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 제3권 검궁인 저 차례 제20장·무림(武林)의 구성(救星) 제21장·소림사(少林寺)에서 제22장·개전(開戰) 제23장·한신(韓信)의 뜻 제24장·음모(陰謀)의 실체(實體) 제25장·불사신(不死身), 그리고 난세지검(亂世之劍) 제26장·지옥염왕(地獄閻王) 제27장·잠룡(潛龍)의 용트림 제28장·부자(父子) 제29장·영웅지로(英雄之路) 제20장 무림(武林)의 구성(救星) ① 시월 초하루. 짙은 안개가 대군마성(大群魔城)을 감싸고 있었다. 천하마도의 중심지인 그 곳은 최근 들어 지극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현상일 뿐 실제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 점은 천하각처에 산재해 있던 군마지부(群魔支部)의 수장(首長)들이 속속 내성으로 당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무슨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그 모든 상황들이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는지라 자세한 내막을 짚어낼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가공할 군마세가 일로 무엇인가 목표지점을 향해 점차 윤곽을 잡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발호하면 어떤 결과가 올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무림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테니까. 마록(魔鹿).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돌의자를 치웠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처소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전의 그는 검박한 것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어째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사치를 즐기고 있었다. 의복이나 사용하는 집기들도 그러했지만 특히 그의 처소는 온통 황금과 기진이보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닥에만도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고급스럽고 화려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태사의에도 양질의 호피가 씌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절세미녀까지 대기하고 있어 장식효과를 높였다. 그 미녀의 이름은 화중화(花中花) 항예(姮 )이다. 그녀의 자태란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 간에 더욱 더 다듬어진 듯 세련미까지도 겸비하고 있다. 마록은 이따금씩 항예의 손을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그의 얼굴에서는 만족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실로 예전과는 놀라운 차이를 보이는 모습이었다. 항예 역시도 과거와는 달라 보였다. 마록이라는 인물에 의해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는 시종 요염하다기보다는 우아한 미소를 띈 채 그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마록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대전에는 줄잡아도 백여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저마다 충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대군마성과 혈사해의 인물들이 엇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기도 했다. 그들을 향한 마록의 얼굴에는 감히 누구도 범접키 어려운 패(覇)의 기운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가공할 마기(魔氣)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사뭇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바야흐로 때는 왔다. 군마세가 최고조에 달했은즉, 남은 것은 그 힘으로 전 중원을 정복하는 일 뿐이다." "우우우--!" 소리 죽인 함성이 군마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마록의 선언이 그들을 흥분과 격동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그들의 심중에서는 똑같은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 드디어 그토록 기다렸던 때가 왔다. 마도의 천하를 얻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세월과 피를 바쳐 왔던가? 전임 군마성주였던 사황 냉전령이 공손히 아뢰었다. "준비된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어 그가 천정에 매달린 끈을 당기자 한 쪽 벽면이 빙글 돌더니 전체가 지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벽이 나타났다. "오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곳으로 향해졌다. 마록의 눈에서도 일순 강렬한 신광이 번뜩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르자면 중원전도(中原全圖)로써 대강남북의 지형(地形)과 지명(地名) 등이 원하는 위치를 한 눈에 알아볼 만큼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구파일방의 위치와 대정성을 중심으로 한 정도세력의 분포도, 그리고 천하 열 곳에 산재해 있는 황금장원의 위치 등도 붉고 푸른 점들로 일일이 나타나 있었다. 마록이 말했다. "대정성은 현재 숙야빈이란 자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그가 없는 대정성은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다. 그는 세 치 혓바닥과 열근의 두뇌로써 그 전부를 얻었지." 그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하지만 숙야빈은 의심이 많은 자다. 아무도 믿지 않으며 심지어는 측근의 인물들조차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최근에는 이런 성향이 더욱 두드러져 그는 하루 이상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지. 그 덕분에 천하 열 곳의 황금장원에서 그를 위해 음식이 차려지고 있으며 가짜 숙야빈이 잠을 잔다. 그와 똑같이 생긴 자들이 말이다." 마록의 말에 군마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록이 왜 숙야빈을 이처럼 의식하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명 협중협(俠中俠)으로 불리우는 숙야빈. 그는 어쩌면 명호조차도 황금으로 사들인 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만이 당금 무림에서 유일하게 마록을 상대할 만한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마록도 얼마 전까지는 숙야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군마성의 수뇌들에게 걱정을 끼쳤으나 지금은 태도를 바꾼 상태였다. 병법을 일체 무시하던 그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논리에 충실을 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군마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마후(魔后)의 충고가 우리 대군마성을 살리는구나.' 그들은 마록의 옆에 그림같이 서 있는 여인, 즉 화중화 항예에 대해 더없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군마성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만 해도 그녀를 달갑게 여긴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로 두 남녀 사이에 어떤 묵계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자청하여 마록의 시중을 들었으며 힘만으로는 진정한 제왕이 될 수 없다고 그에게 누누이 역설해 왔다. 이에 힘입어 마록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거듭하더니 오늘에 이르렀고 가까이서 그 모습을 지켜 보던 군마들은 자연스럽게 항예를 마후로 여기게 되었다. 그녀 정도라면 마록의 배필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마록은 다시금 입을 떼었다.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기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단지 그 뿐이 아니라 천하가 나, 마록을 인정하고 스스로 오체복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오만도 이전과는 확실히 색채가 달랐다. 군마들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으음, 주군의 저런 발상은 지극히 타당하다. 하다 못해 잡초일지언정 그저 꺾는데서 그치면 이듬해 봄에 의례껏 다시 피어나게 마련 아닌가? 하물며 사람의 일일진대 뿌리까지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 '주군께선 그 동안 무엇보다 아집에서 일탈하셨다. 이제야 비로소 최강자의 면모를 갖추시게 된 것이다.' 특히 혈사해의 가신들은 절대적으로 항예를 지지했다. '마후의 기지는 천하의 어떤 여인도 따를 수 없다. 대체 누가 있어 주군의 의지를 조종한단 말인가? 우리 혈사해가 몇 년 동안 시도도 해 보지 못했던 일을 저 분께서는 한 달도 안 되어 이루어 내셨다.' 화중화 항예. 그녀는 대군마성에서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마록은 그녀를 항상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한편, 그녀를 위해 측근에 수하를 두도록 허락해 주었다. 항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군마성 내에서 오직 여인들로만 구성된 비밀 조직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천마화(天魔花)가 그것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마록도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항예를 신뢰한다는 의미로써 무조건 수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천마화에 속한 여인들은 전부 절색의 미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머리에 상징처럼 한 송이의 매화(梅花)를 꽂고 있었으며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성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녀들에 관해서만은 혈사해의 가신들도 가끔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것은 마록의 심중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대략 삼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천마화들은 항예의 명령에만 따른다. 그리고 그녀들은 벌써부터 뛰어난 미모를 이용해 강호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녀들의 활약상을 마록에게 보고하며 항예는 자랑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호호호... 어때요? 소첩의 천마화는 천 명의 군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죠. 두고 보세요. 그녀들은 뛰어난 수완과 함께 미모까지 겸비하고 있어 주군의 천하제패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될 거예요. 정말로 마록은 천마화들로 인해 최근의 무림정세는 물론이거니와 대정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도 그야말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대정성 수뇌급 인사들의 비밀회의 내용이라던가 숙야빈의 그 날 일정과 행선지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천마화는 군마성의 귀와 눈이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파생된 역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군마성에서 본래 첩보조직으로 활동했었던 은천밀사위(隱天密使衛)가 역할을 잃게 되자 유명무실해져 버렸으니까. 또 있다. "본좌는 대정성의 공격을 방법상 삼단계로 나누어 추진하고 있다. 먼저 그 첫단계는......." 마록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제 풀에 멈추었다. 그것은 군마들 속에서 문득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문사 차림의 한 중년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제갈(魔諸葛) 영호위.......' 그 자는 혈사해의 가신들 중 일원이자 별호가 말해 주듯 일찌기 마록의 능력을 알아 본 천재적인 모사(謀士)였다. 만일 그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마록이 혈사해의 대권을 장악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영호위는 마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마도 마록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맞으리라. 그가 할 일을 화중화 항예에게 전부 떠넘겼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게 되기 이전에 그는 몇 번이나 마록을 방문하여 항예를 멀리 할 것과 천마화를 해체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마록은 영호위가 항예를 질투한다고 단정했으며 급기야 그를 근신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실상 은천밀사위도 마록이 대군마성의 지존이 되고부터는 영호위의 관할이었으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마록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여전히 영호위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지만 묵살하고 말을 계속했다. "첫단계는 그들의 이목을 차단하는 일이다. 시급히 천하각처에 퍼져 있는 그들의 정보망을 분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본좌는 이미 그들의 조직을 파악해 두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숙야빈은 치밀한 인물이다. 애초부터 그는 마록과는 달리 천하의 소식을 접하고 명령을 전달하는데 신경을 기울였고 그것을 위한 특수조직까지 운영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판도가 뒤바뀌어 마록이 오히려 그 조직의 내부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다. 단, 일거에 섬멸해야 하므로 거사 일자를 정해 놓고 있다. 앞으로 보름 후, 본 성의 혈마천기군(血魔川氣軍)이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 마록은 말을 마치자 아직도 직위만은 대군마성의 군사(軍師)인 마제갈 영호위를 슬쩍 건네다 보았다. 영호위는 그의 시선을 받자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마록의 입가에 한 가닥 차가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후후후... 영호위, 네 행동을 두고 보겠다.' 그 읊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마록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단계는 대정성의 분성(分城)들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다. 본성의 세력을 팔로(八路)로 나누어 기습전으로 나가되 각로에 배치시킬 군마세는......." 마록은 옆에 서 있는 항예를 돌아 보았다. 그러자 항예는 그의 의중을 알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를 향해 수중에 들고 있던 섭선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얘들아." 학익우(鶴翼羽)로 만들어진 그녀의 섭선은 일종의 신호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것 같았다. 그 움직임에 따라 휘장 뒤쪽에서 두 명의 녹의여인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들은 머리에 피처럼 붉은 홍매화를 한 송이씩 꽂고 있었는데, 하늘하늘한 몸매가 어찌나 선정적인지 그야말로 사나이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을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녀들은 커다란 은쟁반에 받쳐 들고 온 물건을 마록에게 공손히 넘겨 주었다. 그것은 금빛 수실로 묶은 두루마리였다. 마록은 그 두루마리를 군마들에게 들어 보였다. "이것은 군림병마부(君臨兵馬簿)다. 본좌는 여기에 군마팔로군의 명단과 명령체계를 기록해 놓았다. 적힌 바대로 각로의 수장들은 병력을 정돈하여 출병에 대비하라." 군마들의 얼굴에는 일시지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군림병마부는 바꾸어 말하면 출사표(出師表)였으며 자신들의 능력과 신임도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들로서는 여태껏 마록에 의해 군림병마부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므로 자신이 과연 어떤 직급에 속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마록의 입을 통해 명단이 공개되자 그의 낮은 음성을 제외하고는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휩싸 버렸다. 군마들의 표정은 한 마디로 형형색색이었다. 어떤 자의 얼굴에는 대번에 희열이 어리는가 하면, 당연한 결과라는 듯 무덤덤한 자도 있었고, 또 어떤 자는 낙심하여 안면을 잔뜩 구기기도 했다. 대군마성은 일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군마팔로군이라는 본격적인 조직체계가 갖추어지고 각 로별로 공격 목표와 방법 등까지 논의되어지자 그들의 기세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군마성주 마록. 그는 아직 제 삼단계의 전략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 내용은 천하에서 단 두 사람, 즉 그 자신과 화중화 항예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② 무창(武昌). 이 곳은 명실공히 호북의 중심지로써 북쪽의 평원에 이르면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금 정도무림의 기린아인 협중협 숙야빈의 황금장원이 그것이다. 천하 열 곳에 있는 황금장원은 그 규모가 똑같다. 말을 타고 둘레를 한 바퀴 도는데 모두 한 나절이 소요된다. 수증기가 꽉 차 있는 욕실. "후후후... 모든 것이 예정대로란 말이지?" 칠채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욕조에는 무엇인지 모를 유백색 의 액체가 찰랑찰랑 하게 담겨 있었다. 아니, 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부옇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숙야빈이 사지를 활짝 벌리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동안 좌우에서 두 명의 여인이 찐득찐득한 유액을 계속 그의 몸에 문질러 발라 주고 있다 보니 맑은 물이 그처럼 현탁액(懸濁液)이 되어 있었다. 여인들은 두 명 다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미녀로써 옷이라야 속이 다 비쳐 보이는 망사의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나마 물기로 인해 옷이 몸에 찰싹 들러 붙어 그녀들의 몸매가 가진 놀라운 굴곡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는데, 그 상태에서 유액을 듬뿍 찍어 사내의 전신에 쳐바르고 있는 광경이란 선정적이라기보다는 해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사치를 누리는 숙야빈의 입장에서야 다르겠지만. '후후... 금력(金力)이란 역시 좋은 게야.' 그는 자못 여유로운 눈길로 아까부터 욕조 밖에 서 있었던 한 명의 또 다른 여인을 바라 보았다. 일신에 녹의를 입고 있는 그 여인의 머리에는 한 송이의 매화가 꽂혀 있었다. 그녀는 숙야빈의 몸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으며 입가에는 줄곧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숙야빈은 입 안에 든 사탕을 와작와작 씹으며 말했다. "화중화는 역시 요물이군. 여인을 돌처럼 취급한다던 마록을 그토록 쉽게 함락시키다니 말이야." 녹의여인은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화주께서 보내신 정보예요. 보시면 매사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게 되실 거예요." "으음, 좋아." 숙야빈은 만족스런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 유백색 액체가 양 쪽으로 갈라지며 그의 비대한 몸을 드러냈다. 목욕 중이니 물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그러나 녹의여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숙야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그의 몸집이 아니라 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곳이었다. 이를 느끼자 숙야빈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그 자신이 내려다 보아도 그 곳은 체구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우람하고 든든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다시 말하면 그가 요즘 들어 정력을 회복했다는 의미였다. 만사가 뜻한 바대로 풀려나가 주자 그의 개인 역사상 최고의 팽창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멋진 일이야! 멋진 일......!' 숙야빈은 내심 탄성을 연발하는 한편, 이런 기회를 가져다 준 화중화 항예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으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게 그의 진심이었다. 두 이국미녀의 시중을 받아 비단장의를 몸에 걸친 그는 녹의여인으로부터 책자를 넘겨 받았다. 그는 책자를 대충 훑어본 후, 지극히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후후... 군마성 최후도 얼마 남지 않았군." 이어 그가 욕실을 나서자 녹의여인이 뒤를 따랐다. 그녀의 얼굴이 야릇하게 상기된 것은 언뜻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실. 두 명의 이국미녀들은 매겨져 있는 격이 그것 뿐인지 침실을 깨끗이 정돈하고는 즉시 물러갔다. 덕분에 방 안에는 숙야빈과 녹의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천마육화(天魔六花), 군마성의 마후가 은전을 베푸셨다. 내게 오늘 그대의 솜씨를 견식하라고 말이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기량을 한껏 발휘하려고 미리 작정을 하고 왔죠." 녹의여인, 즉 천마육화는 야무지게 말하더니 부끄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스스로 옷을 벗어 내렸다. 무림의 요화답게 그녀는 겉옷이 제거되자 막바로 알몸이었으며 그 몸매란 황홀할 정도도 잘 빠져 있었다. "호호호... 어때요? 이 정도면 마후님만은 못해도 시각적으로 우선 쓸만하지 않나요?" 천마육화는 자신감을 굳이 속이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정말로 단단히 각오를 했는지 숙야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냉큼 침상으로 올라갔다. "흐음!" 숙야빈은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묘한 비음을 흘리며 그녀를 따라 침상으로 올랐다. 그리고는 그녀의 재간(?)에 몸을 내맡긴 채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비단장의가 벌어지는가 싶자 천마육화가 자신의 가슴 위로 나신을 겹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무공 같이 팽팽한 젖가슴의 탄력이 그의 전신에 금세 불을 당겨 놓았다. 이어지는 그녀의 애무는 너무도 능숙하여 오히려 두려움이 일 지경이었다. 그녀의 자세가 점점 아래로 숙여지자 그런 느낌은 더 했다. 마치 심혼을 탈취당하는 듯한....... 숙야빈의 몸이 가늘게 떨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의 침실은 늘 그랬지만 환락의 밀궁으로써 이 순간 사상 최대치의 가치를 선사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숙야빈과 천마육화가 벌이는 행위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상호 간의 계약 외에도 뿌리 깊은 음모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천년불역(千年佛域)의 소림사(少林寺).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문방장실의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번뇌로 인해 잠들지 못한 한 인물이 창문을 통해 침통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금 소림의 장문인인 해우선사(海宇禪師)였다. 평소 인자스럽기 그지 없던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수양을 쌓아온 승려답지 않게 수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의 뒤로는 한 명의 중년여인이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로 미루어 아마도 해우선사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그녀와 무관하지 않은 듯 싶었다. 해우선사가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제안은 타당합니다. 빈승으로서도 그것은 충분히 인정합니다만 현재의 상황과는 어긋나는 면이 있습니다. 무림성주께서 실종되시지만 않았던들 이처럼 피구름이 강호를 뒤덮는 일도 없었을 것을......." 중년여인은 불쾌한 듯 차가운 음성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흥! 그가 있었어도 사태를 걷잡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건 그렇다 치고, 그의 실종이 그토록 안타깝다면 정도무림에서는 왜 그에 따른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던 거죠?" 어투도 그렇거니와 실로 날카로운 힐난이었다. 해우선사는 만면에 수치감을 떠올리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아미타불... 그리 추궁하시니 정녕 드릴 말씀이 없구려. 솔직히 그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구파일방에 있소이다. 그 동안 너무도 안일했던 탓에 쇠퇴일로를 걸어와 눈 앞에 적을 두고도 힘을 쓸 수가 없었소이다." 중년여인의 비웃음은 도를 더 했다. "그럼 언제까지나 걱정은 모조리 입심으로 떼우고 수수방관하실 참인가요? 봉문(封門)을 하고 있으면 최소한 자파는 안전하다, 이 말씀이었겠군요?" 해우선사는 상대의 무례한 언사에도 화를 내기는 커녕 얼굴을 붉힌 채 탄식만을 불어낼 따름이었다. "무어라 하셔도 좋소이다. 이보다 더 심한 비난을 들은들 빈승의 입장에서야 어찌 탓하겠소이까? 아미타불......." 그는 답답한 심경도 스스로에게만 말했다. '업보로다! 석년에 십전무제(十全武帝)가 본사의 장경각에서 달마역근경을 빼내 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제자들을 움직여 무림을 평정코자 시도라도 해 보았으련만.' 중년여인은 제 풀에 지친 듯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때는 늦었는 걸요.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비록 무림성은 무너졌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일어서야 해요." 해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빈승이 각파에 소집첩을 돌렸습니다. 앞으로 삼 일 후면 구파일방에서 장문인들이 이 곳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이어 그는 여인을 향해 돌아서며 꽤 간곡히 말했다. "아미타불... 모쪼록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부인께서 나서 주신다면 그 분들도 예전처럼 의기투합할 것입니다. 성주의 위용을 생각해서라도......." 중년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부탁이니 성주는 더 이상 들먹이지 말아 주세요. 이번 일은 그와는 무관한 일이에요. 제가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대 성주이자 현음교주이셨던 아버님의 대리역이며, 당대의 현음교 교주 자격으로서니까요." 이렇듯 실종된 무림성주 용화천을 증오하며 현음교를 들먹일 여인이라면 천하에 또 누가 있겠는가? 그녀는 무림성주의 부인인 천음선자(天陰仙子)였다. 해우선사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응시했다. "아미타불... 시주, 계속 같은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오이다만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성주의 위명을 빌지 않는 한 구파일방의 단합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흥! 알량하군요. 그 한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 핑계로 몸을 사리려는 거죠? 그 따위 명성이 마도에 무슨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다고?" "아미타불......." 해우선사는 더 말하지 않고 침중하게 불호를 외웠다. 이 곳 소림에 천음선자가 나타난 것은 보름 전이었다. 그녀는 일단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산문 앞에서부터 호령을 하며 출현을 알려 왔는데 그녀의 추종자들은 다름이 아니라 백여 명에 이르는 현음교의 인물들이었다. 구파일방과 힘을 모아 무림성을 재건해 보겠다는 그녀의 의지만은 매우 쓸만 했으나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해우선사는 입장이 아주 난처해지고 말았다. 구파일방으로서는 마땅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문제는 그녀가 무림왕 용화천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현음교주의 신분으로서 행세를 하려는데 있었다. 이는 암암리에 가정적인 분란을 시사하는 격이었고, 이 판국에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모아 놓고 그런 치부를 드러내서 좋을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우선사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시켜 보려 했으나 도통 먹혀 들지 않았다. 천음선자는 굳이 내막까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무림왕의 얘기만 나왔다 하면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인 것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외부적으로는 전대 무림성주가 이끌던 현음교는 무림성 관할 세력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현음교가 어찌 당대 무림성주의 위명을 배척하고 단독으로 구파일방과 연수를 시도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구파일방이 순순히 따라줄 리 만무였다. 아무리 처지가 몰락했을지언정 그들로 말하자면 중원의 정통 무맥(武脈)이었다. 무림성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있기에 한 때나마 사파인 현음교와 한데 묶여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조차도 실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천음선자 단리경. 그녀는 아무리 기를 써도 모든 면에서 무림왕 용화천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대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해우선사의 가슴은 속절없이 타들어갔다. '아미타불... 용이 제 위치를 이탈해 버리니 그 자리를 대신 메꿀 만한 인재가 없구나. 오호, 통재로다! 장차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해 나가면 좋단 말인가?' 그의 말마따나 천하무림의 위기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정도무림에는 이렇다할 영도자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무림의 현황은 암울하기만 했다. 대군마성과 대정성의 한 판 승부는 기정사실이었으되 그들의 싸움은 무림의 안위와는 완전히 별개의 일로써 그저 자신들을 위한 패권 다툼에 불과했다. 대정성이 정도를 표방한 것도 옛말이었다. 어느 틈엔지 숙야빈은 벌써 일 만에 가까운 낭인무사들을 영입했고 그들로 하여금 대정성의 요직에 앉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정성의 횡포는 대군마성에 못지 않았다. 군소방파와 각 지역의 호걸들은 그들 낭인무사들과 중원팔대세가의 지나친 요구와 거드름에 지칠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결국 대정성은 언제부터인가 드러내 놓고 숙야빈의 개인집단임을 과시하는 바 되었으며 정도인들은 숙야빈을 포기하고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도 구파일방의 무력함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영도자를 열망했던 것이다. 애초 중원 무림의 태두격이었던 소림, 그 곳의 장문방장인 해우선사로서는 그러한 무림의 바램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소림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막 움직이려는 즈음에 천음선자가 등장한 것이다. 해우선사는 홀로 절망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분명 선자의 뜻은 무림을 구하는데 있지 않다. 그녀는 엉뚱하게도 이 기회를 빌어 현음교의 교세를 확장하려 들고 있다. 또 모르지, 나아가서 훗날에는 스스로 무림성주가 되겠노라며 부르짖을지도.......' 그는 공허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해우선사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천공을 향하고 있는 그의 눈 또한 한껏 부릅떠져 있었다. "오오! 저것은......!" 그의 가사장삼이 바람도 없는데 격렬하게 떨렸다. "아미타불......! 이것이 하늘의 뜻이련가? 오오, 삼대혈성(三大血星) 밖에 볼 수 없었던 야천에 또 다른 별이 나타나 천기를 바꾸어 놓다니......." 천음선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대사." 해우선사는 격동한 탓인지 체신도 망각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연신 불호를 외워댔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무림에 구성(救星)이 나타났소이다. 천지간을 밝혀 줄 구성이 말이외다. 아미타불......!" "구성?" 천음선자의 눈꼬리가 홱 치켜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우선사는 기쁨의 빛을 감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이 곳으로 오고 있소. 오오, 머지않아 본 소림사에 그가 당도할 것이오." 그 말에 천음선자의 안면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그녀는 해우선사가 천문학과 신산성복학(神算星卜學)에 밝다는 사실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천기를 살피는 그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심중을 드러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 마당에 구성이라니, 어떤 작자란 말인가?' 그 일은 천음선자로서는 영 반갑지 않은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던 그녀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누군가의 방해를 받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염원이야 언제고 절실했지만 얼마 전 아들을 잃어 버린 후로는 더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현음교를 천하제일문파로 만드는 일 뿐이었으니.......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미지(未知)의 인물을 두고 아무도 모르게 눈에서 새파란 불꽃을 튕겨 냈다. 아울러 그녀는 내심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누구고 본교 활동에 제동을 건다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내 손으로 직접......!' ③ 천불동(天佛洞). 이 곳은 소림사의 금지구역으로써 역대 조사들의 유골을 모신 조사동이 있는 장소이다. 위치상으로는 숭산(崇山) 태실봉의 서쪽 뒤켠에 있으며, 그 입구에서부터 소림사의 십팔금강나한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떡 버티고 선 채 엄중하게 지키고 있다. 그들 나한승들로 말하자면 모두 백 세가 넘는 원로들이다. 현 장문인보다도 오히려 한 배분이 높은 노승들로 그 존재는 단지 해자(海字) 돌림의 몇몇 고승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저력이야말로 은연중 소림의 천 년 전통을 지켜온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 나한승들은 소림의 숨은 실력자들이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천불동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가닥 창노한 불호성이 울려 나왔다. 조사들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곳에 웬 사람이 있어 소리를 내는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그 말을 받는 다른 음성도 있었다. "허허허... 노화상(老和尙), 소림이 자랑하는 달마삼검(達摩三劍)도 별 수 없군?" 그저 비아냥으로 흘려 듣기에는 웬지 무게가 실린 음성이다. 먼저의 불호성이 응수한다. "아미타불... 그렇게 말씀하실 일이 아니외다. 본 소림사의 달마삼검은 무적(無敵)입니다. 빈승이 패한 것은 시주의 검학이 워낙 화경에 접어든 탓이기도 하거니와 빈승이 늙어 논검하기조차 기력이 딸리기 때문이외다." "헛헛헛... 노화상의 입심을 보건대 아직 엄살을 부리기에는 이른 것 같군. 자부심도 만만치 않고. 게다가 고작 백팔십여년을 살았다고 노부 앞에서 늙었다고 자랑하긴가?" 농담조로 쉽게 쏟아내는 그 말인즉 실로 기막힌 것이었다. 백팔십여 년을 산 인간이 있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나이 자랑(?)을 탓하는 그 자신은 그럼 몇 살이라는 것인지......? 아담한 한 칸의 석실(石室). 그 곳에서 두 명의 인물이 각기 포단을 깔고 마주 앉아 있었다. 개중 한 명은 들은 바대로 백팔십여 세가 맞는 듯 너무도 늙어 얼굴이 주름살 투성이인 백발의 노화상이었다. 그러나 맞은 편의 인물은 자처하던 바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는 일신에 청삼을 입고 있었는데 언뜻 얼굴만 보아서는 중년 쯤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하얗게 세어 있는 머리카락을 제외한다면 이목구비도 무척이나 단아했으며 눈빛은 물처럼 담담하고 고요했다. "아미타불... 아직 어린(?) 노납이 실례했소이다." 노승은 사죄하는 의미로 합장을 해 보이더니 짓무른 눈을 껌벅이며 말을 이었다. "노납의 생각입니다만, 신검노(神劍老)께서는 더 이상 검에 대해서는 얻으실 것이 없다고 사료되오이다." 신검노.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장춘곡에서 탈출해 온 장춘오로(長春五老)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턱 밑으로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것은 노화상이 진정한 검학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이야. 검학이란 도(道)나 불(佛)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 평생을 수련해도 끝이 없으니 말이야." 노승은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빈승이 또 실수를 했소이다. 시주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군요." 이어 그는 어투를 바꾸어 보다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논검도 끝났으니 그만 본론으로 들어 갔으면 합니다. 시주께서 빈승을 찾아 오신데는 반드시 그만한 연유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신검노는 빙긋 웃었다. "노화상은 지금 내 앞에서 불제자답지 않게 시치미를 떼고 있군.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노승은 주름진 얼굴을 은은하게 붉혔다. "아미타불... 그럼......?" "헛헛헛... 뻔하지 않은가? 이 냄새나는 절간에 노부가 무엇이 아쉬워 찾아 오겠는가? 노화상이 아무리 드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해도 나는 소림의 무학에는 관심이 없네. 단지 이 곳에 보관되어 있는 한 가지 물건을 빌리려고 왔다네." 노승은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빈승도 대충 짐작은 하면서도 계속 설마 했습니다." 그에 반해 신검노의 담담한 어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서 불경이나 내놓네." "시주, 혹시 재고해 보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노승의 음성이 불안을 담은 채 울려 나오자 신검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왜, 노부가 유마패엽진경(維摩貝葉眞經)을 가져가 함부로 내돌릴까봐 걱정이라도 되는 겐가?" "그, 그것이 아니라......!" "그럼 뭔가?" 노승의 망설임이 의외로 길어지자 신검노 또한 못지 않게 조소의 도를 더 했다. "어차피 이 곳 중들의 돌머리로는 유마패엽진경상의 내용들을 절반도 깨우치지 못하지. 노화상도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을텐데 내주려니 아까운가 보군?" 노승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 "우선 유마패엽진경이 본 사에 있다는 것은 시주께서 어찌 아시게 되었습니까?" 신검노는 껄껄 웃었다. "일찍부터 유마패엽진경에 대해서라면 내가 노화상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지. 그 물건은 본래 천축의 대뢰음사(大雷音寺)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대뢰음사가 반도들에 의해 무너진 후로 소뢰음사(小雷音寺)를 세운 마승들은 유마패엽진경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지. 만일 그들이 그것을 찾았다면 천하는 지금쯤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게야." "으음......." "다행히도 달마(達摩)라는 분이 천축에서 건너올 때 유마패엽진경을 가지고 오셨지. 하지만 그 사실을 놈들이 아직껏 몰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소림은 절대로 천여 년에 이르는 역사를 이루어가지 못했을 거야." "아미타불......!" 노승은 탄식을 대신하여 불호성을 외웠다. 그의 얼굴은 거의 잿빛이 되어 있었다. 왜 안그렇겠는가? 소림사 내에서도 극비에 해당되는 사항들을 외부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그는 놀랍다 못해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한참 후. 노승은 애써 음성을 가라앉혀 입을 떼었다. "그렇다면 시주께서는 유마패엽진경을 어떤 용도로 쓰시려는 것입니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비장함마저 어렸다. 이 질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써 여차하면 실력차를 불문에 부치고 상대와 일전을 치루어야 할 판이었으므로. 신검노가 그의 심중을 짐작한 듯 시원스럽게 답했다. "헛헛... 노화상께서는 부디 안심하시게. 노부가 목숨을 걸고 맹세하건대 필히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 쓰여질 테니까." "하면?" "한 명의 기재로 하여금 그것을 익히게 할 참이네." 노승은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그 기재란 시주의 제자를 이르는 말씀입니까?" "노부도 그랬으면 좋겠네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를 제자로 거둘 자격이 없네." "무슨 뜻인지......?" "그만이 장차의 대혈겁을 방지할 인재일세. 그를 두고 하늘이 정해준 구성(救星)이라면, 노화상은 믿겠는가?" "아!" 노승의 짓무른 눈에 일순 기이한 신광이 번뜩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보게 된 신검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춘곡의 괴수들이 세상에 나온다면 엄청난 혈풍이 닥칠 것이네. 어디 그 뿐인가? 혈사해는 벌써부터 열린 상태이지. 이 시점에서 과연 노부 등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에 대처할 만한 인재를 기르는 것 뿐이네." "아미타불......." 노승은 비로소 이해가 가는 듯 눈을 내리 감았다. 그리고는 다소 흥분된 음성으로 덧붙여 말했다. "실은 노납도 어젯 밤에 천기를 살피다 북두좌(北斗座)에 서 구성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검노가 말씀하신 분이 그가 맞습니까?" "헛헛헛... 지금 막 생각한 건데, 노화상도 어지간히 엉큼하군. 내가 말할 내용들을 대강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노부로 하여금 굳이 어려운 시험을 치르게 했으니 말이야." "아미타불... 그 점은 신검노께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워낙 중대사인지라 빈승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소이다." "쯧! 이번 만큼은 사과도 하지 않는군." 신검노는 혀를 차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의기가 상통되어 반갑군. 특히 고집불통인 늙은 중에게 천기를 바로 보는 눈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천지신명께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네." "표현이 틀렸소이다, 시주. 그것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것이올씨다. 아미타불......." 천불동의 대화는 이렇게 두 사람 모두 만족감을 뜻하는 농담을 주고 받음으로써 결말을 맺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무림의 대세를 주무르는 기인들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물론 향후로 그들의 대화 속에서 등장했던 구성이라는 인물의 역량에 의해 입증이 될 문제였지만. 아무튼 여기서 한 가지만 밝혀 두자. 천불동의 노승은 강직한 기개나 무림의 안위를 염려하는 심사 등이 예시했듯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름하여 천공대선사(天空大禪師). 그는 외부로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 기실은 소림최고의 선승(禪僧)이었다. 현재 나이는 백팔십육 세로 현 장문인인 해우선사에게 사조뻘이 되는 인물이었다. ④ 사흘 후. 숭산 소림사에는 전례없는 기사(奇事)가 발생했다. 천하 구파일방의 수장들이, 그것도 비밀리에 모여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앞서도 언급했듯 소림의 해우선사로부터 밀지(密紙)를 받고 서둘러 달려 왔는데 그들의 회동은 워낙 은밀하게 이루어져 심지어 자파에서조차 장문인이 출타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들은 모두 불원천리하고 소림사에 집결했으며 각기 수행도 한 명씩 밖에는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어쩌면 그만치 사태가 급박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대정혼(大正魂)이 아직은 멸절되지 않았다는 것 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방장실(方丈室). 해우선사를 비롯하여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현 상황에서는 그들이야말로 당금 무림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 십 인은 커다란 원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미 많은 말들이 오고 갔던 듯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한숨을 쉬는 자, 잔뜩 굳어져 있는 자 등....... 다만 한결같은 것은 전원이 다 침통해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우선사가 중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천음선자께서는 지금 현음교의 힘을 주축으로 하여 무림성의 재건을 꾀하고자 하고 있소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실 터인즉 빈승은 여러분의 반대를 기대하오이다." 평소와는 달리 강경한 그의 어조에 무당파의 백우도장(白羽道長)이 재빠른 호응을 보이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물론이외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외다. 무림을 병탄한 전대 무림성주의 업적이 현음교로부터 출발한 것은 사실이나 작금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소? 당년의 그 분께선 현음교주로써 교세를 확장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음교의 힘으로 무림의 평안을 도모하여 그 공로로 성주의 위(位)에도 오르셨거늘, 어찌 그 분의 따님은 선친의 뜻을 위배하려고 하는지......." 탄식으로 끝을 맺기는 했지만 그의 말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나머지 장문인들도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해우선사 역시도 탄식을 금치 못했다. "정녕 안타까운 일이오. 대군마성에서는 절세의 마두가 일촉즉발의 기세로 버티고 있고, 대정성마저도 변절하여 패권 싸움에 혈안인 이 때에 선자까지......." 백우도장이 깝깝한 듯 재차 한 마디 거들었다. "무량수불... 이번 일로 실종되신 성주의 위명에 누를 끼치지나 않았으면 좋겠소이다. 쯧, 지금이라도 그 분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천하의 협의지사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시간 문제일텐데 그렇지 못해 속이 탈 따름이외다." "더 이상 속절없는 입담은 관둡시다." 소림과 무당의 두 장문인들 사이에 나서는 그 자는 종남파(終南派)의 장문인인 뇌공(雷公) 육만우였다. "선사께서 말씀하신 북두좌의 구성은 언제 출현하오이까? 소림에 나타나는 것은 분명 하오?" 이는 기대감이 너무 크다 보니 확인이라도 하듯 재삼 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해우선사가 그의 심중을 이해한 듯 보다 강하게 긍정의 뜻을 전했다. "그 일은 비단 노납의 육안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어젯밤에 조사전에서 계시를 받기도 했소이다. 틀림없이 구성은 옵니다. 조사들께서도 빈승에게 북쪽으로부터 현기가 뻗어오고 있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뇌공 육만우는 신음처럼 말했다. "본래 노부는 천기라던가 영적인 교류 등은 믿지 않는 인간이었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반드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소이다." 뉘라서 그와 심경이 다르겠는가? 그의 말은 어쩌면 중인들 거개가 하고자 하던 말을 대신한 것인지도 몰랐다. 해우선사는 내심 중얼거렸다. '쯧! 조사동에는 해탈하신 영령들만이 아니라 사존께서 현존해 계시거늘 그 분에 관해 밝히지 못함이 답답하구나. 그 분의 존재를 알리면 이들도 더욱 확신을 가질텐데.' 그러면서도 그는 입바른 소리는 서슴치 않았다. "아미타불... 우리는 전부 이번 일을 기화로 반성을 해야 하오. 우리들은 그간 너무도 무사안일만을 추구했소이다. 설사 문파의 비급이 유실되었다 해도 그 동안의 세월이면 충분히 새로운 절기를 창안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을......." 그것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중인들로 하여금 다같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그들은 불야성을 찾아 유실된 비급을 회수할 생각만 했지 자파의 무학을 발전시키는데는 소홀했던 것이다. 불야성(不夜城). 십전무제가 남겼다는 그 신비의 장소는 삼백오십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지나도록 세상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불야성이란 것 자체가 한낱 전설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현재로선 설사 불야성이 열린다고 해도 그 여파가 사뭇 두려울 지경이었다. 아마도 각 파의 무공비급이 미처 회수되기도 전에 천하는 지금보다 더욱 더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럴 만한 소지는 다분했다. 무공비급에 대한 무림인들의 탐욕이 빚어낼 사태란 결코 천하제패를 노리는 각축전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터이므로. 방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각기 구파일방의 지존인 그들 중에서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고심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음선자. 일찌기 당대에서 그녀만한 배경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무림성의 전대 성주를 부친으로 두었었고 내막이야 어찌 되었건 현임인 성주가 남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녀가 마음을 얼음장 같이 굳히고 종전보다 더욱 이를 악무는 것도 이 달라진 환경 탓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북쪽으로부터 그 자가 온다고?" 두 명의 미녀가 대답했다. "네. 저희들이 똑똑히 들었어요." "흥! 다들 정신이 나갔군. 그 따위 예시에 기대를 걸다니." 천음선자는 비웃으면서도 곧 살기 띈 음성으로 말했다. "금비, 은비, 너희들은 당장 가서 숭산으로 오르는 북쪽 길목을 차단해라. 만일의 사태를 위해 현음구매(玄陰九妹)를 대동해도 좋다." 금비, 은비라면 과거 용백검의 시녀였던 두 소녀다. 그녀들도 무림성의 붕괴라는 대변란을 어찌 헤치고 나왔는지 이처럼 버젓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들은 그 당시처럼 여리고 앳된 소녀들이 아니라 한껏 성숙해져 둘 다 당찬 여인들이 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교주(敎主)님." 금비와 은비는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는 물러 났다. 그녀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천음선자는 의자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는 피곤한 듯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천음선자에게 있어 혼자라는 의미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순간을 뜻했다. 그녀의 미간에는 어느 덧 타인의 앞에서 죽자코 숨겨 왔던 고뇌의 그늘이 드러나 있었다. 심중이라 해서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검아(劍兒)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면 이 어미가 이토록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하지는 않으련만.......' 천음선자, 아니 단리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그녀 역시 내부적으로는 일반의 여인들과 똑같이 모성(母性)이라는 본능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무림성이라는 기반을 잃고 급전직하했을 망정 자나깨나 아들에 대한 걱정만은 한시도 떨치지 못했었다. 그녀는 최근까지도 어떻게든 새로운 기반을 다지고자 절치부심했다. 아울러 그 일의 추진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격으로 만사를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천음선자를 추종하는 현음교의 고수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위에 여교주로써 군림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놀라운 지도력을 보인 바 있으며 반기를 드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는 결단성도 발휘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배경도 없이 여인의 몸으로 혼자 이루어가기에는 지난한 일이었으되 그 이면에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를 아들에 대한 기대가 작용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의식을 했던, 하지 못했던...... 여기서 그간의 경위를 좀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짚어가자면 이렇다. 알다시피 무림왕 용화천이 실종된 후로 무림성은 크게 두 갈래로 분열되었고 종국에는 애써 구축해 놓았던 조직 자체가 거의 와해되는 비극으로 치달리게 되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욕망궁의 일원인 마화궁(魔花宮)이 침공을 가해 오자 무림성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때에 천음선자는 적들을 맞아 용감하게 항전을 벌였으나 끝내는 역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현음구매와 함께 무림성을 탈출했다. 그로부터 지난 이 년 간 그녀는 모처에 은둔하여 현음구매를 완성시키는 한편, 꾸준히 현음교의 힘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자신이 서자 무림에 재등장했다. 천음선자의 목표는 일단 마화궁을 무너뜨려 무림을 평정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무림성을 재건하고 스스로 그 세력을 수중에 통째로 거머쥐려 했던 것이다. 무림왕 용화천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여전했다. 그 이유는 역시 그가 자신의 부친을 죽였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이상 의혹은 도저히 규명할 도리가 없었고 그녀도 그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남편에 관한 좋지 못한 감정들이나 되씹고 있기에는 아들인 용백검이 미치도록 그리웠던 것이다. '검아야, 어디에든 살아 있기만 하다면 이 어미의 힘만으로도 너를 능히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건만.......' 애타는 모정(母情)은 그녀로 하여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게 만들었다. 과연 그녀가 아들인 용백검이 현재 마화궁에서 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제21장 소림사(少林寺)에서 ① 숭산으로 오르는 산로(山路). 만추에서 막 초동(初冬)으로 접어드는 계절이라서 그런지 날씨가 무척이나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이렇듯 즐기기 애매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유유자적 산로를 오르고 있는 백삼청년이 있었다. 등에 한 자루의 고검(古劍)을 메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분명 문사는 아닌 것 같았으나 단아한 용모나 잠잠한 기도로 보아서는 영판 책이나 끼고 있으면 어울릴 듯 했다. 어쨌든 훤칠하고 잘 생긴 것만은 틀림 없는 그 사내가 바로 용류옥이었다. 그는 낙양을 떠나 이 곳까지 오는 동안 계속하여 신분을 감춘 채 무림의 정세를 살핀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내린 결론이란 무림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날로 흉흉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정성과 군마성의 혈전이 임박해 있어서일까? 천하인들 모두가 타인의 안녕은 고려하지 않고 제 몸 사리기에만 바빴다. 그것을 도처에서 확인하며 그는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 '하루 속히 정도무림 본연의 힘을 모아야 한다. 특히 구파일방은 봉문 중이나 어떻게든 설득하여 일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큰 힘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천하 대세의 흐름을 달리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용류옥은 숭산의 웅장한 산세를 한 번 힐끗 올려다 보고는 종전보다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런데 이 때였다. "호호호호... 영준하신 공자님, 어디를 그다지도 급하게 가시는지요?" 한 가닥 여인의 음성이 들려와 그를 멈추게 했다. 간드러진 말투에 비해 웬지 적의(敵意)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쯧! 불청객이 졸지에 거창한 환영식을 치루게 생겼군.' 용류옥은 내심 혀를 차면서 소리가 들려 온 쪽을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시력이 의심스러웠으므로. 휙! 그의 면전으로 바람 소리를 내며 두 여인이 날아 들었다. 그녀들은 일견하기에도 과히 흠잡을데 없는 미녀들이었는데 그가 놀란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다. 용류옥이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 두 미녀 중 우측에 서 있는 여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공자께서는 묻는 말에 대답을 않는 거죠? 분명 지금 어디로 가시냐고 했을 텐데요?" 추궁에 가까운 그 음성에 그는 은연중 고소를 지었다. '하긴 내가 이 여인들을 반가워할 처지가 아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용류옥도 태도를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짐짓 거만한 투로 말했다. "소림의 불법이 하도 무궁하다길래 불초는 향화(香火)라도 올릴 양으로 오르는 길이외다. 나는 그렇고, 낭자들은?" 이번에는 좌측의 여인이 매섭게 응수해 왔다. "공자께서는 발길을 돌리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 같군요. 소림사는 향화를 받지 않아요." 그녀의 협박에 용류옥은 내심 의혹이 일었다. '어떻게 이 여인들이 문지기가 되어 소림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자께서도 역시 이 곳에 와 계실까?' 그의 앞을 가로막은 두 여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금비와 은비였다. 두 여인의 성숙함과 달라진 분위기 등도 그가 그녀들을 알아 보는데는 하등 지장이 되지 않았다. 용류옥으로 말하자면 눈을 감고도 그녀들의 알몸까지 능히 그려낼 수가 있는 입장이다. 이 점을 상기해서일까? 그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 참 이상하군. 소림에서 언제부터 여승들을 두었지?" 그 말인즉 문전박대에 대한 작은 대가였으나 듣고 있던 은비가 화를 발칵 냈다. "누가 여승이라는 거죠?" 용류옥은 히죽 웃었다. "그럼 낭자들은 여승이 아니었소?" "정말 정신이 나간 작자로군! 겉보기는 멀쩡한데." 은비는 코웃음치더니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그래, 네 눈에는 이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아예 반말로 나오는 그녀가 용류옥에게는 더 재미있었다. '제법 무게가 있어졌다 했더니, 본질적으로는 변한 게 하나도 없군. 늘 그랬지. 용백검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적대감을 보이곤 했었으니까.' 그는 짐짓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그렇지 않아도 나 또한 이상하다 여기는 중이었소. 소림에서는 어째서 아직 머리도 깎지 않은 여승들을 지객승(知客僧)으로 내세웠나 하고 말이오." "뭐, 뭣? 지객승이라고?" 흥분하여 폭발하려는 은비를 금비가 재빨리 막아섰다. 그 상황도 예전과 비슷하다. 그녀는 나이가 한 살 위라는 명목하에 항시 은비보다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었다. 금비는 용류옥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장난 따위나 벌이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절대로 소림에 오를 수 없어요. 정 들어가야 한다면 실력으로 우리를 꺾어야만 가능할 거예요." 용류옥은 도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왜 나를 막는 것일까?' 그러나 이 일은 부딪치더라도 밀고 나가야지, 그로서도 양보할 일이 못되었다. 그는 나름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낭자들이 주는 느낌은 정녕 신선하오. 나는 절간이라면 의례 적막하고 따분한 곳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불초 비록 실력은 없으나 낭자들을 상대로라면 한 수 나누고 싶소." 은비가 대뜸 만면에 살기를 드러냈다. "흥! 네가 여자라고 우리를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좋다! 이 아가씨가 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 그녀가 정면으로 다가드는 순간, 용류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와의 거리는 삼 장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음유한 기운이 밀려와 전신의 뼈가 시큰했던 것이다. '대단하군! 현음투골음풍기(玄陰透骨陰風氣)를 익혔다니. 못보던 사이에 이 여인들은 고수로 화해 있었구나.' 말마따나 은비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현음교의 무학이 초절하다는 것은 용류옥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현음진경을 익혔으므로. "호호호... 어디 한 걸음만 더 내밀어 봐라! 그랬다간 너의 심장이 즉시 가루가 되고 말 테니까."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이 걸음을 멈추어야할 이유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비는 급기야 쌍장을 치켜 세우며 빽 고함을 질렀다. "서라!" 이를테면 그것은 마지막 경고인 셈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용류옥은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빙글거리며 다가갔고 마침내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불과 다섯 자 정도로 좁혀졌다. "바보같은 놈! 내 원망은 마라." 우우우웅--! 은비가 쌍장을 흔들어 대자 그녀의 장심에서 현음신공의 실체인 현음진기(玄陰眞氣)가 대하처럼 쏟아져 나왔다. 본래 현음진기 하면 사공(邪功)답게 음유하면서도 악독한 것이 특징으로써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져 내리는 무시무시한 신공이었다. 용류옥은 그 위력을 모르는 듯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로 현음투골음풍기는 당연스레 그의 가슴 한복판에 적중되고 말았다. 퍼퍽! 섬뜩하면서도 둔탁한 음향이 울렸다. "저런 바보가......!" 은비는 언제 독랄한 공격을 퍼부었냐 싶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현음교의 일원으로써 심성이 전보다 강인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직 살인에 대한 두려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그녀였다. '이를 어째? 보나마나 처참하게 죽었을텐데.' 이것이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뜻하지 않은 사태에 직면해야 했다. "하하하... 알고 보니 낭자에게는 귀여운 면도 있구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귓전을 울려 왔다. "아뿔싸!" 비명과 함께 얼굴을 가렸던 은비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동시에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으리라 여겼던 상대가 코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서 있는 것을. '이, 이런 낭패가......!' 뒤늦게야 사태를 인식한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여 얼른 뒤로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그녀의 완맥이 백삼청년의 강철같은 손에 의해 잡혀 버린 후였다. "이...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손목을 비틀며 악을 고래고래 썼다. 용류옥의 비아냥은 그럴수록 농도를 더해 갔다. "안되지, 낭자에게 객(客)을 맞이하는 법도를 가르쳐 주기 전에는 말이야." 그는 말과 함께 은비를 와락 잡아 당겨 입을 맞추었다. "나같은 미남은 이렇게 맞이해야 되는 게야, 아가씨." '맙소사, 이 놈이 그러고 보니 치한......!' 은비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현재 당한 일보다는 곧이어 있게 될 상황들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틈에 혈도가 짚혔는지 몸은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고 남은 것이라곤 오직 끔찍한 봉변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구원자가 있었다. "더러운 작자!" 위이이잉--! 금비였다. 그녀의 공격은 확실히 은비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의 장심에서는 시커먼 음경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콰르르르-- 용류옥은 은비를 안고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애꿎은 주위의 바위며 땅거죽 등이 금비의 장력에 맞아 풍지박산이 나고 있었다. 실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 공세였다. "하하하하......!" 용류옥은 상대의 열화를 돋구 듯 웃음을 터뜨리기는 해도 연신 피하기만 할 뿐 맞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실상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림사에 드는 것이지 그녀들을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조심하시오, 낭자!" 그는 경고와 더불어 안고 있던 은비를 금비에게 던졌다. "악!" 금비는 대경하여 공력을 거두었다. 자칫하면 은비가 자신의 장력에 비명횡사하게 생겼으니 어쩌겠는가? 그녀는 그 느닷없는 사태에 반쯤 넋이 나간 채 은비를 받아 안았다. 정신이 나가기로 치자면 은비 쪽이 훨씬 더 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금비의 팔에서 빠져 나와 신색을 추스리면서도 자신이 언제 혈도가 풀렸는지도 의식을 하지 못했다. 용류옥은 그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히죽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악의라고는 일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금비도 약간은 표정을 풀었다. '으음, 저 자는 분명 악인은 아니다.' 흘러 나오는 그녀의 음성도 한결 부드러웠다. "한 가지만 묻겠어요. 당신은 어느 쪽에서 왔죠?" 용류옥은 묻는 의도를 몰라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북쪽인 것 같은데, 그건 왜 묻소?" 금비의 얼굴에서 누그러졌던 살기가 다시 번뜩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보다는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알 필요 없어요! 얘기는 끝났으니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② 용류옥은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며 찰나적으로 긴장을 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스스스--! 갑자기 어디선가 한 줄기 음풍이 불어 닥치더니 장내를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어 갔다. 용류옥은 전신이 오싹 하는 한기를 의식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느 결엔지 기척도 없이 그의 뒤 쪽에 두 명의 현의여인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안색이 밀납처럼 창백한 데다가 표정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 모습에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 뜨리고 있으니 가히 유령을 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썰렁하군!' 이것이 그녀들을 대하게 된 용류옥의 소감이었다. 곁에서 은비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호호호... 이번에는 네 놈도 별 수 없을 걸? 네 놈이 현음구매를 물리친다면 소림에 향화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겠다." '현음구매라고?' 용류옥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무림성에서 천음선자에게 들었던 것들이었다. '으음, 그렇다면 그 새 현음구매가 완성되었단 말인가?' 스으으--! 두 명의 현음녀가 미끄러지듯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들은 신법조차도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 했다. 소리도, 기척도 없어 보고 있자면 은연중 공포감이 일 지경이었다. 물론 용류옥이야 그 점에서는 예외였지만. 그가 가지게 된 감정이란 다름 아닌 호기심이었다. '현음구매의 능력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천음선자나 금비, 은비 등이 입을 모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역시 보통의 수준은 넘을 텐데.' 그는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쏴아아--! 왼쪽에 있던 현음녀가 덤벼 들었다. 이에 피하고자 신형을 움직이던 용류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음녀는 그가 움직일 방향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이 미리 몸을 날려 그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빙글 돌리며 우장을 떨쳤다. 파파파팟--! 장천우사의 절기인 만천화우(萬千花雨)의 장법이 그야말로 천(千)의 장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우우웅-- 현음녀가 장영의 세력 범위에 걸려 들었다. 그의 장력은 그녀의 가슴을 정확히 가격했다. 쾅! 폭음과 함께 현음녀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되었다!' 용류옥은 그 정도면 필경 그녀가 즉사를 했거나 치명상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크크크......!" 현음녀는 괴성을 발하며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더니 막바로 전광석화와도 같이 용류옥을 향해 쏘아져 왔다. 스슷! 그녀에게 다시 일장을 날린 용류옥은 크게 놀랐다. 그 느낌이 마치 솜뭉치를 때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휘류류륭--! 뼈까지 침투하는 예의 음풍이 그를 향해 밀려왔다. 용류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공할 현음투골음풍기다! 방금 전에 은비가 펼쳐낸 것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그는 안색이 변해 다급히 쌍장을 뒤집었다. "해룡패왕수(海龍覇王手)!" 우르르릉--! 그것은 다름 아닌 광성자의 독문 패도장공이었다. 꽝--!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이 격돌하자 굉렬한 폭음이 일었다. "헉!" 용류옥은 가슴이 터질 듯한 충격을 받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 나갔다. "카아악!" 현음녀의 입에서도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불사신이라도 되는 양 재차 무서운 기세로 덮쳐 왔다. 그 뿐만 이 아니라 이번에는 다른 한 명의 현음녀도 가세했다. 그것을 본 용류옥은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철렁했다. '보아 하니 금강불괴인 모양인데 둘이 합공을......?' "카카카--!" 쏴아아아-- 현음이매는 좌우 양측에서 괴성을 발하며 덤벼 들었다. 그 여파로 주위의 나무와 바위 등이 온통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 허공으로 마구 떠오르고 있었다. 용류옥으로서도 이쯤되면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지닌 바 전 공력을 사용했고 그의 손에서는 온갖 무공절학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꽈꽈꽝! 꽈르르르-- 경천동지할 폭음 가운데 숨막히는 대접전이 이어졌다. 한편. 전권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채 관전 중이던 금비와 은비는 만면에 경악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럴 수가! 대체 저 자는 누구이기에 현음녀를 상대하면서도 쓰러지기는 커녕 끄떡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현음녀의 위력은 그녀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괴존재는 현음교 비전의 최후대법이 탄생시킨 일종의 강시로써 전신이 금강불괴인 것은 물론 현음신공을 십이성까지 익혀 현음교주조차도 그녀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의 백삼청년은 무려 반 식경 동안을 무사히 견디고 있는 것이다. 금비, 은비는 그의 능력을 재평가함과 동시에 비로소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아! 저런 이유로 소림에서 그토록 저 자를 기다렸구나. 교주님께서 저 자를 경계하신 이유도 그렇고.' 그녀들은 또한 믿고 있기도 했다. 청년이 아무리 기를 써도 얼마 후면 전황은 현음이매의 승리로 끝을 맺으리라고. 왜냐하면 현음녀들의 몸에서는 공격을 펼치건, 그렇지 않건 끊임없이 현음투골음풍기가 흘러나와 설사 거기에 적중되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그 상대자는 자연히 피가 마르고 뼈가 녹아 죽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용류옥. 그는 공격이 먹혀 들지 않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엇보다 진기가 고갈되어 쓰러지겠군.' 그도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했다. '사대신공의 합벽공(合壁功)이면......!' 그는 일신에 모두 네 가지 신공을 익히고 있었다. 현음신공(玄陰神功)과 현천무극진기(玄天無極眞氣), 헌원신공(軒元神功), 그리고 해룡패왕신공(海龍覇王神功) 등. 그 네 가지 신공은 개별적으로도 고금제일의 신공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용류옥은 창주도에서의 피나는 수련과정을 통해 체내에서 융합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룩해 낸 결과야말로 고금에 드문 일일지도 몰랐다. 무림 역사를 다 뒤져도 서로 성질이 틀린 신공들로 합벽공을 완성시킨 사례는 없었으므로. 용류옥은 쌍장을 합쳤다. 우우우웅--! 공기의 파동이 일며 그의 전신에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머리 위에서 각기 다른 네 가지 색의 기류가 형성되더니 삽시에 그의 몸을 뒤덮어 버린 것이었다. 그 상태로 그는 쌍장을 가슴 앞으로 끌어 모았다가 현음녀들을 향해 떨쳐냈다. 꽈르르-- 콰콰콰쾅! 천번지복의 굉음과 더불어 붉고, 푸르고, 검고, 흰 네 가지 기류가 현음이매를 휘감으며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그 속에서 처절한 두 마디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캐액!" "캬아아악--!" 이어 어디선지 일진의 음풍이 불었다. 휘이이이잉-- 그에 힘입어 기류가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현음이매는 저만큼 날아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들의 옷이란 가루가 되어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전라가 된 두 개의 몸뚱이들만이 땅에 반쯤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용류옥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도 역시 땅에 하반신을 묻고 있었는데 입과 코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색은 말 그대로 백지장이었으며 옷도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의식을 잃었는지 그는 아무 말없이 잠잠했다. 그의 눈도 반쯤 감긴 채 붉게 충혈된 흰자위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금비와 은비. 이 두 여인은 눈 앞의 현상을 믿을 수 없는지 똑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인간도 아니야, 저 자는......." 그녀들은 곧 그 곳을 떠야만 했다. 그것은 소림사 쪽으로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내려 오고 있는지 웅성거리는 소음이 귓가에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금비가 은비를 돌아 보며 말했다. "가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저 자는 제 발로 소림을 찾아온 손님일 뿐더러 소림에서도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인물이 아니니?" "맞아, 여기 남아 있어 봐야 우리가 그 추궁을 어찌 감당하겠어? 어서 교주님께 가서 보고나 해야지." 말을 마치자 두 여인은 날렵하게 몸을 뽑아 올렸다. 휘익--! ③ 용류옥은 눈을 뜨자 낯선 풍경에 흠칫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정이었는데 한가운데에 둥근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원 속에는 다시 천수불(千手佛)이 그려져 있었다. 이르자면 천 개의 손을 가진 부처가 그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건네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움직여 본 그는 더욱 더 놀랐다. 사방에 온통 불상들이 꽉 들어차 있어 별세계에라도 온듯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다지 선하게 살아온 편이 아니었으니 설마 내가 극락에 와있는 것은 아닐테고.' 그는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숭산 기슭에서 현음녀와 싸웠던 부분까지는 떠올랐으나 그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죽은 것일까?' 용류옥은 회의와 더불어 몸을 일으켜 보았다. "으윽!" 그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 몸이 부서져 나갈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와 운신이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다지도 아픈 걸 보면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한데.......' 용류옥은 일말의 자조를 입가에 떠올리며 조용히 운기를 해 보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느낌이란 절망 뿐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단전은 텅 비어 버려 한 올의 진기도 모이지 않았다. 그는 가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다행히도 용류옥은 기질상 이렇듯 낙심천만인 가운데서도 본능처럼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고 계속 주의를 기울였고 그것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도 잃지 않았다. 생각이 그러하니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금세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멋모르고 누워 있던 곳이 불전(佛殿)이거나, 혹은 동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림사의 경내에 이런 곳이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대체 이 곳은 어디이며, 누가 나를 옮겨다 놓았을까?' 용류옥은 시선을 천정의 천수불로 옮겼다. 그 순간, 정신이 아찔하더니 그 느낌은 곧바로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어지럼증으로 이어졌다. 단지 환각일까? 그림 속의 불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천 개의 손이 일제히 그를 향해 뻗어 와 목을 휘어 감았다. '우욱!' 용류옥은 숨이 막혀와 고통도 잊은 채 버둥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불상의 손에서는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호흡이 정지된 그는 정신이 다시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혼미를 거듭했는지는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문득 꿈결처럼 아득한 곳에서 한 가닥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하늘이 왜 이 분 시주를 지목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집중적으로 복연을 내려 점지해 두셨으니 말이외다. 빈승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공청석유(孔淸石乳)를 복용한 데다가 체내에서 각기 다른 네 가지 희세신공의 기운까지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려."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이네, 노화상(老和尙).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더구나 이 분 시주는 그 공력을 융합시켜 놓은 상태였는데 마녀(魔女)들의 공격을 받자 마구 뒤엉켜 버렸군요. 이렇게 서로 상반된 공력이 체내에서 다른 흐름을 유지하고 있으면 회복 불가능이 아닙니까?" "쯧! 노화상은 그렇게도 생색을 내고 싶은가? 유마패엽진경이 있으면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을텐데." "아미타불... 설마요? 빈승은 다만 유마패엽신공이 불문사상 가장 지고무상한 불학인지라, 이 분 시주가 과연 연성해 낼 수 있을까고 걱정을 했을 뿐이외다." "둘러대기는! 소림의 선승들은 이상한 방향으로 머리가 좋아 탈이라니까. 좌우간 거기까지는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오. 이 놈의 능력에 달린 일이니 한 번 두고 봅시다." 말투에 비해 무게가 느껴지는 그 음성은 이어 물었다. "가만, 설마하니 지금 와서 내놓기가 아까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미타불... 실망시켜 죄송합니다만, 빈승도 그런 쪽으로는 절대 머리를 굴리지 않소이다." "헛헛헛... 그럼 됐네, 어서 이 아이를 깨우시게."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용류옥. 그는 두 번째로 깨어났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너무도 늙어 안면이 주름살로 뒤덮힌 노승이었고 또 한 명은 오관이 정명하고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그를 대하는 두 사람의 반응이었다.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는. 용류옥의 시선이 가 닿자 그 때까지 멀쩡히 눈을 뜨고 있던 노승은 무엇 때문인지 눈을 도로 감고 불호를 외웠다. 반면에 중년인은 눈이 마주치자 언제 보았다고 아주 반색을 하며 말을 건네오는 것이었다. "헛헛헛... 녀석,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 어떻느냐?" 용류옥은 황당해진 나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르신께선 뉘신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었다. 중년인은 쓴 입맛을 다시더니 턱수염을 한 번 가볍게 쓸어 내렸다. "그래, 그 두 늙은이가 엉큼하게도 노부의 얘기를 일체 하지 않았단 말이지?" 이쯤 되자 용류옥도 언뜻 짚히는 바가 있었다. "두 분 노인이시라면......?" 중년인이 혀를 차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쯧쯧... 못된 늙은이들 같으니라구! 저희들끼리만 네 놈을 끼고 희희낙락이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래 가지고 대체 언제 장춘백장경(長春百藏經)을 익히게 하려고?" 용류옥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역시 이 분께선 장춘오로(長春五老) 중 한 분이셨다. 먼저 뵈었던 두 분에 못지 않게 괴팍하신. 후후후.......' 그는 누운 채로나마 인사의 뜻으로 고개를 움직여 보였다. "처음 뵙습니다, 어르신. 저는......." 그의 말은 중도에서 또 잘렸다. "네 놈의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노부의 이름이나 알아 두어라. 나는 신검노(神劍老)라고 한다." "아!" 용류옥은 부지중 탄성을 발했다. 그도 신검노에 대해서라면 광성자로부터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 그 늙은이는 평생을 검(劍)만 닦았다. 그가 이룬 검의 경지는 가히 반신지경(半神之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늙은 괴물은 검을 쓰지 않고도 무형(無形)의 검강(劍 )을 발출해낼 수 있으며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은 물론 심검(心劍)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다. 용류옥은 본래 검을 좋아 했다. 그리하여 그는 해천오로(海天五老) 중 만검지왕(萬劍之王)의 검학을 십성 이상 익힌 바 있으나 마음 한 구석으로 내내 무엇인가 미흡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검지왕은 강호무림에서 최대의 검수(劍手)로 손꼽히는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도 인정했듯 만년에 이르도록 평생토록 염원했던 검학의 정수만은 터득하지 못했었다. 용류옥은 벌써 오래 전부터 장춘오로 중에서도 신검노를 만나고 싶어 했었다. 그러다가 오늘에야 그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전에 광성자로부터 그는 이 말도 들었었다. -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나머지 세 늙은이도 너를 찾아갈 것이다. 네가 우리 오로(五老) 전원과 상면하게 되면 그 때에 장춘백장경을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로 중 한 명이라도 반대를 하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 놈아! 무얼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느냐?" 용류옥은 신검노의 괜한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쾌해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가 우물거리자 신검노는 계속하여 으르렁거렸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노부가 알기로 네 놈은 천하에 다시 없는 멍청한 놈이다. 앞 뒤 가리지 않고 그 따위 강시 계집들에게 함부로 덤비다니 정말 네 놈은 그게 제 정신으로 한 짓이냐?" "그야 그 쪽에서 저를 가로막으니까......." "시끄럽다, 이 놈! 이 정도이기를 천만다행이지 자칫했으면 네 놈은 그 자리에서 뼈도 못 추릴 뻔 했다." 용류옥은 누워있는 자신을 재삼 의식하며 고소를 지었다. "그건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고이얀 놈, 현 시점에서 네 목숨이 어디 너 하나만의 것인줄 알았더냐?" 신검노는 정말로 안면에 노기를 띄어갔다. "그렇게 덧없이 죽어 버리면 네 놈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우리 늙은이들은 무엇이냐?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칼을 물고 자결이라도 해야 네 놈의 속이 시원했겠느냔 말이다." "어르신......." 용류옥은 대번에 풀이 팍 죽었다. 그는 자신이 만용을 부린 것에 대해 비로소 여러 가지로 후회가 되었다. '그렇다. 내가 너무 어리석어 당시 상황에만 충실했을 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실은... 정면으로 부딪쳐서도 안되었거늘.......' 그는 심정의 일편에 천음선자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그녀는 현음녀들을 보내 자신을 해하고자 한 여인이다. 그러나 용류옥은 그녀를 원망할 입장이 못되었다. 천음선자는 우선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며 지은 죄로 치자면 용류옥 쪽이 훨씬 무겁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본의는 아니라고 하나 그는 결국 그녀로 하여금 아들을 잃게 만드는데 일조한 공범(共犯)이 아닌가? 더구나 용류옥은 도저히 그녀와는 등을 질 수가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천하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우 용백검, 그를 낳아준 어머니라면 자신에게 과연 무엇이 되는가? '그 분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치죄를 당해야 한다면 나와 내 어머니,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아버님.......' 그는 스스로 어두운 상념의 늪에서 벗어 나고자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노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님께서는 누구십니까?" 착 가라앉아 있는 그 음성의 여운을 느꼈는지 천공대선사가 매우 인자한 음성으로 답해 주었다. "노납은 천공이라 하네." 용류옥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마음을 풀기 위해 뭐라 더 말하려고 해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태반의 소림인들이 모르는 이름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곁에 있던 신검노의 설명이 그를 도왔다. "이 늙은 중은 보기보다 권위가 대단한 인물이지. 소림에서 최고령의 중으로 현 장문인에게 사조뻘이 된다." "아!" 용류옥은 와중에도 탄성을 발했다. 소림 장문인도 나이가 지긋한 것으로 알고 있었거니와 그 사조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그만치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대화는 여기서부터 또 침묵으로 갔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용류옥은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 여쭙겠습니다. 현재 소림에 현음교의 고수들이 집결해 있습니까?" 그 말에 신검노도 무거운 안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용류옥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용류옥이 광성자에게 얘기한 바 있었고, 신검노는 광성자를 통해 들었던 것이다. "천음선자도 물론 와 있다." "저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용류옥은 억누르려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크게 심적 고초를 겪어야 했다. 신검노가 표정으로 나타나 있는 그의 심중을 읽어 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노부도 얼핏 들은 얘기다만 천음선자는 지금 개인적인 감정과 탐욕으로 인해 대세를 그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이야 어디에 있던 간에 그녀는 상당히 잘못하고 있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녀가 너를 죽이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녀 자신은 부인하려고 기를 쓰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실종된 무림성주의 정실부인이 아니더냐?" 용류옥은 신검노의 말 중에서 특별히 정실부인이라는 어휘가 가슴을 쑤셔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 자리는 의당 자신의 모친에게 돌아가야 했고 그랬다면 오늘 날 같은 비극적인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신검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천음선자를 제지시켜야 한다, 아니 그녀가 사태를 바로 보고 정도무림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도록 방향타를 잡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 그녀의 아들 밖에 없다." 그는 용류옥을 직시하며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유옥! 지금은 네가 그녀의 하나 뿐인 아들이다." "우우......." 용류옥은 흡사 울부짖음과도 같은 소리를 발하더니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바이기는 했으나 현실로 대두되니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있은 그의 대답인즉 신검노나 천공대선사가 오히려 놀랄 정도로 분명했다. "하겠습니다. 어차피 제 죄업을 용서받을 길은 없고 그렇게라도 하여 세상에 존재하시는 또 한 분의 제 어머님, 그 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아미타불......." 수양 깊은 노선사의 눈에 일순 짙은 비애가 매달렸다. 신검노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감추려 안면을 씰룩였다. "놈! 나보다 한 발 앞선 두 늙은이가 왜 네 놈에게 푹 빠지게 되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④ 삼 일이란 짧게 보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전 인생에 버금가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용류옥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삼 일 동안 폐관을 했다. 외부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천불동에 틀어 박힌 채 유마패엽진경을 익혔던 것이다. 유마패엽진경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불문의 무공으로써 그에게는 생전 처음 접해 보는 생소한 무학 세계였다. 만일 소림이 낳은 일대선승 천공대선사의 자문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로서도 평생을 수련한들 깨우쳐 나갈 수 없었으리라. 그는 또한 현음이매와의 싸움으로 애초에는 중상을 입고 있는 상태였으나 소림비전의 구전대환단(九全大丸丹)으로 인해 쾌차할 수 있었으며 거기에 보태 신검노의 조력까지 있어 내공마저도 가일층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무골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계속 누군가에 의해 키워지고 다듬어져 가고 있었다. 그 각도에서 보면 불운했던 출생이나 성장과정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영웅이 점차 완성을 향해 다가가며 의기(義氣)도 그만치 고양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용류옥은 어느 순간에도 자신에게 얽혀 있는 은원(恩怨)을 잊지 않았고 그것을 한 가지씩 점진적으로 풀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스스로에게 주어진 책무라 여기고 있었다. 이를 일컬어 그가 천명(天命)을 받들고자 한다고 표현한들 틀리지는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가 맺고 있는 은원인즉 천하정세를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므로. 유마패엽신공. 이것은 일반적인 무공과는 차원이 틀렸다. 소림의 달마신공(達摩神功), 천축의 유가문에서 파생한 보리진기(菩 眞氣) 등과 더불어 인세에서 가장 뛰어난 신공이었다. 유마패엽신공을 익히게 되면 우선 심마(心魔)에 빠지지 않는 잇점을 취할 수 있을 뿐더러 갖가지 성질이 다른 공력들을 체내에서 적절하게 융화시킬 수도 있었다. 용류옥은 이미 웬만한 일에는 미혹되지 않는 곧은 기질과 사대신공의 배합이라는 좋은 경험을 바탕에 지니고 있었으므로 유마패엽신공이 전하는 그 묘용들 만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체득해 나가고 있었다. 아무튼 천불동에서의 삼 일을 그는 단 일각도 허비하지 않고 무공수련에 투자함으로써 유마패엽신공을 약 이성 가량 익혔다. 시간이 촉박하여 더 이상은 진전을 시키고 싶어도 불가능했으므로 그 정도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 연후, 용류옥은 신검노와 마주했다. "검을 아느냐?" 이것이 신검노가 그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용류옥은 뭔가 뇌리에서 잡힐 듯 하여 멈칫했으나 잠시 뒤에는 포기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그 말에 신검노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기이한 표정을 짓더니 부언했다. "노부도 검을 모른다." 용류옥의 표정이야말로 그 순간 괴상하게 변해 버렸다. 그는 황당해져 가지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께서 설마 나를 놀리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 검을 모른다고 하시면 대체 누가 검을 안단 말인가?"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정말로 누가 들어도 신검노가 검을 모른다면 믿으려 들지 않았을 테니까. 신검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노부가 세 살 때부터 검을 가지고 놀았다. 그 때는 단지 검이 장난감이었을 뿐이지. 그러다가 사부로부터 검을 쓰는 법을 배웠는데 열 살에 이르자 검이 마치 신체의 일부분처럼 여겨지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가 되었다." 용류옥은 너무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신검합일? 그것도 열 살에......?' 신검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을 지나 열다섯 살이 되자 나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다. 그 때에 사부께서는 내게 검으로 물을 벨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호기가 치밀어 당장에는 할 수 없어도 일 년만 지나면 가능하리라고 대답했다." '음, 어린 시절에도 어지간히 괴팍하셨나 보군.' 용류옥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눈 앞에 있는 노기인(老奇人)을 바라보았다. 그가 전하는 일대기에 흥미를 가지며. "나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그 날로 장춘곡의 유일한 폭포수 곁에 집을 짓고 물을 가르는 연습에 들어갔다." "성공 하셨습니까?" "천만에! 나는 그로부터 장장 삼십 년이 흐른 후에야 폭포수를 가르게 되었지. 허허... 혹시 상상이 가느냐? 그 동안에 내가 겪은 좌절이 얼마였는지 말이다." "아니, 전혀요." 용류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의미인즉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질렸다는 뜻이라면 맞았다. 신검노도 알아 듣고는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좌우간 폭포를 갈랐으니 나는 사부를 찾아 갔다. 그러자 사부께서는 매화나무의 가지 하나를 내게 내미셨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가지로 암석을 가를 수 있어야 한다고." "아!"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수련을 시작했다.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직접 시행해 보니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그 주변의 매화나무를 모조리 작살내면서 또 이십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 자신의 괴행(怪行)을 고백하는 신검노의 어조는 사뭇 농담조에 가까웠다. 그러나 듣고 있는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용류옥의 표정은 어느 덧 숙연해져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어르신께서 취하신 행동을 어찌 우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는 언제 그 같이 진지하게 무공에 몰두해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신검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십 년을 바쳐 매화가지로 암석을 베게 된 나는 사부를 뵈러 갔지. 하지만 나는 그 분을 대면할 수가 없었다. 사부께선 그 사이에 명을 다 해 타계하셨거든." "으음......." "놀라운 것은 사부께서 돌아가시면서도 내게 또 하나의 숙제를 내셨다는 점이다. 벽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셨지." 신검노는 탄식했다. "아직은 나도 그 숙제만은 풀지 못했다." 용류옥은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어떤 숙제였는지 제가 알면 안되겠습니까?" 그 말에 신검노는 잔잔한 음성으로 답했다. "안되긴? 벌써 말했는 걸." "네?" "검을 아느냐? 허허... 그것이 사부께서 내 어깨 위에 던져주고 가신 무거운 숙제였느니라." 용류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어르신과 사부되시는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무도인(武道人)들이다. 결과적으로 오십 년에 걸친 두 분 사도(師徒)의 심리전이 폭포를 가르는 검법과 매화나무 가지로 암석을 베는 경지를 개척해 놓은 셈이건만......!' 그가 두 사도에 대해 가지는 느낌이란 존경을 훨씬 상회하는, 이른바 경외지심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는 무도라는 한 가지 길에 장구한 세월과 끈질긴 집념을 헌납한 그들의 정신자세가 일편으로는 부럽기까지 했다. 신검노는 다시 말했다. "솔직히 노부는 아직도 검이 무엇인지 모른다. 노부가 그 날 이후로 한 짓이란 검을 버리는 일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검이란 신외지물(身外之物)이니 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검을 쓸 줄 모른다는 뜻이겠기에." "으음!" "검으로 물을 가르고 나뭇가지로 암석을 베는 것 등은 한낱 잔재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노부도 검을 버린 후에야 검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가 있었다." 용류옥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검을 버려야 검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지금의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곁에 놓여 있던 부백검을 힐끗 바라보았다. 낙양에서 독고령으로부터 넘겨 받은 후로 그 검은 한 번도 이렇다 하게 사용된 적조차 없었다. '쯧! 여태 나는 저 검과 인연도 제대로 맺지 못했거늘.......' 신검노가 그의 의중을 눈치챈 듯 껄껄 웃었다. "헛헛... 그렇다고 지금 당장에 널더러 어쩌라는 것은 아니니 염려 말아라. 낙심할 필요도 없고. 매사 다 거쳐가는 과정이 있는 법이니라." "그럼 제가 현재 맞이해야 할 과정은 어떤 것입니까?" "너는 의당 검을 가져야지. 그리고 부단히 익혀야 한다." "휴우, 다행이군요. 들려 주신 말씀 중에 제게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지금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허허... 네 놈의 말재간만은 노부와 동수(同數)로구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허허......." 신검노는 자못 유쾌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면은 용류옥이 장춘오로 중 지왜반노괴나 광성자를 통해서도 익히 보아온 부분이었다. 비록 장춘도가 오늘 날에 와서는 퇴락과 붕괴를 거쳐 유명무실해져 버렸지만 오랫 동안 낙원이던 시절이 있었는지라 그들의 성품을 기지가 넘치고 낙천적이도록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용류옥은 그래서 그들이 더 좋았다. 그들이 가진 초절한 무예도, 비장한 각오도 그처럼 그의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신검노의 음성은 아쉽게도 비장한 쪽이었다. 중대사를 앞에 놓고 있으니 그인들 어쩌겠는가? "검은 용도에 따라 익히는 방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무릇 세상에는 두 가지 검법이 있다. 그 하나는 활검(活劍)이요, 다른 하나는 사검(死劍)이다." "으음......." "그 중 네가 배워야 할 검은 사검이다." 신검노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활검은 난세에는 도움이 못 된다. 그러므로 너는 부득불 사검을 익혀야만 한다." 그는 용류옥이 미처 뭐라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활검보다 사검 쪽이 더 익히기가 어렵다. 어쨌든 노부는 사검 중 두 가지 검법을 알고 있다. 한 가지는 움직이는 것을 베는 검법이며, 한 가지는 그와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베는 검법이다." 용류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베는 것도 검법이랄 수 있습니까?" 신검노는 만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내 너에게 한 가지만 묻겠다. 너는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모두 벨 수 있겠느냐?" 용류옥은 그제서야 실수 했다 싶어 움찔했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예를 들자면 암석이나 산 따위 말이다." '끙! 졌다.' 용류옥은 내심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그는 아직껏 세상에서 산을 검으로 벨 수 있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자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허허허......." 신검노는 짓궂게 웃더니 말했다. "노부가 너에게 너무 무리한 질문을 한 모양이구나. 쯧, 노부가 말했던 바는 검의 최고경지를 이르는 것이다만 아마도 너에게는 놀리는 양 쯤으로 들렸겠지." "그럼 놀리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허허... 녀석!" 신검노는 몸을 돌렸다. "노부가 너에게 간단히 시범을 보여 주마." 그는 정면으로 벽을 향하고 앉았다. 그의 시선은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등신대(等身大)의 불상에 꽂혀 있었다. 스슷! 신검노는 불상을 향해 손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는 일순 섬뜩한 예기(銳氣)가 뻗어 나와 그 손 자체가 한 자루의 검으로 화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 저것이었나?' 용류옥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어 신검노가 세로로 한 번 가볍게 손을 긋자 기적과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쩌-- 쩌엉--! 놀랍게도 불상은 정수리로부터 밑부분까지 정확하게 반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분명 용류옥이 지켜 보았건대 신검노는 검을 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의 손끝에서 검기가 파생된 바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은 그처럼 양단(兩斷)이 된 것이다. '오오!' 용류옥이 들리지 않게 탄성을 발하고 있을 때, 신검노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전해왔다. "이 검법은 움직이는 것을 베는 무형이기어검강(無形以氣馭劍 )이지. 대상이 없어 불상으로 대신하기는 했다만. 이 검법에는 언제라도 발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신검노는 또 다른 시범을 보이려는 듯 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상태에서 눈을 내리 감았다.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베는 검법을 보여 주겠다."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그 바람에 어리둥절해진 용류옥은 자신도 모르게 사위를 스윽 둘러 보았다. 변화는 역시 아무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법을 전개하겠다는 신검노 자신도 입정한 노승인 양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정좌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검노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용류옥은 일시지간 이상한 현상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신검노의 몸이 갑자기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현상은 너무도 찰나적인 일이어서 용류옥은 자신이 잠시 환각을 본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이윽고 신검노가 눈을 뜨며 물었다. "보았느냐?" 용류옥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가 없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하는 양이 재미있었던지 신검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맞은 편의 사천왕상을 한 번 살펴 보아라." "으음......." 용류옥은 은연중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신검노의 말대로 사천왕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사천왕상은 아무런 이상도 없는 듯 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러나 용류옥은 곧 입을 딱 벌려야 했다. '아! 어찌 이럴 수가.......'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좀더 관찰해 본즉 사천왕상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가느다랗게 금이 가 있었다. 신검노가 간략히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심즉살(心則殺), 즉 마음이 움직이면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심검(心劍)의 경지이다." 그 말에 용류옥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단지 마음만으로 물체를 벨 수 있다고......?' 그 강렬한 느낌은 다름이 아니라 개안(開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검의 경지가 이토록 오묘할 수 있다는데 대해 막 새롭게 눈을 뜨고 있었다. 용류옥. 그는 그 시각을 기해 신검노로부터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익힌 것과는 판이하게 틀렸다. 그는 여하한 번뇌나 시름을 잊고 오직 신검노로부터 검학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만 몰두했다. 이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상 초유의 무(武)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제22장 개전(開戰) ① "너는......!" 천음선자 단리경은 눈 앞에 서 있는 한 청년을 보자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검아, 너였느냐? 북쪽에서 온다는 자가?" "그렇습니다, 어머님." "맙소사! 금비와 은비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럼 네가 역용을 하고 이 곳에......?"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가 부르짖었다. "어찌 이런 일이! 어미가 멋도 모르고 기껏 살아 돌아온 아들을 정말로 죽일 뻔 하다니......." "그래도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오오! 영영 죽은 줄로만 알았거늘......." 그녀는 급기야 눈앞의 청년을 와락 껴안더니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와 더 말을 이어가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용백검. 그녀의 아들인 그가 마침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정녕 그녀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무서운 살수(殺手)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물론 현재의 용백검은 용류옥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풀어가기 위해 스스로 용백검이 되어 등장했다. 대역(代役)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으리만큼 경험이 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치루어 가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대역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는 정말로 천음선자의 아들이 되어 그녀의 마음 속에 맺혔던 부친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고 무림성주의 정실부인으로써 긍지를 회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상 천음선자가 무림왕 용화천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은 단지 원한이 아니라 애증(愛憎)이었다. 그녀는 용화천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했을 뿐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그것은 지금도 별반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용화천이 그녀의 부친을 독살했다는데 있었지만 본인의 뼈저린 자책과 회한을 감안한다면 그녀를 흘러간 과거지사에 연연하도록 내버려둘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까지가 용류옥이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는 성심을 다해 용백검의 몫을 대행하고자 작정하고 있었다.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그 자신도 마음의 짐을 다소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용류옥은 천음선자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그 동안 뵙고 싶었습니다, 어머님." 천음선자는 흐느끼면서도 그를 힐난했다. "못된 녀석! 살아 이 곳까지 왔으면 즉시 어미부터 찾을 일이지, 어찌 그토록 어리석은 짓부터 저질렀느냐?" "잘못했습니다. 소자, 어머님께 그 간의 진전을 알려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기뻐하실 것 같아서......." "이 못된! 어미가 되어 가지고 천하에서 자식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하마터면......." 천음선자는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듯 오싹 몸을 떨었다. 당대의 현음교주이자 무림의 여걸(女傑)인 그녀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언제 이처럼 격동을 보인 적이 또 있었던가?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어 용류옥의 음성도 떨려 나왔다. "소자는 죽지 않습니다. 어머님을 혼자 두고서는." "그래 그래, 고맙구나. 내 아들!" 천음선자는 자신의 눈물로 인해 아들의 앞가슴이 푹 젖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용류옥은 하늘을 우러러 홀로 장탄식했다. '아아! 이 분이 나의 생모(生母)시라면......!' 두 모자(母子).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천음선자는 어느 틈엔지 꽤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용류옥은 그녀의 질문에 거의 사실에 가깝게 대답했다. "무림성이 무너졌을 때, 소자는 중상을 입었더랬습니다. 일단은 모처로 가 상처를 치료해야만 되었지요." "으음, 그랬었구나. 그리고는 곧바로 이리로 온 게냐?" "아닙니다. 요상은 벌써 오래 전에 끝났고 그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라니?" "그렇습니다, 어머님. 소자 실은 그 동안 아버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뭐, 뭣이?" 천음선자의 눈꼬리가 대번에 홱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아들과 상봉한 기쁨도 잊은 듯 격노하여 부르짖었다. "네가, 네가 어찌 감히 어미도 모르게 그런 짓을!" "고정하십시오,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전부터 어머님과 제가 벌여온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그 말은." "다 알면서도 함구하고 계셨다는 의미지요. 우리 모자에게 애정을 쏟아주지 못한데 대한 속죄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 난 모르겠구나.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천음선자는 충격이 컸던지 손을 저어 용류옥의 입을 닫게 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 쥐고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용류옥은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아직도 아버님이 외조부님을 독살한 범인이라고 여기십니까?" 천음선자는 안면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물론 아닙니다." 선의(善意)의 거짓말이란 이런 것이리라. 그는 목에서 쓴내가 올라오는 것을 꿀꺽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 흉수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도 단지 어머님이 당신을 의심하고 계신다는 것만 아십니다. 변명을 하지 않으신 이유는 어머님이 집착이나마 갖지 않으시면 살아갈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오, 맙소사!" "아버님은 심지가 깊으신 분이셨습니다. 어머님과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소자도 이 사실은 아버님이 무림성을 떠나시기 하루 전, 그 밤에야 알았습니다." 천음선자는 감정의 동요를 억제하지 못한 채 물었다. "그래, 그 때 너를 찾았던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 ... 그 작자가 직접 너에게 말했느냐?" "네, 그리고 소자를 위한 안배도요." "안배... 라니......?" 용류옥은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편, 창주도에서 겪었던 상황의 일부를 전했다. 그가 말한 내용은 무림왕 용화천의 가계(家系)와 이상(理想)에 관한 것으로써 주로 용화천이 무림의 안위를 염려하더라는 말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맺었다. "아버님은 우리가 짐작했듯 악인(惡人)이 아니셨습니다. 그저 철저한 무림성주이셨을 따름이지요." "으으음......." 천음선자는 신음을 발하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검아야, 이 어미는... 너무 혼란하다. 아직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구나. 그럼... 이 어미는 여태까지 감정에만 치우쳐 잘못 살아 온 것이 아니더냐?" 울부짖는 듯한 그녀의 음성을 대하게 되자 용류옥은 가슴이 메어질 것만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자책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거니와 그 자신이 그렇게 유도했을 뿐이니까. 용류옥은 이번에는 천음선자의 자책을 덜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가 정말로 하기 싫어했던 말을 꺼냈다. "어머님께서 놀라실까봐 이것만은 숨기려 했지만......." 그는 일부러 뜸을 들인 후에 말을 이어갔다. "알고 보니 소자에게는... 한 분 형님이 계시더군요. 다른 분의 몸을 빌어 태어났지요." "뭐, 뭣......?" 천음선자는 쓰러질 듯 휘청거렸고, 용류옥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요." "아니, 아니다. 어서 더 말해 보아라. 어서!" 흥분한 그녀를 의자에 바로 앉히고 용류옥은 말했다. "그의 모친은 아버님께 버림 받은 여인입니다. 이르자면 그는 사생아(私生兒)이지요. 듣기로 그들 모자는 우리 쪽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불행했던 모양입니다. 아버님께서는 형님의 존재조차 모르십니다. 덕분에 그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 천하를 떠돌며 갖은 고초를......." 천음선자가 한숨을 쉬며 그의 말을 끊었다. "검아......!" "네?" "네가... 네가 왜 어미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천음선자는 어느 새 또 울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용류옥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따스한 미소를 건넸다. "아버님을 용서하십시오, 어머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용서를 모르는 한 여인의 운명이 어찌 전락해 가는지를 들었고 그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녀... 얘기냐?" "그렇습니다. 그 분은 언제부터인가 희대의 마녀가 되어 자신의 아들마저 저주하고 학대한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용류옥은 떨고 있는 천음선자의 손을 부여 잡았다. "소자는 어머님을 존경합니다." "뭐라고?" "과거에도 그래 왔고 작금에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소자가 어머님께 올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검아, 이 녀석......!" "어머님......." 혈연이 섞이지 않은 두 모자는 또다시 끌어 안았다. ② 천음선자가 가진 현음교의 교권(敎勸)은 그 날부로 아들인 용백검, 아니 용류옥에게로 넘어갔다. 이것은 누가 종용해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결정하고 시행한 일이었다. 그녀가 교권을 이양하며 전임 교주로써 교도(敎徒)들에게 한 말이란 이것 뿐이었다. - 이제부턴 본 선자가 아니라 나의 아들을 따르라. 그는 나보다 몇 배 더 능력이 있으며 그릇이 큰 사람이다. 나는 잠시 시류를 잘못 판단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지만 그는 반드시 제 부친의 뒤를 이어 무림을 병탄하고 무림성을 재건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용류옥은 현음교라는 또 하나의 날개를 달게 되었다. 현음교의 힘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여 그의 비상(飛上)에 크게 한 몫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 인원이라야 백사십여 명에 불과했으나 하나같이 초절정의 고수들로써 강호상의 일반 고수들과는 무공 수준에 있어서 만큼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현음구매(玄陰九妹)의 힘이란 가히 가공지경이었다. 아마도 그 점은 용류옥과의 일전이 있었으니 부언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더구나 그의 공격에 의해 땅에 처박혔던 두 명의 현음녀들도 그 뒤로 꾸역꾸역 되살아 났으니까. 그 밖에는 현음삼십육교(玄陰三十六嬌)와 현음사십팔령(玄陰四十八靈)으로 명명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 중 현음삼십육교란 천음선자가 직접 키운 여제자(女弟子)들이었다. 또한 현음사십팔령은 삼십 세 전후의 건장한 사내들로써 역시 일신에 모두 고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용류옥도 향후로 있을 그들의 일조(一助)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음선자는 모든 면에 지극히 만족해 했다. 용류옥의 현음신공이 십이성에 가까워져 있는 것도, 그에게 전권을 넘기고 홀가분해진 것도, 그리고 남편인 무림왕 용화천에 대해 마음을 비워 버린 것까지도. 그 여유를 빌어 그녀는 간간이 생각한다. '제 부친을 닮지 않고 조부를 닮았다는 그 아이.......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기막히게 제 모친에게서까지 배척을 당해 왔다고 했었지? 쯧, 세상 돌아가는 이치란 정녕 오묘하군. 나는 이전까지 제 부친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검아가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아이라고 생각했건만.......' 천음선자가 생애 최초로 예불(禮佛)을 드리러 소림사의 법당(法堂)을 찾은 것도 기실은 이 때문이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한 인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용류옥. 그는 천음선자와 현음교도들에게 일단 교단(敎團)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 보낸 뒤에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정식으로 상견례를 치루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무림왕 용화천의 안배와 현음교의 전권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중인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용백검이 아니라 용류옥으로써 말이다. 소림을 제외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다소 불신의 기색을 보였으나 그것은 이내 해소되었다. 무엇보다 소림 해우선사의 적극적인 지지가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해우선사는 이미 천공대선사의 전갈을 받은 상태인지라 용류옥의 신상에 관해 거의 전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용류옥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앞에서 무위(武威)를 보여 줌으로써 중지는 더욱 확실하게 모아졌다. 그 혼자서 소림이 자랑하는 백팔나한진을 불과 이십여 초 만에 파해했으니 그가 단시간에 영도자적 위치로 부상하는 데는 더 이상 아무런 하자도 없었다. 그는 끝내 해우선사로부터 정도연맹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기에 이르는데, 난국을 타개해 나갈 그에게 용류옥이냐 용백검이냐로 문제 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때가 때이니만치 그들에게는 갑론을박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어 용류옥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내 놓은 것은 불회도(不回島)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었다. "본인은 아버님께서 안배해 두신 세력을 좀더 체계적으로 정비해 놓기 위해 한 곳으로 이전시켰습니다. 그 곳은 파양호에 있는 불회도란 섬입니다." "아!" 중인들은 모두 탄성을 발했다. 그들은 아직도 무림왕 용화천에 대해 신(神)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가지고 있거니와 그의 안배만 해도 놀라운 데다가 그것이 모처에서 확실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니 실로 감읍할 지경이었다. "금후로 본인은 그 곳을 거점으로 하여 빠른 시일 내에 정도무림의 힘을 끌어 모을 작정입니다." 누구의 입에선들 반대하는 의견이 나올 리 없었다. 용류옥은 그들을 둘러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불회도는 우선적으로 우리가 요하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은밀히 힘을 집결시키기에는 그 이상 적당한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용류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대정성과 대군마성의 세력은 강대합니다. 하지만 우리 측도 계획대로만 된다면 능히 그들에게 대항할 제 삼의 세력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욕망궁에 대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무림의 현황이 이럴진대 이것저것 한꺼번에 노출시키다 보면 자칫 중인들이 사기가 꺾일까 염려해서였다. 소림사. 이 불문의 성지(聖地)에서는 바야흐로 당금 무림의 대정지기(大正之氣)를 수호할 거대한 힘이 태동되고 있었다. 곧 천하각처로 극비리에 첩지가 전달될 것이다. 이를 위해 소림의 승려들이 두 명씩 한 조를 이루어 은밀히 각대문파와 효웅들을 찾아 출발했으므로. 대혈전(大血戰)의 막이 올랐다. 마침내 대군마성이 대정성을 향해 출병(出兵)을 선언했다. 그 선전포고는 천하를 경동시켰다. 무림의 양대 세력이 충돌을 하면 그 결과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대군마성의 성문이 활짝 열리고 군마팔로군(群魔八路軍)이 일제히 말굽을 내닫기 시작할 때,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저마다 숨을 죽이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사려야 했다. 두두두두두--! "으핫핫핫핫... 쳐라! 모조리 짓밟아라--!" 천여기의 인마가 한 덩어리가 되어 절강성(浙江省) 내에 있는 대정성의 절강지부(浙江支部)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기세란 가히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절강지부 측에서도 미리 이를 알고 있었던지라 나름대로 방어하고자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힘과 기량 면에서 워낙 밀리다 보니 도무지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름하여 군마팔로군(群魔八路軍). 각기 여덟 갈래로 나뉘어져 출전에 임했던 그들은 절강지부 뿐만이 아니라 천하 여덟 곳에 퍼져 있는 대정성의 팔개지부를 동시에 공격하고 있는 참이었다. 덕분에 무림천하는 그야말로 시산혈하(屍山血河)로 화하고 말았다. 그들 군마팔로군은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들처럼 천지간을 무력으로 휩쓸어 버렸던 것이다. 대정성은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전달되어 오는 패전의 소식들로 인해 본성(本城)마저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마록이 이끄는 대군마성의 세력은 이전에 사황 냉전령이 관장할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마록으로부터 혈사해의 가공할 무학을 전수받은 군마들의 힘이란 태산이라도 뒤엎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단체인들 상대가 될리 없었다. 대정성의 팔개지부가 초토화되고 만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전황이 이렇게 되자 대정성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렸다. 본래 대정성은 중원팔대세가의 세력이 주축이되 숙야빈의 황금으로 매수된 낭인무사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낭인무사들은 충성심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그들은 도처에서 패주하게 되자 쉽사리 대정성을 등졌을 뿐더러 심지어는 대군마성에 투신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를 이개월여. 승부는 점차 명확하게 가려져 가고 있었다. 그 이면에서는 피로 물든 무림의 산하를 굽어 보며 개탄을 금치 못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뜻있는 지사들로 이 난국을 타개할 진정한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은밀한 가운데서 의기가 하나로 모여지고 있으며 그것을 한 몸에 걸머질 불세출(不世出)의 기재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③ 북경성(北京城)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방대한 규모를 지닌 한 채의 장원(莊院)이 있었다. 이 곳은 천하 열 곳에 산재해 있다는, 저 유명한 황금장원(黃金莊院)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지 숙야빈의 추종자들 몇 명에 불과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장원이 은퇴한 고관의 저택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은 바야흐로 막바지에 이르러 있고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가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 비밀스런 황금장원의 지붕 위에도 눈은 쌓여가고 있었다. 황금장원 내의 후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었다. 그런데 수심이 깊어서인지 기이하게도 연못의 물은 얼어 있지 않았다. 그 가장자리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으음......." 숙야빈이었다. 황금장원의 장주인 그가 아까부터 계속하여 연못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던 그 인물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사탕을 우물거리고 있지 않았다. 항상 그의 주변에서 맴돌던 여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혼자 있는 모습을 보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조용히 지내는 것 보다는 시끌벅적한 속에서 뻐기는 것을 좋아 했으므로. 그렇다고 그가 경망스럽게 군 적은 한 번도 없으나 타인들 앞에서 감쪽같이 속여온 그의 본심이 그러하다는 얘기다. 어떻든 숙야빈이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눈은 꽤 오래 전부터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 살이 너무 많아 둥그런 그의 얼굴에는 일체 표정이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그의 입술이 움직여 탄식을 불어냈다. "너무도 큰 희생이었다. 워낙 대어(大魚)를 낚으려다 보니 미끼의 손실이 예상을 초과해도 한참 초과해 버렸다." 이와 닮은 우울한 빛이 그의 눈에도 떠올랐다. "힘이었다, 역시 무림의 세계에서 우선하는 것은." 숙야빈은 툴툴 웃었다. "예전에는 힘이란 어리석은 자들이나 행사하는 것으로 알았건만, 후후... 그것에 내가 이토록 당하는구나." 슉! 찌가 물 속으로 딸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지도 못한 듯 계속하여 중얼거렸다. "이런 수단까지 써서 그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정말로 막막하게 만든다." 숙야빈의 눈이 비로소 수면으로 향해졌다. 찌가 끌려 들어가 낚싯대 끝이 휘청거리고 있는 광경이 그에게도 보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예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린다. 낚싯대를 당길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때문이다. "화중화와의 약정은 본래 이런 것이 아니었다. 후후... 그를 외부로 끌어내 암살하고자 했던 계획은 중도에서 포기되고 말았지. 왜냐하면 당금 무림에서 그를 죽일 자를 구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살을 도려내 주고 뼈까지 깎아 바치는 고육지계(苦肉之計)를 택했지만......."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 바람에 수 년에 걸쳐 이루어 놓았던 내 세력 기반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후후... 그 작자 하나를 함정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지불한 대가 치고는 너무 비쌌다." 숙야빈은 일편 안타깝기 그지 없는 표정이었다. "으음, 불야파성비도(不夜破城秘圖)를 일 년만 더 빨리 입수했던들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을 것을." 불야파성비도라면 문자 그대로 전설의 불야성(不夜城)을 열 수 있는 비도가 아닌가? 그의 수중에 그런 물건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좌우간 황금과 지략 면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 협중협 숙야빈이다. 그의 흉중에 어떤 것들이 더 숨겨져 있는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대군마성과의 싸움은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로 인해 대정성의 지단은 거개가 붕괴된 상태였다. 군마성의 군마팔로군은 지금 대정성 입성의 순간만을 남겨 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경성의 황금장원. 그 곳에서 숙야빈은 그 자신이 말했듯 고육지계를 감수하면서까지 음모의 발톱을 세우고 있었다. 그가 드리우고 있는 낚싯밥에 과연 원하는 대어가 걸릴 것인지......? 대군마성. 그들은 천하마도의 중심지로써 발판을 굳힌 이후, 현재는 마세를 일로 확장시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속속 날아드는 승전보가 그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입증하고 있었다. 반면에 본성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군마팔로군이 출병함에 따라 전력(戰力)의 대부분이 외부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곳을 비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한 사람, 거인(巨人)이 버티고 있는 한. 이 시대 최고의 마중마(魔中魔)라 불리우는 마록이 바로 그였다. 군마화원. 마록은 한가한 위인처럼 뒷짐을 진 채 화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군마화원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흰 눈송이가 화원을 점차 흰 빛으로 뒤덮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각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눈만은 화원이나 눈송이에 머무르지 않고 연신 기광을 발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목을 휘감아오는 부드러운 손길이 있었다. "무엇에 그리 골똘해 계신가요?" 누가 들어도 꿈결처럼 달콤한 음성이었다. 마록의 입가에 언뜻 그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몸에 닿아 있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머지 않아 내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그야 물론이죠. 현 상태라면 한 달 안에 대정성에 입성할 수 있을 거예요." "후후... 그대에게 포상하고 싶다. 그대의 계략과 작전이 아니었다면 내 계획은 반 년 후에나 실행되었을 테니까." 말을 마치자 마록은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천하제일미녀라 일컬어지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화중화(花中花) 항예. 그녀는 오늘따라 분분히 쏟아져 내리는 백설과 똑같이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마록은 미소 띈 얼굴로 설경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후후... 정녕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군." "아이, 참! 대놓고 그러시면 무안하잖아요?" 항예는 정말로 얼굴을 살짝 붉혔다. 동시에 그녀는 고개를 숙였는데, 드러나 있는 목덜미까지도 분홍빛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청순해 보여 대개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어떤 여인이었는가를 망각하게 만든다. 마록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념의 성을 철저히 지키며 뭇여인들을 농락하던 그의 가슴이 은은히 뛰고 있는 것이다. "항예." "네?" 그가 부르자 항예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마록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야릇한 불길이 뿜어져 나온 것을. 하지만 마록도 그녀 못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항예의 기색을 통해 스스로 무슨 실책을 저질렀는지 이내 알아 차렸다. 그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후후... 그대와 나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이다. 우리는 그래서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다. 그렇지 않은가?" 항예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 말씀은 왜......?" "왜냐고? 후후후......." 마록은 쓰게 웃더니 말했다. "요즘 들어 나는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 모르겠거든." 항예는 눈이 한층 더 고혹적으로 빛났다. "그건... 심경의 변화를 뜻하는 건가요?" 마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나, 마록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오직 힘 밖에 없다고 여겨 왔건만 어이없게도 그 부분마저 회의하게 되어 버렸다." 항예는 생긋 웃었다. "회의라니, 당신께는 합당치 않은 말씀이시군요." "합당치 않다......?" 마록은 불현듯 항예의 어깨를 움켜 잡았다. "그대의 눈에는 지금 내가 무엇으로 보이지? 힘을 가진 제왕인가, 아니면 아무 감정도 없는 목석인가?" 항예는 살짝 보조개를 지었다. "목석." "나쁜......!" 마록은 그대로 항예의 몸을 와락 안아 버렸다. "그대는 악녀(惡女)다, 나를 뒤흔들어 놓은." "아! 아직은 이러시면......." 항예는 입으로는 거부를 표명하면서도 뼈가 없는 연체동물인 듯 유연하게 마록의 품에 안겨 들었다. 마록의 입술이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을 덮었다. ....... 항예. 그녀는 입술과 혀가 합쳐졌던 몽롱한 순간들이 지나자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록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항예의 몸을 안고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항예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에 두 손을 감고 있었다. 이후로 있을 일이 그녀의 뇌리에 환히 그려졌다. 그로 인해 그녀의 입가에는 아무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너, 금욕주의자! 그러나 이 순간부터는 아니야. 나는 네 마지막 성을 부순 사람이 될테고.' 그녀는 심중에 더 할 수 없는 희열이 차올라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강철보다, 바위보다 더 차가운 마음을 지녔다는 인물을 마침내 함락시키게 되었으므로. 물론 그녀도 자신에 대한 마록의 마음이 진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점은 그녀에게 있어 조금도 비중을 둘 만한 문제가 못되었다. '사랑? 그 따위 웃기는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다니 천하의 마록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군.' 화중화 항예는 그런 여인이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상에 눕혀졌는데 그 곳이 어디인지는 굳이 눈을 뜨고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근자에 그녀가 일일이 지시하여 분위기를 싹 바꾸어 버린 곳, 다름 아닌 마록의 거처였던 것이다. 항예는 마록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들자 그제서야 의도적으로 눈을 반짝 떴다. "난 정말로 마후(魔后)예요, 그렇죠?" 그것은 처음부터 그녀가 마록에게서 약속받은 바였으되 여태까지 남들이야 뭐라던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정작 한 번도 오간 적이 없는 말이다. 항예는 이 시점에서 그 말이 일으킬 수 있는 반향까지를 내심 계산하면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록은 그녀의 요구가 오히려 흡족했던지 쾌히 답했다. "물론이다. 내가 천하를 수중에 넣게 되는 날, 가장 먼저 그대와 성대한 혼인식을 치룰 작정이다." "아아! 나의 부군(夫君)......." 그들 두 남녀는 마침내 깊숙하게 맺어졌다. 서로 밀고 당기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끝에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다고 평행선을 치달리던 그들의 운명이 수직으로 방향을 꺾어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④ 마제갈 영호위. 그와 같은 충신(忠臣)도 실로 드물다. "주군! 이성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그는 지금도 안타까운 심경에서 간곡히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목숨을 내건 그의 간언도 통하지 않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마록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주군께서는 벌써 잊으셨습니까? 혈사해의 염원을......." 영호위가 토해내는 음성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화중화는 위험한 여인입니다. 어찌하여 숱한 계집들을 마다하신 주군께서 그 요물을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까?" 그의 말은 일단 터져 나오자 그칠 줄을 몰랐다. "그녀는 주군을 돕는다는 핑계로 천마화를 성내에 두었지만 실은 점차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충심을 가진 가신들이 모두 주군의 곁에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벌써부터 가신들 사이에서는 그 점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팔로군의 편성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기화로 주군의 측근 인물들을 멀리 떠나 보내고 있는 듯한 인상이 짙습니다." 마록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군께서는 화중화의 과거 행적들을 다 잊으셨습니까? 그녀가 강호상에서 어떤 식으로 흘러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극히 불결할 뿐더러 교활하기까지 한 여인입니다." "마제갈 영호위." 마록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그는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물었다. "말, 다 했소?" 영호위는 일순 가슴이 철렁했다. 마록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따라서 마록의 음성이 그런 투로 변할 때는 대개 살인(殺人)이 일어 났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주군......." 그는 기세가 꺾이는 대신 길게 탄식하며 눈을 들어 마록을 직시했다. 그 눈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 당신은 정말로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치실 작정이오? 이젠 내가 누군지도 잊었소? 나는 바로 당신의 오늘이 있게 한 마제갈 영호위란 말이오. "후후후......." 마록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는 당신만은 함부로 처단하지 못하오. 내게 직접적으로 죄를 범하거나 반역을 꾀하지 않는 한." 그것은 공신(功臣)에 대해 그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예우였다. 그는 완강함이 묻어 나오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내 더도 말고 한 마디만 하겠소. 앞으로 내 앞에서 지나 온 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절대 삼가시오. 과거에는 나도 무척이나 불결하고 교활한 자였으니 말이오." 마록은 상대로부터 몸을 돌렸다. "인간은 저마다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오. 그리고 나 는 금후로는 어떤 일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즉 그대는 더 이상 나서지 마시오." "주군......." 영호위는 마록의 등을 보게 되자 절망한 나머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마음 속에서는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주군께선 아십니까? 그녀가 아무도 모르게 외부와 수시로 교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외다.' 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마록으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한 번 결정한 사항은 번복하는 법이 없었는데 혹 그로 인해 커다란 손실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영호위가 만일 심중에 품은 말을 내놓았다면 그대로 목이 어깨 위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날더러 더 이상 나서지 말라고......?' 영호위의 눈에는 어느 덧 그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그가 되뇌인 말의 의미는 곧 직책에서의 해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로 영호위의 모습은 대군마성 내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록에게 퇴박을 당하자 실의에 빠져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었다. 무산(巫山) 신녀봉(神女峯). 자욱한 운무에 휩싸인 마화궁(魔花宮)의 전경이 보인다. 운무의 색채란 궁내에서 진행되는 음모들이 그러할지, 궁 자체를 뭐라 표현키 어려운 신비로 감싸고 있었다. 환청(幻聽)일까? 문득 봉우리 아래로부터 한 가닥 기이한 음률이 들려왔다. 삘리리리-- 띠디딩-- 듣는 이의 가슴을 묘하게 자극시키는 음률이다. 그런데 그 소리가 울리고부터 기현상이 일어났다. 마화궁을 감싸고 있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스스....... 이윽고 안개가 말끔히 걷혀 버리자 마화궁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인세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더없이 화려하게 치장된 궁전이었다. 그그긍--! 정문이 열리더니 안쪽으로부터 일단의 여인들이 걸어 나왔다. 다름이 아니라 바닥에 비단을 깔기 위해서였다. 긴 비단천은 안쪽으로부터 계속 이어져 온 것 같았는데 여인들에 의해 봉우리 아래까지 깔려지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나자 여인들은 비단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누어 도열했다. 하나 같이 미녀들이다. 나이도 주로 이십대로 개중에 간혹 연륜이 느껴지는 여인들도 보였지만 그녀들도 삼십 중반을 넘기지는 않은 듯 했다. 잠시 후. 궁내로부터 다시 여덟 명의 여인들이 걸어 나왔고 그 뒤로 는 한 중년의 미부(美婦)가 모습을 보였다. 일신에 궁장을 입은 그 미부는 얼굴은 면사로 가리고 있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자태에서 엿보이는 완숙미(完熟美)로 인해 이 자리에 서 있는 모든 미녀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봉우리 아래서 들려 오던 음률은 점점 가까워졌다. 삘리리리--! 띵딩딩딩--! 그 소리와 더불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무리를 지어 이 곳까지 오른 그들은 홍색가사를 입은 승려들이었다. 그들의 복장은 중원의 여느 승려들과는 달랐다. 짐작컨대 그들은 아마도 이역(異域)의 라마승들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줄잡아도 백여 명은 됨직한 그들 이승(異僧) 방문객들은 실로 놀라운 진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나 둘도 아니고 전원이 다 발이 땅에서 한 치 이상 뜬 채로 스치듯이 예까지 올라 왔던 것이다. 그들은 한 채의 교자를 호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무리의 중간부에서 열 명의 홍의승이 핏빛을 띈 그 교자를 메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몸집이 거대한 한 승려가 정면을 응시한 채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었다. 그 좌우로는 두 명의 동자승(童子僧)이 따르며 각기 피리와 은빛의 종(鐘)을 불고, 또 때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전해 온 사이로운 음률은 이 두 명의 작품이었다. 그들 무리가 바닥에 깔린 비단천 위를 스쳐 궁문 앞에 이르자 대기하고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대법왕님을 뵈옵니다." 합창이라도 하듯 동시에 쏟아내는 여인들의 음성이 적요한 산역에 긴 메아리를 울렸다. 궁장의 미부가 교자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궁주님을 뵈옵니다." 그 때까지도 교자 위에 앉아 있던 거구의 라마승은 그녀의 인사를 받고는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헛헛헛... 너는 못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황공하옵니다. 모두 양부(養父)님의 덕분이지요."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곧이어 라마승은 미소 띈 얼굴로 교자에서 내려왔다. 예의 동자승들이 습관인 양 좌우에서 그를 부축해 주었다. 라마승은 일어서고 본즉 키도 그리 작지는 않았지만 어찌나 비대한지 전신이 하나의 공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는 유독 신법을 쓰지 않고 여유있게 비단천을 밟으며 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로 백여 명의 라마승들이 줄줄이 따랐으니 실로 위세당당하고 거창한 행렬이었다. 그들이 모두 궁내로 빨려 들어가고 나서야 여인들도 움직였다. 그녀들도 비단을 거둔 뒤에는 입궁(入宮)했다. 마중을 위한 이 행사가 끝나자마자 마화궁은 이전처럼 다시 짙은 안개로 뒤덮혔다. 휘리리리링-- 신녀봉에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가? 신비로 재무장된 마화궁은 침묵 가운데 그렇게 묻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대한 체구를 붉은 옷으로 감싸고 있는 괴라마승. 그가 바로 천축(天竺)의 욕망궁주(慾望宮主)인 적천대라마(赤天大喇 )였다. 그는 지금 태사의에 무게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의 좌우에서는 음률을 담당했던 두 동자승들이 시립한 채 그에게 계속하여 부채질을 해 주고 있었다. 만년설지인 바깥보다야 훈훈했지만 실내 온도는 그다지 더운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채바람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적천대라마는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나치게 살이 쪄있는 탓이었다. 기세에서든 품위 면에서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되 그는 타인 앞에서 본의 아니게 그런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가 자신의 삶 중에서 유일하게 불행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이 점이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움직임조차도 타인에게는 매우 힘이 들어 보일테니 말이다. 그의 앞에는 양녀를 자처하던 궁장의 미부가 서 있었다. 애향령(艾香鈴). 그녀는 다름 아닌 마화궁주였다. 적천대라마가 그녀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한어(漢語)가 아닌, 천축어였다. "그 동안 수고했다. 이 곳에 직접 와서 살펴 보니 네 공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겠더구나. 헛헛......." 그는 치하에 이어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본왕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중원의 정세에도 귀를 기울여 보았고 그 결과로 우리의 계획을 추진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헛헛헛... 중원은 때가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어리석게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키고 있더구나." 애향령의 입에서 면사를 비집고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아버님. 중원을 장악하겠노라는 아버님의 염원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음, 좋아. 하지만 나는 서둘지 않을 작정이다. 시간이 흐를 수록 중원의 힘은 소진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측이 훨씬 유리해질 테니까. 그 때에 쓸어 버리면 별 희생 없이도 중원은 간단히 본궁에 귀속될 것이다. 헛헛헛......." 적천대라마의 웃음소리가 궁내에 은은한 진동을 전했다. 반면에 가까이서 이를 접하는 애향령에게는 아무런 동요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면사 사이에서 시종일관 싸늘한 빛을 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감정이라고는 일점도 품을 줄 모르는 듯 그녀는 가공할 위기상황을 스스로 연출하고 주도해 나가면서도 끝내 무심(無心) 외에는 무엇도 표출하지 않고 있었다. 제23장 한신(韓信)의 뜻 ① 대정성(大正城). 과거의 위세는 간 곳이 없고 지금은 패배의식만이 이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팔개분성(八個分城)의 붕괴로써 사실상 그들은 운(運)을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낭인무사들의 변절은 이들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그리하여 그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지키며 중원팔대세가의 인물들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의사청. 기다란 탁자를 마주하고 십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중원팔대세가의 가주(家主)들이었다. 탁자의 상단에는 여전히 대정성의 성주인 숙야빈이 버티고 앉아 있었으나 장내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정성은 명실공히 천하무림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가 못했다. 시시각각 포획의 그물을 조여오는 대군마성의 팔로군들로 인해 그저 유린될 날만 기다리는 패자들의 칩거지에 불과했다. 와중에서도 팔대세가의 가주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부러지되 구부러질 줄을 모르는 명가(名家)의 후예들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숙야빈을 상대로는 비굴할 정도로 굽히고 나갔던 전력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동류(同類)에 속해 있었으므로 어디까지나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가올 최후의 결전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칼을 갈고 마음을 다진 그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숙야빈은 자신의 앞에 놓였던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자! 여러분, 어서 잔을 드십시다. 하객이 없으면 자축이라도 해야되지 않겠소?" - 대체 무엇을......? 중인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이런 질문이 담겼다. 그것을 본 숙야빈은 한층 더 음성을 높여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축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 했다는데 대한 긍지요. 우리는 단지 때를 잘못 만났을 뿐 정녕 후회없는 전쟁을 치뤘다고 보오. 무인으로 태어나 그 정도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라겠소?"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감탄의 기색을 드러냈다. 패배는 너나 할 것 없이 쓰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수장(首長)이 이렇게 나올진대 고통도 더 이상 고통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순간 숙야빈이 더 없이 크게 보였다. 한 때는 금검대협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 때문에 그의 인격이나 자질을 놓고 회의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옛말이었다. 전 무림을 다 뒤진들 이만한 배포를 가진 인물은 또 찾아볼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건배!" 숙야빈이 외치자 중인들도 따라서 외쳤다. "건배--!" 아울러 그들은 어쩌면 이 잔이 생애의 마지막 잔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단숨에 비워 버렸다. 전서구를 통해 최후의 비보(悲報)가 날아든 것이 어젯밤의 일이다. 그 내용인즉 이틀 후면 대군마성의 팔로군이 대정성에 당도하리라는 것이었으니....... 따라서 이 밤, 그들이 한껏 취해 보고자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언제 이렇게 또 모여 술잔을 기울이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한 동안 그들은 생애 최대의 나날을 누려 왔다. 숙야빈이 어떤 인간이건 그가 내주었던 황금의 맛은 지극히 달았다. 그랬으니만치 필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지금 와서 숙야빈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뿐더러 실상 어림없는 일이기도 했다. 술잔이 몇 순배가 더 돌았다. 그러나 중인들은 묵묵히 술을 들이키고 있을 뿐 아무도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숙야빈. 그는 잠시 침묵에 휩싸인 장내를 둘러 보더니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후후후... 당신들에게는 미안하오만 나도 어쩔 수가 없구려.이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마록이라는 대어(大魚)를 낚지 못하니 말이외다.' 숙야빈은 이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 남궁악이 탁자를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크크큭... 성주, 어딜 가시오? 우리 함께 밤새도록 마셔 보십시다. 어차피 우리는 저승에서 해후하게 될 테지만 그 전에 한 번 흠뻑 취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 자조가 깃든 그 말에 숙야빈은 안면을 굳혔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달리 차갑게 응수했다. "누가 누구와 저승에서 만난단 말이오?" "뭐, 뭣?" 남궁악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일시지간 술이 확 깨어 버리는 것을 느끼며 확인하듯 물었다. "성주, 무슨 뜻이오? 그 말은......?" 숙야빈의 입술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자고로 진정한 영웅은 난세에 모습을 나타내는 법이지. 그대들은 안목이 너무 좁았소. 안되었지만 나 숙야빈은 영웅이 못되었으니까. 또한 나는 보시다시피 그대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에는 아직 젊소." "그, 그럼......!" 남궁악을 비롯한 중인들은 취중에도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듣고는 하나 같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어찌 감히 그런 말을......." 넋을 잃고 있는 그들을 향해 숙야빈은 괴소를 터뜨렸다. "후후후... 그리 놀랄 것 없소. 지금 이 일은 비단 어제 오늘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소이다. 다만 당신들이 어리석어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것 뿐이오." "괘씸한!" "우리는 처지가 어찌 되던 의리를 지키느라 죽음도 불사할 작정이었건만......!" 팔대세가의 가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무섭게 굳어져 있었고 여차하면 손이라도 쓸 기세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숙야빈의 음성은 그들로 하여금 지독한 절망의 수렁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후후후... 의리 따윈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소. 그대들이 마신 술이 작금의 상황과 우리의 너저분한 인연들을 깨끗이 정리해 줄테니 말이오." "아뿔싸! 이 술......!" 숙야빈은 씨익 웃었다. "그건 아마 운공을 해 보면 알게 될 것이오." "오, 맙소사!" 숙야빈이 팔짱을 낀 채 구경하고 있는 동안 중인들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 다급히 운공을 해 보았다. "우욱!" "으으... 이럴 수가......!" 중인들은 비명과 더불어 이를 갈았다. 그들은 운공을 해본즉 단전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며 그와 동시에 전신의 기운이 쑥 빠져 나가 허탈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 현상을 필두로 그들은 차례로 쓰러져 갔다. "죽일 놈......!" "내 저승에서라도 네 놈을......." 그것이 전부였다. 공허한 저주를 마지막으로 중원팔대세가의 가주들은 모두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하하하핫......!" 숙야빈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바야흐로 장내에는 그 혼자만이 남게 되어 그의 메마른 웃음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기괴로운 음파(音波)로 메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숙야빈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안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새삼 장내를 둘러 보았다. 현 상황은 그로서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쓰러진 가주들을 바라보며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또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 동안 이들을 거두기 위해 뿌린 황금이 얼마던가? 그래 놓고 지금에 와서는 내 손으로 직접 제거해 버린 꼴이 되었으니." 그는 입술을 질겅 씹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전부는 아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계략일 뿐, 나 숙야빈은 도로 일어설 것이므로." 숙야빈은 몸을 돌렸다. 그는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끝으로 이런 소리를 흘렸다. "나는 천하의 그 누구도 내 위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향후로도 마찬가지다." 그 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숙야빈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꺼내 놓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따름이었다. ② 마중마 마록.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쪽지를 내렸다. 처음 그 쪽지를 대했을 때는 약간의 긴장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어느 덧 그의 입가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 항복하겠다고? 그것도 자신을 믿고 따르던 수하들을 모두 투항의 예물로 바치겠다고?" 그는 종이쪽지를 손바닥 안에 놓고 가볍게 비볐다. 푸스스....... 경미한 음향과 더불어 그것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록의 입에서 냉혹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한 번 배신한 자는 언젠가는 또 다시 배신을 하게 마련이지. 후후... 안되었지만 나는 그런 자를 용납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못해." 그러나 그 즉시 뒤 쪽에서 부드럽고도 달콤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말을 부인했다. "이번 만큼은 달라요. 그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자예요. 그를 거둔다면 큰 이득을 보시게 될 거예요." '항예.' 마록의 시선이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과연 그의 눈길이 멈춘 곳에는 화중화 항예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노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도 소담한 황국(黃菊)을 한 송이 들고 있었다. 그녀의 타고난 감각이란 외적, 내적으로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마록은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째서......?" 항예는 별로 어렵지 않게 말했다. "당신이 혹 대정성을 무너뜨렸다 하여 그로써 전 중원을 장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에요." "후후... 그건 맞는 말이다." "호호호......." 항예는 웃으며 다가와 황국을 마록의 가슴에 꽂아 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가만히 기대가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중원은 넓어요. 언제, 어느 곳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는 알 수 없죠. 숙야빈이란 자는 뛰어난 지략가(智略家)예요. 그가 무공의 도움도 없이 무림의 반을 차지한 것은 절대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에요." 마록은 국화의 향기를 코로 느끼며 말했다. "그는 무공 대신 황금을 썼다." "호호호...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황금을 수단으로 천하를 웅패하고자 했던 위인은 그 자 뿐이에요. 아닌가요?" "흐음! 그 말도 일리는 있군." "그를 곁에 두시면 언제고 크게 쓰실 날이 있을 거예요. 반대로 그를 처단하면 당신은 덕을 잃게 되요. 패장(敗將)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군왕이란 그저 단순한 패자(覇者)일 뿐 천하를 다스릴 만한 그릇은 못된다고들 하죠." 항예의 설득은 점차로 마록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애초에 품었던 생각을 털어 놓았다. "그가 다시 배신을 하면 그 때는 어찌해야 하지?" 그 말에 항예는 고개를 들더니 크게 웃어 제꼈다. "호호호호홋......!" "왜 웃는가?" 마록은 정색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음성을 착 가라앉혀 말했다. "정말 당신답지 않은 말씀이군요." "흠, 그건 무슨 말이지?" "천하를 주름잡던 마(魔)의 제왕이 한낱 패장의 존재를 놓고 두려움을 가질 줄은 정녕 몰랐어요." 마록의 미려한 눈썹이 꿈틀 했다. "내가 언제 두렵다고 하던가?" "대부분의 인간들이 아량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요?" 본질을 파고 드는 그녀의 질문에는 마록으로서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더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 마록이 있는 곳은 대정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스름한 새벽 하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십오 년 전, 나는 중원에서 가장 미미하고 비천한 존재였지. 그 당시의 나는 다만 한 명의 불량 소년으로써 잡초처럼 아무 곳에서나 뒹굴면서 살았다.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 나의 일상이었지.' 거개의 사람들이 추억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록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지난 날의 추억이란 떠올려 봐야 아프고 쓰린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어느 덧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다 십 년 전부터 나는 결심했다. 천하를 나의 발 아래 두겠노라고. 그것이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지금,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할 수 있겠는가?' 마록이 본연의 의식을 정돈하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일진의 광소였다. "으하하하핫......!" 타인으로서는 도저히 의미를 알 길이 없는, 그의 광오한 웃음소리는 꽤 오랫 동안 계속 되었다. 항예는 눈꼬리가 은연중 파르르 떨렸다. 그녀로서도 상대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순간 만큼은 어쩔 수 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마록은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항예를 직시했다. "내가 세상에서 무엇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항예는 움찔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숙야빈, 그 자가 아무리 영활하다 해도 내 눈에는 단지 한 마리 여우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록은 잘라 말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의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그, 그야......." "후후...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가지 만은 알아 두어라. 여우도 사자에게는 먹힌다는 것을." 항예의 아름다운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건... 당신의 말이 맞는군요." 이는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 번씩 돌출되는 그녀의 진심이 쏟아낸 말이었다. 마침내 대정성의 깃발이 내려졌다. 대군마성의 군마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정성에 입성(入城)했다. 그것은 숙야빈이 일찌감치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패장의 예로써 대문을 활짝 열고 나와 무릎을 꿇고는 군마팔로군을 맞이했다. 그 선두에는 흑마를 탄 마록이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숙야빈은 그를 맞이함에 있어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 광경에 대정성에 남아 있던 몇몇의 고수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천령개를 내리쳐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팔대세가에 속한 인물들로써 주로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뿌린 피는 삽시에 대정성의 성루를 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대가 숙야빈인가?" 마록이었다. 그가 태사의에 높이 앉은 채 전면을 굽어 보며 묻고 있었다. 그 아래,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에는 숙야빈이 초라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마록의 음성에는 도리 없이 경멸이 깃들었다. "그대는 명예를 버리고 목숨을 택했다. 특별히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었는가?" 비아냥을 듣자 숙야빈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살찐 얼굴에 감도는 것은 비굴해 뵈는 미소일 따름이었다. "솔직히 저는 새로운 기회를 갖고 싶었습니다. 방법상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만." 마록은 실소했다. "흠, 소문대로 말을 잘 하는군. 그리고 더는 없나?" "다 같은 얘기기는 하나......." "말해 보라." "제 능력의 한계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제 일인자가 되는 일이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더군요." 그 말에 마록은 크게 웃었다. "으하하핫......! 그대는 실로 영악한 자다. 이렇게 마주 대하고 보니 내 그것을 실감하겠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숙야빈이 주춤거리며 묻자 마록은 정색을 하며 답했다. "그대가 지금 취하고 있는 태도는 내게 거리감을 별로 두지 않을 뿐더러 더 없이 공손하다. 그대의 눈에서도 나에 대한 경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오늘과 같은 처지에서 감히 그렇게 나올 수 있는 자란 세상에서 오직 그대 밖에 없을 것이다." 숙야빈은 할 말을 잃은 듯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마록의 음성이 쏟아 부어졌다. "그대의 언행은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많다. 내 반드시 그 점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겠다." 숙야빈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끙!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무서운 놈.......' 그렇다고 그의 기세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눈에서는 보이지 않게 불똥이 튀어 나오고 있었고 이 자리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 인물은 마록이라는 이름의 승자(勝者) 곁에서 고혹적인 자태로 서 있는 여인, 즉 화중화 항예였다. 마록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튼 그대를 거두겠다. 새로운 기회를 원한다니 직책도 주마. 아마도 그대의 적성에는 딱 들어 맞을 것이다. 그대는 천하에서 가장 계산에 능한 자가 아니냐?"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나에게는 경리가 필요하다. 그대는 앞으로 본좌의 곁에서 자금의 경영과 관리를 맡아 다오. 후후후... 기대 하겠다. 그대의 능력이라면 능히 일 년 안에 본좌의 재산이 배로 늘어나리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래도 되겠지?" '우우우......!'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숙야빈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숨기느라 아픈 줄도 모르고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숙야빈일지라도 이 때 만큼은 표정이 엉망이 되어 있으리라. 다행히도 마록은 상대의 감추어진 기색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 물러 가라. 피차에 오래 대면하고 있을수록 피곤하기만 할테니." 마록은 일어서는 숙야빈을 향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지금부터 바빠질 것이다. 그대가 관리해야 할 장부가 창고에 가득하다. 당분간은 본좌도 그대를 부르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숙야빈은 절을 한 뒤 물러 나왔다. 그런데 그의 흉중에서 마구 들끓는 자조와 분노를 정말로 재미 있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숙야빈이 한낱 장궤(경리)로 전락하다니, 호호호... 정말 우습군. 세상사는 이래서 예측불허라는 건가? 호호호.......' 항예였다. 마록의 절대적 신봉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숙야빈의 배후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③ 암흑천하(暗黑天下)가 도래했다. 대군마성이 천하를 장악한 이후로 마중제일인(魔中第一人)인 마록은 무림을 완전한 자신의 세계로 만들고자 했고 그 일은 날로 현실화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군마성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던 대정성이 무너진 이상 그에게 장애가 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천하무림을 제패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패자에게는 무엇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마록은 그것을 행사할 줄 알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율법을 선포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했다. 그는 스스로를 무림황제(武林皇帝)라 칭하기도 했는데 아무도 이 결정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마록은 또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정성을 증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거대한 토목공사가 벌어졌으며 그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그는 천하 각 문파의 제자들을 동원했다. 그는 무림인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기를 원했고 그것이 그대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무림사상 유래가 없었던 일이 도처에서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선포한 마의 율법이란 것만 해도 그렇다. 천하에 산재해 있는 각대문파가 그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무슨 일이든 그의 무황성(武皇城)에 보고해야 했다. 문하제자를 받아 들이는 일조차 일일이 윤허를 받아야 했을 뿐더러 사소한 시비나 은원관계도 무황성의 재가를 받아야지 절대 자체적으로 해결해서는 안되었다. 이를 위해 천하 십팔 개 지역에 무황성의 지부(支部)들이 세워졌다. 상주 인원은 마록의 측근에 있던 고수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권한은 가히 황제에 못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무림의 현황을 암흑기라 표현한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추세라면 마록이 무림사상 초유의 군림마왕으로 기록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았다. 덕분에 무림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정의(正義)란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직 무황성에 아부하는 자만이 득세를 하고 그들의 눈 밖에 난 자는 발을 편히 뻗고 잘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비참한 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라고나 할까? 무림은 극도로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점차로 질식해 가고 있었다. 구파일방 같은 경우는 아예 무황성의 압력으로 현판을 떼이는 치욕까지도 감수해야만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림인들은 저마다 피눈물을 뿌리며 문을 닫아 걸거나 무림에 발길을 끊어 버리기에 이르렀다. 그토록 우려했던 난세(亂世)가 바로 이런 것이라며. 불회도(不廻島). 파양호에서도 소용돌이를 이루는 험난한 수역에 자리하고 있어 그렇듯 두려운 이름이 붙게 된 섬이다. 그러니 어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는가? 이 불회도 안에 또 하나의 무림 세계가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천명부(天命府). 불회도 안에는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있다. 규모도 꽤 방대했고 그 조직체계도 나름대로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구성원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지사(志士)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의(義)를 숭앙했으며 드높은 기개로 뭉쳐져 있었다. 천명대전(天命大殿). 이 곳은 천명부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거나 의전을 집행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지금 천명대전에는 평소와는 달리 여러 부류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른바 불(佛), 도(道), 속(俗) 등이 총망라되어 흡사 천하 무림의 축소판인 듯 싶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지난 날 무림에서 쟁쟁한 위명을 떨치던 인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우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눈에 띄었고 그 외에도 인상에서 벌써 경륜이 느껴지는 풍진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얼굴에서는 과거 천하를 풍미하던 시절의 기질이나 위엄 등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초라한 노인들이 되어 있을 뿐으로 그것은 난세무림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자칭 무림황제, 즉 마록의 치하에서 수모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소외되다 보니 종국에는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그 시기에 천명부의 부름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기 싫어 자결을 했거나, 혹은 심산유곡에 은거하여 영영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았으리라. 대전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인물들이었다. 좌우간 그들은 이 곳에 전부 모였으며 그 전에 이미 명예나 신분 같은 것은 따지지 않기로 작정한 바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비롯하여 대강남북(大江南北)의 사십팔 개 군소문파의 수뇌인물들, 그리고 사십 년 전 이름을 떨치던 해은삼기(海隱三奇)와 중주칠괴(中州七怪), 하락오웅(河洛五雄), 사해구협성(四海九俠星) 등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배석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한 동안 강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유도 실은 각처로부터 불회도를 찾아 오기 위해서였다. 은밀한 경로를 통해 움직이자니 자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현 무림이 무황의 수중에 떨어진데 대해 통렬한 자기비판을 거친 상태로써 남아 있는 삶을 마지막까지 무림정기를 되찾는데 바치겠노라며 각오를 다지고 있기도 했다. 그들을 앞에 두고 용류옥이 말했다. "무황성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따르는 자는 살고, 거스르는 자는 죽는다는 그들의 율법이 남용되어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천명부주(天命府主)인 그는 공히 군웅들의 영도자였다. 이미 용류옥이란 존재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구성(救城)으로써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제는 정말로 그의 젊은 어깨로 무림의 사활(死活)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물론 용류옥을 처음 대하는 강호의 노기인들까지도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용류옥에게 감탄해마지 않는 것은 무공 수준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너른 도량과 냉철한 이지(理智)였다. 그들에게도 한 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거니와 그 나이에 그런 면모를 갖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증적인 예로 불회도의 천명부에는 하루가 다르게 많은 인물들이 모여 들었으나 용류옥은 그들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감으로써 군웅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사실 출신이나 기질 등이 다른 다수의 인물들, 그것도 의식이 자유분방한 무림인들을 다루는 일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들을 매끄럽게 수용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무림은 유사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이겠습니다만." 용류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무림황제를 자칭하는 마록은 혈사해(血死海)의 가공할 무학을 지니고 있는지라 그 힘을 누구도 꺾지 못합니다. 무림의 존립마저 의심스러운 이 지경에도 말입니다." 중인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 없었다. 그 말인즉 모두가 명백한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반면에 그의 음성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그러나 어떤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필히 무림정기를 수호해야 합니다. 마(魔)에 의해 말살 당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만장하신 여러 군협들께서도 그 때문에 여기 이렇게 모이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리 길지는 않았으되 마치 열정의 발산과도 같은 대단한 웅변이었고 즉시로 그 효력을 발휘했다. 듣고 있던 군호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이는 새롭게 솟구치는 힘과 의기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용류옥 역시도 그들의 반응을 느끼게 되자 절로 그들과 똑같은 심정이 되어 더욱 기세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단지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천명을 받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마도(魔道)가 저렇듯 자만하고 있는 동안에도 긍지와 자부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뜨거운 열기가 배어 있는 그 말에 군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이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서는 급기야 나지막하게 함성이 일기 시작했다. "우우우--!" "또 더 이상 그들을 방치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도 이제는 각자의 안위에 대한 집착 따위는 미련없이 털어 버리고 대의(大義)를 위해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용류옥의 부르짖음은 계속 이어졌다. "벌써부터 천하 각처에서 열띈 호응이 계신 줄은 압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뜻이 하나를 이루지 못했을 때,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를 우리는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이것은 지난 날 무림성의 분열에서부터 붕괴까지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그는 격정에 사로잡혀 있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뇌리에 생생하게 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라면 용류옥 이상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리고 그 간의 경위야 어찌 되었건 그는 무림성주인 무림왕 용화천의 현존하는 아들로써 그 업연(業緣)의 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용류옥은 출정(出征)과 그에 따른 마음자세를 그 때의 일을 배경 삼아 요약해서 얘기했고 군웅들의 열렬한 환호로써 끝을 맺을 수가 있었다. 이후로 그는 군웅들을 위해 조직을 재편성했다. 여기에도 역시 탁월한 솜씨가 요구되었다. 조직력이 보다 강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인원수가 많다 해도 자칫 오합지졸(烏合之卒)을 면치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완벽한 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지자 군웅들을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용류옥의 치밀한 지휘능력과 용병술에는 도무지 이의를 제기할 틈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불회도의 천명부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해 가고 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④ 무황성(武皇城). 당금 무림의 패도지천(覇道之天)이 이 곳이다. 무림황제 마록은 대정성을 증축한다고 선언하더니 그 터에 원래의 규모보다 무려 다섯 배나 더 큰 건물을 세우고 이름도 무황성으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그 곳은 웅대한 규모 뿐 아니라 화려함에 있어서도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에 비한들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로써 마록은 무림일통에 대한 무언의 과시와 군림천하라는 의지를 보다 강력하게 표명하고 나온 셈이었다. 거기에 상응하는 사치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마록은 생활상도 황제가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렸다. 그는 무황성을 지상낙원으로 꾸미려고 작정이라도 했는지 비할데 없이 호화롭게 치장해 놓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그는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진귀한 물건들이란 모조리 실어 와야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수집광적인 면모까지 보였다고 한다. 어떻든 마록을 이르자면 그토록 숭배하던 힘 하나로 종내 명성과 권력, 그리고 부(富)를 동시에 얻은 인물이었다. 한 해에 각 문파에서 무황성에 갖다 바치는 조공만으로도 그는 능히 천하제일부호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금과 은 등의 칠보(七寶)로 요란하게 꾸며진 방. 그 곳에서 마록은 백호피가 씌워진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과거에 비해 약간 살이 오른 듯한 모습이다. 그의 옆에는 일신에 하늘하늘한 나삼을 걸친 한 미녀가 서 있었다. 상관영봉이었다. 그녀는 지금 두 손으로 쟁반을 공손히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 보이는 것은 빙과(氷菓)였다. 마록은 이따금씩 손을 뻗어 빙과를 들었다. 훈풍이 감도는 사월에 빙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아마도 천자(天子)를 빼놓고는 그 밖에 없으리라. 가히 천자에 버금가는 향락을 누리고 있다는 얘기다. "저......." 상관영봉이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마록은 그녀의 음성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하여 눈을 반개(半開)하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관영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다시 말했다. "어찌 된 건가요? 저의 복수는......." 그녀의 눈에는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그제서야 마록이 낮게 중얼거렸다. "너는 지금 내게 숙야빈을 네 손에 넘겨 주마고 했던 그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 "네." 상관영봉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떻게라도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하려는 듯. 그녀는 현재 불공지대천인 숙야빈과 한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는 무황성의 회계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마록은 빙과를 씹으며 말했다. "나는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를 너에게 넘겨줄 만한 명분이 없으므로. 후후... 그가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럼 대체 언제까지......." 상관영봉은 말을 하다 말고 가슴이 답답해져 도중에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 왔던가? 오직 숙야빈을 죽여 아버님의 원한을 갚아 드리기 위해 진즉에 끊어 버렸어야 할 목숨을 질기게 이어가고 있건만.......' 마록은 일찌기 작정한 바대로 명목상 화중화 항예를 정실부인으로, 상관영봉은 첩으로 두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사족(蛇足)을 단다면 그는 본래 대정성을 접수하자마자 항예와 혼례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천하를 진동시킬 만큼 떠들썩하고 화려하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예 쪽에서 사양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정성을 함락시켰다 해서 천하를 완전히 제패한 것은 아니라는 게 그녀가 내세운 이유였다. - 대정성을 기반으로 삼아 완벽한 승리의 터전을 이루세요. 그런 연후에는 변방의 수비에도 주의를 기울이시고요.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소첩은 기다리겠어요. 항예의 그 말은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그대로 마록의 좌우명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그의 귀에는 형식적인 면에 집착하지 않는 진정한 충고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마록은 항예를 더욱 아끼게 되는 한편, 상관영봉에게는 일체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다. 전자에 있은 약속이 꺼림찍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상황이 허락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상관영봉. 그녀는 이 내막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또 모욕감 때문에 치를 떨면서도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마록은 어느 날인가 그녀를 꼭 한 번 취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 나는 동정(童貞)을 마후에게 주었다. 그래서 너를 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해라. 그 말을 들을 당시에 상관영봉은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무림성이 건재한 시절 같았으면 강호의 유녀(遊女)나 다름없는 항예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그녀였다. 그런데 마록에게 심신(心身)을 지배 당하다 보니 그녀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무력해져 갔으며 한 가닥 남은 정신은 아직도 복수심으로 서리를 내리고 있어 마록의 곁에서 더욱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원수를 눈 앞에 두고도 그저 보고만 있어야 된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숙야빈은 최근 들어 무황성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반 년 간 무황성의 재산을 열 배로 신장시키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완전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아아!' 상관영봉의 심중에서는 계속하여 소리 죽인 탄식성이 울리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퇴색되어 가는 삶의 의미가 실체로 화해 고통을 가해오자 그녀로서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더구나 근자에 그녀는 마록의 섭혼마백술에서 조금씩 풀려 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단 한 번 뿐이기는 하나 직접적인 육체관계가 빚어 놓은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 점은 그녀에게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안겨다 주었다. 이성을 회복해 가자 상대적으로 자신의 생에 대한 환멸과 회의도 그만치 부피를 더해 갔기 때문이었다. 마록이 태사의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숙야빈은 내 재산을 훌륭하게 관리해 주었다. 만일 네가 그를 죽인다면 그 때부터는 누가 방대한 본성의 재산관리를 맡지? 혹 네가 할 수 있다면 몰라도." 상관영봉은 한스러운 눈빛을 흘려냈다. "그 말씀은 절더러 포기하라고 하시는 것 같군요." 그 말에 마록은 기소를 발했다. "후후후...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다만 득과 실에 대해서 얘기했을 뿐이다." 이 때, 밖으로부터 한 가닥 음성이 들려왔다. "속하 숙야빈, 성주를 뵙고자 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상관영봉의 몸이 본능인 양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유순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한 빛이 쏘아져 나왔다. '이것이 무슨 생각을......?' 마록은 놀란 나머지 일부러 꾸짖듯 차갑게 내뱉았다. "무얼 하고 있느냐? 너는 이만 물러가라." "으음......!" 상관영봉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원망이 담긴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항명(抗命)이란 곧 죽음이었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조용히 마록의 뒤켠으로 사라져 버렸다. ⑤ 잠시 후. 방 안으로 숙야빈이 들어섰다. 그는 비단옷이 아니라 평범한 청의를 입고 있기도 했지만 과거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뭐니뭐니 해도 전보다 살이 많이 빠졌다는 사실이었다. 숙야빈은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마록이 그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속하, 성주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숙야빈은 고개를 숙인 채 꽤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고, 이에 마록은 기이한 표정이 되어 그를 응시했다. "음, 어떤 말인지 기탄없이 해 보라." 숙야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속하는 그 동안 감히 신명을 다했노라고 생각합니다. 성주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속하는 이전부터 알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하에 대한 성주의 마음입니다." 마록은 씨익 웃더니 그리 어렵지 않게 말했다. "그대는 그 동안 나를 매우 흡족하게 했다. 따라서 나는 그대의 공로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대는 나의 재산을 증식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일처리 능력을 보였다. 천하 각처에 퍼져 있는 분성과 지단, 그리고 무림 제문파들의 문제점들을 그대는 신속하고 완벽하게 해결해 왔다." 숙야빈은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후후... 과찬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의 몫을 내 기대치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 솔직히 애초에는 그대를 죽일 생각이었다만 지금은 그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속하를 그 정도로 보아 주신다니 정녕 감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숙야빈의 태도는 시종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기 그지 없었다. 마록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본좌를 찾아온 이유가 정녕 그것 뿐인가?" 숙야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속하는 처음 성주를 대할 때 한신(韓信)을 떠올렸더랬습니다. 재기(再起)를 노려 온갖 굴욕도 감수하는......." "음, 그럴 수도 있겠지." 마록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계획으로는 일단 성주의 신임을 얻은 다음 기회를 보아 언제고 일을 꾸며 볼 작정이었습니다." 마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중도에서 마음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숙야빈은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속하는 지난 반 년 간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엿보아 왔으나 얻게 된 결론이라곤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숙야빈의 능력을 가지고는 성주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마록은 문득 기소를 흘렸다. "훗훗... 그대의 말에는 웬지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군."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속하에게는 항상 저울질을 하는 버릇이 있을 뿐입니다." "흐음, 그래서 이리저리 재 본 결과는?" "속하는 한신이 아닌 포숙아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포숙아?" 마록은 안면을 씰룩였다. 그 말인즉 충성스러운 수하가 되겠다는 뜻이니 일면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렸다. '숙야빈, 이 자는 심기가 깊은 위인이다. 지금껏도 그랬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추측하기 힘들구나.' 마록은 그 동안 숙야빈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은밀하게 상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힘을 숭상하지만 결코 어리석지 않은 위인이 마록이다. 그가 만일 단순기능만을 가진 두뇌의 소유자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오늘과 같은 위치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록은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포숙아가 되겠다는 것이지?" 숙야빈은 공손히 답했다. "속하는 성주께서 저를 완전하게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또 당연한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마록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 나는 그대 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 이는 나의 철칙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하는 우선적으로 성주께서 저를 믿도록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후후... 내게 그대의 목이라도 맡겨 두겠단 말인가?" 숙야빈이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속하의 목은 두 개가 아닌지라 성주께 맡길 수가 없습니다." 마록도 그를 향해 마주 웃었다. "안심해라. 내게도 역시 그대의 굵고 못생긴 목 따위나 보관하고 있을 일은 없을 테니까." 숙야빈은 웃음을 그치고 종전대로 진지하게 말했다. "성주께 이 숙야빈이 평생에 걸쳐 모아 놓았던 재산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마록은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황금으로 내 마음을 얻어 보겠다는 것인가?" 숙야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성주께서는 혹시 이 숙야빈에게 있어 황금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과거에 제 별호가 무엇이었는지를 아신다면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훗훗... 재미있군. 그대의 별호는 무엇이었지?" "무림에 뛰어들기 전의 것이기는 합니다만 모두들 절더러 황금교주(黃金敎主)라고 불렀습니다." "황금교주?" "그렇습니다. 얼핏 들으면 제가 황금교라는 단체라도 세운 것 같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황금 그 자체가 제 철학이며 교(敎)라는데서 붙여진 별호입니다." "으음." "황금은 저의 생명이자 삶의 전부입니다." 마록은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모든 것을 본좌에게 맡기면서까지 대체 무엇을 추구하겠다는 것인가?" 숙야빈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속하는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장사......?" "속하의 목숨과 전 재산을 성주께 담보로 맡기되 그것을 배경 삼아 고금 제일의 부호가 되기 위한 거래들을 열어 가고 싶습니다. 외람된 말씀이나 무(武)로는 성주를 능가하지 못하니 재력(財力)으로나마 정상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주의 비호 아래 마음껏 날개를 펴고 싶습니다." "으음......." 마록은 신음을 흘렸다. 숙야빈의 말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아니, 그의 제안에 마록은 어느 덧 가벼운 유혹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자신은 무의 제왕이기는 하나 축재에 있어서는 분명 숙야빈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런즉 숙야빈의 제안을 받아 들인다면 그는 가만히 앉아서도 엄청난 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이 만일 이 자의 음모라면......?' 마록이 이처럼 갈등으로 인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호호호... 숙야선생, 아무 염려 말고 선생의 전 재산을 맡기세요. 그러면 무황성의 뒷받침이 있을테니 선생이 뜻한 바대로 기량껏 사업을 벌이도록 하세요." 고혹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그윽한 여인의 체향이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이어 안 쪽으로부터 사실상의 무황성 군사(軍師)가 하늘하늘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마후(魔后), 화중화 항예였다. 마록은 항예의 출현에 기쁨의 빛을 드러냈다. 그것은 골치 아픈 일이나 결단이 필요한 일을 그녀에게 떠넘기면 언제고 곧바로 해결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숙야빈이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마후께서는 저를 인정해 주시는군요." "호호호... 선생의 재산은 필시 엄청 나겠지요?" 항예의 질문에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리 많지는 않으나 중원에서 저를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흐음?" 마록은 그 답지 않게 눈을 크게 떴다. "저는 도합 열 개의 황금광산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 재산이 액수로 쳐서 어느 정도인지는 저 자신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열 곳의 황금광산에서 여전히 황금을 캐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록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녕 엄청난 일이 아닌가?' 그의 마음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한 쪽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리고 있었다. '황금광산! 이 얼마나 매력있는 이름인가?' 마록은 이미 금력의 맛을 알고 있는 터였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야망이 아니라 이번에는 탐욕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새 하나의 염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항예의 기특한 음성이 그의 귀로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그렇다면 선생은 어떻게 재산을 맡기겠다는 건가요?" 숙야빈은 고개를 들었다. "제 재산은 천하 열 곳의 황금장원에 분산되어 있으나 그 핵심은 북경에 있는 장원에 비축되어 있습니다. 그 곳의 황금고(黃金庫) 속에 재산명세서를 비롯하여 각종의 관련 서류들을 보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간단히 덧붙여 말했다. "속하의 황금고를 성주께 내드리겠습니다." 마록은 항예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는 그녀에게 최후의 결정을 하라는 뜻으로써 따르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선택을 마친 후라 항예에게는 갈등할 일이 없었다. "호호호호... 좋아요, 난 벌써 선생의 제안을 수락한 상태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황금고로는 언제 가죠?" 숙야빈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성주께서 원하신다면 하시라도 가능합니다. 속하가 직접 성주를 모시겠습니다." 마록의 고개가 마침내 끄덕여졌다. "좋다! 숙야빈, 그대의 제의를 받아 들이겠다." 숙야빈의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의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성주." 제24장 음모(陰謀)의 실체(實體) ① 상관영봉(上官靈鳳).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흰 그녀의 섬섬옥수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한 자루의 비수(匕首)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공허해 보이리만큼 무심했다. 그 무심한 시선은 지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한 폭의 미녀도(美女圖)가 있었다. 상관영봉은 아름다웠다. 비록 많이 수척해지기는 했으나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지난 날의 화사했던 분위기는 다 어디로 가고 인생을 다 살아버린 여인처럼 안면에 어둡고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얼굴은 아무래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탄식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상관영봉, 너는 죽었어.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무심했던 그녀의 시선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과거 무림성(武林城)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 것이었다. 약혼자인 용백검(龍白劍)과의 꿈같던 나날들....... 그러다 그가 변했고, 그 바람에 그와 더불어 행복을 구가하려던 그녀의 보라빛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 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계속 파멸과 불행의 길로만 치달려 왔다. 그녀는 마록에게 이끌려와 그 곁에서 머물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생각하면 딱히 후회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가슴을 저미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당시 백검은 강제로 나를 취하려 했었어. 나는 너무도 의외다 싶은 나머지 완강하게 저항했고......." 그녀의 입에서 마른 웃음이 툴툴 비어져 나왔다. "차라리 그 때 허락할 걸 그랬나 봐. 백검은 어느 시기부터인가 호색한(好色漢)이 되어 내게 큰 충격을 입히긴 했지만 적어도 나를 농락할 사람은 아니었어." 상관영봉의 눈에는 은연중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심정은 극도로 비참해지고 말았다. 무림성도, 용백검도 세상에는 없는 존재들이다. 아니, 있다손 쳐도 그녀와는 무관해져 버렸다. 그것은 그녀가 몸도 마음도 완전한 마록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관영봉은 뇌리에 그득한 생각들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백검, 당신은 죽었어! 이전의 나와 함께. 설사 살아 돌아온다 해도 우린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어." 그녀는 흡사 용백검의 영상이 자청해서 자신의 머리 속으로 헤집고 들어오기라도 한 듯 심히 원망하는 투로 부르짖었다. 우습게도 어서 떠나 달라고 말이다. 그러기를 한참여. 상관영봉은 고통을 수반하는 몽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복귀했다. 어쩌면 현실이 더욱 뼈아플지도 몰랐으나 그녀에게는 해결해야할 중대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눈물이 어린 눈망울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는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찬찬히 풀어 내렸다. 흑단처럼 검게 물결치는 흑발은 창백한 얼굴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어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록, 그는 나와의 약속을 끝내 지킬 수 없을 거야. 나는 그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가 어떤 면으로든 내게 비중을 두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란 실로 어렵다. 그것도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경우에는 더 하다. 상관영봉은 그야말로 지난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마록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가치조차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상관영봉이 무능한 탓이라기보다는 그녀의 경쟁상대가 워낙 뛰어나서라면 맞았다. 화중화 항예는 미모에서건 지략에서건 어느 모로 보나 그녀를 몇 단계 앞서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만큼은 상관영봉도 자조를 금치 못한다. '내가 정말 운이 없는 거야. 화중화를 보면 아예 질투도 나지 않아. 같은 여자인 나까지도 반할 지경인 걸? 그녀의 과거 행각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가 이처럼 씁쓸하게 체념했던 부분까지 새삼 떠올리는 것은 그만치 마음을 독하게 먹기 위해서였다. 요는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식으로 주변의 모든 관계들을 일체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아무 가책 없이 작정한 바를 시도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도 상관영봉의 계산대로는 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실제적 첫 남자인 마록을 진심으로 사랑하므로. 어찌 되었건 그녀는 수중의 비수를 들더니 거침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그녀는 뭉턱 잘려진 머리카락이 비감을 유발시키자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비장한 결의를 보인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숙야빈!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이고 말리라.' 상관영봉. 그녀는 마침내 숙야빈을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그녀는 앞으로 이나마도 영영 기회를 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부친인 금검대협을 죽인 일대의 효웅 숙야빈.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황성 내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뿐더러 그녀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모종의 제안을 내놓아 마록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고도 했다. 이쯤 되고 보니 상관영봉으로서는 더 이상 때를 기다리거나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기야 아무도 모르게 거사를 단행하고자 했고, 그것이 오늘 밤이었다. 상관영봉은 나삼을 벗고 흑의로 갈아 입었다. 몸에 찰싹 달라 붙는 야행복이다. 이어 그녀는 짧게 자른 머리까지 검은 천으로 갈무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슥--! 그녀의 신형이 창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뛰어 들었다. 무황성의 한 전각(殿閣). 숙야빈의 거처이자 무황성의 전 재정이 또한 이 곳에서 관리되어진다. 이르자면 언제부터인가 점차 심장부(心臟部)로써의 자리매김을 해 가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믐 밤이다. 달빛조차 없어 사위는 칠흑 같이 어둡기만 했다. 스스스....... 흡사 한 마리의 야조(夜鳥)인 양 어둠을 가르며 하나의 흑영(黑影)이 전각 내로 스며 들었다. 상관영봉이었다. 그녀는 오늘을 위해 미리 지형을 익혀 두었던 듯 서슴없이 삼층의 한 내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빙심(氷心)의 여인, 사무친 원한이 이 시각 만큼은 매서운 살의(殺意)를 일으켜 그녀의 마음을 싸늘하게 얼려 놓았다. 두려운 생각이라곤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여살성(女殺星)이 되어 표적을 찾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슷--! 내전의 천정 속이다. 상관영봉은 그 곳까지 잠입하는데 무사히 성공했다. 그녀는 서까래 위에 납작 엎드린 뒤 품 속에서 비수를 꺼냈다. 보기에도 섬뜩한 그 비수에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무엇이건 핏물로 변하는 화혈독(化血毒)이 발라져 있었다. 그녀는 호흡을 차단시킨 채 조심스럽게 천정에 구멍을 뚫었다. 우선적으로 방 안의 정경을 살피기 위해서이다. '음, 됐어!' 그런데 복수심에 불타는 그녀의 눈이 막 구멍에 가 닿는 순간이었다. '하악!' 상관영봉은 대경하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동시에 그녀는 극심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단단히 얼어 붙은 그녀의 빙심조차 이토록 뒤흔들려 버린 것인지......? ② 마록은 눈썹을 찌푸렸다. 잠자리에 들었으되 이것저것 잡다한 구상들이 많아 잠이 오지 않던 그였다. 그러다 어느 틈엔지 까무룩하게 잠들려는 그 찰나에 불청객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었다. "주군(主君), 부디 속하의 배알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도 몇 번이나 그냥 돌아가라고 말했으나 상대는 그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이렇게 되자 마록도 더 이상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침의(寢衣) 위에 겉옷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는 잔뜩 볼이 메인 듯한 음성으로 짧게 내뱉았다. "들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바닥에 꿇어 엎드리는 한 중년인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마제갈(魔諸葛) 영호위였다. 어디론가 잠적했던 그가 이렇듯 야심한 시각에 불쑥 나타나 마록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평범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다. 마록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불쾌한 듯 상대를 외면했다. "본좌는 그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솔직한 그의 진심이었고, 이미 마후로 책정된 화중화 항예를 가운데 두고 새삼스레 설전(舌戰)을 벌이는 짓 따위는 사양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제갈 영호위가 마록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다 간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속하를 피하지 마십시오, 주군. 그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위경에 처해 계십니다. 간부(姦夫)와 요녀(妖女)의 음모가 주군을......." 일순 마록의 눈이 섬뜩한 안광을 발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통촉하소서, 주군! 화중화가 어떤 여인인지에 대해서는 천하무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본좌를 모독할 셈인가?" 마록의 벽력 같은 호통에 영호위는 황급히 부언했다. "아, 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감히....... 다만 충심(忠心)으로 드리는 말씀일 뿐이니 헤아려 주십시오."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몹시 떨려 나오고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왔으나 마록의 분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공포로 인해 간담이 얼어 붙었던 것이다. 마록의 눈이 살기를 띈 채 영호위를 노려 보았다. 입에서 튀어 나오는 음성도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호위, 그대는 그 말 한 마디 만으로도 능히 천참만륙을 당할 수 있다. 그 점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영호위는 거의 사색이 되어 답하더니 그런 자신이 싫었는지 급기야 이마를 땅바닥에 내리치기에 이르렀다. 퍼퍼퍽! 대번에 그의 이마가 터져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그는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주군! 속하의 충언을 믿으셔야 합니다. 만일 속하가 잘못 알고 아뢴 것이 확인된다면 그 때 가서 제 목을 치십시오. 그래도 늦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으음......." 마록은 신음을 흘렸다. 영호위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그를 더욱 심각해지도록 만든 것은 영호위의 기세도 기세려니와 그 모습에서 과장이나 거짓을 엿볼 수가 없더라는 사실이었다. "그 말, 진정인가?" 마록의 음성은 어느 새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영호위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혈사해의 가신으로써 맹세합니다." "좋다! 그럼 무엇을 고하려 했었는지 어서 말해 보라." 마록의 안색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기회를 빌어 영호위는 자신이 직접 듣고, 또 보았던 엄청난 사실을 털어 놓았다. "지금 숙야빈의 처소에서는 상상치도 못할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숙야빈, 그 자가 감히 불륜(不倫)을 저지르고 있는데 상대는......." 팍! "닥쳐라! 더 듣고 싶지 않다." 마록의 의자에 달려 있던 손잡이가 대번에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가고 말았다. 그는 격노한 나머지 얼굴을 무섭게 굳힌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제갈 영호위. 그는 정말로 한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더 말을 꺼냈다간 이번에는 의자 손잡이가 아니라 그 자신이 가루로 화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노화를 간신히 가라앉힌 마록이 먼저 말했다. "그 외에 또 고할 것은 없느냐?" "있습니다. 그들은 진즉부터 의기 투합하여 주군을 해치고자 은밀히 모의를......." 슷--! 마록은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벌써 영호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으라. 내 확인해 본 후, 사실이 아니라면 그대를 용서치 않으리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마록의 음성은 어느 덧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긴장이 풀리자 영호위는 새삼 진저리를 쳤다. 그는 전신이 식은 땀으로 푹 젖은 채 눈을 내리 감았다. "주군께서도 용단을 내리게 될 것이외다. 좋든 싫든 있는 사실을 똑똑히 보시게 될테니......." '오오! 저럴 수가.......' 상관영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내려다 보고 있는 곳은 애초에 뜻한 바대로 정확히 숙야빈의 침실이었는데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란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기에 역겨울 정도로 난잡하기 그지 없는 정사(情事)의 한 장면이었다. 숙야빈, 그가 한 명의 발가벗은 여인과 어우러져 숨이 넘어갈 듯 행위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놀라운 사실이란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숙야빈도 엄연한 사내일진대 아무리 마록의 눈치밥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 한들 여인을 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그의 상대인 여인의 정체였다. 절정에 이른 환희에 눈을 까뒤집으며 기성을 발하는 여인....... "하악!" 그녀는 마후인 화중화 항예였다. '아아! 난 믿을 수가 없어, 도무지......!' 상관영봉은 일시지간 머리가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여기까지 온 목적조차도 그녀는 잊고 있었다. 왜냐하면 작금의 사실이 너무도 큰 충격이었을 뿐더러 그녀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중화 항예는 공히 무림황제인 마록의 여인이다. 마후(魔后)라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신분도 얻었다. 게다가 마록은 힘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는 사내 중의 사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그 모든 것을 차지한 그녀가 이렇듯 불륜을 저지른단 말인가? '왜......?' 라는 강한 의문에 휩싸여 상관영봉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화중화 항예의 비릿한 음성이 들려 왔다. "흐음....... 거사는 착착 진행 되어가고 있어요. 그렇죠?" "그런 셈이오. 후후후......." 숙야빈은 정사의 여운을 즐기듯 항예의 젖가슴을 떡주무르듯 주물러 대며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후후... 그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천 명의 기재들이 만든 지옥십팔무간옥(地獄十八無間獄)에서만은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이오." 화중화 항예는 그의 거친 손놀림에 다시 자극을 받은 듯 나신을 꿈틀거리며 응수했다. "으으음... 좌우간 당신에게는 못당하겠군요. 그 동안 온갖 치욕을 무릅쓰면서도 재기(再起)의 순간을 위해 그토록 치밀한 안배를 갖추어 놓다니 말이에요. 장차의 천하무림은 결국 당신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으음......." 가슴에 놓여 있던 숙야빈의 손이 배언저리를 쓸며 더 아래로 파고 들자 항예는 말을 맺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숙야빈은 말을 이었다. "후후... 마록은 단지 힘만 센 한 마리의 맹수에 불과하오. 그나마 무간옥에 이르게 되면 우리에 갇힌 꼴이 되지." 그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음성이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손가락을 통해 전해져 오는 쾌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나, 숙야빈에게는 완벽한 계획들이 서 있소. 아주 서서히 나는 무황성을 접수해 갈 생각이오." 항예가 열기가 담긴 눈을 반짝 치뜨며 물었다. "설마 잊지는 않았겠죠? 그 때에는 약속한 바대로 중원의 남쪽을 내게 양보해야 돼요?" "물론이오. 생각 같아서는 그대까지도 내 수중에 두고 싶지만 그랬다간 마록처럼 될까봐 관두기로 했소." "호호호... 난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아요. 당신이 혹 내 휘하로 들어 온다면 몰라도요." 숙야빈은 짐짓 질겁을 했다. "그 무슨 끔찍한 농담을?" "그러니까 서로 공평하게 반반씩 똑같이 나누자는 것 아니에요? 호호호......." 재미있다는 듯 까르륵거리는 항예에게 그는 갑자기 심각한 안색이 되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약간의 문제가 생겼소." "무슨......?" 항예는 더 말하지 못했다. 숙야빈의 입술이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덮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숙야빈에게 발생한 문제란 그의 신체에서 일어난 현상인 듯 했다. 한 번 더 그녀를 안고자 용솟음을 치는....... 반면에 그 문제라면 화중화 항예도 이미 겪고 있는 터인지라 두 남녀가 뒤엉키는데 장애가 될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들은 즉시 불꽃 튀는 육박전(?)에 돌입해 갔다. "허억! 나는 지금 통감하고 있소. 천하의 마록이 어찌하여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 나는지를......." 숙야빈의 숨가쁜 음성에 항예는 속으로만 답했다. '너는 뭐 다를 줄 알고?' 외부로 표출된 것은 그녀의 자지러지는 신음성 뿐이었다. "하아아아......!" ③ 상관영봉. 그녀는 더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나 충격은 진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마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녀의 가슴은 무섭게 뛰었다. '아아! 정녕 너무도 무서운 음모다. 어떻게 저 두 사람이 연수하여 그렇게 끔찍한 일을 획책할 수가.......' 상관영봉은 이 순간 어떤 처신이 옳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도저히 그녀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나 그렇다고 이 일을 못본 척 지나치자니 양심이 허락치를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부르짖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이 곳에 왜 왔는지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되려 해결책도 금방 나왔다. '그래! 이 사실을 그 분께 알리면.......' 그 때부터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록에게 이 일이 알려지기만 하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물론 숙야빈도 죄를 물어 처단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상관영봉은 조급해졌다. 마록으로 보아서나 자신으로 보아서나 한시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곧 그녀는 그 곳을 빠져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는 흥분한 나머지 그만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독비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툭! '아차!' 상관영봉은 대경하여 그것을 회수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니, 도로 주운들 아무 소용도 없었으리라. 파앗--! "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래 쪽에서 누가 손을 썼는지 천정이 좌악 갈라져 버렸고, 그 바람에 그녀의 신형은 그대로 무력하게 침전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웃!" 놀란 그녀가 미처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이었다. 한 가닥 날카로운 교성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호호호홋......! 쥐 한 마리가 숨어 있었군." 상관영봉은 내심 절망적으로 읊조렸다. '화중화 항예!' 스스스....... 스산한 음풍(陰風)이 그녀에게로 밀려 들었다. '흑!' 상관영봉은 일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얼음 구덩이에라도 빠진 듯 온 몸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호호호호......!" 예의 교소성이 득의를 내포한 채 요란하게 울려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상관영봉은 눈 앞에 마주 선 화중화 항예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요사스럽게 웃어 대고 있는 여인이 당금 무황성의 마후인 항예였다. 그녀의 기색에서 수치감 따위는 눈꼽 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서 상관영봉은 또 다른 충격을 입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그러는 사이, 화중화 항예는 손가락을 펼쳤다. 상황과는 별개로 그녀는 강호상에서도 내로라 하는 절정의 고수다. 그것을 보자 상관영봉도 정신을 가다듬으며 만만치 않게 응수해 갔다. "매화농농(梅花濃濃)!" 파파파팟--! 검법으로 천하에 위명을 떨치던 금검가(金劍勢家)의 변화무쌍한 검식이 그녀에 의해 펼쳐졌다. 그녀의 수중에 들려 있던 독비가 수백 개의 검영(劍影)으로 화해 항예를 덮쳐 갔다. 그러나 검영이 항예의 벌거벗은 몸 가까이에 이르기도 전, 상관영봉은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떠야 했다. "이럴 수가!" 항예의 신형이 한 차례 흔들 한다 싶자 단번에 수십 명으로 불어나 시야를 어지럽혔던 것이다. "호호호홋......!" "호호......!" "호호호호......!" 그들 수십 명의 항예가 사방에서 한꺼번에 웃어 제껴 삽시에 장내를 기이한 메아리의 소용돌이로 휘감아 버렸다. 그에 따라 상관영봉의 눈이 맥없이 핑그르르 돌아갔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수많은 항예들이 동시에 부르짖었다. "쓰러져라!" "으음......!" 상관영봉의 입에서 급기야 고통에 찬 신음성이 토해져 나왔다. 전신을 통해 찰나적으로 천 개의 침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사이(邪異)한 무공에 당해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그녀의 육신도 수십 명의 항예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너지듯 쓰러졌다. "흐음! 보아하니 계집이던데?" 스스스....... 수십 개로 분리되었던 항예의 신형들이 합쳐져 원래대로 한 몸을 이루었다. 이어 그녀는 혼절해 있는 상관영봉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두건부터 벗겨 냈다. 그녀의 아미월 같은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이 계집은......!"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눈썹은 도로 내려 앉았다. 그녀의 눈은 벌써부터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디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나타났는지 숙야빈이 나섰다. "빨리 해 치우시오. 어차피 우리의 일을 알아 버린 이상 살려둘 수는 없지 않겠소?" 그 말에 항예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홋......! 아뇨, 내게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어떻게?" "숙야선생께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요. 죽이지 않고 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눈꼬리에 야릇한 웃음기를 매달았다. "한 대의 화살로 두 마리의 매를 잡자는 것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숙야빈이 의아해 하자 항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별 것도 아니에요. 지금쯤 영호위란 작자가 우리들의 통간(通姦)을 마록에게 보고했을 거예요." "뭐, 뭣?" "쯧! 그렇게 말해도 못알아 듣다니 당신의 두뇌가 뛰어나다는 것도 죄다 헛말이었군요?" "그, 그럼......?" "그래요, 마록이 눈에 쌍심지를 돋군 채 이 곳으로 열심히 달려 오고 있겠죠." "맙소사!" 숙야빈은 충격을 받고는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끼는 한편, 내심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어쩌면... 최후로 천하무림을 손에 넣게 될 자는 마록이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숙야빈에게는 그리 오래 고심할 시간이 없었다. 마록, 그 만만치 않은 적수가 이리로 오고 있다지 않는가?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무진 애를 쓰며 물었다. "내가 어찌 하면 좋겠소?" 화중화 항예는 언제 그와 뜨겁게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었냐 싶게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말이죠......." "하아아......!" 여인의 나신이 격렬하게 몸부림친다. 숙야빈. 그는 실로 정력이 대단한 사내인 것 같았다. 그가 완강하게 밀어부칠 때마다 여인은 두 손으로 허공을 마구 저었다. 어디 그 뿐인가? 끈적끈적한 교성이 여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아... 흐으윽......!" 여인의 목은 뒤로 한껏 젖혀져 있다. 그 상태에서도 그녀는 극에 달한 희열 탓인지 축축한 목구멍을 통해 간간이 가느다란 오열마저 흘려 내고 있었다. 이어 허공을 연신 움켜 쥐어 가던 여인의 손가락이 땀에 젖어 번들번들한 사내의 등으로 옮겨 가더니 그 곳에서 다시 백사(白蛇)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 순간, 여인은 마치 사내의 등판을 후벼 파내듯 할퀴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악!" 동시에 쾌락의 절정에 이른 여인은 사내의 정기를 모조리 뽑아 내려는 듯 무서운 흡입력으로 와락 끌어 당겼다. 그 바람에 엎어져 있는 사내의 어깨 너머로 아래 쪽에 깔려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동공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크게 확산되어 있는 여인의 얼굴, 그 얼굴의 주인은....... 상관영봉이었다. "그대는 나를 기만했다." 얼음장 같은 음성을 흘려 내며 마록은 경멸에 찬 시선으로 영호위를 내려다 보았다. "그... 그럴 리가......!" 마제갈 영호위는 사색이 되어 부르짖는 한편, 심중에서 치밀어 오르는 한 가닥 의혹 때문에 더욱 몸을 떨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는 되려 자신이 기만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즉 마록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떼어 내고자 뻔한 상황을 일부러 틀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의심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살벌하기 그지 없는 마록의 태도를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감히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마록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본좌는 그대에게 이미 한 번의 기회를 주었었다. 두 번째의 실수까지는 받아줄 아량이 없다." "주군......." 영호위는 전신이 뻣뻣하게 경직된 상태에서도 이 한 마디와 더불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것만이 그가 마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변명이자 충의(忠意)라는 듯. 그 광경을 보면서 마록이 생각해 낸 바는 꼭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간의 정리를 고려해서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츠츳! 마록의 수도(手刀)가 허공을 그었다 싶은 찰나, 마제갈 영호위의 목은 그대로 어깨를 떠나고 말았다. 한 소리 비명도 없었다. 그는 그렇듯 허망하게 죽어갔다. 마록의 말대로 정말 고통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리된 그의 머리통과 몸통에서 각기 시뻘건 선혈이 흘러 나와 소리없이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 스며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死後)의 일이었므로 생전의 마제갈 영호위와는 전혀 무관할지도 모른다. 그의 삶과 관련된 흔적은 오직 모로 누워 있는 그의 수급에만 남아 있다. 그 얼굴이 보여 주는 표정 말이다. 충심으로 간언했다가 오히려 화중화와 숙야빈의 역음모에 걸려 들어 한스럽게 죽어간 영호위는 채 눈을 감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오호라! 지난 날의 노력과 수고가 아깝도다. 우리 혈사해의 중흥(中興)은 당대에서 끝나고 말겠구나. 마록은 영호위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벌써부터 사자(死者)를 떠나 내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곳으로부터 한 명의 미녀가 일신에 눈부신 백의를 걸치고 마치 구원의 여신(女神)처럼 사뿐사뿐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후인 화중화 항예였다. "으음! 어찌 이런 일이......." 그녀는 방 안에 펼쳐져 있는 살풍경에 무거운 신음을 발하며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녀로서도 꽤 충격이라는 듯. 그러더니 그녀는 이내 마록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안면 가득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주군께서는 아무래도 오늘 밤 심기가 불편하시겠군요? 허락만 하신다면 천첩이 풀어 드리겠어요." 사내의 심중을 헤아릴 줄 아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인, 그녀가 선연한 자태로 걸어와 품에 안긴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하게 사향냄새가 풍겨 나오고....... 마록은 그 향기가 좋았다. 어쩌면 그녀가 본래 지니고 있는 농밀한 체향과 어우러져 더 좋은지도 몰랐다. 그가 되려 항예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로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 주겠소?"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강한 욕정(欲情)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④ 우우우웅--! 기이한 금속성이 공기의 파동을 일으켰다. 그저 쇳조각이 마찰되는 소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황금으로 된 의자가 회전하면서 낸 소리였으므로. 황금의자는 눈부신 금광을 발하며 정확히 좌로 다섯 번, 우로 아홉 번을 돌았다. 그그그긍--! 마침내 황금의자는 둔중한 음향을 울리며 뒤로 미끄러졌다. 바닥에 있던 입구(入口)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이 곳인가?" 마록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황금고는 이 아래에 있습니다." 지극히 정중하게 대답하는 이 인물은 숙야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있는 이 장소는 북경(北京)의 황금장원(黃金莊院)이었다. 대전에는 그들 말고도 또 한 명이 있었다. 화중화 항예. 마후인 그녀가 두 사람을 따라와 있었던 것이다. "속하가 안내하겠습니다." 숙야빈이 앞장 선 가운데 그들 삼 인은 드러나 있는 입구를 통해 안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거대한 지하궁전(地下宮殿). 그 곳은 넓이만도 육안으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 화려함 또한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바닥은 전부가 다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천정과 기둥에도 모두 금박을 입혀 놓아 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서는 마록조차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 "대단해! 예상을 초월하는군." 그의 나직한 음성에 이어 숙야빈이 입을 열었다. "그래 보이신다니 다행입니다. 과거 춘추시대의 한 왕의 무덤을 발굴하여 개조한 것이지요." "으음!" 마록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잠시 주위를 여기저기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약간은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실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자금성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숙야빈은 꽤 자신 있는 어투로 대답했다. 마록의 얼굴에 일시지간 놀라는 빛이 스쳤으나 그것은 금세 그 특유의 무거운 침묵 속에 파묻혀 버렸다. 곧 그들은 숙야빈이 이끄는 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동안 줄곧 마록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하나 같이 신기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벌써 다섯 개 째의 대전(大殿)을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에 그들은 화원 만도 무려 네 곳을 지나쳐야 했는데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기화요초들이 만발해 있는 드넓은 화원은 마록을 어지간히 놀라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인공(人工)의 연못도 두 곳이나 있었다. 그 수려함이 가히 선계(仙界)를 방불케 하는....... 한 마디로 이 지하의 장원은 하나의 거대한 왕국과 같았다. 아쉽다면 인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어 이 곳은 무덤 속 같은 적막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었다. 그들 삼 인의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그 고요함에 자못 신비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아홉 번째의 대전이었다. 거대한 흑오철문(黑烏鐵門)이 그들 앞에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숙야빈이 입을 열었다. "이 곳입니다, 성주." 흑오철문에는 손잡이인 듯한 둥그런 쇠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그것을 잡아 당겼다. 그르르릉......! 둔중한 음향을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마록은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질끈 감아 버렸다. 갑작스레 휘황찬란한 보광(寶光)이 시야를 가득 점해 오자 그로서도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석전 안. 그 곳에는 황금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개인이 언제 그 많은 것들을 끌어다 모았는지 이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다. 마록은 그것들을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후후... 영광이로군. 내 생애에 저런 황금의 산(山)을 구경하게 될 날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는 이 시점에 서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독히 가난하고 비참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또 그 이면에는 일종의 보상심리로써 그것들을 차지하고 싶은 욕구도 더욱 가중되었다. '군림천하(君臨天下) 하는데 있어서는 부(富)란 것도 힘에 못지 않은 요소이다.' 이것은 그가 근자에 이르러서야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깨닫게 된 진리(?)였다. 이어지는 숙야빈의 말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 왔다. "이것은 속하의 재산 중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숙야빈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하게 내뱉았다. "성주의 눈에 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동행자들을 이끌고 황금더미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느긋하게 걸어 갔다. 그 반면에 마록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생소하면서도 신비롭기 그지 없는 경험이었다. 더구나 한참을 지나자 황금의 산은 끝이 났는데 그 대신 대전의 사방에 널려 있는 갖가지의 진귀한 골동품과 보물들이 유혹이라도 하듯 마록의 눈길을 잡아 당겼다. 그 물건들은 하나 하나가 전부 값으로 따질 경우 어마어마한 재산 가치를 지닌 것들로 보였다. 특히 그 방면에 별로 식별안(識別眼)을 가지지 못한 마록으로서는 그저 멀거니 바라보며 감탄하는 밖에는 따로 더 할 일이 없었다. 그런 마록에게 숙야빈이 말했다. "사실 속하는 이것들에게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황금고의 진정한 가치는 천하 열 곳에 있는 금광의 위치와 발굴로가 적힌 황금경(黃金經)에 있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걸어 갔다. 그러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대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佛像)의 앞이었다. 사람 크기 만한 불상의 이마에는 붉은 색의 큼직한 보옥(寶玉)이 박혀 있었다. 숙야빈이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슬을 누르면 황금경이 나타납니다." 그는 돌아 서더니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성주께서 직접 누르십시오." "음, 그러지." 마록은 사양치 않고 예의 불상, 즉 환희불(歡喜佛)에 다가갔다. 그는 붉은 보옥을 향해 손을 가져가다가 말고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힐끗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의 뒤에는 숙야빈과 항예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 두 남녀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사뭇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숙야빈, 이것이 만일 함정이라면 그대는 나 하나를 끌어 들이기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지불한 것 같다." 숙야빈의 안색이 일변했다. 평소 달변(達辯)인 그의 입에서도 당황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 그 무슨 말씀을! 속하가 감히 어찌......!" "후후후......." 마록은 말을 대신하여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는 환희불의 이마에 박힌 붉은 구슬을 눌렀다. 우우우웅--! 음향과 더불어 환희불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서서히,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로 돌아가는 속도를 더하더니 종내에는 바닥으로 깊숙히 가라앉았다. 또한 그 곳에는 난데없는 황금탁이 솟아 올라와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하나의 상자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마록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숙야빈에게 물었다. "이것인가?" "네, 성주......." 숙야빈의 음성은 아직도 그다지 편치가 못했다. 마록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한편, 무심한 눈으로 상자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칠보로 장식된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상자를 잡더니 막바로 뚜껑을 열었다. 펑! 폭음과 함께 자색(紫色)의 연기가 삽시에 대전을 메웠다. 마록은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 순간적으로 호흡을 차단했다. 자색을 띈 연기는 독무(毒霧)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의 반응은 조용한 가운데서도 신속했다. 파츠츠츳--! 그는 어느 틈엔지 벌써 숙야빈이 서 있던 곳을 향해 혈사탄기(血死彈氣)를 발출해내고 있었다. 쾅! "웃!" 비명은 어이없게도 그 자신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의 신형이 찰나적으로 휘청했다. 철벽에라도 부딪친 듯 혈사탄기는 거꾸로 되돌아 오고 만 것이었다. "놈!" 마록은 격분하여 안력(眼力)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시각은 이내 자색 연기를 뚫고 대전의 전경(全景)을 투시할 수 있었다. 그는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이, 이런!" 대전의 풍경은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그것도 두터운 사방이 철벽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황금이며 보화들은 간 곳이 없고 꽉 막힌 공간이 그를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마록은 비로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마제갈 영호위의 말을 끝내 믿지 않은 반면 숙야빈이나 마후인 화중화 항예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호기심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일종의 도박을 해 보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는 확실히 도박에서는 패(敗)했다. 숙야빈의 득의만만한 음성이 그것을 입증해 주었다. "핫핫핫핫... 성주, 그 곳은 일명 지옥십팔무간옥의 첫번째 관문인 철마옥(鐵魔獄)이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시겠지만 그 벽은 그냥 쇳조각이 아니라 만년한철(萬年寒鐵)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께도 한 자가 넘소." 마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내 장담컨대 성주께서도 그 곳을 뚫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오. 설사 그 곳을 돌파한다 해도 그보다 더 무서운 두 번 째의 관문이 성주를 기다리고 있소." "으음......." 마록은 한 차례 낮게 신음을 흘렸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만이 어둠 속에서도 맹수의 그것인양 새파란 안광을 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숙야빈은 조롱을 그치지 않았다. "핫핫핫... 성주, 어디 한 번 도전을 시도해 보시오. 아마도 지옥십팔무간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진짜 지옥을 탈출하기 만큼이나 힘들 것이오." 그 말에 이어 몹시도 귀에 익은 음성이 전해져 왔다. "호호호... 미안해서 어쩌죠? 지금 상황에서는 내조(內助)를 해 드릴 수가 없군요. 아니, 고맙다고 해야 맞겠군요. 당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무척이나 즐거웠으니까요." 달콤하기 그지 없는 그 음성의 주인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화중화 항예였다. 정녕 뜻밖인 것은 마록의 기색이었다. 각오가 있어서인지 그는 그녀의 배신에도 이상하리만치 무감동했다. 실상 그가 이 순간 중요시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패배를 승리로 뒤바꾸는 승부수였다. 그는 언제든 패자(覇者)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대가 낳은 마중마(魔中魔) 마록이었으므로. 그는 내심 한 마디를 부르짖었을 뿐이다. '보라! 마제갈 영호위, 혈사해는 영원할 것이다.' 이를 필두로 그의 전신에서 핏빛을 띈 기류가 무섭게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마록은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군림천하도, 혈사해의 염원도, 그것을 위한 자신의 목숨도, 또 사랑도....... 무황성. 그 곳은 여전히 천하 마세의 집결지로써 건재했다. 여하한 변화도 일어난 바가 없었다. 굳이 있다면 무림황제 인 마록이 어딘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이후로 좀처럼 무황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천하가 무황성의 군림에 침묵하고 있는 지금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건 아니건 무림황제라는 인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고무상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배경 하에서 소리없이 가공할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줄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제25장 불사신(不死身), 그리고 난세지검(亂世之劍) ① 우우우웅......! 검(劍)이 운다. 그것도 검가에 놓인 채로 며칠 전부터 쉬지 않고 울어 대고 있었다. 부백검을 향한 용류옥의 안색이 급기야 차갑게 굳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그 동안 계속하여 힘을 배양해 왔으되 출정만은 자제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맞이해야 할 적(敵)이 중원 무림내에 있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백검이 운다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인가? 무황성의 횡포는 일로 극을 치닫고 있었다. 각처에 널린 십팔 개 분성의 만행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대로 부녀자건, 처녀건 가릴 것 없이 유린했으며 살인이나 방화, 또는 약탈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이로써 무림은 그 존속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으니 더 이상 방치한다는 것은 곧 무림의 종말을 의미했다. 설사 외침(外侵)을 받은들 이보다 더 못할 것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용류옥은 진즉부터 천명부의 군웅들로부터 열화와도 같은 재촉을 받곤 했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쓰러져 가는 무림동도들을 구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용류옥은 마침내 부백검을 잡았다. 우우우우웅......! 부백은 그의 손에 들려지자 더욱 힘차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용의 포효에 비한들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용류옥도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부백, 금후로는 네 검광(劍光)으로 세상을 구제하리라." 그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부백의 검신(劍身)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혈광을 발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피를 보아야만 제 빛을 되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용류옥은 부백검을 높이 치켜 들었다. "처단하리라! 무림정기를 파괴하고 천륜을 오염시키는 무리들이 횡행할진대 그 외에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그의 읊조림에 회답이라도 하듯 부백이 다시 울었다. 우우우웅......! ....... 불회도의 천명대전에서는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와아아아--!" 그것은 정의의 기치를 드높이고자 하는 외침이자 천명부에 속한 모든 무인들의 숙원이 담긴 절규이기도 했다. 천명부는 이렇게 강호를 향해 출정을 선언했다. 화중화 항예는 냉소했다.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그도 인간인 이상 무엇이든 먹어야 살텐데 음식은 커녕 물조차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오래 버텨낼 수 있다고 보나요?" 그녀는 귀찮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는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야빈은 굳어 있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사뭇 불안이 깃든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에게는 내 말이 어리석게 들릴지 몰라도 그는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자요." 항예는 손을 들어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아무리 힘을 지녔어도 그렇지 지옥십팔무간옥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에요." 항예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방법을 바꾸었다. 그녀는 숙야빈의 가슴에 어깨를 기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혈사해의 가신들을 각 지단과 분성으로 나누어 보냈으니 그 동안 우리는 계획했던 일들을 속히 진행시켜야 해요. 만일 그들이 의문을 갖게 되면 만사는 끝장이에요." 숙야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런데 이 판국에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죠? 당신은 일천 명의 혈사해 가신들을 어찌 처치할지나 연구하세요.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공으로써 그들을 꺾을 사람이 중원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에요. 아시겠어요?" "으음." 숙야빈은 짧게 탄식하더니 그녀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소만......?" "무엇을 말인가요?" 항예는 섬섬옥수로 사내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생긋 짓는 그녀의 웃음이 너무도 아름다워 숙야빈은 심금이 떨렸다. '요물......!' 그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대가 선택한 사람은 대체 누구요? 어차피 마록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지만......." 숙야빈은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항예의 손이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숙야선생, 당신은 할 필요없는 말을 하고 있군요. 왜,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나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고." "그건 경우가 좀 다르지 아니오?" 항예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다를 거 없어요. 소유되지 않는 사람에겐 늘상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까 같은 맥락인 셈이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내가 현재 당신이 제시한 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당신도 알겠지만 마록은 절대로 누구와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가질 위인이 아니죠. 나 또한 그 옆에서 인형 노릇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구요." 숙야빈의 안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화중화, 당신은......." "호호호... 마제갈 영호위 문제로 당신이 계속 이러시는 모양인데 그 점이라면 잊으세요. 나도 죽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은 이상 설마 하니 당신과 나의 정사 장면을 마록에게 공개했겠어요? 영호위에게 미행을 당할 때부터 벌써 복안을 세워 두었었죠.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어쨌든......." "또 뭐죠?" 배시시 웃는 항예를 향해 숙야빈은 낮게 읊조렸다. "당신은 무서운 여인이오." 아울러 그는 내심 이와 같이 말했다. '항예, 너는 아직도 내게 숨기는 것이 많다.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네 배후에는 또 하나의 엄청난 세력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항예가 보석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렇게 계속 심각해 하고만 있을 건가요?" "아... 아니, 되었소." 숙야빈은 정말로 마음을 돌렸다. '으음, 자중해야지 지금은 이도저도 때가 아니다. 내게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반 년만, 반 년만 주어진다면 나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항예는 불쑥 그를 불렀다. "숙야선생." "흐음?" "우리 이럴 게 아니라 황금고에 한 번 가 볼까요? 꺼림칙할 땐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 최고잖아요?"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그러고 보니 숙야선생의 걱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요. 뭣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해야죠. 초장부터 그리 침울하시니 어디 제가 기운이 나야 말이죠?" 숙야빈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말이 없었다. 그는 항예의 저의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옳은 말이오. 즉시 가 봅시다." 황금장원의 지하대전(地下大殿). 그 곳에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적어도 마후라는 화중화 항예에게는. "이, 이럴 수가......!" 웬간해서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그녀도 이번 만큼은 넋을 잃었다. 숙야빈이 곁에서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끙! 이것 보시오, 내 뭐랬소?" 항예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안그렇겠는가? 그토록 화려하고 웅장했던 지하대전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부숴져 폐허(廢墟)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천하에 마록 외엔 없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고집을 세우던 것과는 정반대로 마록이 그 곳에서 살아났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숙야빈은 내심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우우! 불안해 하면서도 일편으로는 설마 했건만 그는 무간옥을 탈출하고 말았구나.' 그는 마록에 대해 새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했다시피 지옥무간옥은 천 명에 달하는 기관학의 기재들이 머리를 짜 만든 죽음의 뇌옥으로써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그 무간옥조차도 마록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 숙야빈으로서는 정말로 항복을 선언해야할 판국이었다. '졌다! 깨끗이.......' 그가 이렇듯 허탈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핫핫핫핫......!" 충격처럼 한 줄기 광소성이 그의 귀로 들려 왔다. '그다!' 숙야빈은 머리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무사하기까지.......' 그는 웃음소리에서 대번에 상대방이 예전과 똑같은 기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곁눈으로 보니 화중화 항예의 신색도 말이 아니었다. 교활하기로 치자면 오히려 숙야빈을 능가하던 그녀도 대책이 없는지 얼굴이 백지장이 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핫핫핫......! 내 그대들이 올 줄 알고 일부러 이 곳에서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노라." 마록의 음성은 방금 전에 비해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들려왔다. 아니, 숙야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몹시도 휘청거렸는데 그것은 그 음성에 실린 마후강기(魔吼 氣)에 고막이 울고 기혈이 역류했기 때문이었다. "성주......." ② 휘리리링--! 일진의 마풍(魔風)이 부는가 싶더니 마록이 마침내 현신(現身)했다. 그는 처참할 정도로 전신이 엉망진창이었다. 의복은 걸레쪽이 된 채 검게 변색해 버린 핏자국들과 더불어 피부에 엉그러 붙어 있었으며 봉두난발로 화한 머리칼은 미려했던 그의 얼굴을 덮개인 양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숙야빈의 짐작대로 그 기도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야말로 태산거악(泰山巨嶽)과 마주 선 기분이랄까? 마록이 입을 열었다. "숙야빈, 그대는 본좌에 대한 예의도 잊었는가?" "으으......." 숙야빈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 봐야 그가 피할 수 있는 길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정녕 묘한 것은 그런 그를 응시하고 있는 항예의 표정이었다. 분명 그와 똑같은 두려움을 밑바닥에 깔고 있으되 그녀는 숙야빈에 대해 호의적이 아니었다. 뭐랄까? 한 때 동지(同志)였었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듯 혐오와 경멸의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튼 그 판단은 마록의 몫이었고 그의 입에서는 얼음장보다도 더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후후후... 그대들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백골이 되어 여기 누워 있어야 하겠지." 마록은 말과 함께 눈길을 항예에게로 돌렸다. 항예는 봉두난발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의 섬뜩한 안광을 대하자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주... 주군......." 마록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가?" 항예는 입술을 깨물더니 겨우 덧붙여 말했다. "그럼 호칭을 바꾸겠어요. 불사신(不死身)......." 쫘악! "악!" 한 소리 명쾌한 음향이 울림과 동시에 항예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마록에게 뺨을 세차게 얻어 맞은 것이었다. 그녀는 삼 장 밖으로 날아가 처박히더니 그 곳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록이 그녀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천박한 것! 내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는 두고두고 내 곁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는 항예에게 내릴 징계에 관해서는 구상을 끝낸 상태였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이리라. 마록은 생애 최초로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런 만큼 거의 절대성까지도 띄었던 그 마음 자체는 지금도 변함이 없으되, 형태를 달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배신의 상처는 마록의 내부에서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가 지속되는 한 항예는 그가 쳐놓은 애증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화중화 항예의 계산은 여기서 처음으로 빗나가고 있었다. 마록이 일반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 쯤이야 그녀도 진즉 알고 있었겠지만 그의 집요함과 잔인성은 금후로 신랄하게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 한편. 숙야빈은 그 사이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 살아날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다. 여하한 상황일지라도 삶의 포기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좌측으로 십 장 가량 떨어진 지점에는 하나의 연못이 있었다. 그의 눈은 아까부터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그 연못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저 곳까지만 가면......!' 연못은 원래부터 그 밑바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이 고여 있고 그럴 듯 하게 위장이 되어 연못으로 보일 뿐 실은 외부로 연결된 비밀통로였다. 매사에 치밀한 숙야빈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어떻게든 연못까지만 가면 마록의 손에서 완벽하게 도망을 칠 수가 있었다.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안배가 그의 추적을 지연시켜 줄 것이므로. 문제는 그 이전 상황이었다. 당장 마록의 코 앞에 있으면서 무슨 수로 그를 피한단 말인가? 그것은 십 장이 아니라 단 한 자라도 기적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숙야빈은 체념하지 않고 조금씩 몸을 이동해 갔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발버둥이나마 쳐 보자는 심산이었다. 마록이 물었다. "숙야빈, 그대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그것은 숙야빈이 연못을 향해 약 석자 쯤 다가갔을 때였다. 그는 내심 일루의 희망을 느끼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주, 나는 당신에게 졌소. 과연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였소. 물론 운도 그만치 따라 주었겠고." 마록은 차갑게 응수했다. "운? 그건 그대에게나 해당되는 말일텐데. 후후... 그대에게는 운이 없었다. 나와 동시대에 태어났으니 말이다." 숙야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외다." "그럼 무슨 의미를 달아 두었지?" "솔직히 말하리다. 내게 만일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나는 당신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오." "훗훗...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나를 두려워 하고 있다는 뜻도 되겠군." "으음!" 숙야빈은 수치감 때문인지 얼굴을 은은히 붉혔다. "마음껏 비웃으시오. 하지만 더도 말고 내게 반 년 정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당신을 능히 이길 수 있소." "핫핫핫핫핫......!" 마록은 가소롭다는 듯 앙천광소 했다. 이어 그는 웃음을 그치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격장지계는 통하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은 그대의 간계나 충동질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이 종내 살기를 드러냈다. "이 무가치한 시간 낭비도 끝이다. 이제 그대의 교활함에 내 직접 종지부를 찍어 주겠다." 말을 마치자 마록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때에 숙야빈은 자신의 위치를 연못에서 약 오 장 정도의 거리로 좁히는데 성공했다. 그는 말을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몸을 옮겨 갔던 것이다. '어떤 수단을 쓰던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숙야빈은 마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번에는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정녕 안타까운 일이외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내 재산도 역시 아무 곳에도 쓰이지 못하고 유실될테니 말이오." 마록은 그 부분에서 되려 더 노기를 드러냈다. "그대는 본좌를 능멸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숙야빈을 향해 그는 분노와 더불어 약간의 자조가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놈! 이 곳에 가득 쌓여 있던 황금보옥은 모두 가짜였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일종의 자격지심이라면 맞았다. 출신이 비천한만치 보물의 진가(眞假)를 한 눈에 구별하지 못했던 그는 어쩌면 자신에 대해서 더 노했는지도 모른다. 숙야빈은 상대의 심중을 알아 차리고는 씨익 웃었다. "성주, 그 일이 그렇게 해석되었다면 내 사과하리다. 그러나 내 재산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것은 모두 사실이오." 마록은 숙야빈이 움직임에 따라 어느 덧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위치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기 보다는 거의 초절정고수로서의 본능인 듯 했다. '놈! 과연 무공 방면에서만은 달인(達人)이로구나.' 숙야빈은 전신에 비지땀이 솟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천하 열 곳에 있다는 황금광산은 거짓이었소만 내 재산이 황궁을 능가하는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오." 마록은 냉소했다.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라면 그만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숙야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알고 있소.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연장시킬 수 없다는 정도는 말이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방금 전에도 말했듯 나는 막대한 재화가 나와 함께 영원히 땅 속에 묻히는 것은 원하지 않소." 마록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안되었다만 나에게는 황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번 일을 기화로 나는 힘이야말로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신념을 더욱 공고히 다졌으며 쓸데없는 탐욕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그의 전신에 붉은 기운이 어리는 것을 보게 되자 숙야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잠깐!" 황망히 부르짖은 숙야빈에게 마록은 음산하게 물었다. "유언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숙야빈은 잠깐의 그 짬을 빌어 자신의 현 위치와 연못과의 거리를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우우! 신형을 날리기만 하면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그렇지만 수면에 닿기도 전에 나는 저 놈의 장력에 의해 가루가 될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연못과 불과 삼 장여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정도면 경공이 없는 그도 한 번 도약에 충분히 다다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마록의 무공이라는 최대의 장애가 없을 시에 말이다. 그가 일단 그 불가사의한 무공을 펼쳤다 하면 숙야빈으로서는 살아날 희망이란 전무(全無) 했다. "성주, 나는 결심했소." "무엇을?" 마록이 멈칫 하는 틈을 타 숙야빈은 급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죽을 몸이 황금은 가지고 있어 무엇을 하겠소? 저승에 가면 쓸모도 없을진저, 차라리 성주에게 드리겠소." 마록은 비웃음을 흘렸다. "조건도 없이 말인가?" "죽는 마당에 조건은 무슨? 아, 한 가지 있기는 있소." "후후... 어디 말이나 해 보라." "가능하다면 내 시신을 온전하게 거두어 주시오." 마록은 입술 꼬리를 기묘하게 말아 올렸다. "그대의 말이 진심이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후후... 시신의 보존은 물론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을 만들어 줄 수도 있지." "고맙소, 성주." 숙야빈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한편, 눈으로는 연못을 노려 보았다. '이제 이 장여......!' 그는 그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내 전 재산의 목록들은......." 동시에 그는 눈알을 히뜩 굴려 자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마록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내 머리 속에 있소!" 슈욱! 숙야빈은 기합성을 대신한 듯한 그 외침과 함께 마침내 사력을 다해 신형을 뽑아 올렸다. ③ 마록의 눈썹이 꿈틀 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후후... 유명혈륜참(幽冥血輪斬)!" 그의 쌍수가 펼쳐졌다. 파파팟! 시뻘건 혈륜강기(血輪 氣)가 그의 장심에서 발출되었다. 위이이잉--! 두 갈래로 쏘아져 나간 혈륜강기는 막 연못에 떨어지려는 숙야빈의 가슴과 등으로 각각 파고 들었다. '죽음......?' 숙야빈의 얼굴에 극도의 공포가 떠올랐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는 끝내 마록의 공격을 피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꽈릉! "크아악!" 폭음과 함께 처절무비한 비명이 일었다. 동시에 자욱한 피보라가 수면에 촤악 퍼지더니 숙야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집어 삼키고 말았다. 풍덩! 연못물은 핏물이 번져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화해 버렸다. 이로써 일세의 간웅(奸雄)이었던 숙야빈의 자취는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연못 속에 한 번 가라앉게 되자 다시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마록은 그 광경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 보았다. 그런 연후, 그는 빙긋 웃었다. 그것은 찰나적이되 섬뜩하리만치 사이로운 웃음이었다. 이어 그는 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화중화 항예가 있었다. 그녀는 어느 결인지 깨어나 있었으며 그의 눈빛을 받자 가늘게 교구를 떨었다. 마록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감동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항예." "주군......." 항예는 몸을 떨었으나 경황 중에도 최소한 마록에게 자신을 위해할 의사가 없다는 것만은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저, 저는......." 그녀가 뭐라 말하려 하자 마록이 가로채 버렸다. "성중(城中)의 일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군. 후후... 하지만 내가 없어도 그대가 대행 했을테니 걱정은 되지 않소." 그 말에 항예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한참이 지나자 용기를 낸 듯 물었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나요?" 마록은 손을 당겨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말이란 때에 따라서는 무용(無用)한 것이지. 후후... 특히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말이오. 그렇지 않소?" '맙소사! 애정......?' 항예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마록은 굳어 있는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도 머릿 속이 복잡하게 뒤엉켜 더 이상 아무 것도 계산하지 못했다. 항예는 내심 이 한 마디만을 부르짖었다. '끔찍해!' 그녀는 자신을 수용하고 있는 마록의 넓고 완강한 가슴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쩌적! 우르르르-- 푸르른 섬광이 대륙을 가른다. 팔월의 기후는 실로 무더웠다. 그래서였을까? 무더위를 씻어 버리려는 듯 비를 예고하는 먹구름이 몰리더니 그 전초전으로써 뇌성벽력을 내려 보내고 있다. 비가 쏟아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덕분에 대지는 한 동안 뭉클뭉클 김을 피워 올렸다. 쏴아아아--! 도무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폭우(暴雨)는 이 곳에도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호북(湖北)의 진무현(陣武縣)이다. 마애령(摩崖嶺)의 기슭에는 한 채의 웅장한 보(堡)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른바 호북무림을 암흑으로 만든 마의 집결지, 무황성의 호북분성(湖北分城)이었다. 분성의 성주는 유명마제(幽冥魔帝) 서문교였다. 그는 과거 군마성에서 서열 삼위였던 자로써 성품이 잔혹하고 악랄하여 일명 호북의 사신(死神)으로도 불리운 바 있었다. 그런즉 타고난 성품이 어디로 가겠는가? 근자에 이르러서는 소녀채음보양술(素女採淫補陽術)에 맛을 들인 나머지 죄없는 소녀들을 무수히 희생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소녀들의 순음지정(純陰之精)을 흡수하여 공력을 높이는 대법으로 거기에 응하는 소녀는 죽는다. 이로 인해 그에게 끌려와 죽어간 소녀는 부지기수였으며 그 근역에서 소녀라고는 거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서문교의 죄행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호북무림에서 그를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르르르-- 콰콰쾅! 성루에 한 차례 벼락이 떨어졌다.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자연현상에 대한 경외감 내지는 두려움이 유발되는 순간이다. 이것은 폭우 속에서 성곽을 경비해야 하는 초병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그들은 웬지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자 각기 한 마디씩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신세 참 처량하군." "누가 아니래나? 이런 날은 그저 계집이나 끼고 뜨끈뜨끈한 방에서 드러누워 있는 것이 상책인데." 성루를 지키는 두 명의 마도 고수들은 그런 식으로 대자연 의 무서움 앞에서 왜소해지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고 체계가 단순한 그들에게는 이런 날 하필 보초근무에 걸린 것이 인생 전반에 걸친 가장 큰 불운이었으므로. 그러면서도 그들은 의무감을 떨치지 못해 폭우가 쏟아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전방을 열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호소하기 위해 땅바닥에 침을 탁 뱉기는 했지만. "쳇! 공연한 짓이야. 이렇게 비가 장대 같이 쏟아지고 있으니 뭔 일이 일어날 게 있어?"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이내 입증되었다. 이죽거리던 초병은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기......!" 번쩍이는 섬광이 사위를 밝히는 그 짧은 찰나에 그는 마애령으로 접어드는 능선에서 한 점의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해낸 것이었다. "이봐, 육호! 저기를 좀 봐." 육호라고 불리운 자는 하품을 했다. "뭘 보라는 게야?" 그 때는 이미 폭우가 다시 전면을 가려버린 후였다. "방금 전에 저기서 무엇인가 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 육호는 피식 웃었다. "자네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시력도 좋으이. 보이긴 무엇이 보여? 크크... 설마 누가 본성을 공격하려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졸지에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자 흑기단(黑旗壇) 소속의 오호는 하릴 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까지야 내가 어찌....... 글쎄, 그럼 내가 잠깐 헛것을 보았나?" 그가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던 그 때였다. 꽈다당--! 성루에 다시금 벼락이 무섭게 내리쳤다. 더구나 이번 것은 아까에 비해 훨씬 더 강도가 높았다. 오호는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아 옷깃을 추스렸다. "염병할! 무슨 놈의 날씨가 이 모양이람?" 바로 그 순간, 폭우를 가르며 빛살처럼 성루를 날아 넘는 한 가닥 인영이 있었다. 그리고 폭우 중이라 오호와 육호는 끝내 그의 존재를 알아 차리지 못했다. 보중(堡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각. 그 곳의 사층이다. 한 방에서 언제부터인가 계속하여 기이한 음향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아흐윽......." 흐느낌과도 같은 그 소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토해내는 소녀의 신음성이었다. 방 안. 실로 해괴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널찍한 침상 위에 한 소녀가 발가벗은 채 엎드려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성은 그녀에게서 비롯된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있는 그녀의 뒤로 가슴에 털이 수북하게 나 있는 한 중년인이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거친 율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마상(馬上)에 올라 앉아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듯 소녀의 머리채를 양손에 나누어 움켜 쥐고는 마구 당기며 몰아가는 형세를 연출하고 있었다. 정녕 기이한 것은 그 상태에서 중년인의 하반신이 줄곧 짙은 홍무(紅霧)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녀는 비명이라도 내지를 듯 눈을 까뒤집은 상태에서 입을 딱딱 벌리고 있었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이라곤 예의 기진한 신음성일 따름이었다. 중년인의 행위에 따라 그녀의 육신은 이미 정기가 고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섬약한 피부에서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섭게 탄력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극악무비한 마의 대법에 의해 그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이 대법을 좀 더 정확한 용어로 표현한다면 일명 소녀취음흡정술(素女取陰吸精術)이라고 한다. 그 시술자는 공력이 증진되는 것은 물론 죽는 날까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성(人性)이 무시되었다 하여 오래 전부터 마도에서조차 금기로 삼는 대법이었다. ④ "흐흐흐......." 마침내 중년인은 볼 일을 마친 듯 괴소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반면에 소녀는 푹 퍼져 엎드린 채 잠잠했다. 기어이 죽어버린 것이다. 처참했다. 다 자라지도 못한 소녀의 몸은 마치 노인의 그것인 양 전체적으로 쭈글쭈글해져 있을 뿐더러 그녀의 하복부 아래 쪽으로는 침상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놓고도 중년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소녀에게는 일별도 고하지 않았다. 옷을 주워 입는 동안에도 그의 입에서 떠도는 것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이 사악한 중년인이 유명마제 서문교(西門交)였다. 그에게서 가책 따위를 찾아내는 일이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흐흐흐... 앞으로 세 번만 더 취하면 노부는 영생불사(永生不死)할 수 있다." 실로 인간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인물, 그런 서문교를 위해 창 밖에서 한 가닥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포기해라. 그 전에 너는 지옥으로 가게 될 테니까." 서문교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웬 놈이냐?" 꽈르릉--! 흥이 깨져 버린 그는 대로하여 즉시 일수(一手)를 내뻗었고 그 바람에 창문이 대번에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 간에 맹렬히 분투(?)해 온 탓인지 그의 장력은 가공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쩌적--! 우중의 하늘에서 한 줄기 섬광이 작렬했다. 덕분에 시퍼런 광채가 일시지간 방 안을 휩쓸 듯 가득 메웠다. "헉!" 서문교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부릅떠졌다. 섬뜩한 푸른 빛을 통해 한 인물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 자는 일신에 백삼을 걸친 한 청년이었다. 그가 환상처럼 허공을 밟으며 부서진 창문을 지나쳐 오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가운데 아주 천천히, 수중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 내고 있었다. "부백, 너에게 첫 번째 선물을 주겠다." 용류옥(龍柳玉)이었다. 그가 부백검의 검명(劍鳴)을 달래기 위해 출현했다. 즉 그에게는 부백의 갈증을 식혀 줄 악인의 피가 필요했었고 그 첫 번째 대상으로 유명마제 서문교가 선택된 것이다. "우우......." 서문교는 애초의 기세와는 달리 신음을 흘렸다. 웬지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아 꼼짝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내심 당혹을 금치 못했다. 서문교로 말하자면 당금 마도에서 손가락을 꼽는 고수이다. 그런 그가 눈 앞에 있는 청년의 기도에 압도 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전혀 그답지 않은 현상이었다. 그가 소위 일류고수다운 면모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폭갈했다. "뒈져랏--!" 위이잉--! 그를 도로 부추켜 세운 것은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한데 대한 분노였다. 따라서 전력을 다한 바, 그의 쌍장이 대번에 시커먼 묵기류(墨氣流)를 발출해 냈다. 그 기세란 실로 보기 드문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용류옥은 냉소했다. "자! 부백, 네 차례다." 그의 낮고도 차가운 음성을 알아 듣고는 검이 울었다. 우우우웅--! 이 때, 한 가닥의 뇌전이 또 한 차례 전각을 강타했다. 쩌적--! 이와 더불어 놀라운 사태가 발생했다. 천신(天神)이 마침내 노했는지 전각이 그만 불덩이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이다. 화르르륵--! 막 타오르기 시작한 화염을 가르며 한 줄기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악--!" 듣는 이의 고막을 찢을 듯한 그 음향은 유명마제 서문교의 몸이 정수리로부터 서서히 두 조각으로 분리되면서 토해낸 최후의 소리였다. 촤아악--! 피분수가 역겨운 비린내와 함께 사위에 끼얹어졌다. 정확하게 양단된 서문교의 몸뚱이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쓰러지면서 뒤늦게야 핏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으음!" 용류옥의 입에서 딱히 신음이라고도, 탄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서문교의 죽음이 애석해서가 아니라 수중에 들려진 부백검이 이전과는 또다른 무서운 진동파를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피를 맛본 부백검은 바야흐로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전설이 이르던 바대로 악의 일각을 멸하자 검광(劍光)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전각이 벼락에 맞아 화염에 휩싸이던 그 시각, 무림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사방에서 분노와 의기에 찬 함성들이 울려 퍼지더니 폭우를 뚫고 보의 사방에서 무수한 인영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 인영들은 지면에 내려 서기도 전에 벌써 막강한 대공세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막아라, 적이다!" "크으악--!" 가공할 혈풍(血風)이 보내를 휩쓸어 가고 있었다. 살륙(殺戮)의 밤. 팔월의 그 밤을 피와 폭풍, 그리고 연이은 뇌전이 심판의 겁(劫)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명(天命)의 돌풍이 오염되고 타락한 그 곳을 철저히 쓸어내고 있었다. 쿠쿠쿠쿠....... 그 밤에 벌어진 역사는 한 마디로 지옥의 축제였다. 천명부의 전사(戰士)들이 무림정기의 수호를 소리 높이 부르짖으며 힘을 합해 무황성의 호북분성을 피로 씻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 곳은 불과 하룻 밤 사이에 초토화 되고 말았다. 마(魔)를 신봉하던 주구들은 폭우에도 가라앉지 않는 불바다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종내 허리가 끊어지고, 머리가 날아가는 등 모조리 처단되었다. 암흑무림에도 드디어 한 가닥 서광이 비치려는지......? 쏴아아아--! 빗줄기는 허공에 무수한 사선을 그으며 세차게 대지를 때리고 있었다. 그러한 폭우 속에서도 그는 멍하니 선 채 천공(天空)을 응시하고 있었다. 용류옥이었다. 그의 발치에는 난세평정의 업을 그와 나누어 짊어지고 있는 부백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신령스러운 검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다만 땅에 박힌 채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다. 용류옥 역시도 말이 없었다. 그의 전신을 뒤덮었던 핏자국이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의해 점차 쓸려 내려가고 있다. '후후... 격전을 치른 뒤의 허탈감이란 이런 것일까?' 그는 서늘하도록 텅 비어버린 가슴을 그렇게 말했다. 태어난 이후로 그는 가장 많은 살인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심중에서 무섭게 소용돌이 치던 분노가 어느 덧 짙은 허무와 어우러지자 그는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쏴아-- 쏴아아--! 거센 빗소리만이 그의 공허한 가슴에 깃들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무엇이든 채워넣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 폭우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가운데 밤이 지나고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걷혀가기 시작했다. 용류옥. 그가 줄곧 서 있던 곳은 무황성의 호북분성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이었다. 밤과 함께 성보는 스러져 갔고 그의 눈 앞에는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잿더미와 함께 시신들이 나뒹구는 그 곳은 그저 하나의 귀역(鬼域)일 뿐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용류옥의 시선은 언제부터인가 무서우리만큼 차갑고 무심해져 있었다. 그가 가진 따스한 인간미도 악업(惡業)의 종말을 향해서는 일점의 연민인들 허용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뒤로는 이십팔 명의 청년들이 시립해 있었다. 저마다의 가슴에 새겨진 천(天)이라는 글자는 그들의 상징이었다. 천풍이십팔숙(天風二十八宿). 용류옥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기량을 닦은 그들은 위세가 실로 가공지경이었다. 지난 밤, 그들이 펼쳐낸 천풍수라파황대진(天風修羅破荒大陣)이 그 사실을 입증해 준 바 있다. 진세와 맞닥뜨리자 무황성의 마도들은 거개가 맥도 못추고 쓰러져 갔으니 이들 천풍이십팔숙을 일컬어 보는 사람들마다 의(義)의 선봉장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용류옥은 그들의 위호 가운데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부백, 네가 본연의 광휘를 완전하게 되찾는 날까지 피의 장정(長征)은 계속되리라." 스윽--! 그는 지면에서 부백검을 뽑아내 검신을 빗물로 씻었다. 한 때 빛을 발했던 부백의 검신은 어느 틈엔지 도로 검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일명 난세(亂世)의 검이라던 부백은 용류옥의 손에서 다시금 피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스슷! 폭우를 뚫고 그의 신형이 날아 올랐다. 그 뒤를 따라 천풍이십팔숙도 한 덩이 구름이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파아아아-- 일로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의기에 찬 이 젊은 영웅들을 뒤에서 배웅하는 것이 있었다. "와아아아--!" 그것은 마애령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천명부 군웅들의 함성이었다. 첫 번째로 거둔 승리를 환호하는....... 제26장 지옥염왕(地獄閻王) ① 구월이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마침내 식었다. 그러나 대혈겁을 부르는 혈사풍(血死風)은 서늘한 대지 위에서 나날이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무림 전역에서 아수라도(阿修羅道)가 펼쳐지고 있다. 무황성(武皇城)과 천명부(天命府). 그들이 벌이는 피의 대제전은 무림역사의 판도를 서서히 뒤바꾸어 가고 있었다. 천하일통(天下一統)을 이루었던 무황성도 천명부의 출현으로 인해 무너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구주(九州)의 군웅들이 가세하여 함께 검을 뽑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일찌기 그들은 무황성이 선포한 마의 율법에 따를 수가 없어 몸을 숨긴 바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를 만나게 되자 자존심과 명예의 회복은 물론 무림의기를 드높이기 위해 자청하여 나섰다. 그들은 또한 주저하지 않고 속속 천명부에 입부(入府)했다. 그것은 뭉쳐야만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진리를 그 동안의 칩거를 통해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로 인해 무림의 가을은 어느 지역이건 전례없이 스산하고 살벌했다. 청명한 하늘이 무색할 지경으로 추풍(秋風)에는 여지없이 역한 피비린내가 실려 있었다. 그리하여 천명부의 대장정이 삼개월 째로 접어 들었을 때, 무황성은 십팔 개의 분성(分城) 중 절반 가량을 잃었다. 대륙을 주름잡는 전운(戰運)이 그들의 발호를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록. 그는 아름답다. 더구나 마력에 가까웠던 그 본연의 아름다움에 제왕의 경륜이라는 치장까지 곁들여지니 가까이서 보고 있노라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다. 높다란 상단에 백호피(白虎皮)를 씌운 태사의를 놓고 그가 앉아 있었다. 이 시대의 패자(覇者)인 그는 일신에 곤룡포를 입고 머리에는 황금으로 주조된 관을 쓰고 있었다. 무림황제. 그가 스스로 붙였던 이 칭호는 이제 완전한 그의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그에게 너무 잘 어울렸으므로. 이는 화중화 항예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마록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곁에 다소곳이 서 있었는데 예전에 비해 기세가 완연히 꺾여 있는 상태였다. 그녀 특유의 뇌쇄적인 미모 위에는 어두운 그늘이 한 겹 씌워져 있었다.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녀의 영롱한 눈동자에서도 어렵지 않게 불안과 초조를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정녕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정복자와 정복 당한 자, 이 두 사람이 서로 자리바꿈을 했으니 말이다. 마록은 태사의에서 아래 쪽을 굽어 보고 있었다. 그 예리한 시선이 멎어 있는 위치에는 사황(邪皇) 냉전령이 시립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여러 장의 밀신(密信)을 들고는 자못 초조감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성주, 어제부로 본성의 십팔 개 분성 중 십 개 째의 분성이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본성에 반기를 드는 무리들은 중원 전역에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며 그것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 말에 잠잠하던 마록의 눈이 일순 번쩍하고 섬광을 발했다. 그 눈빛을 접하자 사황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으음, 무서운 눈빛이다. 늘 그랬지만.......' 사황 냉전령. 과거 마중제일인(魔中第一人)으로 불리웠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전 생애를 통해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해마지 않았던 인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무림왕(武林王) 용화천이 바로 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직위상 용화천을 가까이 대면하면서도 마록에게서처럼 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마록의 앞에서 위축되는 자신을 실감하며 절망적인 기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록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단 말인가?" "네......?" "사황, 그대는 마치 본 무황성이 지난 날에 있은 대정성의 전철을 밟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서, 설마 그렇게 되기야 할까마는......." 마록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호오! 갸륵하군. 그래도 아직까지 본성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단 말이지?" 사황은 웬지 조롱을 당하는 것 같아 입술을 질겅 씹었다. "그러나...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후후후......." 마록은 기소를 흘리더니 짧게 잘라 말했다. "내버려 두라." "아......?" 사황은 일시지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황당하여 그는 혹시 자신이 잘못 알아 들은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마록이 그를 위해 부언했다. "후후... 그 동안은 지나치게 평화로왔다. 과연 본좌가 무림을 일통시켰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사황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강한 것만을 좋아한다. 강자가 없는 무림이란 그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광오함도 그만하면 초절정급이련만 마록은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이제야 무림은 무림다와지고 있다." 그를 응시하고 있는 사황의 표정이 실로 볼만 했다. 말 그대로 얼이 빠졌다고나 할까? "후후... 더 커야 한다. 나 마록에게 대항할 자라면 최소한 지금보다 두 배는 더 큰 인물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근에 보이고 있는 마록의 성향이었다. 예전에도 그렇기는 했지만 중도에 무엇인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듯 더욱 더 절대성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풀어져 있던 사황의 안면에 일순 경련이 일었다. "성주! 아니될 말씀입니다. 그런 식으로 방치해 두었다간 우리 측의 희생이 너무 큽니다." 그가 갑작스레 분연히 나선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것은 무황성의 분성에 소속된 인원의 대부분이 과거 그가 거느리고 있던 군마성의 고수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록의 대답은 비정했다. "희생이라고? 후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에 쓰러질 약골(弱骨)들이라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주!"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강한 자만을 좋아한다. 모름지기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무림의 생리일진저, 나 마록의 법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아! 이럴 수가.......' 사황은 흉중의 탄식을 차마 입 밖으로 쏟아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그것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성주, 당신은 자만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갈수록 어리석어지고 있을 뿐이오. 강한 것은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오. 그리고 당신에게도 언제고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오.' 마록은 웃었다. "후후후......." 지상에서 가장 패도적인 인물, 그에게는 두려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휘이이잉--! 계절은 또 바뀌어 겨울이 되었다. 대륙의 북쪽, 즉 북천(北天)으로부터 뼈를 에일 듯한 한풍이 밀려 왔다. 북풍에 실려 온 흰 눈이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회오리를 이루며 중원무림의 전역을 휩쓸어 갔다. 십일월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북으로부터 한 사나이가 복수지검(復讐之劍)을 안은 채 장가구(張家口)를 넘어 중원의 대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전신이 비쩍 말라 있었다. 아니, 말라도 너무 말라 마치 육탈(肉脫)을 끝마친 한 구의 시신이 되살아 나서 겨우 숨만을 내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에게서는 만물을 그대로 질식시켜 버릴 듯한 살기가 풍겼다. 뿐만 아니라 움푹 꺼진 그의 눈에서는 소름끼치는 푸른 인광(燐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른바 사안(死眼). 그의 눈은 정말로 삶과는 완전히 무관하여 죽음, 그 자체를 느끼게 하는 눈이었다. 그는 눈보라치는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돌아 왔노라! 중원이여, 나를 기억하는가?" 이어 그가 두 팔을 펼친 순간, 어두컴컴한 천공에서 한 줄기 뇌전이 일었다. 꽈꽈꽝--! 믿을 수 없게도 뇌전은 그의 손끝으로 이어졌으며 그가 다시 손 끝을 뻗어내자 맞은 편 산으로 떨어졌다. 꽈르르릉! 폭음과 함께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삽시에 가루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인간과 악마의 경계조차 모호하달 수 있는 놀라운 무학의 경지였다. 괴인(怪人)의 신형이 눈보라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내가 간다! 기다려라, 마록(摩麓)--!" 죽음의 돌풍을 몰고 어디론가 쏘아져 가는 이 사내....... 대체 그는 누구인가? "누구, 으악--!" 섬서성(陝西城)에 있는 무황분성(武皇分城)이었다. 이 곳도 무황성의 십팔 개 분성 중 하나이다. 성문을 지키던 한 무사가 눈보라 속에서 유령처럼 불쑥 나타난 괴인을 향해 추궁하다가 창졸지간에 비명횡사했다. 무사가 죽기 직전에 본 것이라야 괴인의 섬뜩한 웃음, 그리고 그의 손에서 뇌전이 뻗어 나오는 광경 등이었다. 그것이 죄였을까? 벌써 재수가 지독히도 없었던 무사의 몸뚱이는 숯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크크ㅋ!" 괴인은 무사를 간단히 처치한 후,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비쩍 마른 몸에서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겨 내며 움푹 꺼진 눈으로 높다란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성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꽈꽝--! 그의 손동작은 사실상 아주 작고 단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성문은 통째로 가루가 되어 무너지고 말았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성문이 무너지는 굉음을 전해 들었던지 분성의 소속고수들이 일제히 고함을 치며 밖으로 쏘아져 나왔다. 휙휙휙--! 그러나 성문을 부순 인물이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들의 얼굴에는 꼭 두 가지의 표정이 담겼다. 한편으로 놀랍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는. 그들을 보며 괴인이 웃었다. "크크ㅋ! 죽음을 향해 날아드는 벌레들." 스슷!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뻗었다. 이번에도 지극히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그의 손바닥에서는 뇌전이 일어났다. 쩌저적--! "크아아악--!" 그가 정녕 인간인지는 아무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를 상대하고자 나섰던 고수들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뇌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으므로. 무황성의 섬서분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도 단 일인에 의해 철저하게 괴멸되고 있었다. 정체도 불분명한 그는 살아 있는 것은 무엇도 용납하지 않았다. 낙성신마(落星神魔) 구양락(歐陽洛). 이 인물은 과거 군마성에서 서열 오 위에 속했던 고수였다. 그래서 섬서분성의 성주라는 직위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처럼 화려한 전적도 별무소용이었다. 구양락도 괴인의 손에 걸리자마자 자신의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속절없이 한 덩이의 숯으로 화하고 말았다.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단 일 초에 말이다. 그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사위를 휩쓰는 중에도 괴인은 지옥에서 온 사신(死神)인 양 인간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무려 칠백여 명에 이르던 섬서분성의 고수들이 하루 사이에 이승에서 모두 저승으로 옮겨가 버렸다. 이것은 그야말로 고금미증유의 대살겁이었다. 그런 연후, 괴인은 잿더미가 된 섬서분성을 등지며 비릿한 웃음를 흘렸다. "후후후... 마록!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네 숨통을 조여 주겠다." 그는 중얼거림과 더불어 미련없이 그 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가 사라져 간 방향은 남쪽이었다. ②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의 발길이 이르는 곳에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혈겁이 일어나 전 무림에 충격파를 던져주곤 했을 뿐이다. 지옥염왕(地獄閻王). 그에게는 어느 새 그런 별호가 주어졌다. 어디에서 왔는지, 목적은 무엇인지,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인간 말살에 해당되는 그의 행각을 볼진대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없을 듯 했다. 그는 언제나 혼자로써 누구도 대동하는 법이 없었다. 단신으로 그는 짧은 한 달 사이에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켰다. 무황성의 삼 개 분성이 그의 손에서 초토화 되고 말았다.그가 지나는 곳에는 의례 여하한 생명체도 남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지옥에서 온 염왕(閻王)인지, 그의 살행(殺行)은 갈수록 예측불허였다. 그는 무황성의 인물들만이 아니라 천명부의 고수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죽였다. 천명부의 고수 삼백 인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예외없이 살수(殺手)를 뻗어 전멸시켰던 것이다. 이 지옥염왕 때문에 겨울도 막바지로 접어드는 대륙에는 죽음의 공포가 만연되고 있었다. 자고로 대지는 영원불멸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나간 반 년의 세월은 무림사에 피의 장(章)을 이룩해 놓았다. 도무지 하루도 피바람이 그치는 날이 없었다. 정녕 잔인한 시대였다.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일관된, 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무황성과 천명부의 대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극을 치달렸다. 그런가 하면 죽음의 사신인 지옥염왕의 출현이 또한 혈겁의 무게를 가중시켰으니 바야흐로 무림에는 종말론(終末論)이 공공연하게 나돌게 되었다. 봄. 봄의 가장 큰 의미는 소생에 있다. 얼어 붙었던 동토(冬土)에 훈기가 돌면서 천하만물을 모두 다 깊은 잠으로부터 깨우기 때문이다. 빙하(氷河)가 풀려 강은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북풍은 남풍에 밀려 북천으로 후퇴해 버렸고 피가 배어 있는 대지 위에서도 초목들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스스스....... 비가 온다. 그러나 폭우가 아니라 부슬부슬 내리는 세우(細雨)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대륙을 깨우는 춘우(春雨)였다. 백간산(白干山) 절검봉(絶劍峯). 산세가 흡사 부러진 검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다. 봉우리 위에는 지금 한 인물이 세우에 몸을 내맡긴 채 홀로 서 있었다. 패기(覇氣)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의 일신에서는 나름대로 잘 정제된 듯한 오연함이 엿보였다. 용류옥이었다. 그의 눈 아래로는 군봉(群峯)들이 뿌연 안개에 잠겨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안색은 웬지 침중해 있었다. 그는 부백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는 피로 씻고 또 씻은 그 검을 향해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 하늘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면......." 그의 심중에서는 한 가닥 회의가 일고 있었다. 지난 일 년 간 그는 천명부를 이끌고 무수한 혈전(血戰)을 치루었다. 그것은 정녕 끝이 없고도 처절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베고 또 베었으되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무황성은 역시 강했고, 그렇기에 이 쪽에서도 강하게 맞닥뜨려 가긴 했으나 그 결과가 대체 무언가? 겨우 무림의 산하를 피로 씻기 위해 그토록 아우성을 치며 싸웠단 말인가?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무림 자체가 멸절될 것이다.' 용류옥은 가슴이 답답해져 견디기가 어려웠다. '한낱 미물일지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거늘,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천리(天理)를 역행하는 일이다.' 그가 지닌 회의의 이면에는 정작 무황성의 본성은 건드리지도 못했다는 안타까움마저 내재하고 있었다. 사실상 처음부터 본성을 쳤더라면 결과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아직 윤곽도 드러내지 않은 제 삼의 무서운 세력을 의식한 나머지 전력을 아끼려다 보니 오히려 국지전(局地戰)의 양상을 띈 싸움에서 나날이 희생자만 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무너져가는 쪽은 천명부가 아니라 무황성 측이었지만 그들도 무림동도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용류옥의 눈에서 일순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마록! 당신은 용서받지 못할 자요. 일개인의 야욕으로 인해 무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의 노기는 자연스레 또다른 적에게로 이어졌다. '욕망궁, 그들은 아마도 암중에 머물면서 본부와 무황성이 전면전으로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겠지.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리고 있다.' 최근 들어 천명부와 무황성간의 접전은 소강 상태로 접어 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황성의 십팔 개 분성 중 남은 것은 단지 사 개 분성 뿐이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무황성 본성에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이니 용류옥의 고심도 점차 부피를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의외의 변수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천명부도 최초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바 있었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지옥염왕, 그 자는 누구이기에 갑작스레 불쑥 나타나 무차별 살생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는 서서히 양손을 벌렸다. 스르릉--! 부백검이 뽑혀 나오며 기이한 음향을 토해냈다. 동시에 검신에서는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당장이라도 천지를 모조리 베어 버리고 말 듯한 기세를 과시했다. 용류옥은 탄식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부백, 너 난세지검이여! 알고 있기나 하느냐? 피를 바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전신이 세우에 흠뻑 젖어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의식도 하지 않았다. 번민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눈은 그 시각, 하나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탁! 용류옥은 검을 도로 검집에 꽂았다.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때를 맞추어 그의 시야에 하나의 흑영(黑影)이 나타났다. 스슷! 그 자는 전신에 흑포를 둘렀으며 얼굴에도 흑건을 두른 인물이었다. 용류옥이 나직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흑막삼호." "네." 흑막삼호라 불리운 그 자는 용류옥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용류옥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흑막삼호는 과거 무림왕 용화천이 직접 키운 세간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용류옥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이 곳에서 삼십리 가량 떨어진 주막에 있습니다." "그는 현재도 혼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줄곧 동행이 없었습니다." "그의 정체는 알아 냈나?" "아직 거기까지는....... 그는 자신에 대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흐음!" 용류옥의 눈이 기이한 신광을 발했다. 그는 사뭇 의미심장한 기운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쓰는 무공은......?" "불명(不明)입니다. 다만 소문대로 그가 극히 패도적인 무공을 사용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흑막삼호는 말 도중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극히 잔혹한 무공류인지라 그의 손에 걸린 자 치고 살아난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으음......." 용류옥은 탄식을 불어 내더니 시선을 허공으로 향했다. 그는 방금 전에 비해 매우 침중해진 채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는 또 하나의 전설을 연 인물일지도 모른다." "전설이라시면......?" "흑막삼호, 그대도 불야성(不夜城)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겠지?" 흑막삼호는 놀란 기색이 되어 반문했다. "있습니다만 설마 그가......?" 용류옥은 쓴 입맛을 다셨다. "나도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다. 만일 그가 불야성에서 나온 인물이라면 중원은 또 한 사람의 대살성(大煞星)을 맞이해야 될 테니까." "아!" 흑막삼호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신음을 토해냈다. 용류옥이 음성을 가라앉혀 재차 그를 불렀다. "흑막삼호." "넷." "그대는 이 길로 즉시 불회도로 가라. 그리고 백호법을 만나 이것을 전하라." 용류옥은 하나의 두루마리를 품 속에서 꺼내 상대에게 내밀었다. 흑막삼호는 일단 그것을 받기는 했으나 곧바로 떠나지는 못했다. 그는 흑건 사이로 불안한 시선을 내비쳤다. "주군, 이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 그의 음성은 매우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용류옥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만일 내가 보름 이내로 돌아가지 못하면 불회도를 폐쇄하라. 역천미로대진(逆天迷路大陣)을 펼쳐 불회도의 수로(水路)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라고 이르라." 흑막삼호는 기겁을 하여 부르짖었다. "안됩니다! 주군." 용류옥은 고개를 저었다. "어서 떠나라. 이 일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로 내 결심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에게 혹시 인성(人性)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설득해 볼 작정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을 시엔......." 용류옥은 부백검을 안은 채 팔짱을 꼈다. "그를 부백에게 맡기겠다." 말을 마치자 그의 신형은 그 때까지도 계속 세우가 뿌려지고 있는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스스스....... 그러더니 그는 이내 흑막삼호의 시야를 벗어나고 말았다. "주군......." 흑막삼호는 용류옥이 사라져 간 방향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웬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조여왔던 것이다. 그는 허공을 향해 기원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주군, 부디 일신을 보중해야 합니다. 주군이야말로 무림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스으으....... 봄을 알리는 비는 쉴 새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③ 허름한 주막(酒幕). 밖에서 연신 부슬거리는 빗줄기가 주막 안에까지 음습한 기운을 퍼뜨려 놓아 주객(酒客)의 심중에 기이한 정회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서 혼자 묵묵히 술을 마시는 사내가 있다. 외로움에 지친 나그네인가? 이 우중(雨中)에 자작으로 들이키는 쓴 술로 고독이라도 달래 보려는 것인지.......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 사내가 들어와 눌러 앉아버린 이후로 주막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해져 버렸다. 있던 손님들이 하나 둘씩 슬며시 빠져 나가는가 싶더니 몇몇의 새로운 손님들도 들어 왔다가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 달아나곤 했다. 그것은 사내에게서 풍기는 질식할 듯한 살기가 원인이었다. 그 때문에 주막의 주인인 장가(張哥)는 벌써부터 안색이 핼쓱해진 채 오금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만드는 그 사내는 독한 화주(火酒)를 이미 열 병째 들이키고 있었다. 조금도 취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가 처음 주막으로 들어 섰을 때였다. 주인인 장가가 몸소 사내에게 다가가 친절히 물었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손님." 사내는 그를 올려다 보며 대답했는데 장가는 당시의 그 소름이 끼치는 그 말투를 잊지 못한다. - 산 사람의 피가 있느냐? 있다면 그것을 먹겠다. 후후... 없으면 술이나 가져 와라. 그 정도면 족하다. 농담으로나 들을 수 있으면 정말이지 좋으련만 분명 그렇지가 못했다. 덕분에 장가는 혼비백산했던 나머지 그 때의 공포감을 지금까지도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계속하여 살기등등한 사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행여라도 비위를 건드릴까 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명색이 주인인지라 주막을 비워 두지도 못하고, 넋이 나간 채 문가에 쪼그리고 앉아 바깥 풍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던 한 순간, 그는 또 다시 질겁을 했다. 세우를 맞으며 한 명의 백삼청년이 걸어 오고 있었는데....... '저럴 수가!' 장가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놀랍게도 백삼청년은 지면에서 발이 세 치 가량 뜬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귀신! 귀신......!' 그가 막 거품을 물고 뒤로 나자빠지려는 그 찰나였다. 백삼청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주인장, 자리가 있소?" 담담한 그 목소리에는 기이할 정도의 현기(玄氣)가 배어 있어 장가로 하여금 도로 의식의 끈을 붙들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백삼청년은 그의 앞에 와서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음성과 마찬가지로 그 웃음에도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신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다르다, 이 손님은.......' 장가는 저으기 안도하여 입을 열었다. "있... 습니다만......." 그는 마음과는 달리 말 끝을 흐리고 말았다. 안내를 하긴 해야겠는데 그로서는 먼저 와 있는 무서운 손님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가기는 커녕 감히 돌아다 볼 수조차 없었다. 백삼청년이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씩 웃었다. "그럼 되었소. 잠시 비나 좀 피하고 갑시다." "무... 물론입죠." 장가는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연거푸 놀라는 바람에 오줌발이 바지가랑이를 축축히 적셔 놓았건만, 그것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서 굽신거렸다. 어차피 장사를 해 보겠다고 벌여 놓은 주막이거니와 눈 앞의 신비무쌍한 손님 정도라면 적어도 앞서의 손님으로 인해 되돌아가 버리지는 않을 듯 싶었던 것이다. 백삼청년은 용류옥이었다. 그는 장가를 지나쳐 주막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야에 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가에 면한 채 등을 돌리고 앉은 그 사내를 보자 용류옥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기이한 신광이 번뜩였다. '듣던대로군. 전신에 무서운 살기를 뿜고 있다.' 그는 사내에게로 걸어갔다. 사내는 상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를 하는 것인지 고개도 돌려 보지 않았다. 용류옥이 사내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형장께선 무척이나 운치를 즐기는 분이신 모양이구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 자음자작을 하니 말이오." 사내는 냉랭한 웃음을 흘려냈다. "운치? 후후후... 너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냐?" 그는 그제서야 용류옥을 힐끗 올려다 보았다. 반면에 사내와 얼굴이 마주치게 되자 용류옥은 일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 용류옥의 심중에서는 급기야 의혹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지금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 사내는 일명 지옥에서 온 사자, 즉 지옥염왕(地獄閻王)이었던 것이다. 놀라움을 진정시키며 용류옥은 말을 건넸다. "합석해도 되겠소?" "후후... 되고 말고." 지옥염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괴소를 흘렸다. "오랫 만에 사내다운 놈을 보는군." 지극히 오만무례한 말투였으되 그다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다. 용류옥은 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형장께서 보기에 사내다운 사내란 어떤 위인이오?" "크ㅋ! 우선적으로 기개가 있어야겠지. 최소한 나를 보고 겁을 집어 먹지는 말아야 하니까." 용류옥이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방면에서의 얘기라면 기개의 문제가 아닐 것이오. 형장에게서 사람다움이 느껴지지 않을진대 과연 누구를 탓해야 옳겠소?" 지옥염왕의 눈이 음산한 빛을 발했다. "지금 내게 뭐라고 했느냐? 그럼 내가 사람이 아니기라도 하단 말이냐?" 용류옥은 방금 전에 비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으로 났다면 무엇보다 생명을 중히 여겨야 하는 법, 형장께서 그리 하지 못하셨으니 당연하지 않소?" "너는 나를 알고 있었군?." 지옥염왕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 광경을 보며 뭔가 말하고자 하던 용류옥이 불현듯 눈을 크게 휩떴다. 그는 내심 격동을 금치 못하여 부르짖었다. '아! 이 인물은 바로......!' 그는 정말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었다. '이럴 수가! 비록 모습이 크게 변하기는 했지만 이 자는 숙야빈이 틀림없다.' 협중협 숙야빈. 당금 무림인 치고 이 이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용류옥도 그가 대정성을 수중에 거머쥐고 제멋대로 휘두르던 시절에 먼 빛으로나마 잠깐 그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숙야빈이라면 분명 마록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멀쩡히 살아 무림에 재출도 했다면 이는 필경 예삿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지옥염왕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어낸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벌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용류옥은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우우... 이것은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다. 짐작컨대 금후로 이 자로 인해 무림에는 지금까지보다 더 큰 혈겁이......!' ④ 쩌적! 우르르르-- 하늘이 갑자기 노하기라도 한 것일까? 꽈다당--! 요란한 뇌성벽력에 이어 가늘게 부서져 내리던 빗줄기가 갑자기 장대같은 폭우로 변했다. 쏴아아아--! 용류옥과 숙야빈. 각자 남다른 운명을 어깨에 걸머진 이 두 사람이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숙야빈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무서운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후후후... 당대의 천명부주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외진 곳까지 왕림하시다니 정말 뜻밖이군. 내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너를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용류옥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그렇소. 당신과 나는 어차피 한 번쯤은 서로 부딪쳐야할 사람들이었소. 그러나 그 이전에 숙야빈, 당신이 지옥염왕으로 둔갑해 나타나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오." 숙야빈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더 이상 쓸데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후후... 네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면 너는 과연 불야성의 무학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용류옥은 탄식했다. "당신이 불야성의 진전을 얻었다니 진정 축하해야 할 일이오만 내가 당신에게 궁금한 것은 그 이전이든 현재든 단 한 가지 뿐이오. 왜 그토록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도 무림을 위해 쓰지 않는가에 대해서 말이오." "시끄럽다! 나 숙야빈은 본래 누구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내 목표는 오직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판이 되어줄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 후후... 내 일찍부터 그 때문에 천명부를 점찍어 두었었지. 이 일전(一戰)으로 너를 죽인 후, 천명부를 접수하러 가겠다." 망언(妄言)치고도 그 이상의 망언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자가 누구인지를 감안한다면 그것은 또한 그저 망언으로 취급할 수 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우우우웅--! 숙야빈의 일신에서 막강한 강기( 氣)가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는 무형의 강막이 형성되어 빗방울조차 더 이상 범접치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으음!" 용류옥은 안색을 굳히는 한편, 두 손으로 각기 부백검의 상하부를 나누어 잡았다. 그것은 용트림과도 같은 부백의 진동이 그의 양손으로부터 가슴까지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부백, 또 네가 피를 원하는구나. 마물(魔物)이여!' 쩌저적! 쿠르르르-- 먹구름이 시커멓게 깔린 천공에서 갑작스레 무시무시한 뇌전이 일어났다. "크흐흐흣......!" 숙야빈이 기다렸다는 듯 괴소를 흘렸다. 이와 더불어 그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곤두서며 허공에서 마구 춤을 추었다. 콰콰쾅--! 가까운 곳에서 마침내 한 차례 벼락이 떨어졌다. 그 찰나를 기해 숙야빈은 쌍장을 떨쳤다. "구천만공뢰(九天萬空雷)!" 쩌어억--! 실로 놀랍다고 밖에는 할 수 없으리라. 그의 쌍수가 합쳤다 떨어지는 순간, 한 줄기 강도 높은 뇌전이 그의 수중에서 일직선으로 뻗어 나왔던 것이다. 그 현상 앞에서는 용류옥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벌써 생각을 앞지르고 있었다. 그는 어느 틈엔지 부백검을 뽑아 전면으로 떨쳐내고 있었다. 파츠츠츳--! 갈라진다. 하늘이....... 용류옥의 검 끝에서 가공할 검기(劍氣)가 일어나 대기를 양단해 가는 광경이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그가 지닌 검의 경지는 초극(超極)에 이르고 있었기에. 꽈르릉--! 두 가닥의 각기 다른 기운이 격돌하자 굉렬한 폭음이 일었다. 여기에 이어진 것은 숙야빈의 광소성이었다. "크하하핫......!" 동시에 그는 비쩍 마른 몸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휘리릭--! 그에 따라 용류옥의 신형도 용행천공(龍行天空)의 신법으로 마주 떠올랐다. 쩌적--! 먹장구름 사이로 다시 번개가 쳐 사위를 푸르게 밝혔다. 그 짧은 찰나지간, 두 젊은 절세고수들의 신형이 공중에서 환상처럼 합쳐졌다가 떨어졌다. 희고 푸른 섬광이 그들 두 사람의 신형을 휘감아간 것도 그 순간의 일이었다. 가공지경의 절학(絶學)이 그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만일 이 광경을 세인들이 보았다면 그대로 까무러치고 마는 사태가 벌어졌으리라. 용류옥. 그는 숙야빈의 무학 진경에 내심 충격에 이르고 있었다. 불야성을 열었으니 각오를 하지 않았던 바는 아니지만 숙야빈의 무위는 그의 예상을 완전히 초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은 숙야빈의 입장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숙야빈은 불야성에서 십전무제(十全武帝)가 천하 제문파들의 무공비급을 훔쳐낸 뒤, 그 백미(白眉)만을 추려 독자적으로 새롭게 창안해 낸 기학을 연성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무학이야말로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다가 용류옥과의 싸움에서 비로소 스스로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꽈르릉-- 츠츠츠츳--! 강기( 氣)와 검기(劍氣)가 서로 뒤엉켜 천지를 뒤집어 놓을 듯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하늘을 두텁게 가리고 있던 먹장구름마저도 그 엄청난 소요와 진동에 휘말려 버린듯 함께 휘돌고 있었다. 그런즉 그 여파로 지상에서 일어난 난변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의 주위로 반경 삼십 장여가 땅거죽이 죄다 벗겨졌는가 하면 초목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말았다. 그 두 사람의 싸움은 정녕 무림사 초유의 대전이었다. "으핫핫핫... 구천혈공뢰(九天血空雷)!" 쩌적-- 쩌저적--! 숙야빈의 쌍장에서 푸른 섬광이 연이어 작렬했다. 그에 대응하여 용류옥은 검기로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렸다. 우우우웅--! 이로써 무형의 검막이 형성되자 검파(劍波)와 강기가 더욱더 가공스러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일시지간 하늘도 놀라고 땅도 뒤흔들렸다. 고오오오오....... 용류옥은 그 순간을 빌어 최후의 검식(劍式)을 떨쳐내기에 이르렀다. 부백검이 그의 수중에서 떠나갔다. 콰츠츠츳-- 어풍이기어검술(馭風以氣馭劍術), 검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이자 최대의 경지가 펼쳐졌던 것이다. "헉!" 숙야빈은 허공에 뜬 채 다급성을 발했다. 어느 틈엔지 시야에서 용류옥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대신 눈부신 검광만이 전면으로 쇄도해 왔기 때문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그는 전신의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밀어닥치는 검광을 향해 쌍장을 내뻗었다. "구천명공뢰(九天冥空雷)--!" 고오오오오....... "크아아악!" 일성의 처절한 비명이 혼돈지경의 하늘을 찢었다. 그것은 빗나간 한 청춘이 최후를 고하는 소리였다. 그 뒤에야 내리 퍼붓는 폭우의 음향이 제대로 전해졌다. 쏴아아아--! 천지 간의 자연현상이 안정을 되찾았다고나 할까? 격돌의 현장임을 알리는 그 파괴 위에 빗줄기는 무심히, 그저 세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이상의 소요는 더 없었다. 아니, 있다 해도 방금 전에 천지를 통째로 휩쓸던 그 무지막지한 소용돌이에 비하면 차라리 초라하다고 하면 맞을 것 같았다. "크윽......!" 고통에 찬 인간의 비명은 실제로 너무도 왜소했다. 용류옥이었다. 그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쓰러질 듯 비틀거리더니 한 사발은 됨직한 핏덩어리를 왈칵 토해냈다. 그것이 그 경천동지할 싸움의 결과였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그의 시선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숙야빈. 일세를 떨어 울리던 효웅(梟雄)이자 간웅(奸雄), 그러나 지금의 그는 용류옥보다 더욱 초라하고 왜소해 보였다. 호흡이 끊겨 버린즉 단지 한 덩이의 육괴에 불과했던 것이다. 숙야빈은 하반신이 땅에 박힌 채 선 자세였는데 그의 가슴에는 부백검이 꽂혀 있었다. 그는 검을 두 손으로 움켜 잡고는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죽었다고? 아니야, 그건 내가 도저히 용납 못해! 용류옥은 숙야빈의 눈이 전하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으며 그로 인해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곧 아찔한 현기증으로 이어졌다. 지나치게 진력을 소모한 데다가 극심한 내상(內傷)을 입기도 했지만 어지러운 것이 꼭 그 때문만은 아니리라. "숙야빈, 대체 이게 뭐요?" 용유옥은 휘청거리면서도 숙야빈에게로 쫓아갔다. 부백검은 숙야빈의 가슴을 관통하여 그 끝이 등을 꿰뚫고 삐져 나와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용류옥의 음성은 노기를 띄었다. "이것이 정말로 당신이 원한 결과요? 당신이 죽든, 내가 죽든 이 얼마나 허망하고 딱한 짓이냔 말이오?" 승리의 기쁨 따위는 도시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분노했는데 그 이유는 생명의 존귀함이 인간의 야망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기 때문이었다. 그 생명이 타인의 것이냐, 자신의 것이냐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타인의 생명이 스러졌기에 그는 종내 눈에 눈물을 담기까지 했다. "언뜻 눈을 돌리면 그 곳이 곧 피안(彼岸)이라 했거늘....... 마음을 바르게 고쳐 먹었다면 당신은 아마도 무림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오." 이윽고 용류옥은 손을 뻗어 숙야빈의 가슴에 박혀 있는 부백검을 잡았다. "동정도, 안타까움도 이것으로 끝이오. 숙야빈, 나는 당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으니까." 슉! 검이 뽑혀 나오자 허공으로 피가 뿌려졌다. 용류옥은 숙야빈의 시신에서 부백검으로 눈길을 옮겼다. "부백, 이제 다시 네 잔인한 광휘를 드러내려느냐?" 그런데 조소와 비애가 섞인 그의 음성 뒤로 뜻하는 바와는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쩡--!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며 부백검에 금이 갔던 것이다. "이, 이런!" 용류옥은 너무도 놀라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사이, 부백검의 검신은 아예 반동강이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네가 부러지다니......." 그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난세지검(亂世之劍). 용류옥은 부백검을 사용했으되 극도로 혐오했다. 심지어는 스스로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따지고 보면 부백검 자체를 경원시한 것이 아니라 부백의 활약을 요하는 상황들이 저주스러워서였다. 그가 증오하는 것은 난세였고 거꾸로 난세를 해결해줄 냉혹비정한 전사가 또한 부백이었던 것이다. '이 현상은 길(吉)한 것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흉사(凶事)를 예고하는 것인가?' 용류옥은 부러진 부백검을 집어 들고는 한 동안 백치가 되어 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쏴아아아--! 비는 왜 그치지도 않는가? 용류옥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추적추적 빗 속을 걷고 있었다. 전신이 비에 흠뻑 젖어 오한마저 일었다. 그대로 가다간 정말로 의식을 잃을 것도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는 앞서도 말했듯 숙야빈과의 싸움에서 외상은 거의 없으되 심한 내상을 입었다. 게다가 즉시로 운공을 하지 않아 그의 상세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쿠쿠쿠쿠....... 용류옥은 흙탕물이 아래 쪽으로 거칠게 몰려 내려가는 계류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가물거리기 시작하여 그 곳이 물가라는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다. 탁! 그는 와중에서 돌부리에 발이 걸렸고 그 탓에 여지없이 계류 속에 빠져 버렸다. 콰르르르--! 그의 몸은 격류에 휘말려 빠른 속도로 떠내려 가더니 잠시 후에는 그 곳에서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부백검이 그러했듯 그 주인이었던 용류옥도 운명의 종말을 고하려는지....... 제27장 잠룡(潛龍)의 용트림 ① 오월이다. 연중(年中) 가장 아름다운 달, 각양각색의 화려한 화목(花木)이 대지를 싱그럽게 치장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武林)의 세계를 장식하는 것은 그렇듯 낭만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숙명처럼 다시금 대혈풍(大血風)의 회오리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무황성(武皇城). 마침내 무림황제 마록의 선포가 떨어졌다. "출정(出政)한다! 패도(覇道)의 무서움을 보여 주리라. 천명부를 무너뜨림으로써 천하무림인들에게 진정한 무림의 율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겠다." 그의 음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낮은 울림의 여파가 무림 전역에 미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마록은 무황성의 십팔 개 분성이 모조리 궤멸되어 버리자 오히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분연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명실공히 타고난 전사이자 힘의 제왕이었다. 그리고 그 힘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 출정하려는 것이다. 그 때까지도 변함없이 그는 마도의 우상이었다. "우와아아아--!" 무황성을 뒤흔들다 못해 천지를 진동시키는 군마들의 함성이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당사자인 마록의 기색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그의 입가에는 시종 그 특유의 비정해 보이면서도 마력적이기까지한 웃음만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단순한 선동자(煽動者)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록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조만간 대륙 전체를 자신의 말발굽 아래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 신념이 무황성의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었다. 절대지배자와 군마들을 무림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두두두두--! 수천기의 인마(人馬)들이 하늘을 뒤덮어버릴 정도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황성의 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선두의 흑마(黑馬) 상에서 박차를 가하는 인물,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무림황제 마록이었다. 그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침묵이야말로 완벽한 자신감의 표현으로써 군마들의 더없는 신뢰를 사고 있다. 마록은 단 한 마디만을 외쳤을 뿐이다. "계속 전진하라--!" 곡지현(曲池縣). 아담하고 조용하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다. 곡지현은 샛강을 끼고 펼쳐져 있는 아늑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곳 사람들은 성품이 모두 순박하고 담백하여 대대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왔다. 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땅은 본래 거짓을 모른다. 반드시 뿌린 만큼, 그러기 위해서 흘린 땀방울 만큼의 수확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농부란 어떤 면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직업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곡지현은 세상의 험악함에 일체 귀기울이지 않고 피해 갔으며 설사 뜻하지 않게 전란(戰亂)이 일어나도 땅을 등지려 하지 않는 그 곳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부단히 지켜지곤 했다. 하물며 무림의 세계란 그들과는 너무도 무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공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난세무림이나 영웅천하, 더 나아가서 천하제패 등의 엄청난 어휘에 대해서는 그런 말도 있었는가고 생경하게 여길 정도였다. 화풍장(和楓莊). 이 곳은 곡지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 학자(學者)가 거기서 살면서 그들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담당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풍선생(和楓先生) 우문사(宇文師). 이것이 그 학자의 이름이다. 사람들이 알기로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경세(驚世)할만한 원대한 학문이 담겨 있었다. 반면에 그는 명리(名利)에 초탈한 인물로써 출세에는 애초부터 뜻이 없었다. 그는 과거에 일곱 번이나 장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관(官)에 진출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는 희한한 성품의 소유자인지도 몰랐다. 초야에 묻혀 시(詩)를 읊고 음(音)이나 즐기며 사는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는 곡지현 사람들 모두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주업인 농사에 관한 일에서부터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대소사(大小事), 게다가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그를 찾아가 문의하곤 했다. 하지만 화풍선생에게도 불운한 일면은 있었다. 그는 일찌기 아내를 잃었다. 그리하여 올해로 십육 세가 된 딸 하나를 데리고 화풍장에서 적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나이도 들어 그가 하는 일이란 마을의 소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자신의 집인 화풍장의 화원을 가꾸는 일이 전부였다. 오월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 비추는 화풍장의 후원. 딱! 딱....... 뜨락에는 초록빛 융단과 같이 잔디가 곱게 깔려 있었다. 그 곳에서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돌로 된 바둑판을 사이에 놓고 서로 마주한 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명은 오순 가량 쯤 되어 보이는 인물로써 비교적 청수한 용모와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노문사(老文士)였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인물 역시 백의문사의를 입었는데 일견하기에도 기도가 매우 헌앙하고 출중한 청년이었다. 이들 일노일소(一老一少)가 연출해 내는 분위기란 한가로운 가운데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어울리는 모습은 마치 선계(仙界)에서 잠시 내려와 바둑을 두고 있는 신선들처럼 보였다. 딱! 노문사가 화점(花點) 상단에 백돌을 놓으며 웃었다. "허허허... 자군(自君), 어떤가? 이 한수로 자네의 대마(大馬)가 몰살을 하게 생겼군. 안 그런가?" 그 말에 자군이라 불리운 청년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것은 쉽게 승복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그 상태에서 그는 바둑판을 계속하여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노문사는 너털웃음을 쳤다. "헛헛헛...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거듭해도 묘수(妙手)를 찾기는 힘들 걸세. 그럼 난 잠시 들어가 낮잠이나 자고 있을 것이니 수를 발견하면 부르게나." 자군은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둑판에 고정된 그의 시선도 움직임을 멈추어 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문사는 기분좋은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헛......." 그는 청년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엇에 한 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청년은 의례껏 주변의 일들은 깡그리 잊곤 했었다. 그 덕분에 몰두한 일의 결과는 항시 최상이었다. '그래도 바둑에서 나를 이기는 일만은 잘 안될 걸?' 노문사는 뜨락을 가로질러 대나무로 지어진 한 채의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말마따나 그가 정말로 오수(午睡)를 즐기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떻든 이 노문사가 이 곳 곡지현의 지도자이며 화풍장의 주인인 화풍선생 우문사였다. 청년 자군. 그는 무려 향 두 자루가 탈 시간 동안 궁리를 했으나 묘수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는 피로감을 느낀 나머지 포기한 듯 바둑판에서 눈을 떼었다. 오월의 햇살은 본시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자군은 절로 눈이 자꾸 감겨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햇살이 그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는 바둑판 옆에 놓여 있던 섭선을 집어 얼굴을 가렸다. 곧 기분 좋은 오수가 스르르 밀려 왔다. 자군이 잠 속으로 완전히 끌려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는 서서히 꿈의 지배하에 들고 있었다. '헉!' 그는 대경했다. 머리통 밖에 없는 원귀(寃鬼)들이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그에게 덤벼 들고 있었던 것이다. - 크크크! 도망을 치려고? 어림도 없다. 크크크....... 그래도 그는 너무도 무서워 달아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껏 그가 도망친 곳이라니, 전면이 온통 불바다였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수라지옥도(阿修羅地獄圖)를 이루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 우아아아--! 살려줘! '싫어! 내가 저 속에서 어떻게 저들을......?' 그는 재빨리 뒤돌아 서서 제 삼의 방향으로 달려 갔는데 이번에도 그에게는 요행이라는 것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가 새로 당도한 곳은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곳곳에서 핏물이 시뻘건 내를 이루고 있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경황 중에도 허공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에 올려다 보았더니 까마귀떼가 새카맣게 몰려 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시체들을 쪼아 먹기 위해서이리라. '아무리 죽은 사람들이라지만 한낱 미물들이......!' 그는 분노가 치밀어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까마귀떼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까마귀들은 달아나기는 커녕 오히려 공격대상을 바꾸어 그를 향해 일제히 덤벼 들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창졸지간에 수천 마리의 까마귀떼들에게 뒤덮히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 아니야! 나는 죽지 않았어, 난 시체가 아니란 말이야! "난......!" 자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런데 그가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외치려던 그 찰나였다. 뜻하지 않게 그의 귓전을 간지럽히는 음성이 있었다. "호호... 군(君)오빠, 저예요." "아!" 자군은 나직히 탄성을 발함과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현실감을 되찾았다. 그 이전 상황부터 잔디 위에 누워 달콤한 잠의 유혹을 느끼던 기억까지가 전부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가 꾸었던 악몽도....... 겸연쩍어져 버린 그를 향해 부드러운 손이 뻗어 왔다. 그 손의 임자는 좋은 향기가 나는 손수건을 들고 있었으며 친절하게도 그의 이마에 진득하게 배인 땀을 닦아 주었다. "괜찮으신 것, 맞죠?" 자군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십육, 칠 세 쯤 되어 보이는 한 백의소녀가 화사한 얼굴에 보조개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그는 가능한 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물었다. "금지(芩芝)로구나. 언제 왔지?" "언제 왔냐고요?" 소녀의 이름은 우문금지(宇文芩芝), 화풍선생 우문사의 금지옥엽이다. 그녀는 약간은 괴상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도 좀 멍청한 데가 있군요? 한참 동안 내가 곁에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하긴 정신없이 코를 곯을 때부터 알아 보았지만." 자군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랬나? 내가." 우문금지는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사르르 굴렸다. "군오빠는 무엇 때문에 자꾸 악몽을 꾸는 거죠? 정말이지 딱해 죽겠어요. 어젯밤에도 오빠가 주무시는 방에서 계속 헛소리가 들리던데......." 자군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흠, 그것도 나는 까맣게 모르겠는 걸. 왜 그랬을까? 몸이 좀 허하기는 하지만......." 그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바둑판으로 시선을 향했다. "우문선생께선 아직 주무시느......?" 자군은 말하다 말고 놀란 얼굴이 되어 도중에 멈추었다. 화점 상단에 놓인 백돌로 인해 다 죽어가던 그의 대마(大馬)가 어느 틈엔지 기사회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살펴 본즉 그것은 우상리 삼삼(三三)에 놓여진 흑돌 하나가 일으켜 놓은 변화였다. 그는 우문금지를 돌아다 보았다. "금지, 네 짓이겠지?" "호호호... 야단치지 마세요. 잠드신 사이에 뭐 도와드릴 거라도 없나 했는데, 때마침 그 수(手)가 보이더라구요." 민망한 쪽은 되려 자군이었다. "우문선생의 바둑도 일품이지만 금지, 너의 솜씨는 국수(國手)를 능가할 정도구나." 우문금지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아이, 설마요?" "하긴 바둑 뿐만이 아니지. 네 학문과 음율조예는 근역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으니까. 아마 드넓은 천지에 내놓아도 충분히 제일(第一)을 다투게 될 것이다." 자군의 칭찬에 우문금지는 혀를 쏙 내밀었다. "피이, 추켜 세우시는 걸 보니 오빠는 또 후아주( 兒酒) 생각이 나신 모양이군요?" 그는 짐짓 입맛을 다시며 응수해 갔다. "사실 말이지, 한 병만 더 마실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 우문금지는 얼굴을 싹 돌렸다. "흥! 어림도 없어요. 아버님께서 얼마나 아끼시는 술인데요? 그리고 이젠 다섯 말 밖에 안 남았거든요." "아니, 다섯 말 씩이나?" 자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떠 보이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럼 한 병쯤 덜어내도 표가 나지 않겠구나. 난 또 댓 병 쯤 남은 줄 알고 고민했었지. 금지, 네가 한 병만 몰래......." 그가 이처럼 소녀의 명랑함에 기꺼운 마음으로 흠씬 녹아 들고 있을 때였다. "허허헛... 자군, 자네 또 무얼 그렇게 금지에게 졸라 대는가? 묘수나 부지런히 풀지 않고선." 화풍선생이 건너 편에서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보자 자군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험! 염려 마십시오. 벌써 풀어 놓았습니다." "그래?" 화풍선생 우문사는 바둑판을 들여다 보더니 안색을 굳혔다. 그는 우문금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이 놈! 네가 또 훈수(訓手)를 두었구나." "헤헤... 그래도 때리지는(?) 마세요, 아버님." 우문금지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깔깔 대고 웃으며 자군의 등 뒤로 얼른 몸을 숨겼다. "하하하핫......!" 우문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자군도 그를 따라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자군의 얼굴에 어려 있던 한 가닥 그늘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② 띵... 띠딩... 띠디딩....... 자군의 칭찬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문금지가 뜯는 비파음은 정말로 선음(仙音)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으므로. 대나무로 지은 정자 위. 그 곳에서 자군은 몰래라도 좀 얻어 먹어 보자고 졸라대던 후아주를 우문사와 더불어 정식으로 나누고 있었다. 말이 그렇지, 그가 우문사 부녀(父女)에게 받고 있는 대접이란 너무도 융숭하여 되려 송구할 지경이었으며 그런 식의 은밀한 뒷거래(?)는 그의 취향도 아니었다. 자군은 다만 밝음과 평화로움 속에 파묻혀 사는 그들 부녀의 후의에 감사하고 있는 터라 여기 있는 동안 만이라도 동화되어 보려고 나름대로 무척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후아주는 이르자면 깊은 산 속에 사는 원숭이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물 치고 지능이 우수한 원숭이들은 주식인 각종 과일을 한 곳에 모아 저장해 두곤 하는데 그 과일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저절로 발효되어 빚어지는 술이 후아주였다. 그리하여 순수 자연산(自然産)인 후아주는 술 중에서도 최상의 술로써 맛과 향(香)이 천하일품이었다. "허허허... 자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가?" "네? 아......." 자군은 대답해 놓고도 할 말이 없는 듯 잠시 멈칫거렸다. 이어 그는 잔디 위에 그림처럼 앉아 비파를 타고 있는 우문금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지가 너무 비파를 잘 타기에....... 저도 모르게 한 동안 넋을 잃었었나 봅니다." 그 말에 우문사는 쓴 입맛을 다셨다. "쯧! 너무 애쓰지 말게나. 그게 아니라는 것 쯤은 노부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네." "으음......." 우문사는 술잔을 기울인 후,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곡류하(曲流河)에서 시체나 다름이 없는 자네를 건져내면서부터 이미 알아 보았었네. 그리고 이후로도 주욱 관찰했었지만 자네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자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부는 살아오는 동안 이 곳 화풍장원을 떠났던 적이 별로 없네만 세상사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이지. 허허허... 그것은 아마도 할 일이 없어 지겹도록 읽어 댄 서책들 때문일 게야." 우문사는 운을 떼더니 이내 결론을 맺었다. "노부는 관상이나 골상(骨相)도 조금은 볼 줄 알지. 그 덕분에 자네의 과거지사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네." "그럼......?" 자군의 안색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런 그를 향해 우문사는 가볍게 손을 저어 보였다. "허허... 그렇다고 긴장할 것은 없네. 노부가 설마하니 새삼 스럽게 자네를 추궁하거나 경계하는 짓 따위야 하겠는가? 그 점에서는 안심해도 되네. 다만......." 우문사는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비파를 탄주하고 있는 우문금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저 녀석 때문에 요즘 심사가 다소 어지럽군." 자군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시 알아 차렸다. 그가 곡류하에 떠내려 왔을 때 맨처음 그를 발견한 사람은 우문금지였다. 또한 그녀는 부친을 도와 그를 물에서 건진 후로는 극진한 간호를 베풀었다. 처음에는 삼 일 밤낮을 꼬박 뜬 눈으로 세우며 무의식 상태인 그의 곁에 붙어 있었고 그가 깨어나자 그 때부터는 식사나 의복 시중을 비롯하여 온갖 수발을 다 들어 주었다. 이르자면 자군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일컬어 갱생(更生)을 가능하게 해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녀의 마음 속에서 그가 남자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문금지는 명랑한 모습으로 일관해 왔을 뿐 한 번도 자군에게 자신의 심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 모르겠는가? 이성(異性)을 향해 이끌리는 인간의 감정이란 누구고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것이므로. 자군은 내심 부르짖었다. '안된다! 그건 도저히 안될 일이다.' 그가 이렇듯 뻔한 상황을 거부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우선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마워 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그는 예전에 창주도에서 백하연을 통해 익히 경험한 터였다. 나머지 한 가지의 이유는 현재 자신의 처지가 여인을 수용하고 희희낙락일 만큼 여유롭지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상대가 우문금지가 아닌 어떤 여인이라도 마찬가지였으며 설사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자군은 마음을 다잡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의 뜻은 압니다만 소생은......." 우문사가 다시 손을 저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말하지 않아도 노부는 알고 있네. 자네의 신상이 어떤 정도로 복잡하리라는 것도, 그만치 마음의 공간이 남아 돌지 않으리라는 것도 말이네. 아닌가?" 자군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헛헛헛... 그런 소리 말게나. 인간사 중에는 더러 억지로 안되는 일도 있는 법이지." 우문사는 껄껄 웃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 몸은 좀 어떤가?" "덕분에 완쾌되었습니다." "다행이군......." 최대한 자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문사의 음성에는 끝내 아릿한 여운이 매달렸다. 인자한 가운데서도 냉철함만은 철저하게 유지해 나가고 있는 그도 부정(父情)에 매이자 어쩔수 없이 흔들림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자군은 묵묵히 술잔을 들더니 담겨 있는 술을 단숨에 비웠다. 후아주는 부드러운 맛에 비해 독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독주가 목구멍을 쓰리게 훑고 지나가자 그의 자탄은 오히려 한결 도를 더했다. '유옥(柳玉)!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여기서 계속 언제까지고 미적거리고 있을테냐? 일어서라, 자를 건 자르고 어서 불회도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자군은 다름 아닌 용류옥이었다. 그는 지금 관념상의 변화로 인해 크게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숙야빈과의 대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현상으로써 그 이후로 이 곳 화풍장원에 머물게 되면서부터는 일로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동안 내상도 말끔하게 치유되었고, 은둔자로서의 생활은 용류옥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안락함을 선사했다. 하지만 와중에도 날이 갈수록 번민은 더욱 그를 세차게 조여들 뿐 좀체로 놓아주지 않았다. 인간의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되는 무림의 생리가 그의 내면에 혐오감을 불러 일으켜 놓았다면 화풍장원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은 그로 하여금 무림세계에 대해 강한 도피욕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는 어쩌면 용자군(龍自君)이라는 가명을 대면서 그 때 벌써 평범한 일개 청년으로 남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 아무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작으나마 아늑한 삶의 터전을 일구고 거기에서 안주할 수 있다면....... 가끔씩 이런 바램이 뇌리에 슬며시 찾아 들면 그의 가슴은 소년처럼 마구 설레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망령(亡靈)처럼 반드시 따라 붙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회도의 천명부(天命府)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져라고 기다리고 있을 천명 전사들의 얼굴이었다. 탁! 용류옥은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 놓았다. 술로 해결될 번민 같았으면 동이째로 들이 부을 수도 있으되 그렇지 못한 이상 제 맛도 나지 않는 술에 의지하고자 했던 자신이 웬지 더 비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술마시기를 포기한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문사는 내심 중얼거렸다. '자네는 자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네. 헛헛... 노부의 지나친 욕심이었지. 어찌 용을 좁은 연못에 가두어 두고자 고집을 피웠단 말인가?' 우문사는 눈길을 우문금지에게로 돌렸다. 이 노문사(老文士)의 눈에는 급기야 한 가닥의 연민이 어렸다. '얘야! 너를 어떻게 달래 주면 되겠느냐? 이 아비에게도 자군을 붙잡아 둘 만한 재간은 더 이상 없으니 말이다.' 그의 애끓는 심정이야 누가 알아줄지....... "떠나겠습니다." 용자군, 아니 용류옥은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우문사을 향해 말했다. 화풍선생 우문사. 그는 아까부터 독국(獨局) 중이었다. 그런데 무슨 묘수라도 연구하는지 몰아지경에 이른 듯 영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용류옥은 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하고 생각했다. "그럼......." 그는 공손히 포권을 취한 뒤, 소리없이 돌아섰다. "잠시만 기다리게." 문득 등 뒤에서 우문사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망연히 서 있는 용류옥을 지나쳐 어딘가로 걸어갔다. "자네도 따라 오게." 대답이 없자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내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 그러네." 용류옥은 선 자세에서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지는 모르나 사양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의 신세만 으로도 염치가 없거늘......." 우문사는 껄껄 웃었다. "허허허... 자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네. 하지만 그 점이라면 염려 말고 따라오게. 자네를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위해 주려는 것이니까 말이야." 용류옥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천하를 위해서......?' 그것은 정녕 뜻밖의 말이었다. 적어도 이 곳 곡지현에 은둔한 채 세상과 벽을 쌓다시피하고 살아온 우문사의 입에서는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물을 수도 없는지라 용류옥은 묵묵히 입을 다문채 우문사의 뒤를 따랐다. ③ 내실(內室)의 한 방. 이 곳은 우문사의 침실로써 용류옥으로서는 그와 한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에도 들어와 보지 못한 방이었다. 우문사는 용류옥에게 잠시 앉아 있기를 지시한 뒤, 벽장에서 하나의 긴 상자를 꺼내더니 선뜻 건네 주었다. "자네가 한 번 열어 보게." 용류옥은 내심 의아했으나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우문사의 말대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검(劍)......?' 그의 눈에 반짝 하고 이채가 스쳤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 속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물건은 화풍선생 우문사와 어울리지 않았다. 용류옥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몰랐습니다, 선생께서 이런 것을 지니고 계실 줄은."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는 우문사가 혹시 무림(武林)의 숨은 기인은 아니었을까 라고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우문사의 말을 들으니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나와는 연관이 없는 물건이니 괜한 추측 하지 말고 검이나 잘 살펴 보게. 그러면 노부가 자네에게 그 검을 주려하는 뜻도 알 수 있을 걸세." 우문사는 말을 마치자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용류옥은 중첩되어가는 의혹 가운데 검을 들고 면밀히 살펴 보기에 이르렀다. 그 검은 일종의 청강장검으로써 고색창연한 것이 벌써 예사로운 검은 아니었다. 손잡이는 상아(象牙)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검집은 무엇인지 모를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용류옥의 눈길을 끈 것은 검자루에 새겨져 있는 글씨였다. 그것을 읽는 순간, 용류옥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오오! 이것은......!" 그는 심지어 자신이 잘못 읽지는 않았나 싶어 손등으로 눈을 마구 부빈 후에 다시 그 글자들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그런 실수란 있을 수 없었고 용류옥의 눈에는 검의 이름인 세 글자가 선명하게 쏘아져 들어왔다. <천문검(天文劍)> 난세지검인 부백검과 함께 인구에 회자되어지는 전설의 검을 그는 마침내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일명 평화지검(平和之劍). 그것에 대해 전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천문(天文)이 의인(義人)의 손에서 그 빛을 발하면 태평시대가 오리라. "내 이제서야 자네에게 얘기지만......." 우문사가 말하고 있었다. 용류옥은 거의 넋을 잃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얼마간이나마 정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다만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때까지도 그는 나직한 우문사의 음성에서 웅웅거리는 심한 진동파를 느껴야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부백검이 부숴져 줄곧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다가 뜻하지 않게 평화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천문검을 수중에 거머쥐게 되었으니 말이다. 평화란 용류옥이 지금껏 얼마나 염원하던 것인가? "천문검은 지난 삼백 년 간 대대로 노부의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던 가보(家寶)일세.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달 전부터 그것이 울어대지 뭔가?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거늘." 우문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노부도 무척 놀랐네만, 자네가 본 장원에 오는 날 천문이 울음을 딱 그쳤다네." 그의 음성에 불현듯 탄식이 깃들었다. "노부를 비웃고 욕해 주게. 요점을 말하자면 나는 진즉부터 자네야말로 천문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 그러면서도 아직껏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았지. 웬 줄 아나? 노부는 자네가 본장에 남기를 희망했거든." "선생......." 용류옥은 우문사의 말처럼 그를 원망하기는 커녕 이래저래 감격하여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네는 보아하니 하늘이 안배해 두신 난세지웅(亂世之雄)일세. 어서 떠나게, 천문으로 난세를 평정해야지." 용류옥의 고개가 절로 꺾였다. "고맙습니다, 이 은공을 어찌 다 갚을지......." "허허... 이 사람! 은공은 무슨?" 우문사는 짐짓 너털웃음 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 생각이 나면 언제고 한 번쯤 이 곳에 들러 주게. 내 그 때에도 자네에게 후아주를 대접하겠네." '그럼 금지는......?' 이라고 용류옥의 눈이 묻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밝은 그 소녀의 마음에 그늘이 생길까 못내 걱정이 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찾는 듯 방 안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우문사가 그 기색을 알아 차리고 공허하게 웃었다. "허허허... 어떻게 살아가게 되든 다 제 운명인 게지.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자연히 치유될테고 말이네. 또 누가 알겠는가? 자네가 이 곳을 찾을 때면 금지가 내 외손자놈이라도 떡하니 안고 있게 될지." 용류옥은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지를 담박 알 수 있었다. "선생......." "어서 가게. 금지 일은 염려하지 말고. 그 아이도 아주 철부지는 아니더군. 자네가 떠난다니까 부담 주기 싫다며 자리를 일부러 피해 주었다네." 용류옥은 가슴이 울컥여 뭐라 더 말하려 해도 도저히 입을 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깊이 절을 하고 물러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우문선생, 잊지 않겠습니다. 만일 금후로 제가 난세를 평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들 부녀(父女)의 덕입니다.' 그는 이어 품 속의 천문검을 어루만졌다. 천문검. 전설이 일컫는 이 평화지검은 벌써 그와 뜻이 통한 듯 가벼운 진동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용류옥은 불회도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 동안 천명부 내에 별 탈이나 없는지.......' 그러나 그가 곡지현을 채 십리도 벗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곡류하(曲流河)를 따라 내려가던 그는 멈칫했다. 강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한 노인을 본 것이다. '여기서 무슨 낚시를 한다고?' 용류옥은 내심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의 낚싯대가 잠겨 있는 곳은 유독 물살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어 도저히 고기가 잡힐 만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뿐, 용류옥은 마음이 급촉한 나머지 그대로 노인을 지나치려 했다. 그야말로 천하를 건져 올려야 할 그가 고기나 잡으려는 노인과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그의 귀로 한 가닥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고얀 놈! 오랫 만에 상봉하게 된 어른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다니, 네 놈은 예의도 다 까먹었느냐?"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음성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용류옥의 굳어 있던 얼굴에 격동이 파문처럼 번졌다. "어르신!" 그가 황급히 돌아서며 외치는 찰나, 노인은 벌써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삿갓을 벗으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용류옥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준 몇몇 인물 중 한 명인 그는 새하얀 수염을 배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주름살 투성이인 안면에 반가운 웃음을 가득 떠올리고 있는 노인....... 광성자(廣星子)였다. 자칭 천하제일신복(天下第一神卜)이자 장춘오로(長春五老)에 속해 있는 인물이다. 그와는 북경성에서 첫 상면을 가지고는 이번이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이었다. 물론 느낌 상으로는 평생을 함께 한 것 이상이었지만. "어르신......." 재차 광성자를 부르는 용류옥의 음성은 어느 덧 그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감정의 흐름이 그런즉 어쩌겠는가? 그는 어쩌면 그 간의 정신적 고초를 이런 식으로 호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광성자는 빙그레 웃었다. "놈! 그래도 주름살 팍팍 늘려 가면서 기다린 보람은 있더구나. 노부는 네 놈이 화풍장원에 아주 눌러 앉아 버릴까봐 조마조마했었느니라." "그럼......?"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용류옥은 그만 콧등이 시큰해 와 고개를 아래로 푹 떨구고 말았다. '이 어르신께서는 그 동안 암중으로 계속 나를 지켜보며 호위해 주셨던 모양이로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지난 시간 동안의 갈등이 처음으로 부끄러워지는 한편,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고 자문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말로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광성자가 그의 생각을 실제로 입증해 주었다. "어리석은 놈! 무얼 그리 시달렸더냐? 누가 널더러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다 지라고 했기에." 천하에서 그보다 더한 위로는 없었다. 그 말인즉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용류옥을 향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광성자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장춘오로의 일원들인 지왜반노귀나 신검노가 그러하고 나아가서는 천명부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인물들이 그러할 것이었다. 광성자가 용류옥의 손을 잡았다. "노부는 원래 낯이 간지러워 대놓고 칭찬하는 짓 따위는 못한다만 아무래도 네 놈만은 기특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구나. 그래, 잘 돌아왔다." "어르신......." 광성자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가볍게 탄식했다. "모름지기 싸움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자신과의 싸움이니라. 그것은 천군만마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일보다 더 어렵게 마련이지. 그런데 너는 너를 이겼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 말씀... 크게 힘이 됩니다." 사실이었다. 어느 새 그는 심중에 깊게 새기기 위해 그 말을 되뇌이고 있었으니까. - 자신과의 싸움에서 너는 너를 이겼다, 용류옥....... 광성자가 잡았던 손을 놓고는 그를 채근했다. "어서 가자, 시간이 없구나." "어디로 말씀입니까?" 용류옥의 물음에 광성자는 낚싯대를 챙기며 대꾸했다. "따라와 보면 알 것이야." "알겠습니다." 휙! 휘휙! 두 사람은 차례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용류옥은 한 번 도약에 오십 장이나 날아가는 광성자를 보고는 뭔가 급박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무슨 일로 저렇게 서두르실까?' 이것은 광성자의 모습과 더불어 가물가물하게 산등성이를 타넘고 있는 용류옥의 읊조림이었다. ④ 육반산(六盤山). 이 산의 일부인 마운애(摩雲崖)는 깎아지른 듯 험난했다. 그러나 아름답기 그지 없다. 구름이 마운애를 스치듯 흐르는 경관이란 흡사 신선계(神仙界)를 보는 듯하다. 마운애의 중간부에는 하나의 동굴이 있었다. 용류옥. 그는 광성자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향연(香煙)이 가득 메워져 있는 그 곳에는 뜻밖에도 낯익은 두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아마도 용류옥과 광성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 두 노인을 보자 용류옥은 광성자를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반가움부터 왈칵 치밀었다. '신검노 어르신, 게다가 지왜반노귀어르신까지......!' 장춘오로라는 이름으로 묶여져 있었지만 그들이 이처럼 같은 자리에 모여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용류옥은 심중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내심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인가? 이 침중한 분위기는.' 그의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시선을 신검노와 지왜반노귀로부터 더 안쪽으로 돌렸을 때, 그는 향로에서 피어 오르는 자욱한 연기와 함께 또다른 두 명의 기인(奇人)이 반듯한 자세로 좌화(坐化)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저 분들은......?' 그들은 일남일녀(一男一女)였다. 그 중 남자는 연로한데 비해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로써 일신에 곤룡포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매우 위맹하고 강직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인은 중년쯤 되어 보였는데 전신에서 고결한 기품이 넘쳐 흘러 도시 속세(俗世)의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 두 사람은 호흡이 끊긴 것은 분명했으나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대하자 용류옥은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혹시 저 두 분이 말로만 전해 듣던 고룡왕(古龍王)과 태태모모(太太母母)가 아니실까?' 광성자가 곁에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허허...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더니, 당신네들은 그래서 그 많은 세월을 흘려 보내고 이제야 맺어졌소?" 그의 애도는 이렇게 이어졌다. "고룡, 그리고 모모, 장춘곡에서야 서로 어떤 식의 인연으로 부대꼈건 저승에서는 부디 두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결실이 있기를 바라오." 광성자는 지인(知人)들의 어긋난 사랑과 동시에 이루어진 듯한 그들 두 사람의 죽음을 모두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가 향로에 새로운 향을 꽂고 있는 사이, 용류옥은 절로 숙연해지고 말았다. '좌화하신 고룡왕과 태태모모도 그렇지만 이 다섯 분들은 전부 각별한 우의(友誼)를 가지고 계셨나 보구나.' 용류옥이 상상한 그림은 전체를 위해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사랑을 부정해온 두 남녀와 그런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염려를 떨치지 못했었던 나머지 세 친구 등이었다. 물론 그 가정이 꼭 사실이란 법은 없었지만 용류옥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두 기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후배 용류옥, 두 분 어르신을 뵈옵니다." 그것은 사자(死者)들에 대한 예의이자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기도 했다.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세 사람, 즉 장춘삼로(長春三老)는 그저 그가 하는 양을 지켜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류옥은 지왜반노귀와 신검노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이배 반의 절을 하고는 지왜반노귀를 바라보았다. '으음, 몇 년 전 빙폭에서보다 더 늙으신 것 같구나.' 그는 웬지 가슴 한 귀퉁이가 아릿해지는 기분이었으나 이를 내색치 않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르신, 정말 오랫만이군요." 지왜반노귀도 추(醜)한 안면에 웃음기를 담았다. "녀석! 그 동안 많이 컸구나." 용류옥은 정감이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음성을 듣게 되자 또 한 차례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르신......." 이 때, 신검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이야, 시간이 없구나. 어서 거기 앉거라." 용류옥은 광성자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은 바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그는 비로소 세 노인의 얼굴에 이상할 정도로 조급해 하는 기색이 감도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용류옥은 동굴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신검노가 이번에는 고룡왕과 태태모모를 바라보며 나직히 탄식했다. "고룡, 모모, 정말 아쉽구려. 이 자리에는 필히 그대들도 함께 있어야 했건만 일은 다 만들어 놓고 먼저 가다니......." 물처럼 담담하던 그의 눈에 뿌연 습막이 어렸다. "하지만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오. 이 아이는 여전히 우리 다섯 사람 모두의 희망이오. 남아 있는 세 늙은이들이 그대들의 몫까지 이루고자 최선을 다해 보겠소." 신검노는 말을 마치자 고개를 돌려 용류옥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말마따나 완강한 의지와 더불어 무한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용류옥은 그 눈빛을 접하자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 어르신,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예상했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야, 너는 지금부터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장춘백장경(長春百藏經)을 익혀야 한다." 용류옥은 긴장으로 얼굴을 굳힌 채 잠자코 있을 따름이었다. 신검노만이 말을 계속했다. "강호무림 현황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네가 세운 천명부가 지금 위기에 몰려 있느니라. 너는 마록이란 아이가 불회도를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용류옥은 아연실색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신검노는 되도록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마록이란 아이는 혈사해(血死海) 출신이다.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그를 꺾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 말고도 무슨 일이... 또 있습니까?" 묻고 있는 용류옥의 음성이 무척이나 흔들렸다. "그렇단다. 천축(天竺) 마승(魔僧)들의 집단인 욕망궁(欲望宮)도 불회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용류옥은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라도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중원무림은 완전한 멸망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신검노의 말은 더욱 더 충격적이었다. "그 곳 파양호에서 강호무림의 운명이 결정될 것 같구나. 천명부가 극복해 내기에는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하다." "아아!" 용류옥은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결국... 끝장이라는 건가......?' 절망에 빠져 있는 그에게 신검노가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네가 이렇게 건재하지 않느냐?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천하에서 오직 너 한 사람 뿐이다." "으음......." "이 말은 사족(蛇足)이다만 너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신에 걸려 있는 인과(因果)가 그러하므로." 용류옥은 그 말의 숨은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욕망궁의 일부인 마화궁의 궁주가 모친인 애향령이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천축에 침투시켰던 흑막이호로부터 비밀 전서를 통해 전달받은 정보 중 하나였다. 흑막이호는 또 마화궁이 무산의 신녀봉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곳에 무림왕 용화천과 용백검이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알려온 바 있었다. 신검노는 보다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에게 주어진 시일은 불과 한 달여 밖에 없다. 너는 그 사이에 장춘백장경을 연성해야만 한다." "그,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네 의지와 각오일 뿐이다." 용류옥은 고개를 숙였다. "모쪼록 신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신검노는 눈으로 고룡왕과 태태모모를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은... 너에게 자신들의 원정내단(元精內丹)을 취하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대의(大義)의 실현을 위해서 작은 보탬이나마 되고 싶다고. 정녕 고마운 일이지." "흐음......!" 용류옥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탄성을 발했다. 무림의 내가고수들이 꾸준히 내공을 쌓아가다 보면 궁극에 가서는 단전(丹田)에 일종의 단주(丹珠)가 형성된다. 그것이 원정내단이다. 말하자면 한 명의 고수가 평생을 바쳐 이루어 놓은 내공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원정내단을 지니게 될 정도면 그 사람은 생전에 이미 반선지경(半仙之境)에 이르게 되며 좌화한 후에도 그 시신이 금강불괴가 되어 영구 보존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정내단이 당사자의 몸 안에 머물고 있을 때의 얘기이지, 체외(體外)로 배출되면 살아 있는 경우이던 죽은 시신이던 즉시 가루로 화하고 만다. 따라서 용류옥은 고룡왕과 태태모모에 대해 경외감을 갖는 한편, 그들의 선물이 향후로 자신과 나아가서는 무림 전반에 미치게 될 영향을 생각하며 감읍해마지 않았다. '부디 내 노력이 이 분들의 염원을 이룩할 수 있기를.......' 그는 몸을 일으켜 육(肉)의 집착에서 일탈해 버린 두 기인에게 다시금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잠시 후. 신검노가 엄숙하게 말했다. "장춘백장경은 장춘곡의 천 년 무공을 집대성한 것이다. 우리 오로들도 그 중의 일부만을 익혔을 뿐이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부터 폐관에 들어가야 한다. 장춘백장경은 노부가 연공관(練功關) 안에 옮겨다 두었다." "알겠습니다." "연공관 안에는 그 외에도 음식을 대신할 익곡단(益穀丹)과 한 달 분의 식수를 준비해 놓았다. 노부들은 밖에서 너를 위해 호법(護法)을 서겠다." 이쯤 되자 용류옥은 마음이 들뜨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장춘삼로를 향해 말했다. "그럼 세 분 어르신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지왜반노귀가 괴소를 흘렸다. "흐흐... 녀석, 좋아하지 말아라. 한 달 후에도 네 놈이 나오지 않으면 아예 연공관을 무너뜨려 버릴 테니까." 용류옥은 빙긋 웃었다. "어르신께서는 그 날 제 주린 배를 채워 줄 음식이나 많이 준비해 주십시오." "뭐, 뭣? 이런 고얀 놈 봤나? 이 차제에 묵은 빚이라도 받아 내겠다는 것이냐?" "설마요, 저는 한 달여를 계속 봉양해 드렸지만 어르신께선 한 달 후, 한 끼 분만 수고해 주시면 됩니다." "흐음! 듣고 보니 별로 나쁘지는 않은 거래로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보기보다 매우 선량한 사람이거든요." "우에엑!" "하하하......!" 두 사람의 농담에 침울했던 분위기는 금세 훈훈해졌다. 용류옥은 연공관 안으로 들어갔다. 장춘백장경은 신검노의 말마따나 장춘곡 천 년 무학의 정화(精華)였다. 그것은 실로 오랜 시간에 걸친 인연과 시험 끝에 마침내 그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과연 그는 장춘백장경을 한 달 사이에 깨우칠 수 있을지? 장춘곡의 장춘십로 중 무공수위가 가장 높다는 구천만불왕(九天萬佛王)조차도 장춘백장경 상의 무공은 불과 오성(五成)밖에 익히지 못했다고 한다. 천운(天運), 그리고 고룡왕과 태태모모의 원정내단을 흡취한 용류옥의 자질에 한 번 맡겨볼 일이다. 제28장 부자(父子) ① 파양호( 陽湖).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 중 하나로써 그 수려한 경관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형언할 필요가 없다. 어느 시대의 어떤 시사집(詩詞集)을 들추어 보아도 줄줄이 열거되어 있으며 그것도 하나같이 찬미의 대상이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 곳에는 벌써 한 달 째 전운(戰運)이 짙게 덮혀 있어 누구도 한가롭게 자연경관이나 논하고 있을 처지가 못되는 것이다. 선단(船團). 유선형의 선체에 삼각형의 돛을 단 전선(戰船)들이 드넓은 파양호를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기세도 무시무시했지만 그 숫자는 대충 줄잡아도 백여 척이 넘을 것 같았다. 그들 선단은 지금 하나의 섬을 포위하고 있는 중으로 경계가 어찌나 삼엄한지 섬으로부터 밖으로 빠져 나가는 일이란 설사 나는 새일지라도 불가능할 듯 했다. 선수(船首)에는 개중에서 가장 큰 전선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돛대 위로는 무황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이들 선단은 무황성의 주전력이었던 것이다. 호반(湖畔)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섬 주위로 근 삼십리가 전부 안개로 뒤덮혀 있어 지척도 분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섬 근처의 수역이 시시각각 수류가 변해 소용돌이를 이루는 것도 여전했다. 애초에 명명되었던 죽음의 수역, 그 이상이라는 얘기다. 이로 인해 무황성의 선단도 처음에는 크게 낭패를 보았다. 멋모르고 접근했다가 짙은 안개와 소용돌이에 휩쓸린 나머지 암초에 부딪쳐 배가 난파되는 등 불상사가 잇달았다. 이 때에 수몰(水沒) 되어버린 배가 무려 열 척이라던가? 하지만 그 직후에 당하게 된 난변에 비하면 그것은 조족지혈이었다. 밤이면 의례껏 무성한 갈대 사이로 쾌속선이 나타나 근역을 누비며 화공(火攻)을 마구 펼쳤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무황성의 전선들은 초장(初場)부터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점은 무림황제인 마록를 격노하게 만들어 오늘과 같이 물샐틈 없는 경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섬 전체를 초토화시켜 버리겠노라고 공언을 했다는데....... 그 섬의 이름이 바로 불회도였다. 밤이 되었다. 쏴아아아--! 바람결이 거칠어지면서 파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러나 무황성의 선단이 과시하는 위세란 그 어떤 현상에도 동요되지 않을 듯 당당하기만 했다. 선수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범선(帆船). 갑판 위에 태사의를 가져다 놓고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그는 곤룡포을 입었으며 화려한 금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의 좌측에는 절세의 미녀가 바람결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한 폭의 그림인 양 서 있었다. 또 뒤쪽으로는 일신에 혈삼(血衫)을 입은 인물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곤룡포의 청년이란 다름 아닌 마록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황제, 그는 강한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는 짙은 안개를 응시하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도 저 안개를 걷어낼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러자 옆에 있던 미녀, 즉 화중화 항예가 말했다. "저것은 보통 안개가 아니에요." "미진(迷陣)이라는 것쯤은 본좌도 알고 있다." 마록은 눈빛을 번뜩였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고작 진법(陳法) 따위가 나 마록의 발을 묶어 둔다는 점이다." 항예는 고개를 저었다. "경시하면 안돼요. 저 진세 때문에 우리 측은 벌써 알게 모르게 스물두 척의 전선과 이백오십 명의 고수를 잃었어요." 마록은 안면에 은은히 살기를 드러냈다. "본성에 인물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겨우 천명부 놈들이 설치해 놓은 진 따위를 파해하지 못해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도 섬에 상륙하지 못하다니." 화중화 항예는 그런 그의 곁에서 오히려 생긋 웃었다. 그녀의 기세는 이전과는 또 달라져 있었는데, 그것은 이번 출정에서 여러 가지 활약상을 보임으로써 마록의 신임을 어느 정도 회복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끝없이 물고, 물리는 이들 두 남녀의 관계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는 그들 자신도 아직 장담하지 못했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은 방금 전에 그 방면의 전문가가 도착했어요. 천첩이 은밀히 초빙했었죠." 마록이 흠칫 놀라며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전문가?" "네, 귀기자(鬼機子)라는 별호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들리는 말에 의하면 기문진학에 있어서는 제 일인자라더군요." "으음......." 마록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오랫 동안 혈사해에 묻혀 있던 그로서는 중원에서 항예가 이룩해 놓은 기반을 따라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그는 쓰던 달던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어디 있는가?" "호호호... 이 배에는 있지 않아요. 벌써 소선(小船)을 타고 나갔죠. 아마도 지금쯤은 풍향과 수류, 암초군 등을 열심히 측정하고 있을 거예요. 머지않아 불회도를 에워싸고 있는 진세를 파악해 낼 거구요." 마록은 굳은 어조로 말했다. "내 약속하지. 그가 만일 파진(破陣)에 성공한다면 그에게 황금 일천 관을 내리겠다." 항예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굉장한 하사금이군요? 그도 무척 기뻐할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호호호... 기다려 보세요, 잘 될 테니까요." 마록. 그는 이래저래 부아가 치밀었다. 한 달 간이나 불회도를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천명부는 건드리지도 못했으니 그 동안 답답했던 심경과 헛되게 낭비된 군비(軍備)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어떻게든 짓밟아 놓고만 싶었던 화중화 항예로부터 역으로 도움을 받게 되고 본즉 자존심마저 크게 상처를 입어 한 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그는 심중에 꾸역꾸역 차오르는 분노를 모두 하나의 대상에게 집약시키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천명부였다. 마록은 짙은 안개와 더불어 파도소리가 요란한 전면을 주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천명부! 진세만 걷혀 봐라. 그 때부턴 나 마록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겠다. 어느 한 놈이고 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도륙해 버리리라.' 그런데 그 때였다. 펑--! 좌측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폭음이 울리더니 화광(火光)이 번쩍 일어났다. "으아아악--!" "막아라! 기습이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폭음 또한 단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들려왔다. 그에 따라 곳곳에서 일어났던 화광도 삽시에 크게 번져 나갔다. 마록은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놈들의 짓이냐?" 그러자 경비를 서고 있던 한 명의 혈의인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속히 전황을 보고하라 !" "알겠습니다." 잠시 후. 다른 전선들과의 교신을 마친 혈의인이 보고했다. "역시 놈들의 기습입니다. 제 칠십이호선이 당했습니다." "놈들은?" "전선에 화약을 던지고 달아 났다고 합니다." "멍청한......!" 마록은 분성을 터뜨렸다. 벌써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는 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경계망을 아무리 강화시켜도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항예가 곁에서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귀기자가 파진만 하면 반대로 불회도 전체를 숯으로 만들 수 있을테니까요." 마록은 음산하게 뇌까렸다. "어디 이르다 뿐인가? 먼저 불회도를 불바다로 만든 다음 뛰쳐 나오는 놈들은 전부 토막을 내 고기밥으로 만들겠다." 그는 성격상 허언(虛言)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황이 닿는다면 분명 그렇게 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관건은 귀기자라는 인물이 쥐고 있었지만 그가 불회도를 감싸고 있는 미리대진을 파해시킨다면 정말로 천명부가 초토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천하무림의 운명이 파양호에서의 일전(一戰)으로 결정되리라는 것은 무림인들이면 누구나 수긍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천하의 이목은 일제히 파양호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림정세의 큰 흐름을 그 때까지도 절반 밖에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겁(劫)이 태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최후의 집결지는 파양호이되 발원지는 다름이 아니라 사천(四川)의 촉지(蜀地)였다. ② 무산(巫山) 신녀봉(神女峯). 사시사철 신녀봉을 감싸고 있던 신비한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마화궁(魔花宮)이 베일을 벗고 화려한 본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무서운 마의 발톱과 함께. 뺄리리리...... 띠잉... 띵....... 듣는 이로 하여금 심신이 마비되는 정도의 충격을 입게 할 기묘한 음률이 마화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일단의 무리들이 궁 안으로부터 밀려 나왔다. 그들은 일신에 붉은 법의(法衣)를 걸친 라마승들로써 모두 발이 전혀 땅에 닿지 않는 놀라운 신법을 펼치며 신녀봉 아래로 떼지어 날아 내려갔다. 개중 열 명의 라마승이 하나의 교자를 둘러 메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욕망궁주인 적천대라마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이 곳에 처음 등장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기세도 여전했으며 심지어는 적천대라마의 비대한 몸뚱이가 시각에 부담을 주는 현상도 예전과 똑같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때와는 목적의 경중(輕重)이 다르다는 점 뿐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마화궁의 시찰 정도에 그치던 것이, 지금은 본격적인 침략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그들은 전진했다. "으하하하핫......! 마침내 때가 왔도다, 파양호를 기점으로 본궁주가 전 중원을 접수하는 날이......!" 적천대라마의 능숙하지도 못한 한어(漢語)가 산중에 기나긴 메아리를 울릴 때, 그들 욕망궁의 마승들은 거대한 붉은 구름덩이가 되어 남쪽으로 분주히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마화궁주(魔花宮主) 애향령.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교소성이 터져 나왔다. "호호호홋......! 이제야말로 중원무림은 본궁의 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 "향령......." 무림왕(武林王) 용화천은 절망한 나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득전(說得戰)이 좌초된 것도 벌써 옛말이거니와 그로서는 더 이상 무엇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늙어 있었다. 무공을 스스로 전폐시킨 후로는 과거의 위용 넘치던 그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단지 이마에 주름살이 그려진 초로(初老)의 인물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깊은 탄식만이 그의 마른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향령, 부디 정신 차리시오. 당신의 부친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이 어찌 중원을 등질 수가 있단 말이오?" 애향령이 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빛은 비수보다 더 섬뜩했다. "닥쳐!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아직도 내 아버님을 들먹이는 거지?" 그녀는 통한이 서린 음성으로 계속 부르짖었다. "중원! 중원이 내게 무얼 해 주었지? 내가 일신의 모든 것을 잃고 걸인이 되어 떠돌 때에도 누구 하나 내게 인정을 베푼 사람은 없었어. 호호홋! 나는 욕망궁 사람이야." "향령......!" 용화천은 전신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어떤 말을 해도 늘상 그 끝은 자신의 죄과(罪過)를 무섭게 추궁 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그로서는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그 이유는 애향령의 눈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이지(理智)의 빛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즉 지나치는 현상들을 모두 느끼기는 하되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애향령의 판단력은 정확히 말해 적천대라마에게 거두어지던 그 순간에 중단되었다. 그 뒤로는 직접 판단을 내릴 일도 없었다. 그가 지시하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만일 적천대라마가 잠자리 수청을 들라고 해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비대함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버리자 그 스스로 여색에 흥미를 잃어 그녀를 첩실이 아닌 양녀로 삼았다. 어쨌거나 마성(魔性)의 지배에 놓이게 됨에 따라 이지를 상실해 버린 애향령의 의식은 현재를 살지 않고 계속 과거 속에서 존재하며 원한만을 되씹고 있었다. 무림왕 용화천의 배신도, 그가 부친인 애환령을 살해한 것도, 또 그녀 자신이 뼈아픈 슬픔과 낭패를 겪고 있는 것도 모두 그녀에게는 이십여 년 전의 과거지사가 아니라 눈앞에 당면해 있는 현실이었다. 그녀가 친아들인 용류옥을 그처럼 학대하고 증오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으면 틀리지 않았다. 용화천. 그는 전신에서 힘이 모두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괴감으로 짓눌리다 보니 목숨이 붙어 있어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애향령은 계속하여 음독한 눈빛을 흘리며 말했다. "두고 봐, 나의 양부께선 반드시 중원무림을 수중에 넣으실 테고 나는 그 분의 뜻을 이어 당신이 세운 무림성보다도 열 배는 더 완벽한 패도천(覇道天)을 그 곳에 이룩할 거야." 그 말을 들으며 용화천은 분노보다는 비감이 앞섰다. 왜냐하면 당금의 마화궁주를 놓고 그는 과거의 순진하고 아름다운 여인 애향령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오오! 그녀가, 그녀가 이 용화천으로 인해.......' 그는 작금에도 애향령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천하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동정하는 인간이 용화천이리라. '하늘이여!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말기를.' 마침내 애향령은 떠났다. 마화궁의 궁주로써 전 궁도(宮徒)들을 이끌고는 적천대라마가 간 방향을 따라 남쪽으로 가 버린 것이다. 그녀가 향후로 어떤 짓을 벌일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텅 빈 마화궁에서 무림왕 용화천은 절규했다. "우우! 하늘도 이 몹쓸 인간은 벌하지 않는구나. 죽는 날까지 스스로에게 형벌을 가하라고 말이다." 그의 노안에서는 어느 덧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스슷--! 그에게 방문객(訪問客)이 있은 것은 실로 뜻밖이었다. 야망을 위해 인륜마저 저버렸던 일그러진 영웅 용화천, 그가 이처럼 삶의 마지막 고비에서 홀로 몸부림 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햇빛을 등지고 환영처럼 문 앞에 나타난 그 인물을 용화천도 처음에는 잘 알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최근 들어 무공을 잃는 바람에 시력이 현저하게 감퇴된 탓이었다. "아버... 님......?" 이는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린 용화천의 입에서 울려 나온 음성이었다. 그 인물은 놀랍게도 아주 어린 시절에 장군부(將軍部)에서 보았던 부친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용화천은 곧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아직 죽지도 못했고 설사 죽었대도 나 같은 죄인이 아버님과 같은 세계에 들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의 생각은 맞았다. 좀더 자세히 보니 그 인물은 자신의 부친이 아니었다. 단지 무척 닮아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용화천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럼 너는......!" 그 직후, 그는 상대방의 입에서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 그 인물은 무릎을 꿇고 있으되 용화천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 인물의 격동에 찬 음성이 들려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제 이름은... 유옥(柳玉)입니다. 아버님께선 소자를... 처음 대하시지만 저는 아닙니다." "우우... 너를... 너를... 향령에게서 들었......." 하려던 말도 다 마치지 못하고 용화천은 충격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기어이 무너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님......." 나타난 인물, 즉 용류옥은 혼절해 있는 부친을 안아 들며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부(父)와 자(子). 그들의 상면은 당장 기쁨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지난 시간들이 가져다 준 상처가 너무도 크고 깊었던 것이다. 무림왕 용화천은 기진한 모습으로 침상에 반쯤 누운 자세였고, 용류옥은 그 옆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피차 흉중에 많은 말을 품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또한 그것을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 놓지 못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용화천이 먼저 입술을 떼었다. "유옥." 그리고는 침묵이다. 이번에는 용류옥이 그와 똑같은 심정이 되어 말문을 열어 본다. "부르셨거든 말씀을 하셔야지요." 용화천은 멈칫거리며 물었다. "내가 말을 하면... 마다 않고 들어 줄 수는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후후... 너는 지금 내가 어떤 죄악들을 행한 인간인지나 알고서 하는 소리냐?" 자조와 회한, 게다가 절망감이 뒤엉킨 그 음성에 용류옥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후회하고 계시는지도." "오오! 이 또한 형벌이로다......." 용화천은 그답지 않게 소리죽여 오열했다. 이것은 비단 그의 심기가 이전에 비해 약해져서만은 아니리라. 용류옥은 말했다. "부디 소자에 대해서는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를 모르셨던 만큼 제게는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나를 조롱하지 말아라. 내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저 또한 아버님을 조롱하지 못합니다." 용류옥은 말과 함께 부친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째서?" "그것을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어째서냐면, 이십여 년 간을 목메이게 그리워 했던 제 아버님이시니까요." 그가 지닌 감정의 벽이 무너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친의 가슴에 몸을 묻었다. "아버님!" "옥아(玉兒)......!" 용화천도 어느 덧 그 격류에 휘말려 자신의 아들을 세차게 부둥켜 안고 있었다. 이 때부터는 용류옥이 부친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그것은 생전 처음 안겨본 부친의 가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그 질기고도 오랜 그의 고독은 이로써 충분하게 보상을 받고 있었다. 두 부자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 안은 채 눈물로써 많은 말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정지되었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용류옥은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부친을 향해 나직히 말했다. "아버님, 소자는 가야 합니다." 용화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양호로 말이냐?" "그렇습니다. 창주도에 있던 용가(龍家)의 가신들과 무림의 마지막 군협들이 그 곳의 불회도에서 최후의 대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원무림의 사활(死活)이 걸린......." 용류옥의 말에 그는 탄식을 발했다. "으음! 정말 면목이 없구나. 이 아비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다 떠맡아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버님이 안배해 두셨던 창주도라는 기반이 없었다면 그조차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용류옥은 민망해 하는 부친에게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자, 아버님께서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현재도 무림에서 아버님의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모습을 보이시면 아마 군협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용화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가지 않겠다." "왜......?"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들의 눈을 보자 그는 힘주어 말했다. "내 아들인 네가 가지 않느냐? 나는 너를 믿는다." "아버님......." 용류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곧 무림왕 용화천이 자신의 전부를 정식으로 아들인 용류옥에게 인계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면 혈연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또 한 존재가 있다. 용류옥은 서슴치 않고 그에 대해 말을 꺼냈다. "먼저 백검을 만나고 싶습니다. 실은 제가 행하고 있는 지금의 모든 것들이 그의 몫이었습니다." 용화천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 일은 잊거라." "네?" "나는 검아를 데리고 이 길로 어디로든 떠날 작정이다. 그 아이의 곁에는 이 아비 밖에 없다. 이전에 아비 노릇을 너무 못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지켜주고 싶구나." 용류옥은 잘라 말했다. "그건 안되실 말씀입니다." "왜지?" "어머님께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제게도 역시 또 한 분의 어머님이 되시지요. 저를 백검으로 아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 말인즉 천음선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용화천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종내에는 수긍을 표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구나. 그러나 그 아이가 되어있는 꼴을 본다면 그녀가 상심을......." 용류옥은 빙긋 웃었다. "제게 방도가 있습니다. 백검의 정신을 되찾게 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손상된 공력도 회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용화천은 흠칫 했다. "무슨 뜻이냐?" "소자, 인연이 닿아 장춘도(長春島)의 진전을 얻었습니다." "오오! 이렇듯 다행스런 일이......." 용화천은 처음으로 희색을 보였다. 용백검의 정상회복과 나아가서는 무림구원이라는 희망이 그를 기쁨이라는, 아주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정서에 포함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는 감격에 몸을 떨며 새삼 용류옥의 어깨를 안았다. "옥아, 네가 이 못난 아비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구나." 용화천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망이나 회한 등과는 다른 의미에서였다. ③ 고오오오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불회도를 죽음의 수역으로 만든 원인 중 하나였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제거되고 있었다. 이에 기다린 만큼 가장 열광하는 한 인물이 있었다. "하하하핫......! 드디어 성공이구나. 황금 일천 관이 아깝지 않은 일이로고." 마록이었다. 그가 거대한 범선 위에서 앙천광소하고 있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웅후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군마들이여, 상륙하라--!"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무황성의 전선들은 일제히 파도를 일으키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무림황제 마록의 명령에 따라 불회도에 대상륙작전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기문진학의 대가라는 귀기자(鬼機子)는 마침내 불회도에 펼쳐져 있던 진세를 파해시켰고 덕분에 이들에게는 더 이상 무엇도 거칠 것이라곤 없었다. 쏴아아아아--! "와아아아--!" 전선 일백 척이 동시에 빠른 속도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기세란 가히 태산이라도 그대로 뭉개버릴 듯 했다. 이 때, 불회도를 호위하고 있던 갈대숲 속에서 십여 척의 범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천명부의 선박이었다. 무황성의 전선이 섬으로 상륙하게 되면 전황은 더 볼 것도 없이 끝장나 버린다. 따라서 그들은 미봉책이나마 수전(水戰)을 치르기 위해 출범한 것이었다. 쏴아아아--! "와아아아-- 쳐라--!" "이 땅에서 마도의 무리들을 몰아내라--!" 천명부의 군웅들은 애초부터 전세가 턱도 없이 기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까지도 절망하지 않은 것은 진세 따위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장렬한 전사(戰死)에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천명부주인 용류옥의 실종으로 인해 사기가 크게 저하되기도 했으나 그 면에서라면 그들은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부주께서는 돌아 오신다! 그리고 죽든 살든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마침내 무시무시한 수전이 벌어졌다. 그것은 수상전(水上戰) 치고 무림사상 유래가 없는 대혈전이었다. 꽈르르르릉--! 도처에서 불화살이 날고 화포가 터져 폭음을 울렸다. 그러더니 선박들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서로 충돌했다. 꽈꽈꽝--! 이를 필두로 쌍방의 고수들은 각기 상대의 배로 훌쩍훌쩍 뛰어 올라 도검(刀劍)을 휘두르며 혈전을 벌였다. 그것은 양자가 다 어느 한 개인의 생명 쯤을 지키고자 벌이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원무림이라는 거대한 땅을 가운데 놓고 마지막 승부수를 내걸고 있는 것이었다. 무림 최후의 보루인 천명부. 그들은 전력상 무황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같이 분투(奮鬪)했다. 부족한 인원과 무학의 모자람을 의기로 메워갔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오랫 동안 훈련을 쌓아온 덕분에 수전에 능했으며 근역의 수로(水路)를 환히 알고 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큰 잇점으로 작용했다. 이런 점들을 십분 활용하니 그래도 싸움은 어느 정도까지는 팽팽한 국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창주도 출신 고수들의 무위가 두드러졌는데 그들 중에서도 천풍이십팔숙의 활약상은 발군(拔群)이었다. 적어도 이들이 펼쳐내는 천풍수라파황대진에는 무황성의 고수들도 거개가 맥을 못추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드넓은 파양호반. 무림의 정기를 수호하기 위해 이 곳에서는 천명부의 전사들이 생명을 초개처럼 내던지며 젊음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상혈전은 장장 삼 일을 주야로 계속되었다. 천명부의 전사들이 일사불란한 조직체계와 작전으로써 십 배가 넘는 전력을 지닌 무황성에 끈질기게 버텨온 것이었다. 그 삼 일이 지난 후. 천명부의 선박은 불과 세 척을 남기고 있었다. 반면에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적선(敵船)은 무려 수십 척에 달했다. 그러나 감히 이를 비웃을 자, 그 누구인가? '주군! 어디에 계십니까? 속히 와 주세요.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죽습니다.' 백하연. 창주도의 가신 백충량의 손녀인 그녀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호반 위에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용류옥의 사랑을 받는데는 실패했으나 그 대신 이후에 있은 각고의 노력으로 인해 절대에 가까운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 여전사(女戰士)였다. 현재 불회도 내에는 규모야 어떻든 나름대로 또 다른 진지(陣地)가 구축되어 있고 천명부의 십대장로 중 일인이자 그녀의 조부인 백충량도 거기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써 과감하게 조부와도 따로 떨어져 제 일진인 수상전에 스스로 가담했던 것이다. 아무튼 현재 백하연의 주위는 온통 불바다였다. 애초부터 승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세 척 밖에 남아있지 않는 아군의 범선들은 침몰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두어 시진이면 꼭대기까지 물에 잠길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사방을 첩첩이 에워싼 상대의 전선으로부터 아직도 쉴 새 없이 불화살이 날아 들고 있었으니....... 검수(劍手)인 그녀는 피묻은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아아! 더 이상은 버틸 기력이 없다.' 어느 덧 정신마저 가물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였다. "허허허... 아이야, 실로 장하구나. 이젠 그만 쉬거라."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자애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백하연은 혼미 중에도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각기 개성이 달라 보이는 세 명의 노인들이 막 허공으로부터 날아 내리고 있었다. 그 중 음성의 주인인 듯한 한 노인이 쓰러지려는 백하연을 부축했다. 그녀는 그 노인의 품에 안기게 되자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다. 그들 세 명의 노인이란 다름 아닌 장춘삼로였다. 육반산을 떠나 온 그들이 마침내 이 곳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스스슷--! 백하연을 받아 안은 사람은 신검노였다. 그는 백하연을 안고 선실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지왜반노귀와 광성자는 신형을 날려 각기 좌우측의 범선으로 건너 뛰었다. 이윽고 그들이 싸움에 가담하자 전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우르르르-- 콰쾅--! 장춘삼로의 무공이라면 가히 선경에 접어 들어 있는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장력에 의해 무황성의 전선은 마치 가랑잎처럼 속속 뒤집어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비명이 곳곳에서 잇달아 터져 나왔다. 그것은 무황성의 고수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가며 질러댄 소리였다. 하지만 맹위를 떨치던 장춘삼로의 공세도 적선을 스무 척 쯤 파괴시키고 나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들도 골육을 가진 인간인지라 진력이 고갈되어 버리니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단 삼 인이 이룬 성과로써 그 이상을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이었고 당사자들도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게 아니라 얼마 간이라도 지연시키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황이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얘기다. 특히 귀기자라는 인물은 진법은 물론 병술에도 달인이었다. 그의 병술로 인해 천명부의 범선들은 이미 퇴로마저 완전히 차단 당하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이 자욱한 자연의 안개와 함께 파양호반을 조용히 비추기 시작했다. 그 시각, 불회도를 향해 소리없이 미끄러져 오는 한 척의 범선이 있었다. 그 배는 지옥도를 이룬 수전과는 무관했다. 천명부의 소속도, 무황성에 속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범선은 매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앞머리가 유독 뾰족하고 갑판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옆구리에는 무슨 용도에서인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다. 괴선은 빠른 속도로 수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이어 그 배는 화광과 검은 연기가 충만한 수역에 이르자 행진을 멈추었다. 덜컹! 덜컹......! 갑작스레 배의 옆구리에 뚫려 있던 구멍이 커지는가 싶더니 그 곳으로부터 거무튀튀한 포신(砲身)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이른바 양포(洋砲)였다. 한 가닥 외침이 그 뒤를 이었다. "발포하라!" 그로부터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한 차례 번쩍하고 뇌전이 작렬하더니 가공할 불덩이가 쏘아져 날아갔다. 슈우우-- 꽈꽝--!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불덩이는 무황성의 전선 한 척을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소위 진천뢰(震天雷)라는 양포의 위력이었다. 공격은 단번에 그치지 않았다. 콰쾅! 콰콰콰-- 그에 따라 무황성의 전선들은 속속 붕괴되어 갔다. 미처 비명을 지를 겨를도, 대항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괴선에서 뿜어지는 진천뢰의 포화에 의해 전선들은 하나같이 가루로 화해 버리거나 불기둥이 되어 종내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29장 영웅지로(英雄之路) ① "헉!" 마록의 입에서 열락(悅樂)의 절정을 상징하는 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격정의 화신인 양 화중화 항예의 몸에 막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뱀처럼 자신을 휘어감은 채 똑같이 절정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그녀에게 조소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추(醜)한 계집!' 그러나 그의 느낌은 심적으로든 물적으로든 그 이상 더 이어지지 못했다. "흐음?" 그것은 그가 타고 있는 배가 갑자기 크게 기우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처 그가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 밖으로부터 귀청을 찢어버릴 듯한 폭음이 들려 왔다. "이, 이게 무슨......?" 마록은 대경하여 용수철처럼 침상에서 튕겨 일어났다. 황급히 옷을 주워 입는 그에게 항예가 물었다. "흐응, 대체 무슨 일일까요?" 그녀는 와중에도 일어나기가 싫은 듯 누운 채 미적거렸다. 돌아다 보니 아직도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다. '잡스러운 것!' 마록은 내심 욕설을 퍼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실 밖으로 휭하니 나가 버렸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항예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의외로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옷을 입기 위해 침상에서 내려서는 그녀의 아랫배에는 놀랍게도 하나의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치모(恥毛)에 인접한 은밀한 위치였다. 홍매화(紅梅花). 피처럼 붉은 한 송이 매화의 문신이다. 그것은 새하얀 피부와 대비가 되니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주었으며 얼마나 정교한지 꽃술까지도 일일이 알아볼 수가 있었다. 꽃술은 정확히 다섯 개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과거 용류옥이 무림성으로 잠입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그를 도왔던 기녀 일잔홍도 역시 매화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용류옥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다섯 개의 꽃술을 가진 매화의 주인이 가장 높은 신분이라고. 결국 화중화 항예가 일잔홍이 말하던 그 여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신분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를 제멋대로 희롱하던 화중화 항예도 그 동안 부단히 노력하고 봉사해온 끝에 최근에야 따냈을 정도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토록 염원하던 신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기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의복을 주섬주섬 걸치며 탄식과 유사한 음성을 쏟아냈다. "쳇!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녀는 옷을 다 입고도 선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단지 바깥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편. 갑판 위로 오르는 계단에서 마록은 일순 휘청했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현기증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건......?' 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것은 그 자신도 웬지는 모르지만 신체에서 일어난 현상이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신색을 정비했다. "무슨 일이냐?" 그는 심중과는 역비례로 되려 호통을 쳤다. 전세가 압승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했던 그였으므로 실은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막상 갑판에 올라선 그는 아연실색 했다. "이럴 수가!" 파양호 전체가 불바다였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것 전부가 시뻘건 화염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기막히게도 무황성의 전선 치고 성한 배라곤 단 한 척도 없었다. 그는 도시 믿을 수가 없어 크게 부르짖었다. "게 누구 없느냐?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사황 냉전령이 선체의 후미로부터 걸어 나오더니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제 삼의 적이올씨다, 주군. 어떤 작자가 양포인 진천뢰를 가지고 공격을 감행해 왔습니다." 마록의 준미한 눈썹이 위로 불쑥 치켜 올라갔다. "진천뢰!" 그도 진천뢰에 대해서라면 익히 들었던 바가 있었다. 사황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직히 말을 이었다. "놈은 우리의 약점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천명부로 인해 전력이 손실되었을 것과 우리 측이 수전에 약한 편이라는 점 등을 철저히 이용한 듯 합니다." 마록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 감히 본성을 공격한단 말인가?" 체념 탓일까? 사황 냉전령의 어조는 시종 담담했다. "천축의 라마승들입니다." 마록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어졌다. "감히!" "가볍게 볼 수 없는 자들입니다. 천축무림에 군림하고 있는 욕망궁(欲望宮)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욕망궁!" 마록은 그제서야 충격을 입은 듯 심한 동요를 보였다. 주위의 자욱한 연기가 크게 의식된 것도 아마 그 순간이리라. 그는 다소 흔들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측... 피해는......?" 사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망적입니다." 마록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우우... 이럴 수가! 저들은 미리부터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 마록은 중원무림을 거두어 천축에 고스란히 바치게 생겼지 않은가?' 연기는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그는 그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승처럼 우뚝 선 채 한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황은 곁에서 그를 바라보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마록의 기색이 평소와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마록이 중얼거리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황." "네." "그대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으음......." 사황 냉전령은 신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곧 긍정의 표시라고 보면 맞았다. 마록은 상대의 심중을 들여다 본 듯 말을 이어갔다. "나는 결과적으로 그대를 폐인으로 만들었고 그대가 장악하고 있던 기반을 탈취한 뒤, 그것을 지리멸렬하게 했다." "주군......?" "더 들어라. 본좌가 후회나 자책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대는 아직도 나를 다 모른다." 그건 사실이었다. 사황은 그 동안 마록의 곁에서 누구보다도 그를 더 관찰할 기회가 많았으나 결론은 항상 같았다. 마록. 그는 두렵다는 것 외에는 도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강하다는 면에서는 솔직히 매료된 바도 없지 않았지만 막상 그와 진심을 교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라면 모르긴 몰라도 혈사해의 가신들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의 손에 죽어간 마제갈 영호위나 마후인 화중화 항예 정도가 혹시 그 예외에 속할지 몰랐다. 그는 늘 혼자였다. 일찌기 천하를 군림하는 일만 해도 혈사해의 가신들과 합력(合力)을 했더라면 한층 더 쉬웠으련만 그는 어떤 의도에서인지 그들조차도 의지한 바가 없었다. 이후로도 그는 다만 가신들을 휘하에 두었을 뿐 어려운 일이 생길지라도 상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했다. 사황은 마록의 그런 면에 대해 한 때 찬사를 보내기도 했었으나 언제부터인가는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이번 출정만 해도 재고(再考)를 요청했다가 깨끗이 거절 당한 그였다. 마록은 말했다. "나는 이대로 계속 싸울 것이다." "주군......." 사황은 입술을 질겅 씹더니 약간은 힐난조로 덧붙였다. "진천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미 본성의 정예들을 몰살시키고 혈사해의 가신들마저도 거의......." 그 말에 마록은 갑자기 앙천광소 했다. "핫핫핫핫......! 그럼 본좌도 죽겠군? 핫핫핫......." "으음......." 사황의 괴이쩍은 신음성에 이어 마록은 웃음소리를 뚝 그쳤다. 그리고는 정색을 지으며 잘라 말했다. "아는가? 내 피는 뜨겁게 용솟음치고 있다. 이는 곧 상대할 만한 자를 만났다는 얘기다." 이 순간, 놀랍게도 그의 눈은 모종의 기대와 흥분으로 인해 몹시도 출렁이고 있었다. "나 마록과 욕망궁주! 어떤 쪽이 죽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차피 천하는 이기는 자의 수중에 떨어질 테니까." 사황은 굳어진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록은 최후의 도박을 하려는 것이다. 결과가 승(勝)이면 지금껏 얼마나 피해를 입었건 이족(異族)을 몰아내는 셈이니 여하한 원성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요, 반대로 패(敗)하면 미련없이 죽어가면 그 뿐이라는. 또한 이 도박에 임하려는 그의 심정은 실제로 전혀 비장하지 않았다. 되려 생애 최대의 희열을 느끼고 있다면......? ② 마침내 자욱했던 연기가 걷히고 상황이 드러났다. 마록은 안력을 높이지 않고도 십 장 밖에 떠 있는 한 척의 거대한 괴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무황성을 궤멸시키다시피 한 흉수의 정체였다. 괴선의 갑판 위에는 붉은 법의를 입은 라마승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한 채의 교자가 놓여 있었고 몸이 비대하다 못해 산처럼 느껴지는 한 명의 승려가 그 위에서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채 기대 앉아 있었다. 교자의 앞으로는 면사를 쓴 한 여인이 서 있었으며 다시 그 뒤로 혈의가사를 입은 라마승들과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록의 시선은 교자 위의 비대한 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를 느꼈는지 중이 먼저 말을 건넸다. "꼬마, 이만 무릎을 꿇는 것이 어떠냐?" 엄청난 내공이 깃든 웅후한 음성이다. 따라서 마록은 안하무인인 말투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수록 그의 호기는 만장으로 치솟았다. 마록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욕망궁주! 가까이서 보니 기세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비대한 중, 즉 적천대라마는 흘흘 웃었다. "피차 일반이다. 세상이 넓기는 넓구나. 본궁주는 너를 보니 애초의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노라." 그는 가뜩이나 살 속에 파묻힌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어떠냐? 내 휘하로 들어오는 것이. 그럼 너를 죽이지 않을뿐더러 제 일의 수하로 삼겠다." 마록은 냉소했다. "애초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게 낫겠군. 그것은 본좌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소리였으니까 말이다." "흘흘... 아직 철은 들지 않았군." 적천대라마의 회유는 금세 포기되었다. 그는 안색을 무겁게 굳힌 채 손을 스윽 치켜 들었고 그것이 신호인 듯 몇 가닥의 혈영(血影)이 마록을 향해 날아갔다. 휙! 휘휙--! 혈영들은 전광석화처럼 마록의 전후좌우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네 명의 혈의승들로써 모두 색목인(色目人)이었다. 움푹 패여 들어간 눈에서 푸른 빛을 뿜어내는 이들을 일컬어 천축에서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 부른다. 곧 욕망궁의 사대호법이었던 것이다. "건방진 애송이놈! 받아랏--!" 콰츠츠츠츳--! 그들 사대천왕이 공격을 시도하자 일시지간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하지만 그렇듯 가공할 기세에도 마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후후후......!" 그의 입에서 냉소가 흘러 나온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한 바퀴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으로써 이 일전은 끝을 맺고 말았다. 놀랍게도 사대천왕은 마록의 몸에서 뻗어 나온 혈광에 스치자마자 더 볼 것도 없이 전신이 찢겨져 나갔던 것이다. 후두둑......! 갑판 위로 핏물과 함께 떨어져 내린 것은 사람의 육신이라기보다는 무참한 고깃덩이들이었다. 단 일초였다. 욕망궁의 사대호법이 깨끗이 처리된 것은. "저, 저것이......!" 관전하고 있던 적천대라마는 기가 막힌 듯 입을 딱 벌렸다. 마록의 능력에 대해서는 굳이 소문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이미 인정한 터였지만 설마하니 이런 사태까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록이 그를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적천! 시간을 끌수록 그대의 수하들만 축낼 뿐이다. 본좌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말고 그대가 직접 나서라." "으음......." 적천대라마는 대답 대신 신음을 흘리더니 면사를 쓴 여인, 즉 마화궁주 애향령에게 무엇인가 전음을 보냈다. 애향령. 그녀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실 안. 화중화 항예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울러 그녀 자신도 이를 의식한 듯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결국......." 급기야 항예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그 길로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갑판 위에서 마록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출현을 알게 되자 마록은 뭐라 형언키 어려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든 확실한 것은 그 표정이 동지애로 인한 반가움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항예가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궁주께 대항할 수 없어요. 왜냐면......." 마록은 잠시 그녀를 노려 보더니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이어 웃음을 그친 그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항예, 고작 이 정도였는가?" 그 한 마디에 화중화 항예의 날씬한 교구가 눈에 띌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게다가 이어지는 마록의 비아냥은 그녀의 가슴을 마구 쑤셔 놓았다. "겨우 욕망궁의 주구 노릇을 하기 위해 강호의 유녀(遊女)가 되었었단 말이지? 후후... 본좌가 그대를 너무 크게 보았군. 나는 그대가 여인천하(女人天下)를 꿈꾸는 줄 알았다." "우우우......." 항예는 거의 비명에 버금가는 신음성을 토해냈다. 정곡을 찔리고 보니 참담한 심경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한 가닥 사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들 두 남녀의 오래 묵은 심리전(心理戰)을 가로막았다. "호호호홋......!" 스스슷! 허공을 가로질러 건너오는 그 웃음소리의 주인, 그녀는 마화궁주인 애향령이었다. "호호호... 아이야, 항예를 무시하면 못써. 너는 그 애에게 졌으니까. 네 체내에는 용뇌식골산(龍腦蝕骨散)이라는 극독이 퍼져 있단다. 어디 한 번 더 공력을 일으켜 보렴. 그 즉시로 너는 뼈가 녹아 폐인이 되고 말 거야." "뭐, 뭣이?" 마록은 대경실색했다. 동시에 그는 고개를 홱 돌려 무서운 눈으로 화중화 항예를 쏘아보았다. "항예, 그대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항예는 문득 크고 아름다운 눈에 눈물을 담았다. "맞아요, 내가 한 짓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무척 후회하고 있기도 하구요." "후회......? 농담을 하는군." 마록은 툴툴 웃으면서도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어느 새 항예와 정사를 나눈 후면 언제나 현기증이 일곤 하던 점을 상기해 내고 있었다. 그 때마다 항예는 그에게 감쪽같이 독을 투입했던 것이다. 마록은 지극히 허탈한 눈으로 항예를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일방적이었던 사랑, 그러다 그것이 애증으로 바뀌고 종내에는 이렇듯 처참한 결과를 그에게 선사했다. 항예가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의 말마따나 이 세상에 여인천하를 이루고자 했었어요. 그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꿈인지는 최근에야 깨달았죠. 너무 늦었지만......." "그런 말을 왜 내게 하지?" "당신이 천하에서 유일하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사람이니까요." "후후후... 아직도 나를 희롱할 셈인가?"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진실을 담은 채 마록을 응시했다.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자 나는 처음으로 나를 되돌아 볼 수가 있었어요. 애시당초 내 인생의 행로가 바뀐 것이 한 남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서이거늘, 당신이라는 위대한 사람의 사랑을 얻고서도 나는 끝까지 만족하지 못했어요." 항예는 오열했다. "흑!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요. 내 마음은 벌써 오래 전에 죽어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죽음을 보게 될 일이 이토록 괴로울 줄은 몰랐어요." 마록이 안면을 씰룩이며 뭐라 말하려는 찰나, 애향령의 얼음장 같은 음성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항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듣자듣자 하니 넌 제 정신이 아닌 게야." "닥쳐요! 이 모두가 사부, 당신 때문이에요." "뭐, 뭣이?" 항예는 계속하여 애향령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은 날 기만했어요! 당신도 나처럼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불행한 여인에 불과했으면서." 애향령의 눈이 홱 뒤집어졌다. "못된 것! 은혜도 모르고 감히......." "은혜? 호호홋... 당신은 알고 보니 여인천하라는 건 상상도 못하는 단순한 사람이었어. 그저 당신의 복수를 위해 나를 이용하고 종국에는 나까지도 당신과 똑같은 용망궁의 노예로 만들려고 했을 뿐이지." "우우우......!" 애향령은 심층의 주요부가 건드려지자 신색이 괴이하게 변했다. 눈에서 섬뜩한 마화(魔火)가 피어 오르는가 싶더니 머리카락이 서서히 하늘을 향해 곤두서고 있었다. 이런 현상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마록이었다. '마녀(魔女)!' 그는 마치 충격처럼 다가오는 위기의식에 자신도 모르게 향예를 옆으로 거세게 밀어냈다. "비켜라, 항예! 그대는 저 여인의 상대가 못된다." "아!" 졸지에 화중화 항예는 털썩 넘어져 버렸고, 그 위로 애향령의 사이한 웃음소리가 쏟아 부어졌다. "호호호... 오호라! 너희들이 내 앞에서 지금 유치한 사랑 놀음을 벌이겠단 말이냐? 좋아, 그럼 너부터 상대해 주지." 애향령은 마록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마록.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죽는다는 위협을 무시한 채 전신의 공력을 서서히 끌어 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귀로 모기소리 만한 항예의 음성이 전해졌다. "차라리 나를 죽여 줘요. 주군, 아니 마랑(魔郞)......." ③ 고오오오....... 하늘이 잠시 빛을 잃었다. 그 뿐이다. 두 사람의 격돌에는 아무런 음향조차 없었다. 그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 순간, 마록과 애향령이라는 절세의 고수들이 각자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여 몸부림을 쳤었다는 것을. "멈추시오--!" 허공에서 불현듯 절규에 가까운 일성의 외침이 울려 왔지만 사태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마록과 애향령. 두 사람은 어느 덧 서로 반대편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외침을 발한 인물은 그들 두 사람 사이로 날아내렸다. "크흐흐흑......!" 그 인물은 마치 피라도 토하듯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무림황제인 마록도, 마화궁주인 애향령도 회생(回生)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망연히 지면을 밟고 서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용류옥이었다. 그의 눈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중 한 사람은 굳이 그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꼭 자신과 무관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애도해 줄 다른 사람, 즉 한 여인이 벌써 곁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중화 항예였다. "마랑......." 항예는 마록의 시신 앞에서 가히 넋을 잃었다. 그는 애향령과의 일전으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원인은 격돌 직전에 혈맥이 끊기고 뼈가 녹기 시작한데 있었고 이는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결국... 나는 당신을 죽인 거로군요......?" 그녀는 차마 울지도 못했다. 천하의 마록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을 밀어내고 애향령과 맞서 가던 장면이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새겨졌으니 말이다. 잠시 후. 갑판 위에는 뒤미처 또다른 두 가닥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갑판의 한 쪽에 서 있던 사황 냉전령이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무림왕(武林王)!" 새로 등장한 두 사람 중 한 명은 무림왕 용화천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들이자 무림성의 소성주인 용백검과 함께 격전의 현장에 가담한 것이었다. 사황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성주......." 일찌기 무림성의 분열을 이용해 사(邪)의 종주로 되돌아갔던 그였다. 그리고는 천하제패를 노리다가 마록에게 꺾여 뜻이 좌절되자 주군을 바꾸어 섬기는 최악의 오점을 남겼다. 그런즉 무림성주인 용화천을 마주 대하고 보니 면목은 고사하고 치죄(治罪)가 두려워 그는 절로 심금이 떨려왔다. 실로 의외인 것은 용화천의 응대였다. "냉전령, 그대를 보니 예전의 그대가 아니군. 그간에 고초도 많았던 것 같고. 쯧, 무공을 잃었나?" 그의 눈에서 묻어 나오는 연민을 느끼며 사황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털썩 꿇었다. "성주......!" 이것이 바로 무림왕 용화천의 힘이었다. 무림성주로써 천하를 관장할 때부터 그는 단지 존재 그 자체 만으로도 만인을 압도했었고 지금도 이처럼 그 권위는 건재했다. 사실 이 때문에 용화천은 무림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돕고 나아가서는 무림을 구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용화천의 몫인 절망과 비애는 이 곳에서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는 그것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항령......." 무림왕 용화천과 마화궁주인 애향령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천하무림에서 몇 되지 않는다. 그는 오랫 동안 숨겨온 그 비밀이 공개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그가 진기를 주입시키자 애향령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에는 몽롱했으나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애향령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떠졌다.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지배했던 마공이 죽음을 앞두게 되자 깨어진 것이었다. 물론 본연의 심성도 되찾았다. "향령, 나요." 용화천의 애끓는 음성에 그녀는 격정과 환희로 답했다. "아!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돌아오다니." "항령!" 용화천은 눈물을 떨구며 애향령의 몸을 끌어 안았다. 그 상태에서 그녀를 떠나 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그녀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눈물 반, 탄식 반으로 한참 더 얘기를 나누었다. 용류옥. 그는 분명 용화천과 애향령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하지만 그는 부(父)와 모(母)의 대화에 끝내 끼어 들지 않았다. 본연의 인간으로 환원된 모친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더없이 간절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니 어쩌겠는가? 모친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혼란을 주느니 차라리 행복한 가운데 숨을 거두도록 놔두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아무튼 모친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그의 심정은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머니......." 그는 자신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읊조림으로 심정을 대신하며 자신을 억눌러야 했다. 적천대라마. 그는 또다시 적(敵)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상대 쪽에서 스스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적천대라마는 십 장 위 허공을 평지 걷듯 걸어 오는 상대를 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그 자에게 마록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라고 한 번 권해볼 작정이었다. '흐음, 정말로 마록이라는 아이에 못지 않아.' 용류옥. 그는 적선의 갑판 위에 내려서자마자 입을 열어 적천대라마의 환상을 깼다. "적천, 당신은 중원에 오지 말았어야 했소." 적천대라마의 축 처진 뺨이 마구 씰룩였다. "아이야, 그건 무슨 소리냐?" "당신이 계속하여 천축의 대법왕(大法王)으로 눌러 앉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여생 또한 내내 존경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과욕 때문에 당신은 이역(異域)에서 죽게 되었소." 적천대라마는 안면근육을 푸들푸들 떨었다. "꼬마, 너는 너무 건방지구나." 용류옥은 피식 웃더니 등 뒤에 메고 있던 고검(古劍)을 끌어 내렸다. "이 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오?" "흐음......?" "이 검의 이름은 천문검(天文劍)이라고 하오. 원래는 한 쌍으로써 부백(缶白)이라는 검과 함께 중원의 한 신장(神匠)이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이오." 적천대라마는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왜 검에 대한 얘기를 꺼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류옥은 계속 말을 이었다. "부백검은 일명 난세지검(亂世之劍)으로써 난세에 나타나 피를 부르는 사검(死劍)이었소. 그에 반해 이 천문검은 평화지검(平和之劍)이라 부르오." 그는 천문검을 한 차례 스윽 쓰다듬었다. "그런데 부백검은 사라졌고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검은 평화지검이오. 전설에 의하면 평화지검이 현신하게 되면 난세가 평정되고 태평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오." 용류옥은 서서히 천문검을 뽑았다. "당신은 평화를 위한 천문검의 첫 제물(祭物)이오." 적천대라마의 안색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죽일 놈! 네 놈의 방자함은 본궁주가 직접 다스리겠다." 이어 그는 교자에서 뛰어 내렸는데 비대한 몹집에 비해 그의 신법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신쾌무비한 것이었다. 그의 발이 지면에 닿기가 무섭게 라마승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오체복지했다. 이것은 그들의 율법이 명하는 천축법왕에 대한 예의였다. 용류옥은 천문검을 양손에 나누어 잡았다. 한 손에는 검집을, 한 손에는 검을 든 채 그는 두 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적천, 나는 중원인의 한 사람으로써 예를 갖추기 위해 당신에게 일 초를 양보하겠소." 적천대라마는 대소했다. "으하하하핫......! 어린 아이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그가 웃자 음파(音波)에 의해 수면이 파도쳤다. 주위의 내공이 약한 자들은 얼굴에서 핏기를 잃고 있었다. 심지어는 고막을 감싸쥐고 괴로운 듯 비틀거리는 자도 있었다. 용류옥이 천문검을 가볍게 퉁겼다. 우웅-- 검명(劍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청신했을 뿐더러 그로 인해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공(音功) 때문에 발생한 압력이 말끔히 제거되었던 것이다. 적천대라마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검을 퉁겨낸 용류옥의 공력이 이백 년 수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고는 내심 긴장을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헛헛헛... 과연 네가 한 가닥 하긴 하는구나." 여유를 보이는 그를 향해 용류옥은 빙그레 웃었다. "과찬이시오." 적천대라마는 크게 웃었다. "으핫핫핫... 좋다! 네 일 초 양보를 기꺼이 받겠다. 그러나 그 뒷일이 어찌 될지에 대해서는 네 스스로 책임지거라." 그는 붉은 법의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는데 보통 사람보다 다섯 배는 더 큰 거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날아 오르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뜬 그 상태에서 양수를 합쳤다가 둥근 원을 그리며 떨쳐냈다. "만공우주멸멸진(卍空宇宙滅滅震)--!" 고오오오....... 대기(大氣)가 진공상태로 화했다. 방원 삼십 장 내의 모든 기류가 거대한 흡인력으로 인해 응축되어 버렸던 것이다. "끄으......" 전권에 들어 있던 사람들은 전신의 피가 모조리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정말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쓰러졌다. 만공우주멸멸진. 이는 천축의 전설적인 마공으로써 인간과 마신(魔神)이 이루어 냈다는 최후의 무학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희세의 무학이 펼쳐지자 관전자들은 하나같이 하늘이 빛을 잃고 우주가 기우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용류옥의 신형은 마치 미풍에 흔들리는 것인양 가볍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의 그는 한 마디로 어떤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존재로 화해 있는 듯 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여전히 왼손에는 검집을, 오른손에는 천문검을 수평으로 들고 있었다. 스스스....... 그는 암흑의 덩어리 속으로 들어섰다. 그 광경은 어찌 보면 거대한 악마가 그를 빨아 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천문검이 그의 손을 벗어났다. 그 평화지검은 아주 천천히 앞으로 밀려나듯 날아가고 있었다. "크헉--!" 참담한 비명에 이어 암흑도, 거대한 흡인력도 거짓말처럼 소실되었다. 반면에 용류옥의 손에는 천문검이 다시 들려져 있었다. 그가 검을 기울이자 순백의 투명한 검신(劍身)을 타고 한 방울의 선렬한 핏방울이 갑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똑....... "와아아아--!" 어디선가 환희에 찬 함성이 일어나 근역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는 피와 의기(義氣)로써 건져낸 승리를 자축하는 것이었다. 출처는 거의 부서진 채 물에 반쯤 잠겨 있는 세 척의 범선, 즉 천명부의 배 위였다. 그 곳에는 여러 인물들이 서 있었다. 장춘삼로를 비롯하여 백하연과 천풍이십팔숙, 그리고 언제 나타나 싸움에 가담했었는지 천음선자 단리경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누구누구를 가릴 것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천명부의 소속을 자처하며 똑같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로써 공포의 수상혈전(水上血戰)은 막을 내렸다. 마침내 무황성은 마록의 죽음과 함께 일 년 간에 걸친 패도군림천하(覇道君臨天下)는 종(終)을 고하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치밀한 계획을 세워 중원무림을 삼키려 했던 천축의 욕망궁도 적천대라마가 처단되자 맥없이 무너졌다. 천명부의 희생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 덕분에 중원무림은 먹구름을 헤치고 광명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날의 주역들은 모두 파양호로부터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아 떠났다. 무림성(武林城). 이는 태산(泰山) 옛 무림성의 폐허 위에 재건되었다. 또한 이 새로운 탄생을 기해 제 칠대 성주(城主)가 등극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중원무림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추대된 인물, 그는 용류옥(龍柳玉)이었다. 그는 운명의 난기류를 헤치고 지고무상한 지위에 올랐다. 이르자면 난세(亂世)가 배출해 낸 영웅(英雄)이다. 그러나 난세에는 억울한 희생자도 많다. 상관영봉(上官靈鳳). 그녀가 그 중 한 예이다. 그녀는 마록의 측실이면서 부정(不貞)을 저질러 그에게 죽음을 당할 뻔 했는데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그녀가 당시에 미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뒤로 천하를 떠돌며 유리걸식하다가 무림성이 재건되자 그 곳에 나타났다. 아마 무의식 중에도 그녀를 이끄는 영감(靈感)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상관영봉은 한 사람에게 거두어진다. 그녀 못지 않게 난세에 희생되었던 사내였다. 그녀의 지치고 황폐해진 육신을 굳게 끌어 안은 그의 이름은 용백검(龍白劍)이었다. 무림성주 용류옥. 그는 그런 희생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이란 다름 아닌 무공수련을 위한 폐관이었다. 용류옥은 언젠가 무림에 또다시 혈풍을 일으키게 될지도 모를 장춘곡의 출곡(出谷)에 대비해야만 했으며 피해를 최소화시키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연공관(練功關) 앞에 아내인 독고산혜 외에도 두 명의 미녀가 더 있어 이제나 저제나 하며 그의 출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두 미녀의 이름은 백하연과 우문금지였다. 감정상 우의(友誼)와 애정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그녀들로 인해 그는 아마도 향후로 꽤 골치를 앓게 될 것이다. 사실상 그가 출관을 앞당기고자 기를 써야 할 정도로 가장 보고 싶어하는 존재는 따로 있으니 말이다. 그 존재는 용천명(龍天命),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