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淸香妃 목-차 - 육화탑-六和塔) 안의 황제 노부부의 활약 혼례 준비 신방에 든 도둑 외나무다리의 원수 금적수재의 행방 급히 그린 기호(記號) 비운(悲運)의 여인 꽃을 먹는 소녀 청과 위구르의 대결 향향 공주의 결단 적진(敵陣) 속의 한 쌍 때를 기다리며 여장부(女丈夫)의 계략 세 장수의 곤고 사부 찾아 가는 먼 길 육화탑(六和塔) 안의 황제 권륜은 육화탑에서 이틀 낮 이틀 밤을 꼬박 굶은데다 또 경악속에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갑자기 어린 서동이 나타나 이런 말을 했다. 「도련님께서 나눌 말씀이 있으시다고 동방 나리를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권륜은 그가 진가락의 서동인 심연임을 알아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진가락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반기며 절을 했다. 권륜도 답례를 하고 실내로 들어섰다. 심연이 차를 올렸다. 「잡수실 것을 빨리 가져오너라.」 진가락의 말을 들은 심연이 즉시 쟁반을 하나 받쳐 들고 나왔다. 쟁반에는 접시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했다. 쟁반을 내려놓기도 전에 냄새가 침을 고이게 했다. 심연이 젓가락 두 쌍과 술잔 두 개를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소제 부상당한 친구를 보러 갔다 오느라 이렇게 늦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진가락의 말에 권륜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별로 맛은 없습니다만 우선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권륜은 굶다 지쳐 이젠 뱃가죽이 거의 등에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그는 강건한 체격이라 평소 음식을 잘 먹었다. 그런데 이틀 밤 이틀 낮을 굶었으니 어찌 더 참을 수 있겠는가? 진가락이 먼저 젖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듯 젓가락이 오락가락, 순식간에 네 개의 접시를 다 비우고 나서 마지막 남은 국그룻까지 깨끝이 비웠다. 진가락은 접시마다 하나씩만 먹고는 젓가락을 놓았다. 그는 권륜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 보며 미소만 짓고 있었다. 권륜은 다 먹고 난 뒤 말할 수 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잔 속에 파랗게 우러난 용정차의 가는 잎을 그윽히 바라다보며 천천히 마셨다. 용정차를 마시자 입 안이 개운해지며 은은한 차 향이 온몸에 퍼지는 듯 상쾌했다. 진가락이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밑에서 망을 보고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삼자가 들을 리도 없구요. 진가락의 말에 권륜이 얼굴을 반짝 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까지 납치해다 놓고 그래 어쩔 셈인가? 진가락은 앞으로 두 걸음 내디디며 권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권륜은 그의 눈이 자기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진가락이 말했다. 「형님, 오늘까지도 그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이 말을 하는 진가락의 말소리는 부드럽고 간절했지만 권륜의 귀에는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진가락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권륜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우리는 친형제요, 골육입니다. 형님, 속이지 마세요. 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권륜은 홍화회가 문태래를 구출해 나간 후 이 엄청난 비밀을 더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진가락이 갑자기 (형님)이라고 부르자 너무나 놀라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 의자 위에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형님이 해령에 가셔서 성묘를 하고, 대대적으로 해당을 수리하고, 또 아버님과 어머님을 조신(潮神)과 조신낭낭으로 모시는 것을 보고 근본을 잊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형님, 이 거올에 형님의 모습을 한번 비추어 보세요.」 하고 말하며 창 위의 그림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기자 그림이 위로 말려 올라가며 그 자리에 커다란 거울이 하나 나타났다. 권륜은 일어나 거을 앞에 섰다. 그는 한인의 옷을 입은데다 얼굴이나 표정에서도 만주족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자기 옆에 서 있는 진가락을 바라다보았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만 날 뿐 용모는 정말 닮은 데가 많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진가락이 말했다. 「형님, 우리는 형제이기 전에 형제의 정도 모른 채 골육상잔만 일삼고 지냈으니 부모님께서 지하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서로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권륜은 목이 타고 가슴이 두근거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 원래 너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더냐? 진가락은 시선을 돌려 대강을 바라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권륜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미 조사해 보았더니 네가 향시에 합격했더구나.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네 재주나 학문을 가지고 회시(會誌)나 전시(殿試)에 응시한다면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 것이다. 장래 독투, 상서(尙書), 대학사(大學士)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 너를 임명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이것은 가문이나 나라를 위해서도 너 자신이나 나에게도 모두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불충불효 막심하게도 대역무도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 이 말을 들은 진가락이 벌떡 일어났다. 형님, 내 형님을 보고 불충불효 대역무도하다고 하지 않았는데, 어찌 불충이란 말을 형님이 오히려 나를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권륜이 오히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하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하는 것이 법도인데 임금을 거역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역이다. 내가 임금인데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형님은 분명히 한족(漢族)인데 오랑캐에게 투항을 하고도 그래 그게 충이란 말입니까?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때 잘 모시지 못했고, 아버님께서 조정에 계실 때는 날마다 형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리셨는데 그래 마음이 편하셨단 말이오? 그래 그것이 효란 말입니까? 진가락의 신랄한 추궁에 권륜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송 맺혔다. 「내 본래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너희 홍화회의 세상 떠난 우두머리 우만정이 금년 봄 궁에 들어왔을 때 처음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 사실을 믿을망정 의심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잘못 믿었다면 어리석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불효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래서 내가 해령으로 성묘를 갔던 것이다.」 사실 금년 봄 우만정이 문태래를 데리고 입궁했을 때 진 부인의 편지 한 통을 권륜에게 전달했었다. 편지의 내용 가운데 당시의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또 그의 왼쪽 넓적다리에 붉은 점이 있다는 것도 밝혔다.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중거였다. 그래서 권륜도 십중팔구 믿고 있었다. 또한 그는 우만정이 돌아가자 당년의 유모였던 요비를 몰래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고 더욱 확실히 알았다. 원래 강희(康熙) 50년 8윌 열사흗날, 사황자(四皇子) 윤정의 측비(側妃)인 운호록씨가 딸을 낳았다. 얼마 뒤 대신 진세관의 부인도 같은 날 아기를 낳았다는 소문을 듣고 윤정과 측비는 사람을 시켜 진세관의 아기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데리고 들어갔던 아이는 남자가 분명했는데 데리고 나온 아이는 여자였던 것이다. 진세관은 사황자가 의식적으로 아기를 바꾼 줄 알고 매우 놀랐지만 이 사실을 한마디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당시 황제의 여러 황자들은 권력과 이익을 차지하려고 드러내 놓고 서로 다투고 암투를 벌여 천하에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들은 대신들을 포섭하여 재산을 모으고 사당(私黨)까지 조직했다. 윤정은 부황이 아직까지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형제들 가운데 윤당, 윤사, 윤아 등의 재간은 모두 자신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각자의 세력이 엇비슷했다. 황제가 황태자를 선택할 때는 여러 황자의 재간만 비교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들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황태자를 지명하는 것은 만년지계로서 황자가 죽으면 황손이 바로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황자가 영명한데 황손이 어리석다면 이는 결코 원대한 계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윤정은 이때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나약하여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윤정은 이것을 큰 약점으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하나 더 낳았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지만 딸이 태어난 것이다. 윤정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황제가 되고 싶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진세관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윤정은 여러 황자 가운데서도 그 수단이 악착같았다. 진세관이 감히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나 처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데려간 아이의 이름을 홍력이라 했으니 그가 바로 지금의 권륜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감했다. 여섯 살 때 이미 '애련설'(愛蓮說)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홍력이 아홉 살 때 한 가지 일로 말미암아 강희 황제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이해에 홍력은 할아버지를 따라 열하(熱河)로 사냥을 나갔다. 몰잇군들이 산속에서 큰 흑곰 한 마리를 후려서 황제 앞으로 몰았다. 황제가 화창(火槍)을 들어 한 방에 흑곰의 머리를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황제가 화창을쏠 때 홍력은 말을 탄 채 옆에 있다가 자기도 화창을 들어 겨냥했다. 그 큰 흑곰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너도 가서 한 방 쏴 보려무나.」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에 한번 시켜 본 것이다. 비록 자기가 쏘아 죽이기는 했지만 장래 홍력이 아홉 살 때 큰 곰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면 군신들 앞에서 더욱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홍력은 말에서 내려 흑곰 앞으로 다가섰다. 「너를 쏘아 죽이겠다. 홍력이 이렇게 말하며 흑곰의 배를 겨냥하고 한방 쏘았다. 거기 있던 여러 시위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황제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홍력이 몸을 돌이켜 말에 올라타려고 하는 순간 그 흑곰이 벌떡 일어나 강희가 타고 있는 말 앞으로 무섭게 달려들었다. 시위들이 놀라 일제히 화창을 발사하자 곰은 그제야 완전히 죽어 넘어졌다. 황제도 놀라 시위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큰일날 뻔했다. 이 아이가 복을 많이 타고났구나. 만약 이 아이가 흑곰 앞에 있을 때 그 곰이 일어났다면 어찌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느냐? 이때부터 황제는 홍력이 큰 복을 타고난 아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홍력이 문무를 겸비한 재질을 보여 여러 손자들 가운데서 각별한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윤정이 뒤에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 가짜 아들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옹정이 황제가 되면서부터 해령 진씨 집안의 영화와 은총은 끝이 없었다. 옹정의 이와 같은 은총은 보답의 의미와 환심을 사자는 저의가 동시에 작용한 것이다. 그래야만 이 크나큰 비밀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홍력과 바뀐 진씨 집의 딸은 원래 공주였지만 뒤에 상숙의 장부에게 시집을 갔다. 장부의 부친인 장정석은 옹정 초년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임명되었다. 그때 진세관은 산동순무로 있었는데, 이들 두 사람은 치수(治水)에 공이 많았다. 진세관과 장정석은 뒤에 모두 내각(內閣)으로 들어왔다. 장부는 호부상서(戶部尙書) , 예부상서 , 이부상서를 거쳐 대학사(大學士)의 직위에까지 올랐다. 권륜이 황제가 되었어도 장씨 집안의 영화와 은총은 시들 줄을 몰랐다. 상숙의 촌로들은 장부, 진 부인이 살던 저택을 당지에서는 로두 '공주'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권륜이 처음 옹친왕부로 안겨 들어왔을 때 계속 울기만 할 뿐 젖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윤정의 측비인 유호록씨는 어쩔 수 없이 원래 권륜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 요씨를 부중으로 불러들였다. 그제야 권륜이 울음을 멈추고 젖을 먹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서 권륜이 갑자기 이 일을 요씨에게 물었다. 요씨는 원래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로 보아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믿었다. 요씨는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어 다 털어놓고야 말았다. 그녀는 이때 나이가 벌써 60여 세였다. 그날 밤 요씨는 권륜이 보낸 사람에 의해 교살되었다. 그의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권륜은 자기를 길러 준 요씨의 노고를 생각하며 내심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형님, 자신이 자신을 보셔도 그래 어디 만주족 같은 데가 있습니까? 그런데 뭘 더 의심하고 말고 할 것이 있습니까? 권륜은 침묵만 지킬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진가락이 말을 이었다. 「형님은 분명히 한인입니다. 한인의 금수강산이 오랑캐의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리 황제의 자손을 괴롭히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어찌 불충이요, 불효요, 대역무도가 아니겠습니까? 권륜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자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왔다. 「내 오늘 이미 네 손에 잡혀 와 있으니 죽이겠으면 죽일 일이지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리도 많은가? 「형님, 우리가 해당에서 이미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서로 해치지 말자구요. 아직도 그 말이 귓전에 생생한데 제가 어찌 그 약속을 저버리겠습니까? 하물며 이제 친형제라는 사실을 서로가 알지 않았습니까? 형제가 만나 반가운 마음을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것인데 제가 어찌 형님을 해친단 말입니까? 진가락은 부드럽게 말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럼 나를 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라는 말이냐? 진가락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황제의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불충불효한 황제가 아니라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영명한 개국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개국의 주인이라니? 권륜은 의아해서 물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만청의 황제가 아니라 한인의 황제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권륜은 이 말을 듣고서야 그의 의도를 알았다. 나를 보고 만주족을 관외(關外)로 내쫓으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황제로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원수를 아비로 삼고 적에게 빌붙어 후세에 욕을 먹느니 차라리 분발하여 만대를 두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공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권륜은 본래 공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진가락은 권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말에 설득되고 있음을 알았다. 형님이 지금 황제로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상의 음덕을 승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저기 저 사람을 보세요.」 권륜은 창가로 걸어가 진가락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내려다 보았다. 멀리 있는 밭에서 한 농부가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진가락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저 사람이 옹친왕부에서 태어나고 형님이 농가에서 태어났다면, 저 사람은 황제가 되었을 것이며 형님은 지금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권륜은 여태까지 자신은 천부적인 덕을 타고나 다른 사람과는 비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이제 진가락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듯한 말이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기껏 살아 보아야 백년도 되지 않는 세월입니다. 그 백년도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만약 공을 세우거나 사업을 일으키지 못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나 풀처럼 시들고 썩어 버리는 것입니다. 역대 제황들의 예를 들어 봐도 한고조 당태종 . 명태조 같은 분들은 진짜 영웅이요, 진짜 호걸이라 할 수 있지요. 또한 원의 칭기즈칸, 청의 태조인 누르하치, 태종황태극 (大宗皇太極) 등은 일대의 군주라 할 수 있구요. 한의 헌제(獻冷- 명의 숭정 같은 사람들은 망국의 군주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이 용렬하니 거론할 필요나 있겠습니까? 진가락의 이와 같은 말은 한마디 한마디 권륜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자기가 한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몇 차례나 궁중과 조정에서 한인의 의관으로 바꾸어 입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태후와 만주의 대신에 의해 저지되었다. 만약 정말 진가락의 말대로 만주족을 관외로 내쫓고 한인의 천하를 회복만 한다면 자기는 바로 진씨 성을 가진 황조의 개국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그 공업(功業)이야말로 유방이나 이세민(李世民)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권륜이 진가락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한바탕 요란하게 들렸다. 진가락이 두 눈썹을 치켜 올리고 밖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체구가 굉장히 큰 4마리의 개가 육화탑을 향해 달려오고 그 뒤로 사람 둘이 쫓아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과 4마리의 개가 탑 아래까지 달려왔다. 누구냐고 날카롭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육화탑의 높이는 13층 이었는데 권륜과 진가락은 12층에 있었다. 탑 아래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어 아래에서 하는 말이 잘 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두 사람과 4마리의 개가 탑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4마리의 개가 다시 나와 달아나고 있었다. 맹건웅이 손에 탄궁을 끼고 나와 한바탕 연주탄을 쏘아 斗마리의 개를 쫓고 있었다.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미친 듯 짖어 댔다. 진가락이 그 두 사람과 4마리 개의 정체를 몰라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데 갑자기 탑 안에서 사람 하나가 달려나갔다. 몸놀림이 제빠르기 짝이 없었다. 손을 뻗어 맹건웅의 활을 뺏고 좌장으로 그의 목을 쳤다. 맹건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급히 손을 들어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탄궁의 끝으로 맹건웅의 혈도를 찌르자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그 사람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다시 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가 안으로 뛰어들면서 사람을 하나 집어 던졌다. 벌렁 넘어져 꼼짝 못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안건강이었다. 이때 탑 안에서 마선균 , 마대정 부자가 경보를 알리려고 부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권륜은 그 두 사람이 자기를 구출하러 온 것으로 알고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진가락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달리 아무런 동정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만 온 것을 알았다. 마씨 부자가 뒤늦게 발견하고 경보를 발한 것도 적의 행동이 너무나 민첩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의 손과 몸놀림이 이토록 용감하고 민첩한 것을 보면 틀림없이 대내의 시위 가운데 고수가 분명한데 어찌 보면 금구철장 백진보다 한 수 더 위일 듯 싶었다. 4마리의 맹견이 다시 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자의 질타성, 소년의 외침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2층에서 파수를 보던 주기와 심연이 맹견을 상대하는 소리였다. 이윽고 놀라는 소리와 함께 2층의 창을 통해 2개의 병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하나는 단도요, 다른 하나는 연편이었다. 진가락은 그것이 주기와 심연이 쓰던 병기임을 알아보았다. 적이 그들의 병기를 랫어 던졌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혹시 다치지나 않았는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권륜은 진가락의 표정이 태연자약했었는데 이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변하자 자기 수하의 사람이 유리한 것 같아 은근히 기뻤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몸집이 큰 사내가 철장을 휘두르며 4마리의 맹견을 탑 안에서 내쫓았다. 주기와 심염이 뛰어나와 맹건웅과 안건강을 부축해 들였다, 4마리의 맹견이 어찌나 사나운지 표범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중의 한 마리는 철장에 맞아 뒷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덤벼들어 물려고 했다. 장사근이 4마리의 맹견에 포위된 채 쩔쩔맬 뿐 이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연이 탑 안에서 달려나오며 두 손을 휘둘러 10여 개의 벽돌을 개를 향해 던졌다. 장사근이 이 틈을 노려 철장으로 그중 한 마리의 궁등이를 치자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주기도 탑 밖으로 나와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이제 4마리의 맹견이 장사근과 심연에 의해 맞아 죽을 판이었다. 이때 갑자기 6층의 창구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쏘리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컸다. 4마리의 개가 휘파람 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달렸다. 주기와 심연이 병기를 찾아 들고 탑 아래를 지켰다. 적의 재차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진가락은 적이 6층의 창구에서 개를 지휘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4층의 십이가와 5층의 구가, 6층의 팔가가 그들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큰일났구나!)하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적의 무예가 막강한데다 두 사람이 협력을 하고 있는데 반해 아측은 각 층마다 한 사람씩 배치해 놓았으니 막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4명을 집합시켜 9충에서 막으라는 명령을 내리려 하는데 갑자기 7층에서 한 사람이 도망쳐 나왔다. 바로 서천굉이었다. 그가 막 창문 밖으로 뛰어나오려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어 그의 왼발을 꽉 잡았다. 진가락이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3개의 바둑돌을 던지려고 하는데 서천굉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표창을 받아라. 오른손이 번쩍 들리자 적이 고개를 움츠렸다. 암기를 쏜 것이 아니라, 허초였던 것이다. 적이 멈칫하는 사이 서천굉이 몸부림쳐 왼발에 신었던 신을 벗어 버림과 동시에 벌써 보탑의 처마 끝에 나와 서 있었다. 이때는 거리가 가까워 적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키가 서천굉보다 작은데 회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백발이 성성한 노파였다. 그녀는 등에 단검(單劍)을 꽂은 채 두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서천굉을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서천굉의 오른손에 칼이 없는 것으로 보아 벌써 적에게 빼앗긴 것 같았다. 왼손의 철괴로 일부당관의 태세를 취해 앞가슴을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표창을 받아라. 「어림없는 소리 ! 나를 또 속이려고 하는구나.」 노파가 욕을 퍼부으며 손을 모아 철괴를 뺏으려 했다. 그러나 서천굉의 동작은 허초가 아니었다. 지붕 위의 기왓장을 벗겨 들어 노파를 향해 던졌다. 노파는 피할 겨를이 없자 손바닥으로 기왓장을 쳤다. 기왓장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8층을 지키고 있던 상씨쌍협이 다른 한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는지 -시종 도우러 나오지를 않았다. 서천굉의 무공이 노파의 실력에 미치지 못해 수 초를 겨루는 동안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서천굉은 양동 작전을 펴 상대방을 교란시키며 수 초를 버티었다. 주기가 고개를 들어 서천굉이 탑 모서리에서 그 노파와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런데 상대가 되지 않자 다급해서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아버지! 빨리 손을 쓰세요. 주중영은 10층을 지키고 있다가 벌써 두 제자가 참패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 수양 아들까지 또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몸을 밖으로 내밀며 외쳤다. 「어느 놈이 여기서 소란을 부리는 게냐? 주중영은 2개의 철담을 노파를 향해 앞뒤로 던졌다. 철담이 이르기도 전에 노파가 갑자기 나는 듯 아래로 뛰어내리며, 왼손의 손바닥으로 기왓장을 살짝 누르고 몸을 솟구쳐 6층 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쨍쨍쨍 하는 어지러운 소리 속에 수전이며 철련자 ,강표 ,배노 등 온갖 암기가 8층의 지붕 위에 떨어졌다. 9층을 지키고 있던 조반산이 서천굉을 돕기 위해 발사한 것들이었다. 주중영의 철담이 공기를 가르고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탑 모서리 연목에 맞아 연목이 부러져 나갔다. 그 중 서천굉이 하나를 주웠고, 다른 하나의 철담은 기왓골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주중영이 아래를 향해 몸을 솟구쳐 철담을 주우려 했다 그런데, 발을 붙이기도 전에 장풍이 갑자기 그의 가슴을 습격했다. 그의 몸이 허공에 뜬 상태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장풍이 막강해 만약 손으로 이를 막으려 하다가는 오히려 땅바닥에 떨어져 묵사발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다. 허공에서는 적의 장풍의 힘을 반대로 이용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위급한 가운데 금배대도를 뽑아 얼굴 앞에 세우고 몸째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일 장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겠다는 의도였다. 적은 주중영이 덮치자 몸을 옆으로 살짝 피하며 왼손으로 그의 팔목을 나꿔채려 했다. 주중영은 그의 수법이 빠르고 매서운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펄쩍 뛰어서 피하며 보니 상씨쌍협이 벌써 창 안에서 튀어나와 그 사람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그 사람은 체격이 이상하리만큼 크고 우람했으나 상씨쌍협은 홀쭉한 게 길기만 했다. 매부리코에 주사처럼 붉은 얼굴색, 빤질빤질한 대머리가 독특했다. 주중영은 이 사람의 늠름한 모습과 뛰어난 무공을 보며 생각했다. (이 같은 인물이 청정의 주구 노룻을 하다니!) 그 대머리 영감의 쌍장이 바람처럼 매섭고 빠른데 상씨쌍협은 탑 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2대 1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주중영은 상씨 형제가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질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서 도을 필요까지는 없겠지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6층의 백발 노파가 주기를 공격하는데 주기는 속수무책으로 몰리고만 있었다. 「달아나요, 달아나! 서천굉의 외침이었다. 주기는 서천굉의 말을 잘 들었다. 그래서 즉시 그 자리를 피했다. 노파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대들려고 하는데 주기가 그 자리에 섰다. 「당신이 감히 나를 쫓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림없는 수작 하지 말아요. 여긴 복병이 숨어 있단 말예요.」 주기가 약을 올리자 노파는 두 발로 땅을 찍으며 주기를 향해 날았다. 놀란 주기가 몸을 돌려 달아났다. 주중영은 오른손의 철담을 노파의 등을 향해 날렸다. 노파가 주기를 거의 쫓아가 막 손을 뻗어 등을 낚워채려고 하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암기가 공기를 찢는 매서운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받을 수가 없어 즉시 경공 가운데 한강독조의 초수를 썼다. 그래서 몸을 밖으로 빼어 전신을 탑 밖의 허공에 내놓은 채 왼쪽 발만 탑의 처마 끝에 걸었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철담이 탑 끝에 맞아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벽돌과 기와 가루가 흩어졌다. 그 노파는 철담을 피하고 나서 다시 주기를 쫓아갔다. 주중영이 6층으로 뛰어내리며 칼을 비스듬히 들어 막았다. 이때 주기는 벌써 탑 뒤로 달아나 있었다. 두 사람이 쫓고 쫓기며 탑을 끼고 돌았다. 주기는 서천굉과 약혼을 한 뒤 남편 될 사람이 워낙 똑똑하니 자기가 둔하게 굴다가는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을 당해서도 그전처럼 제멋대로 굴지 않았다. 이번에도 서천굉의 피하라는 말을 듣고 달아나면서도 기회를 보아 반격도 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주중영이 뛰어내려 막 자세를 바로잡는데 딸이 탑 뒤에서 돌아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노파가 여전히 빈 손으로 그녀의 뒤를 추적했다. 그런데 노파의 등뒤에서 또 한 사람이 쫓아나오며 쌍구를 휘둘러 노파의 등을 찌르려 했지만 한 자 정도 모자랐다. 용감하게 대들어 주기를 구출하려고 나선 사람은 바로 구명금표자 위춘화였다. 이때 양성협, 석쌍영 등도 아래층에서부터 쫓아 올라왔다. 주중영이 달려들어 주기를 빼내며 금도를 휘둘렀다. 노파는 주중영의 칼 쓰는 솜씨가 정교함을 보고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뒤로 세 발짝 물러서며 자기 칼을 뽑아 들려고 했다. 이때 갑자기 위층에 있던 대머리 영감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탑 꼭대기에서 공격해 내려갈 테니 당신은 아래서부터 공격해 올라오시오. 목소리가 종을 치듯 쩌렁쩌렁 울렸다. 노파가 듣더니 다른 사람과의 상대를 포기한 채 몸을 솟구쳐 왼손으로 탑 가장자리를 살짝 눌러 그 힘을 이용해 8층으로 올라섰다. 8층에는 막을 사람이 없었다. 노파는 같은 방법으로 9층까지 뛰어올랐다. 그녀는 아래층에서 위층을 향해 올라서며 각 층을 지키는 사람들의 무공이 위로 올라갈수록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록 주중영의 철담과 칼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가 소림의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평지에서 대결한다 해도 결코 자신에 비해 약할 것 같지를 않았다. 그런데 위에는 더 막강한 적이 있을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노파는 몸에 앞서 칼부터 디밀었다. 정신을 가다듬었는데도 갑자기 손이 떨리며 장검이 적의 병기에 부딪쳐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했다. 노파는 또 강적을 만났음을 알았다. 장검을 앞으로 내밀어 상대방 병기의 힘을 피했다. 그녀는 정면으로 대들 수가 없어 비스듬히 왼쪽으로 세 발짝 뛰다가 갑자기 몸을 돌이켜 오른쪽으로 달려나가 몸을 날려 10층으로 올라섰다. 차디찬 바람이 일어나면서 칼이 노파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 노파는 공격으로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쉭쉭쉭 칼을 세 번 휘둘러 상대방의 급소를 노렸다. 상대방은 태극검(太極劍) 가운데 운휘삼무의 세 가지 방식으로 공격을 피했다. 노파는 상대가 가볍게 자기의 공격을 피하자 내가검술의 삼매경을 터득한 사람으로 알았다. 상대방이 반격을 하기 전에 한 발 뛰어 피하며 그를 바라다 보았다. 몸집이 약간 뚱뚱한 중년의 남자였는데, 코밑 수염이 더부룩하고 귀밑머리가 살짝 흰 사람이 왼손에 검을 쥔 그녀를 응시할 뿐 쫓아오지는 않았다. 노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토록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처지에 아깝구나 아까워.」 그 사람은 바로 천수여래(千手如來) 조반산이었다. 그 또한 백발 노파의 행동이 재빠른 것을 보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검을 들고 한 차례 맞붙어 싸웠다. 겐새 이 권륜은 두 사람이 공격해 올라오는 것을 보며 반가운 마음을 누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가락은 워낙 대담한 인물이라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의자 하나를 끌어다 창 앞에 놓고 거기 앉아서 태연하게 관전을 했다. 권륜은 자기를 구출하러 온 사람이 다만 두 명뿐이라 그 두 사람이 설마 홍화회의 다수를 이길 수 있으랴 하는 자신감 때문에 진가락이 태연자약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구출하러 오기 전에는 혹시 그 누가 자기를 구출하러 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대했었는데, 막상 오니 또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말 달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 왔다. 계단에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심연이 달려와 홍화회의 은어로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보고했다. 근처를 순회하며 적정을 탐지하던 두목이 이런 보고를 전해 왔습니다. 2천여 명의 청병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방향이 바로 이 육화탑이랍니다.」 진가락이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심연은 다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권륜은 심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긴장한 표정으로 보아 그들에게 불리한 소식임에 틀림없다고 눈치챘다. 멀리 바라다보니 불길 같은 빨간 단풍나무 사이로 백기가 나부끼는 것이 얼펏 시야에 들어왔다. 백기 위에는 분명 이(李)자가 씌어 있었다. 권륜은 반가웠다. 이가수가 병사들을 데리고 자기를 구하러 온 것이다. 진가락이 창 앞으로 몸을 숙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마 대가, 탑 안으로 퇴각하시오. 그리고 활과 화살을 준비하시오.」 마선균이 탑 아래에서 대답을 했다. 진가락이 외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붉은 얼굴의 대머리 영감이 계속 위층으로 향해 달려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상씨쌍협과 주중영이 바짝 그 뒤를 쫓았다. 그 영감은 탑을 끼고 돌다가 뒤에서 너무 바짝 쫓아오면 몸을 돌이켜 몇 번 상대를 하다가 틈이 생기면 다시 한 층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저쪽의 조반산과 노파의 대결도 치열했다. 대머리 영감이 벌써 12층으로 올라섰다. 상혁지는 그 기세가 맹렬함을 보았다. 12층은 바로 권륜을 감시하는 곳이었다. 다시 그 뒤를 쫓지 않고 허리춤에서 비조를 꺼내 허공에 휘두르며 창 밖에 섰다. 상백지는 쌍장을 비스듬히 들고 그가 선 곳 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형제 두 사람이 진세를 바로잡고 창 박을 봉쇠한 것이었다. 비조는 먼 곳을, 육장은 가까운 곳을 공격하기에 알맞았다. 그 영감은 정세를 판단해 보고 이쪽으로 오지 않고 직접 탑 꼭대기로 올라섰다. 주중영은 쫓아갈 수가 없자 창을 통해 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권륜은 그가 칼을 들고 뛰어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는 탑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계단 위에 서서 적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노부부의 활약 조반산과 그 노파의 공격과 반격은 막상막하여서 순식간에 1백여 초를 주고받았다. 노파의 검법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조반산은 태극쾌겅(太極快劍)의 술수로 맞서며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백발이 성성한데다 여자인데도 이길 수가 없다니?) 그는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암기를 꺼내 승리를 하고 싶었지만 워낙 노파의 공격이 급박해 틈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노파의 장검이 그의 왼쪽 소매를 북 찢었다. 비록 피부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조반산은 꾀나 놀랐다. 서천굉,양성협 ,위춘화,석쌍영 ,주기 등이 병기를 든 채 조반산과 그 노파의 치열한 대결을 지켜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광이 번쩍번쩍 너무나 치열해 눈 깜짝할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조반산의 왼쪽 소매가 노파의 장검에 찢어진 것이었다. 토두들 깜짝 놀랐다. 위춘화가 쌍구를 펴 들고 도우려 했다. 조반산이 이광사석(李廣射石)의 검법을 쓰자 노파가 힘이 밀려 뒤로 한 발 피했다. 이 틈을 노려 조반산이 펄쩍 뛰어 옆으로 물러섰다. '노마나님의 솜씨도 과연 고명하오. e제, 올라가시오. 위춘화는 영문을 몰라 발길을 멈췄다. 조반산은 소매를 찢기자 더 싸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육비청 육 대가가 11층을 지키고 계시다. 헤어진지 10여 년. 틀림없이 무공에 정진하셨을 것이니 이 노파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형제들이 그분을 존경하고 있지만 아직 그분의 탁월한 무예를 본 적이 없다.) 노파를 올라가도록 내버려둠으로 해서 친한 벗인 육비청에게 체면과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한번 주자는 의도였다. 노파는 그가 길을 비켜주자 검을 들어 인사를 했다. 「훌륭한 검법이었소.」 그리고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조 삼숙님, 지지도 않았는데 뭐 그렇게까지 겸양을 하세요? 주기의 이런 말에 조반산이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노파의 검법이 정말 훌륭해. 우리, 육 나리의 무당파 무공이나 보러 올라가지. 그런데 주 소저, 왜 나를 보고 삼숙이라 불렀지? 칠제가 나를 삼가라고 하는데.」 주기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버지를 보아 그렇게 불렀어요.」 그러자 양성협이 그를 놀렸다. 「그러면 저 사람은 칠숙이라 불러야겠군.」 말을 하면서 서천굉을 가리켰다. 「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각자 아측이 사람이 많아 적의 무공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우스운 이야기를 나누며 탑 위로 달려갔다. 9층과 10층은 조용할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11층을 향해 뛰어오르며 육비청과 그 노파가 틀림없이 싸우고 있을 것으로 알았다.그런데 방안이 텅 빈 채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다시 위층을 향해 뛰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칼과 검이 부딪치는 쨍그렁 소리가 계속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중영이 금배대도를 휘두르며 그 노파와 격전을 버리고 있었다. 하나는 칼이 커서 묵중했고 다른 하나는 검이 가벼워 날렵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격전이었다. 진가락은 권륜을 한 귀퉁이로 끌고 가 앉아서 관전하고 있었다. 서천굉이 손짓을 하자 양성협과 석쌍영 두 사람이 창문을 막고 지켰다. 「병기를 버리면 죽이지는 않겠소. 서천굉이 외쳤다. 노파는 자신이 포위된 것을 보고도 전연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계속 검을 휘두르고 찌르며 진격만 했다. 「저 노파 검술이 그 누군가를 닮았는데, 그래 보여요? 주기의 말을 서천굉이 받았다. 「틀림없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노파는 주중영을 공격하여 한 걸음 물러서게 하더니 갑자기 책상을 끌어다 가슴을 가리고 창에 기대어 섰다. 주중영이 급히 내려치는 칼이 하마터면 책상을 칠 뻔했다. 노파가 고개를 돌려 권륜을 쳐다보고 물었다. 「당신이 황제요? 「내가 황제다, 내가 황제다. 구원병이 도착했는가? 이 말을 들은 노파가 책상 위에 뛰어오르더니 돌연 검을 가슴에 댄 체 한 마리 새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붕박만리의 초술로 권륜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빠르고도 매서운 검법이었다. 군웅들은 그 노파가 권륜의 수하로 그를 구출하기 위해 온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권륜을 향해 살수를 쓴 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모두들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가락이 비록 권륜의 옆에 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막을 사이도 없었다. 즉시 왼손의 두 손가락을 나란히 하여 노파의 겨드랑이 밑에 있는 혈을 찔렀다. 노파의 검끝이 권륜의 가슴을 막 찌르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진가락의 손가락이 습격을 한 것이었다. 노파는 좌장을 들어 금룡탐조로 아래에서 위로 치켜 올리며 즉시 손을 뒤집어 잡아채려고 했다. 이것은 36로 대금나법 가운데 무서운 초술로, 점혈과 서로 방법은 달라도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진가락이 팔목을 잡혔다 하면 전신이 금방 마비되는 것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오른손의 검이 주춤했다. 그 사이 진가락이 오른손으로 단도를 뽑아 들고 위로 들어 막았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가락은 다시 왼손으로 적의 얼굴을 향해 반격을 했다. 이 일 초의 뒤를 따라 다리를 번쩍 들어 상하교정의 묘기로 걷어찼다. 그 노파의 권술도 숙달될대로 숙달되어 있었다. 그의 왼손이 습격해 오는 것을 보고 하체를 오른쪽으로 살짝 피하며 손에 든 검으로 상대의 목을 겨누고 찔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가락의 백화착권은 매 일 초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노파가 분명 오른쪽으로 피했는데 진가락의 다리가 그의 오른쪽을 걷어 찬 것이다. 다행히 그의 장검이 이미 뻗어 있었기 때문에 진가락이 다리에 온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이상한 의심이 생겼다. 위기를 모면하고 서로 뒤로 두 걸음씩 물러섰다. 진가락이 권륜을 자기 몸 뒤로 끌어당기고 앞을 막아 선 뒤에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았다. 「노마나님의 존함을 듣고 싶습니다.」 이때 그 노파도 진가락을 보고 누구냐고 소리쳐 묻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소리가 뒤섞여 상대방의 말소리를 똑똑히 듣지 못했다. 진가락이 입을 다물자 노파는 방금 자기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네 이 단검은 어디서 난 것이냐? 진가락은 그가 다른 것을 먼저 묻지 않고 단검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묻자 뜻밖의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내게 준 것이오.」 노파가 다시 물었다. 「친구라니? 네가 황제의 시위인데 그 여자가 무엇 때문에 네게 단검을 준단 말이냐? 천지괴협과 너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진가락은 우선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대답을 했다. 「천지괴협은 제 은사가 되십니다.」 진가락은 노파가 권륜을 찌르려 했던 것을 보고 그녀가 틀림없이 자기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노파의 나이가 많고 또 무공도 훌륭해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노파가 그러냐면서 또 입을 열었다. 「그럼 됐다. 네 사부의 위인이 괴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인 (正人)이요, 군자다. 그런데 네가 어찌 사부의 체면을 깎고 청정의 주구가 되었느냐? 양성협이 참다 못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이분은 우리의 진 총타주님이시오. 쓸데없는 말 그만 지껄이시오. 노파의 표정에 의아하다는 기색이 감돌았다. 「너희들은 홍화회 사람들이냐? 「그렇소.」 양성협의 답변이었다. 노파가 진가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청조에 투항했느냐? 「홍화회는 의협심을 중히 여겨 의로운 일만 하고 있는데 어찌 만청을 향해 굴복할 리 있겠습니까? 노마나님, 앉으셔서 말씀을 하십시다.」 진가락이 앉을 것을 권했지만 노파는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은 다소 누그러졌다. 「이 단검은 어디서 났느냐? 진가락이 노파의 무공을 이미 본데다 또 두 번씩이나 단검에 대해 묻자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 「위구르의 한 친구가 제게 준 것입니다.」 당시 남녀 사이에 물건을 주고받는 일은 그리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진가락이 호걸이요 도량이 넓다고는 하지만 여러 사람 면전에서는 말할 수 없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 노파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네가 취우황삼을 안단 말이냐?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기는 그가 어물어물하자 참다 못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바로 곽청동 언니가 준 것이에요. 노마나님도 그녀를 아시나요? 그럼 우리는 남이 아니로군요.」 「그애는 내 제자다.」 노파의 말에 진가락이 경례를 했다. 「원래 천산쌍응 두 분 선배님이 오셨군요. 이 후배 모르고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 노파는 몸을 살짝 옆으로 피하고 절을 받지 않았다. 「남이 아니라면서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황제를 도와 나로 하여금 그를 살해할 수 없게 하는 게냐? 양성협 등은 진가락이 공손하게 대해 주는데도 그 노파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게 구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때는 상씨쌍협도 창을 통해서 실내로 뛰어든 뒤였다. 그래서 상혁지가 나섰다. 「황제는 우리가 잡아왔소. 죽인다 해도 우리가 죽일 일이지, 그쪽 차례까지 갈 것도 없는 일이오.」 「황제를 당신들이 잡아왔다구? 노파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진가락이 나섰다. 「선배님은 잘 모르실 겝니다. 황제는 확실히 우리가 청해 왔습니다. 우리는 두 분을 청궁의 시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황제를 구출하러 오신 것으로 알고 계속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두 분 선배님의 무공이 실로 고명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적수가 아니라 저지할 수가 없었고 바로 여기서 오해가 생긴 것이지요.」 사실대로라면 홍화회 군웅들이 이미 이 두 사람을 포위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진가락의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겸손에 불과했다. 노파가 갑자기 몸을 창 밖으로 내밀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그만 내려오시오.」 한참 지나도 대답이 없더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탑 아래서 화살이 하나 날아왔다. 노파가 왼손을 뻗어 화살 끝을 잡아 쥐더니 몸을 돌리며 던졌다. 화살이 탁자에 꽃히며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이 믿지 못할 것들이, 그럼 왜 뒤에서 화살까지 쏘느냐? 노파가 날카롭게 질책을 했다. 「선배님, 화내지 마세요. 탑 아래에 있는 형제들이 아직 사정을 몰라 득죄를 한 것 같습니다. 곧 사과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가락이 정중하게 사과하고 창 앞으로 가서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 사람들이니 활을 쏘지 말라.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이때야 비로소 진가락도 똑똑히 보았다. 탑 아래 1천여 명의 청병이 육화탑을 포위한 채 활에 화살을 먹이고 누구든지 창에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쏘는 것이었다. 진가락이 조반산을 바라다보았다. 「삼가, 사람을 보내 탑의 문을 지키도록 해 주세요. 절대 밖으로 나가 싸우지 않도록 당부하세요. 조반산이 대답을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주중영이 나섰다. 「이분이 설조관 노사부(老師父)시군요. 오랫동안 흠모해 왔습니다. 이 노파가 바로 설조 관명매로, 대머리 영감 진정덕의 아내였다. 두 사람의 체격은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으며 그리고 대머리요 백발이었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그들을 독취설조라고도 했고 천산쌍웅이라고도 불렀다. 관명매는 주중영의 말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은 철담 주중영 주 노영웅이십니다.」 진가락이 주중영을 소개했다. 「그래요. 나도 당신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다시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보, 빨리 내려와요 거기서 뭘하고 있는 거예요? 노파가 얌전하게 인사말을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진 노사부가 무진 도장과 대결하고 계실 테니 우리 빨리 가서 사정을 말씀드립시다.」 주중영의 말에 진가락이 상씨쌍협을 향해 눈짓을 했다. 쌍협이 눈치를 채고 권륜 옆으로 가서 그를 감시했다. 진가락과 관명매 등은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는데 13층에 다 왔는데도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군응들은 모두 걱정이 앞섰다. 두 사람의 무공이 워낙 탁월하다 보니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것처럼 험악할 것이었다.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손상을 입게 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명매는 오히려 태연자약했다. 남편이 평생 상대할 만한 적수를 만난 일이 없으니 결코 불행한 일이 생길 리가 만무하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문 앞에 이르니 하얀 칼날만 눈부시게 보일 뿐 온 방안이 검광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방 안을 춤추듯 오락가락했다. 검은 두 자루뿐이었지만 수십 명이 교전하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군웅들이 그 자리에 우뚝 서는 순간에도 무진과 진정덕은 10여 초의 대결을 했다. 관명매는 본래가 자신만만해 태연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수 초를 겨루는 것을 지켜 보는데도 남편이 전혀 우세한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남에 이토록 막강한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의 대결이 갈수록 치열해지는데도 도대체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도장님, 모두 한식구예요. 손을 멈추세요.」 진가락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무진이 검을 들어 방어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진정덕은 살기충천하여 계속 상대의 좌우를 공격했다. 무진이 다시 한 번 뒤로 한 발 물러섰는데도 진정덕이 신타준족의 재주로 찌르고 나왔다. 무진이 왼쪽으로 살짝 피하며 반격을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다시 어우러져 수 초를 겨루었다. 「여보, 이들은 홍화회예요.」 관명매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진정덕이 의아해서 반문했다. 그의 손놀림이 순간 늦어졌다. 고수끼리 검으로 대결할 때는 털끝만한 빈틈도 없는 것이다. 그때 찍하는 소리와 함께 진정덕의 오른쪽 옷깃이 무진의 검에 의해 찢어졌다. 이건 그래도 무진이 진가락의 말을 들은 뒤에 사정을 보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일검은 보다 무서운 공격이 되었을 것이었다. 진정덕이 크게 화를 내며 힉휙 연환삼검으로 공격을 했다. 무진이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네 번이나 검을 휘둘러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이 또 수십 초를 겨뤘다. 진정덕이 삼분검술(三分劍術) 가운데의 절초를 쓰는데 허허실실 변화막측했다. 무진은 추혼탈명검법으로 맞섰다. 72로의 정변 가운데 81로의 기변(奇變)이 숨어 있었다. 진정덕의 일검이 빙하개동으로 무진의 오른팔을 향해 쪼개며 내려왔다. 무진이 왼쪽으로 피하는데 진정덕의 장검이 갑자기 위로 치켜지며 야반봉연으로 나오는데 비할 수 없이 신속했다. 무진은 왼팔이 없어 오히려 유리했다. 「훌륭한 검법이오! 칭찬인지 아니면 약을 올리는 것인지 이런 말을 하며 맹파관탕의 일검으로 상대의 목을 똑바로 찔렀다. 진정덕은 공격이 허사로 돌아가자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다. (바보같으니라구! 저자는 왼팔이 없는데 내 무엇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공격을 했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데 무진의 장검 끝이 어느 틈에 자기 목에 와 있었다 어찌나 공격이 재빠른지 마치 번갯불 같았다. 진정덕으로서도 피할 방법이 없어 검을 비스듬히 내려쳤다. 이렇게 되면 쌍방이 모두 손상을 입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 가운데 무진이 돌연 오른쪽으로 넘어지며 진정덕의 돌격을 피하고 검을 들어 반격을 했다.탕 하는 소리와 함께 2개의 검이 부르르 떨었다. 마치 용이 울부짖듯 윙 하는 소리가 오래도록 울렸다. 무진은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자세였다. 검과 검이 붙은 채 두 사람 다 움직이지 못했다. 각기 내력을 쓰고 있는 중인데 쌍방의 힘이 대등했다. 순강(純鋼)으로 만들어진 두 자루의 장검이 부딪친 곳에 이가 빠졌다. 그런데 서로의 내력에 의해 두 검의 갈라진 깊이가 점점 깊어지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양성협의 수중에서 강편을 받아 쥐고 앞으로 나서며 그들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막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데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훌륭한 솜씨요, 훌륭한 솜씨야! 이런 말을 하며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무진과 진정덕의 쌍검이 동시에 부러졌다. 두 사람은 앞을 향해 몇 발짝 달려나가다 겨우 멈추어 섰다. 각자 부러진 반 토막의 검을 쥔 채 몸을 돌려 서는데 한 사람이 싱글벙글거리며 손에 시퍼런 장검을 들고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무진이 보니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육비청이었다. 육비청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칭찬했다. 「훌륭한 검법이오! 진정덕이 눈을 부라리며 대들어 사생결단을 하려고 하자 육비청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덕형, 이 소제를 몰라 보시겠소? 진정덕이 의아해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자넨 멸리침(綿裏針)이 아닌가? 「바로 그렇습니다. 「아니, 웬일로 여기 계시오? 육비청은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검을 검집에 꽂은 체 몸을 돌려 관명매를 향해 읍을 했다. 「형수님, 여러 해 뵙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겠지요? 「육 대가! 관명매도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원래 육비청은 11층을 지키고 있다가 천산쌍웅이 공격해 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 해 만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생김새가 이상해 금방 그들을 알아보았다. 육비청과 그들 부부는 평소부터 알고 지낸 처지였다. 그들 두 사람이 협사요, 고인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청정의 주구가 될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런 그들이 권륜이 감금되어 있는 장소에 나타나 공격을 한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숨어 있음이 분명했다. 끝까지 지켜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관명매가 11층으로 뛰어들었을 때 막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관명매가 권륜을 찌르는 광경을 보고 또 진가락 등과의 오해에 대해 해명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13층으로 올라가 대들보 위에 숨었던 것이다. 그의 경공이 남보다 훨씬 뛰어난데다 진정덕과 무진이 치열하게 싸우느라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의 대치가 위험한 것을 보고,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누군가가 다치고야 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장검을 쳐 부러뜨림으로 해서 경직된 사태를 풀어 버린 것이다. '흥, 육 노제 자네 검이 진짜 보물이군.」 진정덕의 말이었다. 육비청은 진정덕의 성미를 너무나 잘 알기에 웃으며 말했다. '이건 다른 사람의 것인데 잠시 제게 맡긴 거예요.」 원래 이것은 장소중의 응벽검인데 낙빙이 사자봉에서 가져와 총타주에게 준 것이었다. 진가락은 이것이 무당파에서 역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명검이라고 하여 육비청에게 건네 주었다. 육비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검이 워낙 좋았기에 망정이지 천하의 양대 고수가 붙어 싸우는데 그 누가 이들을 떼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의 뜻은 바로 진정덕과 무진 두 사람을 동시에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기분좋은 말이라 둘 다 마음이 상당히 누그러졌다. 육비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싸워야만 친해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 대가, 제가 이분들을 소개하지요. 이래서 진가락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소개를 시켰다. 육비청은 소개가 끝나자 다시 화제를 돌렸다. 「저는 두 분이 천산(天山) 아래서 편안히 청복을 누리고 계시겠거니 했지, 황제를 살해하겠다고 강남으로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관명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러분이 모두 내가 가르친 곽청동이라는 애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이 일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되었다오. 황제가 위구르를 치려고 파병을 했는데 청동의 아버지 목탁륜이 저항을 했지만 몇차례나 중과부적으로 지고 말았지요. 뒤에 청병의 군량과 마초를 황하가에서 누군가에게 강탈당했다는데 ------.」 「그것은 바로 홍화회의 여러 영웅들이 목탁륜 노영웅을 돕기 위해 한 일이었지요. 육비청이 말참견을 했다. 「음, 그랬군요. 내 위구르에 있을 때에도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것 같군요.」 관명매는 말을 하면서 진가락을 한 번 바라다보았다. 「어쩐지 그래서 그애가 이 단검을 드렸군그래.」 「그건 그 일이 있기 전에 제게 준 것입니다. 목탁륜 노영웅께서 경전을 찾으러 오셨을 때 우리가 도중에서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경전을 찾을 때도 여러분의 도움이 컸다면서요. 그 사람들, 입만 벌렸다 하면 여러분 칭찬에 침이 마르더군. 흥! 말투로 보아 오늘 이렇게 만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인물들은 아니겠지 하는 뜻이 다분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청병은 군량과 마초가 없어서 한 번 패했지요. 그래서 목탁륜이 화의를 제기하게 되었고 쌍방이 정전을 교섭중이었는데 그 조혜라는 자가 군량과 마초가 생기자마자 또 공격을 해 왔어요.」 「만청의 관병은 원래부터 신의를 지킬 줄 모릅니다.」 육비청의 말참견을 듣고 관명매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위구르 백성들은 청병에게 처참하게 죽어 갔어요. 목탁륜 노영웅은 버틸 수 없게 되자 그 일을 상의하려고 우리를 초청했지요. 우리 부부의 본래 생각은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모두 당신 때문이오.」 진정덕의 말참견이었다. '어째서 모두 나 때문이란 말예요? 그럼 청병들이 위구르에서 살인 방화 등 온갖 나쁜 짓을 다하며 백성을 괴롭히는데, 그래 가만히 앉아 구경하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요? 진정덕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다시 말을 받으려 했다. 그러자 육비청이 웃으며 나섰다. 「원, 나이 든 부부가 아직도 그 성깔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입만 벌렸다 하면 말다툼이시니, 그래 젊은이들이 놀리는 것도 부끄럽지 않으시오? 형수님, 형님은 거들떠보지도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관명매가 남편을 향해 하얗게 눈을 흘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통병인 조혜를 없애 버릴까 했었어요. 뒤에 생각해 보니 그까짓 무슨 정변대장군인가 뭔가 하는 것 없애 봐야 황제가 다른 사람을 파견하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싶더군요. 차라리 황제를 없애 버려야 일이 깨끗하게 처리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북경으로 쫓아갔는데 노상에서 소식을 들으니 황제가 강남에 가 있다는군요. 개 몇 마리를 데리고 항주에서만 찾아 다녔는데 여러분이 지하도를 통해 황제를 납치해 갔으니 우리만 죽도록 고생을 한 셈이지요. 우리도 할 수 없이 지하도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황제가 무슨 기분으로 지하도에 들어갔을까 하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뭐라구? 황제를 여러분이 잡아 왔다구? 진정덕의 물음에 진가락은 권륜을 잡아 온 경위를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멋진 일이었지만 통쾌하지는 못해요. 뭐 굶기고 말 것 있나? 한 칼에 죽여 버렸으면 깨끗할 텐데.」 「국가 대사를 어찌 한칼에 처리해 낼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진정덕의 말을 무진이 냉랭하게 받자 진정덕이 벌컥 화를 냈다. 「도장, 검술이 고명하기 짝이 없던데 우리가 아까 우열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소. 도장이 만약 흥미가 있다면 우리 다시 한 번 겨루도록 합시다. 「나이가 드셨으면서도 그래 제자인 곽청동 아가씨만큼도 철이 없으시군요. 우리가 지금 한편인데 그래 무엇 때문에 다시 싸운단 말씀이십니까? '보세요 내가 당신보구 멍청하다고 해도 아니라고 우기시더니 이제 다른 사람까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요? 관명매가 웃으며 나섰다. 늙은 부부가 다시 뻣뻣하게 버틸 태세였다. 「그래, 내가 철이 없다고 하고 맙시다. 진정덕이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무진을 바라다보았다. 우리가 사생결단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실력이나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이오? 당신 검법이 확실히 근사해요. 검법의 이름이 뭔지나 한번 물어 봅시다.」 육비청은 이들 두 사람의 대화가 비뚤어지다가 다시 험악한 분위기로 변할까봐 겁이 났다. 형님의 검법은 삼분검술이라 하고, 도장님의 검술은 추혼탈명검이라 하는데 모두 고금에 자랑스러운 절기지요. 그렇다고 해서 꼭 사람의 혼을 내쫓고 목숨을 뺏어 오는 것은 아니겠지. 진정덕의 쐐기였다. 무진은 본래 육비청의 체면을 보아 한발 양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감이 승부욕만 내세을 뿐 철딱서니가 없었다. 이 몇 마디 말을 듣고 그냥 참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좋소. 그럼 우리 다시 한 번 대결해 봅시다. 내가 만약 지게 되면 평생 검을 쓰지 않겠소.」 군웅들이 이 말을 듣고 만류하려고 하는데 진정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부부는 위구르를 떠날 때 황제를 죽이지 못하면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소. 당신들이 황제를 죽이지 못하게 한다면 무슨 재주로라도 우리를 막아야만 우리도 승복을 할 것이오. 그런데 도장이 나서시겠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소. 내가 지게 되면 그 즉시 돌아갈 것이오. 그리고 다시는 황제를 죽이겠다고 나서지 않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벌써 관명매의 손으로부터 검을 받아 쥐었다. 진가락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공손히 절을 했다. 「무진 도장의 검법이 오묘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진선미의 경지에서 본다면 노선배님과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눈 있는 사람은 다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겨루려 하십니까? 그러나 진정덕은 계속 거드먹거렸다. 「진 총타주는 무엇 때문에 겸양을 하는가? 자네의 사부는 세외의 고인으로서 우리 같은 범부와는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총타주와 한번 겨뤄야 하겠군. 내 무진 도장님께 몇 수 가르쳐 주십사 하고 청한 뒤에 다시 이 영감2 좀 고쳐 주십사 하고 부탁해야겠는걸.」 사람들은 모두 이 영감이 정말 인정도 없고 사리가 막혔다고 느꼈다. 그들로서는 그와 천지괴협 원사소 사이에 얽히고 설킨 사연을 알 리가 없었다. 이 감정을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진가락을 향해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진가락은 꿀꺽 화를 삼켰다. 「저는 더더욱 노선배님의 적수가 아닙니다. 은사님은 평소 천산쌍응의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분도 노선배님을 존겪하고 계십니다. 진정덕은 손가락으로 관명매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자네 사부가 존경하는 사람은 저 여자지 내가 아닐세.」 「아니, 많은 사람 앞에서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또 시시하게 질투를 하고 이럴까. 관명매도 지지 않고 나섰다. 군웅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바라보았다. 육비청이 웃으며 나섰다. 덕형, 형님 내외분은 이제 연세가 육십이오 이 일을 가지고 수십 년을 다투었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으셨단 말이오? 진정덕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염과 눈섭이 꼿꼿하게 섰다. 그러다 갑자기 화살처럼 창을 뚫고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도사, 나오지 않으면 호한이 아닐세.」 홍화회 군웅들은 진정덕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다고 생각했다. 양성협이 입을 열었다. 사가만 여기 계시다면 한번 멋지게 싸워 볼 텐데 유감이로군요. 무진은 양성협이 의도적으로 한 이 자극적인 한마디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삼제, 그 검을 내게 주시오.」 이때 조반산도 아래서부터 올라와 있다가 검을 그에게 넘겨 주며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도장님, 우리와 목탁륜, 곽청동의 교분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든 채 창 밖으로 뛰어나갔다. 탑 아래에 있던 청병들은 탑 안에서 누군가가 나타나자 벌써 메뚜기 떼처럼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무진이 먼저 제안했다. 우리 아래로 내려가서 화살 틈에서 한번 대결함이 어떻겠소. 진정덕이 약한 체할 리가 없었다. 「그거 아주 좋소. 두 발을 뽑자 머리는 아래로 발은 위로 자세가 바뀌며 13층에서부터 6층을 향해 내려왔다. 거기서 왼손으로 탑의 처마를 끌어 잡자마자 벌써 5층의 탑 모서리에 섰다. 그의 별명은 독취로 경신의 무공이 고명하기 그지없었다. 덮치고 꺾는 몸짓이 정말 한 마리의 큰 수리와 흡사햇다. 탑 안의 군웅들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탑 아래에서 쏘는 청병들의 화살이 빽빽해 빈 틈이 없었다. 진정덕이 검을 들어 화살을 쳐 내며 무진의 동정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지켜 보았다. 무진은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오른손을 다리에 붙인 체 나무 작대기처럼 쭉 내려왔다. 탑 아래의 청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분분히 몰려왔다. 무진은 5층까지 내려올 때도 멈추지 않았다. 거의 4층까지 내려왔을 때 갑자기 오른팔을 수평으로 뻗자 검봉이 벌써 탑의 처마와 수평으로 붙었다. 손에 힘을 주자 조반산의 그 순강검의 검신의 부드러움이 반대로 튀겼다. 무진은 그 힘을 이용해 5층으로 가볍게 올라섰다. 진정덕은 그의 손의 쿵후 가운데 경공,내력,검법,담량,견식 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음을 보았다. 그 어느것 하나 평생 보기 듬은 것이 아닌게 없었다. 그러니 어디 추호라도 상대를 얏잡아 볼 수 있겠는가? (공격을 하겠소.) 이렇게 말하며 검을 비스듬히 뻗어 왼쪽 어깨를 찔렀다. 청병들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 하나는 분명 아측이라 믿었다. 혹시 잘못하다가 그가 다칠까봐 즉시 활 쏘던 것을 멈췄다. (우리 각자 화살 하나씩을 던져 저들로 하여금 화살을 쏘도록 합시다.) (좋소.) 무진의 말에 진정덕도 찬성했다. 두 사람은 각기 지붕위에서 화살 하나씩을 주어 쇠수전 수법으로 던져 2명의 병졸을 쓰러뜨렸다. 탑 아래의 청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1천여 발의 화살을 날렸다. 이때 이들 둘이 있는 장소는 땅에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1천여 발의 화살 가운데 하나만 맞아도 치명상을 입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공방을 하면서 동시에 아래에서부터 쏘아 올라오는 화살을 쳐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대결은 구경은커녕 말도 들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군웅들은 모두 6층으로 달려와 관전을 했다. 관명매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 도인의 검법이 이상할 정도로 매서운데다 남편은 나이가 많아 귀나 눈이 옛날 같지를 않았다. 평지에서 겨루기만 해도 그런 대로 안심을 할 텐데 그 곳이 높은 탑 위인데다가 청병의 화살은 마치 소나기가 퍼붓는 듯했다.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슬그머니 3개의 철련자를 손에 쥐고 창 앞에서 지켜 보았다. 두 사람은 날아오는 화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12층에서 권륜을 지키고 있던 상씨쌍협까지 참다 못해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관전을 했다. 두 사람은 권륜이 달아날까봐 각기 한쪽 팔을 잡고 있었다. 권륜의 두 손은 여자 손처럼 보드랍고 매끄러웠다. 그런데 그 손이 상씨 형제의 흑사장에 길들여진 거친 손 안에 잡혀 있었다. 그들 형제가 힌을 안 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한 번 비틀기라도 했다면 권륜의 손은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다시 시를 짓거나 제자를 하지 못했을 것이며 천하의 서화나 명승 고적이 그토록 큰 수난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권륜도 구원병이 온 줄은 알았지만 자신이 홍화회의 수중에 빠져 있는 마당에 만약 이들이 패한다면 분풀이로 오히려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차라리 홍화회가 이겼으면 하고 바랐다. 진가락의 말투로 보아 틀림없이 자기를 석방할 것으로 기대했다. 탑 로서리의 쌍검은 화살의 소나기 가운데서도 계속 치열하게 싸울 뿐 승부가 나지 않았다. 「두 분의 검법이 신기하고 영묘하니 더 이상 겨룰 필요가 없겠습니다.」 진가락이 큰 소리로 외쳐 보았지만 그들 두 사람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진정덕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도인의 검법은 과연 고명하구나. 이길 방법이 없겠구나.) 그는 승부욕이 강했다. 천천히 발길을 옮겨 얼굴은 동쪽을 향하게 하고 등은 탑 아래의 청병 쪽으로 향하도록 위치를 바꿨다. 이것은 대단히 불리한 자세였다. 햇빛이 눈을 가리고 또 화살도 많이 받아야 하는 장소였다. 그저 이기고 지고 할 것도 없이 이렇게 시간만 끌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상대방을 이기는 것으로 판결이 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무진은 그가 고의로 불리한 장소를 택한 것을 보고 벌써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승자박하려고 판 우물이니 나를 무정하다고 원망이나 하지 마시오.) 추혼탈명검 가운데 상팔로의 검법을 쓰며 전적으로 진정덕의 얼굴과 목을 노리고 찔렀다. 검끝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어지럽혔다. 진정덕은 세 차례나 찔러 오는 공격을 피하며 아차하고 후회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에서 쉭쉭 하는 소리를 내며 6, 17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진정덕은 키를 낮추고 고개를 푹 숙이며 핀했다. 이렇게 되자 진정덕의 등뒤로 날아오던 6, 7개의 화살이 무진을 겨냥해 날아왔다. 무진은 우선 검으로 화살을 쳐내고 왼쪽 다리를 번쩍 들어 진정덕의 태양혈을 걷어찼다. 진정덕은 그의 다리의 무공이 이토록 신묘할 줄은 몰랐다.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한 발 피했다. 바로 이때 갑자기 화살 하나가 무서운 속토와 힘으로 진정덕을 향하여 날아왔다. 이 화살은 청궁의 시위 가운데 한 고수가 발사한 것이었다. 속도가 너무 빠른데다가 그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이라 공교롭게도 등으로 화살을 받기 위해 물러서는 꼴이 되었다. 「아이쿠! 관명매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철련자를 발사해서 그를 구할 여유도 없었다. 군웅들도 놀라 함께 소리를 질렀다. 무진이 갑자기 마면척차의 절기를 썼다. 장검이 손에서 떠나 그 화살을 쳤다. 장검과 화살이 동시에 탑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군웅들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갈채를 보내려고 하는 데 아래서 또 화살 몇 개가 날아왔다. 무진은 수중에 검이 없어 화살을 쳐낼 수가 없게 되자 요리조리 피할 수밖에 없었다. 관명매가 철련자를 쏘아 3개를 쳐내고 진정덕도 몸을 돌려 몇 개를 쳐냈다. 두 사람은 본래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이 험악하게 싸웠는데 이제 서로 돕는 입장으로 변했다. 탑 아래 관병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백진은 무진의 수중에서 병기가 없어지자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좋아했다. 그는 서호에서 재주를 겨루다 이 도인에게 패배를 당한 바가 있었다. 그 한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궁수들을 보고 무진을 향해 일제히 발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화살은 메뚜기 떼 몰려들 듯했다. 무진은 동으로 펄쩍, 서로 껑충거리며 손발을 부산하게 놀렸다. 「무서워하실 것 없소. 내가 대신 막아 드리리다.」 진정덕이 외치며 검을 들고 나서서 쳐내려고 했다. 이때 갑자기 6층의 창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몸을 날리며 그 앞을 막아 섰다. 미처 자리도 확보하기 전에 벌써 두 손으로 10여 개의 화살을 받아 쥔 다음 쇄수전의 수법을 써서 계속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던졌다. 그 수법은 기묘하고 빠르기 짝이 없었다. 날아오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집어 던지는데 화살을 놓치거나 떨어뜨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한 사람의 몸에 수십 개의 팔이 달린 것과 진배 없었다. 탑 아래 청병들도 얼이 빠져 쏘던 화살을 멈추었다. 양성협이 고개를 숙이고 외쳤다. '오늘 너희들에게 천비여래의 솜씨를 구경시켜 준 것이다. 청병의 병장과 시위들까지도 충심으로 탄복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조반산이 미소를 머금고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고 머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많은 관병들은 그의 늠름한 풍채를 보고 격렬한 감정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세 사람이 탑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군웅들이 몰려와 축하를 했다. 진씨 부부는 이때 비로소 진심으로 무진에 대해 탄복을 했다. 조반산의 무공과 무진이 자기의 목숨을 버릴망정 적을 구하려 했던 의협심에 대해 마음속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사람들이 서로 겸양과 칭찬의 말을 나누고 있는데 탑 아래 청병들이 다시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서천굉이 말을 꺼냈다. 「제가 가서 황제에게 저들을 조용히 하라고 하지요.」 말을 끝내고 나서 나는 듯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참 뒤에 권륜이 7층 창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 여기 있네. 「황상께서 탑 위에 계시다. 백진이 외치는 소리에 청병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만세)를 불렀다. 권륜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내 이곳에서 일이 있으니 너희는 떠들지 말도록 하라. 한참 뒤 다시 이렇게 말했다. 「각자 삼십 보 밖으로 퇴각하라. 이가수가 권륜의 뜻을 받들어 군대를 통솔하고 뒤로 물러섰다. 「칠가가 황제를 지휘하고, 황제는 관병을 지휘하고 있으니 이것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한바탕 살육을 하는 것보다 나은걸. 황제란 천하의 지보이니라. 죽이는 것이 쓰는 것보다 낫느니라. 진가락이 웃으며 하는 말에 군웅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위춘화는 청병이 후퇴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대오 가운데 몇 명의 사냥꾼이 사냥개를 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저들이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을까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개를 앞장세웠군그래.」 작은 두목의 손에서 활과 화살을 달라고 해서 화살을 뽑아 탑 아래를 향해 쉭쉭 두 번 쏘았다. 몇 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2마리의 개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청병들이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더 빨리 퇴각했다. 진가락이 육비청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 선배님 주 선배님, 두 분께서는 진 노선배님과 관 노선배님을 모시고 말씀을 나누고 계십시오. 저는 올라가서 황제와 다시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총타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모두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위층으로 올라갈 때 홍화회 군웅들은 모두 일어나서 환송을 했고 육비청 , 주중영 두 사람도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몸을 굽혔다. 진정덕과 관명매는 진가락의 형용이 시원하고 풍채가 준수하며 나이가 어린데도 모두들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이상스럽게 여겼다. 혼례 준비 진가락이 12층으로 올라서자 상씨쌍협과 서천굉이 절을 하고 물러갔다. 권륜은 풀이 죽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그래, 결정을 내리셨나요? 「내 이미 네 손에 잡혀 있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네 마음대로 할 일이지 왜 이토록 말이 많으냐? 「아깝습니다, 아까워요.」 「무엇이 아깝다는 말이냐? 「나는 줄곧 형님을 재주가 뛰어나고 꾀가 많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이토록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내게 좋은 형님이 계시도록 해 주셨다고,,,,,,,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무엇을 어찌 안단 말인가? 권륜이 반문을 했다. 진가락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외양으로 보아서는 담력이 꾀나 있어 보이는데 알고 보니 겁쟁이란 말입니다. 내가 겁쟁이라구? 어느 면으로 보아 그렇단 말이냐? 권륜이 벌컥 화를 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필부의 용기야 뭐 대단할 것이 있습니까?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결심을 내린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용기가 형님께는 없다는 것입니다.」 권륜이 발끈 화를 내며 일어섰다. '아니, 천하에 큰 공을 세우고 큰일을 이룩하는데도 다른 사람의 핍박이나 위협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당년 당고조(唐高祖)가 태원(太原)에서 일을 시작하며 머뭇거리기만 할 뿐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제촉하여 할 수 없이 아들이 하자는 대로 쫓아갔습니다. 송태조(宋太 祖)가 만약 진교의 병변(兵變)이 없었다면 어찌 용포를 몸에 걸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두 분은 개국의 황제로 아들과 부하의 강요 때문에 부득이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마침내 대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 그 누가 그들의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권륜은 묵묵히 있었다.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진가락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하물며 형님의 재능은 이연(李淵)이나 조광윤을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다만 한실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결심만 내리면 우리 이 많은 초야의 호걸들이 즉시 형님의 지휘에 따를 것입니다. 제가 장담을 하거니와 그들은 이제 결코 형님에 대해 불경하게 나오거나 신하로서의 도리를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권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뭔가 꺼리는 것이 있는 듯한 표정이면서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진가락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나는 다만 형님이 만청의 오랑캐를 관외로 내쫓는 것만 보아도 만족할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형님께 서호로 돌아가 은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고 요청할 것입니다. 제 수하의 형제들과 꽃 구경이나 하며 술도 마시며 즐겁게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만약 성사만 할 수 있다면 천하 군정의 대계를 네게 보좌해 달라고 청해야 옳겠지.」 형님! 사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 놓아야 되겠습니다. 대사에 성공하면 형님은 내가 물러나 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이 형제들은 예법 같은 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형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군신의 예와 형제의 의를 잃는 결과가 됩니다.」 권륜은 그의 굳세고 단호한 이야기를 듣자 마음속으로 꺼리던일들이 사라졌다. 즉시 손을 뻗어 탁자를 힘껏 내려쳤다. 「좋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자. 진가락은 매우 기뻤다. 「또 망설일 일은 없습니까? 「없네, 다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네. 그것은 홍화회의 고 총타주인 우만정이 몇 가지 물건을 위구르에 맡겨 놓았다는데 그것이 모두 내 출신에 관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네가 가서 그걸 가져다 내게 보여 달란 말일세. 내가 본 뒤에 내가 정말 한인인지 아닌지 확신만 할 수 있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함께 대사를 도모하겠네.」 진가락은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 물건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문 사가가 하는 말을 들었으니 제가 내일 직접 가지러 출발하겠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우선 먼저 어림군에서 일을 하도록 하게. 내 너를 어림군 총관(總管)으로 임명할 것이니 호군(護軍) . 효기 전봉 등 삼영을 통솔하고 있다가 시일이 좀 지나거든 경사구문제독을 겸임하게. 각 성의 병권도 서서히 우리가 신임하는 한인의 수중에 넘겨 주란 말일세. 그랬다가 내가 너를 병부상서로 임명하거든 그때 가서 팔기(八 旗)의 정병을 맥을 쓰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뿔뿔이 분산시켜서 우 리가 거사를 할 수 있도록 하게.」 '황상의 계교가 이토록 치밀하시니 대사를 이루지 못할까 걱정 할 필요가 없겠나이다.」 진가락은 너무나 기뻐 무릎을 꿇고 군신의 예를 차렸다. 권륜이 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진가락이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의 일을 가지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맹세를 해야만 후회하거나 번복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권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가락이 손뼉을 쳐 심연을 불러 권륜의 원래의 의관을 가져다 갈아입으시도록 시중을 들라고 명했다. 「그리고 모두들 들어와 황상께 배알하도록 일러라.」 군웅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가락은 권륜께서 이미 만청 오랑캐를 내몰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에 대해 윤허가 있었노라고 설명했다. '이후 우리는 황상을 보좌하여 대사를 도모할 것이오. 만약 다른 마음을 품고 기밀을 누설한다면 그 죄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시오.」 즉시 피를 내어 맹세했다. 권륜도 맹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다만 진정덕과 관명매만 한쪽에서 가벼운 냉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형님,형수님도 맹주를 드시지요.」 육비청이 권했지만 진정덕은 거절했다. 관가에서 제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해도 나는 여태까지 믿어 본 적이 없소. 하물며 관가의 우두머리가 하는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오. 그러자 관명매도 한마디 했다. 한족의 강산을 회복만 한다면 우리 황제의 자손들이야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정말 이런 마음이 있고 또 우리 부부를 쓸 데만 있다면 진 총타주가 편지로 연락 주시기 바라오. 우리 이 한 쌍의 늙은 부부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강하게 뛰어들어 몸을 바칠 것이오. 허나 이 맹주는 사양하오. 관명매의 이 말이 끝나자 진정덕은 오른손을 뻗어 갑자기 벽에 -더니 진흙과 벽돌을 한 움큼 쥐어 뽑았다. 만약 그 누가 흉악하고 악랄한 이리나 개와 마찬가지 마음으로 배은망덕하여 친구를 팔아 넘김으로써 대사를 그르치는 자가 있다면 이꼴이 될 것임을 명심하시오.」 이렇게 말하며 손에 힘을 주자 진흙과 벽돌이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권륜은 벽에 꽃혔던 손자국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가락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두 노선배님들께서 비록 가맹은 하시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우리와 같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이 모두 의에 살고 의에 죽는 분들이기에 더 이상 당부의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원컨대 황상께서는 다른 마음 품지 마시고 오늘의 맹세를 잊지 마옵소서.」 「모두들 안심하오.」 「좋습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황상을 전송하십시다.」 진가락의 말에 위춘화가 탑 밖으로 달려나갔다. 「여러분, 이쪽으로 오셔서 황상을 영접하시오. 이가수와 백진이 듣고 반신반의했다. 혹시 홍화회가 무슨 흉계를 쓰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면서 병졸을 인솔하여 천천히 접근했다. 그런데 권륜이 과연 탑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지를 않은가? 급히 땅에 엎드려 영접을 했다. 백진이 말을 끌어 오자 권륜이 올라타며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 여기서 저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노라. 며칠 조용히 지내고 싶어 그랬던 것인데 너희는 별일 아닌 것을 가지고 너무나 떠들어 오히려 내 흥을 깨고 말았구나.」 「신 죽어 마땅하옵니다.」 백진이 연방 이렇게 사죄를 했다. 즉시 앞뒤로 호위하여 깃발을 나부끼고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항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만 북소리 가운데 어쩌다 간혹 섞여 들리는 개 짖는 소리가 옥의 티라면 티였다. 홍화회 군웅들이 막 육화탑으로 되돌아 서려고 하는데 진정덕이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늙은 부부는 오늘 강남의 군웅들을 만나 반갑기 한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존경해 오던 주 노영웅, 그리고 여러 해 만나지 못했던 육 노제를 다시 만나고 보니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무진 도장을 모시고 두 차례나 대결을 하게 된 것도 제 평생 하나의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처는 다른 일이 있어 여기서 그만 작별을 해야겠습니다.」 「두 분 노선배님이 어렵게 강남에 오셨는데 며칠 더 묵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후배가 보다 큰 가르침을 부탁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가락의 만류에 진정덕이 눈을 하얗게 흘겼다. 「자네 사부의 재주가 나보다 월등한데 내게 무엇을 배우겠다고 하나? 무진 도장님, 우리 다음 번에는 주량으로 한번 대결하십시다. 누가 센가 보아야겠어요.」 「그야 물론 제가 약하겠지요. 무진이 웃으며 받았다. 관명매가 진가락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결혼했는가? 「아직 못 했습니다.」 진가락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약혼은? 「아직 ,'"'' 관명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다가 돌연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만약 네게 검을 준 사람에게 무정하고 의리 없게 대했다가는 이 노파 결코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진가락은 어이가 없었지만 대답할 말도 없었다. 「여보! 다른 젊은 남자와 소근소근 무슨 잔소리를 하고 있는 게요? 빨리 떠날 생각 않고. 저쪽의 진정덕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관명매는 이마를 한번 찡그리고 몸을 그쪽으로 돌렸다. 갑자기 입술을 모으고 휘파람을 불자 4마리의 큰 개가 숲속에서 달려나왔다. 두 사람은 군웅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4마리의 개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형님, 형수님. 어디로들 가시오? 육비청이 불렀지만 두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의 그림자가 숲속으로 사라지고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멀어져 가며 들릴 뿐이었 다. 상씨쌍협은 그들의 못마땅한 언행에 볼이 부어 있다가 먼저 상혁지가 입을 열었다. 「나이 많다고 나이 대접만 요구해.」 「예의가 없어.」 상백지도 맞장구를 쳤다. '세상 밖의 기인(奇人)이 대체적으로 저렇다오. 우리 탑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눕시다.」 진가락의 말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육화탑 안으로 돌아왔다. 진가락이 입을 열었다. '저는 두 가지 중요한 물건을 제 사부가 계신 곳에 가서 가져오겠노라고 황제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 먼저 천목산으로 가서 사가와 십사제의 부상을 살펴보고 나서 다음 일을 상의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사람들은 이의가 없었다. 탑에서 나와 마선균 -마대정 부자만 항주로 돌아갔다. 군웅들은 말을 타고 서쪽을 향해 출발하여 이튿날 어잠에 도착했다. 다시 하루가 지나 산으로 올라가야 문태래와 여어동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산 위의 나무숲은 울창한데 때는 벌써 늦은 가을이라 만산은 붉은 단풍으로 물들고 풀은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산 위의 소두목이 소식을 듣고 올라가 통보하자 장진이 내려와 일행을 영접했다. 진가락은 낙빙이 보이지 않자 마음속으로 놀랐다.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넷째형수님은? 사가와 십사제는 안녕들 하시지요? '십사제는 아무 일 없이 잘 있습니다. 넷째형수는 사가께 무슨 재미있는 물건을 갖다 드려야겠다며 떠난 지 이틀이 되었는데, 노상에서 보시지 못하셨나요? 장진이 대답했다. 「무슨 물건인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가는 이 이틀 동안 상처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온종일 누워 심심해 죽겠다고 하시는군요. 넷째형수님이 뭐 재미있는 물건 좀 찾으러 나가 봐야겠다고 하셨는데 어느 집이 골탕을 먹게 될는지 모르지요.」 장진이 웃으며 말했다. 조반산도 따라 웃었다. 「넷째 제수씨도 정말 그 버룻 못고쳐.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들처럼 장난을 좋아하니 장래 아들을 낳아서도 조상 전래의 재주를 전해 주려나.」 이 말에 군웅들이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었다. 군웅들은 떠들고 웃으며 산 위로 올라와 한 대장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두들 우선 문태래를 보러 갔다. 그는 때마침 등나무 침상에 누워 심심하던 판인데 군웅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반가워서 일어나 맞았다. 사람들이 그동안의 경과를 대강 설명해 주고 맞은편의 딴 채에 있는 여어동을 보러 갔다. 각자 조용히 문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진가락이 다가가서 휘장을 걷고 보니 여어동이 얼굴을 침대에 파묻은 채 등을 들먹거리며 슬프게 울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모두들 너무나 뜻밖의 일에 어쩔 줄을 몰랐다. 군웅들은 모두 호쾌한 사람들이라 낙빙이나 주기 등 여자들까지도 좀처럼 울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가 슬피 울고 있는 걸 보니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 괴롭기도 했다. 「십사제, 모두들 자네를 보러 왔네. 그래, 어떤가? 상처가 많이 아픈가? 그렇지? 진가락이 부드럽게 물었다. 여어동이 울음은 그쳤지만 몸을 이쪽으로 돌리지는 않고 말했다. 「총타주님, 주 노영감님, 사숙님, 형님 여러분, 저를 찾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일어나 인사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상처는 이 며칠 사이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만 제 얼굴이 너무 흉하게 타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뿐입니다.」 '십사가, 남자 대장부 얼굴 좀 탔다 해서 뭐 그리 대단할 것 있겠어요? 설마 장가 못 갈까봐 걱정이세요? 주기가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여어동의 말문을 막는 말을 듣고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고 소리내어 웃는 사람도 있었다. 육비청이 입을 열었다. '여 사질(余師姪)자네의 얼굴이 탄 것은 문 사야와 나를 구출하려다 그런 것이 아닌가? 천하 호걸들 가운데 이 일을 아는 사람치고 그 어느 누가 자네를 공경하지 알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어느 누가 자네를 보고 대인대의(大仁大義)한 영웅호한이라 하지 않겠는가? 자네 얼굴이 흉악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더더욱 존경하는데 그런 걸 뭘 신경을 쓰나? '사숙님 가르치심이 다 옳습니다.」 여어동이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원래 그가 천목산에 온 뒤부터 낙빙은 조석으로 그의 상처를 보살펴 주러 드나들었고 문태래도 날마다 건너와 말동무가 되어 주고는 했다. 그 스스로도 낙빙에 대한 연모의 정은 천부당만부당함을 알았다. 그러나 시종 잊을 수 없음을 어쩌랴?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언제나 그녀 생각에 괴로워하며 후회를 했다. 그는 낙빙-문태래-장진 등이 자기를 볼 때 어쩌다 스치는 놀라움과 연민의 표정을 읽으면서 자기 얼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하게 타 버렸다고 생각했다. 몇 차례나 거울을 찾아다 비춰 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본래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문태래를 구출함으로써 낙빙에 대한 속죄를 해 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도 못하고 이꼴이 될 줄은 몰랐다. 이원지가 자기를 짝사랑하는 줄은 알지만 보답할 방법도 없으니 이 또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일어나는 이런 상념이 풍류 있고 멋있고 준수하던 금적수재를 괴롭혀 수척하다 못해 이제는 피골이 상접할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놓았다. 군웅들은 여어동의 방을 나와 대청에 모여 상의를 했다. 문태래가 억울해 못 견디겠다는 듯 맨 먼저 말을 꺼냈다. 「십사제가 나를 구출하기 위해 이 지경으로 얼굴이 타 버렸습니다. 본래 잘생긴 소년이었는데. 이제 그만------.」 「남자 대장부가 강호에 행세하면서 중시해야 할 것은 의리뿐이오. 용모가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따질 문제요. 나는 왼팔이 없고 장 십제는 등에 병이 있고 상씨 형제의 인상은 괴상하기 짝이 없지만 강호에서 그 누가 우리를 놀리던가요? 십사제가 너무 생각이 막혀서 그래요.」 무진의 말을 조반산이 받았다. 「그가 어린 소년의 마음인데다 또 병중이라 그럴 거예요. 장래 모두들 잘 타이르면 별일 없겠지요. 오늘 우리 통쾌하게 술이나 마시며 사제의 일이나 경하합시다.」 군웅들도 좋다고 찬성했다. 모두들 신이 나서 소두목에게 술자리를 마련하라고 분부했다. 「낙빙 언니가 없어 섭섭한데 오늘 돌아오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백마를 타고 가셨나요? 주기의 말을 장진이 받았다. 「아니오. 백마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띈다며 사가와 십사제의 부상이 완전히 치료되기 전에는 귀찮은 귀신을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그냥 갔어요. 「지금 우리들 모두가 다 여기 있는데 귀신이 찾아온다면 그거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양성협이 웃으며 말참견을 했다. 장사근은 귀신이란 말을 듣자 석쌍영을 향해 입을 내밀며 웃었다. 석쌍영의 별명이 귀견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 별명을 상씨쌍협 면전에서 부르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 쌍협의 별명이 흑무상 -백무상인데 무상은 귀신이라, 이렇게 되면 형이 동생을 무서워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진가락과 서천굉이 낮은 소리로 상의를 하더니 한바탕 손뼉을 쳤다. 군웅들이 모두 일어섰다. 「육 , 주, 두 선배님은 앉으십시오. 다음부터는 제발 이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육비청과 주중영이 이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이번 일을 아주 통쾌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임무를 부여하겠습니다. 구가와 십이가는 북경으로 가셔서 황제가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지나 않는지, 무슨 다른 흉계나 꾸미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이게 제일 중요한 일인데 조사하기도 가장 어려을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진가락의 말을 들은 위춘화와 석쌍영이 머리를 끄덕여 대답했다. 「두 분 상씨 형님들은 사천(四川)의 운귀로 가셔서 서남 (西南)의 호걸들과 연락을 취하십시오. 팔가는 소북의 환남 일대로 가셔서 연락을 하십시오. 삼가는 절 ,민 ,총 삼성의 호걸과 연락을 취하십시오. 산동 , 하남 일대는 육 노선배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겠습니다. 서북의 제성은 주 노선배님께서 맹 대가, 안 대가, 칠가, 주 소저를 데리고 가셔서 책임을 지셔야 하겠습니다. 사가와 십사제 두 분은 여기서 치료를 하시는데 먼저와 마찬가지로 넷째형수님과 장 십가가 보살펴 주셔야 하겠습니다. 심연은 저와 함께 위구르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마땅히 총타주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진가락의 말에 군웅들이 일제히 수긍을 했다. 「여러분께서 각 성으로 분산 나가셔서 거사 준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각지의 영웅호걸과 보다 긴밀하게 내왕하면서 대사의 기초를 튼튼히 닦아 놓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일이 대단한 기밀을 요하는 것이라 부모 , 스승이나 다름없이 친하다 하더라도 아내에게는 기밀을 누설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거야 우리 모두 잘 아는 일이지요.」 모두들 이렇게 대답했다. 「일년을 기한으로 하겠습니다. 내년 이때 모두들 경사에서 다시 모입시다. 그때는 사가와 십사제의 건강도 완전히 회복될 것이니 우리 한번 크게 일을 벌입시다. 말을 마친 진가락의 눈 속에 광채가 번뜩였다. 진가락이 탁자를 치고 일어섰다. 군웅들이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모두들 의지와 기개가 넘쳐 흐르는 표정이었다. 장진은 총타주가 자기를 보고 또 천목산에 한가하게 남아 있으라고 하자 기분이 언짢았다. 문태래가 그 눈치를 채고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총타주님, 제 부상은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십사제의 화상도 심하다고는 하지만 치료를 계속한다면 곧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일년 동안 여기 있으라 하시니 정말 답답해 어떻게 견뎌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네 사람도 총타주님을 모시고 위구르로 가고 싶으니 그렇게 명령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십사제의 심사도 좀 풀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래.」 장진은 너무나 기뻐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가는 도중 시간나는 대로 산천 구경을 한다면 상처가 더욱 빨리 호전될 것입니다. 문태래의 말에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군요. 그러나 십사제가 견뎌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우선 수레를 타고 가도록 하지요. 길어 봐야 열흘이나 보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태래의 말에 진가락이 좋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장진은 싱글벙글하며 여어동의 방으로 달려갔다가 금방 도로 나왔다. 「십사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답니다.」 주중영이 진가락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총타주님, 문 사야는 구출했고, 또 총타주님은 황상과 골육의 상봉을 하셨으니 경사가 겹친 셈입니다. 여기 기쁜 일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데 총타주님 의향이 어떠신지? 「영감님께서는 칠가와 주 소저의 혼사를 차제에 치르자, 이런 말씀이시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주중영이 웃으며 그렇다고 하자 진가락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요. 모두들 여기 있으니 국수 먹고 경사술 마시고 떠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시간이 급박해서 각지의 친구들을 초대해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고 축하할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울 뿐입니다. 주 소저께서 이 점 섭섭하게 여기시지 않을는지요? 「이렇게 많은 영웅과 호한이 계신데도 부족하단 말씀인가요? 주중영은 흐뭇해서 웃었다. 「그럼 우리 길일을 택해야겠군요.」 「우리 같은 사람이 뭐 길일 같은 것을 따지겠소? 오늘이라고 하면 그냥 오늘 하는 것이지. 딸의 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거나 지장을 줄 수 없다는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라는 것을 진가락은 알아차렸다. 「영감님, 이토록 우리를 생각해 주시니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총타주, 우리 피차간에 지나친 겸양은 피합시다.」 진가락은 희색이 만면하여 주기 앞으로 걸어가 꾸벅 절을 하고 웃었다. 「아가씨, 축하합니다.」 주기는 영문도 모르면서 얼굴부터 붉혔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일곱째형수라고 부르고 싶다구요. 일곱째형수, 축하드립니다.」 「아니, 총타주님도 점잖지 못하게 장난을 치시나요? 「믿지 못하시는 모양인데, 그럼 좋습니다.」 진가락이 손뼉을 치자 떠들고 있던 군웅들이 금방 조용해졌다. 「방금 주 영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칠가와 주 소저의 결혼식을 올리시겠답니다. 우리 오늘 경사술 마시게 되었습니다. 군웅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주중영과 서천굉을 향해 축하 인사를 했다. 주기는 그제야 거짓말이 아닌 줄 알고는 내당으로 숨어 들어가려고 했다. 「십제, 빨리 붙잡아요. 이러다가 신부가 달아나겠는걸.」 위춘화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장진이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주기가 왼손으로 뿌리치려고 하자 장진이 한쪽으로 피하며 엄살을 부렸다. 「아이쿠, 사람 살려요. 신부가 사람을 쳐요.」 주기가 낄낄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즐거워 떠들썩한 판인데 갑자기 문 밖에서 방을 소리가 울리더니 낙빙이 손에 둥글넓적한 상자 하나를 안고 들어섰다. 「모두들 와 계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좋아들 하세요? 말을 하면서 우선 진가락을 향해 인사부터 했다. 「칠가에게 물어 보세요.」 위춘화가 이렇게 말하자 낙빙이 서천굉을 바라보며 물었다. 「칠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서천굉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이상도 하군. 우리들의 제갈량께서 오늘은 바보가 되셨나? 장사근이 서천굉의 등뒤에 숨어서 두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흉내를 내면서 말했다. 「오늘 제갈량이 아내를 맞이하신답니다. 그래서 멍청해졌지요.」 「야단났네, 야단났어. 낙빙이 반갑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야단났다는 말이다. 「넷째형수님, 너무 좋아서 머리가 도신 것 아닙니까? 칠가가 장가를 간다는데 왜 야단났다고 하십니까? 양성협이 웃으며 하는 말에 군웅들도 따라 웃었다. 「칠가와 주기 소저가 오늘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간 김에 진귀한 물건을 좀 많이 가져올걸. 지금 선물로 줄 만한 좋은 물건이 없으니 이게 야단이 아니고 뭐예요. 신방에 든 도둑 잠시후 대청에는 오색찬란한 촛불이 밝혀졌다. 서천굉이 두루마기에 마고자 차림으로 왼쪽에 나와 섰다. 낙빙이 주기를 부축하고 나왔다. 조반산의 사회에 따라 부부가 먼저 천지신명을 향해 절하고 이어서 홍화회 노조(老祖)의 신위에게 절을 했다. 그런 뒤에 쌍쌍이 주중영 부부와 진가락을 향해 절을 했다. 주중영과 그 부인은 반절로 답례를 했고 진가락은 대례를 사양하느라 자기도 무릎을 꿇고 답례를 했다. 주중영이 옆에서 너무 겸양하지 말라고 했다. 새로운 부부는 다시 육비청에게도 사례의 절을 올렸다. 신랑 신부의 교배가 끝나자 순서에 따라 무진 -조반산 문태래 상씨쌍협 등과도 상견례를 했다. 심연이 여어동을 부축하고 나와 의자에 앉혔다. 그는 얼굴을 천으로 가린 채 두 눈만 내놓고 새로운 부부와 상견례를 했다. 대청에는 희색이 흘러 넘쳤다. 여어동이 금피리를 꺼내 봉구황이라는 곡을 불었다. 군웅들은 그의 심정이 호전된 것을 보고 더욱 기뻐했다. 술상이 벌어지자 모두들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무진이 술 주전자를 들고 외쳤다. 「오늘 밤 술에 취하지 않는 사람은 잠을 재우지 않을 것이오.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술 주전자를 정원에 있는 계화수를 향해 던졌다. 이와 동시에 위춘화와 장진이 벌써 총알처럼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두 사람은 이제 술을 마실 참이라 병기를 지니고 있지 않아 맨손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술 주전자가 누군가를 맞힌 것이 아니라 그냥 떨어져 내려왔다. 위춘화가 손을 뻗어 주전자를 받았다. 장진이 담 위로 뛰어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돌아와 진가락을 향해 나가서 수색을 해 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진가락이 껄껄 웃었다. 「오늘은 칠가의 기쁜 날이오. 쥐새끼 같은 무리가 흥을 깨지 않도혹 해야지요. 우리, 술이나 마십시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심연에게 분부를 내렸다. 「몇 명의 두목을 데리고 나가 사방을 조사해 보도록 해라. 못된것들이 들어와 방화를 하거나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말이다.」 심연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군웅들은 그가 전연 개의하는 표정이 없자 다시 즐거운 기분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가락이 낮은 소리로 무진을 향해 말을 꺼냈다. 「도장님, 저도 나무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몸놀림으로 보아 대단한 인물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냥 놔 두시지요.」 무진의 말을 듣고 진가락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도장님이 육화탑 위에서 용맹을 떨치셨습니다. 덕분에 천산쌍응이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자, 모두들 도장님을 위해 잔을 비웁시다. 군웅들이 일제히 일어나 무진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천산쌍응의 이름이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더군요. 진정덕 그 영감이 만약 20년만 젊다 해도 내 적수가 아니었을 겝니다.」 무진이 웃으며 하는 말을 조반산이 농담으로 받았다. 그때 그의 몸놀림이 민첩하다 해도 무공이 어찌 지금의 수준에 이르렀겠습니까? 저-좌석의 장진과 석쌍영은 벌써 술 시합을 하느라 떠들썩하게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떠드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양성협과 장사근이 한 패가 되어 상씨쌍협과 대작을 하고 있는데 네 사람이 각기 7, 8사발이나 황주를 마셨다. 문태래와 여어동은 부상을 당한 몸이라 술과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차를 대신 마셔 가며 이들과 어울렸다. 모두들 여어동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신경을 썼다. 몇 접시의 요리를 비우자 신랑 신부가 나와 술을 권했다. 주중영 부부는 반가운 경사에 입이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주기는 평소 술을 탐하는 편이었는데 오늘만은 어머니의 신신당부 때문에 한잔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와 술을 권하자 모두들 주기도 마시라고 했다. 그녀도 마음놓고 한번 마시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당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양을 했다. 그러나 언짢은 표정만은 얼굴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를 본 위춘화가 말을 꺼냈다. 아이구, 신부가 신랑 때문에 화가 잔뜩 나셨군그래. 칠가, 빨리 꿇어앉아 빌어요.」 칠가, 잠시 손해를 보라구 무릎을 꿇어. ,꿇어 ! 무릎을 꿇으면 첫 아이는 틀림없는 아들이라구-"" '.~ 장사근이 맞장구를 치자 주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들도 없으시면서 어떻게 그걸 아세요? 정말 쓸데없는 말씀을 다하셔. 사람들은 주기의 천진난만함에 더욱 즐거워했다. 주기의 어머니는 웃으면서도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원, 저 철없는 애가 어디 신부 같아야 말이지. 낙빙이 위춘화를 향해 이렇게 소근거렸다. 「칠가에게 술좀 많이 마시게 해서 절 좀 도와주셔야해요.」 위춘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사근에게 눈짓을 하자 둘이 일어나서 신랑에게 술을 권했다. 서천굉은 그들의 행동이 이상야룻함을 보고 자기를 곯려 주기 위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신랑이 되어 권하는 술을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주는 대로 받아 시원하게 마셨다. 10여 잔을 비운 뒤에 갑자기 몸을 흔들흔들하다가 식탁에 엎드렸다. 주기의 어머니는 사위의 이런 모양을 보고 혀를 찼다. 「저 사람이 취했군, 취했어.」 안건강을 시켜 안으로 부축해 들어가 쉬도록 하라고 일렀다. 양성협 등은 서천굉이 취한 것을 보고 낙빙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형수님이 이기시게 되었습니다.」 낙빙이 웃으며 차 주전자를 들어 차를 다 따라 비운 뒤 거기에 술을 가득 채워 들고 주기를 보겠다며 신방으로 들어갔다. 주기는 낙빙이 들어서자 반색을 했다. 「낙빙 언니, 마침 심심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잘 오셨어요.」 「목 마르지 않아? 내가 그럴 줄 알고 차를 가져왔지.」 「답답해서 그런지 마시고 싶지 않군요.」 낙빙이 그녀의 코밑에 차를 갖다 댔다. 「이 차 향기가 근사하다구.」 주기가 냄새를 맡아 보니 술 향기가 코를 찌른다 어찌나 반가운지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벌컥벌컥 단숨에 반 주전자 이상을 마시고 나서야 입을 뗐다. 「낙빙 언니, 언니는 정말 내게 잘해 주셔서 고마워요.」 낙빙은 본래 주기를 놀려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기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보자 약간 주저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신방에 대고 장난을 치는 것은 원래 길상을 도모하자는 것이니 제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래서 웃으며 이렇게 말을 꺼냈다. 「동생, 내 한마디 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실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친해요? 내 동생에게 좀 미안하거나 지나치게 군다고 해서 나를 원망하거나 나무라지는 않겠지? 안 그래? 「그야 물론이지요. 무슨 말씀인지 빨리 하세요.」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던가요? 이따가 신부가 먼저 옷을 벗어야 한다구? 주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뭐라구요? 어머니께선 그런 말씀 없으시던데요.」 낙빙의 표정이 정중하게 변했다. '어머니도 모르실 것 같더라니 남녀가 결혼을 한 뒤에는 동풍이 서풍을 누르거나 아니면 서풍이 동풍을 누르거나 하기 마련이라구. 아무래도 한쪽이 지고 살아야 한다 이거예요.」 '흥, 지기도 싫거니와 나를 억누르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은걸요. 「그래야 해요. 그러나 남자들은 언제나 사납게 나온다구요.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막무가내예요. 게다가 칠가는 워낙 똑똑한데다 동생은 성실해서 조심을 많이 해야 할 거예요.」 낙빙의 이 말이 주기의 심금을 찔렀다. 남편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야 이미 깊을 대로 깊었지만 워낙 성격이나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교활하고 괴팍한데다 남을 속이는 꾀가 대단해서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벌써부터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까 궁리를 했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조바심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다고 낙빙 앞에서 나약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내게 잘못 굴면 나도 겁날 것 없어요. 칼 가지고 결판내고 말지요. 뭐.」 「성질 무섭네! 부부란 언제나 다정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 도리요 이치인데 어떻게 칼 쓰고 창 쓰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놀릴는지 생각이나 해 봤어요? 게다가 또 칠가가 동생에게 이렇게 끔찍하게 잘해 주는데 어떻게 칼을 들어 찌를 수 있단 말인지 원, 애 같은 소리 그만해요.」 주기가 껄껄 웃었다. 대답할 말이 막혔던 것이다. 「문 사야의 무공으로 말한다면 나보다 열 배는 낫지. 정말 싸우기로 한다면 나 같은 사람 열 명이 있어도 소용이 없단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한 번 싸운 일도 없을뿐더러 내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동생도 잘 알지. 「그래요. 언니가 좋은,,,,,,.」 여기까지 말하고 주기는 입을 다물었다. 낙빙이 빙그레 웃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느냐구 묻고 싶지? 그렇지? 주기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낙빙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건 본래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동생이 묻고 싶다니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럼 내가 말해 줄 테니 절대로 칠가에게 말하면 안 돼요. 그리고 내일 나를 원망해서도 안 되구요.」 주기는 영문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 「이따가 방에서 동생이 먼저 옷을 벗으라구요. 그리고 칠가가 옷을 벗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 벗으면 우선 촛불을 끈 뒤에 두 사람의 옷을 모두 이 탁자 위에 올려 놓아야 해요.」 그녀는 창 앞에 놓인 탁자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칠가의 옷이 밑으로 들어가게 동생의 옷으로 눌러 놓아야 해요. 그럼 일평생 동생의 말을 잘 듣게 된다구요, 알겠어요? 주기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구말구 내가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해? 동생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하시지? 틀림없이 어머니께서는 이 방법을 모르셨을 거야. 아셨다면 왜 그걸 동생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겠어? 주기가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과연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옷을 놓을 때 절대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만약 칠가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밤에 슬그머니 일어나 옷을 위아래로 바꾸어 놓으면 그건 보통 야단이 아니라구요. 주기는 이런 낙빙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 부끄럽기도 했지만 생의 화복이 달린 중대한 문제라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런 결정도 내렸다. (그가 나를 업신여기지 않도록만 하면 돼. 그리고 내가 언제나 끔찍하게 잘 대해 주어야지.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외롭게 자랐는데 내가 그를 소홀하게 대하면 안 되지.) 낙빙은 그녀가 믿을 수 있도록 그밖에도 아내로서 지켜야 할 다른 일들을 소상히 들려 주었다. 그 말은 모두가 진실이었다. 주기는 얼굴을 붉힌 채 들으면서 그녀의 가르침에 감사해 마지않았다. 이렇게 재미있게 말을 주고받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이어 서천굉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기가 먼저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서천굉이 두루마기와 마고자를 입은 채 손에 단도와 철괴를 들고 담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도적이 들어왔나요? 주기가 다급하게 물었다. 「누군가가 담 위에서 안을 들여다보기에 쫓아나가니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요.」 서천굉의 대답을 듣자마자 주기가 옷 상자를 열고 밑바닥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원래 주기의 어머니는 딸을 보고 신방에서 흉기를 꺼내 놓으라고 했지만 딸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고 칼을 상자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밖에 나가서 조사를 해야지 . 주기가 칼을 들고 이렇게 말하며 나가려 하자 낙빙이 웃으며 말렸다. 「신부님, 제발 그만두고 얌전하게 앉아 계세요. 여기 많은 아씨들과 형제들이 있는데 설마 혼수를 훔쳐 가도록 내버려둘 것 같아서 그러시나요? 주기가 웃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낙빙이 웃으며 서천굉을 가리켜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잘하시는군. 공연히 술 취한 척하더니! 내 우선 나가 도적을 잡고 돌아와 벌을 주어야지. 내 대신 신부 잘 지키고 있어요. 칼 쓰고 창 쓰는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 이렇게 말을 하면서 그의 손에서 병기를 받아 쥐었다. 서천굉이 껄껄 웃으며 신방으로 들어왔다. 지붕 위며 건물 주위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군웅들이 소식을 듣고 나와 도적을 수색하는 소리였다. (우리가 황제와 굳은 약속을 했으니 이치로 따진다면 조정에서 염탐을 하라고 파견한 사람일 리는 없겠지. 설마 황제가 돌아가자마자 즉시 우리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은 아닐까? 담 위에 있던 사람의 몸놀림으로 보아서는 무공이 대단한 사람 같지는 않던데. 어쩌면 길 가던 좀도둑이 여기 경사가 있는 것을 보고 실속이나 차리려고 그랬겠지.) 서천굉이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하고 있는데 낙빙 -위춘화-양성협 .장진.장사근 등이 들어왔다. 손에 술 주전자와 잔을 들고 떠들기 시작했다. 「신랑이 취한 체하고 사람을 속였으니 어떻게 벌을 줄까요? 서천굉은 할 말이 없어 여러 사람을 상대로 각기 석 잔씩 술을 나누어 마셨다. 사람들은 장난을 칠 셈으로, 이 방법을 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우겼다. 서천굉도 방법이 없어 웃기만 했다. 「좀도둑을 잡지 못했으니 술 좀 아껴 드십시다. 너무 취했다가 물건이라도 도난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신랑은 걱정 말고 술이나 드시라구. 우리 형제들이 오늘 밤 돌아가며 지키기로 했다네.」 양성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떠들썩하고 있는데 주중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위가 너무 취해 잘 서 있지도 못하거니와 말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대신 마시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모두들 신랑이 정말 취한 것을 보고야 주기와 우스갯소리를 나누다가 겨우 방에서 물러났다. 주기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방 안에는 오직 자기와 남편 두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천굉을 훔쳐보니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살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잠그고 촛불 밑에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얼굴이 홍조를 띤 채 달콤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여보, 잠이 드셨어요? 다정하게 불러 보았지만 서천굉은 대답이 없었다. 「정말 잠이 드셨나 보군요.」 주기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옆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좀도둑이 멀리 달아났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겉옷을 벗고 침대 앞으로 가서 남편을 건드려 보았다. 서천굉이 몸을 뒤척이며 침대 안쪽으로 한 바퀴 굴렀다. 주기는 그의 신발과 두루마기, 마고자를 벗겼다. 내복을 벗길까 하는데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두루마기와 마고자면 충분하겠지? 정말 남편을 이기고 싶은 생각도 사실은 없으니까.) 그래서 낙빙이 가르쳐 준 대로 그의 두루마기와 마고자를 창 앞의 탁자 위에 놓고 다시 자기의 옷을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펴 서천굉을 덮어 주었다. 자기는 침대 바깥쪽에 누워 다른 이불로 몸을 감싼 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시간이 지난 뒤에 서천굉이 몸을 뒤척거렸다. 주기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바로 이때 촛불이 탁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주기는 남편이 깨어 일어나 벗어 놓은 옷의 위치를 볼까봐 겁이 덜컥 났다. 일어나 촛불을 꺼 버릴까 했지만 옷을 벗은 채 남자 옆에서 잔다는 것이 무섭게 생각되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주기는 자신의 못났음이 원망스럽다 못해 식은땀까지 흘렀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가운데 갑자기 꾀가 하나 떠올랐다. 내의에서 두 조각의 헝겊을 찢어 내 입에 물고 침으로 적셔 2개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것을 철련자를 발사하는 수법으로 쏘아 촛불을 껐다. 서천굉은 깊이 곯아떨어졌다. 그의 주량은 본래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여러 사람이 강권하는 바람에 억지로 많이 마셔 인사불성으로 곯아떨어진 것이었다. 그가 한 번 몸을 뒤척일 때마다 주기는 한 번씩 놀라 이불을 끌어안은 채 꼼짝도 못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는데 창 밖에서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이윽고 고양이의 야옹야옹하는 소리도 들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며 고양이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양이는 방 안을 한 바퀴 돈 뒤에 나가지 못하고 침대 위 주기 발밑으로 파고들어 자려고 했다. 주기가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침대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벗이 되어 주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몽롱한 가운데 두 눈을 붙이기는 했지만 시종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삼경까지 버텄을까? 갑자기 창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주기는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다. 창 밖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형제들이 장난을 하느라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나 엿보는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물으려 하다가 거북할 것 같아 얼굴만 붉힌 채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연이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꼼짝 마라.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상씨 형제의 목소리도 들렸다. 「대담한 놈 같으니라구. 「아이쿠! 생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대결하는 가운데 열세에 몰려 부상이라도 입은 것 같았다. 주기가 벌떡 일어나 단도를 집고 탁자 위에 벗어 놓았던 옷을 더듬어 보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움이니 뭐니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천굉을 잡아 흔들었다. 「빨리 일어나세요. 빨리요,,,,,,, 빨리 나가 도둑을 잡아야 해요. 도둑이 우리들의 옷을,,,,,, 옷을 모두 훔쳐 갔어요. 서천굉이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런데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자기를 잡아당기고 있지 않은가? 캄캄한 가운데 여인의 살 냄새가 향기로웠다. 그제야 이곳이 자기의 신방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적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정을 할 수가 있었다. 즉시 아내를 잡아당겨 자기 뒤에 숨기고 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적을 맞을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지 와 사방에서 누군가가 가볍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형제들이 사방에서 지키고 있으니 도둑이 달아날 생각을 거.- 낮은 소리로 주기를 향해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 손뼉 소리는 우리 회중에서 신호를 보낼 때 쓰는 방법이야. 사면 팔방을 지키고 있으니 우리는 나갈 필요가 없어요.」 의자를 내려놓고 주기를 끌어안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여보,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혼자 잠이 들었군요. 정말 미안, , ,. 쩔그렁 소리와 함께 주기의 손에서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포옹을 한 채 침대머리에 앉았다. 주기는 머리를 서천굉의 품안에 파묻고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잠시 후에 무진의 욕 소리가 들렸다. '이 도둑이 꾀 재빠르군. 도대체 어딘에 숨었지? 창 밖으로 횃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군웅들이 횃불을 들고 수색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좀 자구려. 내가 나가서 보고 올 테니.」 서천굉의 말이었다. 「나도 나가 보겠어요.」 '좋아요. 그럼 옷부터 입으세오.」 주기가 상자를 열고 두 벌의 옷을 꺼내 입었다. 서천굉이 빗장을 열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자기의 두루마기와 마고자가 주기의 겉옷과 가지런히 문 밖에 놓여 있음을 보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주기가 외쳤다. 좀도둑 정말 이상도 하네. 어째 옷을 다시 가져다 놓았을까? 서천굉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옷을 원래 어디에 놓아 두었기에 그래요? 주기가 어물어물했다. 「침대 옆에 놓아 두었겠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때 낙빙과 위춘화가 손에 횃불을 들고 가까이 접근해 왔다. 「도둑이 신랑 신부의 잠까지 깨워 놓았군그래.」 위춘화가 웃으며 하는 말에 낙빙은 사뭇 놀라는 체했다. 「아니, 어째서 여기 옷이 한 무더기나 있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그들의 장난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서천굉은 전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위춘화가 (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천굉은 제가 술이 너무 취해 도둑이 의복까지 훔쳐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군요.」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한 것1겠지요. 낙빙이 웃으며 말했다. 서천굉도 따라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원래 낙빙은 밤이 깊도록 기다리다가 지금쯤 주기도 잠이 들었거니 싶어 슬그머니 신방의 창문을 건드려 보았다. 창문을 건드릴 때 土리가 날까봐 입으로 계속해서 쥐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창문을 밀며 고양이 한 마리를 방 안으로 던졌다. 창문이 열렸다 닫히는 틈을 타 탁자 위에 놓인 두 사람의 옷을 잡아 챈 것이었다. 양성협 등이 방 안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의복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써서 가져왔느냐고 물었지만 낙빙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떠들다 각자 돌아가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심연이 도둑을 발견했다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낙빙은 이제 의복을 홈쳐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었으니 기회를 보아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다음날 아침 주기의 거북한 입장을 모면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방의 창문 앞으로 달려가 방 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두 사람 모두 일어나 있는 기척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옷을 방문 밖에 놓아 두었던 것이었다. 이때 진가락과 주중영 등도 도착했다. 진가락이 입을 열었다. 「집 주위를 포위해 버렸으니 하늘로 날아 올라가지는 못하겠지요. 우리 한칸 한칸 뒤져 나가십시다.」 군웅들이 한칸 한칸 뒤져보았지만 끝끝내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무진은 화가 나서 계속 욕을 퍼부었다. 「우리 빨리 십사제를 보러 갑시다.」 서천굉이 갑자기 놀라 외쳤다. 그러자 위춘화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총타주님께서 벌써 육 노선배님은 십사제를, 조 삼가는 문 사가를 보호하도록 하셨다네. 그분들이 부상을 당한 몸이라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 만약 사가와 넷째형수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무슨 기분으로 여기 와서 농담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야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한번 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M이 도적이 사가를 노린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십사제를 노리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칠가의 말이 일리 있어요.」 진가락도 수긍을 했다. 군웅들은 먼저 문태래의 방으로 왔다. 방 안은 촛불이 휘황하게 밝은데 문태래와 조반산이 때마침 장기를 두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여어동이 있는 곳으로 왔다. 육비청이 돌계단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가 군웅들이 나타나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는 아무 동정도 없었소.」 이들 영웅호한들은 황제까지도 잡아 왔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오늘 밤은 좀도둑 하나를 잡지 못해 모두들 화를 내면서도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서천굉은 갑자기 창구멍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튀었다 꺼지는 것을 보았다. 틀림없이 방 안에서 누군가 촛불을 불어 꺼 버린 것이다. 의심이 부쩍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들어가 십사제를 살펴봅시다.」 「그 사람 잠이 깊이 들어 내가 밖에서 이렇게 지키고 있었던 게요. 육비청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 빨리 다른 곳으로 가서 조사해 봐요」 낙빙의 말이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들어가 십사제를 보아야 합니다」 서천굉이 우기며 오른손에 횃불을 든 채 왼손으로 방문을 밀자 저절로 열렸다.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침대 위의 사람이 몸을 뒤척이느라 한 번 움직였다. 서천굉이 횃불을 초에 대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잘 붙지를 않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심지가 부서져 초 안에 깊숙이 묻혀 있었다. 틀림없이 암기로 촛불을 꺼 버린 것이다. 그는 깜짝 놀랐다. 혹시 여어동이 예측할 수 없는 불길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닌가? 재빨리 침대 앞으로 가서 여어동을 불렀다. '십사제, 아무 일도 없나? 여어동이 천천히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막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을 여전히 천으로 감싼 채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아, 칠가시군요 오늘 밤 신방에 드셨을 텐데 어인 일로 소제를 보러 모셨습니까? 서천굉은 그에게 아무 일도 없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을 했다. 횃불을 들고 다시 초가 있는 곳으로 가서 보니 단전 하나가 창틀에 꽃혀 있었다. 단전의 끝머리에 촛농과 검은 연기가 묻어 있었다. 이 단전은 여어동의 금피리로 쏘는 것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의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사람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알자 왜 재빨리 촛불을 꺼 버렸을까? 몸을 일으켜 입으로 불어 끌 사이도 없이 암기를 써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단 말인가? 이때 진가락 등도 모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구, 형님들이 모두 오셨네요. 저 아무 일도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여어동의 인사였다. 서천굉이 손을 뻗어 창틀에 박힌 단전을 뽑으려 하자 진가락이 등뒤에서 그를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서천굉이 눈치를 채고 손을 움츠렸다. 이때 군웅들도 여어동의 침대 위의 이불이 불룩하게 올라와 그 말고도 또 한 사람이 그 안에 숨어 있음을 알았다. 「그럼 편안히 쉬시게.」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며 군웅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육비청을 바라보았다. 「육 노선배님, 계속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십사제를 보살펴 주세요 우리는 나가서 계속 수색해 보아야겠습니다.」 육비청이 그러마고 대답을 했다. 군웅들이 물러나자 다시 돌계단에 앉았다. 사람들이 진가락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파수를 보는 사람들 다 들어오시도록 하게.」 진가락의 말에 심연이 전갈을 하자 집 밖에서 파수를 보던 상시쌍협0- 장진 -석쌍영 -장사근이 모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가락은 침대머리에 앉고 군응들은 서고 앉고 하여 그 주위에 몰려 있었다. 모두들 거북한 표정일 뿐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진이 참다 못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좀도둑이 틀림없이 십사제의 이불 속에 숨어 있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십사제가 무엇 때문에 그를 비호하고 있을까요? 그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모두들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각자 자기 의견을 말했다. 어떤 사람은 여어동의 근래의 행위가 이상야릇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무엇 때문에 이가수의 집에 그토록 오래 숨어 있었느냐고 궁금증을 제기하기도 했다. 상씨쌍협은 그가 이가수를 구출해 준 일까지 들먹였다. 모두들 이론이 분분한데 장진이 답답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몰려가 시원하게 한번 물어나 봅시다. 저도 십사제를 의심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도 열혈 남아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만 달랐지 골육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말인들 못할 입장이라고 그래 우리를 속인답리까? 군웅들이 모두 좋다고 나섰다. 「십사제가 혹시 무슨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라도 있을는지 압니까? 당면해서 물으면 말을 안 하려고 할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 심연을 시켜 먹을 것을 보내는 체하며 한번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서천굉의 제안에 장사근이 좋다고 했다. '칠가의 이 방법이 그럴듯하군요.」 주중영이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움직이다 말고 진가락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무슨 의견이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이곳으로 뛰어들어온 사람이 십사제의 방에 숨어 있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다 보셨습니다. 십사제와 우리는 동생공사할 처지입니다. 이번에 그는 생명을 내놓고 사가를 구출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방금 육 노선배님께 부탁을 하여 방 밖에서 살펴보라고 한 것도 그 사람이 혹시 십사제를 해치지나 않을까 해서 방비를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다만 그가 무사하고 평안할 수만 있다면 제 생각으로는 달리 조사해 볼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 공연한 일로 우리들의 의리가 손상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진 총타주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주중영의 말이었다. 「장래 그가 말할 계제가 되면 자연 말을 꺼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이 말을 꺼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젊은 사람은 숭부욕이 강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또 젊은이의 연정 때문에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회규를 범하지 않았다면 십이가께서도 그를 찾아 따지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모두들 이제 돌아가 주무십시오. 내일은 우리 모두 길을 떠나야 합니다.」 진가락의 이 말은 군웅들을 심복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서천굉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도량이 넓은 것으로 따진다면 총타주님은 나보다 훨씬 훌륭하셔. 「혼밤의 일각은 천금에 해당된다고 했는데 신랑 신부가 여기서 뭘하고 있어요? 빨리 돌아가 쉬기나 하지.」 낙빙의 농담에 군웅들이 모두 웃었다. 이 한바탕의 웃음 때문에 큰 저택 안에 다시 경사의 분위기가 가득히 감돌았다. 외나무다리의 원수 여어동은 군웅들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탁자 옆에 서서 군웅들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자 부싯돌을 켜 촛불을 밝히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여기 왜 오셨소? 침대 위에 있던 그 사람이 이불을 걷어 젖히고 내려와 앉아 고개를 숙인 체 아무 말이 없었다. 가슴을 들먹이며 눈물이 글썽글썽하는데 바로 이가수의 딸이며 육비청의 여제자인 이원지였다. 온몸에 검은 옷을 입어 드러난 피부가 눈보다 희다. 백옥 같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한 방울 한 방울 손등 위에 떨구고 있었다. 그날 제독부의 일전이 끝나자 여어동은 홍화회 군웅들을 따라 연기처럼 떠나고 말았다. 이원지는 상심이 되어 기절할 것 같았다. 온종일 말을 타고 항주성 안팎을 되는 대로 달렸다. 이가수는 딸의 심사를 알고 그냥 마음을 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날 새벽녘에 그녀는 서성에서 말을 달리다가 공교롭게도 낙빙이 순무아문에서 옥으로 만든 병을 훔쳐 가지고 달아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전에 낙빙과 몇 차례 대면을 한 적이 있어서 그녀가 홍화회 사람인 줄을 알았다. 멀리서 뒤를 쫓아오다가 이 천목산까지 따라오게 된 것이다. 이원지는 자기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바로 이 미모의 젊은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낙빙은 심정이 마냥 즐겁기만 해 자기를 누군가가 미행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날 밤 이원지의 종적은 몇 차례나 군웅들에게 발각되었지만 그때마다 다행히 숨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다만 여어동을 찾아 자기의 심사를 고백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그래서 어쩌다 어든 곳이 서천굉과 주기의 신방 밖이었다. 심연이 외치는 소리에 군웅들이 사방에서 차단을 하게 되었고 이원지는 마침내 상씨쌍협에게 일 장에 왼쪽 어깨를 얻어맞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픔을 참고 한 어둠 속을 숨어 다니며 양동작전으로 몇 개의 돌을 던져 가지고 후원에까지 뛰어들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마당에서 정면으로 육비청과 부닥치게 되었고 육비청이 그녀를 낚어챘다. 「사부님 . 이원지가 놀라 외치자 육비청은 벌컥 화를 냈다.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여 사가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어요. 육비청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할 수 없이 왼쪽에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 사가.」 이원지가 문을 두드리며 여어동을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사방에서 순시를 하고 있을 때 여어동도 잠이 깨어 일어나 손에 금피리를 들고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습격에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원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깜짝 놀라 빗장을 열자 이원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캄캄한 가운데 젊은 남녀가 한방에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난처한 생각이 들었다. 즉시 부싯돌을 쳐 촛불을 밝히고 왜 왔느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군웅들이 벌써 이쪽으로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잘못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군웅들에게 이 광경이 발각되면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았다. 우선 숨기고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이원지의 체면이라도 건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그는 부상을 당한 몸이라 행동이 불편했다. 그래서 즉시 피리 가운데 있는 단전을 발사해 촛불을 꺼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서천굉이 문을 두드리자 이원지가 애걸을 했다. 「여 사가, 저를 좀 살려 주세요.」 여어동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녀를 이불 속에 숨겼던 것이다. 진가락이 옹호하고 나서는 바람에 다행히 고비를 넘겼지, 만약 이불을 걷어 젖혔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스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이원지를 바라다보는 여어동의 마음도 착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저에 대한 진심, 목석이 아닌 바에야 전들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가씨는 관가 집의 따님인데, 저는 강호상에 떠도는 망명지도니 어찌 아가씨의 일평생을 망친단 말입니까? 「그렇게 갑자기 떠나신다고 해서 일이 끝나나요? 이원지는 흐느껴 울었다. 「저도 아가씨께 미안함을 알아요. 그러나 저는 팔자가 기구한 사람, 마음도 고목이고 꺼진 재 같은 사람이니------아가씨,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 사가께서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우리 아버지의 적수가 되셨 지만 저는 그것을 탓하지는 않아요 여 사가가 의리를 위해서 싸우셨음을 잘 알아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 사가처럼 문무 겸비한 사람이 왜 공명과 부귀를 도모하지 않으세요? 강호상에 떠도는 것이 얼마나 못난 짓이에요? 잘만 해주신다면 제 아버지께서 ,,,,,-.」 「우리 홍화회는 의협심 하나 때문에 죽고 사는 쟁쟁한 남자 - 장부들이오 어떻게 만주 사람의 주구가 되란 말이오? 여어동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원지는 자기가 말을 잘못한 줄 알고 얼굴을 붉혔다. 한찹 만에 다시 말을 꺼냈다. 「사람이 각기 뜻이 다르니 저도 억지로 그렇게 하시라는 것은 아니에요 여 사가께서 좋아서 그렇게 하신다면 저도 좋게 생각하게 되겠지요. 제가 이제 여 사가의 말을 잘 들어 앞으로는 절대로 아버지를 도와 드리지 않겠어요. 그러면 사부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으로 믿어요. 마지막의 두 마디 말은 유난히 커서 밖에 있는 육비청도 들었던 것이다. 여어동은 탁자 옆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기막 했다. 「제가 관가집 딸이라 나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제가 관가집 딸을 포기하겠어요. 홍화회가 좋다고 하시니 그럼 저도------- 여 사가를 따라,,,,,, 홍화회에 가입,,,-, 강호상의 망명지도가 되겠어요.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다급하기도 하여 이원지는 마침내 울어 버렸다. 「제가 당초 중상을 입었을 때 아가씨가 도와 천산만수 항주의 댁으로까지 데려다가 치료해 주시지 않았다면 제 이 목숨은 벌써 없어졌을 것입니다. 이치대로 말을 한다면 분골쇄신한다 타더라도 보답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다만,,,,,,, 아아,,,,,, 아가씨 은혜는 내세에 가서나 갚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여어동의 부드러운 말이었다. 이원지가 벌떡 일어나 섰다. 「그럼 예쁘고 착한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은 아닌지요. 그래서 저를 이토록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대하시는 건가요? 여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건 확실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공연히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격으로, 그는 시종 낙빙에 대한 사모의 정으로 고민해 오고 있었다. 이원지의 인품이나 용모가 결코 낙빙에 비해 손색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든 사람의 눈에서 서시가 나온다)고,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룻이다. 이원지의 이런 추궁을 들으며 어찌 대답해야 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토록 마음이 기울었다면 저보다 열 배 이상 훌륭하겠군요. 저를 데리고 가서 한번 만나게 해 주실 수 없겠어요? 여어동으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을 풀었다. 「제가 벌써 이렇게 흉악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자, 똑똑히 재 얼굴을 보십시오.」 이원지는 갑자기 나타난 울퉁불퉁한 얼굴, 그것도 화상을 입어 까맣게 타 버린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촛불 밑이라 더욱 무섭고 험상궂었다.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불길한 사람이오. 마음씨도 곱지 못해 늘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짓만 하고, 또 나쁜 일을 많이 하오. 게다가 또 태어나면서 팔자가 기구했소,,,,,,,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여어동이 분연하면서도 단호하게 말을 했다. 이원지는 갑자기 그의 이런 모습을 보자 놀랍고 두렵고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여어동이 얼껄 웃었다. '이 추악한 얼굴을 어찌 두 번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밤 이곳에 오신 것을 후회하시겠지요? 하하하하 여어동은 미친 듯이 웃고 떠들었다. 이원지는 더욱 무서워 얼굴을 가린 채 방에서 뛰쳐나왔다. 여어동은 한참 동안 혼자 웃다가 자신의 신세가 가련해 탁자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육비청은 방 밖의 돌계단에 앉아 안의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대강 눈치는 챘다. 지금 여어동을 달래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원지가 밤에 들어왔던 일, 비록 여자 아이의 개인적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를 설명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다면 홍화회 여러 - 그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육비청은 진가락의 방으로 향했다. 진가락은 이때 막 잠자리에 들었었다. 심연은 육비청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 나와 방문을 열었다. 진가락이 침상에서 옷을 걸치고 맞이했다. '총타주님, 제가 청죄를 하러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십사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진가락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여어동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난 줄로 안 것이다. '아닙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이 잘 있습니다. 오늘 밤 소란을 부린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그건 제 어린 제자였습니다. 어찌나 제멋대로 구는지 가리는 법이 없는 아이입니다. 오늘은 칠야의 경삿날인데 무례하게 소란을 피워 여러분을 놀라시게 해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진가락은 아무 소리 없이 잠자코 있었다. 「제 어린 제자는 이미 가 버렸습니다. 일후 제가 그 아이를 찾아내 여러분 앞에 사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이렇게 말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을 했다. 진가락이 벌떡 일어나 답례를 하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 제자분, 선배님으로부터 무공을 배워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육비청은 진가락이 오늘 밤 뛰어들어온 이원지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줄 알았다. 진가락과 이원지가 서호에서 한 차례 대결했던 사실을 알 리 없는 육비청이었다. 「이 아이, 그저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일을 저질러 여러 친구들에게 득죄를 하게 만듭니다. 어떤 때는 어쩌다 그런 못난 제자를 거두어들였나 후회막급할 때가 많습리다.」 「선배님,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그 제자분, 전에 위구르에 간 적이 있지요? 「어려서 서북 일대에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 위구르의 소녀와 아주 친한 것 같았숨니다.」 곽청동이 진가락과 헤어질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사부에게 여쭈어 보시면 아실 거예요.」 진가락은 몇 번이나 육비청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너무 자기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시종 참고 지냈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육비청이 제 발로 걸어와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전연 관심이 없다는 듯 몇 마디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은 벌써 두근두근하여 손에는 땀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코란 경을 뺏기 위한 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서로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약간의 오해도 있었습니다. 곽청동 소저와 제 제자가 두 번 대결을 한 적도 있습니다. 뒤에 제가 나서서 천산쌍은과의 우정을 설명하자 두 사람이 친구로 사귀게 되었지요. 젊은 사람들이라 만나자마자 친해져 버렸나 봅니다.」 육비청이 이렇게 말하며 수염을 쓰다듬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진가락의 입맛은 쓰기만 했다. 육비청은 다만 이원지가 여자라는 사실을 진가락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종 이원지가 남장을 한 여자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진가락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말은 냉담하게 나왔다. 육비청은 다만 그가 이원지가 무례하게 뛰어든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러는 줄로 알았다. 홍화회의 한다 하는 영웅들이 고작 갓 뛰어나온 소녀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 것에 체면이 손상되어 그러려니 했다. 마음속으로 미안한 생각만 가득했다. 그에게 다른 심사가 있어서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또 몇 마디 사과의 말을 하고 물러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심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십사야께서 오셨습니다. 주렴이 들리며 장정 하나가 여어동을 부축하고 들어섰다. 여어동은 육비청이 여기 있는 것을 발견하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장정이 물러갔다. 진가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건너가도 될 텐데 부상한 몸으로 이렇게 나다니는 것은 좋지 않아요.」 「총타주님, 방금 어떤 사람이 제 방에 숨어 있었는데 총타주님은 틀림없이 보셨을 겁니다. 당시 모르는 체하시며 제 체면을 보아 주셨지요 총타주님의 호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게 묻지 않으셨지만 저로서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린 형제나 다름이 없는데 서로 믿으면 그만이지요.」 「그 사람은 소제 하나를 보러 뛰어들어온 것이지 다른 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다만 이 일을 꺼낸다면 그 사람의 명예와 관계가 되는,,,,,,.」 「기왕 그렇다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오. 좋습니다. 이 일은 이후로 우리 아무도 꺼내지 말기로 합시다.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심연, 십사야를 부축해 모시고 다녀오게.」 여어동은 육비청이 이미 이 일을 말했기 때문에 진가락은 자기가 거북해할까봐 다시 꺼내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육비청도 즉시 작별을 하고 그 방에서 나왔다. 이튿날 아침 군웅들은 하산을 했다. 각기 서로 보중하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자기 길을 향해 출발했다. 진가락과 주중영은 동행으로, 본래는 서북쪽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주중영이 당년 숭산 소림사(少林寺)에서 무예를 배울 때 사부나 사백 -사숙들로부터 남방의 보전 소림하원(少林下 阮)의 무공과 숭산 소림의 무공이 한파라는 말을 들었었다. 수백년 동안 내려오면서 보전의 소림사에서 몇 명의 대단한 인물이 나와 소림의 무공을 꾀나 드높였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남쪽으로 온 김에 찾아가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닿으면 절차탁마라고, 한번 배워 보고 싶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 진가락이 이렇게 대답했다. 「남소림 문하의 제자들이 강남에 많이 퍼져 그 명성이 대단하지요. 주 노선배님께서 그분들과 무공에 대해 절차탁마하시는 기회에 보다 더 그분들과 친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일후 우리가 거사를 할 때 만약 소림사에서 조그마한 조력이라도 해 주신다면 실로 천하 백성들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주중영은 아내와 제자인 맹건응 -안건강을 데리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헤어질 무렵 주중영의 부인은 딸 쭈기를 향해 이제 남의 아내가 되었으니 철없이 굴다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신신당부 했다. 주기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만약 나를 업신여기면 어떻게 해요? 말을 하면서 입을 서천굉의 등을 향해 내밀었다. 「너만 잘한다면 무엇 때문에 업신여긴단 말이냐? 어젯밤이 첫날밤이었는데 이원지가 뛰어들어 소란을 부렸고, 낙빙은 그들 신랑 신부의 옷을 가지고 장난까지 쳤다. 낙빙이 시키는 대로 자기 옷을 남편의 옷 위에 눌러 놓기는 했지만 그 방법이 정말 효험이 있을는지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낙빙에게 다시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이제 부모와 멀리 떨어지게 되자 섭섭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주중영이 딸에게 몇 마디 당부를 하고 나서 서천굉을 향해 말을 꺼냈다. 「자네, 아내가 성질이 곧은데다가 철이 없으니 잘 보살펴 주어야겠네. 만약 자네에게 대들더라도 철부지라 몰라서 그렇겠거니 하고 어른스럽게 대해 주게. 내가 다음에 벌을 줄 테니 그리 알게나.」 「아니,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 편이세요? 뭐든지 제가 잘못할 것으로 이야기하시면 어떻게 해요. 주기가 다급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주중영은 웃으며 말에 올라 진가락과 문태래 등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한 뒤 남쪽을 향해 떠나 버렸다. 진가락-문태래-낙빙 -서천굉,주기,장진,여어동,심연 일행 8명은 북쪽을 향해 효풍(孝豊) , 안길(安吉) , 율양을 거쳐 금릉(金陵)에 도착했다. 장강을 건넌 후에 문태래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고 여어동도 많이 좋아졌다. 한달음에 북쪽을 향해 가 는데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초목은 시들어 초겨울의 경치였다. 개봉(開封)을 지나자 여어동의 상처도 이제 완전히 나아 수레와 말을 타게까지 되었다. 이날은 개봉의 서문을 나서서 여덟 필의 말이 힘차게 큰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삭풍이 세차게 불며 먼지와 모래가 얼굴을 때렸다. 문태래가 타고 있는 백마는 다른 말에 비해 너무나 빨랐다. 백마는 힘차게 달려 단숨에 50여 리나 앞장을 서서 한 고을에 이르렀다. 식당을 찾아 닭을 잡고 밥을 지으라 해서 일행이 도착하는 대로 먹을 참이었다. 그는 식당 앞에 앉아 차를 한 잔 시켜 놓고 수건을 꺼내 얼굴을 씻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동쪽에 있는 가게 안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다 그를 보자마자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문태래는 의심이 나서 등을 돌리고 차를 마셨다. 반 시간쯤 지나 진가락 등 일행이 도착하자 문태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서천굉이 동쪽의 가게를 바라다보니 창호지가 젖은 곳에 누군가가 눈알을 굴리며 주시하고 있다가 서천굉의 시선과 마주치자 금방 피해 버린다. 서천굉이 낮게 웃었다. 「금방 나온 햇댕아리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저런 사람까지 나타나 신경을 쓰이게 하다니,,,,, .」 낙빙이 웃으며 말했다. 진가락이 심연을 바라다본다. 네가 가서 보고 오너라. 사정 봐서 좀 도와 주든지 해.」 심연이 대답하고 일어나 그 가게 문 앞으로 갔다. 「천하 만수는 다 근원이 같은 것이요. 붉은 꽃 파란 잎이 다 일가요.」 이것은 홍화회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부를 때 보내는 신호였다. (소제는 모모 방의 모모 타주님 아래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홍화회 대가의 토움을 구합니다.) 이렇게만 대답하면 몇 냥의 은자는 도와 주게 되어 있었다. 심연이 신호를 보냈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내자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커다란 모자로 얼굴의 반쪽을 가린 채 손을 뻗어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십사야께 드리시오.」 심연이 받고 누구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벌써 문 밖으로 달려나가 말을 타고 달아나 버렸다. 심연이 종이 뭉치를 여어동에게 넘겨 주었다. 「십사야, 그 사람이 이것을 드리라고 하더군요.」 여어동이 받아 펼쳐 보니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사모하는 정이 깊고 진실되다면 추하고 잘생긴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천산만수 기어코 그대 뒤를 따르겠나이다.) 필치가 곱고 아름다운 것이 이원지의 글씨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계속 뒤를 쫓아온 것이다. 이마를 찡그리고 그 종이를 진가락에게 보여 주었다. 진가락이 보니 남녀의 사사로운 애정 문제다 더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라 종이를 다시 여어동에게 돌려 주었다. 「이 사람이 계속 저를 귀찮게구는군요. 틀림없이 앞서 가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소제는 여기서 육로를 피해 배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동관에 이르러 다시 여러분과 합류할까 합니다.」 여어동의 말에 장진이 화를 냈다. 「우리 여럿이 다 여기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사람 하나를 무서워하나? 제아무리 재주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와 싸울 것일세.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그 사람을 타일러 주지. 우리 뒤를 쫓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게 아닌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이토록 철없이 굴게.」 장진의 말이었지만 여어동은 난처해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진가락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입장을 이해했다. 「십사제가 배를 타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무방하겠지요. 배 위에서 잠을 많이 자는 것이 말을 타는 것보다는 덜 고생스럽겠지요. 심연, 자네가 십사야를 모시도록 하게.」 심연은 어쩔 수 없이 대답은 했지만 그는 아직 어린아이요, 또 게다가 배를 타면 심심할까봐 내심 싫었다. 주인의 명령이라 거역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어동이 그런 눈치를 채고 이제 상처도 완전히 나았으니 심연이 동행할 필요가 없다고 한사코 사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하가에 이르러 여어동을 위해 배를 한 척 세내어 동관까지 가기로 했다. 진가락 등은 여어동이 배에 올라 돛을 올리고 멀리 떠나 버리자 다시 말에 올라 길을 재촉했다. 장진은 여어동의 우물쭈물하는 태도가 심히 못마땅해 욕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무슨 놈의 꿍꿍이속인지 아니꼬와 죽겠군.」 「십사제가 얼굴을 불에 태운 뒤부터 심사가 어지러운지 하는 짓마다 이상한 데가 있어요. 기회가 오면 충고를 해 주어야겠어요.」 낙빙의 말이었다. 「그때 우리가 문광진에서 그가 어떤 처녀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어떻게 해서 항주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행동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나봐. 그렇지 않다면 왜 사람을 피하려고 그 야단일까? 장진의 볼멘소리다. 「십제,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 문태래가 야단을 쳤다. 여어동은 배를 타고 며칠을 갔다. 이원지가 쫓아오지 않음을 확인하고야 마음을 놓았다. 이날 역풍을 만났는데 날은 이미 어둡고 고을은 멀기만 했다. 물살도 센데다 사공도 밤에는 갈 수 없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부근의 황폐한 들에 정박을 했다. 여어동은 한밤중에 깨어 엎치락뒤치락 잠이 오지 않았다. 둥근 달은 강물에 비치고 탁류는 세차게 흘러 씩씩한 기상에 흥취가 일었다. 자기도 모르게 금피리를 꺼내 자지러지게 불기 시작했다. 신세에 대한 감회와 만강의 심사가 점점 이 피리 소리에 섞여 나왔다. 가락이 격해졌다 처량해졌다 하며 몰아의 경지에 빠져 계속 불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박수 갈채를 보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훌륭한 솜씨로군. 여어동이 놀라 피리를 입에서 떼고 고개를 돌리니 달빛 아래 세 사람이 강가를 끼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3명이 가까이 오며 그중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우리는 길을 재촉하다가 그만 잠잘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어찌할까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인데 귀하의 피리 소리가 너무나 맑고 고와 나도 모르게 실례를 했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라오.」 여어동은 그의 말씨가 겸손하게 나오자 벌떡 일어섰다. 「황폐한 들에서 소제 제멋대로 피리를 불어 소란스럽게 한 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여어동의 말이 교양 있게 나오자 선비로 알고 접근해 왔다. 「괜찮으시다면 소제의 배로 내려오셔서 한잔 나누셨으면 합니다. 여어동의 말이었다. 「좋지요, 좋아요. 세 사람이 언덕에서 내려와 몸을 날려 사뿐히 뱃머리로 뛰어 섰다. 여어동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세 사람의 무공이 약한 편이 아니로구나. 어떤 인물들인지 조심해야겠는걸.) 즉시 허약한 체해 보이기 위해 두 손으로 뱃전을 꽉 잡았다. 배가 기울어 물에 빠질까봐 겁먹는 신융을 한 것이다. 맨 앞에 선 사람은 몸집이 우람한데 명주 옷을 입은 것이 시골의 유지 같았다. 두번째 사람은 뺨에 수염이 그득해 온 얼굴이 새까맣게 보였다. 세번째 사람은 몽골의 복장을 했는데 옷이 모두 양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몸짓이나 행동거지가 이상할 정도로 사나워 보였다. 세 사람은 모두 등에 보따리를 지고 또 각기 병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여어동은 금피리가 그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까봐 그들이 배에 올라오기 전에 숨겨 두었다. 그는 사공을 깨워 술을 데우고 밥을 지으라 하여 손님들을 접대했다. 사공은 깊은 밤에 낯선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고 꾀나 겁을 먹었다. 그러나 오는 도중 여어동이 돈도 시원시원하게 쓰는데다가 또 배를 대절한 주인의 분부라 시키는 대로 했다. 몸집이 우람한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깊은 밤에 번거롭게 해 드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온 천하 사람이 모두 형제와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폐랄것이 뭐 있습니까? 여어동이 겸양을 하자 그 사람이 물었다. 「귀하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제의 성은 우(于)요 이름은 통(通)이라 하며 금룽(金陵) 사람 입니다. 이름은 통이라 하지만 사실은 꽉 막혔습니다. 이번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지요. 고향에 돌아가자니 부모님께 부끄럽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염치가 없습니다.」 여어동이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원래 수재상공이시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었다. 「소제 향시에도 불합격했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또 화재까지 당했습니다. 화신(火神)인 축응의 학대로 집은 기왓장 하나 남지 않은데다가 체면까지 깎여 사람도 만나기가 어려우니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할 수 없이 감숙의 친척 집으로 찾아가 서당 선생 노룻이나 하며 분수대로 살렵니다. 아! 시야(時也)요 명야(命 也)라! 기박하게 팔자를 타고났으니 무슨 말을 또 하리까. 여어동이 문자를 섞어 가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머지 두 사람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 서로 바라다보기만 했다. 그 시골 유지 같은 사람은 글줄이나 읽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공께서는 너무 실망만 하지 마시오.」 「세 분의 존함을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소제의 성은 등입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고 검은 수염의 사람을 가리켰다. 「이분의 성은 고(顧)씨요.」 다시 몽골 복장을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분의 성은 합(哈)씨인데 몽골 분이라오.」 여어동이 읍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는 것도 삼생의 인연이요, 행운이라 했습니다.」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은 그를 꽉 막힌 선비로 여기고 속으로 웃었다. 여어동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요동의 사투리임을 알았다. (이 세 사람이 적인지 친구인지 알 수가 없구나. 만약 강호의 호한이라면 사귀어 놓았다가 일후 거사를 할 때 조그마한 힘이나마 도움을 청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해 보았다. 「세 분이 깊은 밤에 길을 재촉하시면 상당히 위험할 텐데요? 「무엇이 위험하단 말씀입니까?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이 반문을 했다. 여어동은 글을 읽듯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길이 평안치 못하지요. 도(盜)씨가 사방에 깔렸으니 위험하도다. 위험하도다.」 고가 성을 가진 사람이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게요? 「노상에 도적 이 많다는군요.」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이 대답했다. 고가 성을 가진 사람과 합가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이때 사공이 안주를 내왔다. 그 세 사람은 체면을 차릴 것도 없이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이 말을 꺼냈다. '상공의 피리 소리가 정말 근사했어요 다시 한 곡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여어동은 금피리 때문에 자기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사양했다. 「소제 부끄러움을 많이 탑니다. 사람을 보면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성미인걸요. 사양하겠으니 양해하여 주십시요. 그러자 합가 성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한 곡 불지요. 옷 속에서 은을 아로새긴 양뿔을 꺼내 일어서서 우우우 불기 시 작했다. 여어동이 들어 보니 그 소리는 비장하면서도 격앙되어 마치 바람이 부는 초원에서 소와 양을 보는 듯한 사막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격찬을 하면서 곡조를 기억해 두었다. 세 사람이 술을 다 마시자 일어나 고맙다며 가려고 했다. 여어동은 그들을 알아 두고 싶었다. 「불편하시겠지만 배에서 하룻밤 묵으시고 내일 떠나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다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이었다. 여어동은 뒤에 있는 선실에서 자기로 하고 그들은 앞에 있는 선실에서 자도록 했다. 그들 세 사람은 옷을 입은 채 드러누웠다. 잠시 후에 여어동은 코를 고는 체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다. 합가 성을 가진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수재 꽉 막힌 것이 못마땅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쩨쩨하지는 않군 「다 팔자소관이겠지.」 고가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이었다. 「내일 낙양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합가 성을 가진 사람이 묻자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강을 건너 말을 세 필 구해 타고 달린다면 도착할 수도 있겠지. '걱정스러운 것은 한(韓) 대가가 집에 없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오. 그러면 공연히 우리만 허탕치는 것 아니오? 「만나지 못하게 되거든 우리 홍화회의 태호에 있는 소굴을 발칵 뒤집어 엎으면 그만이야.」 합가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고가 성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받았다. 「쉿! 조용히 해요.」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이 그들을 주의시켰다. 여어동은 깜짝 놀랐다. (원래 이놈들이 홍화회의 원수로구나. 놈들이 낙양으로 한가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간다면 아마 한문충이겠지.) 등가 성을 가진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홍화회에는 고수가 많단 말이오. 그들의 노당가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신임 총타주도 대단한 인물이라 하더군. 이곳이 관외(關外)와는 다르니 둘째, 함부로 나서지 말라구.」 「우리 관동육마가 관외를 쉽쓸고 있다는 것은 어린 아이도 다 압니다. 강호상의 호한들이 우리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셋째와 다섯째, 여섯째가 까닭도 없이 홍화회의 손에 피살되었습니다. 이 원수를 갚지 못하면 우리는 사람 노릇도 못해요. 고가 성을 가진 사람은 화가 잔뜩 나서 이렇게 볼멘소리를 했다. 여어동은 생각했다. (원래 관동육마 가운데 인물들이로군 3마 초문기는 육 사숙이 죽였고, 5마 염세괴, 6마 염세장은 위구르 사람들 손에 의해 죽었는데 어째 이걸 다 우리 홍화회에 뒤집어씌웠을까?) 원래 관동육마 가운데의 대마인 등일뢰는 요동의 거부로 재산이 수만 금이라 적지않은 인삼밭과 목장, 금광을 가지고 있었다. 2마인 고금표(顧金標)는 유명한 마적이었다. 4마인 합합태는 본래 몽골의 유목민이었는데 관동으로 흘러들어와 도적이 되었다. 그들은 요동에서 초문기가 어떤 부탁을 받고 홍화회에 의해 납치된 귀공자 하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갑자기 실종되어 수 년 동안이나 전연 소식이 없었다. 최근 초문기의 사제인 한문충이 편지를 보내 이 결의 형제가 벌써 섬서(險西)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할 수가 없어 홍화회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남행을 한 것이다. 북경에 도착한 후 염씨 형제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도 홍화회와 관계가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더욱 화가 나서 낙양으로 달려가 한문충을 찾아 분명히 물어 보아야겠다고 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황하에서 여어동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금적수재의 행방 그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여어동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느라 날이 밝을 무렵에야 겨우 몽롱한 가운데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 금피리를 손에 들고 선창에서 밖을 내다보니 강 위에 수백 척의 큰 배가 돛대를 가지런히 하여 오고 있었다. 맨 앞장 선 배 위에 천자의 친정군임을 나타내는 기가 세워져 있었다. 정변대장군량군軍이라는 일곱 자였다. 원래 조혜에게 보내는 군량이었다. 큰 배의 뒤에 수십 척의 작은 배가 따랐다. 관병들이 강을 따라오면서 노략한 개인의 물품을 실은 것이었다. 여어동이 타고 있는 배의 사공이 정세 불리함을 보고 막 피하려 했다. 그런데 벌써 6, 7명의 청병이 손에 칼과 창을 들고 뛰어올라 왔다. 그들은 말도 없이 사공의 따귀부터 때리며 배를 몰고 뒤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여어동은 관병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습관화 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합합태가 화가 나서 청병을 상대로 대들어 싸우려고 하자 등일뢰가 붙들어 말렸다. 청병들이 뒤에 있는 선창으로 왔다. 여어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태도가 비교적 부드러웠지만 세 사람을 향해서는 무엇하는 놈들이냐고 딱딱거렸다. 「낙양으로 친척을 찾아가는 길이오.」 등일뢰가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앞에 있는 선창으로 가고 이 방은 내놔라. 청병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합합태가 화난 눈으로 째려보며 대들려고 했다. 「넷째, 왜 이러오? 등일뢰가 야단을 치자 합합태가 화를 가라앉힌다. 「수재가 병사들을 만나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다 해도 이 수재야 설마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 몇 명의 청병이 널빤지를 걸쳐 놓고 다른 한 척의 작은 배로 부터 몇 사람을 데리고 왔다. 언-나리, 이 배가 저 배보다는 깨끗한데 영감님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청병의 말에 그 언 나리라 불린 사람이 선창으로 들어와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좋소. 그러고는 거만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여어동은 그 언 나리로 불린 사람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래 이 사람은 전에 철담장으로 문태래를 잡으러 왔던 언백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여어동의 단전에 맞아 한쪽 눈이 멀었다. 얼마 전까지 부상을 치료하다가 사제 하나와 제자 2명을 데리고 무슨 공로라도 한번 세울까 해서 조혜의 군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언백건이 비록 한쪽 눈만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안광은 여전히 예민했다. 여어동의 몸짓을 보고 즉시 의심을 했다. 또 그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어서 그 의심은 더욱 컸다. 그는 고의로 앞 선창 으로 걸어왔다. 등일뢰와 몇 마디 주고받는 체하다가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려 비틀 쓰러지며 오른손을 허우적거리다 여어동의 얼굴 에 가린 수건을 나꿔채 벗겼다. 그때 고금표는 그가 자기를 향해 쓰러지는 줄로 알자 자연히 좌장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 다. 언백건이 재빠르게 움츠려 피했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무공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서로 유심히 바라다보았다. 언백건은 우선 고금표를 놔 둔 채 여어동의 얼굴부터 훑어보았다. 얼굴이 온통 화상으로 일그러져 보기 흉했다. 자기의 눈을 멀게 한 그 잘생긴 녀석과는 완전히 달랐다. 「배가 흔들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네. 이거 아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가렸던 수건을 여어동에게 되돌려 주었다. 여어동이 그걸 받아 얼굴을 가리고 껄껄 웃었다. 「화재에 얼굴이 다 탔습니다. 이런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가린 것인데 놀라지나 않으셨습니까? 언백건은 그의 말투를 듣고 다시 한 번 의심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상을 생각하자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다시 고금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노형도 원래 강호의 동료이셨군요. 자, 들어와 앉으시지요.」 등일뢰 등 세 사람도 사양하지 않고 먼저 언백건의 이름부터 물었다. 그가 진주(辰州) 언가권의 장문인이란 말을 듣자 그 명성도 들은 바 있는지라 숨김없이 자기들의 이름을 댔다. 언백건의 사제는 이름이 팽삼춘으로 호남(湖南) 악양(岳陽) 출신이었다. 쌍방간에 관외와 삼상의 무림의 일사를 이야기하는 도중 꾀나 의기가 투합되었다. 이렇게 되자 주객이 전도되어 여어동이 오히려 개밥의 도토리라고 앞에 있는 선창으로 자리를 옮기게까지 되었다. 여어동은 두 파의 원수들의 회합이 이루어지자 혼자 외톨이가 되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본래 실망하여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이때 대적이 눈앞에 있게 되자 적개심이 일어나 오히려 정신이 가다듬어짐을 느꼈다. 혼자 앞의 선실에 앉아 전에 수재 시험에 응시할 때 공부해 두었던 팔고문을 읊조렸다. 무슨 (선왕지도는 성인지심 이라느니 (형불상 부 예불하서인(禮不下成人)이라느니 혼자 생각나는 대로 읖어댔다. 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득의양양해하면서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언백건은 그의 글 읽는 소리가 못마땅했지만 이것 때문에 여어동을 의심하던 마음은 싹 없어졌다. 저녁밥을 먹을 때 여어동은 술까지 내놓고 그들을 환대했다. 언백건도 부드러운 말로 그와 몇 마디 수작을 나누었다. 여어동이 공자왈 맹자왈 문자만 써 가며 떠드니 네 사람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싫증을 내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거리낌없이 지껄여 댔다. 언백건이 이번에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등일뢰는 낙양으로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만 대답했다. 뒤에 남방 무림의 방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합합태가 갑자기 홍화회의 이름을 들먹였다. 순간 언백건의 표정이 달라지며 홍화회 가운데 어떤 인물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등일뢰가 태연자약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며,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말 같은 것은 비추지도 않았다. 쌍방간에 상대방이 혹시 홍화회와 무슨 관계가 있지나 않은가 해서 빙빙 돌려 물어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되자 서로 꺼리며 경계를 하는 바람에 대화가 먼저처럼 시원시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날은 역풍이 강하게 불어 온종일 겨우 20여 리밖에 가지 못했다. 맹진에도 이르지 못해 군량을 실은 배들이 모두 정박했다. 저녁밥을 먹은 후 등일뢰 등 세 사람과 여어동은 앞 선실안에서 쉬고 있었다. 여어동은 옷도 벗지 못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금피리를 그 안에 숨겼다. 2경쯤 되었을까? 옆 배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렸다. 조용한 밤이라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 이어서 한 여자의 소리가 크게 났다. 여어동은 이웃 배의 관병들이 잔인무도한 짓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때 같으면 달려가 구원의 손길을 뻗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병의 기세가 막강하고 주위는 모두 강적뿐이었다. 자기의 신분이 탄로나면 즉시 죽을 신세다. 이불깃으로 귀를 틀어막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들렸다. '나리, 좋은 일 한 번만 하세요. 제발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또 옆에서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 엄마! 여어동은 참을 수 없어 일어나 귀를 기울였다. 다른 여자의 울음 소리도 들렸다. 청병의 거친 호령 소리가 다시 들렸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네년의 아이부터 죽여 버리겠다. 여자의 비참한 애걸 소리 가운데 관병들이 미친 듯 웃어 댔다. 이어서 두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신음이었다. 여어동은 가슴이 막힐 정도로 화가 났다. 자신의 생사와 안위를 돌볼 계제가 아니었다. 뱃전으로 걸어가니 합합태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 건너가 봅시다.」 '넷째, 모르는 체하오. 언가 성을 가진 형제들 수상한 데가 많아요. 만약 그들이 홍화회와 한패라면 우리는 그만.......」 등일뢰의 만류하는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여어동은 발밑에 힘을 주며 그쪽 배의 후미로 뛰었다. 관동삼마는 이 수재의 경공이 대단함을 보고 깜짠 놀랐다. 손짓을 하고 여어동의 뒤를 쫓아 나섰다. 이때 언백건과 팽삼춘도 놀라 깨어 일어나 여어동 등이 저쪽 배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각자 병기를 꺼내 들고 뱃전에 나와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어동은 후미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뱃전에 몸을 웅크리고 숨긴 채 선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실 안에는 촛불을 환하게 켜 놓고 7, 8명의 청병이 두 여자를 잡고 막 강간을 하려고 했다. 여자는 바닥에 꿇어앉아 울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한 여자는 죽자 하고 아이를 껴안은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바닥에는 남자 한 바닥에는 남자의 시체가 여럿 있었고 옷 상자는 열린 채 옷가지며 동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정을 보건대, 청병들이 군량을 옮긴다는 구실을 이용해 강을 따라오면서 민선(民船)을 납치하고 밤이 되면 객상을 살해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던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여어동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안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하는데 등뒤에서 합합태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큰형님, 이 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안돼! 등일뢰가 만류를 하는데 바로 이때 청병 하나가 여인의 품속에서 아이를 뺏어 바닥에 타작을 하듯 집어 던졌다. 아이의 머리가 터지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여인이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두 명의 청병이 껄껄 웃으며 그 여자를 누르고 옷을 되받았다. 여어동은 순간 기도를 드렸다. ,위에 계신 홍화회 노조님, 제자 여어동은 오늘 제 생명을 버리고 사람을 구해야 되겠습니다. 저를 보우해 주시옵소서. 금피리도 꺼낼 새 없이 대갈일성, 빈손으로 뛰어들며 왼발로 차고 오른손 주먹으로 치고 하여 여자를 누르고 있던 2項의 청병을 쓰러뜨렸다. 뒤이어 한 청병의 목을 움켜잡고 비틀었다. 그 병사가 비명을 지르는데 그의 칼을 빼어 들고 다른 청병의 오른 발을 잘라 버렸다. 다른 청병들이 분분히 병기를 꺼내 들고 여어동을 대했다. 여어동은 칼 솜씨가 서투른 편이었지만 수 합을 싸우는 동안」 또 2명의 청병을 쳐 쓰러뜨렸다. 나머지 청병들이 뱃머리로 도망을 쳤지만 합합태의 발길에 맞고 풍덩풍덩 물 속에 빠졌다. 여어동이 두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빨리 언덕으로 올라 달아나시오.」 두 여자는 너무나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때 이웃 배의 병사들이 격투와 고함 소리를 듣고 횃불을 밝히고 뱃머리로 나와 누구냐고 물었다. 합합태가 선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훌륭한 수재님, 정말 탄복했습니다.」 여어동이 한 여자를 끼고 언덕으로 뛰어오르자 합합태도 여자 하나를 데리고 올라왔다. 고금표가 등뒤에 지고 있던 짧은 엽호를 꺼내 들고 강변에 서서 후로를 차단했다. 등일뢰가 손으로 뱃전을 쥐고 양팔에 힘을 주자 배가 번쩍 들렸다가 뒤집혀 바닥이 하늘을 향했다. 시체와 그밖의 잡동사니가 모두 물 속으로 떨어졌다. 여어동은 깜짝 놀랐다. 엄청난 힘이로구나!> 네 사람은 청병들이 뒤집힌 배 주위에 몰려 소란한 틈을 타 캄캄한 가운데 두 여자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여어동은 수목이 빽빽한 곳만 골라 달렸다. 뒤쫓아오는 청병이 없음을 확인하고 발길을 멈추고 그 여자에게 물었다. 어쩌다 그놈들의 손에 잡혔습니까? 그 여자는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땅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릴 뿐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여기 숨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날이 밝아 병선이 떠나거든 그때 떠나십시오.」 목소리를 높여 뒤에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외쳤다. 「세 분 형님, 도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소제 이만 작별하겠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막 세 발짝쯤 걸어 나가는데 캄캄한 앞에서 누군가가 은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했다. 「여 십사야, 거기 잠깐만 서 계시오.」 여어동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사람이 캄캄한 가운데 걸어나오는데 바로 철천지 원수인 언백건이었다. 그 뒤에는 그의 사제인 팽삼춘도 있었다. 팽삼춘은 양손에 삼절곤을 든 채 오른쪽으로 비켜 서서 여어동이 혹시 달아날까봐 감시하고 있었다. 이때 등일뢰 등 세 사람도 그 여자를 데리고 이쪽으로 왔다. 언백건의 급작스러운 출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뵙지요.」 여어동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한 뒤 등일뢰와 고금표 두 사람 사이로 빠져 나가려 했다. 팽삼춘이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구부려 댕그렁 소리를 내며 삼절곤으로 여어동의 하체를 향해 후려쳤다. 여어동이 이막용문의 자세로 삼절곤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왼쪽 발을 땅에 찍으며 일 장여나 뛰었다. 팽삼춘의 일격이 빗나가기는 했지만 삼절곤의 여세는 막강했다. 삼절곤이 고금표의 다리를 치게 되자 급히 밖으로 흔들어 빼며 앞으로 뻗었다. 삼절곤이 뻣뻣하게 여어동의 등을 노렸다. 여어동이 앞으로 항해 엎드려 삼절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반격할 생각은 안 하고 이 틈을 노려 달아났다. 그런데 갑자기 칼날이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캄캄한 가운데 백광이 반짝하며 두 자루의 단도가 얼굴을 공격했다. 원래 언백건의 두 제자 송천보와 딤천숭이 쫓아온 것이었다. 여어동은 3면으로 적을 맞이해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 속에 있는 금피리를 꺼내 땅땅 쌍도를 막았다. 팽삼춘이 대들어 공격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합합태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세 사람이 한 사람을 치다니 무슨 놈의 호한이 그 모양이오? 팽삼춘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함합태가 손을 재빠르게 놀려 삼절곤의 끝을 잡고 바깥쪽을 향해 낚워챘다. 팽삼춘도 뺏기지 않으려고 잡아당겼다. 둘 다 손을 놓지 않고 밀고 당겼다. 팽삼춘이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왼손으로 삼절곤의 중간 토막을 쳤다. 그리고 오른손을 놓자 삼절곤의 다른 한 토막이 꺾이며 합합태의 왼쪽 어깨를 노렸다. 이것은 삼절곤의 구명(救命)변초(變 招)로 독사파미라 불렀다. 합합태로서는 너무나 갑작스런 공격이라 미처 막을 여유가 없었다. 캄캄찬 가운데 삼절곤의 한쪽 끝이 자기를 노리고 대드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급히 오른쪽을 향해 피했다. 그러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삼절곤이 그의 어깨를 때렸다. 아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합합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삼절곤을 잡았던 손을 풀고 팽삼춘의 허리띠를 틀어 잡았다. 기합 土리와 함께 뚱뚱한 팽삼춘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땅바닥에 태질을 했다. 합합태는 몽골 사람의 씨름에 능했다. 이렇게 되자 팽삼춘은 머리가 터질 듯 아프고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했다. 등일뢰는 합합태가 이기는 것을 보고 「일 저지르지 말고 빨리 갑시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언백건이 나섰다. 「잘들 논다. 관동육마가 원래 홍화회에 투항을 했었구나.」 이 말을 들은 고금표가 화를 내며 머리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는 게요? 「당신들이 홍화회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홍화회 두목의 일을 무엇 때문에 도와 주고 있는가? '아니, 저 사람이 홍화회 두목이란 말이오? 등일뢰가 이상하다고 물었다. 언백건은 두 제자가 여어동에게 몰려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형세가 너무나 다급해 미처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장삼 자락에서 한 쌍의 강환을 꺼내 쩔그렁거리다 강환으로 여어동의 등을 노리고 쳤다. 여어동은 금피리를 돌리며 그의 기문혈을 찍으려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어울려 수 초를 대결했다. 등일뢰가 손을 멈추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지만 언백건은 듣지 못했다. 눈에 가시 같은 원한만 생각하며 한 쌍의 강환을 광풍이나 소나기처럼 놀리며 원수의 급소를 노렸다. 등일뢰가 등에서 독각동인을 풀어 가지고 가까이 접근, 아래를 향해 눌렀다. 땅 하는 맹렬한 소리와 함께 여어동과 언백건의 두 가지 병기가 그 위력에 눌려 떨어졌다. 여어동과 언백건은 팔이 마비됨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심히 놀랐다. '혼전을 벌이지 말고 이 사람의 말 한마디만 들으시오.」 등일뢰가 이렇게 말하며 여어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하는 홍화회 소속이시오? 여어동은 오늘만은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대답할 것도 없이 어둠 속을 향해 달아나려고 뛰었다. 송천보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가 칼을 들고 쫓아왔다. 여어동이 몸을 돌리며 피리를 부렀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피리 속에서 단전 하나가 발사되어 송천보의 얼굴에 꽃혔다. 송천보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펄펄 뛰었다. 등일뢰와 언백건이 뒤를 쫓아왔지만 너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 여어동의 금피리의 단전이 무서워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 등일뢰와 언백건이 서로 몇 마디 주고받았다. 언백건이 여어동의 신분과 내력을 설명해 주고 나서 각자 사방으로 흩어져 뒤졌다. 여어동은 점점 멀리 달아나며 강가를 향했다. 그래도 청병의 군량미를 싫은 배에 붙는 것이 제일 안전할 것 같았다. 내일 이들만 출발하면 별일 없을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는 숲속에 숨어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땅에 엎드려 서서히 포복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청병의 욕지거리 소리가 들렸다. 원래 구출되었던 두 여자가 다시 청병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지키기에도 힘이 들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할 처지가 아니었다.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비명 소리가 갈수록 처참하게 들렸다. 참을 수가 없어 고개를 들고 보니 청병 하나가 양손에 각기 여자를 하나씩 끌고 강가로 가고 있었다. 두 여자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울어대자 청병은 그들을 개 끌듯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갔다. 여어동은 생각했다. (살기를 탐해 의를 저버린다면 대장부가 아니다.) 금피리로 청병의 뒷머리를 겨냥하고 힘껏 불자 단전이 날아가 그의 뇌에 박혔다. 청병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여어동은 단전을 불어 발사한 후 즉시 언덕을 향해 달렸다. 이 단전의 발사로 마침내 그의 종적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수 장을 달려나가는데 고금표가 옆 길에서 엽호차를 들고 나와 막았다. 여어동은 유운검술(柔雲劍術)을 펴 그를 쫓아 버리려 했다. 그런데 수 초를 겨루는 동안 상대방의 몸과 손놀림이 민첩한 것을 보고 강적임을 알았다. 고금표는 이렇게 대결을 하면서도 계속 자기 동료들을 부르는 신호를 보냈다. 여어동은 먼 곳에서 검은 그 자가 엄습해 오는 것을 보고 더 싸을 마음이 없어졌다. 진격으로 후퇴를 삼는다고, 온몸을 앞으로 덮치며 왼손의 두 손가락을 펴 고금표의 가슴 앞 요혈을 찍었다. 고금표가 엽호차를 가로로 들어 막았다. 여어동이 뒤로 뛰어 물러섰지만 팽삼춘의 삼절곤이 벌써 자기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동시에 등일뢰와 언백건 -담천승까지 쫓아와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했다. 「병기를 버려라. 등일뢰가 소리를 질렀지만 여어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리를 바람처럼 쓰며 혼전 가운데서도 발을 들어 담천승을 걷어차 쓰러뜨렸다. 등일뢰가 동인(銅人)을 휘둘러 바람을 가르며 여어동의 허리를 후려쳤다. 여어동은 그의 힘이 막강하여 막을 수 없음을 알고 몸을 날려 피했다. 등일뢰의 병기는 묵중했지만 워낙 완력이 강해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일격이 빗나가자 즉시 거둬들이다가 횡소천군의 태세로 바로 여어동의 허리를 노렸다. 여어동이 고개를 숙이자마자 동인이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갔다. 즉시 원숭이처헐 몸을 웅크리며 직진, 등일뢰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금피리로 그의 기유혈을 찍었다. 등일뢰는 동인을 번쩍 들어 금피리를 떨어뜨리려 했다. 여어동이 갑자기 몸을 빼 솟구치며 송천보의 머리를 뛰어넘고 내려서며 무릎으로 그의 등을 찍었다. 송천보가 비틀거리며 등일뢰의 동인에 부닥치려 했다. 언백건이 옆에서 번개처럼 달려들어 낚워채며 야단을 쳤다. 「죽고 싶어서 그러느냐? 「대단한 솜씨로군. 등일뢰가 여어동을 향해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탄성을 질렀다. 이쪽의 팽삼춘과 고금표가 다시 여어동의 퇴로를 막았다. 합합태가 옆에서 관전을 하다가 여어동이 여러 사람의 병기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어 죽게 되었음을 보고는 싸움판에 끼여들었다. 그는 여어동이 나약한 부녀자를 구출하려는 의협심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었다. 「큰형님, 둘째형님. 물러서시오.」 등일뢰와 고금표가 이 말을 듣고 싸움판에서 뛰쳐나왔다. 여어동은 여러 사람을 상대로 싸우느라 온몸이 땀에 젖을 대로 젖고 지칠 대로 지쳐 내뻗는 금피리도 힘이 하나도 없었다. 등일뢰와 고금표가 뛰쳐나오자 언백건의 오른손의 강환(鋼環)이 벌써 여어동의 금피리 한 끝에 씌워졌다. 그리고 왼손의 강환이 맹렬한 힘으로 피리의 중간을 후려쳤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금피리가 여어동의 손에서 빠져 나가 허공에 날고, 강환은 다시 여어동의 태양혈(太陽 穴)을 노렸다. 합합태가 여어동을 뒤에서 잡아당겨 이 일격을 피하도록 했다. 그리고 몽골씨름의 재주로 오른다리를 걸고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자 여어동이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합합태가 여어동을 깔고 앉았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금피리를 고금표가 손을 뻗어 받아 자기 허리에 꽂았다. 송천보와 담천승은 여어동으로부터 골탕을 먹은 적이 있기에 즉시 달려와 때리려고 했다. 「잠깐만. 합합태가 말리며 여어동의 장삼 깃을 찢어 손을 뒤로 돌려 묶고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나는 당신이 호한임을 믿소. 해야 할 말을 다한다면 우리는 결코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여어동은 코방귀를 뀔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홍화회 소속이오? 등일뢰가 물었다. 「내 성은 여요, 이름은 어동. 강호상에서는 나를 금적수재라 하고 홍화회의 열네번째 교의에 앉아 있소.」 「그럼 됐소. 나도 당신의 이름을 많이 들었소. 내 몇 사람에 대해 물어 보고 싶으니 대답을 해 주시오.」 등일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초문기와 염씨 형제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나도 솔찍히 대답하리다. 그들은 우리 홍화회에서 살해한 것이 아니오.」 언백건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 「이 눈먼 도둑놈아, 내 지금 너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도둑놈의 눈은 내가 멀게 했다. 그래 어쩔 테냐? 내 네놈을 무서워한다면 호한이 아니다.」 여어동의 욕설에 송천보가 화를 내며 칼을 들어 쪼갰다. 합합태가 여어동의 다리에 올려 놓고 있던 오른발을 살짝 들었다. 여어동은 두 발이 자유로워지자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내려치는 칼을 피하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송천보의 왼쪽 다리에 있는 복토혈을 거더찼다. 송천보가 칼을 놓치며 마비가 되어 쓰러졌다. 담천승이 대들어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팽삼춘은 사질이 망신을 당하자 주먹을 휘두르며 대들었다. 「싸우고싶어서 그러나?내 이 사람을끌러 줄테니 한번 1대1로 통쾌하게 싸워 보려오? 합합태의 이런 말에 팽삼춘은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내 우선 당신과 먼저 대결을 해 보는 것도 좋겠군.」 쩔그렁쩔그렁 삼절곤을 흔들며 나섰다. 「다시 한 번 넘어지고 싶은 게로군.」 합합태도 나섰다. 언백건이 급히 팽삼춘을 자기 등뒤로 잡아 끌며 등일뢰가 어떻게 나오나 눈치를 살폈다. 등일뢰가 다시 여어동을 향해 물었다. 「강호상에서는 대부분 우리의 세 형제를 홍화회에서 살해했다고 말하고 있소. 속담에, 원수도 각각 주인이 있고, 부채도 각각 주인이 있다고 했소. 이 일을 도대체 누가 지시했으며 또 누가 직접 살해했는지 두려워 말고 솔직히 말씀만 해 주시오. 그럼 우리는 그 사람을 찾아갈 것이오. 설마 우리가 홍화회의 몇만 명을 다 죽여 없앨 리야 있겠소? 「오늘 내가 당신들 손에 잡혔으니 죽일 테면 죽일 일이지 무엇 때문에 말이 많소? 당신은 홍화회가 당신들 몇 사람을 무서워할 것으로 아는 모양인데 그건 어림도 없는 얘기요.」 여어동의 대답을 듣고 합합태가 나섰다. 「당신이 호한이라 나는 정말 좋아하오. 우리 삼 형제를 도대체 누가 죽였는지 그것만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 세 사람을 누가 죽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절대 홍화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오. 「그렇다면 말씀을 하시지요. 우리가 즉시 당신을 풀어 드리지요.」 고금표의 말이었다. 「이 여 모 비록 무명의 젊은이에 불과하지만 몸만은 홍화회 소속이오. 어찌 다른 사람의 위협을 두려워하리요? 그 세 사람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 당신들에게 말을 해도 무방할 것이오. 또 그 사람도 당신들이 복수를 하러 온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오. 그러나 당신들이 이토륵 나를 핍박하고 있으니 나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여어동의 당당한 말에 고금표가 엽호차를 흔들었다. 엽호차에 달린 3개의 철환(鐵環)이 쨀그렁거렸다. 「말을 할 거야, 안 할 거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어동이 고개를 바짝 들었다. 「말 안 하면 어떻게 할 거요? 배짱이 있거든 그 엽호차로 내 가슴을 찌르시오. 우리 홍화회 형제들이 내 원수를 갚으려 든다면 이렇게 어리석게 굴지는 않을 것이오. 오늘까지 원수가 누군지 그것도 모르면서 쓸데없이 날뛰는 추태는 연출하지 않을 것이오.」 고금표는 화가 나서 엽호차를 부들부들 떨어 가며 욕만 퍼부어 댔다. 합합태가 다시 나섰다. '당신이 만약 나 같은 사람도 친구로 사귈 만하다고 생각되시거든 말씀을 해 주시지요.」 여어동은 이 몇 사람 가운데 합합태 하나만이 자기에게 우호적인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왜 이 일을 한문충에게 물어 보지 않으십니까? 그가 낙양에 있지 않고 지금 위진하삭 왕유양과 같이 항주에 있습니다.」 「정말이오? 등일뢰가 물었다. 「내 언제 거짓말하는 것 보셨소? 여어동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합합태는 그가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가면 갈수록 강인해지는 것이 오히려 호감이 갔다. 그래서 등일뢰와 고금표를 한쪽으로 잡아 끌었다. '협박을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으니 놓아 줍시다.」 「우리가 그를 그냥 놓아 주면 강호상에서는 오히려 관동육마가 홍화회가 무서워 그랬다고 할 것이 아니오? 내 생각으로는 죽여 없애는 편이 좋겠소.」 고금표의 의견에 등일뢰는 반대였다. 「죽인다 해서 좋을 것이 뭐요? 우리가 항주로 한문충을 만나러 갑시다. 저자를 데리고 가며 노상에서 다시 물어 봅시다 어쨌거나 일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진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고금표도 찬성을 했다. 등일뢰가 돌아와 여어동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데리고 항주로 가서 한문충과 대질을 시킬 것이오.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 풀어 주겠소.」 여어동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겠군. 가는 도중에 구출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달아날 방법은 생기겠지.)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등일뢰가 언백건을 향해 손을 들었다. 「다음에 또 만납시다.」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언백건이 잽싸게 이쪽으로 쫓아왔다. 「잠깐만. 이 사람은 우리가 함께 잡았소. 당신들 마음대로 그냥 데리고 가겠다니 말도 되지 않는구려.」 「그래 어쩌겠다는 거요? 합합태가 화를 냈다. 언백건은 생각했다. 자기 편이 4명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세 사람은 무공이 막강하다. 자기야 그런 대로 상대할 수도 있다지만 사제와 도제들은 쓸모가 없으니 억지를 부려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다. 「저자가 내 한쪽 눈을 쏘아 멀게 했으니 나도 저자의 두 눈을 베어야만 속이 풀릴 것이오. 내가 두 눈을 뽑거든 그때 여러분이 데리고 가시오. 등일뢰와 고금표는 생각했다. 여어동을 잡는 데 그의 공로가 컸음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는 관가의 사람이 아닌가? 그의 비위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여어동이 눈이 없으면 데리고 다니기에도 그만큼 편리했다. 또 달아날까봐 염려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언백건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언백건이 오른손의 식지와 중지로 쌍룡창주의 태세를 취하고 여어동의 두 눈을 찔렀다. 여어동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피할까 했는데 고금표가 그의 몸을 잡고 앞으로 밀어 꼼짝달싹도 못하도록 했다. 진가락 등 일행은 황하를 끼고 서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도처에 모래며 자갈 -진흙 등이 홍수 뒤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다 백골이며 해골 등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백성들이 홍수를 피해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끝내 물결 속에 장사를 지내고 만 참상에 모두들 처연함을 느꼈다. 어찌하면 우 임금과 같은 사람이 또 태어나 당(唐)나라의 치수관이 되어 손에 의천검을 들고 다시 몸소 지휘하게 될꼬. 진가락은 시를 읖으며 생각에 잠겼다. 백낙천의 이 우국우민의 시는 정말 그 기백이 비범하구나. 우리 홍화회는 지금 칼을 들고 적만을 죽이고 있으니 어느 날에나 칼을 들고 치수를 지휘하게 될까? 그것이 우리의 소원인네,) 어느 날 동관에 도착했다. 서천굉과 장진 두 사람이 각기 나뉘어 각처의 거리와 담 모퉁이를 살펴보았지만 여어동이 남긴 기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객점에 들어가 쉬며 사흘을 기다려도 시종 여어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천굉과 장진이 수로와 육로의 나루터에 가서 알아보았지만 여어동과 비슷한 사람도 본 일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모두들 모여 상의를 했다. 이상한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고 걱정만 했다. 동관 일대의 나루터를 장악하고 있는 방회는 용문방이었다. 그들과 홍화회는 평소 내왕이 없었다. 여어동이 혹시 그들의 손에 걸리지나 않았나 해서 서천굉은 자기의 명함을 들고 용문방의 용두대가인 상관의산을 방문하기로 했다. 상관의산은 서천굉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듣자 그가 홍화회의 칠당가요, 강호상에 유명한 무제갈임을 알고 나와 맞이했다. 서천굉이 내의를 설명했다. 「오래 전부터 귀회의 인의(仁義)로움을 존경해 왔습니다. 귀회가 계속 강남에만 계셨기 때문에 찾아 사귈 인연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만약 귀회의 십사당가께서 배를 타고 황하에 계시다는 소식을 일찍 들었더라면 잘 모셨을 것입니다. 제가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알아보도록 하지요.」 상관의산의 말은 정중했다. 즉시 서천굉의 면전에서 8명의 제자를 불렀다. 4명은 배를 타고 가며 알아보고, 4명은 양쪽 연안을 따라 가다가 영접을 하되, 여 십사당가를 보는 즉시 동관으로 모시고 오라고 분부를 내렸다. 서천굉은 그가 성심성의껏 나오고 또 의리도 있어 보여 계속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상관의산은 그를 보고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며 소식을 듣고 가라고 청했지만 서천굉은 끝까지 사양했다. 오후에 상관의산이 답례로 홍화회를 예방했다. 진가락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만나지 않았다. 서천굉 혼자 그를 접대했다. 상관의산은 그날 밤 큰 잔치를 베풀고 서천굉을 대접했다. 당금 무림의 호걸들을 모두 초청하여 배석시키는 열성까지 보였다. 동관의 무림 인사 가운데 주중영을 아는 사람이 꾀나 많았다. 서천굉이 서북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철담 주중영의 사위라는 말을 듣자 더욱 응숭하게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무제갈이 강호상에서 명성을 드날리고 있는데 만나고 보니 키도 작고 약해 보인다며 사람은 모습이나 용모와는 다른 것이라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이 호쾌한 것을 보고 친구로 사귈 만하다며 마음속으로 존경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튿날 오전 상관의산이 또 객점으로 인사를 하러 왔다. 수하 사람들이 여어동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단서만은 찾았다고 했다. 「수로에 있는 형제들의 보고에 따르면 요 며칠 서정대군의 군량을 운반하느라 황하의 선박 통행을 봉쇄했다는 것이다. 여 십사야께서도 이 일 때문에 길이 막힌 것이 아닐는지요.」 서천굉은 다소 안심이 되어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상관의산이 또 직접 찾아왔다. 육상의 형제들 보고에 의하면 맹진(孟津)의 큰 거리에 있는 취선루(醉仙樓)에서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보이기 두려워하는 수재 하나가 다른 사람과 싸웠는데 술집이 엉망으로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서천굉이 놀라 물었다. 「그가 틀림없는 여 십사제요. 그래 그뒤에 어떻게 되었다고 합디까? 「제가 알아보라고 파견했던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은 그가 인편에 전해 온 것이라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상관의산의 대답이었다. '상관 대가께서 이토록 최선을 다해 주시니 정말 감격할 따름입니다. 제가 몇 명의 친구를 소개해 드리지요.」 그래서 옆방으로 가 진가락,문태래 ,낙빙 .장진.주기 등을 청해다 상관의산에게 소개해 주었다. 상관의산은 너무나도 좋다며 서로 존경해 왔다는 인사말을 나누었다. '십사제는 워낙 치밀한 사람이라 술 때문에 일을 저지르거나 할 위인은 아닙니다. 그가 싸움을 했다면 틀림없이 원수를 만났을 것입니다. 우리 빨리 맹진으로 갑시다.」 진가락의 말에 문태래가 찬성하고 나섰다. 「그래야 합니다. 지금 당장 가십시다.」 '여러분께서 동관에 오셨으니 제가 이곳 사람으로서 극진히 모셔야 함이 도리겠습니다. 그러나 급한 일이라 하시니 저도 여러분 을 모시고 동행하고 싶습니다.」 상관의산의 말이었다. 진가락은 그가 의리를 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 거절하지 않았다. 상관의산이 2명의 조수를 데리고 와 모두들 함께 말을 타고 맹진을 향해 달렸다. 문태래는 백마를 타고 선발대로 나섰다. 사람들이 맹진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왔을 때 먼저 갔던 문태래가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취선루에 가 알아보았는데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십사제와 싸운 사람은 이 고장의 유지로 이름이 뭐 손대선 이라고 하던가요. 그밖에 관가의 포쾌(補快) 몇 명도 합세했다고 술집 주인이 말했습니다.」 '아니, 손대선이라면 금년 나이가 60여 세, 무공도 모를 뿐만 아니라 늘 겸손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기로 유명한 분인데 어찌 그분이 싸움을 했을까요? 상관의산이 의아해하며 말참견을 했다. 「뒤에 어떻게 되었다고 합디까? 진가락의 재촉이었다. 「그뒤의 일은 술집 주인이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려요.」 「좋습니다. 우리 빨리 가 봅시다.」 진가락의 말이었다. 사람들은 말을 재촉하여 앞을 향해 달렸다. 맹진에 도착하자 상관의산은 취선루로 가서 주인을 찾았다. 주인은 용문방의 용두대가가 나타나자 서둘러 술상을 차리고 접대를 했다. 전연 속임이 없이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지만 문태래가 알아본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주인은 난간과 벽에 있는 병기에 의해 찍힌 자국을 가리키며 그날 싸움을 할 때 남긴 흔적이라고 말했다. 급히 그린 기호 그날 언백건이 여어동의 두 눈을 뽑으려고 손가락을 뻗어 찌르려 하자 합합태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잡고 힘껏 낚워챘다. 언백건은 화가 나서 좌장을 뒤로 향해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합합태의 오른손이 맞았다. 합합태는 너무나 아파 급히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이 각자 한 발짝씩 다가서며 대결할 태세를 취했다. 등일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며 동인(銅人)을 흔들어 막았다. '우리 다 친한 사이니 우의를 깨지 맙시다.」 합합태가 언백건을 향해 이런 말을 꺼냈다. '원수를 갚겠거든 우리 일이 다 끝난 뒤에 하시오. 그때는 우리가 이 사람을 돕지 않겠소. 지금은 절대로 안 되오. 등일뢰는 합합태의 성격이 대나무나 다름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는 한번 한 말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비록 합합태가 말한 대로 한다는 것이 타당하지는 않았지만 제삼자 앞에서 형제끼리 말다춤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백건은 싸움을 해 봐야 승산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씨근덕거리며 쌍환을 거둬들이고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이고 내 저자의 두 눈을 뽑고야 말 테니 두고 보시오.」 「그렇게 하시구려. 그럼 다음에 만납시다.」 합합태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관동삼마는 여어동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언백건은 도제의 다리에 눌린 혈도를 풀어 주고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사패 시분이 되어 등일뢰 등은 맹진에 도착하여 술집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그 술집의 이름이 (취선주루였다. 등일뢰는 술과 안주를 시켜 여어동과 한상에 앉아 먹었다. 술을 한잔 마시고 있는데 계단에 발자국 소리가 울리며 7, 8명의 포쾌와 점잖게 차려 입은 노인 한 사람이 올라왔다. 그 노인이 여러 가지 안주를 시켜 포쾌들을 대접했다. 포쾌와 술집 주인은 노인을 손 (孫) 영감님이라 불렀다. 말씨가 공경스러운 것이, 이 노인은 당지에서 행세깨나 하는 유지 같아 보였다. 잠시 후에 또 네 사람이 나타났다. 합합태는 그들을 보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언백건과 도제들이 따라온 것이다. 여어동은 못 본 체 태연자약하게 술만 마셨다. 등일뢰가 합합태를 바라다보며 말을 꺼냈다. 「넷째, 우리가 관내로 들어온 것은 셋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요. 그런데 어째서 넷째는 그래 원수를 감싸고 돌려고 하나? 셋째와 그들이 구천에서 자네를 원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지도 않은가? 「제가 무엇 때문에 원수를 감싸고 돌겠습니까? 나는 이 사람이 호한이라 다른 사람이 업신여기지 못하게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정말 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땐 제가 먼저 나서서 목숨을 뺏어 버리겠습니다.」 「여기서 항주라면 꾀나 먼데 저자들이------.」 고금표가 이렇게 말하며 언백건 등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이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포기하지도 않고 귀찮게 쫓아다닐 테니, 차라리 그들이 이자의 눈을 뽑아 버리게 놔 두지 그래. 그렇지 않으면 노상에서 일이 벌어질 것 같구먼.」 합합태가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셋이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합합태는 혼자인데다 줄곧 대마인 등일뢰의 지시를 받아 버룻하여 끝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다 벌떡 일어나 섰다. 「큰형, 둘째형, 나 먼저 출발하여 항주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이 사람 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으려오.」 밥도 먹지 않고 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고금표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가 뿌리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합합태는 어려서부터 몽골씨름에 익숙하여 한번 이렇게 멋대로 뿌리쳐도 그 힘이 막강했던 것이다. 「둘째, 그냥 내버려둬, 워낙 소 같은 성질이라 못 말려. 이 사람이나 잘 지키게.」 고금표는 비수를 뽑아 뒤집어 팔뚝 밑에 숨기고 여어동을 향해 낮은 소리로 위협을 했다. 「섣불리 달아나려고 하다가는 몸에 구멍이 몇 개 뚫릴 줄 알게.」 여어동은 도외시해 버렸다. 등일뢰는 언백건의 식탁으로 가서 인사를 하며 친한 체했다. 여어동은 합합태가 떠나 버리자 재앙이 눈앞에 닥쳐왔음을 알았다. 바라다보니 언백건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등일뢰가 그에게 여어동의 눈을 뽑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음이 분명했다.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술집 주인이 황하의 잉어로 끓인 뜨끈뜨끈한 국을 받쳐 들고 나왔다. 고금표가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찬사를 보냈다. 「형님, 생선국이 시원하군요. 어서 마셔 보세요.」 여어동은 숟가락을 뻗어 국그릇에 넣고 퍼먹을 듯이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그룻을 들어 고금표의 면상을 향해 뿌렸다. 고금표는 생선국 맛이 기가 막히다고 칭찬을 하다가 벼락을 맞은 셈이 되었다. 국이 날아와 눈이며 코가 엉망이 되어 뜨거워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여어동은 그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식탁을 엎었다. 술이며 안주 그릇 등이 그를 뒤집어씌웠다. 고금표는 눈을 뜰 수 없어 미처 피할 여유도 없었다. 등일뢰와 언백건이 고금표를 구출하려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어동은 다시 또 하나의 식탁을 뒤집어 그들이 쫓아올 길을 막아 놓고 생각했다. 지금 달아난다 하더라도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잡힐 것이니 어디 숨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다 구원의 손길이 미치기를 기다려야 하겠는데 번화한 곳에서 숨을 곳이란 역시 관가의 감옥이 제일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술집은 금방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술 손님들이 분분히 아래층으로 뛰어 달아났다. 여어동은 손 영감이라 불린 사람의 면전으로 다가가 다짜고짜로 그의 따귀를 올려 쳤다. 그 손 영감은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여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어동은 그의 수염을 움켜잡고 번쩍 치켜들며 비틀었다. 포쾌들이 놀라 손 영감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여어동은 손 영감을 잡은 채 등일뢰 등을 향해 손짓을 했다. 「큰형, 둘째형, 빨리 오시오. 내 잡았으니 빨리 이 포쾌놈들을 쫓아 버리시오.」 포쾌들은 토비들이 손 대인을 납치하려고 하자 철련을 꺼내 들고 소리를 질렀다. 「대담한 놈들 같으니라구. 등일뢰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몇 명 안 되는 포쾌가 등일뢰의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맹진은 큰 고을이라 포쾌나 관가 사람과 일단 쟁투가 벌어지면 금방 관병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등일뢰는 여어동의 교활함을 속으로 욕하면서 포쾌 하나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리고 고금표를 잡아 끌며 아래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언백건이 소리를 지렀다. 「우리는 관병이오. 도둑놈을 잡으러 온 것이오.」 그러나 소란한 가운데 그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팽삼춘이 포쾌 하나를 쓰러뜨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휘파람을 불어 페거리를 찾았다. 먼 곳에서 땅땅땅 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대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모양이었다. 언백건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팽 사제! 빨리 달아납시다. 사제 네 사람이 아래층으로 뚫고 내려가니 포쾌들이 어찌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철련으로 여어동 한 사람을 잡았을 뿐이다. 언백건 등 일행 4명은 맹진으로부터 달아나 조용한 장소를 찾아 쉬고 있었다. 팽삼춘은 여어동이 교활하게 남을 속이는 꾀가 대단하다고 바가지로 욕을 퍼부었다. 언백건은 분해 못 견디겠다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 「작디작은 맹진의 관아에서 어찌 그 녀석을 비호할 수 있겠는가? 우리 오늘 밤 감옥을 습격하여 그 고약한 녀석을 탈취해다가 통쾌하게 죽여 분풀이를 하세.」 팽삼춘은 관가가 무서웠다. 감옥을 습격한다는 말을 듣고 주저했지만, 사형의 말을 정면으로 거역할 수도 없었다. 삼경이 되자 각자 복면을 하고 맹진 아문을 향해 달렸다. 팽삼춘은 뒤에 처져 맥을 잃고 있었다. 언백건은 그가 마지못해 쫓아오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책망을 하지는 않았다. 거의 아문 가까이 다다랐을 때 갑자기 앞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언백건은 그의 행동이 민첩함을 보고 도제들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조심들 하게 . 「언 형이오?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나지막하게 부른다 언백건이 등을 돌리고 보니 등일뢰와 고금표였다. 「여럿이 함께 힘을 모은다면 더욱 좋겠지요.」 등일뢰의 말이었다. 「절대 그놈을 시원하게 단칼에 죽여 없애 버리면 안 돼요. 시달릴 대로 시달리게 해 놓고 죽여야 해요.」 고금표는 국물로 얼굴이 데어 여기저기 수포가 일어나 보기에도 흥칙했다. 여어동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이를 가는 것이었다. 여섯 사람이 즉시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진가락과 상관의산은 취선루 주인에게 자세하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더 깊은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수재는 뒤에 포쾌들에게 잡혀 간 것밖에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여어동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야 안심을 했다. 죽을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관가의 공문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다 보면 오랜 시일이 지나야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상관의산과 함께 손 대선인 (孫大善人)을 예방했다. 손 대선인은 당지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거부로 전답이나 당청 (當廳)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상관의산과 성이 육 (陸)가라고 하는 공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용문방에서 돈을 요구한다면 그들이 달라는 대로 주고 재앙을 면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그런데 상관의산은 몇 마디 수인사를 한 뒤에 화제를 그날 술집에서 일을 저지른 수재에게 돌렸다. 손대선인은 더욱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 꾀나 먹도록 여태까지 누구에게 득죄를 한 일은 없습니다. 만약 강호상의 친구들이 어려운 일이 있다고만 하면 저는 힘껏 도왔습니다. 그들에게 인색하게 군 일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그 수재 상공과 소제는 약간의 인연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손 영감님을 구타했는지 모르겠군요.」 상관의산의 말이었다.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저를 납치하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진가락은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십사제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과 약속하여 이 노인을 납치하려고 했을까? 무슨 숨은 곡절이 있을 것이다. 맹진에 있는 몇 명의 포쾌가 또 어떻게 십사제를 체포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이곳에 대단한 고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상관의산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손 영감님께 우리를 감옥으로 안내해 주십사고 부탁을 드려 그 수재를 만나 볼까요. 「그 수재는 그날 밤 누군가가 구출해 내갔는데 모르고 계셨습니까? 손 대선인이 다급하게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더욱 이상해서 상관의산을 향해 눈짓을 하고 하직을 한 뒤에 그 집에서 나왔다. 많은 공인들과 포쾌들이 변장을 하고 손씨 집 주위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상관의산과 진가락 등은 맹진 용문방 두목의 집으로 와 사람을 시컥 아문에 가서 알아보도록 했다. 과연 그 수재는 그날 밤 누군가에 의해 구출되어 나갔는데 여러 명의 뇌두와 옥졸들이 다쳤다고 했다. 진가락은 두 눈썹을 찡그린 채 서천굉과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았지만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 사람들은 감옥 근처를 답사했다. 낙빙이 갑자기 담 밑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것 보세요. 사람들이 보고 기쁨을 참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관의산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이건 십사제가 남겨 놓은 기호인데요 원수가 추적을 해 부득이 서쪽으로 도피한다는 뜻입니다.」 서천굉이 이렇게 설명했다. 「원수라니요? 틀림없이 그를 귀찮게 쫓아다니는 그 소년일 것입니다.」 장진의 의견이었다. 「그 소년의 무공이 십사제만 못한데 사정이 이토록 긴박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곡절이 있을 겝니다.」 서천굉의 말에 문태래가 재촉을 했다. 「우리 빨리 갑시다.」 사람들이 서쪽 방향으로 찾아 나섰다. 교외에 이르자 커다란 나무 밑에서 또 기호가 나타났다. 그러나 어찌나 급하게 휘둘러 썼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대단히 위급한 상황에서 썼음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중으로 오르는 길에서 또 기호를 발견했다. 문태래와 장진이 앞장을 서서 산으로 달렸다. 길가에서 볼 수 있는 기호는 가면 갈수록 엉망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떤 때는 손이 집히는 대로 한번 구부려 그리거나 한 획을 쓰다 만 것도 있었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다가 장진이 갑자기 (아) 하고 외치며 달려가더니 작은 나무 위에서 죽전 하나를 뽑아 들었다. 문태래와 서천굉도 뜻밖의 일이라고 외쳤다. 그들 두 사람이 비교적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편이라 본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았다. 이것이 호남 진주 언가권의 독문의 암기임을 즉시 알아보았다. 문태래가 벌컥 화를 냈다. 「원래 십사제를 추적한 놈이 간사한 언백건이었구나.」 이때 낙빙이 숲속에서 몇 개의 죽전을 또 찾아냈다. 주기가 갑자기 놀라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보니 뚝뚝 떨군 핏자국이다. 핏자국을 따라가며 찾아보니 숲속에 어두컴컴한 굴이 하나 나타났다. 굴은 얕고 좁아 겨우 사람 하나가 숨을 만했다. 굴 주변에 죽전이며 강표 , 비추 , 작은 강차 등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여어동이 그날 여러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꾀나 치열하게 공격을 받았던 모양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여어동의 사활을 몰라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서천굉과 문태래가 여러 가지 암기를 주워 들고 살펴보았다. 강표나 비추는 무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 누가 쓴 것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작은 강차도 워낙 쓰는 사람이 적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암기로 보건대 여어동을 포위하고 공격한 사람이 적어도 5, 6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날 등일뢰 고금표 -언백건 등 여섯 사람은 담을 뛰어넘고 옥 안으로 들어가 옥졸을 잡아 협박하여 여어동이 감금된 소재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송천보의 발에 뭔가가 걸려 하마터면 넘어 질 뻔했다. 몸을 숙이고 보니 한 사람이 등뒤로 손이 묶인 채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불을 밝히고 번쩍 일으켜 보니 옥졸이었다. 입이 틀어막혀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언백건이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잡고 왼손으로 그자의 입에 틀어박힌 물건을 뺐다. 수를 놓은 2장의 손수건이었다. 언백건이 낮은 소리로 윽박을 했다. 「오늘 잡아 온 수재는 어디에 감금되었나? 빨리 말하게! 소리를 지르면 그냥 눌러 죽이겠다.」 그 옥졸은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쪽,,-, 저쪽의 세번째 감방이오.」 언백건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옥졸은 금방 숨이 막혀 죽었다. 「빨리 갑시다. 다른 사람이 먼저 잡아가면 큰일이오.」 등일뢰가 재촉했다. 사람들이 감방으로 와 보니 과연 쇠붙이에 줄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금표가 부싯돌을 켜 불을 밝히고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여어동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어동의 친구가 그를 구출하기 위해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여어동이 불빛을 보고 외쳤다. 「누군가가 왔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더욱 힘차게 줄질을 했다. 「누구요? 등일뢰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돌아서며 칼을 휘둘렀다. 칼 솜씨가 빠르고도 정확했다. 차디찬 한기가 등일뢰의 얼굴을 엄습했다. 등일뢰의 몸집은 뚱뚱했지만 동작만은 더할 수 없이 민첩했다. 오른손의 동인을 뻗어 칼을 눌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호구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서 상대방의 힘이 막강함을 알았다. 더 싸울 용기가 없어 담천승을 향해 칼로 찔렀다. 담천승이 피하는 순간을 포착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벌써 감방 밖으로 달아났다. 「쫓아갈 것 없소. 이 사람을 데리고 나가는 일이 더 중하오.」 언백건이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한번 대결을 하는 바람에 온 감옥의 옥졸이 모두 놀라 깨어 일어났다. 누군가가 감옥을 습격한 것을 알자 발칵 뒤집혔다. 등일뢰가 감방 문을 지키고 섰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지킬 테니 빨리 줄질을 하시오.」 언백건과 고금표가 각기 줄을 꺼내 동시에 힘을 썼다. 잠시 후 여어동의 손발에 채워졌던 쇠사슬이 마침내 끊어졌다. 언백건은 여어동의 맥문을 잡고 팽삼춘과 둘이 그를 짊어지고 감방 문을 나섰다. 아역과 군사들이 벌떼처럼 대들어 막았지만 모두 등일뢰가 동인을 휘둘러 물리쳤다. 그들은 등일뢰의 흉악함에 감히 접근하지는 못하고 먼 곳에서 소리만 질렀다. 고금표가 앞장을 서서 길을 뚫고 송천보 -담천승이 뒤를 차단하면서 여어동을 둘러싼 채 담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감옥 밖에는 대대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다가 칼과 창을 들고 포위하며 공격해 왔다. 고금표-언백건 -팽삼춘이 각기 상대하여 몇 명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관병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소리를 지르며 계속 대들었다. 혼전이 벌어진 가운데 갑자기 담 모퉁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여어동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담천승이 쫓아가 막았다. 그 사람이 손을 번쩍 들자 담천승은 가슴에 무서운 진통이 왔다. 뭔지 암기에 맞은 모양이었다.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송천보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사람이 여어동을 데리고 달아났다. 「사부님, 저,,,-, 저 사람 도망가요. 송천보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여어동은 땅에 꿇어앉아 총총 무슨 기호를 그리면서 달아났다. 언백건이 덮쳐드는데 옆에서 갑자기 칼이 그를 찔렀다. 언백건이 동환을 꺼내 잡아매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검법이 너무나 빨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대갈일성 언백건을 향해 말을 몰고 돌격해 들어갔다. 언백건이 옆으로 뛰어 피하자 여어동은 칼을 쓰던 사람의 손을 잡아 말 위에 올려 태우고 두 사람이 서쪽을 향해 달렸다. 이때 등일뢰도 벌써 담 밖으로 뛰어나와 있었다. 여어동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언백건의 사도가 쓸모없다고 속으로 욕을 하였다. 「빨리 추적을 하자. 팽삼춘과 송천보가 좌우에서 담천승을 끼고 여어동의 말을 쫓았다. 그들의 발걸음이 워낙 빨라 몇 리 못 가 관병들을 멀리 뒤로 떼어 놓았다. 관가 사람들은 쫓아가 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고 병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등일뢰 등이 한참 쫓다 보니 벌써 실력의 고하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등일뢰는 가물가물 앞장을 서고 고금표는 바짝 그 뒤를 쫓고 있었으나 언백건은 점점 더 뒤로 처지고 팽삼춘 등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등일뢰는 요동에서 비록 귀하고 부유한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무공만은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아 착실한 실력을 쌓았다. 산길은 말을 달리기에 불편했다. 게다가 여어동의 말에는 두 사람이나 타고 있었다. 말도 양마가 아니라 보통 말이었다. 그래서 등일뢰와의 거리가 점점 더 단축되었다. 캄캄한 가운데 말이 갑자기 산길의 웅덩이를 밟고 왼쪽 발을 꿇으며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여어동이 떨어졌다. 여어동은 물구나무 자세로 가볍게 내려섰다. 말 위의 그 사람이 고삐를 챘지만 말은 울기만 할 뿐 일어나지를 못했다. 원래 다리의 정강이 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그 사람은 등일뢰가 가까히 추적을 해 오자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와 여어동과 함께 숱속을 뚫고 들어갔다. 몇 발짝 가지 않았는데 앞에 굴이 보여 그 안으로 숨어 들어 갔다. 「이 사매, 또 나를 구해 주시는군요.」 여어동이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바로 이원지였다. 그녀는 홍화회 군웅들의 뒤를 쫓아가다가 갑자기 여어동이 보이지 않자 잠시 생각해 보고는 그가 필시 수로로 바꾸었음을 알아차렸다. 즉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며 여어동을 찾았다. 맹진에 도착하자 찻집과 식당 등 도처에서 추하게 생긴 수재 하나가 손 대선인을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깊은 밤을 이용해 그를 구출하려고 감옥으로 뛰어든 것이다. 옥졸을 묶은 것은 바로 이원지의 소행이었다. 이원지는 여어동을 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와 누워 쉬라고 하고 자기는 굴 입구를 지켰다. 여어동은 땅바닥에 앉아 그녀의 날씬한 뒷모습을 바라다보며 착잡한 감개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바탕 찬바람이 불어오자 그녀가 가볍게 떠는 것이 애처롭게 보였다. 즉시 자신의 장삼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이원지가 이 사가를 안 이래 처음으로 보여주는 따뜻한 정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상긋 웃었다. 마음속이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막 여어동을 향해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앞에서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죽전이 하나 날아왔다. 여어동은 그녀가 암기가 습격하는 것도 모르고 있어 급히 손을 뻗어 밀며 왼손으로 죽전을 받았다. 「암기를 조심하세요.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또 비황석이 한 덩어리 날아왔다. 이원지가 살짝 비켜 서며 받는데 밖에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사한 녀석, 빨리 굴러 나오지 못할까? 동시에 몇 명의 검은 그림자가 굴 앞에 다가섰다. 여어동은 죽전의 꼬리를 들고 수전을 뿌리는 방법으로 검은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팽삼춘의 넓적다리에 죽전이 꽃힌 것이었다. 등일뢰 등이 있는 곳은 밝고, 여어동 등이 있는 곳은 캄캄해 접근할 수가 없게 되자 여러가지 암기를 굴 속을 향해 던졌다. 여어동과 이원지는 한쪽에 웅크린 채 굴바닥에 떨어진 비표 소차를 주워 들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접근하면 반격을 했다. 이원지는 여어동의 몸에 기대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평생 느껴 보지 못했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굴 속이 춥고 배고프고 지저분할 뿐만 아니라 굴 밖에는 강한 적이 공격을 하고 있지만 제독부의 호화스런 건물이나 방도 이토록 따뜻할 수가 없었다. 「우리 어떻게 나가지요? 여어동이 낮은 소리로 묻자 이원지는 웃기만 했다. 「나갈 필요 있겠어요? 그들이 공격해 들어오지도 못할 텐데요.」 「날이 밝으면 어떻게 합니까? 여어동은 다급했다. 이원지는 그의 말투가 초조한 것을 보고 말을 했다.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보지요...... 이것 보세요. 암기가 또 날아와요. 여어동이 몸을 뒤로 움츠렸다. 한 자루의 작은 강차가 여어동의 발밑 땅바닥에 꽃혔다. 고금표는 화가 나서 두 자루의 소차를 던지며 강차를 휘둘러 자기 몸을 보호하며 굴 입구로 달려 들었다. 이원지가 손을 들어 3개의 부용금침을 날렸다. 암기가 워낙 작은데다가 또 캄캄해서 본래는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금침을 발사하는 그녀의 수법이 아무래도 미숙했다. 고금표가 즉시 발견하고 머리를 숙였다. 2개는 땅에 떨어지고 그중 하나가 머리카락에 박혔다. 피부가 손상되어 꾀나 아팠다. 이와 같이 가늘고 작은 암기에는 대부분 독을 입힌다 마음속으로 놀라며 급히 피하고 금 침을 뽑은 뒤에 불을 밝히고 보니 바늘 끝에 묻은 피가 결코 까만색이 아니었다. 독이 없음을 알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등일뢰가 금침을 받아 보고는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셋째의 머리에 박혔던 것도 이와 같은 금침이 아니던가? 원래 그를 살해한 자가 바로 이놈이었구나.」 그날 초문기가 육비청의 금침에 두 눈을 맞고 죽은 뒤 시체는 몇 년이 지난 뒤에 산골짜기에서 발견이 되었다. 그때 얼굴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병기와 복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의 근육은 썩었지만 몇 개의 금침이 그냥 뼛속에 박힌 채 드러나 있었다. 그날 육비청이 한 주먹의 금침을 초문기의 얼굴에 던진 뒤 대부분 뽑아 회수를 했지만 살 속에 깊이 박힌 것은 뽑지를 못했다. 한문충은 편지 가운데 이 일과 금침의 형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초문기를 살해한 사람이 여어동이 아니요, 오늘 고금표를 쏜 사람이 또한 이 금적수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 리가 없었다. 등일뢰와 고금표는 화가 나서 더욱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금침이 무서워 다시는 굴 속으로 뛰어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원지는 굴 밖의 적을 지켜 보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외 저를 늘 피하셨어요? 저를 보기만 해도 미워지던가요? 「이 사매, 지금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내시나요? 위험으로부터 빠져 나간 뒤에 하면 안 되나요? 여어동의 말에 이원지는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가서는 또 나를 따돌리실 텐데요.」 여어동은 그녀의 말투가 서글프게 나오자 마음속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횃불 하나가 굴 입구에 던져졌다. 여어동은 어리둥절했다. 불빛 가운데 그녀의 고운 얼굴이 원망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불빛에 반사된 눈같이 흰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귀여워 보였다. 「저들이 연기로 공격을 하려나 봐요.」 이원지는 이렇게 말하며 달려들어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적의 암기가 무수히 날아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이원지가 예기한 대로 언백건과 송천보는 과연 풀을 베어다가 횃불 위에 던졌다. 짙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굴 속으로 몰려들어왔다. 두 사람은 매워 계속 기침을 했다. 잠시 뒤에는 횃불이 꺼져 가며 점점 연기만 짙어갔다. 이원지는 굴 속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굴 입구를 지켜 주세요.」 칼을 여어동에게 넘겨 주고 그의 등뒤로 돌아갔다. 여어동은 등 뒤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듣고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저쪽으로 돌리세요.」 이원지가 다급해서 외친다. 여어동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원-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녀가 겉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연기가 매워 두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이원지가 앞으로 나오면서 장검을 받아 들고 장삼 한 벌을 그에게 던졌다. 「빨리 입으세요.」 여어동은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 했다. 「빨리빨리 입으세요.」 그가 옷을 다 입자 장검을 다시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때 연기가 다시 약해지고 또다시 횃불 하나가 던져졌다. 이번에 던진 횃불은 왕성하게 타서 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우리 각기 다른 곳으로 달아나야 해요. 절대로 제 뒤를 쫓으면 안 돼요.」 이원지는 이렇게 말하고 여어동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여어동이 놀라 손을 뻗어 잡아당기려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진가락 등 일행은 굴 근처를 살펴보다가 불에 타고 연기에 그을린 자국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어동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어디로 갔는지 알 도리가 없어 답답했다. 문태래는 걱정스럽다 못해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손에 쥔 몇 개의 죽전을 토막토막 분지르고 있었다. 이를 본 낙빙이 입을 열었다. 「십사제는 워낙 총명해서, 이길 수 없자 달아나 버렸을 거예요. 우리 상관 대가에게 부탁해 귀찮으시더라도 더 많은 형제들을 풀어 근처를 수색해 봐 달라고 하지요. 틀림없이 무슨 단서를 찾아 낼 수 있을 거예요.」 「문사 내외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즉시 돌아가도록 합시다.」 상관의산의 말이었다. 모두들 맹진으로 돌아오자 상관의산은 당지 용문방에서 힘깨나 쓰고 똑똑한 형제들을 로두 풀었다 만약 의심할 만한 인물을 발견하거든 즉시 돌아와 보고를 하라고 당부했다. 초경까지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문태래보고 들어가 자라고 권했다. '사가, 식사도 안 드시고 또 주무시지도 않다가 만약 십사제를 구출하러 출동하게 된다면 무슨 힘과 정신으로 적을 상대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서천굉의 말에 문태래는 못마땅하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 어떻게 잠을 잔단 말이오? 잠시 후 상관의산이 방으로 들어서며 머리를 내저었다. 「소식 이 없군요.」 「요 며칠 무슨 특이한 일은 없었는가요? 서천굉이 물었다. '글쎄요 서쪽 교외에 있는 보상사에 요 며칠 누군가 나타나 야료를 부리며 절을 태워 버리겠다고 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이 일과 십사야가 무슨 상관이 있을라구요.」 사람들은 스님과 건달들이 다투는 것이야 흔히 있는 일이라 어떻게 연관을 지어 보려고 했지만 여어동과는 연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알아보기로 했다. 문태래는 침상에 누워 엎치락뒤치락거리며 여어동이 몇 차례 그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기를 구출해 준 의리를 생각했파. 문태래는 뜨거운 피가 솟구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 누운 낙빙이 깊이 잠들어 있음을 보고 슬그머니 일어나 창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돌아다녀 봐야겠다. 방 안에 답답하게 누워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그는 경공의 재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반 시간도 안 돼서 맹진의 동서남북을 한 바퀴 쏘다닌 셈이다. 울적한 심사가 다소 가라안는 듯한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쪽을 향해 달려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가 한바탕 달리더니 가볍게 손뼉을 쳤다. 먼 곳에서 한 사람이 손뼉을 쳐 응답했다. 문태래는 상대가 여러 사람임을 알고 조심스럽게 미행을 했다. 그 사람이 계속 서쪽으로 가다가 얼마 뒤 교외에 이르렀다. 사방의 지세가 광활하여 문태래는 혹시 발각되지 않을까 더욱 조심을 했다. 멀리 거리를 두고 7, 8리 정도 쫓아오니 그 사람이 산길로 올라섰다. 문태래도 쫓아 올라가니 산 위에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 사람이 틀림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아 뒤를 쫓지 않고 숲속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바라보다가 매우 실망을 했다. 원래 그 건물은 낡은 암자였다. 암자의 처마 밑에 세 개의 글자가 씌어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희미한 야음 가운데 보상사라고 씌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수없구나. 문태래는 낮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기껏 쫓아와 보니 스님들에게 행패나 부리는 건달들이라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기왕 쫓아온 김에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 힘만 믿고 약자를 업신여긴다면 맞붙어서 며칠 동안 가슴에 맺힌 답답함이나 풀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암자 가까이 접근하여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동쪽 창문을 통해 대전을 들여다보니 스님 하나가 부들풀 방석에 꿇어 앉아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 스님이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문태래는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렸다. 등일뢰 등은 불빛 가운데 한 사람이 장삼을 입은 채 복면을 하고 굴 속에서 나오자 대들어 잡으려고 했다. 「금적수재가 여기 있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추적할 수 있겠느냐? 그사람이 버럭 소리를질렀다.등,고,언 세 사람은그를 잡아 먹어도 시원치 않은 심사였다. 굴 속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든 알 바 아니었다. 함께 여어동의 뒤를 쫓았다. 등일뢰가 제일 빠른 편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사람의 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독각동인(獨脚銅人)을 앞으로 밀며 독룡출동(毒龍出洞)으로 뻗어 등을 찔렀다. 그 사람이 한 발짝 뛰어나가며 뒤로 손을 번쩍 들었다. 등일뢰는 그의 금침이 무서워 급히 뒤로 물러섰다. 사실은 이 사람이 이원지였다. 그녀가 여어동의 장삼을 입고 적을 유인하여 나온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어동이 달아나기 편리하도록 해 주려는 것이었다. 손에 금침을 들고 적이 가까이 접근만 하면 던번히 물리쳤다. 등일뢰의 무공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사방이 너무 캄캄했다. 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암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어쩔수 없이 멀찌감치 떨어져 쫓아오면서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웠다. 쫓아 오다 보니 어느덧 맹진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 보니 날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이원지는 객점 하나가 문을 열고 있음을 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점원이 누구냐고 소리를 지르려 하자 이원지는 한 덩어리의 은자(銀子)를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내게 방 하나만 주시오.」 점원은 손 안의 은자를 만져 보았다. 적어도 3, 4냥은 충분한 은자였다. 더 묻지 않고 그녀를 동쪽 채의 비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밖에 빛쟁이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나 여기 있단 말은 하지 마오. 하룻밤만 묵으면 되니까 남는 돈은 죄다 가져도 좋소.」 점원은 너무나 좋아 입이 헤 벌어졌다. 「걱정하지 마십쇼. 빛쟁이 쫓는 데는 이래봬도 도사라구요.」 점원이 막 문을 닫고 나가는데 등일뢰 등이 벌써 객점으로 몰려 들어와 물었다. 「방금 들어온 그 수재 어느 방에 있는가? 우리는 그에게 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네.」 「수재라니요? 점원이 딴전을 부린다. 「방금 들어온 그 사람 말일세.」 언백건이 물었다. 「새벽에 누가 들어옵니까? 혹시 영감님 눈이 나쁘지 않으신가요? 수재는 없지만 장원과 재상은 몇 명 여기 있습니다.」 고금표가 화를 내며 점원을 치려고 하자 등일뢰가 그를 잡아 끌어내며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젯밤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지금쯤 다들 알고 야단이 났을 것일세. 그러니 다른 일 또 저지르지 말고 조용히 있게나. 언백건이 점원을 노려보았다. 「좋아! 그럼 우리가 방을 하나하나 뒤져 나가겠는데 만약 찾아만 내면 그냥 두지 않겠어.」 「아이구, 원 이렇게 사나운 꼴은 처음 보겠네. 그래 황제 어른 친척이라도 되십니까? 점원이 이죽거리고 있는데 장궤가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고금표는 장궤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고 밀어붙이며 북쪽 채로 달려가 펑 하고 방문을 걷어찼다. 방 안에서는 뚱뚱보 하나가 놀라 웃통을 벗은 채 이불 속에서 뛰어나왔다. 고금표가 보니 여어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번째 방문을 밀었다. 뚱뚱보가 온갖 더러운 욕설을 다 퍼부었으니 고금표의 18대 조상까지 일진이 사나웠던 것이다. 객점이 이렇게 소란스러울 때 갑자기 동쪽 채의 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미모의 소녀 하나가 걸어 나왔다. 언백건이 보니 상당한 미인이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다른 방을 뒤져 나갔다. 이원지는 여장으로 갈아입고 웃으며 방 밖으로 나와 거리에 이르렀다. 한 떼의 포쾌와 관인들이 벌떼처럼 객점을 향해 몰려들어가고 있었다. 원래 객점 장궤의 연락을 받고 수상한 사람을 잡으러 온 것이다. 여어동은 이원지가 강적을 유인해 가자 칼을 들고 굴 밖으로 나왔다. 팽삼춘과 송천보 , 담천승이 나오는 여어동을 공격했다. 여어동은 유운검술(柔雲劍術)을 펴 이미 부상을 입은 담천승의 다리를 찔러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그 틈을 타 달아났다. 팽삼춘의 삼절곤이 땅바닥을 휩쓸며 공격해 왔다. 여어동이 몸을 날리자 삼절곤이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여어동이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팽삼춘과 송천보가 반기며 쌍쌍으로 덮쳐 들어 그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몸을 뒤로 일으켜 세우며 왼손을 번쩍 들었다. 한 줌의 재가 팽삼춘과 송천보의 얼굴과 눈에 뿌려졌다. 팽삼춘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몇 발짝 피했지만 송천보는 그 자리에 선 채 두 손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훔치고 있었다. 여어동이 칼을 들어 그의 왼쪽 다리를 찌르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번에 뿌린 것은 바로 그들이 풀을 태우고 남은 재였다. 팽삼춘이 눈에 들어간 재를 씻고 보니 두 명의 사질이 아프다고 끙끙거리며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적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팽삼춘은 화도 나고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상처를 감싸 주고 굴 속에 들어가 쉬라고 한 뒤에 자신은 다시 나와 여어동의 종적을 찾아 나섰다. 산길을 따라 7,8리를 걷다가 언백건과 등일뢰 등을 만났다. 합합태가 다시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밖에 또 낯 모르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이는 40세 전후 등에 철비파를 메고 있는데 발걸음이 빠른 것이 무공이 대단해 보였다. 언백건은 사제가 노상에서 낭패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양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팽삼춘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숙인 채 이실직고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등일뢰 등 세 사람도 여어동을 잡지 못해 피장파장인 셈이었다. 굴로 돌아와 언백건이 팽삼춘에게 소개한 사람은 바로 등에 철비파를 짊어진 한문충이었다. 그는 항주에서 홍화회의 수중에 놀아나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빠져 버렸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왕유양이 진원표국으로 들어와 일을 맡아 달라고 권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오히려 총표두보고 일찌감치 표국의 일을 걷어치우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왕유양은 장소중과 사자봉에서 싸우다 위험한 지경에서 겨우 빠져 나와 죽음을 면한 신세였다. 그후 홍화회를 도을 수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그들을 상대로 싸울 자신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고 있을 때 한문충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그래야겠네 ! 그는 즉시 표국을 걷어치우고 북상하고 말았다. 한문충은 혼자 낙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문불출 무림을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노상에서 우연히 항주로 자기를 찾아 오던 합합태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다시는 무림의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고개를푹숙인 채 못본척했다.그러나 그의 철비파가 유난히 사람들의 눈에 잘 띄었다. 끝내 숨지 못하고 합합태가 그를 알아보고야 말았다. 두 사람은 객점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한문충은 초문기와 염 삼마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경과를 상세히 말해 주었다. 합합태는 그제야 금적수재와 홍화회가 과연 그들의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는 여어동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문충과 함께 가서 오해를 풀어 주기로 생각했다. 한문충은 처음에 다시는 이들의 무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망설였는데 합합태가 떼를 썼다. 가서 오해를 풀어야만 등일뢰나 고금표 두 사람이 여어동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만일 그 사람이 죽거나 다쳐 홍화회의 원한을 사게 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설득했다. 한문충이 생각해 봐도 일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맹진에 도착했다. 마침 등일뢰 등이 객점에서 포쾌와 관병을 물리치고 나오다가 이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다섯 사람은 한곳에 모여 있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찾아 굴로 온 것이었다. 비운(悲運)의 여인 여어동은 위험한 장소에서 벗어나자 이원지의 일이 걱정되었다. 적 가운데 3명의 고수가 그녀를 쫓아갔으니 어린 소녀의 몸으로 어떻게 당해 낸단 말인가? 걱정을 하면서 계속 찾아 나갔지만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맹진까지 오기는 했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이 있어 함부로 찾아다닐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작은 객점을 찾아가 쉬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무정한 자기를 스스로 원망했다. 이원지가 두 번이나 자기를 구해 주었지만 눈앞과 마음속은 오로지 낙빙의 목소리요, 웃는 얼굴의 보조개뿐이었다. 멀리서 딱딱 땅땅 타경 소리가 들렸다. 벌써 이경이 넘었나 보다. 몽롱한 의식 가운데 억지로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옆방에서 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가볍게 비파를 퉁겼다. 그는 평소에도 음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귀를 기울였다. 비파 소리가 가볍고도 부드러워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뒤이어 한 여자가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재주가 많으면 수심도 많은 법 정이 많으면 근심도 많은 법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증세 달게 받아들여야 하겠지 누가 너더러 풍류를 알라더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정이 많으면 근심도 많은 법) 이라는 이 한 구절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잠시 뒤에는 노랫소리가 약해져 옆방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옥과 같은 하얀 미인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누런 흙이 되네),,,,,라는 몇 마디만 귀에 들어왔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다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창을 넘어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거친 들을 한바탕 뛰어다니다가 발걸음을 늦추었다. 방금 들었던 (옥과 같이 하얀 미인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누런 흙이 되네) 라는 두 구절이 귓가에 맴돌았다. 낙빙과 이원지 등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야 가을 물 같은 눈망울, 옥같이 흰 이 등 아름답기 짝이 없다지만 그러나 백 년 뒤에는 마찬가지로 백골이 진토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그들을 위해 근심 걱정을 한다지만 다시 백 년이 지난다면 그것은 한낱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고개를 숙인 채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앞쪽의 산 밑에 우산처럼 가지가 늘어진 거목이 한 그루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곳으로 가 앉아 쉬기로 했다. 연일 놀라고 뛰어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나무에 기대고 있다가 그만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 땅땅 치는 종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금피리를 찾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금표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기가 막혔다. 이때 날은 이미 밝아 종 소리가 유난히 길고 맑게 울려 퍼졌다. 그는 달게 자고 나니 정신이 새로워졌다. (절의 북 소리, 새벽의 종 소리는 정말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구나.) 종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원래 산 위의 절에서 치는 종 소리였던 것이었다. 산길을 따라 올라서니 낡은 암자가 나타났다. (보상 사)라고 쓴 편액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전으로 들어서니 앞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고개를 숙인 불상이 세상 사람들의 끝도 없는 번뇌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사면 벽에는 벽화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벽화를 구경하고 있는데 나이 든 스님 한 분이 나와서 맞이했다. '거사께서는 어인 일로 이렇게 왕림하셨는지요? 여어동은 순간 당황했다. '저는 산천 경개를 유람하고 있는 중입니다. 보찰이 너무나 조용해 며칠 묵어 가고 싶습니다. 폐를 끼치지나 않을는지요. '누추한 사찰이오나 거사께서 묵으시겠다면 들어오시지요. 지객승에게 명하여 객실로 안내하여 소면이나마 대접을 하라고 일렀다. 여어동은 국수를 다 먹은 뒤 또 두 시간이나 잤다 잠에서 깨니 붉은 해가 온 창으로 쏟아져 들어올 듯한 정오였다. 불당에서 목어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서 나와 산 아래로 내려가 이원지를 찾아볼까 했다. 불당을 지나다 벽화가 보여 발길을 멈추었다. 여덟분의 고승이 출가한 경과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중 한 폭에 이런 설명이 있었다. 이 고승은 술집에서 곡사를 듣다가 대철대오 했다는 것이다. 여어동은 계속해 읽지 않고 눈을 감은 체 어떤 곡사이기에 그토록 큰 힘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눈을 뜨니 글씨가 씌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그대 무심하니 나도 그만두리라.) 이 내용이 몽둥이가 되어 여어동의 머리를 때리고 큰 소리가 되어 그의 귀를 울렸다. 멍하니 넋을 잃고 방으로 돌아와 혼자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그대 무심하니 나도 그만두리라를 얼핏 생각하면 알 듯도 하다가 또 아리송해지는 내용이었다. 그날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 종일 바보처럼 지냈다. 지객승이 몇 차례나 와 보고는 몸이 불편하면 일찌감치 잠이나 자라고 권했다. 여어동은 침상에 누워 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닷물 같은 솔바람 소리, 마음은 물결이 되어 출렁거렸다. 23년 동안의 지나간 일들이 하나하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수재에 합격하고, 원수를 죽이고, 강호를 돌아다니며 의를 위해 살다 죽겠다고 얼마나 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던씬 그러면서도 근심 걱정 없이 유유자적했다. 그런데 어쩌다 총타에서 갑자기 전생의 원수였던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의 마음과 눈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그를 묶어 나락에서 헤매게 만들었다. 낙빙이 자기를 대하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언제 한 가닥 다정한 눈매나 말 한마디를 내게 던지던가? 무심하니 나도 그만두리라. 하지만 어찌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심사가 어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일어나 앉아 촛불을 밝혔다. 탁쟈 위에 한 귈의 경서(經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축에서 재일 먼저 전래된 사십이장경이었다. 잡히는 대로 뒤적이다가 수하일숙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천신(天神)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옥녀를 부처에게 보냈다.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가죽 주머니 속이 온통 더러운 것뿐인데 무엇하러 왔는고?>하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읽다가 또 한 번 가슴을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멍한 상태로 멍청하게 있다가 제정신을 되찾았다. (부처는 옥녀를 보고 그래도 가죽 주머니 속에 더러운 피와 더러운 뼈만 가지고 있는데 내 무엇 때문에 그대에게 집착하리요라 고 말했다 하지 않던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노승을 불러 깨워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승이 몇 번이나 말려 보았지만 여어동의 마음은 한결같이 굳기만 했다. 노승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절 안의 온 스님을 모아 놓고 부처 앞에서 그의 머리를 깎고 계율(戒律)을 내리고 법명을 공색이라 했다. 여어동은 예불을 올리고 독경을 하면서 경건하게 며칠을 보냈다. 이날도 불전에 꿇어 엎드려 조과를 끝내고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 제도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마음속이 맑고 깨끗해져 티끌만한 물욕도 잡념도 번뇌도 다 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에서 어떤 사람이 강호의 상스런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빌어먹을, 맹진 주위를 이 잡듯 뒤졌지만 그 녀석이 도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보여야 뭘 해먹지.」 여어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소리가 귀에 익구나.) 또 다른 사람의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받았다. 「맹진을 뒤집어 엎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만은 잡아야 해. 여어동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놈들이 결국은 나를 찾아오고야 말았구나.) 원래 등일뢰와 언백건 등이 그의 등뒤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합합태와 고금표가 그의 등뒤에서 심하게 다투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합합태는 당장 출발하여 위구르로 가 곽천동을 찾아 원수를 갚자고 주장했고, 고금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어동을 잡아야 한다고 우겼다. 잠시 후에는 언백건이 주지를 향해 못생긴 수재 하나가 이 절에 오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투로 추궁하는 말도 들렸다. 주지는 어물어물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했다. 언백건은 의심을 하며 후원의 각 방을 수색하다가 마침내 승방에서 이원지의 그 검은색 옷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언백건은 낯빛이 변해 돌아나와 주지를 향해 시비를 걸었다. 「그 수재는 여기 없습니다. 영원히 찾지 못하실걸요.」 주지의 대답이었다. 여어동은 일어나 목어를 두드리며 서서히 후원을 향해 걸었다. 언백건이 수상히 여기고 송천보를 향해 입을 죽 내밀었다. 송천보가 눈치를 채고 쫓아가며 불렀다. 「여보, 거기 가는 스님. 잠깐만, 내 할 말이 있소.」 여어동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송料가 쫓아오며 손을 뻗어 그의 등덜미를 잡았다. 여어동이 몸을 피하며 승복의 왼쪽 자락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급히 뒤로 피했지만 겨드랑이가 굉장히 아팠다. 원래 목어를 하는 방망이에 얻어맞은 것이다. 「아이쿠, 아파 죽겠구나! 그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무아미타불. 아픈 것은 안 아픈 것이요, 안 아픈 것은 아픈 것이로다. 여어동은 염불을 외우고 목어를 치며 후원을 향해 걸었다. 언백건 등은 딱딱 목어를 치는 소리가 멀어져 가는데도 송천보가 나오지 않자 주지를 놓아 둔 채 후원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송천보가 땅바닥에 앉아 미간을 찡그리고 겨드랑이 밑을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앉아 뭘하고 있는 게요? 그 중은 어디로 갔소. 팽삼춘이 소리쳐 물었지만 송천보는 대답도 못 하고 식은덕 거리며 뒤쪽을 가리켰다. 팽삼춘과 고금표가 뒤쪽으로 쫓아갔지만 부엌에서 일하는 화공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언백건이 송천보를 일으켜 세우고 겨드랑이 밑의 상처를 살펴보니 파랗게 멍이 들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이었다. 「그 중이 이랬나? 송천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 였다. 「그 중이 어떻게 생겼던가? 언백건이 또 물었지만 송천보는 어물어물 대답을 못했다. 사실 그도 시종 그 스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등일뢰가 주지를 잡아 데리고 나타났다. 주지의 손발에 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연 무공을 할 줄 모름에 틀림이 없었다. 「방금 그 중은 어디서 왔소? 주지는 외지에서 온 스님으로 내력을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등일뢰는 의심이 나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언백건이 절을 불살라 없애 버리겠다고 위협했지만 주지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버텄다. 등일뢰의 눈짓에 따라 모두들 절에서 물러 나왔다. 등일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절이 괴상한 데가 있으니 우리 밤에 와서 다시 한 번 조사해 봅시다.」 사람들은 부근의 마을에서 국수를 사 먹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절의 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한 시간이나 망을 뽀았지만 아무 동정이 없었다. 다음날 합합태는 위구르로 곽청동을 찾아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고금표가 한사코 응하지 않았다. 국물을 끼얹은 한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절로 가서 주지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나서 합합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에도 그 못된 중놈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내일 아침에는 당신 말대로 떠납시다.」 문태래가 밤에 본 검은 그림자가 바로 등일뢰와 언백건 등이었다. 문태래가 보니 그 스님이 고개를 돌리는데 온 얼굴이 상처투성이었다. 십사제 여어동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아니, 어째 여기 숨어 스님이 되었지?) 의아했지만 소리쳐 부르지도 않고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동정을 살폈다. 바로 이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며 7, 8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태래는 그 가운데 언백건 하나만을 알았다. 이자가 철담장에 나타나 자기를 잡아갔고, 뒤에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자기를 조롱했었다. 원수를 보자 눈에서 불이 튀었다. (부처님이 영험하셔서 저자를 만나게 해 주셨구나.) 등일뢰 등이 대전으로 달려들며 병기를 들고 여어동을 포위했다. 그러나 여어동은 불상 앞에 꿇어앉아 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합장을 한 채 기도를 드렸다. '제자, 지은 죄가 너무 커 사악한 무리들을 불러 청정 불지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부처님은 자비로 용서하소서.」 사람들은 그의 이와 같은 태도를 의아하게 여겼다. 언백건이 그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무슨 지랄을 하고 있는 거냐? 가자. 절 안의 주지와 스님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시퍼렇게 번쩍이는 병기와 살기등등한 그들의 태도에 눌려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여어동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언백건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 담천승이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어 제쳤다.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아무 말 없이 입구를 가로막고 섰다. 모두들 뜻밖의 일이라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이 사람은 회색빛 바지저고리에 허리띠를 질끈 동여맨 채 두 눈을 사납게 부릅뜨고 버티고 있었다. 언백건은 그가 문태래임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탈옥한 사실을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당신은,,,,,, 당신은 분뢰수(奔雷手).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문태래가 우장으로 그의 팔을 후려쳤다. 이 일 초가 어찌나 빨랐던지 언백건은 방어할 사이도 또 피할 사이도 없었다. 여어동을 잡고 있던 손을 급히 놓았지만 그냥 얻어 맞고 말았다. 언백건이 급히 두 발짝 뒤로 물러서는데 팔이 심하게 아팠다. 뼈가 벌써 몇 토막으로 부러진 것이었다. 등일뢰 등 일곱 사람은 문태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수법이 놀랄 만큼 빠른 것을 보고는 겁을 먹었다. 등일뢰가 동인 을 흔들며 문 어귀를 막아 섰다. 이쪽은 모두 여덟 사람이요, 그 가운데 다섯 사람은 그래도 강호상에서는 한몫 단단히 해낼 수 있는 고수니 상대가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설마 이기지는 못하겠거니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문을 막아 섬으로 해서 적이 달아나지 못하게 방비를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문태래는 여어동을 끌고 불전의 왼쪽으로 뛰어갔다. 「사가,,,,,,.」 여어동이 불렀다. 「부상당했나? 문태래가 물었다. 「아노.」 '좋아. 오늘 우리 한번 통쾌하게 싸워 보세.」 여어동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송천보와 담천승이 벌써 각기 병기를 꺼내 들고 덤벼들었다. 문태래는 두 사람의 몸놀림을 보고는 진주 언가권의 사람임을 알았다. 본래부터 그들 일파를 원수 대하듯 한데다 이 몇 달 동안 당해 본 일이 없는 굴욕을 당한 처지라 인정사정 볼 계제가 아니었다. 몸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그들의 등뒤에 가 섰다. 두 사람이 미처 병기로 내려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적이 없어졌다. 병기를 거두어들이며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팽삼춘이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삼절곤의 독룡출동으로 문태래의 등을 향해 찔렀다. 문태래가 두 손에 각기 한 사람씩 잡고 들어올려 원을 그리며 대갈일성 소리를 질렀다. 마치 맑은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벽력이었다. 팽삼춘이 깜짝 놀라는데 쩔그렁 소리와 함께 삼절곤이 바닥에 떨어졌다. 문태래가 두 팔을 수평으로 벌렸다가 오므리니 송천보와 담천승의 머리와 머리가 부딪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머리가 터져 피와 살이 엉망이 되었다. 문태래가 두 구의 시체를 들어 적을 향해 던지니 고금표 등이 뛰어 피했다. 언백건은 그래도 사도의 관계라 손을 뻗어 담천승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시체일 줄은 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팽삼춘은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손발만 휘적거렸지 삼절곤을 주을 생각도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문태래가 한 발 다가서며 왼손을 뒤집어 주먹으로 쳤다. 팽삼춘이 팔을 휘둘러 막는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벌써 팔뼈가 부러졌다. 문태래가 왼손으로 그의 옷 앞자락을 움켜잡았다. 팽삼춘은 다급한 나머지 연환쌍퇴로 들어올리며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문태래는 오른손을 바람처럼 놀려 그의 왼쪽 발을 잡고 왼손은 밀며 몸을 올리니 그가 거꾸로 매달렸다. 고금표와 언백건이 그를 구하려고 일시에 대들었다. 문태래도 다시 한 번 대갈일성 두 손으로 태질을 했다. 팽삼춘의 머리가 불전의 청석 위에 부딪쳤으니 부서지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이 초가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팽삼춘은 본래 연환쌍퇴로 나와 왼발로 걷어찬 뒤에 다시 오른발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런데 먼저 머리가 부딪친 뒤에야 오른발을 뻗을 수 있었으니 모두가 허사였다. 분뢰수가 맹위를 떨쳐 잠시 동안에 세 사람이나 죽였다. 고금표와 언백건이 좌우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두 사람은 강적이라 방금 죽은 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대였다. 문태래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불탁 위에 놓인 큰 향로를 들어 고금표를 향해 무섭게 집어 던졌다. 향로의 무게가 7, 80근, 게다가 던지는 힘까지 가중되었으니 고금표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어 살짝 피했다. 향로가 등일뢰를 향해 날아갔다. 등일뢰는 고금표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보지 못했다. 고금표가 피했을 때는 향로가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형님, 조심하시오.」 합합태가 다급히 외쳤지만 등일뢰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독각동인을 들어 날아오는 향로를 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돌로 만든 향로파 부서지며 파편과 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언백건과 문태래가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여어동이 북채를 주어 들고 문태래의 뒤에 서서 그를 호위했다. 등일뢰와 고금표는 날아온 파편에 얼굴을 맞아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고금표가 강차를 비껴 들고 적진에 가담하려고 했다. 문태래가 바람처럼 몸을 움직여 언백건의 얼굴에 일 장의 허초를 날리며 갑자기 합합태의 옆으로 접근했다. 그가 벌써 세 사람을 처치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다섯 사람의 무공이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적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다시 몇 사람을 처치해야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합합태와 한문충 두 사람이 비교적 떨어진 장소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합합태의 등을 노리고 일 장을 가격했다. 합합태가 몸을 살짝 낮추어 문태래의 일 장을 피함과 동시에 손을 뒤집어 그의 팔을 낚워채려 했다. 문태래는 그의 수법이 기묘한 것을 보고 의외라는 듯 (이!)소리를 지르고 좌장으로 그의 얼굴 옆을 치며 그의 목을 노렸다. 합합태가 또다시 머리를 숙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문태래는 그의 금나수가 너무나 괴상해 적잖이 놀랐다. 합합태는 문태래와 이 초를 겨루었지만 두 번 다 그의 팔을 치고 말았다. 이 금나수는 본래 그의 백발백중의 절기였다. 두 번씩이나 실수를 해 놀라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을 한대 맞았다. 문태래는 자기의 일 장에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그를 보고 놀랐다. 합합태가 다년간 요동에 머물러 있었지만 여전히 몽골의 습성대로 소가죽 조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문태래가 알 리가 없었다. 이 일 장이 가죽을 치고 만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문태래는 놀라 괴상한 무공을 익힌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얻어맞은 합합태는 앞가슴에까지 통증이 왔다.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팔을 펴 문태래의 허리를 잡았다. 문태래는 우장을 뒤집어 전모조의 자세로 비스듬히 그의 뺨을 노렸다. 합합태가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며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문태래는 손을 들어올려 바닥에 태질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손과 팔이 이상하게 뻣뻣하며 반신의 맥이 탁 풀렸다. 여어동은 문태래가 위험에 빠진 것을 보고 놀라 대들었다. 막 발을 내디定는데 문태래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합합태의 옆구리를 껴안았다. 원래 문태래가 그 사이에 그의 혈도를 누른 것이다. 그러고는 손을 뒤집어 잡고 두 손으로 그를 집어던졌다. 「사가, 그 사람은 친구요. 여어동이 다급히 외쳤다. 이때 합합태는 머리는 앞으로 발은 아래로 둔 채 평평하게 날아가 커다란 종에 막 부딪칠 찰나였다. 등일뢰와 고금표는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달려가 구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문태래는 여어동의 친구란 말을 듣자 갑자기 화살처럼 달려갔다. 그 기세가 합합태의 나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일촉즉발의 고비에서 손을 뻗어 합합태가 신고 있는 오른쪽 신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힘껏 잡아당기며 좌장으로 그의 견정혈을 치고 주물러 일으켜 세웠다. 「아, 친구라는데 미안하게 되었소.」 합합태는 구사일생의 고비에서 빠져나온 뒤라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등일뢰와 고금표는 문태래를 향해 덮쳐 들다가 갑자기 그가 맹제의 생명을 구해 주자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등일뢰가 합합태를 부축하고 옆으로 비켰다. 머리를 조심하세요. 여어동의 외침과 동시에 문태래는 자기의 머리 뒤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몸을 돌리며 소당퇴로 피함도 양보함도 없이 먼저 적부터 걷어찼다. 언백건이 두 손에 쥐고 있던 동환(銅 環)을 뗑그렁 한 번 치며 전신을 솟구쳤다. 우환으로 호신을 하고 좌환을 직선으로 뻗어 문태래의 허리를 후려친 것이다. 좌환이 거의 허리에 와 닿을 찰나 갑자기 거두어들이며 우환을 별안간 던졌다. 문태래가 대갈일성 손을 뻗어 뺏으려 했다. 이렇게 되어 원수끼리 맞부딪쳤으니 사생결단을 하기 전에는 끝날 수 없는 판국이 되었다. 불전 안은 등불이 희미한데 여래불이 고개를 숙이고 눈썹을 내리깐 채 두 사람의 악전고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어동은 불상 옆에 기대어 섰고 등일뢰,고금표, 합합태, 한문충 네 사람은 입구에 안을 향해 서 있었다. 안에 쓰러진 세 구의 시체는 모두 머리가 깨져 피와 살이 엉겨붙어 엉망이었다. 언백건은 등일뢰 등이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관전만 하는 태도에 더욱 화가 나서 쌍환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그의 권법에는 독특한 비법이 숨어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쌍환만 하더라도 수십 년의 고련을 통해 익힌 재주다. 문태래가 그 십여 초를 겨루다 보니 그의 공격과 수비가 엄밀하고 동작도 민첩해 꾀나 법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합 소리와 함께 쌍장을 권법으로 바꾸었다. 매번 권장이 나갈 때마다 한 번씩 기합을 넣었다. 어떤 때는 기합을 넣은 뒤에 수장(手掌)이 나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권법(拳法)이 나간 뒤에 기합이 잇기도 했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동작과 기합이 일치하기도 또 어떤 때는 기합만 넣고 허초를 쓰기도 했다. 외치는 소리와 필법(筆法) 권초가 서로 어우러지는 가운데 몸놀림이 빨라지고 기합 소리가 드높아졌다. 그가 맹위를 떨칠수록 언백건은 더욱 더 궁지에 몰렸다. 문태래의 이 벽력장의 장풍과 고함 소리 가운데는 바로 우레의 기세가 숨어 있었다. 언백건은 버티기도 힘이 들어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다. 두 팔에 맥이 풀려 쌍환을 교차시킨 채 한 발 물러섰다. 그는 문태래가 이 틈을 노려 공격해 들어올 것으로 알았다. 예측한 대로 상대방이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고 한 발 다가서며 장풍을 날렸다. 언백건의 쌍환은 백연전미로 본래 우환은 왼쪽에 좌환은 오른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양쪽이 활짝 열리며 적의 한 팔이 쌍환에 맞아 부딪히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문태래도 상대방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기 위해 손바닥을 펴 그의 가슴을 향해 눌렀다. 언백건은 이 일 장에 그냥 눌린다면 죽지 않으면 부상을 당할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좌환을 돌려 가슴을 가리고 우환으로 적의 어깨를 쳤다. 문태래가 대갈일성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강환을 잡고 나는 듯 적의 뒤로 돌아섰다. 언백건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우환까지 문태래의 손에 잡혔다. 문태래가 힘껏 낚워채는 바람에 언백건의 두 손이 따라서 꺾였다. 만약 손을 놓지 않으면 그대로 팔이 부러질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열 손가락을 풀자 한 쌍의 강환이 벌써 상대방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앞으로 세 발짝 물러가서야 비로소 몸을 돌이켜 세웠다. 「당신의 것이니 반환하겠소. 문태래가 소리를 지르며 쌍환을 그를 향해 던졌다. 던지는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언백건은 병기가 날아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귀를 찢을 것 같은 바람 소리에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그대로 받았다가는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급히 오른쪽으로 피하는데 땅땅 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쌍환이 커다란 종 위에 박히고 말았다. 등일뢰와 고금표 등은 자신들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언백건이 갑자기 두 눈을 위로 뒤집어까고 두 팔을 수평으로 뻗은 체 몸을 꼿꼿이 세우고 깡충깡충 뛰었다. 행동이 마치 얼어 굳은 시체와 같았다. 이것이 언가권 가운데 하나인 기문의 무공이었던 것이었다. 진주 축유과(祝由科)의 섭심술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의 두 눈은 전기와 같이 적의 혼백을 쏘아보며 두 팔을 위아래로 돌려 적을 닥치는 대로 치는데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도 민첩하게 뛰었다. 문태래의 눈이 그의 시선과 접하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당황하여 우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뒤에 벽력장으로 강호상에서 보기 드문 이 강시권과 맞섰다. 그래서 다시 십여 초를 대결하다가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뛰어 물러났다. 언백건의 부릅뜬 두 눈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떨다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선혈을 내뿜으며 꼿꼿하게 굳어 자리에 선 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무서운 꼴을 보자 몸서리를 쳤다. 문태래는 그가 울다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보자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재앙과 복은 원래 문이 없는 법, 오직 사람이 자초할 뿐이니 평안히 가시오.」 여어동이 옆에서 말했다. 언백건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전연 움직이지 않았다. 「언 대가, 우리 가십시다.」 한문충이 말을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끌어 당겼다. 그랬더니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만져 보니 숨이 끊어진 지 오래다. 그는 앞이마와 뒷등을 문태래의 양 장에 얻어맞고 죽은 것이었다. 한문충이 한숨을 쉬며 문태래를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았다. 「분뢰수 문 사야신가요? 문태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한문충입니다.」 문태래는 그가 진원표국의 사람임을 알고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사람들을 데리고 철담장에 나타나 자기를 잡아간 사람은 진원표국의 동조화였다. 그러나 이번 항주의 사자봉에서 장소중과 싸울 때 그들의 표국은 또 홍화회와 한편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적과 아측의 중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문충이 세 사람의 이름을 밝혔다. 피차간에 고개만 끄덕거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세 분은 지난날 홍화회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품고 있었는데 제가 설명을 해 풀어 드렸습니다.」 한문충이 말했지만 문태래는 여전히 벙랭했다. 진원표국에 대해 아직도 미움이 남아 있음을 알고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하직 인사를 하고 불전에서 나왔다. 관동삼마도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문태래는 고금표가 등을 돌릴 때 그의 등에 여어동의 금피리가 꽃혀 있는 것을 보고 두 발짝 앞으로 나섰다. 「고 대가, 제 아우의 병기는 주고 가시오.」 고금표가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리며 화를 냈다. '좋습니다. 그가 재주 있거든 와서 가져가라 하시오.」 그의 무공도 보통의 수준은 넘는 편이었다. 십여 년 동안 요동을 종횡하면서 사람깨나 죽이고 물건도 어지간히 강탈했다. 그러면서 만만한 적수를 별로 만나 보지 못했다. 큰형격인 등일뢰를 다소 꺼릴 뿐 그 누구도 안중에 없었다. 여어동이 자기의 얼굴에 뜨거운 국물을 끼얹은 치욕에 이를 갈고 있었다. 방금 문태래가 용맹을 떨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적수가 아님을 알았다.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지 않았는데 문태래가 자기를 향해 시비조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약한 체 하며 얌전하게 금피리를 그냥 되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즉시 호차를 비켜 들고 적을 맞을 태세를 취했다. 문태래가 손을 뻗어 그의 호차를 뺏으려 했다. 두 사람이 막 달라붙으려고 할 때 여어동이 갑자기 뛰어들었다. 「사가, 소제 이미 출가한 몸이라 금피리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냥 고 대가가 가지고 가시게 내버려두세요.」 문태래는 그의 이런 말을 듣자 참견하기 거북하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흥!)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고금표도 호차를 거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등일뢰는 생각해 보았다. (문가 성을 가진 자가 너무나도 오만무례하다. 제아무리 무공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우리까지 제놈이 무서워 벌벌 떨어야만 한단 말인가? 재주를 보여 우리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때 세 사람은 모두 불전 밖에 나와 있었다. 위호수가 항마보저를 짚고 중앙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전 앞에 등불이 밝혀져 있고, 사대금강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등일뢰가 신좌(神座) 위로 뛰어올라가 적을 이용해 신상을 하나하나 흔들어 놓았다. 문태래와 여어동이 불전 밖에서 우지끈우지끈 나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왔다. 다섯 개의 신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사람처럼 하나하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큰일났구나. 문태래가 이렇게 외치며 여어동의 왼팔을 잡고 순식천로의 경공을 펴 산문 밖으로 뛰었다. 막 발을 떼어 놓는데 등뒤에서 펑펑펑 하는 굉음과 함께 먼지가 앞을 가리고 진흙이 여기저기 날리며 신상이 모두 넘어져 깨졌다. 사대금강은 단단하거니와 대단히 무거웠다. 그 묵중한 신상이 넘어지며 깨지는 기세가 맹렬했다. 문태래는 화가 나서 쫓아갔다. 「사가, 오늘 네 사람이나 죽였으니 그만두시지요.」 여어동의 만류하는 말에 문태래가 어리둥절해 발길을 멈추었다. 「자네 어떻게 해서 중이 되었나? 등일뢰는 불상을 망가뜨리기는 했지만 문태래가 쫓아와 싸움을 걸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금표,합합태와 함께 산 아래를 향해 죽자 하고 달렸다. 고금표는 달리다 이상해 허리춤을 더듬어 보니 금피리가 없어졌다. 놀랍고 두려워 (이!)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등일뢰 등이 발길을 멈추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고금표는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 그 문가 녀석 어느새 귀신같이 금피리를 훔쳐가버렸어요. 네 사람은 문태래와 여어동이 불전에서 뛰어나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쫓아와 금피리를 뺏어 갔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룻이었다. 두려움에 전신이 떨렸다. 「둘째, 욕하지 마시오. 그가 만약 금피리를 가져가지 않고 등이라도 떼렸다면 그래 살아 남아 있을 것 같소? 합합태의 말이었다. 고금표도 문태래가 확실히 사정을 보아준 것이라 여기고 입을 다물었다. 네 사람은 관동삼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위구르로 곽청동을 찾아 가자고 상의했다. 한문충은 동행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세 사람은 떼를 써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을 알고 맹진에 돌아가자 서로 헤어졌다. 한문충은 낙양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두문불출 비파나 뜯으며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여어동은 문태래가 출가한 원인을 묻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사가, 정말 형님께는 미안합니다. 형님,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친형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 같은 것 다시는 꺼내지 말게. 설령 미안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무심코 한 일이겠지.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리고 나는 그런 것 전연 개의하고 싶지 않네.」 「무심코 한 짓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배은망덕을 한걸요.」 문태래가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구해 준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 만약 내게 배은망덕했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나.」 달빛 아래 가사를 걸친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못 쓰게 망가져 있었다. 지난날의 잘생긴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태래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십사제, 우리는 생사를 같이할 골육이나 진배없어 하늘이 꺼져 내리는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이 사가 자네를 위해 감당하겠네. 왜 이토록 의기소침한가? 여어동은 부모가 살해된 후 강호에 떠돌며 홍화회 형제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해 왔지만 여태까지 진짜 친형님처럼 이렇게 다정한 말을 자기에게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감동이 되어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미 출가한 몸이니 얽히고 설킨 실오라기와 속연은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차디차게 말했다. 「사가, 그냥 돌아가 주세요. 앞으로 다시 만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 법명이 공색입니다. 이제 십사제라 부르지도 마세요.」 말을 마치자 갑자기 몸을 돌이켜 절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문태래는 한참 동안이나 어이없이 서 있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다시 무슨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비록 강적을 죽여 원수를 갚기는 했지만 여어동의 냉랭한 태도를 보며 가슴이 매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살며시 그 자리를 떠나 맹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여어동이 절 안으로 돌아와 보니 온통 불상의 파편뿐이요, 네 구의 시체만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서진 불상 앞에 엎드려 깊은 참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땡그렁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자기의 그 금피리가 면전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이원지가 자기 뒤에 와 서 있었다. 이때 그녀는 여장을 하고 있었다. 등불 밑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리따웠지만 표정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어동은 합장을 한 채 허리를 구부릴 대로 구부렸지만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원지는 그의 잔인할 정도로 냉혹한 인내심을 지켜 보며 무슨 말을 꺼낼까 하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꽃을 먹는 소녀 문태래가 객점으로 돌아오니 낙빙은 벌써 옷을 다 입고 병기를 챙겨 들고 그를 찾아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반겼다. 「아무 말씀도 없이 혼자 어디를 그렇게 슬그머니 다녀오세요? 「누가 그렇게 깊이 잠들어 있으라 합디까? 누가 묶어 잡아가도 모르겠더군.」 「잡혀 가 봤으면 좋겠네요. 초조해하는 당신 모습 좀 보게요.」 낙빙은 남편의 표정이 어딘가 쓸쓸함을 발견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 십사제를 만났는데 중이 되었습디다.」 「아니 뭐라구요? 「우리, 총타주님을 뵈러 갑시다.」 문태래는 진가락 , 서천굉 등을 깨워서 경과를 설명했다. 장진은 참지 못하고 제일 먼저 펄쩍 뛰었다. 그 길로 모두들 보상사로 달려갔다. 절에 도착하니 텅 빈 채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절의 스님들이 어젯밤의 악전고투에 놀라 달아났다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낙빙이 불상 앞의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눌려 있음을 발견했다. 모두들 몰려와 그 종이를 펼쳤다. 총타주님, 그리고 여러 형님들 보십시오. 소제 죄업이 너무나 깊고 많아 출가하여 참회하기 위해 일체의 속연을 끊으려 하나이다. 여러분께서는 계속 대사를 위해 노력하셔서 불세의 업적을 이루시기 바라나이다. 소제 이를 위해 조석으로 불전에 빌겠습니다. 소제 이제 밖으로 나가 시주를 얻어다 불상을 중수해야겠나이다. 몇 달 뒤에나 돌아을 수 있게 되겠지요. 관동삼마는 위구르로 곽청동 소저를 찾아나섰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해 주십시오. 소제 여어동 돈수 재배 사람들은 편지를 읽고 모두 상심을 하였다. 낙빙은 말할 수 없는 낙심에 빠졌다. 장진이 벌컥 화를 냈다.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출가야? 우리 이 절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립시다. 그러면 제 녀석이 중 노룻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겠지요. 말을 마치고 촛대를 들고 불을 지르려 하자 낙빙이 소리쳐 말렸다. 서천굉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십사제의 속세에 대한 미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평생토록 중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무슨 근거로 하시는 말씀인가? 문태래가 물었다. '첫째, 그는 우리의 대사를 아직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시주를 얻어다 불상을 중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도 자존심이 강해 타인에게 뭘 요구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시주를 얻겠다고 나섰다니 이게 어디 성공할 것으로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가 틀림없이 옛날 수법을 써서 되먹지 못한 부호의 재산을 털 것으로 믿어집니다.」 여기까지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디 스님이 할 짓인가? 진가락도 이렇게 농담을 했다. 서천굉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가 곽청동 소저의 일까지도 염려하고 있으니 중이 되기는 대단히 어렵겠는걸요. 보세요, 이 종이에도 자기의 본명을 썼지 스님의 법명은 쓰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님이라는 신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서천굉의 말을 듣고 모두들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관동삼마의 무공이 꾀 막강하던데 곽청동 소저가 상대해 낼 수 있을까? 문태래의 물음에 서천굉이 나섰다. 「우리가 일찍이 곽청동 소저와 육마인 염세장이 다투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곽 소저가 그보다는 상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총타주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그들의 독수에 小內 보고 말겠지요.」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대마인 등일뢰의 힘이 보통 세지 않던데요.」 문태래의 말이었다. 「그럼 우리가 빨리 위구르로 출발하여 도중에서 삼마를 만나지요. 우리 우선 이 일부터 마무리를 짓고 다시 돌아와 십사제를 권고해도 늦지는 않아요.」 서천굉의 의견에 모두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찬성을 했다. 사람들이 맹진으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 주루를 찾아 국수도 먹고 술도 마셨다. 서천굉이 말을 꺼냈다. '삼마가 이미 출발했으니 우리 중 누군가가 먼저 넷째형수님의 백마를 타고 쫓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위구르의 사정이 긴박하여 목탁륜 노영웅께서는 그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어 바쁠 것입니다. 공연히 곽 소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삼마의 공격에 말려들면 미처 손쓸 틈도 없게 되면 곤란해요. 진가락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어찌할까 궁리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그러면 제가 먼저 떠날 테니 여러분은 뒤에 오시지요.」 장진이 선발대로 떠나겠다고 나서자 서천굉이 안된다고 했다. '성질이 급해서 도중에 일을 저지르면 큰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럼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낙빙은 서천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위구르 말을 모르시니 도중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거예요. 게다가 지금 도처에서 전쟁을 하는 중이니 공연히 위구르족의 오해를 사면 큰일납니다.」 좌중에는 오직 진가락과 심연, 두 사람만이 회강에서 십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에 정통했다. 낙빙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 그들을 보고 가라는 뜻이었다. 진가락은 그런데도 잠자코 있었다. 심연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럼 우리가 먼저 떠나지요.」 '총타주님, 제가 보기에도 먼저 떠나시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위구르 족의 언어도 아시고 또 무공도 훌륭하신데 관동삼마도 본 적이 없으시니까 좁은 길에서 만난다 하더라도 싸우거나 말거나 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도착하신 후 만약 조혜가 여전히 도전을 한다면 그들 위구르를 위해 좋은 계략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구요.」 서천굉의 말을 듣고도 진가락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했다. 「좋아요. 국수를 먹은 뒤에 상관의산에게 사례를 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도 하직을 하고 낙빙의 백마에 올라타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진가락은 관동삼마가 곽청동을 찾아가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듣고 대단한 걱정을 했다. 그녀의 아리따운 뒷모습이 넓고 넓은 사막속으로 점점 가물가물 사라져 가던 정경이 눈앞에 아련히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이가 성을 가진 소년과 그녀가 이상할 정도로 친했던 모양과, 육비청이 그의 제자와 그녀가 각별히 서로 친밀해 한 말에 생각이 미쳤다. 저 혼자 인심 좋은 체하다가 공연한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서 마음속의 사념을 떨쳐 버리려 해도 그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백마는 빨리도 달렸다. 귀 옆으로 바람이 일어나는 소리만 지나가는데 산이며 수목이 나는 듯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점심때쯤 되었는데 벌써 2백여 리나 달려온 것 같았다. 이쯤 되면 관동삼마를 추월한 지 오래되어 상당히 먼 거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또 말을 달렸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만 해도 관동삼마가 영원히 쫓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저녁에 객점에 들어가서도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이튿날 숙주(肅州)에 도착하여 가욕관에 올랐다. 망린에 기대어 멀리 바라다보니 만리장성이 사면으로 둘러싸여 아득히 먼 곳을 굽어보고 있었다.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성(城) 안을 내려다보니 성냥갑처럼 작아 보였다. 여러 가지 감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경관이었다. 가욕관을 나오며 관례대로 돌을 주워 성 안을 향해 던졌다. 가욕관 밖은 바람과 모래가 험악하여 여로가 험난했다. 그래서 고래로 관문을 벗어날 때는 돌을 성 안으로 던져야만 생환할 수 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몇 리를 못 갔는데 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해는 서산에 지는데 낙타 등에 누군가가 타고 가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가욕관을 지나매 두 눈에 눈물이 마를 새 없어라. 앞은 고비사막이요, 뒤도 모래벌판이어라. 구슬픈 노랫소리가 사방으로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일로 새벽이 되면 길을 떠나고 저녁이 되면 휴식을 취하며 옥문관을 지나 안서에 도착했다. 사막은 엷은 황색으로부터 점차 짙은 황색으로 변했고 다시 짙은 황색으로부터 점점 거무스름한 잿빛으로 변해 고비사막의 변두리로 이어져 있었다. 이 일대는 인가라고는 전연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모래떨판뿐이었다. 그 백마는 광활한 사막을 힘차게 내달렸다. 얼마 뒤 아득한 곳에 산등성이가 나타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석벽(石壁)이 점점 가까워지며 한 일 자로 길게 뻗어 나갔다. 산과 들 사이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것이, 그 안에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한 경치가 나타났다. 다시 가까이 달려갔을 때 갑자기 깎아지른 낭떠러지 사이로 한 줄기 틈이 보였다. 백마는 산길을 따라 달려 들어갔다. 그곳은 바로 감숙과 회강 사이의 교통의 대로인 성성헙이었다. 골짜기 양쪽의 석벽은 까마득하게 직립하여 마치 칼로 썰어 만들어 놓은 것과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파랗다 못해 눈부시게 반짝거려 마치 바닷속에 들어가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골짜기의 암석은 전부 짙은 혹색으로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길은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제멋대로 꼬부라져 있었다. 때는 벌써 겨울로 들어선 계절이라 골짜기에는 초설이 쌓여 흑백의 반사가 묘한 경치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골짜기의 형세가 이토록 험준하니 전쟁을 하기에 딱 알맞은 장소로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나갔다. 성성협을 지나 작은 집 한 채를 찾아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길은 여전히 길게 뻗친 흑색의 골짝이었다. 몇 시간을 달려 넓은 고비사막에 이르렀다. 고비사막은 거울처럼 편편하여 다른 사막의 모래언덕의 기복과는 전연 달랐다. 먼 곳을 응시하니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고 만물은 죽은 듯 고즈넉하여 온 우주에 오직 자기와 말 한 필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 고독감을 느꼈다. 그가 비록 무공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놓이자 자기도 모르는 두려움이 생겼다. 대천세계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도 작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합밀성(哈密城)에 도착한 후 군정이 긴급하여 외래의 여객에 대한 검문이 엄격할 것 같아 성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성 서쪽에 있는 이보로 갔다. 다음날 일어나 일단 이보를 지나 서쪽으로 향해 가다 보면 곽청동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 한인이라 혹시 그들 위구르 사람들이 자기를 첩자로 의심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만 그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그들의 복장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그래서 이보에서 그들 위구르 족의 옷을 사 가지고 들판으로 가서 갈아입었다. 그리고 원래 입었던 옷은 모래 속에 파묻었다. 개울물에 모습을 비춰 보니 영락없는 위구르 소년 같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가는 도중 한 명의 위구르 사람과도 만나지 못했다. 연도에 그들의 촌락과 저자가 모두 잿더미로 화해 있었다. 이는 모두 조혜의 대군이 저지른 만행이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위구르 사람들은 벌써 사막의 심장부에 숨어 들어간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이 넓고 넓은 사막에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만 곽청동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큰길을 따라 찾아간다고 해도 다시 누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될 수 있는 한 편벽한 산속을 닥치는 대로 걸었다. 회강은 본래가 황량한 곳이라 큰 길로 따라가지 않으면 인가를 만나기가 더욱 어려웠다. 남쪽을 향해 사흘이나 걸었다. 휴대했던 비상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다행스럽게도 황양 한 마리를 떼려 잡을 수가 있었다. 다시 이틀을 더 가다가 도중에서 몇 명의 목부를 만났다. 물어 보니 모두들 카자흐 족이라고 했다. 그들은 만청의 대군이 밀려오자 위구르 사람들이 대거 서쪽을 향해 퇴각했다는 사실만 알았지 어디로 퇴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진가락은 방향도 잡을 수 없거니와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어 무조건 서쪽을 향해 말이 가는 대로 그냥 달렸다. 그래도 매일 3, 4 백 리는 충분히 달릴 수 있었다. 이렇게 4일을 달렸지만 눈에 띄는 것은 모두 황사뿐이요 하늘도 뿌옇다 못해 까매서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이날은 갑자기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사막의 기후는 그 변화가 극심해 왕왕 하루 사이에도 겨울과 여름을 맛보는 경우가 많았다. 본래 물주머니 안의 물은 얼어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더워 사람이고 말이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디 서늘한 장소를 찾아 쉬고 싶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가 모래언덕뿐이었다. 할 수 없이 비교적 큰 모래언덕의 해가 비추지 않는 장소로 달려가 물주머니를 열어 세 모금 마시고 말도 약간 마시게 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물을 많이 마실 수도 없었다. 부근에서 수원을 찾지 못하고 주머니 속의 물을 다 마셔 버리면 그때는 오직 죽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마가 한 시간쯤 쉬고 나서 다시 출발했다. 흐리멍덩한 기분에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때 갑자기 백마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공중을 향해 몇 번 냄새를 맡아보더니 갈기를 2며 길게 울고는 즉시 방향을 남쪽으로 달려나갔다. 진가락은 이 말의 영감을 믿기에 그냥 달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얼마 달리지 않아 모래언덕 사이로 갑자기 듬성듬성 소철나무가 나타났다. 다시 또 한바탕 달리니 땅 위에 파릇파릇한 풀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진가락은 앞에 분명히 수원이 있을 것으로 알고 기뻐했다. 백마도 생기가 나는지 네 굽이 마치 나는 듯 달렸다. 잠시 후에는 벌써 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앞에 시냇물이 나타났다. 백마가 시냇가로 달려가자 진가락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말등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네가 이 시내를 찾아냈구나. 우리 한번 실컷 마셔보자. 몸을 숙이고 물을 한 움큼 길어 마시니 속이 다 시원하고 후련했다. 물맛은 감미로웠고 약간의 향기마저 풍겼다.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작은 얼음 덩이가 서로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띵띵똥똥, 마치 선악(仙業)을 듣는 기분이었다. 말도 물을 마신 뒤에 길게 소리를 내고 몇 번이나 껑충껑충 뛰었다.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진가락은 물을 배불리 마시자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이 즐거웠다. 그러나 몸이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그는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물 속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손과 발을 깨끗이 씻었다. 다시 말을 끌어다 한 차례 물을 끼얹고 목욕을 시켰다. 그리고 두 개의 가죽 물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얼음 덩어리가 반짝거리는 가운데 꽃잎이 가끔 섞여 떠내려왔다. 시냇물에서 향기가 난다고 생각한 것은 상류에 꽃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시냇물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혹시 곽청동의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말을 타고 시냇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거슬러올라갔다. 가면 갈수록 시냇물이 점점 더 커졌다. 사막에 있는 냇물은 대부분 위로 거슬러올라갈수록 커지기 마련이고 하류로 내려갈수록 사막이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그는 오랫동안 회강에 살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냇가의 수목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한참 동안 달리다 보니 시냇물이 꼬부라져 고지로 연결되더니 갑자기 하얀 폭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물 소리가 우르르쿵쾅 하며 마치 한 필의 명주를 펼쳐 놓은 것 같은 폭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구슬이 깨지듯 물보라를 이루고 있었다. 장관이요,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황량한 사막 가운데 갑자기 이런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나자 진가락은 심신이 상쾌해지며 호기심이 발동했다. 폭포의 위에 또 어떤 경치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말을 끌고 서쪽으로 돌아 올라갔다. 그는 몇 개의 모퉁이를 돌고 또 하늘에 높이 들어선 청송숲을 뚫고 나가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넓은 호수가 있고 호수의 남쪽에 또 하나의 커다란 폭포가 있는데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햇빛을 받아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호수 주위로는 꽃나무가 길고 짧게 서로 뒤섞여 붉고 흰 꽃들이 어우러져 파란 호수에 비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먼 곳은 넓은 평원으로 푸른 풀이 끝도 한도 없이 자라 아득한 곳에서 하늘과 맞닿았다. 푸른 풀 위에는 수백 마리의 백양이 한가로이 풀을 뜯기도 하고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초원의 서쪽 끝에 높은 산 하나가 하늘 위에 솟아 있었다. 산봉우리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 있었으며 산허리에는 눈부시도록 하얀 백설이요, 그 아래는 온통 새파란 수목이었다. 그는 황홀한 경치에 취해 넋을 잃었다. 나무 위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호수에 떠다니는 얼음 덩이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폭포 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수면을 바라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잔물결이 일어나며 백옥같이 흰 팔 하나가 물 위로 쑥 올라왔다. 이어 축축하게 젖은 머리가 불쑥 올라와 고개를 돌리다 그를 발견하고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로 이러한 찰나 진가락은 벌써 빼어나게 아름다운 소녀임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아니, 산이나 물의 요정이 정말 있단 말인가?) 세 개의 바둑돌을 찾아 손에 움켜 쥐었다. 그때 수면 위에 한 줄기 일직선이 동쪽을 향해 뻗어 나가다가 화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머리가 꽃나무 숲에서 나타났다. 파란 수목의 틈 사이로 눈보다 더 흰 피부가 드러나고 칠흑 같은 긴 머리를 수평에 깐 채 하늘의 별만큼이나 반짝이는 두 눈으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지경이니 그가 어찌 그녀를 요정으로 간주하지 않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는 없는 법이라는 생각과 함께 물의 신이 아니라면 하늘의 선녀가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녀가 맑고 고운 소리로 이렇게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무슨 일로 여기 오셨지요? 위구르의 언어였다. 진가락은 분명히 들었지만 어리벙벙하여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넋을 잃은 체 아무 말도 못하고 아득하고 황홀해 꿈에 빠진 듯 술에 취한 듯 잠자코 있었다. '좀 비켜 주세요. 옷을 좀 입어야겠어요.」 진가락은 얼굴이 화끈 달아을라 급히 숲속으로 피했다. 땅바닥에 앉아 있는데도 가슴이 계속 두근두근했다. 아니, 평범한 위구르의 소녀란 말인가? 나체로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다니 이렇게까지 망측할 수 있는가? 그는 거북해서 즉시 그 자리를 떠날까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만난 사람인데 어찌 곽청동의 소식을 물어 보지도 못하고 떠난단 말인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난처했다. 갑자기 호수 저편에서 아리땁고 부드러우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길 가는 손님은 돌아오소서 무엇 때문에 빨리 달아나시나? 한마디 말씀도 안 하시면서 다른 사람 수영하는데 훔쳐보다니 어디 한번 물어나 봅시다 그 대담함이 옳은가 그른가요? 노랫소리가 경쾌하면서도 활발한 것이, 노래하는 사람의 장난기가 다분히 있어 보였다. 진가락은 노래 가운데 희롱과 책망이 섞여 있음을 알고 호수로「 돌아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숫가 붉은 꽃나무 아래에 눈같이 흰 옷을 입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때마침 긴 머리를 늘어뜨린 체 빗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녀는 맨발이었으며 얼굴 위며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진가락은 소녀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천하에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소녀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고결하고 아름다웠다. 흰 옷의 그림자가 물 속에 거꾸로 비치고 지는 꽃잎이 하나 하나씩 그녀의 머리와 옷, 그리고 그림자에 -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 왼만한 일에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벙어리라도 되었는지 한마디 만도 꺼낼 수가 없었다. 소녀가 그를 향해 상긋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진가락이 그들 위구르의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길을 가다가 덥고 목이 마르던 차에 이 맑은 시내를 찾게 되어 따라 올라오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아가씨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모르고 저지른 허물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말을 하면서 허리 숙여 절을 했다. 소녀는 그의 말이 점잖은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웃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 가는 손님은 어디서 오시나요? 얼마나 많은 사막과 산을 지나 오셨나요? 손님은 초원에서 소나 양을 먹이시나요? 아니면 낙타를 몰고 다니며 장사를 하시나요? 진가락은 그들 부족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도 서로 노래로 대신하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르면 자연스럽게 가락이 맞았다. 자신도 사막에서 다년간 살았지만 그때는 매일 무공에 전념하느라 이 재주를 배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이 소녀의 내력을 모르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저는 동쪽에서 왔습니다. 원래는 관내에서 낙타를 몰고 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지금은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어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가씨께도 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소녀는 그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손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아밀특글이라 부릅니다.」 이 이름은 그들 부족의 남자들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요? 저는 애서 한 이라고 해요.」 그 이름도 그들 위구르 여자들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다. 한인들 가운데 흔히 쓰는 분방이니 정숙(貞淑)이니 하는 이름과 같았다. 소녀가 다시 물었다. 「그래 누굴 찾으시나요? '목탕륜이란 노영웅 한 분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소녀가 가볍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을 아시나요? 그리고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잘 아는 분입니다. 그뿐인가요, 그분의 아드님인 곽아이와 따님인 곽청동도 다 아는데요.」 어디서 그분들을 만나셨는데요? 그분들이 중원으로 성경을 찾으러 오셨을 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좀 앉아 계세요. 제가 먹을 것을 가져다 드릴께요.」 그녀는 맨발로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잠시 후 벽록의 함민과(哈密瓜) 하나와 마유주 한 사발을 가지고 나와 그에게 주었다. 진가락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선 마유주를 한 모금 마셔보니 맛이 참으로 감미로웠다. 소녀가 다시 은장도를 가지고 합밀과를 쪼개니 과육이 마치 노란색 비단과 같았다. 한 번 먹어보니 그 맛은 달콤하고 향기로웠으며 즙액이 꿀과 같았다. 「목탁륜 영감님을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소녀가 물었다. 진가락은 그녀의 말씨를 듣고 그녀가 목탁륜을 매우 존경하고 있음을 느꼈다. 「목탁륜 노영웅과 아가씨는 같은 부족이신가요? 진가락의 반문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이 성경을 찾아올 때 몇 사람의 표사를 살해한 일이 있습니다. 죽은 표사의 친구들이 지금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방비를 하시라구요.」 소녀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아주 무서운 사람들인가요? 그리고 숫자가 많은가요?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무예만은 대단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사전에 준비만 한다면 크게 무서워할 것도 없지요.」 진가락의 말에 소녀는 안심이 된다는 눈치로 웃었다. 「그럼 제가 즉시 모시고 가지요. 그러나 며칠 걸릴 거예요.」 소녀는 머리를 빗고 댕기를 매며 입을 열었다. 「만청의 대군이 아무 까닭도 없이 우리를 공격해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갔어요. 저와 언니, 동생은 여기서 가축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구요. 날씨가 더워 수영을 하러 나왔었는데 이곳에 남자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진가락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천진난만해 너무나 귀여웠다. 게다가 옥같이 예쁜 웅모와 자태가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미인을 이와 같은 경치 속에서 만나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소녀는 머리를 다 빗고 나자 소뿔로 만든 나팔을 들고 우- 우- 몇 차례 불었다. 즉시 몇 명의 여자들이 말을 타고 초원에서 달려왔다. 소녀가 그들 쪽으로 가서 뭐라 한바탕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기를 데리고 목탁륜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으니 가축을 잘 돌봐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몇 명의 여자들이 계속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진가락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소녀가 숲속의 천막으로 가서 비상식량과 약간의 물건을 챙긴 뒤에 홍마 한 필을 끌고 왔다. 이 홍마의 전신은 위아래 모두 불붙은 숯처럼 빨갛고 잡털이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긴 준마였다. 진가락도 자신이 타고 온 백마를 끌고 왔다. 「손님의 말이 아주 훌륭하군요. 자, 같이 가시지요.」 소녀가 말을 마치고 말 위에 뛰어올랐다. 몸놀림이 무척 경쾌했다. 그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시냇물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손님께서 한인들이 있는 데 가시면 그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던가요? 「어떤 사람은 친절하고 어떤 사람은 불친절하지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더 많은 편이지요.」 이때 진가락은 자신이 한인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전연 의심하는 기색이 없어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녀는 한인들이 사는 고장의 풍토와 인정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진가락은 재미있는 말만 골라 이야기를 해 주었다. 소녀는 웃으며 재미껜 들었다. 이날 저녁나절, 높은 산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녀가 고개를 들다가 갑자기 반가운 환호성을 질렀다. 진가락이 소녀의 눈길을 따라 바라다보니 산허리의 낭떠러지 위에 큰 사발만한 이상한 꽃송이가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꽃잎은 짙은 녹색이었으며 산은 흰 눈이 쌓여 있었다. 흰색 가운데 짙은 녹색이 비치고, 게다가 석양의 황금노을이 조명을 더해 요염하고 화사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이것은 정말 만나기 어려운 설중련(雪中蓮)이에요. 어디 저 향기 좀 맡아보세요.」 과연 진가락은 은은하고 달콤한 향내가 낭떠러지 위에서 나는 것을 맡을 수 있었다. 그 꽃은 땅에서 20여 장이나 떨어진 잔께위에 피어 있었다. 그런데도 향기가 이토록 진하니 꽃향기가 대단함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녀는 두 송이의 꽃을 바라다보며 미련이 남아 차마 떠나기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진가락은 그녀의 이런 표정을 보고 말을 꺼냈다. 「가지고 싶으신가요? 소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가요. 우리가 오늘 설중련을 보고 향기를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복인걸요. 진가락이 미소를 머금고 말 안장에서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아니, 왜 그러세요? 소녀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진가락은 이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단전 가운데의 한 가닥 기운을 배와 가슴 사이로 끌어올렸다. 자기의 경공으로 낭떠러지 위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자신도 사실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그는 생사 같은 것을 염두에 둘 입장이 아니었다. 손발을 번갈아 쓰며 조심스럽게 10여 장 이상이나 올라와 있었다. 다시 위로 오르다 보니 낭떠러지 위에 쌓인 눈이 얼어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몇 번이나 실족을 했지만 경공의 힘을 역이용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꽃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까지 겨우 다가섰지만 낭떠러지가 갑자기 온통 볼록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밑에서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기어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그래 보람도 없이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갑자기 꾀가 하나 생각나 품속에서 주색을 찾아내 볼록 튀어 나온 바위를 향해 던져 걸었다. 이때는 검순(劍盾)을 왼손에 쥐고 있었기에 오른손으로 주색을 잡아당기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장소를 정확히 겨냥하고 설중련 옆에 떨어져 내려오며 왼손의 검순으로 얼음을 꽉 눌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윽한 꽃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두 송이 큰 꽃을 가볍게 꺾어 왼손에 쥐고 검순으로 가렸다. 내려가기가 더 어려을 것 같았지만 무공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그 편이 수월한 법이다. 낭떠러지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싶으면 검순으로 살짝살짝 바위를 눌러 가며 속도를 조절했다. 땅에서 3, 4장 정도 떨어진 장소에 이르자 두 발을 낭떠러지에 대고 버티며 한 마리 새처럼 몸을 날려 가볍게 소녀가 탄 말 옆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검순과 주색을 버리고 두 손으로 꽃을 받쳐들고 미소를 띠며 소녀의 면전에 내밀었다. 소녀가 섬섬옥수를 뻗어 꽃을 받았다. 진가락은 소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土녀는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눈물 방울이 꽃 위에 떨어져 아침 이슬처럼 반짝였다. 진가락은 소녀가 왜 눈물을 떨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묻기도 거북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한참 동안이나 말을 달렸다. 진가락은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 오늘 정말 바보 같았구나. 그녀가 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을 보자마자 무엇 때문에 생명도 돌보지 않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 꺾어다 주었을까?) 고개를 돌려 낭떠러지를 바라다보니 험준하게 우뚝 솟은 기상0이 너무나 엄숙하고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몸이 싸늘해 옴을 느꼈다. 원래 낭떠러지를 오를 때 너무나 많은 땀을 흘려 옷이 축축하게 젖었는데 그때 흘린 땀이 이제 마르는 것이었다. 손발까지 나른하게 맥이 풀렸다. 소녀의 아름다움 가운데 어떤 강렬한 힘이 깊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녀를 위해 분골쇄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조차 들었다. 날이 저물자 두 사람은 냇가의 큰 돌 아래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소녀는 불을 피우고 가지고 온 말린 황양의 고기를 구워 그와 함께 먹었다. 소녀는 계속 말을 하지 않았고 진가락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말을 꺼내기만 하면 이 성스러을 정도로 깨끗한 것을 더럽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그윽한 눈매로 그를 바라다보더니 갑자기 수십 보 달려나가 땅에 꿇어 엎드려 신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그녀의 뒷모습을 비춘다. 사방은 정적만 흐르고 설중련의 향기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녀가 벌떡 일어났을 때는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소녀는 조용히 다가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떨어져 죽지나 않을까 두렵지도 않으시던가요? '그때는 그런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토록 좋아하시는 두 송이 꽃을 꺾지 못할까 봐 그 점만을 걱정했으니까요. 소녀가 미소를 머금고 설중련 한 송이를 그에게 건네 주었다. '이 꽃 한 송이를 손님께 드리겠어요.」 진가락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드러운 한마디가 마치 엄중한 명령처럼 들려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받았다. (만약 홍화회 뭇 형제들이 이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뭐라고 할까? 자기들의 총타주라는 사람이 한 소녀의 말에 이렇게까지 순종하다니.......) 소녀가 다시 그를 향해 물었다. '무공을 배우신 적이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험한 낭떠러지를 어떻게 오를 수 있겠어요? 그렇지요? 진가락은 그녀의 말투로 보아 무공을 전연 할 줄 모른다고 판단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일신에 지닌 경신의 무공을 보고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좀 대담하면 되는 것이지요.」 소녀는 이것이 겸양인 줄 몰랐다. '아, 손님은 정말 용감하셨어요. 이렇게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 소녀는 즉시 진가락을 향해 자기는 어려서부터 초원에서 양을 기르며 자랐는데 꽃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정말 보기 좋은 꽃들이 이 초원 위에 무진장으로 피고 지지요. 한번 바라다보세요. 신선한 꽃들이 하늘끝까지 피어 있지 않은가요? 저는 양고기는 먹지 않을 수 있지만 꽃만은 먹지 않곤 못 배겨요. 「아니, 꽃도 먹을 수가 있나요? 진가락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먹어 온걸요. 「물론이죠.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꽃만 따와 오빠는 먹지 말라고 했지만 저 혼자 나와서 양을 치며 먹는데 말릴 수가 있나요. 뒤에 제가 그렇게 많은 꽃을 먹고도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고 이젠 그냥 내버려두신답니다.」 (어쩐지 꽃처럼 아름답다고 했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지요.) 진가락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다. 소녀의 옆에 앉아 있으니 가끔 담박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그녀의 몸에서 풍겼다. 분명 설중련의 꽃향기도 아니요, 또 세상의 어떤 꽃 향기도 아니었다. 다만 담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맑으면서도 그윽해 그 달콤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향기였다. (무슨 지분을 발랐기에 이렇게 향기로울까? 세상의 지분 가운데 이토록 우아한 향기가 있을 수 있을까?) 혼미한 정신 상태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의에 어긋나는 생각이라 자기도 모르게 살짝 떨어져 비켜 앉았다. 소녀는 그가 향기를 맡아보는 표정을 의식하고 상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꽃을 먹기 좋아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몸에서 무슨 향기가 나나 봐요. 역겹지 않으세요? 진가락은 그녀의 질문을 받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더듬더듬할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아가씨는 천진난만하고 솔직한데 내 다시 그녀를 세속의 사람으로 상대한다면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돌리자 갑자기 마음속이 명랑하고 활달해졌다. 그래서 다시금 꺼리는 것 없이 그녀와 밝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소녀의 이야기는 모두가 초원 위에서 가축을 기르는 일, 꽃 따러 다니는 일, 별 구경하는 일 등이 아니면, 소녀들의 유희에 관한 것 뿐이었다. 진가락은 어려서 집을 떠난 뒤 계속 칼과 창, 아니면 권각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이 없었다.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소녀의 재미있게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는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반짝거리는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견우와 직녀가 양쪽에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진가락은 직녀성을 가리켰다. 「저게 여자지요.」 다시 또 견우성을 가리켰다. 「저건 남자구요.」 소녀는 흥미가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야기 들려 주시겠어요? 그래서 진가락은 견우와 직녀에 대한 전설을 말해 주었다. 소녀는 은하수를 바라다보며 두 별이 서로 떨어져 있을 뿐 만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전에는 까치를 보면 검은색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훌륭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다리를 만들어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 주다니 그런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다음 부터는 까치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어야겠군요.」 「하늘 위의 선인(仙人)들이 일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다지만 그들은 수천 수만 년을 두고도 계속 만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수십 년 살다가 죽어야 하니 우리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지요.」 진가락의 말에 소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인 가운데 어느 시인이 이 일을 노래로 읊었지요.」 그래서 진관의 작교선이란 사(詞)를 그들의 말로 번역해 들려 주었다. 소녀는 (가을 바람, 옥 같은 이슬 서로 만나니 세간(世間)의 허다한 정(情)을 훨씬 넘어서네)라는 말과 (부드러운 정은 마치 물과 같고, 아름다운 만남은 꿈만 같으니) 및 (두 정념은 오랜 세월 겪었으니 어찌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일과 비기랴?)라는 구절을 들으며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글썽글썽하며 잠자코 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속삭이듯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한인들은 정말 총명하군요. 이렇게 좋은 노래를 엮어 내다니요.」 사막의 밤은 무섭게 추웠다. 진가락은 마른 나뭇가지와 풀을 주워다 불을 피우고, 담요로 각기 몸을 감고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이 잠든 곳은 서로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진가락은 꿈속에서도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청(淸)과 위구르의 대결 이튿날 다시 출발하여 서쪽으로 나흘을 가니 탑리목 강가에 이르게 되었다. 이날 오후 갑자기 남쪽에 있는 산 옆에서 2명의 위구르 기병이 나타났다. 소녀가 그들에게 다가가 몇 마디 하니 경례를 하고 물러갔다. 소녀가 돌아와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다. '만주병이 아극소화오십을 점령하여 목탁륜 노영웅 일행은 벌써 섭이강으로 후퇴를 했답니다. 여기서 거기까지 가자면 십여 일이 걸릴 거예요.」 진가락은 청병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을 듣자 심히 걱정이 되었다. '방금 만났던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만주병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 서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는군요. 그들의 군량과 마초가 떨어지고 또 이 넓은 사막에서 굶다 보면 자연 싸움을 할 기력이 없어질 거래요.」 진가락은 본래 곽청동의 안위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이런 말을 듣고 위구르의 대대가 서쪽으로 일단 퇴각을 했다면 청병으로서도 그들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겠구나 싶었다. 권륜의 정전(停戰) 칙명만 도착을 하면 조혜는 자연 물러날 수밖에 언는 것이었다. 이제 곽청동이 중토에서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다가 대군의 진영 안에서 호위를 받고 있을 것이니 그까짓 솬동삼마의 복수가 무엇이 무서우랴 싶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자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은 낮에는 가고 밤에는 쉬면서 계속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상당히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진가락은 내심으로 은근히 이런 기대를 했다. (이 길이 영원히 끝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이렇게 평생을 동행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감히 계속 품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만 하면 그 순결하고 무구한 소녀를 바라보다가 스스로 부끄러워져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평범한 범부로서 그녀와 며칠 동행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복인데 이에 무엇을 더 바라랴 하는 마음이었다. 이날 저녁 무렵 해가 초원 위에 뉘엿뉘엿 지며 막 사라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새끼 사슴 한 마리가 화다닥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소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다시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귀여운 새끼 사슴이로군요.」 새끼 사슴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 어리고 약해 보였다. 매애매애, 두어 번 울고 다시 숲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소녀가 쫓아가다가 갑자기 물러나왔다. 「저쪽에 사람이 있어요.」 나지막하게 외쳤다. 진가락이 숲속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여 보니 5명의 청병이 때마침 빙 둘러앉아 큰 사슴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새끼 사슴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며 계속 매애매애 하며 슬프게 울었다. 잡혀 죽어 가는 사슴은 틀림없이 새끼 사슴의 어미일 것이다. 「빌어먹을, 저놈까지 잡아먹을까 보다. 청병 하나가 욕지거리를 하며 벌떡 일어서더니 활에 살을 먹이고 새끼 사슴을 겨냥했다. 새끼 사슴은 달아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더 가까이 접근했다. 소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숲속에서 뛰어나와 새끼 사슴의 앞을 막아 섰다. 「쏘지 마세요. 제발 쏘지 마세요. 청병이 놀라 소녀를 바라다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나머지 려명의 청병도 모두 일어나 섰다. 이때 진가락도 뛰어들어 소녀 옆에 서서 그녀를 지켰다. 소녀가 허리를 숙이고 새끼 사슴의 부드럽고 연한 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미가 죽었구나. 아이, 불쌍해 어떡하지? 새끼 사슴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나서 사나운 눈으로 청병들을 훑어본 뒤에 사슴을 안은 채 몸을 돌려 숲속에서 빠져 나왔다. 5명의 청병이 몇 마디 주고받더니 갑자기 환성을 지르며 병기를 들고 쫓아왔다. 소녀가 죽자 하고 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청병 가운데 파총(把總) 하나가 구령을 내리자 5명이 각기 분산하여 포위망을 좁혀 왔다. 진가락이 소녀의 손을 잡았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내 이 못된 다섯 놈을 때려 죽여 새끼 사슴의 원수를 갚아 줄 테니까요.」 소녀는 이때 진가락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믿었다. 한 사람이 5명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가 말을 했으니 믿고 새끼 사슴을 안은 채 그의 옆에 기대서 있었다. 진가락도 손을 뻗어 부드럽게 새끼 사슴을 쓰다듬었다. 5명의 청병이 쫓아와 사방에서 그들을 에워쌌다. 그 파총이 서투른 위구르 말로 외쳤다. 「무얼 하는 놈인데 우리 일을 방해하려 드느냐? 소녀가 고개를 들어 진가락을 바라다보았다. 진가락이 소녀를 보고 가볍게 웃자 소녀도 따라 웃었다. 소녀는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다. 이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면 이들 청병이 그를 해치기는 어렵겠직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놈을 잡아라. 총병이 외쳤다. 4명의 청병이 병기를 버리고 일시에 대들었다. 그러나 이상도 한 것이, 그들 병사들은 평소 부녀자를 욕보이기 좋아했다. 그런데 이 소녀의 모습을 보고는 감히 그런 음흉한 행동을 취할 엄두도 못 내는 점이었다. 모두들 진가락을 향해 덮쳐들 뿐이었다. 소녀가 놀라 비명을 지르는데 그 土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펑펑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그들 4명의 청병이 허공으로 날아가더니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떨어진 그들은 가냘픈 신음 소리만 낼 뿐 일어나지도 못했다. 원래 그들 모두가 벌써 혈도를 눌린 것이었다. 그들의 파총은 사세가 불리함을 보고 그만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달아나려구? 진가락이 호통을 치며 주색(珠索)을 던져 그의 목을 얽었다. 이쪽으로 잡아당기니 파총이 넘어지고 고꾸라지며 이쪽으로 끌려왔다. 소녀가 손뼉을 치며 즐거운 듯이 소리를 질렀다. 대견하다는 듯이 존경의 눈망울로 진가락을 바라다보았다. 진가락이 소녀의 손을 잡아 끌고 가 옆에 있는 큰 돌 위에 앉게 하고 위구르의 말로 파총에게 물었다. 「네놈들이 무엇하러 이곳에 왔느냐? 총병은 멍청하니 기어 일어나 4명의 부하가 땅에 누운 채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오늘 막강한 강적을 만난 줄 알고 모든 것을 체념했다. '우리------조혜 장군의 부하,-, 상사의 명령을 받고 거기, 거기 거기로,,,,,,.」 진가락은 그가 하는 말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네놈들 다섯 명이 어디로 가려 했다구?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놓아 주지도 않겠거니와 치료도 해 주지 않겠다. 그냥 이 사막에서 굶고 목말라 죽도록 내버려둘 참이다.」 파총이 이 말을 듣고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쎄가 속일 리 있겠습니까? 상사의 명령을 받고 성성협으로 사람을 맞으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위구르 말이 너무 서툴러 답답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가락이 한어로 바꾸어 물었다. '누구를 맞으러 가는 중이었느냐? '효기영의 한 좌령(佐領)입니다.」 파총도 한어로 대답했다. '이름이 어떻게 된다더냐? 공문을 이리 내놓아라. 어디 한번 읽어봐야겠다.」 총병이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 할 수 없다는 듯 품속에서 한 통의 공문을 꺼내 주었다. 진가락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원래 공문 봉투에 정장좌령 장소중대인 훈계라는 몇 개의 큰 글자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小官 항주의 사자봉에서 일전이 있던 날 장소중은 그의 사형인 마진이 버릇을 고치겠다고 데리고 갔는데 어째 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단 말인가?) 공문의 봉투를 그 자리에서 북 찢었다. 파총이 만류하려고 했지만 진가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에 있는 공문을 꺼내 읽었다. 장 대인께서 황제의 뜻을 받아 이곳으로 오시게 되었다니 반갑기 한이 없어 이렇게 영접할 사람을 파견하는 바입니다. 조혜의 서명이 씌어 있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장소중이 황제의 뜻을 받고 온다면 병사를 거두어 돌아오라는 칙명일 텐데 그렇다면 말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공문을 다시 파총에게 되돌려 주고 4명의 병사의 눌린 혈도를 풀어 준 다음 아무 말 없이 소녀와 함께 말을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하시네요. 손님 같은 분이 우리 부족에 계시다면 틀림없이 유명할 텐데 어째서 전에 한 번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진가락도 가벼운 미소를 보내고 딴전을 부렸다. 「새끼 사슴이 배고플 텐데 뭐 먹을 것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군요.」 가죽 부대 안에서 말젖을 손바닥에 따라 핥아먹게 했다. 손바닥이 흰 가운데도 빨간 복숭아 빛같이 비쳐 마치 작은 양지백옥의 그룻 안에 말젖을 담아 놓은 것 같았다. 새끼 사슴이 몇모금 핥아먹고는 매애매애 하는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부르고 있어요.」 소녀의 말이었다. 향향 공주의 결단 두 사람은 다시 6일 동안이나 걸었다. 7일째 되는 날 새벽,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먼 곳에서 한바탕 구름과 안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바람이 불려나 보지요? 진가락의 말에 土녀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아니라고 했다. 「구름이 아니라 땅의 먼지와 모래예요.」 「먼지와 모래가 어째 저토록 많을까요? '저도 모르겠군요. 우리 그쪽으로 가서 보도록 해요. 소녀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은 질풍처럼 말을 달렸다. 한참 동안 달리니 앞에 먼지와 모래가 더 많이 높게 일어나고 있었다. 가끔 군중에서 치는 쇠붙이와 북 소리까지 은은히 섞여 들렸다. 진가락이 영문을 몰라 급히 고삐를 챘다. 「군대요, 이 소리 좀 들어 보시오.」 이어서 고함 소리와 함께 싸울 때 울리는 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진가락이 놀라 외쳤다. '쌍방의 대군이 싸우기 시작한 모양이니 우리 빨리 피합시다.」 두 사람은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돌렸다.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앞에서 먼지가 크게 일어나며 일 표 군마가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철갑 소리가 쩔그렁거리는 먼지 가운데 큰 기 한폭이 나부꼈다. 그 기에는 큼지막한 조긴도 자 하나가 씌어 있었다. 진가락은 황하의 나루터에서 이들 조혜의 철갑군과 싸운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막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소녀에게 손짓을 하고 남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말이 잘 달리는 것이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철갑군과의 거리가 상당히 멀리 벌어졌다. 소녀의 얼굴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의 군대가 저들을 당해 낼지 모르겠군요.」 진가락이 막 무슨 말을 꺼내 안심을 시키려고 하는데 갑자기 호각 소리가 들리며 1열 1열의 보병이 대오를 지어 전진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또 왼쪽에서 급한 북 소리가 들리더니 대지를 진동하며 수만의 기병들이 온 산과 들에 개미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진가락이 왼손을 쳐들어 소녀를 안아다 자기 말에 태우고 검순(劍盾)을 꺼내 그녀의 앞가슴을 가려 주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소녀가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서워하지 말라시니까 정말 무섭지 않네요.」 그녀가 말을 할 때의 입김이 난초 향기처럼 전해 왔다. 진가락과 그녀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 그윽한 향기는 더욱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비록 포위되어 있는 처지이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더 얽히고 설키는 듯했다. 동.남.북 삼면에 모두 적병이 보여 어쩔 수 없이 서쪽을 향해 달렸다. 소녀는 새끼 사슴을 안고 있었으며 홍마는 그 뒤를 계小 따라오고 있었다. 한바탕 달리고 있는데 전면에 또 청병이 나타났다. 기가 왔다갔다하는 모양이 아무래도 포진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방을 휘둘러보아도 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놀라며 비교적 높은 언덕을 향해 말을 달렸다. 청병의 진세를 살펴보고 다시 틈을 찾아 뚫고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세를 살펴보다가 그 규모의 큼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쪽으로 빽빽하게 만청의 보병들이 늘어서고 기병들이 당당하게 포진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의 먼 곳에는 줄문의 의복을 입은 위구르의 전사들이 있었는데 긴 창이 숲을 이루고 만도가 풀밭을 이루어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진중의 장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지휘를 하고 있었고 수천을 헤아리는 군사들은 묵묵히 그들의 지휘에 따랐다. 이때 청군이 벌써 그들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 중 몇 명이 상사의 명령을 받고 검문을 하기 위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오늘 어쩌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이렇게 청병의 진중에 빠지게 되었을까? 잘못하다가는 여기서 생명을 잃겠구나.) 품속의 소녀와 함께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른손의 주색을 한번 휘둘러 보며 왼손의 고삐를 나꿔챘다. 「빨리 가자. 두 다리를 모으자 백마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려나갔다. 청병들이 멈추라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백마는 벌써 그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말이 어찌나 힘차게 달리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3대의 청병을 뒤로 제쳤다. 진가락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려 하는데 백마가 갑자기 앞발을 모으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앞에 철갑군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뛰어넘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진가락은 온 신경을 집중하고 숨을 죽인 체 말머리를 돌렸다. 철갑군의 대오를 끼고 돌아 달아날 참이었다. 그런데 궁전수들이 활에 시위를 먹이고 겨냥하고 있으며, 장모수(長矛手)들은 철창을 비껴 들고 한 겹 한 겹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무리였다. 청병의 장관이 일단 명령을 내린다면 자기와 품속에 있는 소녀의 몸에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창과 화살이 꽃히고 박힐 지경이었다. 제아무리 하늘에 통하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말고삐를 확 쥐고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청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당한 태도로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그때 마침 아침 해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해를 마주 보고 고삐를 당기며 천천히 가고 있었다. 그 소녀의 머리며 얼굴이며 손이며 옷에 담담한 양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청군 관병의 수 많은 병졸들의 눈망울이 넋을 잃고 소녀를 응시했다. 그들 모두의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군관이나 병사들이 모두 이 절색의 용모에 취해 버린 것이었다. 수만에 달하는 양쪽 군사들은 칼을 뽑고 활을 당겨 일촉즉발 혈전을 벌일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다가 갑작스런 순간에 그만 마귀에라도 홀린 듯 혼미한 상태에 빠져 넋을 잃은 것이었다. 쩔그렁 소리가 들리며 한 청병의 손에서 장모(長矛)가 땅에 번져졌다. 이어서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너도 나도 쥐고 있던 장모를 놓쳤다. 궁전수들은 활과 화살을 거두어들였다. 군관들도 넋을 잃고 점점 멀어져 가는 그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혜는 손수 지휘를 하고 있다가 멍하니 그 흰 옷의 소녀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맴돌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유순하고 온화하고 조용해져 싸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수하의 도통(都統) , 부도통 참령,좌령과 친병을 보니 사람마다 온화한 표정으로 칼을 거두어 집에 꽂은 채 그의 명령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조혜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병사를 거두어 원래의 위치로 철수한다. 일단 명령이 내리자 수만의 보병과 기병이 철수를 시작하여 수십 리 밖 흑수하(黑水河)에 이르러 주둔했다. 진가락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빠져 나오자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의 두 손은 가볍게 떨고 있는데도 소녀의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방금 구사일생의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전연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날려 흥마의 등으로 옮겨 앉았다. 「앞에는 우리들의 부대만 있어요.」 진가락도 검순을 거둬들이고 두 사람이 위구르의 부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한 소대가 그들을 맞으러 나오며 환호성을 질렀다. 소녀의 앞에 이르자 모두들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향해 인사를 했다. 소녀와 그들 사이에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기병 대장이 이쪽으로 와서 진가락을 향해 경례를 하고 이렇게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의 알라 신이 당신을 보우해 주실 것입니다. 진가락이 답례와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소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그들의 진중을 향해 말을 달려 들어갔다. 위구르 부족에서 꾀나 위세가 있는지 홍마가 이르는 곳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기병 대장이 진가락을 부대 안으로 안내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진가락은 목탁륜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추장께서는 적진을 살펴보러 나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돌아오시면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진가락은 여로에 지친데다가 또 방금 매우 위험한 지경에서 빠져 나와 죽음을 면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한꺼번에 극도로 피곤해 왔다. 그래서 영 안에서 실컷 자고 일어났다. 오후가 되자 기병 대장이 나타나 목탁륜은 밤에나 돌아오실 수 있다고 전했다. 진가락은 흰 옷의 소녀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말고 그 누가 또 이렇게 아름다을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신랑감을 고르는 재미있는 모임이 있으니 손님도 함께 가십시다. 그 모임에 가면 틀림없이 추장님을 뵐 수 있습니다.」 진가락은 답답도 하고 궁금도 했지만 더 묻기도 거북했다. 저녁이 되자 영 안의 청년 전사들이 몸치장을 하느라 몹시 바쁘게 돌아갔다. 사막의 저물어 가는 어슴푸레한 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이윽고 낚시 같은 달이 하늘가에 떠올랐다. 갑자기 영 밖에서 북을 쳔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기병 대장이 진가락이 머물고 있는 장막 안으로 들어서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초승달이 떴으니 우리 갑시다.」 두 사람이 영 밖으로 나가니 평지 위예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전사들이 사면팔방에서 꾸역꾸역 몰려들어 위구르의 청년을 에워쌌다. 그 주위에는 쇠고기 , 양고기를 굽는 사람, 밥을 짓는 사람, 악기를 불고 두드리며 연주하는 사람 등도 있었다. 모두들 축제에 들뜬 분위기로 충만했다. 호각 소리가 나더니 한 떼의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장막 하나가 이쪽으로 이동해 왔다. 앞장 선 사람은 바로 목탁륜으로서 아들 곽아이가 그 뒤를 따랐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행사가 끝난 뒤에 가서 아는 체를 해야겠구나.) 그래서 옷깃을 들어 올려 반쯤 얼굴을 가렸다. 목탁륜이 여러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자 모두들 꿇어앉아 알라 신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진가락도 그들이 하는 대로 엎드렸다. 기도가 끝나자 목탁륜이 외쳤다. 이미 처자가 있는 형제들은 오늘 수고를 좀 하셔야겠소. 밖에 나가 지키며 여러분의 젊은 형제들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시오.」 호각 소리가 들려 오자 3대의 전사들이 열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각자 왼손으로 말을 끌며 오른손에는 긴 칼을 들었다. 곽아이가 전마에 뛰어오르며 땅바닥에 앉아 있는 젊은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알라 신의 보우 아래 여러분은 오늘 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오.」 젊은 전사들의 환호성이 터져 하늘을 흔들었다. 「알라 신의 보우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적을 막아 주시는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곽아이가 긴 칼을 들어 허공을 쪼개고 3대의 전사를 인솔하여 밖으로 파수를 보러 나갔다. 진가락은 많은 위구르 사람들의 일사 불란한 질서와 법도를 보고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회강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혼인 습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부모의 명에 따르기 때문에 비록 재산이라든가 지위의 고하 등 제반 구속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인들의 예법에 비하면 훨씬 자유스러운 데가 많았다. 이 신랑감 고르는 것은 위구르 사람들에게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풍습이었다. 젊은 미혼의 남녀가 이 모임에서 자기의 애정을 결정하고 약혼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신랑감을 고른다)는 것은 소녀가 자기의 짝을 정한다는 뜻으로, 비단띠를 목에 두르고 춤을 춤으로써 자기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고 이래로 주체는 어디까지나 여자 쪽이다. 황(鳳)이 봉(鳳)을 구하는 것이지, 봉(鳳)이 (凰)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 소리가 갑자기 변하며 가락이 부드럽게 잦아들자 장막의 문이 활짝 열리는 곳에서 많은 소녀들이 떼를 지어 몰려 나왔다. 의상이 아름답고 요염하며 머리 위의 모자에 달린 금실 은실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모두들 노래부르고 춤을 추며 모닥불을 향해 모여들었다. 진가락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2명의 소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목탁륜의 옆으로 걸어갔다. 한 명은 노란 옷을, 다른 하나는 흰 옷을 입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은 그와 동행했던 아름다운 소녀였고, 노란 옷을 입은 소녀는 모자에 파란 깃털을 꽂은 곽청동이었기 때문이다. 달빛 아래 보니 처음 만났을 그때나 다름없이 아리땁고 날씬했다. 두 사랑이 목탁륜 옆으로 가더니 하나는 왼쪽에 다른 하나는 로른쪽에 앉았다. 진가락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이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바로 곽청동의 동생이 아닐까? 모습이 꾀 낯익더라니, 원래 내 옥으로 만든 병 위에서 그녀의 화상을 본 일이 있었지. 초상화를 잘 그렸다고는 하지만 어디 실물의 아름다움의 1만분지 1이나 표현해 냈나?) 그의 얼굴은 화끈거리고 손에는 땀이 배었으며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날 곽청동을 처음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사랑의 싹이 텄지만 그녀와 육비청의 제자가 너무나 친한 것 같아 보이기만 했다. 스스로 그녀에게 사랑하는 상대가 있다고 판단한 진가락은 사모의 정을 억누르기에 애를 썼다. 이 며칠 절세의 가인과 조석으로 함께 지내며 만강의 사모의 정이 누를 수도 없이 흰 옷의 소녀에게 옮겨 가 있었다. 이 시간 그들 자매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황홀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악 소리가 뚝 멈추며 목탁륜의 낭랑한 소리가 울렸다. 「마호메트 성인께서 코란 경 가운데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21장 제190절을 보면 (너희는 마땅히 주체가 되어 너희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할지어다. 또 제22장 제39절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공격을 받은 사람은 이미 항전의 허가를 받은 셈이다. 그들이 이미 억울함을 당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전능한 알라 신이 그들을 원조할 것이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만과 모욕을 받고 있으니 알라 신은 틀림없이 우리를 보살펴 주실 것이오.」 사람들의 환호성이 떠들썩하게 울렸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을 마음껏 즐기시오. 목탁륜이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외쳤다. 많은 금 소리 가운데 사방에서 노랫소리가 일어나며 즐거운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취사를 담당한 사람이 주먹밥과 구운 고기 밀과(蜜瓜) , 건포도, 마유주 등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에 바빴다. 사람들은 바위 소금을 조각해 만든 작은 그룻을 들고 있다가 구운 고기를 그 그릇에 한 번 문질러서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초승달이 중천에 걸리고 환락은 더욱 극에 달했다. 수많은 소녀들이 모닥불 옆에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춤을 추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옆에 접근하면 즉시 허리에 두른 비단띠를 풀어 그의 목에 씌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쌍쌍이 되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진가락은 예법을 엄수하는 제가의 출신이다. 여태까지 이런 하늘을 장막으로 삼고 땅을 자리로 삼아 즐기는 환락의 장면은 구경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노랫소리는 달콤하고 정취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몇 잔의 마유주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얼굴은 살짝 붉었겠다 흥겨운 기분에 흠뻑 빠져들었다. 음악 소리가 갑자기 뚝 멈추었다가 다시 자지러진다. 노래 부르며 춤을 추던 남녀가 분분히 손에 손을 마주잡고 흩어지며 의아한 표정으로 목탁륜 등을 바라보았다. 진가락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흰 옷의 소녀가 일어나 날씬한 걸음걸이로 모닥불을 향해 걸었다. 사람들마다 흥분한 상태로 수군거린다. 진가락의 옆에 있던 기병 대장이 이렇게 말을 해 주었다. 「우리들의 향향 공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가 봅니다. 고 누가 이 공주님의 짝이 될 수 있을까? 목탁륜은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일어나 자기의 짝을 찾겠다고 나서는 것이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딸의 행동을 주시했다. 곽청동도 동생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갑고도 놀라웠다. 원래 그녀의 여동생인 객사려는 이제 겨우 17세의 나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천산의 남북에 널리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천연의 그윽한 향기가 나 모두들 그를 향향 공주라 불렀다. 위구르의 젊은 남자들이 이 절세의 미인을 한번 보면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를 한번 더 바라본다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독하는 것이라고까지 여겼다. 그러니 그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자기의 좌석에서 일어나 이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는 것은 확실히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향향 공주는 가볍게 그 자리에서 몇 바퀴 돌더니 천천히 모잔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두 손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비단띠를 두룬 채 노래를 부른다. 그 누가 나에게 설중련을 꺾어 주셨나? 빨리 이리로 나오세요. 그 누가 내 새끼 사슴을 구해 주셨나? 나 지금 그분을 찾고 있노라. 진가락은 이 노랫소리를 듣자 귀가 멍했다. 무엇에 홀린 듯 넋을 잃고 있는데 섬섬옥수가 자기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그리고 비단띠를 자기 목에 걸더니 가볍게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진가락은 멍하니 그녀가 잡아 끄는 대로 끌려갔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노래를 불렀다. 많은 남녀들이 몰려와 축하의 인사를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몽롱한 달빛 아래 목탁륜과 곽청동은 진가락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저 평범한 자기들의 부족이려니 생각했다. 막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만나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뚜 뚜뚜 세 차례 호각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긴급한 군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사람들이 듣고는 즉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목탁륜과 곽청동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향향 공주는 진가락의 손을 잡아 끌고 사람들의 뒤에 가서 앉았다. 진가락은 그녀가 부드러운 몸을 자기 몸에 기대자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전해 옴을 느꼈다. 너무나 큰 황홀경에 빠져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하늘 위에 와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호각 소리가 일어난 곳을 주시했다. 남자들은 병기를 꺼내 들고 임전태세를 취했다. 두 필의 말이 가까이 달려오더니 두 사람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이렇게 보고했다. '청군의 조혜 장군이 사자를 파견, 뵙자고 합니다.」 「좋다. 데리고 오너라.」 목탁륜의 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달려나갔다. 얼마 못가 두 필의 말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다섯 필의 말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이쪽 사람들과 10여 장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만청의 사자라는 사람은 몸집이 우람하고 걸음걸이 또한 민첩하고 강건했다. 뒤에 4인의 수행원이 따르는데 깜짝 놀랐다. 네 사람 모두 7척이 넘는 킨데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 배쯤 더 컸다. 몸집도 우람하고 단단해 보기 드문 거인들이다. 그 사자라는 자가 목탁륜 앞으로 오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이 추장인가? 태도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청병이 까닭도 없이 침공하여 살인과 방화를 일삼고 있어서 이들 위구르 사람들은 벌써부터 골수에 사무치도록 그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자의 오만무래한 태도에 분노를 터뜨린 몇 명의 젊은이들이 쉭쉭 土리를 내며 긴 칼을 칼집에서 쁩아 들었다. 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할 말을 꺼냈다. 「나는 조혜 대장군의 명을 받고 전서를 전하러 온 사람이오. 만약 당신들이 일찌감치 투항을 한다면 대장군께서는 당신들의 목숨을 살려 주시겠다고 하셨소. 그렇지 않다면 섬멸할 것이니 후회하지 말도록 하시오.」 그가 위구르의 언어로 말하자 사람들이 알아듣고 펄펄 뛰었다. 목탁륜은 군중이 흥분한 것을 보고 두 손을 휘둘러 모두 제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 사자를 향해 늠름하게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들이 이유도 까닭도 없이 우리 백성을 살해하고 우리의 재물을 빼앗아 갔소. 알라 신이 위에 계시니 틀림없이 당신들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징벌할 것이오. 싸울 테면 싸웁시다. 우린 마지막 한 사람이 남는다 하더라도 결코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한 사람이 남는다 하더라도 결코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군중들이 칼을 들고 외쳤다. 「싸울 테면 싸웁시다. 우린 마지막 한 사람이 남는다 하더라도 결코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달빛 아래 칼빛이 흰 눈처럼 번쩍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차라리 비장했다. 그들은 청병의 기세가 막강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 대대로 경건하게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자유를 생명처럼 아꼈다. 그래서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사자는 이 같은 사정을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좋소, 모레 여러분을 모두 죽여 없애 주지. 땅바닥에 탁 하고 침을 뱉었다. 이것은 상대방을 보통 모욕하는 짓이 아니었다. 벌써 3명의 위구르 소년이 군중 틈에서 튀어나왔다. '당신이 오늘은 사자의 신분이라 빈객을 존중하는 의미로 그냥 보내 주겠지만 모레 싸움터에서는 그냥 놔 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사자가 아니꼽다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내밀었다. 이를 본 4명의 거인이 나서서 3명의 소년을 밀치고 사자의 사방을 에워쌌다. 「피, 너희 같은 사람들이 무슨 쓸모가 있냐? 오늘 우리 만주 사람들의 수단이 어떤지 맛을 보여 주지.」 사파가 이렇게 말하고 손뼉을 쳤다. 그중 한 명의 거인이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몇 필의 낙타가 한 그루의 백양나무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나무 옆으로 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백양나무를 안고 몇 번 흔들었다. (얏!)소리와 함께 기합을 넣으니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아연했다. 그 사람이 낙타 한 마리의 고삐를 살짝 잡아당기자 고삐가 끊어졌다. 그리고 낙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낙타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나갔다. 낙타는 평소 느릿느릿 걷다가도 한 번 성질이 나면 말보다 더 빨리 달린다. 그 낙타가 10여 장 달려나갈 때 두번째 거인이 갑자기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거인은 몸집이 큰데도 행동은 민첩하기 짝이 없었다. 금방 쫓아가 낙타의 네 발을 잡고 번쩍 들었다. 몇백 근이 넘는 낙타를 어깨에 들쳐 메고 다시 돌아와 모닥불 옆에 내려놓고는 거만한 자세로 그 자리에 섰다. 세번째 거인이 (흥!)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으로 낙타의 머리를 겨냥하여 탁 하고 내리쳤다. 낙타는 그 큰 몸집을 몇 번 비틀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네번째 거인이 낙타의 두 다리를 잡고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가 공중에서 두 번 돌리고 나서 기합 소리와 함께 던지니 낙타가 7, 8장 밖에 나가떨어졌다. 이 거인들은 네 쌍둥이였다. 이름을 홀륜대호 , 홀륜2호 (二虎), 곤륜삼호(三虎) , 곤륜사호(四虎)라 했는데, 요동 영고탑(寧古塔)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친은 이 큰 네 쌍둥이를 낳을 때 너무나 힘이 들어 홀륜사호를 낳자마자 그만 피를 많이 흘리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부친은 가난뱅이 사냥꾼이었는데 아내가 죽자 이들을 양육할 방법이 없어 고민을 했다. 이때 공교롭게도 숲속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 한 마리가 실족을 하여 사냥꾼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던 것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이 어미 호랑이를 잡아 묶었다. 그런데 이 어미 호랑이 옆에 막 태어난 새끼 호랑이 세 마리가 있었다. 그래서 새끼 호랑이는 잡아 죽이고 어미 호랑이를 집에서 길렀다. 매일 토끼나 노루 등을 잡아다 이 어미 호랑이에게 먹이고 대신 젖을 짜다가 네 아이에게 먹였다. 네 쌍둥이는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힘이 대단했다. 성장하면서 몸집이 우람해지고 놀랄 만한 힘을 발휘했는데, 다만 어딘가 바보스러운 데가 있었다. 사냥을 할 때도 도구나 연장을 쓰는 법이 없었다. 짐승을 발견하면 쫓아가 몸을 잡고 바위에 한번 태질만 하면 그만이었다. 이 네 쌍둥이는 어찌나 많이 먹는지 사냥만 해 가지고는 배불리 한 번 먹을 수도 없었다. 어느날 조혜가 장백산(長白山)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이들 네 쌍둥이와 만나게 되었다. 조혜는 이들의 생김새가 이상한데다 힘이 막강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친병으로 거두어들였다. 날마다 배불리 먹이다가 이번에 사자와 함께 파견하여 그들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서 위구르 사람들에게 겁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네 거인의 재주를 보고 속으로 놀랐지만 적의 면전에서 약하게 보일 수도 없었다. '멀정한 낙타를 왜 함부로 죽이시오? 이렇게 항의를 했다. 사자는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상대방만 비난했다. 이렇게 항의를 했다. 사자는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상대방만 비난했다. 군중들은 더욱 화가 나서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떠들어 댔다. 이러다가는 집단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러자 사자가 소리를 질렀다. '숫자가 많다고 이길 것 같아 사자를 깔보는 것인가? 목탁륜이 소리를 질러 군중을 진정시키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사자인데 오히려 수행원에게 명령해서 우리의 가축을 죽이게 했으니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오. 만약 당신이 빈객이 아니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오. 빨리 가시오. 그러나 사자는 여전히 오만했다. '우리는 당당한 만주 사람이오. 그래 당신들 같은 쓸모 없는 사람들을 무서워할 것 같소? 회신할 것이 있으면 내놓으시오. 하지만 누가 감히 조혜 장군을 뵈러 갈 용기나 있을라구? 어림없는 소리. 이 말이 떨어지자 군중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곽청동이 벌떡 일어섰다. '우리보고 조혜 장군을 만나러 갈 용기도 없다고 하셨지요? 흥, 우리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남자는 그만두더라도 우리 여자들도 얼마든지 갈 수 있어요. 누구나 그만한 용기쯤 다 가지고 있어.SI 그 사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앙천대소를 했다. 「여자라구? 여자는 우리 대군을 보면 기절해 죽을 텐데.」 「사람을 너무 깔보지 마세요. 우린 즉시 당신과 동행할 사람을 파견하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쯤 안중에도 없어요. 여기 모인 사람 누구나 당신보다도 훌륭해요. 누구든지 당신이 한번 선택을 해 보시지. 누구든지 선택당한 사람이 갈 것이오. 마호메트 신도의 기개가 어떤지 볼 수 있을 것이에요.」 곽청동이 화가 나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누구든지 당신이 한번 선택을 해 보시지. 누구든지 선택당한 사람이 갈 것이오.」 「좋소.」 사자도 냉랭하게 받았다. 그는 가장 나약하고 쓸모없어 보0지는 여자를 고를 참이었다. 그래서 울고불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게 함으로써 이들의 체면을 여지없이 깎아 버릴 속셈이었다. 눈을 돌려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환해짐을 느꼈다. 향향 공주의 면전으로 접근하더니 그녀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여자를 파견해 보시오. 사자는 득의양양했다. 향향 공주는 그를 바라보며 서서히 일어섰다. 「우리 전 부족의 어른과 함께 자매를 위해 제가 가겠어요 . 어디를 가든 무서을 것 없지요. 알라 신은 틀림없이 저를 보우해 주실 것을 믿어요.」 사자는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와 늠름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방금의 나약하고 수줍어 보이던 모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용모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후회했다. 이 소녀에게만은 실로 그 어떤 수모를 줄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탁륜과 곽청동을 비롯한 많은 부족들은 사자가 향향 공주를 지적하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오자 로두들 그녀의 용기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곽청동은 더욱 난감하고 후회막심했다. 그들 자매의 우의가 유난히 돈독했지만 여동생은 무예를 전연 몰랐다. 여리고 약한 체구인데 어찌 그들 호랑이와 이리의 무리 속으로 보낸단 말인가? 그 위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 아이는 내 동생이니 제가 대신 가지요.」 곽청동이 대신 나섰다. 그 사자가 껄껄 웃었다.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내 잘 알고 있지요. 당신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처지에 뭣하러 사람을 파견하겠소? 싸우든지 투항을 하든지 회신이나 주구려. 내 가지고 가기로 하고 그만둡시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무례할 줄은 몰랐군요. 후일 싸움터에서 만나더라도 도망갈 궁리는 하지 마세요. 우리들 여자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 그때 보여 줄 테니까요.」 곽천동은 화가 나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 같은 미인이라면 내 사정을 봐 줘야지.」 사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군중들도 그의 경박한 말을 듣고 모두들 치를 떨었다. 향향 공주가 곽청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니, 제가 갈께요. 저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몸을 숙여 진가락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분이 저와 함께 가 주실 거예요.」 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곽청동은 뜻밖에 진가락의 얼굴을 보았다.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가락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잠시 모르는 체해 달라는 신융을 보냈다. 그리고 몸을 그 사자 쪽으로 돌렸다. 남자나 여자나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요. 내 혼자의 몸으로 이 여자와 함께 당신들 군중으로 가서 조혜 장군을 만날 것이오. 무엇 때문에 당신처럼 건장한 사나이가 거인의 호위를 받으려 하겠소? 당신이 데려온 네 명도 아무 쓸모도 없으면서 말이오.」 이렇게 말을 하자 향향 공주가 나섰다. 「낙타는 천 근을 짊어질 수 있고 사람은 겨우 백 근을 짊어질 수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사람이 낙타를 타나요, 아니면 낙타가 사람을 타나요? 사람들은 이 비유를 듣고 모두들 크게 웃었다. 홀륜대호가 사자에게 물었다. 「저들이 왜 웃지요? 「자네들의 몸집이 크고 힘도 세지만 쓸모가 없다는 뜻일세.」 사자의 대답을 들은 곤륜대호가 성을 내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누가 나와 겨룰 수 있는가? 사자가 진가락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또 무슨 쓸모가 있소? 그 왜소한 체구 열 개를 모아도 저자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할 게요.」 진가락은 이러한 기회에 이 사자의 기를 꺾어 놓지 못하면 만주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이들 위구르 사람들을 무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즉시 세 발짝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부족 가운데서도 가장 쓸모가 없는 사람이오. 그러나 당신들 만주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훨씬 나은 편이오. 당신이 네 사람을 보고 내게 함께 대들도록 해 보시오.」 이때 목탁륜도 벌써 진가락의 면모를 알아보았다. 놀랍고도 반가워 옆에 있는 곽청동을 불렀다. 동아야, 저분이 누군지 알겠느냐? 곽청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목탁륜이 고개를 돌리고 보니 딸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입술을 가볍게 떠는 것을 보고 금방 눈치를 챘다.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다 사랑하는 두 딸이 그래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그가 어떻게 해서 작은 딸과 알게 되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이제 그가 또 네 명의 거인과 대결을 하게 되었으니 놀랍고도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중들은 진가락이 문약해 보이는데다 얼굴이 너무나 곱상해 믿기지가 않았다. 사자의 옆에 섰는데도 머리 하나 정도가 작았고, 네 명의 거인과 비교하면 어린애와 어른 같았다. 그는 향향 공주의 마음속의 대상이다. 향향 공주를 위해 용감하게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하기는 했지만 이러다 우리 부족의 위풍을 잃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강약이 너무나 현저한데 어찌 거인들의 적수가 되겠는가? 군중들의 적개심이나 의분은 어느 누구나 똑같았다. 벌써 부족 가운데 이름깨나 있는 몇 명의 역사들이 벌떡 일어나 그 대신 결투를 하겠다고 나섰다. 진가락이 손을 들어 사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형님 여러분, 이 몇 명의 만주 사람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형님들이 나서서 수고를 하십니까? 가장 못난 소제로 하여금 대결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이들 몇 명의 만주 사람들을 꾀나 경멸하는 어조였다. 사자가 진가락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네 명의 거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일제히 대들어 그를 나꿔채려고 했다. 그런데도 진가락은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도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 사자가 급히 손을 뻗어 네 사람을 막고 목탁륜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이 내가 데리고 온 시종과 대결을 하겠다고 나오니 만약 손상이 있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마시오. 뿐만 아니라 1대1로 해야지 다른 사람이 도우려 나서서는 아니 되오.」 그는 홀륜사호의 힘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가락이 맞았을 때 상대방이 떼로 몰려온다면 그것은 정말 막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탁륜이 코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진가락이 나섰다. '1대 1이 뭐가 재미있소? 네 사람이 동시에 대들도록 하시오.」 「그럼 그쪽에서는 몇 명이 나서겠소? 사자가 물었다. 「몇 사람이냐구요? 물론 나 혼자요.」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자 소란스러워졌다. 진가락의 말이 지나치게 경솔하다는 것이다. 그 사자가 냉소를 지었다. 「흥, 당신들이 이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대호, 자네가 먼저 나서 711.J 곤륜대호가 대답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사자가 진가락을 향해 다시 묻는다. 「장(丈)으로 대결하자는 게요? 아니면 무(武)로 대결하자는 거요? 「문으로 하겠다면 어떻게 하고 무로 하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문으로 하겠다면 서로 한 대씩 때리되 막지도 피하지도 말고 먼저 쓰러지는 쪽이 지는 것이오. 무로 하겠다면 마음내키는 대로 하기로 합시다.」 「한 사람이 대드는 것은 신통치 않으니, 싸우려거든 네 사람이 한꺼번에 대드시오.」 사자는 진가락의 자신만만한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이 사람 미쳤거나 아니면 무슨 흉계가 있는 것이다.) 「이 한 사람만 이기면 그들 네 사람이 동시에 대들 텐데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서두르시오? 진가락은 담담하게 웃었다. 「좋소 문으로 비기나 무로 비기나 마찬가지요.」 「우리 힘과 무공으로만 대결을 하기로 합시다. 무로 대결을 하다간 자칫 감정을 상하기 쉬우니 그냥 문으로 대결합시다.」 사자의 말이었다. 진가락의 몸집을 보니 기민하기 짝이 없을 것 같았다. 민첩하게 피하기만 한다면 곤륜대호가 때리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으로 대결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끝까지 피하지는 못하겠지.) 적진 속의 한 쌍 홀륜대호는 사자가 전해 주는 말을 듣고 고함을 지르며 윗 옷을 벗고 나섰다. 사람들은 그의 근육이 나무뿌리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것을 보았다. 두 개의 주먹이 큰 사발보다 더 컸다. 한 주먹으로 그 큰 낙타를 때려 뉘었는데 이 나약한 젊은이가 어찌 당해 낼 수 있으랴? 목탁륜과 곽청동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와 있었다. 곽청동은 동생을 한 번 훔쳐 보았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진가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망울에 천 가닥 사모의 정과 만 가닥 부드러운 정을 가득 담은 채였다. 두려움이나 걱정 같은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곽청동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진가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정된 심기로 태연자약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진가락이 온화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곽천동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누가 먼저 때릴 것인지 심지를 뽑아 정합시다.」 사자가 제안을 했다. 「당신들은 손님이니 저 사람이 먼저 나를 치도록 하시오.」 진가락의 말에 곽청동이 참견을 하고 나섰다. 예의를 차릴 것 없어요. 심지를 뽑아 정하도록 하세요. 그녀는 진가락의 무공이 대단함을 알았다. 만약 권술이나 병기로 대결을 한다면 이기지는 못한다 해도 결코 이 거인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약속을 한 대로 저쪽에서 한 번 치고 또 이쪽에서 한 번 때리기로 하되, 피하지도 말자고 했으니 서로 이렇게 치고 때리다 보면 이 거인의 쇠망치와 같은 큰 주먹을 당해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치기로만 한다면 혹 이길 승산이 있을 듯도 싶었던 것이다. 진가락은 다시 한 번 곽청동을 향해 고맙다는 뜻의 미소를 보내고 곤륜대호 앞으로 두 발짝 다가서며 가슴을 내밀었다. '자, 어디 쳐 보시오. 그 사자가 곽청동을 향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 두 사람이 심판을 보기로 합시다. 만약 누군가가 먼저 발을 떼어 놓거나 손으로 막거나 아니면 허리를 숙여 피하거나 하면 지는 것입니다.」 곽청동이 진가락의 옆으로 다가서며 이렇게 속삭였다. '대결하지 마세요. 우리 다른 방법을 강구해 이겨 보자구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가락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곽청동으로서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사자와 나란히 서서 지켜 보기로 했다. 진가락과 홀륜대호가 마주 선 거리는 불과 팔 하나의 간격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수천 명이 넘는데도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자가 시작의 신호를 알렸다. '만주의 호한이 처음에 한번 치면 위구르의 호한이 두번째 치겠습니다. 만약 둘 다 아무 일이 없다면 만주의 호한이 세번째 치고 위구르의 호한이 네번째 치겠습니다.」 이에 곽청동이 항의를 했다. 먼저 그쪽에서 치면 두번째 가서는 우리 쪽에서 쳐야 해요. 세 번째 가서는 그쪽에서 먼저 치시구요. 이렇게 순서에 따라 밟아야만 공평하지요.」 사자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진가락이 나섰다. 「저들이 손님이니 우리가 끝까지 양보를 해야 해요.」 사자가 이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시원시원한 인물이시군.」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만주의 호한이 먼저 치겠습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곤륜대호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전신의 골절에서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오른쪽 가슴이 불쑥 튀어 나오며 오른팔의 근육이 갑자기 두 배로 굵어졌다. 진가락은 두 발을 안정되게 벌린 채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웃었다. 「자, 쳐 보시오. 위구르 청년 몇 명이 곤륜대호의 위세를 보고 혹시 진가락이 주먹에 맞아 날아가 떨어질 때 머리라도 깨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여서 말을 끌고 가 그의 뒤에 섰다. 날아오면 받을 태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목탁륜과 곽청동은 알라 신을 향해 보살펴 달라는 묵도를 드리고 있었다. 향향 공주는 천진난만하여 마음속의 낭군이 무서워 할 것 없다고 한 말만 믿고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곤륜대호가 두 다리를 살짝 쭈그리며 전신의 힘을 오른팔에 모은 채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철권으로 진가락의 가슴을 맹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방의 가슴이 철권의 힘을 따라 안으로 오그라 들어 감을 느꼈다. 진가락이 가슴을 안으로 오그라들이는 힘은 곤륜대호가 내뻗는 주먹의 힘과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홀륜대호의 철권이 틀림없이 진가락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아묵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점이었다. 홀륜대호로서도 자기의 철권이 틀림없이 상대방의 가슴에 적중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옷깃을 가볍게 건드리고만 결과로 나타났다. 어리둥절해서 내뻗은 주먹을 거두어드릴 생각도 못했다. 「이제 되었지요? 진가락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서야 곤륜대호는 정신을 차렸다. 얼굴을 붉히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먹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이 주먹이 분명 적중이 된 것을 보았는데 마치 허공을 친 것과 다름없는 결과로 나타나자 모두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만 목탁륜과 곽청동만이 진가락의 내공의 심오함에 의지하여 곤륜대호의 가격을 무위로 돌렸음을 알았다. 새삼스런 존경과 함께 안심이 되었다. 곽청동의 보조개가 꽃처럼 퍼지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자도 무공에 정통한 사람이라 이 점을 간파하고 사뭇 놀라워했다. 「이제 내가 칠 차례요. 진가락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치시오. 홀륜대호가 벌컥 소리를 지르며 가슴에 힘을 모으자 가슴 위의 검은 털이 뻣뻣하게 섰다. 진가락은 팔을 뒤로 빼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그냥 뻗으며 가벼운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곤륜대호의 가슴을 향해 내민 것이다. 중수법(重手法) 가운데 대력응조력의 수법을 쓴 것이다. 홀륜대호는 가슴의 통증은 느끼지 못했지만 한 가닥 어마어마한 힘이 자기를 뒤로 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발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 힘을 기울여 몸을 앞으로 내밀어 밀어 오는 힘에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찰나의 일이었다. 진가락의 주먹은 빨리도 나왔지만 수세 또한 그 못지않게 빨랐다. 힘을 다 쏟기도 전에 번개처럼 손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곤륜대호의 천 근이 넘는 힘은 모두 앞에 모여 있었다. 그가 전면의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사실을 직감하고 힘을 거두려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진가락의 몸이 살짝 기울어지는가 싶었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홀륜대호의 거대한 체구가 벌써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있다가 한참 만에야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가락의 일권이 이 거인을 넘어뜨린 것만도 이상한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벌렁 나자빠진 것이 아니라 그냥 땅바닥에 고꾸라진 점이었다. 사자가 급히 손을 뺀어 그를 잡아 일으키는데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넘어지며 앞니 두 개가 부러져 피를 토한 것이었다. 곤륜 삼 형제는 큰형이 부상당한 것을 보자 괴성을 지르며 동시에 진가락을 향해 덮쳐 들었다. 곤륜대호도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많은 위구르 사람들도 이런 상황을 보고 분분히 대들었다. 혼란 가운데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았다. 사람 틈에서 진가락과 곽청동 두 사람이 없언져 버린 것이었다. 곤륜 사 형제는 갑자기 적이 없어져 버리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모두들 물러나세요. 곽청동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평소에도 그녀의 명령에 잘 따랐다. 그래서 즉시 그 자리에서 물러섰다. 진가락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웃었다. 「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일찌감치 네 사람이 동시에 대들라고 하지 않던가요? 자, 이제 덤벼 보시오.」 곤륜대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주먹을 휘둘러 진가락의 머리를 맹격했다. 진가락이 삼호의 등뒤로 돌아가 쌍수로 폐창추을의 자세를 취하고 그의 등을 밀어붙였다. 삼호가 비틀비틀 하다가 하마터면 이호의 몸과 맞부딪칠 뻔했다. 사호가 왼쪽 팔꿈치로 진가락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진가락이 귀를 낮추어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오며 그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사호는 너무나 간지러워 몸을 꼬아 가며 낄낄거렸다. 사람들은 덩치가 큰 사람이 어린 소녀와 같이 간들거리자 어울리지 않는 교태가 가소로워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간지러움을 태우세요.」 향향 공주가 이렇게 말을 하자 진가락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다시 접근하여 그의 허리 부근을 몇 번 긁었다. 사호는 너무나 웃으워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두 주먹을 허위적거리느라 다른 데 정신을 쓸 수가 없었다. 등 뒤를 조심하세요. 곽청동이 놀라 외치는데 진가락은 벌써 등뒤에서 권풍이 자기를 습격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재빨리 몸을 날려 일여 장을 뛰어올랐다. 2호의 일 권이 허공을 쳤다. 사호는 그때까지도 계속 웃고 있다가 허리를 꼬며 몸을 돌려 우권으로 맹격을 가했는데 공교롭게도 이게 이호의 주먹에 가 맞았다. 두 사람이 놀라 뒤로 세 발짝씩 물러섰다가 성이 나서 큰소리를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진가락은 네 사람 사이를 꽃 사이에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오락가락했다. 놀려 줄 생각으로 공격도 반격도 하지 않았다. 여덟 개의 큰 주먹이 여기저기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치고 때렸지만 시종 진가락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처음 진가락이 빠른 동작으로 피해 다니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네 사람의 거인이 맥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네 거인이 계속 성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갑자기 북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호의 옷이 찢어져 나갔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E 한바탕 크게 웃었다. 사자는 벌써부터 진가락이 무술의 고수라 이들 사호와 적수가 아님을 알았다. 「손을 멈추시오. 싸울 필요가 없소. 몇 번 소리를 질렀지만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사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대호가 휘파람을 불며 갑자기 몸을 솟구쳐 한 마리의 사나운 매처럼 진가락을 향해 덮쳐 들었다. 동시에 이호, 삼 호, 사호가 일제히 진가락의 등뒤로 돌아가 6개의 팔을 뻗어 후로를 차단했다. 이것은 그들 사 형제가 짐승을 잡을 때 늘 쓰던 수법이었다. 마치 호랑이나 표범이 날렵하게 원숭이를 잡는 것처럼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소녀들은 무서워 비명까지 질렀다. 진가락은 대호가 덮치는 것을 보고 뒤로 피할까 했다. 그런데 불빛 아래 3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도깨비가 사람을 잡아 깨물어 먹을 것 같은 그런 형상이었다. 몸을 살짝 숙이고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고 있다가 대호가 달려들자 왼팔을 번개처럼 휘둘러 뻗었다. 대호의 왼쪽 겨드랑이 밑을 막음과 동시에 힘껏 밖으로 밀어붙였다. 이 힘에 의해 대호는 즉시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이때 진가락의 우장이 벌써 대호의 왼쪽 다리에 올라가 있었다. 우장을 밀착시킨 상태에서 반은 그의 힘을 역이용하고 반은 이쪽 힘을 써서 던졌다. 대호의 거대한 체구가 앞으로 날아가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밑으로, 발은 쳐든 채 구덩이 속에 꽃혔다. 이 구덩이는 그가 방금 백양나무를 들어 뽑는 바람에 생긴 구덩이였다. 나무가 크다 보니 구덩이 또한 컸다. 흙이 허리 위까지 올라와 두 발만 공중에서 바등거릴 뿐 빠져 나오지 못했다. 사호가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 진가락은 그와 더불어 반 바퀴 정도 맴돌다가 방위를 확인하고 우뚝 멈춰 섰다. 사호가 오른 발을 번쩍 들어 진가락의 가슴을 걷어찼다. 진가락이 우측으로 뛰어들며 오른손으로 그의 바지를, 왼손으로 그의 조끼를 틀어 쥐고 걷어차던 힘을 역이용해 밖으로 뿌리듯 내던졌다. 사호가 마치 구름을 타고 안개를 몰고 가듯 날아갔다.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입으로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떨어지면 죽는다고 무서워 떨다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가볍게 퉁긴다. 재빨리 몸을 뒤집으며 일어나 앉았다. 원래 떨어져 내려온 장소가 공교롭게도 죽은 낙타의 시체 위였던 것이다. 진가락은 방금 그가 그 큰 낙타를 집어 던지는 것을 보고 그의 방법대로 한번 해 본 것이다. 진가락의 뚝심은 사실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사호의 체구가 크다고는 하지만 역시 낙타보다는 무거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진가락을 걷어차기 위해 나름대로 힘을 다 썼는데 진가락이 바로 이 힘을 역이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호가 공중에 떠 있을 때 이호와 삼호가 양쪽에서 동시에 진가락을 공격했다. 이호는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앞으로 박치기를 했고, 삼호는 두 팔을 들어 진가락의 머리를 쪼개겠다고 내려쳤다. 진가락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가 두 사람이 미친 호랑이처럼 공격을 하자 네 자쯤 떨어져 있을 때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몸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비스듬히 옆으로 빠졌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자리를 피한 것이다. 그래야만 두 사람이 이미 취한 행동을 도중에서 수습할 수 없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기했던 대로 이호의 박치기가 삼호의 배에 적중했고, 삼호의 쌍권은 이호의 등에 명중되었다. 펑펑 하는 소리와 함께 2인의 거인이 탑이 쓰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진가락은 그들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어질어질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의 댕기를 잡아 꼭꼭 묶어 맸다. 그리고 길게 웃으며 향향 공주의 옆에 가서 섰다. 향향 공주가 환하게 웃으며 좋다고 손뼉을 치고 다른 사람들은 갈채와 환호성을 연발했다. 사호가 기어 일어나 거꾸로 박힌 대호를 구덩이에서 잡아 뽑았다. 이호와 삼호는 댕기를 서로 잡아맨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느라 한덩어리가 되어 나뒹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었고 또 진가락이 워낙 꼼꼼하게 잡아매 놔서 사자가 한참 동안이나 진땀을 흘리고 나서야 겨우 묶인 댕기를 풀어 주었다. 곤륜 사 형제는 정신이 나간 눈으로 진가락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오히려 공경하고 우러러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곤륜대호가 먼저 걸어와 엄지손가락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훌륭한 솜씨에 이 대호는 정말 감복했습니다.」 그러고는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이호 등 삼 형제도 걸어와 엎드려 절을 했다. 진가락도 급히 무릎을 꿇고 답례를 했다. 이렇게 순박하고 천진한 태도에 방금 지나칠 정도로 놀렸던 것을 후회했다. 다섯 사람이 일어섰다. 진가락은 계속 정중하게 사과를 했고 이들 사 형제는 괜찮다고 겸양을 했다. 곤륜사호가 달려가 죽은 낙타를 짊어지고 왔다. 삼호는 급히 타고 온 네 필의 말을 목탁륜 앞으로 끌고 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낙타를 때려 죽인 것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 네 필의 말을 대신 받아 주십시오.」 목탁륜이 받지 않겠다고 한사코 사양했다. 사자는 이와 같은 정경을 보자 대단히 거북했다. 그러다 곤륜 사형제를 향해 벌컥 소리를 질렀다. 「갑시다. 사자는 말 등에 올라탔지만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향향 공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가시겠소? 「못 갈 것도 없지요.」 향향 공주도 대담하게 나왔다. 그리고 목탁륜의 면전으로 걸어갔다. 「아빠! 회신을 써 주세요. 제가 가서 전달하겠어요.」 목탁륜으로서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의 사자는 계속 자극을 하며 목탁륜의 어린 딸을 데리고 가려고만 든다. 보내지 않자니 전 부족의 체면을 잃는 일이요, 보내자니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가락을 향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진가락이 걸어오자 목탁륜이 좌석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의 손을 잡은 채 자기의 장막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곽청동과 향향 공주 자매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목탁륜은 장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와락 진가락을 껴안았다. 「진 총타주님, 그래 어느 길한 바람이 당신을 여기까지 불어 보내셨단 말입니까? 재가 일이 있어서 천산북로까지 왔다가 도중에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뵈려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따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가락의 대답이었다. 향향 공주는 아버지가 그를 (진 총타주)라 부르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진가락은 목탁륜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계속 그들 자매의 눈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향향 공주의 표정에서 두려움과 의혹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인이라는 사실을 미처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목탁륜이 받았다. 「이 진 총타주님은 우리 부족의 크나큰 은인이시다.우리의 성경을 바로 이분이 뺏어 주셨느니라. 그리고 또 네 언니의 생명도 구해 주셨지. 그뿐이겠느냐, 최근에는 조혜의 군량미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해서 청병의 신속한 공격을 지연시켜 주시기까지 했다. 이분 덕택에 우리가 인마를 모아 저항할 여유가 생겼느니라. 이분이 우리에게 잘해 주신 일은 말로 다 할수 없을 만큼 많으니라. 진가락은 계속 겸양을 했다. 향향 공주가 상긋 웃으며 말을 했다. 「한인이란 신분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에 대한 은혜를 숨기려고 그러신 거로군요. 목탁륜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만주의 사자가 그토록 오만무례한데 다행히 총타주께서 의를 내세워 도와 주셨음으로 해서 그들의 오기를 꺾어 주셨습니다. 그가 객사려를 자극하여 사자로 삼겠다고 했는데 그래 총타주님의 생각으로는 그냥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들 부족의 대사라 제삼자가 뭐라 할 수는 없지. 내 다만 도울 수 있는 한 도울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먼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 이곳의 형편은 전연 모릅니다. 목 노영응께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만약 안가는 게 좋겠다고 하신다면 무슨 거절할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겠지요.」 이렇게 말이 나오자 오히려 향향 공주가 늠름하게 나섰다. 「아빠, 아빠와 언니는 날마다 우리 부족의 일 때문에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까지 나가셔서 그들과 사생결단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쓸모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지케구요. 제가 한 차례 사신으로 다녀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어요. 만약 가지 않으면 그들 만주족이 얼마나 우리를 조롱하겠어요.」 '나는 만주 사람들이 혹시 너를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스럽구나. 곽청동의 말이었다. '언니, 언니가 매일 출전하시는 것도 언제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제가 한 차례 모헙을 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이분의 재주가 그토록 훌륭한데 이분과 동행을 하게 되니 전연 무서울 게 없어요. 언니, 저 정말 무섭지 않아요. 곽천동은 진가락에 대한 동생의 한결같은 정을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상에 젖었다. 이윽고 목탁륜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빠, 그럼 동생을 보내도록 하지요.」 '좋다. 그렇게 하자꾸나. 진 총타주님, 그러면 제 이 어린 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순간 진가락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향향 공주의 가을 물 같은 맑디맑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모아졌다. 곽청동은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렸다. 목탁륜이 회신을 썼다.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이었다. (폭거에 응전할 것이니 신은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이오.) 진가락은 몇 자 안 되는 내용이 비장함을 보고 잘쓰셨다고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목탁륜이 편지를 향향 공주에게 전해 주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동생, 신께서 너를 보우해 주실 것이다. 일찍 돌아오기를 빌마.」 향향 공주가 언니를 껴안고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네 사람이 장막 밖으로 나오자 목탁륜은 잔칫상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사자와 수행원을 접대했다. 잔칫상 앞에 서자 그 사자는 자기의 성명을 밝혔다. 화이대라 부른다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고악수들이 빈객을 환송하는 음악을 연주했다. 화이대가 손을 번쩍 들고 앞장을 선 채 먼지를 가르며 달려나갔다. 향향 공주 등이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곽청동은 줄곧 사람의 그림자가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 보고 있었다. 마음이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의 마음도 곱 말발굽 소리를 따라 끝없는 사막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듯했다. 「동아야, 네 동생이 정말 용감하구나.」 목탁륜의 말에 곽청동이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얼굴을 감싼 채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향향 공주와 진가락은 사자를 따라 밤새껏 달려 새벽나절에 청군의 영중에 도착했다. 화이대가 그들을 별도의 장막으로 안내해 쉬도록 해놓고 혼자 조혜를 만나러 갔다. 조혜를 향해 경례를 하고 보니 그의 옆에 군관이 하나 앉아 있었다. 황제의 친군인 효기영,한군,좌령(佐領)의 복장을 입고 있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조혜를 항해 이렇게 보고했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소장 이미 전서(戰書)를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어찌나 뻣뻣한지 투항하려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시켜 전서를 보내 왔습니다.」 「죽기 전에는 깨닫지 못할 놈들이로구나.」 조혜가 이렇게 코방귀를 뀌고 옆에 있는 친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들 모이도록 전달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호각 소리가 일제히 일어나며 붕붕 북 소리가 울렸다. 각 영의 정부도통(正副都統) , 참령,좌령이 일제히 대장에 모여 대기했다. 조혜가 장막 안으로 걸어 들어 오자 군관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다. 조혜는 계급에 따라 선 위치의 왼쪽에 별도의 자리를 하나 마련해 놓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칙명을 받고 온 효기영의 군관을 그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다시 손에 병기를 든 1백 명의 철갑군을 2열로 배치시켰다. 군기가 꾀나 삼엄했다. 그러고 난 후에 위구르의 사자를 들어오도록 했다. 향향 공주가 앞에, 진가락이 뒤에 섰다. 향향 공주는 얼굴에 미소를 띤 체 전연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위구르 사자가 바로 어제 보았던 젊은 남녀라는 것을 알고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조혜는 원래 위엄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칼과 창의 숲으로 들어온 사람이 결국은 이 미모의 소녀라,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향항 공주는 조혜를 향해 예를 차리고 나서 아버지의 답신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조혜의 친병이 편지를 받기 위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갑자기 달콤하면서도 그윽한 향기를 맡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직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편지를 받으려 하는데 눈앞이 환해지며 티없이 맑고 고운 섬섬옥수가 나타났다. 파리한 손가락에 살갗은 희고 윤택하여 찬연한 빛을 발했다. 순간 마음이 흐려지며 무엇에 홀린 듯 얼이 빠져 버렸다. '편지를 빨리 가져오너라. 조혜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 친병이 비실비실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향향 공주가 편지를 그의 손 안에 올려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친병은 그래도 막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향향 공주가 조혜를 가리키며 가만히 그를 밀었다. 친병은 그제서야 편지를 조혜 앞의 탁자에 올려 놓았다. 조혜는 얼이 빠진 친병의 꼴을 보자 화가 났다. 「끌어내다 목을 베라. 몇 명의 군사가 대들어 그 친병을 끌고 장막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피와 살이 뒤엉켜 엉망인 수급 하나를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와 바쳤다. 「수급을 병사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조혜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병이 들고 나가려고 했다. 향향 공주는 이 잔인하고도 포악한 꼴을 보고 놀라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친병이 자기 때문에 숙었다고 생각하니 상심이 되었다. 군사의 손에서 쟁반을 받아 들고 친병의 잘린 머리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그 위로 떨어졌다. 장막 안의 제장들은 그녀의 용모를 보자 벌써부터 취한 체 있었다. 이제 모두들 그녀를 위해 분골쇄신이라도 하고 싶은 심사였다. (내 목 때문에 이 여인이 울어만 준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 조혜는 제장의 정신이 동요됨을 보고 크게 호통을 치려고 했다. 친병의 목을 벤 군사는 그녀가 슬피 울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잘못 죽였습니다. 그만 우세요. 하고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자기의 목을 찌르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향향 공주는 더욱 괴로웠다. 진가락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계속 울고만 있으니 사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로구나.) 손을 뻗어 가볍게 토닥거리며 낮은 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조혜는 평소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을 잘 매장해 주도록 하라.」 좌우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편지를 뜯어 보았다. 그 몇 자의 내용을 읽고 (흥!)코방귀를 뀌었다. 모레 결전을 합시다. 당신들은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군관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장군, 황상이 필요로 하는 여자가 혹시 이 여자 아니오? 진가락은 본래부터 향향 공주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장막 안에 있는 제장은 보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드니 조혜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대대두 장소중이 아닌가? 이때 장소중도 진가락을 알아보았다. 그가 위구르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상대방이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피차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진가락이 향향 공주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장소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며 진가락의 등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진가락은 향향 공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오른손으로 반격의 일 장을 날렸다. 그리고 발길을 멈추지 않고 장막 밖으로 달려 나왔다. 장소중이 재빠른 동작으로 쫓아 나왔다. 제장들은 모두 향향 공주에게 취해 가지고 있었다. 대장군이 이미 그들을 보고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는데 이 효기영의 군관이 주제넘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고 나선다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장소중을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 진가락은 향향 공주를 잡고 자기들이 타고 온 말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렸다. 몇 발짝 달리지 못했는데 장소중이 벌써 자기들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진 총타주, 오랜만이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소.」 냉소를 섞어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진가락은 품속에서 6개의 바둑돌을 꺼내 그의 상,중,하 세 방향으로 던졌다. 그리고 향향공주에게 재촉했다. 「제가 이 사람을 붙들고 있을 테니 빨리 말에 올라 도망을 치십시오. 「아니예요. 저 사람을 쓰러뜨린 뒤 우리 함께 가도록 해요.」 진가락이 무슨 여유가 있어 이 사람의 무공이 자기를 능가한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는 바둑돌이 장소중을 명중시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다만 장소중이 피하느라 주춤하는 틈을 타 향향 공주를 번쩍 안아 홍마의 안장에 태웠다. 장소중이 두 손으로 각기 2개의 바둑돌을 받아 쥐고 고개를 숙인 체 뛰어 진가락을 향해 덮쳐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2개의 바둑돌을 피했다. 이렇게 한 번 뛴 것은 암기도 피하고 적도추적하자는 것이었다. 방어 가운데 공격이 숨어 있는 솜씨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진가락은 계속 이자와 더불어 싸울 수가 없었다. 몸을 날리며 백마의 배 밑으로 파고 들었다. 장소중의 일 장이 막 말의 엉덩이를 치려다가 갑자기 목표를 안장으로 바꾸었다. 단장으로 말의 몸을 누르며 발을 들어 진가락을 걷어찼다. 진가락은 말의 배 밑으로 들어가 있어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적의 이 발길질이 마치 번개와 같이 빨랐다. 사람이 급하면 꾀가 생기는 법이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말의 배를 찔렀다. 백마가 놀라 두 발로 뒷발질을 했다. 장소중이 단장에 힘을 주며 갑자기 일여 장이나 뛰었다. 진가락은 이 순간을 이용해 말 위로 올라탈 수가 있었다. 「빨리 갑시다. 향향 공주가 고삐를 채 달리기 시작하자 장소중이 다시 뛰어올라 그녀를 향해 덮쳐 들었다. 진가락이 소스라치게 놀라 두 발로 등자에 힘을 주어 내차며 온몸을 날려 장소중에게 덮쳐 들었다. 진가락은 자기의 공력이 상대방에 미치지 못함을 안다.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손해를 볼 것 같아 오른손으로 단검을 뽑아 들어 찔렀다. 장소중이 급히 왼손을 뒤집어 단검을 쥔 그의 팔을 낚워채 잡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땅바닥예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은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사생결단을 하느라 아무도 감히 손을 놓지 못했다. 제장들이 장막 밖으로 나와 이들의 대결을 지켜 보고 있었다. 곤륜 사형제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편지를 전하러 갔을 때 그들은 예의로 우리를 접대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같은 경우로 찾아왔는데 이렇게 무례하게 대해야 옳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진가락에게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위기에 놓이자 네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상의할 것도 없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진가락은 장소중과 내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차의 힘이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버티기가 힘이 들었다. 바로 이때에 4명의 거인이 달려들었다. (끝장이로구나, 끝장이야.) 그런데 곤륜 사형제가 8개의 큰 손을 뻗어 장소중을 누르며 외쳤다. '빨리 달아나시오.」 장소중의 무공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때마침 진가락과 내력으로 버티고 있는 중에 네 사람이 누르자 물리칠 재간도 달아날 여유도 없었다. 사호가 수천 근이 넘는 힘으로 누르니 도대체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장소중의 손이 느슨해지자 진가락이 튀어 일어섰다.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대장부의 떳떳한 행위가 아니겠지. 내 다시 한 번 당신을 용서하리다. 말을 마치고 칼을 거둔 뒤에 말에 올랐다. 장소중이 막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네 사람이 작은 산과 같이 누르고 있어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진가락과 향향 공주가 고삐를 나란히 하고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탄 말은 빨리도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대군의 초소를 뚫고 갔다. 조혜가 병사들을 소집, 추격해 왔을 때는 그들은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진가락은 방금의 격렬한 대결이 비록 시간적으로 짧았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결사적이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한꺼번에 극도로 피곤했다. 게다가 한바탕 달려오느라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향향 공주는 그의 피곤한 기색과 오른팔이 눌려 파랗고 빨갛게 부 부어 오른 것을 보자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안 쫓아오니 말에서 내려 잠시 쉬도록 하세요.」 진가락이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누운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향향 공주가 가죽 주머니 속에서 양유(羊油)를 따라 그의 팔에 발라 주었다. 진가락이 호흡을 가라앉힌 뒤에 일어나 막 말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뒤에서 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큰 함성이 들렸다. 수십 기의 말이 급히 쫓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처 가죽 주머니도 챙길 사이 없이 말등에 뛰어올라 앞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도 먼지를 가르며 일표의 군마가 대들었다. 진가락은 속으로 (아이쿠!)소리를 지르며 두 다리로 말의 배를 조였다. 백마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렸다. 진가락은 향향 공주의 옆을 스치며 이렇게 외쳤다. '내 뒤를 따라 오시오. 어서 뚫고 나갑시다.」 백마가 앞으로 내달렸다. 일단의 길을 달리다 보니 전면에 7, 8필의 말이 나타났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삐를 당기고 기다렸다. 향향 공주가 쫓아왔을 때는 맞은편의 말도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진가락이 점혈주색을 내들고 말에 탄 채 상대할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팔이 시고 맥이 빠질 뿐만 아니라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며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맞은편에서 앞장을 서던 사람이 굴러 내리듯 말에서 뛰어내려와 이렇게 외쳤다. '아니, 총타주님이 아니십니까? 모래 먼지 속에 낭아봉의 날카로운 끝이 반짝였다. 작은 꼽추였다. 진가락은 뜻밖의 해후에 너무나 반가웠다. '십가, 빨리 오시오.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쏘는 청병의 화살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때 장진이 말등에 뛰어올랐다. '적병이 추적하고 있으니 한바탕 막아 주오.」 진가락이 다급히 외쳤다. 「좋습니다. 장진이 대답하고 말을 달려 진가락의 옆을 스치고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또 한 사람이 나는 듯 말을 달려 장진을 추월하고 나7 눈 깜짝할 사이에 청병의 무리 속에 들어가 충살을 시작했다. 생룡 활호(活虎)같이 용쟁호투하는 용감무쌍한 구명금표자 위춘화가 아닌가? 진가락은 더욱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어 문태래 , 낙빙,서천굉,주기 등 네 사람이 달려 진가락을 스치고 지나며 외쳤다. 「총타주님,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즉시 청병 속을 무인지경으로 충살해 들어갔다. 그는 심연이 달려와 말에서 내려 진가락을 향해 이마를 조아리고 웃었다. 「도련님, 우리가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구야까지 오게 되었느냐? 심연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또 한 사람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 적의 대오를 뚫고 들어갔다. 회색빛이 나는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까까중이 손에 금피리를 들었다. 「아니, 십사제가 아닌가? 진가락이 놀라 외치는데 여어동이 멀어져 가며 대답을 했다. 「총타주님. 안녕하세요? 여어동이 들어갔을 때 문태래 등은 벌써 진가락을 추적해 온 두 부대를 섬멸 퇴각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또 한 테의 대군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되돌아와 진가락 옆에 모였다. 「우리 어디로 달아날까요? 문태래가 물었다. 진가락은 추격해 오는 병사들의 규모가 대단함을 보고 생각했다. (위구르의 대군이 서쪽에 있는데 우리가 그쪽으로 퇴각을 한다면 곤란하다. 추격병이 쫓아오면 당장 방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쪽으로. 진가락이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키자 10여 기의 말이 그쪽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뜻밖의 해후가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각자 타고 있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어서 추적하는 병사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다만 사막이라 끝도 없이 아득해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거리가 비록 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눈만 뜨면 보였다. 진가락은 조혜가 대군을 동원하여 그들 두 사람을 추적케 한 것을 보고 작은 일을 너무 크게 벌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웃었다. 이렇게 견식이 없는 처지에 대장이 되었나 싶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장소중이 조혜에게 수군거린 그 말이 떠을랐다. (황상이 필요로 하는 여자가 혹시 이 여자가 아니오?)라고 한 말이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이 말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측해 보았다. 그런데 또 한 떼의 병사들이 남쪽에서부터 포위하며 추격해 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우리 빨리 숨도록 합시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합시다. 서천굉의 말이었다. 「그래요.- 사막에서는 낮에 가 봐야 소용이 없어요.」 진가락이 동의했다. 모두들 말에서 내렸다. 누구는 병기를 가지고 누구는 두 손으로 사막 위에 큰 구덩이를 팠다. 낙빙이 향향 공주를 바라다 보았다. 「아가씨가 먼저 숨어요.」 향향 공주는 한어를 모르기 때문에 미소만 머금고 움직이지 않았다. 청병이 점점 가까워졌다. 낙빙이 향향 공주를 껴안고 먼저 구덩이속으로 뛰어들자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문태래 -장진 -서천굉 - 여어동 네 사람은 이번 위구르 족을 찾아오며 활과 화살을 휴대했다. 활에 시위를 먹이고 쏘자 10여 명의 관병이 맞고 쓰러졌다. 문태래 .서천굉 .여어동 세 사람은 백발백중이었다. 장진의 활솜씨는 신통치 못했다. 화살을 일곱 개나 날렸는데도 한 명도 맞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활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낭아봉을 들고 싸우러 올라가려고 했다. 주기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아니, 죽으려고 이러시나요? 낙빙은 주기가 적과 아측의 정세를 살펴보고 그전처럼 함부로 덤비지 않는 것이 사뭇 대견했다. 이런 침착한 태도가 모두 남편인 서천굉의 덕택이라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킥)하고 웃었다. 주기가 그녀를 향해 하얗게 눈을 흘겼다. 「아니, 내 말이 어디 틀렸나요? 「옳아요 옳아.」 낙빙이 웃었다. 위춘화가 장진이 집어 던진 활과 화살을 집어 들어 연사를 하자 6명 익 청병이 맞고 쓰러진다. 심연이 손뼉을 치며 찬사를 보냈다. 「훌륭한 솜씨예요. 고함 소리와 함께 일대의 청병이 구덩이 입구로 공격해 왔다. 문태래가 화살 하나를 날리자 인솔하던 파총의 가슴에 맞았는데 화살이 등을 뚫고 나갔다. 뿐만 아니라 화살의 힘에 의해 수 장을 날아가다가 비로소 땅에 떨어졌다. 병사들이 놀라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버렸다. 우선은 선발대만 패퇴시켰지만 바라다보니 사면팔방 빽빽하게 인마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활을 쏘지는 않았다. 아무리 모래 구덩이 속에 들어와 있다고는 하지만 메뚜기 례처럼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이제 구덩이의 깊이는 그만하면 됐으니 옆으로 파들어갑시다.」 서천굉의 제안이었다. 사막의 모래는 열여덟 자를 파야만 단단한 흙이 나온다. 진가락,낙빙 ,주기 ,심연,향향 공주가 함께 옆으로 파들어갔다. 거기서 나온 흙을 구덩이 주위에 쌓아 화살을 막는 나지막한 담을 만들어 놓고야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장진이 심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엄호해 줄 테니 올라가 화살을 주워 오세.」 낭아봉을 휘두르며 구덩이 위로 올라섰다. 심연도 따라 올라와 사살된 청병 주위에서 18개의 활과 화살을 한아름 주워서 돌아왔다. 이때 비로소 진가락은 향향 공주를 여러 사람 앞에 소개했다. 사람들은 그가 곽청동의 동생이란 말을 들은데다가 예쁘고 귀엽게 생긴 용모에 친근감을 느꼈다. 다만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진가락은 한참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자 기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장소중 그자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잠시 상대했을 뿐인데도 아직까지 두 팔이 시고 맥이 풀려 활을 당길 힘도 없으니.....) 진가락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물었다. 「구가, 어떻게 여길 다 오시게 되셨소? 그리고 십이가는- 위춘화가 구덩이 위에 있다가 뛰어내렸다. 「총타주님, 이제 좀 정신이 드셨습니까? 지금 보고를 드려도 될까요? 「좋습니다. 말씀을 하시지요.」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사가.십제 .씹사제 .심연은 위에서 적의 동정을 살펴보시오. 우리, 밤이 되면 뚫고 나가도록 합시다.」 위춘화가 보고하기 시작했다. 「저와 십이제는 총타주님의 명령을 받고 조정의 동정을 살피러 북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금방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그러다 어느 날 거리에서 장소중과 그 녀석의 사형인 마진 도장을 만나게 되었지요.」 「우리가 장소중을 그의 사형에게 인계해 주었어요. 그때 마진 도장은 그를 무당산으로 데리고 가서 잘 타이르고 단속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저도 어째서 그자가 다시 나타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그가 북경으로 갔던 모양이군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총타주님, 최근에 그를 보셨습니까? 서천굉이 물었다. 「방금 바로 그자와 대결을 했는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그래서 그와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모두들 듣고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위춘화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 사 형제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우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어요. 마진 도인과 그의 사제가 서로 손을 잡고 사기를 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슬그머니 미행을 했습니다. 그들이 골목 안의 한 건물로 들어가더군요.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나오지 않기에 그들이 그 집에 묵는 줄 알았습니다. 저와 십이제는 끝까지 탐지해 보기로 상의했습니다. 이경이 지나서 우리는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습니다. 이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입니까? 장소중 혼자라도 저와 십이제 둘이 덤벼도 상대가 안 될 텐데 그의 사형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마당에 엎드려 있었지요. 얼마 동안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우리는 슬그머니 다가가 창 틈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마 도장은 누워 있고 그 녀석은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더군요. 우리는 움직일 수가 없어서 몸을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지요. 원래 장소중은 북경에 가서 개인적인 금전문제를 해결해야만 호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북경으로 동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며칠 지나자 황제도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진가락은 권륜이 북경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랬느냐고 했다. 위춘화가 말을 계속했다. 「장소중은 황제의 심부름으로 위구르에 가 한 가지 중대한 일을 처리해야만 되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무슨 일이라고 합디까? 진가락이 다급하게 물었다. 「분명한 말은 없었고 누구 한 사람을 찾아봐야겠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위춘화의 말에 진가락이 이마를 찡그렸다. 뭔가 일이 잘못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위춘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 도장은 그보고 당장 관직을 집어치우라고 야단을 치더군요. 장소중은 오히려 황제의 권위를 믿고 묵살하려 들구요. 어떻게 성지를 거역한단 말이냐고 우기더군요. 만약 거역을 했다가는 무당산도 황제가 파병을 해 짓밟아 버릴 것이라고까지 위협을 했어요. 마 도장은 우리의 강산이 오랑캐에게 짓밟힌 마당에 까짓 무당산이 또 한 번 곤욕을 치른다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대화가 가면 갈수록 경직되다가 마 도장이 화를 벌컥 내며 누웠다 일어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홍화회 친구들 면전에서 뭐라고 했더냐? 그러자 장소중이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대역무도한 놈들과 한 이야기를 가지고 사형께서 너무 진지하게 나오실 것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칼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 도장이 칼을 뽑은 것입니다. 저는 다시 창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마 도장이 손에 칼을 든 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습니다. (네놈은 사부님의 유훈을 기억하고 있느냐, 아니면 잊어버렸느냐?? 이 배은망덕한 놈아! 그래 어쩌다가 만청 조정의 주구로 타락했느냐? 천하에 염치없는 놈 같으니라구. 내 오늘 네놈과 사생결단을 내야겠다. 이렇게 호통을 치고 있었습니다. 십이제가 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더군요. 마 도장의 시비가 분명하고 대의가 늠름하다고 칭찬하는 뜻이었지요. 사형이 이렇게까지 나오니까 장소중이 누그러지더군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형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내일 사형을 따라 호북으로 가겠습니다.) 마 도장이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칼을 거두어 칼집에 꽃고 오히려 두어 마디 장소중을 위로한 뒤에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장소중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표정이 살기등등하게 변했습니다. 그러다 또 주저가 되는지 부들부들 떨기도 했구요. 저와 십이제는 혹시 발각될까 두려워 그가 잠이 들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요. 그러나 그는 시종 자지 않고 있었습니다. 몇차례나 일어나 섰다가는 다시 주저앉곤 했습니다. 입술을 왁 깨물고 있다가 (대사형!)하고 마 도장을 가만히 부르더군요. 마 도장은 이때 깊은 잠에 빠져 가볍게 코까지 골고 있었습니다. 장소중은 슬그머니 그의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는데 향향 공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위춘화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투 속에서 어떤 불행한 살의를 감지했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벌벌 떨며 진가락의 손을 잡아당기고 자기 몸을 그에게 기댔다. 주기가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떨었다. 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 참았다. 위춘화의 말은 계속되었다. 「장소중이 가까이 가더니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즉시 뒤로 뛰어 피했습니다. 마 도장이 참담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데 두 눈에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이리나 개와 진배없는 흉악하고 악랄한 장소중 그놈이 벌써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린 것이지요.」 진가락은 끓어오르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우장으로 구덩이를 탁 쳤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를 부드득 갈며 이렇게 말했다. 「이 간적을 죽이지 못하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 향향 공주는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무서운 생각에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서천굉 등은 이 말을 이미 들었지만 분노는 진가락과 마찬가지였다. 위춘화의 손에 든 쌍구가 흔들리고 말조차 떨려 나왔다. 「마 도장은 아무 말없이 한 발 한 발 장소중을 향해 다가섰습니다. 얼굴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지다가 갑자기 발을 들어 걷어찼는데 장소중이 번개처럼 피해 버렸습니다. 마 도장은 두 눈을 잃어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엉뚱한 장소를 차고 말았던 것입니다. 흙과 먼지가 방 안 가득히 날렸습니다. 장소중도 무서웠던지 문을 찾아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 도장이 먼저 문 앞으로 달려가 퇴로를 차단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장소중은 나갈 수 없게 되자 오히려 껄껄 웃어 젖히더군요. 마 도장이 웃음소리로 방향을 확인하고 덮쳐 들며 왼발로 옆차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장소중이 고의로 자기 사형을 유인해 들인 것이었습니다. 우선 장검을 들어 사형의 왼발이 도착할 장소에 대고 대기했던 것이지요. 마 도장의 다리가 장검에 맞고 잘린 것입니다.」 주기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칼을 들어 몇 번이나 모래를 내리쳤다. 「이때 저와 십이제는 정말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위험한 적지에 와 있다는 것도, 그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나 했다는 듯 창을 뚫고 들어가 그자를 죽이려고 대들었습니다. 그가 못된 짓을 해놓고 겁이 났거나 아니면 우리 편이 또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지 몇 합을 대결하다가 그만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쫓아나갔지만 십이제만 그놈의 금침에 맞고 말았습니다. 저는 십이제를 부축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우선 마 도장의 지혈부터 시켜 놓고 보자는 심산이었지요. 마 도장은 다만 한마디 말만 남기고 머리를 벽에 받아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그분의 한마디가 무슨 말이었습니까? 위춘화의 계속되는 말을 듣고 있다가 진가락이 다급히 물었다. 이때 갑자기 한바탕 찬바람이 불어 모두들 한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위춘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기 사제와 어동이 내 원수를 갚아 주도록 해 주시오!>마 도장의 마지막 말씀이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우리의 다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달려와 누구냐고 외쳤습니다. 저는 급히 십이제를 부축하고 저희들의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이튿날 제가 다시 살펴보러 갔더니 그들이 벌써 마 도장의 시체를 거두었더군요. 십이제가 다섯 개의 금침에 맞아 제가 그걸 뽑아 주었습니다. 지금 북경의 쌍류자(雙柳子) 거리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황제가 장소중을 위구르로 보내 찾으라고 한 인물이 혹시 총타주님의 사부 되시는 분은 아닐까요? 총타주님께서 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의 중요한 두 가지 물건이 원로 선배님이 계신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구요. 비록 원로 선배님의 무공이 비범하여 그를 겁내지는 않는다 하더라고 워낙 악독한 녀석이라 걱정이 됩니다. 모두들 그 놈이 개과천선한 줄 알고 있다가 그놈의 간사한 꾀에 속지나 않을는지요. 그래서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하남(何 南)에서 용문방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총타주님께서 그들의 방주인 상관 대가와 만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즉시 그분을 찾아뵈러 갔다가 공교롭게도 사가와 칠제,십제 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십사제를 찾아갔지요.십사제는 사부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했습니다. 모두들 이쪽으로 오다가 뜻밖에 총타주님을 이렇게 뵙게 된 것이랍니다.」 「그래, 십이가의 부상은 어떻습니까?. 진가락이 물었다. '부상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급소는 맞지 않았습니다. 위춘화의 대답이었다. 이때 추운 바람이 갈수록 세차게 불었다. 하늘 위의 구름은 빽빽해 당장이라도 머리 위에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곧 눈이 내리겠는데요,,,,,,.」 향향 공주의 말이었다. 엄습하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더욱 진가락의 몸을 파고들었다. 주기는 아니꼬운 마음을 계속 억누르고 있다가 드디어 터뜨리고야 말았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예요? 진가락은 가시 돋친 그녀의 말을 듣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이 곧 오겠다고 하는군요. 「흥! 제까짓 게 뭘 안다구? 그리고 잠시 후에 고개를 반짝 들었다. '총타주님, 도대체 마음속으로 곽청동 언니를 사랑하시나요, 이 여자를 사랑하시나요? 진가락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천굉이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며 가만 있으라는 눈치를 보냈다. 왜 옷깃을 잡아당기며 야단이세요? 곽청동 언니보다 좋은 사람이 또 어디 있어요? 나는 누가 그녀를 없신여기는 것을 참고 견딜수가 없어요.」 진가락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흥, 내가 언제 그녀를 업신여긴 일이 있나?) 주기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분명히 말해 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말을 꺼냈다. 곽청동 아가씨는 훌륭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하는것 ----- 순간 주기가 진가락의 말을 가로챘다. 그럼 왜 총타주님은 그녀의 여동생이 더 예쁜 것을 보자마자 그녀를 버리셨나요? 진가락은 주기의 추궁에 얼굴이 더 빨개졌다. 할 수 없이 낙빙이 편을 들었다. 총타주님이나 우리나 곽청동과 한 번 만난 적이 있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뭘 그래요?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지 뭘 사랑하네 안 하네 할 처지가 되나요? 아니, 낙빙 언니! 무엇 때문에 총타주님 편만 드세요. 곽청동 언니가 총타주님께 오래된 칼 한 자루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총타주님이 그 언니를 볼 때의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구요. 내 어리숙하지만 그래도 알 만한 것은 다 알아요. 총타주님은 그 언니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리셨대요.」 낙빙이 웃었다. 「누가 어리숙하다고 했나?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느니,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느니 테들고 야단이실까? 「딴소리 그만 작작 하세요. 낙빙 언니, 총타주님 안 계실 때 우리 뭐라고 했어요? 두 사람이 천생연분인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놓고 지금 왜 또 다른 말을 하세요. 총타주님 아니라 더 대단한 분이라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해요.」 주기는 화가 나서 계속 쏘아 댔다. 향향 공주는 그들의 말투가 긴장된 것 같음을 느끼고 둥근 눈을 더 크게 뜬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가락으로서도 도리가 없었던지 말을 꺼냈다. 「곽청동 소저는 나와 만나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아무 土용이 없는 일이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주기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내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합니까? 주기는 속으로 의심스러웠던 일이 그제야 시원하게 풀렸다. 「그럼 됐어요.제가 공연히 총타주님을 원망하고 있었군요. 쓸데 없이 반나절 화만 내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들 그녀의 천진난만함과 자기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웃었다. 주기는 본래 향향 공주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곁으로 와 손까지 잡으며 친하게 대했다. 얼굴에 갑자기 차가움을 느끼고 고개를 드니 함박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렇게 기막히게 알아맞힐까. 정말 눈이 내리네.」 진가락이 벌떡 일어났다. 우리 뚫고 나갑시다. 사람들이 뛰어 일어나 말들을 구덩이 속에서 끌어올렸다. 청병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왔다. 사람들이 모두 말에 타자 위춘화가 앞장을 서 길을 뚫었다. 그러나 몇 장 달리지 못하고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말에 탄 채 쓰러졌다. 문태래가 깜짝 놀라 달려 나가는데 위춘화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위춘화가 일어섰다. 「말이 화살에 맞아 죽었을 뿐이에요 저는 아무 일 없어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장진과 낙빙이 달려왔다.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이고 각자 위춘화와 문태래를 끌어올려 말 위에 태웠다. 삽시간에 심연과 장진이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원위치로 돌아갑시다. 진가락의 외침에 따라 모두 다시 구덩이 속으로 퇴각했다. 청병들이 여세를 몰고 추격해 왔지만 문태래 -여어동-위춘화등이 활을 쏘아 패퇴시켰다. 이렇게 되자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4者의 말만 잃어 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청병은 (사람보다 우선 말을 쏘아 없애 )려는 심산인 듯했다. 사막 가운데 말이 없다면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독 안의 쥐나 다름없는 신세로 변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지혜를 짜 보았지만 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원병이 없다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겠군요.」 낙빙의 말을 서천굉이 받았다. 「목탁륜 노영웅께서 총타주님과 따님을 기다리다 오시지 않으면 틀림없이 군사를 파견할 것입니다.」 「그들이 벌써 파병을 했을 것으로 추측이 되나 우리가 남쪽으로 이렇게까지 멀리 와 있으니 찾기가 어렵겠지.」 진가락의 말이었다. 「그럼 우리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찾아 구해 달라고 해야겠군요. 서천굉의 말에 심연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진가락은 한참 동안 심사숙고한 뒤에 좋다고 했다. 심연이 보따리속에서 문방사우를 꺼내 놓았다. 진가락이 향향 공주에게 구출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다. 진가락이 심연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넷째형수님의 백마를 타고 가게. 우리가 동쪽을 공격할 테니 서쪽을 향해 뚫고 나가게.」 그리고 위구르 대영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을 설명해 주었다. 주기와 향향 공주만 구덩이 속에 남게 하고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동쪽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심연은 슬그머니 백마를 끌어낸 뒤에 말의 배 밑으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말목을 끌어안고 두 다리를 말 배에 끼었다. 그리고 오른발로 말의 갈비를 살짝 찼다. 백마가 네 굽을 펴고 서쪽을 향해 바람처럼 달렸다. 청병들이 이따금 화살을 날렸지만 힘도 약한데다가 겨냥도 제대로 하지 못해 엉뚱한 장소에만 떨어졌다. 사람들은 심연이 벌써 멀찌감치 달려간 것을 보고 다시 구덩이 속으로 후퇴했다. 눈을 비비고 바라보다가 백마가 눈 속을 헤치고 나가 포위망을 뚫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진가락은 이 몇 해 동안 심연을 동기간이나 다름없이 대했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구원을 요청하러 떠나자 마음이 괴로웠다. 즉시 서천굉 , 위춘화 등은 파수를 보러 올려 보내고 문태래 등은 내려와 쉬도록 했다. 문태래는 내려와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아랑곳없이 노래를 불렀다. 강남의 농부들이 부르는 그런 노래였다. 낙빙은 남편을 따라 중창을 했다. 산에 올라 나무를 할 때는 나무꾼의 노래를 부르네 범도 호랑이도 무서을 게 있나 가난한 삶이지만 그런 대로 즐거움이 있네 돈은 없지만 인(仁)과 의(義)에 산다네 공주가 진가락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이들의 노랫소리는 정말 듣기가 좋군요.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나요? 진가락이 가사를 대강 설명해 주자 향향 공주도 가벼운 콧노래를 따라 불러 보다가 잠이 들었다. 눈은 갈수록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바라다보니 온 세계가 흰색으로 치장을 했다. 날이 샐 무렵이 되었는데도 향향 공주는 계속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머리카락이며 어깨 위에 눈이 수북 쌓였다. 얼굴 위에 떨어진 눈은 물방울이 되어 그녀가 숨을 쉴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낙빙이 가볍게 웃었다. 아인 정말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군요.」 시간이 또 한참 동안이나 흘렀다. 서천굉이 이마를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구원병의 소식이 없을까? 심연이 가다가 혹시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닐까? 문태래의 말이었다. 제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일이에요.」 서천굉의 말을 주기가 받았다. 「무슨 일인데 우물쭈물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기만 해요? 서천굉은 감량(甘凉)의 노상에서 성경을 빼앗을 때 보니 곽청동이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그들 부족이 절대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가락에게 물었다. 「위구르 족의 군사상의 일은 목탁륜 노영웅께서 관장하시나요, 아니면 곽청동 소저가 관장하나요?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다 관장하는 것 같더군요. 목 노영웅이 모든 일을 따님과 함께 상의해서 처리합디다.」 서천굉이 한숨을 쉬었다. 「만약 곽청동이 파병하지 않으려 든다면 그건--어려운데요.」 사람들은 그의 말뜻을 알고 잠자코 있었다. 주기만 펄쩌 뛰었다. 「아니.,,,,, 왜 곽 언니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녜요? 다시 말해서, 그녀가 동생을 시기한다 해도, 그래 자기 좋아하는 사람까지 구출하려 들지 않을리 있겠어요? 「여자가 질투하기 시작하면 못 하는 일이 없는 법이오.」 서천굉의 말에 주기는 화가 나서 마구 떠들어 댔다. 향향 공주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람들은 곽청동과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람됨이 어떤지 잘 알지 못했다. 서천굉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기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며 심연은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진가락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위구르 군영으로 찾아 들어가 편지를 전했다. 목탁륜은 때마침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망망한 사막 가운데 두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청병들이 집결한 곳으로 찾아가 알아볼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초조하기 짝이 없을 때 딸의 편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즉시 친병에게 이렇게 명령을 했다. 즉시 병사들을 소집하라. 곽청동이 심연에게 물었다. 여러분을 포위한 청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던가요? 4, 5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곽청동은 입술을 꽉 문 채 방 안을 오락가락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목탁륜이 장막에서 나와 군사들을 인솔하고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곽청동이 입을 열었다. 아빠, 구하러 갈 수 없어요.」 목탁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구하러 갈 수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어째서? 「조혜는 용병에 능해요 결코 2명의 사자를 잡기 위해 4, 5천 명이나 파견, 포위할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거긴 반드시 다른 흉계가 있어요.」 「네 말대로 흉계가 있다고 하자. 그래, 네 동생과 홍화회의 그 친구들을 청병이 살해하도록 그냥 참고 있으란 말이냐? 곽청동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떼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병사를 데리고 갔다가 사람도 구출하지 못하고 공연한 목숨만 수천 잃을까 봐 그래요. 목탁륜은 두 손으로 자기의 허벅다리를 쳤다. 「네 동생이 친혈육이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진 총타주와 홍화회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이토록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했 는데 그들을 위해 죽은들 뭐 대수로을 것이 있겠느냐? 그런데 너는 너는-,----.」 딸이 갑자기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도 업거니와 그 실망을 말로 다 형언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 고정하시고 제 말씀을 들어 보세요. 비단 그들을 구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대승을 거둘 수도 있다구요.」 목탁륜은 금방 희색이 만면했다. 「역시 너는 너로구나. 왜 빨리 말을 하지 않았느냐? 그래 어떻게 하면 되겠니? 내,,,-, 내 네 말을 들으마.」 「아빠, 정말 제 말씀을 들으시겠어요? 목탁륜이 웃었다. 「방금 내 너무 급해서 그랬으니 신경쓸 것 없다.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니? 빨리 말을 해라. 답답하구나.」 「그러면 아버지 영전을 제게 주세요. 이번 싸움은 제가 지휘해야겠어요. 목탁륜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딸의 슬기와 꾀가 자기를 능가함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좋다. 네게 인계해 주마.」 전군을 호령할 수 있는 영기(令旗)와 영전을 두 손으로 받쳐 딸에게 주었다. 곽청동이 무릎을 꿇고 받은 뒤에 다시 진신인 알라에게 기도를 드리고 나서야 일어섰다. 「아빠, 그럼 아빠와 오빠도 제 명령에 따라야 해요.」 네가 그들을 구출하고 청병을 이기기만 한다면 시키는 대로 하마. 「좋아요. 한마디로 결정한 거예요.」 곽청동이 부친과 함께 장막 밖으로 나오니 각 대의 대장들이 2열로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목탁륜이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오늘 만주의 병사들과 사생결단을 해야겠소. 이번 싸움은 곽청동 소저가 총지휘를 할 것이오.」 전사들이 마도를 높이 들고 외쳤다. 「진신께서 취우황삼을 보우할 것이며, 진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곽청동이 영기를 한 번 휘둘렀다. 「좋아요. 지금 즉시 해산하여 모두들 휴식을 취하시오.」 대장들이 무리를 인솔하고 해산했다. 목탁륜은 어리벙벙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막으로 되돌아오자 심연이 땅바닥에 풀썩 꿇어 엎드려 곽청동을 향해 수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울었다. 「소저, 만약 출동하시지 않으시면 우리 도련님은 살 길이 없으십니다. 「일어나세요. 내 언제 출동하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도련님이 계신 곳에는 아홉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 소저의 동생 되시는 분은 무예도 모르십니다. 그런데 적병은 수천이 넘습니다. 여기서 한 발만 늦게 가도 도련님과 그분들은-,----그만 ,,,,,, 그만,,- 심연은 계속 흐느꼈다. 「청병의 철갑군이 공격을 했었나요, 안 했었나요? 「제가 출발할 때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쯤 공격을 했을까봐 걱정스럽습니다. 그들은 철갑을 입고 있기 때문에 화살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겁이 나서 목을 놓아 서럽게 울었다. 곽청동은 이마를 찡그린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목탁륜은 심연이 슬프게 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잠겼다. (나이가 어린데도 저토록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구나. 만약 우리가 그들을 구출해 내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살아가나?) 장막 안을 오락가락했지만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곽청동이 입을 열었다. 「아빠, 이리를 잡을 때 쓰는 덫을 보셨지요. 쇠고리에 양고기를 끼워 놓으면 이리가 물고 늘어지다가 덫을 채면 금방 잡을 수 있는 것 말예요. 조혜가 우리를 지금 이리로 간주하고 있는 거예요. 동생이 바로 그 양고기나 같아요. 아무것도 없는 이 사막에서 홍화회 인물들이 제아무리 기고 나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적은 사람을 가지고 그래 무슨 수로 4, 5천의 인마를 당해 냅니까? 조혜가 맹공을 하지 않는 까닭을 아시겠어요? 목탁륜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다고 했다. 곽청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청병의 철갑군이 출동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땅에 쭈그리고 앉아 영기의 깃대로 바닥에 작은 원을 그렸다. 이것이 양고기예요.」 원 밖에 두 줄의 선을 굵게 그렸다. 이것이 철갑군이고 저것이 덫이에요. 우리가 이곳으로부터 구출하러 들어가면 그들 철갑군은 양쪽에서 협공을 할 텐데 우리가 무슨 수로 살아 남습니까. 목탁륜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심연을 바라다보았다. 곽청동이 말을 이었다. 청병은 고의로 이분을 탈출시킨 것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혼자 몸으로 어떻게 4, 5천의 군마의 포위를 뚫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일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가요? 네 말의 뜻은 조혜가 우리에게 속임수를 쓴다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 대오의 측면으로 진격해 들어가 미처 손쓸 틈을 주지 않으면 되겠구나.」 목탁륜의 말이었다. 그들 병사는 4만여 명이고 우리는 겨우 1만 5천 명이에요. 정면으로 대들었다가는 우리만 손해를 보게 돼요.」 네 말대로라면 네 동생과 그 친구들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거지? 나는 네 동생도 버릴 수 없거니와 홍화회 친구들의 곤경도 좌시할 수 없다. 내 5백 명만 데리고 구출하러 가겠다. 알라 신의 보우 아래 틀림없이 구출해 내고야 말리라, 구출해 내지 못하면 그들과 함께 죽으면 그만이다.」 곽청동은 침묵 속에 잠자코 있었다. 심연은 곽청동이 고집을 부리며 출동할 생각이 전연 없는 것을 보자 다급해 다시 꿇어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우리 도련님이 소저께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서해 주십시오. 구출해 낸 뒤 소인이 책임을 지고 도련님이 소저께 사죄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저께서 그분의 생명을 구해만 주신다면 우리가 어찌 소저의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곽청동은 이 몇 마디 말을 듣고 심연이 벌써 자기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요. 벌컥 화를 내자 심연도 벌떡 일어섰다. 「소저가 이렇게 독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가서 도련님과 함께 죽어야겠습니다.」 심연은 울며불며 백마에 올라타고 내달렸다. 「출동하지 않겠다면 저 어린아이만도 못하지 않느냐? 제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하더라도 나는 가 봐야겠다. 의를 위해 죽는다면 혼은 천국으로 가겠지.」 목탁륜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아빠, 한인들에게 이야기책이 하나 있는데 -삼국연의라고 해요. 제 사부님께서 그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저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는 계략(計略)을 써서 싸움에 이기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 계책들은 정말 묘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 책에 장수는 꾀로 싸우는 것이지 용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란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병사가 적습니다. 보통의 방법으로써는 승산이 없습니다. 독특한 방법을 써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조혜에게 독계가 있다면 우리도 그 계략을 미리 알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계교를 써야 합니다. 장계취계란 말이 바로 이 것입니다.」 목탁륜은 반신반의했다. 「그게 정말이냐? 「아빠,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곽청동의 목소리가 떨렸다. 목탁륜은 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다. 얼굴까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좋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네가 알아서 출동하여 구출하도록 해라. 곽청동은 한참 동안 궁리를 하다가 이윽고 친병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북을 울리고 기를 올려라.」 북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각 대의 대장들이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곽청동이 중앙에 앉고 목탁륜과 곽아이가 그 옆에 앉았다. 이때 장막 밖에서는 세찬 눈이 내려 땅 위에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목탁륜은 사막에 포위되어 있는 작은 딸을 생각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눈까지 이렇게 내리니 얼어 죽지 않으면 굶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바짝바짝 마음이 타들어 갔다. 곽청동이 영전을 손에 잡고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청기(靑旗) 제1대 대장은 본대의 인마를 인솔하고 고비의 진창의 서쪽으로 가 여차여차하라. 청기 제2,3,4-5-6대 대장은 인마를 인솔하고 목민과 농민을 소집하여 진창 옆에서 여차여차하도록 하라. 6대의 청기병 대장들이 임무를 부여받고 각기 1천 명을 인솔하고 떠났다. 목탁륜은 딸이 본부의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사람을 구출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구조물을 쌓는 공사를 하라고 이르자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곽청동이 다시 지시를 내렸다. '백기(白旗) 제1-2-3대의 세 대장은 섭이강성과 흑수하(黑水何) 양 안으로 가서 여차여차하라. 흑기(黑旗) 제1대의 대장과 카자흐대 대장은 흑수하가에 있는 산 위에 올라가 여차여차하라. 몽골대 대장은 영기반(英奇盤) 산정에 주둔하여 여차여차하라. 각 대의 대장이 명령을 받고 나갔다. 이때의 청병의 서침은 위구르족만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산북로의 카자흐 족과 몽골족까지 재난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적지않은 부족이 위구르 족과 연합하여 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곽청동이 목탁륜과 곽아이를 바라다보았다. 「아빠는 동으로청기군의 총지휘를 담당하셔야겠습니다. 오빠는 서로 백기 ,흑기,카자흐 몽골 각 대의 총지휘를 맡으셔야 되겠습니다. 저는 흑기 제2대를 통솔하여 중앙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싸움의 방책(方策)은 이렇게"""~ 곽청동이 상세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참다 못한 목탁륜이 벌떡 일어나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럼 누가 사람을 구하러 가느냐? 곽청동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흑기 제3대 대장은 부대를 인솔하고 동쪽으로 돌격해 들어가 사람을 구출한다. 흑기 제4대 대장은 부대를 인솔하고 서쪽으로 돌격해 들어가 사람을 구출한다. 두 부대는 청기군과 말을 바꾸어 타도록 한다. 가장 좋은 말만 골라 타야지 한 마리라도 좋지 않은 말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흑기군의 두 대장이 명령을 받고 나갔다. '네가 1만 3천 명의 정병을 모두 급하지도 않은 일에 종사하라고 보내 놓고 2천 명의 노병과 소병만 보내 사람을 구출하라니 그 저의가 도대체 뭐냐? 목탁륜이 소리를 질렀다. 원래 위구르 족 가운데서도 청기와 백기 양 군만이 정병이었다. 흑기군은 이들과 비할 처지도 못 되었다. 흑기 제3, 제4 두 부대는 노년층과 미성년자로 조직되어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도 보초나 서고 물자나 수송했지 싸움에 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곽아이도 평소 누이를 존경해 왔지만 이번만은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계책은,,--,-.」 곽청동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노기충천한 목탁륜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 네 말을 믿지 못하겠구나! 네가,,,,,, 네가,,--진 공자를 좋아하는데 진 공자는 오히려 네 동생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래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래서 네가 그 두 사람 모두 죽게 내버려두겠다 이거지! 네 이 천하에 못된 것아. 곽청동은 기가 막혔다. 손발이 싸늘하게 식어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목탁륜은 너무나 화가 나서 생각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해 버렸다.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다가 그냥 말에 올라탔다. 「나는 가서 객사려와 함께 죽겠다.」 장도를 휘두르며 외쳤다. 「흑기 제3, 제4대는 나를 따르라. 두 부대의 노소 전사들은 이제 막 말을 갈아 탔다. 추장의 뒤를 따라 눈과 바람 속을 뚫고 사막을 달려나갔다. 곽아이는 일그러진 여동생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께서 심란하셔서 자신도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니 너무 상심할 것 없다구.」 곽청동은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 땀이 배었다. 한참 동안 진정을 하고서야 입을 뗐다. '제가 가서 아빠를 돕겠어요. '몹시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도록 해. 내가 가서 도와 드릴 테니까. 곽아이가 말했다. '아니예요. 오빠는 동로의 청기 각 대를 지휘해 주세요. 제가 가겠어요. 전마에 올라 흑기 제2대를 데리고 달려나갔다. 이때 위구르 대영에는 겨우 2, 3백 명의 부상당한 병사와 환자만 남고 1만 5천 명의 병사는 모두 밖으로 나간 셈이었다. 심연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백마를 타고 훌쩍훌쩍 울며 진가락 등이 포위되어 있는 장소를 향해 달렸다. 적군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는데도 청병들이 결사적으로 막지를 않았다. 마지못해 10여 발의 화살을 날리는 것 같았다. 겨냥도 하지 않았는지 심연과의 거리도 10여 자나 먼 곳에 가 떨어졌다. 심연은 곧장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심연이 돌아왔다. 장진이 환호성을 질렀다. 심연은 아무 말도 없이 말에서 내려 백마를 구덩이 속으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목을 놓고 서럽게 울기만 했다. '울지 말아요. 울지 마. 왜 그래요? 주기가 묻자 서천굉이 탄식을 했다. '물어 볼 것도 없는 일이지. 곽청동이 출병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 뻔하지 않은가. '제가 꿇어 엎드려 이마를 조아리며-애걸복걸했지만...... 그 여자는 오히려 저를 욕하고..."'~ 심연의 말소리는 서럽게 우는 바람에 이어졌다 끊어졌다 했다. 사람들은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향향 공주는 왜 저렇게 우느냐고 진가락을 향해 물었다. 진가락은 그녀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구출을 요청하기 위해 나가려 했지만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가 었다오.」 향향 공주가 손수건을 꺼내 건네 주었다. 심연이 받아 눈물을 훔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손수건에서 맑은 향기가 풍겼다. 쓰기가 아까워 옷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고 손수건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서천굉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뚫고 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문태래는 서천굉이 진가락에게 묻지 않고 자기를 향해 묻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즉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총타주님, 빨리 이 소저와 함께 백마를 타고 여길 떠나세요. 진가락이 의아해서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총타주님의 책임은 막중하십니다. 비단 홍화회의 수만 형제를 통솔하셔야 할 임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실 광복의 대업도 역시 총타주님께서 짊어지셔야 하니까요.」 문태래의 말에 위춘화, 여어동 , 주기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총타주만 나가실 수 있다면 우리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죽는데 나 혼자 무엇 때문에 삽니까? 「총타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총타주님이 응하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힘으로라도 내몰겠습니다.」 서천굉의 위협적인 말이었다. 진가락이 잠시후에 좋다고 했다. 「좋습니다.」 백마를 구덩이 밖으로 끌어낸 뒤 일행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향향 공주를 부축하고 나갔다. 문태래 등은 이번이 살아서 이별이요 죽어서 이별임을 알기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 낙빙은 아까부터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진가락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향향 공주와 함께 말에 올라 떠났다. 사람들의 마음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또 진가락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가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문태래는 예나 다름없이 호쾌하고 대범했다. 「우리 여기 총타주님과 그 소저까지 합쳐 10명도 되지 않는데 벌써 7, 80명의 적병을 살해했소. 형제 여러분, 우리 몇 명이나 더 죽여야 죽어도 여한이 없을까요? 「최소한 1백명 이상은 더 죽여 없애야 해요.」 낙빙의 말에 주기가 그 숫자 가지고는 안된다고 나섰다. 「만청병은 정말 못돼먹었으니 3백 명은 채워야 해요.」 「좋습니다. 모두들 어디 한번 세어 가며 죽여 봅시다.」 문태래의 말에 장진이 나섰다. '5백 명만 채웁시다.」 위춘화가 위에서 파수를 보다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우리 여기 여덟 사람이 있습니다. 홍화회의 영웅 호한은 일당 백이라야 합니다. 자, 보세요. 이때 마침 3명의 청병이 눈 위를 서서히 기어 오고 있었다. 위춘화가 장궁(長弓)을 당겼다. 빗나가는 화살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 둘, 셋! 아주 좋습니다.」 여어동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바로 이거요. 우리를 죽이려 하지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아무래도 8백명은 채우고 봅시다.」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군요. 스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우린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겠네요.」 서천굉이 웃으며 말을 하자 낙빙도 따라 웃었다. 「그럼 오가와 육가를 보고 천천히 오시라구 해야겠네요.」 낙빙의 말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상혁지와 상백지의 별명이 흑무상(黑無常) 백무상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무상귀(無常 鬼)가 와서 잡아가는 법이었다. 군웅들은 일단 죽을 결심을 하자 오히려 기분이 더 홀가분해졌다. 심연은 본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태연자약한 그들을 보며 자기도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련님이 영웅 호걸이신데 내가 그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장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리, 오늘 귀천하실 모양이니 우선 저들 오랑캐놈들을 8백 명만 죽이고 보자. 「누구냐? 갑자기 위춘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왜 1천 명은 채우시지 않으시려오오. 진가락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들렸다. 「아, 총타주님이시군요. 어째서 다시 돌아오십니까? 위춘화가 묻는데 진가락이 벌써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웃었다. 그 여자를 보냈으니 당연히 돌아와야지요. 당년 유비와 관운장 , 장비도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의리가 천고에 빛나지만 그들도 말한 그대로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 자매 아홉 사람은 오늘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태도를 보고 권해 보아야 소용없을 것으 알았다. 「좋습니다. 우리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로 하십시다.」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진가락이 심연을 바라보았다. 「심연,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지 말게.ㅣ 이제 우리가 자네를 십오가로 삼겠네. 「그래요, 그래야 해요.」 다른 사람들도 찬성을 했다. 심연은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렸다. 이때 구덩이 속에도 상당한 눈이 쌓였다. 한편으로 눈을 쓸며 계속 한담을 나누었다. 심연이 우스운 말을 꺼냈다. 「지금 여기에 노주 한 단지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굴 또 놀리려고 그래요.」 주기가 하얗게 눈을 흘기자 모두들 떠들썩하게 웃었다. 여어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가, 제가 사가께 미안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마음속에 숨긴 채 그냥 죽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문태래가 의아해서 물었다. 여어동은 자기가 락빙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철담장 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마음에 병이 들어 일찌감치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죽지도 못하고 있으니 괴롭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중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가,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태래가 껄껄 웃었다. '십사제, 내가 전에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았나? 하지만 내가 언제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십사제를 대하는 걸 보았나? 네 형수가 단 한마디도 꺼낸 일이 없지만 내 자연히 알고 있었네. 젊은 사람이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다네. 세월이 지나다 보면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게야. 내 벌써부터 십사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있었네. 그런데 오늘 십사제가 세삼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야. 괜찮네, 괜찮아. 여어동은 부끄럽고도 감격스러웠다. 낙빙도 부드럽게 웃었다. '십사제, 벌써 지나간 일인데 무엇 때문에 그 말을 꺼냈어요?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몹시 불쾌해요.」 「뭔데요? 여어동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십사제는 스님이라 귀천을 해도 부처님이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 아녜요? 그러나 우리 여덟 사람은 오가와 육가에게 끌려 옥으로 가겠지요. 이렇게 된다면 당년 우리가 복은 같이 누리고 재난은 같이 막자고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뭐예요? 사람들은 낙빙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더욱 크게 웃었다. 여어동은 승복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어차피 내 오늘 살인으로 파계를 했으니 오늘 환속을 하겠습니다. 여러 형님, 누님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편이 나 혼자 극락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군웅들이 손뼉을 치며 좋다고 했다. 떠들썩한 웃음소리 가운데 위에 있던 위춘화와 심연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구덩이 위로 올라가며 적을 맞을 채비를 차렸다. 차디찬 달빛에, 눈꽃이 춤을 추는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얀 눈을 밟으며 오는 모습이 정말 신선이 하강하는 듯했다. 바로 향향 공주다. 진가락이 깜짝 놀라 쫓아가 맞이했다. 「왜 저 하나만 버리셨습니까? 향향 공주가 원망스러워하는 말에 진가락은 발을 굴렀다. '혼자 달아나시라고 그랬습니다. 여기는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향향 공주가 눈물을 흘렸다. '저 혼자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설마,,-, 설마...... 제 마음을 몰라 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진가락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자, 오셨으니 우리 들어갑시다.」 그녀의 손을 잡고 나서 구덩이 속으로 돌아왔다. 주기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총타주님, 저는 본래 총타주님께서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혼자 나무라고 있었는데 정말 제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어째서요? '이 소저가 이렇게까지 총타주님을 사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선녀처럼 예쁜 것은 그만두고라도 야차처럼 못생겼데도 이런 마음씨라면 저라도 사랑하겠어요.」 진가락은 흐뭇해 웃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낙빙이 주기를 보고 웃었다. '어쩐지 칠가를 그렇게나 좋아하더라니. 원래 칠가의 마음씨가 고와서 그랬구나.」 「그럼요. 쥐새끼처럼 약기는 하지만 사람만은 얼마나 좋아요.」 서천굉은 아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를 칭찬해 주어 여간 즐겁지 않았다. 향향 공주가 진가락을 바라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야기 하나를 노래로 불러 여러분들께 들려 드릴까요? 진가락이 손뼉을 치며 좋다고 했다. 향향 공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공작하반 철문관(鐵門關) 양안의 수양버들이 흐르는 물에 씻기네 높은 산봉우리에 무덤 하나 있으니 탑의이와 유화나가 누워 있다네. 그녀가 한마디를 노래하면 진가락이 낮은 소리로 한마디를 번역해 나갔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위구르 족의 한 전설이었다. 옛날 언기라는 왕국에 유화나라는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제상의 아들인 탑의이와 어려서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뒤에 제상이 직간을 했다가 국왕의 노여움을 사 처형이 되었다. 국왕은 공주에게 탑의이와 왕래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신의 아들인 흑영웅(黑英維)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그리하여 탑의이를 상자 속에 가두어 공작하에 띄워 축출했다. 공교롭게도 고거국(庫車國)의 공주가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를 구출했다. 고거국의 국왕은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탑의이를 부마로 삼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왕위까지 계승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탑의이는 이렇게 고집을 부렸다. 「폐하의 재물과 왕위, 게다가 아름다운 공주 때문에 유화나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끝끝내 국왕의 호의를 거부하다가 슬그머니 달아나 귀국하고 말았다. 이때 유화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병이 들어 누워 있었다. 국왕은 그녀를 달래기 위하여 가짜로 탑의이의 편지를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병세가 나아지자 국왕은 다시 그녀를 흑O웅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어느 백성이 그녀에게 보낸 축하 선물의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서 탑의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바로 이때 흑영웅이 나타났다. 탑이와 흑영웅이 결투를 했는데 흑영응이 죽었다. 국왕은 탑의이를 교수형에 처했다. 공주는 국왕에게 살려 달라고 울며 애걸을 했지만 화가 난 국왕이 그녀를 굶겨 죽였다. 많은 백성들이 이 연인들의 시체를 짊어지고 만가를 부르며 높은 산으로 올라가 장례를 치러 주었다. 향향 공주가 길고도 구슬픈 만가를 부를 때 낙빙과 주기는 뜻도 모르면서 흐느껴 울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옛 연인들의 불행한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위춘화가 위에서 껄껄 웃었다. 「빨리 와서 이걸 좀 보십시오.」 모두들 위로 올라갔다. 6, 7명의 청병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꼼짝 못하고 있었다. 원래 그들은 습격을 하려고 이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위춘화는 벌써부터 보고 있었지만 더 가까이 오면 활을 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향향 공주의 노랫소리에 취해 눈 덮인 땅 위에 엎드려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혹한이라 잠시만 지나면 몸에 쌓인 눈이 얼어 버렸다. 향향 공주의 노랫소리는 끝났지만 그들의 몸은 그 자리에 그냥 꽁꽁 얼어붙은 것이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내린 눈은 그 자리에 쌓여서 얼어붙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 몇 명의 청병은 완전히 눈과 얼음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때 군웅들도 추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심연이 화살을 가져다가 구덩이 속에 불을 피워 겨우 언 몸을 녹일 수가 있었다. 사흘째 아침이 되었는데도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 「모두들 위로 올라갑시다. 청병이 즉시 공격을 해 올지도 몰라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향향 공주만 빼 놓고 모두들 활에 시위를 먹이고 올라섰다. 이때 날은 훤히 밝아 있었다. 청병들은 어쩌다 몇 개의 화살만 쏠 뿐 집중적으로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서천굉은 이해할 수 없는 의혹에 사로잡혀 있다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다급히 심연을 향해 물었다. 「곽청동 소저가 자네에게 무슨 말을 물어 보던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청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구요. 그리고 또 철갑군도 직접 공격을 하더냐구요. 서천굉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우린 살 수가 있어요, 살 수가 있다구요.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다보았다. 「난 정말 바보야. 공연히 곽청동 소저만 의심하고 있었으니 정말 악인의 심보로구나. 그녀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 「왜 그러세요? 주기가 물었다. '청병의 철갑군이 공격해 왔다면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정말 이상하군요.」 「그들의 철갑군이 없다 하더라도 주위에 있는 이 몇천 명이 일제히 공격해 온다면 우리 8, 9명이 무슨 수로 당해 냅니까? 수천의 ,1마가 무력을 쓰지 않고 그냥 열을 지어 몰려와도 우리를 밟아 죽이고도 남을 겁니다. 또 그들이 지금껏 사격을 하지도 않고 사격하는 척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서천굉의 말을 듣고 모두들 확실히 그렇다고 수긍했다. 「그래요. 정말 그래요. 그들이 고의로 공격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위구르 족의 구원병을 유인해 오자는 수작인데 곽청동 소저가 이 점을 미리 알고 속아 주지 않는 것이지요.」 진가락이 그제야 깨닫고 자신 있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속지 않으니까 우리만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장진의 말에 진가락이 그렇지 않다고 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지금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진가락의 말에 주기가 웃었다. 「그래요. 저는 본래부터 그녀가 그렇게까지 못돼먹지는 않았다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새로운 힘이 생겼다. 여어동과 심연을 남겨 파수를 보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구덩이 안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여장부의 계략 홀륜 사형제는 장소중을 눌러 진가락이 달아날 수 있도록 도와준 뒤 계속 붙잡고 있다가 조혜가 나와 호통을 치자 그제야 풀어 주었다. 장소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손을 뒤로 돌려 일 장을 갈겼다. 재빠르고 매서운 솜씨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홀륜이호의 이가 반 이상 부러져 나갔다. 이호가 정신을 잃고 비틀비틀 쓰러지려고 했다. 사 형제는 화가 나서 일제히 장소중에게 달려들어 치고받았다. 조혜가 계속 호통을 치는 바람에 사형제 는 씩씩거리며 물러섰다. 장소중은 화가 날 대로 났다. 「대장군, 황상께서 나를 이곳으로 파견한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오. 첫째는 방금의 그 여자를 잡아 서울로 보내라는 분부였소.」 「장 형은 여기 온 적이 없는데 그 여자를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조혜가 물었다. 「목탁륜이 옥으로 만든 한 쌍의 병을 황상께 보내며 강화를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 병 위에 그려진 초상화가 바로 그 여자요. 황상께서 그 여자를 직접 한 번 보시고 싶다며 나보고 가서 처리하라고 하셨소. 그리고 복 통령(福統領)이 옥병을 가져다 내게 보여 주었지요. 그래서 그 여자를 알게 된 것입니다.」 조혜가 그러냐고 했다. 「그리고 방금 그 남자도 위구르 족이 아니라 바로 홍화회의 두목인 진가락이었소.」 '아, 그래요? 그런데 그자가 어떻게 여길 왔을까요? 조혜가 깜짝 놀라 물었다. '황상께서 그자에게 몇 가지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지요. 그러고는 나를 보고 그자가 그 물건을 입수하거든 뺏어 오라고 하셨소. 황상께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어쩌면 그자가 몸에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들 두 사람이 제 발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는 황상의 흥복이었소.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그냥 놓아 보냈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오.」 말을 하면서도 계속 자기 다리를 치며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조혜가 웃으며 말했다. '장 형, 그렇게 애석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들의 사자가 왔을 때 저는 벌써 병력을 고르게 배치하고 장수를 타당하게 파견해 놓았습니다. 사자를 미끼로 대어를 낚을 셈이지요. 기왕에 황상께서 이들 두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니 이거야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친병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덕도통(德都統)에게 그 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일러라.」 친병이 대답을 하고 나갔다. '이들 둘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니 위구르 족은 대대의 병력을 파견해서 구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오기만 하면 우리 철갑군이 양쪽에서 이렇게 덮쳐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는 두 팔을 벌렸다 중앙으로 합치며 웃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대장군의 기략과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시기에 황상께서 신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 그래서 이번 정벌의 임무도 대장군께 맡기셨고요. 장소중의 말에 조혜는 득의만면하여 껄껄 웃었다. 「대장군, 이번의 승전은 문제가 없으시겠군요. 그러나 난군 가운데 만약 황상께서 필요로 하는 이들 두 사람을 죽이거나 종적을 잃게 되면 틀림없이 치죄를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좋겠소? 조혜가 물었다. 「제 소간으로는 우선 이들 두 사람을 사로잡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포위망을 풀지 않고 있으면 그들의 주력을 끌어들이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요? 조혜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장 잡으러 간다면 그들이 우리의 계책을 미리 알게 될 테니 장 형,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사흘째 아침이 되자 조혜는 비로소 명령을 내렸다. 장소중은 1백명의 철갑군을 인솔하고 급히 떠났다. 그들이 구덩이 가까이 달려들자 그 안에서 10여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3명의 철갑군이 얼굴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철갑군의 공세가 주춤하자 장소중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 돌격해 들어갔다. 서천굉이 놀라 외쳤다. 「철갑군이 왔어요. 내 추측이 틀렸단 말인가? 「장소중 그 녀석이로구나. 위춘화가 소리를 질렀다. 여어동은 은사님의 참사를 생각하고 눈을 부릅뜬 채 달려나가 닥치는 대로 장소중을 후려갈겼다. 장소중은 험상궂게 생긴 중이 나타나 본문의 무공으로 맹공을 하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때 위춘화도 쌍구를 들고 대들었다. 장소중이 검을 들어 막았다. 그의 무공은 원래 이들 두 사람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위춘화가 워낙 결사적으로 대들었고, 여어동도 자기의 목숨을 내놓은 채 이 원수와 함께 죽겠다는 각오로 나왔다. 속담에 (한 사람이 결사적으로 나오면 만 사람이 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물며 지금은 두 사람이 대들고 있지 않은가? 세 사람이 구덩이 근처에서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수십 명의 철갑군이 벌써 구덩이로 공격해 왔다. 진가락-서천굉-장진-낙빙 -심연도 뛰어올라왔다. 장진의 낭아봉이 쩔그렁쩔그렁하며 달려들었지만 철갑군의 철갑이 단단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장창에 하마터면 찔릴 뻔하기까지 했다. 낙빙과 심연 -서천굉 세 사람도 겨우 자기 방어에만 급급할 뿐 적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문태래의 단도도 철갑에 맞으면 오히려 튀기기만 했다. 문태래가 대갈일성, 단도를 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한 철갑군을 향해 덮쳐 들었다. 그 병사가 창을 들어 찔렀지만 문태래가 끝을 잡고 당기는 바람에 (아이쿠!)하는 소리와 함께 장창을 놓쳤다. 문태래가 창끝을 되돌려 잡을 새도 없이 그냥 창자루로 그자의 얼굴을 찔렀다. 자루끝이 머리를 뚫고 나갔다. 미처 뽑을 겨를도 없는데 낙빙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조심하세요. 등뒤로 강한 바람이 엄습했다. 왼손을 꺾자 찔러 오던 장창이 옆구리 사이로 빠져 나가려 하자 얼른 잡았다. 뒤를 노렸던 청병이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문태래가 오른손을 들어 청병의 머리에 박힌 장창을 뽑았다. 몸을 돌이켜 세우며 그 청병의 얼굴을 노렸다. 장창이 그의 코를 찌르고 뒤통수를 뚫고 나갔다. 철갑군은 어떻게 해서든지 진가락과 향향 공주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방의 나머지 청병들처럼 그냥 공격하는 체하는 것이 아니었다. 용감하게 앞을 다투며 대들었다. 문태래의 용맹을 보고도 물러설 생각을 안했다. 문태래는 두 손에 각기 장창을 들고 사람들 틈으로 뚫고 들어갔다. 2개의 장창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삽시간에 9명의 철갑군이 그의 장창에 찔려 죽었다. 진가락은 병기를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 「심연 , 십가, 나를 따라오시오.」 이렇게 그들을 부르는데 철갑군 한 명이 장창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진가락이 몸을 옆으로 숙이자 장창이 허공을 찔렀다. 왼손에 쥐고 있던 말채찍을 휘둘러 그의 두 다리를 잡아 당겼다. 병사가 풀썩 쓰러졌다. 「심연, 이자의 투구를 벗기게.」 철갑군은 철갑을 입고 있어 몸놀림이 둔했다. 쓰러진 뒤에도 쉽게 일어나지를 못했다. 심연이 그의 투구를 벗겼다. 장진이 받아 들고 내려치자 머리가 터져 죽어 버렸다. 세 사람이 이렇게 당기고 치며 잠깐 동안에 한명의 적병을 때려 죽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문태래가 창을 비껴 들고 대들기만 하면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 버렸다. 이때 위춘화와 여어동은 장소중의 유운검술을 막아내지 못하고 밀리기만 했다. 이를 본 서천굉이 대들어 도왔다. 장소중은 혼자 남아 있음을 알고 쉭쉭 칼을 휘둘렀다. 세 사람을 뒤로 물러서게 하고 자신도 그 자리를 피했다. 문태래가 창을 들고 추격하자 청병들이 활을 쏘아 그를 엄호했다.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낙빙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람들이 쫓아와 뛰어들며 보니 주기가 산발을 한 채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한 자루의 단검을 들고 왼쪽으로 막았다 오른쪽으로 막았다 하며 4명의 철갑군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구덩이속이 좁아 장창은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넷이 모두 패도로 공격을 하는 중이었다. 군웅들이 화가 나서 일제히 달려들었다. 4명 가운데 하나는 낙빙의 단도에 찔려 죽었고, 또 하나는 위춘화의 쌍구에 맞아 죽었다. 나허지 두 사람은 문태래가 맡았다. 왼손으로는 한 명의 뒷덜미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또 하나의 투구를 잡아 꺾어 비트니 둘 다 목뼈가 부러졌다. 서천굉이 달려가 주기를 부축했다. 주기의 어깨와 팔, 두 곳에 칼에 맞은 상처가 보였다. 향향 공주가 옷을 찢어 그녀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조혜는 본래 우리를 여기 포위해 놓고 위구르의 대대를 유인해 들인 뒤에 복병을 출동시켜 공격을 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간사한 장소중이 총타주님을 보자 혹시 공을 뺏기지 않을까 해서 선제공격을 해 왔음에 틀림없어요.」 서천굉의 말을 진가락이 받았다. 「그가 퇴각했지만 결코 그냥 포기할 사람이 아니오.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나타날 것이오.」 「그럼 우리 빨리 함정을 팝시다. 우선 이놈부터 잡아 놓고 보지요. 서천굉의 제안이었다. 모두들 분발하여 서천굉이 지시하는 대로 구덩이 북쪽으로 언 땅 밑을 파들어갔다. 위는 한 자 이상 꽁꽁 얼어붙어 밑의 모래를 파내도 전연 표가 나지 않았다. 함정을 다판지 얼마되지 않아 장소중은 예측한대로 다시 갑군을 인솔하고 공격해 왔다. 그는 조혜 앞에서 큰소리도 쳤고 또 약한 체하기도 싫어 병력을 증강하지 않았다. 그냥 나머지 수십 명의 철갑군만 데리고 왔다. 이번에는 군사마다 손에 방패를 들고 군웅들의 화살 공세를 막아 가며 삽시간에 구덩이 앞으로 공격해 왔다. 진가락이 구덩이 밖으로 뛰어나가며 장소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한 번 승패를 겨루어 봅시다. 장소중은 그의 손에 병기가 없는 것을 보고 자기의 장검을 바닥에 버렸다. 「좋소. 오늘은 끝까지 승패를 겨루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합시다. 두 사람이 하나는 백화착권을, 다른 하나는 무극현공권을 쓰며 눈 위에서 한덩어리가 되어 싸웠다. 문태래,서천굉,장진,위춘화,여어동,심연 등 여섯 사람도 구덩이 밖으로 뛰어나와 접전을 했다. 진가락은 싸우면서 슬슬 함정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후퇴했다. 이제 장소중이 두 발짝만 더 쫓아오면 빠질 판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철갑군 한 명이 대들다 그만 함정에 빠졌다. 놀라 비명을 지르다 밑에서 망을 보고 있던 낙빙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장소중이 깜짝 놀라 혼자 중얼거렸다. 「큰일날 뻔했구나. 그 바람에 몸놀림이 다소 느려졌다. 진가락은 함정을 파 놓은 것이 발각되자 온몸으로 덮쳐 들며 그의 몸을 껴안고 힘껏 아래로 밀었다. 장소중도 두 발로 땅을 꽉 밤고 반대 방향으로 밀었다. 두 사람이 구덩이 가에서 팽팽하게 마주 붙어 하나는 빠져 나오겠다고 다른 하나는 밀어 넣겠다고 안간힘을 쓰느라 서로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2명의 철갑군이 대들며 장창으로 진가락을 찔렀다. 서천굉이 번개처럼 몸을 날리며 단괴를 들어 장창을 막고 몸을 숙여 진가락과 장소중을 번쩍 들어 함정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도 떼굴떼굴 굴러 그 자리를 피했다. 철갑군의 2자루의 장창이 눈 속으로 박혔다. 진가락과 장소중은 모래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며 동시에 손을 놓고 펄쩍 뛰었다. 낙빙이 오른손의 칼로 장소중을 향해 쪼갰다. 그러나 장소중이 공수입백인쿵부(空手入白刃功夫)를 펴 낙빙의 팔을 잡아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단도가 벌써 그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진가락이 그의 등뒤에서 발을 들어 걷어찼다. 장소중은 낙빙을 포기하고 돌아서며 진가락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진가락이 피하며 두 손가락으로 그의 다리에 있는 음시혈(陰市穴)을 찔렀다. 장소중이 오른쪽 다리를 움츠리는데 낙빙이 세 자루의 비도 (飛刀)를 던졌다. 모래 구덩이 속이 좁아 몸을 돌이킬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장소중은 털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날아오는 비도를 하나하나 피했다. 「총타주님, 이 칼을 받으세요.」 낙빙이 외치며 장도(長刀)를 그에게 던졌다. 진가락이 칼자루를 잡고 금강복호도법을 쓰며 장소중의 단도와 어우러져 맹렬하게 싸웠다. 그의 무공은 본래 잡다한 편이라 갖가지의 병기를 다 쓸 줄 알았다. 장소중처럼 검술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10여 합을 싸우는 동안 장소중은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왼손의 권술을 섞어 쓰며 겨우겨우 막아낼 수가 있었다. 낙빙은 자기의 소유인 이 한 쌍의 원앙도 가운데 장도와 단도에 대한 편애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장도가 이겨 주고 단도가 패해 주기를 바랐다. 주기는 칼을 들고 향향 공주 앞을 막아 주고 있었다. 장도와 단도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쨍그렁쨍그렁하더니 장소중이 갑자기 구덩이 밖으로 단도를 집어 던졌다. 내 맨손으로 그대의 병기를 받으리다.」 좌권과 우장으로 진가락의 반짝이는 도광 속을 헤치며 파고들었다. 「이 칼을 받으세오. 진가락이 낙빙을 향해 이렇게 말하며 장도를 던져 그녀에게 되돌려 주고 왼손의 손가락으로 적의 곡택혈을 찔렀다. 모래 구덩이 속은 좁아 몸을 돌리기에도 불편했다. 그러니 달아나지도 물러설 수도 없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평생 배운 무공으로 결사적인 대결을 하고 있었다. 수십 초 후에는 점점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가락의 백화착권이 비록 정밀하고 교묘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장소중의 공력의 심오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내력 또한 그만 못했다.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공격보다는 방어가 더 많아졌다. 낙빙은 그들을 지켜 보며 애를 태웠다. 두 사람이 긴박하게 싸우는 것을 보며 돕고는 싶었지만 손을 쓸 재간이 없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진가락이 열세에 몰렸다. 장소중이 발을 들어 걷어차니 진가락이 왼쪽으로 살짝 피했다. 장소중이 좌장을 뒤집어 공격하는데 그 기세가 마치 바람과 같았다. 「철담을 받아라. 갑자기 구덩이 위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장소중이 갑자기 좌장을 거두고 머리를 가렸다. 과연 거무스름한 철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장소중은 주중영의 철담에 골탕을 먹은 일이 있어 마음이 섬뜩했다. (이 영감이 어째서 왔을까? 높은 곳에서 아래로 던지니 더욱 대단할 텐데.) 받을수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어 뒤로 몸을 뽑아 3자 정도 물러섰다. 몸이 모래 구덩이의 벽에 꽝 부딪치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철담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 서천굉이 뛰어내려왔다. 원래 주중영이 그를 수양아들로 맞이하던 당일 무림에 명성을 날리던 철담의 절기를 그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동안 서천굉은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언제나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해 왔다. 그러다 오늘 처음 적을 만나 시험해 본 것이었다. 일격이 적중되지는 않았지만 장인의 명성 때문에 장소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장소중이 두 발로 땅을 찍으며 몸을 솟구쳐 구덩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일 장이 쪼개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기세가 막강하여 평생 당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내습하는 장력을 무위로 돌렸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바람에 구덩이 밖으로 뛰어 나가지 못하고 다시 떨어져 내려왔다. (이건 또 누군가? 이 사람의 무공이 내 아래가 아니로구나.) 막 발이 땅에 닿는데 누군가가 쫓아 내려왔다. '이 간사한 녀석아,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목소리가 우레처럼 우렁차다. 키가 크고 몸집이 우람한 분뢰수 문태래였다. 위춘화 등이 벌써 철갑군을 패퇴시키고 따라 뛰어내려왔다. 문태래와 장소중은 서로 무섭게 노려보았다. 철담장에서 사로잡힌 치욕과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당한 시달림에 문태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랑이 같은 눈은 당장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대갈일성, 공격 자세는 평생의 절기인 벽력장으로 나왔다. 쉭쉭 내뻗는 수장은 번개보다 빨랐고 우레 소리보다 컸다. 이번의 악전고투는 방금 있었던 진가락과의 대결보다 더욱 치열했다. 향향 공주는 문태래가 고함 소리와 함께 바람이나 번개처럼 장소중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서워 떨었다. 진가락이 두려움에 떠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벽에 기대어 다가가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향향 공주는 그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무어라 하고 싶은 눈치였다. 진가락은 그녀가 방금 싸우느라 얼마나 피곤 하느냐고 하는 것 같아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향향 공주는 옷소매로 그의 얼굴의 땀과 더러워진 자국을 말끔히 닦아 주었다. 진가락은 3개의 바둑돌을 찾아 손에 쥐었다. 문태래가 위험한 곤경에 빠지면 구출할 태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손에 바둑돌을 쥐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바둑을 두는 긴박한 기국과 같이 번잡하고 복잡하구나. 중간에서는 문 사가와 장소중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로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고 청병들은 또 우리들의 밖에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거야. 곽청동 소저는 또 그 밖에서 호시탐탐 우리를 구출해 내려고 하고 있고, 또 하나의 밖에서는 청병의 대군이 전체를 포위하고 있는 셈이지. 이런 국세에서는 한 수만 잘못 놓아도 전부 몰살하고 마는 법이다.) 군응들은 문태래의 만강의 분노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번에는 분명 자기 손으로 복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들 한쪽에서 관전하며 장소중의 도주만 막으려 할 뿐 아무도 직접 나서서 도울 생각을 안했다. 모두들 문태래의 무공이 탁월함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을 굳게 믿었다. 하나는 맹공을, 다른 하나는 방어를 하는 것이 마치 넓은 바다의 거대한 풍랑과 바위의 싸움과 같았다. 거센 파도가 계속해서 바위를 친다. 그러나 바위는 시종 요지부동이다. 파도가 치고 지나면 어쩌다 바위는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진가락은 신중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나서서 돕는다면 사가가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넷째형수가 돕는다면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래서 낙빙을 항해 그런 눈짓을 보냈다. 낙빙이 눈치를 채고 비도를 던져 도울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육박을 하고 있는데, 잘못하다가는 남편이 다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다. '총타주님이 도와 주세요. 저는 안되겠어요.」 진가락은 바로 그녀의 이 말을 기다렸던 것이다. 칙칙칙 3개의 바둑돌이 장소중의 요혈을 겨냥하고 날았다. 장소중이 번쩍번쩍 피하는 틈을 노리고 문태래가 직격을 퍼부었다. 이제 막 승산이 보이는데 갑자기 위에서 함성이 들리며 말 달리는 소리,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구덩이를 항해 달려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진 공자, 객사려, 어디 있소? '아빠, 아빠, 우리 여기 있어요. 향향 공주가 반가움에 목소리가 떨렸다. '구원병이 왔다. 모두들 이 간사한 녀석을 먼저 죽이고 올라갑시다. 진가락이 외쳤다. 사람들이 병기를 함께 들고 일제히 장소중을 향해 공격했다. 장소중이 갑자기 쌍장을 바람처럼 날리며 향향 공주의 뒤를 공격했다. 사람들이 놀라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대들어 그녀의 위기를 막아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장소중의 양동작전이었던 것이었다. 급히 몸을 움츠리며 모래를 한 줌 쥐고 뿌렸다. 구덩이 안에 모래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눈을 감는 순간 장소중은 벌써 구덩이 위로 뛰어 올라선 것이었다. 그의 코방귀 같은 (흥!)소리가 들렸다. 서천굉이 던진 철담에 엉덩이를 맞았지만 결국 그는 달아나고야 말았다. 군웅들이 분분히 뛰어올라 추격을 하는데 목탁륜이 장도를 휘두르며 앞장을 서서 쫓아가고 위구르 전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청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막았다. 장소중의 뒷모습이 사람들 틈에서 몇 번 보이다 사라졌다. 문태래가 장창을 렛어 들고 백마에 올라 적진을 뚫고 추격해 들어가려고 했지만 낙빙이 그를 만류했다. 목탁륜이 인솔한 흑기대가 비록 노약자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두들 용감했다. 방패를 들고 철통같이 원수를 호위했다. 향향 공주가 아버지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목탁륜은 얼굴과 수염과 칼에 온통 선혈이 묻어 있었다. 「아빠! 그녀가 품속으로 파고들자 목탁륜이 얼싸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무서워할 것 없다. 애비가 너를 구하러 왔다.」 서천굉은 말 등에 서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동쪽에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고 있었다. 눈 덮인 땅 위에서 먼지가 일어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철갑군의 공격이다. 「목 노영웅님, 우리 빨리 서쪽의 고지로 퇴각해야겠습니다.」 목탁륜은 그의 기지를 믿었다. 지난번 코란 경도 바로 그가 꾀를 써서 찾아 준 것이다. 즉시 서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청병이 뒤를 추격했다. 한바탕 달리고 있는데 서쪽의 외딴 방향에서 일표의 청병이 돌격해 그들을 중간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목탁륜과 문태래는 말 머리를 나란히 하여 달리고 있다가 고함을 지르며 뚫고 나갔다. 청병들이 한 차례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목탁륜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동아의 말이 과연 옳았어. 방금까지도 나는 그애를 원망하고 있었지. 지금쯤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까? 이번 싸움은 십중팔구 좋지 않겠구나.)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인솔하고 높지막한 모래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갔다. 지세에 의지하여 고수하다가 기회를 보아 탈출할 예정이었다. 위구르 사람들이 높은 지형을 차지하고 대처하자 청병들이 일시에 올라올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곽청동은 군사들을 인솔하고 적진과 10리쯤 떨어진 장소에 주둔했다. 이날 정오 각 대의 대장과 전령을 맡은 기병들이 속속 도착하여 명령대로 처리했다고 보고했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수고를 하셨군요.」 곽청동이 이렇게 말하고 영전을 꺼내 들었다. '청기 제2대 대장은 5백 명의 형제들을 인솔하고 혹수하 남안에 가서 고수하며 청병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상대방이 대군으로 공격을 하더라도 그들과 직접 대항하지 말고 시간만 지연시키면 됩니다. 한 명의 청병이라도 강을 건넌다면 나를 만나러 올 생각도 마세요. 그 대장이 명령을 받고 갔다. 곽청동이 또 말을 꺼냈다. '백기 제1대 대장은 본부의 인마를 인솔하고 청병을 일단 서쪽으로 유인한 뒤에 달아나되 가는 도중 접전을 하더라도 패해야지 이겨서는 아니 됩니다. 사막 안으로 멀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좋겠어요.」 그 대장은 평소 사납고 또 이기기를 좋아하는 성미였다. '우리 위구르 사람은 승전을 할 줄만 아는데 어찌 패전을 하란 말씀입니까?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이건 내 명령이에요. 지금 데리고 다니는 4천여 마리의 소와 양을 계속 버리며 달아나세요. 그래야만 그들이 그걸 잡느라 소란을 피울 테니까요.」 「아니, 무엇 때문에 우리의 가축을 그놈들에게 줍니까? 저는 죽어도 그렇게 못합니다. 곽청동은 그 작은 입술을 꼭 깨물고 있다가 말했다. 「내 명령을 거역하시겠어요? 그 대장은 칼을 높이 들고 외쳤다. 「저를 보고 승전을 거두라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는 싸움을 하라면 죽을망정 거역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고 승전을 하자고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에요. 패퇴하다가 반격을 하면 돼요.」 대장은 눈알을 붉히며 대들었다. 「소저의 아버지까지도 믿지 못하는 그런 개소리를 가지고 나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요? 내 그래 아가씨의 속마음을 모를 줄 아세요? 우리 보고 사방으로 달아나며 가축을 버리라니 그래 놓고는 향향 공주를 구하러 가지 않을 셈이 뻔한데도 그래 아가씨의 명령을 따르라니 어림도 없는 수작은 집어치우시오.」 「이자를 잡아라. 곽청동이 벌컥 소리를 지르자 4명의 친병이 대들어 그의 두 팔을 잡았다. 그 대장은 저항을 하지 않고 냉소만 띠었다. 「만주의 병사들이 우리를 유린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군이 일심 일체가 되어야만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명령에 따를 거요, 안 따를 거요. 곽청동이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물었다. 「안 듣겠습니다. 그래, 나를 어쩔 테요? 그 대장은 계속 버티었다. 「내다 죽여라. 곽청동의 명령이었다. 그 대장은 스스로 용맹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곽청동이 감히 어떻게 자기를 벌하랴 싶었던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금방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친병들이 그를 장막 밖으로 밀고 나가 단칼에 그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곽청동은 그의 머리를 군중에게 보이라고 명령했다. 그녀의 위엄에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곽청동은 백기 제1대의 부대장을 그 자리에서 대장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청병을 사막으로 유인해 들인 뒤에 동쪽에 봉화가 일어나거든 즉시 추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신임 대장이 명령을 받고 떠났다. 곽청동이 나머지 각 대에도 임무를 부여했다. 모두들 동쪽에 있는 넓은 진창에 집결하기로 했다. 그녀는 명령을 다 내리자 혼자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낮은 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만능의 주여, 성도(聖徒)가 득승(得勝)하고 침입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지금 아버지도 오빠도 저를 믿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하까지도 저를 불신하고 있습니다. 재 명령을 듣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했습니다. 만능의 주여, 저를 보우하사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해 주시고 아버지와 여동생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 주옵소서. 원하옵건대, 진 공자와 동생이 영원히 서로 사랑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주께서 제 동생을 그토록 예쁘게 만들어 주셨으니 특별히 사랑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끝까지 그녀를 사랑해 주소서.」 기도를 끝내고 돌아온 그녀는 말에 올라타고 칼을 뽑아 들었다. '흑기 제1,제2,양 대는 나를 따라 나서고 나머지 부대들은 각기 임무대로 현지에 가서 지키도록 하시오.」 목탁륜과 진가락 등은 모래 언덕에 갇혀 있었다. 청병들이 두 차례나 돌격을 했지만 용감하게 막아냈다. 모래 언덕 주위에는 시체가 쌓이고 쌍방간의 손실 또한 컸다. 점심때가 지나자 갑자기 청병의 진용이 움직이더니 일표 군마가 돌격해 왔다. 눈꽃이 어지럽게 날리는 가운데 앞장 선 사람이 노란 옷을 입고 장검을 휘두르는데, 머리에 비취빛 깃털을 꽂은 곽청동 이었다. 「돌격. 목탁륜이 외치며 중군을 인솔하고 쏜살같이 아래를 향해 충살해 내려갔다. 양면의 공격을 받은 청병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4대의 흑기군이 한곳에 모였다. 향향 공주가 말을 달려나가 언니와 얼싸안았다. 과청동이 동생의 손을 잡았다. 「흑기 3대 대장은 속히 부대를 인솔하고 서쪽으로 퇴각하여 백기 제1대와 합류한 뒤에 백기 제1대 대장의 명령에 따르세요.」 청동의 명령을 받은 대장이 달려나갔다. 이 부대가 타고 있는 말은 특선된 쾌마였다. 멀리서 붉은 기를 나부끼며 청정의 청홍기가 정병이 그들의 뒤를 추격했다. 곽청동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잘됐다. 흑기 제1대 대장은 섭이강성 안으로 퇴각하여 제 오빠의 명령을 들으시오. 흑기 제2대 대장은 흑수하 남안으로 퇴각하세요. 그래서 그쪽에 있는 청기 제2대 대장과 합류한 뒤 그의 명령에 따르시오.」 양대의 흑기병이 또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청병의 정백(正白) 양황 양 기가 각기 나뉘어 그들을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 동쪽으로 돌격 . 곽청동이 외쳤다. 3백 명의 근위친병들이 장도를 휘두르며 수장을 호위한 체 앞장서 길을 뚫었다.목탁륜-향향 공주-진가락등은 여러 사람과 흑기 제4대 인마가 질풍처럼 동쪽을 향해 달렸다. 조혜가 직접 통솔하는 철갑군의 양익이 이들을 포위하려고 좁혀 왔다. 이들은 만주의 정람기(正藍旗) 정병으로, 정부도통은 손에 장창과 대극을 들고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위구르 전사 수백 명이 후로를 차단하기 위해 싸우며 후퇴를 했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모두 청병에게 잡혀 사살당했다. 조혜는 너무나 좋아서 곽청동 옆에 있는 신윌대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저 기를 뺏는 자에게 은 백 냥을 상으로 주리라.」 이 말을 들은 철갑군이 서로 뒤질세라 앞을 다투며 추적을 했다. 흑기 제4대가 타고 있는 말도 모두 정선된 양마였다. 그래서 철갑군이 금방 쫓지를 못했다. 3, 40리를 달리는 동안 위구르 전사들이 탄 말 가운데 몇 마리가 힘이 빠지며 뒤로 처지는 바람에 몇 사람이 청병에 의해 또 살해되었다. 조혜는 살해된 사람들이 노인 아 니면 소년인 것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들의 주장 신변에는 정병이 없다. 힘껏 쫓아가라. 다시 7, 8리를 쫓아가니 위구르의 대오가 더욱 산란해졌다. 신월 대독이 큰 모래언덕 위에서 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조혜가 타고 있는 말은 대완의 양마였다. 손에 든 대도를 휘두르며 부대를 이끌고 돌격을 했다. 많은 친병들이 앞뒤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곽청동 등은 청군의 대병이 돌격해 오자 모래언덕의 다른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조혜가 모래언덕으로 올라와 앞을 바라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 혼비백산했다. 온몸이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남쪽에는 1대 1대의 위구르 전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방형(方形)의 진을 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바라다보니 청기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조혜는 손에 맥이 풀려 그만 대도를 놓치고 말았다. 온몸에 오한이 엄습했다. (위구르 놈들이 교활하기 짝이 없구나. 원래 대대의 인마를 여기 집결시키고 기다렸구나.) 북쪽을 바라다보니 백기를 나부끼며 여러 대의 위구르 병사들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더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후미가 선봉이 되어 속히 후퇴하라. 다급히 외치자 친병이 명령을 전달하러 내려갔다. 청병들은 즉시 어지러워졌다. 위구르 전사들의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날았다. 청병은 본래 이들의 숫자보다 몇 배나 많았다. 그러나 각기 나뉘어 적전을 하느라 여기까지 쫓아온 사람은 겨우 1만 명의 철갑군에 불과했다. 그러나 위구르의 주력은 모두 이곳에 집결되어 있었다. 이래서 금방 강약의 판도가 달라졌다. 서쪽에서 또 2대의 위구르 전사들이 공격을 해 왔다. 조혜가 보니 서 남-북,삼면 모두가 적이었다. 다만 동쪽에 틈이 보였다. 「대대는 동쪽으로 뚫고 나가라.」 조혜가 이렇게 외치고 직접 친병들을 데리고 후로를 차단했다. 3면의 위구르 전사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닥쳐왔다. 청병의 대대가 동쪽의 틈으로 벌떼처럼 몰려 나갔다. 혼란 가운데 앞서 가던 철갑군이 갑자기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기병 한 명이 조혜의 면전으로 달려오며 외쳤다. 「대장군, 큰일났습니다. 앞은 넓은 진창이에요.」 1천여 명의 철갑병 인마가 벌써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원래 넓은 사막에 있는 하류는 물이 바다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사막 안에서 우묵한 늪에 모였다가 점차 마르면 그것이 진창으로 변하는 법이다. 이 넓은 진창은 사방이 10여 리, 부드러운 진흙의 깊이가 수십 장에 달한다. 미꾸라지나 파충류가 대부분이요, 사람이나 짐승은 얼씬할 수도 없는 곳이다. 큰 눈이 내려 덮이면 아무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당지의 토착민이 아니면 알 도리가 없었다. 곽청동의 복병이 이런 천연의 지세를 이용하기 위해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혜가 승리에 급급해 쫓아오다가 마침내 천연의 함정에 뛰어든 똘이 되고 말았다. 진가락 등은 모래언덕 위에 선 채 관전을 하고 있었다. 진창에 빠져 들어가는 청병의 숫자가 가면 갈수록 많아졌다. 후미에 섰던 인마가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위구르 전사들이 벌써 깊은 도랑을 파 놓아 말이 뛰어넘기가 어려웠다. 철갑군은 삼면에서 공격을 받아 몰리다가 서로 짓밟아 가며 하나하나 자신들도 모르게 진창에 빠져 들어갔다. 진흙이 천천히 발 위에까지 올라오다가 다음에는 종아리, 그 다음에는 무릎에서 다시 허리까지 차 올라왔다. 무수한 청병들이 넓은 진창에서 지르는 참혹한 비명은 듣는 이의 고통을 더해 줄 뿐이었다. 진흙이 목에 차 오르며 입을 막으면 그제야 비명을 그쳤다. 두 손을 마지막으로 허우적거리다 잠시 후에는 완전히 빠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1만여 명의 위구르 전사들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의 소매를 높이 들고 있었다. 도광(刀光)과 백설이 어우러져 번쩍번쩍 비쳤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조용히 깊은 고랑 밖에 모여 감시만 하고 있었다. 양대의 정병은 쉬지 않고 철갑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청병은 싸울수록 적어져 반 시간도 채 못 돼 1만여 명의 정람기 철갑군이 모두 넓은 진창에 빠졌다. 조혜는 1백여 명의 청병의 결사적인 호위 아래 혈로를 뚫고 겨우 달아났다. 향향 공주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병사와 말들이 넓은 진창에서 서로 껴안고 뒹굴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몸부림치며 죽어 가는 모양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목탁륜은 너무나 좋아 큰 소리로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곽청동을 바라다보았다. 「동아야, 내 방금 말을 잘못했으니 나무라지 말거라. 정말 내 성미가 너무 급해서,,,,,, 이 애비가 잘못했다.」 곽청동은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심연은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머리를 두 번 조아렸다. 「소인 죽어 마땅하옵니다. 소저께서 다른 지략과 계책이 있는 것도 모르고 철없이 대들었습니다. 대인은 소인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으니,,,,,,.」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곽청동은 고삐를 낚워채고 껀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 버렸다. 머쓱해진 심연을 보고 장진이 웃었다. 「됐네. 이따가 총타주님께 부탁해서 대신 사과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세. 그는 기뻐서 손을 휘두르고 발을 굴러 춤을 추며 껄껄 웃어댔다. 「그런데 내 한 가지 모르겠단 말야. 무엇 때문에 그녀가 청병 모두를 이 넓은 진창으로 유인해 들이지 않았을까?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장진의 말을 서천굉이 받았다. 「눈앞에 있는 위구르 병사는 청병보다 그 숫자가 많아요. 많기 때문에 그나마 그들을 진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청병이 모두 이곳으로 왔다면, 그리고 그들이 일제히 밖으로 뚫고 도망을 치려고 했다면 무슨 재간으로 그들을 막아냅니까? 「맞는 말이오. 그런데 방금 우리 모두 그것도 모르고 그녀만 원망하고 있었군그래.」 이때 대부분의 청병은 진창에 빠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머지 극소수의 인마는 반신이 빠져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손을 휘저으며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방에 그들의 비참한 고함 소리만 가득했다. 또 한참 시간이 지나는 사이 그들의 외치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다가 마침내 조용해지고 말았다. 이 넓은 진창이 1만여 명의 철갑군을 깨끗이 집어삼킨 것이었다. 인마며 도창(刀槍) , 철갑, 그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몇백 개의 깃발이 진창 위에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곽청동이 다시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대대는 서쪽으로 가 흑수하 남안에 집결하시오.」 대대는 명령을 받고 즉시 서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노상에서 진가락과 목탁륜은 헤어진 뒤에 있었던 일을 서로 들려 주었다. 목탁륜은 은근히 불안했다. 두 딸은 똑같이 자기의 금지옥엽이다. 그런데 이들이 한결같이 이 한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회교의 법도에 의한다면 남자는 4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다. 그러나 진가락은 결코 청진교도가 아니다. 한인은 정실 아내는 하나만 취할 수 있고 나머지는 첩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원만하게 수습한단 말인가? (우선 청병이나 내몰고 다시 생각할 일이었다. 동아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객사려는 심지가 곱다. 게다가 둘이 우애도 돈독하니 무슨 방법이 있겠지.) 대대는 저녁 무렵 흑수하 남안에 당도했다. 기병 하나가 헐떡 거리며 허둥지둥 달려와 이렇게 보고했다. 「청병의 공격이 너무나 치열합니다. 청기 2대 대장은 전사했고 흑기 2대 대장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양대의 형제 가운데 부상자와 사망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청기 2대 부대장을 보고 독전을 하라고 하되 일보도 후퇴하면 안 된다고 일러라.」 곽청동의 말을 들은 그 기병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갔다. 「우리가 가서 돕기로 하자.」 목탁륜의 말에 곽청동이 아니라고 했다. 「안돼요. 그리고 친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군은 여기서 휴식을 취한다. 불을 피우지도 말 것이며 소리를 질러서도 안된다. 명령이 전달되었다. 1만여 명의 전사들이 캄캄한 가운데 묵묵히 휴식을 취했다. 멀리서 흑수하의 물 소리와 함께 청병과 위구르 병사들의 살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기병 한 명이 또 달려와 보고를 했다. 「청기 2대 부대장이 전사했으며 형제들이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곽청동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청기 1대 대장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가서 지원하세요. 그곳의 지휘도 맡으세요.」 그 대장이 장도를 높이 들어 대답하고 부대와 함께 떠났다. 「곽청동 소저, 저도 나가 싸우면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방금 수고를 하셨으니 잠시 더 쉬세요.」 장진은 그녀가 대대를 지휘하는 위풍이 너무도 늠름한 것을 보고 다시 더 말하지 않고 물러섰다. 청기 3대가 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쌍방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후 곽청동은 전사들의 전력이 회복된 것을 보고 외쳤다. 「청기 각 대는 동쪽에 있는 모래언덕 뒤에 가서 매복하시오. 백기대와 카자흐 , 몽골 각 대는 서쪽에 매복하시구요.」 그리고 장검을 휘둘렀다. 「자, 모두들 갑시다. 사람들은 친병의 옹호를 받으며 앞을 향해 달렸다. 앞으로 갈수록 함성이 더 크게 들렸다. 가까이 접근하자 금속성 부딪치는 소리가 쨍그렁쨍그렁 울렸다. 위구르 전사들이 용감하게 흑수하 지류 위에 있는 몇 개의 목교를 지키고 있었다. 양금기 청병들이 앞에서 나가면 뒤에서 따라오며 목교를 뺏기 위해 결사적으로 대들고 있었다. 「후퇴하시오. 곽청동이 외쳤다. 다리를 사수하고 있던 전사들이 양쪽으로 철수하자 수천 명의 철갑군이 벌떼처럼 우르르 다리를 건넜다. 청군이 반쯤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본 곽청동이 다시 외쳤다. 「나무를 잡아당겨요. 수백 명의 위구르 사람들이 벌써부터 말들을 언덕 아래로 끌어다 숨겨 놓은 후 다시 다리 위의 나무 들보를 느슨하게 해체해 놓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이상이 없는 멀정한 다리였다. 그리고 굵은 밧줄을 이용해 이들 들보를 말에 묶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곽청동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1만여 필의 말이 있는 힘을 다해 앞을 향해 달렸다. 우지끈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들보가 뜯어지며 다리 위에 있던 수백 명의 철갑군이 강물에 빠졌다. 청병은 즉시 양쪽으로 단절되어 강을 끼고 서로 바라다볼 뿐 구할 길이 없게 되었다. 곽청동이 영기를 휘두르자 매복하고 있던 대오가 나타나 충살을 감행했다. 청병은 평소 나름대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혼란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참령 , 좌령(佐領)의 지휘에 따라 한쪽에 집결하여 진세를 폈다. 위구르의 전사들이 청병의 진세 앞 1백여 보 되는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곽청동의 영기가 다시 한 번 휘날렸다. 꽝 우르릉, 황 우르룽, 굉음이 쉬지 않고 터졌다.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을 것만 같았다. 검은 연기가 가득한 가운데 여기저기 청병들의 발밑에서 폭약이 폭발했다. 피와 살이 범벅이 되어 날며 대오가 금방 어지럽게 흩어졌다. 맞은편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날아와 피할 곳이 없자 분분히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청병이 몸에 입은 철갑은 너무 무거웠다. 물에 뛰어드는 대로 금방 가라앉았다. 나머지 병사들의 참패는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는 위구르의 대군에 의해 완전히 섬멸되고 말았다. 끝도 없이 하얗게 횐 눈이 덮인 언덕 위의 이곳저곳에 시체와 병기, 깃발과 방패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맞은편에 있던 청병들은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 섭이강성을 향해 달아나기에 바빴다. 「강을 건너 추격하시오. 곽청동의 명령에 병사들이 다시 목교를 일으켜 세우고 대군이 섭이강성을 향해 추격하기 시작했다. 섭이강성에 사는 주민은 벌써 소개(疎開)를 해 텅 비어 있었다. 곽아이는 정백기 청병이 공격을 해 오자 여동생이 사전에 당부한 대로 저항을 하는 체하다가 즉시 대대를 인솔하고 후퇴를 했다. 얼마 후에는 흑수하에서 괴멸 도주한 양황기 청병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성 안의 대군과 합류했다. 이제 막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주장인 조혜가 1백여 명의 패잔병을 데리고 왔다. 조혜는 양황기의 정병까지도 대패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또 부하가 들어와 수백 명의 관병이 우물물을 마시고 중독되어 죽었다는 보고를 했다. 조혜는 병사들을 보고 성 밖에 나가 물을 길어 오라고 했다. 막 휴식을 취할까 하고 있는데 온 하늘이 붉게 타오르며 성 안의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친병들이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있다는 급보를 전해 왔다. 원래 이곳은 석유가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땅만 파면 석유가 나왔다. 곽청동은 벌써부터 각 처의 민가에 석유를 저장해 놓으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다. 소수의 복병이 대기하고 있다가 일시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온 성 안이 금방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로로 변했다. 조혜는 친병의 호위를 받으며 연기와 불길을 뚫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성 안의 청병들이 갈팡질팡 자기 편끼리 서로 짓밟았다. 친병들이 병졸 틈에서 소경 몽등이 휘두르듯 칼을 휘둘러 가며 혈로를 뚫었다. 서문으로 달려가니 맞은편에 있던 대대의 철갑군이 몰려와 성문이 이미 적에 의해 봉쇄되어 뚫고 나갈 수가 없다는 보고를 했다. 조혜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는 불길이 너무나 거셌다. 철갑이 일단 뜨거워지면 견딜 재간이 없었다. 청병들이 철갑을 벗어 버리고 우왕좌왕했다. 섭이강성 안은 인마가 북적대고 함성이 하늘을 흔들었다. 혼란 가운데 소대의 인마가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대장군은 어디 계시오? 「여기 계십니다.」 조혜의 친병이 대답했다. 앞장 선 사람이 바람처럼 달려오는데 바로 화이대였다. '동문에는 적이 비교적 적습니다. 우리 그쪽으로 뚫고 나가지요. 조혜는 위급한 상황하에서도 여전히 침착했다. 장사들을 데리고 동문을 향해 돌격했다. 적의 화살이 비오듯 날아왔다. 청병은 철갑을 벗어 버렸기 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했다. 몇 차례나 뚫고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성 안의 세찬 불길에 벌써 수천 명의 청병이 타 죽었다. 그 누린내가 견딜 수 없이 역겹고 울음소리는 온 성 안에 가득 찼다. 위급한 가운데 장소중은 손에 장검을 든 채 일대의 청병을 인솔하고 달려와 안팎으로 협공을 해 조혜를 구출해 갔다. 곽청동은 고지에 서서 이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애석하다, 애석해. 목탁륜이 한탄을 했다. 「청기 4대 대장은 본대를 인솔하고 나가 지원하되 동문을 철통같이 지키세오. 곽청동의 명령을 받은 대장이 부대를 인솔하고 나갔다. 조혜가 달아나자 성 안의 청병들은 지휘자가 없어 더욱 당황했다. 사대문은 적에 의해 몇 겹으로 봉쇄되어 갈팡질팡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들 이 큰 화로 안에서 타 죽고 말았다. 「봉화를 올리시오. 곽청동의 명령이 떨어지자 친병들이 벌써부터 마련해 놓았던 큰 무더기의 이리 똥에 불을 붙였다. 검은 연기가 기둥처럼 하늘로 올라갔다. 원래 이리의 똥을 태우는 연기는 짙어 사막에서는 수십 리 에서도 능히 볼 수가 있었다. 「저건 왜 태우지요? 주기가 서천굉을 보고 물었다. 「저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연락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서쪽 20여 리 밖에서도 한줄기의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저쪽의 더 먼 서쪽에 있는 사람이 이 연기를 보고 그쪽에서도 이리의 똥에 불을 지를 것이오. 이렇게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전달해 나가다 보면 삽시간에 수백 리 밖까지 연락을 취할 수가 있다오. 서천굉의 설명에 주기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주 멋진 방법 이로군요.」 위구르 사람들은 세 차례나 대승을 거두었다. 섬멸한 청병의 벙병만도 3만여 명에 달했다. 수천 수만의 전사들이 서로 얼싸안고 섭이강성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곽청동은 각 대의 대장들을 집합시켰다. 「각 대의 인마는 예정된 지점에 가서 주둔하고 있다가 저녁에 사람마다 각자 열 무더기의 불을 피워야 해요. 무더기의 불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겠습니다.」 세 장수의 곤고(困苦) 청병의 정홍기 정병 1만여 명은 도통(都統) 덕악의 통솔 아래 서쪽으로 위구르의 흑기 제3대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었다. 흑기대가 타고 있는 말은 특선된 준마로 사막 가운데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덕악은 조혜의 명령을 받들어 반드시 흑기대를 쫓아가 단번에 섬멸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꼬리를 물고 바짝 따라 붙었다. 양군의 인마가 일으키는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말발굽 소리는 마치 우레와 같았다. 이렇게 수십 리를 달리는데 옆에서 갑자기 수천 마리의 소와 양이 몰려들었다. 청병들은 반기며 분분히 대들어 소와 양을 포살하여 한바탕 포식을 했다. 이 바람에 추격하던 속도가 다소 늦추어졌다. 흑기 3대는 얼마 후에 백기 1대와 합류했다. 그런데도 청병과 적전함이 없이 계속 달아나기만 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멀리 동쪽에서 일어나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취우황삼이 벌써 대승을 거두었으니 우리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백기 1대 대장이 이렇게 외쳤다. 전사들은 사기충천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청병은 그들이 말머리를 돌리자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이들을 공격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접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멀찌감치 돌아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네놈들이 하늘 끝까지 달아나면 우리도 하늘 끝까지 쫓아가리라. 덕악의 말이었다. 양대의 위구르 병사들은 밤을 낮삼아 달아나고 청병의 정홍기 철갑군도 바짝 그 뒤를 따랐다. 도통인 덕악은 공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추격을 하느라 도중에서 말들이 계속 쓰러져 죽었다. 병사들은 자기가 탄 말이 죽으면 걸어서 그 뒤를 따라오고, 말을 탄 병사들은 앞장을 서서 달렸다. 한밤중에 달리고 있는데 앞장을 섰던 몇 명의 군사들이 되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대장군께서 우측 전방에 계십니다.」 덕악이 급히 오른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려가 보았다. 조혜가 3천여 명의 패잔병을 통솔하고 있는데 낭패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조혜는 정홍기 정병이 토착한 것을 보자 정신이 새로워졌다. (적병이 대승을 거두었으니 오늘 밤은 방비가 소홀할 것이다. 적이 예측하지 못할 때 습격하면 패전을 승전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흑수하 옆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 30리를 가니 선발대가 적의 대군이 전면에 주둔하고 있다고 보고를 해 왔다. 조혜와 덕악-장소중-화이대 등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보다가 자기들도 모르게 간담이 싸늘하게 식음을 느꼈다. 온 산과 들에 가득 찬 모닥불만 보였다. 무궁무진 끝도 없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 왔다. 도대체 숫자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추측할 수도 없었다. 조혜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화이대가 침묵을 깼다. 「원래 10여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모두 여기 숨어 있었군요. 중과부적이라더니 어쩐지-, 어쩐지,,,,,, 우리가 패배를 할 만도 했습니다. 이것이 곽청동의 허장성세임을 그들이 어찌 알랴? 그녀는 병사 한 사람마다 10곳에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멀리서 보고 그 위력과 기세에 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조혜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각 대는 급히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철수한다. 아무도 소리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명령이 전달되자 병사들은 미처 밥 먹을 새도 없이 즉시 말에 올랐다. 「향도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남쪽으로 가자면 영기반산 밑을 지나야 한다던데 대설이 내린 후라 산길이 매우 험난하답니다. 화이대의 말이었다. 「적병의 기세가 이토록 대단한데, 어디 한번 보시오. 도처에 그들의 대오뿐이지 않소? 부덕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 고비를 넘어 왔으니 우리도 동남쪽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를 해야 될 것이오. 조혜의 의견이었다. 「대장군의 용병이 확실히 신출귀몰하십니다.」 화이대의 말에 조혜는 코방귀를 뀌었다. 참패를 당한 후에 듣는 이런 아첨의 말은 제아무리 낮가죽이 뻔뻔한 조혜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가 거북했던 것이다. 대군은 남행을 했다. 길은 갈수록 험해지기만 했다. 왼쪽은 혹수하, 오른쪽은 영기반산, 별도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인데 산 위의 백설만이 담담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어느놈이건 소리만 내면 즉시 베어라. 조혜의 엄한 명령이었다. 산 위의 두꺼운 적설은 소리만 나면 어마어마한 눈사태의 재난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려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10여 리를 걸었을 때 길은 더욱 가파르기만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날이 점점 밝아오는 것이었다. 청병들은 하루 낮과 밤을 전투와 보행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 모습은 피곤한 기색으로 말이 아니었다. 이때 갑자기 앞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위구르 병사들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했다. 덕악이 직접 청병을 인솔하고 저항하러 앞서 나갔다. 수백 명의 위구르 전사들이 산 위에서 내려왔다. 가까운 장소에 접근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각자 비수를 뽑아 말 엉덩이에 꽂았다. 통증에 놀란 말들이 미친 듯 청병의 군영에 뛰어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길이 원래 좁은 곳이라 곧 밀렸다 사람과 말이 분분히 강으로 떨어졌다. 위구르 전사들은 지름길을 이용해 산 위로 올라가 큰 돌을 수도 없이 아래로 던졌다. 이렇게 되자 금방 길이 막혀 버렸다. 덕악은 대군에게 급히 후퇴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후미에 있던 부대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원래 후로도 적에 의해 차단이 되었던 것이었다. 덕악은 시석을 무릅쓰고 앞을 향해 돌진했다. 「살상을 불구하고 앞으로 돌격. 조혜의 명령이 떨어지자 1대의 철갑군이 시석 속을 뚫으며 달려갔다. 반은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고 반은 노상의 큰 돌이며 시체 , 부상병들을 닥치는 대로 들어 강에 던졌다. 어느 새 노상의 장애물을 치우며 단번에 뚫고 나가려 했다. 앞에서 수십 명의 위구르 전사가 이를 막았다. 길이 좁은데다가 청병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 한꺼번에 몰려나가기가 어려운데, 후미의 부대가 계속 밀고 올라오느라 입구가 다시 인마에 의해 막혔다. 길을 막던 전사들이 갑자기 산개하면서 수십 문의 토포가 드러났다. 청병들이 놀라 혼비백산하여 함성을 지르며 몸을 돌려 달아났다. 토포가 설치된 곳에서 철편(鐵片)과 철정(鐵釘)이 터져 쏟아졌다. 토포는 한번 발사하면 그만이다. 재발사하려면 다시 폭약과 철편 등을 장전하기에도 반나절의 시간을 요했다. 그러나 청병은 벌써 도망을 쳤다. 이 수십 개의 토포에 2백여 명의 청병이 맞아 죽었고 그들이 갈 길은 또다시 차단이 되었다. 조혜는 다급도 하거니와 화도 났다. 그런데 쉭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목이 차가워지면서 눈 덩어리 하나가 깃 안으로 떨어져 들어갔다. 고개를 드니 정상에서 눈 덩어리가 천천히 굴러 내려오고 있었다. 「대장군, 큰일났습니다. 빨리 후퇴를 하십시오. 화이대가 외쳤다. 조혜는 말머리를 돌려 뒤로 달렸다. 친병들이 닥치는 대로 치고 차고 병졸들을 강에 던져 길을 만들었다. 눈사태가 일어나는 소리가 갈수록 더 크게 들렸다. 적설 속에 모래와 돌이 섞여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듯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당장 귀를 먹게 만들 것만 같았다. 화이대와 장소중은 좌우에서 조혜를 호위해 가며 3리 정도를 달려 나갔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노상에 10여 장 높이로 눈이 덮였다. 수천 명의 정병이 전부 눈사태에 깔린 것이다. 도통 덕악까지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멀리 앞을 바라다보니 온통 길에 눈이 쌓여 걸어갈 수가 없었다. 조혜는 막다른 처지에서 앞이 캄캄했다. 4만여 명의 정병이 하루 낮 이틀 밤 사이에 전멸을 하고 만 것이다. 슬픔이 북받쳐 올라 목을 놓아 울었다. 「대장군, 우리 산 위로 해서 갑시다.」 장소중의 말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조혜를 끌고 숨을 가다듬으며 산 위로 도망을 쳤다. 화이대는 경공의 재주를 쓰며 손에 단도(單 刀)를 들고 뒤에서 호위를 했다. 먼 곳에 있는 산 위에서 곽청동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달아나려고 하니 빨리 가서 잡으시오.」 수십 명의 몽골병이 소대장의 인솔하에 나는 듯 달려갔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기어올라오고 있는 세 사람이 모두 고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사로잡을 체비를 하고 있었다. 조혜는 속으로 (아이쿠!)소리를 질렀다. 오늘 패전을 당한 것만으로도 원통해 죽겠는데 이제 또 사로잡히는 치욕까지 당하는구나 싶어 눈앞이 캄캄했다. 장소중은 한마디 말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그는 한 손에 조혜를 잡고도, 얼어붙어 미끄럽기 짝이 없는 산길을 나는 듯 달리고 있었다. 화이대는 맨몸이었지만 쫓아가지 못하고 뒤로 처졌다. 장소중은 산정에 오르자 조혜를 번쩍 치켜들었다. 수십 명의 몽골병이 동시에 덮쳤다. 장소중은 조혜를 옆구리에 낀 채 일학충천의 묘기를 부려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갔다. 몽골병들은 허공을 덮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코가 깨지고 머리가 부어올랐다. 몸을 돌이켜 쫓아갔을 때 두 사람은 벌써 산 아래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화이대는 1명의 몽골병에게 잡혀 두 사람이 땅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뒹굴고 있었다. 나머지 몽골병들이 달려들어 그를 질질 끌고 곽청동의 면전으로 왔다. 이때 각 대의 대장들도 분분히 올라와 승전을 보고했다. 이번 싸움에 정홍기 청병은 전군이 전멸했다. 목숨을 건져 달아난 사람은 조혜와 장소중 외에 몸이 특별히 날렵하거나 지극히 재수가 좋은 10명에 불과했다. 곽청동 등 일행이 장막으로 돌아오자 전사들이 계속 포로를 데리고 왔다. 이때 위구르 전사들은 청병의 대영도 공파하여 마초,병기 등 노획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포로 가운데 곤륜 사형제도 끼어 있었다. 대영을 공파할 때 그들이 묶인 채 장막 안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해 데리고 왔다는 보고였다. 진가락이 까닭을 묻자 곤륜대호가 이렇게 답변했다. 「조 장군은 우리가 당신을 도와 달아나게 했으니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승전을 거둔 뒤에 처형하겠다고 미루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진가락은 곽청동을 향해 이들 넷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4형제는 고향인 요동으로 가서 사냥꾼으로 살겠다며 떠났다. 이때 척후병이 또 급보를 전해 왔다. 고비 가운데서 청병 4, 5천 명이 남쪽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곽청동이 벌떡 일어나 10대의 전사들을 데리고 대전을 하러 나섰다. 수십 리를 가자 과연 전면에 먼지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곽청동의 영기가 펄럭이며 펴지자 양대의 청기병이 전승의 여세를 몰고 돌격해 들어갔다. 원래 이들은 조혜의 부관격인 부덕(富德)이 데리고 온 원병이었다. 도중에 조혜와 장소중을 만나 청병이 대패했다는 말을 듣고 패잔병을 수습, 동쪽으로 철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재수 사납게도 곽청동에게 다시 들키고 만 것이었다. 청병은 사람과 말이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수까지 적으니 무슨 힘으로 이 대군의 예공을 막아 낸단 말인가? 조혜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수레와 말들을 이용해 하나의 원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청병의 궁전수로 하여금 그 원 안에서 고수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위구르 전사들이 몇 차례나 돌격을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곽청동이 이렇게 제안했다. 「저들이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있는데 무리한 공격을 한다면 그 손실이 대단할 것이에요. 우리는 많고 저들은 적으니 차라리 포위를 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그게 좋겠구나.」 목탁륜도 찬성을 했다. 곽청동이 도랑을 파라고 명령했다. 1만여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청병의 화살이 미치지 않을 만한 거리를 두고 사방에서 길고 깊은 도랑을 팠다. 청병을 굶겨 죽일 판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곽아이가 또 수천 명의 원군을 인솔하고 도착했다. 길고 깊은 도랑 앞에 다시 둑까지 쌓아올렸다. 위구르 사람들이 흑수하 , 영기반산 아래서 청병을 대파하고 포위한 것이 넉 달이나 되었다. 이를 역사상 흑수영지위라 했다. 문태래는 높은 곳에 서서 조혜의 옆에 있는 한 사람이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바로 장소중, 그놈이었다. 화가 치밀어 옆에 있는 전사의 손에서 활과 화살을 받아들었다. 「저 간사한 녀석이 원래 여기 있었군요. 그런데 너무 멀어서 어렵겠는걸요.」 서천굉의 말이었다. 문태래는 있는 힘을 다해 시위를 당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철태궁이 부러졌다. 즉시 2개의 활을 합쳐 가지고 화살 하나를 2개의 활줄에 걸었다. 2개의 철태궁을 당길 수 있는데까지 당겼다가 손을 놓았다. 화살이 유성처럼 장소중의 얼굴을 겨냥하고 날아갔다. 장소중은 깜짝 놀랐다. (거리가 이렇게 먼데 예까지 날아오다니?) 몸을 살짝 빼자 화살이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옆에 서 있던 청병의 가슴에 꽂혔다. '사가, 우리 돌격해 들어가 저놈을 잡읍시다.」 위춘화의 말에 서천굉이 안된다고 했다. '안됩니다. 그것은 곽청동 소저의 영을 어기는 것입니다.」 문태래와 위춘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사람들이 장소중을 바라다보며 치를 떨었다. 「어느 날이고 저 간사한 녀석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속이 풀릴 것이다.」 군중 속에서 슬픈 음악이 연주되면서 위구르 사람들이 땅에 깊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전사한 장사들의 얼굴을 서쪽을 향해 세운 체 묻었다. 진가락 등은 너무나 이상해서 옆에 있는 전사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입니다. 죽으면 혼이 천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육체는 직립시키고 얼굴은 서쪽에 있는 성지 메카를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군웅들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매장이 다 끝나자 목탁륜은 위구르의 전 전사들과 함께 진신의 보우 아래 승전을 거두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자 전군의 환호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이어 각 대의 대장들이 곽청동의 면전으로 분분히 달려와 축하의 군례(軍禮)를 바쳤다. 「이번 싸움에 청군이 전멸했으니 나머지 사람들도 간이 떨어졌을 거예오. 그리고 우리도 또 막혔던 속이 시원하게 뚫린 셈이구요. 위춘화의 말을 듣고 서천굉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분명 우리와 철석 같은 약속을 했는데 어째서 철군을 하지 않고 있을까요? 설마 그가 고의로 만청의 정병을 사막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었을 리도 만무할 텐데.」 '나는 황제의 말을 믿지 않아요. 그가 어떻게 곽청동 소저가 이런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소? 그가 장소중을 파견한 의도는 틀림없이 불순할 게요.」 문태래의 말이었다. 사람들이 한참 동안 의논을 해 보았지만 시원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다시 한 번 곽청동의 신출귀몰한 용병에 한바탕 칭찬을 했다. '손자에 이르기를, (아측은 하나로 뭉치고 적은 열로 분열시킨 뒤에 열로 하나를 공격한다면 아측은 많아지고 적은 적어진다)고 했는데 나이 어린 소저의 용병이 손자병법과 일치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어동의 말에 주기가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세요. 그녀가 이렇게 멋지게 해냈는데도 그래 손자병법이라니 말이 돼요? 내가 보기에는 할아버지 병법이나 시조 할아버지 병법보다 더 근사하던데요」 사람들이 모두 껄껄 웃었다. 말을 하는 동안 진가락은 관심과 걱정어린 눈망울로 계속 곽청동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불빛에 시선을 모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낙빙이 가까이 가서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곽청동이 일어나 맞으려 하다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낙빙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부축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곽청동은 말없이 진정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왈칵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향향 공주,목탁륜,곽아이 -진가락-주기 등이 몰려와 위로를 했다. 「언니, 언니 ,,,,,,.」 향향 공주가 이렇게 말하며 언니를 부축하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 담요를 펴놓고 그 자리에 눕게 했다. 목탁륜은 딸이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이 이 싸움을 지휘하느라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고, 또 직접 전투에 참여하느라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자기와 부장들이 계속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으니 그녀로서도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바로 진가락과 그녀의 동생이 친해진 것이었을 것이다.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장막 밖으로 나갔다. 그는 각 처를 순시했다. 사영(四營)이 모두 곽청동의 지략과 계략이 남달리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한 곳으로 가자 수백 명의 전사들이 둘러앉아 이슬람교 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호메트가 메디나로 옮겨 간 이듬해 메카 사람들이 공격을 해 왔다네. 적의 전사는 950명, 전마 1백 필, 낙타 7백 두로 완전무장을 했지. 마호메트의 부하 전사는 겨우 313명에 전마부대가 둘, 갑옷 6벌뿐이었다네. 적이 3배나 강했지만 마호메트가 마침내 적을 섬멸하고야 말았지.」 「우리도 이번에 적은 숫자로 많은 숫자를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한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옳아, 곽청동 소저가 마호메트의 유훈에 따라 우리를 통솔하여 승리를 거둔 것일세. 코란 경 제3장 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교전 가운데의 양쪽 군대 가운데 이쪽 군대는 교리를 믿는 군대요, 저쪽 군대는 교리를 믿지 않는 군대인데 그쪽의 수가 배가 넘는다. 그러나 알라는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을 돕는다. 전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신이 취우황삼을 보우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승전을 거둔 것이다. 목탁륜은 딸 생각에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아침 날이 미처 밝기도 전에 곽청동의 장막으로 갔다. 그런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라 장막 밖의 보초병에게 물어 보았다. 「곽청동 소저는 한 시간 전에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갔는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추장님께 전해 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목탁륜은 편지를 빼앗듯이 체어 펴 보았다. (아빠, 큰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철통같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수일 내에 섬멸될 것입니다. 동아 올림.) 몇 자 안 되는 내용이었다. 「그래, 어느 쪽으로 가더냐? 목탁륜은 넋을 잃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다시 물었다. 그 보초는 동쪽을 가리켰다. 목탁륜은 말 등에 올라타 그쪽을 향해 달렸다. 반 시간 동안이나 달려 보았지만 망망한 사막 가운데의 수십 리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곽청동이 방향을 바꾼 것으로 생각되어 할 수 없이 되돌아가기로 했다. 오는 도중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향향 공주-진가락-서천굉 등과 만났다. 모두들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곽청동이 병세도 가볍지 않은데 혼자 몸으로 떠나 버렸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장막으로 돌아오자 목탁륜은 4개의 소대를 동서남북으로 파견하여 찾아보도록 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3개의 소대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왔다. 동쪽으로 보냈던 소대만 검은색 한복을 입은 소년 하나를 데리고 왔다. 여어동은 깜짝 놀랐다. 원래 그 소년은 남장을 한 이원지였던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여길 오셨지요? 여어동이 물었다. 이원지는 반갑고도 괴로웠다. 「당신을 찾아오다가 공교롭게도 이분들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데리고 온 소대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저분들이 저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승복을 입지 않으셨나요? 이제 중 노룻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여어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원지는 너무나 기뻐 활짝 핀 꽃처럼 웃다가 두 눈을 붉히며 이슬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향향 공주는 언니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진가락을 바라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언니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어떻게 하지요? 「제가 찾아 나서겠습니다. 여하튼 모시고 돌아오도록 해야지요.」 「저도 함께 가겠어요.」 '좋습니다만, 아버님께 말씀을 드려 보셔야지요. 향향 공주는 아버지께 진가락과 함께 가서 언니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목탁륜의 마음은 착잡했다. 곽청동이 이들 두 사람 때문에 가버렸는데, 이들 둘이 찾아 나선다면 더욱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답답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나도 모르겠구나.」 향향 공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다보았다. 아버지의 눈은 큰딸이 걱정되어서 핏발이 생겼다. 그녀는 살며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원지는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여어동에게 헤어진 뒤의 일을 물었다. 진가락이 향향 공주를 향해 말을 꺼냈다.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는 틀림없이 언니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에요? 언니가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언닌 정말 못돼먹었다.」 향향 공주는 반가운 마음에 이원지 앞으로 가서 아래위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목탁륜도 이 소리를 듣자 어리둥절해졌다. 이원지는 전에 목탁륜과 대면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향향 공주의 미모에 놀라 잠시 동안 말을 잊고 있었다. 향향 공주가 미소를 머금고 진가락을 바라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분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오셔서 대단히 반갑다구요. 그리고 우리와 함께 언니를 찾아가자구요.」 진가락은 그제야 처음으로 이원지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 형, 어떻게 오시게 되셨습니까? 그리고 그동안 안녕하셨구요? 이원지는 얼굴을 붉히며 웃다가 여어동을 향해 아래턱을 들어 올리며 대신 설명을 해 달라는 신융을 했다. 「총타주님, 이 사람은 제 육 사숙님의 제자 되는 분입니다.」 여어동이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린 이미 몇 번 만났지요.」 「제 사매 (師妹)가 됩니다.」 「아니, 뭐라구요? 여어동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진가락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밖에 나올 때는 늘 남장을 좋아했습니다.」 진가락은 그제야 이원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은 입술, 고운 눈매, 남자라고 할 만한 곳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전에 그녀와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곽청동의 일이 마음에 걸려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진가락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다시 천 가닥 만 가닥 생각이 일시에 얽혀 몰려왔다. 원래가 여자였다니? 곽청동 소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빛나갔었구나. 그녀가 나를 보고 육 노선배님께 여쭈어 보라고 했을 때에도 나는 거북하다고만 여겼지. 이번에 그냥 가버린 것도 나 때문이 아닌가? 그녀의 여동생이 나를 이토록 좋아하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옳단 말인가? 사람들은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낙빙은 이원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가까이 와 그녀의 손을 잡고 웃으며 반겼다. 여어동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보며 천목산과 맹진 등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오늘 또다시 풍사 만 리 마다않고 여어동을 찾아나선 그녀의 마음은 물어 볼 것도 없이 뻔한 일이었다. 이제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 여어동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 말할 수 없었던 과거의 고뇌가 일시에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전연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여어동의 냉담한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들의 인연을 맺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원지가 말을 꺼냈다. 「곽청동 언니는요? 제가 중요한 일을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지금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중이랍니다. 낙빙의 대답이었다. 「혼자 어디로 갔나요? '글쎄요. 몸도 성치 않은데 걱정이군요.」 「어느 방향으로 갔습니까? 이원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본래는 동북쪽으로 갔는데 지금 그걸 몰라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야단났군요. 야단났어. 이원지가 발을 굴렀다. 사람들은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관동삼마가 취우황삼을 찾아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요. 이 세 사람을 제가 오는 도중에 실컷 골탕을 먹이기는 했어요. 그러나 그들이 계속 제 뒤를 쫓아왔어요. 곽청동 언니가 동북쪽으로 갔다면 그들과 만났을 가능성이 많아요. 대단히 걱정스럽군요.」 원래 이원지는 맹진의 보상사에서 여어동이 출가하여 중이 된 것을 보고 너무나 슬퍼 얼굴을 가리고 통곡을 했다. 여어동은 마침내 마음을 독하게 먹고 편지 한 통을 써서 진가락 등에게 남겨 놓은 체 이원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표연히 절을 떠났다. 이원지가 한바탕 울고 나서 쫓아갔을 때 여어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맹진 성 안에 있는 사원과 객점을 모조리 찾아다녔으나 사모하는 사람은 찾지도 못하고 재수 사납게도 등일뢰 . 고금표 . 합합태 등 세 사람과 만난 것이었다. 그들은 보상사에서 나온 뒤 조용한 객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원지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위구르로 취우황삼을 찾아가 복수를 하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그들 세 사람이 여어동을 괴롭힌 일 때문에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로 나가 한 봉지의 파두를 사 가지고 와 끓여서 진한 즙을 한 사발 만들어 술병에 담았다. 그리고 등일뢰 등이 묵고 있는 객점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들이 외출하기를 기다렸다가 방으로 들어가 파두즙을 탁자 위의 차 주전자에 가득 부었다. 관동삼마가 외출에서 돌아와 목이 마르다며 이 즙을 마셨다. 맛이 좀 이상했지만 차잎이 싸구려라 그렇겠거니 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복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며 밤새도록 변소를 드나들며 설사를 했다 이튿날 아침이 되도록 설사는 멎지 않았다. 세 사람은 탈진하여 기력을 잃었다. 아침에 길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일뢰가 객점 주인을 불러 한바탕 호통을 쳤다. 주인은 사나운 그들의 기세에 눌려 사과를 하고 의사를 청해다 진맥을 보게 했다. 의사가 어찌 곡절을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오한을 쫓고 배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처방만 내렸다. 주인이 약값을 지불하고 난 뒤 점원이 불을 피워 약을 달였다. 이원지는 객점 뒷문을 통해 들어가 몰래 살펴보다가 변소로 들락날락하는 그들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점원이 약을 달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재빨리 약탕관을 열고 다시 또 한 주먹의 파두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등일뢰 등은 약을 먹고 이제는 좋아지려니 했었다. 그런데 복통과 설사는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이원지는 내친 걸음에 밤에 약재상으로 뛰어들어가 몇십 개의 서랍을 열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약을 챙겼다. 그 약이 숙지황이건 당귀건 패매(貝每)건 아니면 모간이건 낭독이건 가릴 것 없이 가져다 모조리 약탕관에 집어 넣었다. 다음날 점원이 불을 피워 다시 약을 달여 세 사발의 약을 들고 들어갔다. 관동삼마는 이를 단숨에 마셨다. 수십 가지의 약이 한꺼번에 뱃속으로 들어갔으니 오죽하랴? 생룡활호 같던 그들이 아파서 그런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들의 무공이 막강한데다 워낙 건강한 사람들이라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가락이 백마를 타고 서쪽으로 달릴 때 어찌 관동삼마가 아직도 맹진성에서 죽을 고비를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등일뢰 등은 무슨 곡절이 있음을 알았다. 객점을 잘못 잡은 탓으로 돌렸다. 주인놈이 재물을 탐내 자기들을 해치려고 독계를 썼다 고 믿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다시는 약을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루가 지나자 과연 차도가 있었다. 고금표는 강차를 들고 나가 객점 주인과 점원을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고 설쳤다. 등일뢰가 그를 잡아 말렸다. '둘째, 잠시만 참게, 우리 하루 더 쉬자구.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네. 이 객점에 고수가 있을지도 몰라요. 공연히 싸움을 벌였다가 큰코 다치면 어떻게 할 텐가? 고금표는 그 말을 듣고야 다시 주저앉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점원이 한 통의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 위에 (관동삼마 친전)이라 씌어 있었다. 등일뢰가 깜짝 놀라 점원에게 물었다. 「누가 가져왔더냐?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와서 설사를 하고 계신 세 분 나리께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등일뢰가 펴 보고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고금표와 합합태가 받아 읽었다. (취우황삼은 여인 중의 호걸이오. 어찌 당신들 같은 못난이 셋을 무서워하리요. 작은 벌을 내려 파두를 배불리 먹이오. 만약 속히 되돌아가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글씨가 뛰어나게 예쁘다. 등일뢰는 여자가 쓴 것임에 틀림없음을 알았다. 고금표가 편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마침 찾아가려던 참인데 이 계집이 여기 있다니 더 잘 되었군.」 세 사람은 이 객점에 더 머무를 수 없어 즉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틀을 더 쉬고 나니 비로소 회복이 되었다. 맹진의 곳곳을 이 잡듯 뒤져 보았지만 취우황삼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때 이원지는 황하방을 통해 이런 소식을 들었다. 위춘화가 홍화회 군웅들과 함께 여어동을 데리고 이미 위구르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떠났다는데 삼마를 거들떠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뒤를 쫓기 위해 그곳을 떠나 즉시 서쪽을 향했다. 삼마는 곽청동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갔음에 틀림없다며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감숙 경내에서 다시 이원지와 만나게 되었다. 등일뢰는 그녀를 보고 어렴풋이나마 낯이 익은 사람이라고 여겨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틈에 숨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관동삼마가 조반을 끝내고 막 출발을 서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10여 명이 떼를 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에 메고 등에 짊어진 물건들을 내려놓으며 등 나리가 주문한 것이라고 말했다. 등일뢰가 보니 닭이며 오리 ,채소,계란-오리알, 그밖에도 거위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까지 통째로 잡아 왔다. 「이 물건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등일뢰가 험상궂게 물었다. 「이곳에 계신 등 나리라는 손님이 가져오라고 하셨다기에 가져 왔습니다. 돼지와 닭을 잡아 온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분이 바로 등 나리신데요.」 점원의 말이었다. 물건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톤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누가 이렇게 많은 물건을 보내라고 하더냐? 고금표가 화가 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이 떠들석하더니 누군가가 관을 3개나 짊어지고 들어왔다. 그밖에 또 한 사람이 창호지와 석회 등, 시체를 염할 때 쓰는 물건을 들고 따라 들어와 물었다. 「죽은 사람들이 어디 있나요? 「아니, 이놈들이 귀신에 홀렸나? 무엇하러 관을 가지고 왔단 말이냐? 객점 주인이 나와 호통을 쳤다. 「이 객점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면서요? 주인이 그 사람의 뺨을 번쩍 불이 나게 때렸다. 그 사람이 살짝 피했다. 「아니, 여기서 분명 사람 셋이 죽었다던데? 등씨 성을 가진 사람과 고씨 성을 가진 사람, 그밖에 합씨 성을 가진 몽골 사람까지 있다고 합디다. 고금표는 몹시 화가 나서 그 사람을 후려갈겼다. 그 사람이 맞고 쓰러지며 피를 토하는데 이가 3대나 그 속에 섞여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북치고 상악(喪業)을 울리며 한 사람이 만장을 들고 들어섰다. 등일뢰는 노기충천했지만 적이 자기들을 골탕먹이려고 하는 수작임을 알았다. 만장을 펴 보니 그 위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초포삼척귀음세 즉 못난 세 놈이 저승으로 갔구나라는 뜻이었다. 하련(下聯)은 또 이랬다. 관동육마취황천 즉 관동육마가 황천에 모였구나라는 뜻이다. 그러고도 횡액이 하나 더 있었다. 휴수구천(携手九泉)손을 잡고 구천으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글씨는 바로 먼저 편지를 보냈던 그 여자의 솜씨였다. 합합태는 만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그것을 들고 온 사람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래, 누가 보내라고 시키더냐? '네...... 네 한 도련님이 돈 백 문을 주면서 세 친구가 죽었다고 ..... 여기서 죽었다며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벌벌 떨며 이렇게 대답했다. 합합태는 그도 속은 것을 알고 그냥 집어 던졌다. 그는 멀찌감치 나가떨어져 소리를 내며 울었다. 등일뢰가 다시 물건 가져온 사람, 관을 가져온 사람, 애악을 연주한 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두들 한 도련님이 시켜서 그랬다는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등일뢰가 병기로 쓰는 동인(銅人)을 찾아 들었다. 「빨리 쫓아가 보자. 세 사람이 객점을 나와 사방을 찾아다녀 보았지만 무슨 도련님 같은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빨리 앞으로 쫓아가 그 계집을 잡아 죽이자.」 등일뢰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여전히 곽청동의 소행으로 믿었던 것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다급히 길을 재촉했다. 이날은 양주에 도착하여 객점에 들어가 쉬게 되었다. 한밤중에 후원에서 갑자기 불이 났다.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살펴보았다. 등일뢰가 보니 불이 붙어 타고 있는 것은 한 무더기의 나무와 풀뿐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둘째, 넷째, 빨리 방으로 가 봐요.」 방으로 뛰어오니 과연 3개의 보따리가 없어졌다. 이부자리 위에 죽은 사람을 위해 태우는 지전(紙錢)만 수북이 놓여 있었다. 등일뢰는 지붕 위로 뛰어 올라섰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금표는 화가 나서 탁자를 마구 두들겼다. '사람 같으면 정정당당하게 나서서 승패를 가릴 것이지. 이렇게 비겁한 수작을 쓰며 무슨 놈의 호한이라고 큰소리치겠느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일 방값, 밥값도 낼 수 없겠구나.」 등일뢰의 낙담한 탄식이었다. '이거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년을 잡아 없애야지, 이러다 큰 일 나겠는걸.」 화가 난 고금표의 말이었다. '옳아! 둘째, 넷째, 자네들 생각으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등일뢰가 물었다. 이들 세 사람의 무예가 비록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반나절 생각한 것이 고작 한 가지 계책인데 이것은 바로 밤에 잘 때 옷을 벗지 말고, 서로 돌아가며 불침번을 -- 섰다가 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쫓아나가 처치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등일뢰는 이 방법이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닌 줄은 알지만 세 사람이 아무리 머리를 짜 봐도 제갈량 같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했다. '방값, 밥값은 어떻게 한다? 지금 나가서 만들어 오나, 아니면 내일 이른 아침 줄행랑을 치고 마나? 합합태가 난처하다며 물었다. '좌우지간 앞으로도 돈이 필요할 테니 내가 가서 마련해 보지.」 고금표가 나섰다. 그는 몸을 날려 일단 지붕 위에 올라섰다.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가장 큰 집 하나에 눈독을 들이고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뺏든 훔치든 몇백 냥의 은자는 마련해야 될 성싶었다. 한쪽 방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가 살펴보았다. 그런데 등뒤에서 갑자기 쨍그렁 소리가 나며 기왓장 하나가 날아와 땅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어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저 도둑놈을 잡아라.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금표는 깜짝 놀랐지만 자기의 무예만 믿고 그냥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때마침 몇 명의 하인들이 노름을 하고 있었다. 탁자 위의 판돈이 기백 문은 족히 되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들을 질렀다. (재수 더럽구나.) 고금표가 속으로 외치며 물러 나오려고 하는데 밖에서 급박한 방망이 소리와 함께 횃불을 들고 10여 명이 칼과 몽둥이 등을 들고 쫓아왔다. 다급해진 고금표는 창을 부수고 나와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쉭 하는 소리가 나며 머리 뒤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그는 강차를 뒤로 돌려 날아오는 돌을 쳤다. 그리고 다시 몸을 날려 돌을 던졌을 만한 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막 덮치려고 하는데 칼이 자기의 얼굴을 향해 찔러 왔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보니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었는데 몸집이 작았다. 고금표는 연일 골탕을 먹고 도적을 만나 분풀이를 못해 속이 뒤틀려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작다고 해서 그냥 놔둘 그가 아니었다. 쉭쉭쉭 강차를 휘둘러 적의 급소만 골라 찔렀다. 그 사람은 바로 이원지였다. 고금표의 강차가 신속하게 자기를 위협하자 몇 번 상대를 하다가 달아났다. 고금표가 강차를 들고 뒤를 쫓는데 그 사람이 손을 뒤로 들어올렸다. 칙 칙칙 작은 암기가 공기를 찢고 자신을 습격했다. 그는 맹진 교외에서 골탕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금침이 무서운 줄을 알았다. 즉시 물구나무 자세를 취해 지붕 위로 올라섰다. 아래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왔다. 고금표가 강차를 휘두르자 사람들이 칼과 몽둥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가 다시 다른 지붕 위로 뛰어 쫓아가니 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금표는 객점으로 돌아와 씨근벌떡거리며 경과를 말했다. 합합태가 연방 무릎을 쳤다. 「진작에 그런 줄 알았더라면 동행한 것을-, 두 사람이 나섰다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지금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지금 당장 떠납시다. 내일 아침 방값도 지불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나요.」 막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세 사람은 서로 바라다보다가 각자 병기를 꺼내 들었다. 합합태가 문을 여니 주인이 들어왔다. 손에 촛불을 든 채 이렇게 말했다. 「저희 객점은 워낙 본전이 미약한 곳이니 손님들께서는 미리 방값을 주고 떠나시지요.」 원래 주인은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며 이들 세 사람이 돈이 없어 지금 달아나려고 한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가 옷을 걸치고 일어나니 자기를 깨워 준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급히 일어나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보니 과연 등일뢰 등이 떠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금표가 벌컥 성질을 냈다. 「나리께서 지금쓸돈이 없으니 네놈집에서 한백 냥꾸어 쓰고 다음에 보자꾸나.」 강차를 쩔그렁쩔그렁 흔들어 위협하며 주인을 보고 가서 돈을 가져오라고 몰아세웠다. 주인이 울상을 짓고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크게 들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둑놈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삼마가 대문을 통해 바라다보니 객점 문 밖에 횃불을 든 채 1백 여 명이 몰려와 떠들고 있었다. 「도둑놈 잡아라. 등일뢰가 동인(銅人)으로 막아 서며 소리를 질렀다. 「지붕 위로 올라가자. 고금표가 돈궤의 자물통을 비틀어 열었다. 그 안에 있는 돈을 모조리 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셋이 지붕 위로 올라가 달아났다. 관동삼마는 주인이 밤에 일어나 방값을 지불하라고 재촉한 것도, 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들을 잡겠다고 한 것도 다 곽청동의 소행으로 생각했다. 고금표는 이원지와 대결을 했기 때문에 그녀가 위구르 여자가 아닌 한인 소년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적은 달리 돕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셋이 밤마다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또한 온갖 더러운 욕설을 얼마나 퍼부었는지 모른다. 이날은 이제 얼마 가지 않으면 가욕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적의 땅이니 각별히 조심들 하자구.」 등일뢰의 당부였다. 이날 밤 자정 뒤에는 합합태의 불침번 차례였다. 혼미한 가운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데 집 뒤에서 작은 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밤손님이 동정을 살피기 위해 흔히 쓰는 수작이었다. 슬그머니 창문을 밀고 나가 뒤로 돌아가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고금표가 앞에서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합합태는 깜짝 놀랐다. 「야단났다. 또 적의 흉계에 걸려들었구나.」 급히 달려와 보니 등일뢰와 고금표 두 사람이 촛불을 들고 방 밖으로 달아나는데 꼴이 추하기 짝이 없었다. 합합태가 촛불을 들고 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방 안에는 여기저기 파란 뱀과 두꺼비가 어지럽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창문 밖에 대바구니 2개가 놓여 있었다. 적이 여기에 파란 뱀과 두꺼비를 담아 왔음이 분명했다. '이놈의 계집애 정말 지독한 년이구나. 어디서 이런 것들을 이렇게 잡아 왔을까? 등일뢰가 욕설을 퍼부었다. 이원지는 여어동이 지나칠 정도로 무정하게 대하는 것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안타까웠다. 이 일은 떼를 써서 될 일도 아니며. 또 애걸을 한대서 될 일도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언는 차에 이들 관동삼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는 동안 얄궂고 괴상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으니 이런 사연을 저들이 어찌 알 리 있으랴? 이들 파란 뱀과 두꺼비도 그녀가 돈을 주고 장난꾸러기 어린이로 부터 사 온 것이었다. 비록 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삼마는 한바탕 골치를 앓았다. 그들이 여러 가지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까닭이 그 못생긴 수재가 이 제독의 소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그들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시달림을 받은 관동삼마는 저녁이 되어도 도저히 객점에 들어가 쉴 엄두를 못냈다. 낡은 암자나 농가를 찾아 겨우 휴식을 취하곤 했다. 이원지도 자기의 무공이 그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담하게 공공연히 나타나 그들을 괴롭힐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얄궂고 괴상망측한 장난마는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어리광만 부릴 소녀의 몸으로 혼자 만 리 되는 먼 길을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사는 계속 몸을 괴롭히고 그리움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삼마를 상대로 장난을 함으로써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면 도중에 병이 들어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장난을 치며 오다 보니 어느덧 회강에 도착하게 되었다. 사부 찾아 가는 먼 길 사람들은 이원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나 곽청동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었다. 진가락이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이대로 지연시키다가는 큰일날 것 같으니 내가 먼저 찾아 나서야겠소. 「관동삼마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니 보다 많은 사람이 가야 합니다. 총타주님, 두 분이 먼저 떠나세요. 이 소저는 그들과 낯이 익으니 두번째로 출발하십시오. 아, 아니오. 혼자 가시면 위험하니 십사제가 동행하시오. 우리 부부는 세번째로 쫓아가겠습니다. 사가와 넷째형수님, 그리고 나머지 여러분은 여기서 화이대를 지켜 주십시오.」 서천굉의 말에 진가락이 좋다고 찬성했다. 낙빙이 백마를 끌고 와 진가락에게 타라고 했다. 향향 공주는 흥마를 타고 달려 왔다. 「가세요. 두 사람이 나란히 출발했다. 얼마 후에 여어동과 이원지, 서천굉과 주기가 각기 앞뒤로 대영을 떠나 동북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날 오후, 문태래 등은 때마침 목탁륜과 더불어 장막 안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전사가 달려와 화이대를 누군가가 구출해 내고 그를 지키고 있던 4명의 전사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해 왔다. 목탁륜이 깜짝 놀라 문태래와 함께 가 보았다. 3명의 병사는 칼에 맞아 죽었고 다른 한 명의 가슴에도 비수가 꽃혀 있었다. 그리고 비수 자루에 백지가 한 장 매달려 있었다. (장소중이 홍화회 군웅들에게 인사드리오.) 이를 본 문태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백지를 구겨 손 안에 쥐고 힘을 주었다. 위춘화가 보자고 해서 손바닥을 펴니 종이는 벌써 찢어져 바람 따라 나비처럼 날아가 버렸다. 목탁륜은 속으로 탄복했다. (지난번 그들이 무진 도장과 대결을 할 때 천하의 영웅들이 다 여기 모였구나 했더니, 웬걸 이 문 사야도 보통이 아니로구나.) 문태래가 목탁륜을 바라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목 노영웅, 여기서 청병들을 포위하고 계십시오. 우리는 장소중 그놈을 추격해야겠습니다.」 목탁륜이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태래는 위춘화 -장진 - 낙빙 . 심연 네 사람을 데리고 사막 위의 말발굽 자국을 따라 뒤를 쫓기 시작했다. 곽청동은 대승을 거둔 뒤 마음은 오히려 말할 수 없이 외롭고 서글프기만 했다. 그날 밤 장막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막 밖에서는 사람들이 탄부들을 타며 연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자기를 의심했던 일이 생각났다. 또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사람은 자기의 여동생을 좋아하고 있다. 자기도 여동생을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그녀와 다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한 통을 썼다. 병기를 들고 사부님이 주신 2마리의 매를 데리고 말에 올라 동북쪽을 향해 가며 생각했다. (그래도 사부님이 계신 그곳으로 가야지. 가서 그분들을 모시고 살자. 이 몸은 장차 이 망망한 사막에 묻히면 그만이야.) 그녀의 병세는 가볍지 않은 편이었다. 어려서부터 연무(練武)를 해 착실하게 닦은 견실한 기초에 의지하여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사막 가운데서 10여 일을 지낸 셈이다. 천산쌍응이 살고 있는 옥왕곤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4, 5일은 더 가야했다. 그러나 극도로 피곤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날 밤 말라빠진 소철이 듬성듬성 자라다 만 모래언덕 옆에서 타고 온 말이 물이 나오지 않는 소철을 뜯느라 머뭇거렸다. 그래서 곽청동은 작은 움막을 치고 밤을 여기서 보내기로 했다. 밤이 꾀 깊었는데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세 필의 말이 동쪽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모래언덕 옆에 오자 그들이 타고 온 마른 소철을 뜯어먹겠다고 더 이상 가려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쉬기로 했다. 그들은 모래언덕을 가운데 두고 있어서 곽청동의 천막을 발견하지 못했다. 셋은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곽청동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한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자기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취우황삼이 우리를 너무나 괴롭혔단 말일세. 곽청동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욕설이 또 터져 나왔다. 「그 빌어먹을 년, 잡히기만 하면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 놔야겠다. 그렇게 못하면 내 18대 조상까지도 모두 성이 고씨가 아니다.」 원래 이들 세 사람은 바로 관동삼마였던 것이다. 그들은 사막으로 들어와 위구르 사람들이 서쪽에서 청병과 교전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쫓아가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위구르 사람들에게 길을 묻기가 곤란해 사막을 한 바퀴 돌아오느라 이원지보다 10여 일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이날 밤은 공교롭게도 쌍방의 말이 모두 풀을 뜯어먹겠다고 대드는 바람에 그만 모래언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일 진가락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연일 군무에 바빴고 또 곽청동이 의식적으로 그를 피하는 바람에 관동삼마가 복수를 하려고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없었다. 진가락은 진가락대로 대군이 삼엄하게 호위를 하고 있는 마당에 그까짓 삼마를 두려워할 게 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서둘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곽청동은 이들 세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기는 했지만 모두 조혜 휘하의 패장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염 육제의 무공이 그토록 훌륭한데, 그래 나이 어린 소녀의 손에 살해되었겠는가? 나는 믿지 못하겠어요. 그렇다면 그 계집이 틀림없이 속임수를 썼을 게요.」 「그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내가 둘째 자네와 넷째에게 이번만은 함부로 대들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는 그들의 수가 수천 수만이야. 우리도 무슨 속임수를 써야지.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일세.」 곽청동은 그제야 관동육마의 패거리가 온 줄을 알았다. 사막은 한번에 수십 리 밖을 능히 바라다볼 수가 있는 곳이다. 게다가 자기는 병중이 아닌가? 숨거나 달아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없었다. 기회를 보아 대처해야 할 것이요, 꾀를 써야만 몸이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다시 또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가죽 주머니 속의 물이 점점 떨어져 가고 있어. 며칠이나 더 가야 물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 내일부터는 조금씩 아껴서 마시자구. 이렇게 말을 하고는 모래 위에 벌렁 누워 잠이 들었다. 곽청동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 차라리 정면으로 나서야겠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부님 계신 곳으로 데리고 가자.) 다음날 이른 아침 관동삼마는 눈을 뜨자마자 곽청동의 작은 천막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곽청동은 이때 벌써 황삼을 벗어 버리고 모자 위의 파란 깃털도 뽑아 버렸다. 장검은 옷가지 속에 싸서 숨기고 빈손으로 나왔다. 등일뢰 등은 여자가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렇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물 가지고 계십니까? 있거든 조금만 나누어 주시지요」 말을 하면서 1정의 은자를 꺼냈다. 곽청동은 머리를 흔들어 그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신융을 했다. 합합태가 몽골어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곽청동의 부하 가운데도 몽골병이 있었다. 천산북로에는 몽골인과 위구르 사람이 섞여 사는 곳이 많아 그녀도 몽골어를 할 줄 알았다. 제 물을 나눠 드릴 수가 없군요. 취우황삼이 나보고 중요한 편지 한 통을 전하고 오라 해서 빨리 돌아가 보고해야 해요. 타고 가는 말이 물을 적게 마시면 빨리 달릴 수가 없답니다.」 몽골어로 이렇게 대답을 하며 서둘러 천막을 걷었다. 합합태가 달려와 그녀가 탈 말의 고삐를 잡고 물었다. 「취우황삼이 어디에 있소? 「그건 왜 물으시지요? 우린 그녀의 친구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녀를 찾아가는 중이오. 곽청동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 말아요. 취우황삼은 옥왕곤에 있는데 당신들이 서남쪽으로 가며 사람을 속이려고 그래요. 고삐를 당기며 떠나려고 했다. 합합태가 잡은 고삐를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길을 몰라 그러니 좀 데려가 주시오. 그러고는 등일뢰와 고금표를 바라다보았다. 「이 여자가 그 계집년 있는 곳으로 간답니다.」 관동삼마는 병색이 짙은 그녀의 모습과 말할 때 헐떡거리는 숨 소리를 들으며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한어를 모른다고 믿고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어 가며 상의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옥왕곤에 도착할 무렵 이 여자를 먼저 살해한 뒤에 취우황삼을 찾아가자고까지 결정을 내렸다. 고금표는 그녀의 용모가 비록 초췌하지만 자색이 뛰어난 것을 보고 은근히 색심까지 품었다. 곽청동은 그가 이상한 눈초리로 자기를 훑어보자 벌써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눈치를 챘다. 비록 그들이 자기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옥왕곤까지 가자면 아직도 4, 5일은 더 걸린다. 이 며칠 동안 이들 삼마와 한께 동행하며 동숙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몸에 지니고 다니던 천을 한 조각 ◎어내어 한 마리의 매 다리에 붙들어 맸다. 양고기를 한 덩어리 먹인 후 매를 공중에 들어 던졌다. 매는 두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하늘 높이 날았다. 「지금 뭐하는 게요? 등일뢰가 의심을 하고 물었다. 곽청동이 머리를 흔들자 합합태가 몽골어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여기서 가자면 7, 8일 동안 물이 나오는 곳이 없어요. 당신들이 가진 물도 별로 없는데 매까지 어떻게 마시겠어요? 매를 날려 스스로 물을 찾아 마시라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말하며 또 한 마리를 날렸다. 2마리의 매가 물을 마시면 얼마나 많이 마신다고 그러오? 합합태가 또 물었다. 1-시기로 한다면 한 방울의 물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요. 며칠 지나다 보면 자연히 아시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들이 가해할까 봐 의식적으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을 했다. 우리 몽골은 사막이라 해도 물 나오는 곳이 많은데 여기서는 7,8일 동안 가도 물 마실 곳이 없다니 어디 사람이 살 곳인가? 합합태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저녁이 되자 사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곽청동은 모닥불 아래에서 고금표의 이상한 눈초리를 자주 의식하고 놀랐다. 자기의 작 천막 안에 들어간 후 칼을 챙겨 손에 쥐고 비스듬히 천막 입구에 기대어 앉았다. 마음놓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경쯤 되자 과연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수만 명의 청병을 섬멸한 내가 이들 세 사람의 손에 죽지는 말아야겠는데.) 갑자기 추위를 느꼈다. 차디찬 바람이 천막 밖에서 불어왔다. 천막 밖에 쳐 놓은 가리개를 제치고 고금표가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곽청동이 소리를 지를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형이나 합합태가 들으면 난처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입부터 막으려고 눌렀다. 그런데 그만 허공을 누른 것이었다. 담요 속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손을 뻗어 더듬는데 차디찬 칼이 목에 와 닿았다. 「움직이기만 하면 찔러 버릴 테다.」 곽청동이 나지막한 한어로 협박을 했다. 고금표가 일신에 무예를 지녔다고는 하지만 급소를 선제 공격당했으니 꼼짝달싹할 수가 있겠는가. 「땅에 엎드려. 곽청동의 서슬 퍼런 명령에 고금표는 어쩔 수 없이 꿇어 엎드렸다. 곽청동은 칼끝을 그의 등에 댄 채 일어나 앉았다. 두 사람은 이런 상태로 시간을 끌었다. (만약 이 못된 놈을 죽인다면 저들 둘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어쩐다? 사부님이 구출하러 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한 시간쯤 흘렀다. 등일뢰가 자다가 깨어 보니 고금표가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며 불렀다. 「둘째, 둘째 어디 계시나? 「빨리 여기 있다고 대답해.」 곽청동의 낮은 명령이었다. 고금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형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저놈의 바람등이 버르장머리는 종내 버리지 못하는군. 그래 재미나 많이 보라구.」 등일뢰가 웃으며 욕을 했다. 다음날 아침 곽청동은 등일뢰와 합합태가 천막 밖에 와서 계속 재촉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고금표를 내보냈다. 합합태가 투정을 부렸다. 「둘째, 우리가 복수하러 왔지 재미보러 왔소? 고금표는 속으로만 이를 부드득 갈 뿐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 창피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평생 수모를 당할 것은 너무나 뻔했다. 오늘 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선 야욕을 채운 뒤에 죽여 버리기로 작심을 하고 꾹 참았다. 밤이 깊어지자 고금표는 오른손에 호차를, 왼손에 부싯돌을 들고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제까짓 년이 무예를 할 줄 안다 하더라도 손을 두서너 번만 쓰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 수 있겠거니 했다. 불빛 아래 그녀가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덮쳤는데 웬걸 갑자기 발이 죄여 왔다. 큰일났다 싶어 뒤로 뛰어 피하려는데 두 발이 벌써 땅 위에 있던 오라줄에 묶이고 말았다. 허리를 숙여 오라줄을 채뜨려 풀려고 하는데 곽청동이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벌렁 나가 넘어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 곽청동이 낮은 소리로 위협을 했다. 그녀의 장검 끝이 어느 틈에 그의 배 위에 와 있었다. 곽청동은 생각했다. (어젯밤처럼 그렇게 밤새도록 버티다가는 내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 하나만을 죽여 없애 봐야 소용없을 테니 세 사람을 한꺼번에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형놈을 불러들여라.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 고금표도 강호를 떠돌 만큼 떠돈 사람이라 그녀의 의도를 알고 잠자코 있었다. 곽청동이 손에 힘을 주자 칼끝이 옷을 뚫고 들어가 살갗에 상처를 입혔다. 고금표는 배를 칼에 찔리면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줄을 알았다. 그렇다고 그냥 죽을 수도 버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좋다. 그럼 네놈부터 찔러 죽이고 보자꾸나.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고금표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형님, 이리 오시오. 빨리 이리 오시오. 「웃어 . 곽청동의 나지막한 협박이다. 고금표는 이마를 찡그리며 껄껄 억지로 몇 번 웃었다. 「즐겁게 웃어야 해. 곽청동의 명령이 또 떨어졌다. (빌어먹을 년, 어떻게 즐겁게 웃으란 말이냐?) 고금표는 속으로만 이렇게 저주를 했다. 그러나 칼끝이 벌써 살속에 꽃혔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목청을 가다듬고 한바탕 바보처럼 웃어 댔다. 밤중의 웃음소리가 올빼미의 울부짖음과 같이 들렸다. 등일뢰와 합합태는 벌써분터 깨어 있었다. 「둘째, 너무 좋아하지 마시게. 기운 좀 남겨 두게나.」 등일뢰의 놀리는 말이었다. 곽청동은 그가 이쪽으로 오지 않자 다시 명령을 내렸다. 「넷째를 불러 봐. 고금표가 몇 번이나 그를 불렀다. 합합태는 비록 도둑질로 일생을 보내고는 있지만 여태까지 부녀자를 농락한 일은 없었다. 고금표의 비열한 행동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명색이 맹형이라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곽청동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 만약 이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이놈들 셋을 죽이지 못하면 오늘의 수치를 평생 씻지 못하겠구나.) 오른손으로 칼을 잡은 채 왼손을 써서 고금표의 몸을 오라줄로 칭칭 잡아 묶었다. 이 녀석에 대해서는 이만큼 해 놓았으니 안심할 수 있었지만 천막에 기대 앉은 채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날이 밝았다. 고금표는 그런데도 코를 골며 달게 자고 있었다. 곽청동은 화가 나서 말채찍으로 한바탕 두들겨 팼다. 그리고 칼끝을 그의 가슴에 댄 채 낮은 소리로 호통을 쳤다. 「흥, 소리만 질러도 당장 죽여 버리겠다.」 고금표는 얼굴이 피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곽청동은 또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놈을 지금 죽여 없앤다 하더라도 금방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한다? 이놈을 다시 한 번 살려 줄 수밖에 없겠구나. 사부님께서 오늘 오후쯤에는 도착하실 수 있으시겠지.) 고금표를 묶었던 오라줄을 풀고 천막 밖으로 내쫓았다. 등일뢰는 그의 얼굴의 핏자국을 보고 이상해서 물었다. 「둘째, 저 계집 정체가 뭐야? 공연히 잘못 걸려들면 큰일나네.」 고금표는 생각했다. 이 여자가 비록 병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근력이 자기를 능가할 정도요, 게다가 검까지 휴대하고 다니며 또 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으니 예사 처녀는 절대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서 등일뢰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우리 이 여자를 잡읍시다.」 두 사람이 서서히 그녀를 향해 접근했다. 곽청동은 두 사람의 거동이 수상한 것을 보고 갑자기 말 옆으로 달려갔다. 장검을 들어 고금표와 합합태가 타고 온 말 등에 실린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찔렀다. 이어 등일뢰가 타고 온 말 등에 실린 제일 큰 물주머니를 떼어 손에 쥐고 자기 말 위로 뛰어 올라 탔다. 등일뢰 등 세 사람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2개의 가죽 주머니에서 흘러내린 물이 금방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막에서 이 2개의 물주머니에 담긴 물은 금이나 은값에 해당하는 보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 사람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각기 병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곽청동은 말 등에 엎드린 채 계속 기침을 했다. '이쪽으로 오기만 하면 그냥 찔러 버릴 테다.」 칼끝을 마지막 남은 가죽 주머니에 댔다. 관동삼마는 발길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곽청동은 또 한바탕 기침을 했다. '내 호의로 당신들을 데리고 취우황삼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당신들이 오히려 나를 능멸했소. 여기서 물이 있는 데까지 가려면 아직도 엿새가 남았土. 나를 그냥 놔두지 않으면 이 물주머니를 찢어 버릴 것이오. 그리고 우리 다같이 져기서 말라 죽읍시다.」 관동삼마는 서로 바라다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속으로만 이 계집이 악랄하다고 욕을 할 뿐이었다. 등일뢰는 생각했다. (지금은 대답할 수밖에 없겠구나. 사막을 지나면 그때 처치해야지. '다시는 괴롭히지 않을 것이니 그냥 동행합시다.」 「그럼 당신들이 앞에서 가시오.」 그래서 세 남자는 앞에, 한 여자는 뒤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막을 행진했다. 점오가 되자 해가 머리 위에 와 있었다. 네 사랍 모두들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곽청동은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며 어지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내 오늘 여기서 죽어야 하나?) 이때 합합태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보시오! 물 좀 주시오. 그가 몸을 돌려 세웠다. 손에 사기 그룻을 들고 있었다. 곽청동은 정신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그룻을 땅바닥에 내려놓으세요. 합합태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릇을 모래 위에 놓았다. 「백 보를 물러나 있으시오.」 곽청동의 말이었다. 고금표가 머뭇거렸다. 「물러나지 않으려면 물을 마실 생각도 마시오.」 고금표는 혼자 저주의 욕설을 중얼거렸다. 세 사람이 마침내 물러섰다. 곽청동은 말을 탄 채 가서 가죽 주머니의 마개를 열고 그릇에 물을 반쯤 따라 놓은 뒤에 물러났다. 세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와 너도 한 모금 나도 한 모금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셔 버렸다. 네 사람이 다시 말에 올라 출발했다. 2시간쯤 갔을까? 갑자기 길가에 한 무더기의 푸른 풀이 나타났다. 등일뢰의 눈이 반짝거렸다. 「앞에 틀림없이 물이 있을걸세. 곽청동은 눈앞이 캄캄했다. 애를 써서 대처해 나가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또한 머리가 깨질 듯 아파 더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는데 갑자기 창공에서 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물체가 반짝 하더니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내렸다. 곽청동은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왼팔을 뻗으니 매가 깃을 거두고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매의 다리에 검은 천이 한 조각 매달려 있었다. 사부가 머지않아 도착할 것을 알았다. 미칠 듯이 반가웠지만 눈앞이 또 한번 캄캄해졌다. 등일뢰는 무슨 곡절이 숨어 있다고 믿고 손을 번쩍 들었다. 수전 하나가 그녀의 오른팔을 겨냥하고 날았다. 우선 그녀의 수중에 있는 장검을 떨어뜨리고 난 후에 물주머니를 뺏을 생각이었다. 곽청동이 칼을 휘둘러 수전을 쳐 떨어뜨리고 고삐를 채어 질풍처럼 앞을 향해 달렸다. 관동삼마가 소리를 지르며 뒤를 쫓았다. 7,8리쯤 달리자 곽청동은 손발의 맥이 다 풀려 더 버티지 못하고 그만 말 위에서 떨어졌다. 삼마가 크게 반기며 쫓아왔다. 곽청동은 몸부림치며 일어나 말에 오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손발에 맥이 빠져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사람이 다급해지면 꾀가 생기는 법이다. 물주머니의 가죽끈을 매의 목에 걸고 매를 위로 집어 던지며 휘파람을 불었다. 원래 천산쌍응은 매를 기르기 좋아했다. 커다란 매도 새끼 때부터 잡아다 기르며 훈련을 시켰다. 사냥할 때 이용할 수도 있고 통신할 때도 유용하게 썼다. 그들 부부가 천산쌍응이라 불리는 것도 매를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곽청동의 이 매도 사부가 훈련을 시켜 길들인 것이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 물주머니를 목에 건 채 날개를 펄럭이며 천산쌍응을 향해 날아갔다. 등일뢰는 매가 물주머니를 달고 가자 기겁을 하고 말머리를 돌려 쫓아갔다. 고금표와 합합태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이놈의 계집애는 아무래도 달아나지 못할 테니 우선 물주머니 부터 쫓아가는 것이 더 급하다.) 그래서 말을 미친 듯 몰고 쫓아갔다. 고금표가 손을 뒤집으며 소차 하나를 매를 향해 던졌다. 그런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 채찍이 자기의 팔목을 때렸다. 그 바람에 소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합합태가 채찍으로 그의 팔을 친 것이다. 고금표는 화가 났다. 「왜 이래? 「소차가 만약 물주머니를 맞히면 그래 우리가 살아남을 것 같아서 그러나? 고금표가 생각하니 그럴듯한 말이다. 말 안장에 납작 엎드려 앞을 향해 급히 달렸다. 그는 요동의 마적 출신이라 기마술이 출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등일뢰를 앞질렀다. 물주머니 안에는 물이 반쯤 차 있어 무겁지는 않았지만 매가 물주머니를 달고 나느라 세 사람과의 거리는 시종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10여 리를 쫓아가자 급히 달리던 말의 속도가 점점 느려져 이제 다시는 쫓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매가 창공에서 돌이 떨어지듯 아래를 향해 내려왔다. 앞에 먼지가 일어나며 두필의 말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매는 두 바퀴 맴을 돌더니 그 중 한 사람의 어깨 위에 내려와 앉았다. 관동삼마는 말을 재촉하며 앞으로 나서다 보니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홍안의 대머리요, 다른 하나는 백발이 성성한 노파였다. 「곽청동은? 그 대머리 영감이 날카롭게 물었다. 세 사람은 영문을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영감이 매의 목에 걸린 물주머니를 떼어 주자 매는 울부짖으며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날아갔다. 두 노인은 삼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의 뒤를 쫓아갔다. 등일뢰는 그들이 매를 쫓아가 그 위구르 소녀를 구출하려고 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의 무공이 막강함을 믿고 그들 두 노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이 물주머니를 가지고 갔으니 그것만은 빼앗아 와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그들 두 노인의 뒤를 쫓아갔다. 그 두 노인이 바로 천산쌍응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 리의 길을 쫓아가자 매가 땅으로 내려앉았다. 거기 곽청동이 누워 있었다. 관명매는 나는 듯 말에서 뛰어내리며 곽청동을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관명매는 사랑하는 제자가 이꼴이 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누가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이때 관동삼마도 멀지 않은 장소에 와 있었다. 곽청동은 손가락으로 세 사람을 가리키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다. 「아니 영감, 저놈들을 그냥 놔두실 판이오? 관명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왼손으로 곽청동을 안은 채 물주머니의 마개를 열고 천천히 그녀의 입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진정덕은 아내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세 사람이 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말머리를 돌리고 그들 삼마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거의 가까워지자 긴 팔을 뻗어 합합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합합태는 팔을 휘둘러 진정덕을 쓰러뜨리려고 했다. 순간 진정덕의 팔에 진통이 왔다. (이 녀석 솜씨가 빠르기도 하구나. 힘도 대단한걸.) 말이 미처 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허공에서 벌떡 일어나며 다시 그를 향해 덮쳤다. 합합태는 왼손으로 막으며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진정덕은 대갈일성 손바닥을 휘둘러 그의 팔을 후려쳤다. 합합태는 온몸을 벌벌 떨며 비틀거리다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등일뢰와 고금표가 대경실색하며 쌍쌍이 대들었다. 합합태는 말에서 떨어질 때 공중제비를 돌아 땅 위에 내려서며 한 자루의 비수를 뽑아 들고 그를 향해 대들었다. 진정덕이 좌장을 고금표 면전에서 휘두르며 오른손으로 그의 소차를 잡고 밖으로 비틀었다. 고금표는 호구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도 재빨라 왼손에 가지고 있던 두 자루의 소차를 그를 향해 던졌다. 진정덕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소차를 낚워챘다. (어디서 굴러먹던 세 놈의 무공이 이토록 대단하냐? 어쩐지 내 제자가 이 지경으로 당하더라니,,,,,,.) 그런데 갑자기 머리 뒤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관동대마의 외다리 동인이 자신을 후려친 것이다. 진정덕은 몸을 돌려 덤벼들며 자세를 낮추고 쌍장으로 등일뢰의 하체를 직격했다. 관동대마가 동인을 돌리며 그의 옥침혈(玉枕穴)을 찌르려고 했다. 진정덕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두 발짝 뛰어 피했다. 「이놈이 혈을 칠 줄 아는구나.」 「그렇다. 등일뢰가 대답하고 동인을 흔들며 다시 그의 어깨에 있는 운문혈을 노렸다. 이 동인은 외다리였지만 팔은 두 팔이라 두 손을 머리 위에서 합쳤다. 이것은 무서운 폐혈귈이었다. 이 동인은 극히 무거워 점혈을 하는 것말고도 휘둘러 치거나 내려찍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강편이나 철추보다도 무서운 병기였다. 진정덕은 무림 가운데 있는 타혈(打穴) 병기는 판관필 (判管筆)이나 폐혈귈, 그밖에 점혈 강환(鋼環) 등이 모두 가볍고도 날렵하여 사용할 때 신속하고도 혈을 정확히 겨냥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 묵중하고도 둔탁한 무기로 점혈을 하려 덤비다니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즉시 온 정신을 가다듬고 치고 차며 맨손으로 세 사람을 상대로 결사적으로 맞붙어 싸웠다. 관명매는 곽청동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을 했다.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다보니 맨손인 채 열세에 몰려 있었다. 진정덕은 장검을 말 안장에 놓아 둔 채 뽑을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말 위에서 뛰어 일어날 때 말이 놀라 10여 장 밖에 달려나가 있었다. 그는 승부욕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장검을 가지러 가지 않았다. 맨손으로 이들 3명의 강호의 고수를 이겨보려고 했지만 점점 대적하기가 힘이 들었다. 관명매가 장검을 뽑아 들고 합류하면서 삭풍광소로 등일뢰의 등을 향해 찔렀다. 등일뢰가 동인을 뒤로 돌려 막았다. 관녕매는 검술을 완전히 쓰기도 전에 벌써 변초를 했다. 쉭쉭쉭 번개처럼 세 차례나 장검을 휘둘렀다. 등일뢰는 서북에 와 본 일이 없어 삼분검술(三分劍術)의 초식을 몰랐다. 마음속으로만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 말라빠지고 작디작은 노파의 검법이 어찌 이토록 무서운가 생각하며 철저한 방어를 하면서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관명매는 여덟 차례나 장검으로 찔렀다. 한 번 쓸 때마다 더욱 빨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삼분검술의 절초로서 목왕팔준음요지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일뢰가 비록 손발을 허우적거리기는 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다. 진정덕은 이쪽에서 강적이 하나 없어지자 즉시 우위를 차지했다. 쌍장을 춤추듯 움직이며 계속 적의 급소를 노리다가 갑자기 몸으 낮추고 고금표가 떨어뜨린 소차를 주워 들었다. 병기를 손에 잡으니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듯했다. 아미자초술을 쓰면서 들어가 합합태와 번개처럼 붙어 7, 8초를 대결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합합태의 왼쪽 어깨에 소차가 꽃히고 상처가 드러났다. 고금표는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갑자기 곽청동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정덕이 깜짝 놀라 합합태를 버리고 쫓아와 막으려 했다. 고금표가 미처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차가 이미 그의 등으로 날아갔다. 고금표는 왼손을 뻗어 소차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의 병기도 일단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날아오는 힘이 워낙 세어서 비록 소차의 꼬리를 잡기는 했지만 꽉 잡지 못했다. 급한 김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소차가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는 진정덕이 벌써 곽청동 옆에 가 있었다. 합합태가 급히 달려와 도우며 2대 1로 싸웠지만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저쪽의 등일뢰는 자기 방어에도 급급해 와서 도을 수가 없었다. 곽청동은 땅바닥에 앉은 채 사부와 사공(師公)이 점점 우위를 차지하자 마냥 기쁘기만 했다. 다섯 사람의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면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이때 갑자기 먼 곳에서 길게 울부짖는 처절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공포와 기아, 잔인성이 만한 것이 마치 온갖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곽청동이 놀라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사부님, 저 소리를 들어 보세요. 천산쌍응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가 곽청동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약속이나 한 듯 뛰쳐나오며 귀를 기울였다. 관동삼마는 허겁지겁 몰리며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이 멈추어지자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 바빠 대들 생각도 못했다.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먼 곳에서 검은 구름이 물려왔다. 그 사이 간간이 우레 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천산쌍응의 얼굴빛이 변하 니 진정덕이 나는 듯 달려가 말을 끌고 왔다. 관명매가 곽청동을 껴어안고 말위로 뛰어올랐다. 진정덕이 몸을 빼 말 등 위에 올라 타며 외쳤다. 「여보, 좀 올라와 보시오. 어디 피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시오.」 관명매가 곽청동을 말 위에 내려놓고 진정덕의 말 위로 옮겨 왔다. 진정덕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펴자 관명매가 남편의 어깨를 짚고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관동삼마는 적이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는데도 갑자기 손을 거두어 들이고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 위에 올라타 먼 곳을 살펴 보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두 늙은이가 무슨 요술을 부리려 하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금표는 이렇게 욕설을 퍼부었다. 등일뢰는 두 늙은이가 당황해하는 꼴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는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추측할 길이 없어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관명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외쳤다. 「북쪽에 두 그루가 있어요. '나무가 있건 없건 빨리 그리로 갑시다.」 진정덕이 다급히 외쳤다. 관명매는 다시 곽청동의 말 위로 옮겨갔다. 삼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 사람은 곽청동을 데리고 북쪽을 향해 급히 달렸다. 합합태는 그들이 서둘다가 물주머니를 놓고 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챙겨 들었다. 이때 울부짖는 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리 떼다. 고금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말할 때 벌써 얼굴빛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이 급히 말에 올라 천산쌍응의 뒤를 쫓아갔다. 한바탕 달리다 보니 뒤에서 호랑이의 울부짖는 소리와 이리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들이 날뛰는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니 먼지 가운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호랑이와 표범 -야생 낙타, 황양 , 들말이 결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 회끄무레한 수천 수만 마리의 굶주린 이리가 쫓아오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짐승 앞에 사람 하나가 말을 타고 달리는데 그 말이 어찌나 빠른지 호랑이와 표범 앞의 수십 장 거리에서 마치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말이 이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삼마는 말을 탄 사람이 회색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회색 옷은 먼지가 묻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얼굴 모습은 노인 같은데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죽으려고 환장들 했나? 빨리들 달아나라구.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등일뢰가 탄 말은 많은 짐승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그 기세에 눌려 앞 무릎을 꿇으며 등일뢰를 떨어뜨렸다. 등일뢰가 벌떡 뛰어 일어나는데 10여 마리의 표범과 호랑이가 벌써 그를 스치고 달아났다. 「난 이제 죽었구나. 등일뢰는 살려 달라고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고금표와 합합태 두 사랑이 듣고 달려와 구하려고 했지만 맞은편에서 굶주린 늑대 떼가 조수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등일뢰가 동인을 휘둘러 막아 보았다.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었지만 죽을 마당에 쓸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삽시간에 한 마리의 커다란 이리가 날카로운 흰 일을 들어내며 눈앞으로 닥쳐 들었다. 이때 갑자기 옆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회색 옷을 입은 그 노인이 달려와 왼손을 빼어 그의 덜미를 잡고 그 뚱뚱한 몸을 번쩍 들어 합합태의 말 위를 향해 집어 던졌다. 등일뢰는 경공의 재주를 펴 공중제비 재주로 합합태가 타고 있는 말 뒤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말머리를 죽자 하고 달아났다. 천산쌍응은 곽청동을 데리고 번개처럼 달렸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이리 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알았다. 제아무리 사나운 맹수라 하더라도 이 이리 떼에 걸리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한바탕 달리다 보니 앞에 과연 두 구루의 큰 나무가 나타났다. 창피하구나. 그러나 이리의 뱃속에는 들어가지 않게 됐다.」 진정덕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가까이 접근하며 진정덕은 나무 위로 뛰어을랐다. 관명매가 곽청동을 들어올리자 진정덕이 받아 그녀를 높은 쪽에 있는 가지위에 앉혔다. 이렇게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관명매가 채찍을 들어 두 필의 말을 힘껏 쳤다. 죽지 않으려거든 달아나거라. 너희들을 보살필 여유가 없구나. 두 필의 말이 황급히 달려나갔다. 1사람이 막 나무 위에 올라 안자 이리 떼가 벌써 눈앞에 닥쳤 오고 있었다. 앞에 사람이 하나 있는데 회색 옷을 입은 그 노인이었다. 그 사람이로군요. 관명매는 대경실색했다. 「흥, 과연 그 사람이로군.」 진정덕이 코방귀를 뀌고 곁눈질로 아내를 훔쳐보았다. 아내의 황급해하는 표정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내가 만약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면 이렇게까지 조급하게 굴지는 않겠지.」 「아니, 이런 마당에서도 질투를 하우? 빨리 사람이나 구해욧.」 관명매가 화를 내며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몸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진정덕도 코방귀를 뀌며 몸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오른 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가까워지자 진정덕은 왼손으로 그의 허리를 껴안고 들어올렸다. 그 노인의 몸이 뜻밖에 허공에 뜨자 타고 있던 말은 일직선으로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발 밑은 온통 호랑이 , 표범, 그리고 황양의 무리가 득시글거렸다. 그 노인이 재주를 넘어 나무 위에 서서 보니 천산쌍응이다.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났다. 「왜? 원 형도 이리를 무서워하오? 진정덕이 이렇게 말하자 노인이 화를 냈다. 「누가 남의 일에 참견을 하랍디까? 난처해진 관명매가 나섰다. 「여보세요, 너무 괴팍하게 굴지 말아요. 우리 남편이 당신을 잘못 구해 준 것은 아니잖아요. 진정덕은 아내가 자기를 돕고 나오자 득의양양해졌다. 노인이 냉소를 머금었다. 「나를 구했다니? 오히려 내 큰일을 그르쳤土. 「이리 떼에게 놀라신 모양이니 좀 쉬시구려.」 진정덕이 웃으며 말하자 노인이 또 화를 냈다. 「이 원 모가 어찌 짐승을 무서워하리요. 이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바로 진가락의 사부인 천지괴협(天池 怪俠) 원사소였다. 그는 어렸을 때 관명매와 소꿉동무로 자라며 서로 좋아했다. 다만 그의 성질이 괴팍하여 두 사람은 작은 일을 가지고도 잘 다투었다. 한번은 말다툼 끝에 원사소가 멀리 사막 북쪽으로 가서 10여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아 소식이 끊어졌던 것이다. 관명매는 그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체념하고 진정덕에게 시집을 가 버렸다. 뜻밖에도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사소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의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진정덕은 몹시 불쾌했다. 몇 차례나 원사소를 찾아가 화풀이를 했다. 그러나 무공이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원사소가 관명매의 체면을 보아 양보를 했지만 진정덕은 크게 골탕을 먹었다. 화가 난 진정덕은 아내를 데리고 멀리 떠나 버렸다. 그러나 원사소는 옛 정을 잊지 못해 천산으로 옮겨 살았다. 비록 평소에 서로 찾아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사모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위로가 되었다. 진정덕은 그가 쫓아온 것을 보자 자연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명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대로 옛 애인과 만나는 것을 피했지만 진정덕의 쓸데없는 의심 때문에 관명매의 성격음은 날로 우울해지고 더욱 사나워졌다. 부부는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다투기만 했다. 세 사람 모두 백발이 성성했지만 이 풀리지 않는 인연은 마음속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진정덕은 이번에 원사소를 구해 준 것이 마냥 흐뭇했다. 이렇게 구해 주었으니 내게 고맙다고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관명매는 원사소가 자기의 큰일을 그르쳤다고 하는 말을 듣고 궁금해 물었다. 「어떻게 해서 큰일을 그르쳤다고 하십니까? 「근래 이 짐승 떼가 가면 갈수록 많아져 사막의 커다란 두통거리요. 여러 마을의 사람과 가축이 이리 메에게 다 잡아 먹혔다오. 그래서 나는 이리 떼를 유인해 다 죽여 없애려고 했던 것인데 저 사람의 오지랄이 넓어 내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라오.」 진정덕은 그가 한 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져 사뭇 거북했다. 원사소는 관명매가 미안해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위로했다. '진 형과 당신이 호의로 그랬으니 내 고맙게 생각하면 되겠지요. 「그래, 어떻게 이리 떼를 잡으려고 하셨소? 진정덕이 물었다. '대답보다는 사람을 구하는 일이 더 급하오.」 원사소가 갑자기 이렇게 외치며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이리 떼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 관동삼마는 이리 떼의 습격을 받고 세 사람이 등에 등을 댄 채 분전하고 있었다. 두 필의 말은 벌써 이리 떼에게 이리저리 찢기고 있었다. 세 사람이 병기로 10여 마리의 이리를 때려 잡기는 했지만 이리 떼는 계속 달려들었다. 세 사람 모두 몸에 7, 8군데의 상처를 입어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원사소가 갑자기 뛰어내리며 쌍장을 번쩍 들자 2마리의 굶주린 이리의 천령개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그는 합합태를 잡아 나무 위로 집어 던지며 외쳤다. 「자, 받으시오. 진정덕이 그를 받았다. 원사소는 연속적으로 등일뢰와 고금표를 집어 던지고 이어 쌍장을 휘둘러 2마리의 이리를 또 때려잡았다. 그리고 죽은 이리의 목을 잡고 휘두르며 길을 뚫고 나와 나무 위로 뛰어올라왔다. 이렇게 해서 관동삼마는 호랑이 굴 속 같았던 위기를 모면했다. 원사소가 이리를 때려잡는 것이 마치 토끼를 잡듯 수법이 날렵하고 힘이 막강한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다. 그가 나무 위에 올라오자 계속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수백 마리의 굶주린 이리는 나무를 끼고 돌며 목을 길게 빼고 우르렁거렸다. 먼 곳에서 수십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이 이리 떼에게 포위되어 다투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뭇 짐승들이 날뛰며 물어뜯는 것이 너무나 처참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랑이와 표범 등이 이리 떼에게 깨끗이 잡아 먹혔다. 나뭇가지 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은 모두 강호의 호객이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라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진정덕은 관동삼마를 받아 나무 위에 올려 놓았지만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사부(師父)님, 이 세 사람은 호인이 아니에요.」 곽청동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리밥으로 주지 . 진정덕이 이렇게 말하고 쌍장을 교차시키며 그들에게 대들려고 했다. 그러나 나무 아래의 이리 떼가 여러 짐승을 집어삼키는 광경 보자 차마 그럴 수가 없다고 머뭇거리는 사이 등일뢰가 외쳤다. 1쪽 나무로 가자. 옆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위로 뛰어가자 고금표와 합합태 두 사람도 이어 몸을 날렸다. 관명매가 곽청동을 바라다보았다. 동아야, 어떻게 할까? 그녀는 곽청동이 시키는 대로 쫓아가 죽여 없애려 했던 것이다. 그만 두세요.」 곽청동의 마음이 약해진 것이었다. 자기 번뇌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쉰 체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삼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로 취우황삼 곽청동이오. 내게 복수를 하러 찾아왔다며 마냥 그러고 있어요? 등일뢰 등 세 사람은 그녀가 바로 곽청동이란 말을 듣자 놀랍고도 후회스러웠다. 화가 나기는 했지만 지금 무슨 수로 손을 쓴단 말인가? 이리 떼는 빨리도 왔지만 빨리 물러갔다. 나무 아래를 돌며 한바탕 울부짖다가 나머지 짐승들의 뒤를 쫓아갔다. 관명매는 곽청동 보고 천지괴협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원사소는 그녀의 병색을 보고 주머니 속에서 2개의 주흥색 환약을 꺼내 주었다. '이걸 먹지, 이게 설삼환(雪參丸)이야.」 천산쌍응은 평소부터 설삼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진귀한 약재를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기사회생의 효력이 있는 약이었다. 「고맙다고 빨리 인사드려라. 관명매가 말했다. 곽청동이 사례를 하려고 하자 원사소는 나무 밑으로 뛰어내려 달려나갔다. 마치 한 가닥 연기처럼 노란 먼지 속의 가물가물한 흑점으로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