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륜공자 제1권 
검궁인 저


책머리에 부쳐
역사는 돌고 돈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의 운명도 끊임없이 순환한다. 오늘의 광명이 내일의 암흑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비둘기의 순한 눈을 보면서 비둘기가 송충이를 잔인하게 쪼아먹는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를 때 우리는 동조보다는 비판을 하게 되며 오직 자신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재려고 한다.
『혈륜공자』에서는 마도(魔道)에 선 한 인물을 그렸다. 
어째서 마도 쪽이냐 하면 주인공의 운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정도 출신이었다면 정도를 수호하기 위한 일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무협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항상 정도가 승리하는 소설을 읽게 된다. 여기서 어째서 마도가 존재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도는 분명 나쁜 쪽이며 사악한 집단이다. 그런데 어째서 스스로 손가락질 받는 마도의 길을 평생 걷는지 의문이 남게 된다.
의외로 그 답은 간단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도는 마도대로 자신의 길이 최선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아름답다. 길이 다르면 협상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영원한 평행선을 가는 것이 협상의 대안은 되지 못한다. 어차피 하나의 길만이 주어진다면 부딪치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혈륜공자』는 선렬한 혈세무림의 세계를 그린 대하소설이다. 5권의 분량이 말하듯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이 난비한다. 다소 어지러울 정도의 복선(伏線)이 깔려 있고 의외의 결말도 도출될 것이다.
참고로 무협소설로는 처음으로 본문에 주(註)를 달아 감상의 편리를 도모하고 동양문화의 편린을 엿볼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였음을 밝혀 둔다.
1996년 3월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서  장
끝없이 돌고 도는 무림(武林)의 역사는 피의 수레바퀴(血輪)로도 비유된다. 
밤 하늘의 숱한 성좌(星座)처럼 무림의 기인고수(奇人高手)와 초강문파(超强門派)들은 풍진에 파묻히며 명멸해 가는 것이다.
점점이 피로 얼룩진 대무림사(大武林史).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문파는 어느 문파인가?
이런 질문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명멸하는 대무림사에서 초강문파를 꼽는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굳이 꼽아보자면 무림인들은 누구나 세 문파를 꼽을 것이다.
- 기환궁(奇幻宮).
- 금궁지부(禁宮之府).
- 대마성(大魔城).
이 세 문파는 시대연월(時代年月)을 달리하여 나타났지만 한결같이 무림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단연 이 삼파(三派)야말로 무림사상 가장 강한 문파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기환궁(奇幻宮).
일천 오백 년 전 무림사의 시작과 함께 나타났다가 온갖 신비 속에 파묻혀 사라져간 문파가 바로 기환궁이다. 
기환궁은 고대에서 당금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모든 마공(魔功)의 근원지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개세마공들이 기환궁에서 창출되었고 천하무림으로 파생되었다. 
따라서 기환궁이야말로 중원무림의 태두(泰斗)라고 일컫는 소림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뿌리내린 천하마공(天下魔功)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
천령투심환원대법(天靈透心還元大法)
만사천절구혼대법(萬邪天絶拘魂大法)
이와 같은 전설적(傳說的)인 희대마공을 탄생시킨 기환궁을 후세인들은 마도제일지(魔道第一地)라고도 불렀다. 뿐만 아니라 기환궁이 마공으로 무림을 평정했을 때, 무림의 역사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기환대천하(奇幻大天下)가 도래했노라고.
그러나 하늘의 노함 때문이었을까? 어이없게도 어느날 기환궁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유는 화산(火山)의 대폭발 때문이었다.
대자연의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기환궁은 대별산(大別山)의 한 유곡(幽谷)에 영원히 묻히고 만 것이다. 
그 후 기환궁은 천오백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두고두고 기환궁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불안한 예감을 지녀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기환궁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환대천하를 다시 이룰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금궁지부(禁宮之府).
금궁지부는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단체였다. 그만큼 절대적인 신비에 감싸인 곳이 바로 금궁지부다. 
오로지 무림인들이 금궁지부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풍문(風聞)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 필히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천하의 온갖 신공절기(神功絶技)가 금궁지부에 모여 있다고 했다.
즉 금궁지부는 기환대천하 이후 다시 도래할지도 모르는 기환궁의 마공을 억제하기 위해 수만의 정도기인(正道奇人)이 세운 전설상의 정도문파라는 것이다.
그런즉 금궁지부의 위치도 말하는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태산(泰山)의 한 곳에 있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변방의 으슥한 곳에서 아직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금궁지부를 말할 때 한 가지 통일되는 것이 있었다.
천하가 혼란의 극을 달릴 때 금궁에서 절세신협(絶世神俠)이 나타나 천하의 마풍(魔風)을 쓸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풍문이 한낱 전설이든 헛된 몽상가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든, 금궁지부야말로 정도무림의 살아 있는 유일한 힘이자 소망이었다.
대마성(大魔城).
이름 그대로 천하의 모든 마(魔)가 집결된 성(城)이 바로 대마성이다. 대마성이 무림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五十年) 전이었다.
만마지존(萬魔至尊) 백무웅(白武雄).
그는 온갖 마의 화신이자 천하만마의 지존(至尊)이었다. 
오십 년 전 대마성이 한 젊은 마도인에 의해 무림에 세워졌을 때 정도무림맹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흐른 뒤에 천하 정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마지존 백무웅이 세운 대마성은 천하의 만사만마만악인(萬邪萬魔萬惡人)들을 규합하여 무림 역사상 가장 무서운 대혈세군(大血洗軍)으로 성장한 것이다.
마도천하(魔道天下)!
그것은 천오백 년 전의 기환대천하에 비교될 수 있는 엄청난 대마풍(大魔風)이었다. 천하를 휩쓰는 대마풍에 무림협의지사들은 추풍에 갈잎처럼 휩쓸려갔다. 아무도 대마성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암흑천하가 도래하는 듯 했다.
그러나 정도의 불씨는 영원히 꺼지지 않았다. 
대마성이 최후의 일격을 정도 무림에 퍼부어 암흑천지를 만들려는 순간 구파일방(九派一幇)이 중심이 되어 천하백도인들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또한 소림사상 최대의 기재(奇才)라는 한 젊은 기인이 맹주(盟主)로 나섰다.
천무(天武).
법명도 천무요, 이름도 천무요, 별호도 천무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천하백도인의 맹주가 된 천무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는 대마성에 의해 초토화된 정도백파를 정리하여 수백 개 문파를 통일해 무림맹(武林盟)을 발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설의 기인(奇人)들을 끌어내기까지 한 것이었다.
무림삼옹(武林三翁).
무림삼옹은 이백 년 전에 정도 무림을 위해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은자들이었다. 속세를 떠나 사는 그들은 천무의 도움을 거절치 못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무의 통솔하에 전열을 재정비한 정도무림맹은 노한 파도와 같이 대마성으로 쳐들어 갔다. 대마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만 명의 마도고수들을 출성시켰다.
무림사 초유의 대혈전이 대마성에서 벌어졌다.
하늘에서 피비가 내리고 죽음의 바람(死風)이 천지를 휩쓸기를 장장 십 주야(十晝夜), 천하가 시체로 뒤덮이고 있었으나 승패의 결말은 요원하기만 했다.
동도(同道)들의 시체를 타넘으며 혈우(血雨) 속에서 공격과 후퇴를 거듭하기를 보름 동안 했으나 대마성은 함락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림맹의 패색이 짙어갈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나 할까? 뜻밖에도 한 신비문파가 무림맹을 도우려고 나타난 것이다.
제마천문(制魔天門).
문주(門主)가 누구인지도, 어디에 적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는 신비문파가 나타나 무림맹과 함께 협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대마성의 힘은 너무도 강했다. 특히 천지인삼마(天地人三魔)의 무공은 만마지존과 평수일 정도였다. 만마지존과 천지인삼마의 대살행은 무림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그칠 새 없이 끈적거리는 피보라를 흩뿌리는 싸움은 보름간을 두고 계속되었다. 수급(首級)이 짤린 무림맹들의 시체가 태산을 이루어갔다.
전세는 차츰 대마성쪽으로 기울었다. 암흑의 마도천하가 도래하기는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정녕 하늘도 마도의 편에 서는 듯했다.
정도무림의 미래는 풍전등화였다. 바로 그때,
꽈르... 릉!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폭발이 한순간에 대마성 전체를 날려 불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정도무림맹의 누군가가 대마성으로 잠입해 들어가 화기(火器) 창고를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대폭발은 대마성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날려버리고 말았다. 대마성쪽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어 거대한 피의 수레바퀴(大血輪)는 멎었다. 암흑의 마도천하가 종지부를 찍고 만 것이다. 
그것은 무림사의 마지막 장(章)을 장식한 대혈륜지사였다.
그러나 만마지존과 천지인삼마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시신도 남기지 못한 채 한 줌 먼지로 산화(散華)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혈륜(血輪)의 서막(序幕) 1
①
휘이이잉.......
모래바람(砂風)이 분다.
관외(關外)의 대사막 지대에 부는 광포한 모래바람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의 눈을 뜰 수 없게 만든다. 
영겁(永劫) 이래로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반복되듯이 하룻밤 사이에 거대한 모래 언덕(砂丘)이 생겨났다가 소리없이 허물어지는 곳.
세월을 견디던 거대한 암석이 모래바람에 제 살을 갉아먹히다가는 마침내 한 줌 모래로 흩어지는 거대한 대사막의 사구 위를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차츰 그들의 행색이 드러났다.
일남일녀(一男一女)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녀와 삼십 세 정도의 금의인(金衣人)이었다. 
그들의 몰골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가까스로 사구를 내려온 여인이 더이상 서 있을 기력조차 없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털썩 주저앉았다. 여인을 부축하고 있던 금의인이 할 수 없다는 듯이 잠시 손을 놓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십 장 높이의 사구 위를 흐르는 메마른 모래바람이 금의인의 눈에 들어왔다. 
"후후후!"
한동안 사풍(砂風)을 올려다보던 금의인의 입가에서 자조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의 영지인 대사막의 주인이자 사신(死神)과도 같은 모래바람의 고마움을 오늘따라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래바람이 그들의 흔적을 감추고 지워주지 않았던들 그들은 꼼짝없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뚝.
금의인의 가슴께에서 새빨간 핏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리면서 메마른 모래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것이었다.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놀랍게도 모래바닥에 혈족(血足)을 찍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긴 옷자락 사이로 검날에 당한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전신이 새빨갛게 물든 것은 오래 전이었다. 상처로 인해 몰골은 말이 아니었을망정 여인 못지 않게 금의인도 준수한 용모였다. 그런 그들에게 또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기(邪氣)와 마성(魔性)이 흐르는 눈빛이었다. 
한동안 사풍이 휘몰아치던 사구를 올려다보던 금의인이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매. 얼마 남지 않았소. 이 사막만 넘으면 추적대를 떼어버릴 수 있소. 어서 갑시다."
일종의 광기(狂氣) 탓이었을까? 여인을 향한 금의청년의 눈이 희번뜩였다.  
금의인은 왼손에 검(劍)을 한 자루 쥐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베어 죽였는지 날이 다 빠져 달아난 검이었다. 또한 칼자루까지 피가 흠뻑 묻어 있었다.
문득 여인이 기진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형, 아아... 더는 못가겠어요."
"가야만 하오. 무슨 일이 있어도... 으으... 대사형(大師兄)의 배반과 만보총관(萬寶總官)의 배신으로 인해 무너진 대마성(大魔城)을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일으켜야 하오!"
금의인의 저주에 찬 울부짖음이 사구 위로 퍼져나갔다. 그는 여인을 억지로 일으키면서 악에 받친 듯 다시 외쳤다.
"크흐... 기환궁(奇幻宮)의 마경(魔經) 두 권이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언제고 천하를 얻을 수 있소. 자! 어서 변황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사매와 내가 합치면... 절대마종사(絶代魔宗師)가 탄생될 것이오."
여인은 창백한 입술 끝으로 피를 흘리며 말했다.
"사, 사형. 저... 저는 지쳐 더 못갑니다. 열흘 내내 쉬지 않고 달렸더니 기운이 전혀......."
금의청년은 그녀를 다그쳤다.
"가야만 하오. 자! 내가 사매에게 한 알의 마단(魔丹)을 주겠소."
곧이어 청년은 품 속에서 붉은 옥갑을 꺼내 열었다. 옥갑 속에는 붉은 단약이 열 알 가량 들어 있었다.
마단은 체내의 잠재력과 함께 가공할 마성을 일으키는 효험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색정(色情)을 유발시키는 최음제로써도 유효한 약이었다.
"우리가 가려는 혈천마국(血天魔國)의 마단이오. 이것을 먹으면 힘이 나오. 어서 삼키시오." 
금의인이 단약을 내밀자 여인은 애원하듯 금의인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형. 저는 더이상... 제발 혼자 가세요."
"그럴 수는 없소. 사매를 이곳에 두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오. 자, 입을 벌리시오."
"제발......."
여인이 또다시 고개를 젓자 금의인이 손을 뻗어 여인의 아랫턱을 우악스럽게 거머쥐었다. 이어 여인의 입을 벌리게 한 그는 붉은 단약을 억지로 먹였다.
휘리링.......
사구를 타고 내려온 모래바람이 찢어진 금의인의 얼굴과 옷자락에 부딪혔다가 주르르 떨어져 내렸다. 여인과 금의인의 발등이 떨어져 싸인 모래에 파묻히고 있었다.
침묵보다 무거운 시간이 모래바람처럼 두 사람을 에워싸며 흐르기를 얼마나 했을까? 
"하아......."
갑자기 여인의 신체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숨을 크게 헐떡이기 시작하면서 사지를 뒤틀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학."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어 핏기하나 없던 여인의 얼굴이 불꽃같이 타오르는가 싶더니 무엇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눈빛으로 금의인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여인을 내려다보던 금의인의 눈빛도 묘하게 변해갔다. 
'흐흐... 대마성은 무너졌다. 본시 대사형의 아내가 되어야 할 사매와 함께 혈로를 뚫고 도망쳤으나... 밑질 것은 없다. 사매를 취하여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흐흐흐!'
숨을 헐떡이며 야릇하게 몸을 비트는 여인을 보던 금의인이 중얼거렸다. 
"흐흐흐... 사매. 이리 오시오."
금의인이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허헉... 사... 사형!"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여인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
돌연 창공을 흔드는 장소성(長嘯聲)과 함께 모래언덕 너머 아득한 곳으로부터 인영 하나가 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인영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인영은 뜻밖에도 승려였다.
승포자락을 휘날리는 젊은 승려는 어기비행술(馭氣飛行術)로 날 듯이 모래언덕을 치달려 왔다. 
"지독한 놈, 만리(萬里)를 추적해 오다니!"
젊은 승려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금의인은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즉시 몸을 돌린 금의인은 몸을 비비꼬며 야릇한 숨을 토하고 있는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는 몸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 낭랑하면서도 호탕한 질타가 들렸다.
"사악한 마의 제자여! 살계(殺戒)를 어기는 것을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도 용서하시리라."
스르르릉!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던 젊은 승려가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더니 하늘을 향해 집어 던졌다.
쐐애액!
하늘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리는가 싶은 순간 천지가 온통 검파(劍波)로 뒤덮였다.
그것은 소림칠십이종절기(少林七十二種絶技) 중 가장 지고무쌍한 검법인 달마만리어기배검술(達磨萬里馭氣排劍術)이었다.
달마조사(達磨祖師) 이래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익힌 자가 없었다는 검도사상 초강의 검법을 약관에 불과한 승려가 펼친 것이다.
"크아악!"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삼 장 가량을 날아오르던 금의인의 등에 신검이 꽂혔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금의인은 곤두박질치며 피보라와 함께 떨어졌다. 
휘위이이잉.......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막의 회오리바람이 또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욱한 모래를 동반한 회오리바람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리는 것이었다.
휘류류륭!
삽시간에 형성된 거대한 모래기둥이 무섭게 회오리치며 멀어져 갔다.
하나의 젊은 승려가 축지성촌의 신법으로 장내에 떨어졌다. 
관옥같은 얼굴을 가진 미승려(美僧侶)였다. 미승려는 전광(電光)같은 눈빛을 발하며 주위를 쓸어 보았다.
"......!"
고개를 돌리던 미승려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회오리바람에 의해 새로이 생긴 것이 분명한 사구에 파묻힌 붉은 옷자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승려는 손을 슬쩍 저었다. 그 순간 붉은 물체가 섭물진기(攝物珍氣)에 이끌려 날아왔다.
절세미녀(絶世美女)였다. 
바로 금의인에 의해 마단을 복용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잠시 발아래 떨어진 그녀를 내려보던 승려가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다. 이로써 모든 마풍(魔風)은 사라지리라."
휘리리링.......
또다시 불기 시작한 모래바람이 승려의 옷자락을 펄럭였다. 문득 그의 훤한 아미에 한 가닥 그늘이 졌다.
"설마... 나의 신검(神劍)에 맞고도 살아나지는 않겠지."
회오리바람이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던 승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여인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이 여인을 궁(宮) 시주에게 인계해야지. 어차피 그의 사람이니까. 백도(白道)을 위해 사부를 배반한 천하의 영웅에게......."
그 순간 승려가 흠칫했다.
정신을 잃기는 했으나 수려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얼굴이 불꽃같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으음... 하악."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여인은 뜨거운 향풍을 토해내며 막무가내로 승려의 품으로 파고 드는 것이었다.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그나마 찢긴 채 입고 있던 옷자락이 거의 뜯겨나간 후였다. 여인은 풍만한 젖무덤이 거의 비어져 나온 채 였다.
"아미타불... 요물!"
승려의 얼굴에 서릿발이 어렸다.
"하아... 하아!" 
여인은 요사한 탕기를 뿜으며 그의 몸에 달아오른 육체를 밀착시키기에 정신이 없었다.
"다시 살계를 열리라!"
짤막하게 외치며 승려는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승려의 짙은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마침내 그는 본 것이다.
여인의 얼굴은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왔다. 비록 육욕으로 인해 도화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나 그 얼굴은 조금도 추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음욕에 사로잡힌 것이 여인을 더욱 성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순간 젊은 승려는 망아지경(忘我之境)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넋을 잃고 여인의 얼굴을 주시했다. 사르락이며 얼굴을 스치는 모래알맹이들이 눈을 찔러왔지만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인간이란 결국 음욕의 화신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만들게 해준 이성(異性)의 내밀한 품을 못잊는 것일까? 
마침내 그는 여인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이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불타며 밀착되는 순간 그들은 모래밭에 쓰러졌다.
"하악!"
뜨겁게 타오르는 본능(本能)을 그들은 제어하지 못했다. 사내의 손이 비림을 가리고 있는 헝겁조각을 향해 내려가는 순간 여인은 엉덩이를 들어 사내의 손길을 도왔다.
삽시에 두 남녀는 살을 섞기 시작했다.
"하악... 학!"
휘이잉.......
사막의 모래바람이 뒤엉킨 채 요동하는 두 사람의 육체를 파묻을 듯이 휘몰아쳐 왔으나 흐느끼는 숨소리조차 막을 수가 없었다.
"으흐흑!"
숨소리가 고조되어 갔다. 
젊은 승려의 등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는 순간 여인의 손톱이 승려의 등짝 깊숙이 박히면서 상처를 만들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라 쾌락 때문에 승려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헉!"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쾌락성을 내지르며 승려는 자신의 몸 일부분에서 무엇인가가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너무나도 강렬한 쾌감을 동반하고 있었다.
아득한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승려는 여인의 내밀한 곳을 향해 최후의 힘을 폭사해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을 뜨겁게 달구던 열풍(熱風)이 가라앉자 이상하게도 모래바람마저 숨을 죽이는 것이었다.
"으음......."
깊은 열락의 늪에 빠진 여인이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여인이 제일 먼저 본 것은 하늘 한 자락을 막고 있는 거대한 사구였다.
'아니, 내가 왜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거지?'
처음 여인은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물먹은 솜처럼 나른하기만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기분은 상쾌했다. 
그녀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추적대를 피해 이사형과 함께 혈천마국으로 도망치던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힘이 부쳐 모랫바닥에 쓰러지자 사형이 마단을 강제로 먹였고 그것을 먹은 순간 몸이 뜨거워졌던 것까지 생각이 났다.
"그... 그렇다면 사형이 나를?"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여인은 자기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한 번 놀랐다.
여인은 급히 두 손을 아래로 뻗으며 중요한 곳을 가렸다. 그런 행동은 시늉에 불과했다. 
그녀는 급히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사... 사형!"
휘리리링.......
대답 대신 모래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모래알갱이들이 여인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사... 사형, 어디 계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금의인을 찾던 여인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놀라고 말았다. 바로 그녀의 등 뒤에 앉아 있는 한 젊은 승려를 발견한 탓이었다.
"앗, 너... 너는......!"
앉아 있는 승려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여인은 상황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악! 이 더러운 중놈! 네가 나를 범하다니!"
펑!
여인은 일장을 뻗어 젊은 승려를 그대로 후려쳤다. 
여인의 공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가슴에 장력을 맞은 승려가 피를 토하며 이 장 높이로 떠올랐다가 나뒹굴었다.
그러나 승려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뼈저린 후회와 저주가 그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휩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승려. 
그는 다름아닌 천무(天武)였다. 
정도 무림맹의 맹주일 뿐만 아니라 당금 천하 백도의 협웅이자 대소림사상 불세출의 기재인 천무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순간의 애욕을 이기지 못하고 파계를 했으니 그 고통과 후회가 어떠했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는 사악한 마도의 여인이 아닌가?
"크흐... 아미타불......."
입가에 흐르는 피를 씻을 생각도 않고 천무는 쓰러진 채로 중얼거렸다. 
"이 천한 중놈! 너를 죽이리라!"
전라의 여인은 이를 갈며 다시 쌍장(雙掌)을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니 된다. 사매!"
외마디 다급성을 내지르며 두 사람 사이에 유령같이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배, 배반자!"
그를 본 여인은 이를 갈며 저주의 눈빛을 쏟아냈다. 그러나 인영의 손놀림이 더 빨랐다. 
"용서해라, 사매."
땅에 내리기가 무섭게 인영은 손을 뻗어 여인의 혈도를 가볍게 점하는 것이었다. 
인영은 청수하게 생긴 사십 대의 중년인이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여인을 점혈한 중년인은 탄식하며 천무를 돌아보았다.
천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계에 대한 처절한 참회의 눈물이었을까? 그는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장탄식을 발했다.
"아아... 이 모두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부처의 자비를 베풀어야 할 내 두 손으로 피바람을 일으켰기에 하늘이 날 버린 것이다. 아아... 이 죄(罪)를 무엇으로 씻어야 한단 말인가?"
정파의 맹주(盟主)이자 소림 최고의 기재인 그는 번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가로 저었다. 그의 뇌리에 일어나는 번민과 자책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뼈저린 것이었다.
어느새 여인을 안아들은 중년인이 천무를 향해 장탄식했다.
"아아... 잊어야 하오. 피비린내와 함께 모든 것을......"
중년인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 내렸다.
휘이이잉......
모진 사풍(砂風)이 두 사람을 날릴 듯이 휘몰아쳐 왔다.
혈륜(血輪)의 서막(序幕) 2
강호(江湖).
강호는 끝없이 돌고 도는 대윤회지장(大輪廻之場)이다.
혼란이 지나가면 또다시 새로운 혼란이 이어진다. 
무림 초유의 마도천하를 이루며 대혈륜겁(大血輪劫)을 일으켰던 대마성(大魔城)의 멸망 이후 무림은 또다시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누가 인간의 세상을 풍운천하라고 했던가?
대풍운이 일어났다가 스러지듯이 인간의 야망 또한 구름처럼 일어났다가 대초원의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일몰과 함께 스러져 가는 것이었다.
천하는 캐고 캐어도 모를 만상(萬象)의 신비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신비무쌍한 것이 있다. 
당금의 무림은 그 신비사로 인해 기이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천하의 네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音)였다.
쩡... 쩡... 쩡.......
그 첫 번째의 신비한 소리는 바로 바위를 깨는 정(釘)소리였다.
규칙적이면서도 깊이 모를 혼이 담긴 소리는 무림 사상 가장 위대한 문파라는 소림사(少林寺)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림의 절대금지인 불혼애(佛魂崖).
바로 그곳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그칠 날이 없이 울려오고 있는 것이다.
쩡... 쩡... 쩡.......
분명 바위를 깨는 징소리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깎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중원인들에게 더더욱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우... 우... 우.......
두 번째의 신비한 소리.
마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절규성은 대별산(大別山)의 망혼애(亡魂崖) 밑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같기도 했고 바람소리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울음소리를, 마를 부르는 초혼후(招魂吼)라고 믿었다. 아니 악신의 흐느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별산.
그곳은 바로 천오백 년 전 기환대천하(奇幻大天下)를 이루려다 화산의 폭발로 사라진 마도제일지(魔道第一地) 기환궁(奇幻宮)이 있던 곳이다.
우... 우... 우.......
마의 초혼후는 오늘도 중원 무림계를 불안케 하고 있었다.
땅... 땅... 땅.......
세 번째의 신비로운 소리는 바로 맑은 쇳소리였다.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쇳소리는 낙양(洛陽)에서 들려왔다.
궁가병기점(宮家兵器店). 바로 그곳의 대장간에서 맑은 쇳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이었다.
그 쇳소리는 신검(神劍)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개세의 마검(魔劍)을 만드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땅... 땅... 땅.......
규칙적이면서도 해맑은 쇳소리는 열혈(熱血)을 지닌 무인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의혈의 무협인들은 해맑은 쇳소리를 들으며 꿈 속에서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담금질로 신검(神劍)이 나타나리라. 신검의 빛아래 천하 고금의 모든 마(魔)가 굴복하리라!
네 번째의 소리는 저주스런 웃음소리였다.
"오호호... 하늘(天)아... 땅(地)아... 모두 나를 범하라. 오호호호호......!"
처절하면서도 저주에 찬 웃음소리는 북망산(北邙山)에서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가보았으나 아무도 소리의 근원을 찾지 못했다. 안개 속을 헤매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있거나 몇 날 며칠을 헤매다 지쳐 죽곤 했다.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
사람들은 그 웃음소리를 그렇게 불렀다. 들으면 들을 수록 색심(色心)이 솟구치는 웃음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한 번 들으면 영원히 그 인상을 지울 수가 없기도 했다.
"오호호... 호호호홋!"
오늘도 사풍색혼소는 북망산에서 야음을 타고 들려왔다. 마치 무림을 저주하는 듯이.
 1장  병기점(兵器店)의 소년(少年)
①
낙양(洛陽).
천년고도(千年古都)인 낙양의 번화함은 천태만상의 인간사(人間事)를 반영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낙양의 번잡한 거리를 지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신분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모두 삶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좀더 부자가 되기 위해 장사를 하고 더 큰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출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부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낙양의 번화가를 메우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루(酒樓), 전장(錢莊), 도박장(賭博場), 기루(妓樓) 등 낙양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낙양에는 한 곳의 명물이 있었다. 
화운로(華運路).
화운로는 낙양의 수없이 많은 거리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고관대작과 대부호의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가 바로 화운로였다.
그 화운로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낮은 동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번화함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루는, 지극히 어두우며 초라한 거리가 나타났다.
이락(離落).
화운로의 사람들은 그곳을 이렇게 불렀다. 이락은 낙양의 천민과 빈궁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락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한 채의 초옥이 있었다.
땅... 땅... 땅.......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리는 쇳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맑고도 힘찬 망치질 소리는 오래 전부터 낙양인들의 귀에 익숙한 것이었다.
궁가병기점(宮家兵器店).
쇳소리가 울리는 초옥에 떨어질 듯이 걸려있는 현판의 글씨였다. 초옥은 바로 병기(兵器)를 만들어 파는 대장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판 옆에는 이상한 글이 씌어져 있었다.
- 검(劍)은 팔되, 살(殺)은 팔지 않음.
용(龍)이 몸을 비틀며 하늘로 오르는 듯이 웅혼한 글씨였다.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검은 팔되 살(殺)은 팔지 않는다니?
원래 검(劍)이란 살상용 병기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죽이는 검은 팔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었다. 
궁가병기점 앞을 지나가면서 그 글귀를 읽어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땅... 땅... 땅.......
궁가병기점 안에서는 계속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토방(土房).
그곳은 대장간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망치로 두들기는 사람이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로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아 망치질을 하는 사람은 웃통을 벗고 있었다.
발달된 근육이 한눈에 드러났다. 몹시 건장해서 오히려 아름답기조차 한 섬세한 근육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거대한 망치로 두들길 때마다 땀방울이 청년의 곧은 등줄기와 보기 좋은 허리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땅... 땅... 땅.......
쇳소리는 갈수록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망치질 소리가 뚝 그치더니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또 잘못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노하시겠다!"
섬세한 근육을 가진 청년이 망치를 놓으며 허리를 폈다. 그 순간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뜻밖에도 그는 이제 갓 십육 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미소년이었다. 청년의 용모는 마치 여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체격은 완전히 어른인데 청년의 얼굴에는 아직도 천진한 소년의 치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수랄까? 소년의 얼굴에는 기묘한 음영과 함께 비장한 그늘이 어려 있기도 했다. 그로 인해 용광로의 불빛을 받은 소년의 얼굴에서는 아주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미소년은 자신이 만든 검(劍)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방금 전 쇳덩이에 불과하던 것이 어느새 서슬이 퍼런 검인(劍刃)으로 변해 푸른 빛을 토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피를 묻혀낼 듯 섬뜩한 기운이 푸른 빛 속에 어려 있었다.
다음 순간 소년의 준미한 눈썹이 찌푸러지면서 호수같이 맑은 눈에 그늘이 어렸다.
"아아... 나의 마음에 어떤 악마(惡魔)가 있기에 만드는 칼마다 이리도 지독한 것만 나온단 말인가? 어이해... 신검(神劍)을 만들지 못한단 말인가?"
소년은 탄식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음 순간 그는 거대한 망치를 번쩍 치켜들었다.
꽝!
망치가 내려치는 순간 시퍼런 살기를 토해내던 검날은 불똥을 토해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부서져나간 검날을 바라보며 소년은 조금도 아깝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이때였다. 
"호호호...! 네가 바로 파검장인(破劍匠人)의 수제자 파검소년(破劍少年)이로구나?"
느닷없이 등뒤에서 맑고 청량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년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였을까? 
활짝 열려진 문밖에 한 대의 큰 사두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 위에는 하나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깃발에는 다음과 같은 황금색의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 낙양세가(洛陽勢家) 월아보(月娥堡).
월아보는 낙양의 명가였다. 
낙양에서 손꼽히는 부호이자, 명문임은 물론 무림세가이기도 했다.
"......!"
소년의 검미(劍眉)가 꿈틀거렸다. 
마차 위에는 한 명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일신에는 화려한 교의(嬌衣)를 걸치고 섬섬옥수에는 공작선(孔雀扇)을 쥐고 있었다. 
눈은 호수처럼 맑았으며 아미는 그린 듯 선연했다. 나이는 십칠 세쯤 되어 보였다. 
대장간 안에서 소년이 바라보자 미소녀는 가볍게 마차에서 뛰어 내리더니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대뜸 맑고 아름다우며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파검소년. 네가 만드는 모든 병기에는 신비한 힘이 실려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
그 말에 이제껏 무표정하게 소녀를 주시하고 있던 소년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검을 팔기 위해 만들지는 않습니다. 낭자."
파검소년.
그는 하루 종일 검을 만들고 부수는(破劍) 일만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왔다. 따라서 이제껏 그의 궁가병기점에서는 한 자루의 검도 팔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십 년 이상을 반복한 결과 파검소년은 특이한 재주로 인해 어떠한 쇳덩이이건 자신이 마음 먹은 대로 만드는 재간을 지니게 되었다.
미소녀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얼마 후 아버님의 회갑일이다. 그 분께 선물로 드릴 신검(神劍)을 하나 만들어다오. 보수는 이것이다."
미소녀는 일방적으로 말하며 다짜고짜 소매 속에서 금주머니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짜르륵.......
파검소년의 앞에 떨어진 금주머니가 열리면서 찬란한 명주(明珠)가 한웅큼 쏟아져 나왔다. 실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화였다.
파검소년은 그러나 명주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는 검미를 찡그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검을 팔지 않소이다!"
"호호...! 너는 천하제일장인(天下第一匠人)의 제자이다. 천하제일장인 궁우(宮羽)가 병든 이후 네가 모든 것을 도맡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그것은......."
"흥! 보름 안에 신검을 만들어 월아보로 갖고 오지 않는다면 이곳은 박살날 것이니 명심해라."
파검소년이 말을 잇지 못하자 미소녀는 협박하듯 말하며 몸을 돌려 마차에 뛰어 올랐다. 
소년은 급히 외쳤다.
"그래도 주문은 받지 않겠소!"
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에 불과했다.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마차는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고는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한시라도 빨리 지저분한 거리를 벗어나려는 듯이.
"......!"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마차가 사라져간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대장간 바닥에 흩어져 있는 눈부신 명주조차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신검을 만들어 달라고......?"
문득 소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을 만들기 시작할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기이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대로 검을 만들면 무서운 살기를 뿜는 검이 만들어지곤 했다.
"휴... 하지만......."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이때였다.
"콜록... 쿨룩... 쿨룩......."
대장간 옆의 토방(土房)으로부터 심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안색이 급변했다.
"할아버지가......?"
소년은 급히 몸을 돌렸다. 
토방. 
낡을 대로 낡은 목침상 위에는 입과 코로 피를 흘리는 칠순 가량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파검장인(破劍匠人) 궁우(宮羽).
그가 바로 궁가병기점의 주인인 파검장인 궁우였다. 그는 정확히 십오 년 전 낙양으로 흘러 들어와 병기점을 열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소년이 토방 안으로 황급히 뛰어들어오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궁우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처... 천강(天 )아... 검을... 만들었느냐?"
힘들게 말을 내뱉을 때마다 가래가 그르릉거렸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천강은 침상 앞에 무릎을 꿇으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궁우노인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외쳤다.
"그러나 곧 만들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바라시는 신검을... 꼭 만들겠습니다. 온 세상의 마기(魔氣)를 누를 신검을!"
그의 눈에서 신념의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측은하고 애정이 가득찬 눈으로 천강을 올려다보던 궁우노인이 입을 열었다.
"천강아... 너는 꼭... 그것을 네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는 쿨룩... 그래야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천강은 급히 궁우노인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하... 할아버지, 염려마세요"
"그래... 너를... 믿는다. 너는 반드시 해낼 것이다. 쿨룩... 쿨룩!"
궁우노인을 침상 위에 누이며 천강은 침울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지난 번... 어머니에게 갔다오신 이후 병세가 더욱 도지셨습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광기(狂氣)가 도져... 할아버지를 후려쳤나 보지요. 지난 사흘 내내 끙끙 앓으시다니......."
궁우노인은 짓무른 눈을 내리 감으며 말했다.
"네... 네 어머니는...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업보(業報)다. 참으로 무거운......."
"......."
대답 대신 천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운명(運命)이라는 무거운 무게가 그의 머리와 어깨를 힘겹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천강이 말을 잇지 못하자 궁우노인의 깡마른 손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가라... 가서 네 어머니에게 불경이나 읽어 주려무나. 네 어머니가 미쳐서 너를 때리더라도... 너는 아파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네."
천강이 힘없이 대답했다.
"쿨룩... 너는... 꿋꿋한 한 그루의 대나무가 되어야 한다. 알겠... 느냐?
"명... 명심하겠습니다."
"자... 어서 가봐라. 으으... 음......."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던 궁우노인의 코에서 한 줄기 검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하... 할아버지."
놀란 듯 어깨를 들썩이던 천강은 제풀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력이 다했기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궁우노인은 스르르 잠에 취해 버렸다.
"할아버지......."
천강은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궁우를 내려다 보다가 피로 얼룩진 이불자락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잠든 궁우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토방을 나섰다.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그의 모습에서는 외로움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야수와도 같은 분위기를 지닌 천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성은 백(白)이였다.
백천강(白天 ).
이것이 바로 궁가병기점에서 신검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소년의 이름이었다.
②
북망산(北邙山).
북망산은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는 산으로서 옛부터 왕족들의 시신이 많이 묻혔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원인들에게 있어서 북망산은 죽음(死)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지는 곳이었다.
이렇게 죽음을 상징하는 북망산을 어느 문필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 마른 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북망산 기슭은 매우 황량한 까닭에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곳이다. 그런즉 밤이면 오죽할 것인가. 
노을이 깔리고 어스름이 시작되는 밤이 오면 북망산 기슭 일대에는 한없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싸늘한 밤바람이 무성한 잡초를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는 곳.
여인의 눈썹과도 같은 초생달이 검푸른 하늘에 한 폭의 그림처럼 걸리면 북망산의 밤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변한다.
죽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북망산. 
오직 사자(死者)들의 고혼(孤魂)들만이 그곳에 머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탓이라 대낮이라 해도 사람들이 잘 접근하려 들지 않는 곳이었다.
"......."
백천강은 무덤을 헤치며 산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품에 보따리 하나를 싸안고 있었다. 보따리 속에는 서너권의 불경(佛經)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벼락을 맞아 부러진 채 시커멓게 타버린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부러진 고목의 좌우로 무덤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황량한 곳. 그곳에는 경고문이 적힌 석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금지(禁地).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가 들리는 곳이니 들어가지 마시오.
낙양부사(洛陽府使).>
한 번 들으면 색심(色心)을 일으키게 되며 그 웃음소리를 따라가면 불귀의 객이 된다는 사풍색혼소가 들린다는 공포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란 말인가?
"......."
경고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던 백천강은 잠시 후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석비가 세워진 구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스스스스.......
갑자기 음산한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안개는 너무나도 짙어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음침하고 섬뜩한 기운까지 느끼게 했다. 
금방이라도 무덤 속에서 원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공포스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백천강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나 석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단 한 가지 변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법(步法)이었다. 백천강은 옆으로 가듯 좌(左)에서 우(右)로, 다시 우에서 좌로 걸음을 옮기며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그것은 바로 기문진법(奇門陣法)을 뚫고 들어가는 동작이었다. 석비 안의 구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문진법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백천강은 안개를 뚫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전진과 후퇴를 일 다경 가량 거듭했을 때였다. 문득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곧이어 주위의 풍경이 드러났다.
언덕 위에 한 채의 모옥(茅屋)이 있었다. 
허물어져가는 모옥을 본 순간 백천강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띄었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의 표정이 역력했다.
백천강은 급히 모옥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때였다.
"오호호호... 하늘아... 땅아... 달아... 구름아... 호호... 어서 나를 범하라. 철저히... 짓밟아라! 오호호호."
모옥 안으로부터 흐느낌인지 웃음인지 모를 처절한 여인의 부르짖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백천강의 눈에는 뿌연 안개가 어렸다.
'어머니의 광기가 또다시 도졌구나!'
백천강은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의 문은 열려 있었다.
석침상(石寢牀) 위에 백의(白衣)를 입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러나 눈이 번쩍 뜨일만큼 절세미부였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두 발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 소자 왔습니다."
모옥 안으로 들어선 백천강은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그때였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들어서는 백천강을 바라보던 백의미부의 동공이 한순간에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호호... 천무(天武)냐? 호호... 자아... 어서 나를 짓밟아 봐라!"
뒤이어 백의미부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풀어헤치는 것이었다.
백설(白雪)보다 흰 풍만한 젖가슴이 터질 듯이 미어져 나왔다. 그것은 야릇한 색정(色情)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백천강은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어... 어머니... 소자입니다! 어이해...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처... 천강이라고?"
흰 눈동자만 가득하던 백의미녀의 눈빛이 그때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하루 온종일을 광기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단 한 사람, 그녀의 아들인 백천강 앞에서만은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극히 찰나적인 순간뿐이었다.
백천강을 바라보던 백의미부의 눈에서 불현듯 사악한 빛이 흘러나왔다. 돌연 그녀는 손을 휘둘렀다.
짝!
백의미부는 사정없이 백천강의 뺨을 후려치며 외쳤다.
"썩 나가! 더러운 자식... 퇴엣!"
무서운 힘이었다. 뺨을 맞았을 뿐인데도 백천강은 일 장이나 뒤로 나뒹굴었다. 
백천강은 다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저는 맞아도 울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영약으로도 어머니의 병은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늘이 어머니를 고쳐주시리라 믿습니다."
백천강은 그렇게 말하며 싸들고 온 보따리를 끌렀다. 보따리 속에는 세 권의 불경이 나왔다. 
백천강은 그중 한 권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일체고액(一切苦厄),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不異空), 공불이색(空不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불경은 모두 궁우가 준 것이었다. 
모두 심오한 불가의 진리를 담은 성스러운 법문이 적힌 것으로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거침없이 불경을 줄줄 읽어내려갔다.
"오호호... 오호호호홋......!"
미친 듯이 날뛰던 백의미부가 불경소리에 차츰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乃至)......."
백천강이 멈추지 않고 불경 읽기를 한 식경 가량 하자 마침내 백의미부는 침상에 쓰러지며 잠이 들고 말았다.
"......!"
그녀가 잠이 들자 백천강은 불경을 내렸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잠든 백의미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어머니......."
중얼거리는 백천강의 얼굴에 문득 꿈결같은 기색이 어렸다.
잠든 백의미부의 모습은 조금도 광녀(狂女)같지 않았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운이 그득 어려 있는 얼굴이었다.
백천강은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잠드신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은 듯 백의미부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던 백천강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휘이잉.......
삐이걱!
문을 흔들며 북망산의 싸늘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바람을 맞으며 백천강은 주먹을 쥐었다.
"언제고... 어머니의 심마(心魔)를 끊어 버리리라. 내가 신검을 만드는 날...... 어머님도 낫는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꼭 신검을 만들겠다!"
그는 문을 살며시 닫고 모옥 밖으로 나섰다.
휘이잉... 휘잉.......
바람(風).
북망산을 휩쓰는 바람은 몹시 허허롭고 비감한 것이었다.
백천강은 모옥의 주위를 잠시 돌아본 다음 오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들어왔을 때의 보법과는 반대로 걸음을 옮기며 그는 무덤 사이로 사라져 갔다.
휘잉... 휘이잉.......
바람이 그의 장포자락을 뜯어낼 듯이 마구 흩날리게 했다.
③
새벽녘이었다. 
궁가병기점의 후원으로부터 물소리가 들려왔다.
쏴아... ㅊ......!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미명(未明)의 새벽. 
희뿌연 어둠 속에서 찬 공기를 무릅쓰고 찬물로 목욕하는 소년이 있었다. 바로 백천강이었다. 
꼭두새벽마다 찬물로 목욕재계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루의 첫 시작을 그는 목욕재계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것은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꿈 속을 헤메고 있는 미명의 새벽에 치르는 목욕재계의 의식(儀式). 이것은 어느새 백천강에게 하루하루의 통과의례(通過儀禮)와도 같은 것이 되었던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병기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백천강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월아보의 소녀가 그에게 검을 만들어 달라 부탁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검을 팔아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월아보라면 세도가 당당한 곳이 아닌가?'
백천강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뇌리 속에 한 자루 검의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눈을 감은 백천강이 놀라 외쳤다. 
뜻밖에도 서슬이 시퍼런 하나의 검이 현실의 물건인 것처럼 그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刻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기(殺氣)가 물씬 풍겨나는 검이었다.
놀란 백천강은 급히 눈을 떴다. 
그러나 살기로 뒤덮힌 것만 같았던 시퍼런 검의 영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누... 누군가 그 검을 들고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그런 상상을 하자 백천강의 눈썹 끝이 떨렸다. 다음 순간 그의 마음 속에 흥분이 밀려들면서 격동이 일어났다. 
그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기가 물씬 풍겨나는 마검(魔劍)을 만들겠다는 상상만으로 이토록 마음이 격동되었던 적은 이전에 단 한 순간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어머니를 구하고 저주스러운 가문의 업보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검(神劍)을 만들려고 했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격동이 마검을 상상하는 순간 그의 정신과 육체를 짜릿하게 뒤흔든 것이었다.
'안돼! 내가 어찌 그런 악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그때 그는 누군가를 보았다.
찬 눈빛 하나가 담장 너머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너무나 차가워 백천강의 영혼마저 얼려버릴 것 같았다. 또한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누... 누구시오?"
백천강은 놀라 물었다. 
"후후후... 십육 년만에 돌아왔는데 네가 이곳에 있었다니... 내 너를... 머리에 넣고 있지 못했구나."
괴인의 음성 또한 눈빛처럼 차디찼다.
"당신은 누구요?"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다시 물었다.
"후후후... 훗훗... 훗......."
야릇한 웃음을 흘리던 괴인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환영(幻影)처럼 사라졌다. 어느새 차가운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는 오간 곳이 없었다.
다만 새벽안개만이 담장 위를 흐르고 있었다. 
'내가 환상을 본 것일까?'
넋을 잃고 내심 중얼거리던 백천강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분명 환상이 아니었다. 섬뜩한 눈빛과 싸늘한 음성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안개가 흐르는 담장 너머를 쏘아보며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쿨룩......!"
문득 토방쪽으로부터 궁우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백천강은 급히 상념을 떨쳐 버리고 토방으로 달려갔다.
"쿨럭... 쿨럭......."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으나 궁우노인의 행색은 지난 밤에 비해서는 꽤나 양호한 편이었다. 얼굴에도 다소 혈색이 돌고 있었다. 
백천강을 바라보는 궁우노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자비스러웠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천강아... 방금 전 네가 누군가와 말하는 것 같았는데......."
노인의 말에 백천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누구를 말이냐?"
"아주 차가운 눈빛과 음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뭐... 뭐라고?"
궁우의 늙은 얼굴이 홱 변했다.
"그는......."
백천강은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던 괴인의 얼굴과 그가 말한 내용을 말했다. 
궁우의 눈이 공포를 담고 크게 휩 떠졌다.
"설마... 그가 돌아왔단 말인가!"
경악성을 외친 순간 궁우노인의 몸이 침상을 부수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우지끈... 쿵!
놀랍게도 궁우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공력(功力)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 바람에 목침상이 박살난 것이다. 
충격을 받아 진탕된 듯 궁우의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하... 할아버지! 어인 일이십니까?"
놀란 백천강이 궁우노인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 그가 돌아왔다... 그가 드... 드디어......."
넋을 잃은 듯 중얼거리던 궁우노인이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나... 나갔다 오겠다... 기... 기다려라!"
백천강이 말릴 기회도 없었다.
스스스.......
놀랍게도 궁우의 몸이 흔들 하는 듯 싶더니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닌가?
"하... 할아버지!"
백천강은 돌변한 사태에 멍해졌다.
'대...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온통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궁우노인의 말대로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기다림은 몹시도 지루했다.
백천강은 오래 전에 꺼진 화로 앞에서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병기점 앞에서 인기척이 날 때마다 천강은 귀를 쫑긋했다. 그러나 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했다. 
어찌된 일인지 궁우노인이 갑작스럽게 병기점에서 사라진 이후로 병기점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조차 없었다.
휘리링.......
덜컹!
병기점의 찌그러진 문짝을 흔드는 바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마침내 열흘이 지나자 그는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셨길래......?'
그의 얼굴에 불길한 먹구름이 덮였다.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 나라도 가서 돌봐드려야 한다.'
그는 병기점을 나섰다.
휘이잉.......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부는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서 백천강은 낙양성을 빠져 나갔다.
북망산(北邙山).
망자(亡者)들의 침묵만이 깃드는 곳으로 백천강은 들어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불탄 채 부러진 고목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 백천강은 경악하고 말았다. 발치 아래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있는 돌조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낙양부사가 경고문을 새겨 세워둔 석비였다.
'이럴 수가?'
백천강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그는 진법이 설치된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진법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안개 현상도 없었고 시야가 가려지는 어떤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의혹을 감추지 못하면서 백천강은 마구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모옥에 이르렀다. 
모옥 안에는 더욱 놀라운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천강은 모옥 안에 들어선 순간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모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돌침상 위에 있어야 할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단지 어머니의 발목을 동여매고 있던 쇠사슬만이 토막토막 끊어져 나뒹굴 뿐이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너무도 놀라 일시지간 머리가 혼란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방을 뛰쳐 나와서는 모옥 뒤편으로 달려갔다.
"아!"
뒤편으로 돌아간 순간 백천강은 말뚝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노을빛보다 붉은 홍의(紅衣)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女人)이 바보처럼 멍청한 얼굴로 북망산 중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잃은 눈동자가 흡사 백치(白痴)같아 보였다. 
바로 백천강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백수련(白水蓮)이란 여인이었다.
"호호... 호호홋!"
멍하니 산중턱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느닷없이 혼백을 빼앗을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 어머니!"
백천강이 놀라 부르짖었다.
돌연 웃음을 멈춘 여인이 몸을 홱 돌렸다. 싸늘하게 굳었던 여인의 음성이 백천강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풀어졌다.
"천강이로구나. 호호... 궁가병기점에 있지 않고 왜 이곳에 왔느냐?"
너무도 맑은 음성이었다. 추호도 미쳤다고는 볼 수 없는 아름답고 해맑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녀의 음성에는 일종의 사이(邪異)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백천강은 마치 철퇴로 머리를 한바탕 얻어 맞은 기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급히 백수련의 발목을 보았다. 발목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가 보이지 않았다. 쇠사슬이 채워졌던 흔적만 하얗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끊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의 광기(狂氣)가 사라졌기에 할아버지가 끌러준 것일까?'
백천강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때 백수련이 입을 열었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여기 오지마라. 이곳에서 어미 혼자 공부할 것이 있다."
"네?"
여인의 말은 백천강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랫동안 광기에 시달려왔던 여인의 입에서 불현듯 공부를 하겠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것인지 백천강으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어...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백천강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때였다.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백수련의 얼굴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어서 가라니까! 네 녀석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냉혹하게 내뱉은 백수련이 돌연 몸을 돌리더니 모옥을 향해 걸어갔다. 찬바람이 휙휙 이는 걸음걸이였다.
"어... 어머니!"
백천강은 온통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때였다.
"천강아."
불현듯 모옥 왼편의 무덤 사이에서 그를 부르는 청아한 음성이 있었다.
"할아버지!"
정신이 번쩍 든 백천강이 고개를 돌리며 반가운 듯이 외쳤다. 인영(人影)은 없었으나 그를 부른 것은 분명 파검장인 궁우노인의 음성이었다. 
백천강은 흡사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으로 음성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2장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
①
봉분(封墳)을 에워싸고 있는 조그만 둔덕의 한 그루의 소나무 아래 궁우노인이 서 있었다.
때에 절은 그의 백의(白衣) 앞섶에는 점점이 핏방울이 묻은 채 굳어 있었다. 눈빛은 예전처럼 밝아 보였다. 그러나 그 눈빛 깊숙한 곳에는 섬뜩한 한기(寒氣)가 서려 있었다.
백천강은 그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백천강은 궁우노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물었다.
"할아버지, 그간 어디에 가 계셨습니까?"
백천강의 절을 받던 궁우노인이 입가에 야릇한 기소를 베어 물었다.
"허허... 너를 위해 한 권의 고서(古書)를 구해 왔다. 그 책은 네가 명장(明匠)이 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궁우노인은 손을 내밀어 백천강을 일으켰다.
"자, 어서 병기점으로 돌아가자. 가서 네게 주겠다."
"......?"
백천강은 엉겹결에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백천강은 궁우노인과 함께 병기점으로 돌아왔다. 백천강이 병기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찌익!
돌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궁우노인이 현판 옆에 붙어있는 방문(榜文)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 검(劍)은 팔되, 살(殺)은 팔지 않음.
그 방문은 궁우노인이 손수 써붙인 것이었다. 방문을 떼어낸 궁우노인은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품에서 또 하나의 방문을 꺼내 붙였다.
- 진짜 검(劍)을 팜. 살(殺)을 위해 쓰일 검(劍)만을 팜.
실로 놀라운 글귀였다.
"......!"
새로운 방문을 바라보는 순간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글씨는 예전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글씨가 주는 느낌은 과거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백천강은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조금 이상해지셨다. 이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백천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궁우를 따라 토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강이 무릎을 꿇고 앉자 궁우노인은 품 속에서 한 권의 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몹시 낡은 책이었다. 
너덜거리는 표지(表紙)에는 전자체(篆字體)로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천마천병보(天魔天兵譜)>
"할아버지, 이건......?"
고서를 받아들고 백천강이 의아한 듯이 바라보자  궁우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그 책을 공부해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몹시 귀한 책이다. 특히 너에게는......."
잠시 후 궁우노인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 읽은 다음 태워버려라. 아마도 그것은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지막이라니오?"
백천강은 더욱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궁우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헛헛... 늙으면 죽는 법이 아니겠느냐?"
이어 그는 눈을 감았다. 궁우노인의 닫힌 입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더이상 없다는 듯이.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부드러워지신 것도 같으면서도 날카로워지신 것도 같다. 열흘만에 할아버지가 이렇게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백천강은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 듯한 궁우노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밖으로부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핫핫핫! 여기서 검(劍)을 팔다니... 모를 일이군!"
백천강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궁가병기점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제법 청수한 용모에 눈빛이 범상치가 않은 중년문사 하나와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몹시 귀엽게 생긴 미소녀였다. 
녹의(綠衣)를 입은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병기점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궁가병기점의 풍물이 몹시 신기롭게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백천강이 나가며 물었다. 중년문사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헛, 나는 검을 부러뜨린 문사네만... 이곳에서 검을 판다면 아니 사갈 수 없어 들렸네. 내게 검을 팔게나."
백천강은 급히 말했다.
"거... 검을 팔지는 않......."
순간 백천강은 급히 말을 중단했다. 조금 전에 궁우노인이 새로 써붙인 방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곧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 팝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기이한 눈초리로 백천강의 아래 위를 훑어보던 중년문사가 다시 빙그레 웃었다.
"허헛, 그럼 기다리겠네. 검을 완성하면 열래객잔(悅來客棧)의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을 찾아주게나!"
말을 끝낸 중년문사는 품 속에서 전냥을 꺼냈다. 그는 검의 값을 묻지도 않았다. 짚히는 대로 은자 오천 냥짜리 전표를 백천강에게 건네 주는 것이었다.
"허허헛, 계집애야, 돌아가자."
중년문사는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녹의소녀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백천강을 유심히 보더니 곧 그를 따라 사라졌다.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
그는 강호에서 이름난 대협객(大俠客)으로 지난 날 대마성(大魔城)을 칠 때 무림맹에 가입하여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절정고수였다. 
한동안 은거했던 그가 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②
밤(夜).
월광(月光)이 구름에 가려진 적막한 밤이었다. 낙양의 번화가는 불야성으로 아직도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흥청거렸다. 그것은 화운로(華運路)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빈민들이 사는 궁핍한 거리는 인적이 끊긴 지 이미 오래였다.
이경(二更) 무렵.
땅... 땅... 땅.......
날카롭고도 밝은 쇳소리가 궁가병기점으로부터 야음(夜陰)의 적막을 깨고 들려왔다.
궁가병기점의 불화로가 싸늘하게 식은 지 열하루만의 일이었다. 백천강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화로 앞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진짜 검(劍)을 만드는 것이다. 진짜 검을!'
땅... 땅... 땅.......
쇳소리는 날카롭게 들렸다. 검을 단련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백천강의 모습은 마치 한 덩이의 바위같이 보였다. 
그는 드디어 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살검(殺劍)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검을 다 만든 뒤 부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부터 만드는 검은 누군가 임자가 있는 검이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백천강의 몸 안에는 엄청난 마성(魔性)이 잠재하고 있었다. 
백천강의 몸 속에는 대마성(大魔城)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백수련(白水蓮)은 바로 대마성의 후예인이었다. 그 마성이 백천강의 피 속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살검을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땅... 땅... 땅.......
그는 힘차게 망치질을 했다. 
그에 따라 시뻘건 쇠뭉치는 점차 검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발없는 소문이 하룻밤에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불과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 궁가병기점이 검(劍)을 팔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낙양 전체에 퍼졌다. 
낙양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필요에 의해서 궁가병기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검을 주문하는 사람도 늘어갔다. 
주문이 늘면 늘수록 백천강의 망치질 소리는 더더욱 빨라졌다. 그는 단 한순간도 쉬는 적이 없었다. 오로지 살검을 만드는 것만이 그의 숙업인 듯 미친 듯이 망치질을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났을까?
갑자기 놀라운 소문이 낙양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것은 괴이하고 공포스러운 소문이었다.
...... 북망산에 색마가 있다. 농부 다섯이 모두 원양지기(元陽之氣)를 빨리고 죽었다!
...... 북망산의 묘지기 두 명이 발가벗은 채 죽었다.
......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을 듣고 많은 남자들이 홀려 북망산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죽었다.
실로 엄청난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낙양성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디 그뿐인가? 무림의 사람들도 모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흐으윽... 하아악!"
묘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신음소리같은가 하면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소리는 묘하게도 뭇 사내들의 색정(色情)을 자극했다.
황혼(黃昏)이 북망산의 서편 하늘을 처절하게 물들이는 시각.
묘한 신음소리를 따라 북망산의 중턱에 위치한 한 묘옥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가는 인영이 있었다. 
장한의 골격을 지녔으나 얼굴은 뜻밖에도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인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백천강의 가슴은 뛰었다. 
북망산 계곡에서 흐느끼는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지 닷새째였다. 뭇 사내의 혼을 빼앗는 흐느낌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왔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백천강은 어떤 예감 때문에 부르르 몸을 떨곤 했다.
마침내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백천강은 작심을 하고 북망산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벼락을 맞아 불타버린 고목을 지나자 언덕의 무덤 사이로 허물어져가는 모옥이 보였다. 바로 그의 모친인 백수련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모옥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던 백천강은 한순간 얼어붙은 듯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활짝 열린 모옥 안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두 눈을 부릅뜬 백천강은 경악에 찬 외침을 토해내고 말았다. 석침상 위에서 발가벗은 두 남녀가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흑... 하아......"
차마 눈뜨고 못볼 일이었다. 두 남녀는 짐승처럼 서로의 몸을 핥으며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어머니가 통정(通情)을 하다니!"
백천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르짖었다.
그것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백천강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이 놈을......."
그는 즉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정사를 벌이는 사내를 쳐죽이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달려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사내 밑에 깔린 채 희열의 신음성을 토해내던 백수련의 눈이 번적 떠졌다. 이어 그녀의 손바닥이 백천강을 향해 흔들렸다.
"바보같은 자식... 가라!"
꽝!
"아악!"
폭음과 함께 백천강은 비명을 지르며 모옥 밖으로 날아갔다. 전신이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무덤가에 떨어진 백천강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슥.......
하나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나타나더니 정신을 잃은 백천강을 안아드는 것이었다. 바로 궁우노인이었다.
품에 백천강을 안은 궁우노인이 발을 움직였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궁우노인은 단번에 오십 장을 날아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일각(一刻) 후.
거친 신음소리가 잦아들면서 모옥 안으로부터 넋을 잃은 듯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헤헤헤... 헤헤......."
발가벗은 사내 하나가 전신에 비지땀을 흘리며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사내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온몸의 기운을 모두 빼앗긴 듯했다. 
"헤헤헤......."
넋을 잃은 웃음을 연신 흘리며 사내는 허우적거리듯 앞으로 걸어갔다. 
"헤헤헤... 어... 억!"
불과 삼 장이나 걸었을까? 하나의 무덤 옆을 지나던 사내가 무엇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풀썩 쓰러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영원히 다시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호호...호호홋......!"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돌연 모옥 안으로부터 음탕하고 마성이 가득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③
궁가병기점.
"......!"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백천강은 고서를 보고 있었다.
<천마천병보(天魔天兵譜)>
바로 궁우노인이 그에게 준 책자였다. 
천마천병보를 읽어나가는 백천강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되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순간 그의 입에서 살기와 저주에 찬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죽인다. 모두 죽인다. 나의 어머니를 범한 자들을!"
그의 눈에서도 무시무시한 살광(殺光)이 흘러나왔다. 
천마천병보는 갖가지의 신병(新兵)과 암기(暗器), 가공할 죽음의 비병(秘兵)을 제작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죽이리라. 모두!"
한 점 허공을 바라보며 연이어 중얼거리는 백천강의 음성에는 섬뜩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 백천강의 등 뒤에 한 사람이 유령같이 서 있었다.
다름아닌 파검장인(破劍匠人) 궁우(宮羽)였다. 
"......!"
한순간 궁우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악마의 저주처럼 묻어났다.
낙양성 외곽.
북망산 초입의 한 언덕에 한 채의 초옥이 생겨난 것은 늦가을이 지나가기 전의 일이었다.
밝은 햇살이 열린 토방문 사이로 비껴들어 따스한 양지를 만들고 있었다. 백의를 입은 절세의 미부(美婦)가 스며드는 양광을 쬐며 침상 가에 걸터 앉아 있었다.
"......."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그러나 신비스러운 여인이었다. 
초점을 잃은 몽롱한 눈빛만이 꿈 속을 헤매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꼭 백치(白痴)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바로 그런 분위기가 여인을 더더욱 신비스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백의는 약간 남루했다.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미부의 미모를 돋보이게끔 만들었다. 정말이지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십육 년 전 대마성의 후예인들에게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고 불리우던 백수련이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킨 것은 초옥을 따스하게 하던 아침 햇살이 사라진 후였다. 어느새 해는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초옥 앞에 홀로 나와서 멍하니 서 있기 시작했다. 그것이 살풍(殺風)의 시작이었다. 
우연히 북망산 초입에 서 있는 초옥을 지나던 사람들은 한 순간 그녀의 백치같은 미모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마력적이기까지 한 백수련의 미태(美態)를 발견하는 순간 사내들은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그것은 여인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헉헉... 우... 우물(尤物). 내 혼을 바치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고 싶다!"
색(色)의 바람은 그렇게 불기 시작했다. 
우연히 북망산을 지나던 사내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백수련의 용모에 반해 초옥 안으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그 소문은 삽시에 퍼져갔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언제부터인지 색정(色情)에 눈이 어두워진 많은 사내들이 고의적으로 북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인은 사고능력이 전혀 없는 백치임이 틀림없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사내들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분명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백치의 여인이 풍기는 염기(艶氣)는 사내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도 남았다. 여인을 올라탄 사내들은 넋을 잃고 육신을 불태웠다.
 
휘이잉... 휘이이잉.......
세찬 동풍이 몹시 불던 날.
중원에서 인품과 풍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한 은거인이 초옥을 찾아 북망산을 오르고 있었다. 다름아닌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이었다. 
검을 꺾고 은거한 지 십육 년만에 모습을 나타낸 그가 북망산의 초옥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없이 많은 사내를 호리는 파렴치한 여인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기세광은 강호에 나온 이래 유난히도 색을 미워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자였다. 아니 색(色)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살기가 흐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북망산 초입에 당도했다.
스스스.......
언덕 위. 
앙상하게 마른 채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들 사이로 듬성듬성 떼가 벗겨진 무덤이 드러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언덕을 올라갔다.
얼마동안 돌보지 않은 것일까? 비석조차 사라진,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인 무덤을 지나는 순간 언덕 아래 초옥이 보였다.
"저곳이로군. 사악한 계집이 살고 있다는 곳이."
기세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초옥 앞에 한 백의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을 쥔 기세광의 오른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초옥을 향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마침내 여인의 앞에 당도한 순간 기세광은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초점 잃은 눈으로 한 점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여인을 본 순간 그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인이 완전히 백치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것은... 이 여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내들의 잘못이 빚은 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돌아섰어야만 옳았다. 
하지만 기세광은 여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인이 은연중 풍기는 기이한 마력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터지는 활화산(活火山)처럼 색정(色情)이 기세광을 휘몰아쳤다. 여인을 품고 싶다는 뜻하지 않은 욕망은 거짓말처럼 그의 이성과 인품 자체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아아... 마... 마물(魔物)!"
기세광은 검을 내던지고 여인을 안고 말았다.
"헉헉... 헉헉......."
쾌락의 신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④
절검유사 기세광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그것도 초옥에서 불과 오십 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였다. 
그 후부터 무림의 내노라 하는 기인고수들이 북망산의 초옥으로 여인을 찾아갔다.
기세광을 죽인 흉수를 추적할 겸, 또는 여인이 일으키는 색의 유혹에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호기심 때문에 초옥을 방문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튼날이면 그들 역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괴사(怪死)의 시작이었다.
자면신검(紫面神劍) 선우현(鮮于玄)을 비롯하여 도를 잘 쓰기로 유명한 옥면천도(玉面天刀) 위천걸(韋天傑), 을목존자(乙木尊子) 도원강(都元江), 천산신필(天山神筆) 여운몽(呂雲夢)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림인들이 목숨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한 지역을 웅패하거나 중원무림을 질타하는 패웅고수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여인을 찾았다가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정사를 벌였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들은 예외없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죽은 그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모두 초옥에서 오십 장 밖의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것이 하나, 그들의 왼편 가슴에 둥근 테 모양의 상처가 관통되어 있다는 점이 둘이었다. 
상처에는 바늘같이 얇은 수십 개의 쇠조각이 박혀있기도 했다. 그것이 치명적인 사인(死因)이었다.
한순간에 저승객이 되어버린 그들 중에는 정도인(正道人)도 있었고 사도인(邪道人)도 있었다.
무림은 연속되는 괴사에 마침내 크게 경동하고 말았다. 마침내 정도 사도를 막론하고 숱한 무림고수들이 흉수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흉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호기심이 많거나 자신의 무공을 믿는 자들이 초옥으로 찾아가 여인을 범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사신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목숨만을 사신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비응삼협(飛應三俠).
비응삼협이라 일컫는 관씨(關氏) 삼형제의 연이은 죽음은 중원무림을 완전히 공포와 경악의 도가니 속으로 만들고 말았다.
비응삼협의 첫째가 초옥의 여인과 정사를 맺은 후 죽자 둘째가 다시 여인을 찾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자 다시 셋째가 여인을 찾아와서는 정사를 맺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모진 바람 속에서 넋을 저승으로 날려보내야 했다. 사인은 왼편 가슴에 박힌 수십 개의 쇠조각에 의한 것이었다.
그 쇳조각들을 짜맞추어본 결과 날카로운 원형의 형태임이 판명되었다.
마침내 무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무림인들의 의론이 분분해졌다. 초옥의 색녀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흉수를 잡기 위해서는 여인을 살려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강력했다.
결국 한 가지 결정을 택한 무림인들은 초옥 주위에 천라지망(天羅之網)을 치고는 사내 한 명을 여인과 관계를 맺게 했다. 그리고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신의 내공을 격발시키며 흉수를 기다렸다.
그러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희생자는 자꾸 늘어가기만 했다. 
마침내 무림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수가 쓰는 둥근 테의 무기에 사풍인(死風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흉수를 사풍객(死風客)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으로 희생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휘이이잉.......
마치 넋이 빠진 것처럼 날마다 누군가가 초옥을 찾아들었고 여인을 범했다. 그리고 이튿날이면 그는 여지없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궁가병기점(宮家兵器店).
백천강은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갛다 못해 파랗고, 파랗다 못해 새하얗기까지 한 불꽃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빛은 잔혹이 도에 지나쳐 오히려 무심해 보였다.
그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한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휘르르!
옷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한 교영(嬌影)이 그의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고 저주에 찬 음성이 교영의 입으로부터 터져나왔다.
"으드득! 네... 네 놈이 만든 마검(魔劍)으로 아버님이 회갑날 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내가 가장 아끼는 시녀를... 네 놈은 저주받은 놈이다!"
미녀였다. 
일신에 화려한 교의를 입고 손에는 공작선을 든 여인은 바로 월아보(月娥堡)의 여화연(如華娟)이었다. 여화연의 아름다운 눈망울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불 앞에 묵묵히 앉아 있는 백천강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불꽃을 응시하고 있던 백천강이 돌아서면서 말했다.
"후후... 그 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낭자가 아니었소?"
조소가 어려 있는 서늘한 눈매가 여화연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눈빛을 받은 순간 여화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곧 여화연은 이빨을 갈면서 대들었다.
"이... 이 저주받은 놈!"
쐐액!
그녀가 왼손에 쥐고 있던 말채찍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팍!
백천강의 단단한 어깨에서 피가 튀면서 선명한 채찍자국이 드러났다. 그러나 백천강은 눈살을 찌푸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의 입가에 또다시 냉소가 떠올랐다.
"후훗... 나를 죽이러 왔소?"
그의 냉연한 태도에 한순간 여화연은 휘청거렸다.
"어... 어처구니 없는 자!"
그녀의 마음은 두서없이 엉켰다. 미움과 증오 한 켠에 떠오르는 이해못할 감정 때문이었다. 불현듯 여화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침내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검... 검을 하나 더 만들어다오. 아버님의 부탁이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왔다."
말을 마친 여화연이 돌아섰다. 더이상 백천강과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무심하면서 찬 그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여지없이 뒤흔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돌아선 여화연이 세 걸음쯤 걸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검을 만들어 월아보로 온다면... 내가 널 죽이겠다. 사람을 죽이는 살검만 만드는 너의 손에는 저주가 들어 있다."
여화연은 앞으로 걸어가며 내심 탄식을 했다.
'아아... 어째서 사내들은 네가 만든 칼만을 찾는 것인지.......'
두두두두.......
잠시 후 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
백천강은 몸을 돌렸다. 그는 거대한 망치를 집어들었다. 용광로에서 벌겋게 달은 쇳덩이를 꺼낸 그는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땅...땅... 땅.......
망치소리가 들리자 토방 안에서 기침소리와 함께 궁우 노인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쿨룩... 쿨룩. 진짜 좋은 검을 만들어야 한다. 천강아......."
어둠이 잦아들었다. 용광로의 불꽃을 반사시키는 백천강의 얼굴이 점차 기이한 표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3장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①
휘이이이... 잉.......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타향에서나마 가족을 그리는 원단(元旦)으로부터 팔일이 지난 오후.
유난히도 바람이 거센 날 북망산 초입을 향해 황색가사를 입은 중이 오르고 있었다. 
혜원(慧元).
그는 천 년 무림의 태두인 소림사의 승려였다. 그것도 극히 지고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소림사의 차기 장문인(掌門人)감으로써 현 소림사의 장문인 뇌정대사(雷淨大師)의 삼대 제자 중 가장 큰 대제자였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소림 천 년 사상 최고의 기재로서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를 완전히 터득한 천무대선사의 기명제자(奇名第子)라고도 했다.
그런 그가 단신으로 낙양성 밖의 초옥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휘이잉... 위잉.......
삭풍 속에서 짙은 노을이 겨울 하늘을 낭자한 피빛깔로 물들이는 시각이었다. 백의여인이 초옥의 지붕 위로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혜원은 여인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는 오순쯤 되어보이는 나이에 지혜로우면서 정기 충만한 눈을 가진 노승이었다. 여인의 뒤에 멈춰선 혜원은 고개를 숙이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승 혜원이 여시주를 뵈옵니다."
"......."
여인은 귀머거리인 것만 같았다. 혜원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한 듯이 여인은 묵묵부답(默默不答)인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여시주."
혜원은 몇 차례 더 불렀다. 
그러나 여인은 넋나간 듯한 표정으로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는 노을이 후광(後光)처럼 여인의 상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배광 속에 드러나는 여인의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시선과 진홍으로 물든 입술, 학(鶴)같이 가녀린 목줄기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한동안 대꾸가 없자 혜원은 내심 중얼거렸다.
'진정 백치란 말인가?'
서편 하늘을 짙게 물들이던 노을빛이 스러져가면서 저녁 어스름이 깔려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뼘 가량의 빛이 스러질 듯이 남았을 때 여인이 혜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혜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뽀얗게 떠오르는 피부는 백설만 같았다. 영혼이 드러나 보일 것만 같은 투명한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소문과는 달리 여인의 얼굴에는 요기로움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직 꿈 속을 헤매는 듯한 몽롱함이 안개처럼 어려 있었다. 
'진정 백치였구나. 만일 이 여인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혜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상 그는 어느새 여인의 아름다움에 무의식적으로 잠식당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말없이 돌아선 여인이 초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혜원은 급히 합장하며 말했다.
"시주.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여인은 여전히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었다. 실상 혜원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혜원이 여인의 뒤를 따라 초옥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닫힌 문(門).
그것이 그의 운명(運命)을 일백팔십도로 뒤바꿔놓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초옥 안에서 청정한 혜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승의 미약한 힘으로나마 시주의 흐린 정신이 맑아지면 더없이 기쁘겠소이다."
똑... 똑똑똑.......
목탁소리와 함께 낭랑한 염불소리가 용이 구름을 뚫고 솟아 오르듯이 상쾌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천룡선창(天龍禪唱).
그것은 소림의 절예 중 하나로써 사기(邪氣)를 몰아내는 힘이 있었다. 한동안 목탁소리와 함께 천룡선창이 주위를 낭랑하게 위진시켰다.
약 이각쯤 흘렀을 즈음 낭랑히 울리던 천룡선창이 드문드문 끊기기 시작했다.
일대의 명승이자 소림사의 차기 장문인으로써 수양과 공력이 심오한 혜원대사의 천룡선창이 이각(二刻)도 못되어 흐트러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이 뒤이어 발생했다.
"시... 시주......."
촛불이 흔들거리는 그림자를 아로새기는 초옥 안으로부터 혜원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온 것이다.
짙어가는 어둠 속. 
고목(古木)의 삭아가는 가지에 매달린 잎새 하나가 진저리를 치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시... 시주... 허억!"
그것은 범종(梵鐘)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소리였다. 
휘이잉... 위잉.......
겨울 밤이 짙어갈수록 바람은 점점 세게 불며 황량한 북망산의 메마른 풀잎들을 할퀴고 지나갔다.
"허억... 헉!"
오래지 않아 초옥 안으로부터 육욕과 쾌락을 동반하는 뜨겁고도 가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휘이잉... 위이이잉.......
쾅!
초옥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실성한 듯이 뛰쳐나오는 인영은 다름아닌 혜원이었다.
"아아... 업이로다... 업......."
혜원은 넋나간 듯 중얼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휘이이이잉.......
억세게 부는 밤바람이 가까스로 팔다리만 꿰인 승포를 찢어낼 듯 흔들어댔다.
한편 흉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초옥 주위에 잠복해 있는 수많은 눈동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혜원의 파계(破戒)를 지켜보고 있었다. 
혜원의 얼굴에는 처절한 절망이 어려 있었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혜원은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칠흑(漆黑)같은 허공 속으로 떠오르는 한 물체를. 
그것은 빛살같은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그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소리 한 점 없었다. 설혹 소리가 난다하여도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혜원의 몸뚱아리가 짚단처럼 쓰러졌다. 
몸을 숨기고 있던 수많은 눈동자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혜원이 본, 소리없이 내리꽂히는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혜... 혜원대사가 죽었소이다."
"저럴 수가!"
휙... 휙휙휙!
어둠 속에서 수백의 인영이 솟구쳐올랐다. 그들은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칠흑같은 어둠과 살을 에일 듯한 바람뿐 초옥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떼그르르.......
오로지 주인 잃은 목탁만이 바람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정월 팔일 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②
소림사(少林寺).
천 년 무림의 태두이자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파인 소림은 삼원오각(三院五閣)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지(重地)에 속하는 곳은 달마원(達磨院)이다.
달마원.
당금 무림의 중추를 이루는 인물들이 달마원에 모였다. 
소림의 차기 장문인 혜원대사가 죽은 후 소림 장문인 뇌정대사(雷霆大師)가 구파일방에 무림첩(武林帖)을 발부했던 것이다. 
무당(武當) 법정진인(法頂眞人).
화산(華山) 비룡유협(飛龍遊俠).
아미(峨嵋) 백공선사(白空禪師).
곤륜(崑崙) 태청진인(太淸眞人).
청성(靑城) 현성우사(玄星羽士).
점창(點蒼) 제마검협(制魔劍俠) 우문경(宇文卿).
공동(  ) 영풍거사(永風居士).
종남(終南) 선풍비검(旋風飛劍) 우송문(于松文).
개방( 幇)  신풍마취개(神風魔醉 ) 백리천후(百里天候).
실로 기라성같은 무림의 지주들이 소림사에서 보낸 무림첩을 받고 모여든 것이다.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자파의 명예와 긍지심이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달마원 안은 엄숙한 공기가 감돌았다. 
소림의 장문인 뇌정대사(雷霆大師)를 위시하여 그의 세 사제이자 소림삼원(少林三院)의 세 원주도 배석했다. 뿐만 아니라 죽은 혜원을 제외한 뇌정대사의 제자인 혜천(慧天), 혜심(慧心)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약관(弱冠) 정도의 백의청년이었다. 오관이 바르고 꿋꿋한 기상이 헌칠한 이마와 검미에 서려 있는 자였다. 소림과 구파일방의 내노라하는 인물들 사이에 끼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의 품위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
중인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신비하게도 만인을 압도할 듯한 기상이 풍겨나왔다.
십육 년 전.
대마성(大魔城)을 무너뜨린 후 구파일방은 모두 자파의 이익과 영달(榮達), 명예심에 취해 독보적인 자부심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무림첩을 받은 사람들치고 그들이 왜 모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결연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그들은 소림장문 뇌정대사를 주시했다. 
그러나 뇌정대사는 가부좌를 튼 자세로 눈을 감고 침묵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한 식경이 지나도록 고승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곤륜의 태청진인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불진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장문대사. 어서 말씀해 보시오. 이대로 더이상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종남파의 장문인 선풍비검 우송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이대로 가다간 사풍객의 사풍인에 의해 중원무림은 완전히 농락당하고 말 것이오."
"무량수불.... 그렇소이다. 사풍객의 살수를 더이상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오이다."
무당의 법정진인도 도호를 외우며 끼어들었다. 개방의 장문인 신풍마취개 백리천후도 수염을 문지르며 괴소를 흘렸다.
"클클클... 벌써 희생자의 수가 백(百)이 넘었소이다."
다시 중인들의 시선은 뇌정대사에게 집중되었다. 이미 중인들의 의견은 일치된 듯 하였다. 
마침내 눈을 뜬 뇌정대사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여러분의 의견은 충분히 알겠소이다. 하지만 그 여시주를 죽인다고 해서 흉수가 없어진다고는 볼 수 없지 않소이까?"
"......."
중인들은 그 말에 모두 침묵했다. 
불장을 잠시 내려다 보던 뇌정대사가 백미(白眉)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노납의 생각으로는 각파에서 뛰어난 고수 몇 명씩을 선출하여 다시 한 번 흉수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화산파의 장문인 비룡유협이 나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대사의 말씀도 좋은 생각입니다만 사건이 너무 오래되었소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어느 누가 그 색녀에게 접근하겠소이까?"
확실히 비룡유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룡유협은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역시 그 여인을 처치하는 것이 좋을 듯 싶소이다."
그 말에 뇌정대사는 백미를 가볍게 떨며 말했다.
"그러나 무공도 모르거니와 아무런 사고능력도 없는 여인을 죽인다는 것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사제인 뇌광대사(雷光大師)가 끼어들었다. 뇌광대사는 달마원주(達磨院主)로써 평소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장문사형. 빈승의 생각으로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소이다. 어쩌면 그 여인을 처단함으로서 사건이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뇌정대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어리석은 일이네. 어찌 그 여인을 죽인다고 해서 사풍인의 혈풍이 종식될 수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그 말에 혜천이 울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부님! 그럼 혜원사형의 죽음은 어찌 하렵니까?"
뇌정대사는 불장을 흔들며 나직하게 웃었다.
"허허... 혜천아, 어찌하여 불제자로써 원한을 운운하느냐? 혜원의 죽음은 자신의 수양이 부족했던 탓이거늘......."
그 말에 혜천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앙금같은 침묵이 한동안 중인들의 어깨를 눌렀다.
마침내 무당의 법정진인이 나섰다.
"무량수불... 그럼 대사께서는 어찌하겠소이까?"
뇌정대사의 얼굴에는 고뇌가 어렸다. 
한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뇌정대사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중인들을 한 차례씩 훑어보았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인들께서 그 여인을 꼭 죽이셔야 겠다면 노납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그러나 장문인들께서는 그 일을 잠시 노납에게 맡겨 주십시오. 노납이... 직접 가보리다."
"......!"
뇌정대사의 말은 장내의 중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장문인이 일개 백치여인을 만나러 북망산으로 직접 가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도 역시 여인의 색(色)에 넘어가 파계(破戒)한다면 천 년 소림의 명예는 하루 아침에 땅에 떨어질 것이 아닌가?
장내에는 삽시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내심은 달랐다. 그들은 지금까지 각기 자파의 명예와 실리추구에 전념해 왔다. 소림의 지대한 영향력이 항상 그들을 가려왔던 것을 그들은 잊지 않았다. 
만약 뇌정대사가 여인의 색에 넘어가 파계를 해서 소림의 명예가 실추된다면 자연히 그들 문파가 태두로 올라설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마음은 영예와 이득에 눈이 머는 법(法)이다. 숙연한 가운데 장내는 야릇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때 불심원주(佛心院主) 뇌명대사(雷明大師)가 급히 나섰다.
"장문사형. 그건 아니 됩니다. 어찌 장문사형께서 직접 가신단 말이옵니까?"
"아미타불....... 혜원이 죽은 것은 바로 노납의 명을 받고 여인을 구제하러 갔기 때문이네. 모든 것은 노납의 책임... 더구나......"
"......?"
"이 기회에 노납의 불심을 시험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뇌정이 말을 마쳤을 때였다. 그때까지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백의청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 사형께서 가시기 전에 소제에게 그 일을 맡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한 청년이 지고무상한 신분을 가진 뇌정대사에게 사형이란 호칭을 쓰니 말이다. 뇌정대사는 칠순이 훨씬 넘은 고령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발언에 장내의 중인들은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신주제일룡(神洲第一龍) 사유성(査流星).
그것이 청년의 명호였다. 당금 백도무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당금 대명천하(大明天下)의 병권(兵權)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원수(大元帥) 사광천(査光天)의 일남일녀 중 일남이었다. 대원수 사광천은 천자(天子)를 제외하고서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권력의 영화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인 사유성.
그는 이미 십 세 때 학문의 모든 분야를 통달하여 천하와 황실을 놀라게 했다. 더이상 그에게 글을 가르칠 스승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원수 사광천은 아들을 일개 문사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 사유성을 대인으로 키우기 위해 중원무학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소림사에 보냈다.
그때가 사유성이 불과 십이 세 때였다. 
사유성은 소림에서 모두 일만 권의 불경을 읽었다. 
그후 그는 소림무학비예(少林武學秘藝)에 심취해 들어가면서 소림사상 최대의 기재라는 천무대선사(天武大禪師)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천무대선사로부터 소림 칠십이종절기를 대부분 터득했다. 
문무(文武) 겸전의 천하제일의 기재답게 그는 출신도 화려했으며, 무학사문도 천하제일이었다. 결국 사유성은 은연중 당금 천하무림의 후기지수(後期之秀) 중 일인자로 떠오른 것이었다.
그에게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이란 별호가 붙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무림구공자(武林九公子)의 영수이자 일룡구공자(一龍九公子)중 일룡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주제일룡 사유성의 일신무학을 올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몇몇 무림의 노기인(老奇人)을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한 사유성의 말을 막을 자가 달마원 안에는 없었다. 각파 장문인들은 감탄과 질시(嫉視)의 시선으로 사유성을 주시했다.
"사제, 그것은......."
뇌정대사는 사유성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사유성은 뇌정대사를 향해 빙긋 웃었다. 마치 뇌정대사의 염려를 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사부님께 허락을 받아 보겠습니다."
뇌정대사는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이네. 물론 노납은 사제의 무학을 알지만... 그 일만은......."
뇌정대사의 염려는 단 한가지였다. 그것은 사유성이 너무나도 젊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불안했다. 
그러나 사유성은 오만하지도, 그렇다고 겸손하지도 않은 어투로 말했다.
"사형과 사부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소제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
뇌정대사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젊은 사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따스한 애정이 담긴 신뢰와 함께 못미더운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사유성은 소림의 자랑이자 긍지가 아니던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뇌정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노납은 승낙하네. 그러나 사숙께서 허락하실지는......."
사유성은 매력적인 웃음을 싱긋 웃으며 일어나 포권했다.
"소제가 사부님께 간곡히 청해 보겠습니다. 그럼 지금 곧 갔다 오지요."
사라지는 사유성을 바라보는 각파 장문인들의 얼굴에는 모두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장차의 무림이 신주제일룡 사유성의 어깨에 달려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③
불혼애(佛魂崖).
소림사의 절대금지(絶對禁地) 구역인 불혼애는 소실봉(少室峯)후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불혼애는 절대금지로서 소림방장조차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몇몇 고승들뿐이었으나 누구도 이 불문율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 불혼애 정상에 하나의 불상이 있었다.
얼마나 큰지 마치 커다란 암산(岩山)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불상은 미완성(未完成)이었다. 언제 새기다가 그만 두었는지 이끼가 불상을 에워싸듯 뒤덮고 있었다.
"......."
한 명의 중년인이 불상 앞에 정좌하고 있었다. 
중년인의 모습은 또 하나의 불상 같았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인은 회색빛 승의를 입고 있었다. 살이 없어 광대뼈가 움푹 튀어나왔지만 중년인의 용모는 극히 청수하고 준수했다.
미완의 불상을 향해 열려진 두 눈은 물결이 숨을 죽인 깊은 호수와도 같았다. 설사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정도로 무심한 눈빛이었다.
얼마나 오래 그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일까? 몹시 초췌한 몰골을 지닌 중년인의 신체는 마치 무한한 고뇌(苦惱)와 고통(苦痛)의 덩어리같았다.
무뎌진 망치와 날이 닳은 징 하나가 중년인의 무릎에 놓여져 있었다.
실상 중년인은 불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망연한 채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볼 뿐이었다.
중년기인(中年奇人).
그는 바로 십육 년 전 천하 백도무림맹을 이끌고 대마성을 공격한 장본인이었다. 
소림사상 초유로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를 익힌 최고의 기재인 천무대선사(天武大禪師)가 바로 그였다.
스스스.......
겨울의 메마른 삭풍이 불혼애를 스쳐 지나갔다.
팟!
천무대선사의 등 뒤로 한 백의청년이 내려섰다. 그는 바로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사유성은 포권하면서 공손히 말했다.
"사부님, 제자 유성이옵니다."
천무대사는 말이 없었다. 일말의 표정도 깃들지 않은 천무대사의 눈은 허허로운 구름만을 ㅉ고 있을 뿐이었다. 
"제자 청이 있어 왔습니다."
사유성이 재차 말하자 영원히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천무의 입이 열렸다.
"사풍인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사유성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일 다경 후 기다리다 지친 사유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사풍인에 의해 죽은 사람이 백 명이 넘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제자가 해결을 해 보겠습니다."
"......."
"사부님도 아시다시피 보름 전 장문사형의 명을 받고 갔던 혜원도 죽었습니다. 제자가 소림의 제자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천하창생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악(惡)을 제거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
구름을 바라보던 천무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대단히 고통스런 눈빛이었다.
"악(惡)이라고? 과거... 나는 악이라면 원수보듯 했지. 불제자(佛第子)의 몸임도 아랑곳 않고...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사부님!"
불안해하는 사유성의 음성이 들리자 천무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것도 악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 그럼 허락하시옵니까?"
사유성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성급히 행동하지는 마라. 그리고... 낙양의 궁가병기점을 잘 조사해 보도록 해라."
천무의 말에 사유성은 엎드려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제자 최선을 다해 무림에 혈겁을 조성하고 있는 사풍인과 사풍객의 비밀을 밝혀내겠습니다."
"가 보아라."
말을 끝낸 천무는 눈을 감았다. 눈썹 끝이 심정의 괴로움을 말하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절을 마친 사유성이 일어서며 신형을 감추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천무는 감았던 눈을 떴다. 깊이를 모를 천무의 고요한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렸다. 
천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궁시주가... 변절했단 말인가? 어이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천무대선사는 시선을 내렸다.
정(釘)과 망치,
놓은 지 오래된 듯 잔뜩 녹슨 정과 망치를 바라보는 그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④
월아보(月娥堡).
낙양제일의 명문(名門)인 월아보는 하남성(河南省)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무림세가다. 
철비금검(鐵飛金劍) 여상기(如相奇).
월아보의 보주인 여상기는 무림명숙이었다. 
그는 어풍무영비(馭風無影飛)라는 특이한 신법(身法)과 독보금검십팔식(獨步金劍十八式)이라고 일컬어지는 검식(劍式)으로 강호에서 일절을 이루었다.
겨울의 막바지였다.
잘 가꾸어진 화단이 고아한 풍치를 이루며 후원을 메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화목(和睦)은 메말라 있었으나 동백(冬栢)과 동매(冬梅)는 만개해 화려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화단은 철비금검 여상기가 이십 년 동안을 가꾼 것으로서 그는 유난히 화목을 좋아했다.
여상기는 뒷짐을 진 채 동백나무 앞에 서 있었다. 시뻘건 동백꽃이 피처럼 붉은 울음을 터트리며 만개한 동백나무 앞 이었다. 
검박해 보이는 갈의(褐衣)를 입은 그는 칠순(七旬)이었다. 그런데 평소 호방하기만 하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뜻밖에도 여상기의 표정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피처럼 붉은 울음을 토해내는 동백꽃을 바라보는 여상기는 마치 넋을 잃은 듯했다.
그 이유는 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아들을 잃은 것이었다. 그것도 오순(五旬)이 넘어서 얻은 귀한 자식을 오늘 아침에 잃은 것이었다.
평소 자식은 유난히 풍류놀음이 심했다. 자고로 영웅(英雄)은 호색(好色)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상기는 그런 자식을 사랑했다.
어제 저녁만 해도 영기발랄하고 씩씩하고 자신만만하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오늘 아침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왼쪽 가슴에 사발만한 크기의 상처를 입고.
그는 자식과 함께 이십 년을 가꾸어 온 화단의 동백나무 아래 사랑하는 자식의 시신을 묻었다. 막 세워진 봉분에는 아직 비석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평소 아름답게만 여겨지던 붉은 동백꽃이 오늘따라 처절한 울음을 우는 것만 같았다.
동백나무 아래 솟은 봉분을 바라보던 여상기의 늙은 눈에 불현듯 불길이 일어났다.
"무(武)아야... 이 아비는 이십 년 동안 검을 쥐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다시 잡겠다. 너를 위해서!"
누구를 향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침중하게 뇌까리는 여상기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월영각(月影閣).
월영각은 월아보의 후원에 자리한 그림같은 누각이었다. 타는 황혼을 바라보며 누각의 난간에 서 있는 미소녀가  있었다.
여화연(如華娟).
바로 월아보주 여상기의 천금같은 소저였다. 
그녀는 황혼을 바라보았다.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던 노을빛이었다. 그러나 오늘 마주하는 노을빛은 그녀에게 처절한 아픔만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싫어! 오빠는... 저 노을빛같은 피를 가슴에 흘리며 죽었어.'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다. 그녀의 오빠가 오늘 아침에 죽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노을을 싫어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그제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듯이 노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영원하지 않은, 소멸(消滅)을 향해 스러져가는 아쉬움의 여운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월아보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오빠의 죽음 탓인지 다소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포근함이 어려 있기까지 했다.
"아... 과연 그가 올까? 온다면 나는 그를 죽여야 하는데......."
뜻을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중얼거리는 사이 불타오르던 저녁노을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종이처럼 스러져갔다. 
그로부터 오일 후.
월아보의 정문(正門)을 향해 한 흑삼(黑衫)소년이 나타났다.
흑삼소년은 품에 기다란 흑색보자기로 감싼 물건을 안고 있었다. 무심한 눈빛을 가진 소년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일백 장(一百丈)정도 남아 있는 월아보의 문루 앞으로 깨끗한 내(川)가 흐르고 있었다. 반월형의 다리가 내에 걸쳐 있었다.
다리 위까지 걸어오던 백천강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무심한 눈길이 다리 아래의 수면에 내려앉았다.
석양(夕陽).
물 속에 또 하나의 석양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백천강은 일말의 미동도 없이 물 속의 석양을 응시할 뿐이었다.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석양이 스러지고 사위에 어둠이 찾아들었을 때 백천강은 월아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서라!"
날카로운 교성이 그의 발걸음을 잡아채는 것이었다. 
걸음을 멈춘 백천강은 고개를 들었다. 삼 장 거리 앞에서 엷은 어둠을 배경으로 황의소녀가 서 있었다. 
여화연이었다.
"......!"
다소 충혈된 듯한 여화연의 눈과 지극히 무심한 백천강의 눈이 맞부딪쳤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백천강이었다. 
잠시 여화연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백천강이 눈빛을 거두면서 그녀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 순간 여화연이 입술을 씹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살인자(殺人者)! 어디로 가는 것이냐?"
대답대신 백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 여화연은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를 가로막으며 앙칼지게 외쳤다.
"본 보에서는 살인자를 받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살인자란 백천강이 살검(殺劍)을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백천강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백천강은 보자기로 싼 길다란 물건을 내밀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대의 부친께서 주문했던 검이오."
그뿐이었다. 한순간 백천강을 노려보던 여화연이 돌연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를... 죽이겠다!"
번쩍!
후리한 백광이 번갯불처럼 뻗으며 서릿발같은 검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삼십육획을 그어왔다. 놀라울 정도의 쾌검이었다.
펄럭!
백천강의 몸에서 천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놀랍게도 백천강이 입고 있던 흑삼이 산산조각 나 떨어져 내린 것이다. 상반신이 맨몸이 된 백천강의 피부는 그러나 다친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너... 너를......."
여화연의 음성이 떨려왔다.
곧추세워진 검날이 백천강의 목줄기에 닿아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한순간에 목줄기에 구멍이 뚫릴 판국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검을 놓고 가오."
잠시 여화연의 눈빛을 맞받아치던 백천강이 보자기를 바닥에 놓으며 돌아섰다.
파르르.......
검을 쥔 여화연의 손이 떨렸다.
"너... 너를 ......."
백천강은 내처 걸을 뿐이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걸이였다. 
"너를... 죽이지 못하다니......."
흑삼이 떨어져내리면서 드러난 등을 바라보던 여화연은 들고 있던 검을 떨어 뜨렸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백천강의 등줄기에 왠지 짙은 고독의 그늘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백천강의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왜, 왜 죽이지 못한단 말인가. 왜?"
여화연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오만하던 마음 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말이 없으며 항상 우수에 찬 듯한 백천강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깊이를 모를 백천강의 무표정한 눈빛은 멍에처럼 그녀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인한 셈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결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멈춘 여화연의 눈에 바닥에 놓인 검은 보자기가 들어왔다. 그녀는 보자기를 풀었다. 
검(劍)이었다. 그녀는 검을 안으며 내뱉았다.
"백천강. 만일 이 검으로 내 아버님께서 화를 당하신다면... 평생 너를 저주할 것이다."
⑤
땅... 땅.......
빨갛게 단 쇠뭉치를 두드리는 백천강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 너울거리는 용광로의 불빛마저 없었다면 그의 얼굴은 사면(死面)과도 같았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완성된 물건을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괴이했다. 손바닥만한 크기를 지닌 타원형 물체로서 종잇장같이 얇았다.
"......!"
잠시 그 물체를 내려다 보던 백천강은 품 속에 그것을 넣었다. 이어 용광로의 불길을 죽인 백천강이 문을 닫고 궁가병기점을 빠져나왔다.
음습한 음지를 골라 걷던 백천강이 낙양성 밖을 빠져나간 것은 이경(二更)이 지났을 때였다.
"아음... 하아......."
초옥(草屋) 안으로부터 쾌락에 가득찬 숨가쁜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컹!
초옥의 문이 열리면서 한 흑의(黑衣)중년인이 바지춤을 거머쥐고 걸어나왔다. 삼경도 반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그는 머리칼과 옷자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모꼴 눈빛만은 날카롭고도 무서웠다.
흑심귀마(黑心鬼魔) 주성광(朱成廣).
그는 흑도(黑道)의 거물로서 손속이 악랄할 뿐 아니라 마음도 극히 흉악무비한 마두였다. 그는 사풍객을 자신의 손으로 잡겠노라고 큰소리치면서 이곳에 와서는 백치 여인을 겁탈(?)한 것이었다.
"흐흐......."
흑심귀마 주성광은 음침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일면 그는 전신의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리며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어둠에 휩싸인 주위를 날카롭게 살피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이 장 앞의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주성광은 마침내 바위 가까이 이르렀다. 그곳은 초옥에서 오십 장쯤 떨어진 곳이었다.
'이쯤에서 모두 죽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동료들에게 큰소리 친 것을 비로소 후회했다. 
그렇다. 자신만만하던 것도 현실을 도외시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바위.
그것은 여인을 겁탈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간 경계선을 의미했다. 그 바위를 마주치는 순간 주성광의 불안감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억!"
그는 기겁을 하듯 놀랐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위의 한 부분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주성광은 환영처럼 한 명의 흑삼소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네 놈은 누구......."
주성광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흑삼소년의 손바닥 위에서 무엇인가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주성광은 급히 호신강기(護身 氣)를 일으켰다. 
"으아악!"
하지만 패배한 것은 주성광이었다.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툭 고꾸라졌다. 
흑삼소년의 손을 떠난 예리한 타원형의 물체. 그것은 재빨리 펼쳐진 주성광의 호신강기를 종잇장 찢듯 찢어발기면서 그의 심장을 관통해 버린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흑심귀마의 눈은 회의와 불신으로 인해 부릅떠졌다.
뒤이어 그는 도끼에 찍혀나간 나무밑둥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심장이 뚫린 상태라 숨은 이미 지척에 달한 후였다.  
우람한 육신이 아직 땅에 닿기 전, 주성광은 최후의 숨을 몰아쉬는 순간 흑삼소년이 암석 모양의 천을 뒤집어 쓰는 것을 또다시 보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위는 여전히 바위일 뿐이었다.
쿠웅!
그가 쓰러진 순간 어둠 속으로부터 수많은 인영들이 불쑥불쑥 뛰쳐나왔다.
"또 당했소. 흑심귀마가 쓰러졌소."
"빨리 빨리 찾으시오!"
휘휙!
삽시에 수십 명이 신형을 날리며 암석의 주위를 이잡듯이 뒤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느 누가 암석 속에 사람이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풍인은 그렇게 또 한 명의 목숨을 빼앗으며 무림을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4장  무림구공자(武林九公子)
①
영풍주루(英風酒樓).
낙양에서 가장 화려한 주루라는 명성에 버금가게 영풍주루는 거부나 공자대인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화원로(華遠路) 중심에 자리한 영풍주루의 삼층 누각. 아홉 명의 영기 발랄한 미청년들이 커다란 원형주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삼층루각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 아홉 명의 청년들이 통째로 빌렸기 때문에 다른 손님은 일체 받지 않은 것이었다. 
아홉 명의 영기 발랄한 미청년들을 가리켜 세인들은 무림구공자(武林九公子)라고 일컬었다.
무림구공자.
그들은 바로 당금 무림천하에서 태양과 같은 명성을 날리고 있는 백도무림의 후기지수들이었다.
무림구대세가(武林九大勢家).
천 년 무림을 이어 내려오며 숱한 명문세가들이 명멸해왔다.
전통적인 구파일방과는 달리 무림구대세가는 가통을 이으며 명가로서 뿌리를 깊게 내렸다. 따라서 당금 무림에서 구대세가의 위치는 오히려 구파일방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서(江西)의 남궁세가(南宮勢家).
운남(雲南)의 진천세가(震天勢家).
절강(浙江)의 신창세가(神槍世家).
호남(湖南)의 전궁세가(電穹勢家).
산동(山東)의 악씨세가(岳氏世家).
사천(四川)의 당문세가(唐門世家).
석문(石門)의 석대세가(石大世家).
무창(武昌)의 벽력세가(霹靂世家).
하북(河北)의 석가세가(石家勢家)
이들 구대세가의 힘은 가히 백도의 주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한데 오늘 영풍루에 무림구대세가의 소가주들이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무림구공자로서 내일의 무림을 떠받칠 기둥이자 대들보였다.
"......!"
무림구공자의 눈길은 한결같이 원형주탁의 한가운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봉투가 벗겨진 한 통의 서찰이 주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서찰을 노려보는 무림구공자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야심과 패기, 그리고 호승심(好勝心)의 불꽃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이랬다.
<......무공구공자는 정파의 대들보들이다. 당금 천하를 혈풍(血風)으로 몰아 넣고 있는 색녀와 사풍객을 어이해 제거하지 않는 것인가? 무림인들은 구공자가 겁을 먹고 있다고 비웃고 있다. 그대들이 정녕 협의인들이라면 사풍객을 처치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당금 무림의 상황으로 미루어 사풍객을 처치하는 자는 곧 천하제일협(天下第一俠)으로 불리울 것이다.
무림일비(武林一秘).>
실로 괴이한 서찰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자존심 강한 무림구공자를 격발시키기에 충분했다.
"......!"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유성비천협(流星飛天俠) 남궁신효(南宮神梟)가 입을 열었다.
"무림일비가 대체 누구길래 우리에게 이런 글을 보낸 것일까?"
그 말에 진천세가의 소가주 소진천(少震天) 하웅천(河雄天)이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가 누구이든 우리 구공자를 조롱한 것임에 틀림이 없소!"
구공자의 얼굴에는 모두 노기가 떠올랐다. 이때 석대세가의 다지신호(多智神豪) 석장청(石長靑)이 눈썹을 찌푸리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아니오. 그렇게 흥분만 할 일이 아니오. 무림일비란 자는 필시 무엇인가를 획책함이 틀림없소이다. 무림에서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오."
"......!"
중인들은 석장청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지신효 석장청.
그는 학문과 지략은 물론 기문학(奇門學) 등으로 이름난 석대세가의 후예로써 구공자 중에서 가장 생각이 깊었다. 그의 말은 구공자에게 한층 의문의 먹구름을 일으키게 했다.
원래 구공자는 매년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의 후예들로서 구대세가의 친목을 도모하고 무공을 인증하며 장차 구공자의 영향력을 다지는 뜻으로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왔던 것이다.
올해의 모임장소는 바로 낙양의 영풍루였다.
그 사실은 구공자 외에 오직 일룡(一龍)만이 아는 사실로서 외부에서는 그런 모임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무림일비란 자가 모이는 날짜에 맞추에 그들에게 서찰을 보낸 것이다.
잠시 입술을 깨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전궁세가의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이곳에 온 이상 사풍객을 잡으려 하지 않았소? 무림일비란 자가 무엇을 꾸미든 간에 사풍객을 잡는 것은 우리 구공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오?"
구공자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팽무위는 가전(家傳)의 쾌도(快刀)를 익힌 절정고수로써 구공자 중에서 성질이 진중했다. 그것은 전궁세가 전래의 종교심 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는 잔뜩 치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핫핫핫! 더구나 사풍객을 죽이는 자가 천하제일협이 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지 않소? 이번 기회에 우리들의 힘을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팽무위의 말은 구공자의 가슴에 호승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핫핫... 멋진 말이오!"
"옳소. 훗훗... 그 계집이 아무리 색녀라 해도 나 무적신창(無敵神槍) 조유명(曺維命)은 단호히 꺾을 자신이 있소!"
"핫핫... 나 철수룡(鐵水龍) 수검악(水劍嶽)이 제일 먼저 달려 가겠소."
장내는 호기에 찬 웃음으로 가득찼다.
무림구공자들은 모두 젊었다. 때문에 영예욕과 호승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쩌면 무림일비는 그 점을 노렸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다지신호 석장청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있다. 이 이면에는.......'
바로 그때였다. 
"갑시다!"
유성비천협 남궁신효가 주탁을 두드리며 일어섰다. 나머지 중인들도 덩달아 일어서며 한 마디씩을 보태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정도 무림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줍시다."
"무림구공자의 힘을 보여 줍시다!"
다지신호 석장청도 엉겹결에 그들을 따라 영풍주루를 빠져나왔다.
땅... 땅.......
백천강은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망치질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쇳덩이를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오직 검을 만드는 데에 온 신경을 쓰는 듯 웃통을 벗어제낀 그의 모습에서는 장인(匠人)의 고독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휘휙!
궁가병기점 앞에 무리지어진 인영이 떨어졌다. 인영은 전부 아홉이었다. 모두들 위풍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은 바로 무림구공자였다.
땅... 땅.......
그들이 나타난 것을 모르는 듯이 백천강은 기계처럼 망치질만 계속해댔다.
"소형제, 자네가 바로 살검(殺劍)을 만든다는 자인가?"
구공자 중 하나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병기점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바로 남궁신효였다. 
백천강은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억양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상대가 건방져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남궁신효의 준미한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아홉 자루의 검이 필요하네. 자네가 만든 검이 있는가?"
"......."
비로소 백천강은 망치를 놓고 돌아섰다.
"......!"
돌아서는 백천강을 바라보던 구공자는 약속이나 한듯이 흠칫 놀랐다. 뒤이어 그들은 백천강의 무심한 표정과 눈빛에 한결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개 검을 만드는 장인소년의 모습이 그토록 인상적일 줄은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천강은 그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는 한쪽에 설치된 시렁으로 가더니 그곳에서 이미 완성된 아홉 자루의 검을 꺼냈다.
"여기 있소."
"......!"
구공자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각기 한 자루씩 검을 취했다.
검을 잡은 순간 그들은 검에서 발산되는 한기에 다시 한 번 흠칫했다.
'과연... 소문대로 마검(魔劍)이구나!'
그들의 느낌은 똑같았다.
남궁신효는 품 속에서 황금이 든 주머니를 꺼내 던지며 말했다.
"소형제, 그럼 나중에 보세. 자네가 만든 검으로 악을 제거할 예정이네. 후후... 어쩌면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될런지도 모르네."
남궁신효의 장단에 구공자는 다시 호쾌함을 되찾았다.
"하하하!"
"그렇다마다!"
구공자는 검을 허리춤에 꽂고는 대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백천강은 다시 몸을 돌렸다.
땅... 땅... 땅.......
변함없는 망치소리가 또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②
휘이잉... 위잉.......
북망산을 뒤흔들 듯이 메마른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올 겨울은 이상하게도 눈 한송이 내리질 않았다. 황혼(黃昏)이 사위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가운데 여지없이 삭풍이 먼지를 날리며 휘몰아쳐왔다. 
초옥 앞이었다.
구인의 귀공자가 안색이 벌겋게 상기된 채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호호호... 어서 와라. 어서 나를 범해라."
놀랍게도 여인은 넋잃은 백치가 아니었다. 음탕한 교소를 흘리던 여인이 요사스럽게 몸을 비트는 순간 구공자는 참을 수 없는 욕정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이... 이럴 수가. 미친 색녀에게 우리가 똑같은 감정을 느끼다니.......'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구공자(九公子)가 동시에 색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지신효 석장청은 판단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결국 석장청은 그 여인이 마공을 운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럴 수가 없다. 어쩌면 이것은 전설에서나 있었다는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이 아닌가?"
석장청의 부르짖음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흐으흥, 어서 나를 범하라. 호호호......."
뇌쇄적으로 웃던 여인이 자신의 가슴을 풀어 헤쳤다. 그 순간 석양 속에서 박속같은 젖가슴이 눈부시게 노출되었다.  
"으흐흑... 못참겠다."
섬혼검(閃魂劍) 악진원(岳進元)과 천수비랑(天手飛郞) 당백문(唐白文)이 신음을 흘리며 여인을 덮쳐갔다.
찌익! 
"호호호호홋!"
여인은 뇌쇄적인 교소를 연신 흘리며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악진원과 당백문, 그리고 철수룡 수검악, 사마고웅(司馬古雄)은 욕정의 화신이 되어 여인을 덮쳤다. 그러나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여인의 옷자락뿐이었다. 
그 바람에 백치여인의 옷자락이 자꾸만 찢겨나갔다.
부욱!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진 여인의 나신이 옷자락이 뜯겨나갈 때마다 드러났다. 젖가슴이 출렁거리는 순간 딱딱하게 곧추선 유두가 유혹을 불러 일으켰다.
어디 그뿐인가? 잘룩한 허리가 비비 꼬이면서 춤을 출 때마다 움푹 패인 배꼽이며 탐스런 허벅지 위에 위치한 삼각비역의 문은 현란한 빛을 뿌리며 보일듯 말듯 했다.
"허억!"
"우... 우물(尤物)... 헉!"
이미 구공자(九公子)는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흐으응.... 나를... 범하라. 어서!"
마침내 섬혼검 악진원이 여인의 허리를 안았다. 두 사람은 곧 무덤 사이의 풀밭에 쓰러졌다.
"흐응!"
알몸이나 다름없는 여인의 육체가 어둠 속에서 퍼득였다. 순간 여인의 입에서는 마향(魔香)이 풍겨나오며 구공자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허억!"
구공자는 짐승처럼 여체를 덮쳤다. 
그들의 찬란했던 명예도, 명명(明明)했던 정기도, 그 순간만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흐으윽... 하악!"
차마 더 지켜볼 수 없는지 시뻘겋게 타오르던 석양이 서녘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요... 요물(妖物). 정신들 차리게!"
느닷없이 벽력같은 외침이 터졌다. 
그것은 사자후(獅子吼)가 실린 외침이었다. 남궁신효가 전신을 떨며 고함친 것이다. 
"앗!"
구공자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을 차렸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신효는 구공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또한 그는 남궁가 전래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익혀 그들 중 공력이 가장 심후했다. 그는 극적으로 욕정에서 정신을 차려 사자후를 토해낸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오래 전부터 불문의 항마심법(抗魔心法)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형제들. 이 계집은 색공(色功)을 쓰고 있소. 쳐 죽여야 하오!"
남궁신효는 두 눈에 살기를 흘리며 냉갈을 터뜨렸다.
"으으... 내가 색녀에게 넘어가다니!"
"이런 수치가... 크윽!"
무림구공자들은 자신들의 방태에 치를 떨었다.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치심은 곧 무서운 살기와 분노로 바뀌었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호호호... 어서 나를... 범하라. 무엇을 하느냐?"
백치여인은 알몸으로 누워 여전히 음소를 흘렸다. 바로 그 순간,
"살(殺)!"
구공자의 입에서 일제히 냉갈이 터졌다.
츠츠츠츠.......
"아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짙어가는 어둠을 뚫고 길게 퍼져나갔다.
토방(土房).
메마른 한풍이 바람벽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흐릿하게 타오르던 촛불이 짙은 그을음을 내며 파르르 흔들렸다.
"으으음... 천강아... 이리... 가까이......."
생명의 불꽃이 다한 것일까? 궁우노인은 허공을 향해 힘없이 손을 허우적거렸다. 노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움푹 꺼진 그의 눈에 사신(死神)이 깃든 것은 오늘 아침부터였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나 많아서였을까? 꺼져들어가는 목숨을 궁우노인은 쉽사리 놓치 못했다. 
그러나 시작이 있다면 종말 또한 당연히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마침내 궁우노인의 목숨도 끝에 다다른 듯했다.
"할... 할아버지."
궁우 앞에 꿇어앉은 백천강은 그의 깡마른 손을 잡아 흔들었다. 궁우노인의 앙상한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검... 검을 만들어라. 정말 훌륭한 검을......."
"할아버지!"
궁우는 숨을 헐떡였다.
"노부가... 준 책을 완전히 네것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좋은 검을... 천하제일의 신병(神兵)을 ... 만들 수 있을 것......."
"할아버지!"
백천강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궁우의 눈이 점차 빛을 잃기 시작했다. 
백천강의 가슴이 절망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던 궁우노인이 노구를 떨며 힘겹게 말했다.
"끄윽... 부... 부탁이 있다. 천강아......."
"무... 무엇입니까? 할아버지!"
백천강은 궁우의 두 손을 잡고 물었다. 
"내... 내가 죽거든 ... 시신을 묻지 마라."
"예?"
"이... 이유는 묻지... 마라."
"하... 할아버지!"
"부탁... 이다. 알... 겠느냐?"
백천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궁우는 스스로 눈을 감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 내가 죽거든... 네 어미에게 가서... 아... 알려라. 내가 죽었다고......."
그 말에 백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 추악한 곳을 말입니까?"
"가야... 한다. 네 어머니가 아니냐. 꼭 가라... 알겠느냐?"
"알... 알겠습니다. 제발 죽지만 마십시오. 흐흑!"
"이미... 틀렸다."
"할아버지!"
"애... 애당초 사문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 후회 막중......."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할아버지!"
백천강의 절규가 모옥을 무너뜨릴 듯이 퍼져나갔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사이 없이 흘러내렸다.
③
"이... 이럴 수가... 어머니......!"
백천강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물씬 풍기는 피비린내에 당혹해하며 초옥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던 그는 얼어붙은 듯이 멈춰서고 말았다. 어머니가 핏물이 흥건한 침상 위에 눈을 뜨고 죽어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혹했다. 자신이 만든 아홉 자루의 검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알몸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육신을 찌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으으으... 이것은... 꿈... 꿈이다!"
백천강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며 부르짖었다.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궁우노인이 죽은 직후 어머니도 죽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바로 자신이 만든 검이 전신에 꽂힌 채 죽어 있는 것이었으니.
"으으으... 바... 바로 그 놈들이... 어머니를 죽이다니!"
백천강은 울부짖으며 초옥의 바람벽에 고개를 찧었다.
쾅!
바람벽이 무너질 듯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백천강의 눈에 시뻘건 글씨가 들어왔다.
벽에 피로 쓴 글이 있었다.
...... 무림구공자가 무림의 색녀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노라.
어머니의 피로 쓴 것이 분명한 글씨를 바라보던 백천강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빨을 앙다물며 절규하듯이 외쳤다.
"주... 죽이리라!"
뒤이어 백천강은 전신을 바르르 떨며 으스러져라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그의 눈이 살광과 함께 빛났다.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천강에게 어떤 영감을 일깨웠다. 직감적으로 그는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남겼다!'
파팍!
그는 급히 무릎을 꿇고서는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흙바닥이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퍼퍽!
손톱이 떨어져나가며 피가 배어 흘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한 자 깊이쯤 파들어가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
백천강은 급히 그것을 꺼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피를 칠한 듯이 붉은 혈갑(血匣)이었다. 마구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백천강은 혈갑의 뚜껑을 열었다. 
혈갑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한 권의 고서(古書)와 붉은 단약(丹藥), 그리고 양피지 한 장이 전부였다.
"......!"
백천강은 먼저 책자의 표지를 살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
소녀미향탈심대법은 바로 천오백 년 전 마공(魔功)의 근원지라고 일컬어지는 기환궁(奇幻宮)에서 흘러나온 마경(魔經)이었다.
능히 웃음 한 조각으로 상대를 강한 색욕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다는 가공할 색경(色經)이 바로 소녀미향탈심대법이었다.
색경을 넘기던 백천강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 어머니가 이런 것을 익히셨다니!"
색경을 덮은 백천강은 한참동안 백수련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이것을 익히셨기 때문에 그토록 색기(色氣)가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왜, 이것을 익혔던 것일까?'
내심 중얼거리던 백천강은 괴로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잠시 후 그는 양피지를 들었다. 그것은 피로 쓴 혈서였다.
...... 나를 간(姦)한 천무(天武)와 위선의 탈을 쓴 천하정도인(天下正道人)들을 저주한다.
혈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천무는 나를 범한 뒤 또 나를 버렸다. 그는 정도맹주로서 사파인인 나와 맺어진 것을 수치로 알았다. 그는 내가 입을 열까 두려워 중수법(重手法)을 써 나를 미치게 만들었으나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에게 복수하는 유일한 길은 정파인들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가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믿으며 나는 소녀미향탈심대법을 익혀 사내들을 유혹했다. 
언제고 나는 천무에게 죽을 것이다. 무림제일신승(武林第一神僧)의 탈을 쓴 천무에게. 아들아, 이 못난 어미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천무를 죽여라. 위선에 가득찬 정파인들을 저주해라. 
천무는 너의 아버지이나 어미에게는 철천지 원수이다. 언제고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천무의 짓이나 마찬가지다.
너를 위해 혈정단(血精丹) 하나를 남긴다. 어미가 사문(師門)에서 가지고 있던 영단이다. 이 어미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면 복용해라. 
너는 어미가 죽은 후 이곳을 떠나 동해(東海)의 쌍봉도(雙峯島)로 가라. 쌍봉도의 설가장(薛家莊)의 지하서고(地下書庫)에서 한 권의 책을 찾아라. 천무와 대사형 궁우의 배신으로 멸망당한 사문의 것이다. 
그것을 익혀 복수를 해다오. 그 책의 이름은 대혈륜서(大血輪書)다. 기필코 복수를 부탁한다.
- 한녀(恨女) 백수련(白水蓮).>
구구절절이 한이 실린 혈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오...! 어머니.... 그랬었... 나요?"
혈서를 쥔 백천강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고 만 것이다. 정말이지 저주스런 출생의 비밀이 아닐 수 없었다. 
"복수...! 복수를 하리라!"
핏발이 선 눈으로 백천강은 부르짖었다. 
잠시 후.
수개월 동안 천하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망산 초입의 초옥은 한 덩이의 불꽃으로 화(化)했다.
화르르르......!
불의 혓바닥이 미친 듯이 날름거렸다. 
초옥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갔다. 저주와 증오로 뭉쳐진 것 같은 그림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북망산을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각 뒤였다.
백천강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궁가병기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토방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의 충혈된 두 눈이 의혹으로 커다랗게 떠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
토방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궁우의 시신이 없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그 실종사건에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평생 그를 키워준 궁우노인의 신분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궁우노인은 바로 어머니 백수련의 대사형(大師兄)이었다. 결국 그의 배신으로 인해 어머니의 사문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어머니를 가두어 놓고 감시하면서 스스로 속죄함을 핑계삼은 것인지도 몰랐다.
백천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가 죽었고 시신이 사라졌으나 백천강은 개의치 않았다.
땅... 땅... 땅.......
밤낮없이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병가궁기점에서 들렸다. 어느덧 보름째였다. 그동안 망치 소리는 단 일각도 멈추지 않았다.
백천강은 한 자루의 검을 만드는 중이었다.
'마검(魔劍)을 만들리라. 천하를 피로 씻을 마검을!'
백천강의 눈에서 핏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망치를 들기 직전 그는 어머니가 남겨둔 혈정단(血精丹)을 복용했다. 그것을 복용한 후부터 그는 과거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힘이 전신에 충만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신비롭게도 가공할 기운이 전신 백혈(百穴)에 가득찼다. 그러나 백천강은 몰랐다. 혈정단 속에는 엄청난 마성(魔性)을 일으키는 효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국 그의 눈에 떠오른 핏기는 혈정단이 일으키는 마성의 효과로 인한 것이었다.
땅... 땅.......
망치질 소리는 한 달 동안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병기점을 지켜보는 한 쌍의 정기(正氣)로운 눈길이 있었다. 일신에 눈부신 백삼(白衫)을 입은 절세미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사유성(査流星)이었다. 그가 소림에서 낙양으로 온 것은 오일 전이었다.
사유성은 사풍객을 잡기 위해 낙양성 밖의 북망산 초입에 갔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잿더미가 된 초옥뿐이었다. 
그는 그후 구공자를 만났고 그들이 백치여인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 즈음해서 천무대선사의 말이 떠올라 궁가병기점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
백천강이 검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는 사유성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무엇인가 있다. 저 소년 장인의 눈빛은... 장인의 눈빛이 아니다. 저주와 한으로 뭉쳐진 눈빛이다. 더구나 그가 만드는 검은 마검임에 틀림없다!'
땅... 땅.......
노을이 스러지며 땅거미가 짙게 깔려들었다.
'오늘이 사십구 일째다. 그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도 않고 검을 만들다니... 참으로 무서운 집념이다. 어쩌면 저 자가 바로 그 신비의 사풍객일지도 모른다.'
병기점을 주시하고 있던 사유성이 이렇게 생각할 때였다.
스스슷!
그의 등 뒤로 한 가닥 인영이 연기처럼 다가섰다.
'앗!'
이상한 예감을 느낀 사유성은 흠칫하며 신형을 틀었다. 그러나 인영의 손놀림은 더욱 빨랐다. 사유성은 뒷통수가 따끔함을 느끼는 순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신주제일룡 사유성도 그 순간만큼은 별 수 없었다. 인영의 손놀림은 그만큼 빨랐다. 사유성은 얼굴도 보지 못한 인영에게 점혈(點穴)을 당하고 만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드디어... 드디어  완성했다. 절대마검(絶代魔劍)을!"
백천강은 칙칙한 묵기를 흘리는 묵검 한 자루를 치켜들며 격동에 떨었다.
묵검(墨劍).
그것은 정말 끔찍한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멋대로 춤추며 피보라를 뿌려댈 것 같은 살기가 진하게 풍기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한동안 손에 든 검을 바라보며 격동을 가누지 못했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백천강은 마침내 낮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검을 꽂았다.
잠시 후 토방 안으로 들어갔던 백천강은 두 권의 책을 들고 나와서는 그 중 한 권을 미련없이 화로 속에 던졌다.
화르르르.......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에 의해 뜯어져나간 책표지가 날아올랐다.
<천마천병보(天魔天兵譜)>
그런 제목의 책이었다. 너풀거리며 날아오르던 책표지를 불의 혓바닥이 낼름 집어삼켰다. 책은 곧바로 불꽃에 휩싸이며 타들어갔다.
"......!"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빛은 더욱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④
"으음... 이럴 수가!"
마침내 정신을 되찾은 사유성은 텅빈 병기점 안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급히 병기점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천 년을 두고 꺼질 것 같지 않던 용광로에는 불씨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급히 용광로에 손을 갖다 대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용광로 표면의 온기(溫氣)는 그가 정신을 잃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제압했다. 그 사이... 그 아이가 달아났다.'
사유성은 사방을 살피며 내심 중얼거리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둑어둑한 대장간 바닥에 꽂힌 마검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 마검이 완성됐구나."
그는 급히 마검 앞으로 다가갔다. 냉랭한 살기가 마검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유성은 마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불현듯 마검이 기괴한 음향으로 우는 것이 아닌가? 
"......!"
기겁을 한 사유성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검명이 뚝 끊기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마검은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주인이 아닌 사람은 누구라도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살기가 역력히 풍기고 있었다.
사유성은 마검을 쏘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검미가 선명하게 꿈틀거렸다.
휘익!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유성은 급히 발을 굴렀다. 별똥별처럼 사유성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사라져 갔을 때였다. 
스스스.......
텅 빈 것만 같았던 병기점 안으로부터 흐릿한 인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거무튀튀한 안개에 가려진 듯이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괴영은 바닥에 꽂혀 있는 마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훗훗... 정말 훌륭한 물건이다. 후후... 절대마검이라는 이름이 손색이 없다. 이것은 오직 그 아이만이 만들 수가 있을 뿐이다."
음산하고 괴이한 인영의 음성은 듣는 자로 하여금 절로 소름 끼치게 했다.
"흐흐.... 그 아이가 다시 돌아와 이 마검을 잡는 날, 내 뜻대로 천하는 피로 물들리라."
스스스.......
괴영은 실로 끔찍한 저주를 내뱉으며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웅... 웅.......
텅빈 대장간 바닥에 꽂힌 마검이 피가 그리운 듯 울었다.
한풍이 세상의 모든 풍진을 깨끗이 쓸어버린 듯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그토록 깨끗한 강호의 하늘에 겁난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공할 마기가 서린 한 자루의 묵검 때문이었다. 
그 묵검을 처음 가진 자는 바로 낙양의 명가인 월아보(月娥堡)의 보주 철비금검(鐵飛金劍) 여상기(如相奇)였다.
그는 평소 인자한 협의지사였다. 
그러나 여상기의 성격은 어찌된 셈인지 주인 잃은 묵검을 얻은 후 급변했다. 묵검을 얻은 직후 그는 사소한 시비 끝에 무림고수 네 명을 묵검으로 베어 죽인 것이다. 그것이 혈겁의 시작이었다.
어느날 월아보는 초토화되었다. 수많은 복면인들이 쳐들어와 월아보를 궤멸시킨 것이다. 하인에서 식솔, 심지어는 가축까지 씨 하나 남기지 못하고 비명에 갔다. 
철비금검 여상기는 분시(分屍)된 채 죽었고 묵검은 사라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묵검은 악마의 저주가 붙은 듯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묵검을 가진 자들은 어김없이 황천으로 가기 시작했다. 정사를 가리지 않고 묵검을 얻은 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다.
마침내 흑도인들은 마검이란 소문이 붙은 묵검을 얻기 위해 광분했다. 그러나 묵검을 얻은 자들은 어김없이 하루를 못 넘기고 시체가 되어갔다.
묵검은 정녕 저주받은 마검이었다. 그 마검 하나로 인해 무림은 피비린내나는 혈선풍에 잠겨들었다. 
마검의 주인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마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회의와 공포에 찬 비명이 도처에서 들렸다.
"아아아악!"
 5장  쌍봉도(雙峯島)
①
철썩... 철썩... 쏴아.......
망망대해를 달려온 파도가 해안가의 바위를 후려친다. 희디흰 포말을 허공으로 비산시키며 또다시 밀려오는 파도.
인생의 희노애락애오욕(喜怒哀樂愛惡欲)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일까? 집채만한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 미세한 포말이 되어 흩어지는 파도에는 만상과 만감이 담겨 있었다.
동해(東海).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일만 리나 떨어진 망망대해의 동해 한가운데 하나의 섬이 있었다. 사람들은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는 그 섬을 쌍봉도(雙峯島)라고 불렀다.
중원인들에게 동해의 쌍봉도는 낙원이었다. 인간사의 추악한 면이 그곳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고 해도, 중원에서 너무나 먼 거리에 자리하고 있기에 쌍봉도는 세외도원이나 다름없이 여겨진 것이다.
쌍봉도에는 백여 호의 인가(人家)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업(魚業)을 생업으로 삼으며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즐겼다. 중원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어피족(魚皮族)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생선 가죽을 말려 옷을 만들어 입었다. 또한 생선의 뼈를 가공해 단추나 그밖의 모든 장신구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들은 욕심도 없었고 싸움을 싫어했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의 전란을 피해 중원에서 이주해 온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왕가의 후예들이었다.  
설가장(薛家莊)은 쌍봉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커다란 장원(莊園)인 설가장은 바로 쌍봉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이유는 자명했다. 설가장주(薛家莊主)는 곧 쌍봉도주(雙峯島主)였다. 즉 쌍봉도를 영도하는 지도자가 바로 설가장주였기 때문이다. 
쌍봉도의 주민들은 은자(隱者)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섬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십칠 년 전에 쌍봉도에서 십여 척의 배가 중원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왜 중원으로 건너갔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떠났던 배는 곧 쌍봉도로 되돌아왔다. 그날 이후 쌍봉도의 생활은 이전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조상들의 생활방식 그대로의 삶을 영위해갔다. 
쌍봉도에서 십여 척의 배가 중원으로 가는 것을 보았던 동해의 어부들도 이제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철썩... 쏴아.......
눈부신 백사장 끝이 쪽빛 하늘을 닮은 파도에 씻겨 나갔다. 정오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눈부시게 백사장을 반사하고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야말로 태고의 적막이 감도는 백사장이었다.
끼룩... 끼룩... 끼끼룩.......
은빛 날개를 가진 갈매기 한 쌍이 사랑을 속삭이듯 쪽빛 하늘을 여유롭게 선회하다가 바다 속으로 꽂히듯이 추락했다.
첨벙!
물보라가 일었다. 갈매기란 놈들도 쪽빛 하늘과 바다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바다와 하늘은 한통속이었다. 
곤두박질치듯 바닷속에 처박힌 갈매기 한 쌍 중에서 그래도 먼저 떠오른 것은 숫놈이었다.
푸드드득!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던 숫놈 갈매기의 눈이 백사장을 향했다.
끼끼룩... 끼룩!
돌연 숫놈 갈매기가 무엇에라도 놀란 듯이 다급한 울음과 함께 솟구치듯이 하늘로 떠올랐다. 물 속에 처박힌 암놈도 다급한 울음을 토해내며 물을 박찼다. 
끼룩... 끼룩!
쪽빛 하늘로 떠오른 갈매기 한 쌍은 호선을 그리며 눈부신 백사장을 관찰했다.
사람.
분명히 사람이었다. 파도에 떠밀려 백사장에 걸쳐진 하나의 나무등걸에 실린 물체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죽은 듯이 백사장에 엎드려 있었다.
끼룩... 끼끼룩!
날카로운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적요한 해변가를 길게 메아리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가운 하오의 햇살이 서편 하늘을 향해 소리없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꿈틀.
제일 먼저 손가락 하나가 살아났다. 분명히 모래를 짚은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며 움직인 것이다. 또다시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다.
"으으... 음!"
흑의를 입은 채 백사장에 엎어져 있던 인영이 희미한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뒤집었다. 
그 순간 인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백지장같이 창백한 얼굴색이 흑의와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남자였다. 
조각같이 섬세한 코를 비롯하여 반듯한 이마와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 약간 얇기는 해도 차갑게 보이는 입술에 고집과 함께 강인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백천강(白天 )이었다.
중원의 도시 낙양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궁가병기점의 파검소년이 동해의 쌍봉도에 마침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참으로 멀고 먼 길이었습니다.
가슴에 한과 증오만을 품은 채 
일만 리 만경창파를 한 조각 나무등걸만을 의지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아십니까?
천강은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꿋꿋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저주스런 원수들의 심장에 
비검을 꽂아놓을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겠습니다. 
하늘은 저렇게 푸르고 높군요
태양은 눈이 부십니다. 
저는 지금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뜨지 않아도 볼 수 있습니다.
갈갈이 찢긴 마음이 통곡합니다.
저의 눈에는 아름다운 것이 보이지 않는군요.
오직 한 가지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홍의 색깔.......
피(血)만이 보일 뿐입니다.
②
"꺄르르......."
해맑은 웃음 소리가 만경창파(萬頃蒼波)를 향해 울려퍼졌다. 그 뒤로 백사장 안쪽으로부터 두 소녀가 바닷가를 향해 달려나왔다.
"호호호...! 언니, 날 잡아봐. 정아(貞兒)를 잡으면 용치!"
"호호...! 너를 못 잡을 줄 알고!"
노란 옷을 입은 십삼 세 가량의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뒤쫓는 소녀를 향해 연신 혀를 낼름거렸다. 십칠 세쯤 되었을까? 연남빛 교의(嬌衣)를 입은 소녀 하나가 동생인 듯한 소녀를 향해 달려갔다.
초생달같은 아미 아래 선연한 눈빛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절로 빼앗을 것만 같았다. 서늘한 눈빛을 가진 소녀는 안면에 미소를 지으며 노란옷의 소녀를 쫓았다.
그녀의 이름은 설화영(薛華英)이었다. 노란옷의 소녀는 화영의 동생으로 설운정(薛雲貞)이었다.
"꺄르르... 앗... 어머!"
뒤돌아보며 혀를 쏙 내밀던 정아가 갑자기 무엇에 걸려 넘어질 듯이 비틀거렸다. 바닷가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앗... 정아!"
휘릭!
설화영의 신형이 돌연 허공을 날았다.
"정아야, 무슨 일... 앗!"
정아 옆에 내려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정아가 귀여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한 명의 흑의소년을 내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가 다가가자 용기를 얻은 정아는 흑의소년의 가슴에 귀를 갖대댔다.
잠시 후 정아는 얼굴을 들고 기쁜 듯이 소리쳤다.
"언니, 살아있어!"
"......!"
그녀는 급히 백천강을 내려 보았다. 그 순간 소녀의 서늘한 눈망울이 크게 확대되었다.
"언니, 이 분 참 잘 생겼지?"
설운정은 조각같은 백천강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얘는......!"
설화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은폐시키려는 듯 급히 고개를 숙이며 백천강의 앞가슴을 향해 섬섬옥수를 뻗었다.
쿵... 쿵... 쿵.......
미약하긴 했지만 분명 가슴이 뛰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두근거리는 가슴처럼. 재빨리 손을 거둔 설화영이 동생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어서 모셔가야 겠다."
"헹, 언니는 이 오빠가 좋은 거지? 그치?"
느닷없이 설운정이 혀를 쏙 내밀며 놀려댔다.
"얘가!"
설화영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러자 설운정이 한 술 더 떴다.
"호호호! 정아는 언니의 마음을 안다. 틀림없다구. 이 정아도 처음 보는 순간 이 오빠에게 반했는 걸."
설운정의 솔직한 말에 설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나는 이 분이 마음에 든단다. 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이 분을 모시는 거야."
"호호.... 그래, 언니. 이 분을 장원으로 모시자, 응?"
"물론이야."
백천강을 들쳐 업은 설화영이 백사장을 가로지르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땅히 백사장에 찍혀야 할 그녀의 발자국이 없는 것이었다. 백천강을 업었음에도 불구하고 설화영은 백사장에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두 자매는 백사장을 가로질러 송림(松林)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향후 어떤 운명을 이루게 될 줄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송림 사이의 소로는 꽤나 길었다. 소로는 잘 다듬어진 청석이 깔려 있어 몹시 청결한 느낌마져 들었다. 
한 채의 장원이 숲 사이에 나타났다. 몹시 우아하고 기품있는 장원에는 검박한 필체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설가장(薛家莊)>
설화영 자매는 의식을 잃은 백천강을 업은 채 설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오를 지난 따가운 햇살이 숲에 부딪혀 아름다운 음영을 시원하게 이루고 있었다.
설붕비(薛朋飛).
설가장주(薛家莊主)인 설붕비는 팔순이 넘었다. 그는 항상 백삼을 즐겨 입었다. 
의관을 정제하고 오른손에는 학우선(鶴羽扇)을 가볍게 쥐고 탐스러운 흰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버릇이기도 한 그는 늘상 책을 읽었다. 
원래 그는 유학자(儒學者)였다. 유학자의 집안답게 설가장에는 방대한 양의 책이 있었다. 서고만 해도 몇 채의 대전으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였다. 
서실(書室).
단정히 앉은 설붕비는 가볍게 백미를 찌푸렸다. 티끌 한 점 없이 잘 정돈된 서실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흑삼소년 때문이었다.
'음. 겉으로는 유약한 듯 보이나 무섭도록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섬뜩한 기운을 지닌 아이다. 무심한 듯한 눈 속에는 증오심까지 깃들어 있구나.'
설붕비는 흑삼소년을 내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문제는 정아와 영아가 지나친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출신도 내력도 알 수 없는 이 아이를 본장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졸라대니.......'
설붕비는 담담하나 깊이를 모를 예기를 지닌 노안(老眼)으로 흑삼소년을 살펴 보았다.
그가 흑삼소년에 대해서 아는 것은 오로지 백천강이라는 이름 석 자뿐이었다. 그외의 것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소년은 출신 내력은 물론이거니와 쌍봉도에 찾아온 이유조차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설가장주 설웅비는 왠지 흑삼소년을 처음 대했을 때부터 가슴 밑바닥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쌍봉도에 도착한 후 의식을 잃었던 그는 설화영, 설운정 자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이 쌍봉도의 설가장에 와있음을 알았을 때 몹시 기뻤으나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 동해의 쌍봉도로 가라. 그곳의 지하서고에서 대혈륜서(大血輪書)를 취하거라.
백천강의 뇌리에는 오로지 어머니인 백수련이 남긴 혈서의 한 대목만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가장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목표였던 것이다.
설붕비는 백천강을 내려보며 담담히 물었다.
"그래, 본 장원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백천강은 억양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유는?"
"......."
"쌍봉도에 온 이유는?"
"......."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닌가?"
"......."
"자네의 출신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찌 아무것도 모르고 자네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이곳은 평화로운 곳이네. 그리고... 자네의 눈에는 한이 서려 있네.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자네는 복수심을 품고 있음에 틀림이 없네. 안 그런가?"
"......."
"자네같은 사람이 쌍봉도에 머무는 것을 환영하고 싶지 않네."
냉정한 설붕비의 말에 비로소 백천강의 입이 열렸다.
"저를... 장원에 머물게만 해주신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
설붕비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설붕비는 한동안 백천강을 쏘아보다가 문득 노성을 질렀다.
"무엄한 아이로다. 어찌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 본장에 눌러 있겠다는 것인가? 노부는 허락할 수 없다."
설붕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백천강은 석상이 된 듯 무릎을 꿇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흐흠. 네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노부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설붕비는 옷자락을 떨치며 석실을 빠져나갔다. 서릿발같은 냉기만을 남겨놓은 채로.
"......."
서실 안에 홀로 남겨진 백천강은 그러나 일체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닷새가 지나갔다. 그러나 백천강은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자신의 무릎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허허... 고얀 놈이로다. 이 늙은이가 그런다고 질 줄 알았느냐? 어림없다."
설붕비는 이따금 서실을 다녀가며 냉소했다.
그러나 아무리 냉혹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일말의 감정은 있는 법이 아닌가? 마침내 열흘이 지나자 설붕비의 마음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표정이 없는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지난 십일 동안 그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며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버티는 것이었다. 이제 약관도 지나지 않은 소년의 오기치고는 정말이지 대단한 오기였다. 
하지만 설붕비 또한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설붕비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두 손녀들이었다.
"흐흐흑.... 할아버지 미워. 왜 오빠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야? 정아는 할아버지가 미워, 밉단 말야!"
"흐흑! 할아버니, 화영은 저 분이 이곳에 있기를 바래요. 그런데 왜 허락하시지 않으시는 거죠? 으흐흑!"
설붕비가 가장 사랑하는 두 손녀인 설화영과 설운정 자매가 울면서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붕비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일이 뜻밖으로 비화된 것은 이튿날 후였다. 두 자매가 할아버지의 뜻이 완고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설붕비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설화영과 설운정이 식음을 전폐한 지 삼일만에 설붕비는 마침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③
노을이 탔다. 
핏빛 홍운(紅雲)이 그림처럼 수평선 위로 깔리는 순간 대해(大海) 또한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끝없이 펼쳐진 핏빛 수평선과 하늘 사이를 그림처럼 가로지른 홍운은 몹시도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
언제부턴가 인적이 끊긴 바위에 선 채 묵묵히 석광(夕光)을 바라보는 고영(孤影)이 있었다. 일신에 흑삼을 입은 고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
그는 멍하니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설가장주 설붕비에게 승낙을 얻고 설가장에 머물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백천강이 설가장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원했던 일은 이곳저곳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하인(下人)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설화영과 운정자매는 그를 하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오히려 백천강을 친오라버니 이상으로 대하며 무척이나 따랐다. 
그러나 백천강은 그녀들이 따라붙으면 붙을 수록 눈꼽만치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도 일이 끝나자 그는 단신으로 바닷가로 나왔다. 지는 노을을 보기 위해서 였다. 어느새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각이면 바닷가로 나와 불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불타오르던 노을을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불현듯 제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붉은 것을 보면 웬지... 심장이 떨린다. 특히 저 불타는 저녁 노을은......."
백천강은 붉은 색만 보면 가슴이 끓어 올랐다.
석양은 특히 그랬다. 백천강의 가슴은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보는 순간마다 쿵쾅거리며 뛰었다. 뒤이어 전신의 피가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수련이 남긴 혈정단(血精丹)을 복용한 후부터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혈정단은 그의 체내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혈정단을 복용한 후부터 신비한 힘이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음을 그는 느꼈다. 그리고 백일 동안 그의 눈에는 혈기(血氣)가 흘렀다.
그 혈기는 백일이 지난 후 사라졌으나 그때부터 마음 속에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광오한 기운이 잠재되어 있음을 은연중 느꼈다.
특히 붉은 색만 보면 가슴이 격탕되었다. 
붉은 색. 그것은 바로 피(血)를 연상케 하는 색이 아니던가? 백천강의 마음 속에는 언제부턴가 피에 대한 굶주림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불타오르던 석양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천강의 진탕되던 가슴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백천강은 석양이 지며 바다가 어둠에 잠겨드는 것을 보았다.
쌍봉도.
몹시도 평화로운 섬이었다. 순박하게 보이는 도민들은 모두들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툼도 없었고 욕심 따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따스한 웃음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전부인 것만 같았다.
아내는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남편은 배에 가득 고기를 싣고 돌아와 아내를 품에 안았다. 그들의 아이들은 백사장을 뛰놀며 태양과 파도, 바람을 친구로 삼았다.
하지만 백천강의 마음 속에는 그런 따사로운 정경이 파고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나는... 생의 낙(樂)을 잊은 지 오래다."
마침내 어둠이 사위를 시꺼멓게 물들이자 백천강은 뇌까리며 돌아섰다. 
그는 가슴에 검(劍) 한 자루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증오와 저주에 가득찬 피묻은 마검이었다. 그 마검을 뽑을 날을 그는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설가장의 서고는 모두 일곱 개다. 그동안 나는 그 중 두 곳을 뒤졌다. 그러나 내가 찾는 대혈륜서(大血輪書)는 없었다. 나머지 다섯 개의 서고 중에 분명 있을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대혈륜서 하나밖에 없었다. 
설가장의 서가에는 수만 권의 경서가 있었다. 대부분 유학에 관한 책이 전부였다. 백천강은 서고를 청소하며 그 책들을 일일이 살펴본 것이다.
'지하서고(地下書庫). 분명 설가장 어딘가에 지하서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백천강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처소로 돌아온 백천강은 가부좌를 틀고 궁우노인이 전해준 두 권의 책 중에서 천마천병보(天魔天兵譜)의 내용을 떠올렸다. 
천마천병보는 각종의 괴병을 제작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천마천병보의 맨 마지막 장에는 삼초(三招)의 도법(刀法)이 적혀 있었다. 
- 섬(閃).
- 환(幻).
- 살(殺).
바로 세 가지의 도초(刀招)였다. 
내력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세 가지의 도초가 천마천병보의 마지막 장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본래의 책에 추가된 양피지 한 장에 적혀 있는 것이었다. 
중원에서 동해 쌍봉도로 오기 직전 백천강은 천마천병보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삼초식의 도초 구결을 모두 외운 후 책을 불태워 버렸다.
'내일부터는 삼초의 도법을 익히리라.'
가부좌를 튼 자세로 중얼거리는 백천강의 몸 속에 혈정단으로 인한 신비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그 힘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그 힘을 이용하여 삼초식의 도법을 익힐 작정이었다.
백천강은 감았던 눈을 갑자기 떴다.
파르르.......
수직으로 타오르던 촛불이 꺼질 듯이 흔들렸다. 그것은 부릅 뜬 그의 눈에서 가공할 혈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④
태양.
망망대해의 동쪽 수평선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시뻘건 불덩어리는 바닷물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이보다 더욱 아름다운 천지개벽(天地開闢)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어둠을 물리치고 솟아오르는 불덩어리가 대양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처얼썩... 쏴아!
끼룩... 끼끼룩.......
밀려들었다가 부서져나가는 파도를 뚫고 솟구친 한 마리 갈매기의 은빛 날개 또한 찬란하게 불타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사조(不死鳥)가 태양 속에서 솟구치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쌍봉도의 동쪽은 암초(暗礁)가 깔린 거친 곳이었다.
처얼썩... 쏴아!
밀물이 빠져나가자 드러난 암초를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가 포말을 일으켰다. 
하나의 바위 위.
쏟아져내리는 물보라를 뒤집어쓰며 백천강이 우뚝 서 있었다. 고무래 정(丁)자로 서서 솟아 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두 손에 한 자루의 죽도(竹刀)를 쥐고 있었다. 
쏴아... 철썩!
밀려온 파도가 또다시 바위를 치며 부서져 나갔다. 
한동안 태양을 노려보던 백천강이 서서히 죽도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죽도를 겨누는 그의 자세는 헛점 투성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殺氣)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을.
문득 그의 입에서 차가운 일갈(一喝)이 터졌다.
"섬(閃)!"
쌔액!
죽영(竹影)이 길게 뻗어나가며 허공을 갈랐다. 바로 그때였다.
촤악!
거짓말처럼 동터오르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환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끓어오르던 수면이 일순간에 갈라졌다가 합쳐졌다.
놀랍게도 백천강의 죽도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수면을 베어낸 것이다.
"......!"
죽도를 거두는 백천강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틀렸다. 섬(閃)은 무흔(無痕)이다. 수면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야 한다.'
죽검을 내린 백천강이 내심 중얼거릴 때였다. 돌연 바다 속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것은 몸뚱이가 반동강 난 물고기들이었다.
그것은 모두 삼십 마리였다.
"섬은 쾌(快)다. 그 중에서 삼십육변(三十六變)이 있다. 한데 삼십 마리밖에 베지 못했다."
중얼거리던 백천강이 다시 죽도를 고쳐 잡고서 일갈했다.
"환(幻)!"
파츠츠츳!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짧은 순간이었다. 허공이 죽영으로 가득차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뒤이어 자욱한 물보라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백천강의 입이 벌어졌다.
"환(幻)은 칠백이십변(七百二十變)의 화초(化招)를 품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고작 오백사십변밖에 펼치지 못했다."
정말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죽도를 손에 잡은 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은 백천강이 한 초(招)에 오백사십변초를 전개해낸 것이다.
백천강은 무심한 눈빛으로 죽도의 끝을 내려 보았다. 죽도에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나머지 살(殺)은 무변극쾌(無變極快)다. 오직 찌르는 것이다."
백천강이 무심히 중얼거리는 순간 죽도 끝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살(殺)!"
그뿐이었다. 
그는 처음 동작 그대로였다. 애당초 그는 죽도를 발출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수면으로 고기 한 마리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물고기의 미심(眉心)이 정확히 베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
허연 배를 뒤집은 채로 물결에 흔들리는 물고기를 내려다보던 백천강이 죽도를 거두었다.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은방울같은 교성이 들렸다. 
"호호호... 오빠, 멋있었어요."
"......!"
백천강은 검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암초를 향해 늘어져 있는 해송(海松)의 가지 위에 한 인영이 걸터 앉아 있었다. 바로 설운정이었다.
"호호! 오빠가 그렇게 멋진 재주를 갖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설운정이 또다시 낭랑하게 외쳤다.
휙!
그 순간 백천강은 몸을 날렸다. 그는 경공술을 익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 장(三丈)을 건너 뛰어 한 암석 위에 내려섰다.
"호호호! 정아를 받아줘요."
백천강이 암초 위를 걸어가자 설운정은 해송가지 위에서 무작정 뛰어내렸다.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설운정은 그의 품에 떨어지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못써. 이런 장난은 위험하다."
백천강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설운정을 암초 위에 내려놓았다. 그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해변의 비탈을 올라갔다.
"오빠. 정아에게 조개를 잡아줘. 응?"
설운정은 귀엽게 외치며 백천강을 뒤쫓았다. 
늘상 그랬다. 젖먹이 강아지가 어미 개를 따라다니듯 그녀는 항상 백천강을 졸졸 따라다녔다. 무엇을 하든 백천강이 하는 일은 그녀의 관심대상이었다. 
심지어는 측간에 갈 때도 따라 붙을 정도였다. 백천강이 장원 안을 비질할 때도 팔을 턱에 괸 채 방글거리며 바라보곤 했다. 도대체 무뚝뚝하기만 한 백천강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을 따르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흔들!
설운정이 걸터앉아 있던 해송가지의 위가 다시 흔들리며 연남빛 인영이 사뿐히 바위 위에 내려섰다. 놀랍게도 부광약영(浮光躍影)의 경공법을 시전한 인영은 바로 설화영이었다. 
설화영은 비탈을 올라가는 백천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가가(哥哥), 당신은... 비밀이 많은 분이군요. 비록 정순하지는 못하지만 가가가 펼친 도법은 너무나 위력적이었어요."
휙!
그 한 마디를 내뱉은 설화영이 쏜살같이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모습은 눈 깜짝할 새에 송림 속으로 사라져갔다.
 6장  광명대현령기(光明大玄靈氣)
①
설가장의 서고.
그곳에는 고금(古今)을 망라한 온갖 기문벽서(奇文僻書)들이 꽉 차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도 없다니......."
구석진 서가를 뒤적이던 백천강이 중얼거렸다.
그가 설가장에 머물게 된 지도 어언 반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일곱 개의 서고를 모두 뒤졌다. 그러나 그가 찾는 대혈륜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서고에 있는 수만 권의 책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책뿐이었다. 그 와중에서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서고를 정리하면서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백천강의 학문 경지는 대학자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원래부터 초인적인 기억력과 오성(五性)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던 것이다. 
이미 그는 서가의 책을 모두 섭렵한 뒤였다. 
하루 중 반나절은 해변 암초 위에서 도법(刀法)을 연마했고 나머지 시간은 오직 책을 읽는 데만 몰두했다. 따라서 그의 지식은 나날이 박학해져 갔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의 가슴 깊숙이 숨어 있는 증오심과 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식과 비례하여 더욱 쌓여가기만 하고 있었다.
"......!" 
백천강은 일곱 번째 서고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천추승기어도록(天秋勝機御道錄)>
그것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도학(道學)에 관한 책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조금도 지체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수만 권의 학서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력이 있었으므로 천추승기어도록을 읽는 것은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스스스.......
그의 등뒤로부터 한 인영이 안개처럼 나타났다. 바로 설가장주 설붕비가 환영분광(幻影分光)의 신법으로 소리없이 나타난 것이다. 
설붕비는 백천강이 넋을 잃은 채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불과 반 년 동안에 이 아이는 본 설가장의 학서를 모두 읽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아이야말로 천고기재(千古奇才)다. 아... 그러나.......'
다음 순간 설붕비의 노안에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책읽기에 여념이 없는 백천강을 내려보며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이 아이의 내면에는 무서운 마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아이는 장차... 어쩌면 대살성(大煞星)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득 설붕비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살기가 어렸다. 그는 소리없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차라리 지금 죽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정(情)을 끊음으로써 무림을 구할 수 있다면 지금이 가장 적기다.'
부르르.......
설붕비의 흰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일수에 백천강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설붕비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자꾸만 그의 결심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내려칠 것인가? 말 것인가?'
설붕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천추승기어도록을 모두 읽은 백천강이 책을 덮으며 돌아섰다.
팟!
그 순간 유령처럼 설붕비의 모습은 사라졌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서실.
설붕비는 백미를 잔뜩 찌푸리며 한 점 허공을 응시했다. 천장에 야명주(夜明珠)가 박힌 서실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온 것은 반드시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연마하는 도법, 그것은 살인만을 위한 도법이다.'
설붕비는 이미 백천강이 도법을 익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한 점 허공을 응시하던 설붕비가 눈을 돌려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새하얀 벽에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외경(畏敬)스럽게 만드는 천축국(天竺國)의 만다라(曼茶羅) 한 폭이 걸려 있었다.
만다라의 중심을 응시하던 설붕비가 중얼거렸다.
"그 아이의 몸 속에는 무서운 마기가 흐르고 있다. 만일... 그 마기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는 살성(殺星)에서 무림의 구성(救星)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큰 모험이다."
부르르.......
설붕비의 하얀 수염이 가늘게 떨었다. 잠시 후 그는 수중에 든 한 권의 책자를 내려 보았다.
<제마천무심법기해(制魔天武心法氣解)>
책자를 내려다보던 설붕비의 안색에 수시로 갈등의 빛이 어렸다.
"이것은 본문의 최상승 비공(秘功)이다. 과연 이것을 그 아이에게 익히게 해서 마기를 억누를 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던 설붕비가 입술을 깨물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만약... 마기를 억누를 수가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대살성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늘의 뜻(天意)에 달린 일이다."
설붕비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눈을 뜬 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②
백천강은 여덟 번째 서고에서 마지막 서가의 마지막 번째 책(冊)을 빼어들었다. 어느덧 사경(四更)도 중간을 넘어선 시각이었다. 
주위는 적요하기 짝이 없었다. 
귀뚤... 귀뚜르르르.......
서고 밖으로부터 늦가을의 풀벌레소리가 가는 계절을 아쉬워하듯 처량하게 울어댔다. 그러나 백천강의 귀에는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풀벌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것만 읽으면 다 읽는 셈이다."
그는 책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제마천무심법기해(制魔天武心法氣解)>
그 순간 백천강은 흠칫 놀랐다. 이제껏 본 책과는 너무나 틀린 이름 때문이었다. 
그는 급히 책장을 넘겼다.
"......!"
그의 준미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첫 장에는 웅휘한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 항마멸사(抗魔滅邪)에 뜻을 두고 광명정대한 천하의 정공(正功)을 모아 그 힘을 합쳐 멸사지공(滅邪之功)을 남긴다. 
천하마공은 인륜을 파하고 악을 뿌리는데 그 뜻이 있다면 천하정도인들은 정혈(正血)을 바쳐 멸사지법을 이루어야 한다. 정도의 힘을 모아 천하백도제파 삼백육십 문을 의문(義門)에 들게하니 이를 제마천문(制魔天門)이라 한다. 제마천문은 난세가 도래할 때마다 출세하여 멸사행을 이루리라. 
제마천문비학(制魔天門秘學) 중 기본이 되는 제마천무심법을 남기노라. 이는 파사현공(破邪玄功)으로서.......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제마천문(制魔天門).
그것은 바로 십칠 년 전 대마성을 붕괴시킬 때 무림정도맹을 도왔던 신비문파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런 제마천문의 비학(秘學)이 바로 설가장에 비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백천강은 미동도 없이 제마천문심법기해에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무림사 이래에 유례가 없는 심법이었다.
불(佛), 도(道), 속(俗), 유(儒).
제마천문심법기해는 천하 모든 분야의 광명정대한 심법을 융합시킨 것으로 지극히 넓고 허허로우며 현기무궁(玄氣無窮)한 절대지고(絶對至高)의 심법이었다.
"이런 책이 서가에 꽂혀 있다니......!"
백천강은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설붕비가 일부러 그 책을 꽂아두었을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백천강에게 있어서 그 책은 물고기에게 꼭 필요한 물과도 같은 소중한 책이었다.
백천강은 혈정단의 복용으로 체내에 마기와 함께 근 일백 년 가까운 내공을 갖고 있었다. 다만 심법(心法)을 익히지 못했기에 그 내공을 운용하기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손에 넣게 된 제마천문심법은 그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
백천강은 희열을 느끼며 즉시 제마천문심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초인적인 혜지와 오성을 가지고 있던 그는 책을 손에 잡은 지 반 시진도 못되어 제마천문심법의 오의를 완전히 터득했다.
제마천문심법.
그것은 광명대현령기(光明大玄靈氣)라고 불리기도 했다. 광명대현령기는 마를 비롯하여 사, 악, 요(妖) 등 모든 사마지공을 제압하는 힘이 있었다.
백천강은 마침내 광명대현령기의 구결(口訣)을 외운 후 그 자리에 정좌했다. 뒤이어 그는 즉시 연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광명대현령기는 그 특징이 바로 정(靜)에 있었다. 
"......!"
마치 부처의 미소와도 같은 고요한 정기가 백천강의 얼굴에 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지그시 내려 감은 백천강의 전신에서 뿌연 서기(瑞氣)가 어리기 시작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단 한 번 운공했을 뿐인데도 그의 몸에서 서기가 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파사지기(破邪之氣), 즉 광명대현령기였다.
그의 몸이 서기에 둘러싸이자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성으로 가득 찼던 그의 몸에 지극히 엄숙하고 숙연한 기도가 풍긴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백천강의 몸에서 느껴졌던 냉막함과 섬ㅉ한 기운을 감쪽같이 몰아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
불현듯 백천강의 뒤에서 기쁨과 안도에 찬 탄성이 들려나왔다. 탄성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설붕비였다. 
신형을 감추고 줄곧 백천강을 지켜보고 있던 설붕비의 노안에 기쁨이 어렸다.
'성공이다. 저 아이는 이제 제마천문심법의 광명대현령기로 인해 차츰 마기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설붕비의 입가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그는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면... 나 설붕비는 저 아이를 본문의 후계자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기인(老奇人) 설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져 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스스스......
한동안 전신을 감싸고 있던 서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백천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털끝만치의 사기(邪氣)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이제야 머리 속에 안개가 걷힌 기분이다. 내공심법이 이토록 중요한 것인 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니......."
그는 지금 머리가 지극히 맑을 뿐 아니라 전신에 무궁한 힘이 골고루 느껴지는 상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제껏 이해되지 않던 삼초 도식의 막혔던 부분까지 환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광명대현령기의 심오한 힘이 백천강의 심지를 맑게 하고 지혜를 북돋운 것이었다. 마침내 백천강은 손에 들고 있던 제마천무심법기해를 서가에 꽂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
바로 그의 모친인 백수련에게서 얻은 책이었다. 
"이제는 이것을 익힐 수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내공을 익히지 못해 구결만 습득했을 뿐인데 이제야 완전히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천강은 소녀미향탈심대법의 한 구결을 암송했다.
"사환영겁소(邪幻永劫笑)."
그것은 소녀미향탈심대법의 소공(笑功) 중의 하나였다. 구결을 암송하며 백천강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창백하도록 얇은 백천강의 입가에 참으로 신비한 미소가 어린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 자리에 있어 백천강의 미소를 보았다면 그는 삽시간에 그 미소의 마력(魔力)에 이끌려 넋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마력적인 미소였다.
만일 설붕비가 그 미소를 보았더라면 그만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마천문의 심법비학을 넘겨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후후후... 백천강아, 너는 결코 잊지 않았겠지? 천하가 다 너의 적이오. 원수라는 것을......."
문득 백천강의 입에서 끔찍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웃음을 거둔 백천강은 저주의 눈빛을 흘리며 소녀미향탈심대법을 품 속에 집어 넣었다.
③
흑웅(黑熊).
이름이 흑웅인 그는 몸집이 컸다. 자그만치 구 척이 넘는 키에다가 얼굴마저 검었다. 하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그는 곰처럼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쐐액!
파공성을 내며 허공을 가른 도끼가 한아름이나 되는 통나무에 떨어졌다.
파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통나무는 여지없이 두 쪽이 났다. 
설가장의 후원에서 도끼로 장작을 패는 흑웅은 삼십 세 정도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설가장의 하인으로 몹시 과묵한 성품이었다.
팍!
이번에는 팔뚝만한 굵기의 장작이 여지없이 정확하게 두 조각이 났다.
흑웅이 휘드르는 도끼는 무게가 삼백 근이나 나가는 거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웅은 그 철부(鐵斧)를 가볍게 휘두르며 조금도 힘들지 않게 장작을 패는 것이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흑웅이 장작을 패는 곳으로부터 삼 장 떨어진 거리에서 흑웅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에서 기광이 흘렀다.
'흑웅, 저 자는 신력(神力)을 지녔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불현듯 백천강의 눈이 빛났다. 또다시 철부가 파공성을 내며 떨어졌다.
"......!"
그 순간 백천강은 보았다.
흑웅의 거대한 철부가 장작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놀랍게도 철부의 끝이 장작에서 한 치 가량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작이 쫙 갈라지는 것을.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흑웅은 일신에 보이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설가장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쌍봉도의 어부들까지도...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의 발견은 옳았다. 그는 쌍봉도가 예사로운 섬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쌍봉도의 도민은 약 사백 명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공할 비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쌍봉도의 사람들 모두 일신에 가공할 무공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명대현령기를 익힌 후부터 안력(眼力)이 전에 비할 바 없이 좋아진 백천강이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머지 않아 반드시 비밀을 밝혀내고 말리라.'
백천강은 내심 기소를 흘렸다. 흑웅을 지나친 그의 발걸음이 후원 사이의 소롯길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월동문을 지나자 취월헌(翠月軒)이 시퍼런 동백림 사이로 드러났다. 취월헌은 바로 설씨 자매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삘리리... 삘릴리리.......
적음(笛音).
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것만 같은 적음(笛音)이 취월헌 너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취월헌으로 다가가던 백천강의 눈썹이 흔들렸다.
'화영(花英)의 기분이 몹시 울적한 모양이군.'
백천강은 설화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설화영은 경국지색의 미모는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서늘한 눈매가 보는 이들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정말 신비감을 간직한 푸른 호수같았다. 
하지만 백천강의 얼굴은 곧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여인을 증오한다."
싸늘하게 내뱉은 백천강이 곧바로 돌아섰다.
백천강의 가슴에 못박힌 한. 그것은 모친인 백수련이 불륜(不倫)을 맺는 광경에 연유한 것인지도 몰랐다.
바로 그 순간 적음이 뚝 끊기더니 설화영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가가(哥哥), 왜 발길을 돌리시는 거죠? 이 화영이 보기 싫어서인가요?"
"......!"
그녀의 음성을 듣고 걸음을 멈추는 백천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사악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척이나 신비로우면서도 괴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평상시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화영을 싫어하겠소?"
"호호.... 소매는 가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어요."
백천강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원.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화원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때는 어느덧 늦가을이었다. 중원의 낙양에는 이맘때면 첫눈이 내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을 시기였으나 동해의 쌍봉도는 뜻밖에도 온화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꽃 사이로 이어진 소로 끝에 인공으로 만든 아담한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한가운데 정자 한 채가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영정(花影亭).
꽃그림자가 물 속에 어른거린다는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 화월정의 난간에 연남빛 교의를 입은 소녀 하나가 교태로운 자세로 기대 서 있었다. 
맑으면서 서늘한 한 쌍의 눈이 가까이 다가오는 백천강을 응시했다. 그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날 기다렸다니 무엇 때문에?"
백천강이 연못을 가로지른 반월교를 지나 화영정에 오르며 물었다. 설화영은 취옥적(翠玉笛)을 만지작거리며 생긋 웃었다.
"소매는 가가만 보면 항상 기쁜 걸요?"
"그럴 리가.... 나보다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때였다. 돌연 설화영의 음성이 젖어들었다.
"가가. 말을 돌리지 마세요. 화영은 가가가 처음 쌍봉도에 왔을 때부터......."
"......?"
"가가를 운명처럼 따르려고 결심했어요."
"......!"
백천강은 흠칫했다. 그녀의 손 때문이었다.
취옥적을 거머쥔 설화영의 섬섬옥수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소매를 경박하다 탓하지 마세요. 가가에게 향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는 걸요."
"......!"
다음 순간 백천강의 가슴이 뭉클했다.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가늘게 떨리는 설화영의 손. 그 손길의 서늘한 부드러움을 백천강은 정녕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억해냈다. 
쌍봉도에 도착한 그가 칠 주야를 혼미 속에서 깨어나 처음 느낀 손길을. 그 손길은 서늘했으나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설화영은 밤을 새워가며 그를 보살폈던 것이다. 
때로는 백천강의 가슴에 옥용을 묻고 잠든 적도 있었다. 백천강이 어떻게 그러한 설화영의 손길을 잊을 수 있겠는가?
눈과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늘하고 깊었으나 한없는 이야기를 간직한 눈 한 쌍과 무정하기 짝이 없는 눈 한 쌍이 얽힌 것이다.
"화영은 가가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을 정(定)해 버렸어요."
설화영의 얼굴은 술에 취한 듯 붉었다. 
미녀의 옥용이 붉어지는데야 어찌 사나이 철심이 녹지 않겠는가? 마침내 백천강의 눈빛에 약간의 온기가 돌았다.
"가가께서 일신에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는 소매는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매의 마음이에요."
"화영."
백천강이 부드럽게 화영을 불렀다. 
"네. 가가......."
"후회할 것이다."
부드러운 백천강의 말투에 설화영이 아름답게 웃었다.
"후회해도 좋아요. 가가의 마음만 녹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아요."
"화영!"
"......!"
다음 순간 설화영이 백천강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머뭇거리던 백천강이 그녀의 교구를 살며시 안았다.
"아... 가가의 가슴은 넓어요. 소매는 마치 넓은 하늘에 안기는 기분이에요."
"나는......."
"소매는 항상 동경해 왔어요. 멋진 왕자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넓은 중원의 절승지(絶勝地)를 유람하는 것을 말이에요."
"내 몸에는......."
"그 어디라도 좋아요. 가가와 함께라면 설사 끊는 물 속... 또는 검림(劍林)이라도 즐거이 동행하겠어요."
"피비린내 나는......."
"가가의 모습에서는 항상 뼈저린 고독이 뭉쳐 있죠. 소매는 그 고독을 풀어드리고 싶은 거예요."
"후회할 것이다."
"소매는 후회하지 않아요. 소매는 어려서부터 줄곧 이 쌍봉도에서만 살아왔어요. 바깥 세상은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님의 뜨거운 피가 제게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에요."
"......."
설화영의 눈이 꿈꾸듯 몽롱해졌다.
"소매의 부모님 얘기를 해드릴까요?"
"......."
"제 아버님은 제 십오대 쌍봉도주(雙峯島主)가 되실 분이셨어요."
설화영의 취한 듯한 음성이 얼음장같은 백천강의 가슴을 뚫고  봄처럼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④
설인영(薛仁英).
쌍봉도의 제 십오대 도주가 될 영기발랄한 청년인 그의 운명은 빛나는 성좌(星座)처럼 확실했다.
그러나 대중원을 휩쓰는 피의 바람에 애정의 향풍이 실리면서 그의 운명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일은 바로 십칠 년 전에 일어났다. 
공포와 전율의 집마부(集魔府)인 대마성(大魔城)과 정도 무림맹의 한 판 승부가 벌어지던 때였다. 중원에 대혈풍이 불어닥칠 때 쌍봉도의 사백여 도민은 중원으로 출항했다. 정의라는 고기를 건지기 위해서였다. 
싸움은 처절했다. 하늘도 흔들리고 땅도 흔들렸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목숨들이 피꽃(血花)을 토하며 스러져 갔다. 
그런 와중에 설인영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화수옥(花水玉)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여염집의 여인도 아니었고 정도무림맹의 여인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대마성의 여인이었다.
악의 꽃(惡花)이라는 별호로 불리웠던 화수옥.
운명은 잔혹했다. 결국 하늘은 설인영과 화수옥을 애정의 연못에 빠트리고 말았던 것이다.
선과 악의 기로에서 남녀는 부침했다.
설인영은 화수옥의 검을 가슴에 맞으면서 화수옥의 마음을 얻었고 화수옥은 설인영이 내민 사랑이라는 쓰디쓴 약을 먹으면서 사문(師門)으로부터 육신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고 만 것이다.
마침내 대혈풍의 막이 내리자 쌍봉도의 어부들은 정의라는 고기를 안고 섬으로 돌아왔다. 
화수옥과 설인영은 상처투성이의 육신으로 섬으로 돌아와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그들이 함께 한 기간은 오 년이었다. 짧다면 섬광(閃光)보다도 짧고 길다면 영원보다도 긴 그 오 년 동안 그들은 두 딸을 낳았다.
그 두 딸이 바로 설화영과 설운정 자매였다. 
그런 연후 그들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세상을 떠나갔다. 부서지는 파도에 그들의 뜨거운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졌던 것이다.
"화영......."
백천강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뜻밖에도 그는 가슴이 젖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백천강의 품에 안긴 설화영이 눈물로 그의 가슴을 적신 것이다.
"저에게는 부모님의 뜨거운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어요. 그러기에 가가와 함께 한다면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화영."
백천강은 손을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었다. 차갑고 고독했던 그의 가슴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백천강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던 처절한 한과 증오심이 꿈틀거리며 솟아 올랐다.
"화영."
"......?"
"난 화영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몸이오."
백천강의 말에 설화영은 가슴에 묻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자격같은 것은 필요없어요."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화영을 받아들인다고 말해 주세요. 네?"
"만일 내가 목적을 이룬다면......."
"화영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나는 이곳을 즉시 떠날 것이다."
"소녀 또한 가가를 따를 것이에요."
백천강의 싸늘한 말투에도 설화영은 막무가내였다. 다음 순간 백천강이 표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말해 다오. 지하서고가 어디 있는지를!"
백천강의 손아귀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깨를 잡힌 설화영이 놀란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아미를 파르르 떨며 물었다.
"그것이었나요. 가가가 쌍봉도에 온 목적이?"
백천강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 나는 석가장의 지하서고에서 찾을 것이 있다."
"......!"
설화영이 서늘한 눈빛으로 한동안 백천강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지하서고는 오직 조부님만이 열 수 있어요."
백천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도와준다면......."
"제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지하서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
설화영의 얼굴이 그 순간 도화빛이 되었다. 그녀는 급히 되물었다.
"가가. 화영을 믿나요?"
백천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영이 서늘한 눈빛으로 백천강을 올려다보다가 살짝 눈을 감았다. 
"부탁이 있어요."
"......?"
"저에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눈을 감은 설화영이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앵두같은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난향(蘭香)과 함께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오래 전부터 가가의 입김을 가지고 싶었어요."
"......!"
백천강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설화영의 정열은 분명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열은 냉막한 그의 마음을 현혹시키고도 남았다. 
결국 백천강은 어쩔 수 없었다. 이성의 유혹을 견뎌낼 재간이 없는, 끓는 피를 가진 한 신체건강한 사내였던 것이다.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치는 찰나 적막 속에서 달디단 꽃향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취월헌의 화원에 핀 백화(百花)가 일제히 꽃잎을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영정의 누각기둥이 잠긴 연못물에 꽃그림자가 목욕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짙은 꽃내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유유히 수면을 헤엄치던 금잉어란 놈들이 수면에 비친 두 남녀의 그림자를 보는 순간 부끄러운 듯 깊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아!"
설화영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백천강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나긴 입맞춤이 마침내 끝났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에요."
붉게 타오른 얼굴을 감추느라고 백천강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설화영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떻게?"
백천강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치켜세웠다. 농익은 앵두같은 입술이 백천강의 코 앞에 있었다. 
살며시 몸을 빼낸 설화영이 품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냈다.
"이것은 단정검(斷情劍)이라고 불러요. 정을 끊는 검... 과거 이 단정검으로 어머니는 아버님의 가슴을 찔렀지요."
설화영의 뜻밖의 말에 백천강이 의아해했다.
"그것을 왜?"
"단정검은 결국 어머니와 아버님을 맺어지게 했지요. 이제 이것으로... 가가와 화영을 맺으려 해요."
"그... 그것이 무슨 뜻이지?"
백천강의 의혹은 아랑곳없이 설화영은 단정검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가가의 최후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화영은 가가를 돕겠어요. 이 단정검이 가가의 뜻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거예요."
"......!"
그 순간 백천강의 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다. 마침내 그는 설화영이 의도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으로 당신을 찌르란 말인가?"
놀란 백천강의 말투에 설화영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가가는 총명한 분이에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임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화영!"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는 한동안 설화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토록이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백천강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설화영을 끌어 안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 것이 여인의 본능이라면 본능이다. 그래서 고래(古來)로부터 여자를 가리켜 여우라고 하는 지도 모르지만.
백천강의 가슴에 파묻힌 설화영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곧 할아버지께서 오실 거예요. 가가께선 준비를 하셔야 해요."
백천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서 검을 제 목에 대세요."
설화영이 나직하면서 조급하게 말했다. 
그 순간 백천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들었던 것이다. 설붕비의 낯익은 기침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것을. 하지만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서요!"
초조해진 설화영이 스스로 단정검 끝에 가녀린 목을 갖다 댔다. 
"아악!"
그녀는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찰나지간 실같은 핏줄기가 눈부신 목덜미에서 흘러내렸다. 
"무슨 짓이냐!"
천둥같은 호통과 함께 선풍(旋風)이 일어났다. 설붕비가 단숨에 능공허도신법(能功虛道身法)으로 날아든 것이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짓이냐?"
백천강을 노려보는 설붕비의 흰 수염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화영을 끌어안은 백천강이 다른 손에 거머쥔 비수로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천강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천강! 대체 무슨 짓이냐?"
의혹과 함께 분노성이 담긴 설붕비의 추궁이 화영정을 무너뜨릴 듯이 뒤흔들었다. 백천강은 충혈된 눈으로 설붕비를 노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소."
"무엇을 말이냐?"
설붕비의 노안이 부릅떠졌다.
"소생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소."
"뭐, 뭐라고?"
질문을 던지며 설붕비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백천강은 싸늘하고 살기띈 음성으로 내처 말했다.
"서시오. 노장주가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소.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가차없이 찌르겠소."
설화영이 창백해진 얼굴 위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애원했다.
"할아버지! 제발 영아를 살려 주세요!"
"영아야!"
설붕비는 노구를 부르르 떨었다. 백천강을 노려보던 그가 입술을 씹으며 노성으로 물었다.
"그래, 네 놈의 목적이 무엇이냐?"
설화영의 목에서 검을 거두지 않은 백천강이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하서고!"
"지, 지하서고라고?"
놀란 설붕비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소. 이곳 설가장에 대대로 지하서고가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곳에 들어가게 해주시오."
"바... 바로 그것이 너의 목적이었느냐?"
"그렇소."
"으음!"
신음성을 토해내는 설붕비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분노성이 무의식적으로 강기( 氣)를 일으킨 때문이었다.
지하서고. 그것은 쌍봉도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서고로써 그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존재 여부조차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마침내 설붕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 놈은... 노부를 실망시키는구나!"
"......?"
영문을 모르는 백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천강을 노려보던 설붕비는 탄식하듯 소리쳤다.
"네가 조금만 더 기다렸어도 노부 스스로 지하서고를 구경시켜줄 작정이었다."
"......!"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노부도 네 놈에게 마기가 잠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마기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왜인지 아느냐? 그건 마기만 없애면 너는 장차 훌륭한 설가장의 기둥감이 될 수 있는 재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백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 듣고 싶지 않소. 어서 지하서고로 안내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단정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악! 하... 할아버지!"
설화영은 비명을 질렀다. 학같이 매끈한 그녀의 목으로부터 또다시 선홍의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설붕비는 끝내 알지 못했다. 
정작 설화영 스스로가 단정검 끝으로 목을 내밀어 피를 내게 하였다는 것을.
"네... 네 놈이 정녕!"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설붕비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부르르 신형을 떨었다. 한편 백천강의 마음 속은 깊은 감동으로 가득차 있었다.
'화영. 너는 내게 갚지 못할 빚을 안겨주는구나!'
그렇지만 백천강은 쓸데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설붕비를 향해 말했다.
"어서 날 지하서고로 데려다 주시오"
"으으음!"
설붕비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온몸을 경련했다.
"흐흑! 할아버지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설화영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마침내 설붕비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 좋다. 노부를 따라와라."
⑤
설붕비가 앞장서 들어간 곳은 자신의 서실이었다. 그는 서실의 중앙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의자에 앉아 왼쪽 팔걸이의 구슬을 세 번 누르면 지하서고의 문이 열린다."
설화영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백천강이 의자와 설붕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녀를 이끌고 의자로 향했다. 먼저 의자에 앉은 그는 곧 설화영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 광경에 설붕비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영아를 놓아주지 않을 셈이냐?"
백천강은 차갑게 말했다.
"내가 쌍봉도를 안전하게 떠날 때 풀어 주겠소."
"지... 지독한 놈!"
설붕비의 탄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천강은 왼쪽 팔걸이에 솟아있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구슬을 세 번 눌렀다.
기이이... 잉.......
묘한 음향과 함께 의자가 서서히 왼쪽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번을 돌아 제자리로 온 의자는 멈추지 않고 두 번째 회전을 계속했다.
다시 한 번 설붕비에게 등을 보이게 된 백천강은 내심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인질로 설화영을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다음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두 번째로 돌던 의자가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덜컹!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의자가 아래로 푹 꺼져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앗!'
백천강은 한순간 놀랐으나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의자는 급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카락이 쭈빗거릴 정도의 속력이었다. 눈 앞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그러나 지하서고로 처음 내려가는 것이 아닌지 백천강의 무릎에 앉은 설화영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청력을 돋구었던 백천강은 곧 안심했다. 
의자는 무작정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의자를 밑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기관장치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각(一刻)의 시간이 흘렀을까? 빠른 속도로 내려가던 의자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 내려왔나 보군.'
백천강이 내심 중얼거릴 때였다. 
덜컹!
쇳소리와 함께 의자가 멈추는 순간 눈 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조명장치도 특이한 것이 분명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백천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방원 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사면 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서가에는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실로 방대한 분량의 책이었다.
석실의 천장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이때 백천강을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설화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본문의 비밀 무학서고(武學書庫)예요."
"본문(本門)?"
백천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서늘한 눈웃음을 머금던 설화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본문은 바로 신비문파로 내려오는 제마천문(制魔天門)이랍니다."
"제마천문!"
백천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쌍봉도의 설가장이 바로 광명대현령기에 적혀 있던 비급의 제마천문이란 말인가!'
그는 내심 놀라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가 익힌 제마천문심법기해에 제마천문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마천문.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과거 대마성을 공격할 때 위기에 몰린 무림맹을 극적으로 도운 신비문파인 제마천문이 바로 쌍봉도의 설가장이었다니.
백천강의 놀라움을 짐작했다는 듯이 설화영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가도 짐작하셨겠지만... 쌍봉도 사람들은 모두 제마천문의 고수들이에요."
"......!"
"제마천문은 중원에 혈풍이 닥칠 때만 나서야 한다는 문규(門規) 때문에 평소에는 어부로 생활하는 습관이 이어져 내려왔어요."
"으음!"
백천강은 짧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쌍봉도의 설가장에게 이토록 비밀스런 내력이 숨겨져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곳의 무경(武經)들은 바로 제마천문의 조사들이 남긴 것들이에요. 뿐만 아니라 이곳은 제마천문주의 후계자들만 들어올 수가 있는 곳이에요."
백천강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많은 책들이 모두 무공비급이라니... 더군다나 이곳에 들어올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제마천문주의 후계자뿐이라니!'
그는 넋을 잃은 듯이 사방을 에워싼 서가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가가. 가가께서 이곳에 들어오시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느닷없는 설화영의 질문에 백천강은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서요."
"한 권의 책? 도대체 어떤 책인데 가가가 그토록 찾으시려 하시는 건가요?"
"대혈륜서(大血輪書)라는 책이오."
백천강의 짧은 대답에 설화영의 안색이 변했다.
"대혈륜서..., 그건 대체 어떤 책이죠?"
백천강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어머님의 사문(師門)이 남긴 책이오.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오."
설화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백천강은 서가의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가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모두 무공비급들만은 아니었다.
기문진학(奇門陣學)을 비롯하여 역리성복(易理星卜), 변환역용지학(變幻易容之學) 등 여러 방면의 기서(奇書)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백천강은 자신이 찾으려는 대혈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최후의 방법은 모든 책을 일일이 살펴보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7장  대혈륜서(大血輪書)
①
"가가. 이곳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밖에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앞날을 위해서도 가가께서는 여기 있는 무학비급들을 익혀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설화영의 말에 백천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랬다. 백천강은 무공 방면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제마천문의 지하서고에 비치된 무학비급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상고기서들이었다. 천하의 모든 무학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금 무림을 영도하는 구파일방의 무학을 비롯하여 실전되었다고 전해진 전설적인 무공비급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가 대충 살펴본 비급만 해도 절정무학으로써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빙옥수라진결(氷玉修羅陣訣).
태극현옥비급(太極玄玉秘汲).
불령천화경(佛靈天華經).
천룡대파도법(天龍大破刀法).
대원천강검경(大元天 劍經).
태양감리신공결(太陽坎離神功訣).
제왕빙화지수(帝王氷火之手).
천산칠금장경(天山七擒掌經).
철혈파천공(鐵血破天功).
현현무유살강해(玄玄無幽煞 解).
오행금륜무적강(五行金輪無敵 ).
.......
실로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천 수백 년 전의 상고기학(上古奇學)으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급이 꽂혀 있었다.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은 혈선풍(血旋風)의 길이다. 강하지 않으면 비참하게 꺾일 것이다. 꺾이지 않으려면 내가 강해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무학들이 내게는 극히 필요한 것들이다.'
마음을 다진 백천강은 오로지 자기만을 지켜보고 있는 설화영을 향해 물었다.
"화영, 이곳에서 며칠이나 묵을 수 있을 것 같소?"
설화영은 서늘한 눈동자를 들어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식량은 없지만... 허기를 메꾸고 정신을 맑게 한다는 공청현령수(孔淸玄靈水)가 있어요. 그것을 마시면 능히 백일은 견딜 수 있을 거예요."
몸을 돌린 설화영은 한 곳을 가리켰다. 
"바로 저곳에 공천현령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어요."
백천강은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하나의 석반이 있었다. 석반의 한가운데에는 한 자 깊이의 천연 웅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바위틈으로부터 샘(泉)이 있었다. 
샘에서 솟아나는 물은 푸른색으로써 은은한 향기를 동반했다. 그 향기만 맡아도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몸을 돌린 백천강은 뒤따라온 설화영의 손을 잡았다.
"화영, 그대에게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소."
"가가, 그런 말 마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설화영이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날부터 백천강은 서가의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운공(運功) 시간을 제외하고는 백천강은 모든 시간을 비급을 읽는데 바쳤다. 
비급을 읽어 나가는 틈틈이 백천강은 매일 수 차례씩 광명대현령기를 운공했다. 그러한 과정 중에 그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던 마성이 차츰 씻어져 나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천강의 표정은 맑고 평온하게 변해갔다. 설화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내심 기뻐했다.
'아! 가가는 점점 더 완숙되어 가고 있어. 할아버지께서는 가가가 마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잘못보신 걸거야. 오히려 가가께서는 더욱 정기(正氣)가 짙어가고 있지 않아?'
그녀는 기뻤다. 무공비급에 몰두하는 백천강의 모습에서 그녀는 희열을 금치 못했다.
'종사(宗師).... 어쩌면 저 분은 대무학종사(大武學宗師)가 되실지도 몰라.'
설화영은 비급을 익히기에 열중하는 백천강을 바라보며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백천강은 끝없이 심오무비한 무학경지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무공구결이 그의 머리 속에서 빛을 발했다. 
수없이 많은 비급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읽고 제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값어치없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천지를 단 한 순간에 뒤바꿔놓을 심오한 심법(心法)을 적어놓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손이 닿아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세월이라는 좀벌레의 한 줌 양식으로밖에 더는 무엇이 되겠는가?
명검(名劍)이 이름을 날리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주인의 능력에 달려있듯이 무공비급이 무공비급인 까닭도 그것을 완전히 익혀 그 오의를 깨우치는 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결국 설가장의 지하서고에 처박혀 먼지가 쌓인 채 좀이 쓸어가던 비급들은 백천강이라는 인물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실로 방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비급들은 한 인간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내용이었다. 백천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내용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세 번째 서가의 아랫부분에서 한 권의 책을 뽑아내 표지를 넘기던 순간이었다. 
책(冊).
그것은 양피지로 만들어진 평범한 한 권의 책에 불과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내용이 없었다. 아무리 넘겨보아도 텅 빈 양피지만 계속되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무자서(無字書)였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씌여져 있지 않은 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웬일인지 백천강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책에 아무것도 씌여져 있지 않다니... 세상에 이런 책도 있단 말인가?'
그는 강렬한 호기심을 금치 못했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결국 무자서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한 권의 무자서를 취함으로써 앞날에 엄청난 변화가 닥칠 줄이야.
그것은 오직 신이 은밀하게 안배해 놓은 대변수에 불과했다. 그것이 백천강에게 행이 될런지 불행이 될런지는 하늘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②
마침내 백일이 지나자 백천강은 지하서고의 수많은 기서들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대혈륜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빠뜨린 것이 있나하여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녕 이곳에 없단 말인가?"
백천강은 전신의 맥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만 같았다.
대혈륜서.
백천강은 오로지 그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중원을 떠나 머나먼 동해의 쌍봉도를 건너온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대혈륜서는 없었다.
"가가께서 찾는 책이 이곳에 있는 것은 확실한가요?"
허탈감에 빠져있는 백천강을 향해 설화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소. 어머님의 유언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소."
확고한 믿음이 서린 말투였지만 그 음성에는 좌절감이 짙게 배어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 지하서고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대혈륜서는 오리무중이었다.
"화영. 틀림없이 더이상의 서고는 없는 것이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백천강이 고개를 쳐들고 다시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낙심의 기색이 역력했다. 
"......!"
다음 순간 설화영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이 있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백천강은 금방 설화영의 그런 태도를 눈치챘다. 
"화영.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벌떡 일어선 백천강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소매는......."
"말해다오. 화영, 제발!"
설화영을 쏘아보는 백천강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아... 저 눈빛!'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설화영은 전율했다. 
백천강의 눈에서는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설화영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자신의 불안을 억눌렀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백천강을 향해 말했다.
"생전의 아버님으로부터... 이 지하서고에 마경(魔經)만을 모아둔 비밀철궤가 있다고 들었어요."
"마경이라고!"
백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곳이 어디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부르짖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백천강의 행동에 설화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가가, 무서워요!"
"화영!"
백천강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탄식하듯 사죄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미안하오. 내가 너무 흥분했나보오."
백천강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 설화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비밀철궤 속에는... 극랄하기 짝이 없는 천하의 마경들만 모아 놓았다고 했어요. 특히 지난날 대마성이 무너졌을 때 그들의 무고에서 가져온 것들도 들어있다고 했어요. 어쩌면 대혈륜서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 어느 곳에 있지?"
설화영은 백천강이 서 있는 뒷편의 서가를 가리켰다.
"저 서가의 오른쪽을 밀면......."
"저곳이라고!"
설화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천강의 신형이 섬전처럼 서가로 날아갔다. 백천강은 한쪽 벽을 독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서가의 오른쪽 모퉁이를 힘껏 밀었다. 
그그긍.......
기관이 작동하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서가의 한 부분이 분리되며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실로 교묘한 장치였다.
잠시 후 가까스로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공간이 드러났다. 백천강은 급히 공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각(一刻) 후.
백천강은 비좁은 공간 속을 빠져나왔다. 그의 품에는 커다란 철궤 하나가 안겨져 있었다. 사방 두 자 정도 길이로 장방형의 모양을 한 검은 철궤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팍!
철궤를 내려놓은 백천강이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녹슨 열쇠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설화영이 불안한 눈으로 백천강의 행동을 주시했다.
"......!"
백천강은 마침내 철궤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신음과 함께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고 말았다.
"으음......!"
철궤 속으로부터 한랭한 기운과 함께 으스스한 마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마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소멸되었다.
백천강은 철궤 앞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철궤 속에는 수백여 권은 족히 넘을 고서가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백천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서들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몸 속을 흐르는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책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한없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피가 끓어 오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한순간 백천강의 뇌리를 휘어잡았다. 
"으음!"
백천강은 이를 악물으며 가까스로 그런 충동을 자제했다.
그는 철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경들을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겨내는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마혈영참혼경(天魔血影斬魂經).
역혈마라보(逆血魔羅譜).
백골음풍경(白骨陰風經).
마마귀허진결(魔魔鬼虛眞訣).
살인멸혼지결(殺人滅魂指訣).
지옥극혈무무경(地獄極血無無經).
광혈패극경(狂血覇極經).
고루극마파천부(孤壘極魔破天符).
마령수라통혈경(魔靈修羅通血經).
.......
그것은 전설적인 거마들이 일세를 대혈겁에 빠뜨렸던 가공할 마공이 담긴 비급들이었다.
"......!"
마침내 마경들을 뒤적이는 백천강의 손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지 그의 눈에 붉은 핏발이 서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설화영은 그 공포스런 광경을 접하고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아... 저... 저럴 수가!"
설화영의 서늘한 눈에 경악과 함께 공포의 분위기가 가득 떠올랐다.
백천강은 마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미친 듯이 마경을 뒤적여나갔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이...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넋을 잃은 설화영이 속수무책인 양 중얼거렸다. 일이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차... 찾았다. 오오!"
느닷없이 백천강은 부르짖었다. 희열에 찬 그의 부르짖음이 서실 안을 가득 메웠다. 
놀란 설화영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백천강은 표지가 피처럼 붉은 책을 한 권 쳐든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혈륜서(大血輪書)>
표지에 쓰여진 글씨가 설화영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 글씨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했다. 그 순간 환상처럼 설화영의 코속으로 짙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들었다.
"이... 이럴 수가!"
설화영은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백천강은 빨려들듯 대혈륜서를 펼쳐보았다. 대혈륜서의 첫장에는 웅휘무비한 필체의 글씨로 아래와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 만마지존(萬魔至尊)이 남긴다. 노부는 어려서부터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겪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노부에게는 죄악이었다. 
결국 노부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천하백도인들을 모두 궤멸시키겠다는 것이다.>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만마지존. 
그는 바로 과거 대마성의 성주였다. 그렇다면 대혈륜서는 만마지존 백무웅(白武雄)이 남긴 것이라는 말이었다.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 노부는 상고의 기환궁에서 흘러나온 마경 일곱 권을 얻으면서 천하백도를 궤멸시키기로 결심했다. 이에 노부는 기환마경을 바탕으로 대마공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싸움은 힘만으로 승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노부는 백도천하를 멸망시킬 계략을 강구해 두었다. 언젠가는 노부의 마도천하가 이루어질 것이다. 훗날을 위해 노부 만마지존의 모든 것을 대혈륜서에 남긴다.>
"......!"
백천강은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빨려들듯이 대혈륜서를 읽어나갔다. 대마성주이자 만마지존인 백무웅이 직접 남긴 대혈륜서는 상중하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편인 용악지계(用惡之計).
용악지계 속에는 일백팔종에 달하는 사악한 지계(智計)와 권모술수를 비롯하여 이간책, 속임수, 함정, 위악책 따위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실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계(惡計)라고 아니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중편인 천하멸망전(天下滅亡典).
천하멸망전은 상편인 용악지계보더 더 놀라운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그곳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천하 정대문파(正大門派)의 무공을 일일이 파헤친 파해무공결(破解武功訣)이 적혀 있었다. 
만일 천하 정대문파의 파해무공결을 모두 익힌다면 정대문파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하멸망전에는 각 대문파의 총본산의 상세한 지도(地圖)가 작성되어 있었다.
각 문파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곳은 물론이거니와 무공비급을 소장하는 곳과 조사동(祖師洞) 등의 요지(要地) 모든 부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실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과거 대마성의 첩자들이 각 대문파에 잠입하여 탐지해낸 것들이었다.
하편인 대마인절기편(大魔人絶技編).
하편은 대혈륜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대마인절기편에는 만마지존 백무웅이 터득하고 창안한 대마성의 마학(魔學)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신공결(神功訣).
역혈수라심공(逆血修羅心功).
광혈참혼강(狂血斬魂 ).
천극인혼멸강(天極人魂滅 ).
파옥도륙혼천공(破玉屠戮混天功).
대마검결(大魔劍訣).
대마도결(大魔刀訣).
대마편결(大魔鞭訣)
대마장결(大魔掌訣).
.......
실로 끝없는 마공들이 대혈륜서 하편인 대마인절기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공을 극한 절기들로써 십팔만병기를 능가하는 마학이었다.
"오오!"
가슴 가득히 밀려오는 뿌듯한 전율에 백천강은 연신 탄성을 금치 못했다.
대마인절기(大魔人絶技).
그것은 백천강의 가슴에 벅찬 희열을 안겨주었다. 어째서 마공을 접하는 순간 희열을 금치 못하는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으나 분명 그러했다. 어쩌면 백천강은 타고난 마성의 소유자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대혈륜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백천강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 이것은!"
백천강은 놀란 눈을 떼지 못했다. 
대혈륜서의 마지막 장. 그곳에는 급하게 무명지를 깨물어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 굵기가 제각각인 선혈이 뭉쳐진 글씨는 몹시 흐트러져 있었다.
<......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두 놈이 배반할 줄이야.... 대제자(大弟子) 궁우(宮羽)와 만보총관(萬寶總官).... 그놈들의 배신으로 대마성은 무너졌다. 언제고 복수하리라. 이제자(二弟子) 천기(天奇)와 삼제자(三弟子)수련(水蓮)이 살아난다면... 훗날 대혈륜서를 얻는 자는 대마성을... 다시 일으키길......바라노라.>
피가 뭉쳐 굳어진 글씨는 그곳에서 끊어졌다.
"오오!"
엄청난 충격이 체내의 피를 역류케 했다. 
전율하듯 백천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이름 넉 자 때문이었다.
궁우(宮羽).
수련(水蓮).
그 이름은 바로 궁가병기점의 궁우노인과 자신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 어머니의 신분이 바로 대마성이었단 말인가?"
그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충격이었다. 아니 어렴풋한 짐작이 확연한 사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하... 할아버지, 아니 나를 키워준 궁우노인이 대마성의 배신자라니!"
피가 끓었다. 백천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죽이리라. 모두 죽이리라!"
그 순간 설화영이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가가!"
③
"핫핫핫핫핫!"
콰쾅!
광소가 터지는가 싶은 순간 서실의 서고가 박살나며 흑영이 솟구쳤다.
"이놈. 서라!"
설붕비의 분노에 찬 노성이 설가장을 흔들었다.
"핫핫핫! 나를 막지마라. 나를 막는 자는 죽음밖에 얻을 것이 없다."
백천강은 지하서고를 빠져나왔다.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혈광충소신법을 전개해 설가장을 치달렸다. 그의 옆구리에는 설화영이 매달리듯 끼어 있었다. 
백천강이 막 설가장의 담을 뛰어넘으려는 때였다.
쐐액!
한 자루 철부(鐵斧)가 파공성을 토해내며 허공을 가로질러 왔다. 능히 만 근(萬斤)의 경력이 실린 도끼가 백천강의 뒷통수를 노리고 날아든 것이다.
"핫핫핫!"
끊이지 않는 백천광의 광소가 돌연 멈추었다.
"크윽!"
폭음과 함께 외마디 비명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솟아올랐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상황이 드러났다. 어느 틈엔가 흑웅(黑熊) 앞가슴에 자신의 도끼가 박혀 있었다.
후원에서 장작을 패던 그는 백천강이 설화영을 옆구리에 끼고 담장을 넘는 것을 발견하고는 철부를 날렸던 것이다. 그러나 백천강이 내뿜는 막강한 반탄지기에 의해 튕겨 날아온 철부에 의해 자신의 심장이 쪼개지고 말았던 것이다.
백천강의 몸은 붉은 혈무(血霧)에 뒤덮인 공포스런 모습이었다. 
혈무.
그것은 바로 대혈륜을 익힌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극도로 사악한 마성을 지닌 호신강기(護身 氣)였다. 
"제발... 가가... 제발 멈추어요!"
설화영은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후훗... 화영. 나는 이길로 이곳을 떠난다."
백천강은 옆구리에 낀 설화영을 향해 차갑게 말하며 해변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곳은 섬(島)이에요!"
"후훗... 그러기에 네가 필요하다."
백천강의 음성이 또다시 냉혹하게 변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설화영은 전율했다.
"가가!"
그녀는 소리치면서 생각했다.
'변했다. 이미 가가의 심성은 변했다. 오오... 이럴 수가. 가가가 마성에 휩싸이다니!'
"크핫핫핫!"
백천강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단숨에 선착장에 당도했다.
"마... 막아랏!"
선착장에 있던 쌍봉도의 어부들, 아니 제마천문의 고수들이 그물과 어구(魚具)들을 팽개치고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놀랍도록 기쾌한 몸놀림이었다.
그들이 막 백천강을 에워쌌을 때였다.
"핫핫핫! 나를 가로막지 마라. 내 앞을 가로막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돌연 신형을 멈춘 백천강이 우수를 뻗었다.
우우웅... 꽈르릉!
손바닥 중심에서 핏빛 강기( 氣)가 회오리치며 뻗었다. 가공할 내심공력(內心功力)인 역혈수라심공(逆血修羅心功)에 속하는 역혈수라장심강기(逆血修羅掌心 氣)가 폭사된 것이다.
"크윽!"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역혈수라장심강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뒷편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맞은 사람들은 엄청난 압력을 느끼는 찰나에 내장이 파열되면서 죽어갔다.
휘익!
단 일격에 제마천문도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백천강은 경쾌히 신형을 날려 한 척의 소선(小船)에 올라탔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한 물체가 날아갔다.
"악... 제발 가가!"
설화영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백천강은 설화영을 선착장으로 내던진 것이다.
"핫핫핫핫!"
백천강은 광소를 터뜨리며 선미(船尾)의 수면을 향해 장력을 내쏘았다. 
그 순간 반탄지력을 받은 배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백천강은 번갈아 장력을 치며 배를 쏜살같이 달리게 했다.
"가가! 가면 안 되요. 제발... 제발!"
멀리서 설화영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크핫핫핫핫!"
잔혹한 광소를 남기며 백천강은 소선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갔다. 잠시 후 하나의 까만점이 되어 가물거리던 소선이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흑!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설화영은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뼈를 깎는 후회가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바로 자신의 욕심 때문에 백천강이 마성에 빠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흐흐흑...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녀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
그녀의 뒤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백미백염(白眉白髥)의 노인. 바로 설가장의 장주인 설붕비였다. 설붕비는 백천강이 사라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으음.... 조금만 더 참았어도 마성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을. 이제 그로 인해 중원에 엄청난 마풍이 일어나리라."
설붕비가 어두워져가는 수평선을 향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설화영은 설붕비의 발아래 엎드리며 흐느꼈다.
"흐흐흑! 할아버지. 모두가 제 탓이에요. 영아가 그를 돕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흐흐흑!"
설붕비의 하얀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네... 네가 천강을 도운 것이라고? 그랬... 었......!"
"으흐흑!"
설화영은 터져나오는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눈꼽만치의 후회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것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일은 그녀 혼자만의 후회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때였다.
"가가... 가가가 떠났어? 응? 언니야?"
맑은 음성과 함께 노란색 연의를 입은 인영이 날아들었다. 바로 설운정이었다.
서늘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고 있던 설화영이 그녀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정아야!"
잠시 그들 두 자매를 내려다보던 설붕비가 돌아서며 침중하게 말했다.
"준비해야겠다. 쌍봉도는 또다시 중원에 나가게 될 것 같다."
설붕비의 말에 설화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바로 눈물을 떨치고 일어선 그녀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모든 것이 제 책임이에요. 그가 만약 대마인이 된다면......."
설화영의 서늘한 눈에서 일순 살기가 흘러 나왔다.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이고... 따라 죽겠어요."
참으로 무서운 결심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설붕비는 탄식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쌍봉도의 사람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설붕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쌍봉도의 동편 하늘로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참혹하게 붉던 바다는 흑색으로 물들어갔다.
끼룩... 끼끼룩.......
짝을 잃은 해조(海鳥) 하나가 섬으로 날아들었다.
그날 이후 쌍봉도에서는 두 번 다시 고깃배가 뜨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감이 쌍봉도를 무겁게 짓누루고 있었다. 가끔씩 번쩍이는 금속의 광체와 기이한 괴음만이 은은히 해역으로 퍼질 뿐이었다.
④
누가 세월의 흐름을 유수(流水)와 같다고 말했던가?
흐르는 물과도 같은 세월이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사풍인.
낙양의 무림인들을 피의 회오리 속에 몰아 넣었던 사풍인이 중원에서 사라진 지 어느덧 사 년이 지난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들도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러나 지나간 중원의 사 년은 결코 평화로운 나날이 되지 못했다.
마검(魔劍).
거무튀튀한 한 자루의 묵검이 사 년 동안 일으킨 피보라 때문이었다.
낙양의 궁가병기점에서 만들어진 묵검 한 자루가 무림천하를 돌면서 무수한 영웅들의 꽃같은 목숨을 낙화(落花)시켜버린 것이다.
검을 얻은 자는 하루 해를 넘기지 못하고 분시(分屍)되었다. 피에서 피를 부르는 한 자루의 마검 때문에 무림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은 그저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작 후에는 끝이 있는 법이 아니던가? 
마침내 마검의 혈풍은 종식되었다. 뜻밖에도 혈풍의 종식은 한 절세기협의 출현 때문이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따로 있고 거두는 자 따로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사유성(査流星).
무림구공자의 우두머리이자 천하 정도무림의 후기제일지수인 그는 무림에 나오자마자 일백팔일의 대추적 끝에 마침내 묵검을 찾아냈다. 
결국 그는 혼자의 힘으로 묵검을 얻었고 그 묵검을 거두어 자신의 사문인 소림사에 비장시켰던 것이다. 한 자루의 가공할 마검이 불러일으켰던 대혈풍의 막은 그렇게 종식되었다.
그 일로 인해 신주제일룡 사유성의 명성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났다. 
중원 무림에는 숱한 기인들이 있었다.
기인(奇人).
이는 뛰어난 무공을 소지했거나 한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일무이한 일인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칠인(七人)이 있었다.
강호칠기(江湖七奇).
그들 일곱 사람을 무림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들 중에는 물론 무림인도 있었고 무림인이 아닌 자들도 있었다. 물론 남자들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일한 공통점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하유일자(天下唯一者)라는 것이었다.
재보(財寶) 화양금(華陽金).
그는 중원제일의 거부였다. 
그가 지닌 재산은 나라와 맞먹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강남북의 전장(錢場), 기루, 도박장, 선박, 마장할 것 없이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드러난 소문과는 달리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사는 자였다. 
신기자(神機子) 공손연(公孫燕).
그는 기관토목지학(機關土木之學)의 대가(大家)였다. 공손연은 기관학과 토목학에서 고금제일인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가 꾸민 기관은 신이라 해도 돌파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활사묘인(活死妙人) 사마방(司馬方).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한여름에도 매화를 피게 할 수 있는 자로 통했다.
사마방은 생물의 병을 치유시키는데 신같은 재주가 있었다. 그는 꽃을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의 의술은 화타나 편작을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귀진자(鬼陣子) 서문량(西門亮).
진법(陣法)의 대가인 그는 천하의 모든 기문진법(奇門陣法)에 달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 보를 내디딜 때마다 일백팔변(一百八變)하는 기문진법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가 알고 있는 진법의 종류만도 일만 종이 넘는다고 했다.
만사지관(萬事地官) 구천서(仇天書).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는 지관(地官), 즉 땅의 형상을 살피는 자였다. 그는 천하지세에 통달해 있으며 명당을 찾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디 그뿐인가? 수맥(水脈)이나 화천(火泉) 등도 귀신같이 짚어내는 자질을 가진 자였다.
무유생(無有生) 상무효(常無效).
무유생 역시 무림과는 관계가 없는 자였다. 
그는 고금을 통해 가장 뛰어난 조각가였다. 그는 돌을 살아있는 여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의 조각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그가 조각한 물체에는 혼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환락천마녀(歡樂天魔女).
그녀의 이름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환락천마녀라는 별호로 불리울 뿐이었다.
불과 수 년 전에 강호에 나타난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천하의 남자들을 색(色)의 환락으로 사로잡았다.
그녀의 색공에 빠진 사내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무공마저 잃고 일신을 망치는 것이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환락천마녀는 천의 얼굴을 지녔으며 그녀의 몸에서 스며나오는 기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워 한 번 그 향을 맡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잊을 수가 없었다.
 8장  배신자(背信者)들
①
호북(湖北) 무창(武昌).
호북성 제일의 도시인 무창은 봄기운이 완연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양자강의 동쪽에 위치한 무창은 호반의 도시답게 육로보다는 수로가 발달된 곳이었다. 
무창성의 서쪽. 
그 유명한 황학루(凰鶴樓)가 내려다보이는 양자강의 언덕받이에 극히 화려하면서 웅장한 장원이 서 있었다.
<황금장(黃金莊)>
중원을 통틀어 황금장을 모르는 자는 중원인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황금장은 유명한 곳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천하제일의 거부이자 강호칠기 중의 일인인 재보 화양금이 바로 황금장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재보(財寶) 화양금(華陽金).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토록 엄청난 부를 모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백도문파들의 영도자들과 두터운 친교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 백도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물론 천하제일의 거부이기에 그의 목을 노리는 흑도인들의 살수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쩍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도무림인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자신의 안위를 끔찍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층층누각을 비롯하여 수백 채가 넘는 고루거각은 고대광실(高臺廣室)을 방불케 했다. 한 마디로 황금장은 자금성에 비유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재보 화양금은 매일 밤 거처를 옮겨가며 잠을 잤다. 
낮에는 백도무림의 고수에 버금가는 무공을 가진 그의 수하들 삼십육인이 앞뒤를 호위하고 다녔다. 결국 그에게는 아무도 십장 안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경호는 완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인지 화양금은 일신에 창칼이 뚫지 못하는 천잠의(天蠶衣)를 입고 몸을 보호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무공도 가히 초일류라는 것이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좌우지간 재보 화양금은 황제 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삼경 무렵.
후꾹... 후후꾹.......
고즈넉히 깊어만 가는 완연한 봄기운 사이로 야조의 울음소리가 호젓하게 들려왔다.
야조는 아름다운 봄밤을 시샘이라도 하듯 구슬프게 울었다. 아마도 이 좋은 계절에 발정이 나서 짝을 찾는 속삭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수백 채 누각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황금각 안의 다실(茶室).
일신에 화려한 금포를 입은 칠순 가량의 노인이 때깔도 고운 다기(茶器)를 앞에 놓고 앉아서 득의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후후후!"
그는 다름아닌 화양금이었다.
본래 화양금의 거처는 변함없이 황금각이었다. 그가 매일 밤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퍼뜨린 소문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매일 밤 다른 곳에서 잠을 자는 화양금이 있기는 했다. 그 화양금은 사실상 그와 똑같이 변장한 그의 수하들로써 모두  열 명이었다. 
그들은 매일 밤 침실을 바꾸어가며 다른 곳에서 잠을 잤다. 그것은 타인이 미처 생각할 수 없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전법을 구사한 눈속임이었다.
어쨌든 진짜 화양금은 매일 밤 황금각에서 잠을 잤다.
"후훗......."
그는 웃음을 흘리며 데워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좋군. 언제 마셔도 이 운무차(雲霧茶)만큼 맛있는 차는 없단말이야."
찻잔을 내려놓은 화양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찻잔을 채웠다.
지금 그가 마시고 있는 운무차는 일명 후아차( 兒茶)라고도 부르는 기차(奇茶)였다. 후아차는 절강성(浙江省) 부근의 안탕산(雁宕山)에서 구해온 것으로 보양(保養)에 극히 효험이 있는 차였다.
다시 후아차를 한 잔 따라마신 화양금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침실로 눈길을 주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소 흥분된 상태이기도 했다. 
그것은 침상에 다소곳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절세미녀  문이었다.
십일 전 그는 관외에서 들어온 대식국(大食國)의 한 상인으로부터 황금 일만 냥을 지불하고 한 미녀를 샀던 것이다. 
그는 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오늘 밤에는 그 미녀와 함께  밤을 지새기로 한 것이니 어찌 아니 즐겁겠는가? 생각만으로도 화양금은 벌써부터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몸을 일으킨 화양금은 침을 삼키며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눈은 곧바로 휘장이 쳐진 침상으로 향했다. 
황제조차도 부럽지 않을 상아침상을 늘어진 연분홍빛 항라(亢羅)가 보일듯 말듯 가리고 있었다.
"......!"
실눈을 뜨고 침상을 바라보던 화양금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휘장 안쪽으로 한 인영이 침상에 다소곳이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허허허... 오래 기다렸느냐?"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손을 뻗어 연분홍빛 항라를 걷었다.
사르륵.......
감미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던 휘장이 걷히는 순간 화양금의 두 눈이 못볼 것을 본 듯 그만 딱 굳어지고 말았다.
"......?"
그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다소곳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미녀는 간 곳이 없었다. 대신 침상 위에는 피처럼 붉은 혈의(血衣)를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삼십 정도 되었을까? 혈의청년의 안색은 푸르게 느껴질 정도로 창백했다. 전신에서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냉기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냉막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은 그대로 화양금의 심장을 뚫어버릴 듯했다.
한순간 돌처럼 굳어있던 화양금이 불현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 아무도 모를 내 거처를 찾아오다니."
그의 음성은 능청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화양금의 임기응변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상대방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당황과 불안감을 극적으로 가라앉힌 것이다.
그것은 웬만한 정신수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 혈의청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세상의 이목을 속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나만은 속일 수 없었소. 나는 애초부터 당신이 줄곧 이곳에서만 잔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호! 놀라운 일이군. 한데 귀공은 뉘시오?"
화양금이 두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리며 탄성을 발했다. 여유를 가장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화양금의 능청은 통하지 않았다. 
혈의청년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화양금을 바라보며 다른 말을 했다.
"당신이 거금을 주고 사들인 값비싼 미녀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소?"
화양금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황금 일만 냥은 틀림없이 작은 돈은 아니지. 그러나 나 재보 화양금에게는 그리 큰 돈도 아니라네. 원한다면 그 계집을 자네에게 주겠네."
그 순간 처음으로 혈의청년의 창백한 얼굴에 변화가 왔다. 하지만 그 변화는 입술에 국한된 것이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입술. 그것은 분명히 냉소적인 비웃음을 의미했다.
"고맙소. 그러나 나는 일만 냥 정도에 눈이 머는 자가 아니오."
"호오! 배포가 큰 젊은이군. 노부의 마음에 드네. 한데 이곳에 온 이유는 뭔가?"
"나는 당신의 전 재산을 돌려 받으려 왔소."
혈의청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았다.
"......!"
화양금은 내심 흠칫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 말에 놀랄 줄 알았나? 후후후... 그런 말은 수도 없이 들었네. 그러나 지금까지 내 재산을 가지고 간 자는 단 하나도 없었지."
말을 끝마친 화양금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품 속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냈다.
"자네는 무뢰한이지만 노부의 마음에 들었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그는 금갑을 내밀며 혈의청년의 헛점을 살폈다.
그러나 완벽했다. 혈의청년은 분명히 아무렇게나 침상에 걸터 앉아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점의 헛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화양금의 이마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 무서운 놈이다. 그러나 결코 나의 재물을 훔쳐가지는 못한다.'
화양금은 혈의청년을 향해 내밀었던 금갑의 뚜껑을 열었다. 찰나지간 보광이 방 안을 영롱하게 수놓았다.
칠채보주(七彩寶珠).
금갑 안에는 희귀한 칠채보주가 다섯 알이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각기 황금 이백 냥에 해당하는 보주였다. 화양금은 금갑 속의 칠채보주를 보여주며 말했다.
"어떤가. 이것은 황금 일천 냥의 가치를 지니고 있네. 이것을 줄테니 나의 수석시위장(首席侍衛長)이 되지 않겠는가?"
"......."
혈의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헛헛...! 파락호 일천 명을 거느리고 있느니 자네같이 강한 고수 하나가 노부에게는 더 필요하네."
혈의청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후후.... 내 가치가 황금 일천 냥이라......."
"헛허...! 적다면 더 주겠네."
무슨 꿍꿍이 속인지 부자연스럽게 웃던 화양금이 품 속으로 손을 넣더니 이번에는 상아로 만든 갑을 꺼냈다. 그는 상아갑을 만지며 손가락 끝을 가늘게 떨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더......."
말을 채 끝내지 않은 화양금이 급히 상아갑을 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청년의 냉막한 웃음소리가 화양금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후후.... 그것은 열지 않는 것이 좋겠소!"
"어... 어째서?"
"당신의 피가 옷을 적시면 곤란하기 때문이지."
"뭐... 뭐라고?"
화양금은 전신을 떨었다. 
혈의청년이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후.... 이 안의 것은 모두 내것이다. 너의 더러운 몸뚱이만 제외하고는 모두 내게 돌려주어야 한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알겠느냐?"
"옛... 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게 무슨 말......."
화양금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듯 질겁하여 뒷걸음질쳤다.
"으으.... 너... 너는... 대마성으로부터 왔느냐?"
그 순간 공력을 끌어모아 신형을 흐릿하게 분산시키던 화양금이 들고 있던 상아갑을 내던졌다.
콰쾅!
폭음과 함께 허공에서 상아갑이 터졌다. 
파파파팟......!
상아갑이 터지는 순간 수만 개의 독침(毒針)이 날카로운 꽃잎처럼 비산되면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방 안은 독침에 뒤덮였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팟!
독침에 둘러싸인 혈의청년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신형을 흐릿하게 분산시켰던 화양금은 기겁을 했다.
"어... 어디로 갔느냐?"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신형을 드러낸 화양금이 휘청거릴 때였다. 
살기에 찬 혈의청년의 음성이 뒷통수를 치듯 허공으로부터 들려왔다.
"만보총관(萬寶總官) 화운악(華雲嶽). 후후... 대마성의 더러운 반역자. 백도맹과 결탁하여 대마성을 팔아넘긴 너를 이제 내가 처단하겠다."
"이... 이럴 수가... 대마성에 생존자가 있었단 말인가?"
경악에 사로잡힌 화양금이 회의에 찬 부르짖음을 발했다. 바로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쐐액!
"크......."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제대로 다 지르지 못하고 화양금은 목이 따끔하다고 느낀 순간 절명하고 말았다. 한 자루 혈죽도(血竹刀)가 전광석화처럼 그의 살이 오른 목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쿵!
마침내 화양금, 아니 지난 시절 대마성의 만보총관으로서 대마성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던 화운악은 그렇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만보총관 화운악.
그는 백도에 대마성을 팔아넘김으로써 그 대가로 천하제일거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반자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코 앞에 놓여진 향락을 다 즐기지도 못한 채 그는 허무하게 저승길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스스스.......
침실 안을 가득 채웠던 비릿한 혈향(血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혈의청년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
그는 깊이를 모를 차가운 눈으로 한동안 화운악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혈의청년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배신자의 말로는 이렇다."
혈의청년은 곧바로 목에 구멍이 난 시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홍색의 기체가 뻗었다. 부시화골공(腐屍化骨功)을 시전한 것이다. 그것은 마도의 극악한 독공으로써 시체를 형체도 없이 녹이는 내공이었다.
츠츠츳.......
회오리치며 뻗어나간 홍색의 기체가 화운악의 몸뚱아리에 닿았다. 시체는 흐물흐물해지더니 곧바로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최후로 남은 것은 화운악이 살아 생전 속에 입고 있었던 천잠의(天蠶衣)와 금포뿐이었다.
"후후... 이제부터 시작이다."
혈의청년이 냉막하게 웃으며 금포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밀랍처럼 창백하던 혈의청년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묘하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일각 후 그의 얼굴은 영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탈바꿈했다. 그 얼굴은 뜻밖에도 백천강의 얼굴을 쏙 빼닮은 것이었다.
그렇다. 혈의청년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 년 전에 흔적도 없이 낙양에서 사라진 백천강이 불현듯 무창의 황금장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②
휘휙!
어지럽게 신형을 날리던 수십 명의 인영이 일제히 황금각을 에워쌌다. 그들은 화양금을 호위하는 경호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전 상아갑이 폭발한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장주! 어인 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사들은 긴장하여 외쳤다.
때마침 소리도 없이 황금각의 문이 열리며 재보 화양금이 태연히 걸어 나왔다. 뒷짐을 진 화양금은 무사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어서들 물러가라."
영문을 모르는 무사들은 쭈빗거리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화양금은 버럭 노성을 질렀다.
"어서들 물러가라. 노부는 쉬고 싶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여전히 미덥지 못했던지 무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는 무사들을 지휘하는 자로 화양금의 신뢰를 받는 자였다. 화양금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소한 실수가 있었다. 노부는 괜찮으니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해라."
"그럼... 장주의 말씀을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돌아선 화양금은 황금각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휙... 휘휙!
호위무사들은 그가 들어가자 삽시에 몸을 날려 제 위치로 돌아갔다. 잠시 후 화사한 불빛을 토해내던 황금각의 불빛이 꺼졌다.
후꾹... 후후꾹.......
이름모를 야조가 구슬픈 울음을 토해내는 가운데 무창의 봄밤은 깊어만 갔다.
이튿날 새벽.
날이 밝기가 무섭게 화양금은 황금전(黃金殿)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황금장의 재산을 관리하는 십대관사(十大管事)를 소집했다. 
"......!"
새벽부터 황금장주의 부름을 받고 모여든 열 명의 관사들은 자리에 앉아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뱃가죽에 기름살이 오른 오십이 넘은 중년인들이었다. 화양금이 십대관사를 둘러 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인이 여러분들께 두 가지의 명을 내리겠소. 모두 잘 듣고 이행하시오."
"......?"
십대관사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한꺼번에 모인 적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화양금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려는 욕심만큼이나 딴 사람에 대한 의심도 많았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십대관사들이 서로 짜고 자신의 재산을 빼돌릴 것을 염려해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두 사람 이상 만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해 왔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십대관사들 전부를 한 곳에 소집시킨 것이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영문을 모른 채 한 곳에 모여서는 화양금의 눈치만 살피기에 바빴다.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황금장에 미증유의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이런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
미묘한 침묵이 황금전 안을 감돌았다. 화양금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명을 내리겠소. 그 하나는 앞으로 백일 안으로 중원 전역의 이름있는 기루를 모두 사들이라는 것이오."
"......?"
"두 번째는 중원 전역을 활동거점으로 하고 있는 표국(標局) 일백 곳을 사들이라는 것이오."
화양금의 명령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십대관사는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동안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백일 안에 중원 전역의 기루를 모두 사들이라구요?"
"중원 전역의 기루를 모두 사들이라고 하지는 않았소. 이름있는 기루만 골라서 사들이라는 말이오." 
"대...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장주님. 어찌 그런 엄청난 일을... 그 정도라면 본장의 황금을 반을 써도 모자랄 판인데 말입니다."
쾅!
화양금이 탁자를 내려쳤다.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했소. 여러분들은 단지 명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오."
"......!"
화양금의 싸늘한 말에 십대관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대체... 어이해서 이런 엄청난 일을 하신단 말인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내 말을 명심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그대들의 의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화양금은 최후로 그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포를 휘두르며 황금전을 나가 버렸다. 
십대관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줄 모르는 표정들을 주고 받았다.
③
황금각.
황금장의 중추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각의 내실에  앉아 청동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인영은 분명 화양금이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금방 눈치를 챌 것이다. 
대마성을 정도무림에 팔아먹은 배반자인 황금장주 화양금이 바람처럼 나타나 부시화골공(腐屍化骨功)을 시전한 혈의청년에 의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불귀의 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혹자는 또 이런 사실도 기억하리라. 밀랍처럼 창백했던 안색을 지닌 혈의청년의 얼굴에 어느 순간 화색이 돌며 백천강의 얼굴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그렇다. 
지금 황금각의 내실에 있는 화양금의 실체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그의 역용술(易容術)은 완벽했다.
만변환신대법(萬變幻身大法). 대마성의 만마지존이 대혈륜서에 남긴 만변환신대법은 가공할 역용절기였다. 
그것은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뼈와 음성, 피부와 머리색까지 바꿀 수 있는 신출기묘한 대법이었다. 
만변환신대법으로 인해 황금장에 잠입한 백천강은 완벽하게 화양금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제 시작되었다. 비로소 혈륜궁(血輪宮)을 세우는 제 일보를 대딛은 셈이 되었다.'
그가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내실 밖으로부터 옷자락이 서걱거리는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간드러진 음성이 뒤를 이어 들려왔다.
"호호...! 대야(大爺). 오늘은 합환(合歡)을 하셔야지요? 일만냥이나 주고 사들인 모용란(慕容蘭)을 오늘도 독수공방 시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간드러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구랑(李九 )이었다.
이구랑은 사십이 넘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재보 화양금에게 첩실을 대어주는 일을 도맡아 했다.
"......."
그는 잠시 망설였다.
모용란이란 미녀는 화양금이 황금 백만 냥을 주고 관외에서 사들였다는 미녀가 분명했다. 
'기왕 재보의 행세를 시작한 이상... 완벽하게 행동해야 한다.'
내심 중얼거리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들여 보내라."
"호호...! 알겠나이다."
옷자락이 마루를 스치는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구랑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로부터 일 다경이 지났다.
그는 굳은 얼굴로 침상에 걸터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똑... 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굳어 있던 안색을 풀며 입을 열었다.
"들어 오너라."
내실의 문이 가볍게 열렸다. 옷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 순간 방 안은 삽시에 난향(蘭香)으로 가득찼다. 
재보 화양금이 고르고 골라 황금 백만 냥에 사들인 여인. 그녀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왔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나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숱한 미사여구가 진부할 정도였다.
모용란.
그녀는 가히 천계에서 내려온 천녀라고 할만했다.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화양금이 황금 일백만 냥을 아낌없이 투자할 만한 미색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그녀는 미녀의 십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여인이었다.
오발선빈(烏髮蟬 ). 아미청대(蛾眉靑黛). 운계무환(雲 霧 ). 명모유반(明眸流盼). 주순호치(朱脣皓齒). 세요설부(細腰雪膚). 옥지소완(玉指素腕). 연보소말(蓮步小襪). 홍장분식(紅粧粉飾). 기향패훈(肌香佩薰).
정말이지 모용란은 경국지색이라고 일컫는 미인의 십대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속살이 은은히 내비치는 오발(烏髮)빛 나삼(羅杉)을 걸치고 있었으니 오죽이나 아름답겠는가? 화사하게 피어난 꽃같은 얼굴은 보면 볼수록 넋을 빼앗는 듯했다. 
여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나삼 속으로 여인의 육체가 은은히 비쳐보였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더욱이 여인의 몸에서 발산되는 난향은 사내에게 강한 유혹을 도발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마침내 화양금의 앞에까지 다가온 모용란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올렸다.
"소녀(少女) 모용란. 화장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옥구슬이 구르듯 미려한 음성이었다. 그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보았다.
그녀가 꿇어 앉는 바람에 나삼의 앞자락이 처지며 수밀도같은 젖가슴의 계곡이 확연히 드러났다. 알맞게 솟아오른 연분홍빛 돌기 두 알이 유혹하듯 빛나고 있었다. 
인사를 끝마친 모용란이 조심스럽게 일어서서는 미리 마련된 탁자를 향해 뒷걸음질쳤다. 탁자에는 이미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섬섬옥수를 뻗은 모용란은 옥주전자를 들어 금잔에 호박빛 술을 따랐다. 그녀는 금배를 두 손으로 받쳐든 뒤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소녀의 정성을 받들어 주시기 바라옵니다."
'아름다운 계집이군.'
자신도 모르게 뇌까리던 그가 손을 뻗어 금잔을 받았다. 그는 단숨에 술을 마셨다.
"이리 오너라."
화양금이 금잔을 내리며 말했다. 모용란은 옥용을 발갛게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아름답기만 하던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저주와 원한에 찬 눈빛이 한순간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모용란은 마지못한 듯 무릎걸음으로 화양금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꾸물거리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기갈이 들었던 탓일까? 돌연 그가 손을 뻗어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
그녀는 가냘픈 신음을 발하며 빨려들듯이 화양금의 허벅지 사이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모용란은 그의 무릎에 앉는 꼴이 되었다. 
화양금은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야릇하게 웃었다.
"후후.... 교태로운 계집이군."
찰나적으로 모용란의 얼굴에 수치스런 표정이 스쳤다.
"너는 노부가 황금 일만 냥을 주고 샀다. 그러므로 노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알겠느냐?"
"알... 고 있사옵니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
"물... 론 이옵니다."
눈을 내려뜬 모용란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화양금은 눈빛을 야릇하게 굴리며 그녀를 놓아 주었다. 뒤이어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 옷을 벗어라."
"......!"
모용란의 짙푸른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이었다. 가슴에 섬섬옥수를 얹고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깨물며 나삼자락에 손을 댔다.
사르르.......
그녀의 손길에 따라 나삼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눈부시게 희고 동그란 어깨가 노출되었다. 
나삼자락이 비단모래처럼 가벼운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한 순간 나삼자락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 잠깐 걸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눈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묘용란의 몸을 감싸고 매끄럽게 흘러내리던 나삼의 마지막 부분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
모용란의 벗은 육체로부터 그는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한 마디로 천상의 우물(尤物)이었다. 인간의 몸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은은한 불빛을 반사시키는 모용란의 피부는 빙결같았다. 
터질듯 부푼 젖가슴은 잘 익은 수밀도같았다. 그 젖가슴이 두 알의 열매를 단 채로 팽팽히 일어서서 흔들렸다. 세류요같은 허리 아래로 쥐면 곧 터지고 말듯이 요염하게 부풀어내린 둔부,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랫배는 유지로 빚은 듯했고 부끄러운 듯이 움푹한 배꼽은 앙징스럽기까지 했다.
대리석처럼 새하얀 두 다리 사이의 방초 무성한 삼각비문으로부터는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난향(蘭香)이 풍겨나는 듯했다.
"......!"
화양금은 미동도 않고 그녀의 나신을 훑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따가왔는지 모용란이 다리를 살짝 비비꼬았다. 그녀는 다리로 삼각비문을 가리며 날갯죽지같은 두 팔을 들어올렸다. 젖가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
그 행동이 더욱 요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침내 냉혈철심을 지닌 그의 마음에 서서히 동요가 일었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체를 보더라도 가증스러움밖에 느끼지 못하는 그가 모용란의 벗은 몸매를 대하는 순간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으니.
'무서운 우물이다. 내가 동요하다니.......'
은밀히 심호흡을 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
모용란은 두 손으로 몸을 가리며 다가왔다. 매끈한 다리가 움직이며 야릇한 감흥을 일으켰다. 모용란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난향은 방 안을 은은하게 감싸며 흘렀다.
"네 몸은 일품이다."
"아......!"
화양금이 한 마디 찬사를 내뱉았다. 그 순간 모용란의 앵두빛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무의식적인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손을 뻗어 모용란을 끌어안았다. 모용란은 뼈가 없는 듯 유연하게 그의 품에 안기며 두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여체를 품어보는 것이었다. 
여체는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한순간에 육신을 태워버릴 듯한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촉감은 전율스런 것이었다. 그는 우악스럽게 터질 듯한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으음!"
여인은 비음을 발하며 육신을 비틀었다. 젖가슴을 움켜쥐었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며 허벅지와 하반신을 쓸었다. 그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모용란의 육체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리... 으음......!"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모용란의 손이 그의 품 속을 헤집고 들어와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 
그의 몸이 찰나적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여체를 찍어 누르며 침상으로 넘어졌다. 
"으음!"
그의 몸 아래 깔린 모용란이 뜨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다리를 살짝 벌렸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그녀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뱀같이 휘어 감았다. 어느틈에 아래로 내려갔는지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수밀도를 탐했다.
"하아!"
뜨거운 신음성을 토해내던 모용란이 번쩍 눈을 떴다.
모용란이 천장의 한 점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뜻밖에도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타오르는 육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빛은 서릿발이 맺힌 듯 싸늘하기만한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아앗!"
모용란의 입에서 또다시 뜨거운 비음이 터져나왔다. 젖꼭지에 아릿한 통증과 함께 극심한 쾌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쾌감에 몸을 떠는 것은 분명 연기(演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란의 눈빛에 서릿발같은 냉기가 흐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을 가르던 모용란의 섬섬옥수가 쫘악 펴지며 열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변했다. 뿐만 아니었다. 요염하도록 긴 그녀의 손톱끝이 어느새 파랗게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쌕!
독기(毒氣)를 품은 열 개의 손톱이 일제히 화양금의 등뒤 명문사혈(命門死穴)에 내리 꽂혔다.
"아악!"
비명이 터지며 피가 치솟았다. 인간인 이상 어찌 명문혈(命門穴)을 꿰뚫리고도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비명을 내지르며 상체를 일으킨 것은 바로 모용란이었다.
"흑! 금... 금강불괴라니!"
모용란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허우적이며 전신을 경련했다. 
"후후... 계집의 손치고는 너무 악독하다. 고운 육체와는 딴판이군."
화양금이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다짜고짜 모용란을 쓰러뜨렸다. 모용란의 몸을 타고 앉은 그는 거침없이 수밀도를 삼켰다.
"더... 더러운 늙은이!"
모용란은 악을 쓰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화양금은 집요했다. 그는 그녀의 젖가슴을 입으로 애무하며 여체 구석구석을 손바닥으로 쓸어나갔다.
"원수! 더러운 손을 치워라. 흐흑!"
모용란은 눈물을 뿌리며 발버둥쳤다.
화양금의 애무는 점점 더 뜨겁고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젖가슴을 애무하던 그의 입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움푹 패인 배꼽에서 머물던 입술이 더 깊숙한 곳을 파고 들었다.
"아윽!"
마침내 모용란의 바둥거리던 육체가 축 늘어지면 가늘게 흔들렸다.
"흑... 아학!"
증오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모용란의 육체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뜨거운 화산만 같았다. 그의 애무는 모용란의 육체 구석구석에 쉽사리 꺼지지 않는 불을 지르고도 남았다. 마침내 모용란은 불덩이가 되어 나신을 활처럼 휘었다.
"아아... 흐으윽!"
바로 그때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불타오르는 모용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모용란. 너는 대체 누구냐?"
"......!"
뜨겁게 불타오르던 모용란의 육체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말 냉막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뒤이어 모용란은 자신의 육체를 감싸고 있던 육중한 사내의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지독한 수치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흐으흑!"
사내는 부질없이 달아올랐던 육체를 비웃듯 경멸스런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시선 앞에서 모용란은 죽고만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녀는 사지를 오무리며 자신을 향해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죽고만 싶었다. 자신의 몸뚱이가 그토록 쉽게 자신을 배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육체가 그토록 쉽게 원수의 애무에 달아오르다니 말이다. 정말이지 참으로 더러운 몸뚱어리였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찢고 싶었다.
'흐흑... 용란아... 지금껏 지켜온 너의 자존심과 고고함이 고작 이뿐이었더냐? 원수의 애무에 그토록 쉽게 달아오르다니... 으흐흑!'
창백하게 일그러진 모용란의 양 뺨으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천강은 어느새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용란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모용란.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봐라."
"......!"
모용란이 전신을 바르르 떤 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화양금의 음성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화양금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매력이 깃든 청년의 음성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
모용란은 고개를 들고 화양금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몸을 불타오르게 했던 사내. 그는 분명 그녀가 원수라고 생각했던 황금장주 화늙은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 앞에는 볼따구니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화양금의 얼굴 대신에 대단히 냉막하고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예요?"
모용란은 알몸을 미처 가릴 생각도 못하고 아연하여 부르짖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을 지닌 청년이 침상에 걸터 앉으며 냉막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저는......."
모용란은 웬지 눈 앞의 냉막한 인물에게 한없이 끌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물 그렁한 눈을 청년의 얼굴에 고정시키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진정 재보(財寶)... 화늙은이가 아닌가요?"
"그는 내 손에 죽었다."
"아!"
청년의 대답에 모용란은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옥용이 짧은 순간에 몇 차례나 변했다. 그녀는 마침내 봇물 터진 듯 뜨거운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④
"저는... 화도적과는 불공대천지원수예요."
모용란은 눈물을 씻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녀의 부친은 중원대부호인 만금대인 모용천기라는 분이셨어요."
만금대인(萬金大人) 모용천기(慕容天期).
그는 산동성 사람으로 중원천하가 인정하는 대부호였다. 
그의 재산은 대강남북에 걸쳐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특히 그는 은장(銀莊)과 해운업(海運業)에 주력하여 대강남북의 은장, 선박들의 대부분을 장악한 위인이었다.
그의 상술은 신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나날이 번창일로였다. 심지어는 황궁(皇宮)에서도 그의 힘을 의지할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황하가 범람하여 수백만 이재민이 발생하였을 때 모용천기는 나라를 대신해 황금 이천만 냥을 풀었다. 자신의 힘으로 구호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만금생불(萬金生佛)이라는 칭호를 듣기까지 했다. 
그런데 십삼 년 전에 한 명의 새로운 부호가 나타남으로써 그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새로이 중원에 나타난 부호의 이름은 재보(財寶) 화양금(華陽金)이라고 했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무림인을 등에 업고 중원 전역에서 모용천기의 사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는 만금대인의 사업을 망쳐놓기 시작했다. 곳곳의 전장과 해운업이 그의 방해공작과 무림인들을 동원한 협박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재보는 온갖 야비한 술책과 음모를 동원해 차츰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마침내는 모용천기의 재산을 먹어치워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십 년만에 모용천기의 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성품이 고지식하고 선하기만 한 그는 재보의 농간을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천기 또한 사람인지라 솟구치는 원한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화양금의 뒤에는 무림이라는 거대한 뒷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만금대인은 완전히 모든 재물을 몽땅 날리고 말았다. 그러나 재보 화양금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어느날 흑도인을 매수해 몰락한 만금장을 치게 만들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만금장은 한 줌의 잿더미가 되었고 모용천기는 비명에 죽어갔다. 어디 그뿐인가? 모용천기의 아내인 현아랑(玄雅郞)은 간살(姦殺)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만금 장내에 있던 모든 하인과 식솔은 모두 생매장을 당했다. 
그것은 하늘도 분노할 대참극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늘의 가호였을까? 다행히도 모용천기의 외동딸인 모용란은 마침 관외의 외척가에 가 있었기에 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그후 모용란은 복수에 불타며 재보를 죽이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를 만들어 황금장에 첩실을 가장해 잠입하게 된 것이다.
"......."
모용란의 얘기는 모두 끝났다.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배꽃처럼 젖어 있었다.
청년은 뒷짐을 진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순간 청년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는 언제까지 벗고 있을 셈인가?"
"어멋!"
모용란은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급히 온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용란은 침상에 엎드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으흐흑.... 이미 당신께 모든 것을 보여드린 몸, 가려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요. 흐흑!"
실로 사나이 애간장을 끊어 놓을 듯한 흐느낌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그럼 내 앞에서 계속 벗고 있을 셈이란 말인가?"
혈의청년이 말을 끝내며 돌아섰다. 빙기옥골지신(氷肌玉骨之身)이라고 해야 어울릴 여인의 몸이 침상 위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눈빛은 냉혹하기만 했다.
"내가 네 원수를 대신 죽여 주었다.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
"네가 할 일을 내가 대신 하지 않았느냐. 그 빚을 갚을 생각이 없느냐?"
마침내 모용란이 눈물 그렁한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을 지닌 청년을 바라보며 두려운 듯이 물었다.
"무슨 뜻... 이신지요?"
"한 가지 일을 해주어야겠다."
혈의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계산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다. 란(蘭). 너의 목숨은 이제 나의 것이다."
바르르.......
모용란의 몸이 떨렸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후후.... 어떤 방법으로 재보를 죽였을 것 같은가? 그는 천잠의를 입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너의 암습은 화양금에게 결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참하게 당했을 것이다."
"아!"
"따라서 나는 너의 원수를 죽여준 빚과 너의 목숨을 건져준 빚을 동시에 받아야겠다."
모용란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녀의 가슴은 거세게 파동쳤다. 어느새 그녀는 얼음장같은 사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웬지 그를 대하면 대할 수록 한없이 끌려드는 자신을 부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청년이 그녀의 나신을 무심히 내려보며 말했다.
"황금장의 주인이 되는 것."
"넷?"
모용란은 크게 놀랐다.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네가 화양금으로 화신(化身)해 황금장주가 되어주면 된다."
"어... 어떻게?"
"만변환신대법(萬變幻身大法)을 가르쳐 주겠다."
"그... 그런 다음?"
"훗훗... 당분간 황금장을 이끌어라. 그 이후 또 다른 명을 내리겠다."
혈의청년의 입가에 뜻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미소가 흘렀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조소같기도 했다.
"아!"
모용란은 그 미소를 대하는 순간 몸을 가늘게 떨었다. 
갑자기 그녀는 금침자락을 끌어당겨 나신을 가렸다. 심한 부끄러움이 찾아든 것이다.
"잘 들어라. 만변환신대법은......."
청년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 구결(口訣)이 흘러나왔다.
"......!"
모용란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모용란은 청년이 들려주는 구결을 모두 외웠다.
"그럼 차후에 명을 내리겠다."
스스스.......
짤막한 말만을 남기고 청년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려졌다. 모용란은 다급해졌다. 혈의청년이 사라지려하자 그녀는 금침자락이 흘러내려 젖가슴이 노출되는 것도 모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 당신의 이름이라도......."
이미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서 천리전음(千里專音)이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 뿐이었다. 
"나는 혈륜공자(血輪公子)다."
"혈륜공자......."
모용란은 나신을 가릴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9장  혈륜공자(血輪公子)
①
동백산(桐柏山).
하남(河南)과 호북(湖北)의 경계선에 위치한 동백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예로부터 험난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중원 전역에 햇살이 쨍쨍 내려쬐고 바람 한 점 없는 해맑은 날에도 동백산만큼은 바람이 그치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번개도 잦았다. 
동백산의 기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거센 바람과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번개 탓에 나무와 돌들이 괴로워서 울음소리를 낼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동백산에 기인 한 명이 살고 있었다.
만사지관(萬事地官) 구천서(仇天書).
그는 바로 강호칠기(江湖七奇) 중의 일인으로서 땅의 형세를 살피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 지관(地官)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몹시 괴팍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르기를 꺼려하는 동백산중 깊은 곳에 초옥을 짓고 칩거하며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이었다.
사시사철 거센 바람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번개가 떨어지는 동백산 중턱에도 서서히 만춘(晩春)의 신록(新綠)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석양 무렵.
만사지관의 초옥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서편 산자락이 황혼으로 물들어가는 시각이었다. 그는 전신에 피처럼 붉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창백한 얼굴의 사내였다.
그는 다름아닌 혈륜공자였다.
"......!"
석양을 등지고 초옥을 향해 다가오던 그가 반쯤 열린 문 앞에 이르러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기척을 느꼈던 것일까? 한 소녀가 어슴푸레한 초옥 안으로부터 얼굴을 삐금 내밀었다. 소녀는 저녁을 준비하던 중이 분명했다. 손에 물기를 묻힌 십칠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누구신지......?"
소녀는 혈의를 걸친 창백한 청년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아!"
찰나지간 소녀는 가냘픈 몸을 바르르 떨었다. 청년의 전신에서 풍겨나는 냉막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공포에 질린 소녀가 초옥 안으로 뒷걸음질치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혈의공자가 입을 열었다. 한 치의 억양도 느낄 수 없는 음성이 소녀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지관은 있느냐?"
소녀는 홀린 듯이 입술을 떨었다.
"할... 할아버지는... 책을 읽고......."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소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놀란 소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어 소녀는 주위를 두루 살피며 혼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어... 어디 가셨지? 분명 내 앞에 계셨었는데......."
소녀는 혈의청년의 종적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혈의공자는 신형을 드러냈다. 
관솔불이 그을음을 토해내며 타고 있는 초라한 토방이었다. 
"쯧쯧, 젊은 사람치고는 참으로 예의가 없소. 그렇게 정체를 감추고 노부를 찾아오다니......."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백발노인의 입에서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 
혈의공자, 아니 백천강은 흠칫 놀라며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역용한 것을 눈치채다니!'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용약(易容藥)을 바른 것도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천서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백천강이 진면목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낸 것이다.
"......."
노인은 세모꼴의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한동안 백천강을 응시했다.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구천서가 눈길을 거두며 탄식했다.
"휴..., 좋소. 공자의 일신에는 무거운 혈채가 있구려. 분명 내게 필요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을 터, 더이상은 캐묻지 않으리다. 하지만 노부가 공자의 부탁을 들어주기에 앞서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뒤이어 구천서는 곧바로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치 백천강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했다. 
"영영(瓔瓔)아. 이리 오너라."
곧바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르셨어요. 할아버지?"
문이 열리며 예의 소녀가 들어섰다. 
소녀는 백천강이 몹시 두려운 듯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만사지관 구천서는 한동안 측은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얕은 신음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불쌍한 노부의 손녀이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고......."
백천강이 냉담하게 그 말을 끊었다.
"요건만 말하라."
구천서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간단한 것이오. 이 아이의 장래를 맡아달라는 것이오."
"......!"
백천강의 검은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 할아버지!"
구영영(仇瓔瓔)이 꿇어 앉으며 울먹였다.
"허헛.... 이 할애비는 이미 천수를 다할 때가 되었단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는 이 할애비 대신 저 분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구영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구천서가 말했다.
잠시 후 자세를 고쳐 앉은 구천서가 백천강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가 나를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후후.... 천기를 살펴 보고서는 노부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한 가지 남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그 일이 바로 공자와의 일인 것 같소. 천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 즉, 하지만 늘상 이 아이가 마음에 걸렸소."
"......."
"내가 일을 마친 뒤... 의지할 데 없는 이 아이를 공자가 거두어 주신다면 믿고 일할 수 있을 것이오."
백천강은 구영영을 내려보았다.
허름한 마의(麻衣)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나 닦이지 않은 진주(珍珠)같은 용모가 은연중에 드러났다. 또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백옥같은 살결이 돋보였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소녀였다. 
구천서는 마른 기침을 뱉어내며 말했다.
"그 아이를... 종을 삼든 첩을 삼든 알아서 해 주시오."
백천강의 무심한 눈이 빛을 발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좋소."
구천서가 주름진 얼굴을 펴며 기쁜 듯 말했다.
"얘야, 어서 공자께 인사드려라."
"흐흑, 할아버지.... 왜 자꾸만 자신없는 말씀을 하세요?"
"허허.... 영영아. 이 할애비 나이 벌써 팔십하고 아홉이다. 어찌 더 욕심을 부리겠느냐? 어서 시키는 대로 하거라."
"흐흑!"
구영영은 더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구영영은 몸을 일으켰다.
"영영이 공자님을 배알하옵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서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뒤이어 그녀는 백천강에게 큰절을 올렸다.
"자, 이제 맡을 일을 말하겠다."
구영영의 절을 받아들인 백천강이 구천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러자 책상에서 일어난 구천서가 백천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언제고 노부의 이러한 재주가 쓰일 날이 오리라 믿었소이다. 그것이 공자가 시키는 일이라면 신명을 다하리다."
괴인(怪人) 중의 괴인이라고 일컬어지던 만사지관 구천서. 강호칠기 중의 일인인 구천서는 이렇게 백천강에게 굴복했다.
백천강은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관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대마기(大魔氣)를 되살리는 일이다."
"......?"
구천서는 세모꼴 눈을 크게 떴다.
"일천 오백 년 전, 화산의 폭발로 사라졌던 기환궁(奇幻宮) 터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지관이 할 일이다."
"......!"
구천서의 염소수염이, 성긴 눈썹이, 하얗게 센 머리칼이, 낡은 무명옷이 진동하듯 떨었다. 백천강의 말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준 것이다.
그러나 백천강의 음성은 한결같았다.
"회양산(懷陽山) 어딘가에 묻혀 있을 기환궁 터가 어디인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일이다. 기한은 삼 개월 안이다."
"오오... 대체 어쩌시려고?"
구천서는 전율하며 물었다. 백천강은 짤막하게 말했다.
"혈륜대천하(血輪大天下)를 이룩하기 위해서다."
"혀... 혈륜대천하!"
구천서는 벼락을 맞은 듯 노구를 떨었다. 백천강의 억양없는 말투에서 확 풍겨나는 피냄새 때문이었다. 
뒤이어 구천서의 눈이 휩떠졌다. 역한 피냄새가 회오리와 함께 천하를 휩쓸고 가는 환영이 그의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백천강의 무심한 음성이 다시 들렸다.
"나 혈륜공자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아무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으으음!"
눈을 감은 구천서는 신음을 흘렸다. 백천강이 서서히 몸을 돌려 구영영을 내려보았다.
"아!"
그의 냉막한 눈길을 받은 구영영이 가냘픈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구영영은 곧 알아차렸다. 그의 눈길을 받으면 받을 수록 심혼육맥이 흩어지는 것 같으면서 상대방의 눈길 깊숙이 빨려드는 것을!
짧은 순간 구영영의 혼백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백천강의 눈동자 깊숙히 빨려 들고 말았다.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지필(紙筆)을 다오."
"예!"
구영영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녀는 급히 탁자 위에 붓과 종이를 마련하고 먹을 갈았다. 
"......!"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신에 오싹한 살기를 뿜어내는, 냉혹하기 짝이 없는 그를 위해 먹을 가는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며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먹을 다 간 그녀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백천강은 탁자로 다가가더니 곧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혔다. 이어 그는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빽빽한 글씨가 쓰여졌다. 실로 신필에 가까운 필체였다. 
잠시 후 붓을 놓은 백천강이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구영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상은 험하다. 그 험경을 파헤쳐 나가려면 힘이 필요하다. 이것을 익히도록."
사륵.......
백천강의 손에서 날듯이 튕겨나간 종이가 구영영의 무릎에 떨어졌다.
그 순간 몇 개의 글씨가 보였다.
천마요공심법(天魔妖空心法).
혈영무흔신법(血影無痕身法).
만공환상무(萬空幻償舞).
백천강이 종이에 써서 구영영에게 건네준 것은 각종의 무공구결이었다. 
"아!"
그때 만사지관 구천서의 한숨이 방 안을 고즈넉하게 맴돌았다. 어느새 백천강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나타날 때처럼 사라질 때도 유령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화가 될지 복이 될지... 그러나 설사 대혈해(大血海)에 빠진다 해도 노부는 해내리라. 그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다."
구천서는 자신에게 말하듯 뇌까렸다.
②
하남성(河南省) 남서부의 중심도시인 남양진(南陽鎭).
남양진은 수로를 버리고 육로가 시작되는 곳이어서 행려사업이 번창한 곳이다.
북마객점(北馬客店).
남선북마(南船北馬)라 했던가? 강남(江南)은 배를 타고 떠돌며 강북(江北)은 말을 타고 여행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은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는 상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양진에 있는 수많은 객점 중 북마객점은 강북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밤.
삼경이 넘자 흥청거리던 주루의 소음도 멎었다. 
어둠에 휩싸인 북마객점은 정적이 깃들었다. 일박을 위해 객점 안으로 드나들던 인기척도 어느덧 끊어지고 없었다.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한 점 바람에 쫓겨가자 교교한 월광이 북마객점의 후원을 감싸듯이 애무하다가 희끄무레해져 갔다.
사경 말.  
후원에 위치한 여러 개의 객방 중에 그때까지 불이 밝혀진 곳이 하나 있었다.
흑의를 입은 청년 하나가 다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린 듯이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청년이었다. 피부는 여인의 그것처럼 희고 깨끗했다.
검은 눈썹은 수려했으며 약간 얇아보이는 입술은 오연한 기개와 함께 냉기(冷氣)가 묻어 있었다. 
청년은 잠시 한 곳을 쏘아보다가 얇은 입술을 벌렸다.
"백천강. 이제 너는 중원에 폭풍을 일으켜야 한다. 거대한 피의 폭풍을."
청년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이었다. 
불과 보름 전에 그는 자신을 혈륜공자라고 소개했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타인에 의해 사풍객(死風客)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리고...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유년시절에는 파검소년(破劍少年)이라고도 불리운 청년.
지금 북마객점의 한 객방에 홀로 앉아 있는 흑의청년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뇌리에 한순간 거센 파도에 둘러싸인 바위투성이의 조그만 섬 하나가 떠올랐다.
"독인도......."
불현듯 눈을 감은 백천강이 중얼거렸다.
독인도(獨人島).
쏴아... 촤아아... 우르릉... 쏴......!
동해의 험난한 파도가 날카로운 암석으로만 이루어진 섬을 때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절해(絶海). 아무리 사방 일만 리를 둘러본다고 해도 지나는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곳에 험악한 암초로만 이루어진 섬이 하나 있었다. 
그 절해고도에 이름을 붙여준 소년이 있었다.
독인도(獨人島).
그렇게 이름을 붙인 한 소년이 그 섬의 최초의 주인이었다.
바람과 파도, 뼈에 사무치는 무서운 고독만을 키우는 절해고도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독인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섬의 주인이 된 소년.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암초에 달라붙어 있는 조개와 해초뿐인 독인도의 주인이 된 소년은 무슨 연유에선지 처절하게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번쩍!
먹장구름에 뒤덮이고 뇌성벽력이 치는 날이면 소년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허공을 향해.
소년의 고련(苦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머리 속에 수많은 무공비학을 암기하고 있던 소년. 그 소년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수천의 무공비학 중에서도 마공(魔功)만을 피나게 익히며 고통스런 세월을 보냈다.
자그만치 삼 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렇게 보낸 것이다.
뼈저린 고독을 스승삼아 마공을 익히던 소년은 독인도에서 청년(靑年)으로 성장했다. 
콰콰쾅!
쏴아아... 쏴아......!
그렇게 보낸 삼 년 세월의 어느날 밤이었다.
청년이 된 소년은 한 자루의 혈죽도를 들고서 뇌성벽력이 치고 광풍 폭우에 바다가 온통 뒤집어지던 날 밤에 자신의 영토인 독인도와 이별했다.
혈죽도(血竹刀).
그것은 독인도 한가운데에 단 한 그루만 자라던 마령혈죽(魔靈血竹)으로 만든 것이었다. 
청년이 든 혈죽도에는 사무치는 한과 뼈저린 고독,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서리서리 깃들어 있었다.
뇌성벽력과 광풍이 섞인 폭우 속에서 파도를 밟고 달리는 청년. 그가 삼 년 동안 먹은 해초 중에는 인간세상에 구할 수 없는 영초(靈草)인 만년해왕초(萬年海王草)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당사자는 몰랐다.
노한 파도를 밟고 독인도를 빠져나오는 청년의 눈은 핏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
눈을 뜨고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백천강은 한동안 눈 앞의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새 새벽이 되었는지 방 안에 희끄무레한 미명(未明)이 비쳐들면서 촛불의 빛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독인도에서의 삼 년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렇다. 절해고도인 독인도에서 삼 년 동안 마공을 익힌 청년은 다름아닌 백천강이었다.
쌍봉도를 벗어난 백천강은 마공을 익힐 장소를 찾아 끝없이 가다가 독인도를 발견하고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후후!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혈륜대천하가. 그리고 또다시 사풍천하(死風天下)가 도래할 날도 머지 않았다."
백천강이 낮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는 탁자 위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뽀얀 먼지가 일면서 탁자 위에 선명한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 살(殺).
뜻밖에도 탁자 위에 새겨진 글자는 살(殺) 자였다. 그것은 바로 천하인(天下人)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후후후! 이제 천하는 밤을 두려워 하게 될 것이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으스스한 웃음소리가 백천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그 순간에 벌어졌다. 
미소(微笑)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백천강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는 아름답다못해 보는 사람의 혼을 빼앗을만큼 처절한 슬픔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전설의 마공인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이 극성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이제 백천강은 음성이나 표정, 동작 하나만으로도 무서운 미심(迷心)을 이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백천강은 손을 저었다.
팍!
미명에 빛을 잃어가던 촛불이 한 올 연기도 피워올리지 못하고 꺼졌다. 가부좌를 튼 백천강은 곧바로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아흐윽... 흐윽!"
간장을 끓이는 듯한 여인의 신음성이 옆방에서 들려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뒤를 이어 숨을 헐떡이며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 놀랍구료. 여시주가 빈도를... 파계시키다니... 하나 결코 후회는 하지 않을......."
놀라운 일이었다. 
사내가 지신을 가리켜 빈도라고 호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도사(道師)라는 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중생을 가르치고 도반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도사가 날이 밝아오는 이른 아침에 여인과 희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휘잉.......
문득 불꺼진 방에 바람이 일었다. 운공을 끝낸 백천강이 짧은 순간에 빠져나간 것이다.
③
욕망과 관능의 뜨거운 바람이 방 안을 쾌락의 늪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악!"
열락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침상 위에는 발가벗은 남녀의 육체가 뱀같이 얽혀 있었다. 끈적끈적한 육체의 환락을 탐하며 망아(忘我)의 나락에 빠지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흐윽!"
계집이 신음성을 토해내며 세 치 길이의 손톱으로 사내의 벌거벗은 등짝을 쑤시듯이 긁어 내려갔다. 
머리에 도관을 쓴 도사는 터질 듯한 육봉을 가슴으로 짓누르며 계집의 육신 위에서 무섭게 요동쳤다. 성스러워야 할 도인이 파계를 하고 정사(情事)에 몰두해 있는 것이었다.
사내와 여인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서로의 육체를 밀착하고 나신을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삐걱... 삐걱.......
흔들리는 목침상 밑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여인의 녹의(綠衣)자락과 사내의 도복이 한데 어우러져 구겨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미명을 뒷배경으로 창 밖에 한 흑의인이 우뚝 나타났다.
부르르.......
불끈 움켜쥔 인영의 두 주먹이 떨렸다. 
창을 가린 주렴(珠簾) 너머로 방 안의 열풍과 뜨거운 정경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더러운 작자들!"
흑의인영의 입에서 증오로 똘똘 뭉친 듯한 섬ㅉ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흑의인영은 다름아닌 백천강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색(色)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친인 백수련의 패륜을 목격한 그가 아니던가?
"죽이리라!"
절규에 가까운 신음성을 토해내는 순간 백천강은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종잇장처럼 얇게 깎여진 타원형의 예리한 금속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 년 가까이 중원에서 흔적을 감추었던, 무림인들에게 한결같은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던 바로 그 사풍인(死風刃)이었다.
사풍인은 어둠 속에서 악마의 이빨인 양 무서운 빛을 발했다. 찰나지간 백천강의 손가락 끝이 사풍인을 가볍게 튕겼다.
방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크악!"
스스스.......
창 밖에 서 있던 백천강의 모습이 안개처럼 사라져갈 때 방 안으로부터 여인의 경악에 찬 소스라친 음성이 들렸다.
"이... 이럴 수가!"
사내의 밑에 깔려 열정의 신음을 토해내던 여인이 경악성을 발하며 벌떡 일어섰다.
빙기옥골(氷肌玉骨).
탕녀(蕩女)라기에는 너무도 곱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여인이었다. 탱탱한 젖가슴은 사내에게 한동안 시달린 듯 자주빛으로 멍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물(尤物)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다워보이는 십팔 세 가량의 여인의 눈이 경악을 담고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
그녀의 나신이 바르르 경련했다.
그녀의 시선은 벌거벗은 몸으로 엎드린 채 죽어 있는 사내의 목덜미 부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뻘건 피가 아직도 물컹거리며 치솟아 나오고 있는 사내의 목덜미 부분에는 종잇장처럼 얇은 금속이 조각난 채로 박혀 있는 것이었다.
"사풍인... 오오... 사풍인이 나타나다니!"
나체 여인은 전신을 바르르 떨며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여인의 눈에서 불현듯 싸늘한 광채가 폭발하듯 빛났다. 원한과 증오가 뒤범벅이 된 광채였다.
"그가... 그가 돌아왔다. 사풍객(死風客)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홀린 듯이 부르짖던 여인이 별안간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재빨리 옷을 입은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사내의 도사복을 뒤지더니 한 권의 책을 꺼냈다.
<현천살의검강급(玄天煞意劍 汲)>
놀랍게도 그것은 무당파(武當派)에서 극비리에 전해진다는 무시무시한 살의검강을 적은 비급이었다.
사풍도에 의해 불시에 불귀가 되버린 사내는 바로 무당파의 도사였다. 재빨리 검급을 품에 넣은 녹의여인이 슬픔이 묻어나는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흐흑.... 사풍객. 드디어 내가 찾던 원수가 돌아왔다. 두고 봐라. 필히 너를 죽일 것이다. 내가... 몸을 버려가면서도 검법을 익히는 이유가 모두 네 놈을 죽이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언젠가는 깨닫게 해주겠다. 기다려라.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의 딸인 내가 너의 심장에 검을 꽂을 날을."
와장창!
녹의소녀는 섬전같이 신형을 날려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절검유사 기세광.
그는 제일 먼저 사풍인(死風刃)의 희생자가 된 강호유협이 아니던가? 그런 기세광의 딸이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순결을 더럽혀 가면서까지 복수의 칼을 갈아온 것이다. 
녹의여인.
그녀는 바로 기세광의 딸이었다. 그녀는 사풍도에 목숨을 잃은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몸을 팔아가며 지금까지 무림고수의 비급을 얻어왔던 것이다.
④
또다시 나타난 사풍객의 첫 희생자.
그는 바로 정도무림의 지주라는 무당파의 도인 청송자(靑松子)였다. 그는 무당파에서 가장 강한 도인으로 손꼽히는 무당삼자(武當三子) 중의 일인이었다.
무당삼자는 현 무당장문인 법정진인(法頂眞人)의 동배였다. 특히 그중에서 청송자는 무당의 장서고(藏書庫)를 책임지고 있는 자였다.
그런 그가 사풍인을 맞고 죽은 것이다. 그의 시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북마객점의 한 객방에서 발견되었다.
피!
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무림에 다시 혈풍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 사풍객(死風客)이 돌아왔다!
...... 사풍인(死風刃)이 나타났다. 또다시 죽음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공포를 동반한 발없는 소문이 전염병처럼 중원 전역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전야제에 불과했다. 아니 태풍의 눈에 불과했다. 엄청난 대혈풍을 몰고 올 작은 비구름 말이다.
 10장  용악(用惡)의 천재(天才)
①
신기장(神機莊).
하남성(河南省) 복우산(伏牛山) 일대에서 신기장을 모르는 사람은 중원인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기장의 장주 때문이었다.
신기자(神機子) 공손연(公孫燕).
그는 강호칠기 중 일인으로 각종 기관지학과 토목학의 대가로 이름난 자였다. 중원에서 그의 기관토목학을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우산 언덕에 세워진 신기장은 신기자 공손연의 이름을 조금도 헛되게 하지 않았다. 기관토목학의 대가답게 공손연은 신기장을 각종 기관과 함정으로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아무리 무림의 초절정고수라 해도 신기자 공손연의 인도없이는 신기장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 신기장은 처처(處處)가 함정이요. 보보(步步)마다 기상천외한 기관매복이 도사리고 있었다.
흑야(黑夜)였다.
달은 물론이거니와 초롱하게 빛나던 별들조차 먹장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밤이었다. 그러한 밤에 걸맞게 신기장에서는 한 점의 불빛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구천지옥(九泉地獄)의 사신이라도 되는가?
스스스.......
야음을 타고 한 가닥 혈영(血影)이 유령처럼 신기장의 담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흑야를 이용해 신기장에 잠입하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지 기관매복이 거미줄처럼 설치된 신기장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뛰어든 것이다. 혈영이 신기장을 넘어간 직후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쿠쿠쿵!
돌연 괴이한 소리가 신기장 안으로부터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폭음과 함께 들리는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크아악!"
신기장을 넘어간 혈의인이 기관매복을 만나고 만 것일까?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단말마의 비명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릉... 기...잉!
"카악!"
괴음향이 실린 비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장 중심부 가까이에서 들려나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펑!
돌연 불화살이 허공에 치솟더니 찬란한 빛을 비산시키며 신기장 주위를 대낮같이 밝히는 것이었다. 비산되어 떨어져내리는 불꽃으로 인해 신기장 주변의 하늘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야말로 불야성(不夜城)이 따로 없었다. 한 순간에 신기장은 불야성으로 화한 것이다.
쿠쿠쿵!
"크아악!"
신기장 중심부를 향해 폭음과 비명소리가 이동했다. 
심야의 침입자는 사정없이 기관을 부수며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②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석전(石殿).
"저... 저럴 수가!"
한 중년인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석전 중앙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신에 흑색 수사의(秀士衣)를 입은 중년인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간 눈은 그의 지혜(智慧)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가 깊은 속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발 앞의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은 바둑판같은 모양으로 각기 색(色)이 다른 돌이 깔려 있었다. 아니었다. 그것은 돌이 아니라 투명한 빛을 발하는 수정(水晶)이었다. 
각각의 색으로 꾸며진 수정판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동쪽의 일각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수정판의 불이 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 불은 일각에 하나씩 꺼지면서 수정판의 중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깜박.
또 한 개의 수정판이 꺼졌다. 그것을 본 중년수사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대체 누구인가. 누구길래 본장의 천문삼백육십사망관(天門三百六十死亡關)을 이리도 거침없이... 무자비하게 부수며 온단 말인가?"
중년인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마에 진땀을 흘렸다.
"나 공손연(公孫燕)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룬 기관이거늘... 대체......."
중년인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깜박!
또 하나의 수정판 불이 꺼졌다.
"으으...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벌써 팔십일관을 부수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안색이 창백한 중년인, 아니 신기자 공손연의 이마로부터 피가 섞인 땀이 솟아나더니 창백한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찌 아니 공포스럽겠는가.
신기자 공손연은 평생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도 무공(武功)을 익혔다. 그러나 무공보다 더욱 확실하게 그의 목숨을 지켜준 것은 다름아닌 신기에 가까운 그의 기관술이었다.
그는 신묘무쌍한 기관술을 주위에 거미줄처럼 쳐놓고 스스로를 방위해 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자신의 기관을 뚫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차츰 자만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기관술이면 능히 신선(神仙)도 요리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인영에 의해 그의 자만심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자만심이 짓밟히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오싹한 예감이었다.
쿠쿠쿵!
마침내 공손연의 귀에까지 기관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율스런 공포심이 그를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힘주어 붙잡았다. 공손연이 앉아 있는 의자는 일견 황제가 앉는 태사의만큼이나 화려했다. 양 쪽 팔걸이는 두 마리의 용의 모양이었다. 용의 눈은 이름모를 보석으로 박혀 있었다.
부르르!
태사의의 팔걸이를 잡은 그의 손이 떨렸다.
"어쩌면... 나 공손연의 일생 최대의 적일런지도 모른다!"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공손연이 팔을 움직여 태사의의 앞부분을 움켜쥐었다.
이제 반짝이고 있는 수정판의 불은 그의 발밑에 남아 있는 하나뿐이었다.
"흐흐.... 그러나... 이 무적비룡좌가 있는 한 그 누가 와도 두렵지 않다!"
공손연의 양 손이 용수(龍首) 부분을 움켜쥐는 순간 손가락 끝이 네 알의 용안구슬에 닿았다.
무적비룡좌(無敵飛龍座).
그것은 바로 공손연이 최대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관장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의자였다. 그가 앉은 의자에는 무려 삼백육십 가지의 가공할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무적비룡좌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믿었다. 실상 그는 자신의 아내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낳은 자식도 믿지 못했다.
그런 공손연이 유일하게 믿었던 것은 오직 무적비룡좌 하나였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콰쾅!
폭음과 함께 맞은편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드디어... 왔군."
무적비룡좌에 앉은 공손연은 전신을 떨며 중얼거렸다. 한 인영의 모습이 자욱한 먼지 속에 드러났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혈의(血衣)를 입은 인영은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으으! 어... 얼음이란 말인가?"
공손연은 부지중 중얼거리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혈륜공자가 내뿜는 뼈를 에일 듯한 눈빛이 공손연을 한순간에 얼려버리고 만 것이다. 
"으음!"
이를 앙다문 공손연의 입가에서 공포스런 신음이 터져나왔다.
바로 그때 혈륜공자 백천강이 입을 열었다. 만년빙동(萬年氷洞)에서 흘러나온 듯한 음성이 공손연의 심장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대가 공손연인가?"
"너... 너는 누구냐?"
공손연은 턱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하며 반문했다.
"공손연인가 물었다."
백천강의 살벌한 음성이 석전을 울렸다.
"그... 그렇소."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진 공손연이 약간의 분노성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백천강이 싸늘하게 내뱉았다.
"나는 혈륜공자다."
"혈륜공자라고?"
공손연은 한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짧은 순간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호에 그런 이름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혈륜... 그래, 혈륜공자가 본장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오?"
공손연의 질문에 백천강이 억양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 가지 공사(工事)를 맡기기 위해서다."
"공사를?"
"그렇다. 너의 솜씨가 필요하다."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공손연의 마음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용안구슬에 붙은 그의 손가락이 꿈지락거리면서 그의 얼굴에 이제껏 없었던 여유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괴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 일방적으로 일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나 공손연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인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공손연은 말을 하면서부터 점점 더 자신감을 되찾았다. 마침내 그는 앞으로 움츠렸던 허리를 펴며 오만한 눈길로 백천강을 노려보았다.
"애송이놈. 노부에게 청이 있다면 공손히 올 것이지 이런 방식으로 오면 누가 겁을 먹을 줄 아느냐?"
백천강이 입가에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공손연. 너의 옷이 젖어있군, 아직 염천(炎天)도 아닌데 왜 땀을 흘리지?"
그 순간 용안에 손가락을 대고 있던 공손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노... 노부에게는 발한증(發汗症)이 있다. 개... 개념치 마라!"
"후후... 그 나이에 발한증이라면 죽을 때가 가까와진 것 같군."
"뭐... 뭐라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구십구관을 거쳤다. 정확히 아흔아홉 명의 허수아비들을 편히 잠재웠고 장난감같은 기관들을 부수었다. 설마 너는 아직도 기관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겠지?"
"거... 건방진 놈!"
공손연의 눈썹이 거꾸로 올라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크게 흥분한 것이다.
"후후! 너의 치졸한 손재주를 우인(愚人)들은 두려워 할지 모르나 내게는 한낱 어린애 장난감으로 보일 뿐이다."
"찌... 찢어 죽일 놈!"
"후후! 공손연. 화를 내는 너의 얼굴을 동경에 비춰보아라. 마치 썩은 돼지간 빛이다."
"으으... 내 너를......."
그 순간 공손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백천강의 눈이 그것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공손연. 너는 남은 기관을 믿는 모양인데 이미 네가 내게 제압되었음을 모르느냐?"
"그... 그럴 리가?"
놀란 공손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독(毒)을 썼다. 너는 이미 중독되었다."
"뭐... 뭐라고?"
"사실이다."
"믿을 수... 없다. 노... 노부는 아무렇지도 않다!"
백천강의 냉담한 얼굴에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믿지 못한다면 운공을 해보아라. 혈맥을 단전에서부터 서서히 끌어 올리면 필시 중부혈에 은은한 통증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지옥광혈수라산(地獄狂血修羅散)에 중독된 현상이다."
"노부는 믿지... 않는.... 으으!"
한순간 공손연의 안색이 갑자기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속이 깊고 음흉한 위인이었다. 겉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은밀히 백천강의 말대로 운기를 해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부혈이 콱 막히면서 은은한 통증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제 믿겠느냐? 지옥광혈수라산은 무색무향무미의 극독이다. 일단 중독되면 삼각(三刻) 이내에 전신이 오그라들고 미치게 된다. 후후후! 천 마리의 개미가 내장을 뜯는 듯한 고통 속에서 사지를 뒤틀다가 가죽만 남기고 살은 녹아버리게 되지."
"그만, 그만!"
공손연은 악을 쓰듯 부르짖었다.
"그래도 노부는... 믿지 못한다!"
백천강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진기를 거꾸로 돌려봐라."
그 소리가 끝나기도 직전이었다.
"왁!"
공손연은 돌연 입으로 시뻘건 응혈을 토해내며 상반신을 비틀었다. 찰나지간 그의 손가락이 용안주에서 떨어졌다.
그 섬광같은 찰나에 백천강의 손이 들렸다.
콰쾅!
뒤이어 폭음이 터졌다. 백천강의 손에서 뻗어나간 강기( 氣)가 무적비룡좌를 산산히 박살내버린 것이다.
"크윽!"
의자가 박살나면서 신기자 공손연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백천강의 발이 움직였다.
"크윽!"
그의 발은 공손연의 가슴을 사정없이 밟았다.
으드득!
갈비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끔찍하게 들렸다. 공손연은 피를 뿜으며 버둥거렸다.
"크왝... 쿡! 사... 살려주시오... 제발!"
백천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공손연의 가슴을 밟고 있는 발을 떼지도 않고 그는 냉혹하게 쏘아붙였다.
"대답해라. 본인의 하인이 되겠느냐?"
으드득!
또 하나의 갈비뼈가 으스러졌다.
"아악! 제... 제발!"
"죽는 것은 쉽다. 그러나 얼만큼 시달리다가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사... 살려주시오... 하... 하인이 아니라... 개라도 될테니 제... 제발!"
그 순간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백천강의 발이 떨어졌다. 그는 처참한 형상으로 누워 있는 공손연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며 말했다.
"너는 너의 재주를 다해 나를 위해 위대한 궁(宮)을 지어야 한다. 그 궁의 이름은 대혈륜궁이다."
이미 혼비백산해 있는 공손연은 대혈륜궁이라는 엄청난 공포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바... 바치겠습니다. 주... 주공을 위해 천하에,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궁(宮)을 지어......!"
차갑고 투명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던 백천강이 몸을 돌렸다.
"기다려라. 너를 다시 부르겠다."
다음 순간 도저히 기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공손연이 용수철에 튕기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났다.
그는 찢어지는 음성으로 외쳤다.
"주공(主公)! 속하가 입은 지옥광혈수라산의 해약은... 안 주십니까?"
다음 순간 멀리서 천리전음이 들려왔다.
(독공의 최고경지는 무상지독(無上之毒)을 펼칠 수 있는 경지다. 거기에 이르게 되면 마음 먹은 대로 독을 펼쳤다 거두었다 할 수 있는 법이다. 너의 독은 이미 제거됐다.)
천리전음이 끝난 순간 공손연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아이쿠... 으윽... 가슴이야......!"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이 뼈란 뼈는 모조리 부러진 것 같았다.
"휴......!"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공손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중에 다행이라고 지옥광혈수라산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공손연은 박살난 무적비룡좌를 바라보더니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휴.... 신기자도 이제 끝났군."
하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백천강이 고도의 격장지계와 악계(惡計)로써 그를 현혹시켰다는 것을.
지옥광혈수라단.
세상에 그런 독은 없었다. 그것은 백천강이 꾸며댄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운기 직후 공손연의 중부혈이 아팠고 또 토혈(吐血)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이 바로 백천강의 능력이었다. 
그는 마공일도(魔功一道)를 통달한 절세마두였다. 그가 통달한 마공 중에는 인간의 혈(穴)을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비법이 있었다.
그것은 정확한 시간에 진기의 운공을 유도하면 체내에 이상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공손연이 화를 냄으로써 혈기가 중부(中府)에 몰려 있었다. 순간 단전의 진기가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통증이 유발된 것이다.
그런 연후 진기를 역행하면 토혈(吐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서였다.
백천강.
그는 가히 악계(惡計)의 천재였다. 
바로 대혈륜서(大血輪書)의 상편 용악지계편(用惡智計編)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 다음 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