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7章. 커다란 중책을 맡다 위소보는 글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머리통에 쥐가 나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란 다섯 글자만은 꿈속에서라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사십이장경'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고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그가 겪어온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노정(露呈)들, 즉 작위(爵位)직을 받고 또한 험악한 재난을 수없이 겪어야 했던 것은 모두 이 사십이장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만청(滿淸) 조정이 관외(關外)에서 관내로 진입하자 한인(漢人)들의 저항은 가열찼다. 한족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조정에서는 만에 하나 관내에서 밀려날 것을 대비하여 그간 중원에서 약탈했던 수많은 금은보화를 조종(祖宗)의 발원지인 녹정산중(鹿鼎山中)에 은밀히 감추었다. 그곳에 감추어둔 재물과 보화는 만일의 경우 한인들에게 내몰려 관외(關外)로 쫓겨난다 해도 팔기(八旗) 후손들이 먹고 써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역자 주:팔기는 청나라 군대 조직을 말함). 그 숨겨둔 보물을 한 사람이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비밀의 누설을 예방하기 위해 한 장의 지도를 여덟 등분으로 잘라 각기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 겉장 위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 사십이장경을 팔기에 각각 한 부씩 나누어 감추었다. 때문에 정확한 장보도(藏寶圖: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기 흩어져 있는 여덟 조각의 지도를 모아 합쳐야 하고, 그래야 보물을 찾아낼 수 있다. 이 비밀은 대대로 팔기 기주(旗主)에게만 단독으로 전해 내려왔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나중에는 황실에서도 그 비밀을 알게 된다. 또한 모동주(毛東珠)가 가짜 태후가 되면서 이 비밀은 강호에까지 널리 전해졌다. 위소보는 강호의 호걸 모십팔을 따라 황궁에 기어들어 오품태감(五品太監) 해대부(海大富)의 수행원 소태감(小太監) 소계자(小桂子)를 죽이고, 독약으로 해대부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하지만 해대부가 위소보를 제자로 삼은 배후에는 사십이장경을 손에 넣으려는 꿍꿍이가 있었고, 또한 가짜 태후 모동주도 천방백계로 위소보롤 위협하여 사십이장경을 갈취하려 했다. 신룡교의 홍교주(洪敎主)도 사십이장경을 손에 넣기 위해 그를 백룡사(白龍使)란 직책에 봉했다. 그리고 위소보의 다른 스승인 명조(明祖) 숭정황제(崇禎皇帝)의 공주(公主) 구난사태(九難師太)도 만청 왕조의 용맥(龍脈)을 끊을 목적으로 위소보에게 사십이장경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사면 팔방으로 죄어오는 압력으로 인하여 위소보는 몇 년 안에 이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을 다 찾아내고 그 비밀을 알아냈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한 그의 고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부인 쌍아의 도움으로 여덟 조각을 맞춘 다음 잘 기억해 두고 지도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위소보로서는 천하에 오직 자기와 쌍아만이 그 비밀 지도를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 낸 신비하고 기이한 이야깃거리 정도로만 여겨져 왔다. 그런데 태후의 탁자에서 그 사십이장경을 보았으니 위소보가 혼비백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태후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태후는 사십이장경을 힐끔 쳐다 본 후 공주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하게나! 소보는 우리 집 사람이 되었고, 황제이신 너의 오라버니가 조정의 많은 대사를 그에게 맡겼으니 더 이상 그를 못살게 굴지는 말거라. 그저 불경(佛經)이나 많이 읽고 제 몸이나 잘 거두는 것이 여자들이 할 소임이지. 소보! 그렇지 않소?] 위소보는 태후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진짜 태후라면 왕위에 점잖게 앉아 있을 일이지 사십이장경을 찾는 그런 번거로운 일을 왜 자처한단 말인가?) 위소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태후....황액낭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위소보가 백작부(伯爵府)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총관을 불러오라고 명을 받고 나갔던 집사(執事)가 돌아왔다.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찌하여 다륭은 오지 않는 게냐?] 집사가 대답했다. [위작 나으리 분부대로 다 총관은 한 사람을 데리고 온다 했습니다.] 위소보는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다륭이 오는 것을 보고 반겼다. [어서 오시구려.] 다륭의 뒤에는 전에 황궁 입구에서 위소보를 제지하던 어전시위가 따라 들어왔다. 위소보를 보자 다륭은 근엄하고 노기 띤 목소리로 그 어전시위를 책망했다. [이 위작 나으리로 말씀 드리자면 황상께서 가장 신임하시는 분이시다. 너희들이 감히 위작 나으리의 길을 막을 수 있단 말이냐? 목숨이 아깝지도 않더냐?] 그리고 위소보를 향해 말했다. [위 동생, 분부대로 데리고 왔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구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그 어전시위는 별로 주눅이 든 기색이 아니었다. 태연스런 어전시위의 모습을 보더니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다 총관께서 늘 말씀하지 않았소. '모르고 지은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 했소이다. 이 위소보의 이마에 위작 나으리라고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이상 누가 알아볼 수 있겠소? 그러니 이 사람을 탓할 일은 못 되지.] 어전시위는 위소보의 자애로운 말을 듣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 미천한 소인에게는 눈은 있사오나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은 없사옵니다. 이렇게 너그럽게 대해 주시니 이제야 비로소 저의 죄를 깨닫겠습니다.] 위소보는 다정스레 그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여보게, 형제! 그렇게 미안해 할 것까지 없네. 내가 오라고 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은 말게나. 사실 내가 들어올 때 형제가 펼친 무공은 정말 보통이 아니더구만. 또한 자기 직무에 충실한 것을 보고 나는 진심으로 탄복했었다네. 그래서 다 총관과 셋이서 술이나 한 잔 마시자는 것뿐이었다네.] 어전시위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기 귀까지 의심했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어서 술상을 대령하거라!] 이윽고 푸짐한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위소보는 한복판에 앉았다. 그 어전시위도 호탕한 사나이었다. 그는 별로 사양하지 않고 다륭 옆에 앉았다. 어전시위는 술잔을 들고 일어서서 아주 공손히 말했다. [위작 나으리. 소인은 늘 황궁의 어전시위들에게 '위작 나으리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을 들었소이다. 오늘 만나 뵙고 보니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입니다. 앞으로 위작 나으리의 분부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험난한 물속, 불바다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소인이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사내대장부라 할 수 없지요.] 위소보가 물었다. [형제, 너무 겸손해 하지 말구려. 다 총관, 이 형제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다륭이 일시에 대답하지 못했다. 황궁은 크고 어전시위들도 부지기수인지라 황궁 정문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일개 어전시위를 어찌 다륭이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다륭은 어전시위를 보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 네가 직접 여쭙거라!] 어전시위가 말했다. [위작 나으리, 소인은 우아대(于阿大)라고 합니다. 강호에서는 벽력장법(霹靂掌法)을 좀 안다 하여 부끄럽지만 '벽력장(霹靂掌)'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호의 친구들이 괜스레 소인을 떠받들며 그냥 같다 붙인 말인데 위 대인(大人)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대인이고, 소인이란 말이오. 우리 서로 귀애 거슬리는 말은 하지 맙시다. 우 힝제, 우리 이제부터 결의형제를 맺고 서로 호형호제 하는 것이 어떻겠소?] 우아대는 좀 놀라며 말했다. [소인은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존귀하신 위작 나으리를 감허 어떻게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소인이 위작 나으리의 얼굴을 깎는 격이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우리 강호 사람들은 강호의 규칙대로 하면 그만 아니겠소? 관청에서 쓰는 소인이니 비직이니 하는 따위의 말 나부랭이는 집어치기로 합시다. 다 총관의 생각은 어떠시오? 자, 우리 세 사람이 결의형제를 맺읍시다!] 다륭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아대 형제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저도 당연히 감당할 수 없지요.] 위소보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향안(香案)을 준비하라 분부했다. 그리고는 먼저 향 한 대를 쥐고 무릎을 꿇었다. 다륭, 우아대도 할 수 없이 향을 쥐고 위소보의 옆에 끓어 앉았다. 위소보가 말했다. [그렇지! 이래야 형제 같지! 우아대 형제, 금년에 몇이나 되셨소?] 우아대가 대답했다. [스물 여섯입니다.] 위소보는 몹시 기뻐하며 말셌다. [나는 금년에 스물 여덟이라오. 자네는 셋째 아우가 되어야겠군. 여기서는 다 형닙의 연세가 제일 많으니 큰형님이 되시고 말이오.] 위소보가 맹세했다. [우리 세 사람은 결의형제를 맺습니다. 우리 셋은 동년동월동일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동년동월동일에 죽기를 원하오이다.] 다, 우, 두 사람도 위소보를 따라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은 위소보가 맹세를 하며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위소보는 남방의 사투리를 섞어 빨리 이야기 했던 것이다. 위소보가 맹세를 할 때 '셋째 동생'이란 말은 듣기에 분명한 것으로 미루어 다륭은 형제 속에 넣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위소보는 원래 자기 일에 대해서 만큼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위소보는 이변에 다시 강호에 나간다면 에전 같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전에는 천지회를 뒷배경으로 삼았다. 또한 천지회 총타주와 독비신니(獨臂神尼) 구난(九難)을 스승으로 모셨다. 원래 강호 사람들은 본인보다 스승이 누구인가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는 천지회 내에서 존경받는 존재었다.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번 행보만큼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진근남이 죽자 천지회는 머리 없는 용과 다름없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형제들끼리도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구난은 비록 위소보의 스승이기는 하나 지금은 이름뿐이고 실속 없는 일에는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가 양주에 나타나는 날이면 곳곳에서 위해를 가해 왔으며, 핍박이 심하여 목숨마저 보전하기 어려울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일편단심으로 자기를 모실 사람을 물색하던 차에 우아대를 만난 것이다. 우아대는 자기보다 두 살 아래지만 무공이 대단한 인물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이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자 했겠다! 이 어르신은 이 녀석보다 두 살이 많으니, 네 놈과 같이 죽으면 칠백 삼십일은 내가 득을 보는 셈이군. 이 어르신의 무공은 보잘것 없으니 네 놈은 이 어르신을 잘 보필해야 하느니라. 설령 만에 하나 이 어르신이 잘못되는 날이면 네 놈의 목숨도 함께 날아갈 줄 알아라. 그러니 조심하거라.... 다륭 큰형님은 나이도 많은데 공연히 우리 두 형제와 잘못된다 하더라도 염라대왕은 우리와 따로 취급할 것이다.) 위소보는 맹세할 때 '셋째 동생'이란 말만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위소보는 늘 은표를 한 묶음 가지고 다녔다. 그는 두 장을 꺼내 다륭과 우아대에게 한 장씩 건네주며 말했다. [큰형님, 셋째 동생, 이것은 이 형제의 초면인사요.] 다륭은 받으면서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위소보쯤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위소보는 평소에도 돈씀씀이가 컸다. 그러나 우아대는 매우 놀라워 하며 말했다. [둘째 형님, 이렇게 함부로 돈을 쓰시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다륭은 돈을 품 속에 넣으며 말했다. [셋째 동생, 사양하지 말게나.... 둘째 형은 우리 어전시위 가운데서 손이 크기로 평판이 자자하시다네.] 위소보는 우아대의 품 속에 돈을 넣어주고 술을 마셨다. 술이 세 순배가 돌아가자 다륭이 말했다. [둘째 동생, 자네와 셋째 동생이 이런 인연을 맺었으니 차라리 셋째 동생을 둘째 동생의 신변에 두는 것이 어떻겠소? 이것은 내가 결정하기로 하지.] 이 말은 위소보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한 말이었다. 위소보는 내심 매우 기뻤으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셋째 동생의 앞길이 구만리 같은 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륭이 말했다. [둘째 동생이 황상께 간청한다면 그쯤이야 쉽지 않겠나?] 우아대는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형님들, 이 동생은 그저 돌아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면 그만입니다. 떠돌이 주제에 무슨 벼슬이니 돈을 탐하겠습니까? 둘째 형님, 이 동생더러 형님을 따르라 하시니 저로서는 진실로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형님께서 그렇게 많은 은표를 가지고 강호를 다니시자면 누가 돕지 않고서는 정말 시름을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북경으로 돌아온 이후, 강호에서는 그 어떤 일도 위소보에게 맡기지 않았다. 때문에 위소보는 일곱 부인과 아들딸들을 데리고 심심풀이 장난이나 하다가 이따금 강희가 부르면 황궁에 들어가 한담이나 했다. 태후는 연로한 탓인지 위소보보다 손녀 쌍쌍을 매우 귀여워하므로 가끔씩 노인데 방에 가서 즐겁게 보내다 오면 그만이었다. 위소보의 성격은 진득한 편이 못되었다. 그는 2년 동안이나 북경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라 처음 얼마간은 모든 것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좀이 쑤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우아대가 강호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위소보는 기뻐 펄쩍 뛰며 말했다. [셋째 동생, 나의 옛원수를 찾으러 함께 가겠나?] 우아대가 물었다. [누구신지요?] 위소보는 방 안에 부인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부인과 놀아나는....] 우아대가 깜짝 놀라 말했다. [형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구요?] 위소보는 벌킥 화를 내며 말했다. [제기랄 놈, 어느 놈이 그렇게 담이 커서 감허 이 어르신의 부인을 꼬드겨 낸단 말인가?] 그러면서 위소보는 손짓하며 말했다. [셋째 동생, 소리를 좀 낮추게나. 내 처는 무공이 대단하다네. 만약 이 어르신이 그 놈과 대결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내 처가 이 어르신을 먼저 죽일지 모른다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공작부를 빠져나와 한길에서 마차를 삯 내어 타고 곧장 어떤 저택 앞에 이르렀다. 그 집의 대문에는 '해징공부(海澄公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대만 정성공의 공자 정극상(鄭克爽)의 집이었다. 강희가 대만 투항 장군 시랑(施琅)을 파견하여 대만을 정벌할 때 정성공의 막내아들 정극상이 군대를 거느리고 조정에 투항했다. 강희는 인심을 얻기 위해 그를 죽이지 않고 '해징공(海澄公)'으로 봉했다. 위소보의 부인인 아가(阿珂)는 원래부터 정극상에게 마음이 있었다. 위소보는 그녀를 얻기 위해 갖은 수작을 다 피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정극상으로부터 3백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우려내는 바람에 정극상은 대만에서 갖고 온 재산을 몽땅 털리게 되었다. 위소보는 대문에 걸려 있는 '헤징공부'라는 현판을 가리키며 웃었다. [셋째 동생, 이 네 글자와 우리 대문에 걸린 '녹정공부(鹿鼎公府)'라는 글자와 겨루면 어느 것이 더 기맥(氣脈)이 셀 것 같은가?] 우아대는 장소가 밖인지라 위소보를 감히 형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위작 나으리께 물으려는 중이었습니다. 문패를 보니 이 집 주인도 공작(公爵)이신데 위작 나으리 댁 현판은 금빛찬란하고 이 집은 거무튀튀하고 글자 크기도 고르지가 않군요.] 위소보는 사기가 올라 말했다. [별로 다를 거야 없지. 하나는 붉디 붉고 하나는 검다 못해 더 검을 수가 없을 뿐이지.] 우아대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제가 보건대 이 공작은 아마도 운수가 사나운 모양이지요. 이런 운수 사나운 녀석이 위작 나으리의 부인과 쑥덕거린다니 정말 한심한 노릇입니다.] 우아대는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위소보는 벌컥 성이 나 소리쳤다. [정극상, 대갈통을 틀어박고 뭘 하고 있느냐? 요 망할 자식 매를 안 맞았군. 곱게 문 열어!] 우아대가 말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습니다.] 살짝 밀자 문이 열렸다. 정원은 고요할 뿐 이렇다 할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산지사방이 너저분하고 잡초가 무성한 것이 오랫동안 거두지 않아서 정말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 문도 채우지 않은 상태었으며 집안은 온통 거미줄이 얼기설기 드리운 것이 사람이라곤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위소보는 흥이 사라지고 말았다. [요놈 자식이 달아났나, 죽었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별의별 수작으로 나의 부인을 꼬드겼지. 혼내 주지 않은 걸 천만다행인 줄 알거라!] 두 사람이 돌아 나오려 할 때, 돌연 뒤뜰에서 목이 쉰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위소보는 일순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죽지 않았구나! 후원(後園)에 있구나!] 그들은 후원으로 달려갔다. 후원은 원래 공작부의 화원이었다. 화원에는 잡초만이 무성했다. 화원 가운데 연못이 있었지만 물을 갈아주지 않은 탓으로 악춰가 풍기고 구역질이 났다. 오직 몇 대의 연꽃이 뾰족한 끝을 들이밀고 있을 뿐, 그것마저 봄바람에 다 시든 것 같았다.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쥔 채 말했다. [가자!] 우아대는 예리한 눈길로 연못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좀 기다리십시오.] 봄바람이 불어와 가냘픈 연꽃만이 간들거릴 뿐, 아무런 그림자도 없었다. 비록 봄볕이 내리쪼이고 있었지만 위소보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우아대의 등뒤로 가서 몸을 기댔다. 돌연 또 한차례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처량하고 음산하었으며 약간은 미친 듯한 느낌도 주었다. 확실히 웃음소리는 그 연못에서 들려온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연못은 사람은 고사하고 새들마저 몸을 숨길 수 없는 곳이었다. 위소보는 온몸을 떨며 놀란 소리로 외쳤다. [귀신이다!] 그외 눈 앞에는 정극상의 흉악스러운 몰골이 선명히 떠올랐다. 양주 여춘원에서 몽환약으로 정극상을 눕히고는 옆에 있던 그의 정인(情人) 아가를 취했다. 위소보는 그 날 건녕공주를 제외한 다섯 처를 모두 다 희롱하였으며, 아가에게 임신까지 시켰다. 그렇게 하여 위소보는 정극상을 핍박하여 아가를 빼앗아 냈다. 통흘도(通吃島)에서 자기의 스승 진근남이 정극상의 손에 죽자 의분에 북받쳐 복수할 일념으로 칼을 갈던 그는 정극상의 모계, 부계, 형제자매 가릴 것 없이 모두 없애 버리려 했다. 이에 정극상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 누나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그에게 돈을 내놓았다. 그는 정극상의 손가락 하나를 자르면서 그를 핍박하여 혈서로 삼백 팔십만 냥의 돈을 내놓는다는 '차용증'을 쓰게 만들었다. 위소보와 한통속인 포악스런 어전시위들에 의해 재차 빚독촉을 받은 정극상은 가정이 형편없이 파산되고 나중에는 무릎을 꿇고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있었던 일들이 위소보의 눈 앞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위소보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 다리가 무쇠덩이를 달은 것처럼 무거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작 나으리, 정 동생!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이라네. 나는 그 때 삼백 팔십만 냥이라는 돈을 받지 말았어야 했지. 나를 살려 주기만 하면 한 푼도 어긋남이 없이 삼백 팔십만 냥을 고스란히 돌려 드리겠네. 아니 3부 이자까지 쳐서 일삼은 삼, 삼팔 이십사 모두 삼백 구십 일만 사천 냥이군. 원금에 이자까지 몽땅 갚겠소이다. 정작 나으리, 부디 저승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시구려. 비록 임종시에는 비참했지만 저승에 가서 백만장자가 된다면 이 얼마나 가문이 빛나는 일이오. 그렇지 않소?] 사방은 고요하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우아대는 위소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눈길을 연못에서 떼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위소보는 정극상이 몸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계속 중얼거렸다. [정 동생, 동생이 아가를 그리워 하는 마음 나도 잘 안다오. 나는 부인이 일곱이나 되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제는 마음뿐이지 힘이 모자란다오. 그래서 아가를 돌려주려 하오. 하지만 아가도 지금은 꽃같은 아가씨가 아니니 별로 매력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정작 나으리께서는 이제 몇 백만 냥이나 되는 은자가 다시 생길 텐데 어디 가서 괜찮은 처자 하나 못 얻겠소? 그러니 굳이 아가를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게요.] 또 나지막한 소리가 유령 목소리처럼 위소보의 귀에 들려왔다. 위소보는 말했다. [정 동생....] 우아대가 돌연 소리쳤다. [그러지 말고 나오시오. 머리를 처박고 숨어 있으면서 어찌 영웅 호걸이라 하겠소?] 위소보가 말했다. [셋째 동생, 그....그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오. 괜히 귀신을 건드리지 말구려....] 우아대가 냉소했다. [이 환한 대낮에 무슨 귀신이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둘째 형님, 귀를 꼭 틀어막으십시오. 꼭 틀어막아야 합니다!] 위소보가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귀 같은 웃음소리가 두려워 양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우아대는 연못가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단전(丹田)으로부터 진기(眞氣)를 끌어올려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벼락같이 진기를 내뿜었다. 위소보는 내공의 기초가 전혀 없어 귀를 꽉 틀어막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늘땅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찔하여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아대는 또 한번 나직하면서도 무겁게 호통을 쳤다. 마치 평지에서 회오리 바람이 이는 것 같고, 연못가의 연꽃이 한대 한대씩 허리를 굽히는 것 같았다. 이 회오리 바람이 연못가를 천천히 감돌아 오르자 연못 가운데에서 온 얼굴이 흙투성이가 된 사람의 머리통이 솟아올랐다. 우아대는 즉시 연꽃을 밟고 그 사람 곁에 다다랐다. 우아대는 그 사람을 잡아 내력으로 혈도를 짚어 놓았다. 그리고 그 사람을 덥석 안아 들고 연꽃을 밟고 오면서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자가 바로 위작 나으리께서 찾던 사람이 아닙니까?] 위소보는 대답하지 않고 펄쩍 뛰면서 우아대의 주위를 두 바퀴나 돌아보며 위아래로 살폈다. 우아대는 연못으로 들어갔다 왔지만 손에 흙이 묻은 것을 제외하고는 물 한 방을 묻어 있지 않았다. 위소보는 너무도 괴이하여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겨우 말했다. [셋째 동생, 그래 이것이야말로 요술이 아니오?] 우아대가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사람이 위작 나으리께서 찾던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은 우아대에게 혈도를 짚혀 땅바닥에 누운 채 꼼짝 못했다. 그의 머리에서 흙탕물이 흘러내리면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드러나자 얼굴의 주름살도 또렷하게 드러났다. 위소보는 한참을 뜯어보고서야 어렴풋하게나마 정극상의 모양새를 찾을 수가 있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정작 나으리, 무슨 무공을 연마하고 계십니까? 잠수하는 훈련을 하는 걸 보니 대만으로 돌아가실 모양이지요. 또 한판 조정과 맞붙어 볼 작정이시오?] 정극상은 웃으며 말했다. [히히.... 잠수? 맞붙어? 그건 모두 해 볼만한 일이지.] 그의 날카로운 이빨은 야수의 이빨처럼.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위소보는 마치 그의 이빨에 물리기라도 할 것 같아 급히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정씨 양반! 이 어르신을 알아보겠는가?] 정극상이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요지(瑤池) 서왕모(西王母)의 옥녀(玉女)가 아니던가?]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서왕모의 옥녀라구? 이 양반은 지금 남녀 구별도 못 하고 있군. 하하하!....] 그는 웃다가 갑자기 몸을 치떨었다. 햇변은 쪼었지만 봄 한기는 싸늘했다. 정극상은 홑옷을 입고 있었고 전신은 흙투성이로 새파랗게 질린 채 땅에 누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삼십여 세의 부잣집 공자이고, 일대 명장인 정성공의 후손이며 또한 청조가 공작으로 위임한 정극상은 지금 백발ㅚ 성성한 육십 먹은 늙은이처럼 변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정기가 감돌았고 들끓는 열정과 흥분에 싸여 있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정 공자, 물 속에서 뭘 했는가?] 정극상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병(水兵)노릇을 했다. 포로를 붙잡기 위해서....] 그는 말하며 품 속에 넣었던 손을 꺼냈는데 펄떡펄떡 뛰는 미꾸라지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는 미꾸라지의 대가리를 썩썩 씹어 먹었다. 선지피가 입으로 줄줄 흘러 내리면서 미꾸라지는 버둥거렸다. 위소보는 너무도 흉측하여 물었다. [네 놈은 사람이냐, 짐승이냐?] 정극상이 대가리를 다 먹고는 몸뚱이를 내동댕이 치며 웃었다. [다 죽고, 달아났소. 모두 날아갔다오!] 위소보는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양심 없는 놈들! 옛날에는 정씨 가문을 일러 국성(國姓) 뭐라고 추켜세우더니만 지금은 그 위세가 기울게 되니 모두 슬금슬금 내뺀 모양이구나.] 돌연 위소보는 비애를 느꼈다. 어린 시절 양주 기생원에서 천대를 받으며 살던 때에도, 또 그의 스승이 정극상의 손에 살해되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색다른 비애었다. 위소보는 평탄치 않는 길을 걸어왔으며 그 길에는 항상 고통과 슬픔이 뒤따랐다. 그러나 지금처럼 슬퍼 본 적은 없었다. 위소보는 사색에 잠겼다가 슬그머니 품 속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호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었다.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이 돈을 갖고 올 리 만무한 노릇 아닌가? 그는 우아대에게 물었다. [셋째 동생, 수중에 은자 만 냥 정도 지니고 있는가? 내 좀 먼저 씀세!] 우아대는 들은 척도 않고 개죽음이 다된 정극상만을 뚫어지게 보다 돌연 냉소하며 말했다. [귀하의 무공은 대단하구만!] 위소보가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웬 놈의 허튼 소리냐? 이 사람이 지금은 이래도 이전에는 겉치레만은 그럴 듯했다네. 무공이야 이 어르신보다 별로 나을 바 없지만, 지금 이 모양이 되고 보니 정말 비단보에 싼 개똥이군. 미치광이가 된 놈에게 무공이 다 뭔가?] 우아대는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정극상의 눈 앞까지 내밀었다. 정극상은 날카로운 이빨로 우아대의 손가락을 물려 했다. 그는 살짝 신형을 날리면서 번개같이 발 끝으로 정극상의 태양혈을 눌렀다. 우아대가 이제 내력을 쏟아내는 날이면 정극상은 죽어 버린다. 사람의 전신 혈도 중에서 '태양혈'이 제일 말랑말랑하고 치명적인 혈도이다. 때문에 무공 초심자들은 태양혈을 어떻게 보호할 것을 알아야 한다. 정극상은 꼼짝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를 왜 때리는가? 자네에게 미꾸라지를 주지 않아서 그러나?] 우아대가 말했다. [흥! 네가 귀신으로 가장하고 도깨비 놀음을 한다 해도 이 우 아무개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우아대는 발끝으로 정극상의 목 혈도를 풀어 주었다. 정극상은 꿈틀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자네 무공은 정말 대단하구만. 좀 배울 수 없겠는가?] [흥!] 우아대는 돈을 위소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여기 있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저 사람에게 주게나!] 우아대는 정극상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 돈은 위작 나으리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분명히 기억하란 말이다. 네 놈이 만에 하나 은혜를 원수로 대한다면 너 같은 놈을 죽이기는 식은 죽 먹기지!] 우아대는 이렇게 말하며 벅공장(劈空掌)으로 수십 장 밖에 있는 팔뚝만한 나무를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뜨렸다. 위소보가 말했다. [야, 대단하구나!] 정극상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하며 말했다. [아니? 왜 저 나무가 부러졌지?] 우아대는 무표정하게 걸어갔다. 위소보는 따라가며 말했다. [돌아가서 반드시 은자 만 냥을 갚아 줄 테니....] 돌연 눈 앞에 종이 조각들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돌아 보니 정극상이 돈을 갈기갈기 찢어 날리고 있었다. 위소보가 놀라 소리쳤다. [아니, 저 놈! 지금 뭣하고 있는 게냐?] 우아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놈, 저 녀석은 만 냥이란 되는 돈을 물에 던졌구나.] 그는 약간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우아대를 보기도 좀 쑥스러워 말했다. [셋째 동생, 방금 동생은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떤 무공인가?] 우아대는 아주 공손히 대답했다. [위작 나으리,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사자후(獅子吼)'라는 것으로 소림(少林) 내공 중의 하나입니다.] '사자후'는 불교 용어로, 그 뜻은 제 고집만 부리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경고하여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인데, 나중에 몇 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역대 고승(高僧)들의 노력으로 위력이 무진장한 내력을 창조해 냈다. 한번 일갈(一喝)을 하면 상대방은 혼비백산하여 내력을 몽땅 잃게 된다. 그러나 이 무공은 너무도 고심(高深)하여 소림사의 고승 중에서도 몇몇만이 겨우 연성했다. 이로 보아 우아대의 외공, 내공은 최고봉의 경지에 도달했음이 분명했다. 위소보가 물었다. [셋째 동생도 소림사 중대가리 녀석의 제자요? 사실 이 위소보도 소림사 '회(晦)'자 배분의 고승이란 말일세. 하하하!] (작자 주:위소보는 강희의 명령을 받고 오대산에 가 있는 노황제 순치(順治)를 보호하기 위하여 소림사에 가서 몇 년간 중이 되었다. 그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림사 회총(晦聰) 대주지(大住持)는 소림사의 무공을 조정에 누설시키지 않으려고 위소보에게 회명(晦明)이라는 법호(法號)를 지어주고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위소보는 배분상 소림사의 일대 고승 반열에 들 수 있다.) 우아대는 두루뭉실하게 대답했다. [때를 잘 만났을 뿐이지요. 비직은 소림 무공을 좀 배웠을 뿐입니다. 위작 나으리의 웃음거리나 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위소보의 하인이 달려 왔다. 그는 위소보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오래도록 찾았습니다. 지금 빨리 황궁으로 들어 가셔야겠습니다. 황상께서 다 총관을 보내 새 번씩이나 찾았습니다.] 무슨 일로 이처럼 급히 찾는지 몰라 위소보는 더 지체하지 않고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달려갔다. 황궁의 서가에서 강희는 뒷짐을 지고 서성거리며 기다리다가 위소보가 들어서자 질책했다. [위소보! 요 죽일 놈의 소계자야! 또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게냐? 오늘 강친왕 걸서가 돌아와 근보의 일을 아뢰기를....] 위소보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괜히 딴 데 정신을 팔다가 커다란 낭패를 보게 된 것은 아닐까? 걸서 형님이 근보 늙은이의 일을 몽땅 내게 뒤집어 씌웠다면....강친왕부에 사람을 파견해 기다렸다가 그의 입을 봉해야 했는데.... 하지만 소현자가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 걸로 봐서는 별로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위소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희는 이리저리 서성이며 무엇인가 깊이 사색하고 있는 눈치었다. 강희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귀밑에는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현자도 황제 자리 지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나 보군!) 강희는 문득 위소보의 앞에 와서 말했다. [소계자,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너는 강호에서 소백룡으로 불린다면서?] 위소보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십 수 년간 황제 신변에 있었으니 그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사연이 있든 황궁과 연을 맺은 사람이 스스로 '용(龍)'자를 호칭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반역 행위이다. 천하에 오직 황제만이 진정한 용천자(龍天子)이기 때문이다. 위소보는 가슴이 두근거려 말이 잘 나오지 않았으나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강호의 친구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옵니다. 새겨 듣지 마소서.] 강희는 한참을 듣고 있다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걸서가 상황 보고를 할 때, 자네를 많이 칭찬했다네. 자네는 근보의 친구이고 또 황룡대협과 서로 가까운 사이 아닌가? 그래 별호가 '제기랄 놈의 소백룡'이신 소계자 어르신! 어르신께서 황하 치수 현지로 가는 게 어떻겠는가?] 위소보는 놀랐다. [치수라니요? 황상, 이 미천한 신하는 소벡룡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기실은 가문 논바닥에서 기어다니는 용....] '용(龍)'자가 또다시 입에서 튀어나오자 위소보는 자기의 뺨을 후려치며 자신을 욕했다. [이 무슨 망발을 함부로 지껄이는 주둥아리란 말인가? 황상, 이 미천한 신하야말로 일개 말라빠진 논바닥을 헤매는 지렁이에 불과하온데 어찌 제가 물을 다스리겠습니까? 황상, 근보 영감이 합당치 않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소인은 황궁에서 황상의 시중이나 들고자 합니다. 정말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강희가 말했다. [자네는 겁낼 것 없다네. 자네를 하독으로 봉하면 근보가 자네를 도울 거네. 나는 근보의 치수방안을 보았는데 정말 훌륭하더군. 소계자, 우리의 정은 고난 속에서 맺어졌다네. 나는 자네를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거네. 황하 치수사업이 성공하게 되면 물론 자네에게 그 공로를 돌릴 것이고, 실령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근보 자신이 치수 방안을 올린 것이니 그 사람 책임이지. 소계자, 이걸 도박판에 비유한다면 자네 주사위로 던지는 격이라 '지존보'는 따 놓은 당상 아닌가? 제아무리 패가 잘 들어 왔다한들 자네의 '지존보'를 누를 수야 없겠지. 그러니 자네는 전혀 밑질 게 없지. 이것은 보고 도박판을 벌리기도 전에 따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런데 두려울 게 뭐 있겠는가?] 위소보는 전혀 밑질 게 없다는 말을 듣고 한번 도전해 볼 심사로 웃으며 말했다. [황상, 미천한 신하외 도박판 비밀까지 다 알고 계셨군요. 정말 제갈지량을 능가하시는 탁월한 헤안이옵니다. 황상, 그럼 미천한 신하는 분부받자와 주사위를 들고 그 놈들을 모두 발가벗기고 말겠습니다.] 강희는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이번에 북경에 돌아와 보니 강희는 예전처럼 속마음을 다 털어 놓지 않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강희를 존경하게 되었고, 또한 근엄함까지 느껴져 어쩐지 말을 걸기가 어색했다. 강희는 생각하다 말했다. [소계자, 자네가 이번에 하독으로 가면 조정의 늙은이들이 감히 드러내 놓고 반대할 수는 없겠지만 내심 불만이 매우 많을 걸세.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잘 하란 말이오.] 위소보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비천한 신하, 있는 힘을 다해 절대로 황상의 명예에 손상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됐데. 하지만 돈과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물건이니 너무 탐하지 말게나. 황하 연안 백성들은 대대로 황하의 재난에 시달려 왔으니 그 고통을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지. 그러니 그들에게 그 어떤 부담도 더하지 말고 강제로 부역을 시키지도 말게!] 강희는 위소보가 가져다 준 근보의 치수방안을 며칠밤 새워가며 상세히 연구하였다. 또한 강친왕 걸서는 북경에 돌아온 후 그 이해득실 관계를 근보를 대신하여 설명해 주었다. 강희는 깊이 생각을 한 끝에 근보를 다시 등용키로 결정했다. 생각 끝에 강희는 복안을 하나 생각해 냈다. 근보를 파직시키고 심문까지 한 것은 모두 자신의 성지에 의해 한 것인데 번복하자면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는 복장(福將)인 위소보가 떠올랐다. 위소보란 위인은 글도 전혀 모르고 여색ql라면 오금을 못 펴는 자인지라 이런 부류에게 하독을 맡졌다가는 황하 치수는 고사하고 황하 연안 땅이 모조리 그에게 유린될 것만 같았다. 강희는 위소보가 떠올랐지만 내심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위소보는 강희가 자신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것같아 말했다. [황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근보가 치하를 하던 8년 동안 그는 매우 청렴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고 하던데, 이 위소보는 치하 3년만에 필시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강희는 그가 또 흰소리를 친다고 여기면서 천천히 말했다. [2년 동안 자네는 북경에 없었으니 그간의 많은 일들을 잘 모를거네. 나는 근년에 들어 관리들을 제대로 단속하여 약간 효과를 보았다네. 소계자, 색이손(索爾遜)이란 사람을 아는가?] 색이손은 섬서(陝西) 안찰사(按擦使)이다.2년 전 조정에 있을 때 세력이 당당했던 위소보는 어지간한 사람은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 때 색이손은 그에게 무슨 덕이나 볼 심산으로 때때로 많은 양의 돈을 보내왔다. 그랬지만 위소보는 별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강희는 위소보를 보고 말했다. [색이손이란 자는 임명받자마자 은자 일백 육십 냥을 탐오(貪汚)하여 짐은 이미 그를 교살해 버렸다네.] 위소보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색이손이 얼마를 탐오했다구요?] [정확히 일백 육십 냥이라네. 두 달 전에 그는 감옥에서 교살 당했지. 그 때 순무(巡'憮) 포아노(布雅努)가 흠차대신으로 임명받고 색이손의 사건을 심사했는데, 이 놈 또한 죄인을 심사한답시고 하면서 제 뱃속을 채웠다네..그래서 짐은 그를 부실심사(不實審査)의 죄목으로 파직시켰다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이거 정말 아찔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로구나. 단돈 백 육십 냥에 목이 달아나다니, 이 어르신은 목이 이천, 삼천 개가 있더라도 남아나지 못하겠구나!) 강희가 또 말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았다네. 그래서 열흘 전에 짐은 칙령을 내렸다네.] 강희는 좀 있다가 흠령을 읽어 내려갔다. [무릇 다른 죄는 용서하더라도 탐관(貪官)의 죄만은 용서치 않는다. 만약 국법을 무시하고 탐오하는 악습을 고치지 못하는 자는 사형을 집행토록 하겠다. 국법이 엄하지 않으면 어찌 불법을 저지르는 자를 통솔해 나갈 수 있겠는가? 고로 지금부터 그 어떤 탐관이든 모두 사형에 처한다!] (작자 주:강희가 말한 내용은 '청성조실록(淸聖租實錄)' 122쪽에 찾아볼 수 있다.) 강희는 아주 근엄했다. 그렇지만 위소보는 오히려 우습게 느껴졌다. (일백 육십 냥을 탐오했다고 목을 베면 이 조정에는 남아날 벼슬아치 녀석이 하나도 없겠다. 색이손 녀석은 조정의 어느 높으신 나으리의 눈 밖에 나서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간 게지.) 위소보는 속으로는 웃었지만 넙죽 무릎을 꿇고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황상의 은혜는 가없이 넓소이다. 이 소계자가 앞으로 욕심을 부리다가 만에 하나 잘못되는 날이면 소gus자를 볼 면목이 없어질 뿐더러 양심도 없는 놈이지요.] 위소보는 이 때 강희의 심리를 읽고 강희를 소현자라 부르면 강희 또한 자신을 친구로 대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빌미로 환심을 사려고 했다. 과연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런 내 뜻을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만. 나는 사전에경고하는 바, 자네가 돈에 눈이 어두워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이 처남도 자네를 달리 돌볼 수가 없을 것일세. 성지로 그런 칙서를 내렸으니까!] 위소보는 이번에 황제를 다시 만나면서 어쩐지 어린 시절처럼 철없이 행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새삼 느꼈다. 비록 둘 사이가 친근하다고는 하지만 군신(君臣) 관계인지라 감정 상에도 분촌이 있어야 했다. 강희가 말했다. [그럼 이만 하겠네.] 위소보가 읍을 하고 물러날 때 강희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소계자, 자네 가거들랑 근보에게 전해 주게나. 다시는 이러저러한 일이 없을 것이니 직무수행을 잘 하라고 말이데.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하는지 못하는지 두고 보라고 하게나.] [예, 또 다른 분부하실 일은 없으신지요?] 강희는 자기가 이 천방지축인 혼세마왕(混世魔王)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것이 내심 흐뭇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언제나 철이 들는지.... 자네 자녕궁에 가서 태후 어르신 마님을 만나 뵙도록 하게나. 또 다른 분부가 없으신지 모르겠네.] 위소보가 하독에 임명되어 간다는 말을 듣고 부인들은 제각기 따라가겠다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래, 임자들은 그곳이 무슨 양주 여춘원쯤으로 생각하는 게요? 그곳 백성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고 있는데 고생도 모르고 자란 임자들이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이오? 또 그 연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가 고파 눈이 모두 누렇다고 하는데, 임자들처럼 미모의 여인들만 보면 자기 여편데로 만들고 나서 모조리 잡아 먹는다 하더구만. 그래 죽기가 소원이란 말인가? 이 어르신도 겁나는데....] 건녕공주는 태후가 잘 대해 주어서인지, 자기 신분이 다른 여섯 부인보다 높음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위소보의 귀를 틀어쥐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 저 애는 꼭 데리고 가요.] 위소보가 말했다. [임자는 금지옥엽으로 자랐으너 더더욱 안 되오.... 아야, 아얏! 구린내 나는 계집, 왜 이렇게 성화를 부리는 게냐? 소전 아가씨, 빨리 내 목숨을 살려 주시오.] 건녕공주는 일곱 부인 가운데 가장 오만스럽고 툭하면 위소보를 욕하거나 걷어찼다. 과거 소전은 건녕공주에게 앞으로 위소보를 못살게 굴지 말라고 하면서, 만약 한 대라도 때리는 게 눈에 띄기만 하면 열 대를 때려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건녕공주의 무공은 소전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때문에 공주는 소전을 가장 두려워 했다. 이리하여 그 뒤에 위소보는 공주로부터 시달림을 적게 받았다. 부인들의 소란이 계속되었지만 소전과 쌍아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위소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소전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만은 저도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네요.] 그 말을 듣자 건녕공주는 사기가 올라 더욱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니, 어떡 하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군.] 위소보는 너무 아파서 입을 딱 벌린 채 귀만 붙잡고 욕했다. [요 구린내 나는 년아! 그래 남편 귀가 떨어져 나가면 퍽이나 보기 좋겠다!] 쌍아가 그래도 제일 가슴 아파했다. 그녀는 성격이 온순해 좀처럼 성을 내지 않았다. 쌍아가 공주를 보고 말했다. [언니, 손을 놓아 주세요. 위 상공이 우리를 데리고 갈 만하면 어련히 알아서 데리고 가겠지요. 그렇지 못하시겠다면 또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소전이 말했다. [쌍아, 당신은 너무 순진하군요. 그가 무슨 배곯는 백성을 생각한다고 그러세요? 보란 말이에요. 이번에 양주에서 북경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말이에요. 또 어디 가서 계집 사냥을 했는지 누가 안단 말예요? 데리고 가기 싫다면 우리가 안 가면 그만이나 남을 거추장스럽게 할 필요 있나요?] 건녕공주는 그제야 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 말이 정말이에요?] 위소보는 귀를 만지며 웃으면서 말했다. [소전의 말이 맞소. 확실히 봐둔 여자가 있다오.] 건녕공주는 또다시 그의 귀를 틀어잡으려 하면서 앙탈을 부렸다. [어서 말해 봐! 그 교활한 여우 같은 년이 누구지?] 위소보는 신행백변 신법으로 건녕공주를 피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 교활한 여우가 누구냐구? 바로 당신이야. 임자가 바로 교활한 여우란 말이오.] 위소보는 그의 십팔번인 '십팔모'를 부르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걸으며 생각했다. (야, 정말 이년들이 찰거머리처럼 착 들러붙어 사람을 못 살게 구는구나. 이 어르신이 거들떠보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단 말이야!) 그는 건녕공주가 떠들어대던 '교활한 여우, 교활한 여우 같은 년이 누구냐?'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흥! 네 년들이 모두 교활한 여우들이지, 어느 하나를 보더라도 문아보다 나은 년이 있느냔 말이다. 문아야 정숙하고 온화하지만 네 년들은 모두가 다 제멋대로들이지. 청아가 오만하고 포악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희들보다는 낫다. 너희들이 아무리 청아를 따라잡으려 한들 그녀를 따라올 수는 없지.) 위소보는 이렇게 문아와 청아를 생각했다. (지금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청아는 악독하기는 하지만 만나지 않으면 겁날 건 없지. 그 때는 이 어르신이 혼자라서 겁이 났지만 지금은 '사자후' 동생이 있으니 겁나지 않는단 말씀이다. 또 동생의 무공은 그 마귀 같은 년보다 출중하니까 말이야. 이 어르신은 그 동생을 시켜 두 계집년을 붙잡아, 히히.... 그 년들 깝대기를 벗기고 천천히 구워삶아 먹어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급해져 당장이라도 그들 자매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는 속으로 궁리했다. (이 어르신은 지금 하독으로 임명받은 몸, 치하 상황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탐문을 해서 그녀들의 그림자라도 찾아봐야겠다.) 공적인 일을 하는 척하면서 제 뱃속을 채우는 것이 위소보의 또 다른 재간이다. 하독부(河督府)는 개봉(開封)에 있었다. 위소보는 일곱 부인들을 속이고 우아대만 데리고 개봉으로 와서 상근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하독부에는 몇 사람만이 남아 관아를 지키고 있었는데 쥐꼬리수염을 한 총책임자는 신임 하독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근보는 하독을 담당하는 동안 몇 년 간을 황하 치수 현지에 있으면서 이 하독부에는 며칠 묵지 않았다. 지금은 하독도 아니니 이곳에 올 일은 더더욱 없어지게 된 것이다. 개봉부 도대(道台:우리로 하면 도지사 격)는 위소보가 새로 부임되어 온다는 말을 듣고 친히 위소보를 초대했다. 위소보는 문아 자매의 행적이 머리 속에 꽉 차 있는지라 모든 일이 다 귀찮게만 느껴져 초청마저 사절해 버렸다. 단지 쥐꼬리수염을 한 총책임자가 근보를 대신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므로 위소보는 하는 수 없이 참석했다. 술좌석에서 쥐꼬리수염을 한 총책임자는 큰 봉투를 꺼내 공손히 위소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근보 어르신께서 부탁을 하셨습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황상 폐하를 설득시켜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오.' 이렇게 말씀하시며 이 10만 냥을 위작 나으리께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마 부임하면 쓸 곳도 많을 텐데 적지만 성의로 받아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근보는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독을 담당하는 기간 동안 확실히 그 자신은 티끌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고관대작들에게는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 모든 관리들이 부패한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만이 청렴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하더라도 중앙 관리들의 도움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성사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근보가 청렴했다고는 하지만 황하 치수 현지의 많은 재물은 조정의 고관대작들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속담에 '소금 먹은 놈이 물을 켠다'고, 그렇지 않다면 어찌 강친왕 걸서등을 포함하여 모두들 그를 위해 동분서주 했겠는가? 10만 냥! 위소보는 어쩐지 속이 근질근질했다. 근 2년 동안 어찌된 일인지 그의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있는 돈만 해도 위소보는 아들 위호두(韋虎斗)와 딸 위쌍쌍(韋雙雙), 그리고 그의 일가집안까지 쓴다 해도 넉넉했다. 그러나 '돈이라면 뱃속에 있는 아이도 손을 내민다'고, 그 10만 냥을 받지 않으면 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것만 같았다. 봉투를 받으러 손을 내미는 순간, 위소보는 문득 강희의 말이 생각났다. (자네가 돈에 눈이 어두워 그 어떤 문제라도 일으키는 날이면 이 처남을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말게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근엄하고 엄중했던지라 위소보는 속으로 움찔했다. 위소보는 내밀었던 손으로 봉투를 밀치며 제법 정중하게 말했다. [근보 어르신이 나를 어떻게 보았단 말인가? 황하 연안 백성들은 대대로 황하의 재난을 받아 고생이 막심할 텐데 우리가 그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에게 어찌 역부(役賦)를 더 제공해 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 위소보는 강희가 한 말을 하느라고 했으나 '부역'을 '역부'라 했다. 쥐꼬리수염을 한 총책임자는 너무도 감동되어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백성들의 일을 이처럼 여기시니, 이것은 황하 연안 백성들의 커다란 복이지요. 근보 어르신이 아시면 필히 백성들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렸을 겝니다.] 위소보는 또다시 정색해서 말했다. [본 하독이 떠나을 때 황상의 성지가 있었소. 그것인 즉 '근보에게 전하라. 앞으로 이러저러한 일이 없을 것이니 걱정 말고 직무에 충실하기 바란다. 내 말이 진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두고 보라!'고 하시며 이 성치를 필히 근보에게 전하라고 하였소.] 쥐꼬리수염을 한 총책임자는 놀라며 물었다. [하독 나으리께 감히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황상께서 말씀하신 '이러저러한 일'이란 무엇이옵니까?] 위소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 일은 자네나 내나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근보 어르신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 우리 같은 벼슬아치야 황상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만 알면 됐지, 더 캐고 물을 게 있겠소?] [네, 네! 소인이 미천하여 그러하오니, 그런 줄 아시고 널리 헤아려주십시오.] 그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우아대가 손으로 술잔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다가 돌연 술잔을 지붕으로 날려 보내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내려와 우리하고 한 잔 같이!....] 술잔은 파공성을 일으키며 천정을 뚫고 나가 지붕에서 긴 여운을 남기면서 이내 잠잠해졌다. 위소보는 질겁을 하며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 상 밑으로 기어들었다. 우아대는 그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르신, 겁내실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은 가 버렸습니다.] 위소보는 겨우 앉으며 말했다. [이....이 사람아! 어쩌자고 그런 망발을? 본 하독을 죽이려고 그러는가?] 우아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아마 지붕에 오래 엎드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해치기 위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빨리 쫓아야지!] 우아대가 말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소인의 재간으로는 그의 경공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내심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그는 속으로 욕했다. (아마도 그 계집년이겠지. 제기랄, 네 년은 마귀란 말이냐? 왜 이 어르신을 이리도 못살게 구는 게냐?) 아름다운 강남땅은 처처에 꾀꼬리가 지저귀고 화려한 꽃들이 만발했다. 저녁 나절, 휘황찬란한 등불이 눈부시게 비추고 한 척의 화려한 유람선이 진회하(秦淮河) 강변에 유유히 떠 있다. 뱃머리에는 부잣집 공자의 옷차림을 한 위소보가 가부좌를 틀고 시름없이 앉아 있었다. 우아대는 호위무사로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진회하 강변은 자고로 기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봄날 저녁 무렵이면 더욱 그러했다. 한 척, 한 척 유람선마다 요염한 옷차림에 곱게 단장한 여인들이 아양을 부리며 비파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했으며, 귀인과 벼슬아치들, 대상인, 시인, 묵객들도 서로의 솜씨를 뽐내고 부귀를 겨루기에 아주 좋은 절기였다. 어릴 때부터 기생원에서 자란 위소보는 기녀들의 짙은 화장에 구역질이 나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우아대에게 말했다. [모두들 볼품 없는 계집년들이야. 그 어느 모로 보건 여춘원의 계집들만 못하구먼....] 그 때 목이 쉰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한 포기 참대 순이 내 마음에 들었네....] 위소보는 기뼜다. 자기 배 옆에 한 척의 허름한 배가 있었는데 초라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낡은 돛에 비스듬이 기대어 '들꿩'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여춘원 같은 곳의 삼류 기생들이나 부르는 퇴폐적인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옆에는 장님이 앉아 앵금으로 반주하고 있었는데 마치 돼지 멱 따는 소리처럼 듣기가 구차하였다. 위소보가 반색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오경이 그리워(相思五更調)'를 아는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노래만 불렀다. [매일밤 이 몸은 침대머리에서 낭군을 그리며....] 위소보도 홍이 나서 박자를 치며 따라 불렸다. 위소보는 물었다. [십팔모도 부를 줄 아느냐?] 십팔모(十八摸)! 이 노래는 기생원에서 가장 퇴폐적인 노래로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더듬고 핥았다는 내용으로 일반 기생원에서는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불렀다. [한 번 입으로 더듬었네, 아가씨의 머리 카락....] 위소보는 박수를 치며 '좋다!'하고 응대를 한 후 또 물었다. [너의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그녀는 목이 쉰 소리로 대답했다. [이 비천한 몸은 소도홍(小桃紅)이라 부릅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소도홍? 이 어르신이 좀 보이도록 얼굴을 좀 돌리게나.] 그녀는 주저하다가 얼굴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자 위소보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그녀는 마흔 일고여덟은 되었을 성싶었다. 깊이 패인 주름살에 떡칠 하듯 두텁게 분칠을 해놓고 이름이 빨간 복숭아 소도홍(小桃紅)이라니 정말 그 좋은 이름이 아깝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내 보기에 소도홍보다는 원숭이 볼기짝이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구만!] 만면에 굴욕감과 처량함을 가득담은 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위소보는 껄껄껄 앙천대소를 하다가 자기 뺨을 후려 갈기며 말했다. [요놈의 주등이가 또 한 대 얻어 맞을 짓을 했구나.] 그는 어머니 위춘방이 생각났다. (어머니도 지금 저 여자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용모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녀도 한평생 몸 파는 일로 '오경이 그리워'라는 노래를 부르며, 저 모양이 되지 않았던가....) 위소보는 심히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원숭이.... 아니 소도홍! 보아하니 춘추가 지긋하신 것 같은데 이제 이런 일을 그만두고 좀 어린 아가씨들을 구해 여춘원처럼 꾸며 주모 노릇이나 하면 좋을 것 같구려.] 소도홍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으리께서 이처럼 보살펴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하지만 어린 아가씨들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입니다요.] 위소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 돈이 문제겠지요?] 그는 한 뭉치의 돈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이거 오십 냥인데 우선 갖다 쓰시게.] 앵금을 켜던 소경이 돈을 받아 소도홍에게 넘겨 주었다. 소도홍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기실 여자 나이가 이쯤 되고 보니 찾아오는 사내도 적었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이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진회하 강변으로 나와 캐케묵은 노래나 부르며 서 푼, 다섯 푼 빌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남들의 멸시를 받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힁재수가 있는지 부잣집 공자를 만나 은자 오십 냥을 그냥 벌었으니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소도홍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감히 나으리의 함자를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나는 위가라오.] 그 소경이 높은 소리로 외쳤다. [위 나으리께서 소도홍에게 화장값 오십 냥을 주셨도다!] 이 진회하에서는 기생이 마음에 들면 손님들이 화장값입네, 노랫값입네 하고 돈을 건네주는 것을 크게 소리쳐 널리 알리는 관례가 있었다. 소경은 보기에는 병약해 보였으나 목소리는 청청하여 배를 타고 있던 손님들의 이목이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위소보가 언뜻 보기에도 구차한 계집에게 오십 냥이나 되는 돈을 주었다는 말을 듣자 그들은 일재히 웃음보를 터뜨렸다. 한 서생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저런 계집이 소도홍이라 자처하니 애통해 하는 사람이 있고, 소도홍이 이 진회하의 기생 반열에 들어 애통해 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고운 아가씨 많건만 두 눈을 번듯이 뜨고 보기 구차한 소도홍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또한 애통해 하는 사람 있도다!] 위소보는 그 서생이 뭐라고 했는지 딱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불만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녀석! 오십 냥이 그렇게도 욕심이 나느냐? 네 놈 집에는 이런 소도홍이 몇이나 있는지, 있다면 이 어르신께서 오십 냥을 내리겠다.] 서생은 좀 놀라며 말했다. [우리집의 소도홍이라니?] 위소보는 정색해 말했다. [그래 네 에미, 누이, 여동생.... 그들을 보고 소도홍이라 부르지 않더냐?] 이 서생은 위소보가 자기를 욕하는 것임을 알고 분이 상투 밑까지 올라 부르르 떨며 말했다. [허허, 이런 법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성현들이 말씀하기를 '계집과 소인은 먹여 살리기 어렵다'고 했는데, 정말 그 말을 믿어야겠구먼!] 위소보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철두철미하게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지지 않으려고 그 말을 받았다. [네 이 녀석, 뭐라구? 네 에미와 작은 동생도 먹여 살리기 어렵다구? 이 어르신께서 오십 냥쯤은 얼마든지 있으니 내가 먹여 살려주마.] 그 서생은 입으로는 망나니 같은 위소보를 대적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치를 벌벌 떨었다. 위소보는 또다시 은자를 꺼내며 말했다. [소도홍 아가씨, 옛소! 여기 백 냥 더 있소. 좀 통이 크게 여춘원을 꾸려 저 개똥같은 녀석의 에미구, 할미구, 누이구 여동생이구 모조리 사 오면 그 여춘원 아주 흥성할 거외다. 당신은 돈방석에 올라 앉을 날이 멀지 않았구려.] 서생이 말했다. [자기 식구를 기생원에 팔아먹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당신 몹쓸 사람이구먼! 어이, 사공 양반! 어서 배를 몰게나!]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잘 가시오. 부디 조심하시구려. 괜히 물에 빠져 자라 새끼가 되지 말고.] 옆에 있는 뱃머리의 젊은 공자가 느릿느릿 부채질 하면서 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저 어르신은 정말 손이 크구만!] 그러면서 몸을 돌리더니 자기 잎에 있는 심부름꾼 같은 노인을 보고 물었다. [저 나으리께서 소도홍에게 백오십 냥을 주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주면 좋겠소?] 노인이 말했다. [어린 나으리께서는 남에게 져 본 일이 없으니 이백 냥은 줘야지요.] 그러면서 건너 배에 돈을 던지며 말했다. [노남성(魯南成) 공자(公子), 소도홍 아가씨에게 은자 이백 냥이요!] 위소보는 호승심이 강한지라 이런 부잣집 자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히히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노남성'이 뉘 아들이더냐? 소도홍! 이 어르신은 삼백 냥을 더 주겠소.] 말도 끝나기 전에 노남성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 노남성은 사백 냥이요.] [위 나으리는 오백 냥!] [육백 냥!] 이렇게 두 사람이 승강이를 하다 보니 천 냥까지 올라갔다. 위소보는 이렇게 소리치다 보니 목이 말랐다. 노남성의 배를 젓고 있는 뱃사공이 다가와 차 두 잔을 위소보와 우아대에게 권하며 말했다. [소인은 한평생 이 진회하에서 지내면서 위 어르신처럼 돈을 물쓰듯 하는 손님은 처음 봤소이다. 위 어르신, 목이라도 좀 축이시지요. 어쨌든 남에게 지지는 말아야지요.] 위소보는 기세가 올라 있던 지라 차를 단번에 마셔 버놨다. 우아대도 지껄이지는 않았지만 안주가 좀 짜서 차를 절반쯤 마셨다. 노남성은 웃으며 말했다. [위 나으리, 우리 계속해 보지요?] 위소보는 손에 침을 뱉어 가며 말했다. [거야, 더 말할 게 있는가? 이 어르신은 천백 냥을 주겠네.] 그런데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은자가 쥐어지지 않았다. 위소보는 얼마인지 모르지만 품 속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 소도훙의 배로 던지려 했다. 그러나 자기 쟤간으로 던지면 물에 빠질 것을 잘 알고 있는 위소보는 소리쳤다. [우리 우아대가 또 넘겨 준다오!] 돈을 받으려는 순간 우아대는 머리가 아찔해쳐 옴을 느끼고 소리쳤다. [둘째 형, 잘못 됐소. 차에 독이....] 우아대는 뱃사공을 손으로 잡으려 했다. 뱃사공이 몸을 살짝 피하자 우아대는 헛손질을 하고 비틀거리며 배 바닥에 쓰러졌다. 위소보도 연달아 쓰러졌다. 뱃사공은 허허 웃으며 노남성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성 아가씨, 됐습니다!] 뱃사공은 한 손에 위소보를 들고, 또 한 손에 우아대를 들고 노남성의 배로 뛰어올랐다. 노남성의 유람선은 화살쳐럼 물살을 가르며 쏘아쳐 나갔다. 밤은 깊어 인적이 없고 삼라만상은 정적에 횝싸였다. 유독 한 척의 유람선만이 수면을 가르며 쏜살같이 북쪽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옷을 갈아 입자 노남성은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검은 머리채를 길게 드리운 화사한 얼굴은 그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며, 정기가 감도는 눈망울은 약간 냉혹한 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여뻤다. 그는 바로 청아있다. 노남성이란, 개방 방주 성룡의 고향이 산동 노남(魯南)임으로 노남성 공자로 자칭하었으나 위소보는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뱃사공과 심부름꾼으로 가장한 사람들은 개방 쟤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성 아가씨, 이 두 놈을 어떻게 할까요?] 창아는 우아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놈은 물애 던져 물귀신이 되게 하고, 이 위가 놈은 잠시 후에 내가 다시 처리하겠소.] 제자들은 분부대로 우아대를 첨병! 하는 소리와 함께 물에 쳐 넣었다. 청아는 위소보를 발길로 걷어차면서 냉소하였다. [흥! 위가 놈도 이런 날이 있구나! 디 놈과 회희낙락하던 문아와 그 황룡대협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위소보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돌연 배가 휘청했다. 청아가 물었다. [셋째, 왜 그러는가?] 개방 두 졔자가 급히 나와 보니 단지 '풍덩, 풍덩!'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청아가 놀라며 신룡편을 째들자 소도홍의 반주를 맡았던 마귀 같은 장님이 선실 안으로 짓쳐들어왔다. 청아가 신룡편을 꺼내기도 전애 그 장님은 앵금통으로 청아의 일곱 혈도를 짚었다. 청아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장님'의 눈에서 번쩍하고' 빛이 났다. 그는 장님이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위소보를 부축하려 했으나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일어났다. [히야! 장님이 정말 신통하구만!] 그 사람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위 공자님,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위소보는 우쭐대며 말했다. [요 구린내 나는 년이 보잘것 없는 재간로 이 소백룡 어르신을 물에서 어떻게 해 보겠다고? 흥, 어림 없는 수작이지!] 원래 위소보의 무공은 별 볼일 없었지만 임기응변 능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원래 유람선에서 개방 제자들은 뱃사공으로 가장하고 술, 안주, 차에 몽환약을 넣었다. 이리하여 무공이 정심하다는 우아대도 쓰러 눕혔다. 그러나 위소보는 일찍이 문아가 만들어 준 백독도 소용 없는 약을 먹었으니 몽환약같이 독성이 작은 약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아대가 이렇게 되고 보니 위소보는 호신부(護身符)를 잃는 격이었다. 그는 뱃사공의 솜씨를 보고 자신의 무공으로는 열 명이라도 적수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우아대가 넘어지자 그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위소보는 곧장 머리를 굴려, 몽환약에 중독된 척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기회를 노리다가 도망칠 요량을 했다. 정말 중독된 것처럼 시늉을 하며 청아가 발길로 걷어차 삣속까지 욱신욱신 거리는 아픔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욕을 퍼부었다. (요 빌어먹을 년, 이 어르신께서 네 년 옷을 흘딱 벗겨 이 어르신의 여편네로 만들지 않으면 위가라는 성을 갈겠다.) 그 장님은 위소보를 안고 웃으며 물었다. [동생, 나를 알아보겠는가?] 위소보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되물었다. [누구신지요? 저는 정말 생각나지 않습니다.] 장님은 인피면구를 벗었다.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외쳤다. [호 형님!....] 그의 이름은 강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미도왕(美刀王)' 호일지(胡逸之)였다. 호일지의 한 자루 칼은 천하무적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미도왕'이라 불렀다. 이 '미도왕'은 20년 전, 우연히 명기(名妓) 진원원(陳圓圓)을 만나면서부터 그 위풍당당한 사나이는 영향을 받았고, 또한 그로 인해 강호 내부 사실들이 폭로되었다. 명기 진원원은 대간신 오삼계(吳三桂)의 첩이 되어 이자성(李自成)에게 붙잡혀 갔다. 오삼계는 대노하여 청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관내로 쳐들어갔다. 비록 이자성을 쫓아내고 진원원을 되찾았지만 오삼계는 천하강산을 고스란히 만청에 바치게 되었다. 오삼계가 명조를 멸망시키는 데 공이 있다 하여 청나라에서는 운남(云南)의 친왕으로 봉했다. 그렇지 만 진원원만은 만민의 버림을 받는 '미녀화근(美女禍根)'으로 되었다. 천하의 명기 진원원은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씻어 버릴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낙심과 실망으로 곤명교구(昆明郊區) 비구니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호일지는 그 암자 옆에서 그녀를 위해 채소밭을 가꾸며 진원원을 만나 보았으니 그 정이 얼마나 깊었는가 하는 것은 필설로 형용할 필요가 없으리라. 과거 위소보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과 혼사를 정한 건녕공주를 운남으로 호송할 때 호일지와 사귄 일이 있었다. 그 때 이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진원원을 따라 그의 신변에서 우마(牛馬)가 되기를 맹세하고, 한 사람은 진원원의 딸 아가를 처로 삼겠다고 맹세하면서 두 사람은 형제의 의를 맺었다. 호일지가 인피면구를 쓰고 배에 올라 위소보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위소보를 알아 보았다. 청아는 남장을 하고 위소보를 속였지만 호일지의 눈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호일지는 줄곧 청아의 동정만 살폈다. 위소보와 우아대가 꾐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가만히 뒤를 따라 배에 올랐다. 그는 개방 제자 둘을 강물에 쳐 박고 번개같이 청아의 혼수혈(昏睡穴)을 짚어 놓았다. 위소보는 너무도 의아하여 물었다. [형님, 어인 일로 방금 전에는 그 여자를 위해 반주를 했습니까?] 호일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찌 그 모든 사연을 입으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도 모르겠네.] 위소보는 물었다. [그 여자는 누굽니까?....] 그러다가 문득 깨닫고 말했다. [호 형님이 인피면구를 썼으니 그 여자도 교묘하게 분장을 했겠지요. 그런데 호 형님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진원원이 틀림없겠지요. 호 형님, 점잖지 못한 이 사위가 장모님을 한 번 뵈오면 원이 없겠습니다.] 위소보의 부인 가운데 아가는 진원원과 이자성으로부터 낳은 딸이기 때문애 위소보는 '장모님을 뵈옵겠디는 말을 했다. 호일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위 동생, 그 일은 그렇개 쉽지 않을 것 같소 진원원은 감히 자네를 만나지 못할 거네. 하지만 그녀는 자네를 만나면 기뻐하겠지. 아가를 자네에게 주었으니 말이야.] 위소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원원은 지난 날 절세의 미인으로 이름난 기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회하 강변에서 자기 진면목을 감추고 '십팔모'나 '오경을 기다리네' 따위의 퇴폐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난봉꾼들이 조금씩 던져주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호일지는 위소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동생, 다른 일이 없으면 이 형은 먼저 가야겠네.] 위소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형님, 왜 이렇게 서두십니까? 저의 동료가 있는데 개방 놈들이 물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 사람을 좀 구해 주십시오.] 호일지는 놀라 물었다. [동료라니? 그 사람이 동생의 동료인가? 걱정하지 말게나. 그 사람은 나보다 무공이 열 배는 더 뛰어난 것 같던데 아마 내가 구해주지 않아도 될 거네. 동생, 나는 먼저 떠나야겠네. 그녀가 기다린다오.] 위소보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호....장인이라 불러야 합니까? 형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호일지는 안색이 어두위지며 말했다. [동생은 아직도 내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구만!,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추호의 잡념도 없어야 하지. 만약 잠자리에 드는 재미만을 생각한다면 어찌 진정한 가인(佳人)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내라면 나는 정말 정을 줄 수 없다네.] 위소보는 급히 사과하며 말했다. [호 형님,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라는 물건짝은 참으로 이상도 하지. 이 어르신은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여편네로 만들고 싶어지니 말이야. 군자는 말로 하지, 손을 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어르신은 그렇게 못하겠단 말씀이야!) 호일지는 배 안에 누워 있는 청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위 동생,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하겠소? 물 속에 던져 버리겠소?]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 이 동생은 그녀에게 한 가지 커다란 일이 남아 있소이다. 이 여마두의 몸에서 찾아볼 게 있습니다.] 그는 그래도 청아의 무공이 두려위 거듭 부탁했다. [형님, 도와줄 바엔 끝까지 도와 주시구려. 저 여마두의 몸에 십여 군데의 혈도를 더 짚어 주시구려. 반나절이고 하루고 못 일어나게 말이오!] 호일지는 손에 쥐었던 앵금통으로 청아의 몸 네댓 곳에 혈도를 짚어 놓고 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바람결에 호일지의 목소리가 실려왔다. [위 동생, 몸 조심하게나!....] 위소보는 청아의 엉덩이를 발길로 걷어차며 욕했다. [요 악마 같은 년아, 어디 일어나서 다시 한번 이 어르신을 걷어차 보거라!] 그는 또다시 청아외 엉덩이를 걷어찼다. 발이 닿는 곳이 피어오르는 처녀애의 그런 부분인지라 싱싱한 탄력과 뭉클한 감촉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을 불질렀다. 위소보는 다른 생각이 퍼뜩 떠오르며 중얼거렸다. [요 계집년의 엉덩이는 아주 보드랍고 탱탱하구나. 몸은 어떨까?] 위소보는 무슨 일이건 마음 먹으면 일단은 저지르고 보는 위인이다. 청아의 몸매를 떠올리자 솟구치는 음심(淫心)을 주체할 바 몰랐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요 년은 매우 음험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는데, 어디 이 어르신께서 여편네로 만들어도 요 계집년이 계속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가 두고 보잔 말이다. 히히!) 그는 살그머니 청아를 안아다 뱃사공외 침대에 눕혔다. 청아는 혈도가 짚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의 몸에서는 폐속 깊이까지 스며드는 청초한 소녀의 담담한 체취가 풍겨왔다. 위소보는 흐뭇했다. 그는 청아의 옷을 살금살금 벗겼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오직 몸에 찰싹 들러붙어 요염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는 속내의뿐이었다. 위소보의 손길이 몇 차례 그녀의 아름다운 동체(胴體)에서 미끄러지자 이윽고 회고 보들보들한 여인의 살결이 드러났다. 그는 살며시 이불을 끌어와 청아의 몸을 가리고 자기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나란히 누웠다. 위소보는 흐뭇한 마음에 청아의 젖가슴 위에 손을 얹어 놓고 중얼거렸다. [이 꽃같은 계집아, 이 어르신께서는 지금 네 년을 이 어르신네의 여편네로 만드신단 말씀이다! 알아 듣겠느냐? 요 꽃같은 계집을 여편네로 만든단 말씀이다....] 第8章. 벌거벗은 소녀 위소보는 일단 마음을 먹은 일은 뒷일이 어찌 되든 개의치 않았다. 그의 이런 방탕한 기질은 기생원에서 자란 탓에 자연스례 몸에 밴 것이다. 그는 자고로 남녀 간의 명예와 정조란 단어는 머릿속에도 없고, 남녀간의 일에 대해 전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몇 년 전, 양주 여춘원에서 그는 한 침대에서 일곱 여자들과 하룻밤을 뒹굴었는데, 호에 남자 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를 낳게 되었다. 그런 위소보었지만 이렇게 곱디 고운 청아를 옆에 두고도 웬일인지 머뭇거려지며 일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음만 먹으면 청아를 품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청아는 혈도를 짚혀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이 젊고 매력적인 여자 앞에서 이첫저것 생각을 하며 주저했다. 그는 속으로 자기를 욕했다. (제기랄, 왜 뒤에서는 우쭐대던 놈이 앞에서는 졸장부 신세를 면치 못한단 말이냐? 요 계집년이 험상궂게 생긴 것도 아닌데. 여자들이란 정조를 빼앗기지 않았을 때는 우쭐거리고 앙탈을 부리지만, 한 번 정조를 잃으면 곱실곱실 잘 따르는 법, 제 남편을 해치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이 어르신이 요년을 여덟 번째 부인으로 삼아야겠다. 원수를 친구로 삼기보다는 부인으로 삼는 것이 백 번은 나은 일이지. 암, 또한 신변에 이처럼 무공이 고강한 여마두가 있으면 이 어르신에게는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닌가? 이렇게 좋은 일을 눈앞에 두고 주저하면 안 되지.) 위소보는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면서 청아를 안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청아의 가슴을 더듬던 손길마저 거두어 들였다. 위소보는 그런 자신이 참을 수 없어 꾸짖었다. (그래, 이 어르신이 귀신을 만났단 말이냐? 더 이상 겁을 낸다면 이 어르신은 위소보가 아니라 위귀보(韋鬼寶), 위쌍놈이라 해야겠군.... 나는 집에서는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일귤 계집년들이 서로 질투할까 봐 겁을 냈지만 사실 그 년들도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계집들이지. 소전은 신룡교 홍 교주의 부인으로 매일 늙다리 수염쟁이와 밤을 보내도 이 어르신은 조금도 트집을 잡지 않았고, 아가 년은 정극상과 한덩어리가 되어 시근벌떡거리다가 남편을 모살하려 했어도 이 어르신은 다르게 보지 않았으며, 공주는 운남 오삼계의 며느리 즉, 오응웅 놈의 처였지만 정당한 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어르신이 빼앗아 왔지. 그런 이 어르신이 청아 같은 여자를 처로 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청아의 여동생 문아까지도 데려왔으면....) 위소보는 문득 문아가 떠올랐다. 그러자 흥취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위소보는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 대하여, 심지어 그의 장모인 진원원까지 망라해서 허무맹랑한 궁리를 하지 않은 여자가 없다. 말마따나 치마만 두르면 음탕한 눈길로 몸매를 떠올리면서 저 나름의 품평을 하고 침을 삼켰다. 그러나 오직 문아에 대해서만은 이상하게도 그 어떤 음탕한 생각도 일지 않았다. 그야말로 문아는 하늘의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것 같았고, 그녀는 너무도 티없이 맑은지라 감히 그로서는 범접할 수 없었다. 청아는 그런 문아의 언니였다. 설령 만에 하나 성격이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청아가 문아를 만나 자신의 그런 일을 까발린다면 문아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노릇 아닌가?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위소보는 흥이 깨져 일어나 옷을 걸치며 그런 자신을 위안했다. (요 년은 참 보기 드문 계집이지. 하지만 이런 흉악스러운 년과 그랬다가 괜히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새끼라도 낳는 날이면 이 어르신은 고생을 사서 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그는 청아의 적삼을 그녀의 몸에 내던지며 말했다. [요 년아, 이 어르신은 생각이 없어 그만둘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자기가 밑진 것 같은 생각이 퍼뜩 들어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이 네 년을 놓친다면 정말 애석한 일이고, 또 이 일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이 어르신은 일등(一等) 머저리가 되겠지.) 위소보는 청아의 엉덩이를 꼬집고 얼굴을 살짝 집어 뜯으며 말했다. [요 년아, 나중에 시집가더라도 네 년 남편은 네가 숫처녀가 아니고, 또 이 어르신이 먼저 맛을 보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를 게다!] 위소보는 기세등등하여 청아 옆에 책상다리를 꼬고 앉아 십팔모를 흥얼거렸다. [한 번 빨고 더듬고, 두 번 빨고 만졌다네, 청아의 보드라운 엉덩이를 만졌다네....] 돌연 배가 출렁 하고 움직이자 위소보는 흠칫했다. (무슨 일일까? 개방의 무라들이 온 것은 아닐까?)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배는 저절로 강가로 밀려 나왔다. 위소보는 기뻐했다. (그럼 그렇지. 이 어르신이 하는 일은 제대로 척척이지. 이 배를 어떻게 몰아 물가로 나올까 걱정했는대 하늘이 도와 저절로 물가에까지 멀려 나왔구나!) 그는 나가려다 청아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생각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정말 호 형님의 손아귀가 맵긴 맵구나. 그런데 청아를 여기에 혼자 내비려두고 갔다가 괜히 엉뚱한 놈들이 와서 청아를 건드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 어르신이 바가지를 뒤집어 쓰지 않겠는가? 어디에다 숨겨 놓을까? 아니, 그대로 내버려 두자! 위세 부리지 못할 일은 아예 안 하는 게 상책이지!) 그는 한참 생각하다 벌거벗은 청아를 그녀의 옷으로 감싸 안고 배에서 내렸다. 얼마 가지 않아 위소보 앞애 한 명의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얼굴을 가린 채 독기 어린 눈만 내놓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위소보는 소리쳤다. [누구냐? 왜 길을 막는 게냐?] 사내는 천천히 말했다. [이 길은 내가 닦고, 여기에 서 있는 나무는 내가 심었다. 이곳을 지나려면 통행료를 내거라!] 위소보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야, 이 한심한 놈아, 너는 길손의 길을 막는 도적놈이구나! 이 어르신이 누군지 알면 디 놈이 도리어 대갈통을 조아리며 먼저 돈을 갖다 바쳐야 할 걸!] 사내가 말했다. [돈이야 있지. 얼마나 필요하냐? 십만 냥? 백만 냥? 삼백 팔십만 냥?] 위소보는 메우 놀랐다. 이 '삼백 팔십만 냥'이라는 숫자가 매우 귀에 익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들었는지 일시애 떠오르지 않아 무어라고 입을 열지 못했다. 사내가 또 말했다. [니가 안고 있는 것은 또 뭐냐? 이 놈! 또 무슨 보물을 훔쳤는지 좀 보자.] 그는 말하면서 위소보의 비파골을 덥석 움켜쥐려 했다. 위소보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며 신행백변으로 상대방의 치명적인 일 장을 피했다. 사내는 헛손질을 하고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의 무공은 전보다 많이 늘었구나!] 그의 말소리는 어쩐지 어디서 듣던 목소리인데 누구인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위소보가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돌연한 습격을 막아내자, 과연 그는 위소보를 더 이상 치지 못하고 대신 발로 위소보의 아랫도리를 걷어찼다. 위소보는 펄쩍펄적 뛰어 피하며 소리쳤다. [제발 다른 곳은 다 걷어 차더라도 이곳만은 안 된다! 이걸 걷어 차면 대가 끊어지는데!] 사내는 흥! 하고 소리치며 말했다. [이 악독한 건달, 시러배 잡놈의 종자는 아예 깨끗이 없애 버려야지.] 위소보는 말했다. [이 어르신의 대를 끊겠다고? 이 어르신에게는 아들 둘이 있으니 종자야 못 끊지!] 사내는 더 살벌하게 말했다. [둘 아니라 스물, 이백이라면 못할까? 내가 하나하나 죽이자고 마음 먹으면 그건 바로 식은 죽 먹기지.] 위소보가 말했다. [이놈아 두고 봐라! 아들 둘뿐이 아니라, 내 일곱 부인의 무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너 같은 도적놈의 열 가지 암기가 덥쳐와도 문제 없어!] 위소보는 이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속담에 '열 포졸이 도둑 하나 제대로 못 잡는다'고 이 어르신의 두 자식들은 오라고 하면 가고,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달아나며, 개를 잡으라면 닭을 쓰다듬는 녀석들이지. 게다가 부인들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해도 이런 놈을 단속하기가 쉽지 않을 테고, 또 이 도적놈 패거리들이 매일 아들 녀석을 따라다닌다면 그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란 말씀이야.) 위소보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그만 풀이 죽어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대단하구려. 우리 그러지 말고 친구로 사귀면 어떻겠소?] 사내는 이를 갈며 말했다. [죽일 놈, 대낮에 잠꼬대를 하는 게냐? 너 같은 시러배 잡놈과 누가 친구로 사귀겠느냐? 그런 소리는 아예 걷어치워!] 그리고는 사정없이 두 발로 이쪽저쪽 위아래를 들이차는 바람에 위소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위소보는 소리쳤다. [여보시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우리 적당한 선에서 흥정합시다. 만사가 값만 제대로 맞으면 되지 않소? 자, 이렇게 합시다. 정 나를 친구로 사귀기 싫거든 우리 결의형제를 맺는 게 어떻소?] 그 사내는 위소보에게 궤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주 괴이한 권법(拳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다 밑에서 용이 노닐 듯 질풍같이 날쌘 권법이었다. 위소보는 대적하는 것은 고사하고 여태껏 그런 권법을 본 적도 없었다. 무림의 능수라도 그의 적수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위소보는 얻어 맞느라 흥정은 커녕 숨 쉴 겨를도 없었다. 그저 요리조리 피하여 목숨이나 보전하면 다행이었다. 위소보는 놀랐다. (이런 녀석을 어찌 길을 막고 행인들의 잔돈푼이나 노리는 도적놈이라 하겠는가? 강호의 일류고수구나! 정말 이 어르신은 오늘 재수가 더럽게도 없구나!) 신행백변은 몸을 영활하게 쓰는 데 장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위소보는 힘이 빠진 데다 청아를 안고 있으므로 그나마 더 행동하기 어려웠다. 그 사내는 몇 초를 펼치다가 위소보의 목덜미를 틀어쥐려 했다. 위소보는 너무도 급한 나머지 청아를 사내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암기를 받아랏!] 그 사내가 몸을 피하자 청아는 그만 모래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녀의 알몸을 감쌌던 옷이 흐트러지며 청아의 새하얀 살결이 모조리 드러났다. 사내는 놀라면서 말했다. [네 이놈, 시러배 잡놈아! 또 무슨 개수작을 피웠던 게냐?] 그는 말은 하면서도 좀처럼 손은 늦추지 않았다. 위소보는 청아를 던지고 나니 약간은 숨을 돌릴 겨를이 있었다. 그는 신행백변을 펼치며 웃었다. [옳아, 무슨 개수작을 피웠느냐고? 그래 길을 막는 네 놈의 누이와 개수작을 했다!] 사내는 대노하여 말했다. [이 건달 시러배 잡놈아! 죽게 됐는데도 주등이질을 해?] 위소보는 이리저리 돌며 신행백변으로 그 사내를 수십 장이나 떨구어 놓았다. 사내는 신행백변의 괴이함을 보고 더는 추격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뒤돌아 말했다. [이 도적놈아, 졌지! 이 어르신을 할아버지라 부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사내는 그와 말씨름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돌연 무엇인가를 발로 걷어찼다. 한참 흥이 나 있던 위소보도 암기가 날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크, 이놈이 암기를 쓰는구나!)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위소보는 두 다리 환도혈(環跳穴)이 시큰하더니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날아온 암기는 두 개의 돌멩이로 그 사내가 발끝으로 찬 것이 위소보에게 그대로 명중되었다. 사내는 위소보 앞에 와서 말했다. [위작 나으리, 영웅호걸이라면 뭔가 다른 게 있어야 하지 않소!] 위소보는 그 어떤 궤계도 쓸 수 없게 되자 어찌 되든 달아날 궁리만 했다.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가장하여 짐짓 웃으며 말했다. [이 어르신은 지쳤다네. 좀 누워 쉬면 안되겠는가? 쉬겠다는 것까지 막아 나서면 영웅호걸이 아니지?] 사내는 냉소하며 말했다. [쉬다니, 혼자 쉬면 재미가 없을 걸. 위작 나으리께서 지치셨다니 내가 영원히 쉬게 해 드리지. 친구들도 많은 데서 말이야.] 그는 또 발끝으로 위소보의 가슴을 걷어차려 했다. 위소보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다급히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이다.] 사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거리는 그만둬. 이 야밤 삼경에 황막한 들판에서 누가 살려 준다고 그래. 순순히 투항한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강호의 사람들에게는 피는 흘려도 눈물은 흘리지 않으며, 죽을지언정 수치를 당하지 않고 칼이 목에 들어와도 투항은 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다. 그러나 이 관례는 위소보에게만은 예외였다. 당당한 대장부는 두 눈을 뜨고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때문에 투항하는 것쯤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투항이 뭐 그리 대단한가? 이 고비만 잘 넘겼다가 내가 다시 저 녀석을 붙잡으면 될 게 아니냐? 암 그게 낫고 말고. 그러나 지금 이 어르신의 꼬락서니는 정말 말이 아니로군! 아들놈 같은 녀석이 애비더러 투항을 하라고 하다니, 그래 이것이 도리에 맞는 일인가?)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하고 '투항!'이라고 소리치려다 다시 생각했다. (만약 이 놈이 신용을 지키지 않고 투항을 받은 다음, 나를 죽인다면 이 어르신은 밑지고 수치까지 당하지 않는가? 안 돼! 믿지는 장사야 할 수 없지.) 위소보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귀하의 무공이 대단하니 이 위소보가 투항을 한다 해도 부끄러울 건 없소. 하지만 귀하의 존성대명이라도 알아둡시다. 후에 귀하의 무공 솜씨를 알릴 기회가 오면 강호에 귀하의 이름을 전할 수 있도록 말이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네 놈은 이 어르신의 한평생 원수가 될 것이다!) 사내는 이 꾐에 넘어가지 않고 냉소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그대의 아첨하는 재간에 소인은 실로 탄복하외다. 그러나 앞으로는 나으리의 아첨도 쓸모가 없게 되었구려. 방금 당신이 흥정을 하자고 하지 않았소? 그럼 말한 대로 해 봅시다.] 위소보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투항이든 뭐든 할 수는 있는데 흥정을 했다는 말이 강호에 전해지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구려. 무공이 천하 제일인 귀하에게 항복하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아니지. 내가 흥정을 하지 않고 깨끗이 투항을 할 테니, 각기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소?] 사내가 말했다. [거야 물론이지. 네가 투항하면 죽이진 않겠다. 그러나 조건이 있어. 다시는 아가씨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지 못하도록 두 종아리를 잘라 버리겠다. 또 운남이고 대만이고 천지사방을 쏘다니며 손을 내밀지 못하도록 손목을 끊어 버려야겠다. 그리고 또....] 위소보는 그만 질겁을 하여 말했다. [아니, 조건이 너무 많소.] 사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좋아, 흥정을 하고 싶다면 두 가지 중에서 골라 보게나. 하나는 네 놈 불알을 까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네 놈은 말 그대로 태감(太監:내시)이 되는 게지. 다른 한 가지는 귀를 베어 내는 것인데, 그러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더 이상 듣지 못할 것 아니냐, 자 어떤가? 너를 위해 이 어르신이 선심을 쓰지. 둘 중 어느 것을 고르겠느냐?] 위소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내가 말했다. [다 생각했느냐?] 위소보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처럼 나를 못살게 굴 바엔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났지.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구려.] 사내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고생스러우면 정말 재미없는 노릇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위작 나으리, 한번 물어봅시다. 당신이 살면서 원수를 진 사람이 누구요? 원수를 갚고 싶다면 나중에 내가 대신 갚아 주겠소.] 위소보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원수 진 사람이 없소이다. 일찍이 신룡교 홍 교주 홍안통(洪安通)이 나더러 사십이장경을 훔쳐내라고 교사하였소. 나는 그를 없애지 못한 것이 원이었는데 내가 그의 부인을 빼앗은 후에 교주는 죽고 말았소. 다른 하나는 저기 땅바닥에 누워 있는 청아인데 그녀는 틈만 나면 나를 못살게 굴어 나는 정말 골치가 아프오. 그럴 때마다 정말 죽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오. 그녀는 아주 총명하나 총명한 척하다가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격이라오. 그러나 정신을 잃고 난 뒤에 보니 그녀도 온순한 사람이기에 나는 차마 그녀를 죽일 수 없었소. 그리고 또 개방의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있는데 고놈은 정말 악독한 놈이오. 그 놈한테 나는 자칫 죽을 뻔했었소. 그러나 고놈은 몸이 약하고 병까지 있다 보니 내 어찌 병치레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겠소? 그렇지 않소?] 위소보는 그 사내의 비위에 맞게 진지하게 말했다 기실은 아런저런 말로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자는 것이 목적이었고, 또 그의 내력도 알고 자기와 어떤 원수진 일이 있는가를 알아내어 될수록 화해하고 이 고비를 넘기려는 의도었다. 사내가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이 나이 먹도록 원수진 사람이 그들뿐이란 말인가?] 위소보는 생각하다 말했다. [또 있소. 대만 정 나으리의 공자 정극상이 있는데 그는 나의 스승을 죽였소. 하지만 나의 스승은 정가네와 인연이 깊어 나더러 자기를 위해 복수하지 말하고 했소. 그러니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사내가 말했다. [당신의 스승은 이미 죽었고 지금 정극상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만약 당신이 그 놈을 죽이려 한다면 개미 새끼 하나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겠구만.]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자식은 대만 정가네 사람인가? 혹시 정극상의 친구로 그의 원수를 갚자고 이러는 것인가?) 위소보가 말했다. [원한을 맺기는 쉬워도 풀기는 어렵다오. 스승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내가 지금 정 공자를 죽이고 그의 원수를 갚는다 한들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올 수 있겠소? 또 정가 가문은 대대로 충신으로 간신 모리배가 아니니 그런 충신들의 후대를 그렇게 할 필요야 없지 않겠소?] 이 사내는 위소보의 엉덩이를 밟으며 욕했다. [제기랄 놈,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 했는데, 그래 스승의 원수를 갚는 것조차 네 마음대로 생각하다니 죽어도 싸구나!] 위소보는 놀랐다. (아이쿠, 이 놈은 정가네 패거리가 아니었구나! 그럼 천지회 사람이 아닐까? 이 놈은 스승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고 나를 찾아 화풀이를 하는 것일까?) 그는 급히 말했다.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오. 스승님께서 아주 단호하게 절대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게요. 하지만 정가네 그 자식은 내가 혼을 내주었소. 그 놈의 재산을 몽땅 빼앗아 버렸고 또....] 그의 눈앞에는 미친 듯 연못을 헤매던 정극상의 모습이 나타났다. 위소보는 흥분하여 말했다. [스승의 원수를 갚지 않은 것에 대해 문책하려고 당신이 이 자리에 선 것이라면 나를 죽이시오. 죽이면 목이 땅에 떨어질 뿐 명예에는 손상이 없지. 정극상이 지금 저 지경이 되었는데 당신 같으면 그래 끝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을 수 있겠소?] 위소보의 말들은 대부분 거짓이라 해도 이 몇 마디만은 그의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말이었다. 사내는 놀라며 한참 있다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원수진 사람이 없단 말이오?] 위소보가 말했다. [원수라니 무슨 소리요? 우리는 철천지 원수일지라도 친구로 만들어야 하는 강호 사람들 아니오? 그래야 진짜 영웅이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좋네.] 위소보는 약간 시름이 놓었다. (아마 나의 세 치도 안 되는 혀 놀림에 저 놈의 마음이 누그러진 모양이구나!) 그러나 사내의 입에서 또다시 엄청난 말이 나올 줄은 짐작도 못했다. 사내가 말했다. [사람은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아간다고 했는데, 원수가 없으면 살 맛도 나지 않지. 그렇다면 일단은 자네를 도와 주지. 분명히 기억해 두게. 내년 오늘은 너의 제사날이란 것을!] 위소보는 참으로 혼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사내가 비수로 위소보의 가슴을 찔렀다. 위소보는 보의를 입었지만 삣속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방금 전 배에서 청아의 눈을 속여 살아났던 것처럼 소리없이 죽은 척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이 사내는 청아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칼로 찌를 때 칼 끝이 무언가 제지를 받는 느낌을 받고 말했다. [엉? 요 놈이 무슨 요상한 것을 입었구나!] 사내는 그 감촉에 대해서 곧 간파했다. (이 놈은 관청의 벼슬아치이니 보의를 입는 게 틀림없구나. 그렇지만 보의가 목구멍까지 보호하겠느냐? 목을 끊어 버리자.) 그는 위소보의 목을 찍으려고 비수를 들었다. 위소보는 겁이 나 소리쳤다. [스승님! 소인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의 스승은 염라대왕하고 술자리를 같이 해도 몇 백 번은 함께 했을 텐데 너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위소보는 또 말했다. [누가 나의 스승이 하나라고 그럽디까? 독비신니 구난사태, 해대부 해로공 스승님, 빨리 나 좀 살려 주시오!] 그가 스승을 들먹이는 것은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강호에서는 스승과의 연관을 더 따지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 마구 둘러대다 보면 이 사내로서도 좀 꺼림칙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노린 속셈이었다. 해대부는 오품태감이다. 위소보가 소계자로 가장하고 황궁에 숨어들었을 때 그로부터 몇 가지 무공을 배운 적이 있다. 그 사람은 가짜 태후 모동주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독비신니 구난사태만은 달랐다. 그녀는 명조 말기 숭정(崇楨) 황제의 딸이다. 숭정 황제는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달아 죽기 전에 적으로부터 치욕을 면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칼로 찔러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공주의 팔을 찍어 잘라 버렸다. 이후 공주는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법명(法名)을 구난(九難)이라 하고 기교가 절정에 이른 무공을 연마하였다. 하여 강호 사람들은 그녀를 독비신니(獨臂神尼)라 불렀다. 독비신니의 이름은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제자를 죽이자면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과연 칼을 다시 들었던 사내는 주춤거렸다. 독비신니의 명성에 두려움을 느낀 것 같았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스승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지요.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왜 지금까지 안 나타나시는지 모르겠구만? 아마도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급할 때는 나타나셔야 하는데!] 날이 점점 밝아왔다. 강변의 마을과 수림들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강가는 아주 넓고 인적이 없었다. 사내가 말했다. [네 놈의 말은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도 믿기 어렵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 너의 스승이 외팔이건 세팔이건 나는 오늘 너를 먼저 죽이고 너의 스승과 한 번 붙어보겠다.] 위소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릿발 같은 비수만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이고 호일지 형님, 강친왕 걸서, 다륭 형님, 황룡대협 형님, 우아대 동생! 왜 빨리 오지 않는 거요.] 그는 입만 열면 수두룩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었다. 이 사내는 위소보가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주저했다. 그가 칼로 위소보를 찍으려는 순간 위소보는 두어 발 남짓 몸을 굴렸다. 사내는 흥!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발에 진력을 모아 위소보의 앞가슴을 걷어찼다. 보의를 입었지만 갈빗대 세 대가 부러졌다. 그는 고통이 심해 비명을 지르며 꼼짝도 못했다. 사내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여러모로 '관심'도 받고 '신세'도 많이 졌다. 이제 한 번만 더 찍으면 끝장이 날 것 같은데 통쾌하게 끝장을 내주마!]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사양할 거 있나!]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동안 그 어떤 험난한 풍파도 다 겪어낸 이 어르신이 자그마한 골짜기에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구나! 제기랄, 스승과 형제도 적지 않건만 이렇게 위급한 때에는 그 잘난 대갈통 하나 내밀지 않는구나? 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면 다시 태어나서는 다른 스승을 모시고 다른 형제들을 정하지 않으면 위가라는 성을 갈고 말겠다!) 그는 이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사내의 칼날이 사정없이 위소보의 목구멍으로 파고드는 순간.... 이 일촉즉발의 찰나에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비수가 암기에 맞아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내는 손목이 잘려나가 듯 저려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수십 장 밖에서 한 노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노인은 느릿느릿 걸어왔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위소보의 목을 조였다. 그러자 노인은 손을 살짝 들어 금전표(金錢 )로 사내의 팔목을 때렸다. 사내는 삽시에 얼굴이 흙빛으로 되었다. 그는 오늘 위소보를 죽이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늙은이에게 두 손을 마주잡고 경의를 표했다. [소인은 가르침을 잘 받았소이다. 청산은 항상 푸르르고 녹수(綠水)는 끝없이 이어지는 법, 우리 다시 만날 때가 있겠지요.] 사내는 강변으로 걸어갔다. 위소보는 갈빗대가 부러져 고통이 극심했으나 자기를 도울 사람이 온 것을 보고는 몹시 기뻐했다. 그는 웃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잘 가시구려, 멀리 나가지 않겠소이다!] 사내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아를 번쩍 들어 끌어안더니 강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동녘 하늘이 휜히 밝아오자 찬란한 아침 햇살이 온 강변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청아를 안고 금빛찬란한 강물로 들어섰다. 그는 태연자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양, 도도히 흐르는 물결이 마치 탄탄대로인 듯 걸어 들어갔다. 비분강개하며 형장으로 나서는 열사처럼 꿋꿋이, 정겨운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나누며 이 세상을 하직하듯.... 사내는 빠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물이 금방 허리까지 차 올랐다. 몇 걸음 더 걸어가니 물 위에는 일남일녀의 머리만이 보였다. 위소보는 황급히 소리쳤다. [어어! 저 놈이 미쳤나?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왜 애꿎은 청아까지.... 청아는 아직 어리고 고운데 네 놈이 저승으로 데리고 가면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이냐?] 사내는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삽시간에 물결이 밀려들어 두 사람을 삼키고 이내 조용해졌다. 위소보는 너무도 놀랐다. 노인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시주(施主), 자네는 그들을 불러 세울 수 없을 거네. 그들은 죽으려고 이곳까지 흘러들었지. 이곳은 정인탄(情人灘)이라 하는데 매년 이곳에서 서로 사랑하는 정인(情人)끼리 목숨을 끊은 사람이 얼마인지 모른다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정(情)자에 연연해 하는지?.... 아미타불!] 위소보는 이 노인의 옷차림을 보아서는 보통 사람 같은데 불호를 읊조리는 것으로 보아 불가의 사람이라고 여겼다. 위소보는 말했다. [노인 어르신, 어쨌건 죽는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발 어르신께서는 저들을 꼭 구해 주십시오!]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소용없다오. 저 정인탄은 풍랑이 사나워 용왕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구할 수 있단말이오?] 위소보가 말했다. [글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르신의 무공은 용왕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노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무공? 무슨 무공 말인가?] 위소보가 말했다. [어르신께서 방금 펼치신 금표타구(金 打狗:금빚 표창으로 개를 때린다)인지, 뭔지 하는 그 고명한 무공 말입니다.] 노인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시주의 말은 들을수록 얼토당토 않군. 무슨 금표타구고, 은표타묘(銀 打猫:은빛 표창으로 고양이를 때린다)란 말인기? 아미타불! 우리 불가에서는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평등하게 본다네. 고양이고 개고 다 마찬가지지. 그런데 어찌 때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죄를 범하는 일이라네. 죄를 법하는....] 위소보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노인 어르신께서 그들을 구하지 않으시겠다면 그들 명이 다한 것으로 봐야겠지요. 그러나 노인 어르신께서 저를 구해 주었으니 어르신의 은공을 반드시 갚겠소이다.] 노인은 아주 막막해 하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정말 시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구만.] 그는 위소보의 머리를 만쳐보고 놀라며 말했다. [원래 시주는 신열이 있었구만. 그래서 자꾸 헛소리를 했구만!] 위소보는 그제야 그의 진면목을 똑목히 보았다. 그의 용모는 야위었으나 자애로운 눈매에 기다란 수염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소식(小食)하면서 염불을 하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위소보는 갈비뼈가 부러져 밤새도록 고통을 당했다. 그는 이제 양주 여춘원에서 고생을 하던 위소보가 아니었다. 이 맞 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었으니 바로 그런 위소보 나으리가 어찌 이런 고생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이런 시달림으로 인하여 온몸에 열이 났다. 노인이 말했다. [이 늙은이의 집이 이 근처에 있는데 시주께서 달리 생각지 않으면 우리 집에 가서 치료하는 게 어떻겠소?] 노인은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갔다. 위소보는 걸을 때마다 뼛속이 저려와 욕을 했다. (빌어먹을 자식, 이 어르신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러나 위소보가 본 무림능수들은 모두 괴벅스러운 성미를 갖고 있었다. 남의 구원을 바라지만 울분을 참고, 자신을 억제하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위소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므로 시시각각 몰아치는 통증을 꾹 참았다. 노인은 가까운 곳이라 했지만 2리쯤 걸어서야 겨우 나무가 우거진 뜨락애 자리잡고 있는 작달막한 집에 당도했다. 문을 여니 뜰안은 아주 정결했다. 수십 그루의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져 있었는데 몇 개의 돌걸상도 있었다. 노인은 위소보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 아주 겸허히 입을 뗐다. [이 늙은이는 혼자 살고 있다네. 자 이제 시주께서는 편히 쉬도록하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위소보는 그 집에서 달포 남짓 머물렀다. 그 노인은 의학에도 정통했다. 더욱이 외상 치료는 의사를 청하거나 약을 살 필요가 없이 전부 자신이 하였다. 약도 효험이 좋아 뼈도 빨리 붙었다. 위소보는 그 노인이 내색하지는 않지만 무공이 대단하리라 생각했다. 위소보를 해치려던 그 사내의 무공도 뛰어났지만 결국은 이 노인에게 밀려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위소보는 방심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이지, 재간 있는 사람은 나서지 않고, 재간 없는 놈들이 나서서 설치는 세상이구나. 무공이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하지.) 위소보는 이 집에 와서 단 한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 노인은 불가의 제자인지 일년 내내 육식을 하지 않고 채소로 끼니를 이어가는 것이다. 위소보는 육식에 길들여진 터라 매일 채소와 두부만 먹는 것이 식성에 맞지 않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느 날 위소보는 침대에 누워 넌지시 입을 열었다. [노인 어르신, 볶은 소고기를 먹을 수 없을까요?] 순간 낯선 노인의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볶은 쇠고기는 없어도 볶은 사람고기는 있는데 먹겠는가?] 위소보는 놀라면서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황급히 일어나 앉았다. 침대 앞에는 흰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서 있었다. 얼굴은 수염에 가리워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눈길만은 흉악스러웠다. 그의 수염은 너덧 자나 되어 무릎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인자하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사천왕 같은 흉측한 늙다리가 거기에 서 있었다. 위소보는 놀라서 꺽꺽거리며 물었다. [아니, 당신은 누구요?] 그는 냉랭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백룡사! 이 노부를 모른단 말이냐? 그래 내가 그토록 몰라보게 변했단 말이냐?] '백룡사'라니, '노부'라니 이 뜻밖에 말에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위소보는 한참 생각하다 물었다. [그렇다면.... 노인 어르신께서는 홍, 홍....] 늙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노부가 바로 홍안통이오!] 홍안통은 신룡교의 교주이며 지금 위소보의 부인 소전의 전 남편이다. 이 노인은 무공이 신출귀몰하여 사람을 능히 미혹시키고 뛰어난 재능과 계략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신룡교의 창시자로 강호의 마교(魔敎) 가운데 제일 큰 세력으로 강호에서 신룡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을 서늘해 했다. 그러자 홍안통은 개국황제처럼 떠받드는 주변의 부추김에 미혹되어 고집불통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내부에서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등 교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심지어 본인마저 심복의 손에 목숨을 잃고 신룡교는 괴멸되었다. 나중에 위소보는 소전의 면목을 보아 그를 매장해 주었다. 위소보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럼 어르신께서는....] 홍안통이 말했다. [백룡사, 겁내지 말게나. 나는 죽지 않았다네. 나는 또 귀신도 아니라네.] 그는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귀신이야. 내가 죽었지! 자네는 귀신이 대낮에 산 사람이 되어 나타나고, 또 산 사람이 귀신으로 된다는 말을 들었는가?]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위소보를 구해준 노인이었다. 그때까지도 그 노인의 몸에서는 혈맥이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극물에 중독되어 비참하게 죽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위소보는 언뜻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했다. (나는 네가 귀신이라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사람이라니 두렵구나. 내가 화단을 일으켜 신룡교를 혼란시킨 것은 그만 두고라도 제 처와 사통하여 사내애까지 낳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정의 법률에 의하면 음탕한 짓을 한 사기꾼은 관청에 보고하기만 하면 목을 벤다. 그렇게 된다면.... 그래도 관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나는 그 많은 얌전한 아가씨들을 다 제쳐 두고 하팔 소전과 같은 과부를 얻었던가!) 홍안통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날 노부는 무덤 속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지. 무덤 속에서 나와 목숨부터 살리고 보니 신룡도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 있더군. 노부가 평생을 다바쳐 세운 신룡교는 괴멸하고 말았지!] 홍안통은 계속 말했다. [노부는 자결하려고 했다네. 그러나 노부는 다시 한 번 생각했지. 사내대장부가 세운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것 또한 남들에개 폐를 끼치는 일이다! 나는 멓 년째 고심참담한 끝에 보잘것 없는 무공이지만 연마했다네. 때마침 넉 자 네 촌이나 되는 수염이 자라나며 나의 얼굴을 가려 주었단 말이야.] 위소보는 히히 웃었다. 홍안통은 노하여 말했다. [왜 웃는 게냐? 그래 노부를 비웃는단 말인가?] 위소보는 얼른 대답했다. [아니. 제가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교주님, 신룡교가 괴멸한 것은 아래로부터 음모 궤계가 있었던 탓이지요.] 홍안통이 냉소하며 말했다. [물론 나도 아오. 노부는 단독으로 육고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렇게 이야기했지. 하지만 신룡교는 아주 흥성했다.] [예,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신룡교에서.... 저는 너무도 부러위서 우리 애비 에미가 저를 늦게 낳은 것에 대해 원망했습니다.] 위소보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으므로 위소보는 자신의 애비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런 그었기에 애비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는 말이 떨어지기만 하면 애비 에미를 욕하는 위인이었다. 기실 위소보는 홍안통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홍 교주가 제일 반대하는 것은 이런 세속적인 인륜에 대한 것이었고 때문에 위소보가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다. 과연 홍안통은 기색이 온화해지며 말했다. [정말 그랬소 신룡교는 창립. 초기 강호에서 위풍이 당당했지. 그렇지만 신룡교가 전복되는 것과 자네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교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왜두타, 육고헌의 말은 절반은 틀렸지요. 그들이 말하기를 '여러 형제들이 아니면 교주님 혼자서 아무리 애를 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흥! 신룡교가 아니라 신사교(神蛇敎)도 세우지 못하지....' 교주님,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육고헌이 한 말이니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육고헌과 왜두타는 모두 홍안통과 함께 신룡교를 창립한 공신들이다. 그러나 후에 그들 사이가 점점 멀어져 그들은 서로를 원망하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홍안통은 사십이장경을 얻으려고 확실히 위소보를 백룡사로 위임하고 육고헌과 함께 북경에 가서 보물을 훔쳤다. [너는 어찌 되었느냐?] 홍안통이 물었다. 위소보가 대답했다. [그 때 저는 그들과 다투었지요. 다투면서 저는 '교주님은 평범하고 속된 사람이 아니다. 하늘의 무곡성(武曲星), 문곡성(文曲星)이 내려온 것과 같으신 분이니 계책이 빈틈없어 필시 일을 성사시킬 것은 두말 할 것 없으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교주를 따라 덕을 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 공로니 뭐니 운운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남을 모함하기로는 그를 당할 자가 또 있으랴? 이것은 위소보의 또 하나의 재간이다. 그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파렴치하게 거짓말을 주어댔는데 그야말로 그럴 듯한지라 누가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겠는가? 홍안통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귀담아 듣는 것 같았다. 위소보가 또 말했다. [저는 젊고 호승심이 강해 육고헌, 왜두타의 말이 마음에 들지않아 이렇게 생각했지요. 차라리 신룡교를 해산하고 교주님께서 남들의 도움 없이 혼자 새로 신룡교를 세운다면 더욱 흥성해지겠다. 이 대역부도한 반역자들은 남의 위엄을 빌어 난을 일으키려 하는구나.] 홍안통이 말했다. [그럼. 백룡사! 자네는 정말 좋은 마음뿐이었구만.] 위소보는 좀 주춤했다. (내가 다 잘하고 아무런 흠도 없다면 이 늙다리는 믿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다 좋다고 하기야 어렵지요. 제가 보건대 신룡교 가운데 일부 늙은이들은 나이 먹은 티를 내며 우리 젊은 세대들의 일을 간섭하고 또 교주님에 대해서도 존경하지 않으니 이 기회를 빌어 없애버릴 생각도 했지요.] 홍안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참 좋소. 노부는 지금 아무것도 없지만 자네는 마음에 드네!]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교주님, 왜 아무것도 없다고 하십니까? 교주님의 무공은 천하 제일이시고, 지략이 천하 제일이시고, 또....무엇이든 천하 제일이지요.] 홍안통이 얼른 받아 말했다. [자네, 잊은 모양이구만. 노부의 '푸른 모자(綠帽子)' 역시 천하 제일 아니던가!] (역자 주:푸른 모자는 서방질하는 여자의 남편을 빗대어 이르는 말임) 위소보는 놀라며 생각했다. (제기랄, 과연 말 속에 뼈가 있다고, 다른 것은 천하 제일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푸른 모자만은 천하 제일이라고 하면 안 되지. 천하에서 두번째라도 안 되고 말고. 만약 그런 푸른 모자를 함부로 씌운다면 이 어르신께서도 편안하지는 않지!) 때마침 위소보는 생각나는 바가 있어 얼른 말했다. [속하에게는 한 점이라도 사심이 없습니다. 교주님께서 어차피 빈손으로 일궈 세우실 바에야 부인마저 없애심은 어떠실지? 그렇다면 정말 그 능력이 대단함을 나타낼 수 있지요.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말했듯이 형제는 수족(手足)과 같아 잘라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처는 어떠한가? 처는 옷과 같아 해지면 버리고 다시 새옷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하였습니다. 유비는 거무틔틔한 장비(張飛)와 검붉은 관공(關公)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등갑병(藤甲兵)을 불태워 죽이고 일곱 차례 기산(祁山)으로, 여덟 차례 기산으로 도합 열다섯 차례나 쳐들어가 교활한 조조를 쫓아 투항까지 시켰지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때 생뚱한 소리를 줄줄 꿰는 것이 위소보의 습관이다. 홍안통은 눈을 어슴푸레 감고 들었는지 말았는지 묵묵히 앉아 양신(養神)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위소보는 자기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아 더 말하지 않았다. 홍안통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왜 말하지 않는가? 더 말해 보게나!] 위소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에,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낡은 것이 가지 않으면 새 것이 오지 않는다고, 교주님께서는 부디 명이 하늘처럼 길고 복을 오래 누리셔야지요.] 홍안통은 돌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소리는 상처입은 야수가 한밤중에 황량한 들판에서 몸부림치는 처량한 울음소리 같았다. 그 웃음 소리에 위소보는 무서위 머리털까지 곤두섰다. 홍안통은 눈물이 나올 지경으로 웃다가 말했다. [백룡사, 노부는 정말 자네를 고맙게 생각하네!] 위소보는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알 수 없어 두루뭉실하게 받았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홍안통은 탄식하며 말했다. [별 말씀이라니? 자네가 말한 명이 하늘처럼 길다는 말을 몇 년 전에 들었더라면 매우 기뻐했을 거네. 또 그 때라면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공적과 은혜를 찬양하지 않으면 노부는 그들이 나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여겼지. 그러나 노부는 자네 덕분에 요행히 무덤 속에서 살아 나왔고 천하의 많은 일들도 알게 되었다네.] 그는 위소보를 쏘아보며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 명이 하늘처럼 길고 복을 오래 누리니 뭐니 하면서 제 꿍꿍이는 따로 있고, 게다가 부인까지 끌어넣으려고 한다면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푸른 모자를 씌우면 노부는 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으니까.] 신룡교에서 교주 홍안통에 대한 찬사는 이러했다. <교주님께서 명이 하눌처럼 길고 하늘의 복을 오래오래 받으시옵소서!> 위소보가 신룡교에 들어와 백룡사라는 요직을 담당한 후 그는 많은 궁리를 하여 '교주'라는 두 글자 뒤에 '부인'이란 두 글자를 덧붙여 '교주님과 부인께서도 명이 하늘처럼 길고 하늘의 복을 오래오래 받으시옵소서'라고 했다. 그것은 위소보가 새로 지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소보가 홍안통과 그의 부인 소전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을 뿐 나중애 홍안통의 부인 소전이 위소보의 부인이 될 줄은 자신으로서도 몰랐다. 위소보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당언 그런 말을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인은 알고 있습니다. 강희 소황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소보는 강희처럼 말했다. [자고로 사람들은 만세까지 황제 자리에 앉으라 하지만 만세는 고사하고 역사 이래 백세까지 장수한 황제도 없다네. 만수무강이란 말은 사람을 얼르는 도깨비 같은 수작이지.] 위소보는 말은 이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좀 겁이 났다. (지금 당나귀 방귀 같은 소리일지라도 아첨하지 않으면 이 위소보는 더욱 쓸모 없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홍안통이 말했다. [오랑캐 황제의 말도 그럴 듯한 게 있구만.] 또 다른 위소보의 수법은 있는 재간을 단 펼쳐 더 이상 우려먹을 것이 없게 되면 빈말이라도 지껄이며 남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계책을 궁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터무니 없는 일들을 얼버무리다가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황제나 교주님이 보는 게 다 비슷하다는 말이지요.] 홍안통은 위소보가 있는 침대머리를 쥐었다. 위소보는 무의식 중에 두려위 몸을 약간 피했다. 홍안통은 침대머리의 나무를 쥐고 손으로 부비자, 나무가 떡가루 마냥 부실부실 땅으로 떨어졌다. 홍안통은 엄한 기색으로 말했다. [위소보, 자네가 또다시 되지도 않는 아첨을 하면 자네 머리통도 이 나뭇가루처럼 될 줄 알게.] 위소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또 그런다면 입에 똥을 넣고 주둥아리를 잘라 죽인다 해도 싸지요.] 홍안통은 한참 묵묵히 있다가 좀 어색하게 물었다. [소....소전 아가씨는 다 무고한가?]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다 무고하지요.... 교주님, 모두 소인의 잘못이니 그녀를 탓하지는 마십시오.] 홍안통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것을 개의치 않겠네. 사내대장부가 그럴 수도 있지. 노부의 속이 좁았다면 노부는 자네를 구해 주지도 않았을 거네.] 위소보가 말했다. [아, 그 때 교주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까?] 홍안통은 냉소하며 말했다. [자네는 누구라고 생각했는가? 저기 널브러져 있는 늙은 귀신인 줄 알았는가? 그는 공염불이나 할 줄 알지 무공은 전무라네.] 위소보는 문득 깨닫고 말했다. [속하는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닫겠습니다. 그 강변에는 모래벌판이 넓고 수십 장 밖에 수림이 있지요. 교주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 누가 그 먼 곳까지 암기를 뿌려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교주님의 무공은 출신입화, 천하제일, 태산북두이시니 하늘의 복을 누리시....] 홍안통은 대노하여 말했다. [위소보, 노부의 말을 개방귀로 여기는가?] 그제야 위소보는 다시는 아첨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 일이 생각나 자기가 자기 뺨을 찰싹찰싹 치며 중얼거렸다. [요, 기억력도 없는 주둥아리는 맞아도 싸지. 교주님, 속하는 죽어 마땅합니다. 속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속하는....] 홍안통은 냉소하며 말했다. [말끝마다 속하, 속하라고 하는데, 노부는 감당할 수 없다네.]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감당할 수 있지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위소보는 하늘에 맹세합니다. 홍 교주, 홍안통 선생은 영원히 위소보의 교주일 뿐 아니라 영원히 위소보의 친아버지 친어머니이지요....] 그리고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 어르신의 애비는 바람둥이로 나의 기생 어머니를 만나 이 어르신을 낳았으니 우리 애비 에미도 모두 그리 좋은 물건짝은 아니다. 그러니 이 늙은 놈아 너도 평생 기생 밑구멍이나 쳐다보다가 애새끼나 하나 나거라!) 홍안통은 여전히 위소보의 침대를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이르는 곳마다 톱으로 켠 것처럼 나무가 잘려 나갔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위소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위소보는 속이 꿈틀했다. (이 홍 교주의 무공은 정말 대단한 진전이 있었구나. 그의 손이 이 어르신의 몸에 닿으면 몸이 십칠 이십팔 쪽이 날는지 모르겠구나.) 홍안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좋네. 자네가 노부의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면 노부도 자네를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거네. 그럼 이렇게 하지. 자네는 백룡사 노릇을 그만두고 노부가 교주 노릇을 하고 자네가 부교주가 되어 우리 손을 합쳐 신룡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잔 말일세.] 위소보는 울상이 되어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이지 내 목숨은 이제 신룡교 교주 손 안에 있구나.) 위소보는 마치 교주의 지나친 총애에 송구스러워하는 척하며 말했다. [교주님께서 이 미천한 목숨을 거두어 주시고 이름까지 날려 주었으니 속하는 교주님의 우마가 되어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나 부교주인지 뭔지 하는 것은 속하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홍안통이 말했다. [왜 감당할 수 없단 말이냐? 흥! 자네는 할 수 있지! 소백룡 위소보, 대명이 쟁쟁한 백룡사, 위작 나으리, 위 향주인 당신이 감당할 수 없다면 강호의 무림 중에 그 누가 이같은 중임을 맡겠는가?] '소백룡'이라 부른 것은 강호의 호걸인 모십팔이 위소보가 어릴 때 데리고 다니며 지어준 별명이고, 백룡사는 위소보의 신룡교에서의 직분이었다. '위작 나으리'는 조정에서의 작위이며, '위 향주'는 위소보가 천지회 청목당 향주임을 말한다. 위소보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홍 교주는 원래 위에 앉아만 있고, 아래 부하들의 말이나 들었을텐데 이 어르신의 신분과 내력까지 환히 알고 있었다니? 공연히 잘못하다간 큰일 나겠다.) 위소보는 은근히 물었다. [교주님은 무엇이나 다 아십니까?] 홍안통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개나. 우리 함께 손을 잡고 잘 해 보자고 하지 않았는가? 지난 일들은 접어두고 소전 아가씨 일마저도 모두 접어두기로 하지. 사내대장부가 뭐라고 이것저것 중얼거리며 맹세할 필요있는가? 지금부터 누가 만약 지난 일을 들고 나오면 죽을 것을 각오해야 할 거네.] 강호의 사람들은 일언 천금이라, 한번 꺼낸 말은 다시는 후회하지 않는다. 홍안통은 둘도 없이 명성이 높은 사람이라 자신이 한 말을 어기지 않았다. 위소보는 안심이 되어 말했다. [교주님께서 이처럼 대해주시니 그 은혜 태산 같사와 속하가 그 은혜를 갚지 못하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 속하는 교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위소보를 이 집에서 칼탕을 쳐도 원이 없겠습니다.] 그는 이처럼 충성을 맹세했으나 실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는 속으로 다른 궁리를 했다. (이 어르신은 이 집이라고 했으니 딴 곳에서라면 상관이 없지. 평생 다시 이 집구석에 오지 않으면 그뿐이다.) 듣지 못한 것이 약이라고 홍안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 자네가 이렇게 충성을 다짐하니 우리는 다 복이 있는 셈이구만. 위 동생, 우리 과거지사는 다 잊어버리게나. 어쨌든 다시 만나니 매우 기쁘다네. 자, 그럼 그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정표라도 주어야겠네!] 위소보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말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지요.] 홍안통은 한참 생각하다가 품속에서 손가락만한 환약(丸藥)을 주며 말했다. [이 환약은....] 말도 끝나기 전에 위소보는 그 환약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홍안통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원래 신룡교에서 교도들을 통제하는 수단은 은혜와 위협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독문(獨門)의 약물에 의해서였다. 홍안통은 부하들에게 여러 가지 독약을 먹이고 또 해독약을 갖고 있었다. 해독약은 일 년에 한 번씩만 나누어 주었다. 제때에 받아먹지 않으면 전신의 늑골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살이 썩어 꼼짝 못 하고 죽어 버린다. 위소보는 이 홍안통의 약이 독성이 매서운 줄 알면서도 두꺼비 파리 잡아 먹듯이 꿀꺽 삼켜 버렸다. 홍안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총명하구만. 자네가 똑똑한 사람이니 노부는 솔직히 말하지. 이 약은 백연환(百涎丸)인데 백 가지 동물의 타액(唾液)을 제련하여 만든 것이라네. 독성이 심하기는 하지만 노부가 해약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가 이처럼 통쾌하게 먹는 것은 결국 본좌(本座)에 대한 충심을 보여주는 것이니 본좌도 자네를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거네!] 홍안통은 이렇게 대충 말했다. 위소보는 놀라며 생각했다. (아이구, 이 지독한 약을 다행히도 이 늙은이가 만들었다니 천만다행이다. 이 어르신이 일거에 먹지 않았다면 필시 핍박을 하던 다른 수작을 부려 먹었을 게 아닌가! 역시 이 어르신을 따라올 수는 없지.) 위소보는 다시 생각하며 득의양양했다. (이 어르신은 이미 개방에서 만든 백독도 침법할 수 없다는 독문 약물을 먹었는데 '백연환'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씀이다.) 위소보는 공손한 척하고 말했다. [교주님, 속하는....] 홍안통은 그의 말을 잘랐다. [내 말을 더 듣게나. 이 백연환은 독성이 심하지만 역으로 사람의 내력을 증진시키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네. 자네는 총명한 사람이니 더 말하지 않겠네. 노부도 자네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거네. 어흠!]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교주님, 무슨 겸손의 말씀을....] 홍안통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내력의 기초는 보잘것 없지. 약을 먹었으니 내력이 증강될 것이고 무공도 정진될 것이데. 해독약은 매년 단오에 만들어 보낼 테니 그 때 먹으면 되네.] 위소보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단오에 만나지 못하면요?] 홍안통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야 없지. 만약 단오에 약을 받지 못하면 전신이 다 썩어 뼈만 남을 것이고 일주일 내에 죽어 버리지. 그것은 칼탕을 치는 것보다 더 참혹하다네. 자네, 생각해 보게나. 자네 목숨과 관계되는 일인데 노부가 등한히 할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속으로 대노하여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을 죽여 거름으로 만들자는 수작이구나!) 그러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홍안통이 말했다. [짧은 밤에 긴 말을 할 게 있는가? 툭 털어놓고 말하지. 위 동생! 우리는 신룡교를 다시 세웠다네. 경비 조달이 재일 시급한 일인데 자네는 아는 사람이 많으니 이 중책을 맡아야겠네.] 위소보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맡겨도 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돈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선뜻 대답했다. [그건 문제 없습니다. 10만 냥, 아니 20만 냥을 속하가 준비하면 되겠는지요?] 홍안통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빈 주먹으로 시작했으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네!] 위소보는 좀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이상은 어려운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주님 분부라면 속하는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홍안통은 위소보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모자라면 다른 것은 제쳐 놓고라도 사십이장경에 감추어 놓은 보물만 얻어내면 되지!] 위소보는 겁을 먹고 말했다. [사십 이 장경?] [어떤가?] [교주님 분부대로 속하는 및 년 전에 세 부의 사십이장경을 교주님께 바쳤지요. 나머지 다섯 부는 정말 속하의 재간으로서는....] 홍안통은 그의 말을 잘라 말했다. [그건 안심하게나. 노부는 소식하며 공염불이나 외는 사람이 아니니 그 많은 경서를 가져다 뭘 하겠는가? 노부는 그 경서 속에 감추어진 보물을 말하는 거네.] 위소보가 말했다.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보물지도는 확실히 경서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을 전부 찾아 그 조각을 다시 맞춘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홍안통은 냉소하며 말했다. [그 여덟 부의 경서를 다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노부가 자네에게 말한 적이 있지 않는가? 그 비밀은 이미 남이 훔쳐갔다고! 흥, 위 동생, 그래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위소보는 사십이장경을 쌍아와 모두 구해 맞추어 본 다음 불살라 버렸다. 홍안통이 말하는 것을 듣고 위소보는 궁리했다. (너도 추측뿐이구나. 그 비밀을 알아내자는 데 불과하지. 그러나 이 비밀은 이 어르신과 쌍아만이 아는데 어떻게 누설되었을까? 참, 그 세 부의 사십이장경을 저 늙다리가 나에게 맡긴 적이 있었는데 비밀을 남이 훔쳐갔다면 네 놈이 의심할 사람은 나뿐이니, 그래서 이 어르신에게 묻는 모양이지?) 위소보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그렇게 되었군요. 교주님, 속하는 좀 덜렁거리는 탓에 그저 그 경서를 도둑맞지 않고 다시 교주님께 드릴 것만 생각했지 다른 놈이 중간에서 무슨 수작을 피웠으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속하는 필히 방법을 강구해 반드시 알아 내겠습니다.] 홍안통이 말했다. [그럼 좋소. 늦어도 내년 단오절까지라네. 그 때까지 그 지도를 얻지 못하면 해약은 생각지도 말게나.] 홍안통은 위소보를 핍박하여 사십이장경을 얻으려는 수법을 썼지만 지금의 위소보는 그 전과 상판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지금의 위소보는 그 어떤 독약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위소보는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교주님.... 아아!....] 홍안통이 돌연 고개를 휙 돌리니 긴 수염이 일시에 천여 개의 무기가 되어 위소보의 몸으로 쏟아져 왔다. 위소보는 전신의 혈도가 마치 몇백 마리 개미떼가 물어뜯는 것처럼 아프고 가려웠다. 그야말로 참기 어려웠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교주님, 왜....] 홍안통이 말했다. [백연환은 만들기가 참으로 어렵지. 다른 것과 달라 시고, 달고, 쓰고, 맵고 또 가렵고, 저리며, 붓고, 아픈 각가지 맛이 다 있어야 한다네.] 위소보가 말했다. [어르신께서 명년 단오에 오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홍안통은 냉소하며 말했다. [이것은 발작한 것이 아니라 노부가 '무기'로 삼으면 그 약효가 더 세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네. 정말 그 약이 발작하면 이 세상에 치료할 약이 없다네. 이것은 자네가 이전에 한 일들을 잘 생각해 보고 금후에 어떻게 웃어른을 모셔야 하는가를 알게끔 하자는 것뿐이네.] 수염을 '무기'로 삼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위소보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다 맛보았다. 수백 곳의 혈도가 저리고 가립고 시고.... 잡아뜯지도 못하고 두드릴 수도 없어 나중에는 애걸했다. [교주님, 다시 허튼 수작을 부리지 않겠사오니 어르신께서는 제발 속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속하가 잘못을 알고.... 교주님이 화풀이를 하시겠다면 차라리 그 푸른 모자를 속하에게 씌우십시오.] 홍안통은 위소보의 헛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일어나며 말했다. [위소보, 자네는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게나! 노부는 일이 있어 가 봐야겠네!] 위소보가 외쳤다. [교주님, 가지 마십시오. 제발 속하를 구해 주십시오.... 교주님의 크나큰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홍안통은 그냥 가 버렸다. 위소보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길랄 홍안통 놈아! 이 어르신을 이처럼 못살게 군단 말이냐? 두고 보자! 이 어르신이 귀신이 되면 네 놈을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아아.... 제기랄 놈, 시러배 잡놈, 자라 새끼같은 놈, 이 어르신이 저승에 가면 푸른 모자를 백 개고 천 개고 만들어 네 놈의 대갈통 위에 씌우지 않는가 보란 말이다!.... 죽일 놈, 저 망할 놈의 자식....] 홍안통은 이렇게 보복하고 마음이 흐뭇하여 껄껄 웃으며 사라졌다. 위소보는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욕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렇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어 또 개방의 문아를 욕하기 시작했다. [구린내 나는 계집년! 이 어르신에개 무슨 약을 대접했단 말이냐? 백독도 침법할 수 없다고 떠벌리더니 개방귀, 소방귀었구나.... 아아.... 아이구, 이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겠다. 돌아가신다! 아이구....] 그러나 이렇게 울부짖었으나 돌연 뗘오르늑 생각이 있었다. (이 어르신이 이렇게 소리쳐 사람들이 모이면 곤란하지. 차라리 죽은 척하고 누워 있으면서 저기 죽어 나자빠져 있는 늙은이가 재물 욕심이 나고 또 음탕한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바가지를 덮어씌우면 그만이지.... 제기랄, 저 늙은이는 누가 보더라도 음탕한 생각을 털끝만큼이라도 품을 만한 위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혹 이러다가 관청에서 이 어르신을 붙잡아 일곱 부인들의 일을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으면 오히려 내가 바람둥이라고 숱한 푸른 모자를 덮어씌울 텐데. 그러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에 알아서 기어드는 격이지. 야! 이것도 신통치 않으니, 일단은 이 곳을 뜨고 보는 게 상책이겠다.) 그는 이렇게 궁리하다가 어디서 나온 힘인지 집 밖으로 냅다 뛰었다. 그는 감히 큰길로는 달리지 못하고 꼬불꼬불한 소로를 따라 죽어라고 달렸다. 뛰고 뛰다보니 불시에 현기증이 일며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위소보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채 깨어나 보니 사방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같이 깜깜했다. 그는 온몸이 허약하고 숨만 할딱일 뿐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그는 겨우 입을 달싹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게냐?]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소보는 무서웠다. [하늘이 왜 이리도 어둡단 말이냐? 혹시 이 곳이 저승 아닌가?.... 아이구, 나는 죽었구나, 정말 완전히 죽었구나!] 주위는 고요하고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그는 또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이 죽었는데 등불 하나 없이 왜 이렇게 깜깜하단 말이냐? 제기랄, 부인이 일곱이나 있는데 왜 등불 하나도 켜주지 않는단 말이냐? 아 그렇지! 일곱 계집년들은 모두 바람이나 피울 생각을 하겠지. 어찌 이 어르신의 죽음을 애통해 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펐다. [제기랄, 일곱 부인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이 어르신이 다시 살아난다면 앞으로는 한평생 서로 죽자살자하는 처를 하나만 얻어야겠다. 그래야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쓸쓸해졌다. [아니, 내가 귀신이 되면 요 빌어먹을 년들을 가만 놔둘 수 없지. 그리고 저 늙다리 홍안통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 어르신은 그 연놈들을 찾아가 한바탕 해 놓고 말겠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일어나는네 뒤에서 목이 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거든 꼼짝하지 말거라!] 원래 위소보는 짖누르는 듯한 적막감 속에서 들짐승 울음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네 이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작 괴이한 소리를 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소보는 놀라 슬그머니 물었다. [뉘시오?....] 여자가 대답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지. 당신이 귀신이면 나도 귀신이지.] 위소보가 말했다. [나는 남자 귀신이오.] [그럼 나는 여자 귀신이다.] 위소보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야, 내가 정말 죽었는가 보구나. 저승에서 할망구 귀신까지 봤으니. 목소리를 듣자하니 틀림없이 늙고 밉살스럽게 생긴 할망구 같은데 이 어르신은 자고로 저런 늙고 미운 늙다리 여자에게는 아무런 사심도 없지.) 위소보는 제 딴에는 큰 소리로 외친다고 했지만 입에서 나은 소리는 모기 소리만 했다. [늙다리 여귀신,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내 몸에는 병뿐이라오. 폐병, 간질병, 또 매독도 걸렸으니 전염되면 시집도 못 가고 무덤속에서 썩어 문드러질 것이오.] '늙은 여귀신'이 말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말을 마구 지껄이다니 정말 시러배 잡놈이구만.] 위소보가 말했다. [그러는 여귀신은 아주 순결하고 고결하신 분 같은데 열녀문이라도 누가 하나 세워 줍디까? 이 어르신에게 늘어붙겠다면 이 어르신에게는 상스러운 말이야 얼마든지 있지. 믿지 못하겠다면.... 이 쌍년, 빌어먹을 년, 씨종자도 받지 못할 년....] 그만 지껄여대던 입이 불시에 멎었다. 그 늙은 여귀신이 위소보의 아혈을 짚었던 것이다. 늙은 여귀신이 말했다. [왜 더 떠벌리지 않는 게냐? 더 욕을 해 보시지?] 그 늙은 여귀신은 아혈을 눌러 놓았으니 말도 못하고 아무런 생각도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속으로 더 악독하게 욕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요 더러운 년, 칼탕을 쳐서 기름 가마에 쑤셔 박을 년, 살아서 기생 노릇을 했으니 죽어서도 귀신 기생 노릇이나 할 년....) 위소보는 시정잡배 출신이라 욕지거리에는 남다른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늙은 여귀신은 귓가에 들릴랑말랑하게 말했다. [이제야 됐구나. 이제야 얌전한 아이가 됐어. 내가 분명히 알려주지. 네 몸에 있는 독성을 지금 당장 해독시키지 않으면 너는 오늘을 넘기지 못해!] 위소보는 놀랍고도 한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놈의 해독이고, 오늘 죽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 이 어르신은 죽지 않았단 말이냐?) 그는 물으려고 했지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아랫배가 가려운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자그마한 한쌍의 손이 그의 복부 단전혈을 꼭 누르고 있었다. 위소보는 더욱 놀랐다. (요 늙어빠진 색귀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래 이 어르신의 양기를 빨아먹는단 말이냐?) 위소보는 서늘한 감을 느꼈다. 그재야 자신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더더욱 놀랐다. (아니, 이 늙어빠진 여귀신이 이 어르신을 올라 탔구나!) 자그마한 한쌍의 손을 단전에 머문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손은 아주 작고 보드라웠다. 위소보는 나심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이 늙은 여귀신의 목소리는 늙고 듣기에 구차하지만 손만은 얌전한 아가씨 손길 같구나.) 그는 약간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 두 손바닥에서는 무슨 영문인지 가슴을 파고 드는 열기가 퍼져 나와 삽시간에 온몸이 따스해지고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덧 위소보는 잠에 빠져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위소보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깨어났다. 그러나 눈앞은 여전히 캄캄하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가라는 녀석은 중독되어 나에게 붙잡혔지요. 소인은 곧바로 사숙조(師叔祖) 어르신께 데려오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문아 아가씨가 불쑥 나타났지요. 이 질손(侄孫)은 그녀를 대적할 재간이 없어 도리어 그녀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위가라는 녀석을 빼앗아 도망쳤습니다. 어르신께서 손을 써 주십시오.]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캑! 캑! 그들이 달아나면 얼마나 달아날 수 있겠느냐? 지금 모두 사방에서 찾고 있는 중이라네. 문아 그 계집은 별로 상관이 없지만 그 위가라는 녀석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네. 캑! 캑!....] 그 기침 소리를 듣고 위소보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구나!) 바로 앞에서 늙은 여귀신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입을 열지 말아요. 지금은 독을 제거하는 중요한 간두인데 자칫하면 주화입마를 입게 돼요.] 그 목소리는 낮았으나 아주 부드러운 것이 귀에 익은 목소리 같았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불빛이 퉁겨 들어왔다. 순간 위소보는 경황실색하고 말았다. 그의 앞에는 자기처럼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리따운 전라(全裸)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第9章.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 위소보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여자가 다름 아닌 문아었기 때문이었다. 문아가 알몸을 드러내 놓고, 그것도 알몸인 자기 자신과 함께 이렇게 대명천지에 마주 앉아 있다니 그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아는 부끄럽고도 다급한 마음에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밖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들썩했다. [이 동굴을 막아 죽여 버리자고 사숙조께 여쭙는 게 어떻겠소?] [동굴 속에 틀림없이 사람이 있다!] [위가라는 녀석이 틀림없어!] [....] 위소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동굴 속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어쨌던 그들에게 문아 아가씨가 있다는 것을 알려쥐서는 안 된다.) 마치 하늘의 도움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는 벌떡 일어나 황급히 옷을 주워 문아의 알몸뚱이를 가려 주었다. 이윽고 개방 사람들이 위소보의 혼적을 발견하고 동굴 주위를 에워쌌다. 위소보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미녀를 만나기만 하면 재수에 옴이 붙는구만! 문아, 요 계집은 백옥같이 청초하고 아리따운 계집인데 알몸뚱이를 남들에게 보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말도 안 된다! 어쨌든 이 어르신은 목숨을 내걸고라도 막을 테다.) 그는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 동굴 어귀를 막으며 살펴보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황량한 산비탈에 있는 동굴이었다. 개방 사람들은 폐병쟁이 어린 거지의 인솔 하에 동굴 어귀를 얘위싸고 있었다. 위소보가 몸을 드러내자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돌연 잠잠해졌다. 위소보가 말했다. [어이, 친구들!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가?] 돌연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저....저놈! 옷을 홀딱 벗고 있잖아!] 위소보는 문아의 알몸을 가려주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알몸인 것도 잊어 버렸다. 만약 위소보가 옷을 입으려고 동굴 속으로 다시 들아간다면 개방 사람들은 위소보가 도망친다고 여기고 쫓아 들어을 것이다. 그둘이 따라 들어오면 필히 문아가 발각되기 십상이라 위소보는 내심 머리를 굴렸다. 위소보는 알몸뚱이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했다. [이 어르신은 바쁜 일이 있으니 여러분들께서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나는 그만 실례하겠소이다.] 개방 사람들은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알몸뚱이로 말을 하자 모두 어리둥절하여 폐병쟁이 어린 거지를 쳐다보았다. 위소보는 그 어린 거지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그가 비록 어리지만 개방 내에서는 배분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소보는 내심 생각했다. (뱀을 잡으려면 대갈통부터 찍어야 한다고, 먼저 이놈을 족치고 보자!) 그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어린 거지 양반! 전에 객잔에서 얻어맞았던 신룡편(神龍鞭) 맛이 어땠는가? 그리고 그 주루의 음식은 입애 맞던가?] 한달 전, 위소보는 객잔에서 문아가 '무독대공법'을 연마하는 동안 지키고 있었다. 이 때 문아가 독침으로 이 어린 거지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또 살아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잣거리 주루에서 위소보는 또 몽환약으로 그 어린 거지를 쓰러뜨리고 북경으로 떠났다. 위소보는 이 두 가지 일을 거론하면서 은근히 그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 과언 그 말이 효험이 있었던지 어린 거지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천연덕스럽게 벌거벗고 있는 위소보를 어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밝은 대낮에 아무리 황막한 산중일지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을 홀딱 벗고 있으면서도 창피스럽기는 커녕 배를 턱 내밀고 서서 뒷짐을 짓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헤야 좋을지 몰랐다. 알굴이 황소 엉덩짝보다 더 두꺼운 위소보는 태연스레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은 뭐 볼 게 있다고 이 어르신만 쳐다보느냐? 네 놈 집에 누이나 여동생이 있으면 이 어르신께 보내란 말이다. 이 위작 나으리께서 네 놈 집안 사위가 되게 말이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캑캑! 이 자식, 너 동굴 속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게냐?]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뭘 하고 있었냐구? 이 어르신도 무슨 영문인지 모른고 있다, 이 놈아!) 그는 히히 웃으며 되물었다. [네 놈은 이 어르신의 옥체를 보고서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단 말이냐?] 어린 거지가 주춤거리며 말했다. [무공이라도 연마하고 있단 말이냐?] 위소보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무공'이라는 말을 듣자 약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돌려서 말했다. [무림에서 배분이 높다는 놈이 그래 강호의 규칙도 모르느냐? 어찌 다른 문파(門派)의 무공 연마를 훔쳐 본단 말이냐? 흥! 개방에는 성룡 방주 아래 문아, 청아 자매를 제외하고는 늙은 거지, 젊은 거지, 어린 거지, 남자, 여자.... 어느 하나 체통을 지키는 놈이 있단 말이냐?]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말을 뒤섞어 놓으니 도대체 무슨 갈래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어지러움(亂) 속에서 득을 보는 위소보의 천하 일품의 절기(絶技)었다. 과연 개방 사람들은 방주 성룡과 또 은원(恩怨)을 가리기 어려운 청아, 문아 자매를 들고 나오자 어안이 벙벙하였다. 개방은 세칭 천하제일 문파로서 존비(尊卑)와 장유유서를 중히 여겼다. 위소보가 이처럼 큰 소리를 치니 그들은 확실히 내심 주저했다. 그들은 비록 위소보의 내력을 잘 몰랐지만 개방 사람과 매우 깊은 인연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린 거지는 들은 척도 않고 무엇인가 궁리를 하다 천천히 말했다. [캑캑! 귀하께서 지금 절세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다니 거 참 축하할 만한 일이오.] 위소보는 그의 기색을 보고 생각했다. (만약 이 어르신이 절세 무공을 연마하고 있다 해도 요 놈의 폐병쟁이는 믿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마각을 드러낼 지도 모르겠구나?) 그리하여 위소보는 두루뭉실하게 말했다. [한 문파의 무공(武功)을 이삼 일 안에 연마하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지!]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말했다. [그렇지. 차녀음양공( 女陰陽功)은 칠칠이 사십구 일 만에 원만히 연성하기는 어렵지.] 위소보는 생각했다. (차녀음양공(差女陰陽功)? 그러나 문아는 착하지는 않지.) (역자 주:한자 차( )와 차(差)는 발음이 같으나 뜻이 다름. 차: )는 '예쁜 여자'란 뜻인데 위소보는 차(差) 즉, '착한 여자'로 생각했음.) 위소보가 말했다. [이 '차녀음양공(差女陰陽功)'은 칠칠이 사십구 일 만에 연성하기는 힘들지. 오직 사람과 연분에 달렸지!] 그는 이렇게 얼버무려댔지만 말꼬리가 잡힌 줄은 몰랐다. 세상에 '차녀음양공'이라는 것은 없다. 어린 거지는 그의 흘딱 벗은 알몸을 보고 그가 문아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일남일녀가 홀딱 벗고 할 일이란 뻔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거지가 세상에도 없는 '차녀음양공'을 들고 나은 것은 위소보가 여색을 밝히는 음탕한 심사를 비꼬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무공에 대해서는 깜깜부지인 위소보는 바람 부는 대로 말했다. 어린 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귀하의 자질과 경력을 고려한다면 그 무공이 매우 적절하지요. 부디 귀하께서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위소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성공하면 입을 맞추지.] 말을 끝내자 위소보는 그 말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다시 말할까 생각하는 순간 눈 앞이 언뜩하더니 어린 거지가 귀신처럼 위소보의 코밑까지 다가왔다. 그의 손은 아주 컸지만 여위고 앙상하며 뼈마디가 크고 길었다. 그의 연약한 몸과 전혀 어을리지 않았다. 피골이 상접하고 병색을 띤 얼굴에는 관자놀이가 뚝 뻐져 나오고 핏줄이 아롱아롱 비쳐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 더욱이 눈은 징그럽고 흉악스러웠다. 이 소름 끼치는 몰골을 보고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넘어질 뻔했다. 뒤는 바로 동굴 어귀었다. 위소보는 문아가 개방 사람들에게 발각될까봐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죽으먼 죽었지. 문아를 네 놈들 손에서 모욕 당하게 할 수는 없다.) 그는 꼿꼿이 서서 소리쳤다. [그래 손을 마음대로 쓸 테냐? 아니면 강호의 규칙대로 하겠느냐?] 어린 거지가 말했다. [일대 일이라면 강호의 규칙에도 어긋나지는 않을 텐데?] 그는 말하며 위소보의 가슴을 후려쳤다. 위소보가 적수와 마주칠 때면 언제나 몇 가지 보물이 그를 지켜주었다. 예리한 비수, 칼에도 베이지 않는 보의, 박발백중인 몽환약, 변변치 못한 '신행백변', 또한 문아가 그에게 먹여준 백독도 침범할 수 없는 개방의 명약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비수, 보의, 암기를 갖고 있을 수 없었고, 어린 거지가 독약을 쓰지 않으니 먹은 해독약은 쓸데없으며, 또한 신행백변은 도망가는 데나 쓸모가 있지 방어하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 하물며 홍안통이 백연환이란 독물까지 먹여 중독 증상까지 나타나고 있었으니 위소보는 가진 재간을 다 부려도 얻어 맞을 수밖에 없고, 대항할 능력이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일지라도 말할 수 있는 입만은 가지고 있었다. 위소보가 '어라....'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해 그는 욱하니 선혈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린 거지가 얼른 몸을 옆으로 피하자 선혈은 그의 몸에 빗겨 통겨져 나갔다. 위소보는 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네 놈들이 이처럼 악착스럽게 구는 까닭이 무엇이냐? 그래 이 어르신이 문을 걸어 닫고 무공 연마하는 것이나 훔쳐보는 놈들이 감히 강호에서 의리를 논한단 말이냐?] 어린 거지가 냉소하며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어떤 고명한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거요?] 위소보가 말했다. [너희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 묻긴 뭘 묻는 게냐? 이 어르신이 지금 연마하는 건 차녀음양공이야!] 어린 거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캑캑 기침을 하며 허리를 굽히고 웃다가 말했다. [정말 대단한 차녀음양공이구려. 그러나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없다오. 열 달 후면 이 동굴 속에서 연마한 신공(身功)으로 두 사람이 세 사람으로 될 테니 그 때 가면 우리는 당신들을 더욱 감당할 수 없겠지! 하하하.... 캑, 캑!]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이 폐병쟁이 귀신은 기침을 그렇게 해대면서. 왜 죽지도 않는 게냐?) 위소보는 그제야 비로소 흘딱 벗고 있는 문아와 자기가 동굴 속에서 한 애매한 행동을 비꼬아 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소보는 이날 이때까지 입으로 남에게 져 본 적이 없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분명한 사실이지. 만약 네 놈의 여동생도 재간이 있다면 이 동굴 속으로 보내거라. 그러면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여동생은 너에게 쌍둥이 외조카를 낳아줄지 모르지.] 어린 거지의 무공은 고강하였으나 어릴 적부터 시정잡배로 굴러먹은 건달 위소보의 말재간에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린 거지는 한참 멍하니 생각했다. (이런 건달 새끼가 문아와 함께 처박혀 있으면서 도대체 내 여동생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떠벌리는 게냐?) 그는 위소보의 욕에 어쩐지 울화가 불끈 일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말했다. [우리 개방에서는 오늘부터 내부를 정돈하고 있다오. 나으리와는 상관이 없으니 그러지 말고 길을 좀 비켜주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그거야 좋은 일이지. 그런데 나까지 정돈하자는 말인가?] 어린 거지가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비켜 주기만 하면 되고, 우리는 문아를 찾으면 그만이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위소보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뺨을 찰삭! 후려 갈겼다. 이에 거지뿐만 아니라 위소보 자신도 놀랐다. 위소보의 무공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위소보는 어린 거지가 무례하기 짝이 없고 말끝마다 고결하기 이를 데 없는 문아를 모욕하니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 다짜고짜 후려친 것이다. 기실 어린 거지가 얻어맞게 된 것은 방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어린 거지는 이전에 위소보와 겨루어 본 적이 있어 위소보에게 잔꾀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담도 크지 못한데 이처럼 갑작스럽게 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린 거지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멋진 수법이오. 캑, 캑! 여색을 좋아하는 귀하의 마음이 이처럼 극도의 경지에 이른 것을 내 미처 생각지 못했소. 탄복할 일이오.] 어린 거지는 이렇게 말하며 위소보의 단중혈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물속의 물고기처럼 요리조리 피하니 좀처럼 손애 잡히지 않았다. 만약 다른 때라면 위소보는 날렵한 그의 솜씨를 피할 수가 없겠지만 지금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니 빠쳐 나가기도 쉬었다. 어린 거지는 기침을 하며 더는 건드리지 않고 위소보가 피하는 틈을 타서 동굴 어귀까지 왔다. 위소보는 그 거지가 동굴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보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뒤로 가서 어린 거지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위소보의 무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무조건 때리고 걷어차고 밀어붙이는 품이 마치 건달패가 이리저리 쥐어뜸고 싸우듯 손이고 머리고 심지어 몸까지 마구 멀치며 덤벼들었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는 위소보의 무공이 낮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막무가내인 적수를 상대하기는 약간 힘이 부쳤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위소보의 어깨를 틀어쥐려 했다. 위소보는 어린 거지가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비파골이 움켜 쥐어졌음을 느꼈다. 제대로 말하자면 위소보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린 거지는 어깨를 단단히 틀어쥐고 손을 떼지 않았다. 손에 힘을 좀 주자 위소보는 삣속까지 저려왔다. 위소보는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 소리치며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할 게지 왜 이러는 게요? 그래 이 어르신을 죽이자고 그러는 게요?] 어린 거지는 말했다. [다 죽게 됐는데 무슨 잔소리냐? 그래 투항하겠느냐?] 강호의 호걸들에 있어 투항한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위소보에게는 아이들 놀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말했다. [투항이란 개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러오? 투항하겠소.]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이 새상은 할애비가 손자 녀석애게 투항하고, 애비가 아들 놈한테 용서해 달라고 비는 꼴이니 정말 말이 아니로구나!) 어린 거지가 말했다. [투항하려면 어서 비켜라. 우리는 동굴 속에 들어가 내부를 정돈하겠다!] 위소보가 외쳤다. [그건 안 되오! 이 곳은 이 어르신네 조상 대대로 가업(家業)을 이어 내려오던 곳이오. 당신들이 굳이 정돈을 하려거든 딴 곳에 가서 정돈하기 바라오.] 어린 거지가 기침을 쿨럭쿨럭하며 말했다. [캑캑! 나으리께서는 좀 현명하게 처신하는 게 좋겠소. 혼자서 한 계집을 보호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오. 이것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는다면 너무도 애석한 노릇 아니겠소?] 어린 거지는 말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위소보는 '아야!' 하고 아우성치며 몸을 더 굽혔다. 비파골은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이다. 비파골이 부서지면 절정에 오른 무공도 다 무력해지고 만다. 위소보의 무공과 그의 내력은 보잘 것이 없지만 이 비파골이 부서지는 날이면 불구자가 되는 것이다. 무공과 내력으로 대적 못 하는 그이고 보면 지금 기 비파골의 통증이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어린 거지가 말했다. [나으리께서 동굴 어귀에서 비켜 주기만 하면 더는 괴롭히지 않겠소. 그러나 계속해서 버틴다면 손에 사정을 두지 않을 데니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위소보는 허리가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 되자 덜컥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그는 굽혀들기는 커녕 오기가 솟구쳐 올랐다. 무림의 도의(道義)건 뭐건 어쨌든 자기 목숨을 부지하면 그만이다. 그는 문아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는 있었으나 그리 깊은 인연은 없다. 그러므로 그의 목숨을 무엇보다 아끼는 일관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문아를 위해 죽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문아를 위해 서슴없이 목숨까지 바치려 하다니 그의 일생일대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위소보의 머리는 이미 땅에 닿아 있었고 전신의 피가 얼굴로 몰려들어 얼굴은 시뻘개졌지만, 조금도 수그러드는 기색이 없이 말했다. [네 놈들이 이 어르신을 죽이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게다.] 어린 거지는 그가 이렇게 버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린 거지가 냉소하며 말했다. [데 놈이 어떤 인간이냐? 무림 가운데 태산북두(泰山匕斗)란 말이냐? 시정잡배 건달 놈이 무슨 재간이 있어 개방 내부를 정돈하는 것까지 막는단 말이냐?] '시정잡배 건달 놈'이라는 말을 듣고 위소보는 속으로 얼른 대꾸했다. (그래도 이 시정잡배는 무림 능수들과의 몇 차례 손을 쓰면서 잡배의 수단으로 이겼단 말이다.) 어린 거지는 위소보와 더 이상 말씨름을 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밖으로 내던지려 했다. 바로 이 때 회뿌연 모래알이 어린 거지의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위소보는 이전에 쓰던 방법으로 석회를 뿌렸다. 어린 거지는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모래알을 그대로 뒤집어 쓰고 말았다. 그는 눈을 뜰 수 없어 잡았던 손을 늦추었다. 위소보는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어떤가? 무림 태산북두의 맛이 어떠냔 말이다.] 어린 거지는 귀신을 만난 듯이 얼굴이 일그러져 위소보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너,너....] 그리고는 그만 전신이 나른해져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위소보는 너무나 의아하여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이 어르신이 모래를 뿌렸기로서니 죽은 척을 할 작정이냐?] 이전에도 객잔에서 이렇게 죽어버린 것을 본 적이 있었고, 그 후 또 거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죽어나가는 그었기에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야, 이 놈은 죽는 척하면서 사람을 잘도 놀라게 하는구만. 제기랄, 그러나 이 어르신만은 속이지 못하지. 이 어르신은 어릴 적 양주 부두에서 별의별 괴상한 것을 다 봤단 말씀이다. 죽는 척하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게 네 놈들의 재간이란 말이냐.... 별꼴 다 보는군. 어서 일어나란 말이다!] 위소보가 발로 걷어차자 어린 거지의 몸은 힘없이 한 바퀴 뒹굴어 얼굴이 위로 향해졌다. 그는 눈을 빤히 뜨고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 채 죽어 있었다. 정말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 때 한 거지가 뛰어나와 말했다. [그래, 네가 감히 우리 사숙조를 때려 죽였단 말이냐?] 위소보가 말했다. [개소리 작작해! 네 놈 사숙이 죽은 척하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을 네 놈들은 모르느냐? 이 어르신은 코끝 하나 다치지도 않았는 데 날더러 때려 죽었다구?] 그 거지는 달려와 어린 거지의 코에 손을 대보고는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놈이 우리 사숙조 어르신을 때려 죽었다! 때려 죽였어! 우리 사숙조의 원수를 갚자!] 그는 울고불고하며 위소보를 때리려 했다. 숱한 거지들이 달려들었다. 위소보는 안달이 나서 소리쳤다. [야! 이놈들아, 이치를 따져 보래두!] 하지만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위소보는 우르르 달려든 거지들에게 맞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많은 거지들을 어떻게 대적하지!) 그는 얼른 땅에서 모래 한줌을 쥐고는 소리쳤다. [꼼짝하지 말고 제 자리에 서거라! 어느 놈이든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암기를 던질 줄 알아라!] 거지들은 방금 그가 땅에서 모래를 쥐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더구나 벌거벗은 몸 어디에 암기를 감출 수 있겠는가?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요놈 거지들은 이 어르신보다 더 행패를 부리는구나. 만약 죽은 어린 거지가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면 자기 신분을 생각해서 함부로 문아를 난처하게 하지는 못할 테지만 이 빌어먹을 거지 놈들이 동굴 속으로 뛰어드는 날이면 얌전한 문아를 보고, 게다가 발가벗은 문아를 본다면 어느 놈인들 자기 계집으로 삼으려 하지 않겠는가? 추잡한 그들의 계집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위소보는 속에서 안달이 났다. 위소보는 다짜고짜 모래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 어르신이 던지는 모래 속에는 독이 들어 있다. 살고 싶은 놈은 비켜라!] 모래가 날리자 위소보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 있다가 눈을 떠 보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그 아귀신 같은 십여 명 거지들은 모두 얼굴이 바싹 오그라붙어 땅바닥에 쓰러진 채 죽어 버렸던 것이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외쳤다. [야, 귀신이 있다. 귀신이 있어!] 그는 자기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 어르신이 손을 내밀자마자 사람이 죽었단 말인가? 이게 어찌된 노릇이지? 홍안통 늙다리가 말한 것처럼 이 어르신이 '백연환'을 먹고 공력(功力)이 증가된 것은 아닐까?.... 개뿔이나 늘어났겠는가? 이 어르신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데, 혹시 누가 암암리에 도와준 것은 아닐까? 아니, 이런 밝은 대낮 황막한 산중에서 누가 나를 도와준단 말인가? 귀신이 나타났나?) 위소보는 귀신을 생각하니 몸이 떨리고 사방에 늘어쳐 있는 시체들을 보니 더욱 무서워 얼른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위소보는 동굴을 막았던 돌로 다시 동굴 어귀를 막았다. 동굴안은 깜깜했다. 위소보는 어둠 속에서 문아에게 옷을 입혀주며 기도하듯 말했다. [문아 아가씨, 지금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오. 내가 조금이라도 봤다면 내 눈알을 빼서 십팔층 지옥불에 던져 다시는 이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하시구려.] 위소보는 어릴 때부터 기생원에서 굴러먹었기 때문에 벌거벗고 나뒹구는 남녀를 보는 것은 다반사요, 눈가죽이 다 닳을 지경으로 훔쳐봐 왔으니 아무리 어두운 곳일지라도 벌거벗은 여자를 상대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문아만큼은 이 어둠속에서조차 감히 똑바로 보지 못했다. 위소보는 자기가 너무도 배짱이 없는 것에 스스로 성이 났다. (제기랄, 문아 아가씨는 관세음(觀世音)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녀 스스로 옷을 벗었는데 그래 이 어르신은 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왜 이 어르신의 담은 갈수록 벼룩이 간이 되는지?) 그는 문아에게 조심스레 옷을 입혀 주고 자기도 옷을 입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이 때 문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 상공(相公), 저를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문아 아가씨, 정말 미안하구려. 이 위소보가 방탕한 짓을 많이 했소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지는 마시오.] 문아는 말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것저것 따질 게 있나요? 저는 앞쪽 수림속에서 위 상공이 중독된 것을 발견했어요. 개방 사람들을 피해 이 산속으로 피신했지요....] 개방은 독약을 쓰는 문파었기 때문에 문아도 독약을 쓰는 데는 아주 노련했다. 그녀는 위소보가 중독된 것을 보고 일반적인 중독 같지 않아 재빨리 손을 썼다. 일찍이 위소보는 백독도 침법할 수 없다는 개방의 명약을 먹었지만 백연환은 독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독한 약이다. 홍안통은 수염으로 위소보의 혈도를 열어 약성(葯性)이 그의 기경팔맥(奇經八脈) 안으로 확산되게 만들어 중독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홍안통은 위소보를 바로 죽이지 않고, 그 동안의 원한을 갚기 위한 수단으로 그를 이용했다. 그는 내력으로 독을 발작시켰다. 보통 사람이 백연환을 먹으면 바로 중독 증상이 나타나고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홍안통은 그 점에 유의하여 특수한 방법, 즉 수염으로 혈도를 눌러 약독이 위소보의 전신 혈도에 들어가 24시간 내에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모기에게 물린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소보가 개방의 진귀한 헤독약을 먹어 극독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공력이 증가된 사실은 몰랐다. 때문에 위소보는 중독된 상태에서도 수십 리나 되는 곳을 혼자 달려왔다. 그러자 거꾸로 독성의 발작을 촉진시켰다. 문아가 개방 사람들에게서 위소보를 빼앗아 왔을 때는 백연환이 발작하여 생명이 제일 위급한 시기에 있었다. 그 다급한 정황에서 문아는 다른 것 생각할 겨를 없이 우선 그를 이 동굴로 옮겨 왔다. 문아는 개방 사람의 밀방인 '차녀음양대법'으로 위소보를 해독시켜 주었다. 이 차녀음양대법은 개방 제자들 가운데서 밀방(密傍)으로 전해 온 해독법이었다. 해독을 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각기 옷을 전부 벗어야 독성이 장애를 받지 않고 빠쳐나간다. 그러나 여자 몸으로 남자 앞에서 옷을 모조리 벗는다는 것은 자기 남편 외에 부모 형제 앞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 해독법은 개방의 여제자들 속에서 은밀히 전해 내려왔으며 이 수법을 펼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하물며 문아처럼 출가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그 해독법을 펼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아는 차녀음양대법 외에는 달리 위소보의 체내에 있는 극독을 해독시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녀는 위소보를 동굴 속으로 안고 들어와 돌로 동굴 어귀롤 막아 동굴 속을 깜깜하게 했다. 그리고 위소보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늙은 노인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그러나 개방 사람들은 악귀신처럼 따라붙어 동굴 어귀를 열어 젖혔다. 문아는 너무도 창피하고 다급한 나머지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 후 문아가 깨어났을 때는 위소보가 동굴 밖으로 나간 뒤었다. 위소보가 동굴 어귀에서 개방 사람들과 주고받던 말을 똑똑히 들은 문아는 남몰래 감동되었다. (위소보란 사람은 보기에 경박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건달 같지만 행동은 세밀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구나.) 동굴 속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위소보가 말했다. [문아 아가씨, 개방 사람들은 문아 아가씨가 이 곳에 있는 것을 모르오. 설령 그들이 안들 또 무슨 소용이겠소? 모두 다 죽여 버렸소. 다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뿐이오.] 문아는 놀라며 물었다. [그가 누군가요?] [나요. 오늘 이 시각부터 밖에서 조금이라도 추잡한 말이 나돈다면 모두 이 위소보가 한 것이오. 만약 이 위소보의 입에서 흘러나갔다면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일곱 부인, 두 아들과 딸을 몽땅 불살라 태워 죽여 대를 끊고 십팔층 지옥에 던져 버리시오.] 욕지거리를 절반 섞어 맹세하는 것은 그의 입버릇처럼 되었고, 입은 놀리지만 마음에 없는 말을 늘어놓으니 믿을 바는 못 되었으나 이 번만은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문아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위소보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문아 아가씨, 그래도 당신이 안심할 수 없다면 이 위소보는 문아 아가씨 앞에서 죽어 버리고 말겠소.] 그는 비수를 빼들고 가슴을 겨누었다. 죽음을 무엇보다도 겁내는 위소보가 오직 문아의 순결을 지켜 주기 위해 조금도 주저없이 자살하려는 것이다. 문아는 얼른 비수를 빼앗고 아주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위 상공, 왜 그러세요? 저는 분명히 믿어요. 세상사람들이야 뭐라든 자신에게 당당하면 그만 아니겠어요?] 위소보는 격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 위소보는 낯짝이 두텁고 더러운 인간이지만 문아 아가씨는 백옥같이 아름답고 신선 같은 사람이니 나는 한평생 문아 아가씨를 보호하며 살겠소. 누가 만약 문아 아가씨에 대해 험담을 한다면 이 위소보의 무공은 대단치 않으나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을 죽이겠소.] 위소보는 말하면서 또 자기로서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제기랄, 이 위소보는 어르신이 아니라 멍텅구리, 정신병자가 아닌가? 이 어르신은 여태껏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았는데, 그래 요 계집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단 말인가? 내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닌가?) 위소보는 자기 부인들이 생각났다. (만약,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겠는가? 쌍아는 몇 번 나를 구해 주었으니 그녀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하지. 공주를 놓고 말한다면 그는 소황제를 배경으로 삼고 있고 또 지금 태후가 그녀를 잘 대해 주니 이 어르신이 그녀를 위해 목숨 바칠 필요야 없지. 목검병으로 말한다면 목왕부(沐王府)에서 야위어 죽은 낙타라 할지라도 가난한 집 말보다는 살이 더 꼈을 테니 이 어르신은 그녀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을 게고. 소전은 마음이 못 되고 고약하여도 '못된 친척이 항렬만 높다'고 남들이 떠받드니 그녀를 구해야 하고 증유, 방이는 궤계가 다다하기 때문에 그들을 속여넘길 만한 인간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걱정할 게 없지. 아가 요년만은 대만 정극상과 치근덕거리며 나에게 '푸른 모자'를 씌을 년이니, 이 어르신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그건 너무도 이 어르신의 얼굴을 깎는 일이지!) 문아는 위소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고 물었다. [위 상공께서 개방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하셨는네, 위 상공께서 죽였나요?] 위소보는 펄쩍 뛰며 말했다. [이거 큰일났네! 내가 그만 그 놈들이 죽은 것을 찬찬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만약 그 중에 한두 놈이 살아나서 강호에 가서 헛소문이라도 퍼뜨리는 날이면 문아 아가씨의 명성에 커다란 영향이 있을 게 아니오?] 그는 동굴 어귀를 더듬으며 말없이 비수를 들고 걸어 나갔다. 위소보는 비록 강호에서 여러 해 돌아다녔지만 담이 작아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고사하고 죽은 사람을 보아도 겁을 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거지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그들의 요해를 쩔러 정말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위소보는 동굴 어귀를 나서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십여 명이나 되는 거지들의 시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들은 원래 죽지 않았단 말인가? 이 위소보가 이 곳을 떠난 다음 모두 달아났단 말이냐? 그럴 리가.... 그 중에서 그 폐병쟁이 어린 거지만은 이 어르신이 친히 그의 코에 손을 대봤는데 숨이 멎어 있었으니 죽은 것이 분명한데. 그럼 누가 와서 그들을 구해 갔단 말이냐? 그럴 수야 없지. 열댓 명이나 되는 사람을 몇 사람이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일이고, 또 동굴 속에서 아무런 동정도 듣지 못했는데....) 위소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인지라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어 동굴 속으로 돌아왔다. 위소보는 괴이한 일이라며 문아에게 알렸다. 문아가 물었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라니요?] 위소보가 얼른 말했다. [그 놈을 모른단 말이오? 그 폐병쟁이 귀신같이 생겨먹고, 무공이 높은 그 놈 말이오. 개방 사람들은 모두 그를 사숙조라고 하던데.] 문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그는 저희 의부의 제자 관의호(關義虎)예요. 그는 몇 달 전에 객잔에서 나의 독침에 맞아 죽었는데 그래 그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는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났다오. 정말 괴상한 일이군. 나도 그 날 직접 보았는네 얼굴이 까맣게 되어 죽지 않았소? 그런데 며칠 후 나는 또 보았단 말이오. 아까도 그가 죽었는데 지금은 그림자도 없으니 그가 백독도 침범할 수 없다는 약을 먹은 게 아닐까?] 문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일은 정말 괴이하네요. 위 상공, 어떻게 죽이셨나요?]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위소보는 일부러 불려서 허풍을 떨며 어떠어떠하게 또 무슨 무슨 신공(神功)으로 죽었다고 뗘벌렸으련만 오늘 문아 앞에서는 아주 정직한 사람이 되어 말했다. [문아 아가씨도 알겠지만 나의 무공은 보잘 것 없다오. 그 관가라는 거지를 만나면 투항이나 할 처지인데 어떻게 그를 죽이겠소?] 위소보는 그 과정을 이렇고저렇고 실명했다. 그리고 그 폐병쟁이 어린 거지의 이름을 알았으니 자기가 지은 폐병쟁이 어린 거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아는 개방 사람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문아의 얼굴을 봐서도 관의호라 불렸다. 관의호가 자기 비파골을 틀어쥐자 달리 방법이 없어 비겁한 수단으로 모래를 뿌려 관의호가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나중애 관의호가 죽어 버렸으며, 또다시 거지들을 죽인 과정을 일일이 다 설명했다. 문아가 말했다. [위 상공, 노여워하시더라도 달리 도리가 없겠지만 위 상공의 무공으로 관의호를 죽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고, 또 모래로 사람을 죽었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떤 고수가 와서 도와주지 않았을까요?] 위소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그럼 누군가가 개방 사람들을 죽었다 치고, 그렇다면 또 누가 와서 그 시체를 다 걷어갔단 말이오? 제기랄, 사람을 죽이고 슬금슬금 와서 시쳬를 걷어가다니 정말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이로군.] 문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일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 같네요. 저의 오독침 독약은 외부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개방 내의 사람 가운데서도 보통 사람은 헤독할 수 없어요 관의호가 독침을 맞은 자리는 바로 인당혈(印堂穴)인데 독성이 빨리 퍼지지요. 그러면 신선이라도 치료하지 못하지요.] 문아는 무언가 좀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 년 내내 어떤 그림자가 줄곧 저를 쫓고 있다는 감을 느꼈어요.] 동굴 어귀는 완전히 막지 않아 황혼이 깃들어 동굴에 비쳐 들었다. 동굴 속은 음침하고 처량했다. 문아는 말하며 약간 몸을 떨었다. 위소보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문아 아가씨, 겁내지 말구려. 좋은 그림자든 나쁜 그림자든, 또 사람이든 귀신이든 간에 이 위소보가 있으니 문아 아가씨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이오.] 강호에서 순전히 제 살 궁리만 하고 죽음을 겁내며 호색하고 담이 작은 위소보었기 때문에 또한 그 점이 위소보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의 무공은 문아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문아처럼 강호에서 험악한 풍파를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몇 마디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문아는 고아였다. 비록 개방의 방주인 성룡이 그들 자매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지만, 한 젊은 남자가 진심으로 자기를 대하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게다가 오해로 인하여 문아는 개방의 반역자로 몰려 밤낮 쫓겨다녔다. 그런데 그 누가 선뜻 나서서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 줄 사람이 있겠는가? 문아는 위소보의 말을 듣고 눈시울이 젖어들며 말했다. [위 상공, 정말 고마워요.] 위소보가 말했다. [고마을 게 뭐 있단 말이오? 오히려 내가 고맙지. 문아 아가씨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이 목숨은 그만 없어졌을 것이오. 그러니 내 이 목숨은 문아 아가씨가 준 것이라오.] 위소보는 여태껏 살면서 이처럼 마음이 흐뭇한 적이 없었다. 문아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위 상공, 제게 한 가지 청이 있는네 들어주시겠어요?] [들어주고 말고! 문아 아가씨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소.] 문아가 말했다. [우리 의남매를 맺으면 어떨까요?] 그 말에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펄쩍 뛰다가 그만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아픈 줄도 모르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거 참, 좋은 생각이오. 이 위소보에게 이런 여동생이 생기게 되다니 우리 이십팔대 조상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며 향불을 피우고 빌던 일이 오늘에야.... 정말 잘된 일이오!] 그러나 약간은 양심의 가책이 일어 다시 말을 바꾸었다. [문아 아가씨. 하지만 나의 출신은 너무나 너절하고 미천하여 문아 아가씨의 명성을 흐리지나 않을지....] [별 말씀을 다하세요. 영웅은 출신을 가리지 않아요. 저도 귀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에요.] 위소보는 그래도 주저하며 말했다. [아니오. 어쨌든 나의 어머니는 양주 여춘원의 기생이라오.] [위 상공은 그래도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저는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어요.] 위소보는 좀 생각하다 말했다. [문아 아가씨도 말했지만 나의 무공은 애들의 장난이나 다름없지.] [무공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사람을 놓고 말하자면 인품(人品)이지요.] 위소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인품이라는 말은 더더욱 말도 마시오. 나는 진실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라오. 부인 일곱만 하더라도 여섯은 여차저차해서 빼앗아 온 것이나 다름없다오. 기실 쌍아만이 장(庄)할머니께서 보내준 셈이라오. 그러나 제대로 말하자면 나는 조정에서 봉한 벼슬을 갖고 있다고 장할머니를 속여서 그랬던 것이라오.]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라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저도 위 상공을 속였지요.] 위소보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덥석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신 천왕보살이시여, 땅에 계신 지장왕보살이시여! 위소보는 문아 아가씨와 이성(異性) 오누이를 맺으니, 동년동월동일생은 아니지만.... 문아 아가씨, 지금 몇 살이오?] 문아가 대답했다. [열 여덟하고 석 달이에요.] [나는 스물 여덟하고 다섯 달이니 문아보다 십년 두 달을 더 많이 먹었구려.] 그러더니 위소보는 정색을 하고 다시 맹세했다. [동년동월동일생이 아니니 이 위소보는 문아보다 십년 두 달 먼저 죽어야겠소이다.]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맹세를 어떻게 그렇게 하시나요? 동년동월동일에 죽는다고 해야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문아 아가씨가 나보다 십년 두 달 늦게 태어났으니 함께 죽으면 문아 아가씨가 너무 밑지는 거 아니요?] 문아가 말했다. [결의형제를 맺는데 어찌 밑지고 말고를 따질 수 있나요? 하늘땅이 보건대 제자 문아는 위소보와 결의형재를 맺사옵니다. 동년동월동일생은 아니지만 동년동월동일에 죽기를 원합니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내가....내 평생 의부의 원수를 갚아드리지 못하는 것이외다.] 문아는 의부의 원수를 갚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일로 여기고, 죽는 한이.었더라도 의부의 원수만은 갚으려 했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문아 아가씨, 나는 지금부터 여동생이라 부르겠소이다!] 문아는 생긋 웃으며 불렀다. [오라버니!] 위소보가 말했다. [여동생, 이 곳에는 오래 있을 수 없다오. 개방 거지들의 시쳬가 흔적도 없어 사라졌는데 무사할 수 있겠소?] 문아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글쎄, 정말 난처하게 됐군요. 지금 저의 경맥 속에는 오라버니 체내에 들어 있던 독성이 진부 빨려들어 있어요. 저는 지금 움직일 수가 없어요. 이레 밤낮은 걸려야 독성이 없어질 거에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문아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구나!) 그는 문아가 걱정할까봐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동생, 걱정하지 말게나. 이 오라버니가 전에 동생이 무공을 연마할 때 지켜주던 것처럼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실수 없이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무독대공법은 두꺼비, 거미, 독사, 전갈, 지네 등 오독(五毒)을 한데 놓고 먹이를 주지 않고 서로를 참살시키면서 맨 마지막애 남는 한 마리를 비파골 위얘 올려 놓고 그 놈이 피를 빨아먹다가 나중에는 너무 먹어 죽게 된다. 이러면 인체 내에는 독성이 생긴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면 나중에 오독이 완비되어 무독대공법을 연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법을 다 연마하면 자신에게는 해가 없는 동시에 인체에 매우 커다란 독성의 내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무독대공법의 요지이다. 그 때문에 무독대공법을 연마하기란 극히 복잡하고 어렵다. 문아는 무독대공법을 두 해 동안 연마했지만 한 마리 독지네를 성공하고 나머지 청사(靑蛇), 두꺼비는 거의 성공하다가 청아에게 빼앗겼다. 이 두 해 동안 공력을 연마하여 그녀의 경맥은 독을 모조리 흡수했다. 처음 문아가 위소보의 독을 해독시키려 할 때 위소보의 몸에 어떤 독이 있는지 몰랐고, 또한 독을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것은 오직 도의(道義)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녀는 차녀음양대법으로 양 손을 위소보의 아랫배 단전혈에 대고 그의 극독을 문아의 기경팔맥으로 흘러들어가게 했다. 그것은 아주 기이한 체험이었다. 아주 지독한 독성이 느껴지면서도 어썬지 전신의 경맥은 시원하고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나른했다. (작자 주:백연환이란 아편을 말한다. 백년 후,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아편을 중국으로 실어왔다. 청나라 백성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문아가 위소보의 몸에서 흡수한 독약이란 바로 아편으로 그 당시에는 매우 신비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문아는 이 때 절정에 이르는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으나 문아의 후손들인 청나라 말기의 백성들은 아편을 피우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마취되고 타락되었다.) 위소보의 체내 백연환 독성은 문아의 내력으로 밖으로 나와 문아의 기경팔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독성이 지독하여 문아가 짧은 시간 내에 소화하기 어려워 중독 증상이 나타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때문에 이레 밤낮이란 시간이 걸려야 내력으로 그 독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독을 문아의 경맥 가운데서 소화시키게 되면 그녀의 공력은 더욱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위소보는 이 공법을 연마하는데 외부 사람이 쳐들어오면 잘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소보는 자기 무공으로는 무림 능수들을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문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동생, 그 오독침 몇 대 좀 빌려 주구려.] [저 행낭 속에 있으니 가져 가세요.] 위소보가 문아의 행낭을 헤쳐보니 그 속에는 거울, 분, 연지 같은 여자들의 단장품이 아기자기하게 들어 있었고, 또 허술한 금은 목걸이도 있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여동생의 치장품들은 너무나 초라하구나. 그래 내가 오라버니가 되었으니 어쨌든 초면인사라도 해야지.) 위소보는 오천 냥짜리 은표를 꺼내 행낭에 슬그머니 넣고 오독침을 열 대 가량 꺼냈다. 위소보는 동굴 어귀에 일고여덟 개의 오독침을 꽂아 놓고 나머지는 손에 쥐고 급할 때 쓰려고 대비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여동생, 어쩌겠소? 이 오라버니는 동굴 어귀에서 방비해야 할 것 같구려.] [오누이지간에 이렇고저렇고 할 게 있나요?] 위소보는 묵직한 돌멩이를 날라와 동굴 어귀를 단단히 틀어막고 주저 앉았다. 동굴 속은 캄캄했다. 위소보는 원래 참을성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다. 밤낮 이레 동안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은 강희 황제라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위소보는 문아를 지키며 마치 수도승처럼 캄캄한 동굴 속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목이 마르면 냉수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마른 떡을 뜯어 먹었다. 그는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번거롭게 굴면 문아가 놀랄까봐, 밤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위소보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밖은 조용하고 개방 사람들은 오지 않으니 매우 만족스러웠다. 나흘째 되는 날 오전, 위소보는 돌연 밖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형님, 어서 와 보구려. 산토끼 두 마리가 있소이다.]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왔다. 두 사람은 사냥꾼들 같았다. 먼저 온 사람이 산토끼를 주워 들었는지 뒤에 오던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한참 토끼를 보더니 놀라며 소리쳤다. [동생, 만지지 마시오. 이 토끼는 중독되었소. 이 곳은 참 이상한 곳이구만.] 사냥꾼들의 눈은 밝았다. 그들은 재빨리 땅예서 독침을 발견하고 옷을 벗어 손을 감싼 후, 독침을 하나하나 주웠다. 나이 어린 사냥꾼이 중독된 토끼의 전신이 검게 탄 것을 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버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독성이 대단한 줄 알고 대노하여 욕지거리를 했다. [제기랄, 어느 녀석이 이렇세 지독한 독침으로 사냥을 한단 말인가? 산짐승을 멸종시킬 작정인 모양이지! 양심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위소보는 오히려 속으로 욕했다. (이 어르신은 그런 독약으로 토끼를 잡고 또 망할 놈의 사냥꾼도 잡는다. 제기랄, 네 놈들이 상관할 게 뭐냐? 그래 네 놈들처럼 활로 잡는 거나 이 어르신이 독물로 잡는 거나 뭐 다른 게 있단 말이냐?) 나이 많은 사람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필시 동쪽 마을에 문둥병 왕 영감네 넷째가 한 짓이다. 내가 어제 봤는데 그가 무슨 약물을 솥에다 붓고 바늘을 삶는 걸 봤다.] 어린 사냥꾼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왕씨네 넷째가 독물을 만들었다 해도 어찌 이처럼 지독한 독물을 만들 수 있겠소? 내 보기엔....] 나이 많은 사냥꾼이 소리쳤다. [그만둬! 내가 왕가네 넷째라면 뎃째지, 내 말이 틀렸을 것 같은가? 날이 저무는데 어서 다른 데로 가 보자 운수가 좋으면 노루라도 걸리겠지.]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 왕가네 넷째도 와 볼 것 아니냐? 들키면 안 좋으니 순순히 우리가 갖다주지!] 어린 사냥꾼이 투덜거렸다. [갖다 주긴 뭘? 그 녀석이 우리가 잡은 것이라면 우리에게 돌려 주겠습니까?] 위소보는 생각했다. (저 형이라는 녀석은 몇 살이나 더 먹었는지 몰라도, 하는 꼬락서니를 봐서는 강호의 일을 좀 아는 것 같군. 그러나 이 어르신의 그런 일까지 상관할 건 뭐냐!) 위소보는 그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사냥꾼들이 토끼와 독침을 가지고 가면 혼적이 없어질 테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돌연 먼 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뭣하는 사람들이오?] [사냥하는 사람이외다.] [당신들 혹시 이 산중에서 남자와 여자를 못 봤는가?] 나이 많은 사냥꾼이 대답했다. [이 황막한 곳에 우리 같은 사냥꾼 말고 또 어떤 놈이 서성대겠습니까?] 위소보는 생각했다. (아니,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온 것은 아닐까?) 위소보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확실히 개방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관의호 패거리가 아닌 다른 패거리들이었다. 우두머리는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는데 미심쩍은 어조로 말했다. [사흘 전, 사숙조께서 사람을 시켜 총타(總舵)에게 전하기를 이곳에서 여요괴와 위소보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이틀이나 마을과 골짜기 곳곳을 모두 찾아보았으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던데 그들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 거지가 말했다.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하지는 않았을까요?] 그 우두머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사숙조께서는 얼마나 세심한 사람이라구.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는데 어찌 틀릴 수 있겠나?] [글쎄, 말입니다. 그 여요괴와 위소보는 우리가 찾는다는 눈치를 알고 몸을 숨겼는지도 모르지요.] 우두머리는 관의호를 매우 신뢰하는 듯했다. [그 누구도 사숙조 어르신의 눈을 속이고 빠져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흩어져 찾되, 돌 하나, 풀 한 포기라도 놓치지 말고 찾아보란 말이오. 사냥꾼들은 그 자리에 서시오.] 이 우두머리는 원래 사냥꾼 출신이라 코가 매우 영활하여 오독침 냄새를 맡았다. 이 두 사냥꾼은 강호 사람들의 분쟁에 말려들 것을 우려하여 달아나려 했다. 개방 제자들이 나는 듯이 달려와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사냥꾼들은 급히 말했다. [여러 나으리님, 우리는 상관이 없지요.] 우두머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들과 상관없다는 걸 나도 잘 아네. 내가 좀 물어볼 일이 있어 그러네. 지금 자네들의 손에 있는 산토끼는 무슨 독약을 먹었는가?] 사냥꾼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옷에 쌌던 오독침과 토끼까지 주며 말했다. [소인은 이 근처에서 주었소이다.] 우두머리는 오독침을 자세히 훑어보고 말했다. [음, 자네들과 상관없으니 돌아가게!] 두 사냥꾼은 마치 커다란 특사나 받은 것처럼 나는 듯이 떠나갔다. 우두머리는 개방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소리를 죽여가며 말했다. [이것은 오독침인데 그 여요귀가 만들어 낸 암기라오. 모두들 흩어져 찾되 조심들 하시오. 지금 사숙조께서는 계시지 않은데 그 여요괴의 무공은 대단하니 우리는 그의 적수가 못 된다오. 그리고 그녀의 암기를 조심하시오. 그 여요괴에게만 해독약이 있다오.] 한 제자가 말했다. [사숙조께서 말씀하기를 그 여자와 위가라는 녀석은 모두 중독됐다고 하셨는데 두려울 게 있습니까?] 다른 제자가 말했다. [요 여요괴만 붙잡으면 우리 지신분타(智信分舵)는 절세의 공을 세운 것으로 분타주(分舵主)는 그때가서 부방주(副幇主)가 될지 모르지. 그러면 우리 이 형제들도 따라서 등에 주머니 하나가 더 많아지지 않겠는가?] 개방 사람의 신분 고하 여부는 등에 짊어진 주머니가 많고 적은 것으로 구분한다. 졔일 높으면 팔대(八袋)고, 적으면 한 개, 두 개이다. 그 우두머리는 아주 신중하였다. 그는 명령을 내렸다. [주머니 따위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은 목숨이나 보전하고 봐야지. 모두들 공을 탐내지 말고 조심하는 게 좋겠네. 어서 흩어지라구!] 그들의 말을 위소보는 동굴 속에서 똑똑히 들었다. 위소보는 조급했다. (지금 문아는 독성을 제거하는 가장 중요한 간두인데 개방 놈들이 이리떼처럼 몰려든다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만에 하나 잘못 되는 날이면 문아는 불구자, 혹은 염라대왕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위소보는 다년간 강호에서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 백의신니 구난 등 명성 높은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게을러서 무공을 닦지 않아 일류고수의 제자라 하지만 그것은 이름뿐이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위소보는 다시금 생각했다. (내가 지금 몇 대의 오독침을 쥐고 동굴 어귀를 지키고 있으니 요놈들이 들어오면 한 놈한테 하나씩 안기면 되지. 그런데 오독침을 다 쓰고 나면 어쩐다? 아니 이 어르신에게는 비수가 있고, 암기가 있다! 또 보의와 신기한 장갑에다 백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몸이 있으니 맞부딪쳐 싸워보자! 하나를 죽이면 본전치기고, 둘이 오면 내가 하나 밑지고 들어가는 셈인데 이 어르신이 지면 그만이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18년 후에 이 어르신은 더욱 의젓한 사내 대장부가 될 것이고 문아는 더욱 어여쁜 여인이 되겠지.) 위소보는 언제나 상대와 손을 쓰기 전에 우선 목숨부터 살릴 궁리를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좀 달랐다. 문아를 생각하며 위소보는 속으로 또 이렇게 생각했다. (낭패다. 이 어르신과 문아가 여기서 죽는다면 개방 사람들이 강호에서 또 뭐라고 떠벌리겠는가? 이 위소보는 행패나 부리는 시정잡배 건달이니 그들이 뭐라고 욕해도 상관이 없지만 이 얌전하고 꽃 같은 문아 여동생의 명예는 티끌만치라도 흐리면 안 되지. 이 어르신이 그들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동굴을 뛰쳐나가 달아나다 죽지는 말자! 한 사람이 지키면 만 명이나 되는 사람도 쳐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열댓 명의 개방 거지놈들이 어찌 목숨 걸고 대적하는 이 소백룡 어르신을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궁리를 하고 살금살금 동굴 어귀에 와서 문아를 막아 주었다. 개방 지신분타의 우두머리는 제자들을 데리고 샅샅이 살펴보며 동굴 어귀로 다가왔다. 우두머리는 목소리를 죽여가며 말했다. [이 주위의 풀들이 모조리 짓밟혀 있구려. 조심들 하시오.] 이들은 우두머리의 분부대로 세심히 살펴보았다. 돌연 한 제자가 말했다. [보십시오. 저쪽에서 웬 사람이 옵니다.] 우두머리가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 분들은 현정도장과 천지회 친구들이구려.... 모두들 안녕하시오? 불초는 개방 지신분타주(智信分舵主) 위지심(魏至心)이외다. 여러분들을 전에 만나 본 적이 있지요.] 위소보는 현정도장, 천지회라는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컹했다. 현정도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렇구만. 개방의 친구 위 분타주었구만. 이전에는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는데 다들 무고하시오?] 위소보는 이렇게 주고받는 말을 듣고 더 속이 탔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들은 왜 왔을까? 그래 천지회와 개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 어르신을 붙잡으려 한단 말인가?) 이때 현정도장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들려왔다. [자네들은 무얼 찾고 있는가? 그래 개방에서 신룡편이라도 잃어버렸단 말이오? 우리가 좀 도와줄까?]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이들이 우연히 만났음을 알고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위소보는 문득 후회되는 일이 있어 자기 이마를 치며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이 사람들과 손잡지 못하고? 나는 천지회와 비록 이런저런 알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이야 끄고 봐야지. 천지회와 함께 개방의 패거리를 몰아낸다! 천지회라면 문아를 그렇게 난처하게 만들진 않겠지. 문아가 만약 개방 놈들의 수중에 둘어가는 날이면 다 잘못되니까....) 위소보는 이렇게 궁리하고 곧바로 외쳤다. [현정도장, 나 위소보요!] 현정도장이 물어왔다. [위 향주라구!] [나요. 정말 위소보요!] [향주님, 우리는 당신을 찾지 못해 그러는데 거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한집안 식구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현정도장의 맨 마지막 말은 개방 사람인 위지심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위소보가 말했다. [한 마디로 어찌 다 설명하겠소. 나는 양주에서 헤어진 후 황제는 나더러 천지회를 소멸하라고 했소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 목숨으로 맺은 형제들이니 어떻게....] 위지심은 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물었다. [힌정도장, 도장님께서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계시나요?] 현정도장이 말했다. [개방의 영웅들은 모두가 대단한 사람이고 강호에서 명성이 있는 분들 아니오? 아, 내 그만 잊었소이다. 위 분타주, 소개해 드리지! 이 분은 전로본 동생이고, 이 분은 서천천 동생이며, 이 분은 고언초 동생, 그리고 이세력, 번강 두 분이라오. 모두들 인사들 하시구려.] 위소보는 기뻐서 어쩔 바를 몰랐다. (야! 청목당 형제들이 다 왔구나! 현정도장이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듣고 안심하라는 뜻이겠지. 이 어르신의 대오가 이처럼 탄탄하니 그 몇 놈의 거지 나부랭이를 겁낼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천지회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며 무림 중에서도 숭앙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위지심은 감히 소흘히、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지심이 말했다. [저는 전 나으리, 서 나으리, 고 나으리를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했다. 현정도장이 물었다. [향주님! 어찌하시겠습니까? 말씀헤 보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우리 천지회 형제들은 모두 목숨으로 맺은 의리가 있는데, 내 어찌 만청 황제를 도와 형제들을 죽이겠소? 사람은 그랴도 양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청나라 오랑캐는 명나라의 강산을 다 짓밟았는데 내가 그들을 위해?....진 총타주는 살아 생전애 늘 나에게 말하기를 오랑캐 황제를 믿지 말라고 하셨고, 또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고 타일러 주었소이다.] 현정도장은 한숨을 길게 쉬고 말했다. [한집안 사람이 아니니 그 마음이야 다를 수 있겠지요. 향주님, 좀 일찍 그 도리를 알았더라면 천지회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 아니오?] 위소보가 말했다. [지나간 말은 더 꺼내지 마시구려. 나는 옛 일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겠소이다. 나는 사실 후회되는. 일이 많소이다. 나는 이전얘 도박판에만 탐닉하다 보니 총타주를 따라 무공도 배우지 못했소. 하지만 지금 와서 좀 하려고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려.] 현정도장은 위소보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말했다. [무공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한 일어 아니지요. 향주님께서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자 한다면 우리 천지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무공이 약해서는 정말 힘들다오. 곳곳에서 시기하고 멸시하니, 그래서....] 이렇게 말하며 위소보는 눈물을 흘렸다. 울음이야 위소보의 재간 중의 재간이니 눈만 끔벅거리면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그러나 이번만은 진정 가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울음이었다. 현정도장은 감동되어 말했다. [향주님, 괴로워 마십시오. 무공이야 차차 배우면 되지요. 그런데 향주님께서 개방 사람들과 무슨 원수진 일이 있어 그러십니까?] 위소보가 대답했다. [말도 마시오. 내가 북경을 떠난 후, 황제가 나의 일곱 처들을 붙잡고 인질로 삼았다오. 그러니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나는 천지회 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다녔지. 때마침 무공이 대단한 여자를 만나 스승으로 삼고 무공을 배웠다오. 그런데 이 거지떼들이 달려들어 나의 스승을 개방 사람의 반역자니 뭐니 하며 우리를 붙잡아 껍질을 벗기고 속까지 잡아 빼겠다고 하니 우리는 할 수 없이 동굴로 들어와 피신했다오.] 현정도장은 원래 성질이 조급한지라 이빨을 갈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기랄 놈들! 그래 우리 천지회까지 업수이 여긴단 말인가? 살아 있는 것이 원수같은 모양이지?!] 위지심은 놀라며 말했다.. [도장님, 누가 감히 천지회를 건드린다고 그러십니까?] 현정도장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당신을 말하는 게 아니오. 당신들 개방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오.] 위지심은 놀라운 어조로 말했다. [현정도장님, 우리 개방 사람들은 천지회를 괴롭힌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개인이 그럴 수는 있겠지요. 그러니까 개방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요.] 현정도장이 말했다. [그럼 바꿔서 내가 당신을 쓰러뜨렸다고 가정해 보게.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말해 보오. 내가 왜 이 곳으로 왔겠는가?] 위지심이 말했다. [소인은 사숙조의 명령을 받고 우리 개방의 반역자를 붙잡으러 왔소이다.] 현정도장이 냉소하며 말했다. [헛소리! 자네가 말하는 반역자가 우리 천지회의 누구라면 어찌 하겠는가?] 위지심은 놀라며 말했다. [그녀는 천지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는데?] 현정도장은 성을 내며 말했다. [내가 말해주지. 그녀는 우리 위 향주님의 스승이오.] 위지심이 말했다. [위 향주라니요? 위소보가 아닙니까?] 현정도장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닥쳐! 네 놈은 웬 놈이냐? 그래 네 놈이 감히 우리 위 향주님의 존성대명을 함부로 들먹인단 말이냐? 이미 돌아가신 총타주 외에는 누구도 감히 위 향주님의 대명을 부르지 못한다!] 위지심은 속으로 생각했다. (요 위소보라는 놈은 정말 알 수 없구나? 듣기로 그 놈은 조정에서 큰 벼슬아치를 한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천지회 향주 노릇을 또 한단 말인가? 또 어느 새 이 여요괴를 스승으로 삼았단 말인가?) 그의 의심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강호에서 위풍이 당당한 천지회 사람들 앞에서는 꾹 참는 수밖에 없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위....위 나으리께서 천지회 향주라는 것을 소인운 정말 몰랐소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도장님께서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현정도장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말 필요 없소. 어떻게 하겠는가?] 위지심은 속으로 욕했다. (비록 네 놈들이 다른 문파이긴 하지만 나보다 좀 배분이 높은 걸 봐서 존중하는 것이지, 내가 천지회가 겁나 그런 줄 아느냐?) 위지심은 중책을 맡았으므로 정색하고 말했다. [위 향주께서는 우리 개방 사람과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다 무림의 형재들이니 소인은 여기서 지난 일은 모두 덮어두자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여요괴만은 우리 스승과 사조들까지 훼방했기에 그 계집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현정도장은 성을 내며 말했다. [자네 왜 이리도 눈치가 없는가? 썩 물러나지 못할까? 그래 내 말이 개방귀보다 못하단 말인가?] 위지심은 참다 못해 말했다. [현정도장님, 그래 개방의 내부 정돈까지도 천지회의 허가를 맡아야 합니까?] 현정도장이 말했다. [물론 우리 천지회는 다른 문파의 사소한 일을 간섭하지 않네. 하지만 내가 심심해서 간섭한다면 어쩌겠나?] 위지심은 성이 상투 밑까지 치밀었지만 참고 말했다. [우리 개방에서는 여태껏 천지회를 존중했지요. 또 소인도 늘 현정도장님의 무공과 인품에 매우 흠모하여 왔습니다. 도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도 좋지만, 하필 형제들과 친구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거야 있습니까?] 현정도장이 말했다. [정말 이 강호는 점점 말이 아니구나. 개니 소니 하는 놈들이 모두 형제고 뭐고 하며 날뛰니 정말 이 어르신은 기가 막혀 못살겠네!] 위지심은 내력을 모으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현정도장님이 무공이 고강하여 '청풍명월검(淸風明月劍)'의 초식이 절정에 이르러 강호에서 상대를 만나기 어렵다고 하던데 도장님께서 한 수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떨지요?] 현정도장은 큰 소리를 쳐서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고 했는데 위지심의 말을 듣자 내심 경계심을 북돋았다. (이 놈은 나의 무공 내력을 알고 나의 독특한 기술도 아니 우습게 대헤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의 고심한 무공을 배우겠다고? 자네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나 또한 나의 재간을 아까워하지 않겠네.] 위소보는 동굴 속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이 어르신이 청목당 향주 노릇을 좀 했더니만 청목당 형제들의 말재간도 많이 늘었군!) 위지심은 더 이상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병기를 꺼냈다. 그 병기는 아주 괴이했다. 새발톱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끝의 네개의 발톱은 아주 예리하고 신기했다. [아주 신기한 병기구만. 강호상에서 이런 비구(飛鉤)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없구만.] 현정도장은 칭찬했다. 위지심은 속으로 놀라며 말했다. [도장님은 한 마디로 이 병기의 내력을 말씀하니 정말 무공에 정통한 분이라는 걸 소인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인의 병기는 기이하지만 저의 무공이 보잘것 없으니 많이 양해하십시오.] 힌정도장은 손에 칼을 들고 말했다. [사양 말고 어서!] 위지심은 '존로경유(尊老敬幼)' 신법으로 비구를 돌리차 불꽃이 도장 앞에서 떨어지고 돌에 맞으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 방법은 삼구(三鉤), 사국(四麴), 오대(五帶), 육루(六樓), 칠취(七取).... 이렇게 스물다섯 가지 초식이 있는데 이는 그 가운데 첫번째 초식으로 허초를 취하여 상대방에게 존경의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현정도장은 장검을 좀 낮추며 답례했다. 위지심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으로 그 말을 받았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비구'를 날려 사정없이 현정도장이 가슴 혈도를 걸머쥐려 했다. 현정도장은 '훌륭하군!' 하며 검으로 비구를 막았다. 검과 비구가 부딪혀 불꽃이 튕겨 나왔다. 이 겨룸에서 현정도장은 손목이 저려옴을 느끼고, 위지심은 몸이 돌아갔다. 도장의 내력이 우세를 차지했다. 위지심은 비구를 휘두르며 어느 새 도장의 하반신을 걸으려 했다. 이 방법은 음험한 것으로 그야말로 매끄럽기 이를 데 없는 '비봉조양(飛鳳朝陽)'이 있다. 현정도장은 몸을 움직이며 비구를 피하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위지심은 비구 스물다섯 가지 초식을 다 펼쳤다. 힌정도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위지심은 특이한 병기를 쓸 뿐이지 무공과 내력은 별 것이 아니로구나.) 만약 소수로 다수를 대한다면 비구가 우세를 점할 수 있지만 일대 일로 맞붙는다면, 힌정도장과 같은 이런 적수에게는 별로 우세를 점하기 어려웠다. 위지심은 조급해졌다. 그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의 초식으로 아래 위로 현정도장의 머리 '백회혈(百會穴)'을 찍으려 했다. 현정도장은 '이얍!'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으로 비구를 맞받아 쳤다. 그는 신형을 살짝살짝 움직이며 청풍명월검으로 쏜살같이 위지심을 찔렀다. 위지심은 반격할 힘이 없이 점점 뒷걸음질쳤다.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서야 그는 강호의 명성 있는 사람들의 무공은 확실히 독특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경솔히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위소보는 보지는 못했지만 그 소리를 듣고 도장이 우세를 점한 것을 알고 소리쳤다. [죽여 버리시오. 놓아 주지 마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동굴어귀 돌들이 난데없이 날아올랐다. 비구가 동굴 속으로 날아들어 문아를 낚아채려 했다. 위소보는 급히 달려가 몸으로 비구를 막으려 했다. 순간 그의 가슴팍으로 비구가 파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위소보의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第10章. 정체 불명의 우아대(于阿大) 위지심은 현정도장의 적수가 되지 않아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현정도장은 청풍명월검(淸風明月劍)의 삼십육 초식을 모두 펼쳐 위지심을 서른여섯 발자국이나 물러서게 만들었다. 현정도장이 수검식(收劍式)이란 초식을 펼치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장검은 위지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위 친구, 당신은 이미 빈도의 삼십육 초식에 걸려들었으니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이 다시 대적한들 빈도를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니 괜히 오기를 부리다가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일찍이 위지심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가 사용하는 비구 또한 강호에서 둘도 없는 특이한 병기로써 그 위력이 강맹하기 이를 네 없었다. 그는 늘 비구를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 모르는 적수만을 상대했기 때문에 비구의 초식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강호상에서는 적수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현정도장 같은 무학대사(武學大師) 앞에서는 대적할 방법이 없어 여지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위지심은 실망하고 비구를 거두며 말했다. [도장 어르신의 무공은 고강하기 이를 데 없군요. 그 높으신 조예에 깊이 탄복합니다. 산은 언제나 푸르고 물은 언제나 흐를 것이니, 우리 다시 만날 때가 있겠지요.] 위지심도 아주 호쾌한 사나이였다. 그는 힌정도장과 천지회 군웅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개방 제자들을 거느리고 떠났다. 바로 이 때 위소보가 소리쳤다. [그 놈을 보내지 말고 죽여 버리시오!] 위지심은 울화를 참지 못하고 비구를 동굴 어귀로 날렸다. 동굴어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던 현정도장으로서는 미처 손을 써서 막을 방법이 없었다. 비구는 신축성이 강한 병기로써 동굴 어귀의 돌에 맞아 불꽃이 퉁기자 동굴 입구가 더욱 크게 뚫렸다. 위지심은 문아가 눈을 감고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비구는 땅바닥에서 되튕겨 오르며 문아의 가슴을 후려치려 했다. 위소보는 그 다급한 정경을 보고 쏜살같이 달려가 막았다. 비록 보의를 걸치고 있었지만 비구의 강맹한 힘에 그는 선혈을 토하며 쓰러졌다. 위지심은 비구가 위력을 발휘하자 사정없이 또 한 번 내던져 문아를 쓰러뜨리려 했다. 문아는 독성을 제거하고 무공은 연성하는 중요한 관두에 처해 있는지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고, 게다가 위소보마저 쓰러졌으니 문아는 생명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위지심은 냉소하며 소리쳤다. [이 요괴야! 너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구나!] 그러나 비구는 허공에서 힘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문아의 앞쪽에 떨어졌다. 그것은 바로 위지심이 다시 비구를 날려보내려 할 때 전로본과 서천천이 달려와 위지심의 등 뒤 혈도를 짚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위지심은 혈도가 짚이는 바람에 팔이 마비되어 힘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어 비구는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위지심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천지회 호걸들은 원래 사람 수를 빌어 암암리에 수작을 부리는 그렇고 그런 무리였구만!] 현정도장은 급히 동굴 속으로 들어와 위소보를 부축하며 물었다. [위 향주, 어떻습니까?] 위소보는 우는 소리로 말했다. [제기랄, 고놈의 저 개발톱 같은 장난감은 정말 대단하구나. 문아 여동생은 어떠시오?] 문아는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몰랐다. 현정도장은 위소보가 한 여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하기에 독비신니 구난사태 같은 무공이 높고 성망이 두터운 사람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문아를 보니 열댓 살 남짓 되는 여자애인지라 어찌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지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현정도장은 위 향주가 예전부터 여색에 빠져 여자만 보면 오금을 펴지 못하는 위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끌어들여 개방을 제압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현정도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구를 들고 밖으로 나가 위지심의 등을 두드려 짚인 혈도를 풀어 주고 공손히 말했다. [사람을 구하려다 보니 실례가 많았소이다. 참으로 미안하게 됐구려. 빈도는 앞으로 귀하를 친구로 삼겠소이다.] 현정도장의 대법한 품격에 위지심은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위지심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사나이가 아니었다. 상대방에서 이렇게 대해 주니 그는 별다른 이유를 달지 않고 답례하며 말했다. [오늘 나으리 같은 분을 만났으니 소인은 천만다행이외다. 아무쪼록 소인은 떠나겠습니다. 도장님, 안심하십시오. 소인과 제자들은 돌아가서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겠소이다.] 전로본, 서천천도 위지심을 칭찬하며 말했다. [위 동생, 우리는 정말 친구요.] 그러나 위지심은 홍! 하고 코방귀를 뀌었는데 여전히 전, 서 두 사람이 암암리에 손을 쓴 데 대해 울화가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위소보는 다급히 말했다. [도장님, 진 형님, 서 형님! 그를 놓아 주지 마십시오!] 위지심은 다시 돌아서서 물었다. [도장님,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현정도장이 말했다. [위 친구, 어서 돌아가시오. 대장부의 일언은 천금 같다고 했소. 빈도는 개방의 친구들을 믿소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개방 놈들은 아주 비열한 놈들이오. 대장부(大丈夫)는 무슨 대장부라고 그러시오? 소장부(小丈夫), 졸장부도 못 될 놈들!] 개방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자 현정도장이 말했다. [위 향주, 향주 어르신과 아가씨는 여기서 천천히 무공을 연마하십시오. 우리는 떠나겠습니다.] 위소보가 조급하게 말했다. [너회들 나를 두고 가면 안 돼. 나 혼자 남겨 놓고 다들 떠나가면 어쩌란 말이냐?] 전로본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많으면 위 향주께서 무공을 연마하시기가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위소보의 무공은 보찰것 없었지만 과거 천지회를 위해 몇 가지 커다란 일을 했기 때문에 청목당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말로 그를 비꼬았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그래 너희들의 향주가 아니란 말이냐?) 그러나 지금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 거짓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장 어르신, 여러 형제들! 다른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위 향주, 총타주가 우리를 버리고 세상을 뜬 후 천지회는 머리없는 용이 되었지요. 지금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으니 대신 위 향주께서 형제들을 거느리시어 우리 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애쓰셔야 하지 않습니까? 위 향주, 부디 자중자애하시기를....] 힌정도장 일행은 떠나갔다. 위소보는 발을 구르며 말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전에 거짓말을 좀 했기로서니 오늘 진심으로 한 말도 듣지 않다니, 그래 너희들은 정말 이 어르신을 놔두고 떠날 셈이냐?] 그들이 얼마쯤 멀리 간 것을 보고 위소보는 갑자기 비수를 자기 목에 대고 소리쳤다. [멈춰랏! 너희들이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나는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죽고 말겠다!] 그는 영원히 이별을 고하는 듯한 절망적이고 처량한 어조로 소리쳤다. 현정도장과 일행은 위소보와 여러 해 동안 사귀었지만 이처럼 절망적인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뭇 사람들은 돌아보며 주저했다. 총타주가 세상을 하직한 후, 천지회는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어 다시 세력을 규합하자면 위소보에게 의지해야 했다. 하지만 위소보가 자살을 기도한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인지라 그들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위소보의 목소리가 이전과 다르고, 만에 하나 정말 일이 잘못된다면 천지회 입장에서는 커다란 손해가 아니겠는가?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고는 발길을 다시 돌렸다. 위소보는 비수를 들고 사람들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렇소. 이 위소보가 재물을 탐내고 호색한이라고 모두들 저를 믿지 않지요. 그러나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문아를 사귀면서 정말 변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두고 보시오!] 그리고 지나온 과정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황하 연안에 가서 수재 정황을 알아 보게 되었는지, 문아와 청아는 어떻게 반났으며, 얼굴 가린 사람에게 어떻게 당했으며, 신룡교주 홍안통이 자기를 핍박하여 '백연환'을 먹이고, 문아가 자기를 구해 준 일과 개방 사람들이 찾아와 시끄럽게 굴던 이야기를 낱낱이 했다. 그러나 문아와 옷을 벗고 마주앉아 있었던 일만은 꺼내지 않았다. 위소보는 원래 거짓말을 잘 한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솔직히 그대로 말했다. 아마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처음일 것이다. 비록 그의 말 가운데 더러는 이치에 맞지 않는 곳도 있었지만 현정도장등 사람들은 별로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현정도장이 먼저 나서자 모두들 땅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향주님, 아랫것들이 무지하여 향주님을 노엽게 만들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위소보가 늘 허튼 짓이나 하고 다니니까 나를 의심한 게지? 어서들 일어나시오. 내가 무릎을 꿇겠소.] 천지회 사람들이 모두 일어선 후 현정도장은 위소보의 손에서 비수를 삐앗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위 향주, 향주께서 문아 아가씨에게 은혜를 입었단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길에서는 모르는 사람 끼리라도 서로 도와주는 것이 우리 무림 사람들의 본분인데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향주께서는 문아 아가씨를 도와 무공 연마에 힘쓰십시오. 밖의 일은 우리 형제들이 맡을 테니까요.] 위소보는 천지회와 이처럼 쉽게 화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위소보가 물었다. [도장, 당신들은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아니면 우연히 만나게 된 건지?] 현정도장이 말했다. [말하자면 깁니다. 우리는 확실히 위 향주를 찾아 헤댔지요. 북경에 도착해 보니 향주께서 하독으로 임명받았다기에 하독부까지 갔지만 향주외 얼굴은 거기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전로본이 받아 말했다. [어제 우리가 주루에서 밥을 먹을 때 어떤 어린애가 편지 한 장을 갖다 주었소이다.] 그는 편지를 꺼내 위소보에게 건네주었다. 위소보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글자라고는 한 자도 모르니 전 형께서 읽어 주구려.] 전로본이 말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림 한 장도 있었지요. 향주님, 보십시오. 이것은 산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산비탈에 뾰족한 바위들을 좀 보십시오. 바로 이 곳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도를 따라오다 이 곳을 찾았습니다. 그 해괴망칙한 개방 놈들을 만난 것은 차지하고라도 말입니다.] 위소보가 물었다. [그 편지를 가져 온 놈은 누군가?] 현정도장이 말했다. [우리가 그 애를 불러 놓고 물어보았는데 그 아이는 거리를 유랑하는 거지인데 누가 돈을 주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라고 했답니다.] 위소보가 또 물었다. [시킨 사람은 어떤 모습을 한 사람이라고 하던가?] 현정도장이 말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얼굴을 감싸고 있어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기랄, 이상한데!) 그는 사흘 전에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사람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 문아를 붙잡으려 할 때 달리 방법이 없어 모래 한 줌을 던졌더니 개방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두 죽어 버린 일을 이야기했다. 현정도장은 웃으면서도 의구심을 떨칠 수 없어 물었다. [콩을 뿌려 군사(軍士)를 만들고, 불구자를 일으켜 세워 죽었다니 아주 고명한 무공이구려. 위 향주께서는 이런 절세의 무공을 언제 연성하였소?]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이 어르신은 2년 동안 농담이나 지껄이고 주사위나 던졌을 뿐 무공은 무슨 무공입니까? 더욱이 이상한 것은 내가 모래를 한줌 뿌리고 동굴에서 나와보니 십여 명이나 되는 거지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더니 금세 한 놈도 없이 몽땅 사라졌단 말이오.] 현정도장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설명을 듣자하니 어떤 고인이 암암리에 도와준 것 같군요.] 그는 사방 산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산은 황막하고 작은 잡초만이 군데군데 있을 뿐 사람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이라곤 없었다. 저편 작은 수림일지라도 동굴에서 족히 백여 장은 떨어져 있는데, 설령 그 곳에 사람이 몸을 숨겼다 하더라도 암기를 쏘아내 십여 명의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돌연 위소보가 말했다. [그럼 혹시 홍안통 그 영감쟁이가 그러지 않았을까요? 이전에 그는 강변에서 이만한 거리를 두고 암기를 뿌려 얼굴을 가린 녀석을 쫓아 버렸지요. 홍안통이 나를 구해 준 것은 나를 이용하자는 목적으로 백연환까지 먹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또 나를 구해 주었을까?] 현정도장이 말했다. [위 향주, 걱정 마십시오. 그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할지라도 조만간 일의 진상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니 향주께서는 빨리 돌아가 문아 아가씨를 도와 무공을 연마하십시오.] 천지회 뭇 호걸들이 이처럼 나서며 도와주겠다고 하니 위소보로서는 커다란 시름을 덜었다. 위지심도 더 이상 개방 제자들을 끌고 와 변거롭게 굴지 않았다. 문아는 비록 말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명명백백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위소보에 대해 감격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문아는 마음이 안정되자 독성을 제거하고 무공을 연마 속도가 빨라졌다. 이레째 되는 날 그녀 체내에 있던 극독은 기경팔맥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제 자정이 되어 임(任), 독(督) 양맥으로 들어가면 성공하는 것이다. 위소보는 그 내막을 몰랐다. 그러나 문아의 말을 듣고 이레 밤낮이면 독이 다 빠져나온다는 것을 알고 매우 조심했다. 달이 중천에 걸린 한밤중 자시(子時)가 되었다. 현정도장등 사람들은 모두 산비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돌연 동굴 속에서 위소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장님, 전 형님, 빨리 오세요!] 사람들은 모두 놀라 깨어났다. 현정도장이 맨 민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달빛에 비친 문아의 얼굴을 보니 온통 빨갛고, 호흡도 가쁜 것이 혈맥도 평시와는 달리 통하지 않았다. 현정도장이 맥을 짚어보니 맥은 아주 낮고 느렸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상태가 나쁘군요. 문아 아가씨는 경맥이 막혀 임, 독 양맥은 통하지 않는군요.] 위소보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도장님!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현정도장이 한참을 생각한 끝에 위소보를 보면서 말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면.... 한 번 시도해 봅시다. 위 향주! 문아 아가씨의 몸을 안으로 돌려 앉게 하시구려.] 그는 문아를 등이 동굴 어귀를 향하도록 돌려 앉혔다. 현정도장은 내력을 끌어 모아 두 손을 문아의 명문혈(命門穴)에 밀착시키고 천천히 진기를 문아의 독맥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현정도장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전로본이 재빨리 손바닥을 현정도장의 명문혈에 댔다. 두 사람이 진기를 끌어 모아 힘을 합쳤으나 문아의 혈도는 뚫리지 않았다. 전로본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불렀다. [서 형! 빨리....] 서천천도 동굴 밖에서 전로본의 명문혈에 손을 밀착시켰다. 차차 모든 사람들이 모두 와서 서로 명문혈에 손을 짚었다. 시간이 흐르자 모두들 땀이 뒤범벅 되었다. 독성이 너무 강한 탓에 문아는 여전히 혈맥이 통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했지만 별 효과가 없으니 위소보는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어쩐단 말인가?] 위소보는 다급한 나머지 맨 마지막 사람의 등에 손을 대고 밀었다. 기실 위소보의 내력은 너무나 보잘것 없어 명문혈에 손을 댄들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었으나 그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급박한 순간에 돌연 위소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한 여자가 욕지거리를 해댔다. [죽일 놈의 소보, 썩어질 놈의 소계자! 여기서 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냐?] 난데없이 엉덩이를 걷어차인 위소보는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일어나며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어떤 놈이 감히 이 어르신을....] 그러다가 그만 위소보는 웃음보가 터쳤다. [하하하! 소전, 쌍아, 아가, 증유, 방이, 목검병, 이 어르신의 부인들이 모두 충출동했구나!] 그러나 그는 건녕공주만은 부르지 않았다. 공주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성깔을 부렸다. [죽일 놈의 소보! 썩어질 놈의 소계자! 그래 나는 잊었단 말이냐?] 위소보는 너스레를 떨었다. [잊다니? 어떻게 썩어질 공주를 잊겠나? 이 갈보 년아! 제기랄, 만나자마자 상견례가 다짜고짜 이 어르신의 볼기짝을 컫어차니 이 어르신의 볼기짝이 두 쪽이 나고 말았네.] 공주는 달려들어 위소보의 귀를 틀어잡고 비틀며 말했다. [그래 이 죽일 놈의 소보, 썩어질 놈의 소계자! 또 욕을 할 테냐?] 방이가 웃으며 말렸다. [됐어, 그만해! 그이가 아파서 오늘 저녁 너하고 같이 자지 못하면 어쩌니?] 공주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흥, 그럼 너나 같이 자렴!] 모두들 하하 웃었다. 소전은 천지회 사람들을 가리키며 위소보에게 물었다. [소보, 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들은....] 그는 돌연 딴 생각이 났다.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냐고? 네 년의 그 썩어빠지지도 않은 늙다리 남편 때문이지. 너와 그 늙다리가 서로 내통하여 이 어르신을 죽일지도 모르지.] 위소보는 홍안통에 대한 화풀이를 소전에게 하려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동굴 속에 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있는데 그는 참으로 괴상망측한 늙은이라오. 우리를 보더니 기어이 내력을 겨뤄 보자고 떼를 쓰면서 겨루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아니오? 현정도장도 그를 상대할 수 없고, 또 이 많은 사람들도 그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오. 그러니 소전이 그들을 좀 도와주시구려.] 소전은 천지회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땀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그녀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보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현정도장은 그래도 명성이 있는 사람인데 어떤 늙은이길래 전부 힘을 합쳐도 그를 상대할 수 없다고 하는 걸까?) 위소보가 말했다. [보면 알겠지. 소전! 먼저 그들의 명문혈을 만져 보시오. 그러면 알 것이오.] 소전은 반신반의하며 손을 제일 마지막 사람의 명문혈에 대었다. 그러자 내력이 흘러나오며 손바닥은 무엇인가에 끌어당기는 것 같이 내력이 흘러나갔다. 그녀는 온갖 힘을 다해 내력을 밀어냈다. 위소보가 말했다. [요 계집년들 어서 오지 않고 뭣하고 있느냐?] 계집들은 히히낙낙하며 위소보가 또 무슨 끙끙이 수작을 부리는지 몰라 감히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안달이 나 소리쳤다. [요 년들 오지 않으면 이 어르신은 한평생 네 년들과 같이 자지 않겠다! 군자일언(君子一言)은 그 무슨 거라고, 이 어르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공주가 입을 삐죽하고 말했다. [흥, 자지 않으려면 말라지. 별일 다 보겠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래도 공주는 맨 먼저 나서서 소전의 명문혈에 손을 댔다. 히히닥거리던 나머지 부인들도 공주를 따라 서로 명문혈을 누르고 내력을 밀어 넣었다. 쌍아만이 웃으며 옆에 서 있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쌍아야! 왜 다들 와서 돕는데 너만은....] 쌍아는 웃으며 말했다. [난 싫어요. 나는 그들과....] 그러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쌍아, 내력을 비기자는 게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는 것이라오. 그런데 쌍아는....] 쌍아가 말했다. [공자, 더 말하지 말아요. 쌍아는 당신 말을 들을 게요.] 그녀도 두 손을 맨 마지막에 있는 증유의 명문혈에 댔다. 위소보의 일곱 부인들의 내력은 약하지 않았다. 이들이 참여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제일 앞에 선 현정도장은 즉시 강력한 내력이 밀려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러 부인 가운데 소전은 독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녀는 손을 대고 있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수염이 길다는 늙은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천하에 신룡교를 제외하고 이처럼 지독한 독약이 또 있단 말인가?) 소전은 신룡교 교주 홍안통과 특수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신룡교의 일을 더는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점차 회복되는 것을 보고 문아도 구원될 희망이 있겠다고 느꼈다. 그는 부인들이 도와주고 또 부인들을 모두 만나니 아주 기뻐 뒷짐을 지고 북경에서 배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성루에서 뒷동산 구경을 하는데....] 문득 그의 노래 소리가 멎었다. 여러 부인과 천지회 사람들이 모두 땀투성이가 되어 일시에 땅바닥에 쓰러졌다. 위소보는 급히 물었다. [어떻소? 이제 다 끝났소?] 공주는 헐떡거리며 욕을 했다. [죽일 놈의 소보, 썩을 놈의 소계자! 너 우리를 속었구나? 수염이 긴 늙은이라구? 사람의 내력을 빨아먹는 괴물을 가지고!] 위소보는 공주를 본 체도 않고 재빨리 달려가 동굴 속에 누워 있는 문아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감돌고 호흡이 정상이었다. 그는 급히 물었다. [여동생, 괜찮소?] 문아는 고개를 끄덕었다. 문아의 등에 손을 집고 있던 현정도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위 향주, 문아 아가씨에게는 별일이 없을 거외다. 그녀의 임, 독 양맥이 통했으니 좀 휴식하면 곧 기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오. 위 향주, 이제 그녀의 공력을 감당할 사람이 없게 되었소이다.] 위소보는 아주 기뻐했다. 문아가 화가 복이 되어 상등 무공을 연성할 줄은 짐작도 못 하던 일이었다. 위소보는 문아의 성공을 자기 성공처럼 여기고 말했다. [도장님, 여러 형제들, 정말 고맙소이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문아가 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들을 부축해서 밖으로 내보내 주구려.] 현정도장이 동굴을 나오다 위소보의 일곱 부인들을 보고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여러 부인들이 오셔서 도와준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목숨을 구했소이다.] 공주가 숨을 돌리고 물었다. [도장님, 그 수염이 긴 늙은 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긴 거죠.] 현정도장은 좀 놀라며 말했다. [수염이 긴 늙은이라니?] 위소보는 비밀이 탄로나지 않도록 힌정도장에게 눈짓을 했지만 도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대신 눈치 빠른 전로본이 대답했다. [그 수염이 긴 늙은이가 정말 대단하더구만. 수염만도 넉 자 네 치인데, 글쎄 수염을 무기로 삼더란 말이오.] 전로본은 위소보가 말한 홍안통의 일을 둘러댔다. 공주는 일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 하며 말했다. [넉 자 네 치 수염이라구? 거 참 볼만 하겠데. 내가 한번 가 봐야겠군.] 위소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너 미쳤냐? 남의 남자를 함부로 넘보다니!] 돌연 옆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아니, 여자는 남의 남자를 못 본다구요? 남자들은 왜 남의 여자를 그렇게 보고 또 보는 거예요?] 위소보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만 넋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는 뒷걸음질치며 현정도장과 전로본의 뒤에 몸을 숨기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청아닷!] 천지회의 사람들은 청아를 알지 못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여기에 있었고, 또 많은 이름 있는 무공 능수 사이로 청아가 어떻게 들어왔으며 어느 때 들어왔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는 단아한 여인이 나타났다. 현정도장, 전로본 등 천지회 사람들은 모두 강호에서 풍파를 겪은 사람들로서 위소보가 이토록 비명을 내지르자 그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암암리에 경계심을 북돋았다. 문아를 도와 경맥을 통하게 하느라고 여러 사람들이 내력을 다 소모했을 때 강한 적수가 나타났으니 비록 그녀가 혼자라 하지만 대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청아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말했다. [위 상공, 위작 나으리, 안녕하세요? 위작 나으리께서는 그 계집애와 결혼을 했다지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처형을 청해 축하술이라도 마시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공주는 대노하여 청아의 뺨을 후려치려 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헛소리 하네! 위소보 부인이 모두 여기에 계신데 누구와 결혼을 한단 말이냐?....] 공주의 손이 청아의 앞으로 갔을 때 청아는 냉소하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면서 공주의 완맥을 눌렸다. 공주는 일시에 굳어진 듯 팔을 내리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못하고 허공에 들고 있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청아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무슨 예절법인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공주는 황궁에서 자라 곱게 대접만 받았기 때문에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입만은 살아서 노발대발하며 욕지거리를 했다.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냐? 어디서 이런 개쌍년이 굴러와 그런 쌍놈 자식을 찾는 게냐?] 청아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얌전한 여자 같은데 어떤 사내에게 시집을 갔길래 이처럼 말 버릇이 더럽게 변했는가? 이제 한 번만 더러운 말로 욕을 하면 평생동안 말을 못할 줄 알아!] 공주는 오만하였지만 자기보다 더 오만한 여자를 만났으니 찍소리도 못했다. 소전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남자들이 여자들을 못 쓰게 만들지. 그러길래 처녀로 지내면서 한평생 시집을 가지 말아야지.] 청아는 성을 내지 않고 히쭉 웃으며 말했다. [소전 언니 말이 옳아요. 평생 시집을 가지 말아야 시끄러운 일이 없지요. 그러면 '남의 남자를 봤소', '남편을 죽었소'하는 말은 듣지 않지요!] '남편을 죽었소'라는 한 마디는 소전의 상처를 쩔렀다. 소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 온 계집년이 이처럼 나의 일을 똑똑히 알까?) 소전은 속으로는 대노했지만 그래도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말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군!] 청아가 말했다. [이렇게 칭찬을 받으니 믿어지지가 않군요!] 말하는 사이에 돌연 소전이 펄쩍 뛰쳐오르면서 쌍장으로 청아의 가슴을 후려쳤다. 비록 소전의 내력은 이미 다 소모되었지만 성난 김에 손을 내뻗은 지라 그 장풍은 대단했다. [이렇게 마음대로 치기에요?] 청아는 말을 하며 슬쩍 장력을 내뻗었다. 네 번이나 장력을 뻗어내더니 소전은 그만 뒷걸음질 치며 제 자리에 와 앉았다. 청아가 우세였다. 소전은 성도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장력이 대단하구만!] 청아가 말했다. [대단할 거야 없지요. 그저 이럭저럭할 따름이지요. 어찌 소전 언니의 '독살장(毒殺掌)'과 견줄 수 있겠어요?] 소전은 놀랐다. 그녀는 방금 손을 쓰면서 청아보다 못했지만 상대방이 모르게 독살장을 펼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독살장은 상대방의 몸에 접촉되기만 하면 및 분 내에 생명이 위험하다. 그녀가 겨룸에서 패배했지만 웃는 얼굴로 대한 것은 그녀의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몰래 상대방에게 독수를 펼친 것에 득의양양해서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청아는 소전의 수법을 간파하고 여유만만하게 들먹이는 게 아닌가? 소전은 이럴 바에야 하면서 또 일장을 내뻗었다. 하지만 상대는 독살장을 가볍게 막아내며 말했다. 위소보는 자기 부인 하나는 혈도를 짚혀 꼼짝 못하고, 하나는 낭패를 당했으며 나머지 부인들은 멍하니 서 있기만 한 것이 자기로서도 달리 도리가 없어 성난 김에 속으로 욕했다. (더러운 계집년들, 소전은 남편이 둘씩 되니 요년을 언제건 양주의 여춘원에 보내 하루에 한 번씩 시집 보내야겠다.) 그는 또한 일전에 진회하(秦淮河)에서 청아가 옷이 다 벗겨졌을 때 그녀를 안아다 뱃사공의 침대에 눕히고 선심을 써서 그녀를 놓아 준 일이 있었다. 위소보는 그것이 후회스러워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정말 멍청한 놈이지. 그 날 보내지 말고 내 계집으로 만들었다면 지금 와서 나의 부인들과 이렇고저렇고 싸우지는 않을 텐데.) 청아는 곁눈으로 위소보를 보고 물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또 흘끔흘끔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데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 진회하에서 청아 아가씨의 그 아름다운 몸매를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청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의 성미는 아주 괴팍해요. 나는 남자들이 흘끔흘끔 훔쳐 보는 것이 제일 보기 싫어요. 위 상공, 그 눈알을 도려내겠어요!] 청아는 펄쩍 몸을 솟구치며 갈고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위소보의 눈을 찌르려 했다. 위소보는 그만 질겁을 하고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순간 쌍아가 소리쳤다. [내 남편을 다치지 마라!] 그녀는 생사를 헤아리지 않고 청아에게 덮쳐갔다. 청아는 몸을 휙 돌리며 쌍아에게 일 장을 내뻗었다. 쌍아의 무공은 소전보다 못하기 때문에 청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청아는 쌍아의 가슴을 후려쳤는데 보기에는 큰 힘으로 친 것 같지 않았지만 쌍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꼼짝 못했다. 위소보가 달려가 쌍아를 붙잡고 물었다. [쌍아, 어떻소?] [공자님, 조심해요. 손에 독이 있어요.] 그녀는 말을 하고는 고개를 떨군 채 정신을 잃었다. 소전이 달려와 응급조치를 했다. 청아는 생각했다. (내가 내력으로 그들을 쓰러뜨리기란 별로 힘들 것 같지는 않군. 그러나 한꺼번에 달려들면 번거로운 일이 많을 것이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그만두자.) 청아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지금 모두 나의 적수가 못 되니 그만 둡시다. 그리고 지금 우리 개방에는 내부를 정리하는 하는 중이니 여러분들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그녀가 우세를 차지했으니 이쯤 한 마디 하고, 또한 상대방의 체면을 생각해서 일단 손을 쓰는 것은 그만두고 동굴로 들어가려 했다. 돌연 현정도장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누가 적수가 못 된다고 하더이까?] 청아는 한참 있다가 신룡편을 빼들고 말했다. [귀하가 현정도장이지요? 어르신께서는 무림 선배이시니 이 후배가 무기를 들지 않으면 웃어른을 능멸하는 격이겠지요.] 현정도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나는 두 주먹밖에 없다오. 아가씨의 스물한 가지신룡편법을 가르침 받겠소이다.] 위소보는 신룡편은 독성이 강하여 살에 대기만 하면 즉시 절명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현정도장이 상대방을 얕잡아 보는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현정도장, 안 되오. 그 귀신 같은 채찍에 독이 묻어 있소!] . 그러나 현정도장은 교만한 사람이다. 일단 맨손으로 신룡편을 대적하겠다고 했으니 자기 말을 거두어 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위소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위 향주, 걱정 마십시오. 빈도는 조심스레 대하겠소이다.] 그는 두 발을 버티고 서서 말했다. [아가씨, 먼저 손을 쓰시구려.] 청아는 속전속결을 할 심산으로 왼쪽으로는 신룡입해(神龍入海), 오른쪽으로는 신룡비천(神龍飛天), 위로는 신용파미(神龍擺尾), 아래로는 신룡탐두(神龍探頭).... 이렇게 영활한 뱀처럼 그녀는 이쪽저쪽으로 채찍을 날리며 현정도장의 요혈을 노렸다. 청아가 손을 쓰자 현정도장은 그녀가 매서운 적수라는 것을 알고 말 없이 지력을 모아 대적하려 했다. 공력을 놓고 말한다면 현정도장이 청아의 상대가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쪽은 신룡편이 있고, 한쪽은 맨주먹뿐이니 기세에서 이미 지고 들어갔다. 더구나 위소보가 채찍에 독이 묻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더욱 조심하며 신룡편이 몸에 스치는 일이 없도록 방비했다. 때문에 현정도장은 싸울 태세만 갖추었을 뿐 반격은 하지 못했다. 청아는 아직까지 별로 우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심 조급했다. 비록 신룡편이 위력은 있으나 초식을 펼치는 것은 익숙치 않았다. 청아는 불시에 신룡비천 신법으로 현정도장의 두개골(頭蓋骨)을 내리쳤다. 그러나 초식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는지, 혹은 내력이 모자란 탓인지 채찍 끝이 약간 힘을 잃고 늘어지면서 그만 위력 있는 채찍의 약점이 드러났다. 현정도장은 오랜 강호 풍파를 다 겪은 사람으로 그녀의 이런 약점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 채찍을 손으로 걸머쥐었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쥐지 마시오! 쥐지....] 애석하게도 때는 이미 늦었다. 현정도장이 채찍 끝을 쥐자 손이 저려오며 채찍이 저절로 손에서 떨어졌다. 그는 그제야 위소보가 채찍에 독이 묻어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손이 저려오고 팔꿈치까지 저려왔다. 현정도장은 앉아서 내력으로 심맥(心脈)을 안정시켰다. 이 때 전로본이 소리쳤다. [청아, 해독약을 남겨 주시오.] 삽시에 칼이 돌개바람처럼 덮쳤다. 전로본이 혼자 당하지 못할까봐 서천천이 아미자(蛾眉刺)로 급히 청아의 혈도를 눌렀다. 청아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명성깨나 있다는 분들이 염치도 없이 사람 숫자를 빌어 이길 작정이군요.] 위소보는 한쪽에 숨어서 소리쳤다. [모두들 저 년을 붙잡고 해독약을 삐앗거라!] 말도 끝나기 전에 신룡편이 번개같이 날려와 위소보의 뒷잔등을 후려 갈겼다. 위소보는 보의를 입었지만 옷잔등이 찢어졌다. 위소보는 욕을 퍼부었다. [더러운 년, 그래 이 남편을 죽일려고? 이 어르신이 죽으면 네 년이 과부가 되는데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여러 부인들이 겁을 먹고 소리쳤다. [소보, 중독되지 않았어요?] 위소보는 그들을 밀쳐버리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귀신 채찍이 이 어르신을 어쩔 수 있단 말이냐?.... 왜 이러고 있는 게냐? 어서 저 년을 붙잡아 그 해독약을 삐앗아 내야지. 이제 늦으면 현정도장의 목숨을 구하기 어려워!] 그가 이렇게 말하자 일곱 부인이 달려들었다. 청아는 부인들과 천지회 사람들의 포위를 당했다. 무공으로 말하자면 청아를 붙잡을 수는 있겠지만 신룡편에 독이 묻어 있으므로 모두 꺼려했다. 이윽고 청아를 에워싼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이나 중독되어 쓰러졌다. 또 한참 지나자 전로본, 서천천 두 사람만이 청아와 싸우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쓰러졌다. 전, 서 두 사람도 좀 겁을 먹었다. 그러나 호랑이를 올라탄 격으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어쨌든 힘을 다해 청아를 붙잡고 해독약을 빼앗아 내려고 하였다. 바로 이 때 청아가 옆에 서서 말했다. [내 말을 좀 들어봐요. 전, 서 두 분이 계속 싸우고자 한다면 당신들이 우세를 점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승부는 쉽게 날 것 같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나 당신들 가운데 이미 중독된 사람을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신선도 구해내기 어렵지요.] 전, 서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다가 전로본이 말했다. [글쎄, 아가씨께서 해독약만 준다면 다른 것은....] 청아가 말했다. [내가 동굴 속에 들어가 한 사람을 보고 와서 해독약을 줘도 되지 않겠어요?] 전로본이 생각했다. (이 여마귀의 약은 아주 지독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전로본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군자일언....] 위소보가 소리쳤다. [전 형님, 밑지는 장사는 해서는 안 되지요. 저 년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문아의 목숨은....] 청아는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아 말했다. [좋아요. 여기에 앉아 기다리지요. 위작 나으리의 형제들, 그리고 부인들이 염라대왕을 만나는 것을 봐도 나로선 늦지 않으니까요.] [저....] 위소보가 망설이자 공주가 소리쳤다. [더러운 소소 썩을 놈의 소계자! 동굴에 있다는 그 늙은이가 도대체 누구냐? 그래 위가네 십팔대 할애비라도 된단 말이냐? 왜 그사람만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감싸고 이 부인들은 돌보지 않는 게냐?] 공주는 생각할수록 분이 치밀어 청아를 보고 말했다. [아가씨, 동굴 속에 들어가서 그 늙은이를 죽여 버리시오. 다같이 죽고 말게!] 위소보가 소리쳤다. [공주 이년아, 왜 이리 떠드는 게냐?] 공주가 대꾸했다. [죽으면 다같이 죽을텐데 그래 겁낼 줄 알아요?] 맨 먼저 중독되었던 쌍아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녀는 온화한 말씨로 공주애게 말했다. [언니, 위 상공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 수염이 긴 늙은이가 아마도 우리 위가네 가문에 그 어떤 은혜라도 베풀었겠지요.] 청아는 들올수록 어리벙벙해 물었다. [뭐라구? 그래 수염이 긴 늙은이가 또 있다구?] 공주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동굴에 수염이 넉 자 네 치나 되는 늙은이가 있다는데 그 괴물이 우리 내력을 모두 빼앗아갔지. 그 괴물은 아마 위가네 십팔대 조상이나 되는지 저 썩을 놈의 소계자가 죽기 살기로 보호하고 있단 말이다.] 청아는 돌연 대소하며 말했다. [호호! 거 참 재미었구나. 내 알려 주지. 저 동굴 속에 있는 괴물은 늙은 게 아니라 매우 젊단다. 수염도 없을 뿐 아니라 한평생 수염이 날 수 없지. 또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생겼지.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붙잡아 올 테니 보면 알 거다.] 그녀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돌연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로본등이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위소보는 고함을 쳤다. [문아 아가씨, 조심해요! 당신의 적수가 뛰쳐 들어간다오!] 청아는 어느 새 동굴 어귀에 가서 소리쳤다. [여동생, 어서 나와! 늑대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다고....] 청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애 그녀의 몸은 불시에 커다란 힘에 휘말려 높이 솟구쳤다가 땅바닥에 가법게 떨어졌다. 청아는 다치지는 않았지만 10여 곳의 대혈이 막혀 꼼짝 못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청아가 놀라 소리쳤다. [너....너는 도대체 누구냐?] 동굴 어귀에서 기골이 장대한 신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희미한 달빚 아래 보니 기다란 수염을 무릎까지 뒤덮은 것이 마치 새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것 같았다. 청아는 그만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위소뵈 현정도장과 전로본 등도 어리둥절하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누굴까? 언제 들어갔단 말이냐? 문아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아무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천천히 청아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청아 아가씨, 남이 문을 걸어 닫고 무공을 연마할 때는 외부 사람들이 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시오? 말해 보시오!] 청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죽어도 상관 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방의 제자들은 정말 듣던 대로 의협심이 있구려. 청아 아가씨, 사람은 서로 등지기 쉬위도 화해하기 어렵다고 했소이다. 어서 그 해독약을 여기 부인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주시오.]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그녀 입장에서는 꺼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청아가 말했다. [나는 혈도가 짚혀 꺼낼 수가 없어요. 저 행낭 속에 있어요.]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청아의 혈도를 풀어주자 팔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청아 아가씨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분이지요. 내가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 그 약을....] 청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약을 한 봉지 꺼내고 말했다. [흰 알약은 먹고, 붉은 약은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면 돼요.] 위소보는 아리땁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문아가 음험한 홍안통으로 변해 나타났다고 여기고 벌벌 떨며 한쪽 구석에 숨어서 말도 못하고 줄곧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그 사람은 홍안통의 키나 목소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변장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보아....) 위소보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담이 커져 말했다. [나는 중독되지 않았소. 내가 약을 나누어 주지. 해독약이면 그만이지 뭘 먹고, 뭘 킁킁거릴 게 있단 말인가? 무슨 놈의 규정이 이리도 까다로워!] 위소보가 약을 받으러 갔을 때 청아는 여전히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성을 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매우 요염스러워 보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 년은 성을 내도 곱기만 하구나!) 위소보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엎드리며 한 손으로 약을 얼굴 가까이 흔들어 보이며, 몸으로는 수염이 긴 노인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는 오기가 올라 발그스레한 청아의 고운 얼굴과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무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다른 손으로 땅을 짚는 척하면서 그녀의 가슴을 슬금슬금 더듬었다. [요년아, 잘 보거라! 어느 것이 흰 약이고 어느 것이 붉은 약이란 말이냐?] 눈치 빠른 공주가 보고 소리쳤다. [요 썩어빠질 놈의 소보, 어디를 더듬는 게냐?]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만 보인다더니 그건 또 언제 봤느냐? 네년은 좀더 애를 먹게 이 어르신은 맨 나중에 약을 줄 테다!] 청아는 이처럼 치욕을 당하자 울먹이며 말했다. [어느 때고 네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그렇게도 지독한 말을 하다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어르신의 사정은 좀 봐줘야지....] 그러면서 그는 또다시 그녀의 젖가슴을 슬그머니 더듬으며 살짝 꼬집었다. 청아는 눈을 동그랗게 치뜰 뿐 아무 내색도 못 하고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수염이 긴 노인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 사람들을 먼저 구해야지요.] 위소보는 무안해 하며 말했다. [두고 보자! 나중에 두고 보자꾸나, 청아야!] 약을 먼저 천지회 사람들을 주고 다음에 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맨 마지막에 건녕공주에게 주었다. 공주는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약을 먹었다. 약은 확실히 효과가 빨랐다.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일어났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말했다. [청아 아가씨, 어서 일어나시오.] 청아는 속으로 욕했다. (더러운 놈, 나의 혈도를 풀어 주지 않고 날더러 어떻게 일어나라고 하는 게냐?) 청아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전신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며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일어나 앉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괴이하게 생긴 놈이 언제 혈도를 풀어 주었으며, 또 어떻게 혈도를 풀었을까?) 청아는 어릴 적부터 혈도에 대하여 매우 정통하였다. 그녀는 혈도를 짚고 풀어주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혈도를 풀어준 초기에는 피곤하여 맥이 없고 시간이 흘러야 회복된다. 그런데 왜 이처럼 빨리 회복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청아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겉으로는 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그러나 청아는 성격이 변덕스러워서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 노괴물(老怪物)을 힐끔 쳐다보고 홍! 하며 신룡편을 쥐고 나갔다. 그러나 청아가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길은 온화하게 청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이 수염이 긴 노인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하여 슬그머니 물었다. [여보시오....] 그 노인은 위소보를 거들뗘 보지도 않고 청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다가 돌연 불렀다. [청아 아가씨, 좀 기다리시오!] 청아는 벌써 십여 장 정도 멀리 떠나간 후였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그 괴상한 사람을 보고 말했다. [왜 후회라도 되나요? 그럼 우리 여기서 금을 긋고 한번 겨루어 봐요!] 그 괴상한 사람은 천천히 말했다. [아가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나는 정말 아가씨의 무공에 탄복하외다. 아가씨를 속일 수가 없다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얼굴은 일시에 변하고 수염은 간 곳이 없었다. 앞에는 몸집이 장승처럼 우람한 젊은 사나이가 나타났다. 청아는 호감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은?]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우아대라 하오. 나는 아가씨를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아가씨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오? 이십 일 전 진회하에서 아가씨의 휘하 사람에 의해 찻물에 들은 몽환약을 먹고 강물에 던져졌는데....] 그 날 우아대는 위소보와 함께 진회하에서 변장한 청아와 서로 손이 큰 것을 겨루다가 그만 청아의 꾐에 빠져 우아대가 잡혔다. 청아가 다른 사람을 시켜 우아대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 때 개방의 명약을 먹었으므로 중독되지 않고 그 재난을 면했다. 청아는 그 일을 생각하고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 내가 당신을 붙잡으면 그 때는 밧줄로 꽁꽁 묶어서 강물에 던져 고기 밥이 되게 하겠어요. 어디 그 때도 달아나는지 못 달아나는지 보겠어요.] 우아대도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처럼 관심을 베풀어 주시니 정말 고맙소이다.] 청아는 제 갈 길을 갔다. 우아대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자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온갖 산천이 금빚으로 찬란하였다. 목동의 피리 소리는 사람들을 감미롭게 만들고, 지저귀는 새소리는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멀리서 그리운 낭군님을 생각하는 듯한 아가씨의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다리미로 다려도 펴질 수 없는 주름살, 가위로 베어도 베어 버릴 수 없는 근심걱정, 아름다운 거울도 어쩔 수 없는 이 야윈 얼굴....]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소리쳤다. [셋째 동생!] 그러나 우아대는 오직 그 노랫가락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서 있었다. 위소보는 너무도 이상하여 그의 주위를 몇 바퀴 돌고 나서 큰 소리로 불렀다. [셋째 동생!] 우아대는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낮은 소리로 인사를 했다. [둘째 형, 안녕하시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셋째 동생, 그 년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게나. 정말 생각하지 말게. 제기랄, 그 년은 정말 악독하다네. 제 남편도 잡아죽일 년이라네.] 우아대는 어린애처럼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형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위소보는 물었다. [동굴 속에는 어떻게 들어갔는가?] 우아대가 말했다. [모두들 떠들썩할 때 그 틈을 타서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우아대는 이렇게 간단히 말했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가 아무도 모르게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은 세인의 생각을 뛰어넘는 출중한 경공술에 있음을 알았다. 우아대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문아는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아는 이 많은 낯선 사람들을 보기에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창피하고 더욱이 언니 청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녀는 우아대의 도움으로 신출귀몰한 경공술을 펼쳐 떠나갔다. 우아대는 동굴 밖에서 수염이 넉자 네치 되는 늙은이 어쩌구저쩌구 떠드는 말을 듣고 옷을 찢어 얼굴을 가리고 빎 熾걘낮긁가장했다. 마침 달빚이 어두워 사람들은 일시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우아대는 이렇게 몇 마디로 간단히 설명했다.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동생이 그 괴물로 변장하기란 쉽지 않을 텐데, 왜 그 계략을 스스로 밝힌단 말이오?] 이 때 건녕공주가 달려와 떠들어 댔다. [이보세요? 무얼 가지고 또 그렇게 쑥덕공론하는 거예요? 나는 수염이 기다란 늙은이가 누군가 했더니만 우아대었군요!] 우아대는 어전시위 신분이기에 급히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했다. [공주님, 그 동안 무고하셨습니까?] 위소보는 우아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셋째 동생, 이리로 와서 몇몇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게나.] 그러면서 현정도장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의동생 우아대인데 강호에서 벽력장이라 부른다오.] 그러나 위소보는 속으로 이렇게 궁리했다. (천지회에서는 이 어르신을 정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니 이 위소보에게도 이렇게 무공이 걸출한 동생이 있다는 걸 오늘 좀 보여줘야겠다.) 위소보는 우아대에게 그들 하나하나를 소개했다. [이 분들은 모두 강호에서 명성이 있는 분인데, 이 분은 현정도장이고 이 분은 전로본 스승이며, 이 분은 서천천.... 여러분, 잘들 사귀어 보십시오. 이 일곱 계집들은 더 말할 것 없이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 소백룡 어르신의 미천한 부인들이라오.] 우아대는 현정도장등 뭇 사람을 매우 존경하였으므로 후배로서 예절을 갖추어 인사를 했다. 현정도장은 우아대의 신기한 무공을 보고는 그리 얕잡아 볼 수 없겠다고 느꼈다. 현정도장은 강호에서 몇십 년을 보냈으므로 각문 각파의 무공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벽력장 우아대라? 강호에서는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의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다지만 총타주 수하에 있던 인물도 아니야. 무공이란 정말 복잡하여 알 수가 없구나!) 현정도장은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우 동생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구려. 그 동굴에서 청아에게 내뻗은 벽공장(劈空掌)은 산서(山西) 정가(丁家)의 벽력장 내력과 비슷하고 신룡편을 힘없이 떨어뜨린 수법은 광동(廣東) 일반주(一盤珠) 장법과 같으며, 격공점혈법(隔空点穴法)과 해혈법(解穴法)은 거의 운남 대리 단가(段家)의 육맥신검(六脈神劍)과 비슷하더구만.] 우아대는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고 아주 공손히 대답했다. [무학지도(武學之道)란 널리 알아 줄줄이 꿰는 것보다 하나라도 정통하게 익히는 것이 중요하지요. 소인은 아직 두서가 잡히지 않아 여러 선배님들의 웃음거리나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기뻤다. (이 어르신의 의동생에게 현정도장 이 늙다리가 한방 먹은 꼴이구나.) 현정도장은 웬일인지 우아대의 겸손한 태도에 그리 달가워하지 않고 말했다. [자네는 지나치게 겸손하구만. 이런 무공은 강호에서도 아주 보기 드물지. 진정한 영웅호걸은 청년들 속에서 나온다 하듯이 더 묻기가 뭣하네만 그래도 자네 스승님의 함자를 알려 줄 수 없겠는가?] 우아대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도장님께만은 알려드리려 했으나 저의 스승님께서 제자들을 엄하게 단속하시며 강호에 나가거든 스승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분부를 하셨으니 소인은 그 교시를 어길 수가 없습니다.] 강호의 각문 각파의 많은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스승의 이름을 알리지 말도록 하는 규칙이 있었다. 현정도장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빈도가 실례를 했소이다.] 그는 별의별 것을 다 생각했다. (이 우아대란 놈은 과연 수상쩍은 놈이야. 그의 무공은 조잡하지만 비교적 숙련되어 있다. 진짜 일류고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 이만한 재간을 익힌 사람은 찾기 어렵고, 또 이름 자체도 이상하단 말이야. 우아대라니 자고로 무림 능수들은 이런 통속적인 이름을 짓지 않는 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도장은 위소보에게 슬그머니 눈치를 보냈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요 늙다리는 질투가 나는 모양이지.) 그러면서 현정도장에게로 갔다. 현정도장은 다른 사람들이 있어위소보의 천지회의 직함을 부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위 동생, 듣자하니 동생은 신행백변이 아주 능하다꾸 하더구만. 이 형이 배워보려고 하는데 가르쳐 주겠는가?] 위소보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도장님의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 몸을 돌리더니 몇 장 밖으로 나갔다. 현정도장이 소리쳤다. [과연 대단하군! 조심하게나. 내가 따라가겠네!] 그도 몸을 움찔하자 금방 따라잡았다. 위소보의 '신행백변' 수법은 보잘것 없었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현정도장은 전신의 힘을 다해 절정의 경공을 펼쳐 바싹 따랐다. 얼마 안 되어 현정도장도 위소보를 따라 산비탈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고 있을 때 위소보가 나뭇가지에 앉아 불렀다. [도장님, 올라 오시구려. 시원합니다.] 현정도장이 바라보니 위소보는 나뭇가지를 타고 있었다. 그 나무는 크지 않았다. 이미 한 사람이 앉아 다 구부러져 있는데 현정도장이 어찌 올라 갈 수 있겠는가? 현정도장이 갑자기 신형을 솟구치더니 위소보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았다. 현정도장의 육중한 몸이 엄지손가락만 굵기의 나뭇가지에 앉았으나 나무는 부러지지 않고 약간 휘어질 뿐이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도장님의 경공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현정도장은 미소를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위소보가 정색하고 말했다. [도장님께서는 저에게 할 말이 있다 했지요. 이 나무는 비록 작지만 아주 높지요.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면 들을 사람도 없을 테니 이야기해 보십시오.] 현정도장은 웃으며 말했다. [위 향주는 아주 총명한 분이신데, 그 의동생이란 자는 누굽니까?] 위소보는 생각했다. (셋째 동생은 어전시위인데 그 사실을 이 늙다리에게 말할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저번에 북경으로 가던 길에서 만났지요. 그는 강호에서 아무 밑천도 없이 장사를 하는 사람이지요.] '아무 밑천도 없이 장사한다'는 말은 강호의 암호로 협잡하는 도적을 말한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아니, 그의 무공으로 말하자면 일개 문파의 장법(掌法)이라도 숙련된 솜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도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도적 가운데 어찌 이처럼 비범한 능수가 있겠습니까?] 위소보는 거짓말을 해도 언제나 분촌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현정도장이 위소보의 말에 흠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도장님께서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우아대가 말하기를 그의 스승은 당금 무림에 속하지 않은 무공대사(武功大師)로서 성격이 괴팍하여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우아대는 어릴 적부터 산중에 들어가 스승을 따라 무공을 배우다가 스승이 세상을 뜨자 자기는 나와서 강호를 떠돌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는 스승의 유언을 어길 수 없어 그냥 혼자 다니다가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어 남의 재물을 훔치는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현정도장은 또 물었다. [어떻게 그와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말하자면 길지요.] 그는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얼른 생각이 나지 않우면 '말하자면 길지'라는 말로 적당히 시간을 끌었다. 과연 그는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또 거짓말을 생각해 냈다. 그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도장님, 그의 무공이 대단하다고는 보지 마십시오. 어쨌든 그 동생과 저는 똑같이 즐기는 일이 있지요. 도장님, 한번 맞춰 보십시오.] 도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어볼 게 뭐 있겠느냐? 도박이 아니면 여색을 탐하는 것이겠지. 다른 것이야 있을 수 있나?) 도장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그의 무공은 대단하지만 도박판에 끼어들면 아주 둔하기 이를 데 없지요. 백이면 백 지면서 또한 지면 생떼를 쓰는 놈이지요. 도장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이런 생떼 쓰는 놈을 잡아 족치는 데는 전문 아닙니까?] 현정도장은 웃으며 말했다. [우아대가 지고 나서 가진 돈이 없으니 향주에게 자기를 팔았군요.] 위소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도장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오? 도장님께서도 그 도박판에 있었습니까?] [아니, 내 짐작이라오.] 현정도장은 그렇게 말하며 생각했다. (도박이야 너 같은 건달 패거리들이나 하는 일이지.) 도장은 자기가 총명한 것처럼 느꼈지만 자기가 위소보의 꾐에 빠진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도장님의 절묘한 계책은 제갈지량을 초과하외다. 그는 일만 냥애 자신을 저당 잡히고 나와 한 판을 겨루었지요. 두말 할 것 없이 제가 이겼지요. 그렇다고 그렇게 박대할 수야 없잖습니까? 차라리 결의 형제를 맺자고 제안했지요. 도장님, 일만 냥이면 싸지요?] 현정도장은 위소보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아의 임, 독 양맥을 통할 때 위소보가 천지회 사람들에게 한 말을 듣고 위소보가 양주로부터 북경으로 가는 길에서 이 무공이 높은 우아대를 만나 호위 무사로 산 셈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느꼈다. 위소보가 물었다. [도장님, 그 무슨 미심쩍은 일이라도 발견했습니까?] 현정도장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향주님은 지난 2년간 강호에 나다니지 않아 강호에서 떠도는 말을 모르시겠군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그 말은 지난 2년 동안 강호에 널리 퍼져 나돌고 있지요. 오랑캐 황제가 관외(關外)의 녹정산에 대량의 보물을 매장하고 그 장보도(藏寶圖)를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에 감추었다고....] '녹정산'이라 하니 위소보는 놀라 뛰었고, '보장도'라는 말을 듣고는 더더욱 놀랐으며 '사십이장경'이라는 말을 듣자 식은땀이 바싹 돋았다. 위소보는 흠칫하다가 자칫하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그는 꺽꺽거리면서 물었다. [그....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현정도장은 위소보를 보고 말했다. [위 향주,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야 언제나 방귀 뀌다가 똥을 쌌다는 식인데 믿을 게 없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빌어먹을 늙다리, 감히 이 어르신 앞에서 시치미를 뗀단 말인가?) 현정도장이 말했다. [강호에는 떠도는 말이 많지요. 황제가 위 향주를 녹정공으로 위임하고 보물을 보관시켰다느니, 또 조정에서 '사십이장경'을 찾는데 위 향주외 손을 거쳤다느니, 또 세상에서 그 장보도를 아는 사람이 위 향주뿐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를 더욱 격분시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은 천지회에서 미리 손을 써서 위 향주를 조정에 잠복시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보도가 벌써 천지회의 손에 들어갔다고들 떠들어 대고 있답니다.] 위소보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은 사시나무 떨 듯했다. 위소보는 잘하나 못하나 강호에서 다년간 굴러다녔기 때문에 누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대범한 것 같지만 기실 재물을 탐내고 도박을 하고 여색을 은근히 밝히며 어디에 보물을 숨겨 두었다거나 무공 비밀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쉬파리처럼 달려드는 축이 많았다. 만약 현정도장이 말한 것처럼 녹정산의 장보도가 자기 손에 있다는 것이 강호에 널리 퍼졌다면 자기는 편안히 살 수 없을 것이고, 목이 달려 있는 것도 잠시뿐 아닌가? 위소보는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도장님도 알다시피 저는 무공이 보잘것 없는데 제가 어찌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겠습니까? 제가 정말 그 무슨 '사십이장경'이고 '장보도'를 안다면 진 총타주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현정도장은 냉정하게 말했다. [위 향주가 진 총타주께 충성을 다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다 안다면서 이 어르신을 이쪽에 갔다 저쪽에 갔다 한다고 비아냥거리던 말은 잊었단 말이냐?) 현정도장은 이어 말했다. [사람들에게 나도는 말의 힘이 무섭다는 도리를 위 향주께는 더 설명하지 않겠소이다. 보십시오. 위 향주가 강호에 나타나자마자 조정에서 찾지, 개방에서 찾지, 신룡교에서도 찾지....] 위소보는 속으로 또 욕했다. (제기랄, 왜 천지회에서 나를 찾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냐?) 현정도장이 말했다. [바로 이런 때 난데없이 우아대가 나타났으니, 향주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위소보는 궁리했다. (요 늙다리는 내가 우아대와 결의 형제를 맺고 우아대의 무공이 천지회를 짓누른 것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를 삼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자 위소보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장님, 그러면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현정도장은 위소보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위 향주, 우리가 동굴로부터 나온 시간도 적지 않은데 부인들을 푸대접해서야 되겠습니까? 돌아갑시다.] 두 사람은 나무에서 내려왔다. 위소보는 물었다. [도장님....] 현정도장은 위소보의 손을 굳게 잡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위소보는 그의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 옴을 느꼈다. 그 따뜻한 기운은 삽시에 사지에 퍼지고 온몸이 아주 홀가분함을 느꼈다. 위소보는 잠시도 점잖게 앉아 있지 못하는 위인이다. 그는 먼 곳에서 소전, 쌍아 등 여러 부인들을 보자 주사위를 꺼내들고 소리쳤다. [향기가 그윽한 일곱 부인들이여, 어서어서 주사위를 던지거라! 재수가 좋아 지존보가 나오면 특별히 이 어르신께서 오늘밤 품어주마!....] 第11章. 풀리는 의혹 아무리 난잡하고 경망스럽다 하더라도 남의 부부 생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천지회 호걸들은 위소보의 경망스런 행동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는 터라 그의 희희낙락하는 짓거리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제갈 길로 갔다. 오직 우아대만이 홀로 서서 위소보에게 가지도 못하고 현정도장을 따라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로본은 그의 난처해 하는 모습을 보고 불렀다. [우동생, 이리로 오시게나.] 우아대는 말없이 다가갔다. 그의 용모를 보아서는 아주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같았다. 어떻게 보면 무공을 익힐 자질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젊은 나이에 그토록 정심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현정도장등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도 모두 놀라워 했다. 전로본은 우아대를 부르면서 서천천에게 눈짓을 했다. 서천천은 얼른 눈치를 채고 우아대가 앞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쌍장을 내밀어 금고제명(金鼓齊鳴)이란 초식으로 우아대의 양쪽 태양혈을 들이쳤다. 태양혈은 사람의 몸에서 제일 약한 사혈(死穴)의 하나이다. 우아대는 돌연 들이치는 장력에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그 치명적인 일 초를 피했다. 그러자 서천천은 초식을 바꾸어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무상공(無相功)이란 신법을 펼쳐 우아대의 허리 장문혈(章門穴)을 짚으려 했다. 장문혈은 진기(眞氣)가 운행하는데 반드시 지나야 할 혈도이다. 장문혈이 짚이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무공능수들과 대적할 경우 기가 소진되어 패배하게 마련이다. 우아대는 뜻밖의 습격에도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빙글빙글 돌며 서천천의 공세를 피했다. 우아대는 반격하려 했으나 명문혈이 불시에 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서천천에게 혈도를 짚여 할 수 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서천천은 뒷짐을 짚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 동생, 이 형의 솜씨가 어떤가? 괜찮지 않은가?] 천지회 청목당 형제들 중에서 무공이 고강한 사람을 손 꼽는다면 현정도장이고, 심오하고 기기묘묘한 변화를 지닌 사람을 꼽는다면 전로본이고, 무공이 조잡하고도 날렵한 사람은 서천천이었다. 서천천은 팔비원후(八臂猿候)라는 별호가 있어 서로 잘 아는 사람끼리는 그저 서 원숭이라고 불렸다. 그가 처음 '금고제명' 초식으로 우아대를 쳐서 반격을 못하게 하려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자 두번째 '무상공'이란 신법으로 우아대의 장문혈을 치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하게 되자 세번째는 우아대의 명문대혈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상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재주를 부리다 망신만 당하는 격으로 상대방의 손에 되잡히고 말았다. 서천천은 단도직입적으로 세 가지 초식을 모두 펼쳤으나 번번이 상대가 방어를 하는 바람에 상대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우아대는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들이 나를 부른 이유는 이곳에서 한 번 겨루어 보자는 뜻이구나. 방금 동굴에서 내가 너무 재간을 뽐냈구나. 만약 이들이 불시에 손을 써서 그들의 실력을 발휘했다면 청아도 꼼짝할 수 없겠지. 아하, 그래서 청아가 쉽사리 해독약을 바친 게로구나.) 우아대는 두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탄복하여 말했다. [서 스승님, 혈도를 짚는 수법이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그 때 청아가 만약 스승님처럼 혈도를 짚었다면 땅바닥에 쓰러진 것은 그녀가 아니라 소인일 것입니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어찌 그렇게 말하는 게요? 우 동생의 무공은 우리들이 따르지 못하는 데가 있소이다. 그것은 아주 놀라운 경지에 이른 것이지요. 우 동생, 산은 언제나 푸르고 강은 언재나 흐를 것이니 후에 우리가 다시 만날 때가 있겠지요.] 우아대는 몹시 놀라며 말했다. [어르신, 조금 전 저의 둘째 형을 만나셨지요. 그런데 왜 둘째 형님과는 길을 달리 하여 가셨습니까? 저는 아직 어리고 견식이 짧아 후에 어르신의 가르침을 많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현정도장은 우아대의 이런 겸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열었다. [위작 나으리께.... 전하시오. 모든 일에 조심하라고.] 위소보는 일곱 부인들과 회희낙락거리다가 혼자 있는 우아대를 보고 물었다. [셋째 동생, 현정도장과 전 스승,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아대가 말했다. [그들은 위작 나으리더러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위소보는 욕을 했다. [제기랄, 나는 이 어르신의 일곱 부인들만 서로 질투하는 줄 알았는데 사내 대장부들도 다 마찬가지로군!] 위소보는 생각했다. (그들이 가버렸다면 나더러 천지회를 부흥시키라는둥 졸라대지 않을 테니 잘 되었다. 이제는 무공이 뛰어난 우 동생이 옆에 있으니 개방무리도 무섭지 않단 말이야!) 위소보는 우아대에게 그들이 갔으니 우리도 가자고 했다. 우아대는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위소보와 일곱 부인들의 뒤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어갔다. 위소보는 걸으면서 현정도장의 말을 여러모로 곱씹어 생각해 보니 모두가 실없는 말은 아니었다. 사십이장경이니, 장보도니 하는 것은 천지회에서도 진 총타주를 제외하고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현정도장 같은 늙다리들까지 떠들어대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그런 소문이 강호상에 나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또 홍안통의 말을 생각하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에라, 그만두자! 어느 때고 발각되고 말 일인데, 홍안통 수염쟁이도 사십이장경을 알고 소전, 진짜 태후, 소황제, 진 총타주도 사십이장경을 알지. 현정도장 같은 늙다리들이야 확실히 아는 지는 모르겠으나 사십이장경의 소문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이 위소보가 살아갈 날도 그리 많지 않은 듯싶구나. 흐린 하늘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비바람이 불어 날씨가 더욱 어두워지는 격이니 위소보는 밝혀지지 않은 익명의 소보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구나.)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할수록 우아대와 떨어질 수가 없었다. [셋째 동생, 어서 같이 갑시다. 모두 형수들인데 슬금슬금 피할 것 있소?] 우아대는 걸음을 좀 빨리 하며 얼굴이 붉어져서는 말했다. [제가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사람 왜 이리도 숫기가 없는가? 어서 와서 모두 알고 지내시오. 앞으로는 그 무슨 비직이요, 어르신이요 하는 말을 하지 말란 말이오.] 일곱 부인들은 모두 강호 사람들이기에 그 세속적인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소전이 웃으며 말했다. [우 동생, 어서 와서 형수들에게 인사하세요. 형수들이 반드시 예쁜 색시를 얻어 줄 거예요.] 일행이 웃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산아래 자그마한 시진(市鎭)에 이르렀다. 우아대는 보기에는 우악스럽게 생겼지만 매우 세심한 인물이었다. 부인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보더니만 몇 대의 마차를 빌려 왔다. 그리고는 그녀들이 앉아서 갈 수 있도록 우마차에 태웠다. 우아대는 뒤에서 묵묵히 따라 걷고 있었지만 위소보는 이쪽 마차에 올라 뒹굴다가는 또다시 저쪽 마차에 기어들어 치근덕거리기를 수 차례 거듭했다. 위소보가 어떤 인물이던가,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공주는 위소보와 같이 북경으로 돌아가자 하고, 위소보는 하독부에 가 보려고 하였다. 다른 부인들은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저 백작부(伯爵府)에 가면 답답하니 강호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낫다고 느꼈다. 그래서 모두 조급해 하지 않고 북쪽으로 갔다. 이렇게 하루에 고작 몇십 리를 걸어 밤에 안평진(安平鎭)에 도착하여 깨끗한 객잔을 찾아 들었다. 저녁 식사 후 위소보는 쌍아의 방에 뛰어들어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 [일이 성사되었으니 입을 맞추어야지!] 쌍아가 '피이!' 하며 대답했다. [위작 나으리, 위 상공! 공주 방으로 가세요.] 위소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고년 얘긴 꺼내지도 마! 고년은 이 어르신을 보기만 하면 귀를 틀어쥐고 엉덩이를 걷어차니 이 어르신은 고년 꼬락서니도 보기도 싫어.] 쌍아는 위소보의 옆에 앉아 말했다. [그녀의 사정도 좀 이해해 줘야 해요. 그녀는 아주 부유한 가정 출신이고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하고 자랐는데 시집이라고 와보니 아껴 주셔야 할 나으리께서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으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어요?] 위소보는 쌍아를 끌어안고 말했다. [그래도 쌍아가 제일이구나. 언제나 남을 생각할 줄 아니까.] 그러면서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좋아, 그럼 쌍아 마님 말씀대로 하지.] 모두들 피곤하여 이튿날은 아침 늦게까지 잤다. 여섯 부인들은 다 일어났으나 쌍아만이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뾰로통해 하며 말했다. [요 죽일 놈의 소보, 썩어질 놈의 소계자, 쌍아 계집년만 예쁘다고 하면서 또 그 년의 방에 처박혀 있겠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덩짝에 해가 뜰 때까지 잔단 말인가? 내가 가 보겠어!] 한참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공주는 성이 왈칵 치밀어 발로 문을 걷어 찼다. 그러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빨리 와 봐요, 빨리! 소보와 쌍아가 없어졌어요!] 모두 달려왔다. 방안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고 뒷창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공주가 욕을 퍼부었다. [요 양심도 없는 년이 소보를 끼고 달아났구나!] 소전이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부인이 어찌 자기 남편을 끼고 달아난단 말이냐? 어서 우아대를 불러 오세요!] 우아대는 맞은편 방에 있었는데 공주의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뛰어왔다. 소전의 말을 듣고 급히 안으로 들어와 살펴보다가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 나갔다. 이윽고 우아대가 다시 창문으로 뛰어들어 와서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필시 납치되신 것 같습니다. 밤중에 세 사람이 왔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일류고수임이 분명합니다.] 공주는 입을 비쭉하며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말아. 어떻게 세 사람이라는 걸 알지? 네 사람, 다섯 사람은 아니고? 또 일류고수 하나가 왔다는 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반 개, 두 개는 아니고?] 우아대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밖에 있는 발자국을 봐서 두 사람은 몸집이 큰 사람이고, 한 사람은 가벼운 사람이지요. 그 가벼운 사람의 발자국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그 사람의 경공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공주가 말했다. [내 보건대 그 몸집이 큰 두 사람의 무공이 더 센 듯한데? 힘이 세고 무공이 고강하니까 발자국이 더 날 수밖에!] 그녀는 공주의 신분이었으므로 우아대는 감히 그녀의 말에 반대를 할 수 없었으므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고 손을 모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두 사람의 발자국은 깊게 들어갔지만 이리 비뚤 저리 비뚤 족적이 고르지 못한데 어찌 일류고수라 하겠는가?) 공주는 의기양양해서 다시 반문했다. [우아대, 발자국을 보고 그들의 무공 수준을 알아내다니 그렇다면 어느 패거리의 소행인가?] 우아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염상(鹽商) 무리라고 대답했다. 명, 청 시기에 소금은 화폐와 같이 취급하는 매우 중요한 물품이었다. 때문에 소금 밀수는 커다란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일부 흉악한 무뢰배들은 무리를 지어 소금 밀수를 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관병(官兵)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목을 날려 보냈다. 공주가 냉소하며 말했다. [우아대, 그렇게 잘 아는 걸로 봐서 도사가 다 된 모양이구나?] 우아대가 말했다. [공주님, 소금장수들은 일년 내내 소금을 다루기 때문에 그들 몸에서는 소금 냄새가 몹시 나지요. 창문턱에도 그들이 주의를 게을리 해서 흘리고 간 소금 가루가 있습니다.] 공주가 반박하려 할 때 소전이 말했다. [셋째 동생, 그 소금장수들이 흉악스럽다고는 하지만 강호의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소보와 쌍아를 납치해 갔을까요?] 소전은 강호의 사람이므로 그 소금장수들이 흉악스럽긴 해도 사단은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백성들과의 매매에서도 아주 공평했다. 공주가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일이 또 있는 것이겠지. 죽일 놈의 소계자가 또 음탕한 마음을 먹고 남의 집 색시를 건드렸겠지.... 우아대, 당신은 뭘 했나요? 이 몇 사람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일은 할 수 있겠어요?] 우아대는 '그렇소이다!' 하고 대답은 했으나 마음속으로 커다란 위축을 받고 생각했다. (자기들이 조심하지 않는데 낸들 무슨 방법이 있는가? 부부가 함께 자는 것까지 내가 옆에서 지켜야 하는가?) 우아대의 추측이 옳았다. 위소보는 확실히 염상(鹽商)에게 붙잡혀 갔다. 그 날 저녁, 쌍아는 위소보에게 공주의 방으로 가라고 권했다. 이렇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권고는 오히려 그를 더욱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쌍아의 지극한 권고에 마지 못해 공주의 방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그가 문고리를 쥐자 뒤에서 바스락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그만 질겁을 하고 말았다. 어느새 방안에는 세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쌍아는 무공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혈도를 짚혀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위소보는 그만 눈앞이 아찔했다. [당신들 누구요?] 소리를 치는 순간 비쩍 마른 멜대꾼이 어느새 앞으로 다가와 위소보의 목을 틀어쥐며 웃으면서 말했다. [위작 나으리, 신변에 아주 매서운 호위무사가 있다지요? 우리야 그를 건드리지 못하니, 대신 이 손으로 나으리의 목을 잘라 버리겠소.] 위소보는 마치 목이 불에 데인 것처럼 따가웠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이놈의 손은 왜 이리도 매서운가? 내력으로 이 어르신의 목까지도 자르겠는걸!) 영웅호걸은 눈앞의 이익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챙겨야 하고, 눈앞의 손해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위소보는 믿어왔다. 위소보는 일단 정세가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느끼자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어르신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어떤 문파에서 오셨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노여워 하시지만 말고 말씀을 하십시오.] 비쩍 마른 멜대꾼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구멍 동서를 찾느라고 그러오? 내 이름은 알아서 뭘 하겠소? 당신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이 몸도 잘 알고 있소이다. 미안하지만 내 이름은 알려 줄 수가 없소이다.] 위소보는 입으로 밑져 본 적이 없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양주에 나의 여동생이 많이 있다오. 영웅호걸들을 매부로 삼을까 해서 그런다오.] 이렇게 말은 했으나 속으로는 욕을 했다. (여춘원은 한참 흥성하여 아가씨들이 많지. 네 놈들은 여춘원 기생들의 구멍 동서 노릇이나 해라!) 비쩍 마른 멜대꾼이 말했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위작 나으리 어찌 하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 비쩍 마른 멜대꾼의 손이 어느새 위소보의 아혈을 눌렀다. 위소보는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가 손짓하자 일행 두 사람이 쌍아를 부축하고 비쩍 마른 멜대꾼은 위소보의 팔을 잡았다. 곧장 그 다섯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비쩍 마른 멜대꾼의 경공은 매우 출중했다. 그는 위소보를 한팔에 끼고도 나는 듯이 달렸다. 거리를 벗어나자 두 사나이가 쌍아를 부축한 채로 서쪽 산으로 가고, 위소보는 멜대꾼에 의해 양자강쪽으로 갔다. 위소보는 조급했다. (이 녀석들, 네 놈들은 쌍아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자강 지류 한 모통이에 한 척의 나룻배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바람과 파도에 흔들거리는 것이 어렴픗이 보였다. 비쩍 마른 멜대꾼은 강나루에 다다르자 손가락으로 위소보의 혈도를 몇 곳 더 짚었다. 그리고는 그를 나릇배에 던져 넣었다. 위소보는 죽은 돼지처럼 소리도 못 지르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위소보가 배에 오를 때 이따금씩 바람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배밑으로는 거센 물결이 출렁거리는 것이 마치 악마가 사람을 삼키려는 듯했다. 위소보는 너무도 겁이 나 눈도 뜨지 못하고 생각했다. (제기랄, 모십팔이 소백룡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이 어르신은 이번에 진짜 이름 그대로 소백룡이 되겠구나? 우아대 놈은 이 어르신과 동년동월동일에 죽겠다고 맹세까지 해 놓고 지금 어디에 가 처박혀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의 몸은 나룻배 안쪽으로 굴러들어갔다. 위소보는 겁이 나서 이따금 눈을 떠보았다. 그 비쩍 마른 멜대꾼은 거대한 새 한 마리가 공중을 날아 올랐다가 내려 앉는 것처럼 갑판 위에 와서 우뚝 섰다. 그는 맨손으로 주먹만한 굵기의 튼튼한 밧줄을 칼로 베듯 끊었다. 나릇배는 굴레 벗은 말처럼 쏜살같이 강물로 밀려 내려갔다. 위소보는 입을 딱 벌리고 생각했다. (아이쿠! 저 멜대꾼 녀석이 밧줄을 끊듯이 이 어르신의 목을 끊어 놓는다면 이 위소보는 영락없이 무두소보(無頭小寶)가 되겠구나?) 나룻배는 파도에 떠밀려 흘러갔다. 그 비쩍 마른 멜대꾼은 위소보가 어찌 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누워 드렁드렁 코를 골고 있다. 그러나 위소보야 어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신세가 아니던가? 그는 겁이 났다. (만약 이 나룻배가 커다란 파도에 부딪쳐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왜 이 녀석은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잠만 자고 있단 말인가? 이 녀석의 무공은 참 놀랍구만. 헌데 왜 이 어르신을 붙잡아 가는 걸까?) 밤바람이 불자 좀 서늘해졌다. 위소보의 주위에 문득 짜고 비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위소보는 그 냄새가 바로 그 녀석의 몸에서 나는 것임을 느꼈다. 돌연 위소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소금장사꾼이닷!] 양주는 수륙 교통의 요지이며 양회(揚淮) 소금의 집산지이고 염상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 소금 상인들은 매우 부유했다. 목숨을 내걸고 소금 밀수를 하는 이들은 매일 음탕한 기생원에서 세월을 보냈다. 위소보는 어릴 적부터 기생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금장사꾼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저 소금장사꾼이 이 어르신을 납치했을까?)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하다 문득 겁이 났다.10년 전쯤에 양주 여춘원에서 모십팔을 도와 몇몇 염상들을 상하게 한 일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 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일은 나와 모십팔이 한 것인데 쌍아와는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녀까지 납치한단 말인가? 지금 쌍아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를 붙잡아다 어쩌자고 그러는지?) 그는 쌍아의 일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모십팔을 원망했다. (더러운 모씨팔새끼! 떳떳한 대장부라면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네 놈이 남을 상하게 해 놓고, 볼기는 이어르신이 맞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린가? 뒈질 놈의 모씨팔새끼!) 비쩍 마른 멜대꾼은 무공도 그렇지만 잠자는 수법도 독특했다. 나룻배가 밤낮 사흘을 두고 홀러 내려가는 동안 그는 사흘 밤낮을 꼬박 잠만 잤다. 위소보는 처음에는 두려움에 떠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사흘이 지난 지금은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니 배멀미가 심해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일순 정신을 잃고 혼절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돌연 바스락바스락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고 보니 나룻배는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자 푸른 갈대잎들이 얼굴에 스쳤다. 그는 얼굴이 간지러웠다. 이 나룻배 옆에 또 다른 나룻배가 한 척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 두 나릇배에 탔던 사람들은 서로 등을 지고 손은 적삼 밑에 쑤셔넣고 말했다. [이만한 값이면 충분할 거요. 더 올릴 생각은 마시오. 캑, 캑!] 위소보는 캑캑거리는 기침 소리를 듣고 중얼거렸다. (죽일 놈의 폐병쟁이 어린 거지놈! 이것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게 아닌가?) 소금장수가 말했다. [물건을 보고 값을 치러야지. 그 값에 어디 가서 더 좋은 물건을 사겠소? 10만 냥의 은자로는 어림도 없다오. 소금 밀수가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시오?] 어린 거지가 말했다. [그럼 당신이 적당한 값을 말하시오.] 소금장수는 적삼 밑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낮아도 이 정도는 받아야 하겠소. 이보다 더 깎으면 내가 돌아가서 형제들에게 뭐라고 하겠소?] 어린 거지가 말했다. [캑, 캑! 이 물건이 그렇게 값이 비싸단 말이오? 내 그러면 이만 냥을 더 쓰지. 형제간에 이거면 되지 않소?] 이렇게 말하며 적삼 밑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위소보는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행(牙行:전문적으로 가축 매매를 하는 중개인)들이 가축 판매를 할 때 손을 적삼 밑에 넣고 낙찰가를 손짓하며 흥정하는 것을 보았다. 위소보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들이 도대체 무슨 돼지새끼를 팔고 사길래 이처럼 은자 10만 냥이란 비싼 돈을 치른단 말인가?) 이내 그는 돌아가는 사태를 깨달았다. (제기랄 놈들, 이 어르신을 사고 파는 모양이구나. 이 소금장사꾼 놈아! 그래 이 어르신의 목숨 값이 은자 10만 냥밖에, 안 나간단 말이냐? 이런 헐값이라면 이 어르신이 얼마든지 내 자신을 사고 또 사도 남을 텐데 하필 이 먼곳까지 와서 팔아먹을 건 뭐냐?) 비쩍 마른 멜대꾼은 히히 웃으며 말했다. [좀 더 쓰시구려. 좀 더....] 어린 거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더는 못 올리겠소. 팔려거든 팔고 팔지 않으려거든 돌아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이런 물건짝을 개방에서 돈 주고 산다면 강호에서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소? 우리들도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붙잡아 올 수 있다오.] 소금장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우리가 좀 손해를 보지요. 서로 아는 사이이니 후에 당신네 신세나 많이 집시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가 적삼 안에 넣었던 손을 꺼내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두말 하면 잔소리요.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 한들 인의(仁義)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거래야 더 말해 무엇 하겠소? 당신네가 이번에 좀 손해를 보면 다음 번엔 우리가 그만한 사례를 하리다.] 소금장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다음이 다 뭐요? 다시는 이런 거래는 하지 않겠소. 그래도 소금 장사를 해야 재미가 있지.] 어린 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캑, 캑....강호상에서 칼을 쥐고 거래를 한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지. 캑, 캑! 18만 냥의 은표인데 세어 보시구려.] 어린 거지는 돈을 꺼내주며 기침을 몹시 했다. 그는 또 안색이 붉어지며 돈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몰골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소금장수는 돈을 받으려다가 어린 거지를 부축하며 물었다. [몸이 많이 불편하십니까?] 어린 거지가 말했다. [괜찮소. 오래 된 고질병이라오....] 위소보의 뇌리에 번뜩 어떤 느낌이 스쳐 지났다. (요 놈 소금장사꾼은 오늘이 염라대왕을 알현하러 가는 날이로구나!) 과연 어린 거지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어느새 소금장수의 면상을 후려쳤다. 소금장수는 '으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그의 얼굴에는 다섯 손가락의 자국이 깊이 패였고 그는 그 자리에서 중독되었다. 소금장수의 무공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그만 어린 거지의 수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침착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순식간에 어린 거지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말했다. [간악한 개자식! 우리 함께 죽자!] 어린 거지는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 높은 줄은 알고 있었으나 중독되어서까지 반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린 거지는 또한 독장(毒掌)으로 소금장수의 가슴을 들이쳐 늑골을 몇 대 끊어 놓았다. 선혈이 튀면서 어린 거지의 얼굴에 뿜어졌으나 그는 결코 어린 거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가 어린 거지를 단단히 잡고 두 발을 구르자 나릇배는 훌렁 뒤집혔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강물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 자리에서는 물방울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사라지고 갈대밭은 다시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내심 소리쳤다. (거 참 잘 됐군! 이 개종자들은 용왕 어르신을 만나겠구나! 이 소백룡 어르신은 미안하지만 함께 못 간다네!) 위소보는 생각했다. (요 더러운 폐병쟁이 어린 거지 놈은 정말 악독하구나. 이 고명하신 어르신의 몸값이 고작 18만 냥이라는 것도 억울한데 그것마저 주기를 아까워 하다니 너무나 괘씸하구나! 그런데 쌍아도 이놈들한테 팔려 갔을까? 팔려 갔다면 얼마에 팔려 갔을까? 제발 기생집에는 팔리지 말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되어 난봉꾼들이라도 접대하는 날이면, 이 어르신이 가서 쌍아를 데려온다 하더라도 푸른 모자를 쓰는 꼴이 아닌가?) 한참을 기다려도 물 속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일지 않았다. 나룻배만 뒤집혀진 채로 둥둥 떠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다 죽은 것 같았다. 날이 휜히 밝아오고 금빛찬란한 아침 햇살이 빼곡이 들어찬 갈대밭을 비추었다. 고기들은 유유히 헤엄쳐 지나가고 뭇 새들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위소보는 속이 훤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또다시 걱정거리가 생겼다. (요 두 녀석이 죽은 건 잘된 일이지만 먼저 이 어르신의 혈도나 풀어주고 죽을 일이지. 이 어르신은 황막한 갈대밭 속에서 소리도 못 지르고 또 움직거릴 수도 없으니 굶어 죽지 않겠는가?) 그 때였다. 돌연 위소보가 타고 있던 나룻배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배는 물 밑에서 누군가가 이리저리 밀고 가는 것처럼 갈대밭을 헤치며 유유히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갈대가 빼곡이 들어차 있어 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끝내 배가 멈춰 서고 말았다. 그런데 저쪽 갈대 속에서 물소리가 나더니 어린 거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요놈 자식이 숨어 버렸구나? 그래 어디로 달아났단 말이냐? 캑, 캑!] 위소보는 숨소리를 낮추었다. 아마도 물 속에서 비쩍 마른 멜대꾼과 싸우다가 나와 위소보를 찾는 것 같았다. 어린 거지는 한참을 살피다가 또다시 다른 곳으로 혜엄쳐 갔다. 해가 점점 높이 솟아오르자 갈대밭 속에도 햇볕이 비쳤다. 위소보는 더욱 정신이 혼미해졌다. 등에들이 얼굴로 욍욍 날아들었다. 위소보는 욕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을 뿔 없는 물소로 보는 거냐?) 위소보는 손바닥으로 등에를 있는 힘껏 후려쳐 납작하게 만들었다.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혈도가 풀린 것이다. 그는 기뻐서 소리쳤다. [혈도가 풀렸다! 이 어르신의 혈도가 풀렸어!] 몸을 움직이자 나릇배가 흔들리며 자칫 뒤집혀질 뻔했다. 위소보는 천천히 일어나 우선 먹을 것부터 찾았다. 초여름의 갈대밭에는 식물들이 많았으나 먹을 만한 것은 없었다. 위소보는 배가 고파 가릴 것이 없었다. 갈대를 꺾어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어 푸른 즙과 찌꺼기까지도 함께 삼켰다. 갈대도 먹고 또 배 옆에 있는 연꽃 잎까지 뜯어 즙을 짜 먹었다. 물도 두 손을 움켜쥐고 받아 마셨다. 그제서야 약간 살 것 같았다. 위소보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의 무공도 점점 나아지는구나. 그 비쩍 마른 멜대꾼 놈도 이 어르신의 혈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지!] 그는 무공 수준이 낮았을 뿐더러 기본적인 무학의 도리도 몰랐다. 사혈(死穴)을 짚어 놓지 않으면 대개 사람들의 혈도는 막혔다가 일반적으로 12시간 후면 저절로 풀린다. 기실 그의 혈도는 나흘 후에나 풀렸으니 그것은 비쩍 마른 맬대꾼의 내력이 그만큼 고강하고 위소보의 내력이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위소보는 품속의 돈을 더듬어 보았다. 두꺼운 헝겊에 싼 돈이 그대로 있었고 비수는 장화에 꽂혀 있었으며 또 어린 거지에게서 빼앗은 신기한 장갑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암기인 몽환약도 모두 온전했다. 위소보는 비로소 안심했다. 이것만 있으면 강호를 떠돌아 다녀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위소보는 다시 드러누워 좀 쉬었다가 저녁 무렵에 갈대밭을 떠나려했다. 깨어 보니 강기슭으로부터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향당대회(香堂大會)를 열어 제 19대 방주(幇主)를 추임한다!] 뒤이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향당대회를 열어 제 19대 방주를 추임한다!] 미산호(微山湖)는 산동(山東) 경내에 있었다. 예로부터 강호 고수들과 명성 있는 호걸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미산호에는 중앙에 30여 장 높이의 미산도(微山島)가 우뚝 솟아있다. 그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면 만경창파(萬頃蒼波)가 한눈에 안겨 오고, 돛을 단 고깃배와 햇빛을 가리울 듯이 촘촘히 늘어선 갈대밭 사이로 드문드문 연꽃들이 보인다. 저 멀리 물과 하늘이 잇닿은 곳에는 올망졸망한 산들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 일망무제의 천지(天地)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개방의 총타(總舵)는 바로 이 미산도에 있다. 개방은 2년 전 원래 방주였던 성룡이 암해를 받아 죽었고 그의 딸인 문아는 반역을 저지르고 도망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 방주의 원수를 갚지 못하여 후임 방주를 추천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천하 제일의 문파인 개방이 그만 머리 없는 용이 되어 날이 갈수록 규율이 흐려지고 타락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방에서는 성망이 높은 팔대장로(八袋長老)들이 모여 오늘 방주를 추천하기로 하였다. 선발한 사람은 곧 청아였다. 성룡은 살아 생전에 청아와 문아 두 자매 가운데서 후임 방주를 정할 의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문아는 의부인 방주를 살해하였다는 배은망덕의 누명을 쓰고 도망쳤으며, 청아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혈육의 정도 돌보지 않을 각오를 하고 여동생 문아를 찾아 떠나갔다. 그리고 이미 문아의 손에서 개방의 보물인 신룡편을 빼앗아 오는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방주 자리는 더 말할 나위 없는 청아의 차지였다. 향당대회를 여는 것은 강호 문파의 가장 성대한 의식으로 개방의 무리를 놓고 말하자면 더욱 그러했다. 특히 개방의 우두머리인 방주를 추천할 때면 사대(四袋) 이상의 배분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이런 성대한 의식에 참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산도는 축제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미산도에는 장양(張良)의 묘가 있다. 개방의 제자들은 십여 일 전부터 이 묘 앞에 높은 연단을 만들고 장막도 쳤다. 수일 전에 연세많은 집법장로(執法長老)가 불행히 세상을 뜨자 지신분타(智信分舵) 타주 위지심이 집법장로 직무를 맡았다. 그는 비록 나이는 많지않지만 사람이 공정하고 위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의식은 당연히 그가 집행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자 위지심은 두 손에 신룡편을 받쳐들고 연단 앞에 와서 읊었다. [신룡편은 신기하고도 신기하여라!] 모든 개방 사람들이 뒤따라 외쳤다. [위로는 천자를 쳐부수고, 아래로는 신하를 쳐부수자!] 위지심이 또다시 외쳤다. [천하의 불평등한 모든 일, 모조리 쓸어버리자!] 개방의 제자들은 곧바로 그 말을 받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어 대회장은 물 뿌린 듯 조용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연단 위로 쏠렸다.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가 날렵하고 가볍게 걸어나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개방의 반역자도 쳐부수자!] 그 소리는 매우 부드러운 것이 마치 봄날 백령오(百靈嗚)가 우는 것 같았다. 비록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청아한 목소리는 장내 사람들이 모두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원래 향당에서 방주를 추천할 때 개방에서는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암호 가운데 마지막 구절을 후임 방주가 외우기로 되어 있었다. 위지심은 아주 엄숙하게 신룡편을 두 손 높이 쳐들고 외쳤다. [개방 제 18대 방주 생전의 뜻과 여러 제자들의 추천에 의해 제 19대 방주는 성청아 아가씨께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성청아 아가씨께서는 무릎을 꿇고 이 신기(神器)를 받기 바라나이다.] 신기는 신룡편이었다. 그러나 청아는 무릎을 꿇지도 또 신룡편을 받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 신룡편은 가짜인데 제가 어찌 받겠어요?] 위지심은 뜻밖의 일에 놀라 및 발자국을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당신, 당신은 문아 아가씨가 아니오?] 그녀는 확실히 문아였다. 그녀와 청아는 쌍둥이로 생김새가 똑같아 분간하기 어려웠다. 청아는 성격이 좀 괴팍하고 문아는 부드럽고 온화할 따름이었다. 문아가 웃으며 말했다. [위 장로께서는 과연 총명하십니다.] 위지심은 섕각했다. (돌아가신 성 방주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네가 찾아오다니 정말 대담하구나!) 문아가 말했다. [그래요. 성 방주님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이리도 급작스럽게 방주를 추대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없군요?] 위지심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문아 아가씨, 오늘은 우리 개방 사람들에게는 가장 기쁜 날이니 어서 물러가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만 해 준다면 우리는 아가씨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문아 아가씨와의 이러저러한 일들은 신임 방주가 취임한 다음, 그의 분부를 받고 처리할 것이오.] 위지심이 문아의 체면을 많이 봐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아는 이런 충고를 듣지 않고 말했다. [위 장로, 이처럼 저의 체면을 봐주니 고마워요. 그러나 제가 오늘 온 것은 그 점을 해결하려 온 것인데 이후에 처리한다 하심은너무하지 않나요? 그래 당신들은 도처에서 소녀를 죽이려고 하고 또 내부를 정돈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소녀는 찾아온 거예요.] 위지심은 문아가 동굴 속에서 몸의 독을 몰아내고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네댓새만에 여기까지 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제 저녁 팔대장로들과 청아는 오늘 방주를 추천하는 일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그런데 언제 청아가 문아로 변했는지? 그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청아는?....] 문아가 말했다. [언니는 신룡편이 없어졌으니 방주노릇 하기가 힘들겠지요.] 위지심은 문아를 쏘아보다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연단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러 형제들, 이 위 아무개가 오늘 감히 신룡편을 써야겠소이다. 2년 동안 개방에서는 온갖 인력과 물력을 아끼지 않고 문아 아가씨를 찾아 왔소. 그녀를 죽여 성 방주님의 원수를 갚자고 했던 것이오. 그런데 오늘 문아 아가씨가 제 발로 찾아 왔으니 이제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룡편의 위력을 보여 줍시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다. [위 장로, 방주님의 원한을 갚는데 사양할 게 있습니까? 그 요괴년은 죽여 버려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일부 제자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문아 아가씨가 어찌 혼자 이곳까지 왔겠는가? 단신으로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필시 그녀에겐 어떤 놀라운 재간이 있을 것이다. 후과를 봐서라도 괜히 먼저 나설 필요는 없지.) 위지심이 말했다. [여러 형제들, 고맙소이다.] 그는 손에 든 신룡편을 툭툭 털며 말했다. [나는 재간이 없어 무공으로는 문아 아가씨와 견줄 수가 없다오. 하지만 문아 아가씨가 이 집법장로의 명예를 더럽히니 죽는 일이 있어도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겠소이다.] 문아가 말했다. [좋아요.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알려줄 것은 지금 위 장로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은 가짜라는 거예요. 제가 제대로 손을 쓰면 아마 크게 상처를 입을 거예요.] 위지심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가씨, 어디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요. 신룡편은 우리의 보물인데 가짜라구? 그럼 진짜 신룡편은 어디에 있소?) 문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요술을 부릴 테니 두고 보세요!] 그녀가 손목을 가볍게 흔들자 정말 요술처럼 신룡편이 또 하나 나타났다. 그것은 위지심이 들고 있는 신룡편과 똑같았다. 개방의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위지심은 그제서야 일의 내막을 알았다. (청아 아가씨가 문아의 손에서 빼앗아 온 신룡편을 문아가 몰래 바꾸었구나. 일이 이렇게 되다니! 2년 간 개방에서는 어린 여자 하나를 대적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풀었으나 실패했으며 내부도 정돈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기들의 신기(神器)마저 반역자의 손에 들어갔으니 무슨 면목이 있단 말인가?) 그는 그 내막을 말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좋소. 진짜가 가짜로 될 수 없고, 또 가짜가 진짜로 될 수 없는 법이니 우리 시험해 보고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신룡펀을 오른손으로 반듯이 들고 내력으로 나뭇가지처럼 꼿꼿하게 펴서 문아를 향했다. 신룡편은 부드러운 병기인데 나뭇가지처럼 꼿꼿이 편다는 것은 위지심의 내력이 얼마나 센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개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와!' 하고 다시 탄성을 내질렀다. 문아의 신룡편은 아래로 축 드리워졌다. 그녀가 말했다. [위 장로의 내력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군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애석하게도 차이가 많아요.] 위지심은 아주 노련한 사람으로 정신을 통일시킨 다음 신룡편을 쥐고 문아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문아는 사방을 살펴보고 말했다. [관의호가 왔나요?] 관의호란 바로 폐병쟁이 어린 거지이다. 그는 개방의 원래 방주 성룡의 관문제자로서 개방 중에서도 아주 높은 지위에 있었다. 오늘 향당대회를 열고 방주를 추천하는 이 중요한 일에 그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문아가 말했다. [제가 추측하건대 위 장로께서 집법장로 직무를 맡게 된 것은 관의호의 주장이겠지요? 그러니 위 장로께서는 그에게 고맙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가 좋은 뜻에서 그런 것은 아닐 거예요.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신룡편이 가짜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요. 그 가짜 신룡편을 가지고 향당대회를 연다는 것은 스승과 선조들을 우롱하는 일이지요. 만인이 분노할 죄를 짓는 것이지요. 누구든 나중에 그 책임을 추궁하려든다면 그 책임을 지시겠어요?] 개방 중에서 집법장로의 위치는 방주 버금가는 자리이다. 지금처럼 방주가 공석일 때는 집법장로의 한 마디는 추상같은 힘을 발휘했다. 신분과 재간으로 보았을 때 이 집법장로의 몫은 응당 관의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방의 모든 팔대장로들을 설복하여 이 중요한 직무를 위지심에게 맡겼다. 문아가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무공을 겨루는 것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있는 것 같네요.] 위지심은 의연히 겨루어 볼 태세를 갖추었으므로 물러서지 않았다. 집법장로로서 그 신분이 어떠하던 간에 신룡편을 상대에게 향한 이상 그만둘 수 없었다. 더욱이 개방의 사대 이상의 제자들 앞에서 그만둔다면 그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남의 꾐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렸다. 위지심은 조금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문아 아가씨, 손에 사정을 좀 두시구려.] 문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룡편을 휘두르기만 하면 죽고 사는 결판이 나는데 사정을 봐달라니요?] 문아는 자기의 신룡편으로 위지심의 신룡편을 가볍게 쳤다. 신룡편이 서로 부딪치자 문아의 신룡편이 감겨 들었다. 쌍방의 내력은 고하가 분명했다. 개방의 신룡편은 다른 병기와 달라 쓰기만 하면 그 위력이 커져 사람을 황흘하게 할 뿐 아니라 더욱 위험한 것은 해독할 수 없는 극독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해독약은 개방 중에서도 높은 배분의 사람이라도 얻기 어려워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그 위력과 신비로움을 견지해 왔다. 위지심은 집법장로가 되자 그 약을 이미 먹었다. 때문에 문아의 충고롤 듣지 않고 위지심은 고집을 부리며 기어코 문아와 겨루어 보려 한 것이다. 두 신룡편이 맞붙자 각각의 위력이 나타났다. 위지심의 내력은 과연 드세고 강맹했으며 우뚝 솟은 철탑 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아는 지탱하기 어려워 안색이 창백해 졌다. 위지심은 첫 겨룸에서 우세를 차지하자 두려워하던 심리가 많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중하게 내력을 내보냈다. 문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대적했다. 그러나 기력이 모자랐다. 위지심의 신룡편은 점점 꼿꼿해지고 문아의 신룡편은 점점 나른해졌다. 위지심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갈수록 땅에는 깊숙한 발자국이 패였다. 문아는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발자국은 위지심과 현저한 대비를 이루었다. 위지심이 앞으로 나가면 문아는 그만큼 뒷걸음질을 했다. 이렇게 되자 위지심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방심했다. 그러나 그는 기쁨을 드러내 놓지 않고 말했다. [문아 아가씨, 오늘은 후임 방주를 정하는 기쁜 날이니 서로 치고 받으면서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그러니 문아 아가씨와 우리의 일은 새로 부임하실 방주께서 처리하도록 합시다.] 문아는 '흥!' 하고 말했다. [아주 선심을 쓰시네요!] 문아는 내력이 거의 다 소모될 지경에 이르자 삽시에 그녀는 왁! 하고 선혈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신룡편 또한 위지심의 신룡편에 끌려갔다. 위지심은 어쩔 바를 몰라 소리쳤다. [문아 아가씨, 왜?....]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아래에 있던 사대제자 하나가 나는 듯이 위지심과 문아의 중간에 와서 번개같이 문아의 신룡편을 거머쥐었다. 위지심은 대노하며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함부로 날뛰는 게냐? 죽지 못해서 그러느냐?] 문아는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언니, 끝내 오셨군요!] 그 사대제자가 때가 덕지덕지 묻은 머리수건을 벗어 던지자 길고 삼다발 같은 검은 머리채가 드러났다. 청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위지심은 놀라며 소리쳤다. [청아 아가씨!] 청아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문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개방의 성대한 모임인데 우리 자매가 빠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니?] 문아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요. 우리 자매는 2년 동안이나 오늘을 기다리지 않았나요?] 두 자매는 마음껏 웃었다. 청아는 성격이 포악하기는 하나 매우 세심했다. 산 속에서 문아를 찾지 못했을 때 문아가 반드시 이 날은 나타나서 사단을 일으킬 것을 예감했다. 청아는 사대제자로 변장하고 말없이 제자들 속에 끼여들어 왔다. 위지심과 문아가 겨룰 때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문아가 실수를 하자 청아는 기뻐하며 뛰어나와 신룡편을 빼앗았다. 문아가 말했다. [언니, 신룡편을 잘 잡으세요. 그 신룡편은 아주 따가워요. 꼭 움켜쥐지 않으면 망신을 당할 거예요.] 청아는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뭐라구?] 그러면서 신룡편을 다시 낚아채려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두 개의 신룡편이 서로 엉켜 뗄래야 뗄 수가 없었다. 청아가 소리쳤다. [위지심, 왜 놓지 않는 거예요? 우리의 신기를 빼앗기려고 그래요?] 위지심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청아 아가씨, 내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오!] 이 때 청아는 갑자기 신룡편에서 극히 이상한 내력이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뜨겁고 차고 또 가렵고 저린 것 같기도 했다. 청아는 놀라며 신룡편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룡편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내력을 불어넣어도 소용이 없었다. 전에는 문아와 위지심이 신룡편에 한데 엉켰는데, 지금은 청아와 위지심이 서로 떼려고 애를 썼다. 문아는 얼른 옆에 가서 웃으며 말했다. [언니, 어떤가요?] 청아는 그제야 문아의 마수에 걸려 든 것을 알고 두려운 기색으로 말했다. [너, 너는 무독대공법을 쓴 것 아니냐?] '무독대공법'은 개방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공법(功法)으로 배우기가 매우 힘들고 복잡했다. 개방 중에서 성룡을 포함하여 18명 방주 가운데 6명은 일생동안 이 '무독대공법'을 연성하지 못했다. 강호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독물(毒物)은 대부분 독이 있는 동식물로 만들어진다. 독약 가루를 손바닥에 바르고 내공으로 독사장(毒蛇掌)을 만들거나, 혹은 암기, 병기를 독약에 집어넣었다가 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개방 제자들이 주머니에 넣고 독사나 지네 등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제일 저급한 방법일 다름이다. 무독대공법은 독사, 전갈, 두꺼비, 지네, 독거미 등 오독(五毒)을 비파골에 놓고 피를 빨아먹게 한다. 그 독액이 기경팔맥에 들어간 다음 다시 독특한 내공심법(內空'L法)으로 독을 없앤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오독을 모두 체내에 가둘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독대공법을 연성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들에게는 중독 증상이 나타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독성도 없다. 이른바 독이 없으면서 독이 있는 것이 '무독대공법'의 비결이다. 아울러 무독대공법을 연성하게 되면 내력이 크게 증가되어 최고 수준의 일류고수가 된다. 문아는 어릴 적에 의부로부터 무독대공법을 배웠다. 그러나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 후에 독사와 두꺼비를 길러 무공을 연마했지만 그나마 청아에게 빼앗겼다. 얼마 전에 문아는 '차녀음양대법'으로 위소보의 백연환 독성을 제거하려 했는데 신룡교 교주 홍안통이 쓴 백연환 독물이 개방의 독물보다도 독성이 더 컸다. 문아는 자기 몸에 흡수된 백연환의 독성을 겨우 소화시킨 후에 천지회와 위소보 부인들의 협력으로 임맥과 독맥마저 통하게 하니, 화가 복이 되어 마침내 무독대공법이 연성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위지심과 내력을 겨룰 때 문아는 무독대공법의 신기한 내공을 위지심에게 쏟아 넣었으므로 위지심은 이미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문아는 위지심을 당해내지 못하는 척하였다. 이럴 때 청아가 나타났다.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처음 배워서 마음대로 잘 안 되네요. 언니, 많이 이해해 주세요.] 위지심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오늘 잘못 하다가는 목숨도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아가 그의 뒤에 와서 말했다. [위 장로,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데 왜 자신의 목숨을 쉽게 버리려 하는 거예요?] 문아는 이렇게 말하며 위지심의 비파골을 살짝 쳤다. 위지심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문아가 말했다. [위 장로, 단전(丹田)의 기를 완맥(腕脈)으로 보내 보세요.] 위지심은 그녀가 말한 대로 하였다. 순식간에 강렬한 내력이 완맥으로부터 손바닥으로 나오는 감을 느끼자 손에 잡고 있던 신룡편이 마디마디 끊어지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청아가 쥐었던 신룡편은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문아가 말했다. [위 장로, 석 달 내에 진기(眞氣)를 사용하지 않으면 달리 치료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을 거예요.] 위지심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인사하고 떠났다. 청아는 이 신룡편의 내력이 점점 강해지고 그 어떤 형용하기 어려운 힘이 자기 심신에 충격을 가하는 것 같았다.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전신의 뼈가 마치 수천 마리의 개미떼에 의해 물어뜯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녀는 독에 대해 알 만큼은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문아가 무독대공법의 내심공법을 펼쳤다는 것도 알았다. 청아는 이를 악물고 문아에게 불었다. [문아야, 너는 무슨 생각으로 이러늬냐?] 문아가 말했다. [별 것 아니에요. 언니,2년 전에 언니는 어떤 사람들과 내통하여 저에게 의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쐬워 저를 강호상에 떠돌도록 만들었지요. 이제라도 제자들 앞에서 사실을 낱낱이 밝혀 주세요. 그렇게 하면 우리 자매지간의 은원 또한 없었던 일로 할 테니까요.] 청아는 냉소하며 말했다. [자기가 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마라. 너는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구나!] 문아가 말했다. [그럼 좋아요. 언니가 그렇게 영웅 대접을 받고 싶다면 방법이 없지요. 마음대로 하세요.] 문아는 이렇게 말하고 떠나려 했다. 그러자 청아가 소리쳤다. [잠깐만, 문아야! 친자매라는 정을 봐서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러면 나는 저승에서 의부를 만나 어르신의 시중을 들겠다! 의부는 간악한 놈들이 몰래 꾸민 흉계에 걸려 들어 저승에서 고독하게 보내고 계실 테니....] 청아의 말을 듣자 문아도 어쩐지 마음이 아파왔다. 그는 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는 내가 정말 배은망덕하게도 의부를 죽였다고 생각하나요?] 청아가 말했다. [인증, 물증이 다 있는데 어찌 믿지 않겠니?] 문아가 말했다. [언니, 언니의 그 말은 저에 대한 모욕이에요. 만약 질투심 때문이거나 그 어떤 오해가 있었다면 저는 이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 거예요.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이 바로 언니예요. 우리는 한 뱃속에서 나온 자매인데, 언니는 그래 이 여동생이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날 의부가 살해된 집 문 어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제가 의부를 살해했다고 했지만 이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사람은 언니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마저 그렇게 말할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어요.... 그때 나는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마음이....] 청아는 문아의 말을 가로채어 냉소하며 말했다. [강호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은 은원을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부의 은덕이 태산 같은데 내가 어찌 배은망덕한 짓을 한 여동생의 편을 들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문아가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도 제가 의부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청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데가 말해 봐. 흉수(凶手)가 누구인지?] 문아가 말했다. [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나 한 사람은 실마리라도 알고 있을 텐데 그 보배 같은 오라버니 관의호는 어디로 갔나요? 이처럼 성대한 모임에 그 사람이 빠지면 되겠어요?] 청아가 말했다. [관의호는 다른 일이 있어 오지 못했어. 하지만 문아야, 내가 알려 주지. 그가 오지 않는 것이 문아 네게는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바로 관의호가 나타났다. 그는 어느새 자매들 앞에 와서 섰다. 관의호는 '여동생!' 하고 한 마디 했을 뿐 아무말도 못하였다. 청아가 물었다. [관 오라버니, 그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관의호가 말했다. [그 놈은 정말 미꾸라지 같은 놈이구려. 소금장수가 전신의 혈도를 다 눌러 놓았는데도 달아나 버렸단 말이오. 배조차 없어졌다오.] 청아가 '흥!' 하며 말했다. [저는 난생 처음 삶아놓은 오리가 달아났다는 말을 들었네요.] 그리고 문아를 향해 말했다. [여동생, 축하해! 위소보가 달아났다는구나.] 문아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위 상공을 왜 붙잡는단 말이에요?] 청아가 말했다. [방법이 없어 그랬지. 우리는 사전에 여동생이 오늘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했지. 그런대 동생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안심할 수가 없었거든. 소금장사치의 손에서 위소보를 납치하여 그를 인질로 삼고자 했지. 여동생이 무독대공법을 펼쳐서 우리가 이길 숭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위소보의 목숨으로 대체하려고 말이야. 그러면 우리로서는 크게 손해 보는 것이 없지. 그런데 애석하게도 달아났다지 않아?] 문아가 말했다. [비열한 수작이로군요!] 청아가 말했다. [지금 그 사람이 달아나고 없으니 비열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지. 문아야,2년간 보지 못한 사이에 너는 시러배 잡놈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것을 배웠구나. 그러나 강호에 떠도는 말을 듣자하니 그 위소보라는 녀석은 처자든 남의 아낙네든 가리지 않고 차고 다닌다며? 천지회의 향구이며 오랑캐의 벼슬아치, 자기의 스승을 죽인 놈! 어쨌든 천하에 하지 못할 짓을 다 하고 다니는 시러배 잡놈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문아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만에 하나 그 놈의 꾐에 빠지지 말거라.] 청아는 자기 목숨이 문아의 손아귀에 들어 있으니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을 통쾌하게 다 했다. 돌연 문아는 저도 모르게 청아의 뺨을 후려갈겼다. 순간 청아의 입에서 피가 나면서 이빨 두 대가 튀어 나왔다. 관의호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 요괴 같은 년, 네 년이 감히 우리 동생을 치다니! 형제들! 오늘 우리는 내부를 정돈해야 하니 우리 반역자에 대해서 강호의 규칙을 불문하고 이 계집년을 엄단합시다....] 그러나 개방의 사람들은 이 자매의 용모가 너무나 흡사하여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고 또 제자들이 여러 곳에 퍼져 있다 보니 내막을 잘 몰랐다. 또 점잖은 칠대, 팔대 장로들은 무공이 괜찮다는 위지심마저 문아에게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는 공연히 잘못 덤볐다가 자기 목숨까지 잃을 것 같아 조용히 있었다. 이 때 관의호가 선동하자 몇몇 사람이 일어났다. 문아가 소리쳤다. [모두 앉아라! 이 놈에게 본때를 보여 주지.] 문아는 이렇게 말하며 오른손으로 관의호의 앞가슴을 불시에 틀어 쥐었다. 문아가 손을 쓰자 관의호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또한 맞설 겨를도 없이 문아에게 허공에 내던져져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관의호는 꼼짝달싹 못하고 쓰러져 기침을 하며 일어설 기운마저 없었다. 팔대장로 두 사람이 나와서 그를 부축했다. 그 두 사람의 손이 관의호의 몸에 닿자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또한 중독되어 손이 꺼멓게 부어 올랐다. 거듭 세 사람이 나와 부축하였는데 그들 역시 중독되어 쓰러졌다. 문아는 냉소하며 말했다. [죽고 싶은 놈들은 어서!....] 청아가 소리쳤다. [여동생의 일은 그들과 상관이 없으니 그들을 해독해 줘!] 문아가 냉소하며 말했다. [그 날 내가 의부를 죽였다고 모욕했지? 그 때 저 두 분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의분에 북받쳐 날카롭게 소리 쳤지요....] 그 중 백발이 성성한 팔대 제자가 고통스러운 듯 소리쳤다. [이 무정한 반역자야! 다 죽여라 죽여!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고, 이 요괴야 이 어르신을 어서 죽여라!] 문아가 말했다. [똑똑히 말해! 그 때 누가 이런 흉계를 꾸며 나를 모해했는지?] 늙은 거지가 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이 과산호(過山虎)는 수십 년이나 강호를 떠돌아 다녔지. 사람도 죽여 봤고 옥살이도 해 봤지. 이 어르신은 그래도 명성을 적지 않게 날렸으니 20년 앞당겨 죽어도 빠르지는 않지. 그러나 오늘 이 요사스러운 년한테 죽게 되었으니 이 늙은이가 무능하여 방주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이 오직 원통할 따름이다!] 문아가 그 말을 받았다. [아주 충성스럽구나, 내가 당신이 하지 못한 일을 하면 되지!] 문아는 손끝에 기력을 끌어올려 먼 곳에서 과산호의 혈도를 눌렀다. 그는 아우성을 치다가 눈을 희번득하더니만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무공은 아주 신비로웠다. 개방 제자들은 넋이 달아나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했다. 문아는 이렇게 본때를 보여주고 옆에 쓰러져 있는 팔대장로를 보고 말했다. [네 놈은 어떻느냐?] 그 팔대장로는 사십여 살이 되어 보이고 과산호보다 약했다. 그는 중독되었지만 아픔을 참고 문아 앞에 기어와 절하며 애걸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모두 저 관외호의 수작이외다.] 문아가 말했다. [참 솔직하시군요. 좋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도 위지심처럼 석 달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저절로 나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손가락으로 혈도를 좀 누르자 그는 일어나 문아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아무도 그를 배웅하는 사람이 없었다. 문아는 이렇게 개방 사람들을 제압하고 원래 자기가 생각했던 말을 하려는데 젊은 사대제자가 문득 일어서며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무슨 놈의 짓거리란 말인가? 툭 하면 사람을 죽이고! 나는 정말 이런 꼴 보고 싶지 않아!] 문아는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장득력(張得力)이란 사람으로 문아보다 열 살이 많았다. 같이 무공을 배운 적이 있으며 성격도 서로 비슷했다. 그는 성격이 성급하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개방의 중대한 모임에서 사대제자쯤은 말할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문아가 이처럼 살기등등하게 손을 쓰니 협의심을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문아가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장 오라버니, 왜 사람을 욕하시나요?] 장득력은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문아 아가씨는 사람까지 죽이는데 나는 욕도 못하겠소?] 문아가 말했다. [같은 스승님께 배운 면목을 봐서 가만 있겠어요. 어서 돌아가세요.] 장득력이 말했다. [그래,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어쩔 작정인가?] 문아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리도 시끄럽게 구는 거예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장득력이 말했다. [저 과산호 장로를 구해달란 말이오.] 문아가 대노하며 말했다. [영웅호걸이라면 자기가 구할 일이지 나더러 구하라는 것은 무슨 까닭이에요?] 장득력이 걸어나와 말했다. [구해 주라고 했으니 구해 주어야지. 이 어르신이 목숨을 바치면 되겠지.] 그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 말했다. [평소에는 모두 형님, 동생하며 먹고 마시고 도박을 하면서 다정하기 이를 데 없이 굴던 녀석일수록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판국이 되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니, 우리 개방이 어찌 쇠퇴하지 않겠는가?] 그가 주저없이 꺼낸 말은 많은 개방 사람들의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이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가 이런 말을 꺼내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장득력도 두 팔대장로가 관의호의 몸에 손을 대자 중독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거리낌 없이 독에 중독되어 죽은 과산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평생 정직한 분이셨는데 뜻밖의 재난을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스승님께서는 저에게 사권(査拳)의 일식(一式)인 '일로모자(一路母子)'를 가르쳐 주셨지요. 속담에 '하루 스승일지라도 평생 어버이'라고 했듯이 이 장득력은 오늘 스승님과 동행하니 저숭에 가서 그 사권을 저에게 마저 가르쳐 주십시오.] 사권은 민간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권술(拳術)로써 무림 중에서 얻기 어려운 무공 비급은 아니다. 그러나 '일로모자'만은 사권 중에서 매우 정심한 무공이다. 장득력이 죽음으로 과산호의 은혜를 갚자는 것은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다. 개방 사람들은 모두들 그의 행동에 탄복했다. 장득력이 과산호를 부축하는 순간 과산호는 벌떡 일어나 앉아 눈을 부비더니 놀라며 문아에게 인사를 했다. [아가씨, 고맙소이다!] 장득력도 놀라며 물었다. [어르신 어떠십니까?] 과산호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네. 문아 아가씨도 잘 알겠지만 나는 어릴 때 무공을 잘못 연마하여 유근혈(乳根穴)이 막혀 통증이 심했는데 오늘 문아 아가씨가 진기를 불어넣어 주어 나의 고질병까지 없애 주었다네. 이걸 좀 보게나!] 돌멩이를 손에 쥐고 힘을 주자 돌이 가루가 되었다. 과산호가 앙천대소하며 장득력의 어깨를 치자 장득력은 곧바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숨을 바삐 쉬는 것이 중독 증상이 나타났다. 과산호가 말했다. [문아 아가씨, 어서 장 동생을 좀 용서해 주시구려. 그는 좋은 사람이라오.] 문아가 말했다. [저도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으니 좀 훈계를 해주어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야겠어요. 어르신, 먼저 관외호를 구해 주세요.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영원히 불구자가 될 거 예요.] 과산호도 문아가 방주 성룡을 죽였다는 증인이 바로 관의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아가 가장 미워하는 자가 관의호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지만 관의호를 살려 주라고 하니 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예!' 하고 대답을 하고는 얼른 관의호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과산호는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와 말했다. [문아 아가씨, 오늘 소인의 고질병을 고쳐 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훗날 만약 소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늙은 몸을 다 바치더라도 원이 없겠나이다.... 하지만 대장부로서 은원은 분명히 해야지요. 만약 나중에 문아 아가씨가 정말 성방주를 죽인 흉수라고 밝혀지면 소인은 문아 아가씨에게 사정을 두지 않겠소이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내 목을 베어 문아 아가씨의 은혜를 갚겠소이다.] 문아는 웃으며 말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그러나 어르신, 제가 스승과 선조들을 멸시하는 용서치 못할 흉수로 보이시나요?] 과산호는 문아를 찬찬히 뜯어 보고 말했다. [그렇지 않소, 그렇지는 않지요. 문아 아가씨는 마음이 고운 아가씨인데 어찌 만인이 공노할 짓을 했겠소?] 과산호도 떠나갔다. 청아가 보니 문아가 위세를 보이고 아량을 베풀어 그녀와 맞서던 개방 제자들을 굴복시키고 사람들의 환심을 샀고, 또 '격공점혈'등 상상하기 어려운 내력과 외력으로 개방 제자들을 놀라게 했다. 개방 제자들은 문아의 무공을 보고 벌벌 떨었다. 청아는 여동생의 무공이 이처럼 출중한 것은 의부가 '소생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여겼고, 자기는 문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청아는 신룡편을 쥐고 실망하여 말했다. [동생, 이 신룡편을 받거라! 이 언니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문아는 신룡편을 받아 쥐고 청아의 뒷잔등 혈도를 가볍게 누르고 말했다. [언니! 방주 자리는 원래 언니가 맡아야 해요. 그러나 의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이 여동생이 좀 지나친 행동을 하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청아는 아무말도 없이 진기를 끌어올려 오랫동안 통하지 않던 혈도를 풀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문아는 속으로 탄복했다. (언니는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야. 절대 소흘히 대해선 안 되겠다.) 청아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 들으시오! 이처럼 여러 가지 사단이 많을 때 방주를 추천하다 보니 번거로운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 규칙에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해요. 배분이 크든 작든, 또 본 개방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두 방주가 될 수 있도록 합시다.] 그가 개방 사람이 아니더라도 방주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은 문아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문아가 2년 전 개방을 배반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개방에서 제명을 당해 자격이 없었다. 청아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문아도 이 대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청아는 문아에게 말했다. [여동생, 이러면 공평하지 않겠니?] 문아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은 무공으로 승부로 결하여 방주를 결정하자는 것이 아닌가?) 문아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도 좋지요. 아주 공평해요!] 청아가 손을 흔들자 네 명의 개방 제자들이 커다란 가마솥 하나를 떠메고 왔다. 가마솥에는 낙화생 기름이 가득 차 있었다. 문아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건 또 무슨 영문인가? 언니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기름으로 떡을 튀겨 인사를 하자는 것인가?) 제자들이 가마솥을 걸고 불을 지폈다. 이윽고 기름가마가 펄펄 끓기 시작했다. 열기 또한 충천했다. 청아는 금반지를 빼내어 가마솥에 던지고 말했다. [의부께서는 생전에 늘 우리 자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강호의 커다란 세력의 방주로써 무공보다 중요한 것은 담대함이다.' 문아야, 의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니?] 성룡은 살아 생전에 이 두 양녀에게 이와 비슷한 말들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지금 청아가 생뚱맞은 말을 문득 꺼내니 문아는 달리 반박할 수도 없어 옳다 그르다 말이 없었다. 청아가 말했다. [이 펄펄 끊는 기름 가마솥 속에 금반지 하나가 있는데 강호 사람 가운데 누구를 막론하고 손으로 이 금반지를 꺼내면 그를 제 19대 방주로 추천할 거예요. 모두들 동의하십니까?] 강호의 사람들은 이런 희한한 일들을 즐겨함으로써 애당초 방주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개방은 커다란 문파로써 신분의 고하, 나이의 많고 적음에 대한 예우가 아주 분명했다. 만약 개방에 커다란 공로가 없이 하나하나 신분이 오르자면 사대제자는 머리가 새하얗게 될 때까지 올라가도 여덟 주머니를 메기가 어렵다. 물론 관의호는 방주의 관문제자이고 청아와 문아는 방주가 키운 딸이기에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높은 배분을 가지고 있으니 예외였다. 청아의 말을 듣고 많은 팔대 이하의 제자들은 모두 방주 노릇을 해 보려는 심산으로 흥분했다. 방주 자리를 놓고 보면 해 볼만 했지만 정작 펄펄 끊는 가마솥을 보고 누가 감히 손을 넣어 금반지를 꺼내려 하겠는가? 방주는 고사하고 목숨마저 잃을 것 같았다. 청아가 말했다. [어느 분이시든 담량이 있으시면 한 번 나와서....] 사람들은 서로 쳐다볼 뿐 그 누구도 머리를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청아가 말했다. [담이 작으면 장수가 못 된다고, 팔 하나 떨어지고 방주 자리에 오른다면 그래도 괜찮지요.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여동생 문아가 있는데 방금 보다시피 그녀의 무공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고명하니 생명의 위험이야 절대로 없지요. 문아야, 이 언니 말이 옳지 않니?] 문아가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언니는 지혜롭고 기지가 많은데 이 여동생은 언니보다 못하다는 것을 자인해요. 언니 휘하의 여러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 여동생은 사양하겠어요. 방주는 언니가 해야 해요.] 벌수가 낮은 제자들은 문아의 말을 듣고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문아는 개방이 점점 살인 마귀 집단으로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떨치지 못했는데 청아가 이렇게 나오자 더욱 정이 떨어졌다. 방주 자리를 놓고 자매지간에 이처럼 다투는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청아는 나서는 사람이 없자 말했다. [여동생, 한 번 건져 봐. 무독대공법이란 신공이 몸을 보호하는데 끓는 기름이 무슨 소용이겠니? 문아가 방주가 되면 우리 자매지간의 은원 또한 없는 일로 해야지.] 문아는 무공으로 상대를 대적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으나 반지를 건져내는 일 만큼은 몸서리를 쳤다. [나는 방주를 하지 않겠어요. 누구든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하세요.]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을 즐긴다. 여인이라면 더욱 그러하고, 젊은 여인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아름다움을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문아는 기름 가마솥에서 반지를 건지는 일은 생명이 위험하다거나 불구자가 되는 것보다도 화상을 입어 살갗이 흉물스러워지는 일이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문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방주는 고사하고 황제 노릇을 하라 해도 안 하겠다.) 청아는 탄식하며 말했다. [너는 이 언니를 용서하지 않는구나. 내가 이처럼 지독한 일을 스스로 하자고 제안했으니 그럼 할 수 없지. 스스로 죄를 졌으니 그 죄과를 받아야지.] 청아는 기름 가마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펄펄 끊는 가마솥에 손을 넣으려 했다. 문아는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두 눈을 감고 소리쳤다. [언니! 건지지 마세요! 언니가 방주를 하시면 되잖아요!] 청아는 냉소했다. [안 돼!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책임져야 해!] 청아의 손은 기름 가마솥으로....부글부글 끓는 기름 가마솥으로 서서히 손을 내뻗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어르신께서 기름 가마솥에 손을 집어넣겠노라!] 第12章. 개방 방주가 된 위소보 위소보는 나룻배에서 깨어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발각되기를 바랬다. 그는 원래 시끌벅적한 것을 즐겨하는 성미이다. 깨어나서 들어보니 미산도에서 개방 대회를 열어 방주를 추천한다고 떠들썩하자 호기심에 끌려 그들이 어쩌는가 보고 싶어 속이 근질근질거렸다. 정작 가보려고 하니 또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예쁘기는 하지만 지독한 청아, 때려죽여도 죽지 않는 폐병쟁이 어린 거지, 흉악하게 미쳐 날뛰는 위지심,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히 가 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방에서 서로 부르고 환호성,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를 듣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돌연 '개방의 반역자도 쳐부수자!'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소보는 속이 꿈틀하여 생각했다. (아니, 문아 여동생이 아닌가? 그녀가 어떻게 왔을까? 아니 그럴 수야 없지. 개방 사람들이 이빨을 갈며 씹어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데 문아가 죽으려고 찾아 오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위지심이 '당신은 문아 아가씨가 아니오?' 하는 놀라운 소리가 들렸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문아 여동생은 마음이 아주 착한 것이 청아와는 다르지. 나는 문아와 동년동월동일에 죽겠다고 맹세까지 했는데 군자일언중천금이라고 어쨌든 그녀를 도와 주어야지.) 위소보는 배에서 뛰어나와 신행백변으로 삽시에 장량묘 앞에까지 왔다. 원래 그는 부잣집 공자 차림이었으나 소금장수에게 붙잡혀 사흘 밤낮 시달림을 당하다 보니 옷모양은 볼품이 없게 되고 얼굴도 핼쑥해져 거지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거지들은 각지에서 모였기 때문에 서로 잘 알지 못하여 위소보가 그 속에 숨어들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위소보는 문아가 잇따라 상대를 제압하자 느긋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청아가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놓고 기름을 펄펄 끊일 때 위소보는 생각했다. (마침, 잘 되었구나! 문아 여동생은 아무래도 질 것 같구나!) 때마침 문아는 펄펄 끊는 가마솥에 손을 넣을 생각은 커녕 보지도 않았다. 위소보는 한시름 놓고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문아의 오라버니 노릇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지. 오늘 이 어르신은 개방 방주 자리를 빼앗아 착한 여동생에게 첫번째 선물로 줘야지.) 그리하여 위소보는 벌떡 일어서서 소리친 것이다. 개방 제자들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웬 놈인데 감히 대회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게냐?] 위소보가 신행백변을 펼치자 거지들을 물리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요리조리 피하며 무대에 올랐다. 문아는 놀라며 말했다. [오라버니, 어떻게 오셨나요? 개방의 일에는 상관하지 마세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이 오라버니는 어디나 끼여들기를 좋아하지. 참견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오.... 청아 아가씨, 무고하신가? 천지회 친구들과 헤어진 후 밥을 빌어먹을 생각을 바꿔 떡 장사를 하기로 결정하셨소?] 위소보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청아는 가마솥으로 가져가던 손을 거두며 코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흥! 어떻게 뻔뻔스럽게 오라버니니 여동생이니 할 수 있담?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지?] 위소보가 말했다. [오라버니, 동생 하는데 뭐 부끄러울 게 있단 말이오? 이 세상에 오라버니, 여동생이 얼마나 많은데. 청아 아가씨가 부럽다면 나는 당신에게도 그렇게 불러줄 수 있다오!] 위소보는 너스레를 떨며 불렀다. [청아 여동생! 귀여운 여동생....] 위소보는 어릴 적에 기생원에서 자라 난봉꾼들의 농지거리 말투에 익숙했다. 개방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참지 못해 와 하니 웃음보를 터뜨렸다. [네 이놈!] 청아는 성이 나서 얼굴이 창백해지며 소리쳤다. [이 후안무치한 건달 놈아! 너희들이 동굴에 틀어박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아느냐?] 위소보는 금시초문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굴이라니? 청아 아가씨는 정말 건망증이 심하구만. 전에 우리 둘은 진회하의 그 멋들어진 배 안에 있지 않았소? 히히....] 문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오라버니!] 위소보는 놀라며 더 떠벌리려던 상스러운 말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문아가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진심으로 저를 도와주시겠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위소보는 자기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 [요 기억력도 없는 주둥이야, 또 뭐라고 시근덕거렸느냐? 문아 여동생, 청아 아가씨! 이 위소보가 너무 노엽게 해드렸는데 달리 생각지는 마시오.] 청아가 말했다. [흥! 알았으면 빨리 떠나세요!] 위소보가 말했다. [가기는 갈 텐데....] 청아가 물었다. [그래 무슨 할 일이 또 남아 있길래 슬글슬금 눈동자를 굴리는 거예요?] 위소보가 말했다. [색시, 그 반지는 진짜 금인 것 같은데 끊는 가마솥에서 녹아 없어지면 너무 아깝지 않소? 이 위소보는 다른 재간은 없어도 한 가지는 쓸모가 있다오. 고운 아가씨들을 위해서라면 칼산과 불바다일지라도 서슴없이 뛰어들 수 있다오. 더구나 소인이 방금 아가씨들을 노엽게 만들었으니 그 반지를 건져 내는 것으로 속죄를 하겠소이다.] 청아는 돌연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아니, 방주 자리를 넘보겠다고?]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반지를 꺼내고 방주 노릇을 하더라도 괜찮지요. 아가씨가 방금 말하기를 개방 사람이 아니더라도 반지만 꺼내면 방주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청아는 확실히 그런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 시러배 잡놈에게 빌미를 잡혔다. 그렇다고 안 그랬다고 할 수도 없어 말했다. [그래 할 수 있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원래는 자격이 없지요. 하지만 두 아가씨께서 방주 노릇을 하겠다고 다투니 어쩔 수 없지요. 두 아가씨께서 그처럼 곱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는데 더러운 거지들과 사귀는 것이 정말 아깝구려. 두 아가씨가 방주로 된다면 연꽃이 쇠똥에 꽂히는 격이지요. 때문에 자격이 없을지라도 달리 방법이 없어 나왔다오. 이 더러운 거지 녀석들은 잔인무도하기 이를 데 없고 또 사람을 여간 귀찮게 구는 게 아니오. 이 어르신은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했소이다. 그러니 내가 방주 노릇을 하면 두 아가씨의 옥체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위소보 영웅은 두 미녀를 구하고, 두 미인은 위 영웅의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네'라는 명언을 남길 수 있지 않겠소?] 위소보는 이렇게 허튼 소리를 길게 늘어 놓았다. 청아는 훌쩍 뛰며 오른손으로 가마솥 안의 반지를 건지려 했다. 문아는 놀라며 언뜻 생각했다. (위 오라버니는 경망한 사람 같지만 눈치는 빠른 사람이야. 언니가 반지를 건지려는 데는 그 어떤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청아가 손을 내뻗어 가마솥으로 집어넣으려 하는데 그녀의 뒷덜미가 누군가에게 잡혔다. 문아가 그녀의 혈도를 짚고 살짝 흩뿌리자 청아는 날아올라 사뿐히 땅바닥에 내려섰다. 문아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언니, 집안 사람이 손님에게 양보하는 것이 예절이지요.] 청아는 몹시 성을 내며 말했다. [누가 손님이냐? 너는 저런 건달에게 한집안 사람보다 더 잘 대해주는구나!] 문아가 성이 나서 말하려 할 때 위소보가 불렀다. [문아 여동생, 와서 날 좀 도와주구려.] [뭘 말이에요?] [이 기름 가마솥은 아주 무겁소. 이 오라버니께서 손을 넣으면 팔이 잘못될 것 같구려.] [오라버니, 그렇게 위험한데 그만두세요. 방주 노릇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건 안 돼! 군자일언.... 뭐라고.] [정 그렇게 하시겠다면 더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 불구자로 된다면 이 여동생이 한평생 옆에서 시중해 드릴께요.] 위소보는 가슴이 흐뭇했다. (그래도 문아가 이 어르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구나! 이 어르신에게 이런 여동섕이 있으니 이 어르신은 헛살지는 않았구나!) 위소보가 말했다. [불구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목숨을 잃는다면 그 때 가서도 나를 잊지 마시구려. 청명이고 보름이고 설날 밤에 종이를 태우고 죽밥이라도 올리면 이 위 오라버니는 고맙게 생각하겠소.] 문아는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어요.]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욕했다. (요 빌어 먹을 년, 이 어르신의 은혜도 모른단 말이냐?) 문아는 딱 잘라 말했다. [이 여동생은 오라버니와 의형매(義兄妹)를 맺었으니 마땅히 동년동월동일에 죽어야 하지요. 오라버니가 정말 잘못되면 이 동생도 함께 죽을 거예요. 그런데 누가 향을 피워 줄 수 있겠어요? 저승으로 간다 해도 우리는 그리 적적하지는 않을 거예요. 거기에는....] 위소보는 흐뭇해서 물었다. [여동생, 거기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이오?] 문아는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다. [같은 날 태어나지 않았지만 죽어서 귀신되어 함께 있는 것에도 나름대로 풍류가 있을 거예요.] 그 말은 소리가 낮고 점잖은 말이어서 위소보로서는 잘 듣지도 못했고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문아의 수줍어하는 눈길에서 이 소녀가 정겨운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고 말했다. [이렇듯 애틋한 여동생의 말을 들으니 정말 죽어도 원이 없구려.] 그리고는 문아의 손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동생, 이 오라버니가 그저 농담 한 마디 한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청아가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위소보는 짐짓 큰 소리로 외쳤다. [여동생, 나를 좀 도와 주구려. 동생은 시끌벅적하게 강호를 떠도는 유랑악단 사람들을 보았겠지?] 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문아를 끌고 기름 가마솥 앞으로 다가가 개방 제자들에게 돌아가며 인사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노소(老少) 여러분! 우리 형제 자매는 처음으로 귀지(貴地)에 왔습니다!] 그의 어조는 강호의 유랑악단 사람들과 다름 없었다. 문아는 좀 수줍어했지만 놀기 좋아하는 발랄한 소녀인지라 목소리를 가다듬어 얼른 대꾸했다. [그렇지요.] 위소보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얼굴 시늉을 하고 말했다. [낯설고 물 설은 곳이지만.] 문아는 응대했다. [그렇지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무슨 말을 하던가요?] [집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밖에서는 친구들에게 의지하라.] [옳으신 말씀!] [모두들 그냥 있으면 심심할 텐데.] [그럼 어찌시겠어요?] [우리 형제가 여러분들에게 요술을 보여드리지요.] [좋지요!] 위소보의 반지르르한 말재간과 문아의 천진스럽고 깔끔한 목소리가 서로 주고 받으니 정말 유랑악단 사람들의 촌극 같아 개방 제자들은 웃음보를 터뜨렸다. 위소보가 말했다. [처음 배워서 좀 서툴 텐데.] [어떻게 해야죠?] [박수를 쳐 주세요.] [아하, 그렇군요!] [속담에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기러기는 소리를 남긴다고 했는데, 사람이 이름을 남기지 않으민 누군지 어찌 알겠소?] [당연하신 말씀!] [기러기가 소리를 남기지 않으면 어찌 춘하추동을 알겠소?] [지당하신 말씀!] [아이쿠, 잘못 되었군!] [왜요?] [여러분 죄송합니다.] [응당 그래야지요.] 위소보는 아주 그럴 듯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다시피 사람은 실수할 때가 있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져 볼기짝이 빨개질 때가 있으며, 강가에서 나다니는 사람은 신이 젖게 마련이지요.] [옳으신 말씀!] [우리는 어느 분이 스승이고, 어느 분이 무공능수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에게 두서없이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를 받으십시오.] [여러분들에게 경례를 합니다.] [경례!]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보살핌이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위소보는 진기를 끌어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여동생!] [네이.] [우리는 쓸데없는 말을 이만하고 무공을.] [연마합시다.] 위소보가 몸을 돌리는 순간, 문아는 그의 손에 아주 엷은 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주 놀라며 생각했다. (저 장갑은 관의호가 물려받은 장갑이 아닌가? 어찌하여 위 오라버니의 손에 들어 갔을까?) 문아는 한참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그 날 내가 신룡편으로 관의호를 때려 죽였을 때, 위 오라버니께서 그 기회를 빌어 빼앗은 것이 틀림없구나. 그러나 저 장갑은 독은 피할 수 있지만 불까지 피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개방 제자 네 사람이 나무를 안고 나와 불을 지펴 놓자 기름은 더욱 펄펄 끓었다. 위소보는 '헤이!' 하고 소리치며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감은 채 기름 가마솥에 손을 넣었다. 솥은 크고 깊었고 반지는 아주 작아 얼른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더 굽히고 찾았다. 개방은 비교적 흉악스러운 무리였는데 역대로 내려오며 방주 자리를 억지로 빼앗고 죽이고, 심지어는 자기가 불구가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부글부글 끓는 기름 가마에 손을 넣는 것을 보고 그들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문아는 위소보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찾을 자신이 없으시면 그만 두세요.] 위소보는 잠잠했다가 돌연 환호성을 내질렀다. [금반지를 찾았다! 금반지롤 잡았다!] 문아는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어떠세요?] 돌연 청아가 쏜살같이 달려가 위소보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이 돌발적인 사태에 위소보는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만 가마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청아의 힘이 어찌나 강맹했던지 가마 밑바닥은 위소보의 머리통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기름에 불이 붙어 불바다가 되었다. 순간 위소보도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문아는 번개같이 위소보를 옆에 있는 물구덩이로 집어던지며 왼쪽 팔꿈치로는 청아의 허리 혈도를 눌렀다. 청아는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물구덩이는 대여섯 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치 불덩이가 공중을 날아가는 듯하더니 물구덩이 한복판에 살짝 떨어졌다. 위소보는 물구덩이에 떨어지자 물을 왈칵왈칵 먹고 말았다. 소백룡은 이름뿐이지 물에서는 개구리 혜엄을 칠 재간도 없었다. 그는 버둥거리며 겨우 수면에 머리를 내밀고 '살려달라!'고 외쳤다. 기실 물은 허리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제야 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기름은 여전히 맹렬하게 불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물로 몸에 묻은 기름을 대충 씻고 가마솥에서 건진 금반지를 높이 쳐들고 무대로 올라갔다. 위소보는 개방 제자들을 보고 말했다. [우리 서로 인사들 하고 지냅시다. 소인 위소보는 강호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명성을 갖고 있소이다. 나의 친구들은 나의 얼굴에 금칠을 하여 소백룡이라 존칭했지요. 나는 오늘 당신들의 괴이한 규정에 따라 반지를 얻게 되었는데 여러분께서 달리 하실 말씀이 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모두들 잠잠했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께서 달리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이 소백룡은 여러 문파들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이 많습니다. 어느 문파 어느 방주건 장문인(掌門人)이건 낙어심안(落魚沈雁)의 용태에 폐화수월(閉花羞月)의 자태를 지닌 아리따운 미녀가 있습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다시피 여자가 집안살림이나 잘 하면 그만이지 여자가.... 그 무슨 말이 있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당신들의 개방이 다시 명성을 떨치자면 방주는 반드시 여자가 나서야 합니다. 그러니 이 소백룡이 결정하여 추천하려는데....] '문아'라는 말이 미처 나오기 전에 문아는 그의 말을 앞질러 나직이 소리쳤다. [오라버니, 안 돼요!] 위소보는 힐끔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가 안 된단 말이오?] 문아가 말했다. [저는 방주 자리에 앉을 수가 없어요. 개방에서는 신의(信義)를 중히 여기지요. 군자일언중천금이라고 누구든 기름 가마솥에서 금반지를 건지면 방주가 된다고 했잖아요. 금반지는 오라버니가 건졌지, 제가 건진 게 아니에요. 제가 방주가 되면 누가 나를 믿고 따르겠어요? 오라버니가 방주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하지 않겠소. 나는 천지회에서 자그마한 향주 노릇을 하는데 한평생 번거로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오. 이 금반지는 나 혼자 건진 것이 아니라오. 문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소? 문아 여동생, 이 방주 자리는 이 오라버니가 성심성의를 다해 여동생에게 주는 첫 선물이오.] 문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그러지 말고 오라버니께서 먼저 방주를 이어받으시고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는 방주의 한마디면 다 해결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자꾸 늦추지 마세요.] 위소보는 스스로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맞아! 이 어르신은 주둥아리하고 그 윗부분하고는 완전히 다르단 말이야? 아하, 그렇지!]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문아 여동생이 똑똑해!)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하고 '에헴!' 하고 점잖을 빼며 뒷짐을 짚고 말했다. [이 소백룡의 무공과 담량, 그리고 말재간을 여러분들은 모두 친히 보았을 것이오. 여러분들께서는 달리 할 말이 없으시겠지요?] 문아는 신룡편을 이리저리 만지며 말했다. [소백룡 영웅께서 우리 제 19대 방주로 추임 되셨는데 어떻습니까? 좋은지 나쁜지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개방 제자들은 위소보가 그처럼 위험한 기름 가마솥에 선뜻 뛰어드는 담량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는 기름 가마솥에서 금반지를 꺼냈지만 조금도 상하지 않았는데 위소보의 무공을 누가 감히 따를 수 있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들 마음 한구석에는 꺼림칙한 면이 없지 않았다. 개방은 강호에서 커다란 문파이고 무림 중에서도 안면이 넓은 문파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백룡이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근남을 모르면 영웅이 아니다'고, 천지회는 명성이 높았지만 개방은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천지회에 위소보라는 난데없는 인물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위소보는 비록 천지회 청목당의 향주이지만 또 조정에도 출입했다. 총타주 진근남은 그를 반청복명의 방패로 삼고 요긴한 때 이용하려 했다. 위소보는 강호에서 그리 명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개방 사람들이 그가 방주 노릇을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은 위소보가 나이가 젊고 말이 경박하고 눈치질을 흘끔흘끔하는 것이 역대 그 어느 방주보다 침착하지 못하고 위엄이 없었다. 방주를 추천하는 것은 개방의 흥망과 관계되는 대사인데 어찌 감히 소흘히 할 수 있겠는가? 몇몇 연로한 팔대장로들은 이견을 제기하려 했으나, 문아가 미소를 머금고 위소보의 옆에 서서 신룡편을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보고 잠자코 있었다. 청아는 멍하니 서서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개방 사람들은 문아가 청아의 아혈을 눌러놓은 것을 몰랐다. 문아가 생각했다. (모두 이렇게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야. 어쨌든 누구라도 입을 열어야지.) 그녀는 많은 사람 가운데서 팔대장로를 지적하여 말이라도 시키려고 입을 떼려는 데, 팔대장로 과산호가 날렵한 신법으로 무대에 올라오더니 다짜고짜로 위소보에게 걸칙한 가래침을 '퉤!' 하고 뱉었다. 무공이 약한 위소보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 가래침은 위소보의 옷에 묻었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문아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 [과 어르신의 무공은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셨지요. 이 '남천일주(南天一柱)' 무공은 위 오라버니는 물론 당대 일류고수라 할지라도 피하기 어렵지요.] 과산호는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아가씨, 과찬의 말씀이옵니다.] 그리고는 위소보롤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실례했소이다. 위 영웅께서 널리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 개방의 관습입니다. 새 방주가 추임되면 부하들이 방주님께 침을 뱉는 것으로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기뻤다. (그럼 이 어르신이 천하에서 가장 커다란 개방의 방주로 되었단 말이 아니냐? 그러나 이렇게 축하하는 것은 별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 그러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지나친 겸손이옵니다.] 과산호는 여러 제자들을 보고 말했다. [이 과산호는 무공이 보잘것 없지만 어지간한 사람들의 무공은 눈여겨 보지 않는다오. 그러나 문아 아가씨의 크나 큰 의리와 위 영웅의 그처럼 커다란 담량과 세심함에 대해 강호를 떠도는 이 과 아무개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제가 탄복하면 개방 제자들도 탄복할 것이며, 만약 탄복하지 않으면 여기에 올라와 저를 때려서라도 탄복할 것이오.] 과산호의 무공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임 방주 성룡의 수하 사람으로 모두 그를 존경했다. 그리고 그는 개방에서 배분이 있는 사람으로 성격이 직선적이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다. 과산호가 나서 말하니 개방 제자들은 감히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때 관의호와 집법장로는 문아에게 낭패를 당하여 해독하러 가고 없었다. 과산호는 두말없이 문아의 손에서 신룡편을 공손히 받아 위소보에게 건네 주었다. 팔대장로 이하 제자들은 말없이 하나하나 무대로 올라와 위소보에게 침을 뱉었다. 그러나 이처럼 성대하고 열렬한 축하의 자리가 되어야 했지만 사람들은 신임 방주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지라 마지 못해 형식적으로 축하를 보냈다. 위소보의 온몸에는 침이 잔뜩 묻었다. 문아는 나직이 말했다. [오라버니, 의식이 끝나면 제가 씻어 드릴께요.] 위소보가 말했다. [여동생, 방주 노릇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는 이 방주 노릇을 오래 할 것 같지 않구려. 길으면 이삼 일이고 적으면 한 시간쯤이오. 이 오라버니는 고향으로 가야 하오.] 개방 사람들은 아직도 가지 않았다. 문아는 위소보에게 사람들에게 몇 마디 하라고 하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모두들 들으시오. 우리는 천하 각지에 흩어져 있어 함께 모이기 어렵고 또 많은 일들을 해야 하지요.] 과산호가 먼저 말했다. [방주님께서 분부하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천 가지 만 가지 일 가운데 눈앞의 일이 제일 크지요. 우리는 아무리 급해도 눈앞의 일부터 해야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품 속에서 사십여 장의 은표를 꺼냈다. 한 장에 백여 냥은 족히 되었다. 그는 말했다. [지금 제일 중대하고도 시급한 일은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뭇 거지들은 좋아라 하고 환호성을 울렸다. 그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도박 따위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신임 방주가 술을 마시고 도박이나 하자고 하니 이보다 좋은 일이 세상에 없었다. 그들은 신임 방주가 자기들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천지가 떠나갈 듯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이 어르신이 방주 노릇을 하려면 첫 대면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여기에 몇 천 냥이 있으니 모두 갖다 쓰시구려. 이것으로 도박 밑천을 삼으시오.] 이 거지들은 평시에 두, 세 냥만 있어도 콘 부자라고 했다. 그런데 방주가 몇 천 냥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적어도 백여 냥은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위소보만이 자기들의 구명은인인 것 같았다. 위소보가 또 말했다. [이 방주가 오늘 커다란 도박판을 벌일 테니 담이 크고,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모두 여기로 모이시오. 그러나 우선 할 말은 해야겠소. 도박판에는 부자지간도 없다오. 만약 지면 밑천은 내가 꿔 주되, 잃은 돈은 찾아갈 수 없다오!] 어느 한 거지가 소리쳤다. [방주, 당신은 협잡꾼이 아니오?] 위소보는 욕했다. [제기랄 니 에미 오리알이다! 이 어르신은 협잡꾼이 아니라 협잡꾼의 십팔대 할애비다. 그러나 오늘 이 어르신은 예외를 두어 협잡꾼 노릇은 하지 않겠다. 자기 형제들을 속이면 무슨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단 말이냐?] 모두들 요절복통을 했다. 위소보는 품속에서 주사위를 꺼내 높이 뿌리면서 소리쳤다. [지존보닷! 다 먹어 버린다!] 주사위는 한참 돌다가 멈췄다. 별십(別十)이 나왔다. 별심은 주사위 가운데서 제일 작은 숫자이다. 위소보는 탄식했다. (제기랄, 주사위에 꽁수를 부리지 않으면 언제나 진단 말씀이야.) 위소보는 주사위를 걷으며 말했다. [여러 형제들! 우선 식사를 하고 이 방주를 따라 협잡꾼들을 족치러 갑시다.] 개방 사람들은 기뻐하며 흩어졌다. 문아는 웃으며 위소보에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요. 한두 마디로 이 방탕한 거지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니 말이에요.] 위소보가 말했다. [여동생, 나를 비웃지 마시구려. 이 어르신은 좀 방탕한 짓을 해서 그렇지, 그래도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운다오. 그 장졸(將卒)들은 개방 형제들과 비슷하다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또 여자들을....]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자기 뺨을 치며 호통을 쳤다. [요놈의 주둥아리! 또 허튼 소리를....] 문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물 흐르듯 줄줄 말이 잘 나왔으니 오늘만은 특별히 그 주둥아리님을 용서해 주세요.] 위소보는 겸연쩍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청아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 어르신의 주둥이는 용서하더라도 네 년만은 용서 못해! 네 년이 끓는 기름으로 이 어르신을 퉈겨 먹으려고? 그래 이 어르신을 제갈량이 등갑병(藤甲兵)을 불태워 죽이 듯 하려고 한단 말이냐?] 청아는 혈도가 눌려 말도 못하고 노한 눈길로 쏘아볼 뿐이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네 년은 또 흉악한 짓을 저지르겠느냐? '제갈량이 등갑병을 불태워 죽였다'는 말은 제 남편을 죽였다는 말이다. 마땅히 목을 잘라야지. 그러나 오늘은 이 어르신이 방주가 되어 마음이 흡족한 날이니 죽이지 않고 대신 볼기짝을 치겠다.] 위소보는 말하며 청아를 뒤집어 놓고 손바닥으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잇따라 세 번 쳤다. 더구나 그는 눈동자를 위아래로 쉴새없이 굴리며 흘끔흘끔 청아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것이었다. 교만한 청아가 어찌 이런 모욕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렸다. 교만하지만 가련한 그녀의 모습을 보던 위소보는 돌연 자기 뺨을 '착착!' 때렸다. 이번에는 정말 때려서 얼굴에 손자국이 완연히 드러났다. 문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오라버니, 저는 정말 기삐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청아의 혈도를 풀어 주고 말했다. [언니, 우리 자매지간에 이렇게 싸울 필요가 있나요? 우리는 위 오라버니를 도와 의부를 살해한 진상을 분명히 밝혀 의부께서 저희들을 길러 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문아 아가씨는 멍청이가 아니오? 청아와 함께 성 방주의 원수를 갚자고? 성 방주가 살해된 것이 이 년의 수작이 아니라면 나는 위가라는 성을 갈겠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아는 호되게 위소보의 뺨을 후려갈겼다. 위소보의 무공으로는 이 돌발적인 사태를 피할 수 없었고, 또 그어떤 이유에선지 문아도 막지 않았다. 위소보는 스스로 오른쪽 뺨을 치고, 청아가 또 왼쪽 뺨을 후려치자 양쪽 뺨이 모두 시삘겋게 손자국이 났다. 위소보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양쪽이 공평하게 되었군!] [내 언제고 네 놈을 죽이고 말겠다! 두고 봐!] 청아는 악의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호수가로 달려갔다.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해! 문아, 어서 쫓아가!] 문아는 멍하니 청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있다가 말했다. [오라버니, 언니가 방금 때릴 때 제가 막지 않았다고 화를 내지 않으세요?] 위소보가 말했다. [화낼 게 뭐 있소? 좋으나 싫으나 당신의 언니가 아니오?] 청아는 구슬피 울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을 찌르려 했다. 문아는 놀라며 소리쳤다. [언니, 그러지 말아요!] 바로 이 때 호수에서는 돌연 인영이 언뜻 하며 마치 물고기가 헤엄쳐 지나가듯 파문이 일었다. 그가 청아에게 덥쳐들어 바짝 끌어안으니 청아는 비수로 찌를 수가 없게 되었다. 문아는 경공으로 나는 듯이 호수가에 이르렀다. 위소보도 신행백변으로 재빨리 뒤따랐다. 문아가 소리쳤다. [언니를 다치지 마라!] 그 괴상한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청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그는 삽시에 입을 벌리고 물을 화살처럼 빠르고 예리하게 뿜어내 문아의 단전혈을 짚었다. 그처럼 강한 내력을 지닌 문아도 그의 물화살에 맞아 땅에 쓰러지고 혈도도 막혔다. 그 괴상한 사람의 무공은 실로 상상하기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 괴상한 사람은 또 물화살로 위소보를 쏘았다. 위소보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보의를 입었지만 강력한 충격으로 땅에 쓰러지고 가슴이 저려왔다. 그 괴상한 사람은 청아를 안고 몇 장 남짓 솟구치더니 물 속으로 들어갔다. 호수에 파문이 일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괴상한 사람과 청아는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아픔을 참지 못해 앓는 소리만 했다. 그는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놈, 물로 이 소백룡 어르신을 상하게 해! 너무도 이 어르신을 업신여기는군! 네 놈은 도대체 어떤 물건짝이길래 물을 그렇게 즐긴단 말이냐? 썩은 오리알 같은 놈, 어서 집에나 가 봐! 네 여편데가 네 놈을 위해 푸른 모자롤 얼마나 벌어 왔는지 말이야?] 이렇게 욕을 하고 욕을 퍼부었지만 그 괴상한 사람의 그림자는 눈앞에 자꾸 나타날수록 어쩐지 낯익은 것 같았다. 특히 물을 자기에게 내뿜을 때 그 흉악스럽던 몰골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문아는 혈도가 막혔는데 스스로 운기(運氣)하여 혈도를 풀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그 사람의 내력은 아주 강하고 무공도 아주 괴상하지요. 강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위소보는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오. 아귀신이라오!] 문아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오라버니, 그 사람을 아세요?] [그 놈을 불살라 재가 되더라도 나는 알 만하오. 그는 정극상이오. 대만 정성공의 손자이고, 정경(鄭經)의 아들이오.] 위소보는 자기가 어떻게 천지회에서 정극상을 만나 알게 되었고, 또 어떻게 부인 아가 때문에 정극상과 사이가 벌어지고, 또 그 놈에게 어떻게 380만 냥을 협잡하고, 북경으로 돌아가 그를 공작부에서 만났고 또 연꽃 연못에서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하던 과정을 설명 했다. 문아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위소보가 또 말했다. [이 어르신은 그 때 그 놈이 너무 불쌍해서 만 냥을 주었지만 눈 앞에서 찢어 버렸다오. 이 어르신은 지금 후회하고 있다오. 그 때그 놈을 죽여 스승님의 원수를 갚았더라면 그가 또 이렇게 와서 번거롭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문아는 천천히 말했다. [오라버니, 할 말이 있는데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든 꺼리지 말고 하시구려.] [강호에서 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피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놓아 줄 것은 놓아 주고, 용서할 것은 용서해 주어야지요. 모조리 죽이지는 말아야지요. 그리고 사내대장부로써 여색 때문에 서로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되지요. 제 말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위소보는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작자 주:위소보가 얼굴이 붉어지는 경우는 고금 이래로 문아의 말밖에 없다.) [사실 아가도 내가 빼앗아 온 것은 아니라오. 처음에 아가는 확실히 정극상을 좋아했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나중에 어떻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나중에 아가 년은 이 어르신을 죽자 사자 하고 따랐지. 사실 그것은 양주 여춘원에서 임신하게 되어 이 어르신을 따르게 된 것인데,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를 따르지 않았을 거야.) 평생 처음으로 위소보는 자기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가책을 받았다. 위소보가 잠잠히 있으니 문아가 말했다. [오라버니, 저는 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니 틀리더라도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기실 사람들은 강호에서 모두들 자기 뜻대로 될 수가 없는데 어찌 모든 것을 다 돌볼 수 있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나는 여동생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때문이라오.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성미인데, 도리를 깨우치며 나를 훈계하는 사람이 없었다오. 여동생은 마치 나의 어머니처럼....] 그는 기생인 어머니를 문아와 비기기가 좀 어색해서 얼른 돌려 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앞으로 나에게 많은 충고를 해 주시구려.] 위소보는 바삐 서둘다 보니 배가 고팠다. [문아, 이만 돌아갑시다.] 문아는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언니! 제가 언니를 해친 거예요!] 위소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언니는 죽지 않았다오.] 위소보는 진회하에서 정극상이 오늘처럼 청아를 빼앗아 가던 일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진회하의 풍랑은 아주 거셌는데도 청아는 아무 일도 없었소. 정극상은 청아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구해주는 것이라오.] 그 말을 듣자 문아는 약간 마음이 가라앉아 위소보와 함께 미산도의 높은 곳으로 걸어갔다. 한편으로 걸으며 문아가 물었다. [오라버니, 불에도 데지 않는 그 공력은 정말 고명하더군요. 무슨 내공심법인지 가르쳐 줄 수 없나요?] 위소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여동생! 왜 그리 충명한 사람이 청아의 속임수에 빠진단 말이오? 그녀의 그런 짓거리는 양주 거리에서는 세살 먹은 애들도 다 안다오. 이 오라버니는 그런 것을 많이 봤다오.] 문아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내공심법을 쓰지 않았단 말이에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 가마솥에 기름은 틀림없소. 그러나 가마솥 밑바닥에 명반(明礬)을 두껍게 한 겹 깔았단 말이오. 명반은 물에 들어가면 부글부글 끓어 가마솥 밑바닥은 벌겋고 기름이 펄펄 끓어 보기에는 무섭지만 사실은 뜨겁지 않다오. 그러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이 장갑을 꼈다오.] 그는 관의호의 장갑을 꺼냈다. 문아가 말했다. [그건 저도 일찌감치 알았어요.] 두 사람은 웃으며 걸어갔다. 위소보가 개방 방주에 올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자들을 데리고 도박을 하며 마음껏 노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선을 잡았다. 그러나 많은 개방 사람들은 평시에 백 냥, 이백 냥씩 퍽퍽 걸었지만 오늘은 방주가 돈을 대주었는지라 모두들 아까워했다. 그들은 세 푼, 다섯 푼을 대고도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모두들 이렇게 좀스럽게 놀자 위소보는 재미가 없었다. 또 그 어떤 수작을 부리기도 어색해 많이 먹고 잃었지만 정말 시시했다. 위소보는 성을 벌컥 내며 욕을 했다. [은자가 너희들의 애비냐? 왜 이렇게 돈을 걸기 아까워 한단 말이냐? 나는 그만 두겠다. 그만 두겠어!....] 도박판을 걷으려는데 곱사등 늙은이가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방주님은 아주 커다란 도박꾼이신데 저 사람들의 몇 푼 돈을 가지고 어찌 어르신의 심심풀이가 되겠습니까?] 그제야 위소보는 기뻐하며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난 듯이 말했다. [그래도 노형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만. 그럼 한 번 해 볼까요?] 늙은 거지가 말했다. [소인이 어찌 방주님과.... 그러나 방주님의 소원은 풀어드려야지요.] 그는 말하며 한동안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졌지만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위소보는 약간 실망하며 생각했다. (허풍만 떠는 시시한 풋내기구나!) 그런데 그 늙은 거지는 은표 한 장을 탁자에 내놓으며 말했다. [소인은 천 냥을 걸었소이다.] 위소보는 마음에 그리 들지 않았지만 세 푼, 다섯 푼 짜리 도박꾼보다는 만족스러웠다. 그는 주사위를 들고 한참 흔들다가 소리쳤다. [이 어르신께서 모두 먹어 버린다!] 그러나 나온 점수는 8점이었다. 뒤이어 늙은 거지가 주사위를 던졌더니 9점이 나왔다. 그는 위소보의 천 냥을 먹었다. 늙은 거지는 재수가 좋은 듯 연신 싱글벙글했다. 위소보의 도박 재간은 뛰어났으나 천 냥을 잃고 말았다. 늙은 거지는 먼저 걸었던 천 냥을 품속에 집어넣어 방금 먹은 천냥을 앞에 내밀며 말했다. [또 천 냥을 걸었소이다.] 위소보는 이 늙다리가 원래 갖고 온 천 냥을 품속에 다시 넣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이 또 이길 줄 아느냐? 이 어르신께서 그 본전을 되찾지 못하면 성을 고쳐 네 놈의 성을 따르겠다.... 그런데 이 놈의 성은 무엇인지?) 위소보가 물었다. [노형(老兄)은 성씨가 어떻게 되시오?] 늙은 거지는 공손히 말했다. [예, 저의 성은 조(曹)가라 부릅니다.] 위소보는 화가 나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 어르신도 조가가 되겠다.) 그러나 입으로는 번지르르하게 말했다. [아주 좋은 성씨지요. 조씨네 문중에는 커다란 인물들이 많이 나왔지요. 그 얼굴에 울긋불긋 분칠을 한 조조도 당신네 조가지요.] 위소보는 이렇게 말하며 주사위를 던졌는데 또다시 8점이었다. 늙은 거지가 살짝 던지자 묘하게도 또 9점이 나왔다. 늙은 거지는 먼저 먹은 천 냥과 이번에 먹은 천 냥을 함께 밀며 소리쳤다. [이천 냥이요.] 위소보가 말했다. [노형은 주사위 던지는 재간이 있구만.]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오라는 딸년은 안 오고 오지 말라는 며느리년만 온다더니, 이 늙은 거지는 도박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구나. 돈 이삼만 냥쯤 잃는 것은 괜찮지만 이 사람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되겠다.) 사람이 태어나 자기 뜻대로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문제를 따지는 데 있어 위소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도박판에서의 운세였다. 위소보는 주사위를 들고 자세히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 주사위가 이상한데?] 그는 이리저리 살펴보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에 대고 불어도 보고 손에 들고 흔들어도 보았다. 그러는 순간 그는 원래 주사위를 수은을 집어넣은 주사위로 바꾸었다. 위소보는 입으로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도박보살이시여! 서천 여래불, 남해 관세음, 얼굴이 불그죽죽한 관운장, 얼룩덜룩 조조, 모두들 이 어르신의 영을 어기지 못하리!] 위소보는 수은을 넣은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상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지존보야 나와라! 이 어르신께서 깡그리 먹는다!] 그런데 역시 8점이 나왔고, 늙은 거지는 여전히 9점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아는 노래도 곡조를 흥얼거리고 부르지 않으면 곡조를 잊어 먹는다고 하더니만 오래 동안 주사위를 놀지 않았더니, 손에 익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는 온갖 수작를 다 부렸으나 여전히 8점이었다. 늙은 거지가 주사위를 잡자 위소보가 말했다. [노형, 던지지 마시오. 보나마나 9점일 텐데.] [그래도 던져봐야지요.] 그러고 보니 정말 9점이었다. 위소보는 갈수록 의아했다. (아무리 손에 익지 않았다 해도 왜 이 어르신은 늘 8점이고, 저 놈은 9점일까? 제기랄, 남을 잡으려다 내가 잡히겠구나!) 위소보는 더 이상 재간이 없어 주사위를 늙은 거지 앞으로 떠밀며 말했다. [오늘은 도박 귀신께서 출타중이신 모양이구려. 정말 재수 없구만. 이번에는 노형이 먼저 선을 잡으시오, 내가 대겠소.] 늙은 거지는 사양도 안 하고 주사위를 던지니 또 9점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네 놈이 먼저 던지고 내가 나중에 다른 수작을 피워 던지면 이 번에는 틀림없겠지!) 그러나 뜻밖에도 주사위는 또 8점이 나왔다. 위소보는 오늘 제대로 주인을 만났구나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고 던졌는데도 8점밖에 안 되니 늙은 거지 앞에는 수 만 냥이나 쌓였다. 위소보는 늙은 거지가 어떤 수작을 피우는가 눈여겨 보았지만 아무런 기미도 발견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적지 않는 무림능수들과 도박을 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남몰래 수작을 부릴 때면 내력을 집어넣거나 숨을 들이쉬는 순간에 진기(眞氣)를 불어넣기도 했지만 이 늙은이는 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숨을 들이쉴 때 주사위를 입에 가져다 대지도 않았는데 던지면 영락없이 9점이니 그의 무공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다. 위소보는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무공 때문에 머리 아픈 일이 많아 무림 중에 명성이 높은 스승을 모시고 배웠지만 이런 고명한 무공은 배우지 못했다. 그가 제일 흥취 있어 하는 것은 도박이었다. 때문에 오늘 이처럼 고명한 사기꾼의 수법을 보고 비록 돈은 잃었지만 뛰어난 스승을 만나 그 비밀을 배울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정말 우물 밖에 넓은 하늘이 있다고 형님의 재간에 이 동생은 탄복하외다. 형님께서 꺼리지 않으신다면 우리 결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늙은 거지는 환갑은 되어 보였고 위소보는 20여 세밖에 안 되었지만 개방의 방주로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이 늙은 거지를 높이 모시는 것이었다. 늙은 거지는 황급히 일어서며 공손히 말했다. [소인이 어찌?] 그러면서 돈을 위소보의 앞으로 밀며 말했다. [방주님, 이것은 방주님의 돈입니다. 소인이 수작을 부려서 얻은 돈이니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적지 않게 그런 수작을 피웠지만 어르신을 이기지 못했소이다. 돈은 그대로 가져 가십시오. 이 위소보의 품질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도박 품질이야 그럴 수가 없지요.] 늙은 거지가 말했다. [이 돈을 굳이 방주님께서 받으시지 않겠다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소보는 얼른 돈을 들고 구경하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것은 조 할아버지께서 자네들에게 주는 돈이니 어서 조 할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거라!] 늙은 거지가 기뻐하며 말했다. [방주님께서는 정의를 중히 여기시고 재물을 탐내지 않는다는 말을 익히 들었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그 말이 헛된 말은 아니군요. 방주님께서 흥취가 계시다면 대대로 물려내려 온 그 기교를 방주님께 알려드리려 하나이다. 그러면 방주님은 도박판에서 뜻대로 될 것이고, 그 어떤 사람도 방주님을 이길 사람이 없을 거외다.] 위소보는 더없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처럼 배려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늙은 거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많은 사람이 알면 안 되지요. 우리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량묘 앞에 왔다. 때는 밤이 이슥한 시각이었는데 이지러진 달이 구름 속에 숨었다가 나타나곤 했다. 주위는 인적이 없고 그저 개방 제자들이 술판을 벌이고 노름을 하며 환호성을 치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올 뿐이다. 늙은 거지는 돌연 남쪽편에 서서 근엄하게 외쳤다. [위소보는 성지를 받으라!] 위소보는 성지라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소인 위소보 삼가 경하를 드립니다.] 늙은 거지는 말했다. [태후 마나님의 분부를 전하노라. 위소보는 사위의 몸으로 처자들을 버리고 황친황족의 존엄에도 불구하고 강호에서 제멋대로 떠돌아 다니는데 그래 이것이 신분에 맞는 일인가? 즉시 북경으로 돌아와 이 어르신의 슬하에서 시중을 들기 바란다! 흠차!] 위소보는 예를 갖추었으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가짜 태후 모동주에게 혼이 난 적이 있어 '태후'라는 말만 들어도 넌덜머리가 났다. (아무 일도 없던 태후가 왜 갑자기 분부를 내렸을까? 아마 그 공주 년의 수작이겠지. 그 년은 자기가 가짜 태후 모동주와 볼품없는 땡초 중 사이에서 태어난 줄도 모르고 아주 부귀한 집안 출신인 줄 아는 모양이지? 그렇다고 이 사위까지도 가짜인 줄 아느냐?) 여기까지 생각한 위소보는 아마 다른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태후는 공주 년을 모동주가 낳은 줄 뻔히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공주를 잘 대해주는지 모르겠구나? 또 이 어르신을 자기 슬하에 와서 시중을 들라고 하는데 슬하란 무엇일까? 여기에는 반드시 커다란 글귀의 뜻이 담겨 있겠지! 그러나 이 어르신은 애석하게도 글자하고는 인연이 없으니 무슨 글귀일까....글귀? 그렇지 그 날 태후에게 절을 할 때 책상 위에 사십이장경이 놓여 있었지. 그녀가 불경을 읽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 사십이장경으로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래 이것은 또 무슨 변죽을 울리는 것이란 말이냐? 진짜 태후가 가짜 태후처럼 사십이장경의 글귀에 관심을 갖는 날이면 이 위소보는 더욱 번거로워지겠구나!) 위소보는 이것만 생각하다보니 성지를 선독하는 늙은 거지마저 잊어버렸다. 늙은 거지는 인사하며 말했다. [비직, 위작 나으리께 인사를 드립니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와 물었다.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귀하는 누구신지요?] 늙은 거지는 그제야 얼굴에서 인피면구를 벗었다.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 위소보는 놀라며 불렀다. [아! 원래 조 대....] 그는 '조 대간신'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지금은 성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얼른 바꾸어 불렀다. [조 대인!] 그 늙은 거지가 바로 조설근의 조부이며 일등시위 강녕직조 조인이었다. 조인은 무의식중에 물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위소보는 돌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들이 밖으로 나가면 어머니께서 근심한다고 했는데 아주 지당한 말씀입지요. 보십시오, 제가 태후 마님 곁을 떠난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벌써 걱정스러워 분부까지 전해 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야....] 그는 목이 메여 말도 못하고 눈물에 콧물이 범벅이 되어 볼품 없게 되었다. 위소보는 울려고 마음만 먹으면 귀신도 속여 넘길 재간이 있으니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는 울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조 대간신배와 소황제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니, 오늘 이 어르신은 태후의 이름을 빌어 이 조가 놈에게 단단히 으름장을 놓아 소황제에게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야지.) 조인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태후 어르신의 위작 나으리에 대한 총애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위소보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개봉 하독부로 가신 후 태후 어르신께서는 몸이 편치 못했소이다. 비록 태후 어르신께서 작은 나으리를 모셔와 슬하에 두고 기뻐하시기는 했지만 어쩐지 매우 스산해 하시고 고독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위작 나으리께서 이 성지를 받고 빨리 북경으로 돌아오라고 비직에게 전했소이다.] 위소보의 아들 위호두는 난지 수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조인은 '작은 나으리'라고 불렀다. 위소보는 대충 그 말을 받았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태후가 오라고 하니 더욱 조심해야겠구나. 그 내막을 똑똑히 모르고 북경으로 갈 수야 없지.) 조인이 뚫어지게 자기를 보는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물었다. [조 대인, 어떻게 저를 찾았습니까?] 조인이 말했다. [강호에 소문이 자자했지요. 개방에서 19대 방주를 추천한다고 했는데 누가 이 굉장한 의식을 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비직은 위작 나으리께서 혹 여기에 계시지 않을까 해서 찾아 왔소이다. 그런데 방금 너무 무리하게 대한 것에 대해 위작 나으리께서 달리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외다. 조 대인의 솜씨에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조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별로 놀랄 것 없지요. 그저 상 밑에서 두 발에 내력을 모았다가 지면을 진동시키고, 지면이 또 상을 진동시키면 그 주사위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지요.] 조인이 이렇게 간단히 말했지만 위소보는 거기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력으로 지면을 진동시켜 상위의 주사위에 필요한 점수를 나오게 만든다는 것은 내력이 강해야 할 뿐 아니라 단순히 힘만으로 그 주사위를 어떻게 할 수 없고 교묘한 내력의 안배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강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인이 말했다. [제가 그 수법을 쓴 것은 달리 방법이 없어 그런 것이지요. 갖고 온 성지가 발각되면 위작 나으리께 불리하리라 생각했소이다. 그래도 그런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게 된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훌쩍 솟구쳐 번개같이 왼쪽의 가까운 언덕으로 덥쳐갔다. 위소보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조인이 간 곳을 보니 그 언덕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할 때 조인이 그곳에 이르렀다. 조인이 공중에서 일 장 내리치자 그 사람도 맞섰다. 한참 두 사람이 싸우다가 그 사람이 소리치며 넘어갔다. 위소보는 귓가에 그 목소리가 매우 익숙했다. 돌연 한 사람이 떠올라 소리쳤다. [고모님!] 그 사람이 바로 궁녀 도홍영(陶紅英)이었다. 도홍영은 원래 명조 숭정(崇禎) 황제의 공주이며 위소보의 스승인 독비신니 구난사태의 궁녀였다. 만청이 관내로 진입하자 숭정 황제는 매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공주는 북경으로 떠나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도홍영은 계속 황궁에 남아서 궁녀 노릇을 했다. 그녀와 위소보는 사십이장경을 얻기 위하여 가짜 태후가 있던 자녕궁에서 알게 되었고 서로 의지하여 왔다. 위소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를 금세 알아보았다. 도홍영은 땅에 쓰러져 얼굴이 창백했다. 위소보는 급히 그녀를 안고 불렀다. [고모, 고모!]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심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말했다. [조 대....대인, 왜 나의 고모를 때렸소?] 조인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이 여자는 북경에서부터 내 뒤를 밟아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위작 나으리의 고모이겠습니까? 위작 나으리께서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위소보는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제기랄, 개방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네 놈은 너의 고모도 잘못 볼 수 있느나? 조 대.... 대간신 같은 놈, 우리 고모가 잘못되는 날이면 이 어르신은 네 놈과 같이 죽고 말겠다!] [아니,너!] 조인은 너무 어이가 없는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내가 어떻다고 그러느냐? 우리 고모는 과부인지라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데 북경에서 따라오다니? 네 놈은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도적이라고 모는 놈이구나! 그래 우리 고모가 네 놈의 돈을 훔쳤느냐? 그래 네 놈 조가네 돈이 욕심나서 그랬단 말이냐? 빚은 돈으로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이면 목숨을 바쳐야지. 우리 황상 면전에 가서 따져 보자!] 조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언제 네 놈의 고모가 돈을 훔쳤다고 했느냐? 이 시러배 잡놈은 정말 거머리처럼 사람한테 착 들러붙는구나!) 그는 이품(二品)관원이고 강희 황제의 심복이었지만 위소보처럼 황제 면전에 가서 따져보자는 말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조인은 할 수 없이 참아가며 위소보에게 말했다. [비직은 진짜 위작 나으리의 고모님인 것을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위소보는 울며 말했다. [고모가 죽으면 어쩌나? 그래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날 수 있단 말이냐? 그럼 나도 네 놈 대간신배를 죽이고 미안하다 하고, 또 네 놈의 집의 중간신배도 죽이고 미안하다 하고, 네 놈 집의 소간신배도 죽이고 미안하다고 하면 그뿐이냐?] 조인은 이런 엉터리 없는 시달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위작 나으리, 비직은 분부를 다 전갈했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떠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사람을 죽이고도 그냥 가는 법이 있단 말이냐?] 조인이 보니 앞에 흰옷을 입은 중년 비구니가 손에 불진(拂塵)을 들고 조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인은 놀라 소리쳤다. [독비신니!] 독비신니 구난은 위소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지.] 그리고는 조인을 향해 아주 냉랭하게 말했다. [데가 나의 이름을 아는 이상 네 스스로 자결을 하겠느냐, 아니면 내가 손을 써야 하느냐?] 조인은 극히 노하여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 조 아무개는 목숨을 구난사태에게 바쳐도 좋지요.] 돌연 조인은 쌍장으로 구난사태를 쓸어 쳤다. 구난사태는 침착하게 불진을 살짝 떨쳐 쇠심줄 같은 조인의 완맥을 후려쳤다. 조인은 초식을 펼치지 않고 몸을 숙이며 구난사태의 초식을 피했다. 구난사태는 다시 불진을 떨쳐 '정병양유(淨甁陽柳)'라는 일 초를 펼치며 우아한 자태를 펼치며 조인을 공격해 들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20여 초를 겨루었다. 조인의 초식은 흉맹하고 강경하여 매 초식마다 요해를 노렸다. 하지만 구난사태는 방비만 하고 공격은 하지 않았다. 서른 번째 초식이 되자 조인은 신형을 솟구치며 일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구난사태의 천령개(天靈蓋)를 움켜잡으려 했다. 구난사태는 냉소하며 말했다. [당나귀 재주는 기껏해야 뒷발질 하는 재간밖에 없구나!] 구난사태는 여전히 반격하지 않고 위소보를 보고 말했다. [소보, 고모가 '대성장(大成掌)'에게 맞았다네. 이 사람의 대성장은 칠층(七層)은 되지 않고 육층(六層)은 넘는데 생명에는 위험이 없다네.] 조인이 허공에서 구난사태의 천령개를 움켜잡으려 할 때도 구난사태는 모르는 척하고 위소보에게 조인의 무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조인은 실색하며 놀랍게 생각했다. (독비신니는 과연 듣던 소문대로구나. 서른 번 초식을 겨루고 내 무공의 층차(層差)까지 다 꿰뚫어 보다니 경솔히 대해서는 안되겠구나.) 조인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대성장은 경사(京師) 왕씨(王氏)의 '형의권(形意拳)'의 기반 하에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아는 사람이 적은데 구난사태는 일거에 알아냈다. 조인은 약간 주저했다. 구난사태는 불진을 위로 날리며 내력으로 불진을 쇠사슬처럼 곧게 뻗게 만들었다. 조인이 손을 늦추자 구난사태는 다시 불진을 떨쳐 내력을 뻗어내 자신의 혈도를 짚으려 했다. 조인은 재빨리 초식을 바꾸어 불진을 힘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 힘이 모자라 그만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구난사태는 말했다. [소보, 자네는 고모를 업고 조용한 곳에 가서 안정을 시키게나.] 그리고는 곧장 사정없이 조인의 요혈을 들이쳤다. 조인은 삽시간에 위험한 처지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스승이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것을 보고 도홍영을 업고 떠났다. 구릉을 넘어 자그마한 수림을 지나는데 갑자기 수림 속에서 다섯 사람이 뛰쳐나왔다. 사실 그 다섯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매복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달려나와 서로 위소보를 붙잡았다. 위소보는 '악!' 하고 소리치며 도홍영을 돌볼 겨를도 없이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 놓고 신행백변으로 달아났지만 열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다섯 사람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이 양 팔 다리와 머리를 제각기 틀어쥐자 위소보의 몸은 허공에 들리고 말았다. 위소보는 혼비백산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의 적수가 모두 한곳에 모였구나!) 위소보의 왼손을 움켜쥔 것은 폐병쟁이 어린 거지였다. 오른손을 움켜쥔 것은 정극상이다. 왼쪽 다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인피면구를 쓴 황룡대협이고, 오른쪽 다리는 움켜잡지는 않았지만 넉자 데치나 되는 흰수염으로 단단히 휘감은 사람은 다름 아닌 홍안통이었다. 위소보는 소녀의 담담한 향기가 코에 스며들어 눈을 떠보니 청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팔로 그의 목을 눌렀다. 위소보는 가슴이 서늘해져 생각했다. (틀렸구나! 오늘 이 어르신은 황천길을 가셔야겠구나!) 다섯 사람은 말없이 내력으로 위소보를 빼앗으려 했다. 위소보는 사지와 머리가 제각기 떨어져 나가는 것같이 아팠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제기랄, 이 어르신은 옛날에 죄인의 머리와 양쪽 팔다리를 다섯 필의 말이 끌어당겨 몸뚱이를 찢어 죽였다는 말을 들었어도, 다섯 마리 개새끼가 그랬다는 말은 못 들었다!] 어린 거지가 말했다. [캑, 캑! 다 죽게 되었는데 무슨 놈의 잔소리냐?] 위소보가 말했다. [어쨌든 죽을 텐데 입이라도 통쾌해야지. 어이 관 노형, 나는 자네의 19대 방주인데 그래 감히 웃어른에게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어린 거지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늘 방주를 모시러 왔소이다!] 홍안통이 말했다. [그건 안돼! 우리 신룡교 부교주니 나를 따라 가야지!] 위소보는 사면(赦免)이나 받은 듯이 다급히 말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이 소백룡은 언제 어디서나 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대업을 생각하고 있지요. 교주님은 신통력이 대단하시고, 교주님의 법력(法力)이 끝이 없으시니 영원히 복을 누리시고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교주님, 빨리 제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아이구! 제기랄 놈의 홍안통! 너는 이 어르신의 다리를 구운 닭다리인 줄 아느냐? 왜 이렇게 있는 힘껏 당기는 게냐?] 위소보는 다시 황룡대협에게 애걸하며 말했다. [어르신은 아주 좋은 분이지요. 한 번만 더 저를 구해 주십시오.] 황룡대협이 말했다. [네 이놈! 듣기 좋은 말은 무엇이든 주워담는구나. 너에게 황하 연안의 수천 수백만 백성들을 맡겼다는데 강남에서 여자를 데리고 산천구경을 했다면서?] 위소보는 정극상을 보고 말했다. [정 공자, 정.... 어이구! 네 녀석은 나를 죽이려고 했지?] 정극상은 말없이 내력으로 그의 손목을 끊으려 했다. 위소보는 통증을 견디지 못해 땀투성이가 되어 청아를 보고 말했다. [청아 아가씨, 그래도 목숨은 살려줘야 하지 않겠소? 진회하에서 나는 그대를 박대하지 않았잖소? 나를 놓아 주시오. 나는 방주 노릇을 하지 않고 그대에게 넘겨주겠소? 어떻소?] 청아는 '흥!' 하며 말했다. [나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다! 죽이고 말겠다!] 위소보가 노하며 소리쳤다. [요 계집년은 지....] '아비'란 말이 나오기 전에 청아가 목을 졸라 숨도 쉴 수가 없었다. 홍안통은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눈을 뻔히 뜨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리 좋은 일 같지 않소이다. 그러니 우리 다섯 사람이 제각기 재간을 부려 내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다 쓰러뜨리고 이 녀석을 차지하기로 합시다.] 그는 말하면서 격산타우의 내공으로 위소보의 몸을 통해 상대를 넘어뜨리려 했다. 황룡대협도 뒤질세라 내력을 뿜어냈다. 정극상, 어린 거지, 청아는 내력이 조금은 모자랐지만 세 사람이 협력하니 그 힘도 상당했다. 위소보는 그야말로 중간에 껴서 애를 먹는 판이었다. 다섯 사람의 내력은 모두 그의 몸을 통과했다. 그는 수시로 몸이 더웠다 차가웠다 하고, 때로는 저렸다 가렵다 하여 절반은 죽다 살아났다. 위소보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기랄, 이 개종자 같은 놈들! 죽이려면 죽일 것이지, 이 어르신을 이렇게 못살게 굴건 또 뭐냐? 망할 자식들!] 갑자기 다섯 사람외 주위로 사람들이 우 하고 모여 들었다. 위소보는 살길이 트인 것 같아 몹시 기뻤다. 자기 부인 일곱 가운데 여섯(쌍아는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이 오고 구난사태, 의동생 우아대, 문아와 개방 장로 그리고 천지회 청목당의 현정도장, 전로본 등이 왔다.... 몇몇 시위들은 홍안통을 포위했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친애하는 여러 부인, 스승님, 여동생, 의동생, 형제들! 어서 이 위소보를 구해 주시오. 조금이라도 늦으면....] 구난스승이 말했다. [소보, 허튼 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는 홍안통을 보고 말했다. [소보를 놓거라!] 홍안통이 말했다. [못 놓겠소.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잡아갈 것이오.] 구난사태는 불진을 홍안통의 태양혈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도 놓지 않겠단 말이냐?] 홍안통이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못 놓겠다고 말했으면 못 놓지요. 죽으면 다 같이 죽고 어쨌든 위소보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오.] 구난사태는 홍안통에게 기이한 공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내력을 뻗어내면 모두 함께 죽어 버린다. 이렇게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돌연 대포 소리가 들렸다. 주위는 횃불로 대낮처럼 환히 밝혀져 있었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선(官船)들이 미산도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대포는 모조리 섬을 향해 포신을 들이대고 있었다. 깃발이 나부끼는 배에서 어전시위 총관 다륭이 소리 높이 외쳤다. [섬에 있는 자들은 들어라! 황상의 성지를 받들어 일등록정공 위소보 위작 나으리를 호위하노니 만약 그 어떤 자이건 그를 상하게 하면 이 미산도를 평지로 만들고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 <제 2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