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검도 1권 검궁인 저 차례 1장 왕옥산(王屋山)의 은사(隱士)들 2장 도망자(逃亡者) 3장 낙화무영(落花無影) 4장 세치 혀(舌)의 여인(女人) 5장 뜻밖의 구원자(救援者) 6장 흔들리는 여심(女心) 7장 피의 갈대숲 8장 불청객(不請客) 9장 광명회(光明會) 책머리에 부쳐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느 숙명론자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운명에 순응하느냐, 또는 그 운명을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승부(勝負)란 무엇일까? 이기고도 지는 경우가 있고, 지고도 이기는 경우도 있다. 인생이란 전장이 바로 그러하다. 흔히 인생을 도박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도박과 같이 단순치가 않은 것이 인생의 여정일 것이다. 때로는 변칙(變則)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윤리나 도덕, 상식에서 일탈한 변칙의 운명은 어떤 파국을 맞을까? 자로 잰 듯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판도(版圖)로 그 구도가 메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명제(命題)를 던지고, 그에 따라 수순을 밟아 보기로 하자. 인생이란 여정에서 낙오(落伍)된 사람, 명단에서 누락되어 아주 잊혀져 버린 사람, 또는 변칙의 판짜기에 생명을 내건 사람들이 무림(武林)이란 무대에서 벌이는 한 편의 숨가쁜 공연에 동참해 보기로 하자. <절검도>는 예상할 수 없는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전체의 구도를 알 수 없는 가운데 구석진 곳으로부터 형상을 더듬어 가다보면 마침내 그 그림을 알게 될 것이다. 다 짜맞춘 퍼즐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전체를 알게 되었다면 필자의 작은 의도 하나는 성공한 셈이라고 본다. 햇살이 밀려드는 자오정에서 검궁인 배상 제1장 · 왕옥산(王屋山)의 은사(隱士)들 ① 오늘도 그는 낙엽을 쓸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낙엽과 함께 한 탓일까? 그는 점점 낙엽의 쓸쓸함을 닮아가는 것만 같다. 오늘도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다만 그의 치렁치렁한 흑발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가끔씩 드러나곤 하던 서늘한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 시월 초 닷새. 강호무림(江湖武林)은 무공을 자신의 생명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곳이다. 또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허리에 찬 한 자루의 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였다. 정통 무림명문임을 자랑하는 구파일방(九派一 )이 무림천하를 군림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강호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또는 사문(師門)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도 검을 갈며 투혼(鬪魂)을 불사르고 있다. 때는 무력(武歷) 육백오십 년. 당금 무림은 양대산맥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첫번째 산맥은 바로 백화성(白花城)이다. 백화성은 지금으로부터 육십 년 전 구파일방이 중심이 되어 사마외도(邪魔外道)를 척결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다. 백화성의 초대 성주는 만세지존협(萬歲至尊俠) 백선결(白仙潔)이었다. 백화성은 백선결이 초대성주를 맡은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세습제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백씨일가를 능가할만한 무림명가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화성이 있는 한 무림은 태평성대를 유지했다. 그것은 구파일방이 백화성의 모태가 된 원인도 있겠지만, 그만큼 백화성의 조직과 힘이 강건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건곤(乾坤)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던가? 밝은 태양의 세계 맞은 편에는 반드시 어두운 그림자의 세계가 있기 마련이다. - 철혈부(鐵血府). 철혈부는 정도무림인 백화성의 결속을 견제하기 위해 사도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세운 패도적인 조직이었다. 철혈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들은 무림을 재패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위인들이었다. 그런 패류의 강호인들이 세운 집단이 바로 철혈부였다. 초대 철혈부주로는 만마태존(萬魔太尊) 초몽양(楚夢陽)이 추대되었다. 그는 당시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이기도 했다. 당금의 철혈부를 이끄는 것은 바로 초몽양의 직계 제자였다. 백화성(白花城)과 철혈부(鐵血府)! 바로 이 두 조직이 당금무림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 호시탐탐 헛점을 노리며 대결전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힘의 균형을 잘못 판단할 경우 패하는 쪽은 영원히 강호무림에서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한 채 지난 육십 년간을 함께 정사쌍벽(正邪雙璧)으로 군림해왔다. 그런 가운데 쌍방은 한 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서로의 동태를 탐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화성과 철혈부는 끊임없이 세작(細作)을 상대편에 침투시켰다.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활동하는 적의 첩자를 색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따지고 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런 싸움이야말로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② 하남성(河南省) 숭현의 서남쪽에는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산맥의 형상은 기괴했다. 마치 거대한 황소가 엎드려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산의 이름을 복우산(伏牛山)이라고 불렀다. 복우산 중턱에 웅대한 성채가 하나 있었다. 얼마나 규모가 큰지 올려다 보려면 고개가 꺾일 정도였다. 이 거대한 성채는 복우산 중턱을 뱀처럼 휘감고 있었다. 게다가 성곽을 이루는 석재(石材)는 유백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햇살을 받으면 눈부신 빛을 발했다. 이곳이야말로 당금 정도무림의 정화(精華)인 백화성(白花城)이었다. 이 백화성의 규모는 황성을 방불케 했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할 뿐더러 개중 큰 전각은 사방 일백 장이 넘는 규모로 축조되어 있었다. 백화성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단순히 위용을 자랑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백화성은 정도무림의 총본영이었다. 따라서 성내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각파의 지부는 물론 중원의 모든 정도 제파(諸派)의 지부들이 상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화성은 거대한 규모와 달리 개방되어 있었다. 정도에 속하는 무림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백화성은 명절이나 정도무림의 행사가 있을 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도인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백화성 내에서도 단 한 곳만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한 채의 검은 누각이었다. 심지어는 백화성주(白花城主)가 기거하는 구룡연(九龍淵)조차 사시사철 공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그곳만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사람들은 그 누각을 흑루(黑樓)라고 불렀다. 흑루는 삼 층으로 백화성 전체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이 흑루를 중심으로 사방 수백 장은 보이지 않는 매복이 천라지망(天羅之網)처럼 깔려 있었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함정과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어 하늘을 나는 새라 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뉘 알겠는가? 만일 누군가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절지(絶地)인 흑루 안에 들어가 본다면 그는 필히 실망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고작 십여 평에 불과한 흑루의 각 층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흑루의 삼 층. 그곳에는 한가운데 커다란 원탁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원탁을 둘러싸고 도합 스물한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흑루에는 그 흔하디 흔한 장식품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정도무림맹의 총본영이라면 그것을 상징할 만한 물건 하나라도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 상례이거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런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스물한 개의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무 개의 의자가 비어 있었다. 단지 하나의 의자, 즉 다른 의자들보다 약간 높게 설계된 하나의 평범해 보이는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 노인은 일신에 검박한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육순(六旬) 가량 되어 보였다. 언뜻 보기에 노인은 매우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기형적(畸形的)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바로 노인의 머리 때문이다. 노인의 머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의 두 배나 되게 컸던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원탁 위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찻잔 속의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는 은은한 다향이 감돌고 있었다. 그 향으로 미루어 보건데 노인이 마셨던 차는 용정차(龍鼎茶)가 분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딸랑......! 문득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에 파문을 일으키며 해맑은 금종(金鐘)이 울렸다. 그러자 노인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어 그는 원탁 앞에 가지런히 설치되어 있는 여러 개의 단추 중에서 하나를 눌렀다. 촤르르르! 기이한 음향과 함께 한 쪽의 벽이 반으로 갈라지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문(門)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누각의 출입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기관을 누르자 전면의 한 부분이 열리면서 그곳이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열린 문 사이로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사나이는 노인을 향해 부복했다. 그는 일신에 청색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찾았느냐?"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에는 긴장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사나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네." 순간 노인의 눈에서 언뜻 기이한 광채가 솟았다가 사라졌다. "자세히 말해라." "그 자는 뜻밖에도 이곳에서 과히 멀지 않은 왕옥산(王屋山) 근처에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왕옥산? 으음, 의외로군!" "그 자는 딸로 보이는 묘령의 소녀와 함께 약초를 캐며 의원(醫員)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대에서는 꽤나 유명한 의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나이의 말이 끝났다. 노인의 눈이 이상한 광채를 흘렸다. "흠! 천하제일의 잠입술사(潛入術士) 은영환무자(隱影幻無子) 독고인(獨孤引)이 산골에서 의원행세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포섭해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앞에 데려와야 한다. 단, 정중히 모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존명!" 사나이는 대답과 함께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직후 사나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촤르르르! 사나이가 사라지자 열렸던 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사나이가 들어왔던 곳은 다시 벽으로 화해 방금 전 그곳이 출입문이었다는 흔적은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노인은 혼자 남게 되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시대가 변하면 영웅도 바뀌는 법이다. 그러나... 어쨌든 독고인, 그대는 아직은 정도무림에서 필요한 인물일세. 내 그대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을 이해하게나." 노인은 의자에 깊숙이 상체를 묻은 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노인이 바로 백화성의 제 이인자인 만박뇌환자(萬博腦幻子) 숙야풍(叔夜風)이었다. 그는 백화성의 총군사(總軍師)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중원 정도문파의 절대적인 신임과 백화성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위인이었다. 물론 만박뇌환자 숙야풍은 정도문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철혈부와의 수십 년에 걸친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국 지금까지 백화성이 철혈부에게 밀리지 않았던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무궁무진한 책략(策略)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두(大頭)를 가진 인간 - 보통 사람보다 거의 두 배나 큰 기형의 머리를 지닌 만박뇌환자 숙야풍이 아니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백화성은 마도인의 발 아래 무릎 꿇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평화(平和) 아닌 평화는 너무 오래 끌었다. 지난 육십여 년 동안의 팽팽한 대치상태는 이제 서서히 균열(龜裂)을 드러내려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한계점(限界點)으로 비등하고 있었다. 결국 백화성의 총군사 숙야풍은 하나의 무서운 대계(大計)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던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전 무림에서 은퇴한 은영환무자 독고인과 관계가 있었다. ③ 왕옥산(王屋山)의 가을은 깊을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붉게 물든 낙엽이 새파란 하늘을 가리며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실로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영령아(玲玲)아! 영령아!" 왕옥산 기슭에 자리한 아담한 모옥(茅屋)으로부터 한 가닥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약간은 목이 쉰 듯한 노인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음성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은은한 힘이 실린 그 목소리는 낮게 산곡을 퍼져 나갔다. 그 목소리가 서너 번의 메아리와 함께 산곡을 울렸을 때였다. 맞은 편 산등성이에서 맑고 청아한 여인의 대답이 들렸다. "예! 아버님......." 이곳은 아주 한적한 곳이었다. 하루종일을 가도 산등성이를 넘는 구름의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사람의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해맑은 여인의 음성은 깊어가는 가을의 적막을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십칠팔 세 쯤 되었을까? 일신에 담황색의 포의(布衣)를 걸친 소녀가 맞은 편 산등성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곧 모옥을 향해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녀는 소롯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귀엽게 생긴 용모와 깨끗한 피부 등으로 미루어볼 때 결코 이런 산 속에 파묻혀 살 소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것아,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대략 오순 가량 되어 보이는 한 명의 마의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를 보고 책망 아닌 책망을 했다. 그런 노인의 얼굴에는 소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평범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는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연륜을 말해주는 듯 만면에 잔잔한 주름살과 검버섯이 몇 개 피어나 있었다. 노인은 애틋한 사랑을 담은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어리광을 부리듯 혀를 쑥 내밀었다. "피이! 정작 말하려고 할 때엔 주무시고 계셨단 말이에요." 노인은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녕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어딜 갔었느냐?" 그 말에 소녀는 우물쭈물했다. "저어... 산나물을 캐러......." 그때였다. 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것은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눈 속에 담긴 미소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노인은 소녀의 엉덩이를 때리는 듯한 시늉과 함께 말했다. "애끼! 이것아. 또 애비를 속이려 들어? 나물캐러 간다면 바구니를 가지고 가야지 어떻게 빈 손으로 다녀올 수 있느냐?" 그 말에 소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노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또 그 녀석 보러 갔지?" "누... 누굴요?" 소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허허! 발뺌하지 마라. 이 애비가 다 알고 있단 말이다." "무... 무슨 말씀이에요?" "허허! 때만 되면 나타나 이 왕옥산의 낙엽이란 낙엽은 죄다 쓸고 다니는 미친 녀석 말이다.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러자 소녀가 갑자기 뾰족하게 외쳤다. "미치기는 누가 미쳐요? 아무리 봐도 멀쩡한 분인데......." 소녀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노인의 얼굴에 더욱 더 미소가 짙어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뺌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가장 상책은 이런 분위기를 한시 바삐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소녀는 얼굴을 홍시처럼 붉히며 토라진 듯 홱 돌아섰다. "저 식사 준비를 해야 해요!" 노인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아서는 소녀의 엉덩이가 제법 실팍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그런 소녀에게서는 이제 여인의 냄새가 물씬 나는 듯 했다. 문득 노인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감돌았다. 노인은 소녀가 사라진 문쪽을 바라보면서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컸군. 허허! 이젠 짝을 지어 줄 때가 된 것 같군." 밤이었다. 왕옥산의 깊어가는 가을밤은 스산하기만 했다. 낙엽을 쓸어가는 밤바람이 모옥 주위를 어지럽게 맴돌았다. 쓰르... 쓰르르르....... 가을도 저물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바람이 잠시 누그러질 때마다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달빛으로 인해 방 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노인은 곱게 잠들어 있는 소녀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운설(雲雪). 그대와 나의 분신이 벌써 이렇게 컸소. 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이 다시 살아나 내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오." 순간 노인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렸다. 노인은 잠든 소녀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 보았다. 소녀는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문득 소녀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감돌았다. 소녀는 잠 속에서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으음......." 소녀는 곧이어 이마를 찡그리며 신음을 발했다. 행복했던 꿈이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했는지도 몰랐다. "아흑!" 무엇이 슬펐던 것일까? 이번에 소녀는 잠결에 옅은 울음을 토했다. 그리고는 몸을 뒤척이며 모로 누웠다. 그 바람에 양털 이불이 흘러내리며 소녀의 고운 어깨선이 드러났다. "......."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노인은 흘러내린 양털 이불을 끌어올려 소녀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몇 차롄가 소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의 그런 행동에는 지극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노인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일까? 소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고른 숨소리를 내며 홍곤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 했다.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는 소녀의 침상을 빠져 나오며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문을 닫았다. 쯔르... 쯔르르르....... 어디선가 또 한 차례 밤벌레 울음소리가 고즈넉히 들려왔다. 어느덧 삼경도 절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밤이 으슥해질수록 바람은 기세를 서서히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잔 것은 아니었다. 바람은 잊어버릴만 하면 한 번씩 불어와 달밤에 가랑잎을 휘몰아가곤 했다. 노인은 자신의 처소에서 홀로 찻잔을 놓고 앉아 있었다. 차를 다리고 음차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얼굴까지도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때로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면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다. 도리어 빙산(氷山)처럼 수면하에 잠겨있는 더 큰 모습이 진실일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다. 왕옥산의 모옥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쓸쓸해 보이는 노인의 평범한 얼굴 뒤에 어떤 엄청난 비밀이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 노인의 일생은 그의 외모처럼 평범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온통 피비린내와 수많은 음모(陰謀), 살육(殺戮), 한(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다만 지금의 그는 과거를 까맣게 잊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과거를 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이 왕옥산 기슭에 숨어 살고 있을 뿐이다. "......." 불현듯 노인의 미간이 모아졌다. 모옥의 마당을 휩쓸고 달아나는 희미한 바람소리에 섞여 간간히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노인의 귀에 쉬지 않고 들려왔다. 얼핏 듣기에 그 소리는 바람에 쓸려다니는 낙엽소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청각을 기울여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매우 규칙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노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침 열려 있는 창 밖으로 모옥의 울타리 너머 산기슭으로 향해 있는 소로(小路)가 보였다. 막 창백한 달빛이 쏟아지는 소로에 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사람이었다. 노인은 홀연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싹... 싹... 싹....... 시리도록 밝은 달빛 아래 한 인영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청년이었다. 노인은 물론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삼 년 전부터 그를 알게 되었다. 맨 처음 그 자가 나타났던 때는 왕옥산에 가을이 찾아들던 무렵이었다. 가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가 첫 해에 했던 일이란 소롯길에 수북히 떨어져 쌓이고 있는 낙엽을 쉬지 않고 쓰는 일이었다. 그것도 단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가을과 함께 왕옥산에 나타나서는 가을이 다 가도록 낙엽만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물어보아도 그는 일언반구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초설(初雪)이 내리는 날이면 청년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만 되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 비질을 했다. 그러기를 어느덧 삼 년 째였다. "......." 노인은 묵묵히 낙엽을 쓸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왕옥산에 나타난 것은 한 달 하고도 보름 전쯤이었다. 왕옥산이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날부터 청년은 하루도 쉬지 않고 왕옥산 기슭의 소로에서 모옥으로 이르는 길까지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청년이 모옥을 향해 다가올수록 가을은 깊어만 갔다. 마침내 청년은 모옥 가까이 이르렀다. 그것은 이제 초설이 내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었다. 초설이 내린 다음 날이면 청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곧 왕옥산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청년은 이제 약관(弱冠)의 나이를 겨우 넘긴 듯 했다. 그의 얼굴은 늘 헝클어진 장발(長髮)이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바람에 언뜻언뜻 드러나곤 하는 청년의 용모는 뜻밖에도 수려한 면이 있었다. 노인은 줄곧 청년을 관찰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청년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까지는 한 번도 청년과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몇 번 청년에게 말을 걸었지만 청년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자신이 더 이상 입을 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노인 자신도 스스로의 과거를 숨기고 싶어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나 할까? 청년 역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스런 사연이 있는지도 몰랐다. '허허. 만일 그 아이가 마음을 뺏기지만 않았다면 노부는 자네를 그저 이 왕옥산의 일부분 쯤으로나 여기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일세.' 그것이 노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딸이 이 신비한 청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노인으로 하여금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쓱... 쓱... 쓱....... 청년의 비질하는 소리가 적막한 밤을 더욱 적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청년은 낙엽을 쓸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으로 흩어져내린 월광(月光)을 쓸어 모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질소리는 차츰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청년이 뒷모습을 보이며 낮은 언덕 아래로 사라져갔다. 노인은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모옥 안으로 들어가며 마음을 다져먹었다. 며칠 안으로 청년과 진지한 대화를 한 번 해 보아야겠다고. 노인은 모옥 안으로 들어가 딸이 잠든 침실로 들어섰다. 소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소녀의 평화로운 얼굴은 노인의 가슴에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소녀의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는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내심 이렇게 중얼렸다. '그래, 어쩌면 좋은 짝이 될지도 모르지.' ④ 그 분에게는 역시 가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오늘도 하루종일 그 분을 지켜 보았다. 그 분에게서 풍겨 나오는 가을의 냄새는 정말로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한다. 잠자코 그 분을 지켜보노라면 하루 해가 가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어느새 밤이 오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 분이 밤에 혼자 낙엽을 쓸지 않으실테니까. 밤마다 그 분이 혼자 낙엽을 쓸 생각을 하면 공연히 눈물이 자꾸만 나서 싫다....... -시월 초 여드레. 아침 산의 모습은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산이야 늘 한곳에 서 있는 것이지만 시간과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은 늘 변화무쌍하다. 이 날 아침 왕옥산에는 무서리가 가득 내렸다. 그 바람에 절정을 향해 타들어가던 단풍잎들은 더욱 더 빨갛게 물들어 보였고 하늘은 또 가이없이 높고 푸르러 보였다. 노인은 코 끝을 시리게 하는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날의 아침이 더없이 좋았다. 노인은 심호흡을 하며 서늘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들어간 공기는 노인의 몸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활력을 주는 듯 했다. 노인은 오르던 산길을 마저 올랐다. 마침내 산등성이에 서자 발 아래 모옥이 드러나 보였다. 모옥의 굴뚝으로부터 하얀 연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갑자기 오늘 아침의 일이 생각나서였다. 딸아이는 아침부터 웬지 우울한 표정이었다. 노인은 그런 딸을 향해 청년을 아침식사에 초대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 순간 소녀의 표정은 대뜸 밝아졌다. 뿐만 아니라 평소와는 다르게 온갖 부산을 다 떠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끌끌, 못된 것, 늙은 아비보다도 젊은 놈팽이가 더 좋단 말이지?' 그러나 노인은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내려온 노인은 곧장 모옥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빨리 해 모옥을 지났다. 노인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간밤에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청년이 낙엽을 쓸던 길이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노인이 걷는 길에는 낙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한참을 걸어갔다. 군데군데 모여진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청년은 이 길을 지나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지금 쯤이면 딸아이가 손님맞을 준비를 다 해놓았을 터였다. 저만치 앞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청년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낡은 베옷을 입은 채 대나무 비로 한 곳에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청년의 헝클어진 머리칼이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 분명하건만 청년은 비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청년은 왕옥산의 낙엽을 쓸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았다. 그러나 언뜻언뜻 드러나곤 하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독과 깊은 상흔(傷痕)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 노인은 청년에게 다가가려다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웬지 꺼림칙한 기분 때문이었다. '젊디 젊은 녀석이 무슨 번민(煩悶)을 지녔길래... 쯧!' 노인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와 청년의 사이는 고작해야 오장 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은 조금도 노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 보면 청년은 지독한 자폐증(自閉症)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청년의 그런 무관심은 그의 주위에 무형의 벽을 단단히 둘러친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었다. 노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아무래도 내 입으로 저 청년을 초대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군.' 노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 노인은 청년의 고독한 분위기를 깨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청년이 자신의 초대를 달갑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일러.......' 그런 판단이 들자 노인은 두말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가서 딸에게 할 말이 문제였다. 벌써부터 딸의 원망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 했다. "......!" 모옥으로 돌아온 노인은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본능적인 직관력이었다. 노인은 신체의 모든 핏줄이 팽창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노인은 안색이 차갑게 굳어진 채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의 탁자에는 두 사람의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不請客)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똑같은 청삼을 입은 삼십대 초반의 인물들로 그가 처음 보는 위인들이었다. "아버님! 손님이 오셨어요." 옆방에서 독고영령이 나오며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녀에게는 일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모옥을 찾아온 불청객들을 쏘아 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의 음성은 대단히 냉막했다. 너무나 냉막하여 왕옥산에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은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정중하게 포권했다. 두 사람 중 우측 눈썹 사이에 검푸른 점이 나 있는 인물이 예의바른 태도로 입을 열었다. "독고인(獨孤引) 선배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청수(淸修)를 방해하는 줄 알면서도 감히 찾아 왔습니다." "......!" 노인의 눈썹이 부르르 경련했다. 그는 설마하니 그 자의 입에서 자신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노인은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 노인의 뇌리에 섬광보다도 빠르게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가고 또 스쳐갔다. 그러나 노인은 곧 그들의 말을 일축했다. "노부는 독고인도 아니고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소.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일 것이오. 그러니 어서 물러가시오!" 한편 소녀 독고영령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부친이 왜 자신의 이름을 감추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부친의 표정으로 보아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부친 독고인과 두 불청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다른 한 명의 사나이가 독고인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분명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의 입에서는 아무런 음성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전음술(傳音術)로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고영령은 전음술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대화법이 있는 줄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전음술을 펼치는 사나이의 얼굴과 입술 모양을 훔쳐보고 있었다. 독고인은 사나이를 노려보며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굳었던 얼굴은 점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잠깐 나가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예의 검푸른 점이 박혀 있는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자 독고인은 힐끗 독고영령을 돌아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처음보다는 많이 누구러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독고영령은 이제껏 부친의 얼굴이 그렇게 굳어져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의 얼굴에서는 온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독고인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두 사나이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 독고영령은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서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웬지 모르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며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밖으로 나간 직후 문을 빠끔히 열어 보았다. "어머? 어찌된 일이지?" 그녀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나간 것은 방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새 연기처럼 세 사람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도깨비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두더지처럼 땅으로 스며들었거나 날개가 달려 하늘로 솟구치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사라질 리가 없었다. "내가 정말 무엇에라도 홀린 것이 아닐까?" 독고영령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 아침 그녀는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뜻밖에도 아침 식사에 청년을 초대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산책을 나갔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청년과 함께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두 사람이 모옥을 방문했다. 그녀는 생면부지의 두 사람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그들이 부친의 이름을 댔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거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부친은 그들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몹시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 두 분은 대체 누굴까? 게다가 아버님께서는 뭣 때문에 이름조차 숨기려 하신 것일까?' 독고영령의 호기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문득 그녀는 입술을 뾰족 내밀며 심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청년을 초대하기로 했던 아침 식사 건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⑤ 휙! 독고인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그가 펼치는 경공술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한 번씩 땅을 스칠 때마다 무려 십장 여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 경공술은 중원무림에서도 손가락을 꼽을만 했다. 사십 여 장의 거리를 두고 독고인의 뒤를 따르는 두 사나이의 얼굴에는 점차 경악이 어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이미 땀방울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들의 실력으로 독고인을 따른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서서야 독고인은 신형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두 사나이를 기다렸다. 온몸을 땀으로 목욕을 한 듯한 두 사나이가 잠시 후 그의 앞에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탄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 사나이는 바로 당금 정도무림의 하늘이라는 백화성(白花城) 소속의 사대단(四大團)에 속해 있는 현무단(玄武團)의 향주(香主)들이었다. 삼십대의 나이에 현무단의 향주가 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특히 백화성 현무단의 향주라면 그 아래로 적어도 사십 명 이상의 수하들을 부릴 수 있는 직위였다. 두 사나이 중 한 명, 원계묵(元桂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심 놀라움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에 대해 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초라해 보이는 한 노인을 따라잡지 못해 헐떡인 것이다. 그는 현무단주 도한(到漢)이 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 그는 결코 쉽게 상대할 인물이 아니다. 끝까지 예의를 다 하도록 하고 절대로 건방지게 굴어선 안 된다. 알겠느냐? 원계묵은 동료인 탁비(卓飛)를 바라보았다. 눈썹에 검푸른 점이 나 있는 자가 바로 탁비였다. 탁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 심중인 것 같았다. 원계묵은 숨을 가다듬으며 독고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막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앞서 독고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네놈들은 누구냐?" "......!" 만일 보통 때 같았으면 누군가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 자는 벌써 황천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틀렸다. 원계묵은 안색 하나 변치 않으며 정중히 예를 취했다. "소생들은 백화성에서 왔습니다." "......!" 순간 독고인은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마침내 그가 두려워하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항상 불안에 휩싸여 살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단 한순간도 마음 편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 경력 때문이었다. 그는 왕옥산에 숨어 살면서 낯선 자의 방문을 가장 두려워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방문자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백화성에서 왔다. 언뜻 독고인의 눈가에 어두운 그늘이 뒤덮였다. 그는 잠시 두 사람을 쏘아보다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왜 날 찾았는지는 모르나 이미 오래 전에 은퇴한 사람이오. 그러니 돌아가시오. 어떤 방법으로도 날 움직이진 못하오." 그는 되도록이면 많은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만일 모옥에서 탁비가 전음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독고선배님께서는 영애께서 과거를 알기를 바라지 않을 줄 아오. 하지만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탁비의 전음은 매우 겸손한 듯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때 원계묵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것은 소생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일단 함께 백화성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으음!" 독고인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누려왔던 평화로움이 이들로 인해 깨졌다. 비록 영원히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지는 않았으나 갑자기 찾아든 변괴에 그는 가슴이 쓰렸다. 독고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희들을 보낸 자는 누구냐?" 원계묵은 담담히 답했다. "백화성의 총군사님이십니다." "으음, 만박뇌환자......." 독고인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검버섯이 피어 있는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원계묵은 그의 신색을 살피며 재빨리 말했다. "일단 소생들과 함께 군사님을 만나 주셔야겠습니다." 독고인의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나 더 큰 인물이었다. 독고인은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자는 독고인이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만박뇌환자 숙야풍....... 결국 날 찾아 냈구나.' 그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만일 숙야풍이 누군가를 만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원계묵과 탁의는 연신 독고인의 눈치를 살폈다. 청명한 늦가을의 아침 햇살에 서리가 녹기 시작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은 결코 허탕치고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필히 독고인을 백화성으로 데리고 가야만 했다. 백화성 총군사인 만박뇌환자 숙야풍의 입에서 떨어진 말 한 마디는 지상명령이었다. 설사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어도 실행해야만 했다. 마침내 독고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는 지금 어디 있나?" 독고영령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침상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불길한 아침을 맞이했다. 식사에 청하겠노라 했던 청년도 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두 사나이와 함께 모옥을 떠났던 부친도 소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막 모옥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독고영령은 소리치며 달려갔다. 독고인은 새처럼 날아와 안기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냐! 허허, 내가 너무 늦었지." "몰라요! 식사가 다 식었단 말이에요." 독고영령은 토라진 듯 투정을 부렸다.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독고인은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독고영령을 떼어내며 말했다. "얘야. 애비가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 "네? 어딜요?" 독고영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독고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었다. "좀 먼 곳이다. 아마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싫어요! 그럼 저 혼자 이곳에 있으란 말인가요?" 독고영령은 금세 눈이 충혈되었다. 비록 십팔 세나 된 나이였지만 그녀는 아직 한 번도 부친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 "허허.... 다 큰 녀석이 이젠 혼자 있는 법도 배워야 하는 법이다. 애비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라. 돌아올 때 네게 선물을 사다주마." 선물이라는 말에 독고영령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어떤 선물인데요?" "허허! 너도 이젠 숙녀가 다 되었으니 화장(化粧)을 할 때도 되었다. 그러니 동경과 분갑을 사다주마." 순간 독고영령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다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 참, 아버지도... 그건......." "허허헛! 그러니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어요." "녀석. 그럼 다녀오마." 독고인은 즉시 돌아섰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식사도 하지 않고 바로 떠나신단 말이에요?" "그래. 몹시 바쁜 일이란다." 독고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으며 대답했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런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령의 눈가에 언뜻 안개같은 것이 어렸다. "아버지!" 그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독고인을 불렀다. 그러나 독고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녀의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막 숲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예의 두 사나이가 좌우로 모습을 보이더니 독고인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도 잠깐, 삼 인의 모습은 모퉁이를 돌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 아버지......!" 독고영령은 다급히 외쳤다. 웬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막막해진 것이다. 주루룩....... 문득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편 독고인은 원계묵과 탁비의 호위를 받으며 고개를 넘어갔다. 그가 걷고 있는 산길은 낙엽 하나 없이 깨끗했다. 또한 누군가가 방금 비질을 한 듯이 가느다란 빗금이 가지런히 땅에 나 있었다. 쓱... 쓱... 쓱.......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비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들어보니 저만치 앞쪽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청년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독고인은 문득 청년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청년을 돌아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원계묵과 탁비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어서들 가세." 독고인은 두 사나이를 재촉하여 잰 걸음을 옮겨 청년의 곁을 지나쳤다. 원계묵과 탁비는 청년을 잠깐 노려보았으나 갈길이 먼지라 눈길 한 번 던지는 것을 끝으로 저만치 사라졌다. "......." 청년은 삼 인이 지나가는 동안 잠시 비질을 멈추고 있었다. 그는 삼 인의 표정을 모두 보았다. 독고인은 그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았고, 두 사나이는 순간적으로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휘이이잉....... 만추의 바람이 불어 청년의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러자 다소 창백하긴 하지만 수려한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특히 한 쌍의 눈은 알 수 없는 우수(憂愁)를 담은 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청년은 잠시 삼 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다시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제2장 · 도망자(逃亡者) ① 아버님께서 떠나신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가슴이 텅 비어버린 듯 하다. 아버님의 존재가 이렇게 큰 것인 줄 몰랐다. 하루하루 보내는 것이 마치 일 년을 보내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산책을 했다. 그 분은 여전히 낙엽을 쓸고 계셨다. 이제는 왕옥산의 낙엽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낙엽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또 다시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다림, 그것은 정녕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어서 빨리 자야겠다. 내일은 반드시 그 분에게 말을 걸어야지. - 시월 스무 셋째날 스물한 쌍 마흔두 개의 눈동자는 일제히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모래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내실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앙금처럼 내려쌓이고 있었다. 커다란 원탁을 둘러싼 스물한 명의 인물에게서는 호흡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모래시계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작은 삼각형 두 개를 마주 세워 만든 것이었다. 스르르르....... 거미줄처럼 가는 모래알들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분명 모래알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물한 명의 눈에는 하나의 모래알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귀가 아닌 눈으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이제 윗부분의 삼각형 속에 있던 모래는 대부분 아래로 흘러내린 상태였다. 극미(極微)의 관(管)을 통해 아래의 삼각형으로 모래가 전부 떨어져 내리는 데는 정확히 한나절이 걸렸다. 처음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았을 때에는 희망에 차 있었다. 그들은 믿었다.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그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반나절에서 또 반나절이 지나자 모래는 반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희망이 불안감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믿음은 점차 불안감으로 바뀌어 갔다. 마침내 그들의 귀에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들릴 리가 없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스물 한 사람들의 귀에 낙뢰 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리고 있었다. 스물한 쌍의 눈동자들이 한결같이 초조감으로 모래시계를 주시하고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정도 무림맹의 총본인 백화성 내에서 가장 신비한 곳인 흑루(黑樓)였다. 딸랑! 문득 어디선가 금령이 울었다. 그 방울소리는 긴 여운을 남기며 실내의 숨막힐 듯한 정적을 깨뜨렸다. 마침내 시계가 작동을 중지한 것이다. "......." 모래시계를 응시하던 스무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상단에 위치한 의자 위에 한 사람이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나 큰 인물이었다. 바로 백화성의 총군사인 만박뇌환자(萬博腦幻子) 숙야풍(叔夜風)이었다. 숙야풍은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그 말에 중인들의 고개는 일제히 아래로 숙여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믿었던 것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데 대한 허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만박뇌환자의 중얼거림이 나직하게 실내를 울렸다. "은영환무자(隱影幻無子) 독고인.... 그의 신화는 끝내 이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딸랑! 또다시 금종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모래시계가 멈춘 후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스르르륵....... 문득 가벼운 음향과 함께 흑루의 한쪽 벽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물한 쌍의 눈동자는 일제히 벽면에 나타난 출입구를 향해 집중되었다. "......!" 무복을 입은 한 사나이가 문 밖에 서 있었다. 그 사나이를 바라보는 중인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사나이는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 그는 만박뇌환자의 앞으로 걸어가 부복하며 말했다. "전서(傳書)를 가져 왔습니다." 사나이는 무릎을 꿇은 채 품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공손히 숙야풍에게 바쳤다. 중인들의 눈동자는 일제히 숙야풍의 손으로 전달되는 전서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한결같이 긴장감과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숙야풍은 전서를 읽었다. 격동 탓인지 손에 든 전서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그의 눈썹도 부르르 떨렸다. 잠시 후 그는 전서를 내리며 말했다. "성공이다." 만박뇌환자 숙야풍은 짤막하게 말한 후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오오!" 중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토록 커다란 감동을 느낀 것은 처음이라는 듯이. 그 얼마나 고대했던 소식인가? 이십일 인은 오직 그 일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이 계획을 위해 희생된 인명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숙야풍은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실상 그는 격동하는 가슴을 자제하느라고 무척이나 애를 써야만 했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기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득 그는 단추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문이 열리며 전신이 온통 회색 일색인 사나이가 나타났다. "......." 중인들은 그 사나이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회색인영의 얼굴을 주목해 보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나이의 얼굴에는 뿌연 안개가 서린 듯 얼굴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안력을 돋우면 돋울수록 회색 사나이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안개도 짙어지기만 해 결국 사나이의 용모는 알 길이 없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이때 숙야풍이 회색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혼(無魂). 만권각주(萬卷閣主)를 불러라." 스스....... 무혼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대답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중인들은 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무혼이란 인물의 정체는 몰랐지만 만권각주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권각주는 백화성 장서각(藏書閣)의 각주로 무공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자였다. 그가 하는 일이란 백화성의 모든 서책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를 숙야풍이 무엇 때문에 불러들이는지는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언제나 숙야풍이 계획하는 일은 백화성의 일급기밀에 속했다. 따라서 그가 공개하기로 마음먹지 않는 한 아무리 알아내려 해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이번 일의 성공으로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도사린 엄청난 흑막에 대해서 짐작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② 쏴아아아........ 추풍(秋風)은 쓸어모은 낙엽을 부질없이 흩트려 놓았다. 그러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낙엽을 쓸고 또 쓸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듯이. 왕옥산의 가을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은 점차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청명했던 하늘도 점차 잿빛으로 변하며 음습한 습기를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지않아 초설(初雪)이 내릴 징조이기도 했다. 청년은 이맘 때의 왕옥산을 좋아한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왕옥산 풍경도 좋지만 잎을 떨군 채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낸 나목(裸木)의 모습이 더욱 좋았다. 고요한 나목림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온통 비워지고 정신이 홀가분해지기 때문이었다. 비록 쓸쓸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청년에게 어울리는 감정이었다. 그는 북적대는 인간들의 시끄러움이 싫어 이곳에 온 것이다. 따라서 만추에서 겨울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이곳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 청년은 잠시 비질을 멈추었다. 그는 눈을 들어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왕옥산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산자락 사이로 뽀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청년은 다시 허리를 숙여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한 식경 쯤 지났을까? 문득 비에 걸리는 물체가 있었다. 낙엽 사이에 무엇인가 보자기에 싼 물체가 있었다. "......?" 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보자기를 풀어 보았다. 뜻밖에도 보자기 속에는 칡넝쿨로 만든 소쿠리가 하나 있었다. 그 소쿠리 속에는 몇 가지의 소채류와 알맞게 익힌 산오리 고기가 더운 김을 내고 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십여 장 가량 앞에서 숲 속으로 뛰어 달아나고 있는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 청년은 잠시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 앉았다. 그는 소쿠리 안의 음식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고요한 눈에는 언뜻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했다. 그는 젓가락을 들었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젓가락으로 그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 한편 그 광경을 숨어서 바라보는 소녀 독고영령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 음식물을 몰래 갖다 두었었다. 그녀는 청년이 먹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청년은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야......' 독고영령은 지그시 자신의 가슴을 누르며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난 삼 년 간 그녀는 청년을 몰래 지켜 보았다. 비록 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따금 바람이 불 때 간혹 드러나곤 했던 청년의 얼굴과 고요한 눈빛에 그녀의 방심(芳心)은 여지없이 흔들리곤 했다. "크으윽!"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인영(人影)은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설사 야조(夜鳥)라 한들 그 인영만큼 신속하게 날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실로 인세에 드문 절정의 경신술이었다. 그러나 인영은 허공 중에서 신형을 비틀거렸다. 이어 불안한 자세로 땅에 떨어졌다. 착지하는 순간 인영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이곳은 왕옥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한 야산이었다. 인영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걸어가다 한 그루 나무를 붙잡고 몸을 의지했다. 그로 미루어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인영의 눈에 산기슭에 있는 관제묘(關帝廟)가 보였다. "으음....... 일단 저곳으로......." 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관제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관제묘 안. 인영은 먼지 투성이인 관제묘로 들어서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허억."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오순 가량 된 노인으로 다름아닌 독고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전신은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그가 주저앉아 있는 자리에는 이미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주름이 많은 얼굴은 잿빛으로 화한 지 오래였다. 독고인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운기를 끝낸 독고인은 비로소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가 들어온 관제묘는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 듯 온통 먼지 투성이에 벽면은 금이 가고 신탁과 제기들도 몹시 낡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구멍 뚫린 천장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보였다. 독고인은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보자기로 감싼 물건이었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건을 우측 구석의 구멍뚫린 벽 속에 밀어 넣었다. 이어 벽구멍에 대충 흙덩이를 밀어 막아버리자 그 속에 물건을 감추었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독고인의 얼굴에 한 가닥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탄식을 불어내고 있었다. "아아!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무서운 음모를 꾸미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리는지 그는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추적해 올 줄은 몰랐군. 허허! 이제 나 은영환무자도 늙은 것일까? 추적자들을 따돌리지도 못하고 도리어 당할 줄이야......." 문득 그는 눈을 번뜩였다. 멀리서 인기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독고인은 즉시 관제묘 안의 어두운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가 몸을 숨기는 방법은 특이했다. 단지 벽의 그늘진 곳으로 위치를 이동했을 뿐인데도 그의 모습은 완전히 증발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휙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몇 개의 인영이 관제묘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들은 칠흑같은 묵의(墨衣)를 입은 자들이었다. 묵의인들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으며 단지 두 개의 눈구멍만을 내놓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으시시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때 일행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여기 피가 있... 큭!" 그 순간이었다. 소리를 지르던 자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뒷목에는 어느새 한 자루의 소도(小刀)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조심해라!" 사 인(四人)의 복면인들은 경악성을 지르며 일제히 갈라졌다. 한 곳에 몰려있다가는 똑같이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후 날카로운 눈으로 관제묘를 둘러 보았다. 사 인의 눈은 똑같이 한가운데 바닥에 고정되었다. 그곳에 흥건한 피가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핏방울이 우측의 창문쪽으로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저쪽이다!" 한 인영이 벼락같이 창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악!" 창문을 막 뛰어넘던 자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히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신법은 그야말로 신속하기가 번개를 방불케 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관제묘는 다시 조용해졌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시체 한 구만을 남긴 채 적막에 휩싸였다. 문득 창문 바로 아래의 벽에서 검은 인영이 움직였다. 벽면이 움직이는 듯 하더니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독고인이었다. 독고인은 창 밖을 바라보며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놈들이 잠형둔갑술(潛形遁甲術)에 속아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아아!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 가증스런 음모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천하는 난세(亂世)가 되어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뒤덮일 것이다." 이어 그는 급히 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시체의 복면을 벗겨 보았다. 드러난 얼굴은 대략 삼십대 가량의 음침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처음 보는 작자로군.' 독고인은 문득 불안한 듯 방금 전 물건을 감추어 두었던 벽구멍을 흘깃 쳐다본 후 신형을 날렸다. 그가 날아가는 방향은 복면인들이 추적해 간 정반대 쪽이었다. ③ 음사귀장(陰事鬼長). 당금 강호무림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결코 무림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무공은 깊이를 추측할 수 없다고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작 그를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의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세인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오직 한 가지의 이유는 바로 깊고 심원한 그의 지모(智謀) 때문이었다. 별호가 말해주듯 그는 세상의 모든 일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어보는 자였다. 또한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은밀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세인들이 음사귀장에 대해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음사귀장의 진정한 비밀은 보여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음사귀장은 지금 구중층(九重層)의 심처(深處)에 있었다.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백의를 입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동요를 보이지 않던 그가 오늘따라 뒷짐을 진 채 몹시 초조한 모습으로 내실을 서성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하의 그 어떤 일이 그를 이런 모습으로 몰아넣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연신 초조한 표정으로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르륵! 마침내 문이 열렸다. 뒤이어 한 인영이 다급히 들어섰다. "어떻게 되었느냐?" 음사귀장은 인영을 향해 날카로운 음성을 던졌다. 들어선 인물은 삼십대 중반의 사나이로 한 쪽 무릎을 꺾은 채 말을 더듬었다.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바보같은 놈!" "죄... 죄송합니다!" 사나이는 머리를 조아렸다. 음사귀장은 사나이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를 잡아야 한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나이는 대답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물쩡거리다가는 하나밖에 없는 모가지가 동강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가 사라지자 음사귀장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음사귀장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것은 그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기도 했다. 문득 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거야말로 고양이한테 호랑이의 코가 물어 뜯긴 격이 되었으니......." 음사귀장의 검은 아미가 꼬리를 쳐들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는 벌떡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를 부를 수밖에......." 그는 한 쪽 벽에 장치되어 있는 단추를 눌렀다. 그로부터 일다경 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한 사나이가 부름을 받고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칠 척(七尺) 장신의 사내였다. 나이는 대략 이십팔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매우 강팍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얼음처럼 차가와 보이는 두 눈매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오 척이나 되는 긴 장검을 왼손에 잡고 있었다. 사나이는 방 안으로 들어선 후에도 한 마디의 인사도 없이 묵묵히 음사귀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사나이의 얼굴에는 일점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서립(徐立). 이 일은 너밖에 적임자가 없다." "......." 서립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역시 무반응이었다. "이 길로 누군가를 추적하여 죽여다오. 그 자의 이름은......." 서립은 여전히 묵묵부답. 그는 도통 말이 없는 사나이였다. 아니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음사귀장의 입에서 들릴락말락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서립은 이내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한 마디 말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 사라져 갔다. ④ 나 자신 여자이면서도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처음 아버님께서 떠나셨을때만 해도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님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 분과의 이별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요즘 나는 매일같이 하늘을 본다. 첫눈이 내릴까봐 두려워서다. 첫눈이 내리면 그 분은 미련없이 왕옥산을 떠나실테니까....... 아아! 겨울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항상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었으면....... - 시월 스무 여드레. 독고영령은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든 것이다. 오늘 아침은 여느 때의 아침과는 크게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창문으로부터 흘러들어온 햇살은 유난히도 눈부셨다. 문득 그녀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호..... 혹시?" 영령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얼른 창문을 열었다. 건곤일색(乾坤一色). 온 산이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밤 사이에 눈이 내린 것이다. '아, 안돼!' 독고영령은 내심 절박하게 외치며 얼른 옷을 입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눈이 내린 것이다. 안타까움이 그녀의 가슴을 온통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대충 걸치는 둥 마는 둥 한 채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직 그 분이 떠나지 않았으면... 제발!' 그녀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 분이 계셔주기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고백하고 말거야!' 정말이지 이제는 수줍음이고 뭐고 가릴 겨를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또다시 일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아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젠 절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게다가 내년 가을에 다시 그 분이 오실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내심 그렇게 외치며 막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때였다. 덜컹! 그녀가 문을 당기기도 전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독고영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악! 아버지!" 순간 영령의 입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옥 안으로 들어선 인영은 바로 독고인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비명을 지른 것은 단순한 놀라움 때문이 아니었다. 독고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독고인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쓴 듯 피투성이가 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대체 이게......?" 그녀는 너무나도 놀란 탓에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독고인은 힘겹게 눈을 떠 사랑하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이고 있었다. "얘야. 어서 피해야 한다. 준비해라.... 시간이 없구나......." 독고인의 음성은 쥐어짜는 듯했다. 그제서야 영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 치료부터... 아아!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영령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독고인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안 돼! 그럴 시간이 없다. 어서!"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늦었소. 독고인." "......!" 독고인은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찰라지간 그는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중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흰빛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상대방은 미리 예측하고 있었는지 유령처럼 몸을 움직였다. 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문설주에 박힌 것은 손바닥만한 소도였다. 그때였다. "윽!" 느닷없이 독고인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어느새 들어온 것일까? 두 사람의 묵의인이 독고인의 좌우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모옥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독고인의 혈도를 제압한 것이다. 또 한 명의 묵의인이 모옥 안으로 들어왔다. 도합 삼 인(三人). 그들은 한결같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묵색이었다. "큭큭!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우리들이 아니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냉막한 음성이 독고인의 고막에 파고 들었다. 독고인은 쓰러졌으되 정신만은 멀쩡하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무거운 절망감이 밀려 들었다. 놈들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만일 그가 중상을 입지 않은 몸이라고 해도 동시에 삼 인을 상대하기는 불가능했다. 복면인은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알 것이오. 물건을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조차 뜻대로 갈 수 없소." - 지옥에조차 뜻대로 갈 수 없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 말이 허풍이 아님을 독고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말에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를 느꼈다. 물론 목숨이 아까와서가 아니었다. 독고인은 눈을 떴다. 입술을 악문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체념의 빛이 어렸다. 그는 조소하듯 반문했다. "어떤 물건 말인가?" 순간 복면인의 손이 번뜩 움직였다. "아아악!" 엉뚱하게 비명을 지른 것은 독고인이 아니라 독고영령이었다.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복면인의 손에서 검광(劍光)이 번뜩인 순간 피보라와 함께 부친의 한쪽 팔이 어깨서부터 뭉텅 잘려나가는 것을! 촤아아! 잘려진 어깨로부터 시뻘건 피가 분수같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버지!" 구슬픈 독고영령의 비명이 모옥을 울렸다. 정작 팔을 잃은 당사자인 독고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힘없이 눈을 뜬 채 독고영령을 바라보았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딸이었다. "크으으...! 내 실수였다!" 문득 독고인의 입에서 통한(痛恨)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모옥으로 돌아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름없는 산곡(山谷)으로 달아나다 붙잡혔던들 이렇게 한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연히 모옥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가엾은 독고영령에게 화(禍)를 미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묵의인들이 요구하는 물건을 내놓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 하나 쯤은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만큼 그가 취한 물건은 중차대한 것이었다. 그 물건 하나에 수만 명, 아니 천하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딸이었다. 독고영령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물건 때문에 그녀가 어찌된다면....... "다시 한 번 묻겠다. 물건의 행방은?" 촤아아아......! 선렬한 피보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이번에는 남아 있는 왼쪽 팔이었다. 어깨서부터 뭉턱 잘려버린 팔뚝이 저만치서 툭툭 뛰고 있었다. 그러나 독고인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신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고통 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그를 정작 한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독고영령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이 자가 아끼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저 계집!" 묵의인이 고개를 홱 돌리며 손가락으로 전신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독고영령을 가리켰다. "안 돼! 그 아이만은..... 제발!" 비로소 독고인의 입이 터졌다. 그는 팔을 내저으려 했으나 이미 흔들 수 있는 팔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피눈물을 뿌리며 절규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꺄아악! 비단폭이 찢기는 듯한 소음과 함께 독고영령의 비명이 모옥을 울렸다. 북...! 부우욱! 두 묵의인이 거칠게 영령의 옷을 찢어냈다. 두어 번 손놀림에 순식간에 나신이 드러났다. 좌우에서 옷을 길게 찢어내자 순식간에 처녀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젖가슴이 무참하게 노출되고 만 것이다. 독고영령은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놀랍고, 수치스럽고, 당혹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젖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랫도리가 서늘해졌다. 두 묵의인이 치마를 부욱 뜯어내버린 것이다. "악! 악!" 그녀는 연속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손 하나가 빠르게 내려가 치부를 가렸다. 이제 그녀의 몸을 가리고있는 것은 오직 단풍잎처럼 작은 두 개의 손바닥 뿐이었다. "살려줘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었다. "살고 싶으면 네 애비를 졸라라." 싸늘한 음성이 무정하게 그녀의 작은 희망을 단절시켜 버렸다. 독고영령은 보았다. 부친이 두 팔이 잘려진 어깨로 바닥을 짚으며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향해 기어오고 있는 것을. 퍽! 옆에 서 있던 묵의인이 발로 독고인의 머리를 걷어찼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홱 돌아가며 입과 코로 검붉은 피가 튀어 나왔다. 독고영령은 정녕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현실이리라고는 죽어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지독한 현실이 그녀의 동공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묵의인 한 명이 손으로 그녀의 동그란 턱을 치켜 들었다. 쿵, 하고 그녀의 머리가 벽에 부딪쳤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며 하마터면 의식을 잃을 뻔했으나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시작이었다. 그녀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니 믿을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아아악!"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한 묵의인이 그녀의 하복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손바닥을 칼처럼 세우더니 그대로 찔렀다. 태어나서 아직껏 그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이 없던 처녀의 비소(秘所)에 찌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왔다. 너무나 무서운 통증이 그녀로 하여금 혼절하게 만들고 말았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만일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독고영령은 깜빡 의식이 돌아왔다. 아주 잠깐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눈에 보이는 모옥 안의 풍경이 거꾸로 비쳐든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 묵의인이 거꾸로 서있었다. "악!" 다시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묵의인이 그녀의 하체에 어떤 물건을 쑤셔넣는 것 같았다. 이제야 알겠다. 그녀는 묵의인에 의해 거꾸로 치켜든 채 가랑이를 벌린 자세였던 것이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무섭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눈물도 말랐다. 슬픔도 절망도 이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문득 한 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독고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독고인은 이미 팔 다리가 다 잘려나간 뒤였다. 그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마치 무엇인가 뭉툭한 육괴(肉塊)를 보는 것 같았다. 도무지 인간같지가 않았다. 아니 부친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때 그녀의 귀로 여전히 냉혹무비한 음성이 희미하게 흘러들어왔다. "물건의 행방을 대라."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독고영령은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⑤ "또 한 해가 넘어 가는군......." 천지가 은백(銀白)으로 뒤덮힌 왕옥산 기슭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었다. 왕옥산은 온통 설천지가 되어 있었다. 사방 어느곳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오직 백설천지였다. 사나이. 그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낙엽을 쓸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비를 놓은 채 멍하니 흰눈에 뒤덮힌 소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랬다. 그는 비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쓸어야 할 낙엽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왕옥산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갈 때가 됐군." 청년은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는 왕옥산 정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이미 수 년간 되풀이된 일이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이듬해 가을에 다시 찾게 될는지 그 자신도 기약할 수 없었다. "어쨌든 떠나야지." 청년은 낮게 중얼거리며 움직였다. 그는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눈 위로 첫 발자국을 찍으며 걷기 시작했다. 청년이 걷고 있는 방향은 모옥 쪽이었다. 그는 일부러 모옥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 하나를 넘자 눈 아래 아담한 모옥이 나타났다. 그러자 비로소 청년의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모옥을 보는 순간 그는 하나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 그것은 한 소녀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아름답고 천진한 얼굴. 언제나 숲 속에 숨어 그를 지켜보며 얼굴을 붉히던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후후.... 이미 오래 전에 영혼이 죽었다. 이런 감정은 내겐 사치일 뿐. 난 그럴 자격도 없는 인간이다." 불현듯 청년은 자신에 대한 냉소를 흘렀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옥 앞을 지나쳤다. 그때였다. 우두둑....... 환청처럼 사나이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대단히 가늘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돌려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겨울이로군. 벌써부터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니......." 그는 쌓인 눈의 무게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로 들었다. 그런데 모옥을 한 마장쯤 지났을 때였다. "아아악!" 느닷없이 날카로운 비명이 모옥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여인의 비명이었다. 청년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비명은 분명 모옥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다. 문득 청년의 몸이 사라졌다. 놀라운 속도였다. 사나이는 쏘아진 화살처럼 모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우지끈! 그는 모옥의 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갔다. "......!" 청년은 방 안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전신이 굳어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모옥 안은 벽이건 천장이건 바닥이건 할 것 없이 온통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침상 위에는 한 소녀가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처럼 뒹굴고 있었다. 소녀의 젖가슴은 도려내어진 후였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유린당한 채 사지를 벌리고 있었다. 청년은 잠깐 생각했다. 이 소녀가 바로 어제만 해도 그를 훔쳐보며 방심을 두근거렸던 그 소녀인가 하고 말이다. 청년의 시선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가 박혔다. 그곳에는 더욱 더 비참한 육괴가 있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두 눈까지 파헤쳐진 사람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것은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으음!" 사나이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이... 보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 육괴에게서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청년은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슈욱...! 슉슉! 문득 천장으로부터 세 개의 인영이 떨어졌다. 삼 인의 인영은 곧장 사나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는데 그들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사나이는 설마 모옥 안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일단 그가 움직이자 순식간에 세 인영과 그의 몸이 뒤엉켰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그 비명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 들었다. 그 정적은 죽음의 늪과도 같았다. 모옥 안에는 이제 살아 있는 자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어버렸다. 모옥에서 그같은 일이 일어난 지 반나절 쯤 후였다. 한 명의 사나이가 눈덮힌 왕옥산 어귀로 들어섰다. 그는 왼손에 오 척 길이의 장검을 쥔 채 규칙적인 걸음으로 왕옥산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서립(徐立)이었다. 서립은 눈덮힌 소로를 용케도 따라 걷더니 잠시 후 나즈막한 언덕 아래 아담하게 지어진 모옥을 발견했다. "......." 서립은 모옥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봉분(封墳)이 솟아나 있었다. 봉분은 눈이 내린 직후에 세워진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유독 그곳에만 눈이 쌓여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립의 죽어있는 듯한 한 쌍의 회색의 동공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잠시 후 그는 부서져 있는 모옥의 문을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모옥 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서립은 조금도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마치 그는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모옥 안에는 세 구의 시체가 있었다. 한결같이 묵의에 복면을 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죽은 원인은 간단했다. 그들의 목에는 한결같이 대나무로 만든 작은 꼬챙이가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서립은 잠시 시신을 살펴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그것은 옆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문이었다. 서립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인의 방인 듯 했다. 단아한 느낌과 함께 피비린내 속에서도 처녀 특유의 향긋한 체취가 감돌고 있었다. 방 안을 살피던 서립의 눈이 앉은뱅이 탁자 위에 멎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탁자 위에는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서립은 탁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장의 종이를 집어들었다. 종이에는 미려하지는 못하나 여인이 쓴 듯 섬세한 필체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서립은 눈을 가늘게 하며 글씨를 읽어 보았다. 나 자신 여자이면서도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처음 아버님께서....... 서립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기묘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팔랑....... 그의 손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서립은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치한 글이로군. 그러나 중요한 정보이기도 하지."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서립은 무덤을 파헤치고 있었다. 무덤 속에서 발견된 것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두 구의 짓이겨진 시신이었다. 하나는 노인의 시신이었고 하나는 소녀로 보이는 여자의 육체였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두 구의 시신을 확인한 서립은 곧바로 무덤을 원상복귀시켰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한 점 허공을 쏘아보았다. 잠시 후 아주 얇아 보이는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사람은 죽었는데 물건은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물건을 찾을 때까지는 돌아갈 수 없겠군." 그것이 끝이었다. 서립은 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걸음으로 모옥을 떠나갔다. 놀라운 것은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발자국이 전혀 찍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3장 · 낙화무영(落花無影) ①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세 번씩이나 죽는 이들이 세상에는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은영환무자 독고인과 그의 딸 독고영령이었다. 그들은 한 번 죽는 것도 모자라 무덤이 두 번씩이나 파헤쳐진 것이다. 두번째로 그들 두 모녀의 무덤을 파헤친 것은 십삼 인의 사나이들이었다. 그들은 서립이 사라진 지 반나절 쯤 지나 왕옥산의 모옥에 나타났다. 그들은 모옥을 샅샅이 뒤졌다. 그들이 모옥 안에서 발견한 것은 서립과 마찬가지로 세 구의 시신과 독고영령이 쓴 일기였다. 모옥 한 쪽에 생긴 봉분을 파헤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복면인들 중 소매에 금실로 테두리를 한 위인이었다. 그의 명령에 의해 독고인과 독고영령의 시신은 다시 파헤쳐졌다. "틀림없습니다. 정부령주(鄭副令主)!" 두 명의 복면인이 면밀히 시신을 검토한 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정부령주는 차분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뜻밖의 변수로군. 은영환무자도 죽고 철령대(鐵令隊)의 칠호, 팔호, 구호도 죽었다. 과연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없군.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다지 멀리 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복면 사이로 비치는 눈빛은 으시시한 한광을 발하고 있었다. "가자. 서쪽이다." 말이 떨어진 순간 그들 십삼 인은 일제히 서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한 사나이의 손이 관제묘의 벽구멍으로부터 하나의 보자기로 감싼 물건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 사나이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뭔가? 또 다시 나의 운명을 시험대에 올리기 위한 신의 심술궂은 장난이란 말인가?' 사나이는 내심 중얼거리며 손 안에 들어와 있는 물건을 내려다 보았다. 보자기에는 군데군데 마른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는 바로 왕옥산에 가을이 찾아들면 나타나 낙엽을 쓸곤 하던 장발의 청년이었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 속에는 알지 못할 비운의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그는 피묻은 보자기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했다. 왕옥산을 떠나기 직전 모옥을 지나갔던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영환무자 독고인은 한 가닥 숨이 붙어 있었다. 그에게서 청년은 한 가지 부탁을 받았다. 그것은 이곳의 벽에 숨겨둔 물건을 찾아 어딘가에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독고인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 말했다. 그 물건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것이라는 것을. 그 때문에 다시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세상 일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후후! 하늘은 기어이 날 내버려 두지 않는군.' 사나이는 희고 긴 손가락으로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휙휙......! 문득 사방으로부터 옷자락 날리는 음향이 울려왔다. 사나이는 풀다 만 보자기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고 이곳까지 찾아왔군." 그는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서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는 추호도 당황하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제묘의 밖 뜨락에는 어느새 복면괴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십삼 인이었다. 휘이이이잉....... 메마른 겨울의 삭풍이 불었다. 사나이는 옷자락을 날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사나이는 자신을 둘러싼 십삼 인의 복면인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 복면인들은 그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살광을 번뜩였다. 무시당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발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그의 서늘한 눈을 보는 순간 복면인들의 심장은 자신도 모르게 오그라들고 있었다. 사나이의 눈빛은 정녕 매서웠다. 그것은 지옥의 겁화(劫火)가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전신을 유황불로 태워버릴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눈빛이었다. "서... 서라!" 맨 앞에 있던 복면인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복면인은 말한 직후 비틀거리며 도리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상하게도 그는 검을 뽑지 못했다. 그가 바로 검을 뽑아 찌르면 사나이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어붙은 듯 검자루에 손을 얹은 채 뒤로 물러나고만 있는 것이었다. 사나이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헉!" 복면인은 다급한 신음을 발했다. 불현듯 사나이가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나이가 손을 뻗은 곳은 바로 그의 허리춤이었다. "아... 안 돼!" 복면인은 기겁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추릿! 그가 차고 있던 검은 어느새 사나이의 손에 쥐어진 후였다. 그것은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런 행동이기도 했다. 사나이는 흡사 자신의 검을 취하듯 남의 검집에서 검을 뽑아간 것이었다. "막지 마라. 나로 하여금 살인을 하게 하지 마라." 사나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 두 마디였다. 그는 검을 오른손에 잡고 걸어갔다. 사나이는 이제 다섯 명 째의 복면인 사이를 지나갔다. 그동안 복면인들은 어찌된 셈인지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아니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사나이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압감은 그들의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 같았다. 이때였다. 휘이이잉....... 한줄기 삭풍이 사나이의 전면에서 휘몰아쳤다. 그 순간 사나이의 길다란 장발이 흩어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앗! 당신은 삼 년 전 실종된 본성 오령특위대(五令特衛隊) 총대장 낙화무영(落花無影) 단목우(端木雨)가 아니오?" 그 순간이었다. 스파아아앗! 느닷없이 사나이의 손에서 한 웅큼의 빛살이 쏟아져 나갔다. 그것은 정녕 빛살의 폭포였다. 사나이의 손에서 땅으로 향해 처져있던 검이 무수한 빛무리를 쏘아내면서 천지를 휘황한 검광으로 휘감아 버린 것이다. "캬악! 케에에엑......."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정녕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살인에도 미학(美學)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츠츠츳! 사나이의 몸은 검광을 따라 움직였다. 아니 검광이 사나이의 몸과 함께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전광석화같은 동작과 동작의 연결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그 순간은 극히 짧았다. 어느새 열두 개의 수급(首級)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으으... 낙화무영... 다..... 당신이......." 한 사나이가 경악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처구니없게도 살아 남은 자는 그 뿐이었다. 그 자는 목령대(木令隊)라는 특수조직의 부영주였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단목우는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누군가 했더니 정단(鄭檀)이었군." 복면인은 단목우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 나오는 순간 더욱 더 몸을 떨었다. 정단의 눈에는 절망과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총대장.... 당신..... 당신은 왜 그때 말도 없이 본성을 떠나셨습니까? 그리고 이번 일은... 분명 성주님의 특명이거늘.... 어찌해서 방해하시는......." 저벅저벅! 단목우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묵직하게 들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는 정단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단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전율했다. "제, 제발 가까이 오지 마시오. 설마 날... 죽이려는 것이오?" 단목우의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빛났다. "정단. 너는 날 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네가 날 알아본 이상 살려 보낼 수가 없게 되었다." "허억! 난...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제발... 보고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총대장!" 정단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 아주 짧은 순간 단목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정단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정단을 알기보다는 그의 환경을 알고 있었다. 찰라지간 정단은 보았다. 단목우의 눈빛이 흔들린 것을. 그는 급히 말을 이었다. "총대장! 제발... 내게 칠순 노모가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 않소?" 마침내 단목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단. 날 알겠지?" "무... 물론이오." "그럼 널 믿으마." 단목우는 수중의 검을 던졌다. 그가 날린 검은 마치 생명이 있는 물체라도 되는 양 십장 밖의 고목나무를 한바퀴 돌았다. 그때였다. 쩌어억! 정단은 거대한 고목나무가 단칼에 쪼개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약속을 어긴다면 바로 저렇게 될 것이다." 단목우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고목나무를 쓰러뜨린 검은 단목우의 수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손을 움직였다. 콱! 검은 자루조차 남기지 않고 땅 속으로 깊이 박혀 버렸다. 연후 단목우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 정단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진 고목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단목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학이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정단은 가까스로 신형을 일으켜 세우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알려야 한다. 으으...! 낙화무영은 본성의 배신자다. 필히 성주께 보고를 올려야만 한다." 휙! 정단은 신형을 솟구쳤다. 그가 막 허물어진 관제묘의 담장을 뛰어 넘으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무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간악하고 주제를 모르는 무림의 도배들! 감히 천자위(天子位)를 넘보다니......." 번쩍! 뒤이어 한 줄기 묵광이 허공으로 치솟으려던 정단의 허리를 휘감았다. "크아악!" 정단의 입에서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은 정확히 두 쪽으로 분리되어 땅으로 뒹굴었다. 뒤이어 그 자리에 솟아오르듯 나타나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칠척장신의 사나이였다. 바로 서립(徐立)이었다. 서립은 자신의 손에 든 긴 장검을 내려 보았다. 뚝...... 칼등을 타고 흐르던 시뻘건 핏방울이 방울져 땅으로 떨어졌다. 그는 피묻은 검날을 정단의 몸뚱이에 문지른 후 고개를 들었다. "낙화무영 단목우라고 했던가? 예상외로 강한 자로군." 서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검집에 꽂았다. "하지만 예외일 수는 없다. 너도 결코 이 서립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천자위를 노리거나 명을 거역하는 자라면 이 서립이 결코 용납불허(容納不許)할 것이다." 서립은 낙화무영 단목우가 사라져간 하늘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휘이이잉....... 또다시 삭풍이 휘몰아쳤다. 삭풍 속에는 희끗희끗한 눈발이 섞여 있었다. ② 객점이었다. 굵은 황촉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창 밖엔 세찬 눈보라가 한창이었으나 방 안은 고즈넉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은 방 안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나이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객점 안에 있는 자는 바로 단목우이었다. 그는 왕옥산을 떠난 이래 긴 여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언젠가부터 그는 따로 행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행려객(行旅客)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정처없는 행려자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그의 삶은 쳇바퀴돌 듯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비단보를 내려보고 있었다. 비단 보자기에는 여기저기 피가 말라붙은 흔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물건으로 인하여 내 운명은 다시 뒤바뀔지도 모른다.'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것을 저어하고 있었다. 단목우는 가능하다면 보자기를 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노인의 절규가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노인의 음성은 이렇게 단목우를 다그쳤다. ... 젊은이. 자네의 내력이 어떤지는 몰라도 제발 그 물건을 전해주게. 만일 물건이 악인의 손으로 흘러간다면 천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네. 그 물건을 반드시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으로 전해주게나. 단목우는 멍하니 피묻은 보자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자기 속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은 그 물건이야말로 천하의 안위(安危)와 지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인물들이 그것을 탈취하려 들었겠는가 말이다. '자금성으로 전해 달라고? 대체 어떤 물건이길래?' 단목우도 호기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보자기를 끌러 보았다. "이... 이것은!" 단목우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단목우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비단 보자기 속에서 나온 물건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보자기 안에는 하나의 옥갑(玉匣)이 들어 있었다. 옥갑에는 고색창연한 아홉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었다. 용의 문양(文樣)은 하나같이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 "......!" 단목우는 그 옥갑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옥갑을 열었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흘러 나왔다. "이... 이것은 천자직인(天子職印)이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옥갑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천자의 직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당금 중원의 천자가 칙령을 행할 때 사용되는 옥새(玉璽)였던 것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옥새가 보자기 안에 들어있을 줄은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옥새를 확인하자 단목우는 전신을 떨었다. 아무리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고 세상을 등지고 사는 그였지만 이 상황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옥새가 나타나다니.... 게다가 이것을 백화성주(白花城主)가 쫓고 있다니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단목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설마 그가?' 그 다음은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단목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당신이 그 자리마저 노린단 말이오? 그것은 안 될 일이오. 아니 상상조차 해서도 아니 되는 일이오.' 단목우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서서히 몸 속의 피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피를 잠재우기 위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 스스로조차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뇌리에 아득히 잊었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전 생애를 회한과 자학(自虐)으로 몰아넣었던 무서운 사건들이었다. 단목우. 그는 지금까지는 홀가분하게 천애(天涯)를 유랑하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과거를 잊은 자유인이 되고자 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는 가을만 되면 왕옥산의 낙엽을 쓸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우연하게도 왕옥산을 떠나던 날 아침에 모옥을 지나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목우는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무서운 살업(殺業)의 운명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단목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옥갑을 으스러져라 움켜쥔 후 가슴에 깊이 넣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열린 창으로 눈보라가 밀려 들었다. 휘이이잉......! 세찬 바람과 함께 객점의 뜨락에는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독고인이 죽어가면서도 그토록 절박하게 당부했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옥새는 한 나라를 뒤흔들 소지를 안고 있는 물건이었다. 만일 옥새를 잘못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황명(皇命)이 잘못 떨어진다면 수많은 충신들이 억울하게 극약을 먹고 죽을 수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변방의 군사들이 잘못 떨어진 황명을 받고 새외에서 무수히 죽어갈 수도 있었다. 그 밖에도 예측을 불허하는 엄청난 일들이 하루 아침에 꼬리를 물고 있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노인은 그 때문에 한 가닥 남은 숨을 붙여두고 내게 옥새를 자금성으로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단목우는 혈관이 팽창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원하지 않던 일에 발을 들여놓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은 지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어떻게 얻은 마음의 평화인가? 그런데 이번 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안 된다! 난 할 수 없다. 난 이대로 조용히 살고 싶다.' 그 순간 그의 내부에서 또 다른 자아가 그에게 소근거렸다. '아아! 그러나 이 일은... 천하의 억조창생에 관한 중대한 일이 아닌가?' 단목우의 상념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로부터 약 일각이 지났을 때였다. "......!" 불현듯 단목우의 눈썹이 흔들렸다. 마침내 그는 보았던 것이다.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는 객점 뜨락에 하나의 인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사나이는 칠 척의 장신이었다. 단목우는 오랫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느라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 그는 그 인영이 한 그루의 나무인 것으로 착각했다. 칠척장신의 사나이는 죽립을 쓰고 있었다. 죽립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어깨 위에도 세 치 가량의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사나이는 꽤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하는 누구요?" 단목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비로소 사나이가 움직였다. "들어가도 되겠소?' 사나이의 음성은 무척이나 낮았다. 만일 단목우가 아니었다면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단목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들어 오시오." ③ 두 사나이는 웬지 닮아 보였다. 그리고 서로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죽립의 사나이였다. "세상에는 건드려도 좋을 것이 있고 건드려서는 아니 될 것이 있다." 죽립인은 단목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건드려서는 아니 될 것을 건드렸다." 단목우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소." "......?" "당신이 어떤 부류의 인물인가 하는 것을 밝히지 않는 이상 나로서는 당신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오." 서립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둔다. 만일 물건을 내놓지 않으면 그대가 설 땅은 대명천지에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단목우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스쳤다. 언뜻 보면 그것은 냉소같기도 했다. 냉소와 함께 단목우는 입을 열었다. "협박하는 것이오?" "진실을 말하고 있다." 죽립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죽립인. 그는 바로 서립이었다. 어느새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고 있었다. 그것은 열린 창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빛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유황굴조차도 삽시에 북극의 얼음으로 덮어버릴 듯 차가웠다.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자는 타협을 모르는 위인이군. 주인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견(忠犬)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정도 죽립인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었다. "......." 그 순간 서립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생애를 통틀어 지금처럼 긴장한 경우가 없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라도 두려워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대명천하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평소 아래로 보고 있던 한 강호의 낭인무사에게서 대명천자와 버금하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런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단목우는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서립이 앉은 채 뒤로 미끄러졌다. 그 순간 그의 손이 장검을 반쯤 뽑았다. "......!" 방 안의 공기가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품 속에 있던 단목우의 손이 서서히 빠져 나왔다. 서립은 칼을 움켜쥔 채로 단목우의 손길을 주시했다. 마침내 단목우의 손이 완전히 빠져 나왔다. 그의 손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그려진 옥갑이 들려 있었다. "이것을 가지러 온 것이오?" 단목우는 옥갑을 내보이며 물었다. 서립의 눈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그렇다! 어서 다오!" 서립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만일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보다 먼저 그의 칼이 상대를 두 쪽으로 갈라 놓았을 것이다. 그런 후에 물건을 취했을 것이다. 서립은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단목우의 서늘한 눈에는 한 점의 살기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서립으로 하여금 무한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옥갑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서립은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굳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립은 서립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차갑게 말했다. "택일하라. 물건을 주던가 아니면 너의 목을 내놓아라."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단목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다시 서립은 위축감을 느꼈다. '도대체 이 사나이는 누군가? 무림천하의 하늘이라는 백화성의 밀정들조차 두려움에 벌벌 떠는 이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서립은 관제묘에서 단목우가 목령대 십이 인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정단이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만은 보지 못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상대에 대한 강한 의혹이 일어났다. 서립은 상대방의 눈길을 맞받으며 냉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라면.... 음, 목을 내놓겠지." "으핫핫핫!" 그때였다. 느닷없이 단목우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서립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목우는 서립의 대답을 듣는 순간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이어 그는 서슴없이 옥갑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서립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 깨끗한 친구로군. 그렇네. 나도 역시 목을 내놓을지언정 물건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네." "......?" "물건을 가져가게. 단, 조건이 하나 있네." "......?" "첫째, 자네의 정체를 밝힐 것. 둘째, 과연 이 물건을 무사히 지킬 수 있는가를 증명해 줄 것. 셋째는 그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킨 후 말하겠네." 부르르....... 서립의 손목 심줄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서 비롯된 모욕 때문이었다. 키릭! 장검이 삼분지 일 쯤 뽑혀 나왔다. 이어 서립의 장포는 바람도 없는데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이지 그로서는 난생 처음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서립은 가까스로 터져나오는 노기를 억눌렀다. 그는 단목우를 노려보며 이를 갈듯이 중얼거렸다. "으음, 내 이름은 서립이다. 신분은 황실금위대(皇室禁衛隊)의 참장(參將), 소속은 동창(東廠)이다." 황실의 금위대 참장.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분이었다. 하지만 단목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서립은 검을 다시 꽂았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 탁자를 향했다. 탁자와의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에 불과했다. 단목우는 탁자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서립은 알았다. 만일 상대방이 손을 쓴다면 자신은 사정권 안에 든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칼을 뽑지도 않았다. 그는 전신의 근육이 긴장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옥갑을 잡았다. 그때였다. 단목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핫핫핫! 충분하오. 서참장. 당신의 능력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서립은 옥갑을 품에 넣었다. 이어 그는 일시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단목우를 향해 말했다. "고맙소. 인정해 주어서." 단목우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만일 검을 뽑았다면 두 걸음도 걷지 못해 저지 당했을 것이다. 내가 시험한 것은 당신의 소를 잡는 힘이 아니라 지혜와 용기였소." "......." 서립은 분노를 억눌렀다. 아니,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정말이지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평소 무림인들을 무지한 도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실에 몸을 던져 황제를 모시는 비밀시위가 된 지 어언 열다섯 해가 지나는 동안 그는 자신을 꺾을 인물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번에 특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는 수월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임무 수행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단목우를 만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비록 임무를 완수하기는 했지만 그는 단목우에게서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임무는 완성했다. "그럼......." 서립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던졌다. 하지만 단목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네." "......!" 단목우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번째 조건이 남았지 않은가?" 서립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는 반문했다. "또 무엇인가?" 단목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해 주게. 무림에는 무림의 율법이 있네. 황제의 율법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인간들이 바로 무림인들이네. 이번 사건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이네. 단순한 절도사건으로 처리해 주게." "그건......." 서립은 망설였다. 그는 상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그도 내심으로는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만일 이번 일을 확대시킨다면 황궁으로서도 여간 골치아픈 일이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서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힘은 써보겠다."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자네를 믿으니까." 서립은 의아했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는 한동안 단목우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그의 등 뒤로 단목우의 음성이 들렸다. "잘 가시오. 용혈대장." 서립은 고개를 돌렸다. "귀하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 단목우는 침묵했다. "싫다면 그만 두시오." 서립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단목우의 응답이 들렸다. "비밀을 지켜 주시게. 내 이름은 단목우라네" 제4장 · 세치 혀(舌)의 여인(女人) ① 철혈수사(鐵血秀士) 냉보인(冷寶仁). 그는 백화성 소속의 현무단주로서 자신의 지위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외부적으로 볼 때 백화성의 사대단주(四大壇主)라면 천하무림의 정상급이랄 수 있었다. 백화성은 정도무림의 하늘이었다. 그런 백화성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대단은 백화성을 이루는 대들보격인 조직이었다. 그 가운데 현무단주의 지위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자리였다. 냉보인은 그런 위치에 오르기 위해 지나온 생애의 삼분지 일을 바쳤다. 본래 냉보인은 명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섬서(陝西)의 황룡무문(皇龍武門)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백화성에 처음 입문한 것은 서른여섯 살 때였다. 지금 그의 나이는 마흔여섯이다. 정확히 만 십 년만에 그는 현무단주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냉보인은 그런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자신에 대한 대견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런지도 몰랐다. 이름도 없는 촌구석에서 태어난 그가 당금 구파일방의 지존들과 동석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대견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기까지 오르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냉보인은 백화성주를 지상최고의 신으로 떠받들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칠 년 전 우연히 백화성주의 눈에 띄어 다섯 가지의 무공을 전수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그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도 보잘 것 없는 하급무인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냉보인은 거실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백화성은 중원정도무림의 총본영이었다. 그만큼 백화성 내부의 지도자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강호 전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규를 중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직접 출동하여 혈전을 벌여야 할 때도 있었다. 가끔 철혈부(鐵血府)와의 싸움이 일어날 때면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공과를 따져 충분한 보상을 받는 것이 또한 백화성의 방침이기도 했다. 냉보인은 현무단주가 된 이후 여러 가지 혜택과 녹봉, 그리고 보상을 받았다. 냉보인같은 인물은 오직 한 가지밖에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는 백화성이 자신의 전부였다. 더군다나 결혼을 하지 않은 그에게는 백화성이야말로 생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여자에 굶주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백화성의 녹봉을 받는 인물이라면 여자에게 굶주리는 일따위는 일어날 까닭이 없었다. 백화성 내에는 꽃같은 미녀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사단주들에게는 각기 열 명의 미녀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냉보인은 최근 들어 보아(寶雅)란 이름을 가진 여인에게 빠져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방년 십칠 세였다. 정말이지 꿀처럼 달콤한 소녀였다. 그녀는 최근 백화성의 천향루(天香樓)에 든 소녀였다. 냉보인은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멎는 듯 했다. 정말이지 보아의 미색은 천하일색이었다. 그는 즉시 보아를 불러들여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다. 냉보인은 차를 비우며 중얼거렸다. '허허! 오늘 밤에는 보아와 함께 지내야겠군.' 그것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일이었다. 냉보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단주님! 만박령(萬博令)이 떨어졌습니다." 문득 수하로부터 그런 보고가 들어왔다. 순간 냉보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② 흑루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냉보인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꼭 무슨 올가미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대단주라는 신분은 백화성의 어디에서도 당당히 보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그렇지 못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흑루였다. 제 아무리 날아가는 새를 잡아들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자라도 흑루에서라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흑루로 들어서는 순간 이미 그에게서는 아무런 위엄도 거드름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거드름을 피우거나 자존심을 내세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흑루는 백화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의 끝없이 펼쳐진 화원 한가운데 있었다. 그 화원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가꾸어져 있었다. 냉보인은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관등성명을 대시오." 문득 어디선가 칙칙한 음성이 울렸다. 동시에 목덜미에 무엇인가 섬뜩한 것이 와 닿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자명했다. "......!" 냉보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소문에 듣기로 흑루를 수비하는 무사들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무단주인 그의 곁으로 접근하기까지 그가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일 줄은 정녕 몰랐다. "현... 현무단주 냉보인... 이오." 어느새 그의 음성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만박령을 보이시오." 여전히 칙칙한 음성이 명령했다. 냉보인은 소매 속에서 하나의 목패(木牌)를 꺼냈다. 그 순간 목덜미에 닿아 있던 차가운 감촉이 사라졌다. "들어 가시오." 그 뿐이었다. 어느새 칙칙한 음성의 주인공은 사라져 버렸다. "으음!" 냉보인은 신음을 토해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곧장 화원 사이로 난 소롯길로 접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화원이었다. 삭풍이 살을 에이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화원에는 각종 기화목들이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냉보인은 그 꽃들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잔등에는 이미 식은 땀이 흥건히 고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화원 곳곳에서 느껴지는 살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언제 어느 때 괴인들이 불쑥 땅에서 솟아 오를지, 또는 화원의 꽃나무 사이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화원은 음산한 살기로 꽉 차 있었다. 냉보인은 흑루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두 번의 검문을 거쳐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목숨이 졸아드는 기분을 맛보았다. 만일 그가 만박령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벌써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흑루 앞에 당도했다. 처음 흑루로 올 때와 지금의 그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먼저의 그가 육 척의 당당한 체구였다면 지금의 그는 오 척도 안 되는 난장이로 졸아들어 있었다. 철컥! 냉보인이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쇠빗장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 가시오." 어딘가에서 음성이 들렸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로지 음산한 음성으로만 그를 맞아들이고 제어할 뿐이었다. 그 음성들은 어찌된 셈인지 하나같이 억양이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음성은 결코 아니었다. '대체 이렇게나 많은 고수들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냉보인은 식은 땀이 등에 축축하게 달라 붙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여전히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목소리에 의해 냉보인이 인도되어 간 곳은 흑루의 삼 층이었다. 그곳은 오십 평 가량 되어 보이는 넓은 대전이었다. 대전 중앙에는 원탁이 놓여 있었다. 스무 명 가량 되어 보이는 인물들이 원탁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스물한 명이었다. 냉보인은 대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긴장감 때문에 인영들의 수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 냉보인은 그들의 눈이 일제히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직감했다. 오금이 저리고 온몸이 왜소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이곳은 자신이 현무단주로 있는 백화성의 내부이지 적지(敵地)가 아닌 것이다. 문득 하나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음성은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했다. "어서 오시오. 현무단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불렀소." "......?" 냉보인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태사의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원탁의 중심부에 앉아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청수한 얼굴이었으나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나 커 몹시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바로 만박뇌환자 숙야풍이었다. 그가 백화성을 움직이는 두뇌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백화성주를 제외한다면 실질적인 실권자는 바로 숙야풍이었다. 냉보인은 몹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 역시 백화성에서 내노라하는 사단주의 신분이었다. 또한 사단주가 흑루의 아래라는 공식적인 법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만박뇌환자 숙야풍을 바라보는 순간 냉보인은 어쩔 수 없이 위축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선 채 시립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원탁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자신이 앉을만한 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허허허! 다름이 아니라 단주께서 한 가지 임무를 맡아 주셔야겠소이다." 숙야풍의 음성이 들렸다. 냉보인은 배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숙야풍을 주시하며 물었다. "어떤.... 일이오?" "이것을 보시면 알 것이외다." 숙야풍의 앞 원탁 위에 하나의 쟁반이 놓여 있었다. 숙야풍은 그것을 냉보인 앞으로 밀었다. 쟁반은 냉보인을 향해 부드럽게 미끄러져 왔다. "......?" 냉보인은 쟁반 속에 한 장의 밀지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밀지를 취했다. <성명 : 부상설(夫霜雪). 나이 : 이십일 세. 용모 :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특징 :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을 지니고 있음> "......?" 냉보인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부상설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는 밀지와 숙야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라는 뜻인지 언뜻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숙야풍의 음성이 들렸다. "그 소녀를 맡아 주시오. 이 일은 단주가 적임자요." "맡으라시면?" "그 소녀는 철혈부의 요인(要人)이오." "그럼 체포하란 뜻이요?" 냉보인이 반문하자 숙야풍은 고개를 저었다. "척살하시오." "......!" 냉보인은 문득 아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신상명세서에 천하제일미란 말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고작 스물하나의 나이가 아닌가? 'ㅉ, 아깝군. 한창 나이일텐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밀지를 품에 넣었다. "알겠소이다. 그럼......." 냉보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숙야풍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신중을 기하도록 하시오. 결코 보통 계집이 아니오." 냉보인은 대전을 물러나며 속으로 냉소를 흘렀다. '흥! 숙야풍. 네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고작 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냉보인을 너무 무시하는구나.' 그가 사라지자 스무 쌍의 눈은 일제히 숙야풍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숙야풍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냉보인을 부른 것은 다만 토끼몰이에 불과할 따름이지. 허허.... 그러나 병술이란 단계를 밟아야 하는 법이 아니겠느냐?" "......!" 그때서야 이십 인은 숙야풍의 계략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눈에서는 일제히 감탄과 존경의 빛이 흘러나왔다. 숙야풍은 다시 눈을 떴다. "그건 그렇고.... 은영환무자에게 보냈던 철령대와 목령대가 몰살한 것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십 인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묵묵히 숙야풍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시신에는 종류가 다른 두 가지의 상흔(傷痕)이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그것은 황실 비밀특위에 속한 대내고수(隊內高手)의 짓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숙야풍의 얼굴에는 언뜻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수법으로 미루어 그는 단 일검에 그들을 처리했다. 그런데 전혀 무력(武力)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고의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 자가 본성에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향후 난적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너희들은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된다." 이십 인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광채가 일어났다. "일단 구월잠(九月潛)의 계획은 실패로 처리한다. 은영환무자의 배신과 뜻밖의 변수로 등장한 그 자 때문이다. 임시로 그 신비객의 명칭을 백혈(白血)로 하자. 백혈에 대한 전략이 수립되는 즉시 품의하도록." 숙야풍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것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이어 숙야풍은 의자 손잡이에 나란히 장치되어 있는 단추 중 하나를 눌렀다. 기기깅!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몸이 의자와 동시에 아래로 사라졌다. ③ "......." 그는 잠시 망설였다.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하나는 넓게 닦여진 관도였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통행이 뜸한 소로였다. 관도로 들어서면 반드시 큰 시진(市鎭)이 나타날 것이다. 시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객점과 유흥가가 즐비할 것이다. 이제 어느 쪽이든 한 곳을 선택해야 했다. 그는 잠깐 번화한 시진을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그는 그런 생활에 젖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항상 사람들이 들끓는 저잣거리였다. 바로 그 거리에서 그는 자신의 젊음을 마음껏 소비했다. 술과 기녀, 그리고 도박에 취한 채. 마침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그런 곳은 신물이 난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소로였다. 얼마쯤 걸어가자 길은 더욱 좁아졌다. 이제 길은 산등성이를 향해 잡목숲 사이로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는 사람의 발자국 하나 없었다. 단지 야생짐승의 발자국만이 희미하게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그는 쉬지 않고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산길을 오르는 그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쏴아아아....... 겨울바람이 산등성이를 휘몰아쳐 왔다. 바람에 그의 장발이 흩날리며 이따금씩 눈빛이 드러났다. 드러난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이제 들리는 것이라곤 바람소리와 이따금 울리는 겨울새 울음 뿐이었다. 아니 가끔씩은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가 산의 정적을 깨기도 했다. 한적한 숲에는 눈부신 백설이 덮여 있을 뿐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불현듯 그는 허기를 느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주위를 돌아 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후다닥! 무엇인가가 숲 저쪽으로 재빨리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소매 속에서 손을 뺐다. 핑! 그의 손 끝에서 반짝이는 물체 하나가 날아갔다. 갈색의 털을 가진 한 마리의 야생토끼였다. 토끼는 정확히 미간 사이에 동전이 박힌 채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겨울은 야생짐승에게도 배고픈 계절이 틀림없었다. 그가 잡은 토끼는 제법 큰 놈이었지만 며칠 동안 굶은 듯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이 정도면 간신히 끼니를 때울 수는 있겠군." 사나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토끼의 귀를 움켜 잡았다. 토끼의 미간에 박혀 있는 것은 일문짜리 동전이었다. 그것은 그가 소매 속에서 꺼내 던진 것이다. 그에게 이런 기술이 있는 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시진을 등진다 해도 결코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잡은 토끼를 구워먹기 위해서는 적당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는 바람을 피하면서 불을 피울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문짜리 동전으로 토끼를 사냥한 사나이는 바로 단목우였다. 사냥꾼에게 일생의 꿈이 있다면 그것은 백호(白虎)를 잡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호는 아무 사냥꾼에게나 잡히는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백호피(白虎皮) 가격은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비쌌다. 따라서 사냥꾼의 입장에서 본다면 평생에 걸쳐 백호 한 마리만 잡아도 횡재를 하는 것이다. 그 사냥꾼의 이름은 범천(凡天)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냥꾼 생활 십오 년이 지나도록 백호는커녕 평범한 호랑이 한 마리 잡지 못했다. 약초를 캐는 채약사(採藥士)들에게 산삼이 보물이듯이, 사냥꾼들에게 호랑이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을 잡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범천은 지독히도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그래서 지지리도 가난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범천은 서른여섯 살의 나이가 되도록 여자의 손목 한 번 만져보지 못했다. 결국 그의 유일한 소원은 여인과 살을 맞대는 것이었다. 그는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오늘도 산중을 헤맸다. 백호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저 평범한 호랑이라도 한 마리 잡아 기녀를 품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하늘의 도움이란 말인가? 그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살피며 한 숲 속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헉! 이... 이건?" 범천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산중의 눈 위에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자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범천은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호... 혹시 여우가 변장을?' 그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내심 경악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일에 골몰하다 보면 여우에 홀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오늘 산을 타면서 내내 계집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의 눈 앞에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어리둥절 하다가 급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여인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여, 여우다. 틀림없다!' 범천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이었다. 여인은 틀림없는 여우였다. 만일 여우가 아니라면 어찌 그렇게 예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쓰러져 있는 여자의 얼굴은 이제까지 그가 상상하던 대시진의 기녀보다 적어도 백 배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범천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넋을 잃은 듯 여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정말이지 그 순간 만큼은 여우에 홀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는 여인이 여우가 아니기를 바랬다. 여인은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헤헤! 어쩌면 산신령님께서 이 범천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런 기막힌 선녀를 보내셨는지도 모르지.' 그는 허겁지겁 여인을 덥썩 안아들었다. 이어 급히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그곳은 사방이 나무로 가리워진 숲 가운데의 공터였다. 따라서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곳이었다. 아니 미치지않고서야 이런 한 겨울에 산에 오를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 나처럼 호랑이를 잡으려는 사람 말고는 이 엄동설한에 산을 오를 미친 놈들은 없지.' 범천은 그렇게 생각하고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산중 어디에도 그가 선녀와 즐길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산기슭의 한 장소에 여인을 내려놓았다. 그곳은 한 그루 소나무 아래였다. 나무 아래에도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의를 벗어 바닥에 깐 후 여인을 그 위에 눕혔다. 여인의 얼굴을 내려다 보자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기막힌 미녀였다. 그는 여인이 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마침내 범천은 여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먼저 여인의 상의 옷고름을 끌렀다. 툭! 옷고름이 끌러지자 금방이라도 퉁겨날 듯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물론 그것은 붉은 색의 젖가리개에 감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 풍만한 느낌을 주었다. '오오! 신이여.' 범천은 정말 하늘에 엎드려 감사하고 싶었다. 그는 서둘러 여인의 젖가리개를 벗겼다. 그러자 여인의 젖가슴이 불쑥 그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는 숨이 턱 막혔다. 정말이지 백설보다 더 뽀오얀 유방이었다. 앵두 열매를 연상케 하는 분홍빛의 돌기는 마치 연지를 찍은 듯한 테두리를 하고 있었다. 범천은 여인의 유방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마침내 그의 손이 여인의 유방에 닿았다. 그 순간 범천은 까무라치는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살결의 부드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범천은 자신의 몸 한 부분에서 뜨거운 무엇이 분출하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무리 제어하려 해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으음!" 그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찢어발기듯이 여인의 옷을 모두 벗겼다. 여인은 순식간에 나신이 되고 말았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 백설 위에 누워 있었다. "흐으......!" 범천의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은 한 곳에 붙박힌 지 오래였다. 그곳은 은은한 흑갈색의 털로 뒤덮인 여인의 삼각지대였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비경이었다. 도무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바지를 까내렸다. 그의 물건은 이미 성날대로 나 있어 미리부터 용두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여인의 나신 위에 자신의 하반신을 실었다. 그때였다.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이군. 이런 곳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니." "헉!" 범천은 다급한 신음을 발했다. 싸늘한 음성은 바로 뒷전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범천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온몸이 얼어 붙었다.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장포를 휘감은 두 명의 괴인이 서 있었다. "으으! 저, 저는 단지......." 범천은 다시 입술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목에 선뜻한 칼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흰 칼날이 번쩍인 순간 그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악!" 범천은 자신의 목이 동강난 줄만 알았다. 그때였다. 또 다시 그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흐흐! 이런 겁쟁이 같으니. 멍청한 놈아! 네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으으으!" 범천은 이빨을 맞부닥치며 눈을 떴다. 아닌게 아니라 자신의 목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단지 한 자루의 서슬퍼런 칼날이 목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두 흑포괴인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의미있는 눈빛을 주고 받았다. "크크흐! 이거 재미있겠는 걸?" 한 괴인이 그렇게 말했다. 이어 범천의 목에 검을 들이댄 자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어서 하던 짓을 계속 하라구. 그럼 살려주마." "헉! 하, 하지만......." 범천은 사색이 된 얼굴로 흑포괴인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이지 이제 그가 바랄 것은 두 괴인의 자비심밖에 없었다. 그의 물건은 아주 볼품없이 되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힘차게 끄덕이고 있던 그것이 형편없는 자라목이 되어 있었다. "빨리 하던 짓을 계속하라니까." 괴인의 음성과 함께 그의 목으로 검날이 파고 들었다. "으아악! 제, 제발!" "어서 하라니까!" 괴인은 느닷없이 발로 범천을 걷어찼다. 그 바람에 그는 여인의 아랫도리에 고개를 처박고 엎어졌다. '헉... 흡!' 그는 숨이 막혔다. 공교롭게도 여인의 아랫배에 코와 입이 박힌 것이다. 이상하게도 향긋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담이 큰 작자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사족을 못쓰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심약하기 짝이 없는 범천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불행하게도 한 번 기가 죽어버린 범천의 물건은 두 번 다시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쓸모 없는 놈, 꺼져라!" 살기어린 음성이 터졌다. 그 순간 범천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크악!" 범천은 어느새 복부가 터진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그는 허공을 날아 오 장 밖의 거리에 떨어졌다. 그가 떨어진 곳은 가파르게 경사진 곳이었다. 데구르르....... 범천은 얼어붙은 눈 위에 시뻘건 피를 칠하며 아래 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정말이지 재수가 없어도 지독히 없는 날이었다. 범천은 괴인의 단 일 장에 혼백을 구천으로 날려보내고 만 것이다. 두 명의 흑포괴인은 범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전라의 여인에게 눈을 돌렸다. 검을 뽑았던 괴인이 검을 치켜 들었다. 그는 대단히 성미가 급한 것 같았다. "처치해 버리지." 그때였다. 옆의 동료가 불현듯 손을 저었다. "아니야. 잠깐만 기다리라구. 이 계집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 검을 든 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후후! 기왕 죽일 계집인데 한 번씩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지. 어때?" 그 유혹은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마침내 검을 들고 있던 자는 손을 내렸다. "꿀꺽!" 한순간 그의 목구멍에서 마른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흰 눈 위에 전라의 여인이 누워 있는 모습은 폭발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크크크! 백설 위에서의 정사란 말이지!" 그는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④ 눈 덮인 대지 위에 모닥불을 피운 후 고기를 익히는 것은 매우 낭만적인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더욱이 흐르는 구름처럼 정처없이 길을 떠도는 낭인에게는 그 시간이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시간일 터였다. 하지만 모든 계절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낭인들에게 좋은 계절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일 뿐이었다. 북방의 겨울은 낭인들에게 달갑지 않았다. 양식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계절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야생동물들에게도 배고픈 계절에 속했다. 더구나 며칠이고 폭설이 내린 날에는 먹이를 구하지 못한 야생동물들이 무작정 인가로 내려오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낭인들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에게도 겨울은 고달픈 계절임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단목우는 바람이 타지 않는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모닥불을 피우고 익숙한 솜씨로 토끼의 가죽을 벗겨냈다. 토끼는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았다. 꽤 큰 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쩍 말라 있었다. 그야말로 기름덩어리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단목우는 알고 있었다. 기름기 없는 고기는 먹어봐야 더욱 허기가 질 뿐이다. 그는 경험으로 미루어 이럴 때는 고기 중에서 기름이 붙어있는 부분만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목우는 토끼의 뒷다리 두 개를 뜯어 불 위에 얹었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던져버렸다. 타탁... 탁! 모닥불은 세차게 타올랐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토끼다리가 타지 않게 번갈아가며 뒤집었다. 고기 익어가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토끼의 뒷다리가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그는 군침을 삼키며 다리 하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쿵! 느닷없이 단목우의 머리 위로부터 육중한 물체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 단목우는 흠칫했다. 그 물체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낙상한 사냥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떨어진 사람은 분명 사냥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사냥꾼은 아랫도리를 벌거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엄동의 산중에서 사냥꾼이 아랫도리를 벌거벗고 있어야 할 일이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사냥꾼은 입과 코로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단목우는 사냥꾼의 맥을 짚어보았다. 사냥꾼은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낙상이 아니라 내가고수의 장력에 맞아 오장육부가 파열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 단목우는 산등성이 위 쪽을 바라보았다. 이어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모닥불 위에는 다 익은 토기 뒷다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란 놈은 먹을 복이 없는 모양이로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슈욱! 하는 파공성과 함께 단목우의 신형은 전광석화처럼 솟구쳐 올랐다. ⑤ "이제 그만 하라구. 나도 좀 즐기자구!" 바지춤을 움켜쥐고 씨근덕거리는 흑포인의 눈에는 욕정이 가득했다. "허, 허억, 아직 멀었다구. 허헉, 이 계집.... 뜻밖인 걸. 아직 깨끗해. 허억!" 흑포괴인은 전라로 누워 있는 여인의 두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걸쳐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하체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여인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젖무덤이 연신 출렁거렸다. 하지만 여인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는 자신의 순결이 무참히 유린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적당히 하라구, 도저히 못 기다리겠... 억!" 재촉하던 흑포인에게서 불현듯 목이 졸리는 듯한 괴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절정의 고지를 향해 올라가던 동료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으으윽!" 그는 참을 수 없는 괴성을 토해내며 여인의 둔부를 한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는 최후의 일격을 밀어붙였다. 그때였다. "친구. 이제 그만 하게." 그의 등 뒤에서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들렸다. "기다려... 이제 다 되었......?" 찰나지간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음성은 분명 동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사정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반쯤 분출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헉! 누구... 으악!"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대방이 동료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목은 깨끗이 잘려 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하반신은 여인의 다리 사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더러운 놈들!" 단목우는 싸늘하게 내뱉으며 발로 걷어 찼다. 목을 잃은 흑포괴인의 몸뚱이가 저만치 날아갔다. 단목우는 허리를 숙이고 여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너무 늦었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그녀는 심맥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또한 오장이 파열된 상태이기도 했다. 그것은 겁탈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겁탈 당하기 전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군. 악화된 내상으로 보아 꽤 오래전에 당한 것이 분명한데.......'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리며 여인의 손목을 놓았다. 문득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여인의 비부가 환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몹시 민망한 풍경이었다. 그는 즉시 옆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여인의 옷을 집어 몸을 덮어 주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여인의 유근혈(乳根穴) 부위를 가볍게 쳤다. "컥!" 여인은 전신을 부르르 떤 후 한 웅큼의 어혈을 토해냈다. 이어 굳게 감겨졌던 눈꺼풀이 조금씩 떼어졌다. "아!" 여인은 처음에는 몹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무엇을 느낀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단목우는 여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안심하시오. 소저. 소생은 적이 아니오." "......!" 한순간 여인의 눈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여인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고작해야 십칠팔 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록 절세미녀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흑흑!"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하체에 은은히 남아 있는 통증으로 미루어 이미 순결이 더럽혀졌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 단목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때는 어떤 종류의 위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단목우는 여인의 얼굴이 잿빛이 되는 것을 보았다. '틀렸군.'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 순간 여인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대협... 부, 부탁을......" 단목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에는 한 가닥 절박한 빛이 담겨 있었다. "아가씨를... 아아! 백화성 놈들이... 제발... 대협......." 여인의 음성은 잦아들고 있었다. 단목우의 눈이 커졌다. 그는 느닷없이 여인의 어깨를 흔들며 반문했다. "백화성이라고 했소?" "이곳에서 서쪽으로 삼십 리... 그곳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된... 아가씨께서는... 무림의 마지막 등불... 제발... 구... 구원의 손길을... 부탁......." 여인은 눈을 감지 못했다. 그녀는 애원의 빛을 담은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 단목우의 가슴이 무섭게 박동했다. 혈관을 따라 피가 무섭게 빠르게 돌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모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다시 일에 말려들란 말인가? 이제 간신히 하나의 일을 뿌리쳤는데... 또 말려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낮게 탄식했다. "미안하오. 낭자. 난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소." 단목우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인 말고도 두 구의 시신이 눈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사나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시신들을 내려다 보던 그의 눈에 문득 서글픔이 어렸다. 그는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아! 어찌하여 당신은 자꾸만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오? 한때는 당신을 세상 누구보다도 존경했었소. 당신의 명이라면 설사 목을 바치라 해도 서슴없이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던 이 단목우란 말이오. 그러니 제발 나를 실망케 하지 마시오.' 휘이이잉....... 습기를 머금은 삭풍이 휘몰아쳤다. 다시 폭설이 내릴 징조였다. 단목우는 슬픈 눈으로 여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인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잠시 후 그는 양지 바른 곳에 구덩이를 파고 여인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 단목우는 새로 생겨난 무덤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불현듯 그의 뇌리에 한 쌍의 청순한 눈망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눈망울의 주인공은 바로 왕옥산의 모옥에 살던 소녀였다. 문득 단목우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아! 어쩔 수 없군. 서쪽이라고 했던가?" 파스슷! 단목우의 신형이 날아갔다. 그가 신형을 날린 곳의 바닥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으나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제5장 · 뜻밖의 구원자(救援者) ① 태행산(太行山) 기슭에 위치한 죽림 속이었다. 일단의 인물들이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여섯 명이었다.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무림인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가장 연장자인 듯한 인물조차 삼십 세를 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여인을 호위하는 자세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인은 자색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따라서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미발을 허리까지 가지런히 묶은 것이나 다소 큰 키에 미끈해 보이는 몸매로 미루어 보건데 결코 평범치 않는 용모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면사는 얼굴의 아랫부분만을 가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인의 반듯한 이마와 한 쌍의 봉목(鳳目)은 노출된 상태였다. 여인의 드러난 두 눈동자는 샛별처럼 초롱했다. 뿐만 아니라 그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 여인은 봉황을 닮은 눈을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마치 상처입은 들짐승들 같았다. 여인의 눈에 은은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어 있는지를. 그것은 바로 무림을 위한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하나의 명분일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저들은 그녀 때문에 고통을 말없이 감수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전멸일 뿐이야.' 여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리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여인은 중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소녀의 말을 들으세요."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산중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처럼 서늘했다. 중인들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이지 그들은 사경(死境)을 헤멘다고 해도 그 음성을 듣기만 하면 새로이 소생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만큼 여인의 음성은 맑고도 서늘했다. 여인의 음성이 청년들의 심금을 낭랑하게 파고 들었다. "이 상태로 가면 우리는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거예요." 그 순간 청년들의 눈에 비장한 빛이 흘렀다.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부소저(夫少姐)!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소. 애당초부터 그런 졸장부였다면 부소저를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는 이십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남삼을 입은 그 청년은 등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정기로 인해 매우 반짝였다. 기세가 매우 헌양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오른쪽 가슴이 문제였다. 찢긴 남삼 사이로 칭칭 감은 붕대가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시뻘건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년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청년들이 대동소이했다. 어떤 청년은 팔이 하나 잘려 나갔는가 하면, 또 다른 청년은 한쪽 다리가 피투성이기도 했다. 부소저라 불리운 여인은 탄식했다. "아아! 물론 남대장(南隊長)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예요.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곳을 탈출해서 그 예물을 황산(黃山)까지 가지고 가느냐 하는 것이에요." "......." 남대장이라 불리운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여인의 말은 맞았다. 이제는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남대장은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한 자 가량의 목괘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말을 이었다. "철혈부(鐵血府) 와룡선생(臥龍先生)과의 회합은 성공적이었어요. 본회와 그들과의 연맹을 위해 예물을 교환함으로써 당분간 연계체계는 공고해질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나 놈들은 미리 그런 정보를 알고 있었어요. 회합을 마치고 헤어지는 마당에 기습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마침 우리 측에서도 철혈부에서도 이십 인으로 회합인원을 제한한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여인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아마 놈들도 그 점을 노렸을 거예요. 현무단이 출동한 것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빠져 나가야만 해요. 만일 와룡선생과 교환한 예물을 탈취 당한다면... 그 후의 사태는 불을 보듯이 뻔해요." "......." 청년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예물에는 본회와 철혈부 측의 세간 요원들의 명단이 적혀 있어요. 그것은 상호 약점을 교환함으로써 공동선전을 펴는 데 성의를 다한다는 약조의 표시예요. 그러나 이것이 흘러나가 적이 이용하게 된다면 이간책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모처럼만의 금란맹(金蘭盟)의 서약이 깨어지고 무림은 다시 분열되어 놈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될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물을 안전하게 황산으 로 가져가야 해요." 여인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청년들은 여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여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이 중요한지 여러분께서는 충분히 아실 거예요." "......?" 청년들의 얼굴에는 의아한 빛이 어렸다. 여인은 그런 청년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훑어본 뒤 말했다. "이제부터 제가 내리는 지시에 여러분께선 무조건 따르셔야 됩니다. 그것은 무림을 위하는 길이에요." 청년들은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우선, 놈들은 아직도 금란맹의 서약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모르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예물 교환에 관한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있어요.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놈들의 목표는 바로 저에게 국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여인의 봉목에서 음성만큼이나 서늘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눈빛을 대하는 청년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인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새 여인을 바라보는 청년무사들의 눈에는 존경의 빛과 함께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우선 우리 측의 대오를 둘로 나누어야 해요. 남대장은 이곳에 남아 예물을 지키세요. 그리고......." 여인의 입에서 거침없이 지시가 흘러나왔다. "이제 저와 함께 가실 분들은......." 여인은 청년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호명했다. 여인은 열여섯 명의 청년들 중에서 여덟 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자기를 따르는 청년들을 두 패로 나누었다. 호명에 의해 선발된 청년들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역력했다. 그들은 여인과 함께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따위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호명에서 제외된 청년들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인은 마지막으로 남대장에게 명령했다. "남대장께서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해요. 적들은 잠시 후 이곳에 당도할 거예요. 그러나 절대로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곳에 하나의 진을 설치하여 그들이 남대장 일행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손을 쓰겠어요." 여인은 몸을 일으켰다. "이 죽림은 진법을 설치하기에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절 도와 주셔야겠어요." 이어 여인은 청년들을 지휘하여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죽림 속에는 하나의 진(陣)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대나무와 난석(亂石)을 이용한 진세였다. "이 진법은 무형미미정반대진(無形迷迷正返大陣)이라고 해요. 이곳에 숨어 있는 한 최소한 일 주일간은 안전할 거예요. 남대장은 이곳에 숨어 있다가 칠일 후 진법을 해제하고 황산으로 가세요." 남대장이라 불리운 청년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떠올랐다. 청년은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소저......." 여인은 생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제게는 자신을 지킬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이후 황산에서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손을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해요." ② 단목우는 신형을 날리다가 흠칫했다. 그는 급히 숲으로 내려서며 몸을 숨겼다. 몇 줄기의 흑영이 숲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단목우는 몸을 숨긴 채 흑영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흑영은 숫자가 많았다. 줄잡아 수십 명이 넘었다. '역시 그랬었군.' 우려했던 대로였다. 그는 흑영들의 정체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들은 바로 백화성의 정예무사들이었던 것이다. 흑영들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 태행산 일대는 어느덧 그들과 동류인 흑영들로 인해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흑영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한 곳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가는 형국과도 같았다. '분명 저 앞쪽에 무엇인가가 있다.' 단목우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스스스....... 그는 신형을 빨리했다. 단목우는 순식간에 흑영들의 머리를 뛰어 넘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는 자는 없었다. 그만큼 단목우의 신법은 신출귀몰했다. 얼마쯤 흑영들을 앞질러 가던 단목우는 갑자기 신형을 틀었다. 이어 그는 가까이에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 쏜살같이 치솟아 올랐다. "......." 단목우는 산봉우리 위에 우뚝 섰다. 그는 함성이 들리고 있는 계곡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서야 단목우의 시야에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산곡으로 백여 명의 흑영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들은 여섯 명의 인영들을 쫓고 있었다. 그 광경은 토끼사냥을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쫓기고 있는 토끼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단목우는 잠시 형세를 가늠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지혜무쌍한 자가 있군." 맞는 말이었다. 단 육 인을 일백 여명이 넘는 흑영들이 쫓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것은 가망이 없는 도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주하고 있는 자들은 유유자적했다. 그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도주하는 와중에서도 기묘한 공격법으로 추적자들을 기습했다. 게다가 그 기습은 뜻밖에도 큰 성과가 있었다. 도주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추적자들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사인은 추적자에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도주하는 동료들을 호위하며 몸을 숨기고 있다가 불시에 공격을 가하고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도주자들은 매번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리어 뒤쫓는 흑영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단목우는 다시 안력을 돋구었다. 그때서야 좀더 또렷하게 쫓기는 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도주자들을 육 인으로 보았던 것은 잘못이었다. 두 사람이 중심인물인 듯한 자의 곁에 바짝 붙어있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을 지휘하는 중심인물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여인은 일신에 자의를 입고 손에는 하나의 작은 삼각기를 들고 있었다. 여인이 삼각기를 흔들 때마다 도주자들의 행보가 바뀌었다. 그들은 여인의 깃발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공격과 후퇴를 거듭했다. 그것은 차륜전법을 변형한 것이다. 즉 도주자들은 체력을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극도의 공격 효과를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차륜전법은 다수가 소수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전법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것을 역이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주하는 와중에서도 지형지물의 잇점을 살려 소수로 다수를 치고 있었다. 단목우는 그 광경을 살펴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여인은 대체 누굴까? 무림에 저토록 지혜로운 여인이 있었다니.' 그때였다. 맞은 편 산곡을 살피던 단목우의 눈이 불현듯 빛났다. 산곡 맞은 편에 몇 명의 인물들이 숨어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자는 바로......!' 한순간 단목우는 놀랐다. 이어 그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③ 현무단주 냉보인은 짜증이 났다. "빌어먹을! 내가 직접 나서야 하다니!" 냉보인은 산곡 아래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그는 이곳으로 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현무단의 수하들을 동원하는 것으로 그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박뇌환자 숙야풍은 그가 직접 나서도록 명령을 내렸다. 숙야풍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백화성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그러나 냉보인의 마음 속에는 은연중 숙야풍을 깔보는 심사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현무단원들을 이끌고 직접 공격에 가담했다. 냉보인은 이번 일을 쉽게 성공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을 아주 쉽게 산곡 안으로 유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예상 밖으로 도주자들의 저항이 완강했다. 냉보인은 만박뇌환자의 부탁도 있었기에 특별히 고른 정예고수 백오십 인을 이곳에 투입했다. 속전속결로 임무를 끝낼 욕심에서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만박뇌환자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덧 수하들이 삼십여 명이나 쓰러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피해는 미미했다. "으음!" 산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냉보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때서야 상대방을 너무 과소평가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간과할 수가 없었다. 설사 작전이 성공했다 치더라도 희생자가 많이 난다면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만박뇌환자의 콧대를 꺾을 기회를 놓치고 마는 꼴이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옆에 매복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가라! 총력전이다." 휘익! 말과 동시에 그는 신형을 날렸다. "서문소협! 우측 오 장 밖 바위!" 여인은 삼각기를 흔들며 소리쳤다. 서문출은 즉시 그녀의 지시대로 신형을 날렸다. 여인은 다시 전진했다. "......!" 서문출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이번에는 그가 뒤처져 있다가 적들을 거꾸러뜨릴 차례였다. 그는 이런 공격을 여섯 차례나 성공했다. 그는 이번에도 필살의 확신을 가졌다. 서문출은 검을 안고 적당한 순간 포착을 위해 숨결을 가다듬었다. 휙! 문득 바로 옆에서 바람 소리가 일었다. 그는 검을 움켜 잡았다. '단칼에 베어야 한다.' 서문출은 생각과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는 섬ㅉ한 느낌이 등 뒤로 파고 드는 것을 느꼈다. 찰라지간 그의 귓 속으로 하나의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가소로운......."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음성이었다. 어느새 서문출의 등 뒤에는 두 자루의 검이 꽂혔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산곡 입구 쪽만 경계했다. 설마 그의 등 뒤에 적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크으!" 서문출은 피를 토해내며 벌렁 쓰러졌다.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그의 시야에 검은 인영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서문출은 입술을 달싹였다. "안... 돼......." '어... 어찌된 일이지?' 여인은 곤혹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이제 자신의 곁에 남은 자는 불과 세 사람 뿐이었다. 그것은 뒤로 처져 기습을 하기로 되어 있는 청년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병술이 적에게 포착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일이야. 너무 빨라!' 그녀는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심중을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남아 있는 세 청년들의 용기를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청년들은 삽시간에 전의를 상실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적들이 누구인가를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능력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빠져나갈 책략을 치밀하게 세웠다. 그 책략이 성공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자신의 병술이 간파될 줄은 몰랐다. 놈들은 예상보다 훨씬 치밀하고 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순간 그녀는 근심에 사로잡혔다. 불현듯 무형미미정반대진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을 청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여인은 힘을 내어 앞으로 치달렸다. 앞 쪽 십 장 거리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빨리 저쪽으로!" 여인을 앞서가던 남은 세 명의 청년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여인도 경신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숲쪽으로 날아갔다. 일단 숲으로 들어선다면 다른 방책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심사였다. 여인은 급히 숲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때였다. "캑!" 느닷없이 단말마의 비명이 연이어 울려퍼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숲으로 막 뛰어들던 청년들의 비명이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여인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아!" 숲에 내려선 여인은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발 아래 쓰러져 있는 세 구의 시신 때문이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호위해 주던 청년들이었다. "으음!" 문득 여인은 신음을 토해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암흑마신인 양 그녀를 가로막고 서 있는 두 개의 흑영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인을 노려보는 두 흑영들의 눈에서는 가공할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흐흐흐!" 두 흑의인은 괴소를 흘렸다. 그들은 냉보인의 수하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었다. 여인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지금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아!" 그녀는 절망의 탄식을 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라." 음침한 음성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번쩍! 두 흑영은 동시에 검과 도를 날렸다. 여인은 그 공격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두 눈을 질끈 감는 것 뿐이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악!" 느닷없이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길게 울리는 것이 아닌가? "......?" 여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목을 치려던 두 흑영이 목에서 시뻘건 피를 뿜으며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앗, 누구?" 그녀는 경악성을 발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안았기 때문이다. "쉿! 조용히.... 적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귓전에 한 사내의 음성이 낮게 울렸다. 그 뿐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쌔애액! 바람이 귓전을 스치는 음향만이 들렸다. 누군가 그녀를 안고 날아가고 있었다. 이따금 호통과 비명이 그녀의 귓가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안고 달리는 자가 옷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휙휙!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④ 인간은 늘 어둠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상징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어둠을 죽음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익숙한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인간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 죽음과도 같은 공포심을 맛보는 것이다. "......!" 여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어둠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녀가 두려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또한 그녀는 세상에서 알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중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러한 사실이 그녀를 더욱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녀는 느낄 수는 있었다. 자신을 구한 상대방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었다. 아니, 어둠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눈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에 익숙해지는 법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놀란 의식상태가 어둠 속의 환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여인이 있는 곳은 칠흑같은 어둠 속이기는 했다. 그것은 이곳이 깊이 들어간 산동(山洞) 속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본래 인내심이 강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어둠과 침묵은 그녀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누... 누구죠?" 여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둠 속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말해도 모를 것이오. 다만 이곳도 안전한 곳은 못되니 조심해야 하오." 그것은 분명 사내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상대방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여인은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몇 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상대방이 수없는 혈전을 벌였다는 것 뿐이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상대방의 무공은 무척이나 높은 것이 분명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 여인의 공포심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여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의 창고를 헤집어 보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그녀는 다시 입을 열려 했다. 그때였다. "쉿, 적이 왔소. 입을 다무시오." '......!' 여인은 또다시 놀랐다. 분명 자신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이 입술을 벌리려는 것까지도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상대방이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어서 옷을 벗으시오. 시간이 없소." '오, 옷을?' 여인은 경악했다. 상대방이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재촉은 그녀에게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빨리 옷을 벗으시오!) 그것은 전음이었다. 전음이긴 하였으되 그것은 귀가 울릴 정도로 큰 전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옷을 벗지 않았다. 아니, 벗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자신의 속살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말에 따라 무작정 옷을 벗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때였다. "여기 동굴이 있다!" 문득 동굴 밖에서 날카로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척이 들렸다. 여인은 몸을 잔뜩 움추리며 긴장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재빠른 전음이 들려왔다. (정 벗지 않겠다면 내가 벗겨 주겠소.) 전음이 끝나는 순간 무엇인가가 번뜩하고 어둠 속에서 작렬했다. '앗!'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옷은 아래에서 위까지 반 조각이 난 뒤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한 자루의 검날이 그녀의 옷을 깨끗이 자른 것이다. 그것도 속곳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피부 한 점도 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잘라진 옷을 여몄다. 그때였다. "안을 수색하라!" 누군가의 음성과 함께 동굴 입구로부터 화섭자가 켜졌다. 비스듬히 구부러진 앞쪽으로부터 희미한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 거리는 대략 십오 장쯤 되었다. "아!" 여인은 그때서야 자신이 동굴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이 누구를 찾는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여인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준 누군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다급한대로 여인은 좌우로 벌려진 옷자락을 붙잡고 급히 모퉁이로 숨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이 서서히 다가왔다. 불빛과 함께 들어오고 있는 것은 두 개의 그림자였다. "......!" 불빛이 가까이 올수록 여인은 간이 콩알만하게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급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저들은 그것을 눈치챌 것이 틀림없었다. 저벅저벅! 일렁이는 불빛이 점차로 밝아지면서 그에 따라 동굴 속을 울리는 발자국소리도 커졌다. '어, 어쩌지?' 그녀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이제 유일한 방법은 벌거벗은 몸을 동굴 벽에 찰싹 붙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저들이 그녀를 바위로 착각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그녀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으음!"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절망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느닷없이 일렁이는 불빛 위로 하나의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찰라지간 여인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그림자는 두 사람을 쓰러뜨리는 순간 재빨리 화섭자를 꺼뜨렸다. 그녀의 눈에 어리고 있던 화섭자의 불빛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어느새 그 그림자는 쓰러진 두 사람의 흑의를 벗겨낸 후였다. 그녀는 그때서야 자기를 지켜주던 상대방이 사라진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왜 옷을 벗으라고 했는지도 깨달았다. 휙! 가벼운 바람소리와 함께 벗겨낸 옷이 날아왔다. "빨리 입으시오." 여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껴입었다. 그런 와중에 잠깐 후회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진작 사나이의 말에 따라 옷을 벗었다면 속곳까지 잘리는 불운은 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자 깨진 쪽박이었다. 그녀는 급히 흑색의 장포를 걸쳤다. 그것은 여인의 몸에 비해서는 너무 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대충 옷깃을 여몄을 때였다. 하나의 손이 뻗어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따라만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셈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손에 손목을 맡긴 채 동굴 입구를 향해 걸어나갔다. 동굴 입구는 희미한 박명(薄明)이 깔려 있었다. 어느새 밤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에게는 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동굴 밖에는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서 있었다. "어떤가?"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아무도 없었소." 사나이가 말했다. "가자!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향해 물은 자가 외쳤다. 휘휙! 일행은 즉시 신형을 날렸다. 이상하게도 여인은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공포심을 싸그리 잊어버린 후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달리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불현듯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달리는 자는 뜻밖에도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다소 창백하게 느껴지는 안색이었다. 그런 한편 매우 수려하기도 했다. 특히 창백한 이마 아래 자리한 그의 두 눈은 산중의 호수처럼 서늘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그녀는 청년의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사나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아직 위험을 벗어나지 않았소." "......!" 여인은 다소 실망했다. 사나이가 의외로 무뚝뚝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망감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감정의 사치였다. 그러나 여인은 개의치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평상심을 회복한 후였다. 아니, 그것은 평상심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청년을 의지하고 있었다. 일행은 잠시 후 한 산 언덕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사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모여 있었다. 짙어가는 어둠을 틈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 시각 현무단주 냉보인은 초조한 기분으로 한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단어였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그의 심정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말이 있다면 바로 오리무중이었다 냉보인은 정말로 짙은 안개 속에 서 있는 듯 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년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표적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늘로 솟았단 말인가? 아니면 두더지처럼 땅 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냉보인은 고개를 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느덧 태행산은 깊은 어둠에 감싸이고 있었다. 한 식경 전 까지만 해도 손에 잡힐 듯 하던 표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표적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가 도망치는 여인을 뒤쫓아 숲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니, 그때까지는 늦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이 삼 인의 시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여인을 호위하던 자들의 시신이었다. 그 시신을 발견한 순간 냉보인은 내심 쾌재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 쾌재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분명 여인을 사로잡았을 것이라고 믿었던 두 부하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기가 찬 것은 시신이 된 그 두 사람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냉보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수하들을 독려하여 태행산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행방은 지금까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다시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짙어가는 어둠따위는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찾아라! 필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휘익... 휙휙! 산 언덕에 모였던 수하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현무단주 냉보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내린 명령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산등성이를 향해 쏘아가고 있는 수하들 중에 그가 찾고 있는 표적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⑤ "하악!" 여인은 내처 달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무공은 사내들 못지 않았다. 사내들이 괜히 여인이라고 얕보았다가는 큰 코 다칠 정도의 상승의 무공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몹시 지친 상태였다. 그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끌려가다시피 한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살펴주고 있다는 안도감이 긴장감을 쉬이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여인은 정말이지 더 이상 달려갈 기력이 없었다. 어느덧 그녀는 숨이 콱콱 막혀왔다. 그때였다. "앗!" 여인은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청년이 그녀의 옆구리를 안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청년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휙휙! 세찬 겨울바람이 여인의 뺨을 스쳤다. 한동안 힘겹게 달렸기 때문일까? 여인은 까닭모를 상쾌함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바람을 가르며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이 쓰여졌다. 갑자기 자기가 속곳조차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옷은 헐렁한 흑의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 와중에 청년의 손이 자신의 가는 허리를 안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두터운 가슴이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젖가슴을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여인은 다급히 소리쳤다. "됐어요! 그만 내려 주세요." 그러나 청년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그는 여인을 내려놓기는커녕 그녀의 아혈(啞穴)을 짚어버렸다. '이럴 수가!' 여인은 경악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혈을 짚였으므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불현듯 그녀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앙탈을 부리지는 않았다. 앙탈을 부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서 청년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별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인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다는 심정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기도 했다. 휘휘휙!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청년은 암천을 가르는 유성처럼 어둠에 싸인 대지를 치달렸다. 정녕 꺼리낄 것이 없는 신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그녀는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잠잠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여인의 발이 땅바닥에 닿으면서 동시에 아혈이 풀렸다. 그녀는 급히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죠?" "몰라도 되오." 청년의 대답은 짧았다. 한순간 여인은 할 말을 잊었다. 그녀는 멍하니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처음으로 청년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이곳은 사방이 꽉 막힌 동굴 속이 아니었다. 비록 달빛은 없었으나 그녀는 청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무공을 익혔다면 흐릿한 별빛만 있어도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느닷없이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희미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청년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순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한 감정은 일종의 슬픔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은 장발의 청년이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청년의 얼굴을 가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묘한 슬픔을 느낀 것은 흑발 때문이 아니었다. 흑발 사이로 드러난 청년의 두 눈동자. 마치 가물거리는 별빛을 닮은 청년의 서늘한 두 눈동자가 묘하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 슬픔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바로 단목우였다. 여인은 단목우의 눈빛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는 넋을 잃은 듯 단목우를 응시했다. "......." 단목우도 여인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마음 속에 한 가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무엇 때문에 백화성에게 쫓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목우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몸을 돌리며 짧게 말했다. "갑시다." "어... 어디로요?" 느닷없는 단목우의 말에 놀란 여인이 물었다.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소. 그들의 추적은 교묘하고 집요하오. 더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하오." "하지만 어떤 곳으로......?" 여인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그럼 여기 이대로 있을 작정이오?" 단목우의 말에 여인은 얼굴을 붉혔다. 불현듯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바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어찌된 셈인지 단목우를 만난 순간부터 그녀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단목우가 그녀를 덥썩 안았다. "왜, 왜 이러는... 읍!" 그녀는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단목우가 그녀의 아혈을 짚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인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로 한 시진 가량 달렸을 때였다. 단목우의 눈에 몇 채의 인가가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 그 마을은 전형적인 농가로 보였다. 그는 서서히 신형을 늦추었다. 잠시 후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한 그루의 나무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는 여인을 나뭇가지 사이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당신이 입을 만한 옷을 찾아 오겠소." '안 돼요! 난 높은 곳은 질색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여인의 음성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여전히 아혈을 짚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녀는 높은 곳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세, 세상에!' 그녀는 단목우의 신형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뭇가지를 붙잡고 이를 갈았다. 그 사나이를 만난 이후 무엇 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름이 오싹 끼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일 청년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높은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채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녀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조차 망각해 버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나무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문득 그녀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한낱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일각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제는 귀에 익어버린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입으시오. 다행히 여인의 옷이 있었소. 헐렁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오. 그래도 냄새나는 사내의 옷보다는 나을 것이오." "......!" 그녀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 바람에 눈꺼풀 속에 고여있던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여인은 청년이 내미는 옷을 보았다. 그것은 농부의 아낙네들이 입는 허름한 옷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지나치게 컸다. 자신이 입으면 아예 장포같은 느낌을 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뭘하고 있소? 어서 갈아입지 않고." 청년이 재촉했다. 그녀는 기가 막혔다. "여, 여기서요?"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런 그녀의 음성에는 싸늘한 오기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나무 위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남자가 바로 옆에 있거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단목우는 그녀의 내심을 파악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난 보지 않소. 그러니 안심하고 갈아 입으시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여인은 비명처럼 외쳤다. 물론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심으로 소리쳤을 뿐이다. 단목우는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빈정거렸다. "여체가 그리우면 기루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소.." "......!" 그의 말은 여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었다. 여인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을 하겠는가? 어쨌든 간에 지금은 그녀가 참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날이 샐 때까지 나무 위에서 벌벌 떨고 있어야 할 판국이었다. 결국 그녀는 나뭇가지를 의지해서 냄새나는 흑의를 벗었다. 어둠 속에서 속곳조차 걸치지 않은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재빨리 농복을 입었다. 농복의 주인은 엄청나게 큰 덩치를 지닌 여인인 듯 싶었다. 농복은 어찌나 큰지 끈으로 옷깃을 동여매도 앞섶이 벌어질 정도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유방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손으로 앞섶을 꼭 모아쥐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지금 그녀의 앞에 동경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면 기절초풍할 것이 틀림없었다. 여인은 앞섶을 거머쥐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되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단목우는 그녀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다시 허리를 안았다. 이어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이제 또... 어디로 가는 거죠?' 여인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녀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말을 내뱉는 순간 아혈을 짚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제6장 · 흔들리는 여심(女心) ① 진성객점(晋城客店)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시설이 형편없는 곳이었다. 단목우가 여인과 함께 그곳에 든 시각은 여명이 뿌옇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그는 객점에 들기가 무섭게 잠에 골아 떨어진 객점주인을 깨웠다. 그리고 방 하나와 음식을 주문했다. 정말이지 그의 뱃가죽은 등에 가서 붙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삼 일 전부터 먹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우 어제 오후 무렵 비쩍 마른 토끼 하나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을 뻔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림의 떡이 되어 버렸다. 그것을 먹으려는 순간 낯선 불청객의 훼방을 받은 것이다. 그 불청객은 내장이 터져 즉사한 사냥꾼이었다. 그것이 이번 일의 시작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번 일의 시작은 왕옥산에서 일어난 한 소녀의 죽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 급한 것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삼 일 이상을 굶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는 여인을 구한 후 밤길을 달려오느라 진력을 거의 소모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객점은 별 볼일 없었으나 먹을 것만은 푸짐했다. 아니 처음 단목우는 객점이 별 볼일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허기진 눈에 도대체 무엇이 보이겠는가 말이다. 어쨌거나 객점 주인은 그 두 사람에게 특별한 요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바로 팔진(八珍)이라고 불리우는 요리였다. 물론 주인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서 그 요리를 특별히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 음식은 얼마 전에 마을의 잔치에 쓰고 남은 것이었다. 단목우는 그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여인은 겨우 고기를 한 두 점 집어먹고는 저를 놓고 말았다. 도저히 객점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식사를 마친 단목우는 곧 객실로 들어갔다. 그것은 두 평도 채 안 되는 방이었다. 게다가 아무나 잠을 자는 곳이라 지저분하기가 짝이 없었다. 도대체가 주인이 그곳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치우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고약한 냄새까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여인은 처음 그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정말이지 그것은 객실이라고 하기보다는 돼지우리라고 하는 편이 알맞았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틀림없이 옳았다. 하지만 단목우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객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아직도 문가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한 마디 내뱉았다. "주무시오." 그것 뿐이었다. 단목우는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그 순간 여인에게 참으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새 여인은 자신이 황실의 어떤 방보다 화려해 보이는 방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단목우의 서늘한 눈빛을 보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단목우가 단 한 마디를 내뱉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장발 사이로 빛나는 그의 눈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화려한 방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청년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침상에서 잠들어 있었다. 웅크리고 잠든 청년을 보는 순간 그녀는 무한한 동정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청년을 향해 다가갔다. "여, 여보세요." 그녀는 섬섬옥수를 뻗어 사나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인은 다시 입을 떼었다. "여보세요. 주무세요?" 그제야 사나이는 눈을 떴다. 그때였다. 여인은 문득 사나이의 눈이 서늘하도록 맑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눈이었다. 하지만 사나이는 곧바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귀공자들을 만나 보았다. 아니, 그녀는 같은 여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남자들을 대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그녀에게 무한한 찬사와 애정을 갈구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이 거지발싸개같은 사나이는 그녀에 대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여인은 마침내 인내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어떤 귀공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존심을 이렇게 짓밟은 자는 없었다. 여인의 어감이 높아졌다. "이것 보세요!" "......." 귀찮아하는 듯한 사나이의 눈이 다시 뜨여졌다. 그녀의 눈과 사나이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바로 그 순간 여인은 그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여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제발 아혈은 짚지 마세요. 저도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에요." "......." 단목우의 눈이 다시 감겼다. 여인은 황급히 입을 떼었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궁금증이에요. 전 답답해 죽을 지경이에요. 당신이 누구인지, 또 저를 아는지, 알면 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단 말이에요. 대체 뭐죠? 당신은 뭐죠?" 그러나 사나이의 감긴 눈은 더 이상 떠지지 않았다.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제 얼굴이 보기 싫은가요? 왜 자꾸만 눈을 감죠?" 그러자 뜻밖에도 사나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도 남자요. 그렇다고 내가 도인인 줄 아시오? 나도 미인을 보면 품고 싶은 욕망이 있소." "......?" 여인은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단목우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왜 보기 싫겠소? 특히나 당신같은 미인이 그런 차림으로 날 깨우면 자꾸만 충동이 생긴단 말이오.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꾸 보고 싶어지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이오." 여인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차림을 살펴 보았다. '앗!'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농복의 앞섶이 슬며시 벌어져 백옥같은 젖가슴이 반 이상이나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그녀의 얼굴은 대번에 숯불을 끼얹은 듯이 벌개졌다. "그러니 아무 소리말고 잠이나 자시오. 잠시 후 또 길을 가야 할테니까." "하지만 잠이 와야 자죠. 더욱이나 이런 방에서......." 여인은 객실 안을 돌아보며 입을 삐죽였다. 그 순간 사나이가 벌떡 일어났다. 여인은 깜짝 놀랐다. "무, 무엇 하시려고......." 여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나이의 손이 그녀의 몸으로 뻗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워 주겠소." 찰라지간 그녀는 수혈(睡穴)이 짚히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침상 위로 쓰러졌다. 몽롱한 잠결에 사나이의 음성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제발 이제부터는 수다를 좀 줄이시오. 난 수다스런 여자를 보면 자꾸만 안고 싶단 말이오." ② 대황하(大黃河). 수만 년을 두고 도도히 흐르는 황하의 물빛은 거칠면서도 탁했다. 그러나 바로 그 물줄기에는 대륙의 웅장한 숨결과 드넓은 혼이 스며 있었다. 황하는 중원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말없이 그 영고성쇄를 지켜보며 흘렀다. 황하는 태초이래 인간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말없이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이 황하를 건너가고 건너온 수많은 인물들은 백골로 화한 후 진토가 되어 사라졌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군웅들이 나름대로의 생을 끝내고 그런 절차를 밟으며 삼천대천세계 속으로 소멸해갈 것이다. 그때도 황하는 여전히 흐르며 그들의 흔적을 말없이 지켜볼 것이 틀림없었다. 파라라라락....... 물보라를 흩날리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황하의 강변에 두 사람이 우뚝 선 채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자는 건장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바로 단목우였다. 단목우의 뒤편, 이장 쯤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것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삭풍에 옷자락을 날리는 사나이를 보면서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멋있어.......' 단목우는 옷자락과 함께 장발의 머리칼을 날리며 서 있었다. 웬지 그 모습에서는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언제나 제멋대로이면서 독선적인 사내.... 그러나 저이가 없었더라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여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여인의 생각은 옳았다. 단목우는 결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정하기는커녕 오만하고 도도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인의 마음을 녹이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여인은 단목우에 대하여 절로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곁을 맴돌던 수없이 많은 청년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는 그녀가 말이다. 황하를 바라보고 있던 단목우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여인은 얼굴을 붉혔다. 사나이의 눈길을 대하는 순간 웬지 모르게 가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단목우는 입을 열었다. "황하를 건너면 어느 정도 안전할 것이오.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도 앞으로 처신에 만전을 기하시오." 그 말에 여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설마 절 혼자 두고 가시려고요?"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그럼 혼자 놔두고 가지 데리고 살란 말이오?" 여인은 필사적인 기분이었다. "이것 보세요. 어떻게 연약한 여자 혼자 위험한 길을 가게 한단 말이에요? 더욱이 절 해치려는 자들이 있는 판국에......." 불현듯 단목우는 손을 뻗었다. 그는 여인의 어깨를 잡았다. "......!" 여인은 흠칫했다. 사내의 손이 어깨를 잡은 순간 그녀는 웬지 심장이 두근거리며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때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날 아시오?" 여인은 멍해졌다.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몰라요." 단목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나도 그대를 모르오.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내가 왜 그대를 호위해야 한단 말이오?" ".......!" 역습이었다. 여인은 한동안 멍청하게 사나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목우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인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밝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부상설(夫霜雪)이에요. 부상설. 이젠 절 아시겠지요?" "......?" "그리고 나이는 스물 하나구요. 아직 처녀예요. 고향은 산서(山西)구요." 부상설은 밝게 웃으며 입술을 놀렸다. 그녀는 조금 전 사나이의 희미한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단목우는 부상설의 검은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 보았다. 이어 그는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여인의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여인은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대담하게도 그녀는 눈을 빤히 뜬 채로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목우는 그런 부상설의 눈을 들여다 보며 입술을 살짝 갖다 대었다. 쪽!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부상설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단목우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머쓱해진 것은 단목우였다. 그러자 부상설은 입술을 그의 귓전으로 바싹 가져가며 속삭였다. "또 당할 줄 알았죠? 하지만 저의 장점은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단목우는 싱긋 웃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기분좋게 그의 코끝을 간질렀다. 그는 여인의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물었다. "당신의 목적지는 어디요?" 부상설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황산(黃山)예요. 물론 데려다 주시겠지요?" "으잉? 그 먼 곳까지?" 단목우가 두 눈을 치뜨며 놀란 듯이 물었다. 부상설은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쳤다. 그것은 너무나도 먼 길이었다. 산서성 황하에서 안휘성의 황산까지는 삼천 리가 족히 넘는 길이었다. 물론 그 길이는 일직선으로 계산했을 때의 길이였다. 따라서 관도와 험로를 따라 꼬불거리며 걸어야 했을 때에는 오천 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다. 사륜마차를 타고 하루도 쉬지 않고 주야를 내처 달린다 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방해자가 없을 때의 일이었다. 단목우가 이륜마차를 빌려 부상설과 함께 황산을 향해 출발한 지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그 여행은 그다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눈치를 챈 것인지 백화성의 미행이 줄기차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위험이 따르는 먼 길을 동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서로가 잘 알아야 하며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상대가 이성일 경우라면 그 사이에는 반드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관도를 따라 달리고 있는 마차 안의 남녀는 그런 규정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모든 규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단목우의 일방적인 독단 때문이었다. 그는 동행길 내내 부상설의 궁금증을 하나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단목우에게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캐물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쾌한 해답을 듣지 못했다. 아니, 그는 부상설의 질문에 단 한 차례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그에 대하여 묻는 것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묻느니 차라리 갈대밭에 땅을 파고 그 속에다 고함을 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바람에 몸을 흔드는 갈대의 반응은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그 이후로 묻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를 믿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말은 없었지만 청년이야말로 그녀가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믿음이 황산에 도착해서도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편 단목우도 더 이상 그녀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 밝힌 신세내력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한 눈치였다. 정말이지 단목우는 궁금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같았다. 두두두두....... 이륜마차는 관도를 따라 힘차게 내달렸다. 황하를 도강한 후 그들은 황산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황하를 건넌 직후 하남성으로 접어들었다. 그후 관도를 따라 곧바로 상구(商丘)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 와중에 몇 번인가 백화성의 추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단목우는 그들을 능숙하게 따돌려 버렸다. "......." 부상설은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단목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 속에 이상한 슬픔같은 것이 북바쳐 올랐다. 은연중 그녀는 사나이의 얼굴에 어리는 고독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아직도 사나이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녀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말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입속으로 연습했다. '이봐요. 당신 이름을 모르니 제가 얼마나 거북한지 모르겠어요. 이름을 모르니 당신을 제대로 부를 수가 없잖아요.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말이에요. 가령... 예를 들어 당신을 개나 바둑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요?' 부상설은 몇 번이나 그 말을 마음 속으로 연습했다. 그리고는 그 말을 토해낼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였다. (준비하시오. 적이 가까이 왔소.) 느닷없이 들려온 단목우의 전음이 그녀의 마음 속에 찬물을 끼얹었다. 부상설은 흠칫했다. 그녀는 급히 단목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차 앞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부상설은 고개를 빼고 마차의 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숲길 사이로 이어진 관도를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전후좌우를 살폈다. 넓은 관도에는 지나는 행인 하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방도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쌓인 눈들만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데.......?'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기에 이곳은 아주 평화로와 보일 뿐이었다. 단목우는 품 속에서 천조각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부상설은 그런 단목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문득 단목우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허리가 뜨끔했다. 또 다시 점혈당한 것이다. 그때였다. 와장창! 단목우는 그녀를 안고 신형을 날렸다. 그는 마차의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몸을 솟구쳤다. 바로 그 직후. 쐐애애애액! 느닷없이 관도의 양 숲으로부터 무수한 암기와 창(槍), 륜(輪), 도(刀) 등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퍼퍼퍼퍽! 삽시에 마차는 고슴도치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단목우는 마차를 탈출한 뒤였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두 사람은 영락없이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휙휙! 부상설은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가슴에 안긴 채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때때로 사나이의 곁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리곤 했다. 사나이는 때때로 손을 뻗었다. 비명소리는 그때마다 정확히 울렸다. 그녀는 사나이가 어떤 수법으로 몇 명을 죽이는지 보지 못했다. 오로지 그녀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사나이의 무공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 그것은 사나이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극한 정성을 쏟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바람을 가르며 얼마나 달린 것일까? 때마침 부상설은 비명도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를 안은 사나이는 어디론가 계속 달리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고슴도치가 된 후였다. 마차가 쓰러져 있는 관도에는 열여덟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 숲에 매복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지 오래였다. 한 마리는 어디로 갔을까? 주인을 잃은 말 한 마리만이 관도 옆의 숲길에서 유유히 풀을 뜯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짧은 겨울해가 서편 산그늘 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휙휙! 문득 다섯 개의 인영이 고슴도치가 된 마차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키가 크고 깡마른 청삼인들이었다. 먼저 땅에 내린 청삼인은 목면구(木面具)를 쓰고 있었다. 목면구에 뚫린 두 개의 눈구멍에는 회색의 눈이 들어 있었다. "......." 목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에 서 있던 사 인의 청삼인들은 면구를 쓰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하나같이 횟빛이었다. 자세히 본다면 그것도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당했습니다." 뒤에 있던 자가 말했다. 목면인은 대답도 없이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시신 중의 하나를 살폈다. 그의 회색 눈이 이상한 광채를 발했다. "으음, 알 수 없는 상흔이군. 대체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목면인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에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그 계집의 무공은 아닙니다. 계집의 무공은 그저 보통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집을 호위하는 자의 무공이 의외로 강합니다." "......." "이들은 황하십팔괴(黃河十八魁)로 이 일대에서는 제법 강한 자들입니다. 비록 개인의 능력은 보잘 것 없어도 합공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히 죽은 것으로 미루어......." 목면인은 고개를 저었다. "현무단이 실패한 후 흑루에서 우리 목령대(木令隊)의 전원출동을 은밀히 지시한 것으로 볼때 그 계집의 중요성은 알만한 것이다.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이제부터는 양동작전을 쓴다. 놈들의 행선지는 뻔하다. 각로에 연락을 취하고 지단의 협조를 구하라. 그리고 본성에 이 사실을 보고해라. 계집에게 정체불명의 호법이 붙어 있다고." "존명!" 휙휙! 사 인의 청삼인은 즉시 신형을 날렸다. 혼자 남게 된 목면인의 눈에서는 괴이한 빛이 흘러 나왔다. 목면인은 초점이 맞지 않는 회색의 눈을 들었다. 그는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령특위대는 천하 무적이다. 이번에 고작 한 계집을 사로잡는데 본 목령대 전원을 출동시키다니......." 아무래도 목면인은 불만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계집을 호위하는 자의 정체가 문제다." 언뜻 그의 회색눈에 한가닥 의혹이 어렸다. "명령을 받을 때는 없었던 자다. 이 변수가 어떻게 장애요인으로 될지가 문제군." 스스스! 불현듯 그의 신형이 흐려졌다. "후후후! 하지만 결국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사라지는 목면인의 입에서 음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③ "아니? 이번 것은 너무하잖아요?" 부상설은 얼굴을 찡그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소름이 오싹 돋는 기분이었다. 단목우가 내민 옷은 더럽기 짝이 없는 거지옷이었다. 아무리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식으로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그들은 마차를 버린 지난 일주일 동안 최소한 이틀에 한 번 씩은 옷을 갈아 입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추적자의 눈을 피해왔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런대로 깨끗한 문사의였다. 물론 그녀는 자신을 추적하는 자들이 얼마나 치밀한 추적의 명수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겪어본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상설은 이번만은 딱 질색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종류의 사람으로 변신했다. 그에 따라 여러 부류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지금 청년이 내미는 옷만큼은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반 장 정도 떨어진 거리를 격하고서도, 아니 더더군다나 엄동설한의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 옷에서는 심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빨리 입으시오!" 하지만 재촉하는 단목우의 안색은 엄숙하기만 했다. 느닷없이 부상설이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어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뭘 말이오?" "어째서 이런 식으로 비굴하게 피해야 하죠? 제가 보기에 당신의 무공은 천하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예요. 그런 당신이 대체 무엇이 무서워 그들을 피하는 거예요?" 부상설의 관찰력은 정확했다. 지금까지 위기를 벗어날 때마다 보여준 단목우의 무공은 부상설이 보기에 엄청난 것이었다. 그 정도의 무공을 가졌다면 굳이 그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꾸만 변신할 필요가 없었다. "후후!" 문득 단목우는 기소를 흘렸다. 부상설은 기분이 상했다. 사나이의 웃음이 자신이 철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단목우는 돌아섰다. 그러나 그때 부상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나왔다. "잠깐만요. 당신은 그들을 알고 있죠?" "......!" 돌아서는 단목우의 얼굴에 그늘이 어리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부상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물고 늘어졌다. "당신은 누구죠? 네? 그들의 공격 수법을 모조리 꿰고 있는 당신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죠?" 단목우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입을 거지옷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며 다시 한 번 재촉할 뿐이었다. "시간이 없소. 어서 갈아 입으시오." 단목우는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 가지만 명심하시오. 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말이오." 부상설은 아미를 찡그렸다. 이번에는 여인의 차례였다. 단목우는 영락없는 거지가 되어 숲에서 나왔다. 이어 그는 부상설의 어깨를 떼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부상설이 나오는 순간 단목우는 깜짝 놀랐다. 부상설은 여전히 본래의 옷차림 그대로였던 것이다. 다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좀 이상했다. "왜......?" 단목우는 입을 다물었다. 부상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아니?" 단목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부상설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부상설은 서동(書童)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간직하고 있던 여인의 얼굴 대신 희고 깨끗한 서동으로 남장한 것이다. 부상설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굳이 눈을 피해야겠다면 차라리 등하불명(燈下不明)의 원리를 이용하는 게 좋아요. 백주 대낮에 눈에 띄는 차림으로 가는 것이 적의 눈을 속이기 쉬워요." 단목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부상설의 말을 들은 순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걸 쓰세요. 당신에게는 이런 얼굴이 더 어울려요." 그녀가 던져준 것은 하나의 인피면구였다. "가능한한 가장 화려한 의복을 구해 입으세요. 솔직히 말해 난 죽으면 죽었지 그 냄새나는 옷은 절대 입을 수 없다구요." 단목우는 빙긋 웃었다. "하긴."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부상설을 빤히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미녀가 거지꼴이 된다면 아까운 눈요기를 잃는 셈이긴 하지." 그 말에 부상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만일 인피면구가 아니었다면 단목우는 기쁨으로 붉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④ 서주(徐州). 하남성과 산동성에 맞붙어 있는 서주는 안휘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회하(淮河)가 흘러들어가며 만들어낸 홍택호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호수가 무수히 많았다. 따라서 서주는 오랜 옛날부터 수륙교통의 요지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상인들은 그 수로를 통하여 대륙과 물물교환을 해왔다. 그런 곳에 홍등가가 번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낙원로는 서주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깨끗한 거리였다. 또한 그곳은 세상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것은 만화루(萬華樓)를 비롯하여 서주에서 내노라 하는 홍등가와 객점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주가 유명한 것은 바로 이 낙원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크고 작은 호수와 강변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거기에 한몫 거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중원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풍류객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낙원로에 찾아들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술과 여자와 빼어난 절경에 취하여 인생이 늙어가는 것을 잊고는 했다. 화려한 옷차림의 귀공자가 서동 한 명을 거느리고 서주의 낙원로를 지나고 있었다. "호호호! 어서 오세요. 공자님!" "아이, 이리로......." "꺄르르르! 여기 지상 최고의 방중술을 가진 요화랑(妖花浪)을 몰라요?" 그들은 한 걸음씩을 옮길 때마다 기녀들의 유혹을 받았다. 문득 귀공자가 서동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꼭 이런 곳에서 잠을 자야 하오?" 서동은 귀공자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요. 설마 이런 차림으로 허름한 객점에 묵자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깨끗한 객점도 얼마든지 있소." "그러나 유람을 나온 귀공자라면 홍등가에 들리는 것이 가장 어울려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객이 전도된 대화였다. 서동은 분명 귀공자의 시동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귀공자의 풍류를 서동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귀공자와 서동. 그들은 바로 단목우와 부상설이었다. 단목우는 귀공자 차림으로, 부상설은 서동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문득 앞서 걷던 단목우가 걸음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느닷없이 두 명의 기녀들이 그에게 바싹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호호호! 공자님, 저희 집으로 오세요. 네?" 단목우는 급히 부상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물어보는 것이다. 부상설은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녀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니예요. 고급 기루로 가야 해요. 길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기녀들은 전부 하급이에요. 우리는 최고급으로 가야 해요.) 그것을 마다할 단목우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일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고 작정했다. 그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부상설은 어찌된 셈인지 서주의 낙원로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화려한 문루 앞에 이르렀다. "서주제일루라.... 이름대로라면 서주에서 제일 화려한 기루같군." 단목우는 높은 문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부상설을 바라보았다. 부상설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단목우는 성큼성큼 문루 안으로 들어갔다. 부상설이 그의 뒤를 따라 문루를 넘어섰을 때였다. 비단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인 한 명이 뒤뚱거리며 달려 나왔다. "헤헤헤! 어서 오십시오. 공자나리." 중년인은 간드러진 웃음을 웃으며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했다. 단목우는 힐끗 부상설을 바라보았다. (황금 한 덩이를 주세요.) 그것은 전음이었다. 그러나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내겐 먼지밖에 없소.) 부상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미처 그 점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무엇 하느냐? 어서 화대(花代)를 내놓지 않고!" 단목우의 입에서 느닷없는 호통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부상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그런 호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찔끔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매 속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중년인에게 내밀었다. 부상설이 내민 구슬은 흑진주였다. 그것은 하나의 값어치가 성 하나를 살 정도의 귀한 것이었다. 흑진주를 받아 든 중년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헤헤헤!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오늘밤 본루의 최상급 미기(美妓)를 올리겠습니다요!" 앞장서 걷는 중년인의 고개는 아예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한편 단목우의 뒤를 따르는 부상설은 내심 울화가 치밀고 있었다. 그녀는 단목우를 향해 전음을 전했다. 그녀는 강력히 항의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당신, 그럴 수 있어요? 그 흑진주는 내가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던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앞장서 걷던 단목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뿐이다. "내 참 기가 막혀서!" 느닷없이 부상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단목우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중년인은 단목우를 한 채의 별원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하룻밤에 황금 천 냥 정도를 써야만 재미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헤헤! 잠시 몸을 푸시며 기다리십시오.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요." 중년인은 두 손을 마주 부비며 뚱뚱한 허리를 굽신거렸다. 잠시 후 별실의 문이 열리며 요리상이 들어왔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골고루 놓여진 요리상이었다. "......." 단목우의 눈길이 제일 먼저 멎은 것은 담수어로 만들어진 요리였다. 이곳 서주 근방에는 호수가 많았다. 따라서 담수어들이 많이 잡혔다. 그런 지역이니 자연히 어류로 만들어진 요리가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접춘보채(接春補菜)로군. 후후! 입에 대본 지가 어느덧 네 해 전이로군.' 단목우는 회상에 잠겼다. 접춘보채를 대하는 순간 불현듯 지나간 시절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곧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베어물고 말았다. 그리고는 내심 혀를 차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군. 이제 저 음식을 함께 먹던 자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으니 말이야.' 단목우는 다시 한 번 접춘보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맛갈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 지경이었다. 그때문인지 그 외의 요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때였다. "호호! 오래 기다리셨나요. 공자님?" 애간장을 녹일 듯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뒤이어 열 명은 족히 넘을 기녀들이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들어왔다. 띠딩... 띵... 띠잉....... 비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락의 주연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기들은 속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나삼을 입고 춤을 추었다. 단목우는 정말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 셈이었다. 게다가 여인들은 그가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소홍주를 잔에 채웠다. "하하하!" 단목우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한편 그 시각 부상설은 별실 밖에서 추위에 떨며 서 있어야 했다. 그녀는 서동의 입장이었기에 별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부상설은 그야말로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런 데를 오자고 했을까? 정말 바보같이.......' 그녀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 흐응... 어머멋!" 별실 안에서는 여인들의 교태로운 신음과 기성이 연신 울려나왔다. 별실 안에서 지금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부상설은 기녀들에게 둘러싸인 사나이가 온갖 지저분한 놀이를 하고 있을 광경을 떠올렸다. 그래야만 자신의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흥! 그럼 그렇지. 내가 저런 걸레같은 사내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니, 아유, 불결해!' 물론 부상설은 사나이와 자신이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아무리 그 사나이를 불결하다고 생각해도,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다짐해도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묘하게 틀어졌다. "으으음!" 뜨거운 신음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주연이 대충 끝난 별실 안에서는 아닌게 아니라 질펀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절색의 기녀들 두 명이 단목우에게 달라붙어 갖은 아양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화류계의 노류장화들로서 방중술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남자들을 즐겁게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두 기녀는 달착지근한 숨결을 단목우의 귀에 퍼부어댔다. 그러면서 온갖 교태와 손놀림으로 단목우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목우는 적당히 그녀들을 상대하다가 일어섰다. "아니 벌써요?" "저희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기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단목우는 손을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오늘은 피곤하니 일찍 쉬겠다. 가서 서동을 불러와라." "서동이요?" "나는 그 아이의 안마를 받아야 잠이 든다." 기녀들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들은 비록 화류계의 노류장화이긴 했으나 마음에 드는 손님을 만나게 되면 스스로 몸을 던질 줄 아는 정열도 있었다. 그녀들은 단목우를 보는 순간 기실 마음이 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상설은 정말이지 한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밤새도록 안마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단목우는 침상에 느긋히 누운 채 그녀의 나긋한 손길의 안마를 받으며 전음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놈들은 눈치가 이만저만 비상한 것이 아니오. 따라서 위장을 하려면 철저히 하여야 하오.) 그런 와중에서도 부상설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청년이 도무지 밉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 마음은 기녀들이 자신을 부르러 왔을 때부터였다. 그녀는 기녀들의 아쉬운 듯 해 보이는 얼굴을 대하는 순간 자신의 상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심 기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 속에 도사리기 시작한 질투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⑤ 그들이 서주제일루를 나온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이어 그들은 남경으로 방향을 잡았다. 최종 목적지인 황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남경을 거치는 것이 빠를 듯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이 쌓인 야트막한 산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또 하루가 저물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번엔 변장을 다르게 바꿔요." 갑자기 부상설이 토라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단목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녀는 단목우를 바라보며 쫑알거렸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당신은 언제나 주인이거나 어른이고, 난 맨날 하인 아니면 시종이라구요. 흥! 그건 공평하지 못해요." "으하하하......!" 단목우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대소를 터뜨렸다. "아니, 그것이 지금까지의 불만이었소? 평소 주절거리기를 잘하던 당신이 무슨 까닭으로 입을 꼭 다물고 있나 했더니. 으푸푸풋!" 단목우는 너무나도 재미있다는 듯 웃어제꼈다. 이어 그는 웃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상설은 문득 얼굴이 빨개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오." "그럼 왜 절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예요?" 단목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또 한차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정말이지 그는 오랜만에 마음껏 웃어보는 것이었다. "하하핫! 오늘따라 당신이 유난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뭐라구요?" 부상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저... 저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분나쁜 말이 아니었다. 단목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무엇으로 변장하면 좋겠소?" 그 말에 부상설의 안색이 환해졌다. "제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어요." "호홍! 에구 허리야. 얘야. 이제 날 업고 가렴." 허리가 잔뜩 굽은 노파였다. 노파는 지팡이를 짚고 가다 허리가 아픈 듯 아들인 듯한 청년에게 떼를 쓰는 중이었다. 청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놈! 어서 업지 못해? 불효막심한 자식 같으니라구! 네 놈이 어렸을 적 이 어미가 허리가 휘도록 업어 키운 것을 모르다니!" 휘익! 노파의 지팡이가 허공을 갈랐다. 퍽! 그 지팡이는 사정없이 청년의 어깨죽지를 때렸다. 칠순 노파의 손놀림치고는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고스란히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단목우였기 때문이다. 단목우와 부상설은 모자지간으로 변신한 것이다. 물론 단목우가 간단한 신법만 구사했더라도 그녀의 지팡이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대번에 변장한 것이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단목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고보니 이런 흉계가 있었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꾀를 생각해 낸 부상설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단목우는 아픈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며 급히 무릎을 꿇었다. "아이구! 어머니, 누가 뭐랍니까? 어서 업히세요." "흐흥, 진작 그럴 것이지." 부상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냉큼 단목우의 넓은 등에 업혔다. 단목우는 업은 부상설을 추스르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 두 사람은 이제 영락없는 모자지간이었다.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인파들 속에 휩싸여 걷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 인파를 스쳐가던 단목우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그것은 서주를 떠난 지 이틀째 오후 무렵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주변을 조여오는 무형의 살기를 느꼈다. 그때였다. 단목우의 등에 업혔던 부상설은 돌연 얼굴을 묘하게 찡그렸다. 그리고는 울상을 지었다. (그만 내려줘요.) 그녀는 단목우를 향해 전음술로 말했다. 그녀는 그때서야 자신의 계획이 말짱 헛것이 된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그녀는 서주의 기루에서 당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그런 묘안을 짜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앞뒤를 재보지 않은 졸속적인 계획이었음이 드러난 셈이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등에 업혀서 편안한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가 사나이에게 낙(樂)을 제공하는 꼴이었다. 이유는 바로 이랬다. 그녀의 뭉실한 둔부는 바야흐로 단목우의 손바닥 속에 잡히게 되어 있었다. 단목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칠순 노파로 변장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나긋나긋한 처녀의 몸이었다. 단목우는 정말 응큼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그는 그녀를 업은 상태로 손을 놀려 그녀의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업은 자세이니 그렇거니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단목우의 손장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노골적이었다. '아차!'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꼬부랑 할망구가 되어 그의 등에 업힌 이상 그 일 때문에 뭐라 할 수도 없는 입장이 아닌가? 마침내 그녀는 급히 전음을 보냈다. (어서 절 내려줘요!) (안되오.) 단목우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번엔 그도 전음을 사용했다. 이어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긋나긋 뭉클뭉클한 감촉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부상설은 마침내 화가 치밀었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단목우의 긴장된 전음이 그녀의 분노를 삽시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잘 보시오. 행인들 속에 추적자가 있소.) "......!" 한순간 부상설은 긴장했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 보았다. 과연 그랬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 주위에는 꽤나 많은 행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사오 인이 남다른 눈빛으로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으스스 한기를 느꼈다. (어... 언제부터였죠?) (벌써 한 식경 전 부터요.) (그들이 우... 우릴 알아 보았을까요?) 그녀의 전음은 긴장감 때문에 떨려나왔다. 단목우는 담담히 말했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혹시나 할 것이오.) 부상설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조심하시오. 조금이라도 헛점을 보인다면 당장 대여섯 자루의 칼이 날아올 것이오.) "......!" 부상설은 이제 자신의 둔부를 슬슬 어루만지는 상대의 손길에 신경을 쓸래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책을... 세워야 하잖아요.) 이제 그녀는 예전의 부상설이 아니었다. 태행산 근처에서 열 여섯 명의 청년들을 이끌어 나가던 용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목우는 태연하기만 했다. "나도 지금 생각 중이오." 생각 중이라는 사람이 왜 그리 엉큼한지는 정녕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단목우는 그 와중에서도 계속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제 시작이오.) (뭐, 뭐가요?) (저들은 망설일 자들이 아니오. 약간의 의혹만 있어도 죽이고 보는 자들이오. 저 앞을 보시오.) "......!" 부상설의 안색이 급변했다. 오 장 거리 앞에서 세 명의 상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또 다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일제히 단목우와 부상설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목우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저들은 무작정 칼을 뽑아들 것이오.) 부상설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단목우의 전음이 이어졌다. (놈들은 다짜고짜 우리를 찌르고 볼 것이오.) (우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벤단 말이에요?) (그런 것을 따지거나 두려워 할 자들이 아니오.) (그... 그럼 어떡하죠?) 부상설은 안달이 나서 물었다. 단목우는 담담히 말했다. (어떡하긴, 부딪치는 것밖에는 딴 도리가 없지 않소?) 이제 세 상인들과의 거리는 삼 장으로 줄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이구!" 별안간 부상설이 그의 등 위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단목우는 깜짝 놀랐다. 공격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부상설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아이구구! 오, 오줌이 마렵다! 으윽! 싸겠다. 이이이......." 순간적으로 단목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부상설의 비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즉시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부상설의 기지는 기가 막힌 것이었다. 노망든 노파라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한 일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부상설을 추스려 업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아이쿠, 어머니. 제발 좀 참으시오. 이 아들의 단벌 옷에다 싸면 안 되요!" 단목우는 다짜고짜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멍청해진 것은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막 두 사람에게 다가들려던 참이었다. "으악!" "급해요. 급해! 어서 비켜요!" 순식간에 저자거리는 수라장이 되었다. 단목우는 인파가 갈라지는 사이로 잽싸게 뛰어들었다. "아니? 저 놈이?" 세 상인들은 뒤늦게 눈치를 챘다. 그러나 혼잡한 저잣거리를 한 발 먼저 달아난 단목우를 쫓아가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확실한 확신이 서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상인은 두 눈에 살기를 띈 채 뒤쫓기 시작했다. 단목우는 골목길을 막 들어서며 하나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가 막 담장을 뛰어넘은 직후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골목 안 쪽으로 사라졌다. "휴우!" 단목우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마침내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상설의 약삭빠른 기지 덕분이었다. 서주(徐州)의 영화객점(榮華客店). 이름 그대로 화려한 객점의 방 안에서 목면인은 벌써 여섯 장의 전서를 읽었다. 이제 그가 읽지 못한 전서는 한 장 뿐이었다. 목면인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전서를 손에 들었다. 그 전서들은 백화성에 속한 각지의 분타 정보망과, 자신의 수하들이 보낸 것이었다. 전서를 읽어가는 그의 눈빛이 칙칙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전서에도 그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들어있지 않았다. 정말이지 놈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전서를 내렸다. 목면인의 보이지 않는 입에서 짜증스런 음성이 흘러 나왔다. "대체 하늘로 솟았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잡힐 듯 하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니......." 목면인은 바로 백화성주가 직접 거느리고 있는 오령특위대(五令特衛隊) 중의 하나인 목령대주였다. 오령은 백화성 내에서도 극비조직에 속했다. 백화성의 단주들조차도 오령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비밀에 가려진 조직이었다. 오령은 각기 한 가지씩의 전문적인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들은 추적(追跡), 살인(殺人), 암격(暗擊), 독공(毒功), 화공(火攻) 따위로 전문화되어 있었다. 그들의 능력은 가히 현세제일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 가운데 목령대주가 제일 먼저 백화성주의 밀명을 전해받은 것이다. 그 밀명은 바로 부상설이란 여인을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처음 현무단이 그 여인을 잡기 위해 출동한 것은 하나의 위장전술에 불과했다. 그것은 부상설이란 여인이 워낙 지혜롭기 때문이었다. 백화성의 총군사인 만박뇌환자 숙야풍은 현무단이 결코 그녀를 잡을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무단을 내보낸 것은 시간을 벌어보자는 속셈에서였다. 현무단이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동안에 목령대가 들이쳐서 그녀의 실체를 낚아챈다는 전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목령대가 출동했다. 목령대주는 처음 이번 임무가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예상외로 부진이었다. 아니, 그것은 부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초기에는 아주 또렷하게 보이던 목표물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오리무중에 휩싸이고 말았다. 현무단주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혼란을 목령대주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상설이란 여인이 데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호법자 한 명 때문이었다. 오로지 그 자로 인해 지금까지의 모든 예상과 급습이 무위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대체 그 작자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목령대주는 회색빛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본성에서 전서가 당도했습니다." 객실 밖에서 우렁찬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령대주는 급히 말했다. "이리 가져 와라!"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복면인이 쟁반에 전서를 받쳐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목령대주는 급히 전서를 펼쳤다. - 부상설을 호법하는 자를 유의하라. 그 자의 정체에 관해서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임시로 백혈(白血)이란 명칭으로 부르기로 했다. 총력을 다하되 만전을 기해라. "으음! 백혈......." 목령대주는 무겁게 뇌까렸다. 목면구 속에서 번들거리는 그의 회색 눈빛이 흔들렸다. '본성에서조차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라면.......' 순간 목령대주의 마음 속에 승부욕이 불붙었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적수다운 적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 싸움은 꽤나 흥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 불현듯 그는 아직도 서 있는 복면인에게 명을 내렸다. "전 대원에게 알려라. 지금까지의 모든 추적을 포기하라고!" "복명!" "놈의 목적지는 황산이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쳐갈 곳이 몇 군데 있지 않느냐? 이제부터는 그곳에서 놈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제7장 · 피의 갈대숲 ① "좋지 않군." 단목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소호(巢湖) 근처에서였다. 단목우는 등에 커다란 봇짐을 지고 있었다. 미청년으로 변신한 부상설도 봇짐을 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봇짐 속에는 비단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 비단상인으로 변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소호를 지나서 양자강을 건너기만 하면 황산은 코 앞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낌새라도 있나요?" 부상설은 단목우를 바라보며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목우와 함께 길을 오는 동안 자신이 바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단목우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그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스스로 천하에서 가장 지혜가 뛰어난 여인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런 부상설이 한 사나이를 만난 이후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백치(?)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그녀도 자신의 그런 변모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목우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소." "그런데요?"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오. 그들의 능력으로 보아 적어도 오 회 이상의 암격이 있어야 정상이었소. 지금까지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은 막판에 더욱 무서운 함정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소?" "......!" 단목우를 바라보는 부상설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그는 장난스러운 듯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따라서 그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단목우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한바탕 혈전이 있을 것이오. 낭자는 각오를 단단히 하시오." "......!" 부상설은 대답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정녕 알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름은커녕 성도 모르는 이 사나이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도와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불안감 속에는 사나이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사나이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도무지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없다면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드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의혹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졌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 속에 이런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자신도 명쾌하게 설명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시야에 소호의 푸른 물결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부상설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죠." "방법은 없소." "그렇다면......?" "있다면 하나 뿐이오." "뭐죠?" "뚫고 나가는 것이오." "......!" 부상설의 얼굴이 얼어 붙은 것처럼 굳어졌다. 단목우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되물었다. "왜? 겁나오?" 부상설은 고개를 흔들었다. "겁나지 않아요." "호오! 그렇소?" 단목우는 미소를 띄운 채로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때였다. 부상설이 느닷없이 활짝 웃었다. 이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지켜 주는데 제가 겁날 게 뭐가 있어요?"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상설이 처음으로 내보인 신뢰의 말이었다. 단목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막상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일순 그의 마음 속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파동쳤다. 단목우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을 드러내 놓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웃었다. "푸훗!" "왜 웃죠?" 부상설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단목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오." "......?" "당신이 전에 말하지 않았소? 그만한 무공을 지니고 싸우지를 않고 왜 피해 다니기만 하느냐고 말이오?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오." 소호 근처에 한 채의 장원이 있었다. 장원의 이름은 백화장(百華莊)이었다. 백화장은 아주 오래 전에 암석을 깎아 지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우람한 성을 연상케 했다. 그런 백화장에 얼마 전부터 낯선 사람들이 출입하기 시작했다. 출입자들은 이 지방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원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연일 소호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친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면밀히 지형을 조사하고 다녔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소호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조차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화장의 지하 밀실. 원탁을 가운데 두고 일곱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었다. 그들이 풍겨내는 분위기는 음산하기가 한결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만이 목면(木面)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목면인은 바로 목령대주였다. "배치는 완벽한가?" 목령대주는 육 인의 복면인을 향해 물었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친 과신은 금물이다. 이번에 목령대 전원이 출동했다. 만에 하나 실패하는 날이면 우리는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대주" "후후후! 백혈. 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번만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목령대주는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목령대주의 두 눈에서 칙칙한 안개가 피어 나왔다. ② 숲 사이로 난 관도가 넓어지면서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은 어느 물가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어촌이었다. 방파제 뒤쪽으로 게딱지처럼 모여 있는 지붕이 낮은 집들이 보였다. 물가에는 고깃배가 한가로이 떠 있었다. 끼룩... 끼끼룩....... 은빛 날개를 가진 몇 마리의 물새떼들이 고깃배 주변을 선회하고 있었다. 물이 빠져나간 모래톱 위에는 낡은 목선들이 옆구리를 드러내고 누워 있기도 했다. 정말 한가로와 보이는 풍경이었다. 오래 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그런 어촌의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생각해 낼 것이 틀림없었다. 드디어 그들은 마을로 들어섰다. 부상설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그 마을은 고향처럼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제 시작이오. 긴장을 풀지 마시오.) 단목우의 전음이 들렸다. '......?'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아무 이상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길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생선을 늘어 놓고 파는 노점상이며 그물을 수선하고 있는 아낙네, 어구(魚具)들을 수선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어부 등이었다. 개중에는 여행객인 듯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처럼 타지에서 온 장사꾼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단목우의 옆에 바짝 붙어 걸어가는 부상설의 가슴은 콩닥거렸다. 단목우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조금도 이상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천천히 걸으시오.) 단목우의 전음에 그녀는 걸음을 늦추었다. 맞은 편에서 그물을 든 두 사람이 걸어 오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늦추자 그들도 걸음을 늦게 걷는 듯 했다. '이상한데?' 부상설은 그때서야 무엇인가 의아한 것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너무 늦소.) 다시 단목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찰라지간 그물을 든 자들의 걸음이 약간 헝클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무엇인가 있다!' 부상설은 직감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길옆에 생선을 파는 아낙들을 보았다. (시선을 돌리지 마시오.) 단목우의 명령에 가까운 전음이었다. 그러나 부상설의 눈은 이미 여인들을 본 후였다. 아낙들은 아주 늙어 보였다. 그녀와 시선이 부딪힌 한 아낙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리고는 생선을 들어 올렸다. 그 행동은 전형적인 장사 모습으로 보였다. 가난에 찌들은 여인의 얼굴이 분명했다. 부상설은 여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구를 손질하는 어부들도 순박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햇볕에 타고 해풍에 깊은 주름이 진 어부들의 얼굴에는 사심같은 것이 일체 없었다. 그녀는 내심 의아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정말 이상해. 저들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바로 그때였다. 두 어부가 그물을 펼쳐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이어 어부들은 그들의 우측으로 지나쳤다. 단목우와 부상설의 왼쪽에는 생선파는 아낙네 네 명이 있었다. 여인네들의 뒷쪽에는 어구를 손질하는 어부 다섯 명이 있었다. "......?" 찰라지간 부상설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불현듯 환몽에 빠진 듯한 착각이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꼭 무엇엔가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단목우가 그녀의 봇짐 속으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어느 틈엔가 어부들의 손을 떠난 그물이 두 사람을 확 덮어 씌워왔다. 그러나 단목우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어느새 부상설의 봇짐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을 뽑아낸 것이었다. 번쩍! 검광이 환상의 무지개를 그렸다. "크윽!" 그물을 날렸던 두 사람의 목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물은 이미 두 사람에게 덮어 씌워지고 있었다. 그물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선파는 아낙 쪽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그녀는 급히 몸을 움추렸다. 아낙네들 쪽으로 신형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단목우가 소리쳤다. "조심해!" 부상설은 깜짝 놀랐다. "악!" 그녀는 경악했다. 느닷없이 두 개의 목을 날린 단목우의 검이 그녀의 목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쨍! 쇳소리가 났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한 자루 독비수가 단목우의 검날을 맞고 퉁겨나갔다. 부상설은 경악했다. 그녀는 자신을 목을 노리고 독비수가 날아온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말이지 자신의 목을 파고 들던 사내의 검날이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 것이다. 단목우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번에 그가 날아간 곳은 바로 좌판을 벌린 아낙들 쪽이었다. 그때였다. 탕! 아낙들이 느닷없이 좌판을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슈욱! 슈슈슉! 좌판 위에 놓인 생선들이 일제히 탄환처럼 쏘아 온 것이었다. 부상설은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눈을 질끈 감는 것 뿐이었다. 그것이 가장 빠른 피신법이었기 때문이다. 단목우는 날아오는 생선들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펑! 생선들은 장력을 맞고 도로 퉁겨나갔다. 단목우는 그 여세를 몰아 검을 휘둘렀다. 번쩌어어억! 눈부신 빛무리가 삼 장까지 치뻗었다. 부상설은 그 검광을 보았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빠르고 신속한 검법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캐애액!"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낙네들의 입에서 그렇게 거친 비명이 나올 줄은 몰랐다. 시뻘건 피보라가 난무했다. 바로 그때였다. 꽝... 꽈르릉...! 천번지복하는 폭음이 울렸다. 장력을 맞고 날아간 생선들이 일제히 폭발한 것이다. 그쪽은 공교롭게도 어구를 수선하는 작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제 사방은 온통 피의 살점으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부상설은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 생선이 폭발하다니!' 그녀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단지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단목우가 그녀의 허리를 안고 땅으로 쓰러졌다. "다... 치셨나요?" 그녀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끄으윽!" 그들이 쓰러지는 땅바닥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단목우가 땅속을 찔렀던 것이다. 땅거죽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땅 속까지!' 부상설은 부르르 떨었다. 엄청난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휙휙! 단목우는 그녀를 안은 채 앞으로 내달렸다. 지면에 바짝 붙어 날아가고 있었다. "......!" 부상설은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스쳐가는 지면이 온통 피로 물들어 가는 것을! 어느 순간 부상설은 허공으로 던져졌다. "악!" 그녀는 자신의 몸이 힘껏 앞으로 던져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꽝... 콰쾅! 굉음이 울리며 지면의 흙이 솟구쳤다. 그들의 앞쪽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아찔해서 눈을 감았다. 찰라지간 그녀의 신형이 추락했다. 그러나 이미 혼백이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부상설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 이제 끝인가?' 추락하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그녀는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별안간 누군가가 떨어지는 자신을 부둥켜 안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눈을 떴다. "다... 당신!" 어느새 단목우가 달려와 떨어지는 자신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나이의 목을 끌어 안고 말았다. 휙휙휙! 단목우는 호변을 따라 계속 내달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갈대숲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떠 보았다. 그러나 휙휙거리며 스치는 갈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어, 어찌된......?"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단목우의 심각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단목우의 입술에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목령대 전원이 출동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부상설은 의아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단목우의 눈에서 어떤 알지 못할 슬픔과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한 방울의 눈물을 본 듯했다. '눈물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단목우는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상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다... 당신은 강하잖아요? 아무리 많은 적이 있어도 당신의 무공으로......." 그 순간 단목우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비싼 여자요." "......?" "그것도 무척이나 말이오."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음성 속에 섞여있는 뜻모를 비감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단목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갑시다." 이어 그는 부상설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앞으로 가지 않고 등을 대는 것이었다. "......?" "업히시오." 단목우의 말이었다. 부상설은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웬지 거역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순순히 단목우의 등에 업혔다. 그의 등은 넓었다. 그리고 따스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이 세상의 어떤 상태보다도 그의 등에 업힌 것이 편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목우는 이제 둔부를 쓰다듬는 따위의 장난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가 걷고 있는 방향은 바로 갈대숲이었다. ③ 쏴아아....... 푸른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갈대가 춤을 추었다. 어느덧 봄이었다. 훈훈한 봄기운을 실어나르는 봄바람에 갈대밭 전체가 춤을 추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에는 일만 명의 정병이 은닉하고 있다해도 전혀 알아챌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스스스스.......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갈댓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상설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적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갈댓잎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뒤를 따라붙는 적들의 발자국 소리만 같았다. 그러나 단목우는 규칙적인 보행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단목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 대략 이십여 장 앞에 한 사나이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나이는 청삼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서 있었다. 그 사나이의 얼굴은 부상설의 안력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오.) 단목우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눈을 감으시오. 그리고 절대로 움직이지 마시오.) 부상설은 물론 그의 능력을 믿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호한 그의 명령에 조금 반감이 생겨났다. 등에 업힌 채 눈을 감고 움직이지 말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미력하나마 그의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서 옷자락을 날리고 있는 사나이를 보았다. 그때 다시 단목우의 음성이 들렸다. (잊지 마시오. 절대 눈을 떠서는 안 되오.) "......!"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단목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업힌 부상설은 몸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지난 것일까? 불현듯 그녀의 귓전에 바람소리와 함께 아우성과도 같은 단말마의 비명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크아아... 카아아....." 그것은 마치 늑대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아니, 승냥이들의 포효와도 흡사한 것이었다. 촤촤... 촤아아아아! 뻗어오르기 시작한 어린 갈대잎들이 그녀의 뺨과 손등을 할퀴듯이 스쳐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코 끝에 진한 혈향(血香)이 풍기는 것이 아닌가? 부상설은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실눈을 살짝 떴다. "아아!"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갈대와 잡초들 뿐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부터 검과 창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슈욱... 슈슈슉! 그런데 단목우는 그 공격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방어하지 않고 오직 앞으로 달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부상설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인자환영술(忍者幻影術)이다." 그녀는 전설처럼 들어왔던 인자환영술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무(武)의 생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격술이었다. 만일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는 전문살인법의 극치가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부상설이 인자환영술을 알고 있는 것은 언젠가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취리리릭! "앗!" 그녀는 깜짝 놀랐다. 바로 옆에서 한 자루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검은 지척에 이르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목에 바람구멍이 뚫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단목우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 나왔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부상설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목에 닿을 듯 하던 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것은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은 엄청난 위험을 초래했다. 어느 틈에 공격을 당한 것인지 단목우의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상설의 코끝에 혈향이 느껴졌다. "......!" 그녀는 쥐구멍이라고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단목우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그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눈을 감고 움직이지 말라고 한 것이지를 말이다. 그와 동시에 부상설은 단목우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더 짙어졌다. 어째서 그가 자신도 모르는 백화성의 공격전법을 외우기라도 한 듯 잘 아는지 알 수가 없었다. ④ "저... 저럴 수가!" 목령대주는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자신이 자랑하는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갈대밭의 포진은 목령대로서는 최후의 전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적어도 일류고수 백 인 이상을 전멸시킬만큼 강한 전법이다. 그런데 단 일 인에 의하여 그 전법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으으으!" 목령대주는 신음과 함께 부르르 전율했다. 상대방은 자신의 전법을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더러 예측까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저 자가 누구란 말인가?' 목령대주는 검을 뽑아들며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가 갈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느새 비명소리가 멈췄다. "......!" 비명 소리가 멈춘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자명했다. 그것은 바로 목령대원 전원이 몰살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령대원들은 일단 한 명이 떨어지면 최후의 한 명이 쓰러질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게끔 훈련을 받아온 것이다. 목령대주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으으! 이럴 수가......." 목령대주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였다. 스스슷! 목령대주 앞에 사나이가 솟아나듯 나타났다. 그는 바로 단목우였다. 목령대주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다, 당신은 누구요?" "......." 단목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바로 그 순간 목령대주는 사나이의 헝틀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웬지 눈에 익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굴까?' 그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적수가 아니다. 현명한 자는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도리어 목령대주의 자존심을 자극한 꼴이 되었다. 쐐애액! 목령대주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허공을 갈랐다. "너는 예전부터 너무 성급했어. 그게 약점이야. 강목(剛木)." 사나이의 중얼거림이 목령대주의 귓전에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찰라지간 목령대주는 아찔했다. 그의 뇌리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헉! 다, 당......."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한 자루의 칼이 그의 목젖을 가르며 지나간 후였기 때문이다. 투툭....... 목령대주의 신형이 검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 단목우는 칼을 거두었다. 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목령대주의 모습을 바라봤다. 목면 사이로 드러난 그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목령대주는 혼을 잃은 한 구의 시신에 불과했다. 마침내 최후의 결전이 끝난 것이다. 부상설은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단목우의 어깨에서 피가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생긴 상처였던 것이다. "어... 어쩌죠?" 그녀는 몸둘바를 몰라했다. "괜찮소. 어서 갑시다. 앞으로는 더 이상 위험이 없을 것이오." 단목우는 말을 마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부상설은 직감했다. 앞서 걸어가는 사나이의 음성에 비감이 가득 어려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이 사람은... 날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회의하고 있을지도 몰라.' 부상설은 웬지 말을 꺼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갈대밭에 석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석양 사이로 흐릿한 황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계절은 봄이었다. ⑤ "......." 원탁을 둘러싼 스무 쌍의 눈길은 일제히 한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짙은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만박뇌환자 숙야풍. 그는 한 통의 서찰을 읽는 중이었다. 좀체로 표정을 드러낼 줄 모르는 숙야풍의 가는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전서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이 쓰여 있었다. - 작전 실패. 목령대 전원 몰사. 이차 지시 바람. 숙야풍은 전서를 원탁 위에 내려 놓았다. 옆의 사람이 손을 뻗어 전서를 취했다. 그는 전서를 읽고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그렇게 스무 명의 사람들은 차례대로 전서를 읽었다. 잠시 후 제자리로 돌아온 전서는 처음 그 위치에 놓여졌다. 숙야풍은 전서를 취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구기며 입을 열었다. "백혈(白血)은 갈수록 강해진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중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숙야풍은 냉혹한 시선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먼저의 지시는? 백혈에 관한 조사와 방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그러나 역시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문득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자료가 태부족인데다 정체 확인이 늦어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숙야풍의 눈에는 언뜻 분노가 어렸다. 그는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백혈을 특급(特級)으로 분류한다" "......!" 중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급이라면 그들 전원이 최소한 한 달 이상의 집중력을 요하는 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그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문득 만박뇌환자 숙야풍의 중얼거림이 울리고 있었다. "으음! 백혈이 그들과 합세한다면... 일은 더욱 까다로워지겠군" 실내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흑루가 생긴 이래 이런 분위기는 좀체로 드물었다. 중인들은 무거운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제8장 · 불청객(不請客) ① "다 왔어요. 바로 저곳이에요." 부상설의 밝은 음성이 무거운 침묵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음성은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해맑았다. 단목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산 아래 위치한 하나의 촌락(村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황산(黃山)의 동쪽 봉우리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촌락은 하나의 내를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여타의 촌락에 비해 다소 규모가 크긴 하였으되, 특이한 면모는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오백여 촌락의 가옥들은 대부분이 띠집이었다. 마을 입구의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호호! 이상하게 여길 것 없어요. 이곳은 정말 평범한 부락이니까요." "......." 부상설의 말에 단목우는 의아해 했다. 그는 황산에 위치한다는 부상설의 조직이 아주 은밀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좋게 깨어진 것이다. 그는 혹시나 하고 연신 두리번거렸다. 무엇인가 특이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단목우의 속마음을 부상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호호! 아무리 둘러 보아야 소용없어요. 이곳의 사람들은 정말 화전민이나 사냥꾼들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입을 다물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서는 부상설을 보고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이번에는 어떤 주문을 받아 오셨소?' 늙은이였다. 이빨이 거의 빠져버린 촌로였다. 부상설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백호피 열 장을 모으면 은자 천육백 냥을 지불하겠다는 거부를 만났어요." 그 말에 노인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장노인. 왕촌장께서는 안녕하시지요?" "헤헤.... 물론입지요. 마침 아가씨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부상설은 방긋 웃어 보였다. 왕촌장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커다란 절벽 앞에 위치한 여섯 칸의 띠집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상설의 뒤를 따라서 단목우가 띠집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육순 가량의 사람좋아 보이는 노인이 뛰어 나왔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단목우는 벙어리인 양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띠집 안으로 들어간 그는 왕촌장과 부상설이 하는 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두 사람은 계산을 퉁기며 무언가 거래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별다른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잠시 후였다. "이곳이에요." 부상설은 단목우를 커다란 창고로 안내했다. 그 창고는 여러 가지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짐승의 가죽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부상설은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 가죽푸대를 쌓아둔 곳에 섰다. "이걸 치워 주세요." 푸대자루를 치우자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부상설이 바닥을 밟으며 이상한 동작을 취했다. 그녀가 대여섯 번을 왔다갔다 했을 때였다. 기이잉....... 이상한 음향과 함께 바닥이 열리는 것이었다. 열린 바닥 밑으로는 돌계단이 나타났다.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부상설은 단목우를 향해 말하며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단목우는 내심 기이함을 느끼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가 계단을 완전히 내려갔을 때였다. 기이잉....... 위쪽의 입구가 원래대로 복원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통로는 약간 아래로 경사졌다가 다시 위로 향해지고 있었다. 약 십여 장 가량을 걸었을 때였다. 문득 단목우의 눈 앞에 눈부신 빛이 비쳐졌다. "......!" 찰라지간 단목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 앞이 환해지면서 완전히 색다른 별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세계는 계곡의 분지라거나 지상계가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거대한 동굴로 이루어진 광장이었다. 동굴 속의 광장이 눈부시도록 밝은 것은 그곳이 수정동(水晶洞)이기 때문이다. 사방의 벽과 천장에 거대한 수정석과 수정기둥이 매달려 있었고,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어 그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동굴광장의 좌우에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었다. 전각도 있었고, 대전도 있다. 작지만 정교한 구조의 인공연못이나 화원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동산까지 꾸며져 있어 몹시 아늑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부상설의 뒤를 따라 단목우가 광장으로 나섰을 때였다. 육 인의 인물들이 부상설을 마중 나왔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늙은 인물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모두 정기로웠다. 그것으로 미루어 하나같이 정도를 추구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부상설을 반갑게 맞아들이던 인물들이 단목우를 발견했다. 찰라지간 그들의 눈에서 경계의 빛이 번뜩였다. 부상설은 그들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적은 아니예요." 그러나 여섯 사람은 미심쩍음을 지우지 않는 눈치였다. 특히 화의(華衣)를 입은 이십칠팔 세 가량 된 청년은 예리한 눈초리로 단목우의 위아래를 훑어 보는 것이었다. 그는 몹시 영준함과 동시에 기상이 비범한 청년이였다. 그의 눈썹은 붓으로 그은 듯 검었고, 눈매는 사자안(獅子眼)의 그것과 똑같았다. 화의청년은 적대감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단목무를 노려 보았다. 한편, 단목우는 지하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다만 육 인을 보는 순간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화의청년은 그에게 알 수 없는 역감을 불러 일으켰다. 단목우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정연함과 구태연함이 웬지 거슬렸다. 본래 단목우는 솔직담백한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한다면 육 인은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권위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가식으로 자신을 위장하는데 익숙한 위인들이었다. "자, 가요. 여러분. 이번에 몹시 위험한 고비를 넘겼어요." 부상설은 서둘러 말했다. 그녀는 단목우의 기분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 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단목우의 놀라움은 더해졌다. 석부의 시설이 보통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그의 귓전에 부상설의 전음이 들렸다. (놀라실 필요 없어요. 이걸 만드느라 꽤 많은 돈과 인력을 들이긴 했지만.......) 그녀는 은연중에 단목우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들은 하나의 석전으로 들어섰다. 석전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대부분 백의무복을 입었으며 눈빛이 부리부리했다. ②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이었다. 실내의 장식은 담백한 편이였다. 장방형의 탁자를 가운데 두고 십이 인이 앉아 있었다. 언뜻 보아 그곳에는 상석이나 하석의 구분이 없는 것 같았다. 열두 명 중에서 열 명은 나이가 많아 보였다. 나머지 두 사람만이 이십대 초반이었다. 그 둘은 바로 부상설과 화의청년이였다. "......." 부상설은 자신에게 집중된 중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이제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할 때였다. 이 자리는 언제나 그녀가 주관해왔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철혈부와의 금란지맹(金蘭之盟)은 성공적이였어요. 비록 백화성의 공격을 받아 우리쪽의 희생이 컸지만 다행스럽게도 신물을 뺏기지는 않았어요" "......." 중인들의 시선은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의 명문인 구파일방(九派一 )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의 구파일방이 모태가 되어 세운 백화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또다시 이곳에서 은밀히 회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지금까지 부상설을 공격한 것이 바로 그 정도무림맹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백화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정녕 풀기 힘든 수수께끼가 틀림없었다. "아미타불! 모든 것이 부군사(副軍師) 덕분이외다." 불호를 외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노란색의 가사를 입은 중이었다. 그는 소림사의 미앙선사(美仰禪師)였다. 미앙선사는 소림사에서 장문인 바로 아래의 위치에 있는 고승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부상설의 말에 중인들은 귀를 기울였다. "백화성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어요. 따라서 이제까지의 모든 계획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어요."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반 계획안들을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것이 급선무예요. 그리고 수정할 것은 수정해야 해요." 그때였다. 도관을 쓴 노도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무당의 장문인인 정진도장(正震道丈)이었다. "무량수불! 그럼 거사일도 보류해야 한다는 뜻이요?" "물론이에요." 부상설의 대답은 단호했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침울한 빛이 어렸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긴 하지만 이 한 번의 거사의 중요성은 여러분들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세요. 두 번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러므로 지피지기(知彼知己)가 못된 지금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어요." "으음!" 중인들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미앙선사는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아미타불....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오?" 부상설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계속 움츠리자는 뜻이 아니예요. 다만 거사일을 잠시 미루고 완전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차근차근히 풀어나가야 할 일들이 있어요." "......." "첫째로는 백화성이 움켜쥐고 있는 우리들의 족쇄를 푸는 일이에요. 전대에 우리 스스로 발목을 묶었던 쇠사슬을 우리의 힘으로 끊어야 해요."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무혈맹서(武血盟書)를......." 화의청년이 입을 열었다. 부상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구시대의 유물은 빨리 청산할수록 좋아요. 그리고 우리 스스로 행한 맹세를 거두지 않는 이상 명분을 찾기가 힘들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대의명분에 따라 움직여야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있어요"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설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들이었다. "무량수불.... 그러나 무슨 수로 무혈맹서를 다시 찾아온단 말이오?" 사마고웅이 침중한 얼굴로 되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무혈맹서를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중인들의 시선은 다시 부상설에게로 모아졌다. 부상설은 담담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미 소녀가 안배해 둔 것이 있어요. 그러나 아직은 밝힐 시기가 아니예요" "......?" 중인들의 얼굴에 의아심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어떤 일을 비밀로 붙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안배해 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밝힐 시기가 아니라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굳이 물으러 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으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화의청년이 그녀를 향해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군사. 한 가지 여쭤볼 말이 있소이다." "뭔가요?" "아까 군사와 함께 온 자는 어떤 사람이오?" 부상설은 움찔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분위기가 과히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단목우에 대하여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부상설은 잠시 생각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 자신도 단목우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판국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중인들의 의아심을 모르는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었다. "......." 중인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의아심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일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그분은 결코 타인이 아니예요.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희 사부님과 친한 분의 제자이니까요." "그것이 무슨 말이오? 알아듣기 쉽게 말하시오. 그 사람이 군사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란 말이오?" 화의청년이 따지듯 말했다. 부상설은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만난 것은 비록 우연이었어요. 하지만 전부터 알고 있는 분이에요." 그러나 중인들의 반응은 개선되지 않았다. "아미타불.... 신산(神算) 어른의 친구분이라면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미앙선사의 질문이었다.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거예요. 그분은 워낙 강호출입을 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 그러나 중인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분은 옥선산인(玉仙算人)이란 별호를 사용하셨어요." "옥선산인?"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옥선산인라는 별호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미앙선사가 좌중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껄껄 웃었다. "헛헛.... 그렇다면 안심이구려. 신산선생의 친구분의 제자라면 어련하시겠소? 우리와 한편일터이니 잘된 일이오." 부상설은 생긋 미소지어 보였다. "물론이에요." 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하기로 하죠. 저는 먼 길을 오느라 다소 피곤하거든요." 그녀는 곧 자리를 떴다. 그러나 중인들은 아무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얼마의 침묵이 흐른 뒤였다. 사마고웅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량수불.... 난 이해가 안 가오. 옥선산인이라니.... 빈도는 처음 듣는 별호요. 아무리 신산선생이 새외기인이라고 하지만 그분의 친구를 우리가 모를 턱이 있겠소?" 그 순간 미앙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만 둡시다. 부군사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아마도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오. 지금까지 부군사가 한 일은 실수가 없었소. 이번에도 필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오." "으음! 그렇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긴 하오만......."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의문의 찌꺼기는 여전하기만 했다. 그들은 단목우을 내내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적의 첩자이기라도 하면......?' 바로 이것이 그들의 걱정이였다. ③ 석실은 아담했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답게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조였다. 작지만 월창의 흉내를 낸 창문이 달려 있었다. 창 밖으로는 인공연못이 보였다. 연못 속에는 몇 마리의 금잉어들이 놀고 있었다. "......." 부상설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거울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다소 까칠해진 것을 느끼며 머리를 빗어내렸다. 여인이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신의 용모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부상설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태행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계속되는 위험으로 인해 용모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를 빗으며 자신의 본성을 의식하는 여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가지런히 빗어내리고 있는 윤기나는 머릿결과는 달리 그녀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것은 바로 단목우 때문이었다. 그 사나이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문득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상상(霜霜)." 그녀의 음성에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섰다. 나이가 십육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홍삼의 미소녀였다. "부르셨나요? 아가씨?" "그 분은 지금 무엇하고 계시냐?" 상상은 눈치가 비상한 시녀였다. "예, 조금 전 수욕을 하시더니 그냥 침상에 누워계세요." "그래?" 부상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문득 상상의 얼굴에 보조개가 패였다. "아가씨." "응?" "그 분은 누구죠? 혹시 아가씨께서 미리 점......." 부상설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듯이 호통을 쳤다. "못써! 감히......." "호호! 제 예감이 맞았군요?" 상상은 이렇게 말하며 혀를 쑥 내밀었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상설의 시중을 들어왔다. 따라서 그녀의 눈빛만 보고서도 마음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부상설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상상아. 이곳에서 그 분을 보는 시각은 어떠냐?" "그건......." 상상의 얼굴에 한 가닥 염려의 빛이 떠올랐다. "안 좋은 것 같아요. 특히 백대협(白大俠)의 심정이 과히 좋지 않으신 것 같더군요." 부상설은 한숨을 쉬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안 되겠어.' 내심 중얼거리던 그녀는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상상이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 분께 가보시려구요? 아가씨께선 그 분께 완전히 빠지셨나봐." "너 정말!" 부상설은 상상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단목우는 팔베개를 한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이곳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기질은 매우 활발하고 자유분방했다. 어느 곳이건 정착을 하는 것보다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일 먼저 눈에 거슬리는 것은 이곳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도무지 생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위선적인 자들로 비쳐졌다. 그는 이런 류의 인간들을 가장 싫어했다. 군자연하는 작자들치고 진짜 군자인 경우는 드물었다. 단목우는 확신했다. 위선자일수록 겉모습은 멀쩡하다고.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닌데.......'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부상설 때문이 아니였다면 그는 결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는 부상설을 호위하게 되었다. 아니, 진심으로 말한다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왕옥산 모옥의 소녀의 죽음.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소녀의 죽음이 가져다 준 마음의 동요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 때문에 결국 부상설을 만나게 되었고, 바로 그때부터 원치 않은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단목우의 뇌리 속에는 목령대주의 죽은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미안하다 강목.'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단목우는 누운 채 권태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 오시오."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섰다. 방문객은 얼마 전 본 적이 있는 화의청년이었다. 화의청년은 섭선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순간 화의청년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도 침상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기분이 몹시 나빠진 화의청년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인내심이 강했다. 그는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었는지 모르겠소이다." 단목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화의청년을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생긴 자로군.'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어느 한 곳 비뚤어지거나 모가 난 곳이 없는 반듯한 인상의 사내였다. 화의청년은 어색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상대방은 아직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누운 자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상대방을 먼저 방문한 것은 그였다. 그는 헛기침을 발한 후 입술을 떼었다. "흠! 혹시 불편한 것이 없나 해서 들렸소이다." 단목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없소." 그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처음 자세 그대로였다. 화의청년은 눈썹을 꿈틀했다. 너무한다 싶었다. 더 이상 머물러 있기가 모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편히 쉬시오." 화의청년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단목우가 물었다. "귀하의 이름은 무엇이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화의청년은 급히 돌아섰다. 이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소생은 백능소(白能召)라 하오. 귀하의 성함은 무엇이오?" 단목우는 냉담하게 말했다. "말씀해 주어도 모를 것이오. 워낙 무명소졸이라 말이오. 이곳에 계시는 고인들께서는 하나같이 대단하신 분들이라 명호를 내밀면 창피만 당할 것 같소이다." "......!" 언뜻 듣기에는 그 말이 칭찬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욕의 말이었다. 백능소의 눈썹이 위로 성큼 솟구쳤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돌아섰다. 밖을 향해 걸어나가는 그의 안색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어머? 백대협께서 이곳에 웬일이신가요?" 문득 청랑한 여인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고개를 든 백능소의 얼굴에는 언제 그랬느냐싶게 미소가 가득했다. "하하! 그냥 지나는 길이오. 군사께서야말로 웬일이시오?" 부상설이었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볼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벌써 가시는 거예요? 좀 더 계시다가 가시지 않고?" 문득 백능소의 얼굴에 한 가닥 기이한 빛이 스쳤다. "아, 아니오. 볼 일을 마쳤소. 그럼......." 백능소는 서둘러 그녀를 지나쳤다. 그 순간 부상설은 분명히 보았다. 백능소의 눈 속에 한 가닥 냉기가 솟구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녀는 지금 그가 왜 그런 눈빛을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제까지 백능소는 그녀에게 숱하게 청혼의 의사를 밝혀왔다. 그때마다 부상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이 단목우가 출현한 것이었다. 부상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백능소의 기분이 언짢아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좋지 않아.' 사라지는 백능소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④ 똑똑....... 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단목우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부상설이었다. 단목우는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그러나 침상에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부상설은 비로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백능소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는지를 말이다. 이때 단목우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그는 방금 들어선 부상설을 보는 순간 눈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부상설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는 여인을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달랐다. 부상설은 지금 머리를 곱게 빗고 가볍게 화장까지 한 상태였다.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녀는 이전의 부상설이 아니었다. 단목우는 홀린 듯한 눈빛으로 부상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 왜 그런 눈으로 절 쳐다보세요?" 부상설은 말을 해 놓고 놀랐다. 어째서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은밀하기는 했지만 백도무림의 연합조직의 총군사라는 막중한 책무를 떠맡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단목우의 앞에만 서면 어쩔 수 없이 여자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귀밑까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단목우가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보니 꽤 매력적이구려." "......!" 불현듯 부상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우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따귀라도 올려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다 준 사나이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웬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상대방도 그녀의 눈에 새롭게 비쳐지고 있었다. 단목우도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방금 목욕을 끝내고 휴식을 취해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기품까지 엿보였다. 단목우의 두 눈은 한성(寒星)처럼 빛났다. 입술은 석화(石花)처럼 선명했다. 콧날이 약간 날카로운 느낌을 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굳건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부상설은 남자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호...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없으셨나요?" 부상설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군. 똑같은 질문을 벌써 두 번씩이나 받다니......." 부상설은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어쩜. 너무해요. 여자가 들어왔는데도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않다니 말이에요." 단목우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당신은 정말이지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군요?" "푸풋!"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도대체 방문객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으니, 앉아도 되나요?" 부상설이 되물었다. 방 안에는 두 개의 의자와 탁자가 있었다. 단목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곳은 당신의 집이요. 앉거나 서는 것은 당신의 자유가 아니오?" 부상설은 미소지었다. '이 사내에게는 말을 하나마나야.' 그녀는 내심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두 남녀의 시선이 부딪혔다. 한 쌍의 눈은 맑으면서 그윽했다. 다른 한 쌍의 눈은 차가우면서도 밝았다. 부상설은 단목우의 아래 위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목욕이라도 하고 나니 훨씬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요. 그전에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다 짓무를 지경이었는데 말이에요." "......." 단목우는 그저 듣기만 했다. 웬지 여인의 수다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 왜 일어서세요?" 놀란 부상설이 물었다. "가야겠소" "넷?" 너무나 예상밖의 말이라 부상설은 깜짝 놀랐다. "가시다니요? 벌써요?"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그럼 가지 않고 여기서 무엇하란 말이오?" 부상설은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청을 돋구었다. "......?" "그건 말도 안 돼요. 벌써 가시다니.... 안 돼요!"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것이 나의 자유인데 왜 안 된다는 것이오?" "그, 그건... 당신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옷도 갈아 입어야 하고... 또... 아무튼 안 되요." 부상설은 횡설수설했다. 단목우는 그런 부상설을 보고는 어이없어 했다. "아무튼 나는 가야겠소." 그는 다짜고짜 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안 된다니까요!"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부상설은 급히 신형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 순간 단목우는 그녀의 몸에서 풍겨나는 사향 내음을 맡았다. "제발 가지 마세요." 부상설은 애원하듯 말했다. 이어 그녀는 애가 타는 시선으로 단목우를 응시했다. 단목우의 입술이 열렸다. "막지 마시오. 난 원래 한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오. 또 이곳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소." "하지만......." "원래 나란 놈은 이런 곳이 생리에 맞지 않소." 단목우는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대로 안 돼요." 부상설은 또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목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지 말아요. 영원히 계시라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너무나 빨라요. 최소한 당신에게 대접을 해야잖아요." 그녀의 눈에는 간절한 빛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단목우는 냉정했다. "나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오." 그는 슬쩍 부상설을 밀었다. 부상설은 상대가 손을 뻗자 가슴을 내밀었다. 그 바람에 단목우의 손에 뭉클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부상설의 유방에 닿은 것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단목우는 흠짓했다. 그러나 그는 곧 손을 움직였다. 부상설의 혈도를 누르기 위해서였다. 부상설은 재빨리 그것을 눈치챘다. 더 이상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신형을 움직였다. 그를 향해 아예 몸 전체를 던진 것이었다. "엇!" 단목우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온몸을 던져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게 부딪혀 왔다. 단목우는 그녀를 안은 상태로 그만 침상 위에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안 돼요. 절대로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어요." 부상설은 단목우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턱밑에서 할딱이며 속삭였다. "최소한... 하루만이라도.... 단 하루만이라도 쉬었다 가세요."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아아! 고마워요." 부상설의 음성은 환희로 인해 떨려나왔다. 그때였다. 단목우는 가슴이 뛰었다. 사향 냄새를 풍기는 여체가 전신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마구 입맞춤을 해대는 것이었다. 정말로 아찔한 기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슬며시 부상설을 밀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겠소." 부상설은 입술로 그의 목 밑을 간지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하루의 여유는... 나의 것이에요." ⑤ 단목우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그가 만났던 여인은 부지기수였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용모도 천태만상이었다. 성격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가 만난 여인들 중에서 부상설과 같은 부류의 여인은 없었다. 그녀는 아주 특이한 여인이었다. 나약한 듯 하면서도 무척이나 집념이 강한 여인이었다. 집념이 강한 만큼 여인으로서의 매력도 풍부했다. 그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면모가 언제나 한 가지에서 머물지 않고 자꾸만 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인상은 물론 그녀가 갈아입는 옷에서도 기인했다. 하지만 그런 변모는 오래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사람을 쉽게 질리게 만들기도 한다. 진정한 변모는 외부의 영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녀는 바로 그런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단목우는 방금 전까지도 자신의 옆에 누워 있던 부상설을 생각했다. 침상에는 그녀의 체취가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푸풋!" 그는 느닷없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무엇을 획책하는지 아는 이상 내가 머물 곳이 못 된다. 후후! 그런데 나는 왜 떠나지 않고 있지? 그녀의 색이 탐났기 때문에?' 그는 내심 중얼거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결코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상설을 마음껏 농락하고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웬지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지난 사 년간의 생활을 생각해 보았다. 가을만 되면 왕옥산으로 가서 낙엽을 쓸었던 것은 마음 속에 내재하는 갈등 탓이었다. 그는 낙엽을 쓸면서 인생에 대해 새롭게 배우기를 원했다. 단목우는 그 와중에서 한 소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는 엉뚱한 일에 끼어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일이 서립을 만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상설을 만나게 됨으로써 더욱 깊은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는 이런 소용돌이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단목우는 백화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가 왕옥산에서 낙엽을 쓸었던 가장 큰 원인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백화성의 모든 것을 잊기 위한 방편인지도 몰랐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목우는 팔배게를 베며 중얼거렸다. "들어 오시오."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아주 예쁜 한 명의 소녀였다. 정말로 봄의 난(蘭)을 연상케하는 소녀였다. 그녀는 바로 상상이었다. 상상은 예쁘게 입술을 놀렸다. 그러자 새하얀 덧니 하나가 드러났다. "공자님. 식사하셔야지요. 대전에서 하시라는 전갈이에요." "대전?" 단목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상은 눈을 한껏 반짝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전인 부상설이 반해버린 사나이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네. 아가씨께서 부르셔요." 단목우는 다시 귀찮아졌다. "사람들이 또 있소?" "네." 단목우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내일 떠나기로 한 마당에 껄끄럽게 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알겠소. 안내하시오. 꼬마 아가씨." 꼬마 아가씨라는 말에 상상은 샐쭉해졌다. "흥! 전 꼬마가 아니라 어엿한 처녀예요."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오! 그런가? 하지만 내게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흐흥! 그럼 어떻게 되어야 처녀인가요?" 상상은 대들 듯이 물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상상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단목우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툭 쳤기 때문이다. "아직 둔부가 완전히 피지 않았어, 꼬마낭자. 남자를 홀리게 할려면 더 커야 된다오." "다, 당신!" 상상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의 얼굴은 연시처럼 빨개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었다. 어느새 상상의 꽃봉오리같은 가슴은 마구 콩당거리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단목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문 밖으로 걸어갔다. 제9장 · 광명회(光明會) ① 단목우는 그야말로 소태를 씹는 기분이었다. 그는 도저히 이런 식사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식탁이었다. 음식을 먹는 사이사이 웃음띤 대화와 농담도 나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완벽하게 연출된 것이었다. 단목우를 초대한 열두 명의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질문을 아주 겸손하게 포장해서 퍼부어댔던 것이다. 부상설을 비롯한 열한 명의 중인들.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광명회(光明會)라고 소개했다. 당금 강호무림에서 광명회라는 이름을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광명회가 정도무림 속에서도 극히 은밀하게 결성된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 비밀결사조직은 구파일방에서도 상부의 원로들만 알고 있을 정도였다. 당금의 백도무림은 외부적으로는 백화성이 장악하고 있었다. 백화성이 결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육십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구파일방의 수장(首長)들은 흑도무림을 평정하기 위해 백화성을 결성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애초의 뜻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대 백화성주 백선결(白仙潔)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백선결의 능력은 대단했다. 그는 극히 짧은 시간에 백도무림의 대권을 손아귀에 쥐었다. 그후 백화성주는 구파일방을 백화성의 한 분파 쯤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백화성주 백선결은 구파일방에게 봉문(封門)을 명했다. 그 이유는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구파일방 소속 무인들의 무림출입을 금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철혈부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파일방은 울며 겨자먹기로 백화성주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초대 백화성주 백선결에게 바친 무혈맹서(武血盟書) 때문이다. 무혈맹서 속에는 백화성주의 명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구파일방이 부복한다는 내용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바로 그것을 이용하여 백화성주는 구파일방의 봉문을 명한 것이다. 따라서 무혈맹서를 되찾기 전까지 구파일방은 무림을 활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구파일방은 백화성에 대적할 단체를 은밀히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광명회였다. 광명회는 황산의 지하석부에서 오랜 세월을 참고 준비하며 구파일방이 새롭게 탄생하기를 고대해 왔다. 구파일방은 오직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지금까지 혼력을 기울여 온 것이다. 백능소와 부상설은 어색한 침묵을 견디며 식사하고 있었다. 백능소는 광명회의 십대봉공(十大奉公)이자 통령(統領)이라는 직위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백능소는 더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단목우는 무신경했다. 물론 그라고 불편한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지금의 분위기를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는 속마음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식사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무당의 정진도장이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역시 명가의 자제분이라서 신위가 출중하시구려. 선사이신 옥선산인께서는 안녕하신지요?" 단목우는 무슨 말인가 했다. 그때였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부상설이 눈을 찡긋했다. 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진도장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허허허! 사실 빈도는 식견이 짧아서 옥선산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라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우리들에게 식견을 넓혀 주심이 어떤하시진?"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단목우에게 향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옥선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단목우는 좌중을 둘러 보았다. 그는 중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또한 그는 부상설이 자신을 소개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거짓말을 한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단목우는 정진도장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당신은 알 자격이 없소." 그의 대답은 정진도장은 물론이거니와 중인들 모두를 경악케 했다. "......!" 중인들의 얼굴은 일제히 일그러졌다. 그러나 정진도장은 도가의 원로로서 수양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낮게 도호를 외웠다. 이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떤 분이라야 자격이 있겠소?" 단목우의 대답은 여전히 냉혹하기만 했다. "아무튼 당신은 아니오." 순간 정진도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에 있던 미앙선사가 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허어! 진정하시오. 도장, 원래 젊은 사람은 혈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오? 허허헛!" 그는 너털 웃음을 웃었다. 정진도장은 마지못한 듯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가 사그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앙선사는 단목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젊은이. 저 분은 본래 무당의 장로이시오. 또한 젊은이의 사부와 친구되시는 신산선생과도 막역한 분이시오. 그러니 젊은이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소. 그러니 사과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미앙선사는 좋은 말로 단목우를 타일렀다. 그러나 단목우는 미앙선사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도리어 사과는커녕 아예 고개조차 돌려 버렸다. 그것은 정진도장 뿐만 아니라 미앙선사까지 한꺼번에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때였다. "이런 발칙한......!"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선 자는 오십대 정도 되어보이는 청포인이었다. 그는 점창파(點蒼派)의 원로였다. "허어! 참으시오. 장시주." 이번에도 그를 만류한 것은 소림의 미앙선사였다. 청포인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부상설이 그를 향해 애원의 눈짓을 보냈다. 그때서야 청포인은 이를 빠드득 갈며 자리에 앉았다. 부상설은 단목우를 향해 전음을 전했다. (제발... 절 봐서라도 참아 주세요. 네?) 단목우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어 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것은 아예 중인들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로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젠 식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중인들은 수저를 놓은 채 단목우를 무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단목우는 장내가 조용해지자 눈을 떴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청포인이 식탁 밑으로 그를 향해 암경(暗輕)을 폈쳤다. 쉬익! 한 가닥 암경이 막 몸을 돌리는 단목우의 허벅지를 향해 날아갔다. 만일 그 암경에 적중된다면 그의 허벅지는 두 동강이 나고 말 터였다. 그 순간 단목우는 소매를 아래 쪽으로 휘저었다. 와장창! "허억!" 놀라운 일이었다. 돌연 청포인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가며 세차게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퍼퍼퍽! 뒤따라 날아간 음식물이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떨어져 내렸다. 청포인은 단목우가 되쳐낸 암경에 호되게 당하고 만 것이다. "하하핫!" 단목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중인들이 그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휘휘익! 장내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여섯 명이 일제히 단목우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그 속에는 무당의 정진도장도 있었다. "여러분! 제발 그만들 두세요!" 부상설이 다급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애원도 이제는 소용 없었다. 그녀는 단목우의 신형이 그들의 그림자에 갇히는 것을 보았다. 단목우를 에워싼 자들은 하나같이 구파일방의 고수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구파일방의 절기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아무리 단목우의 무공이 강하다 해도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었다. "아아!" 부상설은 신음을 토해내며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내팽개쳐질 단목우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때였다. 펑... 퍼엉... 꽝!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뒤이어 단말마의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찰라지간 그녀는 눈을 떴다. 뜻밖에도 비명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그녀는 경악성을 토해냈다. 주위의 기물은 모두 파괴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오로지 단목우만이 멀쩡히 서 있었다. 그를 공격했던 여섯 명의 중인들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연신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으으으!" 중인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공격은 빨랐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상대방이 자신들의 공격권을 빠져 나간 것이다. 다만 그들의 눈에는 단목우가 몸을 돌리며 양 손을 뻗는 것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별다른 수법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단목우의 공격은 그들의 헛점을 여지없이 뚫고 들어왔다. "으으!" 육 인의 얼굴에는 수치감이 떠올랐다. 구파일방의 고수들인 그들이 단 한 명의 젊은 청년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런 사실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개망신이 아닐 수가 없었다. 슈욱! 이번에는 경고도 없이 한 가닥 검광(劍光)이 뻗었다. 검광은 허공을 격하고 단목우를 향해 쏘아갔다. 단목우는 비로소 신중한 자세로 신형을 연속 다섯 차례나 움직였다. 그래도 검광은 줄기차게 그를 쫓아왔다. "어검성기(馭劍星氣)......." 문득 단목우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신형을 약간 낮추었다. 이어 쌍장을 합쳤다가 뻗었다. 퍼엉!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검기와 장영이 내실을 가득 채운 가운데 한 가닥 무거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음!" 비틀거리는 것은 백능소였다. 그는 검을 앞세운 채 발을 떼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런 백능소 앞에는 단목우가 서 있었다. 단목우가 합장한 손바닥 사이에는 백능소의 장검이 끼어져 있었다. 백능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중인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들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의 내공으로 겨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누군가의 내공이 떨어진다면 그 자는 중상을 입거나 죽게 될 것이다. 스스스....... 백능소의 이마 위에서 뿌연 백기가 흘러나왔다. 단목우의 미간 사이에서는 기묘한 광채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제발 좀 그만 두세요!" 뾰족한 음성과 함께 한 가닥 섬세한 인영이 두 사람 사이로 뛰어 들었다. "앗!" 백능소와 단목우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뛰어든 인영은 바로 부상설이었다. 그녀가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든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는 두 사람의 내공을 모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으음! 저럴 수가!" 중인들은 아찔하여 눈을 감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퍼엉! 폭음과 함께 짤막한 비명이 장내에 회오리쳤다. 중인들은 한결같이 끔찍한 광경을 상상했다. 목숨을 잃은 것은 부상설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스러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며 눈을 떴다. 순간 중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저럴... 수가!" 중인들은 경악했다. 백능소는 폭풍우를 맞고 있는 대나무처럼 전후좌우로 신형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한편 단목우는 한 손으로 부상설을 안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상태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단목우는 연달아 열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마침내 그의 신형이 멈춘 것은 벽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음!" 단목우는 신음을 발하며 부상설을 살짝 떠밀었다. 부상설은 부르르 몸을 떨다가 깨어났다. "제발 같은 편끼리 이러지들 말아요." 그 말을 남긴 후 그녀는 혼절하고 말았다. 단목우는 잠시 벽에 기대 서 있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군사!" "부낭자!" 중인들은 소리치며 부상설에게 달려갔다. ② 부상설이 깨어났을 때는 초저녁이었다. 그곳은 지하세계였다. 따라서 천색을 살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래시계가 가동하고 있었으므로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있었다. "......." 부상설은 거울 앞에 앉아서 망설였다. 그녀는 이제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 속으로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는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아냐, 꼭 그렇게 해야만 해. 하지만.......' 그녀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거울 속의 얼굴은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다. 오늘밤따라 그녀의 신색은 자꾸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갈등 때문이었다.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는 것이 그녀의 성품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버려야 할 줄을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여인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 아니던가? 더더구나 버려야 할 것이 자신의 순결일 때에는 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똑....... 불현듯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할 수 없어. 그 방법밖에는... 이건...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만인을 위하여... 나 하나쯤은.......' 그녀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뺨으로 또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단목우는 느닷없이 방문한 부상설을 보고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진작 떠났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오. 결과적으로 당신에게 폐를 끼친 격이 되었소." "그렇지 않아요." 부상설이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녀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불현듯 단목우는 그녀의 자태가 몹시 고혹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제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예요." "무슨 뜻이오?" 단목우는 되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부상설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그건 당신만이 저를 보호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보호?" 단목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부상설은 단목우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은은한 향기가 단목우를 자극했다. "부탁이 있어요." 부상설은 침상에 앉으며 말했다. 손을 대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저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오." 부상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탁이에요. 이 일은 제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예요. 무림을 위해... 아니 천하중생을 위한 길이에요." 하지만 단목우는 냉정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소. 난 그리 큰 위인이 못되오." 부상설은 더욱 가까이 접근했다. "저의 뜻은 당신이 저와 함께......." 그러나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단목우가 뒤로 벌렁 누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홱 돌아 눕는 것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표시였다. 마침내 부상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 한 가닥 결심의 빛이 짙어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 단목우는 부상설의 부탁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 다시 그는 백화성과 적대관계를 맺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백화성은 그를 지금까지 키워준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비록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떠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번씩이나 형제들에게 살수를 펼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사르륵....... 나직하게 귓전을 스치는 음향이 있었다. '......!' 단목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불현듯 그의 뇌리에 어떤 예감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상설이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이다. ③ 백능소는 소림사가 총력을 기울여 배출한 기재(奇才)였다. 그는 오 세 때 소림에 입문하여 십팔 세 때 소림의 달마칠십이종(達磨七十二種) 절예를 터득했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림의 고승들에게 비전의 대법으로 벌모세수(伐毛洗髓)를 받고 초절정 무학을 익혔다. 그런 백능소에게 광명회의 통령(統領)이라는 중요한 직위가 주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다음 대의 무림의 맹주감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런 그가 단목우와의 한 차례의 싸움에서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그는 단목우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충분히 이기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부딪침에서 그는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느닷없이 뛰어든 부상설 때문이다. 당시 그들은 팽팽한 내력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백능소는 그녀를 구하려면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인해 그가 망설이는 사이 단목우는 목숨을 내던지면서 그녀를 안아든 것이었다. 덕분에 단목우는 그보다 더한 내상을 입고 뒤로 밀려났다. 그 일은 백능소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수치심을 유발시켰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앞세운 나머지 평소 사모하던 부상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실망을 안겨주었다. "으음!" 백능소의 입에서 괴로움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도저히 이 상태로는 잠을 이룰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단목우라는 위인을 떠올렸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묘한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그 자와 결판을 내자!' 백능소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짓이오? 빨리 옷을 입으시오!" 단목우는 소리쳤다. 부상설은 이미 전라의 몸이었다. 처음에는 수치감으로 드러난 유방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아예 그 손마저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이슬이 반짝였다. "절... 가치없는 계집이라고 여기시나요? 한 번 안아 볼만한 가치도 없단 말인가요?" 단목우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똑바로 보세요! 제가 어떤가요? 제법 쓸만하다고 말씀해 주세요! 전...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도 못되나요?" "......." 단목우는 고개를 다시 돌렸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빛났다. "돌아 가시오. 무슨 뜻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그렇게 구걸하는 것은 창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것은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부상설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요. 절... 뭐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정말 제가 한 번 안아볼 매력도 없는 그런 계집인가요?" "풋! 돌아가시오. 그리고 정히 내게 여자를 보내려면 다른 여자를 보내시오. 난 당신같이 비쩍 마른 여자는 딱 질색이니까." 단목우는 그렇게 말하며 홱 돌아 누워버렸다. "......!" 부상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이지 더 이상의 모욕은 없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밖으로 뛰쳐나갈 뻔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입술을 악물었다. '안 돼. 지면 안 돼!' 마침내 그녀는 침상을 다가가더니 단목우의 옆에 몸을 눕혔다. 단목우는 여인이 접근하는 것을 느꼈다. 돌연 그는 벌떡 일어섰다. "나가시오! 난 스스로 옷을 벗고 날뛰는 여자는 딱 질색이니까!" 그러나 부상설은 그의 발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는 오열을 토해냈다. "흑흑! 뭐라고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절.. .절... 흐흑!"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 단목우는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웬지 가슴이 찡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의 뇌리 속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가인(佳人)......." 단목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찰라지간 부상설의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단목우는 부상설의 얼굴을 손으로 치켜 들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비를 맞은 배꽃처럼 처연하기만 했다. "당신은 정말......." 부상설은 눈물로 홍수를 이룬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열었다. 단목우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무 말 마시오." 이어 그는 부상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강한 반발을 보였다. "난... 창부가 아니예요!" 하지만 단목우은 그녀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부상설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허리를 힘차게 안으며 입술을 귓가에 가져갔다. "상설,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요? 당신 자신을 던져가면서까지......?" 그의 입김이 귓가에 닿는 순간 부상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동시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 "아!" 그녀는 단목우의 품을 파고 들며 신음을 흘렸다. 등 뒤를 쓸어 내리는 단목우의 손길이 그녀의 하체를 향해 뻗어내렸다. ④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었던 백능소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이 소리는!' 그는 경악했다. 정말이지 전신의 피가 심장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방 안에서 들려온 것은 여인의 신음소리였다. 그것도 남녀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은밀한 행위로 인한 여인의 달뜬 신음소리였던 것이다. 백능소는 믿을 수가 없었다.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설마... 그 자와?' 그는 일 장으로 문을 박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그는 문에 눈을 대었다. 평소의 백능소라면 절대로 이런 비열한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매달리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잘못이었다. 백능소는 문틈으로 방 안을 엿본 순간 자신의 눈알을 파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방 안을 엿보았는가를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방 안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가 꿈 속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주... 죽일 놈!' 하마터면 백능소는 주먹으로 문을 부술 뻔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충동을 억제케한 것은 방 안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아아! 당신... 정말... 대단히 나쁜 사람... 음!" 그것은 바로 부상설의 음성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열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백능소는 눈알이 빠질 듯했다. 그는 이를 갈며 다시 안을 보았다. 부상설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사나이의 가슴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세로 사나이의 가슴에 정신없이 입술을 부벼대고 있었다. '으으윽!' 더 이상 엿볼 수 없었다. 계속 보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백능소는 홱 돌아섰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곧 폭발할 것 같았다. "당신은... 희대의 바람둥이에요." "후훗! 그렇다면 당신은 요부(妖婦)지." "나빠요!" 부상설은 주먹을 움켜쥐고 단목우의 가슴팍을 때렸다. 튼튼한 가슴이었다. 단목우의 가슴은 그녀의 작은 주먹은 물론이려니와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믿음직스러웠다. 두 사람은 격렬한 정사 후의 나른한 여운을 즐기며 나란히 누워 있었다. 부상설의 몸은 땀으로 젖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단목우는 그녀의 머리칼이 땀에 젖어 젖가슴에 몇 올 붙어있는 것을 손으로 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해. 말라깽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아유, 정말!" 그야말로 부상설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아. 잘못했소. 하하하!" 단목우는 그녀의 허리를 담쑥 안아 버렸다. "어멋! 으음!" 부상설은 부지중 신음을 흘렸다. 단목우의 바위같은 가슴에 온몸이 짖눌리자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을뿐더러 자신이 바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당혹했다. 남자와의 관계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한 번의 격렬한 정사는 그녀에게 없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요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는 사나이의 품에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놀라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목우는 그녀의 감응대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그는 부상설의 요소요소를 빠르고 잔인하게(?) 찔러 그녀를 중태(?)에 빠뜨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흑!" 다시 급소(?)를 찔린 부상설은 입을 딱 벌리며 두 손으로 사나이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사나이의 머리칼 속으로 파고 들고 있었다. 단목우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고 한 쪽 손은 한 줌 밖에 안되는 허리를 지나 둔부를 쓰다듬다가 바짝 당기고 있었다. 부상설은 눈 앞에 온통 별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느꼈다. 유성우(流星雨)와도 같은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목욕한 듯한 두 육체는 하나가 되어 또아리치고, 궁글고, 뒤엉키면서 무지개빛 세상으로 화려하게 진입했다. 방 안을 뒤흔들던 뜨거운 폭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삼 개월 간이에요. 그 삼 개월 간만 백화성의 이목을 다른 데로 돌려 주세요." 부상설은 땀에 젖은 긴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사의 여운은 아직도 신체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빗으면서도 전신에 열기(熱氣)가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단목우는 머리를 손질하는 그녀를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느긋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상의가 약간 벌어져 박속같은 유방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단목우는 여색을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다소 까다롭게 굴 뿐이었다. 그는 매사에 현명하고 차분한 부상설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지금 그는 부상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눈을 가늘게 한 채 그녀의 윤곽이 아름다운 목선과 유방, 그리고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오직 당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어요. 이곳 광명회의 근거지는... 어느 정도 백화성에게 노출되어 있어요. 만일 그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는다면 이곳은 수 개월 안에 집중공격을 받게 될 거예요." "......." "현재 광명회의 능력으로 그들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에요. 당신이 그들을 혼란시켜 준다면 그 사이 저는 시간을 벌 수가 있어요." 단목우는 비로소 담담히 입을 열었다. "상설, 당신은 정말 영악한 여인이군. 아직도 목적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오." 그 말에 부상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절 그런 여인으로 보나요? 방금 전의 일은... 저의 진심이란 말이에요." 부상설은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후후.... 누가 뭐랬소? 그저 그렇다는 것이오." 단목우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상설은 그가 아직 옷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우람한 사나이의 근육이 압도하듯 그녀에게 다가왔다. "휴... 흉해요. 어서 옷을 입어요." "하하핫! 언제는 좋다고 매달리더니." 단목우는 뒤에서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이! 이제 그만 하세요." 그녀가 몸을 빼내며 말했다. 단목우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머리칼에 닿는 단목우의 손길에 부상설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내... 내가 왜 자꾸 이럴까.' 그녀는 혹 자신이 마법에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단목우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온몸의 피가 이렇게 빨리 도느냔 말이다. '으음.' 그녀는 고양이같은 소리를 내며 단목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단목우는 한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뒤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유방 한쪽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 광경을 만일 남들이 보았다면 필시 음탕한 남녀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부상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온몸이 달콤함으로 젖어 있어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문득 등 뒤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단목우였다. "난 애당초 이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었소. 왜냐하면 난 결코 백화성과 적대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오." 그 말에 전신의 피가 식었다. "왜... 왜죠?" 부상설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단목우의 손이 멎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는 빙글 돌아서며 발돋음하여 그와 입술이 거의 맞닿는 자세를 취했다. 부상설은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듬직한 사나이의 체구가 그녀의 가냘픈 몸매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왜죠?" 그녀는 다시 물었다. 단목우는 서늘한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 언뜻 고통스런 기운이 스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부상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오." 그의 대답은 그렇게 간단했다. 늘 그렇듯이. 순간 부상설은 보았다. 단목우의 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짙게 어리는 것을. 그녀는 재빨리 두 손을 그의 목에 걸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이 일은 천하무림을 위한 일이에요." 단목우는 다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같은 미인을 얻었으니 대가를 치러야 당연한 일이겠지." 그 말에 부상설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백화성에서도 미인계(美人計)로 나온다면 또 이쪽을 공격할 건가요?" 단목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과연 그쪽에 당신만한 미인이 있을까? "나쁜 사람!" 부상설은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그때였다. 문득 단목우는 정색을 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 "백화성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언제부터였소?" 부상설은 흠칫했다. 그녀는 순순히 답했다. "꽤 오래 전부터예요. 지금으로부터 십팔 년 전이니까요." 단목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 의도가 본격화된 것은?" "대략... 팔 년 쯤 되었나요? 이곳에 광명지회가 생긴 직후니까요." "......." "그건 왜 묻죠?" 단목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의혹에 싸여 있었다. 부상설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무슨... 짚이는 것이라도 있나요? 당신은... 백화성에 대해 잘 아시니......."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 내부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단목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게 광명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소?" 부상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요." 부상설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광명회에 대한 유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문제의 발단은 백화성의 변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백화성은 무림패업(武林覇業)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정도무림의 지주인 구파일방으로서는 당연히 그것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백화성의 독주를 방관한다면 언젠가는 그들이 무림의 패도집단으로 무림일통을 실현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광명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백화성은 이미 너무 커져 있었다. 그들을 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른바 이적제적(以敵制敵)의 병법이 그것이었다. 즉 백화성의 숙적이자 정도무림과 영원한 적대관계에 있는 녹림무림맹 철혈부(鐵血府)와의 금란지맹(金蘭之盟)이 그것이었다. 광명회는 철혈부과 극비리에 협약을 맺어 백화성의 독주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애당초 백화성을 세운 목적은 바로 철혈부를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백화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철혈부와 손을 잡게 된 것이었다. "......." 부상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단목우는 일체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몰골하는 듯 했다. 부상설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가 직접 이야기해 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억지로 그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상대방을 신뢰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단목우의 얼굴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 단목우는 망설였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게 되면 머지않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또한 그녀는 능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름조차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의 관계로 볼 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지 않았는가. "내 이름은......." 단목우는 그녀의 귀 가까이에 자신의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에게 은밀히 내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만큼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이오." "......!" 단목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단 둘이 있는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음으로 이름을 밝혔다. 부상설은 문득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목우.... 단목우. 절 사로잡은 분이 바로 단목우란 분이셨군요.......' 문득 그녀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또... 또예요?" 단목우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상으로 걸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여인들에게 이러는 것은 아니라오." "세... 세상에." 그녀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침상에 던져졌고 곧 육중한 사나이의 체중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단목우란 사내는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숱하게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보기를 돌보듯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 부상설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전신에 부어지는 순간 그녀의 육체는 해파리처럼 풀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시 열풍이 불어닥쳤다. ⑤ 다음날 아침 단목우는 광명회를 떠났다. 광명회의 구파일방 원로들, 즉 봉공(奉公)들은 의구심을 지닌 채 단목우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와의 거북한 관계가 개선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목우는 광명회에 온 지 만 하루만에 떠나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에 그는 부상설과 불꽃보다도 더 뜨거운 애정을 나누었다. 물론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와 부상설, 그리고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 바로 그 한 사람. 백능소는 하루 전과는 무척 달라진 모습이었다. 단목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증오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단목우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무섭게 짓씹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상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예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의 눈이 부상설의 전신을 훑어볼 때마다 이상한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