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3章. 독비신니 구난사태의 등장 미산호 한 가운데 떠 있는 미산도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룡교 교주 홍안통은 넉 자 네 치나 되는 기다란 수염으로 위소보의 오른쪽 다리를 휘감았고, 인피면구를 쓴 황룡대협은 위소보의 왼쪽 다리를, 폐병쟁이 어린 거지 관의호는 위소보의 왼팔을, 정극상은 괴상한 무공으로 위소보의 나머지 오른팔을 틀어 쥐고 내력을 가했다. 게다가 위소보의 목은 청아가 팔에 내력을 넣어 있는 힘껏 조르고 있었다. 이 다섯 사람이 서로 잡아당기면 위소보는 당장이라도 다섯 토막으로 찢겨 나갈 형편이었다. 위소보가 이처럼 험악한 곤경에 처하기는 조정에서는 물론 강호에서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한 이처럼 고강한 상대를 일시에 만난 적도 없다. 위소보는 갖은 위험이 닥치더라도 매번 매끄러운 세치의 혀로 벗어났지만 오늘만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상대 다섯 사람이 각기 자기의 요해를 틀어쥐고 있으니 세 치 혓바닥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록 그의 부인들과 스승님, 사형 그리고 친구들이 그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독을 깰 수 없는지라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이처럼 백척간두의 위기의 순간, 돌연 포성이 울리며 관병들이 물샐틈없이 미산도를 포위하고 어전시위 다륭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미산도를 평지로 만들겠다는 그 호통소리는 뭇 사람들의 귓전을 뒤흔들었다. 위소보에게는 구사일생의 목소리였다. 그는 크게 기뻐 속으로 외쳤다. (야! 그래도 이 어르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소황제뿐이로구나. 다륭 형님의 저 호령소리에 이 위작 나으리의 살 길이 트이는구나!) 청아는 위소보가 안도하는 기색을 보고 냉소했다. [흥! 웃어? 원병이 도착했다고 좋아하기는 아직 이르지. 대포를 쏠 배짱이 있으면 쏘라지! 나는 네 놈과 함께 동귀어진(同歸於盡)하면 그만이야.] 그녀는 눈에서 한광(寒光)을 뿜어내며 결연하게 말했다. [이 아가씨의 운명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염라대왕전에 가는 것이라면, 저는 응당 여러분들을 위해 먼저 가야지요. 당신들이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아요.] 위소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청아의 잔인한 눈길이었다. 위소보는 간이 녹두알만 해졌다. (청아, 요 계집년은 악랄하기 그지없는 년이라 한다면 하는 년이다. 이 어르신을 죽이자고 맘먹으면 개미 한 마리 죽이기보다도 쉬울 것이다. 사람이 급하면 나무 위로 기어 오르고 개는 담벼락을 넘는다고 하는데 이년이 동귀어진을 작정했으니 오늘은 꼼짝없이 죽고 말겠구나.) 위소보는 억지로 웃으며 청아에게 말했다. [나는 믿소이다. 정말 믿지요. 하지만 그 어떤 사람과 함께 죽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지만 청아 아가씨가 나와 함께 동귀어진 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외다.] 청아가 냉소하며 말했다. [명망이 자자하신 위작 나으리와 함께 죽는데 미천한 계집이 밑질 게 있나요?]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청아 아가씨, 좀더 생각해 보시구려. 저 사람은 수염이 넉 자 네 치나 되니 원래 죽을 날이 멀지 않았고, 저 폐병쟁이는 맨날 쿨럭거리는 꼬락서니가 살기보다 죽는 것이 편안할 것 같고, 또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저 늙다리는 어차피 죽으면 붉은 천이 얼굴에 들씌워질 것을 알고 미리 저러고 다니니 죽은 것이나 진배없고.... 그러나 그대는 꽃봉오리가 방금 핀 것처럼 아리따운 미인인데 어찌 저 늙어빠진 귀신, 앓는 귀신, 얼굴 가린 귀신들과 함께 저승으로 가려 한단 말이오?] 위소보는 자고로 여인들이 귀신을 무서워한다는 심리를 이용하여 귀신을 주워섬겨 청아를 놀라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청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귀신이면 귀신이지 무슨 얼굴을 가린 귀신, 앓는 귀신, 늙어빠진 귀신 할 게 있나요? 나는 먼저 당신을 허튼 수작을 하는 귀신으로 만들어 버리겠어요. 정 공자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정 공자는 대만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이다. 정극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위소보는 화가 치밀어 속으로 욕을 해댔다. (제기랄 년, 세상에 둘도 없이 얌전한 여자라 할지라도 정부가 생기면 음부요부(淫婦妖婦)가 되는 법이구나! 이건 눈이 뒤집히니 정말 자기 남편까지도 죽이려는구나!) 순간 위소보의 오른손을 통하여 간헐적으로 강력한 경력(勁力)이 밀려들어 가슴 속의 혈맥이 터질 것 같았다. 위소보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정극상이 내력을 가해 위소보를 죽이려 했다. 청아도 팔에 힘을 가해 위소보의 목을 더욱 졸랐다. 위소보는 그야말로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이 붉어지며 눈알이 튀어나오고 혀도 점점 내밀어졌다. 생사의 기로에서 투항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으나 청아가 목을 조르고 있는지라 그 말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이런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뿐이었다. (이놈들, 두고 봐라.18년 후에 이 어르신께서 과연 영웅호걸이되는가 안 되는가.) 바로 이 때 두 다리와 팔로부터 세 갈래의 또 다른 기운이 정극상과 청아에게로 밀려나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완맥이 떨리자 위소보를 질식시키고 헐관을 터칠 듯한 내력이 상대의 내력에 의해 밀려나는 것 같았다. 원래 홍안통, 황룡대협, 어린 거지 세 사람은 어떤 심사에서인지 위소보를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내력으로 청아와 정극상의 내력을 되받아 친 것이다. 청아가 이것을 알고 대노하여 욕했다. [어느 놈이 암산(暗算)을 가해 이 놈을 살리려고 한단 말이냐? 그래 이 놈이 네 놈들의 애비나 된단 말이냐?] 홍안통이 말했다. [노부는 위소보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네.] 황룡대협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개방은 영웅의 호기를 숭상하는 방파인데 아가씨는 어찌하여 그리 가볍게 사람을 죽이려 하오? 개방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외다. 위소보가 용서받지 못할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취할 것까지는 없지 않소?] 관의호가 정중하게 말했다. [사매, 사태가 엄중할수록 멀리 내다보아야 하는 법이오.] 청아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호오, 너도 도박판에 흥정을 붙일 줄 아는구나.] 압박하던 내력이 사라지자 위소보는 반지르르한 입을 가만 두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 말씀이 지당하고 말고. 당연히 눈을 아껴 멀리까지 내다봐야지.] 청아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또 허튼 소리를 늘어 놓는군. 이 아가씨가 언젠가 네 놈의 개만도 못한 명줄을 끊어 놓고야 말겠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것도 좋지요. 미인의 손에 죽으면 죽어도 풍류 귀신이 될 테니 말이오.] 홍안통이 뭐가 뒤틀렸는지 코웃음치고 나섰다. [아가씨, 이 위가 놈이 앞으로 또다시 허튼 소리를 한 마디라도 한다면 마음대로 죽여 버리시구려. 노부는 더 이상 위소보를 도와주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위소보를 도와주는 것도 막아 나설 것이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늙다리는 푸른 모자 쓰기가 겁나는 모양이지. 이 어르신에게 농지거리조차 못하게 하다니. 하지만 이 놈의 무공은 고강하단 말이야. 앞으로 청아의 후원자가 된다면 이 화냥년이 언제든지 나를 쉽게 죽이겠는걸. 그러면 이 위소보는 영락없이 위사보(韋死寶)가 되겠구나.) 현정도장이 구난사태에게 말했다. [사태(師太)께서 이번 일을 처리하십시오.] 구난사태는 무공이 고강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세속을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나서서 처리할 수 없었다. 또한 자기 제자가 마두들의 손아귀에 걸려들어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를 위태로운 형편에 처해 있는지라 적잖이 근심이 되어 대답을 회피했다. 홍안통은 내력이 고심한지라 현정도장의 말을 못 들을 리 없었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이 현정 땡초 놈아! 가만 있지 못해!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지 말고.] 그리고 위소보에게 말했다. [네놈도 살고 싶으면 어서 저 배에 있는 놈들에게 손 하나 꼼짝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소리치거라!]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두들 이렇게 나를 꼭 붙잡고 있는데 어찌 소리를 지를 수 있단 말이오? 나를 놓아주면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배에서 포를 쏘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홍안통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나. 우리를 세상 모르는 어린애로 생각하느냐? 그거야 현정 땡초 놈이 소리치면 되지.] 현정도장은 홍안통이라는 자의 악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따라서 그를 몹시 꺼려했다. 그는 아주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리가 이렇게 먼데 위 동생의 내력으로 소리친다 한들 배에서 들을 수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만청 오랑캐 놈들이 제 말을 듣겠습니까?] 홍안통이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듯했다. 그가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배에서-- 너희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 너희들의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이니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라.] 말하는 사람은 체구가 훤칠한 우아대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무공능수들은 우아대를 거의 알지 못했고 또 그의 무공 내력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처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별로 심후한 내력으로 소리를 치는 것 같지 않아 크게 주의하지 않았다. 우아대의 소리는 느릿느릿하게 전해져 나갔는데 여음은 배에 맞아 다시 되돌아 쳤다. 돌연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혈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내공이 약한 위소보 같은 수준의 몇몇 사람들은 현기증이 났다. 당대 무림 능수인 홍안통, 구난사태, 황룡대협 등도 속이 울렁거리며 진정하기 어려웠다. 위소보를 붙잡았던 사람 가운데 청아는 내력이 약하여 손을 놓치고 말았다. 정극상은 위소보의 오른손을 잡고 있었지만 청아가 넘어지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청아를 부축했다. 두 사람이 손을 놓자 어린 거지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이 들어 손을 놓았다. 오직 위소보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홍안통과 황룡대협뿐이었다. 이 때, 두 사람은 동시에 동 뒤에서 장풍이 짓쳐들어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 장풍은 흉흉한 가운데 음과 양이 섞여 있었다. 양기는 굳셌고 음기는 한랭했다. 홍안통과 황룡대협 두 사람은 모두 당대 무학의 대가였지만 내심 흠칫하며 생각했다. (천하에 이런 장력(掌力)도 있단 말인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독비신니(獨臂神尼)의 무공은 정말 그 정진(精進)함이 비할 바가 없구나.) 두 사람은 돌아서며 들이닥치는 일 장을 맞받았다. 우아대외 호령 소리에 두 사람의 내력은 벌써 많은 손상을 받은 상태였다. 두 사람이 위소보를 놓고 돌아서서 맞받아 치자 위소보의 위험은 해소 되었다. 세 사람이 서로 치고 막고 하는 순간 홍안통, 황룡대협은 그제서야 그가 독비신니 구난사태가 아니라 삼십여 세 되는 사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사나이는 공손히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본인은 우아대라 하오. 과거 두 분을 뵌 적이 있소이다.] 황룡대협은 비교적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의 신분을 알지 못하므로 경솔하게 말하지 않았다. 거만한 홍안통이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한 어투로 뇌까렸다. [우아대? 강호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위소보는 우아대가 우세를 점한 것을 보고는 홍안통과 황룡대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재빨리 구난사태와 현정도장 곁으로 달려갔다. 위험은 이미 지나갔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홍 교주, 당신은 너무도 견식이 짧구려. 이 분은 명성이 자자한 강호의 벽력장 우아대이며 나와는 결의 형제라오. 세 분은 서로 알고 지내도록 하시지요.] 홍안통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벽력장? 못 들어봤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아대의 손에서 내력이 밀려나왔다. 배산도해(排山倒海)의 일 장이었다. 홍안통은 입을 다물고 온 힘을 다해 응수했다. 홍안통과 황룡대협은 합공으로 우아대의 공세를 막고는 있었으나 그들의 내력은 둘이 합해야 겨우 우아대의 내력에 견줄 수 있었다. 기실 우아대의 무공은 그들보다 더 월등한 것은 아니었다. 우아대는 한 차례 외침성(一吼之力)만으로도 이삼류 무림 인물들을 얼마든지 상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 황 두 사람 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약 상대가 무방비 상태였다면 우아대가 사자후(獅子吼)의 고심한 내력을 펼쳐 두 사람에게 내상을 입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격상케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정도장은 우아대의 무공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처음 황막한 동굴에서 우아대가 청아를 붙잡을 때 현정도장은 암산을 해서 겨우 그를 물리쳤다. 또 서천천을 사주하여 우아대와 겨루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몇 번의 겨룸에서는 겨우 천지회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현정도장은 이제서야 우아대가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님을 느꼈다. 이 때 다륭은 배에서 높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어서 위작 나으리를 보내시오. 조금만 늦으면 대포가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잿더미가 된 후에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위소보는 '잿더미'라는 말에 겁이 나서 재빨리 소리쳤다. [다 형님, 어쨌든 대포는 쏘지 마십시오.] 다륭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위작 나으리, 별일 없습니까?] 위소보가 대답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다 형님, 제가 곧 갈 테니 기다리십시오!] 위소보는 구난사태에게 나직이 말했다. [스승님, 이 섬은 너무 작고 관병들의 대포는 위력이 대단합니다. 물론 스승님의 무공은 고강하시니까 만청 오랑캐 놈들도 두렵지 않겠지만 이 제자는 어쩐지 걱정이 됩니다. 제자가 배에 올라가서 정황을 잘 살핀 연후에 처신하는 것이 나을 듯싶은데 스승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위소보는 입으로는 모두 스승을 위해 말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도 많지만 적수들도 다 와 있으니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적수에게 붙잡혀 사(死)소보, 무두(無頭)소보가 될 것이다. 어쨌든 다륭 형님이 있는 배로 가야 한다. 거기에 가면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많을 테니 나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박도 할 수 있을 테고.... 지존보라도 나오면 만사대길이 아니겠는가?) 구난사태는 생각했다. (소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여기에 온 사람들이 모두 위소보를 잡으러 왔는데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없다. 배로 가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원한이 없으니 큰 문제야 없겠지. 홍안통과 황룡대협은 무공이 고심하니 만청놈들과 맞붙는다 해도 우리가 밀릴 것 같지는 않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소보, 나를 따라 오게나.] 그녀는 위소보를 데리고 호숫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위소보에게 주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보야, 이 종이는 홍영이 너에게 주라고 한 편지이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급한 김에 땅바닥에 내버려둔 도홍영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물었다. [고모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구난사태가 말했다. [홍영은 조인의 대성장에 맞아 상처롤 입었지만 생명은 위험하지 않단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에는 소(小)자를 쓰고, 그 아래에 둥그런 심장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아래에는 '사십이'라고 썼다. 위소보는 감동했다. (고모는 내가 글을 모르는 줄 알고 '소'자를 써 놓았구나. 위소보 할 때 '소'자는 어쨌든 이 어르신도 알지. 아래에 심장을 그려놓은 것은 나더러 조심하라는 뜻이고, '사십이'는 사십이장경을 말하는데 '장경'이란 두 글자는 내가 모를까봐 쓰지 않았는지 아니면 비밀이 누설될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고모는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갖고 오다 조가 놈에게 당했구나. 내 필히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구난사태가 말했다. [소보야, 고모의 편지 내용을 이해하겠느냐?] 위소보는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스승님, 안심하십시오. 고모께서 이처럼 저를 생각해 주시는데 제가 그것을 모른대서야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구난사태는 위소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도홍영은 원래 구난사태를 시중 들던 궁녀였다. 나라가 망하여 구난사태가 황궁을 떠난 후 그녀는 흘로 청조 황궁에 남아 묵묵히 반청복명의 사업을 암암리에 도왔다. 그녀는 아주 충직하여 구난사태는 그녀를 자매처럼 대했다. 그러나 구난사태는 출가한 사람이었기에 속세의 애증을 말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위소보가 도홍영을 이처럼 친절히 대해주자 구난사태는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것보다 더 기뼜다. 그녀는 원래 위소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눈물을 보고 깨끗이 떨쳐버렸다. 구난사태가 말했다. [도홍영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편지를 전한 것을 보면 조정에서는 소보 너에게 어떤 의심을 품은 듯하구나. 소보야, 그러니 몸조심해야 한다. 이 섬의 일은 나와 현정도장이 맡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위소보가 말했다. [예,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제자가 불능하와 더 모시지 못하오니 스승님께서도 조심하시기를....] 구난사태가 탄식하듯 읊조렸다. [나라 잃은 백성은 마음이 초목과 같아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구나!] 위소보는 스승님이 이전에는 얼마나 위풍이 있고 존경을 받던 어르신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강호를 유랑하면서 어느덧 머리에는 흰 서릿발이 흘러 내린다 생각하자 마음 가운데 슬픔을 참을 수 없어 그만 소리쳤다. [스승님, '사십이장경'....] 구난사태는 눈을 크게 떴다. [사십이장경이라니?] 위소보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사십이장경의 내력을 스승에게 알려 그녀를 도와 보물을 파내 반청복명에 쓰려고 생각했다. 그는 비밀을 털어 놓으려 작정했으나 홀연 생각을 뒤집었다. (소현자는 나에게 잘 대해 주지 않았던가? 내가 만약 스승님을 모시고 녹정산에 가서 그 보물을 파내게 되면 만청의 용맥을 끊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소현자는 황제 노릇도 못할 텐데. 보니까 황제는 산속에 들어가 중노릇이나 하던데. 그렇게 되면 나는 너무도 그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제기랄 이 위소보는 사소한 일로야 이럭저럭 친구들을 속인다지만 명맥을 끊는 일만큼은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사십이장경에 대한 일은 스승님께서 부탁하신 일이니 이 제자는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구난사태는 묵묵히 듣다가 말했다. [만청이 입관한 후 쇠퇴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구나. 용맥(龍脈:천자의 맥)이고 뭐고 하는 것도 모두 사람들이 지어낸 말들이니 진실된 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강희의 선정이 백성에게는 도움이 되는 듯하구나.] 구난사태는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이자성(李自成)이 궐기해 일어나고 대간신배 오삼계가 만청 병사를 이끌고 명조를 멸망시킨 데 대해 줄곧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고 있었다. 구난사태는 나라가 망하고 왕조 또한 몰락하자 불교에 귀의하였다. 강호를 떠돌며 명조(明朝)의 갖가지 세금과 폭정에 대해 민간에서 많은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 들었다. 그리고 청 왕조가 건립된 후, 더욱이 강희 황제가 집정하면서는 여러 가지 세금을 경감하고 무역을 장려하고 또한 황하를 다스리는 등 민생에 관계되는 일에 힘을 기울여 조정이 점차 안정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나날이 나아져 가는 것을 친히 목격했다. 이는 명조 말기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던 형편과는 현저한 대비를 이루었는 바 구난사태의 반청복명 심정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위소보는 아주 기뻤다. [스승님, 소황제의 용맥을 끊지 않으시겠다면 더욱 좋지요. 제가 중간에서 성화를 받지 않게 될 테니 말입니다. 정말 여간해서 사람노릇 하기 어렵습니다.] 사제지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위소보의 여섯 부인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가왔다. 건녕공주가 다짜고짜 위소보의 귀를 틀어쥐고 욕을 했다. [죽일 놈의 소계자, 썩을 놈의 소보, 쌍아를 꼬드겨서 여기로 도망쳐 방주 노릇을 한다면서? 그래 우리 열두 개 눈은 다 멀었는 줄 아느냐?] 위소보는 고개를 돌려 매끄럽게 공주의 손에서 빠져 나와 공주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요 구린내 나는 계집, 이 어르신의 귀를 떼서 술안주에 쓰려고 그러느냐?] 공주가 소리쳤다. [감히 나를 때렸어!] 위소보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때릴 뿐만이 아니라 양주 기생원에 팔아 기생질도 시킬 수 있다!] 공주가 분해서 울며 말했다. [그럼 좋아. 나를 이처럼 업신여기니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어. 우리 함께 북경으로 가서 태후 마님과 황제 오라버니를 만나 시시비비를 따져 보자고.] 위소보가 말했다. [네 년이 그들 앞에 가서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이제 나를 더 화나게 하면 이 어르신은 태후 장모고 황제 처남이고 모두 안 볼 것이다!] 장모와 처남을 모두 안 보겠다는 것은 공주 또한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건녕공주는 새파랗게 질렸다. [좋아, 데가 태후를 모독하고 황제를 모독해? 황족을 모욕하면 구족(九族)이 죄를 받는데도....] 공주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위소보가 노한 것을 보고 무서워 더는 말을 못 했다. 한쪽에 서서 연신 씩씩대기만 했다. 소전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모두들 그만하세요. 지금 일이 까다롭게 되었어요. 소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말해 보세요?] 위소보는 암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태후께서 오라고 하셨는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가야 할 것 같소. 쌍아는 그날 나와 함께 소금장사꾼들에게 납치되었다오. 나는 개방 놈들에게 팔렸는데 쌍아는 누구에게 팔렸는지 알 수가 없다오. 소전, 당신들과 쌍아가 사이좋게 지낸 정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은 그녀를 찾아야만 하오.] 소전은 좀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당신은 일단 북경으로 돌아가시고 쌍아의 일은 우리가 남아 찾아보도록 하지요. 소금장사꾼들에게 부탁하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더욱이 여기에 구난사태께서도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세요.] 공주는 소보를 따라가 황액낭을 만나 따져보고 싶었으나 위소보의 기색이 평소와는 달리 예사롭지 않고 또 다른 부인들이 자기의 생각과 다르므로 더 말하지 않았다. 다륭은 배에서 위소보를 끌어안고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가 기어이 위작 나으리를 찾아냈으니 하늘이 도우신 모양입니다.] 또 위소보의 귀에 대고는 이렇게 물었다. [위 동생, 그간 무고했는가?] 위소보도 그의 귓전에 대고 다정스럽게 말했다. [형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륭이 말했다. [정말 다행스런 일이지. 위 동생, 근보가 황상께 올린 상소에서 동생의 남방 시찰 정황을 보고하였다오. 황상께서는 많이 우려하시고 또 동생이 강호에서 당한 일들을 걱정하셨다오. 그래서 우리를 파견하여 필히 찾아오라 하셨소.] 그러나 위소보는 마음 한 구석에 의문이 남았다. (이 사람들이 내가 이 미산도에 있는 것은 어찌 알았으며 또 황상은 왜 이토록 많은 배를 동원하여 나를 찾았을까?) 위소보는 더 묻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았다. [형님, 술이 있소? 이 동생은 며칠 동안 개방 놈들에게 시달림을 받다보니 무얼 좀 먹어야 할 것 같구려.] 다륭이 시위들에게 소리쳤다. [술을 가져 오너라! 그리고 배를 출발시키도록 하라!] 장강년, 조제현 동 어전시위들이 와서 문안을 했다. 위소보는 이들을 일일이 만나보고 속으로 놀랐다. (소황제가 이 매부를 위해 많은 애를 썼구나. 너무 고마운데!) 위소보가 또 우스갯소리를 했다. [오랫동안 형제들과 도박을 하지 못했더니 손이 근질근질하구려. 조금 있다가 한번 마음껏 놀아 보잔 말이오. 형제들의 솜씨가 얼마나 늘었는지 보게.] 많은 시위들이 입이 찢어지도록 좋아했다. 위소보는 손이 커서 그와 도박을 하면 잃더라도 위소보가 밑천을 대주고, 따면 모두 자기 주머니에 들어가니 모두 한밑천 톡톡히 벌 수 있는 기회였다. 대포 소리가 울리자 수십 척의 배가 닻을 올리고 일제히 출발했다. 다륭은 배에서 연회를 베풀어 위소보를 위로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시위들은 흥에 겨워 도박판을 벌였다. 배는 이틀이 걸려서야 미산호를 벗어났다. 배는 운하를 따라 계속 내려갔다. 이날 밤 위소보는 은은히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다리미로 다려도 펴지지 않는 주름살, 가위로 베어내도 베어지지 않는 이내 시름....] 그 노래 소리는 남방 어부의 아낙데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그 노래 소리는 귀에 아주 익었다. 위소보는 그 노래 소리에 마음이 끌려 앞에 놓인 돈을 다륭에게 밀어 주면서 말했다. [다 총관, 나를 대신해서 선을 쥐고 노시구려. 나는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오겠소.] 밝은 달이 중천에 휘영청 걸렸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났다. 강 위에 한 척의 나릇배가 마치 버드나무잎이 미풍에 날리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뱃머리에는 꽃같은 여자가 홀로 앉아 구슬프게 어부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 소리는 슬프고도 아늑하여 가슴을 파고 들었다. 위소보는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문아!] 배에서 소녀의 '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나룻배가 다가왔다. 위소보는 재빨리 배에 올랐다. 관선의 보초 시위들은 위작 나으리의 그런 풍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야밤에 그것도 젊은 여자가 탄 나릇배에 올라타자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고 관여하지 않고 입을 삐쭉하고 돌아섰다. 잠시 후, 그 나룻배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전 시위들은 모두 생각했다. (위작 나으리는 너무도 성미가 급하구만. 멀리 나가서 남들 눈이나 피할 것이지!) 조금 지나자 배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한 어전시위가 둘러보고 그만 놀라서 외쳤다. [큰일났소! 어서들 와 보시구려.] 나룻배가 뒤집혀지고 여자와 위소보가 온데간데 없었다. 다륭은 급히 달려나와 배들을 사방에 띄우고 흩어져 찾도록 명령했지만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며칠 동안을 찾았으나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 없어 다륭은 하는 수 없이 북경으로 황제를 배알하러 갔다. 원래 일은 이렇게 되었다. 위소보가 배에 올라 문아를 부르자 문아가 냉소를 하며 두 발을 굴렀다. 그러자 삽시간에 나룻배는 뒤집혔다. 위소보가 물속을 헤매다가 겨우 머리를 수면에 내밀고 소리치려 할 때 눈앞에 시체처럼 생긴 사나이가 상반신을 드러내 놓고 서 있었다. 위소보가 '으악! 귀신이닷!' 하고 소리 치려는 찰나, 다시 한 번 살펴보니 그는 다름 아닌 정극상이었다. 위소보에게 정극상은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다. 정극상은 입으로 물을 뿜어내 위소보의 이마 인당혈을 쳤다. 위소보는 그대로 혼절하여 물속에 가라앉았다. 위소보는 눈을 뜨자마자 당장에 문아를 욕했다. [더러운 계집년! 이 어르신의 눈이 멀었지. 그래도 나는 네 년을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등 뒤에서 칼로 이 어르신을 찍는단 말이냐? 더러운 정극상과 결탁해서 남편을 죽인단 말이자. 나는 네 년을 더 이상 여동생으로 여기지 않겠다. 네 년을 붙잡아 먼저 옷을 벗기고 내 계집으로 만든 다음 양주 여춘원 우리 어머니에게 맡겨 하루에 스무 명의 사내들을 맞아들이게 하겠다!] 그 때였다. 눈앞이 환해지더니 난데없이 청아가 걸어와 웃으며 말했다. [위 방주 나으리, 무고하신가요?] 갑자기 빚을 보자 위소보는 실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제서야 주위 정경을 살필 수 있었다. 그 곳은 낮은 초막이었는데 초막 안에는 구덩이가 둥그렇게 패여 있었고 지푸라기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문이 지면에 닿아 있었다. 청아는 호호 웃으며 문어귀에 서 있었다. 위소보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낭패로군. 이 여요괴를 만났으니 재수가 없어도 정말 없구나!) 정말 모를 일이었다. 분명 문아의 나룻배에 올라탔는데 어찌하여 숨어 있는 정극상한테 끌려 왔는지, 또 어떻게 이 찰거머리 같은 청아의 손에 다시 잡혔는지, 위소보는 일어서려 했지만 혈도가 짚혀 꼼짝도 못했다. 다행히 입은 움직일 수 있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사람을 짚더미에 던져 놓다니 이 어르신이 반죽음이 된 돼지꼴이군! 그래 기분이 좋소?] 청아가 위소보의 옆에 앉으며 이죽거렸다. [평소 금의옥식(錦衣玉食)하며 많은 계집종과 부인들에 둘러싸여 시중을 받으시고, 어전시위들의 호위까지 받으시던 위풍당당한 위작 나으리께서 오늘 짚더미에 누워 있는 걸 보니 그 점잖으신 모습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네요.]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이 어르신은 정말 재수가 없구나. 언제나 이 어르신은 요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이야. 그래도 고양이 쥐 생각하듯 자비스러운 말투로군?) 위소보는 또 웃으며 말했다. [체면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자고로 여인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한다오. 지옥으로 갈지라도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간다면 나는 달갑게 받아들인다오.] 청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내 동생이 네 놈을 그렇게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네 놈의 혓바닥은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니까. 하지만 이 아가씨는 구역질이 나서 못 견디겠다.] 청아는 말하면서 위소보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섬섬옥수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삽시에 위소보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려워 참지 못하고 애걸했다. [청아 아가씨, 이러지 마시오. 더 그러면 이 어르신은 정말 참을 수 없다오. 계속 그러면 이 어르신은 당신을 여편네로 삼을 것이오.] 청아는 음탕하기 그지 없는 말을 들었음에도 성도 내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허튼 소리를 잘 하는군요. 결혼 제당(祭堂)에도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의 여편네라는 말을 한단 말이냐?] 청아는 아직까지 수줍음을 타는 어린 나이의 처녀인지라 흉악하긴 해도 천진스러웠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요 계집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위소보의 주책없는 주둥이가 움직였다. [결혼 제당에 가지 않으면 여편데 노릇을 못 한단 말이오? 천하에 결혼 제당에 가지 않고 부부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청아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나는 믿기지 않는데. 그럼 문아와도 부부간이란 말인가?] 위소보는 성을 내며 말했다. [문아 여동생 얘기는 꺼내지도 마! 이 어르신이 다행히도 그녀와 부부가 되지 않았기 망정이지 그 년은 제 남편을 죽이고도 남을 년이야. 이 어르신이 그 년의 손에 죽을 수야 없지.] 청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길래 강호 사람들은 위소보를 호색한이라고 그러는구만. 방금 전까지 달콤하게 오라버니 여동생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욕지거리를 퍼붓는단 말이냐?] 위소보는 청아의 비웃는 말을 듣고도 웃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언니를 보니까 여동생도 정이 떨어져 그런다오.] 청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야 있나요? 어떤 교언령색이라도 나는 네 말을 못 믿겠는데.] [믿지 못하겠다고? 청아 아가씨, 당장에 이 혈도를 풀어 주시오. 그러면 내가 믿도록 해주지.] 위소보는 불시에 정에 넘친 눈길로 청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곰곰이 궁리를 했다. (여자를 꼬드기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지. 요년이 낚시 바늘에 코를 꿰이면 혈도를 풀어 주겠지. 그렇게만 되면 이 어르신은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청아는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생각하세요? 내가 무엇 때문에 문아를 찾아가도록 혈도를 풀어주겠어요? 혈도만 풀리면 당장 그 계집을 찾아 나설 텐네, 그런 당신을 믿고 기다리라고? 호호호, 위 방주께서는 싸우는 무공은 시원찮아도 개새끼처럼 신행백변이 있으니.] 위소보가 말했다. [나는 한 번 하지 않는다고 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내 말에 추호라도 거짓이 있다면 나는 어릴 적부터 나쁜 놈이고 후레자식이오. 또 나의 에미를 기생이라 욕해도 할 말이 없다오.] 위소보는 이렇게 말해 놓고 자기도 우스웠다. (나는 원래 나쁜 놈이고 후레자식이고 어머니도 기생인데 설사 그런 말을 듣는다고 무에 억울하겠는가?) 청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몰상식한 말로 맹세를 하세요? 나는 당신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일부러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렇듯 절박한 심정으로 맹세해도 믿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지.] 청아가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내 말을 들으면 믿어 드리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요년 청아가 그 일을 하자는 게로구나. 그거야 어려울 것 있는가? 이 소백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로부터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청아는 수줍어하며 바닥에 깔아 놓은 짚단 속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돌걸상에 이리저리 그어대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청아 아가씨, 어서 말해 보구려. 나는 여태 당신처럼 아름다운....] 그는 돌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돌걸상이 지푸라기에 잘려 돌가루가 푸석푸석 떨어지고 있지 않는가? 위소보는 입을 딱 벌리고 아무말도 못 하고 생각했다. (이 어르신의 보배 같은 비수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다니! 지푸라기로 돌걸상을 자르다니 이건 요술이 아닐까?) 위소보는 입을 다물었다. 청아는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이 지푸라기로 발과 손의 힘줄을 끊어 놓은 다음 혈도를 풀어주면 어때요?] 위소보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다음에라면 혈도를 풀어 줄 필요가 없다오. 사지를 다 끊어 놓으면 걷지도 못하고 노름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 것이오.] 청아는 여전히 지푸라기를 걸상에 대고 긁었다. 걸상은 매우 깊숙이 패이고 돌가루도 점점 많아졌다. 위소보는 볼수록 몸서리가 쳐졌다. 청아는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 드릴까요?] 이렇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지푸라기로 위소보의 목을 긁으려 했다. 위소보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청아 아가씨! 무슨 일이건 흥정을 해야 한다는 말을 못 들어 보았소?] [흥정이라니? 나는 그런 거 몰라요.] [그렇다면 이 어르신이 가르쳐 주지. 흥정이라 함은 값을 올리고 깎는 것이오. 이를테면 어떤 물건을 당신이 백 냥을 받겠다고 하면 나는 한 냥 주겠다고 하고, 또 당신이 천 냥을 받겠다고 하면 내가 백 냥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라오.] [본론만 말하세요.]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 적당한 선에서 흥정이 성사되는 것이라오.] 청아가 말했다. [이 일은 흥정과는 달라요. 두 가지 값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위소보는 또 울상을 짓고 말했다. [청아 아가씨, 그러지 말고 용서해 주구려. 다른 요구라면 뮈든@다 들어주겠소....] 청아는 좀 망설이다 말했다. [소보와 나의 여동생의 사이를 생각해서 제가 좀 양보하지요. 그런데 듣자하니 커다란 장사를 하셨다죠? 380만 냥짜리 장사 말이에요!] 이 말을 들은 위소보는 자기 일생 가운데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생각되어 말했다. [맞소이다, 맞아. 대만의 정....] 그만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생각했다. (청아가 왜 이 일을 들추는 것일까? 정극상 그 놈을 위해 복수하자는 것일까? 낭패로군. 아무튼 그 정극상이란 놈, 예쁜 계집년 홀리는 재간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나. 그는 이 어르신의 처 아가를 이렇게 꾀어냈겠지. 그리고는 아가 년을 사주하여 이 어르신을 죽이려 했었지. 그래도 이 어르신의 지략이 제갈지량과 관운지장을 능가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진작 푸른 모자를 쓰고 귀신이@되었을 거야.) 위소보는 청아를 보고 생각했다. (정극상 그 놈이 두 번이나 청아를 구해주었는데 둘 사이는 어떤@관계일까? 청아가 만약 남편의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날이면@이거 맞서기 어려울 텐데.) 청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얼 생각하느라고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이 없지요? 갑자기 귀가@멀었나요?] 위소보가 말했다. [아! 그 380만 냥 말이오? 다 지나간 일인데 지금 또 꺼내서 무얼 하겠소?] [우리도 그 때처럼 흥정을 해보면 어떨까요? 백만 냥씩이요.] 위소보는 기가 막혔다. (제기랄 년, 네 년이 나처럼 하겠다는 말이냐? 백만 냥에 우리 어머니 목숨을 팔겠다고? 그렇게 따지면 일곱 부인의 몸값이 7백만@냥, 아들 둘이 2백만 냥, 사랑스러운 딸, 아니 계집년이니까 헐값으로 50만 냥 치고 이걸 모두 합친 가격이 천오십만 냥이 아니냐? 아이구, 그 많은 돈을 내가 어디 가서 얻어온단 말인가? 여태껏 모은@재산을 다 팔아도 어림 없겠는데.) 생각할수록 간담이 서늘해지고 놀라웠다. 청아는 이 열 한 사람의 몸값으로 일천 오십만 냥이나 되는 돈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었다. 청아가 말했다. [위 방주 나으리, 그렇게 하면 공평하지 않겠어요?] 청아는 그의 심리를 환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공평하지, 공평하고 말고.... 그런데 소전은 원래 신룡교 교주@홍안통의 부인이었고, 공주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의 처로서 과부였다오. 재가할 때 제가끔 백만 냥의 몸값을 지불했는데 지나치게@비싼 것 같소이다.] 청아가 말했다. [그럼 꼬리는 떼어내고 모두 천만 냥이면 어떻겠어요?] 위소보는 울상을 하고 말했다. [값은 공평한데 이 위소보처럼 잔돈푼이나 만지던 사람이 어디@가서 그 많은 돈을 구해 온단 말이오?] 청아가 말했다. [방주 어르신은 참으로 겸손하시군요. 위 방주님의 통이 크다는@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강호에 어디 있습니까? 개방의 방주 노릇을@하는 처지에 그만한 돈도 구하지 못하겠어요?] 위소보는 문득 깨달았다. (요년은 내가 방주 자리를 빼앗았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위소보가 재빨리 대답했다. [청아 아가씨, 이 어르신은 방주 자리를 천만 냥에 팔겠소. 아주@공평한 흥정이지 않소? 그렇게 하면 손해보는 쪽도 없을 것 아니오?] 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돈이 필요하지 방주자리는 관심도 없어요.] 위소보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청아는 지푸라기를 위소보의@배에다 대면서 말했다. [듣자하니 위 방주 나으리의 보의는 창칼도 뚫지 못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한번 시험해 볼까요?] 그녀가 지푸라기를 그의 몸에 대자 위소보의 옷은 가위로 자른@것처럼 베어져 속에 입은 보의가 드러났다. 비록 지푸라기였지만@뱃가죽이 이따금씩 아파왔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청아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구나. 만약 이 어르신이 보의를 입지@않았더라면 이 어르신의 목숨이 붙어 있을까 의문스럽구나.)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청아 아가씨, 잠깐만! 내 바지가 다 찢어지면 아가씨가 보기에@너무 민망하지 않겠소?] 청아는 아직 처녀었으므로 안색이 붉어지며 퉤! 침을 뱉고는 잡고 있던 지푸라기로 위소보의 허벅다리를 긁어 놓았다. '악!' 하는@비명소리와 함께 그의 허벅다리에서는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위소보는 죽는 것도 겁이 났지만 고통스러운 것도 겁이나 돼지@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다. [요 더러운 년, 제 남편을 죽인단 말이냐? 아이구, 아파 죽겠네.@나는 죽네....] 청아는 아주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시원하지? 천만 냥을 내놓지 않으면 네 놈의 왼쪽 다리에@석 줄, 오른쪽 다리에 석 줄, 좌우 팔에 석 줄, 얼굴 좌우에 석 줄씩@긁어 놓을 작정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떻게 할지 맞춰 봐!] 위소보가 말했다. [나는 모른다오.... 나는 그 많은 돈이 없다오....] 청아는 손에 쥔 지푸라기로 위소보의 목을 누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여기를 한번 긁으면 개 같은 목숨이 달아나겠지. 그러면 우리의 매매는 성사되는 것이지.]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수를 놓듯 가볍게 움직였다. 위소보는 목이 가끔 아파옴을 느꼈다. 마치 개미가 물어 뜯는 것 같기도 하고@따스한 난류가 몸에서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위소보는 안달이 났다. (이리 베고 저리 베어 각을 떠 팔 작정이란 말이냐?) 위소보가 소리치며 말했다. [청아 아가씨, 제발 잠깐만 멈추시오. 당신 말을 들어주겠소이다.] 청아는 본 척도 않고 지푸라기로 계속 그어댔다. 위소보의 목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다.@위소보는 아프기도 하고 겁이 나서 말했다. [그래도 사람을 살려 놓고 일을 처리해야지, 이 어르신의 목숨을@자르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 어르신의 목숨이 날아가면 염라대왕전에 가서 천만 냥을 받겠소?] 청아가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보란 말이야. 이 붉은 피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 이런@것을 천만 냥의 돈으로 살 수 있겠느냐?] 청아의 눈은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위소보는 몸서리쳤다. [내가 돈을 주겠소. 일만만 냥이라도....] 청아는 입을 삐쭉하고 말했다. [또 빈 소라고동을 불어대는구나. 본전도 찾지 못할 소리니 닥쳐라!] [내겐 돈이 많소. 보물도 있고....] 그만 말이 잘못 새어나갔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청아는 갑자기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 보물이라는 것이 녹- 정- 산- 보- 물이냐?] 그녀는 녹정산 보물을 말할 때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외쳤다. 위소보는 문득 깨달았다. (청아 요년이 이처럼 이 어르신을 못 살게 구는 것은 녹정산 보물 때문이었구나! 그렇다면 요년은 보물을 찾기 전까지는 자기 남편을 죽이지는 않겠지!) 위소보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소? 일찍 얘기했더라면 이렇게 피를 흘릴@일은 없었을 거외다. 나는 정말 의아하게 생각했었다오. 성현의 말씀에 따르면 연지와 보검(寶劍)은 모두 미인에게 드린다 했는데 그@보물은 마땅히 청아 아가써에게 드려야 하지 않겠소?] 청아가 말했다. [보검은 열사(烈士)에게 드리고, 연지는 가인(佳人)에게 주어야@한다는 말 아니예요?]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혈도가 짚혔으므로 움직일 수가@없어 소리 높여 말했다. [아니, 열사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물건짝이오? 연지고 보검이고@세상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가인에게 주어야지. 청아 아가씨는 정말 아름답고 얌전한 것이 왕소군(王昭君)과 비길 만하고 정숙함은 진원원(陳圓圓)을 능가한단 말이오.] 청아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왕소군, 진원원이 누구예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것도 모르오? 자고로 보기 드문 절세의 미인 왕소군과 진원원을 모른단 말이오? 조정에서 학문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왕소군과 진원원을 알고 있다오. 아무튼 모두 왕소군 진원원이라 하면 존경하고, 에 또, 미인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이오.] 청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참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구만. 위작 나으리란 사람이 그렇게 무식해서야....] 위소보는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딴 생각을 품었다. (야, 고년 웃는 모습 한번 어여쁘구나. 이 어르신의 계집으로 만들었으면 원이 없겠구나.)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했다. (요년이 잘난 체 하는 것을 보니, 옛말에 왕소군이 번방(番邦)으로 시집가서 평생 다시는 친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데 네 년도@번방으로 시집이나 가거라. 그러면 이 어르신도 좀 조용히 살 수 있으련만. 그리고 지금 진원원은 진회하에서 '십팔모(十八摸)'를 부르고 있는데 네 년도 배워보지 않겠느냐? 히히! 만지고 또 만졌네, 청아의 엉덩이를....) 청아로서는 이런 다급한 시각에까지 위소보가 추잡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라도 짐작할 수 없었다. 위소보의 흘끔흘끔대는 눈초리를 보고는 지푸라기로 목을 더 누르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니 이제 진심을 털어 놓지?]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청아 아가씨는 왕소군 진원원을 능가하니 그 무슨 양산(良山)에 감춘 보배고 녹정산에 감춘 보배고 따질게 있겠소? 응당 청아 아가씨 몫이지.] 청아는 냉소하며 말했다. [진원원이고 왕소군이고 모두가 미련한 인간이지. 그러나 이 청아는 그렇지 않아. 나는 위소보를 사(死)소보로 만들 수도 있어. 안그래?] [그렇고 말고....] 그러면서도 위소보는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꼼꼼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을 끄는 게냐?] 묘안이 생각나지 않을 때 이런 허튼 소리를 지껄여 시간을 끄는 것이 위소보의 상투적인 수작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년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구나. 이 어르신의 밑천을 다 털어서라도 단단히 응수해야겠다.) 위소보가 말했다. [청아 아가씨, 녹정산에 보물을 감뤘다는 사실을 알면 됐지 기어코 사십이장경 얘기까지 해야 하겠소?] 위소보는 앞뒤 안 맞는 말로 청아를 떠보면서 청아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서 비밀의 내용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알아보려 했다. 그것은 마치 도박꾼이 협잡을 걸 상대의 주머니 사정을 알아내려는 것과 같았다. 청아의 표정만 봐서는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위소보는 또 생각했다. (청아 요년이 녹정산에 감춘 보물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일의 전후 관계를 다 알고 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시원히 말하는 것이 낫겠다.) 위소보가 나직이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만청 오랑캐들이 우리 한족의 강산을 점령한 후 그 정권이 튼튼하지 못해 관내의 많은 보물들을 약탈하여 녹정산에 매장하였다가 의외의 일이 생기면 만족들을 거느리고 다시 관외로 돌아가 그 보물로 대대손손 부귀롭게 살려 했다오.... 어이! 이 지푸라기 좀 치우면 안 되나?] 청아는 지푸라기를 위소보의 앞에서 흔들며 놀다가 말했다. [그 장보도는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 속에 감추었다지? 팔기에 한 부씩 보관했는데 그 여덟 부를 서로 다 짜 맞추어야만 완전한 장보도가 나온다던데, 안 그런가?] 위소보는 놀랐다. (요 구린내 나는 년은 모르는 것이 없구나!) 위소보는 낙심해서 말했다. [원래는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을 다 합쳐야 완전한 장보도가 나온다오. 나의 첫번째 스승님 해대부(海大富), 두번째 스승님 진근남 총타주, 세번째 독비신니 구난사태, 네번째 스승 소황제 소현자, 그리고 홍안통 교주, 가짜 태후 모동주 등 모두가 나에게 사십이장경을 얻어오라고 하면서도 상세한 것은 알려 주지 않았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책에다 보물을 감추어 두었는데 책에 지정한 대로 하면 만청의 명맥을 파낼 수 있다고 했다오.... 그러나 여덟 부의 경서를 서로 맞추어야 장보도가 나온다는 것은 알려 주지 않았다오. 청아 아가써, 그 그림을 어떻게 맞추는 것이오?] 청아는 위소보가 수두룩하게 명성이 뛰어난 인물들을 늘어놓자 비꼬아 말했다. [정말 그래요. 소백룡 위소보, 위 향주님, 위작 나으리, 위 방주님께서는 발이 넓기도 하군요? 그 많은 중책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그래 그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나요? 어떻게 맞춘다는 것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내게 왜 묻는 거죠?] 위소보가 탄식하며 말했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오. 열 마디 중에 한 마디도 진실이 아니니까. 사십이장경을 구해다 먼저 봤지만 장보도는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오. 나는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을 먼저 구해 다섯 부는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 두 부는 홍안통 교주에게 바쳤다오.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서장 싼지라마(桑結喇마) 에게 빼앗겼다오.] 위소보는 후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일찍이 청아 아가씨가 그 장보도를 맞추는 비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전부 당신에게 맡겼을 텐데....] 위소보는 거짓말을 해도 아주 조리 있게 했다. 언제나 열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는 진실된 것이었다. 또 아주 상세하고도 세밀하게 말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감을 주었다. 이를 테면 장보도는 확실히 자기가 구해왔다. 그러나 그 장보도를 맞출 줄 모른다는 것은 에누리 없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여덟 부를 누구누구에게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청아가 말했다. [아직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군요.] [내가 어찌 어여쁜 아가씨를 속이겠소? 더구나 청아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를 이 세상 어느 놈이 속일 수 있단 말이오?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그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을 가져올 것이니 청아 아가씨께서 하나 하나 맞추어 보시오.] [내가 그 사십이장경을 가져서 뭘 하겠어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벌써 다른 사람이 장보도를 갖고 갔어요.] 위소보는 들을수록 간담이 서늘했다. (요년은 아는 것이 정말 많구나. 속여 넘기기가 힘들 것 같은데?)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어느 놈이 그새 사십이장경을 훔쳐갔단 말이오?] 청아가 말했다. [간덩이가 큰 놈들은 많지요. 그 가운데 귀하도 물론 들어 있고요.] 위소보는 담담히 웃으며 계속 딴청을 피워댔다. [이처럼 추켜세우니 이 어르신은 몸둘 바를 모르겠구려. 이 나으리의 일곱 계집은 항상 멍청하다고 놀린다오.] 청아는 기가 막히다는듯 날씬한 허리를 잡고 웃었다. [사람도, 정말 부끄러운 줄을 모르네. 내 말이 당신을 추켜세워 주는 말로 들리세요?] 위소보는 울상을 하며 말했다. [어째서 추켜세우는 말이 아니란 말이오? 강호의 사람들은 모두 이 소백룡 위소보가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재물이건 색이건 어쨌든 살아나야 그런 것들도 소용이 있을 것 아니오? 장보도를 얻어서 또 뭘 하겠소?] 청아는 내심 놀랐다. (이 시러배 잡놈도 옳은 소리를 할 때가 있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놈의 말은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도 믿을 것이 없으니 이 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지.) 청아가 말했다. [데가 재물을 탐내고 또 그 무엇을 좋아한다 해도 어쨌든 장보도를 가져 갔으니 잡아떼도 소용없어!] 위소보는 자기의 예리한 직감으로 청아가 지금까지 장보도의 확실한 근거를 쥐지 못하고 떠도는 소문을 들었을 따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위소보는 전혀 내막을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청아 아가씨께서 믿지 못하겠거든 달리 방법이 없지.] 그는 눈을 감고 잠잠했다. 청아는 약이 올라 또 말했다. [왜 방법이 없느냐? 나는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 청아는 이렇게 말하며 손에 쥐었던 지푸라기를 곧추세워 위소보의 목구멍을 눌렀다. 위소보는 칼로 찌르는 듯이 아파 소리쳤다. [아이구, 어머니.] 청아가 말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찔러서 구멍을 낼 작정이다.] 위소보는 너무도 아파 땀을 삘삘 흘렸다. (내가 알려주면 더 빨리 죽겠지. 흥! 방아 찧고 당나귀 잡아 먹는 격일 텐데, 이 어르신은 이런 일들을 수없이 겪었노라, 이년아!) 위소보가 소리쳤다. [나는 정말 억울하오. 정말....] 이 때 돌연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청아, 어디 있소?] 청아가 나지막이 위소보에게 명령했다. [내가 왔다 갔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위소보는 기뻐하며 생각했다. (청아가 도망치려는 것을 보니 나를 도와줄 사람이 온 모양이구나!) 그 소리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것 같아 일시에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청아는 몸을 움직이자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이내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순간 위소보는 더욱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정극상!]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오늘은 흉악스러운 연놈들이 쌍으로 와서 이 어르신의 길을 막는구나. 제기랄 여요괴가 가니까 남자 마귀가 오다니 정말 재수 사납구나!) 정극상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독살스러운 눈길은 위소보를 몸서리치게 했다. 정극상은 돌걸상에 앉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별일 없으시오?] 위소보는 맥이 없이 말했다.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어 죽지도 살지도 못할 형편인데 무고할 게 있나?] 정극상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소. 사람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지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반죽음 상태가 제일 괴롭다오. 위작 나으리, 혈도를 짚혀 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맛을 모르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 맛을 알면서 어째서 혈도를 열어주지 않느냐?]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정극상 이놈은 오늘 심심풀이로 와서 나를 한바탕 애나 먹이자는 수작이구나.) 정극상은 위소보를 보는 척도 않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 때 얼마나 위풍이 당당하셨던가?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지.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이 불효자식을 낳지 말았어야 했어. 조정에서는 한사코 대만을 정벌하라고 하지만 그러나.... 위작 나으리, 내가 지금 내 자신을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소?] 위소보가 생각했다. (그거야 푸른 모자를 쓴 것이겠지. 고운 아가롤 이 어르신에게 빼앗겼으니. 하지만 나도 큰 고생을 했지.) 위소보는 어물어물 말했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 뭘 하겠소?] 정극상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분명하게 해 둬야지! 이 일은 늘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멍하니 초막의 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거미가 쉴새없이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정극상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내 자신을 원망하는 것은 당신의 스승 진근남을 살해했기 때문이오.] 정극상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위소보로서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매우 놀랐다. 정극상이 말했다. [진 총타주님은 매우 훌륭하신 분이고 재간이 있는 영웅호걸이었소. 나는 나의 스승님 풍석범(馮錫范)의 말을 듣고 그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오. 기실 두 스승님이 사이가 좋고 우리들끼리 싸우지 않았다면 내 어찌 조정에 항복했겠소? 이른바, 백족지충 사이불강(百足之蟲 死而不彊:다리가 많은 노래기는 죽어야 엎어진다)이란 말이 있듯이, 도움이 많았으면 쉽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너의 스승과 나의 스승이 자기 내부에서 싸우길 잘 했지. 그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면 아가는 영락없이 정가데 며느리가 될 뻔 했지. 그랬다면 이 어르신이 빼앗으려 해도 내게 오지 못할 것이고 나의 스승님도 말렸을 것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두 분 스승님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지나간 일을 그만 잊기로 합시다.] 정극상이 말했다. [그 때 나는 풍채당당한 공자님이었지. 나의 스승님은 무공이 비상하여 '일검무혈(一劍無血)' 풍석법이라면 강호에서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웠지. 그러나 나는 열심히 배우지 않아 스승님의 십분의 일도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풍류인물이라 자처하고 매일 싸돌아 다니기만 했다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무공을 배우는 것은 정말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배우지 않아도 그럭저럭 지낼 수야 있지. 우리 둘은 정말 똑같은 처지구나.) 정극상이 말했다.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파산되어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별의별 시러배 잡놈들까지 업신여기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지.] 위소보는 벌컥 대노했다. (제기랄 놈, 이 어르신을 욕하는 거로구나!) 정극상은 계속 말했다. [뼈아픈 교훈을 얻었으면 고심참담해야 사내대장부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지. 위작 나으리, 그렇지 않소?] 위소보는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제기랄 놈, 대가리 꼬리 없이 떠벌리는데 도대체 어떤 개 같은 앙심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위소보는 그저 정극상의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그렇지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지금 늦기는 했지만 나는 결심을 하고 무공을 연마하였다오 하늘은 불행한 사람을 저버리지 않아 2년동안 '팔괘십변니추공(八卦十變泥鰍功)'을 연성해 냈다오.] 위소보는 그제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날 북경에서 이 어르신과 셋째 동생이 연못 속에서 보던 그 미친 놈의 무공이겠구나. 그 무슨 '팔괘십변니추공'인지 미꾸라지 지랄인지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팔십 개의 푸른 모자공'이나 연성할 것이지.) 위소보가 말했다. [정 공작님의 성공을 축하하오.] 위소보는 정극상의 신공(神功)을 두 번 보았는데 확실히 솜씨 있는 무공이었다. 정극상이 말했다. [뭐 성공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정 잡배 후레자식을 다스리는 데는 식은 죽 먹기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무서워했다. (이 놈이 날보고 하는 소리구나.) 또 그 날 괴상하게 물을 뿜던 것과 미꾸라지를 날 것으로 먹던 흉악스러운 몰골을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위소보가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나 앞뒤를 가리지 못하니 나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오. 사람들이 등지기는 쉬워도 화해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우리 두 스승님의 신분을 생각해서 지난 날 과오를 서로 잊읍시다.] 정극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나의 스승님과 당신의 스승님은 모두 대만의 국성이었으니 지난 일들은 그만둡시다. 나는 아직도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데 어찌 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은원을 따지겠소.] 위소보는 기삐하며 말했다. [정 공작님은 정말 홀륭한 분이구려. 정말 큰일을 할 도량이 있으시구려.] 정극상이 말했다. [큰일을 하는 데는 도량만 있어서는 안 된다오. 어쨌든 뒷심이 있어야 하오. 그 뒷심이란 곧 돈이오. 위작 나으리의 구원을 바라오.] 위소보는 가슴이 덜컥했다. (또 녹정산 장보도가 아닌가?) 정극상은 더 말하지 않고 그 말만 했다. [위작 나으리, 나의 스승이신 일검무혈 풍석법이 소리소문 없이 실종되었다오. 그 분이 실종되기 전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들어 보겠소?]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 목숨이 네 놈의 손에 있으니 듣기 싫어도 들어야지.)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풍 사부님의 그 이야기야 매우 재미있겠지요.] 정극상이 말했다. [거야 물론이지.] 그의 눈은 여전히 그 벽 구석에 있는 거미와 거미줄을 보고 있었다. 그 거미가 마치 풍석범인 것 같았고 그 이야기가 바로 그 거미줄처럼 엮어졌다. 정극상은 천천히 말했다. [조정에서 우리 대만에 대해 불순한 거동이 있을까 염려스러워 풍 사부님은 나를 데리고 남몰래 북경에 갔었다오. 위작 나으리, 한 번 말해 보구려. 조정의 소식을 탐문하자면 어느 곳으로 가는 게 제일 좋겠소?] 위소보가 말했다. [두 분의 무공을 보아 황궁으로 가는 게 제일 좋지요.] 정극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라오. 풍 사부님는 나를 데리고 공작부로 갔다오.] 위소보는 놀랐다. (공작부라니? 제기랄, 풍석범 놈이 정극상을 데리고 이 어르신의 집으로 왔단 말인가? 그런데 왜 이 어르신이 몰랐을까?) 정극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위작 나으리는 나와는 달랐지요. 기실 시정 잡배였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소. 그 때 풍 사부님이 말했소. 요 시러배 잡놈은 별 재간은 없지만 황제는 이 놈하고 말하기를 아주 즐긴다. 우리 일단 그 곳으로 가서 탐문해 보고 닥치는 대로 양이고 개고 끌고 오자라고 했다오.] 위소보는 비꼬아대는 욕지거리에 몹시 노했다.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지지 않는 성미인지라 히히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천만다행으로 그 때 나의 공작부로 오지 않았구려. 그 때 나는 항상 버드나무 가지를 준비해 놓고 늙은 거북이나 새끼 미꾸라지 같은 것이 보이기만 하면 곧바로 버드나무 가지로 한데 묶어 달아매서 달아나지도 기어가지도 못하게 했다오. 정 형님, 미안하지만 이것은 정 형님과 풍 사부님을 빗대어 하는 말이 절대 아니라오.] 정극상은 위소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 때 풍 사부님은 나의 손을 잡고 도괘금구(倒卦金錮)로 대청 안에 숨었다오. 그러자 그 위작 나으리께서 한 사람의 만주족 모첩식(芼帖式)을 불러다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놓고 그 종이에 쓴 '만주'라는 글자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소.] (작자 주:모첩식이란 문서를 다루는 벼슬아치를 말함.)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이 자식이 꾸며낸 말은 아니구나.) 정극상이 계속 말했다. [그 문서가 그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소. '도통(都統) 대인(大人), 참으로 소황제께서도 우둔하시지. 이런 시러배 잡놈을 작(爵) 으로 봉하고 도통 대인까지 시켰으니.... 도통 대인, 이 얼꾸나허(爾古納河) 징치리강(精奇里江) 후마얼우즈산(呼瑪爾窩集山)은 모두 우리 관외 만주의 지명입니다'라고 했다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뭐가 지리꾸루강이고 후니마산이고 니미랄 산이고 참으로 듣기 거북하구만.] 정극상이 또 말했다. [그 때 그 어떤 작 나으리가 말한 것과 지금 위작 나으리의 말씀과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구려. 그 때 그 문서가 이렇게 말했소. '도통 대인, 이 강과 산은 모두 우리 만주의 큰 산과 큰 강들이 올시다'라고 하자, 작 나으리가 '그게 모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소. 그 문서 관리가 대답하기를 '도통 대인, 모두 관외의 북쪽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오.] 한참 있다가 정극상이 물었다. [위작 나으리, 그때그 시러배 잡놈이 또 어떻게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소?]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이 어르신이 못 맞출 게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겠지. '문서 양반, 지도 속에 있는 지리꾸루강이고 후니마산이고 하는 만주족 말들을 모두 한자로 써 내라'고 했겠지.] 정극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위작 나으리는 아주 총명하신 분이구려. 그 문서 관리가 그대로 썼지요. 그 시러배 잡놈은 또 품속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들고 '이것은 또 무슨 산이고 강인가?' 묻자 그 문서 관리는 '이것은 시리무디하 아무얼산 아무얼하입니다'라고 했다오.]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들으면 들을수록 괴상한 이름들이군. 그래 정 공작님의 헛소리가 아니오? 듣기 좋은 이름은 달지 않고 무슨 괴상한 지명을 붙여 아마(阿瑪)고 아빠얼(阿파兒)이고 할 게 뭐람.] 정극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는 정말 기억력이 좋은 분이구려. 다 알아 맞추다니.] 위소보가 웃으며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그것이 뮐 알아 맞추기 힘들다고 그러오. 이 어르신은 시러배 잡놈이고 또 그 작 나으리야 그 문서 관리와 이야기 할 때 대들보 뒤에 늙은 거북이와 미꾸라지를 매어 놓았으니까 그렇지.] 바로 그 해에 위소보는 만주 글자로 된 여덟 부의 사십이장경에서 천 개도 넘는 장보도 조각을 꼼꼼하게 맞춰 다른 종이에 하나하나 베꼈다. 위소보는 이것을 기병영(騎兵營)의 문서 관리를 불러다 그 지명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밝은 대명천지에 위세당당한 공작부에서 '일검무혈' 풍석범이 정극상을 데리고 대청에 숨어서 이처럼 훔쳐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그 때 정말 이상하기는 했지. 어쩐지 뒤가 찜찜했었는데 지금 보니 이 놈들이었구나. 이 어르신이 너무 등한히 했군. 한번 잘 수색해 봤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안전하다고 여기는 곳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는데!) 정극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기억력은 비상하구려. 몇 년이 지났지만 자기 한 말과 일들을 그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니.] 위소보는 눈을 희번득하더니 억지로 시침을 떼며 말했다. [나는 정 공작님외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이다. 무엇이 내가 한 말이고 한 일이란 말이오? 정씨 양반! 생사람을 잡으려 드는구만. 그래 또 시러배 잡놈이 뭐 어쩌구 하면서 이 어르신에게 뒤집어 씌울 작정이오?] 정극상은 그와 더 말하려 하지 않고 소리쳤다. [얼다(鄂爾多) 들어와!] [예!]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들어왔다. 위소보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다. 第14章. 기생이 된 위소보 등이 낙타처럼 굽은 여윈 사나이가 들어왔다. 모첩식.... 효기영(驍騎營)의 그 모첩식이었다. 그는 바로 몇 년 전에 위소보에게 녹정산 장보도의 만문(滿文)을 한문으로 번역해 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위소보는 홀연 깨달았다. (아하, 그래서 정극상 이놈이 장보도의 비밀을 알았구나. 이 어르신이 그 때 너무 등한했어. 그 때 모첩식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 몇 글자 때문에 죽는다면 모첩식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닌가?) 정극상이 말했다. [얼더(鄂爾多), 위작 나으리께 인사 올리게.] 얼더는 공손히 따치엔(打千)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역자 주:따치엔이란 인사법으로, 오른손을 아래로 드리우고 왼쪽 다리를 안으로 굽히며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굽히면서 예를 표하는 것을 뜻한다.) [도통 대인, 소인이 문안인사 드립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무고하데 무고해. 보아하니 자네는 배짱도 좋고 아주 담이 크구먼?] 얼더가 다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 이 미천한 제가 담이 크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위소보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담이 작은 친구, 그 때 내가 자네에게 돈을 얼마 주었던가?] 얼더가 말했다. [대인께서 이 비천한 몸에게 50냥을 주셨지요.] 위소보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때 저에게 또 이런 분부도 하셨지요. 이 '시니마니하', '이시니마니산'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경우엔 본전 50냥과 이자까지 합쳐 150냥을 돌려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모 형은 기억력이 아주 좋구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겠구만?] 얼더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비천한 이 몸은 그 때 밖으로 비밀을 누설치 않겠다고 대답했소이다. 그러나....] 얼더는 조마조마하여 정극상의 눈치를 보고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녀석도 반은 사람이고 반은 귀신인 정극상 놈에게 붙잡혀 고생하는구나.) 위소보가 말했다. [그럼 됐소. 자네는 관계 없으니 본전과 이자를 합친 150냥은 정 공작 나으리께서 대신하여 나에게 돌려 주시겠지.] 정극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지금 뭐라 하였소?] 위소보는 생각했다. (제기랄, 그럼 이 어르신더러 어떻게 말하라는 것이냐? 간신과 도둑은 본 즉시 잡으라 했거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제대로 바로잡기란 아주 힘들겠는데?) 위소보는 얼더를 째려보며 말했다. [다른 할 말은 없소?] 정극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얼더에게 말했다. [자넨 이제 돌아가 보게!] 얼더는 인사하며 말했다. [예!] 그가 돌아서자 정극상이 앉은 자리에서 얼더의 잔등에 '퉤!' 하고 가래침를 뱉었다. 얼더는 앞으로 고꾸라져 한참을 부들부들 떨더니 그대로 죽고 말았다. 정극상이 앉은 자리에서 가래를 뱉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의 무공이 얼마나 고심한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위소보는 놀라며 말했다. [왜 그를 죽였소?] 정극상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위험이 적소. 위작 나으리, 지금 천지지간에 우리 둘밖에 없소. 할 말이 있으면 어서....]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놈, 닭 잡아 원숭이를 놀래키는 격이군. 얼더를 내가 보는 앞에서 죽이면 내가 놀라 술술 불어댈 줄 알고? 나를 겁주려는데 놈의 심보를 내가 모를까 보냐? 하지만 이 어르신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 놈이 가래침이나 물살을 뿜어댈 텐데 물론 보의를 입었다지만 이거 정말 사면초가로군!) 정극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순순히 털어 놓으시오. 나는 다른 할 일들도 많다오.] 위소보는 몹시 무서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어서 저 죽은 사람을 밖으로 내가오. 이 어르신은 죽은 사람만 보면 겁이 나서 생각한 것도 다 잊어버린다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바른 대로 얘기해 버릴까? 아무리 장보도가 중요한들, 또 만청의 명맥을 파내는 일이 소황제에게 대역죄를 짓는 것이지만 보물이나 의협심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이 어르신이 정말 어쩔 수 없어 말했다면 황제도 이해해 주겠지.) 그러다가 위소보는 딴 생각이 퍼뜩 났다. (내가 사실대로 말해도 목숨을 구하기는 어렵지. 토끼 사냥을 마치면 토끼 몰이를 한 사냥개를 잡아먹는다고 이 어르신은 그런 일들을 수없이 보았지 않은가!) 위소보는 기지가 빨라 순식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들을 해치웠다. 정극상은 귀찮은지 얼더의 시체를 내가지 않고 기침만 했다. 위소보는 그 기침 소리도 두려워 식은땀이 흘렀다. 위소보가 말했다. [정 공작 나으리, 왜 그리 성미가 급하오? 밖에서 아낙네들이 기다리기라도 하오?] 위소보는 속으로 또 욕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이전에 못할 짓을 좀 했기로서니 요놈이 와서 이제 와서 재수 없게 구는구나.... 어떻게 한다? 떼를 쓸 수도 없고 어쨌든 좀더 지켜보자.) 위소보는 사실 난감했다. 그렇다고 소홀히 대할 수도 없었다. 위소보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정 형, 왜 나를 이렇게도 괴롭히는 거요? 정 형은 국성(國'性)의 후대이고 나는 천지회의 부하이니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정 형께 미안한 일이고, 해서 또 다 털어 놓으려고 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오. 그것은 소황제에 관한 것인데 그는 나를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았단 말이오. 나는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소.] 정극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속임수를 쓰는 재간은 강호에서 둘도 없는 천하 제일이지. 이 일은 강희 황제도 모르는데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오?] 위소보가 말했다. [아주 큰 관계가 있고 말고요. 정 형, 내가 모첩식에게 준 지명이 모두 어디서 났겠소?] 정극상이 말했다. [그럼 황제가 당신에게 주었단 말이오?] 위소보는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아니 정 공작 나으리, 어떻게 그것을 아셨소? 황제가 당신에게 알려 주었구려?] 정극상이 말했다. [황제가 나에게 그런 이야길 하겠소? 흥! 위작 나으리, 우리는 다 같은 공작이라고는 하나 당신은 녹정공이고 나는 해징공(海澄公)이오. 녹정공이야 권세가 있지만 나는 투항한 장군일 뿐이오. 조정에서 정가네 후대를 사람으로 대접했더라면 정극상이 오늘 이 모양이 되었겠소?] 위소보는 이러저러한 말로 정극상의 불만을 토로하게 했다. 그가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위소보는 다른 계책을 생각해 낼 시간을 벌수 있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조정이 정 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관은 너무도 공평치 못하였소. 나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원망하지 마오. 언젠가 황제와 한담하던 중에 내가 말했소. '황상, 대만의 정극상은 정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귀화하였소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를 소흘히 대하지 말아야지요.' 그랬더니 황제도 방금 정 형이 말한 것처럼 냉소하며 '그가 정말 정의를 위해서 귀화했다고 생각하나?'라고 했소.] 정극상은 묵묵하게 듣고 있었다. 위소보가 또 말했다. [그래서 내가 또 황제의 말을 받아 말했소. '네, 소인이 친히 보았는데 정극상은 매일 세 번 북쪽을 향해 절하며 조생어탕(島生魚湯)이시여, 만수무강하옵소서 하고 축원하더이다.'] 정극상이 놀라며 물었다. [아니, 조생어탕이 라니?] 위소보가 말했다. [조생어탕이라는 것은 좋은 국 한 사발이라는 뜻으로 나쁜 국이 아니란 뜻이오. 결론적으로 말해서 황제는 이 탕을 즐겨 드신다오. 내가 알려주겠는데 정 공작 나으리가 후에 황제를 만나거든 '조생어탕'이라는 말로 황제를 칭송하면 황제는 다른 어떤 말을 들은 것보다도 기뻐할 것이오.] 정극상이 말했다. [내가 황제를 만난다고? 이 정가네에는 그런 복이 없소.... 그리고 황제는 또 뭐라고 했소?] 위소보가 말했다.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보고에 의하면 정극상이 해징공부에서 사람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했소. 정 형, 나에게 눈을 부릅뜨지 마오. 이 말은 황제가 한 말로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이오. 어쩌면 어떤 놈이 뒤에서 모함을 했는지도 모르지 않소? 잘 생각해 보시오.] 정극상은 이빨을 악물고 말했다. [더러운 놈 같으니라구. 시랑(施琅)을 빼놓고 또 누가 그런 일을 꾸밀 수 있겠소?] (작자 주:시랑은 대만 정성공의 아들 정경(鄭經)의 옛 부하로서 뛰어난 재질과 비상한 묘략을 갖고 있는 장군이었다. 그러나 정씨 가족 내부에서 내분이 생겨 서로 배척하는 가운데 정경은 시랑을 비방 중상하는 말을 믿고 시랑 일가를 살해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시랑은 혼자 대만을 떠나 청조에 투항했다. 강희 20년(1681년), 강희는 그를 수사제독(水師提督)으로 봉했다. 시랑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때 정경의 아들 정극상은 투항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정 형은 다 알고 있었구만. 시랑 그놈은 주인을 팔아 자기만의 영달을 꾀하려 했군....] 정극상은 위소보가 쓸데없는 말만을 늘어 놓자 얼른 말했다. [시랑은 무치한 인간이니 더 말할 필요 없소. 위작 나으리, 방금 말하던 얘기나 계속하시오.] 위소보의 딴청을 피우는 재간은 강호에서도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이것저것 늘여 붙이다가 드디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별로 쓸모 없는 말을 한 기억이 없소. 정 형, 황상이 나더러 군사를 거느리고 루어사(羅煞) 귀신을 치라고 했던 일을 알겠지요?] '루어사'는 러시아를 말함이다. 위소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러시아로 출정한 것은 당시 청 왕조의 대사로서 정극상도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는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강희 황제가 각하를 파견한 것은 각하를 아주 중용했기 때문이오.] 위소보가 말했다. [중용은 중용이지만 아다시피 나는 시정잡배에 불과한데 군사를 거느릴 만한 능력이 어디 있겠소? 황제께서 종이에 글을 쓰기를 '이것은 시니마디 강인데 여기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또 이것은 시니마디 산이니 양식과 사료를 저장하고....' 또 뭐라 했는데 내가 글을 모르는 데다가 또 만문으로 썼으니....] 정극상이 말했다. [그래서 그 얇은 종이에 쓴 것을 모첩식더러 한문으로 번역하라 했소?] 위소보가 말했다. [정 형은 역시 머리가 아주 총명하오. 글쎄, 그가 번역은 했지만 군사에 관계되는 대사이고 보니 비밀은 꼭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나는 그 때 50냥을 주어 그 모첩식의 입을 막았던 거요.] 정극상은 냉소하며 말했다. [아주 신통하게 엮어내는구나. 그러나 애석하오, 애석해!] 위소보는 그가 비웃자 겁이 덜컥 났다. [아니 신통하게 엮다니? 나는 정 형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구려?] 정극상이 말했다. [그렇담 내가 다른 것을 보여주지. 차마 모른다는 말은 못할 거요.] 정극상은 목청을 바꾸어 일남일녀의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남자: [나는 당신이 그림을 다 맞추었겠거니 했소. 그런데 어제 저녁에 보니까 아직도 삼백 조각이나 남았더군. 그러니 빨라도 5,6일은 더 걸려야겠군.] 여자: [오늘 다 맞추었다면 어찌 하시겠어요?] 남자: [나를 놀리려는 거요? 나는 믿기지 않는 걸.] 여자: [상공 어서 와 보세요. 이것을 보란 말이에요.] 남자: [다 완성되었구만, 성공이야. 쌍아, 이리 오시오. 우리 입이나 맞춥시다!] 정극상의 목소리는 아주 신통하고도 교묘했다. 위소보가 들어보니 그 날 쌍아가 '사십이장경'의 장보도를 모두 맞춘 다음 자기와 나눴던 대화 내용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화 내용만이 아니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목소리까지도 똑같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그 날 방안에 수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했더니 이 더러운 자식들이 숨어 있었구나.) 정극상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조심하고 그의 소식을 물어둬야 한다는 말이 있잖소? 지금은 때가 너무 늦었지만 말이오. 자, 위작 나으리,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아 있소?] 위소보가 말했다. [정 형이 다 아는데 내가 무슨 더 할말이 남았겠소?] 정극상은 매끄럽기가 미꾸라지보다 더하고 순 생떼장이인 위소보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하니 의기양양했다. 이리하여 지난 날 공자의 오만불손한 위세를 부리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방금 말했다시피 당신은 대만 국성님들과 인연이 깊다고 했잖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두 사람이 손잡고 보물을 파낸 다음 사람들을 규합해 대만으로 가자는 말이오. 성공하면 내가 연평왕(延平王) 노릇을 하고 자네는 보정공(輔政公)으로 군사를 거느리면 어떻소?] (작자 주:연평왕은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한 후 명조에서 그에게 봉한 왕위(王位)이다. 후에 정성공이 왕위를 아들 정경에게, 정경은 또 정극상에게 물려 주었다. 그러나 정극상의 대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보정공은 원래 정극상이 숙부 정총(鄭聰)의 작위이다.) 위소보가 놀라며 말했다. [아니! 정 형, 그래 반란을 일으키자는 말이오?] 정극상은 엄중하게 말했다. [반란이 아니오. 내가 조정에 투항한 것은 일시적인 굴복이었소.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이오! 내가 품은 그 뜻을 누가 알겠소?] 위소보는 놀라며 생각했다. (제기랄! 무슨 뜻이고 나발이고 간에 소황제께서 데놈을 해징공으로 봉했으면 감사할 일이지 왜 또 이러쿵저러쿵 잔소리야? 나는 절대 네놈과 손잡지 않겠어. 나는 소황제의 성미를 잘 알지. 소황제는 성품이 부드럽고 너그럽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반란죄만큼은 반드시 목이 달아나고야 말 것이다.) 정극상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나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정 형, 나는 정 형의 큰 뜻에 탄복하며 또 나에 대한 관심을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나는 보정공 노릇을 할 수 없소. 모첩식이 지금 정 형의 수중에 있으니 장보도 또한 정 형의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그러니 보물을 파서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으로 돌아가시오. 이 위소보는 머리를 남겼다가 도박이나 하면서 계집들과 놀겠소.] 정극상은 안색을 바꾸며 냉소했다. [킬킬!]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이 소박한 꿈을 이야기했는데 웃기는 왜 웃소?] 정극상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미꾸라지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듯하오. 내가 말하지. 나는 얼더를 데리고 그 무슨 시니마디 강이니 시니마디 산을 몽땅 뒤져 봤지만 보물은 고사하고 보물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소.] 위소보는 의기양양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이 잘난 체 해봐야 별 수 있겠어? 제갈지량이나 관운지장과 같은 이 어르신 앞에서 감히....) 위소보는 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물을 못 찾았다구? 제기랄, 그 '사십이장경' 장보도가 그럼 가짜란 말이오?] 정극상은 냉소하며 말했다. [장보도가가짜일 리는 없지만 완전하지 못했소. 얼더가 아는 그 몇몇 곳의 지명만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소.] 위소보가 생각했다. (내 진작 이럴 줄 알고 쌍아에게 시켜 장보도의 지명을 서른 다섯 장의 얇은 종이에 나누어 베껴 두었지. 그런 후에 모첩식을 불러 한 장 한 장 번역하게 했으니 그들이 완전한 것을 알아낼 도리가 없지. 불쌍한 모첩식, 그를 붙잡아 닦달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위소보는 아주 상심하는 기색을 하고 말했다. [정 형, 어찌 성미가 그리도 급하오? 그 모첩식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소!] [어째서?] [좀 생각해 보오. 우리는 만주어로 된 지명을 다 모르고 있지 않소.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곤 모첩식뿐 아니오. 모첩식이 정 형을 속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마저 죽으면 알 길이 더욱 없지 않소?] 정극상이 말했다. [속였다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극상을 투항 장군이라 하여 시러배 잡놈들마저 나를 희롱하고 아가까지 빼앗아 갔소. 모두 나를 속였지만 하하! 이 2년 동안 이 어르신은 나를 속였던 놈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오. 위작 나으리, 내가 얼더를 혼낸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소?] 정극상의 눈길은 몹시 잔인하였다.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뭐 들을 것까지 있소?] 정극상이 말했다. [아니, 들어봐야 해! 방금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내가 연마한 무공은 '팔괘십변니추공(八卦十變泥鰍功)'이란 말이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팔십 개 푸른 모자는 아니고?....) 정극상은 위소보에게 '팔괘십변니추공'의 내공과 외공 그리고 그 위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조정은 대만을 수복한 후 정극상을 연평왕의 지위에서 폐위시켰고 정극상은 투항 장군이 되어 버렸다. 비록 강희 황제는 대만 사람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를 공작으로 봉했지만 그것은 이름뿐이고 실권이 없었다. 이리하여 정 공작은 갖은 멸시를 다 받았고 존경하던 스승 풍석범도 까닭 없이 죽었다. (작자 주:강희 황제의 영을 받고 위소보가 역적 모십팔을 사형하는 현장감독을 할 때 사람을 바꾸는 교묘한 수법으로 풍석범을 사형에 처했다.) 정극상은 인생의 달고 쓴맛을 다 맛보았고 또 스승 풍석범의 울타리마저 잃자 오히려 사나이 대장부로서의 정의감이 불타을랐다. 그는 헛되게 보낸 세월을 후회하고 힘을 다해 끝내 '팔괘십변니추공'을 연성했다. 이 공력은 불문(佛門) '이늑경(易肋經)'의 내공심법을 기초로 한 것인데 물에서 그 장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물속에 며칠이라도 잠겨 있을 수 있고 배가 고프면 날고기를 먹고 물을 마신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입으로 물을 뿜고 혹은 침과 가래를 뱉어 사람을 쉽게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이 특이한 공력은 보통 사람은 십 년 걸려도 연마하기 어렵다. 정극상은 대만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물과 인연이 깊었고 또 그의 스승의 무공이 출중하여 늘 보고 들은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더욱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난봉꾼이 개과천선하듯 무공을 열심히 익혀 선조들의 대업을 부흥시키자고 걸심한 데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수년간의 완강한 의지로 끝내 이 무공을 연성해 낸 것이었다. 그래도 위소보가 덤덤한 기색을 하자 정극상은 너무나 기가 막혀 웃어 버렸다. (무식한 시러배 잡놈이 그야말로 이 고심한 무공에 대해 무엇을 알까마는 이 어르신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구나!) 정극상이 말했다. [팔괘십변니추공은 모두 열 가지가 있는데 나는 얼더 몸에 그 열 가지를 하나하나 써 보았소.] 정극상이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얼더를 굴복시킨 과정을 이야기 했음에도 알아듣지 못하는 위소보는 오히려 반감이 들 뿐이었다. (제기랄 놈이 또 이런 방법으로 나를 겁 주는군.) 정극상은 냉소하며 말했다. [이 열 가지는 변화가 복잡하여 짧은 시간에 다 말할 수 없소. 위작 나으리께서는 흥미가 없으신 모양이구려? 한순간에 사람의 음양(陰陽)을 바꿀 수도 있고 계절이 바뀌게 할 수도 있단 말이오. 여름에도 한겨울같이 만들 수 있소. 또 추워졌다가도 바로 삼복 열기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단 말이오.] 위소보가 말했다. [그럼 학질에 걸린 것 같겠구만! 거참 괴롭겠는데.] [위작 나으리, 이 '팔괘십변니추공'을 과소평가하지 마시오. 그 정도가 아니니까. 학질에 비한다면 이 무공은 몇천만 배의 고통을 줄 수 있소. 위작 나으리, 그래도 믿지 못하겠소?] [믿소, 믿소! 왜 믿지 않겠소?] 정극상이 또 말했다. [다른 수법을 한 가지 말씀드리리까? 위작 나으리는 본래 남자지요? 그런데 내가 즉시 여자로 만들어드릴 수가 있다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거, 참 흥미로운 일이로군요.] 정극상이 말했다. [듣기에는 흥미가 있지만 한번 맛본 사람은 죽기보다 못하다고 하오.] 위소보는 갑자기 한 사람이 생각나서 웃으며 말했다. [정 형, 내 한 사람을 알선해 드릴까? 그의 몸에 시험하면 그가 몹시 기뻐할 거요.] [그게 누구요?] [강녕직조 조인의 손자 조설근이오.] [조인의 무공은 뛰어나지만 그의 손자의 무공은 어떤지 모르겠는 걸?] [내가 말하는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오. 조설근은 아직 어린 아이인데 무공이 다 무엇이겠소? 그런데 고 녀석이 아주 이상하거든, 고 녀석은 사내놈인데 사내 노릇 하기를 싫어한다지 않겠소? 쪼그만 놈이 이 어르신보다 헛소리를 더 잘합디다. 글쎄 나에게 '여자는 물로 만든 혈육이고, 남자는 흙으로 만든 혈육입니다'라고 하지 않겠소? 그러니 고 녀석을 향기로운 계집으로 만들면 그놈은 아마도 정 공작 나으리께 머리가 떨어질 지경으로 절을 할 것이오.] 위급한 상황에서도 우스갯소리를 잊지 않는 것은 위소보가 갖고 있는 재간이었다. 정극상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고놈은 나중에 자라서 색골이 되겠구려. 그러나 나의 '팔괘신변니추공'은 그에게 맞지 않소.]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왜 맞지 않다는 것이오?] 정극상은 위소보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허튼 소리와 우스꽝스러운 신공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들었소. 우리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합시다.] 위소보는 속으로 대노했다. (우스꽝스러운 신공이라고? 제기랄 요즘 세상은 정말 꼴같잖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뭐라고 한다더니 정말 뻔뻔하군.) 정극상은 위소보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말했다. [얼더가 이 무공의 맛을 톡톡히 본 셈이지. 아무리 지조가 곧은 영웅호걸일지라도 내 앞에선 한 마디의 거짓말도 못 했소.] 정극상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기색을 보니 이 무공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어디 한번 시험을 해 보실까요?]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찼다 더웠다, 남자가 됐다 바로 여자가 된다.... 그거 아닙니까? 뭘 볼 것까지야....] 정극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그래도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소. 나의 무공 맛을 좀 보면 마음 속에 감추고 있던 말들이 하고 싶어질 거외다. 자 그렇게 되면 시시한 말장난을 계속할 필요가 없어질 게 아니오?] 정극상은 손가락으로 위소보의 하단전혈(下丹田穴)을 눌렀다. 위소보는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네가....] 말소리가 멈췄다. 그의 몸 하단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진기(眞氣)가 흘러 왼쪽은 찬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가워 오고 오른쪽은 불로 지진 듯이 뜨거워졌다. 순식간에 위소보는 덜덜 떨리기도 하고 부채질도 하고 싶었다. 그는 정말 그 고통이 너무 견디기 어려웠다. 정극상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서투른 점이 많소. 위작 나으리, 양해하여 주시오.] 위소보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양해는 무슨 놈의 양해.... 그래 이 어르신을 죽일 작정인가? 아이고 나 죽네.... 죽어.... 이렇게 사람을 치사한 방법으로 죽이는 놈은 영웅이 될 수 없다!] 정극상이 말했다. [좀 생각해 보란 말이오. 당신은 아직 수백만 냥의 돈을 다 쓰지도 못했을 거요. 또 훔쳐오고 빼앗아 온 일곱 부인들과 흥청망청 놀아보지도 못했는데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이오? 그러니 우물쭈물하지 말고 장보도를 어서 내놓기나 하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개자식, 이 어르신이 멍청인 줄로 아느냐? 장보도를 내놓으면.... 결국 너는 나를 죽이고 말 텐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이 어르신은 죽어도.... 죽어도.... 내놓을 수가 없다.] 정극상이 말했다. [똑똑히 굴어! 죽는 것도 다 같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면 죽더라도 고통 없이 보내 주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얼더처럼 이삼 년간 시달림을 받다 죽을 줄 알아라!] 위소보가 말했다. [죽는 것은 한 가지인데 달리 또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정극상은 더 말하지 않고 겉으로는 그롤 봐주는 척하면서 부드러운 힘을 가해 손끝으로 위소보의 단전을 눌렀다. 그러자 차고 덥던 감각은 어느덧 없어지고 사지가 아주 시원해졌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국성님의 후대가 옛정을 보아서 사정을 봐주시는군요.] [뭐라고?] 위소보는 더 듣기 좋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돌연 정극상의 손에 힘이 주어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사슴이 기경팔맥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혈맥이 뻗쳐 오르면서 흥분되어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 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정극상 이놈이 또 어떤 도깨비 같은 수작을 부렸단 말인가? 이 놈이 팔십 개 푸른 모잔가 뭔가 하는 무공을 내게 뿜어대고 있나보다. 제기랄, 그것이 뭐든 학질병만 아니민 두렵지 않겠는데.)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번뜩이고 그 빛은 물의 파문처럼 끊임없이 커졌다. 위소보는 못내 두려워졌다. (이 정극상 놈이 무슨 수작을 피워댄 것일까?) 위소보의 눈앞에는 점점 양주 서호 강변의 명옥방(鳴玉坊)이 나타나고 명옥방 안에 여춘원이 보였다. 여춘원의 광경은 복숭아 꽃이 활짝 피고 실버들이 드리운 아름다운 경치였다. 많은 풍류 공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왔다. 위소보는 속으로 의심했다. (내가 어찌하여 집으로 돌아왔는가? 아니 나는 혈도가 눌리워 굴 속에서 청아의 시달림을 반나절이 넘게 받고 또 지금은 정극상의 손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아, 나의 어머니가 아닌가? 어머니가 차린 여춘원은 지금 아주 흥성하여 강남에서도 소문이 났나보구나!) 위소보는 눈을 크게 떴으나 정신이 몽롱했다. (어머니는 돈이 아까워 예쁜 계집들은 사들이지 못했으니 모두 늙고 더러운 년들 뿐이구나.) 위소보는 참지 못해 소리쳤다. [이런 계집년들이 어떻게 풍류 공자들과 짝이 맞겠는가? 만약 내가 집에 있었다면 공자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겠는데.... 만졌다네, 만졌다네, 공자의 머리 만졌네....] 위소보는 혼잣말을 중얼중얼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기랄, 그래 이 어르신이 기생으로 되었단 말인가? 그러면 내 스스로 타락했다는 말인가?) 정극상은 손가락을 여전히 위소보의 단전혈에 대고 괴상하게 웃었다. 위소보는 돌연 뭘 느꼈는지 물었다. [정 형, 나를 어떻게 만들었소?] 정극상이 말했다. [너는 풍류를 즐긴다고는 하나 호색한에 불과해. 남의 사랑을 빼앗고 또 남외 처까지 빼앗았으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모조리 골라 다했지. 데놈의 모양을 고쳐 그 동안 진 빚을 하나하나 갚으려고 한다.] 위소보는 놀라며 말했다. [더러운 녀석....] 정극상이 웃으며 말했다. [조설근이란 아이 놈, 말 한번 잘했군. 여자는 물로 만든 혈육이고 남자는 흙으로 만든 혈육이라, 그러니 내가 혈육을 바꾸어 주지. 그것 참 흥미롭지 않겠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그건 안 되오. 이 어르신이 매일 여춘원에서 한량들의 술 심부름이나 든다는 것이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요? 정 형, 우리 할 말이 있으면 잘 이야기해 봅시다.] 정극상은 속이 시원하도록 보복한 것이 즐거워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내가 자네를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로 만든 다음 천천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정극상이 이렇게 말하며 내력을 더 가했다. 위소보의 눈앞의 환상은 더 선명해졌다. 숱한 호색한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야릇한 감정이 가슴 속으로부터 번지면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었다. 위소보에게 이런 느낌이 동하는 순간 혈도가 열리고 손도 마음대로 쓸 수가 있었다. 위소보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기 옷을 찢고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공자님, 다시 한 번 '오경이 그리워' 노래를 부를 테니 들어보시겠어요?] 정극상은 웃으며 말했다. [거참 신통한 기생이로구나!] 위소보는 몽롱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기생이라구? 지금 누구더러 기생이라는 것이냐? 날 두고 기생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러면 어떤가? 히히, 고것 참 재미있는 걸.) 위소보는 돌연 눈가가 붉어지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잔등의 명문헐에 양강기(陽剛氣)가 전해짐을 느끼며 정신이 돌아왔다. (낭패로구나. 이 어르신은 당당한 대장부 녹정공이 '아니시던가! 또 꽃같이 어여쁜 일곱 부인이 있으며 장난꾸러기 아들, 딸도 있는 데 내가 어찌 기생이 된단 말인가? 이 정극상 개자식이 꾸며낸 수작이다!) 정신이 들자 위소보는 정극상의 손을 밀쳤다. 무공 재간이란 전혀 없는 위소보지만 저도 모르게 혈도가 열려 언젠가 개방의 무리와 한바탕 일 전을 벌였을 때처럼 정극상의 오른팔을 힘껏 밀어 붙였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정극상의 몸이 하늘로 붕 뜨더니 굴문 밖으로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위소보가 보기에는 아주 이상스럽기만 했다. (정극상 저놈이 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어쨌든 혈도가 열렸으니 꽁무니를 빼는 것이 상수다! 그렇지 않으면 저놈이 다시 돌아와 또 어떤 몹쓸 짓을 할지, 정말 여춘원의 기생으로 만들어 버리면 재미 없지.) 위소보는 일어났다. 밖의 정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신행백변'으로 달아나고 볼 일이었다. 그는 발에 힘을 주어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도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때였다. 그가 신행백변을 날리려는 찰나에 그만 땅이 꺼진 것이었다. 위소보는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 떨어졌다. 위소보는 엉덩이가 아파 욕을 퍼부었다. 그 때 앞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보니 자신이 구덩이에 빠져 있는 깃이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이 어르신의 무공이 그 동안 발전했나 보군! 정극상 놈을 멋지게 밖으로 내동댕이 쳤으니 말이야! 이제 다음 번에도 나를 못살게 굴면 그놈에게 울긋불긋한 분칠을 한 기생으로 만들어 오늘의 화풀이를 해야지.)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하였으나 정작 그렇게 하자니 걸리는 게 있었다. (이 정극상 녀석이 이전에 나의 처 아가와 놀아날 때는 겉모양이라도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희었건만. 그런데 지금은 그 몰골이 꼭 반인 반귀가 되었으니 기생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나는 정말 생각이 없어. 생각은 고사하고 구역질이 나서 그를 어찌 보겠는가!) 위소보는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며 밝은 쪽을 향해 걸어갔다. 몇 굽이를 돌아가니 굴문이 나타났다. 위소보가 기어나가 보니 그곳은 강변이 연해 있었다. 앞은 갈대밭이 하늘을 가리웠다. 정오가 되자 머리 위에서 태양이 내리비쳤다. 위소보는 뒤를 보고 놀랐다. (아니, 내가 지금도 미산도에 있지 않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알만 했다. (내가 문아의 배에 올랐을 때 청아와 정극상의 마수에 걸려 들었지. 문아도 내통하여 나를 붙잡으려는 것은 아닐까? 내 편이 많으니까 이들이 으슥한 곳으로 나를 꼬여내는 판이구나.) 가장 은밀한 곳이 미산도였다. 위소보가 이놈들에게 붙잡혀 미산도에 끌려 온 것은 관병들은 고사하고 구난사태, 현정도장 등도 알지 못할 것이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나도 한 가지를 배웠구나. 위험한 곳일수록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그런데 개방 놈들은 정말 돼먹지 않았구먼. 이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래도 당당한 제19대 방주이신데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이 방주 어르신께서 이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한 놈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으니 말이야. 이 어르신의 무공이 고강하고 남보다 출중하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만약 정극상 그놈이 이 어르신을 기생으로 만들어 여춘원으로 보냈다면 개방의 체면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렇게 허튼 생각을 하다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기랄 개방 놈들! 할애비까지 능멸을 받아도 싼 놈들! 이 어르신이 언젠가 내부를 정돈하는 날이면 데놈들의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치겠다.] 말이 채 끝나지 전에 갈대밭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주님! 괜찮으십니까?] 위소보는 놀라면서 소리쳤다. [누구냐?] 갈대밭에서 작은 나룻배가 오는 것이 보였다. 뱃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잔등에는 여덟 개의 주머니를 진 늙은 거지가 서 있었다. 늙은 거지는 공손히 인사하며, [하인은 팔대 장로 과산호올시다. 방주님을 뵈옵고저 하나이다.] 개방 방주 자리를 다툴 때 과산호는 위소보와 문아를 도와 큰 공을 세웠다. 위소보는 그 때서야 안심을 하고 물었다. [과 장로, 어쩐 일로 예까지 왔습니까?] 과산호는 손을 저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이 곳은 말할 곳이 아니므로 방주님께서는 어서 배에 오르십시오.] 위소보는 그의 말대로 배에 오르고 과산호가 노를 젓기 시작하자 배가 떠났다. 이윽고 나룻배는 망망한 호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나릇배가 호수 중심에 이르자 과산호는 사방을 살펴보고 다른 배들과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방주님! 소인은 문아 아가씨의 명을 받고 이 곳을 지키려 왔소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문아?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문아 아가씨는 방주님을 구하러 갔습니다. 아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위소보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모두 이 어르신이 친히 겪은 일인데, 문아가 다륭의 배에 있는 나를 꾀어 내어 자기 나룻배에 오르게 하고는 발을 굴러 배를 뒤집었지 않는가! 그래서 이 어르신은 물속에 빠졌으며 또한 그 때문에 청아와 정극상의 손에 붙잡혔고....) 그는 너무도 망연자실하여 다시 물었다. [문아가 나를 구했단 말이오?] 방주 자리를 놓고 대결하는 가운데서 문아는 확실히 과산호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래서 그녀를 믿었다. 그런데 위소보의 말을 들어보니 위소보가 문아를 의심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아니 그럼, 문아 아가씨가 방주님을 구하지 않으면 누가 방주님을 구한단 말입니까?]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과 장로, 나는 연놈 마귀들한테 붙잡혀 애를 먹다보니 얼이 빠져서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알려 주십시오.] 과산호가 말했다.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방주님이 큰 배에 오르자 섬에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졌습니다. 문아는 방주님의 적수가 많아 남몰래 뒤를 따랐지요. 그 다음 날이었어요. 문아는 방주님께서 그들의 손에 붙잡힌 것을 알고는 나를 이 곳에서 지키라 하고 방주님을 구하러 갔습니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까 굴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자신의 무공으로 정극상을 밖으로 던졌는가 했더니 아마도 문아가 내력으로 나의 혈도를 통하게 하고 격산타우(隔山打牛)인지 또 격산타구(隔山打狗)인지 하는 기묘한 공력으로 정극상을 밖으로 내던졌군!)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문아가 나를 불러 자기 배에 앉히고 쌀쌀하게 웃다가 발로 배를 굴러 뒤집어 놓고는 내가 그놈들의 손에 붙잡히자 나를 구한다구....) 위소보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 그렇지, 왜 이리 나는 어리석은가! 이 어르신은 정말 그 다섯 놈들한테 넋이 나갔구나! 기실 그 배에 앉아 있던 것은 문아가 아니라 청아년이었구나.... 그들 자매는 쌍둥이니까 언니를 동생으로 잘못 볼 수도 있지.) 과산호가 말했다. [방주님, 뮐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 아니오. 과 장로가 말씀하기를 문아가 나를 구했다는데 왜 보이지 않는거요?] 과산호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방주님의 몸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위소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니 옷은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진 채었고 그 몰골 또한 가관이었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문아는 얌전한 처녀인데 어찌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의 몸을 보겠는가?) 위소보는 정극상이 그 무슨 '팔십 개 푸른 모자'라는 무공을 자신에게 가할 때 자기가 흰소리를 친 것을 문아가 다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다 찢어진 옷 속에 손을 넣어 보았다. 비수, 돈, 장갑, 몽환약은 그대로 다 있어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과산호는 위소보를 호송하여 미산호를 떠나왔다. 위험하지 않는 곳까지 오자 인사하고 둘은 헤어졌다. 위소보는 뭍에 오르자 한 주막집으로 갔다. 그는 주인에게 돈을 주어 옷을 사오게 하고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저녁을 한상 푸짐하게 시켜 먹고 곧장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보니 그제서야 피로도 풀리고 정신이 좀 들었다. (나 혼자 몸으론 이놈들을 대적하기 어려우니 어서 이 곳을 떠나야 하겠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위소보는 생각했다. (도홍영 고모가 죽음을 무릅쓰고 편지를 전해 주며 날더러 조심하라 했지. 또 '사십이'인지 뭔지 하는 것도 있고.... 태후와 황제는 왜 나를 오라고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북경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다.) 위소보는 또 생각했다. (그리운 쌍아는 지금 어느 놈한테 붙잡혀 있는지? 그래도 쌍아는 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또 충심으로 나를 보호해 주었는데.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충신이 아니라고.... 쌍아가 그처럼 나를 보살펴주니 나도 보답을 해야 한다. 그러니 가장 급한 일은 쌍아를 찾는 것이야.) 쌍아를 생각하니 또 여섯 부인들이 생각났다. (공주 고년을 빼고는 모두 쌍아를 찾아 혜매고 있을 텐데.... 그러나 공주 년도 남의 이목이 무서워서라도 꽁무니를 뺄 수는 없을 거야. 또 그년은 며칠이나마 공부깨나 한 년이니 도리를 모를리야 없지.) 위소보는 주막집 주인에게 마차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미산도는 후미진 곳이라 마차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위소보는 우마차를 한 대 구해 거기에라도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우마차는 삐꺽삐꺽하며 하루 남짓 걸려서 겨우 서주부(徐州府)에 도착했다. 위소보는 이 곳에서 마차를 삯내어 타고 다시 남으로 떠났다. 마차는 신이 나게 달렸다. 돌연 마차가 급작스럽게 서자 위소보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는 곧 고함소리가 들렸다. [마차에 앉은 개자식은 어서 내려 오거라!] 위소보는 대노했다. [제기랄, 개자식이라니? 우리 어머니를 빼놓고 어떤 놈이 이 어르신을 감히 개자식이라 부른단 말이냐?] 이렇게 성이 나서 한참을 떠들어댔더니만 한 사람이 나지막하게 하는 건데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제, 무슨 말을 그토록 험악하게 하시오? 좋은 말로 할 것이지.] 위소보가 마차 휘장을 들치고 보니 키가 작달막한 두 사나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위소보는 소리를 길게 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뚱뚱한 사나이가 제기랄! 하고 소리쳤다. 또 다른 비쩍 마른 사나이가 웃음 띤 얼굴로 위소보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희들이 급한 일이 있어 귀하의 마차를 빌리고 싶습니다만.] 위소보가 말했다. [너희들 일은 급하고 이 어르신의 일은 급하지 않는 줄 알아? 안돼!] 비쩍 마른 사나이가 히쭉히쭉 웃으며 말했다. [길을 떠나면 서로 도와주는 법이니 귀하께서 좀....] 위소보가 말했다. [기생집에 온 호색한들도 먼저 오고 나중 온 선후가 있는 법인데 어디서 행패요? 더 이상 내 갈길을 막지 마오.] 비쩍 마른 사나이가 말했다. [사제, 이분이 우리 사정을 봐주지 않는구려.] 뚱뚱한 사나이가 펄쩍 뛰며 손으로 위소보를 잡으려 했다. 위소보는 아주 재치 있게 머리를 움직여 피했다. 비쩍 마른 사나이가 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무공을 아시는 분에게 이처럼 덤벼 실례했습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공연한 말씀을 하오.] 위소보는 속으로 말했다. (이놈들의 무공은 보잘것 없군. 이 어르신이 마차에 앉아 있어 '신행백변'을 쓸 수 없어서 그렇지, 나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군!) 이런 생각이 들자 위소보는 몸을 움찔하더니 마차에서 내렸다. 뚱뚱한 사나이가 씨름 선수처럼 발을 걸어 위소보의 하삼로(下三路)를 치고 비쩍 마른 사나이가 와심권(窩心拳)으로 위소보의 가슴을 치려 했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친구들, 그래 한 방 치려고 그러오?] 위소보는 살짝 두 사람 사이로 빠져 나갔다. 툭툭! 소리가 나더니 비쩍 마른 사나이의 주먹이 어느 새 뚱뚱한 사나이의 앞가슴을 들이쳤고 뚱뚱한 사나이는 비쩍 마른 사나이의 다리를 들이찼다. 두 사나이는 저희들끼리 싸우다 그만 다 쓰러졌다. 기실 이것은 위소보의 무공이 출중해서라기보다는 '신행백변'의 영활성과 임기응변에 의한 결과였다. 무공 실력만으로 따진다면 이 두 사나이가 위소보보다 훨씬 나았다. 위소보는 싸우기만 하면 지는 것이 정해 놓은 이치인데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이겨 봤으니 그 위풍당당함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초면이지만 서로 절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구려!] 뚱뚱한 사나이가 말했다. [제기랄, 누가 절한다고 그랬어?] 이렇게 말하며 펄쩍 뛰더니만 비쩍 마른 사나이를 향해 쏘아보며 말했다. [왜 주먹으로 나를 쳤는가?] 그러자 비쩍 마른 사나이가 대답했다. [사제도 나를 발로 차지 않았나?] 뚱뚱한 사나이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위소보를 바라보고 말했다. [제기랄, 네놈은 요술을 피우는 게 아니냐?] 비쩍 마른 사나이가 당황해 하며 뚱뚱한 사나이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는 이 분의 상대가 안 되니 어서 갑시다!] 라고 하고는 위소보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산은 언제나 푸르고 물은 언제나 흐를 것이니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언제 다시 만난다고 그러오? 후에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두 사나이는 아주 꺼림칙한 표정을 하고 떠나갔다. 위소보가 말했다. [더 바래 주지 못하니 잘 가오.] 위소보도 마차에 올라 낮은 소리로 마부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떠납시다.] 마부가 채찍을 들자 마차는 앞으로 내달렸다. 바로 이 때, 위소보는 비쩍 마른 사나이가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소금장수 가운데 우리 둘의 무공은 그래도 제법 괜찮은 편인에 오늘 그만 그 사람한테 망신을 당했군. 에잇....] 위소보는 '소금장수'라는 말을 듣고는 흠칫 놀랐다. (나와 쌍아가 저놈들한테 붙잡혀 갔지. 내가 지금 소금장수들을 찾아 떠나려는 때에 저들이 제발로 찾아왔구나!) 위소보는 급히 마차를 세우게 하고 두 소금장수를 불러 세웠다. [두 친구, 좀 기다려 주오!] 두 사람은 휙! 돌아섰다. 비쩍 마른 사나이가 겁을 내며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우리를 놓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위소보는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오. 나는 당신들을 보고 아주 탄복했소. 이 마차에 자리도 있고 하니 두 분께서도 급한 용무가 있으시다면 같이 갑시다.] 비쩍 마른 사나이는 몹시 감동되어 말했다. [우리 같은 소금장수가 나으리와 같으신 분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려!] 위소보는 웃으며 돈을 꺼내 마부에게 주며 말했다. [별 말씀을 다하시는구려.] [이 두 분이 급한 일이 있다고 하니 조심해서 빨리 몰게나. 이 어르신이 더 생각해 줄 테니까.] 마부는 생각지도 않던 돈을 받게 되자 기뻐 말했다. [근심 마십시오. 나으리.] 마부는 사기가 올라 재빠르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위소보가 물었다. [두 분을 어떻게 부르는지?] 비쩍 마른 사나이가 대답했다. [소인은 장보근(張寶根)이라 부르고 저 사람은 사제인 정이호(丁二虎)입니다. 나으리의 대명을 물어도 좋겠는지?] 위소보는 재빨리 대답했다. [니로즈(爾老子)라오.] (역자 주:한자에서 '니로즈'란 당신의 애비라는 뜻임.) 비쩍 마른 사나이가 말했다. [니로즈? 나으리의 성함은 정말 훌륭하십니다. 라오즈(老子)는 도가(道家)의 시조인데 성이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라고 하지요. 그러니 니로즈란 이름은 보통이 아니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 장보근이란 놈도 글깨나 읽은 척하는 놈이구나. 나는 그냥 네 애비라고 말했을 뿐인데 웬 놈의 라오즈는 또 뭐냐, 데놈의 애비라 하면 그런가보다 할 것이지, 따지기는 원!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니 그럼 몇 시간만 네놈들의 애비 노릇을 해볼까? 쌍아의 일을 물어봐야겠다. 설마하니 애비가 자식 놈들한데 묻는데 자식이 제 애비야 속이겠나?) 위소보가 말했다. [다행히 만났소. 나는 늘 나의 친구인 소금장사로부터 두 분의 말을 들었소이다....] 위소보는 한바탕 엮어내 보자고 생각했다가 금방 마음을 돌렸다. (이 어르신의 친구야 다 셀 수가 없다마는 소금장사 친구만큼은 없으니 공연히 잘못 말해 정체가 탄로나는 날이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 아닌가?) 그런데 장보근이 공교롭게도 물었다. [니 사부, 소금장사 중에 친구가 있다고 하셨죠? 그가 누구인가요?] [그가 누구냐 하면 말이야....] 위소보는 속이 달았다. (누구라고 할까?) 위소보는 잠시 후에 웃으면서 말했다. [니로즈의 친구라면 아주 유명한 사람인데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의 무공 동작을 말할 테니 알아 맞춰 보시오!] 위소보는 자기를 납치했던 그 호(胡)가라는 소금장사가 생각났다. 그의 이름을 모르기에 알아맞춰 보라고 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니로즈의 친구인 그의 무공은 아주 대단하여 태산북두란 말이오. 예를 들면 주먹만큼 굵은 배의 밧줄을 손으로 꾹 쥐니 칼로 벤듯이 끊어지더란 말이오. 또 그의 잠자는 공력도 대단하지. 단번에 밤낮 사흘을 잔다오. 또 그가 다른 사람의 옷소매에 손을 넣으면 상대는 내력을 쓰지 못하오. 정말 대단하지 않소?] 위소보가 손으로 밧줄을 끊었다고 하자 정이호가 말했다. [참정 절철공(斬釘截鐵功)이구만!] 위소보가 단숨에 밤낮 사흘을 잤다고 하자 정이호는 '미타휴안공(彌陀休眼功)'이라 했다. 다시 위소보가 손을 옷소매에 넣는다고 하자 정이호가 장보근에게 물었다. [이것은.... 형님, 무슨 공력인가요?] 장보근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사제, 우리 같은 소금장사들이 무슨 무공을 연마한다고 그러오?] 정이호가 그제서야 알고 말했다. [아, 그것은 개뿔 같은 공력이지. 값을 흥정하는 암호지!] 장보근이 말했다. [니 사부와 우리 호달(胡達) 사부님은 서로 친구이셨군요. 어쩐지 무공이 고강하시더라니. 이 철모르는 제자들이 실례를 많이 했소이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아, 그 녀석의 이름이 호달이구나! 불쌍하게도 폐병쟁이 어린 거지의 손에 잡혀 미산호 바닥에 가라앉았는데, 이제는 호달이 아니라 자라가 되었겠는 걸!) 두 사나이는 서로 마주보았다. 장보근이 말했다. [니 사부님께 묻기는 좀 뭐 합니다만은 니 사부께서는 언제 마지막으로 호 사부를 보았습니까?] 위소보는 대강의 시간을 따져보고 말했다. [아마 칠팔 일 전인 것 같은데 아, 그렇지 팔 일 전이요. 한 주막집에서 나는 그와 우연히 만났소.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 두 사람은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소. 아마도 두 분께서는 알테지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쌍아는 어떤 두 놈한테 붙잡혀 갔는데 내가 그놈들의 이름만 알면 붙잡을 수 있지.) 정이호가 말했다. [그들은....] 장보근은 아주 교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 사제가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잘라 말했다. [그들 둘은 다 이름이 없는 제자들입니다. 그 날 니 사부께서는 호 사부와 무슨 말씀을 나누었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이 니로즈와 호 사부는 십여 년 전부터 우정을 나누어 온 사이라오. 그러니 그는 무슨 일이든 나와 의논을 하지.] 위소보는 의식적으로 말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그는 두 형제를 데리고 큰 장사를 하러 간다고 했소. 내가 '소금장사가 기껏해야 소금 몇 근을 팔겠지, 무슨 큰 장사를 한다고 그러오?'라고 했더니 호 사부는 '소금 밀수는 10만 냥쯤 하는 큰장사라오'라고 했소.] 정이호가 놀라며 말했다. [호 사부가 그 일을 니 사부께 말했소?] 장보근은 '사제!' 하고 얼른 제지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장 형제는 너무 소심하구만. 정 사제도 모르는 척하구. 이 니로즈가 말한 게 맞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 때 이 니로즈가 '무슨 놈의 장사가 한 번에 10만 냥을 번단 말이오? 호 형은 허풍이 너무 심하지 않소?'라고 했더니 호달이 이렇게 말했소. '이것은 우리 소금장사들의 가장 커다란 비밀이라오. 우리들 가운데 장가 성을 가진 사람과 정가라는 몇 사람만이 알 뿐이라오.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내가 말하는 것이라오.'....아니, 그럼 성이 장, 정인 사람들이란 바로 당신들이란 말이오?] 정이호는 좀 사기가 올라 말했다. [우리를 빼놓고야 또 누가 있겠소?] 장보근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역시 사기가 올랐다. 위소보가 말했다. [자네들의 호 사부는 나에게 가만히 말했소. '우리들은 어떤 사람을 팔려고 하오. 그 사람은 성망이 높은 사람으로서 개방파들은 그를 높은 값에 사려고 한다오.' 그 때 내가 이렇게 말했소. '개방파들은 정말 정도가 없는 놈들이지. 굶주림 때문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 장사를 하는가?' 그러자 호달이 이렇게 말했소. '니로즈의 형제들은 수완이 좋기로 소문이 났으니 강호에서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소? 내가 그 사람이 누군지를 말하면 우리 같은 소금장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당신 같은 백만장자도 속이 근질근질 할거요.' 나는 또 '호 형, 가만 있어 보시오. 내가 맞추어 볼 데니. 강호에서 누가 그처럼 몸값이 비싼가?' 라고 했소.] 위소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며 말했다. [나는 많이 생각해 보고 말했소. '혹시 천지회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 천지회 진 총타주는 이미 돌아가셨지. 그렇다면 독비신니 구난인가? 그러나 개방에서 그 늙은 사람을 사다 뭘 하겠소? 그것도 아니라면 왕공귀족(王公貴族)들이 아닐까?' 이 때 호 사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소. '니 사부, 당신이 말하는 인물들이 몇 푼이나 간다고 그러오. 왜 잊었소? 강호와 무림 중에 자고 이래로 둘도 없는 대영웅 대호걸 대귀인 천지회 청목당의 향주 녹정공 위소보 위작 나으리를 말이오.] ' 위소보는 자신을 있는 대로 추켜세웠다. 그러자 장보근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호 사부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했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거기에 또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소? 장 형제, 믿지 못하겠으면 호 사부를 만나 직접 물어보시구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호달은 이미 물속에 자라가 되었을 텐데 빨리 가서 찾아봐라.) 장보근이 말없이 있는 것을 보고 위소보가 말했다. [나도 호 사부의 말이 다 맞다고는 생각지 않소. 장 형제, 그 위소보 위향주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길래 몸값이 그리도 비싸오?] 장보근이 할 수 없이 말했다. [호 사부가 값이 있다면 값이 있겠지요.] 정이호가 말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위소보는 떼쟁이에 시러배 잡놈이라고 하던데 개방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많은 돈을 들여 그놈을 사려고 하는지?]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의 몸값이 많이 나가는 게 이상하다구? 네 이놈들, 이 어르신을 떼쟁이에 시러배 잡놈이라 욕했겠다!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장보근이 또 물었다. [니 사부, 그 후에 호 사부를 만나 보았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그는 소금장수인 걸 내가 어디 가서 만나 보겠소. 사람이나 붙잡으러 다니겠지.] 장보근이 말했다. [우리 호 사부와 잘 아시는 분이니까 말하는데 우리 호 사부는 그 날 이후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 아이쿠, 혹시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장보근이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위소보는 계속해서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호달과 십년지기 친구라 그의 성미를 잘 아는데 자네들은 아마도 그를 기다리지 못할 것 같소!] 장보근이 말했다. [그럼 니 사부께서 지시하여 주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내가 무슨 지시고 암시고 할 게 있소? 양주에 여춘원이 있다는 걸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 소금장수들은 장강과 회하 일대에 많이 모여 사는데 위소보는 이 두 사람의 말씨가 그 곳 사람들의 억양 같아 이렇게 물었다. 과연 정이호가 말했다. [알아요. 여춘원에는 위춘방이라는 기생이 있지요. 지금은 포주를 하지요. 그런데 괜찮은 색시들이 없어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는 돈이 아까워 색시들을 사들이지 못하는구나! 소금장수들마저 눈에 들어 하지 않으니 무슨 큰 돈을 벌겠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정 형제의 눈에 차지 않으면 장 형제의 눈에 들고 또 장 형제의 눈에 차지 않으면 호 사부의 눈에 들겠지, 내 말이 어떻소?] 명조와 청조 때 소금은 아주 중요한 물자였다. 관에서는 소금 밀수를 하다 발각되면 강도죄를 적용해 옥살이를 시키거나 그대로 참수했다. 때문에 소금장사는 목숨을 내걸고 하는 짓이었으므로 그들은 돈만 생기면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며 도박판이나 기생원에 가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이 말에 정이호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옳아! 호 사부는 아마도 여춘원으로 갔는지도 모르겠소. 개방 사람들한테 받은 돈으로 그 곳에서 흥청망청 쓰고 있을지 누가 알겠소?] 위소보는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며 말했다. [우리 정 형제가 그래도 잘 아는구만!] 위소보는 생각했다. (만약 내 말을 믿고 이 소금장사들이 여춘원에 진을 치고 떠나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감당하기 어렵겠는 걸!) 위소보가 또 말했다. [기실 호 형은 지금 백만장자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런 여춘원의 기생들이 눈에 들겠소? 아마도 사계항(四季香)에 간 것 같소!] 사계향은 양주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기생원이다. 위소보는 어릴 때 사계향이 여춘원의 장사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사계향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니.... 나으리는 양주 정황을 아주 잘 아십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왜 니로즈라 부르지 않을까? 이 세상이 점점 말이 아니야. 아들 같은 놈이 애비더러 나으리라 하니.... 아무래도 요놈이 의심을 하고 있구나.) 위소보가 말했다. [니로즈는 늘 양주에 가서 장사를 하니 양주 정황을 잘 알 수밖에. 자네들 너무 근심하지 마시오. 호달이 가면 어디로 갔겠소? 소금장사들의 위풍을 봐서라도 그가 염라대왕전으로 가기 전까지는 꼭 찾아올 것이요.] 정이호가 말했다. [암, 그렇고 말고, 어느 놈이 감히 우리 소금장사롤 건드릴려구!] 위소보가 말했다. [그리고도 영 꺼림찍하거든 이 장사를 그만 두면 되지. 자네들 소금장사 호달과 같이 있던 두 사람이 그 위소보의 처라고 하는 쌍아를 빼앗아 가지 않았소? 그 계집은 아주 곱고 얌전하여 어느 기생원에 팔아도 돈을 톡톡히 받을 것인데.] 정이호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우리를 너무 업신여기는군요. 우리가 가난해서 미친 줄 아십니까? 우리는 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오. 좀스럽게 기생원에다 아가씨나 대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오. 알겠소?] 위소보가 말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소. 그러나 위가라는 사람을 붙잡을 때 미인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가져다 팔 수도 있지 않소?] 정이호가 입을 삐죽하며 말했다. [무슨 미인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고 그럼니까? 니로즈는 우리 같은 소금장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쌍아가 위소보가 제일 아끼는 처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믿지 않소. 개방 사람들은 확실히 남자를 사지 여자는 사지 않소.] 정이호가 말했다. [강호에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이 어찌 개방 하나뿐이겠습니까?] 위소보는 무심결에 말했다. [또, 누가?....] 정이호가 말했다. [또 강....] 장보근이 또 앞질러 '사제!' 하고 불렀다. 정이호는 입을 막고 얼굴이 붉어지며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 소금장사들의 비밀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하오. 이 정이호가 멍청이가 된 듯싶소!]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누가 멍청이라 했소? 정 형제는 아주 총명하오.] 장보근은 인사하며 말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우리 형제는 이제 떠나야 하겠습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니로즈도 자네들과 아주 재미있게 잘 지냈소. 그런데 어찌 그렇게 급하게 떠나려 하오? 이 어르신과 좀 같이 있어야지!] 장보근은 돌연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너.... 너....] 돌연 장보근은 말이 없었다. 그는 옆구리에 비수를 차고 있었는데 싸늘한 감촉이 느껴지며 암계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정이호가 이상하여 말했다. [형님, 왜 말이 통쾌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오?]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 형님은 배가 고파 그러는데 나에게 먹을 걸 좀 달라고 그랬다네.] 위소보는 이렇게 말하고는 몽환약을 한줌 쥐어 장보근의 입에다 털어넣었다. 정이호가 말했다. [형님, 미숫가루를 먹었소?] 장보근은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었을 뿐 곧 혼미해졌다. 정이호는 놀라 소리쳤다. [나으리, 우리 형님께 무엇을 먹였습니까?] 위소보는 솜씨 빠르게 장보근이 넘어가자 얼른 정이호의 등에 비수를 대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저 형님을 죽이겠소, 살리겠소?] 정이호는 욕을 했다. [제기랄, 니로즈가 형님에게 이상한 미숫가루를 먹인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놈, 네 형은 게걸스럽게 먹다가 반죽음이 되었어. 네가 만약 나더러 구해 달라고 하면 저놈의 목숨을 살려 주고 그렇지 않으면 한 시간 안에 저놈은 죽는다!] 정이호는 강호상에서 다년간 떠돌아 다녔기에 이 니로츠가 어떤 짓을 했는지 금방 알았다. [니로즈, 살 길을 열어 주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좋소! 정 친구, 소금장사들이 쌍아를 어디에다 팔아 먹었는지 알려 주오, 그러면 자네 형은 무사할 것이오.] 정이호는 의심하여 물었다. [그건 알아 뭣합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지. 니로즈에게는 처가 없다오. 자네들의 호사부 말에 의하면 그 쌍아라는 계집은 아주 곱고 얌전하다고 하던데 이 니로즈는 그녀를 사서 처로 삼을 생각이오.] 정이호가 말했다. [니로즈,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은가요. 처를 구해 뭘 합니까? 돈만 있으면 기생원에 기생들이 얼마든지 있는데요.] 위소보가 말했다. [정 형제, 우리 마음은 꼭 같소. 기생원으로 가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노릇이오. 그러나 처가 없으면 아들을 낳지 못하고 대가 끊어지니 죽으면 향불을 피울 사람이 없지 않소?] 정이호는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니로즈, 그 쌍아의 몸값이 아주 비싸서 남들은 10만 냥을 썼답니다. 문제는 이제 돈을 주어도 니로즈께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위소보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건 염려 마오. 니로즈는 어디든 어떤 사람과도 줄을 댈 수 있소. 그가 10만 냥으로 쌍아를 샀다고 했소? 흥! 이 니로즈의 말 한 마디면 그 10만 냥이 아니라 20만 냥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수 있단 말이오.] 정이호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그럼 내가 알려주겠습니다. 쌍아를 산 사람은 강녕 사람으로 성이 조가라는 사람인데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소보가 놀라면서 말했다. [조대화검(曹大花瞼)이 아닌가?] (역자 주:조인을 풍자하여 이르는 말임.) 정이호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넉 자가 아니라 두 자입니다. 뭐라던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위소보는 비수를 더 가깝게 대면서 소리쳤다. [어서 말해, 그 조가라는 놈이 쌍아를 사다 뭘 했는지?]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도 니로즈처럼 처로 삼고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려고 그러겠지요.] 위소보는 대노하여 말했다. [제기랄 놈, 썩 물러가!] 정이호도 소리쳤다. [더러운 개자식 같은 놈!] 위소보는 정이호를 마차에서 밀어 버리고 장보근을 발로 찼다. 정이호가 땅바닥에서 소리쳤다. [제기랄 니로즈,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 형님의 해독약을 두고 가란 말이다....] 위소보는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생각에 빠졌다. (요, 조가라는 녀석은 겉으로는 군자인 척하지만 뼛속까지 색에 미친 녀석이다. 그 고운 쌍아를 그새 자기 계집으로 삼지 않았나 몰라. 천하에 무엇인들 갖지 못할 것이 있으리오만 푸른 모자만큼은 갖지 말아야지.) 위소보는 마부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어서 빨리,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해서 강녕으로 갑시다!] 第15章. 인질(人質)은 인질로 보답한다 위소보는 제법 격식을 차리고 강녕직조 조인의 손님방에 앉아 있었다. 심부름꾼이 들어와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대인 어르신께서 서재에서 만나 뵈옵겠다 하나이다.] 관저에 찾아오는 귀한 손님 가운데 서재에 청하여 만나는 것은 그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조 늙다리가 더러운 격식을 차리는구나! 데놈이 이 어르신과 종품 차이만 해도 대인과 소인인데 친히 와서 본작 나으리의 왕림을 공손히 영접해야 원칙이지. 그래야 내가 세도를 부리고 향락을 누린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에잇! 건방진 놈.) 조인은 서재 문어귀에서 위소보를 맞아 인사했다. [이 비직이 위작 나으리를 뵈옵고저 합니다.] 위소보도 정중히 답례했다. [조 대인, 다 무고하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 조 늙다리야. 무슨 놈의 배짱이 그리도 크냐?) 조인의 서재는 질서정연하고 아담하였다. 주위에는 고서들이 칸칸이 꽂혀 있고 한두 폭의 그림과 몇 가지 고서들을 사이사이 진열하여 자못 우아하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놈의 서재에는 이 어르신의 서재보다 책이 많기는 하지만 네놈이나 이 어르신이나 별다른 점이 없지. 책이 사람을 알아도 사람은 책을 모르니 겉치레뿐이지.) 조인은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을 흥미진진하게 보다가 위소보가 앉은 다음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오도자의 불화(佛畵)는 대단하지요. 위작 나으리 보십시오. 필적이 시원스럽고 그 기세가 웅위로우며 서로 묘하게도 잘 조화 되었지요? 소동파(蘇東波)가 말한 것처럼 자고 이래 오도자가 그린 그림을 능가할 것이 없지요.] 이렇듯 수염을 만지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양은 옹색한 선비의 몰골이지, 누가 조인을 무림고수라 하겠는가! 조인은 위소보가 막연해 하는 기색을 보고 자기도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이 무지한 시러배 잡놈에게 오도자가 이렇고 저렇고 말하는 내가 우스운 노릇이지.) 조인은 좀 어색한지 웃으며 말했다. [이것 참, 위작 나으리께서 무엇인들 모르시려고. 제가 이렇게 떠벌렸으니 가히 명장 앞에서 도끼 장난하는 격이 됐소이다.] 위소보는 좀 이상한 감을 느꼈다. (호랑이를 가둬 놓고 길 들이자는 격이 아닌가? 죽일놈, 이 조 늙다리도 최후 수단을 다 써볼 작정이구나. 그럼 내가 독안에 든 쥐가 된 셈이 아닌가?) 위소보는 속담이나 성어 쓰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열에 아홉은 틀리는데 이번에는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는 말만은 틀리지 않고 알맞게 썼다. 위소보는 속으로는 좀 미심쩍은 생각이 있었지만 입으로는 친절하게 웃으며 대했다. [조 대인, 이번에 재해 정황을 시찰하다 조 대인의 문앞을 지나치게 되었구려. 옛정을 못 잊어 한번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왔소이다.] 조인은 어쩌다 시간을 짜내어 이 명화를 보고 흥미진진해 하는 참에 위소보가 찾아오니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겉으로는 공경하여 대답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이토록 관심을 기울여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소이다.] 위소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조인의 눈치를 알고 생각했다. (이 어르신을 업신여긴단 말이냐! 한번 혼내 놓아야겠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조 대인, 별말씀을 다하오. 몇몇 친구들이 조 대인께 문안을 전하더구만요.] 조인이 부드럽게 물었다. [누굽니까?] 위소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나의 스승 독비신니 구난, 나의 의동생 벽력장 우아대, 천지회의 형제 현정도장과 형제들, 그리고 나의 철모르는 부인들이 모두 와서 조 대인을 뵈옵겠다 하였소이다. 하지만 나는 직조부는 아주 위엄 당당한 관청이니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갈 필요가 없다고 그들을 설득하고 나서야 혼자 오게 되었소이다.] 조인은 미산도에서 이 사람들이 위소보를 보호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조인은 생각했다. (이 위소보의 말은 진실치 못하여 쉽게 믿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온다면 강제로 막을 수는 없지.) 조인은 구난사태와 겨루어 봤고 또 우아대의 '사자후' 신공을 겪어 보았다. 이 사람들이 정말 온다면 대적하기 어려울 일이었다. 조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불초 조 아무개의 안면도 꽤나 넓습니다 그려!] 위소보가 말했다. [내가 이만한 일을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이 떠날 것이 있는가? 나는 조 대인과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니 이만한 것이야 들어 줄 것이라고 했소. 조 대인, 그렇지 않소?] 조인이 정색을 하고 허리를 굽혔다. [혹 위작 나으리의 분부가 있으면 소인은 기어코 하겠습니다. 어떤 분부가 있으신 지?] 위소보는 두루뭉실하게 말했다. [나의 스승 구난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보, 만약 그 조가라는 사람이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너도 사정을 보지 말라. 그 보잘것 없는 대성장은 너의 스승의 철검문신공(鐵劍門神功)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 것 없다. 믿지 못하면 한번 겨뤄보자'고 했소이다. 이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스승님의 말씀이니 나와는 관계가 없소이다.] 조인은 크게 자존심이 상한 듯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위소보가 또 말했다. [나의 처 건녕공주는 황제의 여동생으로 고귀한 황실에서 자랐다는 신분을 믿고 버릇없이 본 위작의 귀를 쥔다오. 그년의 눈에는 윗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이번에 가면 그 조 늙다리더러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라고 하세요.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 공주는 그를 데리고 황제오빠 앞에 가서 한바탕 혼내겠어요'라고 하지 않겠소? 조 대인, 이 세상 모르는 계집들의 말을 염두에 두지 마시오.] 조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난사태의 무공이 출중하다고 하나 나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 건녕공주는 황제의 여동생이니 시끄럽게 훼방해도 어찌 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일도 없으니....) 조인이 웃으며 말했다. [공주야 우스개 소리겠지요.] 위소보는 이렇게 있는 소리 없는 소리로 조인을 어느 정도 눌러놓고 말했다. [조 대인,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요근래 여자를 사왔다지요?] 조인의 낯이 붉어지며 아주 어색하게 말했다. [위작 나으리, 소식이 정말 빠르시구만요?] 위소보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일이 풀린다고 생각했다. 먼저 범을 누르고 산을 두드릴 요량으로 간신 같은 조인에게 한껏 겁을 주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생각이었다. 위소보는 사기가 올라 웃으며 말했다. [이 위소보는 별 재간이 없어도 여인들이야....] 조부(曹府)의 아환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조인은 그가 들을까봐 서둘러 위소보의 말을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위작 나으리, 어서 차를....] 아환이 나가자 친히 문을 닫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비천한 몸은 위작 나으리의 뜻을 알 수 없소이다.] 위소보가 비아냥거렸다. [왜 모르겠소? 당신은 매우 똑똑한데.] 조인은 잠시 생각하다 침울한 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위작 나으리께서 물은 바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소이다. 소인은 여자를 사왔습니다.] 위소보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천천히 말했다. [소금장사꾼들한테 샀소?] 조인이 고개를 끄덕었다. [나으리는 아주 뛰어난 식견을 지니셨습니다.] 위소보가 또 물었다. [그 여자를 쌍아라 부르지요. 그렇지 않소?] 조인은 놀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다 아시는구만요!] 위소보는 득의양양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여자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면 나도 조 대인께 시끄러움을 끼치지 않겠소. 그 여자는 아주 영향력이 있는 여자요....]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조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비천한 몸은 미련하니 위작 나으리께서 많이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위소보는 다소 노성으로 소리쳤다. [가르치고 어쩌고 할 거 없소. 우리 이것저것 말하지 말고 툭 털어 놓고 말합시다. 쌍아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일정한 신분이 있는 사람이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녀와 나의 스승 구난, 또 나의 의동생 우아대, 나의 처 공주, 나의 큰 처남 황제, 또 신룡교 홍안통 교주, 개방의 관의호, 숨어 있는 황룡대협, 천지회 현정도장.... 등과 모두 관계가 있고 아주 큰 인연이 있는 사람이오.] 위소보는 말이 나가는 대로 불어댔다. 하늘이고 땅이고 막힘이 없었다. 조인은 무슨 갈래판인지 모르고 말했다. [그 쌍아는 보통 여자인데 어찌, 어찌....] 위소보는 좀 갑갑증이 났다. [내 말을 조 대인께서 믿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한번 한분 한분 물어보오. 내 말이 거짓말인가?] 조인은 생각했다. (네놈이 대가리 수를 믿고 나를 혼내려고 하는데 내 누구한테 물어보겠나? 어쨌든 이 잡놈이 찾아온 것을 보면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내려는 모양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조인은 아주 세심한 사람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어찌 없는 일을 꾸며대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나으리가 친히 오셨으니 비직이 도와 드려야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조 대인이 알면 됐소. 어서 사람을 내놓으시오.] 조인이 고분고분해졌다. [예! 예! 그럼 제가 위작 나으리를 모시고 가지요.] 위소보가 물었다. [쌍아가 도대체 어디에 있소?] 조인은 돌연 애들처럼 부끄러워 하며 방안을 살펴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으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니 속일 것이 없지요. 저의 모친의 가규(家規)가 몹시 엄하답니다. 또 제 처도.... 소인은 정말....] 위소보가 속으로 웃었다. (네놈의 에미와 여편네는 어떻게 생겼기에 그토록 두려워하는 게냐?) 위소보는 고의적으로 목소리를 높혀 말했다. [에미와 여편네가 무섭다면 남의 여자를 사오지 말 게지? 친정 사람들이 찾아오면 뭐라고 하겠소?] 조인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개미소리만큼 작게 말했다. [위 대인, 제발 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제발....] 위소보는 아주 우스웠다. (요놈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구나. 잘 됐다. 네놈의 코를 쥐었으니 내가 끌면 끄는 대로 가겠지!) 위소보는 짐짓 꾸짖는 투로 물었다. [말소리를 낮추는 거야 쉽지. 쌍아를 어느 곳에 숨겼는가 말하란 말이오!] 조인은 겨우 말했다. [행화루(杏花樓)에 있소이다.] 위소보는 이상하여 물었다. [그 곳에 숨겨 뮐 하는가?] 조인이 두 손을 비벼대며 말했다. [비천한 몸은 그를 소성(小星)으로 삼았소이다.] 위소보는 기생원에서 자랐기에 늘 돈 있는 사람들이 기생을 사가는 것을 보았다. 때문에 소성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재문 했다. [그래 쌍아를 첩으로 삼았단 말인가?] 조인은 어물어물하며 대답했다. [소인이 잘못했소이다. 잘못....] 위소보는 냉수를 머리에 한 바가지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그 일을 했는가?] 조인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나으리, 쌍아가 도대체....] 위소보는 벌컥 뛰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죽일놈, 조 늙다리야. 색에 미친 놈아, 간이 부어서 하늘을 가릴 놈아! 네놈이 그래 감히 그랬단 말이냐? 자는 호랑이에게 불침을 놓다니. 내가 데놈을 혼내주지 않으면 내 성을 고쳐 조가라 하겠다!] 조씨네 가문은 무인(武人)의 가정이고 또 학자 집안이었다. 이런 점잖은 집에서 언제 이처럼 상스러운 욕과 모욕을 당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조인은 어쩔 바를 모르고 얼굴이 점점 벌개졌다. 조인은 무릎을 꿇고 연신 절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노여워 하시지 마십시오. 노여워....] 위소보는 욕을 연신 퍼부었다. [제기랄, 개종자 같은 녀석, 삼대 호로 자식,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조인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말도 못했다. 위소보는 조인의 엉덩이를 걷어차려 했으나 조인의 무공이 아주 드세다는 것을 깨닫고 들었던 다리를 도로 내렸다. 조인이 내력으로 반격하면 자기 다리가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다. 위소보는 다시 소리쳤다. [빨리 이 어르신을 모시고 가서 쌍아를 보이지 못할까!] 이리저리 돌아 조인은 위소보를 데리고 행화루에 들어갔다. 그곳은 극히 은밀한 곳이었다. 조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어머니와 부인이었다. 조인은 아환과 심부름꾼들을 물리치고 조용히 층계를 올라갔다. 수수하게 단장한 여자가 창문가에 앉아 비파를 치고 있었다. 뒷모습을 봐서는 쌍아 같지 않았다. 그럼 누구겠는가? 그 비파소리는 아주 은은하고 구슬픈 소리여서 마치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그 곡은 위소보가 이전에 운남에 있을 때 진원원의 절간에서 듣던 '원원곡(圓圓曲)'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쌍아가 비파를 치고 이런 노래를 부를 리 없는데?) 위소보는 질투심이 치밀어 속으로 욕을 했다. (죽일년, 쌍아 계집년은 이 어르신 앞에서는 제법 단정한 것처럼 하고 '십팔모'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더러운 외도꾼 앞에 와서는 원원이고 방방(方方)이고 불러대는구나. 이 어르신에게 더러운 꼴은 보이다니.... 에잇, 나쁜년!) 조인이 아주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쌍아, 옛친구가 찾아왔다네!] [누구신가요?] 쌍아가 물었다. 위소보는 냉소하며 소리쳤다. 내심 한 대 쥐어 박으려고 주먹을 굳세게 쥐었다. [네 남편이....] 쌍아가 돌아서자 위소보는 말문이 막혔다. 목전의 여자는 십칠, 팔 세 가량의 소녀였다. 자기 처 쌍아가 아니었다. 쌍아는 위소보를 곁눈으로도 쳐다보지 않고 조인을 향해 활짝 웃었다. [나으리,오셨습니까?] 위소보는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약간 비틀거렸다. [조 대인, 이 여자가 쌍아요?] [예.] 위소보는 재차 물었다. [소금장사꾼들에게서 사온 쌍아란 말이오?] [예.] 조인은 전보다 큰소리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위소보는 돌연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조 대인께서는 과연 의리를 지키고 친구로 사귈 만한 사내 대장부이구려. 이 위작 나으리에게 푸른 모자를 씌우려고 그러시오? 나는 잘못 보지 않았소. 조 대인, 대장부의 말 한 마디는 천냥금이라고, 서로 신의가 없으면 서 있을 수도 없다오. 나는 정말 탄복하오. 탄복해!] 조인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위소보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무엇이 한 마디가 천냥금이고 믿지 않으면 서 있지도 못한다고 늘어 놓는 겐가?) 위소보는 또 말했다. [저 계집은 아주 곱고 아름답소. 그런데 조 대인이 그처럼 호색하면서도 슬금슬금 감출 필요가 있겠소? 그러면 쌍아에게 미안하지 않소? 조 대인이 무서워 하는 거 다 나에게 맡기시오. 우리는 친구이니 어려움이 있으면 같이 겪고 복이 있으면 같이 나누어 가지면 되지 않소?] 조인은 이 두서 없는 위소보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저 '예'하고 말았다. [이제 이 위작 나으리는 가야겠소.] [위작 나으리....] [우리는 후에 만날 때가 있을 것이오.] 위소보는 이렇게 말하고 '신행백변'으로 조인이 붙잡을까봐 나는 듯이 달아났다. 잠시 후, 위소보는 거리에 나섰다. 그는 혼자서 웃었다. (글쎄 남의 첩을 자기 처라고 했으니 이 어르신이 왜 이리도 바보 같단 말인가? 제기랄, 소금장사꾼들이 죽일 놈들이군! 쌍아 하나를 팔고 또 다른 쌍아를 팔다니 참으로 찢어 죽일 놈들이야.) 조인이 따라 오지 않자 위소보는 한시름 놓고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 충명하니 다행이지. 저 조 늙다리가 붙잡고 공연히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워 도적으로 몰았다면 이 나으리의 입재간으로도 곤란했겠지.... 흥! 두려울 게 뭐냐? 조 늙다리가 한 마디 하면 나는 두 마디 하면 그만이지. 어쨌든 추후 이 일을 빌미로 대들지는 않겠지.) 그런데 위소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 녀석은 왜 에미와 여편네를 그처럼 무서워할까?) 위소보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걷는 동안 어느덧 비구니들이 사는 절간 앞에 다다랐다. 이 절간은 크지도 않고 아주 아담했다. 절간 앞에는 몇 그루 푸른 대나무가 있었다. 매화나무는 이리저리 가지를 뻗쳤는데 꽃절기는 이미 지나고 야릇한 잎사귀들이 퍼져 있어 그것도 볼만한 풍경이었다. 위소보는 꼼꼼하지 못한 성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성미가 아니라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 (이 번화한 거리에 웬 놈의 절간일까?....천하 비구니는 다 한집 사람이라 하는데 나의 스승님 구난도 이 절간에서 아는지 모르겠구나. 스승님은 쌍아와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스승님이 손을 써 쌍아를 찾으면 꼭 찾을 수도 있을 거야. 제기랄, 이 세상은 점점 말이 아니야. 요즘은 이 어르신을 돕는 사람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단 말이야.) 위소보는 천천히 절간으로 들어갔다. 어린 비구니가 길을 막으며말했다. [시주(施主)님 잠깐만!] 그 비구니는 갓 스무 살을 넘긴 것 같은데 이목이 청수(淸秀)했다. 좀 큼직한 잿빛 승포를 걸쳤지만 날씬한 몸매를 연상하게 했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천성적인 아름다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고운 여자가 왜 비구니 노릇을 할까? 만약 양주의 여춘원에 있으면 몰려드는 외도꾼들이 미여 터질 지경이고 장사도 흥청흥청 하겠는 걸.) 위소보는 도적 같은 눈알을 위아래로 굴렸다. [여동생, 무고하시오?] 비구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나를 왜 여동생이라 부르지?) 그러나 번화한 거리는 산골과 달라 이 꽃다운 비구니도 이런 후안무치한 인간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별다른 기색 없이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시주님, 이 만수암(萬壽庵)은 가묘(家廟)이기 때문에 구경하지 못하옵니다. 시주님께서 많이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위소보는 만수암의 정경을 쓸어보며 대꾸했다. [만수암? 누구데 가묘인가?] 비구니가 합장하여 낭랑하게 말했다. [강녕직조 조부입니다.] 위소보는 놀랐다. (조 늙다리? 빌어먹을, 이 어르신이 전생에 조가 놈과 원수 사이였나? 가는 곳마다 조가 놈의 족속과 맞닥뜨리는구나!) 위소보는 비구니를 향해 예의 거짓말을 털어 놓았다. [여동생, 내가 솔직히 말하지. 나는 조씨네와 수십 년간 서로 사귄 사람이라오. 그 조씨....할아버지가 오면 나를 안내하여 이 가묘를 구경시킬 거요.] 비구니가 입을 삐죽하고 웃으며 말했다. [손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 조 할아버지와 수십 년간 서로 아는 처지라고 하는 가요?] 그가 살짝 웃으면 마치 꽃과 같이 환했다. 위소보는 잠시나마 정신이 몽롱해졌다. 위소보는 마땅한 대답거리가 없어 잠시 혓바닥을 깨물었다. [이것은 한두 마디로 말하기 어렵소. 여동생, 그러지 말고 이 오라버니와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게 어떻소?] 비구니가 힐끔 보며 말했다. [당신은 참 이상하군요. 여동생이고 뭐고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 비구니는 말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위소보는 냉큼 뛰어 들며 소리쳤다. 단숨에 칠, 팔십 자나 들어왔다. [어서 잡아보시오! 나를 붙잡을 만하오?] 비구니는 금방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바로 이 때 문 주렴을 들고 어린 아이가 나오며 말했다. [묘옥(妙玉), 누구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고 여덟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백옥 같은 휜 이빨을 보이고 산뜻한 흰 적삼을 걸쳤다. 더구나 목에는 금목걸이를 걸고 있어 용모나 그 단장이 여자애와 비슷했다. 위소보는 번득 생각이 났다. (아, 이 녀석은 조 늙다리 손자 조설근이 아닌가? 묘옥이라는 비구니는 요 자식이 있어서 들여 보내지 않으려고 그랬구나. 제기랄 놈의 새끼!) 위소보는 웃음진 얼굴로 조설근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조설근은 기억력이 좋아 대번에 '위작 나으리'인 줄 알았다. 그는 위소보에게 반감을 가졌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분을 존경하라는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바로 인사를 드렸다. [위작 나으리, 복 많이 받으세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 됐다 됐어!] 위소보는 가묘로 들어갔다. 비구니 묘옥도 아는 사이임을 알고 더는 제지하지 않았다. 조설근은 문어귀에서 막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밖에 앉아 좀 기다리십시오. 묘옥이 차를 가져오면 차를 마시며 이 대나무를 구경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린 조설근이었지만 조상의 신위가 모셔진 가묘를 외부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어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러나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몇 가지 참대를 봐서 뭘 하나? 요놈도 그 늙다리와 같구나.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속은 잔꾀뿐이야.) 위소보는 참대나무 옆에 있는 돌걸상에 앉았다. 묘옥이 좀 어색한 기색을 하고 차를 들고 왔다. 하나는 참대뿌리를 새겨 만든 찻잔이고 하나는 보통 찻잔이었다. 묘옥은 참대뿌리로 만든 찻잔을 조설근의 앞에 놓고 보통 찻잔은 위소보의 앞에 놓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대노했다. (이 어르신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데 감히 차별을 해? 참으로 눈이 삔 빈대머리 중년이구만!) 그러나 그런 기색은 나타내지 않았다. 위소보는 바삐 서둘다보니 목도 컬컬해서 한꺼번에 다 마셔버렸다. 위소보는 입을 닦으며 말했다. [우리 남방의 강물 맛은 북방의 우물보다 물맛이 더 좋지!] 묘옥이 냉소하며 혼잣말 같이 말했다. [이 물은 이 년 동안 맑게 해놓은 빗물이에요.] 위소보는 말했다. [이것이 빗물이오? 나는 모르겠는데?] 한 그릇 더 부어 맛보려 했지만 한 주전자의 차를 자그마한 찻잔에 붓고나니 더는 없었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동생, 너무하오. 이 어르신이 먼 곳에서 왔는데도 차 한 잔도 더 못 준단 말이오?] 묘옥이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데, 이제 다시는 여동생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이 오라버니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거요, 내....] 묘옥은 그의 입에서 더 거북스러운 말들이 나을까봐 재차 말했다. [차가 없어요. 이런 말을 못 들어 봤는가요. '한 잔의 차는 맛배기이고 두 잔은 목마른 개구리를 주고 석 잔은 황소를 먹인다.'] 그녀는 자기도 우스운지 웃어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활짝 웃자 위소보의 성난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요 계집은 정말 괴상한데. 성을 내도 곱고, 웃으면 더욱 곱구나.) 위소보는 조설근의 차주전자를 끌어 당겼다. [여동생이 부어 준 차 맛이 괜찮구려. 황소고 뭐고 해도 이 어르신은 더 마셔야 하겠소이다. 그래야 동생의 성의를 저버리지 않지.] 묘옥이 안색이 확 변하며 뾰루퉁한 소리로 말했다. [놓으세요.] [차 한 잔을 가지고 뭘 그리 인색하게 군단 말이오?] 위소보는 상대의 완강함에 크게 의아해졌다. 내심 구두쇠 같은 년이라고 욕했다. 묘옥이 쌀쌀하게 말했다. [이것은 오 년 전에 '번향사(樊香寺)'의 매화꽃 위의 눈을 가져다 겨우 한 단지를 녹여 만든 것인데 남이 다 마시고 나면 집안 사람은 뮐 마시겠어요?] 위소보는 대노하여 말했다. [그래 차를 마시는 데도 남이고 아니고 할 게 있나? 여동생 너무도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오! 안 핀 꽃이 맵다고, 나는 속인이고 이 아이는 귀인이란 말인가? 대인은 바로 나란 말이오!] 위소보는 낯짝대기 두껍게도 히히 웃으며 말했다. [여동생, 찻물을 마시는데 무슨 문제가 그리도 많소. 여동생, 양주에 아주 큰 이름이 있는 찻집이 하나 있는데 가봤는지 모르겠소?] 묘옥이 말했다. [저는 비구니인데 그 번화한 양주에 가서 뭘 하겠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도를 닦는다면 다른 곳은 가지 않더라도 양주에는 꼭 가야하고, 다른 경치는 보지 않는다 해도 여춘원이야 꼭 봐야 하오!] 묘옥은 나이 어린 탓에 호기심에 끌려 물었다. [여춘원? 그건 뭘 하는 곳인가요?] 위소보는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비구니 묘옥을 실컷 놀려 주려고 생각했다. [여동생은 밤낮 염불만하니.... 명성이 자자한 양주 여춘원도 모르는구만. 그래가지고 언제 도를 통하겠소? 쯧쯧....] 묘옥은 또 이상하여 물었다. [여춘원은 무슨 찻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불문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관계가 있지. 아주 관계가 많지....] 위소보는 양주지방 사투리로 헛소리를 하다가 어떻게 하면 거짓말로 묘옥을 속일까 하고 생각했다. 조설근이 한 마디 거들었다. [우리 불문에 '물을 많이 길어와도 내가 마시는 건 한 바가지뿐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묘옥이 웃으며 말했다. [손님은 정말 곤란한 분이군요.] 위소보는 물이라는 말을 듣고 곧장 말했다. [그렇지, 불경에 물이라는 말이 있고 차는 물에 끓이니 큰 관계가 있소. 여동생 믿지 못하겠으면 언젠가 양주 여춘원에 가서 한번 맛보란 말이오!] 묘옥이 그가 흘끔흘끔 쳐다보는 눈길을 보고 불쾌한 감을 느끼며 말했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두 분께서는 어서 돌아가시지요.] 그녀는 찻상을 거두면서 조설근이 쓰던 참대뿌리로 만든 찻잔은 거두고 위소보가 쓰던 찻잔은 문밖으로 내던졌다. 위소보는 대단히 노했다. (더러운 계집년,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일부러 사람을 망신시키자는 것인가?) 위소보가 노기등등하여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돌연 밖에서 '아야, 아야!'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검무튀틔한 사내가 절간 문어귀에 나타났다. 가래침에 옥배가 떨어져 깨진다고 묘하게도 밖에 던진 찻잔이 그 사나이에게 맞았던 것이다. 묘옥은 보통 비구니이고 무공이란 전혀 모르며 조설근 또한 부잣집 자식으로 귀하게만 자란 아이였다. 두 사람 모두 겁에 질려 말도 못 하고 뒷걸음질만 쳤다.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며 상대를 살폈다. 헌데 어디선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어, 너....] 본즉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십팔이었다. 상대도 위소보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위소보가 먼저 소리쳤다. [모....모....] 모십팔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쳤다. [털이라니? 얻어맞지도 않았는데 벌써 머리털이 다 뽑혔단 말이냐?] 모십팔은 위소보를 보더니 언성을 높였다. [이 어르신은 자네를 죽자 사자 찾았더니 비구니들과 같이 있었구만 그래. 그건 그렇고 젊은 여스님, 머리에 혹을 만든 빚을 갚겠소, 아니 갚겠소?] 위소보는 모십팔이 말한 뜻을 잘 알 수 없지만 그의 눈길을 보고 무슨 일이 있다고 느껴져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한 일은 언제나 자기가 책임져야하니 이 위소보를 찾으면 되지, 어린 아이와 비구니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악을 쓰는가?] 모십팔이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위작 나으리는 정말 대인이지. 정말 여유가 있구려!] 모십팔은 갈구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위소보의 목을 틀어쥐려 했다. 위소보는 놀라서 소리치며 살짝 피했다. [왜 이래? 미쳤나?] 그들 둘은 서로 위치를 바꾸어 섰다. 모십팔이 말했다. [빨리 나와 한 주먹 겨루자!] 위소보는 소리를 죽여 물었다. [진짜 저 비구니를 때릴 작정인가?] 모십팔이 말했다. [제기랄, 치면 쳤지. 거기에 또 거짓이 있나?] 위소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말했다. 평소의 모십팔과 전혀 다른 언행이었다. [모 형, 왜 이러는가?] 모십팔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연거푸 장풍(掌風)을 일으키니 위소보는 숨도 쉬기 어려웠다. 위소보는 원래 그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모십팔이 위소보를 죽이자면 식은죽 먹기였다. 그는 공격하면서 말했다. [소백룡, 위소보 위작 나으리의 무공이 듣던 소문과 같이 대단하구만. 그러나 애석하오, 애석해!]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의 무공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무림의 태산북두인데 애석하기는 뭘 애석해?] 모십팔은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태산북두라구? 웃기네, 제 여편데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아직도 입은 살았군!] 위소보는 크게 놀라 외쳐 물었다. [여편네란 쌍아를 말이오?] 모십팔은 냉소했다. 안면 가득 조소를 담으며 대꾸했다. [네놈은 못 찾아도 이 처남은 꼭 찾아!]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미친놈, 네놈이 언제 내 처남이 됐느냐?) 위소보가 말하려 하는데 모십팔이 돌연 소리쳤다. [여기 봐!] 장풍이 쏵쏵 위소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가끔 아픈 감을 느꼈다. 위소보는 그 보잘것 없는 신행백변을 빼놓고는 아는 무공이 없었다. 그러니 강호에서 무공으로 반평생을 보낸 모십팔의 어깨는 고사하고 그의 발뒤축에도 가기 어려웠다. 위소보는 오늘 모십팔이 제 실력대로 공격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모십팔은 어느 새 그의 단중혈을 눌렀다. 위소보는 성이 상투 밑까지 올라왔지만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모십팔은 얼른 그를 안아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는 오돌오돌 떠는 조설근을 품속에 안고 펄쩍 뛰어 담장 위에 올랐다. 모십팔은 담장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묘옥을 보고 소리쳤다. [조인에게 알려라. 사람을 찾으려면 사람을 갖다 저당하라고....] 모십팔이 담장에서 내려가려 할 때 '잠깐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십팔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았으므로 조급해 하지도 않고 당황해 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했다. 그는 훌쩍 뛰어내려 적수와 맞섰다. 바로 조인이었다. 조인은 다짜고짜 '대성장'을 펼쳤다. 하지만 모십팔은 가볍게 피했다. 조인은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모십팔이 물러서기 전에 또 공격했다. 모십팔의 무공은 조인을 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위소보를 어깨에 메고 조설근을 품에 안았으니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조인은 모십팔의 대혈요해만을 공격하려 했지만 손자와 위소보를 상하게 할까봐 감히 치지 못했다. 돌연 조인이 쌍장을 교차하여 모십팔의 주위를 돌다가 번개같이 오른손으로 그의 비파골을 잡고 왼손으로는 모십팔의 대추혈(大椎穴)을 쳤다. 모십팔은 피할 수가 없었다. 조인의 공세에 대추혈을 가볍게 격중당했다. 조인은 흐뭇해 하며 말했다. [친구, 내려 놓으시지!] 모십팔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내려 놓으라면 내려 놓지요.] 순간, 몸을 번개같이 돌린 모십팔이 부채 같은 손으로 조설근의 머리를 쥐어틀고 냉소했다. [조 대인, 내가 약간 손에 힘을 주기만 하면 이 아이의 머리는 두 조각이 날 것이오. 동귀어진이 두렵지 않으면 공격해 보시오!] [이런.... 비열한 놈.] 이제 조인이 쌍장으로 모십팔을 들이치면 모십팔이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십팔이 죽기 전에 그의 손자 조설근을 죽이기도 아주 쉬운 일이었다. 조씨 일가는 지금 '기름불이 타오르고 꽃이 만발하는' 흥성기에 있다. 그러나 손자가 잘못되면 대가 끊어지게 된다. 조설근은 온 조씨 가문의 생명이고 희망이었다. 그러니 이 손자가 잘못되는 날이면 조씨 가문의 기둥뿌리가 빠지는 것과 같았다. 조인은 효자로서 위로는 고당(高堂)이었고 아래에는 자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두 손은 지금 허공 중에 걸려 있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모십팔이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감당할 방법이 없다면 이 어르신은 떠나겠네.] 조인은 쌍장으로 계속 칠 태세를 하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극심한 충격에 놀란 듯 수염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 어쩌자고?] 모십팔이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아주 간단하지요. 사람과 사람을 바꾸면 되지요!] 조인은 '흥' 하고 말했다. [친구, 이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오. 아이롤 인질로 삼고 어찌 영웅이라 하겠나?] 모십팔이 웃으며 조인의 흉내를 냈다. [옳소, 옳소. 이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오. 아이를 인질로 삼% 고 어찌 영웅이라 하겠나? 제기랄 자식!] 조인은 이 소리에 노여워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하지만 손자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는지라 묵묵히 듣기만 했다. 모십팔은 무공 '성환두니(早換斗移)'의 한 수법으로 미끄러지듯이 물러갔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널너、다. 만수암은 조가의 가묘로써 좀 외진 곳에 있었다. 모십팔은 몇 번 훨훨 날아 큰거리에 나섰다. 모십팔은 혼자서 득의양양해 했다. 그 때, 등 뒤에서 산을 밀어내고 강을 뒤집는 강력한 내력이 내습해 왔다. 강호나 관청에서나 조인은 이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낮에 거리낌 없이 가묘에 와서 사람을 붙잡아 인질로 삼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백주에 싸운다면 그의 신분에 또 어떤 영향이 미친다는 것도 익히 알았다. 그러나 더 망설일 수 없어서 조인은 손자 조설근과 위소보의 생명을 생각하고 사력을 다해 암산을 했다. 모십팔은 호쾌한 사나이라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조인이 감히 손을 쓰지 못할 줄만 여기고 우쭐하는 마음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조인이 덮쳐드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지만 때가 이미 늦었다. 등 뒤 혈도가 조인의 날쌘 장풍에 격중되어 조설근의 머리를 내리칠 수가 없었다. 조인은 일 초가 성공을 거두자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즉시 대성장의 내력을 일으켜 동 뒤 혈도에 힘을 가했다. 이제 약간의 힘을 가하면 모십팔은 황천으로 갈 판국이었다. 돌연 불진이 조인의 손목을 걸었다. 그것은 행인 중에서 누군가 불쑥 손을 내밀어 펼친 것이었다. 조인은 삽시에 손목이 저려와 내력을 가할 수가 없었다. 모십팔이 웃으며 말했다. [조 대인, 만약 이 손자녀석과 조정에서 개자식 노릇을 하는 위소보의 목숨을 살리려면 5일 내에 나의 쌍아 여동생을 데리고 양주로 오시오. 날짜를 어길 시에는 이 아이의 가죽껍질을 보게 될 줄 아시오!] 모십팔은 이렇게 말하고 날아가 버렸다. 조인은 불진을 휘두른 상대를 보고 소리쳤다. [구난사태!] 구난은 웃으며 말했다. [조 대인, 무고하세요?] 조인은 얼굴을 실룩이며 노성을 발했다. [독비신니는 아주 명성이 높으신 분인데 어찌 사람을 납치하는 도적놈들과 서로 내통하고 있습니까?] 구난은 놀란 척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 사람이 사람을 납치하는 도적인가요? 빈니는 몰랐소이다.] 조인은 '흥' 할 뿐이었다. 구난사태가 모십팔의 비수가 된 것에 대해 몹시 격분했다. 하지만 천하의 구난사태를 상대로 드잡이질 할 자신이 없었다. [빈니는 조 나으리의 전에 일 때문에 찾아왔어요. 대인께서 대성장으로 우리 도홍영을 상하게 했다던데 그건 무슨 까닭인가요?] 조인은 구난이 이 일에 참여하자, 모십팔의 손에서 손자를 빼앗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손자는커녕 목전의 시비마저 쉽게 가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그는 모십팔이 사라진 쪽을 향해 원독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흥! 구난사태께서 부하를 위해 복수하려면 어서 손을 쓰시오.] 연후 조인은 몸을 휙 돌리더니 만수암으로 돌아갔다. 구난사태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고 출수하지 않았다. 비록 조인의 행실이 괘씸했지만 애지중지하던 손자가 납치당한 심사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구난사태가 미소를 지으며 불진을 한 차례 털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위소보는 눈을 비비며 앉아 첫 마디부터 모십팔을 욕했다. [개자식, 모십팔! 재물을 탐내 목숨까지 빼앗는 모십팔놈! 바람둥이 모십팔! 칼탕쳐 죽일 모십팔....] 위소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중복되는 말조차 없었다. 때마침 모십팔이 닭국을 들고 들어와 상 위에 차려 놓았다. [여보게, 위소보! 욕을 다 했는가? 이 닭국은 창자를 뚫는 독약이야. 어때, 먹을 수 있겠나?] 위소보는 오기가 치솟아 단숨에 닭국을 반사발이나 들이켰다. [네놈에게 무슨 개뿔같은 독약이 있다고, 더러운 몽환약이겠지. 이 어르신이 겁낼 줄 알아?] 위소보는 입술을 닦고 재차 말했다. [모 형, 어쩌자고 이런 연극을 하는 거요?] 모십팔이 웃으며 답했다. [쌍아가 지금 조인의 손에 있소. 나는 궁리하다 조가네 그 보배단지를 붙잡아 와서 쌍아와 바꾸려고 했소. 그런데 마침 그 곳에 위 동생도 있어서 갔던 길에 손이 닥치는 대로 끌어 왔더니....글쎄, 동생까지 인질로 끌어온 셈이 됐소.] 위소보는 듣고나서 몹시 감동되어 말했다. [모 형, 이처럼 위소보를 대해주니 정말 고맙소!] 모십팔이 말했다. [그런 일을 가지고 고맙다고 할 것까지 있는가? 과거 이 모 아무개의 목숨을 위 동생이 구해주었는데, 지금 위 동생이 고초를 겪고 있는데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오늘 구난사태께서 손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욱 몸을 뺄 수가 없었을 것이오.] 위소보는 기뻐하며 물었다. [스승님이요? 그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모십팔이 말했다. [그 어르신은 떠나셨다오.] 위소보는 실망스런 기색으로 말했다. [스승님은 왜 이 제자도 보지 않고 가셨을까?] [위 동생, 동생은 왜 이렇게 둔한가? 구난사태께서 어떤 분이 신데 사람을 납치하는 망나니들의 일에 참견을 하겠소?] 위소보는 내심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손을 써서 싸우는 것도 이기자는 것이고, 사람을 납치하는 것도 이기자는 것인데 그 무슨 신분이고 망나니고 할 게 있단 말인가? 스승님은 썩어빠진 예의만 중시하는군!) 그러나 입으로는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그런 망측한 일이야 망나니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지, 어찌 스승님의 명성을 더럽힐 수 있단 말이오?] 모십팔이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위소보! 너 그러고 보니 이 모 아무개를 망나니라고 욕을 하는 게 아니냐?] 위소보가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지요. 조인이 먼저 쌍아를 붙잡아 인질로 삼았으니, 그놈이 먼저 망나니 노릇을 한 것이지요. 우리야 나중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놈은 하졸이고, 우리는 상졸이지요. 이게 바로 그 녀석의 방법으로 그 녀석을 족친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하하!] 두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한참이나 웃었다. 한참 웃다가 위소보가 입을 열었다. [모 형,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좀 잘못된 것 같소이다.] 모십팔이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이냐? 그 녀석의 방법으로 그 녀석을 족쳤는데.] 위소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조 늙다리가 소금장사한테서 사온 쌍아를 내가 보았단 말이오. 그 쌍아는 나의 쌍아가 아니라오. 나의 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단 말이오.] 모십팔이 말했다. [그렇다면 위 동생은 그 녀석의 수작에 걸려 들었군.] 위소보가 물었다. [그럼 내가 본 계집이 쌍아란 말이오?] [물론이지. 그 쌍아도 조인이 확실히 소금장사에게서 샀다네. 거참 공교롭게도 그년도 쌍아라고 부른단 말이야.] 위소보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기랄, 세상에 쌍아가 또 있단 말인가? 하필 두 쌍아가 한군데 모일 게 뭐람!] 모십팔이 말했다. [글쎄 말이네. 그 교활한 조인 녀석은 10만 냥을 주고 자네의 쌍아를 사온 후 위 동생이 애를 태우는 것을 알고 또다시 2천 냥을 주고 다른 쌍아를 사온 것이데. 매미가 껍질을 벗고 달아나듯 간단하게 혐의를 벗은 셈이지.]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의 쌍아야 예쁘고 얌전해서 10만 냥이라도 비싼 게 아니지만 그 2천 냥짜리 쌍아야 물건에 맞춰서 값을 치렀겠지.] 위소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모 형은 어떻게 이렇게 모든 일을 잘 알고 있소?] [그 날 여춘원에서 내가 실수로 동생을 상하게 하지 않았소? 그래 나도 또 조인에게 얻어맞아 상했지. 한 달 남짓 치료하여 상처가 낫자 나는 양주에 가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네. 일이 되려고 그랬던지 닷새 전 그 날 밤 나는 성 밖에 있는 주팔피(周八皮)에게 돈을 꾸러 갔었는데 두 소금장사를 만났다네. 이 두 친구가 수군덕 거리더니 한 녀석이 이렇게 말했지. '이 어르신이 목숨을 내걸고 쌍아를 붙잡아 10만 냥을 받고 팔았다네. 그런데 빌어먹을 녀석들은 나를 이백 냥만 주고 저희들은 및만 냥씩 나누어 가졌으니 정말 공평하지 못하지.' 다른 녀석이 말했다네. '그만하면 됐지. 그 년의 남편은 시러배 잡놈이라고 들었다네.' 위 동생, 이 말은 소금장사꾼 녀석들이 한 말이지 내 말은 아니라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욕이야 아무 상관 없지요. 내 스스로도 생떼를 쓰는 시러배 잡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모십팔은 소금장사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시러배 잡놈은 시끄러운 놈이라네. 나중에라도 그 녀석을 만나면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르겠구만.' 그랬더니 먼저 말하던 녀석이 그 말을 받아 '나도 그 때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녀석은 우리 호달 스승님께 붙잡혔다네. 나중에는 개방 사람들에게 다시 팔아 먹었는데 그가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생각했다. (그 두 소금장사들이 호달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아!) 모십팔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소금장사가 말했다네. '셋째가 어디에서 쌍아라는 기생 년을 얻어다 이천 냥을 받고 팔았는데 혼자 제 호주머니에 넣고 입을 씻었다네. 그래 이것이 공평한 일이란 말인가?' 먼저 말하던 소금장사가 웃으며 말했지. '자네가 돈을 더 얻어가려면 그리 어렵지 않지, 큰 어르신의 처남 노릇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자 다른 소금장사가 대노해서 말했다네. '제기랄, 내가 바로 그 큰 어르신의 처남이네!' 둘이서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할 때 내가 쏜살같이 달려가 한 손으로 그 녀석 모가지의 대추혈을 틀어쥐고 웃으며 말했지. '두 처남들 꼼짝하지 마라!'라고 말이야!]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두 처남은 염라대왕의 손에 붙잡혔으니 한바탕 대접을 받았겠군요.] 모십팔은 이렇게 위소보가 추켜세우자 흥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두 녀석은 그만 오줌을 질금질금 싸서 이 어르신의 바지가 젖었지. 나는 거듭 호통을 쳤다네. '네 놈들 말에 따르면 쌍아가 둘이라고 하던데 어찌된 일인지 바른 대로 말하거라. 니들 말이 옳으면 이백 냥을 이 어르신이 상금으로 내리고, 속이면 목을 이 어르신께서 가지겠노라! 그래 돈을 가지겠느냐, 목을 가지겠느냐!' 이렇게 말이야.] 위소보가 말했다. [모 형, 그 말은 잘못 물은 것 같소이다. 돈은 가질 수 있지만 목을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이오?] 모십팔은 웃으며 말했다. [기실 나는 그 놈들에게 으름장을 놓느라고 그런 게지. 그랬더니 한 녀석은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말했지. '소인이 제대로 말씀드립죠. 그 두 쌍아 가운데 하나는 기생집 기생이고, 하나는 녹정공인지 당나귀공인지 하는 사람의 부인이라 했소이다'라고 말이야.] 위소보가 한 마디 끼여들었다. [녹정공이면 녹정공이지 당나귀공은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이오?] 모십팔이 말했다. [나는 그 때 그런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않고 계속 물었다네. '네 놈들은 그 녹정공의 부인을 누구에게 팔았느냐?' 그가 말했다네. '나중의 일은 잘 모르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강녕직조 조인에게....' 이 때 다른 소금장사 녀석이 그 말을 가로채며 '동생, 이 일은 나보다 분명하게 알지 못할 걸.' 그래서 내가 말했다네. '그럼 자네가 말해보게나. 돈을 줄 테니.' 그런데 그 녀석은 뻣뻣하게 나왔다네. '그런데 왜 죄인을 심문하는 투로 대하는 게요? 일단 손을 좀 놓아주시구려. 돈 이백 냥을 얻는다 해도 이렇게 못 살게 굴면 죽어도 입을 열지 않겠소이다.' 용한 사람은 손만 내들면 안다고 손을 그 녀석들의 목에 대고 보니 무공과 내력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나는 손을 놓으며 '그럼 좋아 어서 말해봐'라고 했지.] 위소보가 말했다. [모 형, 너무 상대를 믿은 게 아니오?] 모십팔이 물었다. [자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그 녀석들은 숨을 돌리자는 수작이겠지요.] 모십팔이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었다. [만약 그 때 동생이 옆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내가 손을 놓으니 그 녀석은 다짜고짜 비수로 저쪽 녀석의 가슴을 찔렀다네.] 모십팔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네. 다시 그 녀석을 목을 붙잡고 소리쳤지. '데 이놈 왜 이러는 게냐?' 그놈은 반항하지 않고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안고 이렇게 말했다네. '동생, 우리 소금장사들은 강호에서 명성이 있는 무리는 아니라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체신을 깎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그 큰 어르신의 일처리가 공평치 못하더라도 우리들 끼리야 서로 싸울 수가 있겠지만 남의 손을 빌어 화풀이를 하지는 말아야지. 그러면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탄복했다네. 그 녀석의 무공은 보잘것 없지만 의협심은 있는 사내대장부였다네. 나는 손을 놓으면서 더 이상 난처하게 굴지 않을 테니 돌아가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 소금장사는 진정으로 말했다네. '고맙소이다. 우리 소금장사들의 규칙을 알겠지요? 그 염독(鹽毒)이 대단하다는 걸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이다'라고 말이야.] [나는 늘 강희(江准) 일대를 떠돌아 다니며 보았는데 소금장사들의 반역자에 대한 징계는 극히 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그 염독은 소금으로 만든 것인데 사람 몸 어느 곳이든 조금이라도 뿌리면 구할 약이 없고 일단 체내에 들어가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네. 이레가 지나면 죽어 버린다오.] 모십팔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 소금장사는 말을 마치자 비수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네....] 모십팔은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이러한 비참한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러나 어쩐지 두 소금장사의 죽음을 보고는 침울해졌었다. (제기랄, 남이 자기를 죽이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 죽을 거야 있나?) 위소보가 물었다. [모 형, 그래 나중에 쌍아를 찾았소?] 모십팔이 말했다. [그 소금장사가 말하기를 자네도 팔려갔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는 위 동생이야 복장(福將)이고 또 궤계가 많으니....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지.] 위소보는 웃으며 거칠게 입을 놀려댔다. [제기랄, 무슨 궤계가 많다고 그럽니까? 그건 궤계가 아니라 뛰어난 자질과 비상한 지략이지. 제갈지량도 따라올 수가 없지, 눈깜빡하는 사이에 천 리라도 가는데!] 모십팔이 말했다. [나는 조인과 서로 겨루어 본 적이 있다네. 그 교활한 놈에게 쌍아가 붙잡혀 있으니 대단히 불리하다네. 나는 급히 가서 정말 그 계집 쌍아를 찾았네.] 위소보는 말했다. [나도 그 년을 봤다오. 생김새가 별 볼일 없는데 2천 냥이나 가겠소? 그 조 늙다리가 색에 미쳐 그 많은 돈을 주었겠지.] 모십팔은 그의 헛소리는 들은 척도 않고 말했다. [그러나 진짜 쌍아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네. 내 생각에 강호에는 늘 헛소문이 많이 떠도는데 소금장사들이 속지 않았는가 하여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네. 그 날 나는 날이 어두워지자 조인의 집 창 밑에 가서 몸을 숨겼지. 돌연 아주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조 어르신이 결단성 있게 손을 써야지요.' 조인은 약담배를 빨며 한참 있다가 말했지. '나도 참 어쩔 수가 없다오. 나와 위작 나으리는 한 조정의 신하이니 괜히 서둘러 잘못 일이 될 경우에는 재미가 없을 것 같으니 좀 신중하게 처리하여 나중에 만나더라도 미안하지 않게 해야지'라고 말이야.] 위소보가 말했다. [조 늙다리는 나와 사이가 괜찮구만!] 모십팔이 말했다. [그 사람이 냉소하며 말했지. '조 대인은 무슨 일이든지 요모조모를 따지시는 데 소인도 탄복합지요. 그러나 만에 하나 잘못되어 위에서 추궁하는 날이면 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어르신께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조인은 아주 불쾌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네.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전심전력을 다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뚫고 나가야 하는 게 도리인데 어찌 너와 나를 구별할 수 있겠소? 그리고 쌍아가 말을 듣지 않으니 당신도 방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 책임을 나에게 넘기자는 것이오?'라고 성을 버럭 냈다네.] 위소보는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소인이고 대인이고 따진단 말인가? 그 조 늙다리는 강녕직조의 신분으로 상관인 강절순무(江浙巡撫)도 두려워 하는데 조정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단 말이오? 그럼 황제가 조인더러 쌍아를 붙잡아 오라고 했단 말인가?] 모십팔이 말했다. [위 동생, 이 형은 정말 동생에게 매우 탄복한다네. 그러나 한 가지 내키지 않는 일이 있는데, 황제와의 관계를 단호히 끊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네. 어느날 나는 고염무 선생을 만났다네. 그는 '자기 민족이 아니면 그 마음도 다르다'고 했다네. 그 분은 아주 학문이 높은 분이고, 나는 그 말씀을 진정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네.]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그렇다면 그는 학문이 있고 이 어르신은 학문이 없단말인가?] 모십팔이 말했다. [하기야 위 동생의 학문도 대단하지. 그럼 내가 물어보겠는데 그 고염무 선생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은 게을러서 책을 다 내던졌다오.] 모십팔이 말했다. [동생도 모르는가 보오? 기실 나도 몰랐다네. 고 선생이 설명을 좀 하고 나서야 알았다네. 그 오랑캐 황제는 우리 한족이 아니니, 우리와 마음도 다르다오.] 위소보가 말했다. [한족도 마음이 다 똑같다고 느끼지는 않소. 숭정황제는 한족인데 왜 충실한 한족 원숭환(袁崇煥)을 죽였단 말이오? 또 이자성은 한족인데 어째서 숭정황제를 핍박해 죽였단 말이오?] 모십팔이 말했다. [뚱딴지 같은 말을 또 하는구만. 이 어르신은 위작 나으리의 상대가 되지 않지. 그러나 고 선생은 학문이 있는 분이니 틀릴 수가 없지. 내가 보건대 황제가 자네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네. 그러니 아무쪼록 조심하는 것이 좋겠데.] 위소보가 말했다.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이오?] 그는 말머리를 돌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알만 하오. 모 형, 우리 쌍아 이야기나 합시다.] 모십팔이 말했다. [나는 조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창문 밖에 오래도록 머무를 수가 없어 조부(曹府)를 빠져나와 조용한 곳에서 조인과 말하던 사람을 기다렸다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얼굴에 복면을 한 사람이 걸어왔다네. 나는 불시에 그의 명문혈을 틀어쥐었다네.] 위소보가 물었다. [모 형, 암기를 사용했소?] 모십팔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 모 아무개는 비록 보잘것 없는 무공을 지니고는 있지만 자고로 그런 비열한 수작은 쓰지 않는다네. 나는 먼저 손을 쓰기 전에 '친구, 잠깐만!'이라고 했지.]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스스로 나서서 화를 자초할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모십팔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얼굴을 가린 사람은 '누가 감히 나를 막는 게냐?' 하면서 번개같이 나의 가슴을 쳤다네. 나는 반격은 고사하고 숨쉬기조차 어려웠다네. 그저 죽었다 하고 눈을 감고 있었지. 그 사람은 몸을 돌리며 장력으로 등 뒤를 치려 했지. 이 때 구난사태께서 나를 구해 주었다네. 그 사람이 다급히 일 장을 내뻗으려 할 때 구난사태가 불진으로 그의 뒷등을 쓸어 쳤지.] 위소보는 무공이 그리 높지 않았으니 본 것은 적지 않아 그 말을 받았다. [세상에 우리 스승님과 붙었단 말이오?] 모십팔이 말했다. [위 동생, 그 사람의 무공은 대단했다네. 구난사태도 탄복하며 귀하의 무공은 매우 뛰어나구려!'라고 칭찬했지. 그러자 그 사람은 웃으며 '구난사태의 칭찬을 받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만약 사태께서 정병양류(淨甁楊柳)의 일 초를 펼치셨다면 저의 목숨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구난사태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내가 졌네'라고 했지. 그러자 그 사람은 놀라며 '사태께서 저의 사정을 봐 주시니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에 대한 모욕이 아닙니까?' 그러자 구난사태는 '자네는 나의 무공을 간파했지만 나는 자네의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내가 진 것이 아닌가?'라고 했지. 그 사람은 한참 있다가 '사태님, 미안합니다. 저는 마땅히 저의 스승님의 내력을 알려드려야 하지만 스승님의 분부를 거역할 수가 없어 어르신께 이름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구난사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네. 그러나 나는 이 모십팔의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어 그러니 귀하께서는 나의 얼굴을 봐서 이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사람이 말했지. '그럼 저는 모 어르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구난사태는 웃으며 '그 늙은 괴물을 보면 나를 대신해 문안이나 전하게나'라고했지. 그 사람은 아주 공손하게 구난사태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네. 그래서 나는 급히 '사태님, 왜 그를 놓아주시는 겁니까?'하고 물었지. 구난사태는 이렇게 말했다네. '저 사람은 녹녹한 인물이 아니라네. 억지로 붙잡다가 일이 커지기보다는 차라리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는 '이 일은 그와 매우 관계가 크지요'라고 했지. 구난사태는 '일이라는 것은 쌍아의 일이 아닌가? 그 일은 조인이 매우 은밀하게 한 일이니 그와 해결해야 한다네. 쌍아를 구하려면 어쨌든 조인을 찾아야 한다네'라고 했지. 내가 다시 말했지. '일이 정말 어렵게 되었습니다. 조인은 조정에서 커다란 벼슬을 하고 무공도 대단하니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쌍아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난사태는 이렇게 말했다네. '조인은 무림에서 명성이 있는 인물인데 왜 이처럼 비열하단 말인가? 납치를 하다니?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 보배 같은 손자가 있다는데, 자기 생각으로 남을 미루어 짐작한다고, 만약 그 손자가 납치당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이 말을 듣자 번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말했다네. '제기랄, 조인 녀석 두고 보자! 늑대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다고 내가 그 보배 같은 손자 녀석을 납치해서 쌍아와 맞바꾸면 되지! 사태님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고개를 들고 보니 사태님은 간 곳이 없었다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스승님은 그 신분으로 보아 그런 일에 간여하고 싶어 하시지 않지.] 모십팔도 웃으며 말했다. [이 어르신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위소보 녀석을 위해서 이 어르신은 체면불구하고 납치하는 산도적 노릇을 했지!] 말은 우스개 소리였지만 위소보는 내심 매우 고맙게 생각하머 말했다. [모 형, 그 조설근 녀석을 어디에 두었소? 잘 지켜야 하오. 그 조 늙다리가 빼앗아 가면 헛고생을 한 거외다.] 모십팔이 말했다. [여기는 양주지, 조인의 굴이 아니네. 여기 와서 손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오. 게다가 조설근은 조씨네 가문의 대를 잇는 명줄이니 조인도 경솔하게 손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네.] 양주라는 말을 듣자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이 어르신의 옛집으로 가 봐야지, 그런데 제기랄 무엇을 입고 간단 말인가?] 위소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모 형, 그 놈을 데리고 왔소? 고놈 자식의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치고 말겠소. 좀 화풀이를 하게!] 모십팔이 놀라며 말했다. [무엇을 가지고 고놈 조놈 하는가?] 위소보가 말했다. [그 조설근이란 어린 녀석 말이오.] 모십팔은 위소보의 침대이불을 벗기며 말했다. [위 동생, 이게 누군가 보게나!] 조설근은 달콤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얼굴은 불그스레 한 것이 마치 술을 마신 사람 같았다. 위소보는 조설근의 코를 비틀어 쥐고 웃으며 말했다. [요놈 이렇게 달큼하게 자고 있다니! 어서 일어나 이 어르신과 한바탕 놀자꾸나!] 그러나 조설근은 여전히 쿨쿨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위소보가 물었다. [모 형, 요놈은 왜 이러는 게요?] 모십팔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이놈이 애를 먹일까봐 혼수혈(昏睡穴)을 짚어 놓았다네.] 위소보는 돌연 대노하여 말했다. [제기랄, 우리는 강호에서 명성이 있는 인물인네 어찌 세상 모르는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부끄럽지도 않소?] 똥 싼 주제에 성 낸다고 위소보의 말을 듣자 모십팔은 소리쳤다. [제기랄, 이놈이 네 할애비라도 된단 말이냐? 그렇게 가슴 아파하게!] 모십팔은 성이 좀 났지만 조설근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나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설근은 깨어났다. 그는 위소보를 보자 일어나 앉으며 눈을 부비고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르신, 여기가 어딥니까?] 위소보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쉬! 하고 말했다. [입을 열지 말게나. 우리는 강도들에게 납치되어 왔다네.] [납치라니 그게 무슨 말인 가요?] [아이들을 붙잡아 돈을 받고 파는 것이란다.] [돈을 받고 판다고? 아이들은 소나 말이 아닌데 어찌 사고 판단 말인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놈, 부자집에서 곱게만 자라서 그러는지 개뿔도 모르는 녀석이구나!) 위소보는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왜 못 판단 말이냐? 부잣집 아이들일수록 값이 더 비싸지.] 조설근은 또다시 물었다. [어르신, 그들이 어르신과 저를 함께 붙잡아 왔다면 어르신도 부잣집 아입니까?] 위소보는 웃으며 욕을 했다. [이 녀석아! 이 어르신이 어찌 애들이겠느냐? 부잣집 아이는 더더욱 아니다....] 위소보는 돌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조 늙다리가 이 어르신의 부인 쌍아를 사서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어르신이 이러고 말 줄 아느냐.... 그렇지 조씨네 이 종자놈을 데리고 나가 이 번화한 세상을 한바탕 보여 주어야지.) 위소보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궤계를 생각하고는 우쭐했다. (조 늙다리가 이 어르신에게 푸른 모자를 씌운다면 이 어르신도 조가네 가문에 고금 이래 둘도 없는 천하제일의 부화방탕한 놈을 하나 만들어 주지. 그러면 나도 믿지지 않는 셈이 될 것 아니냐? 하하하!) (작자 주:수십 년 후 중국문학사에는 한 부의 가장 큰 '음탕한 책' 홍루몽이 나왔다. 그 책 가운데 주인공 가보옥은 '천하제일 음탕한 사람'으로 자처하였으나 홍루몽의 작가 조설근이 천하제일의 망나니 위소보와 함께 양주를 떠돌아다닌 것과는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홍루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홍학가(紅學家)의 몫으로 남겨둔다.) 위소보는 이런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대뜸 말을 바꾸었다. [나는 부잣집 출신이니 너에게 말해 주마. 우리집은 너희 조가네 집보다 돈이랑 재물이랑 더 많단다.] 조설근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우리 조가네 집이 뭐 잘 산다고 그러세요? 다 겉치레뿐이지요. 저는 아버지가 늘 탄식하시며 어려운 일이 많다고 하시는 것을 전에부터 들었습니다. 우리 조가네는 겉으로는 열화가 충천하고 꽃이 만발한 것 같지만 기실 '노래기는 죽어도 굳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지요.] 조설근은 이렇게 말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과연 조 늙다리의 가정교육 하나는 본받을 만 하구나. 요놈의 말대로 지네의 다리가 백 개라고, 그 개자식이 죽어도 그 후손들이 집안을 이끌어 갈 기세가 엿보이는군. 어쩐지 조가 놈이 떵떵거린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조설근이 다시 위소보를 불렀다. [어르신....] 위소보가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입을 열지 말기라! 우리는 도망을 쳐야 한단다. 강도가 오면 너를 솥에 넣고 삶아 기름에 튀겨 먹는단 말이다!] 조설근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사람....사람도 먹나요?] 위소보가 말했다. [왜 못 먹겠느냐? 남자애와 여자애는 고기가 질기지 않아 강도들이 제일 좋아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이 어르신이 있으니 너를 잡아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놈들이 달려들면 우리 둘이 같이 달려들어 그 놈을 삶아먹자꾸나.] (작자 주:위소보와 조설근이 만수암(萬壽庵)에서 납치된 일은 사실이다. 만수암은 조설근의 가묘이다. 조설근의 조부 조인이 강희 황제에게 올린 상서에는 확실히 가묘 '만수암'과 수월암(水月庵) 두 곳이 제기되었으며, 조설근의 홍루몽 가운데도 묘사되어 있다. 수월암의 옛터는 1980년 지금 강소성 남경시 주강로 태평교 남쪽에서 발굴했고, 만수암의 옛터는 1991년 3월 14일 남경 중산동로 289호와 291호에서 발굴되었다.) 第16章. 어린 조설근과 기생 놀음 조설근이 소리쳤다. [저는 무서워요.... 그들이 나를 잡아 먹는 것도 싫고, 저도 그들을 먹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그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얘야, 우리는 도망쳐야 한단다.] 저녁 노을은 천하절경 양주(揚州)를 금빚으로 물들였다. 샛노란 저녁 노을은 부산한 하루일을 마친 고풍스런 절경 양주를 고즈넉한 하릇밤으로 평안히 인도하고 있었다. 위소보에게 이 곳 지리는 손금 보듯 환했다. 그는 조설근의 손을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돌아 여춘원 근처에 당도하여 왼쪽 편에 있는 의복점(衣服店)으로 들어섰다. 위소보가 돈을 꺼내며 말했다. [왕노삼(王老三), 옷 두 벌을 주시구려. 어른 옷 한 벌과 아이 옷 한 벌로 말이오.] 왕노삼은 이 의복점의 오래된 점원이었다. 위소보는 어린 시절, 늘 이 상점에 와서 놀았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처지였으나 위소보가 이미 어엿한 성인으로 번했고 더구나 부귀한 옷차림까지 한지라 그 점원은 알아보지 못했다. 왕노삼은 옷을 꺼내 늘어 놓고 몸에 맞는 것을 고르게 했다. 위소보는 조설근을 서동(書童) 차림새로 단장시키고, 자기는 문사(文士)처럼 검고 긴 적삼을 입고 또한 큼직한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또 어머니 위춘방이 알아볼까봐 검은 고약을 큼직하게 얼굴에 붙였는데 얼굴 절반은 넉넉히 가릴 수 있는 크기였다. 오랫만에 다시 찾는 여춘원의 문루(門樓)는 호화롭게 장식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는 요즘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지?) 위소보는 부채를 들고 느릿느릿 거드름을 피우며 팔자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설근은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고 그림자처럼 따랐다. 손님이 들어서자 울긋불긋하게 분칠을 한 기생들이 일시에 모여 들었다가 가난뱅이 선비 같은 모양새를 보고는 슬금슬금 하나 둘 사라졌다. 위소보는 대노했다. (제기랄 년들,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구나! 사람은 차려입기 나름이고 부처님은 금칠하기에 달렸다고, 이 어르신이 한바탕 쭉 빼고 나선다면 네년들 같은 기생 할망구들을 곁눈질이라도 할 줄 아느냐?) 위소보는 거들먹거리고 꼬리를 치는 기생들이 없자 할 수 없이 걸상을 당겨 앉았다. 그는 조설근을 옆에 세워두고 시치미를 떼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여춘원 기녀들은 이렇게 예를 갖춘단 말이냐? 손님이 와도 보는 척도 하지 않아도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지?] 뭇 기생들은 서로 쳐다보며 히히닥거리고 웃기만 했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반백이 된 서랑(徐娘)이 나왔다., 위소보는 몹시 성이 났다. (돈이 없다고 이 어르신을 업신여기는 모양이지? 제기랄 눈을 가지고도 태산도 보지 못하고, 숭산, 오대산도 보지 못하니 그 눈을 달아 뭘 한단 말이냐? 이 어르신이 여춘원의 양모 어머니를 봐서 참겠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흉가집이란 소리를 듣게 할 수도 있다. 양주지부(揚州知府)의 모천안(慕天顔)인지 모지안(慕地顔)인지 하는 놈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풍비박산 내게 하고 늙은 기생이고 젊은 기생이고 할 것 없이 몽땅 붙잡아다가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치고는 목에 칼을 씌워 양주 관아의 따금한 맛을 보여 줄까?) 서랑은 시답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나으리, 무슨 볼 일이 있으십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이 나으리께서 여춘원에 발길을 들였는데 무슨 다른 일이 있어 왔겠는가? 먼저 어린 아가씨들이나 보내서 차나 대접하게 하시오. 이 어르신의 시중을 잘 들어 기쁘게 하면 저녁에 꽃술상 세 개를 또 차리게 하겠소.] 서랑이 말했다. [나으리께 알려드립니다. 본 여춘원의 규정은 현금을 내셔야 합니다. 나으리께서도 아가씨를 부르기는 어렵지 않지만 먼저 돈을 내셔야 합지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여춘원에 언제부터 이런 규정이 있었단 말이냐? 흥, 이 어르신이 한동안 기생집을 다니지 않았더니 완전히 풋내기 취급을 하는구나!) 위소보는 품안에서 백 냥짜리 은표(銀票)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때렸다. [그래 이 어르신이 모르는 사람인 줄 아나? 내 말하지. 이 어르신은 원래 기생집 내막을 잘 아는 사람이야. 기녀 하나를 불러 차를 마시면 5전이고, 꽃다운 계집은 얼굴값 때문에 두 냥, 찻물을 붓는 계집과 식모는 모두 5전씩 주지 않느냐? 하지만 오늘 이 나으리를 즐겁게 만들면 두 곱은 더 주지!] 이렇게 말하며 백 냥짜리 온표를 척 던졌다. 은표를 본 서랑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나으리께서 호방한 분이신 줄 모르고 실경했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여춘원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를 골라 시중들게 하겠습니다.] 위소보는 그녀를 제지하며 말했다. [본 나으리는 아직 별 흥취가 일지 않으니 우선 이 집 어머니(마마)를 불러다 주시오.] 그가 말하는 '어머니'는 기실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이 여춘원에서는 양모를 '어머니'라 했는데 그녀가 바로 위춘방이자 위소보의 친어머니였다. 중년 기생 서랑은 좀 난감해 하며 말했다. [나으리, 마마는 지금 다망(多忙)하셔서 아무래도....] 위소보는 속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평생 기생 노릇을 했는데 찾는 손님이 적었지. 지금은 양모 노릇을 하여 바쁘게 보내고 있다니 여춘원의 경기가 괜찮은 모양이구나!) 위소보는 또다시 천 냥짜리 은표를 내놓았다. [이 정도면 마마가 잠시 쉴 수 있겠지요?] 서랑이 옷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마마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으리께서 찾으신다면 반드시 와서 시중해 드릴 거예요. 나으리께서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 후 분칠로 덕지덕지 단장을 한 위춘방이 위충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교태어린 얼굴로 말했다. [어느 나으리이시길래 미천한 소녀를 원하시는지요?] 그녀는 입을 놀릴 적마다 덕지덕지 얼굴에 바른 분이 우수수 떨어졌다. 위소보는 가슴이 쓰라렸다. (어머니도 이제는 많이 늙으셨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돈이 이렇게 많으면서도 돈이라면 눈이 벌개지는 그 성미는 아직 여전하구나!) 그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돈이 많으면서 돈을 목숨같이 여기니 그 에미에 그 아들이로구나.) 위소보는 그만 아연실소하다가 어머니가 알아차릴까봐 얼른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위소보가 정색을 하며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위층에서 처량한 노래소리가 들렸다. [천지개벽한 후 누군들 애정이 없으랴. 그윽한 풍경에....] 조설근이 소리쳤다. [아주 잘 불러요!] 위소보는 저속한 사람으로서 '오경이 그리워'니 '십팔모' 따위의 노랫가락이나 흥얼거렸는데 이렇듯 애상적이고 정감이 흘러 넘치는 노래를 어찌 알 수 있으랴! 위소보는 조설근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요 놈은 우는 소리인지 노랫소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좋다고 소리치니 정말 풋내기구나.) 위소보는 다시 생각했다. (저 노래를 부르는 기생은 필시 어머니가 방금 사온 기생인 모양인데, 기녀원 규정을 모르는 계집 같구나. 손님들이 돈을 주고 이 곳으로 찾아오는 것은 기생들과 흥이 나게 희희닥거리며 수작을 부리자는 것인데, 알아듣지도 못할 노래나 부르니 오히려 정이 다 떨어지겠군!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이나 칠 년 같으니라구. 어머니는 왜 단단히 단속하지 못하는지, 제기랄, 어머니도 이 녹정공 어르신과 별 차이 없이 아둔한 일면이 있구나.) 위소보가 이런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설근은 나이가 어려 이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쪼르르 위충으로 달려 올라갔다. 위춘방이 급히 소리쳤다. [안된다!] 위소보는 손에 돈을 혼들며 말했다. [왜 이 어르신에게 돈이 없을까봐 그러는가?] 위춘방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손님은 우스갯소리를 잘 하시는 분이군요. 저는 조 녀석을 보고.... 저 애는 서동인데....] 위소보는 눈을 부릅뜨고 대꾸했다. [서동이면 어떤가? 본 나으리께서 데리고 왔는데 그가 놀고 싶은 대로 놀게 하시오. 돈은 본 나으리가 내겠소!] 위춘방은 '예, 예!' 대답을 하며 위소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예모가 없구나. 위소보 그 후레자식이나 다름없구나.) 위소보가 말했다. [마마,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봅니까?] 비록 위소보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도 애써 바꾼다고 했지만 모자지간이라는 천성을 어찌할 수 없는지, 위춘방은 '마마'라는 소리를 듣자 어쩐지 마음이 산란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보 이 녀석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칼질을 해서 기름가마에 튀길 녀석! 밤낮 계집년들이나 안고 다니며 이 에미 생각을 한번이나 할는지.... 천하에 후레자식!) 위소보는 위춘방이 자기만 바라보자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돈을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본 나으리는 돈이 얼마든지 있으니 먼저 갖다 쓰시오.] 위춘방은 돈이 손에 들어오자 아들 생각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녀는 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으리께서 이렇듯 손이 크시니 정말 탄복하나이다. 나으리의 대명(大名)은 어떻게 되시온지요?] 위소보가 대답했다. [나 말이오? 나는 은혜도 모르는 거북이 새끼(王八蛋)라오.] 위춘방이 킥 하고 웃었다. [나으리, 세상에 그런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나으리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위소보는 정색해서 말했다. [어머니는 이 세상 일을 모르시오. 나으리라고 거들먹거리는 놈의 태반은 본래 후레자식이외다. 본 나으리는 큰 벼슬아치도 아니고 얻는 돈도 적으니 작은 후레자식이고, 나중에 큰 벼슬을 하고 돈이나 많이 얻으면 큰 후레자식이 되지요!] 위춘방은 중얼거렸다. (벼슬이 작으면 적게 얻고 크면 많이 얻는다? 벼슬 하는 것도 장사처럼 밑천이 있어야 하는구나. 이 에미에게 지금은 돈이 좀 있으니 소보 그 후레자식에게 자그마한 벼슬이라도 사 주면 그 놈이 밖에 나가 사기를 치거나 분대가리(粉頭) 계집들을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겠지.) 위소보가 물었다. [마마, 방금 저 위에서 노래 부르던 아가씨는 누구요?] 위춘방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저께 아파(牙婆)에게서 사 왔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를 줄 몰라 나으리의 웃음거리만 되었군요!] 그리고는 위춘방은 위소보의 귀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저 화냥년은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에요. 더구나 규중처녀니 나으리께서 한 번만...., 그러면 그년한데는 커다란 복이 될 겁니다. 히히....] 위소보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제멋대로 저 기생을 천하게 둘도 없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진짜로 예쁜 계집들을 보지 못한 것 같구나! 이 어르신의 일곱 부인을도 예쁘지만 문아 아가씨와 청아 계집년은 정말 꽃같이 아리땁지 않은가? 천하에 그녀들보다 더 아리따운 여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위춘방이 기녀에 대해 한껏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자 위소보는 생각을 조설근에게 돌렸다. 한편으로 막무가내로 위충으로 올라간 조설근이 혹시나 도망쳤을까 두려워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위춘방을 재촉했다. [그럼 우리 그 계집에게 한번 가 봅시다.] 그 여자는 위춘방의 작은 방에 있었다. 그 방은 위소보의 눈에는 매우 익었다.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고약한 냄새도 풍겼다. 자기가 뒹굴며 놀던 침대를 보자 그는 말할 수 없는 상념이 교차했다. 그 여자는 창문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오래된 아쟁(古箏)이 놓여 있었다. 이제 방금 그 아쟁으로 반주하며 노래를 부른 것 같았다. 조설근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누나, 울지 말아요. 누나....] 위소보는 웃었다. (그 계집이 너의 누이냐? 잘 됐다, 이놈! 데놈의 할아버지 조 대간신배는 조정에서 봉한 당당한 강녕직조이고 일등시위이며 또 무림의 태산북두인데 네 놈 집안의 계집을 기생으로 만들었구나! 그래 어서 누나라고 더 부르거라. 그러면 네 놈 할애비도 더 기뻐할게다!) 조설근은 위소보를 보고 급히 말했다. [어르신, 어서 와서 이 누나에게 울지 말라고 하세요. 너무나 슬퍼하세요!]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고개를 돌려 이 어르신이 좀 볼 수 있게 하거라.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자꾸나.]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위춘방이 소리쳤다. [이년아! 손님이 보자는 데 못 들었느냐?] 그 여자는 이미 위춘방의 욕과 매에 겁을 먹고 있던 터라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인 채로 몸을 돌렸다. 위소보가 말했다. [고개를 들거라. 어차피 이런 곳에 온 이상 뭐 부끄러울 게 있느냐?] 그 여자는 천천히 고개롤 들었다.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과연 자색이 뛰어나구나! 그러나 낙어심안 폐화수월이라고 하기에는....] 돌연 말문이 막혔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다니던 쌍아가 아닌가? 조인이 소금장사에게서 이천 냥을 주고 사다 첩으로 삼았다는 쌍아였다.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이게 무슨 조화냐? 조 대간신배 놈은 담도 크지, 집에서 제일 무서운 에미와 여편네를 속이고 이 쌍아를 샀을 텐데 어째서 여춘원까지 보내 왔을까?) 위소보는 속으로 많은 궁리를 해 봤다. (그 조 대간신배 놈이 에미와 여편네에게 발각되어 임시로 피난시켰는가?) (조 대간신배 놈이 나의 어머니가 여춘원을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곳에 보내어 이 어르신에게 아첨을 하려는 것인가?) (조 대간신배 놈이 돈이 궁색해 쌍아를 다시 기생집에 팔았단 말인가?) 조설근은 위소보가 눈을 휘둥그래 뜨고 쌍아만 볼 뿐 입을 열지않자 급히 말했다. [어르신, 어서 울지 말라고 하세요!] 위소보는 쌍아와 조설근을 보고 문득 생각났다. (제기랄, 그 조 대간신배 놈의 보배 같은 손자 조설근이 나의 친구의 손에 납치되었으니 쌍아를 여춘원에 팔아, 한편으로는 자기의 성의를 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쌍아를 위소보에게 돌려주었으니 보배 같은 손자를 돌려달라는 것이로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위소보는 모든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흥! 이 어르신을 어떻게 해 보겠다고? 어림없는 수작이지 이 어르신은 네 놈보다 보고 들은 것이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걸!) 위소보가 말했다. [어이, 그대는 쌍아라고 부르지 않소?] 조설근, 쌍아, 위춘방은 모두 놀랐다. 쌍아는 고개를 들고 보았다. 위소보는 얼굴에 고약을 큼지막하게 붙이고 이따금 부채로 얼굴을 가리니 쌍아가 한번 보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쌍아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춘방은 기뻐서 말했다. [서로 아는 사이라니 잘 됐군요. 두 분께서는 정말 연분이 있지요. 쌍아야, 이 나으리는 손꼽는 부자이시고 좋은 분이시다. 네가 이런 분을 만난 것도 복이 있는 때문이니 잘 접대하거라!] 위소보가 웃으며 나섰다. [본 나으리가 손꼽는 부자는 맞소이다만 그리 좋은 축에는 속하지 못하오.] 위춘방은 위소보가 천 냥짜리 은표를 척척 내놓는 것을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자식으로 여기고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요년은 고집이 좀 세요. 그러나 나으리께서 흥취가 있으시다면 소녀가 방법을 일러드리지요.] [그 방법이라면 춘주(春酒)를 먹이는 것이 아니오?] 위춘방은 의아해 하면서도 반색을 했다. [나으리께서도 잘 아시는군요?] 위소보가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마마님처럼 이런 일을 하지요.] 위춘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그녀는 안색이 침울해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으리의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복이 있는 분이지요. 그 분은 저처럼 이런 일을 하지만 아드님이 이렇게 커다란 나으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나 같은 거야.... 에이 참! 소보 후레자식 놈은 어디가서 죽었는지?] 위소보는 위춘방이 이처럼 자신을 그리워 하는 것을 보고 자기 마음도 설레었다. 어린애처럼 그녀의 품속에 안겨 '어머니'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꾹 참았다. [여춘원이 이처럼 웅장하고 경기도 좋은 것 같은데 마마님 아드님이 무엇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겠습니까?] 위춘방은 위소보가 흘끔흘끔 겉눈질을 하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제 자식 놈은 나으리 또래에 키도 그만하고 나으리처럼 흘끔흘끔 눈치질도 잘 하지요. 나으리와 똑같....]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마마님,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이 나으리는 정말로 마마님 아들이 되고 말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쌍아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는 노래나 한 곡 부르시구려. 이 나으리께서 좀 들어보고 싶구려.] 조설근이 말했다. [이 누나는 노래를 아주 잘 불러요.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크게 괴로워 부르려고 하지 않아요.] 쌍아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위소보가 물었다. [십팔모를 부를 줄 아느냐?] 쌍아는 며칠이라도 여춘원에서 밥을 먹었으니 그 음탕한 위소보의 십팔번 '십팔모'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크나큰 모욕이라 생각하고 말없이 눈물부터 흘렸다. 위춘방이 소리쳤다. [울기는 왜 울어? 이년아! 온 종일 가르쳐 줬는데, 어서 부르지 못 해!] 쌍아는 대답 대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위춘방은 그녀를 힐끗힐끗 노려보다가 웃으며 위소보에게 말했다. [쌍아가 부르지 못하면 소녀가 부르는 건 어떨까요?] 위소보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이 든 분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 않소이다. 마마님, 일이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십시오. 나는 쌍아와 할 얘기가 있소이다.] 위춘방은 알았다고 대꾸한 후 등을 돌려 나갔다. 그녀는 잠깐 문어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말했다. [쌍아야, 이 나으리를 잘 대접하거라. 잘 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네 년의 가죽이 온전히 붙어 있지 못할 줄 알아라!] 위춘방이 나간 다음 쌍아는 고개를 흔들며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그 노래를 몰라요. 또한 설령 안다 해도 부르지 않겠어요.] [노래 한 곡 부르지 않겠다면 무얼 하러 이 곳에 왔단 말이냐?] 조설근이 말했다. [어르신, 이 누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팔려 왔대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래? 어느 양심도 없는 후레자식 대간신배가 이처럼 꽃다운 아가씨를 기생집에 팔아 먹었단 말이오?] 조설근은 쌍아의 신분과 내력을 전혀 몰랐고, 또한 위소보가 자기 할아버지 조인을 비꼬아 욕하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조설근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더러운 사내 녀석이지! 이처럼 예쁜 여자를 만난 것만 해도 평생 커다란 복일 텐데 다른 사람에게 팔다니?] [쌍아는 나쁜 놈에게 붙잡혀 왔는지도 모르지!] 조설근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같은 더러운 사내들을 붙잡아 팔아치운다면 모르지만, 이처럼 꽃다운 미모의 여인을 붙잡아 왔다면 말도 안 돼요. 정말 말도 안 돼!] 위소보는 소리를 길게 빼며 말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든 혈육이라 구린내가 풍기니 강도들이 삶아 먹으려고 양념을 넣어도 그 고기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나지. 하지만 여자는 물로 만든 혈육이니 양념을 넣지 않아도 아주 향기롭지.] 조설근은 강도들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말을 들은 지라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조설근의 입에서는 호기남아와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누나, 무서워하지 마세요. 강도들이 사람을 죽이고 잡아 먹어도 걱정 말아요. 저와 이 어르신께서 여기 있으면 아무리 흉악한 강도라도 누나를 어쩌지 못할 거예요. 어르신, 그렇지 않아요?] 위소보는 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제기랄, 그 할애비에 그 손자라고.... 요녀석은 어린 놈이 벌써부터 계집한테 비벼대는 법을 아는구나!) 조설근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어린애 티를 벗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늠름한 신색이라 위소보는 섣불리 그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위소보가 말했다. [그거야 물론이지. 그러나 강도들은 너희 누나를 죽이지 않는단다. 대신 여럿이 모여서 그녀를 붙잡아다 색시로 만든단다. 그러니 어쨌든 우리는 누나를 구해야 하지.] 조설근은 막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여서 붙잡아 색시로 만든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모여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가요?]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그것과는 다르지. 너도 한번 시험해 보겠느냐?] 조설근이 반문했다. [어떻게 시험하나요?] 위소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쌍아가 조설근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도련님은 훌륭한 아이예요. 그런 추잡한 말을 듣지 마세요!] 쌍아는 재차 위소보에게 냉랭히 말했다. [위작 나으리, 나으리와 조 대인 사이에 그 어떤 은원이 있는 줄 알아요. 원한에는 머리가 있고 채무에는 주인이 있어요. 당당한 칠척남아가 조 대인을 찾아 빚을 청산해야지, 어린애를 상대로 농지거리나 하고 나쁜 짓을 가르치고 있다니, 정말 용납할 수가 없어요.] '위작 나으리'라는 말을 듣고 위소보는 생각했다. (요 계집년이 이 어르신을 알아 봤구나. 그런데 조설근 요 녀석이 뭐 그리 예쁘다고 세상 여자들이 모두 감싸고 도는 걸까? 쌍아뿐만 아니라 문아도 그렇단 말이야!) 위소보는 쌍아의 말을 듣고 말했다. [나의 신분을 알면 그래 이 어르신의 체면도 봐주어야지. 이 어르신께서 노래 한 곡 듣자는데 그것마저 거절한단 말이냐?] 쌍아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아이만 괴롭히지 않는다면 저는 위작 나으리께서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러드리지요.] 쌍아는 창문가에 가서 아쟁을 가볍게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소리는 슬프고도 처량하여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노래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아픔과 그리움을 표현한 노래였다. 학식도 없고 재간도 없는 위소보가 양춘백설이 무엇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그 무엇이 그의 흉금을 흔들어 놓았는지 듣기만 했다. 조설근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위소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르신, 누나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돈이 많이 있어요, 돈이....]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네 할아버지를....] 돌연 위소보가 입을 다물었다. 조설근이 채촉했다. [어르신, 저의 할아버지를 어쩌시려고요?] 위소보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낮게 말했다. [조용히 하거라! 무슨 말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쌍아는 도리질했다. 조설근도 귀담아 들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너희들은 귀가 잘못되었구나. 그 말소리는 이렇게 들린다. '위소보 위 부교주(副敎主) 어서 나오게나. 중요한 일을 상의할 것이 있으니 어서 나오게나. 제기랄 놈 처박혀서 무얼 한단 말이냐?'라고 말이야.] 쌍아는 여전히 도리질하고 조설근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제기랄, 너회들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 어르신의 귀가 잘못되었겠지.... 아니, 틀림없어. 이것은 아주 고심한 무공이야. 전음입밀(傳音入密)이란 말이야.] 전음입밀은 고심한 무공이다. 물론 절세의 무공이라는 할 수는 없지만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다. 강호나 무림 중에 이 신기한 무공을 아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았다. '위 부교주'라는 말을 듣고 위소보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가 왔구나. 천하에서 제일 큰 적수가 왔구나!) 이런 귀신 저런 귀신 다 찾아온다 해도 위소보에게 가장 무서운 상대인 신룡교 교주 홍안통이 온 것이다. 위소보는 욕했다. (제기랄, 이 위소보는 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이런 봉변을 당하는가? 정말 재수가 사납구나.) 그는 겁이 나서 쩔쩔맸다. 마땅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얼른 문을 걸어 닫고 등촉도 죽였다. 쌍아와 조설근을 침대 한쪽에 밀어 놓고 이불을 씌워 놓았다. 그런 후 자기도 신을 신은 채 이불 속으로 끼여들었다. 조설근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물었다. [어르신, 왜 그러세요?] 쌍아는 당황했다. 위소보가 자기에게 억지로 무리한 짓을 할까봐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어쩌자고 이래요?] 위소보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떠들지 말아. 살인 강도 식인종이 왔어! 아이를 보면 잡아먹고 예쁜 여자를 보면 옷을 흘딱 벗기고 마누라로 삼는다오.] 조설근이 물었다. [어르신을 보면 어쩌나요?] [나를 보면 말이지....] 위소보는 말을 하다 말고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를 덮었다. 이렇게 이불 속에서 머리를 틀어박고 있었지만 귓가에는 모기소리만한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위소보, 이 어르신은 네가 숨어 있는 곳을 안다. 네가 나오지 않으면 불을 질러 버리겠다.) 위소보는 들을수록 겁이 나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원래 침대가 작은데 셋이나 비집고 누우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설근이 말했다. [어르신, 숨도 못 쉬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흥, 그래 이 곳이 직조부인 줄 아느냐? 잔말 말고 누운 대로 가만히 있어.] 젊은 사내의 거친 숨결과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쌍아의 혈맥으로 들어갔다. 쌍아는 답답한지 숨을 가쁘게 쉬며 일어나 앉으려 했다. 위소보는 그녀를 누르며 소리쳤다. [누워 있어!] 위소보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는 솜같이 부드로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쌍아는 가슴이 위소보에게 눌리자 난처하여 말했다. [손을 치우세요. 소리치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더러운 년, 너는 네가 지금 깨끗한 처녀인 줄 아느냐?] 쌍아는 너무나 다급해 울상을 지었다. [너, 너....] 위소보는 생각했다. (요 구린내 나는 년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기생집 밥을 먹고 또 소금장사꾼에게 붙잡혀 조 대간신배에게 팔려가서 그 녀석의 첩질을 했을 텐데, 그런 주제에 감히 깨끗한 처녀인 척하니 정말 우스워 죽겠군!) 그는 쌍아의 가슴을 만지며 십팔모를 변용해 흥얼거렸다. [더듬고 만지고, 더듬고 또 만졌네. 쌍아의 젖가슴을 만졌다네.... 히야, 살결이 아주 부드러운데....] 돌연 등 뒤에서 냉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작 나으리, 한참 재미 보시는군요!] 위소보는 깜짝 놀라 살맞은 새 꼴이 되어 실내를 살폈지만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쌍아가 소리쳤다. [조....] 위소보는 쌍아외 입을 막고 웃으며 말했다. [아, 조 대인이셨구려. 나으리께서도 기생집으로 놀러 다니는군요. 그래 집에 있는 두 분이 무섭지 않단 말이오?] 조인은 불을 켜고 침대 앞에 서서 태연하게 말했다. [비직, 위작 나으리께 문안드립니다. 위작 나으리, 복 많이 받으십시오!] 위소보는 퍼뜩 생각이 났다. (오입쟁이와 도둑놈은 보았을 때 붙잡으라고, 일이 잘못되었구나. 이 조 대간신배 녀석이 나와 첩년이 한 침대에 누어 있는 것을 보고 바가지를 덮어 씌우면 이 어르신은 할 말이 없지. 제기랄, 이 조 대간신배와 첩년이 결탁하여 이 어르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수작 아닌가?)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하자 벌떡 일어나 말했다. [조 대인의 재간은 정말 이만저만 아니외다. 이런 곳까지 친히 찾아오니 대단합니다.] 조인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 알려드립니다. 위작 나으리께서 쌍아를 보내라고 하셨으니 비직은 거역할 수 없어 쌍아 아가씨를 그대로 돌려 드렸습니다.] 위소보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누가 쌍아 아가씨고, 또 무엇을 그대로 돌려 보내 준다는 거요? 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이다.] 조인은 침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쌍아는 침대에서 내려 위소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 대인 어르신, 이 사람은 아주 무례한 사람이에요.] 조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말씀해 보십시오.] 위소보가 냉소했다. [조 대인의 맞바꾸는 솜씨가 그럴듯 하구려!] 조인이 말했다. [맞바꾸는 솜씨라니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조 대인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을 거외다. 아무 계집이나 얻어다 나의 쌍아와 맞바꾸다니 정말 고명하구려!] 조인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쌍아야, 이리 좀 오거라!] 쌍아는 조인의 앞에 와서 '어르신!' 하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조인이 준엄하게 물었다. [쌍아야, 사실대로 말해 보거라. 네가 쌍아가 맞느냐?] 쌍아는 약간 주저하다가 '예!' 하고 대답했다. [소금장사에게 붙잡혔다가 나에게 팔려 온 쌍아가 맞느냐?] [예!] [쌍아야, 너는 위작 나으리의 사람이지? 위작 나으리의 일곱 부인들, 그리고 그의 스승, 형제, 친구들과 모두 인연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위작 나으리를 따라 가거라!] 쌍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르신, 무슨 말씀이신가요?] 조인이 말했다. [쌍아 아가씨, 내가 당신의 신분을 잘 모르고 큰 죄를 지었소이다. 당신도 괴이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이오.] 조인은 또 위소보에게 말했다. [위작 나으리, 위작 나으리의 분부대로 쌍아를 위작 나으리께 넘겨 드립니다.] 위소보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오늘 이 떼쟁이 어르신이 떼쟁이 할애비를 만났군.) 자기 재간으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옳거니, 요 늙은 구렁이가 쌍아 년을 이 어르신에게 밀어 넘길 작정이구나. 사람을 동원하여 가짜로 진짜를 바꾸려 하니 제갈량도 방법이 없어 이마를 칠 판국이구나.) 쌍아는 조인의 품으로 달려가서 울며 말했다. [어르신, 저를 저 사람에게 맡기지 말아 주세요.] 조인은 그녀를 밀어 내면서 말했다. [쌍아야, 국법이 엄중하니 나도 달리 방법이 없구나.] 쌍아는 울며 말했다. [어르신, 저의 출신이 비천하다고 그러십니까? 제가 기생집에 있었다고 하지만 노래나 불렀지, 몸은 팔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깨끗한 처녀입니다.... 이 세상에서 조 어르신만이 저를 알아주고 저를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조인은 아주 냉랭하게 말했다. [더 말해 소용 없어! 위작 나으리를 따라 가거라!] 쌍아가 말했다. [어르신, 저를 여춘원으로 보내면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삼 일 지나면 저를 데려간다고 하셨잖아요.] [그 때는 그 때고. 쌍아야, 나도 나의 고충이 있단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쌍아, 조 대인을 너무 괴롭히지 말거라. 그 집에는 아주 무서운 물건짝이 둘씩이나 있는데 너는 상대가 안 되지!] 쌍아가 말했다. [어르신, 저는 어르신의 댁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고, 또 그 무슨 명분도 필요 없어요. 그저 수월루(秀月樓)에서 조 어르신이 저에게 시를 배워주고 읊어요. 제가 어르신께 노래를 불러드리고 이야기나 하며 며칠에 한 번씩 만나면 그것으로 이 수아(秀兒)는 만족하겠어요. 수아는....] 조인이 소리쳤다. [쌍아야, 무슨 헛소리냐?] 때는 이미 늦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쌍아가 아니라 수아였구만! 구린내 나는 꼬리를 잡혔구만. 제기랄, 세상에 쌍아가 둘씩이나 있을 리가 없지!] 조인은 난처하게 되었다. [위작 나으리, 쌍아가 겁을 먹고 정신이 얼떨떨해서 한 말이니 새겨 듣지 마십시오!] 조인은 웃으며 쌍아를 보고 말했다. [쌍아야, 어서 방금 한 말은 실없이 한 소리라고 위작 나으리께 여쭙거라!] 쌍아가 말했다. [저는 가지 않겠어요. 어르신, 저 사람은 떠돌이 무뢰한이에요. 저는 절대 그를 따라 가지 않겠어요.] 쌍아는 조인에게 비스듬히 기대며 정감 어린 눈매로 조인을 보면서 울먹였다. [어르신, 저는 살아도 조가 가문의 사람이고, 죽어도 조가 가문의 귀신이 되겠어요....] 위소보는 이상했다. (제기랄 년, 저 늙다리가 뭘 볼 게 있다고 이처럼 아양을 떤단 말인가? 기생질 해먹는 편이 저놈의 첩살이보다는 백 배는 낫지.) 조인은 비쩍 마른 손으로 쌍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쌍아야, 위작 나으리는 젊고 전도가 유망한 분이시다. 저 분이 또 너에게 마음이 들어하니 너는 복이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게냐?]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나는 쌍아를 원하지 수아는 싫소이다!] 조인은 들은 척도 않고 쌍아를 보고 말했다. [쌍아야, 너는 말을 잘 듣지? 어서 가거라, 어서.] 쌍아는 마지 못해 위소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위소보의 앞에 와서 천천히 위소보의 품속으로 쓰러지듯 기대 왔다. 위소보는 쌍아를 부축하고 웃으며 말했다. [조 대인, 잘못 생각하셨소이다. 이 가짜 쌍아를 나에게 맡기는 것은 괜찮지만 그녀가 다 털어 놓을 때는 조 대인에게는 그리 좋은 일이 없을 것이오.] 조인이 말했다. [이 아가씨가 쌍아인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위작 나으리, 믿지 못하시겠다면 물어 보시구려?] 위소보가 말했다. [좋소. 후회하지 마시오.] 위소보는 여자에게 간지럼 태우는 수작을 부렸다. 손으로 가볍게 쌍아의 어깨를 만지고 입을 그녀의 말랑말랑한 귓볼에 댔다. 여자의 제일 부드러운 마음을 야기시킬 수 있는 남자의 숨결이 윙윙하고 '쌍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쌍아'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황홀감에 빠져 지각을 다 잃은 사람 같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의기양양했다. (이 어르신의 무공은 조 대간신배와 비길 수는 없지만 여인의 몸에 펼치는 재간이야 조 대간신배는 상대가 안 되지.) 그러나 그는 실수할까봐 많은 대책을 생각한 후 말했다. [어여쁜 수아야, 너는 남의 꾀임에 들어 쌍아로 가장했지. 안 그래?] '쌍아'는 아무 대답이 없이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위소보는 은근히 성이 났다. (요 화냥년, 겨우 이것도 못 참고 흐느적거려? 네가 물놀이를 하자면 잠시 후에 이 어르신이 실컷 물결을 태워주지.)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어서 분명히 말해 보거라. 이 어르신은 아주 좋은 분이니까 다 털어 놓거라.] 쌍아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머리가 위소보의 어깨에 기울어 졌다. 위소보는 놀랐다. [쌍아, 아니 수아! 왜 이래? 대답해!] 조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위작 나으리의 무공은 정말 고명하구려!] [무공이 라니?] 조인은 음침하게 웃었다. [위작 나으리는 눈깜짝하는 사이에 사람을 죽여 입을 막는구려. 아주 고명하구려.] 위소보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죽여 입을 막는....]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바가 있어 손을 '쌍아'의 입에 가져갔다. 과연 예상대로 쌍아는 이미 숨결이 끊어져 있었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욕했다. [제기랄, 조 대간신배 놈아! 네 놈은 정말 악독한 놈이구나. 입을 막자고 연약한 여자를 죽이고 죄를 나에게 덮어씌우는구나!] 위소보는 조인을 뚫어지게 보며 계속 소리쳤다. [이 계집이 그처럼 따르는데 목숨을 내걸고 돌봐줘야지, 믿음을 헌 갓처럼 내팽개치고 죽이다니 그래 양심이 있단 말이냐?] 조인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는 억지로 내가 쌍아를 죽였다고 하는데 저는 더 말하지 않겠소이다.] 위소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쌍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 [아가씨, 당신이 쌍아든 수아든 이 위소보는 자기 사람으로 여기겠소! 염라대왕전에 가더라도 나는 이 뼈에 사무치는 원수를 꼭 갚아 주겠소. 그렇지 못하면 나는 성이 위가가 아니라 조가요. 위소보라 하지 말고 조소보라 부르시오!] 위소보는 평생 처음으로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광명정대한 말을 했고 사내대장부의 호연지기를 드러내 보였다. [조 대인, 무공으로 말하자면 나는 상대가 되지 않소. 그러나 오늘 조 대인이 무슨 재간을 쓰더라도 이 위가의 노화(怒火)를 막지 못할 것이오.] 조인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이렇게 말씀하니 이 미천한 몸은 죽을 자리조차 없습니다. 위작 나으리께서 비직에게 간을 하나 더 주신다 해도 비직은 감히 손을 쓰지 못하겠소이다.] 위소보는 냉소하며 말했다. [조 대인, 너무 사양하는구만! 담도 아주 굵은 모양인데 어서 자초지종을 밝혀 보시오!] 조인이 말했다. [비직은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직은 위작 나으리의 분부대로 쌍아를 맡겼습니다. 위작 나으리께 여쭙겠습니다. 저희 손자 조설근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위소보가 냉소하며 말했다. [조 대인께서 쌍아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 어르신은 아주 유쾌하게 돌려드리겠소. 우리는 다 의협심이 있는 사내대장부지요. 똑똑히 말하지만 그 보배 같은 손자는 지금 이 어르신의 손에 있소!] 조인은 속이 달아 올랐다. [그 애를 지금 어디에 숨겼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그건 물을 필요도 없소. 쌍아와 바꾸기 전에는 아무리 물어도 나는 알려 줄 수 없소.] 조인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저는 쌍아가 하나인 줄로 아는데 어디 가서 다른 쌍아를 얻어 오겠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조 대인의 수단은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 지혜와 계략이 제갈지량을 초과하고 무공은 관운지장도 감당하기 어려우며, 악독하고 잔인하여 암암리에 살인하는 신공까지 천하무쌍이오. 그런 재간이면 쌍아 둘이 아니라 일명 백명이라도 손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 조인이 자자구구 뱉어내듯 말했다. [비직이 찾아오지 못한다면?] 위소보가 말했다. [그럼 조가네 보배 같은 손자는.... 흥! 말하기 어렵소.] 조인은 다급히 물었다. [그럼 그 애를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걱정 마시오. 이 어르신은 도량이 있는 사람이오. 아이를 어쩌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러나라니요?] [나 시러배 잡놈 위소보가 그 애를 제자로 받아들여 천하에 제일 무능하고 고금 이래 둘도 없는 불효 자식이며 천지개벽 이래 제일 음탕한 사람으로 만들겠소이다. 그래서 당신들 조가 가문이 후세까지 이름을 날리게 하겠소. 하하하....] (작자 주:수십 년 후 문학거장 조설근의 거작 홍루몽에서 천지 개벽의 첫 문학형상 가보옥을 부각했다. 가보옥에게 이런 평가가 있었다. '천하에서 제일 무능하고 고금 이래 둘도 없는 불효 자식이다.' 이 학식도 없고 재간도 없는 위소보의 말과 일치한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흥학가(紅學家)들의 고찰에 의하면 가보옥은 기실 조설근 자신의 분신이라고 했다. 가보옥에 대한 묘사는 그가 양주에서 위험을 겪은 것과 관계가 있는지? 고찰이 충실하지 않았기에 여기에 제기할 따름이니 뜻이 있는 분들은 연구하기를 바란다.) 조인은 침울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위작 나으리의 부인이 실종된 일을 전부 비직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아닙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가짜 쌍아가 죽었고, 진짜 쌍아는 보이지 않으니 내 어찌 조 대인의 구원을 바라지 않겠소?] 조인을 돌연 흉악스러운 눈길을 드러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 사이에 은원은 해결할 방법이 없군요?] 위소보는 속이 서늘해지며 소리쳤다. [손을 쓰겠다는 게요? 나를 감히 죽일려구!] 조인은 확실히 그를 죽여버릴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위소보가 이렇게 앞질러 말하는 바람에 당장 어쩌지 못했다. 조인은 생각했다. (이 시러배 잡놈을 죽이자면 파리 목숨을 없애는 것처럼 쉬운 일이지만 손자가 이놈의 수중에 있고 또 벼슬이 공작이니, 이놈을 죽였다가 조정에 보고할 방법이 없다. 이 시러배 잡놈은 안면이 넓고 강호에서 많은 무공고수들이 도와주니 죽이기는 쉬워도 그 후과(後果)가 두렵지....) 그러나 그를 쉽사리 놓아 줄 수도 없었다. 조인이 소리쳤다. [우리 함께 황상 폐하의 앞에 가서 시비를 가리자!] 말소리와 함께 번개같이 위소보의 가슴 대혈을 쳐왔다. 위소보는 이미 방비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그리 쉽지 않을 걸!] 그는 몸을 움직이며 신행백변을 펼쳤다. 내력이란 전혀 없어 동작뿐이지 위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발길이 영활하고 가볍고 신쾌해 일류 무공고수도 단번에 붙잡기는 어려웠다. 조인은 이길 것 같았지만 위소보가 살짝 피하자 조인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맹랑하군!] 그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얼른 왼쪽으로 돌아치며 오른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위소보는 신행백변의 영활한 동작으로 또 스쳐 지나갔다. 위소보는 신행백변으로 조인의 옆을 칠팔 자나 미끄러졌다. 기실 위소보의 신행백변이 엄청난 위력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원인은 조인 자신에게 있었다. '위작 나으리'에게 손을 쓰는데 조인은 심리적으로 매우 커다란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무공 십분의 육도 발휘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행백변은 강호 명문(名門) 철검문(鐵劍門)에서 나왔다. 확실히 독특한 점이 있어 간단히 이길 수가 없었다. 조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시러배 잡놈을 약간만 상처를 입혀도 매일 찾아와서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릴 것이 분명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여 버리고 손씻고 나앉는 것이 상책이리라. 비밀리에 이 놈을 제거하면 후에 누가 찾아와도 모른다고 하면 그뿐이 아니겠는가?) 조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사정을 보지 않을 독수(毒手)를 생각했다.그의 '대성장(大成掌)'은 이미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무공을 놓고 말하자면 강호에서 두번째 수위에는 달해, 현정도장이나 전로본과 막상막하였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배우지 못한 위소보가 어찌 조인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겨우 세 가지 방법을 쓰고 나니 또 위험에 처했다. 조인의 장풍이 위소보의 얼굴을 치자 얼굴이 이따금 아파왔다. 위소보가 제일 겁내는 것은 조인의 눈이었다. 방안의 기름등은 껌삑껌삑 하지만 조인의 눈길만은 이리의 눈길처럼 번쩍거리고 살기가 충천했다.위소보가 소리쳤다. [잠깐! 조 늙다리야. 네 놈의 눈에는 뵈는 게 없느냐?] 조인의 '추풍낙엽(秋風落葉)'이란 무공은 그가 10년간 연마한 수법인데 이것으로 위소보의 숨구멍을 끊으려 했다. 방안이 비좁아 조인의 장풍은 더욱 세찼다. 위소보는 이미 구석까지 밀려가 몸 돌릴 곳조차 없어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이 소백룡 위소보가 오늘 끝장나는구나.) 조인이 냉소했다. [위작 나으리, 잘 기억해 두시오. 내년 오늘이 제사날이라는 것을!] 조인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손을 쓰려고 하는데 위소보가 높이 외쳤다. [잠깐만! 이 어르신은 투항하겠소. 이 어르신은 투항!] 조인이 말했다. [흥, 애석하게도 늦었소!] 조인은 추풍낙엽의 세찬 장풍으로 위소보의 머리를 내리쳤다. 위소보는 피할 수도 없어 머리를 감싸고 '아이구!' 하고는 잠잠했다. 조인은 악의에 찬 말로 소리쳤다. [이 망나니 같은 놈, 또 헛소리를 치고 망탕스런 짓을 할 테냐?] 위소보가 도망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조인이 일 장 내려치자 뜻밖에도 허공을 때리고 말았다. 위소보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조인은 대경실색했다. 그 사이 침대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어르신이 헛소리를 하건 오입질을 하건 조 대간신배가 관여할 게 없소!] 조인은 모를 일이었다. (이 비좁은 곳에서 나의 추풍낙엽장법을 피하다니.... 독안에 갇힌 꼴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이 시러배 잡놈이 은신술(隱身術)을 썼단 말인가?) 조인의 '대성장'은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무공은 아니지만 매 초식마다 명문정파(名門正派)의 품격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조인은 어릴 때부터 명성이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무공은 광명정대하다고 자처했다. 그런데 장돌뱅이 출신의 떠돌이 망나니가 자기 적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것은 무슨 은신술이 아니라 조인이 상대의 퇴로를 봉쇄하고 장풍으로 위소보의 숨통을 끊으려 할 때, 그는 위소보의 한 갈래 퇴로를 홀시했다. 즉 자신의 사타구니 밑이었다. 위소보는 어쩔 수 없는 생사지간에 활로가 보여 머리를 숙이고 조인의 사타구니 밑으로 뛰어들었다. 백절불굴 정신을 중히 여기는 강호의 호걸들은 죽을지언정 이렇듯 남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드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 오직 위소보만이 규칙이고 뭐고 관계치 않았다. 남을 이기지 못하겠으면 투항하고, 살기 위해서는 사타구니 밑도 마다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이렇게 하는 행동이 이치에 맞고 당연한 일로 여겼다. 기실 위소보의 이 괴상한 수법은 그 유래가 있었다. 과거 신룡도(神龍島)에서 신룡교주 홍안통은 위소보를 이용하여 '사십이장경'을 얻으려 했다. 이에 홍안통은 부인 소전과 함께 제각기 그에게 세 가지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소전은 죄인삼초(美人三招)'를 전해주고 홍안통은 '영웅삼초(英雄三招)'를 가르쳐 주었다. 이 여섯 가지 무공은 그리 복잡하거나 심오한 무공이 아니지만 아주 실용적이었다. 특히 위소보와 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더더욱 적합했다. 홍안통의 '영웅삼초' 가운데 첫번째 초식은 상대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는 것이고, 두번째는 투항하는 척하며 머리를 숙였다가 상대의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며 세번째는 사타구니 물건을 회롱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광명정대하지 못한 부류의 인간 홍안통만이 가르칠 수 있었고 또한 위소보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위소보는 방금 두번째 초식을 사용했다. 기실 이 방법도 변화가 무쌍하다. 사타구니 밑을 빠져 나갈 때 손으로 상대의 무릎뼈를 끌어당기며 상대의 가슴에 있는 신봉(神封), 신장(神藏), 보랑(步郞) 등 혈도를 발로 걷어차면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위소보는 도망갈 생각만 했지 반격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내력이 전혀 없어 조인의 혈도를 찬다 해도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인은 놀랐다. 그는 아연실색하며 헛웃음을 쳤다. 돌연 조인은 몸을 번쩍 돌리더니 침대 위에 있는 위소보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후안무치한 도적놈! 감히 도망쳐?] 위소보는 태연한 신색을 보이며 아주 신통하게 조인의 목소리를 모방하여 꾸짖었다. [후안무치한 도적놈! 감히 도망쳐?] 위소보는 한 손으로 조설근을 들고 한 손은 비수로 조설근의 잔등을 겨누었다. 조인은 재차 공세를 취하려다 말고 그만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소리쳤다. [이놈! 어쩌자는 수작이냐?]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죽이지는 않아! 이 어르신의 무공이 약하여 적수가 되지 못하니 체면불구하고 네 놈의 보배 같은 손자에게 약을 좀 먹였지.] 이런 까닭으로 조설근은 단잠을 자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인은 이것을 보고 몹시 당황하여 외쳤다. [이놈, 아이에게 무슨 약을 먹였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조 대인, 안심하시오. 그 약은 독성이 그리 크지 않소이다. 하지만 해독약을 만들자면 매우 복잡하여 열흘 보름 내에 만들어내기는 어렵소!] 기실 약이고 해독약이고 하는 것은 모두가 위소보의 헛소리였다. 조설근에 대한 가정교육은 아주 엄했다. 어느 땐가 조설근이 시녀들의 연지를 칠했다 하여 무정한 책망과 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기생집 작부와 함께 한 이불을 덮고 베개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런 두려움과 설레임에 숨을 죽이고 있던 조설근에게 있어 할아버지 조인의 출현은 저승사자의 왕림과도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모골이 송연해 전신이 땀으로 젖었다. 그는 자라처럼 머리를 움츠리고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한편 위소보는 '쌍아'의 시체를 침대에 눕혀 놓을 때 어쨌든 조인과 한 차례 싸울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기회를 엿봐서 몽환약을 조설근의 입에 뿌렸다. 조인은 애지중지하는 손자 조설근이 독에 상해 있다는 말을 듣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위소보는 비수를 들고 말했다. [나의 이 비수는 무쇠를 무우 베듯 하는 보검이오. 내가 두세 번만 휘두르면 펄펄 뛰던 아이들도 '사람몽둥이(人棍)'가 된단 말이오. 조 대인, 손자를 한번 시험해 보겠소?] 조인이 물었다. [사람몽둥이라니?] 위소보는 조설근의 머리 위에서 비수를 휘두르며 말했다. [보시오. 두 팔을 자르고 또 두 다리를 자른 다음, 귀, 코 몸에 달린 것들을 깔끔히 다듬으면 사람몽둥이가 된다오.] 조인은 놀랍고도 잔인하여 그저 '아니....' 하는 소리만 연발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라니? 또 있다오. 마지막으로 후사를 이어주는 그 물건까지 떼어 버리면 진짜 '사람몽둥이'가 되지 않겠소?] 조인은 사랑하는 손자의 생명이 위소보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무공이 초절하다 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다 이빨을 악물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는 정말 지독한 분이구려. 도대체 무얼 원하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조 대인, 나의 요구는 이미 알리지 않았소?] 조인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힘없이 대꾸했다. [위작 나으리, 귀부인의 일은 정말 모르오.] 위소보가 크게 성내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요놈 자식을 먼저 절반 가량 '사람몽둥이'로 만들어 놓고 나서 얘기합시다.] 위소보는 비수로 힘껏 내리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조인은 너무도 놀라 황급히 손을 저었다. [위작 나으리,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귀부인의 일을 비직에게 덮어씌운다면 지금 당장은 나도 달리 방법이 없소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비직이 찾아 보겠소. 위작 나으리께서 시간을 좀 주시오.] [조 대인, 그럼 천천히 찾아보시오. 이틀 사흘이라도 좋소. 어쨌든 나의 여자가 개자식들의 손에 잡혀갔으니 하루나 며칠이나 다 마찬가지요. 이미 신부 노릇을 칠십 번, 팔십 번 했을 텐데 이제 두세 번 더 한들 대단한 일이 아니지요.] 등잔불에 시퍼런 비수가 이따금 번쩍거렸다. 조인은 위소보의 비수가 헛소리가 아니라 확실히 보도(寶刀)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소보는 조인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비수를 쓰지 않았소이다. 우리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무공은 늘 연습해야 하며 사흘만 손을 놓으면 서툴다고 했소. 내가 오늘 '사람몽둥이'를 만들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려. 조 대인이 많은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오.] [위작 나으리, 비직을 너무 핍박하지 마십시오. 사흘 내에 비직은 목숨을 내걸고라도 쌍아 마님을 찾아 주겠소이다.] [좋소. 군자일언중천금이라고 사흘 후에 사람을 바꿉시다.] [그럼 군자일언....] 조인은 말하다 말고 주춤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위작 나으리, 비직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미안한 부탁이고 뭐고, 요녀석을 살펴볼 생각일랑 마시오.] 조인은 생각했다. (이 망나니는 아주 약은 녀석이구나! 조금도 틈을 안 보이니.) 조인은 손을 비벼대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나으리께서 우리 손자 녀석을 그처럼 보살펴 주어 고맙게 생각하오. 그런데 그 녀석이 너무 어려 위작 나으리께 불편한 점이 많으실 텐데....] 위소보는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불편한 것 하나도 없소. 아주 편안하다오. 조 대인의 손자를 이 어르신은 나의 증손자로 섕각하며 아주 귀여워 하고 있다오!] 조설근이 증손자로 되었으니 자기는 조인의 삼촌이라는 말이었다. 조인은 사랑하는 손자가 위소보의 손에 있으니 성만 났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욕을 했다. (언제고 간에 이 화풀이를 꼭 하고야 말겠다!) 위소보가 말했다. [조 대인, 시름을 놓으시구려. 이 어르신은 증손자를 데리고 양주를 돌아보며 잘 유람시켜 주겠소. 여춘원이고 여추원이고 또 행화루(杏花樓), 도화루(桃花樓)에도 가서 그 곳 기녀들을 만나보게 하겠소이다.] 조인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 사흘 후에 다시 만납시다.] 위소보도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조 대인, 사흘 후에....]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맞잡았던 손에서 비수가 떨어졌다. 조인은 그 순간 번개처럼 위소보의 완맥을 짚어왔다. 조인은 오른손으로 위소보의 팔을 틀어쥐고 왼손으로 조설근을 끌어당기려 했다. 위소보가 욕을 퍼부었다. [요 교활한 간신배, 군자일언중천금이라더니....] 위소보는 가까스로 조인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조인은 왼손으로 조설근의 두 다리를 쥐었다. [제기랄, 죽이려면 다 죽이고 말지.] 위소보도 조설근의 머리를 당겼다. 위소보는 머리를 놓으려 하지 않고, 조인도 다리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설근을 서로 쥐고 놓지도 당기지도 못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힘을 쓰시오.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우리 둘이 힘을 합해 차라리 두 쪽을 내고 맙시다. 그러면 요놈이 후에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계집사냥 한다고 근심걱정할 필요도 없고 또 가문을 더럽히지도 않을 것이오.] 조인은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내력으로 위소보를 때려 눕히려 했다. 그러나 조인은 이 무공에 익숙하지 못하여 위소보롤 친다는 것이 조설근을 치곤 했다. 조설근의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조인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했다. [얘야, 할아버지가 너를 구하려고 그런단다.] 위소보가 잇따라 말했다. [얘야, 증조할아버지가 너를 구하려고 그런단다.] 조설근은 이들의 내력에 의해 돌연 혼미해졌다.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할 때 냉랭한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두 사내대장부가 싸우면 싸웠지, 아이 하나를 놓고 화풀이 하다니, 그래 그것이 영웅호걸이 할 짓이란 말인가?] 창문 밖에는 언제 어디서 왔는지 한 여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여자는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나 무공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위소보는 놀랐지만 겉으로 태연을 가장했다. [이 어르신은 원래 영웅호걸이 아니오. 아이를 가지고 화풀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오.] 여자는 아주 냉랭하게 소리쳤다. [어쨌든 모두 손을 놓아요!]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은 놓지 못하겠어. 그래 놓지 않으면 어쩔 작정인가?] 조인도 나타난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없어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여자가 '흥!' 하고 냉소를 하면서 돌연히 훌쩍 덮쳐왔다. 삽시간에 두 사람의 손에 잡고 있었던 조설근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놀랍게도 그 여자가 창문 밖에서 조설근을 안고 있었다. 위소보와 조인은 망연자실 서로를 쳐다봤다. 위소보는 차치하고라도 무공견식이 높은 조인도 그녀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알 길이 없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흥, 당신은 요괴를 불러왔구만!] 조인은 자초지종을 따질 겨를도 없이 그 여자가 손자를 구했으니 고맙게 생각했다. [아가씨, 도와주셔서 고맙소. 아가씨의 존성대명은?] 여자가 말했다. [묻지 마세요. 도와 주려는 것도 아니예요. 두 사람이 하는 행실이 너무 눈에 거슬려 손을 썼을 뿐이에요. 당당한 방주와 명성이 있는 무공고수가 아이 하나를 놓고 비열한 수작을 펼치는데 그래, 부끄럽지도 않는가요?] 그 여자는 여전히 창문을 등지고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말소리만 듣고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위소보가 생각했다. (요 계집년의 키나 목소리가 모두 눈에 익은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굴까?) 문득 생각이 났다. (문아 여동생! 이 어르신의 여동생이 아니고 무림에서 누가 이런 재간이 있겠는가? 아무렴, 이 어르신은 무공 재간은 없어도 여자를 알아보는 공력이야 천하제일이지. 저 조 늙다리는 한참 멀었지.) 그러나 위소보는 또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문아 여동생은 이 조 대간신배를 도와 줄 리가 없을 텐데? 제기랄 년, 자기 일이나 할 것이지.) 위소보는 또 생각했다. (문아는 무공이 고명하고 임기응변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을 때는 항상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위소보의 추측이 맞았다. 그녀는 바로 문아었다. 문아가 강녕직조부에 있을 때는 조인보다 무공이 아주 약했었다. 후에 차녀음양대법으로 위소보를 해독할 때 문아가 역으로 중독되었다. 이에 현정도장, 전로본, 위소보의 일곱 부인들이 모두 함께 내력으로 그의 임, 독 양맥을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화가 복으로 되어 절세의 무공을 지니게 되었다. 조인은 문아가 자기집에 있던 시녀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위소보는 이 일을 모르는 척하고 문아의 등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 일에 간여를 하시니 이 망나니와 저 아첨꾼은 더 말할 게 없소이다. 어르신의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문아는 위소보의 말투를 듣고 의오라버니가 자기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인정에 크게 감동되었다. 문아가 천천히 물었다. [위 방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조 노선배님께서는 어떤 말씀이 계시는지?] 조인은 크게 이상했다. (이 시러배 잡놈 망나니를 어찌하여 개방 방주라 부르는가?) 문아의 말을 듣고 조인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문아가 말했다. [그럼 좋아요. 조 노선배님께서 위 방주님의 부인 쌍아를 돌려주세요!] 조인이 얼른 말했다. [아가씨, 쌍아 아가씨는 이미 죽었소이다.] 문아가 말했다. [아니에요. 저 쌍아는 가짜예요!] 조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진짜 쌍아는....] 문아가 천천히 고개를 혼들었다. [조 노선배님, 천하 일을 모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을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진상이 드러나면 그리 흥취가 없으실 거예요.] 조인이 말했다. [나는 아가씨의 말뜻을 잘 모르겠소이다.] [그럼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요?] 조인은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아니오. 아가씨의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위소보는 이상했다. (허참! 이 늙다리 간신은 기를 쓰고 떼 쓰는 것이 특기인데 문아 여동생의 한 마디에 찍소리 못 하다니? 마치 황제의 성지를 받은 듯하구나. 제기랄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말이 무슨 물건짝이길래 그렇게도 무섭단 말인가? 옳지, 조 대간신배가 이 어르신을 업신여기면 나도 그런 말로 이 늙다리는 혼내줘야겠다. 그러면 이 늙다리도 '투항!' 하고 소리치겠지....) 문아가 말했다. [그럼, 노선배님은 떠나세요.] 조인이 말했다. [아가씨의 말씀을 믿을 수 있다면 노부야 더 말할 게 없소이다. 하지만 저의 손자를....] 문아가 말했다. [조 노선배님, 만약 칠성(七成)쯤 되는 대성장(大成掌)의 내력이 한 사람의 임, 독 양맥을 경과하여 경맥(經脈)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나요?] 조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뭐라고요?] 문아는 뒷걸음으로 다가와 조설근을 안은 채 솟구치더니 두 발로 조설근의 등을 번갈아 걷어찼다. 그녀의 신형이 번쩍하자 조설근은 임맥(任脈), 유부(愈府), 신장(神藏),영허(靈墟),신봉(神封),통곡(通谷),상곡(商曲),유문(幽門),보랑(步廊) 등 여덟 혈도가 문아의 발에 격중되었다. 이 여덟 개의 혈도 가운데 한 혈도만 짚혀도 일어나지 못하는데 여덟 곳이나 채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문아가 이렇듯 걷어 찼지만 위소보나 조인은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 그녀의 '반척연환(反路-各+易連環)'은 뒷등에 눈이 달린 것처럼 혈도를 신속히 알아내고 또 정확하게 들이찼다. 강호의 일류 무림고수들이 정면에서 혈도를 짚으라 해도 이처럼 빠른 시간 내에 짚을 수는 없었다. 상대를 등지고 걷어찬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인의 무공재간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비록 문아는 혈도를 짚었을 따름이지 진기는 내쏟지 않았다. 조인은 땀투성이가 되어 소리쳤다. [아가씨....] 눈앞에 문아는 어디로 갔는가? 문아는 여전히 조인을 등지고 창문 밖에서 조설근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창가를 떠날 수 없는 사람처럼 태연히 서 있었다. 몽롱한 달밤에 밤바람 가볍게 문아의 옷자락을 가볍게 흩날렸다. 마치 만경창파의 수선화처럼, 실버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듯이.... 조인이 수십 년 고통과 그 어떤 신고(辛苦)을 참아오며, 수십 년 동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웅대한 포부를 품고 노력하고, 수십 년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일이 진면목도 알 수 없는 일개 여인의 앞에서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조인은 크게 낙심하고 말았다.... 第17章. 쌍아를 구한 조인(曹寅)의 사연 조인은 갑자기 많이 늙어 보였다. 문아가 말했다. [하찮은 재간을 가지고 조 대인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조인은 상대의 겸양의 말 마디마다 자기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사막의 까마귀처럼 목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의 솜씨에 탄복하오이다.] 문아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방법이 없어 경솔하게 손을 썼는데 대인을 놀라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모쪼록 후배를 용서해 주십시오.] 조인은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계집이 말은 그럴 듯해도 이 늙은이를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흥' 하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문아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대인께서는 북경 왕씨 대성장의 직계제자이시죠? 소녀가 대성장을 배우려 하는데 행여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면 어떻게 치료하나요?] 조인은 크게 놀라 되물었다. [아가씨, 그걸 묻는 저의가 뭐요?] 신경질적으로 반문하던 조인은 깨달은 바가 있어 얼른 무릎을 꿇고 문아의 뒤에 절했다. [아가씨,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소. 정말 고맙소! 우리 조씨 역대 조상님과 후손들이 아가씨의 크나큰 은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 위소보는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히히, 조 늙다리도 호색하는 놈이구나. 고운 여자만 보면 오금도 못 쓰는 그런 개자식이었군!) 위소보는 무공에 대해선 아는 것이 아주 적었다. 한 사람이 무공을 배우는데, 특히 고심한 내공을 배울 때 그 본신이 받아낼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면 주화입마 폐인이 된다는 이치를 몰랐다. 주화입마란 가벼워도 폐인이요, 잘못되면 생명까지 잃는 것을 말한다. 조설근은 칠, 팔 세 되는 아이다. 방금 전에 조인의 육칠성(六七成) 대성장이 조설근의 임, 독 두 맥에 관통되었다. 그러니 나이 어린 조설근이 어찌 받아낼 수 있겠는가. 문아는 '반척연환(反척連環)'으로 조설근의 여덟 곳 혈도를 눌렀다. 조인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여덟 곳 혈도는 잘못된 대성장을 치료할 수 있는 주요한 혈도었다. 조인은 감격하여 뒷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아가씨가 설근이의 혈도를 찬 것은 자기의 무공을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 손자의 내상을 치료하자고 그랬구나!) 내상치료를 하자면 극히 강한 진력(眞力)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조인의 공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조인은 문아의 날씬하고 약한 몸을 보고 속으로 은근히 근심했다. (저 아가씨의 발길질은 괜찮지만 그녀의 진력으로 설근이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문아는 마치 조인의 심사를 읽은 것처럼 옷소매를 펄럭이며 그의 뒤로 내려섰다. 연후 내력을 집어 넣어 조인을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조인은 하나의 풍선이 되어 붕 뜨는 충격을 느끼며 일어섰다. 문아가 웃었다. [노선배님 앞에서 어린 후배가 추태를 부렸사오니 널리 용서해 주세요.] 위소보가 말했다. [아가씨, 사양하지 마오. 아가씨를 만난 것은 조씨 일문의 역대조상들이 공덕을 닦은 복덕으로 .... 아가씨에게 절을 열번 백번 해도 부족하오.] 위소보가 이렇게 되는 대로 떠벌리는 사이에 문아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위소보가 창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기다리시오. 문아!] 조인이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갔소이다.] 다시 조인이 물었다. [문아라니, 위작 나으리, 그녀가 누구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알려줄 줄 알아?) 위소보는 재빨리 둘러댔다. [그 목소리가 모기소리 같고 또 모기처럼 왔다갔다 한다고 문아(蚊兒)라 불렀소이다.] (역자 주:한자 '문(雯)'과 '문(蚊)'은 동음. 그러므로 위소보는 모기 문(蚊)자로 말했음.) 위소보는 문아를 찾는 척하며 달아나려 했다. 조인이 문입구를 막으며 물었다. [무엇 하러 가오?] 위소보가 말했다. [여기에 가짜 쌍아 귀신이 누워 있어 나는 싫소.] 기실 위소보는 조인과 단 둘이 있는 것을 겁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 조가 놈의 진짜 낯짝을 벗겼으니 놈이 그냥 보내줄리 만무하다. 더구나 고놈 종손자 녀석까지 문아에게 빼앗겼으니.... 이제 이 조 늙다리가 걸고들면 도울 사람도 없으니 나 혼자서 싸워 야겠구나?) 하지만 놀랍게도 조인은 그의 앞길을 얼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볍게 허리를 굽혀 위작 나으리 대접을 해주었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수라고 위소보는 외치며 여춘원을 뛰쳐나와 잰 걸음으로 거리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방금 홍안통이 '전음입밀'로 나를 찾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을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 조 늙다리를 겨우 피했는데 또 홍 늙다리까지 만나면 이 어르신의 몸에 곰팡이가 피어날 것이리라.) 날은 어두워지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적었다. 위소보는 한동안 궁리하다가 원래 주막집에 가서 모십팔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모 형의 무공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지.) 위소보가 다시 발길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한 사람의 냉랭한 말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어섰소이다. 사람을 찾으려면 동쪽으로 가야 하오.] 어느 틈엔가 그의 앞에 조인이 서 있었다. 위소보는 어이가 없어 물어보았다. [조 대인은 왜 나만 따라 다니오?] 조인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연신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태산석 감당(泰山石敢當)'이 란 말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오! 나를 데리고 가서 쌍아를 찾자는 것이겠지. 그런데 조 늙다리는 궤계가 대단하니 그의 말을 다 믿을 건 못 된다. 어쨌던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말아야지.) 위소보는 홀연 쌍아를 생각하고 힘껏 자기 뺨을 후려치며 중얼거렸다. (나쁜 놈! 이 위소보는 왜 이리도 무정한가? 자기 살 도리만 생각하니 이래도 사람인가?) 조인이 경공을 쓰니 순식간에 희미한 사람 그림자로 보였다. 위소보는 '신행백변'으로 그를 따라 잡으며 소리쳤다. [나를 기다리시오!] 야밤 삼경, 양주 교외에 자리잡은 황량하고 스산한 묘지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묘지 주위는 나무들이 우거지고 인광이 번쩍거려 귀기가 감돌았다. 위소보는 간이 콩알만 해져 조인을 바싹 따라가며 물었다. [조 대인, 이 곳에서 누굴 만나려 하시오.?] 조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위작 나으리는 내가 귀 부인을 붙잡아 왔다고 의심하지 않소이까? 도대체 귀 부인을 누가 붙잡아 왔는가. 친히 보란 말이외다.] 위소보가 좀 주저하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헌데 왜 기억나지 않을까? 이 어르신의 머리는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는군!] 조인은 이 위소보가 생떼질을 잘 쓰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와 더 언쟁하기 싫어 '흥' 하고 코방귀만 뀌었다. 조인은 위소보를 잡고 살금살금 커다란 묘 앞으로 다가갔다. 묘 앞에선 커다란 돌비석에 '태산석을 당할 자 없다(泰山右敢當)'고 새겨져 있었다. 위소보는 그 글 가운데 산(山)자만 알아보고 나머지는 깜깜부지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어느 큰 인물의 묘 같구나. 이렇게 묘가 크니 속에는 금은보화들이 적지 않을 것이야. 워낙 조 늙다리는 돈에 미친 놈이니, 이 어르신을 모셔다 재물을 파내자는 짓이구나!) 조인이 비석 뒤에 숨어서 낮은 소리로 위소보에게 말했다. [위작 나으리, 갖고 있는 비수가 무쇠를 흙 베듯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들어간 다음. 그놈들이 나오면 그 비수로 하나하나 죽여 버려야 하오.] 위소보는 불시에 머리칼이 꼿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란 누구요? 왜 죽여야 하오?] 조인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사나운 악귀들인데 그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귀부인을 구할 수 없소이다.] 위소보는 귀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을 내는 약심장이었다. 그런데 귀신을 죽이라고 하니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반신반의하는 위소보의 기색을 보고 조인이 또 경고 삼아 말했다. [우리 둘이 다 안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쨌든 목숨과 관계되는 일이니 위작 나으리께서 등한히 해서는 절대 안 되오!] 조인은 손짓으로 위소보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조인은 돌비석을 가볍게 세 번 두드리며 말했다. [태산석 ....] 소리에 응답하는 듯 묘 안에서 모기 소리만큼 저약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할 자....] 위소보는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 다섯 글자는 묘 속의 귀신들과 연락하는 암호였구나.) 갑자기 비석이 서서히 한쪽으로 밀리더니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타났다. 조인은 위소보에게 손짓하고 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비석은 또 제자리로 돌아와서 입구를 봉쇄시켰다. 위소보는 비석 뒤에 숨어 조인이 얘기한 악귀가 나을까 두려워 벌벌 떨며 비석만 주시했다. 홀연 비석이 아무 소리도 없이 움직이더니 다시 출구가 나타났다. 굴 속에서 문득 큼직한 머리가 나왔다. 그것은 눈에서 불빛을 튕기며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진짜 귀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위소보는 비수를 든 채 벌벌 떨었다. 그 '귀신'은 사방을 살펴보다 인기척이 없음을 알고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굴 속에서 기어 나왔다. 지면에 올라선 그가 비석 뒤에 있는 위소보를 발견했다. 그는 낮게 소리치며 위소보에게로 덮쳐왔다. 매발톱 같은 열 손가락으로 위소보의 목을 틀어쥐었다. 위소보는 두려움이 앞서 감히 피하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위소보의 목은 족쇄에 조인 듯 꼬여졌다. 숨쉬기도 어렵고 '투항'한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으로 다다랐을 때, 귀신이 냅다 비명을 토하더니 마구 지껄여댔다. '귀신'이 한참이나 소리쳤지만 호의적인 소리는 아니었다. 귀신이 지껄여대는 소리가 점점 약해지자 위소보의 목을 조였던 손족쇄도 점점 늦춰졌다. 위소보는 이상하여 물었다. [휴우, 대체 무슨 소리요?] 위소보는 말을 하면서 사력을 다해 귀신을 밀어내려 했지만 상대는 요지부동 태산이었다. 위소보를 덮친 귀신의 얼굴은 아주 흉악스러웠다. 위소보는 밀기를 단념하고 이어타정(鯉魚打挺)의 무공을 구사해서 힘껏 위로 솟구쳤다. 귀신의 두 손이 풀리고 말았다. 그 '귀신'은 하늘을 쳐다보며 부들부들 떨다가 자리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그의 배에서는 선지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위소보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군. 누가 죽였을까? 아니면, 자살했는가?] 손에 잡은 비수를 본즉 비수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위소보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비수가 악귀의 배를 찔렀구나! 허참, 죽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내게 고마울 리도 없을 테고.... 여보시오. 악귀 노형, 당신은 이미 죽어 귀신이 됐는데 다시 칼에 찔려 죽었으니 이번에는 어디로 갈 거요? 남들은 한 번 죽는데 두 번이나 죽었으니. 그렇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나는 아직 죽기도 싫고 일곱 명의 아내가 있소. 꿈에라도 나타나서 괴롭히지 마시오. 더욱이 염라대왕 앞에 가서 하소연하지 않기 바라오.] 이 '악귀'는 죽었지만 눈을 뻔히 뜨고 있었다. 위소보는 겁을 먹고 말했다. [에구구! 여기 귀신들은 정말 흉측해. 이 어르신이 피하는 편이 좋겠다.] 위소보가 도망치려고 할 때 문득 쌍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쌍아는 이런 악귀에게 붙잡혀 죽지나 않았는지....조 늙다리가 그녀를 구해 주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그는 또 생각했다. (그 자식의 얘기가 사실이건 아니건간에 이 어르신의 무공으로는 이 곳 귀신의 적수가 되지 않아. 아무래도 스승님, 의매, 의제를 불러와야 이 곳 악귀들을 소탕하고 쌍아를 구할 수 있다. 사실 묘 속의 귀신이야 독 안에 든 쥐 잡기지.) 그는 비열한 생각을 현명한 판단이라 자위하며 등을 돌렸다. 이 때, 재차 비석이 천천히 움직였다. 위소보는 다시 두 다리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묘속에서 머리를 산발하고 혀를 길게 내민 '여귀'가 나왔다. 그 '여귀'는 '악귀'를 보고 소리를 치며 달려가 '악귀'의 입에 손을 가져갔다. 숨이 붙어 있나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여귀'가 새끼 잃은 야수처럼 처량한 소리를 질렀다. 여귀의 울부짖음은 절망적이고 처연했다. 그것은 원한과 증오와 복수의 뜨거운 기운이 한껏 뒤섞여 이 황량한 묘지에 울려 퍼졌다. 여귀는 한이 극에 달한 듯 이따금 이빨을 소리내며 갈았다. 여귀는 독살스러운 눈길로 축수축각(縮手縮脚) 비석 뒤쪽에 웅크리고 있는 위소보를 노려보았다. 여귀의 목구멍에서는 꼴깍꼴깍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야수가 먹을 것을 보고 노리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여귀'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위소보는 피흐르는 비수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라! 거기 서라!] 별안간 위소보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여귀'가 간 곳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사람이냐? 귀신이냐?) 그 때였다. 휙! 하고 무엇인가 등 뒤에 내려서더니 앙상한 손톱이 눈앞에 스쳤다. 위소보는 목이 졸리는 것을 느끼며 땅에 쓰러졌다. '여귀'가 입을 벌리고 위소보에게로 덮쳐왔다. 송곳 같은 이빨로 위소보의 목구멍을 물려 했다. 위소보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르신이 흡혈귀(吸血鬼)를 만났구나!) 위소보는 비수로 이 '여귀'를 힘껏 찔렀다. 그러나 이미 '여귀'에게 팔 혈도를 눌려 들 수가 없었다. '여귀'가 입을 벌리자 그녀의 입에서 심한 피비린내가 확확 풍겨와서 구역질이 났다. 위소보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정신이 몽롱해졌다. 맥없이 여귀의 이빨에 몸을 내맡겼다. 돌연 '여귀'의 입에서 캑! 하는 소리와 함께 여귀가 위소보의 몸에 쓰러졌다. 위소보가 살피니 그 '여귀'도 죽어 있었다. 위소보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니, 내가 비수로 찔렀는가?) 귀에 익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공, 아무 일 없나요?] 위소보가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밤낮 그리워 찾던 쌍아였다.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 너무도 기뻐 쌍아를 끌어 안았다. [쌍아, 당신이 보고싶어서 죽을 뻔했소.] 비록 조인이 옆에 있었지만 쌍아는 자신의 참다운 사랑을 노출시켰다. 평서 수줍어하던 자신을 잊고 위소보의 품속에 뛰어들어 재회의 눈물을 글썽였다. [쌍아가 나를 구했소?] 위소보가 묻자 조인이 설명해 주었다. 위소보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조인이 쌍아를 구해 묘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쌍아는 묘안에서 나온 즉시 '여귀'를 죽이고 위소보를 구해 주었다. 기실 '여귀'의 무공은 쌍아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여귀'는 죽은 '악귀'의 복수를 하느라 암습을 방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쌍아의 번개같은 일격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쌍아는 위소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부터 위소보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헌신적인 여자였다. 이런 그녀에게 위소보의 이번 행동은 커다란 감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평소 느끼지 못했던 뿌듯한 행복감을 만끽하게 했다. 쌍아는 조인의 시선을 도외시한 채 위소보의 가슴 속으로 마구 파고 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상공, 그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위소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하, 쌍아를 위해서라면 나는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어들겠소!] 위소보는 조금 전 자신이 보였던 추태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입으로는 구원할 사람들을 찾으러 간다고 했지만 기실은 쌍아도 돌보지 않고 도망하려 하였으니....) 위소보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기뺨을 쳤다. 쌍아가 깜짝 놀라며 친절하게 물었다. [상공! 왜 이러나요?] 위소보는 어물어물 답했다. [제기랄, 모기라는 놈이 이 어르신을 물어서 그래.] 묵묵히 옆에 서 있던 조인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귀부인을 그대로 돌려 드렸으니 저는 그 '문아(蚊兒)'를 찾아가겠습니다.] 위소보는 놀랬다. [문아라니?] 갑자기 자기가 되는 대로 '문아(雯兒)'를 '문아(蚊兒)'라 한 것이 생각났다. (조설근이 문아의 손에 있으니 조 늙다리가 당연히 찾아야 하지.) 위소보가 줄곧 조인을 의심하게 된 것은 남들 탓이라고 원망했다. (이 죽일 놈들, 소금장사꾼놈들과 모십팔, 이 얼빠진 놈들이 모두 조 늙다리에게 억울하여 들씌웠지.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조 대인을 실컷 괴롭혔지.) 하지만 위소보는 자고로 자기 잘못을 승인한 적이 없었다. [조 대인, 그 '문아'는 무공이 대단하니 조심하십시오, 나는 그녀와 왕래가 있고 잘 아는 처지이니 도와드릴까요?] 조인이 사양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 아가씨의 무공이 대단하니 신의도 잘 지키겠지요.] 위소보는 웃었다. [무공이 대단하면 신의가 있다고? 그건 모르지요. 신룡교 홍안통의 무공은 아주 대단하여 태산북두라 하지만 말한 대로 했소? 그렇게 말하면 무공이 못한 사람은 말한 대로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나의 무공이 보잘것 없으니 말과 행동이 달라도 욕할 사람이 없겠군.] 조인은 '흥'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위소보가 다급히 소리쳤다. [어이, 잠깐만!] 조인은 돌아서며 물었다. [위작 나으리, 어떤 분부가 있는지?] 위소보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각했다. (요 조 늙다리의 도움으로 쌍아를 구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의문점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그 내막을 알고 보내야 하지...., 그럼 어떤 방법으로 요 교활한 놈이 속말을 꺼내게 할까?) 속으로 궁리하다 별 수가 없어 말했다. [조 대인, 누가 나더러 당신을 찾아 쌍아를 구하라고 했는지 아시겠소?] 조인이 얄밉게도 빈정거렸다. [그런 말을 꼭 황상 폐하께서 했다고 말씀드려야만 되는가요?] 위소보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조 대인, 황상께서 벌써 분부했단 말이오?] 조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는 수단이 있는 분이고 황상의 총애를 받으니 입만 열면 태후나 황상의 성지라고 하여 마음대로 명할 수 있지만 저같은 사람이 어찌 성지를 받겠소이까?] 위소보가 조인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뭘 가지고 '태후나 황상의 성지라고 하며 마음대로 말한다'고 하오? 나는 알아 듣지 못하겠소. 그럼 과거에 내가 말한 것이 가짜 성지란 말이오?] 조인은 그만 겁이 났다. (이 하잘것 없는 놈은 황상의 총애를 받는 놈이니 만약 황상께 이렇고 저렇고 헛소리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길 리 없지.) 조인은 얼른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나으리의 농담을 비직은 받아내기 어렵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나도 조 대인이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하오. 흥! 가짜 성지고 뭐고 말하지 말고, 조 대인이 강호의 도적놈들과 결탁하여 이 나으리의 부인을 납치한 책임을 지시오!] 조인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비직이 위작 나으리의 부인을 납치하는 데 참여했다고 의심하시니 불초 조인은 더 이상 변명치 않겠습니다. 귀부인이 계시니 물어보면 알 것이 아닙니까?] 얘기를 끝낸 조인은 서너 걸음 물러서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다음 순간, 튕겨지듯 그의 신형은 허공을 가르고 사라졌다. 위소보는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조가의 무공이 신기에 도달했구나.] 쌍아가 말했다. [상공, 확실히 조 대인을 억울하게 했어요!] 위소보는 억지 궤변을 늘어 놓았다. [내가 그를 억울하게 한 것이 뭐요? 강호에서나 무림 사람들 모두 조인이 납치했다고 말했소.] 쌍아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다 믿을 것이 못 돼요. 그 날 나와 상공님이 소금장사꾼한테 붙잡힌 다음....] 이 장사꾼들은 먼저 살 사람을 찾은 다음 붙잡았다. 위소보는 개방 사람들한테 팔리고 쌍아는 양주의 아주 신비한 조은(曹銀)이라는 사람에게 팔렸다. 쌍아는 이 묘 속에 붙잡혀 들어간 후 자기를 높은 값으로 산 이 조은이 바로 '도묘방(盜墓邦)'의 방주라는 것을 알았다. '도묘방'은 옛묘를 절도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강호의 도적 무리로서 제일 악독한 무리였다. 누가 만약 그들을 건드렀다가는 일생은 물론 죽은 뒤에도 편안하지 못했다. 조상의 묘까지 파내 복수를 했다. 그리하여 강호의 각파 즉 소림, 무당, 개방 동 큰 문파에서도 이 '도묘방'과 등지려고 하지 않았다. 조인은 강호의 흑백양도 어느 무리에게도 자기의 정탐꾼이 있었다. 쌍아가 납치된 것을 위소보 주위 사람들이 자기에게 들씌운다는 것을 알고 매우 노기등등했다. 그러나 조인은 '도묘방'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제딴에는 총명한 것처럼 소금장사꾼한테서 여자를 사오고 그 여자 이름을 '쌍아'라고 소문냈다. 속담에 '참새가 방아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그 결과 위소보의 친구들이 그의 손자 조설근을 인질로 삼았다. 조인은 할 수 없이 쌍아가 감금되어 있는 묘를 찾아 나섰다. 그는 쌍아를 감금하고 있는 조은 부부를 밖으로 유인해 내고 제자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던 쌍아를 구해냈다. 방금 묘 안에서 쌍아는 조인이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고 그 앞뒤 사연을 알게 되었다. 위소보는 억지를 쓰며 말했다. [어쨌든 조 늙다리를 조은이라 해도 좋고 '도묘방' 늙다리를 조인이라 해도 좋소. 다 같은 조가들이 본 위작 나으리의 쌍아를 납치했소.] 쌍아가 말했다. [조은의 은(銀)자와 조인의 인(寅)자는 달라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모두 조가고 '은'이나 '인', 아니 음도 비슷하지.... 에이, 이것을 따져 뭘 하나? 쌍아 일이 성사되었으나 입이나 맞춥시다....] 쌍아는 웃으며 비켜 서서 말했다. [상공, 여기는 좀 음산해요. 어서 가요.] 위소보는 쌍아의 손을 잡았다. [쌍아, 정말 나는 죽을 지경으로 당신이 보고 싶었소.] 쌍아는 낯이 붉어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쌍아도 상공님을 몹시 그리워 했어요.] 위소보는 손을 당겨 쌍아를 끌어 안았다.... 쌍아가 위소보를 밀치며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상공, 이 곳은 아주 기분 나쁜 곳이에요. 어서 가요.]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 부교주, 좀 멈추었다 가도 늦지 않소이다.] 수염이 넉 자 네 치나 되는 늙은 홍안통이 흐흐 웃으며 위소보와 쌍아 앞에 나타났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조 늙다리를 보냈더니 또 홍 늙다리를 만났구나. 정말 재수도 더럽게 없군?) 위소보는 쌍아를 자기 뒤에 감추고 목례를 보냈다. [교주님, 안녕하십니까? 소인은 교주님께서 장수하고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합니다.] 홍안통이 침울하게 대꾸했다. [장수하고 복이 많아 뭘 하나? 너희 두 사람이나 장수하고 복을 많이 받아야지, 아이들도 많이 낳고.] 쌍아는 삽시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굴이 붉어졌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미친 자식, 별 늙다리도 다 있네. 남이냐 애를 낳든 안 낳든 무슨 상관이람!) 홍안통은 한쪽에 있는 돌 위에 걸터 앉았다. [위소보, 잘 알아야 하데. 쌍아가 도묘방에 붙잡힌 후, 나는 매일 밤 이 곳에 와서 염탐했다네. 조은 부부가 제자를 삼는다, 비밀을 말하라, 쌍아를 득달했지만 자네의 부인은 절대 굴복하지 않았네. 내가 보기에는 위 부교주에 대한 애정이 하늘에 닿아 있더군. 정말 열녀(烈女)더구만! 어때, 내 말이 믿기지 않는가?] 홍안통은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위소보는 그가 말하려는 것이 '소전과 같지 않다'는 말임을 알았다. 소전은 홍안통의 부인이었다. 위소보의 유혹에 넘어온 여자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미친놈! 이 흥 늙다리는 지금도 그 일을 마음 속에 잊지 않고 있구나.) 홍안통이 또 말했다. [나는 며칠 동안 남몰래 듣고 쌍아에게 정말 탄복했소. 이 홍안통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여자들을 봤지만 정말 쌍아와 같은 여자는 보기 드물다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놈, 늙다리야! 데가 보고 들은 것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신기하게 떠드는 건가? 미안하지만 나의 일곱 처들은 모두 나에게 충성을 다한단 말이야!) 홍안통은 위소보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늙은이는 쌍아의 모든 일이 성사되도록 한평생 도와주겠어. 위소보, 너는 무슨 놈의 팔자가 그리도 좋아서 이 훌륭한 처를 만났느냐? 쌍아를 조금이라도 박대하면 제일 먼저 이 늙은이가 용서 못 할 줄 알아라!] 위소보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늙은 괴물이 오늘은 웬일이지? 여편데 생각이 나서 미쳤나?) 위소보는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교주님, 무슨 말씀을 합니까? 제가 어찌 쌍아를 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홍안통이 냉소했다. [너는 천하에서 제일 매끄러운 놈이라 열 마디에 한 마디도 믿을 것이 없어. 나는 네 놈을 믿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있으면 품은 바 참뜻을 내 앞에서 맹세해 봐!] 위소보는 심기가 크게 불편했다. (이 늙은 괴물은 평소 자신만 생각하고 소전을 홀시했었다. 만약 소전을 진심으로 아꼈다면 푸른 모자는 쓰지 않았을 거야. 오늘은 이상하게도 쌍아를 편들어 말하는 꼴이 제 화풀이를 하는 것 같은데 이 어르신이 넘어갈 것 같으냐?)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교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위씨네 조상들이 도와준 덕분에 이 위소보가 쌍아 같은 처를 만났는데 제가 어찌 등한히 대하겠습니까?] 홍안통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믿지 못하겠어. 맹세해 봐.] 위소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맹세하라면 맹세하지요. 이 위소보가 만약 쌍아에게....] 쌍아가 재빨리 위소보의 입을 막으며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상공, 맹세는 또 무슨 맹세를 한다고 그래요? 상공의 마음을 내가 알아요. 상공이 나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러 왔겠습니까?] 홍안통이 말했다. [쌍아, 그의 말을 믿지 말아. 그 녀석은 여자들을 홀리는 데 재간이 있어!]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남의 여자들을 흘리고 개자식 같은 남자놈들까지 꼬여내서 푸른 모자를 씌워 놓지요.] 홍안통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놈!] 긴 수염이 꼿꼿이 곤두서며 성을 내는 모습이 노한 사자와도 같았다. 위소보는 그만 겁을 먹고 쌍아 뒤로 숨었다. 쌍아가 말했다. [교주님. 교주님은 아직 우리 상공을 잘 몰라요. 위작 나으리를 놓고 살피면 확실히 미꾸라지처럼 매끄럽지만 본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그가 어떤 사람에게는 비열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알고 보면 착한 사람입니다.] 위소보는 이 말을 듣고 멍해졌다. 쌍아는 강남의 한 농가의 딸로 위소보에게 시집왔다. 그는 평소에 아주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마치 작은 새처럼 귀여웠다. 위소보는 그녀와 함께 생활한 시간이 가장 길었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자기 요구를 말한 적도 없고 또 위소보에 대해 이처럼 많은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위소보를 만난 후 처음이었다. 위소보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쌍아가 말했다. [상공, 내 말이 틀려도 노여워하지 마세요.] 위소보는 그를 끌어안고 복숭아 같은 뺨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내가 당신을 잘못 대해왔소. 성어(成語)로 어떻게 말하더라? 그무슨 나를 낳은 부모가 어떻고, 나를 알아 주는 쌍아가 어떻고, 그 멋진 말이 있었는데....] 쌍아는 얼굴이 붉어지며 비켜섰다. 홍안통이 '흥' 하며 말했다. [우스개 소리야, 위 부교주의 재간이지.] 위소보가 넉살을 떨었다. [그 무슨 억지 말씀이십니까? 쌍아 같은 처를 놓고 따로 맹세할 필요가 있나요?] 홍안통이 목소리를 바꾸었다. [부교주, 대답해 보게나. 만약 쌍아가 위험을 겪고 있을 때 자네가 애써 구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나?]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본인은 지금 당당한 신룡교의 부교주인데 목숨을 걸고라도 쌍아를 구해야지요. 그래야 교주님의 체면을 세워드리는 것이지요. 만약 제가 잘못하더라도 교주님은 남들이 저를 멸시하는 꼴을 좌시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안통이 박장대소를 했다. [쌍아, 들어보게. 요놈이 요리조리 피하면서 맹세하지 않으려 하니 과연 진심이 있는 놈인가?] 의표를 찌르는 말에 위소보는 풀이 죽고 말았다. [하라면 하지요.] 홍안통이 왼발로 땅을 굴렀다. [좋소! 내 들어보겠다.] 위소보는 금방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제기랄! 뭐라고 맹세하는 게 옳은가? '칼탕을 쳐도'라고 할까? 그렇다. 쌍아가 잘못되는 날이면 반드시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쌍아는 부모도 없다. 내가 원수를 갚아 주지 않는다면 누가 갚아 주겠나. 그런데 내가 쌍아와 같이 죽으면 원수를 갚을 수 없지 않은가? 차라리 '죽은 다음 십팔충 지옥으로 가겠다'고 할까? 그럴 바에는 조금 낮춰서 얘기하자. 십칠층이나 십육층으로 가자고 하면 십팔층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문득 쌍아가 정다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욕하는 것 같았다. (야, 위소보, 이 자식아! 일곱 처 가운데 하나를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인데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진단 말이냐? 에잇! 차라리 나머지 계집을 다 쫓아낸다고 맹세할까?) 위소보가 이렇듯 지독한 말로 맹세를 하려고 하는데 홍안통의 시선이 눈에 와 닿았다. 그의 꿰뚫는 안광에 위소보는 크게 의혹이 솟구쳤다. (이 늙은 괴물은 쌍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왜 이 어르신을 핍박하여 맹세하라고 하는가? 정말 서쪽에서 해가 뜰 일이지.)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겼다. (뭔가 있다! 이 늙다리는 쌍아가 죽어도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비밀인가? 이 늙은 놈이 날마다 여기 와서 가만히 들었다는데 알고 보니 그 비밀을 알아 내자는 수작이었구나.) 무슨 비밀인가? 이 비밀을 '도묘방'에서도 밝히려 하고 홍안통도 알려고 하니 '녹정산 장보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워낙 생각이 빠른지라 사태를 직감했다. (그렇지. 홍 늙다리가 나를 맹세하게 하고, 또 쌍아를 위험에 처하게 한 후, 그녀를 살리려면 그 '녹정산 장보도'를 말하라는 수작이구나. 이 늙다리야! 네놈이 나를 우습게 보고 맹세하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어! 이 어르신은 건망증이 심해 한 번 잊어버렸다면 두 번 다시 기억 못 하지. 흐흐흐, 이 어르신이 그토록 어리석은 놈인 줄 알아?) 위소보의 추측이 맞았다. 홍안통은 줄곧 남몰래 '도묘방'을 따라 다니며 쌍아에게 녹정산 장보도의 비밀을 알아내려 했다. 힘 안 들이고 정보를 얻으려는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도묘방'도 수많은 위협과 회유를 한껏 다 부렸지만 쌍아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강호의 사람들은 신의를 중히 여긴다. 홍안통은 이 점을 생각해서 위소보를 맹세하게 하고 쌍아의 생명을 담보로 그 비밀을 말하게 하려 했다. 기실 홍안통은 위소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위소보는 강호를 다녔지만 강호의 규칙은 관계치 않았다. 물론 여러 번 맹세는 했지만 언제나 자기에게 불리하면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붙여서 약속을 저버렸다. 그뿐 아니라 위소보는 한쪽으로 맹세하며 한쪽으로 잊어버리는 후안무치의 사내였다. 위소보는 남몰래 쌍아에게 눈짓을 보낸 후,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 알립니다. 저는 일곱 부인이 있는데 쌍아에게만 맹세한다면 나머지 여섯 부인들이 제각기 트집을 잡을 텐데, 그리하면 매일 시달려서 살 수 있겠습니까?] 쌍아는 웃으며 말했다. [교주님, 위 상공께서는 저를 진정으로 대하시니 달리 맹세할 필요가 없어요!] 홍안통은 자기 재간으로는 약아빠진 위소보를 속여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좋다. 쌍아를 어떻게 대하는가 두고 보겠다!] 위소보가 놀라 소리쳤다. [쌍아, 조심 해 !] 말도 끝나기 전에 홍안통은 '사자요두(獅子搖頭)' 수법으로 수염을 손처럼 펴고 쌍아에게 덮쳐왔다. 쌍아는 어릴 때부터 농가의 전통적인 무공을 연마했다. 비록 그녀의 무공이 홍안통보다 크게 약했으나 적수를 만나 임기응변하는 데는 솜씨가 빨랐다. 홍안통이 살기등등한 눈길로 보자 쌍아는 앉은 자세대로 허공에 떠서 십여 자 밖으로 물러갔다. 홍안통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 재간은 정말 볼만 하구만.] 위소보가 비꼬았다. [아가씨 재간이 볼 만하면 이 어르신의 재간은 볼 것 없겠지요?] 다시 홍안통의 몸통이 팽이처럼 움직였다. 돌연 '아아구' 하는 소리와 함께 홍안통의 수염이 위소보의 몸을 올올이 휘감았다. 위소보는 꼼짝 못했다. 화가 치민 위소보는 고래고래 욕을 했다. [아얏, 개자식! 그래,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이요?] 쌍아가 급히 소리쳤다. [상공!] 그녀는 홍안통에게로 덮쳐가려 했다. 위소보가 제지했다. [안 되오. 당신의 재간으로 이 자의 적수가 되지 않소!] 쌍아는 금방 울상이 되었다. [어떻든 상공을 구해야 하잖아요!] 위소보가 말했다. [일곱 부인이 함께 와도 저놈을 당하지 못하오!] 홍안통은 웃으며 말했다. [위 부교주의 무공이 너무도 형편 없어서 망신스럽지만 눈치만은 빠르지. 쌍아, 내가 요술을 피울 테니 보겠느냐?] 홍안통이 수염을 흔들자 위소보는 한장 남짓 솟구쳐 올라갔다. 그가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홍안통이 다시 수염으로 감아 받았다. 홍안통이 수염을 거세게 흔들수록 위소보의 몸은 더욱 높이 올라갔다. 쌍아는 손에 땀을 쥐었다. 쌍아도 사안이 엄중함을 짐작했다. 홍안통의 무공이 아주 드세고 괴상하여 무모하게 맞선다면 위소보를 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까지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단지 홍안통의 자비심에 의지해 목전의 난관을 관망할 따름이었다. 홍안통이 말했다. [쌍아 아가씨, 나의 내력은 한계가 있소이다. 만약 내력이 모자라 위소보를 땅에 떨어뜨려도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위소보는 혈도를 눌렸다. 설사 혈도를 눌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소보의 무공으로는 이처럼 높은 곳에 던져졌다 떨어지면 죽지 않아도 불구였다. 쌍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교주님, 그럼 방도를 말씀하십시오!] 홍안통이 말했다. [그럼 좋소. 아가씨가 녹정산 장보도의 비밀을 말하면 위소보를 놓아 주고, 또 한 가지 무공 절초를 알려주지. 쌍아, 거래를 할만 하오?] 이 때 위소보는 또 홍안통의 수염에 휘감겨 허공으로 내팽개쳐지는 중이었다. [안 되오! 방아 찧고 당나귀를 잡아먹는 격이오....] 돌연 말소리가 끊어졌다. 위소보는 땅에 떨어지며 또 홍안통의 수염에 꽁꽁 감겨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위소보가 또다시 뿌리쳐 올라갈 때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쌍아, 어서 스승, 의동생, 여동생, 처들을 불러 와....] 위소보가 말한 사람들은 모두 홍안통의 적수들이었다. 하지만 말도 끝나기 전에 또 수염에 감졌다. 쌍아는 이 사람들만이 위소보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남편이 이 지경에 처해 있는데 어찌 떠날 수 있겠는가? 쌍아가 주저하고 있을 때, 위소보가 또 공중에 뿌려지며 재차 소리쳤다. [가서 스승들께 말하오. 내가 재간 있는 개자식을 만나 그놈의 그네를 뛰고 있다고 하시오.] 홍안통이 말했다. [개자식이고 뭐고 그네 뛰기가 재미 있지?] 위소보가 공중에서 쌍아를 보고 소리쳤다. [멍청한 년, 왜 가지 않느냐? 그래 과부가 되고 싶단 말이냐! 과부 집에 사내가 들끓는다고 그 꼴이 좋단 말이냐....] 돌연 또 잠잠했다. 홍안통이 수염으로 위소보의 아혈을 눌러 놓았다. 쌍아는 눈물을 머금고 등을 돌렸다. [저는 갑니다.] 쌍아가 훌쩍 날아갔다. 홍안통이 황급하게 외쳤다. [어이, 내 말 좀 들어....] 홍안통은 벌써 멀리 사라진 쌍아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 계집의 용모는 아름답고 약해 보이는데 경공 하나는 정말 대단하구나!] 홍안통이 정신없이 그녀만 쳐다보는 동안에 위소보가 허공에 있는 것을 잊었다. 그가 정신이 들어 수염으로 받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위소보는 '아이구!' 하는 비명성을 토하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행히 보의를 입고 풀밭에 떨어져 다친 곳이 없었다. 그는 누운 채로 소리쳤다. [이 어르신을 죽일 셈이오?] 홍안통은 못 들은 척하고 생각했다. (쌍아가 갔으니 곧 고강한 고수들을 불러올 것이다. 다른 사람은 두렵지 않지만 구난사태와 우아대만큼은 쉽지 않다. 우선 피하는 게 상책이다.) 둘은 하북(河北) 창주(滄州) 경계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비틀거리며 자그마한 객잔(客棧)으로 들어갔다. 홍안통도 뒤를 따랐다. 점소이(店小二)가 살펴보니, 얼굴에 병색을 띠고 다리까지 저는 거지꼴의 사내였다. 점소이의 대단치 않은 머리가 움직였다. (지금은 전염병이 한창 돌고 있는데 이 사람의 모양을 보아 전염병에 걸린 것 같구나! 주인이 뭐라 하기 전에 쫓아내자.) 점소이는 앞을 막아서서 제법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 객잔에는 지금 자리가 없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위소보는 홍안통의 독문 수법에 의해 혈도를 제압당해 강남에서 북으로 오는 십여 일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시달림을 받아 성이 상투 밑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다. 하지만 화풀이 할 곳도 없어 울화를 참는 판국에 이런 대접을 받고 보니 대노하고 말았다. [제기랄, 이 어르신은 발길마다 재수가 없구나. 가는 곳마다 개자식들이 되지 못한 수작을 피워대며 이 어르신을 업신여긴단 말이야!] 위소보는 아무 대꾸 없이 손을 들어 점소이의 면상을 쥐어 박으려 했다. 그의 동작을 접한 점소이의 얼굴이 지장보살 만난 원귀처럼 웃음을 띠었다. [손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침 자리가 비었군요!] 위소보가 욕했다. [흥! 네놈은 개눈알을 해 박았느냐. 사람 볼 줄도 모르고!] 홍안통은 이런 일은 본 척도 않고 넉 자 네 치나 되는 수염을 끌고 객잔 뒤쪽의 널찍한 방에 들었다. 홍안통은 강호의 이름 있는 인물이다. 또한 교주로서 수십 년간 높은 대접을 받아왔다. 위소보는 돈이 있으므로 이 며칠 동안 길에서 그를 잘 대접하여 홍안통도 아주 만족해 했다. 위소보는 술상을 갖추어 홍안통을 대접하면서 생각했다. (평시에는 가는 곳마다 스승, 형제, 벗, 처들이 득실대더니 이처럼 어려운 고비에는 대가리 반쪽도 내비치지 않으니 전부 쓸 데가 없구나! 에잇, 추후 그들을 만나면 스승이고 처고 다 바꿔치고 말겠다. 전부 무르는 게 속 편할 것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단단히 결심했다. 일곱 아내와 이혼하고, 사부를 갈아치우고 친구와 동생도 절배(絶拜)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헌데, 그의 뇌리에 문아의 청초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했다. (전부 의를 끊고 갈아 치운다면 문아는 어떻게 해야지?) 위소보 자신도 언제부터 문아가 자기 마음 가운데 이처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몰랐다. 위소보는 자기에게 말했다. (문아 여동생이야 버릴 수 없지. 그녀는 극히 엄중한 사안이 있어 나를 찾아오지 못하는 거야. 아마 문아에게 내가 납치당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거나 무슨 더 큰 일이 있는 모양이군. 문아라면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천리길도 단숨에 달려올 텐데....) 위소보는 홍안통의 핍박으로 북으로 오면서 구난사태, 문아, 우아대가 와서 구해줄 것을 간절히 소원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북으로 갈수록 마음이 서글퍼지고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위소보는 홍안통에게 술 한 잔을 부어 놓고 슬쩍 의중을 떠봤다. [교주님, 오늘 푹 쉬십시오. 내일이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소이다.] 홍안통이 말했다. [누가 북경으로 간다고 했소?] 위소보가 말했다. [북경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 번화한 곳을 보지 못한다니 정말 애석하군요!] 홍안통이 말했다. [북경에는 자네의 졸개들이 많아 가지 않겠네.] 위소보가 정색해서 말했다. [교주님, 저의 졸개가 많기에 북경에 꼭 가셔야 합니다.] [왜?] 위소보가 말했다. [교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교주님은 무공이 고강하여 천하의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늘 혼자만 행동하면 누가 천하 고수라고 인정하겠습니까? 북경에 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재간을 펼치면 교주님의 출신입화(出神入化)에 이른 경지를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일거에 천하제일의 명예를 얻을 수 있지요.] 만약 몇 년 전 신룡교가 왕성할 때 위소보가 이처럼 떠받들었다면 홍안통은 따라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홍안통은 담담히 웃을 뿐 아무말이 없었다. 위소보는 실망했다. (이 늙다리가 묵묵히 있는데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군. 이번에는 또 뭐라고 말한다?) 열흘 전, 양주교외에서 홍안통은 위소보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홍안통은 그를 핍박하지 않았다. 위소보를 데리고 밤낮 북을 향해 떠났다. 위소보는 원래 이렇게 생각했다. (홍안통이 나롤 압송하여 북경으로 가는 이유는 첫째로, 구난사태등 적수들을 피하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북경에 감춰진 장보도를 찾아내기 위함이리라.) 그런데 추측과 달리 북경에 거의 도착하자 홍안통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늙다리는 참으로 교활하군! 내가 사전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달리 방법을 강구했을 텐데....) 위소보는 자신의 예측이 빗나간 것에 대해 심히 불쾌했다. 주전자를 들어 술 한 모금을 마시고 양미간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이 객잔은 너무하군! 이 잘난 술로 무림의 태산북두인 이 어르신을 대접한단 말인가?] 홧김에 사환을 불렀다. 점소이가 황급히 달려왔다. [손님,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위소보는 그의 귀를 쥐고 억지로 그의 입에 대고 술을 먹였다. [이놈, 이것도 사람이 마시는 술이냐?] 점소이는 술을 토하며 겨우 말했다. [손님, 노여워 마십시오. 제발....] 위소보가 소리쳤다. [이놈, 어서 좋은 술을 가져 오너라! 어르신들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이 더러운 자라 집구석을 깡그리 불 태워 버릴 테다!] 점소이는 주전자를 받아 쥐고 황급히 달아났다. 위소보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죽일 놈들, 요런 녀석들은 관을 보지 않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단단히 버릇을 고쳐줘야 정신을 차리지.] 점소이가 얼른 술을 가지고 와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손님, 이 술은 삼년 묵은 분주(汾酒)이니 천천히 맛을 보십시오.] 위소보는 냄새를 맡아보고 말했다. [음, 이것이 진짜로구나.] 그리고 점소이를 보고 웃었다. [이놈, 너도 몰래 몇 모금 마셨지?] 점소이가 말했다. [아니 제가 어찌!] 위소보가 말했다. [데놈들이 술을 훔쳐 마시는 일에 대해서 이 어르신이 훤하게 알지. 네놈들이 이빨도 안 닦고 주전자에 입을 대는 게 더 큰 문제란 말이다. 요즘같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때에 더러운 주둥이를 놀려대니 어찌 근심이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 손님한테 올리는 술주전자에는 주둥이를 대지말어!] 여춘원에서 익히 배운 위소보는 일장훈시를 늘어 놓았다. 점소이는 꼼짝 못하고 '예, 예' 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근심했다. (우리 둘 가운데 혹시 누가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까?) 위소보는 품속에서 깨끗한 손수건으로 주전자 주둥이를 깨끗이 닦고 홍안통에게 술을 권했다. 홍안통이 한 모금 마시자 위소보가 물었다. [교주님, 이 묵은 분주가 맛이 어떠하신지? 나쁘면 또 바꾸시죠.] 홍안통이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술은 괜찮은데 냄새가 좀 다르군!] 위소보가 물었다. [무슨 냄새가 납니까?] 위소보는 홍안통의 잔을 받아 단번에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연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묵은 술이란 맛이 다 이렇지요. 교주님, 많이 드십시오. 며칠 후 관외(關外)로 가면 이런 술을 구경하기 쉽지 않습니다요!] 홍안통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수염을 내리쓸었다. [정말 물샐 틈이 없이 생각하는구만! 이 늙은이가 관외에 간다는 것까지 추측하니....] 홍안통이 점소이에게 소리쳤다. [이런 술 몇 병을 더 가져오게. 우리가 가지고 가겠소.] 위소보는 원래 시험하려고 물었는데 정확하게 예견이 맞았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렇군! 이 홍 교주놈이 북경에 들르지 않고 녹정산에 가서 보물을 파낼 계획이구나. 하지만 이 어르신의 슬기와 꾀는 제갈지량도 당하기 어렵지. 나를 속여 넘기자고? 미안하지만 이 어르신은 밤중에 사라져야겠소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너 한잔 나 한잔 들다보니 가져온 술을 다 마셔버렸다. 위소보는 원래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므로 삽시간에 눈앞이 흐리멍덩해졌다. 침대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잤다. 달이 중천에 걸렸다. 위소보가 깨어나 보니 껌벅껌벅하는 촛불이 단잠에 곯아 떨어진 홍안통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길다란 수염은 땅에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위소보는 낮은 소리로 홍안통을 깨웠다. [교주님, 교주님.]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뻤다. 번개같이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하하, 요 더러운 놈이 소백룡 어르신의 발 씻은 물을 마셨구나.) 그는 비수를 들고 슬글슬금 홍안통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비수로 그의 숨통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손이 떨려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이 어르신은 부교주 노릇을 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는가! 교주를 죽이면 상하를 어지럽히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일이야 할 수 없지.) 위소보는 다시 돌아서며 생각했다. (요놈의 수염이 몹시 무서운데, 차라리 이 수염이나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말자.) 그의 수염은 아주 부드럽고 설백(雪白)처럼 매끈하여 보기에도 고왔다. 그런데 병기로 쓰면 그처럼 사납고 무서웠다. 위소보가 비수로 베면 천하무쌍의 이 수염도 깡그리 결판이 날 판국이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이놈이 이전에 얼마나 위풍이 당당했는가? 호랑이도 들판에 나서면 개들한테 물린다고 지음 신룡교도 없고 처마저 없으니, 오직 이 수염만이 친구이다. 내가 그것마저 베어 버리면 이 늙다리가 강호에서 어떻게 살아나가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위소보는 비수를 다시 집어넣고 두 주먹을 맞쥐고 말했다. [교주님, 우리는 좋게 만났으니 좋게 헤어집시다.] 위소보가 문어귀를 막 넘으려는 때였다. [어디로 가는가?] 등 뒤에서 홍안통이 웃었다. 위소보는 혼비백산하여 냅다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홍안통의 긴 수염이 그의 다리를 휘감은 것이다. 침대 앞까지 끌려 온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늙다리야 좀 놓아 주면 안 돼?) 홍안통이 말했다. [위소보, 담도 크구나. 노부에게 더러운 몽환약을 먹이다니.] 위소보는 몹시 후회했다. (내가 너무 등한했군! 이 늙은이는 무공고수이자 태산북두이니 몽환약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위소보는 '하하!' 하고 웃었다. 홍안통이 쌀쌀하게 말했다. [뭘 웃을 게 있나?] 위소보는 너스레를 떨었다. [저의 판단이 과연 맞았습니다. 교주님은 몽환약도 두려워 하지 않고 백독도 침범하지 않으니 정말 기쁘고 축하할 일이외다.] 홍안통이 말했다. [흥! 나쁜 놈 새끼들이 마음대로 몽환약을 먹인다면 나라고 강호에서 배길 수 있겠는가?] 위소보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교주님,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의 몽환약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태국(泰國)에서 우리 황상께 드린 것입니다. 태국사절의 얘기에 의하면 그 나라의 48명 라마들이 심산 밀림에 들어가 84종 약재를 가지고 48 더하기 샤일 동안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홍안통이 짜증을 냈다. [뮐 48 더하기 84일인가? 132일이면 132일이지 왜 그리 복잡하게 말해?] 위소보는 또 멍청한 생각을 했다. (원래 교주님은 이 몽환약을 132일간 만드는 것을 알고 있구나! 정말 대단하지. 교주님의 신공이 세상에서 으뜸가고 또 견식이 넓으니 속일 방법이 없구나.) 홍안통도 은근히 겁이 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몽환약이 태국에서 왔다니 약독이 셀 거야!) 위소보가 말했다. [태국사절은 이 약을 먹으면 천하에 마비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마구 떠벌려댔습니다!] 홍안통이 싸늘하게 물었다. [그래, 자네는 그 약을 가져다 이 교주님한데 먹여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겠군?] 위소보는 손뻑을 치며 말했다. [교주님, 그 때 교주님도 그 곳에 계셨습니까? 그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약이 독성이 강하다는 것은 믿을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이나 마비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소이다.' 그랬더니 그 사절은 '그래, 중국에 그런 고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분이 있는데 그는 고금이래 천하제일이고 둘도 없는 영웅호걸....'] 홍안통과 위소보가 동시에 말했다. [신룡교주 홍안통 영웅!] 위소보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홍안통의 눈치를 살폈다. 홍안통이 코를 씰룩이며 소리쳤다. [위소보, 네놈이 제아무리 나를 떠받들어도 새로운 감이 나지 않는다. 이젠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 위소보는 밑구멍까지 드러내 보였지만 뻔뻔스럽게 웃었다. [교주님, 제가 이번에 꾸며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면 다음 번에 아주 그럴듯하게 꾸며내도록 하겠습니다.] 위소보는 잠시 여운을 두었다가 말했다. [교주님께서 이처럼 독성이 강한 몽환약도 두려워 하시지 않으니 이 부하는 더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나이다.] 홍안통이 말했다. [흥! 이 밥상 밑을 봐라!] 위소보가 본즉 홍안통이 앉았던 걸상 밑에 물이 질펀하고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홍안통이 말했다. [이놈, 그 수작으로 나를 속이려 했어? 나는 술을 마실 때 내력을 발끝의 소상혈(小商穴)을 열어 다 내보냈단 말이야.]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늙다리의 무공은 정말로 대단하구나. 입으로 마시고 발끝으로 내보내다니 강호의 이름 있는 고수일지라도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는가?) 자기 내력으로 체내의 독성을 내보내는 공력은 평법한 수준이 아니었다. 강호에서 극소수의 고수들만 할 수 있었다. 위소보는 원래부터 무공을 정성들여 배우지 않았으며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모조리 스승님 탓이라고 밀어버렸다. 그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인지라 홍안통의 신공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홍안통이 말했다. [나도 잘 이해되지 않네. 자네도 나와 함께 약술을 마셨는데 자네는 왜 중독되지 않았나? 자네의 무공도 아주 고심한 모양이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기쁘고 축하할 만한 일일세!]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야 개방의 백독(百毒)도 불침하는 희세의 영약을 이미 먹었으니 이런 약이야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러나 이것을 알려줘서는 안 되지!) 위소보는 말했다. [이 몽환약은 아무런 독성도 없어요. 그 태국놈이 나발을 불어댔습니다.] 홍안통은 위소보의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캐묻지 않았다. 홍안통이 수염을 걷으며 위소보의 혈도를 열어 주고 점잖게 타일렀다. [위소보는 본교 부교주이니 마땅히 본교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본교를 일으켜 세우기에 힘써야지. 겉으로는 같은 척하고 속으로는 딴 꿈을 꾸어서야 되겠나?] 위소보는 되는 대로 말했다. [암, 그렇고 말고요!] 홍안통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럼 나와 함께 녹정산에 가서 보물을 파내어 우리의 대업을 일으켜 세우세.] 위소보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교주님, 녹정산의 보물이고 뭐고 하는 말은 강호에 떠도는 말일뿐 저는 정말 모릅니다.] 홍안통이 말했다. [본교는 애당초 터무니 없는 일을 하지 않소.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이처럼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오. 위소보, 위 부교주, 딴 일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소.] 위소보는 맥이 탁 풀렸다. [그렇지요. 쓸모 없는 일에 골머리를 쌕히면 죽어서도 염라대왕에게 골치를 썩게 마련이지요.] 홍안통은 금방 달콤하게 잠이 들었다. 하지만 위소보는 어찌 잠을 잘 수가 있었겠는가? 날이 밝을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그 때,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룡편은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그리고는 또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위로는 천자를 치고, 아래로는 신하를 치자.] 위소보는 매우 기뻤다. (히히히, 이 어르신의 제자들이 왔구나!) 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천하에 불평등한 일 모조리 쓸어버리자!] 이에 위소보도 소리쳤다. [개방의 변절자도 쳐부수자!] 거리에서 늙은 사람의 목소리가 되받아 물었다. [위 방주님, 맞으십니까?] 위소보가 들어보니 팔대장로 과산호의 소리였다. 그는 생각했다. (과 장로도 홍 교주처럼 흰 수염이 있는 노인이지만 두 사람의 무공은 차가 많지.) 위소보가 크게 말했다. [바로 나요.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신룡교 홍 교주님도 여기에 계시오.] 이것은 과산호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과산호는 홍안통의 무공이 대단한 것을 알고 침묵을 지켰다가 말했다. [방주님, 알만 합니다.] 이 소리에 쿨쿨 자던 홍안통이 잠결에 흥얼거렸다. [제기랄, 개방놈들이 싸우겠으면 들어오라고 해! 살금살금 얘기할 건 뭔가. 그러고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나?] 밖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잠시 뒤에 발걸음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틀림없이 과산호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크게 욕했다. (죽일 놈! 과산호는 담이 토끼만 하구나. 무슨 놈이 과산호(過山虎)야. 과산토(過山兎)라 하지. 제기랄 놈, 죽는 것을 보고 구하지 않으니 이 어르신이 나중에 만나기만 하면 신룡편으로 네놈에게 상을 내릴 테다.) 날이 어느덧 밝아왔다. 홍안통은 아무일도 없는 듯이 묵묵하게 아침밥을 먹고 위소보와 함께 길을 떠났다. 연도에는 둘, 셋씩 짝지어 다니는 거지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위소보는 속으로 기뻤다. (과산호, 요 토끼 같은 녀석은 원래 이 거지들을 모이게 하느라고 그랬구나. 내가 공연히 그를 잘못 봤군!) 홍안통은 늘 강호를 다녀왔기에 금방 눈치를 차렸다. 그러나 홍안통은 무공이 드세고 담이 커서 이런 거지놈들을 눈여겨 보지도 않고 이따금 '킥킥' 하고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위소보가 눈길로 훑어보니 태반이 일대(一袋), 이대(二袋) 제자들이고 오대(五袋) 이상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과산호도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크게 낙심했다. (이놈들이 무공은 나보다 별로 뛰어나지도 않은데 홍 교주의 적수가 되겠는가, 그런 재간으로 나를 구하겠다고?) 점심 때가 되어 자그마한 수림에 이르렀다. 뒤에 따르던 개방 제자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오랫동안 강호에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이런 정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지형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홍안통은 수림 앞에 서서 말했다. [우리 이 곳에서 좀 쉬며 점심이나 먹을까?] 위소보는 마음 속으로 아주 기뻤지만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는 듯 말했다. [저도 배가 고픈데 잠시 쉬어 갑시다. 자고로 배가 차야 머리도 잘 돌아가는 법이지요.] 홍안통은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위소보에게 냉소하며 말했다. [자네보다 배고픈 사람이 더 많다네.] 홍안통을 말을 끝내자 돌연 소리쳤다. [퉤! 더러운 거지 녀석들, 어서 썩 물러 갓!] 이 소리에 위소보는 눈앞이 아찔하며 땅에 쓰러졌다. 홍안통이 강력한 내력으로 낸 호통은 우아대의 '사자후' 공력과 소리는 다르지만 같은 효과를 냈다. '사자후'는 불문(佛門)의 정통한 내공심법에서 온 것이지만 홍안통의 이 호통소리도 지극히 맹렬하고 흉맹했다. 나무 위와 나무 뒤를 보니 수십 명의 개방 제자들이 일시에 아무 방비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얼굴이 창백하고 혼비백산한 놈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어찌 홍안통의 적수가 되며 또한 이런 사람들이 자신을 구할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낙심하여 겨우 일어나 앉아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 개방 제자들은 모두가 쓸모 없는 놈들이오. 교주님, 그들을 건드리지 말고 갑시다.] 홍안통은 웃으며 말했다. [왜 그리 급해 하나? 진짜 강한 놈은 뒤에 있어!] 그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 과연 주위의 네 그루 나무 위에서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이 내려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섰다. 홍안통과 위소보가 가운데 포위되었다. 第18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문아 홍안통은 태연했지만 위소보는 그만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네 사람은 바로 신룡편을 든 청아, 폐병쟁이 관의호, 비구를 쥔 위지심, 그리고 맨주먹인 과산호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아이쿠! 친구와 적이 함께 올 건 뭐냐? 이거 번거롭게 되었구나.) 개방의 네 사람은 서로 상의하더니 청아가 손짓을 하자 나머지 세 사람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속하들이 방주님을 뵙고저 합니다.] 위소보는 머리를 짓누르던 돌이 땅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원수가 친구로 변하다니 어쨌든 잘 되었구나!)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청아 아가씨, 그간 무고하셨소?] 청아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뀔 뿐이었다. 위소보는 인사를 했는데도 상대가 냉대를 하자 무안하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홍안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신룡교 홍 교주님이라오. 여러분들은 서로 인사를 하시구려.] 청아는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홍 교주님의 명성을 오래 전부터 흠모하여 왔습니다.] 홍안통은 눈알을 굴리더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뭐라구? 뭐를 오래 전부터 흠모했다구?] 청아의 입은 원래 야멸찼지만 홍안통이 이처럼 오만하게 나오자 불끈 솟아나는 노기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웃으며 말했다. [홍 교주님의 무공과 인품은 남들이 따라 배울 만한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청아의 말투에는 비꼬는 말이 많았다. 홍안통은 그것도 모르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개방에서 나의 무공과 인품을 배우려면 자기들 내부에서 서로 다투지 않아 강호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말도록 해야 하오.] 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안의 이러저러한 일들은 신룡교에서도 벗어나기가 힘들지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교는 원래 매우 흥성했다고 하는데 지금 홍교주님 혼자 계신 것 같은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위소보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이유겠소? 홍 교주님은 내부에서 싸울 일이 없는 분이라오. 내부에서 설령 싸운다 하더라도 부하들은 어르신을 죽일 수 없고, 만약 죽인다면 어르신께서는 그 놈들을 능히 죽일 수 있다오.] 홍안통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뀔 뿐이었다. 청아가 말했다. [홍 교주님, 개를 때리더라도 주인을 보고 때리라는 말이 있듯이, 이 위가라는 양반은 잘하나 못하나 우리 개방의 제19대 방주인데 교주님께서 그를 붙잡아 가면 우리 개방과는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고 말고! 하지만 개를 때리다니?....] 위소보는 속으로 대노하여 욕을 했다. (요 빌어먹을 년, 그래 이 어르신을 개에 비유한단 말이냐?) 위소보는 언제나 입으로 남에게 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말했다. [수캐를 때리더라도 암캐를 보고 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아는 얼굴이 붉어지며 못 들은 척했다. 홍안통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무슨 수캐고 암캐고 하는가? 이 어르신이 수캐이고 암캐고 다 때리겠다면 어쩌겠느냐?] 위소보는 생각했다. (제기랄, 수캐고 암캐고 다 때린다고? 때리려면 늙은 놈하고 작은 암캐를 때려야지.) 홍안통은 돌연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그의 긴 수염이 네 사람에게 휘감겨 갔다. 그 네 사람은 모두 강호에서 내노라 하는 위인들로 강호의 경험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나 수염을 병기(兵器)로 삼는 적수는 처음이었다. 나이가 많고 무공이 약한 과산호가 먼저 홍안통의 수염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얼굴에 수염 스친 자국이 생기고 이따금 칼로 에인 듯이 아파왔다. 나머지 세 사람은 뒤로 물러섰다. 과산호가 대노하여 날쌔게 몸을 날려 한주먹 휘둘렀다. 청아는 신룡편을 휘두르고 폐병쟁이 어린 거지 관의호는 기침을 토하며 공격했다. 위지심은 강호에서 보기 드문 비구를 날리며 과산호와 함께 우측에서 홍안통을 덮쳐갔다. 홍안통은 네 사람이 단번에 연수합공에 나설 줄은 몰랐다. 홍안통은 신룡교 자체의 변고로 인해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신룡교가 강호에서 수많은 은원 분규를 일으켜 원수가 많음을 깨달았다. 과거의 성세와 달리 외톨박이가 된 홍안통은 자기의 두 주먹으로 대적하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홍안통은 독특한 수염공(鬚子功)을 연마했다. 제아무리 절세의 신공을 지닌 홍안통이라 하더라도 열 주먹을 당하기 어려운 바, 그의 수염공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홍안통의 이 무공의 독특한 점은 천백 갈래의 수염을 병기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다. 이 무공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유리한 무공으로 기존의 무도(武道)와 판이한 초식을 발휘한다. 이 수염공은 시전하는 사람의 지닌 바 내공력이 수염에 전달되면 기운의 고하에 따라 연한 채찍에서 창으로 변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굵은 밧줄이 되었다가 금방 표창이 되기도 한다. 홍안통의 이 병기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위력이 나타난다. 치고, 당기고, 치르고, 휘감고, 마치 살아있는 천백 마리 독사와도 같았다. 이같은 변화는 개방의 네 고수를 어린애 다루듯 가지고 놀았다. 위소보는 원래 개방 사람들이 나타나자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청아가 '개를 때려도 주인을 보고 때려야 한다'는 말을 하자,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제기랄, 개방 제자들이 나타난 것도 따지고 보면 뭔가의 흑심이 있구나. 기대한 이 어르신이 미친놈이지. 청아 저 화냥년과 저 어린 거지놈은 얘기할 필요도 없고, 나머지 두 놈 과산호와 위지심도 이 어르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자들이 아니다. 엄격히 따져 이 네놈들은 누구 하나 나를 진심으로 도와줄 놈이 없다. 결론적으로 범의 굴에서 도망쳐 승냥이 굴로 들어간 셈이군. 오늘 역시 이 어르신의 일진이 나쁘구나!) 홍안통은 처음 겨룸에서 우세를 점했다. 그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위 부교주, 좀 피하시오.] 위소보는 천천히 옆으로 피해 싸움판에서 물러났다. 그는 생각했다. (개방 놈들이 홍 늙다리를 죽이고 홍 늙다리가 개방 놈들을 죽여 동패공상이나 했으면 좋겠다. 이 어르신은 그저 구경만 해야 하는군!) 위소보는 무공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홍안통의 수염이 때로는 날리고 감기며 때로는 쓸어나가고 때렸다. 청아등 네 명이 일진일퇴하며 홍안통과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위소보는 강건너 불처럼 구경만 할 뿐이었다. 기실 이 네 사람은 시간이 흐르자 홍안통의 이 괴상한 무공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무공도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를 알면 열 가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개방 인물들은 강호의 큰 무리를 써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내력, 외공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있었다. 청아등 네 사람은 다년간 개방 무공의 진전을 익혀 손꼽는 무림 고수였다. 수십 합이 지나자 네 사람은 홍안통의 수법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은 홍안통의 수염을 지닌 기와 암기 등으로 하나하나 막아냈다. 이리하여 홍안통의 신비한 병기는 점차 그 신비한 점을 상실하고 그 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위소보는 그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싸움판 밖으로 물러섰다. 기회를 엿봐 도망치려는 생각이었다. 늙은 구렁이 홍안통이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불시에 홍안통이 머리를 휘젓더니 수염으로 위소보의 허리를 감았다. 동시에 하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수염을 홱 뿌리쳐 위소보를 큰 나무 위에 던졌다. 위소보는 '아이구' 비명을 지르며 가까스로 나무가지에 올라섰다. [늙은 빌어먹을 홍가야! 이 어르신을 뿌려 죽일 셈이냐?] 홍안통이 웃으며 외쳤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애가 본교주와 말장난을 하다니.... 남들이 웃지 않겠나?] 위소보는 악을 썼다. [이 어르신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어른이고 아이고 대접할 게 무어란 말이오? 에잇! 빌어먹을 늙은이.] 홍안통이 말했다. [본교주는 자네가 잘 보이라고 던졌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멀리 내다본다고, 이 교주가 어떤 무공을 발휘해서 암캐고 수캐고 이 한 무리 미친개를 죽이는가 보란 말일세!] 위소보도 대꾸했다. [기왕이면 당신도 죽여....] 돌연 가냘픈 여인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목덜미를 쥐어 떨어지려는 그를 나무가지 위로 끌어당겼다 놓았다. 위소보가 크게 놀라 상대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문아였다.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문아 여동생!'하고 소리치려 했다. 문아가 재빨리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말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아의 가슴을 살폈다. 문아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은 조설근이었다.이 시각 조설근은 얼굴이 불그스레 홍조를 띤 채 달콤히 잠자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어느 곳에 있으며 또 이 수림 속에서 생사결판의 일전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위소보는 흘연 가슴이 뭉클해지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실로 오랜만의 해후였다. 문아는 위소보의 이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하고 나무 아래만 살폈다. 홍안통은 위소보의 도주를 봉좨하자 분산됐던 정신이 하나로 돌아왔다. 근심을 떨친 그의 수염은 더욱 힘있게 네 사람을 공격했다. 청아 관의호 등 네 사람도 전보다 훨씬 적응되어 있었다.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재치 있게 싸웠다. 그 동안 홍안통의 강한 내력에 얻어맞아 쓰러졌던 수십 명의 제자들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공으로서는 홍안통과 감히 겨룰 수 없었지만 또 다른 재간이 있었다. 저마다 등에 지고 있었던 포대 속에서 보기도 흉측한 독사, 전갈들을 풀어놓았다. 개방 제자들은 빌어먹는 것을 위주로 하는 무리이다. 그들은 독사 같은 독물을 기르기를 즐기고 또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주머니를 헤치자 독사, 전갈, 지네 등 독물이 온 땅에 득실득실했다. 위소보는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치밀어 고개를 돌렸다. 문아도 징그러운지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끼리 해결할 문제예요. 우리들은 그냥 가요.] 문아는 조설근을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위소보의 허리를 감아쥐었다. 연후에 숨을 길게 들이쉬더니 신형을 솟구쳤다. 두 사람의 무게가 200여 근이나 되는데도 그녀는 제비처럼 훨훨 날았다. 나무 밑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이들의 도주를 발견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이 순간 자기가 겪었던 위험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눈을 감고 문아에게 모든 것을 맡졌다. 부드러운 지체와 향기로운 체취가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어떤 부귀도 부럽지 않고 천하를 얻은 듯했다. 순식간에 수림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문아는 몇 리 더 나가서 위소보를 놓고 조설근을 품속에 안은 채 물었다. [오라버니, 왜 안색이 그런가요?]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어했다. [그 늙은 괴물.... 홍안통이 어떻게 했는지, 혈도가 봉좨당해 지금 걷지도 못하겠소.] 문아는 위소보의 맥을 짚어보더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홍교주의 점혈법(点穴法)이 괴이하군요!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걷지를 못하다니....] 위소보는 자신의 거짓말이 금방 드러나자 몹시 부끄러웠다. 자기 스스로 화가 치밀어 자신의 뺨을 때렸다. 철썩! 하고 그의 뺨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문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라버니, 왜 그래요?] [문아 여동생, 미안하오. 내가 혈도를 제압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그러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오. 잠시나마 문아 여동생을 걱정하게 한 내 자신이 미워 때린 것이오.] 문아가 생끗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우리는 하늘에 맹세한 남매예요. 그보다 더한 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위소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남매지간이오. 동년 동월 동일에 나지는 않았지만 동년 동월 동일에 죽자고 했지.] 그는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오누이....오누이라....] 문아가 이상해 물었다. [오라버니, 왜 그래요?] 위소보는 고개를 혼들었다. [내가 어떤데? 나는 일없어! 우리야 남매간이지만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서 어쩌겠다는 거요?] 문아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오라버니, 제가 말을 잘못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위소보는 말 못할 괴로움을 느꼈다. 문득 문아의 품속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조설근을 보자 야릇한 질투심이 치밀었다. [문아, 아직도 그 녀석을 안고 다니나?] 문아가 말했다. [오라버니와 조 대인이 싸울 때 큰 내상을 입었어요. 아직 며칠 치료해야....] 위소보는 조설근을 감싸는 문아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알겠소. 정히 그렇다면 조가 일문에 빌붙어 마음껏 은혜를 베푸시오. 조 늙다리가 고마워할 것이오. 어쨌든 추후로 사람 노릇도 못하는 이 오라버니가 누구한테 붙잡혀 죽든지 살든지 모른 체 하시오.] 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위소보는 길게 소리를 빼며 말했다. [아무 뜻도 없소. 단지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오.] 문아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뭔가 오해하고 있어요. 우리는 하늘을 두고 맹세한 사이예요. 그런 오라버니가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군요.] 문아는 조설근을 안고 일어섰다. [오라버니, 몸 조심 하세요. 소매(小妹)는 여기서 작별하겠어요.] 위소보는 놀랐다. [어디로 가려고?] 문아가 말했다. [사람은 응당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해요. 나는 이 조 공자를 집에 돌려 보내겠어요.] 위소보는 황급히 물었다. [그럼 나는 어찌하오?] 문아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모든 일에 강하고 또 수완도 좋으며 강호에 이르는 곳마다 친구들이 있어요. 나는 일개 연약한 여자예요. 오라버니를 돕지도 못하는 처지인데 되레 오라버니에게 짐이 되면 되겠어요?] 위소보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문아, 내가 동생을 오해하고 있다고 했는데, 기실 동생도 이 오라버니의 심정을 모르고 있소. 나는 나는....] 문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더 말하지 말아요. 이 어린 공자도 '제아무리 많이 차린 연회도 먹고 혜어지는 때가 있다'는 도리를 아는데 하물며 강호에 떠다니는 우리가 이 이치도 모르나요? 오라버니와 저도 웃음으로 만났으니 웃음으로 헤어져요.] 그녀의 음성에는 단호함과 서글픔이 어우러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눈자위가 붉었다. '제아무리 많이 차린 연회도 먹고 헤어지는 때가 있다.' 이 말은 위소보가 조설근에게 들은 말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요런 작은 녀석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아마도 그 할애비 조 늙다리가 말했겠지. 요녀석의 말이라고 나는 믿지 않소!] 문아가 낯을 붉히며 말했다. [오라버니, 왜 남을 존경하지 않나요? 늘 늙다리고 요녀석이고 정말 듣기 싫어요.] [아,알....겠소!] 위소보는 홱 등을 돌려 오던 길로 달려갔다. 문아가 소리쳤다. [아니, 어딜 가요?] 위소보는 미친 사람처럼 떠들었다. [상관 말아! 홍 늙다리를 찾아가오. 나는 가서 죽겠소. 그가 나를 죽이려고 했소. 아하하! 문아 여동생에게 그런 말을 듣고 더 살 마음이 없소. 부디 좋은 사람 만나 재미있게 사시오!] 위소보는 죽는 것을 제일 무서워했다. 그런데 그가 죽는다고 했으니 개가 웃을 소리였다. 그를 아는 천지회 친구들이나 그의 친어머니 위춘방도 박장대소할 것이다. 모름지기 천하를 뒤져도 이 말을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엄청난 얘기였다. 위소보가 정말 죽으려 하는가? 위소보가 스스로 나서서 죽으려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인지, 거짓인지.... 위소보는 홍안통과 개방 사람들이 싸우는 수림 속으로 달려갔다. 그의 마음은 오직 '죽겠다. 꼭 죽겠다'는 것뿐이었다. 홍안통이나 청아나 모두 자기를 붙잡으려 한다는 것을 위소보는 알고 있었다. 어쨌든 자기는 누구의 손에 잡히건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문아는 조설근을 안고 다급히 위소보를 따라갔다. 그녀가 서너 걸음 나아갔을까? 홀연 그녀의 눈앞이 노래지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웩!' 하고 한 모금 선혈을 토해 냈다. 그리고 힘없이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조설근은 머리를 땅에 박히자 정신이 들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누나, 왜 이래?] 위소보는 조설근이 우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머리를 돌려보니 문아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놀라 '문아!' 하고 소리치며 달려갔다. 위소보는 문아를 안고 '문아 여동생!' 하고 불렀다. 이 시각 문아는 백지장처럼 해쓱하게 질려 있었는데 입가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꼭 감은 두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어 혼절하기 직전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조설근이 말했다. [어르신, 문아 누나가 왜 이러나요?]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위소보는 문아를 안고 조설근의 손을 잡았다. [빨리 문아 누나를 치료하러 가자.] 위소보는 걸을 수는 있으나 사람을 안고 걷는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문아를 들쳐업었다. 위소보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문아 여동생, 이 오라버니가 꼭 치료해 주겠소. 부족한 나를 실컷 꾸짖어 주시오.) 위소보는 목숨이 경각에 처한 그녀를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문아 여동생, 우리는 결의남매를 맺었소. 문아 여동생과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소. 같은 날 태어나지 않았어도 같은 날 죽어야 하오. 만약 문아 여동생이 잘못되면 이 오라버니도 꼭 같이 가겠소!) 문아의 호흡은 점점 미약해지더니 날숨만 있고 들숨이 없었다. 위소보는 무공 수준이 낮아 내상이 무엇인지 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백출(白出)이었다.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위소보는 몹시 후회했다. (이 오라버니가 무공 연마를 소홀히 한 연유로 문아 여동생마저 구할 수 없구나! 내 이제 저승에 가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리라. 문아 여동생의 옆에서 문아 여동생의 모습만 보고 문아 여동생의 지시대로 무엇이든 하겠소. 영왼히 떨어지지 않고 따라 다니겠소. 오오, 불쌍한 나의 문아 여동생....)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녹정공의 칭호도 수백만 냥의 은자도 아름다운 일곱 부인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아를 안고 마치 꿈 속에 든 어린애를 깨울세라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어갔다. 성시(城市)로 향하는 길은 매우 멀었다. 하지만 위소보는 짧게 느껴졌다. 그는 속으로 길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위소보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과 사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위소보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 본연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선악도 없고 물욕도 없는 무아의 세계에 당도한 것이었다.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한다. 예의 그 자그마한 시가지에 당도했다. 시진을 한동안 혜매다가 눈에 띄는 의원을 찾아 들어갔다. 늙은 의원은 문아의 맥을 짚어보고 도리질을 했다. 위소보를 제쳐두고 조설근의 귓전에 소근거렸다. [얘, 너의 애비는 정신이 나갔구나. 죽은 에미를 가지고 치료할 건 뭐냐. 얘야, 어서 안장할....] 위소보는 의원의 멱살을 틀어쥐고 눈에서 불을 쏘아내며 귀청이 떨어져라 소리쳤다. [이 놈, 뭐라고?] 의원은 성도 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대인께서는 비통하시겠지만 장례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위소보는 비수를 의사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이놈, 이제 한 번 더 헛소리를 하면 이 흰 칼이 붉은 칼로 될 줄 알아!] 의사는 그제야 겁을 먹고 '저, 저....'라고 했다. 위소보는 품속에서 수만 냥이 족히 되는 돈을 의원 앞에 내놓았다. [지금부터 다른 환자를 보지 말고 내 여동생의 병만 치료하오. 병이 낳으면 상금을 주고 그렇지 못하면 흥! 알 만하지!] 위소보는 비수로 상을 콱 찍었다. 상에 구멍이 생기며 비수가 땅바닥에 '딸랑!' 하고 떨어졌다. 의원은 겁을 먹고 움츠려들었다. (아이쿠! 이처럼 잘 드는 칼이면 쇠로 만든 목이라도 견디지 못하겠구나.) 의원은 돈을 보고 문아의 입에 손을 대보았다. 약간 온기가 있음을 느꼈다. 의원이 말했다. [어렵지만 노력을 다해 보겠소이다.] 위소보는 눈알을 찢어져라 굴리면서 소리쳤다. [뭐라고? 노력을 다한다는 게 뭐야?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 세 사람은 한끈에 꿰인 메뚜기야! 살면 다 같이 살고 죽으면 다 같이 죽을 줄 알고 해봐!] 이 이원은 의리에 대해 조예가 어느 정도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백 년 묵은 인삼이 있는데 먼저 다려 먹여 봅시다.] 말을 마친 의원은 인삼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문아는 이빨을 꼭 물고 있었으므로 겨우 입을 벌리고 인삼탕을 떠 넣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문아는 별 차도도 보이지 않고 더 악화 되지도 않았다. 위소보는 의원에게 돈을 주어 복령, 하수오 같은 갖가지 희귀한 약재를 구해 오게 해 문아에게 먹였다. 영약 덕택인지 문아의 목숨은 겨우겨우 이어졌다. 의원은 깨끗한 방을 마련하여 이들 셋이 기거하게 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병을 고칠 자신이 없었다. (의원으로서 죽는 사람을 좌시할 수 없어 치료할 따름이지, 소생시키기는 힘들다.) 그러나 위소보만은 문아의 회복을 의심치 않고 밤낮 문아의 신변을 맴돌며 정성껏 병구완을 했다. 위소보는 이 곳이 북경과 멀지 않음을 생각했다. 북경에는 용한 의원들이 많이 있으니 그 곳에 가서 문아를 치료할까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운신도 못 하는 문아를 경솔하게 마차에 태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병이 회복와 기미가 있으면 북경으로 떠나자고 마음먹었다. 조설근은 비록 나이 어리지만 아주 눈치가 빨랐다. 더욱이 여자의 시중을 드는 데는 천성적인지 아주 세심했다. 그러므로 그는 위소보의 근심거리라기보다 도리어 위소보를 도와 많은 일들을 했다. 하지만 문아의 병세는 조금도 쾌차할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의 마음은 돌로 눌린 기분이었다. 이렇듯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조설근은 밀려드는 졸음을 견디기 어려워 먼저 잠이 들었다. 위소보는 문아의 옆에 앉아 혼들리는 촛불 밑에 의지한 채 시름에 잠겼다. 문아의 얼굴에서 평소 보이지 않던 기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위소보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문아 여동생, 걱정 마시오. 문아 여동생이 하루 누워 있으면 나도 하루 지켜주고, 한평생 누워 있으면 한평생 지켜주겠소. 문아, 내 말을 들었소?] 문아의 얼굴은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위소보는 심중의 말을 꺼냈다. [이 풍파 많은 강호에서 이 오라버니는 혼자서 살아가기 어렵소. 또 문아 여동생처럼 얌전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병석에 누워 긴 세월 보낼 수는 더욱 없소. 만일 하늘이 도와 선녀 같은 문아 여동생의 더러운 병을 낫게 하면 우리 길을 떠납시다. 인적이 없는 산과 들을 찾아 그 곳에서 시름, 걱정 없이 삽시다. 이 오라버니가 사냥을 하고 고기도 잡고 밭을 가꾸며 내 힘과 마음을 다해 한 평생 문아 여동생을 보살펴 주겠소. 그러면 어떻겠소?] 그 때 문아가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찰나였지만 한 달 동안 처음 보는 움직임이었다. 위소보는 너무도 기삐 조설근을 혼들어 깨웠다. [문아가 정신을 차렸다. 문아가....] 잠에서 깨어난 조설근도 눈을 비벼대며 기뻐했다. 위소보는 늦을세라 조용히 말했다. [문아 여동생, 좀 보시오. 오라버니가 여기에 있소. 문아가 제일 귀여워하는 조 공자도 여기에 있소!] 문아가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를 띠었다. 어렴풋이 감각이 살아난 듯했다. 조설근이 바짝 붙어 있다가 소리쳤다. [어르신, 문아 누나가 말해요.] 위소보는 숨을 죽여 들어봤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조설근이 다시 귀를 문아의 입 근처에 가져갔다. [정말이에요. 누나가 말해요!] 위소보는 믿어지지 않아 다급하게 물었다. [뭐라고 하니?] 조설근이 큰소리로 떠들었다. [오라버니가 고맙다고 해요. 또, 또....]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또 뭐라고 하니? 요, 조 공자야, 왜 늙은이처럼 어물어물 하는 거냐?] 조설근이 돌연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문아 누나가 말했어요. '나는 틀렸어요. 나를 집으로 돌려 보내 줘요'라고.... 어르신, 누나 집이 어디에 있는가요?] 위소보의 기색이 침울해지며 말했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강호가 집이지. 문아 여동생, 두려워 마시오. 틀림없이 회복될 것이오.] 문아가 움직이려 했다. 아마도 머리를 흔들려는 것이었지만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몸이었다. 한참 있다가 조설근이 다시 외쳤다. [문아 누나가 또 말해요! '내 병은 내가 알아요, 독이 심장까지 도달해 내상이 엄중해요. 신선도 치료할 수 없어요'.... 문아 누나, 죽지 말아요. 내가 살려 주겠어요. 내가 꼭....] 위소보는 '독이 심장까지 도달해 내상이 엄중하다'는 말을 듣자 칼로 폐부를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 그는 조설근을 보고 소리쳤다. [이 죽일놈, 울기는 왜 울어? 네놈의 조가네가 아니면 문아가 내상을 입어 이 모양이 됐겠느냐?] 조설근이 울며 문아에게 물었다. [문아 누나, 그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지 않겠지요. 누나는 나를 구했지만 오히려 누나가....] 위소보의 눈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조설근을 향해 매섭게 욕했다. [제기랄, 죽일 놈들, 문아 여동생이 잘못되는 날에는 네놈 조가네를 멸족시키겠다!] 조설근은 위소보의 이 악독한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귀를 문아의 얼굴에 대고 들었다. 위소보는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개자식, 지금 뭘 하나?] 이윽고 조설근이 말했다. [문아 누나가 말했어요. '나는 마음병이야. 이 병은 고칠 수 없어!' 누나, 마음병이란 어떤 병인가요? 뭐라고요, 위, 위작 나으리께서 안다고?] 조설근이 고개를 들었다. [어르신, 문아 누나의 심병(心病)이 어떤 병인가요?] 위소보는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문아 여동생, 이 오라버니가 문아 여동생의 마음을 아오. 걱정하지 마시오. 이 오라버니가....] 조설근은 다시 문아의 입에 귀를 대고 모기소리만큼 저미한 음성을 들으려 했다. [문아 누나가 또 말해요. '오라버니, 더 말하지 말아요. 인명은 재천이라 했어요. 이것이 내 운명이에요. 사람은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지요. 오라버니, 나는 오라버니께 미안한 일들이 많아요. 나는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내가 오라버니를 속였어요....] ' 위소보는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다. [요런 죽일 놈, 네놈이 개방귀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문아가 언제 나를 속였다고 그러느냐? 문아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조설근이 놀라며 떠듬떠듬 말했다. [이것은 제가 꾸민 것이 아니라 문아 누나가 말한 거예요.] 조설근이 재차 말했다. [어르신, 문아 누나가 또 말해요. '청아는 아주 훌륭한 아이예요. 그 아이는 많은 억울함을 당했어요. 내....내가 죽은 다음 오라버니는 청아와 서로 사이좋게 지내세요. 그 아이도 나처럼 오라버니를 잘 따를 거예요'라고 말이에요.] 위소보가 생각했다. (청아, 그 화냥년은 아주 지독한 년이야. 무슨 억울한 게 있다는 거야? 그 년이 남을 위해 한 가지라도 착한 일을 했다면 내 당장 절을 백 번이라도 하겠다.) 조설근이 물었다. [청아 아가씨가 누군가요?] [응, 그런 계집애가 있어!]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청아와 서로 잘 지내라고? 흥, 이 어르신은 그 년을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흉칙해서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돌연 조설근이 흥흥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위소보가 노여워 말했다. [노래가 다 뭐냐? 지금 기쁘단 말이냐?] 조설근이 말했다. [아니, 문아 누나가 부르라고 해서 불러요!] 위소보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네가 잘 불러봐!] 조설근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불렀다. [낭군님 그리워 끝없이 흐르는 눈물....] 위소보는 그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처량하고 슬픈 노래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이 노래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과거 여춘원에서 조인에게 죽은 가짜 쌍아가 이 노래롤 불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요녀석, 아주 충명한데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하니 말이야.... 하지만 뮐 그리 대단할 게 있는가? 기생년들이 부른 노래니 잘 기억했겠지. 너에게 글이나 무공을 가르쳐 보라지. 돌대가리라는 것이 금방 탄로날 거야.) 한 곡 다 부르고 나자 조설근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얘, 사내자식이 말오줌을 흘리고, 부끄럽지도 않아? 어서 들어봐. 문아가 또 뭐라고 하는가?] 조설근이 흐느끼며 대답했다. [문아 누나가 자요.] 과연 문아는 눈썹이고 입이고 움직이지 않았다.문아는 정말 소리없이 자고 있었다. 위소보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 그의 코에 손을 대봤지만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며 '의원! 의원!'하고 마구 소리질렀다. (작자 주:조설근은 아주 신기하에 문아가 하는 말을 들었다. 이로 보아 그는 여자의 심리에 대해 특수한 감응(感應)이 있고 여자에 대한 체험과 관찰이 세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조설근이 수십 년 후에 써낸 저작 '홍루몽'에서 전례없이 절세의 여자들을 부각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다.) 의원이 황급히 달려와서 물었다. [대인, 무슨 일입니까?] 위소보가 재촉했다. [어서, 내 여동생을 보시오!] 의원은 한참 동안이나 맥을 짚더니 말했다. [너무 지쳐서 그럽니다.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원은 주저하다가 두 손을 맞쥐고 말했다. [대인, 소인은 고루과문(孤陋寡聞)해서 아는 것이 적고 보고 들은 것도 적어 이 아가씨의 병을 제험으로 치료하기 어려우니 대인께서는 다른 의원을 찾아 보십시오!] 위소보가 냉소하며 말했다. [고루과부(孤樓寡婦)라? 남의 과부를 끌어 안았다고? 그래 이 어르신의 돈을 움켜쥐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없다니.... 도리어 이제는 이 어르신을 쫓아낼 작정인가? 제기랄, 대낮에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군!] (역자 주:보고 들은 것이 적다는 것을 '고루과문(孤陋寡聞)'이라 한다. 그러나 위소보는 '고루과부(孤樓寡婦)'로 들었다. 이는 과부를 안았다는 뜻인데 원래 이런 말이 없고 그가 억지로 만든 말임.) 의원은 울상이 되어 되돌아갔다. 위소보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아가 '독이 심장에 들어가 내상이 엄중하다'던 말이 생각나 머리를 탁 치며 중얼거렸다. (내상이 엄중한 문아를 이런 돌팔이에게 보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도 무림태산 오대산 남두북두 같은 분을 모셔다 치료해야 하지.) 위소보는 언젠가 홍안통의 '백연환'을 먹고 독이 퍼졌을 때, 문아가 '차녀음양대법'으로 체내 독성을 제거해주던 일고 후에 현정도장등 여러 사람과 일곱 부인들이 협력하여 막혔던 문아의 임, 독 두 맥을 통하게 한 일이 생각났다.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하고 내상치료를 해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나야 술 마시고 도박을 하며 우스개소리나 하는 데는 재간이 있지만 무공이고 내력이고 골치 아픈 소리에는 맹탕이다. 또 '차녀음양대법'은 고사하고 '차남음양대법(借男陰陽大法)'도 모르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위소보는 자기가 무능하면서도 늘 남의 탓은 잘했다. (빌어먹을, 이 어르신은 평소에 강호에서 이름 날리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렇듯 생명이 위급한 시각에는 왜 한 놈도 대갈통을 내밀지 않는가?) 이튿날 아침 의원의 문 앞에다 네 폭의 그림을 그려서 명의를 찾는 방문(榜文)을 내걸었다. 한 폭은 곱게 생긴 독비신니이고 한 폭은 수염이 땅에까지 드리운 늙은 홍안통이고 한 폭은 무뚝뚝한 청년 우아대이며 한 폭은 인피면구를 쓴 황룡대협이었다. 이 네 폭의 그림은 위소보가 말한 대로 의원이 따라 그렸다. 그 의원은 의술(醫術)은 평범했지만 그림 그리는 재간은 뛰어났다. 위소보가 그들의 모양을 설명하니 의원은 아주 신통하게 그려냈다. 위소보는 객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주 흐뭇해 했다. (이 어르신의 남자 스승 진근남은 돌아가시고 여스승 독비신니가 계시지. 또 의동생 우아대 그리고 황룡대협, 늙은 괴물 홍안통, 이 네 사람들은 지금 무림의 사대 고수가 아닌가?) 위소보는 일을 시작하면 아주 기민한 사람이었다. 이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와도 문아의 내상을 치료할 수 있으니 근심할 것 없고 네 사람이 다 오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조설근은 아주 총명했다. 위소보에게 찻물을 부어주며 말했다. [어르신, 이 네 분은 모두 의술이 높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거야 물론이지. 이분들은 모두 이 어르신의 친구야. 이 어르신의 친구란 말이야....]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위소보는 자신이 크게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이 네 사람은 모두 무림의 일등고수는 옳은데 이 어르신의 친구라고? 여스승 독비신니, 의동생 우아대는 친구지만 황룡대협은 약간 다르지. 또 홍 늙다리는 친구가 아닐 뿐더러 서로 못 죽여 안달하는 원수가 아닌가!) 위소보는 스스로 뒤통수를 치며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 청한 명의가 보기 싫은 놈이니 어쩌지? 아니 명의라고 해서 염라대왕을 청해서야 되겠는가? 잘못한 것 같구나.) 홍안통이 자신을 못 살게 굴던 그 가지가지 수단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위소보는 속이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에잇! 될 대로 되라지. 벗이든 적수든 문아의 병만 고쳐주면 이 어르신은 그를 내 애비라고 부르겠나.) 화상을 붙인 지도 사흘이 지났다. 원수이건 친구이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문아의 중독증상은 점점 더해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그 의원은 요리조리 피하더니 급기야 이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다른 신통한 방법이 없어 문아에게 인삼탕만 먹여 줄 뿐이었다. 조설근도 그의 눈치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위소보는 또 욕을 퍼부었다. (평소에 일이 없을 때는 빚쟁이처럼 찾아오던 무림의 일류, 이류 고수들이 양주강변의 네 다리를 가진 두꺼비보다 더 많았는데, 정작 필요하니 일류는 고사하고 팔류 십류 가는 나부랭이도 볼 수 없구나!) 이 때 위소보는 스승들이 오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홍안통은 만나도 지옥불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닷새되는 밤에도 여전히 '명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주사위를 꺼내 흔들었다. [우리 주사위를 던져 볼까?] 조설근은 별로 흥취를 느끼지 못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도박을 하자는 말씀인가요? 저는 돈도 없고 할 줄도 몰라요!] 위소보는 이상해서 물었다. [그래 한번도 도박을 해 보지 않았니?] 조설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멸시하는 기색을 나타내며 생각했다. (요놈 자식이 지금까지 주사위를 던져보지 못했다고? 정말 폐물이구나! 이 어르신은 그래도 요놈보다 훨씬 낫지. 제 애비는 몰라도 돈은 알았고, 돈을 알자 주사위를 알았단 말이야.) 위소보가 말했다. [몰라도 할 수 있다. 우리 지존보가 나오든지 별십(別十)이 나오든지 큰 수면 이기는 것으로 하자.] 조설근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도박을 하는지 몰라요.] 위소보는 계속 권했다. [네가 이기면 문아와 여기서 '네 분 명의'를 기다리고 네가 지면 우리 모두 이 곳을 떠나 문아를 북경에 데리고 가서 명의들을 청해 보이자.]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놓고 도박으로 결정하자는 말에 조설근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저....] [얘야, 너는 어려서 잘 모른다. 하늘에는 많은 신선들이 있어. 옥황상제,남해관음,탁탑천왕(托塔天王),서천불조(西天佛祖)....그래도 제일 신통한 분은 도박귀신이야. 도박귀신이 어디 가서 치료하라 하면 틀림없어!] 분주히 너스레를 떨어도 조설근은 여전히 알아 듣지 못하고 믿지 않았다. 위소보가 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아의 병은 지금 도박귀신의 손에 달려 있어!] 그의 독촉에 부잣집 공자 조설근은 난생 처음 도박을 배웠다. 삼판양승에 첫 판은 조설근이 이기고 두번째 판은 위소보가 이겄다. 세번째 판은 모두 8점이 나와 비겼다. 위소보는 골치가 아파왔다. (도박귀신도 결정 못 하니 문아의 병은....) 돌연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박귀신이 결단을 내리지 못 하면 내가 내려 주지!] 홍안통이 땅에서 솟은 듯이 위소보의 앞에 나타났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교주님, 속하 교주님이 장수하고 복 많이 받기를 원합니다.] 홍안통이 수염을 내리쓸면서 대꾸했다. [헛된 예의보다 먼저 앓는 사람이나 보여주게.] 홍안통은 문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홍안통은 당대에 보기 드문 무학종사였으나 문아의 기색을 보고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은 독이 심장으로 들어갔군. 그런데 무슨 독이 이렇게 만들었는지? 본좌의 '백연환'도 이처럼 심하지 않을 텐데.) 위소보는 근심스러워 물었다. [교주님, 이 여동생의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홍안통은 위소보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본인은 자고로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네.] [거야 물론이지요. 쌀 서 말을 주지 않으면 누가 새벽에 일어나겠습니까?] 홍안통은 손을 내밀었다. [좋소. 그럼 가져오게!] 위소보는 수다스럽게 말했다. [교주님, 문아가 나의 마음 가운데 얼마나 소중한 여자인지 아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의 목숨과 일곱 부인들의 목숨, 그리고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이지만 교주님의 목숨까지 다 해도 문아의 머리칼 한 올만큼도 못합니다.] 홍안통은 위소보의 말을 실속 없는 말로 여기고 평소 한 마디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정중하게 말하는 가운데 '교주님의 목숨을 다 해도'라는 말을 하자 홍안통은 그의 말이 좀 무게가 있게 들렸다. 위소보가 정중히 말했다. [저는 교주님께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흥정은 한 손에 돈을 쥐고 한 손에 미인을 쥐고 바꾸어야 합니다. 이래야 공정한 거래이고 누구나 손해보지 않는 합당한 흥정이 아니겠습니까?] 홍안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이치 있는 말이오. 그런데 예약금이야 주겠지?] 위소보가 천천히 말했다. [후니마디산(呼爾女+馬的山).] [뭐라구?] 위소보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말을 쏟아 놓았다. [시리후루강, 아마얼, 아빠얼....] 단숨에 열 몇 개 지명을 말했다. 홍안통이 냉소했다. [나는 들을수록 모르겠군!] 그러나 홍안통은 위소보의 말을 마음 속으로 명심해 듣고 명심해 기억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내심 돌대가리 같은 늙은리라 욕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다시 한 번 더 이야기 하지요. 후니마디산....] 홍안통은 일찍부터 녹정산에 감춘 보물을 파내려고 했기 때문에 녹정산 주변의 지형은 손금 보듯 환했다. 비록 위소보가 말한 '아마얼', '아빠얼'이라는 말을 듣고 모르는 사람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홍안통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얼산 아무얼강 징치리강 등등이었다. 이것은 모두 관외(關外) 만주의 강물과 호수와 산 이름이었다. 홍안통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 못 하겠소.] 위소보는 또다시 외웠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위소보가 말했다. [이 열 곳을 예약금으로 하면 되지 않소? 문아의 병이 낳으면 나머지 74개 곳 지명을 한꺼번에 대지요.] 홍안통은 이 열 개 지명을 반복적으로 외우고 기억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하잘 것 없는 놈은 아무런 학식도 없는 놈인데 단번에 이 많은 지명을 억지로 만들어 낼 수야 없겠지. 들어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아.) 홍안통은 웃으며 말했다. [사람부터 살리고 보지.] 비록 아직까지 의심은 갔지만 위소보가 확실히 장보도를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홍안통은 기뻐했다. 그러나 문아의 맥을 짚어보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아가씨 병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엄중하구나. 오장육부가 독해(毒害)를 받아 썩었으니 내가 구해 낼 수가 있겠는가?)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궁리를 했다. (내 내력으로 이 계집의 정신과 기력을 촉발시켜 죽을 무렵에 잠깐이라도 정신을 맑아지게 할 수 있으니 그 때 치료된 것처럼 하고 장보도를 얻어가지고 가면 된다. 이 계집이 죽든 살든 내가 관계할 것 없지.) 그러나 이렇게 뜻대로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홍안통은 겁나지 않았다. 위소보가 장보도를 안다면 언제라도 손을 써서 공제할 방법이 있었다. 홍안통은 아주 정중히 말했다. [위소보, 나는 나의 내력으로 자네 여동생을 치료하려 하지만 아주 위험하네. 자네가 나의 호법(護法)이 되어 나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네. 만약 나의 공력이 흩어지게 되면 저 아가씨는 물론 나까지... 그 결과를 알 만하겠지?] 위소보가 말했다. [알 만합니다. 교주님과 문아의 안전을 보증하겠습니다.] 홍안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가 그 위험을 알면 됐데.] 홍안통은 문아를 벽에 등지게 앉히고 문아와 손바닥을 맞댔다. 그리고는 강력한 내력을 문아의 장심(掌心)에 있는 '노궁혈(蘆宮穴)'을 통해 '수월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을 따라 문아의 기경팔맥(奇經八脈)으로 들어가게 했다. 밤낮 이레 동안 홍안통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공력을 써서 문아의 내상을 치료하는 데 몰두했다. 위소보도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정신을 집중해 홍안통을 보호했다. 위소보는 이 치료방법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또 홍안통이 어떤 흉심을 가지고 치료에 임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위소보의 무공이 약한 데서 기인한 무지였다. 결론적으로 홍안통은 문아의 목숨을 단축시키는 치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홍안통이 이처럼 힘을 들여 문아를 치료하는 것을 보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홍 늙다리도 양심이 있는 놈이야. 장보도를 주어도 괜찮겠다.) 여덟 날이 지나자 문아는 얼굴에 점점 홍조가 어리고 불시에 '아야' 하는 희미한 소리를 냈다. 흘연 그녀가 벽을 의지한 채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문 밖을 지키다가 재빨리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아는 언제 앓았냐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문아!' 하고 외치며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문아도 머리를 위소보의 가슴에 대고 '오라버니!' 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장강대하와도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기뻐 정신없이 끌어안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문아는 위소보의 품 속에서 얼굴을 떼고 비로소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우리가 서로 만나 기뻐하다 보니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군요!] 홍안통은 얼굴이 창백하고 온 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고, 위엄이 당당하던 수염도 물에 빠진 양 흠뻑 젖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홍안통에게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어르신의 은공을 잊지 않겠습니다.] 홍안통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는지 대답이 없었다. 위소보가 문아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교주님을 방해하지 마시오.] 문아는 위소보를 따라 건넌방으로 왔다. 조설근도 기뻐하며 문아의 품 속에 안기며 물었다. [누나, 병이 다 나았나요?] 위소보는 조설근을 밀쳐내며 나직이 말했다. [여동생, 삼십육계에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일단 떠나야겠소이다.] 문아가 놀라며 반문했다. [아니, 교주님이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버리고 가다니요?] [여동생, 지금 가야 하오. 제기랄, 그 늙다리가 제 끙꿍이를 채우려 할 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다오.] 문아는 완곡히 말했다. [오라버니, 강호의 사람들은 무(武)보다 협(俠)을 더욱 중히 여겨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이 동생은 절대로 할 수 없어요.] 조설근이 옆에서 끼여들었다. [맞아요. 말을 신용할 수 없으면 착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고, 천하가 모두 비분강개하지요.] 위소보가 욕했다. [제기랄 놈, 멋도 모르고 끼여드느냐? 이 어르신이 네놈에게 한 번 물어보자. 목숨이 중요하냐, 그 따위 개코같은 인의가 중요하냐?] 조설근이 말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신의(信義)가 없으면 성사(成事)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위소보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성사하지 못한다는 걸, 그래 이 어르신이 모르는 줄 아느냐? 하지만 그 홍안통 늙다리는 진심으로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야. 모두 자기 .... 위해서지.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좋은 심보는 품지 않았단 말이다!] 문아는 내심 움직이는 바가 있어 얼굴이 붉어져 말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저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 만했다. (아니 저 분이 나에게 음탕한 생각을 품고 있었단 말인가?)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말은 네가 뱉은 말이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요 기회에 좀 놀려 줘야지.) 위소보는 짐짓 목을 길게 빼고 말했다. [이 어르신은 그의 처를 빼앗고 푸른 모자를 덮어씌워 천하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만들었다오. 그런데 그가 나를 가만히 놔두겠소? 나에게 푸른 모자를 덮어씌울 것이고 내 주위에 있는 여인들을 모조리 빼앗고 말 것이오.] 문아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자로서 캐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망설이다가 말했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의 말을 따르겠어요.] [그럼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갑시다.] 그들 세 사람이 문어귀에 이르자 홍안통이 문득 앞을 가로 막았다. [가더라도 간다고 이야기는 해야 하지 않느냐?] 문아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어르신!] 문아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노인은 그렇게 큰 내력을 소모했건만 순식간에 회복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홍안통이 말했다. [위소보, 그래, 또다시 허튼 수작을 벌일 작정이냐?] 위소보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교주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허튼 수작을 부리다니요? 우리는 애초에 본전에다 이자까지 앉어 준다고 분명히 말했지요. 무릇 사람이란 신의가 없으면 일을 성사하지 못하지요.] 홍안통이 말했다. [그렇지.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일을 성사하지 못하지. 당연히 나머지 74개의 지명을 알려 줘야지.] 위소보는 얼토당토한 말을 했다. [무슨 74고 84란 말씀입니까? 염라대왕이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요? 아, 그렇지! 어르신은 염라대왕이 청할 나이가 되지는 않았지.] 홍안통은 성을 벌컥 냈다. [또다시 허튼 소리를 지껄일 작정인가?] 위소보는 그의 흉악스러운 눈길이 사람을 잡아먹을 듯하여 겁이 나 둘러댔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하단 말이냐?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요? .... 아, 생각나요. 교주님께서 문아의 병을 치료하면 74개 지명을 알려드리려고 했지요.] 홍안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이 생각난다니 다행이구나.] 위소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기억이 나요. 맞아요. 교주님과 우리가 처음 약속하기를 문아의 내상을 치료하자고 했지요?] 홍안통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가 말했다. [어르신께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치료를 승인한다는 표시지요? 그럼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여동생의 병을 완전히 치료했습니까?] 홍안통이 말했다. [자네는 눈이 없는가? 보고도 뭘 물어보는 겐가?] 위소보는 문아를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건대 다 치료된 것 같군요.] 그는 문아를 보고 물었다. [여동생, 저번에 우리가 호신선(胡神仙)에게 점을 칠 때 그 신선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고 있겠지?] 문아는 위소보의 말뜻을 몰라 그냥 '녜!' 하고 대답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이 여동생이 옆에 있어 말하기가 뭣하지만 홍 교주님은 남이 아니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여동생은 복이 많고 장수하여 후에 부귀한 왕비로 되고 슬하에 아들 일곱에 사위 여덟이 있으며 백 두 살까지 무병장수한다고 했습니다. 문아, 안 그런가?] 문아는 일시에 얼굴이 붉어졌다. 위소보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호신선이 한 이야기지 제 말이 아닙니다. 교주님, 그 신선은 아주 명성이 있는 분인데 그가 예언한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없답니다. 안 그런가?] 홍안통이 말했다. [무슨 놈의 쓸데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왜 쓸데 없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럼 쓸모 있게 말하지요. 교주님, 여동생이 백 두 살까지 산다면 이 여동생의 나이가 지금 18세이니 102에 18을 덜어내면 84가 아닙니까? 앞으로 84년 동안 여동생이 병이 없이 살다가 명을 다하면 그녀의 병을 완전히 치료한 것이 틀림없으니 그때 가서 저는 그 나머지 74개 지명을 하나도 남김없이 상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홍안통은 성을 내며 말했다. [야, 이놈아! 그따위 얼토당토 않는 말로 시간을 때우려고 한단 말이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염이 일시에 덮쳐왔다. 위소보는 이럴 줄 미리 알고 신행백변으로 피했다. 홍안통은 고개를 휙 돌렸다. 방안이 비좁아 위소보는 피하지 못하고 가슴 혈도를 눌리워 꼼짝 못했다. 홍안통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곱게 말을 듣거라!] 위소보가 이렇게 되자 문아가 공손히 홍안통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어르신은 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 원래 제가 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매로서 보고 있을 수 없으니 실례하겠습니다.] 홍안통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는 안 되오.] 이 때 위소보가 소리쳤다. [여동생, 홍 늙다리에게 본때를 보여줘!] 홍안통은 냉소했다. [아직 어리니 지혜와 용기를 다투어도 아직 모자라지. 일단 아가씨께서는 먼저 운기(運氣)를 해 보시구려.] 문아는 진기(眞氣)를 단전(丹田)까지 운기했다. 그녀는 돌연 '악'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노랗게 변하며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기는 단단한 뼈처럼 단전을 가로막아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했다. 홍안통은 손도 쓰지 않고 두 사람이나 굴복시켰다. 그는 천천히 문아의 뒤에 와서 수염을 문아의 머리 위로 날렸다. 문아는 또 혼절해 넘어졌다. 위소보가 큰 소리로 외쳤다. [홍 교주! 그녀를 상하게 하지 마시오!] 홍안통이 말했다. [그녀를 상하게 하지는 않겠네. 다만 지명을 다 알려 주면 그만이지. 그렇지 않으면 흥!] 홍안통이 수염을 흔들자 문아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속옷까지 내비쳤다. 홍안통은 아주 징그럽게 말했다. [알려주지 않으면 저 속옷까지 깡그리 벗기겠다.] 홍안통은 흐흐! 하고는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나의 처를 빼앗고 나에게 무른 모자까지 씌웠지.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처남으로 만들겠다. 제기랄, 먼저 욕을 보이고 난 후에 죽여 버리지!] 위소보는 떨며 말했다. [아니, 어쨌든 여동생을 놓아주시오. 내가 지명을 알려주면 되지 않소?] 홍안통이 말했다. [그렇다면 좋네!] 홍안통의 눈은 아주 흉악하고도 음탕했다. 그의 눈길은 또 '먼저 욕을 보이고 난 후 죽여 버린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겁에 질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늙다리는 말한 대로 하는 놈인데 순결한 여동생을 욕보이고 죽인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문아를 조금이라도 다치기만 해도 이 오라버니는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위소보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문아를 구하자면 장보도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위소보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뱅글뱅글 돌았다. (이 장보도는 소현자의 용맥이 아닌가? 그 용맥을 파내면 소현자는 조정에서 안절부절 못할 텐데 후에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를 대하겠는가?) (장보도를 독비신니 구난사태께 드리면 어떨까? 그는 숭정황제의 공주이니 국보를 계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천지회에서는 늘 반청복명하겠다고 했고, 또한 진근남 스승님이 임종시에도 염려하셨는데 그 장보도를 천지회에 건네줘도 되지.) (아니야, 그 장보도는 이 어르신이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어르신이 꼭 가지고 있어야지.) (홍 늙다리도 그 장보도를 얻겠다고 하는데 혼자서 어쩌겠는가? 하늘의 별 따기지.) (그러나 장보도를 내놓지 않으면 홍 늙다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문아도 잘못될 텐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위소보는 최후결단을 내렸다. (제기랄, 소현자고 대현자고, 또 여스승이고 남자스승이고 생각할 것 있나? 온 세상의 보물을 다 모아서라도 문아 목숨 하나만은 살려야지. 그러다가 안 되면 투항하고 그만이지.) 위소보의 '투항'은 언제나 자기를 위해 했지만, 이번만은 처음으로 남을 위해 '투항'하겠다고 결심했다. 위소보의 입에서는 불시에 연달아 지명이 나왔다. [후니마디산, 후니데디하....] 돌연 사람 그림자가 언뜻 하더니 위소보의 앞에 멈추어 섰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위소보의 의동생 우아대였다.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소리쳤다. [셋째 동생, 제기랄 왜 이제야 왔느냐?] 우아대가 말했다. [둘째 형, 장보도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이 말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줄 아느냐? 하지만 일단 발등에 불이야 끄고 봐야지!] 홍안통은 슬그머니 우아대의 등뒤로 냉랭하게 말했다. [누가 장보도를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가?] 위소보가 소리쳤다. [셋째! 조심해!] 그러나 이미 늦었다. 홍안통은 긴 수염을 휘두르며 몇 천 갈래의 병기로 변하여 우아대의 열댓 곳의 혈도를 눌렀다. 우아대는 몸부림치며 되는 대로 맞섰다. 한참 지나자 홍안통의 수염은 별다른 위력을 내지 못했다. 우아대는 두 손으로 긴 수염을 단단히 틀어쥐고 냉소했다. [홍 대인, 강호에 명성이 있는 인물로서 이렇게 암계를 쓰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위소보가 기뻐서 말했다. [셋째 동생, 손에 사정을 두지 마시게. 제기랄, 요 늙다리에게 이렇게 긴 털이 자라 있으니 이 세상은 갈수록 말이 아니란 말이오.] 홍안통은 강호에서 그의 괴상한 병기와 또 절세의 내력과 외력으로 하여 그 누구도 적수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젊은 사나이 앞에서 암계를 쓰다 단번에 실패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위소보가 말했다. [홍 늙다리, 얼굴은 왜 붉혀? 붉혀도 곱지 않아!] 홍안통은 불시에 버럭 호통을 내리치며 넉 자 네 치의 수염으로 우아대에게 덮쳐갔다. 우아대는 무공이 고심하여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력의 기초가 전혀 없는 위소보는 홍안통의 내력에 질식할 정도에 이르렀다. 강한 적수를 만났지만 우아대는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돌연 휘파람을 낮게 한 번 불었다. 그러자 홍안통의 수염이 그의 앞가슴에서 두 갈래로 쫙 갈라졌다. 이 순간 우아대는 몸을 번쩍 돌리며 번개같이 홍안통의 가슴과 배에 있는 천지, 신장, 기해 세 곳의 대혈을 눌렀다. 홍안통은 그만 꼼짝달싹 하지 못했다 원래 위풍이 당당하던 수염은 내력을 잃고 내려뜨려졌다. 홍안통은 자기 무공이 이름도 알 수 없는 젊은 청년 앞에서 이처럼 여지없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셋째 동생, 수고스럽겠지만 나의 혈도를 풀어주구려.] 우아대는 웃으며 말했다. [둘째 형님을 가까스로 찾다보니 이 동생은 너무 기뻐 멍청해 진 것 같습니다.] 우아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위소보의 혈도를 하나하나 풀어 주었다. 위소보는 뒷짐을 짚고 갈지자 걸음으로 홍안통 앞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늙다리 교주님, 어르신은 복을 누리지 못 하고 장수하지 못 하기를 축원하나이다.] 홍안통은 낮게 소리쳤다. [이 놈! 죽이려면 죽여라.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것이 사내대장부냐?]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이야 교주님이신데 내가 어찌 웃어른을 노엽게 하겠습니까? 이 어르신은 당연 교주님을 죽이지 못하지요.] 위소보는 홍안통의 수염을 한 줌 쥐고 만지작거리며 살펴보았다. 수염은 희고 부드러운데 병기로 쓰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흉악하고 독살스러웠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요놈의 수염이 그리도 무섭단 말인가? 제기랄, 이놈의 수염을 만날 때마다 이 어르신은 재수가 없단 말이야. 차라리 모조리 뽑아 버려야겠다. 이 늙다리가 털 없는 개가 되어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말이다.) 위소보는 돌연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이 어르신은 이놈의 수염을 볼 때마다 성질이 난다오. 내가 교주님을 도와 이 너저분한 수염을 모두 정리해 주지요.] 이렇게 말하고 홍안통의 긴 수염을 한 대 뽑았다. 홍안통은 무림대사로서 죽을지언정 이런 모욕을 당하려 하지 않았다. 삽시에 안색이 변하며 내상의 위험도 무릅쓰고 소리쳤다. [이런 시러배 잡놈, 감히 노부를 모욕하다니!] 그는 비록 혈도가 짚혔지만 목소리만은 봄날의 우뢰마냥 위력이 대단하여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위소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정색해서 말했다. [좋아 이 어르신의 손아귀에 놓이고도 위세를 부릴 작정이란 말이냐?] 우아대가 위소보를 막아서며 말했다. [둘째 형, 홍 대인은 아주 신분이 높으신 분인데 그렇게 모욕하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되는 대로 말했다. [신분이 높다고? 내가 보기에는 신분이 낮거나 없어!] 홍안통은 우아대에게 감동의 눈길로 보내며 말했다. [영웅호걸은 젊은이들 속에서 나온다고 하더니 이 홍 아무개는 젊은 영웅 앞에서 패했으니 부끄럽지 않구려. 그러니 젊은 영웅께서 노부를 통쾌하게 죽여주시구려!] 우아대가 정색해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를 송구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문아 아가씨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내력을 다 소모한 뒤에 제가 손을 썼으니 저는 이미 득을 본 셈이지요.] 홍안통은 한평생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름도 없는 후배 앞에 별로 손도 못 써보고 패했으니 마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아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어느 정도 내려가 말했다. [만약 우리가 공평하게 겨루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아대가 별로 주저없이 말했다. [어르신이 십초를 펼쳐 저를 죽이지 못하고, 계속 열 여덟 가지 초식을 마주 펼쳤더라면 그 때는 우리 둘이 다 상한 처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마흔 두 가지 초식을 다 펼치시고 제가 다 피했다고 가정하면 그 때 쓰러진 사람은 제가 아니라 어르신일 것입니다.] 홍안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일리 있는 말이구려. 자네의 무공은 아주 비상하구려.] [어르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너무 흉악스럽구만. 목숨을 빼앗는 처지에서 서로 추켜 세우다니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우아대는 홍안통을 보고 말했다. [어르신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스승님이고 비범한 인재이신데 원래 이번에 이러지 말아야 하지요. 그러나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저는 할 수 없이....] 돌연 우아대의 눈에서는 흉악스러운 빛이 튕겨 나왔다. 삽시에 우아대가 쌍장을 내밀자 획휙 하는 장풍이 홍안통의 가슴으로 밀어닥쳤다. 이 일장은 홍안통도 생각 못했거니와 위소보로서도 뜻밖이었다. 홍안통은 가슴을 안고 욱! 하며 선혈을 토하고 쓰러졌다.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그놈에게 으름장을 놓을지언정 죽이지는 말게나!] 우아대가 엄숙히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놈은 문아 아가씨를 죽이려고 했을 뿐더러 조설근도 죽이고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 버리려고 했지요.] 위소보는 잘못 들었나 싶어 놀라며 말했다. [제기랄 네놈이 미쳤단 말이냐?] [위작 나으리, 저는 위작 나으리를 위해서 그랬소이다. 이놈을 살려두면 위작 나으리께는 아주 불리하지요.] 위소보는 대노하여 말했다. [이 개종자 같은 녀석, 이 어르신이 언제 사람을 죽이라고 그랬느냐?] 땅에 쓰러졌던 홍안통이 돌연히 말했다. [노부는 아주 탄복해 했다네. 하지만 불시에 암습하는 그런 재간에는 그리 탄복할 수 없다네.] 홍안통의 돌연적인 말에 우아대는 내심 경계심을 북돋았다. 우아대는 말없이 안색이 변했다. 위소보는 우아대가 또 홍안통에게 손을 쓰리라는 것을 알고 몸을 돌려 우아대를 막았다. 과연 우아대는 쌍장으로 들이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제기랄, 홍 교주님은 잘 하나 못 하나 우리 신룡교의 교주님이신데 때리고 죽이면 이 어르신외 부교주 면목이 깎이지 않는가?] 우아대는 좀 무안해 하고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그렇게 말씀하는데 어찌 감히 손을 쓰겠습니까?] 우아대는 홍안통을 몹시 증오하며 생각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홍안통을 죽이지 않으면 호랑이를 놓아 산으로 내보내는 격이니 후일에 우아대가 죽어도 묻을 자리조차 없지 않는가?) 우아대는 번쩍 쌍장을 들어 위소보를 피했다. 우아대는 손바닥으로 홍안통의 정수리를 덮고 말했다. [어르신, 미안하외다.] 홍안통은 조금치도 두려움 없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부는 수십 년 강호를 다니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차치하고 자고로 사람을 죽이면서 이렇게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네. 작은 괴물 같은 놈, 쓸데없는 말은 걷어치우고 마음대로 하게.] 우아대는 울화가 치밀어 떨며 말했다. [뭐 작은 괴물이라구?] 홍안통은 우아대의 말을 듣고 자기 짐작이 맞았다고 여겼다. [늙은 괴물이 가르쳐 준 것이니 자연히 작은 괴물이겠지.] 우아대는 이를 갈며 말했다. [에잇, 죽어랏!] 내력으로 홍안통의 머리통을 박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뒷등에 비수를 드리운 느낌을 받았다. 우아대는 흠칫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제 3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