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 제2권 검궁인 저 차례 제11장·낙선재(落仙齋)에 숨겨진 비사(秘史) 제12장·운명적(運命的)인 재회(再會) 제13장·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무기(武器) 1 제14장·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무기(武器) 2 제15장·무림(武林)을 움직이는 실권자(實權者)들 제16장·권력이양(勸力移讓)의 이면사(裏面史) 제17장·각처에서 무르익는 전운(戰雲) 제18장·여인(女人)과 여마(女魔)의 차이 제19장·아름다운 명분(名分) 제11장 낙선재(落仙齋)에 숨겨진 비사(秘史) ① 소요된 기간만 해도 장장 칠주야(七晝夜), 그 동안에 탈태환골은 무려 열네 번이나 이루어졌다. 하루에 두 번씩, 정확히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 전신의 피부가 모조리 허물을 벗었으며 뼈 역시도 새로이 형성되었다. 유옥은 거의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굴 윤곽이나 몸매는 그대로 남아 있으되, 피부가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희고 윤기가 흐르게 되자 분위기가 싹 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전의 그가 잘 생긴 외관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메마르고 강팍해 보였다면 의식을 잃고 있는 지금의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더 없이 순수하고 맑아 보이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쩌적--! 시퍼런 번개가 암천을 가르더니 낙뢰가 절벽을 강타했다. 우르르르-- 콰아앙--! 그 바람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절벽은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놀랍게도 천둥번개와 절벽의 붕괴음조차 단숨에 눌러 버리는 일진의 장소성이 울려 나왔다. "우우우우우--!" 흡사 용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그 장소성은 실로 수구산 전역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 번뜩하고 한 가닥 인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 번 신형을 띄울 때마다 무려 이십여 장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가 사라진 곳에는 연이은 뇌음과 함께 사위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꽈르르릉-- 쏴아아아아--! 그의 흔적들을 모두 소멸시켜 버리려는 듯.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내 공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토록 급증해 있다니......!" 유옥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단지 자신이 기이한 액체를 복용하고 정신을 잃었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때문에 의식을 회복한 뒤로 처음에는 혼란을 겪기도 했다. 몸이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져 멋모르고 뛰어 올랐다가 허공으로 십여 장이나 떠오르자 질겁을 하고 도로 내려 왔던가? 이후로도 그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몇 번 씩이나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친 다음에야 그 변화들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가 있었다. 그가 얼마나 기뻐 했는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더구나 그 때는 이미 마록의 공격으로 인해 입었던 내상도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넘쳐 흘러 가히 태산이라도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지금 이 시각, 유옥은 새삼 자신을 돌아 보매 만감이 교차되어 콧등이 다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쏴아아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나 그는 오히려 시원함을 느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만물을 대낮처럼 환히 볼 수 있게 된 그에게는 천하의 그 무엇도 거칠 것이라곤 없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전면을 향해 가볍게 내질렀다. "사인교(死引橋)!" 쾅--! 오 장 밖에 있던 거목이 굉음과 함께 형체도 없이 날아갔다. "인혼멸(引魂滅)!" 낭랑한 외침과 동시에 그의 몸이 핑그르르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기 위해 용트림이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콰콰콰쾅--! 칠, 팔 장 밖의 집채만한 바위가 바수어지는가 싶자 곧장 먼지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천파황(天破荒)--!" 현음구식(玄陰九式)의 중삼식(中三式)의 마지막 절예다. 고오오오오-- 천지가 갑자기 암흑에 잠겼다. 그리고 무(無)....... 놀랍게도 그 일대의 모든 것이 무로 화하고 말았다. 눈 앞에 있던 사물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스스슷! 유옥이라는 한 존재만이 환상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앞서도 말했듯 과거와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관옥같은 얼굴도 그렇거니와 칠흑인 양 검은 두발이 어깨 너머로 휘날리며 더 없이 신비로운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유옥은 입가에 자못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현음신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음구식까지도 마음대로 펼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허공을 우러러 다짐하듯 부르짖었다. '지금부터는 지난 날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으리라. 과거의 유옥은 죽었다. 나는 새로 태어난 유옥이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한 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중화 항예, 후후... 천안사에서 검중검(劍中劍)과 도중도(刀中刀)를 만난다고 했지.' 유옥은 일순 자신의 내부로부터 호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들과 더불어 자웅을 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사이, 내리 퍼붓던 비는 조금씩 그쳐 가고 있었다. 그는 북경성 쪽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 쯤을 가자 그의 앞에 한 채의 다 쓰러져가는 폐가(廢家)가 나타났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서서 폐가와 자신의 차림새를 번갈아 쳐다 보더니 쓴 웃음을 지었다. '닮았군, 저 집과 나의 행색이 말이다. 후후후... 어쨌든 저 곳으로 들어가서 옷을 말려 입기라도 해야겠다.' 그는 곧바로 폐가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로 된 문은 부식되고 뒤틀어져 있으나 마나였는데 그 꼴에도 현판은 붙어 있었다. 그것이라 해서 온전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씌여진 글씨만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낙(落), 선(仙)... 재(齋)......?' 한 자씩 글씨를 읽어가던 유옥의 안색이 일변했다. '오오, 맙소사! 바로 여기였구나.'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지척이 천리라더니 낙선재를 이렇듯 가까이 두고서 그토록 찾아 헤맸었군." 유옥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낙선재는 한 마디로 사람 살 곳이 못되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사람 키 만큼이나 자라 있었으며 지붕이고 서까래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무너졌거나 곰팡이가 그득하게 피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유옥으로서도 질려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곳에 무엇이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리 들은 말이 있는지라 되돌아 나가지 않고 인내심을 발휘해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의외로 폐가는 꽤 넓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그 규모나 성세가 만만치 않던 곳인 듯했다. "안에 아무도 없소?" 유옥은 음성을 높여 사람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 오지 않았다. '역시 빈 집이군. 하긴 이 곳에서 누군들 살 수 있겠는가?' 그는 툴툴 웃으며 대청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던 썩은 나무조각들을 모아 불을 지폈다. 이윽고 유옥은 입고 있던 옷, 아니 걸레조각이나 다름 없는 누더기를 벗더니 말리기 위해 불기운을 쏘이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그의 머리는 쉬지 않고 생각을 거듭했다. '분명 무림왕은 이 곳에서 황노인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어찌 된 셈인가? 나를 용백검으로 알고 한 소리이니 절대 빈 말은 아닐텐데.......' 타다닥... 타닥......! 모닥불은 연신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유옥은 옷이 거의 마르자 다시 몸에 걸쳤다. 그는 내의 안쪽에 품고 있던 반 조각의 녹옥문장을 꺼내 보았다. '쯧! 이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군.' 허탈한 읊조림이 그의 심중에서 일었다. 그것은 일종의 미련 때문이었다. 그는 진즉부터 무림왕 용화천에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끈끈한 그 무엇인가를 느꼈고 그것을 털어 버려야 된다고 생각하자 웬지 기분이 착잡해졌던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인연이 그 뿐인 것을.......' 그가 이처럼 포기로써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쿨룩, 쿨룩......." 폐가의 후면으로부터 희미한 기침소리가 들려와 유옥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그는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있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② "쿨룩! 쿨룩......!" 한 노인. 그는 너무도 늙어 나이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신에는 검은 상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짓물러서 반쯤 밖에 떠지지 않은 듯한 눈에는 눈꼽이 잔뜩 끼어 있었다. 노인은 연방 기침을 해 대면서도 제단(祭壇)에 향을 피우고 있었다. 그 제단 위에는 한 쌍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광천만승대장군(廣天萬勝大將軍) 용공승후지신위(龍公昇侯之神位).> <숭경대부인(嵩慶大婦人) 남씨가령지신위(南氏佳鈴之神位).> 그는 기침이 멎자 나직히 중얼거렸다. "주인마님,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대공자께서 반드시 주인마님의 억울한 한을 풀어 드릴 것입니다." 노인의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곳은 장원의 후면에 위치한 지하석실이었다. 별원의 대청 밑으로 통해 있어 극히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다. 유옥은 석실의 입구에서 몸을 숨긴 채 노인이 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 보고 있었다. '만일 내 청력이 전에 비해 월등하게 진보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이 노인을 발견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노인이 무림왕 용화천이 말한 황노인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옥은 제단 위에 모셔져 있는 신위를 보고는 내심 매우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몰랐었군. 무림왕의 선부(先父)가 무관(武官), 그것도 대장군이었다니. 항간에는 고아로 알려졌을 뿐이거늘.......' 그것은 유옥으로서는 하나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용화천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던 그였으므로.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이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 노인은 침착을 되찾았는지 사뭇 엄숙하고도 비장한 표정이 되어 몇 장의 지전(紙錢)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유옥은 적지아니 감명을 받았다. '저렇게 충성스러운 종복(從僕)도 흔치는 않으리라. 이미 죽어버린 상전을 변함없이 진심으로 모시고 있구나.' 그는 노인에게 들리도록 기척을 냈다. "흐음!" 소리를 들었는지 노인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요?" "소생, 볼 일이 있어 왔소이다." 유옥이 앞으로 나서자 노인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짓무른 눈을 몇 번이나 꿈벅거렸다. "뉘신지......?" 유옥은 대답 대신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노인장께서 황노인이시오?" "그렇소만?" 유옥은 품 속에서 반 조각의 녹옥문장을 꺼내 보였다. "혹시 이것을 알아 보시겠소이까?" 노인의 전신에서 무섭도록 경련이 일어났다. "그... 그럼......?" 노인은 빼앗듯이 녹옥문장을 가로채더니 자신의 면전으로 바짝 가져가 살펴 보았다. "오오!" 그는 탄성을 발하며 자신의 품 속에서 또 한 개의 반쪽 짜리 녹옥문장을 꺼냈다. 그리고 맞추어 본즉 두 조각의 녹옥문장은 원래 하나였던 듯 딱 들어 맞았다. "정녕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요......?" 노인은 부르짖더니 대번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소공자(少公子)!" '소공자라면 용백검......?' 유옥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동시에 줄곧 가깝게 느껴지던 용화천이 그의 의식 속에서 갑자기 타인으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정녕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왕 용화천의 아들은 역시 유옥이 아니라 용백검이었으므로. 참담해져 있는 그에게 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공자(大公子)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당신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향후로 언제든지 이 기린 문장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용가의 후예로 알라고. 당대가 아니라 그 분 소공자의 대(代)에 비로소 모든 일이 성취될 것이라며......." 그 말에 유옥은 오히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으음, 납득이 가지 않는 소리로군. 이 노인의 말대로라면 무림왕이 용백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자 노인이 물었다. "대공자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유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버님의 행방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오." 노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대공자께서는 소인에게도 항상 거취를 밝히시는 법이 없으셨으니까요." 이번에는 유옥이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이 곳에 자주 오셨소?" "일 년에 한 번 씩은 꼭 오셨습지요. 대장군의 제일(祭日)은 해마다 빠짐없이 챙기셨습니다." "나에 관해서는 무엇을 더 말씀하셨소?" "거의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본시 무척이나 과묵하신 분이었습죠. 소인은 그저 그 분이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렸고 그 외에는 대장군 마님의 신위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유옥은 무거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혹 아버님께서 내게 남기신 것은 없었소?"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있습니다. 이 늙은이에게 소공자께서 오시면 필히 보여 드리라고 하신 것이 있습지요." 그는 말을 마치자 한 쪽 벽을 향해 걸어갔다. 곁에서 유옥은 묵묵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노인은 벽에 걸린 한 폭의 산수도를 걷어 내더니 거꾸로 하여 다시 걸었다. 그러자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그르르릉......! 기이한 음향과 함께 맞은 편의 벽면이 좌우로 갈라졌다. '아!' 유옥은 내심 탄성을 발했다. 그의 눈에 벽 속에 있는 또 다른 석실이 들어 왔던 것이다. 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공자께서 혼자 들어 가시라고 하셨습지요." "알겠소." 아무도 없는 빈 석실. 유옥은 그 안에 들어서자 엄숙한 분위기로 인해 다소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석실의 벽에 걸려 있는 다섯 폭 짜리 초상화였다. '아마도 용가(龍家)의 선조 중 한 분이겠지? 혹시 용백검에게 조부되시는 그 분인지도 모르겠군.' 그림 속 인물의 인상은 매우 특이했다. 무골(武骨)의 굳건함과 더불어 기이하게도 그 반대인 섬세하고 온화한 기질이 엿보였다. 소위 양면성(兩面性)이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그 노장군(老將軍)의 초상으로 인해 유옥의 심경은 종전보다 더욱 불편해졌다. 그리하여 시선을 옮겨 초상화 아래 쪽을 보니 거기에는 검은 자단목 탁자가 놓여 있었다. 유옥의 눈은 곧바로 그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두 권의 책자로 쏠렸다. 사실 그 밖에 석실 안에는 관심을 끌만한 무엇도 없었다. 대체로 어둡고 썰렁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유옥은 천천히 탁자로 다가가 책자를 살펴 보았다. 한 권은 얇았고 다른 한 권은 두꺼웠는데 공통점이라면 양쪽이 다 표지에 아무런 제목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먼저 얇은 책을 집어 들었다. 펼쳐 본즉 그것은 일기(日記)였다. 바로 무림왕 용화천이 직접 쓴. '아! 이럴 수가.......' 극도의 경악과 충격이 일기를 읽어 내려가는 유옥의 소감이었다. 과연 어떤 내용이 씌어져 있기에 그러는 것인지? 개중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③ <만력(萬歷) 이십팔년 X월 X일. 올해로 내가 무림성주가 된지도 십육 년이 되었다. 요즘 들어 마음이 심히 답답하고 괴롭다. 한 때 야망에 부풀었던 지난 날의 일들도 모두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특히 타계하신 다섯 사부(師父)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깨게 되며 잠자리가 번번이 식은 땀으로 흠뻑 젖곤 한다. 아아! 욕망이란 한낱 내 청춘을 악마에게 팔아버리게 한 덫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 이전에는 무슨 짓을 하든 명분이나마 뚜렷했건만 결과적으로 과욕이 앙화를 부른 셈이다. 선친께서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쫓겨나신 채 자결을 하셨을 때, 나는 오직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지 나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친의 한을 끝내 풀어 드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원수를 갚으러 나섰을 때는 이미 흉수들도 선친께서 그러했듯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지옥에 떨어진 뒤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의 허탈함이 어쩌면 나로 하여금 무림으로 눈을 돌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나는 천하제일인이 되어 보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으니까. 당시의 내 어리석은 계산 상으로는 군림(君臨)이 곧 회한과 고뇌에서의 완전한 일탈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렇듯 과거를 반추하는 것도 덧없다. 피곤할 뿐....... 그만 쉬어야겠다.> < ...... X월 X일 지난 밤, 또 나의 다섯 사부께서 현몽(現夢)하셨다. 부디 오늘 밤만이라도 그 분들이 유계(幽界)에서나마 편히 보내시기를 기원한다. 그렇듯 자꾸만 피흘리는 모습으로 이 제자를 찾으시니 당신들께서 생전에 내게 베푸신 노고와 함께 더욱 더 죄의식이 사무칠 따름이다. 어쩌겠는가? 야심에 눈이 뒤집혀 인륜을 배반하고 그 분들을 내 손으로 시해했으니 이쯤의 형벌은 의당 감수해야 하리라. 무림성의 성주라는 허울이 저주스럽기만 하다.> < ...... X월 X일 죄과는 어느 때고 반드시 치르는 것인가? 근자에는 가끔식 뼈저린 고독감을 느끼건만 도시 부를 이가 곁에 없다. 내게는 애초부터 가족이란 것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이 또한 업보이니 내 감히 누굴 원망하겠는가? 과거의 기억은 지워지기는 커녕 나날이 선명해져 나를 고통으로 몰고 간다. 성급하게 무림성주의 위(位)를 노려 단리성주(壇里城主)를 암살한 것도 역시 두고두고 괴로운 기억이다. 왜 그랬던지, 하필 향매(香妹)와의 결혼식 날 축하주 속에 절혼극독(絶魂極毒)을 타 일을 저질렀으니 당시의 내 간악함에는 스스로도 용서라는 어휘조차 차마 갖다붙일 수가 없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이라야 오늘 날의 이 애정 없는 결혼생활이 전부이니 무림성주가 되어 천하를 얻은들 기쁨이라곤 조금도 누릴 수가 없다. 아니, 가슴에 깊게 자리 잡은 비원(悲願)이 시시각각으로 나의 숨통을 조여온다. 이런 아비를 가진 백검(白劍)이 너무도 안쓰럽다. 그 아이에게 내가 이루었던 전부를 순차적으로 물려 줄 계획이었지만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다. 눈치로 보아 그 아이는 벌써 자신의 아비가 어떤 자인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결국 아들을 두려워하는 아비가 되었다.> 만력 이십팔 년이면 작년도로써 일기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씌여진 것이었다. 올해분은 없었다. 아마도 아직 만 일 년이 되지 않아 용화천이 그 뒤로는 이 곳에 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유옥은 그 일기로 인해 전신의 힘이 쭉 빠지고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용화천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분노 때문이었다. '무림왕 용화천! 이러고도 그는 인간을 자처했던가? 아무리 야망에 눈이 어두운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부를 시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인(丈人)인 전대의 무림성주까지 독살하다니......!' 그것은 누가 들어도 인세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끔찍한 범죄행위였다. 그는 비로소 성주의 부인인 천음선자가 왜 남편을 그토록 증오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단리목 성주의 죽음에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며, 용화천에게서 그 낌새를 알아 차렸던 것이다.' 유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껏 그가 용화천에 대해 품었던 호감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려는 몸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뒤로 그가 받게 된 충격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 ...... X월 X일 내 결심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아니, 과오를 청산하고 싶은 것은 단지 염원일 뿐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우선적으로 나는 전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죄를 짓게 된 애향령(艾香鈴)을 찾아가 진심으로 빌고자 한다. 이는 물론 용서를 바라서가 아니라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한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나는 설사 그녀가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들 거부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녀에게 진 빚은 어차피 갚을 수가 없다. 나는 그녀의 부친이자 나의 다섯 번째 사부였던 장천우사(掌天羽士) 애환령을 죽였고 그녀의 정(情)까지도 배신했다. 이런 나를 그녀는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을 테니까. 항령을 떠올리면 나는 자신이 극도로 혐오스러워져 견딜 수가 없다. 나도 최근에야 깨닫게 된 일이지만 내가 평생 동안 사랑했던 여인은 오직 그녀 뿐이었으니....... 오오! 하늘이여, 나를 부디 그녀의 손에 죽게 하기를.> "우우우......!" 일기를 들고 있던 유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더니 그는 곧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있을 수 없다! 이런 일은 도저히......!" 찢어져라 부릅떠진 그의 눈은 어느 덧 무서울 정도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쿠쿠쿠쿵......! 심장의 박동조차 뇌성벽력이 되어 유옥의 가슴을 마구 후려치고 있었다. 그는 급기야 미친 듯이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깡그리 무너져 내리거라, 세상이여! 무엇도 남김없이......! 차라리 그 혼돈의 암흑으로 되돌아가 버리란 말이다. 오오......!" 그가 이렇듯 몸부림치는 데는 그만치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④ 무림왕 용화천.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는 분명 한 편에서 타인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인 채 패륜의 악덕(惡德) 위에 생의 기반을 쌓아 올리려 했던 위인이었으므로. 아무튼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그의 출신과 생애를 객관적 시점에서, 또 좀 더 구체적으로 조명해 보면 이렇다. 용화천은 이른바 장군가(將軍家)의 후예로써 그의 부친은 광천만승대장군(廣天萬勝大將軍) 용승후(龍昇侯)였다. 용승후로 말하자면 당대 최고의 명장이자 변방에서는 일명 죽음의 신(神)으로 불리웠던 인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그가 존재하는 한 국경의 수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때문에 그의 아들인 용화천도 어려서부터 부친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랐다. 하지만 정작 수도(首都)인 북경에서는 해석이 달랐다. 용승후가 위명을 드날릴수록 점차로 그를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무리가 하나 둘씩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용승후가 이르게 된 지점은 환관(宦官)들의 눈밖에 나는 것이었는데 당시 명의 조정은 환관들의 천하인지라 그들의 비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더구나 성품이 곧은 대장군 용승후는 진즉부터 환관들의 치세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 타협이란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환관들의 모함으로 어이없게도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 변방에서의 공로가 참작이 되어 겨우 참수형만은 면했으나 관직을 박달 당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용승후는 환관들의 아첨과 횡포에 마냥 놀아나는 황제와 올바른 정치가 서지 않는 현실을 개탄한 나머지 황제에게 바치는 장문(長文)의 혈서를 남긴 채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충심(忠心)이 절절이 담긴 혈서는 끝내 황제에게 전달되지도 못했다. 환관의 무리들에 의해 그것은 안타깝게 중도에서 불살라졌으며 그 바람에 일세의 명장인 용승후의 비장한 죽음은 그만 덧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 장군가는 철저히 몰락했다. 가산은 당연히 몰수되었고 식솔들은 단지 생계 해결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용승후의 독자(獨子)인 용화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졸지에 신앙(信仰)이나 다름이 없었던 부친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모진 고생 가운데 모친마저 병마(病魔)에 빼앗기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로 인해 용화천은 단단히 결심을 하게 된다. 언제고 환관의 무리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명의 조정을 일신시켜 보겠다는. 하지만 복수의 칼을 갈며 그가 나이 이십에 이르렀을 때, 환관들은 새로운 황제인 신종(神宗) 만력제가 등극함으로써 조정의 중론에 의해 전부 제거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일명 철혈(鐵血)의 재상으로 불리웠던 장거정(張居正)의 정치가 황실의 기강을 바로 잡은데서 얻어진 결과였다. 이는 명의 백성으로써 의당 기뻐해야 될 일이었지만 용화천은 오히려 더할 수 없는 허탈감에 빠진다. 왜냐하면 세상이 평정됨으로써 그는 살아갈 목표와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관(官)에 투신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부친의 죽음을 통해 그는 정치라는 것 자체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 시기에 그가 눈을 돌린 신비의 세계가 강호무림(江湖武林)이었다. 그는 지난 날에 대한 한풀이로 무림계의 제일인자, 통칭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겠노라고 다짐한다. 용화천의 의지는 당시에도 헛된 망상만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가문은 대대로 명망있는 무가(武家)로써 그의 근골로 말하자면 타고난 무인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좌우간 그 때부터 용화천은 천하를 유랑하며 자신을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줄 만한 기인을 찾아 다녔는데 그가 만나게 된 첫 번째 사부는 이런 이름을 가진 인물이었다. 환천대공(換天大公) 백리무(百里霧). 한 마디로 이 사람은 풍진기인이었다. 백 년 전에 무림에서 은퇴한 바 있으나 그의 무공은 광고절금(廣古絶今)했다. 천하 각파의 무학에 두루 통달해 있어 모르는 것이라곤 없었다. 용화천은 환천대공의 곁에서 무학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무학을 익히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있어 그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상승의 무학에는 감히 도전해 볼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념을 모르는 그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다. 때마침 환천대공은 어디서 구했는지 한 뿌리의 만년삼왕(萬年蔘王)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세상사를 두루 굽어볼 줄 아는 이 노기인은 용화천의 야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함과 동시에 천하를 손에 쥐기 전에 먼저 인격도야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만년삼왕을 제자에게 내주지 않았고, 사부를 답답해 하고 경원시하던 용화천은 급기야 잠든 사부의 가슴에 칼을 꽂고 그것을 탈취하기에 이른다. 용화천은 만년삼왕을 복용하고 백 년의 공력을 얻었다. 그리고는 막바로 목적 달성을 위해 강호무림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자신의 무공 정도면 능히 천하를 제패하리라 믿었던 그는 크나큰 좌절을 겪게 된다. 강호는 생각보다 넓었고 용화천은 또 한 명의 기인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무공 수준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천기조옹(天機釣翁). 이 인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낚시꾼 노인일 뿐이었으나 고작 십초 만에 기세등등하던 용화천을 꺾었다. 이 때에 천기조옹은 낙심하고 있는 용화천을 제자로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자질에 반해서였다. 이로써 두 번째 사부를 모시게 된 용화천은 이후로 일 년 만에 천기조옹의 진전을 모두 익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무서운 현실과 직면해야 했다. 알고 본즉 천기조옹은 환천대공 백리무와 막역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동문(同文)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절친했고 또 다른 세 명의 기인들과 함께 이미 세간에서 해천오로(海天五老)라고 묶어서 불리우던 인물들이었다. 본시 죄악이란 대가를 지불하고자 드러내놓고 참회하지 않는 한 무마를 위해 더 큰 죄악으로 비화되기 마련이다. 용화천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천기조옹에게 자신의 죄상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으며 그 끝에 제 이의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운기(運氣) 중이던 천기조옹을 암습하여 절명케 한 것이다. 그 이후로 다시 그는 멀쩡하게 세 명의 사부를 모셨는데....... 낙척서생(落拓書生) 우문한도(宇文寒道). 만검지왕(萬劍之王) 제령(帝嶺). 장천우사(掌天羽士) 애환령(艾幻靈). 이 세 사람은 모두 해천오로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살아 있는 무림 최후의 기인들로써 용화천은 그들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고는 한 사람씩 차례로 제거했다. 이렇게 하여 용화천은 무공 방면의 완성을 보았다. 해천오로의 무공을 섭렵한 그에게는 천하를 다 뒤져도 적수가 없었다. 그 뒤로 그는 천하를 유랑하며 무수한 협행(俠行)을 하여 이름을 날렸고 이를 기화로 당대 무림성주의 관심을 끌게 되어 자연스럽게 무림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제 오대 무림성주 현음신군(玄陰神君) 단리목(壇里木)은 용화천을 무척이나 신임하고 총애하여 자신의 딸인 천음선자(天音仙子) 단리경(壇里瓊)과 결혼을 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결혼식 날에 단리목은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그렇게 되기까지 용화천이 암중으로 얼만큼 치밀한 계략을 썼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든 용화천은 단리목의 뒤를 이어 무림성주의 위(位)를 차지했다. 자신이 의도했던 바대로 무공으로든 지위로든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으로 부상되었던 것이다. 무림왕(武林王). 이 영예로운 칭호도 이 때에 함께 주어졌다. 이쯤 되니 더 이상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라곤 없었다. 하시라도 천하를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취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전부를 얻은 그는 또한 전부를 잃었다. 그는 우선 아내인 천음선자를 전혀 마음에 둘 수가 없었는데 장인을 죽였으니 이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었다. 아들 역시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과거지사를 알게 되면 용백검이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늘상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아닌 모든 사람을 불신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더구나 세월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무림왕 용화천은 나날이 고독해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인가 그에게 한 통의 서찰이 날아 들었다. 그 서찰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한 여인에게서 온 것으로써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애향령. 그녀는 다섯 번째 사부인 장천우사 애환령의 딸로써 용화천이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내버린 여인이었다. 그녀로부터 서찰을 받게 되자 용화천은 그 날로 엄청난 고통에 휩싸였다. 그는 이미 전날의 그가 아닌지라 그 서찰을 통해 지나간 인생을 되돌아 보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용화천은 지독한 번민을 거쳐 애향령을 직접 찾아가기로 작정한다. 즉 그녀에게 목숨을 맡길 결심으로 무림성을 나섰는데 이 때에 그는 용백검에게 전권을 일임한다. 그 이유는 그가 용백검에 대해서 낱낱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모친인 천음선자에 의해 은밀히 현음교의 후예로 키워지고 있다는 것도 비밀 정보망을 통해 벌써부터 모두 전해 듣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어쩌면 자신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지자 후사(後事)까지도 당부하고자 했던 것이다. 낙선재의 일기(日記) 건도 같은 맥락이었다. 무림의 정세를 손아귀에 움켜 쥐고 뒤흔들었던 만큼 경황 중에도 그는 최후의 사태에 대한 안배까지도 잊지 않았다. 이것이 무림왕 용화천의 일대기(一代記)이다.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사악한 인물일지도 모르나 일면으로는 가장 불행하기도 한 사내가 바로 그였다. "흐흐흐... 흐으으......." 유옥은 입에서 웃음인지 울부짖음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음향이 새어 나왔다. 그의 눈은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아들아, 부디 너만은 이 아비와 다르게 살아야 한다.> "흐으으......! 그나마 다행이구려. 이 추악한 일기들을 당신의 아들이 보게 되었으니 말이외다. 흐흐흐으......."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흐느낌과도 같은 유옥의 읊조림은 그보다 더 지독한 비탄을 담고 있었다. "알고나 계시오? 태어나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를 기피하고 거부해 오던 내 어머님의 함자가 애(艾)자, 향(香)자, 령(鈴)자 올씨다. 흐흐흐흐......." 약관에 이르도록 성씨(性氏)를 가지지 못한 유옥. 그는 다름이 아니라 용화천과 애향령 사이에 난 아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너무도 처절한 삶을 살아왔던. 그의 음성은 계속 툴툴 이어졌다. "어머님은 당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사악하시오. 흐흐흐...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지만 내 이제부터는 그 분을 혐오하지 않기로 했소. 왜 인줄 아시오? 당신이 그 분보다 백 배, 천 배, 더 혐오스러우니까." 유옥은 부친으로 밝혀진 상대에게 내내 당신이라는 호칭만을 썼다. 그로서는 도저히 용화천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현듯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매 유옥은 새삼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특히 모친의 그 무섭고 끔찍한 복수극은 어떤 결과들을 낳았던가? "흐으으으... 당신은 어찌 책임지시려오? 생사(生死)도 불분명한 당신의 또다른 아들 용백검을 말이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나의 아우......." 유옥은 거기에서 말을 그쳐야 했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기어이 의식을 잃고 말았으므로. 제12장 운명적(運命的)인 재회(再會) ① 유옥이 깨어났을 때는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그는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새로 접하게 된 모든 사실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부인하고 싶은들 그럴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마음에 들건 안들건 그는 무림왕 용화천과 복수만을 필생의 염원으로 삼아 온 애향령을 부모로 인정해야만 했다. '아! 정녕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내게는 어찌하여 이토록 가혹한 시련만이 끝없이 밀어 닥치는 것인가?' 유옥은 그 모든 것이 차라리 꿈이기를 소원했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한 가닥 탁한 노인의 음성이 전해져 왔다. "소공자님, 이것은 대공자께서 남기신 서찰입니다." '무슨 서찰을 또......!' 고개를 돌려 보니 황노인이 침상 옆으로 다가와 공손히 봉서를 받쳐 들고 서 있었다. 유옥은 말없이 봉서를 받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깐 동안 망설였다. 왜냐하면 그 서찰의 임자는 자신이 아니라 용백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옥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백검, 내 너에게는 끝까지 죄를 짓게 되는구나.'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봉서를 뜯어 보았다. <검아(劍兒). 아마도 지금쯤은 나의 일기들을 다 보았겠지. 네가 이 아비를 어찌 여길지도 대강 짐작이 간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다 털어 놓을 수 있어 홀가분한 기분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바가 있다. 그것은 네가 나를 아비로서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무림성의 성주로써 남기는 말만은 거부하지 말고 들어 달라는 것이다. 검아, 너는 내 아들이기 이전에 무림의 아들이다. 장 차 무림성은 물론 무림의 장래가 너의 양 어깨에 달려 있으니까. 당금 무림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듯 하나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늘상 보이지 않는 먹구름에 덮혀 있다. 더구나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혈우성풍(血雨成風)이 불어 닥칠지도 모르니 너는 필히 이를 막아야만 한다.> "후후후... 기막힌 충정이로군." 유옥은 조소를 흘리는 한편, 내심 중얼거렸다. '이 말은 무림성의 붕괴를 뜻하는 것인가?' 그는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무림은 그 동안 지나치리만큼 평온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현상이었을 뿐 나는 언제고 가공할 피바람이 몰아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것은 천축(天竺)의 마교(魔敎)인 소뢰음사(小雷音寺) 출신 마승(魔僧)들의 발호이다. 그들은 벌써부터 욕망궁(欲望宮)이라는 단체를 세우고 호시탐탐 재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이런 일이......?' 유옥의 안색이 일변했다. '나는 욕망궁이란 이름도 처음 듣거늘.......' 그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림왕 용화천이 인간적으로는 어떤 과오를 저질렀건 간에 무림성주로서의 직위에 충실했었다는 것만은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오십 년 전, 천축법왕(天竺法王) 적리휼금은 침공을 시도했다가 현음신군에 의해 패퇴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욕망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적리휼금은 그 곳에서 고작 서열 삼위에 불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림은 욕망궁의 놀음에 놀아난 셈이다. 그들은 우리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의 세력만을 보냈던 것이다.> 유옥은 경악해마지 않았다. '그럴 수가!' 그도 그 때의 일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당시 무림은 그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엄청난 희생자를 낸 바 있었다. 그러고도 욕망궁이라는 단체에 의해 그 일이 획책되었다는 것은 전 무림인들이 여태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나는 비록 한 때 야망에 눈이 뒤집혀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간이나 적어도 무림이 이족(異族)들의 발길에 유린되는 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용가가 대대로 변방을 수호해 온 장군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림성주가 된 이후로 나는 변방의 동태 파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변방 곳곳에 수하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특별히 훈련된 첩자들로써 나는 그들을 키우기 위해 동영의 인자단(忍者團)까지 불러 들였 다.> 유옥은 서찰을 읽어 나갈수록 놀라움이 가중되어 가히 충격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용화천이 무엇을 당부하고자 하는지 그 윤곽을 잡아갈 수 있었다. "당신은 정녕 나를 어렵게 만드시는구려. 더 이상은 비난할 수도, 저주할 수도 없으니......." 유옥의 얼굴에서는 실제로 비웃음이 싹 걷히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계속 서찰을 읽어 나갔다. <수하들이 파견된 지역은 모두 다섯 곳으로써 천축(天竺)과 대막(大漠), 북해(北海) 등의 북방삼역(北方三域)과 안남(安南), 남해(南海)의 남방이역(南方二域)이었다. 나는 오랜 계획과 준비 끝에 그들을 선발했고 십 년, 또는 이십 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각 지역에 심어 두었다. 그들은 이후로 꾸준히 연락을 전해 왔으며 그 결과로 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조짐은 확실시되었다. 북방 대초원의 유목민 집단, 즉 원(元)의 후예인 여진( 女眞)이 새롭게 준동하고 있다는 것도 그 정보들 중 하나이다.> 서찰의 내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대초원의 푸른 이리(靑狼)라 불리우는 몽고의 후예, 즉 여진의 준동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들의 움직임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흩어져 있다가 크게 하나로 뭉쳐지며 넓고 기름진 땅인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반면에 그들을 경계해야할 만력제(萬歷帝)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황음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고 그 바람에 황실의 기강은 다시 전날처럼 문란해지고 말았다. 명재상(名宰相)인 장거정조차 모함에 의해 숙청된 이후, 명의 국운(國運)은 이미 기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림마저 이족에게 유린 당해서는 절대 안된다. 여진이 통일되어 후금(後金)이 세워졌으되 당금 명조(明朝)는 무사안일에 빠져 있다. 따라서 나는 수수방관할 수가 없어 열 명의 첩자를 키워 변방의 무림에 침투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일명 흑막십호(黑幕十號)로 부른다. 그들과의 교신방법은.......> 서찰에는 이 외에 흑막일호(黑幕一號)에서부터 흑막십호(黑幕十號)까지의 신상명세 등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으음, 놀랍고도 철두철미한 안배로군. 이것은 남다른 직관이나 통찰력을 가지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옥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다. 부인하고자 하는 면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등이 커다란 갈등을 빚어 그의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② <결론적으로 천축에서는 욕망궁이 일로 봉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대막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된다. 더욱이 이들 중 대막의 경우는 어쩌면 전설의 혈사해(血死海)와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욕망궁과 혈사해가 중원으로의 진출을 시도한다면 그 결과는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다. 현재 중원 무림의 힘으로는 그들을 막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으음......!" 유옥의 입에서 침중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또한 중원 출신의 무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덧 그는 서찰에서 읽었던 한 마디를 입 속에서 되뇌이고 있었다. '그렇다, 말마따나 나는 무림의 아들.......' <현 시점에서 유일한 희망은 장춘도(長春島)라 할 수 있다. 역시 전설에 불과하지만 당세에서 찾아낼 수만 있다면 영생불사의 신인(神人)들이 능히 중원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왜냐하면 장춘도는 인세에서 사라진지 수백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유옥도 장춘도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안산의 괴노인이 혈사해, 불야성과 더불어 신비의 삼역으로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 속에서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럼 장춘도의 기인들에게나 기대를 걸어 보아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난국(亂局)에......?' 그는 실로 꿈같은 얘기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시지간 무력감이 그로 하여금 맥이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곳 낙선재에 해천오로의 무공을 남겨 놓았다. 그 분들의 무공은 중후함에 특징을 두고 있으며 각각 내공(內功)과 타격술(打擊術), 기문신산술(奇門神算術), 장법(掌法), 검법(劍法)에 있어 중원무학의 최고봉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특별히 너를 위해 그 분들의 무공을 속성으로 익히는 방법을 기술해 놓았다. 아마도 네 정도의 자질이라면 앞으로 일 년 이내에 십성의 수위까지 달할 것으로 본다. ......중략(中略)...... 네가 이 글을 읽을 때면 필경 무림성은 온전하지 못하리라. 물론 그것은 천무전과 군마전에 의해서이겠고. 나는 오래 전부터 그들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유옥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흐음, 놀랍구려. 무림성의 몰락을 예측하고 있었다니.......' 그는 내심 항의라도 하듯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제게는 끝내 일언반구(一言半句)의 말씀도 내비치지 않고 당신은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 자책 때문에 제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아십니까?' 서찰에는 그 부분에 대한 해명도 적혀 있었다. <그들의 음모는 미연에 방지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알면서도 묵과해 온데는 까닭이 있다. 주지했듯 대세(大勢)의 흐름으로 미루어 무림은 불원간 틀림없이 외침(外侵)에 의한 타격을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은 무림성에 집결해 있느니 각기 흩어져 힘을 비축하고 있는 편이 백 번 낫다.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멸망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 아비도 모처에 은밀하게 다른 세력을 구축해 놓은 바 있다. 금후로 네가 맡아 다스 려 줄 것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 곳은.......> "아아......!" 유옥은 자신도 모르게 긴 탄식을 불어냈다. 과연 그 자신이 미리 서두에 언급해 놓았듯 무림성주로써 용화천이 당부하는 바는 들을만 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모든 상황을 대비해 놓고 있었으며, 그 구도는 헛점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이런 그가 과거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의 전부를 아들에게 이양하려 한 것이다. 그것도 자청하여 호랑이굴(?)로 뛰어 들기 위해....... '당신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허공에 대고 묻는 유옥은 어느 새 원망은 스러지고 가슴이 쓰려와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유옥인지 용백검인지는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모름지기 피는 속일 수가 없다고 했거니와 유옥은 처음 무림왕 용화천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뇌리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 당시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닿아 오던 친밀감,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체는 바로 육친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살차기만 했던 모친으로 인해 그 방면에 익숙하지는 못했으나 유옥은 이후로도 절절했던 그 때의 감명을 떨치지 못해 줄곧 크게 번민해 왔다. 그리하여 무림왕 용화천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진 다음에도 유옥은 굳이 이 곳 낙선재를 찾아 왔고 오늘과 같은 날을 맞아 아들로써 본연의 모습인 그와 마침내 상면하게 되었다. 물론 용화천의 입장에서는 아직 유옥이라는 존재조차 까맣게 모른다. 만일 그가 안배해 놓았던 것들이 용백검이 아니라 유옥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유옥의 심중에는 차츰 모종의 결의가 굳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 가지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작금의 난세를 극복해 나갈 자, 그 누구인가?' 당연한 의문이었다. 용화천이 없는 무림은 대들보가 뽑혀져 나간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정말로 용화천을 대행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유옥은 짧게 부르짖은 후, 자긍심을 갖고자 입을 열었다. "황노인, 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소공자." 황노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이 보기엔 어떻소? 내가 그 분을 닮은 것 같소?" "대공자님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유옥의 굳은 얼굴에 비해 황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두 분께선 별로 닮지 않으셨습니다. 소공자께선 작고하신 대장군(大將軍)을 쏙 빼닮으셨습니다. 곁에서 있자니 노복은 마치 젊은 날의 장군님을 뵙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뜻밖이구려. 내가 조부님과 흡사하다니." "대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던가요?" 유옥은 쓰게 웃었다. "한 번도 사적인 말을 나눌 기회가 없었소." "으음, 그러셨군요." 황노인의 안색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유옥은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담담했다. "상관없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어찌 되었건 내가 용가(龍家)의 후예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 않소?" "그야 물론입지요." 정색을 짓는 황노인에게 유옥은 빙긋 웃어 보였다. "아마도 그 분께서 남기신 책들이 어디 더 있을 것이오. 내게 그것들을 좀 가져다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소공자님." 황노인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유옥은 아무 생각도 없는 듯 구부정한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시선을 떼었다. '고맙소, 황노인. 당신의 오랜 충정이 지금에는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의 대답을 들려 주었구려.' 유옥은 은은히 울려오는 가슴의 진동을 느끼는 한편, 입가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뇌리에는 어느 틈엔지 한 괴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어르신.......' 그가 부르는 인물은 바로 안산에서 만난 괴노인이었다. - 녀석아, 자고로 세상사란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는 법이다. 향후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웃음을 잃지 마라. 네 놈의 얼굴에는 살(煞)이 끼어도 한참 끼었어. 그 살을 풀어 버리는데는 그저 웃음이 약이니라. 유옥은 실제로 노인을 대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맞습니다, 어르신. 후후후.......' 그는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옥, 무조건 기뻐해라. 너는 생애 최초로 성을 갖게 되었다.어머님께서 아무리 부정을 하려 들어도 금후로는 남들처럼 성명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느니, 너는 용류옥(龍柳玉)이다.' 그것은 용인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그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존재를 천명(闡明)하고 나서는 순간이었다. ③ 연운루(燕雲樓), 북경 내에서도 제법 크다고 볼 수 있는 주루이다. 그 곳의 이층, 창가에 면한 자리에서 한 명의 백삼청년이 자작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용모도 빼어났지만 투명해 보일 정도로 흰 피부가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용류옥(龍柳玉).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낙선재에서 운명의 한 부분을 되찾은 그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공청석유(孔淸石乳)의 복용으로 인해 그는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내공이 증진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그는 천상천하제일신복이라는 노인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이후로 보답코자 근역을 열심히 뒤졌으나 그 노인의 모습은 끝내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가 연운루에 든 것은 강호정세가 궁금해서였다. '강호의 소식을 듣는데는 주루가 제격이라던데.......' 용류옥은 아까부터 줄곧 손님들의 대화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루 안에는 장사꾼 등의 일반인으로 보이는 몇몇의 인물들이 담소하며 술이나 음식을 들고 있을 뿐 무림인들의 모습은 대체로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용류옥은 일단 목적했던 바를 포기하고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한 가닥 음성이 문득 그의 청각을 자극시킨 것은 그 때였다. "자네, 소식 들었나?" 다른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무슨 소식?"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아, 얼마 전에 의검맹에서 무사들을 초빙한다고 했다지 않는가 말이네." 용류옥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약간 돌려 보았다. 그러자 때마침 무림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장한들이 막 자리에 앉으려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옳다꾸나 싶어 술을 마시면서도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의검맹은 최근 중원팔대세가를 규합하더니 그 때부터 놀라우리만치 야심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네." 말하는 그 자는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정상이 아닌 것은 의검맹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금검대협(金劍大俠)이 아니라는 점일세." 왼쪽 뺨에 점이 찍혀 있는 중년인이 놀라서 물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후후... 자네 협중협(俠中俠)이라는 이름은 들어 봤겠지?" "아! 의검맹의 총순검(總巡檢)을 말하는 것인가?" "맞았네. 후후... 사실상 협중협이 그 곳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지. 이번에 의검맹에서 무사들을 모집하는 것도 바로 그가 시행하는 일이라네." 점박이 장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안되는군. 어떻게 금검대협을 제껴 놓고 그렇게 강한 입김을 행사할 수가 있지?" "쯧, 자넨 아예 귓구멍을 막고 사는 모양이군. 협중협이 누군지를 안다면 아마도 그런 말은 못할 걸세." "누군데......?" 콧수염 장한은 클클 웃었다. "자네, 중원제일부호가 누군지는 아나?" 점박이 장한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렴 그 정도야 나도 알지. 황금장(黃金莊)의 장주인 숙야빈(叔夜賓)이란 인물이 아닌가?" "클클... 그가 협중협일세." 점박이 장한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그럼......?" "그래, 협중협이란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몰라도 약관 의 나이에 천하제일의 부호 소리를 듣던 그가 무림마저 몽땅 금전으로 장악하려 한단 말일세." "흐음!" 그 때까지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류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숙야빈이라는 자가 의검맹을......?' 두 장한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숙야빈은 뛰어난 지략으로 팔대세가 가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의검맹의 무사를 초빙하는 일에도 사재(私財)를 털어 은자 일천만 냥이나 희사했네. 이 일은 근자에 들어 무림 최고의 화젯거리로 떠올랐지." "으음, 대단하군. 일천만 냥이면 결코 장난이 아니야." 놀란 나머지 혀를 내두르는 점박이 장한에게 콧수염이 달린 장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게 내가 이렇듯 열심히 떠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등급에 따라 무사들에게 일일이 은자를 지불하겠다고 했네. 계약 형식으로 매년 일정 금액을 내겠다는 것이야." 점박이 장한이 구미가 당기는 듯 물었다. "선발은 언제 하지?" "클클... 자네도 관심 가질 줄 알았네. 내 자네를 만나자고 한 것도 실은 그 일 때문이었네. 요즘 같이 어수선한 때에는 어디라도 소속되어 있는 편이 유리하거든." "돈도 벌고?" "맞아. 크크......." 두 사람은 죽이 맞아 히히덕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음성을 낮추어 무엇인가 한참을 더 속닥였다. 그 내용인즉 강호무림의 현 정세로써, 그들은 무림성의 붕괴와 그에 따른 변화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당금 무림은 각개 각파로 갈라져 있어 이 상태라면 누구라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미구에 불어닥칠 혈풍의 조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장한의 밀담은 용류옥의 귀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는 그의 청력이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급증해 있는 덕분이었다. 그는 침중한 기색이 되어 내심 중얼거렸다. '과연 아버님의 예상대로 무림은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당분간은 세력 확장을 위해 저마다 기를 쓰겠지. 정말 이대로 두고 지켜보기만 해도 좋은지......? 현재로서는 의검맹과 군마회가 가장 세력이 크나 제 삼의 세력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거늘.' 그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알아 보고자 했던 정보를 얻었으니 더 이상 주루에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다. 폭풍이라야 겨우 태동 중이고, 건드려 보았자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용류옥은 잠룡(潛龍)으로써 당분간 은신하기로 작정하고는 기 억 속에 묻어 두었던 한 미녀의 얼굴을 재삼 떠올렸다. '화중화 항예, 예정대로 천안사(天安寺)에서 검중검과 도중도를 만났을까? 날짜는 벌써 지나 버렸는데.......' 용류옥은 항예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꺼림찍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선 그녀를 만났던 날에 자신이 보였던 행동이 영 바보 같이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후후... 확실히 그 때에 나는 얼치기처럼 굴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짓는 한편, 몹시도 무거운 기색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용류옥은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화중화 항예가 보여 준 매력이 순수한 미(美),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무서운 함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미공(媚功)을 쓰고 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장차 강호에는 걷잡지 못할 파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과거에 비해 그는 무공 증진에 힘입어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나 추리력까지도 한층 향상되어 있었다. 하긴 이전에도 그는 항예의 미공에 끝까지 넘어가지 않았지만. 실상 자라온 환경 탓에 특이한 사고구조를 지니게 된 그는 외부적인 현상에 미혹될 만큼 단순해질 수가 없기도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결코 정도(正道)의 길을 걷는 여인이 아니다. 자신을 제외한 신주칠기성(新州七奇星)을 모두 만난다고 했는데, 과연 그녀의 속셈은 무엇일까? 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고.......' 주루의 문을 막 나서려는 그에게 점소이가 다가와 무엇인가를 전해 주었다. "웬 노인이 이것을 공자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는뎁쇼?" "노인......?" 용류옥은 아연해져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뛰어난 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사이 주루 안에서 노인이라고는 코빼기도 못보았던 것이다. '쯧, 앞으로는 주변 상황에도 신경을 좀 써야겠군.' 그가 점소이에게 건네 받은 것은 한 장의 쪽지였다. 펼쳐 보니 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재수 좋은 놈! 서하구(西霞口)에서 기다리겠다. 신복(神卜).> '아! 어르신.' 용류옥의 얼굴이 대번에 활짝 펴졌다. 그는 단지 짤막한 문구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인지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심중을 차지하고 있던 우울함이 싹 걷히는 것을 느끼며 은자 한 덩이를 던지고는 바삐 주루를 나섰다. ④ 서하구. 이 곳은 북경성에서 서쪽으로 이십여리쯤 떨어져 있는 작은 포구(浦口)였다. 언제부터인가 근역에 사는 주민들의 어선이 모여 들어 자체적으로 선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곳 서하구에 면해 있는 강은 폭이 넓지는 않았으나 그에 반해 수심은 깊은 편이었다. 때문에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주민들의 생계에 절대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낮으막한 언덕. 그 아랫 부분에서 한 노인이 흐르는 강물 위에 한가롭게 낚시대를 드리운 채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물 위에 떠 있는 찌의 모습이 더욱 더 평화로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스윽! 찌가 움직였다. 그러나 노인은 낚싯대를 잡아 챌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아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문득 낭랑한 웃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하하하.... 아주 그럴 듯 하군요. 어르신께서는 지금 세월을 낚는다는 강태공의 흉내를 내고 계신 모양인데." 노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인석아, 남이야 고기를 낚든 세월을 낚든 무슨 상관이냐?" 노인의 등 뒤로 한 가닥 백영(白影)이 드리워지더니 서서히 본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용류옥이었다. "그렇다면 어르신께서는 어째서 타인의 운명에 참견을 하셨습니까? 어찌 되든 상관이 없으셨을텐데요." "빌어먹을! 그 동안 말재간까지 늘었구나." 노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상대를 응시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건 원래부터 제 특기였지요." 자칭 천상천하제일신복(天上天下第一神卜)과 용류옥의 재회(再會)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신복노인은 한 동안 용류옥의 신태를 유심히 살펴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흘흘... 역시 네 놈을 고르기를 잘 했어. 아무래도 재수가 좋은 놈이 여러 방면으로 쓸모가 있는 법이거든?" 용류옥은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하면, 제가 어르신의 말씀을 듣다 굶어 죽을 뻔한 것은 어쩝니까?" "고이얀!" 노인은 눈을 한 번 부라리더니 흘흘 웃었다. "시치미 떼지 마라, 이 놈아. 노부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네 놈은 지금쯤 아마 새까맣게 타 버렸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이 오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충분히 뜻이 통하고 있었다. 용류옥이 노인의 말에 따라 사흘간 굶주림과 싸운 것은 희세의 영약을 복용하기 위해서였고 그 결과로 오늘 날과 같은 무공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용류옥은 농담 끝에 노인을 향해 정중하게 읍했다. "정말 선배님께 뭐라고 감사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일을 기화로 새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복노인은 손을 휘휘 저었다. "집어 지워라! 누가 네 놈에게 그 따위 값싼 인사나 받자고 인세지보를 취하게 한 줄 아느냐?" "그럼 지금부터 빚을 받아내시겠군요?" "흘흘... 물론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 용류옥은 빙긋 웃으며 노인의 곁에 앉았다. "제가 어찌 갚으면 되겠습니까?" 말하는 그의 태도는 어떤 요청이라도 쾌히 수락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결코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복노인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네 놈이 그 못생긴 추괴를 만난 것은 언제였느냐?" 용류옥은 사뭇 의아하여 반문했다. "추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놈 봐라? 발뺌을 한다고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그게... 발뺌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인은 용류옥이 여전히 의문을 나타내는 것을 보자 제 풀에 질려 버린 듯 혼잣말로 읊조렸다. "쳇! 그 망할 놈의 추괴가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었나 보군.어쩌자고 아무 말도 안했단 말인가?" 용류옥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신복노인은 땅바닥에 침을 탁 뱉더니 중얼거렸다. "치사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저 혼자 멋있는 척은 다 했군." 노인은 주섬주섬 낚싯대를 걷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와라." "어디로......?" 용류옥이 뭐라 더 묻고 싶었으나 노인이 앞장 서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강물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때 아니게 작은 나룻배 하나를 빌려 함께 타고 있는 것이었다. 용류옥은 점점 더 짙은 의혹에 빠져 들었다. '기막히군. 졸지에 선유(船遊)라니.......' 그에 반해 신복노인은 답답할 정도로 계속하여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따져 묻자니 웬지 심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로 보아 도저히 그럴 상황은 아닌 듯 했다. 그 기이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덧 황혼이 지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강상(江上)에 진한 홍채를 드리우고 있는 광경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용류옥은 잠시 넋을 잃은 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아! 정말 아름답구나.' 그는 그런 위인이었다. 척박한 삶 가운데서도 늘상 본연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듯 여하한 상황에서건 아름다움이 주는 감명에는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신복노인의 음성이 그의 감상을 무참히 깨뜨렸다. "녀석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 네......." 용류옥은 상념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오자 은은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노인의 첫 물음이었으되, 듣고 보니 두 사람은 여태껏 상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용류옥이라고 합니다." "용류옥?" 신복노인은 다시 물었다. "그럼 네 놈의 아비는 누구냐?" 용류옥은 망설이다가 종전에 비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고아였습니다." "흐음!" 신복노인의 눈에서 일순 기광이 번뜩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그 점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너는 키가 난쟁이 똥자루 만한 뚱보를 만나지 않았더냐?" "아! 그 분 말씀이셨습니까?" 용류옥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그 어르신인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소생이 우둔하여 미처 두 분을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쯧, 그럴 수도 있겠지. 이 넓은 땅에서 그 작자나 나나 무에 그리 대단한 위인들이라고......." 신복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 노추귀의 이름은 지왜반노귀(地矮飯老鬼)라고 한다." '그 분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용류옥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괴인에게 괴상한 이름이 붙는 거야 당연한 이치였으므로. 신복노인은 눈길을 황혼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노부 광성자(廣星子)와 더불어 무릉도원에서 쫓겨난 다섯 명의 늙은 귀신들 중 한 명이지." 그의 음성에서는 웬지 비탄이 느껴졌다. "허허... 한 때는 무릉도원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건만, 그 꿈도 결국은 허망하게 깨어지고 말았구나.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그저 추억에 불과할 뿐......." 용류옥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잠자코 있었다. 신복, 즉 광성자가 그를 바라보며 또 물었다. "너는 혹시 장춘도란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장춘도!' 용류옥은 크게 놀랐으나 되도록 내색치 않고 답했다. "들었습니다." "헛헛... 노부가 그 곳에서 살았었느니라. 지금으로부터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용류옥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이 놈아! 그럼 노부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냐?" 광선자는 또 한 번 침을 칵 내뱉더니 지극히 불만스러운 어조로 투덜거렸다. "어찌 되었건 다 소용없는 얘기다. 지금의 장춘도는 세상에 다시 없이 추악한 곳으로 화하고 말았으니까." 용류옥은 충격을 받은 듯 반문을 거듭했다. "추악한 곳... 이라뇨?" "흘흘...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니 그렇단 말이다. 더러운 돼지들과 요부탕녀들이 그 곳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았지." 용류옥은 심중에 품고 있던 기대감의 일각이 와르르 허물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렇게 변했습니까?" 그의 물음에 광성자는 긴 탄식을 발했다. "그것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 그런 일이......." 용류옥의 눈썹이 의식을 대변하듯 절로 꿈틀거렸다. 그 기색을 눈치채고는 광성자가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왜, 관심이 있느냐?" 용류옥은 부인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으음,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광성자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이더니 자못 허탈한 표정으로 긴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혼을 바라보며 쏟아 놓는 그의 넋두리야말로 무림의 중대비사(重大秘史)였으니....... 제13장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무기(武器) 1 ① 무림(武林)이 천하라는 대지에 뿌리 내렸던 역사는 장구하다. 대륙은 끊임없는 투쟁의 연결장이었고 숱한 영웅호걸들이 각기 주인이 되기 위해 뜨거운 야망의 피를 뿌렸다. 드넓은 중원의 땅은 곧 하늘과 맞닿은 것으로 인식되어졌으며 가히 신(神)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들이 이를 쟁취하려 했다. 따라서 그들 야망의 흥망사는 무수히 되풀이 되어왔다. 끝없는 전쟁, 또 전쟁....... 새로운 왕조(王朝)도 그 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생되었으며 한 때 찬란한 영광을 누리다가 또 다시 저무는 석양처럼 어둠과 영원한 침묵의 장막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강호의 탄생 연원은 이러하다. 언제부터인가 대륙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주군(主君)을 잃은 무사들이 부러진 검을 안고 황야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왕가의 성쇠(盛衰)에 허망함을 느낀 나머지 다시는 왕조를 위해 검을 들지 않으려 했다. 구속을 벗어나자 차라리 홀가분하게 사해팔황(四海八荒)을 떠돌았던 것이다. 와중에도 거의 습성이랄 수 있는 그들의 패기만은 소멸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들은 서로 맞부딪쳤다. 이르자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바로 그들의 각축장인 강호는 강자(强者)만을 용납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되 나름의 세력까지를 형성할 수도 있었다. 이에 낭인 무사들은 녹슨 검날을 갈기 시작하는 한편, 일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살인지술(殺人之術)을 익혀갔다. 그렇게 생성된 강호무림은 이후로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에 이르기까지 패자(覇者)가 되려는 자들의 칼부림이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야할 대륙에서는 한시도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의례 해가 뜨면 이름 모를 황원이나 고봉(高峯)에서 까마귀에게 쪼아 먹히고 있는 시신들이 허다했다. 그들은 통제가 전혀 불가능했다. 애초부터 왕조에 구애받지 않던 그들은 당연히 왕법(王法)도 무시했으며 오직 패주(覇走)에만 열을 올릴 따름이었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무림사(武林史) 최대의 혈겁(血劫)이 일어났다. 수양제가 천하를 정복한 이면에 대륙은 피로 씻겨진 것이었다. 도처에서 기근과 질병이 발생하는 등 전쟁의 상흔은 실로 처참했다. 민심(民心)도 그에 따라 더 없이 흉흉해져 버렸다. 이 사태는 무림에 돌이킬 수 없는 역작용을 일으켜 놓았다. 낭인 무사들마저 제 각기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며 더욱 더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황산(黃山)의 환우대멸전( 宇大滅戰). 후세의 무림사에 일명 지옥대전(地獄大戰)으로 기록될 만한 대혈전이 벌어졌다. 흑(黑)과 백(白)의 구별도 채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낭인 무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황산의 시진봉에서 그들은 진정한 천하제일인자를 가리기 위해 장장 삼십주야에 걸친 대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하늘도 땅도 눈을 감아야 했을 정도로 처절무비했던 그 혈투는 시진봉을 온통 피로 물들여 놓았다던가?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다니 더 형용할 나위도 없으리라. 그런데 그 삼십주야가 다하는 마지막 날, 하늘이 노한 탓인지 뇌성벽력이 치며 일대를 침몰시키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그 바람에 산사태가 일어나 수많은 시신들이 저절로 땅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핏물 또한 장강(長江)을 붉게 물들이는 가운데 모조리 씻겨 동해로 빠져 나갔다. 이로써 혈전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헤아려 보니 일천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삼 만이었던 무사들의 숫자가 겨우 그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거늘 말없이 반으로 갈라져 각기 폭우를 헤치며 사라져 갔다. 한 떼의 무리들은 북으로, 그리고 나머지의 무리들은 남쪽을 향해 떠났다. 소위 지옥대전이라 일컬어지는 그 싸움의 주인공들은 이후로 종무소식이었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전설로나 전해지는 하나의 수수께끼일 뿐. 남과 북이라는, 전혀 상반된 방향으로 갈 길을 택했던 그들은 그 뒤로 천 년이 흐르기까지 그 자취도, 또 그렇게 헤어져간 이유마저도 밝혀지지 않고 내내 무림의 신비로 남았다. 콰아아-- 쿠쿠쿠쿵--! 폭포의 장관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웅장함을 보여 준다. 구룡폭(九龍瀑). 이 폭포는 북경(北京)에서 서쪽으로 삼십리쯤 떨어진 해가산(海伽山)의 한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적이 닿기 어려운 곳에 은밀히 자리하고 있어 그 신비감은 더 했다. 적막한 산중에서, 그것도 문자 그대로 아홉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는 듯 거대한 물줄기가 아홉 갈래로 나뉘어 떨어지고 있으니 그 광경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감명이란 감히 필설로 형용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한 채의 모옥(茅屋)이 구룡폭을 마주 보는 위치에서 자욱한 물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모옥의 앞에는 한 그루의 천 년 고송(古松)이 떡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다시 자연이 형성해 놓은 듯한 넓직한 석반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석반 위에 일노일소(一老一少)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광성자(廣星子)와 용류옥이었다. 용류옥. 그는 넋을 잃은 듯 멍하니 구룡폭에서 피어오르는 물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광성자로부터 들은 지옥대전의 비사가 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용류옥의 해석에 의하면 그 사건은 하나의 비극에 지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는 극도의 회의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대체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 피를 부르는 죄업(罪業)은 과연 언제라야 종식되어질 것인가?' 그는 음울한 의문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은 현재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광성자는 씨익 웃었다. "인석아, 조르지 말고 듣기나 해라. 자고로 역사 흐름이란 돌이켜 보면 반복에 지나지 않는 법이니라. 대개의 인간들이 어리석어 조상들의 전철을 되밟곤 하니까." "으음......." 용류옥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흘려냈다. 광성자의 말이 당금의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었으므로. 그가 들려주는 비사는 계속 이어졌다. "북쪽으로 갔던 무리들은 종내 대막(大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한가운데서 초지(草地)를 발견하고 그 곳에 눌러 앉았지." 용류옥은 심히 안도를 내비치며 물었다. "그럼 남으로 간 사람들도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겠군요?" "왜, 모조리 객사라도 했을까봐 걱정했었느냐? 이 놈아, 염려는 싸잡아 매 두어라. 인간의 목숨이란 생각보다 질긴 거니까." 광성자는 클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 놈의 그런 점은 무척 마음에 든다. 노추귀도 그래서 네 놈에게 홀딱 반해 제 것을 바쳤겠지만." 그는 미소를 띈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남쪽으로 떠났던 사람들도 역시 모처에 이르자 새롭게 삶의 둥지를 틀긴 했다. 최남단까지 내려가 남안탕산(南雁蕩山)의 근역에 말이다." 주름살 투성이인 광성자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회가 어렸다. "그들은 그 곳에서 한 동안 갈등에 빠졌었지. 바다를 건너 이상의 섬을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남안탕에 머무를 것인가의 기로에 서서 고심을 해야 했으니까." 용류옥은 상대의 말이 어쩌면 이해가 갈 듯도 했다. 그 자신이 그들 유랑의 무리 속에 있다고 가정하니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각을 따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남은 것은 당연한 선택인 듯 합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자 광성자는 수긍했다. "맞다. 그들은 중원에 염증을 느낀 상태였으나 그래도 영원히 떠나는 것만은 재고해볼 수밖에 없었지. 그리하여 그들은 남안탕산의 장춘곡(長春谷)이라는 곳에서 정착했다." "아!" 용류옥은 탄성을 발했다. 그는 장춘곡이라는 이름에서 언뜻 장춘도와의 연관성을 느끼고는 감정제어에 실패한 것이었다. "흘흘... 놀라기는......." 광성자는 실소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막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그 곳에서 나름대로 무(武)의 이상국을 건설했지. 그들은 기질적으로 패도를 추구하는 인물들이어서 거기서도 지상최고의 무학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죽음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면서 그 곳은 영겁(永劫)의 모래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또한 그 주변에마저도 인세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혈사류(血沙流)가 뒤덮여 버렸다. 이후로 세인들이 그 장소를 일컬어 혈사해(血死海)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혈사해......!" 용류옥은 놀란 음성으로 되뇌었다. 혈사해라는 전설의 장소를 실재하는 것으로 듣기는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으음, 정녕 뜻밖이구나. 천 년 전 지옥전사들이 이룬 이상향 중 하나가 혈사해였다니.......' 그가 내심 읊조리고 있는 사이, 광성자는 탄식했다. "하늘의 짓궂은 안배라고나 할까?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남안탕산역의 장춘곡도 화산(火山)이 터지면서 앞 계곡이 무너져 지하에 깊숙히 가라앉았다." "그 곳이 장춘도입니까?" 용류옥이 묻자 광성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이어 장춘도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에 들어갔다. ② 당시의 화산 폭발은 기이한 지각의 변동을 가져와 장춘곡을 통째로 지하에 매몰시켰다. 그 바람에 다행히 용암이 일대를 뒤덮었어도 살아 남은 자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졸지에 지하로 가라앉게 된 그 곳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가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분명 어딘가로부터 공기가 계속 유입되고 있건만 그들이 희망을 걸고 찾고자 한 출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수백 년이 흐르고.......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 것인가, 악(惡)한 것인가? 장춘도는 하나의 폐쇄된 세계였다. 애초 오백 인이었던 곡내(谷內) 사람들이 화산 폭발로 인해 숱하게 죽어 갔는데 그 뒤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구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그들은 하나의 작은 왕국을 형성했고 그 곳은 이른바 지저(地底)의 낙원이랄 수 있었다. 출구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장춘도를 살만한 곳으로 꾸미는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조건도 좋았다. 풍요로운 대지와 강(江)이 있었으며 계절은 언제나 봄이었다. 게다가 천정의 거대한 화염천(火焰川)으로 인해 항상 밝은 그 곳 세계에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꽃들이 만발했으며 짐승들까지도 번성했다. 심지어 기약영초(奇藥靈草)까지도 특수한 지질(地質)로 인해 종내에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실로 평화로운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이상국(理想國)을 이룩했으며 더 없이 만족하며 지냈다. 그런데 차츰 문제가 생겼다. 본시 그들은 개개인이 모두 엄청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놀랄 정도로 발전을 거듭한 것이다. 그들은 무공을 일종의 쟁탈전(爭奪戰)에 사용했는데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여인이었다. 장춘도에서는 여자가 귀했다. 지나친 지화(地火)의 기운 탓인지 태어나는 아이들 대부분이 사내아이였으므로 필연적으로 여인을 둘러싼 쟁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강자만이 여인을 취할 수가 있었으며 약자의 신세란 종국에 가서는 노예로 전락했으니까. 덕분에 지저의 낙원에서는 여인들의 입김이 거세어지는 한편,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들이 제공하는 환락은 무서운 무기(武器)로 화했다. 장춘십노(長春十老). 이들은 모두 이백 세를 넘은 장춘도 최고의 원로(元老)들로써 어떤 면으로든 지나친 분규가 있으면 나서서 중재해왔다. 여인들의 쟁탈 문제만 해도 그들이 개입하여 처리하지 않았다면 벌써 오래 전에 장춘도의 멸절사태로 비화되었으리라. 그러나 그 상태도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장춘십노의 수장(首長)인 두천만불왕(九天萬佛王)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스스로 장춘도의 제왕(帝王)이 되고자 했으므로. 이렇게 되니 장춘십노 사이에 오히려 내분(內分)이 일어났다. 두천만불왕을 지지하여 옹립하려는 쪽과 반대로 그의 준동을 제지하려는 쪽의 두 파(派)로 갈라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내분은 일대 충돌을 불러 일으켜 장춘도의 평화는 깨어지고 말았다. 거센 혈풍이 낙원이던 지하왕국을 삽시에 지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콰르르르릉-- 석양(夕陽)이 구룡폭을 비추자 붉은 빛이 사위에 휘황한 무지개를 겹겹이 이루어 놓았다. 하지만 용류옥은 그러한 경관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묵묵히 광성자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광성자는 굳어져 있다가 한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그 뒤로 장춘도는 세상에서 가장 악(惡)한 곳이 되고 말았다. 패권을 잡으려는 자가 여인들을 도구로 이용하는 바람에 환락천지로 화해 버렸으니까." 용류옥이 궁금한 듯 물었다. "다섯 어른들께서는 어떻게 장춘도에서 빠져 나오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헛헛... 우연의 일치랄까, 아니면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할까? 먼저 우리들 다섯 늙은이는 대세가 기울자 승산이 없음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했었지." 광성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장춘도에는 수백 년에 걸쳐 외부로 나가는 출구를 찾기 위해 파놓은 동굴들이 있었다. 실의에 빠진 우리들은 자결을 하기 위해 그 동굴 중 한 곳으로 들어갔었지. 그런데......." 그는 폭포 쪽으로 망연해진 시선을 돌렸다. "한쪽 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또다른 지형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야. 흘흘... 우리들은 기대를 가지고 그 곳에 대고 장력(掌力)을 날렸지." "그 후로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래,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광성자는 곁눈으로 용류옥을 힐끗 보더니 탄식처럼 말했다. "흘흘... 벽이 무너지자 지하의 수맥(水脈)이 터졌고 동굴은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수맥을 따라 어디론가 떠밀려 나왔다. 그 곳은 나오고 보니 동해(東海)였다." "으음, 그랬었군요." 용류옥은 부지중 신음을 흘렸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다섯 늙은이는 모두 무사했다. 최초로 장춘도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 된 것이야." 광성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을 잘한 짓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구나. 우리들이 그러했듯 장춘도의 사람들도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올 테니까 말이다. 그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우리 다섯 늙은이들은 어쩌면 천하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될 수도 있다." '맙소사! 이건 엎친데 덮친 격이로구나.' 용류옥은 거의 넋을 잃고 있었다. 광성자(廣星子)와 지왜반노귀(地矮飯老鬼)를 위시하여 고룡왕(古龍王), 태태모모(太太母母), 신검노(神劍老) 등이 장춘도를 극적으로 탈출한 장춘오로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긴급히 상의했다. 말마따나 장춘도의 사람들도 곧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되,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패자의 야심이 대체 어디까지 그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와중에도 다행이라면 그들이 장춘백장경(長春百藏經)이라는 장춘도 최고의 무학비전을 가지고 나왔다는 점이었다. 본래의 취지는 그것을 불살라 없앰으로써 그나마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을 당대에서 종식시켜 보자는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장춘오로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뛰어난 인재를 찾아 장춘백장경 상의 무공을 전수시켜 훗날을 대비하게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들은 기한을 삼 년으로 정하고 각기 중임을 맡길 인재의 발굴에 나섰다.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일인당 한 명씩 선발해 다시 모인 뒤, 개중에서 가장 쓸만한 한 명을 골라 장춘백장경을 익히도록 할 생각이었다. 광성자는 부옇게 웃었다. "지왜반노귀는 너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다. 목적에 따라 너를 선택했던 것이지." 용류옥은 짐짓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 분께선 어째서 제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설마 하니 어르신의 말씀처럼 멋있어 보이려고 그러시지는 않았을테고......." "물론이지. 그건 내가 괜히 해본 소리일 뿐이다." 광성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그 노추귀는 노부를 비롯한 네 늙은이를 의식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직 기한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우리는 장춘백장경을 아무에게나 넘길 수가 없다. 무공을 익힐 만한 자질은 물론이고 인품과 덕망까지도 두루 갖춘 인물이어야만 한다." 그는 기이한 눈으로 용류옥을 응시했다. "너를 두고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하긴 수구산에서 공청석유(孔淸石乳)를 복용한 것만 해도 그 말은 맞는 것 같구나. 인연이 닿지 않았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테니까. 너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공청석유는 백 년에 한 번 밖에는 고이지 않는다." "후후... 그건 제가 생각하기에도 옳은 말씀인 듯 합니다. 정녕 의외였지요, 제게 그렇듯 크나큰 행운이 따르다니." 광성자는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저었다. "아니다. 이르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일을 꼭 행운이었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 만일 네가 노부의 말을 믿지 않고 약정한 사흘 안에 음식물을 섭취했다거나, 혹은 찾는 일을 중도에서 포기했더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게 아니냐?" 용류옥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당시의 입장으로써 어찌 감히 어르신의 분부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흘흘... 그리 말해 주니 고맙긴 하다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네 믿음과 집념이 얻어낸 결과이다." 광성자의 칭찬에 그는 은연중 얼굴을 붉혔다. "그만 하십시오, 어른신. 소생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것 만큼 좋은 사람이 못됩니다." 용류옥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상대에게 그 때까지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지 못한 바들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이를 알아 차린 듯 광성자가 툴툴 웃었다. "자고로 비밀이 많은 자는 속이 시커멓다고들 하지. 그러나 네 놈을 보면 그 말도 틀리는 것 같구나. 너에게는 분명 응큼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노부는 그 점을 놓고 네 놈이 그만치 뭔가 깊은 사연을 끌어 안고 있나 보다고 생각했었다." "어르신......." "내 굳이 네 신상에 대해 캐묻지는 않겠다. 그러니 너도 지왜반노귀와 나의 선택을 이의없이 받아 들이도록 해라." 그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용류옥도 이쯤 되자 거부하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서는 것은 아니었다. "과연 제가 그런 중임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그의 회의는 대뜸 광성자의 분노를 샀다. "이 놈! 네 놈의 귀에는 노부의 말이 순간적인 충동이나 장난으로 들리느냐? 장차 천하무림의 운명과 직결된 중대사를 논하고 있거늘 시건방지게 토를 달다니."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용류옥의 고개가 푹 수그러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성자의 준열한 꾸지람은 그치지 않았다. "괘씸한 놈, 네 놈에게 자신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어찌 네 놈은 큰 일을 앞두고 그 따위로 못나게 군단 말이냐?" "용서해 주십시오. 제 소견이 짧았습니다." 용류옥은 진심으로 사과한 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실은 미거한 후배를 크게 보고 거두어 주시니 감읍할 지경입니다. 금후로는 신명을 다해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고이얀 놈!" 광성자는 아직도 노기가 풀리지 않은 듯 안면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용류옥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본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광성자의 주름진 얼굴에는 뜻밖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천 년의 한(恨), 즉 장춘도라는 꿈의 낙원을 지키려던 광성자의 염원이 뜨거운 눈물로 화해 안면을 뒤덮고 있었다. "어르신......." 콰아아아-- 쿠쿠쿠-- 구룡폭은 밤이 되어도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석양마저 집어 삼켜 버린듯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에 잠긴 채 포효를 해대는 구룡폭과는 별개로 한 옆의 자그마한 모옥에서는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향후 무림천하의 운명을 걸머진 한 노인과 청년기협이 밤이 지나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무엇인가를 숙의하고 있었다. ③ 만추(晩秋)의 빛깔은 대륙의 색을 다르게 해 놓았다. 나그네의 심사는 경우에 따라 매우 틀리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을 이룬 아름다운 경관에도 불구하고 건듯건듯 불어오는 추풍에 진한 애수(哀愁)를 느끼게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그네의 발길은 고향을 찾아 일로 바빠지게 되고 반대로 타지(他地)를 향해 떠나야 하는 상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며 다가올 겨울을 걱정한다. 청원(淸苑). 북경성에서 남으로 내려가다 형성된 한 시진이다. 그 곳 청원부로 뻗어 있는 관도(官道)는 무척이나 쓸쓸했다. 작은 시진이라 행인들의 자취가 뜸하기도 했지만 노상에 나뒹구는 낙엽들이 연신 나그네의 발에 채이며 버스럭거리는 스산한 음향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길을 홀로 걷고 있는 한 명의 백의(白衣) 청년이 있었다. 단아한 기도를 지닌 그 미청년은 용류옥이었다. 구룡폭에서 광성자와 헤어진 후로 계속 남하(南下)하는 중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행선지를 정해 두고 있었다. '우선 아버님이 언급하신 창주도(滄州島)로 가자.' 그 곳에 어떤 안배가 되어 있는지는 그 자신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현재로선 창주도를 찾아가는 것만이 그가 이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차후의 일은 일단 그 곳에 가서 예비된 것들을 거둔 다음에 생각해 보자. 지금은 아무 것도 결정할 수가 없다.' 용류옥은 가슴이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실종된 무림왕의 행방도, 오로지 복수에 불타는 모친의 행태가 어느 선에 이르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두 가지 일이 나날이 혼란으로 치닫고 있는 무림의 현황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해결의 수단으로써 기대했던 장춘도의 존재마저도 거꾸로 위협이 되어 무림으로 한 발씩 다가들고 있었으니....... 그는 고심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직 낙담은 금물이다. 모두가 다 엄청난 일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씩 차례로 맞부딪치다 보면 뭔가 성과도 있겠지.' 용류옥은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갈 길을 재촉했다. 그로 말하자면 전날에 백종이 넘는 직업을 가져 본 특이한 경력이 있었다.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장점과 더불어 천하의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한 기질이 있었다. 마치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용류옥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머리에 죽립을 깊숙히 눌러 썼다. '두려울 것은 없다. 마음을 다잡기까지가 문제이지, 그 이후로는 열과 성을 다하면 그 뿐이니까. 늘 그랬듯.......' 대청루(大淸樓). 청원부(淸苑府)에서는 가장 큰 주루이다. 이 곳은 주루일 뿐만 아니라 반점과 객점까지를 겸하고 있었다. 황혼(黃昏) 무렵. 용류옥은 대청루의 문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 술 한 잔 하면서 객고(客苦)나 풀고 가야겠군.'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며 대청루로 오르는 계단을 밟았다. 그러나 그는 곧 흠칫하여 그 자리에 도로 서 버렸다. 주루의 앞에는 그가 당도하기 전부터 한 대의 마차가 서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 마차는 무척이나 눈에 익은 것이었다. 드물게 보는 쌍두마(雙頭馬)와 마차를 치장하고 있는 화려한 주렴 등을 다시 대하는 순간 용류옥은 내심 부르짖었다. '아! 저것은 화중화(花中花)의 마차가 아닌가?' 그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그냥 이대로 되돌아가 버릴까? 마주쳐 봤자 도무지 이로울 게 없는 여인인데.......' 화중화 항예(姮蘂)를 떠올릴 때마다 찜찜해지는 기분만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용류옥은 한참을 망설였으나 그렇다고 피하는 것도 우스운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 먹고는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는 따로 이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막바로 이층으로 올라가게 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은은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창가에 면해 있는 한 자리에서 그녀를 발견하고부터였다. '후후... 과연.......' 용류옥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반응과 절세의 인간우물(人間尤物)인 화중화 항예의 눈부신 모습을 비교해 보며 쓴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술 잔을 앞에 놓고 있었는데 동행이 있었다. '누구일까. 저들은......?' 용류옥은 일말의 의혹을 느끼며 일부러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은 후, 항예 일행을 관찰했다. 그녀와 동석(同席)한 두 청년은 특이해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한 청년은 체격이 몹시 컸다. 일신에는 황삼을 입었으며 폭이 넓은 도(刀)를 메고 있었다. 사자(獅子)를 연상시키는 용맹무쌍한 얼굴로써 부리부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또 한 명의 청년, 아니 그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아직 소년(少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잘 어울렸다. 그는 흑삼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창백한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양 무릎 위에 한 자루의 기형검(奇形劍)을 올려 놓고는 줄곧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그의 왼손은 술을 훌쩍 들이키는 중에도 폭이 좁고 가느다란 그 검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아직 치기를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모습이나 동작에서는 웬지 짙은 외로움이 묻어 나왔다. 아무튼 두 청년은 틀림없이 화중화 항예와 술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으나 기이한 것은 그들 세 사람의 태도였다. 화중화 항예. 그녀는 시종 두 청년에게 무관심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예 그들이 거기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만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마치 세상의 미(美)란 미는 모두 합쳐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빨아들일 것 같은....... 반면에 황삼청년은 넋을 잃은 듯 항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때문에 그는 술잔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흑삼청년은 매우 음울한 기색이었다. 이따금씩 항예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예외없이 고통이 깃들곤 했다. 용류옥은 두 청년을 보자 그들의 범상치 않은 기도로 미루어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검중검(劍中劍)과 도중도(刀中刀)를 만난다고 하더니, 아마도 저 두 사람인가 보군.' 그는 술만을 시키려다가 소면도 함께 주문했다. 일단 들어 왔으니 요기라도 해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주문한 것들이 날라져 오자 용류옥은 소면을 먼저 들었다. 워낙 간단한 식사이기도 했지만 그는 음식을 드는 중에도 죽립을 벗지 않았다. 그것은 화중화가 자신을 알아보면 혹시라도 번잡한 일이라도 생길까 우려가 되어서였다. 이 때, 귓전을 간지럽히는 화중화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 벌써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은 이 곳에서 하룻밤 쉬고 가기로 하죠." 그 말은 용류옥에게 한 소리가 아니었다. 대신 슬쩍 건네다 그의 눈에는 기뻐하고 있는 황삼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또한 고개를 푹 떨구고 마는 흑삼청년의 모습도 함께. "자, 술병도 다 비었어요. 우리 그만 일어 나기로 해요." 화중화는 말을 마치자 입술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먼젓번과는 달리 타는 듯이 붉은 옷에 역시 붉은 피풍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용류옥이 보기에도 마치 한 송이의 활짝 핀 장미와 같았다. '글쎄, 이렇대도.......' 용류옥은 그녀의 전신에서 사람의 혼(魂)을 분열시킬 듯한 강한 마력이 발산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식사에 열중하면서도 못내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쯧! 저 두 사람이 걱정이군. 보아하니 저 위험한 여인의 미공에 완전히 넘어간 듯 한데.' 그러다 문득 그는 곁으로 심혼을 마비시킬 듯한 향기(香氣)가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런 소리도 들려왔다. "호호호... 식사 중에도 죽립을 쓰시고 계시다니, 무엇 때문이죠? 혹 남에게 얼굴을 보일 수 없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그것은 언뜻 듣기에도 그저 단순한 참견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말이었다. 용류옥은 그녀의 행태에 쓴 입맛을 다시면서도 응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못말릴 여인......!' 그는 고개를 들더니 죽립을 약간 치켜 올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습관일 뿐." 그의 얼굴을 보는 항예의 아름다운 눈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또한 그래서인지 그녀는 한 동안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용류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을 받자 용류옥의 가슴은 절로 진동을 일으켰다. '으음, 요안(妖眼)......!' 바짝 긴장하고 있는 그에게 항예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분명 당신의 얼굴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녀는 흰 이를 내보이며 생긋 웃은 후, 그의 곁을 지나쳤다. 용류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나를 몰라 보아서.' 그가 항예를 처음 만났을 때는 거지차림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몰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용류옥은 황삼청년과 흑삼청년이 그녀의 좌우로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군.' 그는 새삼 화중화가 지니고 있는 미공의 위력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병기나 무공보다 훨씬 더 무서운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용류옥은 식사를 마치자 자작으로 술을 따라 마시며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어둠은 이미 짙게 깔려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오늘 밤은 나도 이 곳에서 묵어야겠구나.' ④ 달이 구름 속으로 막 숨어드는 찰나였다. 슷! 기다렸다는 듯 한 인영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본래 대청루의 후원은 객원(客院)으로 쓰인다. 그런데 밤이 깊다 보니 길게 늘어져 있는 객사(客舍)에는 벌써부터 대부분 불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스스슥--! 후원에서도 독립적으로 낮은 담장이 둘러진 곳이 있다. 일명 별원(別院)이라 불리우는 이 곳은 다른데에 비해 값이 세 배나 비싸다. 아담한 화원과 인공의 연못까지 꾸며져 있어 주로 돈이 많은 부호나 고관들이 투숙하는 곳이다. 별원의 지붕 위에 야조처럼 소리없이 떨어져 내리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은 다름 아닌 용류옥이었다.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선뜻 기왓장 위에 엎드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찬 밤공기가 전해져 오자 내심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들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그러나 웬지 모르는 척 하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구나.' 그가 지칭하는 상대는 화중화 항예를 따르는 두 청년들이었다.그 중에서도 유독 흑삼청년의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 그로 하여금 그들 사이에 나서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다. 용류옥은 호흡을 차단한 채 주변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숨을 멈출 수가 있었다. 지왜반노귀로부터 전수 받은 기공(奇功)은 물 속에서까지도 피부호흡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사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고정되었다. '아! 저 청년은......?' 화원(花園)의 한 쪽 구석이었다. 그 곳에서 누군가가 한 그루 의 동백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자는 바로 용류옥이 그토록 걱정하던 흑삼청년이었다. 흑삼청년은 가까이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으며 그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가 담겨 있었다. 용류옥은 그 소리를 듣자 더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 쯤은 여인으로 인해 휘청거릴 수 있다. 하지만 저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조심스럽게 신형을 이동시켰다. 스르르....... 그는 처마 끝에 발을 걸더니 거꾸로 몸을 내렸다. 그 곳은 한 방의 창문 쪽으로써 그는 마치 박쥐처럼 매달리게 되었다. 이어 청력을 기울여 본 용류옥은 대경했다. 방 안에서 숨가쁜 신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헉헉!" "하아아아......." 그것은 어떻게 들어도 틀림없이 남녀의 교합(交合)을 의미하는 소리였다. '맙소사! 그래도 설마했더니.......' 용류옥은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해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화중화 항예를 떠올렸다. 그러자 늘상 요기(妖氣)를 띄고 있던 그녀의 모습과 현재의 정황이 너무도 뚜렷하게 연결이 되었다. '쯧, 기어이 사고를 치는 모양이구나.' 그는 그냥 몸을 돌릴까 하다가 기왕 내친 김이라 확인차 빼꼼히 열려진 창문 틈으로 눈을 가져갔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용류옥의 상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중화 항예와 예의 황삼청년이 알몸이 되어 서로 뒤엉킨 채 격렬하게 율동하고 있었다. 전신이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청년은 자신의 건장한 신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항예에게 전부 쏟고 있었으며, 항예는 눈을 까뒤집은 채 몸부림치며 응수해 가고 있었다. "하아악! 최고야, 당신......."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격정적인 음성은 청년으로 하여금 기세를 가일층 드높이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그녀의 풍성한 하복부는 흡사 파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대를." 황삼청년은 굶주린 야수처럼 연신 거친 숨을 내뿜으며 그 끝없는 도전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있었다. 그럴수록 항예의 엉덩이는 더욱 더 위로 쳐들리고....... '정말 못봐 주겠군.' 용류옥은 어느 덧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 두 남녀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건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서로가 원해서 정사(情事)를 벌이고 있다면 감히 누가 가타부타 따지고 들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들이 질탕하게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그 시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이는 다른 한 청년이었다. 더구나 그 청년은 나이도 아직 어리지 않은가 말이다. 따라서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용류옥으로서는 침상이 삐걱거리는 소리나 희열에 찬 남녀의 부르짖음 등이 놀랍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화중화, 대체 무엇이오? 당신이 추구하려는 바는.'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그녀의 속셈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삼각관계를 만들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지......? "호호호... 소검랑(少劍郞), 이리 가까이 와." 용류옥은 들려오는 이 한 마디로 인해 허탈해지고 말았다. 오죽하면 그는 지탄받아야할 대상이 화중화 항예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생각조차 들 지경이었다. 그녀의 행각은 용류옥을 철저히 비웃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비해 연민 따위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냐고 말이다. 용류옥. 그는 황삼청년과 항예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후, 노기가 치민 나머지 마음을 가라앉히려 잠시 지붕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다 항예의 음성을 듣고 도로 창문 곁에 매달려 방 안을 들여다 보고는 그처럼 충격에 휩싸여 버렸다. '우우우...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럴 수가......?' 그가 창문 틈을 통해 엿보게 된 인물은 놀랍게도 황삼청년이 아닌 흑삼청년었다. 항예가 어느 틈엔지 황삼청년을 방 안에서 내보내고 다른 한 명의 청년을 끌어 들였던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에게서 방금 전에 치루었던 방사(房事)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항예는 하늘거리는 나의를 걸친 채 침상에 앉아 있었는데 긴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단정하여 내막을 모르면 청순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흑삼청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전히 왼손에는 검이 완강하게 쥐어져 있었으나 하는 양은 몹시도 미숙해 보였다. "아이,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어서 이리 와서 내 머리를 좀 빗겨 줘." 항예의 음성은 녹아날 듯 달콤했다. "나, 나는......." 흑삼청년, 즉 소검랑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침상에서 반쯤 일어서더니 그의 손을 잡아 당겼다. "아이, 어서." 소검랑을 끌어다 놓은 항예는 그를 향해 등을 돌렸다. "으음......." 소검랑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은 가히 쏟아질 듯 그녀의 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삼을 통해 비춰 보이는 그녀의 나긋한 동체와 분홍빛 살결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항예의 머리채를 잡아갔다. "호호... 뭘 해? 빗기라니까." "알았어요." 소검랑의 얼굴에 스르르 꿈결같은 표정이 번졌다. 그는 빗을 들더니 정말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빗기기 시작했다. 슥... 슥....... 빗질을 하는 그의 얼굴은 마치 황홀한 꿈이라도 꾸는 듯 했다. 항예가 그에게 머리를 내맡긴 채 속살거렸다. "나는 말이지, 소검랑이 머리를 만져 줄 때가 가장 좋아." 소검랑은 언제 어색해 했냐 싶게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음, 나도 그래요." "호호... 소검랑, 내가 예뻐?" "그야 물론." "그럼 오늘 밤에도......?" 항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소검랑의 왼손에서 늘상 달라 붙어 있다시피 하던 검이 툭 떨어져 나갔다. "그럴 수만 있다면......." "호호... 왜 안되겠어? 누가 감히 뭐란다고." 이어 그녀가 몸을 살짝 흔들자 나삼이 흘러내려 동그랗고 매끄러운 어깨를 드러냈다. "너는 나를 보면 언제나 가지고 싶지? 그렇지? 소검랑." "그래요, 나는 항상 당신을......." 소검랑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은 순간, 항예는 몸을 돌리더니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 번 안아 봐, 이젠 네가 나를 말이야." 그러나 소검랑도 이번 만큼은 그녀의 말에 따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앞섶이 열려져 탐스럽게 솟아 나와 있는 그녀의 양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해요, 난......." 울부짖음과도 같은 그의 음성 뒤로 항예가 속삭였다. "귀여워. 이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지." 그녀는 스스로 옷을 끌어 내려 상반신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리고는 소검랑을 자신의 몸에 밀착되도록 바짝 당겨 안았다. "자! 이러면 되었지? 안심하고 고개를 들어 봐." "아......." 소검랑은 전신을 떨면서도 그녀가 시키는대로 고개를 들었다. 항예는 그를 정시하며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을 대었다. "봐, 내 가슴은 무섭게 뛰고 있어. 소검랑 때문에." "나 때문에......?" "그래, 너의 연인(戀人)이었다는 계집애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계속 그 계집애 때문에 갈등한다면 다시는 너를 내 곁에 오지 못하도록 할 테야."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소검랑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하는 한편, 그녀에게 애걸이라도 하듯 매달렸다. "나는... 나는 당신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해요." 그 말에 항예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당연히 그래야지. 너도 알잖아? 내가 너를 얼만큼이나 즐겁게 해 줄 수 있는지를 말야."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도중도(刀中刀)에게도......." 고통과 비탄이 깃든 소검랑의 음성은 항예의 속삭임에 의해 도중에 잘려 나갔다. "그건 염려할 것 없어. 그는 단지 내 노예일 뿐이니까. 내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너 뿐이야." "그 말... 정말인가요?" "아무렴, 그러니까 그 계집애 따위에게도 질투를 하지." 항예는 그의 몸을 침상으로 밀어 눕게 했다. "너는 내 거야, 소검랑."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떨고 있는 소검랑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더니 그의 몸 위로 포개져 누웠다. 그리고....... ⑤ 용류옥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정녕 상상을 뛰어 넘는구나. 진즉 화중화가 요화(妖花)란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언제고 저 여인으로 인해 무림 전체가 크게 흔들리고 말리라.' 그는 역겹다 못해 구역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자신도 매번 마주칠 때마다 잠깐씩 그녀에게 미혹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여 전신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어느 새 거칠고 뜨거운 신음으로 화해 있었다. 그 소리를 귀로 느끼며 용류옥은 장탄식했다. '두 청년은 당금 무림에서 신주칠기성(神州七奇星)으로 불리워지는 칠 인의 신진고수 중 두 명이다. 분명 검중검 이검명(李劍明)과 도중도 전태악(全泰嶽)이겠지. 장래가 촉망되는 두 명의 젊은 고수가 저렇듯 한 명의 요화로 인해 패기를 잃고 색의 노예가 되어 버리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중화! 언제든 때가 되면 내 손으로 그대를 제거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분노에 휩쓸린 나머지 호흡을 멈추는 것을 잠시 잊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호호홋... 거기 숨어서 엿보는 분은 누구신가요?" 방 안으로부터 한 가닥 교성이 울려 나왔다. '아차!' 용류옥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즉시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이어 그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더니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갔다. 그러나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파파파팟--! 예리한 파공성이 울림과 동시에 용류옥은 질풍노도와 같은 강기( 氣)가 자신을 머리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것을 느꼈다. 일성의 폭갈이 울린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어떤 놈이냐?" 쩌저적--! 한 가닥 뇌전(雷電)이 또한 허공을 갈라쳤다. 용류옥은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먼저 기세를 죽여 놓고 다시금 일도양단(一刀兩斷) 식으로 파고드는 그 공격은 도무지 어떻게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황삼청년, 아니 도중도 전태악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가 공중에 높이 떠오른 채 눈부신 일도를 떨쳐낸 것이었다. '과연 도중도답다!' 용류옥이 부르짖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태악이 구사한 풍뢰환우제일도(風雷 宇第一刀)는 강호상에서도 소위 패도무적(覇刀無敵)으로 알려진 초강의 검식이었으므로. 옛부터 무림에는 남과 북에 각각 검과 도의 명가(名家)가 있었다. 일명 남검북도(南劍北刀)라 일컬어지던 그들 두 가문은 비록 오십여 년 전에 멸절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줄곧 세인들의 기억에 남아 인구(人口)에 회자되곤 한다. 그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남검(南劍)은 해남도(海南島)의 한 문파를 근거지로 하여 환광사명검(幻光死冥劍)이라는 검법으로 널리 위명을 떨쳤고, 북도(北刀)는 뇌정문(雷霆門)이라는 문파를 이룬 채 예의 풍뢰환우제일도(風雷 宇第一刀)로써 천하를 주름잡은 바 있었다. 창졸지간에 그 유명한 풍뢰환우제일도를 맞이하게 된 용류옥은 감히 받아치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무기라야 겨우 손바닥만한 유엽비도(柳葉飛刀) 한 자루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전신을 무섭게 긴장시키는 한편, 어느 틈엔지 기이한 동작을 구사해냈다. 그 순간,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는 그의 정수리로 급기야 뇌전을 방불케 하는 도(刀)가 떨어져 내렸다. '쪼갰다!' 전태악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더불어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믿을 수 없게도 용류옥은 찰나적으로 칠 보를 움직였고 그 바람에 애꿎은 기왓장들이 전태악의 도를 맞고 폭발하듯 날아갔다. 콰콰쾅--! "이럴 수가......!" 전태악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도를 내려다 보았다. 상대방은 벌써 삼 장 밖에서 그를 조롱하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용류옥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전신에 구도(九刀)를 맞았으며, 그로 인해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그는 내심 전율을 금치 못했다. '휴우, 하마터면 온 몸이 아홉 토막으로 잘리울 뻔했군.' 그의 안도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휘휙--! 불현듯 지붕 위로 또다른 두 가닥의 인영이 날쌔게 솟구쳐 올라왔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육신을 불사르느라 여념이 없었던 검중검 이검명과 화중화 항예였다. 그들을 보자 용류옥은 은연중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합공(合功)을 받으면 빠져 나가기가 힘들다.' 생각과 동작은 거의 일치했다. 그는 어느 새 신형을 날려 서쪽 방향으로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가고 있었다. 그도 승산이 없는 싸움에 목숨을 내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 때까지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서 무엇인가 번쩍하고 흰 빛이 뿜어졌다. '환광사명검(幻光死冥劍)!' 빛의 실체를 감지한 용류옥은 대경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속도였다. 대체 언제 날아 들었는지 이검명이 벌써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일검을 발출해낸 것이었다. 용류옥. 그는 수많은 절세기학을 접하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연마할 시간을 갖지 못해 실전(實戰)에 약한 상태였다. 또 그는 이 자리에서 굳이 실력을 노출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이번에도.......' 그의 신형이 대취한 듯 흔들렸다. 동시에 그는 유엽비도를 손에 쥐고 파리라도 잡는 것처럼 허공을 휘저어갔다. 깡--!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튕겨져 나와 사위에 비산했다. "웃!" "으음......." 용류옥과 이검명. 두 사람은 신음을 흘리며 각기 뒤로 세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용류옥의 어깨에서는 핏줄기가 솟구쳐 나왔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던 죽립이 무참하게 쩍 갈라져 그의 얼굴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반면에 이검명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읊조릴 따름이었다. "이럴 수가......! 저 자가 내 검(劍)을 막아 내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왜 안그렇겠는가? 검중검(劍中劍)이라는 별호는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나이는 어린 편이되 이검명은 여태까지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자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아주 간단히, 그것도 불과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비수로 그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 때였다. "호호호호......! 난 또 누구신가 했더니 풍운유객(風雲遊客)이셨군요? 아까는 몰라 뵈서 죄송했어요." 화중화 항예가 까르르 웃으며 아는 척을 해 왔다. 용류옥은 갈라진 죽립을 벗어 던지며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죄송할 것 없소. 그건 내가 바랬던 바이니까." 무뚝묵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항예는 눈을 반짝였다. "모습을 뵈니 상당히 변하신 것 같네요? 그 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용류옥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 없었다. "그대가 무슨 상관이오? 나는 그대 같은 여인과는 단 한 올의 인연도 맺고 싶지 않은 사람이오." "호호호... 제가 어떤 여인이게요?" 용류옥은 멀쩡하게 묻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뻔뻔스러워 보여 울컥 하고 혐오감부터 치밀었다. "몰라서 묻소?" 그가 구토증을 억지로 눌러 참고 있는 사이에도 그의 좌우로는 검중검과 도중도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것을 의식하자 용류옥도 나름대로 계산을 세웠다. '탈출로는 단 한 곳......!'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 번뜩 하고 불길이 일어났다. "화중화! 길을 트시오." 위이잉--! 그의 수중에서 유엽비도가 날았다. 그것은 화중화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정확히 쏘아져 갔다. 동시에 그의 신형도 야공을 가르며 위로 높이 솟구쳤다. "호호호호......!" 섬뜩한 느낌을 전하는 교소성이 울린 것은 그 찰나였다. 화중화 항예. 그녀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비스듬히 드러눕는가 싶더니 그 상태에서 솟아 올라 용류옥의 신형을 바짝 따라 잡았다. '뜻밖이군. 요녀의 무공이 이렇게 높았다니.......' 용류옥은 새삼 긴장을 조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비도는 즉시 방향을 틀어 화중화의 등을 노리고 날아 들었다. 본래 비도의 끝에는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絲)이 매달려 있었다. 그 덕분에 화중화는 예리한 경풍이 등으로 날아오는 것을 감지하고는 교구를 홱 틀었다. 펑! 그녀의 손바닥에서 예리한 강기가 뻗어 나와 비도를 단번에 부숴 버렸다. 용류옥은 크게 놀라며 다시 신형을 날렸다. 추적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죽어랏!" "서라!" 파츠츠츠츳--! 검과 도가 배후로 섬광처럼 덮쳐드는 것을 느끼며 용류옥은 전신의 공력을 일으켜 등을 보호했다. '멈추면 안된다!' 콰쾅! "크윽!" 등 쪽에서 폭음이 울리는 찰나, 그의 입과 코로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현천강기(玄天 氣)로 몸을 보호하고 있기는 했으나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용류옥은 정신이 가물가물거렸으나 오히려 그 반동으로 전면을 향해 무려 백여 장을 날아갈 수 있었다. 그는 앞도 보지 않고 본능인 양 계속 치달렸다. '최소한 여기서 무가치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제14장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무기(武器) 2 ① 새벽 안개가 자욱히 흐르고 있었다. 이 곳은 계림(桂林)이 밀집해 있는 얕으막한 언덕이다. "으음......." 한 가닥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사위를 부옇게 점하고 있던 안개가 갑자기 한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휘류류류......! 소용돌이 치듯 안개는 한 곳에서 뭉쳐지고 있었다. 그 곳은 한 그루의 거목(巨木) 아래였다. 슈슈슈-- 괴이한 음향과 함께 안개가 더욱 빠르게 휘돈다. 아마도 그 곳에는 안개를 흡수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안개가 회전을 멈추었다. 곧이어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는데 그 속에서 놀랍게도 사람의 음성이 울려 나왔다. "휴우, 하마터면 치명상을 입을 뻔 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 인물은 용류옥이었다. 그는 지금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지난 밤 청원부에서 있었던 격전 중에 그는 도중도와 검중검에게 적지 않은 부상을 입어 상세를 치료하기 위해 운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류옥은 피묻은 옷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그의 등에는 두 가닥의 상흔(傷痕)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개중 하나는 환광사명검에 의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풍뢰환우제일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뼈가 드러날 정도의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전신에 칠주천(七周天)의 운공을 하고 나자 그의 상세는 거짓말처럼 완치에 가깝게 아물어 버렸다. 그 이유는 용류옥이 신비의 공청석유를 복용한 덕분이었다. 절세영약이 그의 체내에서 놀라운 효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용류옥은 새삼 광성자(廣星子)를 떠올리며 마음으로나마 더 없는 고마움을 전했다. '어르신을 만난 것은 제 일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어젯밤 같은 위기는 도처에서 만나게 될 것인즉 그 때마다 어르신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번 일로 인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루 속히 무공을 연성해야 한다. 강호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널려 있을텐데 그들을 상대하려면 무엇보다 강해 져야지,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것이다.' 현재 그는 두 권의 무공기서(武功奇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 한 권은 해천오로(海天五老)의 무공이 수록된 것이고 나머지 한 권은 광성자가 넘겨 준 광성진해(廣星眞解)였다. '이것들만 제대로 익히면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수모는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용류옥은 피묻은 옷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몸에 걸친 후, 그 곳을 뜨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는 우뚝 멈추어 섰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직감적으로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그는 재빨리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청력을 기울였다. 그의 눈썹이 슬쩍 찌푸러 든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누가 이런 곳에서 싸움을......?' 나무가 부러지고 공기가 파동치는 등의 소음에서 달리 연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 이것이 강호의 생태인가? 가는 곳마다 싸움이니.' 혀를 끌끌 차던 그는 괜한 참견(?)으로 봉변을 당했던 전력이 있는지라 그냥 그 곳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그를 잡아끄는 음성들이 들려와 그의 발을 도로 묶어 버렸다. "핫핫핫......! 기중기(奇中奇),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하하... 운중룡(雲中龍)은 어떻고? 내 직접 겨루어 보니 그 쟁쟁한 위명을 실감하겠노라." 용류옥의 안색이 일변했다. '기중기와 운중룡!' 그 두 사람 역시도 전자에 언급했듯 신주칠기성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 신주칠기성이 이 시대의 후기고수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이란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이쯤 되고 보니 용류옥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기중기는 멸절된 전진문(全眞門)의 후예라고 했다. 그리고 운중룡은 장백(長白)에서 온 신비고수라던가?' 중얼거리는 사이에 벌써 그의 발걸음은 그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음성이 들려 온 곳을 향하고 있었다. 계림 안. 그 곳으로 접어 들자 상황은 짐작과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주변의 아름드리 계목들이 부러져 있는가 하면 땅이 움푹움푹 꺼져 들어가 있는 광경도 볼 수가 있었다. 용류옥은 내심 탄성을 발했다. '호오! 기중기와 운중룡, 정녕 대단하군.' 고수들의 싸움이 빚어 놓은 놀라운 흔적들은 호기심을 자극시켜 그를 더욱 안으로 깊숙히 끌어 들였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청년이었다. 그들은 편편한 바위 위에 마주 앉아 서로 손바닥을 마주 대고 있었는데 그들의 주위로는 무서운 경풍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휘류류류륭--! 용류옥은 내심 부르짖었다. '맙소사! 내력(內力) 대결이었다니.......' 각기 신주칠기성의 일원인 두 청년. 그들은 지금 장력이나 도검을 맞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력으로써 상대를 누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의 무림인들도 꺼리는 행위로써 생명을 내건 도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들의 행색을 살펴 보면 이러했다. 한 명은 백색 도복(道服)에 도관을 쓴 젊은 도인(道人)이었다. 맞은 편 청년은 갈삼을 입었는데 이마가 넓고 콧날이 우뚝 솟아 일견하기에도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우우웅--! 그들의 대결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상호 간에 최후의 내력을 발출시키고 있는지 마주 댄 손바닥이 두 배로 커졌으며 입고 있는 의복도 바람을 받은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채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휘류류류--! 주위의 낙엽은 물론이거니와 나무 둥치들까지도 태풍을 만난 것처럼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두 청년은 모두 이마에 심줄이 툭툭 불거져 나온 상태로 격렬히 몸을 흔들었다. 만일 그 와중에 어느 쪽이든 내공을 거둔다면 그 즉시 내장이 파열되어 즉사하고 말리라. 한 마디로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나 할까? 의지와는 별개로 도저히 거둘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용류옥은 안타까운 나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로서는 두 청년이 벌이고 있는 행각을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탄식 뿐이었다. '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저들은 평소 별다른 원한도 없는 사이거늘, 단지 호승지심 하나로 인해 생명을 내걸고 상대와 싸우다니.......' 그는 급기야 환멸(幻滅)마저도 느껴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무림왕 용화천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용류옥은 쓰게 웃더니 시선을 두 청년, 즉 기중기와 운중룡에게로 돌렸다. 어느 덧 서서히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중기의 상반신이 뒤로 꺾여지고 있었고, 운중룡은 상대를 찍어 누르듯이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검은 기류가 발출되었다. 그것은 장백비전의 흑룡진기(黑龍眞氣)였다. 기중기의 안색은 그 순간 백지장 같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곧 그의 몸에서 새하얀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스스스......! 이로써 전세는 금세 역전되었다. 백색 기류에 밀려 검은 기류가 응축되는가 싶더니 운중룡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밀고 밀리는,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불과 종이 한 장 차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이니 더 이상 일러 무엇하겠는가? 관전 중이던 용류옥이 되려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일다경(一茶更)도 못되어 두 사람 모두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저들을 떼어 놓아야 한다!' 그는 머리를 짜내 보았으나 달리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일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그들을 떼어 놓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그 두 사람의 것이 합쳐진 내력을 감당해낼 수 있어야만 되었다. 그렇지 못하고 덤볐다간 도리 없이 전신이 터져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용류옥도 거기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스스로의 무공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도 기중기와 운중룡의 대결 국면은 점차 극한(極限)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콰르르르-- 콰콰콰--!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째 속속 뽑혀져 나가고 땅거죽이 두텁게 벗겨져 날아갔다. 어디 그 뿐인가? 두 사람이 결가부좌하고 있는 암석마저도 폭발의 위험을 안은 채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더욱 위급지경에 이른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전신이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흠씬 젖어 있었으며 끝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급하다!'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휙! 용류옥은 두 사람 사이로 빛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는 전신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림과 동시에 머릿 속에서는 현음구식(玄陰九式) 중 전삼식을 떠올렸다. 다음 순간, 그는 본신의 전 내력을 동원하여 그 중 한 가지를 펼쳤다. 그것은 현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이자결(離字訣)이었다. 마침내 그의 신형이 두 청년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꽈르르릉--! 천지가 무너질 듯한 벽력성이 울렸다. "헉!" 용류옥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양팔로 두 사람의 내력을 갈라치는 찰나, 무서운 압력이 막바로 심장에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내장이 뒤집히고 온 몸의 혈관이 모조리 터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반(返)!" 경황 중에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반자결(返字訣)을 펼쳤다. 콰쾅--! 이번에는 격렬한 폭음이 터졌다. "크으윽!" "허억!" 각기 다른 두 마디 비명과 함께 기중기와 운중룡은 똑같이 입에서 피화살을 내뿜으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② 한 순간을 빌어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그리고 쓰러진 두 사람 사이에는 그들의 구원자인 용류옥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내장이 제 위치를 이탈해 버렸다는 것을 느끼며 고소를 지었다. '후후... 어쨌든 성공이구나.' 그의 두 발은 놀랍게도 암반을 뚫고 무릎까지 들어가 박혀 있었다. 그는 발을 빼내려다 얼굴을 약간 일그러 뜨렸다. '쯧, 아프군.' 하지만 용류옥은 내심 기쁘기 그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즉사를 면한 점으로 미루어 자신의 내공이 두 사람의 공력을 합친 것보다 우위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니까. 그가 느끼는 희열이란 호승지심 따위의 차원과는 달랐다. 도박을 하자는 심산도 역시 아니었으며 단지 향후로 이어질 무림 행도와 짊어져야할 책무들을 의식했다면 맞았다. 기중기와 운중룡. 세칭 신주칠기성 중 두 사람인 그들은 용류옥의 곁에서 자신의 내력에 자신이 상처 입은 꼴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이르자면 뚜렷한 목적을 지닌 젊음과 그렇지 못하고 감상에 쉽게 이끌리는 젊음이 심히 대조를 이루는 광경이었다. 용류옥은 선 채로 잠시 눈을 내리감고 운기했다. 한참 후에야 눈을 뜬 그는 그제서야 편한 상태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휴우, 슬슬 저들을 깨워 볼까?" 그는 바위에서 빠져 나온 후, 그 때까지도 정신을 잃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씨익 웃으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그들의 혈도를 쳤다. "음!" "으음......." 기중기와 운중룡은 신음을 토하더니 제각기 몸을 부르르 떨며 깨어났다. 그들은 용류옥을 보자 안색을 굳혔다. 용류옥이 먼저 그들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형장들은 자칫 양패동사(兩敗同死)할 뻔 했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일말의 수치감이 번지는 것을 알아 챈 용류옥은 방금 전보다 한결 더 부드럽게 말했다. "두 분에게 혹시 상호 간에 절대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원한이라도 있소?" 그 말에 기중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없소." "그럼 왜 생명을 걸고까지 싸우셨소?" 이번에는 운중룡이 말을 받았다. "후후... 귀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우리를 살려 주었다고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질문은 삼가해 주시오. 우리를 모욕할 생각이 없다면." 용류옥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모욕이라니, 어찌 그리 섭섭한 말씀을......!" "그럼 아니란 말이오? 무림에 뛰어든 이상 강자이고 싶은 마음은 모두 다 한 가지일진대 당연한 소리를 굳이 왜 묻소?" 용류옥은 내심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꼬여도 한참 꼬였군. 아무리 자존심이 상했기로서니.......' 기중기도 지지 않고 뒤를 잇듯 차갑게 내뱉았다. "그 이상 합당한 이유가 또 있다면 어디 말해 보시오." '끙! 어쩔 수 없지. 내가 자청한 일, 이들을 물에서 건져 놓았으니 보따리까지도 내 주어야 할 것 같구나.' 용류옥의 보따리(?)가 풀려 나왔다. "두 분은 진즉부터 신주칠기성으로써 강호에 쟁쟁한 이름을 날리고 있었소. 하면 의당 서로를 용납했어야 되었거늘, 어째서 경쟁을 하려 든단 말이오?" 그의 말은 다분히 힐난조였다. 운중룡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정시하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이기에 우리의 일에 참견을 하는 것이오? 우리는 귀하에게 도와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거니와 이것은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니 더 이상 상관하지 말아 주시오." 용류옥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말에는 어폐가 있소. 무림계에 몸담은 사람은 모두 동도(同道)요. 보다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두 분이 내세우는 이유보다 더 큰 대의명분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소. 고귀한 인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바칠 수 있을 만큼 가치있는 일들 말이오." "으음......!" 운중룡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몹시 흔들렸다. 그것은 기중기도 다를 바 없었다. 용류옥은 비로소 그들을 향해 포권했다. "인사가 늦었소. 소생은 풍운유객이란 사람이오." "풍운유객!" 두 청년은 그 명호를 알고 있었던지 일시지간 모두 안색이 변했다. 용류옥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을 따름이었다. "두 분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이름이오." 그의 태도는 오만하지도, 그렇다고 겸손을 가장하지도 않은 평범한 것이었다. 그는 두 사람과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그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소생은 볼 일을 마쳤으니 이만 가 봐야겠소. 청컨대 두 분은 서로 화합하시기 바라오." 그것은 어쩌면 훗날을 위한 당부인지도 몰랐다. 말을 마친 용류옥은 몸을 돌렸다. 두 청년은 감히 그를 만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싸움에 끼어 든 신비의 청년 풍운유객에 대해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미리 소문을 들어 상대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설마하니 내공대결로 맞붙어 있는 자신들을 떼어놓을 정도로 높은 공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넓은 무림천하를 주유하면서도 지금까지 신주칠기성 이외에 또 다른 젊은 고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저 자는 우리들보다 강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심리적 압박감의 이면에서 슬그머니 피어 오르는 감정이었다. 그들은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에게 적대감보다는 호감을 느꼈다. 용류옥이 저만큼 가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자코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분께선 혹 화중화(花中花)를 아시오?" 그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중기와 운중룡이 흠칫 놀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무림제일화요. 두 분은 혹 아시오?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진할수록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용류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진중하게 덧붙였다. "부디 명심하시기를 바라오. 미와 향기는 무서운 독성(毒性)을 감추는 교활한 수단이 될 수도 있소." 그는 이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림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기중기와 운중룡은 자기들끼리만 남게 되자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 중 기중기가 먼저 쓴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운중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차후로는 누가 강자인가하는 문제를 종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정해 봅시다." "그럽시다. 그건 나도 대찬성이오." 기중기도 자못 흔쾌하게 응수했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부딪쳐 봐야 피차에 손해 밖에는 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또 설사 싸워서 승부를 낸다 한들 그것이 끝은 아니지 않은가? 용류옥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그들이 꺾어야 할 적수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기중기는 몸을 일으키더니 운중룡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렇다 해서 오늘 일을 없던 것으로 하자는 뜻은 아니오. 형(兄)의 가르침은 언제고 꼭 돌려 드리겠소." "핫핫핫... 언제든 사양하지 않겠소." 두 사람은 호쾌하게 웃었다. 승부욕과 자부심에서라면 쌍벽을 이루는 그들이 최초로 의기투합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폐허가 되어 버린 주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신주칠기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시대에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신진고수들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뒤로 이어질 이세대(二世代) 무림의 주인이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공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식의 오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번 일로 크게 달라졌다. 특히 그들의 뇌리에는 풍운유객이라는 자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기중기가 손을 내밀었다. "형장의 가르침은 잘 받았소이다. 그럼 차후에......." 운중룡도 눈에서 광채를 번뜩이며 마주 공수했다. "오히려 불초가 가르침을 많이 받았소이다. 역시 전진무학(全眞武學)은 으뜸이외다." 그들은 명문의 후예답게 예의에도 상대에게 뒤지지 않았다. 언제 생명을 내걸고 싸웠더냐 싶도록 두 사람의 얼굴에는 선망의 빛마저 은은히 떠오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호호호... 이 곳에서 영웅을 두 분 씩이나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군요." 한 가닥 고혹적인 음성이 들려 오자 기중기와 운중룡은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마치 넋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한 그루의 계목 아래였다. 그림인가, 환상(幻像)인가? 월궁(月宮)의 항아가 현신한 듯 아름답기 그지 없는 홍의미녀가 계목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그윽한 눈길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니.......' '오오! 정녕 눈이 부실 정도로다.' 기중기와 운중룡은 그녀의 미모에 완전히 빠져 방금 전 용류옥이 했던 말은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다. -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진할수록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혹 알고 계시는지......? 기중기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포권하며 물었다. "소저께서는 뉘시오?" 홍의미녀는 생긋 웃더니 꽃잎 같은 입술을 움직여 달콤한 음성을 흘려냈다. "이 몸의 이름은 항예(姮蘂)예요. 무림에서 화중화(花中花)라는 과분한 칭호를 얻고 있답니다." "아!" 기중기와 운중룡은 다 함께 탄성을 발했다. 그들은 말로만 듣던 천하제일미녀를 만나 내심 무척이나 기뻤다. 그것이 자신들을 파멸로 몰고가는 함정인지도 모르는 채. ③ 휘류류륭--! 이른바 만년빙천극지(萬年氷天極地). 그 곳은 사천(四川)에서 가장 험지(險地)로 알려진 무산(巫山)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무산을 이루고 있는 십이봉은 항상 운해(雲海)에 잠겨 있어 일대 장관을 연출해 낸다. 그 중에서도 최고봉인 신녀봉(神女峯)은 천상에서 신녀(神女)가 하강했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봉정(峯頂)에는 언제부터인가 짙은 안개를 배경으로 하나의 비궁(秘宮)이 존재했으되 정말로 전설상의 신녀가 그 곳에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스스스....... 농무(濃霧)는 비궁을 감싸고 있는 상태에서 강풍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고 계속 그 신비한 색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궁은 전체가 대리석으로 축조되어 있었는데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이라야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지붕의 윤곽 뿐이었다. 밀전(密殿). 바닥에는 붉은 빛깔의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벽에는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천정에 수천 개의 보석으로 장식된 궁등(宮燈)이 매달려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개중 한쪽 벽에는 커다란 화로가 있었는데 한창 불이 활활 타올라 실내를 훈훈하게 덥혀 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아늑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 백색 비단포가 씌워진 의자 위에 한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대체로 청수한 용모의 소유자였으며 일신에서 만인을 압도하는 기상마저도 느껴졌다. 하지만 웬지 그의 눈에서는 정기(精氣)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향령(香鈴), 뒤틀린 과거지사야 모두 이 용화천(龍華天)의 탓이오만 그로 인해 당신이 욕망궁(欲望宮)의 노예가 되는 것은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무림왕(武林王) 용화천. 무림에서는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그가 이렇듯 초췌하고 나약한 모습이 되어 이 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맞은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곳에는 내부가 은은히 비쳐 보이는 휘장이 천정에서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망사로 된 휘장을 통해 넓은 침대와 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한 미부(美婦)의 모습이 보였다. 잠자리 날개같이 하늘하늘한 나삼에 감싸여 반라(半裸)나 다름없는 그녀의 몸매에는 미태가 줄줄 흘러 넘쳤다. 침대 옆에서 두 명의 시녀가 그녀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용화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향령, 부디 마음을 돌리시오. 당신이 나를 어찌 하든 그것은 죄의 대가일테니 전부 다 감수하겠소. 그러나 나와의 일 때문에 천하무림의 안녕을 위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그의 간절한 음성에 비해 휘장 속에서 흘러 나온 음성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지? 안되었지만 너무 늦었어. 그 동안의 세월을 내가 어떻게 보냈는지 그것을 안다면 당신은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할 거야." "향령, 나는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화천의 말은 예의 차가운 음성에 의해 끊겼다. "당신은 꿈많고 선량했던 한 소녀의 인생을 무참하게 유린했어. 야망에 눈이 어두워 재물로 삼았던 거야. 어디 그 뿐인가? 아무 가책도 없이 자신을 가르친 사부(師父)마저 해쳤어. 그런 인간이 지금은 선심을 가장해 중원의 안위를 염려하다니 정말이지 가증스러워서 구역질이 날 정도야." 무림왕 용화천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나를 더 욕해 주오. 내 더러운 목도 당신이 직접 베어 가오. 그리고 지난 날의 일은 잊어 주시오." "흥! 말이 통하지 않는군." 미부는 코웃음을 치더니 내뱉듯 말을 이었다. "분명히 내가 늦었다고 말했을 텐데? 욕망궁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야. 두고 봐, 머지않아 천하를 통일할 테니까." "향령......!" "당신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무림성도 붕괴되었고 무림은 현재 흑과 백으로 나뉘어 저희들끼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본궁은 일단 그들끼리 싸우도록 유도한 다음... 호호호홋......!" 득의한 웃음으로 뒷말을 대신하는 그녀를 향해 용화천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향령, 매사가 당신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오. 또한 중원은 그대의 고향이거늘 그대는 고향이 피로 물드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게요?" "고향?" 그녀는 반문하더니 요란하게 웃어 제꼈다. "호호호호......! 정말 우습군. 고향이란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모든 것을 잃는 순간 그 모두를 버리기로 했어. 몸과 마음, 심지어는 아들까지......." 용화천이 놀라서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게 무슨 뜻이오? 아들이라니......?" 휘장 속 미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무슨 뜻이긴? 저주의 씨앗을 이르는 말이지. 뿌린 자가 도망을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거두게 된 더러운 물건이야. 호호... 내가 그 물건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 용화천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당신이 그 때 아들을 낳았었단 말이오......?" "그래, 불행하게도 그렇게 되었어.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뱃 속에서부터 질기게도 생명줄을 이어 가더군." "어... 어디 있소? 그 아이는......?" 용화천의 낯빛이 거의 새카맣게 죽어 버렸다. "호호호호... 끝내 한심한 위인이로군. 그걸 내게 묻다니, 호호호... 나는 그 물건을 벌써 당신에게 보냈어. 달리 말하면 당신은 그 물건을 만났었다는 얘기야." "맙소사! 어찌 이런 일이......" 용화천은 머리 위에서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이와 동시에 그의 뇌리에는 영감처럼 강하게 부딪쳐오는 것이 있었다. '그럼......?' 그는 무림성을 떠나올 때, 아들인 용백검과 무존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 얘기하던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의 용백검은 확실히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부친인 자신을 비웃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전에 보이던 혐오감은 배제되고 전에 없이 자기완성을 향한 오연함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 점을 두고 용화천은 단지 아들이 무척 성장해 있다 생각하고 대견하게 여겼을 뿐 달리 어떤 의구심도 갖지 못했었다. 그는 신음과 함께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림성의 검아(劍兒)가... 그... 아이였소?" "호호호... 머리가 아주 안돌아가지는 않는군. 맞아, 그 물건은 용백검이란 아이와 바꿔치기 되었어. 상관없지 않아? 천음선자가 낳았든 내가 낳았든 당신의 아들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로 인해 용화천은 가히 넋을 잃고 굳어져 버렸다. "그랬었군. 내 죄업이 그 두 아이들에게까지......." 그는 심장을 조여오는 통한을 이기지 못해 그만 눈을 내리감고 말았다. 그의 감은 눈 위로 이슬이 내비쳤다. 그러다 문득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도로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럼 검아는? 검아는 어디에 있소?" "호호호호홋......!" 휘장 속의 여인은 대답 대신 미친 듯이 웃어 제꼈다. "설마... 그 아이를 죽이지는 않았겠지?" "호호호호홋......!" 여인의 웃음에서는 섬뜩할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용화천의 가슴을 그대로 무너지게 만드는....... ④ 애향령(艾香鈴). 그녀는 해천오로(海天五老) 중 장천우사(掌天羽士) 애환령의 딸로써 남들처럼 그저 평범한 성장과정을 거쳤다. 그러다 연보라빛 꿈이 마악 부풀던 소녀기(少女期)에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왕자님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용화천이었다. 부친의 제자였던 그는 애향령과 가까이 지내게 되자 곧 애정의 뜻을 표했으며, 그녀는 그런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꿈결같이 달콤한 시간들을 보냈고 그 덕분에 애향령은 언젠가는 용화천과 나란히 말을 달려 천하를 행협(行俠)하리라는 나름의 희망에 부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실로 상상치도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용화천이 수혈을 찍어 그녀를 잠들게 한 후, 그녀의 부친인 애환령을 시해하고 그 곳을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애향령은 그 충격으로 인해 일시지간 정신착란이 되는 불운까지도 겪었다.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그 후에야 알았다. 이후로 부친과 정인(情人), 아니 인생의 전부를 잃은 그녀는 날로 불러 가는 배를 안고 사해를 떠돌며 유리걸식했다. 천하에 그런 처지에 놓인 여인을 돌보아 줄 정도로 인심이 후한 위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녀의 고생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녀는 용화천의 분신인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가 바로 그녀가 그토록 경원시하던 용류옥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그녀는 한 인물에게 거두어져 아들과 함께 천축(天竺)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때마침 중원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변복을 하고 내려왔던 천축의 마승(魔僧) 탑리지목(塔利之木)의 눈에 뜨여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천축에서의 오 년은 애향령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그녀는 욕망궁의 대법왕(大法王)인 대환희불(大歡喜佛) 적천대라마(赤天大喇 )의 양녀가 되었으며 그 곳에서 욕망궁 비전의 사이괴술(邪異怪術)을 전부 다 익혔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무엇보다 그녀의 심성(心性)이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온갖 사공(邪功)과 마공(魔功)을 닥치는대로 가리지 않고 익히다 보니 절로 마성(魔性)이 깃들게 되었다. 그 상태에서 애향령은 용류옥을 데리고 중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중원의 이곳 저곳을 은밀히 내사하고 다니는 한편, 용류옥으로 하여금 용백검의 대역이 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 간에 이룩한 그녀의 성취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욕망궁의 명령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암중으로 마화궁(欲望魔花宮)이라는 특수조직을 만들어 궁주로써 군림하고 있었다. 마화궁. 이는 이름에서 연상되듯 장차 중원무림의 청춘들을 좀먹게 할 무서운 힘의 원천이었다. 그것은 애향령이 시행해 왔던 잔랄한 수법들을 들추어 보면 능히 알고도 남으리라. "호호호호호......." 이 곳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환락의 요지(瑤地)쯤 될까? 오색의 수증기가 환상인 양 뭉클뭉클 피어 오르는 곳에서 무려 수십 명에 달하는 나녀(裸女)들이 한 명의 청년을 둘러싸고 질탕한 육체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청년은 나녀들의 군무(群舞)에 파묻힌 채 연신 몸을 허우적거리며 황홀경을 헤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오관이 무척이나 준수하며 일편으로는 귀공자 특유의 권태와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얼굴의 소유자, 그는 지난 날 무림성의 소성주였던 용백검이었다. 여색(女色)을 즐기는 습성은 여전하되 그는 과거 옥기린(玉麒麟)이라 불리웠던 그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시의 용백검은 내막이야 어떻든 늘상 당당한 정복자의 면모로써 여인들에게 다가갔었건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어이없게도 그가 여인들에게 정복을 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정기(精氣)를 얼마나 빨렸는지 그는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고 눈자위도 거무스름하게 변색이 된 채 움푹 꺼져 있었다. 그러고도 용백검은 눈에서 연신 광기(狂氣)를 흘리며 끊임없이 여인들의 풍만한 육체를 탐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죽음의 육림(肉林) 속에 빠진 용백검을 지켜 보는 한 쌍의 눈길이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그 눈에서는 기어이 피눈물이 흘려 내렸다. 요지의 한 쪽으로 월문(月門)이 나 있었는데 그 앞에서 무림왕 용화천이 스스로 가슴을 마구 쥐어 뜯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는 의미로 애향령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으며 자청하여 일신의 공력을 폐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화천은 용서를 받기는 커녕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지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오오, 신이여! 이것이 나에게 내려진 형벌이었습니까?" 그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더니 월문의 기둥을 부여잡고 겨우 신형을 지탱했다. 그리고는 길게 탄식을 쏟아냈다. "향령, 이건 아니오. 당신은 지금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소. 하늘이 두려운들 어찌 이런 죄를......." 문득 뒤에서 그 말을 받는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호호호호홋......! 하늘이 언제 약자를 도왔단 말인가? 호호호호... 또한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용화천은 그 소리에 예외없이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우우우... 그대의 파천마소(破天魔笑)는 극에 이르렀군.' 그는 이 무서운 희대의 마녀(魔女)를 두고 새삼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는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한 채 내심 읊조렸다. '이렇게 되면 남은 희망이라고는 오직 그 아이 뿐이다. 나의 또 다른 아들, 유옥(柳玉)이라고 했던가......?' 용화천은 아들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용류옥을 생각하자 다시금 가슴이 저며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로 하여금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은 만사를 초탈해 버린 듯 정명하기 그지 없었던 용류옥의 눈빛이었다. '아들아, 만일 너에게만이라도 하늘의 보살핌이 있다면....... 너로 인해 이 모든 원한과 저주가 종식될 수 있으리라.' "쿨룩, 쿨룩......!" 용화천은 기둥을 잡고 기침을 했다. 답답한 음향과 더불어 그의 입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무산에 은밀히 자리잡고 있는 마(魔)의 비궁, 과연 이 곳에 얽혀 있는 인과(因果)는 소멸될 수 있을 것인지......? 제15장 무림(武林)을 움직이는 실권자(實權者)들 ① 하늘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치솟아 있는 준험고봉(峻險高峯)이다. 설사 성성이라 해도 기어오르지 못할 매끄러운 석벽이 장장 천여 장에 걸쳐 가파른 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만추(晩秋). 천산만악이 풍엽으로 인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으되 외방산(外方山)의 천인애(天刃崖)만은 유독 만년설의 흰 빛으로 휘감겨 있었다. 휘류류류륭--! 가을이 이르건 늦건 논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 곳 정봉(頂峯) 일대에는 사시사철 설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므로. 무수한 백룡(白龍)의 떼가 허공으로 떠오르듯 눈보라는 시도 때도 없이 소용돌이를 이루었고 그 덕분에 정봉은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흰 장막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하나의 거성(巨城)이 우뚝 서 있었다. 둘레가 무려 사십오 리에 달한다는 그 거대한 성은 전체적으로 핏빛을 띈 채 눈보라 속에서도 웅자를 과시하고 있었다. 대군마성(大群魔城). 만인의 선혈로 이룩되었다던가? 일찌기 세인들은 이 곳을 일컬어 패도무림(覇道武林)의 마지막 하늘이라고 칭했다. 실제로도 대군마성은 사도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당금 흑도의 팔십일만 효웅들이 신앙처럼 숭상하고 있는 곳으로써 이를 총관장하는 인물은 사황(邪皇) 냉전령(冷典嶺)이었다. 냉전령은 본래 출신이 보잘 것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우한 소년 시절 가운데 자연스럽게 투지(鬪志)를 키워가게 되었다. 강호의 파락호들에게 함부로 얻어터지며 알게 모르게 힘의 위대성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소싯적부터 단 하나의 친구만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차갑고 비정하나 말없이 자신을 따라주는 살인도구, 즉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 힘이 있는 자만이 살 것이며(力有者生), 힘이 없는 자는 끝내 죽고 말 것이다(力無者死). 이것은 평소 냉전령이 습관처럼 부르짖던 말이다. 강호의 생리를 그대로 대변해 놓은 듯한. 그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는 일로 힘을 키워 가더니 자신의 애검과 더불어 남북무림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그 결과로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매 그는 남무림에서 흑도의 총표파자(總飄把子)라는 무상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령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십칠 년에 걸친 기나긴 사투(死鬪) 끝에 중원흑도의 종사(宗師)로 군림하게 되었다. 무림성에 접수된 이후로는 무림왕(武林王)이라는 거목으로 인해 제 이인자로 머물러야 했지만. 휘이이-- 휘이이잉--! 쉬지 않고 피어 오르는 눈보라는 그저 단순한 자연현상만은 아니었다. 자연을 기본으로 하여 인공이 가미되었다고나 할까? 그것은 흑도무림을 이끄는 흑뇌군사부(黑腦軍士府)의 마뇌자(魔腦子)가 피를 토하면서까지 전력을 투구해 창안해 낸 만년선회한성진(萬年旋廻寒星陣)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작금의 눈보라는 그 자체가 군마회의 본산인 대군마성의 사대호법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우르르르-- 흰 빛의 두터운 장막 속에서는 늘 뇌전(雷電)이 울부짖는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유령이 배회하는 듯 괴이한 광경이 계속 펼쳐지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츠츠츠츳--! 동에서 서로, 혹은 좌에서 우로, 날줄과 씨줄이 교차되며 천이 짜여지 듯 짙은 눈보라가 하나의 거대하고도 치밀한 기문포진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일천 명의 유령마군단(幽靈魔軍團). 이들은 사황이 친히 기른 군마회의 영걸들이었다. 똑같이 삼 년여에 걸친 지옥훈련 끝에 초인검사(超人劍士)로 성장하였고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군마회에 모조리 바친다는 각오로 한 집단을 이루게 된 자들이었다. 유령마군단에 속한 인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핏빛 혈잠사로 짠 보의(寶衣)를 걸치고 있으며, 열여덟 가지의 은잠술(隱潛術)에 서른여섯 종의 살인술(殺人術)로 무장한 채 언제나 대군마성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들은 진세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만에 하나 영패(令牌)를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그 날 사황이 정한 암호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유는 물론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에게 주살 당하고 만다. 이르자면 유령마군단은 군마회의 사대호법 중 두 번째였다. 대군마성이 내려다 보이는 하늘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늘 백 마리의 비응(飛鷹)이 떠돌고 있고 그 위에는 각기 한 사람 씩의 난장이가 타고 있다. 그들은 일명 비천마익위(飛天魔翼衛)라 불리우며 대군마성으로 스며드는 침입자가 있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도 사대호법 중 하나로 끼이고 있었다. 제 사의 호법. 그들은 항시 사황의 근처에서 머물러 있다. 군마회 내에서 가장 강하기도 하지만 움직임도 그만치 신속한 무사들이다. 그들은 그림자가 없는 자들로 인식되어져 있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에게는 영무검위(影無劍衛)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 막상 찾아 보면 어디에도 없으나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 어디에서인지도 모르게 나타난다. 이는 영무검위를 단적으로 잘 표현한 말이었다. 그들은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사황에게서 일백 장 이상을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백장위(百丈衛)라는 웃지 못할 별명이 붙어버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황 냉전령. 위의 사실들로 미루어 그는 현재 틀림없이 흑도의 마지막 보루이다. 무림성이 와해된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그가 이룩해 놓은 보루에 도전하려 드는 자가 없었다. 따라서 무림전역에서 냉전령의 명성은 점차 부동(不動)의 것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초겨울이다. 대지는 황폐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 때가 일 년 중 가장 잔인한 절기(節期)인지도 모른다. 지상에 존재하던 많은 생명들이 동면(冬眠)에 들어가면서 그 기운을 감추어 버리므로. 하늘은 세우(細雨)를 뿌려내고 있었다. 소리 없는 우막(雨幕)으로 대지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차갑게 적셔 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면 대지는 얼어 붙고 말리라. 그 아래로 마운령의 흐름이 내리닫는 곳에는 천리하(千里河)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간간이 무성한 갈대들이 싸늘하게 다가드는 북서풍에 가느다란 허리를 내맡긴 채 휘청이고 있을 뿐. 스스스스....... 눈물처럼 흘러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한 쌍의 눈이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향하는 곳에는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대군마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눈의 주인은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입가에는 묘한 웃음을 피워 올리고 있기도 하다. 그의 웃음에서는 일말의 관용도, 친근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강철의 조각(彫刻)에 잘못 새겨진 작은 험집처럼 날카롭고 섬뜩하여 어찌 보면 사악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일신에 핏빛의 전포(戰袍)를 걸친 그는 그렇듯 웃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십이월 이십일....... 현판(懸板)을 떼어 내야지." 그는 싸늘한 어조로 자신의 말에 토를 달았다. "사황은 늙은 너구리다. 효웅(梟雄)이라고 불리울만은 하나 대영웅(大英雄)에는 한참 못미치는 자다. 그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마운령의 이름마저 대신하던 대군마성의 현판을 필히 떼어내야 한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예의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고요한 가운데 죽음과 멸망을 선언하는, 그리하여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도 않을 정도로 전율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뒤쪽에는 아까부터 무수한 무사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그가 뭐라 나직하게 지시하자 비밀의 장막을 펼치듯 어딘가로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② 실로 아름답다. 보이는 장소가 모두 기화요초로 뒤덮여 있으니 왜 안그렇겠는가? 이만 평이 넘는 대지를 차지한 화원(花園)은 하늘에서 뿌려내는 희디흰 눈보라와 어울려 가히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렇듯 기기묘묘한 자태의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는 가운데 또한 각 종류의 기수이금(奇獸異禽)까지도 화원이 좁다 하고 한껏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이 화원이야말로 사황의 힘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른바 군마화원(群魔花園). 흑도의 최후 보루로써 군림해 온 곳으로 사황 냉전령은 이 군마화원에 칩거한 채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흑도무림계의 제반사를 충직한 수하들에게 맡긴 채 권좌를 이양한 황부(皇父)처럼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내부에서 지시만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이 곳 군마화원에서 때아닌 연회(宴會)가 벌어졌다. 화원의 한가운데에 등나무 껍질로 짜여진 거대한 팔선탁(八仙卓)이 놓이고 그 위에는 과일과 고기가 담긴 접시가 가득 올려졌다.명주(明酒)가 담겼음직한 은병도 십여 개나 놓였다. 또 팔선탁의 한 쪽에는 막 잘라 낸 생화(生花)로 꾸며진 큼직한 꽃바구니도 하나 놓여져 사뭇 운치까지 더해 주었다. 그 주위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태반이 서 있는 사람이고 앉아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 자는 얼굴이 대추빛처럼 붉었고 양쪽 눈썹이 세 치 길이로써 매우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자포(紫布)를 걸치고 있었으며 푹신한 태사의에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풍당당했다. 그가 다름 아닌 사황 냉전령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웬지 그와 눈이 마주치기를 꺼려 하는 듯 했고 말소리도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냈다. 신새벽부터 열린 이 별난 회합에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군마평의회(群魔評議會). 이것은 실상 매달 한 차례씩 열리는 집회였다. 대군마성이 지휘하고 있는 군마회 소속의 팔십일만 무사들의 행동이며 거취가 이 자리에서 결정이 나게 된다. 군마회의 표행( 行)이며 은장(銀莊)들의 수입 등이 거론되고 군마회 일급 무사들의 승진문제며, 간혹 있는 반역자에 대한 처단 문제까지도 모두 이 곳에서 다루어진다. 때문에 군마회에서 호법장로(護法長老) 이상의 지위인 이십팔인은 필히 이 자리에 참석해야 되었고 군마회 소속의 무사들은 이 회의에 참석하는 군마이십팔숙좌(群魔二十八宿座) 중 한 자리에 끼이는 것을 필생의 소원으로 삼고 있었다. 스물여덟 개의 잔(盞)은 한결같이 투명한 수정(水晶)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잔에는 모두 호박색의 술이 절반 가량 담긴 채 군마이십팔숙좌라 불리는 흑도의 거물들, 즉 이십팔 명 장로들의 손에 각기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그들을 앞에 두고 사황 냉전령은 당면한 세 가지 문제를 들추며 거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최근 들어 군마회의 수입이 저조한 듯하니 어떤 일을 해서든 부족분을 상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대군마성의 직속 무사들이 강호 각처에 퍼져 나가 있는 분타(分舵)나 지부(支部)의 무사들과 종전보다 좀 더 친밀한 교류를 가지도록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이 점은 그가 전날 무림성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제안한 것으로써 상호간에 분열이 있어서는 훗날 위급한 일이 생겼을 시에 어떤 결과가 오게 될지를 감안하고 한 말이었다. "또 세 번째로는......." 사황 냉전령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야말로 오늘의 군마평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잔은 아직 비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십팔 명의 잔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잔을 들지 않았는데 감히 누가 그를 앞질러 잔을 비우겠는가? 사황은 새삼 눈을 들어 모여 있는 자들을 두루 훑어 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연신 자광(紫光)이 폭사되고 있었다. 그는 칩거 중에 소녀채음비법(素女採淫秘法)을 써서 동정녀들의 음기를 섭취하고 있는지라 내공의 수위가 강호의 제 일선에서 활약할 때보다 오히려 더욱 증가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다들 조그마한 분노라도 살까봐 내심으로 전전긍긍이었으며 그와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했다. 사황은 주름진 손가락으로 잔을 매만졌다. 다른 사람의 잔은 수정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그의 잔만은 황금배(黃金盃)였다. 이런 면은 그가 오랫 동안 무림의 제 이인자로 머물렀던 일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 전력이 그를 지존(至尊)이라는 지위에 무한한 애착을 갖도록 만들었으므로. 그는 눈길을 황금배로 향하며 느긋하게 입술을 떼었다. "무림성은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강호를 독식(獨食) 하였으며 그 때문에 본좌는 그들을 견제하는데만 반생(半生)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억지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가 당시에 무림왕 용화천에게 절대복종을 맹세한 것이나 무림성에 온갖 충성을 바쳤던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일괄적인 침묵일 뿐이었다. 사황의 말이 맞건 틀리건 항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에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제명될지도 모르니까. 사황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림왕은 지극히 편협되고 유아독존적인 인물이다. 본좌는 그의 아성을 붕괴시키기 위해 그 옛날 한신(韓信)이 초에 굴복했듯 잠시 머리를 숙여 주었다. 그 목적은 오직 흑도천하(黑道天下)를 세우기 위함이었고 무수한 피와 죽음이 있은 이후에 본좌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기회주의자인 그는 아전인수(我田引水)에도 능했다. 그가 한 짓이라야 무림왕이 자리를 비운 틈에 무림성 내의 분열이 팽창되자 그 핑계로 배신 행위를 저지른 것 뿐이지 않은가? 자기합리화를 마친 그는 선동에도 열을 올렸다. "만에 하나, 무림왕이 재등장하여 무림성을 재건한다면 천하의 흑도녹림도(黑道綠林道)들이 그와 맞서 싸울 것이며 마지막 한 사람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황의 눈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따지고 보면 그도 여타의 무림인들과 마찬가지로 전 인생을 투지와 야망으로 일관해 온 인물이나 그에게 있어 무림왕 용화천의 존재란 하나의 넘지 못할 거산(巨山)이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무림왕을 존경함과 동시에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으되 지금은 그 같은 인물이 되고자 노력 중이었다. "본좌는 절대 제 이인자가 될 수 없으며 다시는 누구도 본좌를 제 이인자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무림왕이 현신한다 해도 다를 바 없다." 사황은 흥분에 겨워 천천히 잔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거울에 비치는 그의 그림자인 양 잔을 높이 쳐들었다. "금후로는 무림왕이든 그의 후계자이든 우리의 앞길을 막을 자는 없노니, 내 목숨을 걸고 이를 천명하노라!" 그의 우렁찬 부르짖음으로 인해 일대가 온통 뒤흔들렸다. 덕분에 장내의 분위기는 긴장과 더불어 극도로 숙연해졌다. 사황은 또한 이 자리를 빌어 군마이십팔숙 중 누구도 무림성 쪽으로 기울어지지 못하도록 강하게 쐐기를 박았다. "이 잔에 채워진 술은 흑도의 피이니, 이 잔을 비우는 자는 군마회를 위해 목숨을 내걸 각오가 되어 있는 것으로 알겠다. 우리는 지금 피의 맹세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우우-- 여부가 있겠소이까? 대종사." "이 맹세가 깨어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우리 군마회에 도전하지 못하리라. 설사 무림성의 망령(亡靈)일지라도......!" 군마평의회는 더할 나위 없이 엄숙한 행사로 이어졌다. 모든 사람이 마침내 술잔을 입에 대고 차가우면서도 뜨겁게 느껴지는 술을 목구멍 안으로 깊숙히 흘려 넣었다. 그런데 분위기를 깨는 한 가닥 외침이 있었다. "사황께 아뢰오--!" 동시에 한 명의 시위가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날 듯이 회의장으로 뛰어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다급한 음성이 튀어 나왔다. "사황이시여, 속히 이 배첩(拜帖)부터 보아 주십시오." 사황의 앞에 무작정 오체투지하는 그 자는 다름이 아니라 대군마성의 총순찰(總巡察)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냉면마웅(冷面魔雄) 이각(李角). 그의 냉혹하고 치밀한 성격은 흑도무림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눈 앞에서 제 아들이 피를 뿜으며 죽어 자빠진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이각이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회의장 안으로 불쑥 뛰어 들었다면 틀림없이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대체 어떤 일이 있기에 저 자가......?' 군마이십팔숙은 저마다 아연함과 더불어 불안한 표정을 떠올린 채 그의 행동거지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황의 신색도 평소와는 달리 어지간히 굳어져 있었다. 웬만한 일 같으면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으나 냉면마웅이 그렇게 나오니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사황은 사황이었다. 그는 이각을 흘깃 쓸어보며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고작 배첩 한 장으로 인해 소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래, 갑자기 천자(天子)가 첩지를 내리기라도 했더냐?" 사황의 목에는 일순 가느다란 주름이 잡히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살의(殺意)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에게는 피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할 때면 목에 잔주름을 잡는 괴벽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전시 효과를 노린 행동이었다. 어쨌든 총순찰로 인해 중대한 맹세가 도중에 날아가 버렸으니 수하들에게 관대하지 못한 그의 상식으로는 처벌이란 당연한 이치였다. 다만 일에는 선후(先後)가 있는지라 그는 일단 총순찰 이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배첩을 이리 다오." ③ 이각의 수중에 있던 물체가 사황에게로 건너갔다. 그것은 배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보따리였다. 고작 한 장의 봉서가 기이하게도 네 겹이나 되는 천에 감싸여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것은......?" 사황의 눈꼬리가 찢어질 듯 위로 치켜 올라갔다. 네 장의 천은 펼쳐 본즉 놀랍게도 네 개의 깃발이었다. 즉 대군마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네 개의 증표였다. "이, 이럴 수가! 군마사천왕번(群魔四天王幡)이......!" 사황은 자신도 모르게 태사의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네 장의 깃발 중 하나는 핏빛이었으며 표면에 흑룡(黑龍)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군마이십팔숙도 안색이 창백해져 각기 한 마디씩 부르짖었다. "흑룡천왕번(黑龍天王幡)! 오오, 저 깃발은 대군마성의 사대위각(四大衛閣) 가운데 한 곳인 흑룡각의 표식이 아닌가?" "오오! 어찌 이런 일이....... 흑룡각이 무너지기 전에는 저것이 여기로 전해올 리가 없는데......." "누, 누가 감히 저 깃발을 떼어 냈단 말인가?" 그들은 곧이어 흰 호랑이가 수놓아진 핏빛 깃발도 보았다. 백호천왕번(白虎天王幡). 역시 군마사대위각 중 하나인 백호각의 표식이다. 이것도 물론 백호각이 붕괴되기 전에는 내려질 리가 없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백호각이 소리 소문도 없이 멸절되었다는 의미다. "잠마천왕번(潛魔天王幡)도......." "우우우... 청봉천왕번(靑鳳天王幡)도 함께 들어 있소이다." 결론은 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되었다. "그럼 사대위각이 모조리 누군가에게 침공을......?" "대체 어떤 놈이 겁도 없이 그런 짓을 하고 군마사천왕번을 떼어 이 곳으로 보냈단 말인가?" 사황 냉전령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마십이팔숙도 모두 대로하는 한편, 크나큰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사대위각으로 말하자면 대군마성을 수호하는 제 일관문이라 할 수 있었다. 대군마성의 백리 밖에서 외곽지역의 수비를 맡고 있었으며 철저하고도 엄밀한 경계를 펴 왔다. 사대위각에는 각각 천 명 씩의 일급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만에 하나라도 그 중 한 곳이 적을 맞는다면 즉각 위급신호가 대군마성의 내부에까지 전해지도록 안배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마사천왕번이 전부 다 떼어지도록 신호 한 번 오르지 않았다면 내성(內城)에서 누리던 지금껏의 일상적인 평화란 적의 조롱거리 밖에는 안되었다는 뜻이다. "죽일 놈! 대체 어떤 놈이......." 사황은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발작이 터지려는 것을 눌러 참고는 네 장의 깃발 속에서 한 장의 배첩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핏빛을 띄고 있었으며 네모 반듯했다. 이윽고 사황이 배첩을 개봉하자 흰 종이가 끄집어 내졌고 힘차게 보이는 큼직큼직한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오늘 안으로 대군마성을 접수하겠노라. 대군마성의 현판을 떼어냄과 동시에 사황을 나의 수하로 삼겠다. 사대위각을 무너뜨리는 것으로써 내 힘을 증명했으니 부디 시세를 역행하는 우(愚)는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이 찢어 죽일! 감히 어떤 종자가......?" 마침내 사황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와장창--! 그가 손을 한 번 거칠게 휘젓자 태사의고 팔선탁이고 가릴 것 없이 단번에 모두 부서져 날아가 버렸다. "대군마성을 접수하겠다고? 그것도 하루 만에? 크핫핫핫.... 이런 망언을 하는 미친 놈이 있다니, 더구나 나를 수하로 삼겠다고? 내 그 놈을 찾아 가루를 내지 않으면 성을 갈고 말리라." 극도로 흥분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의 부르짖음은 그다지 틀린 말만도 아니었다. 사실 천자가 군사를 일으켜 밀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하루 만에 대군마성을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구파일방의 전 고수가 힘을 합쳐 봉기한다 해도 마찬가지였으며 당금 강호인 중 이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불가능한 일을 이루겠노라며 공공연히 선언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나에게는 자비심이 없다. 단 특별히 나를 막기 위해 저항하는 것만은 허락한다. 이것은 너희들의 자존심에 대한 마지막 예우다. 그런다고 승리가 허용되지는 않겠지만. 나는 종내 그 곳의 모든 것을 취하게 될 것이다. 마록(摩麓).> "마록......? 이 놈은 뭣하는 놈이었더냐?" 사황의 머리카락이 모조리 창날처럼 빳빳하게 일어섰다. 마록이라는 이름은 삽시에 회오리 바람이 되어 대군마성을 휘저었다. 왜 안그렇겠는가? 흑도의 살아 있는 전설인 대군마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자였으니 말이다. 금검세가(金劍世家). 공히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이자 중원팔대세가 연맹의 맹주가 (盟主家)이기도 하다. 그들 팔대세가의 연맹이란 달리 말하면 의검맹(義劍盟)이고 금검세가의 장주인 금검대협(金劍大俠) 상관자기(上官自機)가 맹주로 등극하여 그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의검맹은 현재 명실상부한 강호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구파일방을 제치고 정도무림을 장악한 그들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치달리고 있었다. 금검세가의 장원은 하북(河北)의 석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그 맞은 편에 또 하나의 거대한 성이 축조되었다. 일명 대정성(大正城). 그 성은 의검맹의 총단이었다. 말하자면 중원팔대세가의 총집결지요, 정도무림의 본령(本領)이었다. "하하하... 여러분, 음식과 술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드시면서 즐기십시오." 전체가 진귀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넓은 대전(大殿)이다. 비단옷을 입은 뚱뚱한 청년이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의 앞에는 큰 대리석 탁자가 놓여 있었고 주위로 일곱 명의 근엄해 보이는 인물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재삼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애써 주신 덕에 본 의검맹의 성세는 날로 융성해지고 있습니다." 탁자 위에는 각종의 산해진미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들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중인들은 다름 아닌 중원팔대세가의 가주들이었다. "허허허... 치하를 받아야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총순검이시네. 그 동안 정말 노고가 컸지. 안 그렇소, 여러분?"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한 중년인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는 황산(黃山) 영호세가(令狐世家)의 가주로써 천운수사(天雲秀士) 영호중(令虎重)이라는 인물이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외다." 그들을 한 사람씩 소개해 보면 이렇다. 방금 말했던 천운수사 영호중을 위시하여 서주(徐州) 신필세가(神筆世家)의 가주인 신필수사(神筆秀士) 종익현(鍾翼玄), 강남(江南)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비천신협(飛天神俠) 남궁박(南宮拍). 게다가 사천(四川) 당문세가(唐門世家)의 천수여래(千手如來) 당문호(唐文豪)와 운남(雲南) 곽씨세가(郭氏世家)의 쌍창진건곤(雙槍震乾坤) 곽진천(郭震天) 등도 배석하고 있었다. 절강(浙江)의 철수신군(鐵手神君) 철호악(鐵虎嶽)이나 호북(湖北) 수운세가(水運世家)의 사해수룡(四海水龍) 진삼명(陣三明)도 물론 빠질 리 없었다. 그들은 무림성의 기세에 눌려 빛을 잃었던 지난 날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근자에 들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팔대세가동맹의 성장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총단인 대정성은 철옹성이 되었으며 일 만에 가까운 무림인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천하의 중심지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능히 제패(制覇)라도 할 것 같았다. 특히 황금을 걸고 무사를 모집한 일은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무려 팔 천에 이르는 정예고수들이 선발되었고 그들로 인해 대정성은 당년의 무림성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총순검 숙야빈(叔夜賓)에게 치하가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모두가 그의 작품(?)이나 진배없었으므로. "하하하하핫......!" 중인들은 유쾌하게 술을 마시며 이 자축연(自祝宴)을 즐겼다. 사실 무사를 황금으로 사들인다는 것은 강호인들의 생리로 미루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그 계획은 이처럼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팔천 명의 고수들은 숙야빈의 판단에 따라 등급이 매겨져 벌써 각 부처로 나뉘어 배속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그들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다. 숙야빈. 무림사상 초유(初有)의 일을 해낸 그는 평소의 습관을 잊지 않고 주머니 속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더니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의 쌀찐 얼굴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후후... 그대들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서 황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을.' 숙야빈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중원팔대세가의 가주들을 새삼 빙 둘러 보았다. '그대들은 무림계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내부적으로 재정상태가 부실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지. 내가 뒤로 은자 일천만 냥씩을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종이 호랑이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게야.' 그는 팔대세가 가주들의 복색(服色)이 이전에 비해 월등 화려해져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사탕을 열심히 빨았다. '어때, 돈벼락을 맞으니 좋긴 좋지? 후후... 내 금력(金力)으로 인해 그대들의 생활양식은 크게 변했다. 듣자 하니 기름진 음식에 보석과 향유(香油), 심지어는 미녀들 속에서 환락을 누리기까지도 한다고......?' 숙야빈은 내심 그들을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후후... 그대들이 믿고 있는 팔천의 정병(精兵)들은 실제론 내 사병(私兵)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대들에게 돈을 내고 장소를 빌린 셈이지. 바야흐로 내 야망이 꽃을 피울 터전 말이야.' 그는 시선을 돌리더니 창문을 통해 맞은 편에 있는 금검세가를 넌즈시 바라 보았다. '맹주, 당신께는 좀 안된 일이오만. 후후후.......' ④ 금검대협 상관자기. 그는 뒷짐을 진 채 텅 빈 금검전(金劍殿)을 홀로 서성이고 있었다. 과거에 비해 그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보이던 풍도는 다 어디 가고 초췌해 보일 정도로 여위어 있었다. 얼굴도 골이 패인 데다가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와 예전처럼 인자하게 느껴지는 인상이 아니었다. 그는 입구 쪽을 향해 한껏 음성을 돋우어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 말에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상관자기는 예상하고 있었던 듯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나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하총관(河總官)! 어디 있는 게냐?" 역시 대답이 없었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그 자신의 음성만이 웅웅거리며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이었다. 상관자기는 금세 풀이 죽어 신음처럼 내뱉았다. "대체... 대체 모두 다 어디로 간 것이냐? 내 주위에서는 누구도 얼씬을 않다니......." 뒤늦게야 한 인물이 주춤주춤 금검전 안으로 들어섰다. "맹주......." 상관자기는 그를 보자 반색을 했다. "오! 부총관(副總官), 장내의 고수들은 다 어디 갔느냐?" 그 자는 의검맹의 부총관직을 맡고 있는 남위(南韋)였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모두 대정성으로 갔습니다, 맹주." "그 곳엔 왜?" "연회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회?" 상관자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연회가 벌어졌단 말이냐?" 남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초빙을 완료했다고 자축연을 벌이는 모양입니다. 팔대가주들을 모아 놓고 의검맹의 전 무사들에게 한 턱 쓴다고......." "음, 그렇느냐?" 상관자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면 한 구석을 씰룩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본장을 깡그리 비워 두어도 된단 말이냐?" "그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겠습니까?" "하긴......." 상관자기는 탄식하더니 다시 물었다. "본장에는 인원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속하를 합하여 겨우 십여 명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각자 잔무(殘務)가 있어 따로 맹주의 명을 받들기는 어렵습니다." 남위의 말에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의검맹의 일원으로써 맹주인 나의 명을 따르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누구의 명을 따른다는 것이냐?" "그, 그야......." 남위는 난색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총순검이겠지. 아니냐? 허허... 그래, 그 아이가 이번에는 무슨 구실로 나를 따돌렸더냐?" "총순검께선 맹주의 병환이 깊어졌으므로 조용히 쉬시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 뿐이었느냐?" "저... 앞으로 대정성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노라고도 했습니다." 상관자기의 눈썹이 홱 곤두섰다. "감히! 노부의 의향도 묻지 않고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인가?" 남위는 당황하여 얼른 얼버무렸다. "거, 거기까지는 속하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놈! 네 놈까지도 내 앞에서 시치미를 뗄 셈이냐?" "맹주......." "경을 치기 전에 속히 대답해라. 칠가(七家)의 가주들은 어떻느냐? 그들도 총순검의 명에 따른다고 했더냐?" 상관자기가 대노하여 추궁을 해오자 남위도 그제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의검맹은 더 이상 팔가연맹체가 아닙니다, 맹주." "으음!" "총순검이라는 직위는 그저 명분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그는 현재 대정성주(大正城主)나 다름이 없습니다." 상관자기의 흰 수염이 바람을 받은 듯 부르르 떨렸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남위는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속하가 어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상황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는 황금으로 모든 사람들을 노예화시키고 있습니다. 중원팔대세가만 해도 그 자의 황금이 없으면 당장 끼니조차 이어가기 힘들 지경입니다." "뭐, 뭣이?" 상관자기는 흡사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화를 삭히느라 그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당장... 숙야빈, 그 놈을 이 곳으로 불러 들여라." 남위가 안색이 변하여 되물었다. "대체 어쩌시려고......?" "시끄럽다! 어서 시키는대로 해라." 남위는 거의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맹주,"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금검전을 나갔다. 금검대협 상관자기는 다시금 텅 비어버린 대전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전신을 무섭게 떨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남위가 코가 석자는 되어 돌아왔다. 그의 기색을 즉시 눈치채고 상관자기가 호령을 했다. "어찌 너 혼자 오느냐?" "저... 그것이......." 남위는 민망하여 두 손을 비볐다. 그러자 상관자기의 안면이 그의 심리를 반영한 듯 푸들푸들 떨렸다. "놈이 오지 않겠다고 하더냐?" 남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급전(急傳)을 보냈습니다만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회답이 왔습니다. 차후에 연락을 하겠노라고......." 쾅! 상관자기는 또 한 차례 발로 바닥을 굴렀다. "뭣이? 놈이 그 따위 답을 전해 왔단 말이냐?" 남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상관자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더는 용납할 수 없다. 가서 노부의 검(劍)을 가져 오너라." "맹주......." "어서 가져오라고 하지 않느냐? 네 놈마저도 노부를 우습게 보고 명을 거역할 셈이냐?" "아, 아닙니다! 하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남위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금검전을 나서더니 한 자루의 금검(金劍)을 가지고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맹주." 상관자기는 자신의 애검(愛劍)을 받아 들고는 검신을 쓰윽 훑어 보았다. 이어 그는 굳은 어조로 말했다. "대정성으로 가겠다." 그의 퀭한 눈에서 일순 기이한 신광이 번뜩였다. "만일 내가 두 시진 이내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맹주......?" 그를 응시하는 남위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불길한 느낌이 확 다가들어 자신도 모르게 그리 된 것이었다. 상관자기가 어투를 바꾸어 부드럽게 말했다. "남위, 노부가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들어 주겠느냐?" "맹주......." 남위의 건장한 신체가 어느 덧 가느다란 떨림을 보였다. 나이가 삼십대 초반인 그는 금검대협의 제자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이나 다름이 없었다. 비록 지금은 처지가 몰락하여 그저 외로운 한 노인이 되어 버렸지만 전날에 상관자기는 고아인 남위를 거두어 벌모세수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지닌 무공의 대부분을 가르쳐 주었다. 상관자기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 언제고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았느니,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을......." 그는 벌써 마음이 가라앉은 듯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두 시진 후, 그 때까지도 노부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는 사모(師母)를 데리고 이 곳을 떠나라. 될수록 멀리로 말이다." "맹주......!" "허허... 너도 연회에 불려 가지 못하고 이 곳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불원간 숙청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다행히도 노부에게 가족이라고는 내자 뿐이니 운신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다. 실종된 봉아(鳳兒)가 마음에 걸린다만 혹시 그 아이를 만나게 되면 내 얘기를 전해 다오. 차후의 일이야 어찌 되었건 우선 화는 면해야 하지 않겠느냐?" "맹주......." "꼭 부탁한다." 말을 마치자 상관자기는 몸을 돌렸다. "사부님......!" 털썩! 남위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동시에 그는 넋이 나가버린 표정으로 사라져가는 금검대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오! 지난 날에는 그토록 위세가 당당하셨건만.......' 그의 망막에 상관자기의 굽은 등이 아프게 맺혀왔다. 금검대협 상관자기는 근자에 이르러 갑작스레 노쇠해졌다. 성격도 침울하고 날카롭게 변해 측근에서는 아마도 그 이유가 딸인 상관영봉이 실종된 탓이리라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남위만은 잘 알고 있었다. 금검대협의 정신과 육체를 좀먹어가는 고심은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또한 한 가닥 의혹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상관자기는 팔대세가의 총맹주일 뿐더러 무공 방면으로도 정도(正道)의 최고봉에 달하는 내가고수다. 그런 그가 단지 심적 고통으로 인해 단시일 내에 그 정도로 무력해질 수 있는지......? '어쩌면......!' 남위는 줄곧 기피해 왔던 의문을 비로소 머릿 속에 떠올려 보았지만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제절레 저었다. 그것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 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분명한 것은 그가 금검대협의 등에서 언뜻 사신(死神)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⑤ "뭐냐, 네 놈들은?" 상관자기는 대정성의 정문에서 저지를 당하자 대로했다. 의검맹의 맹주인 그를 상대로 십여 명의 중년고수들이 나서서 진(陣)을 치듯 가로막았던 것이다. "고이얀! 너희가 본좌를 몰라 본단 말이냐?" 그의 호령에도 중년인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황삼인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누구라 해도 상관 없습니다. 총순검께서 친히 내리신 영패가 없이는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관자기의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누구라 해도?"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에 본좌도 포함되어 있단 말이지?" "그런 셈... 으헉!" 황삼인은 말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눈 앞에서 금광(金光)이 번뜩 일었다 싶은 순간, 몸이 두 동강 나버린 것이었다. "미... 미친......!" "막아라!" 챙! 챙......! 십여 명의 중년인들은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그 광경을 본 금검대협 상관자기는 하늘을 우러러 처절하게 웃었다. "핫핫핫......! 대체 이 곳이 어디냐? 맹주를 몰라 보는 놈이 있더니 네 놈들은 아예 내게 칼을 들이대는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명령에 따를 뿐." 위이이잉-- 차차창--! 중년인들은 말과 함께 노여움에 떨고 있는 상관자기를 맹렬하게 덮쳐갔다. 그 기세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죽일 놈들! 고작 황금에 눈이 어두워 변절을 하다니." 휘익--! 상관자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음 순간, 금검이 중년인들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하며 눈부신 금광을 뿌려냈다. "크아아악--!" 연이은 비명과 더불어 피보라가 장내를 뒤덮었다. 금검대협의 명성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당금 무림에서 독보적 절학이던 그의 금검구식(金劍九式)은 분노까지 가세되자 삽시에 대정성의 문전을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흐핫핫핫핫......!" 휘이익--! 상관자기는 일진의 광소를 터뜨림과 동시에 빛살처럼 성내로 쏘아져 들어갔다. "막아라--!" 명령에 따라 여기저기서 괴인영들이 번뜩이더니 그의 진로(進路)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숙야빈의 은자에 몸을 판 무사들이었다. "괘씸한......! 금검대협의 눈이 노기로 인해 붉게 충혈되었다. 파츠츠츳--! 금검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번뜩일 때마다 연신 비명이 터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을 가로막는 자는 무조건 베었다. 그러나 베어도 베어도 도무지 끝이 없었다. "우우우-- 우--!" 상관자기의 입에서 통한을 대변하는 한 줄기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는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몸을 띄웠다. 휘익! 우두둑....... 입 안의 사탕을 깨물어 막 목구멍으로 넘길 때, 그 맛이야말로 짜릿할 정도로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의검맹의 맹주가 찾아왔다고?" 숙야빈. 그는 열 사람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침상 위에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물었다. 다섯 명의 미녀들이 곁에 달라 붙어 그의 팔다리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 색으로 무장되어 있으되 안색만이 유독 창백한 한 중년인이 말했다. "정문에서 불과 한 마장을 통과하는 동안 도합 사십육 명의 무사들을 죽였습니다." 숙야빈은 그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미녀들 중 한 명이 몸을 기울여 사탕 한 알을 집어넣어 주었다. 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거의 투명하여 흑삼인 쪽에서 보면 둔부와 그 골짜기까지 다 비쳐 보일 정도였다. 숙야빈은 사탕을 받아 먹고 나서야 대꾸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그래도 아직 힘은 남아 있군." "이 곳까지 온다면 그의 힘은 구할이 소멸될 것입니다." "흠, 그 때까지의 희생자는?" "대략 백오십 명 정도 되리라 예상됩니다." "백오십이라......, 은자로 쳐서 대충 백 냥씩만 잡아도 장장 만오천 냥이라는 얘기군." 흑삼인은 칼같이 가느다란 눈에서 음침한 빛을 번뜩였다. "저희 흑천루(黑天樓)에서 흑사객(黑死客)들을 출동시키면 피해를 십 인 정도로 줄일 수 있습니다." 숙야빈은 히죽 웃었다. "이봐." "네......?" 흠칫하는 흑삼인에게 숙야빈은 손끝을 까딱여 보였다. "이리 좀 가까이 와 보게." 흑삼인은 영문을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다가왔다. "자네, 흑천루를 세운지 얼마나 됐지?" "십 년입니다." "호오! 십 년이나 되었다면 돈도 꽤 모았겠군?" 흑삼인, 즉 흑천루주(黑天樓主)는 어색하게 웃었다.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숙야선생께 흑천루를 삼 년간 빌려 드리게 된 것 아닙니까?" "훗훗... 하긴......." 숙야빈은 자못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계산에 그리도 어두우니 어떻게 돈을 모아? 그 둔한 머리로 십 년 간이나 흑천루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기적이야." "무슨 말씀인지......?" 모욕감을 느꼈는지 흑천루주는 안색이 일변했다. 흑천루란 일종의 살수단체(殺手團體)로써 그들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 그들의 무공은 철저히 살인술(殺人術) 위주로 되어 있으며 스스로의 죽음도 불사하는 살인기계들이었다. 추명살신(追命殺神) 여장청(呂長廳). 이것이 흑천루주의 이름이다. 그는 냉혹한 살인마로써 지금까지 천 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사내다. 그가 그 정도의 비웃음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내 이 애송이 놈을 당장......!' 여장청은 기세를 올리다 말고 멈칫했다. '쯧! 천정에 두 명, 침대 밑에 세 명, 벽 속에도 여섯 명이나 은잠해 있군. 그것도 최소한 오십 년 이상의 내공 수위를 지닌 자들이다. 이 자를 쳐죽이는 일이야 손가락 하나로도 가능하지만 그랬다가는 나 역시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괴상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저의 계산이 어째서 잘못 되었습니까?" "자넨 그걸 아직도 모르겠나?" 숙야빈은 사탕을 우물거리면서도 놀고 있었던 손을 뻗어 한 애첩의 젖꼭지를 비틀었다. "아이!" 애첩이 교성을 흘리며 허리를 꼬는 동안 그는 말했다. "흑사객 한 명 당 은자 천 냥이니 열 명이면 몇 냥인가?" "만 냥입니다. 그래도 만 오천 냥보다는 적지 않습니까?" "자네는 바보일세." 숙야빈은 잘라 말하더니 처음으로 정색을 지었다. "눈 앞의 것만 보는 정도의 안목은 누구에게나 있다. 흑천루의 인원이 전부 몇 명인가?" "백십팔 명입니다." "그래, 적지 않은 인원이야. 개중 열 명쯤 희생되어도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은자로 쳐도 만 냥 밖에는 안되지. 그러나 전체 전력(戰力)에는 십분지 일의 감소를 가져온다." "그런다 해도 흑천루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답답하기는! 흑천루를 사기 위해 내가 얼마를 지불했는지 잊었나? 개개인의 몸값으로 따지면 십일만팔천 냥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십만 냥을 투자했네." "그야 흑천루 자체가 값이 나가기 때문에......." "흥! 말은 잘 하는군. 그럼 십분지 일의 전력이 상실되어 내가 오만 냥을 잃게 되는 점에 대해서도 한 번 읊조려 보게." "아! 그런 계산법이......." 여장청은 질려 버린 듯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숙야빈은 사탕이 물려 있는 입을 비죽거렸다. "이제 자네가 왜 바보인지 알겠나?" 여장청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쳤다. '애송이 놈! 차라리 죽여 버릴테다.' 숙야빈이 그를 나직히 부른 것은 그 때였다. "여장청." "네, 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뒤로 삼 보만 물러나게." "왜......?" "왜는, 그래야만 자네의 생명이 보존되니까 말이지. 난 어떤 식으로든 재산이 축나는 것은 원치 않거든." 가뜩이나 창백한 여장청의 얼굴이 대번에 핼쑥해졌다. '귀신같은 자!' 제16장 권력이양(勸力移讓)의 이면사(裏面史) ① 쾅--! 문짝이 부서지면서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비틀거리며 내실로 뛰어든 인물은 얼굴과 의복은 물론 흰 수염까지도 시뻘겋게 피에 젖은 금검대협 상관자기였다. "네... 네 놈이......!" 상관자기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끝으로 여전히 침상에 비스듬히 드러누워있는 숙야빈을 가리켰다. 그의 노안(老眼)은 분노로 인해 무섭도록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숙야빈은 일어나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존경하오, 상관선배. 용은 늙어도 용이라는 속언을 이번 기회에 절감했소이다. 당신은 내 예상을 깨고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도합 이만사천육백 냥이나 날려 버리셨소." "으으... 놈! 감히......." 상관자기는 노화를 참지 못해 이를 부드득 갈며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양탄자에 핏자국이 찍혔다. 숙야빈은 혀를 끌끌 찼다. "쯧, 그 양탄자는 천축산으로 은자 오만 냥이나 되는 것이오. 당신은 또 내게 손해를 입히는구려." 상관자기는 더 듣기 싫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네 놈을 베어 버리겠다." 숙야빈은 히죽 웃었다. "아마 당신에게는 그럴 만한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늙은 체력은 한계를 넘어 섰으니까. 혹시 지금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겹지 않으시오?" "으으......." 상관자기는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걸어갔다. 숙야빈은 그 때까지도 역시 천연덕스럽게 사탕을 빨고 있을 뿐이었다. "내 네 놈을 단칼에......!" 츠츳! 마침내 금검이 아닌 혈검(血劍)이 치켜 올려졌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스스....... 천정이 미세하게 갈라지더니 그 틈으로 무엇인가 소리 없이 내려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거미였다. 상황을 모르는 상관자기는 검을 치켜 올린 채 계속하여 숙야빈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고, 이제 검을 내리치기만 하면 그는 목적한 바대로 숙야빈을 벨 수가 있었다. "네 놈은...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 야금야금 노부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 뿐만 아니라 중원팔가와 천하를 우롱하고......." 번뜩하고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비명은 숙야빈이 아니라 상관자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헉!" 쨍그랑! 검은 주인의 손을 벗어나 무참하게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의대협으로써 일세를 풍미하던 인물. 금검대협 상관자기가 서서히 무릎을 꺾고 있었다. 그의 눈 또한 허공을 향해 허망하게 뒤집히고 있었다. "간악한 놈, 독(毒)을......!" 숙야빈은 사탕이 물린 입으로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찮은 거미에 불과하오. 그 전에 당신이 매끼마다 먹었던 만성독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오. 하긴 내장이 반쯤 썩어 있을테니 그 정도로도 효력이야 확실하겠지만." 상관자기는 기가 막히는지 그 경황에도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러고도 네가... 인간을 자처하느냐......?"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본인은 그저 좀 더 유능한 사람이 무림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더는 말이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사이에 금검대협 상관자기는 숨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장청은 내실에 있다가 그 모든 상황을 다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 덧 짙은 공포감이 떠올라 있었다. 적어도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무엇에도 두려움을 모르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을 정도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대군마성. 감히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흑도제일지(黑道第一地)다. 당금 무림계에서 그 권위를 능가하는 단체라야 의검맹 뿐이다. 무림성이 붕괴와 함께 이룩되어진 그들 양대세력으로 인해 흑, 백 양도가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정립되고 있었다. 의검맹도 그렇지만 대군마성은 적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머무르며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도전장을 내밀기 전까지는. <마록으로 추정되는 자가 삼천 명의 가신(家臣)들을 거느리고 청랑진(靑狼鎭)에 머물러 있는 것이 확인됨. 그의 가신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음.> <군마사천왕번을 꺾은 것은 마록, 단 일인이었음. 현재 그는 대군마성을 향해 천천히 전진해 가고 있음.> <급(急)! 마록이 군마대로(群魔大路)로 접어 들었음. 역시 단신(單身)이나 주의 요망.> 이 일련의 보고(報告)들은 대군마성에 거센 바람을 일으켜 놓았다. 그것은 항차 전 무림을 피로 휘감아 버릴 패왕(覇王)의 거취가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가공스러운 행진은 맑은 하늘 아래서 대군마성을 향해 점진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훗날 무림사에 전설로 기록될 마록의 대장정(大長征)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승부는 아직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늘상 무심히 올려다 보는 하늘도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느낌이 사뭇 틀리다. 드높은 곳에서 한 덩이 벽옥(碧玉)처럼 머물러 있는 영원의 보석이랄지, 아니면 작은 조약돌 한 개로도 파괴시켜 버릴 수 있을 만큼 공허한 영화(榮華)의 상징이라고 할지....... 좌우간 이 날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투명했다. 그 짙푸름 아래에는 도도히 흐르는 한 줄기 강이 있었으며 강둑에는 갈대들이 흰 꽃을 피운 채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강안(江岸). 저벅, 저벅....... 누군가 대로(大路)를 따라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깨어나는 시각이다. 다른 때라면 대군마성으로 통하는 이 군마대로 위에는 의례 마차들이 치달리고 있기 마련이었으나 시간이 일러서인지 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강철로 조각된 것 같은 인상이었으되 헌헌대장부였다. 어딘지 모르게 권태로운 표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입매에서는 세상의 모두를 비웃는 듯한 기백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의 승부에는 목격자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음성도 역시 이상야릇하면서도 다부지게 느껴지는 일면이 있었다. 그는 대군마성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계속하여 읊조렸다. "내 자신이 나를 진정한 강자(强者)로 여길 수 있다면 그 뿐이다. 타인의 판단이나 인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는 눈을 들어 푸르디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고독했다. 한 때는 그 고독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던 나머지 아이들과 잘 어울려 보고자 노력도 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를 따돌려 외톨이로 만들었고 그 때에 나는 알게 되었다.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의 눈빛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활화산(活火山)의 용암처럼 그의 눈에서는 천하의 무엇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뜨겁고도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고독이 체질화(體質化)된 인물. 그는 언제, 어떤 곳에 있어도 늘 개성이 두드러지곤 했다. 때로는 막 허물어질 듯한 벼랑을 연상시켰으며 때로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의 망막에는 지금 도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 즉 삼천여 명의 시위 무사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의 안력은 벌써 십오리 전부터 그들의 추적을 모조리 읽어내고 있었다. 대군마성 일대에는 제 일급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다. 전 매복(埋伏)과 기관(機關) 등이 발동되어 하나의 거대한 호위진세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대군마성을 휘어 감은 채 짙은 살기(殺氣)를 품고 있었다. 다만 사위에서 간간이 묵영(墨影)들이 치솟아 오른다. 파팟! 팟!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겹겹의 포위망은 그렇게 조용하고도 은밀히 구축되어가고 있었다. ② 마록. 그는 도무지 주변 상황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포위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느긋하게 군림대로를 따라 마운령의 능선을 넘고 있었다. 그 곳에는 양쪽 가장자리로 철쭉이 활짝 피어 길을 열고 있었으며 스치는 바람이 마른 잎을 사방에 퍼뜨리고 있었다. 감상(感想)도 모르는 것일까? 주변의 풍물이 바뀌어도 마록의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일정한 박자에 맞추어 흔들리는 기계 인형처럼 그저 정해진 길로 직선을 그으며 무심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봐도 헛점투성이였다. 두부(頭部)는 물론 등과 배까지도 활짝 개방되어 있었으며 두 다리나 양팔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염두에 둔 무사라면 의당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절정고수 같으면 타인에게 바늘 끝 만한 헛점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마록은 이 점에서 여타의 사람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마음대로 공격해 보라는 것인지 그는 전신의 문호를 모두 열어둔 채 느릿느릿 걷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 마른 듯 하면서도 철인(鐵人)인 양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는 있으되 그는 산보라도 나선 사람처럼 시종 여유만만했다. 파파파팟--! 무사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고 있었다. 그리고 포위망이 좁혀짐에 따라 그들은 급기야 하나, 둘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일장 길이의 금창(金槍)에 핏빛 마두번(魔頭幡)을 맨 자들이 낙안애(落雁崖)라 불리우는 벼랑의 위쪽으로 표표히 날아 내렸다. 그들은 학익대진(鶴翼大陣)을 형성해 외곽을 포위했다. 그 뒤로 혈무(血霧)가 피어오르듯 땅 속으로부터 혈포괴인들이 나타나더니 피빛 장벽이 되어 마록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후후... 전후좌우, 가히 인해(人海)로군.' 마록은 포위자들의 숫자가 도합 팔천 명으로 불어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일체의 사념(思念)이 배제된 듯 무감동하고 건조하기만 했다. 뚜벅, 뚜벅....... 그는 뒷짐을 진 채로 걸었으며 혈포마영위루(血袍魔影衛樓)의 루주는 제 일진의 선두에 서서 그를 쏘아 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오백여 명에 이르는 인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애송이 놈!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군." 혈포마영위루는 수하도 거느리지 않고 단신으로 나타난 마록을 보자 화가 난다기 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점차 다가드는 마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좁혀지자 기현상이 벌어졌다. 어찌 된 셈인지 상대방은 표정 변화가 없는데 반해 인상을 쓰고 있던 혈포마영위루주의 안면은 갈수록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 순간의 그는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니! 그럼 내 존재가 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더란 말인가?' 사실이었다. 마록은 앞에 있는 자의 우그러진 면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뒤쪽에 버티고 서 있는 거성(巨城), 그리고 그 성을 안고 있는 산역 전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혈포환사(血袍幻邪)라 불리우는 마영위루주와 마록 간의 거리는 불과 오 장 정도로 좁혀졌다. 혈포환사는 대군마성의 군마이십팔숙, 즉 이십팔좌에 속하는 자로써 내삼당주(內三堂主) 가운데 하나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마록을 보며 잠시 안면을 씰룩거리다가 천천히 손을 치켜 들었다. 그의 손에는 혈채마황도(血彩魔皇刀)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이 수직으로 세워졌다가 다시 내리쳐지면 그 순간을 기해 일대에 은잠해 있던 전 무사들이 마록을 덮치게 될 것이며, 화살이 날고 암기가 떠오르는 대장관이 연출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으으......!" 어찌 된 영문인지 혈포환사는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그는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고 호흡까지도 무거워졌다. 불현듯 쳐들려 있는 손이 떨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는 전신에서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록이라는 거대한 벽(壁)에 의해 그는 어느 새 혼백마저 압도되어 버린 것이었다. '무신(武神)이다! 놈은....... 혈포환사는 그답지 않게 사색이 된 채 내심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한 모금 빨아 들인 연후에야 어느 정도 냉정을 회복한 듯 기세를 올렸다. "쳐라--!" 마침내 혈포환사의 입술 사이에서 포악한 일성이 터져 나오며 그의 혈채마황도가 세로로 허공을 쪼갰다. 츄릿--! 핏빛 검파가 사위로 뿜어지자 근처에 모여 있던 무사들이 발검(拔劍)과 동시에 곳곳에서 훌훌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비황석(飛 石), 자모추혼침(子母追魂針), 천갈지주독표(天蝎蜘蛛毒 ), 파천화혈전(破天化血箭), 음시구혼주(陰屍拘魂珠) 등의 암기들이 새카맣게 허공을 뒤덮었다. 파파파파팟--! 소위 십면매복(十面埋伏)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정녕 한 사람을 상대로 하기에는 너무도 무자비한 악마의 진세였다. 마록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화를 보였다. "ㅋ!" 그는 웃었다. 그리고 비로소 혈포환사를 망막에 담았다. '저것은 정녕 인간의 눈이 아니다! 인세의 모든 저주가 담긴 악마의 눈......!' 혈포환사는 상대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차후로도 그의 일생에 있어 그 순간은 가장 공포스러운 시각으로 기억이 되리라. 더구나 불행하게도 혈포환사는 심정과는 별개로 마록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마록이 지니고 있는 힘을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위치라는 얘기다. '우우... 대체 이 가공할 힘은......!' 그 사이, 마록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대들은 내 힘을 입증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고오오오....... "보여 주리라!" 콰르르르르-- 거대한 핏빛 기둥이 형성된다. 마록의 전신 팔만사천 모공에서 시뻘건 안개가 뭉클뭉클 솟아 나와 그의 몸뚱이 자체를 감싸 안은 채 하나의 혈탑(血塔)을 이룩해 가고 있었다. 콰콰콰콰--! 혈탑에서는 실로 강대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그 덕분에 사위는 점차로 핏빛 안개로 뒤덮여 갔다. 그 속에 마록의 신체가 머물고 있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길조차 없었다. 쿠르르르-- 그가 떨쳐내는 혈마풍살강(血魔風殺 )의 위력은 경이적이었다. 그를 향해 쏘아져 나가던 팔천여 개의 암기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고 던져질 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갔다. "헛! 이럴 수가......." "피해라--!" 무사들은 자지러질 듯 놀랐을 뿐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파파팟-- 파팟--! "컥! 크헉......!" 도처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하며 마록을 향해 다가서던 무사들은 속절없이 서 있던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혈포환사.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백짓장이 된 채 휘청이고 있었다. 한 때 무림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던 그도 작금과 같은 상황은 생전 보도 듣도 못했던 것이다. 언제 허공에서 내려섰는지 마록이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으으......!" 혈포환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비지땀만을 흘리고 있었다. 전의(戰意) 따위는 상실해 버린지 오래였다. 어지간해야 목숨이라도 내걸고 싸워볼 것이 아닌가? 그는 현재도 그렇지만 마록의 일신이 왜 그토록 허점 투성이였는지를 확연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에 대한 무한대의 자신감이 그 원인이었다. 마록이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혈사용권마주(血沙龍捲魔柱)다. 쓸만 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삼천패공(三千覇功) 중 서열 팔위의 무공이지." 혈포환사는 마록이 발을 내디딤에 따라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패력(無形覇力)에 의해 심신이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남은 일이라곤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부디 자비를......!" 혈포환사의 무릎이 마록의 앞에서 천천히 꺾였다. 하지만 별로 이상할 바는 없었다. 상대가 누구이던 강자(强者)에게 굴복하는 것이 사도의 오랜 율법이었으므로. 마록도 이에 준해 즉석에서 한 명의 수하를 거두었다. "좋아, 내게 충성을 하겠다면." 그는 약간 몸을 틀어 상대를 지나치며 여유있게 걸었다. "쉬고 있거라." ③ 대군마성은 장장 수십 년에 걸쳐 이룩되었으나 그 일각이 붕괴되는 데는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하룻밤에 전체가 초토화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제 일관 무너짐. 혈포환사 전면 항복.> 이 소식이 충격을 던져준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내성에는 그보다 더욱 놀라운 급보들이 속속 전달되었다. <마록, 제 이관 격파. 이천낭화마영수(二千浪花魔影手)가 그에 의해 모조리 제거됨.> <낙룡애(落龍崖)에 잠입했던 이개 군단(軍團) 괴멸.> <비천마걸(飛天魔傑)이 이끄는 군검수라군(群劍修羅軍), 마록의 소매 바람에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몰살됨.> <피신 요망. 마록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로 분석됨. 그는 여전히 수많은 가신들을 젖혀 놓고 단신으로 내성을 향하고 있음. 만약 그의 가신들마저 가세한다면.......> 와작! 사황은 맨 마지막에 들어 온 보고서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수중에서 구겨 버렸다. 놀랍게도 그의 머리카락은 한 나절 사이에 하얗게 세어 백발이 되어 있었다. 백미(白眉)야 원래 그의 징표였지만 그것도 평소와는 달리 윤기를 잃고 누렇게 떠서 축 늘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그렇듯 꺼칠한 모습으로 검을 안은 채 십팔인교(十八人轎)에 타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그가 친필로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대군마성(大群魔城)> 마도인이라면 누구든 그 편액을 보면 즉각 해검(解劍)해야 한다. 흑도에 속한 인물인 경우에는 현판이 보이는 지점에 이를 때부터 하마(下馬)를 하고 의복을 단정히 정비해야 한다. 이는 흑도에서 있어온 불문율이었다. 그러던 것이, 현 시점에 이르러 한 인물에 의해 지독히도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마록! 그 자는 누구인가?" 사황은 직접 대면하기도 전에 벌써 마록의 힘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비록 기회를 거머쥐는데 재빠르다고는 하나 그는 대군마성을 세운 자답게 무공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절정고수로서의 감각을 소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우... 엄청난 힘이 다가서고 있다. 이것은 그 자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다. 가히 거악(巨嶽)에 버금가는.......' 사황은 눈을 들어 힐끗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진세로 인한 눈보라가 종전보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나 그의 불안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 마록이 이 진세마저 격파한다면 어떠한 안배로도 그를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빌어먹을! 고작 풋내기로 인해 사황이라 불리우는 내가 공포에 질려야 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면의 저 밑바닥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하나의 의문이 있어 그의 주먹은 은연중 스르르 풀렸다. '놈의 힘은 어떤 무공에서 기인된 것일까? 또 그 무공의 연원은......? 혹시 장춘도나 불야성, 혈사해 중 하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의 생각이 거기에 미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였다. 쿠쿠쿠쿠-- 대군마성을 호위하고 있던 진세가 모종의 회오리에 휘감기더니 팔십일개 사문(死門)의 축(軸)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어억--!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 지반이 들썩거리는 가운데 핏빛 그림자 하나가 느릿느릿 사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록이었다. 그는 역시 뒷짐을 진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세 시진 동안 내내 격전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지쳤다거나 피로를 느끼는 듯한 기색이 일체 드러나지 않았다. 마록은 무려 이천사백 명에 달하는 일급무사들을 격퇴시킨 후, 멀쩡하게 사황을 찾은 것이었다. "사황." 그가 사황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군마성이라고 씌여진 편액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게가 실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 눈에 거슬리는 물건을 이리 다오." "뭐, 뭣이? 새파란 애송이 놈이 감히 내게......." 사황은 치를 떨며 수중의 검을 불쑥 치켜 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상당수의 무사들이 아무 기척도 없이 마록에게 덮쳐 들었다. 그들은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등 절세적인 은환술(隱幻術)로 모두 신형을 감추고 있는 상태였다. 마록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며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제법 빠른 자들이군. 그러나 나를 대적하기에는 멀었다." 파파파팟--! 팟팟── 팟── 마침내 땅 속으로부터 수십 자루의 검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검은 무복을 걸친 무사들이 허공으로 훌훌 떠올랐다. 기합성도 없다. 그들은 전문가답게 말이 없는 것은 물론 눈빛의 변화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베는 행위에만 충실을 기하는 그들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좋아, 이제야 무사다운 무사를 보는군." 마록은 포위되며 오히려 웃었다. 그들을 일컬어 영무위검(影無衛劍)이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그림자조차 지니지 않은 그들 암살자 전원이 마록 한 사람을 처치하고자 일시에 덤벼들고 있었다. 쐐애애액--! 수십 자루의 검이 몸을 난도질 할듯 덮쳐들 때에야 마록은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섰던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너희들은 살 자격이 있다. 그 정도면 내 수하가 될 수 있으니까. 내 너희들도 거두겠다." 휘리리링--! 마록의 몸체는 다시 붉은 회오리 바람으로 화해 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영무위사들이 제각기 난색을 표명하며 멈칫거리던 그 찰나였다. 우우우웅-- 허공에서 한 송이의 거대한 혈화(血花)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악마살인화(惡魔殺人花)!" 한 곳에서 외침이 일더니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구겁마령추(九劫魔靈鎚)!" 그 두 곳과 또 다른 방향에서도....... "무극장한수(無極長恨手)!" 도합 세 곳에서 마록의 음성이 들려 왔으며 그것의 세 곱절인 아홉 군데에서 그의 신형이 속속 나타났다. 그러더니 아홉 명의 마록은 각각 아홉 곱으로 불어나 삽시에 팔십일 명의 마록으로 화했다. 결과적으로 그 일대는 온통 마록 천지가 되고 말았다. "우우......! 극치에 이른 분신술이다." "도저히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죽음이 목전에 이르른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 같던 영무위사들도 그 광경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동요를 보였다. 다음 순간, 한 가닥 미풍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들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한 자 정도 떠올랐다. "어엇! 이게 무슨 무공......?"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그 상태에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상대를 공격하기는 커녕 지면으로 도로 내려 오고 싶어도 그들 중 아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무위사들을 그처럼 허공에 가두어 버린 마록은 사황을 무시하고 편액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가 건네주지 않는다면 내 직접 취하리라." "어림 없다!" 사황 냉전령의 눈이 살모사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그 전에 네 놈을 죽이겠다." 그는 십팔인교에서 위로 붕 떠올랐다. 이어 그는 가슴에 안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거머쥐며 신체를 쭈욱 폈다. 우두둑! 그의 검과 몸이 다 함께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되어 허공으로 더욱 높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츠츠츠--! 허공을 쪼개려는 듯 사황의 신형은 찰나적으로 은색의 검광에 뒤덮혀 버렸다. 그렇게 이루어진 은빛 광망은 그대로 마록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 광경을 보며 마록은 짧게 부르짖었다. "오라! 그리고 받으라." 그는 두 손을 하나로 합하더니 천천히 앞 쪽으로 벌렸다. 그 동작에 따라 허공에는 하나의 거대한 태극도형이 떠올랐다. 비검합일(飛劍合一)로 날아가던 사황의 신형은 곧장 그 태극도형에 걸려 들고 말았다. 그는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오오, 이럴 수가! 나의 내공이 사라지고 있다니......!" 은색 광망이 씻은 듯 거두어지며 사황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안색이 흑빛이 된 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 이것은 태극마해인(太極魔解印)! 오오, 설마했건만......." 멍한 눈으로 마록을 응시하며 그가 마지막으로 쏟아낸 음성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우우... 혈사해(血死海)......!" 마록. 사황을 단 일초로 제압해 버린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전 흑도인이 숭앙해 마지않았던 편액이 허공섭물로 소리도 없이 빨려와 그의 가슴에 안겨 들었다. "지금 이 시각부터 이 곳의 주인은 나다. 그대들이 섬길 것은 이 따위 허상이 아니라 나의 힘이다." 마록은 편액을 팔과 허리 사이에 낀 다음 전면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언제 지면으로 내려서게 되었는지 영무위사들이 그를 호위라도 하듯 말없이 따라 걷고 있었다. 그 광경은 흑도의 지존(至尊)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고 사위에 흩어져 있던 무사들에게까지 파급효과가 미쳤다. 무수한 무사들이 처음에는 주춤거렸으나 이내 하나, 둘씩 대군마성의 본전(本殿)으로 향하는 그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하늘이었던 사황을 뒤에 남겨둔 채....... 대군마성의 접수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무공실력으로 사황을 꺾은 마록은 당당히 흑도의 총맹주가 되었고, 전권(全權)이 그의 수중으로 고스란히 넘어 갔다. 사황 냉전령은 지금 태사의에 버티고 앉아 있는 마록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연신 흘러 내렸다. 사황은 마록의 발을 부여 잡더니 그 신발에다가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섬기겠소이다. 수하로 거두어 주십시오." 마록은 선선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대를 이 곳의 총책임자로 남게 하겠다. 어차피 이 곳은 너무 비좁아 나로서는 오래 머물 마음이 없다. 몇 가지 준비를 하는 동안에만 여기에 있게 될 것이며, 추후로는 보다 범위가 큰 정복에 나설 것이다." "하면......?" 놀라 묻는 사황에게 마록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 포부는 원대하다. 자세한 것은 나의 가신들과 얘기 하도록 해라. 다만 한 가지, 그대는 알아 두어라. 나는 시시껄렁한 병법(兵法) 따위는 부정하는 사람이다." "흐음?" "내가 숭배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힘이다. 나의 목표는 천하최강(天下最强)이며 이를 만인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마록은 대화를 가지는 중에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대군마성을 손아귀에 넣고도 그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을 뿐더러 우쭐해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 해서 그가 지닌 소신은 한층 더 빛나 보였으니 상대적으로 사황으로서는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혈사해! 과연 그 위용은 명불허전이구나.' 마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랜 기간 떠나 있어 중원을 아직 잘 모른다. 때문에 사황, 그대 같은 수하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감사하오이다, 신명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는 사황을 보며 마록은 내심 부언했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자인지는 정보망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교활한 지혜를 가진 자, 실은 그래서 필요했었지.' 이 날 이후로 마록의 본래 수하들은 십분지 일 정도만 외부에 남고 모두 대군마성으로 입성(入城)했다. 중원으로 들어와 거처를 정하지 못했던 혈사해의 무사들은 바야흐로 대군마성을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시킬 태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들이 일으키는 돌풍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④ 우르르르릉-- 포효하며 떨어져 내리는 만장거폭(萬丈巨瀑). 그 기세란 한 마리의 성난 잠룡(潛龍)이 구천(九泉)의 고고함을 비웃으며 일로 충천해 오르는 것 같았다. 이름하여 만인혈폭(萬刃血瀑). 폭포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멀리서 바라볼 경우 만 개의 칼날이 핏빛으로 물든 채 대지에 내리꽂히는 듯한 착각을 유발시키기 때문이었다. 우르르르-- 릉-- 폭포수가 대지에 가하는 압력은 어림잡아도 족히 오천만 관은 될 듯 했다. 이러한 만인혈폭 아래에는 백장담(百丈潭)이라는 짙푸른 심연(深淵)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그 담은 추운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았다. 콰콰콰콰-- 콰아아-- 흡사 폭뢰가 터지 듯 만인혈폭은 백장담에 물기둥을 형성시켜 놓으며 쉬지 않고 무섭게 덮쳐 내리고 있었다. 벌써 수만 년 째다. 물의 윤회는 정녕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까지도....... 자연계(自然界)에 존재하는 그 어떤 힘도 만인혈폭의 흐름을 끊어 버릴 수는 없으리라. 한 사람. 철인(鐵人)인 양 강인한 기개로 대지에 버티고 서 있다. 그의 어깨 위로는 오월의 하늘이 푸른 휘장처럼 걸리어 있었다. 그다지 우람한 편도 아니면서 웬지 무겁고 장대한 인상이다. 아니, 오히려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정성을 다해 깎아 만든 전신(戰神)의 조각품이 혹 그와 같이 생겼지 않을까? 얼굴만 해도 턱에는 각(角)이 완연한 한편, 자신만만한 직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는 지극히 오연해 보인다. 마록(摩麓). 그 만한 기세로 대지를 압도할 자는 달리 더 없다. "바람....... 훗훗...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고자 했었지." 마록의 입에서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입술도 거의 벌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의 어떤 존재라도 무너뜨려 버리는 한 줄기 회오리 바람 말이다. 훗훗... 그래, 소년 시절부터 나는 대사막을 휘어감는 회오리 바람처럼 강한 인물이 되고자 했었다." 이 시대의 고독자(孤獨者). 고독한 운명을 바탕으로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친구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혹시 그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모르되 그 이전까지는 천하의 모든 인간들이 오직 그에게 꺾이기 위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오리 바람을 동경한 나머지 대사막의 횡단을 시도 했고, 그 와중에 모래 속에 가라앉아 있던 신비의 왕국(王國)을 발견하게 되었다. 훗훗... 혈사해(血死海)를." 마록의 눈길이 위로 번쩍 쳐들렸다. 동시에 그의 눈빛은 천하 만물을 모조리 태워 버릴 듯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응집된 투혼(鬪魂)이 그 눈에 전부 깃들어 있었다. 최소한 마록과 비견될 수 있는 최강자가 아니고서는 지금 그의 눈에서 뿜어지고 있는 강렬한 빛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에 이를 수 있었다. 훗훗... 중원과 변황을 통틀어도 나의 일검을 받아낸 자는 없었다." 마록은 읊조린 다음 슬쩍 몸을 비틀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파팟! 그의 신형은 일시지간 한 줄기 백홍(白紅)의 기류로 화해 빛보다도 빠르게 만인혈폭의 허리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의 노호성이 대기를 가르며 허공에 울려 퍼졌다. "나를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베겠다!" 콰콰콰콰-- 전 우주(宇宙)를 하나로 합쳐 버릴 듯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강대한 힘이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쩌어억....... 정녕 눈으로 본들 믿을 수 있을까? 대지를 붕괴시킬 듯 떨어져 내리던 만인혈폭의 허리가 한 자루의 검에 의해 마침내 비스듬히 베어지고 말았으니....... - 그래, 나는 회오리 바람이다.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한다. 나는 최후까지 힘을 증명해 보일 것이며 모든 인간들을 내 검 아래 굴복하게 만들 것이다. 그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부르짖음은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최강자로써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전진만을 거듭할 것이므로. 석실(石室). 꽤 넓은데 반해 집기라고는 탁자와 의자 하나씩 뿐이다. 이 방이 새로운 대군마성주의 집무실이었다. 마록은 여기서 사황을 비롯한 수하들을 접견하고 강호정세를 토의한다. 그는 화려함이나 사치 등을 극단적으로 싫어하여 자신의 거처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고행(苦行)하는 선승(禪僧)의 방 같은 곳에서 그는 만족해 하고 있었다. 마록의 손에는 지금 흰 빛이 잡혀 있었다. 서릿발을 연상시키는 그 빛은 한 자루의 패검(覇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검이야말로 마록의 애인(愛人)이자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스읏! 그의 손이 가만히 움직였다. 어찌 보면 감미롭기까지 한 동작이다. 그는 마치 여인의 가슴을 더듬어 나가듯 피와 죽음의 신화를 이룩해 낸 손으로 자신의 애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앞쪽에서는 그가 오기 전까지 대군마성의 지배자로써 군림하고 있었던 사황이 무릎을 꿇은 채 뭔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제대로 머리를 쳐들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한시 바삐 그 자를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림대권(武林大權)을 장악하는데 크게 장애가 될 것입니다." "놈의 비중이 그 정도요?" 마록은 눈을 들어 상대를 정시했다. 현재로선 사황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그가 원하는 만큼의 존재가치를 발휘하고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원래 황금장주(黃金莊主)로써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의검맹의 총순검이 된 후로 숙야빈(叔夜賓)의 세력은 일신우일신 확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아주 치밀하게 강호의 거목(巨木)으로써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입니다." "거목......?" 마록의 눈에서 번뜩하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감정 표현이 적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기란 그리 흔한 일이 못되었다. 그 눈빛을 대한 사황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상대하기 힘든 자! 잠시도 방심을 할 수가 없으니.......' 이어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자칫 상대의 비위를 거슬렸다간 혈사해(血死海)의 패도무공에 의해 이제는 내공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 뿐인 목숨이 달아나게 생겼지 않은가? 그가 생각하기로 마록은 활화산(活火山)이었다. 기질적으로는 조용한 편이되 분출되어 나오는 그 힘에 부딪치면 끝장이다. 따라서 그 내용을 잘 아는 사황으로서는 내심이야 어떻든 일단 세심하게 마록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던 것이다. 마록의 입이 열린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훗훗... 방금 거목이라는 표현을 썼소?" "그렇... 습니다만......?" "사황은 앞으로 어휘 구사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숙야빈이라는 자에 대해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하오. 그러나 그를 거목으로 평가하는 것만은 용납치 않겠소." "그럼 그는 무엇입니까?" "놈은 그저 시류를 따라 흐르는 부평초에 불과하오." "부평초라고... 하셨습니까?" 이번에는 사황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하의 반을 나누어 가진 숙야빈을 부평초라고 말하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쯧, 심하군! 오만한 것도 정도 문제이지.' 사황이 보이지 않게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였다. 마록이 자신이 쏟아 놓았던 말에 대해 설명이라도 하듯 부언했다. "듣자 하니 그의 휘하에는 수십 만의 무사가 유치되어 있고 창고에는 십국(十國)을 이룩할 황금이 있다고 하던데, 맞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놈은 속물이오. 그것이 최대 약점이기도 하지." 사황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말씀인지 속하는 잘 알아 듣지 못하겠습니다." "후후... 그렇다면 쉽게 얘기하도록 하지." 마록은 묘한 웃음과 더불어 말을 이었다. "놈은 우선 무게가 열 근도 나가지 않는 자신의 뇌를 너무 믿고 있소. 고작해야 황금 밖에 헤아릴 줄 모르는데도 말이오." 그는 다시금 검을 소중한 보물 다루듯 매만졌다. "강호계는 장사판이 아니지 않소? 겨우 황금의 노예가 되어버린 낭인 무사들을 거느리고 의기양양해 하기에는 너무도 살벌한 곳이지. 실제적으로 그 무자비함과 잔혹함을 깨달으려면 그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치기 전에는 불가능하오." "그렇지만 그가 여태까지 이루어낸 성과는......." 사황의 말을 마록은 가볍게 잘랐다. "나도 놈이 총명한 것은 인정하지만 역시 거목은 아니오." "으음......." "놈이 이룩했다는 것들은 단 삼 일 만에 붕괴될 수 있소. 놈이 최대의 무기로 생각하는 황금과 화술(話術), 그 두 가지가 제압된다면 놈은 한낱 비곗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오." 그는 사황이 뭐라 말하기 전,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일은 나로 인해 단계적으로 성취될 것이오. 그것도 조속한 시일 내에 말이오." 당년 이십칠 세의 기남아(奇男兒). 마록은 이미 절대자적인 풍모까지도 나타내고 있었다. 이를 느낀 사황은 새삼 놀란 나머지 더 이상 항변하지 못했다. 문득 마록의 어조가 변화를 보인 것은 그 때였다. "이 넓디 넓은 대륙에서 나 마록의 가슴에 충격을 심어 준 인물은 오직 한 명에 불과하오." "그런 인물도 있기는 있었습니까?" "후후... 그렇소, 그 놈의 이름조차도 잊었지만." 마록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 잡혀 있는 하나의 영상은 더욱 뚜렷하게 윤곽을 잡아갔다. 천하에 둘도 없을 난봉꾼에다가 이렇다할 삶의 지표가 느껴지지 않던 한심한 표류자(漂流者)....... '그 때 나는 놈을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해야 했었다. 눈 앞에 대어(大魚)를 놓고도 겉만 보고 그릇된 판단을 했으니....... 당시에 놈을 수하로 거두었다면 지금쯤은 필경 정도무림까지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록은 그답지 않게 입술을 질겅 씹었다. '후회란 빨라도 늦는 법,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놈은 이제 내 휘하로 들어오지 않으리라. 그 간의 시간들을 헛되게 낭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가 이처럼 상대에게 경계심을 느끼는 것은 거의 본능이 일깨워 놓은 현상이었다. 그의 눈이 일순 신광을 발했다. '혹시나 하여 그 날 이후로 수하들을 풀어 놈의 시체를 찾게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놈은 언제고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겠지.' 마록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놈은 숙야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다. 그의 위장에는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갔을 정도였으니까. 후후후... 하긴 나보다 한 발 앞서 천하제일을 구가했던 무림왕(武林王)의 자식이니 왜 안그렇겠는가?' 그는 입술을 기이하게 일그러뜨렸다. '좋아, 놈이 재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의외의 변수가 없으면 천하제패를 한들 너무 시시하지 않겠는가?' 마록이 떠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용백검, 아니 용백검으로써 갖은 추태를 다 연출해 내던 용류옥(龍柳玉)이었다. 대군마성은 축축한 비에 마냥 젖어 들고 있었다. 항차 십팔만리 강호를 피와 함성으로 씻을 그들이었으나 비의 장막에 그 기세를 감춘 채 잠시 웅크리고 있었다. 하늘은 필시 이를 알진대, 그저 묵묵히 앞길을 살피지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만을 뿜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비와 안개로 탄식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제17장 각처에서 무르익는 전운(戰雲) ① 숙야빈. 강호인 가운데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천하제일의 거부(巨富)로써 천재적인 상술로 은자 일 냥을 팔천만 냥으로 늘린다는 속설이 붙은 상계(商界)의 귀재(鬼才)이다. 어디 그 뿐이랴? 중원팔대세가를 수중에 쥐고 흔들며 천하백도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의검맹 총순검의 지위에 올라 있다. 이 정도면 그를 당세의 기라성 같은 기협들 중 하나로 손꼽지 않을 수 없는데 정작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다. 겹겹의 휘장에 감추어져 있다고나 할까? 숙야빈은 우선 자신이 축적해 놓은 부(富)의 정도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어느 때고 마음 내키는대로 만천하를 상대로 막대한 황금을 뿌려 댈 따름이다. 그의 장원은 진시황의 아방궁을 방불케 한다. 그리고 그의 수하들은 타방파의 무사들보다 십 배나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 이로 미루어 숙야빈이 지닌 금력(金力)의 한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러 있었으나 그의 황금은 여지껏도 마르지 않았다. 장본인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처럼 대체 얼만큼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황금을 물처럼 사용하는 신비기협, 강호계에 있어 숙야빈의 저력이란 필설로 다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친서(親書) 한 장이면 실행되지 않는 청탁이 없었으며 그의 황금장이 하고자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따라서 숙야빈이라는 인물은 그 방면에 있어서는 살아있는 신화(神話)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었다. 백석전(白石殿). 녹지(綠地) 위에 세워진 그 건물은 찬란하기 그지 없었다. 우선 운남(雲南) 대리국(大理國)에서 실어 온 아름드리 대리석주(大理石柱) 일백팔 개가 드넓은 돌천정을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매 시각마다 달라지는 빛의 조화를 계산하여 세워진 건물인지라 여명(黎明)일 때에는 사위에 온통 은빛을 뿌려내며 석양(夕陽)을 받을 때에는 황금빛으로 엄숙하게 타오른다. 총면적이 백만 평이고 건평만 해도 십오만 평을 넘고 있다. 천하의 거장(巨匠)들이 지혜를 모아 이룩한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백 보마다 한 채씩 세워져 있고 각처에서 수집된 기수괴금(奇獸怪禽)이 노니는 뜨락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녹지에는 워낙 흔전만전이라 제 때에 따내지 않아 농익은 과일들이 저 혼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으며 기화요초들도 흐드러지게 피어 났다가 지기를 홀로 거듭하고 있었다. 이 곳이 숙야빈의 장원이었다. 그처럼 호사의 극을 달리는 장원들을 그는 한 채도 아니고 천하 각처에 무려 아홉 채나 더 이룩해 놓았다. 그리고는 기분에 따라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을 즐겁게 영위해 갔다. 신기한 점은 그가 언제 어느 장원으로 가든 항시 쾌적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이 곳 말고도 아홉 개의 이궁(離宮)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늘상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세 끼의 식사가 열 군데에서 매일 차려지고, 목욕 시켜줄 시녀들도 매일 저녁 욕조에서 그를 기다린다. 장원을 지키는 무사들도 숙야빈이 있든 없든 부지런히 하던 일을 계속하며 심지어는 서기(書記)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숙야빈의 행각은 열 명의 거부가 따로따로 씀직한 황금을 혼자서 다 쓰고 있는 셈이었다. "봄에는 항주(杭州)가 최고지." 대리석 바닥은 너무도 매끄러워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간 낙상하여 코가 깨질 지경이었다. "하늘은 투명하리만큼 맑고,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상쾌하기 이를 데 없으니, 여기가 곧 무릉도원이 아니랴?" 푹신한 비단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 앉아 있는 청년. 그는 살집이 지나치게 좋아 그렇지 몹시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늘 웃고 있는 표정인 데다가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거부감을 느낄 요소라곤 없었다. 더구나 그는 멋을 안다. 자신의 피부가 흰 것을 의식했는지 자주빛의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와 썩 잘 어울렸다. "낙양(洛陽)이나 장안(長安)의 장원도 운치가 있지만 이 곳 항주의 장원과는 또 맛이 다르지." 뚱보 청년은 정말로 입맛을 쩍 다시더니 탁자로 손을 가져갔다. 그 위에는 사탕이 가득 담긴 금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는 사탕 한 개를 입에 집어 넣으며 더욱 더 만족감을 표명했다. 그는 천하에 걱정이 없는 위인이다. 그에게 번뇌라는 것이 있다면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찐다는 정도랄까? 숙야빈이었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 호사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부(富)가 가져다 주는 모든 영화를 한 몸에 누리고 사는 자이다. 때문에 그는 만천하의 영웅호걸들에게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자 한 적은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일각에서는 그를 우상처럼 여기기도 하니까. 만사가 다 그렇듯 보이는 것은 결과 뿐이다. 사실 숙야빈이 이룩한 부는 공정한 방법에 의해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말이 좋아 상술의 귀재이지, 그는 자신이 지닌 교활한 재능을 발휘하여 재산을 긁어 모았다. 그가 수많은 방파에 도움을 주는 행위만 해도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분명 베풀고 있으되 그의 재산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만 갔으니 뭔가 지출을 상쇄시키는 수단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 각 문파들 중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그의 재정협조를 받지 않는 방파는 한 곳도 없었다. 어쨌든 숙야빈은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누가 어떤 일을 부탁하든 일단은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흔쾌히 들어 준다. 이로써 그의 성가는 더욱 더 높아만 가고....... "핫핫핫핫......." 숙야빈의 유쾌한 웃음 소리가 멀리에까지 울려 퍼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십여 가지의 취미 생활 가운데 한 가지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잔디밭에는 석회로 커다란 원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 안에서 여인들이 한창 씨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며 즐기는 일이 그의 취미생활이라는 것이었다. 여인들의 숫자는 대략 이십여 명이었다. 그녀들은 잔디밭에서 마구 얽히고 설켜 싸우고 있었으며 때로는 할퀴고 물어 뜯는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사지(四肢)를 이용해 상대의 몸을 아무렇게나 조여대는 정도는 보통이고 심지어는 젖가슴을 움켜 쥐어 비틀기까지 했다. 정녕 가관이었다. 개구쟁이 소년도 아니고 성숙할대로 성숙한 여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날뛰고 있는 광경이란 멀쩡한 정신 가지고는 도저히 볼만한 장면이 아니었다. 이 씨름에는 조건이 걸려 있다. 이긴 여인에게는 밤에 숙야빈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의례 무엇인가 담긴 하나의 갑(匣)을 선물로 받는다. 따라서 여인들이 그렇듯 죽기 살기로 씨름에 열중하는 이유는 숙야빈의 변태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정사의 대가로 제공하는 선물이 탐났기 때문이었다. 숙야빈은 황금을 물처럼 쓰는 인물답게 첩과 정사를 나눈 후에도 반드시 사례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커다란 황금덩이가, 어떤 때는 콩알 만한 흑진주가 열 개나 담긴 상자를 주어 여인들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 적도 있었다. 더러는 주안초(駐顔草)를 상자에 담아 여인을 놀래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거액의 전표(錢票)를 넣어 주기도 했으니 화대(花代)치고도 그렇듯 엄청난 화대는 천하에 다시 없으리라. 이 날 씨름의 결승전(?)에는 다홍(多紅)이라는 사천성(四川城) 출신의 미녀와 금마(金馬)라는 금발벽안의 미녀가 올라왔다. 숙야빈은 다홍과 금마가 서로 엉겨 붙어 잔디밭을 끝없이 뒹구는 것을 보며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다. "황금의 힘은 대단하지, ㅋㅋ... 아무 때고 사랑도 얻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내가 원하는 여인에게서 말이야." 그는 밤에 있을 질탕한 육체의 향연을 눈 앞에 그려 보며 자못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속사정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실로 순진하게 느껴지는 웃음이다. 도무지 아무런 사심도, 욕심도 없어 보이는. 이 웃음이야말로 오늘의 숙야빈을 있게 한 최고의 무기이다. 물론 그 자신도 이 점은 모르지 않았다. '과연 다홍과 금마 중 누가 이길까?' 그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한 자세로 관전했다. 다홍은 금마의 목을 조르고 있었으며, 금마는 숨이 막히는 듯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다홍의 젖가슴을 죽어라 물어 뜯고 있었다. "난 지지 않아! 오늘 밤 장주를 모실 여인은 나야." "흥! 누가 할 소릴?" 전생의 원수라도 그처럼 격렬하게 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절세미인들인 금마와 다홍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고 이마에는 굵은 심줄마저 툭툭 불거져 있었다. 실은 그 면이 숙야빈의 주된 구경거리였지만. 그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수동적인 인간형이었다. 그 대신 첩들의 발광을 통해 짜릿한 쾌감과 대리만족을 얻곤 한다. '흠, 확실히 금마의 거대한 엉덩이는 생긴대로 위력도 대단하군. 다홍이 일단 깔려 버리니까 맥을 못추잖아? 크ㅋ! 그래, 더 밀어 붙여 봐라.' 그의 눈에 금마가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홍의 엎어진 몸뚱이에 타고 앉아 박차를 가해대는 모습이 들어왔다. '후후후... 내 오늘 밤에는 금마(金馬), 네 년을 내 애마(愛馬)로 삼겠다. 네가 보여준 그대로 말이다.' 숙야빈은 흥분된 탓인지 눈 가장자리를 은은하게 붉혔다. 그의 귀로 다홍의 꽥꽥거리는 비명소리와 제 풀에 열이 오른 금마의 거친 호흡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올 때였다. 파팟! 한 여인이 뜨락을 가로질러 숙야빈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무(裸舞)를 벌이고 있는 뜨락의 여인들과는 달리 의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일명 나찰대(羅刹隊) 소속의 여인이다. 묘하게도 청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남성혐오증에 걸리게 된 숙야빈은 주위를 여인천지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중에는 절정의 무공을 지닌 삼백 명의 미녀들의 군단(軍團)이 있었다. 그녀들이 나찰대였으며 그의 호법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방금 출현한 여인은 나찰대의 총순찰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초조한 표정이 되어 가지고는 숙야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급보가 있습니다." ② "급보?" 숙야빈의 여유는 그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흑도무림계의 세력판도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금 흑도무림이라고 했느냐?" "예." "훗훗... 난 관심없다. 흑도 놈들은 피에 굶주린 들개들일 뿐이야. 늘 죽고 죽이는 작태만 거듭할 뿐이지. 야만스럽고 무식한 놈들, 나는 강호를 얻기 위해 그 천한 종자들과 어쩔 수 없이 교류를 하고 있다. 정말 슬픈 일이지." 숙야빈은 말과 감정이 정말로 일치했는지 입 안에서 내내 빨고 있던 사탕을 와삭 깨물어 버렸다. 그것을 보며 나찰대의 총순찰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밀지 한 장을 내놓았다. "보십시오, 이 안에 자세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미 없다니까! 안달이 나거든 네가 읽어 봐라." 총순찰은 그가 뭐라고 하든 공손한 태도로 무릎을 땅에 꿇더니 밀지를 읽기 시작했다. <흑도무림의 총본산(總本山)인 대군마성의 현판이 떼어졌음.> "뭐, 뭣! 대군마성의 현판이 떼어졌다고?" 숙야빈의 무심하던 얼굴이 대번에 확 일그러졌다. 그의 어깨가 무섭게 경련을 일으킨 것도 역시 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럼 사황이 패했단 말인가?" 그의 혼잣말에도 총순찰은 의당 그래야하는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상대는 마록이라고......." 숙야빈이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총순찰은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으음! 그 동안 마중마(魔中魔)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던 신비의 인물, 그 작자가 기어이 본색을 드러냈구나." 숙야빈은 심각하게 중얼거리더니 고함치듯 물었다. "그것 말고 다른 소식은 없느냐?" "마록은... 수많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쳐들어가 대군마성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숙야빈의 넓적한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럴 수가! 얼마나 괴물같은 놈이기에 대군마성을 혼자서 무너뜨렸단 말인가?' 그는 명실공히 강호의 반을 장악했으나 심중에 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무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림왕이 실종된 후로는 숙적(宿敵)이 없어졌다고 자위해 오던 터에 갑작스레 하나의 혜성(彗星)과도 같은 존재가 머리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숙야빈은 계속하여 총순찰로부터 마록이란 인물에 대한 보고를 전해 들었다. 그가 무공에 있어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이 되었다는 것, 또 천하흑도의 종사로 군림하고 있던 사황을 간단히 굴복시켜 자신의 휘하로 거두어 들였다는 것 등....... "으음......." 숙야빈의 미간에 언뜻 검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늘 웃던 그가 지금은 웃음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 있었다. 그는 마록이 대군마성에서 행한 일들까지도 소상히 듣고 난 후, 무겁게 말했다. "오늘 일정을 전부 취소하겠다." "하오시면......?" "속히 가서 장로회의(長老會議)를 준비하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한 시진 안에 장로들을 모두 모이게 해야 한다." 숙야빈은 말을 마치자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대전 쪽으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숙야빈은 확실히 평소의 천하태평이던 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예기(銳氣)가 번뜩이는 그의 눈이 그러했다. '작금의 사태는 만에 하나쯤 있을 법한 가능성이 실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록이라는 자가 행한 일이 사실이라면 필경 그 자는 내가 우려했던 이대 세력 중 한 곳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났으리라. 장춘도(長春島)나 혈사해(血死海)......!' 과연 숙야빈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노선이 다른 군마회에서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단발적인 소식을 전해 듣자 이미 십여 가지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있었다. '나는 힘을 숭상하는 자를 증오했었다. 온갖 권모술수를 써서 힘을 가진 자들을 조롱해 왔거늘.......' 그는 어느 덧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 곳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도 아주 밝았다. 이유는 벽을 따라 야광주(夜光珠)가 무수히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숙야빈은 계단을 내려 가며 내심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대개 힘을 가진 자들은 무능했었다. 그리고 그 자들을 하나하나 꺾으며 내 야망을 성취해온 것도 사실이나 진정한 강자가 나타나면 나로서도 대책이 없다.' 그는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빌어먹을!" 그의 입에서는 부지중 욕설마저 토해져 나왔다. '나의 아성은 십만대군이 총공격을 해온다 해도 붕괴되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든든한 성에도 약점이 없지는 않다.' 숙야빈은 초조한 기색이 되어 부단히 걸었다. '만일 혈사해나 장춘도의 인물이 치려고 마음 먹는다면 내가 이룩해 놓은 기반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도저히 피하지 못할 일........ 어째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내 앞에 도래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공! 그래, 나는 무공을 혐오한다만 아무래도 익히지 않은 상태로 강호를 수중에 넣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숙야빈의 조직은 신속 정확하기로 유명하다. 최고위층에서 하부자까지 명령이 하달되는 데에도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의 세력은 규모 면에서 의검맹을 앞질렀지만 특히 이 점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이다. 각 단계마다 일체 걸리적거리는 바 없이 연결고리가 척척 맞아 들어간다고나 할까? 그 면은 아마도 여러 문파의 집합체인 의검맹이 앞으로도 그의 세력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 자파의 안위를 의식할 일도, 혹은 대개의 정도인(正道人)들이 그러하듯 체면이나 위신을 앞세울 일도 이들에겐 없었다. 오로지 숙야빈의 황금 앞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날, 숙야빈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는 황금장로(黃金長老) 들이 모조리 장원 안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거개가 각 방면에서 천재적인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써 지금까지 숙야빈의 두뇌를 도와 준 인물들이었다. 방 안은 어두운 편이었다. 숙야빈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두툼한 휘장이 내려져 있었다. 휘장의 뒤 쪽으로는 열두 명의 노사(老師)들이 원탁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숙야빈은 시종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 무거운 침묵이 언제부터 계속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사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마록이라는 자는 머지 않아 이 곳을 노리게 될 것입니다. 아니, 벌써 준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으음......." "어쩌면 그는 황금장이나 의검맹이 소문에 놀라 먼저 굴복하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숙야빈은 신음으로 모자랐던지 말없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물론 그의 행동을 휘장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보통 흑도의 거마들은 소리없이 일을 처리하려 드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록이라는 자가 공개적으로 대군마성을 삼킨 이유는 자신을 향한 어떤 도전이라도 사양치 않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일 것입니다." 노사의 어조는 짐작을 말하고 있었으나 확신에 가까웠다. "마록은 그 정도의 대공략에서도 병법조차 안중에 두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필시 천하에서 가장 오만한 자일 것입니다. 또 사실상 그럴 만도 합니다. 그는 초절정 무사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논리도 초월해 버렸으니까요. 그가 무슨 방법으로 손을 쓰든 강호는 추후로도 그로 인해 크게 휘청일 것입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숙야빈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가 대군마성을 정복한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그는 더 큰 정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대군마성을 표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예의 노사가 말을 마친 듯 착석하자 또 다른 한 명의 계피학발(鷄皮鶴髮) 노인이 그 뒤를 이었다. "현재 본 장에서는 지난 번에 선출한 팔천 명의 낭인무사들이 살인조(殺人組)에 영입되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음." "장주께서 일급의 무사들로만 구성을 해 놓으신 덕에 그들의 성취도는 가히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다행이구려." "훈련이 끝나 그들을 부리시게 되면 여하한 세력일지라도 사흘 안에 완전하게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숙야빈이 처음으로 웃었다. "훗훗... 팔천 명의 무사단도 실은 대계(大計)를 위한 준비내역 중 하나일 뿐이지. 하여간 그 일의 진척을 서두르시오. 마록이라는 괴물이 나타난 이상 계획들을 빠르게 추진시켜야 하오." 그는 말을 끝내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귀를 곤두세웠다. 휘장 밖 상석(上席)에는 한 명의 꼽추노인이 앉아 있었다. 숙야빈이 기대하는 것은 이 노인의 일언(一言)이었다. 꼽추노인은 장로들 중에서 최고 지위였으며 그만치 그가 하는 말은 황금장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숙야빈은 그의 능력을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 늘상 최후의 목표로 생각되는 일은 모두 그에게 일임하곤 했었다. 수석장로는 어느 틈에 숙야빈의 심경을 헤아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났대야 등이 굽어 다른 사람들의 앉은 키와 별 차이가 없는 그는 실로 불품이라곤 없는 노인이었다.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주,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대업(大業)은 벌써 팔할 가량 완수되었습니다." "팔할이나?" "그렇습니다. 천 명의 기재(奇才)들이 철야까지 해 가며 비도(秘圖)를 해독하고 있는데 어찌 그만한 성과가 없겠습니까?" 숙야빈은 했던 말을 되뇌이며 크게 만족해 했다. "팔할! 그럼 머지 않아 완벽해지겠구려?" "물론입니다. 성(城)이 열릴 날도 이제 머지 않았습니다." 수석장로가 말하는 성이란 아마도 숙야빈의 최후 야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 날이 빨리 와야 한다!' 숙야빈은 어느 새 주먹을 움켜 쥐고 있었다. '반드시 성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완벽한 절대자로 부상할 수 있게 된다.' 과연 수석장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는 숙야빈의 입가에 예전과 같은 미소가 떠오른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록, 그가 설사 무신(武神)이라 해도 내가 성을 연 이후라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훗훗... 무식한 정복자여, 너는 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황금장의 장로회의에서 그 뒤로 어떤 사항들이 더 거론되고, 어떤 결론이 지어졌는지는 참석자들 외에 아무도 몰랐다. 숙야빈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의 진짜 측근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마록과 숙야빈. 이들 두 거성(巨星)의 대결은 이로써 그 서막을 올렸다. ③ 폭설이 쏟아진다. 산동반도(山東半島) 아래의 청도(靑島), 이 곳은 며칠째 연이어 내린 폭설로 인해 온통 흰 눈에 뒤덮혀 있었다. 청도는 동해(東海)에 면해 있는 하나의 포구(浦口)다. 그러나 날씨가 워낙 추운 데다가 폭설까지 줄기차게 내리자 고기잡이 배는 대부분 닻을 내리고 있었다.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한 언덕. 백의를 입은 한 인물이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우뚝 선 채 온 몸으로 눈을 맞고 있었다. 그는 용류옥(龍柳玉)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눈발과 마구 어우러지는 동해의 만경창파는 그의 가슴을 쓰리게 헤쳐 놓았다. 덕분에 그는 스스로 마음을 진정 시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아버님, 당신이 안배해 놓으신 것을 거두기 위해 소자가 마침내 이 곳에 왔습니다.' 흡사 무림왕 용화천을 마주 대하고 있는 듯 허공에 고하는 그의 심경이 어떨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윽고 용류옥은 포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 곳에는 백여호의 어가(漁家)가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출어(出漁)를 하지 못해 집 안에서 그물을 다듬고 있었다. 용류옥은 어가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촌장(村長)의 집을 찾아갔다. 일명 백노인(白老人)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촌장은 그를 대하자 무심히 물었다. "공자께서는 이 늙은이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시오?" "배를 한 척 빌리고 싶습니다." 용류옥의 말에 백노인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안되오. 날씨가 나빠 배를 띄울 수가 없소. 미안하지만 다른 날 다시 찾아와 주시겠소? 내 그 때에는......." 풍류공자로 오인된 자신을 더 참을 수가 없어 용류옥은 상대의 말을 도중에 가로챘다. "창주도(滄州島)라 해도 안되겠습니까?" "흐음?" 백노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공자는... 어디서 오셨소?" 노인의 음성이 떨려 나오는 것을 느끼며 용류옥은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보면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용화천에게서 넘겨 받아 그가 지니고 있던 녹옥문장(綠玉紋章)이었다. 단지 전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 개의 조각이 맞추어져 기린상이 완전한 모습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자 백노인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오오, 녹옥문장! 그럼 공자께서는......?" 용류옥은 심정과는 별개로 담담히 말했다. "광천만승가(廣天萬勝家)에서 왔습니다." "오오!" 노인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주름진 안면을 푸들푸들 떨더니 급기야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께서는 누구시오이까?" 백노인의 말투가 방금 전과는 싹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들어도 분명 가신(家臣)이 소주인(少主人)을 맞는 말투였다. 용류옥은 문장을 거두며 답했다. "만승(萬勝)의 후예요." 그의 어조도 역시 바뀌어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상하관계를 인정하는 일이란 곧 친밀감을 확인하는 길이었으므로. 노인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물론 용소공자(龍少公子)이시겠지요?" "그렇소." "아아! 드디어 오셨군요." 노인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겠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공자(大公子)께서는, 주군(主君)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 말에 용류옥의 눈은 금세 짙은 우수에 젖어 들었다. 그는 스스로도 그 점을 느끼고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게 위임하셨소." 백노인의 얼굴이 대뜸 창백하게 질렸다. "혹시 주군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오. 아버님께서는 자청하여 행방을 감추어 버리셨소." 백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소식은 대강 들었습니다. 무림맹이 무너졌다던데......." 용류옥은 고개를 저었다. "그 간의 사정은 묻어 두고 싶소. 다만 나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그것을 실현하고자 이 곳에 왔을 따름이오." 백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정황은 이해가 갑니다만 백검(白劍)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이제야 오신 것입니까? 창주도의 가신들은 그 동안 공자를 기다리느라 눈이 짓무를 지경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용류옥은 내심 씁쓸해지고 말았다. '백검? 나는 또 그 아이의 대역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정을 모두 밝히고 자신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고 그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되었다. '이 노인이 용가(龍家)의 추한 내막을 다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특히 내 어머님에 관한 부분은.......' 그는 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 잘라 말해 버렸다. "미안하오만 그 간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소. 그보다 나는 속히 섬으로 가고 싶소." 이쯤 되자 백노인도 더 묻지는 않았다. "언제쯤 출발할 수 있겠소?" 백노인의 대답은 처음과는 정반대였다.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습니다, 소주(少主)." "수고스럽겠지만 채비를 좀 해 주시오." 창주도는 동해상에 떠 있는 작은 섬이었다. 청도에서 약 이백여리쯤 떨어진 해역(海域)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곳 사람들은 모두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인구는 오백 인 정도로써 그들은 특이한 생활상을 영위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사십 년 전에 열 척의 범선을 몰고 집단으로 이주해 왔는데 이후로 고기를 잡는 것 외에도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 그들은 다른 어부들과는 상이한 점이 많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눈에서 빛이 났으며 몸동작이 날렵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인가, 이 곳 창주도에 해적(海賊)들이 상륙한 적이 있었다. 해상을 주름잡던 그들 도적의 무리는 섬 사람들을 전부 한 곳에 몰아 가두고 약탈을 시작했다. 섬 사람들은 갇혀 있는지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에 더욱 기세가 오른 해적들은 급기야 창주도의 부녀자들을 겁탈하려 했다. 그것은 그들의 오랜 전통이었으므로. 그런데 그 결과는 실로 뜻밖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창주도에서는 부녀자들이 희생된 것이 아니라 일대 혈풍이 일어났고 해적들 이백여 명 중 살아서 섬을 나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 누구도 모른다. 다만 바다 위를 표류하던 해적선이 타지역의 어부에게 발견되었을 뿐으로 그가 선상에 죽어 널브러져 있는 이백여 구의 시신을 보고 질겁을 하여 달아 났노라는 후문만이 전해졌다. 용류옥은 백노인과 함께 창주도에 당도했다. 그는 섬의 전경(前景)이 눈에 들어 오자마자 직감적으로 뇌리에 부딪쳐 오는 바가 있었다. '음, 이 곳은 보통의 섬이 아니다.' 우선 십여 척의 범선이 선창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평범한 어선으로 보아 넘기기에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선창의 어부들 역시 새로운 객(客)을 보았으면 관심까지는 아니라도 약간의 호기심 정도는 내비칠만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객이 오히려 그들의 기세에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백노인은 섬에 들어선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잰 걸음으로 용류옥을 마을로 인도해 갔을 따름이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장원(莊園)이었다. 이 곳은 도내(島內)의 가옥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써 여러 채의 모옥(茅屋)들이 같은 담장 안에 띄엄띄엄 세워져 있었다. 담장은 울창하게 우거진 죽림(竹林)이 대신하고 있었으며 그 안의 마당쯤 됨직한 곳에서 소란스러운 음향이 울려 나왔다. 용류옥은 대문 앞에 이르자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예의 소리가 한 떼의 아이들이 벌이는 전쟁놀이에 의한 것임을 알았다. '으음......!' 그는 굳은 표정이 되어 잠시 멈추어 섰다. 그의 눈에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영 심상치 않게 비추어졌던 것이다.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것까지는 별 말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들이 손에 각기 죽창(竹槍)이나 죽검(竹劍) 따위를 들고 일정한 진세(陣勢)에 맞추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 아--!" 아이들이 질러대는 함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에서는 어린 아이들 특유의 치기가 아니라 짙은 살기가 묻어 나왔다. "어서 들어 오십시오, 소주." 백노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용류옥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알겠소." 그는 곧 백노인이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라갔다. 그런 그의 표정은 비관적이지도, 그렇다고 낙관적이지도 않은 묘한 것이었다. 용류옥이 안내된 곳은 다섯 채의 모옥 중에서도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큰 모옥 안이었다. 그는 대청에 들어선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격탕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을 확 잡아당긴 것은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초상화였다. 그것은 장군도(將軍圖)로써 붉은 색의 전포(戰袍)를 차려 입은 한 인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오 척이나 되는 거검(巨劍)으로 땅을 짚고 있었는데 체격이 당당하면서도 비호(飛虎)처럼 날렵해 보였다. 필경 만병(萬兵)을 호령하던 기상은 게서 연유된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용류옥의 마음을 끄는 부분은 다른데 있었다. 그 인물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오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천하만물을 투시할 듯 예리하고도 정명한 눈빛은 유옥의 심중에 일말의 감동마저 불러 일으켜 놓았다. 백노인이 사뭇 숙연한 기색이 된 채 입을 열었다. "소주, 광천만승대장군께 절을 올리십시오." "으음!" 용류옥은 부지중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낙선재에서도 그는 그림을 통해 광천만승대장군, 아니 조부(祖父)를 대한 적이 있었으나 그 때에는 감정상의 혼란으로 인해 그다지 자세히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이렇듯 다시 대면하게 되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을 뿐더러 당시에 황노인이 말했던 바대로 자신이 정말로 조부와 무척 닮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소손(小孫), 할아버님께 인사 드립니다. 처음으로.......' 초상화 앞에서 용류옥은 마침내 몸을 던지듯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깊숙히 숙였다. 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이슬이 반짝인 것을 백노인은 미처 보지 못했다. 잠시 후. 신색을 추스르고 일어서는 그에게 백노인이 말했다. "잠깐 이 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소주." 백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무엇이 그리 바쁜지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④ 용류옥이 혼자 남아 있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문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되자 조금 전에 백노인이 왜 그토록 서둘렀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청의 앞마당에는 지금 열 명의 인물들이 부복해 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도 모두 나이가 칠순 이상인 듯 했으며 일신에는 하나같이 붉은 색의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개중에 백노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붉은 전포가 전하는 강렬한 느낌이 용류옥을 사로잡아갈 때, 백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소주, 속하들은 광천대장군 휘하에 있었던 자들로 과거 대장군께서는 저희들을 광천십장(廣天十將)이라 명명하셨습니다." "광천십장......!" 백노인의 눈에는 부옇게 감회가 어렸다. "당년에 대장군께서 자결하시자 저희들은 분루를 삼키며 병영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후로는 대공자께 자진 예속되어 이 곳에서 그 분이 복권되시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용류옥은 가슴이 뭉클해져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이 섬 사람들은......?" 백노인, 즉 백충량(白忠亮)은 이미 청도에서 보았던 어부노인이 아니었다. 그는 묵직하고도 진중한 어조로 답했다. "전부 장군가 가신(家臣)들의 후예입니다." "오오! 어찌 이렇듯......." 용류옥은 크게 감동한 나머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로서는 대(代)를 이어가며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들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대청 아래로 내려가 노장수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고맙소이다, 정말......." 십대가신들도 노안에 눈물을 담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속하, 구자후(仇子候)입니다." "속하는 구양수(歐陽首)입니다, 소주." "속하, 함북평(咸北平)입니다." "속하......." 용류옥의 눈에서도 어느 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뿌리도 없이 방황만을 거듭해 오던 내가 이토록 든든한 가문의 후예였다니.......' 하지만 다른 일편으로 그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비애를 함께 느껴야 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부친의 야망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과 용백검의 안위 등을 떠올릴 때부터였다. 실상 이 자리는 용백검이 서야할 자리이며 자신은 그 대역을 하고 있을 따름인즉, 전대로부터 물려 받은 두 형제(兄弟)의 불행이 새삼 그의 가슴을 들쑤셔 놓았던 것이다. 용류옥은 폭발이라도 해버릴 것 같은 심정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는 부르짖었다. '잊자! 지난 일은 모두....... 금후로는 새로운 길을 터 나가야 한다. 용가(龍家)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또 전날의 비극을 청산하려면 천하무림을 위해 헌신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눈물이 흐르던 그의 눈에서는 비장한 결의가 다져졌다. 창주도의 정확한 인구는 오백팔십이 명이었다. 그 중 칠순 이상은 열두 명이었으며, 오순 이상이 팔십사 명,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가 이백오 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나머지 가운데 백육십 명은 또 십대....... 용류옥이 창주도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인구 구성을 분류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전력(主戰力)을 일단 이십대에서 사십대 사이의 삼백오 명으로 잡고 오순 이상되는 구십육 명의 인물들은 원로급(元老級)으로 규정지었다. 그는 십대의 백육십 명도 별도로 구분을 지었다. 십사 세 이하는 오십삼 명이나 되었지만 너무 나이가 어리니 젖혀 두고 십오세 이상인 백팔 명의 명단만을 한데 묶어 놓았다. 이 작업은 보름 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용류옥은 그 기간을 통해 비단 인구에 관련된 사항 뿐만이 아니라 창주도라는 섬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자체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아울러 용류옥은 무림왕 용화천이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놀라기도 했다. 용화천은 미리부터 창주도의 가신들이 무림에 나설 것에 대비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승의 무학을 익히게 했다. 누구고 다섯 살 때부터 무학에 입문하도록 했으며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에 그가 전수한 것은 해천오로(海天五老)의 무학과 자신이 창안해낸 독문무학이었다. 동시에 그는 열두 명의 무술교범을 키워 그 이후로는 일사불란한 지도 체제까지 갖추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들 열두 명 교범들의 무공 수위였다. 그들은 지금 당장 강호에 내놓아도 최소한 백대고수의 서열에 들 정도로 우수한 재목들이었던 것이다. 용류옥은 실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무림왕의 측근 인물들 중에는 풍령십사(風鈴十師)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창주도 교범들의 무공은 오히려 풍령십사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당신께선 정녕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분입니다. 개인적인 야망도 그렇지만 무림성의 성주로써 물심양면으로 다망하셨을 터인즉, 언제 여유를 쪼개 이렇게까지.......' 용류옥은 부친인 용화천을 떠올리며 혀를 내두르는 한편, 그들무술 교범들에게 십이천장(十二天將)이라는 명호를 부여했다. 그들은 사십대의 인물들로써 이른바 창주도 제일의 고수들이다. 그들을 위시해 인물 체계는 날로 정비되어 갔다. 십대호법(十大護法)이 탄생 되었으며, 그 아래로 팔십일로천승장(八十一路千勝將), 항마철기군(抗魔鐵騎軍), 삼십육천강수(三十六天 手), 칠십이지살수(七十二地煞手) 등이 생겨 났다. 용류옥은 그 일을 마치자 또다른 계획의 실행에 착수했다. 도합 스물여덟 명의 청년들. 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기상이 출중해 보였다. 철썩! 쏴아아아-- 청년들은 지금 해변가에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불타는 눈은 모두 용류옥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용류옥은 해풍(海風)에 백포(白袍)를 휘날리며 한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청년들을 차례로 한 사람씩 둘러 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청년들은 저마다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만치 기세가 밀린다는 얘기다. 이르자면 용류옥의 눈빛에서 그들은 서열이 왜 구분 되어지는지를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비단 받는 느낌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직관력에 비해 무한한 포용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것은 그만이 지니고 있는 특이한 기질이자 사실상 그가 조부와 가장 닮아 있는 점이었다. 즉 외곬수일 정도로 곧으면서도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는 성품의 소유자.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조부는 황량한 변방에서 수하들을 거느리는 과정 중에 그것을 체득했고 용류옥은 부단한 인고(忍苦)의 세월을 거치면서 스스로 쌓아 갔다는 정도였다. 모친의 학대 속에 백여종이 넘는 직업을 전전하고, 또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동까지 취해야 했으면서도 끝내 인간미를 잃지 않은 유별난 인물이 바로 용류옥이 아닌가 말이다. 작금에도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 그 자체인지도 몰랐다. 용류옥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대들은 앞으로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내 이제부터 는 그대들을 천풍이십팔숙(天風二十八宿)이라 부르겠다." 편안한 어조에 비해 그 말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컸다. 그를 향한 청년들의 눈이 재삼 빛을 번쩍 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천풍이십팔숙이라는 명칭은 청년들의 가슴에 대번에 거대한 회오리 바람과도 같이 강한 충격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용류옥은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해풍에 휘말려 오는 파도를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대들은 향후로 신주(神州)에 새 바람, 문자 그대로 천풍(天風)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당금의 무림천하가 그것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으니까." 청년들은 침묵하는 가운데 세이경청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나서는 것은 단지 용가의 가신으로서가 아니다.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무림의 아들로써이다.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가는 강호무림은 그대들의 열혈(熱血)을 기다리고 있다." 용류옥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보아라, 저 광활한 대지를....... 그대들의 타고난 무골(武骨)은 소위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명조의 황실이 아니라 바로 저 곳을 지키기 위해 기량을 발휘하게 되리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는 결국 현재까지 청년들이 습관처럼 고수해 왔던 가치관을 일거에 뒤집어 엎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용류옥은 이내 볼 수 있었다. 이십팔 명 청년들의 눈에서 일어나던 의혹이 곧 불같은 투지(鬪志)로 변모하는 것을. 그들은 젊다. 따라서 포부는 누구 못지 않게 컸으되 오랫 동안 자신들도 모르는 논리에 지배를 당하며 억눌려 왔다. 그러다 비로소 방향타가 제대로 잡히게 된 셈이니 그들로서는 그 이상 감격스러운 일이 없었다. 용류옥이 다시 말했다. "대륙은 그대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넓다. 그만큼 악인(惡人)들도 많다고 보면 맞다. 그러므로 그 곳을 질타하여 평정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청년들 중 한 명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은... 저희들의 능력로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용류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대들이 알아야 할 것은 천하제일인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무공을 접하게 되면 죽는 순간까지 그것을 익히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다른 청년이 물었다. "하면, 저희는 어떤 무공을 더 익혀야 합니까?" 용류옥의 눈에서 뭐라 할 수 없는 신비한 빛이 흘러나왔다. "둘이 합치면 셋의 힘을 내고, 넷이 합치면 열의 힘을 발휘하는 합격술(合擊術)을 그대들은 익혀야 한다. " "아......!" 청년들, 아니 천풍이십팔숙은 저마다 탄성을 발했다. 해풍에 머리카락이 휘날렸으나 용류옥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것은 천풍수라파황대진(天風修羅破荒大陳)이라는 일종의 합격진이다. 일단 펼쳤다 하면 그 힘이 능히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의 얼굴에 경외감이 어리는 것을 보며 그는 의도적인지 더욱 잔잔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천풍수라파황대진은 단순한 합벽대진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풍운만상진(風雲萬像陳)에 검(劍), 도(刀), 창(槍), 륜(輪)의 파황사병(破荒四兵)을 가세한 진세다." 휘이이-- 잉--! 바람이 더욱 거칠어졌다. 파도가 마구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해변의 암석군(巖石群)으로 한 차례 해일이 덮쳐 들었다. 그러나 천풍이십팔숙은 하나같이 서 있던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현상도 활화산처럼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들의 가슴에 변화를 일으켜 놓지는 못하리라. 용류옥은 그들에게 천풍수라파황대진을 가르쳤다. 그것은 천하를 통틀어 기문신산학(奇門神算學)에서 제 일인자였던 인물, 즉 해천오로(海天五老) 중 낙척서생(落拓書生) 우문한도(宇文寒道)가 최후로 창안해낸 무서운 진식이었다. 앞서 그가 언급했듯 일곱 명이 각각 검, 도, 창, 륜으로 무장을 하고 연쇄적으로 절기들을 펼쳐내는 죽음의 진세였다. 천풍수라파황대진은 작게는 사인일조(四人一組)로써 간단하게 펼칠 수도 있었으며, 크게는 칠환겁륜소진(七幻劫輪小陳)에서 십사인이 요구되는 용호풍뇌진(龍虎風雷陳)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다양한 변화가 가능했다. 콰콰콰-- 촤아아아--! 파도는 그 사이에 더욱 더 기세를 더 하고 있었다. 며칠 째 계속하여 뼈 속까지 에이는 강추위와 섬 전체를 날려 버릴 듯한 폭풍이 창주도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곳은 섬이라 그런지 같은 겨울이라도 대륙에서 느끼던 기후와는 차원이 달랐다. 뭐랄까? 자연현상 자체가 너무도 극악스러워 인간의 왜소함을 절로 통감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창주도에서 일고 있는 일신(一新)의 바람을 막지는 못했다. 혹한 속에서도 우렁찬 함성과 병장기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고 혼신을 다해 최고의 전사(戰士)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기개는 나날이 높아만 갔다. 용류옥은 거의 매일을 바쁘게 보냈다. 한시도 쉬지 않았을 뿐더러 그는 자신이 가진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해 창주도 가신들의 무력(武力)을 키우기에 노력했다. 그는 스스로 무공을 연마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천오로의 무학과 지왜반노귀, 광성자 등의 무공을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밤낮없이 고련을 거듭했다. 그 결과로 창주도의 눈부신 변모와 함께 그의 무공도 일취월장으로 발전해 갔다. 이는 곧 백 년 전의 무림기인들인 해천오로, 그리고 장춘도의 전설적 존재들인 지왜반노귀와 광성자의 영향력이 이 곳을 뒤바꾸어 놓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용류옥은 광성자로 인해 신비의 영액인 공청석유까지 취했으니 그들과의 인연은 정녕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하도 진전이 빨라 그가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미처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제18장 여인(女人)과 여마(女魔)의 차이 ① 콰아아아-- 성난 파도가 여전히 광란하고 있었다. 해안이 굽어다 보이는 한 위치에는 마치 한 마리의 해룡이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솟아나온 검은 암석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추위도 모르는 듯 그 암석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지극히 활달한 기상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기질을 풍기는 사람은 창주도를 다 뒤져 보아도 단 한 명 뿐이다. 용류옥이었다. 우우우우웅--! 그의 일신에서 문득 형용키 어려운 기이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검고, 희고, 푸르고, 붉은 그 네 가지의 각각 틀린 기운은 그의 전신을 감싸며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휘류류륭--! 그것은 정녕 신비하고도 장엄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언뜻 보면 네 마리의 용이 날아와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듯 했다. 그 가운데 그의 입에서는 힘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현음(玄陰)! 현천(玄天)! 헌원(軒元)! 화룡패왕(火龍覇王)!" 쿠우우우-- 네 가지 기류의 소용돌이는 급격히 빨라지더니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용류옥의 정수리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스스슷.......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고요함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눈에는 두드러져 보일 만한 광채는 없었다. 다만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신령스러운 기운만이 충만하게 담겨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음, 성공이군. 현음신공과 현천무극진기(玄天無極眞氣), 헌원신공(軒元神功), 혈룡패왕신공(血龍覇王神功) 등의 사대신공이 가까스로 나의 체내에서 융합되었다." 겸허한 말투에 비해 그것은 실로 놀라운 성취였다. 일개인으로써 웬만한 자질이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용류옥이 말한 사대신공이란 그 하나하나가 개세의 절학으로 이른바 천하를 움직이던 무림성과 장춘도의 비전지학들이 그의 한 몸에 모두 수용된 것이었다. 헌원신공(軒元神功)과 혈룡패왕신공(血龍覇王神功). 이 두 가지는 장춘도의 기인들인 지왜반노귀와 광성자의 무공이다. 여기에 좀더 부언을 하자면 이러하다. 헌원신공.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장장 천여 년 전의 기학으로써 일종의 도가신공이었다. 팔괘(八卦)의 이치를 응용하여 창안된 도가선천진기였으며 그 위력으로 말하자면 무형 중에 산을 허물고 바다를 가를 정도라고 한다. 혈룡패왕신공. 이는 광성자의 광성비급에 실린 절학이다. 패(覇)를 위주로 하는 신공으로 천지간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랄 수 있었다. 용류옥은 그 간에 있었던 각고의 노력으로 인해 무공 진전이 등봉조극(登峯朝極)의 경지에 달하고 있었다. 사대신공을 융합시켰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것들을 어느 때고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다는 뜻도 되니, 특히 내공 면에서의 발전이란 정녕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용유옥은 노호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때가 이르고 있다." 무슨 때를 말하는 것인지, 그는 심중의 말을 그 이상 드러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우--!" 스슷! 웅후한 장소성과 함께 그의 신형은 전광석화처럼 솟구치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그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실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백하연(白霞燕). 그녀는 창주도의 수석호법이 된 백충량의 손녀였다. 십칠 세라는 한창의 나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그녀는 갓피어난 난초처럼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해 내고 있었다. 백하연은 지금 정성 들여 차를 끓이고 있었다. 아울러 그녀는 그 차를 마실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주군께서는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 그러시다가 혹 병이라도 나시면.......' 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이내 짙은 수심이 드리워진다. 아마도 떠올린 인물은 그녀의 가슴 속에서 상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는 설빙차(雪氷茶)였다. 마시면 그 시원한 감각이 폐부까지 스며든다는 고급의 차였다. 백하연은 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안채로 향했다. 용류옥. 그는 검박한 나무 탁자와 마주하고 앉아 무엇인가를 살펴 보고 있었다. 그의 시야를 점하고 있는 그 무엇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직 개봉하지 않은 여러 장의 밀신(密信)이었다. '흑막일호(黑幕一號)에서부터 흑막십호까지의 회신(回信)이 단기간 내에 모두 도착해 있다. 이 사실만로도 중원의 정세가 어느 정도로 급박한지는 충분히 알 것 같다.' 모두 똑같은 크기의 네모 난 첩지이다. 열어 보지 않아도 그 속에는 분명 괴이한 글씨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으리라. 그것은 창주도 내에서도 오직 용류옥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씨였다. 무림왕 용화천이 그에게 편지를 통해 알려 준 흑막십호들과의 비밀교신용 암호였던 것이다. 그 동안 용류옥은 이 곳에서 흑막십호 전원과 일일이 교신을 계속해 왔다. 그리하여 그는 가만히 앉아서도 변방과 중원의 소식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히 알게 되었다. 그 소식통에 따르면 중원무림의 세력 판도는 나날이 무섭도록 변화를 거듭해 가고 있었다. 무림성이 멸망한 이후로는 크게 양분(兩分)되어 있었다. 대정성(大正城)과 대군마성(大群魔城). 정과 사로 구분된 이들 양대 세력은 그 위세가 당년의 무림성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출(日出)인 양 화려하게 급부상한 두 명의 인물 때문이었다. 협중협(俠中俠) 숙야빈(叔夜賓). 마중마(魔中魔) 마록(摩麓). 그들 두 사람은 명실공히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각기 정도와 사도무림을 나누어 관장하고 있는 그들은 아직까지는 별다른 충돌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고 일단 부딪쳤다 하면 무림은 그 날부로 시산혈하의 생지옥으로 변할 게 뻔했다. 또 이런 예상은 어느 덧 기정사실화 되어 무림인 치고 걱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동안에도 대정성과 군마성은 각자 착실히 실력을 다져 나가고 있었으니 표면상의 평화를 비웃듯 무서운 전운이 실체가 되어 날로 강호무림에 위협의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용류옥이 흑막십호들과의 비밀 교신을 통해 알고 있는 중원정세였다. 그의 짙은 검미가 슬쩍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 더 있는 것일까? 있어 보았댔자 필경 좋은 일은 아닐테고.......' 용류옥은 마침내 한 장의 밀지를 개봉하여 펼쳐 들었다. <욕망궁(欲望宮)이 무산(巫山) 신녀봉에 세운 분궁(分宮)에 대해 알립니다. 마화궁(魔花宮)이라 불리우는 그 곳은 절망수라환무대진(絶望修羅幻霧大陣)이라는 희대의 절진이 설치되어 항시 자욱한 안개로 뒤덮혀 있습니다. 마화궁주는 여인인데 욕망궁주인 대환희불(大歡喜佛) 적천대라마(赤天大喇 )의 양녀라고 합니다. 일명 마화신모(魔花神母)라고도 일컬어지는 그녀는 휘하에서 무서운 여인의 집단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녀 들은 타고난 미모에 가공할 색공색계(色功色計)를 익혀 부처(佛)라도 파계시킬 정도로 염공의 대가(大家)들입니다. 속하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벌써부터 십마화(十魔花)가 대정성과 군마성을 비롯한 천하각처에 침투되어.......> "으음, 욕망궁이 기어이......." 용류옥은 서신을 읽다 말고 잠시 눈을 내리 감았다. 그 밀서는 흑막구호가 보낸 것으로써 그의 말대로라면 상황은 너무도 위태로왔다. 만일 중원무림이 세력 다툼으로 인한 혈전을 벌이다가 양패구상 했을 때에 욕망궁이 움직인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찌 되겠는가? 용류옥은 마음을 애써 가다듬고는 그 뒤로 이어지는 글을 끝까지 읽었다. 그는 밀지를 덮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확실해진 것은 마록이라는 인물이 전설의 혈사해(血死海)를 취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무공은 의당 개세무적일테고.......' 그는 과거 어느 시기엔가 무림성 부근에서 만났던 혈삼의 청년을 떠올렸다. 당시 용류옥은 그 청년으로 인해 크게 낭패를 당했을 뿐더러 부상을 입고 오랫 동안 고통을 겪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는 청년의 이름을 마음에 깊이 새겨 놓고 있었으되 이런 식으로 그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이었다. '마록! 애초부터 그대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천하의 반을 그토록 쉽게 거머쥘 줄이야.......' 용류옥은 쓴 입맛을 다시는 한편 추리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숙야빈 역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효웅이다. 중원제일의 부호인 황금장주로써 무림성에 뛰어 들어 천무전의 제 이인자가 된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더구나 그 이후로 불과 일 년 만에 대정성의 실제적 성주가 된 그는 지모(智謀)에 있어서는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류옥이 이처럼 삼면(三面)에 막강한 적들을 놓고 호흡이 답답해질 정도로 고심막측일 때였다. 한 가닥 청아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사고(思考)를 멈추게 했다. "주군, 차가 다 식었어요." 등 뒤로 음성을 느낀 용류옥은 언뜻 고소를 지으며 돌아다 보았다. 그 곳에는 언제 들어 왔는지 백하연이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띈 채 찻잔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하연, 너였구나." 백하연은 양볼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주군께서 하도 열중하고 계시기에 조용히 기다렸어요." 용류옥은 씁쓸하게 웃었다. "열중이라....... 하긴 그랬었지." 그는 와중에도 백하연이 들고 있는 쟁반을 건네다 보았다. "차(茶)를 이리 다오." "다시 데워 올 수 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 네가 끓여다 주는 설빙차는 식어도 그 맛이 변함이 없었으니까. 자, 한 잔 따라 주겠느냐?" 백하연은 칭찬이 기뻤는지 냉큼 찻잔을 내려 놓더니 작은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이어 그녀는 차를 마시고 있는 용류옥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며 내심 뇌까렸다. '주군, 소녀가 왜 이렇게 신이 나는지 아세요? 실은 언제나 잊지 않고 제 작은 수고까지도 헤아려 주시는 주군께 감사해서예요. 처음에는 무서운 분으로만 알았었거든요.' 이 지순한 소녀는 활짝 웃다가 제 풀에 금세 시무룩해졌다. 자신에게 하는 그녀의 고백(告白)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또한 그 이상이기를 원해요. 안될까요? 제가 주군을 연모(戀慕)하는 일 말이에요. 평생 주군을 곁에서 모시고 싶은데, 여인으로서 사랑도 받고 싶은데.......' 특유의 밝은 분위기와 걸맞지 않는 무거운 한숨이 그녀의 함초롬한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여느 때에도 용류옥의 존재를 떠올리면 종종 그랬었지만. ② 천풍이십팔숙(天風二十八宿). 그들은 해변에 도열해 있었다. 모두 눈빛이 칼날 같고 정기가 번뜩이는 창주도 최고의 영재들이다. 검, 도, 창, 륜의 파황사병(破荒四兵)을 비껴든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병(天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그들은 칠 인이 한 조가 되어 검진, 도진, 창진, 륜진을 형성했다. 천풍수라파황대진(天風修羅破荒大陣)을 펼치기 위해서다. 방원 오십여 장이 폐허로 화해 버린다는 그 죽음의....... 스스스-- 움직인다. 천풍이십팔숙이 마침내 진세를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상(四象)의 방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이동하자 동, 서, 남, 북의 사방(四方)이 일제히 발진되었다. 콰르르르르-- 성난 파도처럼 진세는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오칠성(子午七星)과 구궁팔괘(九宮八卦)의 기문둔갑에 의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기도 했다. 칠 인의 검수(劍手)들이 동시에 검을 건원(乾元)의 위치로 뻗으며 신형을 움직여 갔다. 서쪽의 방위에서는 칠 인의 창수(槍手)들이 일월쌍천극(日月雙天戟)을 휘두르며 좌(左)로 회전했다. 남쪽의 방위에서는 칠 인의 도수(刀手)가 풍뢰도(風雷刀)를 전개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북에서는 또다른 칠 인이 태양화륜(太陽火輪)을 양손에 든 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콰르르르-- 콰아아아-- 정녕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진세였다. 검진(劍陣)이 일으키는 검파(劍波)는 대기를 수 천, 아니 수 만 가닥으로 끊어 놓고 있었다. 츳츳츳츳--! 일월쌍극천의 예기(銳氣)도 첩첩이 창의 파도를 일으켰다. 파파파파팟! 풍뢰도진(風雷刀陣)에서는 가공할 뇌전이 천지를 갈랐다. 꽈르르릉--! 륜진(輪陣)은 또 어떤가? 양 손에 태양화륜을 쥐고 있는 칠 인은 언제라도 그것을 날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태양화륜은 말그대로 태양처럼 불꽃을 뿜으며 무섭게 회전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자재로 회수할 수도 있었으며,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방향을 선회시킬 수도 있었다. 우우우-- 우우웅--! 천풍수라파황대진. 이 희대의 절진은 기어이 해변을 폐허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만 듣던 그 위력을 굳이 실증해 보이려는 듯. 한 언덕 위였다. 열 명의 노인들이 서서 만면에 경악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쪽에는 용류옥이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늘상 담담하던 그의 표정도 평소와는 달리 심각하기 그지 없었다. 양측의 심정은 서로 정반대였다. 노인들, 즉 창주도의 십대호법들은 다 함께 탄복을 하고 있었지만 용류옥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내심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상위 수준에 들지만 아직 멀었다. 저 정도로는 난세로 접어든 무림을 평정시킬 수 없다.' 이것이 천풍이십팔숙의 천풍수라파황대진을 보고난 후에 있은 용류옥의 소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백호법." "예!" 수석호법 백충량이 대답과 함께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용류옥은 품 속에서 다섯 권의 책자를 꺼냈다. 그리고는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며 백충량에게 넘겨 주었다. "이것은 해천오로(海天五老)의 무공이 수록된 비급의 진본(眞本)이오. 본인에게는 필요가 없으니 백호법께서는 이것을 본도의 제자들에게 나눠 주어 역량껏 익히게 하시오." 백충량의 노안에는 또 다른 의미의 놀라움이 번졌다. "필요가 없다시면......? 이것들을 다 익히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후후... 그런 셈인가 보오." 용류옥이 어색하게 웃는데 반해 그는 정색을 지었다. "과연! 해천오로라면 전대 기인들 중에는 최고수가 아닙니까? 그 분들의 무공을 전부 섭렵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 "그만 하시오, 백장로. 낯이 뜨거워 칭찬은 사양하겠소." 용류옥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제지시키고는 부언했다. "모두들 아버님으로부터 부분적으로나마 전수받은 상태이니 보충해 나가기도 용이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비급을 들고 있는 백충량의 손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볍게 떨렸다. 나이와는 별개로 그도 무공의 증진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무척이나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백충량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용류옥을 응시했다. '이 분은 아직 젊지만 누구 못지않게 크고 넓은 도량을 지니고 있다. 당년의 대공자께서도 우리에게 비급을 아낌없이 내놓는 정도의 은사까지는 허용하지 못하셨거늘.......' 그는 비로소 용류옥의 얼굴에서 익히 알고 있던 한 인물의 모습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 인물이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이전에 주군으로 모시던 광천만승대장군 용승후였다. 백충량은 전율에 버금가는 감회를 느끼며 내심 부르짖었다. '대장군! 이 늙은 목숨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은 덕에 정말로 당신을 빼어 닮은 당신의 후예를 보필하게 되었소이다.' 용류옥의 잔잔한 음성이 그의 감상을 파고 들었다. "본도의 가신들은 향후로 난세무림을 헤쳐나가는 선봉장이 되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비급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공의 수준을 높여야만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백충량의 허리가 종전보다 더 깊숙히 숙여졌다. 용류옥은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처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림은 앞으로도 계속 격변을 거듭할 것이오. 과연 기존의 무공으로 그 상황을 따라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백충량은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용류옥의 고심이 어느 정도인지만은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소주, 당신이 짊어진 짐이 너무도 무겁구려.' 그러는 사이에도 용류옥은 여전히 해풍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담겨 있는 번뇌는 도시 떠날 줄을 몰랐다. '혈사해(血死海), 천년 간이나 폐쇄 되었던 신비의 왕국....... 그곳의 무학과 비교하면 우리가 지금껏 익혀온 중원의 무학은 어쩌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욕망궁을 이룩한 천축의 마공은 여태껏 선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용류옥은 생각한다. 창주도 가신들의 무공이면 강호의 어떤 문파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지만, 마록이 이끄는 일천 명의 혈사해 무리들과 부딪쳤을 시에는 어찌 될 것인가고. 그 면에서 그는 별로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할 마음은 더더욱 들지 않는 그는 갑작스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려움 따위는 없다. 힘이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중원무림이 품고 있는 잠재력은 역사가 증명하듯 무한하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휘이이잉--!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며 불어왔다. 용류옥은 바람을 가슴에 가득히 맞게 되자 오히려 호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일진 장소를 터뜨렸다. "우우우우--!" 그 소리는 창주도를 뒤흔들며 멀리로 메아리쳐 갔다. 군마화원(群魔花園). 여전히 이 곳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다. 다만 예전에는 주인이 사황 냉전령이었으나 지금은 바뀌어 있다. 마중마(魔中魔) 마록(馬鹿).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랄까? 아니, 그 말만으로는 안된다. 어쩌면 그를 표현 하기에는 백 마디 천 마디로도 부족하리라. 그는 보기 드문 냉혈한이며 철저한 무인(武人)이기도 하다. 무공을 지상제일주의로 알고 있는 그는 거기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제거해 버린다. 그 한 예로 그에게는 오른손 새끼 손가락이 없다. 검도(劍道)를 익히는데 방해가 된다 하여 스스로 잘라냈던 것이다. 그는 치장 따위를 본질적으로 혐오하여 집기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석실에서 생활하는데 여기에는 일신의 평안함을 거부함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의 수하들은 그를 신(神)으로 여긴다. 그럴 만도 하다. 그는 나름대로 완벽을 고집하며 그를 이행하고자 하는 독선에는 누구도 감히 대항할 자가 없으므로. 마록은 무감동한 눈으로 한 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차디찬 석실 바닥에 꿇어 앉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저를 어찌하시던 좋습니다. 흑....... 당신의 첩이 되라 해도, 아니 종이 되라 해도 따르겠어요." 그 미녀는 놀랍게도 금검대협(金劍大俠) 상관자기의 무남독녀인 상관영봉(上官靈鳳)이었다. 그녀는 과거 무림성 부근에서 마록을 처음으로 만났다. 용백검에게 정복 당하려던 찰나 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 바 있었으며 그 동안 내내 군마성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마록은 예상과는 달리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고 명분을 정한 것도 아니면서 그저 곁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관영봉 말고도 특별히 가까이 하는 여자가 없다. 영웅호색이라건만 그는 의외로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애초 상관영봉은 그에게 순결을 잃을까 하여 무척이나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일 년이 넘도록 자신을 건드리기는 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자 그녀는 그 때부터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여인, 그것도 미모를 자부하는 여인 특유의 자존심이랄까? 그녀는 마록의 무심한 태도에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지금 그녀가 우는 것은 아니다. "흑... 제 존재가 무엇입니까? 차라리 내치시던가......." 상관영봉은 급기야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했다. 그러자 마록의 덤덤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나는 너를 내치지 않는다. 전에 말했지 않느냐? 너를 내 측실로 삼겠노라고." "그렇다면 어찌하여......?" "훗훗... 왜 너를 내버려 두느냐고 묻고 싶은 거냐?" 상관영봉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에 마록은 웃었다. "후후후... 너는 이미 내 측실이다. 타인들이 인정하도록 공언을 한 바는 없지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는 약간은 차가운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정실이 아니면 동정(童貞)을 허용할 의사가 없다." "아......!" 상관영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동정이라고? 설마......?' 그녀 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으리라. 천하를 휘젓던 마중마 마록이 아직 동정지체라면 쉽게 수긍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후후... 놀랄 것 없다. 그것은 관념상의 문제니까. 이를테면 내가 여인들과 접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공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공광(武功狂)......!' 상관영봉은 내심 비명처럼 부르짖은 한편, 크게 낙심한 나머지 천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③ 마록의 입가에 언뜻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마치 그녀의 심중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왜, 의도한 바가 먹히지 않으니 맥이 빠지느냐?" "아......?" "후후...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아비의 복수를 하고자 나를 상대로 미인계를 쓰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 "으음!" 상관영봉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종전과는 다르게 꽤 야무진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어요." 마록은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숙야빈이 대정성의 성주가 되기 위해 금검대협을 살해한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벌써부터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극비사항으로 붙여져 있고 숙야빈은 여전히 칠대가주를 비롯하여 모든 정도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제가 이렇듯 고심하는 거예요. 그 자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성(城)이 되어 있고, 저는 초라한......." 상관영봉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록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본심이 쏟아낸 통한의 눈물이었다. "그 자의 황금과 교활한 술책으로 인해 천하인들이 모두 제 아버님과 금검세가로부터 등을 돌렸어요. 소녀가 이렇게나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마록이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표현을 바꾸어라. 너는 나를 믿고 의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용하고 싶어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느냐?" 이는 그의 완벽주의가 빚어낸 힐난이었다. 그는 이전부터도 어느 상황에서건 귀에 거슬리는 말은 절대 참지 못하는 자다. 덕분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상관영봉에게 그는 말했다. "숙야빈에 대한 비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자는 거대한 성이 아니다. 단지 속물이며 쓰레기일 뿐이지." 상관영봉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찌하여 그 자를 경시하십니까? 무슨 비열한 수단을 썼건 그 자도 중원무림의 반을 얻은 자인데......." 마록의 눈빛이 일순 날카롭게 번뜩였다. "네가 지금 그 자를 감히 나와 비교하는 것이냐?" 상관영봉은 그 눈빛을 대하자 그만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잘못... 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아 실수를......." 마록은 차디차게 웃었다. "후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 뿐이다. 놈이 아무리 황금을 뿌리고 머리를 굴려도 종국에 가서는 나의 패검(覇劍) 아래 이슬이 되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상관영봉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이 말은 틀리지 않으리라. 이 사람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은 현재까지 전부 실현이 되지 않았는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의 힘을 이용해야만 한다.'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는 그녀에게 마록이 물었다. "정말로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느냐?" "아!" 상관영봉은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번쩍 치켜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던 말을 상대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에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마록의 차갑기만 하던 눈에서 한 가닥 타는 듯한 열기가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좋습니다. 어서 하명(下命) 하세요." "훗훗... 무엇이든......?" "네, 저의 하잘 것 없는 목숨이라도 걸겠어요." 마록의 눈에서는 그 사이 기이한 광기마저 일고 있었다. 변해가는 그 눈빛을 접하자 상관영봉은 온 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저것은 야수(野獸)의 눈빛......!' 피할 수 없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일어서라." "네......?" "못 알아 들었느냐? 일어서라고 했다." "네." 상관영봉은 입술을 세차게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옷을 벗어라." "네에?" 그녀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반문했다. "여, 여기에서... 말인가요......?" "싫으면 그만 두어도 된다." 자르는 듯한 마록의 음성을 통해 상관영봉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감(悲感)을 느꼈다. 금검세가의 금지옥엽으로써 영화롭기 그지 없던 날들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처지가 전락을 하다 보니 그것은 하나의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이라야 현재로선 달랑 몸뚱이 하나 뿐이다. 그나마도 마록에 의해 어떤 지경을 당하게 될런지 아직도 제대로 상상이 가지 않는 그녀였다. 상관영봉은 이십 년 가까이 곱게 지켜 온 자신의 육체가 너무도 서러워 홀로 부르짖어야 했다. '제물(祭物)......!' 어찌 생각하면 그녀는 실로 박복(薄福)한 여인이었다. 늘상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했으되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예전에는 용백검으로 인해 쓰린 상처를 입었고 지금은 마록에게서 그 때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최소한 이건 아니었는데........' 안타깝게도 일 년이라는 기간을 마록의 곁에 묶여 있으면서 그녀의 마음은 어느 덧 그에게 반쯤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비록 마인(魔人)일지언정 마록은 아름다운 사내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사내다. 그러니 고독과 절망에 휩싸여 있던 그녀가 이끌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록의 잔인한 음성이 그녀를 채근했다. "나는 기다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버... 벗겠어요." 상관영봉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고름을 풀었다. 스슥....... 그리 어렵지 않게 여인의 벗은 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둥그스름한 어깨를 쑥 내보이더니 잠시 주춤했다가 상반신 모두를 노출시켰다. 속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이 상황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듯 했다. "으음!" 붉게 충혈된 마록의 눈이 여인의 상체를 직시하고 있었다. 상관영봉은 그 눈길을 느끼면서도 팔로 가슴을 가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아름다운 유방이 적나라하게 전시되는 동안에도 그녀에게는 어차피 따로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치마의 끈을 끄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의식하며 내심 자조를 금치 못했다. '두려워 하긴....... 자청했던 일 아니었어?' 치마가 스르르 흘러 내렸다. 그러자 더 남은 것이라곤 한 장의 고의 뿐이었다. 활처럼 휘어진 허리의 곡선 아래 풍만한 둔부의 양감까지도 이미 다 드러나 있었다. "흐음......." 마록의 숨결이 고조되었다. 이 동장철담의 사내도 빼어난 여인의 육체를 대하면 흥분이 되기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한 겹의 고의마저 제거되었을 때, 그는 부르르 경련했다. '우우......!' 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태초의 알몸이 되어 서 있는 상관영봉을 위 아래로 훑어 보았다. 상관영봉은 도저히 그를 마주볼 수가 없어 눈을 내리감았다. 그 상태에서도 그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마록의 눈길이 유독 여인의 상징이랄 수 있는 곳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을. 마록의 눈은 거의 핏빛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욕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그가 지니고 있는 마성(魔性)의 격발에 의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그의 음성도 평소와는 완연히 변해 있었다. 반면에 상관영봉은 그의 변화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으로써 본능적인 수치감도 있었거니와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비애 때문에 거기까지는 인식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로 한 발씩 다가섰다. 절세의 미녀가 전라로 걷는 모습이란 정녕 뇌쇄적이었다. 미간에 깃든 슬픔마저도 어쩌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남자의 보호본능을 유발시켜 정복을 종용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곤 하는 여인의 신비지처(神秘之處)는 차라리 침몰을 부르는 늪이리라. '우우.......' 마록의 격정은 얼굴 전반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이 그러했듯 안면까지도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 갔던 것이다. 상관영봉은 그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체념으로 인해 눈을 꽉 감고는 있었으나 상대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잔뜩 움츠리기도 했다. 마록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피처럼 붉은 깃털이었는데 길이가 한 자쯤 되어 보였다. 천마혈우(天魔血羽). 이 깃털은 마도(魔道)의 귀중한 신물로써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경구가 붙어 있었다. - 천마혈우가 출현하면 전 마도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전설상의 영조인 천뇌혈붕(天雷血鵬)의 깃털로 영원불멸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천마혈우, 마록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지금 천마혈우를 꺼내서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 '으음......!' 상관영봉은 선뜻한 감촉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것은 뭔가 까칠한 털 같은 것이 목줄기를 간지럽혔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스스스....... 그 불유쾌한 느낌은 곧 그녀의 목을 지나 가슴어림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전신의 솜털이란 솜털은 모두 곤두서는 것 같았으나 두려움이 인 나머지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마록. 그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에서 천마혈우를 움직였다. 그것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양 젖가슴 사이에서 함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으으... 내게 이런 식의 희롱을.......' 상관영봉의 고운 안면이 노여움으로 인해 붉게 상기되었다. 차라리 광포한 손길에 유린을 당한들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요컨대 그녀에게는 지금보다 더한 모멸을 당해도 거부할 여지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천마혈우는 그녀의 오른쪽 젖가슴에서 머물며 쓰다듬듯 애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경직되어 있던 상관영봉의 몸이 다시금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그녀가 보이는 반응은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무엇이지? 이 미묘한 느낌은.......' 실로 기이했다. 그녀는 천마혈우가 왼쪽 젖가슴을 마저 쓰다듬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 아랫배에서 움직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비틀었다. "흐윽......!" 마록은 그 때까지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단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만 열중할 따름으로써 그의 표정에 나타나 있는 집요함이란 거의 잔인하게 보일 정도였다. 천마혈우는 더욱 더 여체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었다. "하악!" 상관영봉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제... 제발 멈추어 주세요!"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애원에 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 때에 그녀는 처음으로 눈을 떴는데 그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짙은 열기가 배어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겁을 집어 먹은 것은 마록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빨려드는 자신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록이 그녀의 청을 들어줄 리 만무였다. 그는 입가에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며 천마혈우를 움직여갔다. "흐으윽......." 상관영봉의 나신이 급기야 뒤로 활처럼 휘더니 석실 바닥에 길게 드러눕고 말았다. 마침내 이성을 상실해버린 것일까? 그녀의 입에서는 열에 달뜬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이란 실로 기괴한 것이었다. 마록은 본능에 의해 광적으로 몸부림쳐대는 여체를 바라보며 그것을 즐기는 듯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④ 상관영봉. 일찌기 고귀한 신분이었으되 현재는 전혀 그렇지 못한 이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엎드린 채 스스로 마록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흑흑......." 그녀의 울음 소리를 들은 마록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는 의자에 반쯤 드러누운 채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난 네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우는 것이냐?" 상관영봉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당신에게 당한 일은 죽음보다 더한... 흑......."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가 어찌 보였는지는 모른다. 마록은 거의 표정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무심히 대꾸했다. "그럼 내게서 무엇을 기대했느냐?" "기대라구요?" 상관영봉은 울면서 웃었다. "호호호... 그렇군요, 저도 애초부터 그런 것은 없었어요." 마록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눈물을 그쳐라. 나는 여인이 내 앞에서 찔끔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나오건 달라질 바는 아무 것도 없다." "으음......." 상관영봉의 입에서는 절망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록은 발을 들더니 그녀의 젖가슴을 아무렇게나 건드렸다. "어쨌든 나는 너를 통해 만족감을 얻었다. 그 대가로 너의 소원 한 가지는 들어 주겠다. 원하는 것이 뭐냐?" 상관영봉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마록의 모욕적인 발짓으로 인해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겨우 한 마디를 쏟아낼 수 있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복수를 하게 해 주십시오." 마록은 입술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숙야빈을 죽이게 해 달라는 것 말이냐?" "그렇습니다. 꼭 제 손으로... 그 자의 목을 따고 싶습니다." "좋아, 허락하지. 나는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상관영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마록의 발을 감싸 안더니 가슴에 댔다. "부탁이에요, 그 이후로도 저를... 버리지는 말아 주세요. 당신은... 영원한 저의 주인이십니다." 상관영봉의 애소는 진심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그녀는 마록에게 이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허락했다 여기고 있었는데 이는 마록의 매력 외에도 그가 지닌 섭혼마백최심공(攝魂磨魄催心功)이 크게 주효했다. 마록이 누구인가? 그로 말하자면 천 년의 신비왕국인 혈사해(血死海)에서 온갖 괴이한 마공(魔功)을 두루 섭렵한 위인이었다. 이 점을 상기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쉽게 납득이 되리라. 그의 일신에서는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늘상 사람의 마음을 빨아 들이는 신비한 기운이 발산된다. 그가 수하들이나 측근들로부터 신처럼 숭상받는 데에도 이 영향은 배제할 수 없었다. "아아... 저는 믿어요, 언제고 당신이 저를 뜨겁게 사랑해 주실 날이 오리라고요." 상관영봉은 마록의 발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며 몸부림쳤다. 황금대전(黃金大殿). 벽도, 기둥도, 천정에 매달린 궁등조차도 모조리 황금이다. 이 세상에서 이처럼 황금에 둘러 싸여 생활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꼭 한 사람 외에는 더 없다. 협중협 숙야빈이었다. 그는 비단옷을 입고 금대를 두른 채 상아로 된 침대에 드러누워 한껏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침상 곁에는 황금쟁반이 있었고 거기에는 예외없이 사탕이 들어 있었다. 숙야빈은 사탕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화중화(花中花)란 여인이 나를 찾아 왔다고?" "네." 보고자는 몸매가 옷 밖으로 터져 나갈 듯이 풍만한 이국(異國)의 미녀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그녀는 열정과 더불어 뭔가 갈구하는 빛이 담긴 눈으로 숙야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모로 분석해 보아도 추파(秋波)가 틀림 없었다. 아마도 여인들에게 휩싸여 지내는 숙야빈의 원칙이 변하지 않는 한 이 현상은 그의 주변에서 끊이지 않으리라. 반면에 최근 들어 숙야빈은 여인들의 기대가 몹시도 귀찮아지고 말았다. 이런저런 일들로 머리가 하도 복잡하다 보니 혼자 있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쓰헐! 내 앞에서 암내 피우는 계집의 속셈이란 게 다 뻔하지 않은가? 천박한 것들.......' 그는 불과 며칠 전에 비해 몸이 또 불어나 있었고, 꼭 그 때문은 아니겠으나 정력감퇴를 실감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남성적 매력에 대해서는 간간이 회의에 이르기도 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금이 아니면 어떤 계집이 얌전히 내 곁에 붙어 있겠는가? 빌어먹을!' 아무튼 이 심리현상은 그의 안면에서 흔하던 웃음기를 싹 걷어가 버렸으며 그는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화중화가 무슨 볼 일이 있어 날 찾아왔단 말인가? 소문에 의하면 신주칠기성 중 사성(四星)을 노예처럼 부리고 다닌다던데 그러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숙야빈은 이 순간 무엇보다 자신이 화중화의 눈에 의해 네 명의 신주칠기성들과 비교될 것이 가장 싫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으로 인해 대사를 그르칠 만큼 경솔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의 두뇌는 다른 방면에서도 눈부시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 여우같은 계집이 직접 나를 찾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자고로 일이 없으면 삼보전(三寶殿)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거늘, 일단 만나 보기나 하자.' 그는 금발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서 들어 오라고 해라." "네......." 숙야빈은 부지중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우... 타고난 요물이다, 이 계집은. 왜 신주사성이 여왕처럼 섬기는지 알 것 같군.' 툭! 격정을 억누르려 무진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 물려져 있던 사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면전에 서 있는 화중화 항예를 보며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녀의 뒤에는 네 명의 인물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검중검 이검명, 도중도 전태악, 기중기 화린(華璘), 운중룡 철천악(鐵天嶽) 등 신주칠기성에 속한 인물들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경호원들까지 달고 있으니......!' 화중화 항예는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법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정말 영광이에요. 천하제일의 협객(俠客)이신 협중협(俠中俠) 숙야빈 선생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요." 그녀의 음성을 듣자 숙야빈은 전신에서 더욱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간신히 입을 떼어 응수했다. "그, 그건 나도 그렇소. 화중화 낭자." 항예는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별 말씀을. 당치 않아요. 소녀의 하찮은 이름이 어찌 숙야선생과 비교될 수 있겠어요?" 숙야빈은 안면을 씰룩이며 어색하게 덧붙였다. "과찬이오. 낭자야말로 소문보다 열 배는 아름다운 것 같소." "호호... 그 말씀, 진심인가요?" 항예는 섬섬옥수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바람에 가느다란 허리가 약간 비틀려 그녀의 자태는 더욱 요염해 보였다. 숙야빈은 어느 덧 움찔하여 몸을 떨기까지 했다. '전신에서 미공(媚功)이 발산되다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 계집은 정말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는 심중을 감춘 채 본론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낭자께서 본 장을 찾으신 이유는 무엇이오? 내가 이 곳 항주 장원에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소?" 숙야빈은 원래 기분 내키는대로 열 군데의 장원을 번갈아 이용하되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캥기는 구석이 있자 나름대로 방어막까지 구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열 곳의 장원에 모두 자신으로 위장된 자를 세워 놓고 타의 이목을 속이는 일로써 대정성(大正城)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려면 천하 열 한 곳을 동시에 공격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숙야빈은 항예의 방문 목적도 궁금했지만 그녀가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 냈는지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 내 조직체계에 구멍이 뚫렸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다면 내 행적이 어찌 노출된단 말인가?' 항예가 묘하게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먼저 후자의 질문부터 답해 드리겠어요. 열 곳의 황금장원에서는 똑같이 숙야선생이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관찰하면 어디 계시는지 금세 알 수 있죠." "어떻게 말이오?" "선생의 유난히 까다로운 식성(食性) 때문에요." "아......?" "호호... 숙야선생이야 전부터 소문난 미식가(美食家)가 아니신가요? 항상 일식(一食) 사십구찬(四十九饌)의 버릇이 있잖아요. 한 끼에 사십구종이나 되는 반찬, 그것도 매번 새로운 것을 마련하여 올리는 일이란 쉬운 노릇이 아니에요. 황금장원의 주방장들은 그 점 때문에 무척 고심을 하죠. 선생께서 계실 적에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으음, 언제 거기까지 연구했었소?" 숙야빈이 경계의 빛을 드러내는데 비해 항예는 더욱 자신있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돌아본즉 아홉 군데 장원의 주방장들은 모두 일거리가 적어 늘어져 있었는데 유독 이 곳 항주장원의 하(河)주방장만은 몸살이 걸릴 정도로 바쁘더군요. 그 이유는 물론 숙야선생께서 그를 너무 괴롭히신 탓이고요." "흐음!" 숙야빈은 신음을 발하며 무서운 눈으로 항예를 노려 보았다. '영악한 계집이로고! 무슨 속셈으로 내 주변을 그다지도 세밀하게 탐색하고 다녔지?' 항예는 그의 심중을 짚어 내기라도 하듯 말했다. "호호호... 이젠 전자의 질문에 답해 드릴 차례네요." 그녀는 약간 뜸을 들인 후, 아름다운 입술을 떼었다. "저는 숙야선생께서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을 제거해 버릴 수 있어요. 그 점을 말씀드리려고 왔죠." "뭐, 뭣?" 숙야빈의 안색이 일변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니, 그게 누구요? 내게는 그럴 만한 대상이 없소." 그 말은 대번에 항예의 비웃음을 샀다. "호호호... 이 상황에서도 잡아 떼시려는 것으로 보아 정말 그 자가 두렵긴 두려우신가 보군요. 그럼 천하의 숙야선생이 꺼리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제 입으로 한 번 말해 볼까요?" "관두시오!" 숙야빈은 정색을 짓는 한편, 노기 띈 음성으로 물었다. "더 이상 빙빙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 합시다. 대체 낭자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항예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죠, 저도 기다리던 바이니까. 간단해요. 그를 죽여 드릴테니 제 요구를 들어 주세요. 그것 뿐이에요." 숙야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 들으면서도 설마설마 했더니, 낭자는 실로 대단한 거래를 청하고 있구려? 일단은 그 배짱이 마음에 드오." 만일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화중화 항예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칭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마중마(魔中魔) 마록이었기 때문이다. 숙야빈은 더 없이 진중하게 응수해 갔다. "낭자가 말한대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낭자는 무림의 흉적을 제거한 사람으로써 천하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이오. 그래,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이라도 있소?" "그야 물론이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자청하여 이 곳까지 찾아올 수가 있었겠어요?" "으음......." 숙야빈은 무엇을 탐지하는지 한 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주시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낭자를 믿겠소. 어서 조건을 말해 보시오." 항예는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숙야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웃음에서는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자부심마저 묻어 나왔던 것이다. 그는 내심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 요망한 계집은 지금 나와 마록을 싸잡아 비웃고 있다.' 제19장 아름다운 명분(名分) ① 열 척의 범선으로 이루어진 선단(船團)이 장강(長江) 하구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와 뱃길을 따라 항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장강으로 흘러드는 또 하나의 지류를 만나자 그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한 곳에서 닻을 내렸다. 그 지류를 타고 계속 역류하면 천하 오대호(五大湖) 중의 하나인 파양호( 陽湖)에 이르게 된다. 이윽고 선단에서는 다섯 명의 노인이 내렸다. 그들은 예정에 있은 일인 듯 뭍을 밟게 되자마자 그 곳에서 가장 큰 자재상을 찾아 갔다. 육만춘(陸萬春)은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눈은 탁자 위에 놓인 하나의 상자에서 영판 떨어질 줄을 몰랐는데 그 속에서는 찬란한 보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상자에는 이른바 칠보(七寶)라고 불리우는 보석들이 하나 가득 들어 있으니 말이다. 금, 은, 유리, 파리( 璃), 차거( ), 산호, 마노(瑪瑙) 등. "어떤가? 이 정도라면 충분한 것으로 아는데......?" "무... 물론 입죠!" 육만춘은 허리를 숙여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이게 웬 횡재냐? 가뜩이나 공사 주문이 끊어져 건축자재 값이 폭락하는 판국에 남아 돌아가는 것들을 몽땅 사들이겠다니.' 그는 희희낙락인 채 눈 앞의 재신(財神)들을 우러러(?) 보았다. 상대는 다섯 명의 노인으로 한결같이 기품이 있어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일신에는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었으며 고령자들임 에도 불구하고 하나 같이 정정해 보였다. 그들 중 가운데 있던 백염(白髥)의 노인이 말을 꺼냈다. "헛헛헛... 노부 등은 은퇴한 관리들이라네. 근자에 뜻이 맞아 섬 하나를 사들였지. 우리는 그 섬에서 죽을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네. 그래서 섬에다 그럴 듯한 장원을 한 채 지어 보려고 자재들을 사들이는 것일세." "헤헤... 부럽습니다. 정녕 좋은 구상이십니다요. 그런데 장원을 얼마나 크게 지으시기에 이렇게 많은 자재를 구입하십니까?" "헛헛... 다섯 가문이 합쳐지니 어찌 안그렇겠는가? 식솔들을 헤아려 보니 대략 오백 명이더군. 그들과 함께 기거하려면 그 정도로도 부족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육만춘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좀 뭐한 말씀입니다만 이런 난세에는 그저 몸을 사리는 것이 최고입죠. 요즘에 저희 같이 힘없는 사람들은 정말 살기가 힘듭니다요. 무사들이 백주에 살인을 저지르고 다녀도 관(官)에서는 속수무책이니......." 백염노인은 그의 시국론(時局論)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자네 말이 백 번 맞네. 주문한 물건들은 언제쯤 가지러 오면 되겠는가?" "헤헤... 워낙 막대한 물량이 되어 놔서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리겠는뎁쇼?" 노인은 점잖게 손으로 수염을 쓸어 내렸다. "알겠네. 배에서 기다릴테니 그 안으로 물건을 실어다 주게." "예예! 알겠습니다요." 열 척의 범선은 그로부터 정확히 열흘 후에 다시 출발했다. 인근의 건축자재를 몽땅 매입하여 배에 가득 싣고서.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건재상인 육만춘도 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큰 횡재를 한 것에 만족하여 입이 쩍 벌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불회도(不廻島). 파양호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섬이다. 불회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섬 주변의 수류가 변화무쌍하 여 자칫 휘말려 들었다 하면 목숨을 잃기 쉽상인 때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뱃길의 경험이 풍부한 어부 몇 명도 그 곳의 급류에만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 뒤로 불회도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전체가 무성한 갈대로 뒤덮혀 버렸고, 이로 인해 한 가지 전설도 생겨 났다. 그것은 춘추전국시대에 한 제후가 전란을 피해 이 곳에 엄청난 보화를 숨겨 두었다는 얘기였는데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정작 그 보화를 발견해 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월이다. 강안(江岸)의 봄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본시 강남의 풍물은 젊은 연인들과 시인묵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곤 했다. 넓디 넓은 파양호반에 유람선을 띄우고 뱃놀이를 즐기는 청춘들의 얼굴에는 의례껏 꿈이 어려 있었다. 이 곳에 열 척의 범선이 나타난 것은 사월하고도 이십구일의 일이었다. 그들 선단은 일명 죽음의 섬으로 불리우는 불회도로 다가가더니 예의 무성한 갈대림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과연 선단이 불회도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니면 전자에 다른 사람들이나 배들이 그러했듯 급류에 휘말려 침몰하고 말았는지, 그것은 누구도 가늠해 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상상치도 못했던 역사의 한 장(章)이 머지않아 열리게 된다. 불회도라는 외딴 섬에서 향후 무림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게 될 엄청난 일이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회도에 웬 공사가 착공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놀랍게도 열 척의 범선은 무사히 섬 안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섬 중앙에 거대한 장원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장 오백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공사였다. 실상 불회도는 아홉 갈래의 급격한 수류가 늘상 주위를 맴돌고 있어 수로를 알지 못하고는 접근해 올 수가 없었다. 설사 섬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두터운 방어막처럼 주변을 십리 이상의 폭으로 둘러싸고 있는 갈대림 때문에 상륙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제 길을 찾지 못하면 그 근처에서 표류하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하므로.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랄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굳이 그 곳을 찾아 들어온 선단에 관한 사항이리라. 그들이 어떤 무리들이며, 또 정확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가 말이다. 장원(莊院). 불회도의 중앙부에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축조되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리 완공된....... 대전(大殿). 이 곳에는 고희(古稀)를 넘겼음직한 열 명의 노인들이 자단목으로 된 탁자를 가운데 놓고 그 주위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약간 높은 자리에는 백포를 씌운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용류옥이 담담한 신색으로 좌정해 있었다. 그는 노인들을 주욱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호법 여러분들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써 주신 덕에 마침내 우리의 장원이 완성을 보았소이다. 본인은 장원의 이름을 천명부(天命府)라 짓기로 했소. 천명을 받들어 난세를 바로잡아 나갈 지사(志士)들의 터전이기 때문이오." "오오! 천명부......!" 열 명의 노인, 즉 창주도의 십대호법들은 탄성을 발할 뿐 어떤 이의도 달지 않았다. 그들은 천명부의 탄생과 곧 있을 출범에 대해서라면 오직 희열과 무한한 기대만을 가지고 있었다. 용류옥이 말했다. "현 무림은 내막적으로 화약고나 다름이 없는 바, 머지 않아 불이 당겨질 것이오. 모두들 아시겠지만 대정성과 군마성의 움직임이 최근 들어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는 소식이오." 그의 진중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들은 소위 제사(第四)의 대열에 있다고 할 수 있소. 그리고 제삼(第三)의 세력인 욕망궁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우리들은 극히 은밀하게 행동해야 하오." "으음, 제사열(第四列)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합니다." 십대호법 중에서 누군가 한 명이 말하자 용류옥은 빙긋 웃어 보인 후,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듯 본도에서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과 암중으로 아군(我軍)을 모으는 것이오." "......!" 십대호법은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수긍의 뜻을 표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용류옥의 논리에는 도시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당금 무림에서 양대세력에 속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세력은 정통문파인 구파일방 뿐이오. 그들은 현재 봉문(封門) 상태로써 가장 미약한 세력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무시할 수 없소. 그들의 천 년 전통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용류옥은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그들을 모두 천명부에 가입시킬 생각이오." 십대호법의 안색이 처음으로 크게 변했다. 구파일방을 가입시키는 데는 많은 위험 요소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천명부라는 이름이 외부로 노출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렇게 되면 전력상 별 도움도 안되는 그들로 인해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마는 불행한 사태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석호법인 백충량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주군, 물론 심사숙고 하셨을 것으로 압니다만 그 점에 대해서 만큼은 재고해 주십시오." 역시 십대호법 중 일 인인 구자후(仇子候)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 늙은이도 백호법과 동감입니다. 그들을 합류시켰다가 자칫 짐만 얻게 되는 것은 아닐른지요?" 용류옥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단호히 말했다. "본인도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소만 이제 와서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또한 나름대로 작정해 둔 바가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여러분께서는 본인이 떠나 있는 동안 예정대로 이 곳에 파천만상이로대진(破天萬像迷路大陣)을 설치해 외부의 접근을 차단시키는데 힘써 주시오." 백충량은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두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주군." "그럼 부탁하겠소이다." 용류옥은 말을 맺음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② "무슨 볼 일이 있어 왔느냐?" 용류옥의 직선적인 물음에 백하연은 할 말을 잊은 듯 우물거렸다. 그러더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듣자 하니... 주군께서 내일 이 곳을 떠나신다기에......." 그의 처소를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실로 용감했었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뭔가?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건만 도시 말이 제대로 나와주지 않았다. 아니,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았다. 용류옥의 추궁(?)은 한결 강도를 더 했다. "내가 떠나는 것과 네가 이 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과 대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이냐?" '끙! 어쩌면 저러실 수가.......' 백하연은 입술을 잘근 깨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에 금시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냉랭하게 느껴지는 용류옥의 음성이 그녀의 귀로 또 한 차례 꽂혀든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하연, 어서 네 거처로 돌아 가거라. 너 정도의 나이라면 타인의 이목도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백하연은 급기야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정말... 해도 너무 하십니다, 주군......." "내가 말이냐?" 용류옥은 정색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지금 지극히 타당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 절대로 네 말처럼 너무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떻게 제게 이렇듯 매정하실 수가 있죠?" 백하연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이 순진무구한 소녀는 감히 어째 보려고 방문을 결행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밤을 통해 그 동안 절실했던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다정한 말이라도 들었으면 했던 게 전부였다. 반면에 용류옥은 그녀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냉정을 가장하면서까지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탄한 인생을 살지 못한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세사(世事)에 밝았다. 따라서 모든 대상에게 너그러운 한편, 감정을 함부로 흘리고 다니는 일 따위는 극도로 자제하자는 주의였다. "잘 들어라, 하연." 그 때까지 그는 백하연에게 앉을 자리도 권하지 않았다. "무릇 남녀의 사이란 같이 지내다 보면 서로 이끌리게 마련이다만 그것을 다 애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주군......." "나는 너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다. 네 지극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이제껏 해온 일의 반도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으로 양양으로 크게 힘이 되어 주었단 얘기지." "그, 그것이 다... 인가요......?" 용류옥은 그녀의 반응이 거세어지자 씁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구나." "흑......!" 울음보를 터뜨리는 백하연에게 그는 스스로 가혹하다 여기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산혜(珊慧)라고 하며 마음이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지. 중요한 것은 온 천하가 나를 업신여기고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그녀가 나를 사랑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독고산혜. 용류옥은 언제나 마음의 한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존재하는 그녀의 영상을 처음으로 타인의 앞에서 끄집어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낙양 장군부에서 자신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그의 음성은 어느 덧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녀에 비한다면 하연, 너는 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내가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 과거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 왔는지 말이다." 그는 새삼 지난 날을 반추하며 비참한 심경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어조에서는 당연히 느껴질 법한 자조를 대신하여 극기(克己)에 성공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절제된 의지가 묻어 나왔다. "네가 보아온 나는 그저 나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온갖 추함, 그리고 불의와 적당히 타협해 온 사악함마저도 숨겨져 있다. 오늘 날 내가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대한 빚을 청산하려는 의미가 크다." 백하연은 언제부터인지 울지 않았다. 그저 꿀먹은 벙어리가 된 채 잠자코 있을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용류옥이 쏟아내는 말들이 그녀가 수용하기에는 모두 벅찬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로 말하자면 창주도에서 성장과정을 보내며 외롭다면 외로웠다고 할 수 있겠으나 조부인 백충량의 든든한 보호 아래 그야말로 세상 모르고 살아 온 소녀였다. 그러니 실제로 독고산혜와 같은 식으로 용류옥을 사랑할 수 있었을지는 아무래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천품이 선(善)하니 경멸까지는 몰라도 자신과 다른 부류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용류옥은 말을 맺었다. "하연, 그러고 보니 내가 방금 한 얘기들은 너 이외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었구나. 후후... 이 정도면 내 진심이 어떤 형태로 너를 생각하고 있는지 너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주군." 백하연이 문득 차분해진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래, 말해라. 하연." "전 그저 얼떨떨할 뿐이에요. 주군께서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겠구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아요." 용류옥은 빙그레 웃었다. "그게 무엇이지?" "주군께선 정말 좋은 분이세요." "흐음?" 의외다 싶어 휘둥그레진 그의 눈에 흡사 한 마리의 작은 새처럼 뛰어드는 백하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쩌려고......?' 용류옥은 일순 가슴이 철렁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백하연은 그에게로 덤벼 들어 목을 와락 끌어 안더니 한껏 열정적인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허용해 주세요! 소녀가 주군을 존경하는 것만은요." 이어 그녀는 용류옥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는 중죄라도 지은 양 그대로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그녀가 그렇게 갑작스러운 행동과 함께 사라져 버리자 용류옥은 한 동안 황당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 안에 남아 있는 소녀 특유의 청신한 향기를 느끼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하연, 네가 부디 그 모습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이는 용류옥이 지순한 한 소녀에게 바치는 기원이었다. 가을 하늘은 더 없이 맑고 푸르렀다. 그 하늘빛을 배경으로 군마화원에는 한창 추국(秋菊)이 만발해 있었다. 백(白), 황(黃), 홍(紅), 자(紫) 등의 갖가지 색깔을 띈 국화가 제각기 그윽한 향기를 뿜어 내며 가을을 노래하고 있었다. 霜露鮮鮮菊萬苑 金風蕭瑟野人家 花中隱逸知人意 歲晩心期 有涯 서리 이슬에 곱게 핀 만 송이 국화여, 가을 바람에 소슬한 야인의 집이로다 꽃 가운데 은밀한 존재로써 사람의 뜻을 알아 주니, 해는 늦으나 마음 기약에 어찌 끝이 있으랴 마록. 당세 최고의 마인(魔人)으로써 마중마라 불리우는 위인이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화원의 한 귀퉁이에 서서 한 송이의 국화를 꺾어 들고는 조용히 향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자국(紫菊)이었다. 그는 꽃 중에서 국화를 가장 좋아했으며, 그 가운에서도 자국을 특히 좋아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한다는 자체가 사실은 몹시 의외적인 느낌을 준다. 평소 같아선 그는 완벽한 무취미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마록은 자국을 코 끝에 댄 채 내심 중얼거렸다. '쯧!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곳 군마성은 너무 좁아, 적어도 나 마록을 수용하기에는. 숙야빈의 집이 천하 열 곳에 퍼져 있다고 했던가? 그 자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그는 황금으로 천하를 다 사려고 계획했던 모양이다만, 훗훗... 그렇게 뜻대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역시 패도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국화가 전해 주는 소박한 정서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그러다 문득 마록은 무엇을 의식했는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어 그의 시선은 한 곳에서 뚝 멈추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화원의 맞은 편 가장자리에 있는 커다란 암석이었다. 그의 입술에는 곧 방금 전과는 또 다른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힘이다. 훗훗... 이 말은 진리이고, 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입김을 훅 하고 불어냈다. 파파파팟--! 순간적으로 마록이 들고 있던 자국이 그의 입김에 떼밀려 꽃잎을 모두 잃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인가? 떨어지진 꽃잎은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더니 예의 암석에 깊숙히 박혀 들어갔다. 푸스스....... 암석에서 돌가루가 자욱히 일어났다. 알고 본즉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지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유력자천하제패(有力者天下制覇)> 이는 힘있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의미로써 마록이 평소에 습관처럼 부르짖던 말이기도 했다. 좌우간 놀라운 일이었다. 단지 꽃잎을 입김으로 불어 단단한 바위에 글씨를 새기다니 이것은 고금 이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묘한 절기임에 틀림이 없었다. "핫핫핫핫......!" 일진광소와 더불어 이번에는 마록의 신형이 장내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감히 누가 나에게 도전을 청한단 말인가?" 마록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모처에서 정말로 도전자들과 만났다. 개중 한 명이 그에게 말했다. "마록, 근자에 들어 너의 그 으스대는 작태란 정녕 눈꼴이 시어 못봐주겠더구나.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네 하수(下手)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마록이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반성할 리 없었다. 그의 입술 끝에 그가 지닌 잔혹성을 대변하는 듯한 웃음이 매달렸다. "훗훗... 철이 없군." "뭐, 뭣이? 이 괘씸한......!" 스스슷--! 서로 다른 네 방위에서 각각 하나씩 괴인영이 솟구쳤다. 그들 네 명은 삽시에 마록을 에워쌌는데 그 덕분에 가까이서 보게 된 그들은 한결같이 영기발랄한 모습의 청년들이었다. 신주사기성(神州四奇星). 바로 신주칠기성 중 네 명이자 화중화 항예를 그림자처럼 따른다는 위인들이었다. 그들이 항예의 독버섯 같은 색(色)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들 사 인, 즉 네 명의 색노(色奴)를 마록은 싸늘한 시선으로 하나씩 둘러 보았다. "훗훗... 그래, 근황이 어떠신가? 화중화의 치마꼬리는 여전히 감미롭던가? 사서(四鼠) 나으리들." 그는 노골적인 언사도 서슴치 않았다. 말이 곱게 나올 아무런 까닭도 없었거니와 마록은 소문만 듣고서도 벌써부터 그들을 지독히 멸시해 오던 터였다. "너,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느냐?" 사성은 하나같이 격노하여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점은 마록으로 하여금 그들을 더욱 무시하게 만들었다. '쯧! 골고루 다 하는군. 이렇게 경박한 자들을 상대로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게 생겼으니.......' 그가 더 이상 비아냥을 겉으로 쏟아내지 않은 것은 그럴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는 뒷짐을 지더니 담담히 말했다. "피차에 쓸데없는 소리는 관두기로 하자. 그럴수록 피곤해질 따름이니까. 분명 도전장을 내민 것은 너희들이었겠지?" 그 말에 항예가 냉큼 나서서 답했다. "아뇨, 서찰을 띄운 것은 이 몸이에요." 마록은 그녀를 돌아다 보았다. "화중화, 그대가 말인가?" "호호호호... 왜, 뜻밖인가요?" 마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감을 잡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청부한 자가 있는 게로군. 그 자가 누구인가?" 항예는 생긋 웃으며 이죽거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텐데요?" 마록은 쿡쿡 웃었다. "숙야빈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저는 그 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후후후... 그렇군. 그대의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 마록은 역시 말장난이라 여겼는지 불쾌한 듯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사성을 향해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에게는 꼭 한 번의 기회 밖에 없다. 그 기회를 놓치면 그 후론 아예 무기조차 뽑지 못하게 될 것이다." '놈......!' 사성의 안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③ 검중검, 도중도, 기중기, 운중룡. 이 네 사람은 나름대로 일신의 무공에 대해 자부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록을 대하자 그들은 상대의 무공이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바로 이럴 때 쓰라고 합공(合攻)이라는 어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화중화라는 한 여인에게 묶여 있는 동안에 다져진 공동체의식(?) 탓인지 어느 덧 상호간에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도 그녀의 요청과 뜨거운 육탄 공세로 인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일에 끌려 들어오기는 했지만. 츠츠츳--! 마침내 사성은 각자 무기를 뽑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당금 무림에서 최강의 후기지수들이었다. 여색에 의해 쌓아온 실력이 다소 마모되었을 수는 있었으되 네 명이 합공을 한다면 문제는 또 달라진다. 갈대가 드러눕는다. 그리고 무엇인가 흐릿한 하늘을 갈랐다. 쩌어억! 그 뒤로는 경천동지할 폭음이 울렸다. 꽈꽈꽝──! 그것은 네 가닥의 각기 다른 기운이 마록이라는 한 점에 집중되면서 일어난 음향이었다. 그러더니 뒤미처 검(劍), 도(刀), 장(掌), 권(拳) 등을 통해 발휘되는 초절예들이 실로 상상치도 못할 거력(巨力)으로 사위에 폭풍을 일으키며 마록의 신형을 강타해 갔다. "환광섬마천(幻光閃魔天)!" "굉천파황멸(轟天破荒滅)!" "낙일(落日)-- 대승인(大昇印)--!" "천마뢰(天魔雷)!" 꽈르르릉! 콰콰콰콰--! 천붕지열(天崩之裂)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파생된 말이리라. 광세의 힘이 갈대숲을 온통 뿌리째 허공으로 뽑아 올렸고 방원 삼십 장 내의 대지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다. "후후후훗......!" 섬뜩한 괴소성과 함께 마록의 신형이 무섭게 회전한 것은. 이와 동시에 시뻘건 기류가 그의 전신에서 줄기줄기 폭사되었다. 그것은 폭죽이 연이어 터지는 장면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네 가닥이던 것이 폭음이 울릴 때마다 숫자를 배가시켜 여덟 가닥으로, 거기서 다시 열여섯 가닥으로....... 콰콰쾅! 콰쾅--! 검중검은 시뻘건 혈구(血球)가 달려 들자 검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다급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헉!" 혈구가 검에 부딪친 찰나, 뜻밖에도 수십 개로 나뉘어지며 그의 전신을 산산조각 낼 듯 짓쳐 왔기 때문이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더불어 그는 그대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도중도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혈구를 베었다. 적어도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크아아악!" 도중도는 스스로 내지른 비명을 자신의 귀로 듣고 나서야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몸이 수십 개의 철구(鐵球)에 관통 당한 것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럴 수가!' 의식이 순간적으로 아득하게 멀어지는 와중에서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두 마디의 비명을 더 들어야 했다. "으아악!" "허억!"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주사성의 불명예스러웠던 청춘도, 목숨도 거의 비슷한 시각에 수십 장 밖으로 산비(散飛)했다. 그들의 피와 육을 집어 삼킨 갈대숲은 침묵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고 오히려 남은 자들에게 묻고 있었다. 그 영원한 침묵과 마록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무심히 서 있었으므로. 화중화 항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현실감을 되찾지 못해 어리벙벙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한 말이란 고작 한 마디 뿐이었다. "당신이... 인간인가요......?" 마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더러 인간이냐고? 훗훗...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 필경 아닐 게야. 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줄곧 지하세계에 갇혀 있었던 자들로부터 영(靈)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으음......!" "그들은 천 년에 걸쳐 똑같은 생각을 고집했다.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기대와 희망이 천 년이 흐르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절망하고 체념했다. 훗훗... 그들이 어떤 일로 심정을 달래 왔는지 아는가?"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이 두 가지 논리에 의거해 오직 무공을 익히는데만 열중했지. 그 곳에서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것 뿐이었으니까." "즐겨요......?" "그렇다. 실제로도 강자가 되고 나면 그 즉시 환락과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매일 비무가 열렸지. 그 중 약자는 죽거나 강자의 노예가 되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다 해야 했다. 그런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는 가운데 그 곳 사람들의 무공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는 마침내 대명천지로 나오게 되었다." 항예는 자신도 모르게 교구를 가늘게 떨었다. "생각지도 않게 당신으로부터 혈사해(血死海)의 전설이 아닌 비사(秘史)를 듣게 되는군요." 마록은 웃었다. "훗훗훗... 어릴 적부터 나는 많은 살인을 했다. 때문에 중원에서는 더 살지 못하고 먼 대막(大漠)까지 쫓겨나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 기회에 나는 혈사해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혈사해는 나로 인해 열리게 된 셈이지." "으음, 우연 치곤 아주 흥미 있는 우연이었겠군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마록은 고개를 저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혈사해에 들어간 나는 한 동안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나를 노예처럼 부렸지. 그렇게 된 유일한 이유는 내가 그 곳의 인간들에 비해 너무도 약했기 때문이다." 항예의 눈동자가 이상한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마록에게서 뼈저린 고독의 응어리를 느낀 것이었다. 마록은 갈대 하나를 뽑아 입에 물었다. "훗훗.. 그 곳에서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고 나는 이를 악물며 그 모든 것을 참았다. 내가 강자가 되기만 하면 능히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는 갈대잎을 질겅 씹었다. "종내 나는 원하던 바를 해냈다. 훗훗... 혈사해에 들어간지 꼭 십 년 만에 나는 그 곳에서 가장 강한 자를 꺾었다." "아!" 화중화 항예는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기색은 감탄과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사위에는 벌써 일몰(日沒)을 알리듯 저녁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석양을 정면으로 향한 마록의 얼굴은 웬지 처량해 보였다. 오직 강해지겠다는 일념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으나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어떤 것도 그 스스로 포기해 왔던 것이다. 마록의 얼굴을 응시하는 동안 항예의 눈빛이 몹시도 흔들렸다. 마음도 거기에 따라 함께 흔들리는지야 알 수 없었지만. "훗훗... 나는 향후로 지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내 꿈은 머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항예는 야릇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에게 있어 삶의 의미란 그것이었나요?" 마록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정녕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항예는 약간의 반발을 보이며 말했다. "하긴 당신에게 물은 내가 잘못 되었군요. 평범한 인간이 누리는 행복 따위에는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는 위인에게 말예요." "평범한 인간이 누리는 행복......?" 마록은 되뇌여 보더니 갑자기 앙천 광소했다. "으하하하하핫......!" 이어 그는 비웃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약자란 늘상 짓밟히고 능멸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런 인간의 행복은 언제 어느 때라도 파괴될 수 있는즉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저 강자의 아량에 의해 유지되어 나갈 따름이다." '정말 기고만장한 작자군!' 항예는 내심 투덜거렸으나 더 이상 항변하지는 못했다. 이래저래 가슴이 썰렁하여 어떤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 때에 마록의 얼굴은 석양빛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항예가 들여다 보고 만 양면성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확실한 것은 이들 두 남녀가 동류(同類)라는 점이었다. 이를 이미 느끼고 있었던 그녀는 눈을 질끈 내리 감았다. '싫어! 이 작자도, 나 자신도.'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파란만장했던 과거지사가 스치고 지나갔다. 불행으로 점철되어 지울 수만 있다면 깡그리 지워 버리고 싶었던 일들이 마록이라는 한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도 빠짐없이 반추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품고 있는 남자에 대한 증오나 한은 쉽게 풀릴 성질의 것이 못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파괴한 자가 남자였을 뿐더러 이후로 그녀는 그 상처에 관한 한 세상 누구에게서도 위로를 받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나도 이 자처럼.......' 그녀의 이 읊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녀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④ 밤. 우우우웅--! 검명(劍鳴)은 어떤 징조인가? "또......!"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미간을 모았다. '음, 도시 영문을 모르겠구나. 부백검이 울다니.......' 이 곳은 낙양성의 장군부이다. 안찰사사(按擦使使) 독고령(獨孤嶺). 그는 지금 대전의 태사의에 깊숙히 앉아 부백검과 마주하고 있었다. 검은 울림을 발할 뿐만 아니라 뻘겋게 타고 있었다. 그것은 선혈이 흘러내리듯 섬뜩하기 그지 없는 빛이었다. 이 현상이 시작된 것은 벌써 열흘 전이었다. 그 때부터 간헐적으로 울어 대던 부백검은 잊을만 하면 자꾸 울어 그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음향은 더욱 날카로와져 갔으며 검신의 핏빛도 점점 더 짙어졌다. '제발 불길한 일만 일어나지 않기를.......' 독고령은 참다 못해 수하에게 천을 가져 오라고 하여 손수 부백검을 닦아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긁고 문질러도 검신을 뒤덮고 있는 피빛은 조금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새삼 하나의 전설이 떠올랐다. - 부백(缶白)에 피가 어리면 난세가 도래한다. 그가 이 전설을 알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나 워낙 그 자신이 침중한 심경에 휩싸여 있다 보니 번뇌인 양 머릿 속을 헤짚고 들어온 것이었다. 독고령은 관인(官人)이다. 따라서 무림의 일에는 거의 개입되어 있지 않았으며 정견(政見)의 피력도 회피하는 편이었다. 그저 묵묵히 무관(武官)으로써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고나 할까? 이것이 그로 하여금 정치적으로도 극도의 난세인 오늘을 꿋꿋하게 살아 남아 버틸 수 있게 한 철학이었다. 철컥! 그는 부백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 넣었다. "아버님." 방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오, 혜아냐? 왜 아직도 자지 않고......."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던 독고령의 입술에 언뜻 자애로운 미소가 맺혔다. 돌이켜 보면 하나 밖에 없는 여식(女息)은 그에게 무수한 고통을 안겨 주었건만 아비된 자의 입장이란 이랬다. 일신에 궁장을 입고 들어선 여인은 다름 아닌 독고산혜(獨孤珊慧)였다. 지난 날에 비해 한결 성숙해진 모습의....... 그녀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부백이 진동하고 있나요?" 독고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 말에 독고산혜는 추수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말했다. "어쩌면... 부백은 새로운 주인을 원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독고령의 안색이 일변했다. "새로운 주인이라니?" 독고산혜는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부백을 넌즈시 바라보았다. "난세가 도래하면 부백이 출현하여 마혈(魔血)을 뿌리게 된다는 전설이 있지 않았나요? 그로 미루어 부백은 아마도 자신을 사용해 줄 새 주인을 찾고 있을 거예요." 독고령은 침음하더니 수긍의 뜻을 표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미간에 한 조각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나 만에 하나, 부백이 주인을 잘못 만나게 될 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렇겠군요." 독고산혜는 긴 한숨과 더불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들어 마음이 무척 불안해요.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부백과 관련된 예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럼 누군가 찾아올 것 같다는 말이냐?" "네." 독고령은 안색을 달리 하며 물었다. "그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느냐?" "네, 아직......." 독고산혜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떨구었다. "죄송해요, 아버님. 저는 항상 속만 썩여 드리고......." "허허... 아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 독고령은 가늘게 떨리고 있는 딸의 어깨를 부여 잡았다. "용기를 내거라. 그는 반드시 이리로 올테니까. 그리고 이 애비가 지금 막 생각한 것이다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가 부백의 주인일지도 모르겠구나." "네......?" 독고령의 눈이 일순 강렬한 신광을 발했다. "사실 애비는 놈을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위인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예감대로 그가 진정한 부백의 주인이라면 나는 서슴없이 부백을 그에게 넘겨 줄 생각이다." "아버님......." 독고산혜의 커다란 눈에는 어느 덧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부친의 말은 곧 그들 부녀가 지칭하던 그 누군가를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녀석!" 독고령은 손을 뻗어 딸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아이는 자고 있느냐?" 독고산혜는 비로소 고개를 들며 살풋이 미소를 떠올렸다. "네, 유모더러 곁에 꼭 있으라고 당부하고 왔어요." "허허허... 그럼 어서 가 보아라. 깨서 제 어미를 찾느라 울기라도 하면 어쩌겠느냐?" "아버님......."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커야지. 이 애비도 요즘에는 그 작은 놈을 볼 때마다 삶의 희망을 느낀다. 눈빛이 어찌나 초롱한지, 모르긴 몰라도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게다." 독고산혜는 부친의 채근에 몸을 일으켰다. "저... 가 볼께요, 아버님." "허허... 그래라. 그 놈 목청이 워낙 커서 울음보가 터졌다간 온 부중의 사람들을 다 깨워 놓을 걸?" "아버님도......." 그녀는 젖은 눈으로 행복한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갔다. 독고산혜의 가슴에는 어린 아이가 안겨 있었다. 겨우 한, 두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기였으나 유독 눈이 크고 그만치 눈빛도 또렷또렷한 사내아이였다. 아이는 욕심스럽게 그녀의 한 쪽 가슴을 빨아 대면서도 또 한 손으로는 다른 쪽 가슴을 움켜 잡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 보던 유모가 한 마디 했다. "소공자님도 참, 이렇게 배가 고프셨으면서 아까까지 잠은 어찌 그리도 곤히 주무셨을까요?" 독고산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 복(福)이죠. 잠도 잘 자 주고 먹성도 유명할 정도이고." 그녀는 사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듯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유모는 어서 가 자도록 해요. 내가 왔으니." "네, 아가씨. 그럼......." 그녀는 유모가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려 혼자 읊조렸다. "아가, 많이 먹고 부지런히 자라거라. 그래야 네 아버님께서 오시면 깜짝 놀라시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말을 받는 음성이 있었다. "그 정도면 되었소, 산혜. 나는 지금도 충분히 놀라고 있소." 몹시도 귀에 익은 음성, 아니 떠나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자는 순간에조차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그리운 음성이다. 독고산혜는 벌떡 일어서더니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옥랑! 당신이죠? 그렇죠?" 그러자 이어진 것은 장탄식이었다. "그렇소. 당신과 나 사이에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고 이제야 나타난......." 그 뒤로 방 안에는 가벼운 바람 소리가 일었다. 휙! 이와 더불어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용류옥이었다. 그는 격동이 배인 눈으로 독고산혜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 아이......." 그는 뭐라 더 말하려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그대로 넋을 잃고 있는 독고산혜와 아이를 동시에 쓸어 안아 버렸다. 그러고도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고작 이것 뿐이었다. "미안하오, 당신과 아이에게 모두......." 독고산혜 역시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이 거짓말 같은 해후에 충격을 입은 나머지 전신을 부들부들 떨 따름이었다. "오... 옥랑......!" 사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몸짓으로 전해지는 언어와 그 사이에서 파닥이는 어린 생명이 그들이 하고자 했던 모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용류옥은 벅찬 심경을 토해내지 못하고 홀로 부르짖었다. '내게, 내게 아이가 생기다니!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는가? 내 운명의 몫은 단지 불행인 줄로만 알았거늘, 오오!' 그의 눈에서 급기야 기쁨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자신에 앞서 흐느끼기 시작한 독고산혜의 등을 토닥이며....... ⑤ "헛헛헛......! 오기만 하면 곤장부터 치려 했는데 그만 두어야겠군. 혜아가 저토록 좋아하는 것을 보니 말일세." 독고령은 눈 앞에 있는 청년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곤장 운운은 그저 농담만은 아니었다. 딸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는 가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입었으며 당시에 용류옥을 보았다면 정말로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흔한 말처럼 세월이 약인지라 독고령은 그간 흰 머리가 부쩍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용류옥이 하도 반가워 내치기는 커녕 당장이라도 태사의에서 달려 내려가 그 늠름한 어깨를 와락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놈만 해도 그렇다. 무슨 눈치를 알았는지 연신 벙글거리고 있으니 혹시라도 그 아비된 자를 누가 어찌 했다간 자신이 오히려 못참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딸의 행복에 겨운 표정에는 약간의 질투도 난다. '쯧! 이래서 여식은 키워 놓으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인가?' 이런저런 심중을 감춘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독고령에게 용류옥이 예를 갖추어 절을 올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감히 장인어른께 드릴 말씀이라곤 이것 밖에 없습니다." 독고령은 품위(?)를 의식하며 껄껄 웃었다. "헛헛헛... 용서는 혜아에게나 구하게. 저 아이가 그 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네. 으르렁거리는 아비 눈치 보랴, 자네를 그리워 하랴, 얼마나 애가 탔었겠는가? 손자놈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노부도 저 아이를 아주 못볼세라 미워 했었네." "짐작이 갑니다. 두고두고 빌어야지요." 용류옥은 눈길을 돌려 독고산혜를 응시했다. 그녀는 부친의 면전인지라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용서는 무슨......." 그러나 이 년여 만에 용류옥을 다시 만나게 된 기쁨은 그녀의 숙인 머리에서도, 목덜미에서도, 모두 진하게 묻어 나왔다. 독고산혜는 또한 갖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의 핏줄을 탄생시킨데 대해 무한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으므로. 그 덕분에 용류옥에게는 불회도(不廻島)를 떠나 낙양성으로 오자마자 감격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는 자신의 혈육이 생겼다는데 대해 실로 남다른 감회를 가지고 있었다. '나도 가정(家庭)이라는 울타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그런 곳이.......' 이전까지 그에게는 가정이라던가 가족애(家族愛)라던가 하는 어휘는 단지 환상에 불과했었다.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히는 모친과 자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부친 가운데서 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모진 시련만을 겪어온 장본인이 그였다. 그나마 천하를 떠돌면서 어디에도 안주해 본 적이라곤 없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에게도 걱정하고 기다려줄 가족이 생겼으니, 터를 잡아 가정을 꾸리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보다 먼저 해야할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말이다. 용류옥은 자신의 입장을 독고령에게 털어 놓았다. "장인어른, 죄송한 말씀이나 저는 다시 떠나야 합니다." "무, 무엇이......?" 정말로 폭발하려는 독고령을 향해 그는 진중하게 말했다. "대세(大勢)가 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이 일은 제 자신이 스스로의 신념에 대고 맹세한 바이기도 합니다. 청컨대 그 동안만 혜매를 더 부탁드립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독고산혜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의 기색을 살피던 독고령이 침중하게 물었다. "자네, 무림인인가?" "그렇습니다." "흠." 독고령은 짧게 침음하더니 자신의 딸에게 말했다. "혜아야, 아비가 결정한 대로 행해도 되겠지?" 독고산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 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용류옥은 그들 부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독고령은 얼떨떨해 있는 그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자네, 언젠가 노부가 검을 갈러 갔던 일을 기억하는가?" "기억합니다." "허허... 그 때 내가 가지고 갔던 검은......?" "그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부백검(缶白劍)이었지요." "그렇네." 독고령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벽에 걸린 부백검을 꺼냈다. 그는 부백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엄숙히 말했다. "이 검은 우리 가문의 보물이네. 한 번도 타인에게 넘어 갔었던 적이 없지. 이 검이 타인의 손에 쥐어진다는 것은 곧 독고가(獨孤家)가 끝났다는 의미니까 말일세." 그는 검이 들려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검을 자네에게 주겠네." "네?" 깜짝 놀란 용류옥이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험! 서론이 길었네만, 자네에게 주면야 아무 문제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이제 우리 가문의 사람이니까. 안 그런가?" "어르신......." 용류옥은 감격으로 인해 콧등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독고령의 하는 양이란 부친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독고령이 신색을 고쳐 엄숙하게 말했다. "부백은 지금 피를 원하고 있네. 바꾸어 말하면 악인들이 천하를 어지럽히며 날뛴다는 뜻이겠고. 자네는 부백검을 거머 쥐게 되면 필히 그 악인들을 징계해야 할 것이네." 용류옥은 더 사양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장인 어른. 부백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두 손으로 부백검을 받아 들자 기현상이 연출되었다. 우우우우웅──! 검이 느닷없이 용(龍)의 울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검을 잡고 있던 용류옥의 손도 부르르 떨렸다. '아! 힘이 느껴진다. 지금껏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독고령이 곁에서 대소했다. "핫핫핫핫... 부백이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았군. 그 영물이 자네를 기다리느라고 그토록 날마다 울었던 게야." 그 말을 듣자 용류옥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만장의 호기 때문이었다. '부백! 조금만 참아라, 네 목을 축이게 해 줄테니. 너의 바른 검날로 천하의 만악(萬惡)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다음 날 아침. 용류옥은 침상 곁에 서 있었다. 독고산혜는 지난 밤의 열기 탓인지 곱게 잠들어 있었다. 그의 품 안에서 그다지도 뜨겁게 몸부림을 치더니 흡사 어린 아이처럼 평온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류옥은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가만히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이불을 더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사랑하오, 혜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리다. 그대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복된 나날을 보내기 위해서 말이오." 그는 돌아섰다. 그것은 아이가 잠들어 있는 옆의 작은 침상을 향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혈육을 그윽히 내려다 보았다. "녀석,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후후... 네가 주인이 되어 살아갈 미래를 열기 위해 나는 세상을 정리하겠다." 용류옥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도 입술을 맞추었다. 이어 그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휙! 그가 새벽녘의 하늘로 날아 오른 뒤, 긴 탄식이 이어졌다. "아아! 당신... 부디 무사하셔야 해요." 독고산혜였다. 그녀는 떠나는 그에게 부담을 안겨 주지 않으려 일부러 잠이 든 척 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베갯잇으로 툭 떨어졌다. - 다음 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