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大河長篇歷史小說 (續 鹿鼎記) 韋 小 寶 傳 原作 : 全 庸(金庸이 아님, 중국대륙의 작가임) ------譯者 序文------ 「녹정기(鹿鼎記」-이것은 김용(金庸)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친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늘 김용에게 묻는 맡이 있다. '당신은 왜 더 이상쓰지 않는가?'라고. 이럴 때면 김용과 항상 붙어 다니다시피 하는 예광(倪匡)이 대신 대답한다. '왜냐하면 써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라고. 이러기를 수십 차례.... 한 술자리에서 김용이 끝내 입을 열었다. '정말 써낼 수 없기 때문이오.' 김용의 작품들을 보면 강맹지검(强孟之劍)에서 연검(軟劍), 중검(重劍) 그리고 초목죽석(草木竹石 )도 검이 될 수 있다는 경지로 발전하고 있다. 녹정기는 바로 '무검승유검(無劍勝有劍)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김용은 녹정기에서 반영웅(反英雄), 반전통(反傳統), 반규범(反規範), 반속박(反束博)을 묘사했기에 역자는 이를 '반서(反書)'라 이름하고 싶다. 또한 인성과 자아, 독립(獨立)과 쾌락(快樂)을 선포한 '정서(正書)'라 명명하고 싶다. 김용은 '설산비호(雪山飛孤)'의 쓰다 만 듯한 이야기 종결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녹정기에서 붓을 꺾고 '정말 써낼 수 없기 때문이오'라고 한 이래 20여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개방된 중국 대륙에서 김용에 필적할만한 '속녹정기(續鹿鼎記) 위소보전(韋小寶傳)'이 발표되어 그동안 아쉬워 했던 독자들에게 위소보의 생생한 후반 인생을 보여준다. 역자는 존경하는 한 선배로부터 이 책을 선물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역자 김찬연 87년 고려대학교 중문학과 졸업 90년 중국으로 건너가 협의소설을 연구함 92년 장백산맥(전5권) 번역.출간 현재 장한기획을 운영하며 통역.번역일을 함 -------著者 序文----- '위소보전(韋小寶傳)은 무협역사소설의 거장 김용(金庸) 선생의 불후의 명작 녹정기(鹿鼎記)의 속편(續編)이다. 일등록정공이 되어 황제로부터 황금빛 마괘자를 하사받은 위소보는 강희 황제와 반청복명 조직인 천지회 사이에서 견디지 못하고 일곱 부인과 자식들을 거느리고 운남(雲南) 대리(大理)로 도망갔다. 2년 후에 그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양주로 돌아온다. 마침 강희 황제는 위소보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은밀하게 강남을 방문하다가 양주 기생원 여춘원(麗春院)에서 천지회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위소보는 교묘한 계략을 펼쳐 강희도 구하고 또한 천지회 호걸들도 구한다. 강희의 명에 따라 위소보는 또다시 북경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중에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개방의 청아와 그녀의 아리따운 쌍둥이 동생 문아, 그리고 신룡(神龍)처럼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않는 황룡대협을 만나 여러 차례 우여곡절 끝에 북경에 당도하게 된다. 강희는 그를 하공총독(河工總督)으로 임명하고, 부임 후 그는 개방 방주의 지위를 놓고 벌이는 분쟁에 휘말린다. 그러던 차에 기회와 인연이 닿아 위소보는 뜻밖에도 개방 방주 자리에 오른다. ....천지회 군웅들은 위소보에게 오해를 풀고 그의 지시를 따르게 되며, 또한 강희도 위소보의 계략과 조언을 따른다. 태후는 위소보의 일곱 부인 중 하나인 건녕공주를 증오하며 복수를 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신룡교 창시자인 교주 홍안통은 부인을 빼앗긴 원한을 잊고 위소보와 다시 화해를 한다. 그리고 철천지 원수인 대만의 정극상은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일류고수인 어전시위 우아대는 위소보와 결의 형제를 맺고, 우아대는 자발적으로 나서 위소보의 호위무사가 되어 준다. 절세의 미인 문아는 위소보와 생사를 같이 하는 벗이 되어 위소보로 하여금 진정한 남녀간의 애정을 깨닫게 해준다. ....위소보는 더욱 출세하여 무소불위의 권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강희, 태후, 천지회, 개방, 신룡교.... 조정과 강호의 각문각파에서는 위소보로부터 녹정산(鹿鼎山)에 숨겨진 은밀한 비밀을 캐내려고 강온 양면책을 모두 동원하며 극단적인 수단마저 불사한다. 자고로 빤질거리기로 소문난 위소보는 도리어 가는 곳마다 쫓기고 처자식이 협박을 당하는 등 쉴새없는 위기가 몰아닥친다. 생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따르는 고통이 그에게 너무나도 처절하고 가혹하게, 또한 끊임없이 찾아온다. 위소보는 이러한 극도의 곤경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정을 맛보며 깨닫게 된다. '위소보전'은 김용 선생의 원작 녹정기의 독특한 필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설키는 줄거리를 바탕으로 독특하고 기이한 등장 인물의 설정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단락까지 읽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위소보의 최후 운명을 알 수 없으리라. - 全庸 주요 인물표 위소보(韋小寶):일등록정공(一等鹿鼎公) 개방방주(弔幇幇主) 신룡교(神龍敎) 부교주(副敎主) 강 희(康 熙):청조에서 가장 성망이 있던 황제이며, 만주 이름은 위엔신쥐에루어이고, 위소보의 어린 시절 친구 황태후(皇太后):순치황제(順治皇帝)의 후(后)이자, 강희의 모후 흥안통(洪安通):신룡교 교주. 소전(蘇筌)의 전남편. 넉 자 네 치의 긴 수염으로 얼굴을 가림 청 아(晴 兒):개방방주성룡(成龍)외수양딸(義女) 문 아(雯 兒):청아와 쌍동이로 개방 방주 성룡의 수양딸. 독비신니(獨臂神尼) 구난사태(九難師大)의 관문제자(關門弟子)로 일찍이 강녕직조(江寧織曹) 조부(曹府)에서 조설근(曹雪芹)의 계집종으로 있었음 구난사태(九難師太):명조(明朝)의 공주(公主) 도흥영(陶紅英):과거 구난사태를 모시던 궁녀로 위소보의 양고모. 황궁에 잠복하고 있음. 우아대(于阿大):어전시위(御前侍衛人 위소보의 결의동생. 재간이 출중함. 그의 무공은 '무협미(武俠迷)이며 가명이 우아대임.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없음 황룡대협(黃龍大俠):강호의 괴상한 협객 순 치(順 治):강희의 부친 오대산 청량사에서 도를 닦으며 법호(法號)를 '행치(行痴)라 함 다 륭(多 隆):어전시위 충관 위소보의 의형(義兄) 조 인(曹 寅):강희의 심복으로 강녕직조 일등시위 조설근(曹雪芹):조인의 손자. 중국 문학의 거작 홍루몽(紅樓夢)의 작자 정극상(鄭克爽):정성공(鄭成功)의 손자. 대만에서 장병들을 거느리고 조정에 투항. 강희가 해징공(海澄公)으로 봉함 소 전(蘇 筌):위소보의 부인. 홍안통의 전처 쌍 아(雙 兒):위소보의 부인 위소보와 함께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비밀을 알고 있음 건녕공주(建寧公主):형식상 강희의 여동생. 원나라 오삼계(吳三桂)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의 처. 후에 위소보의 부인이 되었음. 증 유(曾 柔):위소보의 부인 목검병(沐劍屛):운남 목왕부(沐王府)의 군주. 위소보 부인 중 한 사람 아 가(阿 珂):명기 진원원과 틈왕(闖王) 이자성 사이에서 난 여자. 구난사태의 제자. 위소보의 부인 방 이(方 怡):위소보의 부인 근 보(斬 輔):원래 하공총독(河工總督) 현정도장(玄貞道長):천지회 청목당의 속하 전로본(錢老本):천지회 청목당 속하로 원래 개방 방주 성룡의 관문제자 색액도(索額圖):대학사(大學士) 황태자의 스승 강친왕(康親王):위소보의 의형 장강년(張康年):어전시위 조제현(趙齊賢):어전시위 고염무(顧炎武):명조의 유신(遺臣) 반청의사(反淸義士) 대문학가 서화룡(舒化龍):천지회 굉화당(宏化堂) 향주(香主) 사계좌(査繼佐):반청의사 ------------------------------------------------------------- 第1章. 위소보(韋小寶)를 찾아 나선 황제 일등록정공(一等鹿鼎公) 위소보(韋小寶)는 황제의 성지를 받들고 금의환향한다. 그는 소전, 방이, 아가, 증유, 목검방 공주, 쌍아 등 일곱 부인과 자신의 슬하 이남일녀를 거느리고 흐뭇하게 강남의 명성(名城) 양주(揚州)로 호호탕탕하게 출발했다. 이들이 밤낮 배를 타고 사양집(泗陽集)을 지날 때 반청의사(反淸義士) 고염무, 사계좌, 황려주, 여류량 등의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위소보에게 난을 일으켜 황제에 등극하라고 권고했다. 위소보는 그만 어안이 벙벙하여 한참이나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들, 나는 한낱 유망(流亡:건달) 출신으로 재간이라야 기껏 남을 욕하고 노름이나 할 줄 알지. 황제는 고사하고 장군 벼슬만 해도 남들이 코방귀를 뀌겠는데 어림 없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게나. 내가 점을 쳐보았는데 팔자가 사나워 만약 황제질을 하는 날이면 사흘도 못 산다고 하더구만.] 그 말을 듣고 있던 수재(秀才)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이 때 천지회(天地會) 굉화당(宏化堂) 향주 서화룡(舒化龍)이 본당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위소보의 배를 포위하고 천지회의 반역자 위소보를 처단하여 총타주(總舵主) 진근남의 원수를 갚겠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이에 고염무등이 나서서 위소보를 대신하여 전후 사정들을 낱낱이 이야기해 주었다. 설명을 듣고 난 서화룡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오른손 식지로 자신의 왼쪽 눈을 푹 찌르자 시뻘건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위소보, 고염무 등 뭇 사람들은 깜짝 놀라 외쳤다. [형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서화룡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위 향주를 노엽게 만들었고, '웃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천지회의 규율을 어겼으니 당연히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해야 하오. 이것은 내가 견식이 짧아 사람을 구별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응징을 받아야 하는 거요. 그러나 나는 한쪽 눈은 남겨 두었다가 위 향주가 어떻게 반청복명의 대사를 이룩하여 이 세상을 바로 잡는지 보겠소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모두가 그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면 위 향주는 눈알을 삐서 나에게 배상을 해야 할 것이오.] 고염무등 네 사람, 굉화당의 형제들과 혜어진 후 위소보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혼란스런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돌연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만두겠소. 그만두겠어! 황제는 나를 핍박하여 천지회를 없애라 하고, 천지회는 또 나더러 황제를 없애라고 하니, 나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구나. 한쪽에서는 목을 잘라 바치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눈알을 빼내라고 하니, 낸들 머리가 몇 개이고 눈알이 몇 개란 말인가? 여기서 목을 잘리고, 저기서 눈알을 뽑힌다면 이 몸에 남을 게 뭐란 말인가기 나는 그만두겠다. 그만두겠어!] 사양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수림 속에서 '사람 살려!' 라는 위소보의 처량하고도 애처로운 목소리가 고요한 달이 비추는 깊은 밤에 멀리 허공으로 메아리쳐 갔다. 그러다가 이내 그 소리마저 잠잠해 졌다. 며칠 후, 양강(兩江)총독 마륵길(麻勒吉)과 강녕순무(江寧巡撫) 마우(馬佑)가 육백 리 길 밖에서 급보로 강희 황제에게 '일등록정공 위소보는 사양집 남쪽 육칠 리 되는 곳에서 불행하게도 도적을 만나 배가 불에 타고 위(韋)록정공 소보 및 일곱 부인과 자식 일남 이녀가 모두 행방불명이마 사양집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위록정공 소보의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소리를 몇 번 들었을 뿐 더 이상 기척이 없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도적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물건을 빼앗고는 배와 시체를 불살라 그 흔적을 없애 버린것 같다'고 상주했다. 이로부터 2년간 조정과 강호에서는 어느 누구도 위소보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청산은은수초초(靑山隱隱水 ) 추진강남초목조(秋盡江南草木凋) 이십사교명월야(二十四橋明月夜) 옥인하처교취소(玉人何處敎吹蕭) (청산은 아득하고 물길은 먼데, 강남 늦가을 초목은 조락했데. 이십사 교 회영청 달 밝은 밤, 님은 어디서 피리를 불고 있나!) 낙탁강호대주행(落魄江湖戴酒行) 초요섬세장중경(楚腰纖細掌中輕) 십년일각양주몽(十年一覺揚州夢) 영득청루박행명(羸得靑樓薄倖名) (실의 속에 강호를 술에 취해 다닐 때, 버들 같은 여인들은 손바닥에도 가벼웠네. 십 년의 양주 꿈을 한 번 깬 오늘, 기생집에 탕아라는 이름만 남았구나.) 이 두 수의 시는 당나라 풍류객 두목(杜牧)의 '기양주한작판관(寄揚州韓綽判官)'과 '견회(遣懷)'로써 모두 강남의 명소(名所) 양주(揚州)에 대한 절창이다. 무엇 때문에 양주를 먼저 들먹이는가? 그것은 바로 이 양주가 바로 명성 높은 일등록정공(一等鹿鼎公) 위소보(韋小寶), 즉 위작(韋爵) 나으리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위소보의 어머니 위춘방(韋春芳)이 양주 기녀라는 사실만 알 뿐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한족인지, 만주족인지, 몽골족, 회족, 장족인지 알 수 없고, 위작 나으리 본인도 그것을 모르니 그 선조들이 어느곳 사람인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비록 위작 나으리의 벼슬은 나날이 높아져 갔으나, 학문만은 조금도 진전이 없어 성어(成語)를 잘못 사용하는 것쯤은 예삿일로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청조 강희년 시절 양주는 수륙이 교차하는 교통요지이고 부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강남땅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 해 봄, 어느 날 저녁 무렵 양주의 이십사교(二十四橋)에는 복숭아꽃이 붉게 피고 푸른 버드나무가 하늘거리는 가운데 봄바람에 깃발이 나부끼고 저녁 노을 붉게 물들어 연못가에는 금물결이 일렁거리는 것에 맞추어 봄향기가 그윽하였다. 그야말로 벼슬아치들과 귀인, 시인, 문객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유람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때였다. 서쪽 호숫가 명옥방(鳴玉坊)에는 누각들이 수림처럼 버티고 서 있고, 내노라 하는 청루(靑樓:기생집)가 줄지어 있었다. 그 때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의젓한 공자(公子)가 뒷짐을 지고 한가로이 여춘원(麗春院)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자 뒤에는 위풍이 당당한 데 사내가 따르고 있었는데 심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온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손재간깨나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별다른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예리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기에 무엇인가를 방비하려는 것 같았다. 속담에 '기생 에미는 돈을 탐내고, 작부는 맵시를 즐긴다'는 말이 있듯이, 이 여춘원의 아가씨들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이 공자의 외양만 보고도 단번에 돈있는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공자외 모자 위에 달린 '조모록(祖母綠)'과 오른손 중지에 끼고 있는 백옥반지만 보더라도 매우 진귀한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부잣집 공자들이 어슬렁거리며 왔으니 어느 기생인들 그에게 아양을 부리지 않겠는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재수만 좋으면 적어도 이삼백 냥은 거뜬히 뜯어낼 수 있는지라 그 늠름한 공자의 풍채를 보자마자 십여 명의 기생들이 파리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꽃같이 화사하게 몸단장을 하고 강남 사투리로 애교를 떨며 응석을 부렸다. [아이고,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오셨나요?] [나으리를 오랫동안 뵙지 못해 소녀는 죽을 뻔했어요.] 옥량이라는 기생이 공자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아양을 떨다못해 '요 뒈질놈....'하며 제 어린 새끼 다루듯 했다. 공자는 자고로 이런 봉변을 당해 본 적이 없는지 기생의 애교 섞인 '요 뒈질놈'이란 소리를 듣자 너무나 무안하고 속된지라 곧바로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쳤다. [배짱도 좋구나.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공자의 음성은 그리 높지도 않고 그리 노한 기색도 아니었지만 위엄에 찬 기개는 많은 기생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방탕한 교태를 삽시에 거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했다. 공자는 넌지시 일렀다. [너희들 주인이 누구냐? 어서 불러 오너라!] 원래 청루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그 공자는 아마도 이러한 청루의 관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기생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몸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몰라했다. 하지만 그의 네 수행원은 이러한 기생원에 자주 출입하는지라 기생원의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네 사람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나서서 호통을 쳤다. [나으리께서 너희들의 양어미를 불러 오라시는데 모두들 귀가 먹었느냐?] 기생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안에서 반백에 가까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분흥 비단 적삼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에 붉은 꽃을 꽂고 얼굴에는 주걱으로 긁어내면 긁힐 만큼 덕지덕지 분칠을 했고, 입술은 선지피를 바른 듯 시뻘겋다. 그녀는 공자에게 능청스럽게 그 말을 받아넘겼다. [나으리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세요. 이 어린 것들이 미천한지라 나으리의 뜻을 몰라 실수를 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와요. 제가 잘 모시겠사옵니다.] 그녀가 입을 벌리자 더덕더덕 얼굴에 바른 분이 떨어지며 깊이 패인 주름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여전히 공자에게 기대다시피 하면서 아양을 떨었다. [공자 나으리께 '붉은 참대 무럭무럭 자라네'라는 노래를 불러 드릴까요, 어떠신지요?] 공자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넌지시 그녀의 징그러운 거동을 애써 피하면서 위엄 있게 물었다. [네가 여춘원의 주인 위춘방이냐?] 그녀는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여춘원에서 몇십 년을 굴러먹었지만 그래도 기생 노릇은 하지 않아 명성이 자자한가 보다. 이런 공자까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정말 체면이 서는구나.) 그녀는 흐뭇한 마음에 기세가 올라 옆에 서 있는 기생들을 힐끔 쳐다보고 나서 공자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위춘방인데 공자는 저의 명성을 흠모하여 찾아온 것 같군요.] 공자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고 냉소했다. [허 참, 그럴 듯한 명성이구나! 내가 물어보고자 하는 것은 데 아들 위소보가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위춘방은 공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슴이 뜨끔하고 머리가 아찔했다. (요 죽일 놈 소보가 필시 이 나으리의 은자를 훔쳐 가지고 화냥년 일곱을 데리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교정주(敎正主)가 찾아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벌은 이 에미가 받아야 할 것 같구나. 기름가마에 삶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망나니 같은 놈! 제 에미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는구나!) 위춘방온 평소에 위소보를 욕할 때는 그저 '쌍놈의 자식'이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속으로 궁싯거리는 것이 이번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거짓말을 둘러대서라도 일단 눈앞의 이 공자를 얼려 넘기려 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자는 안색이 변했다. 위춘방은 이런 위엄 있는 기색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얼른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거푸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애걸했다. [나으리,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레자식은 제 스스로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지요. 그러나 그 녀석이 한 짓과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요.]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위소보가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이놈, 저놈 할 필요가 있느냐?] [예, 예! 제 아들 녀석 말입니다. 그 놈의 자식은 운남(雲南) 대리(大理)에 처박혀서 화냥년들 하고 히히닥거릴 줄이나 알지, 이 에미는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른답니다. 그러니 나으리께서 찾으시려면 운남에 가서 찾으십시오. 고 놈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는다 해도 이 에미는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을 겁니다.] 위춘방은 사실대로 고했다. 사실 위소보는 강희와 천지회 사이에 끼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2년 전 사양집에서 화를 당한 것으로 위장하고 남몰래 처와 아이들을 데리고 갔고, 또한 양주 여춘원에서 위춘방을 운남 대리로 데려와 편히 지내게 하려 했었다. 그 때 그에게는 돈도 많았고, 꽃 같은 부인이 일곱이나 있었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위춘방은 청루 생활이 몸에 배어 그런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좀 한가하면 온몸이 근질근질하는 데다 일곱 며느리 가운데 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아 아들과 함께 같이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돈을 좀 주면 혼자 양주에 머무르려고 했다. 위소보는 은근히 이렇게 생각했었다. (이 많은 부인들 가운데 쌍아만이 입이 무겁고 고분고분할 뿐 나머지 모두는 기생 시어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훗날에 잘 대해 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 중에 공주라는 제기랄 년은 금지옥엽처럼 귀여움을 받고 자라서 꼴사납게 격식을 차리고 시어머니가 기생 노릇 한 걸 가지고 이 어르신의 조상 십팔 대까지 들먹이며 욕지거리를 할지도 몰라. 저 자신은 가짜 태후 모동주(毛東珠)의 딸인 줄도 모르고 제 딴에는 무슨 고귀한 집안의 고명딸처럼 행세를 해대니....) 위소보는 어머니 위춘방이 속이 답답하여 수척해 가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소현자(小玄子)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해 미움을 받았고, 또 천지회의 미움도 샀으니 의롭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또 이러다가 어머니마저 이 세상을 등진다면 불효 자식이 아닌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충(忠), 효(孝), 의(義)를 모두 다 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힘겨운 일이지만, 또한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면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효(孝)'자만은 잃지 말고 어머니를 양주에 있게 하자. 지금 내 손에는 돈이 있으니 어머니가 여춘원을 사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2년이 지났건만 천지회는 씨가 말랐는지 시종 깜깜 무소식이고, 또 소황제는 국사(國事)가 다망해 이 매부를 잊었는지, 찾는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으니까....) 위소보는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다가 위춘방에게 돈을 주어 양주에서 기생원을 여덟 채건 열 채건 마음내키는 대로 사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포부도, 사업 욕심도 없는 위춘방은 여춘원 한 채만 달랑 사서 석 달 남짓 주모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난네없이 이 공자가 찾아온 것이다. 위춘방은 아들 위소보가 도박판에서 뭉칫돈을 긁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오늘 귀인 같은 공자가 찾아와, 야단법석을 떠는 품세로 보아 이 후레자식이 제대로 번 돈이 아니라 훔치거나 빼앗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녀는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모든 것을 위소보에게 떠넘기려 했다. 공자는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들이 꼭 제 어미를 빼 닮았구나. 그래 위소보가 전에 운남에 머문 것은 틀림없겠지만, 내가 묻는 것은 지금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묻는 것일세. 그래도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능지처참을 할거네.] 위춘방은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입을 열었다. [그 호로 자식은 방탕한 짓만 저지르고, 또 계집년들 모두가 그렇고 그런 년들인데 그 년들의 충동에 방탕한 짓이나 더 할 텐데, 그 놈의 눈에 어디 이 에미가 보이기나 하겠수? 그 놈 자식이 운남 대리를 떠나 또 어디로 갔는지 저는 정말 모른답니다.] 공자는 짐짓 준엄하게 입을 멨다. [위소보는 남들이 모두 높이 받드는데, 그래 그가 다른 사람의 놀림을 받는단 말인가? 정말 냉수에 이가 빠질 소릴 하는구만. 그러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하게!] 그 말투는 마치 관청에서 죄인을 심문하는 것 같았다. 위춘방은 더욱 안달이 나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청천(靑天) 나으리, 이 소녀(小女)에게 거짓말이란 진정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 벼락 맞을 놈이 어디 가서 죽었는지 이 소녀는 정말 모릅니다.] 그녀의 나이를 보아 소녀라는 말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지라 수행원들은 참다 못해 웃으며 중얼거렸다. [떠벌리는 것을 보면 위소보와 똑같은 물건 짝이구만!] 공자는 노한 표정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바른 말을 하지 않으니, 그럼.... 이 상점을 모두 불태워 버려라!] 공자가 기생원 이름을 모르는 탓인지, 아니면 그의 신분으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청루(靑樓:기생원)'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기 싫어서인지 약간 머뭇거리다가 기생원을 '상점'이라 불렀다. 네 수행원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옛!'하고 대답은 했지만 전혀 움직일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위춘방은 황급히 무릎을 끓고 기면서 공자의 다리를 잡고 애걸했다. [청천 큰나으리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 탓 저 탓 무슨 탓일지라도 모두 그 쌍놈의 위소보 탓일 뿐 이 하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제발 이 상점만은 불사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공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명령했다. [그럼, 그만두거라!] 이 때 돌연 긴 웃음소리와 함께 청청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황제가 기생집이나 쏘다닌다는 게 어디 황제 체면에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공자의 네 수행원들은 갑자기 누군가의 입에서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흠칫 놀랐으나, 그들은 모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인지라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재빠른 몸놀림으로 주위의 방비를 단단히 했다. 이러는 사이, 일곱 명의 사나이가 여기저기에서 삽시간에 청당(廳堂)으로 나타났다. 그들온 공자 일행 다섯 사람을 청당 중심에 놓고 에워쌌는데 방금 청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도장(道長) 이었다. 이 때 공자는 안색이 변했다. 공자는 바로 다름 아닌 강희였던 것이다. 그는 원래 위소보의 소식을 듣고 강남을 순시하는 기회를 빌어 몰래 여춘원에 와서 위소보의 행방을 수소문하고자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누설되어 이들이 찾아온 것이다. 강희 황제는 제왕의 존엄으로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그가 집정한 후 처음 당한 고비는 오배(鰲拜)를 멸족시킨 것이었다. 그 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오배는 강희와 함께 최후를 맞고자 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청량사(淸凉寺) 에서 백의신니(白衣神尼)가 갑자기 나타나 강희 황제를 찔러 죽이려 했다. 또 한 번은 귀신수(歸辛樹), 귀이랑(歸二郎), 귀종(歸鐘) 세 사람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강희를 찌르려 했다. 이 세 번 가운데 두 번은 황궁에서 일어났다. 백의신니와 싸울 때는 황궁 밖이기는 했지만 주변에 많은 어전시위와 어림군(御林軍)이 있어 쉽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그 때 복장(福將) 위소보가 있어 아슬아슬하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고 행장을 간단히 하여 남몰래 오다보니 수행원들도 네 사람뿐인데 상대방은 모두 일곱 명이나 되는지라 실로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익히 어전시위들의 무공 정도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전시위란 작자들은 한 사람을 상대할 만한 재간도 없었다. 그들은 평소 세도를 믿고 행패를 부리거나 남편을 윽박질러 남의 여자나 가로채는 일에 이골이 났을 뿐, 목숨을 내걸고 손을 쓰는 강호협객들을 대적하자면 오로지 투항할 재간밖에 없는 위인들이었다. 강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문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우두머리격인 도장이 대답 대신 그들의 은어로 노래를 불렀다. [다섯 사람이 각자 시를 한 수 짓는데 내가 홍문(洪門)의 영웅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데.] 강희가 태연하게 화답했다. [이 때부터 여러 형제들에게 전해졌고, 후에 서로 알고 다시 모였지.] 도장은 깜짝 놀라더니 계속 노래를 읊었다. [처음 홍문에 와서 형제를 맺고 그 날 즉시 의지를 갖고 진심을표시했었지.] 강희가 받았다. [송백(松柏) 두 가지가 좌우로 뻗으니 중간 가지에 핀 홍문의 꽃은 의(義)로 맺은 정자(亭子)이외다.] [충의당 앞에 형제들이 있고, 성에는 백만 병사가 있다오.] 강희가 다시 화답했다. [복덕사(福德祠) 앞에서 맹세를 하오니, 반청복명은 우리 홍문의 목적이라네.] 이 노래는 청나라 초엽 반청 조직 천지회의 암호였다. 규정에 따르면 상대방이 암호를 받아 말했으면 자신은 즉시 가문을 보고하여야 하므로 도장이 입을 열었다. [빈도 현정(玄貞)은 천지회 청목당 소속입니다. 귀하는 어느 당 식구인지요? 몇 대의 향을 태우시는지요?....] 이렇게 묻고나서는 홀연 귀신에게 홀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오랑캐 황제로서 우리 천지회의 암호를 말하여 속임수를 써서 고비를 넘기려고 획책하는 것이오?] 강희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색을 엄숙히 하고 말했다. [당신들은 이미 나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소동을 부리겠다는 것이오? 아직도 순순히 용서롤 빌지 않고 있다니 고약하군!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하늘의 덕(德)을 생각하여 짐은 빠져 나갈 기회를 주어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을 수도 있다!] 천지회의 뭇 호걸들은 비록 반청복명을 회(會)의 대의로 삼고 있었지만, 정작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강희를 대하고 보니, 젊은 황제의 얼굴에 제왕의 위풍이 늠름한지라 그만 웅심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현정도장은 한참 주저하다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흥! 자네가 그 무슨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을 특사하여 목숨을 살려 주는 제왕의 덕을 볘풀었다 할 수 있겠는가? 관내에 쳐들어 와 강산을 빼앗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양주와 가정에서 도륙전을 감행하여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었는데 그 무슨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볘풀었다 할 수 있겠는가?] 강희는 약간 양심의 가책을 받은 듯한 기색으로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황(先皇)이 관내로 들어올 때, 확실히 많은 사람을 죽였지. 하지만 싸움이란 사람을 죽이는 살육전일세. 자고로 제황들이 이룬 위업 가운데 어찌 사람을 죽이지 않고 성사한 일이 있으며, '장수가 공을 쌓으려면 만인(萬人)의 뼈를 쌓아야 얻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래 짐이 영을 내려 자네들의 천지회 청목당의 향주 위소보에게 양주에 충렬사(忠烈祠)를 짓게 하고 또한 양주, 가정의 백성들이 바쳐야 할 공물과 세금을 3년간 면제해 주었는데 그래 이것이 입공속죄가 아니란 말인가?] 천지회 호걸의 대부분은 머릿속에 든 먹물이 적은데 어찌 강희 황제의 지.호.자.야(之.乎.者.也) 따위의 문어체(文語體) 말들을 알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현정도장이 기중 먹물 냄새를 맡은지라 나서며 말했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는데 무슨 이러쿵저러쿵 할 말이 있는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황제가 먼저 죽어봐!] 현정도장은 말과 함께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내력(內力)을 쏟아 넣었다. 강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는 진정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말인데 너희들에게는 허튼 수작으로 보인단 말인가? 너희들이 믿지 못하겠다면 달리 도리가 없지. 그러나....] [그러나는 무슨 그러난가? 그래 아직도 허세를 부리겠단 말인가?] [나는 인정하네. 인정하지. 내가 듣기에 천지회 사람들은 각자 모두 천하제일의 영웅호걸이라던데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이로구만. 지금 보아하니 강호에 전하는 말과는 달리 천지회의 호걸이란 자들은 원래 사람 수를 믿고 상대를 제압한다는 말이었구만! 나는 그것에 대해 매우 탄복하네, 탄복해!] 강희는 어릴 적부터 만주 사람들의 습관에 따라 말을 타고 활쏘기를 배웠고, 또한 가짜 태후 모동주에게 무공도 약간은 익혔다. 위소보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강호의 기이한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벌였다. 강희는 무림의 규율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고 있었는데, 강호 호걸들이 사람 숫자를 빌어 이긴다는 말을 제일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말로 그들을 머뭇거리게 만들어 시간을 끌려했다. 당당한 천자의 입에서 뜻밖에도 무림의 도(道)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현정도장은 일시에 무슨 말로 대꾸를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때 교활하게 생긴 사나이가 나서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전로본이 홀로 만주 오랑캐와 한 번 겨뤄 보겠다.] 그러자 시위총관 다륭(多隆)이 급히 가로막아 서며 외쳤다. [황상 폐하께 접근하지 마라!] 전로본은 손을 쓰면 반드시 시위들이 나서서 막을 것이라 예측하고 일단 허초(虛招)를 펼쳤다. 비록 그는 교활하게 생겼지만 무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임기응변 재간은 천지회 청목당 내에서는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는 다륭과 일 장을 맞서는 척하면서 몸을 돌려 권내(圈內)로 들어와 강희 황제 앞까지 다가선 후 일 장으로 치명타를 가하려 했다. 그는 강쇄교룡(江鎖蛟龍)이란 초식으로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곧바로 강희의 단중(月+亶中) 대혈(大穴)을 노렸다. 강희는 황급히 몸을 한쪽으로 돌리며 재빨리 상대방의 출중한 초식을 피하면서 도절매(倒折梅) 중의 액저추(腋底錘)란 초식으로 전로본의 면상을 후려쳤다. 이 초식은 원래 가짜 태후 모동주가 가르쳐 준 것인데 생명이 위급한 중요한 고비에는 매우 쓸모가 있었다. 강희는 도절매로 위소보와도 겨루어 본 적이 있었다. 그 초식으로 한 번 후려치면 위소보는 늘 '항복!'하고 소리지르곤 했다. 하지만 전로본과 위소보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가 몸을 약간 움직이며 피하자 강희의 액저추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로본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강희의 이 초식이 규칙에 어긋남이 없으며 쟁쟁한 일개 문파의 풍모와 재능에 손색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강희에게는 전혀 내가공력(內家功力)이 없었으므로 그 초식은 결국 비단보에 개똥을 싼 격으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 전로본이 허초를 펼치지 않고 곧바로 강쇄교룡 초식을 펼쳤더라면 일 장에 강희를 제압했을 것이다. 전로본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 [각하는 원래 무공이 있는 가문의 자제분인데 제가 정말 실례했소이다.] 이렇게 좀 시간을 끌다가 강희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시위총관 다륭과 어전시위 장강년, 조제현 등 세 사람이 나섰다. 다륭이 소리쳤다. [황상 폐하가 어떤 분이시라고 감히 망동을 하는고? 먼저 나와 일 장을 겨뤄 보게나!] 전로본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허허! 일대 일로 겨루자더니, 왜 또 갑자기 변했는가? 정말 체면이라고는 없는 양반들이구만. 그래 이것은 사람 숫자를 빌어 이기자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다륭의 태양혈이 불룩 솟아난 것으로 보아 분명 내력과 외공이 상당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섣불리 대했다가는 커다란 낭패를 볼 것 같아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다륭과 일 장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륭은 텅텅텅! 세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났고, 전로본은 간신히 몸을 뒤집으며 다륭의 장력을 피하고 동시에 장강년, 조제현 등 어전시위의 공격도 피했다. [저 놈들은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야! 단단히 각오해야겠어!] 다륭이 소리치며 장, 조 등 시위들에게 연거푸 눈짓을 보냈다. 그 뜻인즉 내가 일단은 막아낼 테니 너희들은 황상을 보호하여 어서 이 험지를 벗어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전로본이 어떤 위인인데 이런 수작에 넘어가겠는가? 전로본은 곧바로 그 말을 받았다. [약삭빠른 놈들! 현정도장, 일을 그르칠지 모르오. 황제가 도망치려 하는구려!] 현정도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일은 속전속결로 처리해야겠구나.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교외(敎外)의 응조손(鷹爪孫)이 소식을 듣고 수많은 인마들을 끌고 온다면 몸을 빼기가 어려울 노릇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도장은 소리 높이 외쳤다. [청나라 조정에서 강호의 규율을 들고 나을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함께 저 황제를 끝장내게나!]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장검을 가슴팍에 댔다가 몸을 홱 돌리자 번쩍이는 장검이 어느새 강희에게 날아왔다. 전로본도 몸을 홱 돌리며 다륭에게 달려들자 천지회 군웅들이 일시에 덮쳐 들었다. 다륭, 장강년, 조제현 등의 어전시위들이 어찌 천지회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한편으로 강희 황제를 보위해야 하니 십분의 공력을 육분 조차 펼치기 어려워 손놀림에 제약이 많았다. 다행히도 강희는 어릴 적 무공을 약간 배웠기 때문에 현정도장의 몇 가지 수법은 가까스로 피했다. 현정도장은 흥! 하는 소리와 함께 '해저로윌(海底撈月)'이란 초식으로 장검을 아래로부터 위로 치켜올리며 강희의 앞가슴을 향해 찔러 갔다. 이 초식이야말로 힌정도장이 필생의 공력을 들인 것이었다. 그 일 초는 강호에서 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사람일지라도 피하기가 어려운 터라, 강희의 보잘것 없는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다륭 등 어전시위들은 천지회의 뭇 호걸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구원할 방도가 없었다. 강희는 이런 다급한 지경에 이르자 갑자기 소리 높이 외쳤다. [제기랄 놈의 소계자(小桂子)는 어디에 처박혀 있길래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 게냐?] 현정도장은 갑작스레 황제의 입에서 '제기랄 놈'이란 추잡스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또한 '소계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잠시 어리둥절했다. 위소보가 과거 북경에 들어가 소태감(小太監) 소계자를 그만 잘못 치고 받아, 죽이고는 소계자로 가장하여 황궁에서 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그 때 강희와 위소보는 서로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았으며, 강희는 위소보를 '소계자'라 불렀고, 위소보는 강희를 '소현자(小玄子)'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리하여 두 소년은 황궁에서 같이 뒹굴며 놀았다. 후에 이 두 소황제와 소대신은 고명대신(顧命大臣) 오배를 붙잡아 경천동지할 대사를 해결했다. 기실 이들 사이의 사귐은 어렸을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강희 황제는 밀보(密報)를 받고 위소보가 양주로 돌아갔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소계자'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 그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상대방에게는 구원병을 청하는 암호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현정도장은 흠칫 놀라 손길을 약간 늦추었다. 강희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황에서 다시 한 번 위험을 모면했다. 현정도장은 대노하여 소리쳤다. [더러운 황제놈, 잔꾀도 많구나!] 그리고는 검초를 도식(刀式)으로 바꾸면서 허리를 후려쳤다. 강희는 안색이 흑빚으로 변했지만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심 되뇌었다. (남방시찰을 왔으면 남방시찰이나 할 걸. 그 무슨 놈의 위소보, 위소보하고 찾아다닐 게 뭐람. 오늘 이 망나니들한테 목숨을 잃는다면 그야말로 개죽음 아닌가?) 그 때 돌연 한 사람이 히히!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현정도장, 전로반! 모두들 다 계시구만. 황상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 장 형, 조 형 그리고 두 분 모두 수고가 많으시오.] 돌연 귀에 익은 말을 듣자 모두들 즉시 손을 멈추었다. 이윽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치장한 청년이 청당(廳堂)에 나타났다. 그는 두리번 두리번 사방을 살폈다. 뭇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소리 높이 불렀다. [위 향주!] [위작 나으리!] 위 향주라고 부른 사람들은 당연 천지회의 호걸들이고, 위작 나으리 하고 외친 사람은 다륭, 장강년 등 어전시위들이었다. 강희만이 흥! 하며 하늘을 쳐다보면서 황제의 체통을 지켰다. 금빚 마괘자를 걸치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강희와 천지회 사람들이 애써 찾던 녹정공 위소보였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면서 가운데로 들어서며 웃었다. [여춘원의 다 늙어빠진 계집들이 언제부터 조상님들에게 공덕을 쌓았다고 오늘 이처럼 많은 바람둥이와 무림 중에 재간깨나 있다는 사람, 그리고 천하 제일의 황상까지 왔단 말이냐? 이제 양주 여춘원은 더욱 명성을 날리게 되겠구만!] 위소보는 흰소리를 치민서 우스갯소리를 꺼냈지만 내심 머리를 굴렸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황제와 천지회가 어찌 만날 수 없겠느냐만, 왜 하필이면 우리 집에서 만날 건 또 뭐란 말인가! 다른 데서 너 죽고 나 죽고 싸워 모두 죽어 버린다면 시름도 덜고 번거로움도 없을 텐데, 하필 우리 집에 차고 들어왔으니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전시위 총관 다륭온 위소보를 보자 매우 기뻐했다. [위작 나으리, 황상을 구하는 게 시급합니다!] 위소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황상을 구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지. 총관의 분부대로 이 위소보는 있는 힘을 다하겠소이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며 천지회 호걸들이 모르게 암암리에 강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다륭은 위소보가 황제의 신변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고, 지금 황제를 구하기 위해 전력하겠다고 하니 약간은 시름이 놓였다. 강희는 위소보가 궤계가 많고 임기응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내심 생각했다. (저 잡놈은 복장(福將)이니 오늘 일은 일단 저 놈에게 맡기고 아무 말도 하지 말자.) 현정도장과 천지회의 호걸들은 위소보의 말투에서 어쩐지 강희의 편을 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자신들도 모르게 안색이 변했다.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이 살해된 후, 강희는 조서를 통해 위소보가 천지회와 내왕을 끊고 천지회를 타도하면 조정에 충성한 일대공신으로 크게 추앙하겠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이미 현정도장등 천지회 사람들은 위소보의 행실에 대해 커다란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후일, 우연히 녹림호걸 모십팔(茅十八)을 만나 위소보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말을 들었고, 또한 반청의사 고염무, 사계좌, 여류량 등 사람들의 요구대로 위소보가 조정에서 특수한 신분으로 암암리에 반청복명 사업에 종사한다는 말을 듣고 의심이 풀리기는 했었다. 현정도장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위 향주, 진 총타주가 위 향주를 어떻게 대해 주었습니까?] 위소보는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을 하며 그 말을 받았다. [그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스승님의 저에 대한 은혜는 태산 같사외다.] 이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위소보는 일생 동안 진근남만이 자기를 아껴 주고 보살펴 주었다고 믿었다. 비록 사제지간이라고는 하지만 혈육 같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현정도장은 다시 물었다. [진 총타주가 살해를 당했는데 그 원수를 갚겠소?] 위소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누가 갚지 않겠다고 했소? 스승님은 대만 정극상(鄭克爽)의 손에 죽었소이다. 나는 그 정가라는 작자를 죽여 스승님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하지만 살아 생전 스승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셨소이다. 국성야(國姓爺)께서 스승님에게 베푸신 은혜가 태산 같으니 그의 후손들은 손대지 말라고 하셨소이다. 그러니 난들 어쩌란 말이오? 그러나 내가 정가라는 그 작자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다면 어찌 스승님의 원수를 갚고 우리 천지회의 위풍을 천하에 떨칠 수 있겠소이까?] 명나라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정복한 후 명나라 황제는 그에게 주(朱)가라는 성을 내렸다(역자 주:명나라 태조 주원장임).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정성공을 국성야(國姓爺)로 불렀다. 정극상은 정성공의 손자이고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 또한 정성공의 부하였다. 그런데 정극상과 진근남은 근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던 차에 조어도(釣魚島)에서 정극상이 불시에 진근남을 죽여 버렸다. 정극상이 이처럼 악독하고 잔인했지만 살아 생전 진근남은 정씨 가문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 그는 임종시에 제자 위소보에게 자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극상을 찾지 말라고 간곡히 일렀던 것이다. 후일 위소보는 빚재촉이라는 명목으로 정극상을 못 살게 굴다가 정극상이 아끼던 아가(阿珂)를 빼앗아 자신의 처로 삼았다. 이로부터 복수하겠다는 마음도 사그라들었고 손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현정도장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위소보는 다급하게 변명을 했다. [도장, 만약 그 정가라는 녀석을 반드시 죽여 스승님의 원수를 갚으시겠다면 우리 함께 북경으로 가서 그 놈을 칼로 쩔러 개 같은 염통을 빼다가 탕을 끓여 스승님의 천지령(天之靈)에 제를 지내도록 합시다. 도장, 전로반 그리고 천지회 형제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천지회 군웅들은 하늘 아래 첫째가는 위소보의 교활함을 빤히 아는지라 반신반의하며 위소보를 쳐다볼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현정도장과 전로본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천지회의 조종(祖宗) 십팔대까지 들먹이며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죽일 놈들, 간사한 전로본! 천지회 스승이 죽은 후 남겼다는 이 물건 짝들은 하나도 쓸만한 게 없구나. 도리를 존중할 줄도 모르는 망나니들이야. 그래 이 어르신이 너회들의 향주냐, 네 놈들이 이 어르신의 향주냐? 이 향주 위소보의 말은 개방귀로도 여기지 않는구나.)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히히닥거리며 입을 뗐다. [현정도장, 전로반, 나의 제안이 어떻소?] 현정도장은 내키지 않는 듯 그 말을 받았다. [그 반죽음이 된 정극상을 죽이려면 천지회 사람 하나로도 족한데 공연히 황제에게까지 알릴 필요가 있소? 위 향주, 황제를 돕겠다면 시원스럽게 터 놓고 말할 게지,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할 게 뭐 있소?] 이 말은 위소보의 정곡을 찌른 말인지라 얼굴이 황소 엉덩이보다 더 두꺼운 위소보도 약간외 가책을 받았던지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잔머리를 잘 굴리는 위소보는 곧바로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 향주가 천지회를 떠난 두 해 동안 그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현정도장께서 이미 총타주를 대신하셨다니 그야말로 축하할 만한 일이구려.] 현정도장은 자신이 향주인 위소보를 노엽게 만든 불경죄에 대해 위소보가 질책하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기실 천지회의 규율은 아주 엄했다. 존귀와 비천, 상하의 관계를 분명히 했고, 커다란 불경죄를 범하면 그 처벌도 매우 엄격했는 바, 가벼운 자는 삼도륙동(三刀六洞)의 처벌을 받았고, 중한 자는 극형에 처했다. 현정도장은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다. [위 향주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마땅히 죽어야지요. 그러나 지금 대세로 보아서는 우선 위 향주님께서 여러 형제들을 인솔하여 황제를 죽인 후에, 빈도는 스스로 자결하는 것으로 불경죄를 대신 하겠나이다.]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천지회 사람들은 모두 미쳤군.2년 전 굉화당의 서화룡 서 당주가 이미 나에게 눈알 하나를 빼 주더니, 지금은 이 망할 놈의 자식이 또 수작을 부리는구나. 거 참! 이 많은 눈알을 가지고 나보러 뭘 하란 게냐? 그래 음식점에 가서 돼지고기에 섞어 튀김을 만들어 팔란 말이냐?) 하지만 위소보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듣기 좋게 말했다. [도장님, 그러지 마십시오. 난 한 마디에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말은 바른 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오늘 이 대사를 놓고 말할 때, 이 위소보가 대국을 책임지고 집행해야 하겠소, 아니면 도장이 해야 하오?] 현정도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을 받았다. [이 일은 천하 백성과 진 총타주의 피의 원수를 갚는 대사외다. 제 자신의 목숨도 돌볼 겨를이 없는데 어찌 그런 것까지 생각하겠소? 황제만 죽여 버리면 만사 해결이란 말이오. 그러면 그 무슨 망나니고, 소류망이든 그 누가 천지회를 이끈다 해도 나는 두 손 들어 복종하겠소이다. 하지만 그 누가 만청 조정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면 내 친애비 에미라도 이 도장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현정도장은 말끝마다 '망나니'니, '소류망'이니 하며 은근히 위소보를 비꼬아 말했다.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당주는 처음부터 쓸모 없는 귀를 달고 있었구만. 아무튼 물을 건너고 나서 다리를 부수고, 노새를 부리고 나서 잡아먹는다고 오늘 속시원하게 툭 털어놓고 말해 보잔 말일세. 현정도장, 전로본, 그리고 여러 형제들! 시원스레 할 말 하고, 시원스레 갈라지잔 말이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투를 그리 탐탁해 하지 않던 전로본이 황급히 가운데로 나서며 말했다. [위 향주, 위 향주께서는 도량이 넓으신 분인데 하필이면 이 무뚝뚝한 사람들과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천지회를 이끄는 것으로 말하자면 진 총타주가 오늘 여기 계신다 해도 천지회에서 위 향주님을 제외하고 누가 그 중책을 걸머질 분이 있겠습니까? 설령 위 향주께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 천지회에서 만청 황제를 죽였다면 강호에서는 모두들 위 향주를 높이 치하할 것입니다. 이 만고청사에 빚날 위대한 공로는 며칠 사이에 전체 무림과 만천하에 널리 전해질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다시 오는 법이 없으니 위 향주께서는 부디 이 만고에 얻기 어려운 호기를 놓치지 마옵소서.] 위소보는 말없이 전로본의 눈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로본도 그가 동요하는 기색을 눈치 채고 우물쭈물 한 마디 덧붙였다. [위 향주님, 그래 이 부하의 말이 틀립니까?] [맞소이다. 맞아! 과연 옳소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전로본, 자네의 뜻은 알만 하네. 그래 내가 황제를 죽이든 말든 어쨌든 천지회 형제들은 이 크나큰 공로를 모두 이 위소보가 세운 것이라 하겠지. 정말 형제들에게 신세를 지는구만. 여러 형제들이 이 위소보를 천하에 으뜸가는 반청복명의 영웅으로 내세웠구만. 하지만 애석하네, 애석해!] [영웅호걸이 되는데 무엇이 애석하다는 말씀입니까?] [천지회에서 황제를 죽였다면, 조정에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하늘에 사무치는 대역대죄를 분명 이 위소보에게 덮어씌울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여러 형제들은 모두 무림에서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니 기실 조정에서도 달리 도리가 없겠지만, 이 보잘것 없는 위소보의 무공은 천하에서 가장 못난지라 그 벌도 내가 받아야 하고 목이 잘릴 대상도 나란 말일세. 일개 망나니, 건달이 일대를 풍미하는 영웅호걸로 된다면야 참으로 멋지고 통쾌한 일이지. 하지만 이 머리통이 날아가면 계집들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박판에서 돈을 긁어모을 수 없을 텐데, 그 얼마나 애석한 노릇인가? 이 위소보는 머리통이 달린 망나니, 건달로 남아 계집들 엉덩이를 두드리고 노름을 했으면 했지, 머리통없는 영웅호걸이 되고 싶지는 않네.] 강희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등극했지만 여러 해 동안 국가대사를 처리함에 있어 인재등용과 일처리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처한 다급한 시각이라 위소보가 어느 편을 들 것인가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위소보의 말을 들은 강희는 모름지기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무림 망나니들은 위소보를 친구로 여기지만 아직 위소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구나. 이 사람은 확실히 건달로, 자고로 파리 대가리만한 득이라도 봤으면 봤지 절대 자기에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에게 국가대사가 이러니저러니 커다란 도리를 설명한들 쇠 귀에 경 읽기지. 지금 그는 오직 자기 머리통이 달아나는 것만 신경 쓰는 처지라 이쪽이든 저쪽이든 갈 수가 없는 형편이니 나를 따를 것 같구나.) 강희는 차라리 사연을 툭 털어놓아 천지회 내에서 저희들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한 다음 어부지리 하려는 생각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계자, 우리 조정을 너무 형편없이 말하는군. 이 황제가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자네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용서하겠다고 말이야. 나는 자고로 농담은 하지 않데. 말한 대로 할 뿐이지.] 현정도장이 가만 들어보니 원래 위소보와 황제는 사전에 약속이 있어 향주 노릇도 하지 않고 천지회 총타주의 원수를 갚는 것도 슬금슬금 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음침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위 향주, 축하하네, 축하해! 위 향주, 높은 벼슬하면서 잘 살기 바라네.] 그리고는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위소보는 뒷걸음질하면서 경황한 눈길로 말했다. [그래 자네.... 자네, 감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한단 말인가?] 현정도장은 단호히 말했다. [본 회의 반역자는 모두 처단해야 하는 바 빈도는 총타주의 천지령 앞에서 천지회의 내부를 정리하는데 그 누가 누구를 범한단 말이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자기동래(紫氣東來)라는 일 초로 위소보를 향해 들이쳤다. 이 '자기동래'는 현정도장이 명성을 날리는 뛰어난 초식으로 기세가 사납고 전적으로 상대방의 목 읫부분를 노렸다. 천지회의 호걸들은 위소보가 보의(寶衣)를 입었기 때문에 적수공권이기는 하지만 예리한 검도 그를 상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현정도장은 전적으로 목 윗부분을 노린 것이었다. 현정도장의 공력은 실로 대단했다. 장력은 차치하고 장풍만으로도 위소보를 쓰러 눕힐 수가 있었다. 위소보는 현정도장이 이렇게 곧바로 손을 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의 무공은 보잘것 없어 독비신니가 보명용(保命用)으로 가르쳐 준 신도면변(神逃面變) 도 이러한 다급한 찰나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서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전로본이 놀라 소리쳤다. [도장! 그러지.... 그러지 마시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 새 현정도장의 손바닥이 위소보의 머리를 들이치는 위기일발의 시각! 귀여운 소녀의 신형이 나타났다. 물찬 제비가 스치고 지나는 듯 위소보 앞을 막고는 현정도장의 일 장을 맞받았다. [쌍아, 나의 쌍아야! 어서 나를 구해 줘!] 위소보는 기뻐 외쳤다. 쌍아는 어릴 적에 명사(名師)의 가르침을 받아 무공으로 놓고 말한다면 현정도장과 견줄 만했다. 쌍방의 장력이 맞부닺칠 때는 자신이 지닌 내공과 외력 여하에 따라 이기는데 쌍아는 여자이기 때문에 힘이 남자보다 못해 한 번 맞받아 내치고는 쿵쿵쿵! 세 발짝이나 뒤로 밀려났다. 청목당(靑木堂) 사람들은 모두 쌍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존경심은 향주 위소보보다 더했다. 현정도장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쌍아가 장력을 맞받아 치는 순간 장력을 약간 거둬 들여쌍아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지 않게 배려했다. 쌍아는 비틀거리다가 그만 위소보 앞으로 넘어졌다. 위소보는 이 틈을 타서 대청 안에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고 얼굴에 입을 대고 웃으며 넉살을 부렸다. [일이 성사되면 우리 뽀뽀를 하자꾸나!] 쌍아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며 쏘아 부쳤다. [지금이 어느 땐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멍청이 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현정도장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쌍아 아씨, 모두들 위소보처럼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반역자는 죽여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아씨는 왜 이처럼 감싸고 도는 거요? 그래 아씨는 강남 장가(莊家)의 피어린 원한을 잊었단 말인가?] 현정도장이 말한 '강남 장가'란 명말 청초(明末淸初)에 강남 서생(書生) 장정용(莊廷龍)을 두고 한 말이었다. 장정용은 남의 이름을 빌어 명사집요(明史輯要)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는 만청 통치자에 대한 불만의 말들이 많았다. 그 책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목을 잘리고 정배에 처해진 사람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 쌍아는 원래 장 부인의 여종이었다. 후에 장 부인은 위소보에게 은혜의 보답으로 쌍아를 주었던 것이다. 현정도장이 이런 옛일을 들고 나온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쌍아의 옛 원한을 상기시켜 더는 위소보를 감싸고 돌 수 없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쌍아는 냉랭히 잘라 말했다. [장가의 원수는 만청 황제인데 위 공자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에요? 위소보를 죽이기는 어려울 거예요. 이 쌍아는 위소보의 부인으로 아들 호두(虎頭)까지 낳았지만 여전히 이전처럼 위 공자라고 부른답니다.] 위소보는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현정도장, 자네는 마누라가 없으니 모를 걸세. 나를 죽이려면 이 훌륭한 부인이 과부가 된단 말이오. 과부 문전에는 시비(是非)가 많다고, 그래 무슨 덕을 볼 게 있겠소?] 현정도장은 안색이 어둡게 변하며 중얼거렸다. [쌍아 아가씨가 기어이 자기 남편을 보호하겠다고 하니 나는 인심을 잃어 버렸구만.] 조정의 앞잡이를 현정도장이 가장 증오한다는 사실을 전로본은 잘 알고 있었다. 전로본은 그가 노한 김에 다짜고짜 쌍아를 찔러 죽일까 두려워 몸을 홱 돌려 힌정도장과 위소보 사이에 끼여들며 정색을 했다. [위 향주, 위 향주께서 잘못하시는 거외다. 천지회가 창립되고 나서 오늘날까지 강호에 우뚝 서서 무림 동도(同道)의 경앙을 받아왔는데 그것은 첫째 반청복명의 성지를 받든 이유고, 둘째는 의리를 중히 여겨 환락을 같이 해왔기 때문이오. 그러니 어찌 아렛사람이 윗사람에게 불경한 일을 범할 수 있겠소?] 위소보는 쌍아의 보호를 받게 되자 더욱 담이 커졌다. 그는 목덜미를 만지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의(義)보다는 주먹힘(腕力)이 더 앞선다고 보네. 제기랄, 쌍아가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현정도장의 손에 백 번은 족히 죽었을 거네.] 전로본은 위소보의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다시 튀어나오자 그와는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화제를 돌려 말했다. [위 향주는 남달리 총명한 사람이니 더 말할 것 없이 오늘 일을 놓고 따져 봅시다. 향주께서 천지회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오랑캐 우두머리를 죽여 없앤다면 그 어떤 커다란 액난에 봉착하더라도 형제들은 기필코 자기 목숨을 내걸고 위 향주, 그리고 여러 부인, 또 영당의 노부인까지 빈틈없이 보살펴 줄 것 아니겠습니까?] 위소보는 두 손을 앞가슴에 대고 물었다. [내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하겠소?] 현정도장이 빈정대듯 그 말을 받았다. [그거야 바라는 대로는 될 수 없지. 오늘 이곳은 황궁이 아니라 양주란 말일세. 황제가 우세한 것이 아니라 7대 4로 우리 천지회가 우세하단 말이야. 향주께서 이 형제들의 말을 듣는다면 방금 전 동생이 말한 것처럼 후과는 우리 형제들이 모두 맡겠소. 하지만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지극히 권고해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운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죽이고 모든 책임을 위 향주에게 덮어씌워야겠지. 위 향주는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고, 자고로 머리가 총명하니 천지회에 벌을 내리지는 않겠지. 그러나 여러 부인, 공자, 아씨, 또 여춘원의 양모가 조정의 응조손의 독수(毒手)에서 벗어나자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게고, 그렇게 돼서 위 향주가 혼자 이 세상을 쓸쓸히 살아간다면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닐 것이오.] 이런 후과를 위소보는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런 이야기가 현정도장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소보는 평생 충효절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독 자신의 생명과 일곱 부인들만은 중히 여겼다. 천지회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 황제를 살해하고 그 죄를 자기에게 덮어씌운다면 자기는 죽음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뿐더러 또 이 많은 부인들이 모두 억울하게 죽을 게 뻔한 노릇이었다. 설령 자신이 요행히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그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는가? 위소보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만 풀이 죽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러나 황제는 나를 잘 대해 주었고, 나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지. 또 너희들은 모두 나의 형제이며, 나는 또한 의를 중히 여겨 왔었지.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를 도와야 한단 말인가? 참, 나처럼 답답한 놈이 없을 것 같구나!) 위소보는 이렇게 한탄을 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품 안에서 주사위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래! 살고 죽는 것은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이 할 탓이지. 황제를 도울지, 그렇지 않으면 친구를 도울지 하늘의 뜻에 따르기로 하겠네!] 그는 강희를 보며 말했다. [황상, 제가 만약 이 주사위를 던져 '지존보(至尊寶)'가 나오면 황제를 돕겠소이다. 저희 이 몇몇 형제들은 모두 미천한 인물들이고 망나니들이니 요 죽일 놈이 주사위를 던져도 천지회의 형제들에게는 복일 거외다. 황상, 천지회 형제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희나 현정도장은 모두 위소보가 괴상하고 잔꾀가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또 호리병 속에서 무슨 약(수작)을 꺼내 팔려고 하는지 몰라 그냥 지켜볼 따름이었다. 위소보도 그들이 끼여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응낙하겠지요. 그럼 좋습니다. 나는 이제 황제를 놓고 커다란 도박을 하겠습니다. 이전에 내가 대만의 정극상과 도박을 해서 단번에 백만 냥을 먹고 또한 고기가 보고 물 속으로 숨고 기러기가 모래톱으로 숨을 만큼 아리따운 그의 첩까지 빼앗았지요. 이제는 황제를 놓고 도박을 하는 형국이구려. 나는 천하고금을 통틀어 으뜸가는 노름꾼이란 말이오. 천지신명이시여! 선심을 쓰시라!....지존보!] 그는 얼토당토 않는 허튼 소리를 지껄이며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곧바로 멈춰 서지는 않았다. 강희를 위시로 한 다륭, 장강년, 조제현 등 조정시위들과 현정도장, 전로본을 위시한 천지회 호걸들도 정신을 가다듬고 데굴데굴 구르는 주사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주사위는 한참이나 돌다가 겨우 멈추었다. 지존보! 다륭은 몹시 기뻐했고, 현정도장 등은 실색하고 말았다. 강희는 황궁에 있다보니 도박꾼들이나 알 수 있는 주사위 놀이에서 '지존보'가 뭐고 또 요이삼( 二三)이 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다륭, 장강년, 조제힌의 기색을 보고 위소보가 자기를 돕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느슨해졌다. 전로본은 냉소를 금치 못하며 말했다. [위 향주, 위 향주께서는 주사위 던지는 재간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구려. 점점 고명해지는구려!] 위소보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소? 나는 요이삼이 나오면 일심전력을 다해 여러 형제들을 거느리고 황제를 죽이고 천하의 영웅호걸이 되고자 했는데 황제가 복도 많고 명도 길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옥황상제, 관음보살, 지장왕 할아버지, 토지신 할망구 할 것 없이 모두들 이렇게 나와서 도와주니, 빌어먹을 요이삼이 지존보로 변하는 것을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여러 형제들, 이 위소보가 의를 저버렸다고 욕하지는 마시오. 정말 신선이나 보살들이 권세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묘한 수단을 획책해 황제를 돕겠다고 나서는데 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소? 정말 송구스럽구려, 송구스러워....] 천지회 사람들이 어찌 위소보가 던진 주사위에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 무슨 신선이요, 보살이요 하는 것은 모두 대강대강 둘러치는 수작임을 잘 알고 있었다.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이 조어도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 강희는 조서를 통해 천지회를 멸족시킨 위소보의 커다란 공로를 치하해 마지 않았다. 이리하여 천지회에서는 위소보에게 더 많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위소보가 진면목을 드러내면서 공공연히 만족의 개 같은 조정에 달라붙었으니 천지회 호걸들은 크게 실망하면서도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현정도장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통쾌하구만. 위 나으리, 당신은 지금부터 우리 천지회의 향주가 아니니, 이 빈도는 위 나으리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만. 오늘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모르지만 어떻게 손을 쓸 건지 이야기해 봅시다.] 위소보도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이 구린내 나는 도사놈아! 나 자신은 지금까지 그 무슨 향주 같은 노릇은 한 적이 없어! 그러니 사양할 게 있나. 당신이 나보다 수염이 몇 가닥 더 났고, 몇 년은 더 살았으니 자네가 알아서 하게.] 현정도장은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황제의 무공은 비단 보자기에 싼 개똥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고, 위소보는 잔꾀만 부릴 줄 아는 위인으로 무공은 말할 것도 못된다. 그 외에 조정의 앞잡이 네 명의 무공은 그럭저럭 하지만 우리 천지회 형제들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고 더구나 우리는 사람 수도 많으니 우리가 이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이들은 죽어도 원이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현정도장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 나으리, 겸손의 말은 그만두고 우리는 모두 재간깨나 있는 사람이니 강호의 규칙대로 무공으로 승부를 결하기로 합시다. 당신들은 여섯 명이고 우리는 일곱 명인데 사람 숫자로 득을 봐서는 정정당당하지 못하니 천지회 쪽에서도 여섯 명이 나서서 일대 일로 겨루어 각자의 천명에 따라 생사결단을 내는 것이오.] 현정도장의 말은 듣기에는 매우 공평한 것 같았지만 기실 천지회는 이미 득을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강희와 위소보는 원래 천지회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이기든 간에 두 사람은 죽게 되는 것이다. 천지회에서 이 숱한 사람들이 출동한 것은 어쨌든 강희를 죽이고자 함이었다. 다륭은 도장의 말을 듣고 급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겨룸이오. 황제는 만승지구(萬乘之軀)요, 위 나으리는 천금지체(千金之體)인데 어찌 당신들 같은 지푸라기와 손을 쓴단 말인가? 황상 폐하와 위 나으리는 이 일에 상관치 말고 떠나도록 하게 하고 우리 네 시위가 너희 일곱과 겨루어 너 죽고 나 죽자고 한번 해 보잔 말이오.] 위소보는 짐짓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다 총관, 그래 황제와 나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자네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다륭은 몸을 굽히며 더듬거렸다. [아니옵니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나 뭐란 말인가? 자네는 황상을 너무 낮게 본단 말이야. 황상께서는 사내 대장부이고 또한 결승을 생각하고 계시는데.... 그래 자네들 재간으로 어느 누가 황상 폐하와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위급한 관두에서도 여전히 허풍을 떠는 위소보를 보고 강희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저 잡놈의 무식쟁이는 '운주유악(運籌 幄:격전 현지에서 전략을 세움)'이라는 성어(成語)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구나.) 위소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놓고 말하자면 잘하나 못하나 그래도 천지회에서 몇 년간 이름이라도 걸어 놓은 향주이니. '돼지고기는 못 먹어 봤어도 돼지 달아나는 것은 늘 봤다'는 격으로 무공에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니지. 우리의 무공이 그리 높지 않아 이기지는 못해도 저들의 칼탕이 되어 목숨을 바칠 수야 없지. 어쨌든 망나니들에게 황제를 망신시키지나 말아야지.]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잡놈은 평소에 입이 반지르르 하다고 욕을 했지만 이런 긴요한 시각에 그런 영웅적 기개를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나.) 다륭도 위소보의 말에 사기가 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네 놈들이 웅담을 먹어 담이 이렇게도 크단 말이냐? 그래 황제를 이긴다고? 머리가 성한 게 원수인 모양이지. 어디 두고 보자! 일만, 십만 어전시위들이 덮쳐들어도 황제는 이기지 못하지. 그래 천지회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구?....) 그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입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단지 황제의 신변안전을 위해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말씀은 천번 만번 지당하신 말씀이지만....하지만 그러나....] 강희는 참다 못해 호통을 내리쳤다. [다륭! 어찌 이렇게 질질 끄는가?] 다륭은 '챠!' 하며 황제에게만 하는 예의를 차리고 나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현정도장이 입을 열었다. [위 나으리, 잘 상의했소?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날도 저물어 가는데 빨리 손을 씁시다.] 그 뜻은 위소보가 시간을 끌어 병사들이 와서 황제를 구하게 하려는 수작을 이미 알고 있다고 은근히 질책한 것이었다. 위소보는 정색하며 말했다. [현정도장, 너무 성질이 급하구만. 비록 오늘 우리가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정이 든 형제가 아닌가? 이제 싸움이 시작되면 이것저것 가릴 것도 없네.] 말을 끝낸 위소보는 돌언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춘원의 늙은 기생, 젊은 기생 할 것 없이 모두 어서 술을 가져 오너라! 술을 가져 와! 이 어르신은 오늘 친구들과 단두주(斷頭酒)를 마시겠다!] 이 때 얼굴에 때가 한 말이나 될 듯싶은 곱추 여인이 뒷문에서 걸어나왔다. 그녀는 검은 겹저고리를 입었지만 날씬한 몸매까지는 감출 수 없었고, 얼굴은 검고 더러웠지만 자세히 훑어보면 매우 윤곽이 뚜렷한 아름다운 용모였다. 그녀는 바로 위소보의 일곱 부인 가운데 하나인 소전(蘇筌)이었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부인이 친히 출두하니 일이 잘 되가는 판이구나!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의 낡은 저고리를 얻어 입었을까? 늙은 기생 차림이건 젊은 기생 차림이건 제발 어머니를 닮지 말아만 주십사!) 소전은 커다란 쟁반에 술주전자와 술잔을 담아 들어섰다. 위소보는 그만 참다 못해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어 놓으며 웃었다. [이 년들아, 기생질한다고 잘난 체하지 말란 말이다!] 소전은 은근 살짝 눈짓을 보내고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헛소리를 들은체만체 쟁반을 상에 놓고 옆에 서 있었다. 위소보는 여덟 잔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자기가 먼저 한 잔을 들고 말했다. [천지회 여러분! 우리 형제들은 사이좋게 갈라집시다. 그 누가 이 위소보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나와 몇 잔 더 마십시다. 잔을 나눈 다음 형제의 정을 끊고, 은혜와 의리를 단절하고, 한바탕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잔 말이외다!] 전로본이 맨 먼저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위 향주, 위 형제....아니, 위 나으리. 이 전로본은 다른 사람처럼 뛰어난 인재도 아니고 용모도 그답지 않지만 속말은 하야겠소이다. 내 진정으로 탄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소이다. 진 총타주를 제외하고 또 한 분이 계신데 바로 위 나으리지요. 그러나 오늘 위 나으리께서 작심을 하고 황제를 도와 만족의 주구 노릇을 사서 하시겠다고 하니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관계를 끊겠소이다. 이제 싸울 때 위 나으리께서는 손에 사정을 두지 말기 바라나이다.] 그리고는 술 한 잔을 냉큼 비웠다. 위소보도 주저하지 않고 한 잔을 마시고 웃으며 말했다. [좋소, 좋아! 나는 향주라는 이름은 걸고 있지만 무공만은 보잘 것 없으니 거 무슨 사정을 두고 자시고나 할 게 있겠소? 항복이나 하라면 잘 하지!] 현정도장도 말없이 한 잔을 들었다. 위소보는 그와 함께 또 한 잔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도장님은 더 말씀하실 게 없소이까?] 현정도장은 두 눈을 부릅뜨고 땅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네 에미의 허벅지를 말하려 하네! 나는 일찌감치 너 같은 잡놈은 정말 사람 새끼가 아니구나 생각했지.] 위소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에미 허벅지라니? 그래 내 에미 허벅지를 봤단 말인가? 그렇다면 원래 기생집 단골 오입쟁이였구만. 나는 자네를 늘 도사(道士) 로 보았는데 잘못 보았구만. 알고 보니 당신은 내 에미를 항상 찾아오는 더러운 개였구만. 그런 개 같은 짓을 하고도 돈도 내지 않는 고약한 놈 아닌가? 흑 네가 나의 친애비인지도 모르지!] [개소리!] 현정도장이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말을 하는 동안 천지회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말없이 위소보와 절교주(絶交酒)를 마셨다. 위소보는 과거의 강호 형제들이 하나하나 정의를 위해 주저없이 자기와 절교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걸들이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물건 짝들이야! 거 무슨 반청이고 복명이고 할 게 있는가? 모두들 술이나 마시고 노름이나 하고, 계집들이나 데리고 놀면 천하가 태평할 것 아닌가?) 위소보는 다시 말을 꺼냈다. [현정도장, 방금 내 에미 허벅지를 봤다고 했지? 자네는 겉모양은 사람 같은데 알고 보니 여색을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구만. 생각이 있으면 내 에미를 찾아가란 말이야, 돈 걱정은 말고! 이 어르신께서 얼마든지 대줄 테니 말이야. 그리고 전로본(錢老本)! 당신이 아무리 총명하고 재간이 있다 해도 당신 이름이 그렇듯이 본전치기밖에 하지 못할 위인인데, 자그마한 장사라도 하면 처자식 속은 썩이지 않을 것 아니오? 정말 장사하고 싶은 생각 없소? 일만 냥, 이만 냥은 이 위소보가 얼마든지 대줄 테니. 반청복명을 목숨처럼 생각하는데 대청(大淸)이 당신과 무슨 원수진 일이라도 있소? 명나라가 당신에게 뭘 갖다 줬소? 머리가 성하게 달려 있는 게 원수 같단 말인가? 머리를 노리개로 여기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네!] 현정도장은 위소보가 더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의아해 했다. 도장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개 같은 위 나으리, 이제 술도 마셨고 할 말도 다 했으니 시작하지요.] 그러자 위소보는 힐책하듯 그 말을 받았다. [그렇게도 참을성이 없단 말인가? 우리 형제들과는 절교주를 마셨지만, 어전시위들은 얼마나 섭섭해 하겠나? 그들과 단두주를 마셔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는 다륭, 장강년 등을 불렀다. [다 총관, 장, 조 두 동생, 솔직히 우리 손재간으로는 천지회 호걸들의 적수가 못 된다오. 그러니 우리 형제들은 백이면 백, 모두 황천객이 되고 말 게요. 이 단두주를 마시고 우리 황천에서 다시 만나 저승에 있는 영웅호걸 귀신들과 한바탕 겨루어 보잔 말이오. 우리는 비록 호걸들의 적수가 못 되겠지만 호걸 귀신은 이길 수 있을 게요.] 다륭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는 자고로 나으리를 따라 돈이 있으면 같이 쓰고, 술이 있으면 같이 마시고, 잘 살면 다 같이 잘 살고 벼슬도 같이 했소이다. 정말 통쾌했지요. 오늘 단두(斷頭) 친구도 바로 우리란 말씀입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찬동했다. [단두 친구? 거 참 통쾌하구만, 통쾌해!]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강희 황제 앞으로 가서 입을 열었다. [황상, 소인 위소보는 죽어 마땅합니다. 오늘 황상께서 이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도 바로 소인 때문입니다. 황상께서 소인에게 베푸신 은덕은 하늘보다 더 높고 땅보다 더 두텁소이다.] 강희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우리 군신(君臣)들이 이처럼 서로 마음이 맞는 것은 자고로 보기 드문 일이었지! 소보, 자네는 모를 거네. 과거 자네가 양주에 와서 돌아오지 않자 마륵길, 마우 그 얼빠진 인간들은 자네가 사양집에서 화를 당했다고 보고했다네. 나는 믿어지지 않았지. 그 어떤 도적놈들이 이 궤계가 노련한 위작 나으리를 해치겠느냐고 말이야.] 위소보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황상의 찬사에 사의를 드립니다. 그러나 지금 위소보는 사라지는 별이옵니다.] [소보, 자네는 복장이고, 나는 하늘의 천명을 받은 천자라네. 보잘것 없는 천지회 무리가 어찌 건드리겠는가?] [물방울만한 은혜를 샘물을 파고 또 파서 보답하겠나이다. 황상, 소인과 다륭은 있는 힘을 다해 황상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강희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허허! 소보, 두 해 동안 보지 못했는데, 여태껏 성어 한 마디 제대로 못 쓰는 것을 보니 자네의 학문은 전혀 늘지 않은 모양이구만! '되로 받고 말로 준다'면 될 걸 가지고 샘을 파서 갚는다는 건 또 무엇인가?] [샘물은 어쩐지 제가 판 샘물이 나을 것 같아서이옵니다....] 그러다가 위소보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황상, 잠시 후 손을 쓸 테니 그 틈을 타서 떠나십시오.] 그의 음성이 아무리 낮다 해도 현정도장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도장은 냉소하며 말했다. [졸(卒)을 버리고 차(車)를 보존하자는 수작이군. 제기랄! 대낮에 잠꼬대를 하는 거야?] 위소보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누가 졸을 버리고 차를 보존한다 했소? 우리는 차도 보존하고 졸도 떼줄 수가 없지. 황상, 우리 둘이 손잡고 다 총관 일행이 돕는다면 우리는 백에 하나 지지야 않겠지요.] 강희는 항상 자신의 무공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했다. 강희는 의기가 충천하여 입을 열었다. [해 보자면, 한번 해 봐야지! 소보, 두려워 말게나. 우리 군신은 함께 험난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환난을 같이 하고 생사를 같이 해야 하네.] 위소보는 힘이 절로 솟아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는 자신의 의기를 다했으니 갖은 방법을 강구해 위험 속에서 구해야 한다. 하지만 생사를 같이 하자구? 물론 생이야 같이 해야지. 더구나 사(死)로 말하더라도 황제와 함께 죽는다면 이 몸의 명예야 손상이 없겠지.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나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데 멍청하게 남과 함께 죽는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지.) 위소보는 돌연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술잔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황상, 소인은 득승주(得勝酒)를 올려 황상이 승전하시기를 경하합니다.] 강희는 잔을 받아 쭉 비웠다. 위소보는 일어나 웃으며 물었다. [현정도장, 기다리기가 답답하셨지요. 그럼 시작해 봅시다. 어떻소?] 힌정도장이 그 말을 받았다. [시작할 테면 시작하게! 누가 겁이 나서 그런 줄 아는가?] 그리고는 곧바로 은몸에 기를 끌어 모았으나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현기증이 나며 몸이 비틀거렸다. 이내 그는 땅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위소보도 비틀거리더니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일이 잘못됐구나! 술에 독이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뒤이어 현정도장, 전로본 등 천지회 호걸들과 강희, 다륭 등 조정 대신들도 모조리 땅바닥에 쓰러졌다.... 第2章.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曹雪芹)과 만나다 양주 기생원 여춘원 대청 한복판에 열두 명의 사나이가 일시에 쓰러졌다. 위소보의 일곱 부인 가운데 쌍아와 소전만이 청당에 있었는데, 나머지 방이, 아가, 증유, 목검병 및 공주는 후원에서 급히 뛰어 나왔다. 쌍아는 위소보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말했다. [소전 언니, 왜 중독시켰나요. 어서 정신을 차리게 하세요.] 소전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부로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은 죽어도 아쉬울 게 없지!] [소전 언니도 참! 그 사람은 헛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데 그런 우스갯소리 좀 했다고 탓할 게 있나요? 먼저 사람이나 살리고 봐요.] 쌍아는 눈물을 흘렸다. 돌연 쌍아의 품에 안겼던 위소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쌍아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나는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일이 성사되면 또다시 뽀뽀를 합시다.] 쌍아는 너무도 무안해 그를 밀쳐 버리며 말했다. [남들은 모두 조급해서 혼이 달아날 지경인데 또 이런 수작이에요? 소전 언니! 단단히 버릇 좀 고쳐 주세요!] 공주는 강희 앞으로 달려가 울며 소리쳤다. [황제 오라버니, 왜 이러세요? 어서 정신차려요! 어서!....]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게야? 호들갑 떨지 말어. 큰처남은 죽지않을 테니까.] 공주는 위소보의 옷자락을 잡고 으름장을 놓았다. [황제 오라버니가 잘못되는 날이면 당신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줄....] 위소보는 그녀의 손을 툭 걷어 치며 말했다. [시끄럽게 떠들면 살아나지 못해. 죽으면 나도 더 이상 그를 큰처남으로 삼지 않을 거야!] 황제를 처남으로 삼지 않는다면 자기를 처로 삼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흐느껴 울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은 이러했다. 위소보의 어머니 위춘방이 황제와 실랑이를 벌일 때 위소보는 부인들을 데리고 위춘방이 모르게 여춘원 뒷문으로 가만가만 들어와 숨어 있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천지회 사람들이 강희를 찾아와 시끄럽게 구는 것을 보고는 오늘 일이 심상치 않을 것 같아 소전과 조용히 상의를 하여 소전에게 술에 몽환약을 넣게 하였다. 위소보는 자신의 무공이 별 볼일 없음을 잘 알고 몽환약을 넣는 비열한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현정도장등 강호 호걸들은 이 꾐에 넘어갔다. 위소보가 비록 이런 비열한 수단을 썼지만 기실 자신으로서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천지회 호걸들은 과거 자신의 친구들이고, 강희는 어렸을 때 사귄 벗이다. 또 현정도장과의 의리를 놓고 말한다면 소황제는 천지회 형제들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했고, 또한 강희와의 의리로 본다면 천지회에서는 황제를 죽이려 하지 말아야 했다. 그리하여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별다른 수가 없어 술에 약을 넣게 한 것이다. 천지회 호걸들은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약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 술을 먼저 권하고 다륭등 어전시위들의 무공은 그에 미치지 못하므로 나중에 권했다. 그리고 맨나중에 무공이 가장 약한 강희에게 권했다. 따라서 무공이 높건 낮건 일시에 혼미 되어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자기만은 술주전자에 다른 수단을 부려 약물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현정도장이 중독된 것을 보고는 먼저 선수를 쳐서 자기도 중독된 것처럼 쓰러졌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라도 조정이나 천지회에서 찾아와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소전이 말했다. [소보, 이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 쓰러져 누워 있는데 아무 일도 아니라니? 어서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제기랄 것, 모두 다 뒈져 버려라! 황제는 천지회를 없애라고 들볶으니 정말 귀찮아 죽겠어! 죽일려면 모조리 죽여 버려야지.] 공주가 소리쳤다. [안 돼! 황제 오라버니는 죽이지 못해!] [안 되긴 뭐가 안 돼! 나는 우선 이 큰처남부터 없애 버려야겠다!] 위소보는 강희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심통을 부렸다. [제기랄 소현자! 나더러 천지회 형제들을 죽이라구?] 그리고는 다시 현정도장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썩어질 놈, 나더러 나의 친구 소현자를 죽이라구?] 위소보는 하하하! 앙천대소하고 의기양양해 말했다. [이 위소보는 예로부터 천하에 으뜸가는 일이 아니면 안 하지. 자, 보라구! 일곱이나 되는 천하에 으뜸가는 미인들을 부인으로 얻었으니, 자고 이래 이보다 천하에 으뜸가는 복이 있던가? 또 도박으로 백만 냥의 돈을 긁은 데다가 미인까지 얹어 받았으니, 그래 이것이 자고 이래 천하 으뜸가는 도박꾼 아닌가! 황제와 천지회 사이를 요리조리 오가며 죽지도 않았으니, 그래 이것이 자고 이래 천하 으뜸가는 영특한 사람 아닌가! 천하에 으뜸가는 황제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고 천하에 으뜸가는 무림 능수(能手)들을 발로 걷어찼으니, 그래 이것이 자고 이래 천하 으뜸가는 대담무쌍한 호걸 아닌가! 하하하! 네 가지가 천하 으뜸이란 말일세. 그렇지 않은가?] 공주는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또 기고만장이구만! 자고 이래 천하 으뜸으로 낯판대기 두터운 건?....∴] 그러자 방이, 증유 등도 함께 웃었다. 위소보는 화를 내는 대신 웃으면서 말했다. [고금 이래 일곱 미인들이 열 두 사나이를 꼬드겨 술을 먹여 쓰러 눕힌 것도 천하 으뜸가는 화태(花態) 아닌가? 이제 우리 함께 운남에 가서 여기저기 유람이나 한바탕 즐기자구!] 그러자 공주는 앙탈을 부렸다. [난 그렇게 못 해요. 황제 오라버니를 놔 두고는 못 가겠어요.] 위소보는 냉소했다. [그럼 혼자 남으면 될 거 아냐? 흥! 공주는 정말 명문귀족 출신이구만. 그러나 조심해야 할 거야. 천지회 놈팽이들이 붙잡아다 옷을 벗기고 돌아가며 그들의 여편네로 만들면 대단할 거야. 그 맛이 어떨까?] 공주는 겁도 나고 부끄럽기도 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희를 버리고 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주는 평소부터 나머지 여섯 부인들과 의가 맞지 않았는지라 그들이 자기 편을 들어 줄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이 때 소전이 말했다. [소보, 제 생각에도 이렇게 버리고 가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후에 관병들이 와서 천지회 사람들을 죽이거나 황제를 죽인다면 골치 아픈 일들을 모두 우리에게 덮어씌울 게 뻔한데 애당초 앞뒷쪽이 모두 별 탈 없이 지낼 방법을 마련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요.] 위소보는 가락을 넣어 그 말을 받았다. [그 말이 옳구만! 그럼 그렇게 해야지.] 소전은 위소보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소근거렸다. 위소보는 기분이 좋은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절묘하구만, 절묘해!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붙잡았고, 칠군(七軍)을 물에 처넣었다고 해도 우리 소전의 재간에 비긴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 소전은 역시 최고야, 최고! 모두들 어서 소전에게 옷차림과 화장을 지시 받도록 해!] 여섯 부인들은 히히닥거리며 소전을 따라 나갔다. 돌연 인기척이 들리며 사람 그림자가 번쩍 했다. 신형을 놀리는 품으로 보아 위소보가 탄복하는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이나 백의신니 장공주의 재간에 견줄 수 있는 뛰어난 수법이었다. 위소보는 눈앞이 아찔했다. 어느 새 다부진 몸집의 사나이가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놀라 외쳤다. [누구냐?] 사나이는 앞뒤 가리지 않고 위소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길로 나직하게 물었다. [어서 말해라! 황제는 어디 있느냐?] 그는 어느 새 위소보의 쇄골을 움켜쥐었는데 그 솜씨는 고명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리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도 피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위소보는 백의신니에 게서 '신행백변(神行百變)'을 조금이나마 배웠던지라 슬쩍 피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아!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더니 말했다. [귀하는 보아하니 명사(名師)에게서 무공을 익힌 사람인 것 같은데 이거 참 실례했소이다!] 그리고는 더욱 기를 끌어 모아 전신의 힘을 열 손가락에 넣었다. 보기에 위소보의 보잘것 없는 무공은 차치하고 강호의 고명한 호걸들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위소보의 무공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지라 이러한 위급한 와중에도 그 사람이 머리에 화령(花領)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은 어전시위 차림임을 알아차렸다. 위소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차럼새로 봐서는 어전시위 같은데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또한 어전시위들은 모두 허깨비라 무공도 나보다 별반 나은 것이 없는데 어디서 이런 무림의 고수가 나타났을까? 혹시 강호 무림의 사람이 변장을 하고 온 것은 아닐까?) 위소보는 의심을 하면서도 말은 꺼내지 못했다. 또한 이 긴급한 찰나에 이것저것 더 생각할 겨를이 없어 진짜든 가짜든 한바탕 나 죽고 너 죽고 해보자고 버티기로 결심했다. 위소보는 삽시에 비수를 꺼내 들고 눈에 독을 뿜어내며 소리쳤다. [네가 어떤 사람이건 황상은 해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전신의 기를 모아 후려치려던 자세는 조금도 흩트리지 않았지만 말투는 약간 누그러져 물었다. [귀하는 녹정공 위소보 위작 나으리가 아닌가요?]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약간 여유가 생기며 생각을 굴렸다. (이왕 이놈이 나를 알아보았으니 이제는 근엄한 자태를 보여줘야겠구나.)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름 그대로 일등록정공 위소보라네. 당신이 황상을 죽이겠다면 반드시 이 위작 나으리를 먼저 거쳐야 할 걸세!] 그 사나이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외쳤다. [그래 정말 위작 나으리이십니까? 위작 나으리는 조정에 충성을 다하시는 분이신데 정말 명성 그대로이십니다. 위작 나으리! 그런데 황상은 어디에 계십니까?] 위소보는 사나이를 찬찬히 훑어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래 당신은 도대체 누군가? 당신의 몇 마디 말을 듣고 황상을 그냥 맡긴단 말인가?] 사나이는 허리를 공손하게 굽히며 말했다. [비천한 소인이 어르신을 몰라 뵙고 노엽게 하여 정말 송구스럽사옵니다. 소인은 일등시위 치얜펑바투루(欽封巴鬪魯) 강녕직조(江寧織造) 조인(曹寅)이라 합니다. 위작 나으리께 인사드리나이다.] 위소보는 냉랭하게 그 말을 받았다. [아, 알고 보니 조(趙) 대인(大人)이었구만!] 그러면서 속으로는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놈! 조가라구? 일등시위란 뭐고 강녕직조란 다 뭔가? 이 어르신과 비기면 어림도 없는 녀석이 그 시시한 이름을 입에 주워담을 건 뭐람!)(작자 주:위소보는 아무런 학식이나 재간도 없음을 이 대목에서도 역시 엿볼 수 있다. 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강녕직조 조인과 강희는 군신(君臣) 관계로서 황제의 심복이었다. 그의 관직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늘 강희에게 전절밀주(專折密奏)하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권세가 대단했고 일품 왕공대신들도 가까이 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손하게 대했다. 위소보는 비록 지위가 높지만 조정 대신들의 경중(輕重) 관계를 잘 모르고 있으니 세상 이치의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조인은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서울과는 멀리 떨어진 남경에 있었지만 조정의 내노라 하는 인물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손금 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조인은 일찍이 황제가 멍청한 위소보와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어찌 그런 호칭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니, 황상!] 조인은 황상이 암계(暗計)에 걸려들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급히 엎드려 황제를 끌어안고 외쳤다. [황상, 황상! 어서 정신을 차리십시오. 정신 차리십시오!]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쉿! 조 대인 목소리를 좀 낮추시오! 여기는 이목이 많으니 그렇게 소리쳐선 안 되오!] 조인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실 그는 강호의 일류 고수였다. 그는 강희의 맥을 짚어보고 몽환약에 중독되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어 한시름을 놓고 원망스런 눈길로 물었다. [위작 나으리,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시정잡배의 수작을 펼쳐 황상을 음해하려 했습니까?] 위소보는 또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렇게 고명하고 실용적인 무공을 이 어르신을 제외하고 그 누가 펼칠 수 있단 말이냐? 제기랄, 너희 조가네 십팔대 할애비도 이런 망나니 아니었느냐? 보자, 조씨네 가문에는 조조(曹操), 조비(曹丕)가 있지. 모두가 얼굴에 울긋불긋 분칠을 한 간신(奸臣)배들로 망나니, 개망나니, 빌어먹을 망나니들 아니더냐....) 속으로는 이렇게 줄창 욕을 퍼부었지만 입으로는 반지르르하게 말했다. [글쎄 말이외다.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 아니고서 누가 이런....수단을 펼치겠소. 흠, 한 마디로 다 말할 수가 없지. 마침 조 대인이 왔으니 잘 됐소이다.] 조인은 오랫동안 민간에 머무르면서 적지 않은 강호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니 강희 이외에 시위충관 다륭, 그리고 다른 세 명의 어전시위가 있었고, 또한 현정도장 등이 있었다. 그는 놀라며 입을 얼었다. [위작 나으리! 그래 이런 비열한 독수를 펼친 자가 천지회란 말입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 말고 세상에 그렇게 담이 큰 사람이 있겠소! 그들 아니라면 어찌 황상이 이 곳에 온다는 소식을 알고, 또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겠소? 황상께서는 대재웅략(大材雄略)이 있으시고, 다 총관이 '적당히 움켜쥐고, 적당히 숙여들지(善 善撓)' 않았더라면 그 결과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소?] 조인은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대재웅략'은 응당 '웅재대략(雄材大略)'이리라 생각했지만 '선조선요'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조정의 고관대작 중에 학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부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는 묘책과 지혜가 출중하신 분이고, 커다란 공을 세우신 분이지요.... 흠, 현정도장은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인데 이처럼 비열한 수작을 펼치리라곤 정말 생각지 못했소이다. 천지회는 진근남이 죽은 후 점점 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진짜 현정도장 일행이 몽환약을 넣었다면 왜 자기들 패거리까지 중독시켰단 말인가?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인은 더 캐묻지 않았다. 위소보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소. 천지회는 진 총타주를 빼면, 제기랄, 쓸 만한 작자가 한 놈도 없지! 조 대인, 이 일은 더 지체할 수 없소이다. 어서 황상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십시오.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조인이 생각해 보니 정말 일이 시급할 것 같았다. 위소보에게 맡기자니 무공이 변변치 못하니 자기가 나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말했다. [그럼 소인은 황상을 모시고 먼저 떠나겠습니다. 위작 나으리, 일을 처리하신 후 곧장 강녕직조 아문으로 오십시오. 그 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인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었다. [위작 나으리, 폐하께서 이번에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은 모두 어르신 때문입니다. 원래 저희 강녕직조를 시찰하실 때 어르신이 양주에 계신다는 밀보를 받으시고 크게 기뻐하셨소이다. 그래서 금위군(禁衛軍)도 움직일 사이 없이 어전시위 몇 명만 데리고 발길을 재촉하셨지요. 이런 하해와 같은 은혜는 진정 만고에 드문 일입니다!] 이 말은 들은 위소보는 더욱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소현자, 소현자! 이 소계자는 소현자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이 한 몸 바쳐도 원이 없겠소이다.] 이 순간 위소보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강희에게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맹세하는 것 같았다. 조인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다른 분부 말씀은 없습니까?] 위소보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없소이다. 조 대인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어서 황상을 모시고 떠나시오.] 조인은 강희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그런데 문어귀를 나서는 순간 매섭게 생긴 머리가 덥수룩한 구레나룻 사나이와 부닺히고 말았다. 위소보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는 다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저 빌어먹을 십팔대 핼애비 같은 모십팔(茅十八)! 저 놈은 왜 또 나타나서 번거롭게 만든단 말이냐?) 모십팔은 천지회 사람이었다. 그는 천지회의 믓 호걸들, 특히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탄복했다. 그러나 조정에 대해서는 고질병 같은 극도의 증오심을 가진 인물로, 흘몸으로 강호를 떠돌면서 제멋대로 조정에 골치 아픈 일만 저지르고 다녔다. 위소보는 10년 전 양주 여춘원에서 초면부지인 모십팔을 만났는데 그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참으로 얻기 힘든 기회를 얻어 황궁에 숨어들었다. 이로부터 거리의 망나니 위소보는 조정의 큰 관리가 되었다. 모십팔은 흐통을 내리쳤다. [황제를 내려 놓거라!] 그리고는 다짜고짜 쌍장을 발출하여 조인을 후려쳤다. 조인은 황제를 업고 있는지라 다급하게 한 손으로 얼렁뚱땅 모십팔의 일 장을 받아넘겼다. 그러나 모십팔은 요지부동, 그 자리에 끄덕도 않고 서 있었다. 조인은 쿵쿵쿵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대청 가운데로 밀려났다. 무공으로 논한다면 모십팔과 조인은 상대가 되지 않는 천양지차의 실력이었다. 조인은 동 뒤에 황상을 업고 있어 쥐를 잡다가 그릇을 깨뜨리지 않을까 감히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모십팔은 다시 쌍장을 내뻗었으나 조인은 한 손으로 맞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인은 이미 기세에 있어 손해를 보고 들어갔다. 모십팔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냉소했다. [도망치려고? 황제를 내려놓고 꽁무니를 빼거라!] 모십팔은 공중제비를 돌아 조인을 뛰어넘어 신형을 곧바로 세우고는 다시 쌍장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조인이 아니라 등에 업고 있는 강희를 노린 것이다. 조인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인지라 모십팔이 공중으로 날아 오르자 목표가 강희임을 알고는 이정제동(以靜制動), 즉 움직이는 상대를 조용히 기다리며 제압하려고 준비했다. 모십팔은 이미 조인의 등 뒤로 내려와 강맹한 쌍장을 강희에게 내뻗었다. 보기에 강희는 그 일장을 벗어날 길이 없었고, 그 일장에 맞는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십팔은 기쁨을 참지 못하여 소리쳤다. [이 만청 오랑캐야! 너도 오늘이 있구나. 이 모십팔이 양주 가정에서 죽은 무고한 수십만의 원수를 갚겠다!] 바로 그 순간 내뻗은 강맹한 일장이 도리어 자기에게 들이치며 아무런 방비도 없던 모십팔은 왁 하니 선혈을 뿜어내며 대여섯 걸음 뒤로 밀려나면서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속이 뒤집어지고 가슴이 답답한 것이 실로 말 한 마디 꺼내기 힘든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조인의 고심한 내공은 당금 무림 중에서 견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상승 내공심법을 펼쳐 자신의 내력을 강희에게 전도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십팔의 일장이 비록 강희를 내리쳤지만 기실 조인과 맞부딪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모십팔은 노련한 조인의 수법에 걸려든 꼴이 되고 말았다. 모십팔의 무공은 조인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단번에 상대를 거꾸러뜨리려는 생각에 조급히 일을 처리한 것이 도리어 내상을 입고 말았다. 다행히도 조인은 강희를 구하는 것이 시급한지라 스스로 알고 물러서리라 생각하며 더는 추격하지 않아 다행히 모십팔은 죽음을 면할 수는 있었다. 모십팔의 공력은 그리 정심하지 못했지만 상대를 대적한 경험이 많아 운기를 하고는 곧장 공력을 회복했다. 그는 만청을 뒤엎는 데 뜻을 세웠고, 또한 일찍이 강희에게 사형판결을 받은 적이 있어 조정과 강희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다. 그런 그가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격인데 어찌 그대로 놓칠 수 있겠는가? 모십팔은 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냉소하며 말했다. [아주 강맹한 응조손(鷹爪孫)이군! 흥, 그런 일신의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오랑캐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니 정말 애석하구나!] 모십팔은 어느 새 손에 한 자루의 비수를 쥐고 덮쳐들었다. 이번에는 조인의 장력을 상대하지 않고 십팔로육합도법(十八路六合刀法)을 펼치며 강희에게 덮쳐들었다. 모십팔은 그 육합도법을 손에 익힌 지 수십 년이나 되어 그 숙련된 정도로 자신의 내공과 외력의 부족함을 메울 수가 있었다. 만약 그 도법을 펼친다면 이미 혼미 상태에 있는 강희는 더 말할 것 없고, 강호의 일류고수라 할지라도 금종조(金鐘 ), 철포삼(鐵布衫)의 기공(氣功)을 연마하지 않고서는 맨몸으로 그 예리한 칼날과 신법을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다급한 상황이 펼쳐졌다. 조인은 죽을 힘을 다해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갈일성을 토해내며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공수입백인(空手人白刀)의 상승무공을 펼쳐 모십팔의 팔뚝을 움켜쥐려 했다. 모십팔은 거친 것 같았지만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인과 두 차례 손을 쓰고는 자신이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익히 깨달았다. 그런데 어찌 상대가 자신의 무기를 움켜쥐도록 그냥 놓아두겠는가? 모십팔이 몸을 획 돌리자 조인은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모십팔은 또다시 조인의 뒤로 돌아가 강희를 노리며 덮쳐들었다. 위소보는 자기 무공으로서는 조인을 돕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도와준다 해도 독이 올라 눈알이 시뻘건 모십팔과 어찌 목숨을 내걸고 싸우겠는가? 위소보는 누구보다도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위인이라 자고로 남과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없었다. 그저 치고 받고 말싸움이나 하다가 덕이나 보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익힌 재간이었다. 위소보는 멀찌감치서 외쳤다. [모 형, 잘 지냈수?] 모십팔은 강맹한 적수와 손을 쓰고 있는지라 위소보를 힐끗 쳐다보고 지나가는 말로 응대했다. [괜찮네. 위 형제도 별일 없는가?] 위소보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괜찮다구? 무슨 얼어 죽을 놈이나 괜찮지!.... 쓸데없는 놈들이 불쑥 나타나서 개지랄 피우니 이 어르신은 계집들과 흥취를 즐기지도 못하는 판인데.] 모십팔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뭐라고? 이 형님이 이 놈들을 싹 쓸어 버려 위 동생의 원을 풀어주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인의 다섯 손가락이 질풍같이 모십팔의 두 눈을 향했다. 모십팔은 위소보와 말을 주고받다 보니 심기가 흐트러져 있었는데 갑자기 얼굴에 불에 덴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모십팔은 위급한 경각에도 동요 없이 침착하게 칼을 휘두르며 조인의 팔을 내리찍으려 했다. 조인은 이미 그 일초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손가락을 가볍게 통기자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모십팔은 수중에 들었던 단도를 자칫 떨어뜨릴 뻔했다. 조인은 그 틈을 타서 다섯 손가락으로 맹렬하게 앞가슴의 천돌(天突), 현기(玄機), 화개(華盖), 자궁(子宮), 옥당(玉堂), 단중( 中), 중정(中廷) 등 일곱 대혈을 노렸다. 어느 한 곳만 움켜쥐면 모십팔은 죽지 않더라도 최소한 중상을 면치 못할 형국이었다. 이 위급한 시각, 모십팔은 땅바닥으로 굴러 간신히 치명적인 타격을 피해 겨우 지탱하고 설 수 있었다. 그 낭패한 몰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인은 황제를 등에 업어 동작이 완만했지만 보기에 일 초만 펼치면 상대를 쓰러뜨릴 것 같았는데 모십팔이 피하자 맹랑한 마음에 '애석하구나!'하고 속으로 외쳤다. 모십팔은 신형을 바로잡고 말했다. [위 동생, 이 모십팔이 오랑캐 황제를 죽이고 나면 다시 이야기를 하게나.]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강희를 노리며 이리저리 손을 썼다. 조인은 강희가 상할까봐 전신의 힘을 다해 막기에 급급했다. 만약 황제가 상한다면 목숨으로도 그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겨룸으로 인해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순간 모십팔은 날벼락 치듯 칼로 조인의 앞가슴을 찌르려 했다. 조인은 침착하게 팔에 진력을 끌어 모아 그의 칼끝을 후려쳤다. 모십팔의 이 동작은 허초였다. 그는 조인이 팔을 내뻗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나선형으로 몸을 솟구치며 도약해 어느 새 조인의 동뒤로 날아가 단도를 휘둘러 강희의 뒤통수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야말로 변덕도 많고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조인은 급히 몸을 돌렸으나 막아낼 수가 없었다. 순간 조인은 머리가 아찔해지며 속으로 내뱉었다. [끝장이야, 끝장!] 모십팔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오랑캐 황제야! 너회들 오랑캐 청나라도 오늘과 같은 날이 있구나! 하하하....] 긴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단도를 내리쳤다. 순간 쿵! 하는 땅울림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돌연 모십팔의 웃음도 멈추었다. 그러나 땅바닥에 나뒹군 사람은 강희도 조인도 아닌 바로 위소보였다. 원래 모십팔이 단도로 내리찍을 때 위소보는 신행백변(神行百變)의 신공(神功)으로 맹렬하게 강희와 모십팔 사이에 끼어 들었다. 결과적으로 모십팔의 칼은 위소보의 등 뒤를 찍은 것이었다. 위소보는 모십팔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2년 전 강희는 모십팔에게 사형을 언도하면서 위소보더러 형장에 가서 형집행을 감시하라는 명을 내렸다. 위소보는 모십팔의 오해마저 감수하면서, 또한 눈앞에 닥칠 커다란 액난도 무릅쓰고, 대만에 투항한 장수 정극상의 부하 풍석범(馮錫范)을 붙잡아 모십팔의 죽음을 맞바꿈으로써 오늘날의 모십팔이 있게 되었다. 모십팔은 단도를 내팽개치고 위소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위 동생, 어찌된 일인가? 내가 잘못 손을 썼구만!] 위소보는 신음을 하며 말했다. [나, 나도 잘 모르겠소.... 나는 저기 서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나를 집어 던졌는지 모르겠구려. 나는, 나는....]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혼절하고 말았다. 모십팔은 이를 깨물며 다짐했다. [위 동생, 이 모십팔의 목숨은 동생이 구해 주었는데 이런 일이.... 내가 잘못했구만. 나는 죽어 마땅하지! 이 모십팔이 황제를 죽이고 사람들의 원수를 갚은 후에 자결하여 목숨을 구해 준 동생의 은혜에 보답하겠네.] 모십팔은 단도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오랑캐 황제야! 목을 내놔라!] 그러나 어느덧 강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시간을 끌어 조인이 강희를 데리고 사라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홀연 뒤에서 일곱 명의 젊은 사나이들이 나타나 이구동성으로 소리쳐 물었다. [어디서 온 강도놈들이 위 공자에게 감히 손을 댔단 말이냐?] 모십팔은 비분이 극에 달해 윗도리를 꽉 잡아 젖히며 털이 북실북실한 앞가슴을 으쓱 내밀고 외쳤다. [대장부가 행한 일은 대장부가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당연지사! 위 동생은 내가 상하게 했소이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나를 죽여 위 동생의 원수를 갚으시오. 만약 이 모 아무개가 조금이라도 얼굴을 찡그린다면 대장부가 아니외다!] 그 일곱 젊은 사나이들은 교묘하게 남장을 한 위소보의 일곱 부인들이었다. 그들은 뒷방에서 조잘조잘 떠들며 치장을 하느라 대청에서 생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쌍아가 제일 먼저 모십팔을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모 오라버니가 아니세요?] 모십팔은 윗통을 벗어 던진 채 가슴을 내밀고 있다가 쌍아를 보자 얼굴이 시뻘개진 채 어린애가 꾸중을 듣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지 못했다. 돌연 지붕 위에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날아 내려왔다. 그는 모십팔이 영문을 알기도 전에 일장을 내뻗었다. 모십팔은 흡! 하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늑골이 몇 대 부러지고 입에서는 선혈을 토해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사람은 한 손으로 위소보를 움켜쥐고 몸을 날려 지붕을 넘어갔다. 모십팔의 그 한 칼은 필생의 힘을 다한 것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맹했다. 위소보는 비록 보의(寶衣)를 걸치고 있었지만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혼절하고 말았다. 그가 깨어나 보니 자신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콧구멍 속으로 담담히 풍겨오는 향기로 미루어 깊숙한 아녀자의 규방 같았다. 위소보는 일생 동안 여자들의 몸에 적지 않은 공력을 들였기 때문에 여자들의 체취에는 많은 경험이 있었다. 이 향기는 여춘원의 그런 속된 지분냄새도 아니고, 또한 강호 여인들의 몸에서 나는 호방한 냄새도 아니머, 그렇다고 태후궁이나 공주의 방에서 맡을 수 있는 부귀한 향기도 아니었다. 이 향기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짙은 것 같기도 하고 옅은 것 같기도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짙은 듯 옅은 듯 웬지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면서 편안한 것이 마치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위소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그래 이 어르신이 달나라 상아(嫦娥)나 관음낭랑(觀音朗朗)의 은밀한 방으로 왔단 말인가? 정말 이 어르신은 정말 복이 터졌군.) 이렇게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리없이 방문이 열리며 키가 훤칠하고 둥근 얼굴에 복숭아 같은 눈망울을 가진 소녀가 조용히 들어섰다. 그 여자는 위소보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보조개가 보일듯말듯한 얼굴로 부드러운 소주 사투리로 물었다. [위 나으리, 좀 나으셨나요?] 위소보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잠시 후 땅이 꺼질 듯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야, 아파 죽겠네! 돼지 기름에 대파를 튀기는 것 같구나! 신선 여동생, 도대체 여기가 어디요? 신선동(神仙洞)이요, 달나라 상아요, 봉래선산(蓬萊仙山)이요, 옥황상제요,염 라전(閻羅殿)이오? 아니면 저팔계의 유사하(流沙河)요, 손오공의 수렴동(水簾7同)이오? 신선 여동생, 어서 얘기해 주구려.] 그 여자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백옥 같은 치아를 보일듯말듯 입을 열었다. [위 나으리, 그만 웃기세요. 이 곳은 강녕직조 조 대인 댁이에요. 그 무슨 신선동이라고 그러세요?] 위소보는 짐짓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를 속이지 말구려, 믿어지지 않는다오. 신선동이 아니라면 어찌 당신 같은 신선 여동생이 산단 말이오?] 여자는 웃었다. [위 나으리, 당신은 정말 이 곳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말끝마다 신선.... 뭐요, 뭐요 하니 말이에요.] 위소보는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내가 신선 여동생처럼 어여쁘게 생겼단 말이오?] 그 여자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문 휘장이 걷히면서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들어왔다. 그 아이는 옥을 깎아 만든 듯 청수한 이목구비에 담녹색 마고자를 입고 목에는 금빚찬란한 목걸이를 걸고 콩콩 뛰어들어 왔다. 그 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조조를 들먹이니까, 조조가 오는군요.] 어린애는 여자 앞으로 다가와 생끗 웃으며 말했다. [신선처럼 예쁜 누나! 입술에 발라진 연지를 어제처럼 근아(芹兒)에게 한 입 주세요.] 여자는 무안한 마음에 얼굴이 붉어지며 위소보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 아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반문했다. [무슨 일이 있어요?]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아이를 마중하며 화제를 돌렸다. [조심하세요, 도련님. 넘어져서 다치면 어르신들께서 성을 내실 거예요. 욕을 먹는 건 저희들밖에 없어요.] 위소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놀랐다. (이 여자는 절세미인으로, 이 어르신의 일곱 부인들 가운데 아가를 제외하고 누가 저 여인과 견줄 수 있단 말이냐? 이런 미모를 지닌 여자를 왜 계집종으로 쓸까? 이 조가 녀석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이런 미모를 지닌 여인을 부인으로 삼지 않고 계집종으로 쓰다니! 그래 이것을 보고 그 무슨 좋은 물건을 그냥 내팽개친다는 게지!) 그는 '폭진천물(暴珍天物:하늘의 피조물을 함부로 살상함)'이라는 성어(成語)를 모르는지라 '그 무슨 좋은 물건을 그냥 내팽개친다'고 얼버무렸다. 위소보는 여자와 등지고 있어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의 탐욕스런 눈망울은 그 여인의 목덜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린애는 그 여자의 얼굴 가까이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거듭 맡으면서 말했다. [신선 누나의 향기는 정말 좋아! 오늘은 사부님이 사서(四書)를 강론한다고 하셔서 곧장 가야 되는데 신선 누나, 어제 남은 그 연지를 근아에게 줄 수 없나요? 근아는 갖고 갈래요. 빨리 주세요.]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어디 어떤 늙어빠진 색정놈이 저런 색정 새끼를 나았을까? 몇 달 안 된 강아지, 몇 년 안 된 고양이만한 놈이 벌써부터 여인의 즐거움을 알고 치근덕거리다니. 썩어빠질 녀석이 감히 신선 여동생 같은 여인의 연지까지 욕심을 내다니? 참 고약한 놈이로구나. 나중에 어떤 물건짝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위소보는 속으로 웃으며 다시 생각했다. (나중에 어떤 물건짝이 될는지? 일신에 이 어르신처럼 여인에 대한 고매한 경지를 쌓는다면 꽃 같은 많은 부인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어린 놈에게 당한 것 같아 또다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놈, 이 어르신이 색정(色情) 귀신, 색정 늑대라면, 저 녀석은 색정 할애비고 색정 염라대왕이겠구나!) 위소보는 오직 음탕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여자는 마치 뒤에 눈이 달린 듯이 위소보가 자기 목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어린애에게 연지를 건네주며 나직이 말했다. [이리 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손님이 계신데 버릇 없이 굴면 손님이 웃지 않겠니?] 어린애는 침대에 누워 있는 위소보를 보고는 한 쌍의 새카만 눈이 동그래져 한참을 쳐다보다가 돌연 여자가 준 연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방에 구린내 나는 사내를 감춰 놓았구나? 더러워! 이 연지는 필요 없어!] 그 여자는 궁색하게 대답했다. [도련님, 터무니 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 할아버지는 도련님의 할아버지께서 모셔온 귀하신 손님이에요.] 어린애는 입을 삐죽하며 비아냥거렸다. [저 구린내 나는 사내가 무슨 존귀한 사람이라고? '존귀(尊貴)'라는 말을 함부로 더럽히지 말아! 누나는 신선 같이 어여쁜 사람인데 하필이면 왜 저렇게 구린내 나는 사내처럼 더러워지려고 그러세요? 여자는 물로 만든 혈(血)과 육(肉)이고 구린내 나는 남자는 흙으로 빚은 혈과 육이지요. 물은 본래 아주 깨끗한 물건으로 흙이 묻으면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고 구린내가 나지요. 누나는 깨끗한 여자인데 더러운 남자에게 묻으면 속되기 짝이 없고 구린내가 난단 말이에요.] (작자 주:여러 독자들은 이 어린아이의 말을 읽고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바로 홍루몽(紅樓夢)에서 작가 조설근은 주인공 가보옥(價寶玉)의 입을 빌어 후세 사람들에까지 널리 회자(膾炙)되는 통쾌무비한 고론(高論)을 펼쳤다. 위소보가 그런 일들을 겪은 것은 모두 사실이나, 문학적 형상으로 허구화된 주인공 가보옥과는 당연히 다르다. 그러나 고증에 의하면 홍루몽의 작가 조설근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강희와 교분이 두터운 일등시위 강녕직조 조인(曹寅)이다.) 위소보는 자기 앞에 있는 아이가 바로 미래의 대문호가 되리라는 것은 모르고, 단지 예닐곱 먹은 어린애의 희귀하고도 괴이한 말을 듣고 단지 의아하게만 생각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이 녀석이 무엇을 안다고 말을 이렇게도 비비꼰단 말인가? 이 어르신은 원래 스스로를 비아냥거리기 할애비라고 여겼는데 요런 놈이 있으니 내가 손자가 된 셈이로구나! 안 되지! 이 어르신은 비꼬고 비비꼬아서라도 요놈에게 내 낯바닥을 되찾아야지.) 여기까지 생각한 위소보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웃었다. [얘야, 너는 여인에게 치근덕거리고 남자들을 싸잡아 욕을 하는구나. 내가 묻겠는데 넌 남자가 아니냐? 너는 구린내가 나냐, 안 나냐?] 조설근은-독자들이 이미 그의 신분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부터는 직접 그의 이름을 쓰기로 한다- 태연스레 그 말을 받았다. [물론 나도 더러운 남자지요. 더러운 진흙으로 만든 혈과 육이지요.] 위소보는 다시 물었다. [너는 조인의 손자가 아니냐? 네 할아버지는 커다란 벼슬을 하는데 역시 남자니까 그에게 냄새가 나더냐, 안 나더냐? 물론 손자가 더러운데 그 할아버지야 더럽고 더 더럽겠지. 개똥처럼 더럽고, 자라새끼처럼 더럽고, 썩어빠진 거북이 알처럼 구린내가 나겠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하자면 결론적으로 그 구린내는 천 년, 만 년, 만만 년은 풍기지 않겠느냐?] 위소보는 어릴 적 양주 기생원에서 자랐다. 그 뒤얽히고 복잡하고 추잡한 환경에서 자란지라 입만 벌리면 지독하고 듣기 거북한 말들이 튀어나왔고, 이틀 밤낮 욕을 해도 중복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을 지경이었다. 조설근이 꺼낸 남자와 여인에 대한 견해는 기실 동심과 두려움에서 온 순진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대해 어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연관시킬 수 있겠는가? 그가 읽은 것은 고작 사서오경(四書五經)이었으며 가정교육이 극히 엄했고 군군신신(君君臣臣: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부부자자(父父子子: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를 매우 중하게 여기며, 평시에 웃어른들을 들먹이기만 해도 두려워 절절 매는데 어찌 웃어른에게 악취가 천 년 만 년 풍긴다는 말을 연관시킬 수 있겠는가? 조설근은 위소보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말을 듣고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지라 어리둥절하여 말을 못 하다가 와! 하고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마 너무나 궁지에 몰리자 분해서 참지 못하고 터뜨린 울음 같았다. 위소보는 아이의 울음에는 아랑곳 않고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웃으며 말했다. [울기는 왜 우니? 그래도 네 말이 옳으냐? 눈물도 더럽지 않니? 아이구, 아이구, 구린내가 나서 죽겠네. 죽겠네! 신선 여동생, 요 구린내 나는 놈을 안아 주려고? 아가씨의 향기로운 몸이 구린내로 뒤덮이겠네. 하하! 하하하!....] 그 여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 나으리, 그렇게까지 하셔야 되나요?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위소보는 질투심이 발작하여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이 화냥년도 한통속이구만. 세상 모르는 어린애에게 추파를 던지다니? 이 어르신은 기필코 너를 여춘원으로 꿀고 가서 매일 크고 작고 늙고 어린 온갖 잡놈들에게 시달림을 받게 만들겠다!) 조설근은 울먹이며 여자를 밀치고 오기 어린 말투로 지지 않았다. [그 사람 말이 맞아요. 누나가 나를 껴안으면 구린내가 진동을 할 거예요.]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네 납시오!] 그 한 마디 말에 여자는 즉시 일어나 뒤로 물러나 무표정하게 손을 모으고 공손히 시립했다. 아이도 즉시 울음을 멈추고 언제 울었냐는 듯 한쪽 편에 점잖게 서 있었다. 위소보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하릇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던 녀석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었구만. 허 참! 정말 간수물에 두부 굳히듯이, 물건에는 제 짝이 있구만.] 조인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위작 나으리, 일어나셨습니까? 꼬박 이틀이나 깨어나지 못하셨는데, 정말 모십팔 그 녀석은 악독하기 짝이 없군요.] 위소보는 상처를 입은 후 정신이 몽롱했지만 모십팔이 칼로 강희를 내리치려 할 때 자기가 뛰어들어 그 칼을 막아냈다는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원래 조 대인이셨구만. 조 대인, 여기가 당신 댁이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조인은 엄지손가락을 거듭 추켜세우며 말했다. [대단하외다, 대단해! 위작 나으리께서는 오배를 사로잡고, 먼 곳까지 가서 나찰(羅刹)을 원정하는 동 나라에 충심을 다하고 혁혁한 공로를 많이 세우셨지요. 또한 전날 폐하를 보위하시는 모습을 저는 친히 목도했나이다. 역적 모십팔이 한 칼로 내리칠 때 위작 나으리께서 몸을 던져 황상을 보위하지 않았더라면, 으흠! 우리는 만고의 죄인이 되었을 거외다.] 위소보는 속으로 흐뭇했지만 겉으로는 자만하는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황상께서는 오래오래 복을 누리고 명은 하늘과 나란하다고 했소이다. 우리 신하들이야 제 할 일을 했을 따름이지요. 그 날 조 대인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폐하를 사지에서 구하지 않았소? 그 공로야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조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하구나, 대단해. 황상을 구해 준 공로가 있으면서도 추호도 공치사를 하지 않다니. 입담만 번지르르하고 아무 학식도 재간도 없는 그가 정말 이렇게 할 줄은 몰랐구나. 이런 까닭에 어린 나이로 큰 벼슬을 했고, 황상이 그에게 잘 대해 주었구나.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 가운데 필히 스승이 있다'고 했거늘 이 잡놈의 이런 점은 배워야겠구나.) 위소보는 저자거리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을 황궁에서 이럭저럭 보냈다. 때문에 남의 말과 눈치를 보면서 행동 여하를 결정하는 것은 이미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황제와 함께 있는 것이 곧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커다란 벼슬을 하려면 자신의 공로가 클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익히 잘 알았다. 황상은 오래오래 복을 누리고 명은 하늘과 나란하다는 말들은 모두 신룡교(神龍敎)에서 백룡사(白龍使) 노릇을 할 때 홍(洪)교주가 매일 외우게 했던 것이다. 지금 와서는 그 말을 황제를 떠받드는 데 써서 그야말로 본전도 들이지 않는 꿩 먹고 알 먹는 장사였다. 조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말씀이 지당하지요. 이는 모두 황상의 커다란 복이고, 사직(社稷)의 커다란 복이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이 녀석은 줏대도 없이 대갈통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구나!) 위소보는 처자식들과 현정도장, 모십팔 등의 일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 [조 대인, 그날 당신이 나를 구해 주었소?] 조인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모십팔의 칼을 막을 때 비직(卑職)은 그 틈을 타서 황상을 업고 갔지요. 때마침 거리에서 시위들을 만나 비직은 황상을 그들에게 맡기고 혈혈단신으로 다시 여춘원으로 달려갔지요. 그 곳에는 예닐곱 명의 반역도들이 위작 나으리를 둘러싸고 있어, 나는 일장에 모십팔을 때려 눕히고 당신을 구출해 밤을 도와 강녕으로 돌아왔지요.] 반역도란 어디서 온 반역도일까? 위소보는 한동안 생각을 굴리자 분명해 지는 것이 있었다. (분명 이 어르신의 일곱 부인들이 남장을 하고 나온 게로군. 제기랄, 빌어먹을 년들, 서로 아옹다옹이나 할 줄 알지, 이 어르신의 생사는 뒷전이로구나. 돌아가면 이 어르신은 그 년들의 바지를 몽땅 벗기고 볼기짝을 쳐야지.... 히히, 바지를 벗기고, 참 고놈의 보드라운 볼기짝을 때리면?! 허어, 이 어르신은 할 일이 많단 말이다.) 그의 얼굴에서 웃는둥마는둥 하는 기색을 본 조인이 어찌 지금 그가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조인도 멋쩍은 웃음을 히죽 웃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위소보는 갑자기 물었다. [당신은 모 형.... 모십팔을 때려 죽였소?] 조인은 말했다. [그들은 사람 숫자가 많고 비직은 사람을 구하는데 급급해 더 이상 손을 쓸 시간이 없었지요. 하지만 그는 나의 육양장(六陽掌)에 얻어맞았으니 설령 죽지 않았다 해도 염라대왕 앞에 갈 준비를 해야 할 거외다.] 위소보는 또다시 물었다. [그 반, 반역도들은 어떻게 되었소?] 조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도 안정을 바라지 않습니까? 우리처럼 밖을 나도는 벼슬아치들은 언제나 안정무사가 중요하지요. 그 반역도들은 일이 끝나자 자연히 조수산(鳥獸散)했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약 중에 은교산(銀翹散), 백약산(百藥散)이 있다는말은 들었지만 조수산(島獸散)이란 건 무슨 약인지 모르겠구나.) 조인은 그의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고는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급히 해석해 주었다. [한 떼의 새처럼 날아오르고 야수처럼 사라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지요. 사람들이 각자 제 갈 길로 갔는데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조인은 설명을 하면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반역도들이 달아나기는 했지만 비직은 양주부(楊州府) 포정사(布政司) 모천안(慕天顔)에게 나중에 그들이 다시 오더라도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잘 대접해 주라고 당부했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조가는 일처리를 함에 있어 사람을 기쁘게 하는구나. 여춘원이 이 어르신이 자란 곳이란 것까지 알고 적절히 안배해 놓았구나. 저 녀석은 얼굴에 울긋불굿한 칠을 한 조조의 후손이지만, 일처리하는 것은 그의 십팔대 조상들과는 다르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양주의 그 모천안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이 어르신의 일에 대해 감히 소홀히 할 수 없겠지.) 그러나 조인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사생활이 모조리 상대에게 장악된 것 같아 위소보는 은근히 불안을 느끼며 변명했다. [사실 무슨 일이야 일어날 것이 없지요. 다만 우리 신하들은 언제 어디서나 황상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이지요. 황상은 나하고 한담을 하면서 늘 이렇게 말했지요. 자고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하면 번거로운 일이 없고 사단이 적다. 그리고 무슨 원기가 어떻고, 무엇무엇을 삼아야 한다고 했지요.] 조인은 넌지시 물었다. [원기를 헛되이 소모했고,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아닙니까?] 위소보는 맞장구쳤다. [맞소이다. 바로 그 말이외다. 원래 황상은 나에게만 그 커다란 도리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조 대인에게도 설명해 주었구려.] 조인은 말했다. [자그마한 벼슬을 하는 비직이 어찌 위작 나으리와 같은 복을 누려 황상을 가까이 하고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황상이 어찌 너 같은 놈을 충애하는 신하로 생각하겠느냐? 그저 강아지가 고양이를 노리개로 삼는 격이지, 너와 그 무슨 국계민생(國討民生)의 대사를 논하겠느냐? 쇠 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지! '자고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하면 번거로움이 없고 사단이 적게 되는 것이다. 짐이 전대(前代)의 군신들을 관찰해 보니, 커다란 공적만 탐하며 인력과 재물을 손상시키고 질서를 교란하어 원기를 헛되이 소모했고, 상하가 분란을 일으켜 민생을 핍박했으니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황상의 그 말씀은 내가 일찍이 관보(官報) 에서 보았는데, 그것은 황상이 대학사 웅사리(熊賜履)에게 한 말인데 너 같은 잡놈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그저 옆에 죽치고 앉아서 반 마디나 얻어 들었겠지.) 위소보는 그런 눈치도 알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조 대인, 나는 일자무식인데 헛되이 소모한다는 모자는 무슨 '모(耗)'자인지 모르겠구려. 또 심각한 교훈에서 감자는 무슨 '감(鑒)'자 인지요?] 조인은 딱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약간 돌려 말했다. [어르신의 선견지명과 탁월한 견식을 우리 신하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위작 나으리께서 방금 말씀하신 대로 지방이 안정이 되고 모든 백성들이 편안히 사는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위소보는 조인의 심사를 알아채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희한한 일이구만. 제기랄 놈, 보잘것 없는 시위 따위가 감히 이 어르신 앞에서 시치미를 떼! 흥, 말 따로 마부 따로 논다더니 어디 네가 제대로 출세하나 두고 보자.) 조인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들끼리 이야기 하다 보니 커다란 일을 잊었구려.] 그리고는 일어나서 북쪽으로 읍을 하고 말했다. [성지가 있으니 위소보는 성지를 받으라!] 위소보는 깜짝 놀라 황망히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는데 조인이 다시 말했다. [황상은 성지에서 위소보는 신체가 불편하니 그대로 침상에서 성지를 접수하라 했소.] 위소보가 침상가에 끓어앉자 조인은 성지를 꺼내 읽었다. [소계자, 어르신은 본래 너의 내상이 나으면 함께 북경으로 가려고 했지만 급박한 사정이 생겨 먼저 떠난다. 제기랄 놈의 소계자, 너는 일곱 부인들을 데리고 용이 꼬리를 감추듯이 숨어서 매일 주색에 빠져 이 어르신도 잊었단 말이냐? 이 어르신은 네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양강총독(兩江總督) 마륵길(麻勒吉)과 강절순무(江浙巡撫) 마우(馬佑)의 말에 의하면 네가 사양집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정말 괴로웠다네. 빨리 돌아오거라. 북경 너의 공작부(公爵府)는 그대로 있고 이 어르신이 사람을 보내 잘 지키라고 했지. 너의 말처럼 이 어르신도 의리를 다했지 않은가? 네가 돌아오면 이 어르신은 다른 일은 시키지 않겠다. 천지회를 제거하고, 나찰(羅刹)을 정벌하라고 하지 않고 그저 이 어르신의 말동무나 되어주면 된다. 너에게 이렇게 거듭 권하는데도 굳이 벌주를 받겠다면 이 어르신은 사람을 보내 너의 부인들끼리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게 만들 것이고, 또한 네 자식들끼리 서로 죽자 사자 싸우게 만들어 네가 이 어르신에게 비겁함이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 준 것처럼 이 어르신도 너에게 대가 끊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겠다. 이 어르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네 말처럼 군자일언이 그 무슨 말(馬)을 따라잡지 못하겠느냐? 흠차(欽此)!] (작자 주:강희의 성지는 분명 필자가 쓴 것이다. 그러나 강희는 공문을 처리하면서 팔고문(八股文) 어투가 적었고 간간이 그의 기지와 해학이 섞인 문구를 사용했다. 또한 그는 문무 신하들의 칙서에 '알겠느뇨?'라는 말투를 써서 농담스런 허점과 찬란한 황제의 권위를 잘 배합시켰다. 그리고 신하들과도 농담과 우스갯소리를 잘했다. 황제와 위소보의 특수한 관계로 미루어 보거나, 위소보가 먹물과는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에 강희가 이런 성지를 내려보낸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 자신할 수 있다.) (역자 주:팔고문은 명.청 양대에서 과거시험의 답안 작성에 요구되는 문장형식으로 대구법을 사용하는 지극히 무미건조한 문체이다.) 조인이 성지를 다 읽자 위소보의 눈앞에는 황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강희의 모습이 선했다. 조인이 성지를 모두 읽자 위소보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치며 엉엉 땅을 치고 울면서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황상, 소계자가 죽을 죄를 지었소, 죽을 죄를 지었구려. 소계자가 꼬리를 감추고 틀어박혀 있었으니 당신은 홀로 황궁에서 얼마나 고독하고 적적하였었겠습니까? 또 황상은 크고 작은 일로 얼마나 노심초사 했을는지? 오삼계(吳三桂)가 반란을 일으켜 잠을 못 이루고, 또 대만이 재해를 입었을 때 당신은 잠을 못 잤지요. 공무가 끝나면 또 누가 황상과 한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소계자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겠지요. 오직 이 소계자만이 황제와 서슴없이 말을 할 수 있었지요. 황상도 아시겠지만 이 소계자는 숨어 있기는 했지만 기실 마음만은 언제나 편치 못했으며, 소계자도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소계자는 곧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말에 서서라도 돌아가고 머리통이 박살이 나더라도 돌아가겠습니다. 소계자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군자일언이 그 무슨 말(馬)인들 따라잡지 못하겠나이까?] 위소보 혼자 한참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 대는 것을 보고 조인이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비직은 성지의 내용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황상의 어르신에 대한 참된 애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조인은 목이 메어 한참 있다가 겨우 입을 멨다. [위작 나으리, 황제의 성지를 비직이 감히 탐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일이든 비직이 필요하다면 비직은 명명백백히 어르신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위소보는 침대에서 내려서며 눈물을 닦고 입을 열었다. [물어볼 말이 있으면 하시오.] 조인은 넌지시 물었다. [황상께서도 성지에 '군자일언(君子一言):무슨 말을 따라잡기 어렵다(馬難追)'라고 하셨고, 또 어르신께서도 맨마지막에 '군자일언 무슨 마난추'라고 하셨는데, 그 '말(馬)'이 어떤 말(馬)인지, 어르신께서 정확히 말씀하시면 비직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원래 위소보가 말한 '군자일언 무슨 마난추'라는 성어는 '군자일언, 사마난추(君子一言, 駟馬難追:한번 내뱉은 말은 명마로도 따라잡아 거두어 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군자일언 중천금과 같은 뜻)'인데 '사(駟)'자를 기억하지 못해 그냥 '무슨 마난추'라고 했다. 위소보가 그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강희도 가끔 우스갯소리로 위소보처럼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위소보가 어찌 조인에게 그 내막을 이야기해 주겠는가? 조인이 이런 사실을 알면 어찌 체면이 서겠는가? 위소보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말은 무슨 말이겠나? 당연 어떤 말이든 보마(寶馬)와는 견줄 수가 없지. 이를테면 관운장의 적토마(赤兎馬), 초패왕의 오아마(烏雅馬)같은 것으로 그 무슨 말(馬)이겠지.] 조인은 그 무슨 말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적토마, 오아마는 비직에게 없사오니, 필요하다면 몽고에 가서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국화총(菊花騁) 네 필은 대령할 수 있습니다.] 위소보는 그렇게 하자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 네 필의 '국화총' 말은 어쨌든 황상께서 말씀하신 그 무슨 말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말이면 됐소. 오로지 나는 빨리 가서 황제를 만나면 되니까.] 조인은 다급히 그 말을 받았다. [위작 나으리, 걱정 마십시오. 비직은 곧장 가서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네 필의 국화총이 달리면 사나흘이면 족히 북경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위소보는 무엿인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음.... 나는 아무래도 양주에 한번 갔다 와야겠소.] 조인은 말했다. [위작 나으리, 어르신의 가족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작 나으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에 황상께서는 다 충관에게 명하여 어전시위에게 부인, 공자, 소저들을 모두 북경으로 모셨습니다.] 위소보는 놀라 소리쳤다. [뭐라구? 황상이 우리 가족을 모두 서울로 데려갔다고?] 조인은 충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위작 나으리, 황상께서 어르신께 베푸신 은혜는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지요. 군신지간이 이렇듯 애틋하고 무슨 일이든 그처럼 세심하시니 정말 만고에 드물고 드문 일입지요.] 위소보는 조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둘어오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까놓고 말해서, 소현자가 나를 믿지 못한단 말인가! 허허, 나의 부인들을 잡아다가 저당을 잡겠단 말인가? 이 어르신은 천하제일 가는 매끄러운 사람으로 미꾸라지보다 더 매끄럽지만 소현자의 손아귀에서는 빠져 나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이 어르신이 다른 것은 몰라도 화옥(花玉)같은 부인들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잃을 수가 없지.) 위소보는 자신의 사연을 알듯말듯한 표정으로 조인이 자기를 찬찬히 살피는 기색을 보고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지 않구나! 이 조가 녀석은 아무래도 이 어르신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구나. 이 조가 녀석은 조조의 십팔대 후손이니 그리 좋은 녀석 같지는 않아, 도대체 어떤 물건짝일까? 위소보가 황상을 충심으로 대하지 않는 커다란 간신이고, 위소보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이것저것 주어다 일러바치는 것 같구나.) 위소보는 본디 상황판단이 빠른 위인인지라 무엇인가 잊었다는 듯 곧장 얼굴에 놀람과 기쁨을 교차시키며 물었다. [다 충관 일행은 그 난장판에서 어떻게 되었는지요?] 조인은 그저 응! 하는 한 마디뿐이었다. 위소보는 또다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이 빌어먹을 놈이 의심을 하는 모양이구나. 이 녀석을 한바탕 휘저어 놓을까?) 엉뚱하게 날조하고, 없는 일도 꾸며대며, 물을 흐려 놓고 고기를 잡는 것이 원래 위소보의 재간이었다. 그는 조인의 옆에 조용히 손을 모으고 있는 어린애에게 눈길이 돌아갔다. 그는 내던지듯 실없이 물었다. [조 대인, 당신 옆에 서 있는 어린애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인지요?] 조인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 아이는 어린 손자 설근이외다. 설근아, 어서 위작 나으리께 절을 올려라.] 조설근은 방금 전 응석을 부리고 무례한 짓을 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눈을 똑바로 뜨고 어른스레 엎드려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소인, 위소보 어르신께 문안드리옵니다. 위 나으리께서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 위소보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요 놈이 이처럼 공손히 예절을 갖추고 점잖을 빼는 모습은 방금 전과는 영 딴판이로구나!) 그는 몸에 달리 지닌 장난감이 없어 품안에서 집히는 대로 돈 한뭉치를 꺼냈다. 위소보의 몸에서는 언제나 두 가지 '보배'만은 떠나지가 않았다. 하나는 노름을 위한 주사위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었다. 만여 냥은 족히 되는 돈을 세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조설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얘야, 바쁘게 오다 보니 상견례로 줄 마땅한 물건이 없구나. 이 은자를 줄 테니 사탕이나 사 먹거라.] 위소보는 아이가 그 많은 돈을 보고 매우 기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설근은 별다른 표정 없이 두 손으로 공손히 돈을 받고 담담히 인사를 했다. [위작 나으리,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보든 말든 절만 꾸벅하고 돈을 조인에게 건네준 후 매우 의젓하게 조인의 옆으로 가서 시립했다. 위소보는 흥취가 사라지며 속으로 욕을 했다. (요 물건짝은 지금은 의젓한 척하는구나. 하지만 방금 전까지 계집애에게 수작을 부리던 것을 잊었단 말이냐?) 위소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리저리 조인을 보고 갸우뚱거리다가 이리저리 조설근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닮지 않았군, 닮지 않았어!] 조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엇이 닮지 않았단 말씀이옵니까?] 위소보는 조설근을 가리키며 조인에게 말했다. [그 아이는 당신 손자 같지가 않구려.] 그리고는 조인을 가리키며 조설근에게 말했다. [저 분은 너의 할아버지 같지가 않구나.] 조인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위작 나으리께서는 그 말씀을 하려고 하셨군요. 나의 이 손자 녀석은 제 아비를 많이 닮았소이다.] 그의 말소리는 약간 득의양양한 것 같았다. 조인의 아들, 즉 조설근의 아버지 조용(曹鏞)은 학식이 넓고 품헹이 단정하여 강남에서는 매우 명성 있는 도학(道學) 선생이었다. 조인은 힘깨나 쓰는 일개 무인인지라 사림(士林)에서 성망 있는 아들을 둔 것에 대해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조 대인, 당신 아들은 호색지도(好色之徒)이지!] 조인은 성난 기색이었지만 달리 말은 못하고 쓴웃음만 지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또 우스갯소리를 하시는군요. 보잘것 없는 자식놈은 아직까지 학업을 마치지 못했지만 정주리학(程朱理學:정호와 주희의 학설을 말함)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어찌 호색이란 두 글자를 들먹일 수 있겠습니까?] 위소보는 또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놈의 후레자식! 이 어르신께서 학문이 없는 걸 알고 학문으로 누르려고? '정저리학(程猪里學)'(역자 주:한자 朱와 猪, 理와 里는 중국어에서 같은 발음이나 뜻은 다름)이란 어떤 학문이란 말인가? 정(程)자는 와강채(瓦崗寨)의 정교금(程咬金)이겠지! 커다란 도끼로 살인 방화를 일삼는 것이겠지. 저(猪)자는 필시 저팔계(猪八戒)일 테니 고로장(高老莊)에서 계집을 꿰어차 업고 강을 건너는 학문이겠지!) 위소보는 허튼 생각을 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내뱉었다. [그래, '정저리학'이 맞지요. 호색하면 안 되지요. 조 대인께서 설령 '정저리학'이 아니라고 말씀해도 호색하면 안 되지요. 하물며 집에 있는 조상공(曹相公)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당신이 보기에도 저 계집종은 곱고 예쁘게 생겼을 거외다. 이 위소보는 부인이 일곱 있는데 여덟번째 부인으로 삼았으면 하오. 당신들은 그녀를 계집종으로 삼고 있는데, 흠흠, 어흠! 그것이야 말로 좋은 물건을 함부로 내던지는 것 같소이다.] 조인은 그가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한동안 듣고서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았다. (이 색귀신은 계집종을 놓고 수작을 부렸구나.) 조인은 웃으며 말했다. [이 계집아이는 문아(雯兒)라고 하는데 심부롬하는 계집애라고는 하지만 우리 자친(慈親)께서 친딸처럼 여기십니다. 위작 나으리께서 먼 길을 떠나시자면 시중들 사람도 있어야 하니 마음에 드신다면 데리고 가도 됩니다.] 문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조설근의 안색은 어느덧 흐려졌다.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조설근과 문아를 번갈아 보다가 연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면 안 되지, 안 되구 말구! 나는 좋으나 싫으나 웃어른인데 어찌 남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이오?] 조인은 웃음기를 거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혹시 문아라는 계집이 무슨 일을 저지를까 두려워 그러십니까?] 위소보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문아는 이미 주인이 따로 있는데, 조 대인은 정말 모르시오?] [누굽니까? 위작 나으리께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이 보배 같은 손자라오. 당신이 들어오기 전에 그는 문아 아가씨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또 문아 아가씨 앞가슴까지 만졌소이다. 조 대인, 당신도 보구려. 저 아이의 손에 문아 아가씨의 연지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문아는 돌연 고개를 들고 위소보를 쏘아보며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위 어르신, 이 미천한 계집이 어르신께 잘못 시중을 든 일이 있다면 때려도 좋고 욕을 해도 좋아요. 하지만 나이 어린 도련님만은 놀리지 마세요.] 조인은 질책했다. [위작 나으리의 면전에서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서 그는 정광이 번뚝이는 눈으로 조설근을 바라보았다. 조설근은 은몸을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내던졌던 연지를 살그머니 발로 밟아 숨기려 했다. 위소보는 크게 웃으며 의기양양하여 소리쳤다. [어떻소? 당신의 손자가 그래도 호색지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소? 호색한이라고 그리 나쁠 것도 없지. 나를 보란 말이오. 부인이 일곱이나 있지만 문아 아가씨 같은 미모의 여인을 보면 자꾸 눈길이 쏠리고 군침이 돈단 말이오. 그래도 이 어르신은 커다란 벼슬을 하고 녹정공 노릇도 한단 말이오. 조 대인, 성내지 마시오. 당신의 보배 같은 손자는 반드시 출세할 테니 두고 보시오. 분명 위소보보다 더 출세할 거요. 내가 보기에, 예닐곱 나이에 벌써부터 여인들과 치근덕거릴 줄 아니 출세하면 아주 크게 출세할 것이오. 하하, 하하!] 조인은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 몹시 성이 났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공손하게 미소를 짓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덕담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근아야, 위작 나으리 말씀은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니 잘 듣고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예!] 조설근은 낮은 소리로 대답하며 앞에 나와 예절 바르게 위소보에게 인사를 했다. [웃어르신께서 주신 교훈에 소인은 감사드립니다.]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우냐? 욕하면서도 말을 못하는 건 아니냐?] 그는 원래 야박한 말 한두 마디를 더 하려고 하다가 조설근의 추상 같은 눈길을 마주치고는 고만 놀랐다. 이렇게 작은 꼬마에게 이처럼 냉랭한 눈길은 자고로 대해 보지 못했다. 그는 가슴이 뜨끔하여 입에까지 나온 말을 삼키고 말았다. 위소보는 돌연 흥취가 사라져 하품을 하며 말했다. [조 어르신, 날도 저물었는데 우리는 일찍 식사하고 쉽시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북경으로 떠나겠소....] 위소보는 이렇게 둘러댔지만 기실 아직도 내상이 회복되지 않아 매우 피곤함을 느꼈다. 그는 식사를 대충하고 침실로 돌아갔다. 이윽고 문아가 들어와 이부자리를 시중들었다. 문아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위소보는 또 몇 마디 실없는 말을 지껄이려 했으나 문아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위 대인, 편히 주무세요!] 그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위소보는 무안한 마음에욕을 퍼부었다. (더러운 년,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여춘원 기생들보다 좀 나을 뿐이지. 어디 두고 보자. 어쨌든 이 어르신은 네 년을 여춘원으로 보내 어머니께 맡겨서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을 테다!) 위소보는 원래 지난 일은 더 생각지 않는 위인이라 아무 생각 없이 이내 잠이 들었다. 밤중에 돌연 소란스런 소리에 위소보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리거라, 더 때려! 요런 몹쓸 놈은 때려 죽여도 좋아!] 뒤이어 철썩! 철썩!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위소보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천지회의 멍청한 물건짝들이 또 찾아온 것은 아닐까? 제기랄 놈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또 와서 이 어르신을 시끄럽게 군단 말이냐? 그래 이 놈들은 이 위씨(韋氏) 이십 칠팔대 조상들의 은덕도 모른단 말이냐?) 위소보는 조인의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에 현정도장이나 천지회가 찾아와도 어림 없다는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그러나 계속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와 위소보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옷을 주워 입고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조가라는 이 놈도 썩 좋은 물건짝은 아니군. 주인을 보고 개를 때린다고, 이 어르신 면전에서 감히 포도청에서 죄인을 다스리듯 이 어르신 부하의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치다니 정말 사람을 너무나 깔보는구나!) 위소보는 혼자 중얼거리머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천지회 형제들이 커다란 낭패를 입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지금 형편은 그렇더라도 어쨌든 이전에 그들의 향주라는 이름을 걸지 않았던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천지회 사람들이 바지를 벗기우고 볼기짝을 얻어맞는다면, 흥! 이 위소보의 얼굴이 깎이는 것이나 다름없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위소보는 칼로도 뚫을 수 없는 보의를 걸치고 시퍼런 비수를 빼들고 뒤뜰로 나갔다. 이 시기에는 직물(織物)을 짜서 나라에 바치는 남경 강녕직조 조인의 가문은 권세가 당당하고 열화충천하는 흥성기였다. 직조부(織造府) 관저는 매우 웅장했다. 위소보는 어슬렁어슬렁 떠들썩한 곳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뒤쪽 화원은 등불이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계집종과 하인들이 빙 둘러서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곤장을 내리치면 철썩! 철썩! 소리만 들렸다. 위소보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맞고 있는 사람은 현정도장이나 다른 천지회 사람들이 아닌 나이 어린 조설근이었다. 한참을 때렸지만 조설근은 고집이 세서 그러는지, 혼미해 쓰러졌는지 한 마디 소리도 없었다. 위소보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니, 이 어린 것을 이처럼 때려서 뭘 할까? 이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제기랄, 저 녀석도 멍청하지. 때리는 대로 가만 있다니? 너는 발도 없냐, 도망치면 그만이지. 이 어르신의 아들 호두(虎頭)놈이라면 이 어르신이 야단을 쳐도 겁내지 않고, 때리면 마주 대들어 치고 받는데.... 원, 이 조가네 자식들은 왜 이리도 멍청할까?) 조설근의 옆에는 수염이 난 중년 서생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 데 얼굴이 새하얀 그는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성난 어조로 소리쳤다. [때려! 때려 죽여, 망나니 같은 놈!] 위소보는 조인의 말이 생각났다. (이 서생은 아마도 망할 조가 놈의 아들이고 조설근의 애비 같구나.) 그러고 보니 자기 자식들을 훈계하며 매질을 하는 것으로 천지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라 위소보는 시름을 놓고 돌아가 잠을 청하려 했다. 돌연 계집종들과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무릎을 꿇고 빌었다. [큰 나으리, 제발 자비를 베푸세요. 큰 나으리, 노여움을 거두세요.] 조설근의 아버지는 너무도 노여워 수염까지 꼿꼿이 섰다. [이것은 모두 너희들이 저놈을 오냐오냐 해서 저런 것이다. 차라리 오늘 없애 버려 후에 이 가문에 우환이 없게 하자는 것이다. 다시는 가문에 저런 놈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겠다!] 바로 이렇게 왁자지껄 시끄러울 때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떠듬떠듬 말했다. [그 애를 때려 죽이려면 차라리 나를 때려 죽여라. 그러면 모두 시름을 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백발의 할머니가 손에 용두(龍頭) 지팡이를 짚고 계집종의 부축을 받으며 한 발짝 걷다가 한 발짝 쉬면서 다가왔다. 조용은 급히 달려가 만면에 웃음을 띄고 말했다. [할머니, 볼 일이 었으시면 이 손자를 시키면 되지요. 날씨가 이렇게 찬데 감기드시겠어요.] 할머니는 성을 내며 말했다. [웃어른이 죄를 짓고 자식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이치에 맞는 게냐?] 조설근의 아버지 조용은 땅바닥에 무릎을 끓고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듯이 정말 이 손자 녀석이 한 일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 아이를 때리고 벌을 주어 손자가 잘못을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네가 아들을 훈계하겠다는데 나무랄 수야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법이 아무리 지독하다 헤도 제 새끼만은 잡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었듯이 그렇게 심하게 때릴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조설근에게 가보니 그의 엉덩이에는 피가 흥건했다. 할머니는 눈물을 떨구며 그 아이를 껴안고 말했다. [근아야! 니 애비는 이 늙은 것이 참견하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우리가 떠나면 되지. 떠나면 눈치밥도 먹지 않고 성화도 받지 않을테니. 가마를 타고 우리 소주로 돌아가자꾸나!] 위소보는 이 떠들썩한 모습을 보고 내막을 생각했다. (저 노친네가 바로 조인의 어머니이고, 조용의 할머니, 조설근의 증조할머니구나. 재기랄 사대가 한집안에 살다니 복도 많구나. 하지만 이렇게 한집안에서 시끄럽게 굴 필요가 었겠는가?) 할머니가 노여워하니 조인과 조용은 무릎을 끓고 묵묵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할머니는 말했다. [흥!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 애비가 위가라는 성을 가진 골칫덩어리를 집으로 데려온 게 화근이지. 그 놈도 썩 좋은 놈은 못 돼! 다 큰 사람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해서 어린애를 얻어맞게 한단 말이냐? 어디, 그 놈에게도 애비가 있는지 없는지 찾아가서 물어보자. 그 놈 애비가 어떻게 그 놈을 훈계했는지 물어보잔 할어다.] 위소보의 어머니는 양주 여춘원의 기생으로, 그녀 자신도 위소보가 어느 남자에게 생겨났는지 모르는데 위소보인들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애비가 없는데, 애비 없는 이 어르신을 건드려 무슨 득이 될 게 있단 말이냐?) 조용은 다급히 애걸했다. [할머니, 노여움을 거두세요, 노여움을 거두세요! 위작 나으리는 조정에서 봉한 관리(官吏)인지라 조정과 연관이 되는 말이니 제발 이러지 말아 주세요.] 할머니는 냉소했다. [벼슬이 높으면 사람을 놀려도 된단 말이냐? 너회들은 그에게 무슨 작 나으리 하면서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나는 두려울 게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번거롭게 하지는 않겠다. 대신 너희들이 나를 양주로 보내준다면 나는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겠다. 좋든 싫든 작위(爵位)를 받은 가문의 부인일 테니 나는 그 사람과 도리를 따져보겠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양주에 가서 우리 어머니를 찾겠다고? 정말 잘 된 일이지, 잘 된 일이야. 펄쩍 뛰며 기뻐할 일이지! 우리 어머니가 양주에서 여춘원을 차렸으니, 너는 여하원(麗夏院)을 차리고, 우리 어머니가 여추원(麗秋院)을 차리면, 너도 여동원(麗冬院)을 차려 보란 말이다. 어디 한 번 늙은 자매들끼리 누가 잘하나 견주어 보란 말이다. 하지만 이 위소보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함께 못 가는데 노친네들은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구려.) 그는 하품을 하며 돌아가서 잠을 청하려 하는데 돌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위소보는 노하여 나직이 외쳤다. [어느 물건짝이 감히 어르신을....] 위소보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어느 새 뾰족한 비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묻지 말고 나를 따라왓!] 한 여인의 나직한 호통소리였다. (저자 주:본 장의 제목 가운데 '홍루유주(홍루의 어린 주인)'는 조설근을 가리킨다. 그 당시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주(幼主)'라 불리웠고 강녕직조 조인은 조설근의 할아버지이다. 사료(史料)에 기재된 것에 따르면 조인은 강희의 일등시위이며 무인(武人)이었다. 강희는 그를 외지에 파견하여 강녕직조를 담당하게 했다. 직조 아문(衙門)이란 황궁에 쓰이는 일용품을 전적으로 도맡아 공급하는 곳이라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강희는 조인을 강남에 파견하여 지방 관청과 백성들의 민심을 수집하여 보고하게 했는데 실제로는 암탐(暗探)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인은 강희에게 밀서(密書)를 주상한 일이 매우 잦았다. 위소보가 조인을 만났을 당시는 조씨 가문이 흥성하던 시기었다. 조설근이 홍루몽에서 묘사한 것처럼 '꽃이 만발하고 열화충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은밀히 숨겨져 있는 위기도 있었다. 조인은 강희 51년 6윌 23일(1712년 8윌 24일) 병고로 죽었다. 직조 아문에서 몇 년 사이에 빚진 돈과 양식은 9만여 냥에 달하며, 양회염과(兩淮鹽課)에 진 빚은 23만 냥에 달했다. 조인의 아들, 즉 조설근의 부친 조용이 강녕직조를 이어 맡았을 때는 조씨 가문이 예전 같지는 않았고, 조설근 대에 이르러서는 매우 가난했다. 하지만 조설근은 그런 가난함을 무릅쓰고 후대에 길이 남는 거작 '홍루몽'을 집필해 냈다. 조인과 위소보가 서로 알고 지낼 당시 실제로 조설근이 출생했는지 어떤지는 불분명하다. 이것은 소설적 허구를 빌어 필자가 적당히 가상하여 쓴 글이니 분별해 읽기 바란다. 사학자들의 논증 가치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第3章. 노파에게 낭패를 당한 위소보 서릿발 같은 비수를 옆구리에 드리우고 있으니 편안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리 놀라지 않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대단한 미인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난폭하게 구는 게요?] 여자는 깔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여인을 꼬드기는 당신의 재간은 실로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달했군요. 누가 나보고 미인이라 하던가요? 나는 추팔괴보다 더 못생겼어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낭랑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속일 수가 없지. 이 위소보는 다른 특별한 재간은 없어도 여인의 음성만 듣고도 그녀가 크고 작은지, 곱고 미운지를 안단 말이오. 앵무새 같은 목소리를 가진 아가씨는 필시 '낙어심안(落魚深雁)'의 용태에 '폐화수윌(閉花羞月)'의 자태를 지니고 있을 것이오.] 여자는 위소보의 말을 흉내내어 말을 비틀어 받았다. [그 무슨 심어낙안이고, 폐윌수화란 말예요? 나는 당신이 평생 본 여인 중에서 제일 못생긴 여자일 거예요.] 위소보는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무슨 말씀이오? 이 위소보는 평생 보아온 미인들이 적지 않다오. 하지만 아가씨보다 더 예쁜 미인은 보지 못했다오. 아가씨가 못믿겠다면 나하고 양주에 가서 한번 비교해 봅시다. 아무리 비교해도 어림없을 거요.] 여자는 흐뭇했던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이 아가씨는 기회가 된다면 그녀들과 한번 비교해 보고 싶군요.] 위소보는 기뻐하며 내심 궁리를 했다. (좋아, 좋아! 이 어르신은 양주 여춘원의 기생들을 모조리 알고 있으니 네가 한번 그들과 견주어 보거라! 이겨도 져도 좋지, 어쨌든 남겨두고 기생노릇을 시켜도 되지 않겠느냐?) 위소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비교할 필요도 없지. 아가씨는 반드시 이길 것이고, 그들은 질 것이 뻔하지.] 이렇게 흰소리를 치면서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신행백변'의 수법으로 여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빨리 양주로 갑시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 여자는 무슨 수법을 펼쳤는지 소리소문도 없이 위소보의 뒤로 돌아가 차디찬 비수를 그의 관자놀이에 대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당신의 빤질빤질하는 재간은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위소보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비수를 옆구리에 댔을 때는 보의를 입고 있어 그다지 두렵지 않아 허튼 소리를 하며 도망쳤지만, 그녀가 비수를 관자놀이에 대자 보의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곳은 중요한 혈도라 자칫하면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무엇보다 목숨을 귀중하게 여기는 위소보는 삽시에 안색이 변하며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일이 있으면 분부를 하시면 될 일이지. 비수가 태양혈에 있으니 농담도 못 하겠소이다.] 그 여자가 말했다. [다른 커다란 일은 없어요. 방금 보니까 예쁘장한 계집애가 당신을 따라 다니던데요? 나는 정말 못 생겼지만 그 예쁘장한 계집애는 매우 교활해요. 나는 그 계집을 만나면 단번에 죽여 버리려고 했지요. 그런데 붙잡지 못했으니 미안하지만 당신이 길을 안내해 주어야겠어요. 우리 함께 붙잡아 그녀를 죽여 버려요.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그 계집애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자 위소보는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 약간 시름이 놓었다. [당연히 아가씨의 분부를 따라야지요. 하지만 이 직조부는 매우 호화롭고 예쁜 여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느 계집인지 나는 알 수가 없구려.] 여자가 말했다. [나도 그 계집의 이름은 몰라요. 어쨌든 눈매가 곱고 물뱀 같은 허리를 가졌어요.] 위소보는 그만 놀랐다. (아마도 이 여마두(女魔頭)가 찾는 계집은 문아겠구나. 그렇게 아리따운 계집애를 어찌 죽인단 말인가? 정말 애석한 노릇이구나.... 어찌 되었든 이 여마두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면서 이 어르신의 목숨이나 달아나지 않도록 하자.)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었다. [아가씨가 말한 대로 합시다.]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은 믿을 수가 없으니, 그럼 먼저 한쪽 귀를 베어 저당물로 삼겠어요.] 위소보는 그만 대경실색하여 양쪽 귀를 틀어쥐고 애걸했다. [아가씨, 고귀하신 손을 놀리지 마십시오, 고귀한 손을 아끼십시오! 응당 사람에게는 귀가 두 개 있어야 보기 좋지, 한쪽이 날아가면 보기가 좋겠소?] [그럼, 좋아요. 일단 그 개 귀는 그렇게 붙여두기로 하지요.] 위소보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하십시오. 내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 위소보는 그녀를 이끌고 방으로 걸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문아 아가씨, 잔인무도한 화냥년을 만나 이 위소보도 어쩔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려. 문아 아가씨, 제발 어디 꼭꼭 숨어서 이 여마두에게 걸리지 말도록 하시오. 설령 목숨을 잃고 저승에 가서 원한을 갚더라도 제발 이 위소보만은 찾지 말아 주시구려!) 여자는 위소보를 위협해서 끌고 화원을 지나 구곡회랑(九曲回廊)으로 갔다. 돌연 한 사나이가 나직이 소리쳤다. [사람을 놔 주거라!] 동시에 장풍이 그 여자 뒤쪽에서 밀려왔다. 그 장풍은 실로 기세가 세차고 강맹하여 평생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여자는 민첩한 동작으로 발로 걷어차고 왼쪽 팔꿈치로 뒤를 치며 오른손의 비수로 찔러갔다. 그녀는 삽시간에 삼 초를 펼쳤다. 위소보는 그 틈을 타서 신행백변 신법을 펼쳐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달빛 아래 보니 강녕직조 조인과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서 있었다. 위소보는 조인의 무공이 탁윌함을 익히 알고, 그 여자가 적수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안심을 하고 유유자적 난간 기등에 기대 두 사람이 손을 쓰는 것을 구경했다. 두 사람은 주고 받고 순식간에 삼십여 초를 펼쳤다. 그 여자의 무공은 조인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그러나 조인은 자친(慈親)을 놀라지 않게 하고, 또한 위소보를 상하지 않게 해야 했기 때문에 초식을 완만하게 펼쳐 두 사람은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빌어먹을 화냥년의 얼굴은 어떨까? 여춘원에 데리고 가면 기생노릇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위소보는 일단 마음 먹은 일이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미라 소리쳤다. [조 대인, 그 계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게 면사(面紗)를 벗겨 버리십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조인은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그녀의 면사를 낚아채려 했다. 여자는 몸을 빙글 돌리며 살짝 피했다. 조인은 초식을 장력으로 바꿔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일 장을 내뻗었다. 여자는 버틀거리다가 갑자기 홱 손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암기(暗器)를 받아랏!] 조인은 다급히 쌍장을 내밀어 장력으로 위소보에게 날아가는 그 여자의 암기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허초를 펼쳐 조인의 공격을 늦추려는 속셈이었다. 신형이 번뜩하더니 이미 그녀는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조인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위소보에게 다가와 물었다. [위작 나으리, 괜찮습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정말 애석하구려. 애석해! 끝내 그 화냥년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구려.] 조인은 그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자 말머리를 돌렸다. [날이 저물었는데, 위작 나으리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이윽고 두 사람은 객방으로 걸어갔다. 위소보는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넌지시 물었다. [조 대인, 그 여마두는 어디로 갔을까요?] 조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글쎄....모르겠소이다.] 객방으로 돌아오니 위소보의 시중을 들던 문아는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와 조인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가 밖에서 들어왔다. 조인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문아의 오른쪽 어깨를 끌어당겼다. 문아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적삼이 쭉 찢어지자 눈처럼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문아는 너무도 무안해 황급허 두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조인은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아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조 대인, 계집들에게 손과 발을 놀리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합지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조인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우스운 몰골을 보여드렸군요.]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문아에게 성난 어조로 분부했다. [위작 나으리를 잘 시중하거라. 어르신을 노엽게 만들면 큰일 날 줄 알아!] 위소보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잠에 곯아떨어졌다. 깨어 보니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유난히 밝게 비쳐 왔다.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계집종이 들어와 침상으로 오더니 말했다. [위 나으리, 저희 나으리께서 객청(客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위소보는 그녀의 몰골을 보고 성이 나서 소리쳤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래? 너희 나으리 출상(出喪)이라도 나간단 말이냐?] 위소보는 어제 그 문아가 계집종으로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속으로 생각했다. (저 조가라는 녀석은 그야말로 조조의 이십팔대 호로 자식이고 얼굴에 얼룩덜룩 분칠을 한 대간신배(大奸臣輩)로구나. 문아를 나에게 주겠다고 떵떵거리더니 하릇밤 사이에 마음이 변해 아까워서 숨긴 모양이군! 빌어먹을 녀석, 일곱 부인이 서로 물어뜯고 옥신각신하는 판이라 어르신은 그것도 골머리가 지끈지끈한데 하나 더 생기면 이 위소보는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르지.) 조인은 객청에서 위소보를 기다리고 있다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귀한 손님으로 며칠 더 계시라고 하고 싶지만 황상께서 조급해 하실 것이니 비직은 더 머무르시라고 붙잡을 수가 없군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조 대인, 귀부(貴府)에서 양주로 가실 분은 없는지요? 있으면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조인은 말했다. [이치대로 하자면 위작 나으리를 친히 배웅해 드려야 하지만 하찮은 일에 시달리다 보니 몸을 빼낼 수가 없군요. 후일 양주에 갈 일이 있다면 필히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를 배웅할 필요는 없소이다. 하지만 귀부의 무슨 부인이던가, 할머님이 양주에 가시고 싶다면 나와 함께 갑시다. 나는 양주 사람이고, 그 곳을 잘 아니까.] 조인은 위소보가 어제 저녁 자친을 들먹이는 것임을 알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대단허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관리 하나가 총총허 달려와 허리를 숙이고 조인에게 자그마한 함(含)을 받쳐 올렸다. 조인은 함에서 은자 한 뭉치를 꺼내 위소보에게 공손허 건네주면서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몇 푼 안 되는 돈이라 성의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비에 보태 쓰십시오.] 위소보는 돈을 싫어한 적이 없고 자고로 거절헤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웃었다. [아니, 이런 것은 안 받아도 되는데.]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받아 품안에 넣었다. 명마(名馬) 국화총 네 필이 준비되었다고 그 관리가 알렸다. 위소보는 인사를 했다. [조 대인, 그럼 우리는 떠나겠소이다.] 조용, 조설근 부자는 조부(曹府) 문어귀에 시립하고 서서 공손히 손님을 배웅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더러운 녀석들, 엊저녁 온 집안이 난장판이었는데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구나.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이나 다 똑같구나!) 위소보는 다정스레 조설근의 손을 잡고 물었다. [도련님, 그래 어제 저녁 잘 잤는가?] 조설근은 예절 바르게 대답했다. [예, 어르신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위소보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흠, 그런데 왜 문아는 보이지 않는 게요?] 말을 마치고는 껄껄 웃으며 말에 올라 채찍을 후려쳤다. (작자 주:강녕직조부에서의 위소보의 이 대목은 어떤 흥학가(紅學家:홍루몽을 연구하는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나중에 조설근이 홍루몽을 쓸 때 보옥(寶玉)이 얻어맞고 청문(晴雯)이 쫓겨난 재미있는 한 대목의 원소재(原素材)일 것이라 한다. 조설근은 위소보를 매우 미위하고 멸시했으며 위소보 같은 비열한 인물들이 대관원(大觀圓)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홍루몽의 대목 가운데 청문이 누구의 고발로 대관원에서 쫓겨 났는지 홍학계에서 수백 년 동안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위소보는 기실 말을 탈 줄 몰랐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천리마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한 필의 말을 타고 나머지 세 필을 끌고 갔다. 그는 길을 가며 시정잡배들의 저속한 노래인 십팔모(十八摸) 따위의 곡조를 흥얼거렸다. 위소보는 방탕한 놀이에만 정신을 쏟을 뿐 세상 물정은 모르는 인간이었다. 남경이 어찌나 컸던지 위소보는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성(城)을 벗어났다. 그는 문득 조인이 사례로 준 은자를 품안에서 꺼내 보았다. 꺼내 보니 자기가 조설근에게 상견례(相見禮)로 준 돈을 고스란히 자기에게 돌려 준 것이었다. 위소보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망할 놈의 후레자식, 그래 이 어르신을 업신여긴단 말이냐? 좋아, 어디 두고 보자!] 위소보는 홧김에 국화총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말은 네 굽을 치켜들고 나는 듯이 달렸다. 위소보는 길 옆의 수목과 곡식들이 뒤로 달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질겁하여 말의 목을 끌어안고 감허 눈도 뜨지 못했다. 본래 이 말들은 천리마로써 꾸물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질이라 채찍질을 하자 얼씨구나 하고 내달렸다. 위소보는 처음에는 겁이 나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다가 눈을 비스듬허 떠보니 별 일은 없는 것 같아 점점 베포가 커져 채찍질을 하며 내달렸다. 이 때 큰길 한복판에 그와 등을 지고 남루한 옷차림의 노파가 앉아 있었다.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어서 비켜, 어서 비키거라!] 위소보가 소리를 내질렀으나 노파는 듣는둥마는등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위소보는 다시 소리쳤다. [귀머거리냐? 어서 빨리 비켜....] 순식간에 말은 그 노파의 앞까지 달려갔다. 국화충은 앞발을 허공으로 들었다. 그는 겁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천균일발(千鈞一發)의 시각에도 노파는 움직이지 않다가 손을 가볍게 혼들자 기다란 채찍이 뱀처럼 날아와 위소보의 목을 휘감았다. 위소보는 비명을 내지르며 영문도 모르고 말에서 떨어졌다. 위소보가 땅에 떨어지자 네 필의 말은 쏟살같이 달아났다. 그는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욕을 퍼부었다. [눈을 무슨 물건짝으로 만들었느냐?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노파가 손을 가법게 움직이자 위소보는 목이 졸려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제야 위소보는 그 노파의 올가미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파는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욕을 한 마디 하면 나도 한 번 조를 것이고, 두 마디 하면 두 번 조르겠다. 세 변 조르면 데 눈알은 불룩 튀어나오고 혀도 내밀게 될 것이다. 나는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시험해 볼까?] 위소보는 가뿐 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나는 믿지요. 믿고 말고요. 어르신 마님은 말씀하시면 당연히 그렇게 하시는 분이지요. 다시 말해서 혀가 길게 나오고 눈알이 울룩불룩 튀어나오면 그 몰골이 어떻겠습니까?] 노파가 흥! 하고 냉소를 하며 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위소보의 목에 걸렸던 올가미는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채찍으로 깊이 패인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르신 마님은 우리 어머니처럼 손이 정말 맵구려. 우리 어머니도 나를 훈계할 때는 죽일둥 살릴둥 하지요.] 위소보의 어머니 위춘방은 여춘원의 기생이었다. 때문에 그가 방금 노파를 자기 어머니와 같다고 한 것은 슬쩍 돌려서 은근히 욕을 한 것이다. 노파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너 혓바닥에 기름이나 칠하고 놀리거라.] 위소보는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어르신 마님 마음대로 하시구려.] 노파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아직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고 뗘드는 게냐? 고분고분 나나 따라와!] 위소보는 징그럽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어르신 마님은 바쁘실 테고, 게다가 이 소인도 그리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르신 마님이 나를 굳이 데리고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빤질거렸지만 속으로는 노심초사하다가 노파가 팔을 약간 움직이는 것을 보자 위소보는 재빨리 피했다. 노파는 놀라며 입을 열었다. [원래 귀하는 가문이 있는 사람이구만. 실례가 많았소이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겸손의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하찮은 일이 좀 있어 동행하지 못하니 노여위 마십시오.] 위소보는 말을 마치고 정신을 가다듬고 스숭 구난사태(九難師太)가 가르쳐 준 신행백변의 공력으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순식간에 노파와 몇 장 떨어졌다. 노파는 냉소했다. [그래 그것이 귀하의 재간이오? 허허! 철검문(鐵劍門)도 눈이 멀었지. 너같은 놈을 문하에 받아들여 신행백변이라는 그 절세의 무공을 개가 도망치고 게가 옆으로 기어가는 몰골로 만들다니. 상목도장(桑木道長)이 죽지 않고 이 일을 알았더라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이냐?] 위소보는 그녀가 자기 스승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놀랍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더러운 늙은이가 눈은 똑바로 박혀 가지고 이 어르신이 배운 것이 신행백파(神行百爬:게가 옆으로 기어가는 신공)가 아니라 신형백변이라는 것을 알아내다니 괜찮구만.... 어쨌든 이 어르신이 그럭저럭 무공 규칙에 맞게 펼치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겠지.) 위소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땀을 흘리지 않았고 공력을 들이는데 몸을 아꼈다. 그의 스승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은 그에게 고심한 내공심법을 전수하였지만 이 게으름뱅이는 한 번도 연습을 하지 않았다. 독비신니 구난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철검문의 신행백변을 가르쳤다. 그러나 위소보는 자신의 무공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고 강호에 끼여들어 남과 손을 쓸 때면 몽환약 따위의 하류수단을 펼치다가 나중에는 투항한다고 소리칠 줄밖에 몰랐라. 그러므로 위소보는 신행백변이 상대와 손을 쓰는 데는 그리 쓸모가 없다고 여겼지만 목숨을 보전하기 위헤 도망가기에는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위소보는 빤질거리기만 할 뿐 진짜 무공을 익히는 데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공은 고명하지 않지만 나의 무공 초식을 아는 것으로 보아 보는 눈은 있구만. 당신이 나의 사문(師門)을 아는 것으로 보아 나의 사조(師祖)도 알지 않겠소? 나의 사조를 알면 당연 나의 사부도 알 것이고, 나의 사부를 나의 사형, 사제들을 알 것이고, 나의 사형, 사제를 아니 나의 사질(師侄), 질녀들을 알 것이고, 또 나의 십칠 이십팔대 손자들도 알겠구려.] 그는 이런 허튼 소리만 하면 상대가 달리 방법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물러설 줄 알았으나 노파는 담담히 그 말을 받았다. [그런가? 철검문은 정말 날로 번창하겠구만!] 위소보는 냉큼 응수했다. [당신이 알고 있다니 됐소....] 그 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노파는 신형을 번뜩하더니 어느 새 위소보 면전까지 다가왔다. 위소보는 그녀가 손을 쓰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홱 뒤로 돌리며 노파가 후려치는 것을 막아냈지만 어깨의 적삼은 틀어쥠을 당하고 말았다. 위소보는 어쩔 줄 모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이살이나 먹었는데 그렇게 몸을 함부로 놀린단 말인가? 그래 손을 쓸 때 무슨 초식이라고 외치는 강호의 규칙도 모른단 말인가?] 위소보는 다급한 김에 신행백변을 펼쳐 십여 장 밖으로 도망갔다. 노파는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럼 우리 강호의 규칙대로 해 보자꾸나. 조심하거라.] 위소보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그럼 시작해보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파는 무슨 신법을 펼쳤는지 그림자가 언뜩하는 것 같더니 어느 새 위소보의 눈앞에 다가섰다. 위소보는 겁이 나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귀신이야!] 노파가 말했다. [그래 맞다! 너는 귀신을 만났으니 항복하거라!] 위소보는 지지 않았다. [아니, 아니.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그러면서 몸을 날려 다시 뼁소니를 쳤다. 그러나 노파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다가 위소보가 십여 장 밖으로 멀어지자 노파는 어느 새 또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위소보는 신행백변을 익힌 후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도 함부로 자기를 붙잡을 수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귀신 같은 노파에게는 번변히 실패하니 정말 어떻게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거듭 세 변이나 같은 일이 되풀이 되자 위소보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도리어 성을 내듯 말했다. [나의 스승이 나에게 신행백변을 가르칠 때 괜히 허풍을 떨며 이 무공이 어떠어더하다는 둥 장광설을 늘어 놓았지만 일개 노파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다니 원래 별 게 아니었구나! 나중에 다시 스승님을 만나면 이 개똥 같은 '신행백패(神行百敗)'를 돌려주고 말 테다!] 노파는 이 말에 킥! 하고 웃으며 말했다. [무림 중에서 너같이 게으른 놈은 처음 본다! 그런 상승 무공을 가르쳐 주었는데 스스로 열심히 연마하지 않아, 거리의 망나니들이 서로 치고 받고 물어뜯는 하류초식으로 만들어 놓고 도리어 스승님을 원망하니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 한다고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구나!] 위소보는 돌연 입을 열었다. [기다려요, 기다려요. 당신 한 번만 더 웃어 보시오. 내가 보게 말이오.] 노파가 그 말을 듣고 한 번 웃자 주름살은 마치 수레바쿼 자국처럼 깊숙이 패었고 눈도 완전히 꺼져드는 것이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위소보는 실망하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당신이 방금 전에 웃을 때는 아주 예쁜 얼굴이었소.] 노파가 말했다. [무공은 별 볼일 없지만 알랑거리는 재간 하나는 천하제일이구나. 이 나이에 웃어 봤자 무슨 볼 게 있겠느냐?]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라는 듯이 연이어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오. 이 위소보의 여인을 보는 재간은 천하제일로 절대 잘못 보는 일이 없소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정말 귀신을 보았단 말이냐? 그럴 리가 없지. 그 아리따운 아가씨가 웃는 것을 분명히 내가 보았는데. 내가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더라도 지금 당신 같은 추한 노파는 아니었단 말이오.] 노파가 말했다. [어쨌든 나는 너의 허튼 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으니 우리 일단 떠나자.] [그래, 갑시다.] 위소보는 말을 하며 몸을 홱 돌리자 수십 장 밖으로 멀어졌다. 노파의 웃음소리가 날아왔다. [요 미꾸라지 같은 놈아, 그래. 나와 한번 겨뤄 보자고?] 노파는 즉시 절정(絶頂)의 강공(輕功)을 펼쳤다. 어느 새 위소보의 등 뒤에 와서 그의 어깨를 움켜쥐려 했으나 허공을 치고 말았다. 순간 위소보는 또다시 몸을 펄쩍 하더니 원래 제자리로 돌아와 웃으며 소리쳤다. [와 봐! 빨리 와 보시지!]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했다. [허어! 고놈 참 총명하구나!] 원래 신행벡변은 보법(步法)이 영활하고 교묘하여 뱀처럼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것으로 일반적인 무림고수라 할지라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그 노파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그 노파가 헛소리를 하는 사이에 그 내막을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노파는 자기를 잡으러 뒤를 곧장 쫓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십여 장 밖으로 멀어진 후 추격해 오는 것이었다. 원래 그를 쫓아갔다면 그 누구도 쉽게 잡을 수는 없는 것이 신행백변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내공 수위가 낮아 그의 신행백변은 당연 경공이 출중한 노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노파가 등 뒤로 와서 붙잡으려고 할 때 재빨리 몸을 뒤틀면서 신행백변을 펼치자 그는 피할 수가 었었던 것이다. 그런 이치를 깨닫자 위소보는 의기양양하여 허풍을 떨었다. [자, 우리 이제 팔십 번 붙잡기 내기를 합시다.] 노파는 위소보가 그 이치를 깨닫고 허풍 떠는 것을 보자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말했다. [여기서 3리쫌 가면 나가진(羅家鎭)이라는 곳이 나오지. 거기에 평안객잔(平安客棧)이 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기다리겠다.] 그리고는 위소보를 더 이상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위소보는 노파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어르신 마님! 오금이 변변치 못한 것 같은데 조심하세요. 미친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평안객잔에 가서 괜히 아가씨들이나 쫓아버리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년,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냐? 관음보살이 현신을 했나, 아니면 신선 사촌 여동생이라도 된단 말이냐? 감허 이 어르신을 함부로 오라 가라 하다니!) 노파의 경공술은 확실히 절묘하여 이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소보는 억한 마음으로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조인에게 받은 말은 이미 노파와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아직 호주머니에는 돈이 있으니 저자거리에서 가서 말을 사서 타고 갈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돌려 배를 타고 가면 이런 성가신 노파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배를 타고 가기로 작정했다. 흥얼거리며 소나무 숲을 1리 남짓 걸어갔는데 이상하게도 오른쪽 어깨가 근질근질거려 긁으면서 보니 오른쪽 어깨가 노파에게 움켜잡힐 때 찢어졌는지 살이 드러나 있었다. 위소보는 욕을 퍼부었다. [썩어질 것, 그 개발톱이 무섭기는 무섭구나!] 손으로 만져 보니 오른쪽 어깨에 밤알만한 종기가 돋아 있었다. 위소보는 겁이 덜컥 났다. (이건 또 뭘까?) 강남은 물이 많은 곳이라 개울도 많았다. 위소보는 곧장 개울가로 가서 비춰보고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크고 검붉게 부어오른 것으로 보아 필시 독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런 악독한 할망구, 손톱에 독이 있었구나!] '독'이란 글자를 떠올리자 더더욱 가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위소보의 무공은 별 볼일이 없었지만 다년간 강호를 쏘다녔는지라 상처가 아픈 것은 괜찮지만 가렵고 마비가 되는 것은 중독의 기미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저리고 가려울수록 독성이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위소보는 이른 봄의 차가운 냉기도 마다하고 개울물에 어깨를 씻었다. 그러나 씻을수록 더 가렵고 검붉게 부어 올랐다. 그는 땅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한탄을 했다. [제기랄 것, 일이 크게 잘못되었구나! 아무래도 오늘 이 어르신의 위패(位牌)를 모셔야 될 것 같구나.] 돌연 위소보는 노파가 나가진 평안여관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그마한 회망이라도 있게 된 것 같았다. (그 노파가 나를 오라고 한 것은 해독약을 주려고 그런 게 아닐까?) 그는 다시 생각했다. (해독약을 준다고? 이 악독한 할망구에게 또 무슨 꿍끙이가 있어 이 어르신을 골탕 먹이려는 것은 아닐까? 이 어르신은 그 노파와는 생면부지이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악독한 수단을 펼쳤을까? 쉽게 해독해 줄는지 모르겠구나.) 위소보가 이것저것 궁리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노파의 모기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위가야, 오는 게냐, 안 오는 게냐? 나는 여기에 향기로운 차를 준비해 놓았고, 또한 구구팔십일 가지 귀한 약재로 대보환(大補丸)을 만들어 놓았는네 너는 먹어볼 생각이 없느냐?] 위소보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자 펄쩍 뛰어 일어나 소리쳤다. [이 악마 같은 할망구야, 너는 어디서 말을 하는 게냐? 너, 너는 도대체 사람이냐 귀신이냐?] 이 때 위소보는 전에 스승이 천하 무공을 논하며 설명할 때, '전음입밀(傳音入密)'이란 상승의 내공으로는 몇 리, 몇십 리 밖에 떨어져 있어도 자신이 말하고 싶은 상대의 귀에 들리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빌어먹을 할망구가 그런 고심한 내공심법까지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그 소리가 다시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나의 이 대보환은 제 시간에 먹어야 하는네, 향 한 대를 태우는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없어진단 말이다.] 위소보는 모든 것을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노파는 자기에게 향 한 대 태울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해약(解藥)도 소용없고 자신의 독은 해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러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 위소보는 한평생 계집의 말만 들어야 한단 말인가? 계집의 말은 이 어르신에게 있어서는 제기랄 놈의 성지(聖旨)나 마찬가지구나!) 향 한 대를 태우는 사이에 3리를 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숨과 관계되는 일인데 위소보가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신행백변의 신공을 있는 실력 없는 실력 모두 펼쳐 향 한 대가 타기 전에 나가진에 도착하여 평안객잔에 당도했다. 객잔 주인은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황급히 다가서서 만면에웃음을 띠고 물었다. [나으리, 저희 집에 묵으시렵니까? 저희 집은 누추해서....] 위소보는 다짜고짜 발로 걷어차 그를 나뒹굴게 만들면서 욕을 했다. [제기랄, 니미 소금에 절인 오리알 같으니라구!] 위소보는 노파의 상문편(喪門鞭)이 어느 객방 문어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위소보는 몸을 날려 다짜고짜 밀고 들어갔다. 주인은 눈앞에 별똥이 튀며 위소보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주인은 눈을 부비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인가? 밝은 대낮에 귀신을 봤단 말이냐?] 위소보가 문을 밀고 들어서니 팔선(八仙) 탁자 옆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노파가 보었다. 위소보는 헉헉 가뿐 숨을 내쉬며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노파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위 상공은 정말 사람을 믿는구만!] 위소보는 조급해서 불이 날 지경이라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당신과는 마음대로 만날 수도 헤어질 수도 없단 말이오? 우리 강호 사람들은 한 번 말하면 말한 대로 하지요. 한 마디가 일천 냥의 금덩이이고,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서 있을 수도 없다 했소.] 노파는 어리등절하며 생각했다. (무엇이 일천 냥의 금덩이이고, 서 있지도 못한다는 게냐? 맹랑한 소리!.... 흥! 이 녀석은 일자무식인 주제에 제 딴에는 글귀를 쓰느라고 아마도 '일낙천금(一諾千金), 인무신불립(人無信不立)'이란 말을 그렇게 쓴 모양이구나.) 그녀도 위소보의 허튼 소리에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렇지, 한 마디가 일천 냥의 금덩이이고,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서 있을 수도 없지.] 위소보는 다급한 마음에 재촉했다. [내 해독약은....] 순간 노파가 살짝 손가락을 튕기자 위소보는 자기 입 속으로 무슨 물건이 들어오는 것 같아 황급히 물었다. [무엇....] 순간 무엇인가가 매끄럽게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 물었다. [방금 나에게 먹여준 것은 뭐요?] 노파는 말했다. [여든한 가지 귀한 약재로 만든 대보환이데. 맛이 없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맛있습니다. 맛이 최곱니다!] 노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약을 먹었으면 됐지, 뭣 때문에 가지 않는 게냐?]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 목숨의 십분의 팔은 이 악독한 할망구 손에 쥐어져 있는데 가라구? 제기랄, 이 어르신은 사는 것도 정말 번거롭구나. 차라리 염라대왕 만나러 간다고 해 버릴까?) 위소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주인장! 주인장!] 주인은 위소보의 위세에 눌려 문어귀에서 얼굴을 내밀 뿐 감히 들어서지 못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나으리,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요?] 위소보는 품안에서 열 냥이 족히 되는 은자를 꺼내 주인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좋은 술과 맛있는 요리, 차, 과자, 좋은 것이 있으면 모두 가져 와!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 주인은 난데없이 횡재를 하자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고 얼른 대답하며 나갔다. 노파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열 냥이 족히 되는 은자를 세 보지도 않고 주다니 정말 대범하구만!] 위소보는 속으로는 노파를 미위하면서도 겉으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 말을 받았다. [은자를 뭣하러 셉니까? 어르신 마님께서도 필요하신지요?] 그는 품안에서 은표(銀票) 한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어르신 마님, 은자가 필요하십니까? 십만, 이십만 냥은 이 후배에게 있으니 말입니다.] 노파는 담담히 말했다. [우리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잘 알지. 어찌 그런 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지 말고 자네나 두고 쓰게나.]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악독한 노파는 보기에 인질을 일삼는 강도 두목 같지는 않구나. 제기랄, 이 어르신의 목숨을 보아하니 은자를 주고 살 것 같지도 않구나.) 그는 되는 대로 뗘오르는 말을 주워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무릇, 무릇 어르신 마님의 이빨은....치아와 덕행이 존귀한 노인장께서 어찌 은자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노파는 실소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치아와 덕행이 존귀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냐? 치덕구존(齒德俱尊) 아니냐? 이를테면 나이에 맞는 덕행을 갖추어야 존경을 받는다는 게지. 내가 알려주마. 내 치아는 자라지 않을 뿐 아니라 덕도 존귀할 게 없어!] 위소보는 급히 그 말을 받았다. [어르신 마님께서 사양은 하시지만 그것은 사실이지요. 제가 허풍 떠는 것이 아니라 저는 강호에서 내노라 하는 고수들을 모두 보았지만, 어르신 마님의 치아가 이제 더 자라지 않고 덕행도 더 존귀할 게 없다 하더라도 그 누가 감히 자기 스스로 치아와 덕행이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겠소이까?] 노파는 넌지시 물었다. [흥! 그렇다면 너는 강호의 어떤 인물들을 아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아는 사람이야 부지기수지요. 교분이 두텁고 낮은 사람도 있고, 좋고 나쁜 것도 있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원수도 있지요.] 위소보는 그 노파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대충 이렇게 얼버무리며 여지를 남겨 놓았다. 동시에 눈알을 굴리며 그 노파의 기색을 살피며 노파의 내막을 알아보려 했다. 노파는 차를 음미하며 망연히 위소보를 바라볼 뿐,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늙지 말아야지, 나이를 먹으면 다들 간신배처럼 교활해진단 말이야.) 부득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위소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진근남이라는 사람이 있지요.] 노파는 물었다. [사람들이 '진근남을 모르면 영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 천지회 진 총타주 말인기?] 위소보는 자기 스승이 천지회 충타주라는 것을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기에 이것으로 눌러야겠구나.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어 이 어르신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줘야겠구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호의 인물들은 모두 그를 그렇개 말하지요. 그의 '웅혈신조(凝血神 )'는 상대를 움켜쥐기만 해도 사흘 후에는 전신의 피가 천천히 굳어지고 수숫대처럼 야위는데 천하에 치료할 약이 없다고 하지요.] 이것은 위소보의 헛소리가 아니라 북경에서 친히 본 것이었다. 노파는 말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나의 그 움켜쥐는 수법에 비해서 어떻더냐?] 위소보는 정색했다. [어르신 마님의 그 움켜잡는 수단도 물론 매섭기 이를 데 없지요. 스승님과....진근남의 '응혈신조'와 대충.... 비슷해요.] 노파는 그가 성어를 올바르게 쓰지 않는 것을 보고 비꼬아 말했다. [진근남이 그리 매섭단 말이냐? 나는 그를 만나면 필히 겨뤄 보고 싶구나. 그의 '응혈신조'가 대단한지 너에게 손을 썼던 나의 '독수조구(毒手 狗)'가 매서운가를 말이다!] 위소보는 중얼거렸다. (제기랄, 너는 이 어르신을 개에다 비긴단 말이냐?) 그러나 입으로는 내색할 수 없어 돌려 말했다. [진근남의 '응혈신조'가 매섭기 이를 데 없다 해도 어르신 마님의 '독조구수(毒孤狗手)'와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턱 없이 모자라지요. 장래에 두 분이 만나신다면 좋은 일이 많을 겁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우리 스승님과 대면한다구? 진정 펄쩍 뛰며 좋아할 일이지. 스승님은 저승에서 일이 없어 적적하실 텐데. 거 좋지! 지금 당장이라도 가지, 말을 타고 말이야....아니, 아니야! 그렇게 빨리 가면 이 어르신을 누가 해독시켜 준단 말인가?)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 진근남과 승부를 가린다 해도 한 가지 일 때문에 곤란할 것 같소이다.] 노파는 곧바로 그 말을 받았다. [무슨 일 때문이란 말이냐?] 위소보는 말했다. [진근남은 다른 사람과 손을 쓸 때 무명지장(無名之將)과는 손을 쓰지 않는 습관이 있소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 그는 포권을 하고 이렇게 묻지요. '귀하의 대명은?' 그러면 상대는 회답을 하지요. '이 아무개는 대장부 관운장이오', 혹자는 '나는 대장수 여포요'라고 말이오. 진근남은 그제야 그와 손을 쓰지요.] 노파는 흥! 하고 냉소를 하고는 말했다. [진근남이 관우, 여포와 싸웠다니 정말 대단하구만!] 소위 관우니, 여포니 하는 말은 모두 양주 다관(茶館)에서 위소보가 얻어들은 말이었다. 상대의 그런 한 마디에 그는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위소보는 말을 둘러대기도 잘하고 임기응변 또한 뛰어났다. 설령 거짓말이 탄로나도 그는 얼굴이 붉어지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 그는 괴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예를 들어 그렇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당신이 그에게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 그는 당신에게 맞아 죽을지언정 절대로 손을 쓰지 않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노파는 위소보의 말을 흉내내서 비꼬았다. [나는 내 이름을 남에게 알려 주지 않는데, 사기꾼한테는 더더욱 알려 주지 않지.] 위소보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어르신 마님, 시장하실 텐데. 주인장! 제기랄, 밥을 내일 줄 작정인가? 우리 어르신 마님께서 굶어 죽는 날이면, 이 어르신은 자라 굴 같은 이 곳을 모두 불살라 버리겠다!] 주인은 연신 소리쳤다. [녜, 녜! 갑니다. 갑니다....] 노파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사람아, 어찌 이리도 상스러운가? 말을 좀 점잖게 하면 안되나?] 위소보는 '녜! 녜!' 하다가 돌연 입을 삐쭉하더니 울상을 했다. 뒤이어 눈을 끔벅끔벅 하는가 싶더니 정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우는 척하는 것은 위소보가 어릴 때부터 익힌 또 하나의 재간이었다. 어릴 적에 여춘원에서 기생 어미(주모)가 때리려고 손만 들면 그는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노파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측은한 마음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직이 달랬다. [내가 틀린 말을 했는가? 고치겠다고 하면 그뿐이지 울기는 왜 우는가?] 위소보는 흐느끼며 말했다. [어르신 마님께서 그렇게 잘못을 나무라니까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괴로워서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 뻔했소이다.] 노파는 말했다. [어머니 생각이 나면 후에가서 보면 되지않느냐?] [어르신 마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늘 나에게 상스럽고 방탕한 짓을 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일러 주시곤 했지요. 오늘 어르신 마님이 이렇게 훈계를 해 주시는데 어르신 마님은 저희 어머니나 마찬가지지요. 어머니! 이 아들을 욕하지 마세요.] 그는 대성통곡하며 미친 듯이 노파 품으로 파고들었다. 노파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살기 싫어서 그래?] 그리고는 몸을 홱 비키자 위소보는 의지할 곳이 없어 땅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노파는 급히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으면 일어나 얘기하게. 이렇게 체통도 없이 마냥 뒹굴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위소보는 울며 소리쳤다. [저희 어머니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어요. 어머니, 어머니! 그래 당신은 이 아들이 싫단 말입니까?] 그러나 위소보는 속으로 웃었다. (데 년이 나의 어머니라면 그것 참 잘 된 일이지. 우리 에미는 기생이야, 당신도 기생집이나 차리시지.) 노파는 돌연 안색이 일그러지더니 소리쳤다. [너 또 그따위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 왼쪽 어깨에도 비파독(琵琶毒)을 집어 넣겠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악독한 할망구는 나에게 비파독을 넣었구나. 독약의 이름을 알았으니 이제는 됐다. 할망구가 나의 스승을 찾아가겠다고 했지. 갈 테면 가라지. 내 부인 소전은 과거에 남편을 도와 한평생 독을 썼으니 독을 쓰는 데는 할애비일 테니 해독을 하는 데는 손자쯤 되겠지. 이 할망구에게 의존하지 말고 소전을 찾아가면 깨끗한 일 아닌가?) 자기 목숨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위소보는 추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눈시울을 비비며 훌쩍훌쩍 우는 모습은 정말 꼴불견이었다. 노파는 온화한 말로 달랬다. [됐다. 됐어. 다시는 어머니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라. 얼마나 듣기 거북한 말이냐?] [예. 저를 때려 죽여도 어르신 마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겠소이다.] 위소보는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악독한 할망구, 평생 아들 하나 낳아 길러 보지도 못한 모양인데 부끄럽지도 않냐? 보아하니 그런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는 기생집에 석 달을 있어도 난봉꾼 하나 받지 못할 주제에 어느 사내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려구? 우리 어머니는 네 년보다는 훨씬 잘났지만 그래도 모여드는 손님이 적은데.) 위소보는 공손히 밥상을 받고 노파와 함께 식사를 했다. 위소보는 이전에 황궁에 기어들어 소태감 소계자란 이름으로 황궁의 취사방에서 일을 했고, 후에는 황궁의 취사방 우두머리 태감질을 하면서 강희의 식사를 시중한 일이 있어 노파가 밥을 잘 먹도록 이것저것 시중을 들어 노파는 매우 만족해 했다. 식사 후 위소보는 또 노인에게 차를 대접했다. 노파는 흰 수건을 꺼내 입술을 가볍게 닦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담담히 위소보의 콧구멍 속으로 흘러들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오라질 년, 아직까지도 십칠팔 세 꽃다운 처녀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날씨가 점점 어두워지자 위소보는 궁리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미안하지만 나는 내뺀단 말씀이다!) 노파는 그의 심사를 알아차렸는지 입을 열었다. [위 상공, 정말 안 됐구만. 나는 원래 귀하가 적수인지 친구인지 알아보지 않고 다짜고짜 지나치게 손을 썼으니 정말 미안하네 그려.] 위소보는 노파가 자기를 '위 상공'이라 부르자 흠칫 놀랐다. (아이쿠, 큰일 났구나. 이 악마 같은 할망구가 나의 신분내력을 알면 속여 넘기기 힘들 것 같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르신 마님, 너무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의 눈이 박혀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얼렁덜렁대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모두가 제 탓입니다.] 노파는 약간 성난 어조로 말했다. [왜 이리도 말이 많은가? 그래, 내가 두어 마디쯤 하는 것도 못들어 준단 말인가?] [녜, 녜. 젊은 사람은 마땅히 웃어른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지요. 어르신 마님이 건넌 다리는 내가 건넌 다리보다 길고, 어르신 마님이 잡수신 소금은....] 노파가 냉랭한 눈길로 자기를 쏘아보는 것을 눈치 챈 위소보는 스스로 뺨을 후려갈기며 중얼거렸다. [요놈의 주둥이, 왜 너만 말하니? 그렇게 기억력이 없어!] 노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겠지만 자네에게 넣은 비파독은 독성이 그리 크지 않고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어.] 위소보는 물었다. [예, 예? 생명에는 위험이 없다구요?] 노파는 넌지시 일렀다. [그러나 그 비파독이 비파골에 들어가면 사흘 내에 나의 독문(獨門) 해약을 먹지 않으면 비파골이 마디마디 썩어 떨어지고 그 독이 뼈를 따라 퍼지면 석 달 내에 전신의 뼈가 다 썩어 문드러지고 만다네.] 위소보는 겁을 더럭 집어먹었다. 웬지 은근히 어깨가 가렵고 독액이 비파골로 꿰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전에게 해독하러 가다가는 길거리에서 전신의 뼈마디가 다 썩어 문드러지고 말겠다. 그러면 그저 나 혼자 어느 초라한 시골의 백골 무더기가 되고 말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급히 말했다. [어르신 마님, 저를 좀 어여삐 여기시어 선심을 써 주십시오. 저를 살려 주세요. 저희 집에는 처자식이 있고 또 팔십줄이 된 어머니가 계십니다.] 노파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허튼 소리! 자네 나이가 얼마인데 어머니가 여든이란 말인가?] 위소보는 너스레를 떨었다. [어르신 마님, 우리 한 번 팔고 사는 것으로 빗대어 말해 봅시다. 제가 값을 잔뜩 올려 부르면 어르신 마님께서는 그대로 값을 쳐 주시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팔십이 아니라 칠십이라 해도 무방하지요. 칠십이 아니면 육십이라 칩시다. 그래 어디 어르신 마님이 말씀 해 보십시오.] 노파는 성이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세상에서 너같은 인간은 처음이다! 제 어미 나이를 가지고 마음대로 사고 판단 말이냐? 걱정하지 말거라. 비파독은 내가 넣은 것이니까. 보기에 너는 좀 빤질거리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구나. 제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법, 내가 반드시 해독해 주마.]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저는 팔십, 칠십, 육십 세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르신 마님께 감사드립니다.] 노파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또 허튼 소리! 독은 어쨌든 해독시켜 줄 테니, 그렇다고 한가히 보내지 말고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십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궁리했다. (이 야박하고 교활한 할망구가 또 무슨 괴이한 수작을 부릴지 모르겠구나.) 노파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모두 자네를 위한 것이네. 비파독 해약을 만들자면 매우 어렵지. 나에게 단 한 알밖에 없던 해약을 방금 자네가 먹었다네. 그러나 아직도 두 알은 있어야 하니 빨리 만들어야 해. 그 약을 만드는 데는 다섯 가지 독물이 있어야 한다네. 그 독물들이 서로 싸워 나중에 요행히 살아난 독물을 내력으로 태운 다음 또....] 노파는 말이 너무 많다고 느꼈는지 화제를 돌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주 복잡한 것이지. 복잡한 건 괜찮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약을 만들 때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하지. 만약 약을 짓다가 놀라면 독성이 모두 흩어지고 약효가 없게 되지.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신선일지라도 고칠 수가 없게 된다네. 그러니 앞으로 이틀 동안 내가 약을 만들 때 자네는 호법(護法)이 되어 주어야겠네.] 위소보는 무슨 일을 맡기든 쉽사리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올바른 대답이든 어떻든 상관치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은 자기와 연관이 되고 더욱이 자기 목숨과 연관된 일이라 감히 소홀히 대하지 못하고 흰소리도 늘어 놓지 않았다. 그는 약간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웃어른께서 아랫사람의 해독약을 제조하려 하시니 저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호법 일은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저의 그 무슨 '신도백변(神逃百變)'의 무공은 정말 보잘것이 없어 만약 고수가 들이닥치는 날이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고 있네. 내가 약을 제련할 때 이 채찍을 들고 문 밖에 서서 누구든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면 되네! 이 채찍을 들고 있으면 그 어떤 강호의 고수일지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보잘것 없는 채찍이 그리도 위력이 대단하단 말이냐? 아마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보배인 모양이구나. 그렇지, 이 악마 같은 할망구가 약을 다 짓고 피파독을 제거해 주면 이 어르신이 이 채찍을 슬그머니 훔쳐서 강호에 나가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노파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짐을 두었다. [말은 제대로 해야지. 위 상공, 자네가 호법 노릇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네를 위한 것이고 또한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네. 때문에 이 약을 만들 때 만에 하나 주의를 게을리해서 의외의 일이 벌어지는 날이면 마귀굴에 들어가 죽는 길밖에 없데!] 위소보는 웃으며 생각했다. (네 년은 목숨이 위험하니 어쩌니 호들갑을 떨지만 이 어르신은 그 어떤 요사스러운 계책에도 넘어가지 않는 분이니 두려울 게 없단 말이다.) 위소보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르신 마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한 끈에 엮어진 메뚜기처럼 뛰지도 날지도 못하는 형편이니, 내 이 목숨을 걸고 어르신 마님의 안전을 지키겠나이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끈에 엮인 메뚜기라? 듣기에는 거북해도 일리는 있구만. 그럼 됐데.] 그리고는 곧바로 채찍을 위소보에게 넘겨주었다. 달이 중천에 걸려 있고 삼라만상은 모두 정적에 잠겼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이따금씩 그의 얼굴을 감미롭게 스쳐갔다. 위소보는 객방 문어귀에 앉아 채찍을 쥐고 있노라니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채찍은 넉 자 남짓 되는 검은 색이었다.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채찍 손잡이는 다섯 촌으로 손에 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채찍 손잡이만은 짙은 녹색으로 윤기가 반지르르 했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 같았다. 채찍을 이리 둘러보고 저리 훑어봐도 보통 채찍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는 채찍을 걸상에 내던지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놈의 보물이라구? 그래 강호의 사람들이 평소 이것을 보고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구? 정말 나보다 더 허풍이 세구만.) 위소보는 원래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미이다. 평소에 도박 아니면 일곱 부인들과 사방을 쑤시고 다녔다. 어쩌다 혼자 있는 날이면 몇 마디 흥얼거리지 않으면 주사위를 꺼내 던지면서 놀곤 했다. 무료함을 참지 못한 위소보는 이번에도 주사위를 심심풀이로 던져봤다. 그랬더니 '지존보'가 나오는 게 아닌가? 위소보는 흐뭇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참 운수대통이구나. 이 어르신에게는 언제나 흉난(凶難)이 길상(吉祥)으로 변한단 말이야. 그럼 그렇지. 남해(南海) 관세음(觀世音), 옥황대제(玉皇大帝), 서천불조(西天佛祖)가 언제나 나를 보살펴 주고 있지!) 이렇게 한참 혼자 흰소리를 하다가 언뜻 자기 주사위 속에 수은(水銀)을 넣은 것이 생각났다. 그는 흥이 깨져 중얼거렸다. [내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면 개자식이 되는 셈 아닌가?] 삽시에 흥취가 사라져 걸상에 기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보니 객실은 온통 등불이 환했다. (이 악마 같은 할망구가 또 무슨 교활한 수작을 부리는지 누가 알겠는가?) 위소보는 중얼거리며 살금살금 창문가에 가서 혀 끝으로 창문지를 핥아 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 보다가 그만 놀라고 말았다. 노파는 반신을 드러내 놓았는데 한쪽 비파골에는 벼루(硯滴)만한 거미가 붙어 있었고, 다른쪽 비파골 위에는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전갈이 붙어 있었다. 노파의 피를 빨아먹은 거미와 전갈은 배가 통통하게 불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미와 전갈은 동시에 비파골에서 굴러 떨어졌다. 노파는 곧장 두 손으로 받아 쥐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바닥은 마치 불에 구운 것처럼 기이하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노파는 그 독물(毒物)을 손바닥에 놓고는 두 손바닥을 합치면서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것이 불경을 읊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그녀의 정수리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손바닥에서는 이따금씩 퍼런 불꽃이 새어나와 그녀의 얼굴을 불그락 푸르락 비추는 것이 정말 귀신의 형상이었다. 위소보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놀라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 또다시 궁금해 눈을 뜨고 이번에는 노파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 노파의 어깨 피부는 백설처럼 눈부셨다. 위소보는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다 늙어빠진 할망구인데 어떻게 살빚만은 저렇게 희고 야들야들할까? 열예닐곱 먹었다면 참으로 꽃같은 계집인데!) 위소보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거지를 불쌍히 여겨 밥 한 그릇만 주세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 야반삼경에 무슨 거지가 밥을 빌러 다닌단 말인가? 더구나 여기는 여관인데 어떻게 거지가 들어왔을까?)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의구심이 일었다. 순간 위소보는 약을 만들 때는 절대로 정신을 흩뜨리면 안 된다고 하던 노파의 분부가 생각났다. 몸을 돌려 보니 눈앞에 서른 살 남짓의 거지가 서 있었다. 위소보는 음성을 낮추어 소리쳤다. [이 어르신은 자고로 거지에게 밥을 준 일이 없어. 어서 썩 물러가거라!] 거지는 위소보를 보자 홀연 두 눈에서 광채가 일더니 곧바로 눈을 내리깔며 맥없이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불쌍히 여기시고 밥 한 그릇만 주세요.] 위소보는 벌컥 화를 냈다. [이 어르신이 말하지 않았더냐? 밥 덩어리는 개를 줄지언정 거지는 안 줘! 네 에미 썩은 오리알이나 삶아 먹으라구!] 거지는 시비를 걸어왔다. [할아버지, 밥은 주지 않는다 치더라도 함부로 욕을 해서는 안 되지요.] 위소보는 손이 가는 대로 걸상에 걸린 채찍을 쥐고 말했다. [욕을 한다구? 그래 욕뿐인 줄 아느냐? 때리기도 한다!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거지는 그의 기세를 보고 돌연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인은 분부대로 곧장 물러가겠습니다.] 거지는 몸을 돌리지 않고 뒷걸음질로 벽 쪽으로 간 다음 마치 등 뒤에 눈이 있는 것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고 훌쩍 신형을 솟구쳐 일장 남짓 되는 객잔의 담벼락 위로 올라서서 말했다. [소인은 물러갑지요.] 그리고는 훌쩍 담장 뒤로 뛰어내렸다. 위소보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 거렁뱅이의 무공은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군!) 위소보는 채찍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얼굴만 보고는 사람 속을 알 수 없다고, 채찍도 겉만 보고는 알 수가 없구나. 채찍이 너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가신 놈들을 쫓기에는 그만이구나.] 날이 밝아서야 노파는 뜨끈뜨끈한 약 한 알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다. 위소보는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약을 삼켰다. (제기랄, 이 약은 모두 독충으로 만들었지. 목숨하고 상관만 없다면 이 어르신은 일만 냥을 준다 해도 먹지 않겠다.) 그는 또 중얼거렸다. (그럼 십만 냥, 백만 냥을 준다면 어쩌겠는가? 그래도 안 먹겠다. 이 어르신의 살림이 아무리 구차하더라도 이 목숨만은 팔 수 없지. 나에게 꽃같이 아리땁고 얌전한 미녀를 주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나의 일곱 부인들을 제외하고 그처럼 고운 여자들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돌연 위소보는 조부(曹府)의 계집종 문아가 생각났다. (그런 계집을 얻는다면 죽어도 원이 없을지 몰라.) 노파는 위소보를 보자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사람, 자네는 정말 강호의 규칙을 모르는구만. 독문(獨門)의 약을 만드는데 어찌 몰래 숨어 본단 말인가?] 위소보는 시치미를 멨다. [아니, 내가 언제 몰래 훔쳐 봤다고 그러십니까? 거 무슨 볼 게 있다고 그러십니까? 참 별 말씀을 다 하시데요.] 노파는 넌지시 일렀다. [나는 창호지에 바늘을 꼽아 놓았다데. 미안하지만 가서 좀 뽑아오게.] 위소보는 창문가에 가서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어제 저녁 그가 혀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 보던 그 구멍 주위에는 실날 같은 바늘이 네 개 꽂혀 있었다. 바늘 끝은 푸른 색깔이 감돌며 구역질 나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바늘은 절묘하게도 얇은 창호지에 튀어나오지도 않고 꽂혀 있었다. 살짝 꽂으면 창호지에 꽂히지 않을 것이고, 좀 세게 꽂으면 창호지를 뚫고 바깥에서 보일 텐데 그 바늘은 절묘하게도 창호지에 박혀 있었다. 노파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 바늘은 비파독이 아니라 오독(五毒)에 담구었다 꺼낸 것으로 그 오독침에 중독되면 백골이 되는 것을 면할 사람이 없다네!]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히도 이 악독한 할망구가 사정을 봐 뒀으니 망정이지 바늘 끝을 조금만이라도 밖으로 내보냈다면 이 위소보는 위사보(韋死寶) 가 될 뻔했구나!) 위소보는 두렵고도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누가 어르신 마님이 약 짓는 것을 훔쳐 보았을까요? 그는 어르신 마님의 무공이 대단하고 또 오독, 육독(六毒)이 다 들어 있는 줄 모르는 모양이지요? 이렇게 눈이 있어도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인간은 어르신 마님께서는 반드시 죽여 버려야 합지요.] 노파가 말했다. [그는 아마도 모르고 그랬을 테니 이번만은 용서하기로 하지. 이제 또다시 그러면....흥!] 위소보는 옷을 찢어 조심스럽게 오독침을 감싸 노파 앞에 건네 놓으며 거듭 말했다. [어르신 마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생각만 해도 간이 오그라들어 녹두 알만 해지는데 그 녀석에게 다음, 다음 번이 또 있을라구요?] 노파는 말했다. [그가 자네처럼 무서운 것을 알면 좋겠데.] 위소보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구만. 어제 한밤중에 거지 한 놈이 씰룩씰룩 들어와서 살펴 본 적이 있는데 그 놈이 한 짓이 아닐까요?....어르신의 그 채찍은 참 위력이 대단하더군요. 한 번 번쩍 들어 보였더니 그 거지 놈은 꼼짝달싹 못하고 넙죽 엎드려 연신 이마를 짓찧으며 말했지요. '소인은 어르신 마님이 이 곳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부디 어르신 마님께서는 소인을 달리 생각지 말아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저는 그 녀석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며 말했지요. '어르신 마님은 도량이 넓으신 분인데 어찌 네 놈 같겠느냐? 어서 썩 물러가라! 네 에미 썩은 오리알이나 씹어 먹어라!' 이렇게 훈계를 하니까 그 녀석은 꼬리가 빳빳해져서 오줌을 찔끔찔끔하며 도망치고 말았지요. 하하하!] 위소보는 신이 나서 지껄이다 보니 자신의 거짓 밑천이 드러난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노파는 멍하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혼잣말로 내뱉었다. [흥! 그가 정말 찾아왔단 말인가?] 위소보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르신 마님, 그 사람이 누군가요?] 노파는 도리어 킥!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진짜 이 어르신을 찾아왔단 말이냐?] 위소보는 정색하며 그 말을 받았다. [어르신 마님은 치아가 더 자라시고 덕행이 존귀하신데 그런 무명소졸들은 차치하고 강호 무림 중에 누가 모를 것이며 어르신 마님을 존경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튼 소리 말고, 어서 식사나 하고 쉬게!] 위소보는 밤을 꼬박 샌지라 코를 골며 저녁 무렵까지 잤다. 밤이 되자 노파는 또다시 문을 걸어 닫고 약을 만들 준비를 했다. 위소보는 걸상을 가지고 문밖으로 나갔다. 노파는 엄숙한 표정으로 일렀다. [위 상공, 오늘 저녁에는 필히 조심해야 한다오. 승패의 관건은 오늘 저녁에 달렸으니 말이오.] 위소보는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르신 마님, 안심하십시오. 이백 명, 삼백 명의 거지 떼거리가 밥을 빌러 와도 어르신 마님의 신편(神鞭)만 보면 꼼짝달싹 못 하고 투항할 겁니다.] 노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천하에서 제일 빤질빤질한 사람이야. 모든 일을 남에게 미룰 생각만 하고 자신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구만! 묻겠는데 이백 명, 삼백 명은 그만두고 신룡편(神龍鞭)을 본척만척하는 거지 둘, 셋이 오면 자네는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이 채찍을 신룡편이라고 부르는구나. 상문편{喪門鞭)이 아니었구나.)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공도 별 볼일 없고 또한 커다란 판에 붙어 놀아 보지 못했으니 어르신 마님의 가르침을 당연히 받아야지요.]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자네는 확실히 그들의 적수가 못 되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일러주지. 지금 자네에게는 보배 같은 비수가 있지 않는가?]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악마 같은 할망구는 뭐든지 다 알고 있군!) 위소보는 물었다. [예. 그걸 가지고 어쩌란 말씀입니까?] [만약 누가 자네와 손을 쓰려 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좀 넉살을 부리란 말이네. 그럴 형편이 못 되면 다짜고짜 손을 쓰지 말고 그비수를 들고 '이 신룡편을 끊어 버리겠다'고 하게나. 그러면 상대의 열에 여덟은 자네에게 대들지 못할 거네.] 위소보는 꼬리를 달았다. [그럼 여덟은 대들지 않는다 치더라도 나머지 둘이 대들면 저는 어떡합니까?] [정말 마지 못해 손을 쓰게 될 형편이라면 자네가 임기응변할 수밖에 없지. 자네의 무공은 보잘것 없지만 거짓말 재간은 강호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지 않은가?]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이 악마 같은 노파가 자신의 말을 십분의 일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어르신 마님의 칭찬, 송구스럽습니다.] 노파는 실소를 터뜨렸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다니. 내가 자네를 칭찬한 겐가?] 노파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네. 그 사람들은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네. 하지만 내가 그들 손에게 죽거나, 주의를 흩트려 주화입마(走火入魔)된다면 그 해독약은 만들 수가 없지.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저녁 나의 목숨은 그 사람들 손에 달렸고, 자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네. 자네는 총명한 사람이니 더 말하지 않겠네.] 위소보는 예! 하고 대답은 했으나 속으로는 대노했다. (요 썩어질 할망구! 이만큼 살았으면 남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더라도 으레히 죽어야지. 하필 나까지 끄집어들이는 건 뭔가? 이 어르신은 당당한 인재로 천하일색의 일곱 부인들과 기쁨을 다 누리지도 못했고 몇 백만 냥의 은자도 아직 계집들에게 뿌리지 못했는데 염라대왕을 함께 보러 가자구? 그거야 말로 개죽음을 하는 게지!) 위소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자기 목숨과 관계되는 일인지라 등한히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걸상을 문어귀에 놓고 앉아 왼손에는 신룡편을, 오른손에는 비수를 쥐고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지켰다. 초봄의 밤바람은 쌀쌀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밥 한 그릇만 주세요!....] 돌연 밥을 구걸하는 소리와 함께 늙은 거지, 젊은 거지, 어린 거지가 땅바닥에서 솟아나듯이 위소보 앞에 나타났다. 늙은 거지는 덩치가 크고 구레나룻을 앞가슴까지 드리웠는데 보기에도 무서웠다. 어린 거지는 위소보의 나이와 비슷한데 비칠비칠하는 모양새로 보아 폐병쟁이 같았다. 젊은 거지는 바로 어젯밤에 왔던 거지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젊은 거지는 상문편(喪門鞭)에 겁을 먹고 달아난 것이 아니라 원래 채반자(採盤子:강호의 은어로 적의 행적이나 허실을 염탐하는 자를 이름)로 왔다 간 것이로구나!) 세 명의 거지는 위소보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밥 한 그릇만 주세요!] 위소보는 서서 웃으며 말했다. [지금 객잔 문을 닫았으니 미안하지만 여기 앉아 기다리거라! 날이 밝으면 물고기, 돼지고기가 많을 테니, 그 때 내가 한 턱 쓰마!] 세 명의 거지는 눈짓을 주고 받더니 늙은 거지가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하며 자신들만의 은어인 듯한 노래를 읊조렸다. [신룡편은 신비롭고 신비로워라!] 그러자 젊은 거지와 어린 거지가 함께 읊조렸다. [위로는 천자를 쳐부수고, 아래로는 신하를 쳐부수자!] 늙은 거지가 또다시 읊조렸다. [천하의 불평등한 모든 일, 모조리 쓸어 버리자!] 그리고 나서 세 거지는 돌연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보기에 위소보의 응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강호에서는 서로 은어를 대서 제대로 응대하면 안면이 없는 사이라도 자기 문호(門戶) 사람처럼 여기며 잘못된 일이 있어도 자기 문파의 규칙에 따라 해결한다. 그렇지 않고 한쪽에서 은어를 응대하지 못하면 어떤 사람이건 그에 대해서는 전혀 사정을 두지 않는다. 위소보는 그들의 은어를 듣고 추측했다. (그들의 옷차림새로 보거나 은어의 어조로 보아 분명 개방(弓幇) 패거리이구나. 천지회 은어와 신룡교의 은어는 알아도 이 위소보는 개방의 은어를 모르는데.) 모르더라도 이것저것 둘러대는 것은 바로 위소보가 강호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법보(法寶)의 하나었다. 그는 한 편으로 손을 쓸 것을 생각하면서 웃으며 말했다. [참 잘들 부르는구만! 왜 더 부르지 않는가?] 늙은 거지가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의 변절자도 처단해야 하지!] 위소보는 그 사람들이 분명 개방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과거 당나라 명황(明皇)이 황족과 간신들의 핍박을 받아 황궁을 도망쳐 강호에서 유랑하며 적지 않은 개방의 친구를 사귀었고 나중에는 개방 우두머리가 되었다 한다. 얼마 안되어 그의 신분과 처지를 알게 된 개방 사람들은 적개심으로 자신의 개방 우두머리인 '용두대형(龍頭大哥)'의 원수를 갚아 주었다고 전한다. 당나라 명황제는 고락을 같이한 개방의 여러 형제들을 잊지 않기 위해 친히 가죽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신룡편'이라 하고 많은 개방 형제들과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맹세했다. <신룡편은 신비롭고 신비로워라! 위로는 천자를 쳐부수고, 아래로는 신하를 쳐부수자. 천하의 불평등한 모든 일, 모조리 쓸어 버리자. 개방의 변절자도 쳐부수자!> 그 후 이 몇 마디 말은 개방 내에서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은어로 되었다. 위소보가 응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늙은 거지는 안색이 변하며 냉랭하게 물었다. [귀하는 어느 편 사람인데 감히 본방(本幇)을 사칭하는가?] 문호를 사칭하는 죄는 강호에서는 죽어 마땅한 죄로 여겨지고 있었다. 위소보는 안절부절 못 했다. (악마 같은 할망구, 당신네 패거리 동생 조카들이 나를 죽이려 하나이다. 그 구명(救命)약을 아직까지 만들지 못했다면 이 어르신은 그 복을 누리지 못하나이다!) 위소보는 신룡편을 쳐들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개방 중에서 모두 명성이 있는 인물 같은데 그래 신룡편을 모른단 말입니까? 내가 어느 문(門), 어느 파(派)의 인물인가 말해야 알겠소이까? 그건 말할 필요 없지 않소?] 늙은 거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숙(師叔), 어르신께서는 못 들으셨습니까? 강호에 어떤 녀석이 일반 채찍을 신룡편으로 가장하고 도처에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모두 저질러 우리 개방의 명성을 흐리고 있다는 말을 말입니다.] 위소보는 더욱 의아했다. (저 늙은 호로 자식은 수염이 덥수룩한데 누구보고 사숙이라 부를까? 그래 이 어르신을 사숙이라 부른단 말인가? 나는 저런 돼먹지 않은 조카를 둔 적이 없는데?) 그러자 폐병쟁이 같은 어린 거지가 캑캑거리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강호상에는 후안무치한 놈들이....캑! 캑!....그런 비일한 행위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 위소보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폐병쟁이 어린 거지의 말투로 보아 신분이 늙은 거지보다 높은 것 같구나! 그렇다면 저 젊은 거지는 또 어떻게 되는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후리후리한 젊은 거지가 나서며 말했다. [사숙조(師叔祖) 어르신, 사부님, 그가 강호에서 거짓 이름으로 사람을 속인다 해도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자기가 저지른 나쁜 짓을 우리 개방에 덮어씌운다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요. 흥! 그래, 우리 개방의 수백 년 쌓아온 명성을 그 자그마한 벌레 같은 놈에 의해 더럽혀진단 말입니까?] 위소보는 생각했다. (알고 보니 늙은 거지는 젊은 거지의 스승이고, 어린 거지는 늙은 거지의 아저씨로구나! 강호의 각문각파의 규칙은 정말 해괴하구나. 기저귀 찬 할아버지, 지팡이 짚은 손자라니 정말 우습구나. 어린 녀석이 촌수도 높구나. 하기야 뱃속에 할아버지가 들어앉아 있는 법도 있으니까.)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맥없이 말했다. [시간이 될 때까지 당신들 사제지간이 잘 경계하시오. 캑! 캑! 그러나 한 집안 친구는 때려눕히지 말아야지. 호랑이를 잡고 볼기짝 얻어맞을 짓은 하지 말아야 하니까.] 늙은 거지가 나직이 예! 하고 대답했다. 위소보는 정신을 집중하여 늙은 거지를 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손을 쓸 작정인가? 그래도 무방하지. 그럼 여러분께서 손을 쓸 방법에 대해 얘기해 보구려. 이 어르신은 아렛사람에게는 손에 사정을 두는 사람이지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 이 어르신은 강자라고 약자를 깔보거나 사람 숫자를 빌어 일처리는 하지 않으니까.] 위소보는 먼저 말로써 그들의 기세를 제압해 함께 손을 쓰지 못하도록 방비했다. 늙은 거지가 흥! 하며 그 말을 받았다. [귀하도 사람을 더 불러다가 숫자로 이기란 말이오.] 위소보는 태연스레 말했다. [원래 나는 혼자요. 그런데 한 번은 뒈질 놈들 셋이 함께 달려들었지. 세 놈이 불같이 달라붙는데 이 어르신의 두 주먹으로 나머지 네 주먹을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할 수 없이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제기랄 놈 살려!' 하고 소리치며 항복했지. 대장부는 자고로 눈앞에 보이는 손해는 보지 않으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소?] 위소보는 자기 무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만 시작하면 제 살 길을 찾았다. 그런데 오늘 이 고비만은 넘기지 못하고 정말 항복할 것 같아 먼저 뒈질 놈이니, 제기랄 놈이니 하고 침을 발라 놓는다면 이 놈들에게 투항한다 하더라도 그리 손해 볼 것 같지 않았다. 늙은 거지는 그와 말씨름을 하려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리며 위소보 앞으로 다가와 갈고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위소보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늙은이, 그래 이 어르신을 망신시키자는 게요?] 위소보는 소리치며 신룡편으로 늙은 거지의 면상을 후려치려 했다. 늙은 거지는 신룡편이 몹시 겁이 나는지 한쪽으로 피하며 그의 열 손가락은 위소보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위소보는 얼굴에 질풍이 몰려들며 따끔따끔했다. 뒤이어 지독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를 맡자 목구멍이 미어질 듯하고 구역질이 나며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했다. 위소보는 소리쳤다. [이 녀석! 손톱에 독이 있구나!] 늙은 거지는 또다시 몸을 홱 돌리며 채찍을 피하더니 위소보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재간은 별다른 것이 없이 그냥 그 모양이었다. 그러나 늙은 거지는 적을 상대해 본 경험이 많았다. 그는 '연자도초수(燕子倒抄水)'로 오른발을 뒤로 향했다가 그 탄력을 이용해 위소보의 면상을 걷어찼다. 위소보는 무공이 보잘것 없는지라 팔과 다리를 죽으라고 놀려서야 겨우 상대의 강맹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늙은 거지 발에서는 아마 팔십 년 동안은 씻지 않은 듯한 악취가 풍겨왔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이 늙은 두상, 온몸이 독이구나!] 연이어 늙은 거지는 몸도 돌리지 않고 팍팍팍! 하며 '도척련환각(倒賜連環脚)' 초식을 칠팔 초 펼쳤다. 동작을 날렵하게 할수록 더욱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위소보는 늙은 거지의 강력한 내력에 밀려 감히 맞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위소보는 다급한 지경에 빠져 다짜고짜 신룡편으로 늙은 거지의 발목을 걸으려 했다. 늙은 거지는 등에 눈이 달린 듯 곧바로 곤두박질하여 발목에 걸려는 신룡편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는 겁을 먹고 공격을 해야 할지 방어를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그 늙은 거지는 문어귀로 후퇴해 위소보의 퇴로를 차단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궁리했다. (승산이 없으면 집안으로 뛰어들어 악마 같은 할망구에게 한바탕 막아달라고 하자. 악마 같은 할망구가 주화입마 되든, 해약을 못 만들든 일단 피하고나 보자.) 위소보는 언제나 발등에 불을 끄기에 급급한 사람이었다. 지금 흉신악살(凶神惡煞) 같은 늙은 거지는 상문신(喪門神)처럼 문어귀를 가로막고 있어 위소보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위소보가 어찌 고분고분 당하겠는가? 그는 소리쳤다. [어르신 마님! 자라새끼, 육시랄 놈, 오시랄 놈의 망나니들이 악독하기 이를 데 없어 이 어르신은 감당할 수가 없어 도망쳐야겠소이다!] 말을 하면서 그는 신행백변 초식을 펼쳤다. 늙은 거지가 뚫어지게 보고 있는 가운데 위소보는 신형을 이리저리 놀리며 발걸음을 재촉해 신룡편을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휘두르며 어린 폐병쟁이 거지 앞까지 다가갔다. 그 세 명의 거지 가운데 비록 촌수가 높다지만 그 어린 거지가 위소보에게는 제일 만만해 보였다. 약자일수록 업신여기고 강자를 두려워 하는 것이 위소보의 특징이었다. 때문에 위소보는 폐병쟁이 어린 놈을 선택했다. 어린 거지의 앞까지 덮쳐가는 순간 위소보는 흠칫 하고 말았다. 그 어린 거지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위소보는 놀라 소리쳤다. [이 놈이 그래 우리 철검문(鐵劍門)의 신행백변을 안단 말인가? 고 녀석, 나보다 훨씬 고명하구나. 어쨌든 이 어르신을 보고 겁이 나서 달아났겠지.] 앞에 적수가 사라졌으니 위소보에게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위소보는 잰걸음으로 수십 장 남짓 나아갔다. 돌연 한 사람이 휙! 하고 마치 커다란 붕새가 공중에서 날아오르듯이 위소보의 퇴로를 막고 그의 단중혈을 움켜쥐려 했다. 그 사람은 바로 키가 후리후리한 젊은 거지였다. 신형백변은 임기응변하기에 적합하여 위소보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의 옆구리를 매끄럽게 빠져 나갔다.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의 신행백변은 아무리 재간 있는 놈이라도 막아낼 수 없지. 그래도 제 놈이 무공이 고강하다고 까불 수 있단 말이냐?) 위소보는 속으로는 그렇게 안위를 했지만 두려움에 뒤를 살펴 보니 젊은 거지는 꼼짝도 못하고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의 무공은 그럭저럭 쓸 만한데 왜 저렇게 허수아비란 말인가? 저 놈이 저렇게 등을 들이밀고 있는데 이런 때 후려 패지 못하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지.) 이렇게 생각한 위소보는 신룡편을 들고 후려쳤다. 채찍은 묘하게도 그의 목을 휘감았다. 위소보가 약간이라도 힘을 주면 젊은 거지는 휘청거리며 넘어질 것 같았다. 젊은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영웅 나으리,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무공은 괜찮아 보이는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똥주머니 같냐? 이런 허수아비가 영웅 어르신께 대들다니? 이 어르신을 번거럽게 하면서!] 그는 애걸하며 말했다. [소인....소인이 어찌 영웅 나으리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사숙조께서....] 사숙조란 그 폐병쟁이 같은 어린 거지가 아닌가?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황당무계한 말을 잘 하는 시조(始祖)이신데, 네 놈은 이 어르신보다 거짓말을 더 잘하는구나! 그래 너같이 이백여 근이나 되는 물건짝은 그가 안을래야 안을 수도 없을 텐데 그 애늙은이가 네 놈을 이 먼 곳까지 던졌다구?] 젊은 거지가 말했다. [소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가....] 돌연 몸을 움찔하더니 그는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위소보는 겁을 집어먹고 신룡편을 거두어 들이며 말했다. [아니, 왜? 왜 그러는 게냐? 왜 죽은 체하는 게냐?] 그러나 그는 얼굴이 검푸르게 변하며 혀를 길게 내밀고 숨을 거두었다. 위소보는 신룡편을 움켜쥐고 질겁을 했다. (이 어르신이 뮐 했다고 이렇게 내공 진전이 빨라 손에 약간 힘을 주었는데 이런 황소 같은 사나이를 목졸라 죽인단 말이냐? 말도 안 되지. 나는 꿈 속에서도 내공을 연마한 적이 없는데 어디서 갑자기 이런 힘이 나왔을까? 어쨌든 내 손에서 죽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第4章. 기구한 운명을 지닌 여인 전봇대 같은 사나이가 돌연 영문도 모른 채 자기 손에서 죽자 위소보는 겁이 나서 도망치는 것도 잊었다. 그는 맞은편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늙은 거지에게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가 살기 싫어서 저절로 죽은 것이지. 나는, 나는 죽이지 않았소....] 늙은 거지는 들은 척도 않고 폐병쟁이 어린 거지에게 말했다. [사숙, 어르신께서 빨리 아복(阿福)을 구해 주십시오. 아복은 서른 살밖에 되지 않고, 이제 방금 장가를 들었소이다. 어르신께서는 자비를 볘푸시어....] 어린 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가 한집안 사람인데 어찌 내가 모르는 척하겠는가? 그렇지만 저 녀석은 사문(邪門)의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함부로 대할 수 없구만! 자네, 캑! 캑! 자네와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오게!] 그러나 늙은 거지는 망설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거지는 냉랭하게 말했다. [왜 오지 않는 게냐? 오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지.] 늙은 거지는 느릿느릿 말했다. [사숙,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 조카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늙은 거지는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지만 눈길은 여전히 어린 거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엇인가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석 자쯤 되는 곳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거지는 말했다. [내 말을 들어 보게....] 그는 갑자기 머리를 숙인 채 가슴을 부둥켜 안고 기침을 쿨럭쿨럭하기만 했다. [사숙, 괜찮으신지요?] 늙은 거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어린 거지에게 다가서지는 않았다. 어린 거지는 한참 기침을 하고는 허리를 펴며 애절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데. 나야 매년 이 모양이지.] 늙은 거지는 위로외 말을 했다. [길인(吉人)은 하늘이 돕는다고 사숙,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방의 대사가 끝나는 대로 명의(名醫)를 모셔다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거외다.] 어린 거지는 실망스런 어조로 말했다. [생사는 하늘의 명에 달렸지. 달리 생각할 것 있나?] 두 사람은 서로 한담하듯이 말을 주고 받았다. 늙은 거지는 또 위로외 말을 하려 했다. [사숙....]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린 거지는 돌연 발길로 늙은 거지를 걷어찼다. 위소보는 늙은 거지와 이미 손을 써 봤는데 그의 무공은 출신입화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만만히 볼 수 없는 매우 고강한 실력이었다. 늙은 거지는 발길질에 뒤로 떠밀려 위소보에게 덮쳐왔다. 위소보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방금 전에 죽은 젊은 거지도 자기를 어린 거지가 던졌다고 해 미더워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저 썩어질 놈이 요술을 부린단 말이냐?) 늙은 거지는 위소보를 향해 덮쳐오는 듯했지만 기실 위소보가 아니라 신룡편을 덮쳐오는 것이었다. 그 역시 젊은 거지처럼 당황해 하며 절망적인 기색이 역력했다. 위소보는 대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어르신의 내공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상문편이 신기하기 때문이구나.) 위소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 망할 놈들, 제기랄 놈, 가까이 오지 마라! 이 어르신은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다!] 늙은 거지는 삽시에 위소보 앞까지 밀려 덮쳐들었다. 위소보는 그를 상하게 할까 봐 채찍을 등 뒤로 보냈다. 그러자 늙은 거지는 일 장으로 위소보의 앞가슴을 들이쳤다. 순간 위소보는 비틀거리며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늙은 거지는 태연스럽게 서서 기쁜 어조로 외쳤다. [사숙! 내가 이겼소, 이겼소이다!] 비린내가 위소보의 코를 찔렀다. 그는 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왁! 하니 선혈을 토했다. 보의를 입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늙은 거지는 느릿느릿 위소보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징그러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너는 나의 독양장(毒陽掌)에 얻어 맞았다. 얼마 살지 못할 텐데, 네 명이 그뿐이니 나를 탓하지는 말거라.]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위소보야, 네 이 놈 호로 자식은 한평생 좋은 일을 못 해 보고 오늘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아니야, 이 어르신은 죽을 때 죽더라도 통쾌하게 죽어야지!) 위소보는 거지들을 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자식, 망나니, 제기랄 놈들아! 이 어르신은 그래도 네 놈의 개 같은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도리어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 어르신을 죽인단 말이냐? 선(善)은 선으로 대하고 악(惡)은 악으로 갚는다고, 네 놈들은 악독한 짓을 저질렀으니 네 놈들 여편네는 모두 여춘원에 가서 기생질이나 하고, 남자 놈들은 여춘원에 가서 오입쟁이 노릇이나 하고, 네 놈들 새끼들은 모두 밑구멍이 막혀 뒈져라!] 위소보는 비천한 출신으로 어릴 적 기생원에서 자라 욕을 퍼붓기 시작하는 날이면 지독하기 이를 데 없어 몇 시간 욕을 해도 중복되는 말이 없었다. 늙은 거지는 히죽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뭐라구? 염라대왕전에 가서 귀신 노릇이나 해!] 그는 이렇게 말하며 위소보의 가슴을 짓밟았다. 위소보는 비록 중독이 되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하지만 이렇게 짓밟으니 보의를 열 벌 껴입었다 해도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소리쳤다. [망할 놈들! 그래 정말이냐?] 늙은 거지는 행실이 악독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이미 상대를 제압했지만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전신의 진기를 끌어올려 발끝에 넣었다. 더 가슴을 밟는다면 위소보는 오장육부가 튀어나올 형편이었다. 위소보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위소보는 어디서 나온 힘인지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자 몇 척 남짓이나 밖으로 밀려 났다. 늙은 거지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녀석 참 괴상하구나? 나의 독양장을 맞으면 꼼짝도 못할 텐데 무공도 시답지 않은 녀석이 나의 독양장을 받아내다니? 참 모를 일이구나!) 위소보가 비록 발버둥쳐 도망은 쳤지만 증독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늙은 거지는 오른발이 허탕을 치자 다시 왼발로 내리누르려 했다. 위소보는 되는 대로 신룡편을 이리저리 회둘렀다. 공교롭게도 채찍 끝이 늙은 거지의 발에 닿자 그 거지는 귀신이 씌운 것처럼 곧장 뒤로 나동그라졌다. 위소보는 그저 신룡편이 신기하다고는 느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는 기뻐서 소리쳤다. [신룡편이 요 망나니들에게 본때를 보여 쉈구나, 본때를 보여 줬어!] 그는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서서 욕을 퍼부었다. [요 죽일 놈! 네 놈의 독양장인가 뭔가 하는 물건짝은 정말 지독하더구나. 천 년 만 년 묵은 잡귀신들까지도 모두 중독시킬 수 있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방금 전까지 득의양양하던 늙은 거지는 기세가 일시에 사그라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차라리 신룡편으로 이 어르신을 때려 죽여 주게나.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고 핍박하는 것은 영웅호걸이 아니야!] 늙은 거지는 위소보가 자기를 이처럼 원수처럼 대하니 더 이상 살 길이 없으리라 여겼다. 어쨌든 위소보의 손아귀에 들었으니 어떤 고초를 받을는지 그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늙은 거지는 악을 쓰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어린 거지에게 애절하게 말했다. [사숙, 어르신께서 행하시는 일이 모두 성사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거지는 위풍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모두가 우리 문중의 일인데 내가 어찌 손을 씻고 모르는 척 하겠소?] 그리고는 위소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귀하는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형제들이 그만 잘못 보았소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아니, 아니야! 당신의 무공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방금 이 놈들을 단숨에 집어던지는 걸로 봐서는 정말 대단하구만!] 위소보는 늙은 거지와 젊은 거지가 이 어린 거지의 무공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은근히 경계를 했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느릿느릿 위소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부지불식간에 위소보에게 일 장을 후려쳤다. 그 솜씨는 귀신처럼 빨랐다. 그 날렵한 동작을 보고 누가 그를 폐병쟁이라 하겠는가? 위소보는 미처 방비를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위소보는 신룡편의 위력이 매우 강맹하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신룡편보다 더 낫겠느냐? 채찍 맛을 한번 보여줘야겠구나.) 위소보의 입장에서는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은 데다 내공이 전혀 없고 중독까지 되었으니 이 국면을 모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목숨과 관계되는 일이라 부득불 일어나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위소보는 어린 거지가 접근해도 두려울 게 없었다. [어서 가까이 오란 말이야, 어서! 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라 개자식, 후레자식이다!] 어린 거지는 위소보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침착하게 몸을 피했다. 위소보의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손에 들린 예리한 신룡편 때문에 어린 거지는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어린 거지는 요리조리 피하면서 점점 접근했다. 순간 어린 거지는 허리를 굽혀 늙은 거지를 곧장 집어들어 휘두르며 위소보에게 덮쳐왔다. 위소보는 겁이 났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신룡편으로 늙은 거지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비명 소리와 함께 늙은 거지는 머리통이 박살나고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위소보는 이를 갈며 외쳤다. [이 죽일 놈의 거지야. 네 놈은 너무나 악독하구나!] 폐병쟁이 어린 거지는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죽을 텐데 먼저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다를 게 뭐가 있느냐? 게다가 사람을 네가 죽였는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위소보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길로 신룡편을 휘두르며 어린 거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린 거지는 방금 전과는 달리 피하지도 않고 위소보의 품안으로 달려들어 이리저리 움켜쥐려 했다. 그는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상승내공으로 신룡편을 낚아채려 했다. 그의 솜씨는 귀신같이 빨랐다. 위소보는 이미 두 차례 상대를 격퇴시켰지만 그것은 무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채찍의 독성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어린 거지를 만나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놈, 그래 네 놈 자라새끼 몸에는 창칼도 안 들어가고, 백독(百毒)도 소용 없단 말이냐?) 위소보는 신룡편을 이리저리 후려갈겼다. 그러나 어린 거지가 손가락을 살짝 퉁기자 채찍으로 그 무슨 힘이 몰려들었는지 호구(虎口)가 저리고 떨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신룡편을 땅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위소보는 겨우 신룡편을 잡고 속으로 생각했다. (요 자라새끼, 손아귀 힘이 정말 대단한데!) 어린 거지는 일시에 어쩔 수가 없자 '격산타우(隔山打牛)'라는 초식을 펼쳤던 것이다. 위소보는 그것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상상보다 몇 배나 더 매섭다는 것만을 느꼈다. '격산타우'란 자신의 내력을 직접 상대방의 몸에 접촉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를 통해, 즉 무기나 칼 같은 것으로 상대방의 몸에 자신의 내력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이런 전도는 물체가 짧고 단단할수록 빠르고 효과가 있었다. 위소보가 경악을 하고 있을 때, 어린 거지는 그의 앞까지 다가와 웃다가 캑캑거렸다. [캑! 캑!....개방의 문파를 지휘하는 당당한 보물이 너 같은 망나니의 손에 들어가 있다니 정말 말이 아니구나. 캑! 캑! 그러지 말고 곱게 내놓으란 말이다. 이렇게 서로 기분 상하게 할 필요까지 있겠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이 놈의 상문편이 무슨 보물이라고 그러느냐? 네가 가지고 싶다면 가져 가거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린 거지는 손가락을 번개같이 놀려 위소보의 앞가슴 대혈 몇 곳을 짚었다. 위소보의 손에 들린 신룡편은 서서히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순간 위소보는 그 어린 거지 손이 달빛에 번쩍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제기랄 놈, 무공이 고강해서 신룡편의 독도 두려워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원래 보배 장갑을 끼고 있었구나. 그 장갑이 뭐 그리 대단하다구! 이 어르신은 보의를 입고 있는데.) 그렇다면 보의가 왜 장갑에게 졌을까? 위소보는 자고로 그런 것은 따지지 않았다. 어린 거지는 일처리를 매우 세심하게 했는데 그 솜씨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실로 매끄러운 것이었다. 위소보는 비록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정신만은 똑똑했다. 어린 거지는 잇달아 위소보의 뒷등 일고 여덟 곳의 혈도를 찍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움직이기는 커녕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린 거지 놈아! 너도 이 어르신에게 이 방법을 배웠구나. 하지만 범을 죽이려면 확실하게 찔러 살아나지 못하게 죽여야지. 몸을 열 번 스무 번 칼로 찔러 풍비박산을 만들어야 영웅호걸의 행동이 되는 게지!) 격렬한 싸움으로 힘을 너무 소모한 탓인지 어린 거지는 허리도 펴지 못하고 기침만 쿨럭쿨럭 했다. 이 때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썩어질 놈, 기침을 하다가 뒈지면 이 어르신의 원이라도 풀 텐데.) 그러다가 그는 달리 생각했다. (아니야, 기침을 하다가 뒈지면 안 되지. 이 어르신을 이 곳에 말뚝처럼 세워 놓으면 거 참 보기 거북하지.) 어린 거지는 가슴을 안고 한참이나 문지르다가 조심스럽게 위소보의 손에서 신룡편을 빼내며 위소보의 후심 혈도를 움켜쥐고 말했다. [가자! 우리 가서 네 놈의 연두(姸頭)를 보자!] (역자 주:연두(姸頭)는 정식 부부가 아닌데 남자와 같이 사는 여자를 말함.) 위소보는 한참 망설였다. (연두라니? 누가 이 어르신의 연두란 말인가? 이 어르신은 그리 정파 인물은 못 되도 꽃처럼 어여쁜 부인을 일곱이나 두고 있어 자고로 연두를 생각해 본 일도 없는데?) 그러다가 언뜻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이 어린 거지가 말하는 연두는 저 집안에 있는 밉살스럽기 짝이 없는 늙어빠진 노파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대노하여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망할 자식! 그래 이 어르신보고 그 늙어빠진 할망구와 서방질을 하란 말인가? 이 어르신은 그런 욕심 없다! 그런데 네 놈은 무엇 때문에 보겠다는 게냐? 정 마음에 있으면 내 혈도를 풀어 놓고 의논하면 그까짓 할망구 연두는 스물이고 백이고 아낌없이 줄 텐데.) 어린 거지는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네 놈은 정말 솔직하지 못하구나. 눈알만 한 번 굴리면 고약한 잔꾀만 생각하니 나는 너같이 교활한 놈은 환영하지 않아! 차라리 죽여 버리겠다!] 위소보는 넋이 반쯤은 빠져나가 눈을 꼭 감았다. 어린 거지는 위소보의 잔등 혈도를 틀어쥐고 마치 애들 장난감처럼 번쩍 치켜들고 노파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위소보의 몸뚱이와 머리가 문에 부닺치며 문이 일렸다. 노파는 어젯밤처럼 양 어깨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그녀의 백설같이 새하얀 피부는 정말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어제 저녁에는 한쪽에는 독거미를, 다른 한쪽 어깨에는 전갈을 올려 놓았지만 오늘은 양 어깨에 각기 흉측한 두꺼비와 몸서리 쳐지는 자그마한 뱀을 올려 놓고 었었다. 생명과 관계되는 긴요한 시각이라 노파는 고개도 들지 않고 안색이 엄숙해지며 두 눈을 살그머니 감고 숨결마저 죽이고 있었다. 두꺼비와 뱀은 피를 빨아먹고 배가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어린 거지는 신룡편을 꼭 잡고 위소보의 뒤에서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소사매(小師妹), 잘 있었는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사매라니? 소사매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잠시 생각해 보니 알 만했다. 위소보는 늙은 거지가 어린 거지를 보고 사숙이라고 부를 때 어처구니 없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이 어린 거지가 늙다리 노파를 소사매라고 부르니, 개방의 일은 알고도 모를 일이라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는 신룡편을 손에 쥐고, 또한 소사매의 '정부(情夫)'를 방패 삼아 움켜쥐고 있었지만 소사매가 약을 만드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어 내심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는 주화입마되어 가볍더라도 폐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무겁다면 목숨까지 달려 있는 매우 위험한 정황이었다. 아무튼 어린 거지가 이긴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위세를 부리지 못하고 위소보의 후심 혈도를 움켜쥐고 엄폐물 삼아 노파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쓸데없는 말로 노파의 마음을 혼란시켰다. [소사매, 우리 개방의 이십일 초식 신룡편법은 천하무적인데 무엇 때문에 부질 없이 애를 태우며 무독공(無毒功)을 연마한단 말인가?.... ]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뒈질 놈, 모르는 게 되게 아는 척 하는구만. 이 악독한 할망구는 지금 이 어르신의 비파독을 치료할 해독약을 만들고 있는데 무슨 무독공 어쩌고 저쩌고 떠벌리는 게냐?) 노파는 본체만체했다. 위소보는 그녀의 이마에 푸른 심줄이 돋아난 것을 보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푸른 뱀과 두꺼비는 각기 이빨과 혓바닥을 노파의 살갗에 흡착시키고 피를 빨아 배가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위소보는 이 기이한 공법(功法)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폐병쟁이 어린 거지만은 지금 자기 소사매가 내력으로 심맥(心脈)을 촉동(催動)시켜 혈액순환을 가속화함으로써 비파골 위의 두 독물에게 빨리 배를 채우려는 긴요한 관두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노파가 그 독물들을 손바닥에 놓고 불태워 경맥(經脈)으로 들어가게 하면 신룡편은 차지하고 천하 그 어떤 무공을 다 합친다 해도 소사매를 막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어린 거지는 더 이상 경솔히 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위소보를 엄폐물로 삼으며 신룡편으로 노파의 어깨 위에 있는 푸른 뱀과 두꺼비를 후려쳤다. 어린 거지는 야위고 작았지만 무공만은 대단했다. 그가 채찍을 떨치자 그 뱀과 두꺼비가 휘감겨 날아왔다. 어린 거지는 매우 기뻐하며 위소보의 등 뒤에서 뛰쳐나와 허공에서 뱀과 두꺼비를 낚아채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나에게 두 가지 신물(神物)이 들어왔다. 두 가지....] 그렇게 외치는 순간 노파가 옷소매를 획 하고 떨쳤다. 어린 거지는 신물이라는 소리도 내뱉지 못하고 서서히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눈을 뜬 채 죽어 버렸다. 노파의 옷소매가 채 내려오기 전에 뱀과 두꺼비는 가볍게 그녀의 옷소매로 감겨 들었다. 두 신물은 노파의 옷소매에 의해 튕겨 올라 다시 어깨 위로 돌아왔다. 이 모든 동작은 매우 짧은 찰나의 순간에 마무리되었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훌륭하군, 홀륭해!....저 썩어질 놈의 거지 새끼가 이 어르신의 아혈(啞穴)을 짚어 놓았을 뿐 아니라 단중혈, 명문혈(命門穴) 그리고 십칠 이십팔 혈도를 짚어 놓아 이 어르신을 움직이지도, 말도 못 하게 목석처럼 만들어 놓았단 말이야! 하지만 네댓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이 어르신은 움직일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단 말이다! 망할 놈의 거지 새끼야, 너의 혈도를 짚는 재간은 비록 괜찮지만 이 어르신의 해혈(解穴) 수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어르신은 해혈 수법이 천하 제일이란 말이다!] 위소보는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고개를 숙이고 보니 자기 적삼에 십여 개의 독침이 꽂혀 있었다. 그는 식은땀이 돋아나며 너무도 놀라 속으로 소리쳤다. (악독한 할망구야, 이 어르신의 몸은 보의가 보호하고 있는데, 너의 상문독침(喪門毒針)으로 이 어르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위소보가 고개를 숙여 보니 어린 거지는 눈썹에 독침이 한 대 꽂혀 있고, 안색이 흑자색으로 변해 죽어 있었다. 위소보는 모든 것을 환히 알 수 있었다. 노파가 어린 거지에게 옷소매를 떨칠 때 두 가지 독침을 쏘아낸 것이 분명했다. 어린 거지를 향해서는 죽여 버리려는 것이었고, 자기를 향한 것은 혈도를 풀어 주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더 이상 해혈 수법이 어떻다는 둥 허풍을 늘어놓을 수가 없자 무릎을 꿇고 곡을 하며 말했다. [이 썩어질 놈의 작은 거지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삐 저 세상으로 갔단 말이냐? 염라대왕 전에 가서 너희 그 늙은 후레자식과 젊은 후레자식을 보면 반드시 안부인사 전하거라....] 그러면서 슬그머니 노파를 바라보니 노파는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공력만을 연마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어린 거지가 죽기 전에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악독한 할망구는 그 무슨 해독약이 아니라 자신의 무독공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위소보는 내심 화가 치밀어 중얼거렸다. (개방에는 쓸 만한 물건짝이 하나도 없어! 우리 천지회를 보란 말이야. 모두가 자신이 연성한 무공을 지니고 강호를 호령하지 어찌 이 따위 무독공이니, 뭐니 떠든단 말이냐? 이건 모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아닌가? 이 어르신은 약간 빤질거리는 것을 제외하고 일신에 지닌 무공은 없지만 그래도 천지회의 당당한 향주 노릇을 하지 않았더냐?) 위소보는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또다시 곡을 하며 말했다. [너희 세 썩어질 놈들아, 저승에 가서라도 저 괴팍한 노파는 원망하지 말거라....] 위소보는 그런 엉터리 같은 헛소리를 하면 그 노파가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무공을 연마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소리를 한 이유가 있었다. 노파가 정신집중을 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여유가 없도록 만든 후 슬그머니 어린 거지의 손에서 보물 장갑을 벗겨냈다. 그 장갑은 얇고 보들보들한 것이 살색이라 위소보처럼 덜렁거리는 사람은 일시에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장갑을 슬그머니 품안에 넣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 어르신에게는 창칼도 꿰뚫지 못하는 보의가 있고 백독(百毒)도 소용 없는 보물 장갑이 있으니, 천지회에서 칼로 찍는다 해도 두렵지 않고, 개방의 그 독약도 두렵지 않도다! 이 어르신의 무공이야말로 천하 제일이도다!) 위소보는 의기양양해 하다가 신룡편을 주워들고 또다시 곡을 하며 말했다. [이 후레자식들아, 너희 집에는 팔십, 구십, 백 세 되는 세 에미가 있을 텐데 어째서 다 내팽개치고 저 세상으로 갔단 말이냐....] 돌연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언제 어디로 들어왔는지 한 여자가 물었다. [위씨 나으리, 죽은 세 귀신과 당신은 어떻게 되는 사이인데 이처럼 슬퍼하시는지요.] 위소보는 그녀를 보자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문아 아가씨, 당신 무슨 일로 왔소?] 나타난 사람은 강녕직조 조인의 집에서 조설근의 시중을 들던 미모의 계집종 문아였다. 문아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무엇인가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문아라구요? 얼마나 정이 들었기에 문아를 이렇게 잘 기억하세요?] 그녀의 웃음은 어쩐지 교만한 기색이 어린 것이 조부(曹府)에 있을 때의 그 유순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위소보는 원래 얼굴이 좀 반반한 계집만 보면 오금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족속이었다. 게다가 예쁜 아가씨가 말 한 마디라도 건네는 날이면 자기 성씨조차 깡그리 잊고 만다. 위소보는 희희닥거리며 말했다. [당신처럼 아리땁고 얌전한 아가씨에게 반하지 않는 사내는 눈이 먼 놈이고 쓸개도 없는 놈이지!] 노파는 자신의 무독공에만 신경을 쓰느라 위소보와 문아가 주고 받는 말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양쪽 비파골에 있는 푸른 뱀과 두꺼비는 배가 통통하여 손을 대면. 터질 것만 같았다. 문아는 갑자기 노파에게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소매(小妹), 너도 들었지. 위 상공이 너에 대한 정이 어떤지 말이야. 정인(情人)과 나란히 달빚 아래 꽃구경을 하고 노닐면 그 얼마나 애틋하니? 그렇게 고생하며 무슨 무독공을 수련한다고 그러니?] 위소보는 머릿속에 든 먹물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달빛 아래 꽃구경을 하고 노닌다'는 말만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춤을 추듯 손발을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구 말구! 그 무독공이 좋다고는 하지만 독이 없는 것이 더 낫지. 내가 보기에도 독성이 크면 위험할 것 같은데 연마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소매, 들어 봐. 위 상공이 얼마나 너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지 말이야? 너는 어떻게 그리 사람의 성의를 저버린단 말이냐?] 위소보는 그 말에 어패가 있는 것을 느끼고 얼른 문아에게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것은 문아에게 한 말이오. 이 노파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당신은 오해하지 말구려.] 문아는 그 말을 듣더니 깔깔 웃었다.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어찌 이렇게도 흐리멍텅하단 말인가? 문아 아가씨, 이 노친네와 그대는 어떻게 되는 사이요? 정말 개방의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려. 할아버지가 손자로 되고, 노친네가 여동생으로 되다니 배분(輩分)이 너무나도 어지럽구려.] 이 때 푸른 뱀과 두꺼비는 노파의 피를 마음껏 빨아먹고 양 어깨에서 굴러 떨어졌다. 노파는 두 손으로 그 두 가지 신물(神物)을 받으려 했다. 순간 문아는 제비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듯, 돌연 매섭게 신형을 솟구치며 노파에게 덮쳐 들었다. 노파가 옷소매를 미미하게 떨치며 내력으로 두 신물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즉시 쌍장을 문아에게 발출했다.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와 손을 쓰고 싶지 않아.] 그리고는 몸을 번쩍 허공으로 솟구치며 두 신물을 낚아챘다. 노파는 미처 따르지 못하고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팔소매를 떨치자 십여 개의 오독침(五毒針)이 쏟아져 나왔다. 문아는 공중에서 피할 재간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아는 교태롭게 웃으며 말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소매의 무공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구나.] 노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적삼을 돛처럼 부풀리며 일시에 떨어지는 십여 개외 오독침을 받으려 했다. 문아는 노파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너는 어릴 적부터 이 언니보다 철이 먼저 들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었지. 더구나 언니를 대신해 모진 애를 써서 두 신물도 먹여 키워주었는데 이 언니가 모르는 척할 수는 없지!] 순간 노파는 퉤! 하고 문아에게 침을 내뱉었다. 위소보는 눈치가 빨라 노파의 침 속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물건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소리쳤다. [문아 아가씨, 조심해요!] 외침 소리를 듣고 문아도 살펴 보니 그 침 속에는 독침이 갈무리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너무 가까워 문아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이 다급한 시각, 문아는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앵두같은 입술을 벌리며 똑같이 노파에게 퉤! 하고 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노파가 발출한 독침은 돌연 방향을 바꾸어 노파의 얼굴로 덮쳐들었다. 노파는 이틀간 공력을 들이느라 네 마리 독충에게 적지 않은 피를 빨리웠고, 또 긴박하게 문아를 상대하느라 기력이 쇠잔되어 마지막 내력까지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러니 어디 반격할 힘이 있겠는가?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되돌아 온 독침은 정확하게 노파의 양미간에 꽂혔고, 노파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문아는 푸른 뱀과 두꺼비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득의양양하여 웃으며 말했다. [소매, 안심하고 편히 쉬거라. 이 언니는 일이 있어 여기서 헤어져야겠구나.] 그리고는 바삐 달려나갔다. 위소보는 다급히 말을 건넸다. [아니, 문아 아가씨! '새색시가 새 방으로 들어갈 때 중매장이가 문을 열어준다'고, 그래 그대는 한 마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바삐 떠날 수 있단 말이오?] 문아는 문 밖으로 나가다가 그 말을 듣자 생각했다. (저 녀석은 좀 빤질거리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는 말이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되돌아와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하나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큰 일이 성사되었으니 우리 뽀뽀나 합시다.] 이 말은 위소보가 자기 처 쌍아와 버릇처럼 늘상 하는 우스갯소리로 위소보의 말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기실 위소보는 문아에게 그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문아는 웃을까 말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문아하고 늘 그러는 모양이죠?] 위소보는 약간 놀라는 듯하면서 중얼거렸다. (더러운 년, 우리 사이가 어떤지는 네 년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위소보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자 문아는 횅 하니 앞으로 다가와 신룡편을 삐앗아 가며 무뚝뚝하게 한 마디 던졌다. [너하고 문아는 원래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 어서 이 아가씨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위소보는 어리둥절하여 그 말을 받았다. [문아, 당신 왜 그러는 게요?] 하지만 문아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고는 신형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위소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중얼거렸다. (더러운 년, 저 년의 성깔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노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한 마디 때문에 이렇게 몸을 상하게 됐구려. 아니, 혹시 죽은 것 아닌가?] 곁에 가서 코에 손을 대보니 숨결이 전혀 없었다. 위소보는 손을 뻗어 노파의 인중(人中)을 짚어보는 순간 썩은 살이 뭉텅 손에 짚이는 게 아닌가? 위소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르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제기랄, 오독침이 이처럼 대단하단 말인가? 삽시에 사람의 살까지 썩게 만들다니.... 악독한 할망구는 스스로 매서운 독약을 만들어 자기가 제일 먼저 맛을 보았구만. 제기랄 년, 자기가 자초한 일이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 만들기가 무섭게 효과를 봤구만!) 그는 가슴이 후련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중얼거렸다. (아니야, 저 악독한 할망구의 비파독은 할망구를 제외하고는 해독시켜 줄 사람이 없지. 해독을 하지 않으면 사흘 내에 전신이 모두 썩어 문드러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이 진짜든 거짓이든 이 어르신은 진짜라고 믿어야지. 이 어르신은 어여쁜 아가씨들과 함께 가면 몰라도 저런 늙고 추잡스런 할망구하고는 저승으로 갈 수 없는 노릇이지.) 위소보는 자기 목숨과 관계되는 긴급한 시각인지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용기를 한껏 북돋아 다시 일어나 노파에게 다가갔다. 그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악독한 할망구야, 너무 빨리 귀신이 되려고 하지 마시오. 이 위소보의 독을 해독시키고 가도 늦지 않는단 말이오. 내가 살아난다면 당신이 죽더라도 십칠 이십팔 개의 커다란 도량(道場)을 만들어 줄 것이며, 십구 층 지옥에서 십팔 층 지옥으로 데려 가겠소.) 그는 이렇게 흰소리를 하면서 용기를 내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내뻗었다. 그는 손이 가는 대로 노파의 얼굴을 더듬자 또다시 썩은 살이 뭉텅 손에 와 닿았다. 위소보는 비위가 뒤틀리고 구역질이 나서 감히 보지도 못하고 재빨리 손을 놓았다. 순간 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파의 신음소리였다. 위소보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어르신 마님, 당신을 문아 아가씨가 해친 것이지 이 위소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원수를 갚으려면 그녀를 찾아야 하지요.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그녀를 찾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녀가 젊고 미모를 지닌 아가씨인데 만약 당신이 그녀를 끌고 저승으로 간다면 얼마나 애석한 노릇이겠습니까?] 위소보의 귀에 아주 부드럽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 상공, 저를 구해 주셔서 고마와요....] 위소보는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노파가 아니라 살구 같은 눈, 복숭아 같은 얼굴을 지닌 다소곳한 미모의 소녀였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문아였다!....위소보는 너무나 놀라 소리쳤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문아 아가씨로 변했단 말이오?] 문아가 말했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요. 나는 원래 문아예요.] 위소보는 마치 구름 속에서 떨어진 것처럼 망연히 입을 열었다. [나는 친히 내 눈으로 보았소. 어르신 마님은 문아 아가씨의 오독침에 맞아 중독 되어 쓰러졌고 문아는 자기 신룡편을 가지고 갔는데 어떻게 문아가 또 여기 있단 말이오?] 문아가 그 말을 받았다. [위 상공, 위 상공은 강호의 경험이 많으시니 당연히 역용술(易容術)을 아시겠지요.] 역용술이란 기실 현대의 화장술이다. 위소보는 약간 짚이는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이 무공을 연마할 때 몰래 훔쳐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소? 당신 어깨의 피부가 눈처럼 회고 보들보들한 것을 보고 노인네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당신은 그 무슨 노인네가 아니라 폐화수윌(閉花羞月) 낙어심안(落魚深雁)의 꽃보다 더 어여쁜 아가씨였구려!] 문아는 자기가 무공을 연마하느라 어깨를 드러냈는데 젊은 사내가 훔쳐보았다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 상공, '폐화수월'이 아니라 '폐월수화'이며, '낙어심안'이 아니라 '심어낙안'이랍니다.] 그녀는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살짝 드러나 아름답고 귀엽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모습은 위소보가 강녕직조 조부에서 보았던 문아의 모습이었다. 그 때의 문아와 비교하면 여전히 어여쁘고 얌전했지만 좀 차이가 있다면 그 전보다 약간 교활해 보이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십분의 팔은 그녀를 믿었다. 그러나 위소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 물으며 자기의 말이 틀렸다는 그녀의 지적을 한술 더 떠 농으로 받아쳤다. [내가 아직도 의구심이 드는 것은 이 세상에 고운 아가씨들이 적지 않지만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심득어낙득안(深得魚落得雁)', '폐득윌수득화(閉得月羞得花)'한 미인인가 하는 것아오. 당신들이 쌍둥이가 아니고야 말이오.] 문아는 말했다. [위 상공은 아주 총명하시네요. 우리 자매는 확실히 쌍동이예요.] 위소보는 '아! 쌍둥이?!'하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문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 상공, 제 말이 틀렸나요?] 위소보는 말했다. [아니오. 이 위소보는 강호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이 적지 않다오. 문파와 조정(朝廷)이 싸우고, 문파와 문파간에 싸우고, 또 같은 문파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사제지간에 불화가 있고, 부자지간에 서로 다투며, 모녀지간에 서로 원수가 되고, 형제지간에 반목하고....서로 물고 뜯고 하는 일들을 적지 않게 봤다오. 그러나 친 쌍둥이 자매끼리 이렇게 죽으라고 때리는 것은 이번에 처음 봤다오.] 문아는 대뜸 안색이 흐려지며 말했다. [이것은 저희 가문의 불행이지요. 우리 자매지간은....더 말해 뭘 하겠어요? 위 상공, 밖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이 객잔에 더 머무를 수는 없잖아요.] 위소보는 펄쩍 뛰면서 말했다. [아니, 아가씨가 들먹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만 잊어 버릴 뻔했구려. 두려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피가 질펀한 시체가 있으니 우리는 여기에서 떠나는 것이 좋겠소. 문아 아가씨, 걸을 만하시오?] 문아는 뭔가 말을 하려다 멈추더니 잠시 후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오독침에 중독되더라도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길을 걷기가 좀....]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아가씨, 걱정 마시구려. 내가 업고 가면 되지.] 문아는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위소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미안해 하지 마시오.] 위소보는 그녀를 업고 문 밖으로 나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큰일 났소이다! 강도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렀소! 사람 살려....]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주인은 그 외침소리를 듣고 일어나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나와 보니 위소보가 무슨 물건 하나를 던지는 것이었다. 황급히 받아 보니 오십 냥이 족히 되는 은자였다. 때는 눈보라치는 황혼 무렵이었다. 여덟 개의 주머니를 등에 진 중년 거지가 인적도 없는 황막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비록 꽝꽝 얼어붙는 겨울 날씨였지만 그 거지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걷고 있었다. 눈송이는 그의 품에 떨어지면 곧장 뜨거운 김으로 변했다. 그는 이따금씩 허리에 찬 술통을 들어 두어 모금 마시면 몸이 훈훈해지는 듯 걸음걸이도 더욱 빨라졌다. 돌연 무엇인가 그의 발길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니 어린 아기를 싼 포대기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포대기 속에는 한 쌍의 어린 아기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기는 온몸이 새파랗게 얼어 있었지만 숨소리는 가늘게 살아 있었다.... 그 거지는 바로 팔대(八袋)제자 성룡(成龍)이었다. 그는 원래 부모 형제가 없고 집도 없었으며 맨몸으로 강호를 유랑했다. 그의 성격은 소탈하고 활달했으며 무공 재간은 막히는 데가 없었다. 그는 개방 중에서 지위가 높고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룡은 친자식이 없어 그 두 강보에 쌓인 계집애를 주워 길렀는 데, 큰 아이를 청아(晴兒)라 부르고 작은 아이를 문아라 불렀다. 청아와 문아가 생긴 후부터 이 털털한 사나이는 어떤 때는 할머니가, 또 어떤 때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춥고, 덥고 이 번잡한 일들을 알뜰살뜰이 해 나가면서 청아와 문아를 꽃다운 처녀로 키워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귀여워했다. 그들이 자라자 성룡은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그들은 총명하여 개방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이나 무공의 기본법은 보기만 해도 알고, 배우기만 하면 잊지 않았다. 16년 후 개방의 방주(幇主)인 성룡이 방주 지위를 딸에게 물려 주려고 할 때 개방에서는 아무런 이견도 없었다. 그러나 청아는 청아 나름의 장점이 있고, 문아는 문아 나름의 장점이 있어 방주를 누구에게 물려 줄 것인가에 대해 성룡 자신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이럭저럭 1년이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문아가 무공 연습을 하고 돌아와 흥겹게 아빠를 찾는데 놀랍게도 아빠는 입과 코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문아는 겁도 났지만 아버지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빠, 아빠! 무슨 일이세요! 무슨....] 그녀는 나이가 어려 이런 일을 처음 당해 보는지라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비통해 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성룡이 흘린 피에서 이따금씩 사향 냄새가 풍겨왔다. 문아는 내심 두려우면서도 의부께서 개방의 독문내공심법(獨門內功心法)인 무독대공법(無毒大功法)을 가르쳐 줄 때 간곡히 일러둔 말이 생각났다. <이 방법은 지극히 악독하고 극히 위험하다. '무독대공법'을 배우면 그 어떤 독에도 중독되지 않을 뿐더러 내력도 크게 향상된다. 그러므로 상대가 일단 무독장(無毒掌)에 맞으면 피가 거꾸로 흐르면서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피에서 사향 냄새가 코를 찌른다. 즉시 절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독할 약도 없다. 그러니 남과 겨룰 때 무독대공법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조심! 조심! 조심! 조심해라!> 의부는 잇달아 네 번이나 '조심'하라고 했으니 극히 신중하라는 뜻이었다. '무독대공법'은 방주에게만 전수해 주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려면 매우 복잡하여 성룡 본인이 방주 노릇을 몇 년 동안 했지만 그 무독대공법은 그제야 겨우 연성할 수 있었다. 비록 성룡이 방주 자리를 딸에게 넘기려고 했지만 그 자매들의 무공 기초로 보아 아직도 몇 년 더 걸려야 했고,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그럼 누가 그 '무독대공법'으로 의부를 죽였단 말인가? 그래 강호의 그 누가 무독대공법을 안단 말인가? 혹은 개방 무리 가운데 남몰래 무독대공법을 연성한 사람이 있단 말인가? 문아의 어린 마음으로서는 그 답안을 찾을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의부를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만 했다. 돌연 의부의 손 밑에서 피묻은 필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날 일(日)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알아낼 재간이 없어 그녀가 도움을 청하고자 소리치려 할 때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사람이 소리 높이 외쳤다. [흉수를 놓치지 마라!] 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우리 형제들이 의부를 살해한 흉수를 발견했단 말인가?) 문아는 의부의 시체를 안고 겨우 일어나 문어귀에 채 당도하지 못했는데 개방의 팔대 제자들이 둘러쌌다. 문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흉수가 어디 있나요? 그는 왜 의부를 살해했단 말인가요?] 개방 제자들은 대답이 없고 도리어 문아를 분노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문아는 격분하여 말했다. [당신들 왜 이러는 거예요? 왜 나만 쳐다보는 거예요?] 돌연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흥! 늙어 죽은 쥐를 보고 고양이가 곡을 하는 격이구만! 네가 방주를 죽여 놓고 도리어 누구에게 묻는 게냐?] 문아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말했다. [제가 의부를 죽었다고요? 의부가 우리 자매에게 베푼 은혜가 태산 같은데 그래 우리가 의부를 죽였다고요?] 돌연 문아의 뒤에서 아주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을.... 스승님을 바로.... 바로 저, 저 여자가 죽였습니다....] 몸에 피가 흥건한 사람허 문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스승님을 죽이고 또.... 죽인 사람을 태워 흔적을 없애려고....] 뭇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성룡의 관문제자(關門弟子) 관의호(關義虎)였다. 문아는 급히 말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의부의 무공은 고강한데 나의 이 보잘것 없는 재간으로 그 어르신을 해칠 수 있단 말예요?] 한 늙은 거지가 냉소하며 말했다. [흥! 네 말대로 하자면 재간이 있으면 스승이고 뭐고 다 죽일 수 있다는 말이구나?] 문아는 그만 실수하여 그들에게 말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나는 죽이지 않았어!....] 늙은 거지는 그녀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관의호를 부축해 왔다. 그 늙은 거지는 물었다. [의호! 개방 여러 형제들이 여기에 다 있는네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해 보게나! 흠흠, 보기에 방주를 죽인 사람은 그리 높은 무공을 지닌 사람 같지는 않구만. 닭을 더듬으려면 개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고, 그 흉수는 매우 친밀하게 방주에게 다가가 불시에 손을 쓴 것이라고 생각되네.] 말을 마치면서 그 늙은 거지는 힐끗 문아를 쳐다보았다. 관의호도 중한 내상을 입어 힘겹게 입을 뗐다. [문아 아가씨.... 아니 저 살인 흉수는 스승님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스승님께 무엇인가 보여 달라고 했지요....스승님은 아무런 방비도 없었는데 그녀의 손이 스승님의 눈앞에 미치자 나는 사향 냄새를 맡았고, 스승님의 '아!'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문아 아가씨....아니, 흉수는 오른손으로 스승님의 가슴을 들이쳤지요.... 스승님은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발길질을 하여 흉수의 아랫배를 걷어 찼지요.... 나는 더 지탱할 수 없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늙은 거지는 곁에 서 있는 몇몇 팔대 제자들이 물었다. [셋째 형, 둘째, 뎃째 동생, 지난 해 방주께서 채화음적(采花淫賊) 화륙(花六)을 죽여 버리던 날 모두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있지 않았소?] 멎몇 팔대 제자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거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성룡 방주께서 뭐라고 했소?] 한 늙은 거지가 그 말을 받았다. [방주께서는 무독대공법의 두 가지 수법을 보여 주었는데 첫번째 초식은 '미인첩면(美人貼面)'으로 불시에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맞서기만 하면 상대방은 중독 되어 그 어떤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도 막아낼 방법이 없다고 했소이다.] 중년 거지가 뒤이어 그 말을 받았다. [스승님은 두번째 초식은 '공혈래풍(空穴來風)'으로 내력으로써 무독공법을 상대방의 독맥(督脈)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것으로 피가 거꾸로 흘러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흐르면 치료 방법이 없어 죽고 만다고 했지요.] 젊은 거지가 말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기를 '무독대공법은 매섭기 이를 데 없고 독성이 심하여 천하에 해독할 사람이 없으니 죄악이 큰 자를 제외하고는 이런 독수(毒手)를 펼치지 마라'고 하셨소이다. 우리 형제들은 그 때 친히 보고 무독대공법을 방주에게만 전수하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전수하지 않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늙은 거지가 말했다. [그렇지! '죄악이 큰 자를 제외하고는 이런 독수(毒手)를 펼치지 마라'고 하셨지! 방주님, 방주님, 당신은 평생 정직한 분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셨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독대공법에 목숨을 잃었단 말입니까? 문아 아가씨, 그래 이제 그대는 뭐라고 변명하겠소?] [저는, 저는....] 문아는 돌연 관의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의부께서 독장(毒掌)을 받을 때 흉수의 아랫배를 걷어찼다는 말이 생각나 그것이 단서가 되리라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저희들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의 몸을 보십시오....] 그녀는 돌연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자기 아랫배를 내려다 보니 커다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게 아닌가? 늙은 거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문아 아가씨, 무독대공법을 연성하셨다니 축하합니다.] 그 발자국이 언제 어떻게 찍혔는지 문아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증이 이렇게 확연하게 있으니 그녀로서는 정말 황하의 물로도 다 씻어 버릴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 속에서 언니 청아가 있는 것을 보고 문아는 말했다. [언니, 억울해요. 언니도 알겠지만 제가 어찌 의부를 죽일 수 있겠어요?....] 청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의부께서 우리를 길러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미 눈 속에서 얼어 죽었을 거예요. 문아야, 우리는 친 자매지간이지만 강호의 사람들은 언제나 의기(義氣)를 앞세우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소인배에 대해서는 이 언니도 정을 내세울 수가 없구나!] 뭇 거지들 가운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훌륭한 딸은 마땅히 은원을 분명하게 구분해야지!] [한 뱃속에서 나은 형제가 어찌하여 하나는 의리가 있고, 하나는 이처럼 비열하단 말인가? 정말 한 뱃속에서 나온 것 같지가 않구만!] 문아는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언니도 저를 믿지 않는군요. 그럼 좋아요, 모두 나를 흉수라고 하는데 스스로 자결하면 그만이지요!] 그녀는 팔을 약간 구부리고 손가락으로 태양혈을 겨누었다. 뭇 거지들은 잠자코 있었다. 원래 개방에서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 개방 내의 제자 가운데 그 무슨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던 간에 그가 자결하려고 할 때는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또 자결한 후에는 그 직위를 낮추지 않고 그 자녀들을 더욱 우대하며 따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뭇 거지들은 젊디 젊은 여자애가 스스로 자결을 하려고 하니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았다. 돌연 문아는 담장 밑까지 물러갔다가 벼락 같은 기세로 담장에 걸려 있는 신룡편을 손에 쥐고 마구 휘두르며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비켜!] 신룡편은 개방의 첫번째 가는 보물이었다. 신룡편은 독약에 오랫동안 담궈 두었다가 꺼낸 것으로 조금이라도 그 독이 묻으면 즉시 절명하고 만다. 뭇 거지들은 분분히 흩어졌다. 문아는 신룡편의 위세를 빌어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 속을 혜치고 도망쳐 나왔다.... 한 객잔에서 아직 내상이 아물지 않은 문아는 이따금씩 위소보에게 자신의 내력을 얘기해 주었다. 위소보는 여기까지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거 참 잘했구려. 문아 아가씨, 의부를 안 죽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정말 죽였다 하더라도 어수룩하게 자기 목숨을 버릴 수야 없는 노릇이지. 내 말을 좀 들어 보구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귀중한 것은 자기 목숨이라오. 죽어 버린다면 제기랄 뭐 볼 게 있겠소?] 문아는 안색이 흐려지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로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법인데 두려울 게 있나요. 그러나 저는 죽을 수가 없어요. 제가 죽는다면 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누가 의부를 살해했는지 밝혀내야 하고, 또 저는 이 뼈에 사무치는 원수를 갚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거예요!] 문아는 말을 할수록 더욱 강건했고 창백한 얼굴에는 흥조가 피어올라 더욱 고와 보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꽃다운 아가씨는 성을 내도 곱기만 하군!) 위소보는 자기 처지도 생각이 났다. 자기 스승, 즉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이 대만 정극상의 손에 살해되었지만 천지회 형제들이 자기가 죽였다며 방방골골 찾아다니며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니, 버선목이라면 뒤집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지라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위소보는 격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늘 땅이 무너지고 이 위소보가 천번 만번 죽더라도 문아 아가씨를 도와 원수를 갚으리다!] 문아는 위소보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사람이 신중하지 못하고 빤질거린다고 느꼈으나 오늘 또 대하고 보니 그의 충직한 마음과 의로운 담력이 있음을 알고 매우 감동되어 물었다. [왜 저를 그렇게 좋아하시나요?] 위소보는 짐짓 점잖은 척하던 기색이 얼마 되지 않아 밝아졌다. 그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이 위소보는 태생이 비천한 사람이고, 고운 여자를 위해서는 그 어떤 험난한 싸움판이라도 거절한 일이 없다오.] 문아는 곧장 안색이 굳어지며 말했다. [위 상공, 진심으로 저를 돕겠다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만약 그 어떤 경박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애당초....] 위소보는 자기 빰을 스스로 찰싹! 찰싹! 때리며 말했다. [야, 요놈의 주둥이가 또 허튼 소리를 했구나. 요놈의 주둥이...] 그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완연히 드러났다. 문아는 별다른 기색도 없이 그의 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다면야 이럴 필요가 있나요. 아프지 않으세요?] 그녀의 자그마한 손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의 억세고 거친 손과는 판이하게 매우 부드러웠다. 위소보는 매우 기뼜다. (요 꽃 같은 계집은 성을 낼 줄도 알고, 손은 또 아주 보들보들하단 말이야. 내 그녀를 위해서라면 불바다에 뛰어들어도 원이 없겠다.) 그러면서 위소보는 이렇게 말했다. [요 더러운 주둥이는 아가씨를 노엽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얻어 맞아야지요. 하지만 아가씨께서 사정을 하니 이 위소보는 용서해 줄밖에 달리 도리가 있겠소?] 문아는 입을 삐죽하며 웃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달리 도리가 없네요.] 위소보는 슬며시 물었다. [나는 아직도 모를 일이 있다오. 아가씨 같은 무공 솜씨를 가지고 왜 조부에 가서 계집종 노릇을 했는지 말이오. 그래 이것이 아가씨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호에서 개방의 세력은 매우 크고, 누가 개방 사람을 노엽게 만들었다면 그 누구든 못 살게 구니, 편안할 수가 없지요. 개방에서는 반역자를 아주 엄격하게 처벌해요. 위 상공, 생각해 보세요. 제가 개방을 배반해 나오고 또 그들의 신룡편까지 빼앗아 왔으니 어찌 저를 가만히 둘 수 있겠어요? 저도 사람이니 어쨌든 자기 몸을 숨길 은신처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었다. [맞소이다. 강녕직조 조부는 권세가 있고 조인 그 대간신배의 무공 또한 두 말할 나위 없으니 흑백양도(黑白兩道)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오. 정말 훌륭한 은신처지.] 문아는 말했다. [단지 은신처뿐이 아니예요. 그 은신처를 빌어 무독대공법을 익혀 어쨌든 의부의 피값을 갚으려고 했지요.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결국은 헛된 맹세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위소보는 넌지시 물었다. [무독대공법이란 배우기가 어려운 모양이구려.] 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통 사람에게 이 독을 쓰면 독성이 점점 커지고 매우 심하지요. 그런데 개방의 무독대공법은 오직 자기 몸에 티끌만한 독성마저 없어질 때까지 연마해야 상대방에게 손을 쓰면 그 독이 커진답니다.] [그럼 그건 내가 잘 할 수 있소이다. 나는 몽환약을 먹어 보았을 뿐 아무런 독물도 접촉해 보지 못했으니까.] 문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무독대공법은 전갈, 독사, 두꺼비, 거미, 지네 등 그 오독이 서로 싸우다가 마지막에 남는 독물을 쓰는 거예요. 아마 일 년이란 세월이 걸려야 그 다섯 가지 독물을 길러 내지요. 오독이 준비된 다음 비파골에서 피를 빨아먹게 하고 그것을 불에 태워서....] 문아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문중 내부의 내공심법을 외부에 누설하는 것 같아 멈춰 버렸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흥! 무독대공법이 뭘 그리 대단하다고? 세상 무공 중에 어디 쉬운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그래 그것을 좀 배우면 안 되나?) 문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독대공법을 연성하려면 힘이 들고 매우 위험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을 연성할 때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부득불 직조부 같은 곳을 찾았답니다. 그랬지만 결국은 조 어르신께 발각되고 말았지요.] 위소보는 놀라며 물었다. [언제 말이오?] 문아가 말했다. [그날 밤 조부에서 어린 공자를 때릴 때, 저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 가만히 뒤쪽 화원으로 가서 보았지요. 그런데 저희 언니가 언제 그 눈치를 알았는지 조부에 와서 저를 찾았어요. 우리 자매는 그날밤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손을 썼는데 그녀의 무공은 저보다 못해 저에게 쫓겨가고 말았지요. 조부는 아주 넓어 다시 저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위 상공을 붙잡고 길을 안내하라고 했던 거예요.]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이다. 그 때 그녀는 나를 붙잡고 아주 아리따운 계집애를 찾자고 하였소. 하지만 이런 곡절이 있었는지 나는 몰랐지.] 문아가 말했다. [언니가 조부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저는 그 곳에 더 있을 수 없었지요. 위 상공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객방에서 조 나으리가 저를 붙잡으려고 할 때 말이에요. 그 때 저는 매우 놀랐어요.] 그 때 조인이 문아의 적삼을 확 잡아채 찢어 놓았었다. 위소보는 그 때 광경을 떠올리고는 히히 웃었다. 문아는 그가 또 흉측스럽게 웃는 것을 보고 또 얼토당토 않는 말이 나올까 곧장 말을 이었다. [아마도 평소에 제가 무공을 안다는 것이 은연 중에 드러났나 봐요. 또 우리 쌍둥이 형제는 몸매나 용모가 비슷했지요. 이 때부터 조 나으리는 저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어요. 그래서 저는 그날 밤 조부를 떠나고 말았지요.] 위소보는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것, 그 조가 놈은 정말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구만. 이처럼 무공 수위가 높은 선녀 같은 아가씨를 남겨 두었다가 시중을 들게 하면 얼마나 좋겠소? 그런데 퍽 하면 매질이니 정말 눈 뜬 소경이구만. 언제 한번 그놈을 만나면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때리면서 물어 봐야겠소. '감히 문아 아가씨를 무리하게 대하겠느냐'고 말이오.] 문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문아라니요? 그 치아가 가지런하게 길고 덕행이 존귀한 노파 말씀입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건방진 조가 놈! 문아 아가씨의 백옥 같은 치아를 감히 길다고 했단 말인가? 그럼 요괴란 말이 아닌가? 이 어르신은 아랫것들을 시켜 그 조가 놈을 혼쭐이 빠지도록 한바탕 두들겨 패고 삼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 고된 노역을 시켜야겠구만. 하하하!] 두 사람은 한참 웃다가 문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위 상공, 제가 당신을 속였다면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는지요?] 위소보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나를 속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믿어지지 않는구려. 문아가 왜 나를 속이겠소?] 문아는 말했다. [저의 흔적이 발각되면 조 나으리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또 개방에서도 못 살게 굴 것 같아 차라리 조부(曹府)를 떠났지요. 저는 조부를 나선 후 위 상공이 북경으로 가는 것을 알고 변장을 하고 길에서 기다렸어요. 그 때 저는 위 상공을 붙잡고는 당신이 그 무슨 비파독에 중독 되었다고 했지요. 기실 그것은 비파독이 아니라 보통 쓰는 마양분(麻痒粉)이라 독이 없는 거예요. 해독약을 만든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제가 무독대공법을 연마하려는 것이었고, 개방 사람들이 와서 말썽을 일으킬까봐, 위 상공을 청해 저의 무공연습을 보게 한 것이었지요.] 위소보는 가슴 속에서부터 기가 살아 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렇겠지. 이 어르신은 팔백 년 전부터 예견했단 말씀이야. 그렇지만 여자들에게 들어 붙으려면 절대로 여자보다 총명한 척은 하지 말아야 되지.) 위소보는 문아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랍고 두려웠으며 후에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나중에는 문득 깨닫고 기쁜 기색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미타불! 아가씨가 손에 사정을 두셔서 이 위소보는 끝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소이다. 진심으로 사례 드립니다!] 문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 상공은 너무나 총명해요. 또 우스개 소린가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실수했구나. 언제나 아가씨 생각이 이 어르신보다 열 배는 나야지. 총명한 척하다가 손해를 보기 십상이지. 요행히 얻은 환심을 두어 마디 말에 다 잃어 버리면 정말 믿지는 장사지.) 위소보는 말했다. [아가씨께서 나를 중독시키지 않았다면 왜 해독약을 두 알이나 먹였단 말이오? 그래 그것은 정말 십전대보환이오?] 문아는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십전대보환이 아니라 개방의 독문약물(獨門藥物)이에요. 개방 사람들은 매일 각종각양의 독물(毒物)로 이런 약물을 만들어 먹는데 어떤 독도 침투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개방 사람이라고 다 먹을 수는 없어요. 개방 이외의 사람이 먹게 되면 그것은 연분이 있는 탓이지요.] 위소보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문아 아가씨, 그럼 나는 차후에 그 어떤 백독도 침투하지 못하겠구만?]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신룡편의 독은 개방 사람들도 겁을 내는데 위 상공이 그것으로 상대를 막아낸다면 아무 걱정할 게 없지요.] 위소보는 또 물었다. [그럼 몽환약은 어떨까?] 문아가 말했다. [천하에 그 어떤 지독한 독약도 두렵지 않은데, 독성이 제일 약한 몽환약 따위를 겁낼 필요가 있나요?] 위소보는 기뻐 껑충껑충 뛰며 말했다. [백독도 두렵지 않구나! 거 참, 문아 아가씨, 정말 고맙소이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에게는 창칼도 뚫지 못하는 보의가 있고, 날카로운 비수도 있지. 또 암암리에 쓰는 암기가 있고, 아주 신비한 장갑이 있으며, 또 그 어떤 독물을 먹어도 중독되지 않는 약이 있으니 오보(五寶)를 완전히 갖추었구나. 그러니 이젠 위소보라 하지 말고 위오보(韋五寶), 위대보(韋大寶), 위천보(韋天寶), 위지보(韋地寶)라 해야지.) 위소보는 이전에 강희의 성지를 받고 간신 오배의 집을 수색할 때 보의와 비수를 손에 넣었다. 또 그의 스승 독비신니 구난사태가 그의 무공 신행백변을 가르쳐 준 것 이외에도 암기를 주었다. 그 세 가지 보배는 여러 번 위소보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는 지금 또 개방의 폐병쟁이 어린 거지에게 신비한 장갑을 손에 넣었고, 문아에게 백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약물을 얻어 먹었으니 위소보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위소보는 한참 흥이 나 하다가 갑작스레 소리쳤다. [아! 큰일 났구나!] [큰일이라니요?] [문아 아가씨가 의부의 원수를 갚고 커다란 누명을 벗으려면 한 가지 큰일이 남았소이다!] [무슨 큰일인가요?] [문아 아가씨의 원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문아의 보물 같은 언니 청아란 말이오. 동생이 어찌 언니를 찾아 원수를 갚는단 말이오.] 문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위 상공, 위 상공도 보다시피 우리 자매가 원수처럼 대한다면 무슨 혈육의 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언니가 정말 의부를 살해했다면 이것저것 따질 것이 없지요.] 위소보가 물었다. [무엇이 '했다면'이란 말이오? 청아가 의부를 죽인 것이 틀림없는데 그리고도 그 죄를 문아 아가씨에게 덮어씌우니!] 문아는 넌지시 물었다. [그럼, 언니가 왜 그랬을까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것도 모르오? 그녀가 개방의 방주가 되려고 그러는 게지! 문아 아가씨의 의부께서 방주 자리를 당신 자매에게 넘겨 주려고 했소. 그러나 누구에게 줄까 망설이고 있을 때 언니가 의부를 죽이고 그 죄를 동생에게 덮어씌우면 방주의 계승자가 바로 그녀가 될 것 아니오. 그 계책이야말로 참 악독하단 말이오.] 문아는 반문했다. [언니가 방주가 되고 싶으면 하면 되지. 하필 의부를 죽일 필요까지 있나요? 저는 방주가 되려고 언니와 다툰 일도 없는데요.] 위소보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황궁에서 권력 다툼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었고, 개방은 강호에서 모두 한 문파이지만 권력 다툼은 황궁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문아는 마음이 어질어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당신 마음과 같지 않다오. 당신은 방주 자리를 다투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욕심을 내니 말이오. 그렇지 않소?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이 혈안(血案)은 문아 아가씨의 언니 청아가 꾸민 게 틀림없소.] 문아는 내심 움직이는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위 상공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그렇다면 의부가 임종 시에 피로 날 일(日)자를 써 놓았는데 바로 청아(晴兒)의 일(日)자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의부께서 흉수의 이름을 남겼단 말인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일(日)자 부수고, 태양(太陽) 변이니 하느냐? 이 어르신은 그래도 몇 글자는 읽어낼 수 있지만 글자 풀이야 깜깜 무지이지.) 위소보는 옳다 그르다 말이 없었다. 문아가 다시 재촉했다. [아니, 그렇지 않나요?] [아니라니, 뭐가 아니란 말이오?] [의부께서는 우리 자매에게 무독대공법의 구결(口訣)을 이야기하며 알려 주었는데 정말 그대로 하자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예요. 저는 일 년간 조부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했지만 지금도 그 단서를 알아내지 못했는데 청아 언니가 나보다 총명하다 한들 어찌 며칠 사이에 다 익힐 수 있겠어요?]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년, 무독대공법을 쓸 수 없다면 유독대공법을 쓰면 되지 않는가? 그 구린내 나는 의부를 죽였으면 죽였지, 또 무슨 복잡하고 안 하고 할 것이 있는가?) 위소보는 더 말하려 하지 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의부를 죽였으며 어떻게 죽였는가, 이것은 모두 중요하지 않소. 어쨌든 사실이 밝혀질 날이 있겠지. 지금은 우선 아가씨 몸이 빨리 회복되는 게 가장 중요하지.] 문아는 내상을 입었지만 자기 스스로 걸어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이 묵고 있는 진(鎭)은 그리 크지 않고 궁벽한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농상의약(農桑醫藥) 상점들이 다 있었다. 위소보는 그 곳에서 제일 큰 약방으로 가서 주인에게 물었다. [상등 인삼, 복령(茯笭), 하수오(何首烏)가 있습니까?] 주인은 위소보의 차림새를 보고 귀한 손님으로 여기며 매우 친절하게 맞았다. 그는 차를 대접하며 공손히 물었다. [이 약방에는 모든 게 있사온데 손님께서는 어떤 약을 사시려는지요?] 위소보는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이 사람! 왜 이리도 말이 많은가? 제일 좋은 보약을 다 가져 오란 말이야! 내가 돈이 없을까봐 그러는가?] [아니, 아니옵니다.] 주인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삼, 복령, 하수오를 황급히 상에 내놓았다. 위소보는 황궁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많아 백년 묵은 인삼 같은 것은 보기도 하고 먹어도 보았다. 그는 이삼등(二三等)짜리 보약은 눈에 들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따위 보약은 개나 돼지에게 먹이는 것이지 어찌 병을 치료하는데 쓴단 말인가?] 그는 일만 냥의 돈을 꺼내며 말했다. [이 약방에서 제일 비싼 보약을 가져와! 값은 얼마라도 상관 없으니!] 주인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대답했다. [네! 네!] 그리고는 곧장 뒷방으로 들어가 한참 있더니 사람 모양을 갖춘 한 쌍의 하수오를 들고 나와 조심스레 상에 놓고 입을 열었다. [나으리, 이것은 이 약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보물입니다. 보통 사람은 사려고 한다 해도 보여 주지도 않지요. 오늘 나으리께서 급한 일이 있어 쓰신다고 하니 더 속일 수가 없나이다.] 그 두 뿌리의 하수오는 두 자 가량으로 줄기, 잎, 꽃이 모두 완벽한 데다 인형(人形)이고 일남일녀 같으며 머리, 손, 발이 완전하고 여자의 유방, 남자의 생식기도 모두 완벽했으며, 몸통에 털도 있어 성인 남녀와 흡사한 형상이었다. 위소보는 너무나 희한한지라 보면서 생각했다. (이 하수오는 몇백 년, 몇천 년이 되어야 이런 모양이 될는지? 이 어르신은 고사하고 소황제도 못 봤을 것 같구나!) 위소보는 문뜩 강희가 떠올랐다. 그는 황제의 존엄도 불구하고 양주까지 와서 자기를 찾았다. 그는 감동되어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하수오를 사서 소황제에게 주면 그는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면 그에 대한 나의 성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또 생각했다. (문아 그 꽃다운 계집이 무슨 대공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는데 보기에 주화입마된 것 같구나. 이 귀중한 보약을 먹이면 금방 나을텐데. 그 고운 아가씨가 죽으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지. 소황제에게 주지 못하더라도 이 약을 일단 꽃다운 계집에게 먹여 화월용태를 되살리고 보자. 옛말에 '홍분(紅粉), 보검(寶劍)은 가인(佳人)에게 준다'는 말이 있듯이 이 하수오도 예외는 아니지.) 위소보가 뚫어지게 그것만 들여다 보고 있는데 주인은 위소보를 굽어보다가 그의 심사를 알고 입을 열었다. [손님, 이 하수오는 특별히 손님에게만 보여 드리는 것으로 파는 물건은 아닙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팔지 않는다구? 약방을 차려 놓고 자기가 약을 먹으려 하다니, 어찌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주인이 말했다. [나으리 말씀이 옳습니다. 한 달 전에 강녕순무 마우가 어디서 들었는지 이 약방에 천 년 묵은 사람 모양의 하수오 두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까지 보내 황상께 헌공(獻貢)하자고 했지만 소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였소이다.] 위소보는 냉소했다. [그래 당신은 마우로 나를 겁먹게 하겠다는 겐가? 이 어르신이 큰소리 치는 건 아니지만 그가 황상께 바치려 해도, 흠, 흠! 이 어르신 한 마디면 꼼짝달싹 못하고 나에게 보내 올 거네!] 第5章. 개방의 잇따른 추격 위소보는 사실대로 말했다. 조정에서 위작 나으리 위소보하면 권세 높은 인물로 정평이 났던 터라 그의 말 한 마디면 아무리 구하기 힘든 물건일지라도 모두 구할 수가 있었다. 하수오 같은 것쯤은 두 말 없이 바칠 정도였다. 일개 순무(巡撫) 나부랑이들과는 사정부터가 달랐으나 주인은 그런 내막을 몰랐다. 그는 위소보를 그저 부자집 공자(公子)처럼 거드름이나 피우고 입담은 거칠고 세상 물정엔 능란한 사람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손님의 위세를 보니 무슨 일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소이다....] 위소보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위세를 부린다고 그러시오?] 주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 말을 받았다. [그건, 그건....하지만 이 하수오만은 팔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손님!] 위소보는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말해 보시구려.] [솔직히 말하자면 소인의 집에는 여든네 살 되신 어머님이 계신데 늘 병치레를 하셔서 의원에게 보었습니다. 그랬더니 천 년 묵은 인형(人形) 하수오를 쓰면 어르신의 병도 치료되고 목숨도 구원할 수 있어 장생불노하신다고 하였소이다.] 위소보는 소리쳤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팔십 먹은 사람이 더 살아 뭣 한단 말인가? 인형 하수오를 먹고 장생불로하면 귀신이 되지 않는단 말이냐? 얻기 어려운 보물일수록 꽃다운 이팔청춘 색시들에게 주어야 이치에 맞지, 여든 살 귀신에게 먹여서 뭘 한단 말이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이 하수오는 당신이 팔든 아니 팔든 사야겠소.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하자면 결론적으로 이 어르신이 산단 말씀이오!] 주인은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님, 저의 사정을 좀 봐 주십시오....] 위소보는 냉소하며 말했다. [여든네 살 되는 에미가 있다구? 하지만 이 어르신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할 거요. 돈으로 그 노친네를 사서 보약으로 쓴다 해도 당신은 입도 뻥끗 못할 게요. 솔직히 말하시오. 얼마를 주면 팔겠소?] 주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야 달리 도리가 없지요. 그러나 이 약은 백 년, 천 년 가도 얻기 어려운 물건이라 손님께서 살만한 여유가 있으실런지?] 위소보는 허세를 부렸다. [또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군. 도대체 얼마길래 내가 살 수 없다고 하는가?] 주인은 천천히 그 말을 받았다. [제가 살 때 한 뿌리에 십만 냥씩을 주고 샀으니 합해서 이십만냥이지요. 손님께서 사신다면 저는 에누리 없이 원가대로 드리겠습니다.] [이십만 냥?] 위소보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값을 이렇게 올리다니 너무하는구만. 하지만 이 어르신은 서로 손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값을 치르지.] 주인은 태연스럽게 말했다. [손님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손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때 돌연 위소보의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툭툭 치며 끼어들었다. [어르신이 득을 본 거외다.] 순간 뒤를 돌아보니 너무나 반가운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어전시위 장강녕과 조제현이었다. 위소보는 너무나 기뻐 '장....'하고 부르려는데 장강년이 눈짓을 했다. 위소보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곧바로 주워 섬겼다. [약방장 어르신과 인형 하수오를 흥정하고 있는 중이라오. 두 시위(侍衛) 어르신께서도 약방에 뭐 필요한 게 있으신 모양이지요?] 시위라는 말을 들은 주인은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관청의 관리들을 만나면 대개 밑지는 장사를 하게 마련인데 하물며 어전시위를 만났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장강년이 말했다. [우리 형제는 두 어르신께서 흥정하시는 것을 구경할 따름이지요. 나으리께서는 무엇을 사려고 하십니까?] 위소보는 어른스럽게 앉아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요 근자에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몸이 좀 불편해서 약을 사려고 왔소이다.] 어전시위의 재간이라면 첫째는 선량한 사람을 업수이 여기고, 둘째는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즐기는 것이며, 셋째로는 아녀자들에게 집적대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조제현은 대번에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의젓한 분이시니, 마음에 드신다는 분 역시 선녀처럼 아름다우시겠지요. 그런데 나으리께서는 무슨 약을 사려고 하시는지요?] 위소보는 입술을 삐죽 내밀어 하수오를 가리켰다. 조제현은 눈길을 돌리더니 칭찬을 했다. [아! 그렇군요. 이렇게 좋은 약이 있으니 반드시 완쾌되실 겝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물었다. [이 한 쌍의 하수오는 값이 얼마요?] 주인은 꺽꺽거리며 대답했다. [이(二),이(二)....] 장강년은 그 말을 받아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아하, 두 냥? 비싸지는 않구만!]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놈들, 이 어르신이 2년 동안 돈을 주지 않았더니, 이제는 완전히 땡전 한 푼 없는 거지가 되었구나. 협잡을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 그래도 본전은 치러 줘야지.)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잘못 들으셨소이다. 두 냥이 아니라 이십만 냥이라오!] 장강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십만 냥이라도 비싼 것은 아니구려.] 조제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참! 장 형제, 우리가 떠나올 때 황상께서 우리에게 무슨 성지를 내리신 걸로 아는데!] 장강년은 조제현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꺼낸 말이라 여기고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어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황상의 성지야 감히 거스를 수 없지요.] 조제현이 말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등록정공 위소보 위작 나으리께서 짐을 위해 근심하고 국가를 위해 많은 공로를 세웠는데, 그의 몸이 몹시 허약할 테니 이번에 나가면 백 년 묵은 인삼, 천 년 묵은 복령, 인형 하수오, 그리고 또 갖가지 귀중한 보약을 구해 보신시키라고 하셨소. 그렇지 않소?] 장강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렇지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황상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만약 너희들이 보약을 구하지 못한다면 아예 돌아을 생각 말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으라고 했지요.] 위소보는 마음이 흐뭇하여 생각했다. (2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요 두 녀석의 알랑거리는 재간은 상당히 늘었구나.)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비록 황상 폐하의 은덕이 가없이 넓다 해도 당신들 같은 좋은 친구가 없었더라면 어찌 이 위 아무개가 공을 세울 수 있었겠소?] 위소보는 성어(成語)를 항상 틀리게 사용했지만 '황제의 은덕이 가없이 넓다'는 이 말만은 여러 번 들은지라 전혀 틀리지 않았다. 조제현은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얼마나 훌륭한 말씀을 하셨는지 당신 들었소? 장 형제, 여기에 마침 하수오가 두 뿌리 있는데 성지를 받들어 이 훌륭한 하수오 한 쌍을 위작 어르신께 드리면 어떻겠소?]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다 가져가도 된다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훼방을 놓아야, 나중에 이 어르신에게 돌아올 것 아니냐?) 장강년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주인장! 칼을 가져 오게!] 주인은 그들 세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는데 대뜸 '칼을 가져오라'는 명이 떨어지자 안색이 흑빚으로 변했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저 변변치 못한 자그마한 약방일 뿐인데 귀하신 어르신께서 널리 보살펴 주십시오....] 장강년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성지에 따라 구해 가는 물건인데 하자가 있으면 되겠는가? 어쨌든 물건 값은 제대로 치러야지. 칼을 가져와! 속이 어떤가 확인해 봐야 하니 말이야!] 주인은 머뭇거렸다. [그건, 그건....] 조제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가 그건 그건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속에 이상한 물건이 들어있는 모양이구만!] 그리고는 요도(腰刀)를 꺼내들고 하수오를 찍으려 했다. 주인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의 체면도 좀 생각은 해야지!] 그러면서 재빨리 조제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팔목을 찍었다. 조제현은 일순 놀랐으나 웃으며 응수했다. [어허, 알고 보니 무공을 아는 집안이구만!] 그러면서 요도를 휘둘러 손목을 베려 했다. 주인은 물러나지 않고 '흥!' 냉소를 하면서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 초식을 펼쳐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직접 칼날을 움켜잡았다. 조제현은 이 사람의 무공이 이처럼 고강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라 흠칫 놀라 손목을 비틀자 칼날이 약간 기울어졌다. 동시에 약방 주인이 칼을 튕기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중지(中指)에 끼였다. 조제현은 손목이 시큰거리며 마비가 되어 하마터면 요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주인은 그 일 초가 허사로 돌아가자 기세를 늦추지 않고 조제현의 가슴을 향해 쌍장(雙掌)을 들이쳤다. 조제현의 무공은 그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 차이가 많았다. 조제현이 방비를 못하고 일장에 얻어 맞으려는 순간, 장강년은 요도를 빼들고 주인의 등 뒤로 몸을 날렸다. 주인은 욕을 했다. [더러운 녀석들! 둘이서 협공을 하다니, 그래 강호의 규칙도 모른단 말이냐?] 장강년이 웃으며 말했다. [어전시위와 강호의 규칙을 논하다니 정말 얼빠진 놈이구만!] 잠시 후, 조제현도 요도를 빼들고 달려들었다. 세 사람은 진열대 밖에서 한바탕 싸웠다. 위소보는 슬금슬금 한쪽 구석으로 가서 무쇠도 벨 수 있다는 비수를 살그머니 빼들고 사람들이 자기를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인형 하수오를 베어 보았다. 순간 인형 하수오는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러고 보니 하수오는 무슨 놈의 하수오란 말인가? 그것은 원래 파초(芭蕉) 뿌리로 조각해 만든 가짜 하수오였다. 때문에 여자의 유방과 남자 생식기가 실물처럼 모두 완벽해 보였던 것이다. 몸통의 털은 도자기 조각으로 긁어 털이 일게 만들었고, 윗부분의 싹과 아랫부분 줄기는 철사로 갈고리를 만들어 위로부터 아래로 꿰어내 머리와 다리 형상을 갖추게 한 것이었다. 이런 속임수가 있어 주인은 그 하수오를 잘라 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놈, 이게 무슨 하수오냐? 썩을 놈이 개수작을 피웠구나!) 위소보는 자고로 자신의 속임수 재간을 자부해 왔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리어 자신이 당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그는 비수로 가짜 하수오를 쪼각쪼각 난도질해 약방 주인에게 내던지며 욕을 퍼부었다. [옜다, 네 에미에게 줄 하수오! 옜다, 네 에미에게 줄 파초뿌리!] 주인은 혼자서 둘을 상대하며 가까스로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암기(暗器)같은 물건이 날아와 이리저리 후려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에 잡히는 무기는 고사하고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일순 그는 집중력을 잃는 바람에 수세에 몰렸다. 조제현과 장강년은 어전시위라는 신분을 빌어 자고로 약한 자는 업수이 여기고 강한 자에게는 벌벌 떠는 족속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세를 점하자 요도를 마구 휘두르며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다. 주인은 꼼짝 못하고 포위되었다. 주인은 성이 나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에잇 빌어먹을 녀석들! 요 미꾸라지 같은 녀석까지 와서 이 어르신을 집적댄단 말이냐?] 돌연 그는 안색이 붉어지는 것이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조제현은 그가 매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칼로 얼굴을 내리찍었다. 주인의 엄지손가락과 중지(中指)가 칼날을 향해 내뻗는 듯싶더니 부지불식간에 조제현의 요도는 튕겨오르며 허공으로 날았다. 위소보는 싸우면 태평가나 부를 사람이었다. 하수오를 짓부수는 데는 우쭐했지만 시퍼런 칼날이 웅웅거리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무공으로는 피하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주인이 진기를 끌어올려 조제현의 륑겨 날아오른 요도를 향해 장력을 발출하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요도는 위소보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위소보는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아이쿠! 엄마!] 그래도 보의를 입은 탓에 겨우 목숨만은 건질 수가 있었다. 장강년과 조제현은 경황실색하여 쌍쌍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인은 쏜살같이 그들을 스쳐지나 넘어진 위소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나는 이 녀석을 죽여 버리겠다!] 장강년과 조제현은 위소보가 잘못될까 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위소보는 급히 외쳤다. [두 형님, 이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는 주인에게 능청을 부렸다. [어르신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면 꺼리지 말고 하십시오. 누가 보더라도 이렇게 낭패한 몰골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지 않겠습니까?] 주인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나의 천 년 묵은 하수오를 짓밟았는데 너희들이 더 할 말이 있단 말이냐?] 위소보는 곧장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사면 되잖소? 아무쪼록 손을 좀 놓아 주시구려. 내 배상을 해 드릴 테니 말이오.] 주인은 말했다. [그것은 파초 뿌리로 만든 것 아닌가?! 그걸 갖다 뭘 하겠나?] 위소보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어느 망할 놈이 파초 뿌리라고 그럽디까? 파초 뿌리가 어디 그런가? 진짜 사람 모양을 갖춘 보기 드문 인형 하수오지!] 주인은 냉소하며 말했다. [흥, 내가 무엇 때문에 네 손에 쉽게 쥐어 줄 듯싶으냐?] 위소보는 어떻든 주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기 위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다르지요. 주인 어르신께서 가지시겠다 해도 달리 도리가 없지만 어떻게 보면 강압적으로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누가 차후에 그 일을 들먹인다면 귀하의 명성에 손상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시면 내가 마음이 있어 사는 것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게 아닙니까?] 주인은 좀 생각하다 말했다. [어쨌든 네 놈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게다!] 그리고는 위소보를 놓아 주었다. 위소보는 천천히 일어나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주인 어르신의 완력은 참 대단하십니다.] 위소보는 말을 하며 암암리에 비수를 옷소매 속에 넣고 한 장의 돈으로 가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훔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어 순식간에 손을 썼기 때문에 주인은 두 눈을 멀뚱히 뜨고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이것은 일만 냥인데 우선 받으시오. 하지만 아직도 많이 모자라지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혹시 두 형님께서 가진 돈이 있으시다면 먼저 드리면 어떨까요?] 위소보가 조제현과 장강년을 부르자 주인은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눈길이 갔다. 순간 위소보는 신행백변 수법으로 물고기처럼 매끄럽게 그의 팔굽 밑으로 빠져나갔다. 주인은 놀라며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하던 차에 비수가 자신의 등 뒤에 드리워진 느낌을 받았다. 팔꿈치로 치려고 했으나 이미 뒷허리가 따끔따끔 아파왔다. 비수는 이미 그의 옷을 헤집고 들어온 상태였다. 위소보는 욕지거리를 했다. [제기랄 놈, 이 비수는 아주 잘 드는데 어디 한 번 맛 좀 보지?] 주인은 허리가 서늘한 감을 느끼고 위소보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주의를 게을리 해 기회를 준것에 대해 후회했다. 조제현은 곧장 칼을 들고 장강년과 함께 다가와 한 자루는 목에 대고 한 자루는 아랫배에 들이댔다. 장강년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놈과 더 입을 놀릴 필요 없이 이 놈의 배부터 헤집어 봅시다. 도대체 내장값이 얼마나 될는지 말입니다.] 위소보는 그러다가 괜스레 사람을 죽여 번거로운 일이 만들지 몰라 칼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주인 옆에 있는 상 위로 풀쩍 뛰어올라 앉아 비수로 심심풀이 삼아 상을 상처냈다. 그 상은 유자나무로 만든 것으로 약방 주인의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 오던 보물로 매우 단단했지만 위소보는 두부 베듯 쓱쓱 오려냈다. 위소보는 장난삼아 칼로 상을 도려내며 수작을 부렸다. [좀 보란 말이야. 이 비수가 어떤가? 한 번 시험해 보겠나?] 주인은 노기등등하여 눈을 감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상에서 뛰어내려 비수를 그의 눈앞에서 휘둘렀다. 주인은 이를 악물고 있을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위소보는 을러댔다. [흥, 시답지 않게! 별 볼일 없는 놈이 대담한 척하는구만. 요 놈, 맛 좀 봐야겠군!] 그러면서 그를 찌르려 했다. 돌연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신룡편은 신비하고 신비로워라!] 위소보는 흠칫하며 생각했다. (이크, 안 되겠구나. 적수가 또 찾아왔군!) 주인은 눈을 번쩍 치뜨며 받아 외웠다. [위로는 천자를 쳐부수고, 아래로는 신하를 쳐부수자!] 그제서야 위소보는 이 놈이 개방 인물임을 깨닫고 생각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의 운수가 사나워 주사위를 던졌는데 요이삼이 나오다니 본전도 못 찾겠구나!) 그러자 문 밖에서 응대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하의 불공평한 일 모조리 쓸어버리자.] 주인이 이 말에 선뜻 대답을 못하자 위소보가 곧바로 그 말을 받아 응대했다. [개방의 변절자도 쳐부수자!] 이러자 주인이 당황해 하며 낮은 소리로 위소보에게 물었다. [알고보니 귀하도 한집안 사람이구만. 그럼 물어보겠소이다. 귀문중에서는 향을 몇 대 머리에 이고, 몇 대를 밟으며, 몇 대를 손에 듭니까?] 위소보는 비수를 흔들며 말했다. [그것도 모르나? 열 대를 이고, 열두 대를 밟고, 열한 대를 쥐고 있지!] 이것은 가문을 식별하는 비밀이었다. 위소보는 매우 총명했다. 문아는 전에 개방의 규율에 대해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문아는 개방 중에 자기가 열한 번째라고 알려주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그래도 그녀보다 한 벌 높다고는 하지 말아야지. 그저 문아와 같은 벌수라고 해야 문아에게 체면이 서지.) 주인은 놀라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개방에서 제일 높은 벌수가 열번째인데 이렇게 어린 사람의 지위가 이렇게 높은 줄은 생각지 못했구나!) 그러나 개방 중에서는 역대로 어린 사람 가운데 영재(英才)들이 나왔으니 주인도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주인은 장강년, 조제현에게 눈길이 갔다가 다시 위소보에게 입을 열었다. [대사숙(人師淑)!....] 위소보는 속으로 웃었다. (내가 참 그럴 듯하게 주워섬겼구나. 오늘 요 돌팔이 약장사 놈에게 혼쭐을 내줘야겠구나.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개방에서 으뜸이라고 했을 텐데. 그러면 요 놈은 나의 고손자뻘이 될 것 아닌가?) 위소보는 장, 조 두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급히 칼을 칼집에 꽂았다. 위소보는 주인에게 말했다. [이 두 분은 남이 아니니, 할 말이 있으면 하게나!] 주인은 말했다. [소인은 이자안(李子安)이라 하옵니다. 대사숙께서 오신 줄 모르고 커다란 죄를 졌습니다. 대사숙께서 처벌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재빨리 무릎을 끓고 절을 올렸다. 위소보는 훌쩍 상 위로 뛰어올라 앉으며 말했다. [이자안! 네 죄를 네가 알겠지?] 이자안은 말했다. [소인은, 본 개방의 제7조 규정을 위반하였습니다. 소인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위소보는 원래 요 놈을 혼내어 주려고 작심했는데, 때마침 제7조 규정이니 뭐니까지 들먹이자 얼른 물었다. [네가 안다고 하니, 그 제7조 규정이 뭔지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 이자안은 그만 이마에 식은땀이 돋아나며 겨우 얼버무리듯 읊조렸다. [개방 제자는 인을 우선으로 한다(仁爲先). 밥을 빌어먹을지언정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방은 강호에서 매우 커다란 문파였다. 개방은 창립 시에 그 규율이 대단히 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규율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자안 같은 벌수가 낮은 사람이 위소보 같은 사람을 만난 경우, 상대가 눈을 부라리며 개방의 규정대로 처벌한다면 아주 엄단할 수도 있었다. 위소보는 냉소하며 말했다. [개방은 비록 밥을 빌어먹지만 남을 돕는다 했다. 그래 파초 뿌리를 하수오로 속이다니 그야말로 강호의 사기꾼이 아니겠느냐? 개방의 커다란 명성을 네 놈 같은 망나니들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자안은 무릎을 끓고 조아렸다. [소인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어르신의 처벌을 바라나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궁리했다. (제기랄, 이 개똥 같은 개방에 또 어떤 뚱딴지 같은 규정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요 놈을 어떻게 처단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거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밥 한 그릇 주십시오....] 위소보는 그 소리가 귀에 익었지만 어디에서 들었는지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더러운 거지 놈이 저승에 갔는데도 또 와서 이렇게 애를 먹일 작정인가? 거, 참 재수 없구나!) 이자안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위소보는 이내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이자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말이 그렇지. 처벌은 무슨 놈의 처벌이냐? 내가 자네를 그렇게 대할 수야 없지. 처벌이란 말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마라!] 이자안은 살 길을 찾게 되자 기쁜 표정으로 넙쭉 절을 하고는 일어나 공손히 여쭈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대사숙! 가솔(家率)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니 소인에게 상등 인삼이 있사은데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또 파초뿌릴 게 아닌가?] 이자안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아니, 아니! 이번에는 진짜이옵니다.] 이자안은 황송한 마음으로 창고에 가서 인삼을 가져 오려고 하는데 위소보가 그를 막고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저 밖에 있는 친구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니 일단 저 친구를 보내고 나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세.] 이자안은 원래 개방 중의 각 파벌간에 다툼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도 밖에 있는 사람과는 의가 좋지 않아 그러는 줄로 생각했다. 이자안은 마치 성지를 받은 듯이 '넷!' 대답을 하며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 위소보는 넌지시 일렀다. [저 친구에게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얘기를 하지 말게나. 괜히 난 줄 알고 들어와 절을 하며 이러쿵저러쿵 번거롭게 할지 모르니까!] 이자안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대사숙께서 조용한 것을 즐기는 줄 알 만합니다.] 주인이 나간 다음, 장강년은 나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작 어르신, 언제부터 개방의 방주가 되셨소이까? 정말 축하할 일입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지. 저 속없는 녀석이 이 어르신을 할애비로 모시겠다는데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는가?] 이렇게 말하며 웃자 장강년과 조제현도 함께 웃었다. 잠시 후 이자안이 들어왔다. 그는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는 기색이 보이자 시름이 놓였다. 그는 약재 창고에서 상등 인삼, 복령, 하수오를 가득 안고 들어왔다. 위소보는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인지라 이 보약들을 보자 황궁에 있는 것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자그마한 고을의 약방에서는 얻기 어려운 보약임을 알 수 있었다. 위소보는 이자안에게 짐짓 사양의 말을 했다. [너무 폐를 끼쳐 면목이 없구만!] 그리고는 되는 대로 은표(銀票) 두 장을 꺼냈다. 일천 냥은 족히 되는 돈이었다. 약방 주인은 매우 기뻐하며 연신 인사를 하며 문밖까지 마중을 했다. 위소보는 약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 어르신과 문아 사이의 일을 이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그리고는 넌지시 화제를 돌려 장강년과 조제현에게 물었다. [당신 두 분과 다 총관께서는 그 날 양주에서 어떻게 되었소?] 조제현이 말했다. [모든 게 위작 나으리 덕분이지요. 그날 우리는 몽환약에 중독되어 모두들 쓰러졌는데, 난데없이 일곱 명의 호걸들이 나타나 위작 나으리의 친구라고 하면서 저희들을 구해 주었지요.]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어디서 온 일곱 명의 호걸들일까? 아하! 일곱 부인이 구해 주었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게요?] 장강년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위작 나으리! 어서 북경으로 돌아갑시다. 위작 나으리가 돌아가시지 않으면 우리 어전시위들은 모두 목이 날아갈 판입니다.] 위소보는 놀라며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오? 북경에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났단 말이오?] 조제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잘 모릅니다. 황상께서는 성을 내며 '어전시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위작 나으리의 종적도 모르는 시위들을 둬서 뭣 하겠는가?'라고 했지요. 다 총관도 꾸중을 들었소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큰처남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그는 매우 격동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소인을 그처럼 아껴 주시니 그야말로....] 그는 성어 한 마디를 생각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익히 알고 있던 말로 얼버무렸다. [황제의 은혜는 가없이 넓구려.] 장강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 폐하의 은혜가 너에게 넓다면 우리에게는 좁겠구나?)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재촉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가 닥달을 받지 않게 어서 북경으로 돌아갑시다. 다 충관님께서도 위작 나으리를 만나면 꼭 모시고 오라고 부탁했소이다. 위작 나으리, 우리 사정을 좀 봐 주십시오.] 위보소는 약간 미안한 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과 다 총관께서 이처럼 염려하시는데 북경에 가서 반드시 한상 거나하게 차리고 사죄하겠소이다.] 장강년과 조제현은 위보소가 손만 펼치면 정말 크게 논다는 것을 알고 몹시 기뻐하며 재빨리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위작 어르신, 감사합니다.] 위소보는 또 무엇인가 근심되어 속으로 소리쳤다. (좋지 않군! 천지회에서 또 황제를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는 않을지? 그 놈들은 사람을 못 살게 구니까. 혹시 황상께서는 또 천지회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고 천지회에서는 소황제를 죽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내 중간에 끼어서 어쩌란 말인가, 정말 답답한 노릇이군! 차라리 북경에 가서 처자식들이나 빼내 삼십육계하는 것이 상수겠다!) 위소보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또다시 물었다. [황상께서 급히 나를 북경으로 부르시는 연유는 도대체 무엇이오?] 장강년이 그 말을 받았다. [우리 같은 사람이 어찌 조정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조제현이 그 말을 이어 받았다. [소인이 어렴픗이 알고 있소이다.] [동생, 어서 말해 보게나.] 조제현은 약간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었다. [그 날 황상께서는 태화전에서 어전 회의를 열었지요. 때마침 제가 당직이라 한두 마디 얻어 들었는데 황상의 뜻인 즉, 황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지요. 황하가 늘 범람하니 기름진 옥토가 물에 잠겨 백성들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닌다고 하셨소이다.] 장강년은 하남 사람으로 기실 자기의 고향이 황하의 재해를 제일 심하게 받는지라 아는 척을 하며 나섰다. [그렇구 말구요. 강희 15년 10월, 우리 하남 남양은 황하가 넘쳐 흘러 주변 5백 리의 밭과 집이 모조리 물에 잠겨 몇십만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집안이 쑥밭이 되었지요. 그 참상이야.... 정말 허어, 참!] 위소보가 말했다. [황상은 '조생어탕(島生魚湯)'이시며 백성을 사랑하는 진명천자(眞命天子)이시니 자연히 현명한 방법을 강구해 황하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도괘착고(倒桂着苦:극도의 곤경)'를 해결해 줄 것이오.] 그가 말한 성어 가운데 열 마디 중 아흡 마디는 틀리게 말했다. '조생어탕'은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 해야 맞고, '도괘착고'는 '도현지고(倒縣之苦)'라 해야 맞는다. 마침 장, 조 두 시위 역시 무식하기 때문에 위소보처럼 머릿속에 든 먹물이 없어 그의 말이 틀려도 바로 잡지 못했다. 조제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위작 나으리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소이다. 확상께서는 바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기실 그의 아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찌 황제 자신이 자기를 '요순우탕'이라 불렀겠는가? 남들이 그 내막을 까발리지 않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조제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후에 황상께서는 왕공 대신들과 황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숙의했지요. 어떤 사람은 막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높이 둑을 쌓자고 하고, 어떤 이는 위로부터 다스리자 하고, 또 어떤 이는 아래부터 다스리자고 했지요.... 그들은 황상 앞에서 옥신각신했지요. 소인은 멀리 떨어져 있어 잘 듣지는 못했지요.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요. 대학사 색액도(索額圖)와 대신 우성룡(于成龍)이 얼굴을 붉히며 논쟁했는데 황상께서 말리셨답니다.] 위소보는 색액도란 이름을 듣고 급히 물었다. [색 큰형님은 다 무고하시오?] 장강년이 말했다. [황상께서는 색 형을 등용하여 모두들 황태자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공사(公事)가 바쁜지라 우리들은 만나기가 어렵지요.] (색 형은 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기회가 있으면 많이 도와줘야겠구나.) 위소보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그 우가라는 사람과 논쟁을 했다는데 색 형이 이겼소?] 조제현이 말했다. [아마 색 어르신이 진 것 같았소이다. 조정에서는 후에 흠차(欽差)를 파견하고 색 어르신이 아끼시던 치하총독(治河總督) 근보(斬輔)가 파면당하고 북경으로 잡혀 갔지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우성룡을 새로운 치하충독으로 파견했다 하더이다. 우리가 북경을 떠날 때 그 우성룡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꼴이 매우 득의양양 했지요.] 위소보는 발을 구르며 욕을 했다. [우성룡이란 인간은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색 형과 감히 맞서겠다고 한단 말인가? 두고 보자. 내가 북경에 가면 한 번 단단히 버릇을 고쳐놓고 말리라.] 어전시위가 제일 신바람나 하는 일은 위소보와 함께 남을 골탕먹이는 일이었다. 과거 대만의 투항한 장군 정극상을 혼내 주고 백만 냥을 얻어 대부분 시위들이 나눠 가졌다. 위소보의 말을 듣고 조제힌은 신이 나서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 북경으로 가면 곧장 우성룡을 찾아갑시다.] 장강년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조제현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장 형, 우리 형제들이 위작 나으리를 만났으면 응당 기뻐해야지 무엇 때문에 한숨을 쉬는 게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시위가 한숨을 쉬는 것은 아주 보기 드문 일이지요.] 장강년이 입을 열었다. [조 동생 말이 맞소이다. 위작 나으리를 만났으니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하지요. 하지만 물을 다스리는 일과 치하총독 근보 어르신 얘기만 들으면 나는 한숨부터 나온다오.] 조제현이 물었다. [그건 무슨 까닭이오?] 장강년이 짐짓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근보 어르신은 8년 동안이나 황하를 다스렸지만, 아주 청렴결백하여 황하 인근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용왕(龍王)님이라고 불렀지요. 물을 다스리면서도 돈은 한 푼도 달라고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런 공신(功臣)이 죄인으로 몰렸으니....] 위소보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그런단 말이오? 장 형, 걱정 마시구려. 내가 황제를 만나면 얘기하겠소이다!] 장강년은 그 자리에서 위소보에게 거듭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저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위작 어르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뭐 그렇게까지 할 거 있소?] 위소보는 자기가 백성들을 위해 걱정하는 말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뿌듯했다. 세 사람은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위소보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쩌다 발길이 술집으로 향하게 됐지?] 조제현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시위노릇 하는 사람들은 위작 나으리를 보면 뱃속에서 술벌레가 근질근질 거리지요. 좀 마음이 허전해서 위작 나으리를 모시고 술집으로 온 거지요.] 위소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 한 잔 통쾌하게 마십시다!] 그 술집은 크지 않았지만 아주 깨끗하고 조용했다. 점원이 이들을 이충 상등 좌석으로 안내하여 세 사람은 술을 마셨다. 위소보는 술 재간은 별로 없었지만 장, 조 두 사람은 술꾼들이었다. 한참 마시고 나니 약간 얼큰해졌다. 순간 아랫충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거지를 가엾이 여기시고 밥 한 그릇만 주세요!] 그 목소리를 들으니 바로 이자안의 약국 문 어귀에서 구걸하던 거지의 목소리 같았다. 위소보는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였다. 일어서서 창문으로 내려다 보고는 흠칫 놀랐다. 틀림없이 폐병쟁이 어린 거지였다. 위소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많았다. 그는 생각했다. (저 놈이 죽은 것을 내가 직접 보지 않았던가? 오독침에 중독되어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혹시 혼백이 와서 내 목숨을 빼앗으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저 놈을 죽이지는 않았어. 죽인 사람을 찾으려면 문아를 찾아야지, 왜 이렇게 나를 따라다닌단 말인가? 어쨌든 이런 대낮에 귀신이 거리를 쏘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위소보를 보더니 올려보고 소리쳤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거지를 가엾이 여기시어 밥 한 그릇만 주세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죽일 놈, 네 놈이 밥을 구걸하는 걸 보니 분명 귀신은 아니구나. 진짜 귀신이라면 가난한 귀신일 게고, 사흘을 꼬박 굶은 아귀(餓鬼)일 게다. 이 어르신에게는 돈이 많으니 도사(道士)를 청해다가 혼백을 잘 위로하게 해야지. 이 놈이 이렇게 번번이 시끄럽게 굴면 좋은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문아는 아직도 내상이 완쾌되지 않았는데 이 놈이 나를 따라 문아를 찾아가면 그녀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위소보가 창문을 내다보며 불렀다. [거지야, 여기로 올라 오거라! 내가 밥을 줄 테니.] 어린 거지는 인사를 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그러나 돌연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 누가 위소보외 어깨를 툭 쳤는데 그러고 보니 어린 거지는 이미 술상 옆에 앉아 있었다. 위소보는 놀라며 말했다. [내가 정말 대낮에 귀신을 만났단 말인가?] 장, 조 두 사람은 위소보와 술 마시기를 기다렸는데 돌연 어린 거지가 턱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장강년이 노하여 소리쳤다. [어디서 굴러먹던 거지길래 죽으라고 위작 나으리를 따라다니며 성화를 부리는 게냐?] 그러면서 다짜고짜 거지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거지는 겁에 질려 오금을 펴지 못하면서도 머리를 약간 피하자 장강년의 주먹은 빗나가고 말았다. 어린 거지는 말했다. [여러분들, 나는 이 나으리께서....캑! 캑! 오라고 해서 왔소이다. 캑! 캑!] 장, 조 두 사람은 위소보가 항상 보통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엉뚱한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멀뚱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위소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장 형, 조 형 이 사람은 개방에서 나와 가까운 친구라오. 서로 인사를 하시구려.] 장강년은 그 폐병쟁이 어린 거지를 흘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그렇게 하지요.] 위소보는 술과 젓가락을 더 가져 오라고 소리쳤다. 사환은 병색이 완연한 몰골의 어린 거지가 그들과 한자리에 있는것을 보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장, 조 두 사람이 관복(官服) 을 입은 것을 보고는 차마 묻지 못하고 술잔과 젓가락을 놓고 나갔다. 위소보가 젓가락을 쥐고 권했다. [어서, 어서....] 그러나 어린 거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위소보가 안주를 집어 먹자 그 거지도 따라서 집어 먹었다. 그러나 술만은 세 사람이 아무리 권해도 입에 대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 어린 거지의 속셈을 알만 했다. (요 녀석은 아주 약은 놈이군. 술과 안주에 독약이 들었을까 봐 내가 먹어야 자기도 먹는구나. 제기랄 놈, 어디 내 앞에서 몽환약을 먹지 않고 견디나 두고 보자. 그렇지 않으면 내 성을 갈아 네 성을 따라 폐병쟁이 소보거나, 거지 소보라 부르겠다.) 위소보는 안주를 두어 젓가락 집어 먹더니 돌연 몸을 치떨며 혼잣말을 했다. [야, 바람이 부니 쌀쌀하구만!] 그러면서 가서 창문을 닫았다. 제자리에 돌아와 앉자 코가 이상스레 간지러워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비비자 장강년이 물었다. [아니, 위작 나으리 왜 그러십니까? 몸이 불편하신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코가 좀.... 에취! 엣취!] 그는 한참 동안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다가 재채기를 두 번 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말했다. [됐네, 됐어! 술이나 마시게!] 그러자 장강년, 조제현은 마음 놓고 먹고 마셨다. 어린 거지는 위소보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의 거동을 살피다가 여러 사람들이 먹고 마시자 워낙 배가 고픈지라 따라서 먹었다. 그는 매우 꼼꼼한 인물이라 주전자에 어떤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하여 술만은 입에 대지 않고 안주는 위소보가 먹는 것만 따라 먹었다. 위소보는 실컷 먹고 나서 끄윽 하고 트림을 하더니 젓가락을 놓고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술도 다 마셨으니 할 말을 합시다.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따라다니는 게냐?] 어린 거지에게 묻자 어린 거지는 대답했다. [우리 개방에서는 지금 내부를 정돈하는데, 우리는 모두 광명정대한 친구들이니 이 틈을 타서 혼란을 야기시키지 말 것을 권고하나이다.] 위소보는 짐짓 놀란 듯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내부를 정돈한다구? 거 참, 중요한 일이구나. 그런데 혼란을 일으키다니, 그래 우리가 개방 내부를 혼란시켰단 말이냐?] 장강년은 일찌감치 술에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푸념을 했다. [제기랄,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야....혼란은 다 뭐야?] 위소보는 양 팔을 벌리며 말했다. [우리가 혼란을 일으키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어린 거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입을 멨다. [각하께서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시겠다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방의 반역자를 내 놓으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개방에 반역자가 있다니? 정말 큰일 났구만! 그럼 어서 마음대로 찾아보게, 시간을 끌지 말고 어서! 자기 내부외 일을 자신이 정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너희들 내부를 정리한다면 그건 꼴불견이지.] 어린 거지는 안색이 변하여 말했다. [체면을 봐 줄 때 듣는 것이 좋을 거외다. 괜히 고집부리다 후회하지 말기를....!] 위소보는 다시 능청을 떨었다. [후회? 후회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어린 거지는 '흥!'하는 소리와 함께 손으로 위소보를 덥썩 붙잡았다. 위소보는 폐병쟁이 거지의 무공이 고강하기 이를 데 없어 일찌감치부터 주의하여 경계했다. 하지만 늦었다. 그는 위소보의 가슴을 틀어 쥐었다. 위소보는 비명을 내질렀다. [제기랄 요 놈이 사람 죽인다! 장 형, 조 형! 어서, 어서!] 술에 곤드례만드레가 된 그들이 어찌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상에 엎드려 침을 질질 흘리며 쿨쿨 자고 있었다. 위소보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기랄 망할 녀석들! 더러운 시위놈들! 술만 보면 죽을둥살둥 모르고 퍼먹고는 저렇게 자빠진단 말인가?! 이 보시오, 거지 친구. 우리 이러지 말고 말로 하면 안 되나? 군자는 입을 놀리지 손은 쓰지는 않는다고....]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어린 거지는 성난 표정으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더러운 녀석! 캑! 캑! 몽환약을....] 위소보의 가슴을 쥐었던 그의 손도 점점 힘이 빠지더니 이내 땅바닥에 쓰러졌다. 위소보는 흐뭇하여 일어나 힘이 닿는 대로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욕을 했다. [제기랄, 굶다 죽은 귀신같은 놈! 이 어르신이 몽환약을 넣을까 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살피던 놈이 먹기는 왜 먹었냐? 그 주제에 내부를 정리한다구? 이 어르신이 먼저 네 놈들을 정리하겠단 말이다!] 실컷 욕하고 때린 다음 위소보는 비수를 꺼내 어린 거지의 목에서부터 바지 가랑이까지 옷을 쭉 찢었다. 그리고는 또 그를 뒤집어 놓고 또 위로부터 아래로 쭉 찢었다. 이윽고 벌거벗은 알몸뿐이었다. 벗겨 놓고 보니 앙상한 뼈뿐이고, 숨만 할딱할딱거리고 있었다. 위소보는 혼자 중얼거렸다. (요 망할 놈의 폐병쟁이 거지야! 요런 몸으로 무공은 어떻게 배웠단 말이냐? 거 참 이상도 하지!) 위소보는 또다시 그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노끈처럼 만들어 꽁꽁 묶어 상 밑에 놓았다. 위소보는 자기도 우스워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히히, 요 망할 놈! 오늘 혼 좀 나봐라! 네 놈이 깨어나서 이 끈을 풀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릴 거다! 설령 끈을 푼들 어쩌겠느냐? 바지가 없는데. 미안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거라!) 위소보는 무공이 변변치 않은지라 몽환약만큼은 늘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사실은 이러했다. 술좌석에서 위소보가 춥다고 하며 창문을 닫을 때, 몽환약을 이미 품속에 있는 손수건에 뿌렸다. 술좌석에 다시 돌아와 앉을 때, 그는 재채기를 하는 척하면서 몽환약을 음식에다 뿌렸다. 어린 거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위소보를 지켜 봤지만 그 수법만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거지는 술도 마시지 않았고, 또 안주도 위소보가 먹은 것만 먹었는데 어떻게 중독되었단 말인가? 위소보는 이미 개방에서 만든 기약백독(奇藥百毒)도 소용없는 해약을 이미 먹은 것이다. 위소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십팔모(十八摸)'같은 노래를 흥얼흥얼거렸다. 위소보는 어린 거지가 깨어나면 죽었다가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니 요 놈의 무공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니 공연히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이 날 것 같아 아예 그만두기로 작심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거 참, 보기 드문 일이군! 아마도 염라대왕이 요 놈을 보니 귀신보다 더 야위어서 생각 끝에 이 놈을 받지 않고 인간 세상으로 다시 보낸 건 아닐까? 그런데 또 요 놈이 깨어나면 저 끈이 요 자식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세상 모르겠구나. 아들 녀석이 애비를 죽이는 판인데 이 어르신이 저놈한테 죽는다 해도 별로 희한한 일은 아니지. 에라! 다 그만두고 고 앙증맞은 문아나 찾아 목숨이나 구해주자!) 위소보는 누워 있는 세 사람에게 허리를 꾸뻑하고 중얼거렸다. (여러분들, 여기서 푹 한잠 주무십시오. 이 몸은 떠나겠소이다. 누가 먼저 깨어나든 시위들의 무공이 변변치 않으니 이 어린 거지를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또 어린 거지가 이 두 사람을 대하기도 어려울 텐데, 어쨌든 한번 겨루어 보시오!) 위소보는 문어귀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장강년, 조제현의 품속에 각기 은자 이천 냥씩 넣어 주고 그들이 듣건 말건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수고하셨소이다. 이 위작 나으리가 술값 용돈을 주니 받으시오!] 그리고는 또다시 몽환약을 꺼내 어린 거지의 얼굴에 되는 대로 뿌리고 밖으로 문을 걸어 채우고 나섰다. 그가 문을 나서자 술집 사환이 인사를 했다. 위소보는 그에게 돈을 던져주며 말했다. [저 안에 있는 세 사람은 술에 골아떨어졌으니 건드리지 말게. 저들 세 사람들의 성미가 모두 이만저만이 아닌데 괜히 건드렸다가는 낭패를 면치 못할 걸세.] 사환은 받은 돈을 들여다 보고는 묵직하자 속으로 기뻐하며 넙쭉 절을 올렸다. [어르신 걱정 마십시오! 어르신....] 위소보는 보약을 들고 술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거지들이 없어 시름이 놓였다. 그러나 문아가 있던 객점에 들어서니 문아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주인! 주인장!] 주인이 급히 나와 말했다. [손님께서는 무슨 분부가 계시는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이 객방에 있던 아가씨가 어디로 갔나?] 주인이 대답했다. [어르신께서 나가자마자 그 소저는 숙박료를 내고 떠났소이다.] 위소보는 또 물었다. [아가씨가 부탁하고 간 말은 없는가?] 주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 말도 없이 떠났소이다.] 위소보는 욕을 했다. [요 년이 정말 미처 다리도 건너기 전에 다리를 부쉬 버린 격이로구나! 두고 보자! 어르신의 일곱 부인이 너만 못할 줄 아느냐?] 그리고는 곡조를 넣어 흥얼거렸다. [얘들아, 말을 가져오너라! 이 어르신은 북경에 가서 황상을 뵈옵겠다....] 위소보는 손에 들었던 보약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나가 버렸다. 위소보는 개방 사람들을 만날까봐 육로(陸路)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갔다. 이렇게 며칠 걸려 산동(山東) 덕주(德州)에 도착했다. 그는 하루 동안 덕주를 돌며 도박판을 다 돌아보았다. 그러나 양주보다 별로 희한한 것이 없고 재미도 없었다. 수로(水路)는 지겹기 짝이 없어 일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위소보는 정말 갑갑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노잣돈을 주고 이번에는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때는 이미 오후가 되었다. 국도(國道)는 가없이 넓고 평탄하여 마차는 조금도 덜컹거리지 않는 것이 매우 편안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물만 보면 겁을 내니 나는 정말 소백룡(小白龍) 노릇을 헛 했구나. 육로로 오니 이렇게 마음이 상쾌한데!) 위소보가 처음 양주에서 북경으로 갈 때 강호의 호걸 모십팔이 위소보를 대신하여 물에서 그럴 듯하게 솜씨를 보여 주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잘못 알고 위소보에게 '소백룡'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후에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위소보가 정말 신룡교의 백룡사가 되었다. 그는 이 '소백룡'이란 별명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기실 물에서나 육지에서나 그의 무공 재간은 별 볼일 없었다. 위소보는 마차에 앉아 너무도 심심하여 양주 저자거리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흥흥거리다가 또 이쪽저쪽 손으로 주사위를 던지다가 잠이 들었다. 돌연 마차가 흔들거리자 위소보는 깨어났다. 휘장을 들고 밖을 내다 보니 황혼 무렵이었다. 마차는 국도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위소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마부(馬夫)에게 물었다. [마차를 몰 줄을 아오, 모르오?] 마부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채찍을 한 번 후려갈기니 말은 소리치며 냅다 뛰어 내달았다. 위소보는 더욱 불안해져 소리쳤다. [이 사람! 죽지 못해 그러시오?] 마부는 그래도 들은 척 않고 더 빨리 말을 몰았다. 위소보는 뛰어내리려 했지만 너무 빨라 주춤거리며 내리지는 못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가만, 이 마부가 어째 이상한데?) 뒷모습을 봐서는 어전시위 같았다. 위소보는 이상하여 물었다. [마부 양반, 언제 어전시위가 되셨소? 어전시위가 이 어르신을 위해 마차를 몰고 북경으로 가니 내 위풍도 괜찮은 것 같구만!] 위소보는 방심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전시위와 이 어르신이 몇 마디 말을 건네는 거야, 별일 없겠지?)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니 그렇지가 않았다. (어전시위라면 관직 급수로는 이 어르신과는 천지 차이지. 어전시위의 충관 다륭도 이 위소보 위작 나으리를 보면 굽신굽신 하는 판에 누가 감히 이 어르신과 농담을 한단 말인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원수 같으면 몰라도.) 위소보는 살그머니 비수를 꺼내들고 마부의 등허리에 댔다. 비수가 그의 몸에 닿을까말까하는 순간 마부는 채찍 끝으로 뒤를 후려 갈겼다. 둔탁한 음향과 함께 채찍 끝이 마치 사람 손처럼 위소보의 양관(陽關), 유부(愈府), 신봉(神封), 통관(通關), 네 혈도(穴道)를 때렸다. 위소보는 그만 꼼짝달싹 못 하고 내밀었던 팔도 구부리지 못하고 비수도 손에 쥔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오늘 자기가 무공이 정순한 사람을 만나 말을 하려고 해도 입을 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욕을 했다. (이 어르신이 꼭두각시가 되었구나! 나의 두 스승님의 무공은 너무도 허수룩하단 말이야.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만드는 기술은 배워주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마부는 위소보의 혈도를 짚어 놓고 채찍을 휘두르자 말은 더 빨리 달려 어느 새 십 리를 달렸다. 마차는 오솔길을 따라 가다 허름한 관왕묘(關王廟) 앞에 멈추었다. (역자 주:관왕묘는 관제묘라고도 하며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음.) 마부가 마차에서 내려 채찍으로 수레 채를 치자 마치 칼로 찍은 듯이 부러졌다. 위소보는 입을 딱 벌리고 생각했다. (참, 모를 일이군. 이 어르신이 그 고명한 비수로 자른다 해도 한참은 잘라야 할 판인데 어째서 채찍으로 후려갈기자 곧장 끊어질까? 이크! 저 채찍으로 이 어르신의 머리통을 후려친다면 남을 게 뭐 있겠는가?) 마차가 말과 분리돼 떨어지자 위소보도 마차에서 굴러떨어졌다. 말도 굴레를 벗어차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마부는 위소보를 훌쩍 들고 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위소보를 신당(神堂) 앞에 내던지고 자기는 훌쩍 뛰어 중간 상 위에 올라앉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소보! 나를 알아 보겠나?] 위소보는 그 사람을 보자 아주 젊고 예쁘게 생겼으며 얼굴이 익숙한테 어디서 봤던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노형(老兄)의 존성대명이야, 이 강호에서 누군들 모르겠소이까?] 위소보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말도 못 하던 내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아하, 그렇구나. 요 놈 자식이 지극정성으로 이 어르신을 모시고 들어올 때 아마 이 어르신의 혈도를 풀어 놓은 모양이구나.) 마부는 웃을까말까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고저렇고 늘어 놓지 말고 내가 도대체 누군지 말해 봐!] 위소보가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강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소? '진근남을 모르면 영웅호걸이라 자칭해도 영웅이 아니다.' 그리고 또 '눈은 있어도 볼 줄 모른다....] 위소보는 자기 말이 너무나 맞지 않는 것 같아 다시 말을 바꾸었다. [소인은 어르신의 존함을 알고 있지만 혈도를 딱 치니까 머리가 얼떨떨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구려. 그래도 혈도를 풀어 주었으니 망정이지, 더 오래 있었더라면 멍텅구리가 되고 말았을 거외다. 그렇다면 무슨 재미난 일이 있겠습니까?] 마부는 생긋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야, 고 주둥이에다 기름칠도 많이 했구나. 이럴 줄 알았더면. 혈도를 풀어주지 말 걸 그랬네. 멍텅구리가 되게.] 위소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한다 해도 달리 방법이 없지요.] 돌연 그의 머리 속에는 문아가 언뜻 떠올랐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문아와 똑같단 말인가? 위소보는 재빨리 내심 움직이는 바가 있어 소리쳤다. [청아, 나를 살려주시오! 청아, 나를....] 마부가 모자를 벗자 길고 윤기나는 머리채가 드러났다. 당연 청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청아는 웃으며 말했다. [왜 문아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청아를 불렀나요?] 위소보는 한숨을 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크, 다행이구나! 이 어르신이 제대로 맞췄구나. 네가 아무리 남자인 척 가장한다 해도 그 모습이 문아를 꼭 빼닮았지. 그런데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문아가 어찌 너처럼 여귀신 같겠느냐!) 그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나 자신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급한 마음에 세 번이나 '청아, 날 살려주오!' 하고 불렀더니 그만 목숨이 붙어있지 않았소.] 청아가 말했다. [아니, 내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관세음보살인지 알아요?]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어찌 관세음뿐이겠소. 문수보살(文殊菩薩),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 남해용왕(南海龍王), 서천불조(西天佛祖)이지 ....] 돌연 그의 말이 멈춰졌다. 청아가 그의 아혈(啞穴)을 누른 것이었다. 청아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 달콤한 말로 문아나 속여라! 흥, 너희들 일남일녀(一男一女)는 천생연분 한 쌍의 사기꾼이구나. 나는 그런 꾐에 넘어가지 않아! 나는 너의 혀를 잘라 더 이상 달콤한 말을 못 하게 할 테다! 너의 눈을 빼서 더 이상 남의 처자들을 능글맞게 보지 못하게 하고, 너의 검은 마음을 빼서 남의 여자만 생각하는 더러운 생각을 못 하게 할 작정이다!] 청아의 눈은 원한으로 그득했다. 그녀는 위소보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 그의 눈을 찌르려 했다. 위소보는 다급했지만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어르신은 언제나 고운 여자의 꾐에 빠져들어 헤맸는데 이번에는 아까운 목숨까지 고운 여자의 손에 바치는구나!) 청아가 비수를 찌르려는 순간 뒤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허! 개방의 수백 년 쌓아온 커다란 공덕(功德)이 무지한 후손들의 손에 더럽혀지는구나!] 第6章. 천하의 치수(治水)에 대해 논하다 청아는 매우 세심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관왕묘에 들어서면서 주변 안팎을 주의 깊게 살피고 확인했다. 틀림없이 인적이 없음을 확인했는데 갑자기 탄식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녀는 신상(神像) 뒤에 누군가 숨어 있음을 깨달았다. 위소보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자고로 마귀라면 머리통을 처박았을 뿐 아니라 귀신 얘기만 나와도 벌벌 떨었다. 그는 귀신과 마귀는 서로 한통속이라고 여겼다. 그는 청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는 죽을 힘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하늘이시여, 지신(地神)이시여, 관음보살이시여....이 제자 위소보를 구해 주신다면 반드시 사당(祠堂)을 다시 짓고 그대를 금으로 장식하리다.) 청아는 어린 나이었지만 무공은 위소보에 비해 훨씬 뛰어났다. 청아는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경황실색하지 않고 임기응변이 좋았다. 위소보를 찌르려던 비수가 어느 새 방향을 틀어 뒤에 있는 관왕야(關玉爺) 신상으로 날아갔다. 관왕야의 머리는 비수에 맞아 즉시 박살이 나며 먼지가 분분히 피어올랐다. 그녀는 동시에 신룡편으로 머리가 박살난 관왕야 신상을 이리저리 후려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위소보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청아라는 계집은 정말 손놀림이 빠르고 악독하기 그지 없구나. 문아보다 훨씬 났구나.) 청아는 냉소하며 말했다. [누가 감히 내 앞에서 잔꾀를 부린단 말이냐?]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관왕야 신상은 몸체가 마치 칼로 두부 자른 듯 네모 조각으로 되어 우르르 무너졌다. 위소보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저 운수 사나운 관왕야를 칼로 천천히 깎으라면 깎을 수 있겠지만, 저렇게 채찍으로 청아처럼 하기는 어렵지. 그런데 왜 채찍에 맞자마자 부서지지 않고 나중에 부서지는 것일까? 이 어르신은 그 묘리를 잘 모르겠구나.) 위소보는 무공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 청아가 펼치는 신룡편법에 갈무리되어 있는 심오한 내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수법은 하루 이틀에 연성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흙으로 만든 관왕야의 몸은 부서져 뽀얗게 먼지가 이는 가운데 그 뒤에 작달막한 늙은이가 서 있었다. 노인은 수염을 앞가슴까지 드리웠는네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청아는 냉소하며 소리쳤다. [머리를 처박고 꼬리만 내놓는 것이 그래 대장부란 말이냐?] 청아는 채찍을 휘두르며 관왕야를 후려치던 솜씨로 그 늙은이를 이리저리 후려쳤다. 노인은 제자리에 있을 뿐 피하지 않았다. 채찍만이 이리저리 그의 몸을 휘감으며 춤을 추었다. 잠시 후 그 노인의 입에서는 찬사의 말이 터져나왔다. [채찍을 쓰는 수법이 고명하구나!] 채찍에 맞아 볼품이 없게 되었음에도 찬사의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에게는 크나큰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청아는 호승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찌 이런 모욕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느 때든 굴복할 때가 있을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 그 노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맞설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청아는 신룡편법을 모조리 다 펼쳤지만 도리어 채찍이 자기 몸으로 되돌아 칠 뿐 늙은이의 옷에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늙은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안 되겠구먼. 이 늙은이를 긁어주는 격이라오.] 청아는 입술을 깨물고 또다시 사정없이 늙은이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 노인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위소보는 매우 재미있게 생각했다. 만약 아혈을 눌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못된 놈이 못된 놈에게 당한다고, 요 악마 같은 계집은 오늘 임자를 제대로 만났구나!) 청아는 그제야 노인의 무공이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울화를 삭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힐끗 위소보를 보니 그의 표정이 매우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아 번개같이 위소보를 후려치며 노기등등하여 말했다. [어디 네 놈까지 못 때릴 줄 아느냐?] 위소보는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고스라니 얻어맞으며 비명도 내지를 수 없었다. 난데없이 채찍에 얻어맞자 위소보는 흠칫 했다. (아이쿠! 이 위소보는 오늘 저승길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그는 아무 대책없이 맞아 죽을 생각을 하니 원통하고도 무서웠다. 혈도를 짚어 놓아 눈도 감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로서는 멀뚱하니 두 눈을 뜨고 머리통이 박살나는 것을 보며 죽을 수밖에 없었다. 청아가 또다시 위소보의 이마를 내리치려 할 때, 채찍이 갑자기 자기 눈앞에서 정지하더니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누가 혈도를 짚어 놓았는지 청아도 자기처럼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이와 달리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던 위소보는 무슨 영문인지 손발이 자유롭고 말도 할 수 있었다. 위소보는 너무나 기뻐 팔짝팔짝 뛰며 소리쳤다. [요 더러운 년! 너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구나!] 그는 곰곰이 추측을 해 보았다. (아마도 저 늙은이가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상등 내공으로 저 여마두(女魔頭) 같은 계집의 혈도를 눌러 놓고 나의 혈도를 풀어준 것이로구나.) 격산타우는 벽공장(劈空掌)과 비슷한 내공이다. 위소보는 이전에 스승 진근남이 그 수법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위소보는 내심 청아의 뺨을 후려갈겨 그녀가 펄펄 뛰는 모습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감히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위소보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추고 입을 열었다. [소인의 목숨을 구해 주신 어르신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위소보는 염라대왕전에 가 있었을 겁니다.] 노인은 위소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젊은이, 왜 나에게 이름을 묻지 않는 겐가?]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름을 알리고 싶으시다면 묻기 전에 알려 주시겠지요. 어르신이 알리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면 제가 물어보았자 무슨소용이 있겠습니까? 톡 까놓고 말해 어르신이 아무개라고 속인들 제가 어디 가서 알아내겠습니까?] 늙은이가 말했다. [젊은이는 정말 솔직하구만! 관청에 얼마나 오래 있었나? 나는 황하 연안을 떠돌아다니며 부질없는 일들을 많이 했지. 그래도 강호의 친구들은 나를 대접하여 황룡대협(黃龍大俠)이라 부른다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황룡대협? 나는 강호에서 소백룡(小白龍)이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거 참, 잘 됐군! 하나는 황룡이고 하나는 백룡이니, 우리 형제는 정말 기막힌 한 쌍이군. 두 영웅호걸이 서로 싸우면 쌍방이 다 망한다 했지만 두 용이 싸울지, 안 싸울지는 모르는 바가 아닌가.) 위소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인사를 했다. [어르신, 소인은 강호의 견식도 하찮기 짝이 없습니다. 황룡대협의 존성대명조차 모른다고 소인을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오. 소인은 단지 어르신께서 저의 목숨을 구해 주셔서 고맙게만 생각할 따름입니다.] 위소보는 거짓 없이 말했다. 황룡대협은 매우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강호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많이 듣던 이름이라고 떠받들지만 기실은 다 헛소리지. 내 자신도 내 이름을 잘 모르는데 무슨 귀에 쟁쟁하게 들었다 할 게 있단 말인가? 젊은이, 내 말이 틀린가? 이렇게 말하면 자네도 기삐할 거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뭘 그리 대단할 게 있단 말이냐? 이 노인은 꼬리만 내놓고 얼굴은 가리니 자연히 그의 진면목은 알 수 없게 되지, 그래 이런 말로 넘길 작정인가?) 황룡대협은 청아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얘야, 너의 혈도는 내가 짚은 것이 아니니라. 너는 신룡편을 잘쓰기는 하지만 너무 과격하구나. 너의 스승이 '상대방의 내력이 강하면 신룡편의 내력이 오히려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더냐?] 청아가 갑자기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부께서 그녀와 여동생 문아에게 신신당부하던 일이 생각났다. (신룡편은 독특하여 천하대적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강자를 만나면 그 내력이 되돌아와 자기를 치게 된다. 그러니 천번만번 명심하거라!) 사실 청아는 이제 방금 채찍을 쓸 때 전신의 힘을 다해 황룡대협을 후려쳤지만 상대방은 추호의 손상도 받지 않고 오히려 채찍이 되돌아와 자기 혈도까지 눌러 놓았다. 물론 그것은 상관 없지만 신룡편의 내력을 되맞으면 그 독이 뼈에까지 스며들어 뼈가 썩어 문드러지고 죽게 되는데 해독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황룡대협은 흥! 하고 말했다. [계집애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찍은 격이니, 거 무슨 달리 방법이 있겠는가?] 위소보는 속으로 매우 통쾌했다. (요 흉악한 년, 오늘 제대로 걸렸구나!) 그러나 또한 청아의 기죽어 나약한 모습을 보고는 측은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얌전한 아가씨가 여기서 죽는다면 너무나 애석한 일이지. 차라리 양주 여춘원에 보내 기생질이나 시키면 몰려드는 사나이들도 적지 않을 테고 돈도 톡톡히 벌 텐데.) [어르신께서는 저 아가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좀 선심을 쓰셔서 목숨이나 살려주십시오.] 청아의 눈에서는 감격의 빛이 어렸다. 황룡대협은 위소보의 더러운 심사는 눈치 채지 못하고 되려 칭찬하며 말했다. [그녀가 자네를 그렇게 대했는데 도리어 그녀의 사정을 봐 달라고 하다니, 정말 마음이 어질고 넓구만!] 황룡대협은 위소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죄야 스스로 저지른 것이니 할 수 없지. 위 동생, 우리는 할 일이 있으니 떠나세.] 위소보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몸은 이미 허공에 떠올랐고 저도 모르게 황룡대협을 따라 훨훨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위소보는 황룡대협에게 들리어 삽시간에 십여 리나 왔다.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이 무공은 신행백변보다 훨씬 났구나! 신행백변은 죽어라 하고 숨이 차게 달아나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남에게 추격을 받아야 하지. 그러나 이 무공을 배우면 달아나기가 편리하겠는 걸. 이 괴상한 황룡 씨가 가르쳐 줄는지 모르겠구나?) [황룡대협 어르신, 어르신의 경공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가 대단하다 그러는가? 강호 무림 가운데 무공을 놓고 말한다면 그 누가 천지회의 진 총타주와 구난사태, 그 두 분과 비길 수 있겠나?]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노인의 말투로 미루어 봐서는 아마도 나의 신분과 내력을 아는 것 같고, 또 나의 두 스승을 아주 숭배하는 것 같구나. 아예 나를 졸장부라 하기 전에 우선 나의 신분을 어렴풋이나마 알려야겠다.) 위소보는 놀란 시늉을 하면서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 알고 보니 어르신은 소인의 두 분 스승님의 옛친구시군요. 철 모르는 소인이 실례 많았습니다.] 황룡대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진근남을 모르면 영웅호걸이라 자처해도 영웅이 아니지, 또 어찌 감히 진 총타주나 구난사태와 같은 넓으신 안면을 만나볼 수가 있겠나?] [저희 두 스승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무공이라는 도(道)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우물 밖에 하늘이 있거늘 자기밖에 없다고 너무 뽐내지 말라'고 하셨고, 또 무슨 '척(尺), 촌(寸)이 길고, 짧고'를 수없이 얘기했지만 소인은 글을 모르니 그 도리를 알 수가 없습죠.] 황룡대협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것은 '자도 모자랄 때 있고, 치도 넉넉할 때 있다'는 말이네.] 위소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정말 저의 두 분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웅은 틀림없이 모두 똑같지요. 정말 이 소인이...] 황룡대협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위 동생, 말끝마다 어르신이라 부르지 말게나. 이 몸이 하릴없이 몇 살 더 먹기는 했지. 위 동생이 나를 어떻게 볼는지 모르겠지만 큰형이라고 부르게나.]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도 이 어르신을 동생이라 부르는데 나보고 영감쟁이를 큰형이라고 부르라고? 어림 없지. 늙어 죽어가는 얼굴에 금칠하는 격이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동의했다. [큰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동생은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그럼 큰형님! 이 경공술은 배우기가 힘든가요?] 황룡대협이 말했다. [이것은 경공제종술(經功提從術)인데 배우자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 동생의 지금 자질로 봐서는 십 년쯤 하면 할 수 있을 것일세.] 위소보는 어떤 무공이든 힘이 드는 것이라면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두 스승이 모두 무림에서는 출중한 무공 대사이지만 이 제자만은 무공이 형편 없었다. 위소보는 황룡대협의 말을 듣고 묵묵히 있었다. 황룡대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 그럼 우리 시간이 날 때 같이 해보기로 하세. 그런데 지금은 매우 큰일이 있는데 동생이 좀 해줘야겠네!] 황룡대협은 위소보의 손을 잡고 어느 커다란 집의 뜨락 옆에 왔다. 뜨락 주위에는 병정(兵丁)들이 빼곡이 서 있었는데, 캄캄한 밤이었지만 총칼이 번쩍거리고 경계가 심했다. 위소보는 매우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조정의 병정들이라 해도 이 어르신의 대본영(大本營) 아닌가? 황룡대협이고 백룡대협이고 너희들이 어떻든 간에 이 어르신은 대본영에 돌아왔으니 내 말이면 그만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어르신은 너희들의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칠 줄 알아라.) 황룡대협은 위소보를 끌고 뜨락 밖의 나무 밑으로 피하면서 돌연 암기를 호형(弧形)으로 날려 보냈다. 세찬 파공성(破空聲)이 일자 병정들은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황룡대협은 그 틈을 타서 위소보의 등허리를 잡고 성벽으로 올랐다. 성벽에서 발끝으로 살짝 솟구쳐 두 사람은 마치 붕새가 날 듯 십여 장 밖에 있는 그 뜰 안에서 가장 높은 집의 지붕에 가서 멈추었다. 두 사람이 신형을 바로잡기도 전에 돌연 지붕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웬 놈이냐? 게 섰거랏!] 황룡대협은 다짜고짜 발끝으로 기와 조각을 그 사람에게 걷어차 쏘아냈다. 순간 그 자는 초라한 비명을 내지르며 지붕에 쓰러졌다. 그는 혈도가 짚힌 것이다. 황룡대협은 청아가 관왕묘에서 던진 비수를 위소보의 손에 쥐어주며 오른발로 지붕을 밟자 '와르르!' 하는 소리가 나더니 지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황룡대협은 위소보를 구멍으로 밀어 넣으면서 '위 동생, 몸조심하구려.' 하고는 신형을 휙 움직이더니 어느덧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 위소보는 비명을 내지르며 굴러 떨어졌다. 그 집은 매우 높았다. 위소보가 허공에서 바둥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공교롭게도 어느 관원(官員)의 품안으로 떨어졌다. 그 때 손에 쥔 비수가 곧바로 한 폭의 비단 같은 휘장에 걸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관원은 놀라 넘어질 뻔하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붙잡아랏!] 위소보는 땅바닥에 쓰러져 어리둥절하였다. 위소보는 그 관원의 목소리에 듣고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강친왕(康親王)이 아니십니까? 저는 위소보입니다!] 그 관원은 바로 강친왕 걸서(杰書)였다. 강희 원년에 고명대신(顧命大臣) 오배가 정권을 잡자 강친왕과 그의 사람들을 배척했다. 강희는 위소보를 이용하여 오배를 처단하고 강친왕과 그의 사람들을 다시 중용하였다. 강친왕은 마음 속으로부터 위소보의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강희에게 잘 복종하는 것은 두 말할 것 없고 심지어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다. 강친왕은 위소보를 보고 마치 허공에서 보물을 얻은 듯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위 동생. 어쩌다 여기까지 왔소? 다치지는 않았소?] 위소보는 일어나 엉덩이를 만지며 욕을 했다. [요 죽일 놈의 황가 녀석, 그래 이 어르신을 죽이자고 한 노릇 아닌가?] 위소보는 황룡대협이 성이 무엇인지 몰라 '황가'라고 불렀다. 강친왕이 놀라며 물었다. [황가란 도대체 누구요? 어느 놈이 호랑이 간을 씹어 먹고 이처럼 담이 커져서 위 동생을 못 살게 굴었단 말인가? 죽지 못해 안달을 하는 모양이지? 그 황가라는 놈을 반드시 붙잡아 혼내 주겠소!] 위소보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 두십시오. 그 사람의 무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 시위 가운데 그를 대적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친왕께서는 어찌하여 이 곳으로 오시게 되셨습니까?] 강친왕은 그의 말에 대답치 않고 무엇인가 품속에 넣으면서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우선 죄인을 붙잡아 내보내거라!] 위소보가 보니 흰 수염에 여윈 늙은이가 무릎을 끓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이품정대(二品頂戴:이품은 직급을 말하고, 정대는 직급에 따라 장식한 모자를 말함)가 놓여 있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품 대신이 죄를 지어 강친왕이 성지를 선독(宣讀)하는 모양이구나!) 한무리의 심부름꾼들이 정대를 씌우고 끌고 나갔다. 강친왕은 술상을 갖추어 위소보를 위안하려 했다. 위소보는 반나절이나 굶어 몹시 배가 고파 있었기에 허기를 면하게 되자 위소보는 어쩐지 우울해 보이는 강친왕의 기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친왕께서는 아마 저를 대접하는데 돈이 아까워 그러시는 모양인데 북경으로 돌아가면 소인이 한턱 내면 되지 않습니까?] 강친왕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위 동생, 농담이 여전하구만! 하지만....일이 이렇게 되니.... 기실 위 동생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위소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물었다. [일은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초조해 하십니까?] 강친왕은 품속에서 무엿인가 꺼내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위 동생, 이걸 보시게!] 위소보가 보니 성지였다. 성지가 두 쪽으로 찢겨 있었다. 위소보는 너무나 놀라 반문했다. [어느 놈이 이처럼 담이 커서.... 감히!] 그러다가 방금 전의 일이 생각나서 겁을 먹으며 더듬거렸다. [제가 방금 지붕 위에서 떨어질 때....] 강친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금방 전에 강친왕이 성지를 선독할 때 위소보가 지붕에서 떨어지며 방정맞게도 비수로 그 성지를 두 쪽으로 찢어 놓은 것이다. 성지를 찢는다는 것은 참수(斬首)를 당할 커다란 중죄였다. 위소보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 강친왕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소? 위작 나으리는 황상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황상께서도 그리 추궁을 하지는 않을 게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그래 모든 잘못을 이 어르신에게 덮어씌우자는 수작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친왕 나으리, 조급해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의 전후 과정을 상세히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 어떤 훌륭한 계책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친왕은 여전히 맥없이 속으로 생각했다. (너 같은 녀석이 커다란 계책을 생각해 내? 이처럼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르고 원만히 처리하겠다구?) 그러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위 동생, 방금 꿇어앉아 있던 그 죄인을 모르시오? 그가 바로 하독(河督) 근보외다.] 위소보는 넌지시 물었다. [황하를 8년이나 다스리던 하독 근보 말입니까?] [바로 그 사람이오. 위 동생, 알만 하오?] [듣기에 저 사람은 아주 잘한다고 하던데 왜 붙잡았습니까?] 강친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그저 성지대로 할 뿐이라오. 근보 저 사람은 8년이나 황하를 다스렸는데 칭찬이 자자하지요. 그런데 조정의 어느 사람의 미움을 받았는지 그의 황하를 다스리는 방책이 옳지 못하다고 황상께 상주를 올려 그를 파직시키고 붙잡았소이다. 방금 내려온 성지에 의하면 그는 또 치수(治水)에 쓰이는 경비를 함부로 남용하여 황상은 대노하시어 양심이 없는 놈이라고 욕을 했다 하오. 황상께서는 나더러 이 곳에서 심문하라 하였소. 지금 막 심문 중인데 성지가 찢어졌으니 어찌 조정의 이품 대신을 죽일 수 있겠소? 이것은 하늘의 뜻이외다, 하늘의 뜻....!] 위소보는 그런 사연을 듣고 그의 뺨을 후려갈기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가 일품(一品)이든, 이품(二品)이든 목이 달아나는 판국인데 성지를 봐서 뮐 하겠는가?) 위소보가 마음이 가벼워져 '친왕!' 하고 부르려는데 갑자기 귓전으로 모기 소리만한 소리가 들렸다. [위 동생, 황하 연안 수백만 백성들의 목숨은 근보에게 달렸고, 근보의 목숨은 자네 위 동생에게 달렸네. 근보를 구해 내면 우리 서로를 형제로 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네 머리통이 몇 개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네. 설령 황룡대협이 무공 수위가 높지 않고, 자네는 조정의 보호를 받으니 죽일 수 없더라 하더라도, 또 자네의 일곱 부인들이 무공이 뛰어나 죽일 수 없다 하더라도, 자네의 아들 둘은 식은죽 먹기네! 흥, 흥!]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잇달아 냉소를 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친왕 나으리, 지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강친왕은 귀를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만.] 위소보는 황룡대협이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으로 자기에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황가 녀석! 그래 이 어르신의 아들을 죽여 대를 끊겠다고? 안 될 일이지!) 위소보는 치를 떨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일을 할 때 늘 앞뒤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늘 일만 그렇게 할 수 없지. 먼저하고 나중에 할 일을 구분해야지.)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무릎을 탁 치며 강친왕에게 말했다. [친왕 나으리께서 그 일 때문에 걱정하시는데 다행히 제가 일찍 왔기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위소보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되는 대로 주워 섬겼다. [그것은 더 생각하기가 끔찍합니다.] 강친왕은 조급해서 물었다. [위 동생! 그래 황상께서 다른 성지를 내렸단 말이오?] 위소보가 말했다. [성지 말입니까? 그건....]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거짓말로 두리뭉실하게 둘러대자. 그렇지 않다간 후에 돌려 부치기도 어려울 테니.)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왕 나으리, 정말이지 약간이라도 늦게 왔더라면....] 강친왕은 만족(滿族)의 귀족인지라 위소보의 양주 사투리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친왕은 아마도 다른 성지가 있는데 자기에게 알리기가 거북하여 말꼬리를 흐린다고 여기고 입을 열었다. [위 동생, 더 말하지 마시오. 그럼 오늘 일은 위 동생이 알아서 처리하시구려. 나는 시름을 놓겠소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내가 담당해 알아서 처리하라고? 그래 잘못된 일은 내가 다 도맡아서 처리하란 말이 아닌가?) 그러면서 강친왕에게 물었다. [친왕 나으리, 제가 근보를 심문해도 되겠는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되구 말구요. 안 될 일이 뭐가 있겠소?] 위소보는 자리를 옮기고 근보를 압송해 오게 하였다. 근보가 예를 갖추자 친왕이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일등록정공 위작 나으리이신데 묻는 말씀에 그대로 답하거라! 위 동생, 나는 다른 일이 있어 자리를 떠야겠네.] 근보는 죄를 지은 몸이라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 위소보가 아래 위를 훑어보니 근보는 깡마르게 여위고 수염은 꺼칠꺼칠한 것이 매우 불쌍한 모습이었다. (이 늙다리가 그 황가 녀석의 십칠 이십팔대 조상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래 이 늙다리를 내놓고 나와 흥정하잔 말인가?) 위소보는 천천히 찻물을 마시고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근보,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근보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관청이 다 아는 죄를 졌소이다.] 위소보는 약이 올라 다시 물었다. [어떤 죄를 졌는가 말이야?] 근보가 말했다. [관청의 지시를 어기고 8년 동안 황하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황하 연안 백성들에게 면목이 없는 용서치 못할 죄를 졌소이다.] 위소보는 찻잔을 상에 놓고 소리쳤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또 변명을 할 작정인가?] 근보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눈에서 정기를 띠우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위 어르신,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제가 무슨 변명할 게 있겠습니까?] [너는....] 위소보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내가 죄인을 심문하는 건지, 아니면 죄인의 심문을 받는 건지 모르겠구만!) 위소보는 강희가 십여 세 때 근엄한 위풍과 예리한 질문으로 오배를 심문하던 일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풀이 죽어 생각했다. (황상, 대관(大官) 나으리들! 이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니외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상을 탁! 치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랏!] 그러자 포악스러운 사나이 칠팔 명이 '엣!' 하고 달려나왔다. 위소보는 근보를 쏘아보고 근보도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근보는 의기롭고 근엄한 기색으로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옹색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배짱이 있는 사람이군. 이런 배짱이 있는 사람 가운데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지. 그러니 푸대접은 말아야겠구나.) 위소보는 약간 탄복하며 가락을 넣어 소리쳤다. [어서 술상을 준비해 오거라!] 암행어사 출도면 모든 행차가 다 마련된다고 술좌석은 이내 마련되었다. 위소보는 근보를 청했다. 근보는 냉소하며 말했다. [조정에서 이 늙은 것을 염려하시어 이렇게 위작 나으리께서 환대하시니 이 죄인은 황송하옵니다. 위작 나으리께 아뢸 말씀은 이 죄인은 원래 두주불사(斗酒不辭)하고 또한 술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있사오나 8년 동안은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소이다. 위작 나으리의 성의만은 가슴 깊이 새겨 놓겠습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술에 독이 있을까 그러는가?] 그러자 근보는 초연하게 앉아 두 말 없이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위소보도 같이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나는 각양각처에서 당신의 치수(治水) 방안이 매우 훌륭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당신은 매우 총명한 사람이고 일도 착실히 했소. 그런데 왜 황상께서 이렇게 하는지 나도 모르겠구려.] 근보는 한참 주저하다가 위소보의 말이 그 어떤 악의에서 묻는 말이 아님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일이란 사람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다(因人設事, 因人廢事)'라는 이 여덟 글자이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 여덟 자가 뭐라구?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인데, 문틀을 따지라면 방법이 없어도 사소한 일은 도울 수가 있소.] 근보는 만주족들이 급급히 천하를 통치하다 보니, 무(武)를 중히 여겨 글을 모르는 사람이 관청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근보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술 한 잔을 상에 부어 놓고 손가락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것을 황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오면서 많은 모래들이 밀려와 쌓이면 당연 강바닥이 지면보다 높아져 장마철에는 언제나 강물이 범람한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다치고 죽으며 가정이 파탄되어 정처없이 떠도는 이들이 많아지게 되지요. 강희 원년부터 16년까지 수해(水害)가 67차례나 들이닥쳤소이다. 이에 황상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려 황하를 다스릴 결심을 하셨지요. 정말 요순우탕(堯舜禹湯)이지요.] 근보는 치수에 관한 한 그림 보듯 명확했지만 위소보는 잘 알지 못했다. '요순우탕'이란 네 글자만 아주 귀에 익은 말로 늘 강희 황제를 떠받들던 말이었다. 위소보는 다른 일에는 멍청하지만 황제를 떠받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칠새라 곧바로 그 말을 받았다. [그야 물론이지요. 황상은 '조생어탕(島生魚湯)'인지라 천하에 누가 그 공덕을 모를 사람이 있겠소?] 근보는 약간 놀라며 말했다. ['조생어탕'이라니?] 위소보는 성어를 쓰면 백분의 구십오는 틀리지만 쓰기를 좋아했다. 설령 틀리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요순우탕'이지 '조생어탕'이 아니라고 강희 황제가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 그는 자고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위소보는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 [어르신은 학문이 있는 사람인데 그것도 모릅니까? '조생어탕'이란 좋은 탕 한 그릇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해 괜찮은 탕이지요. 어르신께서는 간단히 알아듣게 말씀을 해 주시오. 길면 저는 기억할 수 없어 잠이나 자러 가야겠소이다.] 근보는 어쩌다 하소연할 곳을 만났는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그는 위소보가 정말 그 자리를 뜰까 두려워 좋은 탕이든 나쁜 탕이든 캐묻지 않고 얼른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이 상 위에 있는 술을 막지 않으면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 아닙니까? 이것을 통제하자면 제방(堤防)을 쌓아야 하지요.] 그는 젓가락 두 가락을 좌우에 걸쳐 놓고 넘쳐 흐르는 술을 막아젓가락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르게 했다. 위소보는 무슨 일이든 세심히 다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총명하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만 합니다. 어르신의 뜻은 제방을 높여 황하가 범람하지 못하게 하자는 뜻 아닙니까?] 근보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신분도 잊고 상을 치며 말했다. [제방을 높여야만 황하외 화근을 근절할 수 있습니다!....] 근보는 원래 요양(遼陽) 사람이었다. 순치년(順治年) 국사원(國史院) 편수(編修)에 합격하고, 후에 안휘순무(安徽巡撫)로 있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 무영전(武英殿) 학사(學士)가 되었다. 하도충독(河道總督)을 담당한 후 그의 고급 동료인 진황(陳潢)과 함께 위로 물길을 따라 올라가며 황하 상류(上流)의 정황을 시찰하고 다시 아래로 하류(下流)의 정황을 살폈다. 이렇게 석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는 하도총독부에 돌아와 문헌사료에 있는 황하, 운하, 회하의 수재(水災), 수리(水利) 기록을 보고 치하(治河) 방안을 제정했다. 근보의 치하 방안은 대체로 네 가지였다. 첫째는 황하 하류는 운하, 회하와 지리상으로 가까우므로 그 세 줄기 강을 일체(一體)로 보고 통일적으로 다스려야 한다. 둘째, 제방을 튼튼히 하고 모래를 제거해 물의 흐름을 가속화한다. 셋째, 적당한 곳에 물길을 따로 더 파서 물이 불었을 때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며, 넷째로는 제방의 경사를 낮추어 홍수의 충격을 감소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비교적 타당하여 8년째 수재(水災)를 많이 감소시켰다. 그러나 역대의 하독(河督)들은 황하 치수(治水)도 잘 하지 못하면서 자기들의 배만 불렸다. 그러나 근보만이 청렴결백하였고 티끌하나 손에 대지 않아 치수사업의 인부들과 백성들은 모두 그를 물을 잘 다스리고 재물을 탐내지 않는 용왕전세(龍王轉世)라 불렀다. 근보가 이렇게 설명을 하자 위소보는 정황을 좀 알 것 같았다. 근보는 또 종이에 그림을 그리면서 어디에 나무를 심고, 어디를 파야 하는가를 설명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황상은 매우 세심한 사람인데 왜 이 2년간 어리숙했단 말인가? 만약 이 늙은이를 살려 주고 황제를 설복하여 성지를 다시 회수하려면 이 그림은 매우 쓸모가 있겠구나!) 그리하여 위소보는 그 그림을 품속에 넣었다. 원래 근보의 성과가 적중하여 명성이 높아지자 조정 대신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성룡을 위시한 그들은 근보를 공격하면서 하류를 열어 황하외 입해구(入海口)를 넓히자는 주장을 제기하며 근보의 치수 방안을 부정했다. 우성룡은 조정의 일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강희를 설복함으로써, 강희가 대노하여 근보를 파직시키고 강친왕을 파견하여 근보를 죽이도록 했다. 위소보는 그 내막을 알고 한참 생각하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입해구(入海口)를 파면 바닷물이 도리어 밀려들어 황하의 화근을 뿌리뽑기는 커녕 오히려 바다의 재해까지 겹치지 않겠는가?] 근보는 그제서야 자기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눈에 눈물이 어려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으며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이 죄인은 죽어도 원이 없소이다. 그렇지만 분명 한 가지 일만은....!] 위소보는 천천히 그 말을 받았다. [어르신, 무슨 일인지 할 말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근보는 애걸을 했다. [이 죄인은 황상을 노엽게 했으니 분명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그러나 위작 나으리께서는 황상에게 이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려 주십시오. 그 누구를 하독(河督)으로 파견하던 간에 치수 방안만은 절대로 고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위작 나으리께 천번 만번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8년간 애쓴 성과가 물거품이 되지 않을 것이고, 백성들도 고기밥 신세를 면하게 될 것이니, 근보는 죽어도 원 없이 눈을 감겠소이다.]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책상물림은 자기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도 이렇듯 이것저것 걱정하고 있으니 정말 심지가 굳은 사람이구나!) 위소보는 커다란 벼슬을 했지만 이런 국계민생(國計民生)에 관계되는 일들을 살펴본 적이 없다. 근보가 자기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근심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위소보도 내심 격동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위소보는 웃는 얼굴로 근보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어르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르신은 하독 노릇을 흘륭히 하였소이다. 누가 또 바꾼다고 그럽디까? 돌아가서 일이나 잘 하십시오.] 근보는 자기가 잘못 들었는가 귀를 의심하며 두서 없이 더듬거렸다. [위작 나으리! 이건....저....] 위소보는 가슴을 내밀고 두드리며 말했다. [어르신, 걱정 마십시오! 저에게 맡기면 되지요. 걸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한 마디이지요. 황상은 조생어탕(島生魚湯)이며 현명한 군주이지, 시시한 탕은 아니지요. 우리 신하들은 늘 황상의 바다와 같은 가없는 은혜를.... 바다와 같은 가없는 은혜를....] 근보는 두 손을 쳐들고 감격해서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의 지지성원에 감사를 드리며, 이 근보는 죽는 일이 있더라도 위작 나으리의 은덕을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위소보는 강친왕에게도 알리지 않고 근보에게 이품 모자를 다시 씌워 주고 치수공지(治水公地)로 보냈다. 위소보는 다리를 꼬고 앉아 홀로 술을 마시면서 흥이 나서 중얼거렸다. (이전에 이 어르신은 대만에 가서 만족(滿族)들의 자손을 구해 주어 백여만 냥을 얻었고, 또 많은 만민산(萬民傘:옛날 백성들이 관청 사람들에게 만들어 준 양산)을 받았는데, 이번에 내가 근보 늙은이를 구해 주었으니 황하 연안의 백성을 구해 준 거나 다름없지. 이 어르신의 공덕이 무엇보다 크지! 그런데 근보는 무엇으로 보답할는지 모르겠구나. 만민산은 필요 없는 물건짝이고....요 근자에 들어 이 어르신의 호주머니는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이 적었는데, 그래 국밥만 먹고 살란 말인가? 근보 늙은이가 눈치가 있으면 백만 냥쯤 이 어르신께 정성을 다하면 그만이지.) 위소보는 마음이 흐뭇했다. 그 때 갑자기 강친왕이 병풍 뒤에서 나왔다. 위소보는 속이 꿈틀했다. (내가 성지를 찢어 놓고 또 죄인을 놓아 주었는데, 이 일은 약간 지나친 것 같구나. 만약 황제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 머리통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쩐다?) 강친왕 걸서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민서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 동생, 이런 일은 동생같은 배짱이 있는 사람이나 하지, 나처럼 담이 작은 사람은 단지 근보의 억울한 사연을 관 속에나 가지고 가라고 할 뿐이야.] 위소보는 속으로 심사가 뒤틀렸다. (제기랄, 성지를 잘 건사하지 못해 이 어르신의 칼에 두 쪽이 났으니 망정이지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근보 늙은이를 놓아 준 게지. 그런데 네 놈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니, 어디 두고 보자! 네 놈을 혼내 주지 않으면 이 어르신의 족보를 갈겠다.) 위소보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친왕 나으리, 이 위소보가 머리통이 몇 개라고 목이 달아날 일을 하겠습니까?] 강친왕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아니 그럼, 위 동생! 그것은 황상의 비밀 성지가 있어서 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밀 성지라구? 그 말은 네 입에서 나온 말이지, 나하고는 상관없어....) 그렇지만 위소보는 겉으로는 매우 놀란 듯이 반문했다. [친왕 나으리께서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강친왕이 말했다. [아니, 나는 단지 짐작해 본 것이라데. 위 동생, 그래 황상의 비밀 성지에 뭐라고 했는가?] 위소보는 반문했다. [친왕 나으리, 그것을 묻기 전에 근보가 하독 노릇을 하여 공로를 세웠는가 아니면 정말 죄를 지었는가, 충신인가 간신인가 말해 보십시오.] 강친왕은 황족 출신이므로 관청 내의 일들을 잘 알고 스스로 짐작했다. (나는 황제의 성지를 받았기 때문에 설령 근보를 죽인다 해도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위소보는 성지를 찢고 게다가 황제의 비밀 성지도 받지 않은 채 독단으로 죄인을 놓아 주었다.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배짱이 있겠는가?) 친왕은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위 동생, 황상께서 왜 이 곳에서 근보를 처단하라고 했는지 아시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고, 나도 그것을 캐묻지 않았지요.] 강친왕은 말했다. [근보가 하독으로 있는 8년 동안 황하 연안의 백성들은 적지 않은 혜택을 받았고, 그가 청렴하여 자신의 잇속을 차리지 않아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소. 이런 충신이 파직당하고 붙잡혔다는 소문을 듣자 이 일대 백성들은 격분을 일으켰다오. 황룡대협이라는 사람이 백성을 선동하여 말썽을 일으키고 수인거(囚人車)에서 근보를 빼앗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소. 황상께서는 백성들이 들고일어날까 봐 염려하여 나더러 여기에서 암암리에 근보를 처단하라 하셨소.] '황룡대협'이라는 이름을 듣고 위소보는 속이 꿈틀하여 물었다. [친왕 나으리, 그래 그 황가라는 사람을 만나봤습니까? 그 사람의 무공은 정말 대단합디다. 아니, 무공이 아니라 요술이지요.... 친왕 나으리, 친왕 나으리의 시위가 지붕에서 그에게 당했습니다.] 강친왕은 무공을 아는지라 상 위로 냉큼 뛰어올랐다가 또다시 훌쩍 솟구쳐 대청 대들보를 쥐고 요자번신(鵲子飜身)의 수법으로 위소보가 내려온 구멍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친왕이 한 사람을 들고 살짝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바로 황룡대협이 발로 기와 조각을 살짝 걷어차 얻어 맞은 왕부위사(王府衛士)였다. 친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 틀렸소이다. 전신의 늑골이 모두 부러져 이미 죽었구려.] 위소보는 의아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내 보기로는 황룡대협이 발로 기왓장을 살짝 걷어찼는데 늑골이 부러지다니?] 강친왕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 위사(衛士)는 강친왕이 아주 많은 돈을 주고 청해 온 위사총관이고, 무공을 놓고 말한다면 강호에서도 명성이 있어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황룡대협이 발끝으로 살짝 걷어찬 기와 조각에 맞아 죽은 것이다. 강친왕은 혼자 중얼거렸다. (보건대 이것은 개방의 무독대공법이 틀림없다. 그러나 개방의 우두머리 성룡이 2년 전에 세상을 떴고, 그 후예들 가운데는 아직까지 이 수법을 터득한 사람이 없을 텐데!) 위소보는 약싹빠른 사람이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강호의 일들을 강친왕에게 속일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자기가 어떻게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고, 또 청아를 어떻게 만났는데 황룡대협이 관왕묘에서 청아를 만나 그녀를 어떻게 능멸하고 또 자기를 황룡대협이 어떻게 이 곳까지 데리고 왔는지 과정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강친왕에게 물었다. [친왕 나으리, 그렇다면 황룡대협이 누구를 찾아왔겠습니까?] 강친왕은 모골이 송연해 지며 그 말을 받았다. [그래, 그가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위소보는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렇소이다. 그가 말하기를 강친왕은 '조생어탕'이 아니고 나쁜 탕(湯)이며, 근보와 같은 충신을 죽이니 저....저....그가 한 말을 되뇌이기가 거북합니다.] 기실 위소보의 이 거짓말은 냉수에 이가 빠질 소리였다. '요순우탕'이란 말은 황제에게만 쓰는 말이지, 황룡대협이 어찌 친왕에게 그런 말을 쓸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속에 든 것이 없어 이곳저곳에서 '좋은 국'이니 '나쁜 국'이니 하며 충신과 간신을 구별했다. 강친왕은 생각했다. (황룡대협의 무공이 이처럼 출중하고 악랄하다고 하는데 만약 이곳으로 뛰어든다면 왕부의 어느 위사가 막을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늑골이 부러져 죽을 사람은 위사총관이 아니고 나일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에 빠져 있어 그는 위소보의 말에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의기양양해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는 강 건너 불구경만 하겠다는 게냐? 이 세상에 그리 쉬운 일은 없느니라!) 위소보는 사기가 올라 입을 열었다. [친왕 나으리, 저는 친왕 나으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 위소보는 목숨을 걸고라도 친왕 나으리의 안전을 보호하겠으니 안심하십시오. 소인은 황룡대협에게 진심으로 타일렀지요. '강친왕은 대간신 오배를 붙잡았으니 정말 '조생어탕'이고 나쁜 탕이 아니며, 위소보를 죽일지언정 천번 만번 강친왕은 해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권고하니 고개를 끄덕거렸지요.] 강친왕이 아주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아 위소보는 거듭 입을 열었다. [황룡대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잠시 그 놈의 머리통은 남겨 두고 보자. 위소보, 자네가 그에게 알려 주게나. 만약 근보 어르신을 조금이라고 해치게 되면 나는 왕부의 아낙네를 한 사람 죽이고, 또 근보 어르신을 죽인다면 내가 그 개자식들의....무엇무엇을 다 빼 버리겠다'고 했지요. 친왕 나으리, 이 몰상식한 말들은 그가 한 말이지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강친왕은 위소보의 손을 잡고 감동되어 말했다. [위 동생,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 둘의 정이야 그렇지가 않지. 동생이 달리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여기서 의형제를 맺는 게 어떻겠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친왕 나으리, 농담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무리 낯짝이 두껍기로서니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명대신 오배가 집권할 때, 강친왕 걸서와 연관되는 많은 사람들은 배척을 받았고, 몸을 가릴 곳마저 없었다. 다행히도 위소보가 오배를 죽여 버리자 그는 다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위소보의 은공이야 말할 것 없고, 게다가 방금 위소보의 '거짓말'은 친왕을 몹시 감동시켰다. 왕부는 황궁처럼 왕비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녀들이 적지 않은 편이었다. 또한 위소보는 강친왕이 여색을 밝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심사를 잘 아는 위소보는 짐짓 황룡대협이 '근보 어르신을 조금이라도 해치게 되면 왕부의 아낙네를 한 사람 죽이겠다'는 말로 꾸며댔다. 친왕에게 있어 그 말은 정말 자기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위소보가 일거에 친왕과 왕비의 재난을 모두 제거했으니 또 한 번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나 다름 없었다. 강친왕이 위소보와 의형제를 맺자는 것은 기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강친왕은 위소보를 끌어당기며 억지로 함께 무릎을 꿇고 하늘에 맹세했다. [황상은 위에 계시고 신하는 아래에 있사온데, 이 걸서가 위소보와 이성(異姓) 형제를 맺사오니 동년동월동일생(同年同月同日生)은 아니지만 동년동월동일에 죽기를 원하나이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내가 황룡대협을 만나 참혹하게 죽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외다.] 위소보는 씁쓰름했다. (제기랄, 지가 몇 살인데 다 늙은 주제에 나와 같은 날 죽겠다는 겐가? 그렇게 되면 이 어르신은 밑지고 들어가도 한참 밑지는 게 아닌가?) 위소보는 자고로 밑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왕이 맹세를 했으니 자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이 위소보는 강친왕과 이성 형제를 맺으니 동년동월동일에 나지는 않았지만 동년동월동일에 죽기를 원찮나이다. 이 맹세를 어기면 양주 여춘원에 가서 진짜 망나니질을 하겠소이다.] 그는 '동년동월동일에 죽기를 원하나이다'를 '동년동월동일에 죽기를 원찮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빨리 하고 양주 사투리도 섞었기 때문에 친왕은 알아듣지 못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은 너와 함께 염라대왕을 보러 가고 싶지 않아! 양주 여춘원에 가서 작은 망나니, 큰 망나니, 늙은 망나니가 되더라도 그럴 수는 없지.) 강친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기뻐 말했다. [동생, 내가 수염이 몇 대 더 많고 기니까 큰형이라 하지.] 위소보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 이 동생은 사람이 없을 때는 대담하게 큰형님이라 부르고 사람들 앞에서는 친왕 나으리 하고 부르겠소이다.] 강친왕은 위소보가 아주 사리에 밝게 말을 하자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의 정으로 말하자면 의형제를 맺지 않아도 형제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조정의 관직 등급이 있으니 사람들 앞에서 동생이 좀 억울해도 할 수 없지.]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야, 우리는 형제인데 더 말할 게 있습니까?] 강친왕은 한참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형제간이니 고락을 같이 해야지. 지금 우선 시급한 일은 근보의 일을 어떻게 결말 지을 것인가 하는 것 아니겠소?] 위소보는 생각했다. (뭐 결말 지을 게 있느냐? 나야 내 발등에 불부터 끄고 봐야지. 황룡대협을 먼저 보냈고, 이제 내가 북경으로 가면 소황제는 나의 큰처남이니 유쾌하고 자유로운 녹정공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어르신을 잡아 족치려는 눈치가 보이면 일곱 부인과 이남일녀(二男一女) 자식들을 거느리고 달아나면 그뿐인걸.) 위소보는 강친왕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친왕이니 신분이 존귀하지. 나같은 건달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내가 슬쩍 달아나면 황제가 근보의 일을 친왕과 따지고 들겠지. 그러면 맹형(盟兄)의 흰대가리가 붙어 있을런지?.... 에라, 내가 근심할 거 있나? 남편이 죽으면 과부도 제 살 도리를 찾는다고, 제각기 자기가 살 도리를 찾겠지. 어쨌든 이 동생은 동년동월동일에 죽는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강친왕은 위소보의 기색을 찬찬히 살폈지만 또 다른 성지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비록 위소보는 속에 든 것은 없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약간 시름은 놓었다. 하지만 위소보의 마음에 이런 엉뚱한 꿍꿍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강친왕은 또다시 물었다. [동생, 어떤 묘계를 생각해 냈소?] 위소보는 약간 긴장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예? 예, 큰형님! 황상께서 변복(變服)을 하고 강남에 무엇 때문에 가셨었는지 아십니까?] 강친왕이 대답했다. [황상께서는 나라와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헤아리시고 친히 강남에 가서 수재를 요해(了解)하고 황하의 화근을 근원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가셨던 것으로 아네.] 위소보의 뛰어난. 재주 중의 하나는 그 어떤 방법도 없을 때 이것 저것 얼버무려 놓아 상대방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강희가 남방 시찰을 간 것이 수재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는 말을 듣고 매우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큰처남이 나를 찾으러 왔다고 했는데.... 공무를 보는 척하며 제 볼일을 봤구나! 하지만 황하는 북쪽에 있는데 아무리 황제라도 남쪽에 가서 어떻게 재해 상황을 살핀단 말인가? 그럼 황하가 남쪽에 가서 난리를 피울까봐 걱정이 된 겐가?) 위소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다. 위소보는 대단한 것이나 있는 듯 부풀려 말했다. [큰형님, 황상께서는 저를 찾으러 양주에 왔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왔는지, 큰형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강친왕은 급히 물었다. [그래 황상께서 정말 비밀 성지를 내리셨소?] 위소보는 우쭐해 하며 말했다. [대충 비슷합니다. 2년 동안 저는 황상의 신변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가 형제이니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형님, 생각해 보십시오. 황궁을 드나드는 것이 어찌 묘회(廟會)에 드나드는 것처럼 쉽겠습니까?] 강친왕은 문득 깨닫고 말했다. [동생이 2년 동안 출타를 한 것은 황상의 비밀 성지를 받고 갔겠구만.] 위소보는 두리뭉실하게 운을 뗐다. [글쎄요....] 강친왕은 답답하였던지 거듭 재촉했다.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지 무슨 '비슷'이니 '글쎄'는 뭐요.] 그러나 강친왕도 황궁의 비밀을 물어볼 수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위소보와 강희 황제의 관계는 그 어떤 일반적인 군신(君臣) 관계로 따질 수 없는지라 더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위소보는 대뜸 눈치를 알고 생각했다. (이 여우 같은 형님을 속여 넘기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2년 동안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민간(民間)의 일들을 적지 않게 알았소이다. 이를테면 근보의 파직에 대해 황상께서도 말씀하셨는데 황상도 눈물을 흩뿌리며 마속(馬謖)을 죽인 결(決)이랍디다. '영인흘식(寧人吃食)', '영인불흘식(寧人不吃食)'이니 하는 것을 이 동생은 학문이 없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강친왕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아니, 황상께서 말씀한 것은 '일은 사람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다(因人設事, 因人廢事)'는 말이 아니오?] 위소보는 매우 기쁜 듯이 말했다. [옳습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황상께서 진작부터 형님께 이야기하시고자 한 말씀입니다.] 강친왕은 위소보의 말울 듣고 말했다. [조정에서의 근보에 대한 처리는 정말 공평치 못하오. 황상께서는 약간 후회는 하겠지만 공개적으로 승인하기가 어려운 노릇이지. 위 동생께서 어린 몸으로 황상의 깊은 뜻을 알고 공개적으로 승인하기 어려운 일들을 처리했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위소보가 말했다. [큰형님, 형님은 처음 이 곳에 왔습니까?] 강친왕은 이번에 처음으로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맡았으며 처음으로 외출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이번 길은 강남처럼 번화한 곳은 없지만 번화한 부두(埠頭)는 몇 곳 있지요. 천진위(天津衛)의 소월루(素月樓)에 새로 기생이 왔다고 하던데 천하일색이랍니다. 큰형님, 어쩌다 북경을 떠났는데 한번 가보지 못하면 정말 애석한 일이지요. 히히, 큰형님은 온종일 왕부에 있었으니 아마 고운 여자 맛은 모를 겁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아요. 집꽃은 들꽃보다 향기롭지 못하고, 들꽃을 따오면 그야말로....] 위소보의 그 몇 마디는 모름지기 강친왕의 호색(好色) 충동을 일으켜 놓았다. 그러나 이번만은 어려워하며 주저했다. [저....그건....] 위소보가 말했다. [황상께서는 시간이 없어 친히 백성들의 정황을 요해하지 못하니, 왕부 집안 사람들이 내려와 정황을 요해하면 황상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아닙니까?] 강친왕은 여전히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겠지.하지만....] 위소보는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친왕 나으리께서는 황제의 걱정을 덜어주고, 동생은 큰형님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형님, 근보의 일은 어쨌든 제가 전적으로 담당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강친왕은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동생, 그럼 수고스럽지만 어서 북경에 가서 명령을 집행한 결과를 보고하구려!] 위소보가 말했다. [명을 받들겠소이다. 얘들아, 말을 가져 오너라! 이 어르신은 황제 폐하를 만나러 북경으로 납신다!] 위소보는 보통 차림으로 남색 두루마기를 입고 '십팔모' 노래를 흥얼거리며 의기양양하게 자금성(紫禁城)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몸집이 커다란 어전시위가 앞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도대체 뉘길래 감히 황궁으로 뛰어든단 말이냐?] 위소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내가 누구라고 너희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알리란 말이냐? 너희들 충관을 불러 와!] 이 때 시위총관 다륭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는 먼 곳에서 위소보를 보고 마치 보물이나 얻은 듯이 달려와 그를 포옹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저는 정말 그리워 죽을 뻔했습니다. 황상께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갑시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진작부터 황상을 찾아뵈옵고, 또 다형(多兄)을 만나보려고 했지만 이 형제들이 들여보내지 않는구려.] 다륭은 눈을 부릅뜨고 발로 어전시위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욕을 퍼부었다.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구나! 어서 위작 나으리께 사죄하지 못할까? 내가 지금 위작 나으리를 만나 너무 기쁘니 잠시 네 놈을 용서하지만 후에 두고 보자!] 그 어전시위는 허리를 굽혀 위소보에게 경례하고 더는 말이 없었다. 강희는 서재에서 위소보를 만나보고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제기랄, 소계자! 왜 이제서야 이 어르신을 보러 왔단 말이냐?] 과거 위소보가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그는 어선방(御膳房)의 소태감 소계자를 죽이고 그의 이름으로 강희와 만났고 서로 알게 되었으며, 또한 오배를 처단하는 등 커다란 공들을 세워 그들의 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강희는 그를 '소계자'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의 강희는 오배의 손아귀에서 조롱당하던 과거의 소황제가 아니라, 서른 살이 넘은 위엄당당한 만청 조정의 일대 제왕이었다. 그는 평시에는 말수와 웃음이 적었다. 그러나 오늘은 위소보를 만나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기를 엿볼 수가 있었고, 게다가 오랜 만에 저자거리에서나 쓰는 용속한 '제기랄'이라는 욕지거리 말도 거리낌없이 했다.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전에 약속한 일을 잊어버렸단 말이냐? 사람들이 있을 때는 내가 위소보라 부르고, 자네는 나를 황제라 부르지만, 사람이 없을 때는 내가 자네를 소계자라 부르고, 자네는 나를 어떻게 부르라 했던가?] 위소보는 엉엉! 울며 말했다. [소현자! 이 위소보는 망나니외다. 의기(義氣)도 모르고 친구도 될 수 없는 하찮은 인간이외다. 저는 황상께서 이처럼 대해주는 것도 모르고 처자들을 데리고 달아나려는 도깨비 수작만을 부렸소이다....] 강희는 웃으며 위소보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말했다. [강호의 영웅호걸은 피와 땀은 흘려도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다 큰 사람이 눈물은 왜 흘리는 게야! 소계자, 부끄럽지도 않은가?] 우는 척하는 것은 위소보의 또 하나의 걸작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른 탓인지 거짓 없는 눈물을 흘렸다. 강희도 암암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위소보를 부축하며 말했다. [소계자, 우리가 다시 만나다니 비할 바 없이 기쁘구나. 지금 우리는 이전보다 많이 자랐으니 더욱 큰 일들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강호의 사람들이 늘 말하듯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지.] 위소보는 옷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황상, 황공하옵니다.] 강희는 걸상을 가리키며 위소보에게 말했다. [소계자, 여기에는 다른 사람이 없으니 자네도 앉게나. 우리 앉아서 이야기나 하세.] 위소보는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니 서서 입을 열었다. [황상, 소인은 그 때 나이가 어려 물불을 모르고 버릇없는 짓을 했소이다.] 강희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내가 앉으라는데 겁날 게 뭔가?] 위소보는 2년간 보지 못한 탓인지 강희의 위풍이 그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옆으로 다가가 겨우 걸상 끄트머리에 앉았다. 강희가 말했다. [조인의 말에 따르면 그 날 양주 무슨 원에서 중독되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다 나았는가?] [황상 폐하의 관심에 성은이 망극합니다. 소인은 다 나았습니다.] [천지회 사람들의 무공이 정말 고강하지. 소계자가 다행히 묘한 술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정말 몸을 빼내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오.] [그것은 황상에게 하늘처럼 커다란 복(洪福齊天)이 있어, 소인은 그 혜택을 입은 것이지요.] 위소보는 강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급히 일어나 말했다. [황상 폐하, 소계자는 오늘부터 황상만을 시중들겠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천지회와 내왕한다면 이 소계자의 머리를 천쪽 만쪽 낸다 하더라도 달갑게 생각하겠습니다.] 강희는 얼굴이 침울해지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 천하는 맑고 밝은데 천지회 같은 하찮은 무리들이 또 무슨 커다란 걱정거리가 되겠는가? 나는 앞으로 자네에게 그들을 없애 버리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자네가 그들과 내왕이 있다 해도 사직(社稷)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나도 자네를 상관하지 않겠네.] 위소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북경에 돌아가면 자기에게 천지회를 없애 버리라는 명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 말을 듣자 그는 기쁜 나머지 넙쭉 절을 하며 말했다. [황상 폐하의 가없는 은혜에 감사를 드리옵니다.] 강희는 그의 말을 들은 척하지 않고 청(廳) 가운데 있는 기둥 곁으로 다가가 뒷짐을 짚고 양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위소보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다소곳이 그의 옆에 다가가 서 있었다. 강희는 묵묵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계자 이 기둥에 쐬여진 글자 중에 몇 자나 알고 있는가?] 그 기둥에는 여섯 글자가 씌여 있었다. 위소보의 기억으로는 10여년 전에 이 서재에서 강희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 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글이나 책을 보면 머리부터 지끈지끈거리는 그는 자고로 아예 자세히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참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소인은 학문이 전혀 늘지 않아 저 멜대 세 개가 가로 누워 있는 삼(三)자만 알 뿐 다른 것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강희가 말했다. [자네가 안다는 것은 삼번(三藩)이라는 삼(三)자겠군. 여기에 씌여진 것은 하무(河務), 조운(漕運), 삼번(三藩)이라는 여섯 글자라네.] 강희가 집정할 때는 겨우 십여 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대정치가로서의 자질과 흉금, 포부가 있어 '하무, 조운, 삼번'이라는 삼대요정(三大要政)을 서재 기둥에 친필로 써 놓았다. 동시에 하무(河務)를 삼대요정의 맨 앞자리에 놓았다. 이는 운남에 자리잡고 있는 오삼계(吳三桂), 복건의 경정충(耿精忠) 및 대만의 정성공(鄭成功)등의 '삼번(三藩)'보다 앞에 두는 선견지명과 탁월한 견식을 지니고 있었다. 강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현명한 군주는 민생을 중히 여겼네. 삼번은 조정의 중요 정책을 멸시하고 병변(兵變)을 일으켜 그 피해가 심각했지만 몇 년 되지 않아 평정되었지. 말하자면 한 사람의 엉덩이에 종기가 난 것을 칼로 도려내 버리면 우환으로는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야. 조운(漕運)은 사람으로 따지면 혈맥과 같은데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지. 황하는 늘 범람하여 인민들은 재해를 입어 살아가기가 힘들었지. 이것은 사람의 심장에 고질병(痼疾病)이 생겨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게야. 때문에 삼대요정 가운데 하무가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라네.] 강희는 위소보가 이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전혀 모르는 줄 알기 때문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위소보는 하무라는 두 글자를 듣자 무엇인가 생각나 물었다. [하무라는 말은 치하공사(治河工事)'라는 것이 아닙니까?]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네, 나는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데. 나는 여러 학자, 전문가들의 저서를 읽고 황하가 백성들에게 준 폐해가 매우 극심하다는 것을 느끼고 매일 근심걱정으로 밥맛도 잃고 잠도 이룰 수가 없었어.] 위소보는 생각했다. (황제 노릇 하기란 정말 힘들구나. 있는 돈도 못 쓰고 삼궁육원(三宮六院)에 그 많은 왕비를 두고도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온종일 하무요, 조운이요 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위소보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황상은 조생어탕....] 강희는 한참 껄껄 웃더니 겨우 웃음을 진정하고 그 말을 받았다. [제기랄, 소계자! 너는 정말 학문이 없구나. 남을 추켜 올려세우는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느냐?] 위소보는 급급히 변명하여 말했다. [황상, 소인은 그래도 지난 2년 동안 적지 않은 성어들을 배웠소이다. 거 뭐라던가? '영인흘식', '영인불흘식'....] 위소보는 그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강희는 놀라면서 물었다. ['영인흘식'은 뭐고, '영인불흘식'은 또 뭔가?] 위소보는 덮썩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인은 마땅히 죽어야지요. 황상께서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강희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서 일어나게. 자네는 적들과 내통하여 양주에서 몽환약으로 나마저 중독시켰지! 도의에 어긋나는 반역행위이지만 어쨌든 그래도 자네가 나를 보호한다는 충성심과 덕행으로 이해하고 더는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았네.]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놀라 식은땀이 바싹 돋았다. (내가 몽환약을 넣은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한 일인데 황제가 이렇게 분명히 알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이크! 나중에라도 허튼 수작은 말아야겠구나.) 위소보는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그 말을 받았다. [황상, 소인은 충성을 조금만 다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는 백분의 백, 백분의 천, 백분의 만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강희는 위소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고 웃으며 욕을 했다. [제기랄, 일어나! 자네가 진정으로 충성을 다한다면 웬 놈의 '흘식불흘식'이냐? 다시 한 번 말해 봐!] 위소보는 더 이상 강희에게 달리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돼먹은 위소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소가 풀을 먹지 않고 개가 똥을 먹지 않는다는 소리나 다름 없는데 어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위소보는 더는 아는 척하지 않고 눈망울을 굴리더니 또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것은 황상께서 소인의 개 같은 목숨이라도 용서를 해 주시니 함부로 소인이 입을 놀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