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가행 제4권 검궁인 저 31장 만박노개(萬博老 )의 후인(後人) "와아--!" 분지가 온통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팔대장로가 누대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개방의 팔대장로라면 개방 내에서 뿐만 아니라 무림에서의 명성도 지대하다. 그들의 영향력이 방주 다음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때로는 장로회의의 의결을 거쳐 방주의 행동에 대한 구속력까지도 발휘할 수 있다. 더구나 개방이 천하제일의 조직력을 지닌 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어느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대에 오른 사람은 하나같이 늙은 거지들이었다. 매듭을 여덟 개씩이나 메고 있는 인물들로 눈에서 뿜어지는 안광이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이로 미루어 공력이 심후한 내가 고수들이라는 점은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만 했다. 그들은 엄숙한 눈빛으로 누대 아래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나서며 낭랑하게 외쳤다. "여기까지 오신 제자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요." 장미신개(長眉神 ). 그는 개방의 장로들 중에서도 수석장로였다. 인망이 높아 방중의 제자들로부터 유독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방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기업을 이어 내려왔소. 그러나 여러 형제들의 피와 땀이 없었던들 작금과 같은 성세는 이룰 수 없었을 것이외다. 돌이켜 보면 숱한 영욕과 그 뒤안길에는 많은 동도들의 희생이 뒤따랐었소." 그 말에 장내는 더할 나위 없이 숙연해졌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는 얼마가지 않았다. 불현듯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던 것이다. 소요가 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팔대장로들 중 곽, 서, 기 세 장로가 보이지 않고 예고도 없이 다른 세 명의 인물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으니 왜 안그렇겠는가? 장미신개가 손을 내젓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오늘 이 자리의 모임을 갖고자 한 것은 중대한 안건이 있기 때문이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십여 년 전, 전대 방주의 독살 사건에는 의혹의 여지가 다분히 있었소. 그런데 최근에야 그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소." "아!" "범인은 대체 누구요?" 장내는 금새 충격의 파장을 일으킨듯 술렁였다. 사실 그 건이라면 이미 첩지를 통해 전 개방도들에게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의 중요성으로 보건대 단지 첩지 한 장만으로는 믿기 어려워 재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미신개의 음성은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정순한 공력으로 인해 분지 내에 모여있는 전 개방도들의 귀에 들어갔다. 또한 그 말이 불러 일으키는 반향은 점입가경이었다. "우리 모두가 십년 동안 기만을 당하고 있었소. 범인은 미리 공고했다시피 바로 주휘경이었소."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전해들은 바는 있었지만 장미신개의 입을 통해 직접 그 말을 듣게 되자 더 이상은 사실여부를 회의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 한 인물이 일어서며 외쳤다. "소생은 상산분타(湘山分陀)의 구지철개(九指鐵 ) 허환(虛環)이오." 그는 초봉에 자리 잡고 있던 인물로서 상산분타의 분타주였다. 평소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개방 내에서 신임이 두터운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치 그의 한 마디는 방 내에서 비중이 높다고도 할 수 있었다. 과연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환에게로 쏠렸다. 그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웅후한 음성을 토해냈다. "대체 장로들께서는 어떻게 그 일을 규명지으셨단 말이오? 경위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 한 정확한 판단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드오이다. 이 일에는 필히 방주의 해명이 따라야 할 것이외다." 이 말은 곧 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현 방주의 죽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허환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팔대장로에 대한 불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봐야 했다. 장미신개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스쳤다. 그러나 정황이 정황인지라 그는 금새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형의 말이 옳소. 하지만 이 일을 가볍게 처리한 것은 절대 아니오. 장로희의를 거친 것은 물론 그 전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소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전대 방주는 칠일단장산(七日斷腸散)에 중독되어 살해당했소. 칠일단장산의 제조자라면 누구겠소? 본방의 오독신타(五毒神陀)를 빼놓고 천하에서 그런 극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없소." 장내에는 무거운 침음성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인들은 장미신개의 음성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오독신타는 사건 직후 실종되어 그 동안 본방에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게 했었소. 그런데 이번에 그 자가 잡혀와 음모의 전말을 고스란히 알게 되었소." 장미신타는 자신의 누대의 뒤쪽을 향해 명을 내렸다. "죄인을 대령시켜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년의 두 거지가 한 명의 늙은 거지를 끼고 나왔다. 그를 보자 장내에는 또 다시 소요가 일었다. "오독신타다!" 누군가의 외침이 가리키는 인물, 그는 얼굴이 검고 등이 낙타의 혹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온 꼽추였다. 용모와 신체적 특징상 그는 십여 년 전에 실종되었던 오독신타가 틀림없었다. 장미신개가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봉노삼(峯老三), 이 곳에 모인 동도들에게 사실을 밝힘으로써 조사의 영전에 나아가 참회를 할 기회를 주겠다. 어서 바른대로 실토를 해라." 오독신타 봉노삼은 시야가 흐린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눈은 겉으로 보기에도 뽀얀 기운이 어려 있어 시선이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호했다. "나는... 쿨룩, 쿨룩......!" 오독신타는 입을 열기가 무섭게 기침을 해댔다. 뿐만 아니라 기침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는 몹시도 괴로와했다. 기침이 진정되고도 한참 후에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나는 당시 주휘경의 청부를 받고 그 짓을 했소. 이는 일점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오." "우우--!" 일순 군호들의 입에서 분노에 찬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일찍이 개방에 이처럼 크나큰 오욕은 없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분노는 삽시에 거세게 번져갔다. 장미신개가 그들을 대신하듯 다시 오독신타를 추궁했다. "그대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벌였는가?" 봉노삼은 더듬더듬 대꾸했다. "당시 주휘경은 방주님께 한 가지 비리를 들켰는데... 그로 인해 본방에서 축출 당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 나는... 주휘경의 감언이설에 속아... 그가 장로로 승격시켜 주겠다고 하기에 그만... 쿨룩! 쿨룩......!" 장미신개는 역시 뒤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두 명의 장년거지가 즉시 봉노삼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장미신개는 군호들을 한 차례 쓸어보며 말했다. "여러분도 이제 들으셨으니......." 구지철개가 장미신개의 말을 끊고 나섰다. "잠깐!"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장미신개와 맞섰다. "죄를 확정하기 전에 이 사람이 한 가지 더 여쭙겠소이다. 주방주는 그 뒤 어떻게 되셨소이까?" 구지철개 허환. 그의 태도에는 조금도 굴하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낙척서생 주휘경이라면 추후로 개방의 역사를 논한다 해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교분은 따로 없었지만 그는 주휘경을 지극히 흠모해오던 터였다. 방주의 위(位)에 오른 것만 해도 본인이 탐내서가 아니라 주위의 추대였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자 장미신개도 분노보다는 탄식을 보였다. "불행한 일이오만 주휘경은 본방의 삼십육천강수(三十六天 手)와 칠십이지살(七十二地煞)의 추적을 받자 그들 태반을 죽이고 그 자신도 죽었소." "아!" 허환의 눈썹이 불끈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장내에는 장탄식이 울렸다. 그들은 애도와 더불어 개방의 어이없는 처사에 노골적으로 반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어도 방중의 대사(大事)가 이런 식으로 처리된 적은 없었다. 의당 공개적인 문초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방도들로 하여금 본인의 진술은 들을 수 있게 했어야 했다. 팔대 장로의 권위가 높다 한들 방주를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설혹 방주가 흉사의 진범이라 한들 어찌 그들이 감히 임의로 방주를 추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내세운 증거라는 것도 그렇다. 죄인과 대질을 시켜 자인(自認)을 받아 내기 전에는 어쩌면 혐의를 덮어씌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오독신타 정도를 협박하여 위증을 하게 하는 일이란 팔대장로의 위치로 보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더욱이 그는 언뜻 보기에도 그런 냄새를 역력히 풍겼었다. 군호들의 기색은 점차 그 흐름을 달리 했다. 누구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마다 석연치 않아 하는 눈치와 더불어 은연중 분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누대 위의 팔대장로들은 군호들의 심중을 모르지 않았다. 그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와 똑같은 심적 갈등을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미신개는 내심 통탄을 금치 못했다. '만일 이들에게서 이 의혹을 지우지 못한다면 향후 개방은 크고 작은 숱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주휘경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이 일로 인한 개방의 분열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군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시 정세가 워낙 급박하다 보니 일처리에 다소간의 무리가 있었소이다. 본인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여러 동도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소. 그 점에 관해서는 본방의 조사어른께서 직접 존체를 나타내시어 말씀이 계실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소리가 연달아 세 번 울렸다. 둥둥둥--! 누대의 뒤에서 한 인물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 자는 일신에 마의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가 출현과 동시에 장내에는 갑자기 큰 소란이 일어났다. "삼목신개시다!" "삼목노조께서 돌아오시다니--!" 장내는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화했다. 삼목신개가 누구인가? 그로 말하자면 만박노개와 함께 개방을 부흥시킨 인물로써 절대적인 위명을 구축하고 있는 기인이다. "이번 일은 전부 이 늙은이가 지시했네." 삼목신개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미간에 있는 또 하나의 눈(目)이 유독 신광을 발했다. 그로 인해 나직한 그의 음성은 중인들의 가슴에 더욱 더 기이한 공명을 울렸다. 실상 그의 음성은 일종의 사자후로써 음공을 발휘하고 있었 다. 때문에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중인들의 귀에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것이기도 했다.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이 정도의 내공을 가진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오오! 삼목노조시여--!" "천세노조(千歲老祖)!" 바야흐로 장내에는 감격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중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힘과 덕을 겸비한 지도자다. 그들이 주휘경을 잃고 분개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었다. 무림에 개방의 위세를 떨쳐 무당이나 소림에 느꼈던 열세를 만회했던 것도 그였고, 사대신가, 혹은 무림의 정국을 가늠하는 당금의 삼개 단체와 어깨 겨루기를 시도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무림 최고의 원로이면서 절정고수의 서열에 올라서 있는 삼목노조가 활동을 재개한다면 상황은 다르다. 개방은 더 이상 주휘경의 산화를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삼목신개는 환영하는 개방도들을 향해 담담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오십여 년만에 이렇게 형제들과 재회하게 되니 이 늙은이도 기쁘기 한량없으이." 그의 미간에 있는 또 하나의 눈도 더불어 웃었다. 그는 중인들을 지그시 응시하며 품속에서 하나의 깃발을 꺼냈다. 삼각형의 소기(小旗). 전체가 누런빛을 띈 그 깃발은 길이라야 겨우 한 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분명히 한 쪽 면에는 조(祖), 다른 한쪽 면에는 사(師)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을 대하자 분지 안의 군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조사령(祖師令)을 알현하나이다!" 정녕 일대 장관이었다. 천여 명이 훨씬 넘은 거지들이 동시에 오체복지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피가 끓어오르게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 진일문과 주서혜도 군호들 사이에 섞여 이 광경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주서혜가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저 자가 조사령을 지니고 있는 한, 일은 틀렸어요. 저들은 설사 아버님이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등을 돌릴 거예요."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실망할 것 없소. 저 자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니까. 나도 개방을 위해서라면 저 자가 진면목이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랬다면 주방주를 모해하는 일 따위는 절대 벌이지 않았을 것이오." "어떻게 그렇게 단정짓죠?" 주서혜의 물음에 진일문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삼목노조는 벌써 오십 년 전에 이승을 하직했소. 내 눈으로 직접 그의 시신을 확인한 바 있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감히 노조를 사칭하는 자가 눈앞에 뻔뻔하게 나타나다니......." 주서혜는 놀라는 한편 치를 떨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는 비단 억울하게 죽어간 부친의 명예 회복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방 전체의 안위가 걸려 있은 즉 목숨을 내걸고라도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대사건이었다. 진일문은 내심 의문이 솟구쳤다. '변장은 그렇다치고 저 자는 어떻게 조사령을 손에 넣었을까? 설마하니 그 고분 안으로 들어가서 빼내온 것은 아닌지......?'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둥둥둥--! 다시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러자 삼목신개는 뒤로 물러서더니 미리 준비된 태사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를 대신해 장미신개가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 본인은 사숙 어르신의 명을 받고 한 인물을 선출해 신임방주로 임명하고자 하오." "잠깐! 멈추시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 음성은 장미신개의 외침을 누르며 넓은 분지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이의가 있소이다." 갑작스런 반전에 중인들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곧 어리둥절한 기색이 떠올랐다. 왜 아니겠는가? 상대는 뜻밖에도 방갓을 써 용모를 감추고 있을 뿐 아니라 허리에 두르고 있는 새끼줄도 불과 네 겹밖에 되지 않는 하급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 의외의 인물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진일문이었다. 그를 보자 누대 위에 서 있던 팔대장로들도 한결같이 미간을 모았다. 그것은 네 따위가 무엇 때문에 나섰느냐는 뜻이었다. 그에 반해 진일문의 태도는 필요 이상으로 당당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비굴해 보이지도 않는 담담한 것이었다. 그는 대체로 편안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이 알기로 방주의 직위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신물이 있어야 하오. 그런데 방주께서 지니고 계셨던 신타령과 타구령은 지금 어디에 있소이까? 그 두 가지 신물이 없는 이상 방주로 뽑힌 자라 해도 대권을 행사할 수 없지 않소이까?" 그 말에 군호들은 하나같이 호응을 보였다. "옳소! 그 말이 맞소--!" 군중심리란 선동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조종이 가능하다. 진일문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기 위해 오히려 공격적인 자세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의도가 적중하자 당황한 것은 팔대장로들이었다. 아무리 지고한 신분이라해도 공개석상에서는 옳건 그르건 중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목신개가 불쑥 나서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누가 타구령과 신타령이 없다고 하던가?" 진일문은 일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저 자가 그 두 가지 물건까지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때마침 주서혜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안심하세요. 저 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 두 가지 물건은 아버님이 넘겨주셔서 제 수중에 있어요."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누대를 향해 말했다. "신물이 있다면 속히 형제들에게 보여 주시기 바라오."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의 제자냐?" 삼목신개도 보통의 인물은 아닌 듯 했다. 경황 중에도 그의 어조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진일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조소가 스쳤다. "심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본인은 무명소졸인지라 이런 자리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소이다. 자칫 이름을 댔다가 귀한 분들의 웃음을 사게 될까 두렵소이다." 삼목신개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본방의 서열이 추상같거늘 그대는 이 사조의 말조차 거스리려 하는가? 어서 신분을 밝혀라." 군호들은 숨을 죽이는 일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개방의 유사이래 이렇듯 연속적으로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방주의 폐위나 수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사조의 재출현도 그렇지만 특히 새까맣게 서열이 낮은 자가 조사뻘의 인물을 상대로 따지고 드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진일문. 일단 장내를 크게 경동시켜 놓은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주서혜의 손을 이끌고 천천히 누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미적거리지도 않았다. 그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에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남녀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원래 개방에는 무수한 기인들이 존재한다. 일신에 기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거지라는 신분을 자처하듯 그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때로 사태를 기이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재주도 가지고 있다. 개방의 방도들은 진일문에게서 바로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최소한 개방의 최고 배분인 사조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단단히 믿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느 새 삼목신개에 대한 열광을 접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진일문에 대해 흥미를 보였다. 누대에 오른 진일문은 팔대장로들에게 포권을 했다. 중인들 사이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실로 뜻밖이었다. 예를 올려야할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실 삼목신개라면 서열상 대례를 올려야 마땅했다. 그런데 세 개의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 그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단지 팔대장로에게 포권을 하는 것으로써 인사를 끝내 버렸으니....... 분개한 것은 오히려 장로들이었다. 그들의 눈썹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진일문이 삼목신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정녕 타구령과 신타령을 가지고 있단 말씀이오?" 삼목신개가 진일문을 노려 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신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눈빛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고 말리라. 하지만 진일문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는 그를 보며 삼목신개는 무겁게 말했다. "물론 노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삼목신개는 소매 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한 자 길이의 봉과 가로 세로의 길이가 반 자 가량 되는 목갑이었다. 군호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틀림없이 타구령과 신타령이 들어있는 목갑이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의 냉소가 그 뒤를 이었다. "후후... 그것은 모조품이오." 별로 크지도 않은 그 한 마디는 그야말로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삼목신개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뭣이?" 진일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여기에 진품이 있기 때문이오. 본방에서는 사조를 지극히 모시지만 그렇다고 그 분을 위해 진산지보를 둘씩이나 마련한 적이 없소." "흥! 맞아요.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요." 곁에서 주서혜가 앙칼진 음성과 함께 품속에서 타구령과 신타령을 꺼냈다. 그녀의 손에 들려져 있는 물건을 보게 되자 군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우--!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일순 삼목신개의 눈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특히 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눈에서는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로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단 철검귀옹(鐵劍鬼翁) 송시열을 제외하고는. 송시열이 탄식과도 같은 침음성을 내뱉았다. "결국 저 아이가......."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곁에 있던 장미신개가 그 음성을 듣고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요? 송장로." 송시열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를 잘 보시오. 서혜가 아니오?" "흐음?" 장미신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도 역시 주서혜를 알아 보고는 흡사 충격과도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팔대 장로들 치고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귀여워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를 직접 대하게 되자 가슴이 쓰려 왔다. 송시열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연민을 가지고 주서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서혜가 이끌어 갈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송시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에 의해 구해졌고,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는지를. 그의 심중에서는 소리없이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만박(萬博)노조가 뒷일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어쩌면 서혜와 같이 온 자는 그 분이 보내신 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장미신개에게 한 마디를 더 건넸을 뿐이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그대로 참고 있어 주시오." 어느 결에 그 말을 들었는지 유장로가 거들었다. "내 생각도 송장로와 같소이다. 우리 기다려 봅시다. 주방주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이 있소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속고 있는지도 모르오." "속다니......?" 장미신개의 노안이 충격을 거듭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의 전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도 어느 덧 현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눈이 꿈틀거린다.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한 광경이었다. 삼목신개의 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불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는 신체의 기형(奇形)으로 중인들을 압도하기도 했지만 작금에는 하나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분노를 어찌 표현한들 그다지도 무시무시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는 눈을 통해 상대의 심기를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이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낭랑하게 말했다. "신물은 오직 하나뿐이오. 그리고 진가를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오. 두 개의 신타령을 부딪쳐 보면 되니까. 후후... 삼목노개, 당신에게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소." 그것은 두 번째 폭탄선언이었다. 그는 신물의 진위를 분간하는 방법을 제기했다기 보다는 사결의 제자로써 하늘같이 높은(?) 삼목노조를 비웃고 있었다. 덕분에 장내는 온통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중인들은 놀란 나머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때였다. "발칙한 놈 같으니! 감히 노조께 그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네놈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오분시해 주겠다." 휙휙--! 외침이 울리더니 동시에 삼인이 진일문을 덮쳤다. 아울러 그들은 말 그대로 살수를 펼쳐왔다. 진일문은 가소롭다는듯 혀를 끌끌 찼다. "쯧! 주방주를 몰아 세우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군. 살인멸구(殺人滅口) 따위의 유치한 수단은 한 번은 어찌 통했을지 몰라도 두 번은 안되오."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나직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음성은 진동이 커 누구든지 똑똑히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덮쳐온 자들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 장로에 임명된 세 사람이었다. 진일문은 몸을 날려 그들의 공세를 피하며 시라도 읊듯 중얼거렸다. "동쪽을 치고 서쪽을 향해 손을 흔드니 한 쪽이 비었더라. 왼발로 황하를 건너고 오른발로 동정호의 물을 막으니 어찌 교묘하다 하지 않으리?"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은 중인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천하를 주유하며 비무하기를 일상처럼 즐기던 인물, 그것은 바로 당년의 만박노개(萬博老 )였다.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등장한 것이 주서혜였다. 그녀가 왜소한 신형을 날려 세 장로를 맞이했다. 바람만 불어도 날려가 버릴듯 가냘픈 주서혜가 한 손으로는 동쪽으로 공격해 오는 장로를 밀어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반대쪽의 장로를 잡아채 갔다. 이어 두 발을 번갈아 내딛는가 싶더니 왼쪽으로 나갈듯 하다가 방향을 급선회해 오른쪽으로 발길을 날렸다. 펑! 퍼퍽--! "흑!" "커억!"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세 장로들이 안색이 변한 채 일제히 뒤로 주르르 밀려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주서혜의 쌍장과 두 번의 발길질이 그들을 퇴치해 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서혜의 내력이 세 방향으로 힘을 쪼개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간신히 큰 부상만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망신살만은 어떻게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연약해 보이는 인물에게 당하고 보니 그들로서는 방도들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와아아--!" 중인들은 이 격돌에 환성을 올렸다. 무릇 인간의 마음은 은연중 약자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앞서 있었던 청년의 읊조림이 그들의 사고 방향을 뒤바꾸어 놓았다. 주서혜의 승리는 누가 보아도 진일문의 도움 때문이었다. 그는 만박해초결로 세 사람의 무공에서 보이는 헛점을 재빨리 간파해 내고는 그녀에게 파해법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 장로를 물리치는 것은 약간의 무공만 소지하고 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당사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의 얼굴에도 스르르 기쁨이 번졌다. 송시열의 노안에는 어느 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오오! 개방의 충혼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한편. 주서혜에게 패한 세 장로들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군호들이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 집어 치워라! 적어도 도의가 살아 있는 한 방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비겁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 장로들이 된 세 사람에 대해 한결같이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런 데다가 체면도 잊은 듯 다시 덤벼들려 하자 이를 가만히 보아 넘기지 못했다. 진일문이 이 때를 이용해 크게 외쳤다. "동도들이여!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행위요? 개방은 유사 이래 광명정대함을 근간으로 삼아 왔거늘, 장로란 자들이 일개 제자를 상대로 연합 공격을 펴다니! 대체 개방의 명예와 도의는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이오?" "우우우--!" 누구라서 동조하지 않겠는가? 세 장로를 향한 군호들의 야유는 거의 함성으로 화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서혜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가락으로 삼목신개를 가리켰다. "여러분! 사실 조사령이 가짜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저 삼목노개가 가지고 있는 신타령이 가짜라면 조사령 또한 가짜일 수도 있지 않겠소?" 그는 자못 엄숙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감히 목숨을 내놓고 천명하겠소. 가짜인 것은 무엇보다 삼목노조를 사칭하고 있는 저 자요." "맙소사! 그, 그럴 수가......!" 장내는 삽시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의 세 번째 폭탄선언은 실로 전 개방을 발칵 뒤집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개방은 정체불명인 한 인물의 농간에 의해 철저히 놀아난 셈이다. 과연 방주인 주휘경의 죽음과 그에 따른 엄청난 희생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삼목신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은 물론 당혹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삼목신개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자신도 진일문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예상을 못했던 모양이었다. "네 놈은 누구냐?" "그러는 당신부터 정체를 밝히시오." 진일문의 담담한 응수였다. 그는 삼목신개의 분기탱천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추호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대치한 채 서로를 직시했다. 삼목신개가 가진 세 개의 눈에서는 각기 으스스한 살광이 폭사되었다. 반면에 진일문은 방갓을 쓰고 있어 누구도 그의 눈빛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삼목노개만은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방갓의 틈 사이로 유현한 빛을 흘려 내는 한 쌍의 눈을. 삼목신개는 일순 가슴이 섬뜩해졌다. '대체 누구길래 저런 눈빛을 가졌단 말인가? 음성으로 미루어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설마하니 저 정도 나이에 화후가 등봉조극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윽고 삼목신개는 내심 이빨을 갈았다. 상대가 누구이던 분명한 것은 대세가 이미 틀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죄다 공염불로 화할 공산이 컸다. 삼목신개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감히 노부에게 되지도 않는 소리를 갖다 붙이다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내 너를 제압한 뒤에 어떤 자의 조종을 받고 있는지 단단히 문초를 하겠다." 그의 옷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은은히 진동음이 울리며 무형의 기류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쯤 되자 진일문으로서도 결코 태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주서혜를 뒤로 물러나게 한 다음, 전권으로 나섰다. 군호들의 시선은 삼목신개와 진일문, 두 사람에게 못박혀 있었다. 한 명은 개방의 조사인 삼목신개이며 다른 한 명은 신분조차 밝히지 않은 무명의 사내일 뿐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의당 삼목신개에게 던져져야 할 성원이 예의 무명인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심중에 던져진 한 가닥의 거대한 의혹 때문이었다. 삼목신개는 왼쪽으로 원을 그리듯 느릿하게 돌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은 여전히 바람을 잔뜩 머금은 듯 부풀어올라 있었다. 진일문. 그의 신형은 제 자리에 우뚝 고정되어 있었다. 방갓에 가리워져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에게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일전은 양자가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최후의 고비였다. 무릇 승부의 세계란 패자(敗者)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 진일문은 지금 외견상 만박노개의 후인으로써 전대의 인물인 삼목신개를 꺾어야하는 입장이므로 무조건 이겨야 했다. 삼목신개의 입장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누구이든 승리를 쟁취하고 나면 상황은 다시 뒤집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도 역시 전력을 다해 자웅을 겨루어야만 했다. 삼목신개의 눈동자에서 문득 한 가닥 자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를 본 진일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은 무슨 무공인지는 모르나 절대로 개방 전래의 무학이 아니다. 사이한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필경 상상도 못할 마공(魔功)인 것 같구나.' 진일문은 이를 지그시 물며 기다렸다. 어차피 상대의 무공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해 내지 못했던 터라 이정제동(以靜制動)으로 제압하고자 결정을 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삼목신개의 눈에서 뿜어지는 자광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슷--! 삼목신개의 헐렁한 소맷자락 속에서 불쑥 장(掌)이 뻗어 나왔다. 물론 그것은 본능적인 감각을 통해서 느낌으로 전달 받았을 뿐이지, 육안으로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삼목신개의 공세는 빨랐다. 한 줄기 칼날 같은 강기가 심장을 향해 쇄도해 올 때에야 비로소 진일문도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마주 장력을 날렸다. 콰쾅--! 굉렬한 폭음이 일었다. 그 바람에 누대가 흔들리자 절정의 고수들인 팔대장로들마저 어이없도록 휘청거렸다. 당사자인 두 사람은 똑같이 두 걸음씩 물러났다. 이들의 수장 교환이라야 엄청난 속도로 인해 겨우 장로급만이 알아 보았을 뿐, 중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도무지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화가 있기는 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자리가 애초에 서 있던 위치와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진일문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되 그는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놀라기는 삼목신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비공(秘功)을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이를 거뜬히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뒤로 밀려나게까지 했던 것이다. 두 번째의 접전에는 상황이 거꾸로 되었다. 이번에는 삼목신개가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진일문이 그를 축으로 하여 원을 그리듯 맴돌기 시작했다. 진일문은 상대의 공력 수준을 알아 보고 모험을 감행했다. 즉,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시도해간 것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천하의 어떤 무공이라도 마음 먹은대로 전개할 수가 있을 뿐더러 손만 뻗으면 여하한 초식도 자유자재로 구사해낼 수가 있었다. 파파팍--! 예리한 경풍이 일었다. 진일문이 연달아 십오장을 시전하고 있었다. 삼목신개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십오장의 무시무시한 공세를 놀랍게도 하나하나 정확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의 신형은 한데 어울려 풍차처럼 돌아갔다. 실로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두 사람 모두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물고 물리는 공방수세의 형국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수히 자리가 뒤바뀌고 누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 여파를 두려워한 나머지 중인들은 제각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잔뜩 몸을 사린 채 관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수가 더해질수록 진일문은 점차로 신명이 올랐다. 사실상 고수다운 고수를 만나 공방전을 치뤄본 적이 없는 그는 이 싸움에서의 긴박감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만박해초결이란 본시 총 육천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무학비결로써 자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오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실전에의 응용이 그 첩경이었다. 아울러 취화상이 전수한 천하제일의 기공, 즉 돼지신공 역시 그에게 더 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자신도 모르게 격발되어 상대의 진기를 속속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목신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곤혹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져 가는데 몹시도 놀랐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체내에서 전에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진기가 급속도로 소모되며 단전이 텅 빈 듯 허해져 가는 괴현상이었다. '이 때다!' 진일문은 마침내 그의 정신이 흐트러진 것을 알고는 전력을 다해 공세를 펼쳤다. 파파파팟--! 순식간에 누대는 장영과 권각의 그림자로 뒤덮혔다. 그것은 마치 수려한 무(武)의 제전이 벌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퍼퍼펑--! 삼목신개의 즉각적인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 바람에 굉음은 연속적으로 분지를 뒤흔들어 놓았다. "으음......." 삼목신개의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날아오는 권장을 다 막아내지 못하고 십오지 가운데 삼지에 적중 당했다. 그의 소맷자락에는 소리없이 구멍이 뚫렸다. 고수들의 대결에 있어 이것은 곧 패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삼목신개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세를 조금도 꺾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소를 터뜨리며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흐흐흐... 이 찢어죽일 놈!" 그의 어투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본색을 드러 내려는 것이었을까? 그의 음성은 이제 근엄한 개방 노조의 그것이 아니라 희대의 마두와도 같이 돌변해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우두둑--! 삼목신개의 팔이 뽑히듯이 앞으로 튀어 나왔다. 그의 쌍수는 완전히 자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공(邪功)을 발휘하기 시작했군.' 진일문은 내심 경각심을 다졌으나 간발의 차이로 그만 어깨에 일격을 맞고 말았다. 펑--! "윽!" 신음과 함께 그는 휘청 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삼목신개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진일문을 덮쳤다. 이 때, 중인들 중 누군가가 공포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아! 마교의 자하공령수(紫霞恐靈手)다." 진일문도 그 외침을 들었다. 그러나 피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후두두둑--!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이 이는 보랏빛의 강기가 뇌전처럼 쏘아져 왔다. 이에 진일문은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며 쌍장을 앞으로 뻗어냈다. 쉬이이잉--! 담담한 운무를 품은 잠경이 그의 장심에서 폭출되었다. 그것은 현고자가 전수해 준 태극환허심법을 운용하여 태극십삼세라는 무림 최고의 절초비예(絶招秘藝)를 시전한 것이었다. 쩡--! 뜻밖에도 뒤를 이은 것은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이었다. "으악--!" 비명이 터지는 순간, 시뻘건 선혈이 뿜어져 진일문을 뒤덮었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핏물을 뒤집어쓰게 된 그는 역한 피비린내를 의식하며 재빨리 방갓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목신개. 그는 손바닥이 갈라진 채 안색이 백지장처럼 되어 비칠거렸다. 손바닥은 물론 팔목까지 쪼개져 너덜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의를 상실한 듯 신형을 돌렸다. "크아악--!" 연달아 비명이 세 차례나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놀랍게도 삼목신개가 부상을 입지 않은 좌장을 휘둘러 새로 임명된 세 명의 장로들을 척살한 것이었다. "저럴 수가!" 진일문은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너무도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그 해괴한 사태를 어찌 막아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여타의 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일문을 위시하여 군호들 모두가 넋을 잃고 있을 때, 삼목신개는 그들의 머리를 타넘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우우우우--!" 긴 장소성만을 남긴 채 그는 삽시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깝군." 진일문은 누대 위에 선 채 고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추적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입장이 못되었다. 삼목신개에게 그 정도의 부상을 입히기까지 그 역시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방갓을 벗음으로 해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준수했으나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진력 소모도 그렇거니와 적지아니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또 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것은 일월맹(日月盟)의 영패(令牌)다!" 장내 군호들의 시선이 삼목신개가 사라진 곳으로부터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해졌다. 외친 자는 누대 위에서 하나의 금패를 집어 들고 있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금광이 번쩍였다. 그런 그 금패의 앞뒷면에는 각기 일월(日月)과 위진(威震)이라는 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장미신개가 그것을 보고는 참담한 부르짖음을 토했다. "그렇다면 삼목노조, 아니 그 간특한 자는 결국 마교(魔敎)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마교라는 이름이 거론 되자 군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침중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른바 공포의 대상으로써 악의 상징성을 내포한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사대전 이래 무림인 치고 그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마교로 지목 받는 일월맹의 영패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32장 책임을 종용하지 않는 사랑 주서혜. 그녀는 개방을 중흥시킨 인물, 즉 낙척서생 주휘경의 무남독녀이다. 또한 대내외적으로 개방의 일에 대해 그녀만큼 소상히 아는 인물은 없었다. 이는 일찌기 그녀를 아들로 키우고자 했던 선친의 뜻도 작용했거니와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규방을 지키는 것으로써 평생을 마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주서혜는 어릴 적부터 바느질과 요리보다는 팔대 장로들 틈에서 무공을 배웠고, 남달리 오성과 자질이 뛰어나 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왔다. 하지만 막상 방주의 위(位)를 놓고는 그녀 자신이 먼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저는 방주의 지위를 맡을 자격이 없어요." 이것은 비단 겸손이나 사양이 아니라 주서혜의 본심이었다. 부친을 도와 대소사를 처리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으나 정작 위난이 닥치자 무력감을 절감했던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이런 반응은 개방의 오(五)장로를 더없이 난처하게 만들었다. 어찌 되었건 대세는 이제 주서혜를 원했고, 그들은 주휘경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라도 그녀를 돕는 일이라면 신명을 다 바칠 작정으로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번 일을 통해 주서혜를 달리 보고 있었다. 과연 개방에 누가 있어 궁지에 몰려서도 팔대 장로들과 맞서려 들겠는가? 아직 경륜이 부족해 맹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의 기개라면 능히 개방을 지고 나갈 재목이라 판단했다. 다섯 장로는 설득이 먹혀 들지 않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의사타진을 위해 한 명의 백삼청년에게로 눈을 돌렸다. 백삼청년, 즉 진일문은 담담하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본시 누구나 양면성이 있는 법이오. 아무리 용맹한 자라 해도 위기에 봉착하면 두려워 떠는 또 하나의 자신을 보게 되오. 그런데 주낭자는 그 점으로 인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오?"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주서혜의 미간이 좁혀드는 것을 보며 그는 빙긋 웃었다. "다섯 장로들께서도 향후로 주방주를 대할 때보다 더욱 충심을 다해 주낭자를 보필하실 것이오." 오장로는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삼목신개를 사칭하는 인물에게 현혹되어 방주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주서혜와 더불어 분골쇄신하여 개방을 일으키겠다는 신념 외에는 달리 생각을 가질 처지도 못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전율이 일 지경이었다. 주휘경의 희생은 그렇다치고 하마터면 일월맹의 괴뢰에게 개방을 통째로 내줄 뻔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영향은 개방 자체 내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무림 전역에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개방의 방대한 조직력은 무림 내에서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점을 두고 한결같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오오, 천추의 한을 남길 뻔 했는지고! 자칫 개방의 천년 위업에 먹칠을 하고 마교가 무림을 장악하는데 그 선봉장 노릇을 했을 수도 있었지 않은가?' 아울러 그들은 신임방주를 결정하는 문제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금의 사태를 볼 때에 한시바삐 전열을 가다듬어 마교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후에서 그들의 이런 판단을 도운 것은 진일문이었다. 실상 그들 다섯 장로는 개방의 집회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며 조사의 영전에서 자결을 하려 했다. 그 때에 덧없는 희생과 삶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것도 역시 그였다. 진일문. 그는 만박노조의 후인이라는 입장과 함께 개방의 구성(求星)으로써 이 자리에 배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쏟아내는 한 마디는 이제 개방을 이끌어 갈 주도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서열상으로도 별 무리가 없는 일이었다. 만박노개의 직전으로 장로들과 동배이니 누가 감히 갑론을박하겠는가? 그의 말은 조용히 이어졌다. "내 주낭자를 대면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나 낭자의 성품에서 느낀 바가 많소이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가장 높이 살 만한 것은 낭자의 용기였소. 선친께서는 낭자에게 정녕 훌륭한 업을 물려주고 가신 것 같소이다." 주서혜는 부친까지 들먹이자 말문이 막혔는지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진일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십만 방도의 영수가 된다는 것은 절대 쉬운 노릇이 아니오. 그러나 필요해서 부를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즉 반드시 부응해야 하오. 개인적인 고뇌는 차후의 문제요." 그 순간, 주서혜는 보았다. 거대한 부피를 지닌 운명이 사방으로부터 자신을 꼼짝도 못하게 옭죄어 드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신임 방주를 선출하고자 한다면 개방은 그나마 안정세를 잃게 된다. 역사의 오점은 빨리 정돈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누군가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오오! 그것이 하필 나라니.......' 주서혜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구어 낼듯 잔뜩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진일문의 격려(?)가 가세했다. "하하... 소생 진일문, 개방의 신임 방주 직위에 오른 주여협께 축하드리오." "모, 몰라욧!" 주서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뛰쳐나가고 말았다. "하하하하......!" 방안에는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울려 묘한 화음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개방의 오장로. 그들은 진일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가 만박노조의 후인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특히 그의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경이감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그의 입을 통해 만박노조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들은 저마다 감격해마지 않았다. 소운곡. 군호들이 흩어지자 이 곳은 텅 비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것은 전임방주인 주휘경의 목숨을 앗아간 일월맹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들의 음모를 분쇄시킨 한 인물의 이름이었다. 이제 진일문이라는 이름 석자는 그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의미로써 각인되었다. 그들은 그 이름을 일컬어 개방의 미래라고 말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반면에 진일문 역시도 지대한 수확을 얻을 수가 있었다. 개방으로 말하자면 숫자적으로는 가히 천하 제일 방파이다. 따라서 조직력은 차치하고라도 천하 제일의 소식통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강남북 그 어디에도 반드시 개방의 분타 한 두 개는 세워져 있다. 이로 인해 진일문은 개방을 통해 짧은 시간 동안 강호의 정세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히 알게 되었다. 특별히 가장 큰 소득이라면 이런 것도 있었다. 그것은 최근에 접한 정보로써 소림(少林)을 위시해 무당파와 곤륜파 등이 모여 이른바 중원검정대회(中原劍征大會)를 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밤. 별무리가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린 것이 불과 엊그제의 일이건만 밤하늘은 어느 덧 청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운곡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곡구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안으로 들어서면 하나의 작은 소(沼)로 이어져 있어 운치가 그만이었다. 그다지 빼어난 절경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더 할 나위 없이 아늑한 곳이었다. 개방의 혈사(血事)가 이 곳에서 종지부를 찍었다면 아마도 믿을 자가 없으리라. 들려오는 한 여인의 음성 또한 애잔하기 그지없어 분위기와 썩 잘 어울렸다. "인간이란 결국 스스로 운명을 만드는 모양이지요? 타고난 모습대로 평범하게 살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순리를 거슬렀더니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군요." 남자의 웃음이 그 말을 받았다. "후후... 그럼 지금에 와서 새삼 규방으로 되돌아가라면 할 수 있겠소?" "어쩌면요.... 가끔씩은 회의가 일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정녕 낭자답지 않은 소리요. 당신은 어떻게 해도 완전한 만족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건 왜 그렇죠?" "남달리 이중적이니까." "흥! 또 그 수법이군요. 하긴 당신하고 대화를 시작한 제가 잘못이지......." "후후후......." 나직하게 속삭이고 있으나 두 남녀의 대화는 얼핏 듣기에도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음감을 통해 그 사람 사이에 교류되고 있는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인생에 관한 철학적 의미도 다분히 전해져 왔다. 쏴아--! 밤의 정적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한 크기의 소 주변에는 한 그루의 고송(古松)이 있었고, 그 아래 바위를 깎아 만든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의자에 바로 한 쌍의 남녀가 걸터앉아 있었다. 바로 진일문과 개방의 방주가 된 주서혜였다. 문득 주서혜의 음성이 설득조로 전환되었다. "저는 지금이라도 공자께서 방주의 지위를 맡아 주셨으면 해 요. 사실상 제게는 감당하기 벅찬 자리니까요." "후후... 당신은......." 진일문이 뭐라 말하려다 스스로 말끝을 흐트려 버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 했지요?" 진일문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잊지 마시오, 주낭자." "네?" "그대의 부친이 어떻게 운명하셨는가를 말이오. 그 분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보다 개방을 걱정하셨소. 그런 부친의 피를 이어받는 사람이 바로 낭자요. 부디 선친의 유지(遺志)를 잊지 말기를 바라오." 그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했으나 일편으론 몹시 냉혹하게 들리기도 했다. 주서혜는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보면 늘 느껴온 것이 있어요." "무엇을......?" "당신이 부러워요. 당신도 인간인 이상 번민이 없을 리 없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제 심중을 넘겨다 볼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어떻게 그처럼 줄곧 강한 의지로 일관할 수가 있죠?" 그녀의 음성은 다소 떨려 나왔다. "어머니는 생전에 제게 항상 말씀하셨어요. 여자에게는 남편을 받들고 평탄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요. 왜냐하면 아버님께서는 대사만을 염두에 두셨었기 때문에 어머니께 한 번도 자상하거나 다정하게 대해 줄 기회가 없었어요. 결국 어머니는 길지도 않았던 생을 한을 품은 채 살다 가셨고, 그 바람에 전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지요." 하소연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진일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인생을 통해 가지게 되는 비애는 각자 다르거니와 누구든 자신의 것을 최대치로 알게 마련이다. 그는 주서혜의 비탄에 결코 동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가 온유하고 다감한 여인이라는 것도, 그런 이면에 내재된 그녀의 강인함 대해서도 진일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수 있는 태도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진일문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일찍이 자신의 의지가 명한대로 행하시오. 그게 옳소. 그리고 사람이 나서 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오. 그러고 싶어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자가 세상에는 다수 있소." 그 말은 곧 자신의 내부에 숨어있던 한 부분을 꺼내 보인 것이었다. 문득 주서혜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녀는 손을 빼내더니 그의 품에 살며시 몸을 기대왔다. "당신은 나를 친구로만 여기는군요?" "그렇소.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고." 진일문은 부드럽고 따스한 소녀의 동체를 느끼면서도 굳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주서혜는 그의 턱밑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숨을 새근거렸다. "아니에요. 난 당신에게만은 여자이고 싶어요. 사실 가장 큰 갈등도 지금은 당신 때문이에요." "으음......." "아! 당신과 함께 이대로 어디론가 숨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누구의 손길도 미치지 않는 곳으로요." 진일문은 눈을 내리 감았다. 향기로운 소녀의 입김, 그것은 마치 좋은 술의 향기처럼 남자의 마음을 취하게 만든다. 그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주서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그녀의 다음 말은 그의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당신은 제게 있어 첫번째이자 마지막 남자예요." 그녀가 이렇듯 달콤한 속삭임과 더불어 널찍한 사내의 가슴에 전신을 맡길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주서혜는 상처를 입은 채 절벽으로 몸을 던졌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막바로 혼절하여 이후의 일은 모른다. 그러다 깨어났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발가벗기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서혜는 기겁을 하여 당장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미지의 인물이 자신의 몸에 정성껏 붕대를 감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차례 호통 소리를 듣기도 했다. -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한낱 미물일지라도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오. 그것은 모두가 살 만한 가치를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오. 그리고 낭자는 구하고자 하는 사람 앞에서 죽으려할 정도로 예의도 모르오? 그것은 정녕 주서혜의 삶을 뒤바꾸어 놓을 정도로 호된 질책이었다. 실제로 그 순간의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지고가야 할 책임을 통감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직후, 그녀는 살아났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러했다. 그녀가 가진 이성의 문은 그 순간에 활짝 열렸다. 몸을 보였다는 수치감을 배제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일면 감동과 희열이 되어 그녀의 심금에 기묘한 울림을 전했다. "저는 그 때 결심했어요. 만일 제가 누군가의 아낙이 된다면 그 상대는......." 차마 그 이상의 말은 못하겠는지 그녀는 거기에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어렵게 쏟아 놓은 데 반해 진일문의 대답은 농담조였다. "아마도 그 사내는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거요. 아내가 개방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느라 분주할 테니 어디 사랑인들 제대로 나누고 살겠소? 대체 그 한심한 사내가 누군지 궁금하기 짝이 없군. 억!" 진일문은 말은 괴상한 비명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주서혜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달콤한 매(?)였다. "당신, 정말 끝까지 그럴 거예요?" 씩씩거리는 주서혜를 향해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상대를 잘못 골랐소. 난 말이오......." 그는 주서혜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 당겼다. 살짝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맥없이 그에게로 쓰러져 왔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요구하는 색한(色漢)이오. 아내가 나 이외의 일에 바쁜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소." 진일문은 동그스름하게 떠올라 있는 주서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이 뜻밖의 입맞춤은 길고도 뜨거웠다. 이성을 향한 자연스러운 감정은 주서혜로 하여금 접촉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리게 했다. 그녀는 어느 덧 두 손으로 진일문의 목을 세차게 끌어안고 있었다. 쏴아아--! 물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그들의 입술이 떼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만큼 입맞춤 뒤의 무거운 침묵도 길었다. 주서혜는 그에게서 떨어져 앉은 채 음울하게 말했다. "이것이 전부겠죠? 우리 사이는......." 그녀의 음성에서는 짙은 체념이 묻어 나왔다. "어쩌면 그럴지도......." 진일문의 음성에도 역시 같은 색채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 그는 이제껏 여인은 많았으되 확실한 소유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그 앞에서 죽어간 여인도 있다. "주낭자......." 그가 나직히 부르자 주서혜는 방긋 웃었다. "네, 말씀 하세요." 진일문은 그녀의 눈이 무척 서글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과분하리만큼 많은 여인들이 있었소." 주서혜는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짐작은 했었어요." 진일문은 쓰게 웃었다. 그가 알고 있는 그 여인들의 모습이 불현듯 눈앞에서 명멸했다. 하나같이 그에게 진심으로 대했으되 그만큼 자책이 요구되는 여인들....... 백하련이 그러했고, 흑수선, 그리고 옥가려나 여취벽에 이르기까지 심중에 짐이 되지 않은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침음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칼바람 속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해야 하는 운명....... 후후... 내게 있어 사랑은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르오. 중요한 건 나를 앎으로 해서 행복해진 여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오." "그건 저도 그렇다면서요......?" 주서혜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당신이 방금 그러셨잖아요? 저의 낭군이 될 사람은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라고."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니죠......?" 진일문은 허공을 향해 푸우 하고 웃었다. "당신을 싫어할 정도로 철석간담이라면 나도 좋겠소." "당신......." 주서혜는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격한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의 흐느낌을 접한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보시오, 여자란 그대의 생각과는 달리 편리한 점도 있지 않소? 이렇게 울고 나면 후련해질 터이니......." 그는 주서혜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당신은 훌륭한 여인이오. 향후로 만인의 추앙을 받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소생은 그만 떠나야겠소이다." 진일문이 말을 꺼내자 오장로의 얼굴에는 대뜸 섭섭한 기색부터 떠올랐다. 이것은 그의 존재가 차지하던 비중이 그만치 높았었기 때문이었다. 오장로는 그 동안 진일문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특히 이 점은 무학 방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각 장로들의 무공을 보고 그 취약점을 보강해 준 바 있었다. 본래 개방의 무학은 천하에서 가장 종류가 많고 복잡하다. 그것은 개방에 무수한 기인(奇人)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주를 비롯하여 장로급들까지가 그 무학을 익힐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누구건 간에 그 많은 무학들을 두루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역대의 방주들조차도 수십 종의 무학에 능통해 있었던 반면 지고무상의 경지에는 정작 이르지 못했다. 진일문은 만박해초결로써 이런 고심을 해결해 주었다. 그 자신도 해초결을 익힌 다음에야 무학을 대하는 시야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여하한 무공이든 단지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그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장로들의 무공이 정순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청하여 각기 그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가 행한 이 일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장로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대개의 고수들이 그러하듯 단 한 순간의 영감으로 평생의 난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일문을 만난 것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기연을 얻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점을 두고 그들은 말했다. "진공자는 우리에게 너무도 큰 은혜를 안겨 주었소. 아니, 이는 비단 우리 다섯 늙은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방 전체를 위한 것이오." 장미신개였다. 그 말은 다시 철검귀옹 송시열이 받았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오? 진공자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들은 모두 개방을 위해 쓰여질 것이오." 그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한편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진일문을 바라보았다. 진일문이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별 말씀을.... 소생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만박노선배께서 베푸신 것에 비한다면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외다. 여러분들께서 이 모든 것을 개방 전체를 위해 돌리시겠다니 소생으로서는 오히려 감사 드리고 싶은 심정이외다." 개방이라는 거대단체에 대한 소속감이 이 순간 그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어 주고 있었다. 소위 충혼(忠魂)이라고나 할까? 유장로는 진일문에게 하나의 죽패를 넘겨주었다. "이것은 개방의 자죽신부(紫竹神符)로 장로급 이상의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이오. 언제 어디서든 그것을 보이면 개방의 문하들이 장로를 접하는 예로써 진공자의 명을 따르게 될 것이오." 진일문은 굳이 사양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뿐더러, 언제고 개방에 위난이 닥치면 또 다시 뛰어들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고맙소이다. 소생도 상황이 허락하는 한 개방이 부르면 언제고 달려오겠소이다." "감사하오이다, 진공자." 진일문을 위시한 여섯 명의 인물은 굳게 손을 마주 잡았다. 상대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은 하나 같이 뜨겁게 타올랐다. 진일문은 내심 기쁘기 그지없어. '만박노선배께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기분이다. 이들의 합치된 의기(義氣)야말로 향후 무림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윽고 그는 포권을 취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휘익--! 진일문의 신형이 비조처럼 허공을 갈랐다.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장미신개가 입을 열었다. "정녕 진공자는 우리 개방을 위해 하늘이 내린 인재요." 송장로도 한 마디 거들었다. "왜 아니겠소이까? 무림의 앞날은 바로 저런 젊은이들이 지고 나가게 될 것이외다." 유장로를 비롯한 나머지 세 장로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곡의 입구. 진일문은 오장로에게 작별을 고한 것을 끝으로 무엇 때문인지 흡사 도망치듯 소운곡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입구 바깥에서 한 번은 신형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그루의 나무 아래.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는 단번에 그 그림자가 누구인가를 알아 차렸다. '피하려 했건만.......' 주서혜였다. 그녀를 응시하는 진일문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떠나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배웅이라도 해야겠기에......." 주서혜가 어색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정말로 다시 보기 힘들겠죠? 실은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어 내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입술 꼬리를 살풋 말아올리며 등뒤에 감추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한 벌의 백색유삼이었다. 진일문은 이마에 손을 얹더니 문득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의외적인 그의 웃음은 일종의 반전(反轉)을 가져왔다. "왜 웃죠?" 주서혜의 눈도 따라서 샐쭉 치켜 올라갔다.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소? 개방의 신임 방주가 일개 떠돌이 낭인에게 이런 선물을 주었다면 누가 믿겠소?" "흥! 여전하군요. 전 이것을 만들기 위해 꼬박 일주일 동안 밤을 새웠단 말예요." "알만 하오. 본시 낭자는 그런 일에는 취미가 없지 않았소?" "비웃는 건가요?" "설마!" 진일문은 의미가 다양하게 얽힌 묘한 웃음을 지었다. "주낭자는 고맙다는 말도 못 알아듣소? 낭자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성의를 보이니까 황송해서 하는 얘기요." 그의 음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연중 아픔을 품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린 주서혜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가능만 하다면 제가 가진 어떤 것이라도 다 드리고 싶어요." 진일문은 미인의 정성어린 선물을 사양치 않고 접수했다. 동시에 그는 그 미인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이런 선물은 이번이 두 번째요." 그 말에 주서혜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반문했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웬지 그대라면 감추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아닌 게 아니라 주서혜의 아름다운 얼굴에 나타난 것은 질투 나 시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오히려 뭐라 형용키 어려운 따스함이 묻어 나왔다. "물론 예쁘겠지요? 그녀는......?" "그렇소." 그것은 다름 아닌 옥가려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해 제게 약간만이라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 의미가 특별한 여인이오. 선대(先代)의 인연이 끈처럼 작용했다고나 할까?" "그것을 빌어 당신을 사랑했겠고요?" "후후... 그것은 후에 그녀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그녀 또한 주낭자와 마찬가지로 무림의 기녀(奇女)요. 일반의 여인과는 매우 다른 성품을 소유하고 있소." 주서혜는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친근감이 드는군요. 같은 마음으로 한 사람을 흠모하고 있다는 공감 때문일까요?" 그녀는 다시 진일문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녀에게도 저와 비슷한 것을 요구하셨겠지요? 각자의 길에 충실을 기하자는......?" 진일문은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그것은 어찌 알았소?" "뻔하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곁에 여태도 눌러 앉아 계셨을 것이고, 이렇게 저와 만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하하하... 못당하겠군." 그들은 함께 웃고 있었다. 이별에 대한 심적 고통을 이미 충분히 겪은 탓일까? 초연으로 무장한(?) 그들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싱싱한 젊음이 배어 나왔다. "고맙소." "뭐가요?" "이런 식으로 전송해 주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굳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풀어 주었다. "가겠소." "네, 상공(相公)......." 주서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일문은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휘익--! 이어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전면을 향해 날아갔다. 뚝! 비로소 한 방울의 눈물이 주서혜의 눈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진일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야.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 33장 무당산(武當山)의 괴사(怪事)들 중원검정대회(中原劍征大會). 무림인이라면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오래 전부터 소림을 위시하여 무림의 명문정파라 자부하는 칠대문파가 침체된 그들의 명예와 위세를 부활시키기 위해 공공연하게 개최해 온 비무대회이다. 마교와의 정사대전을 치른 이후로 칠대문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힘의 재정립과 더불어 삼성림에 대한 무언의 견제책으로써 매 오 년마다 이를 열었다. 장소는 매번 바뀌었다. 이번에 검정대회가 열리는 곳은 바로 도가의 성지라 불리우는 무당산이었다. 무당산으로 오르는 길목. 무당산의 산세가 워낙 웅장하고 방대하다 보니 말이 길목이지, 무당 진무관(眞武觀)과의 거리는 족히 수십 리가 넘었다. 중도에는 황색의 주기(酒旗)를 내걸고 있는 주점도 있었다. 도인들이야 술을 마시는 것이 금기사항으로 정해져 있지만 무당을 찾는 여타 부류의 빈객들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늘의 손님들은 모두 무림인들이었다. 하나 같이 병기를 소지했으며 안광이 예사롭지 않은 자들뿐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무기를 소지한 무인들이 이처럼 모여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중원검정대회가 무당의 진무관에서 열리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바야흐로 이월도 다 기울어가는 때다. 마른 말똥을 연료로 하는 난로가 벌겋게 달아 있었다. 그 주위로는 대여섯 명의 강호인들이 불만 섞인 음성으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사십대쯤의 한 중년인이 술기운 탓인지 시뻘개진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빌어먹을! 그 작자들은 아직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세우더군.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우리 항산육호(恒山六虎)를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문전박대 하다니." 맞은 편에 있던 사각진 얼굴의 인물이 맞장구쳤다. "가소롭기 짝이 없지. 흐흐... 마교와의 결전 이후로 정예고수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그들이 아닌가? 이제 와서 위세를 부린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야." 자칭 항산육호라는 그들은 서슴없이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의외인 것은 그들과 동석하고 있는 강호인들조차 모두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불만의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무당의 도사들이었다. 무당의 장문인이 이례적으로 이번 검정대회에 외인의 참관을 거부했던 것이다. 덕분에 무당산에 오르려 했던 고수들은 모두 맥이 빠진 채 이 주루로 모여들었다. 그러니 주루 안의 험악한 분위기도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이라는 기묘한 감정이 있다. 안된다는 금규가 있을 시엔 그것을 깨뜨리면서까지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호기심이라는 마물(魔物)이다. 그러므로 무당이 내놓은 제약은 이래저래 중인들로 하여금 더욱 언성을 높이게 했다. 하지만 그 볼멘 소리들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탕! 갑자기 탁자를 내리치는 인물이 있었다. "쯧! 이 곳에는 하류배들만 설치고 있군. 정작 범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말면서 그 자리를 떠나면 큰 소리를 친단 말야. 에이! 술맛 떨어지는구나." "뭐, 뭣!" 항산육호의 안색이 일변했다. 동시에 강호인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쏠렸다. 몇 사람이 발끈해 일어났으나 금새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탁자를 내리친 인물이란 한 명의 거지노인으로 일견하기에도 상대할 가치가 없어 보였다. 얼굴은 온통 주름살 투성이였고 퀭하게 들어간 눈은 주독이 오른 듯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란 것도 말이 좋아 옷이지, 걸레 조각이나 진배없었다. 애초에는 도복인 것 같았으나 때가 잔뜩 절어 있는 데다가 그나마 다 헤져 있어 신체나 겨우 가려 줄 정도였다. '미친 늙은이를 상대해서 무엇하랴?' 중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쉽게 흥분하는 강호인들이었지만 체신을 잃을까 저어하여 참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미쳤다고 여기는 노인은 계속해서 외쳤다. "이봐! 여기 술을 더 가져 와라.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술로 귀를 씻어 내야겠다." 주점의 공기가 일순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미친 노인의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심해도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항산육호의 기세가 무섭게 돌변했다. 전자에 가장 많이 떠들어댄 것도 역시 그들이 아닌가? 그러니 그들로서는 노인의 말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덥석부리의 장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찢어 죽일 늙은이! 어디 다시 한 번 씨부렁거려......."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안면을 구기며 뒤로 벌렁 나자빠진 것이었다. "아! 저럴 수가......." 중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 새 술호리가 날아와 덥석부리 장한의 입에 그 주둥이 쪽을 틀어박고 있었다. "크크ㅋ! 아무나 보고 함부로 짖어대는 개에게는 그저 몽둥이가 약이지." 예의 미친 노인이었다. 그는 사태를 깨끗이(?) 마무리 지어 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옆자리로 돌렸다. "여보게, 내게 술 한 병 적선할 수 있겠나?" 그의 눈길이 멈춘 곳에는 일신에 백색유삼을 걸친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청년은 선뜻 자신의 술병을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새로 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닐세. 지나친 대접은 오히려 거북살스럽지. 내 입맛에는 마시던 술이 더 잘 어울린다네." 이 때, 항산육호의 나머지 오인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섰다. 차차창--! 맑고 차가운 금속성이 장내를 울렸다. 그들은 무기를 뽑아 들기가 무섭게 노인을 향해 덮쳐왔다. "미친 늙은이!" "감히 우리 항산육호를 건드리다니! 무당산에 묻힐 자리라도 미리 봐 두었단 말이냐?" 휙휙! 쐐애액--! 도, 검, 창 등 각기 다른 항산오호의 무기들이 일거에 노인에게 폭사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에게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청년을 응시한 채 나직히 말을 건넸다. "쯧! 자네, 인심 쓰는 김에 팍팍 좀 써 주게." 그 말인즉 항산육호를 상대해 달라는 의미였다. "원하신다면." 청년은 짧게 한 마디를 내뱉더니 가볍게 우수를 떨쳐냈다. 그 순간, 주루 안에 있던 인물들은 기막힌 광경을 보게 되었다. 따당--! 종전과는 다른 금속성이 울리며 항산오호가 내려친 병기들은 서로 뒤엉킨 채 멀찌감치 날아가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인가? 퍼퍼퍽--! 둔탁한 음향이 이어지더니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항산오호의 비명이 주점을 뒤흔들었다. "컥! 캐액--!" 항산오호는 모두 안색이 시뻘겋게 변한 채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쥐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쪽의 뼈가 부서지거나 탈골된 모양이었다. 중인들은 멍해져 버린 시선을 청년에게로 돌렸다. 언뜻 보기에 그의 손놀림은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결과는 상상을 불허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 기이한 것은 노인의 반응이었다. 청년을 응시하던 그의 눈에서 불현듯 냉기가 깃든 시퍼런 광망이 솟구쳤다.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큭! 태극내경(太極內經)을 익힌 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니, 대체 이 무슨 조화 속이란 말인가? 내가 너무 늙어 시력이 흐트러졌거나 정신이 몽롱해진 모양이군."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술을 오무렸다. 촤아악--! 놀랍게도 노인의 입에서 주전(酒箭)이 쏘아져 나와 그를 도와 주었던 청년의 얼굴을 덮쳐갔다. "아?" 일순 청년의 눈빛이 몹시도 흔들렸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지간히 당혹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지척지간인지라 허를 찔리자 그에게는 노인의 술화살을 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청년은 한 가닥 침음성과 아울러 훅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파아아--! 뭐라 형용키 어려울 정도로 신비한 광경이 벌어졌다. 술화살은 마치 날카로운 도에 베어지는 종이 조각처럼 정확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청년의 귀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오! 건곤양의(乾坤倆儀)까지......!" 노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청년을 향해 크게 외쳤다. "가세나!"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날렸다. 휘익--! 그의 신법은 제 정신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않은 괴노인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중인들이 노인에게 신경을 쏟고 있는 사이에 하늘로 날아갔는지, 땅속으로 꺼졌는지 그만 종적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해검대(海劍台). 이 곳이야말로 무당의 명예를 상징하는 장소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라 해도 좋을 만한 곳이다. 개파조사인 장삼봉진인(張三 眞人)이 이 무당산역에 도가의 성지를 구축해 놓은 이래로 해검대는 강호에서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불문율(不文律)을 만들어냈다. 즉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무당파의 진무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 곳에 무기를 풀어놓아야 했다. 그것은 곧 장삼봉진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써 그 때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계속 무당의 전통이 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해검대에는 수백 자루의 녹슨 병기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주인이 찾아가지 못했고, 오랜 세월에 걸쳐 무당과 함께 풍상을 겪어온 물건들이었다. 지금 해검대는 다섯 명의 도인이 지키고 있었다. 평소에는 두 명에 그치던 것이 무려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는 것이었다. 그 앞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도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무량수불... 절대 불가요. 장문인의 특명이 계셨기 때문에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청하건대 서로 의를 상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오이다." 그들의 면전에는 노기를 띈 십여 명의 군호들이 서 있었다. 모두가 다 중원검정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무당산까지 찾아온 고수들이었다. 반면에 다섯 도인이란 정자(丁字) 항렬의 도인들로 이 며칠 간 계속 해서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이력이 붙었는지 할 말을 마치자 그 이상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도 알고는 있지만 여기까지 온 성의를 보아서라도 우선은 장문진인께 통보나 해 주시겠소?" 육순 가량의 한 노인이 점잖게 말하며 나섰다. 그는 일신에 화려한 금포를 걸친 인물로서 안광이 차분하게 갈무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단한 내가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사실 그는 강호상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대접을 받게 되자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가합니다. 빈도들이 어찌 감히 여러분을 소홀하게 대접하겠소이까? 하지만 오늘만은 명을 받드는지라 어쩔 수가 없소이다." 도사들의 태도는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군웅들은 만면에 불쾌한 빛을 드러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아니, 설사 다섯 명의 도사에게 설득이 먹힌다 한들 무당파 자체가 거부한다는 데야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당파의 위세가 옛날 같지는 않다고 하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대문파로서 구주에 그 위엄을 떨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그들과 의를 상한다는 것은 고초를 자청하는 일밖에 안되었다. 결국 군웅들은 투덜거리며 하나 둘씩 하산했다. 이를 보며 다섯 도사 중 정우(正友)라는 인물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량수불... 정말 힘들군. 대체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가? 이러다가 내 입이 닳고 말지." 그 옆의 도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형, 저는 도대체 왜 이렇게 방문객들을 막아야 하는지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중원검정대회가 무슨 극비사항이라고......." 정우도장이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입 다물게, 정지사제. 이번 검회는 본파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일이네. 그간 장문인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오셨는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과는 별개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공개적으로 하면 더욱 효과가 크지 않을지......." 정지도장의 말은 또 잘려 나갔다. 역시 정우도장이 눈썹을 모으며 엄중하게 나무랐기 때문이었다. "갈! 우리가 장문인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가? 우리로서는 그저 명을 받들면 그 뿐이네." 이어 그는 상대가 무안하리라 생각했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 이번 검정대회에서는 맹주를 선출한다네. 전례가 없던 일이지. 장문진인께서는 본파의 이름을 부동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 기회에 맹주의 위를 얻고자 하시는 듯 하네." "아! 정말 그렇게 될까요?" 정지도장은 금새 의혹을 떨쳐 버리고 흥분이 된 듯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를 향해 정우도장은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장문인께서 하시는 일이니 어김이 없을 것이네. 아, 또 누가 오는군." 정지도장은 그 말에 고개를 전면으로 돌렸다. 두 인영이 산아래 쪽으로부터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싶은 순간, 어찌된 셈인지 다섯 도장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면전에서 맞이해야 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들은 늙은 도장과 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또 그 뿐이었다. 미처 놀랄 사이도 없이 그들은 다섯 명의 도인 앞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쳤다. "잠깐만!" 정우도장이 황급하게 손을 들어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그들은 어느 새 제지를 뚫고 환상처럼 입산(入山)하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정확히 진무관 쪽이었다. "무량수불! 자네들도 보았는가?" 정우도장의 놀란 부르짖음에 정각이라는 도장이 물었다. "방금 전의 그 두 사람 말입니까?" 그 역시 어지간히 놀란 듯 눈을 휩뜨고 있었다. 그러자 정우도장이 안면을 씰룩이며 외쳤다. "보았으면 빨리 전갈을 보내게!" 다른 사람도 보았다니 분명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기세좋게 무당산에 오른 그 두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우도장은 표정을 굳힌 채 내심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어떤 인물들이기에 그처럼 놀라운 경공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뎅뎅뎅--! 무당산 위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여간해서는 잘 울리지 않는 경종(驚鐘)의 소리였다. 무당산역에는 대번에 살벌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무당파의 본관은 진무관(眞武觀)이다. 아울러 이 곳은 명실공히 천하 도교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경종이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외인들로 인해서....... 쾅쾅--! 거창한 소음이 무당산을 울렸다. 그것은 놀랍게도 본관의 육중한 대문에서 비롯된 소리였다. 대문 앞에는 지금 두 인물이 서 있었다. 그 중 늙은 거지가 부서져라고 문짝을 발길로 걷어차고 있었다. 이는 누가 보아도 납득하지 못할 광경이었다. 아니, 대개는 이후에 벌어질 사태를 염려하여 차라리 도망을 치고 말리라. 대체 천하에 누가 있어 감히 진무관의 대문을 발로 걷어찰 수 있단 말인가? 목숨이 수백 개에 이르지 않는 한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야 했다. 과연 우렁찬 외침이 대문 안쪽에서 울려 나왔다. "누구냐! 감히 상청궁에서 소란을 떠는 자가......!" 대문 옆에 딸린 쪽문이 활짝 열리더니 삼십대 가량의 한 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서 기광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여차 하면 출수(出手)도 불사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도인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컥!" 거지노인의 손이 어느 덧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내심 부르짖었다. '언제 손이 올라 왔단 말인가?' 도무지 그에게는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다. 가뜩이나 황당해 있는 데다가 이어지는 거지노인은 말은 아예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 놓았다. "광무는 어디 있느냐?" '엉? 광무라고......?' 그는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라고 믿으면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광무라면 무당 장문인의 별호이다. 분명 외인이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슴없이 입에 담을 수 어휘가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는 형편없는 몰골의 거지노인이 아닌가? "밥통같은 놈!" 거지노인은 젊은 도인의 멍한 표정에 대고 고함을 꽥 질렀다. 그리고는 화가 난 듯 그의 멱살을 들더니 냅다 집어 던졌다. 쿵! 문짝에 가서 처박히게 된 도인은 벌떡 일어나기는 했으나 얼떨떨한 듯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의 호통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가서 광무에게 알려라! 내가 수신관(修身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다." "수신관!" 도인은 비명처럼 부르짖더니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거지노인을 정시했다. 수신관이라면 역대 장문인들이 수양하던 곳이다. 하지만 당대의 장문인은 그 곳을 폐쇄하고 사용하지도 않는다. 하물며 외부인이라면 그런 곳이 있는지조차 몰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거지노인은 기막히게도 그 명칭을 알고 있을 뿐더러 그 곳에 들어가 있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 도인은 거지노인의 차림새에서 자신이 찾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낡고 퇴색해 있어 본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으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틀림없는 도복이었다. 그는 두 방문객을 결코 제지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래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 버린 듯 보이지도 않았으므로. "으음......." 도인은 기묘한 탄성을 발하고는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눈에는 이제 크나큰 호기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왜 안그렇겠는가? 무당의 진무관 내에서 개파조사인 장삼봉진인 시절에도 없었던 괴사가 벌어지려는 것을. 수신관(修身觀). 문 앞에서 허리에 불진을 찬 도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사형께서 돌아오신 줄 알았다면 진즉 마중을 나갔을 것입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기별이 없으셨던 터라......." 지금. 수신관의 넓은 대청 안에서는 기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당파가 무림에 개파를 선언한 이래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물론 그러기까지 무당의 제자들은 수십 년간에 걸쳐 수북히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내느라 온통 야단법썩을 떨었지만. 대청의 한 가운데에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늙은 거지, 그리고 일신에 백의유삼을 걸친 준수한 청년이 마주 하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문 앞의 도인이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서로 잔을 권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도인은 분명 무시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는커녕 만면에 외경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약간 떨려 나왔다. "최대한 빠르게 장문사형께 전갈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일만은......." 노인이 빈 술병을 번쩍 치켜올림으로써 그 말은 끊겼다. "술이 떨어졌다, 광진(廣塵). 청심원(淸心院)의 후원에 가면 측백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그 곳을 파면 잘 익은 국화주(菊花酒) 세 단지가 나올 것인즉 몽땅 가져 와라." 도인, 즉 광진도장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는 당금 무당파의 최고 서열인 광자(廣字) 항렬 중에서도 장문인 다음 가는 인물이다. 그런데 거지노인은 연신 그의 도호를 함부로 불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광진도장이 다시금 난색을 표명한 것은 불쾌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아무리 분부가 지엄하다 해도 과연 신성해야 할 상청궁에 술을 가져와도 되는지의 여부였다. "알겠습니다, 사형." 광진도장은 길게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그는 나직히 탄식을 토하고는 거지노인을 향해 깊숙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사라지자 백의유삼의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나를 몰라 보는구나. 하긴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모습이 매우 다를 것이다.' 그는 진일문이었다. 실로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마주 하고 있는 거지노인이란 바로 무당의 제자들 중 첫째인 광해진인(廣海眞人), 즉 한 때 그가 대역(代役)을 한 바 있던 현고자의 수제자였다. 현고자의 실종 후로 광해진인은 무당을 떠났었다. 그러다가 주막에서 진일문과 우연히 한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광해진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진일문의 손에서 뜻밖에도 무당 비전의 무공인 태극환허공과 태극십삼세가 펼쳐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얘기를 나눈 끝에 결국 동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광해진인. 항간에 알려지기로 그는 현고자가 실종된 후 정신이 흐려진 나머지 자진하여 무당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소문과는 달리 그 이면에는 절박한 사연이 숨어 있었다. 무당파에는 이대(二代)에 걸쳐 무서운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고, 광해진인은 사부인 현고자에 이어 두번째 희생양이었다. 그 역시도 독(毒)에 의해 암살을 당했던 것이다. 그 당시 흉수가 누구인지는 전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이미 세력 기반을 잃고 수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현고자의 뒤를 이어 장문인의 위에 오른 현청진인은 광해진인을 매우 달갑지 않게 여겼고, 이로 인해 그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느끼며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가 미친 척 괴행을 저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광해진인이 무당산을 벗어난 이유도 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흉수의 눈을 피해 독상을 치료할 장소 및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새외(塞外)까지 도주했었던 그는 마침내 요상과 더불어 이전의 무공을 회복한 후,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다. 그 때에 그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된 소문이 바로 무당파에서 중원검정대회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로 무당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진일문. 그는 광해진인의 초췌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분은 아마도 당대에 모든 은원을 청산해 버릴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얼굴에는 잠시 어두운 그늘이 스쳐갔다. "대사형, 분부 받들었습니다." 광진도장의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깼다. '후후... 과연 명문대파의 위계질서란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군.' 그는 광진도장이 세 명의 젊은 도인을 이끌고 술단지를 날라오는 것을 보며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무당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수신관에서 술을 마시겠다고 고집을 피운 사람은 광해진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진도장은 무조건 이를 따르고 있었다. 광해진인은 마치 술에 굶주리기라도 한양 단지째로 술을 들이켰다. 주량도 엄청났다. 목울대를 마구 울컥이며 그는 삽시에 세 단지 중 두 단지를 비워 내고 있었다. 진일문은 한 모금 맛을 보고 나자 그 술이 매우 진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 분이 이처럼 들이붓다시피 하는 것은 단지 술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무당의 비사에 얽힌 통한일진대, 과연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모르겠구나.' 아닌 게 아니라 술을 마시는 동안 광해진인은 시종 말이 없었다. 술단지를 입에서 뗀 후에야 그는 음울하게 입을 열었다. "광진, 너는 이 술이 어떤 술인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이 세 단지의 술은 삼십 년 전 현고사부께서 내게 명하여 특별히 담그게 하신 것이다. 술의 이름은 장천몽(長天夢)이라 하며 사부께서는 이 술로 전진교(全眞敎)의 도우들을 접대하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광해진인의 음성에서는 짙은 비애가 묻어 나왔다. "그 분은 진정한 도인(道人)이셨다. 무공을 익히는 것 외에는 세속의 일에 관여하기를 꺼려하셨으며 유일한 취미라야 친구를 사귀시는 것이었지. 그리하여 본문의 크고 작은 일들도 대개는 현청사숙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셨다." "저도 그 점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광진도장의 얼굴에는 아련한 추억과 더불어 한 가닥 의혹이 떠올랐다. 갑자기 광해진인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저의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광해진인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광진, 네가 만일 모든 것을 믿고 맡겼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광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신형이 눈에 띌 정도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그런 반응에 광해진인은 입술꼬리를 기이하게 말아 올렸다. "사실 사부께서 인세를 사시며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무당의 무공을 되살리는 일로써 그 분은 과거의 찬란한 전통을 잇고자 주야를 구별하지 않고 힘쓰셨다. 즉 조사 이래로 실전되어 온 태극경의 상승무학을 깨우치기 위해 현청사숙에게 그 외의 일들을 모두 일임하신 것이다." 스스로 감정을 배제시킨 듯 광해진인의 음성에는 아무런 느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나치는 현상을 말하는양 그의 음성은 무심하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크ㅋ!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너는 알고 있느냐?" "대, 대체 대사형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사부께서는 실종되셨고 현청사숙이 장문인으로 올라섰다. 사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여기까지는 아마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광진의 안색이 일변했다. 바람도 없는데 그의 옷자락이 마구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제가 알지 못하는 이면사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광진도장. 그는 실상 현고자의 직전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현고자가 생전에 제자를 여섯이나 거두었던 것이다. 다만 광해진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대사형인 광해진인으로부터 무공을 배웠다. 따라서 광진도장에게 있어 광해진인의 존재는 말이 대사형이지, 사부나 다름이 없었다. 그가 유독 광해진인을 어려워 하는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 광해진인은 흐릿한 눈으로 자신이 직접 벌모세수 시키고 일신의 무공을 전수해준 바 있는 사제를 응시했다. "너는 지금까지 그 정도로 모르고 있었느냐?" 그의 눈에 어쩔 수 없이 한 가닥 연민이 스쳤다. "그, 그것은......." 애초부터 성품이 온유해 타인도 모두 그러리라고 믿던 광진도장이다. 그는 광해진인의 시선을 받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광해진인은 이런 광진도장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시선을 진일문에게로 돌렸다. "자네가 광진에게 얘기해 주게." 진일문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광진도장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소생은 전에 도장을 뵌 적이 있소이다. 도장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나 소생은 도장을 잊지 않고 있었소이다." 광진도장의 눈이 다시금 의혹을 띈 채 그를 바라보았다. "수년 전 불회곡에는 한 명의 난입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도장께서는 그의 주장보다는 무당의 법규를 중시해 그 자를 불진으로 날려 버리셨습니다." "아!" 광진도장은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발했다. "그럼 당시의 그 인물이 바로......." "그렇소이다. 소생이 바로 그 때의 그 난입자입니다." 광진도장은 괴로운듯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께서는 그 뒤로 어찌 되셨는지......? 빈도는 도우께 그런 행동을 취해놓고 스스로의 경솔함에 대해 무척 후회했었소이다." 진일문은 미소 지었다.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후로 소생은 도장의 번민까지도 모두 지켜 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런 일이......." 광진도장의 얼굴에는 일순 놀라움이 스쳐갔다. 그러자 진일문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으실 것이외다. 보시다시피 소생은 이렇듯 건재합니다." 그는 광진도장의 얼굴을 정시했다. "그 당시 불회곡에 떨어진 소생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그 곳에서 한 분의 기인을 만났소이다. 동굴 속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감금되어 있던 노도장이 계셨습니다." 광진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불회곡에 문중고인(門中高人)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진일문의 음성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분이 바로 현고자 노선배님이셨소이다." "오오!" 광진도장은 휘청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너무도 놀라 진일문의 말을 도저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껏 현고자는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진일문이 그것을 모조리 뒤집어 엎고 있는 것이다. 진일문의 음성이 약간의 동요를 보였다. "그 분은... 오랜 감금생활과 모진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올바르지 못하신 상태였소. 때로는 나를 현 장문인인 광무진인으로 오인해 핍박하기도 하셨으며, 광해진인으로 여기고 따뜻하게 대해 주기도 하셨소." 광해진인은 곁에서 눈을 감은 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언뜻 그의 눈가에 이슬이 반짝인 것은 단지 환각이었을까? 그에 반해 광진도장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마구 떨었다. "오오! 어찌 그런 일이......." 비로소 그는 오랜 세월을 두고 뒤엉켜 있던 의문들에 대해 하나씩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실상 전대 장문인이었던 현고자의 실종 이후, 무당파에서는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 났었다. 그것들이 지금 실타래 풀리듯 그의 뇌리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광진도장은 현고자의 제자였던 육인 중 광해진인과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원인도 모르게 차례로 죽어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럼 결국 사부님을 해한 자가 우리 사형제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었었단 말인가?' 그러자 직감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현 무당장문인인 광무진인의 얼굴이었다. 더불어 편협하고 독선적이어서 때로 잔인한 면모까지도 엿보이는 그의 성격 또한 함께 연상되었다. 광진도장은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렇다면 그간 본파에서 있었던 괴사건들의 주범은 결국.......' 정녕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문인의 신분이란 본시 지고무상한 것인즉 옳던 그르던 뜻을 품으면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영욕을 위해 얼마든지 악용될 수가 있다. 광진도장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또 한 차례 전율을 일으켰다. 이 때, 광해진인의 음성이 그의 귓전에 파고 들어왔다. "광진, 사숙들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 현암, 현지, 현수, 세 분 사숙들을 먼저 뵙고 싶다." 그 말에 광진도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는 신음에 가까운 음성으로 겨우 말했다. "세 분 사숙들께서는... 이미 타계하셨습니다." "뭣이?" 광해진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에서는 급기야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 더러운 놈이 세 분 사숙들마저 해쳤단 말이냐?" 우우웅....... 벽력과도 같은 그의 음성이 수신관의 대청을 온통 뒤흔들었다. 대들보가 들썩이니 먼지가 자욱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현청, 그 짐승 같은 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그는 격정을 누르지 못해 자신의 사숙이자 전대 장문인인 현청자를 이렇게 칭하고 있었다. 광진도장은 안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간신히 대답했다. "현청사숙께선... 폐관에 들어가셨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조사동에......." 한편. 진일문은 줄곧 광해진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한 가닥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것은 광해진인의 성격 때문이었다. 도인답게 수양이 깊은 면도 느껴졌으나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이들이 의례 그렇듯 괴인(怪人)에 가까운 면모를 수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즉 어떤 때는 몹시 침착해 보이다가도 흥분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광포해지기 일쑤인 것이었다. '무당의 비사는 연원이 깊으므로 신중을 기해 처리해야 하거늘, 과연 믿고 맡겨도 좋을런지.......' 진일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광해진인의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광진, 이리 오너라." 광진도장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다가갔다. 그러자 광해진인은 광진의 완맥을 철쇄처럼 잡아채며 냉혹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라. 광무가 또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광진도장은 고소를 지었다. "그것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뭣이?" 광해진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며 광진도장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대사형께서는 제가 광무사형에게 배척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뭣이? 배척을 당하고 있다고?" 광해진인의 하얗게 센 눈썹이 푸르르 떨리며 주저앉았다. "그럼 다른 사제들은......? 너 말고 또 나와 현고 사부님의 직전인 다른 사제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의 음성이 떨려 나오는 것을 의식하며 광진도장은 비감이 어린투로 대답했다. "대사형께서 떠나신 후로 그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현고사부님의 제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오직 저 혼자입니다." "오오! 이럴 수가......." "제가 만일 그 일에 대한 내막을 알고 있었더라면 저 역시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미련한 덕에 이렇게 대사형을 다시 뵈올 수 있었던 것을......." 마침내 광진도장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무당파의 실권은 현청사숙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저와 사제들은 그 이전에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항상 중요한 일에서는 소외되었으니까요." 광해진인은 할 말을 잃은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광진도장의 완맥은 저절로 풀렸다. 손목이 자유로와지자 광진도장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제 대사형께서 돌아오셨으니 소제는 여하한 일이든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이 한 목숨을 다해서......." 광해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때가 늦어도 너무 늦었구나. 진작 흑막을 거리고 음모를 분쇄시켜야 했거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어찌 조사전에 면목이 서겠느냐?" 광진도장의 눈이 번쩍 이채를 발했다. "꼭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비록 우리와는 계열이 다르다 해도 문도들 중에는 광무사형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 다수 있습니다." 광해진인의 주름진 얼굴에 한 가닥 밝은 빛이 드리워졌다. "그들은 누구누구냐?" 광진도장은 대답하기에 앞서 진일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광해진인이 이를 눈치 채고 재빨리 말했다. "신경쓰지 마라. 그는 외인이 아니다." 진일문이 오히려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분께는 좀 더 대화가 필요하실 것입니다. 소생은 그 동안 바람이나 쐬고 오겠소이다." 그는 몸을 돌려 대청으로부터 나왔다. 오랫만에 만난 사형제지간의 대화에 굳이 끼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화원을 향해 걸어가며 진일문은 내심 중얼거렸다. '무당파는 중원의 대표격인 명문정파이다. 과연 이 위기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광해진인의 행동여하에 따라 어쩌면 사형제들끼리 피를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심중이 이러하니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어. 다만 한 가지 자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광해진인의 본바탕에 녹아 있는 무당에 대한 충심(忠心)이었다. 진무관(眞武觀)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장삼봉진인을 무당산의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모신 이후, 이 곳은 도가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왔다. 진일문은 화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광진도장이 통보를 했는지 경내를 오가는 동안 그를 제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간혹 마주치게 되는 도인들은 하나 같이 도호를 외우고 스쳐 지날 따름이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걸었을까? 진일문은 방향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상청궁과 멀어져 있었다. 상념에 이끌려 걷다 보니 그리 된 것이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 쯤일까?' 그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기이한 냄새가 그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시켰다. '음, 이것은 음식 냄새인데.......' 진일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뜻밖에도 그의 코에 와닿은 것은 고기 굽는 냄새였다. '이 어찌 된 영문인가? 도관에서......?' 의문을 담은 그의 눈에 하나의 인영이 들어왔다. 담장을 끼고 돌아서는 인물, 그 자는 허리가 구부러지고 등이 불룩한 꼽추도인이었다. 손에는 하나의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진무관의 바깥이었다. '대체 이 일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과연 이는 누구라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밤중에 음식을 만든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도관에서 금기시하는 고기요리를 만들어, 그것도 밖으로 내가고 있는 것이다. 스슷--! 진일문은 의구심이 일자 그대로 있지 않았다. 마치 무엇엔가 이끌린 듯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꼽추도인은 산기슭을 돌더니 숲으로 들어갔다. 숲 속은 달빛마저 차단되어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꼽추도인은 그 길에 익숙해져 있는 듯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얼마 후. 꼽추노인이 당도한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절벽의 아랫 부분에는 하나의 동굴이 그 입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꼽추도인은 지체없이 동굴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 뒤를 밟던 진일문은 미간을 모았다. '동굴 속에 누가 있을까? 이 밤중에 은밀하게 음식을 날라주어야 할 사람이라면 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잠시 신형을 멈춘 채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인양 뻥 뚫려 있는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불현듯 동굴 안으로부터 날카로운 여인의 외침이 울려 나왔다. "이 더러운 놈! 이 따위 음식을 먹으라고 가져오다니, 어서 꺼지지 못해? 이 머저리 밥통 같은 말코야, 그 쳐죽일 광무나 오라고 해. 그 악마나 빨리 대령시키란 말야." 진일문은 아연실색했다.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곳에서 여인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더구나 여인의 입에서 저주처럼 쏟아지는 욕은 무당의 장문인인 광무도장을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동굴 속 여인, 대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34장 무당산(武當山)의 음모(陰謀) 수신관. 이 곳의 풍경은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어느 덧 광진도장을 중심으로 하여 광해진인을 따르고자 하는 도인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현 무당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광무진인에게 등을 돌렸던 인물들로써 광해진인의 재등장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숫자만 해도 거의 서른 명, 게다가 한결같이 광자(光字) 배분의 도인으로 그들이 일단의 무리를 이루자 그 위세란 무당의 세력 판도를 뒤집어엎는 것쯤은 시간 문제일 듯 했다. 광해진인도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가 아니었다. 거친 입이 주무기이던 거지 노인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 없었다. 광진도장이 말끔한 도복 한 벌과 도관(道冠)을 진상했으되, 상투를 틀어 올리고 의관을 갖추자 광해진인은 더없이 기상이 출중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고자의 맥을 이어 태극환허신공을 전수 받았으며, 무당의 현 장문인이 되어 있어야 했을 그의 참모습이었다. 누군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대무당의 위계를 흐려 놓은 간적들은 모두 내궁(內宮)으로 도망갔소. 우리는 그들을 진무관으로부터 몰아내 영원히 무당문하의 자격을 박탈해야 할 것이오." 그에 뒤질세라 말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옳은 말씀이오. 대사형께서 복귀하시고 그들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광무가 찬탈한 장문인의 위는 의당 대사형께로 다시 넘겨야 하오." "현청 전 장문인이 그에게 대통을 넘겨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현고사백을 해친 반도에 불과 하오. 그 역시 장문인으로 인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요." 수신관은 온통 흥분으로 들끓었다. 이어 도인들은 이제까지 광무진인이 장문인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저질러 왔던 온갖 비리와 부정들을 그 사례까지 들어 일일이 성토하기 시작했다. 광해진인. 그는 시종 묵묵히 앉아 그들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그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단지 접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얼어붙을 것 같은. 이는 그가 분노한 탓도 있었지만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종의 한음기공(寒陰氣功)을 연마했기 때문이다. 독상을 당한 채 무당을 탈출했던 광해진인은 장백산(長白山)의 한설지(寒雪地)로 피신했다. 하루에 두번씩 발작하는 열독(熱毒)을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음한지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체내에서 독을 몰아내는 과정 중 음한기공을 진기에 유입시켰고, 그로 인해 이처럼 은연 중 으스스한 한기를 발산해 내게 되었다. 문득 침묵을 지키고 있던 광해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다가 본파의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어쩌겠는가? 명색이 도가의 집산지이거늘 세력 다툼으로 인해 양분된다면 타의 웃음거리밖에는 안된다. 권력의 이양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광무가 전해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에 취할 방도를 결정하겠다." 과연 대기(大器)다운 일언이었다. 지나간 오욕의 세월도 그렇지만 그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얼마나 억제하고 있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알만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 한 마디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했다. 중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그들은 비로소 현 장문인인 광무도장이 왜 그를 따르지 못하는지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진인을 위시하여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광무도장이 광해진인의 뜻을 결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무당의 양분(兩分)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어쩌면 동문끼리 혈전도 불사해야 하는 것이 현재 무당이 안고 있는 운명이었다. 광자배의 도인들은 하나 둘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공력을 다스려 놓고자 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들의 침묵은 수신관을 더욱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고 갔다. "우우......!" 동굴 안에서 괴이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그것은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묘한 음향이었다. 즉 선천적인 불구들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소리였다. '벙어리!' 진일문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아울러 그 음성의 주인이 꼽추도인이며, 그가 여인의 손에 의해 뭔가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와장창--! "우워워!" 진일문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쯧! 이번에는 밥그릇이 날아간 모양이구나.' 그는 음식물을 온통 뒤집어 쓴 채 겁을 집어 먹은 듯 꽁지가 빠져라고 진무관을 향해 달아났다. 진일문은 내심 혀를 차는 한편,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잠시 추리해 보았다. 하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아까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피상적인 것들뿐이었다. 요는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만이 의혹을 풀 수 있는 첩경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진일문은 꼽추도인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려 동굴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동굴 안. "아!" 진일문은 한 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그 곳에 펼쳐진 풍경이란 너무도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여인. 그것도 알몸이나 다름없는 여인이 목책으로 막혀져 있는 감옥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나이는 삼십 가량. 일견하기에도 몸매가 빼어난 여인이었다. 의복은 뜯겨 나갔는지 걸레조각처럼 찢어진 천이 풍만한 젖가슴을 다 가리지 못해 뿌연 살결을 태반이나 노출시키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도 매끄러운 살집이 군데군데 드러나고 있었으며 허벅지 아래로는 아예 맨살이었다. 가느다란 목 위에는 긴 머리칼만이 아무렇게나 흘러 내려 있었다. '맙소사! 무당산의 한 귀퉁이에 이런 일이 벌어져 있다니.......' 진일문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인은 딱딱한 나무침상 위에 되는대로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는데, 침상 바닥에는 음식물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예의 꼽추노인이 날라주었던 그것 같았다. 여인은 그 때까지도 진일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용모 또한 꽤 반듯한 여인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뒤척이다 눈을 뜬 여인의 시선이 진일문에게 딱 고정되었다. 그녀의 표정은 놀라움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감탄으로 바뀌어갔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벌려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인의 음성은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육감적인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 그 음성에는 언뜻 요기(妖氣)가 묻어 있었다. "소생은......." 진일문은 말하려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이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젖무덤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여인의 눈이 일순 야릇하게 빛났다. 그녀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매달았다. "광무, 그 도적이 보냈나요? 호호... 이번에는 제법 그럴 듯한 물건을 보냈군. 뭐하고 있어요? 어서 가까이 오지 않고?" "부인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진일문은 정색을 했다. 하지만 여인은 그의 말은 듣지도 못한 듯 계속 같은 투의 말만을 이어갔다. "호호호... 미남계를 쓴답시고 신통치 못한 머저리들만 보내더니 이제야 작정을 한 모양이지? 어서 이리 와요. 당신이라면 광무가 탐내는 도해(圖解)를 몇 장 더 그려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서......." 여인은 눈에서 서서히 타오르는 것이 있었다. 보아 하니 그것은 분명 욕정의 빛이었다. 진일문은 내심 어이 없어 하는 한편, 여인의 심각한(?) 오해를 통해 짐작 되어지는 바가 있었다. 그녀와 광무진인 사이에는 뭔가 떳떳치 못한 거래가 오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으음, 광무진인....... 그 자의 악행에는 실로 소름이 끼칠 지경이구나. 대체 나약한 일개 여인을 상대로 미남계를 써서까지 무엇을 얻고자 했단 말인가?' 목책은 의외로 형식적이었다. 고리를 벗기고 문을 밀자 진일문은 곧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으음, 아마도 장소가 워낙 은밀하다 보니 방비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구나.' 그가 들어서자 여인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목책이 그토록 허술한데 대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인의 한 쪽 손목에는 은빛이 사슬이 감겨 있었는데 그 끝은 벽에 박혀 있었다. '정말 잔인하구나. 이대(二代)에 걸친 취미인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두는 것은.......' 진일문은 과거 은삭에 매달려 있던 무당 최고의 기인 현고자의 시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은은한 분노가 일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다. "호호호... 동생은 꽤나 쓸만한 체격을 갖고 있군. 얼굴도 준수하고. 호호... 그 도적이 정말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야." 여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가슴 언저리를 덮고 있던 머리칼이 젖혀지며 젖가슴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탄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유방이었다. 진일문은 그녀가 의식적으로 몸을 비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역감이 일었다. 그 바람에 옷이라고 할 수도 없는 천들이 거의 다 벌어져 여기저기서 속살이 드러났다. "자아! 어서 이리 와요, 귀여운 사람. 이 누나는 동생 같은 사람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여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동공 속에서는 여전히 욕정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입술마저도 뭔가에 취한 듯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진일문은 다시금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만 소생은 광무진인이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오. 부인이 이렇게 갇혀 있는 것도 몰랐으며, 단지 우연을 빌어 이 곳에 오게 되었을 따름이오." 여인은 그 말에 흠칫 굳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성난 암코양이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거짓말!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가진 것을 털어놓을 줄 알았다면, 이 육선고(六仙姑)를 너무 쉽게 본 거야. 호호호... 도해는 죽어도 넘기지 않아. 광무, 그 찢어죽일 놈이 아무리 계교를 부려도 소용이 없단 말이야."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탄식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는 여인의 눈빛이 불안정하고 기분도 변화무쌍한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대충 알 수가 있었다. '이 여인은 지금 신지가 올바르지 않다. 광무진인, 당신은 너무도 많은 악업(惡業)을 쌓고 있구려.' 그가 잠자코 있자 여인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몸을 꼬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곧 자신의 손으로 한 겹밖에 없는 천조각들을 찢다시피 벗어 던졌다. "부인!" 미처 말릴 겨를도 없었다. 어느 덧 당황하고 있는 진일문의 앞에 그녀는 알몸이 되어 당당하게(?) 섰다. 무릇 삼십대란 여인으로서는 가장 난숙한 나이다. 여인이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신을 통해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었다. 젖가슴은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으며, 특히 뽀얀 피부는 흡사 유지로 이루어진듯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제 풀에 달아 오른듯 손으로 자신의 유방을 어루만지며 다리를 슬며시 벌려 묘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끙!' 진일문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로서도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공세는 점입가경이었다. "흐응, 어서 날 안아줘요. 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그녀는 코먹은 음성을 내며 그를 향해 허리를 비틀었다. 진일문은 잠시 굳은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가닥 상념이 뇌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여인은 지금껏 이런 식으로 광무진인에게 이용 당해 왔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를 이어온 모종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나도 그의 방식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진일문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부인, 정녕 내가 마음에 드시오?" "그래요. 흐응......." 그는 내심 이를 악물어야 했다. "영광이오. 부인처럼 아름다운 분이 나를 환영해 주어서." "정말......?" 여인은 황홀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벌려 신음을 발했다. "으음.... 그러니까 어서 나를 안아달란 말.... 악!" 그녀는 열에 들떠 침상에서 내려 오다가 갑자기 뾰족한 비명을 발했다. 손목에 채워진 사슬을 깜박 잊고 만 것이었다. 여인의 나신이 뒤로 젖혀지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희고 부드러운 그녀의 아랫배가 은밀한 부위의 초지(草地)와 더불어 확연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색정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연민을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진일문이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여인은 그의 손이 닿아오자 대뜸 그의 목에 매달리더니 그의 얼굴에 뜨거운 입술을 마구 부벼댔다. 여인의 유방이 그의 가슴에 밀착되며 뭉클한 감촉을 전해왔다. 진일문은 한 가닥 비애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여인이 하는 양을 탓하지 않고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육선고, 이 곳에 감금된지는 얼마나 되었소?" "으음? 그런 것은 왜......." 여인은 색기가 출렁이는 눈으로 빼꼼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일문의 손이 한 쪽 어깨를 감싸 안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마치 뱀처럼 그에게 감겨들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떼어 놓겠소. 그럼 당신은 내게 손가락 하나도 댈 수 없을 것이오." 여인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그야 뻔하잖아요? 그 놈이 만겁수라동(萬劫修羅洞)을 만들게 해 놓고 우리 귀수신장문(鬼手神匠門)의 사형제들을 차례로 죽였지만, 으음... 이 육선고만은 그럴 줄 알고 마지막 멸천삼관(滅天三關)의 기관도해를 내주지 않았지." "그것 때문에 당신을 가두었다는 거요?" "그럼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흐으음......." 육선고는 허리를 뒤로 활처럼 휘었다. 진일문의 손이 그녀의 유방을 슬며시 쥐었다 놓았기 때문이었다. "만겁수라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광무진인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당신들에게 만들라고 한 것이오?" 그의 손은 이어 육선고의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갔다. 육선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더욱 세차게 그의 목에 매달렸다. "만겁수라동은... 하아....... 본문 비장의 기관지학 총체로... 총 백팔가지의 무서운 기관장치와 죽음의 함정이 설치된, 흐읍!" 그녀는 눈을 까뒤집으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진일문의 손이 어느 부분에 닿았는지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에 반해 진일문의 시선은 냉담하기 그지없어. 목적을 가지고 여인을 애무하는 일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품안에서 꿈틀대는 전라의 여인이 역겨워 구토가 일 지경이었다. 다만 상황이 그것을 요하니 본의와는 무관한 행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광무진인은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오?" "그것은... 나도 몰라. 만겁수라동은... 아무리 무공이 강한 사람이라도 일단 갇히면 절대로 나올 수가 없으니까. 으음......." 진일문은 갑자기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광무진인!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 순간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가공할 음모의 냄새였다. 더구나 광무진인은 지금 중원검정대회를 핑계 삼아 무림 칠대 문파 중 무당을 제외한 육파의 장문인들과 함께 있다. 그러므로 또 무슨 일을 벌인다 해도 자칫 속수무책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진일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실로 무서운 자다. 게다가 광해진인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그 자와 정면승부를 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육선고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만겁수라동의 기관을 조종할 수 있소? 부탁이오, 내게 그 방법을 알려 주시오." 육선고는 고개를 저어 간단하게 그의 말을 일축시켰다. "흥! 어림없는 수작이야." "흐음?" "흐응,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또 만겁수라동의 기관은 오직 이 육선고만이 파해할 수 있고, 단시일 내에는 배울 수도 없어. 당신이 원한다면 천천히 즐기면서 가르쳐 주겠어. 자아......." 이쯤 되자 진일문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짜악--! "악!" 육선고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에게 따귀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이었다. 널브러진 그녀의 육체를 보며 그는 탄식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하지만 진실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소. 나는 아무래도 당신이 원하는 상대는 못되어줄 것 같소." 육선고는 몸이 마비된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진일문이 그녀의 뺨을 후려치면서 연마혈을 동시에 짚어버린 것이다. 진일문은 육선고의 풍만한 나신에 겉옷을 벗어 덮어준 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의 입장이 오히려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감옥 안을 거닐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하든 육선고를 설득해 만겁수라동의 기관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그 열쇠를 쥐지 않고는 도저히 광무진인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는 육선고를 어떻게 설득시키냐는 쪽이었다. 그는 점차 초조감에 휩싸여 갔다. 검정대회가 열린지 벌써 나흘째, 광무진인의 음모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다가올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지 못하면 항차 중원무림에는 커다란 비극이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일문은 마침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간이 없다. 이 여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고문을 해서라도 만겁수라동의 도해를 얻어낼 밖에.......' 그로 말하자면 고문에 있어서는 전문가(?)이다. 그런 그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결심하고 육선고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육선고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생각이 달라지고 말았다. 뜻밖에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음탕했던 요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의외로 수치와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를 올려다 보는 육선고의 눈에는 증오가 이글거렸다. 그것은 종전의 분위기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진일문은 한 가닥 서광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육선고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육선고,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대답을 하시오. 미안하오만 그것은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대신하면 되오. 맞으면 한 번, 틀리면 두 번이오. 그래 주겠소?" 그의 어투는 표정과 함께 진지하기 그지없어. 그래서일까?놀랍게도 그를 노려보던 육선고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진일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방금 전의 일을 기억 하시오?" 육선고의 얼굴이 수치감으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아울러 그녀는 부인하지 않는다는듯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당신의 뜻이 정녕 그러하오? 지금도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하고 싶소?" 육선고는 눈까풀을 파르르 떨더니 두 번 깜박였다. 진일문은 그제서야 확실하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인즉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면 결론은 한 가지, 어떤 금제나 약물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 된다. 진일문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육선고, 당신의 인격을 믿고 혈도를 풀어 주겠소. 그러나 조건이 있소. 그것은 내가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당신 역시도 내게 적의를 가지지 말라는 얘기요. 왜냐하면 나는 광무진인의 하수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일을 제지하기 위해 온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런 의미에서라면 당신과 같은 입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오." 육선고는 반신반의했다. 아마도 상대방을 신뢰하는 일이 그녀로서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인 모양이었다. 이 점에 대해 진일문은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이 처한 입장으로 미루어 내 말을 믿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당신을 설득시킬 시간이 별로 없소." 그는 가능한 한 간단명료하게 자신에 대해 얘기했다. 다행히도 육선고는 머리가 나쁜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금새 표정을 풀었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 혈도를 풀리자 육선고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당신은 진짜 남자예요!" 귀수공공(鬼手空空) 공손야(公孫冶). 소위 귀수신장문(鬼手神匠門)의 초대(初代) 문주(門主)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무엇이건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자라면서 그 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더니 십이 세 때는 움직이는 목마(木馬)를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그는 여러가지 기괴한 물건을 제작하거나 복잡한 기관장치 따위를 설계하는데 더욱 몰두하게 되어 마침내 삼십 세에 이르자 예의 귀수공공이란 별호를 얻게 되었다. 그의 이런 재능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황릉을 만드는 공사에 참가하고부터였다. 역대 황제의 묘가 의례 그러하듯, 황릉의 건축에는 막대한 물량이 투입된다. 천하의 이름난 장인(匠人)들이 총동원되어 무려 수십 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는 것도 역시 불문가지였다. 특히 귀수공공 같은 인물은 이 일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그 이유는 그의 특기가 바로 기관장치를 설치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묘란 항상 도굴의 위험이 따르므로 이에 대비한 갖가지 함정과 기관이 첩첩이 장치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방면의 전문가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묘가 완성되면 대개는 비밀 유지를 위해 장인들도 함께 생매장되었으므로 늘 새로운 인물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귀수공공은 가히 기적을 이루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번번이 그런 위험 속에서 절묘하게 빠져 나왔으며, 묘를 만드는 일에도 계속 참여하곤 했다. 이는 얼핏 일반일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나 장인으로서의 타고난 기질, 재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못견디는 그의 집념이 삶에 대한 애착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보면 맞았다. 그러나 나이가 칠순에 이르자 그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필생의 탐구열은 여전한 반면 눈이 어두워지고 체력이 떨어져 가는 자연 현상에는 그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몇 가지 무공을 익힌 덕에 그나마 그 나이까지 악착같이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말년에 제자들을 맞아들이고 하나의 문파(門派)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재능과 그 동안 연구해오던 기관지학을 그대로 땅에 묻지 않고 승계하기 위해서였다. 귀수신장문이라는 문파는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은 무학 방면에서 본다면 고작 하오문에 지나지 않었으나 기관지학에서만은 능히 천하제일 문파를 자처했다. 귀수공공은 모두 여섯 명의 제자를 거두었다. 뜻이 그러한 만큼 그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섯 명의 제자들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천 명 중 한 명을 골랐을 정도로 영리한 인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재능이 그의 발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귀수공공은 무척 실망했으나 한 가지를 작정하고는 마음을 돌렸다. 즉 자신의 유업을 육등분으로 나누어 각 제자들의 특성에 맞게 한 가지씩 전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이 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자 여섯 명에게 각기 다른 방면의 기관학을 전수해 준 결과, 그는 예상대로 매우 만족스러운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천수를 다 누리고 눈을 감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귀수신장문의 여섯 제자들은 사부가 죽자 뜻을 모으지 못하고 갑론을박했다. 어떤 자는 사부가 남기고 간 기관학을 좀 더 연구해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자는 먼저 강호에 나가 사문의 이름을 빛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침내 나이가 젊은 그들은 후자 쪽으로 의견이 쏠려 들뜬 기분으로 강호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청운(靑雲)의 꿈을 안은 채. 그러나 강호가 어떤 곳인가? 철저하리만큼 무력(武力)에 의해 지배되는 그 사회에 그들이 설자리는 없었다. 일신에 소지하고 있는 무공이라야 강호 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니 제대로 행세하기가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강호에 나온 여섯 사형제들은 가는 곳마다 엄청난 수모를 당해야 했다. 유일한 자랑인 기관지학은 좀체로 발휘할 기회조차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회의와 함께 무림인들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는 한편, 자구책으로 한 가지 무서운 안을 결정짓기에 이르렀다. 그 한 순간의 모의가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전혀 계산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대안이란 바로 여섯 사형제들의 지식을 총동원해 귀수신장문의 정화(精華)인 만겁수라동을 만들고, 천하의 유수 문파나 여러 고인들을 초청하자는 것이었다. 무공으로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없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한 번 이름을 드날려 보려는 의도였다. 즉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기관장치 속에 고인들을 몰아 넣어 보기 좋게 그들의 기세를 꺾어 놓자는 심산이었다. 그들은 결의가 있은 후로 곧 만겁수라동의 도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 각자가 전문적인 분야를 떠맡아 진행해 가는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많은 시간도 소요되지 않았다. 일백여덟 가지의 기상천외한 기관장치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곳곳에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완벽한 미궁(迷宮). 그들 여섯 사형제들은 그 정도라면 귀수신장문의 명예를 날리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라며 매우 흡족해 했다. 어찌 보면 유치할 만큼 단순한 발상이었다. 사실 그들은 다만 무림의 고인들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지, 그 외에는 별다른 욕심도 없었다. 그 와중에 실로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에게 한 명의 도인이 찾아 왔다. 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들이 은신하여 도면을 그리고 있던 팔부산(八部山)의 태안곡(泰安谷)까지 직접 방문했다. 그는 매우 정중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기관학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은 그의 칭찬에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더구나 그 도인이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소림과 더불어 중원의 태산북두 격인 대무당파의 지존이 그런 반응을 보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무당의 장문인, 즉 광무진인은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만겁수라동을 무당산에 만들자는 것으로써 그렇게만 해 주면 무당파가 그들의 일을 적극 돕겠다고 했다. 귀수신장문이 만방에 위세를 떨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여섯 사형제들은 감격해마지 않았다. 정말로 광무진인의 말대로만 된다면 그들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광무진인이 직접 주관해 준다면 공사가 순조로울 것은 물론 도가의 성지에 영구적으로 작품을 남길 수 있으니, 이 또한 지극히 영광된 일로 여겨졌다. 모종의 거대한 음모는 그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동굴 안.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오년 전부터 공사가 시작 되었어요. 진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공사에 필요한 자금에서부터 인부들까지도 그 자가 모두 대 주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 그 더러운 도사놈의 속임수였을 줄이야......." 육선고는 원독에 찬 눈빛을 발했다. 부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동굴 안을 스산하게 울리기도 했다. "우리 사형제들은 그를 훌륭한 도인이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우리를 이용하고 해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만겁수라동이 완성되자 그 악마는 차례로 사형들을 유인해 죽게 했어요." 육선고의 눈에 눈물 방울이 맺혔다. 그것을 본 진일문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으음.... 이 여인의 울분을 대체 어찌 해야 하는가?' 배신감의 부피란 원래 믿었던 바와 비례하는 법이다. 그런즉 그녀의 눈물은 증오의 결정체나 진배없었다. 육선고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그 자가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내가 만겁수라동에서도 가장 무서운 기관인 멸천삼관(滅天三關)의 조종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당시에도 어렴풋이나마 사형들의 죽음에서 수상한 냄새를 느끼고 끝까지 도해를 내놓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광무진인이 도해를 빼내기 위해 자신에게 가했던 온갖 협박과 회유, 고문까지도 모두 털어놓았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입을 열지 않고 잘 버텼다는 것도. 광무진인. 마침내 그는 육선고에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을 썼다. 벙어리 도인인 정수(正壽)를 통해 그녀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게 하면서 그 속에 강력한 춘약을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최음제의 약효로 인해 몸부림 칠 때마다 그녀의 육체를 괴롭히면서 도해를 조금씩 알아내곤 했다. 이 수법에는 육선고도 별 수 없었다. 일단 최음효과가 일어나면 육체의 불을 끄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해에 대해 조금씩 발설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녀의 체내에는 춘약의 약성이 깊숙히 잠재되어 있어 음식을 먹던 안 먹던 마찬가지였다. 본성이 돌아올 때면 육선고는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사형들을 죽인 광무진인에 대해 복수의 집념을 불태웠다.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결심이 그녀의 심중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육선고는 말을 하면서도 내내 민망한 기색을 보였다. 마침 진일문이 들어왔을 때가 한창 춘약의 약성이 그녀로 하여금 발작을 일으키도록 부추켜 놓은 시각이었다. 따라서 보일 것 못 보일 것 다 보였다고 생각하니 그것은 이성을 되찾자 보통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그녀의 처지에 못내 동정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달리 생각지 마시오. 부인께서는 단지 그 자의 간계에 희생된 것뿐이고, 소생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으니까. 지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마시오. 광무진인은 본시 그런 자외다. 무당의 장문인으로써 자격이 없는 자였소." 그는 다소 씁쓸하게 덧붙였다. "마음의 상처가 큰 분께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으나 소생에게는 지금 부인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그리고 부인으로서도 그에게 복수를 하려면 필히 소생과 뜻을 같이 해야 할 것이오." 육선고는 문득 눈가에 음울한 빛을 띄었다. 그녀는 눈을 돌려 한 차례 허공을 ㅎ더니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신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부인이 아니에요. 아직 성혼을 한 것도, 아니 누구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어 본 적도 없는 걸요." 진일문은 결코 웃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만겁수라동을 만드는데 청춘을 날려 버린 것이로구나. 더구나 그 뒤로는.......' 웃기는커녕 오히려 콧등이 시큰해질 지경이다. 그는 내심을 감추느라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과 드리겠소. 소생이 생각이 모자랐소이다. 지금부터는 당신을 육소저라고 부르겠소." 그 말에 육선고는 만면에 홍조를 띄었다. 비록 나이가 들긴 했어도 여인은 어디까지나 여인이다. 게다가그녀는 아름다웠다.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남자로부터 사랑 받을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녀를 바라보며 사뭇 연민지심을 떨치지 못했다. 동굴 안은 비좁았다. 때문에 그는 육선고의 체취는 물론 숨소리까지도 가까이서 모두 접할 수가 있었다. '가능하다면 보듬어 안아 주고 싶다.' 진일문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인 상태로 자신의 겉옷을 대충 걸치고 있는 육선고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욕념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자비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시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괜히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려 놓을까 염려되어서였다. 육선고가 고개를 숙이더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어... 당신이 보기에 제가 몇 살쯤으로 보이나요? 혹시... 늙어 보이지는 않나요?" 진일문은 내심 장탄식 했다. '여인이여! 그대는 대체.......' 사실 지금 상황에서 육선고가 취하는 언행이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여자, 그것도 한 때 미모에 자신을 가졌던 여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진일문은 쓰린 심정이 되어 매우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소생의 눈이 잘못 되지 않은 한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소이다. 육소저는 아름답소이다, 어떤 남자라도 반할 만큼. 이것은 진심이오." 육선고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귀밑까지 빨개지는 그 모습은 얼마 전까지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진일문은 그런 그녀를 응시하며 고소를 지었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면서도 외모에 신경을 쓰다니....... 이런 여인을 상대로 그 자는 어떻게 모계를 꾸밀 수 있었을까?' 그는 광무진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윽고 진일문은 내공의 힘으로 육선고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은빛 사슬을 끊었다. 사슬은 그가 몇 번 힘을 주자 가볍게 풀려 나갔다. 두 사람은 그 길로 동굴 안으로부터 나란히 걸어 나왔다. 35장 천사곡(天嗣谷) 수신관의 대청 앞. 광오진인(光悟眞人)이 양손으로 한 통의 서찰을 받쳐들고 있었다. 대청 위에서는 광해진인을 위시하여 무당의 광자배 도인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장문진인의 전갈입니다." 광오진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광해진인은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서찰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라도 연결되어 있는 듯 그의 손으로 날아 들어왔다. 놀라운 허공섭물진기였다. 그것은 과거 현고자가 한 번 시전해 보인 적이 있었을 뿐, 무당의 절기 중에서도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기예였다. 광오진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는지 어쨌는지 광해진인은 줄곧 심각한 표정이었다. "흐음, 광무가 내게 서찰을? 그렇다면 나를 직접 대면할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 광오진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순간에 흥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치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그 근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쯧, 만용을 부리는군.' 그가 내심 혀를 차고 있는 사이, 광해진인은 서찰을 다 읽고 는 흰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괘씸한 놈, 무당의 존망이 달려 있는 중원검정대회를 주관하느라 마중 나오지 못해 죄송하다고? 그래서 송구스럽지만 사형이 와 줄 수 없겠느냐고?" 광해진인의 얼굴에는 오히려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아무튼 뜻만은 명백히 전달되었다. 광무진인이 한껏 시간을 끌더니 겨우 서찰을 통해 만나기를 청해온 것이었다. 수신관에 모인 도사들은 하나 같이 안면을 굳혔다. 광진도장이 분노가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필시 함정일 것입니다. 대사형, 그는 몹시 교활한 자이오니 그의 말에 응하시면 안됩니다." 광해진인은 그 말에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서찰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광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광오진인은 내심이야 어떻든 감히 그의 시선을 맞받을 수가 없었다. 서열상으로도 그렇거니와 눈이 잠시라도 마주치면 얼음장 같은 기운이 뼈를 쑤셔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문 사형께서는 검회를 주관하시느라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소제가 모시겠습니다." 도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 "그것은 안될 말이오!" "대사형께서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셔서는 안됩니다. 그는 이 순간에도 필경 무엇인가 일을 꾸며 놓고 있을 것입니다." 광오진인이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장문사형께서는 여러 사형제들이 함께 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내친 김에 허심탄회하게 무당의 장래에 대해 서로 털어 놓고 얘기하자고 하셨소이다." "흐음?" 이는 정녕 뜻밖이었다. 광무진인이 그런 말을 했다니 실로 믿기가 어려웠다. 틀림없이 무엇인가 저의가 있지 않고는 그가 순순히 그렇게 나올 리가 없었다. 수신관의 도인들은 모두 얼굴을 굳혔다. 처음 그가 광해진인을 부른다고 했을 때에는 단순히 암격을 예상했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되려 혼란스러워 지고 만 것이었다. 광해진인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좋다. 일단 그의 말대로 하겠다. 사형제들이 전부 모여 있는 자리라면 광무도 쉽사리 일을 저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심중에는 중인환시리에 역천의 죄악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도 함께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광진도장을 비롯한 광자배 도인들로 하여금 불길한 예감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것은 직감적으로 어떤 위기의식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그들은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치뤄내야 할 일이라면 일찌감치 치뤄 버리는 것이 나으리라는. 광해진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광무가 있는 곳이 어디냐? 빈도가 그를 만나겠다." 삼경(三更)이 넘는 시각이었다. 그 때 쯤이면 의례 그러했듯 무당산은 적막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적막을 뚫고 상청궁의 도인들은 납덩이 같은 가슴을 끌어 안은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인물은 광오진인이었다. 광해진인이 광자배의 도인 이십여 명과 더불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제 상청궁에 남아 있는 도인들이라야 대부분이 광자 아래의 항렬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이 밤에 무당파의 운명을 좌우할 엄청난 사태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분이 낮은 그들로서는 명령이 있기 전에는 감히 따라나설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광오진인이 도인들을 인도해 간 곳은 무당산의 서쪽이었다. 그는 앞장 서 하나의 곡(谷)으로 접어들었다. 곡구에서 광진도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 곳은 지난 수 년간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 아닌가?" 광오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이 곳에는 본시 천연의 동혈(洞穴)이 군데군데 뚫린 석벽이 있어 과거 본문의 선사들께서 좌선을 즐겨 하시던 곳입니다." 그는 곡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장문인께서는 그 동안 이 곳에서 중원검회를 개최하기 위해 외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외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곳에는 본문의 유적이 많거니와, 수백 개가 넘는 동혈들이 침식으로 인해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보수공사를 해 놓아 말끔하게 정비되었습니다." 광진도장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다. "왜 하필 이 곳에서 검회를 개최한단 말인가?" "이번 검회에는 본문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광무진인께서는 선사들의 유적이 있는 곳에서 무당의 명예를 새롭게 부활시키려 했던 것이오." 마침내 일행은 모두 곡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는 좁았으되 안 쪽으로는 점차 넓어져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도인들은 달빛에 비친 곡내의 풍경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곳의 경관인즉 그들의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개중에는 이전에 한 번쯤 이 곳에 와 보았던 자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황지계곡에 불과했던 곳이 지금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말끔히 정지(整地)된 것은 그렇다치고, 이름도 모를 기화요초가 가득히 피어 있는가 하면 언덕에는 과수도 심어져 있었다. 지저분했던 개천까지도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었다. 일행은 수목 사이로 걸어갔다. 길도 잘 다듬은 청석으로 덮혀 있어 마치 거대한 궁전의 내부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개울에는 월교(月橋)가 운치 있게 걸려 있었다. 또한 곳곳에 죽림(竹林)이 알맞은 풍수(風水)의 위치에 가꾸어져 있어 지형을 잘 이용한 정자, 혹은 여타의 구조물들과 절묘한 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언제 이런 시설들을 만들었단 말인가?' 도인들은 안으로 접어 들수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그 모든 것이 생경하고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광해진인. 그는 주름진 얼굴에 의혹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 곳을 과거에는 천사곡(天嗣谷)이라 불렀다.' 천사곡은 곧 하늘을 잇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우화등선을 열망하는 도인들이 수도를 하는 곳인지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곡 안의 절벽에 수백 개의 천연동혈이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는 곳이었다. 광무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다 이런 시설을 해 놓았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의식하자 미간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무릇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광무진인에 대해 이렇듯 아는 것이 전무하니 그로서는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일행은 세 개의 구름다리를 지나고, 다시 두 군데의 죽림사이로 난 소로를 가로질러 갔다. 그러는 동안 일행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모두 무거운 침묵 속에서 팽팽하게 부푼 긴장감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은 그들 모두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길의 막다른 곳에 당도했다. "아니! 저것은......?" 도인들은 전면을 바라보며 일제히 탄성을 발했다. 그들의 눈 앞에는 거대한 궁전 양식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절벽을 배경으로 지어진 그 궁은 지극히 아름답고 호사스러웠다. 지붕은 유리기와로 덮었으며 기둥 하나가 장정 대여섯 명이 간신히 팔을 두를 수 있을 정도로 굵었다. 흡사 황궁의 어전을 연상시키는 건물로써 그야말로 요지경이 따로 없었다. 도가의 성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환상적이리만치 아름답고 화려한 궁....... 그것은 절벽 안으로 반쯤 들어 앉다시피한 기이한 구조였다. 도인들은 혹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절로 일었다. 과거 동혈이 숭숭 뚫려 있던 절벽의 모습이란 지금의 정경과는 연관조차 지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동혈마저도 궁에 의해 가려졌으니 지난날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이제 다 왔소이다." 광오진인이 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광해진인을 비롯한 이십여 명의 도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아연한 심정이 되어 거대한 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광무진인이 무엇을 위해 이 궁을 지었으며, 왜 자신들을 이 곳으로 불러 들였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신비의 궁은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것 같았다. 그들은 광오진인의 안내를 받아 궁으로 들어갔다. 궁 안은 막바로 내전(內殿)으로 통하는 특이한 양식이었다. 내전은 실로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거울처럼 사물이 비쳐 보이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기둥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흑색의 철주(鐵柱)로 되어 있었다. 천정의 높이는 무려 십장이 넘어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말이 내전이지, 그 곳은 넓이까지도 하나의 연무장인양 드넓었다. 그 안쪽으로 기둥이 열을 지어 서 있는 한 통로는 회랑인 듯 했다. 내전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넓은 곳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며 내심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호사의 극을 이룬 궁대에 이것이 도를 닦는 도인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일행 중 한 명이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광오가 사라졌소!" 도인들 사이에는 금새 동요가 일었다. "무량수불... 광오! 어디로 숨었느냐? 썩 모습을 나타내라." 왜 안그렇겠는가? 그들이 대전의 모습에 한 눈을 파는 동안 광오진인이 감쪽같이 행방을 감추어 버린 것이었다. 도인들은 이제껏 막연하게 품어 왔던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실체가 되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광진도장이 주위를 돌아보며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무량수불...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것 같소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의 창문이 무엇인가에 의해 모두 막혀 버렸다. 쾅! 콰쾅--! 뒤 이어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것은 바로 여러 곳에서 쇠문들이 내리 닫히는 소리였다. 대전 안이 갑자기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손가락을 코앞에 내밀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인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한편 각기 안력(眼力)을 돋구었다. 하지만 이어진 것은 비명에 가까운 그들의 신음성이었다. "이, 이럴 수가! 안력이 통하지 않다니......."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귀로 광해진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빈도도 마찬가지다. 무량수불... 아무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속히 진기를 끌어 올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어찌 이런 일이!" 일행의 무공 수위로 치자면 사실 강호상에서도 내노라 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어둠 따위에는 대개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하물며 광해진인이 누구인가? 그러나 그에게도 역시 별 대책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 곳에는 아마도 안력을 방해하는 모종의 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떻든 당황하지 말고 대처하기 바란다." "으음......." 도인들은 침음성을 흘리는 반면 그의 말대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호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이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침착을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가히 절망적인 어둠 속.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들의 숨소리뿐이었다. 이제부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도인들은 각자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서로의 호흡소리에서 긴박감이 느껴지니 불안은 더 했다. 그래도 함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위안이 되어 주었다. 여하한 일이 벌어진들 무당 내의 최정예들만 모여 있으니 힘을 합치면 충분히 극복해 나가리라 믿었던 것이다. 곧 그들의 청각으로 괴이한 음향이 부딪쳐 왔다. 그것은 얼핏 듣기에도 결코 예사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경미하게 들리던 것이 점차로 커지고 있었다. 쓰쓰... 쓰쓰....... 느낌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 음향은 사방으로부터 그들을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광진도장이 목소리를 낮추어 옆에 정좌하고 있는 광해진인에게 물었다. "대사형,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벌레 같기도 하고......." 광해진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리만을 듣고도 벌써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무당을 떠나 천하를 방랑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었던 그였다. 그 풍부한 경륜이 어디로 가겠는가? '으음, 이것은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전갈(全蝎)이다. 맹독으로 인해 물리기만 하면 즉사를 면치 못한다. 어찌 이 곳에 그런 독물이? 더구나 소리로 미루어 숫자도 엄청난 것 같구나.' 그는 사제들을 이 곳까지 동반하고 온데 대한 자책과 더불어 광무진인에게 극도의 증오를 느꼈다. '광무! 네가 이렇게 악독할 줄은 정녕 몰랐다. 사형제들이 있는 곳에다 시계(視界)를 차단하고 독물들을 풀어놓다니.' 광해진인은 이가 갈렸으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전갈은 움직임이 느리다. 그렇다면......?' 전갈을 푼 이유란 결국 뻔했다. 전갈은 본시 동물의 체온을 감지하고 다가든다. 그러므로 대거 덤벼든다면 한 군데 모여 있을수록 불리했다. 떼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서로 흩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광해진인은 광무진인의 저의를 명백히 알아차렸으면서도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으므로. "모두 간격을 벌려 흩어져라. 가능한 한 서로 멀리 떨어진 후, 청력을 이용해 다가드는 전갈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분분히 들렸다. 도인들은 놀란 나머지 신형을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무당산을 내려간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전갈이라는 말을 듣자 매우 당혹해 하고 있었다. 광해진인은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광무! 네 놈의 의도대로 되고 말았구나.' 그의 귓전으로 여기저기에서 장풍을 날리거나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사들이 전갈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각기 무력(武力)을 동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불현듯 의외의 소음이 들려 왔다. "앗! 헉--!" 위이잉! 쿠쿠쿠쿠.......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더불어 기관이 작동되는 듯한 묵직한 음향이 울리고 있었다. 쇠와 쇠가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 그리고 무엇인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 등이 어수선하게 이어졌다. 광해진인은 미동도 않고 처음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그 이상으로 알 수 있었다. 도인들이 전갈을 쫓느라 장풍을 날리거나 검을 휘두르다가 대전에 장치되어 있는 기관을 건드려 함정에 빠지는 등의 변고를 만난 것이다. 광해진인은 내심 통렬히 부르짖었다. '광무! 내 너를 죽이지 않으면 다시는 푸른 하늘을 보지 않겠다. 어디 두고 보자!' 그의 심중에서 살심이 하나의 맹세로 굳어지는 찰나였다. 문득 그의 머리 위에서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쉬이익--! 광해진인은 재빨리 손을 들어 이를 막았다. 펑! 폭음에 이어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대경했다. '무엇이건대 되돌아오는 힘이 이다지로 크단 말인가?' 그의 장력에 맞은 물체가 저만치 떨어지고 있었다. 꽝! 그것은 바닥에 닿는 즉시 굉음과 함께 불꽃을 튕겨냈다. 그 물체를 확인한 광해진인은 눈을 크게 부릅떠야 했다. 그가 쳐낸 것은 무게가 천근은 족히 나갈 듯한 철구(鐵球)로써 표면에 날카로운 칼날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만일 그가 공력이 낮았더라면 그 칼날에 의해 손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으리라. 광해진인은 분노한 나머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 때, 갑자기 바닥이 허전해지더니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그 속으로 쑥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헛!" 광해진인의 반응은 기민했다. 그는 즉각 오른발로 왼발의 등을 찍으며 채 반숨도 되지 않는 진기로 도약, 상승을 시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관의 움직임이 그보다 빨랐다. 퍽! 그는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신형을 멈추어야 했다. 어느 새 구멍은 단단한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 철판에 머리를 세차게 부딪치게 된 광해진인은 아래로 급강하 했다. 예상 못한 난변이 그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만일 그 속도대로 떨어져 내리면 아래에 무엇이 있건 그의 몸은 피떡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 순간, 광해진인은 비쩍 마른 몸을 쫙 펴더니 손발을 좌우로 뻗었다. 동시에 그는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좌장을 떨쳤다. 펑! 그의 장심에서 발출된 장력은 그대로 벽을 후려쳤고, 그 반탄력을 이용해 그의 몸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어 매끄러운 벽이 닿아오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양손을 칼날처럼 세워 벽에 박았다. 퍼퍽--! 광해진인의 수도(手刀)는 마치 도끼로 화한양 돌가루를 튕기며 벽에 들어가 박혔다. 그것은 파금수(破金手)라는 절기로써 그의 필생의 공력이 주입된 것이었다. 가까스로 추락사를 면한 그는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고소를 지었다. '아차하면 불귀의 객이 될 뻔했군. 반도를 처리하고 사문을 정리하기는커녕.......' 광해진인은 벽에 두 손을 박은 채 잠시 신형을 멈추고는 숨을 돌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수도로 계속 벽을 찍어가는 방식이었다. 그 방식에는 실상 막대한 공력의 소모가 따랐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잠시 후. 광해진인은 무사히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내공조예가 초절한 그였으나 몹시도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같은 시각. 천사곡의 입구에는 또 다른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숫자는 줄잡아도 대충 사오십 명에 달했는데, 모두 한데 섞여 있기는 했으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들이 각기 네 부류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장 선 인물들은 하나 같이 위풍이 당당하여 적어도 일파의 지존쯤으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먼저 호안(虎眼)에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육, 칠십여세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거대한 체구에 눈이 실 같이 가늘고 소매가 넓은 도포를 입은 노인, 등에 검을 메고 있으며 마른 체격에 안색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노인,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기형의 도를 멘 청삼의 노인 등이 이들 네 부류의 우두머리인 듯 했다. 네 사람은 일행의 선두에 선 채 천사곡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호안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과연 그들이 약속을 잘 지킬지 의문이구려. 첩지대로라면 오늘 그 날짜이거늘, 그들의 말에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는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소이다." 우울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는 이 호안의 노인은 천하에서도 위명이 쟁쟁한 인물이었다. 바로 중원사대신가의 하나인 황룡사가보의 보주 사해신검 사운악(査雲嶽)이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세 명의 노인들도 마찬가지로 각기 사대신가의 가주들이었다. 체격이 거대한 노인은 사천 당가(唐家)의 제일가주인 당평(唐平)이었고, 검을 멘 싸늘한 인상의 노인은 산동 악가(岳家)의 만검장주(萬劍莊主) 악군보(岳君步)였다. 마지막으로 청삼에 도를 소지한 인물은 하북 팽가(彭家), 즉 도방(刀幇)의 방주인 구주진천도(九州震天刀) 팽전위(彭全韋)였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인물들은 사대신가의 정예고수들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전례로 보아 웬만큼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는 사대신가의 가주들이 직접 이렇게 왕림하는 일은 없었다. 사운악의 말에 만검장주 악군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볼모들을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도 할 수 없소. 각오한 대로 이 곳에서 뼈를 묻을지언정 맞서 싸워야 하오. 더 이상 그들의 협박에 끌려 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우리 사가는 지금까지만 해도 엄청난 치욕을 겪어야 했소. 이제 그들의 요구에 응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소." 거구의 노인, 즉 당가의 가주인 당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외다. 사가의 명예는 돌이킬 수가 없으나 더 이상 주구 노릇은 사절이오. 어떻든 담판을 지어야 하오." 팽가의 구주진천도 팽전위도 동의했다. "물론이오. 이 팽모도 그럴 작정이외다.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오. 아무리 그 자의 무공이 높다기로서니 우리 사가 또한 힘을 합한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오."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심중에서 호기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각자 절치부심, 그 간에 일방적으로 겪었던 수모를 만회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사대신가 일행은 모두 곡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풍경이 일변하여 잘 가꾸고 다듬어진 곡내의 모습을 대하게 되자 그들은 앞서의 무당파 도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괴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운악이 걸음을 뚝 멈추며 나머지 세 가주들을 돌아보았다. "무당산에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당평의 가느다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아니, 이 풍경에서는 작위적인 냄새가 나오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엿보이는 것이 같소." 그는 주위를 스윽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다들 보시오. 이 곳에는 곡의 지세를 이용해 일종의 진식이 펼쳐져 있소. 그리고 그 가운데 무형의 살기가 사방으로부터 뻗어 나오고 있소." 당평은 당가의 가주로써 각종 암기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기관지학이나 진법에도 능통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기정사실이나 진배없었다. 사인의 가주들은 가슴 한 귀퉁이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군. 그들은 모종의 안배를 해 두고 동시에 우리들을 불러 들였구나. 오늘 밤, 이 곳에서 우리가 뼈를 묻게 되는 것은 단지 각오가 아니라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들은 똑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천사곡에 깊숙히 접어든 시각은 축시(丑時) 경이었다.한창 어두울 때였으나 달빛이 중천에 걸려 있어 천사곡의 내부를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계곡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워 가히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평화를 잃고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사운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첩지에는 혹 안내자를 보내겠다고 써 있지 않았소?" 그의 음성에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혹 타를 향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소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받듯 이내 어디선가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물론이오! 천년마등주는 허언을 하지 않소." 그 음성을 듣자 사가의 가주를 위시하여 사십여 명에 달하는 사가의 인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집중되었다. 등(燈). 하나의 등불이 죽림 속으로부터 튀어나오더니 일체의 흔들림도 없이 그들에게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천년마등......." 가주들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등불에는 귀왕의 두상이 그려져 있었으며 허공 중에 둥실 떠 있었다. 늘 그렇듯 등불을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없이 등불 혼자 둥둥 떠서 날아오는 장면은 웬지 공포감을 유발시켰다. 비록 의도적인 얄팍한 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으나 그로 인해 수세에 몰려 본 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웃어넘길 일이 못되었다. 일종의 심리전술이랄까? 사대신가의 인물들은 작금에도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의 차가운 음성이 다시 중인들의 귀에 꽂혔다. "마등주께서는 여러분들은 정중히 모셔 오라고 하셨소. 어서 따라 오시오." 등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홀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으음......." 사대신가 가주들은 저마다 입술 사이로 침음성을 흘려냈다. 그들은 등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곧 세 개의 구름다리, 그리고 죽림 사이로 나 있는 길 등을 가로질러 그들은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궁 앞에 당도했다. 화려한 궁의 모습은 그들을 더욱 압도했다. 마치 그들의 지금 처지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등불이 궁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도 체념과 각오가 뒤범벅이 된 얼굴로 하나 둘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승사자를 따라 지옥으로 끌려 들어간들 이보다는 나으리라는 심정으로. 궁문은 마지막 한 사람이 들어가자 소리없이 닫혔다. 천사곡의 입구에 다시 수십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 역시도 모두 무림인들로 복색이 각양각색이었다. 그들은 함께 이 곳까지 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서로 뜻을 함께 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 같이 무림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무당산에서 열리는 중원검정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대강남북에서 찾아온 인물들이기도 했다. 사실 이들은 중도에서 무당파로부터 문전 박대를 당해 크게 실망을 한 경험들이 있었다. 그런데 각기 귀향하려는 이들에게 뜻밖에도 무당장문인에게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그 내용인즉 검회의 참관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제안은 그들의 상한 자존심을 회복시켰고, 그들은 쾌히 응하기에 이르렀다. 매 오 년마다 열리는 대정검회야말로 무공에 대한 안목과 무림의 실세를 판단함에 있어 다시없는 기회랄 수 있었다. 그러니 무당이 태도를 바꾸고 나오는데야 그들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초청장은 아무에게나 발부된 것이 아니었다. 무당산 인근에는 현재 수백 명이 넘는 무림인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초청장을 받은 사람의 수효는 고작 칠, 팔십여 명으로써 모두 강호상에서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초청을 받았다는 것은 곧 명성이 입증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초청장에 명시된 대로 이 곳 천사곡까지 왔다. 그것이 교묘한 암계인지도 모르는 채. 한편. 강호인들이 천사곡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줄곧 숨어서 지켜보는 눈길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각기 다른 방향에 은신해 있으면서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은폐는 철저했다.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는 것을 물론 숨소리조차도 일체 외부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끼리도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어느 덧 달빛도 거의 기운 시각. 불현듯 몇 방향으로 나누어 숨어 있던 그들 인영 중 한 쪽이 은신처에서 몸을 빼내더니 곡 안으로 날아갔다. 스스스슷--!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였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일까? 그들을 필두로 하여 잠깐의 간격을 두고 숨어 있던 인영들이 속속 곡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때로는 십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같은 곳을 출발지점으로 하여 한꺼번에 곡 안으로 신형을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 달빛은 종내 완전히 잦아들고 말았다. 이에 따라 천사곡은 어둠에 파묻힌 채 괴괴한 적막만을 드리우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던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단지 느낌일까? 웬지 섬뜩한 피냄새가 사위를 은은하게 진동시키는 듯 한 것은. 36장 만겁수라궁(萬劫修羅洞) 새벽녘이 되자 천사곡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혔다. 기화요초들과 죽림을 서서히 덮어가던 안개는 점차 그 반경을 넓히더니 종내에는 곡 전체를 가려놓고 말았다. 안개도 보통 짙은 것이 아니었다. 불과 몇 발자국 앞을 내다 보기가 힘이 들 정도였으며 좀체로 걷힐 것 같지도 않았다. 안개 속에서 한 가닥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심해요. 잘못해서 길을 잃으면 곡 전체에 펼쳐져 있는 환몽표홀미무대진(幻夢飄忽迷霧大降)에 갇혀서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돼요. 제 손을 잡는 것이 좋을 거예요." 담담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안개가 곧 하나의 진세란 말이오?" 여인의 음성이 대답했다. "그래요. 지형을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일으킨 것이지요. 별 것도 아니에요. 형성되어 있는 지세에 몇 개의 장치만 가하면 이런 안개쯤은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어요." 그 음성에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호호호... 그 뿐인 줄 알아요? 나의 사부님께서는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었어요. 세상에서 못할 것이 없는 분이었지요." 안개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전진하고 있는 남녀, 그들은 바로 진일문과 육선고였다. 지금 이 곳은 천사곡의 중간부분이었다. 새벽이 되어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자 두 사람도 마침내 입곡(入谷)한 것이었다. 육선고는 짐짓 짖ㄱ게 진일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시야가 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 곳이라면 그녀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이 곡은 원래 황지(荒地)였는데 우리 사형제들이 지형의 특성을 살려 군데군데 초목을 심고 개울을 파서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요. 이 안개는 그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낮 동안 햇살을 받으면 대지가 덥혀지죠. 그 지열로 인해 개울물은 수증기로 화하고, 새벽녘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이런 증발 현상을 일으키게 되지요. 참 간단한 원리죠?" 듣고 보니 이론상으로는 간단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실제응용은 그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귀수신장문의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어찌 자연현상조차 인공의 조작으로 만들어 낸단 말인가? 진일문은 그녀에게 치하를 하려다 관두었다. 정작 중요한 과제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만겁수라동의 무서운 위력에 대해 미리 육선고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우려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무당의 상청궁에 있던 광해진인과 광자 항렬의 도인들이 광무진인의 서찰을 받고 이 곳으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심경은 조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직 만겁수라동에 도착하려면 멀었소?" 문득 그의 손목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여인의 손에 휘감겼다. "서두르지 말아요. 이제 다 왔어요." 진일문은 여인의 손에 손목을 잡힌 꼴이 되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단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끌려 갈 따름이었다. 발밑에 느껴지는 감촉은 딱딱했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돌을 모양새 있게 다듬어서 깔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귓전으로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한 걸음이라도 헛딛어선 안돼요. 제가 밟는 곳을 정확하게 따라 밟아야 해요." 그 말을 듣자 진일문은 매우 긴장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육선고와 몸에 바짝 밀착되었으나 그 점은 느끼지도 못했다. 육선고. 그녀는 진일문의 손을 잡아 가슴에 끌어안다시피 한 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줄곧 신중한 표정이었다. 육선고는 지금 도사들이 입는 도복을 한 벌 빌려 입고 있었다. 상청궁에 여인의 옷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헐렁한 도복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써 허리를 잔뜩 졸라매었어도 걸을 때마다 옷깃이 벌어지며 눈부신 속살이 드러나곤 했다. 걸을 때마다 두 사람의 몸이 조금씩 마찰되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매우 선정적인 한 장면이었다. 졸졸졸....... 가까이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자못 운치가 느껴지는 음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진일문의 감상(?)인즉 이러했다. '이것은 근처에 개울이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답답하군. 마음은 급한데 이렇게 진전이 느리니.......' 그는 주위 환경에 온통 신경을 집중시킨 채 걷고 있었다. '으음, 이 구름다리의 위치는 아까 그 방위에서.......' 그의 감각은 육선고를 따르는 동안 심리적인 갈등과 싸우면서도 사방의 변화들을 차례로 감지해 내고 있었다. 물론 그의 판단은 한 치도 틀림없이 사실과 부합되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녀의 인도대로 따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제대로 가고 있기나 한 것인가?.' 그는 육선고를 힐끗 응시하더니 고소를 지었다. '후후... 내가 의심이 너무 많은 것인가? 아직도 이 여인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 수가 없으니.' 얼마 후. 두 사람은 한 채의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정자란 예의 개울을 의지하여 지어진 작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정자 안에 들어서자 시야가 확 트였다. 비로소 진일문은 주변의 풍경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개울에는 여러 개의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 그 맞은 편에 바로 죽림이 이어져 있었다. 정자 아래로는 일정한 키를 가진 꽃나무들이 가지런하게 열을 지어 심어져 있었다. 어쨌든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경물들이 저마다 모종의 의도를 감추고 있으면서도 겉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사실이었다. 진일문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정말 섬뜩한 일이오. 과연 누가 이 풍경을 두고 위험한 안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소?" 육선고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당황한듯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외쳤다. "기관이 작동 되었어요!" "대체 무슨 소리요?" 진일문도 대경하여 되물었다. 육선고는 정자의 안 쪽에서 난간을 잡고 있었다. 그 난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龍)의 몸체가 둘러져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사각진 난간의 한 모퉁이로써 그 곳에는 용수(龍首)의 형태를 한 돌출물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그 용수의 뿔을 잡고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일문도 재빨리 다가가 용수를 바라보았다. 뿔은 모로 돌아가 있었다. 또한 용의 눈알은 두 개의 묘안옥으로 되어 있었는데, 눈알이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이것이 그럼......?" 육선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뿔이 돌아가고 용안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만겁수라동의 기관이 작동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예요."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뿔을 잡고 오른쪽으로 세차게 비틀었다. 끼끼끽--! 듣기 거북한 마찰음을 울리며 뿔은 세 바퀴나 회전했다. "조심해요!" 육선고의 경고는 상황보다 느렸다. "웃!" 진일문은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졸지에 딛고 있던 바닥이 푹 꺼져버린 것이었다. "이, 이런......!" 그는 당혹성을 발하며 위로 몸을 솟구치려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부드럽고 유연한 물체가 목을 휘감는 바람에 그는 위로 솟구치지 못하고 그대로 낙하했다. 육선고였다. 그녀가 진일문의 목에 매달려 왔던 것이다. 진일문은 풍만한 여체가 밀착되어 오며 달큰한 향내를 풍기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라 떼어놓고 싶어도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된 채 계속 떨어져 내려갔다.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안기다시피한 육선고가 부끄러운듯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흐음?' 진일문은 그녀의 진의를 언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색하고 거북하니만큼 상대방도 그러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듯 추락하고 있는 상태이고 보면 두 사람의 목숨이 온전하게 부지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꾸할 여유도 없이 계속 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가쁜 숨소리가 턱밑까지 차오르며 그녀의 속삭이는 음성이 또 다시 귓전을 간지럽혔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정지되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정말이지, 당신의 가슴은 넓고 편안해요." '어찌 이 경황에 이런 생각을.......?' 진일문은 기가 막혔다. 그는 새삼 육선고가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여인인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그 바람에 되려 그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나직히 물었다. "도대체 이 밑바닥은 얼마나 더 내려가야 당도하게 되는 것이오? 혹시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잊은 것은 아니오?" "호호... 잊다뇨? 절 바보로 아세요? 아시다시피 우린 지금 이렇게 서로 껴안고 있잖아요?" "육소저!" 진일문의 음성이 일순 노기를 띄었다. 그로서는 그녀와 말장난이나 즐기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처지도 그렇지만 무림인들이 당하고 있을 상황을 떠올리면 이 순간에도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그였다. 육선고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계속 웃어 댔다. "호호호호......." 그러더니 그가 뭐라건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듯 입술을 그의 얼굴에 대고 쪽 소리가 나도록 맞추었다. 진일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 여인이 혹시 동반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게는 묻지도 않고......?' 그의 몸이 차갑게 굳어졌다. 여차하면 그녀를 뿌리쳐 버리리라 고 작정을 한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진일문은 바닥에 떨어졌다. 파아아아-- 그는 놀란 나머지 입을 벌렸고, 그의 입 안으로는 차가운 물이 가득 들어왔다. 그가 떨어진 곳은 다름이 아니라 물 위였다. 떨어진 충격으로 인해 그의 신형은 수중으로 깊게 빨려 들어갔다. 그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는 헤엄이라면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물 위로 떠오를 수가 있었다. "왜 진즉 바닥이 물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소?" 진일문은 다소 화가 난 음성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리 말했더라면 그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육선고의 대답은 여전히 엉뚱했다. "당신, 설마 그것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물론 일부러 그랬죠.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 당신의 가슴에 안겨서 내려올 수가 있었겠어요?" 진일문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해졌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며 육선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은 모르지 않지만....... 미안해요. 당신 같이 멋진 남자의 품에 한 번 안겨 보고 싶었어요." 진일문은 입밖에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내심 탄식했다. 듣고 보니 어쩌면 그녀의 심정이 이해될 듯도 했다. '이 여인은 아직 사랑해 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역시 소녀는 아니다.' 그는 또 다시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육선고는 신색을 추스릴 생각도 않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복이 물에 젖어 풍만한 육체의 굴곡이 드러났으나 그것은 요염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처연해 보였다. 진일문은 씁쓸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불룩한 가슴 윤곽이 옷 밖으로 솟아 있는 것을 보자 웬지 콧등이 시큰해져서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성(異性)을 만나 사랑하고 맺어지는 일이란 하나의 과정과도 같다. 육선고는 능욕만을 당했을 뿐 삼십대에 이르도록 정작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여인이다. 사실 그녀가 지닌 육체적인 성숙도도 광무진인의 농간 덕분에 연륜이 가져다 주는 완성미와는 전혀 무관했다. 오랫동안 그저 욕망에만 철저히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그런 육체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란 결국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에 두루 걸쳐진 고독과 허무가 아닐지?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진일문에게서 계속하여 욕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아마도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그 비중의 차이는 별로 없으리라. 육선고의 애타는 시선이 진일문을 응시했다. 어울릴 수 없는 나이차를 모르는 것도, 순결을 잃었다는 자격지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자꾸 쏠리니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일문은 옆얼굴로 닿아오는 그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애써 이를 모른 척 하며 물었다. "이 곳은 대체 어떤 곳이오?" 육선고는 한숨과 더불어 설명해 주었다. "만겁수라동의 기관은 거미줄 같이 얽혀 있어 도해를 모르고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 곳은 도해에도 나와 있지 않은 비밀통로예요. 이 수로를 따라 가면 곧장 만겁궁(萬劫宮)으로 갈 수 있어요." 진일문이 흠칫하여 되물었다. "만겁궁?" "네, 그래요. 만겁궁은 백여덟 가지의 기관장치가 모인 곳으로 우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지요. 만겁수라동은 사실 그 구조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만겁궁와 수라동으로 나뉘는데 편의상 한데 묶어 만겁수라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죠."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만겁궁과 수라동은 어떻게 다르오?" "만겁궁은 기관장치가 중점적으로 설치된 곳이에요. 반면에 수라동은 지형을 이용해 갖가지 함정이나 수화풍독(水火風毒) 등의 살계를 배열해 놓은 곳이죠." "그럼 만겁궁과 수라동은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오?" 그 말에 육선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만일 두 쪽 중 어느 한 쪽이라도 결함이 있다면 우리 귀수신장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겠죠? 호호... 요는 양쪽이 다 완벽하다는 거예요. 설사 귀신이라해도 절대로 만겁궁과 수라동을 빠져 나갈 수 없어요." 진일문은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나자 심정이 둘로 나뉘었다. 지나치게 장담을 하는 게 아닌가고 의심하는 쪽과, 이런 호언에는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며 불안해하는 쪽이었다. 육선고가 그의 내심을 짐작한듯 정색을 지었다. "당신은 아직도 내 말을 다 믿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그럼 좀 더 믿음이 가도록 설명하죠." 그녀의 눈이 기이한 빛을 번뜩이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곳의 기관은 나조차도 완전히 알지 못해요. 그것은 우리 사형제들도 마찬가지죠. 각자 다른 특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 외에는 기초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으음......." 진일문은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육선고는 입술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이 곳에 각종 기관들을 설치한 장본인들인 만큼 공사를 마친 뒤 비밀리에 시험을 해 보았어요." 진일문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명예욕은 대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위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청하여 시험까지 했다니.......' 어쨌든 궁금한 것은 그 결과인지라 그는 물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소?" "우리 사형제들은 스스로도 감탄해마지 않았어요. 우리들 중 누구도 기관을 돌파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직접 만든 기관에 하마터면 사형제들이 고스란히 목숨을 내놓을 뻔 했죠." 진일문은 그녀의 말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은연중 심금이 떨려와 고개를 흔들었다. "실로 끔찍한 일이오. 그대들이 기관을 풀지 못했다면 여타의 무림인들은 대체 어찌 된단 말이오?" 육선고는 어깨를 으쓱 했다.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요. 각 기관마다 구조가 틀리기 때문에 기관장치에 대해 좀 안다 해서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전신에 바람구멍이 나거나 아니면 산적처럼 창살에 꿰어진 채 죽는 등 비극을 당하게 되니까요." 그녀의 말은 들을수록 진일문에게 초조감을 안겨 주었다. 비록 동행을 하고는 있다 하나 그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육선고는 앞서 말한 명예욕과 개인적인 차원의 복수심 외에 무림인들의 안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진일문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전면을 주시했다. 과연 육선고의 말대로 이 곳은 하나의 지하수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지하인데도 불구하고 어렴풋이나마 내부의 경관을 두루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수로를 이어가는 흙벽 속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육선고의 자신감 어린 음성이 다시 설명했다. "이 지하의 흙에는 야광사(夜光砂)가 섞여 있었어요. 우리 형제들은 이것을 필요한 곳만 응용했어요. 그러나 다른 곳은......." "다른 곳은?" "호호... 캄캄한 암흑이죠." "절정고수들에게는 어둠이 별 장애가 되지 않소." 육선고는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당신, 순진하군요. 아까의 안개가 기억나지 않던가요? 지척도 분간이 안되었을텐데요? 이 곳에서는 어둠도 마찬가지예요. 설사 천안통(天眼通)을 가진 자라 해도 말이에요." 진일문은 안면을 굳힌 채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 두 사람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수로의 물은 아래로 흘러 내리고 있었는데 물살이 비교적 완만한 편이었다. 다만 위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지고 폭이 좁아져 이동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았다. 때때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육선고는 망설이지 않고 방향을 잡아 거슬러 올라갔다. 진일문은 줄곧 그녀를 묵묵히 따르면서도 내심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로(迷路)가 따로 없구나. 길을 모르고 멋대로 들어 왔다가는 이 곳에서 수장을 당하기 쉽상이겠군.' 그 상태로 얼마나 나아갔을까? 육선고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녀는 잠시 선 채로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그를 돌아다 보았다. "이 지점이 바로 만겁궁이 있는 곳이에요. 이제 밀도(密道)를 통해 곧장 올라갈 수 있어요." 진일문은 그녀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진법이나 기관지학에 관해서라면 그도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상식 수준은 평생 그것에 목을 매달다시피한 귀수신장문의 여제자 앞에서는 내세울 바가 못되었다. 육선고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단검이라던가 쇠붙이 같은 것 없나요?" 진일문은 손잡이가 비취로 된 단검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면 되겠소?" 육선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탄성을 발했다. "아! 정말 훌륭한 검이군요. 단금절옥(斷金絶玉)의 명검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백년에 하나 나올까말까한 희대의 보검이에요. 대체 이것을 어디서 났나요?" 진일문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 검은 바로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의 것이었다. 머쓱해 있는 그를 향해 육선고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내가 한 번 맞춰 볼까요?" 진일문도 비로소 표정을 풀며 빙긋 웃었다. "그럼 어디 맞춰 보시오." "이것은 아마도 어느 여인으로부터 선물받은 물건일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제 말이 틀림없을 걸요?" 진일문은 아연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궁금한 것은 대체 무엇을 근거 삼아 그녀가 추리해 낼 수 있었느냐였다. 육선고가 그의 심경을 앞질러 입을 열었다. "호호... 간단해요. 이 단검은 가치를 떠나 우선 세공이 아름답게 되어 있어요. 장신구로써의 역활도 충분하다는 거죠." "그래서......?" "호호호... 이런 검을 갖고 다니기에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인이 어울리죠. 그리고 이렇게 소중한 물건을 내줄 정도라면 그 여인은 당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정표로 내주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단검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하는 육선고의 얼굴에는 야릇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질투였다. 진일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역시 입을 연 쪽은 육선고였다. "그 여자... 예쁜가요?" 그녀의 질문에 진일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도 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선고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그로서도 회피로 일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무겁게 입술이 떼었다. "예쁘오. 그런데 그것은 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선고는 또 물었다. "물론 나이도 어리겠지요? 그녀와는 어떤 사이였나요?" 그녀의 집요한 태도는 진일문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잘라 말했다. "나는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할 의무가 전혀 없소. 지금은 한가하게 사적인 문제나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하던 일이나 계속 합시다." 육선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찬 음성으로 응수했다. "내게도 당신을 도울 의무 따위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 내키는대로일 뿐이죠. 당신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면 나는 언제라도 동행을 거부할 수도 있어요." "흐음?" 진일문은 황당해진 나머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묘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육선고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매우 침착하고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부터 당신의 목표는 소생과 달랐소.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줄곧 당신의 시야가 좀 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소. 물론 그런다고 해서 내면에 지닌 상처가 치유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인생은 어느 지점에서고 새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나 역시도 그랬었고......." 그는 설득을 위해 진심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선고의 반응은 실로 의외였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의 가슴에 스르르 몸을 기대왔다. '이런!' 진일문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뭉클한 여체의 탄력이 한 겹뿐인 옷을 통해 여지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노골적인 육탄공세였다. "어찌 이런 행위를......!" 진일문은 그녀를 밀어내려다 말고 멈칫 굳어졌다. '이 여인은 원래부터 음탕한 여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약성이 다시 발작을......?'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 몽롱하게 풀어진 채 황홀경을 헤매는 육선고의 눈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그만큼 절실한 감정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체내에 잠재해 있던 춘약의 약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외부로 표출된 것이었다. '대체 이 상황에서는 어찌 하면 좋은가?' 진일문은 난감해진 나머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 사이, 육선고는 달아오른 몸을 그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으음.......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녀의 입에서 비음 섞인 음성이 새어 나왔다 싶은 순간, 진일문은 질겁을 했다. 뜻밖에도 그녀가 뜨거운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덮어왔기 때문이었다. 육선고. 그녀는 이제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혈관을 흐르는 피속에 춘약의 성분이 남아 있는 한 그녀 자신도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옆에 있는 존재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단지 육체에 지펴진 불을 꺼 주면 그것으로 족했다. 더욱이 지금 그 대상은 그녀가 그토록 염원해마지 않던 진일문이 아닌가? 진일문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입술을 통해 물컹한 그녀의 혀가 그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럴 수가!' 진일문은 일시지간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충격파가 그의 가슴을 때렸다. 마침내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들어 냅다 팽개쳐 버렸다. 퍽! 육선고의 몸뚱이는 그대로 볼성 사납게 흙벽에 가서 처박히고 말았다. 그 바람에 옷자락이 풀어져 팽팽한 유방과 완만한 곡선을 형성한 하지(下肢)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진일문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는 날듯이 육선고에게로 다가갔다. "육소저! 괜찮으시오?" 그는 묻는 중에도 그녀가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벽에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그녀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미안하오, 용서하시오. 본의는 아니었소이다. 나는 다만......." 육선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처연하도록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진일문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으음,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쩌다가.......' 육선고는 차츰 신지를 회복해 갔다. 곧 그녀는 얼굴을 붉히더니 급급히 옷을 여몄다. 아마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 차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한 가닥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가 또 추태를 부렸었군요......?" 진일문은 비탄에 빠져 드는 그녀를 보게 되자 역시 측은지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그것은 누님의 탓이 아니오." 경황 중에도 육선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누님이라고...? 당신이 지금 나를 그렇게 불렀나요?"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재삼 확인하려 들었다. 진일문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담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그렇게 불러도 되지 않겠소이까? 소제는 늘상 누님이 한 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아!" 육선고는 그야말로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일문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온 누님이라는 호칭은 그녀의 외로운 가슴에 직접적으로 와 닿고 있었다. 사실 진일문으로서도 이는 어떠한 가식도, 수단도 아니었다. 타인의 불행을 목도하고 보니 일종의 동류의식을 느꼈고, 그는 단지 그것을 형제애(兄弟愛)로 귀결지었을 뿐이었다. 육선고는 일체의 말을 생략하고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단 한 마디였다. "도... 동생......." 그녀의 서늘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진일문도 그 손만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육선고라는 여인의 본모습과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마주 잡은 채 한 동안 서로를 바라 보았다. 이제 그들 사이를 오가는 것은 추잡한 정염도, 그에 따른 거부감도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따뜻한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먼저 입을 연 것은 육선고였다. "동생, 바로 이 곳이야."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으되 그녀의 음성에서는 전에 없던 활기가 느껴졌다. 진일문은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띄며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그 곳은 겉보기로는 그저 흙벽일 뿐이었다. 진일문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육선고는 생긋 웃으며 수중의 단검을 휘둘렀다. 와르르-- 흙벽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몇 번 더 단검으로 갈라 흙을 모두 제거하니 그 곳에는 놀랍게도 하나의 반듯한 회벽이 나타났다. "아!"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 모습에 육선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이 곳을 뚫으면 곧장 밀도로 들어서게 되지." 그녀의 말에 진일문은 지체없이 앞으로 나섰다. "소제가 뚫어 보겠소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른 부분은 벽의 두께가 두 자 이상인데다 단단한 청석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곳은 연석이며 아주 얇아 조금만 힘을 가해도 부서지게 되어 있어요." 팍! 육선고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벽을 쳤다. 과연 벽이 부서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 뒤, 그 구멍을 통해 안으로 접어들었다. 구멍의 내부는 잘 다듬어진 통로였다. 과연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웠으나 별 문제는 없었다. 비취단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구슬이 은은한 빛을 발해 그들의 진로를 밝혀 주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밀도를 따라 걸어갔다. 결국 목적지인 만겁수라동의 중심부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진일문은 가슴이 세차게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시가 급하다. 광무진인이 무엇을 위해 이렇듯 거대한 함정을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제발 아무 희생이 없기를.......' 슉! 슈슉! 뼈를 가르는 듯한 냉기가 암흑 속을 가른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리며 피비린내가 암도에 가득 찼다.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죽고 죽이는 살육전만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나타나면 누군가를 따지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검(劍)과 검이, 도(刀)와 도가, 그리고 권장(拳掌)과 권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죽는 자의 숫자는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만겁궁. 사실 이 곳에는 여러 부류의 군웅들이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들은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무조건 상대를 죽여야 했던 것이다. 지옥굴인양 칠흑 같은 어둠 속. 상대의 신분이란 말을 나누지 않는 이상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언제가 될지 모를 기관장치의 위협은 생존본능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더욱 부추켰다. 그들도 처음에는 무리를 지어 대처했다. 하지만 사방에서 기습을 가해오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하나 둘 죽어가자 상황은 달라졌다. 모여 있을수록 불리하니 서로를 기피하게 되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칼바람이 일었다 하면 여지없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고, 그 뒤로는 반드시 머리가 날아 갔거나 허리가 동강 난 시체 등이 발길에 채이곤 했다. 보이지 않는 암살자들의 살수(殺手)는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군웅들은 흩어졌고, 홀로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면 즉각 선제 공격을 가했다. 그 편이 차라리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만겁궁은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화해 있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 군웅들은 암도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헤매는 동안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기만을 내심 간절히 빌고 있었다. 광해진인. 그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역시도 암도에서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어야 했다. 가는 곳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무턱대고 죽기 살기로 덤벼 드니 살생은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왜라던가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 등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을 묻기 이전에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해야 했으므로. 그는 줄곧 이어지는 고함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단말마의 비명 등을 들으며 실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 애초의 의지는 분명 이것이 아니었다. 반역과 내분을 다스리겠노라며 무당파로 복귀했건만, 스스로 악귀가 되어 검에 무의미한 피나 바르고 있게 된 것이었다. '광무! 네 놈은 조사의 영령이 두렵지도 않느냐? 신성한 무당산을 피로 씻게 만들다니.......' 쉬익! 다가드는 자의 수급을 베어 내며 그는 절규하고 있었다. 중원사대신가의 인물들. 만겁궁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환영해(?) 주었다. 대전에서 기관에 걸려 일행이 흩어지게 된 것도, 피아(彼我) 구분이 안되는 혈전에 휘말리게 된 것도 모두 똑같았다. 그나마 무공이 약한 자들은 일찌감치 죽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력(武力) 뿐이라고 생각하며 무작정 살수를 펼쳤다. 그들은 싸우면서도 줄곧 진저리를 쳤다. 어쩌면 자신이 베어 넘긴 자가 사문의 사형제였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만겁궁은 그들을 철저히 농락하고 있었다. 기관장치는 단지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것을 이용해 결국은 이 곳에 들어온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시켜 상잔(相殘)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무림개사 이래로 이런 악전(惡戰)은 흔치 않았다. 광무진인이 노린 것이 바로 이 무시무시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였다. 하나의 방(房). 보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전면의 벽에 무엇인가 빛을 내는 광물질이 섞여 있어서인 듯 했다. 하지만 차라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 부윰한 빛 속에서 광해진인을 맞이한 것은 놀랍게도 백골(白骨)들이었다. 무려 수십 구에 이르는 백골들이 우뚝우뚝 선 채 그의 눈에 쏘아져 들어왔다. 그 광경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눈이 있을 자리에 퀭하게 뚫려 있는 구멍에서는 으스스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백골들이 갑자기 덮쳐 들었다. "헛!" 광해진인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 중 한 구의 백골이 그에게 일장을 날렸다. 정신이 번쩍 든 광해진인은 백골을 향해 소천장을 내쳤다. 카캉--! 쇳소리가 울리며 백골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광해진인은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아연실색했다. "어찌 이런 일이......!" 백골들은 일정한 진식을 이루며 그를 공격해왔다. 진퇴(進退)를 거듭하며 몰아쳐오는 그들의 공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광해진인은 당혹을 거쳐 곧 한 가지 사실을 알아 차렸다. 백골들은 기관에 의해 작동되는 철인형(鐵人形)이었던 것이다. 광해진인은 이를 간파해 내자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졌다 해도 인형 따위가 감히 인간을 능가할 수는 없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백골들이 구사하는 공격 방식과 그 초식까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인형들에게 인간처럼 상황변화에 따라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란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광해진인 같은 절정의 고수가 이런 획일적인 공격권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과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골들의 포위망을 뚫고 몸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다시 암도(暗道). 광해진인은 시공(時空)을 모두 망각해야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혈전은 그에게도 크고 작은 상처들을 무수히 입혔다. 심지어 벽 속이나 천정, 또는 바닥에서 칼 등의 예리한 무기가 불쑥불쑥 뻗어 나오는 것은 다반사였다. "광무!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왜 숨어서 이 따위 암계로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펑! 꽈르르릉--! 광해진인은 뚜렷한 목표물도 없이 사방으로 권장을 퍼부었다. 극도에 이른 분노와 증오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크아악--!" 여기저기에서 연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러자 광해진인은 어둠 속을 향해 분성을 발했다. "어떤 놈들이냐? 대체 무엇 때문에 숨어 있으며, 무엇 때문에 덤벼드는 것이냐? 다 나와라! 내 네 놈들에게 무당 무공의 진수를 보여 주겠다." 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안면을 일그러 뜨리고 있는 사이, 등뒤에서 검기(劍氣)가 섬광처럼 찔러 들었다. 쉬익--! '빠르다!' 광해진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로 말하자면 검법의 조예가 최상승의 경지에 올라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노리는 검법은 정녕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쾌속무비한 것이었다. 파앗--! 등줄기가 화끈했다. 혼신을 다해 신형을 날렸으나 어느 새 보이지 않는 검은 그의 등에 적중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뼈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상세였다. 광해진인은 노호성을 발했다. "죽일 놈들!" 동시에 그는 검이 쏘아져 온 방향을 향해 일권을 날렸다. 무당의 무공은 본시 음유한 가운데 강인함을 내포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의 권세는 소리없이 뻗어 나갔으나 상대방의 가슴을 때리는 순간에는 천근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퍽--! "컥!" 짧막한 비명성이 뒤를 이었다. 듣자 하니 젊은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 자는 금새 호흡 소리를 감추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광해진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광무, 네 놈은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그는 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등에서 쉴사이 없이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광해진인은 원래 수양면에서 특히 광무진인과 크게 비교차를 보이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화급하게 변해 버린 성정과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 그를 폭발 직전에 이르게 했다. 지금 같아서는 광무진인이나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면 그야말로 오체분시도 불사할지 몰랐다. 광해진인은 암도를 달려가며 진기를 돋궈 외쳤다. "광무! 어디 있느냐--!" 그 때였다. 어디선가 한 가닥 비웃음이 들려온 것은. "크크...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니. 그래, 노부를 만나 어쩌겠다는 것이냐?" 광해진인은 우뚝 멈추어 섰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성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광무, 이 놈! 모습을 보여라. 네 놈은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 있을 작정이냐?" "크크...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당신은 어차피 나를 만날 처지가 못될텐데?" 광해진인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지체없이 일권을 뻗었다. 그러자 미풍처럼 뻗어 나간 권세는 곧장 벽에 가 부딪쳤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석벽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호오!" 광무진인은 탄성에 이어 빈정거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늙은이의 무공이 제법 늘긴 늘었군. 크크크...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 나를 상대하려면......." 음성은 점차 멀어지더니 종내에는 아주 들리지 않게 되었다. 광해진인.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분노의 극을 넘어서 버리자 그는 자신이 분노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광해진인은 맥이 풀린 나머지 그만 주저앉을 것 같은 심경이 되고 말았다. 그는 허공을 향해 장탄식했다. "아아! 장삼봉진인께서 이루신 대무당의 위업이 당대에서 막을 내리려는가? 조사의 영령이시여, 부디 굽어 살피시기를......." 그는 어느 덧 노안에 눈물을 담고 있었다. 37장 마교(摩敎)의 하수인(下手人) "모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진해라." 낮았으나 매우 힘찬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는 웬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의 영향력은 컸다. 단 한 마디로 인해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질서정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암도의 다른 고수들과는 달리 그들은 행동에 통일성을 보였다. 앞장 선 자는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얼굴이 긴 편이었는데, 유독 눈매가 깊었다. 일신에는 드물게도 녹색의 장의(長衣)를 걸치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신중한가 하면 매 동작마다 일대 종사(宗師)와도 같은 기도가 풍겨 타인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를 따르는 이십여 명의 고수들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대개 삼사십대쯤 되었으며 하나같이 녹색의 단삼(短衫)을 걸치고 있었다. 약간만이라도 강호견식이 있는 자라면 그들의 이런 모습만을 보고서도 능히 정체를 알아 차리리라. 회천궁(回天宮). 바로 삼성림의 구대천궁 중 하나인 회천궁 소속 인물의 복장이 이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출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칠대문파가 주최하는 중원검정대회에 대체 그들이 무엇하러 왔단 말인가? 더구나 이들을 인솔해온 자가 누구인가를 안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녹존성군(祿存星君) 위부명(韋夫明). 이것이 녹색장의를 입은 중년인의 명호로써 그는 다름 아닌 삼성림의 구대궁주 중 한 명이었다. 회천궁의 인물들은 화섭자(火攝子)를 환하게 밝힌 채 앞으로 전진해 갔다. 그들은 여타의 인물들과는 달리 사전에 여러가지 준비가 있은 듯 전혀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설사 아무 대비 없이 지옥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들은 절대 겁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녹존성군과 함께 있는 한은. 녹존성군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곧 하늘이었다. 그들 일행은 암도를 따라 조용히 걸어갔다. 그들의 눈에 곳곳에서 나뒹구는 수많은 시체들이 들어왔다. 그런 살풍경한 장면에도 역시 그들은 일체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회천궁의 인물들은 여러 갈래의 암도가 합류되는 한 지점에 당도했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군웅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기관장치조차도 내내 잠잠하기만 했다. 그들은 개중 하나의 암로를 정해 그 곳으로 다시 진입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눈앞에는 처음의 대전보다는 약간 작았으나 꽤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녹존성군은 그들로 하여금 광장에 들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광장 한복판에 들어선 회천궁의 인물들은 묵묵히 진세를 쳤다. 각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일종의 검진(劍陣)을 형성한 것이었다. 녹존성군. 그는 검진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의 깊숙한 눈매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마치 목각인형을 대하듯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란 것을 도시 읽어낼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말없이 흘렀다. 녹존성군은 수하들은 화섭자가 다 타면 즉시 새 것으로 갈았다. 그 외에는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숨막히는 침묵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쉬익!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한 가닥 섬광이 눈앞에서 번쩍하고 허공을 가른 것은.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습이었다. "웃!" 진일문은 대경했다. 옆에 육선고가 있었으므로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가 피해 버린다면 대신 육선고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생각을 앞지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벌써 어둠을 가른 후였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더니 진일문의 손가락 사이에는 어느 덧 상대의 검인(劍刃)이 끼어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틀었다. "아!" 신음 소리가 상대 쪽으로부터 들려왔다. 하지만 그 자의 무공도 그리 만만치만은 않았다. 검날을 잡히자 내려치던 방향에서 재빨리 찌르는 수법으로 변환시키고 있었다. 진일문은 검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손끝에 진기를 모아 비틀었다. 쩡--! 마침내 검은 부러지고 말았다. 진일문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즉각 부러진 검날을 튕겨냈다. "흑!" 어둠 속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그 뒤를 이어 물체가 쓰러지는 듯한 둔중한 음향도 들려 왔다. 소리로 방향을 잡은 진일문은 그 쪽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그리고는 지력이 적중되는 느낌이 감지되자 앞으로 나섰다. "이 작자였어요!" 뒤에 처져 있던 육선고가 수중의 취옥단검을 내밀며 말했다. 취옥이 뿜어내는 빛으로 인해 상대방의 얼굴이 보였다. 그 자는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는데, 일견하기에도 육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약간 마른 듯한 체구였으며 안색이 본래 그런 것인지, 상세 때문인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발치께에는 폭이 좁은 기형의 검이 부러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 노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록 제압 당해 쓰러져 있기는 했으나 방금 전의 출검(出劍)은 이제껏 그가 경험한 적이 없었던 쾌검이었다. '천하에서 그토록 빠른 검을 구사하는 인물은 결코 흔하지 않다. 해남의 오지검산(五指劍山)류, 혹은 맹사의 일자무영검, 사대신가 중 악가의 쾌검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이 때, 그의 눈에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의 손잡이가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악(岳)> 그것을 본 순간, 진일문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나직하게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만검장의 고인이시오?" 그 말에 노인은 비로소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짙은 의혹이 담겨 있었다. "그대는......?" 진일문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즉시 노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윽!" 노인은 신음을 발하더니 시뻘건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그리고는 금새 혼절해 버렸다. "이, 이런.....!" 난감해진 진일문에게 육선고가 말했다. "동생, 이걸 좀 봐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노인의 가슴팍이었다. 그 곳에는 놀랍게도 허연 서리가 두텁게 앉아 있었다. 진일문은 재빨리 노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맥은 거의 뛰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전신이 얼음장처럼 차가와져 있었던 것이다. '쯧! 지독한 음공에 당했군.' 그는 즉시 노인의 손목을 통해 진기를 불어 넣었다. 잠시 후. 노인은 눈꺼풀을 푸르르 떨더니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노부는... 악군보라는 사람이오. 그대는......?" 진일문은 안면을 차갑게 굳혔다. 악군보라면 바로 사대신가의 하나인 산동악가 만검장의 장주이다. 과거 맹사(盲邪)의 눈이 멀게 한 장본인인 것이다. 이래저래 진일문으로서는 호감이 갈 이유가 없었다. 단지 자신의 손에 의해 죽어가니 유언이라도 들어줄까 하여 지켜 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결례이오만 소생의 이름은 밝힐 수가 없소이다. 진모(眞某) 정도로만 알고 계시면 될 것이오. 그건 그렇고, 노인장은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되었소이까?" 실상 악가장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무명의 청년이 악군보를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악군보가 처해 있는 상황은 이것 저것 따질 처지가 못되었다. 그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지 낮게 한숨을 발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이 곳에서 한 괴인을 만나... 이렇게 당했소. 그 자는 진정... 무서운 무공을 소지하고 있었소." 진일문은 그 때까지도 악군보가 괴인이라 지칭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이상한 것은... 그 자는 무당파의 신법을 쓰면서도 내공은 전혀 틀렸소. 나... 나는 심맥이 진동되어 가망이... 없소." 진일문은 일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광해진인이다!' 짐작하건대 그런 인물이라면 광해진인 외에는 없었다. 그는 한 가닥 의혹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광해진인이 왜 악가장의 장주를 공격 했을까?' 어쨌든 그는 생각을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무당파와 사대신가 사이에는 새로운 원한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우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사대신가의 가주들께서는 모두 이 곳에 오셨소이까?" "그... 그렇소. 우리들은 천년마등주의 서찰을 받고... 놈에게 납치된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진일문은 정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에 북망산에서 접했던 일화가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악군보는 숨이 가쁜 듯 더듬더듬 말했다. "하... 함정이오. 이 곳은... 악마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 부탁이오.... 사대신가의 사람들에게 이 곳을 빠져 나가라고... 전해... 주시오......." 진일문은 그의 말을 듣는 가운데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만겁수라동은 분명 광무진인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천년마등주의 서찰을 받고 왔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광무진인 역시도 마등주와 마찬가지로 마교의 주구였단 말인가?' "으음......." 악군보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발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 덧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광해진인의 극랭한 장력을 정통으로 맞은데다가 무리하게 진일문과 일전을 벌이다 보니 그는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설사 대라신선이라도 그를 구할 방도는 없었다. 진일문은 다시 악군보에게 진기를 불어 넣으며 물었다. "사대신가에서는 어떤 인질들을 잡히고 있었소?" 악군보는 힘겹게 눈을 뜨며 대꾸했다. "놈들은... 각 가문의 적자(嫡子)들을 납치해 갔소. 그래서 우리들은... 놈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오." 진일문의 눈썹이 가볍게 치켜 올라갔다. "사가보에는 아들이 없지 않소? 그렇다면 누가 납치되었소?" 악군보는 의혹을 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하는... 사가보를 알고... 있소?" "약간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소." 악군보의 얼굴에서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진일문은 담담히 말했다. "원수지간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긴, 사가보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그렇다면 누가 있겠소? 그의 금지옥엽인... 영화 질녀가... 납치되었소이다." 진일문은 심중에서 적지 아니 파문이 이는 것을 느꼈다. '역시 사소저가......!' 이런 감정의 흔들림은 그 자신도 별로 달갑지 않은 현상이었다. 한 때 절실하도록 원했으나 지금은 단지 잊고 싶은 이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달리 그는 다시 묻고 있었다. "사소저는 언제 납치되었소이까?" 악군보도 그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낸듯 순순히 말해 주었다. "그 아이가... 납치된 것은... 반 년 전... 이오." 진일문은 대답 대신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이 때, 악군보는 안색이 급격히 잿빛으로 화하더니 거의 애원하듯 말을 이어갔다. "부... 부탁.... 귀공께서... 능력이 닿는다면... 부디... 이 곳에서 사대신가의 사람들을... 탈출시켜... 주......." 그것을 끝으로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쾌검으로써 천하제일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악군보가 허망하게 이런 곳에서 일생을 마감해버린 것이었다. 진일문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과거 맹사의 인생을 망가뜨렸다고는 하나 일세를 풍미하던 영웅이거늘, 여기서 이렇게 죽어 가는구나. 그것도 내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는 악군보의 당부와 더불어 사영화에 관한 사항을 은연중 하나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사감(私感)에서가 아니라 그가 지닌 기질상의 문제도 있었다. 한편. 육선고는 사영화의 얘기가 나올 때부터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줄곧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인질이라면 아마 수라동 제 십팔관문 안에 갇혀 있을 거예요. 동생이 구해내고자 한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보겠어요." 진일문은 그녀의 내심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인질이 잡혀온 것은 벌써 반년 전의 일이오. 새삼 급할 것이 없소이다. 그보다는 이 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일이 급선무요. 무슨 수가 없겠소?" "광무도장이 이미 기관을 움직여 놓았기 때문에 하나 하나 풀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계속 전진하면서 모든 통로를 한 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책이에요." 두 사람은 그 길로 일어서서 다시 출발했다. 그 사이, 진일문은 악군보의 시신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언뜻 연민이 매달렸으나 그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이대로 두고 갈 수밖에.... 미안하오이다, 악장주, 대신 당신의 부탁만은 잊지 않겠소.' 심중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는 곳마다 그는 수많은 참상을 목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죽은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살아 있으되 폐인이나 다름이 없는 자들이 숱하게 눈에 띄었다. 진일문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 곳에 유인되어 들어온 자는 적게 잡아도 오륙백명.... 그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불초를 따르시오!" 통로에는 이백여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된 채 진일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진일문은 각 통로에서 혼전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발견하자 즉시 싸움을 중지시켰다. 아울러 서로 격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역설해 주의를 환기시킨 후, 인솔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육선고가 기관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로막힌 벽들이 그녀의 조종에 따라 새로운 통로를 드러낼 때마다 군웅들은 치를 떨었다. 쌓여 있느니 동도들의 시체요, 아무런 명분없이 흘리게 된 그들의 피가 군웅들로 하여금 격노에 이르게 했다. 이 일의 주범(主犯)인 광무진인에 대한 저주는 끊이지 않았다. 기관장치는 그 때까지도 맹위를 떨쳤다. 육선고에 의해 건드려졌다 하면 무시무시한 마의 이빨을 드러내곤 했다. 벽에서 쏟아져 나오는 암전(暗箭), 철노(鐵弩), 비창(飛槍), 게다가 천정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도(刀)는 소리없이 그 곳을 지나치는 자의 목을 절단하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모르고 지나가려 했다면 군웅들도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전자에 당하고 죽어 나자빠져 있는 자들처럼. 누군가 원독에 찬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광무, 그 죽일 놈을 만나면 절대 가만 두지 않겠소!" 다른 인물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 자가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소. 대체 무당은 어째서 그런 자를 지존으로 모시고 있는 거요?" 진일문은 앞장 서 가다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광무진인은 진정한 무당인이 아니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 자는 마교(魔敎)의 하수인일 공산이 크오." 그 말이 일으킨 반향은 대단했다. "마교!" "어찌 그럴 수가......!" 군웅들은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몸을 으스스 떨었다. 소림과 함께 정도무림의 지도자격인 무당파의 장문인이 마교의 지시를 받고 있다면 대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아무튼 그들은 와중에서도 계속 전진했고, 그 일행은 점차 수효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상호불신이 만연해 있는 지금으로서는 다수(多數)를 따르는 쪽이 아무래도 유리하다고 본 것이었다. 이렇다할 이권이 없어 보이는데도 묵묵히 그들을 이끌어가는 진일문은 그들에게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은연중 그를 현재를 책임질 영수(領受)로 여기고 있었다. 사실 이 곳에 모인 군웅들은 대개 한 지방의 패주이거나 크고 작은 제문파의 상급고수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개 무명청년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 이런 사실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누가 믿을까만 이 곳에서는 아무 이의없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제 세 곳의 기관만 더 움직이면 광장(廣場)으로 모든 통로가 이어지게 될 거예요." 육선고의 말에 진일문은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광해진인은 만나지지 않는 것일까?' 그의 의구심은 모퉁이를 도는 순간에 바로 풀렸다. 그그긍--! 벽이 회전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을 때였다. 그 안으로부터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휘익--!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괴물체가 진일문에게 쏘아져 날아왔다. 그는 놀란 나머지 재빨리 손을 뻗어 진기를 발출시켰다. 퍽! 둔중한 느낌을 손바닥에 전달하며 그 물체는 땅에 떨어졌다. "시체다!"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실제로 화섭자가 비추이는 불빛 아래에는 가슴이 으깨어진 한 중년인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크크크... 어떤 놈이 또 있느냐!"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통로를 진동시켰다. 동시에 흡사 만년빙동에서 불어나오는 듯한 장력이 몰아쳐 왔다. 군웅들은 그 장력이 채 와닿기도 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대경하여 뒤로 물러났다. 진일문은 태극십삼세 중 수휘오현을 발휘했다. 그의 손가락 다섯 개가 쥐어졌다 펴지며 진력을 쏘아냈다. 스스스....... 상대의 가공할 장력은 삽시에 허공으로 분산되고 말았다. "이, 이것은 태극장법! 네 놈은 누구냐?" 통로 저 쪽에서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진일문은 벌써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는 우렁차되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후배입니다. 진인께서는 저를 잊으셨습니까?" 상대는 바로 광해진인이었다. "흐흐흐......."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들리더니 그는 모습을 드러냈다. 도관은 온데간데 없고 수염과 머리칼을 위시하여 도복에 온통 피칠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 광해진인은 눈에서 기광을 뿜어내며 군웅들을 노려 보았다. "이 작자들은 또 누구냐?" 그 말에 군웅들은 일제히 안색이 일변했다. 진인으로 불리우며 진일문이 겸양하는 것으로 보아 상대가 무당파의 고수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군웅들로서는 가뜩이나 무당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판국에 무례한 언사까지 듣고 있자니 울화가 치민 것이었다. 반면에 진일문은 내심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광해진인의 눈빛이 고르지 못한 것을 보고는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이 살생을 저지른 이유를 알겠구나. 이 분은 지금 마성(魔性)이 격발된 상태다. 하긴 장구한 세월을 한 가지 집념으로 일관해 오다가 그것이 무너져 버렸으니....... 이대로 두었다간 정녕 큰일을 벌이고 말겠구나.' 이 때였다. 군웅들 중 누군가가 들고 일어났다. "이보시오, 도장! 말을 삼가시오. 그래, 당신의 눈에는 대체 우리가 무엇으로 보이오?" 그 말을 한 자는 오십 가량 된 노인으로 동백산인(桐柏山人)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기개가 높으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무당파의 도사들이야말로 하는 짓이 어째 그 모양이오? 위로는 장문인이 함정을 파 무림의 동도들을 해치고, 아래로는 안하무인이니 그래 놓고도 명문정파를 자처할 수 있겠소?" 광해진인은 답하지 않았다. 단지 동백산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의 눈에서는 얼음장 같은 광망이 폭사되어 나왔다. 헐렁한 도포 속에서 비쩍 마른 그의 손이 번뜩 움직였다. "으헉!" 미처 말릴 사이도, 또한 피할 겨를도 없었다. 동백산인은 대번에 하나의 얼음덩이가 되어 석벽에 부딪쳐갔다. 퍽--! 그의 몸뚱이가 얼음조각들로 화해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며 군웅들은 한결같이 분노를 터뜨렸다. "우우우--!" 그들의 눈이 무서운 빛을 발하며 광해진인을 노려 보았다. 여차하면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연이은 참사와 혈전으로 인해 군웅들은 신경이 극도로 과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일단 일이 벌어지면 누구도 제지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일문의 냉연한 음성이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여러분께서는 모두 진정하시오! 우리들끼리 분쟁은 자멸을 초래할 뿐이오. 그것은 결국 광무진인이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니 필히 자제해야 하오." 그의 말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군웅들은 분노하는 가운데서도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고개가 절로 하나, 둘 끄덕여지는 찰나였다. 한 인물이 비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크크...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너를 따르고는 있었다만 역겨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새파란 애송이가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하다니......." 그 자는 사십 세 가량된 중년인으로 손에 언월도를 쥐고 있었다. 얼핏 관운장을 연상케 하는 인상이었다. "어린 놈! 내 아까부터 느꼈다만 네가 무엇이건대 무당을 두둔하고 나서는 것이냐? 썩 비켜라! 물러서지 않으면 저 못된 도사에 앞서 너부터 베겠다." 중년인의 말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느끼자 진일문은 반대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식으로 군웅들을 선동해서는 안된다. 감정만으로 일을 처리하려 들었다간 몰살을 면치 못하거늘.......' 급기야 그는 마음을 다지기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다. 대(大)를 위해서는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 진일문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무당과 연은 있으되, 그렇다고 무작정 두둔하는 것은 절대 아니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따름이오. 당신이 나를 시험하고자 한다면 하시라도 응할 수 있소." "건방진! 크크... 어디 그렇다면 내 네 놈의 말마따나 시험을 해 보겠다. 너에게 정녕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이 관북일(關北一)도 승복을 하겠다. 그러나 입만 살아 있는 허수아비였다면 저 도사와 함께 이 자리에서 요절을 내 버리겠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일문에게 향해졌다. 과연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던 것이다. 관북일이라면 석문(石門) 일대에서 명성이 쟁쟁한 고수였다. 언월도를 사용하는 그의 무공은 무림에서도 일절로 꼽혀왔다. 진일문은 담담히 말했다. "영광이오이다. 관대협처럼 기개가 꼿꼿한 분이 불초에게 승복을 하겠다니 말이오." 과연 관북일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위로 홱 솟구쳤다. 그는 언월도를 빙글 돌리더니 탁한 음성으로 외쳤다. "괘씸한 놈!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전에 노부의 언월도가 나불거리는 네 놈의 주둥이를 찢어놓을 테니까." 위이잉--! 언월도가 마치 풍차처럼 돌아가며 진일문을 덮쳤다. 관북일이 분개한 나머지 상대가 후배라는 점도 잊고 선공을 한 것이었다. 진일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오건 만박해초결로 파해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므로. 언월도는 계속 회전을 거듭하며 그의 면전에까지 이르렀다. 그 중심부에 있는 관북일의 신형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 신위에 군웅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류의 무공은 주로 병사들이 시전하는 것으로써 무림의 내가고수가 내공을 가미하여 사용하자 놀라운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반면에 진일문은 수중에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군웅들은 그가 맨손인 것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공평하지 못한 싸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기우(杞憂)라는 것은 금새 판명되었다. 진일문은 서슴없이 언월도의 공격권 내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는 쌍수를 교차시키며 기합성을 발했다. "차앗!" 그러자 실로 믿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었다. 어느 덧 언월도는 그의 양 손바닥 사이에 잡혀 있었다. 물론 자루 쪽을 잡은 것은 관북일이었다. 진일문이 잡은 쪽은 날카롭기 짝이 없는 날(刃) 부분이었다. "아!" 중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회전력을 가지고 짓쳐 들어오는 칼날을 이렇듯 맨손으로 잡아챌 자는 흔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관북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성은 의외였다. "칼날을 놓고서 패배를 인정하겠느냐? 아니면 손 없는 병신이 되겠느냐?" 그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진일문을 쏘아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언월도를 틀어 손을 절단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진일문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귀하는 애병을 잃겠소? 아니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겠소?" 관북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상대가 자신을 희롱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미친 놈!" 욕설과 함께 그는 즉시 공력을 주입하여 칼자루를 틀었다. 그의 뇌리에는 상대의 손이 싹둑 잘려 나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흐음?" 어지간히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산을 들어 올리려고 부질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그의 몸에서는 헛힘이 빠져 나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럴 수가! 고작 약관에 불과한 이 놈의 공력이 설마 나를 능가한다는 말인가?' 관북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십성의 공력을 끌어 올려 일단 자루를 잡아 빼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월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는 지렁이 같은 힘줄이 곤두섰고, 눈알은 금시라도 툭 튀어나올 듯 불거져 있었다. 마침내 관북일은 십이성의 공력을 발휘하여 언월도를 틀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때였다. 진일문의 가슴이 한 차례 극심한 기복을 보인 것은. "후욱!" 그것은 마치 크게 심호흡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흐으......." 관북일은 느닷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탈색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전신의 내력이 모조리 고갈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돼지신공의 놀라운 위력이었다. 진일문은 관북일이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순간에 취화상으로부터 전수받은 이 희대의 신공을 발휘했다. 본시 돼지신공은 상대의 내공을 급속히 빨아들이는 묘용이 있었다.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관북일의 내공은 진일문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본신의 진원진기 중 반 이상을 잃게 된 그는 향후로 적어도 육개월은 정양해야만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다. 진일문은 수중의 언월도를 들어 올렸다. 한 쪽 손을 떼었는데도 언월도는 그의 손바닥에 딸려왔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손을 향했다. 그가 과연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의 수중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언월도가 불에 달군 듯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녕 가공무비한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절기였다. 이윽고 언월도는 쇳물로 화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우우......!" 군웅들의 입에서는 경악에 찬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전 무림을 통틀어도 이같은 내공을 보여줄 사람은 없었다. 비좁은 통로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진일문이 손을 거두며 담담히 말했다. "당분간운 편의상 불초가 여러분의 대표가 되어 이 난관을 열어가 보겠소이다." 이 때, 누군가 감탄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소협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오? 우리들의 안목이 좁아 미처 영웅을 알아 보지 못하였소이다." 그것은 군웅들의 한결 같은 의문사항이었다. 그들은 강호에서 내노라 하는 인물들인만큼 견문도 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진일문이 누구인지 알아 보는 자가 없었다. "불초의 졸명은 진일문(眞一文)이라고 하오." 그 말은 장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그 이름을 아는 자를 찾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물은 없었다. 진일문은 육선고를 돌아 보았다. "자, 누님. 어서 길을 여시오.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점점 더 늘어갈 것이오." '역시 대단해. 동생은.......' 육선고는 내심 탄복해마지 않았다. 그것은 진일문이 짧은 시간 동안 군웅들을 굴복시켜 버린데 대한 놀라움의 표시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이제 제 삼십육, 사십구, 두 개의 기관만 움직이면 돼요." 이번에도 그녀가 앞장서고 진일문은 조용히 따랐다. 그 뒤로는 광해진인, 그리고 군웅들이 따르고 있었다. 광해진인은 자신이 벌여놓은 사태에 진일문이 뛰어든 이후로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 덧 그의 눈에 감돌고 있던 괴기(怪氣)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38장 검맹(劍盟)의 맹주(盟主) 거대한 지하광장. 이 곳에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만겁궁의 각 통로로부터 유인되어 온 군웅들이 모두 운집해 있었다. 말하자면 저마다 처절한 사투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이 연출해 내고 있는 상황은 실로 미묘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서 의혹과 불신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 쪽에는 무당파의 도인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는 처음 이 곳으로 들어올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이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사대신가의 인물들은 형편이 나아 보였다. 그들은 각처에서 모인 군웅들과 더불어 일단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이 지경에 이르러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자들은 삼성림의 회천궁(回天宮) 소속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녹존성군을 중심으로 뭉쳐진 가운데 여전히 막강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녹존성군. 수하들에게 둘러 싸인 그는 조금도 위엄을 흐뜨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중인들을 쓰윽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암계에 걸려든 것이오. 이 밀궁은 애당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소." 녹존성군의 눈길은 무당의 도인들에게서 멈추었다. "무당의 장문진인인 광무도장은 이 함정을 만드느라 꽤 노고가 컸을 텐데, 귀하들은 그 점에 대해 어찌 생각하오?" 그의 어조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추궁이라고는 하지만 미안한 마음보다는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무당의 도인들에게로 쏠렸다. 광수진인(光水眞人)이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탄식에 가까운 음성으로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본파를 대신하여 여러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번 일은 광무사형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일 뿐 본파와는 무관합니다. 부디 이 이상의 곡해는 없으시기를 바라오이다." 그 말은 정녕 누가 들어도 도인다운 것으로써 자책과 비탄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하지만 녹존성군의 응수는 변함없이 냉오하기 그지없었다. "흐음, 대단히 무책임한 말이군. 그럼 무당파는 이제껏 장문인을 별개로 놓고 지내 왔다는 말이오?" 그의 말속에는 무당파를 경시하는 기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삼성림과 칠대문파 간의 묘한 대치 관계를 단적으로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었다. 광수진인은 수치감으로 인해 얼굴을 붉혔다. "무량수불... 중인환시리에 자파 내에서 일어난 일을 밝히고 싶지는 않소이다만, 상황이 이러하니 말씀드리겠소이다. 광무사형은 원래 광해대사형께 돌아가야 할 장문인 자리를 찬탈한 역도요. 우리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소이다. 그러나 잠시 무당을 떠나 계셨던 대사형께서 복귀하셨으니 이 문제는 불원간 무당의 법도에 따라 바로 잡히게 될 것이외다." 그의 자존심에 녹존성군은 찬물을 끼얹었다. "그것은 당신들 사정일 뿐이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무당의 장교진인이 보낸 서찰 때문에 오게 되었소. 그 책임은 대체 누가 질 수 있는 것이오?" 광수진인은 난감한 듯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사실 그 자신도 피해자 입장이거늘 어떻게 응대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그가 더듬거리고 있을 때, 한 가닥 창노한 외침이 울렸다. "그것은 노부가 책임을 진다! 무수한 인명을 해치는 죄과를 범했으니 내 목숨이라도 내놓으라면 내줄 수 있다." 군웅들의 시선은 모두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쪽 벽이 열리더니 그 곳으로부터 백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바로 진일문이 이끄는 일행이었다. 그 옆에는 광해진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사형!" 광수진인을 비롯한 무당의 도인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맞이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미로 속에서 빠져 나와 재회를 하고 보니 기이한 감동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광해진인은 그들에게 먼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중인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책임을 짓되 무당을 모욕하는 언사는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작금에야 기강이 문란해져 쇠퇴했다고 하나 조사의 영명함이 꺼지지 않았거늘, 누가 감히 무당을 욕되게 한단 말인가?" 그것은 녹존성군에 대한 정면 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바람에 장내는 삽시에 조용해지고 말았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경악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녹존성군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지난 수십 년간 삼성림은 무림의 성역이었다. 구대성군의 지위는 그 동안 당연히 각파의 장문인을 능가하고 있었고, 광해진인의 언사는 바로 이를 뒤집어 엎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진일문은 내심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언쟁은 나아가서는 삼성림과 칠대문파 간의 충돌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진일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즉시 중재에 나섰다. "청컨대 두 분께서는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대처해 주십시오. 지금 처지에 분열을 일으켜서는 아니되오이다. 그것은 마교를 도와주는 일밖에는 안됩니다." 마교라는 말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자는 녹존성군이었다. "마교......? 그럼 이 곳에 마교의 인물이 있다는 말인가?" 진일문은 녹존성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심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강한 적개심이 타올랐다. 삼성림의 인물, 특히 녹존성군이라면 불공대천의 원수가 아닌가? 그러나 그 자신이 말했듯 현재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그렇소. 광무진인은 마교의 사주를 받은 인물이오." "그럴 리가......?" 녹존성군의 얼굴에는 잠시 회의가 감돌았다. 그가 이 곳에 온 이유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광무진인의 서찰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인즉 삼성림이 중원대정검회의 공정한 참관인이 되어 달라는, 매우 정중한 것이었다. 사실 삼성림과 중원 칠대문파는 상호간에 꺼리는 사이였다. 마교대전 이후, 삼성림이 무림의 성역으로 부상하면서 칠대문파의 성세가 위축되자 자연스럽게 빚어진 현상이었다. 이번의 초청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할 수 있었다. 삼성림의 지위를 은연중 올려주는 일이 되는지라 녹존성군 자신도 쾌히 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광무진인이 마교의 주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삼성림으로서는 조롱을 당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녹존성군은 만면에 은은한 분노를 떠올렸다. 그것을 눈치 챈 진일문이 묘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사가(四家)의 고인들께서 한말씀 하실 차례이니 그 분들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으면 될 것이외다." 그 말에 녹존성군의 시선이 즉시 한 쪽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 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세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운악과 당평, 그리고 팽전위였다. 즉 황룡사가보와 사천의 당가, 팽가도방의 가주들이었다. 그들을 향한 녹존성군의 추궁은 화살 같았다. "어서 말해 보시오. 세 분께는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사운악이 마지못해 헛기침과 함께 입을 떼었다. "아무쪼록 이해를 바라오이다. 진즉부터 보고를 올렸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소이다. 우리 사가 나름의 큰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녹존성군의 냉랭한 음성이 그 말을 잘랐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거두절미하고 속히 본론을 말하시오." 사대신가는 삼성림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의 난점이 있었다. 그들은 이대 전부터 삼성림으로부터 막대한 영향과 지원을 받아왔다. 그 대신 사가는 그 때부터 삼성림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가신(家臣)이나 다름없는 예를 취해야 했다. 그런데 사가가 삼성림이 모르는 가운데 무엇인가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자 녹존성군은 내심 충격을 입고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이 날카롭게 삼인을 쏘아 보았다. "도시 이해가 되지 않소. 어찌하여 사가의 일 중 삼성림에서 모르는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이오? 그래, 당신들이 이 곳에 온 이유가 마교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일이었단 말이오?" 사운악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실은 우리 사가의 적자들이 마교의 봉공(奉公)인 천년마등주에게 인질로 잡혀 있소이다. 우리들이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녹존성군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광명총궁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단 말인가? 저들이 적자를 인질로 잡혔다면 그 동안 마교의 손과 발이 되어 놀아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사운악은 녹존성군의 표정 변화로 미루어 그의 심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물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달리 생각지는 말아 주시오. 우리들은 적어도 삼성림에 위해가 되는 일은 한 적이 없소이다. 또한......." 그는 참담한 얼굴이 되어 덧붙였다. "우리들은 다만 인질들을 찾기 위해서 이 곳에 왔소이다. 마등주가 여기에서 그 아이들을 풀어주기로 약속......." "닥치시오!" 녹존성군의 눈에서 일순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당신들은 너무도 일을 잘못 처리했소. 그런 일을 어찌 광명총궁에 알리지 않았단 말이오? 당신들의 행동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소?" 사운악은 그만 할 말을 잃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사가에서도 그 점을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삼성림과 의가 상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향후 무림 전반에 미치게 될 영향 때문에 그들로서도 머리가 희어지도록 고심한 바 있었다. 그러나 훗날의 일은 어차피 그 때 가서의 일이고 당장 대(代)가 끊어지는 사태는 어쩐단 말인가? 우선 눈앞에 놓인 당면과제에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녹존성군. 불행히도 그는 그런 차원에서의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구대성군 중에서 가장 냉혹한 위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회천궁이 녹림(綠林)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녹림의 존사를 수하로 부리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비위를 거슬리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는 무림인이라면 대개가 알고 있다. 상대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독수를 뻗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사운악은 삼성림과 등을 지는 것은 물론 그의 증오를 사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황룡사가보의 가주로써 나름대로 지존의 예우를 받고 살아온 사운악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지자 일편으로는 반발이 일기도 했다. '우리 사가는 이제껏 삼성림에 맹목적일 정도로 충성을 다해 왔다. 이는 삼성림의 위세도 그렇지만 과거 어르신들께서 삼천공으로부터 구명지은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실수, 그것도 불가피한 상황을 두고 추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대체 내 이런 꼴을 다른 동도들이 어찌 보아줄 것인가?' 그는 장내에 모여있는 군웅들까지도 의식하게 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 기분은 당가가주나 팽가가주 역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급기야 사운악은 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우리 사가가 마교의 협박을 받아 몇 가지 일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러나 천지신명께 맹세하건대 그것은 본의가 아니었소. 이 자리에 계신 어느 고인이라도 우리의 입장이 되면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이외다. 성군께서도 더 이상은 노부 등을 핍박하지 말아 주시오." "흐음?" 녹존성군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사운악의 언사는 분명 하극상이었다. "핍박이라......?" 그는 곧 폭발할 것 같았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정녕 당신들은 천년마등주의 부름을 받고 이 곳에 왔소?" 의외의 질문이었으나 사운악은 당황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이다. 만일 인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당산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을 것이오." 녹존성군은 어느덧 완전한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특유의 차갑고 오만한 음성이 거듭하여 물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소. 이 곳은 무당의 광무진인이 만든 건축물이 아니오? 어째서 마교의 봉공인 천년마등주가 당신들을 이 곳으로 불러 들였단 말이오?" 사운악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 그들 사이에 진일문이 다시 나섰다. 그의 음성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무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했다. "바로 그 상관관계가 오늘의 요지외다. 광무진인이 마교, 또는 천년마등주와 무관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오." 그는 녹존성군에 대해 그다지 무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가보의 인물들처럼 공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손윗 사람을 대하는 정도랄까? 이는 녹존성군의 지위로 볼 때에는 상식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아니나 다를까? 녹존성군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자네는 누군가? 본 궁주는 무명인의 말은 개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일문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종전보다 다소 냉담해졌다. "불초에게도 석 자의 이름은 있소이다. 진일문이라고, 아마 성군께서는 들어보신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소이다." "진일문......?" 녹존성군의 얼굴에 잠시 한 가닥의 의혹이 어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 네 놈은......!" 녹존성군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비로소 진일문이라는 인물이 과거 혈옥에서 사가보로 옮겨졌다가 자취를 감추어 버린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혈옥의 명부에 지금도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자, 그는 일명 생살부(生殺簿)라 불리우는 삼성림의 이대 극비문서 가운데 생부(生簿)에 올라 있었다. 살부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보는 즉시 죽여야 할 죄인의 이름이, 생부에는 산채로 압송해야할 자들이 적혀 있었다. 진일문은 그 중에서도 왕중헌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로써 반드시 생명이 보존된 채 사로잡아야 할 인물로 정해져 있었다. 녹존성군의 눈이 일순 냉엄한 살기를 띄었다. "진가 아이야, 내 묻겠다. 너는 그럼 왕중헌의 명령을 받고 이 곳에 들어 왔느냐?" 왕중헌이라는 이름은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군웅들은 그 이름을 듣자 한결같이 전율을 금치 못했다. 왕중헌이라면 희대의 마두로써 삼성림에 의해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된지 오래였다. 그의 잔혹무비한 살수라면 소문을 들어 모두들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진일문은 군웅들의 표정을 보며 고소를 지었다. "내 대답은 한결 같소. 왕사부는 단지 내게 학문을 가르쳤을 뿐이오. 나는 그 분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그 분의 명령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소이다.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말하지만 왕사부는 왕사부이고, 나는 나요." 녹존성군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혈옥에서 네 입을 열게 하지 못했다고 본 궁주까지 너를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이렇게 나오자 진일문도 더 이상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싸늘한 음성으로 응수했다. "마찬가지외다. 당신도 과거 혈옥에서의 진모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오." 두 사람의 거리라야 불과 삼장 안팎이었다. 그 사이에서 그야말로 숨막히는 살기가 감돌았다. 쌍방이 모두 일촉즉발, 건드리기만 해도 즉각 격전을 벌일 것 같은 기세였다. 이어지는 녹존성군의 음성이 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지금이라도 본 궁주가 삼성령(三聖令)을 꺼내 한 마디 명을 내리기만 하면 너는......." "잠깐! 멈추어 주시오." 녹존성군의 말을 끊으며 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군웅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로서 이른바 노산초부(魯山焦夫)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별호와는 달리 그의 무공은 이 곳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이는 무림 내에서도 위치가 굳건하다는 의미다. 나이가 든 만큼 그는 냉정하게 사태를 판단하고 있었다. "중도에 끼어 들어서 심히 송구하나 회천궁주께서는 잠시 이 늙은이의 말을 들어 보시겠소?" 백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져 품위까지도 갖추고 있는 노산초부의 말은 이 곳의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녹존성군도 안색을 가다듬고는 이에 응했다. "편노사(片老師)는 무슨 하교가 있으신지......?" 노산초부는 편대치(片大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늙은이가 궁주께 한 가지 청하고자 하오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의 상황이 특수하니 당분간은 궁주께서도 이 곳의 법도를 따라 주십사하는 것이외다." "이 곳의 법도?" "말하자면 그렇소이다. 아시다시피 이 곳에는 가공할 기관들이 중첩되어 있어 아무리 무공이 강한 자라 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소. 간적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려면 우선 뭉쳐야 하며, 필히 이 곳 사정에 밝은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하오." 노산초부 편대치의 말에는 일점도 틀린 것이라곤 없었다. 반박할 여지를 전혀 찾지 못한 녹존성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듣고 보니 편노사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것은 알겠소. 그런데 그것이 대체 저 소적(小賊)과 무슨 관계가 있소이까?" 편대치는 못박듯 확실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들은 진소협을 잠정적인 영수로 결정했소이다. 궁주께서도 그리 알고 따라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뭐, 뭣!" 녹존성군은 너무도 놀라 일시지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놈이 무슨 능력이 있어 이 곳의 군호들이 기꺼이 영수로 정했단 말인가? 혹 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은 아닌지?' 그로서는 진일문이 행한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기질과 무공으로 동시에 군웅들을 압도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진일문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여인이 이 곳의 기관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표정이 어찌 변할지는 가히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녹존성군은 절대로 멍청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는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류의 흐름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앞으로 도 놈을 제압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그 길로 함구해 버렸다. 노산초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 군웅들의 시선은 진일문에게로 향해졌다. 그들의 눈이 모종의 기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진일문은 중인들의 시선을 느끼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양어깨에 군웅들의 생사가 걸려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선고에게 전음을 보냈다. "누님, 광무진인은 어디에 있소?" 육선고는 역시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 자는 아마 총기관을 관장하는 백팔밀전에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곳은 안에서 출입을 차단하면 밖에서는 어떻게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자가 그 곳에 숨어 있는 한 우리는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요." 진일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아무런 방법도 없단 말이오?' 육선고는 대답 대신 아미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진일문은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더 말하지 않았다. 군웅들은 두 사람을 예의 주시하며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장내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목숨을 내맡겨야 하니 어쩌겠는가? 잠시 후. 육선고가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그녀는 다시 전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기관장치가 없어 안전지대에 속해요. 더구나 그 자는 백팔밀전을 벗어나지 못할테니 현재만 같으면 위해를 당할 염려는 없어요. 그러나 이대로 계속 대치하다가는 식량이 없으니 우리 쪽이 먼저 무너질 거예요.' 진일문은 묵묵히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호호... 반면에 그 작자도 아마 편안하게 앉아 그 때만을 기다리지는 못할 걸요? 왜냐하면 기관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이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요. 그 자는 어떻게든 나를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진일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럼 누님의 말은......?' 육선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결심이 선듯 그녀의 입술 끝은 기이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진일문은 알 수 있었다. 육선고가 말을 생략한 부분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그러나 미처 그가 입을 열기도 전, 육선고가 잘라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진일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되오! 그것은 절대로......." 육선고도 지지 않았다. "그 외에는 달리 대책이 없다고 했잖아요." 이제 그들 두 사람의 대화는 전음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인들도 모두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 절박하다는 것 외에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육선고는 그윽한 시선으로 진일문을 응시했다. "동생이 곁에서 도와 주면 아무리 험난한 상황이 닥쳐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요." 진일문은 그녀가 어떤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을 미끼로 광무진인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광무진인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하고, 걸리적거리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육선고의 생명은 끝난다고 봐야했고, 그것은 진일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최소한 여인의 목숨을 대가로 뜻을 이루고자 할 위인은 못되었다. 반면에 육선고는 진일문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자 매우 흡족해져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심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란 그녀에게 있어 커다란 기쁨이었다. 비록 그와 의남매를 맺었다고는 하나 그녀의 여심은 아직도 이성으로서의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한 번 시험해 보겠어요." "누님!" 진일문이 외쳤으나 육선고는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한쪽 벽으로 걸어가더니 벽의 모서리를 더듬어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힘껏 눌렀다. 덜컹! 기이한 음향과 함께 벽에는 이내 장방형의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군웅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그 구멍에 대고 뭐라고 말을 건넸다. 그 구멍은 일종의 창구였다. 백팔밀전과 직접적으로 소리통이 연결되어 있어 하시라도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만겁궁을 설계한 인물이 바로 육선고였으니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진일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 자에게 조건을 제시했어요. 역시 그 자가 바라는 것은 멸천삼관의 도해였어요. 나는 도해를 넘기는 대신 이 곳에 들어온 군웅들을 무사히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 말은 군웅들을 거의 충격에 이르게 했다. 대체 그녀가 누구이길래 광무진인에게 그런 조건을 내걸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멸천삼관이 무엇이기에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진일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가 요구한 조건은 무엇이오?" "간단해요. 도해만 넘기면 돼요." 진일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는 아마 누님을 이 곳에 잡아두려 할 것이오. 그러지 않고는 안심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오." "못당하겠군요. 동생에게는......." 육선고는 한 가닥 고소로 그의 말을 시인했다. 그러자 그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입을 열었다. "나도 누님과 함께 남겠소." 탁하고 음랭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노부도 남겠네." 광해진인이었다. 그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가 남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광해진인은 광무진인에 대한 것은 물론 무당의 숙제들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 풀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웅들은 모두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내심 안도의 숨을 쉬는 한편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위기 의식을 접해야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생명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하니까. 진일문은 그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광무진인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소이다. 그러나 명심하시오. 완전히 이 곳을 벗어나기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오이다." 군웅들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낮게 탄식을 불어내는 자들도 있었다. 육선고는 다시 소리통으로 가더니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안색은 수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진일문의 곁에 돌아와서 불쑥 물었다. "당신이 이 곳에 남으려는 것은 인질로 잡혔다는 그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인가요?" 진일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감하여 잠시 동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그는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는 될 것이오. 하지만 그 비중은 여타의 인물들을 탈출시키고자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소. 소제의 가장 큰 걱정은 역시 누님의 안위요." "으음!" 이번에는 육선고가 말을 잃었다. 진일문의 말인즉 그녀가 절실하게 듣고 싶었던 답변이었으나 일면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포기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한 마디 했다. "고마워요, 동생." 한편. 사대신가의 가주들은 서로 숙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목적이 있어 이 곳에 들어온 이상 그것을 달성해야 했으나 이미 그들 사인 중 악군보가 목숨을 잃었으므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인질을 구출해낸 다음이라면 몰라도 그러기 전에는 덧없이 목숨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무림의 사대신가는 그 날로 봉문(封門)을 해야 되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삼인의 가주들은 진일문에게 다가갔다. "우리도 남겠소이다." 말을 꺼낸 자는 바로 황룡사가보주인 사운악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일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사운악은 아무래도 과거지사를 일소에 붙이고 편하게 진일문을 상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천시하고 경원하던 대상에게 의존을 하자니 심정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진일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고맙소이다." 자고로 때린 자는 그렇지 못해도 맞은 자는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다는 속언이 있다. 바로 지금 두 사람의 처지가 그러했다. 녹존성군도 빠지지 않았다. "본 궁주는 삼성림을 우롱한 광무진인을 추궁해야할 뿐더러 대정검회의 결과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소. 역시 남겠소." 그의 결정을 끝으로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군웅들 중에는 더 이상 남겠다고 지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대신가는 가주 삼인만이 남고 가솔들은 돌려 보내기로 했다. 무당파의 도인들은 광해진인으로부터 몇 가지 명을 전달받고 있었다. 그리고 녹존성군은 수하들 중 일곱 명의 녹의청년만을 자신의 곁에 두기로 했다. 기이이잉--! 굉음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웅들의 얼굴에는 제각기 놀라움과 두려워하는 기색 등 갖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개중에서 육선고만은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 사방의 벽이 움직이더니 새로운 여덟 개의 문이 생겼다. 그 문은 팔괘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는데, 실상 그것이야말로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었다. "기관이 해제되었어요. 여러분들은 저 여덟 개의 문 중에서 오직 하나 뿐인 생문(生門)을 찾아 나가야 해요." 군웅들의 얼굴에는 일시지간 희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의외로 선뜻 나서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당의 광수진인이 한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문이 생문일 것 같소만......?" 그는 애초 팔괘에 정통한 인물이었으나 현재로써는 스스로의 판단이 맞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육선고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지만 만일 기관을 해제하지 않았다면 생문은 휴문(休門)으로 위장되어 있을 테고, 그 상태에서라면 도장께서도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거예요." 광수진인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아울러 그는 내심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호라, 부끄럽도다! 공부(工夫)란 평생 해도 모자라지 않음을 내 한낱 여인을 통해 배우게 되는구나.' 그것은 그가 작금의 사태를 통해 얻게 된 귀중한 교훈이었다. 마침내 군웅들은 생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에서는 하나 같이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워낙 험난한 고비를 넘기다 보니 마지막까지도 불안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이 그들에게는 흡사 억겁과도 같았다. 그들의 등뒤에 대고 육선고가 외쳤다. "호호호...! 모두들 기억해 두세요. 이 만겁수라동이 귀수신장문에서 만든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말예요. 앞으로도 이런 기관학의 총체는 다시 나올 수가 없을 테니까요. 호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는 군웅들의 귓전에 차라리 예리한 비수가 되어 꽂히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귀수신장문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도, 그런 문파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의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영원히 그 존재를 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귀수신장문 사형제들의 소원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수많은 무림인들의 희생까지도 포함하여....... 이제 광장에 남게 된 인물은 모두 열네 명이었다. 그들은 군웅들이 무사히 천사곡 밖으로 빠져나가기를 기원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이는 불안감은 지우지 못했다. '과연 광무진인이 약속을 지킬까?' 설혹 그가 만겁궁 밖으로 군웅들을 내보내 준다 해도 천사곡에 매복이라도 있다면 사태는 또 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 에 있는 십사인의 선에서는 어떻게도 처리해줄 수가 없었다. 군웅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기이잉! 기이이잉--! 다시 굉음이 울리더니 여덟 개의 문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변화는 비단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뜻하게 않게 사방의 벽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녕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육중한 벽이 움직이자 바닥과 천정도 따라 마구 흔들렸다. 금세라도 전체가 붕괴되고 말 것 같은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으음......." 중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긴장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육선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 기관 변화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이윽고 기관이 작동을 멈추었다. 한 방향으로 또 다른 하나의 암도(暗道)가 나타났다. 정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시커먼 구멍처럼 보이는 그 암도는 마치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듯 일말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중인들은 묵묵히 암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심정은 각기 달랐다. 대부분 무림의 초절정 고수였으므로 이렇다할 불안이나 초조감은 없었다. 대신 분노나 투지등 광무진인을 향한 나름의 적대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암도에서 불쑥 한 인영이 나타났다. "아니! 저 자는......." 중인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나타난 자가 너무도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사장삼을 입었으며 목에는 백팔염주를, 손에는 선장(禪杖)을 잡고 있는 한 명의 노승이었다. 나이는 대략 칠순 가량이었고, 청수한 얼굴에는 온화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황룡사가보주인 사운악이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으음, 원광선사(圓光禪師)......." 원광선사라면 당금 소림사의 장문방장이다. 이 곳에서의 그의 출현은 중인들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었다. 역대에 걸쳐 소림은 중원무학의 본산이라고 일컬어진다. 소림의 장문방장이라면 중원무림의 영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 마교대전에서도 당년의 장문인이었던 백료선사(白了禪師)가 중원무림의 맹주로써 군웅들을 이끈 바 있었다. 원광선사. 암도에 서 있는 그는 바로 백료선사의 대제자였다. 그의 출현으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뜻하지 않은 국면으로 이어졌다. "오랫만이외다, 선사." 삼가의 가주들이 먼저 그를 향해 포권례를 취했다. 사대신가는 소림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다. 전대의 가주들도 그러했거니와 그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동안 사가의 가주들은 소림과 친교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더구나 사대신가의 현 가주들이라면 직접 소림을 방문하여 원광선사와 안면을 터놓았던지라 인사를 청한 것이다. "아미타불......." 원광선사도 합장불호로써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불문의 고승답게 그는 대체로 담백한 표정이었다. 웬만해서는 세사 따위에 동요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홍안에는 온화한 미소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녹존성군. 그는 상황이 엉뚱하게 돌아가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뿐, 예의 같은 것은 취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나이나 경륜은 원광선사보다 아래일지 몰라도 신분으로 보아서는 뒤지지 않았으므로 그럴 필요도 못느꼈다. 지난날 그들 구대성군은 칠인의 장문인들을 격파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삼성림과 칠대문파는 상호존중의 관계를 표방하면서도 내면상으로는 언제나 틈이 있었다. 원광선사가 조용히 걸어 나오더니 녹존성군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성군께서는 그간 별래무양하셨는지요? 미처 마중하지 못한 죄, 무겁소이다." 녹존성군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검회의 참관인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것은 허울일 뿐이지, 마중은 커녕 생각지도 않던 고초들을 겪다 보니 오히려 감정이 상해 있는 판국이 아닌가? 그는 차가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방장께서 삼성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본 궁주도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소림이 이렇게 객(客)에 대한 예를 모르다니 정녕 뜻밖이외다." 원광선사는 불호와 더불어 답했다. "아미타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본의 아니게 결례를 했소이다. 삼성림에 대해 별다른 사감은 없소이다." 녹존성군은 여전히 냉소했다. "검회는 어떻게 되었소이까? 본인이 알기로 이번 검회에서는 칠파가 검맹을 결성하고 맹주를 선출한다고 들었소만?" 원광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맹주는 선출되었습니다. 저희 칠파는 앞으로 일맥(一脈)이 되어 행동할 것입니다." 그 말에 녹존성군은 물론 삼가의 가주들, 심지어는 진일문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원광선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칠대문파는 무림 개사 이래 분수령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자리잡고 있어 사실상 통합을 이룬 적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검맹이 결성되었다면 그것은 무림사에 일대 변혁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어째서 만겁수라궁 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다. 녹존성군의 안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럼 맹주는 대사가 맡으셨겠구려?" 원광대사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노납은 그저 검맹의 일원일 뿐이오." "흐음?" 녹존성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중인들 역시도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하나같이 경직된 얼굴로 원광대사를 응시했다. 검맹의 수장(首長)에서 소림이 제외되었다면 그 다음은 당연히 무당이다. 그렇다면 당금의 칠대문파는 소림사의 방장인 원광대사를 젖혀 두고 무당의 광무진인을 추대했다는 말이 된다.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상대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광대사는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들은 노납을 따라 오시오. 검맹의 맹주께서 여러분을 초청하셨소이다." 진일문. 그는 내심 기가 막혔다. '검맹의 맹주가 초청을 한다고? 이미 만겁수라동에 들어와 있거늘 새삼스럽게 무슨 초청을 받는단 말인가?' 녹존성군도 이 순간만은 그와 똑같은 심경이었다. '초청이라? 대체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것인가?' 39장 육선고의 통한(痛恨) 화려한 보전(寶殿). 자단목으로 된 팔선탁을 둘러싸고 일곱 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지금 육인이 앉아 있었고, 개중 한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무슨 묵계라도 있는지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상좌(上座)로 보이는 자리에는 위맹한 인상의 한 도인이 불진을 든 채 점잖게 앉아 있었다. 그것은 상단부 쪽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특별히 의자에 찬란한 구슬들이 박혀 있어 누가 보아도 신분이 구별되는 자리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상석을 제외한 나머지 오인은 용모도 그렇지만 차림새가 각양각색이었다. 중이 있는가 하면 도인도 있었으며, 속인도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나이가 지긋하고 눈빛이 현오하다는 점이었다. 진일문 일행은 원광선사의 안내로 보전 안에 들어섰다. 그들은 팔선탁을 중심으로 앉아 있는 인물들을 확인하자 저마다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상좌의 도인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무당파의 장교진인(掌敎眞人)인 광무진인이었다. 진일문 일행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섬광처럼 빠르게 한 가닥 기광이 스쳐갔다. 일견하기에도 그것은 조소였다. 그에 반해 나머지 오인은 일행의 출현에 여하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전혀 관심이 없거나 애시당초 아무 것도 보지 않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들 오인의 안색이 과히 밝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침중한 기색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무량수불... 어서 오시오, 여러분." 광무진인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말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일행을 무시하지 않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행위였다. 광해진인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 일었다. "광무! 네 눈에는 이 사형조차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그가 폭발하려는 것을 진일문이 손을 뻗어 제지시켰다. 광해진인은 울화를 삭히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보전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때, 삼가의 가주들은 장내를 둘러보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인질로 잡혀 있는 혈육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고, 그나마 말을 꺼낼 분위기도 되지 않자 그들은 낙심천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광무진인의 무례한 태도 따위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녹존성군은 입장이 달랐다. 그는 광무진인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삼성림의 대리로써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광무진인은 의당 삼성림 전체를 맞이하는 예로써 녹존성군을 대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만면에 노기를 띈 채 광무진인을 향해 정면으로 힐난을 가했다. "진인께서는 검맹의 맹주가 되시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셨소? 지존하신 맹주께서 이렇게 불러주어서 무상의 영광이오만, 후에 삼성곡에서 만나게 될 때를 생각하셔야 할 것이오." 그것은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광무진인은 어찌 된 셈인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상좌에 버티고 앉은 채 태연하게 응수했다. "성군의 왕림이야 마땅히 본 맹주가 친히 응접해야 했으나, 워낙 공사다망하여 마음은 있으되 미처 손을 쓰지 못했소이다.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오이다." 사과를 빙자하고 있었으나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녹존성군의 눈썹이 대뜸 위로 솟구쳤다. 그의 수하들인 칠인의 청년들은 분노한 나머지 검을 뽑으려 했다. 곧 녹존성군은 뭐라 입술을 달싹였고, 그에 따라 칠인의 청년 검수들은 기세를 가라앉히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그들을 인도해 왔던 원광선사는 일곱 개의 좌석 중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가 가볍게 기침을 하자 보전의 안쪽에서 여덟 명의 중년화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하고 안광이 형형한 무승(武僧)들이었다. 그들은 자단목을 잘라 만든 원형의 간이의자를 날라오더니 팔선탁이 마주 보이는 위치에 늘어놓았다. 의자의 갯수는 도합 일곱 개였고, 여덟 명 중 한 명의 화상은 의자 대신 원형의 탁자를 그 한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무림인 치고 이들 팔인의 화상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저 유명한 소림의 팔대금강(八大金剛)이 바로 이들이었다. 소림의 장문인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호법승들로써 무공조예로 말하자면 달마칠십이종 절예를 절반 이상 익힌 고수들이었다. 광무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이제 자리에 앉으시기 바라오이다. 귀빈을 모시기에는 적합치 않으나 불편한대로 잠시만 참아주시기 바라오." 그 말에 중인들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 그는 만겁수라동을 만들어 무고한 군웅들 수백인을 몰살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이 곳에 모인 대표급 인물들을 하대(下待)하고 있는 것이었다. 광무진인의 공공연한 모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량수불... 귀빈들께 차를 대접해 드려라."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나치는 말처럼 내뱉았다. 안 쪽에서 이번에는 일곱 명의 중년도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검을 메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가볍고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검수(劍手)들이었다. 소위 무당의 칠성검수(七星劍手)들로써 소림의 팔대금강과 쌍벽을 이루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파의 간판격인 인물들이다. 칠성검수들은 탁자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없이 물러갔다. 이 또한 말이 되지 않는 행동거지였다. 광해진인은 분기를 삭히느라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칠성검수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당의 고인인 그에게만은 깍듯이 대해야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찻잔은 놓여졌으되 아무도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실내는 바늘 한 개가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져 있었다. 팽팽한 긴장과 더불어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 따름이었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육선고였다. "광무진인, 우리 사이의 빚도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그녀의 음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다. 사실 여자라고는 이 자리에 오직 그녀 혼자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삼십대 초반으로써 그 나이가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안정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자 장내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심중에 갈무리되어 있는 원한의 비수를 느끼지도 못한 채.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도복을 입고 있어 차림새가 유별난 데다가 앞섶이 단단히 여몄음에도 불구하고 뽀얀 목밑의 살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광무진인의 눈길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접한 육선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불길을 알아 차렸기 때문일까? 그녀는 마치 알몸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광무진인. 그는 애초 명문정파의 장문인이라는 지고한 신분으로써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드러난 마각은....... 육선고는 순결을 잃던 그 날의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동굴에 감금된 채 며칠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육선고는 멸천삼관의 도해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거절한 대가로 생각지도 않았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놀랍게도 욕정이었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알 수 없는 맹렬한 기운이 체내에서 폭발점을 향해 마구 비등해 가는 것을 느끼며 이로 인해 몸부림을 쳐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음식물 속에 든 음약 때문이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고, 그 때는 이미 약성이 몸에 배어 있어 어떻게도 조정할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음약의 기운은 무시무시했다. 거센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욕망은 수시로 육선고의 순백지체를 괴롭혔다. 아무리 억제를 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때때로 날카로운 바위에 자신의 팔뚝을 긋거나 또는 머리를 석벽에 부딪쳐 보기도 했으나 달구어진 육체는 전혀 식지 않았다. 육선고의 파과(破瓜)는 다름 아닌 광무진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한창 욕망에 사로잡혀 신지를 상실하고 있는 그녀를 사양치 않고 안았다. 아니, 거침없이 농락했다면 맞으리라. 삼십이 넘도록 남자를 모르던 여체가 기막히게도 무당의 장문인을 첫 남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의 행태는 거의 광란에 가까웠다. 음약에 중독된 육선고는 그렇다치고, 도인이라는 광무진인 역시 여체를 다루는데 있어 가히 색마 이상의 조예(?)를 보였다. 그의 거대한 양물이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파고 들었을 때, 육선고는 태초의 고고성보다 더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필두로 그녀는 밤이 지새도록 내내 유린을 당해야 했다. 물론 당시의 쾌락만은 육선고도 부인할 수 없었다. 생애 최초의 환희이자 악의 수렁인 그 황홀경에서 그녀는 연신 혼절을 거듭하며 기성을 발했던 것이다. 뒤에 남은 파과지화를 보고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비참해진 나머지 자신의 욕망을 저주하고 혐오했다. 그 저주가 광무진인에게 옮아간 것은 그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자신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였다. 광무진인은 그러고 나서도 몇 차례나 더 그녀와 몸을 섞었고, 싫증이 나자 별 갈등없이 다른 자들로 대치했다. 그녀가 상대한 남자는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마침내 육선고는 광무진인의 가면을 벗기고 능욕 당한 이상으로 그에게 되갚아 주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었다. 육선고는 내심 이를 갈았다. '광무! 내 이 손으로 너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갈아 마시리라. 나를 색노로 전락시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형들의 원한만은 반드시 갚아 주겠다.' 그녀의 눈에서는 표독스런 광망이 줄기줄기 흘러 나왔다. 그 의미를 아는 자는 이 곳에서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당사자인 광무진인, 또 한 사람은 진일문이었다. 광무진인도 인간인 이상 그녀의 눈빛을 대하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순간일 뿐이었다. 그는 곧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육선고를 정시했다. 일테면 어디 공개할 용기가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이었다. 육선고는 그의 뻔뻔스러움에 능욕을 당할 때보다 더욱 진저리가 쳐졌다. 사실 그와 더불어 온갖 추태는 물론 동물적인 교접 행위까지도 나누었던 그녀였다. 광무진인은 바로 그 부분을 일깨우며 그녀에게 오히려 무언의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 않는가? "더러운 도적!" 느닷없이 육선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중인들은 대경실색했다. 상대가 누구인가? 당금의 무당파 장문인이자 칠대문파의 연합인 검맹의 맹주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의혹에 사로잡혔다. '저 여인은 누구인가? 대체 광무진인과 저 여인 사이에는 어떤 원한이 있기에 저런 욕설을 쏟아 놓는단 말인가?' 물론 중인들은 그 내막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당사자인 육선고가 자신의 입으로 그 사건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한. 실로 기막힌 것은 광무진인의 응수였다. "무량수불... 육여협께서는 말씀을 삼가시오. 일개인의 기질까지야 어찌 나무랄 수 있겠소만, 이 자리에는 무림의 중대사를 논의하느라 여러 고인들께서 배석하고 계시거늘, 부디 결례가 되는 언행은 자제해 주시오." 그는 비난을 하면서도 무당의 장문인다운 품위를 보임으로써 단 한 수로 그녀를 압도하고 있었다. 육선고는 그가 이렇듯 간교하게 상황을 뒤바꾸어 버리자 거의 폭발직전에 이르렀다. "광무! 너는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자신의 더러운 본모습을 감추느라 오히려 나를 궁지로 몰려 하다니......." 광무진인은 그녀의 말을 묵살해 버리듯 시선을 돌려 광해진인을 바라보았다. "사형께서는 오래 못뵌 사이에 많이 변하셨구려." 광해진인의 노안에는 한 가닥 불길 같은 증오가 어렸다. "광무, 정녕 뻔뻔스럽기 짝이 없구나. 그래, 내가 네 사형이란 것은 기억하고 있었느냐?" "무량수불... 사형께서는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되오. 당년에 여러 사숙들께서 사형을 제명하려 하신 것을 소제가 만류했소이다. 이는 무당의 형제들이 다 아는 사실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께서는 술로 허송세월을 하다가 아무 전언도 없이 홀연히 본문을 떠나셨소. 그 이후로 소제는 혼자 무당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고심했으며 한편으로는 사형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 왔었소이다." "닥쳐라! 이 교활한 놈." 광해진인은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그는 분기를 참지 못해 연이어 노갈을 터뜨렸다. "네 놈은 당년의 현청과 똑같은 놈이다!" 어느덧 중인들의 눈쌀이 찌푸러들고 있었다. 사형제지간의 분쟁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광해진인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쪽으로 감정이 쏠리고 있었다. 현청진인이라면 전대의 무당파 장문인이다. 광해진인의 입에서 그 이름이 함부로 불리워지자 경위야 어떻든 두둔할 마음이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진일문은 줄곧 냉정하게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장내의 분위기가 광무진인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광무, 정녕 무서운 인물이다. 저 자는 단지 세 치 혀로 듣는 이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 육누님이나 광해진인은 그의 격장지계에 말려들어 오히려 그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 되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중인들도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모두 광무진인을 추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미혹된 나머지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잊고 있었다. 워낙 철저하게 의연한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있어 거꾸로 그를 공격하는 육선고나 광해진인을 문제시하게 된 것이었다. 이쯤 되자 진일문도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잠깐 광무진인께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이다." 그가 입을 열자 광무진인의 시선이 곧장 그에게로 향해졌다. 광무진인의 눈 속에서 일순 기이한 빛이 스쳤다. 직감적으로 진일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량수불... 빈도가 견식이 짧은 탓에 소협의 대명을 모르겠구려. 소협께서는 어느 분의 고제(高弟)이신지?" 그는 긴장 속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해 왔다. 진일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군. 누구를 상대로도 기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구나.' 진일문은 내심을 감추며 담담히 말했다. "소생의 사문은 다소 복잡하오이다. 무당파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소이다. 소림사와도 마찬가지요." 그 말에 팔선탁에 기대 앉아 있던 원광선사가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그는 나직히 불호를 외우더니 착잡함이 매달려 있는 시선을 진일문에게 던졌다. 진일문은 그의 눈길을 느끼자 빙긋 웃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개방과도 그만한 연관을 가지고 있소이다."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아연해지고 말았다. 대체 눈앞의 약관청년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길래 무림의 칠대문파 중에서도 가장 큰 삼개문파와 연(緣)이 닿아 있다는 말인가? '후후... 일단 주의를 돌리는데는 성공한 셈이군.' 진일문은 고소를 짓는 한편, 여유있게 말을 이어갔다. "진인께서도 우내삼기(宇內三奇)라는 명호는 익히 들어보셨을 것이외다. 불초는 바로 그 분들과 인연을 가지고 있소이다." "우내삼기!" 장내의 인물들은 저마다 탄성을 발했다. 적어도 중원무림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상 우내삼기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비로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진일문을 응시했다. 광무진인 역시도 적지아니 충격을 입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진일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믿을 수가 없소이다. 다른 분은 몰라도 현고사백만큼은 결코 소협과 인연을 맺을 수 없소." 진일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즉시 반문했다. "그 분께서 이십 년이 넘도록 불회곡에 감금당해 계셨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감금이라고? 현고자 노선배가......?" 장내에는 금새 소요가 일었다. 사실 진일문의 말은 금시초문이기도 했거니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무당의 최고기인으로 알려진 현고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듣기에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광무진인의 놀라움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유들유들하던 그의 안색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놈이 그 사실을 어찌 알았단 말인가?' 그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날카로운 눈으로 진일문을 쏘아 보았다. 진일문은 그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불회곡에서 이십 년 이상을 영어의 몸으로 계셨지만 하늘의 안배였인지 불초는 그 분을 만나뵐 수 있었소이다. 이는 언제라도 증명할 수가 있소이다." 그 말을 듣자 광무진인은 더욱 더 위기의식을 느꼈다. 자칫하면 이대에 걸친 무당의 비화가 공개될 판국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제껏 쌓아올린 모든 기반을 한 순간에 잃고 만다. 광무진인은 마음을 다지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내 저 녀석이 광해진인과 함께 나타날 때부터 알아 보아야 했거늘, 미처 거기까지는 대비하지 못했구나.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인즉 지금부터라도 신중해야겠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소협이 무슨 말을 하는지 빈도는 도시 이해가 가지 않소이다. 불회곡은 본파의 금지구역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 누가 갇혀 있는 따위의 일은 없었소이다. 혹 소협은 본파에 대해 무엇인가 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그것은 곧 공연히 무당파를 헐뜯으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힐난이었다. 진일문이 거기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한 차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유감이라면 단지 현고자 노선배께서 도장의 지금 그 말씀을 듣지 못하셨다는 사실 한 가지 뿐이외다. 진실이란 언제고 대명천지에 밝혀지는 법, 도장의 사부이신 현청도인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광무진인의 안면근육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사부께서는 폐관 중이시오." 진일문은 씨익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바로 이 곳 천사곡 어딘가에 계시겠구려? 그 분을 청해 여쭈어 보면 다 말씀해 주실 것 같소만. 후후......." "그, 그건 곤란......." 그는 광무진인의 말을 중도에서 잘랐다. "그럼 그 얘기는 진인의 입장을 보아 그만 하기로 하고, 한 가지만 더 묻겠소이다. 대체 이 곳에 기관을 설치해 놓고 군웅들을 불러 참살한 이유는 무엇이오?" "아!" 중인들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일문의 말이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놓은 것이었다. 광무진인의 대응은 실로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은 즉각적으로 육선고에게로 향해졌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저 분 여도우께서 하셔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만......?" 육선고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도적! 네가 감히 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무량수불... 이 만겁수라동은 분명 여도우와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께서 만든 것이 아니오? 빈도는 다만 이 천사곡을 보수하려고 그 분들을 초청했을 뿐이오." 광무진인의 말은 태연자약하게 계속 되었다. "이 곳에 그렇게 무서운 기관매복을 만들 줄 빈도가 어찌 알았겠소이까? 아시다시피 빈도가 여러분들을 초빙한 것은 다만 중원검회를 개최하는데 참관인으로 모시고 싶어서였을 따름이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어찌하여 아까부터 계속 이 곳에서 벌어진 일을 빈도에게 추궁하려고 하시오? 물론 도의적인 책임은 느끼고 있소이다만......." 그가 이렇게 나오자 중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실상 그의 변명에는 언뜻 듣기에도 충분한 타당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육선고는 분노로 인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악적! 이 만겁수라동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누구냐? 그리고 나서 네 놈은 우리 사형제들을 하나씩 죽이지 않았느냐? 그것도 모자라 나에게는......." 그녀의 눈에서는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여차하면 그 뒷부분의 말까지도 쏟아놓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광무진인에 의해 그녀는 또다시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귀문의 사형제들은 만겁수라동을 이용해 천하무림인들이 서로 상잔을 하게 함으로써 문파의 이름을 떨치고자 했소. 그 사실을 진즉 알았던들 저지할 수 있었을텐데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여도우의 사형제들은 그것을 눈치챌까 염려한 나머지 빈도를 죽이려고까지 했었소. 다행히 무당의 형제들이 손을 써서 제압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빈도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닥쳐라!" 육선고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분노가 극에 달하자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네 놈이 어떻게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휘익--! 그녀는 급기야 광무진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상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일장을 내쳤다. 광무진인은 실소하며 수중의 불진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육선고는 한 가닥 무시무시한 경력이 자신의 장력을 뚫고 가슴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끝장이구나!' 그녀의 눈에 아득한 절망감이 어렸다. 죽음의 문턱이 자신에게 손짓해오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대무당파의 장문인이 무공이 약한 여인을 상대로 태극살형강기(太極煞形 氣)를 사용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문득 차가운 음성이 장내를 진동시켰다. 동시에 한 가닥 음유한 무형의 기운이 육선고와 불진 사이를 가로막았다. 펑--! 가죽북 터지는 음향이 울리며 장내의 공기가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팔선탁에 앉아 있던 육파의 장문인들은 일제히 뒤로 주르르 밀려 나갔다. "이, 이럴 수가!"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실상 그들도 각파의 지존으로서 막강한 내공과 무학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격돌로 인한 여파에는 도저히 항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일문. 그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듯 그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가히 태산 같은 기도를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반면에 광무진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자락이 함부로 구겨졌는가 하면 불진도 엉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 육선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하면 자신의 생명은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비로소 무공의 벽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불현듯 그녀의 눈에서 기이한 광망이 일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더니 입고 있던 도복을 마구 찢어내기 시작했다. 부욱! 부우욱--! "저, 저런......!"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장내의 인물들은 아연실색했다. 아무튼 도복을 찢어 내자 육선고의 눈부신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도 중인환시리에. "더러운 도적놈! 내 너의 가면을 철저히 벗겨주겠다." "무, 무슨 짓을......!" 광무진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전라가 되어버린 육선고는 허공을 우러러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오오! 아미타불......." "무량수불... 어찌 이런 일이......." 중인들이 되려 민망해진 나머지 제 스스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파의 지존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신분의 인물들이었으나 이런 사태를 두고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라 곤혹에 빠져 들고 말았다. 육선고가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존귀하신 나으리들이여! 부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이 몸을 똑바로 보아 주세요. 호호호호... 저 도적놈이 남긴 더러운 흔적을 보란 말이에요." 그것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였다. 육선고는 여인으로써 최후의 자존심도 포기한 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누님......." 진일문의 안면이 몹시도 일렁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만은 육선고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없이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있을 뿐, 차마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녀를 말리겠는가? 육선고는 광무진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부르짖었다. "광무! 네 놈이 내 몸에 남겨놓은 흔적들을 입증해 보이겠다. 물론 다른 자들의 것도 있겠지. 무당파의 존엄하신 장문인께서는 나를 마음껏 희롱하다가 싫증이 나니까 다른 자들에게 넘기기까지 했었지. 호호홋! 그러나 네 놈이 실컷 주무르고 핥아놓은 상처들은 여전히 잘 보관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말아라." 중인들은 그녀의 외침에 저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광무진인은 색계(色界)를 범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저히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 끼워줄 수조차 없었다. "호호호... 보란 말이에요. 이 상처, 그리고 여기, 또 이 곳도....... 모두가 저 더러운 도적이 남긴 상처라고요." 육선고는 손을 들어 직접 자신의 신체 각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눈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제 그녀가 바라는 것은 꼭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명예도, 심지어는 목숨도 그녀에게는 소중하지 않았다. 오직 광무진인을 무너뜨려 복수하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목표였다. 과연 비원이 깃은 그녀의 절규는 중인들의 심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느 덧 그들은 체면 손상 따위는 내던지고 탄식과 더불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육선고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두 손으로 양 젖가슴을 나란히 받쳐 들었다. "여기 이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저 도적놈의 이빨자국이에요. 호호호... 저 도적은 내 이 곳을 떨어져 나가도록 깨물었어요." "미, 미친......!" 광무진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육선고는 그에게 일별도 하지않고 이번에는 두 다리를 벌려 보였다. 무성한 수림의 곁, 안쪽의 허벅지에는 역시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이것도 저 도적이 남긴 것이에요." 그녀의 부르짖음은 광무진인이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호호호... 저 도적의 이빨과 손을 내가 말한 상처에 한 번 맞춰 보세요. 광무! 너는 그럴 용기가 있느냐?" 그를 향해 손가락을 세우는 육선고의 얼굴에서는 절절한 한이 배어 나왔다. "아미타불......" 소림의 원광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눈을 내리 감았다. 마치 더 이상 볼 필요도, 들을 필요도 않다는듯. 나머지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광무진인에게로 쏠렸다. 그것은 무언의 추궁이었다. 광무진인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여러분들께서는 설마 저 미친 여자의 말을 곧이 듣고 대무당의 장문인인 본인을 의심하는 것이오?" 그의 항변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그가 끝내 주장을 펼치려면 육선고의 말마따나 그녀의 상처에 손가락과 이빨을 대보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리라. 그러나 광무진인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육선고의 말대로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나를 들킬 뿐이니까. 광무진인은 대책이 없어지자 대뜸 수중의 불진을 들어 올렸다. "요망한 계집!" 위이잉--! 파공성이 일더니 불진은 수십 개의 환영을 그리며 육선고에게 날아갔다. 누가 미처 말릴 겨를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오, 륙척이나 되었지만 불진의 경기는 즉각 그녀의 알몸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 쇄도해 갔다. 의외로 육선고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떠올리더니 오히려 젖가슴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엇--!" 중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비로소 육선고가 죽기를 자청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할 일을 다한 듯 편안한 표정인 그녀의 얼굴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오오! 어찌 이런 일이......." 중인들은 탄식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콰쾅--! 폭음이 일며 보전의 사방 벽이 진동을 일으켰다. 소용돌이를 이룬 강맹한 기류가 중인들의 옷자락을 어지럽게 휘날리게 했다. "으음......." 그 속에서 육선고의 꺼져 들어가는 듯한 신음성이 울렸다. 체념한 탓인지 그녀는 비명도 발하지 않았다. 다만 고통으로 인한 본능만을 그렇게 노출시켰을 따름이었다. 쿵--! 둔중한 음향이 일자 중인들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그 쪽으로 향했다. 육선고의 몸이 뭉개져 피떡이 되어 있으리라는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육선고는 벌거벗은 채 한 구석에 무참하게 처박혀 있기는 했으나 그런대로 무사한 것 같았다. 단지 입과 코로 실낱같은 혈흔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중인들은 탄성을 발하는 한편, 금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팔선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도인이었다. 그리고 동문의 사형제지간이었다. "광무, 네 놈의 무공에는 어찌하여 사류(邪流)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냐?" 분노한 외침을 발한 자는 다름 아닌 광해진인이었다. 그가 바로 위기의 순간에 광무진인의 불친을 쳐낸 것이었다. 육선고는 다만 그 반탄지기에 의해 날아갔을 따름이었다. 광해진인의 충혈된 눈이 상대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그 상대란 물론 광무진인이었다. 그는 반동강이 난 불진을 축 늘어 뜨리면서도 입가에는 괴이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렇다면 사형의 무공이 어찌하여 음한지기를 띄고 있는지부터 설명해 주시오. 본파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기로 치자면 피차 마찬가지가 아니오?" "놈! 또 수작을 부리는구나." 광해진인은 대로하여 눈썹을 푸르르 떨었다. 뭐라고 답변하겠는가? 실제로 그의 무공은 무당의 정통공부가 아니었다. 독에 중독되어 장백산에서 요상하는 와중에 스스로 깨우치게 된 음한지기의 무공이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그것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무당의 치부를 먼저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광무진인은 바로 이 점을 노려 또다시 그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진일문. 그는 자신의 장삼을 벗어 육선고의 나신을 감싸 주고 있었다. 육선고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짙은 연민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육선고가 그나마 중상을 입지 않은 것에 저윽이 안도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팔선탁을 향해 걸어갔다. "광무진인, 사형에 대한 불경도 그만하면 되었소이다. 이제 더 이상 감추지 말고 불회곡에서 시전했던 혈장(血掌)을 다시 사용해 보시오. 불초가 한 번 시험해 보겠소." 그의 음성에서는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심중에 살기가 떠올라 있다는 뜻이었다. 광무진인은 혈장이라는 말에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소협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당신은 무당의 정종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소. 대신 어떤 연원에서인지 사도의 패도장공을 익히고 있지. 후후... 나는 그 사실을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소이다." 진일문은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지금 그 장공을 시전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당신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조차도 없을 것이오." 이 때, 광해진인이 노기를 띈 음성으로 나섰다. "저 놈은 노부가 처리하겠다. 본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필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담담히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삼초 내로 끝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알겠다. 내 저 놈을 삼초지적으로 삼지." 광해진인은 표정을 굳히며 쌍장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장심에서 곧 반투명한 백색의 기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휘류류류--! 그에 따라 주위의 공기는 만년한풍이라도 만난듯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백색의 기류는 점점 짙어졌다. 중인들의 입과 코로 는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실로 놀라운 현상이었다. 이런 류의 공력이란 전설의 한령신공(寒靈神功)이나 빙혼신장(氷魂神掌)밖에는 없었다. 즉 북극의 오지에서나 익힐 수 있는 괴공으로써 적중 당하면 즉시 혈관이 굳고 온 몸이 얼음덩어리로 화하고 만다. 그 광경에 중인들은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막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무당의 고도(高道)인 광해진인이 이런 패류지학을 사용한다는 것이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에 맞서는 광무진인의 얼굴에는 무수한 갈등이 어렸다. 무당의 정종공부로는 아무래도 광해진인의 괴이한 공력을 받아낼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빙(結氷)!" 광해진인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는 쌍장을 뻗어냈다. 쩡--! 괴음이 울리자 중인들은 더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팔선탁에 앉아있던 육파의 장문인들도 어느덧 몸을 일으켜 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빙이라는 문자 그대로 광해진인의 장려에 스치는 것은 전부 다 얼어 버렸다. 백색의 기류가 허공 중에 엉기더니 사방 일장의 범위 내를 온통 얼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광무진인만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보좌에 앉은 채로 그는 하나의 얼음벽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삼초도 필요 없다. 이번 일초로 너는 죄업과 더불어 이승에 하직을 고하게 될 것이다. 쇄빙(碎氷)!" 쩌엉--! 괴음향이 귀청을 찢을듯 날카로운 공명을 일으켰다. 광해진인이 쌍장을 아래 위로 가르자 얼음벽은 삽시에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매달렸다. 그 균열과 함께 광무진인의 몸도 여지없이 산산조각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얼음의 균열은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광무진인의 본신에까지 이르렀다. 광무진인의 눈이 움직인 것은 그 때였다. 뿐만 아니라 손이 움직였고, 다시 어깨가 움직였다. 또한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그의 손은 앞으로 쭉 뻗어져 나왔다. "저, 저럴 수가!" 광해진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런 그의 눈앞에서 번뜩 혈광이 떠올랐다. 쾅--! 천번지복의 굉음이 터졌다. 광무진인과 광해진인의 장력이 허공에서 격돌한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순간에 벌어진 것은 사태였다. 두 사람의 장심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그들은 바야흐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내공 겨루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으음......."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마찬가지로 중인들도 모두 안색이 일변한 채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절정 고수들의 내력 겨룸이란 실상 병장기를 부딪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흉험한 것이었다. 내력의 비교차가 현저하면 모르되 그렇지 못하면 대개는 양패구상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었다. 광해진인이나 광무진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죽건, 죽이건 결판을 내고 말 심산인 것 같았다. 진일문은 초조한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육파의 장문인을 위시하여 삼가의 가주, 녹존성군 등도 한결같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일순 광해진인의 도포자락이 가볍게 떨렸다. 동시에 그의 흰 머리칼이 위로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진일문은 심중에서 찬 바람이 이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그 싸움의 결과를 예견할 수가 있었다. '광해진인은 광무진인에 비해 나이가 많고 내공의 수련도도 훨씬 더 깊다. 하지만 한 때 독상을 입고 오지에서 견디느라 원양지기를 많이 상실했을 것이다. 반면에 광무진인은 무당의 장문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무당의 심법을 꾸준히 익힌데다가 알 수 없는 무공까지 익히고 있으니.... 이 싸움은 절대적으로 광해진인에게 불리하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칼이 곤두서고 옷자락이 날리는 가운데 광해진인의 몸이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다.그대로 두면 그는 곧 내장이 으스러져 죽게 된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도울 수는 없었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조권(助拳)을 하는 것은 당사자들에 대해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써 일종의 금기사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사 이런 것을 무시하고 뛰어든다 해도 개입자는 내공이 두 사람 모두를 능가하지 않는 한 즉사를 면할 수가 없었다. 진일문은 손바닥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만치 그가 조바심을 내고 있는 탓이리라. '절대로 광해진인을 마교의 주구에게 희생시킬 수는 없다. 그는 무당을 중흥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중인들을 돌아다 보았다. 그들도 불안해하고는 있었으나 광해진인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므로 하나같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싸움의 결과에 노심초사하는 것은 오직 진일문 혼자였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광해진인을 응시했다. '노선배! 내가 끼어드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우우웅--! 불현듯 그의 주위로 경력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태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40장 드러난 마각(馬脚) 우우우웅--! 보전 내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진일문의 신형이 곧장 두 사람을 향해 쏘아져 간 것이었다. 그 때, 웅후한 불호성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아미타불! 아니되오." 원광대사의 선장이 무섭게 진일문을 휩쓸어갔다. 쿠우우우--! 선장은 원래 중병기이다. 원광선사의 심후한 불문 선공을 싣고 허공을 가르자 가히 바다를 가르고 태산을 가루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발휘했다. 진일문은 이 뜻밖의 방해자에 의해 앞이 가로막히자 어쩔 수 없이 신형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는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을 전개해 선장을 손으로 쳐냈다. 그 광경에 중인들은 경악한 나머지 모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맨손으로 선장을, 그것도 당금 소림사의 방장이 휘두르는 선장을 막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원광선사는 아연실색했다. 사실 그도 진일문을 해칠 생각이 있어 나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림의 금기를 범한다고 여기고 이를 제지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미 공력을 거두거나 선장의 방향을 틀기에는 늦어 있었다. "아미타불......." 그는 겨우 반푼의 내력을 거두는 것으로써 자비심을 표명할 수 밖에 없었다. 선장은 여지없이 진일문의 수도와 부딪쳤다. 파팟! 원광선사는 대경했다. 마치 솜뭉치를 때린듯 아무런 탄력도, 저항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는 선장을 통해 막바로 자신의 체내 진기가 스르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자 그만 심금이 떨려왔다. 그것은 이른바 돼지신공의 위력이었다. 진일문이 태극환허공 신공 중 흡공비결(吸功秘訣)과 돼지신공을 혼용해 찰나적으로 임기응변을 발휘한 것이었다. 원래 돼지신공은 쌍방간의 장력을 통해 시전할 수는 있으되 상대의 병기로부터 직접적으로 빨아들을 수는 없었다. 진일문은 그런 전제를 깨고 또 하나의 무공 세계를 열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은 흡사 자석인양 선장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원광선사의 몸이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선장을 통해 그가 수십 년을 닦아온 불문의 선공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만 더 지체하면 그는 폐인이 된다. '안돼지! 이럴 수야.......' 진일문은 씨익 웃었다. 그의 손에서 이번에는 태극환허신공 중 이공비결(移功秘訣)이 떨쳐져 나갔다. "헉!"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더불어 선장은 멀찌감치 날아갔다. 동시에 원광선사는 비틀거리며 물러나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그의 안색은 거의 잿빛이 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그는 탄식성에 이어 즉시 불문호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 저럴 수가......." 관전하던 군호들은 한결 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녹존성군까지도 어느 순간에 몸을 일으켰는지 경직된 자세로 우뚝 서 있을 정도였다. '쓸데없이 시간을 끌었다!' 진일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내력 대결에 임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광해진인과 광무진인. 이 두 도인은 진일문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어떻게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양자가 다 그 상태에서 말을 하거나 움직였다가는 진기가 흐트러져 주화입마를 면치 못한다. 특히 광무진인은 내심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적이 아닌가? 그러는 사이, 진일문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중간 위치에 선 채 맞붙어 있는 그들의 손바닥을 주시했다. 그의 얼굴에 가벼운 회의가 스쳤다. '과연 내 내공으로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을지......?' 그는 묵묵히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심중에서 일어나는 일말의 불안을 일소에 붙여야 했다. 그도 자신의 내력이 그들 두 사람을 능가하는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수도(手刀)를 앞으로 밀어냈고, 그것은 두 도인의 겹쳐진 손바닥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우욱!" 진일문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반탄력으로 인해 그는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후퇴는 불가능했다. 그의 수도는 즉각 두 사람의 진기와 엉키면서 그대로 유착되어 버렸다. 우우웅....... 괴이한 음향을 울리며 세 사람의 공력이 허공 중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진일문은 온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발은 바닥으로부터 세 치 가량이나 솟아 오르고 있었다. 두 가닥의 서로 다른 기운이 수도를 타고 흘러 들어와 그의 폐부를 위협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막았으나 이내 한계를 느꼈다. '역시 두 사람의 공력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벅차다.' 그의 얼굴은 두 사람보다 더욱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진일문은 곧 하나의 방도를 떠올렸다. 그것은 이제껏 한 번도 시행해 보지 않은 무공이었다. 태극환허신공 중 양심비결(兩心秘訣). 이는 마음을 둘로 나눔과 동시에 공력과 무공초식도 일거에 두 가지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 진일문의 신체에는 두 종류의 공력이 내재해 있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무당의 정종심법 외에도 비취암의 절정사태로부터 전수 받은 만만신공(卍卍神功)이 머물러 있었다. 패류(覇流)를 달리는 그 불문공부는 현고자를 만난 이후로는 수련을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만만신공은 그의 꾸준한 내력 증진과 함께 저절로 숙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사자인 진일문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만만신공은 패류인만큼 어느 공부보다도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절정사태의 곁에 있을 당시에는 십성의 성취를 보이던 것이 이제는 그녀와 같은 수위인 십일성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만만신공은 극강극양에 속했으므로 무당정종의 태극신공과는 정반(正反)의 기운을 지닌다고 할 수 있었다. 일찌기 진일문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이런 상황을 간파해낸 인물이 바로 취화상이었다. 그는 상반된 이 두 가지의 진기를 융합시키면 어떤 성취를 볼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취화상은 소림의 무상선공(無上禪功)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두 가지의 기운을 융화시켜 주려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능히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인이 탄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고의 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취화상은 그 절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내력이 진일문을 두 배 이상 능가해야 했는데 불행히도 서로 엇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양심분리(兩心分離)!" 진일문의 입에서 한 가닥 외침이 일었다. 그는 쌍수를 두 사람의 사이로 쳐냈다. 그의 우수에는 만만신공이, 좌수에는 태극환허신공이 극한으로 일으켜진 상태였다. 두 가닥의 상반된 기운은 즉시 소용돌이의 와류를 뚫고 각기 광해진인과 광무진인에게 침투했다. 두 도인은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일문의 몸은 허공으로 무려 다섯자나 떠올랐다. 퍽! 그는 천정에 머리를 사정없이 부딪치고는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세 가닥 고통에 찬 신음성이 중인들의 귀를 울렸다. "으음!" 다행이라면 그 와중에서도 진일문이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돌가루가 풀풀 날리는 가운데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똑바로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광해진인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낸 후, 벌렁 쓰러졌다. 그런가 하면 광무진인은 보좌 위에서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고 있었는데, 외관상 멀쩡해 보여 그가 어느 정도의 내상을 입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장내는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누구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 중에도 중인들의 시선은 하나 같이 광무진인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그가 뭔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를 한참여. 마침내 광무진인은 고개를 바로 하더니 진일문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서 비로소 실날 같은 혈흔이 비치고 있었다. 그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네 놈이 어떻게 태극환허신공을......." 더듬거리는 그의 음성에는 기운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진일문의 담담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의혹을 가지실 필요는 없소이다. 현고자 노선배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된 결과니까. 노선배께서는 무당의 실전비공을 모두 성취하고 계셨으나 안타깝게도 간인의 음모에 휘말려 무당의 중건을 보지 못하고 우화하셨소." 그의 말뜻은 지극히 명확했다. 즉 간인이라 지칭된 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눈 앞의 광무진인이었다. 그 점은 듣고 있던 군호들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광무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중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었다. 태극환허신공이라면 장삼봉진인이 태극내경(太極內徑)에 남긴 신공으로 그가 오랫동안 탐내왔던 무당의 실전비학이다. 그토록 희구면서도 끝내 거머쥐지 못한 것을 타인이 익히고 있다고 생각하자 울화가 치민 것이었다. 그는 언제 기력을 회복했는지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태극환허신공은 본문의 무상신공이오. 외인은 익힐 수 없는 것이거늘, 어찌 하여 소협이 임의로 취득했단 말이오?" 광무진인은 심중에 담긴 탐욕과 질투를 어느덧 그럴 듯한 추궁으로 바꾸고 있었다.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무의 근원은 본시 하나인 것, 어떤 고인 창안을 하셨던 인연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오. 만일 도장이 올바른 도를 수행하며 진심으로 무당의 부활을 추구한다면 불초는 현고자 노선배의 유원을 이어 신공을 돌려드릴 생각도 있소이다." 광무진인은 그 말에 제꺼덕 걸려 들었다. "그렇다면 소협께서는 빈도에게 비결을 이양해 주실 용의가 있다는 뜻이오?" 진일문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후후... 내 당신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소.' 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장께서 개과천선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뭐, 뭣!" 광무진인의 얼굴이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놀림감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사실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었다. 평범한 일반인이 무당의 장문인을 상대로 개과천선을 요구했다면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이 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광해진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대뜸 광무진인을 향해 호통을 쳤다. "광무, 이 놈! 네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마교의 혈령장(血靈掌)이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라느냐?" 그의 말은 장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혈령장이라고!" 녹존성군이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진일문의 입을 통해 광무진인이 마교의 주구일 것이라는 얘기는 전해 듣고 있었으나 별반 신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광무진인이 마교의 비전지학인 혈령장을 사용했다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아미타불! 어찌 그런 일이......." "설마......." 육파의 장문인들은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모습들이었다. 자신들이 합력하여 칠대문파의 맹주로 추대한 자가 마교의 인물이라면 대체 그 결과는 어찌 되는 것인가? 이는 비단 실수 정도가 아니라 무림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삼가의 가주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놀라지는 않았으나 한 때 마교에 동조했던 일화들을 새삼 떠올리며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소림의 원광선사가 불호와 함께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맹주, 그것이 대체 무슨 말이오? 맹주께서는 적어도 우리 여섯 사람에게만은 해명을 해 주셔야 하오." 육파 장문인들의 시선은 광무진인에게 못박히듯 고정되었다. 그들 중에는 이 순간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에 따라 심지어 자결을 결심하고 있는 인물도 있었다. 광무진인의 대응은 실로 감탄할만한 것이었다. "무량수불... 여러분께서는 왜 의심하시는 것이오? 본인은 무당의 장문인이자 중원대정검회의 맹주요. 고작 본파에서 파문된 자의 말 한 마디에 핍박을 하려 하다니, 정녕 불쾌하기 짝이 없소이다. 누대에 걸쳐 본파에는 위대한 무학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거니와, 본인이 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마교의 극사한 무공을 익힌단 말이오?" 육파 장문인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광무진인의 말은 지극히 타당한 데다가 무당의 장문인으로써 가질 수 있는 일말의 자부심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의혹이란 일단 일기 시작하면 좀체로 거두어 들이기 힘든 법이다. 아니 뗀 굴뚝에서 어찌 연기가 나겠는가? 그들은 나름대로 수긍은 하면서도 여전히 찜찜한 얼굴이었다. 이 때, 녹존성군의 차가운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광무진인은 들으시오. 본 궁주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삼성림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왔소. 안되었지만 짚고 넘어갈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소." 그의 음성에는 태산같은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알다시피 마교는 중원무림의 천적(天敵)이오. 그런만큼 이번 일은 절대로 어물어물 지나칠 성격이 아니오. 본 궁주는 지금부터 진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겠소. 성의껏 대답해 주기를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녹존성군의 냉혹비정해 뵈는 얼굴에는 금새 살기가 떠올랐다. 그가 손을 슬쩍 쳐들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칠인의 녹의검수가 즉시 검을 뽑아 들었다. 챙--! 그 기세에 광무진인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곧 눈쌀을 잔뜩 찌푸리며 응수했다. "설마 궁주께서는 삼성림의 세력으로 빈도와 칠파를 위협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는 실로 교묘한 안배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삼성림과 중원 칠대문파 간의 미묘한 갈등까지 끌어 들여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난감해진 것은 육파의 장문인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광무진인이 무당의 세력을 등에 업고 버티는 한, 이렇게 되면 그들은 좋건 싫건 그의 입장을 두둔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녹존성군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삼성림의 구대성군 중 한 명이며 녹림 전체를 휘하에 두고 주물러 오던 그다. 특히 악인(惡人)들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그는 즉시 광무진인의 저의를 눈치채고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웠다. "호오! 진인은 지금 무슨 말을...? 삼성림과 칠대문파는 오랫동안 무림 평화라는 한 가지 논제 아래 같은 길을 걸어 왔소. 상호견제 또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어찌 위협이라는 상식 밖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오?" 그의 눈에서 섬뜩한 한광이 흘러 나왔다.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은 오히려 의심을 더 하게 하는 법, 거리끼는 점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거요." 광무진인의 안면 근육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이 또한 녹존성군의 예리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 궁주가 묻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오. 아마도 삼가의 가주들이 대신해 줄 것이외다." 녹존성군은 화살을 삼대신가의 가주들에게로 돌렸다. 그 말이 떨어지자 중인들의 눈길은 일제히 삼가의 가주들에게로 쏠렸다. 황룡사가보의 보주인 사운악은 녹존성군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즉각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인질을 찾으러 왔소이다. 장문인께서는 바로 그것에 대해 답변해 주셔야겠소이다." 육파의 장문인들은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일변했다. 원광선사가 그답지 않게 조급한 투로 물었다. "아미타불! 인질이라니, 그건 또 무슨 흉측한 말이오? 노납으로서는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외다." 사운악은 탄식을 발했으나 그렇다고 망설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로서도 이는 필생의 관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가의 가주들은 이 곳에서 천년마등주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소이다. 악가보의 보주인 악형(岳兄)은 이미 희생되었고......."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육파의 장문인들은 저마다 경악과 회의에 찬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들 앞에서 사운악은 지금까지의 경위를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얘기했다. 이제 와서 감추느니 차라리 장내의 모든 인물들에게 전부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자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의 긴 얘기가 끝나자 육파의 지존들은 모두 광무진인을 응시했다. 역시 명확한 해명을 촉구하는 눈길들이었다. 광무진인이 이에 응할 리가 없었다. "무량수불... 빈도는 전혀 모르는 일이오. 청정한 무당산역을 지키면서 어찌 그 따위 마교의 봉공과 어울린단 말이오?" 그가 이렇게 나오니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사이, 충격적인 말을 던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던 광해진인이 눈을 떴다. 그는 광무진인을 향해 다시 노성을 발했다. "광무! 천하인의 이목을 다 속여도 나만은 속이지 못한다. 방금 전 네가 펼친 무공은 분명 마교의 혈령장이었다. 대체 네 놈은 마교와 어떤 사이냐?" 혈령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지난 날 마교대전에서 중원무림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공포의 극사마공이다. 따라서 광무진인이 혈령장을 사용했다는 사실만 입증되면 모든 상황이 하나로 귀일된다. 하지만 광해진인의 주장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순간적인 현상까지는 직접적으로 싸웠던 그 자신 외에 누구도 미처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광무진인은 증거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잇점을 이용해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나왔다. "허허...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진일문은 내심 울화가 치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광무진인에게 고문이라도 가해 정직하게 실토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과거 불회곡에서 그의 혈령장을 몸소 구경한 바도 있지 않은가? '몇 년 전에, 그것도 혼자 목도한 일을 증거랍시고 내놓아봐야 당사자가 잡아떼면 웃음거리 밖에는 안된다.' 진일문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짓깨물고 있을 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한 가닥 전음이 스며 들어왔다. "여보게, 저 놈의 가면을 벗기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네.자네가 좀 도와 주겠나?" 그것은 광해진인의 음성이었다. 진일문이 이를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불초가 신호를 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심전심이랄까? 진일문이 광해진인의 의도를 알아 차렸듯 광해진인도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즉각 눈치 채고는 눈짓으로 수긍의 뜻을 전했다. 진일문. 그는 동조자를 구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뜻밖에도 녹존성군이었다. 그로서는 사감(私感)이란 차후의 문제였다. 상황을 정황히 읽고 있으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현재로서는 녹존성군이었던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녹존성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녹존성군도 처음에는 거부감을 보였으나 이내 응해왔다. 그 또한 명성에 걸맞게 그릇이 큰 인물로써 최소한 사태의 심각성 앞에서 사감을 논할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녹존성군의 입가에 한 가닥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세 사람의 의견일치를 뜻하는 것이었다. 진일문이 먼저 팔선탁으로 다가갔다. "장문인들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이제껏 잠잠해 있던 그가 입을 열자 육파의 장문인들은 모두 그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광무! 그만 가면을 벗어라." 웅후한 외침이 울리더니 광해진인의 쌍장이 광무진인에게 섬광처럼 덮쳐갔다. "아미타불!"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육파의 장문인들이 경악성을 발하며 일제히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촌보도 전진할 수가 없었다. 진일문이 쌍장을 나누어 뻗으며 그들 여섯 명을 가로막았다. 우우웅! 파파팟--! 연속적으로 휘둘러지는 진일문의 공세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 앞이 현란할 지경이었다. 그는 우장으로는 무당의 소천성장법(小天星掌法)을, 좌장으로는 천운폐월(天雲閉月)이라는 일반의 초식을 시전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법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구사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더구나 천운폐월이라는 평범한 초식까지도 그의 손에서 발출되자 우장의 소천성장법에 못지 않은 위력을 떨쳐내고 있었다. 아니, 그 두 가지의 무공은 상호 헛점과 공백을 교묘하게 보완하고 있어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무위를 발휘해냈다. 원광선사와 화산(華山)의 장문인인 비여청(飛如靑)은 안색이 일변했으나 동시에 그의 공세를 막고 나섰다. 그것은 정녕 고수다운 면모로써 본능적인 대응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을 제외한 네 사람은 또 다른 강적(强敵)을 맞이해야 했다. 그는 다름 아닌 녹존성군이었다. 위이이잉--! 그의 칠권십이지(七拳十二指)가 눈깜짝할 사이에 네 장문인을 향해 격출되고 있었다. 내내 설전으로 일관해오던 장내는 삽시에 격전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장영과 권풍, 지력 등이 뒤엉켜 난무하는 일대 혼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휘류류륭--! 콰쾅--! 연이은 괴음향과 폭음이 보전을 온통 뒤흔들었다. 팔선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희대의 접전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무림의 초일류 고수들의 접전인지라 여타의 공방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르르릉! 우르르르....... 급기야 사방의 석벽이 흔들리고 지반이 진동을 일으키며 은은한 굉음을 울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쌍방간에 지닌 바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살기를 억누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물론 그 두 사람이란 광해진인과 광무진인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일대일 결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 엎치락 뒷치락 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광해진인. 그는 초장부터 사정없이 살수만을 펼쳐냈다. 이 일전을 통해 어떻게든 상대방을 유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광무진인은 불의의 기습을 당한 형국이라 연신 뒤로 물리며 방어하기에도 급급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쩌엉! 위이이잉--! 오, 륙초수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필생의 공력을 쏟아 부은 광해진인의 공세는 더욱 그 위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펑--! 굉음이 울리더니 가슴에 정통으로 일장을 격타 당한 광무진인은 뒤로 주르를 밀려났다. 그의 입에서는 선혈이 꾸역꾸역 토해져 나왔다. "광무! 내 무당의 율법보다 먼저 네 놈을 심판하겠다." 승기를 잡은 광해진인은 조금도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재차 극음지기를 뿌려냈다. 쩡--! 그것은 광무진인으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그 찰나, 그의 눈에서 차가운 살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단전으로부터 좌수를 끌어 올리더니 일직선으로 뻗어냈다. 그의 동작은 섬전보다도 빨랐다. 그의 장심에서 시뻘건 혈류가 형성되어 광해진인의 장력을 뚫고 나간 것은 실로 탄지지간의 일이었다. "저것이다!" 광해진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의 장력에 틈이 생겨 가슴으로 혈류가 밀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크게 외쳤다. 아울러 혼신의 힘을 다해 그것을 막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흡!" 짧은 비명이 광해진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피화살을 뿜으며 마치 실 끊어진 연인양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혈령장! 역시 그대는......." 분노에 찬 녹존성군의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혼전은 일시에 중단되었다. 명분상 광무진인을 비호하려던 육파의 장문인들이 일제히 손을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것은 결국 사실이었구려." 원광선사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그를 위시하여 육파 장문인들의 얼굴에는 처절한 통한과 배신감이 짙게 드리워졌다. "오오! 이런 변고가 있나?" "그럼 이제까지 우리들은 모두 꼭두각시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들에 반해 광무진인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는 오히려 변명을 하려 들 때보다 더 태연자약이었다. "후후후... 본좌의 실체를 들키긴 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소. 귀하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소." 그는 다소 지친 얼굴로 보좌에 가 앉았다. 원광선사가 그답지 않게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미타불.... 도장이 무당의 장문인인 것은 맞소이까?" 광무진인은 피식 실소했다. "후후... 어리석긴! 두 개의 신분을 가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 할 수 있지." "어찌 그럴 수가! 그럼 검맹의 맹세도 부질없는 공언이었단 말인가?" 분노하여 나선 자는 화산의 장문인인 비여청이었다. 광무진인은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걸 몰라서 묻소? 물론 안다해도 귀하들은 내 명에 따르게 되어 있소. 중원 칠대문파의 보전(寶典)들이 맹세와 더불어 이 맹주에게 바쳐졌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외다." "도장......." 원광선사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것은 육파의 장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아득한 절망이 어리고 있었다. "아! 맹세를 위해 내놓았던 장문의 영부와 비급들이 이런 식으로 악용(惡用)이 될 줄이야......." "힘이 미약해 뭉치고자 하였더니 이런 결과가... 크흑!" 광무진인은 비통해하는 그들에게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염려하지 마시오. 우리들은 곧 하나로 결속되어 천하를 장악하는데 앞장서게 될 것이오. 흑백도의 구별이 대체 무슨 소용이오? 이제껏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던 칠대문파는 곧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오이다." "우우우--!" 중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말인즉 칠대문파를 모두 마교로 귀속시키겠다는 뜻이 아닌가? 육파의 장문인들은 그의 흉계에 꼼짝없이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광무진인의 말은 계속 되었다. "후후후... 본교를 마교라 칭한 것은 시대적 오류에서 빚어진 현상일 뿐이오. 항차 본교는 일월맹(日月盟)이라는 이름으로써 무림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환우일통에 앞장서게 될 것이오. 본파는 가장 먼저 일월맹에 가입하여 그 선봉을 담당하기로 정한 바 있소. 나머지 육파도 이에 순순히 응할 것으로 믿소." 그는 시선을 녹존성군과 삼가 가주들에게 돌렸다. "무릇 시운(時運)을 아는 자만이 영웅이라 했소이다. 여러분들께서도 본맹에 드신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요." 삼가의 가주들은 상황이 묘한 국면으로 흐르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직 인질이 잡혀 있는 상태라 뭐라고도 말할 수 없었으나 애초에 작정한 것처럼 싸우다 죽느니만 못했던 것이다. '육대문파까지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리다니.......' 이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실상 장문영부를 내맡긴 것이나 적자를 인질로 잡힌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편. 녹존성군은 눈에서 냉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광무진인을 쳐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애써 이를 눌러 참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상황 또한 하나의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일 여러분들이 끝까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면......." 광무진인은 보좌의 손잡이에 달린 여러 개의 구슬을 어루만지며 조소가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후후... 여러분은 지금 용담호혈에 와 있소이다. 본좌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러분의 생사는 이 손가락 하나에 달려 있소." 그 말에 진일문은 흠칫했다. '저 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의 눈에 보좌에 달려 있는 구슬들이 들어왔다. 그것들은 모두 색깔이 틀렸고 크기도 다양했다. 그는 그 구슬이 무엇에 쓰이는지 대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저 구슬들은 기관을 움직이는 장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 자에게 생명을 저당 잡히고 있는 셈이다.' 진일문은 시선을 돌려 육선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관장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그녀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진일문은 내심 탄성을 발했다. '아! 누님이.......' 뜻밖에도 그는 육선고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바닥에 이렇게 쓰고 있었다. '좌측 손잡이 세 번째 구슬을 눌러야 해요.' 육선고가 언제 정신이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지금도 단지 손가락 하나를 은밀히 움직여 보인 것이다. '고맙소, 누님.' 그것은 진일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시한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광무진인이 보좌에 버티고 앉아 있으니 무슨 수로 그를 밀어내고 세 번째 구슬을 누른단 말인가? 진일문은 고심막측인 가운데 곧 한 가지 방도를 떠올렸다. 그는 마음이 정해지자 천천히 팔선탁으로 접근해 갔다. "소생, 도장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광무진인이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하시오." "도장께서 일월맹과 뜻을 같이 하고자 하신다면 천의회(天意會)에 대해 무척 듣고 싶어 하시리라 여겨지오만......." 그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과연 천의회라는 말이 나오자 광무진인은 안색이 일변했다. 그것은 장내의 중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녹존성군은 눈에서 한 가닥 차가운 빛을 뿜었다. 광무진인은 진일문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소협은 천의회 사람이오?" 진일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소이다." "그게 무슨 뜻이오?" "불초의 말은 천의회와 관계는 있으되 소속은 아니라는 뜻이오. 또 천의회에 대해 아는 것이 적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오. 만일 도장께서 흥미가 있으시다면 그 건을 놓고 기꺼이 협상을 할 수도 있소." 광무진인은 경직된 안면을 풀었다. "그래, 어떤 면에서 협상을 하자는 것이오?" "혹 도장께서는 천의회의 회주인 왕중헌이란 분을 아시는지 모르겠구려? 그 분은 소생의 글선생이었소이다." 녹존성군의 싸늘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너의 글선생만은 아닐 것이다. 이쯤 되었으면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 더 효과적일텐데?" 진일문은 무감동하게 답했다. "뭐라 해도 좋소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소생의 안위일 뿐이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소이다." "졸렬한!" 녹존성군은 만면에 경멸의 기색을 드러냈다. 이는 역으로 해석하면 진일문을 도와주는 격이었다. 그는 미소를 띄우며 광무진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보시다시피 불초는 아직 젊소이다. 삼성림의 사람도 아니며 천의회와도 생사를 같이할 만큼 절박한 사이는 아니오. 일월맹과 수평의 관계라면 협상을 못할 이유가 없소이다." "놈!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녹존성군은 급기야 호통을 치기에 이르렀다. 워낙 성격이 맹렬한 그이기도 했지만 방금 전 잠시나마 진일문과 뜻을 합쳤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녹의검수의 검을 빼앗듯 낚아채더니 진일문을 향해 공격해 갔다. 파파팟--! 여섯 줄기의 막강한 검기가 전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진일문은 곧바로 칠금신법을 펼쳐 교묘하게 검막을 벗어났다. 그는 허공을 향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과연 삼성림의 구대성군답소이다. 그러나 그 솜씨로 소생을 위협을 할 생각은 마시오." 그는 이어 태극십삼세를 펼쳐 검날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쨍--! 검은 그대로 반동강이 되어 날아갔다. 그런데 부러진 검날은 놀랍게도 방향을 틀더니 광무진인을 향해 날아갔다. "엇!" 광무진인은 느닷없는 기습에 경악성을 발했다. 동시에 그는 의자의 손잡이에 내려놓았던 손을 번쩍 들어 이를 막았다. 땅! 검날이 그의 수도에 부딪쳐 날아가는 찰나, 진일문은 육안으로는 분간할 수조차도 없는 쾌속무비한 신법으로 팔선탁을 뛰어 넘어 그의 턱 밑 천돌혈(天突穴)을 걷어찼다. "헉!" 광무진인은 다급한 나머지 헛바람을 들이 마셨다. 막 검날을 날려 버린 참이라 자세도 불안정했고 진기도 제대로 이어지지 상태였던 것이다. 연이은 급공에 그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그의 신형은 의자 손잡이에 있는 구슬들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몸을 틀게 되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진일문은 원앙쌍비각이라는 각법을 구사해 연달아 십팔각의 발길질을 날렸다. 광무진인에게는 그야말로 숨돌릴 여유도 없었다. 워낙 근접한 거리였기 때문에 아차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국이었다. 그 자신도 진일문의 신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즉시 쌍장을 어지럽게 교차시키며 진일문의 발길질을 막아냈다. 진일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황한 중에도 광무진인의 대응은 완벽했던 것이다. '과연!' 하지만 생각은 잠깐이었다. 진일문은 그 틈을 노려 의자 손잡이에 달려 있는 구슬을 힘껏 밟았다. 그것은 육선고의 말대로 여러 개 중에서 세 번째 구슬이었다. 쾅! 콰쾅--! 갑자기 시야가 칠흑같이 캄캄해지더니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진일문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몸이 어딘가로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호신기공을 일으켰다. 41장 환희흡정대법(歡喜吸精大法) 진일문. 그는 깜빡 정신을 잃었다가 막 깨어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물컹하고 따뜻한 감촉이 몸에 닿아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사람의 동체......?' 그는 내심 실수했다 싶어 얼른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아래 깔린 물체를 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뭔가 매끄럽고 동그란 것이 그의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왔다. "으응......." 귓전에는 또한 여인의 음성이 부딪쳐 왔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일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가 잡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인의 젖가슴이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일어서고자 몸의 중심을 잡아갔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는 손 안에 들어와 있는 물체(?)에 힘을 가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아야!" 여인의 뾰족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런!' 진일문은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그 물체로부터 손을 떼냈다. 그 바람에 그는 더 큰 사고(?)를 치게 되었다. 중심을 잃자 그만 그 물체 위에 엎어져 버린 것이었다. 여인 특유의 육향이 코에 확 끼얹어 왔다. 왜 안그렇겠는가? 방금 전에 잡았던 여인의 유방에 아예 코를 박고 말았으니. 매끈한 동체의 느낌까지도 그의 몸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맙소사!' 진일문은 얼굴을 들며 그제서야 겨우 손으로 여인의 몸이 아닌, 바닥을 짚을 수가 있었다. 그는 어찌 하여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졸지에 웬 여인과 위아래로 겹쳐져 누워 있게 되고 보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여인이 몸을 꿈틀 하더니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세차게 감아왔다. 진일문은 질겁을 하여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대답이 없었다. 여인은 다만 몸을 더욱 바짝 밀착시켜 오며 달뜬 신음을 발할 따름이었다. "으으응......." 진일문은 기가 막혀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와중에도 여체는 마구 요동치며 노골적으로 욕구를 알려왔다. 그 바람에 비단결 같은 피부가 계속 그와 마찰을 이루었다. 그러나 진일문으로서는 이로 인해 정염이 일키는커녕 오히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동물이 아닌 이상 이런 상황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진기를 한 모금 들이 마시고는 여인을 세차게 뿌리쳤다. "아악!" 여인은 저만치 날아가 벽에 부딪치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일문은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 보았다. "이럴 수가!"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장방형의 석실로써 희미한 유등이 걸려 있어 침침하나마 그 안의 정경을 볼 수가 있었다. 어차피 안력이란 통하지 않는 곳이므로 그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석실 안의 풍경은 도저히 눈뜨고는 봐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사오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벌이는 행위란 가히 황음(荒淫)의 극치였다. 그들은 바야흐로 서역(西域)의 환희밀교(歡喜密敎) 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음탕한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남녀가 벌거숭이가 되어 뒤엉킨 채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전라의 남녀들은 방금 전의 사태는 의식하지도 못하는 듯 오직 상대의 육체를 탐하는 데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덕분에 석실 안은 온통 그들이 발하는 기성과 신음, 그리고 그들의 나신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진일문은 굳어진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찌 인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아무리 밀폐된 공간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구나.' 기억을 더듬자 그는 육선고의 손가락이 지시한대로 세번 째의 구슬을 누른 부분까지가 생각이 났다. 짐작컨대 그는 아마도 그 직후에 이 곳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은 기관지학으로 필생의 승부를 내려 했던 만큼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런 안배는 결코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역시 이 곳에도 마교의 입김이 닿은 것인가?' 진일문이 이런 생각으로 전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상체를 감아오는 손이 있었다. 그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또 다른 여인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일문은 역감으로 인해 눈쌀을 찌푸렸다. 동시에 그의 손은 뒤로 돌아가 여인의 옆구리에 무정한 일격을 가했다. 퍽! "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에게 덤벼들던 여인은 뒤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진일문은 은은한 분노에 휘말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흠칫 놀라고 말았다. 여인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있는 벽안(碧眼)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옆구리에서는 피를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경황 중에도 그녀의 눈은 야릇한 열기를 담은 채 진일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으로 인한 몸짓이 아니라 그에게 뭔가 요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쯧! 어쨌든 지혈을 시켜 주어야겠지.' 진일문은 여인을 향해 움직이다 문득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혼란이 밀려왔다. 누워 있는 요녀(妖女)가 선정적으로 느껴진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다. '아! 이런 현상은.......' 그는 대경하여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선은 벽에 걸려 있던 유등에 고정되었다. '저것이 주범(主犯)이다!' 유등에서는 파르스름한 청연(靑煙)이 가느다랗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미향(迷香)으로써 바로 그것 때문에 석실 안의 사람들이 신지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나까지도 당할 뻔했군.' 진일문은 즉시 호흡을 멈추고는 진기를 일주천해 정신을 맑게 가다듬었다. 그런 연후에야 그는 여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종의 착란 상태에 빠져 있는 여인은 그에게 어떤 동요도 일으키지 못했다. 물론 역감도 더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이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고 혈도를 점해 버린 것은 거의 동시에 있은 일이었다. 진일문은 신색을 수습한 뒤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 동안에도 광란하는 남녀의 몸부림은 계속해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거듭해서 보게 되자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음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같이 공통된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개중 남자들은 대부분 해골처럼 말라 뼈하고 가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여인들은 모두 피부가 기름지고 풍요로와 보였으며 얼굴에는 윤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진일문은 이를 두고 별 어려움 없이 추리해 나갈 수 있었다. '마교는 본시 서역의 환희밀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들 비전의 대법 중에는 채양보음(採陽保陰)도 빼놓을 수 없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저 유등이 타오르고 있는 한 이 황음의 지옥도도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는 유등을 향해 소리없이 지풍을 날렸다. 스슷--! 비취검(翡翠劍)에 박힌 구슬이 여전히 어둠을 물리치는데 일조했다. 유등에서 발산되던 미약의 기운이 중지되자 뒤엉켜 있던 남녀들은 서로 떨어지거나 껴안은 채 혼수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이것밖에는 그대들을 도울 방법이 없구려.' 진일문은 그들에게 일별을 고하고는 구슬의 여명을 빌어 주위를 살폈다. 검자루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이 그의 마음을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윽고 석실을 나서려던 진일문은 무의식 중에 천정을 올려다 보게 되었다. 그 곳에는 하나의 구멍이 뚫려져 있었다. 그는 짐작되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내가 저 곳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모양이구나.' 천정은 언뜻 보기에도 꽤 높았다. '쯧! 그래서 정신을 잃었던 게로군.' 그는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상황은 그다지 호전적이지만은 않았다. 전면에는 흙과 바위로 된 동굴이 이어져 있었는데, 네 개로 나뉘어 있어 선뜻 진로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육선고의 존재가 새삼 간절해졌다. '육누님이 곁에 있었다면 고심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깐이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스스로를 향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후후... 육누님의 생사도 알지 못하는 판국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래서 인간은 저마다 이기적이라는 것인가?' 진일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강 서쪽이라 추정되는 길로 진입해 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끌리는 대로 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동부는 구조는 갈수록 복잡해졌다.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지로(支路)가 나타나더니 그 중 한 길로 접어들자 또 갈림길이었다. 이러기를 수 차례. 진일문은 길이 갈라질 때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그가 줄곧 느낀 것은 안으로 깊이 접어들수록 동부 자체가 점차 위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긴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 식경이 지나도록 진일문에게는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의혹을 느꼈다. '정녕 뜻밖이다. 혹 이 곳을 지나치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해이해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 했으나 최소한 경각심을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전과 다름없는 마음 자세로 계속 걸음을 떼어놓았다. 다시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나타나고, 그의 신현이 막 오른쪽으로 돌았을 때였다. 느닷없이 한 가닥 음풍이 그의 면전으로 밀려 왔다. 쉬익--! '과연!' 진일문은 즉각적으로 우수를 들어 막았다. 팍! "음!" 격타음과 더불어 가느다란 신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암습하려던 자가 되려 그에게 역습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이번에는 왼쪽으로부터 예리한 검풍이 진일문을 덮쳐 왔다. "웃!" 그는 급히 자세를 낮추었으나 어깻죽지가 화끈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적중 당하지는 않았지만 검날이 가볍게 스쳤던 것이다. 상대방의 검이 다시 예리한 검명을 전해왔다. 쉬익--! 진일문은 수중의 비취검을 들어 검세를 봉쇄했다. 쨍--! 검과 검이 부딪치자 요란한 금속성이 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취검은 상대의 검을 그대로 잘라 버리고 말았다. '좋아!' 진일문은 여세를 몰아 즉시 상대를 향해 일검을 날렸다. "카악!" 듣기 거북한 비명과 함께 뜨거운 피가 그의 얼굴로 확 뿜어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한편 소매를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의외로 무력하게 이끌려 왔다. 시커먼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진일문은 재빨리 손가락을 튕겨 혈도를 점했다. 동시에 그의 손은 기우뚱하고 쓰러지려는 상대방을 얼른 낚아챘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진일문은 아연실색했다. '여인!' 그에게 무서운 공격을 가해온 자는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며, 치렁치렁한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한 쪽 어깻죽지가 잘려 나가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쯧! 한낱 여인인 줄도 모르고.......' 진일문은 쓴 입맛을 다시며 비취검의 빛을 이용해 주변을 살려 보았다. 그랬더니 한 쪽의 구석에도 또 다른 나체의 여인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벽에 기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맨 처음 그의 일장을 맞고 격퇴 당한 여인인 듯 했다. 진일문은 두 여인의 눈빛을 접하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이 여인들도 아까 그 석실에서 보았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지가 바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 곳에서 이미 대법을 성취하고 나왔을 공산이 크다.' 그는 여인들이 발휘했던 무위가 보통의 수준이 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터였다. 아무리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해도 그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자는 결코 흔치 않다. '대체 이 동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있을까?' 그의 심중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정녕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나약한 여인들까지 동원해 살인도구로 이용하다니.......' 진일문은 마교의 비인도적이고 잔혹한 행각에 실로 치가 떨렸다. 아울러 그는 두 여인이 자신의 손에 의해 회생불능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다시 전진을 시도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들 말고도 마녀(魔女)로 화한 여인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진일문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많은 마녀들과 마주쳤고, 본의 아니게 그녀들과 처절한 혈전을 벌여야 했다. 모두 가공할 내공을 소유하고 있어 인정을 두었다가는 그 자신이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될 지경이었으므로. 파파팍--! 창! 차앙--! "카아아악--!" 진일문의 비취검이 허공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마녀들은 속속 검이나 수족(手足)을 잃었다. '여인들이여!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말기를.......' 그는 심중으로 연신 부르짖고 있었다. 마녀로 화하기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인성(人性)을 지니고 있었을 그녀들을 향해....... 잠시 후. 사위가 조용해지자 진일문은 검세를 멈추었다. 그의 눈에 장장 수십명에 달하는 나녀(裸女)들의 시체가 들어왔다. 그는 그녀들의 명복을 비는 대신 이렇게 다짐했다. '내 그대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마교를 궤멸시키고 말겠소.'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바로 수라동(修羅洞)에 해당되었다. 과거 무당파의 연공석부가 있던 곳을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이 죽음의 함정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통팔달의 미로를 만들고 각종의 기관장치를 설치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관은 진일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육선고가 모두 파괴해 버렸고, 마교의 안배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일문이 상대해야 하는 적(敵)은 그로 하여금 마교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필사의 투지를 갖도록 했다. 마교, 즉 일월맹은 실제로 그가 짐작한 것 이상으로 천축의 환희밀교와 깊은 연대를 맺고 있었다. 환희밀교에서는 일월맹을 위해 소위 팔대법왕(八大法王)을 중원에 파견하기도 했다. 바로 그들이 중원을 비롯한 각처의 여인들을 납치해 이 곳에 가둔 뒤, 그들 나름의 사이한 대법을 펼쳤던 것이다. 그 대법을 통해 무림 고수들의 정기를 흡취한 여인들은 평범에서 일약 절정의 고수로 변한다. 그것이 이름하여 환희흡정대법(歡喜吸精大法), 신지를 상실한 마(摩)의 괴뢰들은 이렇게하여 탄생되었다. 진일문은 하나의 석문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 이유는 석문에 새겨진 해괴한 그림 때문이었다. 마치 살아있는듯 정교한 춘화도(春畵圖). 성적인 교접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해 놓은 것도 그렇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체위, 심지어는 짐승과 인간이 뒤엉켜 있는 그림까지도 있어 그를 더없이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것들은 환희밀교에서라면 전혀 문제시 되지 않았다. 그들은 교리상 성(性)의 신을 앙복하고 있는가 하면 완전한 해탈까지도 성의 추구에 두고 있으니까. 유학(儒學)에 근간을 두고 있는 중원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사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감히 이적(異敵)들을 끌어들여 중원을 더럽히다니.......' 진일문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석문을 향해 쌍수를 뻗었다. 그러자 그의 장심에서 푸른 기운이 일어나 곧바로 그의 손을 청동빛으로 물들였다. "천강일기(天剛一氣)!" 짧은 외침과 함께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쏘아져 나갔다. 쩡--! 굉음이 일더니 석문은 정확히 두 쪽으로 양단되고 말았다. 그 위력에는 오히려 진일문 자신이 놀랄 지경이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잠시 신기한 듯 스스로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진일문이 떨쳐낸 무공은 천강일기공(天剛一氣功), 일명 천강수(天剛手)라 불리우는 절학이었다. 그것은 비취암의 절정사태를 통해 습득하게 된 무공으로써 만만신공(卍卍神功)이 십성 이상에 이르러야 비로소 시전해낼 수 있었다. 물론 당시의 절정사태는 천강수를 펼치기는 했으되 단지 필요에 의해서였지, 그에게 가르쳐 주는 친절을 베푼 적은 없었다. 그것은 진일문이 만박해초결을 익힌 이후 스스로 체득하게 되었다. 지금 그에게는 천하의 어떤 무학이라도 그 기본만 알면 언제라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막상 천강일기공을 펼쳐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 성과에 대해 저윽이 만족했다. 만일 절정사태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놀라서 까무러치고 말리라. 진일문이 펼쳐낸 천강일기공은 이미 절정사태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석문을 지나치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매달았다. 그가 보기에도 석문의 두께는 자그마치 한 자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석문의 안쪽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잘 다듬어진 석부(石府)였다. 우선 사위가 밝았으며, 인공이 가해진 통로는 어찌나 매끄럽고 반듯한지 벽과 바닥에 얼굴이 다 비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한참을 들어가도록 만나지는 사람이 없자 진일문은 다소 괴이한 느낌이 들었다. '후후... 워낙 말끔한 곳이라서 그런가?' 이윽고 한 칸의 석실에 들어선 순간, 그런 느낌은 일소 되었다. 진일문은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그 석실에는 괴이한 신상(神像)들이 기막힌 광경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것이 주는 충격이란 어떤 느낌과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위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갖가지 신상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상인 괴물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표면이 반들반들했으며 전체적으로 우유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신상 자체라기 보다는 그들이 두 다리 사이에 매달고 있는 물건(?)이었다. 성기(性器) 쯤으로 보이는 그것은 일단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개중 작다는 것이 한 자 정도, 크다면 무려 일장이 넘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특히 코끼리 형상의 신상은 족히 일장은 됨직한 성기를 하늘로 뻗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부복한 자세의 여인상이 놓여 있기도 했다. '으음, 이것들은 아마도 어떤 종교적 상징성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 같구나.' 진일문은 일면 이해가 가는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은근히 분노가 치미는 것은 이런 신상들을 천축이 아닌, 중원 땅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신상들은 모두가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어 흡사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오래 들여다 보며 신봉하다 보면 영적인 교류도 능히 가능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것은 무엇보다 여인상이었다. 그것은 신상에 복종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 줌으로써 흡사 그와 똑같은 사고를 종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일문은 눈쌀을 잔뜩 지푸린 채 여인상을 노려 보았다. '저 상이 표현하는 것은 결국 색(色)의 지배에 놓이고자 희구하는 인간형이다. 무릇 인간을 지배할 것은 선(善)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즉 도덕일진대.......' 여인상이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벌거벗은 채 나뭇잎 같은 것으로 간신히 중요 부위만을 가리고 있는 모습도 역시 진일문의 상식을 넘어선 것이었다. 게다가 젖가슴은 너무도 커 바닥에 닿을 정도였으며, 하복부로 이어지는 곡선의 부위에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즐겨 암송하는 법경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취하고 있는 자세란 실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두 손으로 코끼리상의 거대한 양물을 소중하게 받쳐 들고 있었는데, 여인의 얼굴에는 타는 듯한 갈망과 더불어 무한한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아무튼 신상의 숫자는 줄잡아도 백여 개는 될 듯했다. 세어 보면 도합 백팔 개라는 것을 알 수 있겠으나 진일문은 굳이 그 숫자를 세어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심히 불쾌했을 뿐더러 그것들을 부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굳어져 있던 진일문의 안색이 스르르 풀렸다. '피곤하군.' 그는 전신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 피로감은 매우 기분 좋은 것이었다. 마치 할 일을 다 마친 뒤에 오는 당연한 현상인양. 아울러 그의 마음 속에 조용히 깃드는 것은 뭐라 형용키 어려운 그리움이나 감동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 품에 안기라고.......' 다음 순간, 그는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다지 개의할 것은 못되었다. 그것은 곁에서 부축해 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그는 낮은 신음과 더불어 그 대상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하나의 섬섬옥수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따뜻했다. 그리고 방금 안 것이지만 그 얼굴은 기이하게도 그의 모친과 닮아 있었다. "어머님......." 그는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가슴은 의외로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저 손 안에 들어 오자 알맞게 잡혔다. 그 느낌이란 얼마나 포근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는 두 알의 유실이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의 원천이었다. 그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그래야만 원하는 것이 허용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여인은 한 줌 밖에 안되는 가느다란 허리에 손가락 굵기의 금줄을 걸치고 있었다. 황금으로 된 듯한 그 사슬은 그녀의 허리춤을 한 바퀴 돌아 두 갈래로 내려 와서는, 다시 배꼽을 지나 윤기 도는 체모 사이로 감추어져 있었다. 진일문을 호기심을 느꼈다. 짖ㄱ게도 그것을 잡아당겨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안돼, 그것은....... 그 음성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인 키득키득 웃더니 금사슬로 그의 허리를 감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포근한 가슴에 밀착시켰다. 그러자 그는 단전 어림에 스멀스멀 더운 기운이 배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매우 이중적인 느낌이었다. 모성과 쾌락을 공유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여인은 안아도 될 듯도 하고, 또 그래서는 안될 듯도 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목이 말랐던 것이 혹 그래서였는가고 그는 생각했다. 여인이 입술을 벌려 그의 입에 무엇인가를 전해 주었다. "으음......." 그래도 그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젓자 여인은 안되었는지 이번에는 그의 입속에 분홍빛이 도는 유실을 밀어 넣어 주었다. '아아! 이것이었구나.' 진일문은 입 안은 물론 목구멍까지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이 뱃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작은 충격을 느꼈다. 흡사 독한 술처럼 일시에 그를 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시지간 몽롱해져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녕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마신 것이야말로 환희밀로액(歡喜蜜露液)이라는 이름을 가진 환희밀교 비전의 액제라는 것을. 그가 가만히 있자 여인의 손이 움직여졌다.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더니 점차 아래로 내려오며 그의 상의를 벗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아니, 석실 안의 신상들이 모두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사실 그 자신만이 알지 못할 뿐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녀상이었다. 예의 신상들이 뿜어내는 가공할 마기(摩氣)로 인해 그녀가 진즉부터 깨어나 있고, 또 상황이 이렇게 돌변해 있다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바야흐로 장내에는 환희밀교의 법전행사(法展行事)가 열리고 있었다. 여인이 진일문을 상대로 환희밀교의 환희흡정대법 중에서도 가장 가공스러운 대법을 시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마치면 그 여인은 사해에 걸쳐 가히 전무후무한 희대의 마녀로 화하게 된다. 이는 환희밀교 내에서도 종교적 사활을 걸고 있는 행법으로써 무작정 치르는 일이 아니었다. 진일문이 들어선 곳은 하필 팔대법왕이 마교와의 연수를 조건으로 축건하게 된 밀교의 법전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녀상이라 본 여인은 일명 환희밀선녀(歡喜密仙女)라 불리우며 이후로 환희밀교의 대제사장역을 맡게 될 거물(?)이었다. 신상들의 배치도 실은 일종의 진세(陣勢)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환희밀교의 밀전에 수록된 그들 최고의 천지혼황만색대진(天地混荒萬色大陣)이었다. 여하한 고수라도 이 진세에 걸리면 꼼짝없이 진기를 갈취 당한 후 백골이 되고 만다. 설사 천하제일의 정력(定力)를 소유한 자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리라. 백팔개의 신상이 엮어내는 괴진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되, 특별한 심마(心魔)를 부르게 되어 있다. 일테면 인간의 내면에서 심약한 부분을 꿰뚫고 거기에 공략을 가한다고나 할까? 그들이 단지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종교라고까지 불리우는 것은 바로 이런 능력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마법에 걸려 들면 나녀상의 유액(乳液)인 환희밀로액을 마시게 되어 있고, 그것은 곧 방사(房事)로 이어진다. 환희밀선녀(歡喜密仙女)는 도합 백인의 내력을 빼앗아 대법을 완성시키게 되어 있었다. 진일문은 그 중 구십다섯 번째로 걸려든 불운한 사례에 속했다. 축축한 입술이 뜨겁게 부딪쳐 왔다. "으음......." 진일문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몽롱하던 그의 정신을 일깨워 준 것은 바로 환희밀선녀의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그윽하고도 청신한 향기였다. 그녀의 타액은 또 얼마나 달콤한지, 그것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도시 어떤 식으로도 항거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여인의 긴 머리칼이 그의 얼굴 위로 늘어져 피부를 간지럽혔다. 여인은 아마도 그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복과 귀속의 중간 형태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안기도, 안기기도 하는 여인에게서는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내다. 그녀의 눈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 무얼 망설이는 거죠? 내가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는데....... 본시 마(魔)가 인간의 심성에 잠식해 들어갈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이 때문인지 모른다. 확실히 그것은 일반의 최음제의 효과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나, 나는......." 마침내 진일문은 더듬거리며 여인을 안았다. 여인의 젖가슴이 그에게 만족할 만한 크기로 보인 것도, 또 여인의 모습이 미추의 개념에서 일탈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안자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너른 대지에 포용된 기분이 이러할까? 이율배반적으로 짓밟고 싶은 충동적인 느낌이 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웬지 심중에 응어리가 뭉쳐져 있는 것 같기도 했거니와, 그녀라는 대지 위를 마음껏 달리고 나면 시원하게 풀릴 것도 같았다. 그는 기꺼이 한 마리의 말이 되고자 했다. 완만한 구릉지대를 마음껏 누비되 목이 마르면 샘물을 찾으면 되었고 기력이 다해 쉬면 그 뿐인 것이다. 그를 부르는 것은 영원한 휴식이었고, 그는 그 지점을 향해 미친듯 달려가고 싶었다. 그의 귓전으로 다시 한 가닥 공명이 전해져왔다. - 어서요! 실컷 달리고 나면 울분이 풀릴 거예요....... 진일문은 안도감을 주는 그 음향에 부스스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운명이라는 놈에게 사로잡혀 마음 놓고 달려본 적도, 쉬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물론 알지 못했다. 아니,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환희밀선녀의 얼굴 위로 법열(法悅)을 기대하는 야릇한 도취감이 깃들고 있는 것을. 그런데 그가 막 용감하게 대지를 무너뜨리고 그 위로 덮치려는 찰나였다. 번쩍하고 한 줄기 섬광(閃光)이 피어 오르더니 흡사 암천을 가르는 뇌전처럼 작렬했다. 파아앗--! 그것은 진일문의 손목에서 뻗어 나와 기대감으로 몸을 떨고 있던 환희밀선녀를 정수리로부터 정확히 두 조각 냈다. "카아아악--! 법전 안에 뒤흔드는 날카로운 비명은 아수라귀의 절규를 연상케 했다. 그녀의 지체는 두개골에서부터 다리 사이까지 양분된 채 피보라를 뿌리며 각각 좌우로 나뉘어 쓰러졌다. 쿵! 쿠웅--! 그러자 법전 안을 휘감고 있던 마세가 일시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한 순간의 반전(反戰)이 환희밀교의 천지혼황만색대진의 진세를 여지없이 파괴해 버린 것이었다. "음!" 진일문은 짧게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정신은 어느새 서릿발처럼 찬 기운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장내를 돌아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녕 천우신조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 다음 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