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륜공자 제4권 검궁인 저 30장 백도통일대계(白道一統大計) ① 태실봉(太室峰).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을 마주한 숭산의 고봉 태실봉 기슭에는 우람한 산채(山寨)가 형성되어 있었다. 산채가 생긴 지는 불과 수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규모는 엄청났다. 산채는 태실봉을 빙 두른 크기로 곳곳에 고각(高閣)이요, 웅장한 규모의 목전(木殿)이 처마를 맞대고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중원 칠백백도제파연합맹인 대광명회의 총본산이었다. 광명각(光明閣). 광명각은 칠층의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명각의 각 층은 크고 작은 대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대전들은 정도 무림맹의 각종 대소사를 처리하는 회의장으로 이용되었다. 때로는 대광명회를 방문한 자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칠층만은 예외였다. 그곳은 바로 대광명회의 회주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의자였다. 그럼에도 그것은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의자는 활짝 열려진 창가에 놓여 있었다. 백삼을 입은 청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쏴... 아... 쏴아아아! 폭우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청년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시선은 뚜렷한 목표물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청년이 앉아 있는 오른쪽. 그곳에는 한 자루의 장검이 걸려 있었다. 손잡이는 백상아(白象牙)였다. 또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집은 만년교룡피로 된 것이었다. 게다가 손잡이에는 열 알의 보주가 박혀 찬연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 광명지존검(光明至尊劍). 만년교룡피로 만들어진 검집에는 그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광명지존검은 바로 대광명회를 이끄는 신물(信物)이었다. 열 알의 보주는 바로 구파일방(九派一 )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파 장문인들이 직접 바친 것들이었다. 광명지존검은 오직 대광명회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칼을 가진 자는 대광명회의 생살권(生殺勸)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의자에 앉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청년. 그의 나이는 이십팔 세 가량 되어 보였다. 쏴... 아... 쏴아아아....... 폭우는 일 주야를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사선(斜線)으로 불어왔다. 그 바람에 약한 빗줄기들은 방향을 바꾸어 창틀 너머로 떨어졌다. 후두두둑! 창틀을 때리는 빗줄기가 반동으로 인해 튀어올랐다. 튀어오른 물방울들이 청년의 얼굴을 적셨다. "......!"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청년은 그때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청년은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물방울들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또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숭산의 웅자한 모습을 자욱한 장막으로 가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군......." 청년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대광명회주 사유성이었다. 그때였다. 사유성의 등뒤에서 한 중년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매우 담담한 음성이었다. "공자, 그 비는 폭우성시(暴雨星時)로 인해 내리므로 앞으로 보름 간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에도 바로 이런 비가 내렸소이다.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외다." 그 말에 사유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조만간 황하(黃河)가 범람할지도 모르겠군." "그렇소이다. 적어도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 일을... 자금성에서는 알고 있소?" "대원수 어른께 전했으니 황상(皇上)께서 조치가 계시리라 봅니다." "음. 정녕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단 말인가?" 사유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허허! 공자,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힘이 하늘을 앞지를 수도 있소이다." "......?" "대혈륜궁의 망동이 그 예입니다." "대혈륜궁......." "그러나 그들의 혈겁을 가로막는 것 또한 바로 공자께서 하셔야 할 일이오." "내 힘으로......." "공자는 하늘을 대신할 하늘이 내린 기재이십니다." 사유성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흘러 나왔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백문선생. 처음 아버님의 친서를 갖고 선생이 내게 찾아 왔을 대 솔직히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소이다." "......." "그러나 지금 나는 하늘에 감사하는 기분이오. 과거 유비가 공명을 얻게 된 것 만큼이나 기쁜 심정이오." 사유성의 음성에는 활기가 넘쳐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륵....... 서실로 통하는 월문(月門)의 휘장이 걷혔다. 그다음 한 명의 백의 중년문사가 걸어 나왔다. 중년문사는 섭선과 한 장의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문선생(百門先生) 우문기(宇文奇)였다. 바로 우내일봉(宇內一鳳) 사운봉(査雲鳳)의 글선생이었다. 그가 사광천의 천서를 품고 광명회에 찾아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 - 사랑하는 아들 유성아. 네가 천하 강호계의 평화를 위해 부심하고 있음을 알기에 아비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대사(大事)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하여 우문선생을 보낸다. 그를 얻음은 유현덕이 공명을 얻음과 같으니 그의 지혜를 빌면 용이 비를 만난 듯 하게 되리라. 반드시 크게 쓰임이 있을 것이다. 사광천의 편지는 짧았다. 처음 사유성은 백문선생의 존재를 그다지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사유성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백문선생은 광명회의 대소사를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그의 수완은 참으로 명쾌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탁월한 예지와 분석력으로 천하대계를 짰다. 그리하여 단시간 내에 칠백대파(七百大派)라는 방대하고 치밀한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결국 백문선생은 사유성에 의해서 광명회의 군사(軍師)로서의 직위를 공고히 하게 된 것이었다. 번쩍! 콰르르르....... 한차례 섬광이 하늘을 찢으며 떨어졌다. "......." 사유성은 벼락이 떨어진 소림사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개방총단이 피로 씻긴 지 보름이 지났소. 그 후로 별다른 일은 없는 지..., 폭우로 인해 중원 각처의 전서구들도 차단되어버렸으니 도무지 사정을 알 길이 없소." 개방총단을 휘몰아친 혈풍. 그것은 광명회로서는 치명타를 입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광명회로서는 그야말로 오른팔을 잘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실로 들어온 백문선생은 사유성의 등뒤에 공손히 섰다. 그는 현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폭우로 인해 이목(耳目)이 차단된 것은 본회뿐만 아니라 혈륜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조해 하실 것 없다고 봅니다." 사유성은 한숨을 쉬었다. "우문선생의 말씀을 듣고보니 다소 위안이 되오. 하지만......." 그는 문득 이를 갈았다. "개방이 혈겁을 당한 원한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그 십 배, 아니 백 배로 갚을 것이오!" 사유성은 차갑게 외쳤다. 한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섬칫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백문선생은 담담히 말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우선 추진 중에 있는 백도일통대계(白道一通大計)부터 완성시켜야 합니다." 그 말에 사유성은 앉은 채 의자와 함께 빙글 돌았다. "그래, 진전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백문선생이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받쳐 올렸기 때문이다. "여기 있소이다." "오오. 벌써 완성하셨소이까?" "다행히 공자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유성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과연 백문선생답소이다. 칠백백도제파의 수십만 고수들을 일통시킬 대계를 단 보름만에 완성시키다니." 좌르르륵....... 사유성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의 길이는 근 일 장여나 되었다. 그 속에 웅휘유려한 필체로 깨알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 사유성은 두 눈에 광채를 빛냈다. 그는 백도일통대계를 온 정신을 기울여 읽어 내려갔다. "오오... 귀... 귀신이 놀랄 대계요!" "......." "이럴 수가! 가히 공명이라 해도 이 정도의 대계를 짤 수는 없으리라!" "......." "진정 무림사 초유의 대계이오!" 사유성의 입에서 감탄의 신음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세찬 격동이 사유성을 떨게 만들었다. 그는 백도일통대계를 읽어내려가며 희열에 가득찼다. 백문선생은 그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는 사유성을 침묵으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백문선생 우문기의 입가에서 야릇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사유성은 두루마리를 모두 읽었다. "오오... 정말 훌륭하오!" 사유성은 감격에 찬 부르짖음을 발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백문선생의 두 손을 덥썩 쥐었다. "선생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오!" "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백문선생은 겸허하게 웃었다. "아니오. 진정이오. 나 사유성이 무림정기를 바로 세우고 마도척결의 대위업을 이루게 된다면 그 공의 절반은 필히 선생께 돌릴 것이오." "무슨 말씀을.... 노부는 단지 일개 유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유성에게 손을 잡힌 우문기는 여전히 겸손했다. "......!" 사유성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만족스런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우문기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사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문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두루마리를 접어 소중한 듯이 품 속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오늘은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연회를 베풀겠소이다. 결코 사양해서는 아니되오이다." 그 순간 백문선생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되오이다.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사유성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놀란 듯이 물었다. "시작이라니? 백도일통대계말고도 더 큰 일이 있단 말이오?" 백문선생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정녕 공자께서는 발견하시지 못하셨단 말이시오?" "......?" "허허... 왜 이러십니까? 공자의 심기가 너무 깊어 노부가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녕 그리 나오신다면 노부는 이만 제독부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때서야 사유성의 안색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급히 포권했다. "하하... 소생이 잘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선생께서 그렇게 나오시다니 소생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허허허!" "하하하핫!" 사유성과 우문기는 한동안 웃었다. 잠시 후 사유성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정색을 하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백도일통대계 속에 구공자(九公子)만 유독 빠져 있었소이다. 그들을 포함하지 않으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소이까?" 백문선생의 입가에 뜻모를 기소가 어렸다. "허허허... 그것은 노부의 복안이오이다. 그들은 차후 복병(伏兵)이 될 것이오이다. 감추어 둔 비병(秘兵)으로......." 사유성의 눈이 번쩍 빛났다. "하핫... 그렇다면 그 방법은......." "허허... 공자께 지필묵을 드리오리까?" "좋소이다!" 이윽고 그들은 종이 위에 자신들의 의견을 적었다. "후후... 선생의 고견과 소생의 우둔한 생각이 맞을지 모르겠소이다." 사유성과 백문선생은 자신이 쓴 종이를 동시에 내밀었다. - 고육지계(苦肉之計). 그것은 사유성이 쓴 글이었다. 백문선생이 쓴 글은 낭중지침(囊中之針)이었다. "역시!" 두 사람의 눈에서 희열의 빛이 넘쳐 흘렀다. 사유성은 백문선생의 팔을 덥썩 잡으며 외쳤다. "과연 선생이시오!" "허허... 공자의 지혜를 감당 못하겠소이다." 백문선생은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운 자다!' 백문선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고육지계란 스스로의 살(肉)을 끊어 적을 속이는 계책이었다. 낭중지침(囊中之針)은 문자 그대로 주머니 속의 침(針)이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핫핫핫!"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한참동안 대소를 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사유성은 웃음을 그쳤다. 그의 얼굴에 침중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백문선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선생께서 직접 해주시오." 백문선생은 공손히 읍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유성은 빙긋이 웃었다. "선생이라면 틀림없이 잘 해내실 것이오." 콰쾅! 문득 멀리 불혼애 쪽에서 뇌전이 번쩍였다. 섬광은 두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가 금방 사라졌다. 한 사람의 얼굴은 신비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얼굴에는 야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방 안에 다시 어슴푸레한 어둠이 찾아들어왔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폭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일까? 폭우는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가히 오십 년만에 재발되는 대홍수(大洪水)의 시작이 틀림없었다. ② 구중천(九重天). 구중천은 광명회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대전의 이름이었다. 구중천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몹시 컸다. 그것은 아홉 개의 하늘을 말하는 것이었다. 더욱 자세하게 파고 들자면 그것은 바로 무림구대세가(武林九大勢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 구중천에는 구대세가의 신가주(新家主)들인 무림구공자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우문선생! 이럴 수가 있소? 어째서 우리 구공자가 광명회 내에서 아무런 직위도 얻지 못한단 말이오?" 제일 먼저 노성을 지른 것은 유성비천협(流星飛天俠) 남궁신효(南宮神梟)였다. 그는 바로 남궁세가의 새로운 가주로 무림구공자 중에서 제일 연장자였다. 쾅! 소진천(少震天) 하웅천(河雄天)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진천세가(震天勢家)의 새로운 가주였다. 하웅천은 노성을 질렀다. "우리 구대세가가 전만 못하다고 해서 꼭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이오? 이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오!" "제기럴! 이건 정말 우리들을 얕보는 짓인 걸 모른단 말이오?" "퉤엣! 도저히 참을 수 없소!"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는 가래침을 뱉으며 분해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장내의 세 사람만이 무표정했다. 그들은 바로 화신 사마고웅(司馬古雄)과 다지신호(多智神豪) 석장청(石長靑), 석몽화(石夢花) 남매였다. 화신 사마고웅은 과거 오해로 인해 구공자의 합공을 받아야만 했다. 그 후로 사마고웅은 무공이 폐지된 몸이었다. 그는 묵묵히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벽력장이 날아간 이후 그는 한곳에 틀어박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석장청과 석몽화. 그들은 쌍둥이 남매였다. 과거 석장청은 환상자(幻像子)의 무학을 폐관수련했다. 그동안 쌍둥이 동생이었던 석몽화는 남장을 하고 그녀의 오빠 행세를 했다. 그런 사실은 이제 더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 석장청은 묵묵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풍객에게 암습당한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듯했다. 석몽화는 줄곧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장내의 공기가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백문선생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대협들, 흥분하지 마시고 노부의 말을 들어 보시오." 철수룡(鐵水龍) 수검악(水劍嶽)이 코웃음을 쳤다. "흥! 들어보나 마나요. 모든 조직은 바로 선생이 짜지 않았소?" "그... 그렇지 않소이다. 그것은 노부의 뜻이 아니었소." 남궁신효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누구의 뜻이오?" 구공자의 시선은 일제히 백문선생의 얼굴로 집중했다. 찰나지간 백문선생의 얼굴에는 당황이 번졌다. "그것은......." "빨리 말하시오!" 남궁신효가 재촉했다.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누구요?" "누구냐니깐!" 찰나지간 백문선생의 입이 열렸다. "좋소. 내 속시원히 말하리다. 그것은 바로 회주의 명이었소." "......!" 구공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내에는 냉랭한 살기가 감돌았다. 백문선생은 계속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꺼리낄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회주께선 여러분을 백도일통대계에서 빼도록 명하셨소이다." 백문선생의 말에는 은밀히 불만이 섞여 있었다. "노부가 수 차례 간언을 하였소. 그러나 회주의 뜻은 강경하셨소이다." "......!" 구공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하웅천은 흥분했다. 그의 분노는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쾅! 하웅천은 탁자를 또다시 내리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서며 고함쳤다. "그 자는 우리 구공자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한순간 구공자의 안색이 홱 변했다. 하웅천이 대광명회주에게 그 자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었다. 구공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공감의 빛이 떠올랐다.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구공자들의 마음은 일치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백문선생을 노려보았다. 백문선생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 노부도 동감이오. 이번 일만은 회주께 불만이오." 구공자의 얼굴은 다소 밝아졌다. 남궁신효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우리들을 무시한다면 굳이 우리들이 이곳에 붙어있을 이유가 없지 않소? 더구나 우리들은 구중천의 후예들이 아니오? 결코 구파일방에 뒤지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지 않소?" 남궁신효의 말은 구공자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렇소!" "떠납시다!" "이따위 썩은 광명회에 연연할 필요가 없소!" 중인들은 흥분하여 외쳤다. 남궁신효는 안광을 번쩍이며 가라앉은 침성으로 말했다. "이제 중지는 모아졌소. 남은 것은......." 그는 슬쩍 백문선생을 바라보았다. 백문선생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도 여러분들을 힘껏 돕겠소이다. 구중천이 다시 무림의 하늘이 될 때까지" 그 말에 구공자는 모두 감격했다. "선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모두 백문선생에게 포권했다. 그들은 모두 백문선생의 탁월한 지략과 심기에 이미 탄복하고 있었다. 그가 도와만 준다면 구중천이 무림의 하늘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구공자의 가슴에는 새로운 야망이 싹텄다. 그때였다. 백문선생이 중인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어 그는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돕겠소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노부는 광명회에 묶인 몸이오." 구공자의 얼굴에는 미미하게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 대신 노부가 여러분께 한 분 이인(異人)을 소개해 드리겠소이다." "......?" 중인들은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 분은 노부보다도 뛰어난 분이시오. 여러분들은 귀곡선생(鬼谷先生)을 아시오?" "......!" 구공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석장청이 재빨리 되물었다. "귀곡자... 바로 제갈무후의 스승이신 귀곡자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백문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소개하려는 분은 귀곡문(鬼谷門)의 전인이외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는 분이시기도 하오." "......?" 구공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구공자들 중에서 귀곡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귀곡자의 제자로서 귀곡문의 전인이 있다는 말은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백문선생은 무림구공자인 자신들이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림구공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무림구공자들은 제각각 수없이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무림인들을 만났지만 자신이 귀곡문의 전인이라고 소개한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백문선생은 잠시 무림구공자들을 바라보았다. "......?" 무림구공자들의 얼굴에는 의아심이 가득했다. 마침내 백문선생은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바로 무림일비(武林一秘)이시오." "무림일비!" "서... 설마!" 구공자는 안색이 홱 변했다. 한순간 그들의 뇌리에 잊고 있었던 기억 한조각이 떠올랐다. 무림일비. 그는 수 년 전 그들에게 서찰을 띄워 낙양외성 색녀를 차단케한 바로 그 신비인물이었던 것이다. 구공자는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일비... 그가 실제 인물이란 말이오?" 석장청은 의아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허허... 그렇소이다. 단지 그는 꼬리를 보이지 않은 신룡일 뿐이오." 백문선생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자신있게 말을 이어갔다. "노부는 이미 그 분에게 연락을 해두었소이다. 여러분이 광명회를 떠나기만 하면 반드시 무림일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 구공자는 모두 경악했다. 백문선생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구공자는 그런 것을 따지고 들기에는 너무 연륜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결심이 어렸다. 마침내 그들은 입을 열었다. "그를 만나겠소!" "당장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구공자는 모두 의자에서 벌떡벌떡 뛰어 일어났다. 단지 남장을 하고 있는 석몽화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③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은 부드러운 초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은 바로 태실봉 후면이었다. 초지에서 보면 불혼애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쏴아아.......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자욱한 비안개 때문이었다. 빗줄기는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부드러운 장막과도 같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뿌옇게 서린 안개는 계곡의 신비로움을 한층 더하게 했다. 한 채의 소각(小閣)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현판도 걸리지 않은 무명각이었다. 그러나 그 무명각의 주인은 천하가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곳은 바로 대광명회주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후두두둑....... 바람이 또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세력이 많이 약해진 빗줄기가 소각의 창을 때리며 지나갔다. "......."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유성과 석몽화였다. 석몽화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자욱한 비안개를 내려다 보던 사유성이 물었다. "몽화,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석몽화의 아름다운 눈에 물안개가 어렸다. 그녀는 사유성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잠시 후 석몽화는 꽃잎같은 입술을 열었다. "몽화가 떠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예요." "떠난다고?" 사유성은 흠칫했다. "왜... 왜지?" 그는 빙글 돌아서며 석몽화의 가냘픈 어깨를 잡았다. 석몽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그녀는 사유성의 눈을 바라보며 가늘게 말했다. "성랑이 구중천을 너무 푸대접했기 때문이에요." "......." 사유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석몽화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사유성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창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사유성은 중얼거렸다. "결국... 그 때문이었군." 석몽화는 따지듯 물었다. "왜? 왜죠?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죠?" "후훗... 몽화, 너는 모른다. 나의 마음을." "무엇 때문인가요?" "천하를 위해서지." "서... 성랑의 야심 때문이라고 왜 말 못하나요?" "후훗! 그럴지도 모르지." "아!" 석몽화는 비틀거렸다. "성랑은... 너무 야심이 커요. 그러나 큰 야심에 비해 그릇이 작아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하거늘... 넘치는 것을 배척하려 든다면 언젠가는 후회할 거예요." "후훗! 나 사유성은 결코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다." "구중천은 결코 이대로 주저앉지 않을 거예요!" "알고 있다." 사유성은 고개를 돌린 채 짧게 응수했다. 석몽화는 사유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꼈다. 지금의 사유성은 옛날의 사유성이 아니라는 것을. 뒤돌아선 그의 뒷모습에서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석몽화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럼 왜 구중천을 푸대접하죠?" 사유성의 대답은 단호했다. "각자의 길이 틀리기 때문이다." 석몽화의 눈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이보다 더 치명적인 말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들은 지금까지 한 길을 같이 걸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것이 전부인가요......?" 바로 그때였다. 창 밖을 응시하고 있던 사유성이 갑자기 빙글 돌아섰다. 이어 그는 깊은 눈으로 석몽화의 눈을 직시했다. 두 남녀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 석몽화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유성의 눈빛. 그것은 옛날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의 싸늘한 어투와 냉정한 행동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유성의 깊고 투명한 눈빛 속에는 어느새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석몽화는 어떤 것이 그의 진실된 모습인지 혼동스러웠다. 그때였다. 불현듯 사유성이 입을 열었다. "믿어다오. 몽화." "......?" "유성은 결코 몽화를 실망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석몽화의 눈에 잔잔한 파랑이 일었다. "정... 정말인가요?" 사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마." "아!" 석몽화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한순간의 원망과 분노가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믿겠어요! 믿겠어요...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 해도... 당신만을 믿고 따르겠어요! 으흐흑!" 그녀는 사유성의 품에 안긴 채 가늘게 오열했다. "몽화......." 사유성은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문사건을 벗겼다. 사르르륵....... 칠흑처럼 검고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장발이 폭포수처럼 흘러 내렸다. 사유성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너를 사랑한다." 석몽화는 눈물 그렁한 눈을 내리깔았다. 살풋 긴 속눈썹이 내려 감겼다. 이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말했다. "소... 소매두요." 사유성의 두터운 입술이 내려 앉았다. 파르르 떨리던 석몽화의 속눈썹이 그의 입술에 덮혔다. "아......!" 석몽화는 뜨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그의 품에 전신을 묻었다. 사유성의 입술이 매끄러운 석몽화의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④ 지상의 세계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겨울의 한밤중, 바람도 잠든 시간에 눈이 내리는 소리일 것이다. 겨울의 한밤중에 내리는 눈의 소리. 그것은 이별을 예감하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이별을 예감하는 것이기에 아름답다. 결국 영원한 것은 추하거나 진부할 뿐인 것이리라. 여인이 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사르르륵....... 여인이 옷을 벗는 소리는 묘하게도 한밤중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과 동시에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 사유성은 분명 그 음향을 들었다. 옷을 벗는 여인은 바로 석몽화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유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몽화... 이래도... 되겠소......?" 석몽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장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모든 것은... 당신 거예요. 성랑... 오늘의 헤어짐에 간직할 추억이 없다면 언젠가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그래서 아예... 성랑께 모든 것을 드리기로 했어요." "몽... 화......." 사유성은 마침내 돌아섰다. 여인의 나신은 완벽했다. 풋풋한 싱그러움이 배여 있는 석몽화의 육신은 완미옥결지신(完美玉結之身)이었다. 터질 듯 부푼 젖가슴 정상에 매달린 두 알의 유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연분홍빛이었다. "......!" 사유성의 눈길은 탐색하듯이 여체를 훑어내려갔다. "혹시 저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계집이라고 욕하시진 않겠지요?" 석몽화는 두 손을 다소곳이 내리며 수줍게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내보이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은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몽화. 그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같거늘 어찌 부끄러움을 모른다 하시오?" "성랑." "몽화!" 말과 함께 사유성은 아주 환하게 웃었다. 뒤이어 그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으음!"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죽침상 위에 쓰러졌다. 쏴아아아.......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가히 오십 년만의 폭우다웠다. 그러나 그들의 귓가에는 더이상 폭우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아!" 두 개의 불덩어리는 서로를 살랐다. 사유성의 뜨거운 손 끝이 석봉화의 육체를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그때마다 그녀의 내밀한 곳에서 뜨거운 희열과 기쁨이 터져 올랐다. 폭우는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 31장 운명(運命)이여! ① 대혈륜궁(大血輪宮)이었다. "......." 혈륜공자 백천강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혈륜육신을 위시한 수십여 명의 인물들이 부복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혈륜총호법인 혼세천마 위지경을 비롯하여 마도삼전의 영수들과, 마도오문의 문주들, 마지막으로 팔곡의 곡주들이 부복하고 있었다. 백천강의 입이 열렸다. "크크ㅋ! 첫 번째 피의 수레바퀴는 잘 굴러갔소. 개방총단은 초토화되었으며 개봉부 인근 칠백 리의 팔십이개분타(八十二個分陀)는 철저히 궤멸되었소." "......!" 부복하고 있던 마도인들의 신색이 밝아졌다. 그들의 얼굴에 역력히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후후.... 이번의 공은 위지경 총호법에게 돌아갈 것이오." 백천강은 위지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옵니다. 모두가 궁주의 탁월하신 능력 덕분인 줄로 아오이다." 위지경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좌는 허언(虛言)하지 않는 사람이오. 총호법에게 상을 내리겠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철저히 하는 것이 본좌의 지침이오. 자, 이것을 받으시오." 말을 마친 백천강은 위지경을 향해 무엇인가를 휙 던졌다. 탁! "......!" 위지경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의 앞에 떨어진 것은 한 권의 백서(帛書)였다. <환마십이교전(幻魔十二敎典)> 백서의 표지 부분에는 위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오오!" 그것을 본 순간 마도인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환마십이교전. 그것은 바로 일천여 년 전에 실전(失傳)된 마교의 비급이었다. 그것을 남긴 자는 마교의 십이대교종 중의 하나인 환마(幻魔)였다. "화... 환마교종의 비예가!" 위지경은 책자를 잡고 격동으로 전신을 떨었다. 그때였다. "훗훗.... 이번 거사에 가담한 팔로혈륜대에게도 상을 주마!" 휙휙휙! 백천강의 손에서 다시 여덟 권의 책자가 날아갔다. 그것은 각각 삼전오문의 지로들 앞에 떨어졌다. "오오!" 책자를 집어드는 순간 그들은 희열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책자들은 바로 그들 사문에서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각종 비예가 적힌 마공비급이었다. "구... 궁주!" 그들은 책자를 움켜쥐며 주체할 수 없는 희열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순간 백천강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이제부터 대혈륜은 구르기 시작했다. 다음 목표는......." 마도인들은 모두 몸을 부르르 떨며 긴장했다. 백천강은 맞은편 벽을 향해 가볍게 일지를 날렸다. 그르르릉....... 석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때였다. 거대한 지도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석벽 전체에 그려진 것이었다. 지도에는 중원은 물론이거니와 변방과 사해까지 상세히 수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하 각 문파의 소재지까지 상세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아아!" 마도인들은 감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서야 혈륜공자가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마도인들은 모두 지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백천강은 그들이 충분히 지도를 살펴볼 시간을 준 다음 입을 열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각 문파가 모두 우리의 목표다. 그러나 제일 먼저 손보아야 할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광명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구파일방이다." 백천강은 서서히 손가락을 뻗었다. 파... 팟! 백천강의 지력에 의해 지도의 두 지점이 가루가 되었다. 그것을 본 마도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화산(華山)!" "공동파( 派)!" 마도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백천강이 지력으로 지워버린 곳은 바로 화산파와 공동파였다. 다음 순간 마도인들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살광이 솟구쳤다. 화산과 공동파는 특히 마도인들에게 원한이 깊은 곳이었다. 과거 대마성의 폭발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만마지존(萬魔至尊) 백무웅(白武雄)의 세 제자인 천지인삼마(天地人三魔)중 두 제자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다. 대마성을 배반한 두 제자. 그들은 바로 천마(天魔) 궁우(宮羽)와 만보총관(萬寶總官)이었다. 그들의 배신으로 인해 대마성이 폭발한 후, 화산과 공동 양파는 끝까지 흩어지는 대마성의 마인들을 추격하여 잔혹한 살수를 펼친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양파는 마도인들에게 깊은 원한을 사고 있었다. "크크크.... 철저히 도륙내리라!" "클클클!" 마도인들은 살기띈 괴소를 터뜨렸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이석타란. 바위로 달걀을 부수는 전법을 쓰겠다. 썩어빠진 정도인들의 기를 완전히 꺾는 것이 목적이다." 이석타란(以石打卵). 그것은 상대도 되지 않는 큰 힘으로 작은 것을 철저히 부수는 잔혹한 전법이었다. "훗훗훗! 화산은 팔곡에게 맡긴다. 그대들의 역량을 보겠다. 공동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본좌가 직접 가겠다." "......?" 그 순간 마도인들의 얼굴에는 모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혈륜궁에는 충분한 전력이 있었다. 굳이 혈륜궁주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혈륜궁주의 말은 거두어지는 법이 없었다. 마도인들은 백천강의 깊은 의중을 알지 못한 채 명령에 따라 행동을 개시했다. ② 태사의를 향해 다섯 쌍의 인영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칙칙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섯 쌍의 남녀들. 그들은 바로 극락십령(極樂十靈)이었다. 극락십령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극락십령은 살아있는 인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혼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주인인 혈륜공자의 명령만을 따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잠시 후 백천강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음성이 터져나왔다. "마음이 죽은 자들, 그대들처럼 나의 마음도 죽었다." 뒤이어 그는 극락십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대들은 최소한 나보다는 행복하다. 나는 마음이 죽었으되 혼이라는 것은 살아 있다. 혼, 그것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지... 후후...! 혼이 일으키는 고뇌가 얼마나 큰지 너희들은 모르리라." "......." 극락십령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았다. 그들은 생기가 떠오르지 않는 눈으로 깊고 깊은 유부(幽府)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노애락을 차라리 모른다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칠정오욕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것을 끊어야 하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너희들은 모르리라." "......." 백천강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중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철이 든 이래 자신의 심중을 단 한 번도 털어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극락십령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ㅋㅋ! 부질없는 짓이지. 너희들이 어찌 나의 마음을 알겠느냐? 크크ㅋ!" 백천강은 자신을 향해 실소했다. 하지만 그 실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문득 극락십령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십령! 이제 너희들의 힘을 최초로 발휘할 때가 왔다. 크크크... 너희들만의 힘으로 공동을 무너뜨린다. 너희들이 천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백천강의 속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극락십령으로 하여금 공동파를 궤멸시킬 뜻을 세운 것이다. 쏴아아... 쏴아....... 폭우는 연일 계속되었다. 황하와 장강의 물이 범람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중원은 대홍수의 피해로 무법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수백만의 수재민이 생겨났음은 물론이거니와 곳곳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기아로 인해 비참하게 굶어 죽어가는 양민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명조(明朝)에서는 양곡을 풀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수탈 또한 극심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만난 듯이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양곡을 빼돌렸다. 결국 수재민들에게 돌아가는 양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의 자식이나 노모를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기 시작했다. 번쩍... 우르릉... 콰쾅! 중원 전역을 뒤덮는 섬전은 최후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했다. 쏴아아아아아....... 폭우는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권세를 가진 자들은 여전히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③ 화산(華山). 섬서성(陝西省)의 화음현에 위치한 화산은 중원의 오악 중에서 서악(西嶽)이라고 불리워지는 명산이었다. 화산의 높이는 자그마치 오천 길이 넘었다. 이런 화산의 동쪽에 세 개의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다. 화산의 연화봉 정상에 커다란 장원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바로 화산파의 근원지이자 본거지였다. 화산파는 대대로 검법으로 이름을 날린 문파였다. 중원에는 모두 다섯 개의 검파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당(武當), 화산, 청성(靑城), 공동( ), 종남파(終南派) 등이었다. 중원인들은 이 다섯 개의 문파를 일컬어 중원오대검파(中原五大劍派)로 불러왔다. 중원오대검파의 하나인 화산파는 독하고 빠른 검법으로 전통을 이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매화검법(梅花劍法)과 난파풍검법(爛破風劍法)이었다. 쏴아아아....... 화산 연화봉에 자리잡은 화산파는 폭우에 갇혀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은 컴컴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은 먹구름 때문만이 아니었다. 끄... 아... 악! 끄... 악!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연화봉 주위에서 메아리치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바람을 뚫고 하늘을 날아오는 괴조(怪鳥)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괴조들은 폭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백 마리는 족히 넘는 숫자였다. 괴조들은 커다란 날개를 휘저으며 연화봉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뜻밖에도 괴조의 등에는 살기 번뜩이는 눈빛을 가진 괴인들이 타고 있었다. 쏴아아아.......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의 위력은 대단했다. 화산 연화봉의 계곡들은 봇물터지듯 쏟아져내리는 물줄기의 위력에 무력했다. 우르르르... 콰쾅! 마침내 산사태가 나고 말았다. 무너져 내린 바위며 흙더미들은 세찬 물줄기를 타고 인가를 덮쳤다. 한순간에 마을 전체가 흙더미에 파묻히고 마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르....... 폭포를 이룬 계곡의 물줄기들은 노도처럼 황하를 향해 밀려들었다. 뿌리뽑힌 나무들과 온갖 익사체들은 흙탕물에 휩쓸리며 떠내려갔다. 정녕 하늘에 구멍이 난 것만 같은 폭우였다. 그러나 연화봉 정상에 우뚝 선 화산장원은 꺼떡도 하지 않았다. 쏴... 쏴아... 아아....... 개방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 폭우. 그것은 십오 주야를 계속했다. 그 보름 동안 중원에서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 아니던가? 후두두... 둑....... 마침내 세차게 퍼붓던 폭우도 그 위력을 서서히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기분좋은 서풍이 불기 시작했다. 서풍은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을 북쪽으로 몰아갔다. 드디어 지긋지긋하던 폭우가 멈추기 시작한 것이다. 멀리, 몰려가는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우가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후두두둑....... 한두 차례씩 성긴 빗줄기들이 또다시 기승을 부렸다. 무시무시한 폭우가 할퀴고 간 상처는 참혹했다. 연화봉에도 가는 비가 간간이 흩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도 폭우로부터 온전하지는 않았다. 연화봉은 여기저기 산사태로 허물어져 있었다. 흉측스럽게 떨어져 내린 계곡이며 시뻘건 흙더미에 파묻힌 논과 밭은 볼수록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어느 순간에 흉하게 파헤쳐진 땅가죽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었다. 그건 땅가죽이 아니었다. 뱀(蛇). 그것은 바로 수만 마리의 뱀이 온통 바닥을 뒤덮으며 스물스물 기어가는 광경이었다. 쓰쓰쓰....... 치이익....... 시뻘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수만 마리의 뱀이 기어 오르는 곳은 바로 화산파가 있는 곳이었다. 놀랄 일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연화봉의 북쪽 지역. 껑충! 껑충! 수천 명은 족히 넘을 강시(彊屍)들이 연화봉 정상을 오르고 있었다. 강시들은 뻣뻣이 선 채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한 번 뛰어 오를 때마다 십 장을 건너 뛰었다. 강시들의 두 눈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눈동자가 썩어 구멍만 뻥 뚫린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크크크!" 강시들의 웃음은 흉측했다.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흩뿌리며 화산장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화봉의 서쪽. 난장이들이 구르듯이 연화봉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장검을 메고 있었다. 난장이들의 눈에서는 가공할 살기가 폭사되고 있었다. 거인들은 모두 구 척이 넘는 거구였다. 쿵! 쿵! 쿵! 그들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위건 땅이건 한 자씩 움푹움푹 패였다. 거인들의 걸음걸이는 마치 태산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ㅋㅋㅋ! 사자의 거력을 발휘할 때다!" 누군가의 입에서 웅후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음성은 마치 쇠종을 치는 것만 같았다. 모두 여덟 방향이었다. 마도군들은 팔방을 에워싼 채로 화산장원을 향해 짓쳐 들어가고 있었다. 쏴아아아....... 폭우가 또다시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쩍... 콰르르르! 섬전이 다시 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도군들의 행진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마도군들 속에는 두 눈이 새파란 독인(毒人)들도 있었다. 선비차림의 유생은 물론이거니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꽃으로 장식한 여인들도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화염에 둘러싸인 괴인들도 있었다. 쏴아아아....... 번쩍! 섬전이 연화봉을 밝혔다. 대화산파가 있는 장원이 푸르게 드러났다가 어둠 속에 파묻혔다. 바로 그때였다. 꽈르르릉... 콰콰쾅! 불현듯 만근뇌정(萬斤雷霆)의 폭음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화산장원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화산장원의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끄... 악! 끄아악! 푸드드득......! 때마춰 하늘에서 수백 마리의 괴조가 내려 꽂히기 시작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연화봉을 오른 수천의 강시들은 일제히 화산장원 안으로 뛰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파츠츠츳....... 난장이들은 몸보다 긴 장검을 휘두르며 날아들었다. 거인들은 담장과 전장을 무러뜨리며 짓쳐 들었다. "누... 누구냐? 아아악!" 화산파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대참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폭우는 결국 재앙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큰 재앙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무림사에 일찌기 없었던 대살륙이었다. 화산파는 느닷없이 하늘과 땅을 비롯한 사면팔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것을 막고 어쩌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 위이잉... 쐐애애액! "저... 적이다. 크웩!" 혁혁한 명성과 전통을 자랑하던 대화산파의 종말(終末)은 순간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종말은 너무도 어이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참혹했다. 화산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독사에게 발등을 물려야 했다. 아니었다. 그들은 검을 검집에서 빼기도 전에 머리통이 수박처럼 으깨어졌다. 괴조들의 강철같은 부리가 머리통을 부순 것이다. 쐐애애... 액! "크윽!" 난장이들의 장검은 화산인들의 허리를 동강냈다. 거인들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이 피골을 뭉개었다. "키키키키......!" 강시들은 껑충껑충 뛰어 오르며 산 자건 죽은 자건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화르르르릉... 화악! 괴인들은 불덩이를 날렸다. 무수한 암기를 꽃잎삼아 날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다... 달아나라!" "화... 화산의 멸망을... 광명회에 알려야 한다!" 휙... 휘익! 몇몇의 화산인들은 용케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절박하게 외치며 장원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탈출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어느새 장원 밖에는 죽음의 절진(絶陣)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도의 유생들이 곳곳의 지형을 이용해 천라지망(天羅之網)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크... 아... 아... 악!" 처참한 단말마의 비명이 하늘을 찢었다. "화... 화산은 끝이다! 으아악!" 종말의 끝을 예고하는 무지개 대신에 피보라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대화산의 멸문은 지긋지긋한 폭우 속에서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화산을 멸문시킨 여덟 방향의 괴인들. 그들은 전설 속에서나 나옴직한 마도팔곡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화산인들은 죽어가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마도팔곡은 수백 년 간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④ 공동산( 山)의 공동도관( 道觀)이었다. 폭우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청우(靑雨)와 청송(靑松). 두 공동도사는 공동도관의 입구에 위치한 누각에서 연신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막 식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탁자 위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고기 한 접시와 모태주(茅台酒)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제환공(齊桓公)이 상육(想肉)을 즐긴 이유를 알겠군. 별미 중에 이런 별미도 없을 거야. 아우, 그렇지 않은가?" 청우의 말이었다. 청송은 상육 한 점을 씹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형님의 요리 솜씨는 누구도 따를 자격이 없소이다. 크ㅋ... 서고를 정리하다가 뜻밖에도 계륵편(鷄肋編)을 발견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자! 한 잔 더 합시다." "그러자구!" 그들은 태연히 잔을 주고 받으며 상육을 씹었다. 벌써 보름째 폭우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공동도관을 방문하거나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오래된 경험으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청우는 요리에 일가견을 이룬 자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요리에 남다른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질긴 고기나 풀이라고 해도 그의 손에서 요리가 되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 형제가 공동파에 들어오게 된 것도 따지고보면 청우의 요리솜씨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식도락가이기도 했다. 청송도 미식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청우에게 요리의 비서(秘書)라고 할 수 있는 계륵편이 주어졌으니 오죽하겠는가? 청우는 즉시 사람의 고기를 구해왔다. 그것도 갓 태어난 여아의 고기를. 그는 폭우로 인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한 양가에 들어가 갓태어난 여아를 은자 한 냥에 사온 것이다. 그런 청우를 향해 아기의 부모들은 오히려 감지덕지했다. 자신들이 먹을 끼니거리도 없는 판국에 갓난아이를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어쨌거나 청우는 그 여아를 가지고 계륵편에 적힌 대로 요리했다. 그것은 참으로 별미였다. 어느새 모태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도관을 쓴 도인의 신분으로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도(道)란 무(無)이니 그들은 사람 고기를 또한 사람 고기로 보지 아니한다는 말도 안 되는 도리(道理)로 스스로를 미화시키며 진귀한 요리(?)를 맛본 것이다. 쏴아아아....... 누각 밖으로 세찬 빗줄기가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돌연 청우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이어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일까요?" 청송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에 공포심이 어렸다. "헉! 누... 누구요? 당신들은......?" 모두 십일 인의 괴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들은 폭우 속에서 꼼짝도 않고 두 형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죽립괴인들로부터 가공할 사기(邪氣)가 질식할 듯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우도인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때였다. 앞장 서 있는 혈의죽립인 뒤에서 두 명의 흑의죽립인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옷차림새로 보아 그들은 남녀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청송이었다. 그는 청우보다는 대가 센 편이었다. "시주들은 무슨 볼일로 본 도관을... 크윽!" 청송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뒤이어 청우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나왔다. "큭!" 두 사람은 단지 눈 앞에 두 쌍의 손바닥이 어른거리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손바닥이 내쏟은 진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횟빛 안색이 되어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츠츠츠....... 어느 순간 쓰러진 그들의 칠공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동시에 그들의 몸은 쭈글쭈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 그것을 지켜보는 열한 쌍의 눈동자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두 구의 백골로 화하고 말았다. 그것은 전설로 내려오는 전율스런 마공의 현상이었다. 한 쌍의 남녀가 시전한 것은 바로 백골회회마공(白骨灰灰魔功)이었다. 그때였다. "들어가자. 오늘은 너희들이 신나게 춤을 추어도 좋다. 천오백 년의 긴 잠에서 깬 기분으로 마음껏 춤을 추어 보아라." 혈의죽립인의 입으로부터 차디찬 음성이 흘러 나왔다. 냉혹무비한 음성의 소유자. 그는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의 뒤를 따르는 다섯 쌍의 흑영들은 바로 극락십령이었다. "저... 저주의 마귀들이다!" "이... 인간이 아니다. 크아악!" 공동인들은 한 식경이 지나지 않아 모두 백골로 화하고 말았다. 그것은 오로지 한 명의 사람과 열 명의 실혼인에 의해서 였다. 휘이이... 이이잉....... 혈우를 동반한 대사풍(大死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번쩍... 꽈르르... 콰... 쾅! 중원대륙이 섬전에 갈라지는 순간 대혈륜의 수레바퀴는 무섭게 굴렀다. 32장 동심회(同心會) ① 구인(九人)의 인영은 한 산곡에서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구공자들이었다. 섬혼검 악진원만 빠진 구공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아홉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섬혼검 악진원을 대신해서 한 사람이 추가 되었기 때문이다. 추가된 인영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석대세가의 석몽화였다. 그들의 한가운데는 뜻밖에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무림구공자들은 바로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중앙에 서 있는 인영은 표표히 나부끼는 연남빛 유삼을 입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관옥보다 희었다. 얼굴은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는 바로 옥운생이었다. 옥운생은 섭선으로 얼굴 아랫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지극히 태연한 표정으로 구공자의 눈총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지금 구공자의 앞에 나타난 옥운생의 신분은 무림일비(武林一秘)였다. 마침내 구공자는 광명회를 탈퇴한 것이다. 그들은 사유성에 대해 비분강개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태실봉을 등졌다. ...... 여러분들이 숭산을 빠져나가기 전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오. 바로 그 사람이 내가 추천하고자 하는 무림일비요. 그가 여러분들을 도와줄 것이오. 과연 백문선생의 말은 틀림없었다. 그들은 숭산의 산역을 채 다 빠져 나오기도 전에 한 인영에 의해 길을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무림일비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림구공자는 크게 실망했다. 무림일비는 뜻밖에도 약관에 불과한 섬약하게 생긴 유생이었기 때문이다. "......." 오랜 침묵을 깨트린 것은 남궁신효(南宮神梟)였다. 그는 의혹이 가득찬 음성으로 옥운생을 쏘아보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 무림일비요?" 옥운생은 섭선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마침내 폭우가 그쳤군. 이제 대홍수가 멈추려는가 보군." 그토록 끈질기게 쏟아지던 폭우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청명한 하늘에서는 어느새 뜨거운 폭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남궁신효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고작 계집같은 자가 무림일비였을 줄이야......." 그때였다. "뭐라고 그랬소? 내가 계집같다 하였소?" 옥운생은 문득 차갑게 반문했다. "그렇소." 남궁신효는 불쾌한 듯이 쏘아부쳤다. 그 순간 옥운생은 문득 기소를 흘렸다. "훗훗...이래도?" 스스스....... 찰나지간 옥운생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덧 삼십대의 청년에서 사십대의 우락부락한 장한으로 바뀌었다. 극히 짧은 순간 옥운생의 얼굴은 다시 칠순의 노인으로 화했다. 마지막에는 머리가 파뿌리처럼 세더니 근 백여 세의 백발노인이 되는 것이었다. "허허헛...! 노부를 계집이라고 했는가?" 그는 음성마저 지극히 창노했다. "저럴... 수가!" 구공자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마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환신법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만변환신대법(萬變幻身大法)이었다. 무림구공자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흥! 하지만 무공도 그만큼 되는지 알 수 없군!" 팽무위가 코웃음쳤다. 찰나지간 팽무위의 몸은 돌풍처럼 회전했다. 그러면서 엄청난 도광(刀光)을 폭사해 내는 것이었다. 쐐애애액! 수천 가닥의 도광은 삽시간에 옥운생을 뒤덮었다. 그것은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극히 짧은 순간 팽무위는 삼백육십사초의 도초를 옥운생의 주위에 펼쳐낸 것이다. 과연 탈백신도다운 솜씨였다. 이때였다. "핫핫하... 제법이오!" 옥운생의 낭랑한 웃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도광이 깨끗하게 걷히는 것이 아닌가? "오오!" "저... 저럴 수가!" 구공자들은 경악성을 발했다. 팽무위의 육중한 도는 어느새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섭물진기에 빨려들 듯이 옥운생의 섭선 끝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으으!" 팽무위의 얼굴은 그만 간빛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 옥운생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탈백혼천도법(奪魄混天刀法)을 잘 견식했소. 그러나 내공이 부족하여 그 회후가 깊지 못하오." 옥운생은 슬쩍 섭선을 밀었다. "으윽!" 팽무위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어 그는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팽무위는 가까스로 신형을 바로 잡았다. "......!" 구공자의 안색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이름도 없는 무림일비가 단 일초에 팽무위를 가볍게 제압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옥운생은 어느덧 본래의 용모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도와주려는 것밖에 다른 뜻이 없소. 당신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정 나를 믿지 못한다면......." 그녀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할 수 없는 일이지. 난 가겠소." "자...잠깐만!" 남궁신효가 다급히 말했다. 옥운생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돌아섰다. 남궁신효는 급히 말을 이었다. "한 번만... 귀하의 힘을 더 보여 주시오." 옥운생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좋소." "내가 시험하겠소. 직접......." 남궁신효가 나섰다. 그때였다. "잠깐... 남궁형! 소제가 시험해 보겠소!" 그의 앞을 성큼 가로막는 인영이 있었다. '웃... 어느새!' 남궁신효는 대경했다. 전혀 기척도 없이 한 인영이 자신을 가로 막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다지신호(多智神豪) 석장청(石長靑)이었다. 석장청의 얼굴에는 아직 병색이 짙었다. "아니... 석제!" 남궁신효는 놀라 외쳤다. "어... 어떻게 하려고?" 나머지 육공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석장청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남궁신효를 향해 가볍게 포권했다. "소제에게 맡겨 주십시오. 무림일비가 진정 강자라면... 소제가 먼저 그에게 무릎을 꿇겠소이다." 그 말에 남궁신효는 눈살을 모았다. "석제, 자네의 상세가......." 그러나 석장청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② 석장청은 옥운생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귀하, 귀하의 능력이 우리를 앞지른다면 귀하를 믿고 따를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하하... 스스로 물러나겠소이다." 옥운생은 낭랑히 대꾸했다. "좋소. 그럼......." 석장청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스스스....... 순식간에 석장청의 모습이 연기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참으로 가공할 신법이었다. "......!" 옥운생은 경악했다. '이...이것은 환상비종(幻像秘宗)이다!' 석장청이 펼친 신법은 바로 무림삼옹(武林三翁) 중 환상자의 독문신법이었다. "오오!" "아... 석제가 환상자 노선배의 문하였을 줄이야!" 칠공자는 모두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쾅! 일진폭음이 울리면서 자욱한 흙먼지가 치솟았다. 옥운생은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역력히 경악이 어려 있었다. '사... 삼 갑자가 넘는 내공이다. 이럴 수가!' 그녀는 급히 전신내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그 순간 옥운생의 배심혈을 향해 웅후한 경력이 뻗어 왔다. 하지만 상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옥운생은 신형을 열여덟 번이나 바꾸었다. 스슥... 슥... 슷! 그러나 놀랍게도 석장청은 그림자인 양 따라 붙는 것이었다. 환상문의 경공절예는 천하제일이었다. 다만 적수가 있다면 오직 마도삼전 중의 유령전뿐이었다. 스스슷... 스슥.......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번 위치를 바꾸었다. 츠츠츠... 콰웅! "으윽!" 두 마디 신음이 들리는 순간 장내를 맴돌던 회오리가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흐릿한 신형이 드러났다. 바로 석장청이었다. 그는 앞으로 삼 장여나 주르르 달려갔다. 옥운생은 꼿꼿이 선 채 섭선을 뻗고 있었다. 파파팍! "헉!" 석장청은 눈 앞이 온통 섭선으로 뒤덮이는 것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석장청은 두 팔꿈치가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팔을 뻗치려고 했다. 하지만 의지뿐이었다. 어느새 그의 두 팔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으음!" 칠공자는 모두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석장청의 상상치도 못한 신법과 무공에 놀랐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패배였다. "......!" 석장청의 안색은 창백했다. 옥운생은 내심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휴...! 만일 마혼인(魔魂引)의 기공으로 그의 공력을 흡인결(吸引訣)로 빨아들이지 않았다면 크게 당할 뻔 했다. 저 자의 공력이 그렇게 높을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석장청의 내공수위는 근 이백 년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상자의 원정지기를 이어받은 때문이었다. 그가 옥운생에게 패한 것은 경험부족 때문이었다. 석장청은 차갑게 말했다. "섭선 끝에 무영침(無影針)을 숨겨 놓다니... 비겁한 암수가 아니오?" 그는 섭선 끝에서 발출된 무영침에 당한 것이었다. 석장청의 말에 칠공자는 일제히 분노의 기색을 띄웠다. 그때였다. "후후후! 싸움에서는 승자만이 남는 법이오. 패자는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어떤 방법을 쓰든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싸움의 기본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싸움에서 비겁한 행동 따위를 따지자는 것이오?" "......!" 옥운생의 말은 지당한 것이었다. 석몽화를 비롯한 팔공자는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옥운생은 섭선으로 얼굴을 부치며 말을 이어갔다. "더구나 나는 귀곡의 문하요. 오히려 무력을 쓰는 것이 수치이거늘... 마음만 먹었다면 그대들은 이미 이 산곡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을 것이오." "뭐... 뭐라고?" "터무니없는 소리!" 팔공자는 일제히 흥분했다. 하지만 옥운생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속은 셈치고 나를 따라 오시오." 휘익! 그는 신형을 날렸다. "......?" 구공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즉시 몸을 따라 날렸다. 그들이 산곡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콰르르르... 르릉....... 대폭발과 함께 무림구공자가 서 있던 산곡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었다. "저럴 수가!" 아홉 사람은 그 광경에 식은 땀을 흘리며 옷을 적셨다. 만일 한 걸음만 늦었다면 그들은 형체도 없이 몸뚱이가 찢겨져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하하하... 어떻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들의 목숨쯤은 가볍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겠소?" 옥운생의 낭랑한 웃음이 그들의 등뒤에서 들렸다. 팔공자는 만면에 분노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명색이 정도(正道)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은 속임수나 계책, 암수 등을 쓰는 자를 경멸했다. 아홉 사람은 서서히 옥운생을 포위했다. 그곳은 부드러운 풀이 깔린 곳이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풀이 흔들리며 미세한 향기가 퍼졌다. 그때였다. 옥운생은 풀잎을 하나 뽑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후후... 또 한 번 그대들은 속았소!" "......?" 팔공자는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무... 무엇이냐? 또 이번엔?" 남궁신효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외쳤다. 옥운생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발 밑을 보시오." 아홉 사람은 일제히 발 밑을 내려 보았다. "이것은......?" 한순간 그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어느새 그들의 옷은 정강이까지 은은한 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었다. 옥운생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모두 운공을 해보시오." "......!" 석몽화를 위시한 팔공자는 반신반의하며 급히 숨을 들이 마셨다. 그 순간 기이한 향기가 그들의 콧속으로 흘러드는 것이었다. 그 향을 맡는 순간 아홉 사람은 일제히 맥이 쑥 빠지는 것이었다. "다... 당했다!" "독이다!" 그들은 모두 경악성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하하하! 그렇소. 그대들은 한 가지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내가 뿌린 산공독(散功毒)에 당했소. 발이 물든 것은 그저 물감에 불과했소. 그대들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내가 바람을 등지고 산공독분을 뿌린 것이오." "으으!" 팔공자는 모두 맥빠진 신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석장청이 갑자기 옥운생을 향해 포권하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길게 읍하며 입을 열었다. "무림일비. 귀하에게 소생 석장청 진심으로 굴복하는 바이오!" 석장청의 말과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 나머지 여덟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순간은 극히 짧았다. 어느 순간 그들은 석장청보다 더욱 길게 읍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외쳤다. "무림일비. 진심으로 그대를 믿겠소." "구중천을... 도와 주시오!" 그들은 마침내 옥운생에게 굴복한 것이다. 찰나지간 옥운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스승님의 말대로다. 구공자는 비록 기재들이지만 경험부족에다 자만심이 강해 헛점이 많다고 하셨지. 호홋... 이들은 좋은 방수자들이니... 큰 도움이 될 거야.' 옥운생의 눈가에 기쁨이 스쳤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그곳으로부터 일 마장 떨어진 암석 위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혈의죽립(血衣竹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동파를 멸망시킨 백천강의 모습이었다. "옥운생. 네가 구공자를 포섭했구나." 백천강의 입에서 가벼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는 공동도관을 황폐화시키고 숭산으로 몸을 날리던 중이었다. 옥운생을 비롯한 아홉 사람들은 백천강이 나타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그들의 대화는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백천강은 천시지청술을 전개했다. 잠시 후 그는 중얼거렸다. "동심회(同心會)라고? 흠... 동심원(同心圓)이라......." 이어 그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더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을까? 한순간 백천강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혈륜궁으로 잠입한다고?" 어느새 백천강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조소를 흘렀다. "훗훗... 뜻은 가상하다. 하지만 두고 보아라. 너희들은 스스로 그물로 들어가는 고기가 될 것이다." 백천강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죽립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태양아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영준한 그의 얼굴에는 푸르스름한 사기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마인(魔人)의 눈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깊이를 모를 백천강의 동공을 바라보노라면 혼백이 빨려들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백천강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소림사가 있는 숭산이었다. 숭산의 한 곳을 바라보며 백천강은 낮게 중얼거렸다. "크크ㅋ! 이번이 두 번째다. 천무... 그는 아직도 불상을 새기고 있을까?" 백천강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러나 한없이 차가운 음성이었다. ③ "아미타불... 시주들은 누구... 으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뻗쳤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두 분 시주... 크악!" 정도무림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소림사에 혈풍이 휘몰아친 것이다. 그 혈풍은 소림의 다섯 방향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혈풍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다섯 쌍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음산한 흑의를 입고 있었다. 흑영들의 손속은 잔혹했다. 스스....... 그들이 손을 뻗기만 하면 비명이 터졌다.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손이었다. 웅후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소림의 승려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다섯 쌍의 남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땡! 땡! 땡! 땡! 요란한 타종소리가 소림사를 온통 뒤흔들었다. 그것은 호불종소리였다. 호불종은 천여 년 이래 소림사에서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었다. 휘휘휙.......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인영이 솟구쳤다. 그 인영들에 의해 소림의 중지(重地)란 중지는 모두 삼엄한 대소나한진이 쳐졌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우... 우우......!" 어디에선가 마소(魔笑)가 길게 울려퍼졌다. 그 순간 대소나한진은 파도에 부딪치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이다. "......!" 백천강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으로 대광명회(大光明會)를 노려 보았다. "광명회.... 비록 정도칠백제파가 모인 철옹성이라지만 나에게는 종이호랑이로 보일 뿐이다." 낮게 중얼거리던 백천강의 모습이 돌연 안개처럼 흐려졌다. 스스스슥....... 백천강은 거침없이 광명회 내부로 스며들었다. 광명회에 상주하는 고수들의 수는 근 삼만(三萬)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천 명에 하나 정도 고르고 뽑은 최정예들이었다. 그들은 치밀한 진법을 구사하며 대광명회를 지키고 있었다. 가히 나는 새조차 가둘만한 철벽같은 경비였다. 스스스....... 경비무사들은 그저 한 가닥 미풍이 스쳐간다고만 느꼈을 뿐이다. "응? 철노사(鐵老師). 방금 무슨 기척을 못 느꼈나?" "글쎄... 뭔가 스쳐간 것 같기는 한데.... 아마 바람이겠지." "그렇지?" 경비무사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백천강의 신법은 가히 신화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경비대들의 코 앞을 지나가면서 비웃음을 흘렀다. '크크ㅋ.... 썩어빠진 백도의 눈먼 장님들아. 이 따위 수비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백천강은 진간허(陣間虛)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진세와 진세 사이의 헛점을 누비며 더욱 깊숙히 파고 들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스스슥....... 백천강은 수십 개의 전각을 지났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대광명회의 중심부에 다달았다. "......." 백천강은 칠층 누각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바로 대광명회주가 거처하는 광명각이었다. 그는 부운종(浮雲宗)의 신법을 구사하며 누각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인들의 눈에는 백천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백천강이 마교의 비전인 둔형술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마침내 백천강은 육층 창문께에서 신형을 멈추었다. 그는 처마 그늘에 편복괘천( 天)의 신법으로 매달렸다. 그리고는 귀식대법으로 호흡을 끊고 전신의 땀구멍까지 차단했다. 그것은 체취조차 풍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그것은 참으로 완벽한 위장술이었다. 이제 백천강은 처마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백천강은 이어 투시대법(透視大法)을 전개했다. 그 순간 창문을 통해 누각 안의 정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곳은 거대한 탁자가 일 자로 놓여진 넓은 정청이었다. "......!" 정청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잔뜩 깔려 있었다.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안광이 형형한 고수 백 명 가량이 탁자에 일렬로 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上席)에 앉아 있는 자는 백색유삼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광명대회주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사유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중인들은 광명회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인 광명구대존자들로 구성된 호법단을 비롯하여, 칠백백도제파의 영수들 중에서 고르고 뽑은 팔십이로광명멸사단(八十二路光明滅邪壇)의 단주들, 그리고 광명회의 군사인 백문선생이 작성한 백도일통대계(白道一統大計) 속에 포함된 백도의 원로들이었다. 회의는 절정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사유성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더이상 혈륜궁의 만행을 좌시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그렇소! 더이상은 기다릴 수 없소이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격분과 흥분의 물결이 번졌다. 사유성은 다시 중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광명회의 조직도 완비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백도의 사기는 높게 진작되어 있소이다." "......." "혈륜궁이 아무리 집마대궁(集魔大宮)이라 해도 광명정기 앞에서는 쓰러지고 말 것이오!" 중인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경청하고 있었다. "이제 본인은 광명대령(光明大令)을 선포하고자 하오이다. 광명지력을 총동원하여 혈륜궁의 마겁을 분쇄하기 위함이오!" 사유성의 고조된 음성이 이어졌다. 마침내 중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혈륜궁을 궤멸시킵시다!" "정사대전(正邪大戰)을 벌입시다!" 장내는 삽시에 뜨거운 열기에 뒤덮였다. 마침내 정도지혼(正道之魂)은 분노를 폭발시키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이때 처마 밑에 몸을 숨긴 백천강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서 으시시한 마광이 솟구쳤다. 뒤따라 백천강의 몸은 가공할 마기에 휩싸였다. 그것은 그의 몸이 절대마신지경(絶代魔神之境)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천강은 이제 기환만겁윤회마공(奇幻萬劫輪廻魔功)으로 인해 점차 극마지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훗훗훗! 좋다. 마음껏 떠들어라. 썩어빠진 위선의 무리들아... 하늘 중에서 마천(魔天)의 높고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크크크!' 그는 내심 저주의 괴소를 흘렸다. 스스....... 이어 처마 밑에서 희미한 안개가 퍼지는 듯 했다. 찰나지간 백천강의 신형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정청 안의 흥분된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거대한 탁자에는 어느새 준비된 지도(地圖)가 펼쳐지고 있었다. 중인들이 지도 주위로 몰려들었다. 백문선생은 신비한 혜광을 흘리며 중인들에게 자신의 병략(兵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사대혈전의 막은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방과 화산, 공동의 멸망이 광명회로 하여금 대혈전의 용단을 내리게 한 것이었다. ④ 스스스....... 한 가닥 혈영이 바람을 타고 불혼애 위로 솟구쳤다. 휘리리링....... 스산한 바람 한자락이 불혼애를 감싸듯이 어루만졌다. 소림의 금지구역인 불혼애는 적막하기만 했다. 중원 전역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린 폭우나 염천의 태양도 불혼애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 거대한 마애불은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석불의 입가에 어려야 할 자비스러운 미소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이 석불을 향해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한때 천하제일인이란 호칭을 부여받았던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천무(天武)였다. "......." 천무는 말이 없었다. 아니, 미동조차 없었다. 천무의 무릎에는 녹슨 정과 망치가 놓여 있었다. 잿빛가사는 너무나 낡아 곧 부서질 듯했다. 단지 바람에 날리는 백발만이 무심한 가운데 그의 마음을 전하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인연이 무의미하다는 듯이. 천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중원을 뜨겁게 달구던 해는 마침내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스....... 천무의 등뒤로 바람처럼 한 혈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 백천강의 싸늘한 눈빛이 천무의 등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런 백천강의 눈 속에 담긴 것은 뜻밖에도 증오였다. 그때였다. 불현듯 천무의 잿빛가사가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왔... 느냐!" 백천강은 흠칫 놀랐다.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순간 천무의 입에서 떨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애로운 웃음같기도 했다. "허허! 하루도 쉬지 않고 너를 관찰했거늘. 내 어찌 네가 온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 "매일 밤 천살성(天煞星)의 향방(向方)을 살피는 것이 노납의 일이라면 믿겠느냐?" "천살성?" 백천강은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아미타불.... 천중에는 네 개의 별이 있다. 천살성, 천추성(天樞星), 천무성(天武星). 그리고 적미성(赤眉星)이다. 그 중 천살성이 바로 너의 별이니......." 백천강은 갑자기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천무! 날 안단 말이오?" 백천강의 음성은 차디찼다. "......." 천무는 앉은 채로 서서히 뒤로 돌았다. 그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다음 순간 천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천강은 만변환신대법을 이용해 혈륜공자의 모습으로 화신해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과 눈에는 푸르스름한 사기(邪氣)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아미타불.... 오오! 더욱 혈기가 짙도다. 아이야, 너는 또 무슨 마공을 연마했느냐?" 천무대선사는 격동하며 물었다. 백천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당신의 아이란 말이오?" "오오.... 아이야 네가 천의 얼굴로 변한다해도 노납은 너를 알아볼 수 있다. 왜냐면 너는... 내 아들......." "닥치시오!" 백천강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어 그는 분노로 인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헛소리 하지 마시오! 본좌는 대혈륜궁주요! 천하에 군림할 마도종주란 말이오!" 천무대선사는 백천강의 말을 부정하듯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고해는 끝이 없으나 돌아보면 피안(彼岸)인 것을.... 아이야. 지금이라도 도도(屠刀)를 놓아라. 부처님의 불법은 무한한 것이다." 그 순간 백천강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뻗쳤다. "ㅋㅋ! 천무. 천하제일의 위선자! 오늘 본좌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겠느냐?" "......." "크크ㅋ! 머잖아 정사대혈전이 벌어질 것이다. 본궁은 광명회를 철저히 피로 씻을 것이다.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는 천무 당신도 정사대혈전에 참가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ㅋㅋㅋ!" 백천강의 괴소는 끔찍했다. 그 웃음은 왕성히 뻗어오르는 마의 기운이 일으키는 것이었다. 천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아이야. 증오를 품으면 모든 것이 비뚤어져 보인다. 노납은 네가 유성과 싸웠을 때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천살성이 더욱 붉게 빛나는 것을 보고 오늘을 근심했거늘. 마침내 종장(終章)이 도래했단 말이냐?" "후훗.... 천무! 두고 보시오! 그대의 잘난 제자 사유성이 어떻게 처참하게 전락하는가를! 훗훗.... 그의 검자국은 아직도 나의 가슴에 뚜렷이 남아있소. 이제 그 빚을 갚을 때요!" "오오!" 천무는 마침내 눈을 감고 말았다. 백천강은 전면의 거대한 마애불을 바라 보았다. 미소를 잃은 마애불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백천강은 괴소를 흘렸다. "ㅋㅋ...! 언젠가 저 불상의 얼굴을 바꾸어 놓고 말겠다. 천무! 어떤 얼굴로 바뀔지 궁금하지 않소?" "아미타불......!" 이제 천무의 목소리는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크ㅋ! 위선의 탈을 쓴 중에게 강간당한 것도 모자라 버림받은 후, 미쳐 죽은 한 여인이오. 나는 필히 저 불상의 얼굴을 그 여인의 얼굴로 바꾸어 놓겠소. 훗훗...! 그 여인의 이름은 바로 백수련(白水蓮)이오." "아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연신 불호를 외우는 천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어느새 그의 주름진 이마에 구슬같은 땀방울이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모습이 흐려졌다. "훗훗! 다시 보게 되는 날, 그때는 천무 그대에게 비검(悲劍)을 안겨 주겠소. 크핫핫핫!" 백천강은 섬뜩한 웃음소리만 남겨놓고 사라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덜컹! 석옥의 문이 세차게 열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석옥 안으로부터 흑영 하나가 신형을 쏜살같이 날리는 것이 아닌가? "원수! 널 절대 놓치지 않겠다!" 그것은 분명 여인의 음성이었다. 흑영은 날카로운 교성을 내지르며 백천강이 사라진 곳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쐐액! 그야말로 전광같은 속도였다. 바로 그 순간 어두컴컴한 석옥 안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연아(娟兒)야! 아직 이르다. 가지 마라!" 석옥 안에서 한 노인이 걸어나왔다. 노인은 일신에 허름한 마의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었다. 턱밑에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흰수염이 달려 있었다. 오 척 단구의 노인은 언뜻 보아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흑영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계집애가 성질이 너무 급한 것이 탈이거든. 조금 더 참아야 하거늘." 그는 중얼거리며 천무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노인은 천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천무는 그때서야 눈을 떴다. 이어 그는 노인을 향해 공손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만검옹 노시주께 송구할 뿐입니다." 만검옹(萬劍翁). 그는 바로 무림삼옹 중의 하나였다. 무림삼옹이란 전설적인 세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환상자(幻像子). 만검옹(萬劍翁). 장천화옹(掌天華翁). 이들 세 사람은 바로 천무대선사에 의해서 대마성의 결전에 참가한 무림고수들이었다. 이제 만검옹이 나타남으로써 무림삼옹 중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석대세가의 환상자였다. 만검옹은 짓무른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 아이가 자네의 아들인가?" 천무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노납의 업보이외다." "쯧쯧! 기도로 보아서는 절대종사(絶代宗師)감이거늘 아깝게도 마가 씌웠군." 천무는 만검옹의 중얼거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시주. 연아가 위험하오니 어서......." "껄껄! 걱정마시게." 스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검옹은 미끄러지듯이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신법이었다. "......." 천무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적미성이 점점 더 적기를 띄우고 있다. 결국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인가? 아아, 그러나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 이어 천무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33장 색정(色情) ① 백천강은 신형을 날리다 흠칫했다. 스스스....... 극히 미세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누군가가 그를 따라오고 있는 소리였다. '추적자가 있단 말인가?'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마침내 그는 답공술을 발휘해 허공에 몸을 세웠다. 그때였다. "악마! 검을 받아라!" 앙칼진 외침이 들려왔다. 그 뒤를 이어 백천강을 향해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날카로운 검기가 쏘아오는 것이었다. 위윙... 츠츠츳....... 백천강은 흠칫했다. '어검술(馭劍術)이다!' 그는 허공을 쏘아오는 검의 음향만 듣고도 그것이 어검술임을 간파한 것이다. 팟! 찰나지간 백천강은 허공에서 회전했다. 그 순간 혈광(血光)이 원을 그렸다. 차창창! 하는 요란한 쇳소리와 울렸다. 동시에 무수한 검꽃이 만천우화처럼 작렬했다. 위잉! 백천강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던 검이 타원형을 그리며 파공성을 냈다. '고수다!' 백천강은 상대의 절묘한 어검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 땅에 내리는 순간 백천강은 경악했다. 그에게 어검술은 전개한 자는 흑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흑의인영은 여인이었다. 대략 나이는 이십삼 세 정도로 보였다. 창! 흑의여인은 허공을 가르며 돌아온 검을 회수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척에 불과한 단검이었다. 원래 병기는 길면 길수록 유리한 법이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짧은 병기를 쓰는 자들이었다. 짧은 병기를 쓰는 자는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흑의여인은 백천강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서릿발을 방불케 했다. 한순간 여인의 입에서 대갈이 터져나왔다. "사풍객! 오늘 너의 심장에 구멍을 뚫어 주겠다!" 위잉... 츠츠츳....... 말이 끝나기가 무서웠다. 흑의미녀는 번개처럼 단검을 날리는 것이었다. 츠츠츠... 촤라락! 눈부신 검광이 그물처럼 펼쳐졌다. 이어 그것은 백천강의 심장을 겨냥하며 무섭게 날아왔다. 백천강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내심 부르짖었다. '놀라운 검법이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즉시 혈죽도를 뻗었다. 츠츠츠... 파아... 팟! 백천강은 대마인절기(大魔人絶技) 중에서 마인도법(魔人刀法)을 전개했다. 그러자 자욱한 검광과 도광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그들은 짧은 순간 백팔십여 차례나 위치를 바꾸었다. 파파파팟! "아!" 한순간 짧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기세좋던 검광이 위축되었다. "훗훗...! 미녀치곤 가시가 날카롭군."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백천강의 비웃음이 들렸다. 위잉! "학!" 숨가쁜 교성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어느새 흑의여인은 연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단검을 가슴에 모아쥐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안색은 몸시 창백해져 있었다. 마침내 백천강은 공격을 중지했다. 그는 혈죽도를 허리춤에 꽂으며 이죽거렸다. "크ㅋ.... 대마인도법을 사십 초나 견디다니 정말 대단하군." 실상 흑의미녀의 검법은 놀랄만큼 정교하고 광범위했다. 그녀가 밀린 것은 단지 내력이 약한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흑의여인은 백천강을 노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증오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마귀 붙은 놈! 네 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 여화연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백천강은 깜짝 놀랐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여화연이라고? 네가?" "그렇다. 이제서야 나를 알아보느냐? 이 사악한 놈아!" 여화연의 음성에는 증오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흑의여인은 바로 낙양세가였던 월아보의 여화연이었다. 월아보는 백천강이 만든 마검으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화연은 그 일로 인해 백천강에게 뿌리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 백천강의 눈에 동요의 기색이 어렸다. "흥! 이제야 나를 알아보겠느냐? 나의 오빠와 아버님께서는... 네 놈 때문에 죽었다!" 여화연은 표독스럽게 외쳤다. 그녀의 두 눈에 어리는 증오심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백천강은 그녀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묘한 충동을 받았다. 그는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훗훗.... 그랬던가?" "마귀 붙은 작자. 널... 죽이겠다!" 쌔액! 여화연은 악을 쓰며 교구를 날렸다. 검과 몸이 합일지신(合一之身)을 이루며 백천강을 향해 폭사해 갔다. 그러나 백천강은 피하지 않았다. 푸욱! 섬칫한 음향과 함께 단검은 백천강의 심장 깊숙이 박혀 버렸다. "아앗!" 그런데 뜻밖에도 비명을 지른 것은 여화연이었다. 그녀는 백천강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 기분 나쁜 느낌에 부르르 신형을 떨었다. 백천강의 가슴은 뜻밖에도 물컹했다. 그녀의 검은 물론이거니와 손목까지 깊숙이 파묻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밀가루 반죽을 찌른 기분이었다. "으... 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손을 빼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크크ㅋ...! 찌를 때는 멋대로 찔렀다만 멋대로 뺄 줄 알았더냐?" 백천강의 비웃음이 귓전에서 울렸다. "......!" 여화연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이어 그녀는 전신의 맥이 탁 풀어지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백천강이 손을 뻗어 자신을 끌어 안았기 때문이었다. "훗훗훗! 여낭자. 그대는 완전히 성숙해졌구료." 백천강은 여화연의 귓전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노... 놓아라...! 악적." 여화연은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러나 여화연의 음성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백천강은 그녀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날 어떻게 알아 보았지?" "그건... 네놈이 천무대선사와 얘기할 때 알았다." "훗훗.... 그랬군. 그럼 그대가 시전한 만류검종류(萬流劍宗流)는? 그것은 무림삼옹 중에서 만검옹의 비전인데?" 백천강은 다시 물었다. "그 ... 그 분은 사부님이시다!" 여화연은 자신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백천강의 최심술 때문이었다. "훗훗.... 사라졌던 삼옹이 풍진 속으로 다시 나타났군." 백천강은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는 여화연을 향해 으시시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을 보시오." "......?" 여화연은 고개를 들었다. 찰나지간 그녀의 얼굴은 멍청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너... 너......." 여화연은 몸을 바르르 떨며 홀린 듯 말을 더듬었다. 어느새 백천강의 얼굴은 과거의 파검소년(破劍少年)의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② "흐흐흑!" 여화연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천강의 얼굴을 본 순간 참고 참았던 설움이 오열되어 터져나온 것이다. "나... 나쁜 사람."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백천강의 눈썹이 작은 파문을 보였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사악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훗훗.... 그래, 이 나쁜 놈이 여기 있다.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보아라." 백천강은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여화연은 와락 그의 목에 매달리며 애원하듯이 부르짖는 것이었다. "흐흑.... 천강! 제발 마음을 돌려요! 당신이 정도로 돌아온다면 모든... 원한을 잊겠어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백천강은 그녀의 애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 여화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놀란 여화연이 부르짖었다. "후후.... 그대를 안고 싶다." 백천강은 두 눈에 열기를 띄우며 말했다. 그 순간 여화연의 안색은 도화꽃처럼 빨개졌다. "여... 여기서요?" "후후.... 어때서 그러냐? 이 숲이 조용해 더욱 좋지 않겠느냐?" "하... 하지만 우린... 아무런 명분도 가지고 있지 않잖아요." "명분은 만들면 되는 것." 대답과 동시에 백천강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르륵! 채대가 풀리며 그녀가 입고 있던 흑의가 좌우로 벌어졌다. 흑의 사이로 붉은 속곳이 드러났다. 여화연은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정말... 당신... 마음을 돌리기로 한 건가요?" 그녀는 잔뜩 겁먹은 음성으로 물었다. "후훗.... 사실... 옛날 너를 볼 때부터 네가 좋았다." "정... 정말요?" "이렇게... 증명해 주지 않느냐?" "아음!" 여화연은 신음을 흘렸다. 백천강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어느새 속곳이 풀어헤쳐진 것이다. 그리고 터질 듯이 무르익은 육봉이 불쑥 튀어나왔다. 백천강은 서슴없이 손을 놀려 여화연의 육봉을 터뜨릴 듯이 덥석 움켜쥐었다. "아......!" 여화연은 사지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가까스로 팔을 뻗어 백천강의 목에 매달렸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이성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은 전신이 무섭게 뜨거워지며 사지가 온통 근질거릴 뿐이었다. 백천강의 손이 움직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뒤틀고 있었다. "아학!" 어느 순간 그녀는 뜨거운 비명을 내리르고 있었다. 백천강의 얼굴이 그녀의 앞가슴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와락 그의 머리를 끌어 안고 말았다. 백천강의 입술이 그녀의 민감하기 그지없는 유실을 세차게 빤 것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온몸의 힘이란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땅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활처럼 뒤로 굽히고 있었다. 백천강은 개미처럼 가는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휘어감았다. "흐윽!" 여화연은 입술을 벌리며 더욱 몸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백천강은 그녀의 옷을 좌우로 벌려 되도록 그녀의 나신을 크게 노출시켰다. 그야말로 눈부신 나신이었다. 두 개의 젖가슴은 성숙할 대로 성숙하여 허공을 뚫고 불쑥 솟아나와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질 듯이 무르익은 가슴이었다. 그 가슴은 사나이의 정열을 기다리며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 내리락하며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마침내 백천강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에 달라 붙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은 그녀의 터질듯한 젖가슴을 희롱하며 더욱 뜨거운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은 양쪽 젖가슴을 차례로 희롱하다가 점차 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흐으윽......!" 그녀는 열락에 빠진 듯 괴롭게 신음하며 그만 전신의 힘을 놓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의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풀밭에 벌렁 드러눕게 된 여체(女體), 여체는 더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말은커녕 아무런 사고(思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여체를 내려다 보는 백천강의 얼굴에 묘한 일렁임이 일어났다. 나뭇가지에 걸린 햇살이 백옥처럼 하얀 여체에 그물처럼 갈라져 내리고 있었다. 그로인해 그녀의 나신은 아롱진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흑의는 금침인 양 여인의 새하얀 나신 아래 펼쳐쳐 묘한 흑백(黑白)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아아!" 여화연의 나신은 꽃뱀인 듯 원초적인 본능을 유발하며 비틀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버들같은 허리가 비비 꼬이며 풍만한 둔부가 가볍게 들썩였다. 부드럽고 뽀오얀 허리에서 기름진 아랫배로 흘러내리는 선은 매끄럽고 농밀했다. 또한 허벅지 안쪽의 깊은 샘은 사내의 갈증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어느새 백천강도 옷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입성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여체를 더이상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의 완강하고 단단한 근육은 부드러운 여체를 짓눌렀다. "하학!" 여화연은 숨가쁜 비명을 내질렀다. 온몸이 압박을 받음과 동시에 은밀한 곳이 파괴되는 듯한 아픔이 일어났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힘껏 오무렸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사내의 쾌감을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무릎을 움츠리자 사내의 단단한 근육질은 더욱 더 그녀의 무릎을 벌리며 무섭게 파고든 것이었다. "흐으윽!" 백천강은 더욱 세차게 여인의 문을 밀어부쳤다. 마침내 여인은 자신의 내부가 폭발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 폭발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육체를 녹일 정도의 엄청난 뜨거움이 여화연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대로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며 온몸이 녹아나는 쾌감에 휘말리고 말았다. "으으음......." 백천강은 안도의 신음을 토해내며 여인의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하늘을 보고 누웠다. 그의 동공을 통해 뭉개구름 하나가 푸른 창공을 유유히 흐르는 것이 보였다. "......." 백천강은 목을 태우던 갈증이 비로소 해소되는 느낌과 함께 시원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한순간 그는 저 구름처럼 꺼리낄 것이 없다는 듯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땀을 씻으며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여화연을 바라보았다. 여화연은 눈을 꼭 감고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신이었다. 아직까지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을까?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다. 그때였다. 주르르....... 불현듯 눈물 한 줄기가 검은 눈썹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눈물은 여화연의 관자놀이를 타고 귓볼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문득 백천강은 놀라며 상체를 벌떡 일으ㅋ다. '이럴 수가! 나도 모르게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을 쓰다니......!'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미향탈심대법을 전개해 여화연을 범하고 만 것이다. 태어난 이래 최초로 그는 욕정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 최초의 욕정이었다. 그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소녀미향탈심대법을 전개해 여화연을 범하고 만 것이었다. '내가... 욕정을 느끼다니!' 백천강은 아연했다. 그는 다시 여화연을 바라보았다. 여화연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질끈 감은 그녀의 속눈썹 사이로 또 한 방울의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 백천강은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동요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에 불과했다. 어느새 백천강의 눈에 푸르스름한 사기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여화연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천강......."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ㅋ! 그렇게 쉽게 뜨거워지면서 날 죽이겠다고 덤벼든 것이냐?" 돌연 백천강이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 그녀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럼 날 농락했단 말이냐?" 여화연은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백천강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묻은 한 방울의 혈흔(血痕)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네가 처녀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덕에 넌 본 궁주의 사랑을 받지 않았느냐? 너는 그것으로 은혜를 입은 것이다." "아아!" 여화연의 눈에서 독망이 쏘아져 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리며 무릎을 오무렸다. 무서운 원한이 그녀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지옥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악마... 이 악마!"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며 외쳤다. 백천강은 그녀를 향해 잔인하게 웃었다. "후후후!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 점을 몰랐던 것을 원망해라!" 말을 마친 백천강은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사라지자 여화연은 여전히 알몸으로 햇살의 그물에 갇힌 채 몸을 뒤틀며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흐흑!" 하지만 그것은 증오와 원한의 울음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백천강에 의해서 스무 해 이상 소중히 지켜온 순결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꿈과 이상(理想), 고고하던 자존심도 함께 무참히 꺾이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순결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증오심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여인의 아픔을 느꼈고, 사내를 받아들였다. 바로 그런 사실이 여화연의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그리움 한 조각을 남긴 것이다. "흐흑흑!" 여화연은 풀뿌리를 잡아 뜯으며 오열했다. 그녀는 마침내 풀밭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사르륵....... 누군가가 흑의로 그녀의 나신을 덮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화연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피를 토할 듯이 오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흑의를 덮어준 자는 바로 만검옹이었다. 그는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여화연을 내려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쯧쯧.... 그 아이는 지금 마기(魔氣)를 벗지 못하고 있다. 너무 서두른 네가 잘못이지." 만검옹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짓무른 그의 눈 속에 문득 한 가닥 연민이 스치고 지나갔다. ③ 무창성(武昌城). 무창성은 호북성(湖北省) 제일의 도시였다. 무창성의 동쪽으로는 장강(長江)의 드넓은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물결은 드넓은 대륙을 비옥하게 살찌우는 젖줄이기도 했다. 장강을 이용한 수로(水路)의 발달과 곡물의 집산지로 이름난 무창은 상업도시로도 이름이 높았다. 군방기루(群芳妓樓). 무창에서 가장 이름난 기루를 뽑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군방기루를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군방기루는 이름 그대로 군방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미녀가 많았다. 군방기루의 기적(妓籍)에 오른 기녀의 숫자만 해도 일만 오천이라고 했다. 아무튼 군방기루는 천하명물이었다. 일단 무창성에 입성한 인물치고 군방기루를 찾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군방기루의 밀실. 한 명의 혈의청년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한 명의 중년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태공(太公), 물으실 말씀은?" 중년여인은 겸손하게 입을 열었다. 백천강은 잠시 중년여인을 내려다보다가 억양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근래 강호 동향을 알고 싶다." "......." 중년인은 백천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궁주님의 명이 있었사옵니다." 그녀는 품 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여인은 두 손에 두루마리를 받쳐들고 백천강에게 전했다. "읽어 보시면 아실 것이옵니다." 백천강은 두루마리를 집어들며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훗훗.... 공야운리는 약속을 잘 지키는군. 중원의 기루를 모두 넘겨줄 때 나의 귀가 되어 달라고 했던 것을 철저히 지키는군." 군방기루는 그가 음양궁주 공야운리에게 넘긴 조직의 일원이었다. 실제적으로 전 중원에 퍼진 기루들은 그의 이목 구실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다. "흠!" 백천강은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당금 무림의 상세한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구십일(九十一). 백문선생(百門先生) 우문기(宇文奇)란 자가 수상함. 그는 도독부의 사운봉의 글선생이었음. 최근 광명회로 들어가 군사가 되었음. 광명회의 모든 책략은 그의 머리에서 나옴. 그 자를 예의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음.> <백십칠(百十七). 무림삼옹(武林三翁 중 만검옹과 장천화옹이 출현함. 그들은 소림에 있음.> <이백일(二百一). 광명회는 공격 준비를 끝마쳤다고 전 중원으로 전서구를 날림. 내용은 혈륜궁 토벌(討伐).> <삼백팔(三百八). 동해에 있다는 신비문파 제마천문(制魔天門)이 중원에 상륙한다는 설(說)이 있음. 크게 경계해야 함.> <오백(五白). 혈천마국의 동태 수상함. 본녀(本女) 직접 탐지 예정임.> 두루마리는 모두 오백 가지 소식을 담고 있었다. "......!" 그것을 다 읽고 난 백천강은 눈을 가늘게 내려뜨렸다. 지금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바로 삼백팔(三百八)이라는 번호가 붙은 소식이었다. <...... 제마천문(制魔天門)이 중원에 상륙.> 그것은 비록 설(說)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다. 하지만 백천강은 그 내용을 접하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감싸였다. '그렇다면 쌍봉도(雙峯島)가 출도(出島)했단 말인가?' 그는 내심 중얼렸다. 뒤이어 그의 뇌리에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으음... 설화영!' 백천강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설화영을 떠올릴 때마다 거역하지 못할 운명같은 것을 예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조의 웃음을 흘렀다. "후후훗....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 아니던가?" 백천강은 조소와 함께 싸늘하게 내뱉았다. 이어 그는 두루마리를 비볐다. 푸스스....... 두루마리는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문득 그는 중년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가 혈천마국을 직접 탐지하러 갔다고?" 갑작스런 질문에 중년미부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렇사옵니다. 얼마 전 대막으로 떠나셨습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물러가라." 그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중년미부는 머뭇거렸다. 백천강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가지 않느냐?" "혹... 계집이 필요치 않으신가요?" 그때서야 중년미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천강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묻어났다. "훗훗! 운리의 뜻이냐?" "그렇사옵니다. 태공이 원하신다면 황녀(皇女)라도 구해다 바치시라 했사옵니다." "크크ㅋ...! 황녀라도 바치겠다고? 운리는 정말 애를 쓰는군. 크크크ㅋ......!" 백천강은 계속 괴소를 터뜨렸다. 내처 웃는 가운데 그의 눈은 점점 푸른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안면에는 욕정이 번들거렸다. "그래, 이곳엔 쓸만한 계집이 있느냐?" "무, 물론입지요." 여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후훗! 본좌는 평범한 계집은 원치 않는다." "그럼?" "가시가 있는 계집일 수록 좋다. 그것도 독(毒)을 잔뜩 품은 계집 말이다." "......!" 중년미부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그녀가 듣기로 태공이란 사람은 색을 멀리 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구나.'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여인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직접 골라 보시겠나이까?" 백천강은 내심 음소를 흘렸다. '크크.... 웬지 근질거리는군. 갑자기 계집을 품고 싶은 느낌이 든다. 전에는 이런 기분이 없었거늘.' 실상 그는 점점 더 마성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었다. 살(殺), 색(色), 악(惡). 백천강은 그 세 가지 기운에 차츰 제압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두 그가 익히는 기환만겁윤회마공(奇幻萬劫輪廻魔功) 탓이었다. 기환만겁윤회마공이야말로 절대마신지경으로 접어드는 첩경이었던 것이다. 군방기루에서 가장 화려하고 넓은 대전이었다. 그곳에서는 지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신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육림(肉林)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군방기루의 일급 기녀에 해당하는 백여 명의 여인들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녀들은 감히 손을 올리거나 알몸을 가릴 생각도 못했다. 대전에는 무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녀들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것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한 명의 혈의인 때문이었다. 백천강의 눈은 어느새 색정으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여인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가는 것이었다. 한순간 그는 냉소를 머금었다. "ㅋㅋ! 모두 꽃은 꽃이되 혼(魂)이 없구나!" 그는 차갑게 혀를 찼다. 중년여인은 한쪽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미를 찌푸렸다. '저 애들은 모두 만(萬)에 하나 뽑은 애들이다. 그런데도 눈에 차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였다. 백천강이 음소를 흘렸다. 이어 그는 중년여인을 돌아보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또 없느냐?" 중년미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보신 애들은 모두 일급이옵니다." "하지만 내눈에는 잡화(雜花)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모멸도 그처럼 심한 모멸이 없었다. 모여있던 기녀들의 얼굴은 심한 멸시감으로 인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들의 미색은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수많은 공자대부와 풍류남아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매달리던 미색이었다. 백천강은 그런 미색을 앞에 두고 한낱 잡화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기녀들의 자존심은 구겨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백천강은 다시 조소했다. "ㅋㅋ! 황녀라도 대령한다 하지 않았느냐?" "아, 알겠사옵니다!" 중년미부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백여 명의 기녀들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 시진쯤 시간이 흘렀을까? 기녀들과 함께 사라졌던 중년미부가 다시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났다. 그 뒤로 장한들이 열 개의 자루를 메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놓고 물러가라." 중년미부는 장한들을 향해 말했다. 장한들은 메고 있던 자루를 땅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즉시 사라졌다. 중년미부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태공, 이번에는 무창성 내에서 가장 신분이 고귀하고 미모가 뛰어난 규수들을 대령했습니다." 백천강은 눈을 야릇하게 빛냈다. "어떤 계집들인가?" "무, 무창성주(武昌城主)의 무남독녀도 있고... 부사(副使)의 딸, 그리고 감찰어사의 딸도 있사옵니다." "납치했겠군?" 중년미부는 어색하게 웃었다. "설사 황녀라 해도 이에 못지 않을 것이옵니다." "훗훗...! 그대의 충성심만은 감탄할 만하군." "호호...! 그럼 보시겠나요?" 중년미부는 교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녀는 한 개의 자루를 끌렀다. 자루 속에서 잠옷바람의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소녀는 막 침실에서 자다 끌려온 것이 분명했다. 소녀는 혈도가 짚혀 꼼짝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은 공포심이 가득했다. 나이는 십팔 세 정도였다. 소녀의 피부는 백설같았다. 특히 겁이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찌익. 중년미부는 거침없이 소녀의 잠옷을 찢어버렸다. 그러자 익을 대로 익은 두 개의 수밀도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젖가슴에 맺혀 있는 탐스런 두 알의 유실은 연홍빛이었다. "그만해라!" 돌연 백천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중년미부는 한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백천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도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백천강은 차갑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내가 직접 보겠다." 다음 순간 그의 손 끝에서 예리한 경기가 뻗었다. 츠츠츠츳! 그 순간 나머지 아홉 개의 자루가 일제히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었다. 뒤이어 아홉 개의 새하얀 옥신(玉身)이 드러났다. 그가 발출한 경기가 어느새 아홉 여인의 옷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사내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처녀의 백옥지신이 아무렇게나 대전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떤 젖가슴은 투실투실했다. 어떤 것은 사발같기도 했다. 또 어떤 것은 아직 익지 않아 풋복숭아처럼 봉긋하기만 한 것도 있었다. 처녀들의 밀지(密地)도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여인은 짙은 삼림(森林)으로 우거져 있는가 하면 어떤 여인은 채 자라지도 않은 초지가 듬성듬성한 것도 있었다. "......." 한순간 백천강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어 그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았다. "치워라." "네엣?" 중년미부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독가시같은 계집이라지 않았느냐? 저 계집들은 쑥맥일 뿐이다." "그... 그럼......." 중년미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백천강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백천강은 차갑게 물었다. "군방기루에 다른 계집은 없느냐?" "다른 아이시라면?" 백천강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내 듣기로 중원의 사대 기루에 각각 공야운리의 사대비녀(四大秘女)가 있다고 들었다." 그 순간 중년미부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 분들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크크... 안 된다는 거냐? 설마 그 계집들이 황녀보다도 귀하단 말이냐?" 한순간 중년미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백천강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말했다. "그... 그렇사옵니다." "킬킬킬! 그거 재미있군. 사대비녀가 황녀보다도 고귀하다니 그렇다면 더욱 흥미가 당기는 걸?" "태... 태공!" "대령하라." 어느새 백천강의 음성이 착 가라 앉았다. "그... 그것만은......." 중년미부는 어쩔줄 몰라했다. 바로 그때였다. "흥! 어쩔셈인가요? 본 비녀 대령이오!" 차가운 음성과 함께 대전에 한가닥 녹영(綠影)이 떨어져 내렸다. ④ 녹영은 섬세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녹색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순간 백천강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녹의여인의 전신을 탐욕스러운 눈길로 훑어보며 말했다. "훗훗.... 네가 사대비녀냐?" 녹의여인은 차갑게 대꾸했다. "본 비녀는 사대비녀 중 한한(恨恨)이에요!" 백천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오! 한한이라, 이름도 좋군." "......!" 한순간 한한의 두 눈에서 살기어린 불길이 흘러나왔다. 이때였다. "한한낭자 왜......?" 중년미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쩔줄 몰라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백천강은 재미있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크ㅋ! 한한, 본좌는 네가 마음에 든다. 특히 너의 독이 오른 두 눈이 말이다." 한한은 싸늘하게 말했다. "이 몸을 갖고 싶다 그 말인가요?" "훗훗.... 그렇다." "흥! 그럴 자격이 있나요?" 백천강은 빈정거렸다. "훗훗.... 네가 이미 처녀가 아님을 안다. 그것도 남자 경험이 많은 계집이라는 것을. 그러니 본좌가 한 번 취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라." "......!" 한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찰나지간 그녀의 눈은 더욱더 독기를 흘렸다. 백천강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실로 향하며 말했다. "훗훗.... 본좌는 너의 무르익은 몸이 더욱 좋다." 마침내 한한의 눈에 결심이 어렸다. "호호호! 좋아요. 태공이 원한다면 이 몸을 드리죠. 그러나 이 몸을 뜨겁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한한은 독기와 요기(妖氣)를 동시에 뿜으며 백천강을 따르기 시작했다. "......!" 중년미부는 얼떨떨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한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한한낭자는 사비녀(四秘女) 중 가장 표독스러운데... 어째서 순순히 따르는 것일까?' 그녀는 복잡해진 머리를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천강은 침상에 걸터 앉았다. 이어 그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흥미로운 표정이 가득했다. 한한은 요대를 끌렸다. 그녀의 동작에는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사삭... 사르륵....... 녹의가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한 겹 남은 속옷도 발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녀는 완전 나신이 되었다.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이 풍만했다. 두 알의 유실(乳實)은 이미 사내 경험을 한 탓인지 은은한 자주빛으로 영글어 있었다. 허리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세류요였다. 거기에 반해 둔부는 놀랄만큼 크고 둥글었다. 익을 대로 농익은 그녀의 전신에는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앙증맞은 배꼽과 그 주위 아랫배의 능선은 팽팽한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길게 뻗은 두 다리는 인어처럼 매끄럽고 가지런했다. 백천강은 전라가 된 한한의 육체를 탐닉하듯 천천히 감상했다. "크크.... 정말 훌륭한 몸매군. 솟을 곳과 꺼질 곳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었군." 한한은 자신의 손으로 터질 듯한 젖가슴을 슬쩍 어루만지며 웃었다. "호홋! 정말 쓸만한가요?" 그녀는 슬쩍 다리를 벌렸다. 그 순간 은밀한 춘궁이 살짝 드러났다. 그야말로 고혹적인 자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독기가 어려 있었다. 이때였다. "왜 복면은 벗지 않지?" 백천강이 물었다. "호호! 날 뜨겁게 하기 전에는 벗길 자격이 없어요." "킬킬! 그거 재미있군." 백천강은 기소를 흘렸다. 이어 그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한 앞으로 다가간 그는 서서히 한한의 나신을 안았다. "......." 하지만 한한은 목석인 양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백천강은 한 손으로 그녀의 팽팽한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부푼 둔부를 움켜쥐었다. 젖가슴이나 둔부나 한 손으로는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만했다. "......." 한한은 여전히 무감각했다. "클클......." 백천강은 야릇한 기소를 흘리며 그녀를 번쩍 안았다. 이어 그는 침상 위로 한한을 내던졌다. 뜨거운 폭풍이 불었다. 백천강은 여체의 구석구석에 불길을 뿜었다. 한한의 자주빛 유실은 그의 입술 속에서 마음껏 유린되었다. 그의 손에 의해 여인의 험지(險地)는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백천강의 뜨거운 입김은 여체의 곳곳에 폭우처럼 퍼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한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육체는 더욱 더 싸늘해지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서서히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 계집은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어느 순간 한한은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훗훗...! 한한.... 너는... 뜨겁다.... 뜨거움에 몸부림치고 싶어질 것이다." 백천강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파고 들자 한한의 전신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너는 전신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후훗! 시간이 흐를수록 넌 그 뜨거움에 몸을 내맡기고 싶어질 것이다. 자... 이제 넌 색녀가 되어 몸부림칠 것이다......." "으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 순간 입술로부터 뜨거운 훈김이 절로 토해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백천강의 손바닥이 인두가 되어 그녀의 육신을 지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아... 아......." 마침내 그녀는 완전히 불꽃덩이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이미 그녀의 정신을 꼿꼿하게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지배는 허무하게 꺾여버리고 말았다. 백천강의 손바닥이 젖가슴을 강하게 틀어쥐자 그녀는 온몸이 녹아나는 듯한 쾌감에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활처럼 들어올리고 있었다. "아아!" 이번에는 또 다른 손바닥이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왔다. 동시에 사나이의 강철같은 근육이 그녀의 몸을 짖눌렀다. 그녀의 다리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입술을 벌리며 사나이의 입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둔부를 들어올리며 안타깝게 사나이를 찾았다. "후후훗! 이제 준비가 되었느냐?" 백천강은 음소를 흘리며 입성해 들어갔다. 바르르....... 그녀는 전신을 경련하며 손톱을 사나이의 등에 박았다. 온몸이 관통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무서운 쾌락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뜨거운 폭풍우에 휘말리며 육신을 떨었다. 폭풍은 거세었다. 한 순간에 침상을 온통 태울 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악!" 여인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발버둥쳤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아...! 왜 이렇게 뜨겁지......? 온몸의 혈관 끝까지 불꽃이 번져 재가 되어 버릴 것 같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스윽! 마침내 여인의 몸부림 때문에 녹색의 복면이 벗겨졌다. 복면 속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차가우면서도 극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는 복면이 벗겨졌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백천강의 격렬한 율동에 따라 그녀의 여체는 포말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마침내 절정이 가까와졌다. "하... 아!" 그녀는 산산조각으로 전신이 분해되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뚝. 그녀의 눈 가장자리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사람의 얼굴이 가장 평화로워 보일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잠들어 있을 때의 얼굴일 것이다. 잠자는 자의 얼굴은 그가 누구이든지 평화롭기 그지없다. 천하인이 증오하는 자. 육신은 물론 영혼마저도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싶어하는 공포와 저주의 대마인(大魔人) 혈륜공자. 혈륜공자 백천강의 차갑고 냉혹한 얼굴도 잠든 순간에는 평화로와 보였다. 그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 여인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내려보고 있었다. 여인의 흑발은 고왔다. 가냘픈 어깨를 가로질러 치렁하게 흘러내린 흑발은 풍성한 젖가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자주빛 유실 하나가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유실은 열풍의 시달림 속에 더욱 충혈되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로 급격히 굵어진 둔부에는 아직도 사내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 여인의 그린 듯한 아미가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바로 아득한 옛날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 년 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낙양(落陽)거리를 지나다가...... 이상한 방문을 붙인 대장간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지...... 아버지는 그곳의 대장간 소년에게서...... 한 자루의 검을 주문했지...... 그때 나는 열 살도 채 안되었지...... 한데 그것이 불행의 시작일 줄이야...... 아버지는 그 검을 들고 한 미친 여인을 죽이려 떠나셨지...... 그리고... 죽어서야 돌아오셨지...... 가슴에는 사풍인(死風刃)의 상처를 새긴 채......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자살하시고...... 나 기검화(奇劍花)는 그 이후...... 사풍객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몸을 팔아 무공을 익혔고...... 그러다가 음양궁에 몸을 의탁하였지...... 이제 눈 앞에 그가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어...... 이제 그를 찌르기만 하면...... 내 소원은...... 이루어지는 거야...... 길고 긴 복수행은 끝나는 거야...... 또르륵.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침상으로 떨어졌다. 기검화(奇劍花). 그것은 한한의 본래 이름이었다. 그녀는 바로 백천강이 과거 한 객점에서 정사중이던 무당파 도인을 죽였을 때 비급을 훔쳐 달아났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정확히는 절검유사 (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의 딸인 것이었다. "죽이리라. 기어이... 한을 풀고 말리라!" 기검화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금침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날이 시퍼런 비수 한 자루를 꺼내 곧장 치켜 들었다. 기검화는 비수를 든 채 잠든 백천강을 내려다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머리 속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음양궁주 공야운리였다. 그녀의 귓가에 공야운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 호호홋! 네가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면 언제고 기회를 주마. 그러나 반드시 내가 허락해야만 한다. 알겠느냐? 윤락녀가 되어 삼류고수들의 하찮은 무공이나 익히던 널 건져낸 것도 나였고, 이만큼 크게 한 것도 나다. 그러니 날 배신할 수는 없다. 알겠느냐? "......!" 기검화는 비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용서해 주세요. 언니. 하지만 검화는... 더 참을 수가 없는 걸요! 이 자가 절 노리개로 선택했을 때 저는 그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기검화는 비운의 소녀였다. 그녀는 이제 겨우 십육 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육체는 숙성할 대로 숙성해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복수를 위해 육체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천강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스슷! 높이 쳐들렸던 비수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침내 비수는 백천강의 심장 부근에 이르렀다. 바르르....... 기검화의 손목이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원수! 죽엇!" 짧은 외침과 함께 기검화는 백천강의 심장을 향해 비수를 내리꽂았다. 푸욱! 마침내 비수는 백천강의 심장을 꿰뚫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무런 비명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천강을 내려다보던 기검화는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경악했다. 비수는 분명히 백천강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그것도 칼날만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루 끝까지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천강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흘러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ㅋ.... 어리석다. 본좌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았느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백천강은 눈을 번쩍 뜨는 것이 아닌가? "아악!" 기검화는 질겁을 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전신의 맥이 완전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크ㅋ.... 너는 누구냐?" 백천강은 괴소를 흘리며 일어났다. 이어 그는 다짜고짜 기검화를 깔아 뭉개는 것이었다. "흐윽!" 기검화는 그의 육체 밑에 깔리며 신음을 냈다. 두 개의 육봉이 우람한 가슴에 깔려 찌부러졌다. 백천강은 내처 물었다. "클클! 말해라. 네가 누군지를." 기검화는 눈을 감으며 체념했다. "죽여라! 악마. 나는... 절검유사의 딸 기검화다. 사풍인에 죽은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이 날만을 기다려 왔으나... 실패했다. 그러니 어서 죽여라!" 기검화의 목소리는 앙칼졌다. "절검유사?" 백천강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는 잠시 기검화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의 입술에 싸늘한 냉소가 어렸다. "클클! 이제보니 내게서 검 한 자루를 사갔던 자였군. 그러고 보니 너는 그때 녹의를 입었던 계집애로구나." 백천강은 비로소 기억을 떠올렸다. 기검화는 수치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훗훗훗! 그때 코흘리개 어린애가 이렇게 컸다니 세월무상이군. 클클클!" 백천강은 놀리듯이 괴소를 터뜨렸다. 기검화는 눈을 감은 채 악을 썼다. "죽여라! 이 악마!" "후후.... 죽이진 않겠다. 그 대신에 너를 한 번 더 취하마." 백천강은 말과 함께 기검화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악마! 치워랏!" 기검화는 이를 갈며 외쳤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백천강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몸을 파고 들어갔다. "아... 악마... 흐윽!" 몸부림치던 기검화의 입에서 끝내 뜨거운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말았다. 한 번 허물어져 버린 그녀의 육체는 더이상 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정(無情)한 사내의 육체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마의 욕망의 구렁텅이로 잔인하게 몰아넣고 있었다. 34장 단정검(斷情劍) ① 쏴아아... 철썩... 콰르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파도였다. 동해의 만경창파(萬頃蒼波)는 쉴 사이없이 해변을 향해 몰려들었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철썩... 콰르르....... 하얀 물거품이 산산이 비산되었다가 흩어져갔다. 상산포(相山浦). 상산포는 절강성(浙江省)의 동안에 위치한 포구였다. 그곳은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포구였다. "......." 한 인영이 상산포구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일신에 흑의를 입은 자로써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었다. 청년의 전신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과 음산한 분위기만 제외한다면 그는 여인을 방불케 하는 미남자였다. 그가 상산포에 나타난 것은 불과 보름 전이었다. 그날 이후 청년은 줄곧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한 언덕 위에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객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청년이 묵는 객점은 상산잔(相山棧)이었다. "......." 흑의 미청년은 언덕에 서 있었다. 그는 깊이를 모를 신비한 눈으로 끝없는 창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 끝에는 뭉개구름만 가물거릴 뿐이었다. 끼룩... 끼룩....... 처량한 울음을 토해내며 커다란 은빛 날개를 가진 물새가 수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청년의 시선은 물새를 따라 움직였다. 어느새 물새는 하나의 점이 되어 수평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였다. 불현듯 청년의 입이 열렸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왜? 무엇 때문에 그녀를 기다리는가? 꼭 화영을 봐야 한단 말인가? 쌍봉도의 고수들이 이곳을 통해 상륙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다니... 아직도 내 마음에 끊지 못할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제마천문(制魔天門) 고수들이 중원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착잡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바로 쌍봉도주의 손녀인 설화영 때문이었다. 설화영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아닌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설화영 때문에 대혈륜서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갖가지 마공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백천강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광활하고 드넓었다. "......." 어느 한순간 백천강의 눈에 문득 푸르스름한 기운이 떠올랐다. 뒤이어 그의 입가에 기묘한 웃음이 묻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저어... 공자님......." 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백천강의 등뒤로부터 들려왔다. 그것은 기어 들어가는 듯 낮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맑고 아름다웠다. 언덕 위로 한 소녀가 올라왔다. 소녀는 평범한 황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소녀는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백천강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예의 그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술을 가져 왔어요." 백천강은 그때서야 몸을 돌렸다. "......." 그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흘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황의소녀는 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부끄러움 때문에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정작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잘 알 수 없었지만. 백천강은 부드럽게 말했다. "후후. 전낭자가 직접 오시다니 황송하구료." "부... 부끄럽습니다." 소녀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소곳이 무릎을 꿇으며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소녀의 이름은 전랑(田娘)이었다. 전랑은 상산잔 객점의 주인 딸이었다. 그녀는 백천강이 상산잔에 묵을 때부터 줄곧 그의 시중을 들어온 것이다. 보자기에는 잘 익은 매로주(梅露酒)한 병과 여러 가지 음식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흔히 맛볼 수 없는 진미뿐이었다. 오리고기와 살짝 데친 소고기 한 접시, 상산전 특기의 상어 요리 한 접시, 갖가지 패(貝)류를 볶은 것들이었다. "드세요. 공자님." 전랑은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백천강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군." 그는 젓가락을 들어 상어 요리 한 점을 맛보았다. 그리고는 잔을 들었다. 백천강은 전랑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가 따라 주겠소?" 그대라고 호칭하는 백천강의 음성은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전랑은 그만 귓부리까지 붉어졌다. 그녀로서는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듯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세상이 온통 아름다운 것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전랑은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었다. 쪼르륵....... 분홍빛의 맑은 액체가 투명한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워갔다. "......." 잔이 채워졌다. "고맙소." 백천강은 가볍게 웃어보인 후, 천천히 술을 마셨다. 그때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전랑이 젓가락을 들었다. 이어 그녀는 상어요리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받쳐 올렸다. "드세요." 말과 함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백천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랑이 받쳐올린 젓가락이 입 앞에 있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상어요리를 먹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랑의 입술을 안주 대신 취했다. "어멋!" 전랑은 순식간에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입술을 통해 혼백이 어딘가로 빨려들어 간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아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구름 위에 둥둥 뜬다고 느꼈다. 사나이의 혀가 처녀의 비릿한 입술을 뚫고 치아를 마저 열고 들어왔다. 백천강의 혀는 물고기가 물 속을 유영하듯 마음껏 소녀의 입 속을 헤엄쳐 다녔다. 전랑은 우주가 송두리째 자신의 내부 속으로 밀려드는 듯한 황홀함을 느꼈다. 그 순간은 영원과도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녀는 허전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어느새 사나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한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것은 지극히 준수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무심한 얼굴이기도 했다. 전랑은 풀밭에 드러누운 채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소." "무... 엇을?" 전랑은 입술을 꼬옥 깨문 뒤 급히 말했다. "무엇이든 공자님의 부탁이라면... 모두 하겠어요." "후훗!" 백천강은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전랑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전랑은 자신의 손을 백천강의 손 위에 얹었다. 그녀의 손은 불타는 듯이 뜨거웠다. 잠시 후 백천강은 전랑의 곁에 벌렁 드러누웠다. "......." 그는 멍하니 하늘에 뜬 구름 하나를 바라 보았다. 뭉개구름은 누군가의 얼굴을 닮은 것만 같았다. 찰나지간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옥운생.......' 그 순간 백천강은 돌아 누웠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 멀리 수평선에 가물거리는 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점들 위로 돛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선박이었다. 선박은 모두 열한 척이었다. "왔다."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공자님?" 전랑은 놀라 따라 일어났다. 백천강은 급히 그녀에게 물었다. "낭자. 상산포에 객점이 모두 몇 개 있소?" "모두 네 곳이에요. 그런데?" 전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백천강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백천강은 내처 물었다. "가장 큰 곳은?" "바로... 저희 집이에요." 전랑이 말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 갑시다." "......?" 전랑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그녀는 뭔가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랑은 더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백천강은 성큼성큼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② 열한 척의 범선은 상산포에 당도했다. 한적한 포구인 상산포에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다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이 전에도 한 차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 상산포의 눈썰미 좋은 노인네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닻을 내린 열 한 척의 배는 바로 이십여 년 전에 상산포에 입항했던 배라는 것을. 마침내 범선은 닻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범선에서 내려와 포구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대략 사백 명 정도였다. 개중에는 여인들도 있었다. 수염이 하얀 노인들도 많았다. 또한 이제 겨우 열다섯 살 가량 된 소년도 있었다. 그러나 한결같은 것은 그들의 걸음걸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볍고 경쾌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빛은 예리하면서도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청의(靑衣) 무복을 가뿐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사백여 명이 넘는 무인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상산포는 대번에 시끄러워졌다. 갑자기 상산포는 잔칫날이라도 맞은 듯이 분위기가 흥청거렸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무인들은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사대(四隊)로 나뉘었다. 그런 후에 상산포의 사대 객점에 나누어 투숙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두 명의 미청년이었다. 그들은 이십 세 전후로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 미청년은 그 인상이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팔순이 넘어보이는 원로인물들을 비롯하여 위풍당당한 중장년인들이 열을 지어 범선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지도자급의 인물들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내린 인물들은 상산포에서 가장 큰 객점인 상산잔에 투숙했다. 그들은 긴 해로(海路)에 시달린 피로를 상산포에서 풀 모양이었다. 객점 상산잔은 바닷가에 면해 있었다. 특히 후원의 정자에 오르면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달이 떴다. 암흑에 잠긴 동해로부터 처녀의 얼굴같은 달이 고요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경 말 무렵이었다. 미청년 한 명이 상산잔의 후원에 있는 정자로 오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범선에서 내린 인물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 그는 정자에 오른 후 뒷짐을 진 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미청년은 바다 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달.... 그 얼마나 중원에서 보고 싶었던 달이던가? 특히 그가 떠난 이후로 오늘이 오기를 그토록 기다리며 염원을 빌던 달... 그런데 쌍봉도의 달빛이나 이곳에서 보는 달빛이나 변함이 없구나." 독백하는 것 같은 미청년의 음성은 흡사 여인의 음성처럼 가늘고 맑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미청년의 안타까움이 깃든 중얼거림은 해풍을 타고 흘렀다. "아! 나 설화영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간 그 분......."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리는 미청년. 그는 바로 쌍봉도주의 손녀인 설화영이었다. 그녀는 쌍봉도를 떠나기 전에 남장을 한 것이다. 설화영은 중천으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시름에 젖어들었다. "중원이 대혈륜궁이라는 마도의 무리에 의해 핍박받고 있지 않았다면 난 이곳으로 나오지도 못했겠지.... 이제 이 몸은 제마천문의 문주가 된 이상 소신껏 혈겁을 진압하리라. 그런 후에 천강, 그 분을 찾으리라." 설화영은 이제 제마천문의 문주였다. 그녀는 할아버지인 설붕비로부터 제마천문의 대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과거의 설화영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은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반박귀진(返璞歸眞)의 내공수위를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 문득 설화영은 섬미를 살짝 찌푸렸다. 어디선가 희미한 파공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가닥 흑영이 전면으로부터 떠올랐다. 스슥....... "누구ㄴ!" 설화영은 날카롭게 쏘아부쳤다. 이어 그녀는 즉시 손바닥을 뒤집었다. 쏴아아! 찰나지간 그녀의 손바닥은 천변만화했다. 그 순간 방원 오 장여를 그녀의 장영(掌影)이 뒤덮었다. 실로 가공할 장법이었다. "아!" 정자를 향해 날아들던 흑영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흑영도 만만치 않았다. 그도 역시 설화영을 향해 손바닥을 뒤집어 뿌린 것이다. 그 순간 붉은 빛 한 가닥이 쏘아져 나왔다. 쐐액! "앗!" 설화영은 경악성을 발했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은 뜻밖에도 장력이 아니라 검공(劍功)이었다. 한 가닥 시뻘건 검광이 일직선으로 그녀의 목으로 파고 들었다. 그것은 일체의 변식(變式)조차 없는 지극히 단순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빠르기는 섬전(閃電)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설화영도 고스란히 당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제마천문의 법통을 이어받은 절세고수였다. "흥! 비겁자, 암습을 하다니! 천화불혈수(千花佛穴手)!" 파파파... 팟팟! 날카로운 불꽃이 튕겼다. 그순간 두 사람은 똑같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때였다. "크ㅋ.... 화영. 그 동안 놀랍게 진보했군!" 싸늘하면서도 낯익은 음성이 설화영의 귓전을 울렸다. "누구?" 설화영은 흠칫했다. 스스슥! 흑영은 비로소 신형을 멈추었다. 그 순간 설화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 그는 바로 그녀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정인(情人)이 아니던가?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달빛을 등지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가가! 가가가 맞지요? 이... 이것이 꾸... 꿈은 아니겠지요?" 설화영은 부르짖듯이 외쳤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괴소를 흘렸다. "크ㅋ.... 화영. 분명히 꿈은 아니다." "그... 그럼... 정말 가가인가요?" "후후.... 그래. 난 백천강이 맞다." "아!" 설화영은 탄성을 흘리며 쓰러지듯 그의 품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백천강은 재빨리 위치를 옮겼다. "앗!" 백천강의 품 안으로 뛰어들던 설화영은 그만 난간에 걸려 비틀거렸다. "왜... 왜죠?" 그녀의 안색은 대번에 창백해졌다. 어느새 백천강은 달을 바라보는 위치가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달이 변했다고 느끼는가?" "......?" 설화영은 의아해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달은 언제나 똑같아요." 백천강은 다시 물었다. "후훗.... 그럼 너의 마음도?" 설화영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물론이에요." 그 순간 백천강은 사악하게 웃었다. "ㅋㅋㅋ.... 과연 그럴까?" "가가! 믿어줘요. 소매의 마음은 전과 같아요. 하루라도 가가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설화영은 매달리듯 말했다. "후후.... 그럼 한 가지만 물으마." "......?" "중원에는 무엇 때문에 왔지?" "그건......." 그 순간 설화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백천강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불현듯 가지게 된 불안한 예감 때문이었다. 어느새 백천강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사기가 흐르고 있었다. 백천강은 내처 말했다. "후후.... 제마천문주의 자격으로 무엇을 부수려고 왔지?" "그... 그건......." "크ㅋ.... 필시 혈륜궁을 부수기 위해 광명회의 부탁을 받고 왔겠지?" 바로 그 순간 설화영은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설화영의 안색은 한순간에 새파래졌다. "그럼... 가가는!" "후훗.... 그때 내가 찾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대... 대혈륜서(大血輪書)! 설마!" 설화영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파삭! 그 바람에 난간을 쥔 그녀의 옥지(玉指)가 난간 깊숙이 박혀들고 말았다. 백천강은 두 눈에 푸르스름한 기운을 흘리며 물었다. "ㅋㅋ! 이제 알겠느냐? 나 백천강이 바로 혈륜궁주라는 것을." "아!" 설화영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백천강이 혈륜궁주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몸은 구겨지듯이 땅을 향해 쓰러졌다. 찰나지간 백천강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들었다. "화영. 여전히... 아니 더욱 아름다와졌군." 백천강은 설화영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두른 영웅건(英雄巾)을 벗겼다. 영웅건이 벗겨지자 치렁치렁한 흑발이 탐스럽게 흘러내렸다. 백천강은 흑발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숙명치곤 멋진 숙명이군. 과거에 사랑하던 연인이 현재는 죽여야 할 적이라니......." "그... 그럴 수는 없어요!" 그 순간 설화영은 악을 쓰듯 외쳤다. "제발... 제발......." 그녀는 백천강의 옷깃을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빌테니... 혈수(血手)를 씻으세요. 네?" 백천강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늦었어. 대혈륜은 이미 구르기 시작했다." "가가... 제발!" 설화영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요지부동이었다. "네게 보여줄 게 있다." 백천강은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 "......?" "후훗.... 본좌가 가는 길은 패(覇)의 길이다. 그 길을 가는 데는 정을 끊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온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단정(斷情)......!" 설화영의 옥용은 더욱 하얘져갔다. 백천강은 괴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크ㅋ.... 과거는 흘러갔다. 남은 것은 각자의 길이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은 나의 마음에서 너를 지우고, 너의 마음에서 나를 지우는 일이다." "그... 그럴 순 없어요!" 설화영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백천강은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후후.... 달이 밝군. 일다향(一茶香)을 나눌 시간은 되겠지." 백천강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 설화영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새 백천강의 뒷모습이 후원을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만요." 설화영은 불현듯 외치며 그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③ 백천강은 설화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곳은 상산잔의 별채였다. 백천강은 먼저 의자에 앉았다. "앉지." 그는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설화영은 다소곳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 한순간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방 한쪽의 휘장이 쳐진 곳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곳은 침상임이 분명했다. 뜻밖에도 침상 위에 누군가 누워있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손님이... 오셨나요?" 침상에서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인의 음성에는 비음이 섞여 있었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달콤한 음성이었다.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 차를 부탁한다." "호호.... 알겠어요." 요염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인은 침상에서 일어섰다. 부드러운 휘장이 걷히면서 한 여인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바로 전랑이었다. 놀랍게도 전랑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속이 환히 내비치는 잠자리 날개같은 야의를 입고 있었다. 그 때문에 풍만한 젖가슴과 두 다리 사이의 삼각비역이 훤히 드러났다. "흑!" 그 순간 설화영은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냈다. 이어 그녀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백천강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아이, 밤 늦게 나가시더니 손님을 데려 오셨군요." 전랑은 애교를 부리며 백천강의 목에 두 팔을 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뒤에서 자신의 풍만한 젖가슴을 밀착시켰다. "후후.... 옛 친구다. 차를 끓여 주겠느냐?" 백천강은 기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전랑의 탐스러운 둔부를 쓰다듬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 설화영이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후려쳤다. 그녀의 두 눈은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백천강을 노려보며 외쳤다. "크흐흑! 당신은... 변했군요!" 백천강은 전랑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괴소를 터뜨렸다. "ㅋㅋ! 세상이 변했는데 나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있느냐?" "아, 악마! 내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쐐액!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화영은 소매 속에서 시퍼런 단검을 꺼냈다. 이어 그녀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검을 찔렀다. 푹! 단검은 여지없이 백천강의 복부에 꽂혔다. "푸훗! 단정검(斷情劍)인가? 이것으로 우리의 정은 모두 끊어진 셈인가?" 백천강은 괴소를 흘렸다. 그는 복부에 단정검을 꽂은 채 공포에 질린 전랑을 끌어 안았다. "훗훗.... 오늘밤은 몹시 힘이 솟는다. 이 계집과 못다 나눈 운우(雲雨)를 즐겨야 하겠군." 백천강은 전랑의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움켜 쥐었다. 그리고는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흐흑! 너를... 너를... 죽이겠다. 반드시!" 설화영은 백천강을 노려보며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발을 굴렀다. 휘익! 그녀의 신형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백천강은 침상에 전랑을 쓰러뜨렸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의 한 겹 옷을 찢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서는 시퍼런 광기(狂氣)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흐흑... 가... 시렵니까?" "가야 한다." "이대로 영원히 끝... 이옵니까?" "애당초 알았던 일이 아니냐?" "하지만......." 전랑은 침상 위에서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백천강은 묵묵히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희디흰 무릎 아래의 침상보에는 한 점 앵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단 한 번 뿐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그 한 번만으로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백천강의 음성은 싸늘했다. "흐흐흑!" 마침내 전랑은 엎드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백천강은 돌아섰다. 그의 등은 한없이 높고 멀어 보였다. 그는 전랑의 애처로운 흐느낌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이제 모든 것을 끊었다. 남은 것은 대혈륜(大血輪)을 세차게 굴리는 일뿐이다." 백천강은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직 끊어야 할 것이 남았어요!" 문득 차가운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었다. 인영은 청의를 입은 미소년이었다. 언뜻 보기에 미소년은 남장을 한 설화영을 닮아보이기도 했다. "......." 백천강은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년의 정체를 파악했다. "후훗.... 설운정(薛雲貞), 너였구나." 백천강은 빙긋 웃었다. 미소년은 바로 설운정이었다. 그녀는 남장을 한 채 안색을 싸늘히 굳히고 그를 가로막은 것이었다. 어느새 설운정은 완연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토록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에서는 이제 소녀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아는 아직 끊지 못했어요!" 설운정은 백천강을 노려보며 야멸차게 말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너를 생각지 못했군." "생각 못했다고요? 이... 정아가 그동안 얼마나 가가를 그리워 했는데!" "후훗... 그랬었나?" 백천강은 냉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조소하듯 말을 이었다. "분명히 말해두지. 지금 방 안에 있는 여인처럼 내게 정을 단 한 번 바치고도 만족하는 계집들이 숱하게 많다는......." "닥쳐요!" 설운정은 차갑게 외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가가가 이렇게 변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차라리......." "차라리?" "정아의 손으로 가가를 죽이고... 정아도 따라 죽겠어요!" 백천강은 괴소를 흘렸다. "ㅋㅋ.... 그렇게 될까?" 그때였다. 설운정은 품 속에서 검은 구체(球體)를 하나 꺼냈다. "이게 뭔지 아세요? 가가?" 순간 백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벽력참혼주!" 벽력참혼주(霹靂斬魂珠). 그것은 삼백 년 전 화기(火器)의 명가인 뇌공(雷公)이 남겼다는 전설적인 화탄이었다. 그것은 한 번 폭발하면 방원 오십 장이 초토화되어 버리는 엄청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백천강은 일그러진 안색으로 물었다. "그것을 터뜨릴 셈이냐?" 설운정의 음성은 싸늘했다. "그래요. 차라리 가가와 함께 저승으로 가겠어요. 이승에서 맺을 수 없는 인연이라면!" "도... 돌았군!" 백천강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돌았어요. 앞장서요!" 설운정은 내처 말했다. "어디로?" "이곳에서 터뜨릴 순 없잖아요!" "음!" 백천강은 신음을 흘렸다. "가가가 앞장서요. 명심할 것은 절대... 소매에게서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서도 다가와서도 안 되요!" "좋다." 휙... 휘익! 두 남녀는 앞뒤로 신형을 날렸다. 월광 아래 그들의 신형은 빛살처럼 사라졌다. ④ 쏴아아아....... 어둠을 뚫고 밀려온 밤파도가 포말을 내며 부서졌다. 월광 아래서 부서지는 파도는 더욱 아름다웠다. "......." 백천강과 설운정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들은 달빛을 받으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설운정의 얼굴에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가와 화영언니가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꼈어요." "......." "가가가 혈륜궁주라니... 저는 믿을 수 없어요. 우리 자매가 제마천문을 이끌고 중원에 온 이유가 바로 혈륜궁을 결파하기 위해서인데... 결국 제가 가가와 싸워야 하는 운명이란 말인가요?" "......." 백천강은 눈을 번뜩이며 설운정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전신 내공을 극(極)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일섬(一閃)의 기회라도 포착되면 그는 서슴없이 손을 쓰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소매는 결정을 내렸어요. 가가와 함께 죽어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설운정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밤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그녀는 물기어린 눈으로 백천강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망울 속에는 뜻밖에도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마세요. 가가가 아무리 경공이 빠르다 해도 단숨에 오십 장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쏴아아아....... 파도가 또다시 밀려들며 포말을 흩뿌렸다. 바람에 날린 차가운 포말이 두 사람의 얼굴을 적셨다. "......." 그녀는 서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 순간 흑색의 구슬은 손바닥 한가운데서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흔들렸다. "새... 생각을 돌려라!" 백천강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설운정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더 큰 비극이 오기 전에... 차라리 이 편이 나아요." 설운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침내 손바닥을 기울였다. "사랑... 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바보!" 백천강은 벼락치듯 외치며 쌍장을 쳐냈다. 펑! "아악!" 설운정은 백천강의 장력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벽력참혼주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순간 백천강은 전 힘을 다하여 신형을 날렸다. 꽈르르릉... 콰콰콰쾅....... 천번지복(天飜地覆)을 능가할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아 근처 십여 장을 완전히 화염으로 뒤덮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폭발이 일어난 사방 오십여 장은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폭발로 주위는 완전히 으스러져 버린 것이다. 휘우우웅....... 뜨거운 열기를 품은 폭풍은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폭풍은 찰나지간 모든 것은 휩쓸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모래먼지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해변가에 정적이 찾아 들었다. 쏴아아... 철썩... 쏴아....... 백사장을 때리는 무심히 파도소리만 드높았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 으......."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음소리는 해변가의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폐허가 된 돌멩이 투성이 속에서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인영의 의복은 갈갈이 찢어져 있었다. 그의 머리칼은 완전히 그슬려 있었다. 찢어진 의복 사이로는 피가 점점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결국 백천강은 엄청난 폭발 속에서도 살아난 것이다. "크ㅋ.... 이까짓 화탄에 죽을 본좌가 아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백천강은 말했다. 이어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리석은 계집.... 결국... 피모래가 되었단 말인가?" 한순간 그의 입에서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 문득 백천강의 충혈된 눈이 혈광을 발산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한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설운정은 모래구덩이 속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광경은 실로 참혹무비했다. 설운정의 사지는 말짱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사지가 떨어져 나간 것 이상으로 참혹했다. 그녀는 백천강의 일장을 맞아 내장이 뒤틀린데다 벽력참혼주의 폭발로 인해 전신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는 백천강의 장력을 맞고 웅덩이 속에 떨어져 분시(分屍)되는 것만은 면한 것이다. 백천강은 급히 그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때였다. "가... 가가... 저를... 꼭... 안아줘요." 죽은 줄 알았던 설운정이 기어 들어가는 음성을 흘렸다. "......!" 백천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 소매는... 후회... 안 해요... 다만... 가가와 함께... 가지 못한 것... 미안해요." "......!" 그 순간 백천강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설운정을 끌어 안았다. 그 순간 백천강의 심장은 무섭게 경련했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즉시 설운정의 명문혈에 장심(掌心)을 붙였다. 우웅....... 백천강의 머리 위에 자광(紫光)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마공(魔功)을 끌어올린 것이다. 그때였다. "아악!" 설운정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체내로 마공지기가 흘러들어오는 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낀 것이다. "......!" 백천강은 급히 마공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즉시 설운정을 내려다 보았다. 마공지기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비참해 보였다. 한순간 그의 얼굴이 씰룩였다. "마공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한순간 백천강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잠시 후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우웅! 이번에는 완전히 반대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자광 대신에 그의 안색이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뒤를 이어 전신에 현기가 감돌았다. 스스스! 어느새 그의 얼굴에 어려있던 사기(邪氣)와 마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백천강은 완전히 대정인(大正人)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우우웅... 스스스....... 백색기류가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일각 후 백색기류는 그의 손가락을 통해 설운정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음." 설운정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그때였다. "아... 가가!"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손을 뻗어 백천강을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렀다. "흐흑... 가가... 옛날대로... 돌아와 주셨군요... 흐흑." 백천강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그런데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멍청한 표정으로 설운정을 내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백천강의 얼굴에는 마기(魔氣)라고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옛날로? 내가?" 백천강은 멍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바로 제마천무심법기해(制魔天氣心法氣解)의 광명대현령기(光明大玄靈氣)를 운공한 것이다. 광명대현령기. 그것은 고금제일의 파사신공(破邪神功)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운공하는 순간 그의 혈맥은 광명대현령기로 인해 마심지기(魔心之氣)를 몰아낸 것이었다. 물론 가공할 기환만겁윤회마공의 마공지기는 완전히 소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파사(破邪)의 기운에 말렸을 뿐이었다. "아! 정아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어요... 가가의 품에 안겨 있으니......." 설운정은 입과 코로 검은 피를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실상 가망이 없는 몸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녀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설운정의 밝아졌던 얼굴이 다시 검어졌다. "어지러워요... 가가... 정아는... 자고 싶어요... 그런데......." 설운정은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려 했다.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혈륜궁을 치는 계획... 가가는 달아나야 해요... 이것을......." 설운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품 속에서 피묻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혈륜궁을 치는 계획의 일부가... 가가... 아주 멀리... 달아나세요... 언니와 함께... 부탁... 부탁...이에......." 설운정의 눈은 마침내 감기고 말았다. 죽음 직전에 그녀의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와락! 백천강은 두루마리를 움켜쥔 채 벌떡 일어났다. 찰나지간 그의 맑던 얼굴이 검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검게 변한 얼굴은 다시 푸르게 변색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마심(大魔心)이 다시 찾아왔다는 증거였다. 백천강은 푸른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거둔 설운정을 내려다 보았다. 다음 순간, "우우우... 우......." 그의 입에서는 대마후(大魔吼)가 터져 나왔다. "크핫핫! 이제야 모든 것을 끊었다. 남은 것은... 피의 혈륜을 굴리는 일뿐이다. 크핫핫!" 휘익! 백천강은 으시시한 광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느새 동해 바다로부터 여명이 터오고 있었다. 백천강은 여명을 배경으로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갔다. 35장 뜻밖의 패배(敗北) ① 광명각(光明閣)이었다. "......." 육층의 밀실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광명대회주인 사유성과 백문선생 우문기였다. 탁자 위에는 수북이 쌓인 전서(傳書)가 있었다. 그것을 읽는 사유성의 눈빛은 예리하게 번뜩였다. 잠시 후.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정말 큰 일을 해낸 셈이오." 백문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이는 하늘이 광명회의 승리를 바라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보다도......." 백문선생은 말을 끊었다. 순간 사유성은 백문선생을 감탄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선생의 낭중지침계가 성공했기 때문이오." "허허! 별말씀을, 회주께서도 생각하신 바가 아니오?" "어쨌든 동심회(同心會)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오. 특히 일비(一秘)의 힘은 정말 컸소." "허허.... 일비는 노부의 친구이오. 그는 강호평화를 위해 배전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서로를 칭찬하며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탁자 위에 수북히 쌓인 전서(傳書)들은 무림일비를 주축으로 한 동심회 일원들이 제각각 보낸 것이었다. 무림 팔공자들이 새로이 만든 동심회는 대혈륜궁에 잠입해 있었다. 그것은 극비사항이었다. 대혈륜궁에 잠입한 그들은 꼬박꼬박 전서를 보냈다. 그 전서의 종착지는 백문선생이었다. 결국 동심회는 광명회의 첩자(諜者)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동심회의 회주라고 할 수 있는 옥운생(玉雲生)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석몽화를 비롯한 나머지 팔공자는 자신들이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사유성은 전서를 모두 읽고 몸을 일으켰다. "차츰 대전(大戰)의 날이 무르익고 있소. 제마천문의 고수들도 중원에 상륙했다는 연락이 왔소. 뿐만 아니라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던 의협(義俠) 기인이사들이 속속 본회로 몰려오고 있소!" "......." "하하! 사필귀정의 법칙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오. 거사의 날은 다가오고 본 광명회의 사기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소." "......." 백문선생은 빙그레 웃었다. 사유성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작성하신 대천문역쇄팔로천계(大天門逆碎八路天計)의 대공격을 실시하면 혈륜궁은 하루 안에 완전히 초토화될 것이오. 하하핫!" "헛헛헛! 하늘이 한 명의 위대한 영웅을 탄생케 하실 모양이오." 백문선생은 너털웃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사유성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동쪽으로부터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유성은 여명을 주시했다. 밝아오는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유성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정했소. 광명회 팔로천군(八路天軍)의 출병일은 팔월 초일(初日)이오! 혈륜궁을 무너뜨리는 날은... 십오일이 될 것이오!" "......!" 백문선생의 검미가 그 순간 파르르 떨렸다. ② 대혈륜궁의 밀전. 스스스! 한 혈의인이 밀전 중앙의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푸르스름한 사기가 떠올라 있었다. 혈의인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의 안색은 거의 청면(靑面)에 가까웠다. 특히 두 눈은 벽안과도 같았다. 백천강의 등뒤로는 흑의를 입은 열 명의 남녀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극락십령(極樂十靈)이었다. "......." 재보 화양금, 즉 모용란이 백천강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장부가 들려 있었다. <대혈륜궁입궁자명부(大血輪宮入宮者名簿)> 장부에는 그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백천강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 책에 모두 몇 명이 실려 있느냐?" 모용란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총... 십팔만 정도 됩니다." "......." 그 순간 백천강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십팔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숫자의 마두들이 대혈륜궁에 모여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최근에 입궁한 자들의 명부는?" 모용란은 두터운 장부의 끝부분을 넘겨 받쳐 올렸다. "......." 백천강은 눈으로 살펴보았다. 사삭... 삭....... 책장은 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넘어갔다. 그것은 바로 가공할 무형이기공(無形以氣功)이었다. "......." 백천강의 눈이 벽광을 뿜었다. - 동심십우(同心十友). 그런 이름이 책장의 끝부분에 적혀 있었다. 백천강은 기광을 번뜩이며 물었다. "동심십우... 이들은 모두 어디 있지?" 모용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본궁의 법대로 모두 분산되어 있습니다. 각자 칠십이각(七十二閣)에 소속된 것으로 압니다." "그들을 시험하는 자는 누구냐?" "천마부의 입궁당주 혈살제(血殺帝) 염악군(閻惡君)입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동심십우의 소속을 알아오라." "알겠습니다." 모용란은 절한 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잠깐 애틋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밀문을 통해 사라졌다. "훗훗.... 동심십우라. 그럴 듯한 이름이군." 백천강의 입가에 으시시한 미소가 어렸다. 동심십우. 그들은 이 개월 전 혈륜궁에 가입했다. 동심십우는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의형제들로 구성된 그들은 혈륜궁에 가입한 후 각자 분산 배치되었다. 그것은 혈륜궁의 방식이었다. 동심십우의 우두머리는 동심대형(同心大兄) 철무기(鐵武奇)였다. "......." 그는 칠십이각중 회륜각(回輪閣) 소속이었다. 비록 요직을 맡지는 않았으나 그는 회륜칠십이살천 중의 한 명이었다. 지금 철무기는 한 석실에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석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한 인물이 들어선 것이었다. "......!" 철무기는 흠칫했다. 그는 급히 쓰던 밀지를 감추고 돌아섰다. 한 명의 푸르스름한 사기를 두른 혈의인이 서 있었다. 그를 본 순간 그는 아연했다. "구... 궁주님께서!" 그는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그대가 동심대형인가?" 백천강은 무심히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동심대형 철무기는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는 사순(四旬)의 텁석부리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의 예리한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백천강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훗훗.... 옥운생(玉雲生), 네가 아무리 절묘하게 변장하고 있다해도 나는 너를 알아 볼 수 있다.' 이어 그는 의자에 앉았다. "남해에서 왔다고?" "해남(海南) 오지문(五指門)출신입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검파(五指劍派)가 이백 년 전에 절문(絶門)되었다는 것은 풍설인가?" 그 말에 철무기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동심십우 의형제는 원래 낭인(浪人)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해남도(海南島) 오지산(五指山)에서 오지검파의 검경(劍經)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오지검파의 맥을 이었습니다." "......." 백천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해남검파는 정사중간(正邪中間)으로 알고 있다. 굳이 본궁을 택한 이유는?" 옥운생은 힘차게 말했다. "그건 날개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날개라고?" "황송하오나 혈륜궁의 힘을 빌어 단시일 내에 본문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심이 크군." "감히......." "지금에 만족하는가?" 그 말에 옥운생은 고개를 벌떡 치켜 들었다. "불만입니다." "왜지?" "속하는 적어도... 일원(一院)쯤은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무공에 자신이 있단 말인가?" "형제아우들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백천강의 눈에서 푸른 빛이 번뜩였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본궁은 항상 능력자를 환영한다. 기회를 열어주마." 그 말에 옥운생의 털로 뒤덮인 얼굴이 해맑게 찢어졌다. 혈월장(血月場). 그곳은 대혈륜궁의 십이장 중 하나였다. 방원 삼백 장의 넓이를 가진 혈월장은 방대한 혈륜궁의 고수들이 자리다툼을 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곳이었다. 바로 비무(比武)를 통해 지위고하를 가리는 곳이 혈월장이었다. "......!" 동심십우는 혈월장의 비무석대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심판대에 오른 것이었다. 그들은 입궁한 지 불과 이 개월만에 삼십육원(三十六院)의 원주자리에 도전한 것이었다. "미친 놈들!" "건방진 피라미놈들!" 근 오백여 명에 달하는 마도인들의 눈초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특히 상대자로 지목된 열 명의 원주들의 얼굴에는 살기(煞氣)가 충만했다. 혈륜궁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동심십우를 꺾어야만 원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혈(血), 살(煞), 사(死), 냉(冷), 염(焰), 혼(魂), 마(魔), 사(邪), 유(幽), 귀(鬼) 등의 이름이 붙은 십대원주들은 가공할 마파(魔派)의 수뇌들이었다. 개중에는 백 세가 넘는 노마두도 있었고, 수십 년 전 중원천하를 시산혈해로 만들었던 공포의 혈마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동심십우의 도전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십대원주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일이었다. 둥....... 북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혈륜궁주 백천강이 나타났다. 그는 중앙의 태사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등뒤에는 극락십령이 시립해 있었다. 혈륜육신(血輪六臣)을 비록하여 일부삼전(一府三殿)의 쟁쟁한 고수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로 혈월장은 살벌하고도 엄숙한 분위기였다. "크크크ㅋ! 애송이놈, 너를 피떡으로 만들어주마!" 쉬잇! 혈원주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칠십 년 전 혈혈두태(血血斗太)라는 별호를 가진 아수라왕이었다. 둥....... 또 한번 북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파앗! 동심대형 철무기는 허리춤에서 철검(鐵劍)을 뽑았다. 그때였다. "크카카캇! 뒈져랏!" 쐐액... 츠츠츠... 츳! 용호상박의 대격전이 벌어졌다. 신형이 어지러이 얽히며 장경과 검강이 장내를 소용돌이쳤다. 싸움은 격렬했다. 동심대형 철무기는 다소 열세인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혈혈두태의 동작은 점점 둔해졌다. "해남파(海南派)... 천(天)... 검류(劍流)......." 마침내 철무기의 입에서 냉갈이 터졌다. 파츠츠츳......!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피분수가 솟구쳤다. 어느새 혈혈두태의 목 중심부에는 철검이 꽂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찰나지간 혈혈두태의 두 눈알은 툭 튀어 나왔다. "미... 믿을 수... 없다. 이럴 수...가 ...큭!" 쿵! 혈혈두태는 온통 회의하다가 고목처럼 쓰러졌다. 스슷! 철무기는 철검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전광처럼 신형을 돌려 백천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겼습니다!" 백천강의 벽안이 빛을 발했다. "해남파천검류라... 과거보다 배나 강한 것 같군." "......!" 철무기의 안색은 그 순간 약간 변했다. 백천강은 음랭하게 말했다. "동심대형 철무기를 혈월주로 인정한다. 다음!" 둥.......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우우!" 마도인들은 전율했다. 파팟... 콰르릉....... 동심이형(同心二兄) 문세광(文世光)과 살원주(煞院主) 인육도마(人肉道魔)와의 결전이 속개되었다. 문세광 역시 검을 썼다. 인육도마의 대혈혈마도(大血血魔刀)에서는 가공할 혈도광이 폭사했다. 그들의 숨막히는 대결은 백초(百招)를 경과했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번쩍... 슈슈... 악....... 한순간 인육도마의 몸뚱이는 오분시(五分屍)되었다. 토막난 그의 몸뚱이는 피비(血雨)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치 자신이 수없이 타인의 몸을 토막쳤듯이. "새로운 살원주 동심이형 문세광!" 백천강의 냉음이 장내를 울렸다. 피비린내나는 비무는 계속되었다. "으으!" "이럴 수가!" 관전하던 마도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회의가 떠올랐다. 동심십우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애송이들은 연승에 연승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모두 절륜했다. 그들은 비록 한결같이 해남 오지검파의 검법을 쓰고 있었으나 최후의 살초는 각기 불가사의했다. 그것은 마도류와는 상반(相反)된 정공(正功)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주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무가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동심십우는 가차없이 구원주를 도륙했던 것이다. 아무리 비정한 마도인들이었으나 그들은 점차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태사의의 백천강은 웃고 있었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여라... 훗훗... 너희들이 도륙한 피만큼.... 앞으로도 너희들이 피흘릴테니 말이다. 너희들은 한 걸음 더 깊숙이 함정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두... 웅.......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공포의 비무는 속개되었다. 동심십우의 무공은 확실히 고강했다. 그들은 차례로 삼십육원의 원주 지위에 올랐다. "크아아악!" 마지막 승부였다. 그리고 그 승부는 완벽했다. 동십십제(同心十弟), 즉 석몽화의 검은 귀원주(鬼院主) 귀마루왕(鬼魔褸王)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심십우는 이제 혈륜궁의 심장부의 주요인물로 부각된 것이었다. 그들은 승리의 기쁨으로 인해 자신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스스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동심대형 철무기의 얼굴에는 의혹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되다니......?'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백천강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이미 백천강은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③ 팔월 초일(初日). 그날은 무림사상 중대한 의미가 부여된 날이었다. 그날 극비밀리에 숭산의 태실봉의 대광명회는 문을 닫았다. 하루 전날 밤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인물로 변장하여 태실봉을 내려갔다.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바로 제마멸사(制魔滅邪)의 굳은 신념으로 인해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대행진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행진이었다. 그것은 바로 의(義)를 내건 결사의 행진이었다. 아주 조용히 중원의 하늘에는 피구름이 뒤덮이기 시작했다. 팔월 오일... 십일.......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행진의 향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원사방에서 시작된 행진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대별산(大別山)이었다. 번쩍... 꽝... 콰르르르....... 먹장구름이 가득 뒤덮인 하늘에서 벽력이 쳤다. 뒤이어 폭우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 쏴... 아아아....... 그러나 대별산으로 향하는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폭우를 맞으면서 중원천하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의 모습은 가히 노도와도 같았다. 팔월 십이일. 끊임없이 이어진 행진은 사천(四川)과 섬서(陝西), 호북(湖北)의 접경으로 몰려들었다. 노인, 거지, 농부, 여자, 표사( 士), 중(僧), 도사(道士)...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들이 대별산 산역으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투지에 불타고 있는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았다. 상전(桑田). 대별산에서 서쪽으로 백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뽕나무밭이 있었다. 그 뽕나무밭은 수십 년은 족히 넘은 곳이었다. 그런데 약 반 년 전에 뽕나무밭의 주인이 바뀌었다. 새로 뽕나무밭의 주인이 된 사람의 이름은 상무해(桑武海)였다. 그는 육순쯤 된 노인이었다. 그가 상전을 사들인 것은 육개월 전의 일이었다. 상무해는 그 후 이상한 공사(工事)를 했다. 그는 상전의 수로(水路)를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 상무해는 한길 깊이의 수로를 파 항상 충분한 물이 상전 사이로 흐르게 했다. 멀리서 보면 상전 사이를 바둑판처럼 가르며 흐르는 수로가 보였다. 그것은 몹시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뽕나무는 그로인해 무성하게 자랐다. 얼마 전까지도 그는 수로공사를 계속했다. 상전의 수로공사가 전부 끝난 것은 팔월 십삼일이었다. 번쩍... 꽈르르릉....... 섬전은 먹장구름 덮인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한순간 섬전의 광휘에 상전의 정경이 드러났다. 바로 그 순간 눈이 있는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다. 상전 사이를 흐르는 수로를. 그것은 마치 미로(迷路)같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것은 어떤 진도(陣圖)같기도 했다. 상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정(山頂)에 삼인의 인영이 있었다. 꽈르릉....... 벼락이 산정 근처에 떨어졌다. 그 빛에 의해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도롱이와 우장을 걸치고 있었다. 한 명은 유삼의 중년문사요, 한 명은 기도가 비범한 백의청년이었다. 그들은 바로 백문선생 우문기와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그리고 그들 옆의 바닥에 초로의 노인이 엎드려 있었다. 그는 바로 상전의 새로운 주인인 상무해였다. 백문선생이 물었다. "상노제(桑老弟), 전도(戰圖)는 완성시켰는가?" 상무해는 비를 흠뻑 맞은 노안에 자부심어린 웃음을 흘렸다. "허허.... 다행히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는 거대한 상전을 가리켰다. "......!" 사유성은 눈아래 환히 보이는 상전을 바라보았다. "으음! 대천문역쇄팔로천도(大天門逆碎八路天圖)... 정말 놀라운 대사(大事)이요." 사유성의 입에서 감탄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백문선생이 거들었다. "허허.... 이제 저 전도에 따라 대세가 가름될 것입니다. 비록 예상치 않은 폭우로 인해 약간 지장이 있겠으나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될 것입니다. 하늘이 정도의 편인 이상......." 쏴아아....... 세찬 폭우가 그의 말을 가렸다. 사유성은 유심히 상전을 내려다봤다. "전도를 보니 팔로천군(八路天軍)은 모두 당도했소. 남은 것은......." "출병(出兵)입니다." 백문선생이 말했다. 사유성은 상무해에게 물었다. "전황(戰況)을 그때 그때 작성할 자들은 제 위치에 들었소?" 상무해는 자신있게 말했다. "상전의 수로 요충에 매복했습니다 폭우가 내려 물이 불긴 했으나... 물줄기를 바꾸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황하수룡보(黃河水龍堡) 출신의 수부(水夫)들입니다." 사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빈틈없이 해내야 하오. 실상 그들의 기민성에 이번 거사의 성패(成敗)가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오." "염려 마십시오. 회주!" 사유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우르르... 우르르릉....... 뇌음(雷音)이 진동하는 하늘의 먹장구름 속에 갇힌 태양을 보려는 듯이. 한순간 죽립 속의 그의 눈이 번쩍였다. 대별산의 망망봉(忘忘峯). 망망봉은 대별산의 팔십이봉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거대한 괴석으로만 이루어진 봉우리였다. "크크ㅋ! 이제 시작되었다. 대혈륜을 굴릴 차례가 되었다." 쏴아아....... 세찬 빗줄기 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기(魔氣)에 가득 찬 음성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망망봉 정상에는 한 혈의인이 우뚝 서 있었다. 혈의인의 주위에는 마인(魔人)들 백여 명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가공할 살기가 흘러나왔다. "훗훗훗! 광명회는 백 리(百里) 안으로 가까와졌다. 그들은 무덤으로 다가오고 있다. 본좌는 그들을 모두 합장시킬 셈이다." 그것은 바로 백천강의 음성이었다. 백천강. 그는 이제 혈륜왕으로 불리웠다. 혈륜왕 백천강은 먹장구름으로 가득찬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ㅋㅋ...! 하늘은 마를 돕는다. 이 폭우가 그 증거이다. ㅋㅋ! 놈들은 어둠을 싫어하지. 이 어둠이 깃든 동안에 놈들은 철저히 무너지리라! 크하하하핫!" 그의 웃음소리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대마후(大魔吼)였다. 그것을 듣는 순간 마인들조차 가슴이 떨리고 안색이 변했다. 뒤이어 그들은 전신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백천강은 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설운정이 죽으면서 그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차르륵....... 그는 그것을 펼쳤다. 내리는 비는 그의 몸 일 장 주변에서 무형강기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백천강은 두루마리를 주욱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그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으음, 놈들이 이런 무서운 공법(功法)을 쓸 줄이야.... 대체 누가 있어 이런 가공할 병술(兵術)을 쓴단 말인가?" 백천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것은 무서운 병술이다! 놈들은 모두 팔로로 나뉘어 본궁을 짓쳐 들어올 것이다. 이것에는 그 중 일로(一路)가 씌여 있다. 만일 이것을 얻지 못했다면!' 백천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머지 칠로(七路)는 예측불허다. 만일 놈들을 저지하지 못하면... 본궁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백천강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일단 일로를 파악했으니 철저히 부수어야 한다. 철저히.... 선봉은 제마천문이다. 제마천문.......' 문득 그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문득 그는 뒤를 향해 외쳤다. "위지 총호법! 오늘이 며칠이오?" 그 말에 천마부주 위지경이 급히 대답했다. "팔월 십사일입니다." "훗훗.... 그럼 전야(戰夜)의 혈제(血祭)를 벌여볼까?" "넷?" "......?" 마인들의 얼굴에 의혹이 드러났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이제 대혈륜이 구르리라. 철저히 짓밟고 뭉개면서... 영세제일마궁인 본궁의 천하를 위해 마음껏 구르리라!" 우르르릉... 콰앙. 근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④ 대별산 동서쪽의 기슭이었다. 하나... 둘....... 아니, 그렇게 세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인영이었다. 쏴아아....... 폭우 속에 밤은 깊을 대로 깊은 시각이었다. 그런 시각 음침한 하나의 산곡(山谷)을 따라 유령처럼 움직이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투혼(鬪魂)으로 인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부산히 움직이는 인영들의 숫자는 수천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우살진(花雨煞陣)을 펴라. 신중히....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총공격은 얼마 남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는 어둠 속이었다. 격동에 찬 음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하나의 거대한 천막이 처져 있었다. 천막 속에는 화섭자(火攝子)가 활활 타고 있었다. 화섭자를 가운데 두고 사십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심각한 안색으로 하나의 도해(圖解)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남장을 한 제마천문주 설화영이 있었다. "......." 그녀의 눈에는 반짝이는 눈물과 함께 독기(毒氣)가 흐르고 있었다. '흐흑! 운정을 죽이다니...? 너를... 널 처참하게 죽여 복수할 것이다!' 설화영은 가슴 속에 복수의 칼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백천강에 대한 복수심이 유황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남은 것은 날이 밝기 직전 총공격하는 거예요. 진세는 마무리 중이고.... 계획대로라면 혈륜궁의 마도 일각은 우리의 공격에 완전히 무너질 거에요!" "......!" 사십여 명의 중인들의 눈에서는 일제히 강렬한 신광이 번쩍였다. 그들은 바로 제마천문의 제마위대(制魔衛隊)의 영수들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팔순이 넘었다. 내공은 근 일백 년 수위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 대마성과의 혈전 때 크게 위용을 떨친 자들이었다. 꽈르르르릉....... 먼곳에서부터 낙뢰(落雷)가 울렸다. 그 순간 천막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때였다. "아니?" 갑자기 설화영의 고운 일색이 크게 변했다. "......?" 제마위대의 영수들은 의아했다. 그 순간 설화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비... 비명을 듣지 못했나요?" "비명이라구요?" 영수들은 모두 노안을 찌푸렸다. 그들은 폭우와 뇌성 밖에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꽈르릉....... 다시 한 차례의 뇌성이 울렸다. 뒤이어 요란한 폭우음이 천막의 지붕을 뚫을 듯이 울리며 지나갔다. 쏴아아... 쏴아아....... "대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까?"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해 했다. "비명이 틀림 없어요! 곡외(谷外)에 변고가 생겼어요!" 설화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 갑자기 폭우를 뚫고 처절한 비명이 들려온 것이다. "변괴(變怪)다!" "기습(奇襲)이란 말인가?" 중인들은 안색이 질리며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죽음의 혈제(血祭)가 폭우 속에 베풀어지고 있었다. "막아라! 혈륜궁의 기습... 아아악!" "크아악!" 산곡은 어느새 지옥의 문으로 화하고 있었다. 수천, 아니 일만이 넘는 괴영(怪影)들이 폭우를 뚫고 기습해 온 것이다. "크크크...! 정파의 조무래기를 씨도 남기지 말아라!" "핫핫핫...! 혈륜궁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피의 회오리가 산곡을 휩쓸기 시작했다. 산곡에서는 폭우로 인한 내(川)가 만들어져 콸콸 흐르고 있었다. 아니었다. 그것은 폭우의 내가 아니라 피의 내(血川)였다. "으아아아악!"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불어닥친 엄청난 대기습이었다. 그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가공할 혈륜궁의 전대마도인(前代魔道人)들이었다. 싸움은 기선을 잡는 것이 승리의 상책(上策)이었다. 뜻밖에도 제마천문의 군웅들은 기선의 허(虛)를 찔린 것이다. "......!" 설화영은 안색이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어째서 노출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아수라지옥이 따로 없었다. 산곡은 바로 아수라지옥의 무덤이었다. "제마위대 영수들... 빨리... 제 위치로 가세요. 전력으로 마도들을 막아요!" 휘익! 설화영은 창망하게 외치며 교구를 날렸다. 그녀의 봉목(鳳目)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휘휘휘휙! 제마위대의 영수들도 어지럽게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전세(戰勢)는 이미 기울어진 후였다. "이... 이럴 수가!" 설화영은 엄청난 충격에 신형을 가눌 바를 몰랐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쏴아아....... 폭우가 쏟아져 내(川)를 이루었으나 흐르는 물은 혈천(血川)이었다. "오오... 이럴 수가!" 찰나지간 설화영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다음 순간, 차아앙! 그녀는 허리춤에서 제마천위검(制魔天威劍)을 뽑아들었다. "마도! 지옥으로 보내주겠다!" 설화영의 몸은 신검합일(身劍合一)되어 전광처럼 쏘아갔다. "크하하핫...! 죽여라. 죽여!" "크크크... 너희들의 피냄새를 기다린지 오래다. 크크ㅋ!" "크아악!" 바로 그때였다. "제(制)... 마(魔)... 파(破)... 천(天)... 무(舞)......!" 산곡을 울리는 처절한 외침이 터졌다. 쓰쓰쓰... 쓰....... 그 순간 예리하고 가공할 검기가 폭우를 뚫었다. "크아아아악!" "케에엑!" 마도들의 목과 허리, 팔다리가 허공으로 분시(分屍)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폭우 못지않게 쏟아지는 혈우(血雨) 속에서 제마천문의 군웅들은 환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가까스로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제마천문주시다!" "차앗! 사필귀정(事必歸正)......." "크아아악!" 지옥의 혈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싸움은 극(極)과 극을 이루며 계속 되었다. 죽고 죽이는 혈무는 계속되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적을 죽여야 했다. 내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적을 쓰러뜨려야 했다. 차아앙! "크아악!" 섬화(閃花)가 밤하늘을 찢어 발겼다. 그 순간 참혹한 아수라지옥도가 드러났다. "흐흐흑...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모두... 모두... 쓰러지다니! 크흐흐흑!" 설화영의 몰골은 참혹했다. 그녀는 어느새 혈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영웅건은 벗겨져 달아난 지 오래였다. 탐스러운 머리칼은 비와 피에 젖어 둘러붙었다. 고운 옥용은 빗물과 핏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백설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제마천위신검을 움켜쥐고 부르짖었다. "흐흐흑! 지옥까지 가서라도 네 놈을 저주하리라! 크흐흐흑!" 위이잉... 파파파팟....... 그녀는 검신일체가 되어 마도 속을 풍차처럼 누볐다. 이미 그녀의 귀에는 비명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뇌리 속에는 오직 살(殺)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마도들은 너무나 수가 많았다. 설화영은 인해(人海)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아군(我軍)은 전멸되고 적도만이 그녀를 수십 겹 에워쌌다. 위이이잉...... 하지만 설화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회오리 검기류가 되어 마도를 도륙했다. 실로 초인적인 공력이자 가공할 절기였다. 한 여인의 무공이 그토록 가공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그때였다. 한 인영이 커다란 암석 위에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스....... 인영의 몸은 흐늘거리는 환무로 감싸여져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로 유령환마(幽靈幻魔) 천음소(天音嘯)였다. 천음소는 바로 마도삼전 중 유령전의 전주였다. 문득 천음소는 음흉하게 웃었다. "ㅋㅋㅋ...! 저 계집은 지독한 독종이군!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지칠 것이다. 그때 털도 뽑지 않고 잡아 먹으리라. 킬킬!" 이때였다. 설화영의 입에서 울분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흐흑... 아아... 어... 어지럽다. 크흑흑...! 놈들을 쳐죽여야 하는데......." 츠... 츠... 츠....... 뒤이어 검기가 흐트려졌다. 마침내 설화영은 비틀거리며 멈춰서고 말았다. 그녀는 더이상 검기를 뻗을 수 없었다. "계집이 지쳤다. 쳐라!" "켈켈켈... 쳐라!" 마도인들은 제 세상을 만난 벌떼처럼 설화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악!" 마침내 설화영은 장력을 맞고 말았다. 그녀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ㅋㅋ.... 이제 끝인가?" 그 순간 유령환마는 신형을 날렸다. 스스슷! 그는 빛살처럼 날았다. 그리고는 실 끊어진 연처럼 날던 설화영을 낚아챘다. 찰나지간 그의 입에서 괴소가 흘렀다. "대승(大勝)이다. 궁주께 승전보를 전해라. ㅋㅋ...! 본좌는 이 계집의 반들반들한 살을 즐기겠다!" 휘잉! 유령환마는 폭우 속을 선풍처럼 날더니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우우우!" 마도인들은 승리의 환성을 울렸다. 결국 천문역쇄팔로천군의 일대는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꽈르릉! 벼락이 산곡 안에 떨어지고 있었다. 36장 옥운생(玉雲生) ① 팔월 십오일의 여명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폭우는 세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쏟아져 내렸다. 사위는 그로 인해 침침했다. 그러나 어쨌든 여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산정에서 두 사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유성과 백문선생이었다. "저... 저럴 수가! 제마천군이 기습으로 전멸하다니!" 사유성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대단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어 그는 상전(桑田)을 내려보며 두 눈이 찢어질듯 부릅뜨고 말았다. "......!" 자세히 보면 상전을 어지럽게 교차하는 수로는 분명 거대한 진도(陣圖)를 이루고 있었다. 그 진도는 은은히 태극팔궤(太極八卦)의 형상이 건곤(乾坤)의 형태와 복합혼천대원결에 의해 교차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면 볼 수록 복잡하고 신묘한 진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밤사이에 그 수로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태극팔궤가 변한 것이다. 한 줄기 수로의 흐름이 중지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팔괘는 칠성(七星)의 형태로 변한 것이다. 사유성은 충격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럴 수가... 밤 사이 기습을 받다니!" 사유성의 두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어 그는 백문선생을 쏘아보며 물었다. "선생! 어찌된 일이오? 전술이 새나갔단 말이오?" 백문선생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그럴 리가 없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겨났단 말이오?" 사유성은 분성을 터뜨렸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백문선생은 침중하게 말했다. "아마도 놈들은 계획의 일부를 어떻게 알았을 것이오. 천문역쇄팔로천계는 모두 여덟 개로 나뉘었으니 설사 새나간다 해도 진도를 파악할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속히 총공격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쏴아아....... 비는 쉬임없이 내렸다. 마침내 사유성은 결단을 내렸다. "좋소.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이라고 했소! 이미 화살은 사위를 떠났소. 여기에서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총공세를 명하시오." "알겠습니다." 백문선생은 즉시 대답했다. 이어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철통(鐵筒)을 꺼냈다. 백문선생은 철통을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는 손잡이 부분의 단추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쇳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폭우를 뚫고 한 가닥 불길이 여명의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불길은 긴 꼬리를 끌며 허공 백 장 높이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펑! 이윽고 불길은 사위를 향하여 터지며 무수히 많은 불꽃들을 흩뿌리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펑... 펑... 펑....... 사방 일곱 군데에서 그에 호응하듯 연막이 터져올랐다. 찰나지간 사유성은 두 눈에 신광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무림사에 영원히 남을 대혈겁이 이루어질 것이다. 팔월 보름 오늘을 후세인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때였다. 사유성을 지켜보고 있던 백문선생의 눈빛이 야릇하게 번쩍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대혈전(大血戰)의 막이 올랐다. 피의 아수라장은 대별산의 곳곳에서 펼쳐졌다. 그것은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대혈전이었다. 이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중원무림백도정예들과 집마부인 혈륜궁과의 본격적인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팔월 십오일의 대혈사를 의미했다. 쉐에엑... 슈슈슈슉....... "와아! 쳐라! 혈륜궁도들을 남김없이 지옥으로 몰아 부쳐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쳐라!" 파츠츠츠츳....... 대광명회의 정도고수들은 폭풍같은 기세로 대별산 망혼애의 혈륜궁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일곱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들의 위력은 태산을 허물어뜨리는 노한 파도와도 같았다. 무림정도지혼인 그들은 진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짓쳐들고 있었다. 혈륜궁도들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크하핫...! 정도의 겁쟁이들아. 얼마든지 덤벼라. 모두 핏물로 만들어 주겠다!" "크카카캇! 가소롭다! 고작 이 정도 무공이냐?" 대혈륜궁의 마도들은 상상불허의 마공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살륙만을 위한 것이었다. 츠츠츠츳! "크아악!" 바야흐로 피의 대제전이 대별산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혈천(血川)이 대별산 계곡을 흐르기 시작했다. ② 쏴아아아....... "크크ㅋ.... 정말 기가 막힌 계집이다. 노부 유령환마가 생전 처음 보는 우물(尤物)이다." 음욕에 젖은 탕소가 폭우 속에서 흘러나왔다. 탕소는 산곡의 이름없는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굴 안에는 반라의 여인이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로 설화영이었다. 그녀는 탈진상태였다. 또한 혈도가 잡혀 꼼짝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스스....... 괴인(怪人)이 탐욕스런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괴인은 바로 유령환마 침음소였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빗물에 젖은 여인의 백옥지신이 드러났다. 그야말로 욕망을 자극시키는 광경이었다. 설화영은 원독의 눈빛으로 침음소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비록 제압되었으되 정신을 잃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악마! 날 죽여라!" 유령환마 침음소는 흉물스럽게 웃었다. "크크ㅋ! 아서라. 아이야, 안심해라. 널 죽이지는 않겠다. 흐흣.... 이렇게 탐스럽고 고운 몸뚱이가 썩어 될 말이냐?" 유령환마는 털투성이의 손을 뻗었다. 이어 그는 설화영의 젖가슴을 덥썩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옷자락을 뜯어냈다. 부욱! 옷자락이 길게 뜯겨져 나가자 익을 대로 익은 수밀도 두 개가 툭 튀어나왔다. 한 쌍의 젖가슴은 탐스러웠다. 터질 듯이 부푼 젖가슴 정상에 매달린 두 알의 유실은 수치감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악, 이... 색마!" 설화영은 악을 썼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킬킬킬.... 보면 볼 수록 육감적인 몸매로구나." 부욱... 북! 유령환마는 거침없이 손을 놀려 남은 옷자락을 마저 뜯어냈다. "아악!" 설화영은 절규를 토해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전라나 다름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뽀오얀 백옥지신이 동굴 바닥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단지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하복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손바닥만한 천 한 장뿐이었다. "클클클.... 기다려라. 곧 극락구경을 시켜 주마!" 유령환마는 음소를 흘리며 손을 뻗었다. 그의 징그러운 손이 터질 듯한 젖가슴을 쓰다듬는가 싶더니 한 번 꽉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 악!" 마침내 설화영은 분노와 수치를 이기지 못해 혼절하고 말았다. "킬킬킬.... 아무도 손대지 않았군. 이 야들야들한 촉감......." 유령환마는 몸을 굽혔다. 그의 손은 거침없이 나신을 쓰다듬어 내려갔다. 유령환마는 색광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여체를 가까이 하지 않고는 못베기는 색마였던 것이다. "훗훗훗.... 익을 대로 익었군." 유령환마는 징그러운 괴소를 흘렸다. 이어 그는 입술을 설화영의 젖무덤으로 가져갔다. 설화영의 젖가슴. 그것은 단 한 번도 타인의 입술은 물론 시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곳이다. 바로 그것을 유령환마의 입술이 범하고 있었다. 동시에 유령환마는 털투성이 손으로 여체의 기름진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갔다. 그의 손은 급기야 마지막 한 장의 천에 닿았다. "클클......!" 괴소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천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더러운 놈!" 우우우웅....... 돌연한 외침과 함께 웅후한 장풍이 유령환마의 등뒤로부터 뻗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헉!" 막 극락경을 맛보려던 유령환마는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가공할 장력은 이미 그의 명문혈에 닿아 있었다. 설사 신이라 해도 피하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유령환마의 이름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바로 마도사상 경공술의 최절정 거마였다. 스팟! 거짓말처럼 유령환마의 모습은 연기처럼 꺼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바위산도 으스러뜨릴 엄청난 장력은 혼절한 설화영의 젖가슴을 향해 쇄도해가는 것이었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였다. 설사 신선일지라도 장력을 회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설화영을 향해 쇄도해오던 장력이 돌연 미풍처럼 변해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한 화영(華影)이 내려섰다. 화영은 일견하기에 구순도 넘어 보이는 화복노인(華服老人)이었다. 그는 만면에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새하얀 검미가 잔뜩 치켜 올라가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노인의 두 팔이었다. 그 팔은 너무나 길어 무릎까지 닿았다. 손바닥은 어찌나 넓은지 마치 무쇠 솥뚜껑 만했다. 바로 그때였다. "크크ㅋ! 장천화옹(掌天華翁)! 쭈그렁 귀신이 되어서도 아직 살아있다니 놀랍구나!" 스스슥....... 운무에 쌓인 유령환마가 괴소를 흘리며 나타났다. 그렇다. 팔이 유난히 긴 화복노인은 바로 무림삼옹 중에서 장천화옹이었다. 장천화옹은 백미를 푸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천음소! 네 놈이 죽지 않고 또다시 음행을 저지를 줄은 몰랐구나!" "크ㅋ, 쭈그렁 늙은이.... 곱게 죽을 것이지 무엇하러 무림에 나왔느냐?" "천음소, 네 놈이 혈균궁에 가담하다니 과거의 죄를 아직도 뉘우치지 않는 것이 분명하구나! 더구나......." 장천화옹은 알몸으로 혼절해 있는 설화영을 힐끗 보며 분노했다. "이런 천인공로할 짓을 저지르다니!" "크크ㅋ, 걸레같은 늙은이! 괜한 참견은 마라. 늙은 뼈다귀를 온전히 보존하려면!" "못된 놈! 본옹(本翁)이 너를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겠다!" 장천화옹은 즉시 손바닥을 쳐들었다. 찰나지간 폭풍과도 같은 경기가 폭사되며 벽력성이 울렸다. 콰콰쾅....... "크ㅋ! 늙은이 성질은 여지껏 죽지 않았군!" 스스....... 유령환마의 모습은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우르르르....... 장천화옹의 장력은 대단했다. 그 바람에 동굴 한쪽이 완전히 허물어져 내렸다. "크ㅋ! 그 정도 실력으로 어림도......." 바로 그 순간 유령환마의 음성이 꼬리를 감추었다. 우웅....... 어느새 장천화옹의 몸 주위에는 수영(手影)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천수(天手), 아니 만수영(萬手影)을 능가하는 손바닥이었다. 수만 개의 손바닥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이어 장천화옹의 대성이 동굴 안을 무너뜨릴 듯이 메아리쳐왔다. "천라지망장(天羅地網掌)! 네 놈을 죽이기 위해 창안했도다!" 콰콰쾅....... "크윽!" 한순간 수십 방위에서 폭음이 터지더니 비명이 일어났다. 푸학....... 시뻘건 핏줄기가 동굴 안으로 자욱이 퍼졌다. 그 순간 유령환마는 맞은편 석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장천화옹의 장력이 그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입과 코로는 검은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크윽! 늙은이... 이런 묘수를 짜냈을 줄이야......." "헛헛헛! 천음소. 네 놈을 놓친 후 고련한 비기다!" "으으!" 유령환마는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늑골은 이미 다섯 개 이상 부러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장육부가 뒤틀린 상태였다. 지독한 중상이었다. 결국 그의 호신강기도 장천화옹의 이백 년 공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장천화옹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네 놈의 심장을 터뜨려 다시는 못된 짓을 하지 못하게 해주마!" 우웅....... 장천화옹은 솥뚜껑같은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가공할 장경이 뻗어나갔다. 파파파팟! 석벽이 모래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사색이 되었던 유령환마의 눈이 교활하게 반쩍였다. "구... 궁주! 속하를 구해 주십시오!" 찰나지간 유령환마는 희열에 들떠 부르짖었다. 그 순간 장천화옹은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장력의 힘이 빠져버렸다. "......!" 그러나 그의 등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천화옹은 순식간에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았다!" 그는 다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크ㅋ! 늦었다!" 슉슉슉... 슉! 섬전과도 같은 순간에 유령환마의 소매 속에서 붉은 빛이 뻗었다. 장천화옹은 장력을 뻗어 붉은 빛을 쳐냈다. 바로 그 순간 유령환마의 모습은 유령처럼 꺼지고 말았다. 스팟! "윽!" 장천화옹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어느새 그의 왼쪽 어깨에 화끈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세 치밖에 안 되는 혈검(血劍) 한 자루가 자루까지 깊숙이 박혀있었다. "크으... 또... 당했다!" 장천화옹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유령환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어혈이 뭉쳐 있었다. 등이 닿았던 석벽은 움푹 패여 있었다. 장천화옹은 이를 물고 혈검을 뽑았다. 푸학....... 시커먼 피가 상처로부터 솟구쳤다. "독검!" 그의 노안이 파르르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우수를 들었다. 그리고는 즉시 왼쪽 어깨를 미련없이 내려쳤다. 팍! 독검이 꽂혔던 왼쪽 팔은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장천화옹은 조금도 고통스런 표정을 짖지 않았다. 그는 즉시 혼절해 있는 설화영을 옆구리에 끼었다. "아아! 한 발 늦어 제마천문이 전멸했다. 설제(薛弟)를 볼 낯이 없군!" 휘잇....... 장천화옹은 즉시 동굴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크아아... 악!" 생과 사의 갈림길은 한순간에 교차되는 것이었다. 대별산은 온통 생사의 격전장으로 화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냉혹한 철리가 지배하는 무림. 생과 사는 한순간의 도검(刀劍)의 번뜩임으로 결정되었다. 파츠츠츳....... "쳐라!" 정도 대 사도의 싸움은 수천 년을 이어내려 왔다. 하지만 그 승부는 지금까지 영원한 미지수였다. 쏴아아아....... 콰앙! 폭우 속에서 섬전이 번쩍였다. 뇌성이 이는 가운데 피에 굶주린 인영들은 아수라귀처럼 날뛰었다. 날이 지고 또다시 밤이 왔어도 싸움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③ 대혈륜궁. 혈륜궁도들은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다. 반은 궁 밖의 광명회를 상대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최후의 혈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스슷....... 각 장(場)과 원(院), 각(閣)을 스치며 마소를 흘리는 인영이 있었다. "ㅋㅋㅋ!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준비하라... 후훗... 본궁은 정도인의 거대한 무덤이 될 것이다!"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인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지금 그는 혈륜궁의 각처를 돌며 기관매복과 궁도들을 배치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백천강의 푸르스름해진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훗훗... 놈들은 반드시 궁내까지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준비한 선물이 있다. 그것은.......' 스스....... 백천강의 신형이 하나의 전각을 넘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동심대형 철무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옥운생인 그녀는 혈원주(血院主)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두 눈에 재기를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호홋! 동심회가 각 요지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혈륜궁은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다. 안에서 대응하면 혈륜궁은 금방 무너진다. 더우기 이곳의 비밀을 모두 스승님께 알렸으니......" 그는 입가에 만족한 웃음을 머금고 눈 앞의 정청을 주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정말 그럴까?" 불현듯 지척에서 빈정대는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무척이나 음산했다. "헉.... 누구냐?"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아니!" 다음 순간 그녀는 대경했다.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혈륜궁주가 그의 일 장 뒤에 서 있었다. 혈륜궁주의 입가에는 냉랭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구... 궁주님! 웬일로......?" 그녀는 황망히 예를 취했다. 그 순간 백천강은 문득 벽안을 기이하게 번뜩였다. "혈원주, 오늘따라 그대의 미가 더욱 돋보이는군." "미... 라니오...? 불초가 어찌?" 그는 짐짓 어이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찰나지간 백천강은 괴소를 흘렀다. "크ㅋ.... 혈원주, 본좌의 눈이 멀었는 줄 아는가? 이미 처음부터 그대가 미녀임을 알고 있다." "......!" 옥운생은 그만 등줄기가 서늘했다. "소... 속하는 단지......." 어느새 옥운생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훗훗.... 행동하기 편리해서 남장을 했단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훗훗....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는 너무 아름다운 게 탈이다." "......?" 옥운생은 의아해 했다. 바로 그때였다. 백천강의 눈빛이 돌연 기이하게 변해갔다. 그것은 바로 욕정에 찬 눈빛이었다. "너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원주." "그... 그것은......!" 옥운생은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렸다. "본좌는 하고자 하는 일은 관철하는 사람이다. 훗훗... 너희 동심십우가 모두 변장한 자들임을 처음부터 알았다. 그대로 둔 이유는 너를 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아!" "자, 이제 너의 고운 얼굴을 본좌를 위해 보이는 것이 어떠냐?" 백천강은 기소를 흘리며 말했다. 스스....... 찰나지간 옥운생의 얼굴이 변화를 일으켰다.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그녀는 삽시에 절세가인으로 화했다. "후후훗.... 정말 아름답다. 너희들이 무슨 목적을 품었는지 따지지 않겠다. 단, 너는 본좌의 계집이 되어야 한다." 백천강의 일방적인 말에 옥운생의 옥용이 파래졌다. "만약... 듣지 않는다면?" 옥운생은 백천강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백천강은 괴소를 흘렸다. "모르겠느냐? 본좌는 이미 나머지에게 손을 썼다." "손을......?" 옥운생은 아미를 떨었다. "알려줄까? 그들은 지금쯤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을 것이다. 방금 전 그들은 십일몽환산(十日夢幻散)이 든 차를 마셨다. 앞으로 열흘 동안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 있을 것이다." "아아!" 옥운생은 절망의 단말마를 내질렀다. 이어 그녀는 상체를 가눌 수가 없다는 듯이 비틀거렸다. "후훗! 너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백천강은 음소를 흘렸다. "......?" 옥운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무공과 지혜에 자신감을 가지고 무림의 폭풍 속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그 어느 것도 쓸모가 없었다. "널 한 번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용서해주마." 백천강의 두 눈에는 점점 더 음욕의 불길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를 본 옥운생은 온몸에 소름이 끼침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자의 무공은 고금미증유다. 정면으로 덤비면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색을 이용해야 한다!' 그때였다. "호호호홋!" 옥운생은 느닷없이 요염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녀는 교태로운 자세를 취하며 백천강을 향해 다가섰다. "그렇게도 제가 마음에 드셨나요? 궁주님?" 그녀는 슬쩍 장삼을 풀어헤쳤다. "......!" 그 순간 백천강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는 이미 마성에 깊이 빠진 상태였다. 특히 색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일어났다. "크ㅋ.... 너는 탐스런 계집이다. 왜냐하면 너는... 누군가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 한순간 옥운생은 의아해 했다. "누구... 죠? 그녀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백천강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훗훗.... 말해 줄까? 그녀의 이름은 바로......." "바로?" "옥운생이라고 하지!" "앗!" 파팟! 옥운생은 경악했다. 바로 그때 백천강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뻗었다. 백천강은 섬광같은 기습을 전개해 그녀의 전신 요혈을 짚어갔다. 옥운생은 한 차례의 방어도 해보지 못한 채 허물어지듯이 쓰러지고 말았다. "핫핫핫! 옥운생. 애당초 너는 본좌의 상대가 아니었다!" 백천강은 그녀를 낚아챘다. "아... 대체?" 그녀는 백천강의 팔에 안기며 의혹과 공포로 몸을 떨었다. ④ 슷....... 백천강은 침전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침상 위로 옥운생을 던졌다. 옥운생의 얼굴은 공포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백천강은 대답 대신 음침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서서히 혈의를 벗었다. 혈의가 벗겨지며 우람한 육신이 드러났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옥운생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수치심에 눈을 감아 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는 무림일비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단지 늑대 앞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너는 두 번째로 인생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백천강의 말에 옥운생은 공포 속에서도 의혹을 금치 못했다. "두... 두 번째라고?" "훗훗.... 그렇다." 그 순간 백천강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북... 찌익! 순식간에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이어 그녀는 그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아... 악마! 흐흑... 제발!" 옥운생은 수치감과 분노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이미 색정에 불타오르는 한 마리의 사나운 야수에 불과했다. "아악!"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벌거벗은 사나이의 무거운 체중이 그녀의 알몸을 짓누른 것이었다. 동시에 젖가슴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상대방의 손길은 그녀의 육체 깊숙한 곳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흐흑... 악마!" 옥운생은 질겁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낯익은 음성이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귓전으로 파고 드는 것이 아닌가? "후후.... 운생. 눈을 떠라. 그리고 내가 누군지 보아라." "......!" 옥운생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나신을 바르르 떨었다. '이 음성은......!' 그녀는 순간 눈을 떴다. "아... 석... 석무심!" 그녀는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놀랍게도 자신의 육체를 짓밟고 있는 사내는 혈륜왕이 아니라 석무심이었다. 석무심은 예의 그 진부하도록 평범한 얼굴에 특유의 무심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운생. 오랜만이군." "서... 석... 가가!" 옥운생의 얼굴은 그 순간 노을처럼 붉어졌다. 석무심은 슬쩍 그녀의 터질 듯한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운생, 이젠 거부하지 않겠지?" "음!" 옥운생의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이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는 열탕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다. 백천강은 그 순간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의 환희미심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후.... 운생, 너는 정말 아름답다." 백천강은 내처 중얼거렸다.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다. "하아!" 그녀는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옥운생은 온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백천강의 건장한 육신 밑에서 몸부림쳤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욕망의 육체적인 언어였다. 그러나 백천강은 뜻밖에도 계속 그녀의 육체에 불을 지를 뿐이었다. 그는 더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옥운생은 그만 미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백천강의 음성이 더욱 달콤해졌다. "운생. 너의 진실한 정체는 무엇이지? 그것을 알고 싶다." "아아... 소매는... 사(査)... 운봉(雲鳳)......." 백천강의 음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운봉? 그럼 봉매의 정체는 뭐지?" "음... 소매는 제독부에서 뛰쳐나와... 강호로... 스승님이 무림일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라고 흐윽... 기왕이면 오라버니를 돕기위해 이곳으로 잠입......." "오라버니가 누구지?" "과... 광명회주(光明會主)... 어서... 으음!" "......!" 백천강은 마치 철퇴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옥운생이 사유성의 누이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이지 그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 순간 백천강의 눈에는 더욱 음침한 빛이 흘렀다. 그는 사운봉의 젖가슴을 희롱하며 물었다. "봉매의 사부는 누구지?" "흐으... 윽! 백문선생 우문기... 지금은 광명회의 군사(軍師)로... 흐윽!" 사운봉은 더이상 욕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신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백천강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를 물었다. 마침내 사운봉은 타버리려는 옥체를 꿈틀거리며 술술 불어댔다. 마침내 모든 질문이 끝났다. 동시에 백천강은 그녀의 체내로 깊숙이 들어갔다. "하악!" 사운봉의 눈이 희열로 짓떠졌다. 백천강의 벽안에서는 더욱더 기괴한 마광이 색광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운봉은 자신이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육체의 환열에 혼백을 사르고 있었다. 37장 패배(敗北) 1 ① "쳐라! 마도의 혈귀들을 쳐라. 중원의 정도를 지켜야 한다!" "크하하핫! 죽어라 정도의 쓰레기들아!" 쏴아아아아....... 폭우는 지칠 줄 모르고 퍼부었다. 비의 장막에 휩싸인 대별산의 정사대혈전은 점차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대광명회의 정도인들은 진세를 폭풍처럼 몰아 혈륜궁도들을 몰아부치기 시작한 것이다. 상전(桑田). 거대한 상전 사이를 누비는 수로(水路)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수로의 흐름은 어느덧 수천 차례나 바뀌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로가 이루는 진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하다는 것이었다. 그 시각 사유성은 산정에 있었다. "......!" 진세를 내려다보는 사유성의 얼굴에는 마침내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백문선생의 얼굴도 기쁨에 차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사유성은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하늘이시여! 이토록 많은 피를 흘려야 했소이까? 이제... 마도탕멸의 뜻을 이루어지게 해주시옵니까?" 호탕하게 부르짖는 사유성의 얼굴에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가 세차게 흘러내렸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격동한 탓에 흘리는 눈물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사유성은 백문선생을 돌아보며 부르짖었다. "선생! 신호를 올리시오. 최후의 단혈파혼책(丹血破魂策)을 쓰라고. 이제 혈륜궁이 무너지는 것은 눈 앞에 있소!" "대명(代命)!" 백문선생의 목소리는 폭우 속을 뚫고 멀리 퍼져나갔다. 슈욱! 뒤이어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때를 같이하여 붉은 연막이 하늘을 뒤덮었다. 사유성은 하늘을 우러러 격동하며 부르짖었다. "혈륜왕. 기다려라. 무림의 수십만 정혈을 흘리게 한 대마성인 너를 이 사유성이 심판해 주마!" 이어 사유성은 폭우 속으로 신형을 날리며 외쳤다. "갑시다!" 콰콰쾅! 그 자리에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는 깊은 구덩이가 패였다. 바로 그때였다. "......!" 백문선생 우문기의 모습이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나타나는 것이다. 뜻밖에도 그는 사유성을 따라 신형을 날린 것이 아니었다. "......." 한순간 우문기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서서히 대혈륜궁을 내려다보며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남은 것은 광명회의 전력을 반으로 줄인 후... 혈천마번(血天魔幡)을 흔드는 일이다." 백문선생 우문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폭우 속에 흐려진 상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훗훗훗.... 본존의 걸작이다. 천하를 한꺼번에 움켜쥘 대계(大計)였음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사유성, 네가 아무리 비범해도 본존의 놀이감이 되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리라!" 백문선생은 낮게 중얼거렸다. 문득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대호신(四大護神)!" 그때였다. 스스스! 마치 땅 속에서 형체가 만들어지듯이 네 개의 혈영(血影)이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안색이 냉막한 중년인들이었다. 뜻밖에도 중년인들의 얼굴에는 가공할 마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안개처럼 솟구쳐오른 그들은 나란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상!" 바로 그때였다. 백문선생 우문기가 빙글 돌아섰다. 스스스...... 어느새 그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단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한덩어리의 혈무(血霧)가 뭉쳐져 있을 뿐이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언젠가 백천강의 뒤에서 나타났던 괴인물이었다. 스스로를 가리켜 적미성(赤眉星)이라 일컫던. 그는 바로 혈천마국주(血天魔國主)였던 것이다. 백문선생. 대광명회의 군사인 그가 바로 혈천마국의 국왕(國王)이라는 사실은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혈무인의 입에서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기스런 음성이었다. "사대호신,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어간다. 혈륜궁 내에는 모든 준비는 되었느냐?" 그 순간 사대호신의 입에서는 한 사람이 말하듯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모두 끝났습니다. 혈천마번만 나타나면 일시에 혈천마국천하가 될 것입니다!" "흐흐흐... 그렇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본존은 수많은 땀을 흘렸다. 힘이란 쓰면 쓸 수록 소모하는 것이다. 가장 상책(上策)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다." "모두가 주상의 영명하심 덕분입니다." "크ㅋ! 가라. 가서 모두들 준비하라 일러라. 적기가 되면 본존이 혈천마번을 꺼내겠다." "복명(伏命)!" 스스슷....... 사대호신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혈무인은 다시 한 바퀴 신형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감쪽같이 백문선생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쏴아아아....... 폭우는 점차로 가늘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음흉한 음모의 장막은 다가오는 밤처럼 두텁고 어둡기만 했다. ② 망혼애(亡魂崖). 망혼애는 아득한 옛날 천하마공의 근원지였던 기환궁(奇幻宮)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무림사상 초유의 대혈살풍을 일으키는 혈륜궁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새 망혼애의 계곡은 메워져 있었다. 이제 그곳은 평지가 되어 있었다. 평지 위에는 천 개(千個)가 넘는 나녀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실로 괴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틈엔가 엄청난 수효의 군웅들이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대광명회의 수천 고수들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혈륜궁도들의 저지를 뚫고 혈륜궁의 입구까지 짓쳐온 것이다. 그들의 만면에는 비장한 빛이 가득 어려 있었다. 이제 군웅들은 생사의 혈전을 뚫고 오직 의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 사이 쓰러져 고혼이 된 자는 수만을 넘었던 것이다. '아아.! 더이상의 희생은 싫다!' 이것이 모든 중인들의 한결같은 속마음이었다. 군웅들의 눈은 핏발로 인해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악을 향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 그러나 군웅들은 수 백의 나녀상을 대하는 순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녀상은 너무나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사실이 군웅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영웅치고 미인을 좋아하지 않는 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녀상은 석상(石像)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웅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덧 폭우는 세우(細雨)로 변해 내렸다. 그때였다. 군웅들 앞으로 한 백삼미청년이 나섰다. 청년의 전신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는 바로 대광명회주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 군웅들은 모두 경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사유성에 대해서 십분 공경하고 있었다. 사유성이 지금까지 광명회주로서 보여준 업적은 너무도 눈부신 것이었다. 사유성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격동으로 인해 사뭇 떨리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드디어 이곳까지 왔소이다. 무수한 형제들의 희생을 치르고... 마침내 후세인들에게 남길 위대한 유산을 이루기 위해 혈륜궁에 왔소이다!" 사유성의 말은 군웅들의 영웅심에 불을 질렀다. 그는 계속 말했다. "신명을 바쳐 피흘려 온 형제들의 염원은 한시라도 빨리 혈륜궁의 악업을 종식시키는 것이 될 것이오. 하지만......." 사유성은 깊이를 모를 두 눈에 신광을 뿜었다. 그는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럴 수록 우리는 침착해야 하오. 혈륜궁은 처처가 기관이요. 함정으로 이루어져 있소. 무작정 몰려들어 가면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서 혈륜궁으로 들어가야 할 의협을 나누어야 겠소이다." "옳소!"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그때였다. 백문선생이 군웅들 사이에서 걸어나온 후 포권했다. "회주의 말이 맞소이다. 한 방울의 피도 헛되이 흘려서는 안 되는 일이오. 노부가 입궁타마(入宮打魔)할 명단을 작성했소이다." 그 순간 여러 군웅들의 얼굴에 불만과 불안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이 이곳까지 이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 대열에서 빠진다면? 그것은 똥을 누고 밑을 닦지 않은 것만큼이나 기분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사유성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백문선생에 의해 입궁타마할 최후의 명단이 불리워졌다. 호명된 군웅들은 명실공히 당금 정파무림의 정예들이었다. 그 수는 모두 일만이 넘었다. "......." 선택된 정예들은 나녀상 앞에 섰다. 사유성은 신광을 번뜩이며 나녀상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백문선생에게 물었다. "선생. 어떻게 하면 좋겠소?" 백문선생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것은 천문역로만상대진(天門逆路萬像大陣)에 환욕미라진이 가세된 것입니다. 게다가 나녀상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조각되어 있어... 설사 진도를 안다해도 색의 유혹을 이기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사유성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 "화탄(火彈)입니다." "아!" 사유성은 탄성을 발했다. 백문선생은 문득 품 속에서 주먹만한 구슬 한 개를 꺼냈다. "쓸모가 있으리라 여겨 화신(火神) 사마대협에게 얻은 것입니다." 사유성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즉시 백문선생에게 명령했다. "혈륜궁의 문을 파괴시키시오." 잠시 후였다. 꽈꽈꽈... 꽝.......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허공으로 치솟아 흔들렸다. 폭풍이 한바탕 휩쓴 후였다. 나녀상이 서 있던 평지 아래로 악마의 아가리같은 구멍이 뻥 드러났다. "와!"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사유성도 그 순간만큼은 격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최후의 결전이다. 혈륜왕! 너는 필히 죽어야 한다. 바로 나 사유성의 손에!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유일한 태양은 바로 나다. 오늘 너와 나의 운명이 판가름난다!' 마침내 사유성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외쳤다. "탕마멸사행(蕩魔滅邪行)!" "와아아!" 대별산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성난 물길처럼 군웅들은 혈륜궁의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와아아!" 엄청난 살기가 혈륜궁 내부에 회오리쳤다. 광명회의 고수들이 혈륜궁 지하대전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은 노해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거대한 지하광장에 당도했다. 그러나 군웅들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놀라운 일이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눈빛을 빛내며 광장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혈륜궁도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유성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놈들은 기관매복을 이용할 것이오. 여러분들은 각자 계획한대로 대(隊)를 나누시오!" 사유성의 입에서 우렁찬 말이 떨어졌다. 순간 군웅들은 약정한 듯 대열을 나누었다. "십이장, 삼십육원, 칠십이각이 이곳의 구조이오. 모두들 요충지를 파괴하시오!" 다시 한 번 사유성의 말이 떨어졌다. "쳐라!" "혈륜궁도들을 남김없이 주살하라!" 휘휙... 휙! 군웅들은 어지럽게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이미 혈륜궁의 내부사정을 익힌 듯 거침없이 거미줄처럼 엉킨 미로를 따라 물밀듯이 질주했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익... 쿠쿠쿠쿵! 마침내 혈륜궁의 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벽과 벽이 마구 움직였다. 멀쩡하던 바닥이 푹 꺼져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슈슈슈슈슉....... 천장과 벽에서 독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서는 독연이 뿜어지기도 했다. 스스스....... 그러나 군웅들은 이미 목숨쯤은 초개같이 버린 지 오래였다. "악도들을 뿌리뽑아야 한다!" "의(義)를 위해... 크윽!" 군웅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진에 전진을 계속했다. 꽈르르릉! 그들은 기관을 격파하며 혈륜궁의 요충을 차지하기 위해 무섭게 쏘아갔다. 마침내 그들은 혈륜궁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바로 그때였다. 덜컹! "크크크! 정파 협잡배들아!" "크하핫...! 죽여주마!" 곳곳의 석벽이 열리며 혈륜궁의 마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위이이잉... 콰릉....... "크아아... 악!" 삶과 죽음이 숨쉴 틈도 없이 명멸했다. 드디어 혈륜궁의 곳곳에서 피튀기는 대혼전이 벌어졌다. 무너뜨리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대결. 그것은 곧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다름 아니었다. 옛 기환궁터였던 혈륜궁은 피의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③ 법정진인(法頂眞人). 그는 바로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이었다. 휘익... 휙! 법정진인은 무당칠검(武當七劍)과 백여 명의 무당제자들을 이끌고 대혈륜궁의 삼십육원의 하나인 살원(殺院)을 돌파하고 있었다. "무량수불... 돌파하라!" 법정진인은 도호를 외치며 직접 선봉을 섰다. "크크크... 썩은 말코들! 뒈져랏!" 쐐액... 파츠츠츳. 혈전은 속개되었다. 가로막는 혈륜궁도들과 무당도인들은 생사의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무당도인들은 무당 최고의 정예들이었다. 정통 무당정종의 무공은 확실히 고강했다. 그들은 혈륜마도들을 꺾으면서 깊숙이 진격했다. 바로 그때였다. "크악!" 달아나던 혈륜궁도들이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찰나지간 피보라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아니?" 무당도인들은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다. 쫓겨 달아나던 혈륜궁도들이 영문도 모르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수십 명의 혈륜마도들이 쓰러졌다. 그때였다. 휙! 한 가닥 인영이 혈륜마도들 앞에서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구렛나루가 텁수룩한 장한이었다. 장한은 법정진인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포권을 취하는 것이었다. "장문인. 안녕하시었소이까?" "시주는 누구요?" 법정진인은 의혹을 금치 못하고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래도 모르시겠소이까?" 장한은 느닷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영준하고 패기만만한 삼십 세 정도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나... 남궁시주!" 법정진인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장한은 바로 무림구공자의 한 명인 유성비천협(流星飛天俠) 남궁신효(南宮神梟)였던 것이다. 남궁신효는 부리부리한 눈을 번뜩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뜻밖이었소이까? 장문인?" "저... 전혀... 시주들이 말없이 광명회를 떠났을 때 궁금했지만... 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법정진인은 반색을 금치 못했다. 남궁신효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우리 구공자는 짐을 짊어지기로 했소이다. 이곳에 잠입하여 내분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소이다." "......!" 법정진인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무량수불.... 과연 구중천(九重天)의 후예들이오이다. 장차 무림사에 빛나는 업적을 쌓게 될 것이오." 그때였다. 불현듯 남궁신효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이어 그는 법정진인을 향해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의 음성은 대단히 낮았다. "장문인, 우리 구공자는 그동안 이곳에서 놀라운 비밀을 탐지했소이다. 그 비밀은 혈륜궁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을만큼 중대한 것이오." "......?" 법정진인은 경악과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남궁신효는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비밀은 불초의 품 속에 있소이다." "......?" "장문인만 보십시오." 남궁신효는 서서히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법정진인은 의혹과 기대의 표정으로 남궁신효에게 가까이 갔다. "바로 이것이오!" 번쩍! 찰나지간 남궁신효의 품 속에서 섬광이 뻗었다. 법정진인은 눈부셔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 악!" 처절한 비명이 피보라와 함께 일어났다. 어느새 남궁신효는 품에서 검을 뽑아 휘두른 것이다. 법정진인은 대무당파의 지존이었다. 그러나 남궁신효의 창황간의 기습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일섬의 순간에 그는 몸을 날렸다. 그러나 남궁신효의 검광은 이미 그의 가슴을 후빈 뒤였다. "크으... 이럴... 수가......." 쿠웅! 법정진인은 경악했다. 그는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졌다. 갈라진 그의 가슴에서는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졌다. "앗! 저럴 수가!" 무당도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느꼈다. 찰나지간 남궁신효는 통로 안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어 그는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크크ㅋ! 우리 구공자는 구대세가를 푸대접한 광명회에 복수하기로 했다. 하하하하! 어리석은 자들아! 이곳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저... 저런... 죽여라!" 휙... 휘익. 무당도인들은 분노성을 질렀다. 그들은 격분하며 그를 추격해갔다. 그러나 그들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콰르르릉... 슈슈슉! 석벽이 회전함과 동시에 독화살이 빗발치듯 쏘아왔기 때문이었다. "크윽... 헉!" 무당도인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아스라이 남궁신효의 비웃음 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훗훗훗... 혈륜궁은 너희들의 무덤... 혈륜대총(血輪大塚)이 된 것이다." 정녕 무서운 일이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림구공자들의 변절이었다. 현성우사(玄星羽士). 그는 청성문(靑城門)의 장문인이었다. 현성우사는 삼백여 명의 청성도사들을 이끌고 삼십육원 중 한 곳을 뚫고 있었다. "백도의 명예를 걸고 뚫어라!" "차앗!" 청성도사들은 모두 피투성이였다. 그들은 거듭 치른 수 없는 악전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혈륜궁의 마도들은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예측무비하게 쏟아지는 암기세례와 기관매복의 함정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청성도사들은 벌써 반수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도의 혼(魂)은 꺼지지 않는다!" "무량수불! 조사님의 령이 지켜주신다. 전진하라. 차앗!" 그들은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현성우사를 선두로 한 그들이 하나의 석실에 당도했을 때였다. 덜컹! 갑자기 현성우사의 앞에 있는 석벽이 열리는 것이었다. 이어 그 속에서 한 청년이 불쑥 튀어나왔다. "장문인!" 그는 반갑게 외쳤다. 현성우사는 흠칫하다가 반색을 했다. "아니, 조... 조대협!" 청년은 장창을 비껴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는 위맹함이 넘쳐 흘렀다. 청성도사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신창세가(神槍勢家)의 무적신창(無敵神槍) 조유명(曺有命)이다!" 나타난 청년은 바로 무림구공자의 한 명인 무적신창 조유명이었다. "조대협이 이곳에... 어... 어찌된 일이오?" 현성우사는 다급히 물었다. "크ㅋ!" 조유명은 문득 사악한 괴소를 터뜨렸다. 바로 그때였다. 푹! "크악!" 장창이 번뜩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현성우사의 몸을 산적꿰듯 꿰뚫고 만 것이 아닌가? "아니?" 찰나지간 청성도사들은 아연실색했다. "핫핫핫핫!" 조유명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장창을 뽑아들고 석벽 속으로 신형을 날리는 것이었다. "자, 잡아라!" "조유명이 변절했다!" 도사들은 발을 굴리며 석벽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쿵! 그들의 몸놀림보다 더욱 빠르게 석벽이 닫혀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오오!" 청성도사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신풍마취개(神風魔醉 ) 백리천후(百里天候). 개방의 장문인인 그는 타구봉(打球捧)과 섭선을 종횡무진으로 휘두르며 삼십육원을 통과하고 있었다. 개방 거지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혈륜궁의 기습으로 총단이 피로 씻긴 이후 개방은 절치부심 이를 갈았다. 복수를 위해 그들은 생명따위는 던진 지 오래였다. "와아!" "형제들의 원을 풀어주리라!" 차차차... 창! "케에엑!" 혈륜궁의 마도들은 개방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마도들은 추풍낙엽처럼 어지럽게 쓰러지며 패퇴했다. 개방 거지들은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마침내 그들은 대혈륜궁 깊숙이로 들어섰다. 그곳은 바로 삽십육원의 중심부였다. 그러나 중심부에 당도한 그들은 잠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토록 악착같이 가로막던 혈륜궁도들이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모두 흩어져서 수색하라!" 신풍마취개는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와아!" 개방도들은 함성을 지르며 수많은 석실로 갈라져갔다. "......!" 신풍마취개는 한 석실에 도달했다. 역시 그곳도 텅 비어 있었다. '놈들이 모두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의아해 할 때였다. "크아악!" 주변의 석실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이 비명의 시작이었다. "크아악... 이럴 수가!" "큭! 케엑!" 여기저기서 경악과 회의에 찬 비명소리가 화음을 맞추듯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신풍마취개는 대경했다. 그는 급히 신형을 날리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방주!" 그의 앞을 비틀거리며 가로 막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입과 코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형당주(刑堂主)! 무슨 일이오?" 신풍마취개는 대경했다. 형당주는 개방의 팔결(八結) 고수였다. "바... 방주......." 형당주 잔심개(殘心 )는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대... 대체 이게......?" 신풍마취개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바로 그때였다. "큭!" 신풍마취개는 예리한 칼날이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순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신풍마취개는 정신이 흐려졌다. 쿠웅. 그는 속절없이 쓰러졌다.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는 죽은 것이다. "크크!" 그때였다. 괴소와 함께 잔심개의 얼굴이 변했다. 그것은 바로 혈륜왕 백천강의 얼굴이었다. 백천강의 눈에서 빛나는 푸르스름한 사기(邪氣)는 더욱 짙어져 있었다. 그는 허무하게 죽은 신풍마취개를 내려보며 괴소를 흘렸다. "훗훗... 이제 시작이다.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 될 것이다. 애당초 이곳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였다. "바... 방주님!" 휘...익! 당황한 음성과 함께 수십 명의 인영들이 날아왔다. 그 순간 백천강의 모습은 어느새 신풍마취개의 모습으로 화했다. "으윽!" 신풍마취개는 피를 뿜으며 비틀거렸다. "방주!"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십여 명의 개방고수들은 그를 부축했다. 그들도 이미 피투성이가 되긴 마찬가지였다. 신풍마취개는 꺼져들어가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빨리... 퇴각... 한곳으로... 이곳은 저주에 찬 곳... 구공자가 배신... 어서... 물러나게... 큭!" 신풍마취개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주!" 개방고수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외쳤다. 바로 그때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방주님의 말이 맞소!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전멸이오... 빨리... 퇴각합시다!" 그 말이 끝나자 개방의 고수들은 피눈물을 흩뿌리며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크흑!" "방주님... 시신을 거두지 못하는 죄 용서하십시오!" 곳곳에서 피맺힌 절규가 들려오고 있었다. "크흐흑! 퇴각... 퇴각하라!" 마침내 그들은 사라졌다. 그 순간 쓰러졌던 신풍마취개는 다시 일어섰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백천강으로 돌아와 있었다. "크ㅋ! 이제 제 이 단계다.." 백천강의 입에서 음산무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④ 석실. "......." 석실에는 한 청년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로 무림구공자 중 하나인 유성비천협 남궁신효였다. 콰르르르....... 멀리서 대혈륜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남궁신효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살랑거리는 미풍이 석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미풍 속에는 뜻밖에도 한 가닥 기향(氣香)이 실려 있었다. 그로부터 약 일각 후였다. "으으음......." 남궁신효의 입에서 잠꼬대와도 같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석상 위에 누워 있는 그의 몸이 꿈틀거렸다. 바로 그때 남궁신효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어찌된 일인가?"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즉시 석실을 살펴보았다. 석실은 눈에 익은 곳이 아니었다. "내...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남궁신효는 경악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그는 즉시 기억을 더듬었다. 마침내 그는 혈륜궁주의 초청으로 차(茶) 한 잔을 마신 후부터 기억이 끊겼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호... 혹시... 정체가 발각난 것이 아닐까?" 남궁신효는 한 가닥 공포심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는 즉시 석벽 한곳을 눌렀다. 그르릉! 석문이 열렸다. 남궁신효는 다짜고짜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런 일은 석실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무림구공자. 동심회를 결성한 그들은 모두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가 기향을 맡고 깨어났다. 그리고는 모두 한 가닥 공포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그것이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기 위한 엄청난 또 하나의 함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뛰쳐 나간 것은 그야말로 불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드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구공자를 조심해라!" "구공자가 변심했다!" 군웅들의 외침은 통로의 곳곳을 울리고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이를 갈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핏발이 선 채 충혈되어 있었다. 악전고투도 이런 악전고투가 없었다. 어느새 군웅들의 숫자는 삼분지 일 가량 줄어들어 있었다. 한 마디로 공포였다. 혈륜궁은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가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믿었던 무림구공자들의 배신은 그들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그르릉....... 석벽이 갈라졌다. 순간 석벽 안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왔다. "......!" 군웅들은 긴장하여 그를 포위했다. 석실을 뛰쳐나온 청년은 바로 무림구공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전궁세가의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였다. "여... 여러분들이 어찌......?" 팽무위는 군웅들을 보자 대경했다. 바로 그때였다. "팽무위다! 쳐라!" "배신자! 죽여라!" 군웅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쐐애액! "아... 아니... 여러분... 쿡!" 분노한 군웅들의 공격은 무지막지했다. 팽무위는 수없이 많은 장력을 얻어 맞았다. "크윽!" 그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터져나왔다. 팽무위는 삽시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팽무위의 눈에 보이는 하늘은 캄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었다. '왜... 왜... 그러는 거요? 나 팽무위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소!' 팽무위는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에서도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츠츠츠... 파파팟! 그의 가전보도인 전궁도(電穹刀)가 찰나지간 불을 뿜었다. "크악!" 삽시에 십여 명이 쓰러졌다. 팽무위의 무림일절인 전궁도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팽무위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비켜라.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쐐액! 팽무위는 혼신의 힘으로 전궁도를 휘둘렀다. "크악!" 전궁도가 한 번 불꽃을 내뿜을 때마다 이삼십 명의 모가지가 달아났다. 이어 팽무위는 죽을 힘으로 신형을 날렸다. "잡아라!" "배신자를 잡아라!" 군웅들은 피를 보자 더욱 흥분했다. 그들은 광분하여 팽무위를 추격해갔다. 팽무위는 이미 모든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살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전궁도를 휘둘렀다. "크아아... 비켜라!" 팽무위는 아수라귀가 되어 미친 듯이 치달렸다. "왜... 왜 이러는 것이요?" 철수룡(鐵水龍) 수검악(水劍嶽)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수운세가의 새로운 가주였다. 수백 명의 군웅들은 이를 갈며 수검악을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죽여라!" 군웅들은 흥분했다. "이... 이럴 수가!" 수검악은 부르짖었다. 그의 혼백은 이미 달아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였다. "죽엇!" 쐐액! 등 뒤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쏘아져왔다. 놀란 수검악은 소스라치며 검기를 피했다. 그러나 중인들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도륙을 냅시다!" "저런 자는 능지처참해야 하오!" 쐐애액! 군웅들은 일제히 짓쳐들었다. 그들은 수검악을 향해 사정없는 맹공을 퍼부었다. "크윽! 대체 왜 그러는 거요... 큭!" 군웅들의 합공은 잔혹했다. 수검악은 등에 삼장(三掌)을 맞았다. 가슴에는 이검(二劍)과 삼권(三券)을 맞았다. 울컥! 수검악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나왔다. 그는 가까스로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피를 토하며 부르짖었다. "이...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다!" 쐐액액! 그는 분수아미자를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둘렀다. 차차창! 요란한 쇳소리가 석실을 울렸다. 그 순간 군웅들 칠팔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으아아!" 수검악은 표효를 내질렀다. 그 음성은 성난 사자의 그것과 같았다. 이어 그는 군웅들의 시체를 밟고 내달렸다. "추격해라!" 군웅들은 끝없이 그를 가로 막았다. "크흐흑! 비... 비켜라!" 수검악은 울부짖으며 마구 살초를 쏟아냈다. "크윽!" 수검악은 혼신의 힘으로 아미자를 휘둘렀다. 군웅들은 가슴이 뚫리고 머리가 부서지며 쓰러져갔다. 석장청(石長靑)과 석몽화(石夢華)남매. 석대세가의 후인들인 그들 쌍동이 남매도 위기에 몰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등을 맞댄 채 군웅들을 노려보았다. 그들 남매는 오백 명이 넘는 군웅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이미 그들 앞에는 이십여 명의 군웅들이 쓰러져 있었다. 석장청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음모요! 이... 이건 모함이란 말이오!" 석몽화도 외쳤다. "그래요. 이것은 혈륜궁의 음모예요!" 하지만 이미 군웅들의 이성은 마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듭되는 충격과 피보라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죽여라!" "배신자들! 백도의 이름을 걸고 처단하라.!" 쐐액... 파츠츠츳! 수백 명의 군웅들은 일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그 위세는 실로 엄청났다. "이... 이럴 수가!" "모... 모두 미쳤어요!" 석몽화는 대경했다. 그때였다. "몽화! 날 잡아라!" 석장청은 외침과 동시에 신형을 솟구쳤다. 뒤이어 석장청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나왔다. "어리석은 자들... 환상천파수(幻像天破手)!" 파파파파... 팟! 바로 그 순간 수십 개의 인영이 허공을 뒤덮었다. 놀랍게도 석장청의 모습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이다. 찰나지간 인영들의 손끝에서 강기가 뻗어나갔다. "아아악!" 군웅들은 강맹한 경기에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석장청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환상자의 진전을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구공자 중에서 최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석장청의 일합에 군웅들은 흩어졌다. 석장청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휘익! 석장청은 석몽화와 함께 포위망을 뚫고 날아갔다. "배신자를 잡아라!" 군웅들은 노성을 지르며 추격해 갔다. 38장 패배(敗北) 2 ① 광장은 무척이나 넓었다. 그곳은 방원 삼백 장이 넘는 대광장이었다. 그곳은 바로 대혈륜궁의 십이장(十二場) 가운데 초혼장(招魂場)이었다. "......!" 백여 명의 군웅들이 서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수백 구의 시신이 깔려 있었다. 시신은 군웅들과 혈륜궁도들이 반반이었다. 군웅들의 우두머리는 바로 무림삼옹 중의 만검옹(萬劍翁)이었다. "......!" 만검옹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는 쌍검을 쥐고 눈 앞의 인물을 노려보았다. 그의 앞에는 축융전의 전주인 축융마제(祝融魔帝)가 대치하고 있었다. "크크크... 늙은이! 목숨을 청산할 때다!" 축융마제는 괴소를 흘렸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마도들은 대략 오백인 정도였다. "크크크... 쳐라! 남김없이 불고기로 만들어라!" 축융마제의 일갈이 터졌다. 화르르릉......! 축융전의 마도인들은 축융신공과 축융이화신공, 열양화폭장(熱陽火爆掌) 등을 전개하며 군웅들을 공격했다. 그 순간 마검옹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헛헛...! 마도들. 오늘로써 영원히 악행의 종지부를 찍으리라!" "와아!" "필승타마(必勝打魔)!" 군웅들은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펼쳤다. 차차차... 창! "크아악!" 끈적거리는 피보라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뒤이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비규환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초혼장은 피바다가 되었다. "축융노적! 받아라!" 위잉! 만검옹의 일신은 눈부신 검광으로 변했다. "크크크... 축융멸천하!" 화르르릉....... 콰웅! 검광과 화광(火光)이 충돌했다. 그 순간 시뻘건 불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번쩍! "케에에... 엑!" 정녕 검의 신이었다. 광명대회주 신주제일룡 사유성. 그가 가는 곳은 무적이었다. 그는 신의 맹위를 어김없이 떨치고 있었다. 광명지존검(光明至尊劍)은 광명천하를 위해 혈륜궁도들을 추풍낙엽처럼 휩쓸고 있었다. 번쩍! 검광은 사십 장을 뻗었다. 달마어기배검술의 위력은 최강이자, 무적이었다. "와아!" "사필귀정(事必歸正)!" 사유성을 따르는 광명회 고수들의 사기는 크게 충천하고 있었다. "핫핫핫... 마도들아! 오늘로써 너희들은 천하에 디딜 땅을 잃을 것이다!" 쐐애액! 광명지존검이 한 차례 더 회전했다. 어느새 사유성은 칠십이각의 중심부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대승(大勝)이 눈 앞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무림 구공자들에 의해 벌어지는 상황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② 혈륜전(血輪殿). 대혈륜궁의 모든 기관과 진식이 모이는 중심부였다. 백천강은 그곳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혈륜육신이 부복하고 있었다. 혈륜육신의 얼굴에는 온통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백천강의 입에서 음산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훗훗훗! 본좌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 만사지관 구천서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구... 궁주님, 대체 어찌하시려고?"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혈륜궁 곳곳이 지옥으로 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유생 상무효도 간언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닙니까? 천하무림을 일통하는 것도 좋지만 희생이 너무 큽니다." 그 순간 백천강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혈륜육신을 내려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희생이 너무 크다고? 크핫핫... 이 정도에? 그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으으!" 혈륜육신은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려움의 신음을 발했다. 백천강은 잔혹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태사의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세 개의 구슬 중 흑주(黑珠)에 손가락을 얹었다. "크ㅋ.... 이 구슬을 누르면 본궁의 모든 기관이 작동하면서 차례로 폭발한다. 지금이라도......."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혈륜육신은 모두 공포의 신색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이라도 누르면 이곳에 들어온 자들을 모두 생매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본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 혈륜육신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백천강은 내처 말했다. "왠지 아느냐? 훗훗... 그것은......." 백천강의 눈에서 다시 한 차례 벽광이 번뜩였다. "놈들에게 완전한 굴복을 얻기 위해서다." 이어 그는 기소를 흘리며 덧붙였다. "특히, 광명회주와는 필히 일전을 나누어야 한다." 백천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귀진자(鬼陣子) 서문량(西門亮)에게 물었다. "궁 밖의 사정은 완벽히 시행되고 있소?" 순간적으로 서문량의 시선에 교활한 빛이 스쳐갔다. "네, 궁도들은 비밀통로를 통해 이미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적도들을 포위했을 겁니다." 백천강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 남은 것은 본궁에 들어온 광명회 잔당들을 서서히 전멸시키는 일이다." 그는 혈륜육신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을 지킨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이곳은 안전할 것이다. 삼십육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백천강은 서서히 출구로 걸어갔다. 그의 입에서 비장한 말이 새어 나왔다. "크ㅋ...! 유성, 너와 나의 대결은 숙명적이다. 오랜 기다림 속에 오늘에야 부딪히는구나." 스스스....... 이어 백천강은 출구 밖으로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휴우......." 그가 사라지자 혈륜육신은 모두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긴장과 공포로 인해 전신이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순간 재보 화양금, 아니 모용란은 내심 안타깝게 부르짖고 있었다. '아아! 그 분의 얼굴에서 점점 마성이 짙어지니... 어쩌면 그 분은 무림사상 최대의 마인이 될지도 모른다. 아아.......' 그녀는 안타까운 심중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사지관 구천서, 활사묘인 사마방, 무유생 상무효, 신기자 공손연....... 그들의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다. 그들은 모두 대혈륜궁을 짓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라 백천강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사태가 점점 파국으로 접어들자 그들의 가슴은 공포로 짓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무림사상 가장 저주스런 대혈사의 일원으로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아! 이토록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줄이야!' 그들은 그동안의 과정을 모두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달랐다. 그는 바로 귀진자 서문량이었다. 그의 눈빛은 쉴새없이 변하고 있었다. '흐흐흐! 이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어 간다. 남은 것은.......'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서문량은 문득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섯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부 할 말이 있소이다." "......?" 오신은 모두 의아했다. 그들은 일제히 서문량을 주시했다. "이번 사건은 전 무림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더욱 중대한 국면이오." "......?" "그래서 노부가 한 가지를 생각해 냈소이다." 서문량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들 가까이 오시오." 그는 음성을 낮추었다. 오신은 의아해 하면서 그에게 다가섰다. 서문량은 서서히 말을 꺼냈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는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꺼냈다. "......?" 그는 주먹쥔 손을 꺼냈다. "이 손 안에 방안(方案)이 있소이다." 오신은 모두 더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무엇이오? 빨리 펴보시오." "어서!" 모두들 재촉했다. 이때였다. "클클클!" 서문량은 기이하게 웃으며 손을 폈다. 그 순간 미처 예측 못했던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펑! 무엇인가가 터진 것이다. ③ 거대한 대혈륜궁의 지하석부는 거미줄같이 얽힌 미로였다. 미로 속에서는 끊임없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아악!" 그런데 실로 괴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차츰 혈륜궁도들의 숫자가 줄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광명회의 정예고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싸움은 백중지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륜궁도들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와아!" "마도탕멸!" 광명회의 군웅들은 점점 더 사기충천했다. 그들은 신나하며 혈륜궁의 미로 속을 치달렸다.그러나 그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 군웅들의 목을 조이는 거대한 음모(陰謀)의 손아귀라는 것을. 파츠츠츳... 콰앙! "으음!" 만검옹과 축융마제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초혼장의 혈투는 막바지로 이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혈륜궁도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축융마제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 늙은이! 본제는 이만 물러가겠다!" 휘익! 축융마제는 통로 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수백 명의 축융전 고수들도 그의 뒤를 따라 일제히 퇴각했다. "서라! 축융마제!" 쓰으이...잉! 만검옹의 손에서 검이 날아갔다. 하지만 축융마제는 시뻘건 화강을 쏘아내며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쫓아라!" 군웅들은 더욱 사기백배했다. 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마도들을 추격해갔다. 그때였다. '심상치 않다. 어째서 놈들이 이렇게 쉽게 퇴각한단 말인가.?' 만검옹은 웬지 불안감을 느꼈다. "와아!" 곳곳에서 함성이 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군웅들의 함성이었다. ".....!" 만검옹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한순간 그는 신형을 날렸다. 그것은 광명회주인 사유성을 찾기 위해서 였다 한편 사유성은 신의 위용을 발휘하며 혈륜궁 깊숙이 진입했다. 그는 백문선생으로부터 들어 이미 혈륜궁의 내부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천중원(天中院)으로 향하고 있었다. 천중원은 삼십육원의 중심부였다. 일단 그곳을 장악하면 삼십육원 전체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스슥! 사유성은 환불무영비(幻佛無影飛)라는 불문경공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중원에 당도했다. 사유성은 넓은 석실에 당도한 후 흠칫했다. 그는 사방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때였다. 그르르릉! 돌연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의 석벽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것이었다. 쿠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기관이 멎었다. 어느덧 석실은 넒은 석전으로 화하고 있었다. 그 순간 사유성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대뜸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소리가 차단됐다. 이것은 통로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사유성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수중의 광명지존검을 움켜쥐었다. "......." 사유성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석전에는 여전히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문득 사유성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넓은 석전을 돌아보며 외쳤다. "후후! 무엇이든지 나 사유성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현세 천하제일인이기 때문이다." 사유성의 패기에 찬 음성이 석벽 안을 울렸다. 그때였다. 한 가닥 냉막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훗훗.... 정말 그럴까? 너의 그 오만함이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을 알려줄까?"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사유성은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섰다. 이때였다. 한쪽 석벽의 휘장이 걷혀지며 한 혈의인이 걸어 나왔다. 그를 본 순간 사유성은 기절초풍을 했다. "사... 사풍객(死風客)!" 나타난 혈의인은 바로 사풍객이었다. 백천강이 본래의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사풍객! 주... 죽지 않았다니!" 사유성은 경악의 중얼거림을 토해냈다. 정말이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풍객은 분명 천장대에서 자신의 천추신검에 꿰뚫렸다. 그런 후 아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사유성은 그 승리의 희열을 지금까지 잊지 않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얻은 사풍인(死風刃)의 상처가 지금까지 가슴 한쪽에 남아 있었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다!" 그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크크ㅋ!" 백천강은 냉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사유성을 향해 다가갔다. "믿어야 한다. 사유성, 나는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으니까! 크크클!" 백천강의 미소.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미소였다. "으으!" 사유성은 전율했다. 그는 놀라 부릅뜬 눈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때의 너는?" "물론 진짜였다." "그... 그런데 어떻게?" "후훗... 어떻게 죽지 않았느냐고?" "그... 그렇다." 백천강은 문득 혈의 앞섶을 벌렸다. 순간 그의 오른쪽 가슴에 끔찍한 상혼이 새겨져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훗훗! 너는 나의 심장을 겨누었다. 그러나 나는 검을 오른쪽에 박히도록 유도했다." 사유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럼 일부러 져주었단 말이냐?" 백천강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클클클! 사유성, 내가 무엇 때문에 일부러 져주었는지 알겠느냐?" "......?" "그건 더욱 철저히 복수하기 위해서 였다." "복수라고......?" 사유성의 얼굴은 의혹으로 일그러졌다. 백천강은 내처 말했다. "너는 천무의 제자다. 나의 최종 목표는 위선의 탈을 쓴 천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크ㅋ.... 그런만큼 그의 제자인 너도 역시 나의 파멸대상이다." 사유성의 얼굴에는 더욱 의혹이 짙어졌다. "그렇다면 왜......?" "왜 일부러 져주었느냐고? 간단한 일이다. 네가 더 큰 후에 철저히 파멸시키기 위해서다." "무... 무엇이?" 사유성의 얼굴이 분노로 새파랗게 변했다. 백천강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어렸다. 그는 사유성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킬킬킬! 네가 사풍객을 처치해야만 정파의 맹주가 될 것이 아니냐? 그때 너를 꺾으면 곧 천하백도를 꺾는 것이다." 그 순간 사유성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잔혹한 놈! 네 놈은 곧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럴까? 너는 혹시 광명회의 허수아비들을 믿는 것이냐? 그들이 본궁에서 남김없이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을 믿지 못한단 말이냐?" "본궁!" 순간적으로 사유성은 다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백천강은 얼굴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그 순간 백천강의 얼굴은 변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한 혈륜왕의 얼굴이었다. "크ㅋ! 혈륜왕이 또 하나의 나의 신분임을 몰랐겠지?" 사유성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렸다. "이... 이럴 수......." 사유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크크클! 너뿐만이 아니라 천하가 모두 속았다. 훗훗...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완벽해서 속였거늘 그 누가 의심하겠느냐?" "으으음!" 사유성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이마의 심줄은 툭툭 불거졌다. 그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공포감과도 같은 증오심을 맛보고 있었다. 부르르....... 사유성의 검을 잡은 손이 떨렸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백천강에 대한 무서운 증오심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번쩍! 눈부신 검광이 일었다. 사유성은 마침내 광명지존검을 뽑아든 것이다. "핫핫! 사풍객, 너는 고금미증유의 대혈마(大血魔)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너는 그야말로 완벽한 혈마다. 그러나 나 사유성이 있는 한 너의 존재는 본 무림에서 지워지게 될 것이다!" 사유성은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터뜨린 광소는 자신의 당황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훗훗! 그럴까? 너의 무공이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백천강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사기가 감돌고 있었다. 쓰쓰쓰! 광명지존검에서 새하얀 백광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백광은 사유성의 일신을 감쌌다. "물론이다!" 사유성은 패기만만하게 말했다. 순간 백천강은 사악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크크ㅋ! 벌써 잊었느냐? 나는 너의 검을 오른쪽 가슴으로 유도하여 일부러 맞았다. 그러나 너는 사풍인이 날아드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바로 그 순간 사유성의 신형은 흐트려졌다. 이어 그의 입에서 피맺힌 절규와도 같은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으윽!" 백천강의 말은 틀림없었다. 그때 분명 사유성은 사풍객이 날아드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 사유성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백천강은 사유성을 쏘아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교만따위로 인한 일말의 헛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너는 졌다.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 이미 너의 패인이다." "다... 닥쳐라!" 우웅! 사유성의 분노성이 끝났을 때였다. 한 가닥 검기가 십여 장을 치뻗었다. "싸움에 있어 흥분은 절대 금물임을 잊었느냐? 대소림의 최고고수가 그 기본마저 잊다니... 크ㅋ!" 백천강은 냉소했다. 그의 냉소는 그대로 침(針)이 되어 사유성의 자존심을 찔렀다. "사풍객! 싸움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너도 검을 뽑아라" 백천강은 서서히 허리춤에 손을 댔다. 백천강의 허리춤에는 한 자루 묵검(墨劍)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그가 과거 낙양의 궁가병기점에서 백일 동안 직접 만든 것이었다. "크ㅋ.... 이 검은 그동안 소림에서 잠자고 있었지." "......!" 사유성은 흠칫했다. 백천강은 내처 말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마검이라 부르지만 이 검에는 원래의 이름이 있다." "......?" "비검(悲劍), 바로 비검이다." 어느새 사유성은 완전히 하나의 검기(劍氣)덩이가 되어 있었다. 즉 검과 몸이 완전히 합일된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검도사상 최상승경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검무환허종(劍霧幻虛宗). 그것은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의 극치였다. 검에서 흐르는 기운이 몸을 감싸고, 급기야는 몸이 형태를 떠나 검기에 영입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몸의 형태는 자취를 감추고 오직 검혼(劍魂)만 남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림검도의 비기 중 비기였다. 사유성은 마침내 검무환허종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백천강은 비검을 서서히 뽑았다. 쓰쓰쓰....... 칙칙한 묵기(墨氣)가 석전을 일순 어둡게 메꾸는 듯 했다. "훗훗! 이 비검을 만들 적에 맹세했다. 비검에 한을 품게 한 자들의 피를 바르리라고!" 우우웅....... 그 순간 묵검은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오싹한 검명은 마후음에 가까웠다. 그것은 바로 지옥의 혼령들이 울부짖는 아수라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검의 울음 속에는 온통 저주가 서려 있었다. 우우우웅....... 마침내 백천강의 몸을 칙칙한 묵기가 집어삼키듯 흡수했다. 이어 그는 흑무덩어리가 되었다. 사유성은 백무였다. 흑무와 백무는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녕 운명의 대결이 아닐 수가 없었다. 쓰쓰쓰쓰....... 흑무와 백무의 회전속도는 점차로 빨라졌다. 파파파팟! 마침내 두 개의 별이 충돌하듯이 그들은 무섭게 격돌했다. ④ 혈륜전(血輪殿) 안. 서문량이 손바닥을 폈을 때였다. 펑! 그의 손바닥에서 무엇인가가 터졌다. 바로 그때였다. "훗훗훗훗!" 서문량의 입에서 음침하면서도 교활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때를 같이하여 혈륜전의 모든 것이 자욱한 연기에 뒤덮였다. "으윽! 독... 독무(毒霧)다!" "크윽... 이럴 수가!" 자욱한 독무 속에서 오신의 경악성이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순간의 일이었다. 쿵... 털썩! 그들은 차례로 바닥에 쓰러졌다. 독무 속에서 서문량의 교활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몰랐겠지? 노부가 바로 혈천마국의 비령삼호인 줄을?" 스스스....... 연기가 걷혔다. 그 순간 드러난 상황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느새 귀진자 서문량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서문량은 바로 대혈륜궁의 모든 기관을 조종할 수 있는 태사의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의 발밑에는 혼절한 혈륜오신의 몸뚱아리가 구겨지듯 뒹굴고 있었다. 서문량은 만면에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손을 팔걸이의 흑주에 올렸다. "흐흐흐! 이것만 누르면 혈륜궁의 모든 것이 차례로 폭발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이곳은 무덤으로 변할 것이다. 광명회 정예고수는 물론 혈륜왕까지도.... 크하하핫!"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크하하핫! 혈륜궁이여, 너와도 이젠 끝이다." 서문량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는 힘껏 흑주를 누르고 말았다. 쿠... 쿠... 쿠... 쿵....... 둔중한 폭음과 함께 혈륜전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촤아악....... 한 가닥 피무지개가 호선을 그리며 뻗었다. 참혹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크으윽!" 콰르릉....... 백무와 흑무는 뒤엉긴 채 계속 소용돌이쳤다.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핏방울을 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이어 그것은 즉시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툭. 그것은 검에 잘려진 한 짝의 팔이었다. 우우... 우... 우웅....... 서서히 백무와 흑무의 소용돌이가 걷히기 시작했다. 이어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으! 내... 내가... 패... 패하다니!" 단말마의 신음을 토해내는 사람은 바로 사유성이었다.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한 듯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사유성의 오른팔은 어깨부터 잘려지고 없었다. 그는 왼팔로 콸콸 피가 뿜어나오는 어깻죽지를 감싼 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 백천강은 삼 장 거리에서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문득 백천강의 입이 열렸다. "크ㅋ! 당연한 귀결이다. 너는 처음부터 나를 이길 수 없었다." "왜... 왜지?" 사유성은 경악하듯 물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수치,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백천강의 얼굴은 완전히 청면(靑面)이었다. 그것은 사기가 뒤덮인 결과였다. "훗훗! 너는 인간의 무공을 펼쳤으나 나는 마신의 무공을 펼쳤기 때문이다. 크ㅋ!" "마... 마신(魔神)이라고!" 사유성은 급히 반문했다. 그의 안색은 어느새 잿빛이 되었다. "ㅋㅋㅋ! 내가 익힌 마공은 고금미증유의 불멸하공이다. 크ㅋ... 앞으로 일성만 더 끌어올리면 나는 마신경(魔神境)으로 접어든다. 그때가 되면 나는 영세무적인(永世無敵人)이 될 것이다!" 백천강의 말은 으시시한 것이었다. 사유성은 혼미해가는 정신 속에서도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마침내 백천강은 비검을 들었다. "이제 종지부를 찍어주마!" 바로 그때였다. 쿠... 쿠... 쿠... 쿵....... 돌연 엄청난 폭음이 멀리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폭음은 가공한 것이었다. 아스라한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전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아... 아니! 누가?" 백천강은 안색이 홱 변했다. 그러나 더 생각할 틈도 없었다. 콰르르르... 릉....... 곧바로 석부 전체가 마구 흔들렸다. 석벽이 갈라지고 천장에 금이 갔다. "흐... 흑주를 누르다니!" 백천강은 분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붕괴되는 대혈륜궁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차앗!" 그는 급히 장력을 뻗었다. 콰콰쾅! 백천강의 장력에 의해 한쪽 석벽이 허물어졌다. 그는 즉시 허물어진 석벽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으으... 빠... 빠져 나가야 한다!" 사유성도 뒤이어 혼신의 힘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그가 막 석전을 빠져나간 직후였다. 콰르르릉....... 굉음과 함께 석전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간일발의 순간이었다. 쿠쿠쿠... 쿵! 엄청난 대폭발이었다. 대혈륜궁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칠십이각이 차례로 무너지고 삼십육원이 주저 앉았다. "함... 함정이다! 으악!" "빠... 빠져 나가라!" 군웅들은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에 깔리며 아우성을 쳤다. 어느덧 그들은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통로가 무너지고 혈륜궁 전체가 무섭게 뒤흔들렸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는 것이다. 혈륜궁도들은 이미 모두 빠져나가고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군웅들은 적의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아! 끝장이다!" "이대로 생매장당하다니!" 군웅들은 절망성을 터뜨리며 돌더미를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다. 이때였다. "우아아!" 돌연 저주에 찬 마후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휘익! 그 뒤를 이어 한 혈의인영이 광장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이 나타난 순간 군웅들은 모두 흥분했다. "혈륜왕이다!" "저 자를 쳐죽여라!" 기왕에 죽은 목숨이었다. 군웅들은 벌떼처럼 백천강에게 덤벼 들었다. 그러나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크하핫핫...! 비켜라.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콰르르릉......! 백천강은 쌍장을 가볍게 휘둘렸다. "케에... 엑!" 군웅들은 엄청난 장력에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백천강의 무공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휘익! 백천강은 곧바로 무너져 내린 통로쪽으로 날아갔다. 이어 그는 전력으로 쌍장을 뻗었다. 충천하는 자광(紫光)과 함께 돌먼지가 회오리쳤다. 콰르르르....... 마침내 돌먼지가 피어올랐다. "뚫렸다!" "와아!" 그 순간 군웅들은 공포 속에서도 환성을 질렀다. 백천강은 무너져 내린 통로를 장력으로 뚫은 것이었다. 그의 신형은 즉시 돌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군웅들에게는 이제 분노도 증오도 없었다. 그들은 오직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품고 백천강이 뚫은 통로로 무조건 따라 뛰어 들었다. 쿠쿠쿵! 동작이 늦은 군웅들은 집채만한 돌더미에 깔려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휘휘휙! 백천강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유일한 출구는 밖으로 통하는 밀로(密路)뿐이었다. 나녀상이 있는 출구는 이미 폐쇄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밀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천강은 망설이지 않았다. 꽈르르릉! 백천강은 전력으로 막혀버린 통로를 장력으로 뚫어 나갔다. 그를 따르던 군웅들은 모두 그의 인간 이상의 괴력에 공포에 가까운 경악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 대한 증오조차 품을 여유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같은 배를 탄 심정이었다. 꽈꽈꽝! 군웅들도 사력을 다해 통로를 뚫었다. 혈륜궁의 붕괴는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군웅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밀로를 뚫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혈륜궁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망혼애(亡魂崖) 위였다. 쿠쿠쿠쿵! 혈륜궁이 있던 곳은 거대한 대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우...! 믿을 수가 없다!" "모두... 모두 생매장되었다. 오오!" 군웅들은 공포와 경악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안색은 밀랍보다 더욱 창백했다. 혈륜궁 안으로 들어간 광명회 정예고수들은 혈륜궁의 붕괴와 함께 모두 생매장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당했단 말인가?" 군웅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넋을 잃은 채 붕괴되는 대혈륜궁을 망연자실 내려다 볼 뿐이었다. "......!" 하지만 어느새 그들은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만약 자신들도 혈륜궁에 입궁했다면 모두 부질없이 지하고혼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이때였다. 삐이익! 돌연 사방으로부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 순간 군웅들은 안색이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어느새 자신들을 새카맣게 뒤덮은 인영(人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만의 인물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실색하여 부르짖었다. "소... 속았다!" "함정이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음침한 괴소가 중인들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크흐흐흣! 어리석은 자들. 너희들은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었다!" 스슷! 이어 군웅들 앞으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를 본 순간 군웅들은 대경하여 소리쳤다. "천마부주(天魔府主) 혼세천마(混世天魔)다!" "위지경(尉遲經)이다!" 군웅들이 알아본 대로였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천마부주 혼세천마 위지경이었다. 그는 바로 대혈륜궁의 총호법이기도 했다. 위지경은 군웅들을 내려보며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킬킬킬! 너희들의 정예는 혈륜궁과 함께 영원히 지하에 묻혔고, 너희들은 겹겹이 포위되었다." "......!" 장내에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군웅들 중에는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위지경은 경멸의 눈초리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백도무림은 허울만 좋았지 썩을 대로 썩었다. 그러므로 자연 도태되어야 한다. 너희들의 앞에는 오직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 군웅들은 동요했다. "사는 길과 죽는 길, 오직 두 가지 길뿐이다!" 위지경은 일성을 토해냈다. 그때였다. 군웅들 속에서 누군가가 외쳐 물었다. "사는 길은 어떤 것이고, 죽는 길은 어떤 것이오?" "......?" 그 말에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자에게 향해졌다. 그리고 찰나지간 군웅들은 흠칫했다. 위지경에게 질문을 던진 자는 전진우사(全眞羽士) 당송우(唐松雨)였다. 그는 전진파(全眞派)의 마지막 장교였다. 지금 전진의 위세는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쇠락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진파는 그래도 무림의 명숙이었다. 위지경은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침하게 말했다. "후후...! 간단하다. 사는 길은 굽히는 것이고, 죽는 길은 부러지는 것이다." 그때였다. "배... 백도는 결코 굽히지 않는다." "악은 결코 영승(永勝)하지 못한다." "꺾일지언정 굽힐 수는 없다!" "와아!" 군웅들은 모두 비장하게 외쳐댔다. 삽시에 장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시오!" 돌연 전진우사 당송우가 외쳤다. 군웅들은 잠시 흥분을 가라 앉혔다. 전진우사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소. 사실 백도무림은 그동안 안일에 빠져있는 것도 사실이오. 이 기회에 새로운 무림일통(武林一統)의 길에 서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군웅들은 경악했다. 아니, 크게 분노했다. "미친 소리 작작해라. 백도는 결코 혼을 팔 수 없다!" "옳소. 이곳에 뼈를 묻을지언정 어찌 사마외도에게 몸을 의탁하겠소?" 군웅들은 크게 흥분했다. 이때였다. "후후후...!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시오." 불현듯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음성에는 기이하게도 신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군웅들은 삽시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는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백, 백문선생!" 뒤이어 군웅들은 똑같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새로이 입을 연 자. 그는 바로 광명회의 군사인 백문선생 우문기였다. 39장 악인천하(惡人天下) ① 백문선생은 군웅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무림의 생태는 적자생존의 법이오. 만일 강하지 못하면 정도 또한 추구하지 못하는 법이오." "......!" 그 말에 군웅들은 모두 술렁거렸다. "보시오. 광명회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지금은 오히려 궁지에 몰려있소. 만일 이곳에서 대결전이 벌어지면 광명회는 그 뿌리까지 짓밟힐 것이오. 다시 살아나려면 그 뿌리를 보호해야 하오." 백문선생의 말은 군웅들을 동요시켰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광명회 정예가 몰살한 지금 혈륜궁과 승상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제 생사의 관건은 혈륜궁쪽에서 쥐고 있는 것이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는 혈륜궁에게 자비를 구해도 마땅치 않을 판국이었다. 백문선생은 군웅들을 둘러본 후 다시 말했다.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느냐? 죽어 흙이 되느냐는 여러분의 판단에 달려 있소이다." 이때였다. "현혹되지 맙시다. 백도가 굽히면 삶은 없소. 영원한 암흑이 있을 뿐이오. 여러분은 벌써 잊었소? 그 지옥과도 같았던 대마성의 시절을?" 돌연 차디찬 음성이 군웅들의 가슴을 진탕시켰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무림삼옹(武林三翁)!" "와아! 장천화옹(掌天華翁)이시다!" 군웅들의 얼굴에 일말의 생기가 떠올랐다. 바로 전설적 고인인 장천화옹이 나선 것이다. 그의 출현으로 인해 군웅들은 어느 정도 생기를 되찾았다. 사태는 다시 급전했다. "살아 욕되느니 차라리 죽어 이름을 남기자!" "백도는 영원하다!" 군웅들은 비장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차... 차차창! 일시에 검광과 도광은 대별산역을 밝혔다. 마침내 중원백도 존멸의 대혈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때였다. 문득 백문선생 우문기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ㅋ! 어리석은 자들아. 본존(本尊)을 보아라!" 그 말은 군웅들의 가슴을 경직시켰다. 군웅들은 대경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스! 백문선생의 모습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욱한 핏빛 혈무가 그의 모습을 에워싼 것이다. "아니?" 그것은 마도의 비술임이 분명했다. 군웅들은 삽시에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백문선생. 그들은 믿었던 대광명회의 군사가 마도의 무리였다는 사실에 넋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스스슷! 네 명의 혈의인들이 백문선생의 뒤에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땅 속에서라도 솟아난 듯 나타나서 차례로 시립하는 것이었다. 바로 혈천사대호신이었다. 백문선생, 아니 혈무인의 음성이 으시시하게 변했다. "크크크! 어리석은 자들아. 본존이 누구인 줄 아느냐? 너희들은 혈천마국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혈... 천마국?" "......?" 군웅들은 모두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혈천마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혈무인은 기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크크ㅋ! 그렇다면 기환궁(奇幻宮)은 알겠지? 본궁은 바로 기환궁의 종주국이다." "아아! 기환궁!" "그, 그럴 수가!" 군웅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환궁(奇幻宮).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름이었다. 기환궁은 바로 천하마공의 발원지이자 저주의 마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혈천마국이 기환궁의 종주국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혈무인의 응랭무비한 웃음이 또 한 차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군웅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크크ㅋ! 본존은 바로 혈천마국의 국왕이다. 이제 천하무림은 본국의 수하에 들 것이다." "으으!" 군웅들은 모두 공포에 질렸다. 혈천마국주는 다시 말했다. "혈륜궁은 단지 본궁의 한 부분일 뿐이다. ㅋㅋ. 혈륜왕 그 아이도 본존의 이용물에 불과했을 뿐이다." "아아!" 군웅들은 완전히 혼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대음모의 전말이었다. 다음 순간 혈천마국주는 혈무 속에서 시뻘건 혈기를 꺼내들었다. 이어 그것을 세차게 흔들었다. "크하하핫! 혈천마번(血天魔幡)이 출세(出世)했도다. 크핫하핫...! 모두 경배하라!" 그의 광소가 터진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십만이 넘는 혈륜궁도들이 일제히 땅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마번출세(魔幡出世)!" "마국현현(魔國現現)!" 그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십만이 넘는 마도인이 부르짖는 음성은 중원천하를 온통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 기절초풍할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혈천마국주는 돌연 차갑게 말했다. "마번의 추종자들이여! 충혈을 보여라!" 그가 말을 끝냈을 때였다. "크아악!" "이럴 수가... 아아악!" 정녕 하늘도 땅도 믿을 수가 없었다. 찰나지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형제였고, 사문(師門)이었으며 지인(知人)이었던 자들이 느닷없이 친구의, 사형의, 심지어는 스승의 목을 베는 것이었다. "크아악! 이... 이럴 수가?" "크악! 왜...?" 그것은 하늘과 인간이 다함께 공노(共怒)할 일이었다. 군웅들은 이 믿을 수 없는 대변괴에 우왕좌왕했다. 혈살풍(血殺風)은 그렇게 불기 시작했다. "크핫핫핫! 쳐라! 오늘이 오기까지 그 얼마나 참아왔던가? 쳐라! 모조리... 혈세(血洗)하라!" 혈천마국주는 연신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오늘을 기다렸다." "크크! 뒈져랏!" 마침내 거대한 피구름이 대별산에 몰려들었다. "크크크! 이제야 나의 야망이 이루어지고 있다. 클클클클!" 혈천마국주는 망혼애가 내려보이는 절애(絶崖) 위에서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사대호신이 그림자처럼 시립하고 있었다. "킬킬킬! 나 갈천기가 중원을 떠나면서 피로 맹세했던 일들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때였다. 사대호신이 똑같이 입을 열었다. "주상께서 중원으로부터 오셨을 때부터 속하들은 오늘같은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크크... 그랬던가?" 갈천기는 즐거운 듯이 괴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피보라가 일어나고 있는 아비규환의 혈전장을 내려 보았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의 머리 속에서 대마성이 붕괴되던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대사막의 탈출.... 그리고 오늘까지... 나 갈천기의 증오심은 단하루도 잠든 적이 없었다. 후훗! 수련(水連), 보아라. 나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그때였다. "크으으윽! 바로 네 놈이었구나! 본인의 혈륜궁을 무너뜨린 놈이." 절애 위로 원한에 가득찬 외침이 들려왔다. 쐐애액! 동시에 시뻘건 혈영이 쏘아 올라왔다. 그 순간 혈영의 손에서 가공할 묵검강이 폭사되었다. "네 놈이 살아 있다니!" 갈천기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였다. "크흣흣! 감히 주상을 해치려 들다니 마겁타라니(魔劫陀羅尼)!" 파츠츠츳.! 혈천마국의 사대호신들이 쾌속하게 혈영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이어 그들은 네 줄기의 혈기류를 뿜어댔다. 콰콰... 쾅! "크윽!" 혈영은 비명과 함께 곤두박질쳤다. 이윽고 혈영은 비틀거리며 땅으로 내려섰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의 몰골은 비참했다. 혈의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드러난 육체 사이로 피가 비치고 있었다. 안색은 탈진할 대로 탈진해 백지장같았다. 백천강은 마침내 지옥같은 혈륜궁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진력을 소비하여 초주검상태였다. 거기에다 사대호신의 막강한 전력에 진탕되어 내장이 뒤틀렸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가공할 신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크으윽! 네 놈들이 누구길래 나의 혈륜궁을 무너뜨리느냐?" 백천강은 입과 코로 검은 피를 흘리며 다가갔다. 순간 갈천기를 둘러싼 혈무가 흔들렸다. "훗훗! 어리석은 놈, 몰랐더냐? 혈륜궁도들이 그 이전 본좌의 수하들이었음을? 네 놈은 그동안 본좌의 손바닥 속에서 놀았다." "무... 무엇이라고?" "크ㅋ! 본국이 중원무림을 장악하는데 네 놈을 이용했을 뿐이다." "크... 크윽!" 돌연 백천강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뿜어졌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때문이었다 "크으윽! 널 죽이겠다!" 우웅! 순간적으로 백천강의 전신은 자광에 휩싸였다. "크크... 어딜!" 스스슥! 사대호신은 신형을 움직여 백천강을 가로 막았다. 그들의 눈에는 백천강이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비로만 보였다. "크아아아! 모두 죽이겠다!" 백천강은 울부짖으며 쌍장을 뻗었다. 이때였다. 갈천기가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비켜라. 본좌가 놈을 처리하마!" 그 말에 사대호신은 꺼진 듯 비켰다. 갈천기는 더욱 짙은 혈무에 싸이기 시작했다. "크ㅋ! 네 놈에게 진정한 마공(魔功)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마!" 우우우... 웅....... 그 순간 한 줄기 자광이 악령의 그림자인 양 갈천기를 덮쳤다. 백천강은 혼신의 힘을 다해 갈천기를 공격한 것이다. "크핫핫핫...! 아수라마혈황공(阿修羅魔血荒功)!" 스읏! 갈천기의 광소와 함께 시뻘건 혈기류가 자광을 뒤덮었다. 마침내 마공과 마공이 격돌했다. 한순간 혈기류와 자기류가 혼합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의 현상일 뿐이었다. "으아악!" 찰나지간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시뻘건 핏줄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백천강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커다란 고통을 맛보았다. 그것은 백천강의 몸을 혈기류가 감싸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온 몸의 혈관이 터질 듯이 팽창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의 시작에 불과했다. 쩌억... 쩌쩌억....... 뒤이어 온몸의 피부가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핏줄기가 무섭게 뻗쳐 나오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백천강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오직 그것만이 백천강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촤아악....... 자욱한 혈무가 사방을 뒤덮었다. "아... 아... 아... 악......." 처절한 비명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백천강은 핏덩어리가 된 채로 아득한 절애 아래로 추락해 내렸다. 절대마인의 길을 걸었던 한 불운한 인물의 종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크하하핫!" 혈천마국주 갈천기는 망혼애를 내려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핫! 드디어 천하일통의 꿈이 이루어지도다! 무림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업을 말이다. 크핫핫핫핫!" ② 대별산의 정사대혈전 이후. 하늘과 땅은 그 모습을 뒤바꾸고 말았다. 대혈륜궁이 일으킨 피의 수레바퀴는 암흑무림의 도래를 위한 서곡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어쨌거나 혈륜궁은 마침내 붕괴되었다. 광명지회의 정예들은 모두 옛 기환궁터에 뼈를 묻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광명회의 정도고수들도 의골(義骨)을 대별산역에 고스란히 묻어야만 했다. 시체는 또 하나의 산을 만들었고 피는 강물을 이루며 흘렀다. 마침내 혈천마국은 중원천하를 장악했다. 그것이 악인천하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정도를 표방하던 숱한 무림인들이 다투어 변절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중원의 명문대파도 모두 혈천마국의 속파가 되고 말았다. 소림과 무당, 아미 등을 위시한 구파일방도 한낱 혈천마국의 분타(分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녕 통재(痛哉)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소림사(少林寺). 천 수백 년의 무림정기(武林正氣)를 수호해오던 대소림사는 지금 그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숭산은 이제 더이상 불가성역이 아니었다. 소림사는 마침내 파계승과 무뢰배, 색승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지객당(知客堂). 지객당은 소림사에 참불하러 오는 불도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석가모니불이 버젓이 모셔져 있었다. 험상궂은 사대천왕상이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버티고 서 있는 곳이기도 했다. "흐으윽... 아악...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아악!" "흐윽... 이럴 수가... 불승이 이럴 수가!" 지객당 안에는 악에 바친 여인의 비명이 울려왔다. 불당 안에는 지금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낯 뜨거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두 명의 여인이었다. 여인들은 예불객이었다. 한 여인은 고귀한 집안의 젊은 아낙인 듯했다. 다른 하나는 그녀의 시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들은 발가벗겨진 모습이었다. 여인들은 바로 번들거리는 대머리를 가진 중 다섯 명에게 강간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으윽! 놔... 놔라! 아윽!" "처, 천벌을 받으리라. 아흑!" 여인들은 손톱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녀들은 수치와 절망에 몸부림쳤다. "흐흐흐! 가만 있거라... 부처님의 자비를 줄테니까." "고것... 싱싱하구나... 헉헉!" 그들의 행동은 짐승의 그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망측스럽기 짝이 없는 교접이 벌건 대낮에 강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도 부처님이 보는 앞에서. 그러나 부처님은 말이 없었다. 오로지 염화시중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그들의 행위를 지켜볼 뿐이었다. "흐으윽... 하윽... 악!" 중들은 번갈아가며 여인들을 덮쳤다. 여인들은 몇 차례나 계속되는 능멸에 실신했다가 깨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여인들은 자비스런 불법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얻은 것은 무법자들의 횡포일 뿐이었다. "우... 우... 우... 우......." 느닷없이 만추(晩秋)를 깨뜨리는 장소가 대별산역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마의 장소성(長嘯聲)이었다. 음산한 장소성이 울려나오는 곳은 무심곡(無心谷)이었다. 무심곡은 사라진 기환궁과 혈륜궁이 있던 망혼애의 반대편에 있는 깊이를 모를 계곡이었다. "우우우... 우......." 그 계곡으로부터 으시시한 마의 기운이 가득 깃든 장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하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열 사람의 입에서 터져나온 저주의 장소성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 이잉....... 시커먼 구름덩이가 무심곡으로부터 솟구쳐오른 것이었다. 휘이익! 흑운 덩어리는 한순간에 백 장의 높이를 솟구쳐 올랐다. 뜻밖에도 흑운 덩어리는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 명의 흑영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이라와 같았다. 열 명의 흑의인들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흰 천으로 칭칭 동여맨 미이라 하나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우우... 우!" 흑의괴인들의 입에서는 연신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장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지면을 밟지도 않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휘이익!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별산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섬전과 같은 빠르기로 북쪽으로 사라져갔다. ③ 항산(恒山). 초겨울로 접어드는 항산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항산은 너무나 험준하며 사냥꾼의 발길조차 닿지않는 험산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인간은 살고 있었다. 항산 기슭에 초옥(草屋)이 있었다. 초옥은 몇 칸의 모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곳은 일년 내내 사람이 찾아들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옥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초옥에 살고 있는 사람은 늙은이 하나와 여인 하나였다. 두 사람은 조손지간(祖孫之間)이었다. 그들은 이름을 잊고 산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독심절의(毒心絶醫) 구불리(仇不利)와 그의 손녀인 옥잠(玉簪)이었다. 독심절의 구불리는 천하에서 가장 괴팍한 명의였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 그곳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열흘 전에 골치아픈 일이 생긴 것이다. 열흘 전의 아침 무렵. 구불리를 찾아온 괴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흑의를 입은 다섯 쌍의 남녀들이었다. 모옥의 넓지 않은 마당에 흑의인들은 서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는 전신을 흰천으로 칭칭 동여맨 미이라가 누워있었다. 언뜻 보기에 미이라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 다섯 쌍의 흑의인들은 무표정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섬뜩한 사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보기드문 선남선녀들이었다. 그들은 열흘 전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모옥 마당에 장승처럼 서 있는 것이었다. "......." 독심절의 구불리도 괴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들에게 일언반구 묻지도 않았다. 구불리는 그들에게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약실(藥室)에 틀어박혀 밤낮 약의 연단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 그 열흘 동안 몸이 다는 것은 옥잠뿐이었다. "세상에... 저들은 배가 고프지도 않나 봐!" 그녀는 부엌에서 힐끗 마당을 내다보고 혀를 찼다. 벌써 열흘 째건만 흑의남녀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열하루째 아침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기가 바쁘게 약실로 쪼르르 달려 갔다. "할아버지!" 그녀는 맑게 외쳤다. 의자에 앉아 약을 배합하던 구불리는 고개를 돌렸다. "웬 호들갑이냐?" 구불리의 말투는 짐짓 나무라는 어조였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대하는 그의 눈길은 매우 부드러웠다. "저대로... 저 분들을 내버려 두실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구불리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옥잠은 맑은 눈을 굴리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저대로 두면 저 분들은 굶어 죽을 거예요!" 다음 순간 구불리는 코웃음쳤다. "흥! 저 놈들은 설사 일 년을 굶어도 죽지 않는다!" 옥잠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죠?" "흐흥! 저 놈들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옥잠은 더욱 놀랐다. 그녀는 금방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사람이 아니면... 그... 그럼 귀신인가요?" 구불리는 사랑스러운 듯이 옥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신이 아니다. 놈들은...강시(彊屍)들이다." "강... 시?" "사람은 사람이되 혼이 없는 놈들이지." "그... 그런 것도 있나요?" "불쌍한 놈들이다. 제멋대로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놈들이다." "......?" 옥잠은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저대로 둘 건가요?" 구불리는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 둬라. 놈들은 제 주인을 구해달라고 왔지만... 흥! 필시 강시를 부리는 걸 보면 좋은 놈은 못된다. 어쩌면 구해주고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순간 옥잠은 울상이 되었다. "하... 하지만 어찌 죽어가는 사람을 놔둘 수가 있어요?" 구불리는 혀를 찼다. 그는 옥잠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쯧쯧! 아직도 그 동정심을 버리지 못했느냐? 벌써 배은망덕한 그 녀석을 잊었단 말이냐?" "......!" 그때였다. 옥잠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옥잠은 창밖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가가......." "쯧쯧.... 잊어라. 놈은 돌아오지 않는다." 구불리는 안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찰나지간 옥잠은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가가는 반드시 돌아오실 거예요. 반드시!" 옥잠은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감싸쥐고 뛰쳐 나갔다. "허어.... 그것 참......." 그녀가 나가자 구불리는 잠시 탄식했다. 이어 그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강시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필시 보통 내력은 아닐 텐데. 그러나 이미 숨소리가 멎었고 온기도 전혀 없으니 보통 방법으로는 살릴 수가 없다. 노부의 환혼단(還魂丹)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약초배합에 열중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흑의남녀는 장승처럼 미동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그들은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 같았다. 눈이 내렸다. 첫눈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우며 펄펄 내리는 흰눈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항산은 삽시에 건곤일색(乾坤一色) 은색으로 물들었다. 백설은 인간의 온갖 추악함도, 세상사의 복잡함도 모두 덮어버리려는 듯이 탐스럽게 내리는 것이었다. "호호호! 할아버지. 눈이에요. 첫눈이에요!" 옥잠은 천진스럽게 웃으며 산비탈을 뛰어올라왔다. 정말이지 그녀는 유난히 눈을 좋아했다. 그때였다. 쿵! "아앗!" 그녀는 공교롭게도 흑의인 한 명과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는 바로 바닥에 누워있는 미이라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멋!" 그녀는 겁에 질려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이것은!" 옥잠의 눈은 한순간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한 가지 물건을 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옥비녀였다. 비취로 된 옥비녀 하나가 흰천에 싸인 인물의 가슴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아아!" 갑자기 옥잠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뒤이어 그녀는 두려움도 모르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뻣뻣한 미이라를 끌어 안았다. "아아! 가가! 돌아와 주셨군요. 돌아와 주었어요! 내 그럴 줄 알았어요. 흐흐흐흑! 가가이신 줄도 모르고!" 옥잠은 진주같은 눈물을 흘리며 반가움에 몸부림쳤다. 미이라의 앞가슴에 꽂혀 있는 비취 옥비녀. 그것은 그녀가 과거 진우명(陣宇明)에게 정표로 준 것이었다. "할아버지!" 마침내 옥잠은 희열에 들떠 미친 듯이 외쳤다. 그리고는 약실로 뛰어들어갔다. ④ 부글부글... 치익... 치익칙....... 독수가 끓고 있었다. 독수는 천 가지 이상의 독액이 혼합된 것이다. 그것은 고약한 냄새와 푸른 연기를 피워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만한 항아리 속의 독수는 그야말로 천하의 모든 독이 혼합된 것이었다. "......." 그것을 지켜 보는 두 쌍의 눈길이 있었다. 바로 독심절의 구불리와 옥잠이었다. 옥잠은 몹시 초조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진가가를 구할 수 있을까요?" 구불리는 침중하게 말했다. "지금으로선 단언하기 힘들다. 우선 만독투골역신대법(萬毒透骨逆身大法)으로 그를 완전히 독인(毒人)으로 만들어 잠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다음 환혼단을 먹여야 알 수 있다." "꼭 살려주세요. 할아버지. 네에?" 옥잠은 애처롭게 말했다. 구불리는 딱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쯧쯧! 그가 진우명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그 말에 옥잠은 급히 도리질했다. "아니예요! 틀림없어요. 진가가가 틀림없단 말이에요!" 그때였다. 구불리는 옥잠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안타까운 듯이 탄식했다. "설사 그가 틀림없다해도... 예전의 그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좋아요. 가가가 살아나기만 한다면 옥잠은 아무래도 좋아요!" 구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얘야, 너는... 정이 너무 많아 탈이다." 이어 그는 결심한 듯 명령했다. "그를 데려 오너라.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벗긴 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옥잠은 번개처럼 옆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녀는 한 혈인을 안고 들어왔다. 그것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흐흐흑!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녀는 연신 흐느껴 울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너무나 끔찍했다. 혈인의 전신은 성한 곳이라고는 없었다. 혈관도 모조리 파괴되어 있었다. 어떻게 아직 죽지 않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흐흐흑! 세상에... 이럴 수가!" 옥잠는 너무도 끔찍한 진우명의 모습에 오열을 금치 못했다. "......!" 평소 희노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는 구불리조차도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도저히 살아있는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조차 없었다. "으음! 그를... 이곳에 넣어라." 구불리는 신음하며 말했다. "흐흐흑.... 가가!" 옥잠은 흐느껴 울며 혈인을 안아 올렸다. 비록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진우명임을 굳게 믿었다. 첨벙! 혈인의 몸이 항아리 속의 독수에 담가졌다. 치지지칙... 치이익... 푸시시식....... 시퍼런 독연이 자욱이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독수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마치 진우명의 살이 독수에 타버리는 것 같았다. 구불리는 잠시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만일 살아난다면 이 놈은 독중지성(毒中之聖)이 된다. 천하의 모든 독을 흡수했으므로 독중지체가 되어 모든 독공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게 된다." 이어 그는 바퀴가 달린 의자를 굴려 연단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목쉰 음성으로 말했다. "옥잠아, 그를 지켜보아라. 나는 환혼단을 연단하겠다. 며칠 내로 완성될 것 같구나." "네! 할아버지." 옥잠은 급히 대답했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항아리 속의 진우명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이지 진우명에게 향하는 그녀의 사랑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연단실로 향하는 구불리의 탄식이 들려왔다. "쯧쯧! 어린 것이 정을 모르고 자라더니......." 어느덧 항산은 고립되고 있었다. 폭설이 내려 온 산이 설백천지가 되어 있었다. 그 폭설에 열 명의 흑의인들은 가슴 이상을 묻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옥잠은 약실에서 완전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부글부글....... 독수는 쉬지 않고 끓었다. 진우명의 몸은 점차 독수를 흡수하여 새카맣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희대의 독중지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⑤ 겨울은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으핫핫핫! 드디어... 드디어 성공이다! 백골에 살을 붙이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환혼단(還魂丹)이 완성되었다!" 연단실에서였다. 독심절의 구불리의 희열에 찬 광소가 들려왔다. 그날은 구불리가 환혼단의 연단실에 들어간 지 꼭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구불리는 단로(丹爐) 앞에서 벅찬 희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단로를 바라보며 감격에 찬 표정으로 뇌까렸다. "몇 십 년만이던가? 흐흐흐.... 노부의 모든 생애가 집결된 환혼단을 만들기 위해... 흐흐....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는가?" 어느새 구불리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줄줄이 흘러 내렸다. 마침내 단로가 식었다. 구불리는 단로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 그는 곧 용안(龍眼)만한 붉은색 단약 한 개를 꺼냈다. "오오! 이 향기! 이 광택!" 그는 환혼단을 소중히 감싸들고 어쩔줄을 몰라했다. 휙! 구불리는 다리를 덮은 천을 걷어냈다. 그 순간 앙상한 백골만 남은 두 다리가 드러났다. 그 순간 구불리의 얼굴이 동요를 일으켰다. "크흐흐! 이제 이 다리에 살이 붙고... 흐흑...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흐흐흑!" 너무나 벅찬 기쁨 탓이었다. 구불리의 음성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어 그는 제어할 수 없는 기쁨에 벅차 두 손을 떨었다. 마침내 그는 환혼단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그것을 먹기만 하면 다리에 새로운 살이 오르고 걸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할아버지! 환혼단이 완성되었나요?" 불현듯 연단실 밖에서 옥잠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뜻밖에도 그 음성에는 기대가 잔뜩 차 있는 것이었다. "......!" 입으로 다가가던 구불리의 손은 딱 멈추고 말았다. 이어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 때문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구불리는 반쯤 얼이 빠져 버렸다. 그의 눈은 천장을 향해 부릅떠졌다. '오오! 환혼신단... 이것은 단 한 개밖에 없지 않은가? 삼천 육백 가지의 약초가 배합되었지만 단 한 개! 단 한 개밖에 만들지 못했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내심 부르짖었다. 불행히도 환혼신단은 단 한 알 뿐이었다. 수십 년의 정열을 쏟아 부었건만 겨우 단 한 알밖에 생산해내지 못한 것이다. "......!" 구불리는 넋을 잃었다. 이윽고 그의 눈은 백골만 남은 그의 하반신으로 내려갔다. 그 얼마나 걸어보기를 열망했던가? 환혼단을 복용하기만 하면 그는 일어설 수 있었다. - 먹어라! - 제발 먹어라! 너도 남들처럼 떳떳하게 걸어보고 싶지 않느냐? 그의 마음이 유혹을 했다. 하지만 구불리는 망설였다. '환혼단이 없어지면 옥잠은......?' 구불리의 안면근육은 마구 실룩거렸다. 환혼단이 없어지면 진우명은 끝내 독수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옥잠은 필시 살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런 맹목적인 정열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허허헛......!" 구불리는 한순간 모든 것을 초탈한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다시 하반신을 천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내 나이 백이십.... 이제 더 산다한들 얼마나 살겠는가? 드르륵! 그는 의자를 굴려 연단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약실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안색이 창백해진 옥잠이 일어났다.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두 눈은 해골의 눈처럼 퀭했다. 그것은 진우명을 지키느라 제대로 침식을 하지 못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녀의 눈은 절로 구불리의 손으로 갔다. "허허.... 성공이다. 옥잠아." 구불리의 음성은 초탈했다. "아! 할아버지!" 옥잠은 눈물을 철철 흘렸다. 곧이어 진우명은 독수 속에서 꺼내졌다. 독수는 반 이상 줄어 있었다. 진우명은 완전히 독인(毒人)이었다. 그의 온몸은 독으로 가득 배어 있었다. 뼛골 깊숙한 곳은 물론이거니와 혈관 속에도 독기가 배어 있었다. 그의 전신은 독으로 인해 칠흑같이 검은 윤기가 흘렀다. 그것은 실로 괴이한 모습이었다. 그는 녹피장갑을 낀 옥잠에 의해 돌침상에 눕혀졌다. 옥잠은 얼굴이 온통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진우명을 살린다는 흥분도 흥분이려니와 남자의 나체는 생전 처음 대하기 때문이었다. 진우명은 일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우람한 남성의 근육과 상징이 그대로 옥잠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막상 진우명을 살리려는 순간 구불리는 한 가지 큰 고민에 부딪치고야 말았다. "......." 구불리는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옥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촉했다. "할아버지! 어서 가가를 구해줘요." 마침내 구불리는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는 옥잠을 향해 말했다. "옥잠아." "네?"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구불리의 음성은 무척이나 엄숙했다. 한순간 옥잠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네?" 하지만 그녀는 곧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러겠어요." "그럼 이것을 복용해라." 그는 한 알의 흑색단약을 건넸다. "......?" "그것은 만독을 제거할 수 있는 독황단(毒皇丹)이다. 그걸 복용한 후 옷을 모두 벗어라." 구불리의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옥잠은 깜짝 놀랐다. "옷을... 벗어요?" 구불리는 엄숙히 말했다. "그렇다. 그를 구하려면." 드르륵....... 구불리는 의자를 굴려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그의 침중한 음성이 들렸다. "남김없이 옷을 벗은 후 그의 몸 위에 누워야 한다.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그의 모든 부분과 밀착하여... 그의 멈추어버린 혈류를 흐르게 해야 한다." "......!" "혈류가 흘러야 환혼신단을 흡수할 수 있다." 그 순간 옥잠의 얼굴은 도화꽃처럼 빨개졌다. 처녀의 몸으로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자와 맨살을 밀착시켜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옥잠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하... 하겠어요! 가가를 살리는 길이라면." 사르륵....... 그녀는 서슴없이 옷자락을 끌렀다. 곧바로 신비로운 여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약냄새가 코를 찌르는 약실에서 태어난 이후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던 여체였다. "......!" 옥잠은 젖가슴과 아랫배 성역을 각각 손으로 가렸다. 그것은 손바닥 하나로 다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다시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돌침상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처럼 뛰고 있었다. "......." 진우명은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진우명의 몸 위에 자신의 순결한 나신을 포개었다. 한순간 뼛골을 저밀 것 같은 차가움이 그녀의 몸을 부르르 떨게 했다. 그러나 옥잠은 곧 구불리가 시킨 대로 행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부분이 진우명의 육체와 맞닿았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입술과 입술이,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아랫배도 맞닿았고 두 다리도 찰싹 붙였다. 그것은 처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참기 힘든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그녀의 육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궁과혈(推宮過穴)을 시작한 것이다. 옥잠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구불리로부터 배운 내가진기를 진우명의 입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혀는 얼어 굳은 듯한 진우명의 입 속을 서서히 헤집었다. 뒤이어 그녀의 순결한 설백지신은 진우명의 전신을 마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마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행위는 점차 격렬해졌다. "으으음." 옥잠의 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은 점차 냉기로 인해 푸르게 변했다. 어느덧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옥잠은 마음을 다잡았다. '차... 참아야 해! 가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옥잠의 모든 것쯤은 버려도 좋아.' 옥잠은 더욱 격렬하게 진우명의 전신을 추궁과혈했다. 한편 약실 밖에서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들려왔다. 구불리는 어두운 암천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