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자세한 것은 그 분을 만나게 되면 알 수 있으리라.'
그는 흑수선과 더불어 걸음을 재촉했다.
공소곡.
이 곳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즉 원래는 커다란 소(沼)였으나 만년 묵은 이무기가 승천하는 바람에 물이 말라버려 계곡으로 화했다는 것이다.
과연 계곡은 입구에서부터 움푹 꺼져 있어 소를 연상케 했다. 진일문과 흑수선은 그 안쪽을 향해 나란히 신형을 날렸다.
얼마쯤 들어가니 계곡은 차츰 좁아지고 있었다. 한 가닥 내(川)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자 종내에는 넓고 편편한 바위가 펼쳐져 있는 곳이 나타났다.
그런데 흑수선이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발했다.
"피!"
"으음......."
진일문은 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냇물의 색이 붉다는 것, 그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싸움이 벌어졌나 보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니.......'
그는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흑수선이 정신없이 달려가자 그도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악! 사형--!"
그에 앞서 바위 하나를 넘어갔던 흑수선이 또 비명을 질렀다.
진일문은 흠칫하여 급히 신형을 솟구쳤다. 
바위의 아래 쪽.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에 반신이 물에 잠긴 시체가 있었다. 흑수선은 그 시체에 매달려 몸을 떨고 있었다.
"사형! 사형! 흐흐흑......! 대체 누가 사형을 죽였죠?"
그녀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온 계곡에 메아리 쳤다. 반면에 진일문은 시신을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신은 삼십대의 사나이로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았다. 일신에 흑에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죽은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목이 반쯤 베어져 있는 데다가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창자가 한 자도 넘게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른팔도 어깻죽지부터 뭉턱 잘려져 나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주위에는 온통 선혈이 낭자했으며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경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시체가 네댓 구 쓰러져 있기도 했는데, 그들은 옷차림이 모두 달랐다.
진일문이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들을 알고 있소?"
흑수선은 시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천의회(天意會)의 사람들이에요."
진일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으음, 이 곳에서 천의회의 사람들이 모이기로 했던 모양이군. 그리고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이 지경이 된 것 같소."
그 말에 흑수선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용서할 수 없어요! 분명 그 놈들일 거예요."
"그 놈들이라니?"
"삼성림 말예요."
흑수선은 말을 마치자 비조처럼 신형을 날렸다. 
'수선!'
진일문은 일순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그녀의 미간에 언뜻 검은 그늘이 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어느 정도까지는 관상을 볼 줄 알았다. 그것은 지난 인고(忍苦)의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진 이력 중 하나였다. 
물론 진일문도 그런 것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심중에서 일어나던 불길한 예감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실상 요 며칠 간 흑수선의 얼굴에는 좋지 않은 사조(死兆)가 계속 끼어 있었던 것이다. 
'제발 내 예감이 틀리기를.......'
그는 곧 그녀의 뒤를 따라 신형을 뽑아 올렸다.
흑수선.
그녀는 넋을 잃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흑수선은 핏기 없는 얼굴로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응시했다.
숲 속에 있는 하나의 공지였다.
그런데 지옥을 방불케 하는 참상은 그 곳에도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았던 것보다 그 충격이 오히려 수 배는 더 했다.
우선 쓰러져 있는 시체만도 삼십여 구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었으며 역시 의상도 다양했다. 하지만 한결 같은 것은 모두가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지를 검붉게 물들인 선혈이 인간 지옥도인 그들의 주검을 장식하고 있었다. 
혈전은 대체 얼마나 격렬했던 것일까? 
장풍에 의한 것인 듯 여기저기 깊은 웅덩이가 파여져 있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허리가 부러져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팔다리가 잘려진 채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장검에 베어진 시신은 뺄랫줄 같은 창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셋째 사형, 넷째 사형, 여섯째 사형....... 모두 죽었군요? 아아! 어찌 이런 일이......."
흑수선이 망연히 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흡사 백치와도 같았다. 아마도 너무도 충격이 커서 잠시 신지가 마비된 모양이었다. 
진일문은 줄곧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장내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상황은 어느 정도 짐작할만 했다. 
천의회의 인물들로 보이는 시신은 대략 열두어 명이었다. 나머지 시신들은 상대쪽이었는데, 처절한 전투로 인해 양측이 함께 뒤엉킨 채 죽어 있었을 따름이었다.
진일문의 눈에 기이한 광망이 일었다.
'천의회는 기습을 받고 손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당했다. 이것은 정녕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들은 행동이 은밀해 무림에서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흑수선을 바라보았다. 이어 떨고 있는 흑수선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수선, 정신 차리시오. 싸움이 벌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오. 좀 더 둘러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소."
진일문은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직 굳지 않은 것을 눈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흑수선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선뜻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하긴, 동문의 사형들이 거의 몰살을 당했으니.......'
진일문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연후,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공소곡은 막다른 계곡이 아니라 계속해서 통해져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지세를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숲의 안쪽으로 이어진 핏자국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나무와 풀이 함부로 누워있는 것도 보였다.
"그럼 수선, 당신은 이 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내 얼른 안 쪽을 살펴보고 오리다."
진일문은 흑수선의 어깨를 한 번 감싸안아 주고는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수림(樹林)이 우거진 곳.
진일문은 그 속에서 속속 시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소매에는 모두 한 겹의 검은 테가 둘러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내심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으음, 이 표식은 삼성림의 현음궁(玄陰宮) 소속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매에 테를 둘러 직급을 구분한다고 했다. 그런데 검은 색인데다가 한 겹밖에 되지 않으니 이 시체들은 개중에서도 하위인 자들이다.'
진일문은 전날에 옥가려로부터 구대천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기억의 일부분을 더듬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튄 것도 역시 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삼성림! 끝내 나와는 이런 식으로 부딪치는구나.' 
그는 다시 안으로 진입해갔다. 깊숙히 들어갈수록 시체는 점차 보기가 드물어졌다. 그 대신 검은 테가 두 개, 혹은 세 개까지 둘러진 시체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흑(二黑)은 향주급, 그러나 삼흑(三黑)이라면 현음궁 오대당주(五大堂主)의 다음 서열이다. 이른바 현음삼십육수(玄陰三十六手)라 불리우며 무공이 강호에서도 일류급에 해당되는 고수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은 곧 천의회 측에서도 이들의 실력을 뛰어넘는 고수가 나왔었다는 말이 아닌가?'
진일문은 과연 천의회 소속인물 중 누가 그렇게 강할 것인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물론 천의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그로서는 추정해 나갈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신형을 날리며 그는 벌써 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인물, 그러면서도 기이한 예감으로 와 닿는 자였다.
'허무영(虛無影)! 바로 수선이 대사형이라고 부르던 자.......'
그러다 문득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놀랍게도 현음삼십육수였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구나! 이 자들은 전부 한 사람에게 당했다.'
그들은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것도 한결같이 목 한 가운데에 정확히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그 크기는 손가락보다 약간 굵을 정도였다. 
아무튼 주변의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도 난전(亂戰)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진일문은 전장(戰場)의 바닥을 면밀히 살핀 후,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음, 이들을 죽인 사람도 역시 중상을 입었다."
핏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보기에도 흘린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휙--! 
한 마장쯤 가자 숲은 끝났고 난석들이 널려 있는 곳이 나왔다. 그 곳에서 진일문은 다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 위.
한 명의 인물이 단정히 앉아 있는 자세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 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무릎에 한 자루의 단소(短簫)를 얹어 놓고 있었다.
노인의 가슴과 옆구리에는 각각 두 자루의 칼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등에는 무려 다섯 종류의 암기가 깊숙히 파고 들어가 있었다.
진일문은 이 노인의 모습에서 대뜸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노인은 강남사우 중의 한 명이다. 소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음우(音友)인 모양이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정녕 의외다. 음우가 천의회의 인물이었다니.......'
진일문은 강남사우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사우 중에서 두 사람을 먼발치로 보았을 뿐이었다. 
북망산에서 신비의 귀왕등(鬼王燈) 앞에 모였던 복면인들이 서우(書友)와 화우(畵友)를 사로잡아 대령하지 않았던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나서지는 않았지만 심중에 차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아야 했던 그였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그만치 그들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었다는 얘기가 된다.
'으음,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실로 당당한 모습이다. 당금 천하에서 현음궁의 협공을 받고도 이 지경이 되도록 맞서 싸울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진일문은 손을 뻗어 음우의 눈을 감겨 주었다. 아울러 이마를 만져보니 아직 미지근했다. 
'죽은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휙--!
그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다시 한 마장쯤을 달리자 그의 귓전으로 은은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가 있다!'
진일문은 내심 다급히 부르짖는 한편 더욱 속도를 가했다. 그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 오십장을 날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산벽(山壁).
그 아래에서 혼전을 벌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현음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삼인(三人)을 포위한 채 협공을 가하고 있었다. 전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일견하기에도 삼인이 쓰러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들 삼인 중에서도 마의도포를 입고 있는 한 명의 백발노인이었다. 
그는 도포를 시뻘겋게 피로 적신 채 분투하고 있었다. 삼흑을 두른 여섯 명의 고수와 금테를 두른 한 명의 중년인이 그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매우 특이했다. 그것은 하나의 철판(鐵板)으로 가로세로 줄이 그어져 있어 언뜻 보아도 바둑판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천하에서 그런 것을 무기로 사용할 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강남사우 중 기우( 友)였다. 그는 또한 사우 중 가장 무공이 강한 것으로도 공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기우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특히 소매에 금테를 두른 중년인의 음양극(陰陽戟)은 그의 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 채 분전하고 있었으나 이들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한 명은 이미 왼팔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고, 다른 한 명은 꼬챙이와 같은 묵봉(墨棒)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두 사람은 십여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묵봉을 쓰는 청년의 무공은 의외로 높아 등뒤의 얼굴이 검은 중년인을 오히려 위기에서 속속 구해 주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에게는 전황을 역전시킬 희망이란 단 일 점도 없었다. 상대편에는 아직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십오륙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이 이흑이나 삼흑의 고수들이었다.
현음궁의 우두머리는 소매에 금테를 두른 또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눈이 실처럼 가느다란 자로 등에 일월륜(日月輪)이라는 패도적인 외문병기를 메고 있었다.
"흐흐... 천당주(千堂主), 그만 끝내는 것이 어떻겠소?"
기우와 싸우고 있던 금테의 인물이 그 말을 받았다.
"좋소이다, 곡당주! 이 늙은이가 생각보다 끈질기구려. 하하... 이제는 목을 잘라버려야 될 것 같소."
아마도 두 사람은 직위가 동급인 모양이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천당주라 불리운 자는 번개 같이 음극을 찔러왔다. 동시에 양극은 아래서 위로 올려 뻗었다.
쉬쉭--!
때마침 여섯 명의 삼흑고수를 상대하고 있던 기우에게는 도저히 그것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강남일대에서 존경을 받아온 백전의 노장,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노부 평생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오. 현음궁의 귀한 분들에게 어찌 보답이 없을 수 있겠소? 내 적어도 세 분 만은 저승으로 함께 모시고 가리다."
그는 천당주라는 자의 음양쌍극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중의 철판을 무시무시하게 휘둘렀다.
슈우우웅--!
"헛!"
그의 이런 대응은 현음궁의 천당주를 무척이나 놀라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철판이 휩쓸자 세 명의 삼흑고수가 허리가 동강나며 허공 중에 피보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에 기우는 가슴과 복부에 각기 하나씩의 쌍극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비명은커녕 눈썹 한 올 찌푸리지 않고 다시 철판을 앞으로 밀어냈다.
펑--!
"으윽!"
철판은 천당주의 가슴에 그대로 격중되었다. 기력이 소진되어 위력이 다소 떨어지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그는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고 말았다.
"이, 이런!"
천당주는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부여안고는 만면에 살기를 띈 채 기우를 노려보았다. 
"우우우--!"
기우의 입에서 처절한 장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한 모금의 피를 왈칵 토해내더니 흡사 고목처럼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강호 도의도 모르는 치사한 자들! 삼성림은 무슨 일이든 숫자로 해결하려 드는구나."
허공으로부터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 왔다. 매우 낭랑한 음성이었으나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한결같이 안색이 대변했다.
"웬 놈이냐?"
천당주는 유독 머리 위에서 소리가 느껴지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허공에서 하나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헉!"
천당주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도법이었다. 섬전이 작렬하듯 무섭게 쏘아져 오는 한 줄기의 도광(刀光),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쌍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자신의 방어가 얼마나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그는 금새 알 수 있었다.
파파팟--!
과연 도광은 그의 방어벽을 뚫고 무자비하게 파고 들어왔다.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이와 더불어 조각조각 분시된 인육(人肉)이 후두둑 피우박을 쏟아 냈다.
그 바람에 장내는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싸움을 하던 인물들이 저마다 손을 멈추고는 넋을 잃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당주라면 현음궁의 오대당주 중 한 명으로 강호에서도 손가락 꼽히는 고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것도 산산조각나 죽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장내 인물들의 시선은 당연히 한 곳으로 쏠렸다.
 
수중에 만도(蠻刀)를 들고 서 있는 인물.
그 자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고요한 기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정 또한 무심, 그 자체로써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땅을 향하고 있는 만도 끝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진일문이었다. 숲 속의 한 시체로부터 만도를 취한 그는 만박해초결에 따라 천당주를 가볍게 처치할 수 있었다.
만박기예는 일정한 초식이 없다. 상대방의 초식에 따라 즉석으로 변화하되 막바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무공이다. 마침내 진일문은 이 해초결을 실전에 이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연 만박어르신의 무공은 명불허전이로구나. 설마 하니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줄이야.......'
그는 심중에서 감탄과 만족감이 어우러지자 입가에 묘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 미소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치는 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진일문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의(殺意)가 발동된지 라 회의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다. 말은 더더욱 필요치 않았다.
'먼저 저 쪽으로!'
그는 가까이 있는 삼흑고수 세 명에게 접근해갔다.
"으으......."
삼인의 고수는 대경하여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벌써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인가 번쩍 얼굴을 스쳤다고 느낀 순간, 그들은 구천으로 향하는 문턱을 넘어서야 했다. 단 한 명도 예외라고는 없었다. 모두 면상이 두 쪽으로 갈라져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필두로 하여 진일문은 계속 움직임을 진행했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고나 할까? 지극히 유연하되 그 위력에 있어서는 단지 작은 물줄기가 아니라 굉렬한 폭포수였다.
그의 도는 도광을 폭사해 내며 무리들 속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아울러 그것은 일직선으로 베었으며, 직각으로 꺾이며 또 무엇인가를 베었다.
이러기를 수십여 차례....... 
그 때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감촉이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전율이 일 정도로 확실한 살인의 감촉이었다.
하지만 이에 병행되는 감흥이란 그 자신도 놀랄 만큼 전무했다. 움직임을 더해갈수록 그는 오히려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는 베어져 나가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나무토막, 혹은 한 덩어리의 짚단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와중에서 진일문은 한 가닥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상하군? 왜 이들은 가만히 있는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정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작이 너무 빨라 응할 자가 없다는 것을. 
실제로 그는 상대방이 미처 동작을 개시하기도 전에 만도를 긋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일으키는 이 회오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크아아악--!"
연이어 터지는 비명, 또 비명.......
무리들 중 벌써 반 이상이 고혼(孤魂)이 되었다. 누구의 입에선가 저주의 찬 고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우... 저 자는 인간이 아니다. 도귀(刀鬼)다!"
그것은 그 자가 몰라서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사실 진일문은 특정한 도법을 익힌 적이 없었다. 그라면 검을 들어도 똑같이 전개했을 것이며 하다 못해 막대기나 곡괭이를 들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왜냐하면 애당초 그는 어떤 초식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죽일 놈! 네 놈은 누구냐?"
등뒤로부터 분노한 외침이 들려 왔다. 진일문은 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므로.
'곡당주라는 자!'
그는 두 갈래의 예리한 파공성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마치 뒷덜미에도 촉각이 있거나 눈이 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후후... 그 자의 일월륜!'
쉬익--!
만도가 뒤로 돌아가더니 교묘하게 두 개의 륜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륜은 일종의 중병(重兵)으로써 빠르게 회전하며 막강한 위력을 발산해 내는 병기다. 일반 병기로 거기에 부딪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행위였다. 
진일문의 만도는 역시 륜과 부딪치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약간의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였을 따름이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도래했다.
윙! 카칵--!
놀랍게도 륜은 방향을 꺾더니 오던 방향으로 도로 날아갔다.
"허억!"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기묘한 음향이 울렸다. 
진일문은 그제서야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 가슴 양쪽에 각각 한 개씩의 륜이 깊숙이 박힌 채 무너지듯 쓰러져 가는 곡당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곡당주는 불신과 회의에 찬 눈빛으로 진일문을 응시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천하의 누구라도 자신의 애병(愛兵)에 스스로 당한다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쿵--!
진일문은 곡당주의 육신이 지면과 맞닿는 것을 보고서야 도를 거두었다. 그는 무감한 눈길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현음궁 소속의 인물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진일문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한 차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우우......."
하지만 늘상 가슴속에 뭔가 응어리진 한이 간직되어 있어서일까? 그는 일편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제껏 굴욕으로 점철되어 왔던 삶, 이런 식의 징계는 어쩌면 그에게 있어 응분의 보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사람.
진일문의 곁으로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삼십 세 정도로 보였으며 안색이 유난히 희고 영준한 자였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데다가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진일문을 바라보는 눈동자만은 한성(寒星)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귀공께 감사하오."
그는 바로 방금 전에 묵봉을 쓰던 그 인물이었다. 진일문은 만도를 한 옆으로 내던지며 낮게 물었다.
"허무영(虛無影)......?"
그 말에 청년의 얼굴에는 언뜻 놀라는 빛이 스쳐갔고, 그것을 확인한 진일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는가 보구려."
청년 허무영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그렇소이다만 귀하는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소이까?"
진일문은 대답 대신 담담한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허무영은 눈에 이채를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귀하가 막내 사매와 함께 왔다는......?"
진일문이 그 말을 잘랐다.
"아! 죄송하오. 나는 그녀에게 돌아가야겠소이다."
비로소 흑수선을 상기해 낸 그는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로 인해 심중에서 불안감이 치민 것이었다.
"누이는 어디 있소?"
허무영의 음성이 갑자기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도 역시 불안해하는 빛이 스쳐갔다.
진일문은 더 말할 여유가 없는 듯 즉각 신형을 솟구쳤다.
휘익--!
허무영도 그와 함께 몸을 날리려다 그만 우뚝 멈추어 섰다.
"으음......."
뒤쪽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아!"
허무영은 정신이 번쩍 든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죽은 줄 알았던 기우가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노선배!"
그는 반가움이 깃든 외침을 발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27장 이별(離別)
 
숲 속의 공지.
그 곳에서 진일문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녹색의 옷조각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흑수선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헝겊조각 하나만이 달랑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분명 그녀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진일문은 참담한 심경이 되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짧은 순간 동안 그의 뇌리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강적을 만나 싸우는 것이던가, 혹은 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납치되어 가는 것 등....... 
그러나 와중에서도 그의 머릿속에 가장 확연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역시 극도의 후회였다. 더구나 지난 며칠 간 그녀에게서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자 그는 자책으로 인해 그야말로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녀를 혼자 남겨두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로선 무엇보다도 흑수선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진일문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금 주위를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물론 옷조각 외에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으음, 이처럼 가벼운 옷조각이 아직 바람에 날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이 곳에서 그녀가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휘익--!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찾아내야 한다! 기필코.......'
공소곡 밖으로는 두 갈래의 길이 나 있었다.
진일문은 잠시 망설이다 오른쪽 길을 택했다. 왼쪽 길은 숲길치고는 대로(大路)였으므로 간간이 행인들의 왕래가 있었다. 
백주에 여인을 납치해 가기로는 아무래도 부적당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잠시 후.
진일문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가고 있는 길은밀림이나 다름이 없는 숲 속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 곳은 보아하니 사냥꾼들이나 지나다니는 길이로군. 이 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영 놓치고 만다.'
숲 사이로 신형을 날리며 그는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달렸을까?
진일문은 갑자기 발길을 뚝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한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물체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분노가 함께 어렸다.
등(燈).
대낮에 어울리지 않게 불을 밝히운 등롱이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귀왕상이 그려져 있는 그 등을 그는 북망산에서 본 적이 있었다.
'설마 흑수선이 귀왕등의 주인에게 납치를......?'
등에 그려진 귀왕상이 그를 향해 흉측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것은 정녕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귀왕등의 주인이 대체 누구인가? 진일문은 북망산에서 그 등을 본 이후로 주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이름하여 천년마등(千年魔燈).
강호에서 밥을 먹는 강호인 중 이 말을 모르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년마등이라는 말은 그만큼 수백년에 걸쳐 공포의 존재로써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마등주(魔燈主)는 한 마디로 희대의 색마(色魔)였다.
천축의 밀교(密敎)인 환희라마교(歡喜喇痲敎)의 일맥으로 여색(女色)과 남색(男色)을 고루 즐기는 색광으로 알려져 있다. 마등을 걸어 놓는 것은 바로 그의 존재를 알리려는 의미였다.
마등에도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초흔마등과 환희마등으로 구분되어 불리우는데 귀왕상이 웃고 있다면 환희마등이다. 
즉 마등이 걸린 지역 내에서 마등주가 환희대법을 시행하고 있다는 표시로써 그것을 보게 되면 즉시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지가 분시되는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반대로 귀왕상이 웃지 않고 성을 내는 표정을 짓고 있다면 이는 마등주가 살인을 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 초혼마등을 본 자는 차라리 자신의 눈을 뽑아 버리는 편이 낫다. 그러지 않으면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육신이 심장과 먼 곳으로부터 차례로 잘려나가는 것을 보게 될 테니까.
단 일 각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진일문의 눈앞에 걸려 있는 것은 바로 환희마등으로써 흑수선이 마등주에게 끌려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진일문은 이를 악물었다.
"천년마등이든 무엇이든 그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의 손이 번뜩 움직였다. 그러자 마등은 소리도 없이 가루로 화하고 말았다.
"앗!"
어디선가 외마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얼핏 듣기에도 분노가 내포된 음성이었다.
'어림없는!' 
진일문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곧장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 오장 정도 전진했을 때였다. 
휘익! 휙!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더불어 얼굴에 귀왕탈을 뒤집어 쓴 두 명의 괴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떤 놈이냐? 감히 마등을 훼손하다니."
파파팟--!
음침한 외침과 동시에 두 괴인은 다짜고짜로 그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진일문은 살의(殺意)가 이미 만장으로 치솟고 있었다.그는 두 괴인이 지척까지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한 순간을 노려 벼락같이 양수를 뻗었다.
푹--! 
섬ㅉ한 음향과 함께 그의 손가락은 두 괴인의 공세를 뚫고 그대로 그들의 눈에 꽂혔다. 
"으악--!"
괴인들은 두 손으로 눈을 감싸며 나뒹굴었다. 그들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창졸지간에 두 명이 똑같이 눈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의 심중에는 일점의 인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괴로운 듯 바닥을 구르고 있는 괴인들의 목젖을 향해 두 발을 날렸다.
퍽! 퍼퍽--!
괴인들은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해 버렸다. 
진일문은 그들의 시체를 밟고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한 채의 모옥.
바위 아래 지어져 있는 모옥은 이 곳을 지나는 사냥꾼들의 휴식을 위해 임시로 지어진 듯 매우 허술한 모습이었다. 
모옥 앞에는 한 그루의 아름드리 전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마등이 걸려 있었다. 환희마등이었다. 
또한 마등의 아래에는 무엇인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몸뚱이였다.
"오오!"
진일문은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여인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사지를 쩍 벌린 채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눈부신 피부에 막 떠오른 햇살이 나뭇가지를 뚫고 암울한 음영을 그려놓고 있었다. 
참혹했다. 알맞게 솟아오른 유방은 온통 멍투성이였고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는 아직도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참할 정도로 유린당한 여인.......
진일문은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타는 듯한 그의 눈은 오히려 여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칼이 얼굴을 덮고 있어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절망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는 쥐어짜듯 신음을 발하며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낮추어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 했다.
여인은 죽어 있었다. 그것도 몸 여기저기에 푸른 반점이 생겨난 점으로 미루어 사악한 마공(魔功)으로 인해 음혈이 고갈되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선......."
진일문은 떨리는 손을 들어 여인의 머리칼을 들추었다. 
다음 순간, 그는 온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천만다행으로 여인은 흑수선이 아닌 낯선 여인이었다.
여인은 눈을 위로 치뜨고 있어 흰자위 만이 드러나 있었다. 상당한 미모였으나 만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 어려 있었다.
"으음......."
진일문은 부지 중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모옥을 향해 걸어갔다.
'저 안에도 분명 누군가 잡혀 있을 것이다. 이번처럼 역시 그녀가 아니기를.......'
그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는 한편, 질식할 듯한 긴장감에 휩싸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전신에 공력을 끌어올린 채.
일녀이남(一女二男).
그들은 해괴망측하게도 모두 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또한 여인이나 남자들이나 전부 알몸이었다.
특히 여인은 상반신은 침상의 아래 쪽에, 하반신은 위쪽에 걸쳐진 상태로써 몹시도 추잡하게 느껴지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 위로 두 남자가 덮치고 있었는데 한 남자는 그녀의 하반신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고, 한 남자는 그녀의 유방 사이에 얼굴을 올려놓은 채 혀를 베어물고 있었다.
모옥의 구조는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간단했다. 그 침상이라는 것도 나무와 짚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었다.
그 밖의 가재도구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만한 창으로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남일녀가 연출해내는 광경은 현재 정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 숨쉰 적이 한 번도 없는 인형처럼 굳어져 있었다.
진일문.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원래 인형이 그러하듯 그녀의 눈동자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일면 슬픈 듯, 혹은 체념한 듯 단 한 가지의 표정만을 보이며 허공을 향해 멀거니 떠져 있을 따름이었다. 
두툼하면서도 고혹적인 입술은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하얀 치아에서 햇살이 반짝 반사광을 일으켰다.
진일문이 그녀를 불렀다.
'수선.'
그러나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손이 한 번 움직이자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두 사내는 저만치 날아갔다.
퍼퍽--!
햇살 아래 적나라한 여인의 알몸이 드러났다. 전신에 역시 푸른 반점이 돋아 있었고 하반신은 거의 짓뭉개져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된 건가......?"
진일문은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흡사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여인의 얼굴을 안더니 손으로 눈을 쓰다듬었다. 비로소 여인의 눈이 편안히 감겼다.
흑수선.
그녀는 이렇게 어이없이 죽었다. 어떻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미간에 떠돌던 그늘의 의미, 그것은 바로 사신(死神)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단지 의외인 것은 그녀의 몸 위에 엎드려 있던 두 사내도 숨이 끊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일문은 그들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모옥 앞.
진일문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그 곳에 흑수선의 시신을 정성껏 묻어 주었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작은 봉분이 만들어졌을 때, 등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일문은 돌아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과연 의아해하는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귀공, 그 무덤은 누구의 것이오?"
진일문은 대답 대신 반듯한 나무 둥치를 골라 손으로 깎았다.
쩌적! 파팍--!
그의 수도(手刀)가 스칠 때마다 마치 칼로 내치듯 나무가 매끄럽게 깎여져 나갔다.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내력이었다.
나무는 삽시에 목비(木碑)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자 그는 동작을 이어 나가듯 거기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애처(愛妻) 흑수선지묘(黑水仙之墓).
        망부(亡夫) 진(眞) 읍립(泣立).>
 
"으음......."
등뒤로부터 이번에는 한 가닥 신음성이 울렸다. 그것을 들으며 진일문은 천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 대체 어... 어찌 된 일이오? 그렇다면 막내사매가 죽... 죽었단 말이오?"
짤막한 대답이 그 말을 받았다.
"그렇소."
일순 허무영의 흰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그는 신형을 비틀거리며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누가 사매를 죽였소?"
"바로 저기......."
진일문은 말하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손가락은 예의 마등이 걸려 있던 나뭇가지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걸려 있던 마등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텅 빈 나뭇가지에서 시선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서운 눈으로 허무영을 노려보았다.
"없어졌소."
"누가... 말이오?"
허무영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진일문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 곳에 있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자의 신물이었소. 바로 그것이 불시에 사라졌단 말이오."
"나는 귀공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못 알아듣겠구려. 그래, 사매는 정말 죽은 것이 확실하오?"
그의 눈이 오히려 추궁하듯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진일문은 비로소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기는 하나 그는 대체로 몸가짐이 단정한 사람으로 보였다. 진일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죽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고, 또 비목까지 세우겠소?"
그러자 허무영의 눈길이 새삼 목비에 새겨진 글귀로 향했다.
"애처라는 의미는......?"
언뜻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질투의 빛이 스쳤다. 그것을 진일문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그녀는 분명 내 아내였소. 그녀가 어찌 생각하든."
이는 흑수선의 평소 성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또한 그 정도로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허무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죽거리듯 읊조렸다.
"믿지 못하겠소. 그녀가 당신과 맺어졌었다니......."
진일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이제 와서 그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느니 차라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천의회주는 어디 계시오?"
허무영은 흠칫 하더니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귀공은 그럼 사매와 함께 본회의 회주님을 만나려 했었소? 왜......? 무엇 때문이었소?"
진일문은 잘라 말했다.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허무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침중하게 대꾸했다.
"불초 역시 회주님을 만나지 못했소. 이 곳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소. 뜻밖에도 기밀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 같소."
진일문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다행이라고 하는 것이오?"
허무영은 움찔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불초의 말뜻은... 본회는 타격을 입었을 망정 그 분만은 함정에 걸리지 않으셨기에......."
"그래서 애석하다는 뜻이겠지?"
진일문의 차갑게 돌변한 음성이 그 말을 도중에서 끊었다. 허무영이 놀라서 눈을 크게 치떴다.
"그것이 무슨 뜻......?"
진일문의 손은 놀랍도록 빨랐다. 허무영이 뒤로 확 물러나며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려 하는 순간, 진일문의 손은 어느 덧 그의 늑골을 가격하고 있었다.
퍽!
"윽!"
다시 두 번의 발길질이 숨쉴 틈도 없이 허무영의 복부와 가슴을 후려갈겼다.
"커억!"
허무영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진일문이 즉시 다가가 무자비하게 발로 그의 가슴을 밟았다. 
우두둑....... 
허무영은 입을 딱 벌렸으나 더 이상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한 순간에 가슴의 뼈가 무려 세 개나 부러졌지만 숨통이 꽉 막혀 있으니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발의 힘을 약간 풀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 나는... 물론 허무영......."
우두둑--!
허무영의 눈동자가 홱 돌아갔다. 또 다시 두 개의 뼈가 부러지며 그에게 무지막지한 고통을 안겨준 것이었다.
반면에 진일문의 음성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말해라, 너는 누구냐?"
"난... 나는... 으악!"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더니 허무영은 그만 고개를 앞으로 푹 꺾고 말았다. 
그 순간, 진일문은 어느 새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쪽에서 소리도 없이 미세한 암기가 날아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것!'
과연 진일문의 시야에 언뜻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 가닥의 검은 인영이었다. 
그 인영의 신법은 그야말로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쾌속무비했다. 진일문으로서도 강호에 나온 이래로 그런 신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누굴까? 이런 신법을 구사하는 자는......?' 
진일문은 내심 의문에 사로잡히면서도 전력을 기울여 그 인영을 뒤ㅉ아갔다. 그러나 그의 추적은 곧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겨울이라 잎이 대부분 진 상태이면서도 워낙 울울창창한 숲이 그의 시계를 차단해 버렸다. 그는 한 마장쯤 달려가다 그 곳에서 발을 멈추어야 했다.
"쯧! 놓치다니......."
진일문은 사뭇 허탈한 기분이 되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자신이 세상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할 때의 감정이란 역시 좋을 수가 없었다.
사실 진일문 같은 인물은 범상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때문에 겸손과는 무관하게 가슴 한 구석에 늘상 호승지심이 내재되어 있기도 했다. 사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판단력과 추리력만 보아도 그가 어떤 인물인가는 능히 알 수 있었다. 
진일문은 허무영이 나타났을 때 이미 마등의 실종이 그의 짓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눈을 피해 마등을 제거해버릴 수 있는 인물은 허무영 외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진일문은 허무영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집어냈다. 얼마 전과 똑같은 옷이되 핏자국이나 그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환사로부터 배운 역용변환술도 기꺼이 한 몫 했다. 일단 자세한 관찰로 들어가면 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역용이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진일문이 중점을 두었던 것은 상대의 기도와 눈빛이었다. 그는 허무영과 마주치자마자 벌써부터 진가(眞假)를 정확히 가려내고 있었다. 
아무튼 가짜 허무영의 죽음으로 인해 진일문은 더욱 더 비분을 느껴야 했다. 결과적으로 흑수선의 불행한 최후는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이었고, 그를 직접 처단하지 못한 것이 진일문에게는 문자 그대로 망부(亡夫)로써의 짐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흑수선을 잃음으로써 진일문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고 봐야 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데 비해 천의회의 내막과 회주인 왕중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진일문은 그 점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흑수선의 처참한 주검만이 계속해서 그의 뇌리를 맴돌 따름이었다.
사고 방식은 철저히 달랐으되 한 때나마 함께 이상향(理想鄕)을 꿈꾸던 여인....... 사랑이라는 것이 타인에게는 어찌 정의되는지 몰라도 돌이켜 보니 그것은 분명한 애정이었다.
진일문은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져 버릴 듯한 분노와 슬픔을 안은 채 신형을 돌렸다.
28장 신비인(神秘人), 그의 이름은 허무영(虛無影)
 
진일문.
그는 지금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만남까지 합친다면 그로서는 불과 하루라는 날짜에 걸쳐 세번째로 부딪치게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알 수 있었다. 이번의 대면이야말로 최초로 그 자신이 예감했던 운명의 획을 긋게 되리라는 것을. 
그의 시야에 투영된 인물.
흑의를 걸친 그 자는 한창 무덤을 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인기척을 느꼈는지 동작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동요되지 않을 것 같은 침착한 기도였다.
이어 그 자는 상대가 진일문이라는 것을 알자 눈에 떠올렸던 살기를 스르르 거두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숙연한 빛마저 스치고 있었다.
"이번의 회합은 함정이었소. 그리고 나는 어리석게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 이 곳에 사람들을 모이도록 했었소."
흑의청년은 다름 아닌 허무영이었다. 
흑수선이 생전에 그토록 칭찬한 바 있던 대사형(大師兄)이 바로 그였다.
허무영은 자책으로 인해 나직하게 한숨을 불어냈다.
"나는 본회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소. 뿐만 아니라 고혼이 된 분들께도......."
그러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듣고 있던 진일문이 웬지 차갑게 말허리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상대는 삼성림뿐이었소?"
허무영은 잠시 의외라는 눈빛으로 진일문을 응시했다. 곧이어 짙은 우수(憂愁)가 그의 눈에서 회의를 몰아냈다. 그의 음성이 축축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삼성림이라.... 후후... 물론 그들만은 아니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본회나 삼성림이 다 같이 제 삼의 적에게 농락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내가 알고 싶은 것도 바로 그 제 삼의 적에 관해서요."
진일문의 말에 허무영은 간략하게 대꾸했다.
"그들은 일월맹이오."
허무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강남사우 중 기우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안아 구덩이에 매장했다.
그 곁에서 진일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일월맹(日月盟)......."
일렁이는 창파(蒼波)에 구름이 떠 있으니,
강물도 하늘도 백운(白雲)에 싸여 있노라.
이는 강풍경을 묘사한 싯구로 대개 여름날에나 읊을 만한 문자였다. 과연 천하에 누가 있어 한겨울의 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游覽)을 즐기겠는가? 
어쩌면 그것은 운치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그리고 이런 운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도 않다.
허무영은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뱃전에서는 박빙(薄氷)이 깨어지는 소리가 빠드득 빠드득 들리고 있었다. 
밖과는 달리 선실 안은 훈훈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두 명의 기녀, 즉 산월(山月)과 해강(海江)이 각각 호금과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비단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기예가 뛰어나기로도 유명했다.
상(床)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두 기녀의 발갛게 달아 오른 얼굴 또한 한층 더 여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에 비한다면 선실 밖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바람에 돛은 찢어질 듯 펄럭였고, 이따금 자잘한 얼음 덩어리와 더불어 차디찬 물방울이 뱃전으로 튀어 올랐다.
"일월맹은 마교(魔敎)의 후신이오. 그들은 마교의 부활을 노리고 재등장한 것이오. 강호에서는 아직 일월맹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 천하삼도(天下三道)의 각축은 벌써부터 수년간에 걸쳐 계속되고 있었소."
허무영은 뱃전에 우뚝 선 채 설명하고 있었다. 진일문이 뒤에 서서 그의 등을 보고 있었다.
'검은 옷이 무척 잘 어울리는 사내로군.'
진일문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허무영에게서 발견한 형언키 어려운 매력을 나름대로 정의해 본 말이었다.
허무영의 음성은 다시 이어졌다.
"그 천하삼도란 삼성림과 일월맹, 그리고 본회요."
진일문은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허형께는 미안한 말이오만 정녕 유감이구려. 천하가 단지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각축장으로 전락해 버리다니 말이오. 현재는 모두 암중으로 활동한다지만 언젠가는 표면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가 말끝을 흐리자 허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의 말이 맞소.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무림의 생리요. 수많은 희생을 거친 끝에 가장 강한 세력만이 남게 되는."
"후후... 매우 비정한 논리구려."
"그것도 옳은 말이오. 때문에 천하인들은 이 쪽도 저 쪽도 마음 놓고 가담하지 못하고 때로는 두 곳, 혹은 세 곳에까지 다리를 걸친 채 최후까지 목숨을 붙여보고자 안간힘을 쓰기도 하오. 대개 어느 한 쪽이 득세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쪽으로 방향을 정하려는 속셈들을 가지고 있소."
진일문은 그 말을 듣자 자연스럽게 사대신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허형은 천년마등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소?"
"나도 잘은 모르지만 마등주가 일월맹의 사대호법(四大護法) 중 한 명이라는 정도쯤은 들은 바가 있소."
진일문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후후... 무림의 명가라는 사가(四家)도 삼성림과 일월맹에 각각 양다리를 나누어 걸치고 있었군."
"으음......."
허무영은 무거운 신음을 발하더니 말을 이었다.
"역시 그랬구려. 내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의문점이 많았는데 진형의 말을 듣고 보니 해답이 나왔소."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사가는 일월맹 측에 인질을 잡히고 있소."
"결례일지는 모르나 그 부분에 대해 진형이 알고 있는 바를 내게 얘기해 줄 수 있소?"
허무영의 진중한 음성을 접하자 진일문은 굳이 숨길 것도 없다 싶어 자신이 북망산에서 보았던 사실을 그대로 얘기했다.
잠시 후.
"고맙소." 
허무영은 치하와 더불어 간단한 논평을 덧붙였다.
"일월맹이 마침내 본격적으로 나선 모양이군."
"그럼 삼성림과 일월맹은 어느 쪽이 더 강하오?"
그 말에 허무영은 고개를 돌리더니 씨익 웃었다.
"왜 천의회에 대해서는 묻지 않소?"
진일문은 그를 마주 보며 역시 웃었다.
"아직은 가장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하하하하... 솔직해서 좋소. 그렇소, 진형의 말대로 본회는 삼개 세력 중 제일 약하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단정을 짓게 되었는지 궁금하구려?"
진일문은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겨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매사가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는 데다가 연락방법조차 점조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노출을 꺼려한다는 의미일테고, 그것은......."
"말해 보시오."
"후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오?"
"하하하하하.......
허무영은 감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뚝 그치더니 종전과는 달리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진형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오."
"흐음?"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기 보다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알고 있었소."
"진형,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체 천의회를 놓고 어디까지를 파악해 두고 있는 것이오?"
"사실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오. 다만 천의회를 이끄는 분, 왕회주에 대해 약간의 사전 지식이 있을 따름이오."
허무영의 눈빛이 일순 예리한 칼날처럼 번뜩였다.
"회주님을 안단 말이오?"
"그렇소."
허무영의 얼굴에 언뜻 한 가닥의 불신이 스쳐갔다.
"언제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요."
허무영은 입술을 묘하게 움직였다.
"그렇구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원래대로 다시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진일문이 담담히 말했다.
"내가 아는 그 분은 어쩌면 허형이 회주로 받들고 있는 분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소. 왜냐하면 그 분이 전자에 내게 보여 주셨던 모습은 작금과는 판이하니까 말이오."
허무영의 몸이 웬지 가늘게 떨렸다.
"그건......?"
"후후... 내가 아는 왕중헌이라는 분은 오만하고 염세적일 뿐만 아니라 무공을 입에 담지도 않았던 일개 문사였소이다."
그 말에 허무영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물었다.
"진형은 대체 누구요?"
"말했지 않소? 불초는 진일문이라고."
"하하하...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로군. 하하하하......."
 
선실 안은 매우 따뜻했다.
하지만 더욱 따뜻한 것은 산월의 젖무덤이었다. 사내의 손이 귀엽게 도드라진 그녀의 유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 으응......." 
산월은 연신 몸을 틀었다. 사내의 남아있는 또 하나의 손은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해강은 다른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과실 한 조각을 떼어 그 사내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해강의 몸이 아닌, 비파의 현을 만지고 있었다.
띵... 띠딩... 띵.......
사내의 손가락은 빨라졌다 느려졌다 그 흐름을 바꾸어 가면서 그윽한 선율로 선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툭!
마침내 과실이 해강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가진 인내력의 한계였다. 그녀는 무너지듯 사내의 품에 몸을 던지더니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사내는 굳어 버린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비파를 타는 것 외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아아......."
달뜬 여인의 신음이 그의 귓전에 들려 왔다. 처음의 사내에게 눌려 뒤로 쓰러지고 있는 산월의 모습이 보였다. 아울러 그녀의 젖무덤에 닿아 있는 사내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비파를 타던 사내는 그 광경을 보자 오히려 해강을 물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나, 나으리......."
해강은 허리춤이 따끔하는 것을 느끼며 주춤 했다. 그녀는 흐트러진 자세 그대로 원망스러운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에게 일별을 고한 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른 사내의 아래에 깔린 채 버둥거리고 있는 반나의 산월이 아주 잠깐 그의 시야에 잡혔다가 사라졌다.
진일문.
선실 밖으로 나온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시 이해 할 수 없는 사내다.'
그것은 바로 허무영에 관한 그의 생각이었다.
최소한 흑수선의 죽음을 알렸을 때에도 허무영은 기이한 태도를 보였다. 그저 눈빛이 약간 흔들렸을 뿐 지금까지도 내심을 감춘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 눈 깊은 곳에서 한 가닥의 분노는 분명하게 읽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동요 외에는 여하한 감정의 흐름도 도무지 엿볼 수가 없었다.
허무영은 그 때에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따라간 곳이 기루였는데, 그 곳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도 부족해 산월과 해강이라는 두 기녀를 대동하고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 곳에서 철 아닌 뱃놀이를 즐기게(?) 된 연유였다.
진일문은 흑수선이 허무영을 몹시도 존경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허무영을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높이 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 이유에 대해서라면 진일문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곁에서 대해 본즉 감탄할 만한 부분들을 여러 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구실로도 마음 한 쪽에서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오는 허무영에 대한 의혹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확실히 불투명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인가 실체(實體)를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것이 그를 감싸고 있는듯 했다.
밤이 되자 유선은 포구로 돌아왔다.
허무영은 그 때까지도 계속 술을 퍼마셨고, 산월이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진일문이 거부했던 해강마저 결국 취하고 말았다.
진일문의 눈에는 허무영의 그런 행동들이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종의 자학 같다고나 할까?
'후후... 이것이 과연 나만의 느낌인지......?'
허무영.
족히 말술을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위인은 전혀 취해 있지 않았다. 진일문과 함께 무창부중으로 들어가며 그는 실로 오랫 만에 입을 열었다.
"진형, 사매를 죽인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진일문은 의아함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건네다 보았다.
"천년마등주가 아니었소?"
"아니오. 마등주는 절대로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소."
"흔적이라니? 무슨 흔적을 말하는 것이오?"
"진형이 사매의 몸에 푸른 반점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건 맞소만......."
허무영은 씨익 웃었다.
"마등주의 색혈흡정대법(色血吸情大法)은 벌써 초극지경에 이르러 있소. 따라서 여인의 정혈을 흡수하기 위해 채음하게 되면 그 시체는 의당 껍질만 남아 쭈글쭈글하게 변해 있어야 하오."
"아!"
진일문은 경탄성을 발하는 한편,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럼 대체 누가 한 짓이란 말이오? 그 곳에는 틀림없이 마등이 걸려 있었거늘......."
허무형은 웃는 모습 그대로 미간을 약간 좁혔다.
"천년마등주에게는 괴상한 아들 녀석이 하나 있소. 그의 이름은 보현(甫玄)이라고 하오."
진일문의 얼굴이 갑자기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졌다.
"보현? 그 자가 수선을 능욕했단 말이오?"
"그렇소."
진일문은 침중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들 부자(父子)는 그런 식으로 이제까지 몇 명이나 죽였소?"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요. 그들은 하루도 그 짓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오. 워낙 호색한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익힌 무공이 색을 필요로 하는 희대의 마공이기 때문이오."
"으음......."
"말하기조차 뭣하지만 그들 부자는 여색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색까지도 취한다는 일설이 있소."
허무영은 정말로 민망했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반면에 진일문은 북망산에서 본 다섯 명의 미서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희생물이었겠군.'
그의 표정 변화를 의식했는지 허무영이 물어왔다.
"진형은 복수할 생각이오?"
진일문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럼 허형 같으면 아내를 해한 자를 용납할 수 있겠소?"
"글쎄, 나는 아직 아내를 가져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소."
"수선은 당신의 사매요."
허무영은 묘한 웃음을 발했다.
"후후... 그건 맞소. 그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이 아니오?"
뜻밖의 말에 진일문이 놀라 물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보현에게요. 왜, 두렵소?"
진일문은 어이가 없었다.
"방금 내게 두렵냐고 물었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설마하니 그 자가 무쇠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닐테고."
허무영이 다시금 어깨를 으쓱 했다.
"실은 무쇠보다도 무섭소."
진일문은 그만 기분이 언짢아지고 말았다. 마치 조롱이라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그는 불쾌한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며 나직히 물었다. 
"나도 진즉부터 몸에 칼이 들어가지 않는 인간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소만, 혹 보현이란 자가 그 부류라도 되오?"
허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보현은 바로 몸에 칼이 들어가지 않는 인간이오."
"으음, 부디 그 말이 농담이 아니기를 바라오."
진일문의 음성이 딱딱하게 흘러나오자 허무영은 피식 웃었다.
"불초도 아직 진형과 농담을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소. 그런데 어찌 농담을 한다 생각하시오?"
이어 그는 탄식과 더불어 덧붙였다.
"더구나 그 작자는 따지고 보면 진형과 불초, 두 사람 공동의 원수가 아니오?"
진일문은 기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결론적으로 보현이란 자는 도검불침이란 얘긴데, 과연 어찌 하면 그를 처단할 수가 있겠소?"
허무영은 대답 대신 꽤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천년마등주와 그의 아들인 보현.
그들이 익힌 마공은 서역의 밀종비공으로 전신에 걸쳐 도검 이 통하지 않는 위인들이었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라 해도 그들을 처치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들의 악행은 가히 정평이 나 있으되, 지금껏 방관해 온 이유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이어 쓴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내 담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만일 사매를 죽인 흉수가 보현이 아니라 마등주 본인이었다면 아마도 사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오."
"무슨 뜻이오?"
"우선 나는 감히 그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오. 마등주의 무공은 보현에 비한다면 십배요."
진일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정시했다.
"그 말은 두렵다는 뜻이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합치되는 듯 하다가도 서로 약점이라도 캐내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덕분에 그들 사이에는 내내 긴장이 떠나지 않았다.
이를 의식한 진일문은 내심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공연히 흥분을 하고 있구나. 이럴 필요까지야.......'
허무영의 담담한 음성이 그의 물음에 답했다.
"나는 언제고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소. 분명 마등주는 내가 상대하기에는 벅찬 인물이오."
진일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기는 보현도 마찬가지요. 따라서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모험이오. 그것도 진형의 능력을 계산에 넣은. 후후......."
그 말은 진일문을 짙은 의혹으로 몰고 갔다.
'이 사람의 관점은 도시 종잡을 수가 없구나. 매사를 방관과 회의, 혹은 체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치밀한 계산과 극도의 신중함을 갖추고 있다. 대체 이 자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 인간에 대해 이렇게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호의(好意)가 내재되어 있기는 했지만.
실상 이제껏 진일문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은 왕중헌이었다. 작금에도 또한 그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왕중헌을 떠올리면 존경과 더불어 섬뜩할 정도의 냉정한 성격으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부성애에 가까운 정(情)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감정을 채 정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자는 모든 면에서 왕사부와 흡사한 구석이 많다. 유독 다른 점이 있다면 지독한 허무주의자라는 것 뿐.'
진일문은 입가에 슬며시 고소를 매달았다.
'허무영(虛無影), 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 알만 하군.'
그러는 사이, 허무영은 번화한 거리를 지나 홍등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곳은 무창부에서 유명한 지역이었다.
진일문은 그를 따르며 묻고 싶은 말들이 꽤 있었으나 참았다. 분명 그에게 어떤 계산이 서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진일문은 내심 읊조렸다.
'이 곳은 항주와 매우 다르면서도 비슷하군.'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른바 색향인 항주, 그 곳의 홍등가와 비교할 수 있는 곳이란 천하에 없다. 다만 나름대로의 끈끈하고 질척한 풍경만이 유사할 따름이었다.
허무영은 그러한 홍등가를 한 바퀴 빙 돌더니 그 중에서 가장 큰 기루를 선택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넘어서자마자 그는 진일문의 귀에 대고 나직히 속삭였다.
"진형은 이제부터 아주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게 될 거요."
'재미? 무엇이......?'
진일문은 그의 내심을 알 수 없어 미간을 모았다.
 
기원의 한 실내.
여인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묻지도 않고 거침없이 옷부터 벗어 제꼈다. 놀랄 만큼 몸매가 잘 발달되어 있는 여인이었다.
두 개의 수박덩어리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유방, 그에 반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는 허리, 게다가 엉덩이는 둥그런 호선을 그리고 있으되 시야가 꽉 막힐 지경이었다.
진일문이 그녀에게서 느낀 것은 미(美)라기보다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 먼저였다. 다소 역겹다고나 할까? 
여인의 눈이 벽안(碧眼)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그는 그런 감정에서 겨우 해방되었다. 
'으음, 중원인이 아니라 색목인이었군.'
아무튼 허무영은 그녀를 고르는데 꽤 많은 시간과 금자를 들인 것 같았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는 듯 여인은 옷을 벗고 나자 즉시 침상에 올라가 누웠다.
허무영은 여인의 나신을 내려다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후후... 이 계집은 제법 쓸만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 중원의 여인과는 달리 피부가 좀 거칠기는 해도 그 점이 오히려 색감을 자극하니까. 더구나 그 방면의 기교로 말하자면 사내 한 둘을 녹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후후후......." 
이어 그는 진일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떻소? 생각이 있다면 안아 볼 수도 있소."
말하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여인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반면에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몸을 내맡긴 채 눈가에 은은한 색기(色氣)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푸른 눈은 사고가 정지된듯 멀뚱히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위 백치미(白痴美)랄까? 그녀는 마치 허무영이 이르는 그 방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여인인 것 같았다.
도시 그녀의 유방은 인간의 그것이 아닌 듯 했다. 그 위를 지나는 허무영의 손이 오히려 작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얼굴을 대면 어떨지에 대해 진일문은 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여인의 머리칼에는 약간 붉은 기가 감돌았다. 진일문은 여인의 배꼽 아래 그 곳의 빛깔도 머리칼과 일치하는 것을 보았다. 
'끙! 흡사 한 마리의 동물을 보는 기분이군.'
이것이 바로 그의 정직한 소감이었다. 허무영은 그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잔잔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최근에는 특별한 계집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 중원에서도 이런 인종들을 종종 볼 수가 있소. 파사국이나 포국(포르투칼)에서 미녀를 사오는 일이란 이제 흔해 빠진 일상이 되어 버렸소." 
진일문은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허형이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쪽에 이르기까지 두루 달통해 있으니.......'
그는 마치 불가해한 사건과 마주하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 색목의 이녀(異女)를 데리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미루어 보건대 색을 취하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고......?'
어느 덧 여인은 허무영의 손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가슴을 크게 들먹이고 있었다. 이어 그녀가 허리를 비틀어 대자 그 곳의 숲이 함께 흔들렸다.
진일문은 보고 있기가 심히 민망했으나 그렇다고 눈길을 돌리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지기 싫은 승부근성과 호기심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허무영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물감이 들어있는 작은 옥병 몇 개와 세필(細筆) 한 자루, 그리고 하나의 침(針) 등이었다. 그 세 가지 물건이 어디에 쓰여지는지 진일문으로서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허무영은 먼저 옥병을 열더니 붓에 먹을 찍었다. 가느다란 세필이 곧 여체 위에 닿았다. 
슥슥....... 
붓이 움직이며 하나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뜻밖에도 허무영은 여인의 몸뚱이를 하나의 화폭으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 진일문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허무영의 태도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창백한 이마에는 금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이것은 허무영이 그만치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로써 진일문으로서는 감히 어떤 참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마침내 완성된 그림을 보게 된 진일문은 우선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아! 이것은.......'
놀랍게도 여인의 몸에는 세 마리의 뱀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 뱀들은 금방이라도 살아나와 꿈틀댈 것만 같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느낌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머리를 유방 쪽으로 쳐들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은 여인의 유두를 음흉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머지 한 마리의 뱀은 반대로 머리를 아래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여인의 깊숙한 그 곳을 향해 혓바닥을 날름대고 있었다.
모두 표피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화사(花蛇)였다. 그 세 마리의 뱀은 여인의 가장 중요한 세 곳을 향해 각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어떤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듯 했다.
진일문은 그 모습에 실로 전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허무영.
그가 이번에는 침을 들었다. 그리고는 역시 신중한 태도로 그림을 따라 침을 찌르기 시작했다.
'문신(文身)!'
비로소 진일문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여체에 문신을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눈쌀을 술쩍 지푸렸다.
'갈수록 태산이로구나. 지금까지의 기행(奇行)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보현을 찾으러 와서 기껏 한다는 짓이 이렇듯 변태적인 문신을 새기는 것이라니.......'
그는 불쾌해져서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방 밖에 서 있다고 해서 그다지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야가 차단되자 소리가 곧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흐으... 응........"
방 안으로부터 여인의 야릇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침에 마구 찔리우니 그것은 일편 당연한 노릇일 것도 같았다. 문제는 그것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아니라 쾌락에 겨운 음성이라는데 있었다.
'못들어 주겠군.'
진일문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간이 경과될수록 여인의 음성은 더욱 점입가경이었다. 심지어 어느 때는 환희의 절정에 도달한 듯 오열과 더불어 헉헉거리는 격렬한 숨결을 마구 뿜어내기도 했다.
진일문의 뇌리에는 어쩔 수 없이 여인의 몸뚱이에서 혀를 날름대고 있던 뱀의 형상이 떠올랐다. 보지 않으려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초(?)란 면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이대로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으나 곧 마음을 돌렸다.
'어차피 왕사부를 만나려면 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에게는 다른 계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안에서 다소 지친 듯한 허무영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젠 되었소. 진형, 그만 들어오시오."
진일문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밖에서 있을 수만도 없는지라 그는 주춤주춤 발을 떼었다.
'맙소사!'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진일문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여인은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녀의 유방은 누워 있을 때보다 훨씬 거대해서 자못 위태로와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닌 고로 그가 놀란 것도 그 때문은 아니었다.
실로 찬탄할만한 문신이 여인의 전신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세 마리의 화사가 여인의 나신을 감고 있는 것처럼 소름이 쫘악 돋는 광경이었다.
두 마리는 금방이라도 여인의 유방을 집어 삼킬듯 보였고, 또 한 마리는 배꼽을 지나 아래로 기어 내려가고 있는듯 했다.
"후후후... 어떻소? 진형."
뭐라고 답하겠는가? 진일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더구나 여인의 하는 양은 그를 더욱 질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문신의 뱀을 진짜 뱀 대하듯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그 뱀들을 열심히 쓰다듬고 있었다.
진일문은 특히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랫배 쪽의 뱀을 어루만지는 것을 보며 구역질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허무영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것은 단지 미끼요. 사냥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오."
진일문은 눈을 크게 떴다.
"미끼! 그랬었군."
29장 어떤 죽음(死)
 
사창굴은 무창부의 가장 후미진 곳에 있었다. 이 곳은 대체로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대낮에도 골목은 어두웠고 곰팡내가 났다. 이런 곳을 드나드는 인간이란 모두가 다 뻔한 부류들이다.
기루란 본시 돈이 많은 자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하류층의 인간들은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기에 그런 낙을 향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만은 못해도 그들을 위한 욕정의 배설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값이 싼 여자, 복잡한 절차보다도 직접적인 행위를 우선하는 곳, 어쩌면 이런 곳이 그들에게는 더 편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양지(陽地)와 음지(陰地)가 존재하는 한 이 조건들을 갖춘 사창굴은 세상 어디라도 있기 마련이다.
반면에 이 곳의 여인들은 주로 퇴기이거나 그보다 더욱 비참한 처지에 놓인 여자로서, 마지막 남은 생의 업(業)을 청산하기 위해 겨우 숨통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며칠 전부터 이 사창굴에 한 괴인이 들었다.
그는 하루 종일 여자를 불러 들였다.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정력의 소유자로 밤이고 낮이고 구별이 따로 없었다. 끊임없이 여자를 상대하며 정욕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곳의 여인들이라면 그런 일에는 도가 튼 여자들이다. 그러나 이 괴인에게만큼은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다. 
어떤 여자를 막론하고 그와 몸을 섞다 보면 채 반나절도 견디지 못하고 울면서 알몸으로 뛰쳐나오곤 했다. 그 이후로 앓아 눕는 것은 정해진 행사였다.
정녕 불가사의한 정열의 소유자, 그는 또한 비대했다.
인간이 이렇듯 비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경이에 속한다.그는 전신이 거대한 비곗덩어리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목과 어깨의 구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얼굴도 살에 파묻혀 눈이라고 해야 다만 가늘게 그어진 선에 불과했고, 입과 코까지도 살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가슴은 배까지 축 늘어져 있었고 다리 하나가 황소의 허리를 방불케 했다. 따라서 그는 앉아 있으면 그대로 육괴로 보였고, 누워 있으면 불룩한 배로 인해 산처럼 보였다.
이 괴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가느다란 실눈에서 찬탄과 경이가 솟아 났으므로. 살집에 밀려 작게 오무라든 입술은 희열로 인해 마구 실룩거렸다.
"오오! 멋지구나. 정녕 희대의 예술품이로고."
괴인의 음성은 분명한 한어(漢語)를 구사하고 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서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여인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누운 채 귀찮은 듯 일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인이 옷을 벗자 상황은 일변했다. 그의 육중한 몸집이 마치 용수철처럼 벌떡 튕겨 일어난 것이었다.
"훌륭해! 훌륭... 자, 자, 이리 가까이......."
여인은 나신을 육감적으로 흔들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는 세 마리의 화사가 감겨져 있었다. 두 마리는 유두를 향해서, 한 마리는 배꼽 아래를 향해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실로 정교하게 새겨진 문신이었다. 여인이 유방을 출렁이며 걸어오자 괴인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여인은 기이한 힘에 이끌려 괴인에게로 딸려 갔다. 그리고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무릎에 풀썩 쓰러졌다.
괴인은 여인을 무릎에 눕히더니 흡사 소중한 보물이라도 만지듯 여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쓰다듬었다.
"오오! 정말 걸작이다. 이 문신, 누가 새겼느냐?"
여인은 잘록한 허리를 한껏 비틀며 콧소리를 냈다.
"흐응... 그런 건 무엇 하러 물으시나요? 우선 저와 운우지락(雲雨之樂)을 즐기신 다음에......."
그러나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나오려던 말을 도로 삼켜버려야 했다. 괴인의 손이 우악스럽게 유방을 움켜 쥐자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 나리......."
그녀는 눈알을 허옇게 까뒤집으며 문신의 출처를 댔다.
괴인.
그는 예의 실눈에 자못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담았다.
"진가(眞哥)라고 했던가? 흐흐... 네 문신 새기는 솜씨가 좋다고 들었다. 내 몸에도 문신을 새겨다오. 마음에 들게 되면 내 후한 상을 내리리라."
그 앞에는 꾀죄죄한 몰골을 한 문사차림의 청년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서 있었다. 바로 진일문이었다.
진일문은 아직도 방안으로 들어설 때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세상에 이렇게 비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이러하니 타인에게 들었다면 터무니없는 과장쯤으로 일축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허무영이 한 말의 진의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보현은 도검이 들어가지 않는 자요. 내 말은 아마도 그를 보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오.
도검불침을 이룬 인체란 거개가 외공(外功)을 익혀 몸을 단련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눈앞의 괴인은 상상을 절하고 있었다. 아니, 설사 단단함이 아닌 두께로 승부를 가름한다손 치더라도 정도 문제가 아닌가?
'우우....... 이 자의 살가죽은 한 자 이상의 칼로 쑤셔도 결코 내장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질린 나머지 맥이 탁 풀려 버리는 기분이었다. 괴인의 탁하고 둔중한 음성이 그의 귀로 들려왔다.
"흐흐... 내 몸을 볼 텐가? 문신할 곳이 딱 한 군데 남았지."
괴인, 즉 보현은 비단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속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아 그는 금새 알몸을 드러냈다.
'크윽!'
진일문은 하마터면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괴인의 벗은 몸은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피둥피둥한 살집은 그렇다치고 그는 피부까지도 비계로 이어진 물컹한 돼지의 가죽 같았다. 게다가 그의 몸에는 한 치도 틈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문신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또한 온갖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결같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추잡한 춘화도(春畵圖)였다. 벌거벗은 남녀가 온통 기묘한 모습으로 뒤엉켜 있었다.
"흐흐... 어떤가? 아름답지 않은가?"
보현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그에게는 자신의 문신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괴상한 인간들이 참으로 많다. 취미도 각양각색이어서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것들이 많다.
보현이란 자가 바로 그런 부류의 하나였다. 그는 문신을 새기는 것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큰 낙이자 취미인 자였다.
문득 보현의 음성이 종전에 비해 애조를 띄었다.
"전면은 내가 직접 새겼지. 하지만 뒤쪽은 손이 닿지 않아 소위 명가라는 것들에게 부탁을 했는데 겨우 이 모양이야. 도대체 만족할만한 작품이 없거든."
그는 정말로 슬픈 기색을 보이더니 몸을 돌려 자신의 등을 보여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비탄에 잠길 만도 했다.
보현은 등판에도 역시 하나 가득 문신을 새겨놓고 있었는데, 그의 말마따나 가슴 쪽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졌다. 밑그림도 그렇거니와 정교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이번에 중원으로 건너 오게 된 이유 중에는 문신의 명인을 만나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 흐흐... 훌륭한 문신을 떠 준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마."
진일문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어... 어르신의 등에는 문신을 뜰 곳이 없습니다. 대체 어디에 새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보현은 껄껄 웃었다.
"먼저 뜬 졸작들을 죄다 지우면 될 것 아닌가?"
진일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문신을 어떻게 지운단 말입니까?"
"흐흐... 나라면 가능하지. 자, 이렇게 하면......."
보현은 침상 아래에서 한 자루의 도(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끝이 구부러져 있는 기형의 도였다.
쉭--!
번쩍 불꽃이 인 순간, 진일문은 그야말로 못 볼 것을 보아야 했다. 보현이 자신의 등가죽을 훌러덩 벗겨낸 것이었다.
"앗!"
진일문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발했다. 
그러나 놀라움은 비단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현의 등가죽은 두껍게 한 겹이 베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실로 불가사의가 따로 없었다.
"자, 이제 되지 않았느냐? 어서 멋진 작품을 떠 다오."
진일문은 턱을 덜덜 떨며 보현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 정도로 겁을 먹지는 않았으나 그럴듯해 보이려고 연극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놀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보현은 특별히 만든 초대형의 침상에 엎드렸다. 
진일문은 미리 준비해 간 물감병과 붓을 꺼냈다. 이어 그는 사람의 것이라기 보다는 마치 편편한 바위 같이 보이는 보현의 등에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 그림에 조예가 있었으므로 진일문의 그림 솜씨는 미숙하지 않았다. 다만 보현의 주문에 따라 그려야 한다는 점이 그를 더없이 난감하게 만들었다.
보현이 요구하는 것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괴망측한 춘화도였다. 몸은 사람이되 머리가 괴수의 형상인 남녀, 바로 그들의 성적 행위를 정밀하게 묘사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진일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허무영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보현을 죽이는 일은 쉽지 않소. 그의 몸은 비대한 살덩이로 인해 도검은 물론 어떤 무공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소. 방법은 단 한 가지, 문신을 뜨는 척 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옥침혈(玉枕穴)에 침을 꽂는 것이오. 그것도 반드시 찰나적으로 해치워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꾹... 꾹... 꾹......!
수침( 針). 
그것은 신중하게 그림과 무늬를 따라가며 살을 찌르고 있었다. 또한 그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진일문의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은 급기야 얼굴을 타고 내려와 턱 밑에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보현은 몹시도 만족해 했다. 진일문이 떨어뜨리는 땀방울을 맞으며 그가 훌륭한 문신을 새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예술의 위대함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는 보현이었다. 그는 재능과 더불어 이러한 정성과 열의가 병행되어야 완벽한 작품이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보현은 문신이 이를 수 있는 극고의 경지를 기다리며 중원의 한 장인(匠人)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는 이 장인을 영원히 곁에 둘까도 고려 중이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가 기대하는 완벽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추구 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상이몽(同床異夢).......
진일문.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비록 상대를 죽이기 위한 편법이라고는 하나 보현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문신을 새기는데 온 정열을 다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이 자의 정신을 한 곳으로 쏟게 한 뒤, 단 일격에 성공을 거두어야만 한다.'
진일문의 시선이 힐끗 보현의 옥침혈로 향했다. 그러자 그의 손끝이 긴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그가 문신을 새기고 있는 곳은 보현의 등 한복판이었다. 그 넓은 곳에 그럴 듯한 작품을 만들어 가자니 이제까지 소모된 시간만 해도 자그마치 네 시진이었다.
단지 순간적인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진일문은 생전 겪어보지 도 못했던 희한한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목숨을 건 사투(死鬪)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튼 와중에서 그는 허무영이 지목한 사항 외에는 아무런 방도도 없다는 것을 줄곧 절감하고 있었다. 
보현의 비대한 몸은 과연 어떤 외문기공보다도 완전한 호신지공을 이루고 있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무슨 낭패를 당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그 사이에도 수침은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림에 따라 계속 옥침혈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한 순간, 보현은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그만큼 안도한다는 의미일까?
사실 옥침혈(玉枕穴)이라면 치명적인 사혈(死穴)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목의 윗부분 뒤통수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사람이 누우면 베개가 닿는 부위였다.
보현의 무지막지한 살집은 심지어 목까지도 이르러 있어 마치 아름드리의 통나무를 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옥침혈만은 그도 보통 사람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두터운 살가죽이 겹쳐 있기는 했으나 다른 곳처럼 비곗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침 끝은 연신 살가죽의 굴곡을 넘어 문제의 옥침혈과 불과 두 치 정도의 거리를 남겨 두고 있었다.
진일문은 마지막 윗부분의 그림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제 서너침만 더 가하면 문신을 새기는 작업도 끝을 맺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슥--!
진일문의 손이 자연스럽게 위치를 바꾸었다. 그에 따라 수침은 보현의 옥침혈을 향해 뇌전처럼 빠르게 찔러갔다.
푹!
침은 그 끝조차 남기지 않은 채 정확하게 목표지점에 들어가 박혀 버렸다.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보현의 눈이 한껏 부릅떠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의 비계살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수천개의 벽력성이 한꺼번에 울리는 듯한 괴성이 보현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크아아--! 이 찢어 죽일 놈!"
그 사이, 진일문은 벌써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보현이 그를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감히 본좌를 암살하다니! 내 네 놈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찢어 죽이겠다."
쏴아아아--!
'이럴 수가! 이 자가 과연 인간인가?'
진일문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침이 옥침혈에 그토록 깊이 박혔는데도 불구하고 보현은 죽지 않았을 뿐더러 노성을 토해내며 그를 향해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문신을 새기는 침의 길이는 겨우 세 치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 같으면 옥침혈에 그 삼분지 일만 박혀도 즉사를 면치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보현은 죽는 것은 고사하고 실로 놀라운 신위를 보여 주었다. 차라리 섬광이라 해야 옳으리라. 보현의 산과 같은 거대한 몸집은 일단 움직이자 그 빠르기가 가히 초인적이었다.
펑--!
"윽!"
진일문은 놀랍기도 하려니와 보현의 몸에서 퉁겨나오는 엄청난 반탄력에 의해 그대로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가 간신히 신형을 바로 잡은 것은 벽에 부딪치기 바로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보현의 거대한 몸통은 이미 산악처럼 그를 뭉개오고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보현의 솥뚜껑 같은 손이 진일문을 내리쳤다. 
쉬익--!
만일 그 손바닥에 눌린다면 설사 철골동근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무조건 압사(壓死)일 것 같았다.
진일문은 다급하게 어깨를 흔들었다.
스슷--!
그의 신형은 환상인양 벽을 따라 단숨에 일장이나 옮겨갔다. 이 기묘한 신법은 다름 아닌 칠금신법 중 하나로 뱀의 형상에서 유추된 것이었다. 그 속도야 재삼 논할 여지도 없었다. 
진일문은 그 한 번의 움직임이면 당연히 보현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기대가 처음으로 주인을 배신하는 순간이었다.
쉬이익--!
그야말로 태풍에 버금가는 손바람이 진일문을 몰아쳤다. 어느 새 보현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며 여전히 거대한 손바닥을 내리 눌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웃!'
진일문은 대경했으나 이를 악물고 다시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스읏!
그의 신형이 이번에는 무작정 피하는 것이 아니라 보현의 팔꿈치 아래로 슬쩍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아울러 그 짧은 찰나지간, 그는 벼락 같이 이권삼장(二拳三掌)의 공세를 내쳤다.
퍼퍼퍽--!
그의 쾌공은 여지없이 보현의 몸에 적중되었다. 그것은 실로 눈부신 임기응변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그 순간 마치 솜뭉치를 때린 듯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주먹이 보현의 몸 속으로 손목까지 쑥 들어가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주먹이 들어가기가 무섭게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비곗살이 전후좌우, 엄청난 압력으로 그의 손을 조여 왔던 것이다.
"헉!"
진일문은 급급히 진기를 회수했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손은 금방 빠져 나왔다.
"크크크, 쥐새끼 같은 놈! 네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보현은 괴물처럼 웃으며 쌍장을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콰르르릉--! 휘이이-- 이잉--!
엄청난 잠경이 퉁퉁한 보현의 손바닥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의 장영이 스쳐 지나간 곳은 무엇이든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나고 말았다.
우르르르--
벽이건, 천정이건 가릴 것 없이 차례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진일문의 심경은 거의 충격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보현의 장세에 밀려 연신 뒤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반격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아니, 그는 최소한 보현의 곁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는 불리할 뿐이다.'
위기의식이 뇌리를 사로잡은 가운데 진일문은 만박해초결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운용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상대방에게 접근을 시도할 수 없는데야 어쩌겠는가?
어느 덧 사면의 벽은 보현의 장력에 의해 몽땅 날아가고 말았다. 뿌연 분진만이 시야를 온통 흐려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 돼지신공이라면.......'
진일문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불문의 대기인인 취화상의 신공을 전신에 끌어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는 자신을 짓쳐오던 압력이 어느 정도 격감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보현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둔화되어 갔다.
"흐응?"
양볼이 축 늘어진 보현의 얼굴에 기괴한 표정이 떠올랐다. 공격을 가할수록 위력이 감소되는가 하면 체내의 진기마저 비어가니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느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교활한 놈! 사술을 쓰는 구나."
괴성을 토해낸 보현은 쌍장을 합쳤다가 벼락같이 떨쳐냈다.
우우웅--! 
웅후한 음향과 함께 진일문은 마치 폭풍에 휘말린 허수아비인양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것은 실로 인간의 몸으로는 받아내지 못할 엄청난 장력이었다.
보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광처럼 빠르게 다가서며 거대한 손으로 진일문의 현기혈을 잡아채 갔다. 확실히 그에게 있어 체구와 경신술은 별개의 문제였다.
다시 위기를 접한 진일문은 십지(十指)를 일제히 탄출해냈다.
쇄애액--! 파파팟--!
능히 강철이라도 뚫을 만한 지력이 보현의 눈과 얼굴을 노리고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아무리 도검이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눈만은 예외이리라는 것이 진일문의 계산이었다. 
"엇!"
보현도 이를 느꼈는지 즉시 고개를 틀어 그의 지력을 피했다. 이 때였다. 진일문이 칠금신법을 발휘해 그림자처럼 보현을 따라 붙은 것은. 그의 신법은 영활하기 그지없어 찰나일지라도 웬만해서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스스슷--!
보현의 등뒤로 위치를 바꾼 진일문의 손에는 어느 덧 한 자루의 비수가 들려져 있었다. 동시에 여취벽이 준 바 있는 그 비수는 한광을 뿌리며 보현의 등을 내리 그었다.
촤악--!
"큭!"
비곗살이 갈라지며 섬뜩한 피분수를 뿜어냈다. 이른바 쇠를 무우 자르듯 하는 보도(寶刀), 보현의 호신괴공도 그것까지는 감히 당해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광경에 진일문은 다소 안도했다. 공격이 처음으로 먹혀 들자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잠깐이었다. 
다음 순간, 실로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적어도 한 자 이상은 등이 갈라졌음직한 보현이 신형을 빙글 돌리더니 그를 향해 무지막지한 일권을 날린 것이었다.
퍽--!
"우욱!"
진일문은 방심의 대가로 인해 신음을 토하며 뒤로 밀려나야 했다. 그는 하늘과 땅이 노랗게 변색하는 것을 보았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그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돼지신공을 운공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한 방의 주먹에 전신이 으스러지고 말았을 것이므로.
반면에 상처를 입은 보현은 한 마리의 괴수로 화해 있었다.
"크아아아--!"
이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듯 괴성을 지르며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진일문을 향해 거구를 날렸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보현! 이게 무엇인지 보아라."
불현듯 보현의 뒤쪽에서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엉?"
보현은 움찔하여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무엇인가 섬전처럼 그의 눈을 쑤시고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크악!"
피가 튀었다. 보현의 한 쪽 눈알이 무참하게 파열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감싼 채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런 그의 앞에 한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허무영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해 보일 정도로 침착한 기도를 지닌.
허무영은 보현이 등의 상처로 인해 주의력을 흐트리고 있는 틈을 노려 묵봉으로 눈을 찔러버렸던 것이다. 사실 보현에 대해 서라면 그 만큼 잘 알고 있는 자도 없었다.
"크아아아--!"
보현은 한 쪽 눈까지 잃게 되자 아예 미쳐버린 것 같았다. 마치 성난 짐승처럼 포효하며 쌍장을 마구 휘둘러댔다.
휘이이-- 우우웅--!
실로 무시무시한 잠경이 허무영을 쓸어갔다. 하지만 이도 역시 예상하고 있었던 듯 허무영은 벌써 그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이윽고 그의 냉소가 들려온 것은 보현의 등 뒤였다.
"멍청한 놈! 나는 여기 있다."
"허어엉!"
보현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돌아섰다. 그의 한 쪽 눈에서 파열된 안구가 밖으로 비어져 나와 덜렁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벌거벗은 그의 가슴과 배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당사자의 고통이야 어떻든 그 광경은 정녕 끔찍한 것이었다. 전신에 가득 새겨진 문신과 더불어 그의 외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했다.
아무튼 보현은 그 상황에서도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비대한 몸이 잠깐 사이에 두 배나 되게 커져 버렸다.
"천비수라마공(天肥修羅魔功)!"
허무영은 경악성을 발하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운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종의 경외감이랄까? 
츠츠츠츳--!
보현의 장심에서 시커먼 기운이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지없이 허무영의 전신을 덮쳐갔다.
진일문이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앗!"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체념과 절망이 어우러진 허무영의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우수를 뻗었다.
그러자 정녕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의 체내 진기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뚝을 통해 손목에 차고 있던 뇌정환에 모조리 투입된 것이었다.
쩌어억--!
바야흐로 한 가닥 뇌전(雷電)이 천지를 갈라쳤다. 뇌정환이 섬광과 함께 하나의 도(刀)로 화하더니 뇌전을 폭사해낸 것이다.
뇌정도(雷霆刀), 이를 일컬어 천상천하의 독존도(獨尊刀)라 칭한 것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었다.
"캐애액--!"
마침내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뇌전이 정수리에 떨어지자 보현의 몸도 더 견디지 못하고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 다. 마치 뇌신(雷神)의 저주라도 받은 듯.
양단된 거대한 육괴는 육중한 소음을 일으키며 각기 따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내장 부스러기와 아울러 피가 사방으로 튀어 도저히 맡아줄 수 없을 정도로 역한 악취를 풍겨냈다. 
진일문과 허무영.
두 사람은 한 동안 멍하니 그 광경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들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여전히 보현의 시신을, 허무영은 그와는 달리 진일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에 찬 허무영의 눈은 진일문의 손에 달라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빈 손이란 말인가? 분명 보현을 내리친 것은 눈부신 도광(刀光)이었거늘.......' 
천하에 모르는 것이라고는 없을 듯 하던 허무영이었다. 하지만 그도 상고신검(上古神劍)인 뇌정도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진일문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녕 놀랍구려. 진형의 무공이 이토록 신기에 이르렀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과찬이외다."
진일문은 겸양을 취했으나 일면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굳이 허무영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뇌정도의 위력을 실감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계속 그대로 선 채 뇌정도를 펼칠 때의 그 감각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사실 진일문은 뇌정도를 얻은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뇌정도의 완벽한 발도법(拔刀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 중에 진기의 흐름을 빌어 뇌정도를 발출시켰던 것도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좌우간 뇌정도의 위력은 그를 가히 감동으로 몰고 갔다.
'천상천하유아독존도! 과연 단 일도에 보현이 저 지경이 되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진일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팔목에 채워져 있는 뇌정환을 내려다 보았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부터 목구멍을 향해 계속 치밀어 올라와 그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그러한 격정에는 참기 힘들 정도로 궁금증이 뒤따랐다.
'뇌정도에는 분명 내가 풀지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뇌정도를 만든 장인 야소도 그렇거니와 훗날 천하제일도로 추앙받은 뇌환공(雷還公)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과연 언제쯤이면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허무영이 평소의 그로 돌아가 또 다시 괴이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보현의 시체에 허연 분말을 마구 뿌려댔다.
치지직.......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필두로 보현의 시체는 삽시간에 핏물로 녹아 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그의 육괴는 형체마저 보존하지 못한 채 지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잠시 후.
허무영이 진일문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이 자의 취미가 워낙 별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처럼 쉽게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오. 어찌 되었건 이로써 진형과 나는 공동의 빚을 갚게 되었구려."
진일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무영의 미소가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보현의 약점은 하루라도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었소. 특히 한 곳에 머물 때는 종종 이런 사창가에서 신분을 감춘 채 며칠이고 틀어박혀 있곤 했소."
허무영도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연이어 읊조릴 뿐이었다. 
"다 어리석은 소치요. 감히 타지에 와서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하들마저 따돌리고 이런 곳에 몸을 맡기다니, 후후... 덕분에 우리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셈이지만."
진일문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허무영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허형은 어떻게 이 자의 내력을 그처럼 자세히 알고 있소?"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까?"
허무영은 히죽 웃었다. 이렇듯 종잡을 수 없는 태도는 오히려 친일문으로 하여금 더 이상 추궁하기가 거북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진일문도 묻기를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왕회주를 만나고 싶소."
허무영은 이번에도 역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을 보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야 고작 이런 것이었다.
"진형이 내 아픈 곳을 찌르는구려."
"무슨 뜻이오?"
"내 비록 세상사를 적지 않게 알고 있다고 자처하나 단 한 가지만은 예외요. 알지도 못하거니와 설사 안다 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 그것이 바로 회주에 관한 것이외다."
"설마 모른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오?"
"후후...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소. 그 분의 행동인즉 워낙 신비로우니 낸들 어쩌겠소? 뿐만 아니라 늘상 표홀히 움직이기 때문에 나조차도 가끔씩은 그 분이 과연 이 세상에 실재하는 가를 회의할 때가 있소."
말을 마치자 허무영은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진일문은 인사도 없이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응시하면서도 굳이 부르거나 붙잡지 않았다. 이제는 달리 목적하는 바도 없었지만 웬지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잘 가시오, 친구.......'
섭섭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불원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강한 예감 때문이었다.
30장 개방( 幇)의 풍운(風雲)
 
후두두둑.......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마구 흩뿌려지고 있었다. 웬지 음산한 기분이 절로 이는 그런 밤이다.
창! 차창! 펑--!
어둠 속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며 울부짖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뿐인가? 장풍이 허공을 가르며 괴음향을 쏟아내기도 했다. 
인간의 육성도 한 몫 했다. 호통소리와 더불어 날카로운 비명소리까지 어우러져 밤을 더욱 으스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일대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 이 곳은 무창부에서 북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하나의 야산(野山)이었다.
"다들 멈추지 못하겠느냐? 너희들이 어찌 감히 하극상(下克上)을 범한단 말이냐?"
"닥쳐라! 주휘경(朱煇京), 조사령이 발동된 이상 설사 방주라 해도 그 명을 좇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대야말로 어찌 이 지경이 되고서도 굴복하지 않는 것인가?"
어둠을 가르는 고함성에는 각기 무서운 살기가 배어 있었다. 탄식과 함께 기운이 쇠한 중년인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유(柳)장로, 이번 일은 개방의 사활이 걸린 문제요. 나로서도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소이다."
"터무니 없는 소리! 주휘경, 오래 전부터 그대의 흉심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부정할텐가? 그렇다면 어디 설명해 보라. 대체 무엇 때문에 조사령을 어기면서까지 전대 방주의 사인에 대한 조사를 거부한단 말인가? 그것은 장로회에서 의결된 사항이거늘......." 
"닥치시오!"
문득 쇠잔해 있던 중년인의 음성이 쨍쨍하게 높아졌다.
"그대들은 지금 누구에게 오명을 덮어 씌우려는 것이오? 신분을 떠나서라도 나 주휘경, 모욕은 참지 않겠소. 당신들의 술수에도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밤은 또 다시 흐트러지고 말았다. 
병장기와 장풍 등이 어우러지는 소리, 그 뒤를 잇는 단말마의 비명, 그리고 부상입은 자들의 고통 어린 신음소리....... 그 소음들은 일제히 바람에 섞여 밤하늘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던 듯 소리들은 차츰 그 곳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는 예전과 같이 이 이름 모를 야산에는 정적이 찾아 들었다.
스슷--!
어둠을 뚫고 하나의 인영이 나타난 것은 그 때였다. 
그 인영는 주위를 돌아보고는 안타까운 듯 쓴 입맛을 다셨다.
"흐음, 전력을 다해 달려 왔는데도 한 발 늦었구나."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주위로는 온통 참혹한 시신이 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이 뿌려낸 피가 대지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 가시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나 그의 시력은 어둠 속에서도 그 광경을 확실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하나 같이 개방의 인물들이로군. 더욱이 이 시체들은 최소한 칠결 이상의 신분이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가?"
예로부터 개방의 신분 표식은 이러 했다. 즉 방주가 구결(九結), 장로급이면 모두 팔결의 매듭을 매도록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작금의 사태가 말해주는 것은 개방의 핵심인물들끼리 상잔을 벌였다는 것밖에는 안된다. 인영의 음성은 비록 회의에 가득 차 있었으나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놀라움과 더불어 적지아니 고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가? 왜 그들이 대외적인 체면조차 망각한 듯 이런 일을 자행한단 말인가?"
인영은 잠시 굳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마도 나름대로 추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마음을 정한 듯 낮게 부르짖었다.
"개방에 어떤 변괴가 일어났든 나로서는 이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관여할 자격도 충분하지 않은가?"
개방의 일에 대해 이렇듯 의무감과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처하는 인물, 그는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사실 그의 말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개방의 사숙조(師叔朝)인 만박노개로부터 후사를 위임받은 바 있는 그였다. 그는 절대로 국외자(局外者)의 입장이 아닌 것이었다.
휘익--! 
진일문의 헌칠한 키와 준수한 풍채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듯 사라져 버렸다. 다시 발자국이 찍혀 있는 흔적을 따라 쾌속하게 쏘아져 가고 있었다.
모옥(茅屋).
산중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 모옥은 규모가 매우 간단했다. 흔히 그렇듯 사냥꾼들의 임시 거처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지금 모옥의 안에는 정체가 불분명한 몇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사냥꾼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침상 위.
그 곳에는 병색이 완연한 중년의 서생이 누워 있었다. 
두 명의 늙은 거지가 시립해 있고, 한 명의 소년거지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문 밖에는 네 명의 장한이 각기 타구봉을 꼬나든 채 경계 태세를 갖추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색은 일견하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모두 중상을 입은 듯 의복이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팔이나 다리 등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이 곳에 당도하기 직전, 과연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듣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이 모두가 본인의 부덕에서 야기된 일이외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중년서생이 탄식을 쏟아냈다. 그러자 노개들 가운데 키가 난장이 만한 인물이 그 말을 받았다.
"이번 일이 어찌 방주의 탓이리오? 그 간악한 무리들이 반역을 꾀해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그의 음성은 더 없는 절망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 일찍이 개방이 이처럼 내분을 일으키고 상하가 서로 칼을 들이대는 참상은 없었소. 이제 개방의 운명도 그만 끝장이 나려는가 보구려."
그 옆의 고목처럼 마른 노개도 빠지지 않고 거들었다.
"빌어먹을! 유장로와 기장로, 송장로, 그 세 놈들이 작당을 하여 반심을 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이 자는 성깔이 꽤 있는 듯 음성도 칼칼했다. 그러나 앞서의 노개와 마찬가지로 역시 분노과 비애만은 감추지 못했다. 
서생은 눈을 반쯤 내리 감았다.
"팔대 장로들이 서로 갈라져서 상잔을 벌이다니, 만일 이로 인해 천년 개방이 무너진다면 이 주휘경은 죽어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것이오."
주휘경이라면 현 개방 방주의 이름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거지의 집단이라고는 하나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방파의 지존인 그가 이런 곳에서 한탄을 하고 있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주휘경의 외호는 낙척서생(落拓書生)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개방의 방주가 되었다. 
물론 수많은 무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개방의 운명을 맡기기에는 그가 너무 경륜이 짧고 어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은 짧은 기간 내에 일소되고 말았다. 주휘경을 믿고 따르라는 전대 방주의 유언도 있었거니와 방주의 위(位)에 오른 그의 능력이 실로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휘경은 탁월한 지도력과 치밀한 두뇌로 인해 개방의 조직을 강화시켜 더욱 더 그 위세를 만방에 떨쳤다. 그리하여 종국에 이르자 그는 오히려 십만개방도의 숭앙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져 있었다. 
말마따나 개방에는 반역이 일어났고, 덕분에 방주인 그는 생애 최대의 고비를 맞고 있었다. 현재 그를 따르는 자는 팔대장로 중에서 오직 이들 곽(�u), 서(舒) 두 장로뿐이었다.
곽장로는 안색을 굳히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무슨 소리요?"
"본 방의 신타령(神陀令)을 내려 각 타주들에게 직접 방주의 신임을 묻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소?"
"그것은 안되오."
주휘경은 단호하게 그 말을 잘랐다.
"나도 그 방법을 검토해 본 바는 있지만 아무래도 무리요. 그럴 경우, 본방은 당장 세력이 양분되어 엄청난 유혈사태로까지 발전될 가능성이 있소."
곁에서 서장로가 나섰다.
"방주!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대로 대권을 넘겨줄 수는 없지 않소이까? 개방의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달리 방도가 없소이다."
그는 참기 힘든 분노로 인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목도한 주휘경이 다시금 나직하게 탄식을 불어냈다.
"이런 때일수록 분별력을 잃어서는 안되오. 자칫 감정만으로 일을 처리하려 했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오." 
이윽고 주휘경은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소년거지에게로였다.
대략 십칠, 팔세 정도 되었을까? 소년의 얼굴은 흡사 계집아이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땀과 땟국물에 젖어 있기는 했지만 그 속의 옥같이 흰 피부를 다 감추지는 못했다.
감정의 동요 때문에 계속 찰랑거리는 눈은 되려 맑고 깊은 호수를 연상시켰다. 그래서일까? 가냘픈 몸매와 더불어 소년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섬약하게 느껴졌다.
"혜아(慧兒)야."
"네, 아버님."
"너는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던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소년은 격정이 치민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나는 너를 더 이상 돌보아 줄 수 없게 되었구나. 그것은아마도 네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두 분 장로의 가르침을 이 아비의 훈시로 여기고 개방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본방을 무림에서 제일가는 문파로 만들기에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아버님!"
소년은 금새 눈시울을 붉혔다.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평소 우상처럼 신뢰하고 숭배해 오던 부친이 최후의 결단을 내리려 한다는 것을.
 
문득 자애롭던 주휘경의 안색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혜아야. 개방의 운명이 너의 양어깨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네 어찌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이냐?"
"아버님, 저는......."
소년은 뭐라 말하려다 그만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으음......."
주휘경은 나직하게 탄식을 발하며 안색을 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곽, 서 두 장로를 응시했다.
"두 분께서는 내 결정을 수용하시리라 믿소이다."
곽, 서 두 장로는 흠칫 했다.
"그럼 역시......?"
"잠시 후에는 그들이 이 곳까지도 추적해 올 것이오. 호천십걸(護天十傑)의 방어에도 한계가 있소. 내가 여기 남아 적들을 막아볼테니 두 분은 어서 혜아를 데리고 떠나도록 하시오."
그 말에 두 장로의 안색이 대변했다. 
"말도 되지 않는! 그것은 절대 불가하오."
"방주, 차라리 우리들이 남겠소이다."
두 장로는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밖을 지키던 네 명의 장한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더니 피를 토하듯 외쳤다.
"방주! 아니 되오이다."
"천부당 만부당한 명이시오."
주휘경은 또 다시 탄식을 불어냈다. 그는 자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자 격동하는 한편, 비참한 심경에 이르고 있었다. 
휘하에 거느려 왔던 만치 그들의 충정이 어떠한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은 오히려 세력 기반을 상실한 지존으로써의 무력감을 더해 줄 따름이었다.
주휘경은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더니 품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하나의 타구봉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신타령을 받들라."
더 이상은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복명(服命)......!"
"개방의 제 사십삼대 제자인 곽, 서 두 사람이 타구령을 받드오이다."
두 장로와 네 명의 장한들은 일제히 이마를 바닥에 댔다.
이름하여 신타령, 즉 푸른 색의 그 타구봉은 바로 개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그것을 접하게 되면 개방의 제자들은 무조건 그 명에 복종해야만 한다.
"개방의 사십사대 방주로서 나 주휘경이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한시 바삐 이 곳을 떠나도록 하라."
"크흐흑... 방주......."
명은 더할 나위 없이 지엄하되 선뜻 일어서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주휘경은 더욱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역하는 자, 개방의 율법에 따라 처리하겠노라."
"존명(尊命)......."
네 장한들은 오열하고 있었고, 곽장로와 서장로까지도 눈가에 붉은 기운을 드리운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주휘경은 신타령을 소년에게 넘겨주며 엄숙하게 덧붙였다.
"너는 이 길로 몸을 숨겨 어떻게든 본방의 사숙조이신 만박사조를 찾는데 주력해야 한다. 그 분을 만나 이 신타령을 보여 드리고 아비의 무능력을 전하거라. 그러면 뒷일은 그 분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실 것이다."
"아버님......."
"하늘이 개방을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 어디서든 만박사조와 상우(相遇)할 수 있으리라." 
주휘경은 신타령을 건네더니 할 일을 모두 마친 듯 침상에 앉아 눈을 내리감아 버렸다.
곽, 서 두 장로는 그가 한 번 결단을 내리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마지막을 고하는 대례를 올렸다.
이어 그들은 소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결정은 끝났소. 명을 이행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소."
"주(朱)아가씨, 어서 갑시다."
아가씨라 불리운 소년(?)은 기어이 울먹였다. 
"그럼 아버님께서는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어... 흑....... 소녀, 가까운 장래에 재회하게 되기를 앙망하겠나이다."
그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주서혜(朱書慧).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개방의 방주인 주휘경의 무남독녀였다. 
그녀가 단장의 슬픔을 안은 채 대례를 올리는 동안 두 장로는 벌써 밖을 향해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들은 네 장한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도 어서 떠나세."
네 장한은 그 때까지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마를 세차게 땅에 박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신타령을 어긴 죄는 차후로 목숨이 붙어 있다면 자결로써 그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저희 천지풍운(天地風雲), 네 형제는 무슨 일이 있건 절대로 방주의 곁을 떠나지 못하오이다. 이 점 혜량하시어 두 분 장로께서는 속히 이 곳을 떠나 주십시오."
"으음......."
두 장로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로서는 오히려 바라던 바인지도 몰랐다. 이른바 호천사개(護天四 )라 불리우는 천지풍운 네 형제들이 뒤를 맡아 준다면 그나마 심중의 짐을 덜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탄식에 가까운 주휘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장로께서는 서두르시오. 시간이 없소이다. 호천사개는 뜻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시고......."
그 말에 호천사개는 일제히 외쳤다.
"감사하오이다, 방주!"
천하에는 함께 죽기를 자처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자가 종종 있다. 개방의 인물들에게 있어 이 점은 거의 속성에 가깝다. 그만큼 의혈(義血)로 뭉친 집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거운 것은 떠나는 자들의 발걸음이었다. 두 장로와 주서혜가 바로 그렇게 이 곳에서 사라져 갔다.
인원이 비게 되자 그 대신 침묵이 방안을 메웠다.
주휘경.
그는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다. 중상을 입어 본신의 공력을 절반밖에 발휘할 수 없는지라 결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주휘경은 문 밖을 지키고 있는 호천사개에게 물었다.
"밖은 어떤가?"
천지풍운 중 천개가 답했다.
"아직도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흠, 그들이 올 때가 되었는데......?"
바로 그 때였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산한 음성이 귓전으로 들려온 것은.
"우리는 벌써 와 있다. 주휘경, 준비는 되었는가?"
주휘경은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담담하게 말했다.
"송장로와 기장로는?"
"송장로는 그대의 딸을 추격하고 있다."
일순 주휘경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그는 이내 안색을 펴고는 서서히 밖으로 나가며 말을 이었다.
"유장로, 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이는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본방의 천년 기업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오."
"그래, 무엇인가?"
"이번 일에는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소. 전대 방주의 죽음에 관한 사건이 밝혀지게 되면 유장로는......."
그의 음성이 갑자기 흐트러지더니 꼬리를 감추었다.
호천사개는 즉시 방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방주가 전음술을 시전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했다.
그러기를 한참여.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유장로의 숙연한 음성이었다.
"알겠소, 방주. 이 호칭과 지금의 경어는 당신을 위해서 이 늙은이가 마지막으로 바치는 것이오."
"고맙소, 유장로. 그럼......."
주휘경은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전히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사위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어둠의 저편에서 수십, 아니 수백의 호흡이 이어지며 사나운 눈빛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휘경이 그들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개방의 방주는 죽는 순간까지 절대로 굴복하는 법이 없다. 자! 누가 먼저 본인의 선법을 받아 보겠는가?"
실로 웅후하기 이를데 없는 기개였다. 그는 경황 중에도 개방의 방주답게 자긍심과 더불어 굳은 신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촤라락--!
그의 수중에서 하나의 낡아빠진 부채가 활짝 펼쳐졌다. 
주휘경은 본시 역대 방주들과는 달리 타구봉을 쓰지 않고 이 부채를 애용했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낙척서생이라는 외호를 가지게 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어둠 속 호흡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사실상 누가 있어 주휘경의 기개를 따르겠는가? 아니, 그들은 오히려 지존에게 맞서려 했던 자신들을 회의하고 있었다.
이 때, 어디선가 한 가닥 냉혹한 외침이 울렸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반도를 처리하는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어서 공격해라!"
그 외침은 다시금 사태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어둠을 관류하는 호흡성은 금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라지망(天羅之網).
그들은 무려 수십 겹에 이르는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그래도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해야 옳았다. 
개방은 조직의 방대함에 있어 공히 천하제일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들의 추적술 또한 무림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덕분에 곽, 서 두 장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주서혜를 보호해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헤치고 나아갈수록 가로막는 자들의 수효는 더욱 급증했다. 게다가 부상까지 입었던 터라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자 체내의 진기는 모조리 고갈되어 버린 상태였다.
결국 세 사람은 혼전 속에서 각기 헤어지게 되고 말았다.
주서혜.
그녀는 자신이 한낱 여자라는 사실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엄한 가르침과 더불어 꾸준히 무공을 익혀 왔던 그녀였다.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여자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무인(武人)으로 인식하며 자라났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주서혜는 자신의 여린 감정선에 넌더리를 냈으며 체력의 열세에는 거의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위기를 만났으나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었고, 그 이유는 그녀의 실력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다. 
즉 개방의 고수들이 그녀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아울러 아직도 그녀에 대해 공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주서혜는 이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자존심이 상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살갗을 에일 정도로 혹독한 추위는 그녀로 하여금 더욱 더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진눈깨비는 멈췄으나 그 이후로 기온이 급강하해 있었다. 주서혜는 절로 턱이 떨리는 가운데 내심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하늘이여! 마침내 개방을 버리시렵니까? 내 차라리 아버님 곁에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을....... 개방의 운명을 걸머져 보겠다고 피눈물을 삼키면서도 비겁한 도주를 감행했건만, 설사 잡히지 않는다 해도 얼어죽게 생겼구나.'
그녀는 비탄에 잠긴 채 자신의 몰골을 힐끗 내려다 보았다. 
여전히 남장이었으나 입고 있는 의삼은 피투성이인데다가 그나마 여기저기 찢어져 피부를 은은히 드러내고 있었다. 
머리를 묶었던 끈도 언제 잘라져 나갔는지 삼단 같은 머리칼이 의삼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실제로도 막다른 곳에 처해 있었다. 전면을 비롯하여 좌우 양쪽이 다 천애의 절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길이라야 오직 왔던 길 하나 뿐으로 그 쪽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곧 추적자들을 영접하러 가는 격이었다.
"우우... 틀렸어."
주서혜는 절망에 이른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등뒤에서 한 가닥 나직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그렇구나, 혜아야. 네가 빠져나갈 곳은 없단다."
"송(宋) 할아버지......!"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안 주서혜는 그만 다리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금시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으나 억지로 이를 참으며 신형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삼 장 밖에 서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검귀옹(鐵劍鬼翁) 송시열(宋時烈).
그는 팔대장로 중 일인으로써 평생 동안 한 자루의 철검으로 무림을 질타하며 개방의 위명을 널리 떨쳐왔던 인물이었다. 
주서혜는 그를 위시한 팔대장로들을 모두 할아버지라고 불렀었다. 그것은 그만치 믿고 따랐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시열 같은 경우에는 무인으로써 무척 존경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검극(劍極)을 들이밀어야 하는 적대 관계가 되고 말았으니 이전의 감정이란 오히려 피차에 거북한 짐이 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을 의식해서일까? 송시열은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혜아야, 이제 그만 포기해라. 개방은 아마도 너만은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아들여 줄 것이다."
"용서라고 하셨나요?"
주서혜의 아름다운 눈에서 일순 불꽃이 튀었다.
"누가 누구를 말인가요? 호호호호... 할아버지는 부끄럽지도 않나요? 소위 개방 장로의 신분으로 방내에서 반모를 일으키다니, 하늘에 계신 조사의 영령이 무섭지도 않은가요?"
"닥쳐라!"
송시열은 노호성을 발했다.
"반모를 꾀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아비다! 그는......."
주서혜가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제 부친께서 반도라고요? 호호호... 지나가던 개도 웃을 얘기로군요. 아버님께서 개방을 위해 그 동안 얼마나 헌신해 오셨는지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흐음!"
"저는 지켜보겠어요. 당신들이 귀문관(鬼門關)에 들어올 때 과연 우리 부녀의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있는지를!"
주서혜는 저주에 찬 외침을 끝으로 몸을 틀었다. 
휙--!
그녀의 교구가 낭떠러지를 향해 무섭게 쏘아져 날아갔다.
"앗! 미쳤구나--!"
송시열은 경악성을 발하며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는 설마하니 그녀가 절벽으로 몸을 던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삼 장의 거리를 격하여 주서혜를 가로막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오......!" 
그의 입에서 막 안타까운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찰나였다.
스읏--!
옷자락 스치는 경미한 음향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걸쭉한 욕설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크크크... 빌어먹을 잡놈 같으니! 송시열, 네 놈은 간덩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구나. 내 이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감히 반역을 꾀해?"
대체로 낮은 음성이었다. 음성의 주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엄청난 내력이 실린 사자후로써 송시열의 귀에는 벽력처럼 부딪쳐왔다. 그는 고막이 찢겨져 나갈 듯한 충격을 느끼고는 휘청하며 지면에 내려섰다.
이어 송시열은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안색은 어느 덧 밀랍처럼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가 이토록 전율을 금치 못하는 것은 비단 사자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두고 그런 욕설을 퍼부을 자는 천하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마... 만박사숙......!"
예의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네 이 노옴--! 네가 죽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이제는 감히 사숙의 외호까지 입에 담다니, 네 놈은 대체 목숨이 몇 개냐?"
이번에는 지엄한(?) 호통이었다. 
스스슷--! 
파공성과 함께 뒤이어 하나의 인영이 송시열의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뗏국물에 절어 꾀죄죄한 행색에 마구 헝클어진 백발을 머리에 얹고 있는 거지노인, 그는 다름 아닌 만박노개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한 사람이 끼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자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던 주서혜였다.
'이럴 수가......!'
송시열은 일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십년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행방이 묘연했던 개방 최고 기인이 이렇 듯 눈앞에 현신해 있는 것이었다.
음성을 들었을 때 벌써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다소 회의가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정녕... 사숙이십니까?"
"돌대가리 같은 놈! 못본지 불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거늘, 그 사이에 벌써 네 사숙의 모습도 잊었단 말이냐?"
"사숙!"
송시열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개방에 대한 충정이 남아있는 한 이런 행동은 현 방주와의 반목과는 별개였다. 
"우둔한 제자가 사숙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죽을 죄를......."
"시끄럽다!"
만박노개는 냉소하며 손을 저었다.
"내 지난 수십 년 동안 방중의 일에 관여치 않았다만 이번만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구나. 일단 제자들을 돌려보내라. 더 이상의 소란은 용서하지 않겠다."
"존명."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송시열은 즉시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이 왔던 곳을 향해 웅후한 사자후를 토해 냈다.
 
"제자들은 듣거라--!"
"와아아--!"
멀리서부터 그의 외침에 답하는 것은 함성이었다. 아마도 개방의 인물들이 그 쪽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방으로 돌아가라! 나도 곧 뒤따를 것이니라!"
사위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뜻밖의 명령에 저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한 동안 함성을 대신해 분분한 외침이 들려 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개방의 고수들은 난데없는 퇴각 명령에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박노개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송시열."
"네, 사숙."
송시열은 다시금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 그 동안 말은 안했다만, 네 놈의 자질을 특출하게 보고 방주를 도와 개방을 크게 부흥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노라. 그런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누대에 걸쳐 본방은 충혼을 맥으로 하여 이어져 내려 왔거늘, 네 놈이 버러지들과 작당을 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하극상을 범하다니......."
만박노개는 장탄식 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전신을 세차게 떨더니 이마를 땅에 박았다. 
"사숙, 그럼 어찌 하오리까? 이번 일은 삼목사숙(三目師叔)께서 직접 주관하셨은즉 제자로서는 어떻게 해도 하극상은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뭣이! 삼목사제라고?"
만박노개의 빗자루 같은 흰 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괘씸한! 대체 누가 삼목노개로 둔갑해 일을 벌였단 말인가? 그는 시체가 되어 북망산의 고분 안에 누워 있지 않은가?'
그는 만면에 분노를 떠올리는 한편, 송시열을 정시했다.
"좋다! 이 일에는 웬지 구린내가 나는구나. 내 네 놈들에게 맡기지 않고 친히 나서서 조사해 보겠노라."
"제자도 그것을 원합니다."
"일의 진상을 규명하기 전에는 너를 치죄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사숙."
"그러나 명심해라. 내가 조사를 하는 동안 너는 나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언급해서는 아니된다."
"알겠습니다."
"꺼져라, 네 놈의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럼... 제자, 다시 뵈올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송시열은 고개를 조아려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실종되었던 전대(前代)의 인물이,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나타나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그 때까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만박노개는 송시열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옆구리에 끼고 있던 주서혜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혼혈을 짚혀 줄곧 의식을 잃고 있었다. 
만박노개는 주서혜를 깨우려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신이 들어 보았자 이로울 게 없겠군. 쯧! 이렇게 탈진한 상태에서 부친의 죽음을 알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놀랍게도 그의 음성은 일변해 있었다. 방금 전의 창노하고 걸걸한 음성은 어디로 가고 영락없이 낭랑한 젊은이의 그것이었다.
아무튼 그 뒤를 이은 것은 계속하여 깊은 탄식이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로군. 졸지에 부친을 잃고 수십만에 이르는 방도를 다스리며 개방을 이끌어 가야하니......."
이윽고 만박노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해야겠군."
그는 주서혜를 옆구리에 낀 채 신형을 날렸다.
휘익--!
허공을 솟구치는가 싶더니 그는 삽시에 절벽을 따라 스치듯 날아가고 있었다. 실로 절묘하고도 비쾌한 신법이었다.
<조사령(祖師令)으로 명하노니,
북육성(北六省)과 남칠성(南七省)의 백이십여 분타주(分陀主)는 즉시 개방의 신방주(新幇主) 즉위식에 참가하라.
       팔대장로(八大長老) 공서(共書)>
한 장의 붉은 첩지가 개방의 각 분타로 날아들었다. 
이로 인해 개방에는 일대 소요가 일었다. 첩지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그것과 더불어 실로 믿기 어려운 소식 두 가지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는 방주인 주휘경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개방의 방도들에게 축출 당하고, 그들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삼목노개(三目老 )의 출현이었다.
삼목노개로 말하자면 만박노개와 함께 개방에서는 가히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년 전, 정사대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실종되었다.
그런데 개방의 인물들로 하여금 정작 충격을 입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사건의 상관 관계였다.
삼목노개는 현 방주의 사숙조뻘이다. 그러한 그가 갑자기 나타나 방주를 반역자로 지목했다. 즉 전대 방주를 독살하고 음모 가운데 방주의 위를 찬탈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삼목노개는 방주인 주휘경을 죽음으로써 치죄 했노라고 공표하기에 이르렀고, 이 또한 개방의 모든 인물들의 귀로 전해졌다.
동백산 소운곡(巢雲谷).
이 곳은 넓이가 수마장에 달하는 하나의 분지(盆地)다.
그런데 정오가 조금 지나자 그 광활한 분지는 온통 개방의 방도들로 꽉 들어찼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수 개의 초붕(草棚)에는 각처에서 모인 분타주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서열이 낮은 하급의 무리들은 맨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마디로 분지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사람들로 메워졌다. 
그러나 그들 사이로는 바늘 한 개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결같이 엄숙한 신색으로써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정적과 더불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눈에 띄는 두 인물이 있었다.
한 명은 벙거지를 쓴 거지였는데, 그 옆에 한 명의 다른 거지를 대동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의 거지는 유난히 몸매가 작고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데다가 전자의 거지를 행여 놓칠세라 바짝 따라 붙고 있었다.
"정말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앳되어 보이는 거지가 주위를 휘이 둘러 보더니 벙거지를 쓴 인물에게 속삭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음성은 듣기가 거북했다. 왜냐하면 가느다란 음성을 억지로 굵게 내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벙거지를 쓴 거지가 나직하게 응수했다.
"용기를 가지시오, 주낭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더욱이 낭자의 부친께서는......."
그가 말끝을 흐리자 소년 거지는 오히려 생긋 웃었다.
"그래요. 선친(先親)께서 저를 굽어보고 계실 거예요."
웃고 있는 그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 올랐다. 이어 운명과도 같은 탄식이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직하게 새어 나왔다.
"과연 제가 남자였어도 이랬을까요? 아버님의 위업을 대행해야 하건만 매사가 이렇듯 두렵게만 느껴지니......."
타고난 여인으로서의 본성과 주어진 운명으로 인해 자신을 혐오하게 된 소년거지, 그는 다름 아닌 주서혜였다. 
위대한 방주를 부친으로 두었을 때는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현실, 즉 자신이 나약한 일개 여인에 불과하다는 점에 대해 그녀는 내내 통한의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벙거지의 인물은 바로 진일문이었다. 그리고 만박노개로 변장해 개방의 변괴에 뛰어 들었던 것도, 또 주서혜를 죽음 직전에서 구출해낸 것도 모두 그였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낙척서생 주휘경만은 진일문도 끝내 구해내지 못했다. 대신 그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 때에 주휘경은 진일문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주서혜를 도와 개방의 위계를 바로 잡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것이다.
진일문.
그는 여러 방면으로 신중하게 검토한 후, 이 회합에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간단하지 않은 문제일수록 정면으로 맞닥뜨려 승부를 내는 것이 바로 그의 방식이었으므로.
진일문의 그런 성향은 주서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부친의 죽음을 전해듣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으나 그에게 감화를 입어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진일문이 특별히 그녀에게 상기시켜 준 것은 그녀가 무가(武家)의 피를 이어 받은 여인이라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일반의 여인과는 다르다는 긍지를 그녀의 심중에 심어놓았던 것이다.
'후후...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
진일문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주서혜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자 고소를 지었다. 그가 왜 모르겠는가? 운명을 헤쳐 나오며 그 자신이 겪은 한 단계인 것을.
과연 이들의 앞날은?
- 제2부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