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淸香妃 고립된 두 사람 인연 맺어 주기 이재민 구제 알 수 없는 관계 권륜 황제 배 위에서 춘휘당의 내력 약속 한 쌍의 옥병 마술사들의 정체 이틀간의 여유 바뀐 아기 갈령에서의 대결 홍화회의 계략 화염 속의 구출 작전 황제의 실종 비밀 통로 고립된 두 사람 주기는 난군 가운데서 일행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사방을 휘둘러 보아도 청병뿐이다. 되는 대로 손에 든 칼을 휘둘러 몇 명을 쓰러뜨렸지만 청병은 사면 팔방에서 꾸역꾸역 모여들기만 했다. 당황한 그녀는 말을 몰고 달아났다. 한참 동안 달리다 또 한테의 관병과 마주쳤다. 다시 대항할 용기를 잃은 그녀는 말머리를 돌려 지름길을 택해 달렸다. 그녀는 피곤한데다가 캄캄한 밤이라 무섭기까지했다. 그런데 이때 말이 뭘 잘못 밟았는지 걸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녀도 그만 안장 위에서 떨어지며 딱딱한 땅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날이 어두운 탓에 청병들은 미처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우르르우르르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얼굴이 시원해지면서 물방울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주기가 눈을 뜨니 온 하늘에 검은 구름이 뒤덮여 큰비가 대야를 엎어 놓은 듯 쏟아졌다. 주기는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이때 갑자기 옆에서도 한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 깜짝 놀란 주기는 급히 땅 위에 있는 단도를 주워 들고 찌르려고 하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서천굉이었다. 「아니, 주 소저 어째 여기 계셨지요? 서천굉이 놀라 물었다. 주기는 난군 가운데서 한밤을 싸웠다. 아버지도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는데 지금 여기서 서천굉을 만난 것이었다. 평소에 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또 그와 계속 말다툼을 했지만 그래도 자기 편의 사람이다. 제아무리 초이규라는 별명을 들으며 대담한 성격에 남자에게 양보할 줄 모르는 그녀지만 이때만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주기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우리 아버지는요? 서천굉은 갑자기 손짓을 하며 빨리 엎드리라는 신융을 했다. 「쉿! 관병이 있어요. 주기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둘은 천천히 기어 흙으로 쌓인 언덕 뒤로 돌아가 고개를 내밀고 동정을 살폈다. 이때는 벌써 날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청병이 땅을 파고 시체를 묻으며 투덜대고 있었다. 잠시 후에 시체를 대강 묻자 파총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장득표(張得標) 왕승은 시체가 또 있는지 없는지 사방을 한 번 수색해봐. 청병 둘이 대답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다가 두 사람이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또 두 구의 시체가 있습니다.」 주기가 자기를 시체 취급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달려가 분풀이를 하려고 할 때 서천굉이 그녀의 팔을 잡고 낮은 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이쪽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요.」 청병 둘이 삽을 든 채 걸어왔지만 주기와 서천굉은 죽은 체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이 접근하여 몸을 숙이고 건드리려 할 때 갑자기 칼을 뻗어 그들의 배를 찔렀다. 두 청병은 비명도 지를 사이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파총이 아무리 기다려도 병정 둘이 나타나지 않았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는데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입 속으로 갖은 욕을 다 퍼부으며 말을 탄 채 살펴보려고 왔다. 「아무 소리 내지 마세요. 래 저자의 말을 뺏어야겠꺼요.」 서천굉의 낮은 말소리였다. 파총이 가까이 접근하여 두 병정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데 서천굉이 쏜살같이 쫓아나가며 칼을 들어 비스듬히 쳤다. 파총은 손에 병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채찍을 들어 막았지만 채찍과 머리가 동시에 칼에 맞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빨리 말에 오르시오. 서천굉이 고삐를 잡은 채 말하자 주기는 펄쩍 뛰어 안장에 올라 앉았다. 말이 출발하자 서천굉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청병들은 적의 정체를 발견하고 함성을 지르며 각기 병기를 들고 추격했다. 서천굉은 몇십 보 달리다가 금침에 맞은 왼쪽 어깨가 아파 견디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주기는 고개를 돌려 적정을 살피다가 갑자기 서천굉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삐를 채 말머리를 돌리고 그의 옆으로 달려가 그를 안장에 비스듬히 태운 후 칼등으로 말 엉덩이를 치자 말은 나는 듯 달렸다. 청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기는 청병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칼을 허리에 꽃고 서천굉을 바라다보았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고 호흡도 가냘프기 짝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난 주기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면서 그를 부축해 똑바로 앉히고 왼손으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말에서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호젓한 지름길만 골라 달렸다. 한참 동안 달리다 보니 앞헤 숲이 나타났다. 말을 숲속으로 몰았다.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차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이때는 비도 어느 정도 멈추었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 숲속의 공터에 이르러 서천굉을 바라다보니 여전히 정신을 잃은체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를 안아 내려서 풀 위에 눕히고 자기도 휴식을 취하면서 말에게 풀을 뜯게 했다. 스무 살도 안 된 처녀가 숲속에 외롭게 버려진데다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속수무책이라 자기도 모르게 슬픔이 북받쳤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강싼 채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이 한 방을 두 방을 서천굉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서천굉은 땅바닥에 누워 있다가 점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 것으로 알고 살그머니 눈을 떴다. 주기의 얼굴이 보였다. 그 큰 눈이 울어서 붉게 충혈이 되었고, 또 눈물 방울이 자기의 얼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끙 소리를 냈다. 왼쪽 어깨가 아파 자기도 모르게 (아이쿠)하고 비명을 질렀다. 주기는 그가 정신을 차리자 몹시 반가웠는데 자기의 눈물이 또 그의 입언저리에 떨어졌다.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려고 하다가 뻗었던 손을 흠칫 움츠렸다. 「왜 남의 앞에 와 누워 있는 거예요. 저만큼 물러나 있지 않구요. 서천굉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려고 몸을 힘들게 움직였다. 「그만두고 여기 그냥 누워 계세요. 그런데 우리 어떻게 하면 좋지요? 당신은 별명이 제갈량인데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죄가 많다고 칭찬을 하셨으니 무슨 수가 있겠지요? 「내 어깨가 너무 아파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군요. 아가씨, 내 상처 좀 보아 주시겠어요? 「싫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주기는 몸을 숙여 상처를 살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피도 흐르지 않구요. 서천굉은 억지로 일어나 앉아 오른손의 단도 끝으로 옷깃을 찢고 눈을 비스듬히 떠 상처를 살펴보았다. 「여기 금침 세 개를 맞았는데 살 속을 뚫고 들어갔어요. 금침이 작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뼛속에 박혀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마치 큰 칼에 세 번 찔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 우리 고을로 가서 의원에게 보일까요? 「그건 안 됩니다. 어젯밤 그 소란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의원을 찾아가 치료를 부탁한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이건 본래 흡철석으로 빨아내면 되는데 지금 당장 그걸 어디에서 구하겠어요? 수고스럽지만 아가씨가 칼로 살을 도려내고 빼 주세요.」 주기는 밤새 악전고투를 하면서 적지 않은 관병을 살해했지만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서천굉의 어깨살을 도려낸다니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참고 있을 테니 빨리 손을 쓰시오,,-. 아, 잠깐만요」 그는 옷을 찢어 몇 개의 끈을 만들어 주기에게 넘겨 주면서 물었다. 「혹시 부싯돌을 가지고 계시나요? 주기는 자기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있군요. 그런데 그건 어디에 쓰려구요? 「마른 나뭇가지와 잎을 주워다 태워 재를 만들어야 해요. 금침을 뽑은 뒤 상처에 재를 바르고 다시 이 천으로 싸매 주십시오.」 주기는 그가 시키는 대로 불을 질러 재를 모아 놓았다. 「그만하면 됐어요. 원, 백 명의 상처를 치료하고도 남겠다.」 「그래요, 난 바보라 그러니 당신이 직접 하세요.」 「제가 말을 잘못했으니 화내지 마십시오.」 「흥! 당신도 잘못을 깨달을 때가 다 있군요. 그녀는 오른손에 단도를 들고 왼손으로 그의 어깨에 있는 바늘 「구멍 주위를 눌렀다. 손끝이 남자의 피부에 가 닿자 자기도 모르게 찔끔 손을 떼면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귀밑까지 빨개졌다. 서천굉은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을 보고 무제갈이란 별명을 듣는 그로서도 까닭을 몰라 물었다. 「왜, 무서우세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공연히 자기 쪽에서 무서워 벌벌 떨면서 재게 묻는군요.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쳐다보지도 마세요.」 서천굉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주기는 바늘 구멍 근처의 근육을 누르면서 칼끝을 살 속에 박고 천천히 돌렸다. 선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렀다. 서천굉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이 없었지만 이마에는 콩알만한 땀방울이 솟았다. 주기가 환부를 도려내자 금침의 끝이 드러났다. 모지와 식지로 바늘끝을 잡은 채 잡아당기니 바늘이 뽑혔다. 서천굉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 가지고도 억지로 이죽거렸다. 「바늘끝에 귀만 있어도 실을 꾈 수 있을 텐데, 그럼 주 소저 수 놓으시라고 드릴 텐데요.」 「저는 수 같은 것 놓을 줄 몰라요. 작년에 어머니가 배우라고 하셔서 몇 번 해 보다가 바늘만 분질러뜨리고 또 골무만 망가뜨리고 말았다니까요. 어머니가 꾸중을 하시자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어머니! 나 안 되겠어요. 좀 가르쳐 주세요.)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어디 한번 맞혀 보세요.」 (이리 다오. 내 가르쳐 주마)고 하셨겠지요. 「흥, (나 그럴 시간 없다)고 하시더군요. 뒤에 가서야 나도 알았지요. 원래 어머니도 수를 놓을줄 모르셨다나요. 이 말에 서천굉이 껄껄 웃었다. 말하고 웃는 동안에 또 하나의 금침을 뽑았다. 「저는 본래 배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하실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가르쳐 달라고 계속 떼를 썼지요. 제가 하도 귀찮게 구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자꾸 까불면 아버지께 일러 때려 주라고 하겠다)구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바느질을 못 하면 흥, 뒤에,,,,,,.-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뚝 멈췄다. 원래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장래 시집도 못 가겠다)고. 「바느질을 못 하면 뒤에 어떻게 된다고 그러셨나요? 서천굉이 짓궂게 물었다. 「떠들지 마세요.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 손은 멈추지 않고 세번째 금침까지도 뽑아냈다. 재로 상처를 누르고 천으로 싸매 주었다. 서천굉은 전신에 피가 묻었는데도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기와 시시덕거리기만 했다. 주기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체구는 작지만 그래도 영웅호걸의 기백은 대단하구나. 만약 다른 사람이 내 살을 이렇게 도려낸다면 내 그냥 참고 있었을까?) 아버지 어머니에게 생각이 미치자 또 한 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의 손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 계세요. 물 좀 찾아 마시고 올께요.」 지세를 살펴보면서 숲속을 나와 수백 보 걸어나가니 냇물이 나타났다. 큰비가 내린 뒤라 냇물이 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우선 손에 묻은 피부터 씻고 물을 마시려고 몸을 숙이다 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리는 엉망으로 새둥지가 되었고 옷도 여기저기 구겨진데다가 또 젖기까지 했다. 얼굴은 핏자국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구 망측해라. 이 꼴을 그가 다 보았겠구나. 이를 어쩐담.) 그래서 냇물을 거울삼아 얼굴을 말끔히 씻은 다음에 빛 대신 손가락으로 머리를 대강 빗은 후 물을 손바닥으로 떠 마시다가 서천굉도 오죽 목이 마르랴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물을 떠 갈 만한 그릇이 없어 망설이다가 꾀가 하나 떠올랐다. 보따리 속에서 옷을 하나 꺼내 냇물을 흠뻑 적셔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천굉은 방금 주기와 웃고 얘기하는 바람에 억지로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깨의 통증이 너무나 심해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다. 주기는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버티고는 있지만 오죽이나 아프랴 싶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냇물에 적셔 온 옷을 그의 입에 대고 짜며 물었다. 「많이 아프세요? 서천굉은 여태까지 이 거칠기만한 처녀를 싸워야 할 적수로 간주하여 여자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부상을 당하자마자 공교롭게도 이 적수가 나타나 자기를 간호해 주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도 않았다. 이제 입장이 이렇게 되자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부드러운 말로 자기의 상처를 염려해 주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으로 감동이 되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다볼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기는 넋을 잃고 바라다보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또 정신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니, 왜 또 그러세요? 주기의 다급한 질문에 서천굉은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괜찮아요.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흥, 누가 고맙다는 인사 받으려고 했나요? 「우리 이렇게 여기 있는 것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오. 그렇다고 고을로 찾아 들어갈 수도 없구요. 차라리 조용한 농가를 찾아 친오누이 사이 라고, ,,, , ,.」 「아니, 그럼 오빠라 부르란 말이에오?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되거든 차라리 아저씨라고 하든지.」 「피, 어림없는 소리 집어치워요. 오빠라 부를께요. 그러나 사람이 있을 때만 부르고 사람 없으면 안 불러요.」 「부르지 않아도 좋아요. 사람들을 만나면, 노상에서 대군을 만나 보따리를 모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한 차례 되게 얻어맞기까지 했다고 말합시다.」 둘이 이렇게 결정을 내리자 주기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자, 주 소저는 말에 타시오. 난 다행히 다리에는 부상을 입지 않아 걸을 만하다오.」 「아무 말 하지 마시고 그냥 타고 가세요. 여자라고 깔보는 것 아니ㅖ요. 서천굉은 껄껄 웃으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말 위에 올랐다. 두 사람은 숲속을 나와 해를 향해 호젓한 지름길만 골라 갔다. 서북은 거칠기만한 벽지라 남방처럼 곳곳마다 뿡나무밭이나 삼밭이 있는 것토 아니요, 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한 시간쯤 걷자 배도 고프고 피곤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한 가닥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가까이 접근해 보니 초가집이 나타났다. 집앞에 당도한 서천굉은 말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노파 하나가 나와 그들의 이상한 차림을 보고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서천굉은 방금 주기와 꾸민 그 말을 하면서 먹을 것을 줄수 없느냐고 했다. 노파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물었다. 「고약한 관병들 같으니라구. 그래, 성 이 뭔가요? 「주(周)가라 합니다.」 서천굉이 대답을 하면서 주기를 바라다보니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노파는 자기 성은 당(唐)이라 하면서 아들이 고을로 나무를 팔러 갔다가 개에게 물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대기로 그 개를 때려 죽였는데 알고 보니 그 개 임자는 고을에서 세도깨나 부리는 부자였다는 것이다. 아들은 개 주인에게 실컷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상처가 심한데다가 화까지 나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젊은 며느리는 충격을 받아 그 다음날 목을 매 자결을 했기 때문에 노파 혼자 외롭게 산다고 하소연을 했다. 노파는 하소연을 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주기가 듣고 화가 나서 그 부자의 이름은 뭐며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다. 「그자도 글쎄 성이 당가라오. 면전에서는 당 육야니 당수재(唐秀才)니 하고 부르지만 배후에서는 당리비상이라고 쑥덕거리지요. 고을에 살고 있는데, 그자의 집이 제일 크지요.」 「고을 이름은 뭐며 그곳은 어디로 가지요? 주기가 물었다. 「그 고을요? 여기서 북쪽으로 5리쯤 가다가 언덕을 넘어 큰 길로 해서 다시 동쪽으로 20리만 가면 되는데 문광진이라고해요. 주기가 벌떡 일어서면서 단도를 든 채 서천굉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봐요. 오빠, 제가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여기서 쉬고 계세요. 서천굉은 그녀의 눈치로 보아 당장 그 당리비상이란 자를 죽이러 가려는 줄 알았다. 「설탕을 먹으려거든 밤에 먹는 것이 제일 좋지. 주기가 듣고 벌써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 제가 부상을 당해 걸을 수가 없어요. 하룻밤만 여기 제워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묵는 것이야 괜찮지만 워낙 가난한 집이라 대접할 것이 있어야지요.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할머니께서 묵게 해 주시는 것만도 감사하기 짝이 없는걸요. 제 누이의 옷이 젖어서 그러는데 헌 옷이 있거든 좀 빌려주셔서 갈아입도록 해 주세요.」 「제 며느리가 입던 옷이라도 괜찮다면 드릴께요. 원, 몸에나 맞을는지 모르겠네요. 주기가 옷을 바꾸어 입고 나와 보니 서천굉은 벌써 노파의 아들 방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저녁때가 되자, 서천굉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주기가 그의 손을 만져 보니 손이 델 정도로 뜨겁다. 아마 상처가 곪은 모양이었다. 일이 심상치 않았지만 주기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다가 답답했던지 화를 버럭 내며 칼을 들어 아무 곳이나 찍다가 구들에 엎드려 울었다. 노파는 불쌍하기도 하고 또 무섭기도 해 감히 나타나 말리지 못했다. 한참 동안 울던 주기가 눈물을 거두고 노파에게 물었다. 「고을에 의원이 있나요? 「있구말구요. 조사붕 의원이라면 용하기로 소문난 사람인걸요. 그러나저러나 어찌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우리가 사는 이런 시골에는 얼씬도 안해요. 제 아들이 앓고 있을 때 저와 며느리가 그를 향해 몇십 번이나 큰절을 했건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구요. 주기는 노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가서 청해 오지요. 내,,,,,, 오빠가 여기 있으니 할머니께서 잘 좀 보살펴 주세요.」 「아가씨!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아이, 그러나저러나 그 의원이 이곳에 절대 오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주기는 노파를 상대하지 않고 단도를 안장 옆에 숨긴 채 말을 타고 단숨에 문광진에 도착했다.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작은 주막 앞을 지나는데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 의원을 청해 그의 상처부터 치료해 주고 다음에 보자. 설마 술 마실 기회가 없을라구.) 맞은편에서 어린 아이가 오는 것을 보고 조사붕 의원이 어디 사느냐고 물어 그 집을 향해 달렸다. 조가의 집에 도착하여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니 겨우 한 사람이 마지못해 나와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날이 저물었는데 무엇 때문에 남의 집 대문을 부서지라고 그렇게 두들겨요? 주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그래도 사람을 청하러 온 입장이라 성질을 부릴 수 없어 꾹 참았다. 「조 의원님을 모시러 왔어요. 집에 급한 환자가 있어서요.」 「집에 없어요. 차디차게 한 마디 뱉고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리려고 했다. 다급해진 주기는 덥석 그의 팔을 낚워챔과 동시에 단도를 뽑았다. 「그 사람, 집에 있느냐 없느냐? 혼비백산한 그 사람은 벌벌 떨었다. 「정말,,,,,,, 정말 집에 없어요.」 「어딜 갔는지 빨리 말을 해라.」 「소매괴네 집에 가 있어요.」 「소매괴라는 것이 무슨 물건이냐? 그래 어디 있느냐? 「사람 이름이에요.」 「쓸데없는 소리! 그래, 사람 이름이 어째서 하필 소매괴란 말이냐? 그 사람은 다급했다. 「저,,-,,, 아,,,,,, 아가씨, 소매괴는 기생이에요.」 「기생이라면 나쁜 사람인데 그런 집엔 뭣하러 갔단 말이냐? 그 집 사람은 이 아가씨가 사납기는 하지만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 우스웠다.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어 잠자코 있었다. 「아니, 내가 묻는데 왜 대답이 없느냐? 주기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기생은 영감님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예요.」 주기는 그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라. 잔소리는 그만 집어치우고 말이다.」 (내가 언제 잔소리를 했다고 야단일까? 공연히 자기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는 내게 화만 내네.) 그러나 차디찬 칼날이 목에 와 있으니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조그만 집 앞에 당도했다. 「바로 이 집이에요.」 「네가 문을 두드리고 의원을 나오라고 해라.」 주기가 시키는 대로 문을 두드리며 의원을 부르자 기생에미가 나와 문을 열었다. 「급한 환자가 있다고 손님 한 분이 나리를 모시러 왔어요. 제가 나리께서 틈이 없다고 말했더니 믿지 않고 여기까지 억지로 끌고 오는군요. 기생에미는 눈을 하얗게 흘기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덜컥 잠갔다. 주기는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부서져라고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에서는 쥐죽은 듯 고요할 뿐 인기척이 없었다. 화가 난 주기는 그 사람의 등을 힘껏 걷어찼다. 「빨리 꺼져. 공연히 이 아가씨 앞에 얼씬거리며 화를 돋우지 말. 그 사람은 보기 좋게 나뒹굴다가 기어 일어나 투덜거리며 가 버렸다. 주기는 그가 멀찍이 사라지자 담을 펄쩍 뛰어넘었다. 방 안에서 창호지를 통해 불빛이 새어나왔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납작 엎드려 동정을 살펴보니 두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 반가웠다. 만약 그 의원이라는 작자가 기생과 놀아나고 있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끝에 침을 묻혀 창호지를 뚫고 안을 들여다 보니 두 남자가 침상에 누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는 건장하고 다른 하나는 깡마른 체구인데, 요염하게 생긴 여자가 때마침 깡마른 사나이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어느 놈이 조사붕이냐, 썩 나오너라. 주기가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건장하게 생긴 사나이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여자가 일어서며 웃었다. 「또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상의하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제발 자식이나 손자를 위해서라도 적덕이나 하시지 않구. 그러다 다음에 눈 없는 아이 낳지 마시구요.」 「무슨 방귀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건장한 사나이가 웃으며 응수하자 그 여자도 따라 웃고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은 뒤에 내당으로 들어갔다. (저게 바로 소매괴라는 계집이겠지. 정말 뻔뻔스럽군. 그러나 말만은 제법 일리 있게 하는데.) 주기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건장한 남자가 4개의 원보전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조 형, 이게 이백 냥이오. 우리 늘 하던 거래요. 똑같은 값이 아니겠소. 그러자 깡마른 사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당 육야, 요 며칠 대군이 통과하는 바람에 군량을 대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또 한번 큰 돈을 벌게 되지 않으셨숩니까? 주기는 듣고 반기면서도 또 한편 화가 치밀어올랐다. 반가운 것은 당리비상이란 작자가 여기 있으니 달리 찾아나설 것도 없어 수고를 덜게 된 것이요, 화가 난 것은 그가 대군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어 이가 갈리는 판인데 원래 이자가 그들 대군의 일을 돕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보 조 형, 그들 농사 짓는 녀석들이 얼마나 교활한데, 그래 순순히 곡식을 내놓을 줄 아시오? 요 며칠 성화같이 재촉을 하지만 사람만 피곤해 죽을 지경이라오.」 「이 두 봉지의 약만 가져가시면 재미있을 텐데 뭘 그러세요. 이 빨간 봉지의 약을 그 여자에게 먹이시면 금방 인사불성이 되어 당 육야 하고싶은 대로 다할수 있을테니 굳이 제가 설명을 드릴 필요조차 없겠지요.」 두 사람이 다같이 껄껄 웃었다. 깡마른 사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검은 종이에 싼 약을 그 남자에게 먹이십시오.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라고만 하세요. 먹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죽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귀신 같은 녀석이라도 당 육야를 의심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때요? 제 계획이 그럴듯하지요? 「아주 훌륭하고말고요.」 건장한 사나이가 흐뭇해하며 웃었다. 「당 육야, 사람도 생기고 돈도 버는데 제게 이백 냥을 주신다면 액수가 좀 적은 편이 아닐까요? 「조 형, 우린 형제나 다름없는 처지이니 솔직히 말을 하리다. 그 계집, 용모는 확실히 예쁘게 생겼습디다. 남장을 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끌리던데 뒤에 가서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흥흥, 입 근처까지 온 고기를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 당 육의 십팔대 조상까지 어지간히 적공도 쌓지 못했다고 욕할 것이 아니겠소? 사내놈이 있어서 좀 성가신 편이지만 나는 계집만 필요하니 그놈을 살려 둘 수는 없지요. 두 사람의 값이 아니라 한 사람 값이니 이백 냥이면 됐지 뭘 그래요.」 「아니, 그자가 금피리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제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금피리 하나만 해도 상당한 값이 나갈 텐데요.」 「그래 그래, 알았소. 내 오십 냥만 더 내놓으리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 그자는 다시 원보전 하나를 꺼내 놓았다. 주기는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발길로 방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장한 사나이가 아얏 소리를 지르며 주기의 칼 든 손을 발길로 걷어찼다. 주기의 단도가 뒤집어지며 그의 오른쪽 다리를 치고 다시 한 번 가슴을 찔렀다. 깡마른 사나이가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벌벌 떠는데 윗니와 아랫니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들릴 정도였다. 주기는 칼을 뽑아 죽은 자의 옷에 문질러 닦고는 깡마른 그자의 멱살을 왼손으로 잡고 호통을 쳤다. 네놈이 바로 조사붕이지? 사나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제-----아가씨---용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네 목숨을 빼앗겠다더냐? 빨리 일어나거라.」 조사붕이 억지로 일어나 서기는 했지만 오금이 떨려 다시 꿇어 앉고 말았다. 주기는 탁자 위의 원보전 5개와 약 봉지 2개를 자기 품속에 챙겨 넣었다. 「나가자. 조사붕은 그녀의 의도를 몰랐지만 방문 밖으로 나와 대문을 열었다. 「누구요? 기생에미가 문 소리를 듣고 안에서 물었지만 조사붕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주기는 그자를 시켜 자기 말을 끌어오게 하고는 함께 고을을 빠져나왔다. 주기는 그가 탄 말의 고삐를 채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떠들기만 하면 당장 네놈의 목을 쳐 죽이고 말겠다.」 「감히 ,,,,,,.」 '아니, 내 네놈의 목을 감히 어떻게 치겠느냐고 하는 말이것다. 그럼 어디 한번 치는지 못 치는지 보겠느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아가씨가 제 목을 못 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감히 어떻게 소리를 지르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주기가 웃으며 칼을 다시 집에 꽂았다. (내 지금 어떻게 네놈의 목을 치겠느냐? 만약 친다면 누구에게 치료를 맡기란 말이냐.)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들은 벌써 노파의 집에 도착했다. 주기가 서천굉이 누워 있는 구들 앞에 와 보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촛불 밑에서도 그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열이 대단한 모양이다. 주기가 조사붕의 덜미를 움켜잡고 말했다. 이분이....... 아니, 오빠가 부상을 당했으니 빨리 치료를 해라.」 조사붕은 치료를 하라는 말을 듣고야 겨우 떨리는 가슴을 다소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서천굉의 얼굴색을 쳐다보고 맥을 짚고 어깨의 끈을 풀어 상처를 살펴보면서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이 나리 지금 혈기가 심히 이지러지고 허화(虛火)가 위로 솟구쳐 ,,-,--.」 「누가 그 따위 잔소리를 늘어놓으랬더냐? 서둘러 치료를 해 완쾌시켜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여길 떠날 생각을 말란 말이다.」 「제가 고을에 가서 약을 가져와야지요. 약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이때 서천굉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를 듣고 있었다. 「흥, 네놈이 날 세 살 먹은 어린애 취급을 하려 드는구나. 네가 처방을 내리면 내가 가서 약을 지어 올 것이 아니냐? 조사붕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럼 아가씨, 지필묵을 내놓으세요. 제가 처방을 내리지요.」 그러나 이 가난한 시골집에 붓과 종이가 있을 리 만무다. 주기는 이마를 찡그린 채 무슨 묘안이 없을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조사붕은 득의만면해 이렇게 말했다. 「이 나리의 병은 서둘러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고을에 가 약을 가져오는 것이 제일 좋겠군요. 「누이, 가느다란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들어 아무 종이 위에나 쓰게 해. 종이도 없거든 차라리 널빤지에 쓰게 하든지.」 누워 있던 서천굉이 주기만 들리게 말했다. 「과연 꾀가 많으시군요.」 주기가 반기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숯을 만들어 놓자 노파는 보살을 모시려고 마련해 놓았던 낡은 황지 한 장을 내왔다. 조사붕은 어쩔 수 없이 그 종이 위에 처방을 적었다. 주기는 그가 처방을 다 쓰자 새끼줄을 찾아다 두 손을 뒤로 돌려 묶고 발도 함께 꽁꽁 묶었다. 그를 구들 옆에 있게 하고 서천굉의 단도를 그의 베개 옆에 놓아 주면서 노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고을에 가서 약을 구해 올 동안 만약 이 못된 의원이 달아나려고 하거든 제 오빠를 깨워 주세요.」 주기는 이렇게 당부를 하고 말에 올라 고을로 향했다. 약재상을 찾아 1O여 첩의 약을 주문하고 계산을 하니 모두 1냥 3전의 은자라고 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방금 가지고 있던 원보전 다섯 개를 노파집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그냥 황급하게 나온 것이었다. 「외상으로 해요. 곧 갖다 드릴께요. 점원이 깜짝 놀라 안된다고 했다. 「아가씨, 그건 안됩니다. 아가씨가 이 고장 사람도 아닐뿐더러 워낙 자본이 짧은 가게라,,,,,,.」 주기는 화가 났다. 「그럼 이 약을 잠시 빌리는 것으로 해요. 장래 당신이 이 병애 걸리면 내가 그때 다시 반환하면 어떼요. 「이 약은 칼에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데 쓰는 약이 아닙니까? 나는,,,,,, 다른 사람과 싸울 일이 없어요.」 「칼에 다칠 리가 없다구? 흥,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를 뽑아 들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 한번 이 칼로 찔러 볼까? 칼이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보자. 점원은 시퍼런 칼을 보자 오금이 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주기는 부잣집 소저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낙빙과는 달랐다. 오늘 억지로 외상을 하자고 떼를 쓰기는 했으나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이라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약을 챙겨 말 위에 오르니 날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거리에 순라꾼이 나타나 조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당리비상이 피살된 사실이 벌써 발각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거리 모퉁이에 숨어 순라꾼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비로소 말을 달려 노파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이미 날이 환히 밝아 있었다. 노파와 함께 서둘러 약을 달여 그룻에 담아 서천굉을 깨웠다. 서천굉은 깨어 일어나 주기의 얼굴이 온통 땀과 재로 범벅이 되었고 또 머리에도 나뭇가지와 검불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부잣집 출신인 그녀가 언제 이런 거친 일을 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속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앉아 약을 받아 마시려고 하다가 그 약그룻을 조사붕의 입 언저리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우선 두어 모금 마셔 봐라.」 조사붕이 영문을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주기는 벌써 서천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요. 우선 저자에게 마시도록 해야 해요. 얼마나 흉악한 사람인지 오빠는 모르실 거예요.」 조사붕이 어쩔 수 없이 두어 모금 마셨다. 누이는 좀 쉬구려. 이 약은 조금 있다가 마시겠소.」 「왜요? 「저자가 죽나 안 죽나 봐야지.」 「그렇군요. 저자가 죽으면 이 약은 마실 수가 없지요. 주기는 등불을 조사붕의 얼굴 근처에 옮겨놓고 그 큰 눈으로 조사붕이 죽나 안 죽나 살펴보았다. 조사붕이 쓰디쓰게 웃었다. 의원은 환자에게 자기 허벅다리 살을 베어 먹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 네놈이 당리비상과 함께 다른 집 아가씨를 해치고 남의 금피리를 렛으려고 흉계를 꾸미는 것을 내가 다 들었는데도 그런 뻔뻔스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주기가 듣다 못해 화를 내는 말을 들은 서천굉은 금피리라는 말에 무슨 일이냐고 그 까닭을 물었다. 주기는 밖에 있다가 엿들은 얘기를 그에게 들려주고 또 당리비상을 살해했다는 얘기까지 햇다. 주기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밖으로 달려나가 노파를 향해 아들과 며느리의 원수를 갚았다고 했다. 노파는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울며불며 고맙다고 했다. 서천굉은 주기가 다시 들어오자 조사붕을 향해 물었다. 금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 어떻게 생겼더냐? 그리고 남장 여인은 누구냐? 주기도 단도를 뽑아 들고 옆에서 위협을 했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이 칼로 너부터 찔러 죽이고 말겠다.」 조사붕은 두려운 나머지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소------소인 사실 그대로 아뢰겠습니다...-. 어제 당 육야가 저를 찾아와 자기 집에 두 사람이 찾아와 묵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하나는 중상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미모의 소년이었다고 했습니다. 본래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소년이 워낙 잘생긴 것을 보고 하룻밤 묵어 가라고 했는데 어쩐지 소년의 말씨나 행동거지가 워낙 여자 같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또 그 남자와 한방에 자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남장 여인이라고 단정했다더군요. 「그래서 너를 찾아와 약을 사겠다고 했느냐? 주기가 날카롭게 추궁했다. 「소인 그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그 남자는 어떻게 생겼더냐? 이번에는 서천굉이 물었다. 당 육야가 가 보라 해서 가 보았는데 나이는 23, 4세, 선비 차림이었으나 칼과 몽등이로 맞아 몸에 7, 8군데 부상을 입었더군요.」 상처가 대단하더냐? 서천굉이 물었다. 「상처는 대단했지만 외상이라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서천굉은 더 물어봐야 별 말이 나을 것 같지 않아 손을 뻗어 약사발을 가져다 마시려고 했으나 손에 맥이 풀려 벌벌 떨다가 약을 약간 흘리기까지 했다. 주기가 보다 못해 약 그룻을 받아 그의 입에 대 주었다. 「고마워요.」 서천굉이 약을 마시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조사붕은 그들의 행동을 곁눈질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강도들이 원래 남매가 아니었구나. 오라비가 어떻게 동생에게 고맙다고 경어를 쓰나?) 서천굉은 약을 다 마신 후에 잠이 들었다. 땀을 흠뻑 흘리고 저녁때 또 한 사발의 약을 마셨다. 이 조사붕이란 작자 인품은 말이 아니었지만 의술만은 용해 그의 약만 먹으면 병은 깨끗이 나았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서천굉은 꾀 호전되어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또 하루가 지났다. 서천굉은 이제 좀 무리가 될는지 몰라도 말을 타기만 하면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금피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은 바로 내 십사제요. 어쩌다 그 못된 놈들의 수중에 빠졌는지 모르겠군요. 주 소저가 그 녀석을 이미 살해했다니 큰 지장이야 없을 것 같소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군요. 오늘밤 한번 수소문을 해 보고 싶은데 주 소저의 의향은 어떤지요?」 서천굉이 주기의 의사를 타진했다. 「뭐라구요? 그가 십사제라구요? 「주 소저의 철담장에도 온 일이 있으니까 아마 보셨을것입니다. 바로 우리 총타주께서 제일 먼저 소식을 알아보라고 파견했던 바로 그 사람 말이오.」 「아! 그랬군요.9진작 그인 줄 알았으면 여기로 모시고 와 함께 치료를 받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서천굉은 웃기만 하다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그 남장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저녁때가 되자 주기는 2개의 원보전을 노파에게 주었다. 노파는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감사하다며 받았다. 주기는 조사붕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오른쪽 귀를 칼로 잘랐다. 「네놈이 우리 오빠를 치료해 주었기에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앞으로 또 못된 짓을 한다면 바로 그 당리비상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내 이 칼이 그때는 네놈의 가슴을 찌르고야 말걸.」 조사붕은 피가 흐르는 귀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어떻게 ,-----.」 「내가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는 뜻이냐? 주기가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아닙니다. ,,,,,,소저가 감히 그렇게 못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소인이 감히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다시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우리가 석 달 뒤에 다시 돌아와 조 의원을 찾아보겠소.」 서천굉의 말이었다. 원,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영웅들을 찾아뵈어야지요. 어떻게 -----' 「오빠가 저자의 말을 타세요. 그리고 우리 떠납시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 문광진을 향해 달렸다. 「우리가 석 달 뒤에 다시 오겠노라고 하셨는데 왜 그랬어요? 「그야 그 의원을 속여먹으려고 했지요 그래야만 노파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인연 맺어 주기 주기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 사람을 상대하면서 그토록 교활하세요? 난 질색인데요.」 서천굉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주 소저는 강호상의 인심이 얼마나 험악한지 잘 몰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친구를 상대할 때야 물론 인의를 제일 중시해야지요. 그러나 소인을 상대할 때도 진심으로 대하다가는 큰 손해를 입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늘, 차라리 본인이 손해를 입을망정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게 바로 주 소저 아버님의 훌륭하신 점이에요. 그래서 강호상에서 철담장 주 노영웅의 말만 나오면 백도흑도 관부녹림을 막론하고 다들 그분은 대인대의한 영웅호한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존경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 본을 좀 배우시지 않으세요? 「주 노영웅께서야 천성이 인후하신 분이니까 그렇지만, 나같이 잔꾀나 많고 괴상한 사람이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로 그 잔꾀 많고 괴상한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버지께서는 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도 내게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서천굉은 마음속으로 감동하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왜 잠자코 계세요? 뭐 또 기분이 나쁘신가요? 아니면 저를 골탕 먹일 궁리를 하고 계시나요? 「원,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제가 감히 어떻게 주 소저를 골탕 먹입니까? 방금 헤어진 의원의 말투를 흉내내 말하자 주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좋은 것 골라 배우실 생각은 않고, 그래 그 개 같은 의원의 흉내나 내세요? 개 같은 의원이라구요? 개를 치료하는 의원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개같이 생긴 의원이란 뜻입니까? 「개를 치료하는 의원이란 뜻으로 말을 한 거예요.」 주기가 또 한 번 낄낄거렸다. 둘은 서로 이렇게 우스운 말을 주고받는 바람에 외로운 줄을 몰랐다. 한 차례 환난을 겪고 나자 서천굉은 그녀에 대해 충심으로 감격을 했고, 주기 또한 그가 자기를 은인으로 대하며 사사건건 양보를 하자 이쪽에서도 겸양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전에 저는 당신을 정말 뼛속까지 돼먹지 않은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 「사실을 알고 보니 어떻단 말씀입니까? 주기의 말을 받아 서천굉이 이렇게 반문했다. 「제가 보기에는 고의로 나쁜 사람 행세를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서든 내 비위를 건드려 화나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요? 「한 사람의 장단점을 처음 만났을 때는 늘 잘못 보기 마련이지요. 제가 처음에 어떻게 소저가 그리도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땐 내가 아주 거만하고 또 쩨쩨해 보였던 모양이지요? 서천굉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문광진으로 들어왔다. 당리비상의 집을 찾아 담을 뛰어넘어 서천굉은 순찰을 돌고 있는 경부(更夫)를 붙잡고 칼로 위협하면서 여어동의 행방을 물었다. 경부는 당 육야가 그날 소매괴의 집에서 조사붕 의원에게 살해를 당하자 집안이 어수선해졌는데 잠을 자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두 손님은 이른 아침에 어디로 떠나 버렸다고 했다. 「우리, 그들의 뒤를 쫓아가 봐요.」 주기가 이렇게 제안했다. 고란(토蘭)을 지나 다시 이틀을 가자 서천굉은 노상에서 진가락이 남겨 놓은 암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모두들 개봉(開封)에서 만나자는 뜻이었다. 서천굉이 이 사실을 주기에게 말해 주었다. 주기는 다들 무고하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그동안 줄곧 아버지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근의 술을 사서 둘이 통쾌하게 마시기까지 했다. 이때는 서천굉의 어깨 상처도 아물었고 원기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한담을 계속 주고받았다. 서천굉은 강호상에서 일어났던 별로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일들과 노상에서의 금기 등을 상세히 들려 주었다. 「진작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시지 않고 왜 계속 저하고 말다툼만 하려고 그랬어요? 주기의 말이었다. 이날 그들은 동관에 당도했다. 객점을 찾으려고 물어 보니 래(悅來) 객점이 제일 좋다고 했다. 그 객점에 와 보니 좋은 방은 겨우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서천굉은 엽전 한 줌을 심부름꾼에게 쥐어 주며 방을 한 칸 더 찾아보도록 하라고 주었다. 심부름꾼은 난처한 일이라며 한 바퀴 돌아보고 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방이 꽉 찼군요. 나리와 소저는 어떤 관계이신지 여쭈어 보아도 괜찮을는지요? 「우리는 남매일세.」 서천굉의 대답이었다. 「친남매 사이라면 한방에 묵으셔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웬 잔말이 그리 많으냐------? 주기가 버럭 화를 내는데 서천굉이 갑자기 그녀의 옷깃을 잡아 당기며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 그만두게. 방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대로 묵을 수밖에 없겠군. 주기는 계속 그와 동행을 하면서 그가 자기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는 것을 보고 확실히 점잖은 군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한방에서 묵겠다고 나서니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또 한편 의심이 생겼다. 그러나 심부름꾼의 면전이라 잠자코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서천굉은 즉시 문을 닫았다. 얼굴이 빨개진 주기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서천굉이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으라는 손짓을 하며 이렇게 속삭였다. 「방금 진원표국의 그 못된 녀석을 보았어요.」 「뭐라구요? 사람들을 데리고 와 문 사야를 잡아가고 내 동생을 죽게 만든 바로 그놈이에요. 「얼핏 보았기 때문에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그놈이 우리를 볼까봐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따 한번 살펴봅시다.」 심부름꾼이 들어와 차를 따르며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서천굉이 주문을 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북경 진원표국의 나리들이 여기 묵고 계시지? 「그래요. 그분들이 동관을 경유할 때는 꼭 우리 객점에서 머무르시기 마련이지요. 서천굉은 그 심부름꾼을 밖으로 내보낸 뒤 말했다. 「그 동조화란 녀석 천하의 악질이니 우리 오늘밤에 그놈을 해치웁시다. 그래야 주 소저의 동생과 사가의 원수를 갖는 셈이 아닐까요? 주기는 동생의 참사와 철담장의 화재를 상기하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서천굉이 강경하게 만류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칼을 뽑아 들고 달려나갔을 것이다. 「좀 누워 쉬세요. 밤에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요.」 서천굉은 이런 말을 하고 탁자 앞에 엎드려 자는 체하며 다시는 주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주기는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제하고 구들 위에 비스듬히 기댄 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이경쯤 되었을까? 주기는 도저히 더 참을 도리가 없어 단도를 뽑아 들었다. 「자, 가요.」 「저들이 숫자가 많으니 어쩌면 고수가 있을는지도 몰라요. 우선 사정을 알아본 뒤에 그자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그자가 나오면 조용히 처치해 버려요.」 서천굉의 조용조용한 말에 주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마당으로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동쪽에 있는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서천굉이 손짓을 하자 두 사람은 살금살금 그쪽으로 접근했다. 주기가 문틈을 발견하고 눈을 댄 채 방안을 엿보았다. 서천굉이 병기를 잡은 채 그녀의 뒤에 서서 주위를 살피는데 순간 주기가 벌떡 일어나서 오른발을 들어 창을 걷어차려고 했다. 깜짝 놀란 서천굉이 번개처럼 달려들며 주기의 앞을 막았다. 주기의 발이 번쩍 들린 채 서천굉의 가슴을 차려는 순간 다시 뻗었던 발을 움츠렸다. 그러자니 자연 주기가 넘어지려고 뒤로 몇 발짝 밀렸다. 서천굉이 달려가 부축을 하며 낮은 土리로 물었다. 「아니! 왜 그래요? 「빨리 손을 써야 해요. 우리 어머니가 안에 계신데 그들에 의해 꽁꽁 묶여 있어요.」 「빨리 방으로 돌아가 대책을 상의합시다.」 놀란 서천굉이 이렇게 말했다. 방으로 돌아온 주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할딱거렸다. 「아니, 무슨 놈의 대책을 상의하자고 이래요? 지금 우리 어머니가 저들에게 잡혀 있는 판인데요.」 「좀 참고 있으라니까요. 내 책임을 지고 구출해 낼 테니까요. 그래 방 안에는 몇 사람이나 있습디까? 「아마 6, 7명은 될 거예요. 서천굉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왜, 무서워서 그러시나요? 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요.」 주기가 답답해서 이렇게 말했다. 「무섭기는요. 내 지금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주 소저의 어머니도 구출해 내야 하고 또 그 녀석도 해치워야 하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만 하거든요.」 「우선 어머니부터 구출을 해야 해요. 그 녀석은 죽일 수 없거든 그냥 놔 두지요.」 바로 이때 문 밖을 지나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서천굉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누군가가 문 앞을 지나며 혼자 투덜 거렸다. '야밤 삼경에 일찌감치 누워 뻗을 일이지, 무슨 놈의 술을 처먹겠다고 야단이람?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구. 보살님의 보우로 저것들 보표 가는 도중에 힘센 사람 만나 표은이나 몽땅 털렸으면 시원하겠다.'」 서천굉이 들어 보니 심부름꾼의 목소리다. 보표들이 밤중에 술을 가져오라고 해서 화가 난 것이었다. 서천굉의 머리에 한 가지 꾀가 반짝 스쳤다. 그 조사붕이가 만들었다는 두 가지 약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 중에 한 붕지는 먹으면 금방 인사불성이 된다고 들었는데 빨리 내게 주시오.」 주기는 그의 의도를 몰랐지만 그냥 꺼내 주며 물었다. 어디다 쓰시려구요? 서천굉은 대답도 없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하고 창을 열고 뛰어 나갔다. 주기도 그의 뒤를 따랐다. 서천굉이 마당을 건너 서더니 낮게 土근거렸다. 거기 엎드려 움직이지 말아요.」 주기는 도대체 그가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아무 동정이 없었다. 답답해서 물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불빛이 반짝이더니 심부름꾼이 촛대와 쟁반을 들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서천굉이 땅바닥에서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집어 던지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촛불이 꺼졌다. 심부름꾼이 투덜대었다. 귀신이 나타났나? 바람도 불지 않는데 촛불이 꺼질 게 뭐람.」 쟁반을 내려놓은 채 불을 밝히러 돌아갔다. 서천굉은 그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재빨리 달려나가 부싯돌을 쳐 불을 켰다. 쟁반 위에 2개의 술 주전자가 있었다. 그 약을 반씩 나누어 주전자에 넣었다. 저자들의 방 근처로 가요.」 서처굉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은 표사들이 묵고 있는 방 밖으로 가 엎드렸다. 서천굉이 창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과연 한 중년 부인이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인 채 바닥에 앉아 있고, 그밖에 다른 여러 사람이 앉아 큰소리로 떠들고 있는데 철비파수 한문충, 전정륜,동조화는 알겠고, 나머지 네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사들이었다. 맨 먼저 동조화의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철담장을 말할 때 동장철벽(銅場鐵壁)이라고 하더니 이 나리의 횃불 하나에 깨끗이 타 없어지고 말지 않았소. 하하, 이걸 보고 (동조화가 철담장을 태워 없애고 주중영은 땅을 치며 통곡하더라!>고 하는 근사한 문장이라고 하는 게요.」 주기는 창 밖에서 이 말을 똑똑히 들었다. 원래 철담장에 불을 지른 장본인이 동조화였던 것이다. 서천굉은 그녀가 금방 발작을 할까봐 뒤로 손을 돌려 흔들었다. 여보, 너무 큰소리 땅땅 치지 마오. 그 주중영 나도 만나 보았지만 대단합디다. 우리가 다 함께 덤벼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께요. 그가 일후에 표국을 찾아올 텐데, 뭐 그리 신이 나서 떠든단 말이오? 한문충의 기가 죽은 말이었다. 「두고 보구려! 우리야 이제 복이 터졌다오. 공교롭게도 철담 주중영의 마누라까지 우리를 찾아왔을니까. 이제 우리가 이 여자를 데리고 있는데 그래 그가 우리를 향해 감히 어떻게 한단 말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있을 때 심부름꾼이 쟁반을 받쳐 들고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여러 표사들이 떠들석하게 마시고 먹어 댔다. 한문충이 의기소침해 있으니까 동조화는 계속 그에게 술을 권했다. 「한 형, 호한도 사람이 많을 때는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손에 한번 패한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러시오? 다음에 우리 힘을 합쳐 그들 홍화회 사람들과 1대 1로 우열을 가려 봅시다.」 「원, 다른 사람이 1대 1로 대결한다면 그건 모를 일이지만, 당신이야말로 그래 누구와 대결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게요? 다른 표사 한 명의 말이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여자들을 상대하면 될 게-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하고 벌렁 뒤로 넘어졌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 부축을 할 때는 자기들 손발의 맥이 먼저 풀려 하나씩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서천굉은 단도를 창틈 사이에 찔러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기도 따라 들어가 엄마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묶인 끈을 황급히 풀었다. 주씨 부인은 사랑하는 딸을 보자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입만 벌린 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천굉이 동조화를 붙들어 일으키고 이렇게 말했다. 「주 소저! 죽은 동생의 원수를 갚으시오.」 주기가 칼을 휘두르자 동조화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평생 동안 갖은 못된 짓을 다하며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동조화는 마침내 오늘 서천굉과 주기의 손에 의해 제거된 것이었다. 주기는 나머지 표사들도 다 죽여 없애려고 했다. 주 소저, 이 사람들의 죄가 죽여야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소. 그러니 그냥 용서해 줍시다.」 서천굉의 말에 주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도를 거두었다. 부인은 딸의 성미를 너무나 잘 안다. 제가 하고 싶으면 어떤 일이든지 하고야 말았다. 어쩌다 아버지의 말이나 몇 마디 들을까 말까, 다른 사람의 말은 듣는 법이 없는 그녀다. 그런데 그녀가 서천굉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본 어머니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서천굉은 표사들의 몸을 일일이 수색했다. 편지 몇 통이 나왔지만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그냥 품속에 챙겨 넣었다. 우리 빨리 방으로 돌아가 물건을 챙겨 가지고 여길 떠납시다.」 3 사람은 창을 넘어 방으로 돌아왔다. 서천굉이 보따리를 들고 탁자 위에 방값과 밥값으로 1정의 은자를 놓아 두고 마굿간으로 가 세 필의 말을 끌어내 타고 동쪽을 향해 출발했다. 주중영의 아내는 딸이 서천굉과 동행하며 한방에서 묵는 것을 보자 부쩍 의심이 일었다. 그녀도 성질이 불 같은 사람이었다. 네 아버님은? 이분은 도대체 누구냐? 어째서 그와 함께 있느냐? 또 아버지와 다퉈 성질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성질을 부리고 나오셔 놓고는 공연히 나만 야단치시는군요. 어머니, 좀 있다가 그런 걸 물어보시면 안되요? 모녀가 다 불같은 성미라 입을 열자마자 말다툼으로 번졌다. 서천굉이 나서서 말렸지만 주기는 오히려 화를 냈다. 「모두 자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요? 서천굉은 어쩔 수 없어 웃으며 물러섰다. 모녀는 입을 삐죽 내민 체 각기 자기 생각에 몰두했다. 그날 밤은 한 농가의 방을 빌려 자기로 했다. 모녀가 한방에서 잠을 자게 되자 주기는 비로소 그동안의 일들을 하나하나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주기는 별로 말이 많지 않은 성미인데, 주중영의 아내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 이것저것 마구 물어댔다. 두 사람이 웃다가 울기도 했고, 또 딸이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딸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고 하느라 겨우 새벽녘이 되어서야 헤어진 후의 얘기를 대충 끝마칠 수 있었다. 원래 주중영의 아내는 아들이 죽자 비분이 솟구쳐 아예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고란(로蘭)에 도착하자 친척인 허(許)씨 집안을 찾아갔다. 주인의 접대가 나무랄 데 없었지만 고민이 많아 심사가 편할 날이 없었다. 몸이 한가할수록 마음은 더욱 답답해 하직 인사도 없이 그 집을 나와 버렸다. 이날 동관(通關)에 이르러 열래 객점에서 진원표국의 깃발을 발견한 것이다. 남편의 제자인 맹건웅으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아들의 비명횡사가 진원표국의 표두인 동조화 때문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밤에 열래 객점에 뛰어들어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뭇 표사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동조화가 그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노기충천한 그녀는 앞뒤를 돌볼 사이도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표국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보니 마침내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홀몸이니 요행을 바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저기 딸이 나타난 것이다. 주기는 이번에 원수를 갚고 또 어머니를 구출하게 된 것이 모두 서천굉의 덕이라고 했다. 주중영의 아내는 서천굉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다음날 길에 올라 주중영의 아내는 서천굉을 향해 집안 형편과 출신에 대해 물었다. 「저는 절강 소흥 사람입니다. 열두살 때 온가족이 관가의 모함을 받아 모두 죽고 저 혼자 겨우 살아 남았습니다.」 관가에서 무엇 때문에 모함을 했다는 얘기인지요? 관가의 지부가 제 누이에게 반해 첩을 삼겠다고 달라고 했습니다. 제 누이는 벌써 다른 사람과 혼약이 되어 있었으니 제 아버님으로서는 당연히 거절을 했지요. 그러자 지부는 제 아버지가 초비들과 결탁되었다고 누명을 씌워 아버지는 말할 컷도 없고 어머니와 형님까지 모두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 누이에게 승낙만 하면 우리 아버지를 석방하겠노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매형 될 그 사람이 지부를 찔러 죽이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붙잡혀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누이는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버지나 어머니, 형님이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기는 여기까지 듣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원수를 갚았나요? 내가 성장하고 무예를 배운 뒤 그 지부를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승진이 되어 다른 고장에 가고 없었지요. 이 몇 년 동안 도처를 돌아다녔지만 시종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 개같은 녀석 이름이 뭐예요? 내 그놈을 그냥 놔 둘수 없군요.」 그자의 성이 방(方)가라는 것만 알 뿐. 이름이 뭣인지 그때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어요. 얼굴 왼쪽에 검은 사마귀가 있어 보기만 하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요.」 주기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중영의 아내는 또 결혼을 했느냐고도 물었다. 강호를 여러 해 동안이나 떠돌았으니 설마 보아 둔 색시 하나 없겠느냐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 워낙 약아빠져서 좋아할 처녀도 없을 거예요.」 주기가 웃으며 하는 말인데 그녀의 어머니가 책망을 했다. 아니, 앙가집 규수의 말이 어째 그 모양이냐? 어머니가 이 사람 중매 서려고 물어 보시는 것 아녜요? 어느 집 규수예요? 혹시 허씨집 처녀 아닌가요? 그날 밤 객점에 들어 쉴 때 어머니는 딸을 원망했다. 네가 처녀의 몸으로 저런 청년과 동행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방에서 잠까지 잤는데, 그래 다른 집 총각에게 시집갈 것 같으냐? 「그가 부상을 당해 치료를 해 주었을 뿐인데, 그래 그것도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나요? 그 사람이 약삭빠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겐 얌전하게 굴었단 말이에요.」 주기도 화를 냈다. 「그거야 너도 알고 그도 알겠지, 나도 믿고 네 아버지도 믿으실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믿어 주겠니? 네가 평생 시집을 가지 않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만약 장래의 네 남편 될 사람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일을 걷잡을 수 없는 게야. 그게 바로 여자들의 고충이란다. 「그럼 평생 시집가지 말지요.」 두 사람의 말은 할수록 더 소리가 커지다가 또 말다툼이 되고 말았다. 「그 서 도령이 옆방에 있는데 공연히 떠들다가 그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야단이냐? 무서을 것 하나도 없어요. 제가 뭐 부끄러운 일을 했나요? 들으면 어떼요? 이튿날 아침 모녀가 깨어 일어나자 심부름꾼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들어왔다. 옆방의 서 나리가 이 편지를 아주머니께 전해 드리라고 해서요. 「그 사람은요? 주기가 물었다. 일이 있어 먼저 가셔야겠다며 아침 일찍 말을 타고 떠나셨어요. 주기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 왜 우리를 깨우지 않았나요? 서 나리가 그럴 필요 없다며 할 말을 모두 편지에 쓰셨다고 해 그랬습니다.」 주기는 심부름꾼을 놓아 둔 채 편지를 읽었다. (아주머니, 주 소저 보십시오. 제가 부상을 당했을 때 주 소저가 생명을 구해 주셨으니 고마운 말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제 두 분 모녀께서 만나셨고 여기서 개봉이 별로 멀지 않으니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과히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소저의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이며, 결코 다른 사람에게는 이 말을 꺼내지 않을 것이오니, 이 점에 대해서는 두 분이 안심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서천굉 올림.) 편지를 다 읽고 난 주기는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그 편지를 집어던지고 구들 위에 벌렁 누워 다시 잠이 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아침밥을 먹고 어서 출발하자고 했지만 대답도 없고 또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았다. 「얘, 아가야. 우리가 지금 철담장에 있는 것도 아닌데 성질을 부리고 있으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이냐? 주기는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 원망스러워서 그러니? 「나 잘되라고 그냥 떠났는데 제가 왜 그 사람을 원망해요? 「그럼 네가 이 에미를 원망하는 게로구나. 주기는 몸을 벽 쪽으로 돌리며 이불을 아예 머리 위까지 덮어 버렸다. 「그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원망하는 게냐? 이 말에 주기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에 어머니가 하신 얘길 그가 다 들었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무슨 소문을 퍼뜨리면 내가 평생 시집 못 갈까봐 그게 걱정스러워 혼자 떠났단 말이에요. 편지속에 (결코 다른 사람에게는 이 말을 꺼내지 않을 것)이라고 쓰지 않았나요? 그래 제가 시집가든 못가든 왜 엄마가 그걸 걱정하세요? 내 평생 시집 가지 않을 테니 두고 보세요.」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울며불며 하는 말을 듣고 서천굉에 대해 벌써 어느정도 정이 쏠려 있음을 알았다. 입으로 분명하게 말을 꺼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에미는 딸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는데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겠니? 우리 개봉에 도착해 아버지를 뵙거든 말씀을 드리고 너를 그 서 도령에게 시집보내 주자고 할 테니 안심하거라. 그 점은 이 에미가 책임을 지마. 알겠니? 어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하자 주기는 오히려 펄쩍 뛰었다. 「누가 그에게 시집가겠다고 그러던가요? 내가 뭐 안심하고 말고 할 것 있어요? 다음에는 누가 내 면전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거들떠 보지도 않을 테니 두고 보시라구요.」 서천굉은 그날 밤 객점에서 쉴 때 표사들의 몸에서 나온 몇 통의 편지를 등불 밑에서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중 한 통은 진원표국의 총표두 왕유양이 한문충에게 써 보낸 것으로, 즉시 서울로 올라와 귀중한 보물을 호송하여 강남으로 가라는 것이었으며 나머지는 별로 대수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편지를 다 훑어보고 심심하게 누워 있는데 옆방의 주씨 모녀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차례나 자기의 이름을 들먹이기에 귀를 기울이니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결국 주기가 자기를 구출해 줌으로 해서 그녀의 명성에 오점이 생겼다는 내용이니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지 한 통을 남겨 둔 채 이른 아침에 혼자 떠난 것이었다 하남성(何南省) 경내에 당도하자 연하의 백성들이 모두 황하의 홍수로 인하여 인심이 흉흉해 있었다. 서천굉은 재난을 보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천재라 하지만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도 있으련만 모두 높은 자리에 앉기만 하면 노략질만 했지 언제 재민을 안중에 두기나 했던 적이 있었는가? 기호에 적힌 대로 개봉으로 찾아가 변량의 호걸 매양명의 집에서 군웅들과 만날 수 있었다. 군웅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매양명은 즉시 큰 잔치를 베풀어 그를 환대했다. 이때는 장진,위춘화,심연 등의 부상도 거의 완쾨되어 있었다. 석쌍영은 회강으로 소식을 전하러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씨쌍협은 그때까지도 문태래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으며, 장사근은 황하의 수세를 살펴보기 위해 나가 있었다. 서천굉은 주중영을 만났으면서도 그의 아내와 주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루만 지나면 그들이 올 텐데 공연히 말을 꺼냈다가 꼬치꼬치 묻기나 하면 답변하기가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군웅들을 향해 도중에 여어동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가 중상을 입고 어느 남장 여인과 같이 있다는데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상의해 보았지만 도대체 그녀가 누군지 추측조차 할 수가 없어 걱정만 했다. 그러나 여어동이 워낙 꾀가 많고 재간 있는 사람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부상을 치료하고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주기 혼자서 애써 집을 찾아왔다. 부친과 다른 군웅들을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로 만나 반가운 인사가 끝나자 주기는 서천굉을 향해 이렇게 속삭였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이쪽으로 좀 오세요. 서천굉은 혼자 생각했다. 이 아가씨가 틀림없이 말도 없이 떠났다고 자기를 나무라고 책망할 것이다. (욕을 하고 싶으면 하게 내버려둬야지. 나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을 테니까.) 천천히 걸어서 그녀의 옆으로 갔다. 「우리 어머니가 아버질 만나러 오지 않으시겠대요. 좋은 방법 좀 강구해 주세요.」 이 말을 듣고서야 서천굉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 아버님보고 가서 어머님을 만나라고 하면 어떨까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으시대요. 입만 여시면 아버지가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는군요. 서천굉이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내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요.」 몇 마디 나지막하게 당부를 했다. 「그렇게 해서 될까요? 「틀림없습니다. 먼저 가 보세요.」 서천굉은 주기가 문 밖으로 나가자 여러 형제들과 한담을 주고 받다가 매양명에게 이 지방의 명승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거의 시간이 되었다고 느긴 그는 주중영을 향해 소근거렸다. 주 노영웅님, 여기 철탑사(鐵塔寺) 옆에 있는 수죽원 주가(酒家)의 술이 이 하남성에서 제일 유명하다니 한번 맛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좋은 술이 있다는 말에 주중영은 신이 났다. 「그것 좋지요. 내가 한잔 낼 테니 모두들 나가 한번 통쾌하게 마셔 봅시다.」 이곳은 큰 고장이라 포쾌들의 이목이 많습니다. 여러 사람이 가면 불편하니 총타주님과 제가 모시고 갔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좋겠군요. 역시 용의주도하신 분이라 생각이 다르군요.」 그래서 진가락과 세 사람이 철탑사로 왔다. 수죽원은 과연 훌륭했다. 그릇이 정결하고 창이 밝고 탁자가 깨끗했다. 서천굉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조용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 사람이 술을 마시며 황하의 잉어를 안주삼았다.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자 서천굉은 다시 한 번 술잔을 높이 들었다. 「주 노선배님! 오늘 부녀가 단란하게 만나셨으니 제가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주중영이 술잔을 비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 노선배님!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요? 한숨을 다 쉬시게요? 혹시 철담장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셔서 그러시나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제물이야 별로 대수로운 게 아니지요. 그까짓 철담장 하나 타 버린 것이 애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그러면 세상 떠난 아드님 때문이신가요? 주중영은 아무말 없이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가락은 서천굉을 향해 감정을 건드리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나 서천굉은 못 본 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 아드님이 어린 나이에 철이 없어 사가가 숨은 장소를 말했는데, 주 노선배님은 화가 나셔서 그만 실수로 그를 죽였을 뿐이지요. 주 노선배님께서는 강호의 의리 때문에 그러셨겠지만 저회들 로서는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칠가! 이제 그만 갑시다. 술도 이만 하면 많이 마셨지요. 듣다 못해 진가락이 가자고 나섰다. 그러나 서천굉은 여전히 주중영만 상대했다. 「사모님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집을 나가셨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화가 나서 나가 버렸지요. 아아, 외로운 여자가 지금쯤 어디 가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으니 정말 내가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기실 나는 그때 너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했지, 어디 그애를 죽일 생각을 했겠습니까? 사가만 구출하면 나는 하늘 끝까지라도 그녀를 찾아나서야지요. 그래서 꼭 아내를 찾고야 말겠습니다.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세상에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아내와 딸 둘 뿐입니다 그려.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문의 발이 들리며 주중영의 아내와 주기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신의 얘기를 내 모두 옆방에서 듣고 있었어요, 자기 잘못을 인정했으니 되었어요. 나 바로 여기 있으니 찾아나설 것 없어요.」 아내가 하는 말이었다. 주중영은 뜻밖에 나타난 아내를 보자 놀랍고 반가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 대가님, 이분이 우리 어머니예요.」 주기가 어머니를 진가락에게 소개했다. 「어머니! 이분은 홍화회의 진 총타주님이세요.」 두 사람이 상견례를 했다. 주기는 심부름꾼을 불러 옆방에 있는 접시를 이쪽으로 옮겨 오라고 시킨 뒤에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정말 공교롭기도 하군요. 저는 이곳 술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께 가서 마시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셨답니다. 제가 이곳으로 모시고 왔더니, 그래 바로 아버지 계신 옆방에 앉을 줄 누가 알기나 했나요? 다섯 사람은 즐겁게 술을 들며 헤어져 있던 동안의 얘기를 나누었다. 주기는 이제 부모가 서로 만나 모든 일이 원만하게 수습되자 마무나 즐겁기만 했다. 그래서 신바람이 나 동조화를 살해해 동생이 죽은 원한과 철담장에 불을 지른 것에 대해 복수를 했다고 했다. 서천굉이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눈짓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분의 계책이 정말 훌륭했어요. 표행의 그 녀석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저는 창을 뛰어넘어 들어가 어머니를 구출했지요. 저분이 동가 녀석의 멱살을 잡고 내 앞으로 끌고와 나로 하여금 그를 처치하게 했어요.」 즌중영과 진가락은 서천굉에게 술을 권했다. 노제가 내 아내를 구하고 또 내 대신 원수까지 갚아 주었으니 고맙기 한이 없군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모두가 주 소저의 공로입니다.」 그런데 두 분이 어떻게 도중에서 만나게 되었나요? 진가락의 질문에 서천굉이 어물어물했다. 그제야 주기는 혀를 찼다. 야단났구나. 야단났어! 내가 동조화를 죽일 때 저 사람과 같이 있었다고 말해 놓았으니 그전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속인담.) 컬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당황한 나머지 무의식중에 손을 흔들다 그만 젓가락과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으니 더욱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진가락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벌써 두 사람 사이에 이 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또 주기가 서천굉을 말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분이) 어쩌고 (저분이) 저쩌고 하는 말에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 매씨 집으로 돌아오자 진가락은 서천굉을 한쪽으로 불렀다. 「칠가가 보기에 주 소저는 어때요? 「총타주님! 방금 주 소저가 술집에서 한 말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내지 마십시오. 그녀는 순진하고 정숙한데 만약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야단입니다. 그녀에게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우리가 주 노영웅께 미안하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도 주 소저의 인품이 훌륭하던데 내 칠가를 위해 중매를 선다면 어떨까요? 서천굉은 펄쩍 뛰었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그만한 자격이 있나요? 「너무 겸양하지 마시오. 칠가가 별명이 무제갈(武諸葛)지용을 겸비하고 있음을 강호에서는 모두들 알고 있지 않소? 주 노영웅께서도 칠가를 말할 때는 십분 탄복을 하십디다.」 서천굉은 잠자코 있었다. 「그래, 어때요? 진가락은 계속해서 그의 의중을 타진했다. 「총타주님은 모르십니다. 주 소저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 칠가는 그것을 어찌 아셨소? 「주 소저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한걸요. 저같이 잔꾀 많고 괴팍한 사람은 아주 질색이라구요. 우리는 계속 말다툼만 하고 지낸걸요. 진가락이 껄껄 웃었다. 그럼 칠가는 승낙을 한 것이오? 총타주님! 저를 위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서로 재미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는 처지니까요.」 이때 갑자기 매씨댁의 심부름꾼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진 나리! 밖에서 주 노영웅이 잠깐 뵙겠다고 하십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요. 진가락은 서천굉을 향해 한 번 웃고 방 밖으로 나왔다. 주중영이 뒷짐을 진 채 복도를 오락가락하고 있다가 반겼다. 노선배님! 무슨 분부가 있으시온지요? 사람을 시켜 부르실 일이지 무었 때문에 여기까지 이렇게 오셨습니까?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주중영은 진가락의 손을 잡고 조용한 대청으로 와 앉았다. 제게 걱정이 하나 있어서 그러는데, 진 총타주님께서 주장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배님! 분부만 내려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숩니다.」 제 딸의 나이가 금년 열아홉입니다. 별로 잘나지는 못했지만 천성은 그래도 착한 편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이 애비가 개에게 약간의 무예를 가르친 것이라고나 할까요. 보통 사내놈들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바람에 여태까지 질질 끌다가 그만 짝도------...」 여기까지 말하다가 멈칫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귀회의 칠 당가 서 나리는 강호에서 모두 그의 뛰어난 이름을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지혜도 있고, 용기도 있고, 인품 또한 훌륭합니다. 이 늙은이 생각으로는 진 당가께서 중매를 서셔서 제 딸을 그분에게 시집보냈으면 합니다. 다만 제 딸아이의 성미가 고약하니 감히 바라다보기도 어렵겠지요.」 진가락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반가워 자기 가슴까지 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을 지겠숱니다. 주 노선배님은 무림의 태산 북두(泰山北斗)이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시니 우리 홍화회 여러 형제들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재가 금방 가서 해결하겠습니다.」 단숨에 서천굉의 방으로 달려온 진가락은 자초지종을 말했다. 서천굉도 기뻐 가슴이 두근거렸다. 「칠가! 주 노영웅의 표정을 보니 또 다른 할 말이 있는 것 같던데, 말을 꺼내지 못합디다. 내 추측으론 (칠가가 승낙을 할는지 모르겠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뭔데 승낙을 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까? 내가 생각해 봐도 승낙 못 할 건 없을 것 같아요. 주 노영웅의 세 아들이 모두 죽었는데, 막내는 또 우리 홍화회 일 때문에 죽지 않았소? 이제 주씨댁 혈통이 꾼어지게 되었소. 내 생각으로는 칠가가 사위 노릇만 할 게 아니라 아들 노룻까지 해야 되겠다 이거요. 「그럼 저보고 주씨댁 데릴사위가 되란 말씀이신가요? 이재민 구제 바로 그거요. 장래 아들을 낳으면 큰아들의 성은 주가가 되고 둘째 아들은 서가가 되는 것이오. 자고로 자손 없음이 제일 큰 불효라 하지 않았소? 우리 이렇게 하는 것이 그래도 주 노영웅의 은혜에 답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서천굉은 주기가 자기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하며 시원스럽게 승낙을 했다. 두 사람이 주중영의 방으로 돌아와 그의 부인까지 들어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주기까지 어머니를 따라 들어왔다. 주중영은 진,서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벌써 일이 성사되었음을 알았다. 주기야! 너 밖에 좀 나가 있거라.」 주기를 향해 웃으며 말했지만, 주기는 오히려 화를 냈다. 또 나를 속이려고 하세요? 싫어요. 무슨 일인지 전 여기서 알아봐야겠어요.」 주기는 이렇게 하면서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진가락은 서천굉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려 한다는 뜻을 밝혔다. 부인은 너무 좋아 입을 헤 벌린 채 다물지를 못하고 주중영도 희색이 만면했다. 원, 이거 감히 어떻게,,,,,, 감히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서천굉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렸다. 주중영이 황급히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웃었다. 「우리 외지에 와 있으니 무얼 가지고 예를 치르겠소. 내 이따가 칠가께 철담 쓰는 재주나 가르쳐 주고 싶은데 의향이 어떤가요? 주중영의 아내가 웃으며 나섰다. 아니, 영감도 주책이시오. 그래 지금도 칠가라 부르고 경어를 쓰실 참이세요? 주중영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서천굉은 장인 될 분이 철담의 솜씨로 무림에 이름을 떨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경사가 겹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귀여운 아내도 얻고 또 훌륭한 스승까지 모시게 된 즐거움에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래서 두 사람은 서로 부자의 호칭을 쓰기로 했다.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자 모두들 달려와 축하를 했다. 그날 밤 매양명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경하했다. 주기는 부끄러워 숨은 채 낙빙이 제아무리 죽자 하고 끌고 나오려 해도 나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석쌍영이 들어와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보고했다. 「총타주님! 편지를 전해 주고 왔습니다. 이것은 목탁륜의 회신입니다. 진가락이 받으며 말했다. 「십이가, 만 리나 떨어진 곳을 이토록 빨리 다녀오시다니 정말 수고가 많았소. 자 술이나 한잔"""~ 말을 미처 맺지도 않았는데 돌연 장사근이 뛰어들어왔다. 황하의 둑이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벌떡 일어나 수재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맹진(孟津)에서부터 동와상 사이에 7, 8군데나 둑이 터졌습니다. 여러 지방의 길이 다 막혔습니다.」 모두들 듣고 근심에 잠겼다. 수재민에 대한 대책도 시급했지만 서천쌍협의 소식이 없으니 문태래의 일이 윰시 궁금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여러 날 동안이나 기다렸는데도 오 육가는 시종 소식이 없습니다. 어쩌면 무슨 일이 있을 듯싶은데, 길이 막혔으니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을 좀 모아 봅시다.」 진가락의 말에 장진이 먼저 나섰다. 여기서 더 기다릴 수 없으니 모두들 북경으로 갑시다. 사가가 지옥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구해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춘화 , 양성협 , 장사근이 찬성하고 나섰다. 진가락과 주중영 ,무진,조반산 등이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상의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을 지연시킬 수 없으니 우리 즉시 출발합시다.」 그래서 매양명을 향해 그동안 폐를 많이 끼쳤다고 인사를 한 뒤 동쪽을 향해 출발했다. 진가락은 노상에서 목탁륜이 보낸 편지를 뜯어 보았다. 홍화회에서 소식을 알려 주어 재삼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부족을 소집해 준비를 완료하고 강적이 오기만 하면 대항할 것이로되 워낙 적이 많고 아측이 적어 승리하기 어려을 것 같기는 하나 부족의 노소가 로두 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굴복하지는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편지에 쓰인 말이 너무나 비장해 진가락은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변해 석쌍영에게 물었다. 목탁륜 노영웅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사가를 구출했느냐고 묻고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자 꾀 걱정하시더군요.」 진가락은 입 속으로 (음) 소리만 냈다. 그러자 석쌍영은 또 이런 말을 했다. 「부족 사람들의 우리에 대한 의리가 여간 깊지 않아요. 총타주께서 파견한 사자라고 제게 여간 잘 대해 주지 않았어요.」 「목탕륜 노영웅의 가족들도 만나 보셨나요? 부인과 아들, 두 따님을 모두 만났습니다. 큰따님은 총타주님도 만나 보셨지요? 총타주님의 안부를 묻더군요. 진가락은 잠자코 있다가 또 물었다. 「큰따님이 그밖에 다른 말은 않던가요? 석쌍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제가 떠날때 곽청동 소저가 제게 무슨 말을 할듯 할듯하더니 끝내 말은 꺼내지 않고 사가를 구출하려던 사정만 자세히 물었습니다. 진가락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손을 품속에 넣어 곽청동이 자기에게 주고 간 단검을 어루만졌다. 단검의 날 길이가 8촌, 환한 빛이 찬란하다. 칼자루는 금실로 휘감았는데 닳아 없어진 부분이 많다. 얼핏 보아 수백 년 된 골동품이 분명했다. 곽청동이 그날 단검을 주면서 이 칼에 크나큰 비밀이 숨겨 있다는 전설을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리 살펴보아도 시종 특이한 곳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서쪽으로 돌렸다. 뭇 별만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멀리 사막을 상상해 본다. 혹시 이 별資이 그 파란 깃털과 담담한 그녀의 노랑 옷을 비춰 주지는 않을까? 사람들은 밤새 길을 재촉해 날이 밝을 무렵 황하의 둑이 터진 곳에 이르렀다. 황하의 흐린 물결이 하늘에까지 창일하고 분류가 세차게 흘렀다. 다시 몇 시간을 가자 넓은 평원이 택국을 이루었다. 낮은 곳에 있는 인가와 전답은 수몰된 지 오래다. 이재민들이 산야의 곳곳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붕 위나 나무위에 갇혀 있기도 했다. 넓고 큰 천지에 밥 짓는 연기도 오르지 않고 도처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울음소리만 들렸다. 가끔 시체가 되어 물살에 떠내려가기도 했고, 살림살이도 거기 섞여 떠내려 가고 있었다. 군웅들은 높은 곳만 골라 돌며 동쪽으로 향해 갔다. 그날 밤은 산중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돌고돌아 겨우 사회업(社會業)에 도착했지만 어디나 슬픈 참상이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주기는 줄곧 낙빙과 함께 있다가 참다 못해 말을 달려 서천굉을 쫓아갔다. 잔꾀가 워낙 많으신 분이니 이 백성들을 도와 줄 방법이 있나 생각해 보세요.」 서천굉은 그녀와 정혼을 한 뒤 서로 서먹서먹해 이틀 동안이나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벌린 약혼녀의 입에 나온 말이 세상의 난제(難題)라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 좋은 생각이지만 이재민이 이토록 많으니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 제가 방법이 있으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와 묻겠어요? 내일 모두들 있을 때 다시는 내 별명을 무제갈이라 부르지 말라고 해야지. 그래야만 날 입장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제가 언제 입장 곤란하게 해드렸어요? 차라리 제가 말을 잘못 했다고 하세요. 내 이제 말을 꺼내나 보세요.」 입을 삐죽 내민 채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주기! 이제 우린 한식구나 다름이 없는 처지인데 자꾸 말다툼만 하면 어떻게... 그러나 주기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 이번만 용서해 주구려. 자, 어디 한번 웃어봐요. 주기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홱 돌렸다. 「아, 안 웃을 거요? 원래 신랑감을 만나면 부끄러움을 타는 법이었다. 주기는 참지 못하고 킥 웃음을 터뜨리고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 「다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 이 채찍으로 때릴 거예요.」 낙빙은 그들 두 사람 뒤에 있었다. 백마가 멀리 회강까지의 만리 길이나 다녀와 힘이 빠졌을까봐 이 이틀 동안 천천히 몰았다. 주기가 천진난만하게 서천굉과 더불어 웃는 모습을 보자 남편 생각에 수심만 더 깊었다. 미시(未時)경에 초토영(招討營)에 도착했다. 이곳은 황하 연안에 있는 큰 고을로 교외의 이재민들이 모두 이 고을로 모여들었다. 낙빙은 몸에 지니고 있던 황금을 은포에 가 돈으로 밖워 양식을 사서 그들에게 나눠 주었지만 이재민들이 벌테처럼 덤벼들어 금방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양식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해 그들이 고을을 벗어났는데도 많은 이재민들이 섭섭한지 그 뒤를 따라갔다. 다소의 양식이라도 얻어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지 못해서였다. 군웅들의 마음도 괴로웠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말을 타고 달렸다. 연도의 이재민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남부여대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웅들이 가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한 필의 말이 갑자기 달려왔다. 산길이 좁은데도 그 말은 거침없이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 어린아이를 안은 이재민 여자 하나를 건드려 길 옆의 물 속에 빠뜨렸다. 그런데도 말 위의 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달렸다. 군웅들은 화가 났다. 위춘화가 맨 먼저 뛰쳐나가며 말 위에서 그자의 왼발을 잡아채 말 아래로 끌어내리며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 사람은 (와)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주저앉아 피와 이빨 세 개를 토했다. 그는 군관이었다. 벌떡 일어나 서며 욕부터 먼저 퍼부었다. 네 이 토비놈들, 감히 무엄도 하구나. 나리 긴급한 공무가 있어 가지만 돌아을 때 어디 한번 보자. 말에 올라타려고 하자 장진이 오른쪽에서 낚워채 다시 끌어내렸다. 무슨 놈의 긴급 공무란 말이냐? 십가, 그의 몸을 수색해 보시오. 무슨 물건이 있는지. 진가락의 말에 장진이 그의 몸을 뒤져 공문을 하나 찾아냈다. 진가락이 보니 화급한 공문의 봉투였다. 각 역참에 명령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채송하라는 것이다. 봉피에 '육백리가급정변대조' 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봉투를 뜯고 공문을 꺼냈다. 군관은 봉투를 찢는 것을 보자 대경실색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군중의 기밀 문서요. 목이 잘릴 텐데 무섭지도 않은가? 목이 잘려도 당신의 목이 잘릴 테니 걱정 없소.」 심연이 웃으며 받았다. 진가락이 공문상의 서명을 보니 운량총병관손극통이 조혜씬에게 보내는 보고서였다. 대군의 군량을 남競對까지 운반했지만 황하가 범람했기 때문에 수일이 지연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진가락은 공문을 서천굉에게 넘겨 주었다. 상관이 없군요. 사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서천굉이 읽어 보고는 희색이 만면했다. 총타주님, 이건 그냥 문 안으로 굴러 들어온 보물입니다. 우리가 목탁륜 노영웅도 돕고 또 황하의 이재민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공문에 있습니다.」 말에서 뛰어내려 그 군관의 면전으로 걸어가 공문을 확확 찢으며 웃었다. 「조혜가 있는 곳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난봉으로 되돌아가겠느냐? 군중의 문서를 잃었으니 목이 잘리지 않겠느냐? 살고 싶거든 이 길로 그냥 달아나지.」 그 군관은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실이 그러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몸에 걸친 군복을 벗어 물 속에 집어던지고 이재민 가운데 섞여 그곳을 떠났다. 진가락은 벌써 서천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군량을 뺏어 이재민을 구제하니 일거양득이오만, 대군의 군량을 호송하자면 상당한 군인이 있을 것이오. 우리 사람의 숫자가 적어 어떻게 그 큰일을 처리해야 할는지 칠가가 묘안을 강구해 보시오.」 서천굉이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몇 마디 소곤거리자 진가락이 크게 반겼다. 「좋군요. 우리 그렇게 합시다.」 즉시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각기 지령을 가지고 흩어져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 난봉 성내에는 갑자기 수만의 이재민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현령인 왕도(王道)는 기미가 이상한 것을 보고 포쾌를 풀어 몇 명의 이재민을 잡아다 물어 보았다. 오늘 구제 양곡을 준다기에 그것을 받으러 왔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당황한 왕도는 급히 성문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는 이미 소문이 사방팔방으로 퍼진 뒤라 동서남북에서 이재민이 모여들었을 때다. 성 안,밖을 막론하고 수만 명의 군중이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모여 있어 왕도는 사람들을 시켜 낭설이라고 통고했지만, 이재민은 믿으려 들지 않았다. 왕도는 이재민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직접 동성(東城) 석불사(石佛寺)에 주둔하고 있는 통병 손극통을 찾아가 병사들을 동원해 진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손극통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소장은 조 장군의 명령을 받아 즉일로 군량을 호송해 회강으로 가야 합니다. 만약 실수가 생기면 이것은 목이 잘리는 죄가 됩니다. 소장이 돕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워낙 군무가 중대하니 왕대인이 제 입장을 이해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왕도가 재삼 간청을 했지만 손극통은 끝끝내 응하지 않았다. 왕도가 어쩔 수 없이 하직하고 거리에 나오니 이재민들이 벌써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려고 할 때 현아와 감옥은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가게에서 갑자기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다. 왕도는 급히 관리와 포쾌를 인솔하고 나가 불길을 잡기에 바빴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공인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런 보고를 했다. 나, 나리 큰일났습니다. 이재민들이 서문을 때려 부수고, 수천만의 이재민들이 조수처럼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왕도는 눈앞이 캄캄해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말을 준비해라. 공인들을 데리고 서문을 살펴보기 위해 그쪽으로 항했다. 그런데 도 가지 못해 이재민들 때문에 도로가 막혀 통행이 불가능했다. 이재민 가운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동성 석불사에서 구제 양곡을 준다고 하니 모두 석불사로 갑시다. 많은 이재민들이 이 말을 듣고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화가 난 왕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저 악랄한 자를 잡아 오너라. 내 직접 신문을 해야겠다.」 두 명의 공인이 대답하고 철련(鐵練)을 휘둘러 큰소리로 떠들고 있는 깡마른 이재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사람이 단숨에 철련을 빼앗아 휘두르자 공인 하나가 맞고 허리뼈가 부러졌다. 「우리는 배가 고파 그러는데 무슨 죄를 범했단 말이냐? 왕도는 사세가 불리함을 보고 말머리를 되돌렸다. 남문으로 돌아오자 맞은편에서 또 한떼의 이재민이 몰려들었다. 왕도는 손 총병이 있는 곳으로 가 피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막 그쪽을 향해 가고 있는데 성 안의 순라를 도는 병정들이 분분히 달아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도사 하나가 손에 장검을 들었고 뚱뚱보 하나가 철편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꼽추 하나가 낭아봉을, 또 다른 장한이 철장을 들고 그들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왕도는 병정들 틈에 섞여 석불사를 향해 말을 재촉했다. 절 문이 닫혀 있는데 문을 지키고 있던 사병이 지현 대인임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어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때 절 밖에는 이재민들이 벌써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이재민 가운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조정에서 구제 양곡을 이재민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는데도 개같은 관리 놈들이 홀랑 삼켜 버렸다. 빨리 구제 양곡을 나누어 주어라. 빨리 빨리"""~ 이재민들이 이구동성으로 고함을 지르니 기왓장이 다 흔들흔들했다. 왕도는 계속 벌벌 떨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모반이다. 모반이야. 손극통은 역시 무관이라 대담했다. 병사들을 시켜 사다리를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그 사다리 위로 기어 올라가 소리를 질렀다. 「분수를 지키는 양민들은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 빨리 성 밖으로 나가시오. 나가지 않으면 화살을 쏘겠소.」 이때 두 명의 군관이 벌써 궁전수들을 사방에 배치해 놓았다. 이재민들이 계속해서 웅성거리자 손극통이 명령을 내렸다. 「화살을 쏘아라. 화살이 일제히 날자 앞에 섰던 10여 명의 이재민이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재민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서로 밟혀 엄마를 찾는 소리,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엉망징창이었다. 손극통은 담 위에 서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재민 가운데 누군가가 돌 두 개를 주워 팔매질을 했다. 손극통이 몸을 옆으로 돌려 그중 하나는 피했지만 다른 돌 하나가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나 아픈지 더듬어 보니 온통 피투성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손극통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활을 쏘아라. 활을 쏴. 궁전수들이 활을 당기자 또 10여 명의 이재민이 화살에 맞았다. 이재민들의 놀란 비명 소리 가운데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키가 크고 마른 두 사나이가 담 위로 뛰어오르며 손을 휘두르자 궁전수 몇 명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재민들은 떨어져 내려온 궁전수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뭇매를 때렸다. 어떤 녀자들은 거기에 합세하여 물어뜯는 사람까지 있었다. 홍화회 군웅들은 벌써부터 이재민 가운데 섞여 있었다. 서천굉의 의도는 관병들이 좀더 이재민들을 위협해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때 가서 단숨에 절을 향해 돌격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씨쌍협이 담 위에 나타난 것이다. 군웅들은 놀람과 반가움이 일시에 교차했다. 낙빙은 쌍도를 휘두르며 담 위로 뛰어올라 상혁지 옆으로 접근했다. 「오가, 사가를 보셨나요? 그래 어때요? 상혁지는 낙빙을 보자 대단히 놀랐다. 「아! 넷째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사가를 만났으니 안심하세요.」 낙빙은 그 말을 듣자 용기가 솟았다. 그러나 너무나 반가워 오히려 사지에 맥이 풀려 싸을 기운이 없었다. 담 밖으로 뛰어내리며 머리를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장진과 심연이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와 물었다. 「아니, 왜 그러세요? 부상을 입으셨나요? 「아무 일도 없어요. 오가가 사가를 만났다는군요. 낙빙이 웃으며 대답했다. 담 위를 바라다보니 위춘화,양성협 ,주기,맹건웅 등이 모두 공격에 나서서 관병들과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절 문이 활짝 열리며 장사근과 맹건웅이 절 안에서부터 달려나오며 이재민들을 향해 연방 손짓을 했다. 「모두들 들어와 양곡을 가져가시오. 이재민들이 우르르 절 안으로 몰려들었다. 절 안의 관병들은 그때까지도 병기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이재민을 살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이재민들이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또 그중에 무공이 막강한 사람들이 섞여 통병(統兵) 군관을 계속해서 몇 명이나 살해하는 것을 보고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병들의 수가 워낙 많은데다가 또 병기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재민들이 감히 더 접근할 수가 없었다. 손극통은 큰 칼을 휘두르며 몇 명의 친병을 거느린 채 담 위에서 결사적인 항전을 하면서도 자꾸만 뒤로 밀렸다. 이때 갑자기 등뒤에서 바람소리가 일어나더니 등뒤가 마비되면서 뜨끔해지며 손에 들고 있던 큰 칼을 놓쳤다. 그리고 또 두 손이 누군가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에 뒤로 묶였다. 이어 목이 차디차지면서 뒤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야. 관병들보고 병기를 버리고 절 밖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려. 손극통이 주춤거리는 사이 목이 뜨끔 아팠다. 칼 한 자루가 목에 닿은 것이다 그 사람이 가볍게 칼날을 움직이자 목에서 피가 흘렀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손극통으로서도 그 말에 쫓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병기를 버리고 절 밖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관병들은 총병이 귀신처럼 생긴 사람에게 잡힌 것을 똑똑히 보았다. 주장의 명령이 이미 떨어진 마당에 결사적인 항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각자 병기를 버리고 절 밖으로 물러났다. 이재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진가락이 대전으로 들어가 보니 다섯 칸의 방에 부대마다 양식이 쌓여 있고, 수레마다 은전이 가득 실려 있었다. 석쌍영이 현감 왕도를 끌고 들어와 진가락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네놈이 현감 나리냐? 「네,,,,,, 네,,,,,,. 대왕님.」 왕도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네놈 보기에 내가 산적의 대왕 같으냐? 진가락이 웃으며 물었다. 「제가 죽어 마땅한 몸이라 그만 말을 잘못했나 봅니다. 공자님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진가락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은 하지 않고 또 물었다. 「네놈은 과거를 치른 현감 나리겠다? 「감히 제 가,, ---,.」 「감히 뭐 어쨌다는 얘기냐? 진사 출신이라면 어느 정도 재주와 학식을 겸비하고 있겠지. 그럼 어디 네놈의 학식과 재주를 시험해 보겠다.」 그는 부채를 휘저으며 고운 이마를 들어올리고 웃었다. 「내 물음에 답을 맞추면 네놈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만, 만약 틀리면, 흥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느냐? 이재민들은 홍화회 군웅들이 곧 양식과 은전을 나누어 주겠다는 통보에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제 또 지현이 사로잡히고 홍화회 총타주가 그의 학식과 재주를 시험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어나 왕도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황하의 물이 맑기를 기다리는데 사람의 수명이 기하(幾何)요! 묻노니 강물이 맑아지기 쉬운가, 아니면 관리가 맑아지기 쉬운가? 왕도의 이마에 콩알만한 땀방울이 솟았다. 황급한 나머지 약간의 재주나 학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벌써 황하의 물결따라 양양한 바다로 흘러가 버렸을 것이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겨우 이런 말을 했다. 「공자님, 위에 말씀하신 것이 너무 어려워 저,,,,,,, 저로서는 대답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좋다. 맞추지 못해도 할 수 없겠지. 내 네게 묻겠는데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이 쉬우냐, 아니면 관리들이 맑아지는 것이 쉬우냔 말이다?」 재수가 좋을 때에는 정신도 맑아진다고 하더니 왕도가 바로 그렇다. 제가 보기에는 천하의 관리들이 모두 맑아져야만 황하도 맑아질 것입니다.」 진가락이 껄껄 웃었다. 「말 한번 잘했다. 네 목숨은 용서해 주마. 네 빨리 벼슬아치들을 시켜 양식과 은전을 이재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해라. 여봐라, 총관. 자네도 이자의 일을 도와 주게.」 손극통과 왕도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군량을 잃었으니 벌써 목이 잘릴 죄명이다. 그런데 어찌 자기 손으로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명령을 거역하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우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병졸과 벼슬아치들을 시켜 군량과 은전을 이재민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이재민들의 환호 소리가 우레처럼 퍼졌다. 분분히 홍화회 군웅들을 햐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과 양식을 받아 갈 때는 손극통과 왕도를 향해 야유를 했지만 그들은 두 눈을 감은 채 못 들은 체했다. 여러 어른과 형제 자매들은 들으시오.일후 관가에서 나와 조사를 하거든 총병관과 현감 나리가 직접 나누어 준 것이라고 대답하시오. 진가락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재민들은 좋다고 했다. 「암, 그렇구말구. 군웅들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옆에서 감시를 했다. 이제 거의 다 나누어 주었을 때 서천굉이 외쳤다. 「여러 어른들! 여기 있는 병기도 모두 가지고 가 집에 숨겨 놓으시오. 개 같은 관리들이 자기 잘못을 알면 그뿐이지만 만약 우리들이 떠난 뒤에 여러분을 괴롭히며 양식과 돈을 반환하라고 하면 그때 가서 결사적으로 항거하시오.」 이재민들은 이때 홍화회 군웅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들을 판이었다. 장정들이 나타나 병정들이 땅바닥에 버린 칼과 창을 가져갔다. 관병들은 이재민의 기세가 등등한데다 또 총병이 적의 수중에 갇혀 있으니 감히 항거할 도리가 없었다. 「큰 일을 마쳤으니 형제 여러분 저를 따라 떠납시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고 일어서자 군웅들은 손극통을 에워싼 채 이재민들의 우레 같은 박수 갈채를 받으며 석불사를 떠나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왔다. 10여 리를 달리다 진가락은 손극통을 말 위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손병 나리! 양식과 은전 정말 고마웠소 우리 다음 기회에 또 만납시다. 다음번 군량을 호송하게 되거든 꼭 알려 주시오.」 두 손을 마주 잡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껄껄 한바탕 웃고 군웅들과 함께 먼지를 가르며 달렸다. 다시 10여 리 이상을 달리고 나서 진가락은 상씨쌍협을 향해 물었다. 「그래, 두 분께서는 사가의 소식을 들었나요? 「십사제가 남겨 놓은 표지를 봤는데 사가는 이미 항주로 끌려갔답니다.」 상혁지의 대답에 진가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항주라니, 그게 웬일이지요? 어째 북경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황제가 직접 심문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평소 십사제가 하는 일이 정확하지 않았습니까? 확실한 소식을 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상백지의 말이었다. 진가락은 모두 말에서 내려 둥그렇게 앉아 상의해 보자고 제의했다. 「사가께서 항주로 가셨다니 우리도 강남으로 달려가 구출할 방법을 강구해야 해요. 항주라면 우리의 기반이 단단한 곳이 아닙니까? 게다가 조정의 세력도 북경만큼 크지 못하니 구출하기는 더욱 용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한 분이 북경으로 가서 소식을 알아봐야 합니다. 만일 다른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서천굉의 말에 모두들 옳다고 했다. 진가락은 석쌍영을 바라다보았다. 「수고스럽겠지만 십이랑께서 또 한 번 고생을 하셔야겠소.」 석쌍영이 좋다고 했다. 상의가 끝나자 석쌍영 혼자만이 북으로 떠나고 군웅들은 남쪽을 향했다. 진가락은 다시 여어동의 상처가 어떻냐고 물었다. 상씨쌍협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형제가 기호를 보자마자 소식을 알리러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난붕을 지나다 이재민이 많이 모인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이들을 따라 석불사로 왔다가 관병들이 활을 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담 위로 뛰어올라 싸움을 하다가 뜻밖에 군웅들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문태래와 여어동의 소식을 듣고 다소 안심이 되었다. 문태래가 위기를 모면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무사하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양곡을 뺏어 이재민을 구제한 것을 얘기하면서 통쾌해 마지않았다. 「서정에 나선 대군들이 군량이 없으니 곽청동 언니가 틀림없이 승리를 거둘 거예요.」 주기의 말을 받아 무진이 웃었다. 그 소저 검법이 그럴듯한데다 운도 꾀 좋았어요. 모두들 그녀를 도와주었으니 말이오. 승전을 했다는 소식이 오면 우리도 기쁠 테데. 알 수 없는 관계 군웅들이 서주(徐州)에 도착했다. 단지 홍화회 분타에서는 총타주와 내외향당 여러 향주들이 일시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극진한 접대를 했다. 강북 일대의 회중은 양성협의 인솔하에 있었다. 그는 분타주에게 조용히 함은 물론 뭇 형제들에게도 와서 총타주님을 뵈올 필요도 없다고 일렀다. 군웅들은 겨우 하룻밤을 묵은 뒤에 계속 남하를 서둘렀다. 일로 남쪽으로 가는데 크고 작은 나루터에는 모두 홍화회의 분지 두목들이 있었다. 군웅들은 기밀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다. 수 일 후에는 항주에 도착하여 그곳 분타 타주인 마선균의 집에서 묵었다. 마선균의 집은 서호(西湖) 고산(孤山) 아래 자리를 잡고 있어 호광산색풍물이 아름다을 뿐만 아니라 조용하게 외따로 떨어진 곳이었다. 마선균은 큰 포목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2개의 큰 직물 공장을 차려 놓고 직접 명주와 비단을 짜기까지 했다. 천성이 무예를 좋아해서 위춘화를 사귀게 되었고, 또 그의 소개로 홍화회에 가입했다. 마선균의 나이는 50세 전후, 뚱뚱한 몸집에 비단 웃옷과 검은 마고자를 입었다. 얼핏 보면 복 많은 부자 영감으로 보이지 그가 풍진의 호걸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채였다. 그날 밤 뒷채에서 군웅들을 대접하면서 문태래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했다. 「소제, 즉각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해 보겠습니다. 사 당가가 어느 감옥에 계신지 알아보고 난 후 기회를 보아 행동을 취하지요. 마선균이 이렇게 말을 하고 아들 마대정을 시켜 사람을 풀어 조사해 보도록 했다. 다음날 오전에 돌아온 마대정은 이렇게 보고를 했다. 순무아문 -항주부(抗州府) -전당현 -인화현 등 각처의 감옥 및 주방장군원소 , 수륙제독아문에 이르기까지 형제들을 풀어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문 사당가는 없다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군웅들을 소집해 대책을 숙의했다. 「이곳의 무태 -부현(府縣) 및 장군(將軍) , 제독아문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본회의 형제들이 있숩니다. 문 사당가께서 만약 관부의 감옥 안에 계시다면 틀림없이 찾았을 것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관부에서 사당가의 안건이 워낙 중대하다고 판단해 개인의 감옥에 감금했다면 그야 속수무책이지요.」 마선균의 말이었다. 「우리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문 사가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마 대가께서는 계속 힘 있는 형제들을 각처의 아문으로 파견 조사해 보도록 해 주십시오. 오늘밤 도장님과 오가 , 육가는 순무아문으로 가십시오. 제일 중요한 것은 공연히 그들을 건드려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싸우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소. 진가락의 말에 무진이 대답했다. 마선균은 도로와 무태아문의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 사람이 자시(子時)에 훌발해서 두 시간쯤 지난 후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무태아문의 경계가 어찌나 삼엄하던지 수천의 병정들이 등불을 밝히고 철야 보초를 서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순찰을 돌고 있는 군관들이 빨간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2, 3품에 해당하는 고관들이라 감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 아무리 기다려도 파수를 보는 관병들이 해이해지는 기색이 없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군웅들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는지 추리조차 할 수가 없었다. 「요 며칠 항주 성내의 각처에서 검문 검색이 여간 심하지 않아요. 각처의 노름방 기생집, 심지어 수상의 강산선(江山船)까지 관원들이 돌아다니며 조사를 했고요, 여러 사람들이 무고하게 잡혀가기까지 했습니다. 혹시 이런 일들이 문 사당가와 관계가 되지는 않을까요? 마선균의 말에 서천굉이 그럴 리는 없다고 했다. 「그럴 리는 없어요 혹시 북경에서 황제의 사신이 내려온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지방 관리들이 이때 환심이나 얻어 놓으려고 공연한 야단을 피우는 것이 아닐는지요? 군웅들이 여러 시간 상의를 해 보았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 이튿날 주기가 부모에게 서호에 가서 놀자고 졸라 데자 주중영이 대답을 했다. 주기는 서천굉을 향해 함께 가자고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서천굉은 얘기를 꺼내기가 거북해 못 본 체했다. (자식의 속은 역시 부모가 안다)는 말과 같이 주중영이 딸의 눈치를 채고 웃었다. 「천굉아, 우리 여태까지 항주에 와 본 일이 없으니 함께 동행을 하자. 길도 모르는데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겠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서천굉이 대답을 했다. 「제가 가자니까 못 본 체하다가 아버지께서 가자니까 얼른 대답을 하시는군요.」 주기가 소근거리며 항의했지만 서천굉은 웃기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그런데 이제 주중영 내외가 친자식처럼 대해 주는데다 약혼녀 또한 천진난만해 귀엽기만 했고, 어찌나 친하게 구는지 다른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기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즐거워하며 그녀를 아끼고 좋아했다. 진가락도 심연을 데리고 바람을 쏘이러 호수로 나왔다. 소제와 백제를 산보하고 혼자 제일교(第一橋) 위에 앉아 호산(湖山)의 깊은 곳을 바라다보았다. 대나무 숲이 울창해 파릇파릇한 기가 돌았고 수려한 산봉우리가 구름 위로 보였다. 그는 어려서 서호에 여러번 와본 일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경치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 다시 와 보고야 비로소 산용수의(山容水意) 화태룬정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반나절 동안이나 넋을 잃은 듯 뚫어지게 바라다보다가 마차 한 대를 세내어 타고 영은(靈隱)으로 와 비래봉(飛來峰)을 구경하기로 했다. 비래봉의 높이는 50장이 넘으며 밑에서 꼭대기까지 모두가 돌이다. 나무는 돌 위에서 자라 가지와 잎이 괴상하게 반들거리고, 석아는 가로 세로로 눕고 뻗고 뒤섞여 부러질 듯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넓고 넓은 하늘 위에 걸쳐져 있었다. 일시에 흥이 난 진가락이 심연을 향해 말했다. 「우리 올라가 볼까? 봉우리 위로 올라가는 길은 원래부터 없었다. 두 사람의 경공이 보통이 아니라 웃으며 이야기하는 동안에 벌써 정상에 올랐다. 삼천축을 우러러보니 만목이 공중에 높이 늘어서 "맑고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저쪽이 더욱 좋군.」 진가락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은 봉우리를 내려와 서서히 걸어 상.중,하 삼축을 향해 갔다. 10여 장쯤 걸어나갔을 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남빛 두루마기를 입은 장한이 두 명 나타났다. 그들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아래위를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총타주님! 저 두 사람 다 무예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 심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똑같은 차림을 한 두 사람이 또 경치에 대한 한담을 주고받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말투를 들어 보니 기인(旗人)들이다. 산으로 올라오면서 이렇게 차려입은 사람을 3, 40명을 만났는데 진가락을 볼 때마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이었다. 심연은 눈이 다 어지러을 지경이었고, 진가락도 궁금하게 생각했다. (무슨 강호의 방회나 무림의 종파가 여기서 모임을 가졌나? 그러나 항주는 홍화회의 기반이니 우리들에게 통지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나를 볼 때마다 놀라 의아한 표정을 지을까?) 한 굽이를 돌아 천축 관음묘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산허리에서 거문고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며 길게 읊조리는 소리가 잘게 부서지는 폭포 소리와 어울려 들려 왔다. 금수강산 아름다운 경치 이 황제 치세로 기강을 바로잡았지 사방의 제후들이 찾아드니 군사가 많아지고 황제 계신 곳 바라보니 구름이 열린 곳에 일산이 보이네. 백성은 고개 빼고 어가를 고대하네 평화로운 마을마다 주기(酒旗)가 나부끼네. 국태민안하니 황제의 향로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모락모락 피어나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거문고 소리는 평화롭고 아취가 있지만 가사의 내용은 황은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마을마다 주기가 나부긴다)는 그 대목만은 그럴싸했다. 만약 온 천하의 마을마다 술잔이 있어 백성이 즐길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살 만하겠는가 말이다. 거문고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니 바위 위에 고관 차림을 한 사람이 앉아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이는 40세 정도이며 옆에 2명의 장한과 깡마르고 몸집이 작은 노인이 서 있었다. 역시 모두들 남빛 두루마기를 입었다. 진가락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음을 느꼈다.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리고 잘 알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그사람의 생김새가 날씬하여 고상해 보이고, 기품 또한 우아한데 용모를 살펴볼수록 낯이 익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 만났는지 영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순간 심신이 황홀한 것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인 것도 같고, 아니면 아주 멀리 있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도 같았다. 이때 그 사람과 2項의 장한도 역시 진가락과 심연을 발견하고 유심히 살펴보면서 이쪽으로 와 무슨 말을 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거문고를 어루만지던 사나이가 손가락을 떼자 소리가 뚝 멈추었다. 진가락이 두 손을 공손하게 마주 잡았다. 「방금 인형의 고상한 연주를 들었는데, 가사나 곡이 모두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인형께서 새로 만드신 것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금수건곤(錦繡乾坤)은 최근에 제가 지은 것입니다. 귀하가 음을 아시니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그 사람이 웃으며 겸양을 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가사 가운데 평화로운 마을마다 주기가 나부낀다라는 말이 제일 잘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희색이 만면했다. '「형께서 곡사를 아시니 여기 와서 앉으시지요'라고 권했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황제 계신 곳 바라본다느니 구름이 열린 곳에 일산이 보인다느니 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아첨이 지나쳤는걸. 이 곡의 격조가 이리도 유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이 사람에 대해 친근감이 생겨 오라는 대로 그쪽으로 가 인사를 하고 앉았다. 그 사람도 진가락의 얼굴 모습을 살펴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은 체 아무 말이 없었다. 진가락이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제가 산에 오를 때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보기만 하면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인형도 역시 마찬가지시니 혹시 제 얼굴에 어디 이상한 곳이라도 있나요? 「형은 모르십니다. 제게 친척이 하나 있는데 생김새가 꼭 형을 닮았습니다. 유객들이 모두 제 친구들이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아! 원래 그랬군요. 인형의 모습도 꾀나 낯이 익어 꼭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워낙 우둔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혹 인형께서는 무슨 생각이 떠오르시는지요? 그 사람이 껄껄 웃었다. 「그건 정말 인연이 있는 모양이로군요. 그래 인형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진가락의 이름은 강호에서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알려주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했다. 「제 성은 육(陸)이요, 이름은 가성이라 합니다.」 (진가락의 세 글자를 뒤집어 중국어로 발음을 하면 육가성이 된다.) 「그래, 인형의 존함은요? 이번에는 진가락이 물었다. 그 사람은 잠깐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제 성은 복성으로 동방(東方)이요. 이름은 외자로 이(耳)입니다. 제 고향은 직례인데 형은 말씨가 본지 사람 같숱니다.」 예 바로 이 고장 사람입니다.」 진가락이 이렇게 대답하자 자칭 동방이라고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강남의 산수가 천하무쌍이란 말만 듣다가 오늘 올라와 보니 과연 헛소문이 아닙니다. 비단 뾰족뾰족한 산붕우리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걸지령(人傑地靈)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재주가 뛰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진가락은 그 사람의 말씨가 속되지 않고 또 2명의 장한이나 노인이 자기에 대해서도 지극히 공손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말을 하면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으면서도 전연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몹시 궁금했다. 「인형께서 그토록 강남을 좋아하시면서 왜 이곳에 와 사시지 않으십니까? 만약 이곳에서 사신다면 제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텐데요. 이 말에 동방이가 껄껄 웃었다. 「반나절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과분한데, 나 같은 속인이 무슨 청복이 있어 그런 향락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인형이 음을 아시고 또 뛰어난 식견이 있으시니 필시 고수가 분명할 것입니다. 어디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을 마치자 칠현금을 진가락의 면전으로 밀었다. 진가락이 손가락을 튕기자 맑고 고운 음이 과연 명품이다. 거문고를 살펴보니 금두에 금실로 내봉(來鳳)이라는 두 글자가 전자로 아로새겨져 있으며. 목질의 문의가 아름답고 온화한 것이 과연 천년의 귀물임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며 이런 거문고는 값을 칠 수가 없는 귀중한 보물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구했을까 궁금했다. 「인형의 솜씨가 비범하신데 이거 공연히 추태를 보이나 봅니다.」 하며 진가락은 현을 고른 다음 금옥의 소리를 내며 뜯기 시작했다. 연주하는 곡은 평사낙안이었다. 동방이는 귀를 기울이고 경청했다. 곡이 끝나자 동방이가 물었다. 「인형은 변방에 가신 적이 있지요? 「제가 회강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지요? 「형의 금운(琴韻)에는 평야의 장활함과 대막의 풍광이 현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정말 기막힌 솜씨입니다. 이 평사낙안이란 곡을 소제 평생에 수십 번 들었습니다만 형 같은 솜씨는 정말 처음입니다. 이와 같은 기상은 만고에 드물 것입니다.」 진가락은 그도 과연 음을 아는 사람이라 호감이 갔다. 동방이가 또 말을 꺼냈다. 「소제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습니다만 여쭈어 보고 싶어도 초면에 너무 무례하지 않을까 해서 망설이게 되는군요. 「말씀하셔도 무방합니다.」 「형의 금운 가운데 은은히 금과의 소리가 있어 홍중에 십만의 갑병을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형의 모습을 보니 귀공자처럼 생겨 온화하고 문아하며 우아한 것이 결코 통병대장(統兵大將)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바로 이 점이 궁금하군요.」 「소제 일개 서생에 불과해 초야에 묻혀 사는데 형의 말씀을 들으니 식은땀이 다 나는군요.」 동방이는 진가락이 한 말을 믿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형은 틀림없이 세가(世家) 출신이 분명합니다. 존대인(尊大人)께서는 지금 어느 관직에 계시며 형은 어떤 공명을 가지고 계신지요? 「선친께서는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라오. 저같이 용렬한 사람이 공명이나 이록(利祿)과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 인형의 말씀이 고상하고 재주 또한 비범한데 설마 과거에 응시했다가 실의하신 것은 아니온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곳 절강 순무는 저와 절친한 교분이 있습니다. 인형께서 내일 그를 한번 만나 보시지요. 혹시 좋은 기회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인형의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소제 관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럼 인형은 평생 초야에 묻혀 사실 생각이십니까? 「백성을 살상하며 위엄을 자랑하느니 차라리 은거하고 살겠습니다. 동방이는 이 말을 듣자 금방 안색이 달라졌다. 남빛 옷을 입은 두 장한은 그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 성큼 다가섰다. 동방이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껄껄 웃었다. 「인형은 고인이라 그 고상한 운치와 흉금을 나 같은 속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요.」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훑어보며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의심과 걱정을 하면서도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친근감이 생겼다. 「인형께서는 회강으로부터 먼 강남으로 돌아오셨으니 도중에 보고 들은 게 필시 많았을 것이오.」 동방이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신주(神州) 만 리 길에 산천이 뛰어남을 구경하자면 그야 물론 눈 뜰 새 없이 바쁘겠지요. 그러나 황하의 범람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 오는 마당이라 풍경을 즐길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재민들이 난봉에서 서정대군의 군량을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인형께서도 도중에 그런 소문을 들으신 바 있습니까? 동방이의 말을 듣고 진가락은 뜨끔했다. (이 사람의 소식통이 어찌 이리도 라를까? 우리가 군량을 뺏은 후 강남으로 달려오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체한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런 일이 있었지요. 이재민들이 입을 것 먹을 것이 없는데도 백성의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구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니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 아닐는지요? 동방이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담담하게 이런 말을 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일은 그뿐이 아닙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홍화회가 이재민을 선동해 일으킨 반란이라고 합디다.」 「홍화회라니!! 그게 뭔데요? 진가락은 모르는 체 반문했다. 「그건 강호에 있는 난동모반의 방회인데 그래 인형은 들어 본 일도 없으십니까? 「소제는 거문고와 바둑 사이를 방랑하는 사람이라 세상사는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말을 하자면 부끄럽기 한이 없군요. 그토록 쟁쟁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방회의 이름을 오늘 처음 듣다니요.」 진가락은 이렇게 말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정에서 소식을 알고 나면 홍화회에 대해 엄한 처벌이 내리겠군요. 「그야 말할 필요조차도 없지요. 그짯 녀석들 별로 대수로을 것도 없어요. 진가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인형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천자께서 재위하시면서 조정 정사를 잘 다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두 명의 재사만 파견해도 홍화회쯤 여반장으로 섬멸할 것입니다. 「소제 조정 정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황당한 얘기가 나오더라도 웃지 마십시오. 소제의 우견으로서는 조정 대신이라는 것들이 모두 밥통이나 다름없는 무리라 무슨 큰일을 해 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동방이와 그의 옆에 있던 노인 장한들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하게 변했다. 「인형의 그 말씀은 세상 모르는 서생의 견해에 불과하오. 조정의 명장이나 재간 있는 관리의 얘기를 꺼낼 것도 없이 제 신변에 있는 이 몇 명의 친구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모두 비범한 인물이라오. 애석한 점은 인형이 문사(文士)라는 사실이오 문사가 아니라면 이들의 재주가 보통이 아님을 금방 아실 수 있을 텐데요. 인형이 만약 무공을 아신다면 제 말이 결코 그룻되지 않음을 아실 것이오.」 동방이의 말이었다. 「소제 비록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사람이지만 태사공(太史 公)의 유협열전을 읽은 뒤부터 평생 영웅 협사를 존경해 왔습니다. 그런데 인형이 어느 종파의 종주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분들은 모두 귀파의 제자들입니까? 가능하시다면 이분들의 절기를 구경하게 해 주신다면 소제도 눈을 뜰 수 있겠습니다.」 진가락의 말에 동방이는 두 장한을 바라다보았다. 「그럼 자네들 어디 한번 재주를 보여 주게나. 그래서 이 육 나리께 지도를 부탁드려도 좋겠지.」 진가락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청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손 쓰는 것을 보면 어느 종파에 속하는지 금방 알 수 있겠지.) 한 장한이 먼저 나섰다. 「나무 위에 있는 까치가 너무 시끄럽게 짖어대니 쏘아 조용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손을 흔들자 수전 하나가 나무 위의 까치를 향해 날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수전이 까치 근처에 접근했을 때 살짝 방향이 바뀌며 빗나갔다. 동방이는 그의 솜씨에도 불구하고 적중하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 장한은 부끄러움에 귀까지 빨개졌다. 다시 한 번 손이 들리고 수전이 또 나무를 향해 날아갔는데 수전이 까치 근처에 접근했을 때 어디서 날아온 진흙덩이인지는 모르지만 이 작은 진흙 덩이가 수전에 맞고 방향이 비뚤어지는 것을 모두들 똑똑히 보았다. 동방이의 옆에 있던 노인은 심연의 오른손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의 수작임을 알았다. 「이 어린 소년의 솜씨가 정말 놀랍군. 어디 우리 한번 친해 보자구. 다섯 손가락이 강조철구로 변해 그의 손을 긁었다. 진가락은 깜짝 놀랐다. 이 노인의 솜씨는 바로 숭양파의 대력응조공이었다. 수장을 뻗을 때 속도는 느렸지만 약간의 바람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 사랑 정도의 무공이라면 강호에서 1, 2위를 다투는 인물이다. 만약 일파의 우두머리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무림의 선배 고수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동방이의 부하 노룻을 하고 있을까?) 손에 든 부채를 흔들어 펴고 노인과 심연 사이를 가로막았다. 노인은 뻗었던 손을 즉시 움츠렸다. 주인이 이 사람을 친구로 정중하게 대해 주고 있는데 그의 물건을 망가뜨리면 큰 실례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가락이 혹시 무예를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해서 다시 한 번 아래위를 훑어보니 부채를 흔드는 모습이 너무나 태연자약하여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인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무예가 고강하다니 대단한 일이오. 인형은 어디서 이 소년을 얻으셨습니까? 동방이의 질문이었다. 「이 애는 결코 무예를 할 줄 모릅니다. 다만 어려서부터 벌레를 잡아 새에게 던졌다는데 그래서 겨냥이 정확할 뿐이지요.」 동방이는 대수로을 것 없다는 진가락의 답변을 듣고 더 추궁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바라보면서, 「인형 수중에 있는 부채는 누구의 묵보(墨寶)입니까? 어디 한번 보여 주시겠소? 진가락이 부채를 그에게 넘겨 주었다. 동방이가 받아 보니 전조의 사인(詞人)인 나란성덕의 금루곡이 씌어 있는데 내용이 더할 나위 없이 고상하고 필력이 걸출하며 고매하다. 「나란성덕은 귀족의 신분으로 여력을 사장(詞章)에 발휘했는데 뛰어난 기상이 일품입니다. 서체는 저수량(情遂良)의 체를 본받았군요. 인형이 명사가 아니면 절대로 어울리지도 않을 것인니다. 인형은 이런 보물을 도대체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정말 훌륭하군요. 「소제 우연히 책방에서 십금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그 간의 십 배를 주고 샀다 하더라도 싼 편이지요. 이와 같은 물건은 대부분 세가에나 전해 내려오는 것인데 인형이 책방에서 쉽게 입수하셨다니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방이가 이런 말을 하며 껄껄 웃었다. 진가락은 그가 자기 말을 곧이듣지 않는 줄 뻔히 알면서도 따라 웃기만 했다. 동방이는 진가락의 당당한 태도가 좀 못마땅했지만 또 금방 작별하기도 섭섭해 다시 한 번 그의 생각을 타진해 보기로 했다. 부채를 뒤집어 보니 뒷면은 글씨도 그림도 없는 백지였다. 「이 부채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감히 소제에게 주십사고 말씀드려도 괜찮을는지요? 「괜찮습니다. 인형의 마음에 드신다니 그냥 가지십시요. 「이 백지에 형의 휘호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후일 기념이 될 것 같군요. 댁이 어디신지? 소제 내일 사람을 시켜 가져오면 어떨는지요? 「무방하시다면 소제 이 자리에서 써 드리겠습니다.」 심연을 시켜 보따리 속에서 붓과 벼루를 꺼내 놓으라고 한 뒤 잠시 생각해 보다가 부채 뒷면에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응조공을 쓸 줄 아는 노인은 그가 붓과 벼루를 휴대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구상이 민첩한 것을 보고는 무공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단정을 내렸다. 동방이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부채를 받은 후, 저도 물건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하며 두 손으로 거문고를 받쳐 진가락의 면전에 놓았다. 「보검은 무사에게 드려야 한다고 했으니 이 거문고는 마땅히 인형이 가지셔야 합니다.」 진가락은 이 거문고가 세상에 드문 보물임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초면인 사람이 이렇게 쉽게 자기에게 주자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재상집 출신이라 진귀한 보물을 많이 보아 왔고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는 생각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심연에게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인형이 회강으로부터 강남에 오셨다는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리까? 동방이가 웃으며 물었다. 한 친구에게 급한 일이 있어 도와 해결해 주려고 왔습니다.」 인형의 표정에 수심이 서려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아직도 그 친구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셨나요? 內1,그렇습니다.」 「그 친구가 어떤 곤란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 친구가 많으니 혹시 힘이 되어 드릴 수도 있을 듯싶은데요.」 며칠 후면 원만히 해결될 것 같습니다. 인형의 호의 대단히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지만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날 만약 소제의 힘이 필요하시면 이 거문고를 가지고 북경으로 오셔서 찾아 주십시오. 이제 그만 함께 하산하시면 어떨까요? 동방이의 말에 진가락이 좋다고 대답을 하고 함깨 손을 잡고 하산했다. 영은(靈隱)에 도착하자 갑자기 맞은편에서 몇 사람이 이쪽을 향해 왔다. 앞장 선 사람의 얼굴이 관옥 같고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모습이 진가락과 비슷했고 나이도 같아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양쪽이 다같이 놀랐다. 「육 형, 이 사람 인형과 비슷하게 생겼지요? 제 조카입니다. 강아 이리 와 육 대숙께 인사를 드려라.」 그 사람이 이쪽으로 와 공손하게 절을 하자 진가락도 황급히 답례를 했다. 이때 갑자기 먼 곳에서 놀라 외치는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진가락이 고개를 돌리고 보니 주기와 그의 부모 그리고 서천굉이 영은사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마 주기가 갑자기 2명의 진가락을 발견하고 놀란 모양이었다. 진가락은 못 본 체 고개를 돌렸다. 「그쪽을 쳐다보지 말아요.」 눈치 빠른 서천굉이 주기를 향해 속삭였다. 「육 형, 우리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꼭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군요. 후일을 약속하고 오늘은 여기서 헤어집시다.」 동방이의 말에 둘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 진가락은 고개를 돌린 채 가볍게 끄덕거렸다. 서천굉이 눈치를 채고 주중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총타주께서 심부름을 시키션서 저 먼저 좀 가봐야겠습니다. 어머님, 기와 함께 더 노세요.」 주기는 달갑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서천굉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장한들의 뒤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때가 되자 서천굉이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그 사람은 호수에서 반나절이나 놀다가 뒤에 순무아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진가락은 방금 동방이와 있었던 일을 서천굉에게 들려 주었다. 두 사람이 궁리를 한 결과 동방이가 관가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추측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위가 대단히 높아 북경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칙명을 띤 사신이 아니면 황친의 종실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습이 만주족을 닮지 않았으니 칙명을 띠고 나온 사신일 가능성이 더 많았다. 또 그의 옆에 있던 노인의 무공이 그토록 막강한데 그의 부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결코 평범한 하급 관리는 아니었다. 「혹시 이 사람이 나타난 것이 사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오늘밤 직접 나가 알아보아야겠군.」 진가락의 말에 서천굉이 좋다고 했다. 「그래요. 하지만 형님을 한 분 모시고 동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혹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옆에 누가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요.」 「조 삼가를 토시고 가지. 그분도 절강 사람이니 항주에 대해서는 낮설지 않을 것 아니오? 권륭 황제 이경(二更)에 진가락과 조반산이 경공을 펼쳐 순무아문을 향해 갔다. 두 사람이 기왓장 위를 소리도 없이 스쳐 지나며 진가락은 이런 생각을 했다. (태극문의 무공은 내가의 비밀스럽고 심오한 절기라고 들었는데 조 삼가의 경공이 과연 대단하구나. 한가할 때 지도를 부탁해야지.) 조반산도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총타주의 권법이 교묘함은 철담 주 노영웅과 대결할 때 이미 보았지만 경공까지 이렇게 비범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분의 사부인 천지괴협이 십 년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훈련을 시킬 수 있었을까?) 어느덧 순무아문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동시에 지붕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지붕 위를 소락가락하며 순찰을 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반산은 그들이 등을 이쪽으로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번쩍 들어 철련자(鐵蓮子) 하나를 수 장 밖에 있는 나무를 향해 던졌다. 그들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 틈을 노려 진가락과 조반산은 몸을 숙인 채 순무아문으로 뚫고 들어가 즉시 지붕 모퉁이의 캄캄한 곳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아무 동정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래쪽에는 대낮처럼 횃불을 밝혀 놓았다. 수백 명의 병정들이 활과 칼을 뽑아 들고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고, 몇 명의 무장이 건물을 끼고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많은 병정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걸을 때는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어다니며 발소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 수백 명이 모여 있으면서도 조용하기 짝이 없어 담 밑의 귀뚜라미 소리가 들릴 지경이요, 가끔 횃불 위의 대나무 조각이 타 터지는 소리가 섞일 뿐이었다. 진가락은 들어갈 방법이 없자 조반산을 향해 손짓을 하고 함께 물러나왔다. 지붕 위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담 밑으로 내려와 낮은 소리로 대책을 상의했다. 진가락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공연히 저들을 놀라게 할 것이 아니라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십시다.」 「그렇게 하지요.」 몸을 날려 다른 집 지붕 위로 뛰어오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태아문의 옆문이 열리며 한 무관이 걸어나왔다. 그 뒤로 4명의 만주 병정이 나와 다섯 사람이 길을 따라 순찰을 도는데 수십 장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이런 삼엄한 경계와 순찰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섯 사람이 다시 거리 쪽으로 나가자 진가락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을 쳐 때려누이지요.」 조반산이 눈치를 채고 달려나가며 3개의 전표를 날리자 만주 병정 셋이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진가락도 2개의 바둑알을 던져 무관과 다른 한 명의 만주병의 혈도를 적중시켰다. 두 사람이 달려들어 캄캄한 곳으로 그들 다섯 명을 끌고 들어가 옷을 벗기고는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두 사람은 지붕 위의 순라꾼이 등을 돌린 틈을 이용해 담을 뛰어넘었다. 횃불이 대낮같이 밝은 마당을 나 보란 듯 당당하게 걸어가니 수천 명의 관병이 왕래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적이 섞여 들어온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원으로 들어가 보니 왕래하고 있는 호위 는 모두가 고관뿐이라 총병 아니면 부장들인데 다만 숫자가 밖에보다 적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빈틈을 찾아 몸을 움츠리고 처마 밑으로 숨어 서까래를 타고 올라가 숨을 죽였다. 몇 명의 무관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완전히 숨어 버린 후였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진가락은 자신들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두 발을 대들보에 건 채 몸을 아래로 숙였다. 침을 발라 창을 찢고 안을 들여다볼 때 조반산이 그의 뒤에서 망을 보았다. 눈으로 육로를 지키고 귀로 팔방을 살피며 적의 공격을 감시했는데, 그들 두 사람이 무예도 막강했지만 담대하기에 감히 이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와 적의 동정을 살필 수는 있었지만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진가락이 안을 들여다보니 꾀 넓은 대청 안에 5, 6명이 서 있는데 모두들 관복을 입은 고관들이고 한 사람이 등을 이쪽으로 대고 앉아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고관들의 태도가 어찌나 공손한지 감히 눈도 옆으로 돌리지 못했다. 이때 밖에서 관원 하나가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세 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큰절을 했다. 진가락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황제를 배알할 때 하는 절이 아닌가? 황제가 미복으로 항주에 나타났단 말인가?) 의혹에 싸여 있을 때 그 관원의 말소리가 들렸다. 「신(臣)절강 포정사(布政司) 윤장해(尹章核) 황상께 인사드리나이다. 진가락은 분명히 들었다. (과연 예측했던 대로 당금의 권륜(乾隆) 황제였구나. 어쩐지 호기가 대단하다고 했더니,,,.) 황제의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대담한 놈이로고.」 윤장해는 조관(朝冠)을 벗고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내 회강을 정토(征討)하려고 락병을 했는데 네놈이 못마땅해 한다는 소문을 들었노라.」 진가락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아니, 황제의 목소리가 어쩌면 이렇게 귀에 익을까?) 윤장해는 이마를 조아리면서 (신, 죽어 마땅하옵니다. 신, 죽어 마땅하읍니다)를 연발했다. 「내 절강에서 군량 십만 석을 모아 급히 운반해 군수에 조달하라고 했거늘 네놈이 어찌하여 내 영을 어긴단 말이냐? 「신, 만번 죽어도 그럴 리가 있겠숩니까? 다만 금년 절강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어려운 형편이라 당장 십만 석을 마련하지 못했을 뿐이옵니다.」 「뭐? 백성들이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다고? 흥! 네가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관리 행세를 하는도다.」 윤장해는 계속 이마를 조아렸다. 「신, 죽어 마땅하옵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단 말이냐? 대군의 양식이 부족해 야단인데 그들 보고 회강에서 모두 굶어 죽으라고 해야 옳단 말이냐? 「신, 감히 아뢰을 말씀이 없습니다.」 「감히 말씀을 아뢸 수 없다니! 어디 말을 해 보도록 하라.」 만세야의 성덕이 사해를 교화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회강은 보잘것없는 오랑캐의 무리입니다. 기실 왕사의 원정이 필요하겠습니까? 대신 하나만 파견하여 덕을 베풀면 오랑캐의 무리는 자연 순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황제는 코웃음만 칠 뿐 말이 없었다. 윤장해가 또 입을 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병자(兵者)는 흉기(兇器)라 성인(聖人)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상께서 만약 원정을 중지하신다면 천하가 모두 그 은덕에 감읍할 것입니다.」 「나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파병, 정벌해야겠는데 그렇다면 천하에 원성이 가득하겠구나.」 윤장해는 죽자 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머리로 바닥을 받는 바 람에 양 볼에 피가 흥건히 흘렀다. '어지간히 고집 센 녀석이로고 감히 짐을 향해 도전을 하다니.」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리는데 진가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원래 이 황제는 오늘 낮 영은 삼축에서 만났던 동방이였기 때문이었다. 진가락은 경험이 풍부해 웬만한 일을 당해도 침착한 편이지만 이때만은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권륜 황제(乾隆皇帝)의 말이 다시 떨어졌다. 「일어나거라. 그리고 네놈의 모자를 여기 남겨 두도록 해라. 윤장해가 다시 또 몇 번이나 이마를 조아리더니 일어나 물러갔다. 권륜이 다른 대신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윤 모의 처사에 분명 폐단이 있을 것이니 총독과 순무는 철저히 조사해 아뢰도록 하라. 사정(私情)을 가지고 비호하는 자는 엄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몇 명의 대신들이 쩔쩔맨다. 「모두들 물러가 십만 석의 군량을 즉시 마련해 운반토록 하라.」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강아(産兒)를 들라 일러라.」 권륜의 말에 내시 하나가 주렴을 걷어 올리고 나갔다가 소년 한 명을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진가락은 이 사람이 바로 자기와 용모가 닮은 이임을 알아보았다. 그가 권륜의 옆에 섰는데 어찌나 친해 보이는지 다른 대신들처럼 겁을 먹은 태도가 아니었다. 「이가수(李可秀)를 들라 일러라.」 권륜의 말에 따라 내시가 복창을 하자 무장 하나가 들어와 이마를 조아렸다. 「신, 절강 수륙제독 이가수 황상께 문안드리옵니다.」 「그 홍화회 문가 성을 가진 비적을 어찌했느냐? 진가락은 문태래의 말이 나오자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다. 「그 비적이 어찌나 흉악하고 사납던지 부상이 대단합니다. 신이 의원을 청해 치료하도록 했사오니 정신 차리기를 기다려 심문하심이 좋을까 합니다.」 「각별히 조심해야 하느니라.」 「신,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가 보도록 하라.」 이가수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우리 저자를 쫓아갑시다.」 진가락의 말에 두 사람은 가볍게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막 발이 땅에 닿았는데 대청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자객이다! 진가락과 조반산은 바깥 마당으로 뛰어나와 사병들 속에 섞였다. 사방에서 대나무 방망이를 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진가락이 낮에 천축에서 만났던 깡마른 노인이 合資 옷을 입은 장한들을 인솔하고 이곳저곳 순시를 돌았다. 그 노인은 안광을 번뜩이며 두리번 거렸다. 진가락은 벌써부터 등을 돌린 채 서서히 문 옆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때 그 노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누구냐? 손을 뻗어 조반산을 향해 낚워채려고 했다. 조반산의 창장이 여봉사폐의 태세로 그의 공격을 물리치고 문 옆으로 달렸다. 노인이 급히 뒤를 쫓으며 수 장을 휘둘러 그의 등을 쪼갰다. 이때 조반산은 벌써 문어귀에 가 있었다. 등뒤에서 이는 권풍 소리를 듣고 몸을 숙이며 반격 태세를 취하는데 진가락이 벌써 렛어 입은 그들의 옷을 벗어 노인의 머리부터 뒤집어씌웠다. 노인이 옷자락을 잡아채자 양쪽으로 찢어졌다. 진가락이 손에 들린 반쪽의 옷자락을 휘두르며 기합을 넣자 옷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나며 깡마른 노인을 후려쳤다. 그 틈을 이용해 진가락이 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노인도 보통이 아니었다. 손을 뻗어 진가락이 들고 있는 옷자락을 끌어당기자 다섯 가닥으로 찢어졌는데도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문밖으로 쫓아나왔다. 바로 이때 병사 한 명이 노인의 가슴을 겨냥하고 평평하게 허공을 날았다. 조반산이 잡아 집어던진 사병이었는데 노인은 왼팔로 받아 한쪽에 치워 놓고 다시 쫓아나왔다. 이렇게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자객들은 벌써 순무아문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뒤에서는 2, 30명의 시위가 벌떼처럼 쫓아나왔다. 「모두 황상을 보호하라, 너희 다섯은 나와 함께 자객의 뒤를 쫓자. 노인이 소리를 지르며 다섯 명의 시위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경공을 펼쳐 거리로 나와 보니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앞에 있는 지붕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 노인도 몸을 날려 단숨에 10여 채의 지붕을 뛰어넘었다. 적과의 거리가 좁혀져 막 수하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앞에 있는 집 아래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적의 지원이 있음을 직감하면서도 노인은 멈추지 않고 쫓아왔다. 앞에 보이던 두 사람이 갑자기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며 거리의 중앙에 우뚝 서자 노인도 지붕에서 뛰어 내리며 쌍장을 교차시켜 진가락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진가락은 물러서지도 않고 또 방어도 하지 않은 채 껄껄 웃었다. 내 당신의 주인과 친한 친구인데 감히 무례하게 굴 거요? 노인은 달빛에 비친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 네놈이 과연 호인이 아니었구나. 나를 따라 황상을 뵈러 가자.」 「네 감히 나를 쫓아을 테냐? 진가락은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노인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뒤에 있던 5명의 시위도 이곳까지 쫓아왔다. 이에 진가락과 조반산은 서쪽을 향해 후퇴를 했다. 「추격하라. 노인이 외쳤다. 서호(西湖) 가에는 만주 병사들이 주둔해 있어서 관가의 역량이 집중해 있는 소재지라 노인은 자신이 있었다. 적이 호반으로 달아나면 그것은 화약을 지고 불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 안심하고 쫓았다. 호숫가로 쫓아오자 진가락 등 두 사람이 한 척의 서호선(西湖船) 위로 뛰어올랐다. 사공이 노를 젓자 언덕에서 수 장이나 미끄러져 나갔다. '여보시오, 도대체 어느 쪽 인물인지 이름이나 남기고 가시오. 노인이 언덕 위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온주의 조반산이오. 귀하는 숭양파 인물이렷다. 「아, 강호상에서 천비여래라고 부르는 조 선생이오. 「그것은 친한 친구들이 놀리려고 붙인 별명일 뿐이오. 귀하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내 성은 백(白)이요, 이름은 외자인데 진(振)이라 하오.」 이 말이 떨어지자 조반산과 진가락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서로 바라다보았다. 원래 백진의 별명은 금조철구였으며 숭양파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고수다. 대력응조공은 30년 전에 벌써 무림에 그 이름을 떨쳤으나 강호상에 소식이 없어 어디를 갔는지 몰라 궁금하다고들 했는데 그런 그가 황제의 곁에 있는 시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반산이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았다. 「원래 금조철구 백 노선배님이셨군요. 어쩐지 공력이 무척 오묘하더라니. 그런데 그토록 우리 뒤를 쫓으시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조 선생이 홍화회의 삼 당가란 말을 들었는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요? 갑자기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었던지 다시 이렇게 물었다. 「아, 혹시 귀회의 총타주이신 진 공자가 아니십니까? 조반산은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 백 노선배님은 어떻게 하시겠소? 진가락이 부채를 펴 들며 말했다. 「월백풍청(月白風淸)의 이 좋은 밤, 백 노선배님께선 우리와 함께 한잔 나누심이 어떠하올지? 「귀하께서 밤에 무태아문에 뛰어들어 관가를 놀라게 했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저와 함께 제 주인을 만나러나 가시지요. 가시지 않으면 제 입장이 난처합니다. 주인이 귀하를 극진히 생각하고 계시니 절대로 괴롭혀 드릴 리 없습니다.」 「당신의 주인이 속인은 아닙니다. 돌아가 그렇게 말하시오. 호수의 경치가 아름다우니 이곳으로 나와 함께 취함이 어떻겠느냐구요 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리다.」 진가락이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백진은 오늘 황상이 이 사람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보았다. 은총이 그와 같은데 만약 득죄를 했다가는 오히려 자기가 책망을 들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야밤에 황상을 놀라게 했는데 잡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룻이 아닌가? 하지만 부근에 배가 없으니 쫓아갈 도리도 없다. 할 수 없이 망설이다가 돌아가 권륜 황제에게 사실 그대로를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권륜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서호에서 나와 함께 달을 완상하고 싶다고 했다니 좋은 일이겠지. 네 먼저 가서 내 즉시 가겠다 하더라고 전하라.」 저들은 망명지도( 亡命之徒)요, 황상께서는 만금지체이십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모험을 피하심이 옳을까 하옵니다. 「어서 가거라.」 백진은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급히 말을 몰아 호숫가로 왔다. 장사근이 뱃머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주인께서 금방 오시겠다 하더라고 당신 주인에게 알리시오. 백진이 복명을 하기 위해 돌아오는데 어림군의 효기영 위군영(衛軍營) , 전봉영의 각 영 군사들이 호숫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로 좀 떨어져 항주에 주둔하고 있는 기영과 수사(水師)가 나타났다. 백진은 혼자 생각했다. (황상께서 어인 일로 그자에게 반해 함께 달 구경을 하시겠다고 이 많은 사람까지 동원하실까?) 급히 돌아와 시위들을 배치하며 권륜의 호위를 서둘렀다. 권륜은 기분이 좋아 웃고 있었는데 절강 수륙제독 이가수가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다. 「준비가 되었겠지? 가자.」 백진이 나타나자 권륜이 물으며 일어섰다. 어느새 편복으로 갈아 입었고 수레를 따라갈 시위관들도 평민의 복장을 한 채 서호로 달렸다. 일행이 호숫가에 당도하자 권륜이 분부를 내렸다. 내가 누군지 그가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모두들 평범한 백성처럼 행동하라.」 이때 서호가에는 곳곳마다 어림군의 각 영 군사들이 매복을 했고, 그 밖에도 기영, 수사,이가수의 친병이 배치되어 서호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등불이 흔들리면서 다섯 척의 배가 이쪽을 향해 저어 왔는데 그중 한 척의 뱃머리에 꼿꼿하게 서 있던 잘생긴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 소인 육 공자의 분부를 받고 동방 선생을 모시러 왔습니다.」 말을 마치자 언덕 위로 뛰어오르며 권륜을 향해 읍을 했다. 바로 위춘화였다. 권륜이 머리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자, 갑시다. 언덕을 내려와 배 위에 올랐다. 이가수, 백진과 3, 40명의 시위가 각기 분승을 했다. 백진은 시위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사람 10여명을 골라 생명을 걸고 황상을 호위하라고 당부했다. 5척의 배가 호심을 향해 저어 나갔다. 호수 가운데 등불이 휘황하다. 물 위에 있는 놀이배가 모두 등불을 밝혀 밤하늘의 뭇별처럼 반짝거렸다. 호심으로 가까이 접근해 나가자 거문고와 퉁소 소리가 수면을 타고 들려오고, 한 척의 작은 배가 나는 듯 달려오더니 뱃머리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동방 선생 오셨습니까? 육 공자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셨습니다. 오셨어요. 위춘화의 대답이었다. 그 배가 뱃머리를 돌려 방향을 바꾸고 맞은편의 선척 대대를 향해 안내를 하며 가까이 접근했다. 백진과 뭇 시위들은 상대방의 이같은 기세에 놀랐다. 비록 대대의 인마를 배치해 놓아 크게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각자 숨겨 둔 병기를 만져 보았다. 저쪽 뱃머리에서 진가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연 동방 선생께서 오셨군요. 어서 이쪽 배로 건너 오세요.」 두 배가 서로 닿자 권륜, 이가수, 백진 등 비교적 지위가 높은 시위 몇 명이 그쪽 배로 건너갔다. 그 배에는 진가락과 그의 서동 두 사람뿐이었다. 백진 등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 꽃배의 선창은 꾀나 넓었다. 그림이 그려진 벽과 아로새긴 난간이 십분 깨끗하고 화려했다. 배 중앙의 탁자 위에는 술잔과 그룻,젓가락 등이 놓여 있고 과일과 안주 등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인형께서 호의로 왕림해 주시니 어찌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고맙게 청하셨는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둘이 손에 손을 잡은 채 크게 웃고 마주 앉았다. 이가수와 백진 등은 모두 권륜의 뒤에 섰다. 진가락은 백진을 향해 가볍게 웃어만 보일 뿐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언뜻 이가수의 뒤에 한 미모의 소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살펴보니 육비청의 제자가 아닌가? 그가 어찌하여 조정의 관원들과 함께 섞여 있단 말인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 번 바라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원지가 그를 향해 생긋 웃으며 눈을 찔끔 감아 아는 체하지 말라는 신융을 했다. 심연이 잔에 술을 따랐다. 진가락은 권륜이 의싱을 할까봐 자기가 먼저 마시고 안주를 집어먹었다. 권륜은 진가락이 먹던 안주를 몇 젓가락 먹더니 아예 손을 멈추고 만다. 이때 이웃 배에서 퉁소 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영가빈이라는 가락이었다. 「인형은 참으로 고상한 취미를 가지신 분이군요. 창졸간에 이토록 용의주도한 배려를 다 하셨으니 말이오.」 권륜이 웃자 진가락은 겸양을 했다. 「술이 있으매 노래 없을 수 없고, 옥여의(玉如意)의 노랫소리 들으니 이 전당의 묘미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녀를 불러 인형을 모시고 대작함이 어떠하올지? 권륜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하고 고개를 돌려 이가수에게 물었다. 「옥여의란 어떤 사람이오? 「항주의 명기입니다. 어찌나 도도한지 자기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황금 열 냥을 주어도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다 하니 어찌 노신이 대작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본 적이 있는가? 이가수는 황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소,,-,,, 소인이 감히 어떻게"""~ 「그럼 내 오늘 한번 보도록 해 주리다.」 권륜이 웃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이에 위춘화가 벌써 저쪽 배로부터 옥여의를 데리고 나타났다. 권륜이 보니 백옥 같은 얼굴이 아리땁고 귀엽고 영롱하기 그지없다. 얼굴이 두드러지게 예쁜 것이 아니라 초롱초롱한 한쌍의 눈이 특히 인상적이요 매력적이다. 단 한 번 둘러보는 사이에 거기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친숙한 눈 인사를 다 하였다. 윤곽이 또렷또렷하고 아리따움이 사람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먼저 진가락을 향해 날아갈 듯 절을 하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육 공자님, 오늘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군요.」 진가락은 손바닥을 펴 권륜 앞으로 내밀었다. 이분은 동방 나리시네.」 옥여의가 권륜을 향해 가볍게 절을 하고 진가락의 옆에 나비처럼 기대어 앉았다. 「노래를 잘 부른다니 오늘 어디 한번 실컷 들어 볼 수 있겠소? 「육 공자님께서 듣고 싶으시다면 사흘 낮 사흘 밤이라도 부르겠어요. 옥여의가 꽃처럼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비파를 받아 가볍게 한 번 퉁긴 뒤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일반아라는 소곡이다. 벽사 창 밖 조용도 하여라. 침상에 엎드려 입맞추려는데 살짝 돌아서니 원망도 하오. 뉘 나를 보고 화났다 하랴 반은 사양이요, 반은 응하고 싶거늘! 진가락이 손뼉을 치며 좋다고 했다. 권륜은 그녀의 청초하고도 부드러운 노랫소리와 달콤하고도 재치 있는 가사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흥이 났다. 옥여의가 눈동자를 돌리며 웃고 붓끝처럼 가는 손가락으로 비파를 퉁기다 고개를 들어 권륜을 바라보며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때리고 싶었는데 장난이라 생각지 마오 정말정말 때리고 싶어라. 정말정말 때리고 싶어라. 살짝 때리자니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요 세게 때리자니 그럴 수도 없는 일. 에라 차라리 때리지 않음이 나으리라. 권륜은 노래가 끝나자 자기 신분을 잊어버렸다. 「때리고 싶거든 때리구려 .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에 진가락이 껄껄 웃었다. 이원지만이 부친의 등뒤에 숨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고, 이가수나 백진 등은 감히 웃는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옥여의는 그들의 거북해하는 모습을 보자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권륜은 구중궁궐에서만 자랐다. 궁중에 비빈과 가녀가 많다고는 하지만 모두 단아하게 판에 박은 사람들뿐이다. 언제 이런 강남의 명기를 대해 본 적이 있었으랴. 그녀의 눈썹과 눈언저리에는 풍정 (風情)이 넘쳐 흐르고, 노랫소리는 변화무쌍한데 아취 또한 그윽하 고 가락은 또 왜 이다지도 얽히고 설켜 꿈틀대는가? 게다가 가끔 미풍에 실려 오는 꽃향기 코를 찌르고 찰싹이는 물결에 달그림자 는 모였다 부서졌다, 정말 꿈속에 노니는 듯 점점 몽롱해지면서 대도(大盜)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 가고 있었다. 옥여의가 권륜과 진가락을 위해 술을 따르자 두 사람이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옥여의도 그들과 함께 한 잔을 비웠다. 권륜은 손에서 벽옥의 반지를 뽑아 옥여의에게 상으로 주었다. 「다시 한 번 노래를 부르지.」 옥여의가 고개를 떨군 채 웃자 두 개의 보조개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정말 아리땁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권륜의 마음이 어이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라 하시니 부르겠습니다만, 동방 나리 절대로 화를 내시면 안 돼요.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권륜도 덩달아 껄껄 웃었다. 「노랫소리에 취해 좋아할 여가도 없는데 어찌 화를 내겠느냐? 옥여의가 그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치더니 비파를 퉁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경쾌한 가락이 울려퍼졌다. 비파의 전주 소리를 듣고 아직 노래도 나오지 않았는데 권륜은 박수 갈채부터 먼저 보냈다. 배고파 종일을 뛰어다니다 겨우 먹을 것을 구하니 이제 입을 옷이 걱정이구나. 비단 옷을 치렁치렁 감쌌건만 고개 들어 지붕이 낮다고 원망도 하는데 고루거각을 지었으나 침상 앞에 고운 아내 없구나. 귀여운 아내와 예쁜 첩 얻었으나 출타할때 탈 말 없구나. 높은말 한필사놓으니 앞뒤로 종자가 또 부족해 수십 명 하인을 거느리나 돈은 있어도 세도 없으니 멸시가 이만저만. 운 좋아 지현(知縣)은 되었으나 관직 낮음이 또 원망타. 상서(尙書)도 지내 보고, 재상이 되고 나니 아침 저녁 황제의 자리가 탐나도다. 권륜은 웃으며 흐뭇한 기분으로 재미있는 가사를 듣고 있다가 (아침 저녁 황제의 자리가 탐나도다)라고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옥여의의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하루아침에 천자 되어 동정서토 오랑캐 무찌르니 사해 만국이 다 머리를 숙이도다. 신선을 청해다가 바둑이나 두어 볼까. 신선을 청해다 바둑을 두자면서 하늘에 오를 사다리 재촉하니, 사다리 다 되기도 전에 염라대왕 화를 내며 재촉이 성화 같다. 하늘에 올라서도 자리 낮음이 한이로다. 옥황상제 자리마저 양보해 주었으나 천궁이 화려하지 않다고 투정이로다. 진가락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권륜의 표정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이 계집이 내 신분을 알고 고의로 이런 가사를 불러 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냐?) 옥여의는 노래를 끝내자 비파를 내려놓고 웃었다. 「이것은 가난한 선비를 놀리는 노래예요.9동방 나리나 육 공자는 모두 부귀한 분이라 고루거각에 귀여운 아내와 예쁜 첩이 고루고루 갖추어져 있으니 달리 생각 마세요.」 권륜이 껄껄 웃으며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곁눈질로 옥여의를 바라보니 아리따운 모습과 귀여운 자태에 그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 이가수예게 황궁에 들여보내라 명령을 할까 궁리를 했다. 은밀하게 해야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배후에서 천자가 호색한다고 나쁜 소문만 퍼질 것이었다. 이때 갑자기 진가락의 말소리가 들렸다. 「한황은 호색하여 경국 미인을 구했고, 당현종(唐玄宗)은 풍류의 천자였습니다. 천자가 풍류를 즐기는 것이야 대수로을 것 없지만 멀정한 금수강산을 오랑캐인 안록산(安祿山)의 수중에 빼앗긴 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지요.」 당현종도 초기에는 영명했지만 만년에 가서 어리석어졌지요. 그의 조상인 당태종에 비하면 어림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당태종의 뛰어난 재주와 꾀, 인형도 탄복하고 계시겠지요. 권륜이 평생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한무제와 당태종이었다. 두 황제는 국토를 넓혀 이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그가 황제가 된 이래 어떻게 하면 그들을 본받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회강에 원정을 하려고 파병을 계획한 것이다. 원래의 뜻은 한무제와 당태종의 위업을 계승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진가락이 존경하느냐고 묻자, 당태종의 뛰어난 무용과 영명이야 오랑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온 천하가 존경해 마지않았지요 그분의 문필 재능과 군사상의 책략이야 세상에 보기 드물고말고요.」 소제 당태종의 언행을 기술한 정관정요를 읽어 보았는데 책 가운데 몇 마디 말은 대단히 일리가 있더군요.」 「어느 대목 말입니까? 권륜도 반가워 물었다. 그가 진가락과 만난 이래 호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대화만은 재와 물과 기름 같았다. 그런데 이제 그가 당태종을 존경한다는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당태종의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지요. (배는 인군과 비할 수 있고, 물은 백성과 비할 수 있다. 물이 배를 띄을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엎을 수도 있다.) 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천자가 유도한즉 백성의 추앙을 받을 것이오, 무도(無道)한즉 버림을 받을 것이니 참으로 두렵다)고요.」 권륜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진가락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비유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우리가 이 배에 타고 있으면서 물의 성질에 따른다면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대로 노를 젓거나 난동을 부리거나 괴상한 생각이 나서 천리마보다 빨리 가고 싶어한다면 이 배는 뒤집어지고 말 것입니다. 호수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확실히 위협이다. 황제를 멸시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언제라도 황실을 뒤엎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당장이라도 황제를 물 속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권륜은 평생 조부인 강희(康熙)와 부친인 옹정만 마음속으로 두려워했지 언제 이런 위협과 공갈을 받아 본 일이 있었겠는가? 끓어오르는 노기를 가까스로 참으며 생각했다. (지금은 네놈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이게 그냥 놓아 두지만 이따가 잡힌 뒤에도 계속 지껄이나, 아러면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하나 구경 좀 하자.) 그는 어림군과 주방기영(駐防旗營)이 이미 서호 주위를 포위하고 있음을 안다. 게다가 또 수하에 있는 시위는 모두 천 사람 만 사람 중에서 고르고 고른 무공이 탁월한 고수들뿐이다. 보잘것없는 강호의 방회가 감히 무슨 일을 저지르랴? 권륜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장자(長子) 가로되, (천지는 군자를 낳고, 군자는 또 천지를 다스린다. 군자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천지와 그 덕 (德)을 나란히 한 사람으로 만물을 총령하는 사람이요, 만민의 부모다.) 제황은 하늘의 명을 받았으니 온 천하가 모두 제황의 신하라 했습니다. 인형의 논리는 선현의 가르침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지요. 진가락이 주전자를 들어 잔에 술을 따르며 또 말을 꺼냈다. 우리 절강의 명망 있는 향현인 황리주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황제가 되기 전에 (천하 사람의 생명을 도살하고 천하의 자녀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함으로써 나 한 사람의 산업을 획득한다. 이미 획득했으니 천하 사람의 골수를 박탈하고 천하의 자녀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함으로써 나 한 사람의 향락을 받들게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리고 가로되, 이것은 내 상업의 이자(利子)로다 이 말씀 더할 나위 없이 잘 하신 것이지요.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으시고, 자 술이나 드시지요.」 말을 마치자 잔을 들어 비워 버렸다. 권륜은 더 참을 수가 없어 술잔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화를 내려고 했다. 배 위에서 술잔이 뱃바닥에 떨어지려고 하는 찰나 심연이 옆에서 이를 받았다. 잔에 가득히 담겼던 술이 반 이상이나 엎질러지긴 했지만 신연은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동방 나리, 다행히 잔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권륜은 일이 이렇게 되자 어리둥절해서 파랗게 질린 채 코웃음만 쳤다. 이가수가 잔을 받으며 황제의 눈치를 보아 행동을 취할 태세다. 권륜이 정신을 가다듬고 껄껄 웃었다. 육 형, 이 동자 손발이 기민하기 짝이 없군. 고개를 돌려 한 명의 시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 이 동자와 어디 한번 놀아 보도록 해라. 그러나 정말 대결을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그 시위의 이름은 범중은으로, 한 쌍의 판관필(判官筆)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황상의 지시를 받자 즉시 허리를 펴고 심연을 향해 가는 체하다가 판관필을 쏘아 그의 좌우 혈도를 찍으려고 했다. 심연은 즉시 뒤로 다섯 자쯤 뛰어 뱃머리에 섰다. 워낙 어린 나이라 공력은 부족했으나 경공이야 천지괴협 원사소에게 배운 것이라 손색이 없었다. 심연은 범중은의 판관필이 무서운 속도로 오는 것을 보고 무공으로써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직감한 그가 배를 덮는 뜸 위로 펄쩍 뛰어 오르며 웃었다. 「우리 숨바꼭질할래요? 나를 잡으면 진 것으로 하고 다시 내가 잡으러 갈께요.」 범중은은 판관필이 빛맞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두 발을 땅에 한 번 구르며 뜸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막 뛰어오르자마자 심연은 일학충천의 재주를 펴 한 마리의 큰 새처럼 왼쪽에 있는 작은 배로 날아 떨어졌다. 범중은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두 사람은 서로 이쪽에서 뛰어오르면 저쪽에서 뛰어내리며 10여 척의 배 사이를 오락가락 맴돌았다. 범중은은 심연의 앞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자 약이 바짝 올라 다시 한 바퀴 맴을 돌았는데 눈앞에 세 척의 작은 배가 정자 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심연이 가까운 배로 뛰어오르자 그는 왼쪽으로 덮쳤다. 심연이 낄낄거리며 오른쪽에 있는 배로 뛰었다. 그런데 그가 왼쪽으로 덮친 것은 어디까지나 허세였다. 즉시 오른쪽 배로 뛰어올라 왼손에 쥔 판관필을 뻗어 심연의 가슴을 찍으려 했다. 심연이 몸을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위급한 가운데 앞을 향해 덮치며 손바닥으로 범중은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범중은이 왼손의 판관필을 들어 막으며 오른손의 판관필로 상대방의 등을 급히 찌르려고 했다. 어찌나 그 솜씨가 빠르고 정확한지 피할 길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육중한 병기가 급습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적의 정체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우선 자구책에 급급했다. 허리를 꼬며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손의 판관필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해 상대방의 병기에 부딪쳤다. 쩔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상대방의 병기가 살짝 내려가는 듯하더니 다시 그의 허리를 향해 비스듬히 날아왔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상대방의 병기가 쇠로 만든 노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노를 쓰는 사람은 선미에 있던 뱃사공이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벌써 상대방의 힘이 막강함을 알았기 때문에 무리를 해 방어할 수가 없었다. 몸을 솟구쳐 가볍게 뱃전으로 내려서며 뱃사공의 혈도를 찍으려고 했다. 장사근이 심연의 위기를 풀어 주고 나니 범중은이 자기를 향해 달려들려고 허공에 몸을 솟구친다. 급히 철장을 들어 수면을 휘젓자 배가 반원을 그렸다. 범중은이 뱃전에 떨어지는 찰나 배는 원위치에 있지 않았다. 아이쿠 하는 비명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범중은은 물 속에 풍덩 빠져 허위적거리며 물을 들이켰다. 「술래잡기를 하자고 했더니 날 잡으러 물 속으로 들어갔나요? 심연이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권륜이 타고 있는 배 위에서 헤엄을 잘 치는 시위 2명이 그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를 향해 가까이 헤엄쳐 가자 장사근이 범중은의 면전을 향해 노를 뻗었다. 그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철장이 손에 닿자 그것이 무슨 물건이건 아랑곳할 것도 없이 팍 잡고 늘어졌다. 장사근이 노를 들어 권륜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자, 받으시오. 범중은의 사숙인 용준도 어전 시위였다. 황급히 뱃머리로 뛰어들며 손을 뻗어 범중은을 받았다. 범중은은 황상의 면전에서 이토록 망신을 당했으니 난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무슨 벌이 내릴는지도 모른다. 화도 났지만 우선 앞이 캄캄했다. 문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그는 선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물만 뚝뚝 뱃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용준은 동료로부터 심연이 낮에 삼축에서 진흙덩이를 던져 수전을 때림으로써 어전 시위를 망신시켰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자기의 사질을 농락한 것이다. 그런 그가 진가락의 뒤로 돌아가자 벌떡 일어나서 음흉하게 말을 꺼냈다. 「이 어린 소년의 암기가 고명하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디 한번 구경하고 싶군요.」 진가락이 권륜에게 말했다. 「제가 인형과 처음 만나자마자 옛 벗과 같이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아랫사람들의 말다툼으로 말미암아 서로의 우의를 깨뜨리고 싶지 않군요. 이분이 아마 암기의 명수이신 모양인데 어디 과녁을 하나 주어 재주를 펴게 하심이 어떨는지요? 권륜이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서 응낙을 했다. 「그러나 창졸간에 어디 과녁이 있나요? 심연이 몸을 날려 양성협이 타고 있는 배로 건너가 몇 마디 귓속말을 했다. 양성협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옆에 있는 작은 배에 타고 있던 장진을 향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장진이 뛰어 건너왔다. 「저 배의 끄트머리를 잡으시오.」 양성협이 소리를 지르자 장진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자기가 원래 타고 있던 배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이전 양성협도 벌써 뱃머리의 막대기를 끌어 잡아당겼다. 「자, 일으켜 세우자구. 두 사람은 기합 소리와 함께 한 척의 작은 배를 번짹 들어을렸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도 한쪽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 같은 신통한 재주에 자신들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낙빙도 보고 재미가 나서 배 위로 뛰어오르며 웃었다. 「정말 훌륭한 과녁이로군요. 쌍장을 저어 양성협이 타고 있는 배를 꽃배 가까이 접근시켰다. 「도련님, 이것 쓰실 만하겠어요? 붓으로 과녁을 그리시지요.」 심연이 외치자 진가락이 술잔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손을 들어 휘두르자 술잔이 날아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높이 들고 있는 작은 뱃바닥에 박혔는데 평평하고 온전한 채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또 한 번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백진과 용준 등 고수들은 양성협과 장진이 배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그 힘이 막강한 데 놀랐다. 그러나 뚝심이 워낙 세어서 그 정도겠거니 했다. 그런데 진가락이 내력을 이용해 자기(磁器)로 된 술잔을 뱃 바닥에 박는 데 이르러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마를 찡그린 채 대결하기 어려운 상대임을 직감했다. 「저 술잔을 과녁으로 삼고 이분의 암기 묘기를 구경했으면 합니다. 진가락이 웃으며 말을 했다. 낙빙이 노를 저어 배를 수 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너무 먼가요? 그녀가 묻는데도 용준은 아무 대꾸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다섯개의 독질려를 연속해서 휘둘렀다. 짤그랑거리는 어지러운 소리 속에 자기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뱃바닥에 박힌 술잔이 산산조각으로 부선졌다. 「과연 휼륭한 솜씨로군요.」 심연이 배 뒤로부터 뛰어나오며 칭찬을 하는데 용준은 갑자기 독심을 품고 다시 다섯 개의 독질려를 날렸다. 이번에는 심연의 상하좌우를 겨냥한 것이다. 사람들은 달資 아래서 이 광경을 똑똑히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용준의 암기의 무공은 정말 무서웠다. 손이 들리자마자 암기가 벌써 심연의 면전에 와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속에 다섯 개의 독질려가 심연의 다섯 곳의 급소를 노렸다. 깜짝 놀란 심연이 몸을 숙이고 데굴데굴 굴렀고, 낙빙의 두 자루 비도가 벌써 날았다. 쩔그렁 잴그렁 소리와 함께 비도와 2개의 독질려가 부딪쳐 호수 가운데 떨어졌다. 심연이 구르는 바람에 나머지 2개는 피할 수 있었지만 중간의 하나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왼쪽 어깨에 맞고야 말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겠는데 어깨가 뻣뻣하게 마비되자 일어서며 욕을 퍼부었다. 홍화회의 군웅들이 노기충천하여 작은 배를 저어 몰려와 용준과 대결을 하려고 했다. 청궁의 뭇 시위들도 용준의 태도가 지나치게 악랄하다고 느꼈다. 황제의 면전, 뭇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열한 수단으로 상대방의 어린이 하나를 상대하다니 이건 분명 면목이 없는 수치임애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홍화회 군웅들이 험악한 기세로 모여들자 긴 옷자락 밑에 숨기고 있던 병기를 꺼내 들고 황제를 호위하며 대결할 태세를 취했다. 이가수는 호가를 꺼내 입가에 대고 불려고 했다. 이 호드기만 불면 병사들이 모여듦은 물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형제 여러분, 동방 선생은 내 귀한 손님이오. 우리가 무례하게 굴면 아니 되오. 다들 물러서시오.」 진가락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군웅들은 총타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작은 배를 저어 수 장 밖으로 퇴각했다. 이때 양성협과 장진은 들어올렸던 작은 배를 수면 위에 내려놓았고 낙빙은 심연의 상처를 보살펴 주었다. 서천굉도 이쪽으로 뛰어와 어떠냐고 물었다. 「넷째아주머니, 칠야, 안심하세요. 아프지도 않고 몹시 가렵기만 하군요.」 심연이 이렇게 대답하며 상처를 손으로 긁으려고 했다. 낙빙과 서천굉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암기에 극히 무서운 독약이 묻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심연의 두 손을 잡았다. 「가려워 죽을 지경이에요. 빨리 이 손을 놓아 주세요.」 심연이 이렇게 말하며 몸부림을 쳤다. 서천굉은 마음속으로는 다황했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좀 참고 있으라구.」 하고는 고개를 돌려 낙빙을 바라다보았다. 「형수님, 삼가를 모셔 오세요. 낙빙이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낙빙이 막 떠나자 작은 배 한 척이 쏜살같이 이쪽으로 저어 오는데 뱃머리에 홍화회의 항주 총두목인 마선균이 서 있었다. 그는 서천굉이 타고 있는 배 위로 뛰어올라 이렇게 소근거렸다. 「칠 당가, 서호가에 청병이 가득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어림군의 각 영도 포함되어 있어요.」 「몇 명이나 됩디까? 「칠팔천 명쯤요. 외부에서 호응할 기영의 병정들을 빼고서도요.」 「즉시 항주성 밖의 형제들을 호숫가에 집합시키고 명령을 기다리도록 해 주시오. 절대로 관부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하구요. 모두들 몸에 빨간 꽃을 한 송이씩 숨기고 있으라고 하시오.」 마선균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서천굉이 또 물었다. 「몇 명이나 즉시 소집할 수 있습니까? 「제 공장의 직공을 포함해 이천 명 정도는 금방 소집이 되겠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성 밖의 형제들이 도착한다면 또 천 명쯤 추가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최소 1대 5로 상대를 한다면 삼천 명이 만 오천 명의 청병을 당해 낼 수는 있겠지요. 또 녹영 안에도 우리 형제가 있으니까요. 가셔서 잘 배려하도록 하시오.」 마선균이 명령을 받고 떠났다. 조반산이 이쪽으로 와 심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그의 어깨에 박힌 독질려를 가볍게 뽑고 주머니 속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어 심연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몸을 서천굉 쪽으로 돌리고 쓸쓸하게 말했다. 「칠제, 구할 방법이 없소.」 서천굉이 깜짝 놀랐다. 「뭐라구요? 「암기에 묻은 독이 대단히 무서운 것이어서 암기 주인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은 손쓸 방법이 없구려.」 「그럼 앞으로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요? 「길어 봐야 세 시간 정도,,,,,,.」 「삼가, 우리가 가서 그 녀석을 잡아다 놓고 구해 내라 하지요. 이 말을 들은 조반산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주머니속에서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꺼내 왼손에 끼고 몸을 날렸다. 세 번 펄쩍 뛰어 세 척의 뱃머리를 발로 찍자 벌써 진가락과 권륜 앞에 나타났다. 「육 공자님, 제가 이 암기의 명가에게 그 수단을 좀 배울까 합니다. 진가락은 용준이 심연을 다치게 한 것에 대해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조반산이 나타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권륜을 향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암기에 대한 이 친구의 재주가 상당합니다. 저들 두 사람이 제주를 한번 겨루어 본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입니다.」 권륜릉은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자연스럽게 찬성을 하고 나섰다. 험악하게 싸울수록 더욱 즐거운 것이다. 고개를 돌려 용준을 바라다보며, 「가 보게. 그러나 체면이 손상되면 아니 되네.」 용준이 대답을 했다. 이렇게 되자 백진이 용준의 귀에 입을 대고 주의를 주었다. 「저 사람은 천비여래야. 용 현제, 각별히 조심을 하라구.」 용준도 천비여래의 명성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어 마음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암기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적수를 만난 일이 없는 그였다. 오늘 강호에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천비여래를 물리치기만 한다면 그건 여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용준은 여러 사람을 향해 두 주먹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 「보잘것없는 용준, 천비여래 조 선배님을 모시고 한수 배우고자 합니다.」 조반산이 코웃음을 쳤다. 「과연 당신이었군. 내 본래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은 이렇게 비열한 수단을 쓰지 않을 것으로 믿었지.」 용준은 냉소를 머금었다. 「내 겉우 팔 두 개밖에 가지지 않았지만 어디 한번 천비여래의 가르침을 부탁해 볼까요. 어디까지나 그를 비웃는 말이었다. 천 개의 팔 아니라 만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 이 두 팔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반산이 몸을 돌이켜 물러나오며 낮게 소리를 질렀다. 「따라오시오. 「난 당신 하나하고만 암기를 겨를 참이오. 조반산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아니 그럼, 우리 형제가 뒤에서 당신을 몰래 해칠 것으로 알았소? 「좋소, 내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런 거요. 몸을 날려 한 척의 작은 뱃머리에 올라섰다. 그는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홍화회의 악랄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비록 조반 산이 장담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이미 비열한 수단으로 상대방의 소년 하나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해칠까 겁이 났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장소에는 발을 디딜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조반산은 그가 뱃머리에 서자마자 왼손을 번쩍 들고 오른손을 휘둘러 세 개의 금전표와 세 개의 수전을 발사하고 머리를 숙이며 등뒤로 또 하나의 배노를 쏘았다. 용준은 그가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일곱 가지 암기를 동시에 발사하자 간담이 싸늘해졌다. 즉시 피할 도리도 없거니와 체면이고 뭐고 돌볼 겨를이 없었다. 몸을 움츠리고 납작 엎드리자 팍팍팍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곱 가지 암기가 모두 뱃바닥을 때렸다. 선미에 섰던 사람이 욕을 퍼부었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 꼴에 뻔뻔하게 무슨 암기를 겨루자고 나서는가? 용준은 벌떡 일어나 섰다. 달資 아래 조반산의 형체가 뚜렷이 보였다. 우선 한 개의 보리자를 그를 향해 날렸다. 조반산은 공기를 찢는 소리를 듣고 독질려가 아님을 알고 몸을 옆으로 돌리며 오른쪽으로 피하는데 세 개의 독질려가 벌써 얼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조반산은 철판교(鐵板橋)의 재주를 부려 고개를 뒤로 꺾었다. 3개의 독질려가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하는구나. 찬사를 보내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다시 또 세 개의 독질려가 이번에는 하체를 노린다. 용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곱 가지 암기를 쏜 것이다. 이를 연환삼격(連環三擊)이라 한다. 조반산은 몸을 꼿꼿이 세우기도 전에 왼손의 비황석과 오른손의 철련자를 날려 2개의 독질려를 맞춰 물 속에 떨어뜨리고 중간의 하나 는 손을 뻗어 받아 품 속에 집어넣었다. 과연 상대방의 암기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음험하고 악랄한 인간이라 어쩌면 속임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조반산은 속아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손을 번쩍 들어 세 개의 금전표로 그의 상체 신정혈(神庭穴)과 젖 밑의 천지혈(天池穴)하체의 혈해혈(血 海穴)을 노렸다. 용준은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몸을 빼 다른 한 척의 배로 내뺐다. 조반산은 그의 발이 떨어지는 장소를 확인하고 1개의 수전을 그를 향해 뿌렸다. 용준이 손을 들어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괴상하게 생긴 병기 하나가 활처럼 굽은 상태로 선회해 이쪽으로 날아왔다. 급히 머리를 숙여 피하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병기가 다시 조반산의 수중으로 날아 돌아가고 조반산이 그것을 다시 이쪽으로 던졌다. 용준은 여태까지 이 독특한 암기인 회룡벽(廻靈壁)을 본 일이 없어 놀란 나머지 정신이 어지러워 방어 태세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데 2개의 보리자가 면전으로 날아와 왼쪽 눈섭 끝에 있는 양백혈(陽白穴)과 왼쪽 어깨에 있는 결분혈(缺盆穴)을 동시에 맞고 나무토막 쓰러지듯 뱃머리에 고꾸라졌다. 뭇 시위들은 그가 쓰러지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내에서 용준과 같은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일위도강 저원(情 圓)이 칼을 들고 얼굴을 가진 채 그를 구출하려고 몸을 날렸다. 몸이 반공에 떠 있는데 맞은편에서도 누군가가 칼을 들고 뛰었다. 저원이 먼저 뛰었기 때문에 한발 앞서 뱃머리에 떨어져 내려 즉시 오른손의 칼을 휘둘러 맞은편에 나타난 그 사람의 목을 노렸다. 그를 위협해 물 속에 빠뜨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타난 사람도 몸이 반공에 뜬 채 칼끝으로 저원의 오른팔을 찌르려고 노렸다. 밤이라지만 어찌나 정확하고 빠른지 놀라운 솜씨였다. 저원은 급히 손을 거두어 들이며 비스듬히 상대의 발을 찌르려고 했다. 이 일초는 달마 검술 가운데 있는 허식분금이다. 그 사람은 왼발을 흔들다 오른발로 저원의 오른팔을 걷어차자 저원은 팔을 들어 피하기에 바빠 미처 변초를 쓸 겨를이 없었다. 이 틈을 이용해 그 사람은 벌써 뱃머리에 내려와 섰다. 달빛 아래 보니 도사의 복장을 했는데 왼쪽 소매를 허리춤에 붙들어 매었다. 저원은 원래 중으로, 법명을 지원이라 했는데 불가의 규칙을 어겨 도첩을 빼앗기고 강제로 쫓겨나 환속을 한 뒤 저원이라 개명했다. 그는 숙달된 달마 검술에 의지해 황제의 시위가 된 것이다. 그가 원래 불문(佛門)에 있었고, 또 환속한 뒤에도 오랫동안 궁성에만 있었기 때문에 강호의 일에 대해서는 전연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나타난 적의 검법이 신속한 것이 평생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상대가 72수 추혼탈명검(追魂奪命劍)으로 천하에 독보적 존재인 무진 도인임을 알 리 없는 그였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저원이 묻는 말에 무진이 웃었다. 「아니, 검법을 배웠다는 주제에 내가 누군지조차 모르나? 저원이 금강복호(金剛伏虎)에 이어 구품연태의 절기를 발휘해 상하로 공격하자 무진이 또 한 번 웃었다. 「검법은 그래도 쓸 만하군. 어디 한번 금륜도겁의 묘기를 써 보시지.」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막 나오자 저원이 과연 옆으로 빠져 나오는데 금륜도겁의 술수로 나왔다. 그는 칼을 뻗자마자 겁이 덜컥 났다. (아니, 어떻게 내가 금륜도겁으로 나을지 알았을까?) 무진이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채 칼끝으로 좌우를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 「부구읍수에 이어 흥애박견(洪崖拍肩)으로 나와 보시요. 말이 끝나자마자 저원은 과연 그의 말대로 이 두 가지 절초를 쓰고 나왔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가 결사적으로 나을 수가 없었다. 마치 사부가 제자를 훈련시키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저원은 평소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검초를 쓰고 난 뒤에 뒤로 두 발짝 물러서서 상대를 응시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또 화도 났지만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기실 무진은 달마 검법의 정수를 깊이 알고 있어, 저원의 조예가 비범한 것을 본 그가 칼끝을 움직여 저훤이 그 묘기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를 한 것이다. 그리고 사전에 그 초술의 이름을 먼저 말했다. 이렇게 되자 겁을 먹은 저원은 감히 재차 공격을 펼 수가 없었다. 낙빙은 고물에서 쌍장을 든 채 빙글빙글 웃으며 진가락과 권륜의 면전에 배를 갖다 댔다. 황제로 하여금 그의 부하가 얼마나 났나 똑똑히 좀 보라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때 조반산은 벌써 용준을 붙잡았고 서천굉은 낮은 소리로 해약을 내놓으라고 위협하고 있었다. 용준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서천굉이 칼을 그의 목에 대고 위협을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 죽을 각오로 버티기만 하면 돌아간 뒤에 황상께서 상을 내리실 것이다. 겁을 먹은 기색이 조금만 보여도 황상의 체면을 깎는 것이요, 내 일생의 전적을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황상의 면전에서 제까짓 토비들이 설마 나를 죽이지는 못하리라.) 내 이 초술은 선인지로(仙人指路)다. 그대는 회두시안의 초수로 받아라. 무진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저원은 그가 시키는 초술로 대항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무진의 검봉이 그의 오른쪽 볼을 찔렀다. 저원은 달마 검법을 20여 년간이나 익혀 심검합일이 숙달될 대로 숙달되어 확고부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상대의 검봉이 이렇게 나오니 자기로서도 부득불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끝을 동쪽으로 비스듬히 휘둘러 2개의 칼날이 하나는 하늘을, 하나는 땅을 향했으니, 이것이 바로 무진이 지시한 그대로의 회두시안이다. 무진은 선인지로의 초술을 씀으로 해서 지원이 회두시안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도가에서는 선(仙)을 구하 고 불가에서는 불(佛)을 배운다. 그를 지도해 줌으로써 당황하게 만들면 스스로 실패를 자인하고 물러가기를 바란 것이다. 저원이 회두시안으로 방어를 하고 나니 무진이 장검을 거두어들이며 뚫어질듯 자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요,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었다. 내 이 초술은 당두봉갈(當頭轉喝)이니 빨리 횡강비도로 나오라. 무진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며 장검을 뻗어 그의 머리를 쪼갰다. 저원의 몸이 칼이 돌아가는 대로 따라 도는데 왼손이 오른손 팔꿈치를 누르고 있는 자세가 바로 달마 검술 가운데 있는 횡강비 도의 술초가 아니고 무엇인가? 권륜도 약간의 무예는 알고 있었다.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대내에 기재이능 지사가 많다보니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 왔던 것이다. 무진의 외치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저원이 벌써 그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하니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지만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원이 대내의 뭇 시위들 가운데 그래도 일등의 고수라 할 수 있는 처지인데 토비 하나를 상대하면서 고양이 쥐 놀리듯 농락을 당하고 있으니 정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저 따위 인물을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그가 무진의 검술이 해내무적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권륜이 또 몇 초의 대결을 구경했지만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백진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원을 불러들이도록 하게.」 「저 형, 주인께서 들어오라고 하시네.」 저원은 이 소리를 듣자 너무나 반가웠다. 만청군대의 군법이 너무나 준엄해서 마음대로 진퇴를 결정했다가는 중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진퇴양난이라 난처해 견딜 수 없는데 바로 이때에 황상의 영이 떨어진 것이다. 특사라도 받는 기분에 칼로 전신을 방어하면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이를 본 무진이 호통을 쳤다. 「일찌감치 가라고 할 때는 가지 않더니 이제 가려고 들다니, 어림없는 수작이로다. 흥, 이 나리 절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 장검이 번쩍이는데 저원이 보니 전후좌우가 모두 적의 검이다. 전신이 검기에 둘러싸여 반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과 목에 싸늘한 것이 스치고 지나는 것이,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병기가 여기저기 제멋대로 건드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백진은 저원이 빠져나오지 못하자 몸을 날려 두 사람을 향해 덮치며 쌍조(雙爪)를 뻗어 무진의 장검을 빼앗으려고 했다. 무진은 그의 기세가 험악한 것을 보고 검봉을 돌리며 그의 하체를 찌르려 했다. 백진의 무예는 저원보다 몇 배나 고명했다.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검봉을 치면서 오른손의 일 장으로 그의 왼쪽 어깨를 때렸다. 무진은 왼팔이 없기 때문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이 왼쪽을 공격하면 피해야지 반격할 도리가 없는 그였다. 몸을 옆으로 빼면서 오른쪽 검으로 적의 목을 노렸다. 신속하기 짝이 없는 솜씨였으나 백진의 몸이 워낙 빨랐기 때문에 무진의 칼에 찔리지는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칼을 피하면서도 우장은 계속 상대방의 왼쪽 어깨를 추격했다. 무진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오른팔을 결국 잡히고 말았다. 조반산, 서천굉 , 낙빙 등이 이를 똑똑히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검광과 장영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진이 왼발을 번쩍 들어 상대방의 오른쪽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백진이 왼쪽으로 피하며 그 기세를 이용해 장검을 빼앗으려 하자 무진은 왼발이 미처 떨어지기 전에 오른발을 들어 찼다, 백진은 그의 발길질이 번개처럼 이렇게 빠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평생 보지 못한 묘기에 급히 뒤로 물러섰다. 무진은 오른발이 헛 나가자 왼발을 들어 걷어찼다. 이렇게 되자 백진이 피하지 못하고 넓적다리를 얼얼하게 걷어채이고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물 속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워낙 하체가 단단한 그라 즉시 안정된 자세를 취하며 두 손으로 무진의 두 눈을 할퀴려고 덤벼들었다. 무진이 고개를 돌려 피하기는 했지만 어깨를 그의 수장에 맞았다. 무진은 욕을 퍼부으며 연환미종퇴를 정신없이 휘둘렀다. 백진이 즉시 변초를 했는데도 상대방의 발이 또 한 번 들리는 것을 보고 몸을 솟구쳐 피했다.2명의 고수의 무공이 다같이 신속하고 민첩해 어찌나 빠르게 돌아가는지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이 다 어지러을 지경이었다. 낙빙은 고물에 앉아 있다가 백진이 몸을 솟구치는 것을 보고 노를 들어 수면을 쳐서 그를 향해 물을 튀겼다. 백진은 본래 뱃머리로 내려서서 공수로 무진의 장검과 또 한바탕 대결을 하려고 했는데 물이 자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보고 급한 나머지 공중에서 물구나무를 한 바퀴 서면서 꽃배 위로 살짝 내려섰다. 워낙 몸놀림이 날렵해서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반신이 축축하게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원의 모습과 비교를 해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래 저원은 그의 도움을 받아 무진의 검광이 포위망을 뚫고 꽃배로 돌아을 수가 있었는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막 권륜의 뒤에 가 서려고 할 때 갑자기 옥여의의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권륜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져 있고, 진가락은 웃는 듯 마는 듯 각자의 표정이 너무나 이상했다. 마음이 뜨끔한데 한바탕 미풍이 불어 한기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꼴을 살펴보다가 그만 대경실색 했다. 자신의 의복이 무진의 칼에 이리저리 찢겨 말이 아니었고 머리 위가 화끈거려 만져 보니 땋은 머리카락, 심지어 눈섭까지도 말끔히 칼에 깎여 면도가 되어 있었다. 부끄럽고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번에는 바지가 스르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원래 바지끈까지 무진이 칼로 잘라 놓았던 것이다. 급히 두 손으로 바지춤을 걷어올리는데 이번에는 퐁당 소리가 나며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물 속에 빠뜨렸다. 권륜은 수하에 있는 무예가 제일 높다는 3명의 시위가 모두 낭패한 꼴을 당하자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시 더 대결을 해 보아야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가 않아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육 형, 이 친구들 과연 무예가 놀랍군요. 육 형과 함께 조정을 위해 힘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이 너무나 애석하지 않습니까? 원래 권륜은 상당한 재략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호걸을 조정으로 청해 쓰고 싶었던 것이다. 「이 친구들 소제와 마찬가지로 강호에 떠돌며 한가하게 살기를 원할망정 조정에 출사할 생각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형의 호의가 고마을 뿐이지요.」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오늘밤 너무 오래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권륜이 말을 마치고 조반산의 배에 있는 용준을 바라다보았다. 「조 삼가, 동방 선생의 시종을 이제 그만 놓아 주시지요. 진가락이 조반산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안돼요! 심연이 그의 독질려에 맞아 중독이 되었는데도 해약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군요.」 낙빙이 안된다며 배를 가까이 댔다. 권륜이 이가수를 향해 가만히 몇 마디를 하고 고개를 용준 쪽으로 돌렸다. 「해약을 주도록 하게.」 소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해약을 북경에 놓아 둔 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권륜은 이마를 찡그린 채 잠자코 있었다. 「조 삼가, 그를 그냥 놓아 주시오. 진가락이 또 말했다. 조반산은 입장이 매우 난처했다. 총타주가 독질려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놓아 주라고 하니 딱했다. 그렇다고 공공연히 이 자리에서 그를 처치해 버릴 수도 없는 처지다. 게다가 워낙 악질적인 인물이라, 처치한다 해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고 설사 그의 신변을 뒤져 해약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용법을 모르니 그 또한 공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처지에 그냥 놓아 보낸다면 다시 또 잡아들이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심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총타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라 망설이기만 했다. 「삼가, 그 독질려 두 개를 제게 주세요.」 서천굉이 말을 했다. 조반산은 그의 의도를 모르기는 했지만 품속에서 두 개의 독질려를 꺼냈다. 하나는 심연의 어깨에서 뽑은 것이요, 또 하나는 암기로 대결할 때 받아 놓았던 것이다. 서천굉이 받아 들고 왼손으로 용준의 앞가슴 옷자락을 북 찢었다. 털이 가득한 가슴이 드러나자 오른손을 번쩍 들어 독질려를 가지고 찔러 여섯 개의 구멍을 냈다. 용준은 (아이쿠!)비명 소리를 지르며 놀라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서천굉은 독질려를 조반산에게 되돌려 주고 진가락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육 공자님, 술 몇 잔 보내 주세요. 우리 이 용준 나리와 나누어 마시면서 친구로 사귀기로 하고 즉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삼가, 술 보내요.」 진가락이 좋다고 말하고 술잔을 들어 던졌다. 술잔이 수평으로 꽃배로부터 날아왔다. 조반산이 가볍게 받아 드는데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박수 갈채 소리 속에 나머지 2개의 잔도 조반산의 수중으로 날아왔다. 서천굉이 술잔을 받고 말했다. 「용 나리, 우리 건배 한잔 하십시다.」 용준은 상처가 가렵고 아파 견디기가 어려웠는데 술을 보자 마치 징그러운 뱀을 대하듯 놀라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술이 일단 뱃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혈액 순환이 빨라지기 때문에 독국물이 금방 효과를 나타내 생명을 잃는 것이다. 「드세요. 뭣 때문에 사양을 하십니까? 서천굉이 웃으며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로 그의 콧구멍을 눌러 막고 엄지손가락과 식지로 그의 양쪽 볼을 힘껏 누르니 용준이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서천굉이 석 잔의 술을 모두 그의 입 안에 쏟아 부었다. 용준은 석 잔의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가슴이 답답하고 근육이 시커멓게 변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이다. 그는 독질려의 독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공명이고 부귀가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제 혈도를 풀어 주세요. 제,,-, 제가,-, 해약을 내놓겠습니다.」 용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반산이 웃으며 비틀고 때려 그의 막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용준은 이를 악문 채 주머니 속에서 세 봉지의 약을 꺼냈다. '빨간 것은 내복약이요, 검은 것은 독을 빨아들이는 약이며, 흰색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조반산은 황급히 빨간색 가루약을 술잔에 털어넣고 호수의 물을 떠 섞어 심연에게 주어 마시게 했다. 그리고 검은 약을 상처에 바르니 잠시 후에 검은 피가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낙빙이 피가 흘러 나오는 대로 씻어 주자 검은 피가 자색으로 변하다가 다시 빨간색으로 변했다. 심연이 (아이구, 아이구!)비명을 질렀다. 조반산이 다시 흰 약을 발라 주며 웃었다. 「이제 겨우 살려 낸 모양이로군. 서천굉은 악독한 용준이 너무나 미워 세 봉지의 약을 모두 품속에 챙겨 넣었다. 당신이 해약을 북경에 놓아 두고 왔다니 다시 가지러 가도 늦지는 않을 거요.」 다른 사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떠들었다. 조반산은 용준의 비참한 꼴을 보자 불쌍한 생각이 들어 서천굉에게 약을 얻어 가지고 그에게 주었다. 진가락이 권륜을 향해 사과의 말을 했다. 소제의 이 친구들 거친 사람들이라 예의를 모르니 인형께서 과히 허물치 마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오늘 정말 희한한 구경 많이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헤어지십시다.」 권륜이 손을 흔들며 마른 웃음을 보냈다. 동방 선생이 돌아가시겠다니 배를 언덕에 대시오. 진가락의 말에 사공이 대답하고 꽃배를 서서히 언덕으로 댔다. 수백 척의 작은 배들이 좌우에서 호위를 하는데 배 위의 불빛이 별처럼 호면에 반사되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춘휘당의 내력 잠시 후에 배들이 언덕에 닿았다. 이가수가 먼저 언덕 위로 뛰어 올라 두 손을 뻗어 권륜을 부축하자 뭇 시위들이 반원을 그리며 삼면에서 그를 호위했다. 이가수가 호가를 꺼내 뚜뚜뚜 세 번 불자 수백 명의 어림군 효기영 군사들이 나는 듯 달려왔다. 시위 하나가 백마 한 필을 끌고 와 무릎을 꿇고 권륜이 디디고 을라 말에 오르게 했다. 사방에서 군사들이 서서히 올라와 진가락 등 일행을 중앙에 놓고 에워쌌다. 권륜이 이가수를 향해 눈짓을 하자 이가수가 홍화회 군웅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대담한 것들 같으니라구. 황상을 뵙고도 어찌 머리를 조아리지 아니하느냐. 서천굉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마선균, 마대정 부자가 화포유성을 꺼내 공중을 향해 쏘았다. 몇 줄기 혜성이 호면을 가르고 날아가 물 속에 떨어지는 듯했다. 갑자기 사방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나무그늘 밑,집 모퉁이,다리 밑,돌뒤 등 도처에서 사람이 빠져나왔다. 모두 머리에 빨간 꽃을 꽂았고 손에는 병기를 들었다. 서천굉이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 여러분, 홍화회 총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들 오셔서 뵈시오. 홍화회 회중이 우레같은 환호성을 울리며 분분히 몰려들었다. 어림군 각 영 군사들이 활에 화살을 먹이고 칼을 집에서 뽑아 든 채 그들 앞을 막았다. 쌍방이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이가수가 다시 호가를 불자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울리며 항주를 지키는 기영(旗營)과 녹영의 병정들이 달려왔다. 이가수가 말 위에서 병마를 지휘해 홍화회 군웅들을 몇 겹으로 포위하는 것이 권륜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즉시 체포할 태세다. 진가락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천천히 한 어림군 군사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가 쥐고 있는 말고삐를 잡았다. 군사는 그의 눈資에 겁을 먹고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넘겨 주었다. 진가락이 말 위에 뛰어올라 품속에서 빨간 꽃 한 송이를 꺼내 옷깃에 꽂았다. 꽃이 접시만큼 큰데 금실과 빨간 융단으로 갓을 둘렀고 꽃 옆에는 파란 잎이 받치고 있었다. 보석으로 아로새긴 것이라 횃불에 비쳐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것은 홍화회 총타주의 표지로서 군대의 사자기(師字旗)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홍화회 회중이 우레 같은 환호성을 지르며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기영과 녹영의 병정들은 본래 질서정연하게 정열해 있었다. 그런데 많은 병정들이 갑자기 대열에서 벌떼처럼 이탈해 나왔다. 통병관좌가 큰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탈해 나온 병정들이 진가락의 면전으로 달려가 두 손을 가슴 앞에 교차시킨 채 머리를 숙여 홍화회에서 총수령을 배알할 때 하는 대로 큰절을 했다. 진가락이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이탈해 나왔던 병정들이 예를 행한 후 대열로 되돌아가자 뒤에 있던 대열에서 또 병정들이 몰려나와 인사를 했다. 이렇게 몇 차례나 거듭하고 나서야 겨우 인사가 끝났다. 원래 홍화회는 강남의 세력이 크게 팽창하여 기영과 녹영의 병정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가입해 있었다. 기영과 녹영 가운데에는 한인 병졸의 숫자가 더 많았던 것이다. 권륜은 자기 군대 가운데에도 이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진가락을 향해 인사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어림군의 각 영은 북경에서부터 직접 자기를 호위하고 왔기 때문에 그들의 충성심은 믿을수 있었고, 또 각 영 가운데 홍화회 회중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오늘밤 싸움이 벌어지면 승산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또 자신은 지금 적지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아닌가? 그냥 어물어물 끝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권륜이 이가수를 향해 차디차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훌륭한 병사들을 대동했군그래.」 이가수 자신도 너무 놀라 어리벙벙해 있다가 권륜의 말을 듣자 황급히 말 위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신, 죽어 마땅하옵니 다. 신, 죽어 마땅하옵니다.」 「모두들 물러가도록 하게 . 네. 이가수가 일어나 병정들을 향해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천굉은 청병이 물러가자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 여러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들 가시오. 「총타주님, 당가 여러분, 또 만나십시다.」 홍화회 회중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우레같이 사면팔방으로 흩어졌다. 권륜 황제 홍력(弘曆)은 어려서부터 부친인 옹정의 가르침을 받은 문무 겸비한 인물로서 만청 황족 가운데 일등 가는 인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당년 태조(太祖) 태종(太宗)이 동정서벌 공성약지(攻城略地)를 할 때마다 시석을 무릅쓰고 친히 직접 전쟁에 임했던 사실에 대해 깊이 사모하고 있었다. 만청의 병례에 의해 팔기가 출전을 하면 각기 會場의 통병(統兵)은 화석친왕, 다라군왕, 다라패륵 , 고산패자가 모두 맡아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본기(本旗)의 인정 마필을 즉시 칠기 (七旗)로 고르게 나누어 주어 사람마다 선전을 했기 때문에 계속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륜이 황제의 위(位)에 오른 이래 해내가 태평하여 영웅의 기개를 펴 보일 기회가 없었다. 진가락이 호수에서 초청을 한다는 말을 듣고 태조 태종이 당년 장백산(長白山)과 흑룡강 사이에 드나들며 드높였던 기개를 상기했다. 이 정도의 위험이 무슨 모험이 되랴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참석을 하고 보니 여기저기 꿀리는 데가 너무나 많았다. 다행히 도량이 넓은데다가 사리도 밝아,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손을 들고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호상의 연회는 정말 즐거웠소. 인형의 깊은 우정과 융숭한 대접 고마웠소. 여기서 이만 작별하고 후일을 기약합시다.」 뭇 시위와 관원들의 호위 속에 순무서로 돌아왔다. 진가락이 껄껄 웃고 다시 배로 돌아와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통쾌하게 술을 마셨다. 홍화회 군웅들은 어전 시위를 일패도지로 몰아넣었고, 마지막에 가서는 서천굉과 마선균의 용의주도한 배치로 황제 수하의 많은 병사들이 꼼짝 못하고 물러간 것에 대해 마냥 즐거워 떠들어댔다. 서천굉이 마선균을 향해 말을 꺼냈다. 「마 대가, 황제가 오늘 곤경을 치르고 갔으니 아마 그냥 있지는 않을 게요. 항주의 뭇 형제들에게 각별히 조심을 하라고 당부하세요. 더욱이 기영과 녹영 안에 있는 형제들이 그들의 흉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하겠지요. 만약 그들이 대군을 동원하여 대들 것 같으면 태호로 후퇴해 들어오라고 하세요. 마선균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술잔을 비운 뒤에 먼저 가봐야겠다며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진가락이 잔에 가득 찬 술을 마시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밝은 달이 중천에 걸린 채 물결에 반사되어 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서천굉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인가요? 요 며칠 어찌나 바빴던지 날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군요.」 오늘이 열이레입니다. 그저께 우리 다같이 추석을 쇠지 않았습니까? 진가락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주 선배님, 도장님, 형제 여러분, 오늘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체면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 문 사가의 소식도 들었고요. 모두들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내일은 제가 사사로운 일을 좀 보고 모레 우리 사가를 구출하기로 합시다.」 총타주님, 우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모시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천굉이 물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위험한 일이 아니니까요. 저 혼자 여기서 조용히 뭘 좀 생각해 보아야겠어요.」 사람들이 배를 언덕에 대고 진가락과 인사를 한 뒤에 헤어졌다. 양성협-위춘화-장진-장사근 등은 벌써 술이 얼큰히 취해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항주의 밤거리를 방약무인으로 쉽쓸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진가락은 사람들이 멀리 사라지자 한 척의 작은 배에 뛰어올라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가 거울처럼 맑은 호면을 가볍게 미끄러져 호면에 닿자 진가락은 노를 멈춘 패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원래 다음날인 열여드레는 그의 생모인 서(徐)씨의 생신이었다.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자애롭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슬픔이 북받쳐올랐다. 방금 서천굉이 날짜를 말해 줄 때부터 참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 사람들이 멀리 가고 나자 마음놓고 대성통곡을 한 것이다. 이쪽에서는 통곡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가락이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작은 배 한 척이 서서히 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달빛 아래 살펴보니 옅은 회색빛 옷을 입은 사람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아는 체를 한다. 「진 공자님, 아직도 혼자 달 구경을 하고 계시나요? 진가락이 보니 바로 육비청의 제자다. 방금까지 권륜의 뒤에 서 있었는데 무슨 일로 다시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급히 눈물을 훔치고 답례를 했다. 「이 공자님,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이원지가 진가락이 타고 있는 뱃머리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 금적수재의 소식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진가락은 가볍게 놀랐다. 「앉아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이원지가 웃으며 앉아서 손가락으로 호수의 물을 만지작거렸다. 이때 달빛이 공교롭게도 뱃머리를 비쳐 그녀가 물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물 속의 달이 어지럽게 부서졌다. 우리 여 형을 만나셨나요? 그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진가락이 물었다. 「물론 알고말고요. 그러나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걸요.」 진가락이 또 한 번 어리둥절해했다. 어린것이 괴팍도 하구나. 생각하는데 말씨가 마치 까불기 좋아하는 계집애 같았다. 진가락은 이원지가 그날 곽청동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시시덕거리던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혐오감이 생겼다. 이원지는 한참 동안 물장난을 하며 축축하게 젖은 오른손을 뻗어 공중을 향해 물방울을 튀기다가 달빛 아래서 그의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물었다. '응, 울고 계셨나요? 방금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원래 그랬군요. 진가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가와 십사제 때문에 걱정이 되어 그러시나요? 괴로워할 것 없어요. 제가 말씀드릴께요. 두 분 다 안녕하시답니다.」 진가락은 원래 자세히 좀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어린애 달래듯 하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찾아낼 자신이 있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제 사부님은요? 함께 항주로 가셨나요? 이원지가 물었다. 뭐라구요? 육 노선배님과 함께 계시지 않았나요? 「그럼은 그날 밤 황하의 나루터에서 소란이 있던 날부터 뵙지를 못했는데요.」 육 노선배님의 무공이 워낙 탁월하시니 다른 일은 없을 겝니다. 안심하세요.」 홍화회의 세력이 이토록 큰데 왜 사람을 파견해 찾아보시지 않나요? 진가락은 그녀의 무례한 언동이 못마땅했지만 꾹 참았다. 이 대가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내일 사람을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이원지는 한참 있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육 사가의 말을 들었는데 무예가 아주 대단하시던데요. 정말입니까? 내 사부로 모셔도 손색이 없다고 그러던데, 그래 우리 사부님보다 강하신가요? 진가락은 그녀의 경솔한 말에 어이가 없어 웃었다. 「육 노선배님은 무림에서 보기 드문 고수이십니다. 제가 제자가 되고 싶어도 그분이 받아 주실지 의문인걸요. 그분이 제자를 거두신다면 아마 자질이 훌륭한 분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고,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방금 술잔을 집어던지는 솜씨를 보니 내력이 여간 대단치 않으시더군요. 그렇게 홍화회 사람들이 진 공자 앞에서 너무 쩔쩔매는 꼴이 눈에 거슬리던데요.」 진가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존경하고 복종하는 것이지 뭐 무공으로 위협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 이치도 모르는 사람과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녀의 유치하고도 무례한 태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날이 곧 밝겠군요. 언덕으로 올라가겠으니 다음 기회에 또 만납시다.」 진가락이 말을 마치고 노를 들었다. 그녀가 자기 배로 옮겨 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원지가 기분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다른 사람이 모두 존경하고 복종한다고 해서 내게까지 그렇게 오만할 것은 없지않아요? 이 말을 들은 진가락은 불끈 화가 치밀었다. 화풀이를 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자기는 군웅들의 영수요, 홍화회 뭇 호걸의 우두머리다. 아무데서나 함부로 화를 낼 신분이 아니었다. 이 이가성을 가진 위인이 자기에 비해 어린데다가 또 제삼자도 없다. 말다툼을 한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면 어른이 아이를 윽박질렀다고 말할 것이다. 게다가 그의 사부는 우리 홍화회에 대해 깊은 정을 표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사부의 체면을 互아서라도 자기가 참아야할 처지였다.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고 노를 저었다. 이원지는 어려서부터 귀여움만 받고 자라온 사람이다. 진가락이 거들떠보지 않을수록 약만 바짝 올라 답답한 심정으로 뱃머리에 그냥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작은 배가 거의 삼담인월(三潭印月)에까지 오자 이원지는 냉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세요. 정말 강한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혼자 숨어서 울겠어요. 진가락은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니, 내 말이 들리지 않아요? 이원지가 소리를 꽥 질렀다. 진가락이 한숨을 내쉬며 곁눈으로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저게 정말 철이 없구나. 제 사부도 나를 보면 겸손하기 그지없는데 감히 나를 향해 땅땅 큰소리를 치다니.) 아니, 내 호의로 소식을 알리러 왔는데도 그래 거들떠보지도 않 는단 말예요? 내 도움 없이 어디 문 사가를 구출해 내나 좀 보아야겠군요. 이원지가 차디차게 내뱉듯 말했다. 「그런 재주를 다 가지고 계셨나? 뭐라구? 사람 깔보는 거예요? 그럼 우리 여기서 한번 대결해 볼래요. 이원지가 팔을 뒤집어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들었다. 진가락은 육비청의 체면을 보아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았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칼을 뽑아 든 것이다. 방금 권륜의 등뒤에 서서 통병의 제독과 친한 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그가 적이란 말인가? 답답하고 우울한데 부쩍 의심이 들었다. 평소 사람을 대할 때 원만한 그였지만 도대체 이 사람을 만나서는 말할 수 없는 증오심만 느꼈다. 수려한 용모와 예쁜 눈에 분노를 가득 담은 그녀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못해 답답했다. 「방금 황제의 배후에 서 있었는데 도대체 가짜로 투항을 한 거요, 아니면 조정에 무슨 관직이라도 가지고 있소? 「둘 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 청정의 주구들 가운데 친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이원지는 자기 아버지를 주구라고 일컫는 말을 듣자 노기충천하여 그의 얼굴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아니, 젊은 사람이 함부로 욕을 하오. 진가락은 그녀가 정말 싸우려고 나서는 것을 보고 과연 청정의 관원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그렇다면 양보할 입장이 아니다. 「좋다. 네 사부를 찾아가 어디 한번 따져 보아야겠구나.」 몸을 살짝 돌려 칼을 피했다. 이원지는 그가 일어서자 즉시 그의 가슴을 노리고 칼을 찔렀다. 진가락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칼끝이 옷깃에 와 닿자 돌연 숨을 토해 내며 가슴을 뒤로 3치쯤 움츠렸다. 그때 이원지는 있는 힘을 다 쓰고 있었다. 거리가 겨우 3치라 하지만 칼끝이 그를 찌르지는 못했다. 이원지는 그의 반격이 무서워 두 발을 바닥에 찍으며 몸을 날려 호수 가운데 있는 삼담인윌의 바위가 있는 높직하고 평평한 장소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그 장소는 배와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위가 미끄러운데도 사뿐히 내려서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본래 맨손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무당파 상승의 경공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장소중과 대결을 한 적이 있어 무당파 무공이 대단함을 잘 알았다. 몸을 옆으로 솟구쳐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끝을 스치고 다른 하나의 바위 위에 올라섰는데 손에는 벌써 버드나무 가지를 하나 쥐고 있었다. 이원지는 그의 날쌘 동작에 자기도 모르게 겁이 났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터 보기로 했다. 「칼을 받아요. 좌장으로 몸을 보호하며 진가락이 서 있는 장소를 향해 달려들며 그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찔렀다. 삼담인월은 서호 가운데 있는 3개의 높직한 바위다. 호수 위에 떠 있어 추석날 밤에는 이곳 항주 사람들이 습속에 따라 오색 종이로 삼담인월에 있는 작은 구멍들을 막았다. 이때는 추석이 막 지난 때라 색종이가 아직도 남아 있어 달資이 색종이를 통해 호수에 반사되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고 있었다. 하나의 회색資 그림자가 새처럼 스치는데 반짝이는 검광이 호수에 비쳐 휘황한 광채를 발했다. 진가락은 몸을 한쪽으로 약간 기울이며 버드나무 가지를 그녀의 등을 향해 휘둘렀다. 이원지는 일격이 빛나가자 오른발로 바위를 찍으며 봉점두(鳳點頭)의 자세를 취해 버드나무 가지를 피하고 다른 바위로 뛰었다. 거기서 옥대위요의 재주를 펴 장검을 계속 휘둘렀다. 바로 유운검술의 묘기를 부리며 몸을 날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진가락이 오른쪽 바위로 장소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가락은 끝끝내 물러서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덮치자 몸을 갑자기 솟구쳤다. 반공에서 몸을 돌리고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한 채 버드나무 가지를 휘둘렀다. 이원지가 장검을 들어 막으려고 하는데 버드나무 가지가 검신을 따라 구부러지며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한 대 맞은 것이다. 그리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얼얼하고 화끈거려 견디기 어려웠다.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머리를 숙인 채 왼쪽에 있는 바위로 달아났다. 막 안정된 자세를 취하는데 진가락토 벌써 낙하했다. 옷깃이 바람을 일으키고 버드나무 가지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원지는 매우 화가 나서 장검을 왼손에 바꾸어 쥐고 오른손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부용금침을 한 주먹 쥐고 계속 세 번 휘둘렀다. 세 무더기의 금침이 상, 중, 하 세 방향에서 진가락을 향해 날았다. 진가락은 바위 위에서 피할 장소가 없자 두 다리를 밖으로 뻗어 몸이 허공에 뜬 채 수면과 수평이 되게 하고 왼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바위 끝을 눌렀다. 세 무더기의 금침이 그의 팔 위를 스치고 지나 물 속에 떨어졌다. 그가 좌장에 힘을 쓰자 몸이 솟아올라 몸에 물 한 방을 묻지 않았다. 이원지는 금침이 빗나가자 결코 자기의 적수가 아님을 알았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만납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소영주정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내 공격도 받아야지요.」 진가락이 외치며 몸을 솟구쳐 버드나무 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쳤다. 이원지가 장검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휘둘렀다. 칼로 그가 가지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없애 버릴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버드나무 가지는 칼이 이르자 방향을 바꾸며 검신을 에워쌌다. 한 줄기 강한 힘이 그녀의 장검을 뺏어가려고 하는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상대방의 왼손이 벌써 자기의 젖가슴을 누르려고 했다. 이원지는 놀랍기도 했지만 우선 부끄러웠다. 즉시 오른손에 쥔 칼자루를 놓고 좌장으로 막았다. 그녀의 좌장과 진가락의 좌장 이 부딪치는 순간의 힘을 역이용하여 오른쪽에 있는 바위로 뛰었다. 그녀의 장검이 공중에 떴다가 내려오는 순간 진가락이 손을 뻗어 받았다. 이원지는 창피하다 못해 욕이 먼저 나왔다. 「총타주라는 주제에 어찌 이렇게 비열한 초술을 써요. 「뭐? 비열한 초술이라고? 진가락이 어리둥절해 반문을 했다. 이원지가 생각해 보니 상대방은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음이 당연했다. 그러면 이 초술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土영주정을 향해 뛰었다. 진가락은 그녀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벌써 그녀의 의도를 알았다. 이원지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진가락이 먼저 그 장소에 와 있었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장검을 두 손으로 넘겨 주었다. 이원지는 볼이 부어오른 채 장검을 받아 집에 꽃고는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이미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진가락은 옷깃의 빨간 꽃을 떼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성의 동쪽에 있는 후조문(候潮門)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성 가까이 이르니 벌써 성문이 열렸다. 문을 지키던 청병이 진가락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가슴앞에 교차시키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원래 그도 홍화회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하고 성문 밖으로 나왔다. 「총타주님, 성 밖으로 나가시려면 말 한 필이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좋겠군요.」 청병과 진가락의 대화였다. 그 청병이 희색이 만면한 채 갔다가 말 한 필을 끌고 다시 나타났다. 그 뒤로 2명의 하급 관리가 따라와 진가락을 향해 함께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총타주를 위해 수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 한없이 영광스러웠던 것이었다. 진가락은 말을 타고 달렸다. 80여 리의 길을 쾌마는 두 시간에 달려 사시(巳時)에 해령성(海寧城)의 서문인 안술문(安成門)에 도착했다. 그가 집을 떠난 지 어언 10년! 이제 다시 돌아와 보니 병색은 옛 모습 그대로다. 어려서 뛰놀던 성벽도 전연 변화가 없고 푸른 풀, 돌과 바위가 거의 모두 옛날에 어루만지며 놀던 그대로이 다. 혹시 낯익은 사람을 만나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면서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5리쯤 가서 농가 하나를 찾아가 쉬며 점심을 얻어 먹고 낮잠을 청했다. 하룻밤 잠을 설쳤기 때문에 달콤하게 자고 일어났다. 농가의 부부는 그가 공자 차림인데다가 말씨조차 이 고장 사람이라 접대가 은근하기 그지없었다. 저녁에는 닭까지 한 마리 잡아 그를 환대했다. 진가락은 근년의 상황을 물어 보았다. 「황상께서 최근 해령 전역에 삼 년 동안 전량을 면제해 주라는 분부가 내렸어요. 이 모두 진각로의 체면을 보아 내린 처사지요. 진가락은 생각해 보았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인데 황제가 무엇 때문에 근년에 이르러 자기 집안에 대해 각별한 은총을 베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그는 약간의 은자를 꺼내 농가에 사례하고 말을 달려 성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남문에 이르러 바닷가 제방에 앉아 바다를 바라다보며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그의 손을 잡고 이곳에 와 조수를 구경하던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회강에서의 10년, 매일 보이는 것은 끝없는 모래 벌판일 뿐이었는데 이제 다시 파도를 대하자 마음이 탁 트였다. 해풍에 옷깃을 나부끼며 넓은 바다를 바라다 보면서 그는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었다. 어려서의 옛일들이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바닷가의 흰 물거품이 점점 모호하게 보였다. 말을 언덕 위의 버드나무에 매어 놓은 채 서북쪽에 있는 자기 집을 향해 뛰었다. 진가락은 자기 집 문 앞에 이르러 약간 당황했다. 원래 저택의 본명이 우원이었는데, 옛날의 현판은 떼어 버리고 새로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안란원(安爛園)이란 세 글자였다. 필치가 둥글고 부드러운 것이, 금방 보아도 권륜의 어필임을 알 수가 있었다. 옛집옆에 또 새집을 지어 놓았는데 정자며 누각이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마음속으로 의아해하며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자가 보이고 거기 큰 돌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 달빛에 비친 비석을 살펴보았다. 비문은 새로 새긴 것인데 6수의 오율시(五律時)가 씌어 있었다. 제목은 (어제주진씨안란원즉사잡영(御製駐限氏安潤園理事雜誌)이다. 비문의 글자 또한 권륜이 쓴 것이다. (원래 황제가 우리 집에 온 적이 있구나.) 달빛 아래서 그 비문을 읽어 보았다. 안란원의 풍물을 칭찬하고 또 진씨 집안의 공명과 훈업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시가 썩 잘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집안에 대해 겸손하게 읊은 것을 보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쪽으로 긴 복도를 돌아 창파욕경지헌을 거척 환벽당(環碧棠)에 이르니 당중에 새로운 현판이 걸렸다. 애일당이란 세 글자가 보이는데 역시 권륜이 쓴 것이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애일이란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히 여긴다는 뜻으로 효자가 부모를 오래도록 모시고자 하는 마음을 이름이다. 이 두 자를 내가 쓴다면 도리에 맞겠지만 황제가 친필로 여기에 써 놓다니? 이 황제 학문이 막혀도 보통 막힌 사람이 아니로구나.) 애일당을 나와 적란곡교와 천향오를 지났다. 북쪽으로 꺾어 십이루 곁을 지나 군방각과 죽심하 정헌(竹探情情理)을 거쳐 다리를 건너 대나무가 울창한 곳을 통과 하면 바로 어머니가 사시던 균향관(準會館)이었다. 관 앞에도 새로운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름하여 춘휘당(奇變율)이라 했다. 역시 권륜의 어필이다. 깜짝 놀라 돌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맹교(孟郊)의 시 한 수는 정말 나를 읖은 것인데.......)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에 들린 실 유자(遊子)의 몸에 걸친 옷. 떠날 때 꼬박꼬박 케매 주셨으니 더디더디 돌아올까 두려웠음이라. 그 누가 말했나 한 치 풀의 마음이라도 석 달 봄의 資料을 보답하리라고? 진가락은 이 춘휘당이라는 세 글자를 바라보며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갑자기 전신을 떨며 벌떡 일어났다. (춘휘(春曜)라는 두 글자는 아들이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밖에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런데 황제가 이 편액을 써서 내 어머니가 사시던 집에 걸어 놓은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이렇게 어리석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내가 성묘를 올 것을 알고 특별히 이 편액을 써서 나를 농락하려고 했단 말인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즉시 가볍게 다락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의 배치는 어머니 생존시나 다름이 없었다. 홍목의 가구나 꽃을 조각한 큰 침대 , 옷장 등이 10여 년 전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빨간 초가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옆방에서 발자국 소리를 내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쪽 귀퉁이로 몸을 숨겼다. 들어온 사람은 늙은 아주머니였다. 진가락은 뒷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원래 어머니가 시집을 때 데리고 온 몸종 서방이었다. 진가락을 어려서부터 열다섯 살 먹을 때까지 보살피며 키워 준 하녀 가운데 제일 친했던 사람이다. 서방은 방으로 들어와서 걸레로 가구들을 일일이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침대 밑에서 어린아이가 쓰던 모자를 꺼내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빨간 비단에 꽃을 수놓아 만든 것으로 그 위에 파란 옥이 수놓여 있고, 파란 옥 주위에 8개의 구슬이 있었다. 바로 진가락이 어렸을 때 쓰던 모자다. 진가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살처럼 방으로 뛰어들어가 그녀를 껴안았다. 서방이 놀라 소리를 지르려 하자 진가락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하오. 나요. 서방은 그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놀라 입을 벌린 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원래 진가락이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난 지 10년 후라 몸이 많이 변했지만 50여 세의 아주머니는 십 년 동안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아주머니, 나 삼관이에요. 알아보시겠어요? 서방은 그때까지도 넋을 잃고 있었다. 「아니 ,,,,,,, 삼관이라구요? 돌아,,,,,, 돌아오셨군요.」 진가락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방은 정신을 가다듬고 희미하게나마 그의 얼굴에서 까불기만 하던 삼관의 어릴 때 모습을 발견했다. 갑자기 두 팔을 벌려 그를 꽉 껴안은 채 통곡을 터뜨렸다. 진가락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해요. 다른 사람이 모르도록 해야 해요.울지 마오.」 「괜찮아요. 모두들 신원으로 갔기 때문에 여긴 아무도 없어요. 「신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금년 봄에 새로 지은 것이에요. 몇십만 냥을 들여서 지은 것인데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진가락은 그녀가 그러한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선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나요? 무슨 병을 앓으셨나요? 서방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홈쳤다. 「아가씨는 그날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종일 기분이 언짢으셨어요. 사흘 동안이나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시더니 그만 병을 얻으셨어요. 10여 일 견디다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지요.」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흐느낀다. 원래 강남의 세가에서는 규수가 출가할 때 몇 명의 몸종을 데리고 간다. 규수가 부인이 되고 할머니가 되어도 따라온 몸종들은 계속 아가씨라 불렀다. 그녀는 또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세상을 떠나실 때도 계속 도련님 걱정만 하셨답니다. (삼관은 어찌 된 일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 삼관이를 불러 오라고 했는데,, ) 이렇게 이틀이나 도련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눈을 감으셨어요.」 진가락도 오열을 터뜨렸다. 「나는 정말 불효자요. 어머니께서 임종하실 때 뵙지도 못했으니.」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래, 어머니 묘는 어디 있나요? 「새로 지은 해신묘 뒤에 있어요.」 「해신묘라니? 「그렇군요. 그것도 금년 봄에 새로 지은 것인데 굉장히 커요. 해당가에 있어요.」 「아주머니, 내 가서 봐야겠군요.」 「아니,,,,,, 아니 됩니다.」 서방이 황급히 말했지만 그는 벌써 창문을 뛰어나가고 있었다. 집에서부터 해당까지는 그에게 제일 익숙한 길이라 눈 깜짝 하는 사이에 벌써 도착했다. 서쪽으로 높은 누각이 공중에 솟아 있는데 어렸을 때 본 일이 없는 몇 개의 건물이다. 새로 지었다는 해신묘겠지 하고 묘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묘문의 좌우 양쪽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급히 뒤로 물러나와 한 그루의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보니 신묘의 좌우에서 각기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묘문 어귀에서 네 사람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데 발길을 멈추지 않은 채 신묘의 좌우로 나뉘어 달려가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해령은 바닷가에 있는 작은 고을이다. 네 사람의 무공이 결코 허약해 보이지 않는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을까? 쫓아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또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사람이 또 신묘 옆에서부터 나타난 것이다. 이 네 사람의 몸집이나 모양이 앞서 나타났던 네 사람과 비슷비슷했다. 그는 더욱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 네 사람이 교차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묘문으로 뛰어올라가 담 위에 엎드려 몸을 숨긴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일어나는 곳에서 또 네 사람이 빙 돌며 지나간다. 대충 헤아려 보아도 40여 명이 넘는다. 각기 해신묘를 끼고 도는데 정신을 집중한 채 기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결코 무공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떤 교파에서 해신을 향해 무슨 의식이라도 거행한단 말인가? 아니면 해적의 큰 방회에서 이곳에 모여 장물이라도 나누어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 혹시 누가 나타나 빼앗을까 봐 삼엄한 경계를 펴기 위해 순라를 도는 것일까? 만약 자신의 경공이 보잘것없었다면 벌써 이들에게 발각되었을 것이 뻔했다. 호기심이 일어나 가볍게 뛰어내려와 담 옆에 몸을 숨긴 채 대전을 향해 연기처럼 들어갔다. 동전에 모신 것은 해당을 건조한 오월왕 전류 요, 서전-토에 모신 것은 조신(潮神)인 오자서와 문종(文種)이다. 다시 중전에 이르니 향을 피우는 연기가 자욱하고 촛불이 휘황하게 밝았다. 여기에는 어떤 신을 모셨나 궁금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보고는 그만 깜짝 놀랐다. 중앙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조신의 얼굴은 준수하며 턱에 약간의 수염이 있는 것이, 자기의 부친 진각로의 생존시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진가락은 너무나 이상해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가볍게 냈다. 이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진가락은 재빨리 큰 종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네 사람도 모두 검은 옷을 입었는데 손에 병기를 든 채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갔다. 약속 그는 왼쪽에 있는 문 한쪽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살그머니 그 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양쪽에 담을 쌓고 흰 돌이 깔린 길이 길게 뻗어 있는데 대단히 웅대하여 마치 북경 금성 궁전의 규모와 흡사했다. 이 길로 그냥 걸어가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발각될것 같아 길 옆의 지붕 위로 뛰어을라 연기처럼 끝까지 가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무도 없어 가볍게 뛰어내렸다. 다시 더 앞으로 나가니 또 하나의 신전이 나타났다. 밖에 천후궁이란 세 글자가 크게 씌어 있는데 문이 닫혀 있지 않아 들어가 신상을 우러러보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원래 천후신상의 얼굴이 둥근 달처럼 생긴데다가 두 눈이 살짝 치켜올라간 것이, 자기의 생모인 서씨와 완전히 닮았기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해 마치 오리무중에 빠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와 어머니의 묘지를 찾기로 했다. 천후궁 뒤로는 끝없이 노란 천의 장막이 드리워진 것이 눈에 띄었다. 즉시 담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밖을 주시했다.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검은 옷의 장한들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노란 천의 장막 밖을 오락가락하며 순시를 돌고 있었다. 오늘 밤 보이는 모든 광경은 평소 상상하지도 못한 진풍경이었다. 이들의 경계가 삼엄했지만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담대했다. 끝까지 살펴보기로 결심한 그는 땅바닥을 천천히 기어 장막 가까이 접근했다.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막 몸을 돌리자마자 진가락이 장막 자락을 들치고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꼼짝 않고 동정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발각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드니 장막안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다. 바닥을 어찌나 깨끝이 정리해 놓았는지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한 장막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양쪽을 장막으로 담을 쳐 놓은 듯 즐비한 것이 뒤에까지 쭉 뻗어 있었다. 그 장막 하나하나마다 촛불과 등잔을 켜 놓아 양쪽의 불꽃이 계속 휘황한 빛을 발했다. 미혹과 두려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궁금증, 이를 가슴에 안은 채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는 그는 정말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방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 촛불의 심지가 터지는 소리가 그토록 크게 그의 마음에 울렸다. 숨을 죽인 채 수십 보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한쪽으로 몸을 숨기고 기다려 보아도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몇십 보 걸어나가자 등불 아래 응기된 2개의 큰 무덤이 나란히 보이고 그 앞에 누군가가 꿇어앉아 있었다. 묘 앞에는 각기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주홍색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황청태자태부문연각대학사공부상서 진문근공휘세관지묘信之墓요, 다른 하나는 (황청일품부인진모서부인지묘>였다. 진가락은 촛불 밑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원래 자기 부모가 바로 이 자리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말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달려들며 통곡이 터지려고 하는 순간 묘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진가락이 놀라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은 잠시 동안 무덤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몇 번 절을 하고는 엎드려 일어나지를 않았다. 어깨를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흐느껴 우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보자 진가락의 경계심이 상당히 풀어졌다. 자기 부모의 묘 앞에서 우는 사람이라면 친척이거나 아니면 부친의 제자 또는 과거에 데리고 있던 관리임에 틀림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너무나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냐? 「나도 성묘를 온 사람이오.」 진가락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를 거들떠볼 겨를도 없이 묘 앞에 꿇어앉았다. 부모가 생전 양육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자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어머니, 아버지. 삼관이 너무 늦게 와 뵈을 수가 없었군요.」 하며 울부짖었다. 서 있던 그 사람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발걸음을 옮겨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진가락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며 뒤로 뛰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등불 아래서 서로 바라보다가 놀라 각기 뒤로 몇 발짝씩 물러섰다. 원래 그의 부모 묘지 앞에서 울던 사람은 바로 당금의 만청 권륜 황제인 홍력이었던 것이다. 권륜도 놀랐다. 「아니,,)당신이 심야에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소? 「오늘이 바로 내 어머님의 생신이라 성묘를 하러 왔는데, 당신은? 권륜은 그의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을했다. 「그럼 당신은 진,,,,,, 진세관의 아들이오? 「그렇土, 강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당신도 알고 있었겠지? 권륜이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소.」 원래 요사이 권륜의 해령 진씨댁에 대한 은총은 지대했다. 신하들 가운데 홍화회의 새로운 수령이 세상을 떠난 진각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나 아무도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황제의 희노애락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라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가는 칭찬은커녕 자칫 잘못하다가는 살신지화를 당하기가 십상이었던 것이다. 이때 진가락의 경계심은 사라졌지만 의혹은 더욱 짙어졌다. (밖의 경계가 그토록 삼엄하더니 원래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였구나.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이곳에 와야 했을까? 심야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묘지와 오는 길을 모두 노란 장막으로 가려 놓았으니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려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제가 무엇 때문에 남물래 대신의 묘에까지 참배를 할까? 물론 황제가 대신을 끔찍히 사랑하여 죽은 뒤에도 그를 그리워할 수는 있겠지만 묘지까지 찾아다니며 통곡할 이유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의 의혹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권륜도 그를 자세히 훑어보더니 점차 표정이 누그러지며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다. 「자, 앉아서 얘기합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묘지 앞의 돌 위에 앉았다. 두 사람은 오늘 밤 세번째 만나는 것이다. 맨 처음에는 영은삼축 에서의 해후로서 서로 미심쩍은 가운데서도 이상한 친밀감을 느쪘고 두번째는 호수 위에서 만나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지금 세번째 만나자 적의는 사라지고 오히려 친근감이 생겼다. 권륜이 진가락의 손을 끌어 잡았다. 「내가 심야에 여기 와서 성묘를 하는 것을 보고 당연히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오. 부친께서 생전에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덕에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소. 이번 남행한 기회를 이용해 오늘 방 특별히 이렇게 참배를 하게 된 것이오.」 진가락은 반신반의했다. 「이 일이 밖에 알려지면 대단히 불편하게 되오. 발설하지 않을 수 있겠소? 진가락은 그가 자기 부모를 존경하는 것을 보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은 안심하시오 내 부모의 묘지 앞에서 맹세를 하리다. 오늘 밤 일은 절대로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꺼내지 않겠습니다.」 시원스레 약속을 했다. 권륜은 그가 무림의 영수임을 안다. 그의 말이 중천금인데 하물며 자기 부모의 묘지 앞에서 맹세한 말이니 어길 리가 없다. 안심이 되어 만면에 희색이 감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묘 앞에 앉았다. 하나는 당금의 중국 황제요, 또 하나는 강호상에서 제일 크다는 방회의 수령이다. 두 사람은 묵묵히 사색에 잠긴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먼 곳에서 한바탕 천둥 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진가락이 먼저 듣고 말했다. 「조수가 밀려오고 있군요. 우리 바닷가로 나가 보십시다. 저도 10여 년 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좋지요.」 권륜도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진가락의 손을 잡은 채 장막을 빠져나왔다. 팔윌 열여드레 조수가 제일 크지요. 어머니의 생신이 공교롭게도 이 날이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진가락이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권륜은 상당히 관심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께서 뭐가 어쨌다는 말씀인가요? 「그래서 제 어머니의 처녀 때 이름이 조생(潮生)이었지요.」 진가락은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약간 후회했다. 무엇 때문에 황제 앞에서 어머니의 처녀 때 이름을 꺼냈을까? 그러나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기에 크게 어색할 것은 없었다. 권륜의 표정에 약간 놀란 기색이 스쳤다. 「네? 원래,,,,,,.」 뒷말은 꿀꺽 삼키는 듯했다. 진가락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밖에서 순라를 돌고 있던 시위들은 황제가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나타나 모시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은 했지만 감히 묻지는 못했다. 백진 -저원 등 시위들의 수령은 더욱 전전긍긍했다. 어찌하여 장막 안으로 사람이 숨어 들어간 것도 몰랐을까? 황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이 사실을 언짢게 생각한다면 시위들의 죄는 죽어 마땅한 것이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바로 홍화회의 총타주가 아닌가? 그만 대경실색하여 식은땀을 흘렸다. 시위가 황제의 말을 끌고 오자 권륜이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타도록 하시오.」 시위는 다른 말 한 필을 또 황급히 끌고 왔다. 둘은 말 위에 올라 춘희문을 향해 나갔다. 이때 천둥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춘희문을 나오자 귀에는 파도 소리만 들렸다. 넓은 바다를 바라다보니 평온한 바닷물이 둑 밑의 7, 8장 거리에까지 와 있고 달資이 담담하게 바다 위에 깔려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권륜이 바닷물을 하염없이 바라다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인형과의 인연은 참으로 공교롭기도 하군요. 나는 내일 항주로 갔다가 다시 사흘만 묵으면 북경으로 가야 하오. 나와 함께 동행하면 좋지 않을까요? 늘 내 곁에 있으면 더욱 좋구요. 이렇게 만나고 보니 꼭 부친을 뵈온 것 같군요.」 진가락은 그가 부드럽고 친절하게 이런 말까지 꺼낼 줄은 몰랐다. 정말 대답하기 거북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권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인형의 문무 겸비한 인품은 장래 부친의 직위를 계승한다 해도 어려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강호에 묻혀 사는 것보다야 훨씬 좋은 일이지요.」 황제가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장래 그를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에 봉하겠다는 뜻이었다. 청대에는 재상이 없었다. 대학사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높은 지위였다. 그 말을 들으면 그가 몹시 반기며 머리를 조아려 고맙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진가락은 이렇게 말했다. 「호의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부귀를 탐했다면 집을 떠나 외로운 신세로 강호에 떠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 정말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왜 얌전하게 지내지 못하고 하필 강호상에 뛰어들었나요? 혹시 부형께서 용납하시지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건 제가 어머님의 분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내 아버지나 형님은 모르시는 일입니다. 그들은 있는 심혈을 기울여 도처에서 저를 찾은걸요 지금도 제 형님은 사람을 파견해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 어머니께서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요. 무엇 때문에 그랬지요? 진가락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다가 한참 만에야 말을 꺼냈다. 「그건 어머니의 상심사라 저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형의 해령 진씨 세대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고 과거에도 이름을 떨쳐 해내에 비길 만한 집안이 없었습니다. 3백 년 동안 진사가 2백 수십 명이요, 재상이 셋에, 상서(尙書) , 시랑(侍郞) , 순무 포정사를 지낸 사람이 11명, 정말 대단한 숫자지요. 부친 문근공도 깨끗하고 바르기로 유명한 분이었지요. 늘 황고 (皇考) 앞에서도 백성을 위해 청명(情命)을 하다가 통곡까지 하시는 일이 많았답니다. 황고께서 퇴조(退朝)를 하신 후에 몇 번이나 껄껄 웃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세관이 오늘도 또 백성을 위해 내 앞에서 울었지. 어쩔 수 있나? 그가 하자는 대로 대답하고 말았지.) 진가락은 그가 부친의 정치적인 공적을 말하자 상심도 되고 또 기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백성을 위해 황제 앞에서 우셨고, 나는 또 백성을 위해 황제의 군량을 빼앗았구나. 방법은 달랐지만 의도는 같았다.) 이때 조수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두 사람의 말소리를 삼켜 버렸다. 먼 데 일직선의 백선이 달料 아래 천천히 이동을 했다. 한기가 갑자기 두 사람을 엄습했다. 백선이 점점 가까워지며 우뢰소리를 내고 크나큰 조수가 마치 옥으로 쌓은 성이나 눈 덮인 고개처럼 하늘가에서부터 밀려오는 기세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조수가 가까워짐에 따라 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 백만 대군이 북을 치며 돌진해 들어오는 듯했다. 권륜은 왼손으로 진가락의 손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가볍게 부채를 흔들며 서 있었다. 갑자기 밤의 조수가 맹렬하게 밀려오는 것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 부채를 둑 밑의 돌계단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진가락이 그에게 주었던 부채다. 권륜이 (아차!)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어느 틈에 백진이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위로 향한 채 둑 밑으로 뛰어내렸다. 왼손으로 둑에 있는 돌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부채를 주워 들었다. 조수가 가까워질수록 그 속도도 빨라졌다. 마구 출렁대며 하늘을 삼키고 달을 삼킬 듯 거대하기 짝이 없는 물로 된 담이 둑을 세게 때렸다. 큰 물결이 이제 막 백진의 몸을 휘감고 물러갈 참이라 뭇 시위들은 놀라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백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경공의 재주를 펴 둑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미처 둑 위로 올라서기도 전에 파도가 그를 엄습했다. 진가락은 위급한 상황을 보자 훌쩍 두루마기를 벗어 찢어 두 가닥으로 만든 뒤에 꼭꼭 묶어 길게 만들어 가지고 던져 백진의 목에 걸었다. 백진이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오르며 손을 빼내어 두루마기의 한 끝을 잡았는데 파도가 그의 다리를 때렸다. 진가락이 힘껏 잡아 당기며 휘둘러 그를 돌둑 위로 건져 냈다. 이때 권륜과 뭇 시위들은 사나운 조수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겁이나 수 장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백진이 막 둑 위에 올라섰을 때는 조수가 이미 그를 덮쳤다. 진가락은 어려서부터 둑에 나와 자주 놀았기 때문에 조수의 성격을 잘 알았다. 백진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즉시 뒤로 펄쩍펄쩍 뛰었다. 백진이 낙하했을 때 해당 위의 물은 그 깊이가 벌써 몇 자나 되었다.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부채를 저원을 향해 던지고 두 손으로 둑 옆에 있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확 얼싸안았다. 달빛이 파도에 비쳐 은가루를 뿌리며 무서운 기세로 날름거리는 광경은 마치 만 마리의 말이 달려드는 기세와 흡사했다. 삽시간에 백진의 몸이 파도 속에 빠져 보이지 않았다. 조수는 빨리 몰려오기도 하지만 또 재빨리 물러가기도 했다. 잠깐 동안에 조수는 깨끗하게 물러갔다. 백진이 입을 다문 채 숨을 죽이고 버드나무를 꽉 안고 있는데 그의 열 손가락은 마치 10개의 쇠못처럼 단단히 나무에 박혀 있었다. 조수가 밀려가자 그때서야 손가락을 뽑고 피해 나왔다. 권륜은 그의 충성심과 용맹함을 보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저원의 손으로부터 부채를 받아 들며 백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 도포 한 벌을 상으로 주리라.」 백진은 전신이 후줄근하게 젖은 채 급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려 감사를 표했다. 권륜은 진가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십만 대군의 함성이 심야의 조수 같다)고 했는데 이 정경을 보니 정말 천하의 가관이로군요.」 당년 전왕이 삼천의 철노로 조수를 쏘았다지만 어디 조수가 꿈잭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으로 보더라도 자연의 추세는 억지로 못 하는 법이지요.」 권륜은 그의 말을 듣자 마치 서호에서 주고받았던 말을 다시 한번 반추하는 것만 같았고, 그가 결코 조정에 나와 려슬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람마다 각기 그 뜻이 다르니 나도 억지는 부리지 않겠소만, 한마디 충고는 하고 싶군. 「네,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 홍화회의 소행이 거의 역적 행위나 다름이 없소. 기왕지사 과거는 일체 불문에 붙이겠지만 이후 다시는 그런 무법무천의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오.」 「우리는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여 한 일이라 마음만은 편안하답니다. 권륜은 탄식했다. 「애석하도다, 애석하도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 밤의 면식 때문에 장래 홍화회를 섬멸할 때도 인형만은 내가 죽음을 면케 해 드리리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또한 인형이 만약 홍화회의 수중에 떨어 지더라도 내 해치지는 않으리다.」 권륜이 껄껄 웃었다. 「황제의 면전에서 말 한마디라도 전연 지지 않으려 하는군. 좋소. 대장부의 일언이 일단 떨어지면 말을 타고도 쫓기가 어려운 것이라 했소. 자, 우리 손바닥을 쳐 일후 피차에 해를 끼치지 않기로 약속을 합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바닥을 세 번씩 쳤다. 뭇 시위들은 황상이 진가락의 대역무도한 언동에 대해 언짢은 내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손바닥을 쳐 맹세까지 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조수가 이토록 사납게 몰아치는데 해당을 튼튼하게 수축하지 않았다가는 백성의 전답이나 가옥은 물론 분묘까지 모두 조수에 밀려 떠내려가겠군요. 내 반드시 관전을 풀어 해당을 대대적으로 수축해 생령을 보호할 것이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대업이라 강남의 백성은 모두 지극히 감격할 것입니다.」 권륜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꺼냈다. 인형의 부친은 국가에 끼친 공헌이 막대하니, 내 결코 그분의 묘소가 조수에 떠내려가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오.」 고개를 돌려 백진을 바라다보았다. 명일 하도총독 고진에게 일러 즉각 해령으로 와 전력을 기울여 시공토록 하라.」 백진이 머리를 숙여 대답했다. 조수가 점점 평온해지며 바닷물이 일렁거리는데 마치 끓는 물 같았다. 권륜은 진가락의 손을 잡고 다시 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뭇 시위가 따라나서려고 하자 권륜이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게 했다. 두 사람은 둑을 따라 수십 보를 걷다가 권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의 신색이 아무래도 우울해 보이오. 부모를 그리워하고 또 친한 친구를 걱정하는 일말고 무슨 다른 괴로움이 있소? 기왕 벼슬도 마다하는 판이니 무슨 바라는 바가 있거든 서슴지 말고 내게 말해 보구려.」 진가락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하나 허락해 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슨 요구든 내 다 들어 드리리다.」 「정말이십니까? 진가락이 반겼다. 「황제의 말이 허담일 리 있겠소. 제 청은 바로 제 의형인 문태래를 석방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권륜은 난처했다. 그가 이러한 요구를 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의형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 사람만은 석방할 수가 없소. 기왕에 대답을 했으니 신용만은 지키겠소. 이렇게 합시다. 내 그를 죽이지는 않겠소.」 「그러시다면 우리가 힘으로 그를 구출할 수밖에 없겠군요. 제가 석방을 요청한 것은 우리가 구출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병기를 쓰게 되면 인형과의 우정이 손상괼까 봐 염려해서죠.」 권륜은 어제 홍화회 인마의 기세와 재주가 대단함을 보았다. 그의 이 말이 결코 큰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호의는 알겠소. 솔직히 말하거니와 그 사람 내 손에서 돌려 보낼 수는 없소. 인형이 기어코 그를 구출하려고 한다면 나는 사흘안에 그를 처단해야겠소.」 진가락은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만약 인형이 문 사가를 살해한다면 잠자리도 편안치 못할 것이며 음식도 달게 드시지 못할 것이오.」 「만약 그를 죽여 없애지 못한다면 더욱 음식도 달게 먹을 수 없고 잠자리도 편안치 못할 것이오.」 권륜이 차디차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지존의 자리에 계시면서 우리만큼도 즐겁고 편안치 못하신 것 같군요.」 권륜은 그가 다시는 문태래의 일을 꺼내지 말았으면 했다. 「그래, 인형은 금년 몇 살이오?「스물다섯 살입니다.」 권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가롭게 산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 젊음이 부럽소. 아! 공로가 제아무리 세상을 뒤덮어도 나이가 차면 마침내 황토로 변하는 것이 인생 아니오? 두 사람은 또 한 차례 둑을 거닐다 권륜이 물었다. 「그래, 부인은 몇 살이나 되오? 그러고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패옥을 끌렀다. 「이 보석, 세상에 드문 것이니 가지고 가서 부인께 드리시오.」 진가락은 받지 않았다.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권륜이 껄껄 웃었다. 「그래, 얼마나 눈이 높길래 마음에 드는 처녀를 구하지 못하셨나? 하여튼 이 보석을 지니고 있다가 장래 마음에 드는 규수가 생기거든 그때 정표로 드리시오.」 약간 파르스름한 빛깔이 달資 아래서 담담하고 부드러운 광채를 발했다. 진가락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받아 드니 촉감이 따뜻하다. 원래 이상하고도 진귀한 난옥으로, 옥 위에는 금실로 아로색인 네 줄의 작은 명문이 보였다. 정심불수 강극즉욕 겸겸군자 온윤여옥 (정이 깊으면 장수하지 못하고, 지극히 강하면 욕이 되도다. 겸손한 군자의 온화함이 옥과 같도다)하는 내용이었다. 권륜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내 만약 인형의 도량이 활달함을 몰랐다면 이 보석을 드리지도 않았겠거니와, 더욱이 마음에 드는 규수에게 드리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오. 이 네 마디 명문이 어찌 보면 불길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지당한 이치를 내포하고 있지요.」 진가락은 (정심불수 , 강극즉욕)이란 말을 음미해 보았다. 그중에 내포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천지는 유유(悠悠)한데 세간의 불여의한 일들이 갑자기 마음속으로 몰려와 한바탕 시원하게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젊은 연인들은 정이 너무 깊어 가끔 귀신의 시기를 사기 마련 이지요. 그래서 재자가인의 말로가 원만치 못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속인들은 능히 백년해로를 하지요, 정불가극(情不可 極)강즉이절이라고 한 선현들의 말씀은 확실히 만물지정에 맞는 말이지요.」 권륜의 말이었다. 그러나 진가락은 더 듣고 싶지 않아 난옥을 품속에 챙겨 넣으며 작별을 고했다. 「주신 선물 정말 고맙습니다. 후일 다시 뵙겠습니다.」 「몸조심 하오.」 권륜이 오른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가락은 몸을 돌리고 성 안을 향해 걸어갔다. 백진이 진가락의 뒤를 따라와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정말 감격했숨니다. 이 은혜 쉽게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스럽군요. 「백 노선배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우리 다같이 무림의 동도가 아닙니까? 친구에게 일이 있을 때는 당연히 도와야지요.」 진가락은 다시 각로부로 향해 달렸다. 담을 뛰어넘고 안으로 들어가 서방을 찾았다. 내 형님은 이 시간 신원에서 몹시 바쁘실 것이오. 좀 있다가 다시 찾아가 봐야지. 그런데 아주머니는 무슨 소원 없어요? 어디 말씀해 보세요. 내 꼭 들어드릴게요.」 「제 소원은 다만 도련님이 편안하시고 장래 어진 아내를 얻어 훌륭한 아들이나 낳으셨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진가락은 웃었다.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군요. 청화(晴畵)와 우신 둘은 어디로 갔어요? 청화와 우시는 진가락이 어렸을 때 데리고 있던 종이었다. 「우시는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구요. 청화는 아직 여기 있으니 재가 가서 불러 오지요.」 그녀가 나간 지 얼마 후에 청화가 먼저 뛰어들어왔다. 진가락이 그녀의 날씬한 모습을 보니 이미 다 큰 예쁜 처녀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어리숙하던 태도가 아직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진가락을 보자 얼굴을 붉히며 (도련님!)한마디 부르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 어른이 되었군. 그래 우시는 어쩌다 죽었나?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어요.」 청화는 쓸쓸하게 말했다. 「아니, 무슨 일로 바다에 뛰어들어? 진가락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청화가 사방을 한번 휘둘러 보고 나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둘째나리께서 첩을 삼으시려고 하자 그만,,,,,,.」 진가락은 (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우리 자매들의 일을 도련님께 속이고 싶지 않군요. 우시는 집안의 하인인 진충과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요.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모았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시의 몸값을 모아 보려고 했던 것이지요. 마나님께서도 속신을 시켜 진충 과 부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허락을 내리셨어요. 그런데 둘째나리가 그녀에게 눈독을 들여 어느 날 술이 취해 가지고 그녀를 방안으로 불러들였어요. 다음날 우시는 울며불며 진충에게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우리의 팔자소관이 기박하니 짓밟혀도 할 수 있느냐고 달랬지만 끝내 고민만 하다가 밤에 몰래 바다에 뛰어들었답니다. 진충은 그녀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울다가 대문앞에 있는 돌사자에 머리를 찧어 죽었답니다.」 진가락이 그 말을 듣고 성이 나 눈이 째질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우리 형이 그 따위 인물일 줄은 정말 물랐군. 내 한번 만나려고 생각했다만 만날 필요조차 없겠구나. 그래, 우시의 묘지는 어디 있느냐? 좀 안내해 다오.」 「선덕문(宣德門) 옆에 있어요. 날이 밝은 후에 제가 모시고 가지요. 「지금 당장 가 보자구.」 「대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가요? 진가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끼어 안았다. 청화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막 입을 벌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 하는데 벌써 몸이 구름을 탄 듯 허공에 뜬채 창밖으로 날아가 지붕 위에 섰다. 진가락은 그녀를 데리고 지붕 위를 달렸다. 한참 달리다 보니 지붕이 끝나 그제야 땅바닥으로 내려와 걸었다. 잠시 뒤에 선덕문 옆에 당도했다. 청화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놀라 물었다. 「도련님, 선술을 배우셨나요? 「왜, 무서운가? 진가락이 웃으며 하는 반문에 청화는 미소만 머금을 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를 안내하여 우신의 묘지 앞으로 갔다. 한덩꺼리의 황토, 그것이 예쁜 젊음을 삼킨 것이다. 진가락은 어려서의 정리를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처연해져 머리를 숙였다. 청화는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도련님께서 집안에 계셨다면 둘째나리께서도 이런 일은 하시지 못했을 거예요.」 진가락은 잠잠하게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머리를 드니 밝은 달은 서천에 기울고 뭇 별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나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항주에 가야 한다.」 진가락의 말에 따라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진가락이 막 창을 뛰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다. 「도련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청화의 말이었다. 「어디 말해 보구려.」 「제게 한번만 더 도련님을 시중들 수 있게 해 주세요. 머리라도 한번 빗겨 드리고 싶어서요.」 진가락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웃으며 앉았다. 「그렇게 합시다. 청화는 희색이 만면해 밖으로 나가서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2개의 사기그릇이 놓여 있는데 한 그릇은 계화백목이 백합탕이요, 다른 한 그룻에는 네 쪽의 나미감당 우가 들어 있다. 이 은쟁반을 진가락의 앞에 내려놓았다. 진가락은 집을 떠나 십 년 동안 사막의 궁벽한 곳에서 살다가 다시 강남의 부귀한 집안의 재미를 맛보게 되자 새삼스럽게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는 은숟가락으로 탕을 떠 먹었다. 그동안 청화는 벌써 그의 땋은 머리를 풀어 기름을 바른 뒤에 빗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탕의 가운데 있는 찹쌀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덩어리는 자기가 먹고 다른 한 덩어리를 청화의 입에 넣어 주었다. 「여전히 그 버룻은 버리지 못하셨군요.」 청화가 웃으며 말했다. 머리를 다시 땋아 내렸을 때 진가락도 음식을 다 먹어치웠다. 「도련님, 어째 두루마기도 입지 않으셨어요? 그러다가 감기 드시면 어쩌려구요? 진가락은 속으로 웃었다. (내 아직도 십 년 전 약해빠졌던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청화는 청색의 비단 두루마기를 한 벌 내놓았다. 「이거 둘째나리 옷이에요. 좀 크기는 하겠지만 그냥 입어 보세요. 그를 도와 두루마기를 입히고 몸을 숙인 채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 주었다. 진가락은 그녀의 눈물이 한 방을 한 방을 옷자락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코끝이 찡했다. 몸에 지닌 몇 점의 금화를 모두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아버지에게 드려 몸값을 지불하게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서 잘 살아요. 나 이제 그만 가리다. 두 발로 땅을 구르며 창문을 통해 뛰어나갔다. 한 쌍의 옥병 진가락은 부드러운 인정과 슬픈 생각을 거두고 말을 달려 항주로 돌아왔다. 마선균의 집으로 오니 모두들 석쌍영을 둘러싼 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석쌍영이 바삐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북경에 가서 알아보니 황제가 벌써 강남에 와 있다기에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여러 형님들이 벌써 황제를 만나 서로 다투기까지 했다구요.」 「십이가,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많았소. 무슨 다른 소식은 들은 것이 없나요? 진가락이 물었다. 「저는 황제가 강남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중요한 일이 있구나 생각하고 다른 일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진가락은 그의 행색이 초라한 것을 보고 이 며칠 동안 연일 연 야 달려오느라 오죽이나 피곤하랴는 생각을 했다. 「빨리 들어가 잠이라도 좀 자고 잠시 쉰 뒤에 우리 다시 얘기를 나눕시다.」 석쌍영이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가다가 고개를 돌려 낙빙을 향해 말했다. 「넷째형수님의 그 백마가 정말 빨라요. 안심하세요, 제가 그동안 잘 보살폈으니까요. 「고마워요.」 석쌍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길에서 이 말의 옛날 주인인 한문충을 만났습니다. 「그래요? 그가 말을 찾아가려고 하던가요? 「그 사람은 나를 보지 못한걸요. 제가 양주의 여관에서 그 사람이 진원표국의 표두 몇 명과 함께 우리 홍화회 욕을 하는 것을 엿듣기까지 했습니다. 뭐 우리가 몽한약을 써서 비열하게도 그 동가성을 가진 자를 살해했다는 그런 이야기들이더군요.」 석쌍영의 이야기를 듣던 서천굉과 주기가 여기까지 듣다가 서로 바라다보며 웃었다. 「그날 그 녀석들을 죽이지 않고 용서해 주었더니 고맙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 욕을 하고 다니다니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것들이군요.」 참다 못한 주기의 말참견이었다. 「진원표국에서는 이번에 또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습디까? 서천굉의 질문에 석쌍영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한참 동안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하사한 진귀한 물건을 북경에서부터 해령의 진각로 댁으로 호송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진가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물건이 총타주님 댁으로 가는 것이기에 저는 강령(江寧)의 역타주에게 통지하여 암암리에 물건을 보호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대단히 고마워요. 이번에는 우리가 진원표국과 손을 잡은 셈이로군요. 「그들의 총표두까지 직접 나선 것으로 보아 그들이 이번 일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석쌍영의 말이었다. 진가락-무진 -조반산 주중영 등은 위진하삭 왕유양까지 나섰다는 말을 듣고 약속이나 한 듯 (아.小 하고 감탄성을 냈다. 주중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왕 노표두는 십여 년 전부터 직접 나선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나섰다니 그것 참 희한한 일이로군요. 총타주님, 댁의 명성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그들이 또 호송하고 있는 물건이 총타주님 댁으로 가는 진귀한 물건말고도 옥으로 만든 한 쌍의 병이 있다는 말도 들었거든요.」 석쌍영의 말에 진가락이 (옥으로 만든 병이라니?)하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글쎄 말입니다. 그것은 위구르의 보물인데요. 이번 조혜가 서정 에 나서자 위구르 사람들이 비록 한때 이기기는 했지만 청병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니 오래 싸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옥으로 만든 이 한 쌍의 병을 선물로 내놓으며 강화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석쌍영의 말 가운데서 위구르가 이겼다는 말을 듣자 모두들 흥분하여 그 진상을 물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혜의 대군의 군량을 우리가 빼앗았기 때문에 여러 날 굶고 지내다 할 수 없이 퇴각을 하는데 도중에 위구루의 복병을 만나 이삼천 명이나 살해되었다고 하더군요.」 군웅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주기가 서천굉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곽청동 언니가 만약 이 계책을 제 오빠의 묘책인 줄 안다면 틀림없이 고마워하겠지요.」 「그거야 누이가 날 보고 생각해 내라고 한 것 아니오? 서천굉이 웃으며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석쌍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혜는 군량이 도착하는 대로 다시 한 번 공격을 하겠지만 이번 싸움은 끝까지 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위구르의 강화 사신이 북경에 도착했는데 조신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사람을 강남으로 보내 황제의 결심을 듣기로 한 모양입니다. 왕유양 이 영감이 직접 출마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옥으 만든 한 쌍의 병을 위해서지요.」 「한 쌍의 병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진귀한 보물이 있다해도 황제는 강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진가락의 말에 석쌍영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제가 표국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강화를 허락할 것 같으면 물론 옥으로 만든 병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되돌려 줄 것이라고들 하던데요. 그렇기 때문에 옥으로 만든 병이 손상되어서는 아니되겠지요. 진가락이 서천굉을 향해 눈짓을 하고는 둘이 함께 저쪽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칠가, 어제 저녁에 내가 황제를 만났었소. 사흘 뒤에는 북경으로 돌아가겠다며 그 안에 사가를 살해하겠다고 하오.」 서천굉이 깜짝 놀라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가 이미 사가가 제독 이가수의 내아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지금 정세가 위급하니 즉시 손을 써야 되겠군요.」 「황제가 어쩌면 아직 항주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시위들이 대부분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우리의 일이 더 쉽게 해결될 수도 있겠지요.」 「황제가 항주에 없습니까? 진가락은 권륜이 해령에서 조수를 구경하며 해당을 대대적으로 수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해 주었을 뿐 성묘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서천굉은 탁자 위에 있는 붓과 벼루 , 종이 등을 이리 옮겨 놓았다가 다시 저리 옮겨 보았다 하며 심사숙고할 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진가락은 그가 사람을 구출할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한쪽에 비켜 앉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서천굉이 입을 열었다. 「총타주님, 우리 힘은 강하고 상대방의 힘은 약하니 강공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다.」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두 사람은 결정이 내려지자 다시 대청으로 돌아와 군웅들을 소집해 임무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진가락이 두 손바닥을 치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 즉시 문 사당가를 구출하러 출발합시다.」 군웅들이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십삼가께서는 수영 잘하는 삼백 명의 형제를 인솔하여 선척을 준비하시오 우리가 일단 거사에 성공하면 모두들 배를 타고 태호로 퇴각할 것이오.」 장사근이 명령을 받고 물러갔다. 「마대정 마 형제는 가벼운 물건만 챙겨 가지고 심연과 여기 형제들의 가족을 우선 배에 태우도록 하시오.」 마대정도 명령을 받고 물러갔다. 「십이가께서는 너무 피곤하실 테니 배에 올라 잠깐 쉬십시오. 나머지 여러 형님들은 나와 함께 가서 제독부를 공격, 문 사가를 구출하십시다. 이제 칠가께서 공격에 대한 구체적인 임무를 말씀드릴 것이니 모두들 그의 지시에 따르시오.」 서천굉이 나섰다. 「넷째형수님, 형수님은 사시(巳時)에 제독부 동쪽에 있는 흥릉포 장점으로 가셔서 그곳에 방화를 하신 후에 제독부의 서문으로 오셔서 공격에 합류하십시오.」 낙빙이 임무를 부여받고 물러갔다. 서천굉이 이번에는 마선균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 대가께서는 사람을 시켜 흥릉포장점의 주인과 심부름꾼을 모두 이리로 청해 오세요. 무슨 설명을 그들에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이 끝난 뒤에 바로 손해 배상을 해 주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전 성의 각 거리에 있는 수룡대를 소집해 주시고 힘 깨나 쓰는 사백 명의 형제들도 소집해 주시오. 녹영 가운데 소속된 형제들 삼백 명을 별도로 선발했다가 진시(辰時)에 여기서 명령에 쫓도록 조치해 주시오.」 마선균이 명령을 받고 즉시 사람을 시켜 회중을 소집하도록 했다. 팔제는 2字 명의 형제를 인솔하되 백 명은 손수레에 마른 풀을 가득 싣게 하고, 나머지 백 명에게는 장작과 숯을 짊어지게 하여 나무꾼으로 위장하도록 하시오. 구제는 수룡대를 인솔하여 불을 끄는 체 하시오. 주기 누이는 백 명의 형제를 인솔하고 난민으로 위장하여 각기 백 근의 기름을 지게 하고 또 등에 가마솥을 메게 하시오. 「가마솥과 기름을 준비하라니, 무슨 요리를 만드나요? 주기가 웃으며 반문을 했다. 내 쓸 곳이 있어서 그래요. 십제는 백 명의 형제를 인솔하여 미장이와 목수로 위장하여 각기 손수레를 끌고 수레에는 석회를 가득 싣도록 하시오.」 군웅들은 서천굉의 지시를 들으며 우습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서천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 대가, 마 대가께서는 청병의 군관으로 분장하시고 3백 명의 녹영 소속 형제들을 통솔하여 밖에서 순라를 돌도록 하시오. 잡인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제독부 사람이 밖으로 나와 소식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의부와 맹 대가, 안 대가는 남쪽 담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십시오. 총타주님과 도장, 그리고 저는 서쪽 담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갈 것이니 삼가, 오가, 육가는 북쪽 담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십시오.」 그가 이렇게 임무를 부여한 뒤에 예정된 계략을 상세하게 설명하자 군웅들은 모두 묘한 계략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선균은 즉시 사람을 이곳저곳으로 파견, 은자를 가지고 나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인마를 소집하도록 했다. 항주에서의 홍화회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그 모든 준비를 완료할 수가 있었다. 군웅들은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거사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도 배불리 먹었겠다, 각자 변장을 하고 병기를 숨긴 채 각기 나뉘어 제독부를 향해 출발했다. 진가락이 서천굉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손자병법에, 불의 도움을 써서 공격하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물의 도움을 써서 공격하는 것을 강(强)이라 했는데, 이제 화공(火 攻) -수공(水攻)그밖에 유공(油攻) , 석회공까지 있으니 이가수가 무슨 방법으로 막아내겠소?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포장점이 불에 타는 것이었다. 낙빙이 포장점에 방화하자 유황이며 초석(硝石)이 폭발하고 근처 주민들이 놀라 도망하는 바람에 크게 어수선해졌는데도 제독부 쪽은 아무 동정도 없었다. 그녀가 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에 제독부의 높직한 담 옆에 수백 명의 병사들이 일렬로 선 채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삼엄한 경비태세를 취하고 있었으며, 그밖에 수십 명의 병정들이 물통을 든채 담 앞에 모여 기다리고만 있을 뿐 불을 끄러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낙빙은 이가수가 꾀 지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적의 계략에 걸려들까 두려워 밖이 제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유리한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혼란스런 가운데 수백 명의 나무 장수들이 몰려와 불이 난 것을 보고 당황해하며 지고 온 나무들을 여기저기에 그대로 버렸다. 제독부 안에서 군관 하나가 나와 이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바보 같은 것들아, 나무 짐을 여기 버리면 얼마나 위험한가? 빨리 지고 가지 못할까. 말채찍을 들어 닥치는 대로 치니 나무 장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다. 이 어수선한 가운데 징소리가 크게 울리며 수십 대의 소방용 마차가 달려오는데 이때 제독부 밖에 버려진 마른 나뭇짐에도 불이 붙어 타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주기가 통솔하는 위장한 난민들 1백여 명이 몰려와 땅 위에 솥을 걸고 그 안에 기름을 부은 뒤에 장작불을 때어 끓이기 시작했다. 이가수는 담 위에 서서 불길을 바라보다가 군중들의 이상한 움직임을 보고 참장인 증토남을 시켜 조사해 보도록 했다. 증도남이 난민들 곁으로 다가가서 꽥 소리를 질렀다. 「네놈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우린 음식을 준비하고 있어요. 보고도 모르시나요? 주기가 웃으며 대답하자 증도남이 욕설을 퍼붓는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아!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이렇게 떠들고 있는데 마선균이 벌써 녹영의 병정들을 인솔하고 와 사방에서 제독부를 겹겹이 에워싸고 다른 잡인들을 모두 쫓아 보냈다. '어느 나리께서 병사를 인솔하고 오셨습니까? 빨리 이쪽으로 오셔서 이들 간사한 무리들을 좀 쫓아 보내 주셨으면.......」 증도남의 외치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주기가 펄펄 끓는 기름을 나무국자로 떠 그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증도남은 너무나 뜨겁고 아파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수종하는 병정이 놀라 그를 부축한 채 제독부 안으로 달아났다. 담 위에 있던 청병들이 이를 보고 화살을 퍼부었다. 홍화회의 뭇 형제들은 땔감을 실은 손수레 뒤에 숨어 문에 화살이 그들을 맞추지 못했다. 이때 벌써 기름이 있어서 위춘화는 수룡대를 독려하여 끓는 기름을 소방 부어 담 위를 향해 뿌렸다. 청병은 뜻밖의 기습에 머리며 손에 온통 기름 세례를 받고 즉시 떨어져 내려왔다. 이가수는 홍화회의 무리들이 감옥 안의 죄수들을 구출하기 위해 습격한 것으로 판단하고 즉시 사람을 파견, 밖으로 내보내 지원하게 하고는 자신은 직접 담 위에 나타나 방어에 임했다. 그런데 밖으로 파견한 사람들이 모두 마선균이 인솔한 녹영의 형제들에 의해 차단되고 있지 않는가? 어이가 없어 속수무책인데 불길까지 점점 거세지며 담으로 접근해 오고 있어 공연히 두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사실 서천굉이 땔감에 불을 지르게 한 것은 허장성세를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정말 제독부에 불이 붙어 타고 문태래를 미처 구출해 내지 못한다면 이 어찌 일을 크게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끓는 기름은 다 써 버리고 난 후라 다시 떵수를 퍼붓기 시작했다. 장진이 통솔하고 있는 무리들이 생석회를 포대째 제독부 안으로 집어던져 소방 호스로 뿌린 냉수에 젖어 부글부글 끓자 놀란 청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돌격하시오. 진가락이 외치자 뭇 형제들은 사기충천하여 사방에서 제독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위장한 -백 명의 난민들은 여전히 제독부 밖에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청병들은 각기 칼과 창을 들고 대항했다. 장진이 낭아봉을 휘두르며 진격해 들어가고, 그 양쪽에서는 양성협과 위춘화가 각기 회중을 인솔하고 맹렬하게 돌격해 쳐들어갔다. 청병은 대항을 하면서도 계속 밀려 수천 명의 관병이 연무장에 몰려 북적거리다 홍화회 회중에 의해 2중 3중으로 포위되었다. 서천굉이 홍화회의 암호로 명령을 전달하자 회중이 갑자기 사방으로 물러나고 사람들 틈에서 수십 대의 소방 마차를 밀고 나와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물을 청병을 향해 뿌렸다. 청병들은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지만 달아날 장소가 없어 그 자리에서 뒹굴며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파고들어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잠시 살수를 멈추시오. 서천굉이 이렇게 명령하고 다시 청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목숨이 아깝거든 빨리 병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엎드리라.」 청병이 망설일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물을 뿌려라. 수십 줄기의 물이 다시 청병들을 향해 쏟아졌다. 대부분의 청병들이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가수가 두려워 쩔쩔매고 있는데 갑자기 한 소년이 칼을 든 채 밖에서부터 뛰어들어오며 그의 손을 잡고 달리면서 외쳤다. 「아버지, 빨리 가요. 바로 남장을 한 이원지였다. 진가락과 무진 등은 이미 제독부 안팎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낙빙은 남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손에 잡히는 대로 청병을 하나 붙잡고 칼등으로 그의 어깨를 마구 두드리며 물어 보았지만 그 청병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기만 했다. 정말 문태래가 감금되어 있는 장소를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때 갑자기 복면을 한 사람이 옆에서 뛰어나오며 칼로 낙빙을 향해 찔렀다. 낙빙은 오른손의 단도로 막으며 왼손의 장도로 반격을 했다. 그는 칼을 들어 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남편을 만나고 싶거든 내 뒤를 따라오시오. 낙빙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사람은 벌써 고개를 돌려 가 버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낙빙이 물으며 뒤를 쫓았다. 장진과 주기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을 하며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복면을 한 그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 곧장 후원을 향해 달렸다. 낙빙 -주기 장진이 그 뒤를 쫓아갔다. 「당신은 누구요? 낙빙이 계속 물었지만 복면을 한 그 사람은 대답도 하지 않은 체 몇 개의 월동문을 지나 벌써 회원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시체만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무진 등이 문태래의 소재를 찾아다니는 도중에 살해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화단 옆으로 달려와 그 화단을 끼고 한 바퀴 돈 뒤에 네 번 손뼉을 치고 말했다. 「화단 밑에 있어요,,----.」 이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가수 부녀가 화원으로 뛰어들어오는 것이 보이고, 상씨쌍협이 뒤를 쫓고 있었다. 복면을 한 그 사람이 상씨쌍협의 앞으로 뛰어가 칼을 들고 막는데 이 틈을 노려 이씨 부녀가 담 위로 뛰어올랐다. 상백지가 비조를 휘두르자 복면한 사람이 칼을 들어 비조의 공격을 막고 뒤로 펄쩍 뛰었다. 상씨 형제가 접전을 할 때는 늘 서로 호응을 했다. 이들 형제 네 손과 네 발은 마치 한 사람의 손발처럼 움직였다. 상백지의 비조가 날자 상혁지는 벌써 적의 퇴로를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뒤로 물러서자마자 상혁지의 왼손이 벌써 그의 등을 후려쳤다. 그가 뒤로 몇 발짝 비틀거리는 것을 보며 낙빙이 소리쳤다. 「오가, 육가. 그를 해치지 마세요.」 상씨쌍협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그는 벌써 화원의 문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낙빙은 그의 이상한 거동을 상씨쌍협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쌍협이 화단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궁금중을 풀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는데 장진이 조급해 소리를 지른다. 「사가, 사가, 어디 계시오? 우리가 사가를 구출하러 왔소. 낭아봉을 휘둘러 화단의 화분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셨다. 상혁지가 언뜻 보니 부서진 화분 하나의 밑바닥이 이상했다. 제빨리 그쪽으로 뛰어가 살펴보니 쇠고리 하나가 달려 있었다. 힘껏 잡아당기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며 화단이 서서히 이동하여 하나의 커다란 돌판이 나타났다. 주기는 그 아래에 분명 무언가 있음을 알고 밖으로 달려나가 서천굉과 진가락 등을 불러들였다. 상씨쌍협 -장진-낙빙 등 네 사람이 힘을 합쳐 돌판을 들어올리려고 해 보았지만 쇠를 부어 만든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여보, 여보. 당신 아래에 계셔요? 낙빙이 큰소리로 이렇게 부르고 돌판에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서천굉이 그 돌판을 보니 아무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뒤로 몇 발짝 물러서 다시 그 화단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며 갑자기 그 돌판의 오른쪽 모서리에서 희미하게 태극 팔괘의 그림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돌판 위로 펄쩍 뛰어올라 단괴의 끄트머리로 태극도의 중심을 눌러 보았지만 아무 동정이 없다. 다시 한 번 힘껏 누르자 갑자기 발밑이 흔들림을 느끼고 급히 뛰어 물러났다. 돌판이 갑자기 내려앉자 낙빙은 너무나 기뻐 막 뛰어내리려고 했다. 「잠깐만. 상백지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잡았다. 바로 이때 아래서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 셋이 날아왔다. 낙빙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돌판이 완전히 내려앉자 거기에 돌 계단이 나타났다. 「오가, 육가, 두 분은 여기 입구를 지키세요. 그리고 우리는 내려가 봅시다.」 진가락의 말이었다. 이때 무진,조반산.주중영 .양성협 .맹건웅 등이 벌써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함께 들어갔다. 장진이 낭아봉을 휘두르며 앞장을 섰다. 돌계단이 다 끝나자 길고 긴 좁은 길이다. 군웅들이 끝까지 달려가보니 거기 철문이 보인다. 서천굉이 부싯돌을 꺼내 불을 밝히고 철문 위를 비춰 보니 예기했던 대로 태극 팔괘도가 있다. 단괴로 태극도의 중앙을 두 번 누르며 외쳤다. 「모두들 한쪽으로 비키세요.」 군웅들은 좁은 길의 양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혹시 철문 가운데 무슨 암기가 있어 발사될까 봐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암기는 없었고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철문이 땅 위에서 몇 자 정도 올라가자 군웅들은 확실히 보았다. 철문의 두께가 두 자는 넉넉하다. 그렇다면 그 무게는 적어도 천 근은 넘을 것이다. 낙빙은 철문이 다 올라가 붙기도 전에 몸을 숙이고 그 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넷째형수님, 잠깐만. 서천굉이 만류했지만 낙빙이 벌써 들어간 뒤였다. 장진과 주기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군웅들이 막 쫓아 들어가려고 하는데 위춘화가 밖에서 안으로 뛰어들며 진가락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총타주님, 그 장군이 벌써 밖으로 빠져 달아났어요. 미처 막을 사이도 없었습니다. 빨리 손을 써야지, 그자가 구원병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가서 마 대가를 도와 화살을 많이 준비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구원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오.」 진가락의 말을 듣고 위춘화는 밖으로 나갔다. 진가락과 무진 등이 모두 철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또 좁은 길이 나타났다. 모두들 사람을 구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암기 같은 것에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앞을 향해 곧장 달려나갔다. 몇 장 정도 달려나가자 좁은 길이 끝나는 듯싶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렇게 복잡해서야 원. 장진이 욕을 하며 끝까지 가 보니 원래부터 꺾어진 길이다. 군응들이 모퉁이를 돌자 눈앞에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장진이 낭아봉으로 치자 문이 그냥 열리며 갑자기 환해졌다. 문 뒤는 작은 방이었다. 실내에 커다란 촛불이 켜져 있고 중간에 있는 의자에 한 사람이 칼을 짚고 앉아 있었다. 원수를 만나면 눈에서 불꽃이 튄다더니 바로 화수판관 장소중이었다. 장소중의 뒤에는 침대 하나가 있는데 낙빙이 제일 먼저 보았다. 그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바로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남편이었다. 문태래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보니 사랑하는 아내가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어리둥절 했다. 그의 손발은 모두 수갑과 족쇄로 묶여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다만 (아) 소리만 냈다. 낙빙은 께 자루의 비도를 장소중을 향해 날렸다. 그가 받거나 피하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대로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로 엎어지듯 쓰러졌다. 장소중은 왼손을 오른쪽에서부터 휘둘러 날아오는 세 자루의 비도를 손 안에 잡은 뒤에 오른손으로 자기가 앉아 있는 의자에 설치된 단추를 눌렀다. 쇠로 만든 그물이 연중에서 떨어져 내려와 문태래가 누워 있는 침대를 덮었다. 이들 부부는 눈을 뜬채 서로 바라보기만 할뿐 방법이 없었다. 우리 힘을 합쳐 이 간사한 자부터 요절을 내고 맙시다.」 진가락이 외치며 소매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뒤집어 들고 장소중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무진 , 조반산, 주중영 등은 장소중의 무공이 막강한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일이 위급해서 1대 1로 상대하는 것이 떳떳한 호한의 행위라는 사실 같은 것을 따질 사이도 없었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들고 그를 에워쌌다. 화수판관은 정신을 집중해 접전하면서 네 사람의 공격을 물리치고 그 바쁜 가운데서도 응벽검으로 공격 태세까지 취했다. 진가락은 비수를 품속에 챙겨 넣고 두 손으로 금나법을 쓰며 장소중의 앞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는 적의 공세는 무진 등이 대신 받아 줄 것으로 알고 수비는 포기한 채 연거푸 계속 진격해 들어갔다. 장소중의 무예가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어찌 네 사람의 진공을 혼자 당해낼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원래 좁은 실내라 등을 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무진은 크게 반기며 칼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동시에 주중영과 진가락 , 조반산도 일시에 공격을 했다. 장소중은 왼손을 벽에 대고 버티며 꼬른손의 칼을 들어 저항했다. 무진의 칼이 점점 더 빨라져 이제 곧 그를 칼로 찍어 벽에 못박아 놓을 참이었다. 그런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갑자기 작은 문이 나타나며 장소중이 번개처럼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감과 동시에 문이 닫혀 버렸다.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진은 발을 동동 구르고 애석해하며 마구 욕을 퍼부었다. 진가락이 문태래의 면전으로 펄쩍 뛰었다. 이때 장진과 주기 , 낙빙이 각기 병기를 들고 문태래를 덮고 있는 쇠그물을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찌르고 자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철판 하나가 내려와 문태래를 그 안에 가두어 이들과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급히 낙빙과 주기를 뒤로 잡아당겼다. 하마터면 이들 두 사람이 철판에 깔릴뻔 했다. 장진이 낭아봉으로 철판을 두들겨 댔지만 탕탕 하는 소리만 들리고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천굉은 이 철판을 열 만한 무슨 장치가 없을까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태극 팔괘의 도형이 나타나 힘껏 눌러 보았지만 장소중이 벌써 안에서 무슨 수를 썼는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양성협은 맨 뒤에 서서 좁은 길의 모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밖에서 누가 침입하여 자기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며 쇠로 만든 바가 꼬이며 움직였다. 「큰일났어요. 양성협이 외치며 빠져나갔다. 서천굉 등은 포기할 수가 없어 계속 그 철판을 열 수 있는 장치를 찾고 있었다. 낙빙은 철판을 어루만지며 울부짖었다. 「여보, 여보. 갑자기 좁은 통로 가운데서 양성협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데 너무나 다급한 소리라 조반산과 주중영이 그쪽을 향해 뛰었다. 「빨리들 나오시오, 빨리요 빨리.」 잠시 후에 조반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모두들 뛰어나갔다. 낙빙만이 못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철판에 손을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주기가 모퉁이를 돌아가다가 낙빙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달려와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 당겼다. 양성협이 두 손으로 천 근이 넘는 그 쇠문을 받치고 있는데 벌써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중영이 큰칼을 집어던지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힘을 다해 쇠문을 위로 받쳤다. 「우리 먼저 나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진가락이 형세가 위급함을 보고 외치자 군웅들은 쇠문 밑으로 빠져나왔다. 양성협과 주중영이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지만 그 쇠문은 여전히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내려왔다. 장진이 허리를 굽히고 달려들며 외쳤다. 「내가 떠받칠게요. 곱사등으로 천 근이 넘는 쇠문을 받치고서야 양성협과 주중영이 겨우 밖으로 빠져나을 수가 있었다. 양성협이 바닥에 집어던졌던 강편을 주워 쇠문에 버텨 세우고 외쳤다. 「십제, 빨리 나오시오. 장진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 쇠문이 아래로 내려왔다. 강편이 버티고 있어 떨어져 내려오는 기세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를 틈타 양성협이 장진의 어깨를 잽싸게 나꿔챘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강편이 쇠문의 압력에 의해 부러져 나가고 다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쇠문이 땅바닥에 내려와 앉으며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양성협과 장진은 모두 맥이 빠져 땅바닥에 앉아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좁은 길 가운데로 급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상혁지가 달려들어왔다. 「총타주님, 밖에 어림군이 도착했습니다. 접전을 할까요, 말까요. 「직접 대결하면 불리하니 우리가 후퇴를 합시다.」 서천굉의 말에 진가락도 동의했다. 「좋아요, 우리 모두 퇴각합시다.」 조반산과 주중영은 닫힌 쇠문의 장치를 들추어 보기도 하고 잡아당겨 보기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진가락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화원 가운데 곱게 차려 입은 젊은 부인 하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숨을 곳을 찾는 모양이 보였다. 「잡아라. 진가락의 외침소리를 들은 주기가 달려가 붙잡았다. 제독부 밖으로 나오니 놀란 군중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는데 관병과 군중이 제멋대로 섞여 엉망이었다. 진가락이 홍화회의 은어로 외쳤다. 「즉시 퇴각하여 모두 무림문떳잔껸-밖에 집합하시오.」 뭇 사람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각로(各路)의 인마가 북쪽을 향해 퇴각했다. 관병들은 영문을 몰라 쫓아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군웅들은 일이 거의 성공할 무렵에 실패를 하자 노상에서도 이론이 분분했다. 성 밖으로 나오자 진가락이 외쳤다. 「성 북쪽의 산속에서 음식을 만들어 요기를 한 다음 다시 상의해 봅시다. 주기가 통솔하고 있는 무리들은 때마침 큰 가마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십 명의 회중이 쌀과 찬거리를 사다가 숲속에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조반산이 낙빙을 위로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우리가 사제를 편안히 구출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라오.」 뭇 사람들은 두 차례나 문태래를 구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를 장소중이 망쳤다고 해서 용서할 수 없는 놈이라고 욕들을 했다. 모두들 또 그 복면을 하고 나타났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궁금해했다. 문태래가 감금되어 있던 장소를 알려 주었으니 틀림없는 친구일 텐데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있으니 답답했고, 또 이가수를 도와 달아났으니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상의하고 있는데 숲 밖에서 워우-위이양, 워우-위 이양 하고 외치는 물품 호송꾼들의 소리가 들렸다. 「진원표국 사람들이로군요.」 양성협의 말에 낙빙은 욕부터 했다. 「진원표국인은 극악무도한 놈들이에요. 그 동가 성을 가진 녀석 칠가께서 죽여 없애기는 했지만 아직도 제 마음속의 원한은 풀리지 않았어요. 이번에 제놈들의 재수가 좋아서 총타주님 댁의 물건을 호송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제놈들 물건을 안뺏고 그냥 있을 수가 있나요. 서천굉이 진가락을 한쪽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떠들썩하게 했는데 황제가 당황해 혹시라도 사가를 미리 처단하지는 않을까요? 「방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진가락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옥으로 만든 병을 뺏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옥으로 만든 병이라니요? 「그렇습니다. 아까 십이제가 그러는데 위구르 부족이 옥으로 만든 한 쌍의 병을 보내 와 강화를 요구했는데 그걸 진원표국에서 호송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황제가 이미 서정을 위해 대군을 파견한 마당에 강화에 응할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옥으로 만든 병은 틀림없이 반환할 것입니다. 물건은 받고 강화에 응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웃을 테니까요. 황제는 늘 체면을 제일로 치고 생색 내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은 꾀 꼼꼼이 따지는 성미거든요.」 「그러니까 옥으로 만든 그 병을 빼앗아 가지고 가서 상대하자는 것이지요? 사가의 머리털 하나만 건드려도 그 옥병을 깨부수겠다고 고 말이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옥병을 가지고 사가와 맞바꿀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며칠 지연시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위구루의 목 노영웅님에게도 유리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우리 그러면 위진하삭 왕유양과 어디 한판 대결해 봅시다. 진가락은 희색이 만면하여 서천굉이 내놓은 의견에 찬성했다. 마술사들의 정체 위진하삭 왕유양은 금년 예순아홉 살이다. 서른살 때부터 탁송하는 물건을 호송하는 이 업에 나섰다. 한 자루의 팔괘도와 한 쌍의 팔괘장(八卦掌)으로 강북(江北)의 농림을 쳐 무적의 왕이 되었다. 그가 직접 창설한 진원표국은 30여 년 동안이나 북방에서 그 명성을 드높였고 적지않은 세파의 바람과 파도 속에서도 시종 우뚝 솟은 채 넘어지지 않았다. 녹림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염라대왕을 건드릴망정 노왕 (老王)은 건드리지 말고 그의 표기(標旗)만 보면 대담한 사람까지도 멀리서 한 번 바라보고 말았다. 그는 원래 내년 70세의 생일만 지나면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 청복이나 누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년에 조혜 장군의 명을 받아 위구르의 성물인 코란 경을 호송하다가 그 성물을 탈취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신뢰하던 표두까지 여러명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 다시 옥으로 만든 병을 호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병부에서 직접 나서야 한다고 지명까지 했다. 왕유양은 나이가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무공은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 조정의 심부름이 중차대하다는 것을 안 이상 소홀히 취급할 수가 없어 각 처의 표국에서 여섯 명의 고수를 선발했다. 조정에서도 4명의 대내시위와 20명의 어림군을 파견해 주어 위구르의 사자와 동행하여 남행을 하면서도 삼엄한 경계를 펴 그동안 별 할 일이 없이 지내 왔다. 이날 오패시가 될 무렵 한 큰 고을에 도착했다. 항주성과는 1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고을이다. 모두들 비교적 큰 식당을 찾아가 음식을 시켰다. 이곳은 인구가 많은 곳이라 별 탈이 없을 것으로 믿었다. 모두들 홀가분하고 들뜬 기분으로 항주에 도착한 뒤에 어떻게 한번 멋지게 놀아 볼까 하고 떠들고 있었다. 침들을 튀기며 떠들썩한데 갑자기 문 밖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와 한문충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쏜살같이 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애마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데 말 등에 딱딱한 장작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토록 사랑하는 말이 짐 나르는 일을 하다니 한문충은 불쌍한 생각도 들고 또 한편 화도 났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이 앞서 펄쩍 뛰어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말 뒤로 시골 사람 하나가 따라오다가 채찍을 들어 말 엉덩이를 치고는 말 등의 장작 위에 올라 앉았다. 한문충이 고삐를 미처 잡기도 전에 말은 수 장이나 달려나갔고 말위에 타고 있던 사람의 아이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앉은 자세가 불안했던지 떨어질 것만 같다. 한문충이 필사적으로 쫓아가자 말은 모퉁이를 돌아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문충이 어디 (숲을 만나면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그런 금기를 고려할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대로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표두들은 그가 시골 사람의 뒤를 쫓는 것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표두인 왕호천이 이 광경을 보고 웃었다. 「한 대가가 그 백마를 생각하다가 머리가 돌았나봐. 노상에서도 그저 하얀 말만 보면 끝까지 쫓아가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니까. 집으로 돌아가 한 형수의 하얀 살결을 보고도 혹시 그 백마가 아닌가 해서 저렇게 달려들 테지. 모두들 이 말을 듣고 낄낄거렸다. 이렇게 웃고 떠드는데 심부름꾼의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 나리,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오늘 무슨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오셨을까? 돈 많은 장사꾼 차림을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데 쪽빛 두루마기에 비단 마고자를 입었다. 뒤로 4명의 식구가 있는데 담뱃대를 든 사람도 있었고 먹을 것을 담은 합을 든 사람도 있었다. .돈이 좨 많은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장 나리라 불린 사람이 좌정을 하자 점원은 금방 차를 따랐다. 장 나리, 이것은 호포(虎砲)의 샘물로 끓인 차예요. 어제 길어온 것이에요. 이 명전(明前)의 용정(龍井)차를 맛보세요.」 음, 고기 좀 샐고 하포선 한 접시와 오래 묵은 소흥주를 서 근만 가져오게나.」 정확한 항주 말투로 이렇게 주문을 했다. 점원이 대답을 하고 나간뒤 얼마 되지 않아 향긋한 술 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받쳐 들고 왔다. 한 노제는 떠난 지 한참 되었는데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가? 왕유양의 물음에 졸개인 손노삼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나막신 끄는 소리를 내며 난쟁이 하나가 들어오고 그 뒤로 커다란 처녀 하나와 건장한 장정이 따랐다. 세 사람 모두 강호상의 떠돌이 차림이었다. 난쟁이가 사방을 향해 읍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속담에 이르기를, 집에서는 부모님께 의지하고, 나와서는 친구에게 의지한다 했습니다. 저는 강호를 떠돌며 작은 재주를 가지고 여러분께서 술을 드시면서 즐기시라고 웃음을 팔고 다닙니다. 재미가 있다고 생각되시면 몇 푼 집히는 대로 주시고 재미가 없거든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을 마치자 탁자 위에 찻잔을 들고 머리에 썼던 낡은 모자를 벗어 찻잔을 덮고는, 「변해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모자를 제치니 찻잔이 없어져 버렸다. 모자를 들어 여기저기 뒤집어 보이는데도 찻잔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마술이 다 속임수임을 알기는 했지만 그가 도대체 어떻게 손을 놀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장 나리라고 하는 자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자 난쟁이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나리의 담뱃대를 잠시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 나리는 재미가 나서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자기의 담뱃대를 그에게 건네 주었다. 난쟁이가 담뱃대를 모자 밑에 넣었다 다시 접힐 때는 이미 없어져 보이지 않았다. 장 나리의 집안 식구가 웃으며 말을 했다. 勺 담뱃대 아주 비싼 것이니까 망가뜨리면 안 돼요.」 「당신의 주머니를 한번 뒤져 보세요.」 난쟁이가 웃으며 하는 말에 따라 그는 자기 주머니를 뒤지자 거기서 그 담뱃대가 나왔다. 이렇게 되자 장 나리와 그의 식구들만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 아니라 표사들과 어전 시위까지도 몰려와 난쟁이의 주위를 에워싸고 구경을 했다. 장 나리가 왼손 식지에 끼고 있던 비취 반지를 뽑아 난쟁이에게 주며 웃는다. 어디 한번 더 재주를부려 보시오.」 난쟁이가 반지를 받아 탁자 위에 놓은 후 모자를 덮고 거기에 김으로 바람을 일으켜 불고 소리를 친다. 동으로 변했다, 서로 변했다,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변해 보아라. 손끝으로 모자를 한 번 가리키며 제치니 과연 반지가 없어져 버렸다. 모두들 신기해하며 박수 같채를 보냈다. 나리, 나리의 주머니를 뒤져 보세요.」 난쟁이의 말에 따라 장 나리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힌 재주로군.」 이때 가게 문으로 수십 명이 계속 안으로 들어왔다. 보부상도 있고, 관가의 심부름꾼 같은 사람도 있고, 통병 군관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사람들이 모여서 마술을 구경하는 것을 보는 그쪽으로들 다가왔다. 한 군관이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이 따위 마술이라는 것이 다 속임수지 뭐 그리 희한할 것이 있나? 이 나리의 이 물건 어디 네놈이 변하게 하는가 보자. 손으로 탁자를 탁 치는데 보니까 보수 문서다. 봉피에 (급정북경 병부왕대인(急呈北京兵部王大人)이란 글자가 보이는 아래는 (절강 수륙제독이)라고 씌어 있었다. 난쟁이는 죄송스러워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군관 나리,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밥이나 얻어먹자고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데 관가의 중요한 문서를 어찌 감히 건드릴수 있겠습니까? 장 나리는 군관의 기염이 못마땅했다. 장난삼아 하는 마술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니 어디 한번 그 문서를 가지고 해 보구려.」 하고는 고개를 돌려 자기 일행을 바라보았다. 營業營業 「은자 다섯 냥을 이리 주게.」 집안 식구 중에 한 사람이 행낭 속에서 1정의 은자를 꺼내자 장 나리가 그것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재주를 잘 부리기만 한다면 이 은자는 자네 것이 되네.」 난쟁이는 은자를 보고 고개를 돌려 큰 처녀와 몇 마디 귓속말을 주고받은 뒤에 그 군관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다. 「군관 나리, 제 감히 무멈하게도 재주를 부릴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자를 들어 문서를 덮고 소리를 질렀다. 빨리 변해라, 빨리. 옥황상제가 오시고 태백금성(太白金星)이 큰 소리를 치는구나. 이렇게 되는 대로 지껄이다가 손으로 동서남북을 가리키더니 갑자기 옥으로 만든 병을 담은 가죽 그릇을 가리키며, 「들어가거라,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카락 하나가 가죽 그룻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모자를 번쩍 치켜드는데 그 문서가 보이지 않는다. 「바보 같은 놈이 손재주 하나는 그럴듯하구나.」 군관이 비웃는 듯이 말하였다. 난쟁이가 장 나리를 향해 꾸벅 절을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리, 이 상금 정말 고맙습니다.」 탁자 위의 은자를 챙겨 뒤에 서 있는 큰 처녀에게 넘겨 주었다. 구경꾼들이 일제히 잘한다고 갈채를 보냈다. 「이제 됐으니 문서를 도로 이리 주게.」 그 군관의 말에 난쟁이가 웃었다. 이 가죽 그릇 안에 있으니 나리께서 직접 열어 보세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표행의 무리들이 소스라치제 놀랐다. 가죽 그릇 위에는 황궁 내부의 봉인이 찍혀 있으니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 군관이 그쪽으로 가서 손을 뻗어 가죽 그릇을 만지려고 했다. 여보시오 군관, 이건 황궁의 보물이라 건드릴 수 없는 것이오. 표두인 왕호천의 말이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오? 군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대려고 했다. 누가 당신과 농담을 한단 말이오? 썩 물러나시오. 어전 시위인 마경협(馬敬成)이 나섰다. 군관은 마경협이 시위의 복장을 한 것을 보자 계급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인 것을 알고 허리를 굽혔다. 네, 네. 죄송스럽지만 대인께서 제게 문서를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마경협이 난쟁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장난 집어치우고 빨리 문서를 이분께 돌려 드려라.」 문서는 정말 이 가죽 그룻 안에 있습니다. 대인께서 믿지 못하시겠거든 열어보십시오 금방 아실 텐데요.」 그 군관은 화가 나서 주먹으로 난쟁이의 어깨를 후려쳤다. 「잔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내놓아라.」 큰 처녀가 화를 내며 나섰다. 「말로 해도 될 텐데 왜 사람을 때리십니까? 아니. 이 빌어먹을 것들이 이 나리의 공문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군관이 다시 한 번 욕을 하자 장 나리가 못마땅해하며 나섰다. 여보시오 군관 나리, 거칠게 굴지 마시오.」 하고 다시 난쟁이를 바라보았다. 재주를 부려 문서를 빨리 이분께 돌려 드리게.」 난쟁이는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감히 나리를 속일 리 있겠습니까? 그 문서는 정말 가죽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재주로는 꺼낼 수가 없습니다.」 장 나리는 마경협을 향해 두 발짝 다가섰다. 「대인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내 성은 마씨요.」 「저자의 소인배 하는 일이 분수가 있겠습니까? 마 대인께서 용서하시고 문서를 저분께 돌려 드리도록 하시지요.」 「이것은 황가의 어봉입니다. 황상의 분부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열 수 없는 것입니다.」 장 나리도 이마를 찡그렸다. 일이 아주 난처해진 것이다. 「자네가 문서를 돌려 주지 않아 중요한 공무를 그르치게 되어 사형을 면할 수 없게 된단 말일세. 여러분, 이치로 따져 보아도 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식당 안에 여기저기 앉아 있던 10여 명의 군관과 병정들의 복- 이 문서를 휴대하고 있던 군관과 같은 것으로 보아 그와 동일한 영(營)에서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이때 다같이 몰려들어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씩 하며 그 군관을 거들어 주었다. 형세로 보아 마경협으로부터 문서를 되돌려 받아야 일이 끝날것 같았다. 왕유양은 수십 년 동안 강호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라 오늘 일의 괴상함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 일의 열쇠가 그 난쟁이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과 함께 손을 뻗어 난쟁이의 왼쪽 어깨를 잡아채려고 하자, 난쟁이는 몸을 움츠려 피하며 죽는 소리를 냈다. 「높은 나리들, 용서해 주세요. 왕유양은 그의 몸놀림이 민첩한 것을 보자 더욱 의심이 갔다. 막 쫓아가 잡으려고 하는데 수십 명의 군관과 사병들이 벌써 표두와 어전 시위를 상대로 말다툼이 벌어져 소란스러웠다. 왕호천이 가죽으로 만든 그룻을 가슴에 꽉 껴안고 있었고 2명의 표두가 그의 앞에 서서 호위를 했다. 마경협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느놈이 감히 여기서 떠들고 야단들이냐? 썩들 물러가거라.」 하자 군관도 칼을 뽑아 들었다. 「문서를 되돌려 주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 어디 한번 사생결단을 내보자. 형제들, 한꺼번에 대드시오. 이렇게 말하고 덮쳐들어 마경협과 대결하기 시작했다. 왕유양이 소리를 지르며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아 있던 군관과 사병들이 병기를 뽑아 들고 나서자 패싸움이 벌어졌다. 어전 시위 가운데서 마경협은 손가락을 꼽을 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이 군관들과 수 초를 대결하는 사이에 벌써 열세에 몰렸다. 상대방의 칼 쓰는 솜씨가 비범할 뿐만 아니라 무공 또한 심오한 편이었다. 놀랍기도 했지만 화가 더 났다. 다시 수 초를 겨루다 하마터면 어깨에 칼을 맞을 뻔했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문 밖에서 또 한 테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오면서 그중 한 사람이 외쳤다. 「어떤 사람들이 여기서 소란을 피우고 야단들이냐? 이놈들을 모두 두 잡아라. 안에 있던 관병들이 그가 하는 말의 위세에 눌려 모두 멈추었다. 마경협이 한숨을 몰아쉬고 보니 수십 명의 관병이 한 젊은 고관을 가운데 모시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젊은 고관이 황상으로부터 제일 총애를 받고 있는 복강안(讀康安)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지금 만주(滿洲) 정백기(正白旗)의 만주도통(滿洲都統)인데 북경구문제 독 겸 어림군통령으로 있었다. 마경협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자 나머지 몇 명의 어전 시위가 그 뒤를 따라나와 예를 행했다. 「너희들 여기서 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냐? 고관이 묻자 마경협이 대답했다. 「통령 대인께 아룁니다. 저자들이 여기서 이유도 없이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과를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래! 그 마술을 부리던 자는 어디 있느냐? 젊은 고관의 말이었다. 그 난쟁이는 멀찍이 숨어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나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이 일이 이상하기 짝이 없구나. 너희들 모두 나와 함께 항주로 가자. 내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다.」 네. 통령 대인의 영단에 따르겠습니다.」 마경협이 허리를 구부리고 말하자 고관이 머리를 돌렸다. 「가자. 하고 밖으로 나가 말 위에 올랐다. 그의 수하의 관병들이 표행 사람들과 소란을 피운 군관 및 위구르의 사자들을 데리고 갔다. 왕유양은 본래 일이 괴이함을 보고 강도를 집어서 저 무력으로 소란을 부린 군관들을 제압하고 나서 다시 따져 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림군의 통령인 복강안이 나타나자 오히려 반가웠다. 마경협이 젊은 고관을 향해 말을 했다. 「복 대인, 이 사람이 진원표국의 총표두인 왕유양입니다.」 왕유양이 그의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그 고관은 왕유양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코방귀를 뀌었다. 「가자. 일행이 항주성 내에 도착하자 왕유양 등은 어림군 관병의 뒤를 쫓아 서호 고산 안에 있는 한 커다란 공관으로 들어서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는 틀림없이 통령 대인의 임시 숙소일 것이다. 그가 황상으로부터 제일 총애를 받는 중신이니 이렇게 으리으리하겠지.) 모두들 내청으로 들어왔다. 젊은 고관이 마경협을 향해 말을 꺼냈다. 여러분, 잠시만 앉아 계시오.」 대인, 편리하신 대로 하십시요.」 마경협이 대답하자 그 고관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어림군의 군관 하나가 나타나 소란을 피운 군관과 마술을 부린 사람, 장 나리와 그의 집안 식구들을 불러들였다. 왕호천이 이런 말을 꺼냈다. 방금 소란을 부릴 때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혼났어요. 군관들이 옥으로 만든 병을 혹시 깨뜨리지나 않을까 해서요. 그들의 정체가 아무래도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마경협이 이 말을 받았다. 음, 그들 몇 사람의 무공이 지나치게 훌륭해서 평범한 군관 같지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복 대인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있나요? 복 대인 말입리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에요. 젊은 공자가 그런 공력을 가지고 있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왕유양의 말에 마경협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요? 복 대인의 무공이 훌륭하다구요?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그의 눈의 정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무공이 틀림없이 대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실 종족의 나리들 가운데 무공이 탁월한 분이 워낙 많이 계시니 희한한 일도 아니지요.」 이렇게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군관 하나가 나타났다. 진원표국의 왕유안 드시랄니다.」 왕유양이 벌떡 일어나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2개를 통과하여 후청에 이르니 복강안이 벌써 관복으로 갈아입고 중앙에 앉아 있었다. 노란색 마고자와 깃털이 붙은 모자가 더욱 위엄이 있어 보였다. 면전에 공탁(公卓)이 놓였고 양쪽 옆에는 수많은 어림 군인들이 그를 호위하고 서 있었으며 마술을 부리던 난쟁이와 장 나리 등이 왼쪽에 꿇어앉아 있었다. 왕유양이 들어서자 양쪽에 있던 군관들이 일시에 소리를 질렀다. 「저기 꿇어앉거라. 이러한 위세에 왕유양은 꿇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內놈이 바로 왕유양이렸다? 복강안의 호령이었다. 「소인이 왕유양입니다.」 「듣자하니 네놈의 별명이 위진하삭이라고 하던데 사실이렷다. 「그것은 강호상의 친구들이 제멋대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황상과 내가 모두 북경에 있는데, 그렇다면 네놈의 위세가 황상과 나까지 모두 떨게 하겠구나. 복강안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왕유양은 뜻밖의 말에 놀라 연방 이마를 조아렸다. 「소인이 감히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당장 이 별명을 없애버리겠습니다. 「대담한 놈 같으니라구. 당장 이놈을 가두어라.」 양쪽에 있던 관병들이 대들어 그를 데리고 나갔다. 일신의 무예를 지니고 있는 왕유양이었지만 감히 반항할 수도 없었다. 계속해서 마경협과 왕호천 등 시위와 표두를 하나씩 불러들이고 마지막으로 표국의 심부름꾼까지 수갑과 족쇄를 채워 감금해 버렸다. 군관 하나가 두 손으로 가죽 그릇을 받쳐 들고 복강안의 공탁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가죽 그룻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웃었다. 「복 통령에게 아뢰나이다. 여기 옥으로 만든 병을 가져왔습니다.」 복강안이 껄껄 웃으며 공탁에서 일어섰다.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장 나리와 난쟁이 일행이 모두 일어나서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복강안이 난쟁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칠가, 무제갈이란 세 글자가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소. 원래 마술을 부리던 사람은 서천굉이요, 그 뒤에는 주기와 안건강이 변장을 했었고, 장 나리는 마선균, 복강안은 진가락, 소란을 부린 군관은 상혁지와 맹건웅 등이었던 것이다. 장 나리의 집안 식구와 점원은 모두 마선균의 수하 사람들이 담당했었다. 서천굉이 계책을 정한 뒤에 표사 가운데 한문충이 홍화회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반산으로 하여금 시골 사람으로 변장하게 하고 낙빙의 백마를 타고 그를 소나무 숲속으로 유인하여 상백지와 함께 그를 꼼짝 못하게 잡아 놓았던 것이다. 서천굉의 마술은 전부 속임수였다. 모자도 똑같은 것을 미리 여러개 준비해 놓았다가 그중 하나를 가지고 찻잔을 덮었다 젖히면서 금방 주기에게 넘겨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탁자 위에 쏠리고 있을 때 서천굉은 벌써 다른 모자를 들고 있다가 이리저리 뒤집어 보이곤 했으니 그 안에 물건이 있을 리 없었다. 장 나리와 식구들도 담뱃대와 반지를 한 쌍씩 가지고 있으면서 서천굉이 하나를 가지고 재주를 부리면 그들은 자기 주머니 속에서 똑같은 것을 꺼내 들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물론 가죽으로 만든 그릇 속에 문서가 들어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다만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 진가락이 나타났을 때는 뭇 표두와 시위가 마술에 홀려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서천굉이 계책을 정하고 진가락으로 하여금 젊은 고관으로 변장하도록 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 그의 모습이 복강안과 닮은 데가 너무나 많아 몇 명의 시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걸어와 인사까지 했으니 이 계책은 그야말로 물샐 틈도 없이 치밀했던 것이다. 진가락이 봉피를 뜯어 버리고 가죽 그룻을 열자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한 쌍의 양지백옥병이 나타났는데 높이가 한자 두 치쯤 되고 번쩍번쩍 빛나는 모양이 유순하고 온화하며 윤택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병 위에는 한 미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미인은 길게 땋아 내린 머리에 작은 모자를 썼는데 복장이 위구르의 소녀 차림이다. 얼굴이 곱고 자태가 요염하여 사람의 마음을 녹일 만했으며 찬란한 광채가 실물과 흡사한데, 은근한 정을 나타내는 고운 눈동자, 움직일 듯 말 듯한 앵두 같은 입술, 지금 당장이라도 그림 속에서 걸어나을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옥병을 보면서 혀를 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역(西域) 회강(回疆) 땅에 이토록 고명한 화가가 있다니 놀랄만하다. 제일 먼저 위춘화가 말을 했다. 내 곽청동 누이를 보고는 너무나 예뻐 천하 무쌍이라고 생각했는데 원, 그림 속의 여자는 그녀보다 훨씬 더 예쁜걸.」 다음은 낙빙의 찬사였다. 「그야 그림이니까 그렇지요 정말 이런 미녀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주기의 말을 다시 낙빙이 받았다. 「화가가 정말 이런 미인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런 미모를 상상해 낼 수 있었을라구. 「그럼 우리가 그 위그르의 사자를 불러다 물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요.」 서천굉의 의견이었다. 위그르의 사자는 진가락을 보자 존귀한 집안 출신의 중신으로 알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진가락의 인사말이었다. 「개별흥이라고 부릅니다. 관인(官人)을 어떻게 불러야 할는지요? 진가락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자 서천굉이 나섰다. 「이분은 절강수륙제독 이 군문(李軍門)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진가락과 군웅들은 어리둥절했다. 서천굉의 저의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목탁륜 목 노영웅께서도 안녕하시겠지요. 진가락의 물음이었다. 「군문의 안부 대단히 고맙습니다. 우리의 족장께서도 편안하십니다.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림 속의 미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옛날 사람입니까. 아니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화가가 생각나는 대로 그린 것입니까? 진가락이 물었다. 「그 그림은 우리 족의 유명한 화가인 사영(斯英)이라는 분이 그린 것입니다. 이 한 쌍의 옥병은 본래 목 노영웅의 셋째따님인 객사려(喀絲麗)의 소유였는데, 그림 가운데의 미인은 바로 그녀 자신의 초상(肖像)입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곽청동 소저의 여동생이라는 말입니까? 주기가 말참견을 했다. 아가씨께서는 취우황삼을 아십니까? 개별흥이 깜짝 놀라 물었다.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진가락이 곽청동의 근황을 묻고 싶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선균이 밖에서 총총 들어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가수가 삼천 명의 관병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우리를 상대하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개별흥을 바라보았다. 「사자쩨서는 내려가 쉬시지요.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누십시다.」 개별흥이 절을 했다. 「군문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이 한 쌍의 옥병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달리 조치하겠습니다.」 맹건웅이 개별흥을 데리고 물러나갔다. 이틀간의 여유 「형제 여러분, 우리 우선 항주로 퇴각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지금 사가를 구출하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청병과 무모한 싸움을 해보아야 아무 이득도 없는 것입니다.」 진가락의 말에 낙빙은 대단히 섭섭했다. 「이가수가 우리 그이를 감금했는데 우리 먼저 그놈의 첩부터 죽여 없애 버립시다. 총타주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첩이라니요? 진가락은 알지 못하는 일이라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래요, 우리가 제독부에서 요염하도록 아리따운 여인을 하나 잡았는데 바로 이가수의 첩이었습니다.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기에 제가 따귀를 몇 대 때렸더니 지금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있습니다. 군웅들은 그녀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화가 치밀어 이 여자라도 가지고 분풀이를 해야만 속이 풀릴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미소를 지었다. 「총타주님, 이가수에게 편지를 한 통 써서 전해 보시지 않으시겠 습니까?」 서천굉의 말에 진가락은 벌써 눈치를 챘다. 「그거 아주 좋지요. 붓을 들어 편지를 한 통 썼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이 군문 존하, 오늘 아침 호숫가를 노닐다가 군문께서 총애하는 첩실을 만났습니다. 군문께서 무척 사랑하고 계신 줄 알기에 특별히 알리오니 일차 왕림하시기 바랍니다. 홍화회 회주 진가락 배상 「구가, 이 편지를 이가수에게 전해 주십시오. 팔가께서는 구가의 뒤를 따라가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진가락의 명령을 받고 양,위 두사람은 황급히 그자리를 떠났다. 진가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가수가 그의 이 소첩을 총애한다면 경거망동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만약 황제의 명령이 있다면 그가 마음속으로 꺼린다 하더라도 부득불 황제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칠가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는지요? 「우리가 본래 생각하기로는 옥병을 빼앗아 가지고 황제와 한번 흥정을 해 보자고 한 것인데, 누가 이 한 쌍의 옥병이 이렇게까지 진귀하고 아름다을 줄 상상이나 했습니까? 황제가 이 옥병을 본다면 틀림없이 굉장히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위구루의 화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지요. 우리가 이제 옥병을 인수했으니 이거야 정말 목 노영웅의 대사를 그르치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만약 이로 말미암아 전란이 크게 계속되어 재난이 그치지 않고 백성이 도탄 속에서 허덕이게 된다면 이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요. 서천굉의 이 말에 진가락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틀림없는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입수한 이 옥병을 그냥 이렇게 그에게 되돌려 쭈어야 한단 말입니까?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총타주님께서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하며 서천굉은 즉시 자신의 계략을 설명했다. 「너무나 공명정대하지 못해요. 나는 못마땅한걸요.」 주기가 이렇게 반발하자 주중영이 나섰다. 「총타주님의 분부에 따라야 해. 계집애가 말참견하고 나서면 못쓴다. 주기는 꼼짝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게 부도덕하지 않으면 뭐가 부도덕해. 진가락이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위구르의 화의도 그르치지 말아야 하며 또 사가도 구출해야 하는 두 가지 문제를 다 고려한 칠가의 계책은 쓸 만합니다. 칠가, 그러면 칠가가 가서 그 사자에게 말을 하시오.」 고개를 돌려 주기를 향해 웃는다. 칠가는 친한 친구를 상대로 결코 부도덕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주 소저는 걱정하지 마시오.」 주기도 웃으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요.) 서천굉이 가서 개별흥을 만나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내가 안내할 테니 가서 황상을 만나 보십시다.」 맹건웅이 가죽 그룻을 받쳐 들고 나왔는데 그룻 속에 있는 옥병 가운데 벌써 하나를 꺼낸 뒤에 다시 봉피를 붙여 놓았으니 개별흥으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세 사람이 순무부 앞에 이르자 맹건웅이 가죽 그룻을 사자에게 되돌려 주며 순무부를 손으로 가리켰다. 「혼자 들어가 보십시오.」 하고 두 사람은 곧장 고산(弧山)의 마씨(馬氏) 댁으로 되돌아왔다. 도중에 양성협과 위춘화를 만났는데 이가수가 편지를 받고는 화들짝 놀라면서 화를 내며 병사들을 거느린 채 물러갔다고 했다. 신패시의 문간방에서 한 통의 명함이 전달되었는데, 한 무관이 총타주님을 예방하러 왔다고 말했다. 명함 위에는 이런 글씨가 씌어 있었다. 후학 증도남 돈수. 마선균이 이것을 보고 웃었다. 「칠 당가의 계략이 반은 성공한 셈이로군요. 이 증도남은 이가수의 심복입니다.」 「구가께서 나가 그자와 만나십시오.」 진가락의 명령이었다. 위춘화가 객청으로 나오니 의자 뒤에 몸집이 우람한 무관이 하나 앉아 있는데 얼굴에는 온통 끓는 기름에 데인 수포가 생겨 보기 흉했다. 오늘 제독부에서 한 차례 상대해 보았던 그자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위춘화가 먼저 말을 건넸다. 「증 장군께서 우리 회의 총타주님을 만나려고 그러시는 모양인데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저는 이 군문의 심부름을 받고 귀회의 진 총타주님을 뵙고 한가지 중요한 일을 상의하려고 합니다.」 「총타주님은 지금 시간이 없으십니다. 증 장군께서 제게 말씀을 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증도남은 신분이 조정의 관리로서 강호의 민간인을 한번 만난다는 사실도 벌써 자존심을 굽힌 것인데 이제 상대방이 거드름까지 부리며 나오니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쪽에서 아쉬운 부탁을 해야 할 처지라 끓어오르는 화를 꿀꺽 삼켰다. 「군문께서 방금 진 총타주님의 편지를 받고 부인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진 총타주님께서 그 부인을 되돌려 보내 주신다면 생각을 달리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야 쉽지요. 저희들 총타주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위구르에서 보낸 옥병에 관한 것입니다.」 위춘화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위구르에서 사람을 파견하면서 한 쌍의 옥병을 가지고 와 강화를 요청하고 있는데 황상께서 열어 보시니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상께서는 대단히 분노하고 계십니다. 사자를 불러 물어 보니 절강수륙제독 이가수를 자칭하고 나선 젊은 군관과 대화를 주고받은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황상께서 이 군문을 불러 물어 보셨지만 이 군문께서도 그 까닭을 아실 리 없지요. 다행스럽게도 황상이 영특한 분이시라 이 군문이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줄 아시기 때문에 별로 크게 책망하지는 않으셨습니다만 분명 다른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 참 잘됐군요.」 위춘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러나 황상께서는, 이 군문이 책임을 지고 사흘 안에 잃어버린 옥병을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셨으니 이게 야단입니다. 「찾아오지 않으면 파직을 시킬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따지고보면 관리를 그만두는 것이 가장 홀가분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만약 온 집안 식구를 다 처형한다면 그건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지요. 증도남은 그의 조롱을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참된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하는 법이 아니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제가 특별히 찾아뵈온 이유는 바로 그 옥병을 되돌려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위출화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옥병이니 뭐니 하는 말을 난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군문께서 이런 난관에 봉착하셨다고 하고 또 증 장군께서 직접 이렇게 왕림하셨으니 우리가 도와 찾아보는 것도 무방하겠지요. 반년이고 일년이고 지나다 보면 무슨 단서라도 찾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지요.」 증도남은 무공이 그렇게 탁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일도 시원시원하게 잘 처리하는 편이었다. 이 같은 강호의 사람들과 상대할 때에는 솔직할수록 그 결과가 빨리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군문께서는 귀회의 진 총타주님을 오래 전부터 존경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가까이 사귈 기회가 없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외람되게도 찾아와 두 가지 어려운 일을 부탁드리며 아무 보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 총타주님의 무슨 분부가 있으시면 겸양치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증 장군께서 더할 나위 없이 시원스럽게 나오시니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진 총타주님의 뜻은 첫째, 우리 홍화회가 오늘 이 군문께 득죄를 한 점은 그분께서 하해와 같은 관용으로 나무라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야 물론 당연한 일이지요. 제가 책임을 지고 보장하겠습니다. 이 군문께서 이후 이 일로 말미암아 귀회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지요.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당가인 문태래가 제독부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은 증 장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증도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국사범이기 때문에 감금한 것입니다. 이 군문께서 제아무리 담대하다 하더라도 감히 석방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 총타주께서 그를 너무나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오늘 밤 한번 만나게 해 주십시오.」 증도남이 잠시 심사숙고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일이라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 군문께 여쭈어 보고 와서 답변하겠습니다. 진 총타주님의 다른 분부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증도남이 하직을 하고 나간 후 한 시간 뒤에 다시 와서 또 만나자고 했다. 여전히 위춘화가 그를 접견했다. 증도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문 사야가 범한 사건이 워낙 중대하기 때문에 군문께서는 절대로 면회를 시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러나 진 총타주님께서 이왕 옥병을 반환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군문께서도 목숨을 걸고 한번 만나 보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작은 일만은 진 총타주님께서 허락을 해 주셔야겠숩니다.」 어디 말씀을 해 보시지요.」 「첫째, 이 일은 군문께서 친구 한 분을 사귀자고 목숨을 걸고 대답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재앙을,,----.」 「그러니까 절대로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 이거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제가 총타주님을 대신하여 확답을 드리지요. 「두번째, 면회를 할 때 진 총타주님 혼자 오시라는 것입니다.」 「이 군문께서야 물론 우리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분을 탈출, 하실까봐 걱정하시겠지요. 좋습니다. 이 점도 대답을 하지요. 면회는 진 총타주 혼자 하기로 하고 또 절대 탈옥을 시키지 않겠습니다.」 「위 대형은 영웅호한이시니 약속을 천금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 돌아가서 보고를 하겠습니다. 오늘 진 총타주님이 제독부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진 총타주와 문 사당가가 만날 때 옆에 장소중이 있으면 이를 속일 수도 없으려니와 이 군문께는 대단히 불리할걸요.」 「위 대형의 말씀, 일리가 있습니다. 군문께 여쭈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그를 그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강호상에 떠돌아다니는 신세이긴 하지만 도의만은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이 군문께서 오늘 약속한 일만 준수한다면 그의 부인과 옥병은 일이 끝나는 대로 즉시 반환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고맙다는 인사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군웅들은 증도남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청에 모여 문태래를 구출하기 위한 진가락의 지시가 떨어지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진가락이 말문을 열었다. 「칠가께서 임무를 부여하시지요.」 서천굉은 침묵만 지킬 뿐 말이 없다가 한창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장소중을 그 자리에 없도록 했고 또 총타주님께서 안으로 들어가 계시니 기회를 보아 행동을 취한다면 옥을 깨부수는 일이야 쉽겠지요. 그러나 이가수도 이 점을 고려하여 틀림없이 방비를 할것입니다. 먼저 그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계산을 해 본 뒤에 기습 작전을 써야지요.」 「바로 그렇게 해야지요.」 진가락이 말했다. 「제가 생각해 보건대, 그는 틀림없이 많은 병사를 투입해 지하에 있는 옥을 포위할 것이오. 어쩌면 대내의 시위 가운데 고수들의 협조를 받아 배치해 놓을 것입니다. 총타주님 한 분만 들어갔다가 나오시게 하겠지요.」 양성협의 말에 상혁지도 나섰다. 「우리도 제독부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호응할 태세를 취해야 해요. 간교한 무리들이라 총타주님을 해치려고 들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호응할 만반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지요. 그러나 이가수가 총타주님을 해치려고 덤비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의 첩과 옥병을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모두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주고받으면서도 눈앞의 사태가 오늘 오전보다는 유리하다고 느꼈다. 첫째, 지하에 있는 옥의 구조나 장치를 이미 알고 있는데다가 진가락이 안에 들어가 있음으로 해서 밖에서 공격을 하면 안에서도 즉시 호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가수의 방비는 틀림없이 오전보다는 삼엄할 것이기 때문에 무모한 공격만으로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는 희박했다. 무진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야지, 이 일을 너무 오래 지연시킬 수는 없소.」 이때 진가락이 흥분하여 이렇게 말을 꺼냈다. 「있소! 방법이 있소. 칠가, 내가 사가를 면회하러 갈 때 넓은 옷을 입고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들어가면 되오.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는 것처럼"""~ 서천굉은 벌써 진가락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한 사람을 얻자고 또 한 사람을 잃는 것이니, 묘책이 아닙니다.」 무진이 나섰다. 총타주님, 말씀을 다 해 보세요.」 그러자 진가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 사가와 옷을 바꾸어 입은 뒤에 사가를 보내면 간수는 난 줄 알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거에 사가를 구출하면 되겠지요. 「그럼 총타주님은요? 무진의 반문이었다. 황제와 나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그들이 사가가 탈옥을 한줄 알면 자연 나를 내보내게 되겠지요.」 이 말에 위춘화가 나섰다. 총타주님, 묘책임에는 틀림없숱니다만 총타주님은 우리 회의 수령이시니 함부로 모험을 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제가 그 역할을 담당하지요.」 여러 형님들, 제가 공연히 만용을 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제가 제일 적합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어느 분이 가신다 하더라도 사가는 구출해 낼 수 있겠지만 자신은 적의 수중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형제의 정을 나누고 있는데 사가라고 해서 다른 어느 형제보다 특별히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진가락의 말에 양성협이 나섰다. 총타주께서 이 일을 담당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못해요.」 여러분은 아무래도 잘 모르실 겁니다. 황제와 나는 피차간에 헤치지 않기로 손바닥을 쳐 맹세한 사이입니다.」 어젯밤 해당에서 두 사람이 이렇게 맹세를 하게 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황제가 음흉하고 악랄하니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서천굉이 이렇게 말했지만 진가락은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기왕 그러시겠다면 양쪽 다 원만한 방법을 쓰지요.」 서천굉이 승복하고 말았다. 낙빙은 군웅들이 서로 문태래를 구출해 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사하겠다고 나서자 마음속으로 매우 감격하면서도 괴로워 어찌할 줄 모르고 잠자코 있었다. 주중영은 옆에 서서 이들의 의리가 이토록 대단함에 마음속으로 감탄을 하면서 생각했다. (홍화회의 명성이 강호에 떨치더니 과연 회중의 인물들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낙빙의 신색이 이상한 것을 보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문사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천굉의 말이나 한번 들어 보십시다.」 서천굉이 입을 열었다. 「총타주님의 이 계략은 대단히 고명하지만 상당한 위험이 따르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일단 사가를 구출한 뒤에 즉시 공격하여 옥을 깨부수고 총타주님을 구출해야 합니다.」 군웅들은 수령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자 마음속으로는 불안했지만 정말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어 그냥 따르기로 했다. 낙빙이 진가락의 면전으로 걸어가 머리를 굽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총타주님의 이 은혜 우리 부부가 분골쇄신한다 하더라도 보답 하기 어려을 것,,,,,,.」 여기까지 말하고 눈시울을 붉히자 진가락이 답례를 했다. 넷째형수님,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형제들이 골육의 정을 나누고 있는 처지에 무슨 보답이니 뭐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즉시 이렇게 저렇게 배치할 것을 배치하고 진가락은 통이 넓은 검은색의 옷을 입고 깃을 세운 뒤에 삿갓을 푹 눌러 쓰고 위춘화와 함께 곧장 제독부로 향해 출발했다. 이때는 이미 황혼 무렵이라 하늘에는 초저녁 별이 떠 있었다. 제독부 가까이 갔을 때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진 총타주님이십니까? 위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따라오세요. 그리고 이분은 여기 계시기 바랍니다. 위춘화는 거기에 멈추어 선 채로 진가락과 그 사람이 제독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물어 가는 어슴푸레한 저녁별이 망망한 가운데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까마귀 떼의 지저귐이 위춘화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총타주의 안위가 길하기보다는 흥할 것 같은 두근거림 때문이었다. 잠시 후 거짓으로 꾸미고 치장한 홍화회의 뭇 형제들이 드문드문 나타나 제독부의 사방으로 흩어져 대기 태세를 취했다. 진가락이 문으로 들어가니 온 제독부 안에는 손에 병기를 든 병사들이 가득 깔려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3개의 마당을 지나자 그 사람이 진가락을 별채로 안내하고 잠시 앉아 있으라 하고는 나가 버렸고 잠시 후에 이가수가 들어오며 아는 체했다. 진가락은 옷깃을 내려 얼굴을 드러내고 웃었다. 전일 호수에서 뵙고 또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그 범인을 만나러 가십시다. 나를 따라오세요.」 이가수의 말이었다. 두 사람이 막 문 밖으로 나오는데 한 병사가 허둥지둥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황상께서 오십니다. 장군, 빨리 나가 맞으십시오.」 이가수가 깜짝 놀라며 진가락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군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진가락은 이가수의 표정이 거짓이 아닌 듯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와 앉았다. 이가수가 급히 달려나가 보니 어전 시위들과 함께 권륜이 벌써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가수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밀실을 하나 마련하여라. 내 직접 문태래를 심문하겠다.」 권륜의 지시에 이가수는 황제를 자신의 서재로 모셨다. 빽빽하게 몰려온 어전 시위들은 서재의 전후좌우는 물론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호위를 폈다. 권륜이 백진을 향해 말했다. 「내가 기밀을 요하는 대사를 범인에게 물을 것이니 듣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네, 네. 백진이 대답을 하고 물러나자 잠시 후 4명의 시위가 들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태래는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채 들것 위에 누워 있었다. 시위가 허리를 굽히고 물러나가자 서재 안에는 문태래와 권륜 두 사람만 남아 있었고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문태래는 외상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정신만은 맑았다. 그는 누운 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있었다. 먼저 권륜이 물었다. 「자네 몸의 부상은 이제 괜찮은가? 문태래가 눈을 떠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그는 노당가인 우만정이 궁중에 들어갈 때 따라가 일찍이 권륜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지금 항주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었으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 죽지는 않을 것이오.」 「내 그들을 보고 자네를 북경으로 청해 오라고 한 것은 더불어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일세. 오해가 생긴 것이야. 그러나 그들을 이미 처벌했으니 거7것 없네.」 문태래는 그가 뻔드르하게 말을 하자 화가 치밀어 다시 한 번 흥 하고 비웃었다. 「그때 자네가 자네들의 수령인 그 우가 성을 가진 사람과 한 번 와서 나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한 가지 대사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이야. 그런데 그가 돌아간 뒤에 병이 들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야.」 「만약 우 노당가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분도 이렇게 감금되었을 것이 아니오. 문태래의 말에 권륜이 껄껄 웃었다. 「자네들 강호의 남자들은 성질이 곧아서 뱃속에 있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다 해야 속이 풀리지. 내 자네에게 한마디 묻겠는데 솔직하게 답변한다면 즉시 자네를 석방해 주겠네.」 「나를 석방해 준다구?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아시나요?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날마다 밥도 편안히 먹을 수 없고 잠도 편안히 잘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데도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죽이지 않고 무엇을 묻겠다고 하는 것이오. 「자넨 의심이 꾀 많은 편이군.」 권륜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서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우가 성을 가진 자네의 수령이 나와 만나 이야기한 것을 자세하게 모두 들려 주던가. 무슨 말을요? 문태래가 반문했다. 권륜이 곱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문태래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뿐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권륜이 고개를 돌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출신에 관한 일이오?」 문태래는 마음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자기가 이미 권륜의 수중에 있는 한 죽으면 죽었지 살 가망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홍화회의 군웅들이 다들 항주에 와 있으니 시간만 끈다면 조만간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옥을 깨고 자기를 구출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전조 황제와 황태후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당신의 출신을 그 누가 모른다고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권륜이 한숨을 쉰다. 그날 그가 심야에 나를 찾아와 만났는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 아시는가? 우 노당가께서는 일찍이 당신을 한 번 크게 도와 준 일이 있는데 '최근 우리 홍화회의 경비가 부족하니 그에게 삼백만 냥만 달라'고 그걸 부탁하러 가겠다고 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일 때문에 오히려 여기 이렇게 갇히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니 나가면 배은망덕한 당신의 소행을 낱낱이 온 세상에 퍼뜨리겠소.」 권륜이 껄껄 웃는데 그 소리에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싶었다. 곁눈으로 문태래를 살펴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왕 그렇다면 내 자네를 죽이지 않을 수 없겠군. 죽이지 않으면 자네가 나가서 내 명예를 그르칠 테니까.」 누가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합디까? 나를 죽여 없애야 밥도 잠도 편안히 먹고 자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리고 황태후를 만나도 다른 꿍꿍이속을 품지 않아도 될테니까요.」 이 말을 들은 권륜이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물었다. 「황태후께서 어떻다구? 「그야 자신이 너무 잘 아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자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식었다. 사실을 전부 안다구요?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요. 노당가께서는 황태후가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했다고 하시던데, 당신이 삼백만 냥이 아까워서 그런다고 하셨소. 당신이야 금산도 있고 은산도 있으니 그까짓 삼백만 냥이야 구일 누가 알려오? 그런데 그게 아까워서 그렇게 벌벌 떠시오. 권륜은 마음이 다시 누그러지며 헤헤 하고 웃고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방울을 닦았다.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는 황제의 면전에서도 전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군그래. 과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남자 대장부임에 틀림없는가 보군. 뭐 걱정스러운 일이 있거든 한번 이야기해 보게나. 내 한번 들어 보겠네. 자네가 죽은 뒤에 내가 사람을 시켜 처리해 주겠네.」 난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오. 또 당장 나를 죽이지도 못할 테니까요. 내가 자네를 죽이지 못한다구. 「당신이 만약 나를 죽인다면 당신의 비밀이 탄로날까봐 두려워서 한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정말 나를 죽인다면 하하하------ 당신의 비밀은 지켜질 수가 없소.」 「설마 죽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문태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가 그 편지를 뜯어 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증거를 천하에 공포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황제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지겠지요.」 「무슨 편지인가? 권륜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 노당가께서 당시 당신과의 일을 한 통의 편지로 상세하게 써서 밀봉을 한 뒤에 두 가지 중요한 증거물과 함께 한 친구에게 보관하라고 부탁하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이 황궁으로 들어가 당신을 만났던 것이오.」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도 발생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게로군.」 「물론이지.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믿는다는 말이오? 우 노당가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 두었소 만약 우리 두 사람이 갑자기 죽거든 보관한 그 편지를 뜯어 보고 그 내용대로 처리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죽고 하나가 살아 남거든 절대로 편지를 뜯어 보지 말라구요. 이제 우 노당가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당신이 감히 나를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권륜이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문태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편지와 두 가지 증거물을 삼백 냥의 은자를 내놓고 사시오. 그만한 값어치는 충분할 것이오.」 「은자? 내 본래 주려고 했던 것이니 은자도 주고 자네도 석방해 주겠네. 그럼 자네가 그 친구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그 편지와 증거물을 가지고 오도록 하게. 내 즉시 은자를 지불하겠네.」 「하하하------.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 당신은 즉시 시위를 파견해 그를 죽여 버릴 것이 아니오? 솔직히 말해 나 여기서 대단히 편하게 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 나갈 생각도 하고 있지 않소.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죽을 운명이오. 만약 내가 먼저 죽는다면 당신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오.」 권륜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한참 만에야 침묵을 깼다. 「자네가 편지를 쓰지 않겠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내 자네에게 이틀 동안의 시간을 주지. 모레 저녁 다시 와서 물어 보겠는데 그때도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자네를 죽일 수밖에 없겠네. 내가 자네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일세. 그러면 자네의 그 친구는 자네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을 것이 아닌가. 또 한발짝 양보해서 말한다면 내 자네를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네의 두 눈을 도려내고 자네의 혀를 자르고 자네의 두 손을 잘라 버릴 수는 있을 테니------. 이틀 동안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게. 말을 마치자 문을 밀고 서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뭇 시위들이 뒤에서 그를 쫓으며 호위했고 이가수는 문 밖까지 나와 꿇어엎 엎드려 그를 전송했다. 바뀐 아기 권륜이 떠나자 문태래는 제독부의 친병들에 의해 다시 지하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가는 도중에도 장소중이 칼을 들고 그를 호송했다. 막 옥으로 돌아오는데 친병 하나가 장소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장군이 장 대인께 드리는 편지가 여기 있습니다.」 장소중이 편지를 받아 읽어 보고는 옥에서 나갔다. 문태래는 침대에 누운 채 귀여운 아내와 소중한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구출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세력이 막강한데다 황제까지 직접 나타났으니 이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자기를 구출하려다 손상을 입는다면 이건 보통 큰 부담이 아니다. 설령 구출되어 살아서 나간다 하더라도 평생 마음이 편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심란해 있는데 문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태래는 장소중이 들어왔겠거니 여기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침대 앞으로 다가와 소근거렸다. 「사가, 내가 왔소.」 문태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떴다. 총타주 진가락이 아닌가. 황히의 나루터에서 진가락이 군웅들을 통솔하여 자기를 구출하려고 했을 때도 만나지 못했었다. 오늘 오전 그 풍채를 우러러볼 수는 있었지만 위급한 가운데 쇠창살을 격해 몇 번 바라다본 것뿐이다. 의리가 깊고 일을 당해서도 침착하여 늘 존경해 오던 총타주를 이제 옥중에서 다시 만나니 놀랍고 반갑기 그지없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총타주님 ! 진가락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에서 두 개의 강철로 만든 줄을 꺼내 들고 그의 수갑에 대고 몇 번 쓸었다. 수갑위에 몇 개의 자국이 생기고 줄만 파손되었다. 원래 이 수갑은 서양의 홍모 강철을 부어 만든 것이라 웬만한 줄을 써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진가락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마음이 조급해져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몇 번 줄질을 하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로 만든 줄이 부러졌다. 다른 하나의 줄을 바꾸어 들고 또 쓸었다. 한참 동안 이렇게 줄질을 했지만 이마에 땀방울만 송글송글 돋아날 뿐 수갑은 여전히 까딱도 하지 않았다. 진가락은 다시 품속에서 끌,송곳-망치 등 연장을 꺼내 애를 썼지만 수갑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총타주님! 이 족쇄나 수갑은 보도나 보검을 써야만 끊어질 것입니다. 민망해하며 바라보던 문태래의 말이었다. 진가락은 황하 나루터에서 장소중이 한 자루의 웅벽검으로 자기의 구검순패와 무진의 장검을 잘라 버린 사실을 상기했다. 「장소중이 온종일 사가를 감시하고 있지요? 「그는 내 곁에서 촌보도 떠나지 않고 있는데 방금 무슨 요긴한 일로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검을 뺏기로 합시다.」 그러고는 줄 등 연장을 침대 밑에 밀어넣었다. '제가 나갈 수 있을는지 못 나갈는지 예측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황제가 나를 죽여 없애려고 하면서도 비밀이 샐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총타주님, 제가 그 비밀을 총타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면 제가 죽거나 살거나간에 우리의 큰 일을 그르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사가, 어디 말씀을 해 보시지요.」 「그날 밤 제가 우 노당가님을 따라 황궁에 들어가 황제를 만났을 때 권륜은 물론 놀라기도 하고 의아하게도 생각했지요. 우 노당가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절강 해령 진씨 댁의 한 노마님이 저를 여기 보내셨숨니다.) 그러고는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놓았습니다. 황제가 보고 난 후 얼굴색이 변하며 저를 침궁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황제와 한 시간 동안 밀담을 나누고 우 노당가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노상에서 황제는 한인이요, 총타주님의 형님이 되신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가락은 깜짝 놀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내 형님은 아직도 해령에 계신데... 「우 노당가께서는 당년 전조의 옹정 황제가 딸을 낳았는데 공교롭게도 총타주님의 자당께서도 같은 날 아드님을 낳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옹정 황제가 사람을 시켜 아기를 좀 보자고 해서 안고 들어갔는데 나올 때 보니 딸로 바뀌었더라는 것입니다. 그 남자 아이가 바로 당금의 권륜 황제라고,,,,.,.」 이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진가락은 황급히 침대의 귀퉁이로 몸을 숨기자 한 명의 친병이 들어왔다. 그는 진가락이 보이지 않자 의아해서 물었다. 「홍화회의 진 당가는 어디 계십니까? 진가락이 침대 밑에서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이오? 장소중 대인이 돌아오십니다. 이 장군께서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빨리 나가시지요.」 「좋소. 진가락이 대답을 하고 왼손을 뻗어 친병의 통곡혈을 찔렀다. 그 친병은 짹 소리도 못 내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진가락은 그를 끌어 침대 밑에 숨겼다. 「그 장소중이 곧 돌아을 테니 자세한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 노당가는 황제가 한인인 줄 알자 그를 보고 만주족의 조정을 뒤엎고 한족의 조정을 세워 만주족을 몰아내 한족의 강산을 회복하자고 권유했습니다만 그는 여전히 황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어느 정도 마음이 움직이는 듯한 내색을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여부를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니 우 노당가보고 2개의 증거물을 가지고 와서 자기에게 보이고 난 후에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 노당가가 돌아오자마자 병들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분은 진가락이 총타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한실 광복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제게 강조하셨습니다. 황제는 총타주님의 형님이십니다. 만약 그분이 만주족을 뒤엎고 한족의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총타주님을 황제로 모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진가락은 넋이 나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호수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권륜과 자기 부모의 묘지 앞에서 울며 절하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정답게 자기를 대하던 모습들도 생각해 보았다. 그 가운데는 평범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기이함이 너무나도 많았다. 정말 황제를 우리 부모님이 낳으셨을까? 그러기에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춘휘니 애일이니 차는 편액을 써서 우리 집에 붙이지 않았을까? 문태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옹정이 어떻게 여자 아이를 총타주님의 형닝과 바꾸었는가 하는 데 대한 경과와 상황은 총타주님의 자당께서 직접 상세하게 한통의 편지로 써 놓으셨답니다. 그밖에 몇 가지 증거물까지 있는데 우 노당가께서는 이것들을 모두 총타주님의 사부이신 천지괴협 理性俠 원 노선배님께 드려 그분이 보관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금년 여름 상씨쌍협이 내 사부님을 뵈러 왔을 때 바로 의부님의 명을 받고 이 물건들을 전하러 왔었던가요? 진가락의 물음에 문태래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워낙 기밀을 요하는 큰 일이라 총타주님 조차 모르시게 한 것입니다. 원 노선배님도 그냥 굉장히 중요한 물건으로만 아시지 도대체 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전연 모르고 계십니다. 우 노당가께서 임종하실 때 (진가락이 총타주가 된 뒤에 편지를 뜯어 보고 함께 거사를 도모하라)고 유언하셨지요 그런데 제가 실수하여 잡히는 바람에 하마터면 큰 일을 그르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총타주님, 오늘 만약 저를 구출해 내지 못하시더라도 서둘러 회강으로 가셔서 사부님을 만나 보셔야 합니다. 절대로 저 한 사람의 안위와 생사 때문에 팡복의 대업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문태래는 이 말을 끝내고 이제 자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계속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진가락을 향해 숨으라는 손짓을 했다. 진가락이 침대 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문태래는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늘어뜨린 체 죽은 것처럼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장소중이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실의 옥 안에는 콩알만한 등불이 하나 켜 있을 뿐이라 몽롱한 가운데 문태래의 상반신이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본 장소중은 혹시 그가 죽은 것이 아닌가 하여 놀라 달려들었다. 문태래의 등을 가볍게 밀어 보았지만 전연 움직이지 않았다. 장소중이 또 한 번 놀라 그를 잡아 일으켜 앉히며 숨을 쉬나 안 쉬나 살펴볼 때 문태래가 벌떡 일어나 서며 그를 덮치고 수갑을 찬 두 손으로 후려갈겼다. 장소중은 뜻밖의 역습에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랫배의 기해혈(氣海穴)이 뺏뺏해지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두 발짝 빠져나가 쌍장을 교차시켜 몸을 가리며 적을 상대하는 한편 호흡을 고정시켜 혈도를 막았다. 진가락은 그가 혈도를 찍혔는데도 쓰러지지 않자 이상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침대 밑에서 빠져나와 쌍장을 바람처럼 휘둘러 삽시간에 그의 얼굴을 예닐곱 번이나 주먹으로 쳤다. 장소중은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손을 쓰기 위해 힘을 뺐다가는 당장 혈도가 막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몇 차례나 주먹으로 맞으면서도 발밑을 천천히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진가락이 발을 들어 그의 오른쪽 허리를 걷어찼다. 장소중이 왼쪽으로 피하는데 신정혈 (神庭穴)이 시고 아팠다. 또 혈도를 상대방으로부터 맞은 것이다. 더 견디지 못하고 전신이 마비되어 나무토막처럼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진가락이 그의 몸을 더듬었지만 응벽검이 보이지 않았다. 실망하여 그의 몸을 뒤지는데 주머니 속에서 종이 한 장이 잡혔다. 등불에 비추어 보니 이가수가 그에게 써 보낸 쪽지였다. 응벽검을 가지고 나오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귀인께서 잠깐 그 칼을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이가수가 그를 밖으로 유인해 내기 위해 댄 핑계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소중이 갔다가 걱정이 되어 금방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칼을 구경하겠다고 해서 나간 것인데 구경을 다 끝내기도 전에 돌아왔으니 거기 그냥 놓아 두었음에 틀림없었다. 진가락이 다시 그의 몸을 뒤졌다. 분명했다. 칼을 구경하겠 갔다가 걱정이 되어 금방 돌아온 것이 해서 나간 것인데 구경을 다 끝내기도 전에 돌아왔으니 거기 그냥 놓아 두었음에 틀림없었다. 지가락이 다시 그의 몸을 뒤졌다. 손끝에 뭔가 잡히자 너무나 반가워 펄쩍 뛰었다. 희색이 만면한 그의 표정을 보고 문태래가 답답해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가락이 손을 번쩍 드는데 거기서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열쇠를 수갑과 족쇄에 꽂으니 저절로 열렸다. 문태래는 갑자기 굴레가 풀리자 두 손과 두 발을 한참동안 움직여 보았다. 진가락이 넓은 옷과 삿갓을 벗으며 말했다. 「빨리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시오.」 「총타주님은요? 「내 여기서 잠시 머물고 있을 테니 빨리 나가도록 하시오.」 문태래가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총타주님의 호의는 그지없이 감격스러우나 저로서는 결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가는 사정을 잘 모르시겠지만 난 여기 머물러 있어도 절대로 위험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는 권륜과 손바닥을 쳐 맹세하게 된 경과를 간략하게 들려 주었다.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합니다.」 문태래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가락이 이마를 찡그렸다. 「나는 총타주요. 홍화회의 크고 작은 인물이 모두 내 명령에 따르오. 그래요, 안 그래요? 「그야 물론입니다.」 「그럼 좋소. 이것은 나의 엄연한 명령이오.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가시오. 밖에서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다오.」 이번의 명령은 거역하겠습니다. 다음 처벌을 감수하겠습니다.」 「넷째형수님이 오매불망 사가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여러 형제들이 사가가 하루빨리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단 말이오. 지금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사가는 어찌하여 이토록 무정만 하오? 진가락이 재삼재사 촉구했지만 문태래는 계속 머리를 내저었다. 한참 동안 이렇게 고집을 부리자 진가락은 그가 결코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얼핏 머리를 스치는 꾀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 둘이 한번 모험을 해 봅시다. 저자의 옷을 입고 나갑시다.」 말을 하면서 장소중을 턱으로 가리켰다. 「묘한 생각입니다. 좀 일찌감치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두 사람이 장소중의 옷을 벗기고 문태래가 바꾸어 입은 후에 다시 수갑과 족쇄를 장소중에게 채웠다. 진가락이 열쇠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웃었다. 「당신이 제아무리 비상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겠지.」 장소중은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 낼 듯이 화가 났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출입문을 벗어나 통로를 통해 돌계단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눈앞이 환하게 밝았다. 온 마당에 횃불이 대낮처럼 밝게 켜져 있는 것이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손에 긴 창을 비껴 들었는데 창날이 번쩍번쩍 지하실의 옥문을 겨냥하고 있었다. 먼 곳에도 또 수백명의 병사들이 활에 시위를 먹인 채 옥문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가수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그 손을 아래로 흔들기만 하면 창이며 화살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공격할 것이다. 진가락과 문태래의 무예가 제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목숨을 건질 법은 없었다. 진가락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낮은 소리로 문태래를 향하여 물었다. 「부상당한 곳이 어때요? 뚫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문태래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되겠어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군요. 저는 상관하지 마시고 총타주님 혼자 나가세요. 「그럼 어디 한번 장소중 행세를 해 보시지요.」 문태래는 모자를 눌러 써 눈썹을 가리고 큰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이가수는 장소중과 진가락이 함께 나오자 마음속으로 (아이 쿠!>소리를 질렀다. 장소중이 벌써 진가락을 체포한 것으로 알고 고개를 이원지 쪽으로 돌렸다. '네가 가서 장소중에게 칼을 돌려 주며 몇 마디 말을 걸어 홍화회의 총타주가 달아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겠다.」 이원지가 두 손에 응벽검을 받쳐 든 채 지하 옥의 입구를 향해 걸어왔다. 칼을 문태래의 면전에 내밀며 의식적으로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장 사숙님, 이거 사숙님의 보검이에요.」 팔꿈치로 진가락을 밀었다. 문태래가 (흥) 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받으려고 했다. 이원지는 불빛 아래서 그를 똑똑히 보고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달아나려구요? 두 손을 움츠리며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으니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그 칼로 문태래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문태래가 몸을 옆으로 살짝 피하며 식지와 중지로 칼날을 잡고 오른손을 전광석화처럼 놀려 그녀의 태양혈(太陽穴)을 맹격했다. 깜짝 놀란 이원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가 검신을 두 손가락으로 끼고 있었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급히 손을 놓으며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왼쪽 어깨를 문태래의 다섯 손가락에 맞아서 통증이 뼛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진가락이 밖을 향해 두어 발짝 뛰다가 고개를 돌려 보니 문태래가 벌써 뭇 친병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웅벽검의 백광이 난무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창날이 부러져 나갔다. 「손을 멈추지 않으면 활을 쏘겠다.」 이가수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문태래가 응벽검을 휘두르느라 힘을 쓰는 바람에 상처가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뚫고 나갈 기운이 없음을 안 문태래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총타주님, 이 칼을 가지고 빨리 나가세요.」 응벽검을 진가락을 향해 던졌지만 어깨가 아프고 손에 맥이 풀려 얼마 가지 못하고 그냥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원래 어깨를 화살에 맞았던 것이다. 진가락이 달려나가며 이가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활을 멈추게 하시오.」 이가수가 손을 휘젓자 중병들은 화살을 쏘지 않았다. 10여 개의 장창이 여기저기서 진가락과 문태래를 몰아넣었다. 「빨리 의원을 청해다 문 사당가를 치료해 주시오. 그럼 나는 가리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고 당당하게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친병들은 사전에 이가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공연히 소리만 지르며 쫓아오는 척했지 정말 막지는 않았다. 진가락이 담 위로 뛰어올라 보니 안팎에 2중 3중으로 궁전수와 장모수(長矛手)가 포위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상대방의 이같은 삼엄한 경비 속에서 다시 문태래를 구출해 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제독부를 벗어나오자 위춘화와 낙빙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진가락은 쓰디쓰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이때는 벌써 날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군웅들은 울분을 달래며 고산의 마씨 댁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두어 시간 동안 잠자리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려고 했지만 모두들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어 다시 대청에 모여 대책을 숙의했다. 진가락이 위춘화를 향해 먼저 말을 꺼냈다. 「구가, 옥병과 이가수의 소실을 그에게 보내 주시오. 우리 쪽에서는 신용을 지킵시다.」 위춘화가 대답을 하고 나갔다. 이때 마대정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총타주님, 장소중이 총타주님께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장소중이 내게 편지를 써 보내다니요? 참 이상한 일이로군요. 도대체 뭐라고 썼을까?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뜯어 보니 온통 격분한 말뿐이다. 정정 당당하게 나오지 않고 비겁한 행동을 취했으니 영웅호한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1대 1로 대결하여 승부를 겨루고 싶으니 시간과 장소를 결정해 통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녀석 어젯밤의 원수를 갚고 싶은 모양이로군. 흥, 어림없는 소리. 1대 1로 결투를 하자면 누가 제놈을 무서워할 줄 알았나? 즉시 붓을 들어 회신을 썼다. 내일 오시에 갈령에서 만나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 돕는다면 영웅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진가락이 막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서천굉이 만류하고 나섰다. 「우리가 이틀 안에는 문 사가를 구출해 내야 합니다. 장소중과의 약속을 며칠 미루시면 어떨까요? 이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습니다.」 「옳은 말씀이오. 오늘이 스무날이니 그러면 스무사흗날 오시로 연기하지요.」 즉시 회답을 바꾸어 써서 사람을 시켜 제독부로 보냈다. 조반산이 나섰다. 「그 녀석의 보검이 날카로우니 총타주님 병기를 가지고 대결할 생각은 마세요. 권각으로 상대한다면 그에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놈과 칼로 대결한다면 그 녀석이,,,,,,.」 무진의 말이었다. 그는 황하의 나루터에서 장소중의 칼에 맞은 원한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중영도 나섰다.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 총타주님은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노선배님은 겸양치 마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진가락이 주중영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총타주님의 무공은 나도 맛을 보았는데 확실히 고명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중의 공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와 상대를 해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공연히 상대방의 예기를 기르고 우리의 위엄을 죽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총타주께서 그에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를 이긴다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필승을 거둘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해야겠습니다. 「주 노선배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저로서도 그를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쪽에서 결투를 하자고 했는데 제가 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웃지 않겠습니까? 다만 최선을 다할 뿐 승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진가락의 말에 상백지가 나섰다. 「그럼 우리가 먼저 그놈의 칼을 훔쳐 녀석의 기를 꺾어 놓지요.」 장진도 나섰다.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그놈을 찾아가 싸움을 하지요.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틀 동안에 그놈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놓을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럼 총타주님은 이틀 동안 편안히 쉬시다가 왕성한 기력으로 나온다면 되지 않을까요? 이 말을 들은 군웅들이 껄껄 웃으며 일리가 있다고 머리를 끄덕 거렸다. 이렇게 상의를 하고 있는데 마씨 댁의 장정 하나가 들어와 마선균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나리, 그 왕유양이라는 영감이 여전히 식사도 거절하며 욕설만 퍼붓고 있습니다.」 「뭐라고 욕을 하던가? 마선균이 물었다. 「어림군의 하는 일이 돼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몇십 년 동안 강호상에서 활동하는 사람마다 자기를 존중했다나요. 그런데 이번 조정의 보표에서는 오히려 자기를 이곳에 까닭도 없이 감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허, 그 위진하삭이 우리 강남에 와서는 위풍이 없어졌다 이거지? 골탕 좀 먹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 이 말을 듣던 서천굉의 머리에 꾀가 하나 떠올랐다. 「사기(史記) 진진전에 이런 말이 있지요. 변장자 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하자 심부름꾼 아이가 말렸습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소를 잡아먹으려면 서로 싸우게 되고 싸우면 큰 놈은 다치게 되며 작은 놈은 죽게 됩니다. 다친 큰 놈을 찌르면 일거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장자가 그럴듯 하게 여기고 기다리니 어린이의 말 그대로 두 마리의 호랑이가 과연 싸우더랍니다. 싸우다 다친 놈을 찔러 결국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때요? 십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계책인데 여러분, 어디 한번 쓸 만한가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책을 설명하자 모두들 손뼉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 「묘책이오, 정말 기가 막힌 묘책이오! 무진은 이렇게 찬사를 보냈고 주기는 못 당하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서천굉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진가락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주 소저는 또 칠가가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비웃으시는군요. 그러나 소인을 상대하면서까지 군자지도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맹 대가, 가셔서 그 위진하삭에게 말씀을 하시지요. 왕유양은 제(齊) ,노 , 연(燕) ,조 등의 땅을 40년 동안이나 종횡하면서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순조릅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강남에 오자마자 이런 좌절에 봉착한 것이다. 그가 떠들며 야료를 부리는 것도 사실은 어림군의 통령을 만나 한번 따져 보아야겠다는 심사에서 그러는 것이었다. 혼자 떠들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어림군 군관의 복장을 한 맹건웅이었다. 그는 똑똑하고 기민하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훌륭했다. 위춘화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걸었다. 「당신이 바로 위진하삭이오? 왕유양은 그의 오만무례한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그렇소. 위진하삭이란 별명은 강호의 친구들이 붙여 준 것이오. 복 통령의 귀에 거슬린다 하니 내일부터 강호의 친구들에게 알려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하겠소.」 「복 통령은 황친이오 강호의 당신들이 서로 부르건 말건 그런 것 개의할 분이 아니오.」 「그럼 얌전하게 조정의 보물을 호송하여 항주까지 오면서 도중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까닭도 없이 이 늙은이를 여기 이렇게 감금한단 말이오? 「왜 그러는지 정말 알고 싶소? 「그야 물론이지요. 「나이가 너무 많아 놀라서 충격을 이기지 못할까봐 걱정이로군요. 왕유양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나이가 많아 쓸모없다고 하는 것을 질색으로 여겼다. 즉시 내력을 모아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니 나무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탁자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나 왕유양, 나이는 비록 많다고 하지만 웅심만은 젊은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소. 도산(刀山)에 오르건 기름 가마에 들어가건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런데 내가 무얼 무서워한단 말이오? 「왕 영감 기백에 내가 놀랐소. 강호상에 이런 말이 있지요 (염라 대왕을 건드릴망정 왕유양은 건드리지 말라. 창에 세 번 맞을망정 장소중과 부닥치지 말라)고. 정말 그렇소 「그야 도둑들의 무리가 이 영감 무섭다고 그런 말을 퍼뜨린 것이지요. 「그럼 왜 왕 영감을 장소중 위에 올려놓고 말하나요? 왕 영감의 무공이 장소중을 능가한단 말인가요? 왕유양은 이 말을 듣고 나자 모든 것을 환히 깨달았다.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를 쳤다. 「아, 화수판관이 내 무공을 시기해서 그랬구나! 내가 바보처럼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장 대인은 나의 상관이오. 그 점은 아시겠지요? 「나도 장 대인이 어림군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그분을 아시지요? 「우리가 서로 북경에 있지만 그는 관리요, 나는 평민이오. 그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었지만 만나 본 일은 없소.」 「우리 장 대인도 왕 영감님의 이름을 많이 들었지요. 지금 그분이 허명을 위하여 서로 다툰다는 것도 남 보기 흉한 일이라고 하셨소. 장 대인은 이제 모두 타향에 와 있으니 세 가지 일을 왕 노영웅과 함께 상의하자는 것이오. 만약 왕 노영웅이 철석같이 약속만 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실 수 있을터다.」 「내 지금 당신들 어림군에게 감금되어 꼼짝 못하고 있지를 않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당신들 마음대로 하면 될 텐데 무슨 대답을 하란 말이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을 가지고 왜 화를 내십니까? 「그래, 화수판관이 나를 보고 어쩌란 말이오? 「첫번째 일은 왕 영감이 위진하삭이란 이름을 버리라는 것이오.」 「흥, 두번째 일은? 「진원표국의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왕유양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냈다. 내 이 진원표국을 세운 지 삼십 년, 도둑들의 손에도 무너지지 않았는데 장 대인이 나를 보고 문을 닫으라고 하다니. 좋소! 세번째 일은 뭐요? 「세번째 일은요, 왕 노표두께서 무림의 동료들을 청해다 이렇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을 건드릴망정 왕유양은 건드리지 말라. 창에 세 번 맞을망정 장소중과 부닥치지 말라)는 이 말의 순서를 바꾸도록 하라는 것이오. 그밖에 또 장 대인의 부탁이 한가지 있는데 왕 노영감님 나이가 많아 이 자금팔괘도를 쓸 데가 없으니 차라리 어림군에게 헌납하라는 것입니다.」 왕유양이 듣고 노기충천하여 외쳤다. 「나와 장소중은 원한을 산 일도 없고 원수를 진 일도 없는데 그가 어찌하여 이토록 사람을 업신여긴단 말인가? 「왕 영감, 사십 년 동안이나 명성을 드날렸으니 이제 그만 하면 물러날 때도 되지 않으셨소?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 그만한 이치도 모르시겠소? 맹건웅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 그자가 나를 꺾고 사해에 자기 이름을 떨쳐 보자는 속셈 때문에 그랬군. 흥, 내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를 여기서 석방하지 않겠다 이건가? 좋소, 팔자 소관으로 돌릴 수밖에 없겠지. 공적인 명분을 빌려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겠다니 천하의 그 많은 입을 어 찌 감당하려고 그러나. 「장 대인이 영웅호걸이신데 어찌 이런 일을 하겠소? 그분은 오늘 오시에 사자봉에서 만나 권검으로 한번 대결해 보자는 것뿐이오. 만약 왕 영감이 우세하면 세 가지 조건을 다시 거론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만약 진다면 세 가지 조건에 응해야 될 것이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이 영감 사십 년 동안의 명성을 화수판관의 손에 팔아 넘긴다 하더라도 억울할 것 없겠지.」 「장 대인께서는, 이 일을 황상께서 아시게 된다면 대단히 난처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왕 노표두께서 응할 용의가 있거든 혼자 약속 장소로 오셔야 하오. 만약 겁을 먹고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대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유양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이 늙은이 뼈를 황산에 묻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혼자 갈 것이니 염려할 것 없소.」 「그럼 편지 한 통을 써 주시오. 내가 가서 장 대인께 보고할 것입니다. 맹건웅이 말을 마치고 지필묵을 내놓았다. 왕유양은 분을 이기지 못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짤막하게 편지를 썼다. 장소중 장 대인 존하, 당신의 언행이 지나치게 사람을 업신여 기오. 오늘 오시에 사자봉에서 만납시다. 내 당신의 손에 패하거든 당신 마음대로 처치하시오. 왕유양 씀 그는 한 사람의 무부에 지나지 않는다. 글재주가 신통한 편도 아닌데다가 화가 나서 쓴 편지라 더욱 엉망이었다. 맹건응이 웃으며 편지를 챙겨 넣었다. 「당신의 이름도 알려 주오. 이따가 한번 대결해 봅시다.」 왕유양의 말이었다. 맹건웅의 오만한 태도가 더욱 비위에 거슬려 화풀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야 새까만 후배인데 어디 감히 이름을 선배 앞에 내놓겠습니까. 1대 1로 대결하신다 했으니 나도 사자봉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사람의 숫자로 말할 것 같으면 진원표국이 어찌 어림군과 비할 수 있겠소? 흥! 냉소를 날리며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홍화회에서는 왕유양이 관가를 무서워해 결코 제멋대로 달아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적당히 문을 닫아만 두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일신의 무공에다가 수갑과 족쇄도 채우지 않았으니 이까짓 엉성한 나무 문짝으로 어찌 그를 감금해 둘 수 있으랴? 철비파 한문충은 그날 말의 뒤를 쫓아갔다가 그만 잡히고 말았다. 이날 오전 한 칸의 작은 방으로 끌려와 감금되었다. 이제는 홍화회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요행을 바라기는 어렵다고 혼자 체념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방에서 누군가가 욕설을 해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총표두인 왕유양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가 장소중을 철없는 소인이요, 안하무인이라고 욕하고 있지 않은가? 한문충이 의아해 막 소리를 질러 물어 보려고 하는데 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한 나리, 대청으로 가시지요.」 대청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세 사람이 왼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좌에 앉은 사람은 홍화회 총타주 진가락이요, 그 다음의 한 사람은 허옇게 흰 아랫수염을 가볍게 날리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몸집이 왜소한데 모두 감량(甘凉)의 노상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한문충은 창피하여 아무 말 없이 윰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한 대가, 우리가 감숙에서 만나뵈었는데 뜻밖에 오늘 또 여기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하, 인연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진가락의 말에 한문충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때 다시는 무림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만 왕 표두께서 이번에 한 번만 동행을 해야겠다고 해서 나섰습니다. 우선 친구의 청을 거절하기 민망했고 또 이것이 공자님 댁의 보물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님께서 책망하시지 않으시겠지 생각하고 그래서"""~ 「여보 한 형! 우리들 강호에서는 신의(信義)라는 두 글자를 제일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 않소? 당신이 말을 하고도 신용을 저버렸으니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오.」 서천굉이 날카롭게 추궁했다. 한문충은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내 이미 당신들 수중에 떨어졌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죽이겠으면 죽이고 뼈에 붙은 살을 발라 내겠으면"""~ 「한 대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오. 왕 표두가 이번 장소중에게 지나친 모욕을 당하고 있어요. 그 장가 성을 가진 자 권세를 빌려 너무 위세를 부리고 있어요. 왕 노영웅의 명성이 하삭(河朔)에 떨치고 있는데 이런 큰 모욕은 평생 당해 본 일이 없을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이 화수판관과 한번 사생결단 결판을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무림에서도 모두들 분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왕 표두께서 지금 저희 집 물건을 호송하고 있는 중이니 나로서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일이오. 한 대가와 장소중의 교분은 어느 정도입니까? 하고 진가락이 물었다. 「북경에서 몇 번 만나 보기는 했습니다만 서로 귀천이 유별한데다 그가 자기의 무공만 믿고 있으니 우리 같은 사람을 어디 거들떠나 보겠숩니까? 그러니 교분이고 뭐고 따질 수가 없지요.」 이 편지를 한번 직접 보시지요.」 왕유양이 쓴 편지를 그에게 주어 읽게 했다. 한문충은 본래 총표두가 관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장소중에게 대들 리가 없었다. 그러나 명성을 드날린지 오래요, 또 성격이 너무 강했다. 게다가 장소중이 워낙 권세를 등에 업고 사람을 업신여겨 왔으니 참을 데까지 참다가 폭발한 것 으로 알았다. 방금 그가 장소중을 욕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편지를 보니 틀림없는 그의 필적이라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기왕 그렇다면 제가 총표두와 만나 상대할 대책을 한번 상의해 보아야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이르지 않으니 이 편지를 우선 한 대가가 장소중에게 전달한 뒤에 돌아와 왕 노영웅과 만나시는 게 어떨는지요? 진가락의 말이 상의하는 투로 나오기는 했지만 한문충으로서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십이가, 이리 나오세요.」 진가락이 크게 외치자 석쌍영이 내당에서 나왔다. 진가락이 그를 한문충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 석 형제가 모시고 갈 테니 장소중을 만나십시오. 한 대가, 장소중이 어떻게 왕 노영웅의 체면을 깎았는지 말을 꺼내자면 너무나 깁니다.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이 없군요. 장소중을 만난 뒤 이 석 형제가 귀 표국의 표사라고만 말씀하십시오. 모든 것을 이 석 형제가 말할 것입니다.」 한문충은 의심이 생겨 또 주저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진가락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대가, 뭐 이상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공자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서천굉은 그가 의심하는 줄 알고 일을 그르칠까봐 한마디 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안으로 들어가 술주전자와 잔을 들고 나와 술을 따른 뒤에 한문충을 향해 내밀었다. 방금 소제가 너무 버르장머리없이 굴었습니다. 이렇게 사과를 드릴 것이니 이 잔을 받으시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이 야기요.」 잔을 들어 비우고 말했다. 「진 공자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시겠습니다.」 진가락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한문충이 편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서천굉이 갑자기 놀라 외쳤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한 대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방금 그 술잔에 독이 들어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고 한문충이 얼굴색이 변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술에 독을 탔어요. 본래 암기를 적시려고 했던 것인데 하인이 모르고 그걸 그냥 나에게 준 모양입니다. 방금 저도 냄새를 맡고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한 대가께서 한 잔을 마셨으니 이거 야단났습니다. 빨리 해약을 가져오너라. 서천굉의 당황한 목소리에 한 장정이 나섰다. 「해약은 동성택자에 있습니다.」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빨리 말 타고 가서 가져오너라.」 그 장정이 대답을 하고 나갔다. 「소제가 소홀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죽어 마땅하지요. 한 대가, 우선 이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셔서 해약을 드리지요.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우리의 석 형제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서천굉이 한문충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한문충은 그가 고의로 독을 탄 술을 자기에게 마시게 한 줄로 알았다. 자기를 겁주어 그들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술수임이 뻔했다. 만약 홍화회가 시키는 대로 따를 것 같으면 돌아와 해약을 마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이제 죽는 신세다. 서천굉을 향해 하얗게 눈을 흘기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석쌍영이 그 뒤를 쫓아 나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주중영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한문충이란 위인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천굉이 독주까지 마시게 한 것은 너무나 떳떳하지 못한 처사였네.」 「아버님, 그 술에 독약을 타지 않았습니다.」 「독을 타지 않았다구? 「그렇습니다.」 술을 따라 한 잔 마시고 웃었다. 「그가 장소중의 면전에서 딴 소리를 해 우리의 일을 그르칠까봐 겁을 주느라고 그랬을 뿐입니다. 이따가 다시 한 잔 마시게 하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아요. 사람들이 모두 서천굉의 죄에 한바탕 웃었다. 갈령에서의 대결 장소중은 갈령에서 만나 대결하겠다는 내용의 진가락의 회신을 받고 마음속의 노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그는 진가락과 몇 차례 상대를 해 본 경험이 있어 십중팔구 승산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지난날의 치욕을 씻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문태래의 옆에 앉아 감시를 하고 있는데 옥문이 열리며 친병이 하나 들어왔다. 「장 대인, 손님 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장소중이 보니 크고 빨간 첩자 위에 (위진 하삭 왕유양 돈수)라는 아홉 자가 눈에 들어왔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찾아뵙겠다는 주제에 자기의 별호까지 쓰는 법이 어디 있나?) 즉시 친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공무를 보는 중이라 손님을 만날 시간이 없다고 이르게. 그리고 주소를 남겨 놓고 가면 다음날 내가 찾아가 보겠노라고 전하게.」 친병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손님이 가려고 하지 않고 이 편지를 전해 드리라고 하는군요. 장소중이 뜯어 보니 화도 나고 궁금하기도 했다. 자기와 왕유양이 평소 감정을 산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결투를 하겠다는 것인가? 친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이 군문께 가서 나는 손님을 좀 만날 테니 누구 내 대신 간수 볼 사람을 하나 파견해 주십사고 전하게.」 문태래를 간수할 4명의 시위가 오자 장소중은 두루마기로 갈아 입고 객청으로 나왔다. 그는 한문충을 알기 때문에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왕 총표두는 안 오셨소? 「장 대인, 제가 이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 표국의 석 표두입니다. 왕 총표두께서 이분을 보고 몇 마디 말씀드리라 해서 같이 왔습니다. 장소중은 왕유양이 보낸 편지를 읽고 탁자 위에 집어던졌다. 「왕 총표두의 위명은 내 오래 전부터 들어왔소. 내가 그분과 평소 별로 감정을 산 일도 없는데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다)고 했으니 도대체 무슨 말이오?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니 어디 두 분께서 말씀을 해 보시오.」 「왕 총표두님은 무림의 영수이십니다. 무림 가운데 패륜을 한 자가 나타나면 그분과 감정을 샀건 안 샀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무슨 위진하삭이란 별호가 어울립니까? 석쌍영의 냉랭한 말에 장소중은 화가나 벌떡 일어섰다. 「왕유양이 나를 보고 무림의 패륜아라 한단 말이오? 석쌍영이 흥터투성이의 얼굴을 바짝 쳐든 채 아무 말 없으니 묵인한다는 뜻이다. 장소중은 노기충천하여 쏘아붙인다. 「내 어느 점에서 무림의 체면을 깎고 있다는 것인지 어디 한번 말해 보오.」 「왕 총표두께서 몇 가지 일을 장 대인에게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한 가지 일은 우리 무예를 배우는 사람은 어느 일가 어느 파를 막론하고 가장 미워하는 것이 사부나 사형을 능멸하는 것입니다. 장 대인은 무당파의 고수이신데 듣기로는 동문의 사형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공을 탐해 그 사형을 체포까지 했다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 사 형제 사이의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장소중이 화가 나서 내뱉는 말이었다. 두번째 일이오. 우리 강호의 사람들은 백도 , 흑도(黑道) 관부(官府) 녹림을 막론하고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신의 요. 장 대인과 홍화회는 감정을 산 일도 원수를 진 일도 없다고 하던데 진급과 치부를 위하여 분뢰수(奔雷手) 문태래를 체포했으며, 철담장의 어린아이를 속여 목숨까지 잃게 해 놓고도 마음이 편안하시오? 「내가 황제의 녹을 먹고 있으니 황제께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것이 당신들 진원표국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장소중은 치를 떨었다. 장 대인이 홍화회를 이길 수 없거든 혼자 달아나고 말 일이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독계를 써 진원표국에 누명을 씌워 표두와 심부름꾼의 생명을 잃게 합니까? 장소중과 한문충은 모두 깜짝 놀랐다. (원래 왕유양이 이 일 때문에 화가 났구나.) 감량(甘凉)의 노상에서 진원표국의 염세장과 대영명이 피살된 일, 전정륜이 손을 다친 일은 한문충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참을 수가 없어 나섰다. 「장 대인, 그 일은 확실히 크게 잘못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왕 총표두께서 화가 나실 만도 하지요.」 「그밖의 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이 세 가지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디 말씀해 보십시오.」 석쌍영이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두 눈을 하얗게 흘겼다. 그가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듯한 태도로 나오자 장소중은 더 참지 못하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대들었다. 「대담한 놈 같으니라구 살기가 싫은 모양이로구나. 감히 내게 대들다니 . 당장이라도 일격에 없애 버릴 것 같은 험악한 순간이었다. 석쌍영이 일어나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말을 꺼냈다. 「왜? 위진하삭이 당신과 대결하자고 하니까 겁이 나서 내게 분풀이나 하려고 그러나요? 「누가 겁이 난다고 하더냐? 그자가 오늘 오시에 사자봉에서 우열을 가려 보자고 했는데 내 안 가면 호한이 아니다.」 「만약 가고 싶지 않거든 금후 다시는 무림에 나타나 행세할 생각은 마시오. 왕 총표두께서는 당신이 자신 있거든 혼자 나타나라고 하셨소. 우리 표국에서도 절대 제삼자가 그 자리에 있지 않겠다고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관가에 알려 관병을 동원한다면 우리 평민으로서는 오늘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소. 그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하겠소.」 석쌍영의 말이었다. 「왕유양이 허명뿐인데. 그래 그 늙은이가 무서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할 것 같으오? 「우리 왕 총표두님은 구변이 별로 좋지 않으니 이따 만나더라도 무공으로만 대결하셔야 하오. 공연히 쓸데없이 욕을 하려거든 지금 이 자리에서 통쾌하게 하고 마시오.」 장소중도 역시 구변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석쌍영이 이토록 화를 돋우는데도 시원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석쌍영이 다시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이렇게 정하고 이제 그만 가겠土. 그러나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일은 아직도 시간이 있으니 무예나 다시 한 번 연습 해 보시고 뒷일도 처리할 것은 처리하고 나오시오.」 장소중은 두 눈에서 불을 뿜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석쌍영을 향해 일 장을 뻗었다. 석쌍영이 급히 몸을 빼기는 했지만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왼쪽 어깨를 맞은 뒤 뒤로 비틀비틀 밀렸다. 장소중의 솜씨는 신속하기 짝이 없었다. 일 장을 가격한 뒤에 몸을 솟구쳐 쫓아가 다시 한 번 왼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맹격했다. 석쌍영은 태극권 가운데 남작미의 재주를 부려 그의 일 장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 장소중은 그가 내가의 무공으로 나오자 순간적으로 어리벙벙했다. 바로 이때 석쌍영이 다시 뒤로 몇 발짝 물러서며 외쳤다. 「좋소, 당신이 왕 총표두님을 만나기가 무서워 그러는 모양이니 어디 나와 한번 우열을 가려 봅시다.」 쌍장을 교차시켜 공격 태세를 취하는데 오른쪽 어깨가 시고 또 맥이 없어 들 수가 없음을 느꼈다. 「당신은 내 적수가 아니야. 돌아가 왕유양께 오시에 정확히 도착하겠다는 말이나 전하게.」 장소중의 말에 석쌍영이 냉소를 머금고 돌아 나오니 한문충도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한문충은 자기가 독주를 마신 일만 걱정하고 있었다. 전신이 거북하고 불편한 것 같아 빨리 할 말을 다 끝내고 돌아가 해약을 먹을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투고만 있으니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이마에 땀방울까지 솟았다. 가까스로 고산의 마씨 댁으로 돌아오자 석쌍영이 결과를 보고했다. 「오시에 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한문충은 배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의자에 쓰러졌다. 서천굉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한 대가, 이게 해약이오 어서 드시오.」 한문충이 급히 손을 뻗어 잔을 받았다. 주중영이 중간에서 잔을 뺏어 목을 뒤로 젖히고 마셔 버렸다. 한문충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그러자 주중영이 웃었다. 「농담은 그만하면 충분하오. 한 대가는 처음부터 독주를 마시지 않으셨다오 저자가 한 대가와 장난을 한 것뿐이오. 천굉이, 나와서 한 대가께 사과를 드리게.」 서천굉이 웃으며 한문충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읍을 했다. 「한 대가, 잘못했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실대로 해명을 했다. 한문충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증오하던 마음은 다소 누그러졌다. 맹건웅이 다시 들어와 왕유양을 만났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제멋대로 지껄여 대는 것이었다. 「장 대인이 대답을 하셨으니 지금 곧 갑시다. 여보시오! 장 대인은 누가 우물쭈물하는 것은 아주 질색을 하십니다. 이따가 사자봉에서 만나거든 무공으로만 대결해야지 당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 보아야 듣지도 않으실 겝니다. 애걸복걸해 봐야 소용이 없어요. 무섭거나 후회스럽거든 지금 그만두겠다고 해도 늦지는 않아요. 「나 이 늙은 한 생명 오늘 버리고 말겠다. 왕유양이 벌떡 일어나며 외치고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맹건웅이 손을 흔들자 장정 한 명이 왕유양의 자금팔괘도(資金八卦 刀)와 표낭을 갖다 바친다. 그가 손을 뻗어 받아 쥐고 씨근덕거리자 하얀 수염이 뻣뻣하게 섰다. 왕 총표두님, 가셔서도 조심하십시오. 한문충이 문 앞에 섰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도 다 알고 있는가? 왕유양의 말에 한문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장소중을 만났었습니다.」 「그자가 나를 보고 뭐라고 욕을 하던가? 소인의 말에 왕 총표두님이 귀 기울일 것 없으십니다.」 「말을 해도 상관없네.」 보잘것없는 늙은이, 허명뿐이라고 욕하더군요. 왕유양이 코방귀를 뀌었다. 정말 허명뿐인지 지금이야 모르겠지. 내가 만약 잘못되거든 한 노제가 표국과 우리집 일을 알아서 처리해 주면 고맙겠네.」 왕유양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검영(劍英)과 검걸(劍傑)을 보고 원수를 갚으려고 서둘 것 없다고 해 주게. 그애들 형제의 무공 가지고는 안돼. 공연히 생명을 잃을 것까지야 없겠지. 왕검영과 왕검걸은 왕유양의 두 아들인데 가전의 팔괘문 무예를 익혔다. 총표두님의 무공이 심오하시니 장소중이 적수가 못 될 것으로 압니다. 전 여기서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유양은 대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안내하는 장정을 따라 사자봉으로 떠났다. 사자봉에서는 차잎이 많이 생산되는데 사자봉 용정차는 천하의 절품이다. 산봉우리가 높고 가팔라 올라오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다. 왕유양은 등에 큰 칼을 짊어지고 올라왔다. 가장 높은 곳 은 널찍한 평지이고 그 주위는 차나무뿐이다. 앞에서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간편한 복장에 몸집이 우람한데 왕유양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당신이 바로 왕유양인가? 왕유양은 그가 직접 자기 이름을 부르며 나오자 화가 났다. 그러나 이제 70이 가까운 나이에 소년 시절의 패기도 많이 여인데다가 장소중이 또 현직 무관이라 다소 경외하는 입장이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왕유양입니다. 당신이 화수판관 장 대인이신가요? 이 사람이 바로 장소중이었다. 「그렇소, 우리 권각으로 대결하겠소, 아니면 병기로 대결하겠소? 장소중은 치밀한 사람이라 봉우리로 올라오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과연 상대방이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들을 매복시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왕유양이 비록 거칠고 오만한 점은 있지만 표두의 신분으로 정말 관가와 맞설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응전하러 올라온 것이다. 왕유양은 혼자 생각해 보았다. (내가 저자와 깊은 원수를 진 일도 없는데 병기로 대결하여 다치게 할 것까지야 없겠지? 실수를 하여 관원을 죽이게라도 된다면 그 후환을 어찌 감당하려고? 팔괘장으로 그의 오기나 꺾어 이 영감의 명성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만 알리면 되는 게지.) 나 왕유양은 천하가 다 아는 장 대인의 무극현공권의 맛을 보고싶습니다. 「좋소.」 장소중이 동의하고 좌권과 우장을 모아 인사를 했다. 그는 비록 자만심이 강했지만 배운 것은 무당파의 내가권법이었다. 그래서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피로한 적을 공격하는 것과 이정제동의 방법에 능했다.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상대가 진격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왕유양은 그가 선공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좌장을 밖으로 꺾으며 우장을 유공탐조로 해서 그의 오른쪽 어깨를 빠갰다 동시에 좌장을 뒤집어 맹호복용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팔을 치며 우장을 주먹으로 바꾸어 그의 앞가슴을 공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삼 초를 연발한 것이다. 장소중이 뒤로 세 발짝 물러서며 무극현공권으로 뿌리쳤다. 두 사람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한 바퀴 돌고 나서 서로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 탄복했다. 장소중은 생각했다. (이 삼 초가 날카로우면서도 무서운 것을 보니 이자는 보통 강적이 아니로구나.) 왕유양도 같은 생각이었다. (내 이 유한 가운데 강한 삼 초를 뿌리치는 것을 보니 과연 화수 판관이란 이름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구나.) 두 사람은 서로 가볍게 상대할 인물이 아니라고 조심을 하면서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장소중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왼발로 비스듬히 걷어찼다. 왕유양이 펄쩍 뛰어 피하고 쌍장으로 그의 얼굴을 눌렀다. 장소중이 왼발을 들어 차는데 거기 벌써 공격창옹 과 수소금후의 두 초가 들어가 있었다. 왕유양이 쌍장으로 누르는 힘에 이 두 초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나 각기 자신의 절기를 펴 결사적인 대결로 벌써 3, 40초를 겨루었는데 이때는 이글거리는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땅 위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난무하고 있었다. 왕유양은 승산이 보이지 않자, 자기는 나이가 많아 상대방의 씩씩하고 왕성함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이렇게 오래 싸우다 보면 기력이나 투지가 틀림없이 약화될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초식을 바꾸었다. 수장은 팔꿈치에서 떨어지지 않고, 팔꿈치는 수장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일 장은 호신을 하고 일 장은 상대와 대결했다. 또 우장을 왼쪽 팔에 붙이고 발을 선천팔괘도 식(先天八卦圖式)에 따라 밟으며 장소중을 가운데 두고 급하게 맴돌았다. 바로 자신의 평생의 절기인 유신팔괘장을 쓴 것이다. 이 일로의 장법을 쓸 때는 한 발도 멈춤이 없이 적의 몸을 끼고 왼쪽으로 돌았다 오른쪽으로 돌았다 하며 급히 선회를 하다가 틈만 보이면 맹격을 가하는 그런 솜씨였다. 가위 (분명히 앞에 있었 는데 어느새 뒤에 가 있더라)라는 말과 같이 적이 상대를 하려고 하면 벌써 뒤에 가 있고 몸을 돌이켜 상대를 하려면 다시 또 뒤로 돌아간 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몇 바퀴 돌다 보면 무예가 제아무리 출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만 어질어질 혼을 뺏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가 잠시만 멈춰서 움직이지 않으면 등뒤의 급소를 수장이나 주먹에 맞게 되어 있었다. 왕유양이 두 바퀴를 돌았을 뿐인데 장소중은 벌써 상대방의 술 수가 대단함을 알아차렸다. 그가 자기 뒤로 돌아가기 전에 옆으로 발을 빼 비키며 왕유양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대들어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나 왕유양이 벌써 그의 등뒤로 돌아간 후였다. 장소중은 그가 구궁팔괘를 따라 밟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감궁에서 이위로 달릴 것으로 알고 쌍장을 휘두르며 건위(乾 位)로 먼저 들어섰다. 두 사람이 이렇게 7, 8바퀴를 돌면서도 수장을 교환할 겨를이 없었다. 이 장법은 왕유양이 수십 년 동안이나 숙련을 한 것이다. 가면 갈수록 빨라지며 발걸음이나 수장을 자유 자재로 움직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눈코 뜰 새 없이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장소중은 그의 초술에 따라가며 대처해 나갔다. 처음에는 백중지세를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방의 민첩함에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서로 돌아만 가다 보면 열세에 몰릴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바꾸고 즉시 무극현공권의 이유극강(以柔克剛)의 요결로 발걸음을 멈춘 채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막 발걸음을 멈추자 왕유양이 벌써 그의 등뒤로 접근하며 금룡조조로 일격을 가했다. 장소중은 그의 수장이 미치자 왼손을 뒤로 뻗어 돌리며 그의 팔뚝을 틀어 잡으려고 했다. 왕유양은 뻗었던 수장을 급히 거두어들였으나 일격이 빛나감과 동시에 발길의 위치를 바꾸며 마음속으로 탄사를 보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폐목환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다니.) 원래 장소중은 상대방의 은빛 흰머리를 바라보며 지금은 비록 자기보다 용감하고 강건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필시 유리한 기회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폐목환장)의 재주를 부려 그의 (유신팔 괘장)과 맛섰다. 이 무공을 연마할 때는 검은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청력과 피부의 감응에 의지하여 적의 공격 방향을 살피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적과 대결할 경우에도 주로 수세만 취하고 있다가 상대의 적이 한 자 내외의 거리에 접근하면 번개처럼 기민한 역습을 감행하는 것이다. 적이 제때에 공격태세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면 팔을 낚워챔과 동시에 관절을 부러뜨려 버린다. 이 장법은 원래 야간의 접전이나 바위 속의 굴 또는 캄캄한 암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장법의 변화가 오묘하여 상대방의 신체를 공격한다기 보다는 손에 쥔 병기를 탈취하거나 수족의 관절만 부러뜨려 기선을 잡기 위해 흔히 쓰였다. 그때 한 사람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몸을 살짝 숙인 채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번개처럼 일 초나 이 초를 겨루고 왕유양은 다시 맴을 도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또 수십 초를 대결했다. 왕유양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렇게 기력을 소모하다가는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 갑자기 그의 등뒤로 덮치며 좌장을 허초로 내밀고 우장도 또 허초로 가격하는 척했다. 장소중은 다시 손을 뒤집어 나꿔채려고 했지만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 왕유양이 왼손으로 다시 허초를 연발하면서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맹렬하게 쪼갰다. 장소중은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그의 연속된 4개의 허초를 상대하다가 갑자기 장력이 어깨를 습격하자 깜짝 놀랐다. 피하거나 막을 여유가 없었다. 오른손을 꺾어 그의 오른쪽 손등을 누르고 좌권으로 그의 오른 팔꿈치를 맹격했다. 이 일 초는 선검참룡으로 상대방의 수장이 일단 눌리기만 하면 팔이 부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는 어깨가 치명의 급소가 아니니 뚝심에 의지하여 일 장을 맞는다 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며 상대방의 팔은 못 쓰게 될 것으로 알았다. 왕유양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의 일 장이 그의 어깨에 가 맞자 순간적으로 기뻤다. 그런데 갑자기 수장이 눌려 뽑을 수가 없음을 느꼈다. 그런데 상대방의 좌권이 벌써 자기의 오른쪽 팔꿈치를 맹격하는 것이 보였다. 야단났다는 생각과 함께 오른팔을 급히 돌리며 수장을 뒤집는 동시에 좌장으로 상대방의 어깨를 내리쳤다. 장소중의 좌권이 내려치자 왕유양의 팔꿈치가 벌써 돌아가 구부러져 비록 주먹에 맞지는 않았지만 곡지혈(曲池穴)이 슬그머니 마비되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한 번 장법을 교환한 뒤에 각자 펄쩍 뛰어 피했다. 이렇게 되자 장소중의 손해가 왕유양에 비해서는 컸다. 권법에서 한 수를 진 셈이다. 장소중이 소리를 질렀다. 「장법이 과연 고명하오. 우리 이번에는 병기로 겨루어 봅시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벌써 응벽검을 손에 틀어 잡았다. 왕유양도 등에서 자금팔괘도를 뽐아 들었다. 이때 두 사람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왕유양은 그의 코가 부어오르고 눈언저리가 크게 멍이 들어 있음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훌륭한 무공을 지닌 장소중인데 설마 장소중을 능가할 수 있는 그런 고수가 있어서 그를 이 지경으로까지 부상을 입혔단 말인가? 어젯밤 장소중이 진가락의 권격에 맞아 머리와 얼굴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음을 왕유양으로서는 알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장소중은 병기로나마 체면을 되찾을 심산을 가지고 응벽검을 잡자마자 연속적으로 공격을 폈다. 그의 공세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왕유양은 그의 검광이 가을 물처럼 차디찬 것을 보고 보검인 줄을 알았다. 만약 자기의 병기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자기의 칼이 깎여 나갈 것 같아 조심스럽게 팔괘도법을 펴며 대항했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공방전을 펴는 가운데 장소중은 싸울수록 정신이 새로워짐을 느꼈다. 그러나 상대방이 문호를 워낙 물샐 틈없이 방어하고 있어 당장 유리한 공격의 기회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왕유양이 철우경지(鐵牛耕地)의 초술로 비스듬히 쪼개며 들어왔다. 장소중은 즉시 천신도현의 초술을 써 보검의 칼끝을 팔괘도의 끝에 실었다. 왕유양은 칼을 뽑을 여유가 없게 되자 왼손의 식지와 중지를 가지런히 하여 그의 얼굴을 향해 찔렀다. 장소중이 고개를 돌려 피하는데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팔괘도의 끝이 부러져 나갔다. 「훌륭한 솜씨요. 왕유양이 찬사를 발하며 뛰어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각자 한 수씩 이겼습니다. 장 대인, 계속 겨루시렵니까? 그로서는 이 정도에서 끝내더라도 서로 체면을 잃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훌륭한 솜씨)라고 찬사를 보냈던 것이 그만 장소중의 비위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장소중으로서는 자신이 이번에 이긴 것이 재주로 이긴 게 아니라 보검이 좋아서 그 덕으로 이겼으니 별로 자랑스러을 것도 없는 게 아니냐 하는 조소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왼손을 흔들며 버럭 화를 냈다. 「승패를 가리기 전에는 오늘 일이 끝나지 않았소. 보검을 비스듬히 들어 찔렀다. 엎치락뒤치락 또 7, 80여 초를 싸웠다. 왕유양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이렇게 시간만 질질 끌다가는 자기가 불리할 것을 알았다. 슬그머니 금표(푼골이라고 하는 것으로, 먼 데서 던져 사람을 살상하는 데 쓰는 작은 골)를 더듬어 쥐고 칼을 왼손에 바꾸어 들며 소리를 질렀다. 「금표를 받으시오. 도법이 갑자기 바뀌었다. 왼손의 도술(刀術)이 변하며 3개의 금표가 그 도세를 따라 발사되었다. 이 도중협표 역시 그의 절기였다. 그의 왼손의 도법은 보통 도법의 반대여서 적이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금표가 도세를 따라 발사되기 때문에 적이 금표를 피하면 칼을 피할 수가 없고 칼을 피하면 금표를 피할 수 없게 되어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왕유양의 한 칼이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쪼개지며 금표 하나가 장소중의 오른쪽을 향해 날아갔다. 장소중이 오른쪽으로 피하며 손을 뻗어 금표를 받아 쥐었다ㅣ. 왕유양의 금도가 다시 쪼개지며 내려오자 장소중이 막 머리를 숙여 피하는데 상대방의 금표 하나가 또 하체를 노리고 날아왔다. 급히 손에 쥐고 있던 금표를 날아오는 금표를 겨냥하여 던졌다. 2개의 금표가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땅바닥에 떨어져 꽃혔다. 왕유양의 칼 솜씨가 점점 빨라짐에 따라 금표의 발사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이제 24개의 금표가 거의 다 발사되는데도 아직까지 상대방을 어쩌지 못해서 매우 답답했다. 이때 그의 수중에는 3개의 금표만이 남아 있었다. 왼발을 오른쪽으로 한 발 옮겨 짚고 몸을 살짝 꺾으면서 왼손의 칼을 밑으로 포개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장소중은 그가 21개째의 금표를 발사하는 것을 보고 칼로 포개면 반드시 금표 하나가 자기를 향해 날아올 것으로 알았다. 다만 그의 금표가 가면 갈수록 빨라지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칼과 금표를 막기에도 바빠 부용금침을 꺼내 반격할 여유가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즉시 몸을 돌리며 그의 오른손을 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번에도 허초를 썼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장소중의 손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허공을 잡은 것이다. 왕유양은 벌써 진위(震位) 방향으로 내디디며 역벽화산의 솜씨를 발휘해 그의 얼굴을 쪼갰다. 장소중은 칼이 내려오는 힘이 막강함을 알자 정면으로 막을 수가 없어 한 발 미끄러지며 응벽검의 횡운단봉으로 비스듬히 상대의 허리를 공격했다. 왕유양이 내리치던 금도로 그것을 막았다. 그런데 쨍그렁 소리를 내며 팔괘도가 부러져 벌써 두동강이 나 버렸다. 왕유양이 대갈일성 반 토막의 칼을 그를 향해 던졌다. 장소중이 고개를 숙여 피하려 하자 왕유양은 3개의 금표를 일시에 발사해 버리고 말았다. 장소중이 (아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며 웅벽검을 놓친 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원래 왕유양은 그가 몸을 돌리도록 고의로 유인했던 것이다. 햇빛에 눈이 시어 시선이 불분명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동시에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그가 자기의 칼을 부러뜨리도록 만들고 득의양양해 하는 찰나를 이용해 3개의 금표를 발사했던 것인데 과연 예상했던 대로 일격에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장 대인, 큰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 금창약이 있습니다.」 왕유양이 불러 보았지만 쓰러진 장소중이 기다려도 반웅이 없자 왕유양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표가 그의 생명을 해치지는 말아야 했다. 그를 때려 죽이다니, 그는 조정의 명관이 아닌가? 자기는 집도 있고 사업도 있다. 도대체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가가서 몸을 숙이고 살펴보려고 하는 순간 장소중의 대갈일성이 터졌다. 왕유양은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여 큰일났구나 싶어 철판 교(鐵板橋)의 자세로 뒤를 향해 피했지만 오히려 한발 늦었던 것이다. 왼쪽 가슴과 어깨에 몹시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미 암기에 맞았음이 틀림없었다. 왕유양은 화가 나서 포효일성 벌떡 일어나 그와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힘을 쓰자마자 가슴과 어깨의 통증이 뼛속으로 파고들어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장소중이 껄껄 웃으며 오른팔에 박힌 금표를 쁩아 내고 옷깃을 찢어 상처를 싸맨 뒤에 일어났다. 왕유양이 욕을 퍼붓는다. 「장소중 네 이놈, 내가 만약 호의로 네놈의 부상을 보살피러 오지 않았다면 네놈이 어찌 나를 해칠 수 있었겠느냐? 네가 이토록 비열한 수단을 삼는 주제에 감히 영웅이며 호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슨 낮짝으로 강호상의 호한을 만날 테냐? 「여기 네놈과 나 둘만이 있는데 이 일을 누가 알 수 있겠느냐? 네놈은 그만큼 살았으면 이제 하늘 나라에 갈 만도 하다. 명년의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니라.」 장소중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왕유양이 이 말을 듣고 보니 장소중이 자기를 죽여 없애서 입을 봉해 버릴 심산이 분명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퍼부 었다. 장소중이 달려들며 손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를 찍어 아혈을 눌러 버렸다. 왕유양은 입에서 욕이 나오지 않자 눈에 불을 뿜었다. 얼굴의 근육을 실룩거리며 당장이라도 가슴이 폭발할것 같은 기세다. 장소중이 부러진 반 토막의 팔괘도를 주워 들고 땅 속에 큼직한 구덩이를 파 놓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왕유양을 번쩍 들어서 그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네놈이 위진하삭이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이제 여기서 조용히 잠이나 자거라. 오른발로 흙을 차 구덩이 속에 넣어 그를 산 채로 매장하려 했다. 발로 몇 번 흙을 차 넣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 먼 곳에서 누군가가 냉소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장소중이 고개를 돌리니 한 사람이 괴상하게 생긴 병기를 들고 붉은 資料 아래 나타나 숲 옆에 서 있었다. 바로 철비파수 한문충이었다. 장소중이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다 이놈들 1대 1로 대결하자고 해 놓고는 네놈들 진훤표국에서는 벌써부터 매복하고 있었구나. 뻔뻔한 놈들 같으니라구.」 「뻔뻔하지 않은 놈은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쓰는 법이라더냐? 한문충의 대꾸였다. 「좋다.. 내 오늘 네놈의 철비파수 맛을 보아야겠다.」 장소중이 이렇게 말하고 경신의 재주인 팔보간섬을 돌다. 펄쩍펄쩍 세 번 뛰자 벌써 한문충의 측근에 와 있었다. 칼을 들어 찌르니 한문충이 뒤로 두 발짝 물러서는데 숲속에서 한 자루의 칼이 비스듬히 날아왔다. 장소중이 보검을 세웠다. 그 사람의 칼이 날아오는 속도도 빨랐지만 거두어들이는 솜씨 또한 빨랐다. 칼에 보검이 부딪치기 직전에 그 사람이 발사했던 칼을 벌써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장소중이 그 사람을 보니 아까 무례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었던 석가 성을 가진 바로 그자였다. 「너희 두 놈이 함께 대든다 해도 이 화수판관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겠다.」 화가 나서 추격해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펄쩍 뛰며 고개를 돌리니 8, 9명의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바로 홍화회 총타주 진가락이었다. 어젯밤의 치욕을 생각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숫자가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모두 평범한 고수가 아니라 슬그머니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악과 분노 가운데 사방을 두리번거려 달아날 만한 길 부터 찾았다. 진가락이 한문충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대가, 먼저 왕 총표두님부터 구하시오. 한문충이 구덩이 옆으로 달려가 왕유양을 안고 다시 이쪽으로 왔다. 장소중도 방해하지 않았다. 진가락이 왕유양의 혈도를 몇 번 주무르고 만져서 막힌 아혈을 풀어 주었다. 왕유양의 나이가 70이 가까운데다가 워낙 크게 부상을 입은 뒤라 아혈이 풀렸는데도 잠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소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왕유양 이 영감이 나보고 Z대 1로 대결을 하자고 했으니 제삼자는 관여하고 나설 일이 아니오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오. 진총타주, 우리는 삼일 뒤에 갈령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렇게 말하고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한 뒤에 하산하려고 몸을 돌렸다.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저와 여러 형제가 이곳에 와서 경치를 감상하다가 우연히 두 분의 대결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권장이나 병기, 암기 등을 쓰시는 솜씨가 놀랄 만하더군요. 그러나 장 대인, 장 대인이 이기시긴 했지만 좀 공명정대하지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자고로 전쟁에서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힘으로 싸우고 꾀로 싸우는 마당에 상대방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면 되지, 거기 뭐 되고 안 되고 할 일이 있나요? 장소중의 대꾸에 진가락이 빙그레 웃었다. 장 대인의 식견이 과연 고명하십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택일을 하느니보다 아무 날이나 닥치면 그날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장 대인과 제가 한번 대결을 하자고 이미 약속을 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났으니 다른 날로 미를 것이 아니라 오늘 솜씨를 구경시켜 주셔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장 대인이 오른팔을 다치셨는데 저로서도 남이 위태로운 틈을 타서 해를 입힐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장 대인의 부상이 일조일석에 치료될 것도 아니니 우리의 약속을 차라리 석 달 뒤로 미루는 것이 어떨까요? 장소중은 그가 자기의 비위를 건드려 보려고 이런 말을 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은 참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석 달 뒤의 오늘 우리 다시 갈령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진가락이 그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제가 분뢰수 문 사당가를 구출하려고 하는 일을 장 대인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그래 그게 어떻단 말이오? 「그분의 몸에 채운 수갑과 족쇄는 모두 정강으로 주조한 것이라 줄이나 끌 같은 것으로는 꼼짝도 못 해.9그러니 귀하의 보검을 빌려 쓸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무림의 일파라 의리를 제일 중시하는 처지니 장 대인께서도 흔쾌히 도와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진가락의 말에 장소중은 어이가 없었다. 상대방의 숫자가 많으니 오늘 그냥 빠져나가기는 어려을 것 같았다. 「내 보검을 빌릴 재주가 있거든 어디 한번 가져가 보시오.」 말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멀찍이 뒤로 빠져나가며 몸을 돌리고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홍화회의 계략 그가 막 힘껏 산 아래를 향해 뛰려고 하자 갑자기 정면에서 두 자루의 비조가 왼쪽 가슴과 오른쪽 다리를 노리며 치고 들어왔다. 상하를 공격하는 비조의 힘이 막강할 뿐만 아니라 속도 또한 빨랐다. 그는 보검을 뻗어 가슴을 보호하며 하나를 막아냄과 동시에 펄쩍 뛰어 왼발로 또 하나의 비조를 차 버리고 다시 산 아래를 향해 뛰었다. 상혁지가 비조를 돌리며 치자 장소중은 몸을 낮추며 오른쪽으로 피했다. 상백지가 비조를 버리고 가까이 접근하며 쉭 土리와 함께 흑사장의 낭박강초의 솜씨를 부려 그의 얼굴을 쪼갰다. 장소중과 상씨쌍협은 일찍이 오초령에서 싸운 적이 있어 그들 형제의 막강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대결을 시작한다면 수십 초 내에 몸을 빼기는 어려을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몸을 뒤로 날리며 남쪽을 향해 달렸다. 상씨 형제는 북쪽을 지키며 쫓아오지 않았다. 이때 태양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장소중은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진가락 등 일행을 돌아 피하며 남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산할 수 있는 길목에 다다랐는데 쉭쉭 하는 소리가 나며 2개의 비연은사( 제비처럼 날아가는 은으로 만든 북)가 날아롸ㅆ다. 그는 이 북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즉시 벌렁 드러누워 두 바퀴를 돌아 피했는데 쨍그렁 쨍그렁 하는 쇳소리와 함께 은으로 만든 북 속에 장치되었던 작은 북이 튀어나오며 발사되었다. 그는 웅벽검을 머리 위로 들어 비스듬히 쳐서 은으로 만든 북을 두 토막으로 잘라 버리고 뛰쳐나왔다. 그는 남쪽을 향하다가 봉황전시의 재주를 펴 보검으로 원을 그리며 다시 동쪽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에서 암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발걸음을 멈출 겨를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팍팍--보검을 휘두르자 3개의 수전과 2개의 보리자가 보검에 맞아 떨어졌다. 군웅들은 그가 서쪽으로 암기를 쳐 떨어뜨리면서 몸은 계속 동쪽을 향해 달아나는 재빠른 속도를 바라보며 자기들도 모르게 감탄했다. 장소중은 동쪽에도 분명 누군가가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다. 발걸음을 잽싸게 움직이면서도 사방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어느 쪽도 방심할 수 없는 급박한 시간이었다. 다시 몇 발자국 안가 예기했던 대로 옆길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손에 대도를 들고 막아섰다. 백발을 날리는 위풍이 늠름한 노영웅 철담 주중영이었다. 장소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맞설 생각을 버리고 서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계속해서 남쪽과 북쪽, 동쪽의 세 길을 뚫고 나가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들이 포위망을 좁히기만 한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서쪽의 길에 그 누가 나서서 막으면 살수를 써서라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왼손에 한 움큼의 부용금침을 쥐고 보검을 휘두르며 서쪽을 뚫기로 했다. 그런데 또 그쪽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팔이 하나뿐인 단검을 든 추흔탈명검 무진 도인이 아닌가? 장소중은 그와 상대를 해 본 적이 있어 홍화회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자기와 1대1로 대결한다 해도 질것이 뻔했다. 앞이 캄캄해졌지만, 급하면 꾀가 생기기 마련이다. 정면으로 돌격하며 백홍관일 은하횡공의 재주로 급공을 했다. 응벽검의 날카로움을 안 상대방이 막지 못하고 피하는 틈을 이용해 벌써 무진의 서쪽에 가 있었다. 무진이 막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보검을 피하고 오른손의 장검으로 무상두색과 살신당도의 무서운 초술로 반격을 했다. 양 초의 초술이 마치 일 초의 초술과 같았다. 장소중이 비록 하산길 입구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몸을 뺄 방법은 없었다. 보검을 휘둘러 무진의 양 초를 막아내고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두 움큼의 부용금침이 무진의 좌우를 공격한 것이다. 그는 한 팔의 도인이 무공이 워낙 탁월하여 금침으로도 그를 해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장검을 들어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달아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 사람만 제치고 나서 결사적으로 하산을 한다면 다른 사람이야 자기를 막지 못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무진도 그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온몸을 날려 덮치며 장검으로 그의 오른쪽 발을 노리고 찔렀다. 이 초술은 추혼 탈명검 가운데서 비교적 드물게 쓰는 초술로 원혼전족이라 하는데 전적으로 적의 하삼로(下三路)를 공격하는 데 쓴다. 장소중이 깜짝 놀라 보검을 아래로 직립시켜 유성타지(流星墮地)의 솜씨로 막았다. 무진이 다시 장검의 끝을 땅에 대고 버티니 쏴쏴하는 가벼운 소리가 뒤에서 한바탕 들리며 금침이 땅 위에 떨어졌다. 무진이 장소중의 머리 위로 펄쩍 뛰어 오름과 동시에 장검을 용의하약의 자세로 아래를 향해 휘둘렀다. 장소중이 오른쪽 어깨를 살짝 옆으로 피하며 채홍경천으로 보검을 위를 향해 어지럽게 휘둘렀다. 무진은 벌써 장검을 거두어들이며 땅으로 내려와 판관번부 , 조객임문의 양 초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그가 다시 서쪽을 차지하고 장소중을 안쪽으로 몰았다. 이때 장소중은 상대방의 장검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탈출할 방법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다만 공격 태세를 보아 가며 그때그때 상대를 하며 기회를 보아 장검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보검으로 깎아 버리겠다는 생각만 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두 사람은 또 3, 40초를 대결했다. 무진은 그가 부상을 당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수십 초를 당해 내는 것을 보며 마음이 초조해졌다. 검광을 번쩍이며 계속 살수를 썼다. 장소중도 결사적인 방어를 하면서 점점 어려움을 느꼈다. 다시 수 초를 대결하다가 무진이 대갈일성 (칼을 버려라!)고 소리를 치며 염왕척필의 재주를 폈다. 긴 웃음소리 가운데 장소중의 오른팔이 칼에 맞았다. 쩔그렁 소리와 함께 응벽검이 땅에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무진이 발을 들어 장소중의 왼쪽 사타구니를 걷어 차는 바람에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무진이 달려가 덮쳐 누르려고 하는데 장소중이 벌떡 일어나며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무진이 장검을 들어 손을 치려고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칼이 만약 그의 한 손을 잘라 버린다면 그는 다시 총타주님과 상대하기는 어려을 것이다. 이만한 상대를 만나 대결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혹시 총타주님의 흥취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까?) 무예가 높고 강한 사람들이 알맞은 상대를 한 번 만난다는 것은 우연히 만나는 것이지,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무진은 무예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가락도 역시 마찬 가지일 것이다. 한 손이 잘려 나간 사람과 대결하면서 떳떳할 수는 없겠지. 이런 생각 때문에 장검을 들어올리기는 했지만 차마 내려 치지 못하고 있었다. 장소중은 다급했다. 그가 잠시 멈칫 하는 틈을 타 좌장으로 오른팔꿈치를 받치고 오른손의 주먹을 져으며 그의 왼쪽 허리를 쳤다. 무진은 팔이 하나뿐이라 왼쪽을 방어하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권법에는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급히 옆으로 살짝 피했다. 주먹의 위세가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피하지 못하고 허리를 맞고야 말았다. 그는 너무나 아파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몇 발짝 밀려났다. 장소중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다. 무진이 매우 화가 나서 그 뒤를 쫓아갔으나 그는 벌써 봉우리를 내려가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무진은 검법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평소 암기를 쓰지 않았다. 산 아래로 달아나고 있는 장소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이자를 놓치면 홍화회의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장소중이 죽거나 살거나 그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장검을 들어 오귀투차의 절초를 쓰기로 했다. 장검을 막 던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산 옆에서 누군가가 질풍처럼 굴러 내려와 장소중의 두 발을 꽉 얼싸안았다. 두 사람이 한덩어리가 되어 땅바닥에 넘어졌다. 무진이 재빠른 동작으로 장검을 거두고 보니 장소중을 얼싸안고 넘어진 사람은 십제인 장진이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양성협과 장사근이 또 달려가 세 사람이 함께 그를 타고 앉아 누르고 있다. 낙빙이 오랏줄을 꺼내 그의 두 손을 앞가슴에 대고 꽁꽁 묶었다. 그가 철담장에서 무리를 끌고 와 남편을 잡아갔던 원한에 치를 떨며 낙빙은 주먹을 들어 코가 깨어지도록 그를 후려쳤다. 「넷째형수님, 잠깐만. 진가락의 말 때문에 낙빙의 두번째 주먹이 날아가다 말았다. 진가락이 가까이 오자 장소중이 욕을 퍼붓는다. 「너희가 사람이 많다고 해서 나를 이토록 능멸하는 게냐? 이 장 나리, 오늘 네놈들 도둑의 무리에게 잡혔으니 죽이겠으면 당장이라도 죽여라. 눈이라도 깜박하면 내 이미 호한이 아니다.」 왕유양도 가까이 와서 장소중을 항해 욕을 했다. 「너는 나와 특별히 원수진 일이 없는 처지인데, 그래 비열한 수단이 탄로날까봐 나를 생매장하려고 들었단 말이냐? 흥! 화수판관, 네놈은 꽤나 악독하구나.」 「이게 바로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니 저자를 여기 파묻읍시다.」 석쌍영이 냉랭하게 쏘아붙이자 군웅들은 좋다고 갈채를 보냈다. 장소중은 비록 오만한 편이었지만 생매장의 비참한 광경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진가락이 나섰다. 「승복을 하시겠소? 진 것도 잘못했다는 것도 인정하고 다시는 홍화회와 맞서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육 사가의 체면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오.」 그러나 장소중은 여전히 뻣뻣했다. 「죽이겠으면 당장 죽일 것이지 웬 말이 그렇게 많은가? 너희가 속임수를 썼는데 어느 놈이 승복한단 말이냐? 어림없는 소리다.」 「좋다! 그래도 남자다운 고집은 있군. 그러면 내 한칼에 너를 죽여 생매장의 고통을 덜어 주마.」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고 단도를 뽑아 그의 면전에 댔다. 「정말 죽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장소중의 얼굴에 쓰디쓴 웃음이 스쳤다. 「통쾌하게 죽여다오.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진가락이 손을 휘젓자 단검이 그의 앞가슴에 가 닿았다. 그리고 껄껄 웃으며 팔을 뒤집자 장소중의 두 손을 묶었던 오랏줄이 끊어졌다. 이렇게 되자 장소중만 뜻밖의 사태에 놀란 것이 아니라 군웅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가락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 우리가 당신을 잡는 데 계략을 쓴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당신은 죽어 마땅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소. 허나 오늘 우리가 당신을 죽인다 하더라도 당신은 귀신이 되어서도 승복하지 않을 것이오. 당신 마음대로 가도 좋소. 다만 당신이 과거의 잘못을 다 뉘우치기만 한다면 이후 또 만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여전히 못된 짓만 하면서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면 홍화회도 당신 장소중 한 사람쯤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오. 다음에 또 우리 손에 잡히면 죽어도 원망하지 마시오.」 「총타주님, 그를 놓아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장진-낙빙 -양성협 -상씨 형제 등이 일제히 이렇게 말했다. 진가락이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의 사형인 육 노선배님이 우리의 은인이신데 우리가 아직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홍화회는 은혜와 원수를 분명히 가리는데 오늘 그분의 사제를 석방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분에 대한 보답의 일환이 되는 것입니다.」 군웅들은 총타주의 이러한 말에 더 반대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다만 증오가 가득 찬 눈으로 장소중을 노려볼 뿐이었다. 장소중이 진가락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했다. 「진 총타주, 우리 다시 만납시다.」 말을 마치자 몸을 돌리고 가려고 했다. 「여보 장씨, 잠깐만. 서천굉이 만류하고 나서자 장소중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냥 이렇게 가면 되는 게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장소중은 즉시 눈치를 채고 군웅들을 향해 개별적으로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했다. 「진 총타주의 대인대의(大仁大義)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 장소중 좋고 나쁜 것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오. 본래 석 달 뒤에 대결을 하기로 약속했는데 저는 여러분의 적수가 아니오. 돌아가서 다시 무예를 연마해야겠소. 오늘의 이 대결에서는 내가 진 것을 인정 하겠소.」 장소중의 이 말은 언중유골이었다. 너희가 나를 이긴 것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뿐이니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쯧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군웅들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더욱 약이 올랐다. 주기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홍화회 총타주님이 당신을 석방하는 것은 그분이 워낙 대인대의 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한마디 물어 보아야겠어요. 당신이 철담장에 와서 재주나 힘으로 사람을 잡아갔다면 나도 더 할 말이 없어요.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아는 것도 없고 철도 들지 않은 내 동생을 유인해 그런 비열한 행동을 취했나요? 나는 홍화회 사람도 아니요, 당신의 사형으로부터 무슨 은혜를 입은 일도 없어요. 오늘 동생의 원수를 갚아야겠어요.」 하고 말을 마치자 단도를 들고 결사적으로 대들었다. 장소중은 난처했다. 젊은 처녀 하나뿐이라면야 무서을 것이 없지만 눈앞에 여러 고수가 있으니 만약 처녀가 패한다면 그들이 수수 방관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다시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 뒤를 수습할 길이 막연했다. 즉시 한 발짝 뛰어 주기의 칼을 두 번이나 피했다. 주기가 세번째 쓴 솜씨는 달마면벽(達磨面壁)이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쪼개며 내려치는 칼의 힘은 매서웠다. 장소중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오른손을 춘풍불유로 주기의 면전을 향해 헛손질로 들어올렸다. 그녀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피하면 즉시 왼손으로 그녀의 칼을 뺏을 참이다. 칼을 뺏은 뒤에 좋은 말로 몇마디 충고나 하고 칼을 되돌려 주면 다시는 자기를 죽이려고 대들지는 않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기가 칼을 거두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팔을 앞으로 내뻗어 찌르려고 했다. 장소중은 식지와 중지를 아래서부터 위로 올리며 주기의 팔꿈치에 있는 곡지혈(曲池穴)을 찔렀다. 주기의 팔이 부르르 떨리며 한 자루의 칼이 하늘로 떠올랐다. 서천굉이 바람처럼 대들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단괴 로 철쇄횡강의 재주를 부려 장소중의 면전에서 흔들며 다른 손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주기의 단도를 잡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주중영은 대도를 휘두르며 장소중의 퇴로를 막았고 안건강도 칼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네 사람이 이미 협공할 태세를 취한 것이다. 막 혼전이 벌어질 판인데 갑자기 산허리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를 질렀다. 「손들을 멈추시오, 손들을 멈추시오.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쪽의 산길에서 두 사람이 질풍처럼 상봉을 향해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회색 옷을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검은 옷을 입었는데 모두들 경공이 대단해 달리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벌써 산 위로 올라섰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금리침 육비청임을 모두들 알아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나이든 도사였다. 등에 칼을 지고 있었고 얼굴이며 눈이 자상하게 생겼는데 모르는 얼굴이었다. 육비청이 소개를 하려고 하는데 장소중이 갑자기 그 도사 앞으로 달려가 읍을 했다. 「대사가여러 해 뵙지 못했는데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군웅들은 그제야 이 도사가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掌門入) 마진 (馬眞)이요, 또한 금적수재 여어동의 사부가 됨을 알고 분분히 나아가 인사를 했다. 육비청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마 사형과 제가 막 고산에 도착하여 마선균 나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외인이 아니라며 사자봉의 대결 약속을 말씀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사방을 휘둘러 보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마진과 왕유양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깊은 교분은 없었지만 서로 상대방의 무공을 존경하는 처지였다. 홍화회 군웅들은 여어동의 말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가 이렇게 만나니 반가워 오래전부터 존경해 왔노라는 인사를 나누기에 바빠 장소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장소중은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어 주춤하게 서 있었다. 마진은 진작부터 이 사제의 비열한 행적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본파의 문규(內規)를 들어 가며 한바탕 징벌을 내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옷은 여기저기 핏자국이 얼룩지고 얼굴은 불안한 표정이며 코와 눈에 퍼런 멍이 들어 부어올라 낭패한 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딱한 모양을 보고 차마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장 사제,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저는 혼자인데 저들이 이렇게 많으니 자연 이 모양이 되고 말았지요. 장소중이 발끈 화를 내며 이렇게 대답했다. 군웅들이 이 말을 듣고 노기를 띈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주기가 참다 못해 나섰다. 「그래도 당신이 잘했다는 것인가요? 마 사백 , 육 사백, 어디 한번 누가 옳고 그른지 가려 주세요.」 손에 단도를 들고 다시 대들려고 덤볐다. 주중영이 딸을 꽉 붙들고 말했다. 「지금 두 분의 사백이 이렇게 오시지 않았느냐? 무당파는 평소 문규가 엄하니 두 분 사백의 분부대로 따라야 할 게다.」 이 말은 분명 마진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마진은 육비청과 장소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중영과 진가락의 면전에 무릎을 꿇어 주저앉고 말았다. 군웅들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 노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여럿이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으나 마진의 마음은 격렬하게 요동하고 있었다. 여러 사형, 어진 아우님들. 이 못난 장 사제 하는 짓마다 하늘에 용납될 수 없는 것뿐입니다 내 무당파의 장문인이 되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즉시 문호를 숙청하지 못했으니 무슨 체면으로 천하 무림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 나.....- 흐느끼느라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동안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육비청을 향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육 사제, 자네가 내 뜻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시게.」 「제 사형께서는 우리 이 장 대인의 훌륭한 덕행을 아신 뒤 화가 나서 식사도 못 하시고 잠도 편안히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 그러나 돌아가신 사부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감히 여러분에게 간청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군응들은 진가락과 주중영을 바라보며 그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기마늘 기다리고 있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내 스스로 인심을 쓰다가 주 노영웅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저분이 뭐라고 하시든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주중영만 바라보았다. 주중영이 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자가 철담장을 불사르고 또 제 아들을 해친 원수로 따진다면 내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쉽사리 손을 뗄 수는 없습니다.」 잠시 중단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마 사형께서 기왕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내 두 분의 친구를 새로 사귄다는 뜻으로 지난 일은 그만 잊어버리기로 하겠습니다. 주기가 어림도 없다는 듯 (아버지!)하고 외치자 주중영이 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가야, 그만두자꾸나. 진가락이 나섰다. 「마,육 두 분 선배님의 체면을 보아 우리 홍화회에서도 지난 잘뭇은 다시 들추지 않겠습니다.」 마진과 육비청이 뭇 사람들을 향해 돌아가며 읍을 했다. 「정말 감격할 따름입니다.」 무진이 차디찬 목소리로 한마디하고 나섰다. 「마 도형, 이번 일은 그냥 이렇게 끝내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만약 또다시 함부로 나쁜 짓을 한다면 그때 마 도형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마진이 결연히 대답을 했다. 「앞으로는 빈도가 엄히 단속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 사제가 다시 못된 짓을 한다면 우선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군웅들은 마진이 마치 못을 자르고 쇠를 끊듯이 굳고 단호하게 나오자 잠자코 있었다. 다시 마진이 말을 이었다. 「제가 저자를 무당산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아 걸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겠습니다. 육 사제는 여기 머물며 이분들을 도와 문 사가를 구출하십시오. 빈도는 칼을 거둔 지 오랜지라 도와 드릴 수 없으니 이 점 여러분께서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 사가를 구출한 뒤 육 사제는 즉시 내게 편지를 보내시오. 그래야 나도 시름을 놓을 것입니다. 빈도의 제자인 여어동은 어찌하여 이 자리에 없습니까? 마진의 물음에 진가락이 나서서 답변을 한다. 「십사제와 저희가 황하에서 그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뒤에 부상을 입었는데 어느 여자가 그를 구출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아직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사가를 구출하면 즉시 찾아볼 것이니 도장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빈도의 제자는 총명한 편이지만 너무 어려 철이 없을뿐더러 신중하지 못하니 진 당가께서 많이 보살펴 주시며 꾸짖어 주십시오.」 「우리 형제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돕고 허물이 있으면 서로 충고하며 골육이나 진배없이 지냅니다. 십사제는 똑똑하고 또 재간도 많아 모두들 십분 신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일을 빈도는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진 당가님, 주 노영응, 무진 도형, 그리고 여러 어진 아우님들 장래 호북 지방을 지나시게 되거든 꼭 무당산에 오셔서 잠시라도 머물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모두들 그러마고 대답하자 마진이 장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세 . 장소중은 낙빙이 자신의 응벽검을 벌써부터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아까운 신병(神兵)의 이기(利器)를 랫기다니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칼을 찾으려고 하다가는 또 무슨 욕을 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원래 그는 황하 나루터에서 군웅들과 헤어진 뒤 이원지의 행방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가의 소저이고, 또 사람이 영리하여 무슨 일은 없겠지 하고 믿었다. 모든 일의 관건이 장소중 한 사람에게 있는데 이자는 본파 문호의 수치라 즉시 호북으로 남하하여 대사형 마진을 찾아가 출산(出山)하자고 청했던 것이었다. 북경으로 쫓아가 알아보니 장소중은 벌써 항주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총총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렇게 몇 번 돌아 다니느라 홍화회 군웅들은 뒤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산을 내려왔다. 진가락이 왕유양과 한문충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편리한 대로 하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진 당가께서 다시 살게 해 주신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왕유양의 말에 진가락이 껄껄 웃고 말을 이었다. 「왕 노영웅께 두 가지 일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관가의 심부름꾼으로 위장하여 옥으로 만든 병을 빼앗는 일과 그와 장소중이 대결하도록 이간책을 썼다고 사실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왕유양은 본래도 활달하고 호쾌한 사람이었으나 이번에 매우 위험한 지경에서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게 되자 세상사를 보는 눈이 더욱 담대해졌다. 그래서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제가 진 총타주와 장소중이 만나 얘기하는 것을 듣고야 비로소 가짜 통두(統頭)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하, 정말 영웅은 소년 가운데서 나온다더니 이 영감 나이가 들 대로 들어서야 또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군요. 싸워야만 친해진다는 말도 있지요. 비록 장소중과 내가 대결한 것이 홍화회의 이간책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내 생명을 구해 준 것은 역시 홍화회였습니다.」 진가락도 따라 웃었다. 「우리들의 중요한 일이 끝나는 대로 한번 통쾌하게 모시겠숱니다. 이렇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호숫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마씨 집에 도착했다. 육비청이 왕유양의 몸에 박힌 금침을 흡철석(吸鐵 石)으로 뽑아 내고 금창약을 발라 주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마선균이 들어와 이렇게 보고했다. 「한나절 이상 일을 했습니다. 몇 시간만 지나면 완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습니다! 마 대가,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십삼가께서 공사를 감독하시지요. 장사근이 대답하고 나갔다. 진가락이 몸을 돌려 왕유양과 한문충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귀국의 표두와 심부름꾼은 우리가 잘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서호에 놀이나 나가지 않으시렵니까? 소제가 하루나 이틀 뒤에 여러분을 모시고 접대하며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왕유양과 한문충은 원 별 말씀을 다 한다고 겸양을 했다. 왕유양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홍화회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양을 보고 그들이 지금 대단히 바쁘다는 것을 눈치챘다. 틀림없이 문태래를 구출하기 위한 준비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시간에 자기가 외출했다가 그들이 계획대로 성공을 하면 다행이지만 만일 기밀이라도 누설되면 자기가 관가에 밀고한 것이라고 의심을 할 것만 같았다. 「저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다가 금침의 부상이 괴로워 이곳에서 하루쯤 더 폐를 끼칠까 합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소제가 직접 모시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진가락의 대답이었다. 왕유양과 한문충은 마대정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가 표두 왕호천 등과 만났다. 왕유양은 표행 일행에게 한 발짝도 마씨 댁 문 밖을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두렵고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홍화회의 일이 실패하는 날이면 관가에서 잡으러 몰려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이들과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발각된다면 그 죄는 서호의 물이 마르도록 길어다 씻어도 다 씻지 못할 것이었다. 화염 속의 구출 작전 군웅들은 배불리 밥을 먹은 뒤에 각자 방으로 돌아가 편히 휴식을 취했다. 유시(酉時)가 되자 작은 두목이 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땅굴을 이미 제독부까지 팠으나 앞에 큰 돌이 막혀 아래쪽으로 돌을 피해 다시 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가락과 서천굉이 인원을 배치했다. 누구는 좌로 공격하고 누구는 우로 공격하며 또 누구는 호응을 하고 누구는 후미를 차단하라는 등 타당한 조치를 끝냈다. 유시 삼각이 되자 작은 두목이 다시 나타나 보고했다. 철판까지 파들어갔으나 안에서 놀랄까 봐 잠시 일을 멈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만 더 기다리고 있다가 밤이 깊어지면 행동에 들어갑시다. 진가락의 말이었다. 낙빙은 좌불안석이다. 장진은 대청을 왔다갔다하며 혼자 욕을 하고 있었다. 상씨 형제는 골패를 들고 양성협 , 위춘화와 더불어 놀음을 하고 있는데 양-위 두 사람이 흥이 나지 않자 상씨 형제만 계속 재미를 보고 있었다. 주기는 응벽검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몇 자루의 순강(純鋼)으로 만든 헌 칼을 찾아다가 거기에 대 보니 손이 가는 대로 무 잘려 나가듯 한다. 과연 보기 드문 보검이었다. 서천굉은 옆에서 미소를 머금고 주시하고 있었다. 마선균은 계속 주머니 속에서 큼직한 시계를 더듬어 보고 또 보았다. 조반산과 육비청은 모퉁이에 앉아 헤어져 있었던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무진과 주중영은 장기를 두고 있었으나 무진이 화가 가라앉지 않았고 또 수가 낮아 한 판 또 한 판 지기만 했다. 진가락은 육방옹집을 들고 혼자 읖고 있었다. 석쌍영은 두 눈을 멀뚱멀뚱 천장에 모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한 시간을 보내자 마선균이 침묵을 깼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군웅들이 벌떡 일어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끼리 모여 대문 밖으로 나갔다. 각자 변장을 하고 병기를 숨긴 채 속속 제독부 밖에 있는 한 민가로 모여들었다. 이 민가의 주인은 벌써 이사를 가 버린 빈 집이었다. 장사근은 군웅들이 도착하자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일대는 청병의 순라가 대단히 삼엄한 곳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쇠로 만든 노를 손에 쥐고 땅굴 입구를 지키는가 하면 군웅들은 줄줄이 안으로 들어섰다. 땅굴을 깊이 판데다가 항주의 지세가 낮고 축축하여 바닥의 물이 복사뼈까지 올라왔다. 큰 돌이 있는 곳까지 가자 진흙물이 가슴까지 차 올라왔다. 수십 장을 더 나가자 땅굴 끝에 도착했다. 7, 8명의 작은 두목들이 손에 횃불과 괭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총타주 등이 나타나자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로 앞에 철판이 있어요. 「시작합시다. 진가락의 말이 떨어지자 작은 두목들은 총타주의 앞이라 더욱 신이 나서 괭이질을 했다. 잠시 후에 철판 옆에 있는 돌을 치을 수가 있었다. 다시 또 파자 큰 철판까지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위춘화가 쌍구를 들고 앞장을 서고 군응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작은 두목이 횃불을 들고 옆에서 길을 비추어 주었다. 군웅들이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실을 향해 달리자 끝에 철문이 내려져 있다. 위춘화가 팔괘도의 단추를 눌렀지만 철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서천굉은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팔제, 구제, 빨리 지하실의 출구를 지키시오. 놈들의 다른 술수를 방비해야 되오.」 양성협과 위춘화가 대답하고 나갔다. 작은 두목 몇 명이 철문 옆의 돌을 치우자 모두들 힘을 합쳐 그 철문을 번쩍 들어올렸다. 철문은 쇠고리와 큰 돌에 연결되어 있었다. 낙빙이 응벽검을 들고 몇 번 치자 쇠고리가 잘렸다. 낙빙이 제일 먼저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쿠. 실내는 텅빈 채 문태래의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낙빙은 몇 차례의 실망에 더 견디지 못하고 털석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주기가 위로하려고 나서자 주중영이 낮은 소리로 만류한다. 「우시도록 내버려둬.」 진가락은 실내에 다른 출구가 없는 것을 보고 응벽검을 받아 장소중이 지난번 달아났던 작은 문을 찔렀다. 그 문은 강철로 부어 만든것이었다. 몇 번 치자틈만 약간벌어졌을뿐 문 뒤에는큰 바위가 놓여 있다. 서천굉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가수 그 녀석이 우리가 혹시 감옥을 탈취하지 않을까 해서 사가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감금한 것 같군요.」 「제독부를 공격합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가를 찾아 내도록 합시다.」 진가락의 말이었다. 뭇 청병들이 지하실의 입구로 몰려들었다. 양성협이 철편을 휘두르며 몰려드는 청병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위춘화가 현장에 없는 것으로 보아 벌써 뚫고 나가 적과 교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무진도 대갈일성, 지하실을 뚫고 나가며 장검을 휘두르자 2명의 청병이 죽어 넘어진다. 군웅들이 그 뒤를 따라나가 보니 예닐곱 명의 청군 군관이 위춘화를 포위한 채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육비청은 생각해 보았다. (나와 이가수는 주객의 정리-가 있으니 얼굴을 내밀면 거북 해진다.) 두루마기의 아래 깃을 찢어 얼굴을 가리고 두 눈만 내놓았다. 군웅들이 돌격하자 청병들이 분분히 패퇴했다. 위춘화 등이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쫓는다. 서천굉이 둘러싼 담 위로 뛰어올라 내려다보니 제독부 안의 도처에 관병들이 지키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방망이를 두드리는 어지러운 소리가 한바탕 들렸다. 청군의 장군이 방어할 군사를 배치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서천굉은 각처에 배치 된 군사들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남쪽에 외따로 떨어진 2층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주위에 5, 6백 명의 관병비 겹겹으로 에워 싼 채 지키고 있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건물에 방비를 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면 틀림없이 문태래가 그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그는 담 위에서 뛰어내려 단도와 쇠지팡이를 흔들며 외쳤다. 「형님 여러분, 저를 따라오시오. 앞장을 선 서천굉은 남쪽을 향해 돌격했다. 과연 예기했던 그대로 그 건물에 접근할수록 접전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혼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마선균과 조반산이 비교적 무공이 강한 수십 명의 작은 두목들을 인솔하여 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청의 군관이 비록 수적으로 많았지만 홍화회 군웅들의 막강한 무공을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순식간에 군웅들이 벌써 그 건물에 접근했다. 장진이 짧은 자루의 낭아봉으로 오룡소지의 재주를 부리며 몸을 낮추고 제일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있던 한 청군이 큰 창을 쓰면서 옆으로 치고 앞으로 찍어 장진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위춘화,낙빙 ,양성협 ,석쌍영 등이 제각기 관병 가운데 적수를 상대로 대결하고 있었다. 횃불 아래서 그들의 싸움은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을 지키는 관병들의 무예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무진이 조반산을 향해 말을 꺼냈다. 「삼제, 우리 올라가서 보세.」 조반산이 좋다고 하자 무진은 연달아서 두 번 뛰더니 벌써 입구에 가서 서 있었다. 그때 불빛 아래 무진을 향해 칼 한 자루가 쪼개져 내려왔다. 무진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마면도심(局面挑 心-의 술수를 폈다. 칼을 쓰던 사람의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강도(鋼刀)가 땅에 떨어졌다. 조반산도 눈 깜짝할 사이에 2명의 청병을 쓰러뜨렸고 두 사람은 내당으로 뚫고 들어갔다. 주중영 , 낙빙 등도 모두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육비청은 장진의 상대가 무공이 막강함을 알았다. 장진이 짧은 병기로 상대의 긴 병기를 공격하자니 자연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즉시 그자의 왼쪽으로 쫓아 들어가 장검으로 천외래운의 솜씨를 부려 갑자기 그의 왼쪽 목을 찔렀다. 그자는 창자루를 돌려 있는 힘을 다해 육비청의 장검을 후려쳤다. 자기의 병기가 길고 힘도 막강해 틀림없이 육비청이 칼을 놓치고 말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육비청이 징검을 거두어들이며 왼쪽 팔에 힘을 주어 위로 뻗자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큰 창이 허공에 뜨고 창을 쓰던 그 자의 호구가 찢어지며 혼비백산 옆으로 피해 나가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장진은 몸을 돌려 위춘화를 상대로 싸우고 있던 2명 가운데 하나를 맞아 싸웠다. 위춘화는 이제 하나만 상대해도 무방하게 되자 홀가분한 기분으로 쌍구로 옥대위요의 재주를 부려 적의 좌우에서 몰아 들어갔다. 그자는 한 쌍의 쌍도(雙刀)를 쓰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그 쌍도를 거꾸로 들어 세워 좌우를 막았다. 위춘화는 살수를 쓰기로 하고 쌍구를 가슴 안에 가지런히 모은 채 온몸으로 덮쳐들었다. 이 일 초는 빠르기도 하거니와 매섭기도 했다. 쌍구로 자신의 손을 보호하며 칼날을 적의 앞가슴에 꽂았다. 그자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아래층에서 고투를 하고 있었는데 적들은 싸울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이때 갑자기 무진이 홍화회의 은어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제가 여기 있소 우리가 구출해 냈소. 군웅들이 이 소리를 듣고 환호성을 질렀다. 주기는 홍화회의 은어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 서천굉을 멍하니 바라다 보았다. 「도장님께서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사가가 위에 계신데 구출했다고 했소.」 서천굉의 대답을 들은 주기도 반겼다. 「잘됐군요. 우리 그분 뵈러 올라가요.」 「올라가 보시오. 나는 여기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주기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지키고 있던 관병들은 무진 등에 의해 거의 소탕되었다. 그녀가 급히 위층으로 뛰어오르는데 뭇 사람들이 쇠로 만든 커다란 새장 같은 우리 주위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진가락이 때마침 응벽검으로 우리의 굵은 철선을 끊고 있었다. 주기가 가까이 가 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원래 쇠로 만든 우리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우리가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쇠로 만든 것이었다. 문태래가 그 안에 갇혀 있는데 손발에 모두 족쇄와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맹수를 감금해 놓은 것과 같았다. 이때 진가락이 벌써 밖에 있는 우리의 난간의 철선을 2개 끊어 놓았다. 장진이 힘껏 당겨 꺾어 구부려 놓고 다시 쇠난간을 당겼다. 낙빙은 몸집이 날씬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낙빙은 보검을 받아 들고 다시 작은 쇠우리 위의 쇠고리 줄을 끊었다. 군웅들은 모두 기쁜 얼굴이었다. 오늘만은 청병의 천군만마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이 건물을 사수하며 문태래를 구출해 놓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상씨 형제와 서천굉이 홍화회 두목들을 통솔하며 아래층에서 방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각 소리가 들리며 청군 관병들이 10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물러갈 때 질서정연하게 각자 나누어 서서 포진을 만들었다. 상백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오랑캐 놈들이 화살을 쏘려 하니 모두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오. 군웅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고 상씨 형제는 뒤에 처져 그들을 호위했다. 그런데 청병들은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홍화회 진 당가는 내 말을 들으시오.」 진가락이 2층에서 이 말을 듣고 창가로 나왔다. 이가수가 큰 돌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 당가와 할 말이 있소.」 이가수의 외침이었다. 「나 여기 있소 이 군문, 무슨 일이오?진가락이 물었다. 「여러분, 모두 건물에서 나와 물러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떼죽음을 당하오.」 이가수의 말에 진가락은 웃으며 대답했다. 「죽음이 무서웠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오늘 미안하지만 우리가 문 사가를 모시고 함께 나가겠소.」 「고집만 부리고 있을 것이 아니오. 불을 붙여라. 이가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증도남은 병정을 통솔하여 대오 가운데서 마른 풀과 장작을 대량 끌어냈다. 장작과 마른 풀에 기름을 뿌려 불을 붙이자마자 건물 사방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군웅들은 불길 속에 갇힌 것이다. 진가락은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군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들 함께 손을 써서 쇠우리의 난간을 끊으시오.」 다시 이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이 군문, 이 화공진은 보기에 별로 고명할 것도 없는 것 같소.」 이때 이가수의 등뒤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와 삿대질을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장 죽을 판인데 아직도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애걸할 생각을 못 하는가? 건물 아래층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불빛 아래 자세히 보니 말하는 사람은 어전 시위 범중은 이었다. 그 옆에 저원 등 몇 명의 시위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지원병을 파견한 것 같았다. 진가락이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서천굉이 은어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단났구나. 여기는 온통 화약뿐이다.」 진가락은 건물에 들어올 때 아래층이 창고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나무통마다 물건이 가득했는데 그게 바로 화약이었단 말인가? 힐끗 보니 위층의 사방에도 나무통이 많이 있었다. 달려들어 손바닥으로 세게 치니 나무통이 깨지며 검은색의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초석(硝石)과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화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우리 홍화회 식구들이 모두 오늘 여기서 분골쇄신해야 한단 말인가?) 몸을 돌리니 작은 쇠우리의 자물쇠 고리가 풀리고 낙빙이 문태래를 부축하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진가락은 외쳤다. 「넷째형수님과 삼가는 사가를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따라 이곳을 뚫고 나가십시다.」 말을 마치자 앞장을 서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장진이 몸을 낮추어 문태래를 업고 낙빙 ,조반산,육비청 ,주중영 등이 앞뒤에서 보호하며 그 뒤를 따랐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문 밖에서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날아왔다. 위춘화와 상씨 형제가 몇 차례나 뚫고 나가려 하다가는 기세에 눌려 되돌아오곤 했다. 이가수가 다시 소리를 지른다. 「당신들 발 밑에 폭약이 묻어 있소. 그리고 도화선은 내가 이렇게 들고 있소.」 진가락은 방 안에서 화약을 직접 보았기에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문태래가 국사범이라 꺼리는 바 있어 함부로 도화선에 불을 당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벌써 일망타진했을 것이었다. 진가락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가를 내려놓고 우리 빨리 나갑시다.」 장검을 휘두르며 위춘화 상씨 형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뚫고 나갔다. 장진은 고개를 숙이고 달리느라 진가락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조반산이 말을 꺼냈다. 「빨리 사제를 내려놓게. 정세가 위급하기 짝이 없어. 우리 빨리 가자구! 그러다 잘못하면 사제만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네.」 장진이 문태래를 입구에 내려놓았는데도 낙빙은 머뭇거리고 있 었다. 조반산이 왼손을 뺀어 그녀의 팔을 잡고 검광을 번쩍이며 뚫고 나갔다. 이가수는 불빛 가운데 문태래를 이미 내려놓은 것을 확인하고 손을 흔들어 화살을 쏘지 못하도록 했다. 혹시 문태래가 화살에 맞을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군웅들은 건물에서 떨어져 담모퉁이에 모였다. 진가락이 입을 열었다. 「상씨 형님, 팔가, 구가, 십가는 선두에서 저 오랑캐놈들을 쫓아 흩어지게 하시오. 칠가는 도화선을 끊을 방법을 강구하시오. 그리고 도장님, 삼가 등은 기다리고 계시다가 기회가 오면 우리와 함께 뛰어들어가 사가를 구출해 내십시다.」 상씨 형제와 서천굉이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가수는 사람을 시켜 문태래를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리려다가 상씨 형제 등이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군사를 풀어 방어하도록 했다. 어전 시위인 범중은,주조음,저원,서대림 등이 나와 막았다. 육비청은 먼저 퇴로를 확인해 놓고 머리를 숙이자마자 화살처럼 이가수를 향해 돌진했다. 이가수의 친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칼과 창을 들어 막았다. 육비청은 그들과 상대하지 않고 왼쪽 오른쪽으로 살짝살짝 피해 가며 나는 새나 미끄러지는 물고기처럼 찰나 이에 7, 8명의 친병을 젖히고 이가수의 면전에 이르렀다. 이원지는 남장을 한 채 아버지 옆에 서 있다가 갑자기 복면을 한 괴한이 습격을 하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뭘하는 놈이냐? 칼을 들어 춘운사전의 재주로 가슴을 향해 찔렀다. 육비청은 말대답을 할 것도 없이 몸을 낮추고 칼 밑을 빠져나갔다. 이가수는 자기를 향해 습격해 오자 발을 들어 괴성척두의 술수로 그의 얼굴을 걷어 찼다. 육비청은 왼쪽 다리를 꺾으며 이가수의 등뒤로 돌아가 손바닥을 뻗어 등을 떠받치며 장력을 토했다. 이가수의 뚱뚱한 몸집이 허공에 떴다. 이원지가 놀라 칼을 들O 찔렀다. 육비청이 다시 한 번 살짝 피하자 칼은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이가수가 땅 위에 쓰러지자 이쪽의 증도남은 구하려 쫓아오고 저쪽의 양성협은 체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증도남이 철창을 들어 독룡출동(毒龍出洞)의 재주로 양성협을 향해 찔렀다. 그를 우선 쫓아 보내고 나서 상사를 구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양성협이 몸을 옆으로 돌려 창을 피하고 계속 달렸다. 그는 몸집이 뚱뚱한 편인데다가 너무 급하게 달리다 그만 중간에 있는 철탑과 증도남을 한꺼번에 들이받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렸다. 이때 이가수는 벌써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육비청이 바람처럼 잽싸게 달려들었다. 이원지는 아버지의 위기를 보고 앞을 향해 달리며 장검으로 백홍관일의 재주를 부려 복면을 한 괴한의 등을 찔렀다. 육비청은 등뒤에서 장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가 이가수의 왼팔을 잡아끈 채 불덩이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관병들이 놀라 큰소리를 질렀지만 워낙 불길이 세어 아무도 그 속을 뚫고 들어가 구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위춘화가 쌍구를 휘둘러 이원지를 차단했다. 홍화회 군웅들은 육비청이 이가수를 끌고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장진이 맨 먼저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장사근이 그 뒤를 쫓아 들어갔다. 이를 본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인원이 충분하니 더 들어갈 것 없습니다.」 뭇 군웅들이 불길 가까이 접근했다. 청군 관병들은 주장이 위험에 빠지자 홍화회 군웅들과 싸을 것도 잊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불길 속의 다섯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증도남이 기어 일어나 한 명의 통군총병과 도화선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주장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한 사람이 횃불을 잡아채 가지고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증도남이 깜짝 놀라 그 사람을 보니 어전 시위 범중은이었다. 이 사람은 일전 서호에서 물에 빠지는 바람에 황제의 면전에서 추태를 연출한 적이 있었기에 창피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이제 문태래가 구출될 판이니 까짓 것 이가수야 죽건 말건 아랑곳할 것 없다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만 것이다. 한 가닥 불꽃이 땅 위에서 타들어가는데 그 빠르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바퀴 불구덩이를 끼고 돌기만 하면 아비규환의 참상이 눈앞에 벌어질 판이다. 문태래뿐만 아니라 이가수 , 육비청 ,장진 및 장사근까지 가루가 될 것이 뻔하거니와 건물 안에 그토록 많은 화약이 쌓여 있으니 일단 폭발하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재난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청군의 관병들이 소란을 피우며 분분히 뒤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놀라움과 소란스러움 가운데 갑자기 한 사람이 불 속을 향해 달렸다. 남색 장삼을 입었고 얼굴은 남색 천으로 가린 채 두 눈만 내 놓고 있었다. 손에는 1개의 단편을 들고 쏜살같이 달렸다. 그는 단편으로 도화선의 이곳 저곳을 닥치는 대로 때렸다. 그러나 도화선은 계속해서 힘차게 타들어가기만 했다. 진가락과 서천굉은 형세가 다급한 것을 보고 자신의 안위를 돌볼 사이도 없이 분분히 그쪽으로 달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화선을 끊을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복면을 한 그 사람은 도화선을 끊을 방법이 없자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용강하게 옷을 입은 채 온몸으로 도화선을 덮쳤다. 몸에서 불꽃이 튀더니 이윽고 전신이 불길에 싸였다. 이 바람에 도화선이 타들어가던 속도가 잠시 주춤했다. 이렇게 잠시 주춤하는 사이 장진과 장사근이 벌써 문태래를 짊어지고 불구덩이 속을 뚫고 나왔다. 세 사람 모두 전신에 불이 붙었다. 상씨 형제가 이를 보고 달려들며 외쳤다. 「데굴데굴 굴러요! 굴러 ! 장진과 장사근이 문태래를 내려놓고 그를 먼저 땅 위에 굴렸다 몇 바퀴 구르자 문태래의 옷에 붙었던 불이 꺼지고 낙빙이 달려들어 보살펴 주었다. 장진과 장사근도 몇 바퀴 굴러 몸의 불을 껐다. 상씨쌍협이 급히 불 속으로 들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복면을 한 사람을 끌고 나왔다. 이 세 사람이 나올 때도 역시 전신에 불이 붙었다. 일단 몸의 불을 끄기는 했지만 복면을 했던 사람의 의복 손발 어느 곳 하나 까맣게 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육비청은 문태래가 위험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이가수를 어깨에 둘러멘 채 숨을 들이마시고 연자삼초수의 재주로 한 마리 큰새처럼 불길을 뚫고 나왔다. 그가 비록 한 사람을 등에 둘러메고 나오기는 했지만 워낙 경공이 탁월하여 그래도 부상을 제일 가볍게 입은 편이었다. 「성공했으니 물러갑시다. 진가락의 말에 무진이 장검을 휘두르며 앞장을 서서 길을 뚫었다. 상씨 형제는 복면한 사람을, 장진과 장사근은 문태래를 메고, 육비청은 이가수를 업은 채 모두들 그 뒤를 따라 뚫고 나왔다. 이원지는 부친이 포로가 된 것을 보자 다급해 견딜 수가 없었다. 검을 비껴들고 추적을 했지만 위춘화의 쌍구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마터면 위춘화의 쌍구에 다칠 뻔까지 했다. 청군 관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추격은 했지만 모두들 홍화회에게 골탕을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다. 8명의 어전 시위는 황제의 분부를 받고 문태래를 감시하는 데 협조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주범을 놓치는 날에는 목이 잘리는 죄명을 쓰게 된다. 그러니 어찌 조급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범중은은 판관쌍필을 든 채 죽을 힘을 다해 쫓아왔다. 진가락은 방금 그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었다. 악독한 사람을 그냥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응벽검을 조반산에게 넘겨 주며 이렇게 말했다. 「삼가, 여러분을 위해 뒤를 차단해 주세요. 저는 이 녀석을 요절 내겠습니다.」 품속에서 주색(珠索)을 꺼냈다. 마대정이 그의 구검순(動劍盾)을 건네 주자 진가락이 칭찬의 말을 했다. 「훌륭한 형제요. 이토록 용의주도하다니.」 원래 진가락의 검순주색은 여태까지 심연이 휴대하고 다녔다. 심연이 부상을 당해 마대정이 이 심부름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진가락이 오른손을 들자 다섯 가닥의 주색이 정면으로 범중은을 찍으려 날았다. 범중은은 판관필을 쓰기 때문에 자연 점혈에 능숙했다. 다섯 가닥의 주색 끝에는 모두 쇠공이 달려 선회하며 날아 상대방의 혈도를 정확히 겨냥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는데 주조음이 주의를 주는 소리가 들렸다. 「범 대가, 저 녀석의 그 줄이 무서우니 조심하시오. 마대정은 그가 총타주를 욕하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삼절을 들어 머리를 쳤다. 주조음이 머리를 옆으로 피하며 반격했다. 이쪽의 범중은은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어가며 진가락과 수초를 겨루었다. 이렇게 수 초를 대결하는 사이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겁을 먹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빠져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전신이 주색의 공격에 말려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진가락은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 오른손을 옆으로 휘둘러 주색의 천두만서 재주로 어지럽게 찍어 댔다. 범중은은 진가락이 도대체 어디서 어디로 공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판관필을 가지런히 합쳐 가지고 진가락의 품속으로 직격해 들어갔다. 이른바 무가에서 말하는 일촌단 일촌험(一大短-寸陰)이라는 말이1 즉, 한 치가 짧으면 한 치가 위험하다는 뜻이다. 판관필은 짧은 무기라 원래 위험한 초술로 득승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이 틀림없이 피할 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달아날 수 있을 것으로 예측을 했던 것인데 상대방의 순패가 갑자기 앞을 막았다. 순패 위에는 번쩍번깩하는 아홉 개의 날카로운 검이 꽃여 있었다. 범중은은 깜짝 놀라 식은땀이 흘렀다. 쌍필을 거두어들일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쌍필로 순패를 정확히 찍으며 힘을 역이용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진가락은 순패를 살짝 옆으로 돌려 쌍필이 미끄러지게 했다. 그리고 주색을 휘둘러 그의 다리를 감고 힘껏 내동댕이치니 범중은이 꼼짝 못하고 불길 속으로 떨어졌다. 진가락은 손을 멈추지 않고 주색을 옆으로 쉽쓸었다. 주조음 등을 쇠공으로 맞고 비명을 지르는데 마대정의 삼절곤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정강이뼈를 정통으로 맞혔다. 마대정은 그가 총타주를 욕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온 힘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두 다리의 정강이뼈가 동시에 다 부러지고 말았다. 이때 군웅들은 대부분 담을 뛰어넘어 나갔고 조반산이 후미를 차단하느라 3명의 청궁 시위와 대결하고 있었다. 진가락이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물러갑시다. 위춘화의 쌍구가 이원지를 향해 세 차례나 급공을 폈다. 이원지가 막지 못하고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위춘화가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면서 주먹을 휘두르자 청병이 얼굴을 맞아 입이 부어오르고 코가 비뚤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을 빼앗아 아까 복면한 사람이 꺼 버린 도화선에 다시 불을 붙였다. 청병의 놀란 외침소리 가운데 홍화회 군웅들은 모두 철수를 끝마쳤다. 서대림 , 저원 등 시위가 청병을 통솔하여 추적할 준비를 서두르는데 갑자기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화광이 번쩍하더니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연기가 눈을 가리고 벽돌과 돌이 어지럽게 날았다. 관병과 시위들은 급히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건물 안에 화약을 너무 많이 저장해 놓았었기 때문에 폭음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계속해서 터졌다. 청병들이 비록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기는 했지만 벽돌과 돌, 나무 등이 어지럽게 날아와 아무도 감히 일어날 엄두를 못 냈다. 그러나 벌써 수십 명이 벽돌과 나무에 맞아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범중은은 몸이 불구덩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산화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폭음소리가 완전히 멎고 청병과 시위들이 거의 일어났을 때 홍화회 군웅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말에 을라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에 나섰다. 홍화회 군웅들은 문태래를 구출하여 성 밖으로 나왔는데도 아무도 뒤쫓는 사람이 없자 모두들 안심했다. 다시 얼마 동안 가자 길가에 이르렀다. 거기 10여 척의 배가 가지런히 매여 있었다. 마선균이 나와 반기며 축하를 하고 군웅들은 희희낙락 배에 올랐다. 육비청이 낮은 소리로 진가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가수와 저는 그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문 사야를 이미 구출했으니 우리 그를 풀어 보내지요.」 「그렇게 하시지요.」 작은 두목이 이가수를 묶었던 끈을 풀고 그를 언덕 위로 올려 보냈다. 출발합시다. 우리 먼저 가흥으로 갑시다. 진가락의 말이었다. 절서의 강과 나루터는 꾀 많았다. 배를 한참 동안 저어 가자 벌써 5, 6개의 물굽이를 돌았다. 「우리 서쪽을 향해 잠(潛)으로 가 사가를 호송, 천목산에서 치료를 받도록 합시다. 이가수로 하여금 가흥으로 쫓아오도록 만들어 놓구요.」 진가락의 말에 군웅들이 껄껄 웃었다. 몇 달 동안의 울분이 이 한바탕 웃음소리로 다 풀렸다. 이때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낙빙은 문태래의 몸을 깨끝이 닦아 주고 수갑과 족쇄도 응벽검으로 다 끊어 풀었다. 깊이 곯아떨어져 자는 그를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서천굉이 말문을 열었다. 「총타주님! 사가를 구출한 복면한 그 사람의 부상이 매우 중한데요. 우리 그분의 복면을 벗겨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군웅들은 그가 누군지 몰라 호기심을 가졌다. 주중영이 말렸다. 「그가 복면을 한 것으로 보아 자기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랬을 것이니 벗기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심연의 상처는 이제 많이 좋아졌다. 복면한 사람의 화상 입은 상처에 백장유를 발라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온몸은 수포뿐이라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몸부림치며 신음 소리만 냈다. 심연은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죽을까봐 더럭 겁이나 달려와 알렸다. 진가락 등이 급히 뛰어가 보니 상처가 너무 심해 걱정스럽기만 했다. 복면한 그 사람이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두 손을 허우적 거리다 갑자기 얼굴을 가린 천을 왼손으로 찢었다. 「십사제 !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사람은 바로 금적수재 여어동이었던 것이다. 얼굴이 온통 붉게 부어오르고 새까맣게 타서 여기저기 수포가 수도 없이 많았다. 잘생긴 얼굴이 타 버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군웅들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낙빙은 젖은 수건을 가져다 그의 얼굴의 진흙과 화약을 가볍게 닦아 주고 또 닭털에 백장유를 묻혀 발라 주며 심정이 착잡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마음만 울렁거렸다. 자기에 대해 연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데 이번에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문태래를 구출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연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낙빙 자신은 이미 문태래에게 속해 있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다만 동맹과 결의의 정만이 있을 뿐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그날 저녁 철담장 밖에서 무례하게 군 일도 뒤에 생각이 날 때마다 분노를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이번에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도 그녀의 남편을 구출해 주었으니 그렇다면 이 연정의 미련이 필경 비천한 정욕만은 아니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친 모습을 바라보니 생명을 건지기 어려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설사 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준수하게 생긴 한 젊은이가 보기 흉한 꼴로 변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자기에 대한 이 젊은이의 연정의 미련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도 모르게 일렁이는 착잡한 심사에 멍하니 넋을 잃었다. 배가 여항에 도착하자 마선균이 서둘러 사람을 시켜 의원을 청해 왔다. 의원이 문태래를 진찰해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나리가 입은 것은 외상입니다. 근골이 강건하시니 몇 달만 치료를 받으면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어동을 가리켰다. 「이분의 화상은 대단히 심하군요. 화독이 심장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겠어요. 제가 산화해독(散火解毒)의 처방을 내릴 것이니 두어 첩 자시고 경과를 보지요.」 자신이 없다는 말투였다. 의원은 작별하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한참 뒤에 문태래가 눈을 뜨더니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어째 모두들 여기 계시지요? 낙빙은 반가움에 눈물을 떨구었다. 「여보, 이제 구출되어 나오신 거예요.」 문태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군웅들은 문태래는 아무 일 없다는 의원의 말에 안심이 되었지만 여어동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장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십사제는 정말 똑똑해요. 제독부로 숨어 들어온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지난번 지하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준 것도 그였는데 우리들은 그것도 모르고 한 대 때리기까지 했으니,""'~ 상혁지의 말을 이번에는 상백지가 받았다. 「그가 이가수까지 구하려 했으니 그 저의를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사람들이 분분히 의논을 해 보았지만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의 실종 원래 그날 황하의 나루터에서 야간에 싸움이 벌어지자 이원지는 난군 가운데서 여러 사람과 흩어졌다. 황망한 가운데 큰 수레 하나를 발견하고 그 위에 타고 앉아 노새를 몰고 떠났다. 청병 몇 명이 달려들어 막았지만 이원지가 칼을 휘둘러 쫓아 버렸다. 그녀는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노새를 몰았다. 날이 밝고 대군과는 이미 멀리 떨어진 장소에 와 있음을 확인하고야 휴식을 취했다. 수레의 휘장을 젖히니 그 안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도중에서 두 차례나 만났던 본문의 사형인 여어동이었다. 고달프게 꼬부라져 있는 것이 중병에 걸린 듯싶었다. 슬그머니 이불 한 귀퉁이를 벗기니 온몸에 붕대가 여기저기 감겨 있었다. 그제야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원지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다시 수레를 몰아 큰길을 따라 문광진에 도착했다. 그녀는 관가의 소저라 배포와 씀씀이가 컸다. 마을에서 제일 큰 저택을 골라 투숙하려고 했는데 그 집은 바로 마을의 악당 두목격이요, 별명이 당리비상인 당육(唐六)의 집이었다. 당육은 그녀가 수상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은근한 접대를 하는 척했다. 그 뒤에 그녀가 남장을 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의원인 조사붕과 함께 음홍한 흉계를 꾸미다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당육이 제수가 없었던지 그만 기생인 소매괴의 집에서 주기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때 여어동은 혼미했던 정신을 회복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혹시 관가에서 조사를 왔다가 연루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원지와 함께 어수선한 틈을 타 그 집을 떠났다. 이원지는 항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고 여어동은 문태래가 항주로 잡혀 갔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그는 부상을 당한 몸이라 먼 길을 가는 동안 이원지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까불기만 하던 이원지의 성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상당한 그의 딱한 처지 때문에 모든 걸 양보하고 참았기 때문이다. 여어동의 괴로워하는 표정과 의기소침한 언행을 지켜보며 병후의 쇠약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따뜻한 말과 부드러운 태도로 그를 위로해 주기에 바빴다. 항주에 도착하여 부모를 만나서도 이원지는 오히려 여어동이 자기를 구하려고 도적과 싸우다 부상을 당했다고까지 말했다. 이가수 부부는 너무나 고마워서 그를 제독부 안에서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해 주고 또 명의를 청해다 치료까지 해 주었다. 그의 인품이 걸출해 보이고 문무를 겸비한데다가 딸의 생명까지 구해 준 사람이라, 완쾌하면 사위까지 삼을 생각만 했지, 이 사람이 홍화회에서 당당한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을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몇 달을 이렇게 보내는 동안 이원지는 때로는 즐겁고 또 때로는 걱정이 되었다. 이 호감가는 청년이 분명 부친의 원수인 줄은 알지만, 그러나 꽃다운 마음에 싹트는 깊고 고운 정이 한 가닥 단단한 실이 되어 그녀의 온 몸을 칭칭 감아 버렸다. 당일 감량(甘凉) 도상에서 이 사가는 이슬비 내리는 시골의 여인숙에서 웃으며 적을 막았고, 평사의 거친 들에서 피리를 불며 길을 막던 일 등, 멋지고 근사했던 모습들이 생각나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다가 어느새 수심에 잠기고는 했다. 그의 상처가 거의 완치될 무렵 홍화회 군웅들은 연일 제독부를 공략했다. 그날 여어동이 이가수를 구출해 주자 이원지는 마음속으로 슬그머니 기뻐했다. 그가 이미 자기 편에 선 줄로 알았다. 그런데 뒤에 와서 그는 또 문태래를 구출했고 홍화회 군웅들을 따라가 버린 것이다. 여어동은 전신에 수포가 일어나 통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혼미한 가운데 갑자기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더 말도 안 되게 구는군요. 어떻게 총타주님을 보고 기생 집에 가서 즐기라고 하실 생각을 다 하세요? 희미한 의식이었지만 철담장의 주 소저의 목소리 같았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또다시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 항주로 돌아가 함께 기생집으로 갑시다. 무서을 게 뭐 있어요? 여어동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도장님은 출가인인데 어째서 기생집에 가 놀려고 하실까?) 중상을 입은 뒤라 여러가지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다시 또 잠속에 빠져들었다. 권륭 황제는 저원 등 어전 시위가 숨을 헐떡거리며 허둥지둥 달려와 청죄를 하며 홍화회가 감옥을 탈취하고 문태래를 구출해 갔다고 보고하자 놀라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국사범이 이미 탈옥을 한 마당에 이들 시위를 책망해 보아야 일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사람들을 보니 머리카락이 타고 또 얼굴에 진흙이 묻었으며 심지어 상처를 입은 사람까지 있었다. 물어보지 않고도 이들이 나름대로 역전을 다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알겠네. 이 일을 가지고 자네들만 책망할 수는 없지.」 황제의 입에서 오히려 부드러운 말이 나왔다. 저원 등은 본래 이번 일로 큰 벌을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상이 이토록 관대하게 나오니 감격하다 못해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얼마 뒤에 이가수도 왔는데 권륜은 일단 면직은 시키되 대기하고 있다가 일후에 공을 세움으로써 속죄를 하도록 하라는 성지를 내렸다. 이가수는 너무나 기뻐 수없이 이마를 조아리며 성은에 감사했다. 이가수가 물러가자 권륜은 문태래의 탈옥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기의 출신 성분에 대한 비밀이 혹시 탄로나지는 않았을까? 문태래의 말투로 보아서는 이 기밀을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으로 보아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는듯 싶었다. 그가 두 가지 중요한 증거물을 밖에 숨기고 있다고 했는데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두 가지 증거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자기가 한인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확실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방 안을 오락가락 거닐었다.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지존의 천자의 몸으로 한 떼의 군도를 이기지 못하다니 이 무슨 체면이요 체통이란 말인가? 이 출신 성분에 관한 기밀이 상대방의 수중에 있으니 평생 그들의 조종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탁자 위에 있는 청자 화병을 들어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렁 소리와 함께 깨져 수십개의 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뭇 시위와 내시들이 밖에 있다가 이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황상이 지금 크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부름이 없이는 아무도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법이다. 모두들 전전긍긍하며 서서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몇 명의 어전 시위는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황상이 갑자기 다시 문책을 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권륜은 어지러운 심사로 한나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은은한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에서 무서문 앞까지 왔다가는 또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또 한 차례의 악기 소리가 지나갔다. 권륜 황제는 평소에도 음악을 좋아했다. 은은한 한바탕의 악기 소리에 은근히 마음이 동했다. 「누구 있거든 들라 일러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외쳤다. 시위 학사 한 명이 걸어 들어왔다. 최근 총애를 받기 시작한 화신이었다. 이 사람은 상사의 눈치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잘도 모셨다. 그래서 연일 권륜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다. 많은 시종들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재빨리 이 사람의 등을 민 것이었다. 밖의 악기 소리는 무엇 때문인가? 가서 물어보고 오너라.」 화신이 대답하고 나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나가 알아보고 왔습니다. 오늘 항주 전 성의 명기들이 성호에 모여 무슨 화국장원을 뽑는다나. 그 밖에 무슨 방안이니 탐화니 전려니 하는 것들까지도 있다는군요. 아니, 나라에서 인재를 뽑는 대전을 빌려 이런 장난을 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로고.」 권륜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화신은 황상의 용안에 웃음기가 섞인 것을 보고 한 발 다가서며 이렇게 소근거린다. 전당의 사염(四艶)이 모두 참석한다고 들었나이다.」 「전당 사염이란 무슨 말인고? 「신이 방금 항주 토박이에게 물어보았는데 가장 훌륭하고 예쁜 네 명의 기녀라 하더군요.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도대체 누가 금년의 화국장원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이 쏠려 있다고 하더군요.」 「나라의 장원이야 내가 뽑는다지만 이 화국장원은 누가 뽑는다고 하던가? 설마 화국황제라는 거야 없으렷다. 「한 명의 명기가 한 척의 꽃배에 타게 되어 있는데 꽃배 위에는 고객이 보내 준 금은이나 돈, 진귀한 장식용품 등을 진열하여 누구의 배가 가장 화려한가, 누가 가장 풍성한 화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보아 항주의 풍류 명사들이 서열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권륜도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들이 언제 그 행사를 한다던가? 「곧 시작할 듯싶습니다. 날이 좀 어두워지기만 하면 꽃배 위에 등불을 밝히고 화국장원을 뽑는답니다. 황상께서 흥미가 있으시다면 가서 구경하심이 어떨는지요. 「물의를 일으킬까봐 걱정이 되네. 만약 태후가 사후에 이 일을 알게 되면 분명 귀찮은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아닌가? 하- 하,,,,,,.」 「황상께서 평민의 차림으로 변장하시고 구경을 하신다면 그 누가 알겠습니까? 「그거 좋겠군. 떠들석하게 굴지 말라고 이르고 우리 슬그머니 옆에서 구경하다가 금방 오도록 하세.」 권륜이 장삼과 마고자로 갈아입을 때 화신은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마치 돈 많고 지위 높은 유지의 차림이 되었다. 화신 자신은 평범한 선비 복색으로 차리고 백진 등 10명의 시위만 데리고 서호를 향해 갔다. 이때 서호 안에는 곳곳마다 생황과 노랫소리가 가득했고 대낮처럼 밝힌 궁등이 말할 수 없는 변화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수면 위에는 20여 척의 꽃배가 서서히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그 배 위에는 고운 휘장과 비단등이 드리워져 있었다. 권륜이 배를 가까이 대라 하고 보니 비단등 위에 바늘로 찔러 무언가를 그려 놓았는데 거기에는 인물과 옛이야기 등이 있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어떤 배 위에는 비단으로 꽃이며 풀이며 벌레며 고기 등을 만들어 가운데 등불을 켜 놓아 장식을 한 것들도 있었다. 권륜은 강남의 풍류가 북지싻地를 능가함에 마음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수백 척의 놀이배가 북처럼 오락가락 그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배 위에는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는 호객이나 호사가들을 태우고 있어 각자 손가락질을 해 가며 꽃배의 아름다운 장식의 우열을 품평하기에 바쁘다. 그때 갑자기 징소리가 울리자 각 배의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가 뚝 멈췄다. 하나하나의 불꽃 유성이 하늘 높이 발사되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다 물 위에 떨어진다. 처음 발사된 불꽃은 (명경승평) (국태민안) (천자만년)등 공덕을 칭송하는 글씨를 하늘 위에 수놓아 권륜도 흐뭇한 마음으로 구경을 했다. 이어서 (군방쟁염) (족족앵화)니 하는 등의 풍류가 있는 글씨들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가 다시 일어나며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꽃배 위의 휘장이 걷혔다. 그 안에는 예쁘게 단장한 아가씨들이 앉아 있었고 서호의 여기저기서 환호의 갈채가 우레처럼 터졌다. 내시가 황상의 흥을 돋우기 위해 술과 안주 등을 차려 놓았다. 놀이배가 서서히 수면 위에 미끄러지며 꽃배 옆을 스치고 다녔다. 정말 여기저기 좋은 장관을 보느라 눈 깜짝할 사이조차 없었다. 권륜의 후궁은 3천을 헤아렸다. 천하의 미인을 그동안 많이 보았으련만 그러나 이 시간 등불의 그림자며 물빛, 로 젓는 소리들이 어울린 풍광에 자신도 모르게 취해 들어갔다. 놀이배는 (전당사염)이 탄 배 옆으로 저어갔다. 그들 4척의 꽃배는 보통 사람들의 것과는 또 달랐다. 맨 첫번째 배는 연꽃을 따 배 모양으로 치장을 했다. 꽃배 주위는 온통 연꽃등뿐이다. 빨간 꽃, 흰 연꽃, 거기 연잎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꽃배의 주인공은 변문련이었다. 두번째 꽃배에는 2개의 정자가 마련되어 호화와 부귀의 분위기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정자안에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둘러치고 '옥립정정'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씌어 있었다. 원래 꽃배 안의 기녀는 이쌍정이었던 것이다. 세번째 꽃배는 광한궁 모양으로 꾸몄고 옆에는 종이로 옥토끼와 계수나무를 만들어 놓았다. 꽃배 위의 오선연은 고대 의상을 입고 손에 둥근 형상의 부채를 들어 달속의 항아로 분장했다. 권륜은 한척 한척 볼때마다 한번씩 갈채를보냈다.놀이배7 네번째 꽃배 옆으로 갔을 때 배 위에는 모두 진자나무와 진자가로 장식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나뭇가지가 비스듬히 뻗친것이라든지 꽃과 잎의 엉성함과 촘촘함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한 폭의 명가의 수묵 산수화를 보는 듯했다. 꽃배 위의 기녀는 흰옷을 입었는데 물을 격해 바라보자니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 때묻지 않은 자태가 아리땁다 못해 신성한 느낌까지 주었다. 다만 뒷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권륜은 격렬한 감정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서상기가운데 수간한 곡을 높은 土리로 읖었다. 「응, 어째 얼굴도 돌리지 않는단 말인가? 그 기녀는 누군가가 높은 소리로 읖조리는 노랫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며 상긋 한번 웃어 보였다. 권륜은 마음이 출렁임을 느꼈다. 원래 이 아가씨는 며칠 전 호상에서 본 적이 있는 옥여의였던 것이었다. 이때 갑자기 죄꼬리 같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저쪽의 연꽃 배 위의 변문련이 부르는 것이었다. 곡이 끝나자 갈채 소리 가운데 크고 작은 원보전이 배 위에 던져져 가득 쌓였다. 이어서 이쌍정이 가볍게 비파를 끌어안고 (춘강화월야)를 탔다. 오선연은 퉁소를 불었다. 권륜은 그가 부른 곡이 (승룡가객)이라 화신에게 명하여 10냥의 금을 상으로 주게 하였다. 사람들의 놀이배가 옥여의의 꽃배를 둘러싸자 그녀는 붉은 입술과 흰 이를 드러내며 피리 소리를 반주로 노래를 불렀다. 때는 8월 중순, 호수의 기온은 약간 선선한 편이었지만 옥여의의 노랫소리는 봄의 따사로움과 꽃의 향기를 지니고 있어,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그런 마력을 풍기고 있었다. 권륜은 탄복해 마지않았다. 참으로 재자의 문필이 아닐 수 없다. 강남의 풍물을 모두 이 곡 속에 묘사했으니.」 그는 이 노래가 (도화선)가운데 있는 (방취)임을 알았다. 강회 연간의 공상임이 지은 것으로 후방역 (候方域)이 명기인 이향군(李香꿀)을 찾아갔던 고사를 묘사한 것이다. 옥여의는 이 곡을 부르며 추파를 보내며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권륜은 너무나 기뻤다. 그녀가 이 곡을 부른 것은 옥여의를 이향군에 자신을 후방역으로 비겼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기뻤던 것이다. 그는 재주와 학식을 자랑하기 좋아했다. 이번 남쪽으로 와서도 도처에서 시를 읖고 글씨를 남겼다. 중신들은 구구절절이 아름답고 편편마다 구슬인데 시는 이태백과 두보를 뒤덮고 글씨는 종요와 왕희지를 능가한다고 아첨을 하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제 자신이 미복으로 갈아입고 놀이를 나왔다가 마침내 명기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된 점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 잘생긴 미인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니 이는 제황의 존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실력 때문이라고 착각까지 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송옥과 같은 감정, 반안과 같은 용모, 자건(子建)과 같은 재주에 홀딱 반한 것으로 믿었다. 당년 홍불과이라는 명기가 이정(李情)을 보자 한눈에 반해 일생을 만나게 된 인연이 다 이와 같아서 명기라면 정말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만약 중한 상을 내리지 않으면 자기를 알아 주는 눈을 토독하는 것이 아닐까? 즉시 화신에게 명하여 황금 50냥을 상으로 주도록 일렀다. 그리고 시상을 더듬느라 잠시 침묵에 잠겼다. 항주는 평소에도 번화한 고장이라 일렀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꽃 중의 꽃을 선발하는 제전, 당지의 호사가들은 만사를 제치고 이 행사에 참여했다. 멀리는 소 ,송,태 ,상 가 , 호-등지의 한가한 사람과 풍류를 아는 선비들까지 이날마는 항주로 운집하여 멋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부를 과시했다. 그래서 잠시 동안에 그들 기녀에게 던져주는 행하가 꽃배마다 가득 쌓였는데 그중에서도 전당사염이 가장 많았다. 자야(子夜) 시가 되자 선화회의 우두머리격인 사람이 그들의 상품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 같아서 기녀들만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라 호수에 나와 노니는 사람들까지 관심이 집중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권륜이 화신에게 몇 마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화신이 머리를 끄덕여 대답하고 작은 배에 올라 무서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보따리 하나를 받쳐 들고 다시 나타났다. 상품의 점검이 끝나자 모든 배가 우두머리격인 사람이 탄 배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가 서열을 공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 상품은 이쌍정 이 소저가 가장 많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배마다 떠들썩해졌다. 누군가는 손뼉을 치며 좋다고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말도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내 변문련 아가씨에게 황금 백 냥을 더 내놓겠소.」 그러고는 즉시 황금을 내놓았다. 또 하나의 호객이 나섰다. 「내 오선연 아가씨에게 비취 팔찌 한 쌍과 야광주 열 알을 주겠소. 사람들이 등불 밑에서 보니 비취 팔찌의 밝은 빛이 짙은 녹색을 발하고 있었으며 야광주는 크고도 둥글었다. 값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황금 백 냥을 훨씬 웃도는 보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이 놀라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금년의 장원은 이 호수 위의 상아가 틀림없다고 믿었다. 우두머리격인 사람이 더 기다려 보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막 오선연이 금년의 장원이라고 선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화신이 외치며 나섰다. 「우리 나리께서 한 보따리의 물건을 옥여의 아가씨에게 드리려 하오.」 라고 말하며 보따리를 건네 주었다. 우두머리격인 사람의 나이는 40여 세, 얼굴의 생김이 청초하고 준수한데 입술 밑에 약간의 수염이 돋아 있었다. 아랫사람이 그의 면전으로 보따리를 바치는데 보니 세 권의 서화였다.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왼쪽에 있는 한 노인을 보고 말했다. 「번사 선생, 이 물건을 보내신 분이 운치도 있고 품위도 아시는가 본데 무슨 정선한 물품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랫사람에게 서화를 펼쳐 보도록 명했다. 권륜이 화신을 바라본다. 「가서 저 배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알아보고 오게.」 화신이 가 물어 보고 와서 이렇게 아뢰었다. 「우두머리격인 사람은 항주의 재자인 원매 원자재요,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강남의 명사들이랍니다.」 「내 일찍부터 원매가 장난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구나. 권륜이 웃으며 말했다. 제일권의 두루마리를 펴 보다가 원매와 그 주위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원래 축윤명(祝允明)이 쓴 이의산(李義山)의 두 수의 무제시였던 것이다. 원매가 번사 선생이라 부른 그 사람의 이름은 여악이라고 하는데 역시 항주 사람이었다. 여악은 시사(時 詞)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시보다는 사가 더 유명했다. 그는 축윤명의 법서를 보고 연방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정말 유명하고도 귀한 것이오.」 시인인 조익(超翼)은 성질이 급했다. 그래서 즉시 두번째 두루마리를 펼쳤는데 당인(唐仁)이 그린 한 폭의 잠화사여도였다. 그 위에 (권륜어람지보)라는 주인까지 찍혀 있었다. 원매는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심 연형(沈年兄) 장 대가, 두 분이 보시기에 이 서화를 보낸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그가 (심 연형)이라 부른 사람은 심덕잠(沈德潛)으로, 호를 귀우 (歸愚)라 했는데, 권륜 연간의 대시인으로서 원매와 같이 권륜 4년 에 진사가 되었었다. 다만 하나는 일찍 하나는 늦게 합격이 되었을 뿐이다. 원매가 진사에 합격했을 때 겨우 24살의 나이였으나 심덕 잠은 벌써 60이 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강남의 노명사라 불렀던 것이다. 장가 성을 가진 사람의 이름은 사전 호가 심여 (人體)로, 희곡(戱曲)의 대가였다. 그와 원매 조익 세 사람을 강좌 삼대가(江左三大家)라 불렀다. 이 두 사람이 보고는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심덕잠은 온건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우리 건너가 한번 만나 봄이 어떨까요? 배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두 사람도 원매가 초청해 온 명사들이었다. 하나는 재치와 해학의 명수인 기효람이고, 다른 하나는 시화삼절의 정판교였다. 기효람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그 배로 한번 건너가면 다른 사람들이 불공평하다고 조롱을 할 것이오.이 두 점의 두루마리 서화가 이토록 진귀하니 당연히 옥여의가 장원이 되어야겠지요. 「세번째 두루마리가 또 무슨 보물인지 보는 거야 무슨 상관이 있을라구. 정판교의 말이었다. 사람들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보니 한폭의 서예였다. 필치는 남보다 뛰어났지만 도장도 낙관도 없이 임조맹부서 라는 다섯 글자만 보였다. 정판교가 맨 먼저 평을 했다. 「약간 빼어난 기운은 있지만 필력이 부족하군. 「이는 금상(今上)의 어필(御筆)이오.」 심덕잠이 누가 들을까봐 겁을 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깜짝 놀라며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품을 점검한 결과 장원은 옥여의요, 방안은 오선연, 탐화는 변문련이오.」 원재자가 큰소리로 이렇게 선포하자 호수 위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원매 등은 이 3점의 두루마리를 보고 물건을 보낸 사람이 종실의 귀족이 아니면 거물급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쪽 배를 살펴보아도 별로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밤중이라 배 위에 탄 사람의 얼굴도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혹시 이 풍류를 즐기기 위한 행사를 어사가 보고 조사하여 보고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본래는 시부를 지어 흥을 돋우며 즐기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슬그머니 언덕으로 올라가 헤어지고 말았다. 권륜도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옥여의가 배 안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소리가 부드럽고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려 화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네 건너가 저 소저를 이리로 불러오게.」 화신이 대답을 하고 가려고 하자 권륜이 다시 불렀다. 「내가 누구란 말은 하지 말도록, 알겠는가? 「네, 신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놀이배가 옥여의의 꽃배 가까이 저어가자 화신이 펄쩍 뛰어 그 배로 건너갔다. 잠시 후 한 장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와 권륜에게 바쳤다. 「이걸 써 주며 (당신의 나리께 전해 주세요)라고 하더군요. 권륜이 받아 등불에 비추어 보니 내일 오라는 내용의 시가 한 수 씌어 있었다. 잘 쓴 글씨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편지지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권륜이 웃었다. 「내 이미 오늘 와 있는데 무엇 때문에 내일 다시 오라 하는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옥여의의 꽃배가 저만치 가 버렸다. 그는 제황의 귀한 몸, 후궁과 비빈들이 천방백계 동침의 행운을 구하지만 그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 여자로부터 이런 거절을 당해 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상스럽기도 했다. 상대방이 가까이하는 듯하기도 하고 멀리하는 듯도 하는 그런 애매한 태도를 취할수록, 그리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댈수록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낑이 들었고, 그럴수록 얻은 결과의 쾌감은 더욱 컸다. 그래서 급히 성지를 내렸다. 「사공을 시켜 빨리 저 배를 쫓도록 하라. 많은 시위들은 황제가 조급해하는 모양을 보았다. 이럴 때 진충보국하지 않고 어느 때를 다시 기다리랴? 즉시 노를 들어 있는 힘을 다해 배를 저었다. 시위들 가운데는 외공이 대단한 사람도 있었고 내력이 심오한 사람도 있었다. 이때 그들의 눈앞에는 오직 충성 충(忠) 자 하나만이 있었던 것이다. 두 팔을 휘두르며 노로 물을 치는 데 필생의 공력을 다 쏟고 있으니 배는 쏜살같이 옥여의의 꽃배를 쫓아갔다. 권륜은 뱃머리에 서 있었으나 마음은 앞에 있는 꽃배 위에 가 있었다. 온 호수 위의 등불은 하나둘 꺼져 갔지만 퉁소의 가락 소리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앞에 있는 꽃배에서는 은은히 두런두런 나누고 있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권륜은 흥겨운 기분에 취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두 배가 가까워지자 꽃배의 창문이 열리며 무언가 한 덩어리의 물건이 권륜을 향해 던져졌다. 백진이 깜짝 놀라 외치며 왼손으로 는 항룡복호(降龍伏虎)의 자세를, 오른손은 금사박상의 자세를 취했다. 이는 그의 금구철장의 대금나수 가운데 유명한 절기이다. 진중에서 적의 창을 뺏거나 야간의 전투에서 표창을 받게 되면 손만 뻗으면 그뿐, 백에 한 번의 실수도 하는 일이 없었다. 연못처럼 조용하면서도 산처럼 오뚝한 그의 자세와 번갯불과 같이 번쩍하며 천둥 소리처럼 떨치는 수장(手掌)은 과연 무학의 대종장(大宗匠)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시위들은 백진의 늠름한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 손에 받아 쥔 물건이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암기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즉시 권륜 황제에게 바쳤다. 권륜이 받아 보니 빨간 손수건인데 네 귀퉁이를 붙들어 맨 것이다. 펼쳐 보니 엿에 버무린 연근과 백합이 있었다. 연근은 아름다운 짝을, 백합은 애정이 두터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권륜의 재주는 육두요 시는 팔보(八步)이다. 비록 당년의 조자건보다 이두가 적다고는 하지만 일보(一步)가 더 많으니 어찌 이 풍론의 함축된 의미를 모를 리 있으랴? 그 손수건은 매끄럽고도 향기가 있어 손에 쥐니 어질어질할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 되었다. 잠시 후 꽃배가 언덕에 닿았다. 불資 가운데 옥여의가 한 대의 작은 마차에 오르며 고개를 돌려 권륜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는 휘장을 내렸다. 마차 옆에 본래는 두 사람이 횃불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횃불을 꺼 버려 깜깜한 가운데 마차가 사라져 갔다. 「여보시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화신이 큰소리로 외쳤다. 마차는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말발굽 소리만 울리며 서서히 남쪽을 향해 멀어져 갔다. 「빨리 마차를 마련하여라.」 화신이 다급히 분부를 내렸지만 깊은 밤 호숫가에 마차가 있을리 없었다. 백진이 낮은 소리로 몇 마디 당부를 하자 서대림이 경공을 펴 칠보추혼(七步追魂) 팔보간섬으로 쫓아가 마차를 젖힌 뒤에 몸을 돌리며 마부를 향해 천천히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 뒤에는 저원이 마침내 마차 한 대를 끌고 나타났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을 쫓아 보내고 억지로 빼앗아 온 것이었다. 권륜이 마차에 오르자 저원이 직접 몰았다. 시위와 내시들이 마차 뒤를 따라왔다. 앞에 가는 마차는 속도가 느렸고 저원은 정신을 가다듬고 힘차게 몰아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당년 조부가 주목왕을 태운 채 팔준마를 몰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노닌 것도 생각건대 이와 같은 위풍에 불과했을 것이다. 백진은 마차가 성 안의 번화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 별일 없는 것으로 알고 안심을 했다. 오늘 황상이 틀림없이 이 기녀의 집에서 밤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전에 이 여자가 홍화회 인물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혹시 무슨 음모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방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서대림에게 보다 많은 사람을 파견 , 호위하라고 명령을 했다. 옥여의의 마차는 몇 개의 큰 길을 지나고 다시 긴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 검은 칠을 한 대문 앞에 멈추었고,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권륜도 마차에서 내려섰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자 한 아낙이 걸어나왔다. 마차의 휘장을 걷어올리며 인사를 했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옥여의가 마차에서 내려서며 권륜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는 체했다. 「아이구, 동방 나리가 오셨군요. 방금 많은 상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권륜이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저원이 권륜 앞으로 나서며 눈으로는 육로를, 귀로는 팔방 (八方)을 살폈다. 손으로 칼자루를 눌렀다. 혹시 자객의 급습이나 오입쟁이의 난동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만약 적의 종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달마검법으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당장 요절을 낼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철사 고리로 바지가랑이도 묶어 놓았다. 지난번처럼 무진의 장검에 바지가랑이가 잘려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거기는 마당이었는데 꽃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정원에 나무 그림자가 너울거렸고, 거기에는 두 그루의 계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때는 8월의 날씨, 계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권륜은 옥여의를 따라 건너채의 한 방으로 들어섰다. 붉은 초가 방 안을 밝히고 있는데 꾀나 운치있게 방 안을 꾸며 놓았다. 백진이 먼저 들어가 한 바퀴 순시를 돌았다. 침대 밑과 주위를 살펴도 잠복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등을 벽에 대 보고 또 손으로 두들겨도 보았지만 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안심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여하인이 술상을 차렸다. 권륜이 보니 8개의 접시에 고기며 닭,피단 등 야식용 안주가 정갈하다. 궁중에서 먹던 생선이며 고기 등에 비해 또 다른 정취가 있는 듯싶었다. 이때 백진 등은 모두 집 밖에서 순시를 돌고 있었고, 방 안에는 오직 화신 혼자 권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권륜이 손을 흔들어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여하인이 두 잔의 술을 따라 부었다. 바로 오래 묵은 소흥주였다. 진한 향기가 방 안에 그윽히 퍼졌다. 옥여의가 먼저 잔을 들어 마시며 아양스럽게 웃었다. 「동방 나리! 오늘 제가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좋을는지요. 권륜도 잔을 들어 비우며 웃었다. 「우선 먼저 노래부터 한 곡 부르시오. 어떻게 고맙다고 해야할는지 우리 천천히 상의해 봅시다.」 옥여의는 비파를 꺼내 들고 가볍게 쓰다듬고 타며 주미성이 지은 소년유(少年遊)라는 노래를 불렀다. 권륜은 듣고 마냥 흐뭇했다. 당년 송나라 휘종인 도군 황제가 밤에 거리에 나왔다가 우연히 명기인 이사사(李師師)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휘종이 가지고 온 술을 함께 먹으며 이사사가 그를 보고 묵어 가라며 이렇게 말했다. 밖이 몹시 춥고 서리가 내려 길이 미끄럽습니다. 아무도 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차라리 여기서 묵어 가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옆방에 숨어 있던 대사인인 주미성이 이 말을 듣고 말았다. 그는 이 사연을 새로운 사로 엮고 곡을 붙였다. 휘종이 비록 그 뒤 금나라의 포로가 되기는 했지만 그 멋진 풍류와 재능은 고래(古來)의 황제 가운데 극히 드문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풍류와 재능을 가지고 그들 둘을 논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누가 더 많은 복덕(福德)을 누리느냐고 한다면 함께 거론할 수도 함께 비교할 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안 가네, 안 가. 권륜은 기분이 좋아 혼자 떠들어 댔다. 황제는 방 안에서 신나게 술을 마시며 노래를 듣고 있었으며, 백진 등은 밖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이때 면직된 상태로 유임이 되어 죄를 뒤집어쓴 채 공을 세워야만 하는 절강수륙제독 이가수는 병정들을 데리고 달려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의 수하의 총병 ,부장,참장,유격들이 골목 안에 있는 모든 집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지고 옥여의의 집 하나만 남겼다. 백진은 시위들을 데리고 지붕 위에서 순라를 돌며 사방에 궁전수와 철갑군(鐵甲軍)이 빽빽하게 겹겹으로 포위를 했다. 권륜의 이번 출입만은 그 규모로 보나 위풍으로 보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시위와 관병들이 온 밤을 바쁘게 돌아갔지만 날이 밝도록 아무 일도 없이 평온했다. 해가 높이 솟아오르자 화신이 살금살금 옥여의의 방 밖으로 와 창틈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침대 앞에 권륜의 가죽신과 꽃을 수놓은 한 쌍의 작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지막하게 내려진 휘장만 보일 뿐 인기척이 없이 고즈넉했다.펯 혀를 한 번 내밀며 화신이 물러나왔다. 묘시(卯時)에서 진시(辰時)가 되었고, 다시 사시(巳時)까지 기다려 보아도 시종 황상이 기침을 하는 기색이 없었다. 조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 창 밖에서 낮은 소리로 불러 보았다. 「나리, 아침 진지를 드시지 않으시렵니까? 몇 번 불러도 휘장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화신은 속으로 놀랐다. 방문을 밀어 보았지만 안에서 빛장을 걸었는지 열리지 않았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불러 보았다. 「나리 ! 「나리 ! 방 안에서는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화신은 다급했지만 문을 부술 수는 없었다. 돌아나와 이가수 . 이가수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백진과 더불어 상의를 했다, '우리 기생에미를 시켜 조반을 가지고 가 문을 두드리게 해 봅 시다. 황상께서 우리를 「이 군문의 말씀대로 하십시다.」 백진도 동의했다. 세 사람이 기생에미를 찾았지만 기원 안의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대경실색했다. 일이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급히 옥여의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두드려 보았다, 아 무리 힘차게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밀고 들어갑시다. 이가수가 다급해 외치자 백진이 쌍장을 문에 버티고 약간 힘을 쓰자 빗장이 와지끈 부러졌다. 화신이 맨 먼저 들어가 가볍게 휘장을 들추었다. 침대 위에는 이불과 옷만 어지러을 뿐 권륜과 옥여의의 그림자가 어디 있는가? 너무나 놀라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백진이 급히 시위들을 불러들였다. 기원 내의 안팎은 물론 상자마다 서랍마다 열어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아무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놀랍기도 하거 겁이나 무서워 부들부들 떨었다. 밤새도록 철통같이 지켰건만 모두가 허사였다. 참새 한 마리만 날았어도 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황제가 실종되었단 말인가? 백진은 다시 한 번 여러곳을 조사해 보았다. 혹시 벽에 눈에 띄지 않는 문이라도 있을까 싶어 반나절이나 찾아보았지만 전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얼마 뒤에는 어림군의 통령인 복강안(福康安)과 절강 순무까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기원 안에 모이기는 했지만 속수무책이요, 혼이 몸에 붙어 있지 않았다. 모두들 얼굴이 흙백이 되어 넋을 잃었다. 황상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비밀 통로 그 밤 권륜은 옥여의의 노래를 들으며 몇 잔의 술을 마시고 얼큰히 취해 있었다. 옥여의가 귀엽게 웃었다. 「나리를 모시고 이제 그만 쉴까요. 권륜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여의는 그의 외투와 신발 , 버선 등을 벗겼다. 그리고 그를 부축하여 침상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 주며 가볍게 웃었다. 「저 잠시 나갔다 와서 모실께요.」 권륜은 베개와 이불 사이에서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몽롱하게 가벼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침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 깜찍한 것아, 빨리 올라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나. 권륜이 웃으며 재촉을 하는데 휘장이 젖혀지며 머리 하나가 쑥 들어왔다. 삼 껍질 같은 험상궂은 얼굴에 괴상하게 생긴 두 눈, 뺨에는 구레나룻이 더부룩해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촛불 아래 드러났다. 옥여의의 꽃 같은 얼굴, 달 같은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권륜은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자는 반짝거리는 비수를 그의 목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빌어먹을 놈, 네놈이 황제렷다. 소리만 질러 봐라. 당장 이 칼로 요절을 내 줄 테니.」 권륜의 놀라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욕망이 사라졌다. 한 통의 얼음물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사람은 두말 하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을 틀어막은 뒤에 침대 위의 이불에 둘둘 말아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권륜은 소리는커녕 몸도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눈은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에게 둘러메여 한 발 한 발 아래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고만 느꼈다. 진흙의 곰팡이 냄새와 습기가 코를 찔렀다. 한참 가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듯했다. 그제야 권륜은 깨달았다. 원래 이들은 지하도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시위나 관병들이 제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막 이렇게 추측을 하고 있는데 몸이 몹시 흔들리며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권륜을 마차에 실은 것이었다. 모반을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또 그들이 자기를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알 수 없는 노룻이었다. 마차는 오랫동안 굴렀다. 길이 울퉁불퉁한지 아까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벌써 성 밖으로 빠져나온 모양이다. 또 반나절이 지나서야 마차가 멈추어 섰다. 다시 사람들에게 둘러메인 채 가고 있었다. 점점 더 높아만 가는 것이 끝도 한도 없었다. 두려운 마음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불 속에서 울음이 터지려 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마치 산마루를 향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멎으며 그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권륜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조용히 사태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몸을 감고 있는 이불깃을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기울이니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도 들렸다. 맑고 은은한 방을 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바람 소리가 가면 갈수록 세차게 들렸다. 자기가 있는 장소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공포로 몸을 떨었다.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보려고 막 몸을 움직이는데 캄캄한 가운데 누군가가 낮은 소리로 위협을 했다. 「살고 싶거든 움직이지 마라.」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옆에서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권륜은 놀라 자라목처럼 목을 움츠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지겨운 시간을 끄는 사이 걷잡을 수 없는 심정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바람 소리가 점점 멎으며 날이 새기 시작했다. 권륜은 자기가 있는 장소가 작은 방임을 알아보았다. 굉장히 높이 올라온 것 같은데, 그렇다면 높은 산마루 위의 건물이란 말인가? 이 생각 저 생각 심사가 어지러운데 옆에서 후루룩후루룩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이 때마침 국수를 먹는 중이었다. 소리로 보아 두 사람이 입맛을 다시며 먹고 있었다. 그는 밤을 시달려 피곤하기도 했지만 배도 고팠다. 구수한 국수 냄새가 배를 꾸루룩거리며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한참 동안이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이 이제 국수를 다 먹은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가까이 오더니 그룻에 가득 담긴 국수 한 그릇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섯 자쯤 떨어진 위치요, 사발 위에 젖가락 한 쌍이 꽃혀 있었다. 권륜은 생각했다. (나 먹으라고 주는 것인가?)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아무 말이 없으니, 배가 고팠지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이거 드시오. 독약은 타지 않았으니까.」 한 사람의 말이었다. 권륜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먹을까 하다가 갑자기 몸이 서늘해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원래 어젯밤 옥여의가 시중을 들며 그를 침대 위에 누일 때 아래위 옷을 다 벗겨 알몸이 되었던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다른 사람 면전에서 이불을 빠져나와 어떻게 국수를 먹는단 말인가? 「제기랄, 독이 있을까 무서워 그러나? 그럼 내가 먹을 테니 구경이나 하라구. 그릇을 들어 국물이며 사리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권륜은 그 사람을 바라다보았다. 얼굴이 온통 흉터투성이요, 차디차 무서운 인상이었다. 「나 옷을 입지 않았으니 옷 한 벌만 구해다 주오.」 떨리는 말소리가 공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의 위엄이 아직은 남아 있는 말투였다. 그 사람이 아니꼽다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이 영감 그럴 시간이 없소.」 이 사람은 귀견수(鬼見愁) 십이랑 석쌍영이었다. 그의 인상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권륜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자기 목숨이 이들 손에 있으니 황제의 위엄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한참 동안 걸려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할 수가 있었다. 「당신은 홍화회 사람이오? 나 당신들 수령인 진가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소.」 「우리 문 사가를 당신이 괴롭혀 전신이 상처투성이요. 총타주님은 의원을 청해다 그를 치료해 주느라 당신을 만날 틈이 없소. 문사가의 부상이 완쾌된 뒤에나 봅시다.」 석쌍영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권륜은 혼자 생각해 보았다. 그의 상처가 완쾌되려면 몇 달이 걸릴지 아니면 몇 년이 걸릴지 알수 없는 노룻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암담한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사가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어 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에는 당신의 목숨과 바꿀 수밖에 없소.」 목소리가 거칠고 험상궂게 생긴 또 다른 사람의 말소리였다. 그 사람은 철탑(鐵塔) 양성협이었다. 권륜을 위협하자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 자기의 폐부에서 나온 말이었다. 권륜은 반박할 말이 없어 못 들은 체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주거니받거니 제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만주 오랑캐가 한인의 강산을 차지했다느니 관리와 토호들이 양민을 괴롭힌다는 등 권륜으로서는 귀를 막고 싶은 말들 뿐이었다. 점심때가 되자 맹건웅과 안건강 형제가 교대를 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관부에서 양민을 고문하는 독형에 대한 말만을 주고받았다. 무슨 대나무 송곳을 손톱 밑에 박는다느니, 쇠를 불에 구워 궁등이를 지진다느니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해 댔다. 마지막에 가서는ㅤ 맹건웅이 권륜 들으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장래 우리가 그들 탐관오리를 잡아다가 그놈들이 한 대로 한번 그 맛이 어떤가 보여줘야 해.」 이 말을 들은 안건강도 거들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잡아다가 그놈의 손톱 밑에 대나무 송곳을 박고 또 궁등이를 찢어 버리는 일이야.」 이날 권륜은 하루를 정말 일년처럼 지루하게 보냈다. 가깟으로 저녁때까지 버텼는데 교대해 온 사람들은 상씨쌍협이었다. 이들 형제는 우선 아무 말없이 술만 마시다가 거나하게 취하자 그때부터 강호에서 원수를 갚을 때 취하는 여러 가지 무시무시하고 참혹한 방법을 가지고 떠들었다. 무슨 흑호강 학채주가 실수로 체포되었다가 뒤에 그를 잡아간 조 지부의 눈을 빼 버렸다는 이야기며, 무슨 산서의 백마손칠이 자기 형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원수의 온 가족을 산 채로 매장해 버렸다는 이야기 등 끝도 없이 무궁무진했다. 권륜은 배도 고프고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이 주고받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형제 두 사람은 입심도 좋았다. 날이 밝도록 계속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입에 담지도 못할 험한 욕설을 백 번도 천 번도 더 들어야만 했다. 권륜은 온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상씨쌍협은 그 생김새도 무서워 마치 산 귀신 같아 등불 밑에서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조반산과 위춘화가 교대를 하러 왔다. 권륜은 이들 두 사람의 인상이 하나는 온화하고 또 하나는 잘생겨 어제의 그들처럼 흉악하지 않은데다가 또 모두 서호에서 만난 적이 있어 다소 안심이 되었다. 정말 이제는 허기가 져서 더 버틸 재간이 없어 조반산을 향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진가 성을 가진 당신들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으니 통보해 주시오. 「총타주님은 오늘 매우 바쁘십니다. 며칠 후에나 봅시다.」 조반산의 답변을 듣고 권륜은 혼자 생각했다. (이런 지루하고 곤욕스러운 날을 며칠 더 보내게 된다면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그러면 요기할 것이라도 좀 주시오.」 조반산이 좋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황상께서 수라를 드시겠다니 빨리 상을 올려라.」 위춘화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권륜은 반가웠다. 「의복도 한 벌 가져다 주시오.」 조반산이 또 큰소리로 외쳤다. 「황상께서 옷을 입으시겠다니 빨리 용포를 가져오너라.」 권륜은 흐뭇했다. 「사람이 괜찮군. 이름이 무언가? 장래 중상을 내려 줌세.」 조반산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권륜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다시 말을 꺼냈다. 「아! 기억이 나네. 암기 솜씨가 대단히 훌륭하더군.」 맹건웅이 옷 한 벌을 들고 들어와 이불 위에 올려놓았다. 권륜이 받아 보니 명나라때 한인의 복장이었다.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옷 한 벌밖에는 없습니다. 입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조반산의 말에 권륜은 생각했다. (나는 만청의 황제인데 어찌 명나라 때 한인의 복장을 입는단 말이냐? 그러나 의복을 입지 않고는 밥을 먹을 수가 없다.) 하루 낮 이틀 밤을 꼬박 굶었으니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되는 대로 주워 입었다. 한인의 복장을 입고 나니 비록 거북한 점도 있었지만 알몸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어나 몇 발짝 걷다가 창 밖을 바라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먼 곳에 돛단배가 몇 척 가물가물 떠 있었다. 대강이 바로 발 아래에 있는 것이다. 수목이 납작 땅 위에 엎드려 있고 밭 이랑이 바둑판처럼 보였다. 원래 높은 탑의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탑은 팔각형으로 지어진 것이다. 대강의 옆에 있다면 그것은 항주의 유명한 육화탑(六和塔)이 분명했다. 다시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사람이 나타나 알렸다. 「주안상을 차려 놓았으니 내려가 드시지요. 권륜이 조반산과 위춘화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중잉의 원탁 위에 술잔이며 젓가락이 얌전하게 놓여 있는데 그룻들이 모두 고상하고 깨끗했다. 탁자에는 사람들이 둥글게 앉아 있고 3개의 자리만 빈 채였다. 사람들은 그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모두들 일어나 공손히 두 손을 마주 잡고 맞이했다. 권륜은 그들이 갑자기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나오자 은근히 기뻤다. 무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 총타주님은 황상을 만나뵙자마자 오래 사귄 친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리로 모시고 와 며칠 묵어 가며 오랫동안 심금의 말씀을 나누고 싶다고 하셨는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 오시지 못했습니다. 빈도를 보고 대신 정중한 사과의 말씀을 올려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권륜은 사실 여부야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냐고 하고 말았다. 무진이 상좌를 권하자 권륜도 사양하지 않고 그냥 앉았다. 하인이 술 주전자를 내오자 무진이 받고 말했다. 「형제들이 모두 거친 무리들이라 황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을 하면서 술을 따랐다. 술잔에 술이 가득 차자 무진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지며 하인을 향해 욕을 했다. 「황상께 최상의 술을 드려야 하는데 어디서 이따위 맛도 없는 술을 가져왔느냐? 잔을 들어 하인의 얼굴에 술을 뿌렸다. 하인은 황공해하며 손을 비볐다. 「여긴 이런 술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인이 성 안에 가서 좋은 술을 사 오겠습니다.」 빨리 가라, 빨리 가. 이런 술은 우리같이 거친 사람들이야 그냥 마셔도 되지만 황상께서 어찌 마신단 말이냐. 서천굉이 주전자를 받고 여러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권륜 앞의 잔만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고는 계속 권륜을 향해 사과를 했다. 잠시 후 하인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요리를 네 접시 내왔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진이 이마를 찡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건 어느놈이 만들었느냐? 요리사가 두 발짝 앞으로 나섰다. 「소인이 만들었습니다.」 「넌 뭘하는 놈이냐? 어찌하여 황상께서 총애하시는 궁중 요리사 장안관(張安官)을 불러다 시키지 않았느냐? 항주의 이런 거친 음식을 어떻게 황상께 드시라고 내놓는단 말이냐? 무진이 신경질적으로 화를 냈다. 「이 몇 가지 요리는 색도 향도 좋은데 이걸 가지고 거칠다 할 수는 없지.」 권륜이 이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집어 접시의 음식을 집었다. 육비청이 그의 옆에 앉아 있다가 젓가락을 뺏으며 말을 꺼냈다. 「이런 거친 음식 드시면 아니 됩니다. 속을 버리지 마십시오.」 자기의 젓가락으로 권륜의 젓가락을 잡은 채 내력을 쓰며 가볍게 내려 놓았다. 권륜의 젓가락이 부러졌다. 군웅들은 육비청이 아무 내색도 없이 이렇게 나오자 모두들 진심으로 탄복했다. 무진은 생각했다. (저분의 사제인 장소중의 무공이 높다고 하지만 내공만은 자7의 사형에 미치지 못하겠는걸. 금리침의 명성이 헛되이 해진 것이 아니로군.) 권륜은 젓가락이 부러져 뻗을 수도,그렇다고 거둬들일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무안해서 얼굴이 빨개지며 부러진 젓가락을 상 위에 던졌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본 체 서로 음식을 권해가며 먹기 시작했다. 「빨리 가서 장안관을 찾아다 황상을 위해 요리를 만들게 하지않고 뭘 꾸물거리는 게냐? 황상께서 시장하시다. 알겠느냐? 서천굉이 요리사를 향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요리사가 쩔쩔매며 (네, 네) 하고 물러났다. 권륜은 그들이 자기를 고의로 놀리는 줄 알았다. 배에서 꾸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계속 나고 입 안의 침을 삼키기에 바빴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연방 맛이 있다고 칭찬했다. 화가 나고 약도 올랐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요리는 하나하나 계속해서 식탁에 올랐다. 탑 안에는 난로형 부져이 설치되어 있어 요리 냄새와 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권륜은 가까스로 그들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버텄다. 하인이 마지막으로 용정차를 내왔다. 이를 본 서천굉이 말을 했다. 「차는 그런대로 괜찮으니 황상께서도 한 잔 드시지요.」 권륜이 받아 두 잔을 거푸 마셨다. 따끈한 차가 빈 뱃속으로 들어가자 더욱 배가 고팠다. 장사근은 옆에서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다가 두들겼다. 「잘 먹었다! 그러자 조반산이 권륜을 바라다보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벌써 황상께 드실 잔칫상을 마련하라고 했으니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귀빈을 소홀히 대접하면 총타주님이 돌아오셔서 언짢아하신다고 무진은 옆에서 발을 구르며 야단이었다. 주중영은 철담을 가지고 놀며 쩔그렁쩔그렁 소리를 냈다. 「황상, 시장하시지요? 권륜은 코방귀를 뀔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배고프냐구? 난 잘 먹었는걸.」 장사근의 말에 서천굉이 맞장구를 쳤다. 「이걸 보고 (배부른 사람이 배고픈 사람 사정 모른다)고 하는 게요. 천하에 배고픈 백성이 몇천 몇만이오? 그러나 위정자가 언제 배고픈 백성의 고충을 생각이나 하나? 오늘 황상께서 약간 시장하셨으니 혹시 앞으로 백성이 배고플 때도 마찬가지겠지 하고 생각하실수도 있을께요. 「다른 사람은 달마다 해마다 굶어가며 평생토록 한 끼도 배불리 먹어 보지를 못해요. 한두 끼 못 먹었다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할께 있습니까? 상혁지의 말을 상백지가 받았다. 「우리 형제도 어렸을 때 두 달 동안 나무 껄질과 풀뿌리만 먹고 지냈는데 어디 한번 그 맛을 보시지.」 배고픈 것에 대해 말을 한다면 홍화회 군웅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라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화제가 얼마든지 있었다. 권륜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수없이 변했다. 그들의 말이 사실처럼 생생하게 들리며 자기도 모르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천하에 과연 그런 참담한 일이 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가난하다면 그건 정말 대단히 불행하겠구나.) 그는 들을수록 거북해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해 그 자리를 떠났다. 군웅들도 그를 막지 않았다. 「수라가 마련되는 대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서천굉이 말했지만 권륜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권륜은 갑자기 파와 고추에 버무린 양고기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과연 궁중 요리사인 장안관이 솜씨를 자랑하는 요리였다. 반갑고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이 정말 그를 데려왔단 말인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장안관이 나타나 이마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황상! 수라를 드시지요.」 「어떻게 자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권륜이 의아해서 물었다. 소인이 어제 극장에서 구경을 하고 나오다 모르는 사람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오늘 황상께서 이곳에 계시다며 저를 보고 모시라 하기에 왔습니다.」 권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오니 식탁 위에 평소 자기가 즐겨 먹던 음식이며 간식들이 수북수북 차려져 있었다. 「황상! 수라를 드시지요.」 무진 등이 이구동성으로 권했다. (이번에는 정말 먹게 할 모양이로군.) 권륜이 이런 생각을 하며 막 젓가락을 들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18, 9세 정도 되어 보이는 다 큰 처녀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와 주중영을 향해 말을 꺼냈다. 「아버지! 고양이가 배가 고픈가 봐요.」 바로 주기였다. 고양이가 주기의 손 안에서 몇 번 바둥거리다 식탁으로 뛰어오르며 몇 입 먹었다. 주기와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를 쫓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두 다리를 쭉 뻗으며 발버둥치다가 검은 피를 토하며 죽었다. 권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장안관이 놀라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황상------황상---,,,, 음식에 저들이,,,,,, 저들이 독을......, 잡수시면 아니 되옵니다.」 권륜은 기가 막혀 껄껄 웃었다. 네놈들이 대역무도하도다. 임금을 죽이려 들다니. 죽이겠으면 당장 죽일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음식에 독을 탄단 말이냐? 의자를 밀어붙이고 벌떡 일어났다. 「황상, 이 수라를 정말 안 드실 참이오? 무진의 말에 권륜이 벌컥 화를 냈다. 「대역무도한 놈들 같으니라구! 네놈들, 하늘도 무섭지 않느냐? 어디 한번 무슨 꼴을 당하나 두고보자.」 권륜은 고양이가 독살된 것을 보며 자기도 오늘 죽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거침없이 욕을 했다. 무진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탁 쳤다. 「대장부 생사가 다 운명에 달린 것인데 당신이 먹지 않으면 내가 먹겠소. 누가 나와 함께 먹을 배짱이 있는가? 말을 끝내고 젓가락을 집어 고양이가 건드린 음식을 집어다 입에 넣고 씹어먹었다. 군웅들이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탁 앞에 모였다. 「죽으면 죽는 것이지 뭐 대단할 것 있나? 닥치는 대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권륜은 이들 역적의 무리가 독이 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바라다보며 그들의 저의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잠시 동안에 군웅들은 바람이 구름을 쉽쓸어가듯 식탁 위의 음식을 깨끝이 먹어치웠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 그들이 음식에 독약을 탄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고양이에게 독약을 먹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권륜의 입에 거의 들어갈 뻔했던 음식이 모두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바탕 우롱까지 당한 셈이 되고 말았다. 원래 그날 군웅들은 항주의 배 위에서 문태래는 이미 구출했지만 권륜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상의들을 했다. 무진은 기왕 시작한 일이니 내친 김에 철두철미하게 하자며 차라리 권륜을 납치해다가 다시는 홍화회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자고 주장했다. 군웅들은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들이라 모두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다시 항주로 돌아왔는데 공교롭게도 서호 가운데서 선화국의 장원을 뽑는 날이라 권륜을 옥여의의 집으로 유인 , 납치한 것이었다. 군웅들은 권륜이 문태래를 잡아다 고문을 하여 반죽음을 만들어 놓은 것에 치를 떨었다. 낙빙이 부상을 당한 일, 주중영의 아들이 죽은 일, 여어동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일 등 어느 것 하나 권륜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상씨쌍협과 장사근 등은 권륜을 한 칼에 죽여 없애 버리거나 아니면 한바탕 몰매를 때려서라도 시원하게 분풀이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진가락과 서천굉 등이 간곡히 그들을 설득하여 겨우 이 정도의 곤욕에서 그치고 만 것이다. 첫째는 복수요, 둘째는 그의 기를 꺾어 진가락과 그가 마지막 담판을 할 때 이쪽 의사에 따르도록 하자는 의도가 다분했던 것이다. 권륜은 꼬박 이틀이나 굶었다. 그동안 항주의 관아는 발칵 뒤집혔다. 황상이 실종됐다는 사실을 숨긴 채 성 안을 샅샅이 이 잡듯 뒤졌다. 항주에서 밖으로 통하는 각 처의 수로와 육로를 봉쇄하여 한 명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도록 했고, 성 안이나 성 밖에서 이틀 동안 잡아 온 혐의범이 기천 명에 달해 감옥마다 만원이었다. 지방 관부에서는 엄청난 일을 당해 정신이 헷갈려 처치할 바를 몰라 허둥댔지만 이 틈을 노려 돈 많은 부호와 큰 장사치를 잡아다 감옥에 가두고 거액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이 충군애국의 큰 일이니 일후에 그 누가 추궁을 하거나 조사를 하랴 생각했던 것이었다. 황제가 이상야릇하게 실종이 되자 복강안 , 이가수 및 백진을 위시한 몇몇 호가 대신들은 이 이틀 동안 뜨거운 가마솥 위의 개미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홍화회의 土행이라고 단정하고 일이 벌어진 후 대거 각처를 수색해 보았다. 그러나 전 성의 홍화회 사람들은 숨을 사람은 숨고 성을 빠져나갈 사람은 다 빠져나가 한 명도 잡을 수가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 복강안은 또 사람들을 무서에 소집시켜 놓고 회의를 열었다. 사람마다 근심과 걱정으로 미간을 찡그린 채 속수무책, 이 일을 황태후에게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했다. 그러나 일단 보고하면 그 결과가 참담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전 시위 서대림의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달려와 백진의 귀에다 몇 마디 소근거렸다. 백진이 하얗게 질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런 일이 있었나? 복강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황상 침전 밖의 수위 여섯 명이 모두 살해되었답니다.」 서대림의 말을 들은 복강안은 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기뻤다. 「우리 가서 봅시다. 이 일이 반드시 황상의 실종과 관계가 있을 것이오. 어쩌면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사람들은 무서 안에 설치된 권륜의 침전으로 왔다. 서대림이 문을 안으로 밀었다. 순간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 여섯 구의 시체가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데 눈이 퉁겨나온 자, 가슴에 구멍이 뚫린 자------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권륜이 잠을 잘 때는 언제나 여섯 명의 시위가 침전 밖에서 밤을 지킨다. 비록 황제가 실종되었지만 시위는 언제나 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밤중에 모두 피살된 것이다. 백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여섯 명이 모두 그래도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들인데 어째 아무 소리도 없이 피살되고 말았을까요? 각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백진은 시체를 살피며 사인을 알아보려 했다. 중수(重手)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칼에 머리가 반쯤 잘려 나간 시체도 있었다. 그들 여섯 사람이 미처 병기를 뽑지도 못한 채 그냥 죽었다. 그렇다면 자객의 행동이 너무나 신속해 시위들이 방어를 하거나 경보를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백진이 이마를 찡그렸다. 「이 방의 면적으로 보아 집단적으로 싸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객은 많아야 2, 3명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일거에 여섯 명을 살해했으니 무공은 막강하다고 보아야겠지요.」 이 말에 이가수가 나섰다. 「황상이 이미 그들에게 납치된 마당에 무엇 때문에 이들 여섯명의 시위를 살해하러 왔겠소? 어젯밤의 자객과 황상을 납치한 자들이 한패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복강안도 이 의견에 동조했다. 「틀림없소 자객도 모반을 하고 황상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오. 그들은 황상이 여기 계시지 않은 걸 몰랐을 뿐이오.」 「두 분의 예측이 옳은 것 같습니다. 만약 홍화회가 시위를 살해한 것이라면 황상은 다른 사람이 납치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홍화회말고 누가 이토록 대담하게 이런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만약 황상을 납치한 것이 홍화회라면 그밖에 어디 또 이렇게 무공이 막강한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백진의 말이었다. 홍화회 사람들만을 상대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갑자기 또 다른 강적이 나타났다면 보통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시체를 살펴보는데 시체의 앞가슴에 개의 발톱에 할퀸 자국과 날카로운 이빨에 물진 흔적이 보였다. 급히 이가수를 보고 사람을 시켜 사냥개를 찾아보라고 했다. 1시간쯤 지난 뒤에 심부름꾼이 사냥꾼 3명과 사냥개 3마리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가수는 2천여 명의 병정을 소집해 출발할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백진이 사냥꾼을 보고 사냥개로 하여금 시체 주위에서 냄새를 맡게 한 뒤에 수색을 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냥개가 앞장을 서자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아 서호가로 왔다. 산양개가 호수를 향해 미친 듯이 짖어 대었다. 백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객이 개를 데리고 와 시위를 살해한 뒤에 앞장을 세워 황제를 찾아나선 것으로 알았다. 사냥개가 한바탕 짖어 댄 뒤에 호숫가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흔적을 찾았는지 언덕을 따라 달렸다. 호숫가의 축축한 진흙위에 예기했던 대로 사람과 개의 발자국이 보였다. 사냥개는 권륜이 올라왔던 언덕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성 안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성 안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냄새가 여러 가지였다. 사냥개가 이리저리 냄새를 맡다 보니 자연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다 찾아간 곳이 옥여의가 살고 있는 기원이었다. 기원에도 원래 파수병을 배치해 놓았었는데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과 실내에도 2명의 시위와 10여 명의 관병이 죽어 있었다. 자객의 행위가 너무나 악랄했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학살했는데 어떤 병졸은 목이 개에게 물려 거의 끊어져 있었다. 백진은 죽은 사람의 몸집과 상처 부위를 보고 체구가 굉장히 큰 개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관외의 커다란 맹견이 아니라면 서북(西北)에서 이리나 승냥이와 개를 교배시킨 혈종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자객은 관외나 서북의 변방에서 왔단 말인가? 6마리의 사냥개가 옥여의의 침실 안에서 몇 바퀴 맴돌았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을 마구 긁었다. 백진이 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개들은 여전히 계속 긁으며 짖어 댔다. 병졸을 시켜 칼로 바닥을 들어올려 보라고 명령했다. 돌판의 바닥이 드러났다. 「빨리 들어. 백진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병졸이 돌판을 들어 치우자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사냥개가 우르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가수와 백진은 바닥에 지하도가 나타나자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수천 명의 병사가 기원의 사방은 물론 지붕 위까지 올라가 파수를 보고 있었는데 황제가 귀신도 모르게 실종되었던 것이다. 원래 자객은 지하도를 통해 들어왔다 나간 것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병졸들을 인솔하고 쫓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