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검도 3권 검궁인 저 차례 18장 구중천(九重天)의 풍운(風雲) 19장 무형지검(無形之劍) 20장 쓰러지는 백혈(白血) 21장 신산(神算)과 만마태존(萬魔太尊) 22장 흔들리는 마인(魔人)들 23장 백화십팔계(白花十八戒) 24장 패륜(悖倫)의 비사(秘事) 25장 혈전(血戰) 26장 애증(愛憎)의 여로(旅路) 27장 무너지는 백화성(白花城) 제18장·구중천(九重天)의 풍운(風雲) ① 갑작스런 금포인의 출현에 고귀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그녀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침의를 집어 나신을 가렸다. 요염하기만 했던 그녀의 표정에는 온통 수치심과 모멸감이 얼룩져 있었다. "오왕야......." 고귀인은 옷자락을 여미며 금포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대가 백혈인가?" 그러나 금포인은 고귀인을 완전히 무시한 채 단목우의 얼굴을 주시하며 말을 던졌다. 단목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역시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이다. 당신은 이곳의 주인이시겠구료." "흠!" 금포인은 신음을 발했다. 과연 그는 이곳 왕부의 주인인 오왕야였다. 다시 말해 대명황실의 종친(宗親)이자 당금 황제의 아우이기도 했다. 그의 신분은 실로 하늘과 같이 지고무상한 것이었다. 일반인은 그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하며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능자였다. 그럼에도 눈 앞의 일개 청년은 추호도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당당하게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오왕야는 신음을 흘리며 단목우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 충돌했다. "......!" 오왕야는 눈썹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상대방이 감히 자신을 마주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단목우의 차갑고 정명을 눈빛을 대하는 순간 흔들리고 말았다. 이런 느낌은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심지어는 당금의 황제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오왕야는 미간을 좁히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곳은 왕부일세. 자네가 야심한 시각에 본 왕부에 침입한 목적이 무엇인가?" 단목우는 즉시 대답했다. "한 가지 물건을 가지러 왔소이다." "그게 무엇인지 얘기해 줄수 있나?" "혈판장." 단목우는 구구한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왕야의 안색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이 자는 타협을 모르는 자다.' 오왕야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황족이었으며 거대한 야망을 안고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짧은 시간에 단목우의 기질을 파악했다. "허허! 정말 가소로운 말을 하는구나. 감히 왕부에서 태연히 물건을 훔쳐가려 하다니." 오왕야는 냉혹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는 슬쩍 우수를 들어 올렸다. "죽어랏!" 돌연 창문이 박살나면서 십여 명의 인영이 뛰어 들었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단목우를 공격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기습이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그들이 휘두른 검광도영(劍光刀影)으로 뒤덮여 버렸다. 그러나 단목우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그 자리에 선 채 검을 가볍게 움직였다. 일섬(一閃)! 그의 손에서 전광과도 같은 검기가 폭사했다. 번쩍......! 검기는 그를 중심으로 방 안을 온통 푸른 빛으로 휘감았다. "크아아악!" 처절한 단말마가 연이어 울렸다. 이어 자욱한 피보라가 퍼졌다. 방 안에 뛰어든 십여 명의 인영은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은 들어올 때보다 더 빨리 바닥에 누워 버렸다. 실로 놀라운 쾌검이었다. 또한 잔인한 살검이기도 했다. 한 사람도 숨이 붙어있는 자가 없었다. 단 일검에 단목우는 습격자들을 황천으로 보낸 것이었다. 바닥에 즐비하게 쓰러진 흑의인들의 가슴은 한결같이 일 자(一字)가 그러진 채 선혈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검식이었다. ".....!" 오왕야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고 있었다. "헛! 놀라운... 쾌검!" 그는 비록 황족이었으나 평소 많은 무림인들을 접해 왔었다. 또한 스스로도 무학을 익혔으므로 무공에 관한 넓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단목우가 펼친 검법 만큼 빠른 쾌검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단목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안색으로 말하고 있었다. "왕야, 이 정도 인물들로 불초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큰 오산이오." "......!" 단목우는 만면에 조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왕야의 야심을 위해 한껏 이용하고 정을 나눈 고귀인까지 제거하려는 짓은 왕야의 신분으로부터 인품으로 보나 너무도 비열한 짓이 아니오?" 그 말에 고귀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의문으로 눈으로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날... 죽이려했다니?" 단목우는 냉오한 시선을 오왕야에게고 돌리며 말했다. "고귀인께서 직접 물어 보시오." "왕야!" 고귀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오왕야를 바라보았다. 오왕야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단목우를 향해 호통을 쳤다. "터무니 없는 소리! 무슨 증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하하하! 왕야. 체통을 지키시오. 그럼 이것은 무엇이란 말이오?" 단목우는 왼손의 주먹을 펼쳐 보였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검푸른 빛이 번쩍이는 자오정(子午釘)이 대여섯 개 놓여 있었다. "그... 그게 뭐냐?" 오왕야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단목우는 자오정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자오정에는 극독이 발라져 있소. 일단 피를 보면 극독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침투하여 일각도 못되어 전신이 시커먼 독수(毒水)로 화해 버리게 되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잘 보시오. 자오정에는 백화성의 고유문양이 새겨져 있소. 그렇다면 이들은 백화성의 무인들일 것이오. 그들은 창문을 통해 날 습격하는 척하면서 그 중 두 명이 고귀인을 향해 자오정을 날렸소. 미리 발견하여 막아내지 못했다면 고귀인은 지금쯤 한 줌의 독수로 화해버렸을 것이오. 이래도 변명하시겠소?" "아아! 왕야...! 당신이 그럴 수가......?" 고귀인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그녀는 실로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이제껏 목숨을 내걸고 그와 살을 섞으며 불륜을 저질렀으며 황제를 시해하기 위한 음모에도 가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와서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니....... 고귀인은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맞아! 이곳에 매복자를 숨겨둔 것만 봐도 언젠간 날 해치려 했었음이 분명해!' 한편 오왕야의 얼굴은 완전히 탈색되어 있었다. 단목우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실제 백화성의 무인들을 시켜 고귀인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고귀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백화성과의 협정으로 더이상 고귀인이 필요 없었다. "다... 당신이 감히......!" 고귀인은 전신을 덜덜 떨며 분노에 찬 외침을 발했다. 그녀의 눈은 한껏 독기를 뿜은 채 오왕야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왕야는 모든 것이 들통났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이상 변명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도리어 입가에 냉혹한 미소를 띄웠다. "날 원망하지 마시오. 귀인." 고귀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왕야의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정말 그녀를 제거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왜? 대체 무엇 때문에...? 난 왕야에게 잘못한 게 없는데......?" 오왕야는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귀인은 날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야망을 위해서라면 형제마저 제거할 수밖에 없는 내 성격을." "아아!" 고귀인은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순간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단목우였다. 단목우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고귀인, 당신은 이제 오왕야의 본성을 알게 되었을 것이오. 비록 잘못을 저지르긴 했으나 당신에게는 아직도 선택의 여지가 있소. 귀인이 지금이라도 바른 길로 돌아선다면 방법은 남아 있소." 고귀인은 그의 가슴에 기댄채 핏기를 잃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게... 무엇이죠?" "혈판장이 어디있는지 말씀해 주시오. 대명황조를 지키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혈판장을 찾아야 하오." "......!" 고귀인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어렸다. 이때 오왕야가 으시시한 음성으로 협박했다. "귀인! 그걸 발설하면 너는 물론 네 오래비 고영까지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겠다!" "......!" 고귀인은 전신을 한 차례 바르르 떨었다. 단목우는 그녀의 허리를 통해 그녀가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겁먹을 것 없소. 귀인. 옳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오. 지난 날의 잘못은 옳은 결단을 내림으로써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이오." 문득 고귀인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특히 단목우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고 있었으므로 마치 다정한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인! 역시 타고난 탕녀답구나, 그새 그 놈과 붙었느냐? 보기가 좋구나." "......!" 고귀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오왕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 그래도 이 몸은 한 때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런데...당신의 마음이 이토록 사악할 줄이야....... 아아!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어요." 단목우는 문득 동정심이 일었다. 그는 고귀인의 가냘픈 몸을 가볍게 안아주며 말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시오. 귀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고귀인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서렸다. "만일... 조금만 더 일찍 당신을 만났더라면... 아아!" 문득 고귀인은 손을 뻗어 휘장이 처져있는 내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혈판장은 침상에 있는 베개 속에 숨겨 두었어요." 그 말에 오왕야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고귀인은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독기어린 음성을 뱉았다. "왕야! 당신은 큰 실수를 했어요. 애초부터 이 몸에게 혈판장을 맡기지 말았어야 했어요. 더구나 날 해치려 들지 말았어야 했어요. 당신의 야망도 이젠 끝이에요!" 단목우는 고귀인을 안은 채 신형을 날렸다. 내실 안에는 상아로 된 커다란 침상이 있었다. "내가 혈판장을 꺼내 주겠어요." 고귀인의 말에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귀인은 즉각 베개를 꺼내더니 침상 머리맡에 숨겨두었던 비수로 베개를 그었다. "이게 바로 혈판장이에요." 단목우는 그녀가 건네주는 비단으로 된 책자를 받았다. 그는 책자를 잠시 살펴 보았다. 책장 속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각각 다른 필체로 적혀 있었다. '과연 틀림없는 혈판장인 것 같군.' 이때 오왕야가 내실로 걸어 들어왔다. 단목우는 혈판장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오왕야는 고귀인을 노려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귀인, 놈이 혈판장을 손에 넣었다고 사태가 달라질 것 같은가?" 고귀인은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어요. 왜 날 제거하려고 했죠?" "흐흐! 당연한 것이 아닐까?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과 간통하고 그녀의 힘을 빌어 황위에 올라서야 어찌 제왕의 체면이 지켜지겠는가?" "겨... 결국 그랬었군요!" 고귀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 나왔다. 오왕야는 고개를 돌려 단목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백혈, 그대의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지. 그러나 우리가 인연은 과히 좋은 것이 아닌 듯 하구나." 이어 그는 손뼉을 두 번 쳤다. "부르셨습니까?" 누군가의 음랭한 응답과 함께 사면의 벽이 소리없이 열렸다. 놀랍게도 침실의 사면 벽에서 유령처럼 흑영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략 잡아도 이십 명이 넘었다. "이럴 수가......!" 고귀인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설마하니 침실에 조차 감시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 했다. 그것은 단목우도 마찬가지였다. 침실이란 가장 은밀한 장소다. 뿐만 아니라 이곳이 어디인가? 바로 오왕야의 처소였다. 이곳에서 고귀인은 그와 숱하게 몸을 불태웠으며 교태를 부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침실의 벽에 수십 명이 은닉하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들이 은밀한 두 사람의 정사를 환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고귀인은 그만 너무도 놀란 나머지 침상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지나친 경악과 배신감, 허탈감이 겹쳐 혼절을 하고 만 것이었다. "흐흐흐......! 백혈. 오늘로써 너도 끝이다." 이때였다. 꽝...! 우르르! 돌연 전각이 무너질듯한 폭음이 울리며 사면 벽이 진동했다. "무슨 일이냐?" 오왕야는 안색이 대변했다. 쾅! 하는 폭음이 울리며 갑자기 문쪽으로부터 무수한 궁노가 쏘아들어왔다. 슈슈슈슈슉!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수십, 수백 자루의 강전(强箭)이 날아온 것이었다. "크아악!" 벽으로부터 나타났던 흑영들이 강전을 맞고 반 이상 쓰러졌다. 오왕야는 이 돌연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역죄인은 포박을 받아라! 황명에 의해 왕부를 접수하고 오왕야를 모반 혐의로 체포하노라!" "헉!" 오왕야는 그만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돌변한 사태였다. 방 안으로 수십 명의 인영이 우르르 달려들어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신에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었다. "오군도독부!" 오왕야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득 컬컬한 음성이 울려왔다. "오왕야! 당신을 모반 혐의로 황명을 받들어 체포하러 왔소!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오!" 뒤이어 붉은 갑주를 입은 오순 가량의 위풍당당한 장군이 호위병을 거느린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순간 오왕야는 모든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부르르 떨면서 뇌까렸다. "오군도독 오합소(吳合蘇)! 네가 어찌 이곳에......?" 과연 그랬다. 나타난 장군은 바로 대명의 병권(兵權)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오군도독 오합소였다. 오합소는 천자의 직인이 찍힌 황금색의 두루말이를 펼쳐들며 위무당당하게 말했다. "황상의 성은이 하해와 같은데 감히 같은 황족으로서 역모를 꾀하다니, 만조백관과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대를 체포하겠다! 황명을 받들라!" "으으......!" 오왕야의 이마에 굵은 심줄이 어렸다. 그는 모든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당초 오군도독 오합소는 혈판장에 서명하도록 포섭할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오군도독부의 군사들을 이끌고 왕부에 나타났다는 것은 일이 틀어져도 보통 틀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때였다. 단목우가 그를 향해 말했다. "오왕야. 당신의 음모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판을 받으시오." "으으음!" 오왕야는 입술을 악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주위에는 수하들이 아직 십여 명 있었다. 그들은 화살을 간신히 피하거나 막아낸 자들이었다. 문득 오왕야의 얼굴에 음침한 빛이 어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단목우를 향해 말했다. "본좌가 졌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저벅저벅 오군도독 오합소를 향해 걸어갔다. 오합소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날 쉽게 포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합소. 내 발로 걸어 나가겠다. 네가 날 저지하려 한다면 많은 희생을 치뤄야 할 것이다." "감히... 황명을 거역하시겠단 말씀이오?" 오합소는 약간 질린 표정이었다. 이때 그의 귓전으로 한 가닥 전음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단목우의 전음이었다. "오군도독. 그를 막지 마시오. 그는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장군의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소." 오합소는 의아한 표정으로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단목우는 그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자는 동창 금의위의 서립에게 맡기시오. 오왕야는 그가 직접 처리할 것이오." 단목우의 전음에 오합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이곳에 나타났던 것은 바로 서립 때문이었다. 서립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오합소는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오왕야, 전하는 황족이외다. 예의를 갖추어 일단 보내 주겠소. 하지만 결국 전하는 모반에 대한 심판을 받게될 것이오." "으하하하핫! 그야 두고봐야 알 것이다." 오왕야는 일진광소를 터뜨리며 오합소를 지나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를 따라 흑의인 십여 명도 서서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단목우는 오합소에게 말했다.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결국 바른 길을 택하셨구려." 오합소는 눈썹을 꿈틀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황상의 태조 폐하의 성은을 입은 신하가 어찌 감히 반역을 꾀한단 말이오? 당연지사외다." 단목우는 창가로 걸어갔다. 부서진 창문을 통해 왕부를 내려다 보니 수많은 횃불이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왕야가 그 횃불 사이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못해 멈추어야만 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한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립. 이젠 자네가 공을 세울 차례다.' 단목우는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창문을 빠져나와 밤하늘 속으로 자취고 감추고 말았다. ② 자금성(紫金城). 자금성은 일명 구중천(九重天)이라고도 불리운다. 그것은 아홉 겹의 하늘이란 뜻이다. 그만큼 자금성의 규모는 천하를 군림하는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명침궁(明寢宮)은 구중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전으로 일반인 물론이거니와 기라성같은 고관대작들조차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명침궁은 바로 황후(皇后)가 거처하는 내명부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궁녀거나 환관(宦官), 또는 황제밖에 없었다. 삼경 말 쯤이었다. 스스스....... 야심한 시각에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명침궁으로 스며드는 자가 있었다. 바로 서립이었다. "......!" 서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오군도독 오합소를 설득하여 왕부를 치게 하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오왕야를 생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명침궁으로 잠입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찜찜하기만 했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남의 시선을 피하며 황후가 기거하는 명침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역모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황후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었다. '저곳이로군.' 서립은 자신이 목표로 하던 건물을 찾자 이내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황후마마." 꿈결인 듯 했다. 그러나 똑같은 음성에 똑같은 부름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황후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대명황제의 황후였다. 그녀가 잠든 명침궁은 구중천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천하에도 오직 한 사람, 황제가 아니라면 잠든 그녀를 깨울 자란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 황후는 비단 침의를 여민 채 상아에 황금, 보주로 장식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휘장 밖을 내다보는 황후의 얼굴에 미미한 동요가 어렸다. 누군가 엎드려 있다. 그 자는 궁녀도 아니고 환관도 아니었다. 일신에 누런 경장을 한 무인의 복장이었다. 황후의 얼굴에 추상같은 분노가 떠올랐다. "누구냐? 야심한 시각에 감히 명침궁에 예고도 없이 들어오다니......?" 침전에 엎드려 있는 자는 다름아닌 서립이었다. 그는 황후가 깊이 잠들어있는 것을 보고 부복한 채 몇 번이나 아뢰었던 것이다. "황후마마! 신(臣)이 무례를 범한 것은 극형에 처해질 행동이나 워낙 화급한 일인지라... 잠시 신의 말씀을 들어 주소서." 정명황후(貞明皇后)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 무척 분노했으나 상대의 말에서 충심(忠心)을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필시 그럴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정명황후는 노기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음! 그대가 이 시간에 명침궁에 든 것은 필히 까닭이 있을 터, 그 이유를 말해 보아라. 하지만 명분이 뚜렷치 않다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줄은 알고 있으리라?" 정명황후의 말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서립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신은 서립이라 하오며 동창에 소속된 금위대입니다." "동창의 금위대라고?" 정명황후는 언뜻 미간을 모았다. 동창이라면 대명황조를 지켜온 핵심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자가 뜻밖에 자신을 찾아온 것에 황후는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황후는 재촉했다. 서립은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신이 감히 황후마마의 침소를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은 고귀인의 반역음모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 입니다." "뭐라고?" 정명황후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동시에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고귀인이 누구인가? 의당 그녀가 차지해야할 황상의 총애를 독차지한 채 매일 밤 그녀로 하여금 독수공방을 지키게 한 숙적이 아닌가? 정명황후는 비록 대명의 국모(國母)로 한없이 깊은 자애와 인덕을 지지고 있었으나 결국 여인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사랑을 빼앗아 가버린 고귀인에 대해 무서운 질투심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황후라는 신분 때문에 노골적으로 질투를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황후는 고귀인이란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도 깰 지경이었다. 그만큼 고귀인에 대한 그녀의 한은 깊었다. 그런데 느닷없는 침입자의 입에서 고귀인이 반역음모를 벌였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그게 사실인가?" 서립은 즉각 말했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분명 고귀인은 반역에 가담했사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엇인고?" 정명황후는 급히 물었다. 그녀는 이제 상대가 명침궁을 침입한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번 반역음모는 고귀인뿐 아니라 배후인물이 또 있사옵니다." 황후는 음성이 떨려 나왔다. "배후인물이라고? 그게... 누구인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오왕야 주천능(朱天凌) 전하이옵니다." "뭐... 뭐라고?" 정명황후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오... 오왕야가? 그게 사실이냐? 그... 그럴 수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왕야는 오래 전부터 역천을 꿈꾸어 왔으며 고귀인과 더불어 은밀히 모반을 추진했습니다." "그... 그래서?" 서립은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용서를 구할 일이 있사옵니다." "......?" "감히 신 직분을 망각하고 오군도독 오합소를 설득하여 오왕야의 왕부로 군사를 출동시켰사옵니다." 정명황후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오군도독부가 출병했다고? 아니, 폐하의 윤허를 받지 않고 말이냐?" "신 감히 월권을 했습니다." 그 말에 정명황후의 안색이 변했다. 황제의 칙령을 받지 않고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분명한 월권이었다. 아니 그것은 엄청난 행위였다. 마음대로 그것도 자금성이 있는 황도에서 군사를 움직이는 자는 능지처참하게 되어 있었다. 정명황후는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시선을 휘장 밖으로 던졌다. 서립은 여전히 부복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저 자는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다. 비록 이곳을 무단침입하고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긴 했지만 그것은 역모를 진압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명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고귀인에게 황제의 총애를 뺏긴 후 명침궁에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이름만 황후일 뿐 그녀는 점차 권력이 멀어져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라.' 그녀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서립이란 자는 제발로 들어와 고귀인의 역모를 알렸다. 게다가 오군도독부까지 움직여 오왕부를 진압했다고 고하지 않는가? 정명황후의 입가에서는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죄가 됨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지? 그렇다면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냐?" 서립은 비로소 고개를 약간 들었다. 서립의 강직한 인상을 본 황후는 더욱 그가 믿을 만한 사나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황후마마. 이번 역모에는 오왕야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즉 황족이 얽혀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신이 어찌 황상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만, 자칫 폐하께서 자비로운신 나머지 역모를 단호히 처리하지 않으실까 근심스럽습니다." 정명황후는 부지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고귀인은 황제가 지극히 총애하는 요녀였다. 게다가 오왕야는 황상의 친동생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황제가 그들이 반역을 했다는 직언을 한들 믿을 리가 없었다. 비로소 정명황후는 서립이 허락도 받지 않고 오군도독부를 움직여 왕부를 진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라! 자세히 얘기를 듣고 싶구나." "황공합니다." 서립은 완전히 고개를 들었다. 정명황후 쪽에서는 그를 볼 수 있었지만 휘장으로 인해 서립은 그녀를 볼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알려다오." 서립은 충심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사건은 태후(太后)께서 직접 나서야만 합니다." "태후마마께서!" 정명황후는 놀란 듯 외쳤다. 그러나 곧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서립의 뜻을 알게된 것이었다. 태태는 바로 황제의 친모였다. 비록 연로하여 내명부의 일에서 손을 뗀지 오래였으나 그녀야말로 종실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황제도 태후의 말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 아닌가. "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정명황후의 음성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 서립을 자신의 측근으로 대하고 있었다. 서립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신 황후마마께서 저어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 놓으십시오. 그들이 역모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이미 확보해 두었습니다." "오! 그게 무엇인가?" "역모에 가담한 자들이 직접 서명을 한 혈판장이 있습니다." "혈판장! 그게 지금 어디 있느냐?" 서립은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신에게 강호에서 사귀게 된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혈판장을 구해올 것입니다." 이어 서립은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는 원래 말주변이 없는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조리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단목우의 안배였다. 서립이 황후에게 한 말은 대부분 단목우가 미리 알려준 것들이었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였다. 정명황후는 서립과 함께 명침궁을 나서고 있었다. 물론 태후궁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대도 함께 가도록 하오." 정명황후는 약간 뒤에서 걷던 서립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서립은 고개를 흔들었다. "신이 어찌 감히 태후마마를 뵈올 수 있겠습니까?" "괜찮다. 함께 가도록 하자." "황공하옵니다만 신에게는 급히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태후마마를 뵙고 보고드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단 말이냐?" 서립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일에는 태감인 고영반(高領班)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자는 고귀인의 오래비로 이미 역모에 깊이 가담되어 있는 자입니다." "그렇구나!" 정명황후는 비로소 떠올린 듯 안색이 변했다. 서립은 이어 말했다. "만일 그 자가 오왕부가 오군도독에 의해 장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필시 동창의 고수들을 동원하여 난(亂)을 일으킬 것입니다. 신은 이 길로 고영을 제압하러 가야 합니다." 황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 말을 듣고보니 그 일이 더 급한 듯 하구나. 그럼 무사히 반역자를 처리한 후 다시 내게 보고하도록 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마마!" 황후는 믿음직스러운 눈으로 서립을 잠시 바라본 후 돌아섰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태후궁으로 향했다. 서립은 멀어져가는 정명황후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고영! 이제 우리들의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은원만 남았다.' ③ 만박뇌환자 숙야풍. 그는 기형인간(奇形人間)이었다. 그것은 그의 머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나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대두(大頭)에는 천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엄청난 지략이 들어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있는 자들은 결코 그를 기형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의 앞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숙야풍은 큰 뇌로 만인을 꿰뚫어보고, 그들을 압도한 채 백도의 하늘인 백화성을 군림하고 있었다. "......." 그런 숙야풍이 지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난제에 부딪쳤을 때 보여주는 표정이기도 했다. 한편 숙야풍을 주시하고 있는 스무 쌍의 눈빛도 역시 어두웠다. 지금 그들은 원탁 위에 펼쳐진 전도 상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주사로 점을 찍어놓은 곳은 바로 자금성이 있는 곳이었다. 문득 숙야풍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복림도방에 나타났었다고?" 스무 쌍의 눈동자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두 시진 전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그곳에서 한 임물과 도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는 갑자기 누군가의 암습을 받아 살해되었습니다." "그 자의 신분은?" "금위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숙야풍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눈알을 디루룩 굴리더니 반문했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고 생각되느냐?" 스무 쌍의 눈동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대답했다. "혈판장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숙야풍은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단목우.... 네놈은 갈수록 날 괴롭히는구나." 스무 쌍의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다. 숙야풍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를 빨리 제거해야만 잠자리가 편해지겠군." 숙야풍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십인 중에서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처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늦었다." 숙야풍은 짤막하게 내뱉고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 스무 쌍의 눈동자는 깊이 가라앉았다. 이미 늦었다. 그것은 숙야풍의 판단이었다. 또한 이십인도 그 점에 있어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십인은 선천적인 불구자들로 평생을 의자에 앉아서 지내야만 했다.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숙야풍에게 이십 개의 뇌(腦)를 빌려주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의 판단과 숙야풍의 생각은 늘 일치되어 왔다. 그럼으로써 이십인은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백화성에서 가장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생명은 숙야풍의 것이었다. 그들의 뇌가 그러하듯이. 따라서 그들은 숙야풍이 움직여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고, 그가 침묵하면 따라서 침묵해왔다. "......." 지금 흑루의 대전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십인의 눈동자도 무겁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인인 숙야풍을 괴롭히고 있는 인물. 백혈(白血). 아니 이젠 이름이 밝혀진 인물. 단목우란 사나이에 대한 집중이 시작되고 있었다. ④ 숙야풍은 좀처럼 떠나지 않던 흑루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가 흑루에서 나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백화성 사람들은 그가 흑루에서 나오는 것을 본 자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엇다.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숙야풍의 모습은 상당히 기묘해 보인다. 그는 큰 머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했다. 걸을 때마다 고개가 기우뚱거렸고, 그에 따라 걸음걸이도 어린아이처럼 오종종해 보였다. 지금 숙야풍의 표정은 무척이나 괴상해 보였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무엇인가 가슴 설레는 일을 하러가는 듯 연신 입술을 벙싯거리고 있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백화성의 서쪽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쪽에는 성보(城堡)대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곳이었다. 백화성의 서쪽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성보도 방책도 없었으나 백화성 사람들은 아무도 그곳에 가려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서쪽 절벽에 이르는 곳에 야생화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에 가공할 절진(絶陣)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한 번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과거 호기심에 찬 무인들이 몇 번 몰래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날 시신이 된 채 발견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그곳은 절대금역이 되고 말았다. 그곳은 만훼야(萬卉野)라 불리웠다. 만훼야 깊은 곳, 절벽 아래 두 칸의 모옥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 만훼야를 가로지르는 숙야풍의 코 끝에는 갖가지 꽃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꽃향기에 취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숙야풍이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지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만훼야를 질러가고 있는 그는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마침내 절벽 아래 당도했다. 두 칸의 아담한 모옥이 그곳에 축조되어 있었다. 울타리도 없는 모옥은 만훼야의 야생화와 어울려 무척이나 한가한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 풍아가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숙야풍의 얼굴에는 놀랍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모옥 안으로부터 자애로운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 오너라." 그 말을 듣자 숙야풍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얼른 그것을 감추 듯 소매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숙야풍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방 안의 모습은 기이했다. 바닥에도, 벽에도, 창문에도, 탁자에도, 온통 야생화가 가득차 있었다. 그로인해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 아니라 마치 온실에 온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방 안쪽에는 역시 야생화로 온통 둘러 싸여있는 백색의 침상이 있었다. 그 침상 위에 한 중년미부가 누워 있었다. 야생화에 파묻히다시피한 방. 백색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중년미부. 그 앞에 무릎꿇고 있는 머리가 두 배나 큰 숙야풍. 모든 것이 부조화였으며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운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미부의 안색은 창백했다. 아니, 창백하다 못해 완전히 백색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은 과거 빼어난 미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기괴한 것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여인은 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긴 정도가 아니었다. 누워 있는 몸체에서 무릎까지가 머리칼이었다. 더욱 괴이한 것은 그녀의 머리칼이 동앗줄처럼 가닥가닥 꼬아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로인해 여인의 머리칼은 언뜻 검은 동앗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괴이한 것은 바로 여인의 눈빛이었다. 여인의 눈은 차가왔다. 만년한빙동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또는 북극의 빙천설지 위를 스치는 눈보라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머니." 숙야풍의 음성은 어린애처럼 어리광마저 느껴졌다. 그러자 여인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빠르게 사라졌다. 이어 이번에는 지극히 자애로운 빛이 흘러 나왔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왔느냐, 풍아." "네. 어머니." 숙야풍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마치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한껏 받는 듯한 어린아이가 보여주는 표정과도 같았다. 숙야풍은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드디어 어머님의 소원이 이루어질 날이 멀지 않았어요. 이제 넉넉잡고 석 달 후면......."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들었다." 문득 여인의 표정은 다시 일변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가닥가닥 증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원수 놈은 아직도 버젓이 눈뜨고 있지 않느냐? 그 자가 가증스럽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쉬고 있는데 내 어찌 편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에 숙야풍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 그는 두려운 듯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머님.... 설사 그렇다해도 그 분은 풍아의 친부가 아닙니까? 풍아는......." 여인은 싸늘하게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겠지." "흐윽! 어... 어머님!" 숙야풍은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을 떨었다. 놀랍게도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다! 내 너만 보면 그 더러운 인간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다. 썩 꺼져라!" 그 말에 숙야풍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이마를 바닥에 마구 찧어댔다. "흑! 어머님! 제발 노여움을 푸세요. 풍아는 견딜 수가 없어요.......!" 여인은 멍하니 그를 바라 보았다. 그런 여인의 얼굴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숙야풍은 피가 줄줄 흐르는 커다란 이마를 들어 올린 채 그녀를 바라 보았다. "아아! 풍아야, 왜 그러느냐?" "흐윽! 어머님." 숙야풍은 눈물과 핏물이 범벅이 된 채 무릎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갑자기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득 그녀는 침상 옆에서 촛대를 집어 들더니 냅다 던지는 것이었다. "보기 싫다!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퍽! 촛대는 무방비 상태인 숙야풍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 바람에 숙야풍의 이마에는 깊은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신음 하나 내지 않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것이 여인을 더욱 노하게 만들었다. 여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상의를 활짝 벌리는 것이 아닌가? "여길 봐라!" 여인은 자신의 유방을 가리켰다. 그녀의 유방은 아직도 아름다왔다. 여인의 손이 두 쪽의 유방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호호! 이게 무엇인지 알겠느냐? 바로 네 애비란 작자가 새겨준 정표다." 여인의 아름다운 유방 사이에는 보일 듯 말 듯 꽃잎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네 놈이 애비라 부르는 그 놈은 인간도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내가 네 놈을 낳은 어미인데 내 아버지인 그가 어떻게 또 네 애비가 된단 말이냐?" 여인의 음성은 증오심으로 날카롭게 울렸다. "제발! 제발! 그만 하세요, 어머니!" 숙야풍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쾅쾅쾅! 그는 그 큰 머리를 바닥에 마구 찧으면서 절규했다. "제발! 제발... 크아아!"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평소 침착하고 신중하기만 하던 만박뇌환자 숙야풍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완전히 광인의 그것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때였다. 숙야풍을 내려다 보던 여인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졌다. 여인은 손을 벌렸다. "아아! 사랑스런 내 아기야. 어미가 잘못했다. 흐흑! 네 괴로움을 왜 어미가 모르겠느냐? 자, 이리 오너라." 숙야풍은 부르르 떨면서 무릎걸음으로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그의 커다란 머리통을 안았다. 숙야풍은 머리를 여인의 부드러운 젖가슴 사이에 묻었다. 그 순간 숙야풍의 광기는 거짓말처럼 가라 앉았다. 여인은 숙야풍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화를 풀려무나. 그런데 어쩐 일이냐? 좀처럼 찾지않던 어미를 다 찾아오다니." 숙야풍은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의 그의 음성은 본래의 침착함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 가지 곤란한 점이 발생했습니다." 여인은 무엇을 느낀 듯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여전히 숙야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어미가 나서야할 일이라도 생긴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어머니." 숙야풍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모든 일은 풍아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한 방해자가 나타나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자의 능력이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나서 주셔야 겠습니다." "방해자가 나타났다고?" 여인은 아미를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에서 새파란 광망이 솟구쳐 올랐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정말 이 어미가 나서야 할 정도도 대단한 인물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머니." 숙야풍은 비로소 머리를 떼었다. 그는 어머니라 부르는 여인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한 그 일은 모두 여인을 위한 것이었다. 숙야풍은 머리가 두 배나 큰 기형인간으로 태어나 성정은 일반인과는 판이하게 틀렸다. 그런 그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은 바로 여인이었다. 저주스런 운명을 타고난 모자(母子). 두 사람 사이에는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불가해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들어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한 사나이의 출현 때문이었다. "자세히 얘기해 보거라. 풍아." 여인의 말이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숙야풍은 공손히 네, 하고 답한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백화성에서 근간에 일어났던 일들에게 대해 조리있게 얘기했다. 백혈(白血)이란 자의 행적, 광명회를 친 일, 그리고 그가 꾸민 일들에 백혈이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고 있는지를 얘기했다. 이윽고 그의 얘기가 끝났다. "그 아이가 그토록 널 괴롭혔더란 말이냐?" "어머니의 선처를 바랍니다." 숙야풍의 말에 여인은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탁, 하는 소리가 울리자 문득 방 안에 흰빛이 날아들었다. 야옹!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와 함께 백설처럼 흰 백묘(白猫) 한 마리가 불현듯 허공에서 떨어지더니 여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숙야풍의 커다란 머리를 품고 있던 젖가슴이었다. 젖가슴에는 숙야풍이 흘린 피가 얼룩져 있었다. 그런데 백묘는 그녀의 젖가슴에 안기더니 혀를 내밀어 그 피를 싹싹 핥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눈처럼 흰 고양이의 눈은 대조적으로 핏빛이었다. 여인은 백묘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천산설묘(天山雪猫)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됐구나. 놈은 결코 설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놈은 어미가 처리할테니 넌 너대로 일을 진행해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숙야풍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럼......." 숙야풍은 다시 한 번 절을 한 후 밖으로 뒤뚱뒤뚱 걸어 나갔다.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갑자기 여인의 표정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백묘를 쓰다듬으며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녀는 천장을 쏘아보며 살기띈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백가야. 이제 네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느냐? 호호호홋!" ⑤ 별영부(別榮府). 별영부는 동화문(東化門)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전각들을 통칭했다. 그곳은 다름아닌 동창(東廠)의 본부로 별영부란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아직도 짙은 어둠이 곳곳에 깔려 있는 여명이었다. 별영부의 화원을 한가로운 자태로 거닐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화원의 꽃들을 감상하며 화향에 취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미간에는 짙은 그늘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삼십대 후반으로 보였다. 기이한 것은 그의 용모였다. 그는 수염이 전혀 없었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에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수염자국이 전혀 없어 몹시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남자인 듯 하기도 했으며 여자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가 하고있는 복장은 황궁의 내전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복장으로 환관(宦官)들이 입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황궁의 태감인 음사귀장(陰邪鬼匠) 고영(高榮)이었다. 문득 화원을 서성이던 고영은 숨을 길게 들이키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머리를 툭 치며 중얼거렸다. "별 일이야 없겠지. 감히 누가 누이를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고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면(粉面)에 가깝도록 흰 그의 얼굴에는 다시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젯밤 돌아와야 하거늘 왜 아직 소식이 없단 말인가? 내궁이 빈 사실이 알려지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텐데......." 이때였다.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누굴 기다리나, 고태감?" "......!" 고영의 분면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약간 뜸을 들인 후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한 사나이가 팔장을 끼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팔장 한가운데는 한 자루의 거무튀튀한 검자루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고영은 그 사나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그의 숱이 적은 눈썹이 가늘게 춤추었다. "서립, 정말 너였군!" 사실 고영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상대가 서립이란 사실을 알았다. 서립은 느린 걸음으로 고영에게 다가섰다. "별로 놀라지 않은 모양이구려." 고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네가 호송관을 죽이고 탈출했다는 보고를 들었네. 그땐 다소 놀랐었지. 평소 자네의 성격으로 볼 때 결코 황명을 거역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서립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렇소. 과거의 나는 목을 내놓을지언정 황명을 거역하는 사람은 아니었소." "그럼 지금은 항명할 수 있단 뜻인가? 황상이 두렵지도 않나?" 서립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고영! 지금 네 입에서 감히 황상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 고영의 안색이 더욱 희어졌다. 그는 무엇인가를 느낀 듯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무슨 뜻이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고영! 이미 네 반역 음모는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래도 무릎을 꿇지 않겠느냐?" "음!" 고영은 신음을 발했다. 문득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날씨가 무척 좋군." "반역자의 최후로는 지나치게 좋은 날씨다." "흐흐! 넌 자신이 있느냐?" "자신없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넨 동창 내에서도 그런 면에서 무거운 인물에 속했었지. 아쉬운 일이었네." "뭐가 말인가?" "후후! 자네가 내 편이었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 것이란 뜻일세." 서립은 팔장을 풀었다. 그는 검자루를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 "고영. 모든 건 끝났다. 이젠 대가를 치룰 일만 남았다." "좋다. 서립.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스윽! 말과 함께 고영의 신형이 미끄러졌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처음에는 그저 고영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는가 싶었다. 그 순간 고영은 이미 서립의 앞으로 쇄도하면서 우수를 뻗어내고 있었다. 슈와앙! 가공할 장력이 폭사해갔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무서운 한기를 담은 장력이었다. 그러나 서립도 느리지는 않았다. 휘익! 그는 삼장 뒤로 몸을 섬광처럼 뺐다. "마지막 예를 표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겠다. 혈판장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 또한 오왕야는 오군도독부에 체포되었다." 고영은 흠칫했다. 그의 하옇던 안색이 이젠 석고처럼 굳어졌다. "사실이냐?" 서립은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한 번도 허언을 한 적이 없다." 콰아아아! 고영의 우수가 벼락처럼 날아왔다. 그의 손바닥은 열두 개의 수영(手影)을 뿌리며 서립을 향해 물샐틈없이 휘감아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손은 마치 서리가 덮인 듯 하얗게 변해 있었다. 동시에 주위에는 뼈를 에일 듯한 한기로 뒤덮이고 말았다. 서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의 검이 불을 뿜었다. 카카카캉! 손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냈다. 놀랍게도 고영은 맨손으로 서립의 날카로운 검을 쳐냈다. 동시에 고영의 좌수가 원을 그렸다. 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립은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으음!" 서립은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비틀거렸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처져 있었다. 그는 고영의 일장에 적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다만 어깨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 서립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서립은 당황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빙백수(氷魄手)?" 고영은 눈에 으시시한 살기를 뿌리며 말했다. "좋은 눈이야. 이미 실전된 지 백여 년이 지난 무공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그때서야 서립은 오른쪽 어깨가 한기로 인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백 년 전 천하에 악명을 떨친 빙백마군(氷魄魔君)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흐흐! 그 분은 조부이시다." 고영은 음침하게 뇌까리며 다시 장력을 날렸다. 콰콰콰....... 손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는 순간 그 어떤 것이라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한기가 휘모아졌다. 그와 동시에 서립의 눈빛이 장렬한 빛을 발했다. "사검파천(死劍破天)!" 번쩍... 파파파파팟! 서립의 검에서 무수한 검광이 장강대하처럼 뻗어나갔다. 빙백잠경(氷魄潛勁)이 하늘을 뒤집고, 검영(劍影)이 그 공간을 쪼개기를 수십 차례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불과 눈 몇 번 깜박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쿠쿠쿠쿠.... 쿠쿠! 지축이 흔들렸다. 수만 송이의 꽃잎들이 휘날렸다. 그로 인해 화려하게 만개해있던 화원의 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검기가 온통 천지를 가르고, 장경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꽃잎은 산산조각으로 잘려지고 가루가 되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주변은 금새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콰쾅! 문득 굉렬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갈라섰다. "음, 대단하구나." 먼저 입은 연 것은 고영이었다. 그는 밀랍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무서운 살기가 더욱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는데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쿨럭쿨럭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무려 한 자 길이의 깊은 검상(劍傷)이 나 있었었다. 서립의 검격에 적중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립 또한 온전치 못했다. 아니, 그는 더욱 큰 중상을 입고 있었다. 주르르....... 서립의 입가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상대방의 가공할 빙백잠경에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서립은 검을 의지한 채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만일 검이 아니었다면 그는 제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립의 눈빛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흐흐! 대단하구나. 네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젠 끝을 낼 때가 되었다." 고영은 음산하게 말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비록 검상을 입었으나 아직도 여력이 있었다. 그는 저벅저벅 서립을 향해 걸어갔다. "......!" 서립은 입술을 악문 채 검자루를 힘주어 잡았다. '이걸로 정말 끝장인가?' 그는 알고 있었다. 두 번씩이나 빙백잠경을 맞은 그의 혈맥은 이미 진기가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그저 강호의 삼류고수 정도의 실력만 있어도 현재의 그는 상대할 힘이 없었다. "......!" 문득 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보았다. 앞으로 걸어오던 고영이 쌍수를 서서히 치켜드는 것을. 그 순간 무시무시한 예기(銳氣)가 그의 쌍수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에 보여주었던 빙백수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두 자루의 종잇장처럼 얇은 유엽도(柳葉刀)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옥대로부터 뽑아든 것이었다. 파파파파팟! 도광이 줄기줄기 뻗어 올랐다. 불과 한 자 길이의 짧은 유엽도에서 토해지는 도광은 단숨에 대지를 뒤덮을 듯 서립을 휘감아 갔다. 서립은 다급히 숨을 들이키며 최후의 진력을 다 뽑아내며 맹렬하게 검세를 떨쳐냈다. 카카캉! 불꽃이 튀어올랐다. "으윽!" 짧은 신음과 함께 서립은 두 번이나 공중에서 회전하며 저만치 뒤로 떨어졌다. 단 한 번의 교전이었으나 거기서 느껴지는 상대방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는 어깨와 대퇴부, 그리고 옆구리까지 도합 여섯 군데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 서립은 전율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검이 빠르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러나 고영의 유엽도는 그보다 더욱 빨랐다. 뿐만 아니라 눈부시도록 현란하기조차 했다. "각오는 되었겠지?" 고영은 환관만이 지닐 수 있는 가냘프면서도 날카로운 음성을 자신도 모르게 토해내며 독수리처럼 서립을 덮쳐갔다. "으음!" 서립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미 내상이 깊은 상태였다. 이번 격돌로 이렇게 많은 상처를 입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열 번은 쓰러졌을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저 자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서립은 죽기를 각오하고 동귀어진(同歸於盡)이란 문자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파아! 그의 검이 호선을 그려갔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문득 여명 속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와 고영을 향해 섬광처럼 쏘아가는 것이 아닌가? 카카캉... 번쩍!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이 연이어 울리며 무수한 불꽃이 일어났다. 동시에 두 개의 인영이 갈라섰다. "......!" 고영은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천하에서 자신의 유엽도를 막아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전권에 뛰어든 인물은 그의 유엽도를 모두 차단했을 뿐더러 그로 하여금 뒤로 삼 장이나 물러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으음!" 고영은 무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서립과의 사이에 내려선 인물을 바라보았다. 나타난 자는 의외로 ㅈ었다. 그 자는 평범하게 생긴 수중의 검을 흡사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흔들며 입가에 미소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놀랍군. 오래 전에 맥이 끊어진 것으로 알려진 해남도(海南島)의 칠칠사십구식 유엽쌍도(七七九十式 柳葉雙刀)를 다시 보게 되었으니 말이오." "......!" 고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수법을 단숨에 파악해낸 데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대는 누군가?" 고영은 의혹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청년은 여전히 검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 대며 대꾸했다. "고영반은 아마도 백화성의 인물들에게 들어 보았을 것이오. 백혈이란 이름을." "백혈!" 고영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백혈이란 이름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고영은 상대에게서 엄청난 압력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겪어보지 못했던 무형의 압력이었다. 아니 여느 사람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기도였다. 제19장 · 무형지검(無形之劍) ① 고영은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것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무형의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목우는 여전히 검끝으로 땅을 툭툭 찍거나 흔들어 대면서 느릿하게 말문을 떼었다. "나는 일찍이 해남도(海南島)의 유엽쌍도에 대해 들어보았소. 언젠가 한 번은 견식하고 싶은데 하늘이 내 뜻을 굽어 보신 듯 하오." "......!" 고영의 눈꼬리가 파르르 진동했다. 이 얼마나 오장육부를 비트는 한 마디인가? 단목우는 한 마디 더 던졌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담담한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또한 상대로 하여금 강렬한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분노하고 있는 고영이었다. 아니, 그는 지금 이 순간 전 공력을 끌어올려 무엇인가 폭발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고영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날렸다. 파아......! 유엽도가 허공을 갈랐다. 춤추듯 그림자를 그려내며 유엽도는 하늘과 대지를 번뜩이는 섬광으로 가득 채우며 단목우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휩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스윽......! 단목우는 한 발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며 수중의 검을 가볍게 위로 베어갔다. 지극히 간단한 동작이었다. 번쩍! 일도쾌섬(一刀快閃). 한 줄기 섬광이 환상처럼 피어올랐다. 유엽도에서 발한 섬광의 무리와 환상적으로 피어오른 검광이 충돌한 것은 뇌전이 때리는 것보다 더 빠른 순간이었다. 콰... 아아아......! 작렬하듯 굉렬한 음향이 울렸다. 동시에 유엽도에서 발한 섬광무리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때였다. 섬광 사이로 드러난 고영의 몸뚱아리가 아래서부터 정수리로 이어져 올라가며 정확히 둘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악!" 피보라가 솟구쳐 오르며 길고도 처절한 단말마가 울렸다. 투두... 툭! 고영의 양분된 몸뚱아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단목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섰다. "......!" 서립은 부지중에 몸서리쳤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보았던 단목우의 일검은 인간이 펼쳐냈다고는 믿어지지 않은 쾌(快)와 강(强)의 일검이었다. 그런데도 단목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검을 펼쳐냈던 사람이라고 믿기에는 단목우의 눈빛은 일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것이었다. 단목우는 싱긋 하얀 이를 드러냈다. "내가 손을 쓴 점을 용서하게. 하지만 주위에 고수들이 둘러싸고 있고, 바쁘게 움직여야할 자네가 지체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서였네." "후훗!" 서립은 그때서야 고소를 머금으며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그도 이미 자신의 청각을 이용하여 그런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찍부터 동창의 고수들이 몸을 숨기고 이번 결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과 고영이 치르는 승부의 결과를 지켜보고 그 여하에 따라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당신도 그런 겸양의 말을 할줄 아오?" 서립은 쑥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서립은 익히 알고 있었다. 만일 단목우가 제때에 나타나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립의 속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단목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거나 왕부에 갔던 일로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게 되어 다행이로군." 서립의 눈에 열기가 치솟았다. 그는 급히 되물었다. "찾아냈소?" "여기 있네." 단목우는 소매 속으로부터 얇은 비단책자를 꺼내 서립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바로 혈판장이었다. 서립은 즉시 그것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단목우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만 가겠네." 서립이 고개를 급히 저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 단목우는 또 한차례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섭섭하이. 어떤가? 화예원(花藝院)에서 술이나 한 잔하며 대화나 나누는 것이?" 그 순간 서립은 미간을 모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또 화예원이오?" "왜 여자라면 그리 질색하는가? 혹 자네 그 물건이 형편없는 것이 아닌가?" 단목우는 웃음을 깨물며 물었다. 서립은 얼굴을 붉혔다. "모욕은... 삼가 주시오." 사실 그랬다. 단목의 말은 농담이었다. 지금까지 서립은 오직 무(武)만 숭상해 왔을 뿐이었다. 그는 여인을 가까이 해 본 적이 극히 드물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서립은 음양의 조화가 무엇인지도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만 매달려 온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단목우가 여인들 얘기를 꺼내자마자 질색하여 술마저 사양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서립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세인들이 말하는 쾌락이며 즐거움 따위를 무시하며 지내온 사내였다. 단목우는 안색을 굳혔다.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절대 황궁과 백화성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힘써 주게. 무림사(武林事)는 무림인의 손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놓아두는 것이 피차간에 좋을 것이네." "가능한 한......." 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 황상을 뵙는게 어떨까 하오만....... 황제께서 당신의 알현을 받고자 하시오."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게. 황상이 아니라 황후의 뜻이겠지." 서립은 씁쓰름하게 웃었다. 자신의 속내를 들켰기 때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황후마마께서 황상께......." 서립은 아쉽다는 듯이 단목우에게 말을 이었다. 그 순간 단목우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강호의 일 이외에는 어떤 것에 관심이 없네. 더더욱 황궁의 일에는 일푼의 흥미도 없네." 서립은 미간을 모았다. "황상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오?" "후훗! 날 겁주지 말게. 난 어느 누구의 명도 받지 않는 사람이니까." "......!" 서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제안이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기는 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단목우는 바람과 같은 삶을 사는 자였다. 그런 자를 자신의 뜻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틀만 기다리겠네. 그때까지 오지 않으면 바쁜 줄로 알고 떠나가겠네." 말과 함께 단목우는 신형을 날렸다. 휘익! 말이 끝났을 때, 단목우의 신형은 한 마리 대붕(大鵬)처럼 여명 속을 가르며 사라져갔다. "휴우!" 서립은 한숨을 내쉬며 신형을 틀었다. 이제부터 그가 고영반이 없는 동창을 수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② 쪼르르륵....... 술병이 기울어지며 잔이 차올랐다. 이번에는 빈 손이 잔을 잡고 비웠다. 술병이 다시 기울어졌다. 이번의 술병은 먼저 번보다 좀더 깊숙이 기울어졌다. 다시 잔이 차올랐다. 또다시 빈 손이 잔을 들고 비웠다. 쪼르르르... 쭈욱! 그런 동작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화예원의 별실에서 술을 자작하며 마시는 사내. 그는 바로 단목우였다. 단목우는 홀로 술잔을 들이키며 고독을 씹고 있었다. 항상 일을 해결하고 나면 전신에 몰려오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단목우는 그런 외로움이 싫어 연신 술잔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벌써 이틀째였다. 그동안 서립은 오지 않았다. 아니, 온다간다 기별조차 전해주지 않았다. 단목우는 그가 이 반역 사건을 철저하게 파헤치리라 짐작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서립은 그런 인물이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 그는 술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도 서립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의미한 행위란 것을 일찍부터 예감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그와 한 번 술을 마음껏 마시고 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는 않았다. 어느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도 드물었다. 그만큼 서립이란 인간이 마음에 들었다. 딸랑... 따르륵....... 문득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패물(佩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그것은 그가 기거하고 있는 문 앞에 멈추었다. 단목우는 언뜻 미간을 모았다. '오늘만은 어떤 여인도 사양한다고 일러 두었거늘.......' 단목우의 가슴 속에서 은근히 짜증이 일었다. 그는 화예원의 기녀들이 유난히도 자신을 따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만큼은 홀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곧 단목우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다. 찰나지간 문 밖에서 뼈속까지 파고드는 강렬한 살기를 감지한 때문이었다. 스윽! 그의 손이 항상 몸 곁에 두고 있는 검, 즉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검 자루를 잡았다. 그때였다. 파파파팟! 흡사 벽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연기처럼 탁자 아래, 천정과 벽으로부터 은의인의 인영이 뛰어나오며 단목우를 뒤덮었다. 쐐애애액! 휘황한 검광이 질풍노도처럼 단목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단목우가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파앗! 그는 허공으로 가볍게 솟구쳐 오르며 어느 사이엔가 뽑아든 검으로 허공 위를 찌르고는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츠으으... 츠츳! 수중의 검이 환상처럼 눈부신 섬광을 토해내는 순간 처절한 단말마가 열두 번이나 울리며 피분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끄아아악! 시신으로 화한 열두 명의 은의인(銀衣人)들이 바닥에 연이어 처박혔다. 스슷! 뒤이어 단목우가 내려섰다. 그때였다. 그보다 한 걸음 늦게 은의인 한 명이 내려섰다. 단목우는 여전히 처음의 위치였다. 다만 처음의 자세와 다른 것은 서 있다는 것뿐이었다. 단목우가 그 짧은 순간에 보여준 검무는 숨막힐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를 암습한 십삼인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것도 불과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으으!" 은의인은 무거운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삼십대 정도는 되었을까? 은의인의 안색은 공포로 인해 시퍼렇게 변하고 말았다. 단목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말려 올라갔다. "이제보니 나극준(羅極峻), 그대였군." 은의인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초, 총령!" 그는 은령대의 영주(令主)로 압습에 실패하자 단목우의 성격이 어떠하단 것을 알고 있는지라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단목우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이것도 운명이겠지. 한때는 생사를 같이 나누던 우리가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는 것도......." 문득 나극준에게 다가서던 단목우는 우뚝 멈취섰다. 비록 나극준이 목령대의 령주이기는 하나 가볍게 일검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단목우의 몸은 굳어지고 있었다. 예기(銳氣)! 등 뒤에서 엄청난 예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예기를 무시하고 나극준을 죽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죽이면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생애를 통털어 이렇게 강한 예기는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 언뜻 단목우의 미간이 모아졌다. 불현듯 한 가닥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스친 것이었다. '여인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 패물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라면 그런 장신구를 몸에 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일개 여인에게서 이처럼 강한 예기가 뻗어 나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믿어야만 했다. 그의 귀에 들려오는 조용한 음성이 있었기에. "백혈이라 했던가? 과연 과거 백화성이 자랑하던 오령특위대의 총령답게 뛰어난 신수(身手)를 지니고 있군." 조용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단목우는 자신이 아는 인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백화성 내에서 이처럼 강한 여인을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기억 속에는 그러했다. "백혈. 이제부턴 단목우라 불러야겠지. 지금 네 등에는 나의 검이 향하고 있다. 움직이면 심장이 관통될 될 것이다." 단목우는 결코 그 말이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인의 제공권 안에 자신이 포착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움직이던 검은 자신을 따라 움직일 것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심장을 파고 들어올 것이다. 단목우는 태어난 이래 이처럼 곤혹스러운 적은 없었다. 어느새 그의 반듯한 이마에는 진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한편, 나극준은 단목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자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에게 향해지는 압력도 상당히 소멸되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단목우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냉랭하게 소리쳤다. "나극준, 어서 검을 버려라." 그의 검끝이 느릿하게 나극준의 목젖으로 향해졌다. 나극준은 다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순간 단목우 등뒤의 예기가 무서운 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만일 지금의 상황에서 나극준이 기습을 가해온다면 단목우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설혹 나극준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어도 등뒤의 예기만은 피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단목우는 백전노장답게 이런 내심을 추호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는 도리어 눈빛을 차갑게 굳히고는 나극준을 향해 검을 거누었다. 하지만 나극준은 알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단목우의 검날이 약간 비틀어져 있다는 것을. "......." 단목우는 검을 겨눈 자세로 안력을 돋구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약간 비틀려져 있는 검신에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자의(紫衣)를 입은 여인이었다. 목소리만으로 볼 때 여인은 꽤 나이가 들었으리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 실제 나이는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여인의 수중에는 한 자루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검끝에서 검 모양의 검기(劍氣)가 뻗치고 있었다. 그 검기는 무려 석자 반이나 이르고 있었다. '무형지검(無形之劍)이로군.' 단목우는 즉시 그것을 알아보았다. 여인이 시전하고 있는 것은 검도에 있어서 최상승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氣)로 유형의 검을 만들어 내는 경지였다. '검도로 치면 나와 같은 수준이구나.'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나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그녀의 공격권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신을 통해 상대와 자신의 처지를 한 눈에 파악한 단목우는 순식간에 나극준의 검봉(劍棒)을 때렸다. 타탕! 나극준의 검이 박살나는 순간 단목우의 신형은 섬광처럼 나극준의 앞으로 튀어나가며 좌수로 완맥을 잡아챘다. 그때였다. 슈아악! 여인의 비수에서 무형지검이 폭사했다. 단목우는 몸을 앞으로 숙임과 동시에 나극준을 끌어당겨 자신의 앞으로 세웠다. 섬뜩한 전율이 전신을 핥고 지나갔다. 어깨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일찍이 보여준 바 없는 신속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검은 빨랐다. "크아악!" 피보라와 함께 처절한 비명을 토해내며 나극준이 모로 떨어져 나갔다. 단목우가 잡고 있던 한쪽 팔이 어깨죽지부터 뭉턱 잘려져 나간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자의여인의 가공할 무형지검이 만든 결과였다. 나극준은 팔이 잘린 채 바닥에 두 차례 뒹굴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엄청난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혼절하고 만 것이었다. 단목우는 섬광처럼 신형을 돌렸다. 그는 비로소 간발의 차이로 그녀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의여인과 마주섰다. 그는 여인과 마주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녀를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의당 보여야 할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등 뒤에서 느껴졌던 예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럴 수가!' 단목우는 흑, 하고 호흡을 들이 마셨다. 자의여인은 그보다 더 빨리 움직여 다시 등 뒤로 돌아간 것이 었다. 여인은 정녕 빠르기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신법을 구사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가까운 거리였다. 등 뒤에서 여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다. 아니, 찌르는 듯한 예기가 곧장 옷을 뚫고 등줄기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음! 각오해야 할 것 같군.' 단목우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상대방은 경공에서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그녀의 움직임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생일대의 강적(强敵)이었다. 아니, 그로서는 난생 처음 만나는 고수였다. 더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가공할 상대를 등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물론 그것은 죽음이지만-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단목우를 휘어감았다. 그때였다. 파파파팟! 옷자락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검기가 등으로 파고 들어왔다. 스스스슷! 단목우는 본능적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곱 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다. 그로서는 지금까지 이렇게 빠른 신법을 펼쳐본 적이 없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전광석화처럼 신형을 날렸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다. 무엇인가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단목우의 장삼자락이었다. 그의 장삼자락은 상대의 무형지검에 여러 조각으러 잘려져 나간 것이었다. 다만 피부를 베지 않았을 뿐 실로 소름이 오싹 끼칠 지경이었다. 위험의 고비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목숨을 노리고 파고드는 검기는 여전히 그의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불과 삼촌(三寸)의 거리를 둔 채 시종일관 그의 배심(背心)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단목우는 전신이 젖은 상태였다. 너무나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나마 여인의 공세를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수중의 검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검날에 비치는 자의여인의 모습을 통해 미리 공세를 파악하고 신법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스파아아앗! 자의여인은 이제 무차별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무형검기는 방원 오 장여를 뒤덮었다. 단목우는 연거푸 스물네 번이나 신형을 날리고, 뒤집고, 곤두박질치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위기가 다가오는 것을 통감했다. 마침내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공격권 안에서 몸부림 친들 체력만 소모할 뿐이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단목우는 우뚝 멈추었다. 그러자 등 뒤를 바짝 따라붙던 검기도 멈칫하며 멈췄다. 그것은 본능적인 반사작용이었다. 그로인해 검과 그의 배심과의 간격은 여전히 삼촌을 유지했다. '.......' 단목우는 지극히 완만하게 검을 수평으로 눕혔다. 그에따라 그의 흑포가 바람도 없는데 서서히 흔들리다가 종내에는 몸서리치듯 심하게 펄럭였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무형의 강기( 氣)가 일어났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최후의 반격을 시도하기 위해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파르르륵! 펄럭이는 그의 장포는 더더욱 실내의 공기를 싸늘하게 얼어붙이며 압력을 가중 시켰다. 여인의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울린 것은 그때였다. "단목우, 대단하구나. 이런 상황에서 먼저 움직이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선공하려 하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보구나." 단목우는 만면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오." 이런 상황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하는 행위였다. 말을 하기 위해서는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력을 끌어올리면 진기가 계속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목우만은 예외였다. 그의 전신에 이는 무형의 강기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입을 열어도 진기가 끓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반항도 못해보고 죽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소. 강자와 정면으로 겨뤄보는 것이 검을 잡은 자의 본분이니까." "......!" 찰나지간 여인은 흠칫했다. 단목우는 말을 이었다. "더더욱 당신과 같은 고수를 만나기란 평생에 걸쳐서 한 두 번에 불과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 영광스럽다고 하지 않겠소? 그러니 오늘 설사 당신의 손에 죽는다 해도 행운으로 알겠소." "오늘 죽는다 해도 행운으로 안다고......?" 여인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본인은 늘상 생각해 왔소.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원없이 겨루다 죽는 것이 무인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이오." 단목우는 담담하게 입을 놀렸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상대의 공격권 아래서 벗어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도저히 없는 듯 싶었다. 자의여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그러나 네겐 그럴 기회마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슷! 문득 두 개의 인영이 단목우의 앞에 떨어졌다. 그들은 뜻밖에도 피빛처럼 붉은 홍의를 걸친 늘씬한 몸매의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눈빛은 달랐다. 여인들의 얼굴은 입고 있는 홍의와는 정반대로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아니, 들고있는 검으로 단목우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다가서는 기세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기세였다. 두 홍의여인은 단목우를 향해 서서히 다가서며 검끝을 들어밀었다. 그녀들을 보는 순간 단목우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났다. 그는 지금까지 백화성에 이런 여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째서......?' 그는 자신이 모르는 일에 대해 짜증이 왈칵 일었다. 그러나 더욱 다급한 것은 그런 의혹보다 위기의식이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에서 쏘아오고 있는 두 개의 검은 빨랐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쐐애액! 시퍼런 검광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심장과 목젖을 노리고 찔러왔다. 실로 무서운 검세였다. 그러나 단목우로 하여금 식은 땀을 쏟아내게 하는 것은 그들 두 여인보다도 보이지 않는 등 뒤의 비수였다. "......!" 비수는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강렬한 예기는 극에 달한 듯했다. 더군다나 그것은 소리마저 없었다. 단목우로서는 눈 앞의 빠른 검은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느릿하게 다가오는 등 뒤의 보이지 않은 검은 그야말로 피하기가 어려웠다. 단목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수중의 검에 진기를 잔뜩 불어넣고 있을 뿐이었다. "......." 그는 기다렸다. 마치 목석처럼. 그의 지금 모습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초탈한 듯했다. ③ 팟! 단목우의 심장과 목젖을 노리고 짓쳐들어오던 검이 허공을 가르다 멈춰섰다. 동시에 등 뒤에 다가오던 예기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홍의여인들은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그로 인해 실내를 무겁게 짓누르던 긴장과 살기도 누그러졌다. "......." 절대절명의 위기가 해소되었음에도 단목우는 표정 하나없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비로소 보였다. 얼굴을 면사로 가린 자의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섬세한 몸매이나 그녀의 육체에서는 은연중 나이를 느끼게 하는 풍만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오?" 그는 그렇게 물었다. 사실 그로서는 의아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반격을 가했다면 눈 앞의 두 여인은 죽일 수 있으나 등 뒤의 검만은 절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상대 여인은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거두어버린 것이었다.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차피 늦으나 빠르나 결과는 같으니까." 쉽게 말해서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의여인은 그러나 목소리를 완곡하게 한 채 덧붙였다. "그대는 마음에 드는 자다. 아까운 인재를 죽이고 싶지 않다." 단목우는 침묵을 지켰다. 자의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찌 그 뜻을 모르겠는가? 그것은 항복하고 검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단목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자의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덧없는 죽음을 추구하지 마라. 내 밑으로 들어오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함께 할 수 있다." "후훗! 부귀영화를 바랬다면 내가 백화성에서 떠났겠소?" "으음!" 자의여인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싶다." 단목우는 흐릿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고맙소.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죽음을 앞당길 필요는 없다." "......?" "앞으로 삼일의 여유를 주겠다. 그대가 그 삼일 안에 내 손에 잡히지 않고 그 안에 패하지 않으면 그대를 고이 돌려 보내겠다." 단목우는 미간을 모았다. "그럴 필요가 있겠소?" 자의여인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대가 내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패하게 되면 다시 백화성으로 돌아와라. 물론 그대는 거부하겠지만 그때가서 내가 그대의 몸과 마음을 굴복시키겠다." 휙!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신형을 돌려 밖으로 날아갔다. 두 명의 홍의여인도 지체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 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적막에 휩싸였다. 한동안 서 있던 단목우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탁자로 다가가 술잔을 들었다. 술잔은 비어 있었다. 그는 술병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잔에다가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르르르....... 병을 완전히 기울이자 술잔이 가득 차올랐다. 그것이 마지막 술잔인 듯했다. 그는 신중한 동작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좁혀진 미간은 좀체로 펴지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좋다. 한 번 해 보는 것이다.' 한순간 단목우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 여인의 정체와 능력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다.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그 여인이야말로 백화성을 움직이는 실체일지도 모른다.' 탁! 그는 술잔을 내려 놓고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숨바꼭질 따위는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꽤 재미있을 것 같군.' 단목우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④ 따르르륵......! 그릇 속의 주사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탁! 물주(物主)는 공기를 뒤엎고 앞에 앉아있는 인물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입가에 간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헤헤! 이제 돈들을 거시지요?" 그는 미간을 모은 채 우측의 흑의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그는 바로 단목우였다. 단목우의 앞에는 꽤 많은 금전들이 쌓여 있었다. 족히 수천 냥은 됨직했다. 단목우는 그 중 일부를 집어 오(五)에 걸었다. "......!" 물주는 두 눈에 얼핏 득의에 찬 주름을 잡았다. 그는 자신있게 공기를 뒤집다가 그만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으으... 또!" 오였다. 물주는 벌써 수십 차례 기묘한 기술로 상대에게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자신의 기술이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이번의 패배로 물주는 다시 수백 냥의 금자를 손해보았다. 함께 주사위 도박을 하고 있는 다른 작자들이 걸고 있는 금액은 단목우가 거는 것에 비한다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후후!" 단목우는 물주가 얹어주는 금액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웃음을 떠올렸다. 단목우는 즐거웠다. 돈을 따서가 아니었다. 그 신비의 자의여인은 자신이 설마 오백여 리나 달려와 산동성(山東省) 양천(陽泉)이란 곳에서 이렇게 한가하게 도박을 즐기고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할 것이란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문득 나직한 여인의 음성이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겨우 이곳까지밖에 오지 못했나요? 단목공자(端木公子)." "......!" 단목우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빙글 돌아섰다. 거짓말처럼 두 명의 홍의여인이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여인의 가슴에는 눈처럼 흰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하나같이 절색의 용모에 늘씬한 몸매가 사내의 시선을 홀리고 가슴을 울렁이게 할 정도였다. 백묘(白猫)를 안고 있는 홍의여인이 빙긋 웃으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저의 주인께서는 아직 하루의 여유가 남아 있다며 공자께서 생각을 바꾸셨으면 하는 뜻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단목우는 미간을 모았다. 사실 이틀이 지났다. 약속은 삼일 간이니 하루의 여유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는 상대에게서 있지 이제 자신에게서 그 여유는 사라졌다. 지금 자의여인은 하루의 여유가 더 있다고 전해준 것이었다. 최소한 그 시간 동안은 단목우를 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단목우는 지난 이틀 동안 누군가가 추적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소 긴장이 풀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誤判)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도 이만저만한 오판이 아니었다. "그럼 이만......." 두 홍의여인은 허리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단목우는 고소를 떠올리며 도박판에서 일어섰다.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또 어디론가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내야 했다. 그가 도방을 나가자 안에서는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그가 땄던 돈을 고스란히 남겨 놓고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다. 그 때문에 그것을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휘휘휙! 세 개의 섬세한 인영이 질풍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자의여인 하나와 홍의여인 둘이었다. 여인들은 백설처럼 흰 고양이 한 마리를 따라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앞서 달리는 고양이의 속도였다. 고양이가 치달리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것은 초절정 고수가 경공을 펼쳐내는 속도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순간 고양이가 우뚝 멈춰섰다. "......!" 고양이가 달리는 것을 멈추자 세 여인도 신형을 늦추었다. 이어 여인들은 고양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의여인이 면사로 가린 얼굴을 설묘를 안고 있던 홍의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천산설묘(天山雪猫)가 그의 종적을 놓친 것은 아닐까요?" 백묘를 안고 있던 홍의여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 보며 말했다. "그럴 리 없다. 내 이미 그의 몸에 만리천선향(萬里天仙香)을 뿌려 두었기 때문에 설묘의 후각을 벗어날 수 없다." "......?" 그 말에 자의여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홍의여인은 말을 이었다. "만리천선향은 천산설묘만이 맡을 수 있는 것으로 그 향기가 족히 십일 이상 지탱한다. 그가 옷을 바꾸어 입지 않았다면 설묘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홍의여인의 품 속에 있던 천산설묘는 한차례 날카롭게 울부짖더니 갑자기 우측으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세 여인은 즉시 설묘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홍의여인은 설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지금 세 여인이 서 있는 곳은 강변이었다. 홍의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단목우. 과연 총명한 자다. 그는 설묘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설묘의 능력을 짐작하고 강물을 이용해 피하고자 했다." 뒤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던 자의여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그가 강물을 건너......." "흥, 그러나 그는 결코 본녀의 추적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설묘가 물 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만리천선향은 물 속에 있어도 흩어지지 않을 뿐더러 흐려지지도 않는다." 자의여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홍의여인은 냉소를 토하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각기 상류와 하류로 가보아라. 갈대가 보이면 즉시 돌아와라." 두 여인은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즉각 몸을 날렸다. ⑤ 강변의 갈대숲. 단목우는 수면 위로 머리만 내놓은 채 들어가 있었다. 그는 일 마장이나 상류에서 이곳까지 내려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절대 여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몸을 숨긴 것은 여인의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 흰고양이에게 묘한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서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내가 어디로 몸을 숨기든 결국은 찾아낼 것이다.' 여인이 사흘간의 말미를 준 시간은 앞으로 세 시진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르르륵......!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강변을 흔들었다. "단목공자!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찬물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으면 아무리 강한 체력이라 해도 원기(元氣)가 크게 상한답니다." "......!" 단목우는 쓰게 웃었다. 말은 그를 염려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배알이 뒤틀리는 충언(?)이 아닐 수 없었다. 단목우는 느릿하게 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홍의여인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맞이했다. 이어 그녀는 마치 그를 유혹이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화사하게 웃으며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불이라도 지필까요? 옷이 젖어서야 어디 당당한 대장부로서의 체면이 서겠나요?"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고맙소만 그보다 당신의 주인부터 만나고 싶소." 홍의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리고는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양 몸을 돌려 달려갔다. 그로부터 일각 후 자의여인이 단목우의 앞에 나타났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을 터인데?" 자의여인은 품 속에 안은 설묘의 털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두 시진이 남기는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소. 나는 당신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자의여인은 흠칫했다. "무슨 말이냐? 날 기다린게 아니라고?"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주인이오. 그녀를 나오라고 하시오." 단목우는 자의여인의 말을 끊으며 강변쪽의 갈대숲을 응시했다. 갈대숲으로부터 백묘를 품에 안은 채 홍의여인이 서서히 걸어나왔다. "어떻게 나인줄 알았지?" 단목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의여인을 돌아보았다. "간단하오. 축골공(縮骨功)이나 변성공으로 체구와 음성은 변화시킬수 있지만 단 한 가지만은 변화시킬 수 없소." "그것이 무엇인가?" 홍의여인은 단목우의 앞에 섰다. 단목우는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사람에겐 각기 독특한 분위기가 있소. 굳이 표현한다면 기도라고나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이건 한 번 만나면 그 사람의 특성을 머리 속에 새겨두고 있소. 그러므로 웬만한 변장술로는 날 속일 수 없소." "그대... 더욱 마음에 드는 인물이야." 홍의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탁월하군. 천부적인 무골이고. 그대만 내게 있어 준다면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인으로서는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찌 일개 여인의 입에서 천하를 운운한단 말인가. "과분한 칭찬이오."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처음 도방에서 변장한 당신을 보았을 때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소. 나중에 백묘가 평범한 짐승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당신이 변장했다는 것을 알았소."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렸지?" 홍의여인은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단목우는 빙긋 웃었다. "그런 영물이란 다루기가 무척 힘드오. 완전히 굴복시키기 전에는 절대 사람을 따르지 않소. 그러나 일단 한 번 사람을 따르면 충실하게 따르오. 다만 오직 자신을 굴복시킨 사람만을 말이오.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정말 마음에 드는 젊은이야." 홍의여인은 벌써 두 번째 그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단목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나 적이 되면 큰 장애물도 되는 법이오." 홍의여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점이 문제야." 그녀는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그녀의 용모는 빼어나게 아름다와 역용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보아하니 자네는 아직도 전혀 굴복할 뜻이 없는 것 같군. 설혹 무력으로 패배시킨다해도 마음까지 굴복시킬 수는 없는 철심(鐵心)을 지닌 사나이야." "날카로운 눈이오." 단목우는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홍의여인의 눈에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제거해야만 할 것 같네." 단목우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표정만은 여전히 담담했다. "좋은 결정이오. 나도 당신과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오." 홍의여인의 눈빛은 점점 파랗게 변해갔다. 그것은 여인의 눈이 아니었다.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니 후회는 하지 말아라!" 촤아아아! 홍의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거꾸로 치솟기 시작했다. 수십 가닥씩 동아줄처럼 꼬아서 묘한 느낌을 주는 머리칼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것은 마치 쇠꼬챙이가 수십 개나 직렬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단목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상대의 무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수로 보여주던 예기보다는 최소한 수십 배는 더욱 무서울 것이라고 짐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콰아아아아!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무려 일 장 방원을 뒤덮으며 단목을 찍어왔다. 그것은 마치 수십 개의 화살이 빽빽하게 공간을 메우며 날아오는 것과 같았다. "핫!" 단목우는 대갈일성과 함께 전 공력을 운집시킨 검을 떨쳐냈다. 엄청난 검강이 폭발했다. 카카카캉!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무수한 불꽃이 튀어올랐다. "으음!" 단목우는 신음을 흘려내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어느새 그의 어깨와 옆구리, 정강이 부분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여인의 송곳같이 날카로운 머리칼에 관통당한 것이었다. "......!" 찰나지간 단목우는 급히 자신의 검을 내려다 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검은 이란 이는 모조리 빠져나가고 하나의 고철(古鐵)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는 내심 경악했다. '엄청난 공력이다! 전 공력을 검에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낱 머리칼에 이처럼 검날이 다 빠져버리다니!' 단목우는 이를 악물었다. 상대의 무공은 너무도 강했다. '그렇다면 이제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라천환검(多羅千幻劍)!" 일갈과 함께 단목우의 신형이 홍의여인을 향해 쏘아갔다. 콰아아아! 처음, 그 검세는 한 줄기 빛에 불과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 줄기 빛은 곧바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무수히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허공을 가득히 채우며 벼락처럼 홍의여인을 향해 쏘아갔다. 단목우가 물러서고 반격하기까지의 모든 변화는 다만 일섬(一閃)을 천분지 일로 쪼갰을 정도로 빨랐다. 여인의 머리칼이 다시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며 움직였다. 콰아아아아앙! 굉렬한 폭발음이 울렸다. 천지가 뒤집혀질 기세였다. 하늘을 메울 것만 같던 기세가 검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삼 장 넓이로 뒤덮은 머리칼의 기세도 잠시 주춤했다. "으윽!" 단목우는 짧은 신음을 토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자의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가공할 경기에 튕겨나간 것이었다. 슈우우욱! 머리칼이 주춤하던 기세를 바꾸며 화살처럼 뻗어나갔다. 그야말로 단목우의 전신을 고슴도치로 만들겠다는 기세였다. 이미 한 번의 격돌로 내상을 입은 단목우였다. 내장이 뒤집혀졌고, 맥이 산산히 흩어져 진기가 한 줌도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그녀의 공세를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국향! 그만두지 못할까!" 문득 창노한 외침이 허공으로부터 울려왔다. 쿠우웅....... 동시에 해일(海溢)과 같은 가공할 잠경이 쏘아오며 여인의 머리칼을 가로 막았다. 콰르르르릉! 굉렬한 음향이 울리는 순간 단목우는 잠경의 회오리에 휩쓸려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때였다. 여인의 안색이 대변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몽양, 다... 당신이!" 기이하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또한 일말의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이기도 했다. 그녀는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고 있었다. 하나의 인영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산허리의 숲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옆구리에는 갸날픈 몸매의 여인을 끼고 있는 듯 했다. 인영을 보자 여인은 두 눈에서 독광을 토해냈다. "빠드득! 몽양, 당신이 감히 나의 일을 방해하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녀의 신형은 섬광처럼 허공을 도약하며 질주해 갔다. 그녀가 신형을 날리자 두 여인도 다급히 몸을 날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단목우는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연신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도 엄청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인가? 그는 멍하니 산허리로 사라져 가는 세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한 줄기 강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옷자락을 찢을 듯이 잡아당겼다. 단목우는 비로소 자신을 되찾았다. "무서운 여인이다! 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그녀의 무공에 비한다면 나의 무공은 정말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문득 그는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이 사실을 상설에게 알려야 한다. 어쩌면 숙야풍, 그보다도 더 무서운 적이 될 저 여인에 대해 알려 주어야만 한다." 그는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되었다. 부상설을 떠올리자 느닷없이 그녀의 신변이 불안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상조차 살피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경공술을 전개하였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강변으로부터 사라졌다. 그때였다. "노선배님! 왜 그 이를 만나려는 절 막는 것이죠?" 한 여인이 눈물을 머금고 원망어린 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창노한 모습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강변을 타고 사라져 가는 단목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20장 · 쓰러지는 백혈(白血) ① 알만한 사람이라면 그 눈빛만 보고도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눈에 알아 보았다. "오랫만이구려. 총령." 그 자가 입을 열었다. 단목우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상관추!" 그렇다. 그는 상관추였다. 당금 오령특위대의 총령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과거 단목우의 수하이기도 한 자였다. "그렇소. 나요." 상관추의 눈빛이 심한 혼합색을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꽤나 오래 눈싸움이 갈 것 같았으나 예상 밖으로 일찍 깨어졌다. 그 이유는 단목우가 피식 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웃는 자와 웃지 않는 자. 상관추의 눈빛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진 것이다. 단목우는 피로 물들어 있는 주위를 둘러보며 담담히 물었다. "상관추. 이것이 너의 작품이더냐?" 그러나 상관추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닫고 있었다. 한 순간의 눈싸움이었으나 자신이 왜 그 동안 상대방을 능가하지 못했나를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라면 자신은 절대로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소. 총령. 아니 단목형." "훗! 단목형이라... 많이 컸군." 단목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관추를 바라보았다. 단목우의 시선을 받은 상관추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상관추야, 상관추야! 너는 과거의 상관추가 아니다. 보라, 천하의 단목우가 지금 네 손 안에 있지 않느냐?' 상관추는 용기가 사라지려는 자신을 향해 그렇게 다독이며 억지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는 단목우를 쏘아 보았다. 한편 단목우는 비록 겉으로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으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차 있었다. 상처가 의외로 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또 정상이라고 해도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십이인과의 승부는 예측할 수 없었다. 단목우는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그들의 능력을 헤아릴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관추. 무슨 이유로 날 막느냐?" 상관추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단목형이 더 잘 알 것이오."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 일은 근본적으로는 자네와 무관하나 백화성의 주구인 자네이기에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겠군." 상관추는 더 이상 그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단목형. 이들이 단목형을 섭섭치 않게 해줄 것이오. 최소한 저승길로 인도할테니 말이오." 단목우는 대답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검은 지금까지 버텨오는 동안 가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 앞에 서 있는 금면인(金面人)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오령총령으로 있을 때는 그들이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근자에 백화성에 합류한 자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앞에 이렇게 태연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해라." 상관추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열두 개의 인영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현이 움직이는 것이지, 바람처럼 난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었다. 휙휙휙! 그들은 단목우의 주위를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십이 인은 한 마디로 경공술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회전하자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인의 벽(壁)이 형성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어지러운 신법을 사용하여 시선을 혼란시킨 후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 단목우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팟! 한 자루의 검이 그의 허리로 날아 들었다. 단목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허리께로 날아드는 검을 몸으로 받았다. '윽!' 불에 덴 듯한 통증과 함께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본래 단목우는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상대의 검을 탈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첫 번째 상대의 검을 몸으로 받은 후 검을 낚아채는 순간 바로 뒤에 달려드는 검을 보지 못한 것이다. 비명조차 지를 겨를이 없었다. 두 번째 상대의 검이 그의 왼쪽 아랫배를 사정없이 쑤셨다. 슈파앗! 다시 한 자루의 검이 그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십일인의 검은 마치 한 사람의 검인 듯 순간적으로 모든 방향을 차단하고 날아 들었다. 단목우는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들의 무공으로. 단목우의 무공은 백화성주 백선결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백가비전의 검술이었다. 그런데 금면인들의 무공은 전문적으로 백가의 검공을 파쇄하는 수법들이었다. 결국 자신처럼 백가의 검법을 익힌 후 배신하는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양성된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검을 탈취하지 못했다. 한 자루의 검을 빼앗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뚱이를 동강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짧을수록 좋다. 길면 그만큼 명(命)이 짧아지므로.' 마침내 생각을 끝낸 그의 몸은 앞으로 날아갔다. 놀랍게도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향해 뛰어든 것이었다. "윽!"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파파팟! 열한 자루의 검을 동시에 맞는 기분은 아마도 천하 어느 누구도 맛보지 못했으리라. 그의 몸에는 열한 자루의 검이 박혀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단목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검을 무시하고 두 손으로 눈 앞에 다가온 금면인의 목을 움켜 쥐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금면인의 목이 돌아갔다. 바로 그 순간 단목우의 손에 금의인의 검이 쥐어졌다. 그의 손목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두 금면인의 목이 몸체에서 분리되어 떠올랐다. 그는 단숨에 삼인을 죽였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가 치룬 댓가가 너무나도 엄중했다.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으으! 지독한 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상관추는 전율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슈슈슈슉! 아홉 자루의 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단목우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감각도 오지 않았다. 어느새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단목우는 습격해 오는 금면인들을 무시하고 뜻밖의 장소로 검을 내던졌다. 휘리리리릭! 검은 철륜처럼 회전하며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단목우도 검을 뒤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 순간 단목우는 믿고 있었다. 회전하며 앞서 날아가는 검이 방패가 되어 그의 몸을 막아주리라는 것을. 단목우는 이미 방향을 정해두고 있었다. 그는 강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거대한 호수인 홍택호(洪澤湖)를 향해 검을 날린 것이었다. 그곳만이 지금의 그에게는 유일한 탈출로였으므로. 그러나 그의 판단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었다. 풍덩! 하는 소리가 나야 옳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윽!" 막 수면에 떨어질 듯 하던 그의 몸이 도로 튕겨 올라왔다. 누군가가 수면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암기를 날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은 고슴도치가 되어 지면에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파팟! 이번에는 아홉 자루의 검이 그를 쫓았다. 단목우는 이를 악문 채 땅을 뒹굴었다. 이른바 뇌려타곤이라고 하는 굴욕적인 신법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앞에 두고 굴욕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아홉 바퀴나 땅바닥을 굴렀다. 바로 그때였다. 그가 구르기를 멈춘 곳의 지면이 느닷없이 튀어올라왔다. 퓨퓨퓨퓨퓻! "앗!" 단목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뼈져리게 되씹었다.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라 그는 그만 땅 속에 숨어있는 목령대의 존재를 잊은 것이었다. 그의 어깨에 한 자루의 검이 박혔다. 두 다리에도 깊은 자상이 났다. 물론 그로인해 육인의 목령대는 땅 속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목숨을 대가로 바쳐야만 했음은 물론이었다. 피피피핑! 단목우는 또 다시 아홉 자루의 검이 자신의 몸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취할 수 없었다. '이젠 끝이다.' 마침내 단목우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바로 그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차가운 음성 하나가 단목우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멈춰라!" 그것은 상관추의 음성이었다. 순식간에 눈 앞의 검영이 사라졌다. "......." 단목우는 눈을 감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죽음의 덫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부는 그보다 더 큰 굴욕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상관추는 그에게 다가왔다. 단목우를 노려보는 그의 눈에는 잔인한 빛이 흘러 나왔다. 단목우는 눈 앞으로 다가오는 상관추의 희미한 모습을 느끼면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내 상관추는 그의 반장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단목우를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소? 단목형. 이 정도면 대접이 섭섭하지는 않으리라 보는데." 그러나 아쉽게도 단목우의 반응은 상관추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단목우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웃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조소하는 듯한 희미한 음성이 상관추의 귓전에 울렸다. "후후! 아마도... 성주님을 위해 만든 것인 모양인데 내게는 너무 과분한 대접이었어." "......!" "후... 후후! 숙야풍은 날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거든." 상관추의 눈이 일그러졌다. 단목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관추를 철저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이... 이, 죽일 놈......!" 상관추는 울부짖듯이 토해내며 발을 들었다. 그리고 힘껏 밟았다. 단목우의 얼굴을! ② "흐흑!" 여인은 자꾸 울먹였다. 한 쌍의 봉황(鳳凰)을 닮은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다. "흑흑! 선배님. 왜 보고만 계세요? 저 분이... 저 분이 저러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창노한 모습의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은 호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이었다. "허허... 아이야. 조급하게 굴지 말아라.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자꾸 채근하는 게냐?" "흐윽! 선배님, 제발!" "ㅉ, 알았다. 너무 걱정 말아라. 네 낭군을 멀쩡하게 만날 수 있게 해줄 터이니." 한 명의 아름다운 처녀와 백살도 넘어 보이는 노인의 대화였다. ③ 상여(喪輿) 행렬은 황혼이 지는 관도를 지나갔다. 죽은 자가 만장을 앞세우고 이승을 하직하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다소 이상한 점이라면 상여 행렬을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검을 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무사들이 상여꾼이 되어 상여를 운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관도는 비좁았다. 하나의 운구 행렬이 관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하고 있었다. 앞장 선 자는 금의를 입은 자로 말을 타고 있었다. 그는 바로 상관추였다. 상관추의 뒤로 수십 명의 무사들이 한 대의 마차를 에워싸고 길을 걷고 있었다. 마차 위에는 수백 송이의 꽃으로 뒤덮인 관이 실려 있었다. "......!" 지금 상관추는 입술꼬리에 만족한 미소를 달고 있었다. 뒤에 실린 관 속에는 그가 평생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수없이 열등감을 씹게 했던 사나이가 누워 있었다. 단목우란 이름의 사나이였다. 지금 그는 아직 죽지 않았으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래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단목우를 척살하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압송하는 이유는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단목우가 철저히 짓밟히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백화성으로 압송해 간다면 단목우의 장래는 뻔한 것이다. 그는 필시 죽음보다 수백 배나 더한 수치스런 모습으로 파괴될 것이다. "후후......" 상관추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앞쪽에 깃발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흠칫했다. 그 깃발은 바로 만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앞쪽에서도 상여 행렬이 마주 오고 있는 것이었다. 펄럭이는 만장이 점차 그들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만장에는 특별한 표식이 있었다. 그것은 관부인(官府人)의 상여 행렬이라는 표식이었다. 무림과 관부는 본래 경원하는 사이다. 서로 불간섭의 전통이 있었다. 상관추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관도의 노폭은 좁았다. 따라서 두 개의 상여 행렬이 나란히 비껴가기에는 비좁았다. 결국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해야할 판국이었다. 본래 상여 행렬은 길을 비키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잠시 멈추어라." 수하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상관추라면 여하한 일이 있어도 남에게 양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쪽이 관부라면 공연한 시비가 붙을 필요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양보하여 길 옆으로 비켜섰다. 이윽고 상여 행렬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아닌 게 아니라 이십여 명의 관인들이 상여를 메고 있었다. "......." 상관추도 옆으로 약간 물러섰다. 그는 찬찬히 상여를 살펴 보았다. 상여에는 수백 송이의 꽃이 덮여 있었고, 죽은 자의 전력을 적은 듯한 붉은 표식들이 상여 주변에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차례차례 상여 행렬이 스쳐가고 있었다. 길이 좁아 이쪽의 행렬과는 거의 닿을 정도로 스치고 있었다. "......." 문득 그의 눈길이 한 여인에게 향해졌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있는 젊은 미망인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군.' 그는 불현듯 욕정을 느꼈다. 상복을 입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묘하게 그 점만으로도 색감(色感)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그는 여인의 선연한 몸매며 가는 목, 그리고 앞가슴의 둥그런 선을 더듬듯이 눈으로 즐기다 여인의 희고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여인도 그를 바라보았다. 생긋, 여인이 웃었다. 상관추는 눈길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단전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은 느꼈다. '끄응! 오늘이 아니었다면.' 여인이 꼬리를 친다고 느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일이니만큼 지금은 그런 쾌락에 젖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여인이 스쳐 지나갔다. 상여 행렬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은 꽤나 길었다. 더욱이 상여끼리 옆구리가 닿았을때는 잠시 정체되기도 했다. 이윽고 상여가 다 빠져나가고 관도는 다시 넓어졌다. "가자!" 그는 수하에게 지시했다. 멈추어졌던 상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고개 하나를 넘었을까? 아무래도 상관추의 뇌리에는 방금의 여인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특히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생긋 웃었을 때 그 눈빛은 분명 낯이 익었다. '누굴까?' 홀연히 그는 부르짖었다. "멈춰라!"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 그는 홱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등은 이미 땀으로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제발!' 그는 뒤로 돌아가 상여 앞에 멈추었다. 그는 상여를 맨 수하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이상이 없느냐?" "......?" 상여를 맨 수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리어 상관추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관추는 불길한 예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번쩍! 하는 검광이 일어났다. 쩌억! 상여와 그 속의 관이 한꺼번에 두 쪽으로 쪼개졌다. 상관추가 검으로 양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오! 이럴 수가......?" 상관추는 넋을 잃었다. 두 쪽이 난 관 속에는 틀림없이 누워 있어야 할 단목우의 몸이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실 단목우의 몸이 사라진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텅빈 관 밑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구멍을 보는 순간 상관추는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상여!' 비좁은 길을 스쳐 지나던 상여가 잠깐 멈칫거릴 때가 있었다. 그 사이 마차의 밑으로 사람이 숨어 들어 밑창을 가르고 단목우를 빼내간 것이었다. 상관추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감쪽같이 당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상복을 입었던 여인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으으! 그 계집이었어!' 언젠가 사당 안에서 겁탈하려다 웬 노인 때문에 실패했던 광명의 여군사 부상설이었다. "따라와라!" 두두두......! 그는 악을 쓰듯 수하들에게 외친 후 말을 달렸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그는 박차를 가했다. 그는 곧 단목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수없이 마음 속으로 주문외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까 오던 고개를 막 넘었을 때였다. 히히히힝! 느닷없이 말이 울음소리를 발하며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앞발을 번쩍 치켜드는 것이 아닌가? "앗!" 상관추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그는 간신히 신형을 바로 잡고 말을 몰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디 말은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히히히히힝......! 말은 자꾸만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 상관추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형강벽(無形 壁)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말이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아무리 공력이 강한 위인이라도 관도 전부를 강기의 벽으로 막을 자가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상관추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 그는 비명을 질렀다. 무엇인가 날아와 얼굴에 호되게 적중된 것이었다. "누, 누구냐?" 그러나 대답 대신 다시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그는 얼른 그것을 움켜쥐었다. '윽!' 손바닥이 뚫릴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손바닥을 펴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손바닥을 반쯤 파고 들어가 있는 것은 한 알의 호도알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상대방은 호도알로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안색이 변했다. 이때 멀리서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울려왔다. "호도알보다도 작은 놈. 노부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 두 번째로 용서한다." 그 음성은 괴이했다. 처음에는 산쪽에서 들리는 것 같다가 나중에는 허공에서, 다시 그의 뒤에서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전설상에서나 듣는 천리전성술(千里傳聲術)이었다. "......!" 상관추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안색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 음성은 이미 두 번째로 들었다. 손 안에 들어왔던 부상설을 빼앗길 적에 들은 적이 있는 음성이었고, 이제까지 그가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는 숨을 죽였다. 예의 노인의 음성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벌써 십 리 이상 밖으로 사라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관추는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언덕 위로부터 수하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상관추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그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어서 인근 지단에 연락하여 물샐틈 없는 수색을 하라고 일러라!" 그러나 이미 그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젠 도저히 단목우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④ 쏴아아....... 호면을 미끄러져 가는 소선(小船) 위에는 일노일소가 앉아 있다.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관이 있었다. 지금 소선은 순탄하게 호심(湖心)을 향해 별 진동도 없이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ㅉ! 이건 살아있다고 하기도 어렵군. 이 상태로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군." 노인은 혀를 차고 있었다. 그의 눈은 관 속을 내려보고 있었다. 관 속에는 시신이나 다름없는 사나이가 누워 있었다. 노인은 일신에 백의문사의를 입었으되, 말이 문사의지 그가 입고있는 것은 너무나 낡고 피폐하여 영락한 노문사이거나 아니면 미친 문사처럼 보였다. 흰 수염이 갈대꽃처럼 허옇게 세었고, 눈썹까지도 눈송이같아 얼마나 나이가 먹었는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여인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절세미인이었다. "괘... 괜찮을까요?" 여인은 울먹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부상설이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을 관 속의 사나이에게서 한 시도 떼지 않았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신이나 다름없는 사나이는 바로 단목우였다. 백발은염의 노인은 부상설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자애로움이 담겨 있었다. "허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계집이 웬일이냐? 기껏 산적같은 사내놈 하나 때문에 눈물을 다 흘리다니?" 부상설은 지금 농담을 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종 단목우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으나 너무나 절망적으로 당했기에 가망이 없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어느 정도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단목우의 상세는 설사 대라신선이 살핀다해도 도무지 회생가망이 전무해 보였다. "아아! 놀리지 마세요. 초노백(楚老伯). 어떻게든 손을 좀 써보세요. 네?" 부상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촛농인 듯 떨어졌다. "허어, 이것 참,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 계집의 마음이라니까." 초노백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를 죽자고 따라다니던 백능소인가 뭔가 하는 놈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이가 어째서 이 바람둥이같은 놈에게는 사족을 못쓰는 건지 원......." "초노백!" 부상설은 고함을 빽 질렀다. "자꾸 놀리기만 할 거예요? 전... 이 분이 죽으면 따라 죽을 거예요!" 초노백은 흠칫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부상설을 바라보다가 껄껄 웃었다. "헛헛! 설아. 너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아니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닌 자가 바로 네 사부거늘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냐?" 순간 부상설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그... 그렇군요!" 그녀는 마치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흥분어린 눈으로 배가 미끄러져 가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절망에 휩싸여 있던 그녀의 얼굴은 봄날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호수 저쪽. 그곳에 검은 점 하나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섬이었다. 제21장 · 신산(神算)과 만마태존(萬魔太尊) ①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단목우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 몽롱한 의식은 어디론가로 그의 영혼을 자꾸 끌고가는 듯 했다. 그곳은 이승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맞아. 난 죽었었지. 그 지경이라면 죽는 것이 당연지사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은(恩)과 원(怨)조차 이렇게 되고보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후후! 이런 것이었나. 죽음이란 이렇게 편안하고 무감동한 것이었나?' "사부님. 이 이가 깨어나려는 것 같아요!" 아름답고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단목우는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음성이라고 생각했으나 누군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인의 창노한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녀석, 왜 그렇게 조급하게 구느냐? 일대의 재녀라는 명성은 다 어디가고.... ㅉ, 계집들이란 그저 사내를 만나면 멍청해진다니까." 그러자 또 다른 노인의 음성이 잔잔하게 울렸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지났네. 그러나 워낙 체력이 떨어져 있으니 푹 쉬어야 하네." 단목우는 자신의 몸 속으로 무엇인가 박혀드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다시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극적으로 구함받아 안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몰랐다. 또한 그가 있는 곳이 호중도(湖中島)로 천하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며, 더불어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인물들과 있다는 사실도 알 리가 없었다. 아늑한 장원. 장원은 호수 한가운데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섬에 있었다. 은은하고 고아한 분위기가 감도는 정실(靜室)에서 지금 눈동자가 맑아 보이는 한 노문사가 단목우의 몸에서 금침을 빼내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육순쯤 되어 보였으나 무한한 혜지가 느껴지는 인상으로 다소 마른 듯한 체구였다. 그의 옆에는 부상설이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허허! 이제 잠이 깊이 들 것이다. 깨어나면 많이 좋아질 거야." "괜찮겠죠?" 부상설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허허! 이제 이 사부의 솜씨도 믿지 못한단 말이냐?" "그게 아니고......." 노문사는 허허 웃으며 부상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나가자꾸나. 이대로 두는 것이 제일 낫다." 그러나 부상설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전 이 분을 간호하겠어요." 노문사는 빙그레 웃었다. "녀석, 기껏 훌륭한 신랑감을 데려 오라고 강호에 보냈더니 어디서 걸레가 다 된 녀석을 데려와 사부를 고생시키더니, 이젠 아예 이 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구나." 부상설은 그 말에 얼굴이 홍시가 되었으나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헛헛헛!" 노문사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한 자루의 종이 섭선을 습관처럼 부치고 있었다. 그런데 부상설이 사부라고 부르는 인물이라면? 그렇다면 그 대상은 천하에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신산(神算) 제갈중(諸葛中)이었던 것이다. 신산은 한 칸의 정실로 들어섰다. 백발은염의 피폐한 노문사가 뒷짐을 지고 창 밖의 화원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서면서 물었다. "그 아이는 좀 어떤가?" 신산의 청수정명한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이런, 오늘은 전부 왜 이런가? 평생 사내라곤 모를 것 같던 설아가 방정을 떨더니 이젠 자네까지......." 백발노인 초노백은 그저 입가에 주름을 지을 뿐이었다. 신산은 자리에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질 걸세. 워낙 골격이 튼튼한데다가 재질이 있는 놈이라......." "음, 다행한 일이야?" 두 사람은 침묵에 싸였다. 신산은 초노백을 보고 있었다. 초노백은 창 밖의 화원을 보고 있었으나 실은 그의 시선이 허허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산은 탄식했다. "여보게. 몽양(夢陽). 아직도 자네의 얼굴에 암운이 가시지 않았군." 초노백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허어! 아닐세. 이젠 다 잊어 가네." 신산은 고개를 저었다. "난 못 믿겠네. 다 잊은 사람이라면 왜 얼굴에 그늘이 가시지 않는가? 허허... 내 눈은 못 속이지." "휴우!" 초노백은 다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신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긴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지. 더욱이 비극의 씨앗이 아직도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상에......." "......." 초노백은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흰 눈썹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다는 것을 신산을 볼수 있었다. 그 광경에 신산은 가슴이 답답해 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허어! 무슨 인연이 그리도 고약해 천하제일을 다투던 두 기재를 이토록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나? 이건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로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러간 뒤 신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몽양. 천하를 이대로 둘 셈인가?" "......." "자네들의 문제로 인해 천하는 혼란에 빠져 있네. 결자해지(訣者解之)라는 말이 있네. 매듭은 지은 자가 풀어야 하지 않나? 정작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당사자들인데 누가 그 일을 대신 하여줄 수 있단 말인가?" 초노백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암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신산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것 보게. 몽양. 자네는 단순한 방랑객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강한 집단 중 하나인 철혈부(鐵血府)의 부주(府主)네. 그 입장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되네. 설사 자네가 피하려고 해도 언제까지나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란 말일세." 놀라운 일이었다. 초노백이 철혈부주란 말인가? 그가 바로 만마태존(萬魔太尊) 초몽양! 바로 그였던가?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철혈부주 초ㅁ양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닐세. 그건 이미 옛날 말일세. 지금의 나는 일개 방랑자에 불과한 몸이네. 철혈부도 내 손을 떠난 지 오래네." 그러나 신산의 집요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허어! 그것이 더 문제란 말일세. 철혈부도 자네의 손을 떠났다, 백화성도 백가(白家)의 손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은 그럼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자네들과 정말 무관한 일이란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자네들의 옛 은원 때문 아닌가? 생각해 보게. 전대의 망령 때문에 도탄에 빠져버린 천하를......." "......." 초몽양의 눈썹은 괴로운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들인 자네들은 은퇴라는 미명으로 모든 진실을 외면하고 있으니 이 어찌 그릇된 심사가 아니겠는가? 그럼 천하는 대체 누가 맡는단 말인가?" "그건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네." 그 말에 신산은 버럭 화를 버럭 냈다. "아니? 그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자네들이 직접 과녁이라도 되어 그 화살을 맞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비겁하게 피하기만 한단 말인가?" "......." "생각해 보게! 지금 천하를 흔들고 있는 숙야풍이 누구인가를! 바로 자네와 백가가 만들어 낸 비운의 사생아......." "그만!" 돌연 초몽양은 소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부르르 전신을 경련하더니 밖으로 휭하니 나가 버렸다. 도저히 격동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크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고맙네 신산. 내게도 생각이 있네. 다만 지금은... 좀더 시간이 필요할 따름이라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 신산은 외로운 거인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왠지 그 모습에서 강한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아아! 단 한 번의 실수가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한을 남기고 상흔을 남게 하다니......." 신산은 지선을 부치고 있었다. ② 기나 긴 잠. 단목우에게 있어 이번의 수면이야말로 일생중 가장 긴 수면일 것이다. 그는 보름이 지나도록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부상설이 한 걸음도 떠나지 않은 채 간호하고 있었다. 간호라야 계속 지켜보는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었으나 하루에 그래도 두 번씩은 꽤나 힘든 노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목우의 체내에 스며있는 독기(毒氣)와 자상독(刺傷毒)이 땀과 함께 모공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일일이 그것을 닦아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인의 몸으로는 하기 힘든 거북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상설은 그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씩, 그녀는 단목우의 옷을 모두 벗기고 알몸으로 만든 후 깨끗한 청수를 사용해서 닦아준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단목우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목우는 그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휘우우웅....... 밤 바람이 차다. 섬 정상의 평지 위에 우뚝 선 거인은 오래도록 삭풍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백발은염이 바람에 멋대로 흩날리고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만마태존 초몽양. 평생을 마도제일인(魔道第一人)으로 군림하던 일세의 거인. 그는 지금 자신의 온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난날의 엄청난 실수가 오늘의 악연을 만들었고, 그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렸다. 이때였다.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왔는가?" 신산이었다. 신산은 그를 바라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흐음, 음성을 들어보니 많이 안정된 것 같으이." "허허! 안정이랄 것이 무에 있겠나?" "그 아이가 깨어 났다네." 그 말에 초몽양의 안색이 약간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 잘된 일이군. 역시 자네의 의술은 화타나 편작을 능가한다는 것을 이젠 믿겠네." "헛헛...! 과찬일세. 내게 마침 좋은 영약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구하지 못할 뻔 했네." "허허.... 그게 바로 인연이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그 아이가 죽었다면 자네 제자가 과부가 될 판국이니 말일세." 신산은 그 말에 껄껄 웃었다. "핫핫핫핫! 맞아. 그렇게 되었다면 노부는 평생을 눈총을 받고 지내야 했을 걸세!" 두 사람, 당대의 기인인 두 노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한동안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한참 후, 신산은 문득 정색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몽양." "......?" "그 아이 말일세." "......?" "어쩔 셈인가?" 초몽양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신산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느꼈네만 자네가 그 아이에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네. 나 역시 자네의 생각을 지지하는데, 어떤가? 지금이 그 때가 아닌지?" 초몽양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걸 어떻게?" "하하하하! 내가 누구인가? 신산이란 별호가 공연히 붙은 것인줄 아나?" 초몽양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튼 자네에게는 못당하겠네." "하하하하! 우리가 교우를 맺은 지도 어언 칠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지났다네. 서로의 생각쯤이야 표정만 봐도 환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초몽양은 문득 정색을 짓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번 일은 자네의 협조가 필수적이네." "핫핫핫! 내 그럴 줄 알았지. 아울러 축하하네. 자네의 기나긴 악연의 매듭을 풀어 줄 존재가 나타났으니 말일세." 초몽양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흘러내렸다. "자네가 아끼던 만년삼왕(萬年蔘王)을 내놓아야 함에도 그렇게 좋은가?" 신산은 지선을 흔들었다. "허허, 어차피 내 제자 아이의 신랑이 될 사람이 아닌가? 그것이 그것이고, 예물로 생각한다면 그다지 손해볼 것도 없는 셈이지." "그런가? 헛헛헛! 역시 자네의 계산법은 언제나 대단하이!"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어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핫!" "껄껄껄!" 한참 호쾌하게 웃던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데 한 가지 근심스러운 문제가 있네." 신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공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네." 초몽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자네에게 설국향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마공을 익혔다네.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희세의 마인(魔人)이었던 낭심인마(狼心人魔)의 낭심혈경(狼心血經)을 익힌 것 같네." 낭심혈경이란 말을 듣자 제갈중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국향은 초몽양의 부인이었다. 지금이야 원수가 되어버린 상황이지만 그래도 함부로 입에 올릴 처지가 아니다. 침묵이 흘렀다. 제갈중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낭심혈경을 익혔다고?" 초몽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낭심혈경의 무공을 익히면 인성을 상실하네. 그녀는 더 이상 가망이 없네. 언제고 그 아이를 해치려 들지 모르네." 제갈중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공을 가르쳐 주자는 것인가?" 초몽양은 머쓱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의 무공이야 그런대로 몇 가지는 쓸만하지만 그대의 무공이야말로 당금에서 가장 뛰어난 절기이네......" 미처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이다. 제갈중이 손을 저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게. 사실 무공으로 치면 자네야말로 날 능가하지 않는가?" "어찌 됐거나 우리가 무공을 전수해 준다면 공력이 모자라도 결코 그녀에게 뒤지지는 않을 것이네." "공력이라면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지. 우리가 예물로 내놓은 물건들로도 최소한 지금보다 다섯 배는 강해질 테니까." "그럼 더없이 다행한 일이지. 특히 자네를 위해서는......."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 쑥스러워지네. 오히려 무공은 내가 부탁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네가 먼저 나서서 말하다니 말일세." "정말 놀랍군. 자네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사람, 이제보니 날 철면피로 보고 있었군?" "그럼 아니었나? 하하하하!" "하하하핫!" 초몽양이 먼저 대소를 터뜨리자 제갈중도 뒤이어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일세의 대기인들이었다. 따라서 마음 속의 근심을 떨치고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③ 황하를 건너 북으로 가면 산서성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산악을 볼 수 있다. 태악산(太岳山)이었다. 그러나 태악산은 그 지명보다는 다른 이유로 인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산이었다. - 철혈부(鐵血府). 바로 철혈부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철혈부는 마도녹림의 총본산으로 백화성과 더불어 무림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근 육십 년 전부터 태악산은 금지구역으로 알려졌다. 이곳에 허락없이 오르는 자는 아무도 목숨을 보장받지 못했다. 철혈부는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존재로 태악산에 우뚝 솟아 있었다. "하아악!" 이상야릇한 신음성. 그것은 지금 묘한 율동을 자아내고 있는 한 여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전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였다. 여체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손을 대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묻어날 듯 희고 부드러운 피부의 여체가 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흐윽!" 사나이는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상하로 흔들리는 여체를 느끼며 끝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사순의 나이라면 인생의 오의를 느낄 때다. 아니, 어쩌면 인생보다는 여체의 즐거움을 더욱 탐닉할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하의만 벗고 의자에 앉은 채 여인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코 앞에서 여인의 탐스러운 유방이 아래 위로 야릇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눈을 게슴츠레 하게 감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군언악(君彦岳)이었다. 철혈부의 보루 책임자로 본시 그는 녹림수로삼십육채 채주(寨主)로 철혈부에 입부한지 어언 이십여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하늘을 베어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야망을 안고 철혈부에 입부했으나 시퍼렇던 야망은 어느덧 사그라지고 지금은 고작 일개 수문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로인해 이따금 저자에 나가 기녀를 사 여체나 즐기면서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하아악!" 여인은 절정에 이른 듯 상체를 한껏 뒤로 뒤집고 있었다. 군언악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뒤로 떨어질 듯 젖혀진 여인의 몸에서 두 개의 유방이 크게 팽창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여인은 막 절정의 문턱에 오른 것이다. 정사란 묘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즐기는 것은 이렇다할 만족을 주지 못한다. 정사의 묘미를 아는 자들은 남과 여가 동시에 절정을 느끼는 것이 가장 높은 쾌감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언악은 여인의 몸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욱 아랫도리에 힘을 주면서 젖혀진 여인의 상체에서 크게 부풀고 있는 유방을 한 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아!" 여인은 입을 딱 벌리며 신음을 토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하얗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군언악은 욕망의 분출물이 봇물 터지듯 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문 밖에서 수하의 보고가 들려왔다. "저어... 큰일났습니다! 정문에서 어떤 미친 작자가......." 막 사정의 쾌감에 몸을 떨고 있던 군언악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수하의 음성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뭐라고?" 그는 사정없이 여인을 홱 밀쳐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그로 인해 벌거벗은 그의 하초가 시커멓게 드러났다. 만족을 채우지 못한 그의 육괴는 미련이 남은 듯 덜렁거리고 있었다. 단향목으로 만든 의자. 이런 의자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필시 마음이 차분한 사람일 것이다. 동시에 형식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내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와룡선생(臥龍先生). 이렇게 불리우고 있는 그는 철혈부의 군사(軍師)였다. 마도제일뇌(魔道第一腦)라는 외호가 붙어 있으나 실제 그가 정말로 마도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그는 차를 즐기고 화원을 가꾸는 것을 즐겨했다. 지금도 그는 느긋한 자세로 한가하게 차를 마시다 호들갑스럽게 뛰어들고 있는 군언악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는 요란스럽게 뛰어든 군언악을 향해 막 호통을 치려 했다. 그런데 군언악이 더듬거리며 보고하는 내용이 그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하고 있었다. "군, 군사님! 부... 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고? 부주님이......?" "......." 단목우는 철혈부의 보문 정면에 있는 철사자상(鐵獅子像) 위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방대한 철혈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철혈부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보루는 있으나 정작 성보(城堡)는 없었다. 그것은 철혈부가 태악산 전역에 걸쳐 방대하게 흩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형식상의 보문을 제외한다면 어떤 형태의 울타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그는 웃음이 나왔다.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나타났던 수문장이란 친구는 자신의 소매 속에서 나온 패(牌) 하나를 보더니 안색이 싯누렇게 변한 채 인사할 생각도 잊고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어갔던 것이다. 단목우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극적으로 회생했다. 아니, 회생했을 뿐더러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그의 뇌리에는 초몽양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 현 철혈부의 자리는 공석이네. 그래서 사실상 철혈부의 힘이 많이 약화되어 있지. 부주 대행을 맡고 있는 자는 와룡(臥龍)인데 그 혼자로는 육부(六府)의 완전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네. ...... 중략...... 육부는 서로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 서로가 부주가 되려고 암투를 벌이고 있네. 그러므로 자네의 입성이 그다지 수월하지는 않을 걸세. 그러니 와룡의 힘을 얻게. 단목우. 그는 마침내 철혈부에 왔다. 물론 여기까지 온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후후! 지금부터가 전쟁이겠군.' 단목우. 그는 낙천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전개될 상황은 결코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림의 앞날과 전대에 맺어진 악연의 종결을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실수나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목우는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본성이 낙천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보루의 문을 통해 누군가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자는 세모꼴의 얼굴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는 자의문사였다. 나이는 대략 오순 쯤으로 보였는데 품위하고는 담을 쌓은 듯한 인물이었다. 그는 손에 무게를 잡느라 그런지 여의홀(如意笏)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찌보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단목우는 그가 결코 보통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심상치 않은 혜지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단목우는 그가 바로 초몽양이 말하는 와룡임을 알아 보았다. '의외로 빠른 대면이로군.' 와룡은 철사자 위에 오만하게 앉아있는 단목우를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 보았다. 호들갑스럽게 보고했던 군언악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와룡은 부주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작 서둘러 나와보니 눈 앞의 인물은 고작 이십대에 불과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눈으로 물었다. "저, 저 자가 철혈신패(鐵血神牌)를 가지고 있기에......." 군언악은 얼굴이 시뻘개지고 있었다. 와룡은 단목우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중히 포권했다. "실례지만 선생께서는 신패를 보여 주실 수 있는지요?" 와룡은 단목우의 확실한 신분을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단목우는 피식 웃었다. "그러기 전에 자네가 먼저 관등성명을 대는 게 순서겠지." '뭐? 자네?' 와룡이 누구인가? 그는 철혈부의 군사로 육부의 인물들조차 그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물며 새파란 청년이 이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그는 꾹 참고 말했다. "본인은 철혈부의 군사인 와룡이란 사람이오." 단목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실로 가관이었다. "으음, 그런대로 똑똑해 보이는군. 역시 소문대로야." 단목우는 철사자상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그리고 와룡의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뭘 그리 멍하니 보나? 어서 안내하게." "어, 어디로?" 정말이지 와룡은 온통 얼이 빠진 것같은 기분이었다. "어디긴 어딘가? 부주 집무실이지. 그리고 육부의 아이들을 모두 집합시키게. 상견례를 치뤄야 할테니." 단목우는 일사천리로 말한 후 앞장서 저만치 걸어가기 시작했다. "......." 와룡은 멍하니 선 채 단목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단목우는 당당한 걸음으로 보문 안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와룡은 ㄲ달았다. 실은 그 자신조차도 아직 철혈신패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단목우를 바라보며 눈빛을 번쩍였다. 동시에 가슴에 알 수 없는 격랑의 물결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아! 어쩌면 드디어... 드디어 철혈부가......!' 와룡은 빠른 걸음으로 단목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오직 이날을 기다리며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일이 도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돌고 있었다. "아, 아직은 이릅니다!" 와룡은 한 채의 전각 앞에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곳은 철혈각(鐵血閣)이었다. 철혈각은 철혈부의 중심부로 오직 부주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는 곳이었다. 철혈부주가 떠난 이후로 전각의 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와룡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단목우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정식으로 부주의 자격을 인정 받으셔야만 비로소 입각할 수 있는 곳입니다." 와룡의 말투는 어느샌가 존칭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전각은 이미 수십 년 간 폐쇄되어 있었다. 철혈부주 만마태존 초몽양이 어딘가로 떠난 이후부터였다. 단목우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럼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의 음성은 다소 차가와져 있었다. "육... 육부와 저의 인정을 받으셔야 합니다." 순간 단목우의 입에서는 예기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내 잠시 늦게 왔더니 많이 건방져 졌군!" "......?" "내가 누구냐?"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단목우는 와룡이 멍한 표정을 짓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와룡은 순간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현기증이 일고, 기혈이 마구 뒤집혀지고 있었다. '가, 가공할 내공이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아직까지 이렇게 음파에 강한 진기를 실을 수 있는 인물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와룡도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가 마도의 총 집결지인 철혈부의 군사가 될 수 있었겠는가? "모르오." 솔직한 말이다. 단목우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법?'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와지고 있었다. "멍청한 것!" "지... 지나치오!" 이번에는 와룡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진짜 부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지나친게 아니라 모자란 것이다." "......?" "철혈십조(鐵血十條)를 아느냐?" 철혈십조. 그것은 철혈부의 율법이다. 철혈부의 인물이라면 누구나 암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 아오." "그럼 철혈 제 일조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알겠군." "......!" "안다면 외워보아라." "부, 부주는 신(神)이다."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알고는 있군. 그렇다면 묻자. 그래 신을 심사하겠다는 거냐? 대체 그 놈들이 누구냐?"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휘익! 하는 파공성과 함께 흰손 하나가 떠올랐다. 단목우의 손이 날아오른 것이다. 꽈아아앙! 폭음이 진동했다. 전각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오목(烏木)으로 된 문이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문이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헉!" 그 광경에 와룡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 눈에 단목우가 쓴 것이 과거의 철혈부주 초몽양의 것 임을 알 수 있었다. 철혈마조(鐵血魔爪)! 일명 철혈수(鐵血手)라고도 불리며, 일 갑자 이상의 공력이 없이는 펼치지도 못하며 철혈마조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서는 능히 백 년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철혈마조의 위력은 가공하여 만근거암이나 철삭(鐵索)따위도 단숨에 박살내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공이 불과 이십여 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일개 청년 단목우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 와룡은 멍한 표정으로 휭하니 뚫려버린 전각의 문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문득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목우가 전각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리고 급히 주위를 둘러 보다 아직도 곁에서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 군언악을 보고 호통쳤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육부의 부주들에게 소집명령을 하달해라!" 제22장 · 흔들리는 마인(魔人)들 ① 군마악(君魔岳). 이것은 태악산에서 특정 장소를 부르는 말이다. 날카롭게 치솟은 거암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군마악 아래 전체가 검은 색으로 지어진 석부가 있었다. - 묵천부(墨天府). 바로 이곳이 철혈부의 육부 중 하나였다. 지금 아무런 장식도 없는 거실의 한가운데 앉아 장도(長刀)를 닦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육십대로 보이는 나이였으나 체격이 건장하고 턱밑에는 검은 수염이 짙게 자라있어 마치 관운장을 연상케하는 모습이었다. 도마(刀魔) 주장천(朱長天). 이런 명호를 지니고 있는 그는 육부 중 목천부(木天府)의 부주였다. 그는 일생을 도만을 사용하고 연마한 인물이었다. 과거 한 자루의 도를 들고 천하를 주유하다 초몽양의 눈에 들었다. 당시 그는 초몽양과 대결하여 백초만에 패한 후 스스로 철혈부에 들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초몽양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했었다. 그러나 지금 도를 닦고 있는 그의 마음은 동요하고 있었다. 철혈부의 부주라는 자리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었다. '만마태존이 실종된 지 어언 사십 년. 더이상 힘의 공백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철혈부에는 새로운 부주가 탄생되어야 한다.' 그는 도를 닦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도신(刀身)을 닦을 때면 마음이 가라앉을 뿐 아니라 전신에 새로운 힘이 차오르기 때문이었다. "부주님.!" 문득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는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분노가 솟구쳤다. 자신이 도를 어루만지는 시간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들려온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그토록 소중하게 어루만지고 있던 도를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서야만 했다. "지존(至尊)께서 오셨답니다!" 군마악에서 철혈각까지는 아무리 못걸려도 일다경은 달려가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마 주장천은 일각도 못되어 당도했다. 어찌나 빨리 날아왔는지 눈썹이 다 휘날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자신이 육부주 가운데서 가장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철혈각의 대전에는 이미 와룡선생을 위시하여 나머지 오부의 주인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군사! 대체 어찌된 일이오? 지존께서 오셨다니?" 그러나 와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미 여섯 번씩이나 받은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어서 내전으로 들자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 내전으로 들어서는 순간 칠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지난 사십여 년 간 아무도 앉은 적이 없었던 태사의에 한 명의 청년이 거드름을 피우며 떡 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막 들어서고 있는 칠인을 향해 호통치고 있었다. "모두 굼벵이를 삶아 먹었느냐? 보기싫다! 당장 물러가라! 회의는 내일 다시 열겠다." 칠인은 멍청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역력히 읽히고 있었다. ② 장식이라고는 전무한 방 안. 도마 주장천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종 잡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아니, 가슴 속에서는 분노마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놈이, 그것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 놈이 다짜고짜 신패 하나를 들고 와 그것을 빌미로 철혈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을 능멸하려 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육부주 모두가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문득 주장천은 밖을 향해 외쳤다. "악중악(岳中岳)을 불러라!" 악중악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청부살인의 전문가였다. 같은 시각, 주장천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하고 있을 때 도리어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기는 있었다. - 신녀부(神女府). 육부중 유일하게 여인들만의 집단인 신녀부의 부주가 바로 그러했다. 화예부인(花藝婦人) 도진진(陶珍珍)이란 별호를 지니고 있는 그녀의 특기는 색공이었다. 강호에서 화예부인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남자라도 하룻밤 사이에 백골이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고 말이다. 아니 고통은커녕 무한한 쾌락 속에 죽어가게 하는 재주를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지금 화예부인 도진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뇌리에 얼마 전 태사의에 앉아 있던 청년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호호호! 잘된 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는 힘이 부치는 판에 좋은 협력자가 나타난 셈이지 뭐야. 호호! 그를 내 허벅지 아래 깔고 앉고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녀는 현란한 나신을 자신의 손으로 애무하며 공상을 즐기고 있었다. 더욱이 신나는 것은 그 청년이 꽤 미남이라는 사실이었다. "호호! 마침 잘 됐어. 그렇지 않아도 금사향(金麝香)에게 비기를 전수한 후 써먹을 데가 마땅치 않았는데 우선 실험대상으로... 그래 그 아이라면 잘해 낼거야." 도진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밤이 되었다. 단목우는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과거 철혈부주 만마태존 초몽양의 침실이었다. 그는 편안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문 밖에서 한 가닥 달콤한 여인의 음성이 들린다. "저어... 신녀부에서 시비로 차출되어 왔사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사내들의 뼈를 흐물흐물 녹일 것 같은 마력이 깃든 음성이었다. '이제 시작인가?' 단목우는 느긋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들라."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스물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시비 복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잠자리 옷이라고 하기가 더욱 어울렸다. 그녀가 걸친 것은 은은히 속살이 투영되어 보이는 망사의였던 것이다. 단목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인의 육체미를 훑어 보았다. 여인은 아주 아름다운 얼굴이었고, 특히 두 눈에 묘한 색감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금사향이라고 하옵니다." "흐음."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터인즉 목욕을 하시는 것이 어떠하오신지요?" "그거 좋지." 단목우는 싱긋이 웃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작 상대방을 홀리려고 온 것은 금사향이란 시비였다. 그런데 그녀는 단목우를 본 순간 자신의 본분을 까맣게 망각하고 말았다. 단목우의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대한 순간 그녀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래선 안 되는데.......' 금사향은 손으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가슴을 지긋이 누르며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욕실은 침실 바로 옆방에 마련되어 있었다. 미리 준비시킨 탓인지 욕조에는 뜨거운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었다. 쏴아....... 수증기가 가득한 가운데 단목우는 느긋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수증기와 물에 젖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금사향의 나신을 눈을 가늘게한 채 바라보았다. 풍만하기 그지없는 젖가슴의 사이의 깊은 계곡이 젖은 망사의를 통해 뚜렷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젖가슴 정상에 맺혀있는 두 알의 유실은 망사의를 뚫고 나올 듯이 도발적으로 보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씰룩거리며 사향냄새가 진동했다. 만일 보통 사내였다면 단지 그녀를 곁에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몸이 달아올랐을 것이다. 단목우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담담한 표정이었다. 금사향은 욕조 밖에서 섬섬옥수를 움직여 그의 전신을 세심하게 씻겨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욕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무엇이 잘못된 것일게다. 단목우도 남자였다. 그는 금사향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손이 그의 가슴을 문지르고 신체의 구석구석을 애무하듯 쓰다듬을 때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의지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의 일이다. 지금 그의 눈빛은 지극히 담담했다. 도리어 눈빛이 풀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금사향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사향의 눈동자는 충혈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사나이의 우람하고 탄탄한 가슴을 쓰다듬던 그녀는 아랫도리에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냥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숨을 할딱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서툴게 수욕을 도와주고 있었다. "흐윽." 마침내 금사향은 참고 참았던 신음을 흘려내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의 한 마디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오금이 저리게 했다. "좀 더 세게 문지를 수 없느냐?" 금사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한쪽 다리를 올려 욕조 속으로 들이밀었다. 단목우의 다리를 씻기려면 그녀도 욕조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욕조 속에 두 사람은 마주보게 되었다. "......!" 숨이 막힐 듯 했다. 금사향은 전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찌된 셈인지 숨이 콱콱 막히고 온몸에 맥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뭐하느냐?" 단목우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금사향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한 후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아랫배로 그녀의 손이 내려갔다. 단목우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반쯤 드러눕고 있었다. 금사향의 떨리는 손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문득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이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튀었다. "아!" 금사향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손에는 사나이의 강철같은 어떤 부분이 접촉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어떤 놈이냐? 엿보려면 당당하게 엿보아라!" 느닷없는 호통이 단목우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금사향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단목우가 손을 천장으로 뻗는 것이 보였다. 우드드득! 놀라운 일이었다. 천장이 그의 손짓에 따라 통째로 뜯겨지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와앗! 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한 사나이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떨어졌다. "예의가 없는 놈이로군!" 단목우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사나이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라도 묶인 듯 주르르 앞으로 끌려왔다. 단목우는 욕조에 앉은 채로 사나이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 잡았다. "끄으윽!" 사나이는 삼십대의 장한으로 눈빛이 살모사처럼 삼각형을 한 음침한 인상이었다. "가서 네 놈의 멍청한 주인에게 말해라. 본 부주는 거추장스런 호위병은 필요없다고 말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단목우의 손이 가볍게 앞으로 내저어졌다. 우지끈...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몸은 그대로 허공을 붕 떠 날아가더니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창 밖으로 날아가서도 무려 십여 장이나 곤두박질친 후 땅바닥에 떨어졌다. "......!" 금사향은 안색이 밀랍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 그녀가 두 눈으로 본 것은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토록 가공한 무위는 처음 본 것 같았다. 이때 단목우가 손을 뻗었다. 그는 금사향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음!" 금사향은 탄탄한 사나이의 가슴에 안기는 형국이 되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전신이 쩌르르 진동했다. 그러나 그녀의 귓전에 떨어진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의 피는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넌 아직 어리니 가서 네 주인을 오라 해라. 본 부주는 애송이보다는 전문가를 좋아한다." "......!" 금사향은 그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어처구니없게도 태산을 향해 도전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③ 최근 들어 철혈부에서 가장 바빠진 사람은 바로 와룡선생이었다. 그는 본래부터 철혈부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단목우가 철혈부에 들어온 지 만 하루만에 그는 책상 앞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는 보고서와 각종의 전서를 읽느라고 눈 돌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같으면 골치가 지끈거려야 할 터인데 지금은 즐겁기만 했다. 그는 방금 전에 들어온 보고서를 읽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목천부에 이어 신녀부라......." 그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제꼈다. 찬바람이 방 안으로 일시에 밀려 들어왔으나 도리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허허! 한 번 일어난 폭풍을 뉘라서 막을손가?" 와룡의 작은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반짝이고 있었다. 화예부인 도진진은 방바닥에 부복하고 있는 금사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금사향은 방금 전 철혈각의 욕실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하고 있었다. "......!" 도진진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금사향의 보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금사향의 눈에 어린 한 가닥 경외지심 때문에 놀랐다. 금사향은 분명 철혈부주를 유혹하기 위해 갔다. 그런데 돌아왔을때는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철혈부주를 이야기 할 때 만면에 존경과 연모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그 자가 어느 정도길래? 이 아이가 그새 홀딱 빠졌단 말인가?' 도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 자가 나더러 직접 오라고 했단 말이지?" "네. 부주님." 도진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철혈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제 겨우 약관의 어린애에 불과해. 그가 나의 염정나찰마공(艶情羅刹魔功)을 이겨내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 도진진의 눈에서는 만인을 흘리는 듯한 강렬한 염기(艶氣)가 뿜어져 나왔다. "호호! 그래? 그랬단 말이지? 그럼 천천히 가 볼까?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내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이때였다. "그럴 필요없다. 본 지존이 직접 왔다." "......!" 도진진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이토록 가까이 사람이 다가오도록 자신이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만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음성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삼의 곤룡포를 입은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들어왔는지 이해가 되지않았다. 원칙적으로 신녀부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신녀부 소속 여인들의 엄중한 경비를 통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눈 앞의 청년은 마치 제방 드나들 듯 오중 육중의 신녀부의 경비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녀가 멈칫하는 사이에 단목우는 호통치고 있었다. "건방지구나! 넌 그 사이 예법도 잊었단 말이냐?" 그 말에 도진진은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이곳이 신녀부라지만 장소가 어디건 간에 부주가 직접 행차하는 곳은 곧 부주의 집무실이 된다. 도진진은 그 사실을 상기하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부복했다. 단목우는 인사를 받는둥마는둥 하더니 안쪽으로 걸어갔다. 안쪽은 그녀가 사용하는 침실이었다. "......?" 그가 의자에 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앉지 않고 안으로 들자 도진진은 어리둥절했다. 이때 침실 안에서 단목우의 호통이 들려왔다. "무엇하고 있는 것이냐? 오늘은 여기서 자겠다." '맙소사!' 도진진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뭐라고?" 도마 주장천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얼마 전 악중악이 낭패 당하고 돌아왔을 때만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도진진이 잠... 잠자리 시중을 든단 말이냐?" 그러나 그의 이 질문은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는 의미 외에는 없었다. 수하는 고개를 바닥에 박으며 똑똑히 말하는 것이었다. "예. 안을 엿보지 못해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럴 리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천하의 화예부인 도진진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고개까지 좌우로 내저으며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 시각 신녀부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좀 더 위." "......!" 사나이의 묵직한 지시에 여인의 손은 가볍게 떨고 있었다. 여인은 도진진. 화예부인이란 아름다운 별호를 지니고 있는 미태(媚態)가 농염한 것으로 유명한 신녀부주였다. 지금 그녀의 뱅어같은 손가락은 단목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단목우는 상아로 만들어진 화려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도진진이 홀로 사용하는 침대였다. 그는 편안하게 사지를 뻗은 채 누워 안마를 받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의 신녀부주가 안마사가 되어 있다니. 지금 그녀의 손은 단목우의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었다. "음." 단목우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반면 도진진은 점점 더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인해 선연한 아미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고운 아미 사이에 푸른 기운이 돌고 있는 것은 그녀가 극도로 인내의 한계를 견디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막 그녀가 입술을 악물고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몇 살이지?" 문득 고막을 때리는 것은 단목우의 음성이었다. 순간 도진진의 몸이 흔들렸다.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 예기치 않은 질문에 그녀는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공력을 집어넣어 상대의 혈도를 짚으려는 순간이었으므로 그만 기혈이 탁 막히고 말았다. "흐음, 귀가 먹었느냐? 몇 살이냐니까?" "스... 스물 일곱입니다." 도진진은 비록 모든 사람들이 화예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았다. 단목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음. 좋은 나이야. 남자는?" 도진진은 당황했다. 설마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 그렇게 말하는 도진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의 색녀로 알려진 도진진이 아직까지 남자 경험이 없다니?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순결한 처녀였던 것이다. 비록 겉으로 희대의 탕녀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여인이었다. 도진진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본 단목우는 내심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의외로군. 좋아. 본 지존은 순결한 여인을 더 좋아하니까." "......!" 도진진은 다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화가 난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였고, 다른 하나는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비밀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단목우는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진진." "네......?" 어이없게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도진진은 공손히 대답하고 말았다. "이제부터 다른 자가 너에게 남자가 있냐고 물으며 있다고 대답해라. 만일 그 사나이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단목우라고 하면 된다. 철혈부주 단목우. 알겠느냐?" "......." 도진진은 꿀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어쩐지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 적이 없었다. 그녀가 희대의 색녀로 알려진 것은 그만큼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기에 다만 철저히 이용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단목우에 의해 비로소 자신이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단목우의 담담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됐다. 안마는 그만하고 옷을 벗어라." 도진진은 말 잘듣는 인영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단목우의 말에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서서 옷을 벗는 모습을 바라보며 단목우는 더욱 편안한 자세로 눕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도진진이 하나하나 옷을 벗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제법 훌륭한 몸이야." 새벽이다. 단목우는 화예부인 도진진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었고 도진진은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도진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약간 달라 보였다. 본래 머리를 궁장(宮裝)으로 틀어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풀어내려 풍성하고 긴 머리칼이 허리 아래로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그로인해 개미같이 가는 허리와 비례적으로 더욱 커보이는 둔부의 일부분이 머리칼에 의해 살짝 덮여 있었다. 만지면 터질 듯한 젖가슴과 유지처럼 매끄러운 살결, 늘씬한 하체의 은밀한 비부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칼에 가려져 있다 살짝살짝 드러나곤 했다. 그녀가 벗고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단목우가 아직 그녀에게 옷을 입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옷시중을 들고있는 도진진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이마에도 몇 올의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백설같은 젖가슴에는 은은한 홍반이 어려 있었다. "가시... 려고요?" 도진진의 입술에서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단목우는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돌아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전라의 도진진에게 힐끗 눈길을 한 번 던진 후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문득 그의 등뒤에서 다소곳한 도진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천첩은 이제 부주님의 종입니다." 단목우의 음성이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건 이미 오래 전부터 결정된 것이야." 신녀부를 나선 단목우는 새벽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었다. 이곳 철혈부는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방대한 태악산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므로 한적한 분위기였다. 그는 걸어 가다가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동시에 내심 중얼거렸다. '육부의 인물들이겠지.' 단목우는 벌써부터 사방 곳곳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자들의 눈길과 호흡소리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아니, 도리어 그들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앞으로 하는 일이 더욱 수월해지고 기간이 단축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걷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적양부(赤陽府)였다. ④ 적양신군(赤陽神君) 북리담(北里膽)은 아직도 잠이 덜깬 상태였다. 그는 비교적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눈을 부비며 갑자기 들어선 불청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신임부주인 단목우였다. 예고도 없이 적양부를 방문한 그가 한 말은 간단했다. "차를 다오. 산책하다 잠시 들렀다." 북리담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육부의 주인으로 철혈부에서도 손가락 꼽히는 고수가 아닌가? 그는 동자순양지기(童子純陽之氣)인 적양신공을 익힌 고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여자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인물이었다. 그로인해 그의 거소에서 여자라곤 얼씬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차를 끓일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철혈부주였다. 할 수 없이 북리담은 자신이 직접 차를 끓여야 했다. 차는 냉한(冷寒)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가 익힌 열양지기에 속한 적양신공과는 반대되는 성질이었다. 따라서 그는 평소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차 끓이는 솜씨도 형편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단목우는 북리담이 끓여온 차를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본래 평소에도 말 수가 없는 북리담이었다. 그러나 그는 궁금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허허, 차 맛이 어떻습니까?" 단목우는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조용히 하게.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 맛을 보고 있는 중이다. 장부의 철심이 들어있는 차를 말이다." "......!" 북리담은 흠칫하며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목우는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한참만에야 찻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단목우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맛은 훌륭했다. 다만 다음부터는 차에 충심(忠心)도 함께 담아 주었으면 하네." "......!" 북리담은 단목우가 남긴 말을 몇 번이고 입속으로 되뇌어야만 했다. 단목우가 사라지고 난 후 그는 자신이 끓인 차를 맛보았다. "윽!" 그는 입 안에 넣었던 것을 도로 게워내야만 했다. 차는 완전히 소태였던 것이다. 잠시 후 북리담은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은 단목우가 사라진 곳을 향해 못박혀져 있었다. 제23장 · 백화십팔계(白花十八戒) ① 대륙에서 제일 먼저 봄을 맞는 곳은 강남이다. 강남에서 시작한 화신(花信)은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대륙 전체를 온통 꽃향기로 뒤덮는다. 예로부터 봄은 생명의 기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륙을 감싸고 있는 냉기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백도의 하늘이라는 백화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화성 전역에는 모란(牡丹)이 앞다투어 만개하고 있었다. 잎보다 먼저 피는 모란꽃은 순백색이었다. 그로인해 멀리서 보면 백화성은 온통 모란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대륙은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봄은 잔인한 일면을 지닌 채 대륙을 방문했다. 수개월 전 일어났던 광명회의 몰락은 백화성에 반기를 들었던 불순집단의 음모라는 설이 퍼지면서 강호는 도리어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것이다. 광명회의 붕괴로 인해 모든 상황이 전도되었다.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한다. 지난 육십여 년 간 백화성이 존재함으로써 무림은 평화로왔었다. 비록 철혈부와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적당한 힘의 균형이 도리어 무림에 잠정적이나마 평화를 불어온 것이다. 그런데 불순세력이 세운 광명회가 백화성에 반기를 들고 무림을 어지럽히려 했다는 소식에 무림인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급기야 중원 각처의 무림인들, 군소방회, 문파들의 수장들은 백화성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백화성이 좀 더 강력하게 무림을 통제해 달라고 공동으로 요청한 것이었다. 그로인해 무림에 새로운 파문이 일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백화성의 계략이었다. 강호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백화성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인 흑루에서 나온 치밀한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흑루에 도사리고 있는 도합 이십인의 신비인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책략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 강호인들이 공식적으로 강력한 통제를 요청한 것도 모두 그들의 책략에 의한 것이었다. 이른바 백화십팔계(白花十八戒)는 그렇게 하여 하루 아침에 무림천하에 포고되기에 이르렀다. 백화십팔계! 무림인들은 이 포고를 놓고 의론이 분분했다. 혹자는 혼란한 강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하고 비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너무 심한 조치하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화십팔계의 포고령에 아무도 감히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백화성주의 직인이 찍혀 있는 백화십팔계는 구대일방을 위시한 천하각파에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백화십팔계의 포고문을 받은 구파일방을 비롯한 각 방회문파들은 한결같이 커다란 충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백화십팔계의 내용에는 대부분 무림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부로 살인을 금한다. 문파간의 시비는 무력(武力)으로 해결해선 안 된다. 모든 중재는 백화성이 직접 나선다. 백화성의 허락없이 군웅대회 및 비무대회, 개파대전 따위는 할 수 없다 등등....... 그러나 단 한 가지 조치가 무림, 특히 각 대문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각파가 자발적으로 장문신부(掌門神符)를 백화성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이러했다. 각파의 충돌을 방지하고 자파의 이기심으로 인한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공평하게 각 대문파는 장문신부를 백화성주에게 바쳐 큰 일이 일어났을 때 백화성주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문신부는 각파의 개파조사(開派祖師) 이래 장문인을 상징하는 최대의 보물이었다. 그러므로 장문신부를 잃는다는 것은 문파의 정신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암운이 일고 있었다. 무림에 보이지 않는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각 대문파는 갈등했다. 장문신부를 바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백화십팔계에 반발을 하고 나서야 할 것인가? 봄은 오는데 무림에는 왠지 스산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기한은 삼 개월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중원의 제문파는 장문인이 직접 장문신부를 받쳐 들고 백화성을 방문하여 백화십팔계에 맹종한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만일 불응할 시에는 백도의 공적(公敵)으로 보고 백화성이 직접 응징하겠다는 엄중한 경고가 함께 선언되어 있었다. ② 흑루. 백화성 내에서 외인의 출입을 거부하는 유일한 곳. 그러나 그곳에서 만박뇌환자 숙야풍과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이십인의 인간들은 무서운 책략을 하나하나 짜맞추어가고 있었다. 지금 숙야풍은 원탁의 중심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십인이 각기 제출한 문서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각각 따로 작성한 것으로 천하정략계(天下征略計)가 적혀 있었다. 이십 인은 각자 최대한으로 심력과 지력을 소모해가며 천하정략계를 제출했다. 문서의 내용은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백화성의 전력과 무림 각파의 힘, 반대파인 철혈부의 힘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백화성의 작전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들은 대전이 벌어질 경우의 승률 계산과 무림을 평정하기까지의 기간들은 나름대로 작성했다. 물론 그것은 숙야풍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숙야풍이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광명회를 무너뜨린 직후였다. 그 이후 그는 연일 놀랄만한 명을 내리고 있었다. 또한 근자 들어 그는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우선 자체 내에서 자신의 야망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숙청 대상에 오른 인물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 숫자가 근 삼백 명 이상이라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못되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배 이상 많았기 때문이었다. 숙야풍은 광명회를 무너뜨렸을 때 그곳에서 백화성에 잠입해 있는 광명회 첩자들의 밀서를 찾아냈다. 첫 번째 숙청의 대상자는 바로 그들이었다. 두 번째는 철혈부에서 백화성에 잠입시킨 첩자들이었다. 숙야풍은 먼저 명단에 적혀있는 자들부터 모두 제거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세 번째 숙청 작업은 더욱 살벌한 것이었다. 백화성에서 은밀히 활동했던 첩자들은 물론, 그들을 천거했거나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백화성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준 자들까지도 제거했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애매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터럭 한 올만큼의 연관이 있기만 해도 가차없이 제거해버린 것이었다. 공포......! 전율......!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숙청기간은 단 보름이었다. 그 사이에 무려 칠백팔십육인이 흔적도 없이 이슬로 사라졌다. 실로 가공할 피의 숙청이었다. 지금 스무 쌍의 눈동자에는 흥분의 물결이 어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문서를 읽고 있는 숙야풍의 표정에서 만족의 빛을 읽어낸 것이었다. 이윽고 숙야풍은 문서를 모두 읽고 덮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후! 앞으로 삼개월. 삼개월 후면 천하가 하나가 된다. 이 숙야풍의 발 아래에......!" 문득 그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첩자들은 몇 명이나 남았느냐?" 스무 쌍의 눈동자 가운데 하나가 답했다. "팔인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철혈부에서 보낸 자들입니다. 신분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워낙 교묘하게 잠입해 있는지라 뒤늦게 찾아낸 자들입니다. 지금 철령대가 도주하고 있는 그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좋아." 숙야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단목우를 제거하는데 실패한 오령대였으나 언제나 든든한 신뢰를 안겨주는 백화성의 전위대였다. 그러나 숙야풍은 단목우를 떠올리자 금세 안색이 음울하게 변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행동을 미루어 온 것은 그를 완벽하게 제거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행동하자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목우를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패한 이상 더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오직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새로이 들어온 정보는?" "있습니다." 입을 연 자가 계속 답했다. "하나는 철혈부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이 출현했다는 젊은 부주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매우 신비한 자라고 알려졌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능력이 꽤 탁월한 자인 것 같습니다." "......." 숙야풍의 범인보다 두 배나 더 큰 머리통이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그 자는 강호경험이 노회한 마인들을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완전히 굴복시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은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다고 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뜸을 들인뒤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단지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그가 초몽양의 뒤를 이었다면 초몽양의 제자이거나 그와 연관이 깊은 자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미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숙야풍이 그의 말에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단목우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단목우를 구해간 자가 초몽양이므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배제할 수 없는 일이지." 숙야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단목우건 누구건 상관없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스무 쌍의 눈동자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점은 그 점이었다. 계획은 이미 섰다. 남은 것은 계획대로 실행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숙야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내야 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적을 모르면 철혈부와 싸움은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 점이라면....... 약간의 시간만 주시면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숙야풍은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만족의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이들 이십인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보았던 어떠한 자들보다 머리가 뛰어났다. 더욱이 그 뛰어난 머리가 제각기 특성을 갖고 서로를 보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일이라도 그들이 세운 계획은 완벽했다. 그들에게 있어 실패란 극히 드물었다. 숙야풍이 눈을 감자 이십 쌍의 눈동자도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채 일제히 감겨지고 있었다. 천하정략계는 시작되었다. ③ 군사(軍師) 와룡선생. 적양부주(赤陽府主) 적양신군 북리담. 묵천부주(墨天府主) 도마 주장천. 신녀부주(神女府主) 화예부인 도진진. 생사부주(生死府主) 생사판(生死判) 희천세(希天世). 오행부주(五行府主) 음양동자 (陰陽童子). 편복부주(편복府主) 야신(夜神) 염책량(閻柵亮). 그들은 철혈부의 기둥들이다. 개개인이 모두 수십 년 간이나 세력을 형성하고 있거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도의 거인들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신녀부주 도진진만이 가장 나이가 어릴 뿐 한결같이 육순에서 구순까지 이르는 위인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철혈각에 모여 있었다. 지난 한 달 반이라는 기간은 그들에게 나날이 경이와 탄복, 그리고 당혹의 연속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철혈부주를 자칭한 한 청년으로부터 경악이 시작되었고... 한 달 반이 흐른 지금 그들은 철혈각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철혈부는 전대부주 초몽양이 실종된 이후 융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힘이 크게 약화된 것도 사실이었다. 철혈부가 하나가 되기 이전에는 영원히 백화성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한 명의 청년에 의해 철혈부는 통일된 힘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기적은 아니었다. 그동안 단목우가 행한 숱한 기행과 설득, 또는 강경책으로 육부의 주인을 굴복시키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와룡과 육부주는 지금 철혈부에서 지존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 생사부주 희천세는 신임부주와 생사를 건 내기를 했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한 방울이면 소 천 마리를 죽일 수 있는 독수를 술잔에 가득 따라 나누어 마셨다. 결과는 참담한 그의 패배였다. 희천세는 그로부터 일주야만에 깨어났다. 그리고 그의 침상 머리맡에는 단목우가 빙그레 웃고 있었던 것이다. 오행부주 음양동자는 겉으로는 오 척 단구의 어린아이처럼 보이나 실은 가장 나이가 많은 위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부하던 독문신공으로 능히 단목우를 제압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목우는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고 그의 오행지기(五行之氣)를 받아 내겠노라고 말했다. 음양동자는 코웃음쳤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고련한 오행지기를 몽땅 단목우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단목우는 마도의 전설적인 괴공(怪功) 마라진무(魔羅眞舞)라는 수법으로 그의 본신 진기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음양동자는 꼬박 열두 시진을 그의 앞에 무릎꿇고 자신의 공력을 돌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만 했다. 편복부주 야신. 그는 낮을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낮에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밤에만 활동했으며 그의 특이한 경공은 천하에 으뜸이었다. 단목우가 신임부주가 된 것을 그는 마지막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실상 그가 가장 괴로워 하는 것은 낮시간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숙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한달 사이에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해만 뜨면 단목우가 그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대로 가다가는 말라죽을 것 같았다. 급기야 그는 밤중에 단목우를 공격했다. 밤의 제왕(帝王). 그것이 바로 편복부주 야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암습 이십칠 회, 정면대결을 구 회에 걸쳐 퍼부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자부하던 경공술도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한 달 이십일 만에 그는 단목우의 발 아래에 무릎꿇고 부복하고 말았다. 와룡선생과 육부의 주인들! 그들은 이제 새로이 열리고 있는 철혈부의 역사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새 주인을! 그들의 뇌리에는 과거의 철혈부주의 영상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단목우란 한 청년이 초몽양의 자리를 대신 비집고 들어왔다. 어쨌거나 철혈부는 하나가 된 셈이었다. 지금 그들은 새로운 부주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 그런데 벌써 한 시진이나 기다리고 있었으나 철혈부주 단목우는 인사를 받으러 나오기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평소의 그들이었다면 화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 들이고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지금 이 시각 단목우는 그동안 소모했던 심기와 진력을 보충하기 위해 세상 모른 채 골아떨어져 자고 있는 중이었다. ④ 찻잔은 오래 전부터 식어 있었다. 그러나 영호광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처소는 어두웠다. 그는 백화성 내에서 유일하게 무공을 모르는 위인이기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았다. 영호광은 처소로 돌아오면 언제나 자유로움을 느낀다. 충정루의 업무를 끝내고 이곳에 돌아와 휴식을 취할 때마다 그는 안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 그랬다. 지금 그는 조금의 자유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지금 그는 사방으로 부터 자신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눈들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당하고 있었다. 비록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매복이었으나 그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각이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단목우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이미 그가 단목우와 손을 잡고 백화성과 흑루를 우롱했다는 사실이 발각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야풍은 그를 잡아들여 고문하거나 제거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왜 자신을 그대로 놓아두는지를. 그것은 아직 단목우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숙야풍은 언제고 자신을 미끼로 단목우를 다시 잡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 영호광은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보고 있었다. 본래대로 한다면 그는 자결이라도 했어야 옳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단목우의 입장으로 볼 때 오직 약점이 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결하지 않았다. 그는 자결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숙원을 풀지 못한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노리고 있었다. 숙야풍의 가슴에 비수를 박을 날을. 그는 주위의 수많은 감시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문득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원으로 걸어 나갔다. 화원에는 모란이 한창이었다. 화원 곳곳에서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화원을 산책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언뜻 아득한 슬픔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인......." 단목가인(端木佳人). 그녀는 단목우의 여동생이었다. 또한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여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숙야풍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너무도 비참했다.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녀의 시신을 보았을때 영호광은 하늘에 맹세했다.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영호광은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호광은 입술을 악물었다. 피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삭이기 위해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눈 앞에 환상처럼 그려지는 한 여인의 얼굴만은 떨칠 수가 없었다. '단목가인.......' ⑤ "으음.... 난 이미 틀렸어. 자네라도......." 두 사람은 온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상이 심한 한 사람 때문에 두 사람 모두가 전력으로 질주할 수 없었다. 어깨를 부축해 주고 있는 청의인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살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 철혈십조라는 것을 모르나?" 다리와 옆구리에 심한 검상을 입고 있는 백의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누구라도 철령대의 추적을 벗어나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하네. 놈들이 이미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그만 말하고 기운이나 내게!" "육묵성. 진정 자네가 철혈부의 형제라면... 내 죽음을 헛되게 해선 안 되네. 난 이미 틀렸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이었다. 백의인의 상처는 누가 보아도 가망이 없었다. 설혹 화타나 편작이 부활해도 그를 되살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청의인은 망설였다. "하지만......." "육묵성. 우리 형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자네도 봤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 살아서... 백화성의 음모를 알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던져 철령대를 막아냈네." "......!" "그렇기에 우리들이라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네." "유현(劉玄)! 내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난 자네를 도저히 버려둘 수 없네." 그때였다. 음침한 웃음소리가 그들의 신형을 멈춰세웠다. "흐흐흐! 옳은 소리야. 친구란 함께 죽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붕우(朋友)지." 동시에 흑의를 걸친 인물들이 속속 나타나더니 사방을 그물처럼 포위했다. "처, 철령대!" "빌어먹을!"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이제 희망은 사라졌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이었다. 유현은 이를 갈았다. "더러운 놈들! 앞으로는 정의를 내세우며 뒤로 천하를 대란 속에 몰아넣고 그 책임을 우리들에게 떠넘기다니... 네 놈들의 더러운 음모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흑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섰다. "곧 죽을 놈들이 말이 많구나. 자, 이제 그만 갈 때가 됐다." 그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흑의인들은 일제히 포위망을 압축해 왔다. 유현은 육묵성을 돌아 보았다. "묵성! 빨리 떠나게. 내가 이들을 막아내겠네." 육묵성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혼자서 어떻게......." 유현은 버럭 소리쳤다. "자넨 정말 개죽음하고 싶은가? 우리의 임무도 잊었단 말인가!" 처절한 외침이었다. 육묵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자신의 임무를 잊을 수 있겠는가? 목숨보다 임무를 먼저 완수해야 하는 것이 철혈부의 철칙이었다. 또한 그것이 철혈부가 지금까지 백화성과 쌍벽을 이루며 독자적인 아성을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는 죽을 것이 확실한 동료를 버려두고 혼자 떠날 수가 없었다. 육묵성이 계속 망설이자 유현은 그를 밀어냈다. "어서 떠나게! 자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목을 자르겠네!" 유현은 수중의 검을 자신의 목에 댔다. 육묵성은 다급히 외쳤따. "안 돼!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유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가 계속 못나게 굴면 이 방법밖에 없네! 자, 어서 떠나게. 아니면 내 스스로 자진하겠네." "유현!" 육묵성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사나이의 눈물이었다. 마침내 그는 돌아섰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현은 육묵성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독백을 흘려냈다. "묵성! 고맙네. 저승에서 만나면 내 자네에게 술 한 잔 톡톡히 내겠네." 그때 예의 흑의인이 음침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대단히 감동적인 장면이군." 유현은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흑의인은 비웃음을 흘렸다. "너의 그 희생정신은 본받을만 하다. 하지만 안 됐군. 결국 너나 네 동료는 모두 우리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유현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가소로운 놈들! 정의를 내세우며 우리 녹림인보다 더 철면피한 일을 저지르는 네 놈들을 하늘인 듯 가만둘 줄 아느냐? 흐흐흐! 하지만 하늘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다. 이 유현이 네 놈들을 지옥길의 동무로 데리고 가겠다!" 그 말에 흑의인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곧 죽을 놈이 무슨 소리냐? 혹 머리가 돌아버린 게 아니냐? 네놈이 무슨 힘으로......." 문득 그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유현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뻗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우욱! 유현은 갑자기 상의를 좌우로 당겨 뜯어냈다. 그러자 그의 상반신에 무엇인가 칭칭 동여맨 것이 보였다. 그것은 여러 개의 검은 상자들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흑의인은 전신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급히 외쳤다. "화약이다! 모두 피해라!"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의 외침이 터지고 철령대 소속의 인물들이 막 몸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더러운 놈들! 지옥에서 만나자!" 유현이 비장하게 외치며 주먹으로 자신의 배에 동여맨 상자들을 쳤다. 콰콰콰... 콰콰쾅......! 놀라운 일이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굉렬한 폭음과 함께 주위가 온통 화염에 휩싸였다. 그야말로 대폭발이었다. 유현은 자신의 몸을 화약과 함께 산화시켜버린 것이었다.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가 울렸다. 폭음 속에 묻혀 그 소리는 미약했으나 거의 동시에 사방으로부터 울렸다. 화염과 연기, 폭풍과 같은 회오리가 서서히 가라앉자 주위의 전경이 드러났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웅덩이가 움푹 패여 있었으며 사방에 팔다리를 잃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속에서 유현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으으윽!" "나... 날 좀... 차라리 죽여줘!" 전신이 찢겨지고 불에 탄 채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자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토해내는 자들의 모습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내장이 밖으로 터져 나왔으며, 어떤 자는 얼굴의 반쪽이 날아간 모습이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니 진짜 지옥이라도 이보다는 덜할 것이다. 차라리 숨이 끊어진 자들이 행복했다. 살아있는 자들은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육묵성도 그 폭음을 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폭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유현.... 자네의 희생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겠네!'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유현의 희생을 값어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야 했다. 살아서 철혈부로 돌아가 이 모든 사실들을 알려야 했다. 그는 눈물을 뿌리며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 유현의 유골이라도 찾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철혈부는 결코 자넬 잊지 못할 것이다.... 철혈부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자네의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위대한 철혈부의 무인으로......!" 목이 메었다. 차라리 통곡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유현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달렸다. 제24장 · 패륜(悖倫)의 비사(秘事) ① 단목우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초운빈(楚雲彬)이란 여인을 아시오?" 단목우가 그렇게 물었을 때 와룡의 안색은 경악으로 크게 동요했었다. "그럼 지존께서는 드디어!" "초노백께서 만나보라 하시었소." 단목우는 지금 와룡이 일러준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초운빈은 만마태존 초몽양의 누이동생이었다. 무림에서 그녀의 이름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초운빈이란 여인은 태악산의 한 암자에 살고 있었다. 똑똑... 똑똑똑.......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암자 안을 은은히 울리고 있다. "......." 단목우는 벌써 한 식경이나 눈앞의 여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승은 아주 해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처음 여승을 보았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초노백의 누이라면 최소한은 칠순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여승일 줄이야......' 초운빈은 여승이었다. 그런데 지금 단목우의 눈에는 고작 삼십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득 목탁소리가 멎었다. "아아! 세월이 그토록 많이 지났건만 오라버니께선 어쩌자고 자넬 보냈단 말인가?" 여승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그녀의 눈에는 뿌연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단목우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결자해지라고 하였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비록 불가에 귀의하여 속세의 연을 끊었다 하실지 모르나 과거의 연이 오늘의 엄청난 비극을 자아내고 있는데 어찌 모른 척 하신단 말입니까?" 여승은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 몽롱한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영준한 젊은이로군. 아미타불.... 과거의 그 분께서도 그랬었지." 단목우는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모진 것이 인연이라더니... 오십 년이나 지난 일들이 오늘에 와서 이런 풍파를 빚어낼 줄이야." "......." 여승은 눈물을 떨구었다. 아무리 불문에 귀의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입 속으로 불경을 암송했다. 그녀가 외우는 불경은 다라니경이었다. 단목우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이윽고 여승은 눈을 떴다. 그녀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선배님을 만나 보라고만 하셨습니다." "......." 여승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못난 계집의 판단에 맡기신다는 뜻.... 그것이야말로 더욱 어려운 일인데......" 여승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단목우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미타불.......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기겠노라 결심하였건만... 또다시 번복하고 풍진에 나서야 한단 말인가? 비록 그녀가 마도(魔道)에 발을 들여놓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모든 은원의 시점은 바로 이 못난 것에게서 비롯된 것을......" 문득 단목우는 이때 선방 안에 하나의 위패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애녀상아지위(愛女孀娥之位)> '상아?' 단목우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여승은 그가 위패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듯 탄식을 발했다. "젊은이. 그 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라오." "......?" 여승의 눈이 감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감긴 눈자위로 눈물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여승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밝혀져서는 아니될 일이나... 젊은이가 개입된 이상 당시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어쩌면 오라버니께서 그대를 보낸 이유도 그 때문일 터이니......." 단목우는 안색을 가다듬었다. 바야흐로 초운빈이란 여승의 입으로부터 전대비사가 흘러나오려 하는 것이다. "상아... 정확히 말하자면 백상아(白孀娥)는 빈니의 딸이오. 또한 남편의 두 번째 부인이기도 하다오." "......!" 단목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딸이자 남편의 두 번째 아내이기도 하다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패륜(悖倫)도 보통 패륜이 아니었다. 자신의 딸이 남편의 두 번째 아내라면 한 남자가 모녀를 함께 취했다는 뜻이 아닌가. 단목우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윽고 여승의 입으로부터 비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② 백선결과 초몽양. 그들은 정사무림을 양분한 양웅(兩雄)이었다. 한쪽은 백도에 섰으며, 한쪽은 사도에 서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쪽이 백도에 섰기 때문에 나머지가 흑도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한 산에 양호(兩虎)가 살 수 없듯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백선결이 백도무림을 규합해 백화성을 창건하자 초몽양도 질세라 철혈부를 만들었다. 그로 인해 정과 사는 숙명적으로 양립했다. 백화성이 사도무림을 핍박하면서부터 초몽양은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도와 달리 사도무림은 잘 규합되지 않음으로써 그 힘이 열세에 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초몽양은 편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인계(美人計)를 쓰기로 했다. 그에게는 절세미인인 누이동생이 있었다. 초운빈이라는 이름을 지닌 천하절색의 미인. 그녀는 오빠의 부탁을 받아들여 백선결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그와 혼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녀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로 백선결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초몽양으로부터 독촉받고 있었다. 그것은 백화성의 기밀을 빼오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 기밀을 빼돌리게 되면 백화성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갈등하던 초운빈은 결국 오빠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직전 그녀의 마각이 발각나고 말았다. 백선결의 배신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초몽양의 누이동생이었다는 사실과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였다는 사실을 안 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충격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아내인 초운빈을 자신의 손으로 쫓아내야만 했다. 실로 뼈를 깎는 아픔이었다. 초운빈은 비록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무한한 슬픔을 느끼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결국 하늘을 따를 수 없었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당시 그녀의 몸에는 백선결과의 사랑의 씨가 잉태되고 있었다. 그 씨앗은 축복받지 못한 생명이었다. 초운빈은 슬픔을 씹으면서도 사랑의 결실인 아이만을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비극의 씨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초몽양의 누이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 백선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마침 그의 나이도 젊었다. 그는 복수를 다짐했다. 이후 그가 취한 행동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초몽양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어느 날, 초몽양의 아내 설국향(雪菊香)은 산책을 하던 중 한 명의 준수한 문사를 만나게 되었다. 설국향은 사도무림의 패주인 남편 초몽양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초몽양이 비록 진정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긴 했으나 여인의 마음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헤아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설국향의 마음 한 구석은 늘 텅 비어 있었다. 유난히도 외로움을 느끼는 그녀의 여린 마음 속에 마침내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범해서는 안될 역풍의 바람이었다. 문사를 몇 차례 만나는 순간 설국향의 마음은 그만 문사에게 기울어 버리고 말았다. 문사는 무림패업에 전부를 바친 초몽양과는 반대로 늘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인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설국향은 남편보다도 문사와 함께 있는 것에 훨씬 행복감을 느꼈으며 그로 인해 비로소 여인의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남편이 아닌 문사에게 애원했다. 자신을 데리고 멀리 도망쳐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문사는 마각(魔脚)을 드러낸 것이었다. 설국향과의 한 차례 정사가 끝난 후, 문사의 얼굴에는 한껏 비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아오?" "무슨... 말씀이에요?" "후훗! 당신이 아는 이 사람의 진정한 면모를 알고 싶지 않소?" "......!" "후후훗! 내 이름은 백선결이오. 당신 남편이 그토록 싫어하는 백화성주 백선결이오." "그... 그게 사실인가요? 믿을 수 없어요! 거... 거짓말을 한 거죠?" 세상이 온통 뒤집혀지는 충격이었다. 설국향은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바보같으니! 어리석은 계집! 저주받아야 해! 너같은 건! 설국향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알을 파내고 심장을 바수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속은 것이었다. 달콤했던 말. 한없이 다정했는 미소. 꿈결처럼 부드러웠던 그의 눈길. 애정을 담뿍 담고 그녀의 전신을 애무했던 그의 손.......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계략에 불과한 것이었다. 백선결은 그녀의 심장에 못을 박는 선언을 했다. "후훗! 어리석은 여인아. 내가 진실로 사랑했던 여인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뿐이오. 그녀의 이름은 초운빈이라고 하오. 당신은 내게 있어 하룻밤 노리개에 불과했을 뿐이오. 으핫핫핫핫......!" 백선결은 앙천광소를 터뜨였다. 그리고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설국향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설국향은 이를 갈았다. 여인의 한은 오월에 서리를 내린다고 했다. 마침내 설국향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다. 남편을 배신하고 남편의 적수에게 농락당한 그녀가 제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야기되었다. 그녀는 홀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막 딸을 해산했던 초운빈의 처소에 들러 그녀가 갓 낳은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핏덩이야말로 백선결과 초운빈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후 세월은 물같이 흘러 어언 십팔 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해도 한참을 변했을 세월이었다. 그 기나긴 세월은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사랑의 배신과 상처를 안고 사라진 설국향. 그녀는 그날 이후 복수심에 불타 희대의 마녀로 변신했다. 그리고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복수를 꿈꾸었다. 그녀의 복수는 그야말로 끔찍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납치해 간 여아를 키웠다. 그 여아에게 복수심을 심어주고 엄청난 패륜의 길을 걷도록 주문했다. 그 여아의 이름은 백상아(白孀娥)였다. 백상아는 타고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성장했다. 그로부터 십팔 년 후였다. 어엿한 여인으로 성장한 백상아는 설국향의 명으로 백화성에 들어갔다. 그것이 복수의 시작이었다. 백상아를 본 백화성주는 처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여인 초운빈과 똑같이 닮은 여인을 만난 것이었다. 마침내 그의 정열은 다시 타올랐다. 환상처럼 나타난 소녀 백상아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딸일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백상아도 자신이 유혹한 백도의 거인이 바로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마침내 패륜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설국향이 의도한 복수는 참으로 잔혹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상아가 불행의 결실을 잉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임신을 알게 된 어느 날 설국향이 찾아왔다. 설국향은 백상아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얘야. 네 부친이 누구인지 아느냐? 호호홋! 바로 지금의 네 남편인 백선결이 바로 네 생부란다. 깔깔깔! 믿을 수 없다고? 믿어야 한다. 네 에미는 초운빈이란 여인이고, 너는 그 계집과 백선결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난 백선결에게 복수하기 위해 널 납치해서 이제까지 키운 것이란다. 알겠느냐? 넌 하늘 아래 다시없는 패륜을 저지른 것이란다!" 설국향은 백선결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백선결과 백상아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두 부부 아니 모녀(?)는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백상아는 충격을 받아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미친 채 백화성을 뛰쳐나와 방황했다. 백선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무나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백상아를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이 준비되고 있을 줄이야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희대의 마녀 설국향이 미쳐버린 백상아를 데리고 사라진 것이었다. 백선결과 초몽양. 두 시대의 거인은 이렇게 해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모두 뜻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백화성주 백선결은 폐인이 되어 구룡연에 틀어박혀 버렸다. 초몽양 또한 누이동생의 불행을 가책하며 철혈부를 떠나 떠돌이 낭인이 된 채 천하를 유랑하게 된 것이었다. ③ "믿을 수가 없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초운빈으로부터 놀라운 비사를 들은 단목우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시대의 두 거인이 걸어온 엄청난 비극과 고통이 그의 가슴 속에 칼날처럼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두 양웅은 야망이라는 허울 때문에 스스로 어둠의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인륜과 도덕이라는 철쇄(鐵釗)를 차고 영원히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버린 신세가 된 셈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초운빈은 합장한 채 불호를 외우고 있었다. 뼈아픈 과거가 백팔번뇌로 밀려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단목우는 비록 자신의 탓은 아니었으나 공연히 수십 년 간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정양을 깨뜨리고만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는 힘겹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숙야풍은.......?" 초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상아의 아들이라네. 불행의 씨앗이지. 불행스런 과거가 그로 하여금 초씨도 백씨도 버리고 엉뚱한 성을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라네." 단목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가 그처럼 사악했던 것도 과거의 불행 때문이었군.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단목우는 한숨을 쉬었다. 숙야풍의 불행한 과거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가 저지른 만행이 묵과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숙야풍 한 사람으로 인해 천하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닌가. 초운빈은 불호를 마친 후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백팔번뇌를 치룬 비구니답지 않게 맑은 눈빛이었다. 어쩌면 고뇌가 그녀로 하여금 세상사를 초월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해주었네."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의 심기를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닐세. 이 모든 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이네. 언젠가는 풀어야할 숙명이기도 하고......." "노선배님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자넨 참으로 뛰어난 청년이로군." 단목우는 싱긋 웃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닐세. 일찍이 자네만한 영재를 본 적이 없네. 단 한 사람.... 그 분을 제외하고는." 단목우는 그녀가 말한 그분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 분은 아직도 백선결을 사랑하는구나.' 사랑. 그것은 참으로 묘한 감정이었다. 수십 년 동안이나 그토록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건만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언제 떠나려는가?" 초운빈의 질문에 단목우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떠날 것입니다." 초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 안의 염주를 굴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아! 불존의 가르침은 영원하구나. 돌고 도는 윤회(輪回)가 인생사라더니......." 단목우는 조용히 일어섰다. "노선배님의 청정(淸靜)을 어지럽힌 죄가 큰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아니네. 어차피 이 일은 결자해지의 원칙대로 매듭을 지은 자들이 풀어야 할 일이었네." 단목우는 돌아섰다. 그는 초운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④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란 말입니까?" 와룡선생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는 줄곧 암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목우가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자 내내 불안한 심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온 단목우는 그에게 엉뚱한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단목우는 한가롭게 앞서 걸으며 말했다. "동창의 금위대 가운데 서립이란 친구가 있소. 그에게 연락하여 동창의 고수들을 이끌고 철혈부로 오도록 연락하시오. 그들이라면 백화성과 맞서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오." 와룡선생은 곤혹스럽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황궁 무사들을 무림에 동원하는 일은 자칫......." "이미 황궁도 무림에 얽혀 들고 말았소." 단목우의 말에 와룡선생은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단목우는 고소를 머금었다. "백화성이 범해서는 안될 것을 범했소. 그들이 감히 천자위(天子位)를 노렸소. 이 일은 어차피 황궁이 나서게 되어 있소." 이어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 말에 와룡선생의 얼굴은 온통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로 엄청난 말을 단목우에게 들은 것이다. "음!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와룡선생은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꼬리를 흐트렸다. 단목우는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황궁에서도 이미 백화성을 반역도로 결정 내렸을 것이오." 와룡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단목우는 담담히 말했다. "백화성과의 일전에 최대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황궁과 연계할 생각이오." 와룡선생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사도 알겠지만 백화십팔계로 인해 각 대문파는 반감이 커지고 있소. 각파의 장문영부를 바치라는 포고에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반발을 하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표면적으로 반감이 드러나게 될 것이오. 와룡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그도 이미 정보를 통해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황궁에서 백화성을 반역도로 선포하게 되면 상황은 빠르게 반전될 것이오. 이제껏 백화성에 충성을 다했던 무리들도 역사에 남을 반역도가 되기는 싫을 테니까." 와룡선생은 절로 탄성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렇군요." 그는 두 눈에 열기를 띄며 말했다. "황궁에서 포고령을 내린다면 백화성은 고립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백화성의 힘은 반감될 것이며 우리 쪽이 크게 유리해질 것입니다." 단목우의 계획이 생각할수록 좋은 듯 와룡선생은 입가에 미소마져 띄우고 있었다.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서두르지 마시오."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와룡선생은 그의 뜻을 알 수 없어 멈칫했다. 단목우는 자신이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말했다. "그보다 우선 세 사람에게 서신을 보내시오. 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삼일 이내 보내져야 하오." 와룡선생은 의혹을 떠올렸다. "세 사람이라면......?" "첫째, 비상맹의 사자왕에게 보내시오." 비상맹이라면 과거 단목우가 한 번 도움을 받았던 수적의 무리였다. "둘째는 천축의 만금노(萬金奴)에게 보내시오. 그에게 서신을 받는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철혈부로 오도록 조처하시오." "......!" "셋째는 장백파(長白派)로 서신을 보내시오. 그들 역시 철혈부로 오도록 조치하시오." 와룡선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와룡선생도 단목우가 거론했던 세 인물이나 세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철혈부의 정보기관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금노. 그는 천하제일의 갑부이자 상인이었다. 그는 한때 백화성을 굶주리게 만든 적이 있었다. 통천신 범각. 그는 황하 일대를 주름잡던 수적 비상맹의 수왕(水王)으로 백화성의 비호를 받는 세력들에 의해 삼문협으로 밀려났으나 세력은 여전했다. 그가 백화성의 선단을 화약으로 괴멸시킨 것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였다. 화화공자(花花公子) 송욱. 여자를 후리고 유혹하는 데는 천하제일이라는 이름난 채화음적이었다. 그가 백화성에 타격을 준 것은 장백파의 장백일미(長白一美)를 유혹하여 결혼함으로써 백화성과 장백파 간의 동맹을 파기시켜 버린 일이었다. 와룡선생은 단목우가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단목우가 거론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정도무림의 하늘이라는 백화성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자 와룡선생의 뇌리에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부주님. 과거 그들이 백화성과 적대관계를 맺은 것도 부주님의 뜻이었습니까?" 단목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소. 덕분에 그들은 백화성의 눈을 피해 몸을 사리게 되었소." 와룡선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의 일은 강호를 진동케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바로 단목우의 작품이었다니.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그들을 부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단목우는 가볍게 웃었다. "군사는 낚시를 좋아하시오?"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웬 낚시 얘기를......?' 와룡선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낚시를 좋아했다. 한가할 때 호수에 낚시를 담근 채 명상을 즐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좋아합니다만...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하하! 그럼 고기를 낚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겠구료?" "그야... 훌륭한 미끼를 쓰는 일입니다." "맞소. 훌륭한 미끼가 있어야 대어를 낚을 수 있는 법이오. 미끼를 드린 후에는 느긋이 기다려야 하오. 충분히 여유를 두고 기다리다 보면 큰 고기가 절로 걸려드는 법이오." "......!" 와룡선생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바보는커녕 철혈부의 두뇌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이 정도쯤 되면 눈치를 못챌 리가 없었다. 문득 그는 탄성을 발하며 부르짖었다. "부주님께서 도모하시는 것은 포전인옥(抛塼引玉)이시군요!" 포전인옥. 이는 삼십육계(三十六計)의 하나로 적전계(敵戰計)에 속하는 것이었다. 즉, 벽돌을 던져 옥을 낚아 올리는 계략인 것이었다. 마침내 와룡선생은 단목우의 뜻을 읽었다. 단목우는 그들 삼인의 세력을 이용하여 백화성을 움직이도록 만들겠다는 깊은 뜻을 품고있는 것이었다. 와룡선생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주께서는 선공(先攻)을 생각하시는 것이다. 즉, 적의 의표를 찌르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하! 역시 와룡이오. 내 뜻을 모두 알고 계시는구료." 단목우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와룡선생은 탄복의 빛을 띈 채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두 사람은 한 명의 무사가 그들을 향해 신형을 날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와룡선생은 한 눈에 그가 정보 업무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단목우를 향히 포권했다. "부주님, 속하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단목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와룡선생은 달려오는 무사를 향해 걸어갔다. 무사는 그의 앞에 멈춰서며 부복했다. 단목우는 무사가 보고하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와룡선생의 안색이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와룡선생은 허탈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주님. 백화성에 잠입시킨 우리 무사들이 모조리 살해되었습니다. 육묵성 하나만이 살아 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백화성의 동정에 대해서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단목우는 흠칫했으나 곧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측 무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니 애석한 일이오. 그들의 가족에 대해 후사해야 할 것이오. 어차피 백화성의 의도는 완전히 드러난 셈이니 그들의 동정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오." "알겠습니다." 와룡선생은 고개를 숙였다. "육묵성을 만나본 후 다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알겠소." 단목우가 손을 젓자 와룡선생은 무사와 함께 사라졌다. 단목우는 산허리에서 웅장한 철혈부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철혈부의 정보원이 모조리 당했다면 영호광도 무사하지는 않겠군.' 그는 이미 백화성이 벌이고 있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대해서도 정보를 듣고 있었다. 숙야풍은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호광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만일 숙야풍이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영호광은 결코 그 마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단목우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말았다. '기다리게. 아직은 자네를 찾아갈 수 없는 몸이네. 내가 움직일 그 날까지만 자네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네.' 단목우는 내심 중얼거리며 어두워져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⑤ 단목우는 아침부터 방문객을 맞았다. 그는 와룡선생이었다. 와룡선생은 만면에 흥분한 기색을 드러낸 채 다소 흥분한 기색이었다. "정말 생각치 못했소이다. 백화성주 백선결은 거의 폐인이 되어 감금되어 있는 상태이며 실제 백화성을 움직이는 자는 숙야풍과 그를 추종하는 이십인이라 합니다." 태사의에 앉은 단목우는 담담한 안색이었다. 그는 숙야풍의 존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새삼 의아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십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와룡선생은 단목우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묵성의 전언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지혜가 뛰어난 자들이라 합니다. 그들은 금지구역인 흑루에서 지금까지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오직 숙야풍을 위해 지혜를 빌려주는 괴인들이라 합니다." ".......!" 단목우의 표정이 비로소 약간 달라졌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직 숙야풍을 위해 지혜를 제공한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인간의 능력은 어느 한 방면에 집중될 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십인의 괴인들이 흑루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오직 계략만 짜내고 있다면 그들의 계략은 실로 범인의 상식을 초월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숙야풍같은 위인이 이십인을 그렇게 존중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와룡선생의 다음 말은 더욱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이 흑루 밖으로 나오지 않는 데는 달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겉으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조치인 것 같으나 실은 그들이 하나같이 걸음을 걸을 수 없는 불구(不俱)자들이라는 겁니다." "......!" 단목우의 안색이 변했다. 와룡선생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는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이 오직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는 자들이라면 이십인이 함께 짜내는 계략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서둘러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단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소. 숙야풍은 과연 대단한 모사(謀士)요. 그는 자신이 뛰어난 모략가이면서도 평생 자신을 배신할 수 없는 자들을 동원하여 지혜를 빌리고 있으니 정녕 무서운 인물임이 틀림없소." 와룡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하, 비로소 숙야풍이란 자의 무서움을 알겠습니다." 단목우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와룡선생의 지혜도 결코 그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오." 와룡선생은 얼굴을 붉혔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부주님께 비한다면 저같은 것이야 달빛 아래 반딧불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하핫! 그 무슨 겸손의 말씀이시오?" 문득 그의 눈이 게스름하게 좁혀졌다. "어떻습니까? 부주. 속하는 이 사실을 무림에 공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단목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사태에 대한 별다른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오. 그는 오래 전부터 실권을 흔들어 왔고 암중으로 백화성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었소." 와룡선생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성주의 이름을 빌어 명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아직도 백화성의 주인을 백선결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제문파들이 등을 돌릴 것 입니다." 그 말에 단목우는 고소를 떠올렸다. "군사, 잊은 모양이구려." "......?" "지금의 백화성은 사리를 따라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만사를 무력(武力)으로 밀어부치고 있소.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감히 백화성에 등을 돌릴 수 있단 말이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반기를 드는 문파가 당장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오." "그렇지만......." "비록 울분을 지니고 있다해도 각 문파들은 자신의 문파가 먼저 멸문하기를 결코 원치 않을 것이오.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사실이 밝혀진다해도 먼저 움직이려 들지 않을 것이오." 와룡선생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단목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단목우는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떠올렸다. "군사께서 지금부터 할 일이 있소." ".......?" "철혈부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하오. 그동안 본부는 너무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었소. 쟁기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게 마련이오. 장차 있을 환우일전에 대비하여 사기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다. 와룡선생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주의 혜안은 도무지 깊이를 알 수가 없을 정도다. 평생을 심계(心計)를 사용해온 나조차 부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니.......' 와룡선생은 탄복을 금치 못하는 눈으로 단목우를 바라보았다. 단목우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돌아섰다. "뒷일은 군사께 맡기겠소. 그럼." 단목우는 밖으로 나갔다. 와룡선생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25장 · 혈전(血戰) ① 호중도(湖中島). 호수 한가운데 자그마한 섬이 하나 있었다. 넓이가 이백 장이 겨우 될 정도의 섬은 양류(陽柳)를 비롯한 갖가지 꽃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양류로 둘러싸인 섬 중앙에는 하나의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안에서는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불세출의 기인인 신산과 초몽양이었다.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도원계의 신선을 방불케 했다. 비록 중원무림계는 폭풍전야 속에 들어 있었으나 그들 두 기인들의 안중에는 오직 흑백(黑白)의 판세만이 중요한 듯, 바둑판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호중도의 갈대밭도 온통 흰꽃으로 뒤덮여 있었고, 정자 주변에는 백양목이 훈풍에 이따금 긴 가지들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움직임이 없었다. 초몽양은 바둑판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면 신산은 한가롭게 고개를 돌려 창천을 관류하는 화사한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꽃을 완상하기도 했다. 일견하기에도 흑의 대마(大馬)가 몰살 직전이었다. 초몽양의 이마는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고, 이따금 눈꼬리가 춤추듯 경련하는 것을 보면 위기에 몰린 것이 분명했다. 딱. 마침내 초몽양은 돌을 던졌다. 그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 여덟 점이나 깔고도 안 되다니. 졌네." 백의 완벽한 불계승이었다.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마도의 패주, 만마태존 초몽양은 아주 무참한 표정이었다. 그는 못내 아쉬운 듯 바둑판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이미 기울어버린 국면을 만회할 길이 없었다. 신산은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섭섭해 하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바둑마저 진다면 대체 뭘 이기란 말인가?" "허헛! 글쎄, 애당초 나란 놈은 아무 것도 이기는 것이 없건만 이 놈의 바둑마저 지니 씁쓸하구먼." 그렇게 말하는 초몽양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지고 있었다. 신산은 그가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고 문득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무슨 소린가? 이번만은 자네가 승리했네." ".......?" 느닷없는 말에 초몽양은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신산은 흡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제법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더군. 벌써 철혈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는가? 기대 이상일세. 그렇지 않은가?" 초몽양은 그 말에 비로소 굳어졌던 안색을 폈다. "허허허! 이 죄많은 늙은이가 만년에 무슨 복인지 모르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흐믓함이 어리고 있었다. 신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기어이 일을 낼 셈인가 보이. 물론 백화성의 그 아이를 저지하기 위해서긴 하지만. 아무튼 전대의 은원은 그 아이의 손에서 해결을 볼 것 같네." "......." "어떤가? 가볼 셈인가?" "......." "가봐야 하네. 당사자들이 이 일을 회피한다면 대체 누가 해결한단 말인가?" "......." "허허허허! 결자해지라네." 여전히 초몽양은 대답없이 눈을 감고만 있었다. 문득 그윽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부상설이 다기를 받쳐들고 정자 위로 오르고 있었다. "무료하실까 해서 차를 끓여 왔어요." 부상설은 과거보다 더욱 아름다와진 느낌이었다. 봄이라서인가? 그녀는 크게 성숙한 느낌이었다. 신산은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아. 너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네? 어디를요?" "철혈부 말이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부상설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네! 다녀오겠어요! 당장요!" 그녀의 즉각적인 반응에 신산과 초몽양의 굳어졌던 마음은 금새 활짝 개이고 말았다. "으허허헛!" "껄껄껄!" 두 노인의 웃음이 이어졌다. 그 바람에 부상설은 내심을 완전히 들켜버려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② 한 번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은 조금만 불을 가해도 시뻘겋게 이글거리기 마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철혈부의 분위기는 빠른 속도로 끓기 시작했다. 억누르고 눌렀던 패도의 기질이 백화성과의 일전이 기정사실화되면서 크게 사기가 진작된 것이었다. 와룡선생은 철혈부의 고수들에게 머지않아 닥칠 백화성과의 일전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 지시가 떨어지자 철혈부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흥분했다. 그들은 녹슬었던 검을 닦고, 칼을 손질하며 때가 오기를 고대했다. 언제였던가? 백화성이 백주무림을 군림하는 동안 철혈부의 무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했다. 그들은 아무리 분노가 끓고 자존심이 상해도 시비를 피해야만 했다. 그 동안에 쌓인 감정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공석이었던 철혈부주가 새로운 젊은 주인으로 바뀌며 가일층 패기만만한 상태였다. 철혈각(鐵血閣). 와룡선생을 위시하여 철혈부의 수뇌들이 둘러앉아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실로 사십여 년 만에 하나의 힘으로 뭉친 철혈부였다. 따라서 이곳에 모인 인물들은 오랜 세월동안 백도에 억눌려온 한을 이번 기회에 시원하게 풀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우기 백화성이 백화십팔계를 통해 선언한 최종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천하무림 제파에게 장문신부를 바치는 기한을 설정해 둔 것이었다. 다가오는 유월 십육일이 바로 그 날이었다. 철혈부도 그 날 정사대전이 벌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시간을 살같이 지난다. 철혈부에는 연일 전서구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 전서구에는 백화성의 동태가 낱낱이 전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림 전체의 반응과 움직임도 빠짐없이 보고되고 있었다. 단목우는 그 모든 것을 와룡선생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했다. 그는 뒤켠으로 물러나 일체 공사에 관여치 않았다. - 제 이백십 번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