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9章. 사모함은 정(情)으로 남는다 뜻밖에도 막아나선 사람은 위소보였다. 평소에 홍안통이라면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위소보 가 제지하고 나서자 우아대는 너무나도 의외의 일인지라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위작 나으리, 도대체 무슨 영문이오?] 위소보는 비수를 우아대의 등뒤에 겨눈 채 대꾸했다. [놀라지 말게나. 이 형은 강호에서 시러배 잡놈 노릇을 했지만 사람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네. 셋째 동생, 우리 형제의 의를 상하지 않도록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홍안통으로서도 위소보가 자기를 도와 나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무슨 영문인 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우아대는 천천히 손을 거두며 냉소했다. [위작 나으리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지!] 순간 홍안통이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조심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아대의 일 장이 전광석화처럼 작렬했다. 위소보는 느닷없이 일 장을 가슴을 얻어맞고 뒤로 세 걸음 밀려났으며 손에 쥐고 있었던 비수마저도 땅바닥에 떨 구었다. 다행히 보의를 입었고 우아대가 손에 사정을 두어 일 장을 내뻗은 관계로 그는 갈 빗대 몇 대가 부러졌다. 위소보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홍안통을 도운 것인데 우아대가 뜻밖에 일 장을 발출하자 아픔을 돌볼 겨를도 없이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아니, 셋째 동섕! 정말 손을 쓰겠다는 건가? 강호의 의리마저 저 버리고 이 형을 죽일 작정 이란 말인가?] 우아대는 두 손을 맞쥐고 허리를 굽혔다. [둘째 형, 이 동생은 달리 방도가 없어 그랬소이다. 차후에 대사가 끝나면 둘째 형이 친히 이 동생을 죽여도 아무런 원망을 하지 않을 것이외다.] 위소보는 냉랭하게 내뱉었다.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시오. 동생의 무공을 따를 사람도 없고 마음도 악독하기 그지없으니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가 누구의 목을 날릴 것인지는 뻔한 일이 아니오?] 그 말을 듣는 우아대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폭사되었다. 위소보는 순간 움찔하며 두려움 을 느꼈다. (이 동생은 평소 목석 같고 아주 너그러운 사람인데 오늘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흉악하게 변했단 말인가? 아하! 오늘 홍 늙다리를 놓아주면 나중에 홍 늙다리가 기회를 틈타 우리를 깡그리 죽일까봐 그러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위소보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며 내심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홍 늙다리가 우리를 다 죽인다고 해도 문아 여동생과 홍 늙다리는 서로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죽이겠는가? 또한 조설근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인데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아대의 분노에 찬 기색이 일순 사라졌다. [이 일은 아주 커다란 일입니다. 차후에 제가 형님께 사죄하지요.] 우아대는 불시에 몸을 돌려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홍안통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홍안통은 조용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위소보도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 았다. 위소보와 홍안통은 서로 은원이 있기는 하지만 당대의 영웅인 홍안통이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자 위소보의 마음은 어쩐지 무거워졌다. 돌연 한 가닥 인영이 언뜩하는 것 같더니 부드러운 불진이 우아대의 손을 낚아 올렸다. 순간 우아대는 내력이 삽시에 소멸 되어 내리칠 수가 없었다. 우아대는 놀라 소리쳤다. [구난사태 어르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독비신니 구난사태였다. 구난사태가 불진을 살짝 떨치자 우아대는 곤두 박질치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구난사태는 우아대의 인후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사지(死地)에 처해 있을 때 손을 쓰면서 어찌 어엿한 사내 대장부라고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절대로 그런 비열한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네!] 우아대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더듬거렸다. [사태 어르신, 소인이....] 위소보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스승님....] 구난사태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다리 부러진 노루는 같은 동굴에 모여든다고, 소보는 저 사람과 결의 형제를 맺었다지?]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스승님, 우리 셋째 동생은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무슨 영문인 지....] 구난사태는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그래도 양심이 좀 있구만. 홍안통을 구해 달라고 사정하니 다른 사람을 책벌할 수 도 없고 차라리 너를 죽여 우리 문하 내부를 깨끗하게 해야겠다.] 이처럼 엄한 표정으로 잘라 말하자 위소보는 다른 말은 감히 못하고 어물어물했다. [스승님, 이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구난사태는 불진을 걷어들이며 우아대를 보고 말했다. [자네는 어서 돌아가게.] 우아대는 매우 어색해 했다. [사태 어르신, 제가 홍 교주를 해치려고 한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난사태는 무슨 영문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다짜고짜 매섭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단 말이오? 무슨 중요한 일이길래 감히 사람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렇다 치고 은인을 이렇게 대해서야 되겠는가?] 위소보가 우아대를 변호해 말했다. [스승님, 저 홍 늙다리가 문아 여동생을 구해 준 것은 진심이 아니라 암암리에 흉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홍안통 늙다리는 바로 이 제자에게서 사십이장경을 빼앗으려는 음흉한 생각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주 청나라가 명조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구난사태는 명조의 공주로써 반청복명의 대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지라 '사십이장경'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위소보는 그녀의 기색을 흘끔흘끔 훔쳐보면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 제자가 그 무슨 사십이장경인지 오십삼장경인지를 어 찌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저 흥 늙다리가 너무나도 핍박하니 할 수 없이 이 제자는 궁여지 책으로 헛소리를꾸며내 '니 에미 산'이고 '니 애비 강'이니 하고 지껄였을 따름입니다.] 구난사태는 이 제자의 무공은 보잘것 없지만 얼렁뚱땅 넘어가는 솜씨는 천하 제일이라는 것 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홍안통이 어찌 사십이장경을 위소보에게서 얻어낼 수 있겠는 가? 구난사태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아대가 말했다. [사태 어르신, 사실 저 홍 교주는 문아 아가씨를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아 아가씨에게 내력을 쏟아 잠시 해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술수를 부렸을 따름입니다.] 구난사태는 불진으로 문아외 혈도를 짚어보고는 우아대의 말이 옳음을 깨달았다. 구난사태 는 비열한 홍안통의 수법을 깨닫고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냉랭하게 읊조렸다. [너희들 내노라 하는 무림의 사내 대장부라는 작자들이 정말 빈니를 탄복시키는구나!] 그러나 구난사태는 불진으로 홍안통의 눌린 혈도를 가볍게 쓸어주며 말했다. [홍 교주님, 어서 돌아가십시오.] 홍안통은 일어나 말없이 구난사태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우아대를 보고 말했다. [이 작은 괴물아, 산은 언제나 푸르고 물은 언제나 흐를 것이니 다시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홍안통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지붕을 뚫고 날아올라 사라졌다. 그는 중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날렵한 신법을 펼치자 우아대는 저으기 놀랐다. 구난사태는 아 무것도 못 본 듯이 조용히 있다가 우아대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자네를 보고 작은 괴물이라고 부르는가?,,] 위소보가 나섰다. [홍 늙다리는 이 동생의 무공을 간파하지 못했고 더구나 이길 수도 없었습니다. 제기랄, 그 랬기 때문에 이 동생을 '작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구난사태가 소리쳤다. [소보, 왜 자네는 항상 늙다리고 뭐고 하는 말꼬리를 입에 달고 있는 게냐? 다시는 그같이 경박한 말을 입에 담지 말게.] 그리고는 우아대를 보고 물었다. [우 대협의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무고하시오?] 우아대는 이 돌발적인 물음에 당황했다. [사태 어르신, 어르신께서 그렇게 저에게 물으시니 저로서는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 습니다.] 구난사태는 냉소하며 말했다. [당황할 게 있는가? 나는 단지 자네 사부님이 여전히 무고하신가 물은 것뿐일세!] 우아대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다리미로 다려도 펴지지 않을 주름살....] 순간 우아대는 노랫가락에 정신이 팔려 불시에 '청아....' 하고 소리치며 그 자리를 빠져나갔 다. 구난사태는 못 본 척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늙은 괴물? 늙은 괴물이라?] 구난사태는 고개를 돌려 위소보를 보고 물었다. [소보, 자네는 자네 의동생의 신분과 내력(來歷)을 익히 잘 알고 있겠지?] 위소보는 스승님이 정색해서 묻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황궁 어전시위입니다.... 스승님은 무슨 일에나 정통하시니 먼저 문아 여동생을 살펴봐 주십시오.] 구난사태는 문아를 안아다 침대에 앉히고 맥을 자세히 짚어 보더니 독문상약(獨門傷藥) 두 알을 먹였다. 문아는 혼곤히 잠이 들었다. 구난사태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소보, 사실대로 말해 보게나. 그대와 이 아가씨와는 무슨 관계인가?]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결외 남매로써 문아는 나의 여동생이고 나는 문아의 오라버니일 뿐입니다.] 구난사태는 설레설레 도리질을 했다. 절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위소보가 다급히 말했 다. [이 제자가 늘 방탕한 짓을 했다고 진정으로 한 말도 믿지 못하시겠단 말입니까?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정말 깨끗합니다...] 위소보는 또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밝은 하늘이 내려다보는데 위소보가 만약 문아 여동생에게 그 어떤 더러운 생각을 조금이 라도 했다면 스승님께서 이 위소보에게 당장 나가 죽어라 해도 아무런 원망도 없이 죽겠습 니다.] 위소보는 늘 맹세를 하더라도 양주 사투리를 섞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두루 뭉실하게 맹세도 했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말하기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구난사태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스승이 믿어 주면 되지. 그러나....] 구난사태는 더 말하지 않고 여운을 두었다. 위소보는 다시 긴장했다. [스승님, 왜 확실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구난사태는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소보, 자네가 말해 보게나. 그대의 여동생은 어떤 내상을 입었는가?]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실대로 얘기했다. [강녕조부 조 늙다리가 그 무슨 대성장인지 소성장인지 하는 무공으로 이 제자를 죽이려 하 다가 뜻밖에도 자기 손자에게 중상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문아 여동생이 쓸데없는 일 에 참견하고 나서다가 그만....] 구난사태는 그의 말을 잘라 말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소보, 내가 묻겠는데 세상에서 제일 치료하기 어려운 내상(內 傷)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느냐?] 위소보는 막연하게 생각하다 겨우 대답했다. [스승님의 얼굴을 깎는 일이지만 부끄럽게도 이 제자는 무공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 다.] 구난사태는 안색이 붉어지며 말하기 거북해 했다. 위소보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스승님은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무엇이 부끄러워 어물어물하며 얼굴까지 붉힐까? 어느 늙 다리를 암암리에 흠모하면서 이 어르신더러 중매쟁이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닐까?) 위소보는 문득 생각났다. (아, 그렇지. 스승님은 방금 홍 늙다리를 구해 줬지. 아마 그 늙다리가 마음에 들어 그러는 것이 아닐까? 제기랄, 그렇게 되면 구난사태는 나의 사모님으로 되고 홍 늙다리가 나의 스 승님의 남편이 되니 이 어르신은 밤낮 고달프겠구나.) 이런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구난사태가 물었다. [소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위소보는 '홍 늙다리....'라고 말하다가 자기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 [제기랄, 요 기억력 없는 놈의 주둥이가....] 구난사태는 성을 내며 말했다. [내가 묻는 말을 모두 어물어물하면서 넘어가려고 하는데 좀 잘 생각해서 얘기하면 안 되는 가?] 조설근은 한쪽에 피해 있었지만 어린애인지라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이 때 조설근이 나직이 읊조리듯 한 마디 거들었다. [땅과 하늘이 갈라진 이래 그 누군들 다정한 사람이 없으랴?] 구난사태는 놀라며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아이는 누군가? 너 뭐라고 했느냐?] 위소보가 말했다. [스승님, 이 아이는 조 늙다리 손자인데 작은....] 그 때 비로소 조설근은 구난사태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소인은 조설근이라 합니다. 사태 어르신께 문안 인사 드립니다.] 위소보가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놈, 뻔뻔스럽게도 스승님에게까지 아첨하려고 그런단 말이냐?) 조설근은 까만 눈망울을 깜박였다. [사태 어르신, 소인은 문아 누나가 거린 병이 무슨 병인지 알만 합니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조그만 놈이 뭘 안다고 나서는 게냐?] 위소보는 원래 추잡한 말로 더 욕하려다가 구난사태의 안색을 보고 더 말하지 않았다. 구난 사태가 말했다. [이 아이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구나. 그래 너 어디 한번 말해 보려무나. 문아 누나가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느냐?] 조설근은 공손히 '예' 하고 낮은 소리고 외웠다. [땅과 하늘이 갈라진 이래 그 누군들 그 다정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아름다운 경치는 그 정 을 더 깊게 하거늘 이럴 때면 가슴 아픈 지난 날이 더욱 절실하고, 사위가 잠든 적적한 한 밤에는 정든 님 생각이 더욱 깊지요.] 조설근은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 아이처럼 읊으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구난사태도 꿈결 마냥 무엇인지 머리에 떠올리고 조설근의 말을 다시 음미했다. [정이 가슴에 새겨들면 가슴 아픈 지난 날이 더욱 절실하고, 사위가 잠든 적적한 밤에는 정 든 님 생각이 더욱 깊다!] 그녀의 앞에는 원승지(袁承志)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원래 구난사태는 어린 시절 강호를 떠도아 다니며 젊고 영준한 대협(大俠) 원승지를 사모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숭지가 마음 이 변해 구난사태는 애정의 괴로움을 맛볼 대로 다 맛보고 더구나 나라마저 빼앗겨 세속의 모든 미련을 버리고 비구니가 되었다. (작자 주:구난사태와 원승지의 애정 이야기는 '벽혈검(碧血劍)'을 보라.) 조설근은 다시 천천히 읊조렸다. [그 일도 지나간 지 여러 해 되고 꽃다운 청춘 시절 다 지난 지라 불상과 촛불을 마주하는 마음은 어느 새 재가 되었도다.] 조설근의 몇 구절은 구난사태의 그립던 옛정을 환기시켰다. 조설근은 다시 읊조렸다. [난세의 영웅들은 험난한 세상을 탄식하지만, 사람이 사노라면 정도 생기게 마련....] 구난사태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고 조설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너는 참으로 총명하구나!] 위소보는 질투심이 났다. (그놈이 총명하긴 뭐가 총명하단 말인가? 우리 어머니의 여춘원에서 기생들이 부르던 노래 를 몇 가닥 주워 배웠겠지. 이 어르신은 어릴 때부터 배운 노래가 네놈보다는 훨씬 더 많 지! 한 번 만지고 두 번 만졌다네....) 구난사태는 말머리를 돌려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보, 지금 문아의 병은 몹시 엄중하다네!] [스승님 어떻게 하든지 구해 주십시오.] 구난사태가 말했다. [아미타불,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층 석탑을 쌓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공덕이니라. 당 연히 구해 줘야지. 그러나....] 위소보가 다급히 물었다. [어떤 약인지 스승님께서 말씀만 하십시오. 용의 간, 봉황의 머리통처럼 얻기 어려운 약이라 도 이 제자는 산을 뒤집고 바닷물을 다 퍼 올려서라도 구해 올 수 있습니다.] 구난사태는 고개를 저었다. [약은 필요 없다네. 소보, 자네도 알겠지만 인간 세상에서 '정'이라는 독이 제일 무서운 독 이라네. 만약 한 사람이 정이라는 독(毒)에 중독되면 그 어떤 약도 소용 없지. 소보야, 내 말 을 알아듣겠느냐?] 구난사태는 출가한 사람이라 '정'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에 대해 매우 어색해 했다. 그러 나 학식이라곤 전혀 없는 위소보가 어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구난사태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소보, 나는 문아를 나의 관문(關門) 제자로 삼으려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소보는 기뻐하며 생각했다. (거야 이 어르신이 바라는 일이지. 문아 여동생에게 이런 명망있는 스승님이 있으면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홍 늙다리처럼 악독한 놈일지라도 감히 문아 여동생을 못살게 굴지는 못할 것이고, 또....)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사기가 올랐다. (나는 스승님의 제자고 나의 처 아가도 스승님의 제자지. 지금 또 스승님께서 나의 여동생 도 제자로 삼으려 하니 온 집안 사람이 모두 구난사태의 제자가 되겠구나. 정말 스승님이야 말로 남해 관세음보살이지. 아미타불처럼 고난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위소보가 말했다. [스승님,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문아 여동생은 분명히 기뻐할 것입니다.] 구난사태가 말했다. [소보, 아가는 이미 나의 제자이지만 문아는 다르다. 그녀가 만약 나를 스승으로 삼겠다면 반드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야 한단다.]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다'는 말에 위소보는 머리가 휑해지며 펄쩍 뛰었다. 불가(佛家)의 일반 제자는 계율의 금제가 많지 않고 혼상(婚喪)도 일반 세상 사람과 같지만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면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다. 위소보는 손을 저으며 악을 썼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구난사태가 물었다. [어째서 안 된단 말이냐?] 위소보는 '저, 저....' 하다가 말문이 막혔다. 구난사태가 엄숙히 말했다. [소보, 만약 문아가 불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단다!] 위소보가 말하려는데 문아가 깨어나 정신을 차리더니 구난사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혼미 한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를 자세히 들은 모양이었다. [이 제자는 사태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머리를 깎겠습니다.] 위소보는 놀라며 말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도록 깜짝 놀랐다. [여동생 그러면 안 되오, 안 돼....] 구난사태가 소리쳤다. [소보, 무슨 허튼 소린가?] 문아는 듣는 척도 않고 무릎을 꿇는 채 다소곳이 구난사태에게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문아야, 불문은 넓고 인연 있는 자를 제도하는 것이 불가의 본분이다. 내 묻겠는데 마(魔) 가 어떻게 비롯되는지 아느냐?] [마는 마음(心)에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문아는 선문답을 하는 여인처럼 공손히 답했다. [마음은 어디서 생기느뇨?] [정(情)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정은?....] [정은 경(景=우러러 봄, 사모함)에서 비롯됩니다.] [경은....] 구난사태의 안색이 엄숙해졌다. [헛된 욕심에서 생기는 줄 아옵니다.] 문아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구난사태는 손에 들린 불진으로 자신 의 머리롤 쳤다. [조금도 틀리지 않았도다. 욕(慾)으로 인해 경(景)이 생기고, 경이 쌓여 정(情)을 낳는도다. 정이 극(極)에 이르면 마음을 상하게 하니 마(魔)가 자리잡아 마음을 부수는 것이다. 그렇다 면 너는 이 심마(心魔)를 억제하는 법을 알고 있느냐?] 문아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심마는 스스로 물러나는 줄로 아옵니다.] 구난사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선하고 선하도다. 그대의 선한 마음에 모든 겁(劫)은 물러갔도다.] 말을 마친 구난사태는 문아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한 차례 내력을 가하자 문아 의 아름다운 머리칼은 분분히 땅바닥으로 흩날렸다. 구난사태는 문아의 머리칼을 자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를 설파했다. [공공세계(空空世界)에는 마(魔)가 없고 마음도 없도다. 너는 이제 부처님께 귀의하니.... 법 명은 심무(心無)니라.] 구난사태는 문아의 법명을 심무라 했다. 구난사태는 친히 문아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삽시 간에 문아의 머리칼은 한 올도 남지 않았다. 문아가 절을 하고 일어섰을 때는 여전히 만면 에 병색이 어린 비구니였다. 위소보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꿈을 꾸었나 하고 뺨을 꼬집어보았다. 구난사태는 위소보를 가리키며 문아에게 말했다. [심무, 이제부터 이 분은 자네의 사형(師兄)이라네.] 문아는 두 손을 합치고 '사형!'이라고 불렀다. 위소보는 들은 척도 않고 멍하니 서서 생각했 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형국이란 말이냐? 얌전한 문아 여동생이 눈깜짝하는 사이에 비구니가 되다니? 내가 미쳤는가, 문아가 미쳤는가? 그렇지 않으면 스승님이 미쳤는가? 정 말 모를 일이야, 모두가 미쳤어....) 구난사태가 말했다. [소보, 자네는 이 조 공자를 강녕부에 데려다 주게나. 나는 심무를 데리고 산으로 돌아가야 겠네.] 구난사태가 불진을 흔들며 방안을 나섰다. 문아는 위소보에게 인사하고 구난사태를 따라가 며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조설근이 위소보의 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어르신, 저 분들은 다 떠나시는 거예요?....] 위소보는 미친 사람처럼 마구 웃어댔다. [가도 좋아, 가도 좋아.]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집을 나섰다. 조설근은 바싹 뒤를 따라가며 외쳤다. [어르신, 어르신은 어디로 가세요?] 위소보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받아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연거푸 하 늘을 쳐다보며 뇌까렸다. [가도 좋아, 가도 좋아!] 조설근은 겁이 나서 온 힘을 다해 따랐지만 어린 아이 걸음인지라 점점 더 떨어졌다. 조설 근은 울며 불렀다. [어르신,어르신,기다려요....] 돌연 조인이 질풍같이 달려와 조설근을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설근아, 설근아!] 조설근은 조인의 품속에 안겨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 선배님은 미쳤어요.] 조인이 물었다. [어느 선배 말이냐?] 조설근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이에요!] 위소보는 신행백변으로 멀리 갔으므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가 위소보임을 조인은 분 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조인은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네 선배냐?] 하지만 조인은 위소보가 왜 그렇게 허둥지둥 가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속으로 생각했 다. (저 시러배 잡놈이 왜 저럴까?) 위소보는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옷도 다 찢겨져 섣불리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자신으로서 도 얼마나 달렸는지 또 어느 곳에 왔는지도 몰랐다. 이 날 점심 때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 쨍쨍 내리쬐어 행인들은 불에 구워진 사람처럼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한 초막집 앞에 한 그루 커다란 홰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곳에는 주루라는 기폭이 걸려 있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주루 안 탁자 머리에 한 사람 이 앉아 있었다. 위소보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히히덕거리며 그 사람 옆에 가 앉았다. [폐병쟁이 어린 거지 무고한가?] 그는 바로 개방 어린 거지 관의호였다. 관의호가 웃으며 말했다. [소류망 방주님 무고하시오?] 관의호가 말할 때 입에서 술냄새가 심하게 풍겨 나오는 것이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위 소보와 관의호는 원수였다. 이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는 네가 죽고 내가 사는 싸움을 하 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옛친구처럼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관의호가 집주인을 보고 분 부했다. [어서 우리 방주님께 술잔을 가져 와!] 위소보는 아쉬우면 화장실에 앉아서도 인사를 하는 위인인지라 자기의 상심한 마음을 달랠 사람이건 말건 개의치 않고 그의 어깨에 다정스레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 취할 때까지 마셔 봅시다.] 이렇게 말하고 위소보는 품속에서 은자를 주인 앞에 던지며 말했다. [좋은 술과 안주들을 있는 대로 가져오시오. 이 어르신은 제기랄, 돈이 얼마든지 있어!] 두 사람은 마주앉아 술을 마셨다. 관의호는 술을 잘 마셨으나 위소보는 워낙 주량이 적어 너 한 잔, 내 한 잔 하다 보니 완전히 취하고 말았다. 돌연 관의호가 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다 큰 어린애가 말오줌을 흘리다니 부끄럽지 않는가? 히히...] 관의호가 노해 말했다. [내가 울고 싶어 우는데 상관할 게 뭐 있단 말이오?] 위소보도 목청을 높였다. [네놈도 울 줄을 안단 말이냐? 우리 한번 누가 슬프게 우는가 내기를 해볼까?] 돌연 위소보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엉엉, 제기랄 이 어르신은 왜 될 일도 안되고 이리도 팔자가 사납단 말이냐....] 관의호는 그 울음소리를 듣자 주체할 수 없어 대성통곡을 하며 넋두리를 했다. [제기랄, 왜 나를 업신여긴단 말인가? 어느 때든지 이 어르신은 네놈을 붙잡아 칼탕을 치고 말겠다. 엉엉....] 위소보는 참았던 비애를 한껏 늘어놓았다. [관 동생, 동생은 원수를 갚을 수 있지만 엉엉.... 이 어르신은 벙어리 냉가슴을 뜯는 격이니 내 이 고통을 어디에다 다 하소연하겠나, 엉엉....] 너도 울고 나도 울고 하다 보니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서로 알 수가 없었다. 집주인은 이 런 일은 늘상 보아온지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주판알만 통겼다. 담이 작은 손님들은 이 들이 술주정을 하며 시비를 걸까 봐 슬금슬금 달아났다. 두 사람은 집안이 떠들썩하게 울다 가 위소보가 먼저 눈물을 씻으며 물었다. [관 동생, 무슨 일이 있어 그처럼 슬프게 울었는가?] 관의호는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이를 갈며 말했다. [정극상 그놈이 청아 아가씨를....] 그는 성이 나서 숨까지 막히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극상이라는 이름을 듣고 위소보는 놀라서 물었다. [정극상이 청아 아가씨를 어쨌단 말인가?] 관의호가 왈칵 성을 내며 말했다. [제기랄, 떼쟁이 소류망이 왜 청아 아가씨에게 이처럼 관심을 갖지? 그래, 너도 한 몫 끼어 들려고 그러느냐?] 위소보도 성을 내며 말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물어 보는데 뭘 그리 대단하다고 이러는 게냐?] 관의호는 흉물스러운 얼굴로 위소보를 쏘아보았다. 그 뼈밖에 없는 손마디에서는 마디마다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이전 같으면 위소보는 겁이 나 바로 줄행랑을 놓았으련만 마 음을 단단히 먹고 한 잔 술을 마신 후 지지않고 관의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놈! 이 어르신을 왜 자꾸 쳐다보는 게냐? 이 어르신을 눈에 집어넣어 평생 달고 다니려 고 그러느냐?] 관의호가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이 어르신이 네놈을 죽이는 것은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지!] 순간 관의호는 번개같이 위소보의 목을 틀어쥐었다. 위소보는 너무나 경황 중에 당한 일인 지라 신행백변도 펼치지 못하고 그대로 목을 움켜잡히고 말았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다짜고짜 관의호의 손을 집어 뜯으며 말했다. [제기랄, 방금 술 한 모금 마셨는데 고기 안주 몇 점이라도 먹고 죽어야지 않겠느냐?] 위소보는 쇠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꿀꺽 삼키고서는 입을 닦으며 말했다. [됐어. 어디 한번 손을 써 봐!] 관의호는 '응' 하며 내력으로 위소보의 목을 움켜쥐었다. 위소보는 질식할 지경이었지만 얼 굴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돌연 관의호가 손을 늦추었다. 위소보는 눈을 크게 뜨고 욕했다. [제기랄, 무슨 못된 심사가 일어 이 어르신을 죽이지 않는 게냐?] 관의호도 욕했다. [제기랄,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이 어르신이 왜 네놈을 죽이겠느냐?] 위소보가 돌연 탄식하며 물었다. [관 동생,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나. 사람이 사는 것이 좋은가, 죽는 것이 좋은가?] 관의호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은 살아야 좋고, 나는 죽으면 좋지!] 위소보는 이상하여 물었다. [그건 왜?] 관의호가 말했다. [방주님은 돈이 있고 권세가 있고 또 부인이 일곱이나 있으니 살면 살수록 재미가 나겠지만 이 어르신은 빈털터리야,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위소보는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비구니가 된 문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마다 남이 이해할 수 없는 고충이 있는 법이야.] 그리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 [문아 여동생이 여승질하러 갔다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다가 '하하' 하고 웃어 버렸다. 이 때 벽을 사이에 둔 술상의 손님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왜 웃는 게요?] 그 손님은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위소보는 상을 '탁' 치며 소리쳤다. [제기랄 놈, 이 어르신이 웃고 싶어 웃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 말도 끝나기도 전에 '쌩!' 하는 소리와 함께 먹던 뼈다귀가 날아오더니 곧바로 위소보의 입 을 막았다. 위소보가 '퉤!' 하고 뼈다귀를 뱉어 던지며 대노하여 말했다. [어느 눈물나는 효자 녀석이 이 어르신에게 뼈다귀를 먹으라고 주는 게냐?] 그 손님이 말했다. [우리 집에는 개가 있는데 사람을 물려고 할 때면 뼈다귀로 입을 막는다네!] 위소보는 자고로 말에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자기를 개에 비기자 대단히 노했 다. [어떤 물건짝이 이 어르신의 머리 위에 앉아 똥을 싸려고 한단 말이냐? 그래 살아 있는 것 이 원수 같다면 당장 죽여주마!] 그 손님은 더 대꾸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돌연 손님이 젓가락을 들더니 또 뼈다귀가 위소 보를 향해 날아왔다. 위소보가 피하려고 할 때 관의호가 돌연 쥐었던 술잔을 살짝 뿌렸다. 술잔과 뼈다귀는 공중에서 '딱' 하고 마주쳤는데 그래도 술잔은 술 한 방울 쏟아지지 않고 제자리에 고스란히 돌아왔다. 위소보는 '히야!'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 손님은 느릿느릿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었다.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려는데 술잔에 맞은 뼈가 휙 돌아 치며 머리에 쓴 삿갓을 연을 띄우듯이 날려보냈다. 그 손님의 면목이 드러났 다. 위소보는 겁을 먹고 소리쳤다. [정극상 놈이다!] 정극상은 얼굴이 붉어졌다. 관의호와 정극상의 내력 겨룸에서 관의호의 엷은 술잔은 단단한 뼈와 마주쳤는데 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술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극상이 날린 빼는 술잔에 맞아 되돌아와 삿갓을 스치고 나갔으니 관의호의 내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극상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첫 번 겨룸에서 정극상이 지고 말았다. 관의호가 대소했다. [귀하께서 지닌 육지의 재간으로는 안 되지요!] 정극상이 말했다. [그럼, 우리 물에서 다시 만나지요.] 위소보가 생각했다. (저 정가 놈은 아주 흉악한 놈이고 관의호 이놈도 좋은 종자는 아니지. 서로 겨루려면 너죽 고 나죽고 나뒹굴어야지 왜 한 번만 겨루고 만단 말인가? 더 싸워야 두 놈이 다 죽지!) 그는 한참 눈을 굴리다가 말했다. [정 형, 왜 혼자 왔소, 청아 아가씨는?] 정극상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위소보는 머리를 굴리며 두 사람을 이간시키려 했다. [그 날 미산도 그 초막집 방안에서 당신들 두 사람은 대단히 좋아하더구만, 히히히!] 관의호가 물었다. [미산도가 뭐고 초가 방안은 무엇이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초막집 방안은 수수한 방이지만 개방의 비밀 지점으로 관의호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위소보는 고의적으로 신비한 기색을 나타내며 낮게 말했다. [그것은 우리 개방의....밀실(密室)인데 그 안에는 또 암도(暗道)가 있지.] 관의호가 대노하여 말했다. [그것은 우리 개방의 중요한 비밀 장소라오. 팔대장로도 방주님의 허가 없이는 드나들지 못 하는데 그 정가 놈이 감히 들어갔단 말인가? 네놈이 담도 크구나!] 위소보가 해명했다. [아니, 정 형 탓이 아니오. 청아 아가씨가 데리고 들어갔다오.] 관의호가 물었다. [그들이 안에 들어가 뭘 했느냐?] 위소보가 말했다. [나도 잘 모르오. 그 때 나는 방금 방주로 되었으니 문아 여동생이 나를 데리고 들어갔었는 데 이들이 그 곳에 숨어 있었다오. 아마도 우리 개방의 비밀을 알아내자는 뜻이겠지.] 위소보는 정극상을 보고 말했다. [관 형, 사실 나는 그 때 관 형과 청아 아가씨가 그 곳에 있는 줄 몰랐소. 나는 두 분의 말 을 몰래 들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오. 양해하시오.] 관의호가 얼굴을 붉혔다. [웬 잔소리가 이리도 많은가? 그들이 도대체 그 곳에서 뭘 했는가 말이야?]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이 어르신은 그저 관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오. 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하지. 지금 여기에 우리 둘밖에 없소.' 히히히! 관 형, 이 말은 정 형이 한 말이 아니오?] 이 말은 확실히 정극상이 미산도 초막집 방에서 했다. 이것은 은근히 녹정산 장보도를 알아 내려고 한 말이었다. 정극상이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내가 말했소. 그렇다면 어쩌겠소?] 위소보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정 형이 말했으니 좋소. 그러나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소이다. '당신 의 입은 꿀보다 더 달콤해요'라고 누군가 말하더이다.] 이 말을 할 때 위소보는 신통하게 여자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관의호는 위소보의 말을 듣 고 청아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위소보가 또 물었다. [이 말은 누가 한 말이오? 정 형, 하늘도 알고 땅도 다 아는데 이 말을 잊었단 말이오?] 청아의 웃던 모습은 정극상의 머리에 늘 잠재돼 있었다. 게다가 위소보의 말을 듣자 갑자기 청아가 생각났다. [누가 한 말이겠소?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고귀하고 정갈하신 청아 아가씨의 말이지.]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나중에 또 정 형은 땅이 꺼져라 탄식을 하면서 '사람이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이지만,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괴롭다'고 했다오. 그런데 정 형, '죽 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것이 괴롭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오? 이 어르신에게 알려 줄 수 없소?] 그것은 정극상이 자기 신세를 놓고 한탄한 말이었다. 그 신세타령은 어찌 한두 마디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정극상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얘기했다. [정 형이 솔직히 말하지 않겠다면 이 어르신도 달리 방법이 없지. 나중에 정 형은 또 '여자 는 물로 만든 혈육이고 남자는 흙으로 만든 구린내 나는 물건짝이니 지금 자네의 구린내 나 는 물건짝을 바꾸시오, 그러면 그 맛도 아주 괜찮을 것이오'라고 했소. 정 형, 이 말은 아주 학문이 깊은 말이외다.] 이것은 정극상이 '음양을 바꾸는' 신공으로 위소보를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만들었던 일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정극상은 위소보가 여자로 되어 기생이 된 일을 생각하고는 실소 를 하고 말았다. 그의 웃음은 위소보의 비위를 건드렸다. [제기랄, 웃기는 왜 웃는 게냐? 이래야 이 어르신의 속이 시원하지. 안 그래?] 정극상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야, 속이 시원하지.] 위소보는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정 형은 속시원하지만 청아 아가씨는 만나려고 하지 않소. 청아 아가씨가 이렇게 말했소. ' 나는 아직 당신과 혼례당에도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인으로.... 평소에 풍의족식하고 많은 계집종과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시던 분이 어찌 짚더미 속에 눕겠어요? 신분에 어울리지 않 지요.' 히히히! 관 형, 젊은 남녀 두 사람이 짚더미 속에 누워서 무엇을 하겠소?] 정극상은 머리가 빨리 회전되는 사람이었지만 요리조리 붙여 대는 위소보의 올가미에 자신 이 걸린 것을 몰랐다. 기실 이 말들은 청아, 정극상이 부동한 자리에서 위소보와 한 말이다. 그런데 위소보는 교묘하게 그들의 대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주절거리는 위소보의 말마디마 다 원인과 결과가 있어 엉겁결에 대꾸하다 보면 그의 의중에 말려드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 다. 사실 이 말은 위소보가 앞뒷말을 뜯어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 만들어 낸 것이다. 관의호 는 그럴 듯한 위소보의 거짓말을 듣자 병색이 감돌던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아니, 당신들은 추잡한 일들을 획책하고 있었구만.] 정극상은 이미 위소보의 미혼술(迷魂術)에 걸려들어 관의호가 한 말이 사십이장경에 대한 이야기인 줄로 여기고 다급히 변명했다. [네놈이 무슨 허튼 소리냐? 우리는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어!]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정 형을 책망하려는 뜻은 아니오만 기실 정 형은 너무도 경솔했다오. 청아 아가씨가 이 관 의호와 어떤 사이인 줄 아시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의호는 노호하며 정극상에게 덮쳐갔다. 第20章. 평생 처음 돈을 떼이다 정극상이 황망히 소리치며 한쪽을 피했다. [물론 알지. 청아 아가씨는 저 관 동생과 함께 한 스승님 밑에서 무공을 배웠지....] 정극상은 이렇게 말하다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 시러배 잡놈이 빙빙 돌려 붙인 것은 나와 청아 아가씨가 그렇고 그런 사이란 뜻이 아닌 가?) 정극상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생각하기도 전에 관의호가 재차 덮쳐 왔다. 시간이 너무나 창졸지간인지라 정극상은 재빨리 몸을 구부려 치명적인 공격을 한 차례 피했 다. 관의호가 미친 듯이 한 발 또 한 발, 두 발을 연이어 들이차자 정극상은 반격은 고사하 고 일어서지도 못했다. 정극상은 괴이하게도 물 속에서의 공력은 대단했으나 육지에서는 그 위력을 과시할 수 없었다. 정극상은 관의호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관의호는 몸이 너무 허약한 폐병쟁였으나 무공은 출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청아 자매 와 함께 무공을 배웠다. 그 때부터 청아에 대한 남다른 생각이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 각하고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술을 마신 데다가 또 위소보의 이런 저런 도발적인 얘기를 듣자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혀 있었던 온갖 정감이 북받쳐 터져 나왔 다. 그의 무공은 지극히 음험했는데 '사랑의 적수'를 접하게 되자 더더욱 악날해졌고 상대의 요 해만을 들이쳤다. 정극상은 위험에 처했다. 위소보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기고 옆에서 붙 은 불에 키질하며 말했다. [쳐라! 저 작은 정가 놈을 호되게 족쳐라.... 제기랄, 네놈은 전부 말뿐이야. 청아 아가씨를 찝쩍거리는 재간은 대단하던데 싸움판에서는 말뚝박은 허수아비냐? 제기랄, 자라새끼처럼 목을 움츠리고 대가리를 처박고 뭘 해?] 위소보가 이렇게 떠드는 순간 관의호는 발로 정극상의 태양혈을 들이찼다. 정극상은 자기 재간으로는 막을 수 없어 뒹굴며 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관의호가 발로 상을 걷어차자 술상은 박살나고 말았다. 위소보가 소리쳤다. [관씨 양반, 정씨 양반, 싸우려면 속시원이 싸울 것이지, 이렇게 슬렁슬렁하면 이 어르신이 감상하시는데 재미가 없잖아!] 돌연 상 조각이 날려 와 위소보의 얼굴을 후려쳤다. 얼굴에서는 선혈이 흘렀다. 위소보는 비 명을 질러 댔다. [아이구, 아이구, 제기랄, 가만히 있는 이 어르신을 왜 친단 말이냐?] 관의호가 냉랭하게 말했다. [제기랄 놈, 헛소리를 더하면 이 어르신의 마음이 혼란하게 된단 말이야. 캑캑. 더 지껄이면 네놈을 한 평생 말을 못하게 만들 줄 알아!] 위소보는 내심 마구 욕했다. (개자식, 네놈을 위해 격장지계를 펼치고 있는데 무슨 말방귀 같은 소리냐!) 그러나 위소보는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관의호는 조금도 늦추지 않고 연속 때리고 걷어찼다. 정극상은 여전히 일어나지도 못하고 땅에서 뒹굴며 얻어맞았다. 뒹굴다 홰 나무가 몸을 가로막았다.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관의호는 밤중의 야수마냥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입으로는 연신 기침을 쿨럭거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 [헤헤, 또 달아나 봐! 캑캑!] 관의호가 몸을 훌쩍 날리며 두 발로 정극상의 가슴을 밟으려 했다. 이 순간 정극상은 옆에 있는 돌걸상으로 자기 가슴을 막았다. 동시에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돌걸상이 부서졌다. 백여 근이나 되는 돌걸상이 관의호의 발길질에 사방팔방 부서져 날아올랐다. 관의호의 일 각(一脚)의 힘이 어찌 천 근만 되겠는가? 만약 정극상의 가슴을 내리 밟았다면 가슴팍은 가루로 변했을 것이다. 그 사이 정극상은 벌떡 일어나 '팔괘십변니추공'으로 관의 호와 맞섰다. 이것은 물 속에서 쓰는 공력이었다. 비록 육지에서 그의 위력을 제대로 낼 수 없었으나 그래도 일정한 위력은 있었다. 이 '니추공'은 독특한 내력으로써 일반 사람은 막아내기 힘든 공력이었다. 관의호의 육상 무 공은 아주 출중했지만 격노한 나머지 이따금 실수를 하곤 했다. 정극상은 지닌 무공이 비범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약점을 틀어쥐고 이따금 반격을 가했다. 관의호는 이따금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수십 차의 겨룸을 걸쳐 쌍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의호는 여전히 날렵한 신 법으로 정극상의 요해를 노리며 치명적인 살수만을 펼쳤다. 정극상은 다급한 와중에서도 대 노하여 소리쳤다. [어이, 친구! 자네는 나와 무슨 원수진 일이 있는가?] 관의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냐?] 정극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청아 아가씨 때문이란 말이냐?] 관의호는 '흥' 하고 대답 없이 '흑호도심'으로 정극상의 가슴을 전 광석화처럼 힘있게 쳤다. 정극상은 돌연 두 손을 축 드리우고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말하는 사이 얻어맞은 것이다. 관의호가 한 장 치면 정극상은 끝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명문정파 (名門正派)의 제자로 무방비 상태의 적에게 살수를 펼칠 수 없어 관의호는 내밀었던 주먹을 거둬들였다. 정극상은 비틀거리며 '왁!' 하고 피를 토했다. 관의호가 소리쳤다. [왜 맞서지 않는 게냐?] 정극상은 숨을 가쁘게 쉬며 겨우 말했다. 안면 가득히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맞서야 한단 말인가?] 관의호가 냉소하며 말했다. [네가 꼬리를 내린다고 캑캑! 내가 네놈을 죽이지 않을 줄 아느냐?] 정극상이 관의호에게 두 주먹을 맞쥐고 말했다. [나를 일 장에 죽여준다면 나는 저승에 가서라도 감사히 여기겠소.] 정극상은 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삶을 체념한 사람처럼 조용했다. 관의호는 상대의 언행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사실 수십 초의 겨룸을 놓고 볼 때, 자신이 약간 우세 를 점했을 뿐 상대를 사경에 몰아넣었다고 생각되지 않아 정극상의 말이 깊은 의미가 있음 을 알았다. 정극상이 무엇 때문에 눈을 감고 죽으려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지라 모두들 의아해 했다. 관의호는 여전히 들이칠 기세를 보이며 물었다. [정말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정극상은 아주 오만스럽게 답했다. [나는 비록 뛰어난 영웅 호걸은 아니지만 나라와 가문의 원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로 죽는 것은 두렵지도 않고 또 죽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소. 그러나 귀하께서 청아 아가 씨 때문에 나를 죽인다면 죽어도 무방하오!] 관의호가 대노하며 소리쳤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청아 아가씨를 염두에 두고 있단 말이냐?] 정극상이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혼들었다. [청아 아가씨에 대한 섕각이 있든 없든 우리 둘은 청아 아가씨와 인연이 없다오!] 관의호가 크게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정극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차례 실소를 터뜨리더니 처연히 대꾸했다. [청아 아가씨는 우아대를 따라 갔다오!] 관의호가 반문했다. [우아대라니? 그 사람은 또 누구요?] 그러다가 돌연 미산도에서 '사자후' 신공을 펼치던 사나이가 뇌리를 스쳤다. [그 사람은 바로 위소보의 결의 형제가 아니오?] 정극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관의호는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그 무엿이 불 끈 치밀어 올랐다. [그 우가라는 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소?] 정극상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도 모른다오. 청아 아가씨는 항상 노래를 불렀지....] 그의 귓전에는 청아의 정에 흘러 넘치는 노랫가락이 들려 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뇌까렸 다. [다리미로 다려도 펴지지 않는 주름살....] 정극상의 표정은 생사를 안중에 두지 않는 듯 태연히 노래만 불렀다. 관의호가 노기등등하 여 소리쳤다. [그 우아대라는 놈은 대체 어떤 물건짝이란 말이오? 대갈통을 틀어박고 꼬리만 내놓으니 신 분이나 성격이 음침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 아니오? 개자식, 마치 게으른 두꺼비가 하 늘의 두루미 고기를 먹어 보려는 격이구나! 제기랄, 이 어르신은 반드시 그 녀석을 죽여 버 리고 말겠다!] 정극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놈을 죽이면 청아 아가씨는 평생 슬픔에 잠겨 비통하게 지낼 것이오.] 관의호는 더욱 약이 올랐다. [그녀가 기뻐하건 말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내가 얻지 못하는 것이면 그놈도 얻 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이오!] 정극상이 싱긋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아니라오. 청아 아가씨가 기qqj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나 기쁘다오.] 관의호는 상대의 얼토당토 않는 말에 기가 막혔다. [흥! 대단히 선심을 쓰는구만.... 그 우가라는 놈이 지금 어디에 있소?] 정극상이 한숨을 길게 불어 냈다. [나는 모르오!] 관의호가 손을 내렸다. 정극상의 목숨을 빼앗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럼, 좋아. 이 어르신은 먼저 그의 형인 위소보를 죽여 버리지. 나중에 그놈이 찾아온다 해도 나는 무섭지 않아!] 그는 주의를 살피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위소보가 보이지 않았다. [어어, 위소보는?] 위소보는 이미 떠났다. 이전 같으면 한시라도 빨리 일곱 부인들을 만나지 못해 안달했을 것 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북경에 가서 처자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때 모처럼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면서 자기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숙고했다. (강호가 이처럼 험난한데 북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 가면 별 재미가 없을 것 같구나! 만약 북경으로 돌아가면 소황제가 묻겠지. '하독 어르신,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 왔는가? 황하치수는 어떻소?' 그럼 이 어르신은 '황상 폐하의 덕분에....' 제기랄, 항상 그 말 만 하면 소현자도 싫증내고 미워하겠지.) 십여 일 후, 위소보는 황하 치수 현지에 나타났다. 위소보는 원래 개봉 하독부로 가려 했다. 이 날 위소보는 개봉에서 멀지 않은 제방 위를 걷 고 있었다. 돌연 병사들이 나타나서 양쪽으로 줄줄이 늘어서며 위엄 있게 소리쳤다. [떠들지 말거라!] [어서 물러서거라!] 병사들이 북과 징을 치며 나발을 부는 소리가 하늘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오의 중간에 는 푸른 비단으로 단장한 커다란 가마가 오고 있었다. 이 곳은 황하의 커다란 언제(堰堤)였 다. 이 곳은 공사장 관리 외에 지방의 관리들은 별로 올 일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푸른 휘장의 가마는 조정의 큰 관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탈 수 없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그 모습을 보고 몹시 기뻤다. (그래도 근보 어르신은 인정이 있는 분이야! 내가 그를 구해 주었다고 마중을 오는 모양이 구나?)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득의양양하여 길 어귀에서 옷을 툭툭 털고 점잖게 근보가 가마에서 내 려 맞아 줄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가마가 위소보 앞을 오기 전부터 병사들이 몽둥이를 휘 두르며 소리쳤다. [사람 같지도 않은 물건짝들, 어서 비켜!] 위소보는 놀라다 못해 당황했다. (제기랄, 그래 이 하독 어르신을 붙잡으러 왔단 말인가?) 곰곰 생각해 보더니 문득 깨달았다. (원래 근보 어르신이 이 어르신을 마중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보러 가는 판이구나. 흥! 북경도 아니고 기껏 흙탕물 튕기는 황하 바닥에서 더러운 격식을 차려 누구에게 보이려고 이런단 말인가? 제기랄, 저 혼자 청렴이 어떻고 결백이 어떻고 불어대던 것이 모두 다 헛소 리였구나!) 위소보는 멋모르고 덤비다가 괜스레 공매나 얻어맞을 것 같아 언제 옆에 피해 섰다. 하지만 이 대오가 끊없이 장사진을 이룬 것을 보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 어르신이 목숨을 걸고 근보를 살려줬더니 제딴에 위풍을 부리고 이 어르신을 한쪽 눈으 로도 보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 근보가 하독인가, 아니면 이 어르신이 하독이란 말이냐?) 가마가 앞을 지날 때 위소보는 내심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제기랄, 일단 근보 놈을 가마에서 끌어내리자. 어쨌든 그놈에게 한번 망신을 줘야겠다.) 위소보는 훌쩍 대오의 증간으로 들어섰다. 이제 위소보의 신행백변은 무림고수들에게는 감 당할 수 없었지만 보통 병사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이 번쩍 한다고 느꼈을 때 위소보는 이미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 있던 병사들은 하늘이 무너진 듯 야 단법석을 치며 호통을 내리쳤다. [큰일 났다! 쥐새끼 만한 놈이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소백룡 어르신의 행차를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위소보는 가마 속으로 다짜고짜 뛰어든 지라 어두컴컴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욕을 했다. (근보 녀석은 정말 담도 크구나! 본 하독을 보고도 이렇게 위세를 부린단 말인가?) 위소보는 손으로 더듬어 붙잡으려 했지만 사람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더듬거리 는데 갑자기 물렁물렁하고 오싹한 느낌의 물건이 손에 닿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흰 뱀이었다. 위소보는 원래 뱀을 무서워하는지라 '악!' 하고 소리치며 그것을 던져 버렸다. 원 래 이 가마 안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상이 있었고, 그 위에 붉은 칠을 한 커다란 쟁반이 있 었는데 그 위에 커다란 뱀을 모셔 놓고 있었다. 위소보가 손으로 뱀을 내던지자 그놈은 다 시 쟁반 위에 떨어져 또아리를 틀었다. 이윽고 가마가 멈춰 섰다.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몰려 들며 칼이고 창이고 꼬나 쥐고 가마를 겹겹이 둘러쌌다. 위소보는 밖의 동정을 살펴보고 가 마 문을 닫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나가면 저놈들이 이 어르신을 칼탕을 칠 거야.) 이 때 한 사람이 소리쳤다. [네놈은 웬 놈인데 무례하게 감히 소백룡 어르신의 행차를 감히 막아선단 말이냐?] 위소보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어르신도 소백룡인데 강호에 평판이 괜찮은 모양이구나.)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 어르신의 이름을 알면서 이렇게 떠들썩할 필요가 있느냐?] 밖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 소백룡이십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은 성도 고치지 않고 이름도 고치지 않았는데 그래 소백룡이 아니고 무엇이겠느 냐!] 밖에서 말소리가 또 들려 왔다. [소백룡이라면서 어째 저렇게 생겼지?] 위소보가 말했다. [이 어르신의 어머니가 이 어르신을 낳았으니 이 모양이겠지.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느냐? 너 희들이 믿지 못하겠다면 근보를 불러오거라. 그가 보면 이 어르신이 소백룡인가 아닌가 하 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위소보가 서슴없이 가마 안으로 들어가고 또 소백룡으로 자처하며 하독 나으리롤 '근보'라고 부르는 것을 봐서 뭔가 있다고 여겼다. 위소보가 가마 안에 앉아 들으려니 갑자 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너무도 이상하여 문틈으로 본 즉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 고 있었다. 위소보는 병사들의 돌변한 태도가 크게 이상했다. [어이, 자네들은 왜 이러는가?] 한 나이 먹은 병사가 말했다. [소인들은 어르신인 줄을 모르고 무례를 범하는 죽을 죄를 졌습니다.] 위소보는 크게 흡족했다. [죽을 죄라니? 어서 이 어르신을 모시고 가서 근보를 만나게 하라!] 병사들은 '예!' 하며 가마를 메고 쏜살같이 달렸다. 위소보는 가마에 앉았으나 뱀을 보자 마 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는 자그마한 횐 뱀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다같은 소백룡 아니냐? 이 어르신은 너를 해치지 않을테니 너도 이 어르신을 물지 말거라. 그러면 어떻겠느냐?] 다행히도 그 뱀은 꼼짝하지 않고 쟁반 안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근보는 언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이전 하독과는 달리 황하 치수 현장에서 먹고 자고 했다. 그는 이미 소식을 받고 길옆에 서서 소백룡의 왕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위소보가 가마에서 내리자 근보는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여 재빨리 예를 취하며 물었다. [위작 나으리,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위소보는 쟁반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이 소백룡은 황상의 성지를 받들고 황하 치수를 위해 왔소이다.] 두 사람은 간단히 인사말을 나눈 후, 근보는 사람을 시켜 소백룡을 임시 관부에 보내고 자 기는 위소보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근보는 위소보를 상좌에 모시고 절하며 말했다. [이 비천한 근보는 구명 은인이신 위작 나으리께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이 비천한 몸이 오 늘까지 산 것도 모두 위작 나으리의 하해와 같은 은혜 때문입니다.] 위소보도 웃으며 답례했다. [근보 어르신,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황상의 덕 분이지요. 나야 황상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을 따름이지요.] 근보가 술상을 갖추라고 분부했다. 공사장의 연회는 아주 조촐했다. 검소한 생활은 근보의 습관으로 주석 역시 조촐했다. 위소 보는 침이 넘어가지 않고 흥취를 잃었다. (이 근보 영감탱이는 너무도 인색하구나. 이런 것으로 감히 구명은인을 대접한단 말인가?) 위소보는 어쩐지 마음이 내려가지 않아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데 근보가 재무 관리원을 불러 봉투를 가져오게 했다. 근보는 두 손으로 봉투를 위소보에게 올렸다. [위작 나으리, 이것은 위작 나으리의 노임이니 받아 주십시오.] 위소보는 내심 반가웠으나 겉으로는 사양했다. [나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어찌 노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근보가 거듭 권했다. [위작 나으리는 하독이시고 이것은 응당 받아야 할 나라에서 주는 노임입니다.] 위소보는 받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노임이라면 황상의 하사금이니 거절할 수 없어 명령대로 받겠습니다.] 봉투를 받아 쥐고 보니 적지 않은 것 같았다. 뜯어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으나 근보의 눈 도 있고 해서 보지 않고 물었다. [하독의 노임은 괜찮은가요?] 근보가 말했다. [노임은 다 같지요. 그러나 사람에게 달렸지요. 하지만 위작 나으리 같은 분이 하잘것 없는 노임을 받는다면 세상이 웃겠지요. 그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황상께 말씀드려 저를 구원한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상 이것은 황하 연안의 천만 백만 백성들의 복이지요. 그러니 노임도 자연히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위소보는 봉투를 쥐고 계면쩍게 웃었다. [많으면 받기 곤란한데?] 근보가 한 손을 저으며 낮게 말했다. [많지 않습니다. 겨우 50만 냥입니다.] 위소보는 크게 놀랐다. [오,오십만?] 근보가 송구스럽다는 듯 두 손을 비벼댔다. [이가촌(李家村) 언제를 곧 막게 됩니다. 지금 공사장에서는 겨우 이 정도 돈밖에 변통할 수 없습니다. 위작 나으리께서 더 쓰시겠다면 제가 며칠 후 방법을 강구해서 더 올리지요.] 위소보는 난생 처음 사양했다. [아니 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위소보는 큰돈을 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이전에 십여 세 때 황제의 성지를 받고 간신 오 배의 집을 수색할 때 하루에 45만 냥의 돈을 얻은 일이 있고, 대만에 가서 사흘 흠차대신을 하여 150만 냥을 끌어 모았으며, 운남 오삼계의 평서부(平西府)에 중매꾼으로 가서 오삼계의 며느리 건녕공주를 자기 처로 만들면서도 또 오삼계에게서 100만 냥의 뇌물을 받아먹었다. 그러나 여기는 황하 공사장이지 대만이 아니었다. 치하(治河) 8년 동안 청렴하게 살아온 근 보는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내는 대간신 오삼계가 아니었다. 위소보는 근보를 다시 한 번 쳐 다봤다. 근보는 머리가 다 빠지고 옷이 남루하며 비쩍 마른 상판을 봐서 50만 냥씩 내놓을 부자 같지 않았다 위소보는 또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늙은이의 모양새를 봐서는 개방 제자나 다를 바 없는 것이 백만장자 같지도 않아. 그렇 지, 이 어르신이 한 가지 배웠군. 돈이 있을수록 가난한 척하는 것이 청렴한 것이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돈은 써야 돈이지 쓰지 않으면 돈이 아니야. 이 어르신은 돈이 있으면 먼저 쓰고 보는 성 미니까 다른 것은 다 가장할 수 있어도 거지로는 가장할 수가 없지. 그런데 근래 2년간은 호주머니에서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이 적단 말씀이야. 어떻게 하든지 내 호주머니롤 채워야지.) 기실 근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건만 위소보는 오해했다. 근보는 이곳에서 8년간 치하하였지 만 청렴을 가장한 위선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근보는 위소보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 을 보고 의아해 했다. [위작 나으리,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고 계십니까?] 위소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정색을 하고 말을 돌렸다. [어르신,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늘을 동원했습니까?] 근보가 수염을 내리쓸면서 웃었다. [하독 어르신께 보고하지요. 이가촌 언제를 오늘 막게 됩니다. 그리하여 백룡대왕(白龍大王) 을 청했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아니 한 마리의 흰뱀이 대왕이라니?] 근보는 짐짓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치하 공사장에서는 예로부터 언제를 막으면 대왕을 청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 백룡대왕 은 용왕 가운데서 제일 효험이 있어서 한번 청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요행히 오늘 청했는데 마침 위작 나으리께서도 오시고 백룡대왕도 왕림하셨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한바탕 추켜올리니 위소보는 마음이 흐뭇해서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이 어르신이 알만 하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해서 결론적으로 백룡대왕과 내가 하독 인 셈이구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청하시오.] 근보는 감읍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함부로 청하겠습니까? 사실 나으리처럼 귀한 분은 하독이 아니라 앞으로 친왕이 되실 것입니다. 옥황상제께서도 도우실 것입니다.] 근보는 좀 쉬었다가 또 말했다. [그러나 이 비천한 몸은 그런 복이 없지요. 오직 고역으로 고산준령을 허물며 나무를 베고 길을 닦고 언제를 쌓아 강을 메울 뿐이지요.] 근보의 이 말은 위소보를 풍자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어 쨌든, 언제 막기는 치수 공사장에서 커다란 대사인데 백룡대왕이 왕림하고 또 하독 위소보 가 친히 참석했으니 그야말로 경사스러운 날에 더욱 광채롤 돋구었다. 위소보는 원래 이렇 게 왁자지껄 시끌벅적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근보가 오늘 이 언제 막기 의식에서 사회를 보라고 하니 두 말 없이 응낙했다. 근보는 이 틈을 타서 오늘 일을 위소보에게 맡기고 강물 의 정황을 시찰하러 떠났다. 언제 막기의 의식은 간단했다. 위소보가 먼저 향불을 피우고 절 을 하자 나머지는 관원들이 알아서 처리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의 기생 어머니는 귀중한 손님이 오면 절하고, 또 이 어르신은 소황제를 만나면 절하고, 이 공사장의 사람들은 또 이 뱀에게 절하니 결국 만나면 절하는 것이 천하의 도리 로구나.) 위소보는 흐뭇한 마음에 사흘 동안 바쁘게 보냈다. 그 사이 언제도 막고 '백룡대왕'도 돌려 보냈다. 그는 원래 소류망으로써 조정에 드나들며 부잣집 자식들의 습성을 배우고 방탕한 생활에 물들어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여자들을 희롱하는 것을 생활 가운데 낙으로 여기 며 살았다. 그런데 이 황막한 공사장에는 민부(民夫)들뿐이고 다른 사람이란 볼 수도 없어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었다. (제기랄, 노임까지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일을 해야 하지. 이 어르신이 근보의 50만 냥을 받 고 달아날 수야 없지 ) 근보는 한 번 나가면 십여 일씩 걸렸다. 위소보는 너무도 심심하여 아침밥을 먹고 무관과 함께 돌아다녔다. 이 날 저녁 한 초막집을 지나가는데 등불을 환하게 켜 놓은 집이 있었다. 그 안에서는 고래 고래 소리를 치며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소보는 정신이 번쩍 나서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활개치며 들어갔다. 민부들이 한참 도박을 하고 있었다. 수십 명 민부들이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보느라고 물샐 틈없이 둘러서 있었다. 위소보가 발꿈치를 들고 보니 네 사람이 앉아 주사위 노름을 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다짜고짜 한 마디 던졌다. [제기랄, 주사위 노름을 하면서 감히 이 어르신께는 알리지도 않는단 말인가?] 민부들은 모두 철탑 같은 사나이들이어서 위소보의 힘으로는 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 갔던 무관이 주먹질하며 소리쳤다. [제기랄, 하독 나으리께서 오셨는데 길도 비키지 않느냐?] 위소보는 망나니로 사는 가운데서도 도박판에서만은 도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재빨리 무관 을 발로 걷어차며 웃었다. [제기랄, 도박판에서는 아들 애비도 없는데 무슨 하독이고 민부고 나발을 불 게 있단 말인 가? 황상도 도박판에 들어서면 백성과 다 똑같단 말이야!] 상머리에 앉은 여읜 늙은이가 웃으며 답했다. [이 늙은이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관청 나으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처음 들었소이 다. 어서 자리를 내드리시오.] 민부들은 그 늙은이의 말을 듣고 비로소 비켰다. 위소보는 들어가 네 사람에게 돌아가며 인 사를 했다.1 [여러분 고맙소이다.] 그는 늙은이와 마주앉았다. 늙은이 앞에는 십여 개 은전이 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너절한 몇 푼 짜리밖에 없었다. 늙은이가 말했다. [우리 가난뱅이들의 노름은 귀인들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겁니다.] 위소보가 보니 동전만 주고받는 좀스러운 판이어서 그는 별로 흥취를 느끼지 못했다. [모두들 계속 재미있게 노시구려.] 늙은이는 선을 쥐고 주사위를 굼뜨게 던졌다. 네 사람은 도박에 재간이 없는지 잃는 것이 더 많았다. 노인의 손동작에는 약간의 속임수가 있었다. 늙은이는 이렇게 몇 판 놀며 이기기 도 하고 지기도 했다. 위소보는 옆에서 구경하다가 비록 좀스러운 노름이었지만 손이 근지 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제기랄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이 어르신이 모른 체 할 수는 없지.) 위소보는 웃으며 상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선을 쥐면 어떻겠습니까?] 늙은이는 천천히 주사위를 위소보에게 밀며 말했다. [마땅히 귀인께서 선을 쥐어야 하지요.] 위소보는 주사위를 건네받고 손에 살랑살랑 혼들어 보고는 이내 납이 들어 있음을 알아냈 다. 위소보는 기뻐했다. (이 어르신은 원래 이기려고 하지 않았는데 네놈들이 수작을 피운 주사위를 주었으니 이 어 르신이 네놈들의 돈을 한두 푼 먹는다해도 원망할 게 없겠지?) 그의 천부적인 속임수가 발휘되었다. 이렇게 몇 판 놀고 나자 늙은이의 은전이 거의 위소보에게 돌아왔다. 위소보는 이 몇 푼 돈 은 눈에도 차지 않아 다시 밀어내며 말했다. [여러분들, 재미있게 노시오.] 잃었던 몇 사람은 일시에 기뻐하며 자기 돈을 걷어 넣으려고 하는데 늙은이가 '에헴!' 하고 소리쳤다. 이 몇 사람은 늙은이를 크게 어려워하는지 슬금슬금 손을 거두었다. 위소보는 화 가 치밀었다. (제기랄, 그래 이 어르신을 망신시키자는 것이 아닌가?) 늙은이는 돈을 다시 위소보의 앞에 밀며 온화하게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지면 진 것이고 이기면 이긴 것이지, 다시 돌려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귀인께서는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상대의 말에 제법 뼈가 있다고 섕각했다. [귀하의 도박 품성은 아주 훌륭하구려.] 늙은이가 두 손을 맞쥐고 말했다. [과분한 말씀을 하십니다. 도박 품성이 곧 사람의 품성이지요. 따라서 이 늙은이는 도박 품 성을 지키지 않을 수 없소이다.] 이 몇 마디 말이 위소보의 마음에 들었다. 그 말은 평소 위소보의 입장이었다. [아주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인품이 무슨 놈의 쓸모가 있습니까? 천하에서 제일 중요한 것 은 도박 품성이지요!] 위소보가 일어나 돈을 온 방에 던지며 말했다. [모두 나누어 가지시오. 술을 마시고 계집들과 놀아야 할 것 아니오?] 민부들은 모두 자기 피땀으로 얻은 돈으로 노는 것이었다. 그런데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누가 싫어하겠는가? 일시에 서로 돈을 줍느라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돌연 늙은이가 그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순간 공중에서 떨어지던 은전이고 동전이고 갑 자기 간 곳이 없었다. 늙은이는 아주 태연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던진 돈은 일전 한 푼 사라지지 않고 몽땅 늙은이 앞에 모었다. 늙은이는 위소보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귀하의 도박 솜씨에 저는 탄복합니다.] 위소보는 멍하니 한참 동안 말을 못했다. (정말 모를 일이군. 이 늙은이 무공이 이렇게도 대단하단 말인가?) 위소보는 재빨리 두 손을 맞쥐고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의 그처럼 재빠르고 날렵한 솜씨에 저는 진심으로 탄복합니다.] 늙은이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우리 초민들이야 보고들은 것이 없어 귀하의 웃음거리나 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소보는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돈이야 개도 먹지 않는 물건인데 어르신께서는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늙은이가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개도 먹지 않는 물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말 속에 뼈가 있음을 알고 위소보는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그럼, 좋습니다. 이 돈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 형제들을 깔보는 것이라 하니 저는 분부대로 다시 받겠습니다. 노인장, 나중에 다시 봅시다.] 이렇게 말한 위소보는 널려 있는 돈을 걷어 품속에 넣고 떠나려 했다. 늙은이가 다시 제지 했다. [귀하께서는 떠나려고 하십니까? 저 사람들은 원래 좀스럽게 노는 사람들인데 우리 둘이 한 판 놀아 볼까요?] 위소보는 점점 늙은이가 두려워졌다. [저는 공무가 있어 가야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꼭 와서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온 집안의 도박꾼들이 나서서 위소보를 막았다. 따라 갔던 무관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그래, 감히 하독 어르신에게 이처럼 무례하게 대한단 말인가? 반란을 일으킬 작정인가?] 이렇게 소리치며 난초(亂招)를 휘둘렀다. 순간 늙은이가 긴 팔로 무관의 가슴 혈도를 가볍게 후려쳤다. 그러자 무관이 쥐었던 칼이 '쨍그랑!'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늙은이는 느릿느 릿한 동작으로 장난감을 다루듯이 무관을 당겨다 걸상에 앉혔다.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놀자고 하는데 자네가 막아나설 게 뭐 있는가?] 무관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아무 말도 못 했다. 위소보는 강호에서 이런 일을 수없이 겪어 보았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제기랄, 이 가난뱅이들은 이 어르신의 몇 푼 안 되는 돈을 먹어보자는 것이구나. 하지만 누 가 이길지 어찌 알겠는가?) 늙은이는 품속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 한 장은 50만 냥인데 나으리, 한번 놀아 보시겠습니까?] 위소보는 생각했다. (제기랄, 어전시위 노릇을 해도 시원치 않을 녀석이 무슨 노름이냐? 그래 몇만 냥이라고? 네놈의 딸과 손녀까지 팔아도 그렇게 되지 않겠는데, 흥! 수작을 피워 이 어르신을 꼬득이 려고?) 돌연 위소보는 속이 꿈틀했다. 뒤통수를 망치로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50만 냥! 왜 40만 냥, 60만 냥은 떠벌리지 않고 50만 냥을 들먹일까? 이 어르신이 노임으로 받은 돈이 50만 냥이니 아마도 오늘 일은 상서롭지 못할 것 같구나!) 늙은이가 또 물었다. [귀하! 놀아 보시겠습니까?] 위소보는 생각했다. 아니 결정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기랄, 못 놀아도 놀아야겠군.)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그 종이까지야 꺼낼 필요 없지요. 한 마디로 50만 냥이라면 됐지요. 옛말에 대장부 의 한 마디는 천 냥금이라는 말이 있지않습니까? 하물며, 어르신이야?] 그러나 늙은이는 여전히 종이를 내밀며 재차 독촉했다. [소인은 50만 냥을 댔소이다. 나으리, 어서....] 위소보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지요. 저는 30만, 50만 냥의 돈이라면 언제든지 재산을 팔아서 구할 수 있지 만 공교롭게도 오늘 가진 것은 몇 푼 되지 않소이다.] 늙은이는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나으리,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단번에 50만 냥을 먹었는데 단번에 50만 냥을 내면 되 지 않습니까?] 위소보는 내심 탄성을 터뜨렸다. (이 늙은이는 그 50만 냥에 눈이 어두웠구나. 도대체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을까?) 그는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심 머리를 굴렸다. 돌연 한 사람이 생 각나서 물었다. [어르신, 귀하는....] 늙은이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제가 누구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박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요 몇 년 운수가 사나워 잃기만 하고 따지를 못하니 오늘 받은 50만 냥은 아 무래도 남의 50만 냥이 되겠구나!) 그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럼 어르신이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놀겠습니까?] 늙은이는 그제서야 굳혔던 안색을 부드럽게 고쳤다 [귀하께서 선을 쥐었으니 귀하의 말씀을 따르지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늙은이는 무공 재간이 극히 고강하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도박을 하면 협잡꾼이기 십상이라 이기기만 하고 지는 법이 없으니 이 어르신은 이 늙은이의 상대가 될 것 같지 않 구나. 오늘은 이 50만 냥은 그저 떼일 것 같구나!) 한숨을 내쉰 위소보는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한 판에 이기고 지는 것을 결정하면 이 어르신은 본전도 찾을 기회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이 어르신은 단단히 밑지는 장사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우리 오판삼승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늙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귀하의 방식대로 합시다.] 위소보는 주사위를 달그락달그락 굴리며 남몰래 천패(天牌)와 지패(地牌)를 갈라놓고 이리 저리 몸짓을 하고 주사위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하늘의 천지신명, 땅속의 지장왕보살이시여! 널리 굽어살피사 모두 다 먹게....] 위소보가 주사위를 살짝 던지니 7점이었다. 그는 속으로 몹시 기뻤다. (오랫동안 도박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 어르신의 솜씨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있구나.) 그렇지만 겉으로 위소보는 아주 가련한 상을 하고 말했다. [재수 없군. 별십(別什)은 쥐지 말아야 하지.] 손을 내밀어 세번째 패를 쥐려 했다. 패쪽을 가져오기도 전에 늙은이가 상 위에 골패쪽을 섞었다. 위소보가 성을 내며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늙은이가 침중하게 대꾸했다. [귀하가 이겼소이다.] 늙은이는 자기는 골패를 쥐지도 않고 또 상대방의 패도 보지 않고 자기가 졌다고 했다. 위 소보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졌다고 인정합니까?] 위소보는 다시 골패는 섞으며 생각했다. (이 늙은이는 귀신같단 말야. 어느 새 내가 천패를 귄 것을 알았단 말인가? 이거 조심해야 겠군.) 두번째 주사위를 던졌더니 힘을 넣은 탓인지 상에서 한참이나 구르다가 9점이 나왔다. 늙은 이가 다시 말했다. [이번 판에도 귀하가 이겼소이다. 시간을 끌 것 없이 세번째 판을 합시다.] 이렇게 패도 쥐지 않고 또 보지도 않고 두 판이나 졌다. 위소보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골패를 아는데 이렇게 노는 것은 본 적이 없 어. 거 참!) 오판삼승에 위소보는 상대의 패도 보지 않고 두 판을 이긴 셈이다. 잠시 우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다음 판부터는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위소보는 사기가 올라 이러저러한 수작을 부렸지만 웬일인지 연거푸 두 판을 지고 말았다. 위소보가 최후의 결판을 내려고 주사위를 저을 때 늙은이가 위소보를 막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 그만 합시다.] '위작 나으리'라는 말을 듣고 위소보는 놀랐다. (이 사람은 이 어르신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 어르신은 왜 알아볼 수 없을 까? 제기랄 이 어르신이 더 놀면 필시 지고 말겠구나.) 위소보는 천천히 말했다. [무슨 작 나으리니 뭐니 할 거 있습니까? 그런데 저는 어르신과 초면인 것 같기도 하고 어 디서 많이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늙은이가 그의 말을 막았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우리는 그런 것에 관계치 맙시다. 골패가 재미 없는데 차라리 거래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위소보는 곰곰히 또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늙은이인데, 그래 그렇다면 그가....) 늙은이가 재촉했다. 두 눈에서는 시퍼런 한광이 쏘아져 위소보를 압도했다. [위작 나으리, 어쩌시겠습니까?] 위소보는 두려운 마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어르신이 말씀하십시오.] 늙은이는 안색을 풀며 제법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는 쓸데없이 무공 겨룸이니 뭐니 그런 하찮은 짓은 하지 말고 시원스럽게 거래 합시다. 이 한 장의 종이를 위작 나으리께 50만 냥에 팔겠습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 돈 50만 냥이 아까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단 말이야. 그래, 종이 한 장, 말 한 마디에 50만 냥을 준단 말인가? 그러면 이 어르신은 너무도 값이 없지.) 늙은이는 접힌 종이를 쥐고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한 장의 종이는 그냥 흰 백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 올려 뿌렸다. 마치 눈이 내리는 듯 종잇조각이 땅바 닥에 떨어졌다. 늙은이가 손을 털며 넌지시 바라보았다. [제가 이 몇 마디 말로 위작 나으리의 50만 냥을 바꾸자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위소보는 내심 욕을 마구 퍼부었다. (제기랄, 네놈의 말이 성지냐? 황상의 말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렇게 물어보는데 어느 놈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순간 늙은이의 음성이 갑자기 돌변했다. [위 동생, 황하 연안 천백만 사람들의 생명이 근보 한 사람에게 달렸고, 근보의 목숨은 위 동생에게 달렸네....] 그는 또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두 마디를 50만 냥에 살 수 있겠습니까?] 위소보는 놀라 소리쳤다. [황룡대협 어르신!] 이 몇 마디 말은 바로 위소보가 처음 황룡대협을 만났을 때 그가 위소보에게 한 말이다. 황 룡대협은 위소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 봐 그의 아들딸을 죽여 대를 끊겠다고까지 위 협했다. 이리하여 위소보는 할 수 없이 생명을 무릅쓰고 근보를 구했다. 후에 미산도에서 황 룡대협은 홍안통, 관의호 청아와 함께 위소보를 붙잡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황룡대협은 당 시 인피면구를 썼으므로 그외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비록 여위기는 했지만 이처럼 점잖은 풍모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위소보가 요모조모 살펴보니 그는 마치 시골마을 서당의 훈장 같았다. 위소보는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어르신, 그 동안 무고하십니까? 정말 하루를 보지 못한 것이 삼 년이나 지난 것 같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뵉게 되니 정말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황룡대협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위소보의 매끄러운 혓바닥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다. [뭘 그리 겸손해 할 게 있는가?] 위소보는 이런 무공 고수들을 만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예의 거짓말을 꺼냈다. [어르신을 뵈니 저에게는 떠오르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황룡대협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누가 생각난단 말이오?] 위소보는 비치지도 않는 눈물을 짜냈다. [저희 아버님 생각이 납니다. 어르신은 저의 아버님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위소보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지었다. (이 어르신의 애비가 누군지? 어느 외도꾼 개자식인지? 황룡대협이 이 어르신의 아버지라면 좋겠는데.) 위소보는 가죽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아주 존경하는 것처럼 말했다. [어르신,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르신께서 우리 아버님처럼 저를 많이 가르쳐 주십시 오.] 황룡대협이 크게 감동되어 말했다. [위 동생, 그런 말을 하지 말게나. 사실 말이지, 나는 늘 그대를 가만히 따라다니며 주시했 는데 좀 협잡기가 있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네.] 위소보는 속으로 대노했다. (제기랄, 그래 그것이 주시하는 건가? 맨날 뒤롤 따라 다녔다면 이 어르신의 애비가 아니라 아들놈 새끼구나!) 황룡대협이 부드럽게 말했다. [위 동생이 개봉 하독부에서 근보가 10만 냥을 주는 것을 받지않고 도리어 도리를 들먹이며 날카롭게 꾸짖는 모습을 보고 나는 무척 감동했다네.] 그 날 하독부에서 근보가 사람을 시켜 위소보에게 10만 냥을 건네주었다. 그 때 위소보는 받지 않고 도리어 '근보 어르신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본단 말인가? 황하 연안 백성들은 대 대손손 황하의 재해를 받아 그 괴로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우리는 그들의 곤란을 해 결해 주지 못하면서 어찌 그들에게 부역을 더 증가시키겠는가?'라고 말했다. 기실 위소보는 재물을 자기 목슴과 같이 여겼다. 그런데 그 10만 냥을 보고 왜 마음이 흔들 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강희는 일찍이 위소보의 성품을 알고 떠날 때 '만약 소계자가 돈 에 눈이 어두워 잘못을 저지른다면 이 큰처남은 그대의 안면을 봐 줄 수 없다네'라고 엄포 를 놓았던 것이다. 황룡대협은 그 과정은 몰랐다. 그저 지붕 위에서 위소보가 거절하는 말을 듣고 크게 감동되었다. 위소보는 히히 웃었다. 그는 강희가 자신을 착한 인물로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황룡대협이 의아해서 물었다. [왜 웃는가?] 위소보는 정색을 했다. 아직 상대가 확실한 친구가 아님을 깨달았다. [제가 말하더라도 어르신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 날 저는 어르신이 지붕 위에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저 들개나 오소리가 껄덕거린다고 여기고 들개, 오소리, 황가리, 들고양이, 쥐새끼, 자라새끼 등 그 짐승들의 조상들을 욕했지요. 이것은 절대 어르신을 욕하는 것이 아 닙니다.] 황룡대협은 그의 말에 노여워하지 않았다. [이 늙은이야 곧 죽어 묻힐 몸, 몇 마디 욕 따위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네.] 그는 가볍게 미소를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오늘 황하 연안 주현(州縣)의 형제들이 여기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네. 위작 나으리, 무엇 때문인가 생각해 보게나.] 위소보는 가볍게 대꾸했다. [생각할 게 있습니까? 도박을 놀면 되지요.] 황룡대협이 준엄한 음성을 토해 냈다. [황하의 재해가 이처럼 심하니 도박을 놀 흥취도 없다네. 강호에 들리는 말에 따르면 하독 어르신께서는 50만 냥의 재해금을 받으러 왔다지?]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욕했다. (요 개자식 같은 황룡대협은 개새끼보다 냄새를 더 잘 맡는구나! 이 어르신이 노임을 받은 것을 알고 털어 보려고 왔구나.) 황룡대협은 벌떡 상에 올라서서 소리쳤다. [여러 형제들, 어서 위작 나으리의 크나 큰 은덕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시오.] 한 무리의 도박꾼들은 일제히 인사를 했다. [황하 연안의 뭇 백성들은 하독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이 많고 모두가 호걸 같은 사나이들이어서 그 소리는 우렁우렁했다. 위소보는 속이 떨 렸다. (그래, 이것이 감사를 드리는 것이란 말이냐? 완전히 협박이지!) 그래도 위소보는 대장부의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내심 어차피 빼앗길 것 기왕이면 호기롭게 털리자고 작정했다. 그는 50만 냥을 꺼내고 웃으며 말했다. [돈은 개도 먹지 않는 물건이지요. 또한 사람이 쓰던 개가 쓰던 다 똑같지요.] 위소보의 말은 양주 사투리로 말이 빨라 알아들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는 혀만 놀리면 욕이 나오곤 했다. 혹간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감격하여 구명 은인으로 여기고 위소보를 세상에서 보기 힘든 청렴한 관리로 여겼다. 황룡대협이 소리쳤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하독 어르신께서는 치하를 위하여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이 많은 돈을 재해 구제에 쓰라고 내놓았소. 우리는 하독 나으리 앞에서 정중히 맹세를 해야 하오.] 황룡대협이 소리쳤다. [어서 술을 가져오게나!] 사람들이 술 한 단지를 메어다 상 위에 놓았다. 황룡대협의 수도(手刀)는 칼과도 같았다. 손으로 술단지 윗부분을 한 바퀴 긋자 마치 칼로 벤 듯이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잘 드는 칼로도 이렇게 벨 수는 없었다. 뭇 사람들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황룡대협이 비수를 꺼내 위소보에게 주며 말했다. [하독 어르신, 어서!] 위소보는 겁이 덜컥 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칼로 어쩌자고 이러시오?] 황룡대협이 말했다. [50만 냥은 적은 양이 아니오. 천만 백만 이재민들의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라오. 오늘 하독 어르신께서는 형제들을 인솔하여 혈주(血酒)를 마시고 맹세를 하도록 합시다.] 위소보는 겁이 났지만 짐짓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미 50만 냥을 내지 않았습니까? 몇 방울의 피를 짜내는 일은 그만둡시다.] 황룡대협이 그의 말을 되받았다. [위 동생, 사실대로 말해 주지. 이 모든 사람들은 재해를 받고 살길이 없어 온 사람들이라 오. 눈이 달아오르면 무슨 짓이나 가리지 않고 한다네.]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은 50만 냥이나 내고 눈깜짝하지 않는데 그들이 나를 어쩐단 말이오?] 황룡대협이 또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이 민부들은 관부에 너무 시달려 관청 나으리들의 말을 개방귀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믿지 않는다오. 위 동생이 혈주를 마시면 진심이라고 믿으며 영원히 후회 하지 않고 시름을 놓을 것이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돌연 수십 명 '도박꾼'들이 소리쳤다. [하독 어르 신, 먼저 혈주를 드십시오.] 위소보는 가슴이 덜렁했다. (혈주를 마시고 맹세하면 꼭 그대로 해야 한단 말이지. 이 어르신이 맹세야 그 때뿐이지. 그 대로 하든지 않든지 너희들이 상관할 게 있겠느냐?) 헝세를 보니 피를 빼지 않고는 될 것 같지 않았다. 위소보는 호기롭게 팔소매를 걷고 웃으 며 말했다. [형제들!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맹세합시다. 이것은 이 위가의 영광이지요. 이 위가가 조상 들에게 효성을 다했더니 이 많은 형제들과 영웅 호걸들을 알게 되는구려.] 속으로는 또 욕지거리를 했다. (제기랄 놈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망나니 같은 개자식들을 만난단 말인가? 나중에 이 어르신은 이 놈들을 하나하나 개봉부에 보내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치고 삼천 리 밖의 변경으로 보내 노역질을 시키고 말 테다!) 위소보는 속시원히 욕을 다 하고 황룡대협처럼 팔소매를 높이 걷었다. 비수로 팔을 그었다. 팔에는 흰 자리가 날 뿐이었다. 위소보는 고개를 들어 황룡대협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어르신의 칼이 잘 들지 않는군요!] 황룡대협이 냉랭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의 가죽은 두꺼워 보통 비수로는 벨 수 없지!] 위소보는 황룡대협이 풍자하는 말을 듣고 아프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살짝 상처를 내 안간힘 을 다해 피를 겨우 두 방울을 짜냈다. 눈에도 차지 않는 피를 술단지에 넣고 비수를 황룡대 협에게 돌렸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도 이 어르신의 가죽이 엷으니 망정이지, 두터우면 대포를 쏘아야 할 텐데 그러면 여려 형제들이 다칠 것이외다.] 황룡대협은 비수로 팔을 깊숙이 베고 술단지에 피를 떨구어 넣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 람 피를 술단지에 넣었다. 술은 붉은 색으로 변했다. 황룡대협은 혈주를 한 사발 떠서 위소 보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위소보는 한 모금 겨우 마셨다. 술맛이 약간 비릿했다. 그는 또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 어르신은 무슨 술이건 다 마셔 보았지만 개피술은 처음이로구나!] 위소보는 '개'라는 말만 나직이 빨리 말했다. 말하고 나니 좀 후회되었다. (제기랄, 이 어르신도 개가 되었군! 어리석게도 이 어르신은 자신까지도 욕을 하는군!) 황룡대협은 기타 사람들과 함께 아주 정중히 술 한 사발을 들이켰다. 혈주를 다 마시고 황 룡대협이 맹세했다. [하늘의 신(神)이 위에 있고 땅의 신(神)은 아래에 있거늘 하독 위소보 나으리께서 희사하신 50만 냥을 황하 연안 수재민들에게 돌린다. 만약 누가 자기 호주머니에 넣으면 황하에 던져 고기밥이 되게 하고 절대 변심하지 못하게 한다!] 뒤이어 황룡대협은 당장 그 자리에서 어느 주(州) 어느 현(懸)은 얼마라며 인구와 재해 정 황에 따라 합당하게 50만 냥을 나누었다.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황룡대협은 두 손을 맞쥐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 위작 나으리께서 우리를 믿으신다면 우리를 형제로 여기십시오. 그 어떤 분부 가 있더라도 우리들은 물 속이나 불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위소보도 두 손을 맞쥐고 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후에 형제들께서 돈이 떨어지시면 이 위가를 찾으십시오.] 모두 흩어져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황룡대협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어디서 온 분인지 어서 들어오십시오.] 말이 끝나자 누군가 발끝으로 상을 밟고 사람들 머리 위로 날아왔다. 한 마리 새처럼 유연 한 신법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놀랐다. 황룡대협이 손을 놀려 상대를 거머쥐었다. 상대가 몸 을 피하려는 순간에 황룡대협은 평소의 인피면구를 썼다. 황룡대협은 그의 앞가슴 요혈을 노리며 한 주먹 갈겼다. 그러자 상대는 맥없이 요혈을 가격 당했다. [어느 무례한 놈이....] 황룡대협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니, 자네 였구만!] 위소보는 상대를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아하, 자네가 왔는가?] 바로 폐병쟁이 어린 거지 관의호였다. 관의호는 병에 걸린 몸인지라 가슴 요혈을 눌리자마 자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위소보는 관의호를 보고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오늘 요놈한테 놀아나고 또 황룡대협을 만나 50만 냥을 떼었지. 제기랄, 좀 화 풀이라도 할겸 저 관가 놈을 혼내 주라고 해야겠다.) 관의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캑, 캑! 위....방주님, 어서 여동생을 구하시오.] 위소보는 여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대뜸 관심 있게 물었다. [어느 여동생을 말인가?] 관의호가 가까스로 말했다. [청아 여동생을!] 위소보는 문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 청아 화냥년 말이오?] 관의호가 애걸했다. 평소 그답지 않게 다급해 했다. [방주님! 우리 개방 사람이라는 것을 봐서 청아 아가씨를 구해 주십시오. 늦으면 그녀의 생 명이 위험합니다.] 위소보는 차갑게 대꾸했다. [흥! 이제야 방주님을 알아본단 말이냐? 너희들은 이 때까지 이 어르신을 어떻게 대했느냐? 악은 악으로 대한다고 청아 그 화냥년이 죽으면 쌤통이지! 그런데 네놈은 왜 그리 조급해 하느냐?] 황룡대협이 갑자기 눈을 번뜩거리더니 소리쳤다. [청아.... 청아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관의호가 앙상한 손을 들어 말했다. [저.... 황하에....] 황룡대협은 '그래?!' 하는 소리와 함께 관의호의 앞가슴을 찼다. 뒤이어 지면을 박차더니 간 곳이 없었다. 관의호는 황룡대협의 발에 채여 뱃속에서 물이 샘물처럼 솟구쳐 나왔다. 그 물 이 흘러나와 땅이 질퍽해졌다. 위소보는 그 까닭을 알았다. (오늘 청아 화냥년이 적수를 제대로 만나 황하 물에 던져진 것이 분명하구나. 청아 화냥년 은 육지에서의 무공은 괜찮지만 물에서야 이 소백룡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어쩌지 못하니 낭 패를 보지 않을 수 없지.) 위소보는 관의호의 모양새를 보고 짐작했다. (이 녀석은 다급한 김에 다짜고짜 그년을 위해 덤비다가 골탕을 먹고나서 도리가 없으니 이 어르신에게 구해 달라고 온 게 틀림없어.) 위소보는 속이 시원해서 물었다. [어느 호랑이 간을 삶아 먹은 놈이 감히 청아 아가씨를 황하 물에 던졌단 말이냐?] 관의호는 연신 물을 토해 내며 답했다. [그 정.... 정극상....] 위소보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제기랄, 정가라는 놈은 죽을 지경으로 청아 화냥년을 따르던데 왜 그랬을까?) 위소보는 원수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즐겨 했다. 게다가 무공고수인 황룡대협이 싸우게 되니 더욱 마음이 근질거렸다. 그는 소리쳤다. [모두들 이 어르신을 따라 황하로 나가 개 같은 녀석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자!] 모두들 밖으로 달려나갔으나 사람 그림자는 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第21章. 천지회와 다시 마주치다 황룡대협이 떠나자 초막 안의 사람들도 따라나섰다. 이 틈을 타서 위소보를 호위하던 무관 은 살길이 났다고 줄행랑을 놓았다. 커다란 초막에는 위소보와 관의호 둘만 남았다. 위소보 는 욕했다. (제기랄, 방금까지도 이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떠들더니 시키기도 전에 모두 달아 났구나. 황룡대협인지 흑룡대협인지 모두들 당나귀를 부려먹고 잡아먹는 배은망덕한 녀석들 이야.) 관의호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와 같이 있는 것이 가장 싫었다. 위소보 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관 동생, 그대는 여기서 푹 쉬시구려. 이 어르신은 청아 아가씨를 구해 오겠소.] 위소보는 재빨리 나와 버렸다. 이 초막 집은 황하 옆에 있었다. 제방에 올라서자 강가에 황룡대협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둥근 달은 중천에 걸려 대지를 대낮처럼 비추고 쟁반 같은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사람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듯했다. 때는 바로 장마철이라 널따란 황하는 누런 물줄기가 끊임없이 이 어지는 일망무제였다. 이 거세찬 물결 속에 두 남녀가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황룡 대협과 뭇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대대손손이 이곳에서 자랐지만 이 거세 찬 물결을 보고만 있을 뿐 어찌할 재간이 없었다. 위소보는 대뜸 알아보고 황룡대협에게 알 려주었다. [저 여자는 청아 화냥년이고 저 남자 놈은 정극상입니다.] 그러면서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정극상 놈은 '팔괘십변니추공'인지 뭔지 하는 것을 배워 가지고 물에서 재간이 대단하 다지만 청아 화냥년은 언제 저처럼 고상한 무공을 배웠을까?) 돌연 위소보는 자기 머리가 우둔함을 느꼈다. (저 정가 놈이 청아에게 딱 들러붙어 애를 먹이니 청아는 그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했겠지. 그러니 정가 놈은 겁이 나서 청아에게 그 신비한 무공을 선물로 알려주겠다고 꼬득였을 것 이다.) 황룡대협은 위소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청아! 위험하오. 어서 올라오시오!] 청아는 깔깔 웃으며 물 속에서 소리쳤다. [이 곳이 좋은데 올라가 뭘 하겠습니까?] 황룡대협이 또 소리쳤다. [올라와! 듣지 못했느냐?] 청아가 물살을 가르며 응수했다. [어르신, 성은 왜 내세요? 재간이 있으면 내려오세요. 아주 좋은데요!] 황룡대협은 할 수 없이 정극상과 이야기를 했다. [정작 나으리, 당신은 당당한 국성님의 후대로서 강호에서도 명망이 있는 사람인데 젊은 아 가씨를 괴롭히다니 너무 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오?] 청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어르신,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정 오라버니는 저를 데리고 헤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왜 저를 괴롭힌다고 그럽니까?] 청아는 다시 정극상에게 말했다. [정 오라버니, 저 노인네의 말을 듣지 말고 저쪽으로 헤엄쳐 가요. 저 노인의 투덜거리는 말 이 들리지 않게 말이에요!] 위소보도 소리쳤다. [그래, 안쪽으로 헤엄쳐 가거라. 염라대왕이 촛불을 켜고 너희들 둘이 결혼식장에 들어서기 를 기다린단다.] 황룡대협은 위소보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가 마지못해 내렸다. 위소보는 겁이나 고개를 움츠렸다. 황룡대협이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위작 나으리, 또다시 헛소리를 했다가는 불초의 손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청아 화냥년이 네놈의 할망구라도 된단 말이냐? 무엇 때문에 그처럼 청아 년을 감 싸준단 말이냐?) 위소보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황룡대협은 늘 어두컴컴한 곳에 대가리를 처박고 숨어 있는 녀석인데 청아를 이렇게 걱정 하다니 혹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은지 모르겠구나....) 이런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황룡대협이 정극상과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정작 나으리, 청아 아가씨는 그대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소! 그러다가 청아 아가씨가 잘못되는 날이면 노부는 그대를 용서하지 않겠소.] 정극상이 음침한 소리로 대꾸했다. [어르신, 어르신이 그처럼 청아 아가씨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녀를 대신하여 응낙해 주십시 오.] 황룡대협이 물었다. [무엇을 응낙한단 말인가?] 정극상이 목소리를 돋구었다. [저의 처로 되라고 말입니다.] 황룡대협은 대노하여 폭갈을 터뜨렸다. [이놈!] 청아가 깔깔거리며 끼어 들었다. [정 오라버니. 당신도 참 어쩔 수 없군요. 청혼을 하려면 저에게 할 것이지 남을 시킬 필요 가 있나요?] 정극상이 가볍게 냉소하며 말했다. [황룡대협은 남의 사사로운 일에 잘 나선다고 강호에 소문이 자자하다오. 청아 아가씨가 나 의 처로 되겠다고 응낙해도 만약 황룡대협이 안 된다면 물 속의 달이나 거울 속의 꽃처럼 되어 모든 일이 허사로 되고 말 것이오..] 청아가 말했다. [이 몸으로 말하자면 강호에서 천마(天馬)가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듯 하는데 누가 나를 이래라저래라 하겠어요? 제가 시집을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고 싫으면 안 가는 거예요.] 정극상이 청아의 팔을 쥐고 애걸했다. [청아, 그럼 대답해 주시오!] 청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 말이 정 오라버니의 진심인가를 알아봐야 해요.] 정극상이 급히 말했다. [진심이오, 정말 진심이라오!] 청아가 눈짓을 하며 말했다. [귀를 가까이 대세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낯짝 두꺼운 놈들! 제기랄, 청아 화냥년이 이제는 백주대낮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꼬리까지 치는구나. 만약 어머니가 계신 여춘원으로 보냈으면 그 곳의 기생년들을 모조리 누를 수 있 을 텐데.) 청아가 정극상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정극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려 왔다. [청아, 청아! 내가 달콤한 말로 그대를 속인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내 마음을 진심으로 이 야기한다고 생각하시오?] 위소보는 참지 못해 야유를 퍼부었다. [제기랄, 구린내 나는 정가 집안 놈들! 네놈들도 여인네들에게 들어붙는 재간은 별볼일 없구 나. 이 어르신이 한 가지 알려주지. 세상 여자들은 달콤하게 어르는 걸 좋아해!] 청아가 말했다. [정 오라버니, 들으셨나요? 저 위 방주는 여자를 꼬드기는 재간이 출중해 부인을 일곱이나 얻고 또 문아 계집년과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어요. 정 오라버니도 그런 재간은 배워야지요.] 정극상이 한참 잠잠했다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이상 나는 그대를 속이지 않겠소. 청아가 나를 죽이려면 아무 때나 죽여도 나는 사나이로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겠소. 그러나 청아가 나더러 하라는 일이 나라 와 가문의 원한과 관계되는 일이라면 절대로 못 하겠소이다!] 위소보는 아주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기에 국가고 가문이고를 따지는 것일까?) 위소보는 머리를 재빨리 돌려 다른 생각을 했다. (그 날 미산도에서 정가 놈은 나에게 녹정산 장보도를 내놓으라고 하며, 나라와 가문의 원 한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또 청아의 일이 떠올랐다. (이전에 청아 화냥년은 볏짚을 칼처럼 쓰면서 이 어르신의 팔에 상처를 입힐 때 장보도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위소보는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아가 정극상을 도와 장보도를 얻고 또 그에게 시집을 가면 정극상 놈은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지.) 녹정산 장보도의 얘기만 떠올리면 위소보는 몸서리치고 식은땀이 배어 났다. (이 놈과 저 화냥년이 이 어르신을 보는 것이 봐서 수상치 않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연놈들을 서로 싸움을 시켜야 한다. 나중에 맥이 빠져 둘 다 죽어 버리면 눈에 든 가시를 뺀 것과 같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위소보는 목청을 돋구었다. [청아 아가씨, 절대 꾀임에 빠져들지 마시오. 그놈은 믿을 만한 놈이 못 되오.] 청아가 눈을 부라리며 앙칼진 일성을 뱉어 냈다. [허튼 소리 말아요!] 위소보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 [나는 천지신명에게 맹세할 수 있다오.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오. 정가 놈이나 나는 모두 작 나으리라오. 그대도 알겠지만 작 나으리 노릇 하는 사람치고 처가 대여섯 없는 사람이 어디 에 있겠소?]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위 방주는 부인이 일곱이지요.] 위소보는 얼씨구나 상대의 말꼬리를 이었다. [내게 비하면 저놈은 훨씬 더 많다오.] 위소보는 입에 침을 튀기며 험담을 늘어놓았다. [나는 저놈보다 적고, 저놈은 나보다 더 많소. 생각해 보시오. 저 녀석이 대만에 있을 때는 부인이 서른일곱이나 됐었소. 투항한 후 해징공을 시키고 황상께서는 집 생각을 할까 봐 또 부인 열여섯이나 얻어 주었다오. 삼십칠 더하기 십육 하면 부인이 쉰셋이란 말이오. 그래 나 보다 많지 않소?] 정극상이 노해 말했다. [이놈, 헛소리하지 말거라!] 위소보는 계속 정극상을 몰아세웠다. [이 어르신의 말이 헛소리라구? 청아 아가씨, 절대 그놈의 달콤한 말에 속지 마시오. 저놈이 부인이 쉰셋이나 있으면서도 지금 도처를 싸돌아다니며 여인네들을 꼬드기고 있다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 어르신의 부인 아가와 결탁해서 남편을 죽이자고 했다오. 다행히 아 가가 양심이 있었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어르신은 비록 푸른 모자는 쓰지 않았을 지라도 풍류 귀신이 된 지 이미 옛날일 것이오!] 아가를 들먹이자 정극상은 펄펄 뛰며 말했다. [아가는 원래 나와 마음이....] 위소보가 말했다. [옳아, 아가가 원래 너의 처가 맞지. 그래, 백만 냥에 이 어르신에게 팔지 않았느냐?] 정극상이 안색을 붉히며 떠들었다. [그건 나를 핍박을 했기 때문이야!] 위소보는 일단 승기를 잡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점점 허튼 소리를 하는군. 네놈의 무공은 비할 바 없이 출중하고 나의 무공은 보잘것 없는 데 이 어르신이 네놈을 어떻게 핍박한단 말이냐? 다른 사람은 속여도 무림태산 오대산 강호 의 남두북두야(南頭北頭爺)는 속이지 못하지.] 한마디 한마디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정극상은 딱히 대답할 꺼리가 없었다. 위소보는 청아 를 보고 소리쳤다. [청아 아가씨, 절대로 저놈한테 시집가지 마시오. 저놈은 제 목숨을 구하기 바쁘면 무엇이나 다 팔아먹는 놈이라오. 그대를 백만이나 삼백만 냥에 팔아도 쉰셋이나 되는 부인이 있다오. 정말 시집가면 녹아 날 건 그대밖에 없소!] 청아가 물었다. [정 오라버니, 그것이 정말인가요?] 정극상이 말하기 전에 위소보가 또 나섰다. [정말이오. 거짓말이 절대 아니오. 청아 아가씨, 생각해 보시오. 그대같이 곱고 얌전한 색시 가 어찌 쉰네번째 처로 되겠소? 그대가 정말로 시집을 가면 그야말로 고섕을 사서하는 격이 라오.] 황룡대협은 원래 위소보의 헛소리에 반감을 가졌지만 이 때만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 었다. 이것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청아를 구할 궁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정극상은 성 이 나서 펄펄 뛰었다. 젊은 시절의 정극상은 국성로서 아가는 그토록 그를 사랑했으나 정극 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위소보는 기회를 노려 아가를 빼앗으려 했다. 후에 죄진 몸으로 조정에 투항한 정극상은 각박해지는 인정 속에서 받기 어려운 시기와 능욕을 당하고 보니 인간 세상의 참된 정이 귀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너무 때가 늦어 정극상 은 영원히 아가를 잃고 말았다. 정극상은 이런 처지에서 청아를 겨우 만났다. 그리하여 그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나 청아 의 마음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늘 청아에게 '팔괘십변니추공'을 배워준다는 명목으로 청아를 황하에 끌고 들어갔다. 여기서 청아의 허락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청아 또한 자신이 목적하는 바가 있어 그를 따라 황하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남몰래 청아를 사랑했지만 자기 처지를 생각하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던 관의호는 정극상 의 그 음모를 알고 물에 뛰어들어 청아를 구하려 했다. 관의호는 육지에서의 무공은 정극상 을 훨씬 초과했다. 그러나 물결치는 황하에서 그의 재간은 별다른 도리가 없었고 정극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정극상외 손아귀에서 물을 실컷 먹고 겨우 혜어나와 사람들 에게 구원을 청했다. 정극상은 어르고 다그치는 방법으로 청아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 서 만난다고 공교롭게도 오늘 위소보가 이렇게 나타나서 훼방을 놓았다. 정극상이 한 손으 로 청아를 받쳐들고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연후에 조심스레 물었다. [청아, 나를 보시오. 청아가 저 소류망의 말을 믿든 믿지 않든 나의 부인으로 되겠소, 말겠 소?] 청아는 웃는지 마는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 어쩔 작정인가요?] 정극상이 우울해지며 반문했다. [나는 이전에 아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소. 그대는 무엇인지 알겠소?] 청아가 고개를 가볍게 혼들었다. [모르기는 하지만 아가를 팔아 버린 것이겠지요?] 정극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사내 대장부로서 자기가 얻지 못할 것이라도 남에게 간단히 건네주지는 말아야지!] 정극상이 뚫어지게 청아를 바라보았다. 차디찬 물에 몸서리쳐 그런지 정극상의 음험한 눈길 이 무서워서인지 청아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정 오라버니, 나를 언덕까지 보내 주세요!] 이 때 날이 점점 밝아 오며 별과 달이 사라지고 동녘 하늘이 은백색이 되었다. 아침 노을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니 황하에는 금물결이 넘실거렸다. 정극상이 청아를 오래오래 바라보 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만 해!] 청아가 놀라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 오라버니, 무엇을 알았단 말이에요?] 정극상이 다소 처량한 음성으로 물었다. [청아, 나는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구려.] 청아가 피식 웃었다. [무슨 요구인지 말해 보세요!] 정극상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복이 없는 사람이라 여동생과 한 쌍이 되어 하늘 높이 훨훨 날아다닐 수 없을 것이 오. 우리가 살아서 한 자리에 들지 못하더라도 죽어서나 한 쌍의 부부로 될 것을 바라오.] 돌연 정극상이 억지로 청아의 입을 맞추려 했다. 청아가 놀라며 소리쳤다. [왜 이러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극상의 입술은 청아의 입을 막았다. 밝은 대낮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 이 쳐다보는 앞에서 대담하게 입을 맞추자 청아는 성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몸부림치 며 소리쳤다. [정말 나에게 이처럼 억지로....] 청아는 불이 나게 정극상의 뺨을 쳤다. 정극상이 얻어맞고 흉악한 눈길로 청아를 쏘아보았 다. 황룡대협도 크게 놀라 소리쳤다. [이 정가 놈아! 꼼짝 말아라!]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정극상은 청아를 놓아 버렸다. 청아가 구원의 손길을 저었으나 거센 파도는 야수 마냥 삽시 에 청아를 삼키고 말았다. 황룡대협이 급히 소리쳤다. [청아!] 그는 아무것도 혜아리지 않고 강가로 달려갔다. 몇몇 사나이가 겨우 그를 붙들어 안았다. 정 극상이 팽이처럼 몸을 돌리자 그의 몸이 점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발까지 나왔 다. 마치 황하는 물이 아니라 누런 비단 같았다. 정극상은 그 비단위에 태연스레 서 있었다. 위소보는 놀라며 말했다. [제기랄, 정가 놈이 요술을 피우나?] 정극상이 수면에서 하늘을 향해 슬프고도 처량하게 소리쳤다. 마치 그 소리는 호랑이나 이 리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정극상은 다시 팽이처럼 몸을 돌리더니 물 속으로 들어가 그 자 취를 감추었다. 해가 솟자 도도한 물결은 더욱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황룡대협은 높이 높이 외쳤다. [청아, 돌아와! 청아야....] 황룡대협은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 정신없이 황하 물결을 따라 달렸다. 정극상과 청아는 모두 위소보의 적수였다. 위소보는 원래 그들이 서로 싸워 다 기진맥진하여 다시는 애를 먹 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 둘이 정작 차디찬 황하의 물에 몸을 던지니 측은한 마음 을 어쩔 수 없었다. 위소보는 혼자서 맥없이 임시 관사로 돌아왔다. 근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위소보는 너무도 심심하여 혼자서 주사위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시간을 보냈 다. 그러던 사홀째 되는 날이었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도 흥취가 없어 위소보는 속으로 하루 동안 실컷 잠을 자고 근보가 오든 말든 그 곳을 떠나려 했다. 저녁 무렵 위소보가 달콤하게 잠들었는데 누가 와서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손님이 왔습니다.] 위소보는 잠결에 물었다. [누구요? 어르신이 자는데!] 그 사람이 황급히 말했다. [위작 나으리, 어서 일어나십시오. 황상께서 오셨습니다.] 또 옆에서 어진 목소리가 들렸다. [소계자가 아주 피곤한 모양인데, 좀 자게 놔두게나.] 비록 잠결이지만 '소계자'라는 말은 똑똑히 들렸다. 위소보는 벌떡 일어났다. 침대 앞에 강 희가 서 있었다. 위소보는 다급히 무릎을 꿇고 어쩔 바를 모르며 말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졌소이다. 죽을 죄를....] 강희가 말했다. [우아대, 그대는 이제 그만 돌아가게나.] 우아대는 '예!' 하고 나갔다. 방안에는 강와 위소보만 있었다. 강희는 위소보의 엉덩이를 걷 어차며 욕을 했다. [제기랄, 소계자야, 어서 일어나!] 위소보는 '제기랄!'이라는 황제의 말을 듣자 시름을 놓고 꾸벅 절하고 물었다. [황상 폐하, 언제 오셨습니까?] 강희가 뒷짐을 지고 걸으며 말했다. [이미 십여 일이나 황하를 따라 공사장을 돌아보았소. 오늘 근보를 만나 자네가 이 곳에 있 다는 것을 알았네.] 강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소계자, 자네 하독 노릇을 괜찮게 했더구만!] 위소보는 웃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위소보는 아주 흐뭇했다. 솔직히 나를 듯이 기뻤다. (다행히도 이 어르신이 공사장에 먼저 왔으니 말이지 하마터면 꼬리가 잡히고 말 뻔했구나. 그래도 이 어르신이 영명하단 말씀이야. 그 신기묘략이야 제갈지량도 따를 수가 없지!) 강희가 말했다. [근보가 자네를 아주 칭찬하더군!] 위소보가 말했다. [이 소계자는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거야 친구들이 저를 추켜주느라고 그랬겠지 요....]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사흘 보지 못하면 눈을 비비고 본다고, 제기랄, 소계자도 사양할 줄 아는구만. 기실 자네 말이 틀리지 않네. 근보가 확실히 그대가 잘 한다고 했소. 제대로 말하면 그는 자네 때문에 자기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얻었지.] 위소보는 이런 때에 황제를 더 치켜올려야 한다고 여기며 생각했다. [아니지요. 황상께서 근보의 재간을 잘 헤아리신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근보가 제아무 리 재간이 있고, 이 소계자가 아무리 그를 위해 앞뒤를 돌아다녀도 방법이 있겠습니까?] 강희는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했다. 강희가 깊은 사색에 잠겼다고 여긴 위소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희는 한참 걷다가 생각나 말했다. [내 보건대 남에게 의지하여 뜻을 이룬다는 것은 옳지 않고, 남에게 의지했다가 일을 망쳐 버리면 더욱 낭패지.] 강희가 8세에 황제로 되고 14세부터 집정하여 황제의 보좌에 앉고 보니 군국대사를 한 몸에 지녔으므로 마음대로 말할 수도 없고 걸음 한 발자국이라도 황제의 존엄을 보여야 했다. 오 직 어린 시절에 사귄 위소보만이 한가한 때면 서로 만나서 민간에서 쓰는 하류적인 언어, ' 제기랄'과 같은 말을 썼다. 위소보는 비록 지위는 높지만 사회 밑바닥 건달 출신으로서 아 무런 학문과 재간도 없는 인간이어서 올려 바치는 말재간도 점잖은 왕공대신(王公大臣)들보 다 훨씬 못했다. 그러나 황제와 위소보는 서로 마음이 맞았다. 강희는 옆에 아무 사람도 없 음을 알고 나직이 말했다. [소계자, 태후 마마와 내가 왜 자네를 북경으로 오라 했는지 아는가?] 위소보는 속이 뜨끔했다. (아마도 사십이장경 때문이겠지.) 그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말했다. [소인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성지를 받고도 여태껏 돌아가지 못했으니....] 강희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아니, 그대를 탓할 것 없네.] 강희는 앉으며 위소보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정에서는 싸움을 하려고 하오. 자네도 불러오고 우리 여러 대신들과 이 일을 상의해 보 려고 하네.] 위소보는 크게 놀랐다. [황상, 삼번(三藩)을 다 멸하지 않았습니까? 또 무슨 싸움을 하려고 하십니까?] 강희가 웃으며 준엄하게 답했다. [이번 싸움은 자네와 관계가 아주 많다네. 자네의 맹형(盟兄)을 치려 한다네!] 위소보는 몹시 놀라며 말했다. [소인.... 소인은 황상의 말씀을 정말 모르겠습니다.] 강희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어느 해 자네가 양주에서 거얼단(葛爾丹)과 서로 사이좋게 보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위소보는 그제야 생각났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위소보는 양주 여춘원에 갔다가 어찌되어 그만 서장 의 대라마 싼제(桑結)와 몽골 왕자 거얼단의 손에 붙잡혔다. 위소보는 몸을 빼기 위해 급한 순간에 좋은 생각이 문득 떠올라 그들과 결의 형제를 맺었다. 싼제 대라마가 큰형이 되고 거얼단 왕자가 둘째로 되고 위소보 녹정공은 셋째로 되었다. 그 때 오삼계가 싼제, 거얼단과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위소보는 싼제와 거얼단을 회유하기 위해 강희를 대신하여 싼제를 라마교의 수장으로 하고 거얼단은 준거얼한이 되는 것을 응낙했다. (작자 주:위소보는 '준거얼한(准喝爾汗)'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강희에게 보고할 때 거 얼단을 '정거얼호(整個兒好)'를 하게 했다고 말했다.) (역자 주:한어 '정거얼호'는 우리말로 '모두 좋다'임.) 오삼계의 두 기둥을 찍어 버리기 위하여 강희는 정말 싼제와 거얼단을 그대로 책봉했다. 그 러나 지금 강희는 거얼단과 싸움을 하려고 성지를 내려 위소보를 북경에 돌아오게 했다. 위 소보는 마음이 들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황제는 '정거얼호'의 일을 모두 나에게 위임하는데 이 어르신이 잘못하면 위사보로 되겠 군!) 강희가 말했다. [그 거얼단은 대역무도한 자이네. 그가 무슨 '정거얼호'인가? 그놈이 청해(靑海)와 서장(西 藏)을 빼앗은 후, 흥! 황하 연안에 와 말을 세우고 황하 물을 먹이겠다고 한단 말일세.] 위소보도 노했다. [제기랄, 천하는 황상 폐하의 천하인데 거얼단이 무슨 명목으로 황하에 와서 말을 세우고 물을 먹이겠다는 말입니까? 그들 몽골에는 물이 없는가? 그놈들의 말이 기갈이 나 죽었단 말입니까?] 강희가 재차 노성을 발했다. [그뿐이 아니라네. 자네의 맹형은 또 나찰과 결탁하여 서양 사람들의 총과 대포로 우란푸퉁 (鳥蘭布通)까지 쳐들어오려고 하오.... 소계자 뭘 그리 생각하고 있는가?] 위소보가 급히 말했다. [달리 생각하는 것은 없습니다. 황상 폐하, 우란푸퉁은 어느 곳입니까?] 기실 황제가 거얼단이 나찰과 결탁한다고 말할 때 위소보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은 나찰의 공주와 같이 잔 적이 있었지. 그래도 그녀는 이 어르신을 커다 란 벼슬에 봉했단 말이야. 원래는 친구나 친구의 처와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지만 거얼단 은 나의 맹형이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속닥거리다니 정말 친구로서의 의협심도 없단 말 이야.) 위소보가 이런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강희는 전혀 몰랐다. 강희가 계속 말했다. [우란푸퉁은 북경과 7백 리 떨어져 있소. 만약 자네의 맹형이 일어나면 북경은 아주 위험하 오. 아마도 계엄을 실시해야 할 것 같네. 그러면 쌀값도 한 섬에 석 냥씩 오를 것이네.] 위소보는 생각했다. (소황제는 정말 소심하기 그지 없구나. 황제가 쌀값까지 관계할 건 뭔가? 이 어르신은 녹정공 노릇을 하며 있는 돈을 쓸 생각하면 서 쌀값이니 고깃값이고 전혀 관계치 않고 사는데.) 강희는 침울한 기색으로 걸으며 말했다. [자기가 관할하는 곳에 누가 마음대로 쳐들어오게 하겠는가? 소계자, 미안하지만 그대의 맹 형과 싸워야 하겠네!] 위소보는 그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강희는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반란이나 반역 행위 의 기미가 조금만 있으면 절대로 용서치 않았다. 위소보는 강희의 말을 듣고 식은땀이 났다. 그는 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상 폐하, 애당초 소인은 황상께 그 두 사람은 인품이 그리 좋지 못하니 완전히 믿지 마 시고 약간은 경계해야 하며, 그들의 동태를 보건대 우리를 돕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우리를 치려 한다고 아뢰었지요.] 위소보는 확실히 이 말을 강희에게 한 적이 있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위소보 는 생각했다. (그렇지. 이 어르신은 또 한 가지를 배웠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우선 제 살 길을 마련해 놓아 야 하지. 만약 그 때 이 어르신이 황상에게 이 형제들의 좋은 점만 말했다면 오늘 황상은 이 어르신을 그들과 다 똑같은 놈이라 해도 변명거리가 없지.) 강희가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두려워 할 것 없소! 그 때 그대는 아주 잘 했소. 거얼단과 싼제와 결의 형제를 맺고 오삼계의 두 날개를 베어버려 짐은 결과적으로 삼번을 소멸하게 만들지 않았는 가! 그 때 자네는 참 잘 했네!] 그제야 위소보는 시름을 놓고 말했다. [황상 폐하의 은덕에 감사를 드리나이다.] 강희가 경서를 읽듯이 한자 한자 뇌까렸다. [밥은 한 술 한 술 먹어야 하고 싸움은 하나 하나 해야지. 이것이 하나 하나 격파해야 한다 는 말이네. 알만 한가?] 위소보가 '예!' 하고 대답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 하나 격파(擊破)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어쨌든 당나귀를 부려먹고 잡아먹는다는 말과 같겠지. 이 어르신은 천지회와 신룡교를 접촉하면서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았으니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소황제는 무슨 영문인데 이 어르신을 아마도 암탉(鷄婆)으로 본단 말인가?) (역자 주:위소보는 몰상식하여 격파(擊破)를 계파(암탉)로 들었다. 한어 '격(擊)'과 계(鷄)'는 동음임.)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언짢았다. (이 어르신이 암탉이라면 알도 낳을 수 있을 텐데. 나의 결의형제를 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황제는 필시 지금 잡을 시간이 없어 그러지 언젠가는 이 어르신을 잡아먹고 말 것이 아닌가? 이 어르신이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격이군. 제기랄, 필히 달아나야겠다. 달아나지 않 으면 나는 성이 위가가 아니고 소황제의 성으로 고치겠다.... 제기랄, 그런데 소황제 성이 뭐 더라?) 위소보는 이렇게 제 궁리만 하고 황제도 자기 생각만 했다. 위소보는 황제가 의심할까 염려 되어 웃으며 말했다. [황상 폐하, 우리는 언제 출정합니까? 이 소계자가 선발대로 나서겠습니다. 제가 거얼단을 붙잡아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치겠소이다.] 강희가 물었다. [소계자, 맹형을 쳐도 될까?] 위소보가 답했다. [황상 폐하, 이 소계자가 왜 부인 일곱만 두었는지 그 뜻을 아십니까?] 강희는 웃으며 욕했다. [제기랄, 그 주제에 일곱이면 됐지!]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원래 소계자는 그만하면 됐겠지만 원래는 여덟이었습니다. 팔선녀가 바다를 건넌다고 했는 데 제기랄 놈의 저 거얼단 맹형이 여덟번째 부인을 빼앗아 갔습니다.] 원래 거얼단의 부인 아기(阿琪)는 구난사태의 제자이며 아가의 언니이다. 어느날 양주 여춘 원에서 위소보는 소전, 아가 등 여자들과 한 침대에서 서로 안고 뒹굴었다. 그 때 위소보는 아기에게 몽환약을 먹였다. 그리고 그녀를 두 번이나 침대에 안아 올렸다가 주저하며 다시 내려놓았다. 이리하여 아기는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위소보가 이만한 사정을 봐준 것은 거 얼단의 무공이 무서워 그랬지 사실 그가 맹형의 면목을 보았거나 아기가 앞으로 둘째 형수 로 된다고 여기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위소보는 이 일을 오히려 거얼단이 자기 처 를 빼앗았다고 억지를 썼다. (제기랄, 거얼단 녀석은 무슨 면목으로 나와 형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황상이 이 번에 그 녀석을 쳐야 이 어르신의 화풀이라도 할 텐데.) 강희는 신중하게 말했다. [나는 어린 몸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선황들에게 미안한 일은 하지 않았소. 그러나 친히 병 사를 거느리고 싸워본 적이 없어 전에부터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소. 그러나 지금 서장 의 싼제가 손을 쓰려 하고 있는 때 거얼단을 치면 외각을 때려 한복판을 뒤흔드는 격이니 싼제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될 것이오.] 강희가 돌연 말했다. [소계자, 거얼단을 칠 때 짐이 친히 출정하겠네!] 위소보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그럼 제가 선발대로?] 기실 이 때 위소보의 섕각은 싸움인 것이 아니라 아기 생각뿐이었다. (아기 그 화냥년이 지금 어떤지? 아기가 거얼단을 따르면 정말 한 떨기의 고운 꽃이 쇠똥에 꽂힌 격이고, 거얼단이 소황제를 이기지 못하면 옥석같은 아기를 구덩이에 던지는 격이니 참으로 아깝구나. 차라리 이 어르신의 처가 되었다면 팔선녀가 되어 바다나 건넜을 텐데.) 강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네. 만약 자네를 선발대로 내세우면 거얼단이 비웃을 것이네!] 위소보는 학문이 없을 뿐이지 그리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강희의 말을 듣고 자신의 역량을 깨달았다. (내가 황제의 자그마한 대신으로서 어떻게 병사를 거느리고 또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소보는 낯이 두껍게도 재차 간청했다. [황상 폐하, 촉나라에 대장이 없어 요화(廖化)가 앞장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희는 이상하게 섕각하고 말했다. [소계자, 이전보다 학문이 대단히 늘었구만. 어디서 그런 고상한 말들을 배웠는가? 한 자도 틀리지 않네!] 위소보는 더욱 유식한 말을 늘어놓았다. [황상 폐하를 따라다니면 목석 같은 사람도 적지 않은 학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강희는 이 한 마디가 마음에 들었다. 만청에서는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몹시 중시했다. 따라서 그 책을 군사의 교과서로 삼았 다. 위소보는 다년간 황제와 만청의 귀족들과 사귀면서 그들이 모두 '삼국연의'에 큰 비중을 두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 앞으로 말할 때 성어를 함부로 쓰지 말게나. 왜 우리 청조에 대장이 없겠는가? 짐의 외삼촌 동국강(董國綱), 그리고 대장 비양고(費楊古), 이들은 모두 선발대로 갈 수 있지!] (작자 주:후에 강희는 거얼단을 치려고 두 번이나 동국강과 비양고를 파견했다. 동국강은 전 쟁터에서 장렬히 순직하고 비양고는 거얼단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나중에 거얼단은 강희 36년에 약을 먹고 자결했다.) 강희가 잠시 여운을 두고 생각하다 말했다. [거얼단을 토벌하기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다네. 이 일은 아마 소계자가 해야 할 것이네. 그러니 이번에 짐과 함께 북경으로 돌아가야 하겠네.] 위소보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다짜고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후과가 어떤 것인 지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결과였다. 위소보는 그 연고를 묻 고 싶었으나 감히 묻지 못했다. 바로 이 때 시위총관 다륭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황상 폐하께 고합니다. 근보가 뵈옵고저 하나이다.] 강희가 소매를 흔들었다. [들어오게 하라!] 근보는 다륭을 따라 들어와 강희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며 문안을 올렸다. [소인 근보가 황상 폐하를 배알하옵니다.] 강희가 천천히 말했다. [근보, 이 몸은 황하 공사장을 180리를 다녀왔소. 언제(堰堤)들이 튼튼하고 강물이 맑아졌소. 그대의 치하 방안은 실정에 알맞는 것 같구려. 이 몸은 아주 기쁘게 생각하오.] 근보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황상 폐하의 성찰과 위작 나으리의 훌륭하신 방안이 있어 이루어진 것입니 다.] 강희는 크게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좋네. 붓을 가져오게!] 강희는 필묵을 날리더니 큼직한 종이에 한 수의 시를 썼다. 그 뜻은 이러했다. 방하우우식,육어출심궁(防河紆旴食,六御出深宮) 완가구민은,감류차속궁(緩軻求民隱,臨流嘆俗窮) 하년동가장,차일시소통(何年樂稼穡,此曰是疏通) 이저근로의,안란조진공(已著勤勞意,安瀾早秦功) 치하를 위해 밤낮 근심걱정, 밥맛을 잃어 구중궁궐을 홀연히 떠났네. 가마 타고 세상을 돌아보니 도도히 흐르는 백성들의 탄식소리. 언제야 즐겁게 밭갈고 씨뿌릴꼬 보아하니 오늘의 일에 의지할 밖에. 만민의 부지런한 노력 하루빨리 결실이 있기를 바라노라! (작자 주:강희의 원래 시구는 '청사고'를 보라.) 강희는 다시 한 번 상세히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근보에게 내림'이라고 썼다. 황제가 이 시 를 써 주자 근보는 감동되어 만면에 눈물투성이가 되어 말했다. [황상 폐하의 은혜 이처럼 넓으신데 소인은 죽어도 그 은혜 갚기 어렵습니다.] 위소보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제기랄, 근보 늙은이는 정말 못난 놈이지. 그 무슨 돈도 아닌데 저렇게 눈물, 콧물을 흘리 기까지 할 게 뭐람?) 무식한 그로서는 황제의 친필 어시(御詩)가 얼마나 영광된 하사품인 줄 알지 못했다. 강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근보, 어서 일어나게!] 근보는 만면의 눈물을 씻지 못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근보 늙은이는 우는 재간이 나보다 훨씬 뛰어난데? 눈물을 흘리고 씻지도 않다니, 남들 이 모두 잘 보라는 얘기구나. 나도 앞으로는....) 강희가 다시 위엄을 갖추었다. [짐이 집정 초기에 서재 기등에 하무(河務), 조운(漕運), 삼번(三:藩) 여섯 자를 써 놓았소. 나는 이 세 가지 일 가운데 '하무'를 첫자리에 놓았소. 어째서 그랬는지 알겠소?] 근보는 곧바로 그 말을 받았다. [소인이 섕각건대 삼번(三藩)은 보기에는 사납지만 실상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고, 조운은 사 람의 혈맥과 같아 소통만 잘 된다면 생명에 그리 염려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황하는 전국에 가로놓여 심장과 같기에 하무를 삼대요정(三大要政) 가운데 첫자리에 놓았다 고 생각하나이다.] 위소보는 이전에 황제의 서재에서 이 여섯 자를 들은 적이 있고 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무엇 인지도 모르거니와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위소보는 강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 고 생각했다. (근보에게 이 어르신은 또 한 가지를 배웠군. 남을 추켜 올리자면 학문도 있어야겠구나. 하 지만 그 학문을 배우자면 고생스러워 어찌 배울 수 있겠는가? 이 어르신은 골치가 아파 평 생 배우지 않을 것이다.) 위소보는 반지르르한 혀놀림으로 만사롤 임기응변해 나갈 뿐 어렵고 고생스러운 일은 좀처 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강희가 근보를 보고 말했다. [자네가 나의 뜻을 알고 또 아래 백성들의 정황을 알고 있으니 계속 이 하독일을 해야 하겠 네.] 근보가 머리를 땅에 박으며 감읍했다. [이 비천한 소인은 견식이 짧아 이 중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위작 나으 리의 구체적인 지도가 있고 또 황상께서 이와 같이....] 강희는 그의 말을 질러 말했다. [아니, 위소보에게는 다른 일이 있다네.] 위소보는 생각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몇 달 동안 하독 노릇을 헛했군! 어쩌다 얻은 50만 냥 노임도 황룡대 협한테 떼었지 하독 노릇도 못 하니 톡톡히 밑졌군.) 근보는 인사하고 나갔다. 다륭이 급히 들어와 말했다. [황상 폐하! 이 곳에는 강호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습니다. 속히 환궁하셔야 합니다.] 강희는 여러 번 강호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때마다 적지 않게 시끄러웠다. 이 말을 듣고 황 제는 근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다륭이 나직이 아뢰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황룡대협이라 합니다.] 강희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황룡대협? 또 그 사람이구만. 나는 오면서 그 이름을 많이 들었는데 그 사람은 황하 연안 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야!] 위소보도 대화 중에 끼여들었다. [그 사람은 저도 봤습니다. 황하 연안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 기에 그는 조정에 애를 먹일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강희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럴수록 그런 황룡대협이 무섭단 말....] 그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황하 연안은 수재로 재해가 심하고 민심(民心)이 좋지 못한 곳이었다. 황룡대협과 같은 사람들이 민심을 농락하여 시기를 엿보다가 일어나면 그 결과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강희는 황룡대협을 숨어 있는 우환거리로 여겼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심중 깊은 곳에 감추었다. [그럼 오늘 떠나기로 하자.] 나가려던 다륭을 향해 강희가 다시 일렀다. [우아대를 부르시오.] 우아대가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위소보가 살피니 전보다 기골이 강건해 보였다. 강희는 우아대를 향해 엄명을 내렸다. [우리는 오늘 돌아가겠네. 자네는 위소보를 잘 보살펴 후에 북경으로 돌아오게. 만약 그에게 무슨 차질이 생기면 자네도 돌아올 생각하지 말게!] 강희는 마침내 떠났다. 사홀이 지났지만 위소보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우아대는 자기 책임 이 중대함을 느끼고 물었다. [둘째 형님,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위소보가 생각했다. (이 어르신이 이렇게 떠나면 너무도 근보의 좋은 노릇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다소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왜 그리 조급해 하나? 제기랄, 이 곳 밥이 이처럼 맛이 좋은데 우리가 석 달을 파먹어도 근보는 거렁뱅이가 되지 않아!] 우아대가 울상을 지었다. [둘째 형님, 황상께서 그처럼 무거운 짐을 저에게 맡겼는데 제 사정도 좀 살펴 주십시오.] 위소보는 우아대를 힐끔 보며 말했다. [황상께서 자네를 크게 믿으시는 듯하네.] 우아대가 말을 받았다. [그건 모두 다륭 형님이 말한 탓이지요. 그 날 내가 위작 나으리를 찾다가 다륭 형님을 만 났지요. 그랬더니 나를 데리고 황상 폐하 앞에 가서 이 동생의 좋은 말을 몇 마디 했습니 다.] 위소보는 문득 깨닫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왜 이걸 생각지 못했나? 그렇지! 우리가 결의 형제를 맺을 때 다륭도 있었으니 황상 에게 동섕이라고 알리며 잘 말했겠지.) 위소보가 말했다. [동생,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을 하오? 다륭 형님도 그대를 생각해서 그랬겠지!] 우아대는 위소보의 표정이 몹시 재미있어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받았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큰 형이나 둘째 형의 저에 대한 관심이야 더 말할 게 없지요!] 위소보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면 됐소. 동생이 가서 알아보시오. 근보 영감이 우리를 언제 환송하겠는가를 말이오.] 우아대가 가서 한참 있다가 돌아왔는데 근보는 오지 않고 쥐꼬리수염이 난 관리가 왔다. 우 아대가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를 가리켰다. [할 말씀이 있으면 위작 나으리께 하십시오.] 위소보는 속이 꽁해서 쌀쌀하게 말했다. [근보 어르신은 통이 아주 크구만. 감히 어전시위도 청해 올 수가 없구만!]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께 보고 드립니다. 근보 어르신께서는 언제를 막으러 떠나셨습니다. 떠나시며 위작 나으리께 죄를 짓게 되어 크게 황송하다 하셨습니다.] 위소보는 천장만 보며 '흥!' 했다. 우아대가 관리를 두둔했다. [근보 어르신이 그만한 예절을 모를 분이 아니지요. 하지만 공무가 더 엄중하니....] 위소보는 우아대가 그를 감싸 말할 줄은 몰랐다. 위소보가 말했다. [예절? 물론 근보 어르신은 알겠지. 그런데 황제로부터 그 무엇을 받았으니 이젠 예절이니 뭐니를 다 잊었겠지?]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황망히 대답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근보 어르신은 정말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을 분입 니다. 청컨대 제발 그 말씀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위소보의 노기를 좀 가라앉힌 후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봉투를 꺼냈다. [근보 어르신이 나가실 때 이것을 위작 나으리께 드리라고 분부하였소이다.] 위소보는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그건 뭔가?]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말했다. [5만 냥인데 위작 나으리께서 꼭 받으시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많지 않은 5만 냥이지만 없기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위소보는 비로소 생각했다. (네놈이 좀 일찍 꺼내 놓았더라면 이 어르신이 성이라도 내지 않지!) 위소보의 말투는 비로소 온화해졌다. [그것 참 안 되었군. 근보 어르신께서 이처럼 염려할 거야 있는가?]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손을 비벼 댔다. [아니, 공연한 말씀을....] 위소보는 우아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아대도 챙겨 줄 생각이었다. [이 어전시위 동생은 어쩌겠습니까?]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준비 했소이다.] 또 한 장을 꺼내 우아대에게 주었다. [나으리, 받으시오.] 우아대는 받아 바로 위소보에게 주었다. 위소보는 받지 않았다. 슬쩍 보니 5천 냥이었다. 위소보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신세였 지만 돈만은 보면 벼락같이 알아냈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었다. 위소보는 은 표를 우아대에게 건넸다. [근보 어르신의 성의인데 거절하지 말고 받아 두게나!]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가 그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청했다. [위작 나으리께서 분부가 계시면 근보 어르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양 마시고 말씀하 십시오.] 위소보는 잠시 생각을 했다. [내일 말 두 필을 준비해 주십시오.] 우아대가 정색을 하며 나섰다. [위작 나으리, 마차가 좋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 내일 마차 세 대를 준비하십시오.] 위소보가 이상해 물었다. [우리 둘이서 마차 세 대나 해서 뭘하나?] 우아대가 설명했다. [나의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나더러 그의 가속을 함께 북경으로 보내 달라고 했소이다.] 위소보는 흥이 나서 웃으며 물었다. 예의 그 지저분한 혓바닥이 날쌔게 움직였다. [젊고 예쁜가?] 우아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지금 병이 있어 사람을 볼 수도 없고 바람을 맞아도 안 된다 고 하였습니다.] 위소보는 넌지시 짚어 넘겼다. [아마도 예쁜 여자겠지!] 우아대는 반신반의의 시선을 굴렸다.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위소보는 손뼉을 치며 떠들었다. [자네는 정말 모르는구만. 정숙하고 예쁜 여자들은 바람을 싫어한다네. 그러니 꼭 예쁜 아가 씨가 틀림없어!] 쥐꼬리 수염을 한 관리는 이튿날 황막한 황하 연안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아주 화려한 마차 세 대를 얻었다. 위소보가 첫 마차에 앉고 우아대가 마지막 마차에 앉았다. 마차가 떠나기 전에 우아대가 위소보에게 부탁했다. [둘째 형님, 이번 길이 그리 순탄할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다른 일을 보지 말고 갑시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동생이 있는데 무슨 다른 일을 볼 게 있겠나? 걱정하지 말게나!] 우아대도 싱긋 웃음을 띠어 보였다. [조심하면 나쁜 일이 없지요.] 기실 우아대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위소보 본인도 속히 돌아가려 했다. 위소보는 이번 길 에서 겪은 풍파가 너무도 많아 하루속히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 부인들을 만나볼 생각 뿐이 니 오히려 그가 더 조급해 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지만 마차 안에 꾹 참고 앉아 있었다. 위소보는 낮잠을 청하다가 심심풀이로 혼자 주사위도 던져 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심심했 다. 문득 생각이 났다. (우아대가 뭘 하고 있는지? 이 녀석이 이 어르신을 돌보지 않고 침이나 흘리며 자고 있지나 않는지?) 마차에서 바깥을 보려고 휘장을 슬쩍 걷자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바람에 하마터면 손을 얻어맞을 뻔했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소리쳤다. [제기랄, 눈이 멀었는가?] 마부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위작 나으리, 노여워 마십시오. 지금 강호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데 심상치 않습니다. 꼼짝 말고 계셔야 합니다.] 위소보는 노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강호 사람들이 다 뭔가? 자는 호랑이에게 코침 놓기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자신도 강호 사람들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위소보는 혼자 있기 겁나서 마부에게 말했다. [저 우 나으리를 오라고 소리치오!] 마부가 고개를 저었다. [위작 나으리께 말씀드립니다. 우 나으리께서 소인에게 분부하시기를 의외의 사고를 대비해 서 누구도 자기 마차를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다시 노성을 터뜨렸다. [제기랄, 우아대는 호랑이 같은 재간을 가졌으면서 간덩이만은 모기만 하구만. 그렇게도 겁 을 낸단 말인가?] 또 속으로 생각했다. (셋째의 무공이라면 강호에서 누구도 감당할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처럼 조슴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을 만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다 이 어 르신까지 일을 당하면 크게 재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겁도 났다. 마차가 좀 쉬게 되었다. 마부는 그들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밥 도 안에서 먹게 했다. 위소보는 어두컴컴한 마차 안에서 먹자니 화가 치밀어 욕이 나왔다. [제기랄, 징역살이를 시키는 건가?] 마차는 계속 길을 떠났다. 위소보가 마차에서 내릴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자그마한 주막 집 문어귀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차 두 대는 보이지 않았다.위소보는 놀라서 마부에게 물었 다. [어이, 나와 같이 온 우 나으리는?] 마부는 낮은 목소리로 아주 신비스럽게 대답했다. [우 나으리는 지금 남몰래 위작 나으리를 보호하고 있소이다.] 마부는 위소보를 방안에 모시고 술로 접대를 했다. 위소보는 잠들었지만 그는 자지 않고 옆 에서 지켰다. 이튿날 날이 밝자 위소보는 또 마차에 앉아 길을 떠났다. 그러나 우아대는 여 전히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평탄치 않은 길에 들어서자 이전 일이 생각났다. (제기랄, 전에 이 어르신은 그 마부한테 단단히 손해를 봤지. 그때 청아 화냥년이 마부로 가 장하고 이 어르신을 관제묘에 끌고 가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 어르신이 운수가 좋아 황룡대 협이 나타나서 청아 화냥년을 족치고 나를 살려 주었지.) 위소보는 이 마부가 아주 공손히 대해 주는 것 같지만 그의 행동을 봐서 별로 시름이 놓이 지 않았다. (언젠가 소황제가 나를 보고 말하기를 이전의 일을 생각하고 훗일을 어떻게 하라고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어쨌든 주의하라는 말인데. 그렇지, 전에 이 어르신이 청아 화냥년 에게 욕을 봤는데 오늘 만약 이 마부 놈한테 또 욕을 보면 이전 일을 잊은 것이 아닌가?) 도망칠 생각이 번쩍 났다. 이번에는 마부 몰래 뒷문으로 내리려 했다. 그런데 위소보가 마차 휘장을 쥐자 마부는 머리 뒤에 눈이 있는듯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채찍으로 그의 손등을 후려치려 했다. 다행히 위소보는 눈치 빠르게 손을 거둬들였기 때문에 상하지 않았다. 위소 보는 안색을 붉히며 노갈을 터뜨렸다. [왜 때리는가?] 마부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 [소인은 위작 나으리의 안전을 위해서 그럽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구린내 나는 마부 놈아....) 돌연 위소보는 욕도 못 했다. 구린내 나는 마부 놈이란 그 자처럼 당금 강호에서 채찍을 자 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무림고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 채찍으로 어느 곳을 치려고 작정하면 바로 그 곳을 치는 이런 마부는 세상에서 찾기 어려웠다. 이 사람은 필시 강호의 사람으로 서 이름 있는 무림고수 같았다. 그는 왜 마부로 가장했으며 그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지 위소보는 생각했다. (어쩌자고 이럴까? 어쨌든 이 어르신을 청하여 술을 마시고 도박을 놀고 계집들을 데리고 놀자는 것은 아닐 텐데?) 어쨌든 지금 도망하는 것이 제일 상수다. 그런데 어떻게 도망하는가? 위소보는 자기가 마부 에게 죄인처럼 갇혀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공에 의지해 도망칠 수도 없고, 설사 도망친다 해도 그 채찍에 다시 감기워 올 것이 분명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의 금년 운수는 정말 사납구나. 도박을 하면 떼이기만 하고 계집들과 놀자면 코 를 떼이니 정말 책에서 말한 것처럼 호랑이 굴에서 나와 이리 굴로 들어가는 판이구나.) 돌연 우아대가 생각났다. (제기랄, 이게 무슨 개뿔같은 형제냐? 이 어르신을 보호한다고 큰소리를 탕탕치고는 위험하 면 제 살 도리만 찾는구나.) 또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아대는 그럴 사람 같지 않았다. (소황제가 면전에서 '만약 이 위소보가 잘못되면 자네도 돌아오지 말고 스스로 자결해 버리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 어르신을 던지고 갈 수는 없을 텐데.... 혹시 그도 마부의 꾀 임에 빠지지 않았을까?) 무공이 고강한 우아대가 상대의 손아귀에 든 것을 생각하니 위소보는 더욱 겁이 났다. 아무 리 해도 어쩔 방법이 없어 그는 긴 탄식을 하며 무릎을 쳤다. 순간 단단한 물건이 손끝에 감촉으로 느껴졌다. 그의 뇌리에는 언뜩 비수가 떠올랐다. 무쇠도 흙 베듯 한다는 비수가! 위소보는 기뻤다. (그렇지. 이 어르신은 지금까지 갖가지 모진 풍파를 다 겪어 왔는데 그래, 이런 하잘것없는 마부 놈에게 거꾸러진다는 말인가?) 위소보는 비수를 단단히 틀어쥐고 마차 밑바닥을 민첩하게 내리 그었다. 주위는 황막한 것 이 인가도 보이지 않았고 인적도 없었다. 때는 점심때가 조금 지났다. 마부는 여전히 위소보 를 내리지 못하게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점심 무렵이 되자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사서 마차 안에 들여보내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식사를?....] 대답이 없었다. 잠이 든 것처럼 마차 안은 조용했다. 마부는 또 불렀다. [위작 나으리, 식사하십시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미풍에 마차 휘장만 흔들렸다. 마부는 혼자서 말했다. [아마도 피곤해서 잠이 든 모양이군!] 마부는 휘장을 들춰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마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차 바닥에는 둥그 렇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위소보는 이리 흔들 저리 혼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원래 위소보는 경황지중에 문득 꾀가 생겨 조심스레 비수로 마차 밑바닥에 구 멍을 뚫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 길옆에 숨었다. 길은 울퉁불퉁하여 마차가 덜컹대는 데다가 비수가 날카로워 마부는 아무런 동정도 알아차 리지 못했다. 마차가 지나간 다음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 신행백변으로 요리조리 몸을 날리 며 황하의 커다란 언제까지 다가왔다. 근보가 8년간 공들여 심은 나무들은 이미 황하의 언 제에 수림을 이루고 있었다. 위소보는 수림 속에 들어가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설령 마 부가 알아차렸다 해도 이곳에서는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부는 황하의 큰 언제를 따 라 동쪽으로 가고, 위소보는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걸어갔다. 오후가 되어 자그마한 시진 (市鎭)에 도착했다. 위소보는 방금까지 가슴 조이며 오던 노정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돈을 거침없이 내어 이 곳 에서 제일 큰 객잔에 들었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술안주를 청해 놓고 혼자서 술을 마셨다. 위소보는 오늘 일이 아무래도 흐뭇하여 혼자 생각했다. (제기랄, 감히 이 어르신을 건드리지 못하지. 그따위 마부 놈이야 아직은 풋내기지.) 술이 거나하게 되자 그는 올방자를 틀고 자신의 명곡 '십팔모'를 흥얼거렸다. [만지고 더듬고 또 만졌다네....] 돌연 노래를 멈춘 위소보는 누구를 만졌다고 해야 할지 막상 생각하니 적당한 사람이 떠오 르지 않았다. 위소보는 정('情)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여자를 보면 이 여자를 꼬득이고 저 여자를 보면 저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고 눈을 흘끔거 렸다. 때문에 부인이 일곱이나 되었지만 어쩐지 문아와 청아 두 자매의 생각이 간절했다. (이 세상에 문아, 청아 둘 가운데 하나라도 이 어르신외 부인으로 된다면 부러울 것이 없겠 다.) 위소보는 일곱 부인이 있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겼으나 날이 가면서 그 자랑도 차츰 흥취가 없어졌다. 위소보는 계속 중얼거렸다. [만지고....만지고....] 돌연 콧등이 찡하더니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위소보가 우는 재간은 천하 제일이다. 어느 때 누구를 만났든지간에 때와 장소의 수요에 따라 눈물을 많이 흘릴 수도 적게 흘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이 없고 다른 수요도 없었다. 그러니 오늘 울음은 평생 처 음으로 자기를 위한 울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음 한가운데 말할 수 없는 쓰라림으로 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머 술만 마셨다. 그는 워낙 주량이 많지 못한 데다가 기분까지 울적해 얼마 안 되어 술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어느 정도 되었을까, 돌연 누가 부르는 소 리가 들렸다. [위 향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을 차리십시오!] 술에 취한 위소보의 눈길은 흐리터분하고 입가에서는 침이 길게 흘러나왔다. 한참 지나서야 얼버무리는 소리로 말했다. [누구냐? 위 향주? 위 향주라고, 웬놈의 향주란 말이냐?] 또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어찌하여 이렇게 취했을까?] 위소보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취하지 않았어. 절대....]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펴 보자 겨우 몇 사람은 알만 했다. 위소보는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어르신은 자네들을 알만 하네. 자네는 현정 땡초 놈이고, 자네는 전로본이고, 자네는 서 천천 녀석이고, 또 너는 제기랄....] 말하면서 다시 상에 엎드려 코를 골며 잤다. 현정도장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향주님, 향주님 !] 서천천도 말했다. [나를 좀 봐요!] 아무래도 도리가 없자 그들은 한 대야의 물을 담아와 위소보의 몸에다 퍼부었다. 위소보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며 물었다. [당신들은 언제 왔소?] 현정도장은 천지회 사람들과 함께 인사했다. [저희들은 향주님을 뵈옵고저 왔습니다.] 위소보는 손을 저어 만류했다. [겸손해 하지 마시구려!] 그러면서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천지회가 다 망해 버렸는데 향주님이라니. 개코 같은 향주냐!) 현정도장이 두 늙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향주님, 저희들은 두 어르신을 모시고 왔습니다. 이 두 어르신으로 말하자면....] 위소보는 두 사람을 시답잖은 투로 쏘아봤다. [알만 하오. 이 분은 고염무 선생이고 저 분은 사계좌 선생이지요.] 현정도장이 말했다. [원래 서로 잘 아시는 사이구려!]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왜 모르겠소? 고 선생과 사 선생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 있는 반청의 영웅이시고 복명 용사 들이지요. 고 선생, 사 선생 두 분께서는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속으로는 아주 미웠다. (이 두 놈은 나더러 반청복명하라고 왔겠지. 정말 모를 일이야. 청나라 조정에서 네놈들에게 무슨 노여운 일을 했길래 이처럼 반청하고, 명조에서는 네놈들 핼애비에게 무슨 좋은 일을 해주었기에 복명하려 한단 말이냐? 정말 할 일도 없지. 시간이 나면 술이나 마시고 도박이 나 하며 계집들과 놀면 차라리 천하가 태평해지지 않겠는가?) 고염무, 사계좌 두 선생이 인사를 했다. [향주님, 무고하십니까?] 위소보도 답례했다. [그저 이럭저럭 보냅니다. 두 분께서 이렇게 오셨으니 많은 가르침이 있기를....] 두 선생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득 옆에서 거구의 사나이가 나서며 소리쳤다. [향주님, 저를 알아보시겠소?] 그 사람의 오른쪽 눈은 빛이 번쩍거리고 왼 눈은 우묵하게 패여 보기에 아주 흉악스러웠다. 위소보는 꺽꺽거리며 대꾸했다. [알다 마다. 알다 마다....] 第22章. 알 수 없는 황궁의 음모 위소보가 어찌 그를 알아볼 수 없겠는가? 그는 바로 천지회 굉화당(宏化堂)의 향주 서화룡 (舒化龍)이었다. 2년 전 위소보는 황제의 성지를 받고 일곱 부인과 자녀 이남 일녀를 거느리 고 호호탕탕하게 고향 양주로 떠났다. 그 날 소북 사양집(泗陽集)을 지날 때 서화룡이 굉화 당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위소보가 탄 배를 둘러쌌다. 그 때 서화룡은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왼눈을 찔러 눈알을 뺐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으나 서화룡은 그 당시 '나는 한 쪽 눈을 남겼다가 위 향주가 정말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반청복명의 대사를 이룩하는가 보겠소 이다. 만약 우리를 속였다면 위작 나으리도 자기 눈을 빼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오'라고 당 당하게 외쳤다. 위소보는 서화룡을 보고 몸서리쳤다. (야, 이 서가 녀석이 눈알 값을 받으러 왔구나. 이 어르신에게 붙어 있는 눈알은 겨우 두 개 밖에 없는데 네놈에게 주면 이 어르신은 외눈박이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 그러면 기생집 아 가씨들이 보는 척도 하지 않을 것이고 또 도박판에서 나쁜 놈들을 어찌 붙잡을 수 있단 말 이냐? 일곱 부인들마저 외눈박이라고 같이 자지 않고 사내들 사냥을 다 떠날 텐데.... 제기 랄, 저 서가 놈은 이 어르신을 홀아비로 만들고 푸른 모자를 씌우면 속이 시원하겠지.)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서 형님, 무고하시오? 그 눈은 아프지 않소?] 서화룡이 냉랭히 대꾸했다. [위 향주 덕분에 이 비천한 몸은 아주 무고하오. 아직까지 살아서 위 향주님이 어떻게 천지 회 형제들을 거느리고 반청복명의 대업을 하는가 보러 왔소이다.] 위소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떠벌렸다. [만청은 뒤엎어야 하고 명조는 되찾아야 하지요. 그러나 이처럼 중대한 일은 마땅히 긴 세 월이 필요하지요.] 서화룡이 말했다. [위 향주님의 눈이야 헛되이 던질 수가 없지요. 오늘 형제들이 같이 왔으니 그간의 일에 대 해 시비를 가립시다.] 그는 현정도장과 고염무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몇 분들은 이 동생이 청해 온 증인(證人)들이외다. 서로 알고 있다니 더 잘됐습니다. 앞 으로 사이좋게 지내기 바랍니다.] 위소보가 생각했다. (미친놈, 네놈이 청해 온 증인들을 이 어르신이 알고 지내서 어느짝에다 써먹는단 말이냐?) 위소보는 현정도장, 전로본과 청목당 형제들을 보고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제기랄 놈들, 네놈들은 모두 이 어르신의 부하들인데 자기 도리는 하지 않고 저 흉악스런 서가 놈을 도와 이 어르신의 눈을 빼러왔단 말인가?) 현정도장은 위소보의 불쾌한 기색을 보고 급히 말했다. [위 향주님, 저희들은 그 때 향주님께서 서 향주와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오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향주님의 지시를 바랄 뿐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청목당 형제들은 남들에게 지지 않겠지?] 이 한 마디가 그만 위소보의 눈을 빼려던 굉화당 서화룡의 일을 훌쩍 뒤집어 청목당과 굉화 당의 싸움으로 변하게 했다. 서화룡은 그만 꾀임에 빠져들었다. 그는 냉소하며 말했다. [흥, 청목당이 무슨 물건짝이오? 명성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그 둥제중(風除中) 나 으리도 청목당의 영웅호걸이지 않소?] 풍제중은 확실히 청목당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희가 암암리에 파견한 간첩으로서 천지 회를 와해시키고 심지어는 총타주 진근남의 죽음에 혐의가 큰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현정도장이 옷소매를 걷으며 나섰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서 향주님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빈도가 한 수 배우려 하오이 다.] 서화룡은 드디어 주먹을 쥐고 말았다. [치려면 쳐 보시오. 누구 겁낼 사람 있는 줄 아시오?] 위소보는 기뻤다. (너희들끼리 서로 사정없이 쳐 봐!) 두 사람은 분에 넘쳐 펄펄 뛰었다. 이 때 전로본이 막아서며 제지했다. [두 분께서는 노여워 마십시오. 할 말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로 풀어야지 이렇게 기분을 상 하게 할 거야 있습니까?] 방금까지 싸우려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전로본 네 놈이 실없이 이 일에 참견할 건 또 뭐냐?) 고염무도 나서서 한 마디 거들었다. [나라가 위험에 처하고 있는 때 성심성의로 단걸해야 하는데 어찌 서로 손부림을 하겠습니 까? 친인들이 속상해 할 때면 적들이 속시원해 할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위소보는 다시 불씨를 살려내려고 했다. [성심성의가 뭐고 단결이 다 뭔가? 서 향주가 청목당의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잘 것없는 물건짝으로 취급하는데 달리 방법이 없지!] 서화룡이 비꼬는 투로 응수했다. [청목당은 총타주님까지도 부추겨 주는데 천지회 가운데서 누가 감히 존경하지 않겠소?] 진근남은 확실히 생전에 청목당을 편애했기에 다른 당 내에서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현정도장이 상대의 말을 곧바로 가로챘다. [그렇소. 천지회의 원수 오배를 소멸하고 대간신 오삼계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그래도 우 리 청목당이 하지 않았소? 총타주님은 다 일리가 있어 그랬지!] 위소보는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현정도장도 괜찮은 땡초 놈이구나. 이 어르신의 얼굴을 세워주다니 기특한 노릇이군!) 서화룡은 대노하여 소리쳤다. [그럼 우리 굉화당은 쓸모 없다는 말이지!] 위소보는 고의적으로 이상하다는 시늉을 지어 보였다. [서 향주님, 굉화당이 쓸모 없다고요? 그렇지 않지요. 크게 쓸모가 없으면 작게라도 쓸모가 있겠지요.] 서화룡이 살기 등등하게 외쳤다. [개방귀 같은 소리!] 위소보는 코를 막으며 말했다. [정말 구린내가 나는구려, 정말 구리구려. 서 향주님 다른 곳에 가서 방귀를 뀌면 안 되오? 우리 강호의 모든 사람들과 총타주마저 생전에 그래도 당신들을 존경하지 않았소?] 서화룡이 씩씩거리며 삿대질을 했다. [흥! 존경? 그래, 총타주님을 들먹이며 감히 누구를 얼리려고 한단 말이냐?] 위소보는 상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뭐라구? 총타주님으로 얼린다고? 아니 굉화당 서 향주는 정말 대단하구만. 진 총타주님께 서 해골도 되기 전인데도 벌써 모욕한단 말인가?] 현정도장이 대노하여 말했다. [서화룡! 그래, 웃어르신을 노엽게 하고 반란을 일으킬 작정인가?] 서화룡이 급히 말했다. [그건 내가 말한 것이 아니오....] 불시 주먹을 휘둘러 위소보의 가슴을 노리며 소리쳤다. [오늘 네놈과 이판사판 따져보고 말겠다!] 위소보는 그가 손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므로 미처 피하지 못했다. 서화룡의 주먹 을 보고 현정도장이 재빨리 앞을 막았다. [위 향주를 치려면 먼저 우리를 거쳐야 하네!] 두 사람은 주먹을 쥐고 맞섰다. 순식간에 한 주먹씩 주고받았다. 현정도장은 제자리에서 꼼 짝하지 않고 서화룡은 텅텅텅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서화룡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사람 숫자를 빌어 상대를 제압하려 하다니 그래 청목당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가?] 현정도장이 말했다. [사람 숫자를 빌어 이기면 귀하는 승복할 수 없단 말인가?] 서화룡이 몸을 돌리며 달려들었지만 현정도장은 이리저리 피하며 그가 기진맥진할 때를 기 다렸다가 반격했다. 현정도장은 그래도 그의 신분을 봐서 손에 여유를 두었다. 무공을 논하 자면 서화룡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화룡은 노기를 참지 못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 만 매번 얻어맞고 물러섰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무공고수들의 무공 겨룸이 아니라 거리 망나 니들의 드잡이질과 같았다. 현정도장은 상대가 계속 물고 늘어지자 홧김에 서화룡의 얼굴을 노렸다. 번개같은 서화룡은 한 대 맞고 코에서 피를 흘렸다. 서화룡은 노기등천했다. 서화룡 은 욕을 했다. [제기랄, 이 땡초놈아! 이 어르신은 네놈과 사생결단을 내고야 말겠다!] 그는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었다. 현정도장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나는 여지껏 당신처럼 치졸한 사람을 보지 못했구려!] 현정도장이 두 손으로 서화룡의 두 주먹을 단단히 틀어쥐고 천천히 말머리를 누그러뜨렸다. [서 향주, 나는 향주를 아주 의협심이 높은 사나이로 보았소. 우리 이러지 말고 서로 이야기 를 나누면 안 되오?] 서화룡이 대노하여 외쳤다. [이 어르신은 네놈과 이야기할 게 없어!]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불시에 머리로 도장의 가슴을 들이박았다. 도장은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여섯 발자국 뒷걸음쳤다. 이렇게 되자 서화룡은 노한 기색이 좀 엷어지며 말했다. [흥! 이 어르신을 업신여긴 대가외다.] 서화룡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현정도장이 됫걸음질친 청석판에 깊숙한 발자국이 나타났다. 원래 현정도장은 서화룡을 사내대장부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고의적으로 손에 사정을 두었 다. 현정도장의 얼굴이 붉어지고 괴로운 표정이 안면 가득했다. [서 향주님의 무공에 저는 탄복하외다!] 서화룡은 현정도장이 자기 면목을 봐 양보한 것을 알았다. [도장님의 인의에 탄복합니다. 이 동생이 만약 그것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오늘 일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도장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위소보가 생각했다. (제기랄, 그것도 말이라고 하나? 이 어르신이 아직도 청목당의 향주이니 이 어르신의 분부 대로 해야 하지. 그래, 현정도장이 말해야 하는가? 정말 꼬리가 어딘지 대가리가 어딘지도 모르는 놈이야.) 현정도장이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고 선생이 말씀하다시피 원수가 눈앞에 있으니 우리 서로 이러저러한 일들은 이로써 화해 하고 맙시다. 서 향주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 위소보는 생각했다. (좋기로는 저 놈을 죽여버려야 시원하겠는데.... 죽일 수 없으면 화해라도 해야지.) 서화룡은 여전히 원한을 품고 말했다. [고 선생이나 현정도장님의 말씀을 저는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 향주께서 만청 복명을 하게끔 하기 위해 그 때 저는 스스로 눈알을 뺐습니다. 위 향주께서 정말 반청복명 의 대업을 행했다면 저는 남은 눈알을 다 빼버려도 아무런 원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위 향 주가 말과 속이 다르면 위 향주님은 이 눈을 배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정도장은 서화룡의 조리있고 단호한 말을 듣고 반박할 수도 없어 위소보에게 물었다. [위 향주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위소보는 딴청을 피웠다. [서 형님, 나는 그 눈을 달라고 하지 않았소이다. 게다가 하나 더 빼서 뭘 하겠소? 그 눈알 은 돼지고기나 개고기도 아닌데 삶아 먹을 수나 있겠소?] 현정도장은 위소보의 언사가 불쾌했다.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위 향주님이나 서 향주님이나 모두 우리 천지회의 대업을 위 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위소보는 비웃는 어조로 대꾸했다. [무공이 출중하고 견식이 넓은 현정도장님이 그렇게 말씀하니 지당한 말씀이겠지요. 단지.... 흥흥.] 현정도장이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단지 어떻다는 것인지 위 향주님 알려주십시오.] 기실 위소보가 '단지'라고 했지만 자기도 몰랐다. 이 말은 그가 미처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입버릇처럼 하는 말로써 시간을 좀 벌자는 데 있었다. 과연 좀 지나니 궁리가 났다. [오직 우리 천지회의 진 총타주님이 돌아가셨으니 모든 일은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소? 우 리는 눈을 남겼다가 눈을 부릅뜨고 만청 오랑캐 황제와 싸워야 하지 않겠소? 눈알을 형제들 끼리 서로 빼주거니 받거니 한다면 그래 다른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영웅호걸로 볼 수 있겠 소?] 이 그럴 듯한 대꾸에 고염무는 감동되어 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말했다. [아주 잘 말씀하였소이다. 듣기에는 거북한 말씀같지만 아주 견식이 있는 지당한 말씀이오 다. 위작 나으리, 서로 좋게 지내는 게 어떻습니까?] 서화룡은 원래 오늘 한바탕 야단법석을 벌이려고 했지만 현정도장이 있고 자기 원수도 갚을 것 같지 못하게 되니 남이 하자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염무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이 늙은이 뜻인즉 이전의 무슨 내기고 약속이고는 다 잊고 다같이 힘을 합쳐 지금부터 해 보자는 것이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르신의 눈알을 빼지 않고 그대로 두게 되었구려!] 고염무가 말했다.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 고염무는 이 '아주 좋은 기회'를 위해 천지회 군호들을 찾았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에 반청복명의 지하조직은 아주 많았다. 세력이 제일 큰 천지회를 빼놓고 또다른 세 개가 있었다. 그것은 '홍화록엽백련적(紅花綠葉白蓮籍)'인데 이는 세 개 교이지만 원래는 한 개 교였다. '홍화'는 홍문(洪門)으로서 후에 홍방(洪幇)이다. '녹엽'은 청방(靑幇 )이다. '백련'은 백련교(白蓮敎)이다. 백련교에서 또 갈라져 나온 것이 있는데 그를 이문(理門)이라 했다. 그 창시자가 양여래(羊 如來)인데 만청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나중에는 패배하여 그의 처마저 적과 싸우다 죽고 말았다. 양여래는 할 수 없이 천진(天津)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바 꾸면서 이문(理門)을 세웠다. '이문'은 겉으로는 금연(禁煙)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만청을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조직은 폐쇄적으로 운용되어 그 발전이 빨라 전국 각지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더욱이 북방의 세력은 극히 강성했다. 비록 이 조직에는 사 람이 많지만 전반을 영도할만한 인재가 없고 더욱이 경비가 많이 부족했다. 반청복명을 일생의 뜻으로 품은 고염무는 도처로 다니며 지하조직과 연계를 맺다가 천지회 와 양여래가 합치고 천지회에서 사람과 돈을 내고 다같이 만청을 뒤집어 엎을 것을 건의했 다. 고염무는 현정도장을 찾았다. 때마침 서화룡을 만나고 위소보를 찾게 되었다. 그들은 위 소보가 나서서 사람을 모집하고 경비를 해결하도록 강구하자고 결정하였다. 위소보는 고염 무가 찾아온 의도를 알고 몹시 분개했다. (천지회는 정말 옷에 달라붙은 벼룩처럼 이 어르신을 끝까지 귀찮게 따라다니며 물어뜯을 작정이로구나. 이 어르신은 천지회와 함께 소황제를 반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 소황제를 도와 천지회를 치려고도 하지 않아. 이 어르신은 숱이나 마시고 도박을 하며 계집들과 놀면 돼!) 위소보는 이들의 싸움에서 겨우 몸을 뺐는데 또 이 싸움에 휩쓸려 들어갈 줄은 섕각도 못 했다. 위소보는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양여래가 천지회와 합친 것은 아주 잘된 일이고 만청 황제를 뒤엎는데 더욱 믿음성이 있게 되지요. 고 선생, 현정도장님, 모두 훌륭한 일들을 했소이다.] 현정도장은 그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이처럼 중대한 일은 아마도 위 향주님께서 주재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위소보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이렇게 큰 일을 주재하겠습니까? 자기의 자그마한 일도 못 하는데! 이 위소보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자면 동의하지 않은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위소보는 아주 듣기 좋게 말했지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놈들을 얼러 보내고 이 어르신은 북경 공작부에 틀어박혀 있을 테다. 우아대와 같은 무 공고수 몇 명을 더 얻어 지키게 하고 집에서 시름놓고 도박이나 놀고 술을 마시며 '십팔모' 나 부르면 그만이지.) 생각해 보니 이것도 그리 상서롭지 못했다. (소황제는 거얼단과 싸우려고 하고, 천지회에서는 소황제와 싸우려 하니 이 어르신은 또 중 간에서 견뎌내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또 저 홍안통, 정극상, 청아 화냥년이 장보도를 내놓 으라고 졸졸 따라다니니 이 어르신은 중간에 끼어 자라새끼처럼 납작하게 될 판이구나.) 별 수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궁리가 났다. (북경에 돌아가 남몰래 처들을 데리고 달아나자. 평생동안 황제고 천지회고 홍안통이고 다 시 보지 않으면....) 현정도장이 아주 엄숙히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합시다. 녹정산 장보도를 위 향주님께서는 내놓으십시오!] 그가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위소보는 놀랐다. (야, 이놈이 좀 냄새를 맡았구나. 그런데 이 어르신이 그저 생떼질을 쓰며 모른다고 하면 너 무도 좀스럽지 않겠는가?) 위소보는 두 손을 빈쩍 들며 말했다. [내가 무어라고 말해도 여러분들은 믿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여러분께서 시원히 들추어 내 십시오.] 현정도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위 향주님, 우리 형제들을 어떤 사람으로 봅니까? 우리는 모두 다정한 형제들인데 누가 믿 지 못하겠습니까? 우리도 그 장보도가 지금 향주님의 몸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있다 면 위 향주님이 바로 내놓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화룡이 말했다. [지금 장보도가 위 향주님의 몸에 없다면 우리가 따라가서 가져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현정도장이 뭇 사람들의 의중을 물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전로본이 말했다. [향주님이 혼자 가신다면 안전하지 못하고 또 우리가 시름을 놓을 수 없지요. 다같이 가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얼르고 뺨치고 하는 수작을 위소보가 모를 리 없었다. 오늘 일이 원래 생각 과는 달리 아주 어렵게 되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는 천지회에서 노골적으로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위소보는 아주 시원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좋소. 이 어르신이 혼자 가자면 너무 허전할 테니 같이 가면 좋지요. 이 어르신이 길을 떠 날 때는 항상 노리개 삼아 개나 고양이를 데리고 다녔는데 심심치 않더구려.] 그의 입은 모질기 이를 데 없어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그의 시러배 잡놈의 근 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지라 그 누구도 그와 이러쿵저러쿵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날부터 위소보는 천지회 군웅들과 고염무 사계좌와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저마 다 다른 생각을 했지만 위소보는 적적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원래 벼락부자로서 돈을 물처 럼 쓰고 돈을 돈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은 털끝만치도 쓰지 않는 천하 일등 깍 쟁이가 되었다. 길가에서 쓴 비용은 몽땅 천지회에서 지불했다. 위소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어르신을 보고 장보도를 내놓라고 하면서 또 죄인처럼 대하는데 이 어르신이 돈까지 내 서 그들을 먹여준다면 너무나도 밑지는 장사지.) 천지회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출신이고 강호를 다니며 갖은 고생들을 다 겪었으므로 변변치 못한 음식이라도 아무런 타박이 없었다. 그러나 호의호식하던 위소보만은 견뎌내기 어려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기랄, 현정 땡초놈은 이렇게 가난하단 말인가?] 북경이 가까워지자 이 많은 강호 사람들이 함께 모여다니기 불편하여 서로 상의하고 낮에는 객잔에 들고 밤에만 걸었다. 이 날 온밤을 걸어 객잔에 들었다. 위소보는 너무도 심심하여 잠을 잘 수가 없어 문밖으로 나왔다. 현정도장이 물었다. [위 향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위소보는 죄진 사람처럼 얼른 대꾸했다. [바람도 쐬야 하지요. 도장님, 모르십니까? 감옥의 죄인도 하루에 한 번씩 바람을 쐬게 하지 요.] 현정도장은 더 말하지 않았다. 위소보가 아직도 향주님의 신분이기에 현정도장은 생각했다. (할 수 없지. 이 녀석과 함께 산보나 하자.) 두 사람은 객잔을 나와 걷다가 위소보는 술냄새를 맡고 주루로 달려갔다. 현정도장도 할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위소보가 이층 상방에 이르자 누군가 불렀다. [둘째 형님!] 위소보가 보니 우아대였다. 그는 너무도 기뻐 소리쳤다. [셋째 동생, 무고하시오?] 우아대는 새 옷을 입었지만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위소보는 훑어보다가 의아한 표정 으로 물었다. [동생, 무슨 일이 있길래 이처럼 옷차림을 화사하게 했는가? 그래 오늘 신랑 노릇이라도 하 는 건가? 신부는 누군가?]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 방주님, 정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우리는 또 만났군요!] 위소보가 본즉 청아가 새옷차림을 하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소보는 기절초풍을 하며 소리쳤다. [아니,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 청아가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물론 귀신이지요. 물에 빠져 죽은 물귀신이지요!] 우아대가 말꼬리를 잘랐다. [청아 아가씨, 농담은 그만하시오. 형님, 그 날 청아 아가씨가 정극상에게 이끌려 황하로 빨 려들어간 후 때마침 제가 아래에서 배를 타고 지나다가 청아 아가씨를 구했습니다!] 위소보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제야 영문을 알고 말했다. [동생이 말하기를 친구의 가속 한 분이 우리와 함께 떠난다고 했는데 바로 청아 아가씨였구 만. 동생이 감쪽같이 나를 속였구만!] 우아대의 얼굴이 벌개지며 웃기만 했다. 위소보는 약간 속이 쓰림을 느꼈다. [이 어르신은 원래 그러는 줄 알았다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친구의 처는 원래 건드리지 못하는 법이지. 청아 화냥년이 동생의 처가 되었으니 이 어르 신의 체면에 먹칠은 하지 말자. 하지만 과거에 그 예쁜 아기를 거얼단에게 얌전히 건네주면 서 사람의 도리를 지켰지만 밑지고 나앉은 건 이 어르신뿐이야!) 우아대는 그 날 청아를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었다. 화(禍)는 사람에게서 오고 복(福)은 하늘 에서 떨어진다고 때마침 황하에서 배를 타고 지나다 죽어가는 청아를 구원해 주었다. 청아 는 구원된 후 몹시 앓았다. 때마침 강희 황제의 엄명이 떨어졌다. 위소보를 북경까지 데려오 라는 명령에 지체할 수가 없어 우아대는 단독으로 마차롤 세내어 청아를 싣고 떠났다. 우아 대는 이 둘째 형이 꾀가 많아 자기가 청아를 데리고 동행하면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재 간 있는 사람을 청해 단독으로 위소보롤 호송케 하고 자기는 청아와 함께 딴 길로 갔다. 위 소보가 실종된 후 우아대는 겁을 먹었다. 그는 청아와 함께 오던 길을 다시 샅샅히 수색하 며 위소보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무쇠신발이 닳도록 찾아 혜맬 줄 알았던 그를 뜻밖에도 이 곳에서 만난 것이었다. 우아대는 몹시 기뻐하며 현정도장에게 인사했다. 위소보는 청아를 가리켰다. [청아 아가씨도 인사를 시켜야지.] 청아가 웃으며 말했다. [인사시킬 거 있나요? 우리는 만나보기도 하고 현정도장의 고명한 무공을 배우기까지 했는 걸요.] 과거 언젠가 강남의 동굴에서 현정도장이 문아를 위해 청아와 서로 싸울 때 천지회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위소보의 일곱 부인들이 모두 청아의 신룡편에 중독되었으나 다행히도 우아 대의 도움을 받아 청아를 붙잡고 해독약을 얻어냈었다. 청아는 비웃는 어조로 말했지만 현 정도장은 무림고수의 도량으로 청아의 무공을 칭찬했다. [그 날 청아 아가씨께서 해독약을 주었기에 모두 살 수 있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만 나지도 못했을 것이오.] 우아대는 오늘 남달리 기뻤다. [만나지 않으면 서로 알 수도 없지요. 일단 다함께 가서 축하의 잔을 나눕시다.] 위소보는 스스로 의자를 당겨앉아 술을 마셨다. 현정도장도 따라 술좌석에 앉았다. 기실 현 정도장은 같이 앉아 있으면서도 근심이 많았다. (우아대는 무공이 출중한 데다가 그의 경력이 신비하기만 하고, 청아 아가씨는 이전에 위소 보와 적수였지만 지금은 제수씨가 되었으니 당연 위소보를 도울 것이 아닌가?) 현정도장은 청아와 겨루어 보았으며 우아대의 괴이한 무공도 본적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 을 상대로 대적은 커녕 단독으로 대해도 어려웠다. 지금 자기를 도울 사람들은 객잔에서 잠 자고 있어 그들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그는 이런 역경에 처했지만 이런 난관을 많이 겪어 본 사람이기에 아주 태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지켜보며 행동할 수밖에 없지1) 이 여러 사람 가운데 위소보가 가장 의기양양해 하였다. (이 어르신은 그래도 운수가 좋아. 언제나 위험에서 빠져나오곤 한단 말씀이야. 이제 식사나 든든히 하고 현정도장과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동생과 제수씨를 따라 내빼면 그뿐이지. 흥! 네놈들 천지회 나부랭인들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들고 보니 우아대가 이상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위소 보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우아대가 아주 어색해 하며 잔을 들고 권했다. [둘째 형님, 이 동생이 한 잔 권하지요.] 현정도장이 위소보를 보고 말했다. [위 향주님, 밖에 나와서는 술을 적게 마시는 것이 좋지요. 강호의 사람들은 험악한 짓을 많 이 하니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그래도 이 땡초놈이 이 어르신을 일깨워 주는구나.) 내심 현정도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말했다. [거야 물론이지요. 그런 오늘만은 우리 형제간이 어쩌다 만났으니 약간 경우가 다르지 않습 니까? 동생, 그렇지 않소? 도장님, 우리 함께 듭시다.] 이렇게 말하며 우아대만 바라보았다. 우아대가 웃으며 말했다. [도장님 말씀도 옳고 형님의 말씀도 옳지요. 이젠 그만 합시다.] 위소보는 볼수록 우아대의 눈치가 이상했고 무슨 일을 감추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내가 정말 멍청하지. 이 동생의 신분, 경력과 무공이 어떤지 확실히 모르고 경솔히 따라간 다는 것도 말이 아니야. 차라리 좋은 방법을 강구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몽환약을 먹여 놓 고 혼자 가면 만사태평 아닐까?) 위소보는 잠시 딴청을 피웠다. [제기랄, 날씨가 왜 이렇게 무덥단 말인가?] 그러면서 손을 슬그머니 품안에 넣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손을 빼고 말았다. 청아는 개방 의 원래 방주 성롱의 양녀이다. 백독도 침범할 수 없다는 개방의 멍약을 먹었을 테니 몽환 약에 중독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만약 현정도장과 우아대를 중독시켰다 해도 청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이 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도리가 없어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은 이처럼 운수가 사나워 가는 곳곳마다 적수를 만난단 말인가?) 기실 위소보는 몽환약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현정도장, 우아대와 청아가 예리한 눈길로 위소 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위소보는 모든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제기랄, 황제와 천지회에서 이 어르신을 양쪽에서 들볶아대고 있고, 또 신룡교와 개방놈들 까지 손을 쓰고 있으니 이 어르신은 중간에서 말라 비틀어지고 말겠구나. 그렇지, 이런 때는 다른 생각할 것 없이 슬쩍 빠지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저희들끼리 치고받고 할 것이고, 이 어르신은 구경이나 하면 그만이지.) 돌연 위소보는 일어나 밖에다 소리쳤다. [전 스승, 서 스승, 고 선생, 사 선생! 모두 다 오셨는데 우리 함께 북경으로 갑시다. 그러면 사람이 많으니 심심치는 않을 것이오. 하하하!] 이 때 전로본등 사람들은 위소보와 현정도장이 보이지 않아 거리로 찾아 나섰다. 이를 발견 한 위소보가 소리쳐 술집으로 불러들였다. 위소보는 어전시위와 강호 사람들의 호위 하에 아무런 변고 없이 북경에 당도했다. 천지회 사람들과 고, 사 두 사람은 감히 공작부로 들어 가지 못하고 서로 헤어졌다. 우아대가 위소보를 데리고 공작부로 갔다. 청아는 이미 우아대 와 서로 헤어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따라왔다. 위소보는 천지회 사람들이 공작부 주위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거지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위소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어르신이 내 집으로 돌아왔는데 너희들이 이 어르신을 건드리려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 다. 다른 사람을 차치하고 부인 일곱만 해도 이 어르신을 보호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나 공작부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위소보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시위총관 다륭뿐이었 다. 다륭은 우아대와 청아의 눈을 피해 위소보를 서재로 끌어당겼다. 다륭은 매우 긴장한 기 색으로 말했다. [위작 나으리,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위소보는 크게 놀라 물었다. [다 총관, 무슨 일이 생겄는가? 왜 부인들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게요?] 다륭이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며칠 전부터 공작부 주위에는 강호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약간 시름을 놓으며 말했다. [아마도 강호의 어느 무리들이 회의를 하겠지. 하물며 강호 사람이 어전시위 총관을 찾아와 번거롭게 하겠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통 강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위작 나으리, 보십시오, 신룡교의 홍안통, 황룡대협 그리 고 독비신니 구난사태 등 명성깨나 있다는 무림고수들이 다 모였다오. 또 개방과 그 외의 이름 없는 작은 문파들도 한꺼번에 몰려왔고요.] 위소보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쳐 물었다. [그래 나의 부인들은?....] 다륭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황상께 알리고 부인들과 아이들은 모두 황궁으 로 보냈소이다.] 위소보는 시름을 놓고 또다시 감격하여 말했다. [다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다륭이 말했다. [동생,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우리는 형제지간인데 겸손해 할 필요 있소?] 위소보는 근보가 준 5만 냥을 내놓으며 말했다. [다륭 형님, 이 동섕은 이번에 나가서는 많이 벌지 못했다오. 가져다가 시위 형제들과 나누 어 쓰시구려.] 다륭은 돈을 받아넣고 일어서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 갑시다.] 위소보는 의아한 시선으로 다륭을 쳐다봤다. [어디로?] 다륭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황궁으로 말입니다!] 위소보는 주저했다. 황제가 그를 찾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늦었는데 황궁으로 어찌 가겠소?] 다륭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지만 위작 나으리께서는 제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무얼 주 저할 게 있단 말입니까?] 다륭이 또 낮게 말했다. [태후와 황상이 모두 나으리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황상은 소인에게 각별히 분부했지요. ' 태후 마마가 시름을 놓게 소계자가 오면 곧바로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시오'라고 말입니다.] '소계자'라는 말을 듣고 강희가 친히 부탁한 말이라고 믿고 위소보는 눈물을 흘렸다. [황상이 이처럼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나는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다륭이 말했다. [황상의 은혜는 위작 나으리과 황상과의 연분이겠지요.] 위소보는 부인들과 자식들이 그리워 다륭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 때는 이미 황혼이었다. 서쪽 하늘은 온통 붉은 색으로 단장했다.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비추어 황궁은 더욱 금빛찬 란했다. 가벼운 바람이 불자 나무잎사귀는 위소보의 마차와 그의 몸에 떨어졌다.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벌써 가을이 되었는가?] 자금성(紫禁城) 문어귀에 이르러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걸어갔다. 길가에는 보초군들이 촘촘 이 늘어서서 경비가 아주 삼엄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다륭 형님의 말이 옳구나. 소황제도 경계를 강화하는구나.) 강희는 서재에서 위소보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금방 만나겠다고 전갈해 왔다. 다륭도 위소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위소보는 강희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강희는 걸상에 않아 이전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소계자를 청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구만? 정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慮)보다 더 하구만.] (역자 주:'삼고초려'는 유비가 제갈량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삼은 이야기 임.) 삼고초려 이야기는 위소보도 들은 적이 있어 말했다. [황상, 과분한 말씀을 하십니다. 소인이 어찌 제갈지량이겠습니까? 황상의 묘략이야말로 제 갈지량을 능가하시지요!] 강희가 말했다. [소계자, 너무 겸손해하지 말게나, 묘략이 다 무슨 말인가? 소계자의 잔꾀를 부리는 재간이 야 무림에서 따를 자가 없고 천하에서 제일이지.] 위소보는 강희 말을 듣고도 별로 마음이 시원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소현자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좀 조심해야겠다.) 강희가 또 물었다. [소계자, 그대는 기억하고 있소? 그대는 이 조정을 위해 몇 가지 커다란 공을 세우지 않았소?] 위소보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황상 폐하의 물음에 답하나이다. 미천한 신하는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강희가 고개를 천천히 혼들었다. [지나치게 겸손할 거야 있나. 공로야 공로지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위소보는 머리롤 조아렸다. [미천한 신하는 황상의 분부대로 했을 따름이지 공로라고 하기에는 어렵지요.]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가 자화자찬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네.] 강희가 돌연 색액도를 부르라고 했다. 다륭이 받아 전했다. [색액도를 부르라!] 이윽고 색액도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위소보가 곁눈질해 보니 그는 이 2년간 몸이 많이 나고 또 태자의 스승 노릇을 한 까닭인지 얼굴에는 오만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강희의 얼 굴 표정이 갑자기 근엄해졌다. [색액도, 어서 일어나서 위소보가 다년간 세운 공로들을 하나하나 말해 보시오!] 색액도는 황상에게 정중히 절을 하고 종이 한 장을 꺼내들고 위소보를 마주보며 선독했다. [일등녹정공 위소보는 일곱 가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소현자가 이렇듯 굉장하게 분위기를 끌고 가는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색악도가 목청을 가다듬고 고했다. [첫째 오배를 사로잡고 간신을 처단했음. 둘째, 모동주를 사로잡고 태후 마마를 구해냈음.] 위소보는 첫째 공로를 선독할 때는 묵묵히 있다가 두번째 공로를 선독하자 그는 크게 놀랐 다. [황상, 이 것만은....] 원래 모동주가 태후를 감금한 사실을 위소보가 발견하고 태후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황실의 비밀로 이날 이때까지 황제, 태후, 위소보 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가 놀 란 것은 색액도가 선독하면 그 비밀이 누설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황궁 내의 중대한 비밀은 극히 소수 사람만 알아야지 한 사람이라도 더 알면 비밀 유지가 힘들다. 강 희는 일처리에서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오늘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색액도가 선독하는지 옆에 있던 다륭도 이상하게 여겼다. 강희는 아무런 기색도 없이 색액 도를 보고 말했다. [계속 선독하시오.] 색액도가 계속 읽어 내려갔다. [셋째는 위소보가 집을 떠나 승려생활을 하며 태상 황제를 보호했음.] 강희의 부친 순치(順治) 황제는 자기가 사랑하는 동악기(董鄂基)가 죽자 너무도 상심하여 황제 자리를 버리고 남몰래 오대산 청량사(淸凉寺)에 들어가 중이 되고 법호를 행치(行痴) 라 했다. 강희는 이 소식을 알고 위소보를 먼저 소림사에 파견하였다가 후에 오대산 청량사 에 가 있는 순치를 보호하게 했다. 이 비밀 역시 황제와 위소보만 알고 태후마저 모르는 비 밀인데 강희는 선독을 하도록 했다. 색액도가 계속 선독했다. [넷째, 오대산에서 황제를 구원했음. 다섯째, 나찰을 쳐부수고 니부추조약(尼布楚條約)을 체 결했음. 여섯째, 몽골 서장 두 장령을 설복하여 투항시킴으로써 반역자 오삼계의 좌우 날개 를 잘라 버렸음. 일곱째, 근보와 같은 재간이 있는 대신을 보호했음.] 색액도의 선독이 끝나자 강희가 물었다. [위소보, 자네의 공로 중에 빠진 것은 없는가? 혹시 짐이 잊은 것이 없는지?] 위소보는 비록 강희가 왜 이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의 이런 수법을 봐서 심상치 않음 을 느끼고 삽시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위소보는 연속 절을 하며 말했다. [황상 폐하께서는 매우 현명하십니다. 매우 현명하십니다.] 강희가 다시 물었다. [자네가 조정을 위해 세운 공로를 짐은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네. 위소보, 자네는 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위소보는 신중히 대답했다. [소인은 황상께 충성을 다해야 하고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 하면 충신이 아니외다....] 강희가 냉소했다. [충성이라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잘 말했지만 어떻게 충성을 다했는지 짐은 알 수 없 구만?] 위소보는 섕각했다. (소황제께서 천지회의 일과 또 개방, 황룡대협 등 사람들과의 일을 알고 있는 모양 같구나!) 위소보는 절만 꾸벅꾸벅하며 뒷말을 이었다. [황상은 현명하십니다. 소인은 대체적으로는 황상께 충성했사오나 친구들과의 감정을 상하 게 되는 대목에서는 황상께 그리 충성치 못했소이다.] 강희가 말했다. [친구들에 대한 자네의 의협심에 대해서 이 몸은 관계하지 않으며 또 추궁하려고도 하지 않 소!] 위소보는 큰 시름을 놓고 말했다. [소인은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강희의 음성이 약간 싸늘해졌다. [짐이 아직 말도 다 하지 않았는데 은혜가 다 뭔가?] 한참 있다가 돌연 정색해서 말했다. [위소보 사실대로 말해보게나. '사십이장경'은 어찌 되었는가?] 위소보는 몸이 오싹해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왜 그 일을 잊었단 말이냐?) 그는 어떻게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퍼뜩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황상의 충명한 지혜는 제갈지량을 초과하시고 무공은 관운지장을....] 강희가 돌연 소리쳤다. [그만 두게나!] 위소보는 자기 뺨을 후려치며 중얼거렸다. [요놈의 주둥이가 또 허튼소리를 하는구나.] 그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마치 천연덕스럽게 장난질을 하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말하 고 나서 또 잘못됨을 느꼈다. (황상의 은덕을 말하고 어찌 허튼소리라고 한단 말이냐?) 그리하여 곧바로 변명했다. [황상을 찬양하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 제 말이 허튼소리라는 말입니다.] 강희도 어이가 없는지 웃어버렸다. 황제가 웃자 위소보는 좀 마음이 놓여 곧바로 말했다. [황상, 소인은 아주 우둔하고 얼이 빠진 놈입니다. 그러나 충성을 다 바쳐....] 강희가 웃으며 소리쳤다. [됐네, 그만둬 !] 강희는 본래 '제기랄' 하고 욕을 하려 했으나 색액도와 다륭이 그 자리에 있는지라 정색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충성을 다바친다는 말은 그만 두게나. 자네가 충성을 다 바친다면 세상에서 교활한 놈이 하나도 없을 거네!]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예. 예! 소인은 교활하고 후안무치합니다. 더구나 말할 줄 모르고 일할 줄 모르며 머리 쓸 줄을 모르기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황상의 현명한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나이다.] 강희는 웃음기를 거두고 생각했다. (이 소류망에게는 웃는 얼굴로 대하지 말아야겠다. 이놈의 매끄러운 혓바닥만 더 움직일 테 니.) 강희는 잠시 궁리를 한 후 손을 흔들었다. [일어나시오!] 위소보는 '황상, 고맙습니다'라고 절을 하고 일어났다. 강희가 물었다. 이번에는 잔뜩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십이장경을 찾으라고 했는데 어떻게 됐는가?] 위소보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희가 사십이장경에 대해서 갑자기 추문하는 것 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헛점을 드러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상에게 몇 책 건네준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에 위소보는 평소대로 일단 잡아떼기로 작정을 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황상, 소인은 황상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 그 경서를 황상께 드렸지요.] 강희가 말했다. [준 것만은 사실이오. 그러나 내가 묻고저 하는 것은 사십이장경은 우리 황가(皇家)에서 대 대로 물러 내려오는 보배인데 누가 책표지 속에 있는 것을 건드렸는가를 묻는 것이오?] 위소보는 그제야 황제의 뜻을 깨달았다. (이러쿵저러쿵 한 것이 원래 소황제는 사십이장경 속에 있는 장보도 때문에 그랬구나. 하지 만 이건 겁나지 않지. 소황제는 여덟부의 경서가 모두 이 어르신의 손에 들어온 것을 모르 고, 더구나 이 어르신이 암암리에 수작을 피운 것은 알 수가 없을 테니 짐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위소보는 좌우를 둘러보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어느 놈이 무슨 놈의 간을 씹어먹었길래 감히 황가(皇家)의 경서에 손을 댄단 말인가? 제 기랄, 살아 있는 게 원수같은 모양이지?] 강희가 말을 받았다. [그런 놈도 있겠지. 위소보, 그 경서에서 무엇을 가져 갔는가? 어서 내놓아!] 위소보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황상, 소인이 어찌 담이 그리 커서 황상과 태후 마님의 경서를 다치겠습니까?] 강희가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지 딴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진심이라고 믿었을 것 이다. 강희가 벽력같이 소리쳤다. [다륭! 내다 죽여버렷!] 다륭은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으나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겁이 나 펄썩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황상,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강희는 입가에 조소를 띄었다. [죽기가 겁나는가? 죽기가 겁나면 사실대로 말해!] 위소보는 땀을 흘리며 말했다. [황상,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미천한 신하가 어찌 알겠습니까?] 강희의 얼굴에 짙은 노여움이 감돌았다. [위소보, 고개를 들엇!] 위소보는 고개를 들고 땀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눈에 들어온 강희의 모습은 아주 익숙한 얼 굴이었다. 이전에 그 얼굴은 애티나는 얼굴이었다. 위소보는 어린 시절 그와 함께 씨름도 하 고 무공도 배웠으며 또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던 오배를 지혜롭게 사로잡아 강희가 집정한 후 처음으로 장애물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지금 황제의 얼굴에는 위엄 있는 수염이 나고 부 리부리한 눈길을 지녀 황제의 존엄이 나타났다. 더욱이 그의 이마에는 때 이르게 주름살이 나타났는데 수많은 근심과 우환이 아로새겨놓은 흔적 같았다. 강희도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위소보의 얼굴도 옛적보다 넓어진 것 같았다. 이전의 시정잡배의 몰골과는 달리 지금은 깊 이 있고 중후한 멋이 있었다. 위소보는 섕각했다. (만약 소현자가 황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서로 장난질 할 친구인데,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 가?) 강희도 생각했다. (만약 이런 일이 없고 소계자를 영원히 소태감이나 자그마한 신하로 두어 나와 함께 구속 없이 이야기나 나누며 보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강희가 돌연 나직이 말했다. [위소보, 이리로 오게!] 위소보는 무릎걸음으로 강희의 앞까지 다가갔다. 강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소계자, 우리는 영원한 친구라네. 서로 갈라질 수 없는 친구란 말이야. 안 그런가?] 위소보는 코끝이 찡해져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 황상, 소인에게 한 번만 더 그런 기회를....?] 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야 물론이지. 그러면 나도 몹시 기쁘고 마음이 가뿐하지!] 위소보는 흐느끼며 울먹였다. [소.... 소현자, 소현자....] 돌연 위소보는 말이 튕겨나오려고 했다. (소현자, 이 소계자가 녹정산 장보도를 훔쳤소이다. 그러나 시름을 놓으시오. 나는 절대 소 현자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겠소이다. 나는 절대 그 보물을 파내지 않겠소이다. 나는 절대 로 그 보물을 파내서 소현자의 용맥을 다치지 않겠소이다.) [소계자, 이 일은 조정의 대사이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네.] 강희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다륭, 위소보를 데리고 가서 잘 접대하시오.] 위소보는 '접대'라는 말을 듣고 사형에 처한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인 줄 알고 더럭 겁이 났다. (이 어르신을 끌고 나가 목을 자를 작정인가?) 위소보는 그만 모든 것을 혜아리지 않고 소리쳤다. [소현자! 소현자는 이 소계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지요. 이 소계자가 아무리 커다란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요. 사내대장부가 한번 말을 내뱉으면 말한 대로 해 야 하지 않습니까? 군자일언....] 강희가 뒷말을 제지시켰다. [그렇소. 다륭, 위소보를 데리고 가서 부인들을 만나보게 하오.] 다륭은 '예' 하고 대답했다. 그들이 방금 문어귀에 이르자 강희는 또 불러세우고 말했다. [다륭! 위소보의 몸에 하찮은 물건들이 많으니 하나 하나 살펴보시오.] 위소보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 총관, 우리는 형제인데 걱정하지 마시오. 내 스스로 하지.] 위소보는 품속에서 비수, 암기, 몽환약, 그리고 수십 장의 돈을 몽땅 꺼냈다. 위소보가 마지 막으로 옷을 헤치며 다륭에게 물었다. [다 총관, 더 검사하겠소?] 다륭은 다 수색했지만 다른 것이 더 없었다. 색액도는 문관이었다. 그는 위소보의 몸에서 나 온 흉기들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말했다. [위소보, 자네는 담도 크구만. 이런 흉기를 들고 어찌 황궁으로 들어온단 말이오. 규정에 어 긋나지 않소?] 위소보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색 대인, 이 위소보도 겁내지 않는데 어르신이 겁낼 게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 위소 보에게 머리가 백 개 있다면 아흔아흡 개는 이미 황상에게 잘리웠소이다. 지금 하나 남은 머리로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며 계집들과 놀고 있다오!] 서재를 나오자 위소보는 물었다. [다 형님,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다륭이 말했다. [동생, 어쩌겠소? 천뢰(天牢)에 들어가서 며칠만 있으시오.] (역자 주:천뢰는 지금의 감옥을 말함.) 위소보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황상께서 나를 데리고 가서 부인들을 만나보라고 하지 않았소?] 다륭이 가만히 말했다. [동생, 내가 제대로 알려주지. 일곱 제수씨들과 세 조카들은 모두 감옥에 갇혀 있다오.] 이제서야 위소보는 사태가 엄중함을 알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총관, 이미 다 잘 안배했다고 하지 않았소?] 다륭이 말했다. [상부의 명령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할 뿐이라네. 그러나 동생, 걱정하지 말게나. 제수씨들 은 장강년과 조제현이 잘 보살펴 주고 있다네.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말이네.] 몇 걸음 걷다가 다륭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황상이 노한 마음에 그랬을 텐데 며칠 후에는 다시 부르실 거네.] 천뢰는 조옥(詔獄)이라고도 했다. 그 위치는 자금성 내에 있는데 조정의 중대한 죄수들을 가 두는 곳이다. 대부분은 중요 대신이나 황족들과 그 친척들이다. 다륭은 위소보를 말로 위로 할 따름이었다. '조옥'이 설치된 이래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위소보도 다년간 이 황궁에 있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더 생각할 것 없 이 천뢰로 들어갔다. 고민에 쌓여 있는 부인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이, 오늘 저녁에 어떻게 잘 것인지 우리 주사위를 한번 던져 볼까?] 건녕공주가 먼저 달려와 또 위소보의 귀를 틀어잡고 욕했다. [더러운 소보, 죽일놈의 소계자!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기에 태후마님과 황제 오라버니가 이 처럼 노여워하신단 말이냐?] 위소보는 귀를 붙잡고 소리치며 말했다. [요 더러운 년, 썩어질 년의 공주야! 너는 이 어르신이 밖에 나가 계집들 사냥을 했다고 큰 처남이 성을 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소전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느 때라고 이렇게 떠들썩한 거예요?] 이 한 마디에 공주가 손을 놓았다. 하지만 노기가 가시지 않는지 연신 씩씩거렸다. 다륭이 말했다. [위 동생, 모두 형제들뿐인데 할 말을 다 하오.] 공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다륭, 여기에 좀 와 봐요!] 다륭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공주께서는 무슨 분부가 계시는지?] 공주가 악을 썼다. [나를 내보내 줘요!. 내가 태후 마님과 황제 오라버니를 찾아 왜 이러는가 똑똑히 물어 보겠 어요.] 다륭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예, 일단 태후 마님과 황상께 알리고 공주님을 모시러 오지요!] 공주가 소리쳤다. [안 돼요. 나를 지금 내보내 줘요. 딴 사람은 몰라도 나를 감히 가두다니? 나는 어떤 신분이 에요? 나는 공주란 말이에오. 부귀한 황실에서....] 다륭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나가버렸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했다. (제기랄, 네년이 정말 부귀한 황실에서 태어난 줄 아느냐? 네년은 가짜 태후년과 신룡교 그 비쩍마른 땡초 놈의 사생아야.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것도 모르고 부귀한 황실이 어쩌고 저 쩌고를 들먹이다니?) 다륭이 보는 척도 하지 않으니 공주는 그 자리에 앉아 울며 욕했다. [다륭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본 공주의 말도 듣지 않는단 말이냐? 내가 나가면 너희들같 은 더러운 시위 녀석들은 하나 하나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마음씨 고운 쌍아가 가서 그녀를 말렸다. 공주가 이렇게 떠들 때 위소보는 소전과 가만히 말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구려. 아마도 위소보가 사소보(死小實)로 될 것 같소!] 소전이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위소보는 일곱 부인 가운데 소전만이 재간이 있고 큰일을 해냄을 알고 있었다. [또 그 사십이장경 때문이겠지?] 소전은 원래 신룡교 교주 홍안통의 부인으로써 처음부터 신룡교에서 이 사십이장경을 얻으 려고 온갖 힘을 다해 온 처지였다. 그러므로 소전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 경서는 지금 당신 손에 없지 않아요?] 위소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상은 그 경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장보도를 내놓으라고 하오!] 위소보는 주위의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을 때 소전의 귀에 대고 말했다. [경서는 이미 다 바쳤다오. 그러나 그 장보도만은 내가 남겼두었다오.] 소전은 놀라서 물었다. [그래 황상에게 말했나요?] 위소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귓전에 나직이 소근거렸다. [내가 보건대 소황제도 추측뿐이오. 이 일은 매우 커다란 비밀이라오. 아는 사람이 없다오.] 소전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는 하지만 그가 알든 모르든 어쨌든 말하지 말아야 해요!] 위소보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다음 말을 물었다. [왜?] 소전이 말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해요. 우리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죽이지는 못하고 천천히 심문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방법을 강구할 시간을 벌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서 죽여 버리고 말 거예요.] 위소보는 '쪽' 하고 소전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소전뿐이구려!] 소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느 때라고 또 이렇게 치근덕거려요?] 눈치 빠른 공주가 소리쳤다. [둘이서 무슨 꿍꿍이 수작을 하는 게냐?] 위소보는 공주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공주님, 이러면 됐지?] 위소보는 부인들, 그리고 아이들과 천연덕스럽게 한동안 놀다가 난데없이 물었다. [모두들 왜 이 곳으로 온 게요? 이 곳이 놀기가 좋아 왔소?] 공주가 큰 소리로 욕했다. [놀기 좋다고? 어전시위들이 말하기를 태후 마님이 우리를 그리워 한다고 하면서 이 곳으로 데려왔지. 그런데 태후 마님과 황제 오라버니를 보지도 못하고 여기에 갇혔어!] 위소보는 그녀를 위로했다. [아마도 장모님과 큰 처남이 이 매부를 그리워도 나타나지 않자 모두 여기로 데려와서 겁을 주려는 게지. 하지만 돈도 들지 않는 집에서 살며 돈을 내지 않고 먹고 자니 얼마나 좋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저녁밥을 가지고 온 장강년과 조제현은 위소보를 보고 공손히 인사 했다. [위작 나으리, 무고하십니까?] 위소보는 냉소를 날렸다. [무고가 다 뭐요? 이번에도 8만, 10만 냥은 얻어왔었는데 황상이 돈이 필요하다고 다 거둬 가서 두 분께 줄 돈도 없구려.] 장강년이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공연한 말씀을 합니다. 위작 나으리는 우리들을 언제나 잊지 않고 계시군요. 나중에 돈이 생기면 얼마라도 주시겠지요.] 저녁상은 연회석처럼 잘 차렸다. 그러나 모두 입맛이 없어 먹지 않았다. 위소보만이 배불리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장, 조 두 사람이 상을 치웠다. 장강년이 두 손을 모으고 웃었다. [위작 나으리, 알아 맞춰 보십시오. 제가 뭘 가져왔겠습니까?] 위소보는 속으로 대강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저히 알 수가 없구려.] 장강년이 손을 펴니 주사위가 들려 있었다. 위소보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다짜고짜 빼앗아 쥐고 소리쳤다. [히야! 지존보닷!] 주사위는 빙빙 돌더니 과연 '지존보'가 나왔다. 위소보는 대뜸 주사위에 야료가 있음을 알았 다. [제기랄, 주사위에다 수은을 넣었구만.] 조제현이 웃으며 말했다. [주사위에 수은과 연을 넣지 않고 어전시위들이 어찌 나쁜 놈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위소보는 상대의 깊은 뜻을 익히 알았다. [그건 그렇소.] 위소보는 입으로 웃으며 말했으나 마음속으로 아주 감격했다. (과거에 이 어르신이 주사위를 소현자께 바쳤더니 형제들은 내가 도박을 즐긴다는 것을 알 고 주사위를 갖다 주었구나. 이런 정은 잊지 말아야지.) 위소보는 그러면서도 근심했다. (제기랄, 가두려면 이 어르신 혼자 가둘 것이지 온 집안 식구들을 다 가둘 건 뭐람.) 다시 곰곰히 생각하니 그 내막을 알만 했다. (이 어르신 하나만 가두면 일곱 부인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강호의 각문각파와 서로 연계 하여 탈옥하거나 번거로운 일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으니 소현자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 아닌가?) 부인들은 모두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위소보는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이 어르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지. 그러나 일곱 부인들은 모두 예쁘고 얌전한데 이 어르신 과 함께 죽는다면 얼마나 애석한 노릇인가?) 소전이 나직이 물었다. [탈옥할 수 없나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되오. 제기랄, 경계가 매우 심하다오!] 공주가 소리쳤다. [탈옥이라니?] 위소보는 급히 소리쳤다. [구린내 나는 년,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더 소리치면 네 년을 던져버리겠다!] 공주가 삿대질을 하며 일어섰다. [소리치면 치는 거지! 내가 소리지르면 어쩔 작정이냐? 나는 내일 태후 마마과 황제 오라버 니를 만나서 이야기하겠어. 탈옥하면 공개적인 반란이 아니냐? 나는 당당한 공주인데 역적 들과 함께 있지 못하겠다!] 위소보는 홧김에 소리쳤다. [시위들, 이리로 오게나!] 십여 명의 어전시위들이 급급히 달려왔다. 장강년이 물었다. [위작 나으리, 무슨 일이십니까?] 위소보는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년은 이 어르신이 싫으니 자네들이 끌고 가서 바지를 벗기고 마누라로 삼으시오!] 공주가 놀라 소리쳤다. [이 놈 소보, 무슨 헛소리냐?] 위소보는 노기등등해서 외쳤다. [이 어르신이 헛소리를 했다구? 이 어르신이 싫다면 싫은 거지. 어서 이 어전시위들을 따라 가서 여러 사람들의 마누라 노릇을 하면 좋을 거야.] 공주는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쌍아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공주, 위 상공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마세요.] 공주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더러운 소보, 죽을 놈의 소계자! 이 공주를 모욕했지? 내일 태후마마와 황제 오라버니에게 말할 테다. 그들이 나의 화풀이를 대신할거다!] 공주는 입으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위소보가 진짜로 자기를 어전시위의 마누라로 보낼까 겁 이나 더 이상 입을 열지는 못했다. 소전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위소보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했다. [황상은 모든 일에 빈틈이 없고 자그마한 실책도 범하지 않았소. 제갈지량도 따를 수가 없 지. 하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나중에 어떻게 될는지 기다려 봅시다.] 소전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입을 뗐다. [소보, 황상에게 커다란 기대는 걸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래 도 우리가 방법을 강구하여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어요.] 위소보도 동감을 표했다. [그래, 그렇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지!] 그렇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소현자가 그렇게까지 인정이 없지는 않은데?) (작자 주:이문(理門)은 반청 장령 양여래(羊如來)가 창설한 것으로 북청(北淸)을 멸망시키자 는 비밀 목적을 지니고 겉으로는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차를 벗하 여 모임을 유지했다. 수백개의 단구(壇口)를 관내외로 확산시켜 청조의 주의(注意)에서 벗어 나려 했다. 후에 양여래는 난수동(瀾水洞)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으며 131세까지 살았다. '이문'은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북청을 멸망시키자는 구호는 남해관세음(南海 觀世音)으로 변질되었고 나중에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 없이 순전히 금주 금연하며 차를 만 끽하는 것으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또한 대학사 색액도의 나머지 경과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황태자의 스승 노릇을 하면서 황태자를 위해 조정 대신들을 끌어들여 자기 휘하의 신하들을 육성하여 강희의 의심을 받았 다. 황태자가 몇 번 흥망성쇄를 겪으면서 나중에는 버림받은 후 강희는 색액도를 '작당하여 사 사로운 이익을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자결하도록 했다. 이것은 오래 전 일이다. 뿐만 아니라 당초의 색액도는 위소보의 '칠대공로'를 선독하는데 참 여하여 황궁의 많은 비사(秘史)를 장악했으므로 이것 역시 그가 죽어야 하는 원인으로 되었 다.) 第23章. 잇따라 닥쳐오는 위기(危機) 돌연 초롱불을 들고 밥통을 멘 사람 뒤에 태감 몇 사람이 걸어왔다. 감옥 문어귀에 와서 수 령태감이 소리쳤다. [황태후의 성지를 받들어 일등 녹정공 위소보 일가에 음식을 대접하나이다.] 공주는 눈물도 닦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틀림없지. 그래도 황액낭만이 이 딸을 아껴주는구나!] 수령태감은 시위들더러 옥문을 열지 못하게 하고 음식을 굵은 철난간 사이로 들여보내게 했 다. 그리고는 술잔 열한 개를 꺼내 위소보의 이남 일녀까지 포함하여 각기 한 잔씩 따랐다. 수령태감은 열한 개의 잔에 술을 다 붓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 모두 태후 마마의 은혜에 감읍하시오!] 위소보가 놀라며 망설이고 있는데 건녕공주가 먼저 술잔을 받아들고 말했다. [이 딸이 황액낭께 사죄하지요!] 공주가 잔을 들며 마시려는데 뜻밖에도 소전이 날렵한 발길로 공주가 들고 있는 잔을 걷어 차자 손에 쥐었던 술잔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건녕공주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소전 언니, 왜 그래요?] 위소보가 말했다. [개가 여동빈(呂洞賓)을 물고도 좋은 사람인 줄 모른다더니 소전이 제 목숨을 살려준 줄도 모르는구만. 어서 고맙다고 못 할까?] (역자 주:여동빈(呂洞賓)은 당대 경조(景祖)사람으로 팔선(八仙)중의 한 분이다. 저서로는 ' 여조전서(呂祖典書)'가 있음.) 공주가 핏대를 세웠다. [헛소리 마라! 황액낭이 내려준 술을 마시는데 무슨 목숨을 살리고 말고 할 게 있단 말이 냐?] 위소보는 냉랭하게 웃으며 쏘아부쳤다. [흥! 그 태후 쌍년이 준 술이 그리도 맛 좋단 말이냐?] 건녕공주가 대노하여 말했다.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황액낭 마마를.... 년이라고 욕한단 말인가?]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이 지경이 됐는데 그 쌍년을 감싸 줄 게 뭔가?] 공주는 위소보의 옷자락을 틀어쥐고 쥐어 뜯으려 했다. 소전이 주먹으로 공주의 가슴을 치 며 소리쳤다. [이제 더 떠들면 독주를 너만 먹이겠어!] 공주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독주라니?] 위소보는 화가 치밀어 욕을 퍼부었다. [네년은 죽어도 어찌 죽었는지 모를 거야!] 수령태감이 술잔에 다시 술을 부어가지고 와서 권했다. [어르신께서는 어서 드십시오. 태후 마마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위소보는 가래침을 뱉으며 소리 질렀다. [제기랄, 초상이 났다고 빨리 가서 알려!] 위소보는 속으로 후회했다. (이전에 저 태후년을 구해주지 말 걸 그랬어! 한 평생 가짜 태후 모동주에게 붙잡혀 갇혀 있었다면 오늘 이런 일도 없었는데.) 그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태후가 이처럼 음험하고 악독하다니.... 자기 구명은인을 독주를 먹 여 죽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만약 자기가 친히 겪어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은 아무리 말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금 이래 태후라는 화냥년들은 모두가 나귀를 부려먹고 잡아먹는 년들이지. 하나도 쓸모 없어.) 하지만 욕을 해봐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큰 마음을 먹고 소전에게 말했다. [소전, 다른 방법이 없구려. 차라리 이 개 같은 태감과 어전시위들을 죽여버리고 달아납시 다.] 소전이 고개를 저으며 울상이 되었다. [안 돼요. 웬일인지 요즈음 우리 일곱 자매들은 내력을 조금도 끌어올릴 수가 없어요. 우리 가 탈옥하려 한다면 밖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어 요.] 위소보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왜 내력이 없어졌다는 게요?] 소전이 쓸쓸하게 말했다. [아마 어느 놈이 수작을 피운 것 같아요!]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희망도 없었다. 위소보는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소황제야, 너무도 악독하구나!] 수령태감이 다시 독촉했다. [위작 나으리, 다 상의했습니까? 소인들은 다른 할 일들이 많습니다. 나으리, 소인들의 사정 도 좀 혜아려 주십시오!] 수령태감은 말을 하다 말고 돌연 소리쳤다. [어전시위들은 어디 있느냐?] 장강년과 조제현은 줄곧 숨어 있다가 그제서야 할 수 없이 몸을 드러내며 공손히 말했다. [태감님, 분부하십시오....] 수령태감이 위엄 있게 명했다. [태후 마마의 성지인데 위소보 일가에게 좋은 술을 대접하시오!] 장, 조 두 사람은 다년간 위소보와 사귀면서 위소보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마음이 서로 맞 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옥문을 열며 아주 우울한 기색으로 위소보에게 공손히 말했다. [위작 나으리, 우리는 성지를 어길 수 없소이다. 우리는 어찌 할 방법이 없으니 위작 나으리 께서는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위소보도 웃으며 대했다. [아니, 자네들을 나무랄 거야 있는가?] 위소보는 주사위를 꺼내며 재차 말했다. [우리 집사람들은 주량이 서로 달라 시끄러운 일이 많았다오. 태후 마마께서 보낸 좋은 술 이란 말만 들으면 서로 마시겠다고 하겠으니 주사위를 던져 선후롤 결정해야 한다오. 그러 면 서로 다투지도 않고 감정도 상하지 않게 되지.]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그만이라도 더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령태감이 위소보의 심 계를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시간이 되었소. 어전시위들, 어서 권하시오.] 어전시위들은 술잔을 받쳐들고 다가왔다. 이 위급할 때 위소보가 소리쳤다. [황상 폐하의 성지가 있소!] 사람들은 그만 놀라며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위소보가 생각했다. (우선 목숨을 살리고 봐야지. 가짜 성지야 이 어르신이 몇 번 해봤으니까.... 그런데 뭐라고 할까? 어쨌든 이 놈들을 놀라게 할 성지를 내려야겠지.) 그리고 또 생각해 보았다. (소현자가 나를 죽이자고 이 곳에 보냈을까? 아니, 태후년이 한 짓이 분명해! 소현자도 모를 수 있어!) 순간 위소보가 하늘을 보니 이미 밤중이 되었다. 그는 둘러댈 '성지'가 생각나서 짐짓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황상의 성지를 받으라! 시위 장강년, 조제현 두 사람은 자시에 위소보 일가 11명 죄인을 근 정전(勤政殿)에 압송할 것. 본 황제가 신문하니 어기지 말 것. 이에 알림.] 수령태감은 오랜 태감으로 견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냉소하며 말했다. [이전에 태후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없소이다. 위작 나으리의 재간은 아주 대단하구려. 글쎄, 그렇기로 스스로 성지를 내리니 정말 대단하오. 대단해!] 장강년도 위소보의 '성지'를 눈치챘지만 위소보를 도와주려고 수령태감과 말했다. [황상이 성지를 어떻게 내렸든지 관계할 거 있습니까?] 수령태감이 교활하게 말했다. [그렇지요. 그러나 황상의 성지가 있다고 하시니 위작 나으리께서는 그 성지를 보여주십시 오. 그래야 우리도 태후 마님께 보고하지요.] 위소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보건대 태감은 황궁에 있은지 하루 이틀 같지 않은데 왜 이런 규례도 모르오? 그래 성지는 모두 종이에 써야 성지인가?] 수령태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기는 합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럼, 태감에게는 태후의 성지가 있....] 돌연 위소보는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제기랄, 그야 태후의 성지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 이놈이 이렇게 큰 소리칠 수 있겠는가?) 과연 수령태감이 성지를 꺼내고 소리쳤다. [위소보, 그래, 이 성지를 거역할 작정인가?]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거역해도 죽고 겨역치 않아도 죽는 판인데 듣지 않으면 어쩔 작정이냐?] 돌연 눈이 아찔하더니 누군가 귀를 틀어쥐었다. 위소보는 욕했다. [제기랄, 누가 또 이 어르신의 귀를 잡아뜯는 게야?] 이번에 귀를 틀어귄 사람은 공주가 아니라 흉악스러운 수령태감이었다. 이 수령태감도 무공 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일곱 부인들이 달려들었다. 수령태감이 팔을 좌우로 펼치자 일곱 부 인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수령태감이 마침내 소리쳤다. [장, 조, 두 분은 저 몇 사람들에게 한 잔씩 권하시오!] 그리고 수령태감이 독주를 위소보의 입에 부어넣으려고 했다. 이때 돌연 엄엄한 소리가 들 렸다. [잠깐!] 수령태감이 말했다. [누구야!] 또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황상 폐하께서 납시었소!] 과연 강희는 다륭 등 어전시위들의 호위 하에 걸어왔다. 수령태감은 그제야 겁을 먹고 땅에 엎드려 꺽꺽거리며 말했다. [소인, 소인은 죽을 죄를....] 강희가 호령했다. [붙잡거라!] 강희와 함께 온 시위들이 달려들어 태감등 사람들을 몽땅 붙잡았다. 수령태감이 무릎을 꿇 고 말했다. [황상 폐하, 노여워 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소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태후 마마께서....] 강희가 소리쳤다. [닥쳐!] 그리고 어전시위들에게 명령했다. [누구든 손에 술이 있으면 그 술을 마셧!] 열한 잔의 술은 태감 다섯 명과 시위 여섯 사람들 손에 있었다. 강희의 명령이 내리자 열한 사람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 폐하, 제발! 황상 폐하, 제발....] 위소보는 몹시 기뻤다. (네놈들이 우쭐하고 이 어르신에게 먹이려고 했지? 잘 됐다. 어서 너희들이 마셔야지 이 어 르신의 속이 시원하지.) 위소보는 문득 장강년, 조제현도 술잔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황상....] 이 때 다륭이 자기가 거느리고 온 시위들을 보고 말했다. [황상 폐하의 말씀을 너희들은 못 들었는가?] 그러자 시위들은 호랑이처럼 달려가 두 사람이 한 사람씩 붙잡고 입에 독주를 부어 넣었다. 태감과 시위들은 발버둥쳤으나 역부족이었다.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셋을 세기도 전에 눈, 코, 귀, 입에서 검붉은 피가 나오며 태감과 시위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그 술은 독성이 강했 다. 독에 대해 아는 소전마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위소보는 배를 끌어안고 뒹구는 장 강년과 조제현의 참상을 보고 가슴이 쓰렸다. (이 두 형제는 생전에 나의 돈도 많이 쓰고 또 나를 많이 도와주었지. 나는 후에라도 돈을 더 주자고 했는데 주지 못하게 되었구나. 내가 이 귀신 같은 굴에서 나가면 다른 일은 차치 하고라도 먼저 두 사람에게 이, 삼백 냥짜리 지전을 사서 향불이라도 피워야겠다.) 다륭이 시위들을 시켜 열한 사람의 시체를 끌어내게 했다. 밤낮 '황액낭'과 '황제 오라버니' 를 보겠다고 쪼아대던 공주는 이 참상을 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다가 벌벌 떨고 있는 딸 쌍쌍이를 부둥켜 안으며 중얼거렸다. [왜 이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그는 명의상 공주라고는 하지만 강희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었다. 강희는 그녀와 황궁에 서 함께 자랐지만 공주의 출생 이전 일을 모르고 친 여동생으로 여겨왔다. 횡폭하고 무지막 지한 여동생이 이 모양이 된 것을 보고 강희는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강희가 걸 어와 공주의 품속에 안긴 쌍쌍을 쓰다듬어 주었다. 공주는 그의 손을 밀어버리며 소리쳤다. [다치지 말아요. 상하게 하지 마세요. 이 아이들은 나의 딸이에요!] 강희가 손을 거두면서 타일렀다. [여동생, 나를 믿든 아니 믿든 내가 알려주지. 독주에 대한 일은 나는 전혀 몰랐다네!] 공주는 정신없이 증얼거리다 강희에게 물었다. [황액낭, 나는 황액낭의 딸이에요. 쌍쌍이는 외손녀구 소보는 사위예요. 그런데 왜 독주 로?....] 위소보는 이전부터 공주가 부귀한 황실 출신이라고 뽐내는 것을 아니꼽게 보았다. 그러나 다년간의 부부로 있으면서 그 정이 날로 깊어졌다. 위소보는 그녀가 너무도 속이 상해 있는 것을 보고 위로했다. [공주, 그대도 알지만 우리 궁전의 태감들이 제멋대로 망탕짓을 하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절대 황상이나 황.... 잘못 생각하지 마시오.] 강희가 위소보를 쓸어보며 명했다. [다륭, 나의 지시대로 그런 태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게. 그리고 누가 가짜 성지를 전했는 가 명확히 밝히시오.] 다륭이 '예!' 하고 대답했다. 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를 속이지 말아요. 저는 알고 있어요. 그들은 모두 황액낭이 파견한 사람이에요. 황액낭, 우리가 무슨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지었다고 이런 악독한 짓을 한단 말인가요?] 강희가 말했다. [여동생, 여동생 일가의 안전은 내가 보장하지!] 강희는 왔다갔다 걸으며 혼자서 말했다. [그렇지. 한 사람에게 머리가 백 개 있다면 아흔아흡 개를 베어버려도 하나는 남겨 주어야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 수 있지않는가?] 그는 위소보가 평상시에 하던 말을 뇌까렸다. [위소보, 내 말이 맞소?] 위소보는 황제가 아직도 자신에 대해 정감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황상은 아주 현명하시니 군자일언.... 뭐던가?] 강희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지!] 위소보는 크게 시름을 놓았다. 강희는 잠시 생각하다 옥패를 다륭에게 주며 말했다. [다륭, 옥패가 바로 나요. 앞으로 짐의 친필 성지가 없으면 어떤 사람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 시오. 위반한 자가 있으면 죽여도 살인죄로 치지 않겠소!] 다륭이 대답했다. [성지대로 하겠습니다.] 강희는 또 생각하다 어전시위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듣거라. 일후에 위소보에게 보내온 음식은 너희들이 먼저 먹어 본 다음 이들 가 속들에게 먹도록 하라!] 어전시위들이 일제히 '예' 하고 대답했다. 시위들은 열한 사람의 시체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 쳤다. 위소보는 강희가 돌아간 다음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너희들은 잘 들었지! 만약 더러운 년들이 구린내 나는 태감 녀석을 시켜 그런 약으로 우리 가속들을 잘못되게 하는 날에는 너희들 스스로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 어전시위들이 누가 위소보의 명성을 모르겠는가? 그래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의 옥패가 여기에 있소이다. 어느 놈이 감히 와서 건 드리면 호랑이의 코에 불침을 놓는 격으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위소보는 헛웃음이 터졌다. [허허, 거야 모르지. 이 어르신이 알고 있는 어떤 년은 아주 음험하고 악독해. 늘 보살처럼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독사같은 마음이란 말이오. 못된 짓은 다 한다오.] 위소보는 장강년이 준 주사위를 던지며 중얼거렸다. [하늘이시여 지존보가 나오게....이 어르신은 오늘 저녁에 공주를 끌어 안고....] 강희의 엄한 명령에 겁내지 않은 어전시위가 하나도 없었다. 밤낮 경계를 강화했을 뿐더러 매끼 식사마다 먼저 맛보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위소보 일가가 식사하게 했다. 위소보와 여러 부인들은 좀 시름을 놓았지만 탈옥하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또 닷새가 지나 갔다. 그러나 강희는 그들을 이 곳에 가둬놓았을 뿐 심문도 하지 않으니 마치 이들을 잊어 버린 것 같았다. 어느날 아침 위소보는 어전시위들 가운데서 우아대를 발견했다. 위소보는 몹시 기뻤다. (이 어르신은 살 길이 생겼구나. 셋째 동생은 무공이 출중하여 보통 시위들이야 어림도 없 지. 그 무슨 '사자후'인지 '멧돼지후'인지 한 번 소리만 치면 이런 시위들이야 한 절반 죽어 버리지.) 위소보는 우아대를 보고 소리쳤다. [우....] 우아대는 멍하니 서 있다가 모르는 척하고 지나갔다. 위소보는 대노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좀 괜찮을 때는 벌벌 기어들다가 신세가 이렇게 되니 보는 척도 안 한단 말인가?] 점심밥은 우아대가 가져왔다. 그는 아주 쌀쌀한 표정으로 말없이 밥과 음식을 담았다. 위소 보는 볼수록 성이 나서 불렀다. [다 총관, 이리로 오시오.] 다륭이 급히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위작 나으리, 무슨 일입니까?] 위소보는 우아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새로 온 사람이오?] 다륭은 위소보를 보고 또 우아대를 보며 생각했다. (너희들은 결의형제인데 왜 모르겠느냐?) 다륭은 뭐라고 하기 어려워 그저 '예! 예!' 했다. 위소보는 트집을 잡기로 작정하고 소리쳤 다. [새로 온 사람이 규칙을 모른다면 다 형도 규칙을 모르는가?] 다륭은 비로소 우아대를 발로 차며 소리쳤다. [우아대, 얼이 빠졌나! 황상의 성지가 있는데 무릇 위소보 일가의 음식은 시위들이 먼저 맛 보라고 했는데 왜 이처럼 어리석은가?] 우아대는 대답도 없이 밥과 음식을 담아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다. 한참 지난 후 우 아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다륭은 친히 위소보 일가에게 밥과 음식을 담아 주었다. 위소보는 코로 '흥!' 하고 우아대를 모르는 척하고 소리를 길게 빼며 다륭과 말했다. [다 총관, 황상은 다 총관을 아주 믿더구만. 이 중대한 책임을 다 총관 혼자에게 맡겼는데 황상의 성지를 알아야 하고 조심해야 하지요. 그런데 왜 마음대로 개 한 마리를 끌고 왔소? 너무도 법을 무시하고 황상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오?] 다륭이 급히 말했다. [아니, 내가 어찌?] 위소보의 말투가 모두 우아대를 빗대어 말한다는 것을 알고 다륭이 말했다. [위작 나으리, 양해해 주십시오. 요즘 일손이 모자라 잘 살펴드리지 못할까봐 사람을 증가했 습니다.] 강희의 성지로 하여 황궁 내의 경계는 더욱 엄하게 되었고 게다가 며칠 전 장강년, 조제현 을 포함해 몇 명의 어전시위들이 죽었으니 사람들이 더욱 모자랐다. 이 감옥의 경비를 강화 하기 위해 다륭은 특히 우아대를 데려왔다. 이리하여 감옥을 지키는 일 외에도 결의형제로 서 서로 보살펴 줄 수 있으리라는 배려에서였다. 그러나 일은 생각과 달리 우아대가 오자 위소보는 더욱 성을 냈다. 다륭은 더 말하기 불편하여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우아대, 조심스럽게 심부름을 잘 해! 위작 나으리께서 사오 일 후에 나가면 그대에게도 좋 은 일이 있어!] 위소보는 능청을 떨었다. [여기가 이처럼 좋온데 나가기는? 여기에서 여러 형제들이 시중들어 주니 살기가 좋아. 나 갈 생각이 나지 않소.] 다륭도 웃으며 말했다. [위작 나으리, 이 곳이 좋다 해도 황상께서 여기에 편안히 있지 말라면 어쩌겠소? 조정에 매일 큰 일들이 많아 아마도 황상이 위작나으리를 모셔다 다른 일을 시킬 것이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두고 봐야지!] 위소보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일생 가운데 스승 두 분을 모셨는데 진근남 스승은 돌아가셨으니 탓할 것 없 고 또 한 분은 구난사태인데 이 어르신을 돕지 않을 뿐더러 어르신의 의여동생을 데려다 비 구니로 만들었단 말이야. 두 분 스승이 이 어르신에게 가르쳐 준 무공을 보잘것없는 것이어 서 생명이 위급한 때에도 쓸모 없으니 후에 만나면 이런 개같은 무공을 돌려주고 말겠다.) 그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어르신은 적지 않은 결의형제를 맺었는데 강친왕 걸서, 또 색액도, 우아대, 문아 여동생 등이 있지! 그러나 이 어르신이 운수가 사나워 아직 사형장까지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이런 때에 강친왕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색액도는 겁을 먹고 황제 쪽에 서서 이 어르신을 욕하 며 다륭은 이 어르신을 공작부에서 이 곳까지 속여서 데려 왔지. 그래도 양심은 조금 남아 있어 이 어르신을 크게 난처하게는 굴지 않는단 말이야.) 위소보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제일 기분 상하게 하는 놈은 우아대인데 말조차 하지 않는단 말이야. 강호에서는 의협심을 중히 여기고 친구가 위험에 처하면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선뜻 나선다고 떠벌였지만 모 두 개방귀 같은 소리야!) 돌연 위소보의 눈 앞에는 문아의 그림자가 언뜻 스쳤다. 마치 자기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후회되어 스스로 자기를 욕했다. (제기랄, 위소보야! 너는 왜 문아 여동생을 그런 나쁜 놈들과 같다고 여겼느냐? 문아가 나의 형편을 알면 꼭 와서 도울 것이야. 또 내가 소현자에게 살해되었거나 태후년의 독주를 먹고 죽었다면 문아 여동생은 이 위소보를 위해 뜨거운 눈물이라도 흘리겠지. 이같이 눈물을 흘 리는 문아 여동섕이 이 세상에 있으니 제기랄, 죽어도 원이 없지!) 순간 기세당당한 대장부의 호탕한 기백이 갑자기 치솟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기백은 순 간적인 것이었다. 그는 곧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고운 여자들이 다 와서 송장(送葬)을 한다 해도 나는 죽기 싫어. 소류망 출신인 내가 오늘까지 겨우 살아왔는데 무엇이 모자라 죽겠는가? 곱고도 얌전한 부인 일곱 이 있고 떼쟁이 아들 둘이 있으며 또 장래에 미인으로 될 딸애도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죽음은 위소보에게 너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위소보는 또 친 구들이 생각났다. (모십팔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현정도장, 전로본, 서화룡, 개방의 과산호, 또 어르신께서 50만 냥이나 가져간 황룡대협, 또 이 어르신이 아낌없이 돈을 내어 보살펴 준 조설근의 할 애비 조인.... 이 어르신은 그래도 네놈들에게 은공이야 있지 않는가? 그러니 이 어르신을 모 르는 척할 수야 없겠지?) 위소보는 죽음을 앞에 놓고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심지어 자기 적수들인 홍안통, 정극상, 폐병쟁이 어린 거지 관의호마저 생각났다. 평시에는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겁이나 쩔쩔맸지 만 어쩐지 지금은 그들마저 자기 앞에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들이 그 어떤 독약이나 암기를 쓰든지간에 자기를 이 감옥에서 구해 이 황궁을 떠나게만 하면 그들의 손에서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죽는 것도 겁났지만 지금처럼 자기가 새처럼 새장에 갇혀 있 는 것이 더 겁났다. 위소보는 잠들 수가 없어 이런 허튼 생각만 했다. 돌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전시위들이 교대하였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우아대였다. 두 사람은 자지 않고 서로 마주보고 서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돌연 우아대가 기지개를 켜 며 하품을 했다. 다른 한 어전시위도 위소보는 알고 있었다. 두강(杜康)이라 부르는데 아주 재치 있게 생기고 무공도 고강한 사람이었다. 우아대는 어전시위로 된 후 황궁문만 지켰다. 그러다가 후에 위소보를 따라 강호를 다녔기 때문에 어전시위들은 서로 잘 알지 못했다. 만약 다륭이 이번에 이 곳에 임시로 보내지 않 았다면 이런 사람이 있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두강과 우아대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두 강은 우아대를 하찮게 보았다. 두강이 소리쳤다. [보초를 서며 왜 하품만 하는 거냐?] 우아대가 말했다. [예, 잘못했소이다.] 비록 잘못했다고 했지만 참지 못해 또 하품을 했다. 두강이 노해 말했다. [그래, 어르신의 말을 못 들었나?.... 아 함!] 그도 전염된 것처럼 긴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아대가 말했 다. [형님, 미안합니다. 저는 고의적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 아 함!] 두강이 웃으며 말했다. [대낮에 뭘하고? 기생집에 갔겠지? 아 함!] 우아대가 말했다. [아니외다.... 아 함!] 두강이 말을 하다 말고 재차 하품을 했다. [제기랄, 네가.... 아 함!] 두 사람은 너도 나도 번갈아 하품을 마치 내기나 하는 듯 말할 사이도 없이 계속했다. 위소 보는 이상하게 여기고 말했다. [제기랄, 너희들은 몹쓸 병에 걸린 것이 아니냐?] 소전이 위소보를 당기면서 낮게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여기에는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요.] 위소보는 귀가 번쩍 트였다. [꿍꿍이라니? 몽환약이라도 먹었단 말인가?] 말도 끝나기 전에 두강이 땅에 쓰러지며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우아대는 정신을 차리고 위 소보에게 말했다. [형님, 형수님들, 다들 무고하신지요? 조카들도 괜찮습니까?] 위소보는 이 뜻밖의 질문에 믿기 어려워 하며 반문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오. 아니 동생, 요술을 피웠소?] 소전이 웃으며 말했다. [우 동생, 동생의 미혼대법(迷魂大法)이 효과를 냈군요!] 우아대가 말했다. [둘째 형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군요. 이 공법(功法)은 힘이 대단히 들지요. 저의 내력도 제대로 펼치지 못해 감히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훈장 앞에서 글자풀이하는 격입니다. 형수님의 웃음거리나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아대는 이렇게 간단히 말했지만 무공에 대한 조예가 깊은 소전은 이 무공 내막을 알고 있 었다. 미혼대법은 현대의 최.면술(制民術)이다. 현대 최면술은 암시법(暗示法)을 강조하고 무 공의 미혼대법은 고심한 내력으로 상대방을 졸게 하는 것이다. 소전은 원래 남편 홍안통도 이 무공을 펼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 젊 은 우아대는 이 무공을 펼치는 것이었다. 소전은 우아대가 특이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보 았지만 그의 무공 내력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우아대가 손을 비 비며 말했다. [둘째 형님, 남의 이목이 있어서.... 낮의 일을 많이 양해해 주십시오!] 위소보가 웃으며 답했다. [제기랄, 지나간 일을 말할 것 있나? 동생, 어서 이 감옥 문이나 열어주게나. 밤이 길면 꿈 도 많다고 제기랄....] 우아대가 대꾸도 없이 재빨리 두강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그는 아주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 가 물었다. [이 두강 형제는 이제 깨어나지 못할 거요. 형님,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위소보는 창살을 뒤흔들었다. [동생, 어서 우리를 내보내 주시게.] 우아대가 소전을 자세히 훑어보며 말이 없었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말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의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남의 처를 힐끔힐끔 쳐다볼 건 뭔 가?] 우아대가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형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형수님의 기색을 보니 몹시 피곤해 하시는데 아마도 다른 작자가 암암리에 수작을 피운 것 같소이다!] 소전이 말했다. [그래요. 우리 자매들은 내력이 다 소실되었소.] 우아대는 안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황궁의 경계가 심하지만 이 일곱 형수님들과 함께 힘쓰면 이 곳은 나갈 수 있다고 여겼는 데 내력이 다 소실되었다고 하니 일이 다 틀렸소이다.] 위소보도 크게 당황해 울상으로 변했다. [그럼 어쩐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해 봐!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우아대가 한참 생각하다가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 [이것은 원래 말하려고 하지 않았소. 이 지경이 되고야 이것저것 돌볼 게 없지.] 위소보는 마른 침을 삼키며 상대의 입을 주시했다. [어쨌든 살고 봐야지. 어서 말하시오.] 우아대가 은밀하게 말했다. [형님이 다륭에게 속아 궁전으로 들어온 후 형님의 공작부에 많은 강호 사람들이 왔다오!] 위소보는 뇌리를 스치는 그 무엇에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요?] 우아대가 말했다. [황룡대협, 신룡교의 홍 교주, 구난사태, 천지회의 현정도장 일행과 개방의 관의호, 정극상.... 그리고 명성이 높지 않은 이러저런 사람 백여 명은 족히 됩니다. 저는 모두 기억할 수 없습 니다.] 위소보는 심중에 있던 사람의 안위를 생각했다. [문아 여동생은 오지 않았소?] 우아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위소보는 실망했다. 소전이 자기를 보고 웃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에 좀 눈치 차 렸는지 위소보는 실없는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그 놈들이 오면 뭘 하는가? 자기 의리도 지키지 못 하는 녀석들! 모두가 좋은 심보 를 품은 놈들은 아니야!] 우아대가 정색을 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어디에서 알았는지 모두 위작 나으리를 구하려고 온 것 같았 습니다.] 위소보는 의기양양해 말했다. [소전, 보시구려. 이 소백룡 나으리는 그래도 강호에서 평판이 자자하지 않소?] 입으로는 나발을 불어댔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근심되었다. (스승님이 와서 나를 구해주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야. 게다가 황룡대협, 현정도장, 그들 도 수수방관할 수 없지. 그러나 홍안통, 정극상, 폐병쟁이 어린 거지까지 와서 나를 구한다 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야. 이 어르신은 그들과 그럴 만한 정이 없는데.) 소전은 강호의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참 생각하더니 그 내막을 알고 물었다. [우 동생, 그들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우아대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것이지요.] 위소보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말해 보구려. 무슨 요구요? 아무리 그래도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어렵겠소?] 우아대가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님, 그들이 말하기를 형님이 그 무슨 녹정산 장보도고 하는 것을 안다며 자기들을 데리 고 가서 보물을 파내어 나누어 가지고 형님께도 한 몫 드린다고 했소이다.] 위소보는 펄쩍 뛰며 욕했다. [제기랄, 녹정산이고 장보도이고 다 뭔가? 그래 구난사태도 그 말을 믿는단 말인가?] 우아대가 말했다. [사태께서는 다른 사람과 달라 믿지 않겠지요. 그러나 형님을 구한다고 하니 사태께서도 부 득불 그들을 따라왔지요. 사태께서 저에게 조용히 말씀하기를 형님께 그 분의 생각을 알려 달라고 하셨소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스승님의 무공이야 태산북두이니 황궁을 드나들어도 두려울 것 없지. 그러니 이 어르신도 무섭지 않아.] 여기까지 말하고 잠잠했다. 구난사태의 무공을 황궁에서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경계 가 이처럼 심한 때 그녀가 혼자서 열한 사람이나 구해내기는 벅찬 일이었다. 위소보의 이마 살이 내 천(川)자를 그렸다. [소전, 어쩌면 좋을까?] 소전이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소보,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이에요. 그래도 위작 나으리가 말해야 하지요.] 위소보는 더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이 어르신이 그들의 요구대로 대답하면 되지.] 우아대가 숙연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한참 있다가 우아대가 어물어물하며 말했다. [그 교활한 놈들이 형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어쩌시겠습니까?] 위소보는 발로 땅을 세차게 굴렀다. [싹 쓸어버리지! 대장부가 말하면 군자일언.... 뭐라더라?....] 하지만 자기도 믿음성이 없음을 느꼈다. (이 어르신이 말이야 믿을 게 없지. 이랬다저랬다 하는 데는 강호에서 이름이 있지. 그 놈들 에게 뭐라도 좀 주지 않으면 믿지 않을 건 뻔한 사실이지.) 위소보는 난처한 기색이 되어 재차 물었다. [그들이 또 무엇을 요구했소?] 우아대는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먼저 형님을 구한 다음 형님이 그들을 데리고 가서 장보도를 파낼 때까지 그들 각각이 형님의 혈도를 한 곳씩 눌러놓자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쯤이야 누르고 싶으면 누르라지.] 위소보는 무공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적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또 무슨 큰 일인가 했더니 혈도를 짚겠다는 것이구나. 너희들이 누르려면 눌러라. 나 중에 친구를 찾아 풀면 그만이지.) 소전이 말했다. [소보, 이 일은 그리 경솔히 대할 일이 아니예요. 좀 세심히 생각해야 하지요. 각 파들이 혈 도를 누르는 방법은 저마다 달라 다른 사람이 풀어낼 재간이 없어요.] 위소보는 다소 놀라 눈망울을 굴렸다. [제기랄, 그처럼 무서운가?] 우아대가 말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렇지요. 여러 사람에게 혈도를 눌리우면 그들 손아귀에 든 것과 마찬가지지요.]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알만 하오. 입으로 빈 말을 해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니 당장에 현금치기를 해야지.] 우아대가 근심되어 소전을 바라보았다. 소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대가 소리를 죽여 말했 다. [그럼, 내일 밤 자시에 봅시다.] 우아대는 더 말하지 않고 두강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얼마 안 되어 두강은 깨어나 눈을 비 비며 좌우를 살폈다. [내가 잠들었던가?] 우아대는 공손히 말했다. [두 형님께서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신 거지요.] 하루가 일 년처럼 지리하고도 고달펐다. 이튿날 밤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웬일인지 다륭은 다섯 명의 어전시위들을 거느리고 옥문 앞에서 순시하며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예 정된 시간이 박두했다. 우아대는 너무도 조마조마해 위소보에게 눈짓을 했다. 위소보는 계획 적으로 말했다. [다 총관, 이리로 오시오.] 다륭이 급히 달려와 물었다. [위작 나으리, 무슨 일이 있습니까?] 위소보는 짐짓 매우 신비스런 어조로 말했다. [나의 공작부 서재에 120만 냥 돈을 감추어 두었다오....] 다륭이 아주 기뻐하며 들었다. 우아대가 다륭의 뒤에 번개같이 접근해 손으로 다륭의 잔등 을 쳤다. 다륭은 꼼짝 못 하고 쓰러져 죽었다. 우아대가 쏜살같이 밖에 나가 어전시위들의 혈도를 하나하나 눌러놓았다. 위소보는 기뻐하며 소리쳤다. [동생, 문을 열게나!] 멍하니 서 있는 시위들을 보고 위소보가 소리쳤다. [제기랄, 생명이 위급한 지경인데 지체할 건 뭔가?] 우아대가 말했다. [우선 열쇠를 찾아야 하지요. 가만 있자. 이놈한테 있나?....] 잠시 후 감옥문을 열었다. 위소보가 막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려 할 때 였다. 돌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다. 위소보가 기뻐서 말했다. [그들이 왔구려!] 우아대는 정신이 긴장되어 중얼거렸다. [걸음소리가 터벅터벅 무거운 것을 봐서 무공고수들 같지 않소이다.] 우아대는 급급히 누워 있는 어전시위들을 하나 하나 끌어다 세워놓았다. 그들은 혈도가 눌 리워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우아대가 이들을 다 세워놓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후 마마께서 납시오!] 순간 위소보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되어 맥이 탁 풀렸다. [저 화냥년이 찾아왔으니 이 어르신은 목숨을 살리기 어렵게 됐구나.] 우아대가 낮게 말했다. [형님,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는 문어귀에 달려가 황태후를 맞아들였다. 황태후는 가마에도 앉지 않고 왔다. 많은 태감 들을 거느리고 들어오며 우아대를 보는 척도 않고 다른 감방으로 들어갔다. 위소보는 놀랍 고도 이상했다. (이 년이 야밤중에 왜 왔을까? 그래, 그 곳에 곱게 생긴 놈들을 가둬 넣고 그 곳에 가서 못 된 장난을 치려고 그러는가? 그런데 이리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면 불편할 텐데? 나는 여춘원에서 자랐지만 이런 외도꾼을 보지 못했구나.) 그가 이런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괴상한 소리가 나더니 간벽이 무너지듯 아래로 꺼져 내려가 옆의 감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그 방에는 수십 명 남자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얼마 동안 갇혀 있었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쾡한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고 머리가 텁수룩하며 볼품이 없었다. 그들은 황태후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 니 서 있었다. 황태후는 위소보와 그 남자들 중간에 서고 뒤에 수십 명의 태감들이 서 있었 다. 태후는 쌀쌀한 눈길로 위소보와 그의 부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낮 기다리던 공주는 황액낭을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황태후가 천천히 물었다. [위소보,무고한가?] 위소보는 웃으며 답했다. [황액 낭, 무고하십 니 까?]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쌍년, 뒈지지 않았구나D 돌연 황태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위소보, 자네는 아이신죠뤄(愛新賞羅) 가문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지금부터 황액낭이고 뭐고 부르지 말게!] (역자 주:아이신죠뤄는 강희의 만주 성이다.) 위소보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황액낭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속으로 생각했다. (황액낭이라 부르지 말라면 기생년이라고 부르지. 볼품없는 기생년아, 이 어르신의 요구대로 해주겠느냐?) 황태후는 그가 행패를 잘 부리는 줄 알고 그와 더 말하려 하지 않고 그 남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위소보, 이 사람들은 모두 자네와 연원이 있으니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위소보는 찬찬히 보고 생각했다. (제기랄, 어떤 녀석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생면부지인 것이 하나도 똑똑히 알 수 없구나. 그런데 저 화냥년은 나와 무슨 연원이 있다고 이러는가? 그래, 우리 어머니와 좋 아하는 외도꾼들이 아닌지? 그 가운데 이 어르신의 애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위소보는 웃으며 답했다. [황.... 황태후 마마,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려면 양주에 가서 저희 어머니께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황태후는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위소보, 이 서른네 명 가운데 한 사람도 모른단 말인가?] 위소보가 생각했다. (나의 어머니는 기생인데 이 서른네 명이 모두 이 어르신의 애비인지도 모르겠다?) 황태후가 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이 나으리를 모르겠느냐?]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제가 연원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들과 연원이 있다 해도 나는 죄인이니 친척을 맺 자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황태후가 천천히 말했다. [어얼꾸나호(額爾古納河).] 그러자 이 서른네 명의 사람들은 뭐라고 숙덕숙덕, 만주 말로 징치리쟝(精奇理江) 후마얼워 지산(呼馬爾窩集山)이니 하고 중얼거렸다.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말할 줄도 모르는구나. 무슨 놈의 '니 애비 강'이고 '니 에미 산'이란 말이냐?] 문득 위소보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이 산들은 모두 녹정산 장보도 가운데의 지명이었다. 그 해 위소보는 사십이장경 가운데 감추었던 조각들을 꺼내 쌍아와 함께 장보도를 맞춘 다 음 만문(滿文) 지명을 쌍아가 서른다섯 장에 그대로 본떠 그려냈다. 그리고 위소보가 서른다 섯 명의 만주(滿洲) 모첩식을 찾아 한 사람에게 한 장씩 나누어 주어 만문을 한문으로 번역 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징치리강이고 우마얼워지산이었다. 번역에 참가했던 모첩식은 모두 서른다섯 명이었다. 그 중에 지금 서른네 명이 여기에 있었 다. 한 사람은 정극상의 스승 풍석범에게 붙잡혀 갔다. 그 한 사람의 모첩식은 금년에 미산 도에서 정극상에게 붙잡혀 위소보를 죽이려 했다. 위소보의 많은 의문들이 이제 와서 풀렸 다. 강희는 장보도 때문에 위소보의 일가를 감옥에 가두고 서른다섯 명 모첩식 가운데 서른 네 멍을 몽땅 붙잡았다. 위소보는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태후 마마, 어르신은 모든 일에 빈틈이 없습니다.] 태후가 탄식하며 말했다. [대청(大淸) 용맥과 관계되고 아이신죠뤄의 천하와 관계되는 일인데 빈틈이 있어 되겠는가?] 위소보는 계속 찬사를 보냈다.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의 수중에 있는데 대청의 강산이야 천만 년 흥성해질 것이고 어르신도 장수할 것이며 그 복을 길이길이 누릴 것입니다.] 황태후가 냉랭히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나는 자네가 큰 재간은 없어도 꾀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네. 자네가 한 일 을 나는 아주 꼼꼼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네!] 위소보는 눈알을 돌리더니 비로소 알았다. (이 화냥년은 서른네 명 모첩식을 붙잡았지만 아직도 장보도를 찾아내지 못해 시름을 놓지 못하고 있구나?) 위소보는 아주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지만 많은 것들을 생각해 봤다. (요년이 녹정산 장보도를 찾으려고 사람을 바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야. 그러면 이 어르신을 도울 사람들이 오게 될 것이니 미안하지만 그 때 이 어르신이 달아나면 그뿐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히히 웃으며 말했다. [이 며칠 동안 저는 강호를 다니며 적지 않은 놈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 놈들은 저와 이 전에 일들을 물으며 무슨 돈이요, 보배요, 지도요 하며 놀라게 만들었지요. 저는 깡그리 잊 어버렸는데 태후마마께서는 널리 아량을 베푸시어 제가 며칠 생각해 보게 해주십시오.] 황태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위소보, 정말 생각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 위소보가 말했다. [그래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물건을 잃어버리게 되니 얼마나 아 깝습니까?] 황태후가 말했다. [그럴 것 같지는 않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하지만 물건만 있고 아는 사람이 없다면 잃어버린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싸늘한 시선으로 태감들을 휙 돌아보았다. 불시에 한 무리의 태감들 이 비수를 들고 모첩식을 향해 달려갔다. 서른네 명의 모첩식은 그만 비수에 찔려 일시에 쓰러졌다. 이렇듯 비참한 광경을 보자 사람을 죽이고도 눈깜빡하지 않던 소전마저도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태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독오른 살모사처 럼 음침각박했다. [위소보, 똑똑히 봤지!] 위소보는 겁이 나서 말도 못 하고 더듬거렸다. [태후.... 너무....] 태후가 사악한 안광을 번뜩였다. [너무도 악독하다는 말이지? 그러나 방법이 없어. 아들 황제의 강산을 위해 황액낭으로서 몇 사람 죽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위소보는 속으로 몹시 증오하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년! 네년 아들 하나를 위해 남의 집 아들 서른네 명이나 죽인단 말이냐? 그런데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단 말이냐?] 황태후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위소보, 뭘 중얼거려?] 위소보는 오싹 소름이 끼쳐 얼른 손을 저었다. [저....저는 저 사람들이 어쩐지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황태후가 말했다. [그들은 이전에 나를. 위협했어. 자기들을 죽이면 사십이장경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고 했 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생각했어. 그들이 영원히 말하지 않으면 그 비밀이 영원히 누설되지 않지. 위소보, 내 말이 이치에 맞겠지?]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 마마, 도리야 옳지요.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돈과 보배를 친구의 집에 감춰두고 말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래도 살려두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태후 마님?] 황태후가 이상야릇한 조소를 입가에 지었다. [자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이지?] 위소보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것이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황태후가 냉소하며 말했다. [흥! 자네도 자신을 잘 아는구만. 자네에게 돈이 많고 보물이 있어도 황제는 안심되지 않을 것이고, 또 돈과 보물을 꺼내기 위해 용맥을 다치면 황실의 앞날을 파괴하는 것이니 작은 놈 때문에 큰일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제일 좋은 방법은 돈이나 보물을 아는 사람 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위소보의 최후수단은 황태후에게 하나 하나 다 부결되고 말았다. 위소보는 식은땀이 났다. 위소보는 다급히 말했다. [태후 마님, 교활한 토끼가 굴을 세 개 판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돈과 보물을 파묻은 사 람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태후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똑똑히 알고 있네. 그런 사람은 전부 여기에 있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년은 도처에 간사한 놈들을 파견하여 그 내막을 잘 알고 있구나. 그러나 이 어르신의 신 변에는 그런 놈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혹시 공주년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장보도가 무 엇인지 모르고 있지.) 황태후가 돌연 안색을 바꾸며 태감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무엇을 기다리느냐?] 수십 명 태감들이 피묻은 비수를 들고 위소보 일가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위소보는 겁을 먹고 급히 물러서며 말했다. [제기랄, 손을 쓸 작정이냐?] 위소보의 무공이라면 목숨을 살리기 위해 달아나는 것이 제일 큰 재간이었다. 그러나 이 작 은 감방에서 신행백변을 펼칠 수가 없었다. 일곱 부인들은 내력이 조금도 없어 자기를 돌보 기도 어려워 위소보를 구원할 방법은 더욱 없었다. 수십 명 태감들의 무공은 별 수 없지만 그래도 다년간 훈련을 받아 동작이 민첩하여 위소보 일가의 힘으로는 당할 수가 없었다. 제 일 앞에 선 태감이 비수로 위소보의 가슴을 찌르려 했다. 위소보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 을 때 쌍아가 불시에 막아 나서며 위소보를 뒤에 끌어 당겄다. 쌍아의 내력은 전부 소실되 었지만 무공 수위는 아주 높았다. 위소보가 피하자 쌍아는 오른손으로 태감의 팔목을 누르 고 왼손으로 태감의 비수를 빼앗았다. 쌍아는 태감을 물러서게 하고 소리쳤다. [가만 있어! 나에게 할 말이 있어!] 쌍아는 아주 부드럽고 말수 적은 사람이지만 이 때 그의 깐깐한 소리는 주위의 사람들을 모 두 멈추게 했다. 쌍아가 태후에게 말했다. [태후, 사십이장경은 위 상공과 관계 없어요. 장보도는 내가 감추었어요. 그를 놓아 줘요. 내 가 바치면 되지 않겠어요?] 위소보가 '쌍아!' 하고 소리쳤다. 황태후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쌍아, 위소보는 소류망인데 이처럼 그를 감쌀 건 뭐냐?] 쌍아가 단호한 어조로 소리쳤다. [태후, 그가 시정 잡배이고 용서 못할 죄인이고 강도이고 살인범이라 해도 나의 마음 가운 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완전무결한 남자예요!] 황태후가 허리를 잡으며 웃었다. [위소보에게 이처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니 큰 복이야!] 한 태감이 소리쳤다. [이년을 붙잡앗!] 서너 명 태감들이 달려 들었다. 쌍아는 끄덕하지 않고 위소보의 앞에 의젓이 서서 죽음을 같이하려 했다. 돌연 공주가 쌍아 앞에 나서며 말했다. [황액낭, 이 딸은 달리 바라는 게 없어요. 이들을 놓아주세요. 아무리 큰 죄라도 이 딸은 황 제 오라버니 앞에 가서 벌을 받겠습니다.] 황태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너는 나를 누구로 알고 함부로 부르느냐?] 공주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황액낭이지요.] 황태후는 돌연 대소하며 말했다. [황액낭? 호호호! 내가 너의 황액낭이 될 수 있단 말이냐?]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물론 이 딸은 불효하여 어르신을 노엽게 했지요. 황액낭....] 황태후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닥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년이 다 뭐냐? 나의 친딸인 척하고 도처에 다니며 사람을 속였지? 내가 알려주마. 너는 원래 반역자 모동주의....] 위소보가 급히 가로채며 말했다. [....태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황태후가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질타했다. [흥! 죽어도 똑똑히 알고 죽어야지. 너는 반역자 모동주의 딸이야! 너를 벌써부터 죽여버리 려고 했지만 그래도 사정을 봐서 말없이 보냈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나를 황액낭이라고? 부끄럽지 않아! 흥! 그런 주제에 부귀한 황실 출신이라고? 너도 생각해 봐. 네가 만약 나의 친딸이라면 저런 소류망에게 줄 수 있겠느냐?] 공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액낭, 이 딸이 황액낭을 노엽게 하여 그런 말씀하시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렇 지 않지요, 네?] 황태후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정말인가 거짓말인가 네가 믿지 못하겠으면 저 위소보에게 물어봐라!] 위소보는 평시에 공주가 언제나 부귀한 집안 출신이라고 자처하며 우쭐대는 것을 제일 미워 했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런 때 공주의 내력을 흘딱 밝혀 놓았으니 태후의 음험하고 악독한 행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소보는 참을 수 없어 욕했다. [제기랄 이 쌍년아! 네년은 죽어도 편안히 죽지 못할 것이다!] 위소보는 평생 처음으로 황태후에게 면전에서 상스러운 욕을 했다. 공주는 그제야 모든 것 을 알았다. (원래 이런 문제였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공주는 목이 메어 가까스로 소리쳤다. [황....태후, 나를 죽여요....] 황태후는 난생 처음으로 쌍년이라는 욕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최대의 모욕을 당하고 나니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수십 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몽땅 죽엿! 몽땅....] 태감들은 황태후가 이처럼 노여워 펄펄 뛰니 그 누가 어물어물하겠는가? 모두들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바로 이 때 우아대가 갑자기 나서며 높이 소리쳤다. [잠깐! 황상 폐하가 여기에 계십니다.] 태감들은 황제라는 말을 듣고 꼼짝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태후가 냉랭하게 물었다. [황제가 어디에 있느냐?] 우아대가 황제가 준 옥패를 높이 들고 외쳤다. [황상의 성지, '옥패가 바로 나다. 나의 친필 성지가 없으면 어떤 사람도 이 감옥에 들어오 지 못한다. 이에 명령함.'] 황태후가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황제가 친히 왔다고? 설령 친히 온들 어쩌겠느냐? 천하에 아들은 어머니 말을 들어야 하지만 어머니가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태후가 태감들을 보고 소리쳤다. [저 어전시위까지 함께 죽여버렷! 누가 내 말을 거역하고 달려들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 어!] 황태후의 엄한 명령을 받자 태감들은 지체 없이 비수를 들고 위소보 일가 사람들에게 달려 들었다. 우아대에게는 태감 셋이 달려들었다. 우아대의 무공으로 이 세 사람을 당하기는 아 주 쉬운 일이었지만 황태후를 고려하여 몸을 피할 뿐이었다. 위소보는 그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 욕했다. [제기랄, 우아대! 머리를 내밀고 찍기를 기다리는 거냐? 어서 손을 써서 그 쌍년을 꼼짝 못 하게 하면 우리를 구한단 말이야!] 우아대는 이 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감히 태후를 쌍년이라고 욕할 수 있었으 나 우아대는 이런 담이 없었다. 어떻게 황태후에게 손을 대겠는가? 그러면 웃사람을 노엽게 하는 반란이 아닌가? 우아대가 주저하고 있는 순간 위소보의 일가 사람들은 태감에게 몽땅 붙잡혔다. 우아대의 가슴에도 피묻은 비수가 겨누고 있었다. 위소보가 욕했다. [우아대! 제기랄, 이 어르신이 너를 그저 죽으라고 했느냐?] 우아대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반항도 하지 않고 말했다. [위작 나으리, 어쩌겠습니까? 우리 운명이 이러니!] 이 때 돌연 길게 웃는 여자 소리가 들렸다. [운명이라고? 그럴 수야 없지!] 승복을 입은 사람이 나는 듯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한 중년 승려가 황태 후 뒤에 와 섰다. 감방은 원래 크지 않은데 죽은 사람 산 사람 7,80 명이 빼꼭히 들어서서 발디딜 곳 없었다. 그런데 이 승려가 어느 때 어떻게 들어왔는지 누구도 몰랐다. 위소보는 너무도 기뻐 소리쳤다. [스승님!] 여승은 바로 구난사태였다. 구난사태는 불진을 황태후의 등뒤 혈도에 대고 웃으며 말했다. [소보, 자네 말이 옳네. 도적을 붙잡으려면 먼저 우두머리를 붙잡아야지. 이 늙은....] 위소보가 뒷말을 받았다. [그 쌍년을....] 구난사태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보, 왜 말씨가 그리도 듣기 거북한가? 태후를 붙잡으면 태감들이야 겁낼 것 없지.] 위소보는 가슴에 댄 비수를 밀어버리며 말했다. [야 이놈들! 나의 스승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손에 든 비수를 내려 놓아라! 저 쌍년이 염라대왕을 만나게 됐다.] 구난사태가 내력으로 불진을 태후 잔등에 대었다. 태후는 아주 참기 어려워 했다. 구난사태 가 소리쳤다. [태감들이 비수를 놓게 해!] 태후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구슬같은 땀을 흘렸다. 그녀는 마지못해 명했다. [잠시 물러서라!] 태감들은 비수를 던지며 하나 하나 물러섰다. 구난사태가 말했다. [모두 나오시오.] '훼' 하는 소리와 함께 지붕과 문어귀로부터 십여 명 사람들이 날아들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홍 교주, 황룡대협 형님, 현정도장, 정작 나으리, 청아 여동생, 관 동생, 모두 왔구려.] 홍안통이 들어오자 위소보의 단중혈을 눌렀다. 위소보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어이, 홍 늙은이, 왜 이 어르신의 혈도를 눌러놓는 게요?] 관의호, 황룡대협, 청아, 정극상.... 등등 제각기 달려와 위소보의 기해(氣海) 부근(腑筋) 명문 (命門) 등의 혈도를 눌러놓았다. 사람마다 혈위를 짚는 수법과 혈도가 다르니 위소보는 일시 에 전신이 시리고 마비되어 붓고 아프고 그야말로 참기 어려웠다. 위소보는 원래 아픔을 참 지 못하는 지라 '아이구, 아이구!' 하고 고함치며 욕했다. [제기랄, 개놈들, 빌어먹을 놈들, 망나니같은 놈들, 그래, 이 어르신을 죽이자는 노릇이냐?] 구난사태가 소리쳤다. [소보, 더 이상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말거라!] 위소보는 더욱 엄살을 떨었다. [아이구.... 스승님, 말씀하기는 쉽지만 스승님이 한번 겪어보십시오. 얼마나 아픈가?] 구난사태가 말했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하기로 한 것인데 그대도 동의하지 않았는가?] 위소보는 자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래, 이것이 이리 굴에서 나와 호랑이의 아가리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비 겁하고 악독한 건 호랑이의 아가리가 아니라 개 주둥이로 들어간 것이지. 이렇기 악독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저 태후년의 손에서 죽고 말 걸. 그러면 죽어도 고생스럽지야 않았겠지!] 구난사태의 불진이 황태후의 몸에 닿자 그녀는 허공에 날렸다. 태감들이 경황실색하여 소리 치는 속에서 태후는 홍안통의 앞에 살짝 떨어졌다. 홍안통은 즉시 황태후의 백회혈(百會穴) 을 눌렀다. 구난사태가 말했다. [그녀를 죽이지는 말아요.] 이와 함께 구난사태는 위소보의 앞에 와서 이미 눌린 혈도를 돌아가며 주물러 주었다. 일시 에 훈훈한 열기가 위소보의 기경팔맥을 따라 지나가니 몸이 아주 가뿐함을 느꼈다. 구난사 태가 말했다. [홍 교주, 황룡대협,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우리는 돌아갑시다.] 황룡대협이 말했다. [사태 말씀대로 합시다.] 구난사태가 황태후를 틀어쥐고 으름장을 놓았다. [살려줄 것이니 잔소리 말고 우리를 내보내 주거라! 만약 그 어떤 수작을 피웠다가는 흥! 스 스로 고생을 사서 하는 줄 알아!] 구난사태가 이렇게 말하며 불진을 휙 돌리자 감옥 쇠난간이 일시에 끊어졌다. 태후는 무공 을 몰랐다. 하지만 가늘고 부드러운 불진이 이처럼 위력이 큰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구난사태는 황태후를 단속하고 앞에 세웠다. 여러 협객들은 위소보 일가 십일 명을 중간에 세우고 뒤를 따라 호호탕탕하게 밖으로 나왔다. 오문(午門)에 이르자 돌연 호각소리가 나며 횃불이 사방에서 대낮처럼 환히 비췄다. 헤아릴 수 없는 관병들이 활과 화기(火器)를 들고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역적을 놓치지 말라!] 요란한 고함소리가 울렸다. 第24章. 녹정산을 찾아서 [반역자를 놓치지 말아라!] 수백 명 어전시위들이 활과 화기(火器)를 들고 위소보의 일행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홍안 통과 구난사태 등 사람들은 이 엄엄한 대세를 보고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위소보 일가를 납치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무공기술이 높은 것은 말할 것 없고 대담하고 세심한 사람들이 었다. 이들은 황궁에 들어가 위소보 일가의 열 한 사람을 안전하게 탈취해 와야만 했다. 수 많은 적들 속에서 더욱이 화기를 물리치고 살아서 황궁문을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구난사태는 속으로 시름을 놓았다. 그것은 태후가 자기들 손에 있으니 감 히 손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일은 끝장나는 판이었다. 구난사태 는 황태후를 앞으로 밀며 신중한 소리로 말했다. [몽골 황제, 누군가 봐요!] (역자 주:구난사태가 말한 '몽골 황제'는 강희를 멸시하는 뜻임.) 그의 말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극히 후더운 내력을 내보냄으로서 떠들썩하던 적들의 소리를 눌러 놓았다. 함성으로 떠들썩하던 오문(午門)은 삽시에 물 뿌린 듯 잠잠했다. 구난사태가 태후에게 소리쳤다. [어서 아들과 말해!] 태후가 겨우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내가 너의 황액낭이다.] 강희는 어머니가 적들에게 붙잡힌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놀라 말했다. [황액낭, 어찌 되어....]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위소보를 찾았다. [위소보! 제기랄, 네놈이 그래 태후 마님을 납치하다니 양심이 있느냐?] 위소보는 가슴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황상! 제기랄, 태후가 나를 죽이려 하니 양심을 따지다가는 내 목숨을 잃고 말아!] 강희는 비로소 부드럽게 말했다. [소계자, 태후 마님을 놓아주시오. 우리 잘 이야기하면 되지 않소? 그러면 소계자 요구대로 다해 주지. 군자일언.... 그런 말이 있지 않소?]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소현자, 다른 일은 다 이야기해도 되지만 태후만은 놓지 못하겠소이다. 태후를 놓아주면 군 자일언.... 무슨 말도 따라잡지 못하오!] 두 사람은 서로 '제기랄'이고 '소계자', '소현자'고 또 '군자일언'이고 뭐고 주고받으며 말했 다. 마치 강호 무리들의 암호 같아 옆에 있는 사람들은 멍해 있었다. (역자 주:위소보가 말한 군자일언(君子一言)은 원래 일언기출(一言己出) 사마난추(駟馬難追), 즉 말은 한 번 하면 다시 거둬들일 수 없다는 뜻임.) 황태후가 불시에 소리쳤다. [아들아(皇兒)!] 강희가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예!] 태후가 한자 한자 또렷또렷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묻겠다. 대청(大淸)의 강산은 어떻게 세워졌느냐?] 강희가 공손히 답했다. [선조 황상들이 세웠소이다.] 태후가 또 물었다. [너는 몇 대 황제냐?] 강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4대외다.] 태후가 재차 물었다. [일후에 누구에게 넘기겠느냐?] 강희는 하늘을 올려 보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자자손손이 천만년 이어가게 하겠소이다.] 태후는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아이신죠뤄(愛新賞羅) 후대에 손색이 없다.] 태후는 원래 몸이 쇠약한 여자였다. 구난사태가 내력으로 그의 혈도를 눌러 놓았으므로 숨 을 가빠했다. 그녀는 숨을 좀 돌리고 나서 말했다. [아들아. 또 한 가지가 있다. 너는 그 도리를 아직 모르고 있다.] 강희가 숙연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황액낭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태후가 말했다. [잘 기억해라. 충성을 다하면 효성을 다하기 어렵고 효성을 다하면 충성을 다하기 어렵다. 자고로 충성과 효성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강희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 아들은 가슴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태후가 돌연 소리쳤다. [대청의 강산을 위해 지금 여기에 있는 역적들을 몽땅 죽여라!] 구난사태는 그녀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을 짐작하고 불진으로 그의 아혈을 누르려 했다. 그러나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구난사태는 놀랐다. 이처럼 여위고 가냘픈 여자의 눈에서 사 람을 놀라게 할 만큼 늠름한 정기가 흘러나왔다. 구난사태는 불진으로 더 내려 누를 힘이 없었다. 하지만 눈을 딱감고 내력을 가했다. 강희가 놀라며 소리쳤다. [황액낭, 황액낭을 어찌....] 황태후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불효 자식! 그래 대청의 강산이 중요하냐? 나의 목숨이 중요하냐?] 구난사태가 냉소하며 말했다. [흥! 이처럼 당당할 줄 몰랐는데?] 위소보가 생각했다. (왜 몰랐겠는가? 이 진짜 태후년이 가짜 태후에게 여러 해 갇혀있으며 갖은 고생을 견디어 낸 것도 소황제의 안위(安慰)와 소황제의 강산을 위해서가 아닌가? 제기랄, 담이 작은 여자 들이라도 태후가 되면 죽는 것도 겁내지 않는구나!) 구난사태가 살기를 돋우며 말했다. [황제, 어떻게 하겠나?] 강희가 두 손을 힘없이 내렸다. [구난사태님, 태후 마마를 놓아주시면 제가 여러분들을 무사히 황궁에서 내보내 드리겠습니 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태후가 또 말하려 하자 구난사태는 불진으로 그녀의 아혈을 눌렀다. 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위소보는 강희, 더욱이 황태후에게 품었던 자그마한 환상마저 물거품으로 되었다. 구난사태 가 강희의 말에 응낙할까 봐 위소보는 급히 외쳤다. [사모하는 스승님, 소황제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구난사태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위소보를 노려보았다. [소보, 왜 그렇게 말하오. 무슨 사모....] 구난사태는 젊은 시절에 불교를 믿게 되었다. 비록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정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해 본 적이 없이 묵묵히 보내 왔다. 위소보의 경박한 말을 듣고 그가 비록 자기의 제자라고 하지만 구난사태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코치 모르 는 제자 위소보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스승님도 얼굴이 붉어지니까 참 예쁜 아가씨 같구나. 애석하게도 너무 늙었어. 젊어서는 아 주 예쁘고 얌전했겠는데?) 위소보가 말했다. [내 말은 듣기는 거북하지만 그 도리야 거북하지 않지요. 스승님, 제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눈앞의 손실을 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황제는 신의(信義)를 지키지 않고 당나귀를 부 려먹고 잡아먹는 격이랍니다.] 구난사태는 원래 명조의 공주로서 제황(帝皇)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므로 황제들의 성미를 알 고 말했다. [몽골 황제, 소보의 말을 들었지요? 우리는 황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강희가 냉소하며 말했다. [믿지 못하면 어쩌겠습니까? 이 몸은 나라의 황제로서 협박해서는 안 되지요.] 구난사태가 말했다. [홍 교주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홍안통은 수염으로 황태후를 감아 허공으로 던지며 말했다. [제기랄, 뭘 이것저것 말할 거 있나? 너 죽고 나 죽고 해볼 판이지.] 위소보가 놀라며 소리쳤다. 홍안통의 수염에 크게 혼이 난 그인지라 위력도 잘 알았다. [홍 교주님, 그래도 좀 사정을 봐줘야....] 강희는 홍 교주라는 말이 들리자 안색이 변했다. 태후가 한 가닥 낙엽처럼 날리는 것을 보 자 매우 당황했다. [홍 교주, 아무 짓이나 하지 말아!] 황태후가 공중에서 떨어질 때 홍안통은 수염으로 태후를 살짝감고 물었다. [어쩌겠는가 말해 보시오.] 강희가 탄식하며 말했다. [좋소. 당신들이 이겼소!] 그리고 어전시위와 어림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사람들을 놓아주어라!] 구난사태가 미소를 짓고 태후를 가리켰다. [좋아요. 그런데 황제의 어머니는 우리를 따라 한 번 갔다 와야겠어요!] 강희가 물었다. [어디로 같이 간단 말입니까?] 구난사태가 말했다. [황궁 어귀까지요. 우리가 성문을 나가면 사람을 보내어 맞아 가시오.] 강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응낙했다. [말한 대로 해야 합니다.] 위소보는 확실한 다짐을 받기 위해 한 마디 내뱉었다. [군자일언....] 우아대가 구난사태에게 말했다. [사태,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우리는 어서 이 곳을 떠납시다.] 이 일행은 북경성을 나왔다. 성 밖에서는 이미 마차와 말이 다 준비되어 있어 여러 사람은 밤을 도와 관외(關外)를 향해 질주했다. 위소보는 원래 감옥만 떠나면 새가 자기 둥지에 온 것처럼 아주 자유스러울 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달랐다. 홍안통, 황룡대협, 관의호, 정극상, 현정도장, 청아, 서화룡.... 이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독특한 혈도를 짚는 수 법으로 위소보의 수태음폐경(手太削市經) 족태음비경(足太削卑經) 수소음심경(手小陰心經) 임맥(仟脈) 독맥(督脈)을 짚어 놓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위소보는 꼼짝못하고 마 차 안에 갇혀 있었는데 전신이 마비되어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반주검이 되었다. 참을래야 참을 수 없어 위소보는 고함을 쳤다. [스승님,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 이 위소보가 죽습니다. 죽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구난사태는 제자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이 어려워 도와줄 수도 없었다. 단지 온화한 말로 권할 수밖에 없었다. [소보, 좀 참게나. 며칠 지나면 나을 것이네.] 위소보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참지 못하겠어요. 조금도 참지 못하겠어요.] 구난사태는 너무도 불쌍하여 말했다. [단전의 진기(眞氣)를 천천히 사백(四白) 곡지(曲池)에 보내려무나....] 홍안통이 돌연 이것을 보고 '허허!' 하고 냉소했다. 우아대가 의아해서 물었다. [왜 웃습니까?] 홍안통이 말했다. [이 어르신이 웃는 까닭이 있소. 내놓고 돕지 못하겠으니 암암리에 도와주니 참 가소롭단 말이오.] 황룡대협은 인피면구를 써서 그의 기색은 볼 수 없었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무엇이 가소롭단 말이오?] 홍안통이 답했다. [글쎄, 이 녀석이 내력이란 전혀 없는데 어찌 운기를 하겠소? 사태께서 그에게 내력을 펼쳐 보라 하지만 소귀에 경 읽기지!] 우아대가 대노하여 외쳤다. [너 무엇이 좋다고....] 구난사태가 살며시 말했다. [홍 교주님, 실례했소이다.] 위소보는 그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스승님, 이 제자가 죽는데 실례가 다 뭣입니까?] 구난사태는 엄하게 꾸짖었다. [소보, 자네가 살려면 떳떳하게 살아야 하고 못살겠다면 이 스승이 일 장으로 죽여 버리겠 네. 우리 철검문(鐵劍門)의 명예에 손상을 주지 말아야지.]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위소보는 구난사태가 왈칵 성을 내자 감히 대꾸질 못하고 혼자 말같 이 투덜거렸다. [철검문이고 목검문(木劍門)이고 다 뭔가? 이 제자는 그 개 같은 철검문에서 뛰쳐나오고 말 겠습니다.] 소전은 그가 점점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소보, 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위소보가 말했다. [어르신이 이렇게 말하면 어때. 내가 모를 줄 아는가? 너와 아가 화냥년은 이 어르신이 빨 리 죽기를 바라지?] 소전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건 무슨 뜻인가요?] 위소보가 말했다. [딴뜻이 없어. 네 두 화냥년은 원 남편이 다 살아오니 지금 이 남편에게 푸른 모자를 씌우 자는 거지!] 아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나까지 끄집어 넣어요? 자기들끼리 말할 거지.] 위소보가 이상해 하며 말했다. [내가 너를 끄집어 말한 것이 무엇인가? 이 어르신이 말한 것은 너희들 두 화냥년이 간사한 남편과 결탁하여 이 어르신의 혈도를 눌러서 죽이자는 것이란 말이야. 그래 이것이 네년들 과 관계없단 말인가?] 아가가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크게 억울한 듯 자신의 얼굴까지 쥐어뜯었다. 소전이 소 리쳤다. [아가, 울 건 뭐냐?] 아가가 금속성의 목소리를 발했다.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니 어찌 견뎌요!] 소전이 온화한 기색으로 위소보를 타일렀다. [소보, 잘 말해 봐요. 나와 아가가 잘못한 일을 한 것이 무엇인가요?] 위소보가 빈정거렸다. [잘못한 것 없어. 이 어르신께 푸른 모자를 씌운 것 뿐이지. 그것도 물론 큰 일은 아니야!] 소전은 너무도 분해 이를 악물고 위소보의 뺨을 번개같이 후려쳤다. 위소보는 놀라 고함쳤 다. [더러운 계집년, 죽일년, 화냥년, 그래, 남편을 죽일 작정이란 말이냐?] 소전이 냉소하며 말했다. [죽이면 죽였지 차라리 억울한 말을 듣지 않게 해야지. 홍안통, 정극상, 이리로 와요!] 미인이 노하니 위풍도 있었다. 희로애락이 분명치 않은 홍안통, 악독하고 음침한 정극상도 그만 무서워 다가왔다. 소전이 정극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극상, 그대는 원래 아가를 사랑한 적이 있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정극상은 말뚝처럼 서서 말못했다. 소전이 또 홍안통을 보고 말했다. [홍안통, 내가 당신의 처가 옳소, 아니오?] 홍안통은 어물어물하며 말했다. [소전, 내....] 아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전 언니, 언니 말이 아주 듣기 거북해요.] 소전이 앙칼지게 말했다. [거북할 거 있나? 남자들은 처를 서넛씩 가져도 죄가 없는데 왜 여자들이 마음에 있는 남자 가 있었거나 시집가면 이처럼 큰 죄로 된단 말인가?] 소전은 안색이 파랗게 되어 눈물을 흘렸다. [정극상, 홍안통, 만약에 당신들이 사람이라면 소보를 주먹으로 죽여 버려요. 우리 둘은 당 신들을 따라 당신들의 부인으로 가겠어요!] 쌍아가 놀라 말했다. [소전 언니, 아가, 욕하면 욕하지 어찌 이런 농담을 하오?] 소전이 분기탱천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이 살아서 이런 신세로 전락하고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겠소? 아가, 우리는 갑시다.] 그녀는 두 아들을 끌고 성난 김에 떠났다. 겨우 몇 발짝 걸어갔는데 돌연 청아가 몸을 날려 그들 앞에 막아섰다. 그리고 살그머니 웃었다. [두 분 언니, 이런 연극은 그만하면 됐어요!] 아가가 눈을 크게 떴다. [청아 아가씨, 무슨 연극 말이오?] [호호호.... 두 분이 남몰래 보물을 취하려 떠나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뭐라고?....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고? 기가 막히는군요. 정 의심을 한다면 보물을 찾은 후에 떠나도 좋아요. 하지만 소보와는 절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소전은 태연하게 아가의 손을 쥐고 위소보에게 되돌아왔다. [소보, 이 연극이 이만하면 어때요? 채 끝나기도 전에 청아의 거짓 갈채를 받았군요!] 위소보는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소전은 꼭 된다고 했지. 그대들은 모를 게요. 청아 아가씨는 양주 여 춘원에서 사랑 때문에 질투한 일들이 많다오. 그런데 어찌 속일 수 있겠소?] 아가가 들올수록 어리등절하여 말했다. [나는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요. 여 무슨 원인지 청아 아가씨가 어찌 그 곳에 갔었나요?] 소전이 코웃음을 쳤다. [소보의 헛소리를 믿어요?]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저 고모가 우리를 가지 못하게 하니 너는 어서 아버지 있는 데로 가거라.] 이것은 한 차례 머리를 짜내 꾸며낸 계책이었다. 위소보는 원래 소전, 아가 그리고 두 아들 을 데리고 이 위험한 곳을 떠나 밖의 구원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요 괴상한 청아가 그만 눈치를 차렸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할 뿐 별수가 없었다. 홍안통 일행들도 속으로 다행이라 고 생각하며 위소보에 대한 감시가 더 엄밀했다. 그들도 저마다 딴 생각을 하고 서로 의심 하다 보니 누구도 위소보와 접촉 못하게 했다. 이렇게 가다가 객잔에 들리게 되었는데 위소 보를 단독으로 다른 방에 들게 했다. 이렇듯 다른 방에 들게 했건만 서로 시름을 놓지 못하 고 그와 접촉할까 봐 밖에서 윤번으로 지키게 했다. 위소보는 욕했다. [제기랄, 어르신이 무슨 놈의 보배라고 부인들까지 시중들지 못하는지? 네놈들은 이 어르신 께서 계집년이 없으면 자지도 못하는 성미를 모른단 말이냐?] 이날 밤 위소보는 성이 나서 혼자 외롭게 이불 속에 파묻혀 잤다. 그가 흐리멍덩하게 잠이 들려는데 돌연 침대 앞에 얼굴을 가린 여자가 나타났다. 위소보는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그 여자는 위소보의 입을 막으며 밖을 가리켰다. 위소보는 그녀의 냄새를 맡고 기뻤다. [문아 여동생!] 그 여자는 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비구니 심무(心無)입니다. 스승 오라버니를 뵈옵고저 합니다!] 위소보는 맥이 탁 풀렸다. [문아 여동생, 정말 비구니로 되었소? 아니, 농담이겠지!] 심무 즉 문아가 말했다. [스승 오라버니, 이런 말을 하면 아미타불, 죄이오다. 죄이오다.] 위소보는 몹시 반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요 문아 년이 스승님 꾀임에 들어 며칠 가 있더니 말끝마다 아미타불이고 뭐고 하니, 제기 랄, 미치지 않았나?) 위소보는 전처럼 다정스럽게 불러 보았다. [문아 여동생....] 문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문아는 이미 죽었어요. 빈니는 심무예요.] 위소보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래. 심무면 심무지. 무슨 다른 점이 있소. 결국 말해서 여동생은 나의 마음 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불러도 나의 친한 여동생이지.] 위소보의 말은 입에 발린 소리 같지만 이 '친한 여동생'이라는 말만은 아주 경건했다. 심무 는 얼굴에 면사를 썼기에 그녀의 기색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소리는 아주 쌀쌀 했다. [사형(師兄), 만약 그렇게 말하면 심무는 가겠소이다.]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 지금부터 다시는 문아 여동생이라고 부르기 않겠소. '친한 여동생'이라고는 더 욱 부르지 않고 심무 여동생이라고 부르고 친한 심무 여동생이라고....] 심무는 위소보의 말이 너무도 우스워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사형은 말할 때 친.... 자를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무슨 '친'이 그렇게도 많은가 요?] 위소보는 그제야 시름을 놓고 물었다. [여동생, 어떻게 왔소? 여기는 아주 위험하오. 어서 돌아가시오!] 심무는 대답이 없이 마음 가운데 아주 감동을 받고 생각했다. (사형은 말은 반지르르하지만 그래도 나를 많이 생각해 주는구나.) '생각해 준다'는 말을 생각하자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면사로 가려 위소보는 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버릇처럼 또 자기 뺨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요놈, 친한 심무 여동생을 만나니 너무 기뻐했구나. 심무 여동생, 내상은 다 치료했소?] 심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승님께 많은 폐를 끼쳤어요.] 이렇게 말한 심무는 위소보의 손목을 쥐고 맥을 한참 짚어 보았다. [사형은 일곱 사람들에게 혈도를 짚혔는데, 다 풀자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위소보는 다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욕을 퍼부었다. [어렵다구? 제기랄, 이 어르신 보고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말하기를 제각기 다 른 방법으로 혈도를 눌러 놔서 다른 사람이 열어 주기 어렵다고 했소!] 심무는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저마다 다르게 혈도를 눌렀다는 것은 옳아요. 그러나 열 수 없는 것은 아니지요. 혈도를 열 자면 내력이 있어야 하지요. 구난사태, 그리고 의동생 우아대가 열자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아요!] 위소보가 급히 물었다. [심무 여동섕, 가만! 이제 방금 누가 나의 혈도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했소?] 심무가 말했다. [스승님과 우아대 말이에요. 그 두 분의 내력이면 아주 쉬울 것 같아요.] 위소보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아주 쉽다, 아주 쉽다. 스승님과 우아대면 된다고?] [사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위소보는 대충 얼버무렸다. [오, 아무것도 아니오.] 심무가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시간이 가는데 지체하면 사람들에게 발각되겠어요. 사형, 내가 혈도를 열어 드리지요!] 위소보는 놀랄 지경으로 기뻐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동생도....] 돌연 위소보는 심무의 무공은 우아대나 구난사태와 비슷하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그 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가운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알고 왔소?] 심무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말문을 떼었다. [나는 줄곧 남모르게 뒤를 따랐지요. 그러나 그들의 무공이 고강하고 경계가 심해 조금도 틈이 없어 오늘 여기에 와서 이 방에 숨어 있었지요. 마침 운수가 좋아서 이렇게 만난 거예 요.] 위소보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감동되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 위소보는 복이 많고 명이 길어 언제나 위험할 때면 관세음마님께서 그의 옥녀(玉女)를 보내 구해 준단 말이오.] 심무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먼저 임맥 혈도를 열어 주지요.] 두 시간 남짓하여 위소보의 임맥이 열렸다. 심무는 피로하여 이마에 구슬땀이 흘렀다. 심무 는 한참 동안 운기조식을 한 후에 말했다. [사형, 아직도 일곱 곳의 혈도를 열지 못했어요. 매일 오후 어느 객잔 간판에 붉은 단풍나무 잎사귀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집에 머무세요. 객잔에 들어가 어느 방에 자리잡으면 그 잎사귀를 창문에 붙여 놓으세요. 그러면 내가 그 곳으로 찾아가겠어요.] 위소보는 마음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근심도 되었다. [놈들이 모두 심술 사나운데 어르신의 말을 들을까?] 심무는 웃기만 했다. 뺨에 보조개가 패여 더욱 미모가 돋보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문아 여동생은 비구니로 되었지만 그래도 아주 총명하구나. 이 어르신의 작은 일까지 다 알아주니 정말 마음에 꼭 드는구나.) 그 날부터 위소보는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심무가 사전에 마련해 놓은 객잔으로 갔다. 거기 에 가서도 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죽네사네 하며 생떼를 쓰곤 했다. 그랬지만 여러 사람은 장보도를 얻기 위해 위소보를 더 어쩌지 못했다. 여드레 후 위소보의 혈도는 다 열렸다. 그 제서야 허리도 쭉 펼 수가 있었다. 그는 또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며칠 동안 어르신은 죽을 뻔했네!] 심무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사형, 혈도가 안 풀린 척하세요.] 위소보는 롱명스레 물었다. [그건 왜?] 심무의 얼굴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들에게 발각되면 다시 혈도를 짚이게 돼요. 그러면 이번처럼 풀기 어려워요.] 위소보는 그녀의 사려가 고마웠으나 호기를 부렸다. [나중에 발각된다고? 제기랄, 그놈들에게 또 나중이 있을까?] 심무가 눈을 크게 떴다. [사형, 그럼 어쩌자고?] 위소보는 벌떡 일어서서 도망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 오라버니는 말이야 그놈들과 '안녕' 하면 그만이지. 이 어르신은 널따란 길을 따라 제 갈 길을 가고 그들이야 외나무다리로 가면 되지. 그러면 누가 누구를 건드릴 것도 없어!] 심무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망하려고?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들은 모두 무공고수들이고 지금 경계가 아주 심한데 도 망칠 수 있나요?] 위소보는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의 무공이 드세면 심무의 무공도 약하지 않지?] 심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손에 가져갔다. [사형, 나와 함께 도망하자고요?] 위소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결의남매를 맺지 않았소!] 심무는 좀 주저하다가 말했다. [만약 사형이 도망하면 부인과 애들은 어쩌나요?] 위소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의 여동생이여. 왜 그리도 머리를 못쓰오? 내가 가면 장보도가 날아가는 판인데 그들이 부인과 애들을 끌어안고 뭘 하겠소? 이제 10년 20년이면 남자는 장가들고 여자는 시집가는 법이니 그들이 나를 도와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맞아 들여야지. 이러자면 돈이 많이 들 어야 하니 이런 밑지는 노릇을 그들이 하겠소?] 심무가 생각해 보니 이치는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이 이치는 있어요. 그런데 지금 부인들과 애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아요? 그들 생각이 나지 않아요?] 위소보는 탄식하며 말했다. [왜 섕각이 나지 않겠소. 하룻밤 부부는 백날 은인이라고 이 어르신의 그 더러운 부인들은 비록 이런저런 흠집이 있지만 그래도 이 어르신을 대하는 데는 괜찮소. 정말 그들을 버릴 수 없지.] 좀 쉬었다가 위소보는 또 말했다. [그러나 제대로 말하자면 친애하는 여동생과 같이 있는다면 그들이 그리 생각나겠소?] 심무는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다. [사형, 다시 한 번 경박한 말을 하면 나는 가겠어요.] 위소보는 정색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품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여동생,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요. 나는 동생이 나를 깔본다는 것을 아오. 나는 거리의 유망 출신이고 아무것도 모르오....] 심무가 그의 말을 막았다. [사형, 이 여동생이 깔보는 게 아니에요. 영웅은 출신이 낮은 것을 가리지 않으니 거리 유망 이라는 게 흠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오라버니는 부인들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 니 말은 분별이 있어야 하고, 사람은 스스로를 고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해요.] 위소보는 계속 떠들었다. [나는 부인들이 있소. 그러나 많지는 않소. 일곱밖에 안 되오. 부인가 일곱이 있은 후 늘 재 수가 없고 업신여김만 당한단 말이오. 그래서 처 여덟을 하려고 마음먹었소. 팔선녀가 바다 를 건넌다고 그래야 복도 있고 만사대길이란 말이오.] 심무는 참지 못해 키드득' 하고 웃었다. [사형, 정말 우스갯소리를 잘하는군요!] 위소보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우스개 소리가 아니고 진심의 말이오. 천지신령이 다 계시는데 이 제자 위소보는 부인을 여덟으로 하지 않으면 이 몸이 갈기갈기 찢어 죽어도 괴롭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겠소이 다.] 심무는 한참 잠잠했다가 나직이 물었다. [사형, 몇 개의 마음이 있나요?] 위소보는 얼른 대답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마음이지!] 심무는 실내를 거닐며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요. 하나밖에 없는 마음을 여덟 여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어요.] 위소보가 다급히 말했다. 그녀의 심중을 직시했다. [아니, 줄 수 있소, 줄 수 있어! 나는 그들에게 대해서는 일반적인 정으로 일반적인 사랑, 일 반적인....] 심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형은 잘 몰라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마음뿐이고, 또 그 마음은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 어요.] 위소보는 좀 생각나는 바가 있었든지 심무의 말을 입 속으로 반복했다. [한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마음뿐이고, 그 마음은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다?....] 돌연 그는 무엇인가 깨달은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일곱 부인을 만나면 남녀지간의 일만 생각나고 문아를 만나면 조그마한 잡념 도 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일곱 부인을 생각하면 그들의 아름다운 용모만 생각하고 문아 를 생각하면 하늘의 신선처럼 생각될까?) 위소보는 백승도왕(百勝刀王) 호일지가 생각났다. 호일지는 마음 가운데 사랑하는 여자 진원 원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대대협(一代大俠)의 신분이었지만 달갑게 채소를 가꾸는 농부로 되 었으며 또 진원원에게 앵금을 켜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도 호일지의 '네가 한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은 그를 기뻐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절대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체 험해 보려 했다. 위소보는 어릴 때부터 기생원에서 자라며 보고들은 것이라면 남녀 육체 접 촉에서의 정감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지간외 육욕보다 더 높은 정감을 느꼈다.위소보 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아 여동생, 나는 알았소. 오늘부터 내 이 마음을 그대에게 주겠소. 나는 밤낮 그대를 생 각하고 그리오.... 그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꼭 하고 그 어떤 시달림도 견뎌 내겠소.... 나는 나의 일곱 부인에 대해 관계가 좋소. 앞으로도 좋을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일이 고, 여동생에 대해서는 마음 가운데 또 다른 일이라오....] 여자 앞에서 위소보는 낯이 두껍고 말이 줄줄 흘러나왔으나 오늘은 웬일인지 꺽꺽거리며 잘 되지 않았다. 위소보는 스스로를 욕했다. [제기랄, 네놈이 평시에 요리조리 잘 줏어 대던 입이 오늘은 웬일이냐?] 심무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합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사형이 이렇게 말하면 죄이오다. 죄이오다.] 위소보는 참지 못해 심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동생, 비구닌지 뭔지 그만두고 민간에 다시 돌아오오. 우리는 가만히 보물을 파내어 인적 이 없는 곳을 찾아가 둘이서 한 평생 잘 살아가면 어떻소? 말해 보오!] 돌연 심무의 완맥으로부터 강력한 내력이 전도되어 왔다. 위소보는 손이 떨리며 심무의 손 을 잡았던 것을 놓았다. 심무가 처연하게 말했다. [심무, 심무, 저는 심무예요. 마음도 없어요. 이 몸은 이미 불문으로 들어간 몸이니 어찌 다 시 이 세상으로 오겠어요!]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한참 있다가 위소보는 일어서서 최대의 결심을 내 린 것처럼 어전시위 장강년이 보내 준 주사위를 꺼내며 말했다. [문....심무 여동생, 이렇게 합시다. 우리 이 주사위로 내기하여 하늘이 시키는 대로 합시다. 지존보가 나오면 심무가 나를 따라오고 별십(別什)이 나오면 내가 심무를 따라가겠소.] 심무가 물었다. [사형이 나를 따라가 뭘 하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우리는 남매이니 복이 있으면 다같이 받고 재난이 있으면 다같이 겪고 여동생이 비구니가 되고 내가 중노릇을 하면 되지!] 심무가 차갑게 대꾸했다. [오라버니, 우스개 말을 더 하지 않는 것이 어때요?] 위소보가 말했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요. 자고로 잊어 본 적이 없는 진심이오.] 이렇게 말하며 주사위를 높이 높이 던졌다. 비록 주사위 속에 연은 넣었지만 딴 수작은 쓰 지 않았다. 주사위는 뒹굴뒹굴 돌다가 마치 싫어하는 듯이 별십이 나왔다. 위소보는 실망하 는 대신 기뻐하며 말했다. [야아, 이 어르신은 무뢰한 시러배 잡놈질을 해봤고 큰 벼슬, 장군질도 해봤지. 이제는 또 중 나으리질도 해야겠구나. 거 참!] 심무는 이 사형이 헛소리만 하는 줄 알고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했다. (사형이 그들을 따라가면 확실히 호랑이의 굴로 들어가는 것과 같지. 어쨌든 빨리 이 곳을 떠나야 하지.) 그녀는 이렇게 섕각하고 말했다. [사형, 내가 먼저 염탐해 보겠어요.] 심무는 살그머니 도괘금구(倒掛金鉤)로 두 다리를 대들보에 걸었다. 이 여관 창문은 아주 높 았다. 심무는 침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바깥 동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살짝 내려오며 말 했다. [뒤에는 의동생 우아대가 지키고 있어요.] 위소보는 몹시 기뻤다. [그럼 잘 됐소. 셋째 동섕이 그래 우리를 놓아주지 않겠소?] 그러나 또 생각해 보니 우아대가 그리 미덥지 않아 위소보가 소리쳤다. [제기랄, 정극상 놈은 청아가 싫다고 하는데 그녀와 실랑이를 벌일 건 뭐람? 청아는 지금 의동생과 눈이 맞아 좋아하는데 그놈이 끼여들어 뭘해?] 심무가 놀라며 낮게 말했다. [사형, 무슨 말씀을....] 위소보는 오히려 손을 내저으며 높이 말했다. [청아 아가씨는 정말 말이 아니오. 그는 나의 제수씨가 되겠다고 손이야 발이야 맹세까지 했는데 정극상 그놈과 더 이상 쑥덕거리지는 말아야지. 우아대가 푸른 모자를 쓰면 이 형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소?] 심무는 위소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행낭에서 여러가지 물건을 꺼냈다. [사형, 이것 좀 봐요. 이 방법도 괜찮지 않아요?] 위소보가 본 즉 원래 자기 물건들이었다. 비수, 암기, 관의호가 갖고 다니던 백독을 막을 수 있는 장갑, 몽환약, 돈뭉치였다. 심지어 주사위까지 있었다. 이 물건들은 강희 서재에서 다륭 이 수색해 간 것인데 어떻게 되어 심무의 손에까지 왔는가? 심무가 말했다. [사형을 구하러 황궁에 갔었어요. 이 물건들이 사형과 한시라도 떠날 수 없는 물건인 줄 알 고 닥치는 대로 집어 왔어요.] 황궁은 경계가 심하여 그리 쉽게 갖고 올 수는 없었다. 문아의 재간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위소보는 그녀에게 더욱 깊은 정감을 느끼며 넌지시 입을 열었 다. [여동생,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마시오.] 심무는 위소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우리 갑시다.] 위소보는 심무의 내력에 힘입어 창문을 뚫고 제비처럼 날아갔다. 심무의 경공은 출중하고 위소보의 신행백변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어 두 사람은 이 위험한 곳을 떠나 밤낮 쉴새없이 보름이나 걸려 겨우 녹정산에 도착했다. 녹정산은 관외(關外) 만주 제일 북쪽에 있었고 기복 을 이룬 몇백리 뻗은 산들은 구름 속에 우뚝 솟아 비할 바 없이 험준하였다. 위소보는 입을 딱 벌렸다. [히야! 지도에 '후니마디산'은 깨알만 하고 시니바디강'은 실오리 같은데 보기에는 가까운데 와 보니 멀고 이처럼 크단 말인가!] 위소보는 원래 녹정산의 보물은 자그마한 땅굴 속에 묻은 줄로 여기고 이 큰 산중에서 돌아 다니며 찾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제기랄, 골짜기만 세는 데도 십 년은 걸리겠네.] 위소보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녹정산의 보물이고 지랄이고 더 찾을 마음이 섕기지 않았다. 평소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골치 아픈 일이라면 도망갈 구멍부터 살피는 그인지 라 목전의 상황을 접하자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형,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찾아봐요. 샅샅이 뒤지면 뭔가 단서를 발견할 거예요.] [에구구.... 그보다 사매하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봐야겠소. 죽자 사자 보름을 달려왔더니 만 사지육신이 안 쑤시는 곳이 없소. 사랑하는, 아니 친애하는 심무 여동생의 부드러운 안마 를 받아야 걸을 것 같소.] 이 말에 심무의 얼굴이 일순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가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또 한 번 그런 말로 이 동생을 놀리신다면 당장 되돌아가겠어요. 그리고 영원히 사형 앞에 나타나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외쳤다. [심무 여동생, 이 사형의 말은 한 글자도 틀림없는 사실이오. 자, 보시오. 이렇게 발이 부르 터서 더는 걸을 수 없다오.] 그는 신발을 벗어 냄새나는 발가락을 심무의 코앞에 들어 보였다. 심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살피니 그의 왼쪽 새끼발가락에 좁쌀보다 약간 큰 물집이 하니 있을 뿐이었다. [흥, 고작 티끌 만한 물집 가지고 엄살을 부리나요? 무릇 사내대장부라면 발가락이 하나 잘 라져도 아무 내색하지 않고 걸을 거예요.] [아.... 아니오. 이 물집으로 말하자면.... 에, 과거 양주 여춘원에 있을 때, 발에 생긴 물집을 잘못 터뜨렸다가 파상풍 독이 올라 다리를 자른 사람을 봤소. 이충(李忠)이란 자였는데 그 후 며칠 못가서 죽었다오. 헌데, 그 자식이 하도 가난해서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서 내가 은 화 다섯 냥을 내놨다오. 이충의 형이란 작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동생을 대신해 갚을 농력도 마음도 없으니 훗날 저승에 찾아가서 이자까지 받으라고 했소. 난 그냥 승낙하고 돌아왔는 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그 형이라는 작자가 못내 괘씸해 견딜 수가 없더군. 다음날 아 침을 먹자마자 쫓아가서 얘기했지. '오늘 중으로 자네가 저승에 있는 동생을 찾아가서, 자네 도 몹시 빈한한 듯하여 내가 자네 몫으로 은자 만냥을 꿔 줄 테니 훗날 동생이 갚게나 하고 물어 보게'라고 했더니 그 멍청한 자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날 밤 자결을 했소. 가 족들에 말에 따르면 잠시 동생을 면회가는 것이니 염라대왕도 편리를 봐 줄 것이라 하면서 목매어 자살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소이다.] [듣기 싫어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심무는 어이가 없는지 다소 풀어진 어조로 말했다. [문아, 아니 심무 여동생! 이 사형은 비록 부처님을 믿지 않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오. 도박의 신인 오로재신(五路財神)께서는 거짓말이라면 극히 싫어하는 분이오. 내가 거짓말만 찰찰 하고 다녔다면 어찌 지존 보가 밤낮 나와서 수십만 냥의 은자를 땄겠소? 다 신령님들 의 보살핌이 계셨기 때문이오.] 위소보는 너스레를 떨면서 신발을 다시 신었다. 그리고는 큰 대자로 쭉 뻗으며 중얼거렸다. [아! 만청의 지맥(地脈)도 수려하다. 홍안령(興安嶺)을 베고 누워 청풍(淸風)과 미녀의 향기 를 음미하니 이곳이 봉래(蓬萊)인가 곤륜(崑崙)인가....] 심무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여기서 주무실 건가요?] [동생이 원한다면 인가를 찾아 깨끗한 정실에 몸을 눕힐 수도 있지.] [좋아요. 정 피곤하시다면 인가를 찾아서 오늘 하루는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보물을 찾아봐 요.] [그게 정말이오?] 위소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날은 이미 중천을 훨씬 지나 해가 서편으로 절 반쯤 드러누운 형상이었다. 이곳 북쪽 지방은 해가 짧아 금방 어둠이 오고 한 번 찾은 어둠 은 쉽게 사라질 줄 몰랐다. 심무는 산속에서 야숙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익히 아는 터 라 발걸음을 앞세워 길을 열었다. 그들이 두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어느 협곡에 들어서자 쏴아 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이, 삼 마장 나아가자 제법 큰 물줄기가 보였다. 두 사람은 골짜기 물을 따라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한 채의 통나무 집이 보였다. [사형, 집이 있어요! 헌데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군요.] 심무가 날렵한 경신재간을 일으켜 초막을 향해 쏘아졌다. 초막은 지은 지 오래된 듯 풍우에 썩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했는데 흐르는 계곡물 옆에 서 있었다. (제기랄, 귀신이라도 나올 집 같군! 만청 오랑캐의 귀신이라면 이 어르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텐데....) 위소보가 중얼거리는 사이 심무가 겨우 붙어 있는 나무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 먼저 귀신 쫓는 경문부터 외우시오. 내가 아는 신령님들은 오랑캐 귀신하고는 얘기가 안 통하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막 안으로부터 '악!' 하고 심무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비 명소리에 놀란 위소보도 '으악!' 하고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에구구! 오랑캐 놈들의 지독한 귀신이 숨어 있는 모양이구나. 문아 여동생의 무공으로 봐서 놀라게 할 무공고수가 숨어 있지는 않을 테고, 보나마나 홍안령에 사는 무서운 산도깨비거 나 추위에 얼어죽은 오랑캐 귀신이 분명하다.) 이같은 생각에 위소보는 도망갈 길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문아는 죽어서라도 서방 극락세계 에 태어날 것이리라는 자위를 하며 자신의 비겁함을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초 막 안에서 심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형, 여기는 사냥꾼의 초막이에요. 호두(虎頭), 녹두(鹿頭), 웅두(熊頭) 등 짐승의 뼈다귀가 가득해요.] [뭐라고? 난 그것도 모르고 동생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놈들과 사생결단을 하려 던 참이었다오.] 위소보는 큰소리로 자신의 충심을 내보인 후 초막 안으로 몸을 날렸다. 과연 초막 안에는 짐승 뼈다귀가 즐비하게 쌓여 있었는바 두개골은 껍질을 벗긴 채 벽에 걸려 있었다. 심무가 우측에 있는 조그만 나무문에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이 방이 침실인 모양이에요. 다소 지저분하지만 하룻밤 지내기에는 적당하군요.] [집주인이 아주 게으른 놈이군! 이 어르신께서 오실 줄 알면 깨끗이 방을 치우고 불을 지펴 야지.] 위소보가 발을 한 번 내지르자 바닥에 쌓여 있던 잡뼈들이 와스스 부서졌다. 그는 다시 홧 김에 소리쳤다. [나쁜 놈들, 가죽은 그렇다 치고 고기 몇 점이라도 남겨 놔야 들르는 사람이 먹고 갈 게 아 닌가? 눈이 쌓여 있을 대 왔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군!] [건량을 가져왔잖아요. 그나마 비를 피할 수 있고 맹수를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요?] [동생은 부처님을 믿으니 어느 놈이든 다 이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오라버니는 다르다오.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면 쌀과 고기부터 가득 쟁여 놓고 오가는 사람을 실컷 포식시키겠소. 또 따뜻한 옷도 수십 벌 준비해 몸에 맞는 것을 골라 입게 하겠소. 이런 경우 어떤 행동이 부처님의 마음이오?] 이같은 억지에 심무는 할 말을 잊고 '그건, 그건....' 하고 뒷말을 잊지 못했다. 그때 지독한 사투리가 섞인 음성이 초막 밖에서 전해 왔다. [크흐흐.... 어딜 와서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가? 헤헤혜, 산군(山君)께서 잡아가면 큰상이 있 다.] 음성은 만어(滿語)가 섞여 있어 머리를 두어 번 굴려야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위소보는 박 장대소하며 응수했다. [하핫핫! 낮말은 개미가 듣고 밤말은 모기가 듣는다고, 밖에 있는 개미 양반 어서 오시오! 글쎄, 이 초막 주인 오랑캐가 높디높은 이 어르신의 왕림도 모르고 집안에 고린내만 남겨 놓았구려. 우리 그놈을 잡아 함께 혼을 내줍시다.] [크큭, 어젯밤 지렁이가 그곳을 무는 꿈을 꿨는데.... 과연 물렸군!] 어조가 시원찮은 목소리가 재차 들리더니 와하하 하고 몇몇 사람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심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재빨리 목소리를 죽여 소근댔다. [사형, 벗이 아니라 적이에요. 말조심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할 거예요.] [동생, 걱정 마시오. 내 비록 무공이 약하다 하더라도 이 홍안령에 사는 짐승 도적놈은 혼내 줄 수 있다오.] 위소보의 장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의 사투리가 들려 왔다. [크크크, 홍안령이라니?.... 그러고 보니 중원에서 온 놈이구나. 흐흐흐, 감히 금아림(金阿林) 의 성스러운 곳을 침범하다니.] [금아림?] [크크크.... 아림(阿林)은 만주어로 산이라는 뜻이다. 금아림을 가리켜 동금산(東金山)이라고 도 부르지.] 갑자기 초막문이 쾅!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문밖에는 팔척 거구의 가죽옷을 입은 거 한이 세 명의 사냥꾼을 대동한 채 서 있었다. 거한 역시 활과 전통을 메고 있었는데 장비가 환생한 듯 우락부락한 체구에 무성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크크크.... 녹정산을 지키는 산군(山君) 휘하의 호력사(虎力士) 니얼츠(尼爾子)이다.] [산군?] 위소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녹정산을 지키는 산군이란 자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듣기 때문 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녹정산이란 곳이 아주 은밀한 곳으로 사람은 커녕 너구리 한 마리 얼씬못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바, 산군의 존재는 크게 충격적이었다. (흐윽! 어쩌면 그 산군인지 산적인지 하는 자가 벌써 녹정산 보물을 파내서 날름 집어 삼켰 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이 십 년 동안 고심했던 게 털빠진 호랑이 가죽 꼴이 됐 구나!) 그가 맥이 탁 풀려 꼬리털 빠진 장닭처럼 낭패해 할 때 호력사 니얼츠가 전통에서 살을 꺼 내 시위에 걸었다. [꼼짝 말고 두 손을 내밀어라. 나 호력사의 화살은 호랑이 여덟 마리의 숨통을 끊은 신전(神 箭)이다!] [아니? 여덟 마리나? 혹시 거짓말을 약간 보탠 게 아니오?] 위소보의 너스레에 호력사 니얼츠의 안색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화가 몹시 치민 듯 뒤 따르는 세 사내에게 만어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세 놈은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밧 줄까지 꺼내 들었다. 문아가 앞으로 나섰다. [시주님들, 잠시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이 분은 저희 사형이신데 평소 우스개 소리를 자주 합니다. 언사에 오해가 있었다면 빈니가 대신 사죄할 테니.] 그녀의 말을 가로채듯 니얼츠가 하늘을 향해 하하하! 하고 방성대소를 터뜨렸다. [산군께서 명하시길 중원 사람이 녹정산에 발을 딛으면 그 즉시 주살하라 명하셨다!] 그러자 뒤에 있던 세 사내도 이구동성으로 뒤따라 외쳤다. [산군께서 명하시기를 중원 계집이 녹정산에 말을 딛으면 먼저 잡는 자가 이레 동안 데리고 잘 수 있다고 하셨다! 여럿이 함께 잡으면 사람마다 이레씩 교대로 데리고 자고 목을 베라 하셨다!] 세 사내의 눈가에 갑자기 음탕한 기운이 감돌았다. 승복을 걸쳤지만 문아의 자색은 선녀가 현신한 듯 아름다웠다. 위소보는 기가 막혀 속으로 꺽꺽할 뿐이었다. (우라질 새끼들, 문아를 어쩐다고?.... 이 어르신도 문아 여동생의 속살 냄새를 못 맡았는데 감히 이레씩이나 끼고 잔다고.... 씹어 먹다가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들!) 그가 마구 욕을 퍼부을 때, 문아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당장이라도 푸른 피를 토 할 듯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니얼츠가 음충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크크크, 말을 고분고분 들으면 살 수도 있다. 산군께서 말씀하시기를 팔기(八旗)의 아이를 잉태하거나 노비로 평생 살기를 원하는 자는 용서한다 하셨다.] [닥쳐라! 내 아무리 불문의 제자라 할지라도 너희들의 방자한 입까지 용서할 줄 아느냐?] 심무가 살기등등하게 외치며 쌍장을 곧추세웠다. 위소보는 홀연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 어 그녀를 막아섰다. [잠깐! 당신이 말하는 산군이라는 사람도 팔기(八旗) 중의 사람이오?] [그렇다. 양남기주(穰藍旗主) 부륵호씨(富勒瑚氏)의 후예이신 칠십삼(七十三)이시다.] (역자 주:팔기군 가문의 이름들은 거의 숫자로 불리웠다. 예를 들어, 구십(九十), 육십일(六 十一), 팔십육(八十六) 등 숫자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같은 이름은 체제가 완비된 건륭시대 까지 이어졌다.) 니얼츠의 말에 위소보는 한시름 놓았다. (어느 산도깨비인가 걱정했더니 고작 팔기군(八旗軍)의 나부랭이였군! 그렇다면 나 일등녹정 공 위작 나으리의 맛 좀 보여줘야지.) 위소보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양남기주 휘하 호력사 니얼츠는 황상의 성지를 받거라!] [뭐라고?] 니얼츠를 비롯한 놈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 찢어 죽일 새끼들아, 여기 계신 이 어르신으로 말하자면 당금 황상 폐하의 처남이자 일 등녹정공 어전대시위이신 위소보 위작 나으리시다! 황상의 성지를 받고 녹정산에 오신 고귀 한 분이란 말이다. 냉큼 무릎을 꿇고 삼배(三拜)를 올려 조금 전에 범한 불경을 사죄해라.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을 때는 성지를 거역한 죄로 구족(九族)을 멸하겠다!] [진....짜 황상의 성지이....십니까?] 니얼츠가 못 믿겠다는 투로 물었다. [정말 걸레 같은 자식들이군! 이 위작 나으리의 지저분한 욕설을 듣고도 신분을 모르겠느 냐? 흥흥....] [그럼 성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대체 네 놈들이 목이 몇 개냐? 황상께서 녹정공이라는 작위를 내렸을 때는 녹정산을 염두 에 두고 하사하신 이름이니라. 이곳 녹정산의 대만청(大滿淸)의 용맥(龍脈)이 있는....] 위소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니얼츠와 세 놈이 에구구! 하는 경악성을 터뜨리며 납죽 땅에 엎드렸다. [소인들이 눈이 있어도 위작 나으리를 몰라붰으니 얼른 죽여주십시오!] [흠, 이제야 이 위작 나으리의 신분을 알겠느냐?] [예예, 황상께서 파견하신 칙사이신 것을 몰라 뵙고....] [알았다. 내 이번에 황상의 지엄하신 분부를 받고 녹정산에 왔느니라. 지금 산군이란 자가 어디 있느냐?] 위소보는 평상시처럼 위작의 위엄을 뽐냈다. 그는 니얼츠외 말속에서 산군이란 자가 녹정산 보물의 비밀을 알고 있고, 어쩌면 몰래 캐내 뱃속에 삼킨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황 제의 성지를 사칭해 산군을 문초할 생각이었다. [산군께서는 지금 퉁구리(天君) 제단에 오르신 지 두 달이 됐습니다.] [제단이 어디 있느냐?] [녹정봉(鹿鼎峰)에 있습니다.] 니얼츠는 겁을 먹었는지 술술 대답했다. (역자 주:퉁구리는 만주어로 동북 아시아 및 우랄 알타이어족의 창조신 하느님의 이름이다. 어원을 살펴보면, 텡그리 - 퉁구리- 당구르 - 당골 - 단군으로 이어져 한민족의 창조신과 연결된다. 놀랍게도 불가리아 건국 당신의 창조 하느님 이름이 텡그리임을 밝혀 둔다.) 위소보는 내심 무릎을 쳤다. 니얼츠의 말속에서 녹정산의 비밀이 한겹씩 벗겨지는 것을 알 았다. (아하, 녹정산에 녹정봉이 있었구나! 결론적으로 녹정봉에 만청의 용맥이 숨어 있고 이 때문 에 퉁구리인가 천군인가 하는 신의 제단을 세웠구나. 그렇다면 녹정산의 보물은 녹정봉 천 군 제단 밑에 파묻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위소보는 나는 듯이 기뻐하며 하마터면 '찾았다!'하고 외칠 뻔했다. 문아가 그의 심중을 헤 아리고 생긋 미소를 던져 보였다. 위소보는 지닌 바, 기질을 발휘해 니얼츠를 부추겼다. [흠, 자네 이름이 니얼츠라고 했던가? 어쨌든 이번 성지를 완벽하게 수행하면 자네를 녹정 후(鹿鼎侯)에 봉하도록 황상께 진언하겠네. 에, 그리고.... 자네들 셋도 공이 있으니 팔기군 참령(參領)을 삼고 녹정백(鹿鼎伯)의 작위도 주겠네.] [예엣! 가, 감....사하옵니다.] 네 사내들은 감투를 씌워 준다는 말에 눈이 홱 뒤집혀 머리를 땅바닥에 연신 찧어 댔다. 이 리하여 위소보는 니얼츠와 세 사람을 앞세우고 녹정봉을 향해 치달았다. 그 동안 네 사내들 은 산군에 대한 갖가지 얘기를 들리주었다. 녹정산 산군은 팔기군의 가문에서 선출된 자였 다. 청나라가 중원천지를 점령하자, 고토(故土)를 중시하고 선조의 맥을 잇는다는 취지 아래 녹정산 녹정봉에 퉁구리 제단을 쌓고 여덟 가문의 선령(先靈)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다. 따 라서 녹정산 산군은 팔기군 가문의 제사장으로 그 실권이 엄청났다. 하지만 만청이 중원 천 지를 지배하고 황권(皇權)이 강화된 후에는 팔기군 잔여 세력에 의해 겨우 명맥이 유지됐다. 쉽게 설명하자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퇴락한 종갓집의 종손 같은 존재였다. [그럼, 산군은 어디 사느냐?] 위소보가 달리면서 물었다. [산군께서는 녹정봉 아래 운도신궁(雲圖神宮)에 기거하십니다. 저희 팔기에서는 매년 용모가 아름다운 동녀(童女) 한 명씩을 뽑아 신궁에 바칩니다. 또한 무예가 출중한 용사 한 명을 선 발해 신궁수신(神宮守神)으로 보내지요. 이들은 구년 동안 산군님을 모시다가 각기 가문으로 돌아갑니다. 개중에는 산군님의 총애를 받아 계속 산궁에 머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니얼츠는 묻지도 않는 말까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는 녹정후라는 말에 경각심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위소보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다. [그렇다면 신궁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있겠군?] [수신역사(守神力士)가 백여 명, 신녀(神女)가 팔십여 명 정도 기거합니다. 하지만 삼관(三 關)에는 몇 명이 있는지 소인들은 모릅니다.] [삼관이 라니?] [황상께서 삼관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나요?] 계속되는 질문에 니얼츠는 약간 의심이 생긴 듯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위소보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황상께서 얼마나 다망하신 분인데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시겠나? 설마 자네 이름까 지 들먹이며 하교(下敎)하셔야 하겠나? 이 위작 나으리에게 녹정산의 중요한 지점을 살피고 어떤 일을 처리하라는 한 말씀만 계셨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자네의 얘기를 뭣 때문에 세 이청경하겠으며 녹정후를 삼겠다고 하겠나?] [아,예예....] 니얼츠는 위소보의 핀잔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세이경청(洗耳敬聽)을 세이청경이 라 틀리게 말한 것도 모르고 고개만 조아렸다. 순식간에 세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전망이 탁트인 협곡에 이르렀다. 문득 전면에 하늘을 찌를 듯한 암봉(岩峰)이 운무에 감싸여 웅자를 뽐내고 있었다. [녹정봉입니다. 듣기로는 산정상에 오르면 사슴뿔처럼 여러 갈래의 지맥(枝脈)이 있어 천하 어느 산과도 다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소인들은 오르지 못합니다. 산군님 과 신녀님들만 오를 수 있습니다. 삼관을 설치한 것도 속인의 근접을 막기 위함 때문입니 다.] [삼관은 누가 지키는가?] [소인들은 신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해서 삼관이 있다는 것만 알지 그 내막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얘기하는 사이에 일행은 녹정봉 아래 깎아지르는 벼랑을 기대고 서 있는 고색창연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건물은 십여 채의 고루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장 여에 달하는 기단 (基壇) 위에 세워져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돌층계를 오르자, 삼층 누대로 만들어진 궁문 이 보였다. 붉은 편액에 금글씨로 '운도신궁 녹정봉(雲圖神宮 鹿鼎峰)'이라 쓰여 있었다. 문 아가 나직이 소근거렸다. [지금 산군이 없으면 누가 우리를 영접하죠?] [산군이 없으면 어느 놈이라도 있겠지!] 위소보는 굳게 닫혀 있는 궁문 안을 향해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궁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나와 이 어르신을 말을 듣거라! 화냥년도 빠짐없이 나와 무릎을 꿇어라. 황상 폐하의 처남이며 황태후 마마의 사위이신 일등녹정공 위소보 위작 나으리인 이 어르신이 황상의 지엄하신 성지를 받들고 운도신궁에 왔느니라. 누구든 명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단칼에 목을 베서 황실의 기강을 세우겠노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운도신궁의 궁문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네 명의 무장을 한 사 내가 부복을 했다. [삼가 위작 나으리를 뵈옵니다.] 이들의 어투는 만주어가 섞여 있었으나 과거 황궁에서 태감들과 생활한 위소보는 어렵지 않 게 알아들었다. 이에 그는 약간의 만어를 섞어 쓰며 얘기했다. [나 일동녹정공 위소보는 폐하의 성지를 받잡고 녹정봉을 살피러 왔다. 지금 산군은 어디 있느냐?] [예예.... 천군단(天君壇)에 오르셔서 기도를 올린 지 육십오 일이 되었사옵니다. 이번 천제 (天祭)는 백 일이 지나야 끝이 나옵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대답할 때, 신궁 안으로부터 십수 명이 달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반백이 된 도복(道服) 차림의 노인이 절하며 말했다. [소인은 운도신궁의 원주(院主) 바루타(巴魯打)이옵니다. 칙사님을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이 옵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헤아려 주시고 용서해 주소서.] [흠, 산군이 천제를 지내고 있다?] 위소보는 잠시 망설였다. 곧장 녹정봉으로 오르느냐 아니면 신궁을 살펴본 후 행동을 취할 까 생각했다. (어차피 녹정산은 코앞에 있고, 보물도 이 산중에 있을 테니 한바탕 놀고 갈까? 재수가 좋 으면 이 놈들이 이 어르신의 호주머니에 몇 푼 채워 줄 지도 모르고 그것도 안 된다면 노름 이라도 해서 주머니를 채우자.) 자신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노리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위소보는 소류망 기질이 발동되었 다. [우선 상방으로 안내하라. 보름이나 걸려 당도했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또 시장도 하니 입에 맞는 음식과 술을 준비해 이 위작 나으리를 기쁘게 하도록 해라. 이 어르신이 피로가 풀리 고 주효가 입에 맞으면 네 공을 기록부에 적어 황상께 보고하마.] [황감하신 말씀이옵니다.] 바루타는 좌우를 호령해 길을 열고 위소보를 안내했다. 머뭇거리던 니얼츠가 소리쳤다. [위작 나으리, 소인들은 어찌할깝쇼?] 위소보는 뒤돌아보며 손짓해 불렀다. 적진에 들어온 이상 한 명의 방수라도 필요했다. 따라 서 네 사내들은 녹정봉 꼭대기까지 데려갈 생각이었다. [너희들은 내 호신위사(護身衛士)가 되어 폐하의 성지가 순조롭게 완수되도록 본 위작을 수 행하라!] [알겠사옵니다.] 네 사내는 평소 만청의 성지인 운도신궁에 발 한짝 들여놓지 못하던 바, 위소보의 명이 떨 어지자 크게 기뻐하며 뒤를 따랐다. 이를 본 바루타는 이맛살을 크게 찌푸리며 무어라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크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칙사가 동행을 허락하는 터라 아무 소리도 꺼내지 않았다. 바루타는 기암괴석을 늘어놓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질러 향나무 숲에 자리잡은 한 채의 정사(精舍)로 안내했다. [이곳은 팔기의 도통(都統)께서 머무르는 서흥관(瑞洪館)이옵니다.] [도통?.... 본 위작이 황상의 성지를 받들고 왔는데 고작 도통이 냄새 피웠던 곳으로 안내한 단 말이냐?] 위소보가 욕설을 퍼붓자 바루타는 사색이 되어 손을 비벼 댔다. [신궁에서 이보다 더 깨끗하고 정결한 장소가 없습니다.] [산군의 거처는 여기보다 못하단 말이냐?] [산군께서는 고작 세 칸의 석실만을 쓰고 계시옵니다. 침상도 돌침상이온데.... 그곳이 마음 에 드신다면.] 위소보는 깜짝 놀라 정색을 표했다. [아, 아니다! 본 위작이 황궁에서만 잠을 잔 까닭에 웬만한 시설은 눈에 차지도 않아서 나무 란 것이다. 훗날 황상께 말씀드려 운도신궁을 크게 중수(重修)시키도록 하겠다.] 그가 연신 황상의 이름을 들먹거리자 바루타와 니얼츠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연신 허리를 굽혔다. 서흥관은 생각보다 시설이 화려했다. 커다란 대청 좌우로 각기 네 개의 협실이 있었 는데, 서재와 욕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만청의 전통의상을 걸친 여덟 소 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영접했다. [아니, 이 아이들은 누군가?] [팔기의 가문에서 보내 온 신녀(神女)들입니다. 올해 뽑혀 온 아이들이죠.] 위소보는 내심 놀랐다. (제기랄, 이 어르신도 팔선녀를 얻지 못해 봉래산에 못 가는데 여기 있는 산군이라는 놈은 매년 여덟 계집씩 데리고 놀 수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위작인지 녹정공인지 때려치우 고 녹정산 산군 노릇을 해먹는 건데.) 여덟 소녀의 자색을 살피니 피부도 희고 입술도 붉은 예쁜 계집아이였다. 나이는 고작 열 다섯 살 정도, 첫눈에 사내의 손길이 가지 않은 깨끗한 소녀들이었다. 그가 입을 혜벌리고 있을 때, 심무가 앞으로 나섰다. [여기 계신 위작 나으리는 황상 폐하의 지엄하신 명으로 녹정산에 오셨다. 너희 어린아이들 은 성지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니 물러들 가거라.] 비구니가 소사미를 나무라듯 그녀의 어조는 매우 단호해 위소보까지 두려움을 느꼈다. (알고 보니 문아가 여승질을 한다고 입으로 니붇대지만 속심은 화냥년 심보가 그대로 남아 있구나! 이 어르신이 요 어린 계집들을 주물러 댈까 두려워 쫓아내자는 수작이구나!) 바루타는 묘령의 여승 심무에 대해 갖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황제의 칙사가 무슨 연유로 비 구니를 데리고 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행여 호통이 떨어질까 하는 마음에 그 호기심을 꾹 눌러 밟고 있었다. 그런데 심무가 위소보를 제치고 명을 내리자 더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위작 나으리, 이분 여스님은 어떤 신분이신지?] [아, 그 스님은 황실의 안녕을 부처님께 기원하는 심무대사님이시오. 삼 년 전 황상께서 황 궁 내에 황불사(皇佛寺)를 세우고 주지로 임명하셨다오. 법술과 도술이 높아 귀신을 쫓고 죽 이는 데 엄청난 신통력이 있지요. 이번 만청의 용맥을 범하는 요괴(妖'怪)가 있다는 말을 듣 고 특별히 모셔왔다오. 그뿐만 아니라 이 위작 나으리의 의동생이기도 하오.] 위소보의 능란한 거짓말에 심무가 도리어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바루타는 잘 보여 손해 볼 것 없다는 심산으로 얼른 합장을 했다. [예, 심무 대사님!] 심무도 마지못해 합장을 하고 답례를 했다. 바루타가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은 듣거라. 심무대사님의 말씀도 계시고 하니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물러가 있거 라. 그리고 화주님(火主任:주방장)께 알려 칙사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라.] 원주 바루타의 말에 여덟 소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제기랄! 잠시 방심하는 사이 아름다운 기러기 떼가 날아갔군. 이럴 줄 알았으면 문아를 데 려오지 않는 건데. 요즘 웬일인지 이 어르신의 일진이 항상 상문(喪門)이란 말이야. 에잇! 황제인지 소현자인지 하는 놈은 날 잡으려고 안달이고, 태후년인지 황액낭인지 하는 년은 독을 먹여 이 어르신의 사랑스런 일곱 부인들과 새끼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니 넓은 천지에 해골쪽 마음놓고 눕힐 곳이 없구나. 정 그렇다면 녹정산 보물을 파내서 나도 모반이나 일으 킬까? 다행히 운이 좋으면 황제가 되고 재수 없으면 붙잡혀 목이 뎅겅 잘려 자금성 문루에 효수되겠지. 반란?.... 소현자만 죽이면 황상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일곱 부인은 황후와 황 비가 되어 금이 번쩍번쩍 박힌 가마를 타고 다니겠지. 그렇게 되면 문아도 강제로 승복을 벗기고 머리를 길러 이 어르신의.... 히히!) 위소보가 엉뚱한 상념에 사로잡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대 바루타가 고개를 조아렸다. [칙사님과 대사님께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화주를 재촉해 음식을 장만해 오겠습 니다.] [술도 가져오게!] 위소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다시 찬란한 보관(寶冠)을 쓴 심무의 모습을 연상하 기 시작했다. 심무가 다시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 [저 사람들은 어쩌나요?] 대청 밖에 서성거리는 니얼츠와 세 수하를 가리켰다. 위소보는 네 사람이 명을 기다리고 서 있음을 발견하고 어조를 돋구었다. [녹정후와 세 참령은 서홍관의 문을 지키고 허락 없이 사람을 출입시키지 말도록 하게.] [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네 사람은 크게 감동한 듯 우렁차게 답하고는 문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널따란 대청 안에는 단지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위소보는 대청 중앙에 있는 팔선탁(八仙卓)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대사님, 이 위작 나으리의 권력이 어떻소?] [호호호, 사형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어요. 하지만 이 동생을 대사라고 부르는 것은 승려의 법도에 어긋날 뿐더러 제가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황불사의 주지께서 대사의 칭호를 감당할 수 없다면 천하에 누구를 감히 대사라 부르겠소? 차라리 국사(國師)라고 부를 걸 잘못했구려.] 두 사람이 허리를 잡고 웃을 때, 니얼츠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주효가 준비됐사옵니다. 들여보낼까요?] . 위소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이어 십여 명의 남녀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것은 첩첩산중에서 구할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두 사람은 주위의 시중을 받으며 오랜만에 포 식을 했다. 배가 부르자 위소보는 졸음이 몰려왔다. [커억, 이제 한숨 자는 일만 남았군. 심무 여동생도 일찍 쉬시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합시 다.] 그는 우측에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위소보가 깨어났을 때는 동녘이 훤히 밝아 있었다. 침실 을 나서자 대청에 앉아 있는 심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밤새 의자에 앉아 있었는지 약 간 초췌한 기색이었다. [아주 늘어지게 잤구려. 심무 동생은 안 잤소?] [니얼츠와 얘기를 했는데 삼관이 매우 흉험한 모양이에요. 지난 백여 년 동안 아무도 통과 한 자가 없었대요.] [아무 걱정 말아요. 설마 황상의 성지를 받고 녹정봉에 오르는데 어느 시러배 잡놈이 앞길 을 막겠소?] 위소보는 탁자 위의 찻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손뻑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니얼츠와 세 부하가 달려왔다. [가서 원주라는 자를 불러오너라.] 위소보는 원주를 통해 삼관의 허실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 고 말았다. [녹정봉에 오르는 길은 양장혈(羊腸穴) 밖에 없습니다. 하오나 소인들도 양장혈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화급한 일이 생겨 산군님을 찾을 때는 봉화를 올려 산상에 신호를 보냅니다.] 원주 바루타의 대답은 이러했다. 위소보의 이마에 내천(川)자가 그려졌다. (요것 보게. 결론적으로 산군이란 놈은 아주 음흉한 너구리구나. 자기 혼자만 여덟 계집을 데리고 녹정봉에 올라 실컷 재미를 보는 작자로군! 그러니 양장혈인지 양모혈(羊毛穴)인지 하는 동굴을 만들어 쥐새끼 한 마리 못 오르게 하지. 에잇! 그렇다고 이 위작 나으리.... 아 니, 이젠 위작이 아닌 위 대인이지. 어쨌든 내가 삼관이고 삼십관이고 다 때려부수고 녹정봉 에 오르겠다.) 이같이 결심한 그는 품안의 소지품을 한 번 확인한 후에 큰소리로 외쳤다. [본 칙사는 황상께서 하사하신 몇 가지 신병이기가 있어 도산검림이라도 갈 수 있는 몸이 다. 성지가 지엄하니 속히 양장혈로 안내하라!] [아침도 안드시고 오르실 작정이십니까?] 바루타가 손을 비벼 대며 물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더 머무를 수 없다. 허나 그대의 성의를 봐서 몇 가지 음식을 챙겨 갈 테니 저들에게 지워 보내라.] 니얼츠의 부하에게 음식과 술 세 병을 등에 지게 한 위소보는 바루타의 안내로 양장혈을 향 했다. 몇 채의 건물과 층계를 지나 깎아지를 듯한 봉우리 아래 이르자 입을 쩍 벌린 동굴이 보였다. 동굴 입구에는 돌로 쪼아 새긴 만어 세 글자가 보였다. 위소보는 만어로 말할 줄만 알았지 읽을 줄은 몰랐다. 바루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이 양장혈입니다.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산군께서 말씀하시 기를 통과하는 데 세 개의 횃불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수고했네. 이번 일이 잘 처리되면 자네를 팔기군의 도통으로 삼으라고 황상께 주청하겠네.] [황송하옵니다.] 위소보는 바루타가 건네주는 횃불에 불을 붙이고 성큼성콤 굴안으로 들어섰다. 니얼츠와 세 사내들은 다소 두려운 표정이었으나 감투를 씌워 준다는 말을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심무도 일행을 따랐다. 동굴 안은 몹시도 냉기가 감돌았다. 몇 걸음 나아가기도 전에 횃불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뼈를 에이는 한풍이 엄습해 왔다. 위소보는 심무를 보고 말했다. [동생, 이 안에 요괴가 숨어 있으니 귀신 쫓는 경문이 있으면 외워 이 오라버니의 앞길을 막는 사악한 요괴를 물리쳐 주시오.] 심무는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전과같이 무엇이 라도 꿰뚫을 듯 예리해졌고 두 손은 가슴 부위에 두어 언제라도 출수할 기세였다. 대략 오 십 보쯤 나아가자 길이 우측으로 꺾어지며 통로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눈앞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음산한 귀기만이 감돌고 있었는데 벽쪽에 세 개의 굴이 뚫려 있었다. [길이 세 갈래로군! 동생, 어느 길이 녹정봉으로 오르는 길일까?] [우선 가운데로 가 봐요.] 심무의 답변에 위소보는 더 망설이지 않고 가운데 길을 택해 들어섰다. 그러자 백여 척쯤 걷기도 전에 다시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지?] [오라버니,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가운데 길로만 가요.] 위소보등 일행은 다시 가운데 길을 택했다. 그러자 굴은 전처럼 다시 구불구불 뱀이 또아리 를 튼 것처럼 이리 돌고 저리 돌았는데 그때마다 좌우에서 또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급기야 이들은 되돌아 갈 길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횃불 세 개가 다 타 들어가고 니얼츠가 예비 로 준비해 온 두 자루의 횃불만 남았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아요. 누군가 인공적으로 굴을 뚫어 출구를 찾지 못하게 만든 모 양이에요.] [제기랄, 어떤 개자식이 만들었는지 되게 복잡하게 만들었군. 차라리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점괘를 가지고 길을 찾아볼까? 천지신명, 지장왕보살, 관음대사, 구천현녀가 도와주셔서 험 지를 벗어날지도 모르지.] 위소보는 맥이 빠져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무언가 와스스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횃불을 들고 살피니 놀랍게도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백골이었다. [크악! 해....골이다.] 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꽁지가 빠지게 앞으로 달렸다. 그가 정신없이 달리자 일행도 기겁을 하고 뒤를 따랐다. 이십여 장쯤 나아갔을 때 또다른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어디 서 흘러들었는지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여기서 좀 쉬다 갈까?] 위소보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을 때 니얼츠의 수하 한 사람이 천정을 가리켰다. [박쥐가 있습니다! 저 박쥐를 놀라게 해서 깨우면 출구로 안내할 것입니다.] 사냥꾼이라 길을 찾고 위기를 벗어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하하! 자네 말이 훌륭하이. 그럼 저놈에게 길안내를 시키지.] 위소보는 남은 횃불에 불을 붙이고 천정의 박쥐를 향해 마구 휘둘렀다. 천정에 붙어 있던 박쥐는 빛에 놀랐는지 아니면 화기에 놀랐는지 끼익! 하는 괴성을 발하며 허공을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놈은 하나의 굴을 택해 번개같이 날아갔다. [어서 가요!] 심무가 위소보의 횃불을 뺏아 들고 박쥐를 추격했다. 위소보와 네 사내도 그녀를 따라 몸을 날렸다. 다행히 박쥐는 중간 중간 천정에 몸을 붙였다가 사라지곤 해서 뒤따르는데 별 어려 움은 없었다. 박쥐를 따랄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오르고 내려가고 몇 차례 숨바꼭질을 한 끝 에 환한 광선이 비추는 출구에 이르렀다. [네가 진짜 상을 받을 충신이구나. 이 어르신이 황상에게 아뢰 네 놈한테도 벼슬을 내리겠 다.] 동굴에서 쫓겨나서 어디론가 날아가는 박쥐를 향해 위소보는 소리쳤다. 출구 밖은 녹정봉 중턱 부근에 있는 곳으로 아래는 천길만길의 낭떠러지였다. 또 암벽에 의지한 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만한 길이 보였다. 그것은 사람의 손을 빌려 만든 듯 제법 단장되어 있었다. [휴유, 양장혈이 제일관이라면 나머지 두 관문도 흉험하기 그지 없을 것 같아요.] 심무가 낭애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자칫하면 사소보가 되어 밑에서 빼를 추리겠군!] 위소보는 암벽에 몸을 붙이고 천천히 나아갔다. 조금만 실수해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 는 바 걸음마다 신경을 썼다. 암벽에 나 있는 협도를 따라 반 마장쯤 올라갔을까? 주위 경 물이 크게 일변하며 산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석공(石工)의 솜씨가 가미된 듯 한개한개 정확한 높이와 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젠 살 것 같군! 아무렴, 이 어르신이 오르기로 약정되어 있는 데 녹정산 산신이 마다할 리 없지. 공사할 때 현몽을 해서 길을 넓히라 한 모양이야.] 그는 신바람이 나서 산상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밟았다. 대략 삼백 개의 계단을 밟았을까? 돌연 주위가 회뿌옇게 변하더니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짙은 운무(雲霧)로 순식간 에 한자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동생, 내 옷자락을 잡고 천천히 따라오시오.] 위소보는 심무를 향해 소리쳤다. [저는 상관 마시고 사형이나 조심하세요.] [무서우면 언제든지 이 오라버니를 부르시오.] 위소보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때었다. 운무는 계단을 오를수록 점점 짙어 져 급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청천벽력이라더니 대낮에 무슨 안개가 이토록 낀담?] 위소보는 입으로 연신 투덜거렸지만 발걸음마다 경각심을 두었다. 한발만 잘못 딛어도 수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는 전신의 모든 촉각을 발에 두 고 일보일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하지만 짙은 운무는 쉽게 걷히지 않았고 돌계단도 끝날 줄 몰랐다. [동생, 아무래도 잠시 쉬었다가 안개가 걷히면 올라가는 게 어떨까?] 위소보가 등을 돌리며 물었으나 심무의 응답이 없었다. [심무 동생!] [....] 여전히 아무 대꾸가 없었다. 위소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머리칼이 쭈뼛 하 늘을 향해 곤두섰다. [문아? 지금 어디 있소?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위소보는 계단 아래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되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만약 문아 여동생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면....) 그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전신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솟구치고 무서운 한기가 전신을 엄습해 왔다. [니얼츠!] [....] 니얼츠 역시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아무 응답이 없었다. 第25章. 위소보의 최후. 위소보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염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아이고.... 문아 여동생뿐만 아니라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졌구나. 녹정산 보물이 무어 그래 대단하다고 관외 끝까지 찾아와서 만청 땅의 귀신을 만들고 말았구나. 문아가 떨어지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그 고운 얼굴이 참혹하게 변해 죽어서도 좋은 곳에는 가지 못하겠구나. 이 위소보가 죽일 놈이지. 에잇!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악소보(惡小寶)라 부르겠다. 차라리 다른 년을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일곱 부인이라고 해도 문아 여동생보다 나은 년은 아무도 없어. 아, 불쌍한 나의 문아.... 이제 살아 생전에는 문아를 이 어르신의 부인으로 못 삼겠구 나!) 위소보가 속으로 통곡 아닌 통곡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계단 아래쪽에서 '아아악!' 하고 길다 란 비명성이 들려 왔다. 그가 경악성을 발하기로 전이었다. 이번에는 산쪽에서 또다른 비명 성이 들리더니 전후좌우에서 거푸 처절무비한 단말마가 전해 왔다. [누, 누.... 구냐?] 위소보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짙은 안개 속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리 더니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계단 아래쪽에서 점차 다가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황궁 시위들이 이 어르신을 잡으러 출동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 면 우선 피해야 한다.) 위소보는 다시 산위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던 운무가 옅어지며 하늘에 희뿌연 태양이 보였다. 서너 계단도 오르기 전에 주위가 환해지며 운무가 걷혔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며 위로 오르는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헌데 어찌된 일인 지 계단 좌우로는 예의 안개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내, 내가 귀신에 홀렸나? 아니면 저승길로 가는 것일까?] 위소보가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계단을 살피는데 산위로부터 우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 많은 기마병들이 달려 내려왔다. 그중 선두에 선 자는 철갑으로 전신을 두른 거구의 장수였 다. 그는 다짜고짜 손에 쥔 긴 창을 수평으로 세우며 달려왔다. 일격에 위소보를 찌를 듯 흉 흉한 기세였다. 위소보가 장수의 얼굴을 살피니 놀랍게도 정극상이었다. 그는 만면에 살기를 띤 채 창을 세우고 무찔러 왔다. [정극상, 네 놈이 웬일이냐?] 위소보는 소리치다 말고 얼른 신행백변으로 왼쪽으로 피했다. 휙! 하고 정극상의 긴 창이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위험해! 여긴 절벽이야!] 그가 외치기도 전에 정극상의 신형이 눈깜짝할 사이 산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뒤따르던 기마병이 함성과 호통을 지르며 다시 무찔러 왔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계단 대신 운무를 짓밟으며 덮쳐왔다. [안 돼!] 위소보는 계단을 밟고 달려오는 한 기마의 발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과거 신룡교 홍안통으 로부터 배웠던 세가지 치사한 수법 중의 하나였다. 그가 사람의 가랭이가 아닌 말의 가랭이 밑으로 들어가자 흘연 주위 경물이 크게 일변했다. 짓쳐오던 기마병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산상으로 뻗쳐 있던 계단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아이쿠!'하는 사이 발밑이 허전해지며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이 모든 것은 찰나지간에 이루어진 변화로 위소보는 대경실색 혼산 비백 입이 찢어지도록 놀랐다. 위기의 순간! 그는 신행백변의 한 동작을 일으키며 몸을 팽 이처럼 회전시켜 추락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는 사력을 다해 손을 내밀어 계단의 모서 리를 잡았다. 천우신조랄까? 그는 몸을 회전시킨 관계로 계단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었다. 그의 발 아래는 수천 길 낭떠러지였다. [사람 살려! 아무도 없소?] 위소보는 열 손가락에 모든 힘을 모은 채 소리질렀다. 가까스로 계단을 붙잡은 터라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발밑도 비석처럼 가파른 벼랑이라 발가락 하나 의지할 곳이 없 었다. 손가락의 힘이 다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뼈도 못 추릴 상황이었다. (아이고, 녹정봉 산신령님!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일년에 열 번씩 제사를 지내 드리겠습니다. 이 위소보는 약간 잡스럽게 살아왔지만 남을 죽이고 변신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산신 할아버지....아니, 할머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번만큼은 재수가 없어서 미끄러졌으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서방 극락세계 부처님, 귀신님, 조상님들 굽어살피 소서.) 그는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내심 기도를 했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경신 재간이 부족한 것에 대해 패 죽이고 싶도록 스스로가 얄미웠다. 대략 열을 셀 시간이 흐르자 그의 손가락 이 조금씩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위소보가 예서 죽는구나!] 그가 체념의 일성을 하늘에 던지는 순간이었다. 일진의 향기로운 내음이 후각을 진동하더니 가볍게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여인의 음성으로 차분한 가운데 냉기가 깃든 목소리였다. 뒤이어 여인의 두 손이 위 소보를 위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비록 깊은 내력이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날렵한 몸재간이 있었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자 가볍게 계단 위로 오를 수 있었다. 그가 탈진한 상태로 계단에 올라 상대를 살피니 남의(藍衣)와 황의(黃衣)를 걸친 스물다섯 가량의 두 만주족 여인이 서 있었다. [도와쥐서 고맙소. 두 분은 뉘시오? 혹시 이 산에 사는 신령님의 시녀가 아니신지?] [산군의 명을 받고 칙사를 영접하러 나온 정남신녀(正藍神女)와 양황신녀(穰黃神女)입니다.] 황의여인이 무슨 경서(經書)라도 외우는 듯 감정 없이 대꾸했다. [신녀?.... 당신들이 산군인가 뭔가하는 놈의 팔신녀(八神女)란 말이오?] 위소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뜸 욕설을 늘어놓았다. 남의의 여인 즉, 정남신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이 녹정봉은 황상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범할 수 없어요. 산군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당신은 운몽미로진(雲夢迷路陳)의 진법에 죽었을 거예요. 흥! 우리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제기랄, 내 동생이 이미 죽었는데 무슨 개소리냐? 내 산군이란 자를 만나면 황상 폐하의 이름으로 처단할 테니 그리 알아라.] [흥, 이 녹정봉에서는 팔기의 어느 누구도 산군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게 돼요. 당신은 그 것도 모르고 녹정봉에 왔나요?] [난 팔기의 사람이 아니오!] [중원 사람이라면 더 살아남기 어렵지.] 정남신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쏘아 부쳤다. 두 사람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양황신녀가 나섰다. [귀인과 동행하신 분은 죽지 않았어요. 저 아래를 보세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아래를 살피니 이, 삼백 개의 계단 아래 심무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자욱하던 안개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티끌만큼도 시야를 가리지 않았 다. [동생!] 위소보가 반가움에 고성으로 외쳤으나,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미동도 없었다. 양황신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아래는 아직도 진법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황이죠.]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얼츠와 세 사람은 어디 있소?] [운몽미로진은 인간의 삿된 심성을 격동시켜 위력을 발휘하는 진법이지요. 마음이 악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터 큰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쫓다가 죽음을 당합니다. 아마 그 네 사 람은 허상을 이기지 못해 죽은 모양입니다.] 양황신녀는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심무의 팔을 잡고 천천 히 계단을 올랐다. 심무는 흡사 장님이라도 된 듯 양황신녀가 이끄는 대로 조심조심 따라왔 다. [우리가 오르는 줄 어찌 알았을까?] 위보소는 전보다 어조가 부드럽게 고쳐 물었다. 신녀의 도움 없이 녹정봉에 오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남신녀는 그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듯 냉랭하게 대꾸했 다. [신궁에서 보내 온 연락을 받았어요. 우리는 봉화를 이용해 통신을 해요. 봉화의 수효와 색 깔을 가지고 어떤 소식이라도 전하지요.] 그녀의 쌀쌀한 어투에 위소보의 머리가 잠시 복잡해졌다. (요 화냥년의 콧대를 보면 산군이란 작자의 거만함을 익히 알겠는걸. 황상의 성지를 우습게 볼 게 뻔하군. 그렇다면 어떻게 겁을 줘야 고분고분 말을 듣게 만들지?) 위소보가 속으로 궁리를 할 때에 양황신녀가 심무를 데리고 진법을 벗어났다. 그녀는 위소 보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는 무슨 이유인지 연신 아미타불을 불러 댔다. 사실 그녀도 운몽미로진에 갇혀 심마(心魔)와 싸웠다. 비록 불문에 귀의한 그녀였지만 위소보에 대한 정과 회한이 내재되어 있어 심마를 이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죽은 줄만 알았던 위소보를 다시 접하게 되자 잠시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불호를 연발했다. [자, 산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양황신녀의 재촉에 일행은 녹정봉으로 걸음을 떼었다. 두 신녀의 출현으로 위소보는 삼관을 거치지 않고 녹정봉에 오르게 되었다. 녹정봉에 도달하자 갑자기 전망이 탁 트이며 사면팔 방 뻗어 나간 산맥, 지맥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녹정봉은 대략 오백 평 가량의 평평한 공지였는데 그 중앙에 팔괘(八卦)의 형태를 한 돌제단이 있었다. 다섯 자 높이의 제단 위에 는 백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황의노인이 정북방을 향한 채 석상처럼 좌정해 있었다. 팔각 의 돌제단 아래 각 괘상(卦像)에 해당되는 자리에는 각기 방향을 향해 여섯 명의 신녀가 앉 아 있었다. [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정남신녀가 단앞에 고한 후 빈 자리를 찾아 다른 신녀처럼 좌정했다. 양황신녀도 가벼운 미 소를 남기고 남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황의노인을 태극으로 삼고 여덟 신녀가 팔괘가 되어 하나의 도형을 만든 모습이었다. 잠시 여운이 흘렀다. 위소보는 제단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장보도의 보물이 어디 숨겨져 있 을까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하지만 녹정봉에 보물을 파묻을 만한 곳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산봉 전체가 단단한 화강암으로 땅을 파고 묻을 곳이 없을 뿐더러 돌제단 자체도 거대한 청 석덩어리로 천연적인 바위에 인력을 가한 것이었다. 그가 낙심천만해 할때 황의노인이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그대들은 무슨 연유로 퉁구리를 찾아왔는가?] 황의노인 산군의 음성은 해탈한 고승의 법어(法語)처럼 무욕(無慾)의 어조 바로 그것이었다. 심무는 문득 깊은 존경심이 치밀어 합장 배례했다. [빈니는 심무라 하옵고, 저분 사형은 위소보라는 분으로....] [불문의 제자라면 청정(淸淨)을 스승으로 삼고 수행하는 분인데 어찌하여 오욕탁세(汚辱濁 世)의 일에 뛰어드는가?] 심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산군의 말은 심무의 폐부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예리했다. 심 무는 스스로를 책하고 말았다. (그렇다! 내 어찌하여 속연(俗緣)을 떨치지 못하고 이곳까지 왔는가? 부처님에 귀의한 몸으 로 세속의 이해에 이끌리다니....) 그녀의 신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위소보는 처음부터 산군이란 자가 못마땅했다. 그런데 자 신의 목적을 훤히 알고 있다는 양 말하는 그의 말투에 크게 속이 상했다. [에헴, 이곳에 온 것은 지엄하신 황상 폐하의 성지를 받들고 찾아왔소이다. 폐하께서는 나 일등록정공 위작께 하명하사 대청(大淸)의 용맥을 자세히 살펴보라 하셨소이다.] [다른 분부는?] [과거의 물건이 잘 있는가 엄밀히 조사하라는 성지가 계셨소.] 위소보는 슬쩍 한 마디 던지고 산군의 반응을 주시했다. 산군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듯 한 동안 말이 없다가 침중한 어조로 답했다.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대청(大淸)의 용맥을 지키고 있다오. 만주의 모든 용맥은 금아림 (金阿林:홍안령) 녹정봉에서 출발하오. 까마득한 옛날 하느님(퉁구리)께서 하늘과 땅을 만든 후, 이곳 녹정산을 지정(地鼎:땅의 중심, 기(氣)를 만드는 솥)으로 삼아 여덟 방위로 지맥(枝 脈)을 나누었소. 그중 제일 먼저 발흥한 을상통맥(乙象統脈)은 서남방으로 뻗어 나가 색리국 (索離國:부여족의 원류. 즉, 한민족의 일파인 고구려 이전의 국가)을 세우고 그 후손이 부여 국을 일으켰소. 후일 고려(고구려)에 이르러 운이 쇠해 맥이 끊어졌소. 그 다음은 솔빈통맥 (率賓統脈)으로 지맥이 동남으로 흘러 물길국(勿吉國:말갈족) 육천 리를 만들고 그 후손이 발해국(渤海國)을 세웠소. 발해국의 용맹한 전사들은 대다수가 흑수물길(黑水勿吉)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들이오. 솔빈통맥이 쇠하자 이번에는 발륜통맥(勃倫湘爪)이 융성해 주르친(朱 申:여진)이 대금(大金)을 세웠소. 그들의 선조는....] 산군의 얘기가 계속되자 위소보는 짜증이 났다. (제기랄, 누가 만주의 늙은 귀신들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나? 이 어르신이 듣고 싶은 말은 보물이 어디에 숨겨져 있고 안전하게 있느냐가 관심일 뿐이야.) 이에 그는 손을 저으며 산군의 말을 막았다. [이 위작 나으리는 그 뒷말까지 다 알고 있다오. 그 다음에는 몽고가 발흥해서 대원(大元)을 세우고, 그 다음 주인이 대청이 됐다는 얘기가 아니오? 이 위작 나으리는 황상 폐하의 지엄 지상한 성지가 계셔서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소. 속히 장보도의 물건이 묻혀있는 곳을 말하시오!] 이 말에 산군은 등을 돌린 채 하하하!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위소보는 화가 치밀어 다시 외쳤다. [빌어먹을, 웃기는! 나 일등록정공으로 말하자면 황상의 성지를 받고 오신 칙사로써 내 말 한 마디면 당신은 산군 지위에서 쫓아낼 수도 있소.] [오라버니!] 그의 거친 언사에 심무가 끼여들었다. 위소보는 더욱 큰소리쳤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제아무리 팔기의 가문에서 뽑은 산군이지만 황상 폐하의 성지 를 우습게 안단 말씀이야.] [위작 나으리, 이 늙은이는 산군의 직책에 아무 미련도 없소.] 산군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다음 순간, 위소보와 심무는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산군은 두 눈이 먼 장님이었다. 만면에 수도 없이 많은 깊은 주름살, 앙상한 얼굴, 검 게 찌든 모습 등은 모진 세파를 이겨 온 한 그루의 고목과도 같았다. [정말 당신이 모른단 말이오?] 위소보는 왠지 동정심이 생겨 이렇게 물었다. 산군이 느릿느릿한 어조로 답했다. [돌아가서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녹정산 보물을 찾으려면 사십이장경부터 구하라고 아뢰시 오. 전임 산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십이장경을 찾아 대청의 용맥을 따라 내려가면 그 어딘 가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하셨소. 내가 알려줄 이야기는 이것뿐이오.] 산군은 말을 마치자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석상처럼 굳어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의 언행에서 티끌 만한 가식도 발견하지 못했다. 산군도 녹정산 보물에 대해 별 반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기랄, 결론적으로 이 늙은 개뼈다귀를 만나러 왔다가 죽을 고비만 겪고 별소득도 없이 내려가는군. 하지만 녹정산의 용맥을 따라 내려가 보면 무슨 놀라운 단서라도 발견할지 모 르지.) 그는 심무를 향해 가자는 시늉을 한 후 산군에게 넌지시 물었다. [대청의 용맥을 조사해야겠소. 어느 능선을 타고 가야 하오?] [양백신녀(穰白神女), 귀인을 배웅하라!] 산군의 명이 떨어지자 정남의 방위를 지키고 있던 백의여인이 일어섰다. [이 맥이 대청의 용맥입니다.] 그녀가 가리키는 정남방으로 길다란 산맥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에헴, 황상께 당신이 용맥을 수호하느라 정성을 다한다 아뢰겠소. 산군에게도 높은 작위가 내려질 거요.] 그러나 산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입정한 고승처럼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심무 여동생, 어서 갑시다.] 위소보는 대청의 용맥이 뻗어 나가는 정남방의 바위 능선을 따라 신형을 날렸다. 산군과 팔 신녀는 강건너 불처럼 두 사람의 발길을 제지하지도 환송하지도 앉았다. 두 사람은 녹정봉 의 암봉을 내려선 즉시 대청의 용맥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주위에 수많은 산봉과 강들이 아련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대략 삼십 리쯤 달렸을까? 능선 좌측으로 한 줄기 강이 나타났다. 그것은 산봉과 벗하며 살리는 듯 끝없이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심무는 주위를 살 피면서 물었다. [사형, 여기 지명들을 한 번 다시 외워 봐요!] 위소보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그는 '지리꾸루강', '후니마디산', '아데얼', '아마얼하' 하며 줄줄 외웠다. 심무가 또 생각하다 말했다. [장보도에 그려진 지점은 아마도 '시리무디하', '징치리강', '후마얼워지산' 등 지방의 경계 에 있는 것 같아요.] 위소보가 말했다. [경계구역이 이처럼 넓은데 어디 가서 찾겠소?] 심무가 또 생각하다 물었다. [사형, 지도에 산도 아니고 강도 아닌 지명이 없어요?] [한 곳 있었소. 그런데 아주 이상하오. 그 무슨 소림사(少林寺)라고 하더구려.] 심무가 이상하여 물었다. [소림사? 그것은 하남(河南)에 있지 않나요?] 위소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 말이오. 모첩식이 등한해 틀리게 적은 것이겠지!] 심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지. 만주 북쪽에 소림사가 나타나다니?] 서늘한 바람이 불자 나무 잎사귀가 떨어졌다. 주위에는 뭇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벽돌 기와집이 나타났다. 바람결에 중이 경을 읽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심무는 눈을 번쩍 뜨더니 소리쳤다. [사형, 저것은 무엇인가요?] 더 말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재빨리 그 곳을 향해 달려갔다. 심무가 보니 사원(寺院)의 문에 는 멋들어진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소림사(少林寺)> 위소보는 소림사에 머문 적이 있어 그래도 이 세 글자만은 알아보았다. 그는 기뻐하며 말했 다. [이 어르신이 제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제기랄, 빈 대머리 중놈들은 이 지체 높으신 고 승을 맞아들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심무는 아주 세심하였다. 위소보와 함께 문어귀에 와서 지객승(知客僧)에게 인사하며 말했 다. [대사님, 안녕 하십니까?] 지객승은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도 곧 답례했다. 심무가 말했다. [비천한 우리 남매가 귀사에 들러 좀 쉬려 하오니 어떠하신지?] 지객승이 합장하며 말했다. [모두 불문자제들인데 사태님 사양치 마십시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제기랄, 하남의 그 소림사에서는 여자를 들여놓지 않는데 이 놈의 소림사는 여승까지 받아 들이니 어느 놈의 소림사가 진짜인지 모르겠다.) 다 같은 불문자제이지만 남녀가 구별이 있어 지객승은 위소보와 심무를 사원 옆에 있는 우 아하고 아늑한 뜨락에서 쉬게 했다. 찻물을 붓는 심부름꾼은 소사미(少沙彌)였다. 심무가 물 었다. [동자님, 이전에 내가 이 곳을 다녀봤지만 이 소림사를 보지 못했는데 어느 때 세웠어요?] 소사미가 웃으며 답했다. 겨우 열두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사태님, 너무도 이 소림사를 가볍게 보시는군요. 이 절은 순치(順治) 5년에 세워졌습니다.] 심무는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동자님은 나이 어리지만 학식이 아주 깊군요. 저 간판에 쓴 글자는 아주 대범하고 풍채가 있어요!] 소사미는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사태님의 견식은 평범치 않는 것 같군요. 저의 스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순치 할아버지께서 친히 썼다고 했습니다.] 소사미가 나간 다음 심무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사형, 우리는 제대로 찾아 왔어요. 생각해 봐요. 순치 5년이면 청나라 병사들이 입관한 지 오래지 않아 바로 관내의 보물들을 납치하여 옮길 때지요. 소림사 세 글자는 순치가 어린 시절에 쓴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위소보는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이 곳에 소림사를 세워 뭘 하겠소? 어쨌든 특별한 무엇이 있겠지!] 심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조심해야 해요. 우리는 아까 지객승을 보지 않았어요? 서로 인사할 때 옷소 매가 미미하게 날리는 걸 봐서 내력이 대단해요. 그리고 방금 들어왔던 소사미도 어리다고 보지 말아야하지요. 경공은 아마도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아요!] 위소보는 이상스러워 물었다. [그런가? 왜 나는 보지 못했을까?] 심무가 말했다. [소림사는 황룡과 호랑이가 숨어 있는 곳이지요.] 위소보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가볍게 흰소리를 했다. [옳소. 이처럼 중요한 곳이니 조정에서도 자연히 중시해야지. 황룡이 아니라 멧돼지 곰도 숨 어 있을지 모르지요!] 돌연 긴 웃음소리가 나더니 지붕에서 휙 하며 네 사람이 내려와 위소보와 심무를 둘러쌌다. 위소보는 대경샐색했다. 청아, 정극상, 관의호와 우아대였다. 위소보가 말했다. [제기랄, 방금 멧돼지니 곰이니 했더니 정말 몇 마리가 왔구나!] 위소보는 아주 이상했다. (이들이 어찌 이 소림사를 알고 왔을까?) 청아가 웃으며 심무를 쏘아보았다. [여동생의 재간과 궤계는 정말 대단하구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것을 몰랐 지?] 심무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렴, 다같이 왔으니 똑같이 나누면 되지요.] 청아가 냉소하며 말했다. [강호에는 또 한 가지 규례가 있지요. 이전투구(泥田鬪狗)란 것인데 두 분께서는 이것을 모 르는 모양이지요?] 심무의 얼굴에 일순 노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어쩔 작정이오?] [어쩌지는 않겠어요. 단지 두 분의 비파골만 끊어 놓겠어요. 그리고 우리를 도와 보물을 찾 으면 되지!] 위소보는 겁이 나서 말도 못했다. 심무가 냉랭하게 물었다. [이 몇 분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청아가 말했다. [이전에는 우리 몇 사람이 함께 손을 써도 너의 적수가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보의 혈도를 여느라고 내력을 다 뺐으니 너 하나쯤은 어렵지 않다.] 위소보가 심무를 바라보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제기랄, 이 어르신이 정말 청아 화냥년의 손에 죽게 되었구나!) 이 위급한 때 위소보는 우아대를 보고 말했다. [셋째 동생, 그대는 어쩔 작정인가?] 우아대는 청아를 의식하는 듯 그녀의 신색을 살폈다. [소인은....] 돌연 청아가 나지막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다리미로 다려도 펴지지 않는 주름살....] 우아대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청아만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청아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위소보가 욕했다. [우아대, 배은망덕한 놈! 여편네가 있으니 형제도 거들떠보지 않는단 말이냐? 그래 네놈은 이런 말을 모르느냐? 여편네는 옷과 같아 해지면 바꾸지만 형제는 수족과 같아 끊어지면 제 기랄, 잇지도 못한다고!] 청아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우아대가 옷을 즐기든 수족을 즐기든 상관할 것 없잖아요?] 위소보는 소류망답게 눈을 끔벅이며 사정했다. [청아 아가씨, 비파골인지 뭔지 끊겠다고 했는데 그 요구가 너무 높구려. 약간 내려 줄 수 없소?] 청아가 냉소를 날렸다. [감히 나와 흥정하겠단 말이에요? 어이, 모두 뭘 하고 있어요? 빨리 손을 써요.] 우아대는 위소보를 안중에 두지 않고 청아와 함께 긴칼로 심무의 어깨를 찌르려 했다. 관의 호와 정극상도 악이 받쳐 위소보에게 덮쳐 갔다. 심무가 소리쳤다. [언니, 모두들 이러지 마세요. 제게 긴요히 할 말이 있어요!] 위소보도 맞장구쳤다. [옳소, 옳소. 단박에 덤벼들지 마시오. 나도 요긴한 일을 말할 게 있다오!] 청아가 칼을 휘두르며 표독스럽게 외쳤다. [먼저 끊고 보자!] 바로 이 때 황룡대협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가 번개같이 네 사람의 혈도를 눌러 놓자 그 들 넷은 목석처럼 서고 말았다. 황룡대협은 심무 위소보를 끌어 자기 뒤에 보내고 말했다. [청아, 관의호, 너희들은 자기들끼리 치고 받는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청아가 두 눈초리를 가로로 쭉 찢으며 마구 욕했다. [또 너로구나! 대체 너는 무슨 물건짝이냐? 그래 감히 이 청아 아가씨를 훈계하겠단 말이 냐?] 심무가 소리쳤다. [언니, 너무 무례해요. 어르신은....] 황룡대협은 천천히 얼굴에 썼던 인피면구를 벗고 말했다. [청아야, 너는 나를 모르겠느냐?] 이 사람들 가운데 위소보를 제외하고 이전에 누구도 황룡대협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었 다. 청아와 관의호는 진면목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청아는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아니, 당신은 사람인가요, 귀신인가요?] 심무가 소리쳤다. [어서 의부라고 불러요.] 그 때의 문아, 지금의 심무가 위소보에게 개방 원래 방주 성룡의 일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 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문득 문아 자매의 '의부'가 나타났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황룡대협이 두 화냥년의 의부란 말인가? 그들 둘의 의부가 개방의 원래 방주 성룡이 아 니었던가? 문아는 친히 나에게 성룡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개방 내부에는 많 은 풍파가 일어나고 또 이 때문에 문아는 개방의 역도로 몰렸다. 그런데 왜 죽지 않았단 말 인가? 제기랄, 개방 일은 정말 거지 망태기구나.) 청아가 실성한 여자처럼 말했다. [의부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동생, 관 사형(師兄), 우리가 모두 자기 눈으로 보고 우 리가 친히 묻었지. 그런데 또 난데없는 의부라니요?] 심무가 말했다. [언니, 관 사형, 의부는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그것은 이 동생과 의부께서 꾸며낸 연극이에 요.] 그녀는 위소보를 보고 말했다. [위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를 속였어요....] 2년 전 천지회 내부의 분쟁이 폭발하여 천지회는 하룻밤 사이에 와해되었다. 이리하여 천지 회에 의해 명성이 높지 못하던 다른 무리들이 그 대신 일어나게 되었다. 개방도 바로 그 가 운데 하나였다. 바로 이 때 위소보는 운남에 은신해 있었다. 그런데 강호에는 어디에서 소문 이 퍼졌는지 위소보가 녹정산 장보도를 갖고 있다는 비밀이 도처에 마구 전해졌다. 개방 방 주 성룡도 이 때 보물을 얻으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자기로서는 이 일을 알아내기 어려 움을 알고 의녀 문아와 상의하고 가짜 죽음의 비극을 꾸며냈다. 이렇게 하면 개방의 내란으 로 강호의 다른 무리들이 지나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고 이 기회에 문아, 청아, 성룡이 세 갈래로 나뉘어 활동하면 보물을 탈취하는 데 희망이 더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비밀은 단지 성룡과 문아만 알았다. 성룡은 구식대법(龜息大法)으로 호흡을 정지하고 죽은 척하였다. 매장한 그 날 밤 문아가 남 몰래 구해 냈다. 이로부터 황하 연안에는 황룡대협이 나타나고 강녕직조 조인의 댁에는 선 량하고 다정스런 아환이 나타났다. 심무가 설명했다. [오라버니. 내가 직조부를 선택한 것은 강녕직조 조인이 조정에서 아주 큰 권세가 있을 뿐 더러 강호와 서로 내왕이 아주 넓은 데 있었지요. 그리고 오라버니는 조정에서 작 나으리라 는 신분과 천지회에서 향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주 사람으로써 강남에 나타나면 강 녕직조 조인도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이었어요.] 위소보는 이처럼 엄청나게 복잡한 관계는 생각 못했다. 그는 너무도 놀라 혀를 빼 들고 한 동안 있다가 겨우 말했다. [제기랄, 개방의 이런 심사는 소현자 황제와 쌍년 태후도 따르지 못하겠구나!] 심무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위 오라버니, 많은 죄를 졌어요.] 성룡도 두 주먹을 맞쥐고 말했다. [위 동생, 만약 원망하려면 나를 원망하시게.] 위소보는 쓰디쓴 웃음으로 말했다. [원망하고 아니하고 할 것 없지요. 개방 형제들이 이 많은 보물을 얻어 모두가 백만장자가 되면 그것도 괜찮지요!] [위 동생, 원래 나는 생각하기를 이 보물들을 개방에서 가지려고 했소. 그렇지만 이 2년간 황하 연안에서 수백만 백성들이 황하의 재해로 사람이 죽고 가정이 파산되어 정처 없이 돌 아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오. 나는 이 보물들을 황하 연안에 날라다 재민들을 구제하려고 생각했소. 위 동생, 이 보물은 원래 동생에게 돌려줘야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소?]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 목숨이야 너의 손에 있으니 안 된다면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이 많은 보물을 자기가 하나도 가지지 못하면 어쩐지 아쉬웠다. 바로 이렇게 주저하 고 있을 때 위소보는 심무 여동생의 곱다란 눈이 자기에게 희망을 품고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고귀한 보물은 일찍 문아.... 아니 심무 여동생에게 주기로 했소이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심무는 온통 웃음으로 차고 넘쳐 위소보를 불렀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성룡도 인사를 했다. [위 동생, 나는 황하 연안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리오.] 위소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필요야 있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빈말뿐이야. 나에게 감사를 드린다면 네 딸에게 비구니 노릇을 하지 말라고 해야지.) 성룡이 말했다. [개방 제자들, 다 들었지. 그럼 이렇게 결정했네. 사람은 저마다 의지가 있으니 억지로 해서 야 안되지. 우아대, 정극상 두 친구는 도(道)의 규정에 따라 보물을 판 다음 자기가 쓸 만큼 가지고 가면 되오. 두 분의 생각은 어떤지?] 정극상은 큰 포부를 품고 조상들의 대업을 부흥시키려고 돈과 재물에 대해 중히 여기는지라 아무 대답도 없었다. 우아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돈은 싫습니다.] 성룡이 말했다. [그럼 어떤 계획이 있는지 말해 보시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성 어르신, 남자가 크면 장가를 들고 여자가 크면 시집가는 법인데 나의 의동생은 어르신 의 큰딸을 욕심 낸답니다.] 청아가 돌연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그가 나를 욕심 낸다고? 누가 그를 거들떠본다고 그래요? 흥, 제 좋은 생각을 하네!] 우아대가 꺽꺽거리며 물었다. [청아 아가씨, 청아 아가씨가 대답하지 않았소. 나에게....] 청아의 입에서 다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나요? 흥, 나는 그대의 손을 빌어 보물을 얻자고 그랬지, 내가 시집가겠 다고? 오줌싸개....] 이처럼 얌전한 아가씨 입에서 이처럼 몰상식한 말이 나오니 모두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 다. 성룡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입 다물거라!] 심무가 말했다. [의부, 언니의 혈도를 열어 주세요.] 성룡이 말했다. [흥, 내가 거짓으로 죽었을 뿐인데, 너희들이 개방를 이처럼 난장판으로 만들었단 말이지?] 그는 먼저 우아대와 정극상의 혈도를 열어 주고 관의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나쁜 놈을 도와 나쁜 짓을 했지? 그 날 나는 강남 객잔에서 신룡편에 중독된 너를 구 원해 주지 말아야 했을 걸 그랬어!] 관의호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자는 스승님의 구명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위소보는 머리가 빨리 돌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놈을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다고 했더니 알고 보니 성 어르신이 암암리에서 보호 해 준 것이구나. 그 날, 동굴에서 나와 문아 여동생이 갈 길이 없어 할 때 네놈은 나의 손에 서 죽었지. 그 때 나도 내심 어디서 이처럼 큰 힘이 있어 네놈을 죽였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겼어. 그리고 죽은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으니 천지회 형제들이 와서 구해 주었는가 했 더니 성룡 어르신이 한 일이군요.] 성룡은 웃고만 있었다. 그는 묵묵히 청아를 보았다. 청아는 떳떳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성 룡이 탄식하자 그녀의 혈도가 열렸다. 심무는 친절히 앞에 가서 부축하며 말했다. [언니....] 청아는 뿌리치며 빽하고 소리 질렀다. [너만 좋은 사람인 척하지 말아!] 성룡이 소리쳤다. [청아야!] 오만한 청아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나는 의부도 없고 여동생도 없어요! 왜 다들 모여서 나를 업신여기는지?....] 그녀는 날렵하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심무가 따라가려 했으나 성룡이 말렸다. [그만 두어라. 가려면 가라지!] 청아가 문어귀에 이르자 '아이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냉랭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 렸다. [성 방주님은 보물 때문에 선녀 같은 딸마저 저버리겠단 말이오?] 집안의 사람들은 크게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홍안통이 긴 수염으로 청아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구난사태, 현정도장, 서화룡.... 감옥에서 탈옥시키려던 강호의 호걸들이 모두 왔다. 위소보의 일곱 부인과 이남 일녀 자식들도 왔다. 그들은 몹시 피곤해 했다. 우아대는 청아가 홍안통의 수염에 감겨 있는 것을 보고 대성호갈하며 덮쳐 갔다. 홍안통이 수염으로 청아의 목을 더 졸랐다. 홍안통이 말했다. [야 이놈, 무지막지하게 덤비지 말아. 네놈이 한 걸음이라도 더 오면 청아가 천당으로 갈 줄 알아라!] 성룡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홍 교주님은 강호에서 이름 있는 분인데 애들을 이렇게 대하다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홍안통이 웃으며 말했다. [성 방주님, 방주님도 강호에서 이름이 있는 분인데 강호의 도의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럼 좋소, 어떻게 하겠는지 말하시오.] [아주 간단하지요. 위소보는 본 교의 부교주입니다. 그러니 본 교에 돌려주면 본인은 성 방 주님의 딸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현정도장이 말했다. [홍 교주님, 위소보는 우리 천지회 청목당의 향주라는 것은 강호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돌 려주려면 우리 천지회에 돌려주어야 하지요.] 성룡이 말했다. [두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더욱 돌려줄 수 없소이다. 위소보는 개방 신임방주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모를 리야 없겠지요.] 우아대가 냉랭하게 말했다. [위소보가 조정의 공작이니 그럼 황상에게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까지 비치지 않던 구난사태가 돌연히 말했다. [모두 왜 이럽니까? 왜 저의 제자를 뻬앗으려 합니까?] 소전이 말했다. [소보는 어디도 가지 못해요. 이들은 모두 선심을 써서가 아니지요. 우리들의 남편이니 마땅 히 우리를 따라가야지요....] 위소보는 대성질타했다. [됐어!] 위소보는 원래 내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성질호하니 무공 능수들도 놀라 잠잠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나는 공작이고 또 부교주, 방주, 철검문 제자, 향주, 일곱 부인들의 남편이오.... 하지만 나 자신은 누구란 말이오? 왜 나는 없느냔 말이오? 모두가 나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드는 게요?] 위소보는 말할수록 비분했다. 그가 말했다. [이 어르신이 알려주겠소. 이 어르신은 양주 여춘원 기생 위춘방의 아들이오. 이 어르신은 나의 친아버지가 한족 만족 회족 몽골족 장족인지 모르고 있소. 여춘원의 외도꾼들이 나를 쌍놈이라 하고 나의 어머니를 쌍년이라 하오.... 헤헤, 나는 양주에 가서 쌍놈 개자식 망나니 라 해도 신경 쓸 것이 없으니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며 계집들을 데리고 놀겠소. 그러면 한 평생 얼마나 자유스럽소!] 위소보가 울분에 차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각기 향주, 작 나으리라고 하지만 결국 이 어르신은 송곳 방석에 앉은 격이 지, 어느 하루 편안히 보낸 날이 있단 말이오?] 위소보는 수년간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니 검은 구름을 몰아내고 맑 은 하늘을 보는 듯 마음이 환해졌다. 위소보는 매몰찬 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녹정산 장보도는 나의 머릿속에 있소. 누가 보물을 가지려면 나를 따라가서 파내면 되오. 장보도를 바치고 이 어르신은 교주 향주 방주 또 제기랄, 남편이고 뭐고 몽땅 당신들 께 바치겠소. 그러면 어르신은 거뜬한 몸으로 양주 여춘원에 돌아가 외도꾼들의 물심부름이 나 하겠소. 그러나 이 어르신이 권고하고 싶은 것은 보물을 얻었다고 지레 기뻐하지 마오. 돈이 많을수록 근심 걱정이 많고 시름 놓을 날이 없을 것이오.] 이 기다란 장광설을 듣고 모두 가슴이 두근거렸다. 위소보는 소리쳤다. [제기랄, 뭘 또 기다리나 보물을 파내러...] 모두 보물을 파러 떠나려 할 때 우아대가 소리쳤다. [태산석을 당할 자 없다!] 위소보는 이 말을 알고 있었다. 과거 양주에서 쌍아가 묘지에 감금되어 있을 때 조인이 '도 묘적'들에게 외치던 일이 대뜸 생각났다. 위소보가 주저하고 있을 때 수천만 사람들의 '태산 석을 당할 자 없다!'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땅을 뒤혼들듯이 울렸다. 삽시에 횃불이 대낮처럼 비췄다. 혜아릴 수 없는 청병(淸兵)들이 소림사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위장을 벗긴 대포가 포구마다 이들을 조준했다. 여러 호걸들은 대경실색했다. 위소보는 그제야 문득 깨닫고 우아 대를 보고 말했다. [훌륭한 셋째 동생, 원래는 동생이 첩자였구만!] 우아대가 냉소했다. [흥! 정정당당한 어전 일등시위이며 강호에서 명성이 높은 괴상한 어르신의 훌륭한 제자인 내가 어찌 떼쟁이 소류망과 형제를 맺는단 말인가?] 그는 불시에 위소보를 붙잡고 산으로 달렸다. 여러 호걸들도 어쩔 사이가 없었다. 우아대가 위소보를 붙잡고 공주 앞을 지날 때 그녀가 소리쳤다. [그 자리에 섯!] 우아대는 어전시위 신분이라 황실 공주라는 위풍에 그만 놀랐다. 이 순간 공주가 덮쳐 갔다. 우아대는 고수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몸빼기 어려움을 알고 일 장으로 공주의 가슴 을 쳤다. 공주는 그만 땅에 쓰러졌다. 순간 구난사태, 성룡 등 사람들이 달려와 수중의 병기 로 우아대의 혈도를 누르려 했다. 우아대는 위소보를 버리고 청병의 진지로 갔다. 위소보는 공주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랑하는 공주, 정신 차리시오! 정신을....] 공주는 눈을 뜨고 미소지었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소보, 나를 공주라 부르지 말아요. 저는 쌍년이에요!] [아니, 훌륭한 나의 아내요, 훌륭한....]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는 훌륭한 아내가 못 돼요. 소보, 후에 우리가 부부로 되면 그 때 나는 꼭 잘 시중 해 드리고 훌륭한 아내, 훌륭한 어머니가 되겠어요.] 돌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만 잠잠했다. 위소보는 공주를 안고 혼들며 울부짖었다. [훌륭한 아내여, 죽지 마시오! 왜 이리도 빨리 간단 말이오....] 돌연 산비탈에서 강희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빨리 간 것이 아니야! 위소보, 너도 곧바로 따를 수 있다!] 위소보가 말했다. [황상,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야 합니다. 비록 공주가 황상의 친여동생이 아니라 하더라도 같 이 자라지 않았습니까?] 강희가 냉엄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나의 친여동생이라도 나라와 황제에게 위험을 주면 죽이지 않을 수 없어!] 위소보가 말했다. [정말 악독하구만!] 강희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도 자네처럼 양주에서 태어나고 자네처럼 술을 마시고 도박이나 한다면 방법이 없을 것 이네. 하지만 이 몸은 제황지가(帝皇之家)에서 태어난 일국지군(一國之君)으로 강호의 도의 (道義)고 자식들의 정이고 다 돌볼 겨를이 없다네!] [나도 알만 하외다. 소계자와 소현자가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해도 소계자는 소계자이고 소현 자는 소현자이니 영원히 훌륭한 친구로 될 수 없다는 걸....] 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자네가 모든 것을 잘 깨닫고 있는 것으로 치지. 유감스러운 것은 일찍이 몸을 뺏어야 하지. 점점 험난 속에 들어가면 나중에는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네.] 한참 있다가 강희가 또 말했다. [소계자, 죽어도 똑똑히 알고 죽는 게 좋겠지. 그대도 알겠지만 왜 녹정산 장보도 비밀이 강 호에 전해졌겠소? 그것은 강녕직조 조인이 황제의 성지를 받고 고의적으로 강호에 널리 퍼 뜨린 것이라네. 또 짐이 왜 자네에게 하독을 시켰겠나?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강호에서 사 단을 일으키게 했지. 하지만 짐이 왜 사람을 파견하여 그대를 보호하게 한 줄 아는가?] 위소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알겠소? 소현자는 총명하기를 제갈지량을 초월하니 이 소계자야 그저 무릎이나 꿇고 투항할 뿐이지!] 강희가 냉소하며 말했다. [각하께서는 너무 겸손하구만. 내가 알려주지. 짐은 녹정산 장보도를 아는 사람을 그대로 내 버려둘 수 없었다네. 알만 한가?] 위소보는 연신 헛웃음만 토해 냈다. [나는 알만 하오. 이 위소보가 강호에 나타나기만 하면 강호의 사람들은 똥을 만난 파리처 럼 달려들지. 그것을 미끼로 모든 사람을 일망타진할 계획이었군!] 강희가 돌연 명령을 내렸다. [쏘거라!] 바로 이 때 침착하고 무던한 소리가 들렸다. [현엽(玄燁), 경솔하게 서둘지 말게!] 강희 이름은 아이신쑈뤄 현엽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황태후를 제외하고 누가 감히 이렇게 부를 수 있겠는가? 강희가 놀라며 물었다. [누가 이렇게....] 소림사에 돌연 붉은 구름이 일더니 수염이 앞가슴까지 드리운 숭엄한 고승이 날아왔다. 이 고승은 경공이 출중하여 구름에 싸여 날아오는 것같이 천천히 사람들 속에 내렸다. 강희가 돌연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 아들이 부황을 뵈옵나이다.] 위소보는 멍했다. (황제의 부친이라니? 소현자의 부친인 순치가 아닌가?) 공교롭게도 고승은 위소보의 옆에 와서 섰다. 위소보는 보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행치(行痴) 대사님 안녕하나이까?] 고승은 강희의 부친인 순치였다. 그는 청년 때 황위를 포기하고 오대산 청량사에 가서 중이 되어 법명을 행치라 했다. 위소보는 오대산에 가서 그를 호위한 일이 있으므로 서로 알았다. 행치는 위소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희와 말했다. [현엽, 왜 이러는가?] 강희가 말했다. [부황께 알립니다. 이 아들은 역적들을 처단하려 하나이다.] 행치가 말했다. [녹정산 장보도 때문인가?] 강희가 머리를 조아렸다. [부황께서 고견을 내리시기를 바라나이다. 장보도는 아주 중요한 것이온데 대청의 용맥과 대청의 강산과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옵니다.] 행치가 말했다. [현엽, 그대는 나의 말에 대해 이해가 깊지 못하네. 나라를 공고히 하자면 백성들에게 조세 와 부역을 더하지 말라는 것을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 두면 그만이지 용맥과 무슨 상관이 있 겠는가?] 강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부황....] 행치가 자애롭게 말했다. [다시 생각하게. 장보도는 뭇 사람들과 무관하니, 함부로 인명을 상하지 말아야 하네!] 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 아들은 성지대로...] 행치가 고개를 돌려 위소보를 노려보았다. [위소보, 자네는 정말 녹정산 장보도를 알고 있는가?] 위소보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예!] 행치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럼 너는 살려 둘 수가 없도다!] 불시에 일 장으로 위소보의 정수리 백회혈(百會穴)을 쳤다. 행치는 아주 똑바로 호되게 쳤 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할 사이도 없이 위소보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오대산 청량사에는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풍류의 살인수' 위호두(韋虎 頭)와 '쌀쌀한 마녀' 위쌍쌍(韋雙雙)이 청량사에서 법호가 심무(心無)인 비구니를 찾아내겠 다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그 후로 그들의 종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강호의 물결은 또다시 일었다. 몇 년 후 북경 향산(香山), 한 초가집에서 한 낙척서생(落拓書生)이 책을 향해 붓을 집어 던지며 불의를 위해 떨쳐나서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옆에는 연로한 비구니가 서 있었다. 이윽고 중원 천지는 황색 두건의 물결에 흽쓸렸다. <완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