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淸香妃 이리떼 속의 남녀들 하얀 산붕우리 비밀의 궁전 쫓는 자 쫓기는 자 소녀의 유서 텁석부리 영감 궁지에 몰린 장소중 옹정의 편지 土림사(少林寺)의 방문객 황궁(皇宮) 안의 사막 사랑과 대의(大義) 사이 순결한 가슴에 꽂은 비수 참영웅이 가는 길 내일 떠오를 태양 작가후기 (作家後記) 이리 떼 속의 남녀들 관명매는 곽청동을 안고 나무 아래로 내려와 우선 설삼환 한 알을 복용케 했다. 곽청동은 약을 삼키자마자 한 가닥 뜨거운 열기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하더니 금방 전신이 편안해졌다. 「넌 정말 운이 좋구나. 영약을 얻어먹으니 금방 좋아지는 것 같구나.」 관명매의 말에 진정덕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 약을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아. 「아니, 그럼 동아가 더 시달리기를 바란단 말이에요. 관명매가 남편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나 같으면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약만은 먹지 않겠소. 당신 같으면 병이 없어도 그가 주는 약이라면 뭐든지 다 먹겠지? 관명매는 남편의 시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막 비난의 말을 퍼부으려고 하다가 곽청동을 얼핏 보니 두 눈에 눈물이 글썽 글썽 고여 있었다. 그래서 꾹 참고 그녀를 등에 업은 채 북쪽을 향해 떠났다. 진정덕은 뒤를 쫓아가면서 혼자 중얼중얼 투정을 부렸다. 세 사람은 윽왕곤에 있는 천산 쌍응의 집으로 돌아왔다. 곽청동은 약을 복용한 후 자고 일어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관명매가 침대 옆에서 병든 몸으로 왜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곽청동은 계략을 써 청병을 섬멸한 일과 오는 도중에 삼마를 만나게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집을 나오게 된 까닭은 시종 말하지 않았다. 관녕매는 성질이 급해 계속해서 꼬치꼬치 물었다. 곽청동은 사부를 존경하기 때문에 더는 속일 수가 없어 ◎ 울음을 터뜨렸다. 1사람이..,,,, 제 여동생을 좋아해요. 제가 병사를 파견할 때 ... 아빠와 모든 사람들이 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의심을 했어요. 아니, 새 사람을 좋아하느라 옛 사람을 버리다니, 그리고 네 여동생은 어쩌면 그렇게 몰인정하냐. 두 사람 모두 죽여 없애야겠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가 가서 따져 봐야겠다. 관명매가 이렇게 말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정덕은 아내가 떠드는 ◎ 소리를 듣고 와 보려고 하다가 두 사람이 하마터면 문에서 부딪칠 뻔했다. 관명매가 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가서 배은망덕한 두 사람을 죽입시다. 좋소. 1들 두 사람이 달려나갔다. 곽청동이 벌떡 일어나 쫓아가서 말리려고 했지만 내복만 입고 있어 나갈 수가 없었다. 곽청동은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부와 사공이 벌써 멀리 가 버린 뒤였다. 그녀는 이들 두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성질이 급한데다가 무공 또한 막강해 진가락 혼자서는 당해 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만약 정말로 진가락과 여동생을 살해한다면 어떻게 하나? 곽청동은 병중의 허약함을 무릎쓰고 즉시 말을 타고 쫓아갔다. 관명매는 가는 도중, 배신한 남자는 마땅히 죽여 없애야 한다고 계속 이를 갈았다. 「동아가 단검이 진귀한 보물임에도 호의를 가지고 그에게 주었으니 얼마나 깊이 그를 사모한 것인가? 그런데도 동아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그녀의 여동생에게 눈독을 들이다니,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여야 해요. 「동아의 여동생은 어쩌면 그렇게 염치가 없을까? 제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을 렛다니 말도 안돼. 천산쌍응이 3일째 가고 있는데 앞에서 먼지가 일어나며 두 필의 말이 남쪽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관명매가 (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오? 진정덕은 물었지만 자기도 똑똑히 보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진가락이었던 것이다. 즉시 칼을 뽑아들었다. 「잠깐만, 저들이 탄 말이 얼마나 빠른지 보세요. 말을 달려 추적하기가 어렵겠는데요. 우리는 로르는 척하다가 손을 써도 늦지 않아요. 관명매의 말에 진정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진가락도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와 말에서 내려 절을 했다. 「두 분의 선배님을 뜻밖에 뵈오니 정말 반갑습니다. 혹시 곽청동 소저를 만나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못된 짓을 했으니 마음이 불안하겠지. 꾀나 걱정하는 체 하는군.) 관녕매가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다. 못봤는데, 왜, 무슨 일이 있는가? 관녕매가 묻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무척 예쁘게 생긴 소녀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언니의 사부님이시니 빨리 말에서 내려 인사를 드리세요.」 진가락이 말했다. 진정덕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녀석의 마음이 변할 만도 하구나. 제 언니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는걸.) 관명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린 계집애가 어찌 이토록 교활하게 생겼담.) 관녕매는 전연 내색을 하지 않고 웬일이냐고 물었다. 진가락은 경위를 설명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구.」 관명매가 이렇게 말한 뒤, 네 사람은 나란히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 때문에 동아를 만나려고 할까? 두 사람이 동아를 약올릴 셈으로 함께 왔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두 사람이 미워 뒤에 약간 처지며 남편을 향해 이렇게 속삭였다. 있따가 당신은 저 남자를 죽여 버려요 난 저 계집애를 맡을 테니까. 진정덕이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자 이들 네 사람은 모래언덕 옆에서 야영을 했다. 밥을 먹은 뒤,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향향 공주가 보따리 속에서 쇠기름으로 만든 초를 꺼내 불을 밝혔다. 쌍응은 불빛 아래서 이들 한 쌍의 남녀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남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옥으로 만든 나무 같았고, 여자는 안개 속의 작약처럼 예뻤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하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들의 마음이 어째서 그렇게 나쁠까?) 향향 공주가 진가락을 향해 물었다. 「언니에게 정말 아무 위험한 일도 없을까요? 진가락으로서도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언니의 무공이 훌륭한데다 총명하니 별일 있겠습니까? 수만 명의 청병도 섬멸할 자신이 있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으로 믿어야지요. 향향 공주는 진가락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믿고 싶었다. 언니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언니는 병이 들었잖아요. 언니를 찾으면 함에 돌아가서 편안히 쉬자고 말씀하셔야 해요.」 「물론 그래야지요. 진가락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관명매는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모두 일부러 꾸며 내는 것인 줄 알고 기가 막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향향 공주가 갑자기 진정덕을 향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영감님, 우리 한번 장난이나 하며 노시지 않을래요? 진정덕은 어이가 없어 아내를 바라다보았다. 관명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상대방이 의심할 행동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좋아! 무슨 장난을 하자는 건가? 향향 공주는 관명매와 진가락을 향해 웃었다. 「같이 해요. 네?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향향 공주가 안장을 내려다가 네 사람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 안장 위에 한 무더기의 모래를 올려놓고 다진 뒤, 다시 그 위에 작은 칼을 한 자루 꽃고 말했다. 우리가 이 작은 칼로 모래를 한 덩어리씩 잘라 내는 거예요.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초를 쓰러뜨리는 사람은 그 벌로 노래나 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춤을 추기로 해요. 아시겠지요? 그럼 자, 영감님부터 하세요.」 작은 칼을 진정덕에게 넘겨 주었다. 진정덕은 몇십 년 동안 이런 어린이들의 장난을-해 본 일이 없었다. 작은 칼을 손에 쥐고는 좨나 면괴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 자르세요.」 관명매가 그의 팔목을 밀며 이렇게 말했다. 진정덕이 씩 웃으며 모래를 한 덩어리 잘라낸 뒤 칼을 아내에게 넘겨 주었다.관명매도 한 덩어리 잘라 냈다. 이렇게 세 바퀴도 돌지 않았는데 모래 더미는 기둥처럼 변했다. 초보다 별로 더 굵을 것도 없었다. 이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초가 넘어질 지경이었다. 진가락이 칼로 모래 등 한쪽을 살짝 건드려 파냈다. 「지독한 심술쟁이로군요.」 향향 공주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칼을 받아 반대 방향을 건드려 팠다. 이때 모래 기둥이 살짝 흔들렸다. 칼을 받아드는 진정덕의 오른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래, 뭐가 무서워서 떨어요? 관명매가 그를 놀렸다. '가볍게 모래 한 알만 긁어 내도 돼요.」 향향 공주가 요령을 가르쳐 주며 웃었다. 진정덕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손에 힘을 너무 주어서 모래 기둥이 무너지며 초가 쓰러지고 말았다. 진정덕은 안타깥다고 소리를 지르고, 관명매와 진가락은 재미 있다고 손뼉을 쳤다. 「영감님, 노래를 부르시겠어요, 아니면 춤을 추시겠어요? 향향 공주가 웃으며 묻자 진정덕의 노안이 홍당무가 되어 못하겠다고 떼를 썼다. 관명매는 남편에게 시집을 온 이래로 줄곧 말다툼을 하거나 아니면 진지하게 무예를 익히다가 때로 공동으로 적과 대결만 했지, 여태까지 이렇게 마음놓고 놀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의 어리숙하고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 「여보,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사람과 약속을 했으면 실천을 해야지, 못 하겠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우.」 진정덕은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좋아요. 그럼 내 어렸을 때 부르던 노래를 하나 하지.」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와 네가 젊은 부부가 되어 살림살이 꼭 소꿉장난만 같은데 아직도 거기서 왜 울고만 있나요,,,,,,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계속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관명매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남편과 막 결혼했을 때의 달콤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만약 원사소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평생 즐거웠을 것이다. 이 몇 년 동안 너무나 남편에게 잘못한 것이 많았다. 까닭도 없이 늘 화를 내곤 했다. 그러나 남편은 늘 자기를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었다. 어쩌다 질투도 하고 말다툼도 잦았지만 생각해 보면 모두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때 갑자기 수십 년 동안 너무나 남편에게 잘못했다는 생각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손을 뻗어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진정덕은 다정하게 나오는 아내의 태도에 매우 놀랐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관명매는 자기의 부드러운 표현에 감격해하는 남편이 너무나 고마웠다. 지난 세월 남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냉담하게 대했던 것이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상긋 웃었다. 이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진가락과 향향 공주도 서로 바라다 보며 웃었다. 네 사람이 다시 모래를 깎아 내는 장난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가락이 졌다. 그는 축영태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천산쌍응은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새삼스럽게 옛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산백과 축영태는 서로 사랑을 했지만 부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기들 부부는 엄연히 백년해로를 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과거 수십 년 동안 서로 다투느라 서먹서먹할 때가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 과거의 그런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새로 가까워지려는 마음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향향 공주는 이 옛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처음에는 계속 웃으며 듣다가, 양산백이 축영태가 남장을 한 여인임을 몰랐다는 말이 나오자 어지간히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나도 이원지가 남장을 한 여자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꾀 미련한 고양이로구나.) 그러나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자신이 미련했기 때문에 향향 공주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곽청동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반은 기쁘고 반은 부끄러워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진정덕이 또 한 차례 졌다. 그러나 정말 부를 만한 노래가 없었다. 「제가 당신 대신 옛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관명매가 딱해 못 보겠다는 듯이 나서자 향향 공주가 좋다고 손뼉을 쳤다. 관명매는 왕괴가 계영을 배신한 옛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밤이 점점 깊어만 갔다. 향향 공주는 추위를 느끼자 관명매 옆으로 다가앉았다. 관명매는 그녀의 아리따움과 추위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살그머니 껴안았다. 그리고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관명매가 이 옛 이야기를 꺼낼 때는 이들 두 사람을 죽이기 전에 한 차례 훈계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 알게나 하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도중 짙은 향기를 맡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기화요초가 있는 화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낮추고 보니 향향 공주가 어느 틈에 자기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천산쌍응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노부부가 사막에서 살다 보니 어떤때는 정말 너무나 적적했다. 관명매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우리들에게 이렇게 귀여운 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촛불은 바람에 흔들려 꺼지고 별빛이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비춰 주고 있었다. 오른팔로 자신의 몸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 마치 아기가 엄마를 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모두들 이제 그만 잡시다.」 진정덕이 쉬자고 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이 아이가 잠에서 깨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관명매가 낮은 소리로 말하고 살며시 일어나 그녀를 안은 채 천막 안으로 들어가 뉘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향향 공주가 꿈속에서 잠꼬대를 했다. 「엄마, 양젖을 가져다 새끼 사슴에게 먹여 주세요. 배고프지 않도록요. 관명매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하마, 잠이나 자렴.」 살금살금 물러나오며 생각했다. (분명 천진난만하고 마음씨 고운 아인데 어쩌다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때 진가락이 자기의 천막을 치는데 향향 공주의 천막과는 거릭 너무 먼 곳이었다. 진정덕이 가까이 와서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같은 천막에서 자는 것은 아니로군.」 관명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아직 자지 않고 계속 그 칼만 들여다보고 있군. 잠이 들면 해치울까? 아니면 제놈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 준 뒤 처치할까? 관명매로서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진정덕은 달콤한 생각이 들어 지금 심정으로는 살인 같은 것을 차고 싶지 않았다. 「우리 좀더 앉아 있다가 저놈이 잠들면 그때 감쪽같이 해치웁시다. 반 시간쯤 지나자 진정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이 들었나 내가 가서 들여다보고 오지.」 관명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정덕은 일어날 생각도 안했다. 입으로 흥얼흥얼 무슨 곡조인가를 읖조리고 있었다. 이제 손을 써야지요? 「암, 그렇게 해야겠지.」 관명매의 말에 진정덕이 동의를 했지만 아무도 먼저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차마 결단을 내리기가 난처했던 것이다. 천산쌍응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위인들이었다. 강호에서 그들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숫자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잠든 두 사람에게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별자리가 움직임에 따라 한기가 더욱 심해졌다. 노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추위를 견뎠다. 관명매는 남편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으며, 진정덕은 가볍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두 사람도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진가락과 향향 공주가 깨어 일어나 보니 두 노인은 벌써 가고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걸 보세요. 저게 뭐예요? 향향 공주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진가락이 고개를 돌리고 보니 모래 위에 글씨가 씌어 있었다. (못된 짓만 하면서 회개하려 하지 않으니 반드시 그대들의 목숨을 취하리라.) 각 글자의 넓이가 다섯 자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아 칼끝으로 쓴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진가락은 이마를 찡그리고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향향 공주는 한문을 몰라 궁금해서 물었다. 「무슨 그림이에요? 진가락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일이 있어서 먼저 떠난다는 내용이오.」 「언니의 사부 두 분은 정말 훌륭하,,,,,,.」 향향 공주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뛰어 일어나며 놀랐다. 「저 소리를 들어 보세요. 진가락은 벌써 먼 곳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울부짖음을 들었다. 「이리 떼가 몰려오니 빨리 갑시다. 두 사람은 서둘러 천막을 걷고 식수를 챙긴 뒤에 말을 타고 달아났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리 떼가 벌써 가까이 왔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들이 탄 말이 워낙 빨리 달린다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이리 떼를 뒤로 멀리 떼어 놓았다. 이리 떼는 굶은 지 오래 되어 사람과 말을 발견하자 죽자 하고 쫓아왔다. 비록 거리가 멀어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모래 위의 발자국을 따라 계속 쫓아왔다. 진가락과 향향 공주는 반나절 이상이나 달렸다. 이쯤이면 위험을 벗어났겠거니 여기고 말에서 내려 물을 마셨다. 막 불을 지펴 먹을 것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급히 달렸다. 날이 저물어 이리떼와는 거의 1백 리쯤 떨어졌을 것 같은 장소에서 천막을 세우고 쉬기로 했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백마가 길게 울며 이리뛰고 저리 뛰어 진가락을 깨웠다.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까워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천막도 걷을 사이 없이 물주머니와 비상 식량만 들고 말에 올랐다. 이렇게 달아나다가는 쉬고, 쉬다가는 달아나며 사막을 헤맸지만 시종 이리 떼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과 말만 모두 지쳐 버렸다. 향향 공주가 탄 흥마는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죽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함께 백마를 타고 달아났다. 백마는 두 사람이 타서 무거워지자 달리는 속도가 점점 더 늦어졌다. 3일째 이렇게 달렸지만 이리 떼를 멀리 떼어 놓지 못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만약 이 말까지 건실하지 못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 말이 이틀 낮과 밤을 견뎌 주었지만, 이제 반나절만 더 달리다 보면 이 말도 죽고야 말리라.) 다시 한 시간쯤 달리다 보니 왼쪽에 작은 나무숲이 나타났다. 말을 달려 그쪽으로 가서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지키며 말을 쉬게 해야지.」 향향 공주와 협력하여 야트막한 모래담을 쌓았다.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 담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들 두 사람과 말을 중앙에 놓은 채 삽시간에 불길이 원 로양으로 타올랐다. 이렇게 배치를 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리 떼가 몰려들었다. 이리들은 불이 무서워 그 주위를 맴돌며 으르렁거릴 뿐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다. 「말이 기력을 되찾으면 그때 밖으로 뛰쳐 나갑시다.」 「그래,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진가락의 말을 듣고 향향 공주가 자신 있느냐고 물었다. 진가락으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물론, 문제 없습니다.」 향향 공주는 이들 굶주린 이리가 모두 피골이 상접한 것을 보고는 얼마나 굶었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리들도 불쌍하군. 진가락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원, 이 아가씨의 자비심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우리가 곧 이놈들의 뱃속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판에 불쌍한 생각을 하다니? 차라리 자신이나 불쌍해하지.) 그녀의 붉은 두 볼과 희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피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불 밖에 있는 이리 떼에게 돌렸다. 날카롭고도 긴 흰 이를 드러낸 채 침을 모래 위에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불길만 꺼지면 금방이라도 덮쳐들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 거렸다. 향향 공주도 그의 초조해하는 눈동자를 보고 자기 두 사람이 살아 남을 가망이 희박함을 직감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서 진가락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두 사람, 죽은 뒤에도 천국에서 여전히 즐겁게 지내며 영원히 떨어지지 말아요.」 진가락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천국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이 여자가 천국에 있다면 나는 지옥에 가 있겠지.)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이 여자가 흰 옷을 입은 채 천국의 백옥 난간에 기대서서 나를 생각해 준다. 어쩌면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을 떨구겠지. 그 눈물은 틀림없이 향기로울 것이다. 눈물이 꽃 위에 떨어지면 그 꽃은 더욱 예쁘게 되고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하리라.) 향향 공주가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만은 애창에 젖어 있었다. 한숨이 나와 차라리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런데 한쪽의 나뭇가지가 거의 타들어가 불길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그 위에 나무를 얹었다 3마리의 굶주린 이리가 그 틈을 타고 불길 안으로 뛰어들었다. 진가락은 잽싸게 그녀를 잡아끌어 자기 뒤에 숨겼다. 백마가 왼쪽 다리를 들어 이리 한 마리를 걷어찼다. 진가락이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한 마리의 목을 잡고 다른 회색資 이리를 향해 휘둘렀다. 그 이리는 일단 뛰어 피했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다른 2마리의 이리가 빈 틈을 통해 안으로 뛰어들었다. 진가락은 있는 힘을 다해 손에 쥐고 있던 이리를 밖으로 집어 던졌다. 3마리가 한덩어리가 되어 물고 뜯으며 불 밖으로 나갔다. 그는 땅바닥에서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회색빛 이리를 쳤다. 그 이리가 입을 딱 벌리고 사람처럼 꼿꼿이 일어나 그의 목을 물려고 했다. 그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이리의 입에 쑤셔 박았다. 길이가 두어 자 되는 나뭇가지가 입 안으로 끝까지 들어갔다. 이리는 아파 날뛰다가 이리 떼 속으로 뚫고 들어가 바닥에 쓰러져 굴렀다. 진가락은 이 틈에 다시 땔감을 얹었다. 그러나 마른 나뭇가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 땔감을 주워 와야만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나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여 장 정도의 거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왼손에는 구검순을 들고 오른손에는 주색(珠索)을 든 채 향향 공주를 바라보았다. '내가 땔감을 주워 올 테니 불을 잘 타게 해 주시오.」 「네, 조심 하세요.」 향향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마른 나뭇가지가 자기들의 생명을 지켜 주는 것으로 알았다. 불길이 꺼지면 그들 두 사람의 생명의 불도 꺼져 버리는 것이다. 진가락은 구검순으로 호신을 하며 주색으로 길을 뚫고 경공의 재주를 펴 나무숲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리 떼는 불길 속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오자 그쪽으로 몰렸다. 앞장 선 2마리가 주색에 맞아 쓰러졌다. 진가락이 세 번 펄쩍펄쩍 뛰자 벌써 나무 옆에 와 있었다. 이들 관목은 키가 너무 작아 올라가 봤자 이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즉시 구검순을 휘두르며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었다. 수십 마리의 굶주린 이리가 그를 포위한 채 달려들려고 했다. 매번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반짝이는 9개의 구검에 놀라 물러서곤 했다. 그는 한 다발의 땔감을 마련한 뒤 몸을 숙이고 발로 밟아 그것을 주색에 붙들어 맸다. 바로 이 틈을 노리고 사나운 이리 한 마리가 그를 덮쳤다. 그가 검순을 휘둘러 치자 이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넘어졌다. 그러나 검순 위의 낚시 같은 물체에 이리의 몸이 걸려 떨어지지 않았다. 남은 이리들이 무섭게 울부짖었다. 그는 급히 잡아당기며 죽은 이리를 힘껏 집어 던졌다. 이리 떼가 대들어 물고 뜯었다. 진가락은 이 틈을 타 나무 다발을 들고 다시 불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하향 공주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너무나 반가워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진가락이 웃으며 그녀를 어루만져 주고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구덩이 안에 또 다른 사람이 하나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체격은 우람한데 옷은 벌써 굶주린 이리에게 뜯겨 엉망징창이 되었고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손에 칼을 쥔 채 표정만은 냉랭했다. 차디찬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臺천지 원수인 화수판관 장소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향향 공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분도 이리 떼를 피해 달아나다가 불길을 보고 달려 오신 모양 이지요? 그래 얼마나 놀라고 지쳤으면 이렇게까지 되셨을까? 물주머니에서 물 한 사발을 따라 그에게 건네 주었다. 장소중은 그것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소매를 들어 얼굴의 땀과 피를 닦았다. 향향 공주가 가벼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가 조혜 휘하에 있는 무관으로서 진가락과도 다툰 일이 있고, 뒤에 또 모래 구덩이 안에서 문태래와 악전고투를 한 인물임을 알아본 것이다. 진가락은 앞을 막고 주색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자 또 대들어 보시오. 장소중이 촛점을 잃은 눈으로 진가락을 바라보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원래 그는 화이대를 구출한 후 진가락과 향향 공주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러다 도중에서 이리떼를 만난 것이었다. 화이대는 이리 떼에게 잡아 먹혔다. 그는 다행히 탁월한 무공에 의지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수십 마리의 사나운 이리를 때려 죽이고 하루 낮과 밤을 사막에서 헤매다 지쳐, 타고 다니던 말까지 죽었다. 할수 없이 맨몸으로 달렸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또 하루를 견뎠다. 그러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고 결사적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한 가닥 남은 내공으로 버티고 있다가 마지막 힘이 빠지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향향 공주가 가서 보살펴 주려고 하자 진가락이 그녀를 붙잡았다. 「이 사람은 대단히 음흉해요. 잘못하다가는 속임수에 빠져요.」 한참 동안 기다려도 동정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향향 공주가 냉수를 가져다 그의 이마에 뿌리고 양젖을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장소중이 천천히 눈을 뜨며 반 잔쯤의 양젖을 마신 뒤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진가락은 어느 귀신이 이자를 자기에게 보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자를 죽인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남이 위태로운 틈을 타서 해를 입힌다는 것은 남자답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객사려의 마음씨가 너무나도 고왔다. 저항할 힘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면 그녀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용서해 주었다가 이자가 기운을 차린다면 자기가 적수가 못 되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 향향 공주를 바라보았다. 장소중을 바라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가락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자를 한 번만 더 용서해 주기로 했다. 세 사람이 곤경에 빠져 있는데 기운을 차리기만 한다면 어쩌면 이자의 탁월한 무공이 이리떼를 물리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 보았다. 둘이 협력만 할 수 있다면 향향 공주의 구출은 문제가 없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몇 모금의 양젖을 마신 뒤 잠시 쉬기로 했다. 얼마 후 장소중이 깨어났다. 향향 공주가 말린 양고기 한 덩어리를 먹으라고 주고 이리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천으로 싸매 주었다. 장소중은 그들 두 사람이 자기에 대한 원한을 잊고 도리어 은혜를 베풀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진가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장 대형, 우린 지금 똑같이 위험에 빠져 있으니 지난날의 여러가지 원한은 잠시 접어 둡시다. 아무래도 서로 힘을 합쳐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것 같소.」 옳은말씀이오. 우리 둘이 지금 다투다가는 세 사람 모두 굶주린 이리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오.」 만약 이리 떼에게 잡아 먹힌다면 더 할 말이 없을 것이오. 그는 한 시간쯤 쉬고 난 뒤라 원기가 다소 회복되어 어떻게 하면 이 곤경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곰곰이 궁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늘이 나를 도와 이들과 만나게 해 준 것이다. 세 사람이 만약 곤경에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우선 먼저 선수를 쳐서 진 공자를 처치한 뒤에 다시 이 예쁜 계집을 잡아 가기로 하자. 잡아만 간다면 앞으로 수십 년간의 공명과 부귀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진가락은 이렇게만 있다가는 그 결과가 어찌 될는지 몰라 불안했다. 그러다가 등굴게 타오르는 불길 밖에 이리의 똥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곽청동이 이리의 똥을 태워 연락을 취하던 방법이 생각났다. 그래서 주색을 이용해 이리 똥을 긁어다가 무더기로 쌓아놓고 거기에 불을 질렀다. 짙은 연기가 하늘 위로 곧장 올라갔다. 장소중이 소용 없는 짓이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설사 누군가가 본다 해도 감히 구출하러 오지는 못할 것이오. 수천의 대군이라면 이리 례를 쫓을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오.」 진가락도 이 방법이 아무 보탬이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무작정 이대로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는 기대를 막연하게나마 걸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세 사람은 타고 있는 불 위에 다시 땔감을 얹어가며 번갈아 잠을 잤다. 진가락이 향향 공주를 향해 속삭이듯 말을 했다. 「이 사람은 음흉하기 짝이 없으니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조심해서 살펴봐요.」 향향 공주가 머리를 끄덕였다. 진가락이 나뭇가지를 그와 장소중 사이에 쌓아 놓았다. 자기가 잘 때 혹시라도 장소중이 습격을 할까봐 미리 방비를 한 것이다. 향향 공주로서는 저항할 기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막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수천 마리의 굶주린 이리가 땅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하늘 위의 달을 바라다보며 일제히 울부짖는 것이었다. 소리가 어찌나 처절한지 모골을 송연케 만들었다. 한바탕 울부짖던 굶주린 이리의 소리가 뚝 멈췄다. 이것은 승냥이와 이리의 수만 년 동안 내려오는 습성이었다. 뒤에 사람들이 이것들을 길들여 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개들도 깊은 밤 달을 바라다보며 가끔 짖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날 새벽, 세 사람은 이리 떼가 여전히 불길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연 물러갈 기색이 없었다. 「야생 낙타 떼가 나타나야만 이놈들을 유인할 수 있을 텐데. 진가락의 말이었다. 이때 갑자기 먼 곳에서 또 다른 이리들이 울부짖으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장소중이 이마를 찡그렸다. 「아니, 이놈들이 갈수록 많아지니 야단났는걸.」 먼지가 날리는 가운데 세 필의 말이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말 뒤를 수백 마리의 이리가 쫓고 있었다. 말 위에 탄 사람은 이쪽의 이리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자 이쪽에 있던 이리들이 그쪽으로 달려들며 세 필의 말을 포위했다. 말 위의 세 사람이 병기를 쓰며 대항을 했다. 「저 사람들을 데려와야지요. 향향 공주가 안타깝다는 듯이 소리쳤다. 「우리, 저 사람들을 구하러 갑시다.」 진가락이 장소중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이 병기를 들고 세 필의 말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하여 혈로를 뚫고 세 필의 말을 불구덩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한 필의 말 위에 다른 사람이 또 하나 있었는데 말 안장에 엎드린 채 축 늘어져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차림새로 보아 위구르 처녀였다. 세 사람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중 한 사람이 그 처녀를 안아 내렸다. 「언니, 언니 . 향향 공주가 놀라 외치며 그 처녀에게 달려들었다. 진가락도 깜짝 놀랐다. 향향 공주가 그 처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예쁜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처녀는 바로 취우황삼 곽청동이었다. 원래 곽청동은 병든 몸을 끌고 사부와 사공의 뒤를 찾아 나섰다가 얼마 후에 관동삼마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저항할 힘이 없어 칼을 뽑아들고 자겯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금표가 달려들어 장검을 뺏고 그녀를 사로잡았다. 관동삼마는 원수를 사로잡자 미칠 듯이 좋아했다. 합합태는 당장 죽여 세 분 맹형에 대한 복수를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금표는 다른 흑심이 있어 요동으로 데리고 가 세 분의 맹형 영전에서 산 채로 잡아 제사를 지내자고 우겼다. 고금표가 형이라, 합합태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즉시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귀향길에 올랐다. 하루쯤 갔는데 곽청동이 고의로 엉뚱한 길을 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공연히 사막을 헤매다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 이날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검은 연기를 보고 인가가 있는 줄 알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연기는 진가락이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이리의 똥을 태운 봉화였다. 곽청동은 전신이 허약해 이리 례의 추격을 받는 도중 정신을 잃었었다. 그러다 이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천천히 눈을 뜨다가 진가락과 동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반가운지 아니면 덤덤한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고금표는 진가락이 대들어 사람을 뺏어 가려고 하자 호차를 쩔렁거리며 벌컥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는 거요? 가까이 오지 마시오. 향향 공주가 진가락을 잡고 울며 매달렸다. '빨리 언니를 내놓으라고 해 주세요. '걱정 마시오.」 진가락이 자신 있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고금표를 노려 보았다. '당신들은 무엇하는 사람이오? 무엇 때문에 내 친구를 사로잡았소? 등일뢰가 고금표를 가로막고 나서며 차디찬 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두 분께서 구해 주셨으니 우선 고마운 인사부터 두 분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진가락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장소중이 나섰다. '이분은 홍화회의 진 총타주요.」 삼마가 깜짝 놀라며 등일뢰가 다시 물었다. '귀하의 존함은요? '내 성은 장이요, 이름은 소중이라 하오. 등일뢰가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원래 화수판관이셨군요. 어쩐지 두 분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즉시 자기들 세 사람의 이름을 댔다. 진가락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이리 떼의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갈는지도 모르는 판에 계속해서 강적을 네 사람이나 만났으니 이 노룻을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우선 곽청동을 구해 놓고 볼 일이었다. 우리들의 원한은 잠시 거론하지 맙시다. 눈앞의 이리때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여러분께서는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가지고 계신지요? 진가락이 말을 했다. 「그래, 진 당가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합합태가 물었다. 「우리가 협력을 한다면 혹시 이리떼를 물리칠 수도 있겠지만 서로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모두가 이리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오.」 등일뢰와 합합태는 그렇다고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진가락이 「그러니 고 형은 즉시 제 친구를 내려 놓으시오. 고금표가 호차를 흔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내려놓을 생각이 없소. 그래, 그렇다면 우리 일곱 사람 가운데 당신이 제일 먼저 이리의 밥이 되셔야겠소.」 진가락의 말에 고금표가 내 당신부터 먼저 이리에게 먹이겠소.」 진가락이 다시 말을 꺼냈다. 좌우지간 내 친구를 내려놓으시요. 그리고 우리 다같이 물리칠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어떻게 하시려오? 이들 삼마는 서로 바라다보며 아무 대답도 못했다. 등일뢰와 합합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금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풀어 놓으시오! 우리가 서로 다투지 않는다 하더라도 살길이 막연하오.그런데 우리가 서로 싸운다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지건간에 쌍방이 모두 손상을 입어 죽게 되오. 그러니 고 형, 어디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둘째, 우선 그 여자를 내려놓고 보세.」 등일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고금표는 천신만고 끝에 꽃 같고 옥 같은 곽청동을 가까스로 잡았다. 죽을망정 내놓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머리를 흔들었다. 등일뢰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우리도 세 사람, 저들도 세 사람이니 숫자는 같다. 그러나 화수판관의 검술과 권법은 대단하다고 들었다. 무림 가운데서도 엄지손가락을 꼽는 인물이다. 이 진가 녀석의 이리 잡는 솜씨도 대단했다. 이 미모의 소녀도 그들의 동행이고 보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정말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그만 기가 죽었다. 「둘째, 내려놓으라니까 그러네. 일이 벌어지면 나는 자네를 도울 수가 없네.」 등일뢰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충고를 했다. 고금표는 정말 곽청동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문약해 보이는 진가락에게 단독으로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신이 만약 내 수중에 있는 호차를 이길 자신이 있다면 이 여자를 마음대로 데려가시오. 영웅호한이라면 1대 1로 대결하여 결판을 냅시다. 진가락은 정말 이리 떼의 포위망 속에서 서로 해치고 싶지 않아 망설였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장소중이 나섰다. 「안심하시오. 나는 아무도 도와 주지 않으려오.」 어찌 보면 이 말은 진가락보고 들으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고금표를 향해 의심할 것 없이 어디 한번 마음대로 덤벼 보라고 충동하는 뜻이었다. 고금표는 기뻤다. 「대결할 생각이 없거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마시오. 대결을 하고 싶다면 권각, 병기 아무것이나 원하는 대로 응할 것이오. 우리 형제가 셋이나 홍화회의 수중에 죽었는데 이 원수를 갚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마지막 이 말은 등일뢰와 합합태가 들으라고 한 것이다. 사욕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명분 때문에 나서는 것이니 너희 두 사람도 결코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는 말이었다. 진가락은 곽청동을 바라보았다. 곽청동의 얼굴에는 원망과 분노가, 향향 공주의 얼굴에는 근심과 안타까움이 가득 어려 있었다. (이들 자매가 모두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 오늘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이들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하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도 모면할 수 있거니와 이들 자매의 골육의 정이 나 때문에 깨지는 일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아가씨는 내 친한 친구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 빨리 그 아가씨를 내려놓으시오.」 곽청동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자기에 대해 전연 무정한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이 여자만은 내놓지 않겠소. 고금표의 말에 장소중이 웃었다. 「잘됐소, 그럼 어디 두 분이 사생결단을 해 보시오.」 삼마는 그의 말투를 듣고 그가 진가락에 대해 우호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두 사람이 사생결단을 하다가 당신이 나를 죽이든 내가 당신을 죽이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우리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같이 나가 이리를 죽이기로 합시다. 많이 죽이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합시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방법이 최소한 이리떼의 위협을 다소라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이리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량에 손실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합합태가 좋다고 손뼉을 치며 제일 먼저 찬성했다. 장소중이 나섰다. 「만약 진 당가가 이기면 고 형이 그 아가씨를 인계해 주시고, 또 만약 고 형이 이리를 많이 죽인다면 진 당가는 다른 말씀을 하셔서는 아니되오. 진가락과 고금표는 서로 노려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리를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둘 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곽청동을 그냥 적의 수중에 넘겨 줄 수도 없었다. 진가락은 그가 호차를 쓰니 틀림없이 사냥을 잘해 어쩌면 자기보다 많이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금표는 또 그가 이리를 잡는 것으로 시합을 하자고 했으니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줄 알고 속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보고 대결을 하자고 했으니 목숨을 걸고 합시다. 대수롭지도 않은 장난 같은 것은 흥미없소.」 장소중이 나섰다. 「제가 오늘 세 분을 처음 만났지만 평소에 존경을 해 온 터요 진 당가와는 과거 약간 거북한 사이였지만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나는 어느 쪽도 돕지 않겠소. 지금 내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결판을 낸다 하더라도 쌍방의 우의를 손상시키지는 않는 방법이오. 그러나 여러분 생각이 어떠실는지? 등일뢰는 그가 진가락과 감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반겼다. 「장 대형, 말씀을 하시지요. 화수판관의 명성이 무림에 떨치고 있으니 틀림없이 고명한 방법이겠지요.」 장소중이 미소를 지었다.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우리가 이리 떼에게 포위되어 있는 마당에 서로 싸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다. 진 당가, 재 예기가 어떻습니까?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소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리를 잡는 것으로 시합을 한다는 것은, 이 고 형이 호한의 행위가 아니라고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숩니다. 재가 한가지 계책을 내놓지요. 두 분이 적수공권으로 함께 이리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겁이 많아 먼저 달아나 돌아오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하지요.」 사람들이 듣고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어지간히 악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적수공권으로 이리떼 속에 들어갔다가 누가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장소중이 말을 계속했다. 만약 어느 한 분이 불행하게 이리에게 잡아 먹히면 다른 한 분이 다시 불길 속으로 돌아오면 이기는 것이지요.」 진가락의 두 눈섭이 올라갔다. 「만약 두 사람이 다 죽으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것이오? 그러자 합합태가 나섰다. 나는 당신이 호한임을 존경하오. 내가 책임을 지고 이 아가씨를 풀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합 형의 말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 아가씨를 그 누구도 괴롭혀서는 아니 됩니다.」 말을 하면서 향향 공주를 손으로 가리켰다. 합합태가 자신 있게 나섰다. 하늘을 두고 제가 맹세를 하지요. 만약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이리가 나를 맨 처음 잡아먹을 것이오.」 「대단히 고맙소.」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이미 결심을 했다. 이리 떼의 포위는 고사하고 자기 혼자 이들 4명의 강적과 상대해 살아날 가망은 없는 것이었다. 이제 자기 생명을 버려 요행히 곽청동 자매를 구출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실 광복의 대업은 어쩔 수 없이 홍화회의 여러 형제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검순 주색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 고금표를 바라보았다. 「고 형, 나갑시다. 고금표는 호차를 든 채 망설였다. 그는 비록 떠돌이 신세지만 맨손으로 이리 떼 속에 나설 용기는 없었다. 장소중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다시 충동질을 했다. 「왜요? 고 형, 무서우신가 보군요? 원래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요. 고금표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향향 공주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표정이 대단히 긴장해 있다는 생각만 했다. 곽청동은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히 들었다. 진가락이 자기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까지 하자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가지 마세요! 차라리 제가 죽겠어요. 절대로 당신을 다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이제 생사의 기로에 서서 격렬한 감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외친 것이었다. 쟁그렁 소리가 들리며 한 자루의 호차가 땅 위에 떨어졌다. 고금표는 진가락에 대한 그녀의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자 질투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성질이 난폭하여 일단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면 하늘도 땅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리에 물려 죽을망정 네놈보다 먼저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갑시다. 하얀 산봉우리 진가락은 곽청동과 향향 공주를 향해 빙그레 웃고 고금표와 나란히 불길 밖으로 뛰어가려 했다. 곽청동이 놀라서 또 한 번 정신을 잃으며 외쳤다. 「가지-, 가지 마세요! 향향 공주는 까만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두 사람이 불길 밖으로 나가려 하자 등일뢰가 갑자기 외쳤다. 두 사람이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진 당가, 몸에 단검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미안합니다. 내 잠시 잊었군요.」 등일뢰의 말에 진가락이 웃으며 단검을 끌러 가지고 곽청동의 면전으로 걸어갔다. ....속상해하지 마시오. 이 검을 볼 때는 나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검을 그녀에게 넘겨 주었다. 곽청동은 눈물을 떨구며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바로 이재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고개를 숙이세요.」 속삭이듯 말을 하자, 진가락이 고개를 숙이고 귀를 가까이 댔다. 「불을 써 보세요. 곽청동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진가락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즉시 왜 그러는지 알아차렸다. 진가락은 고개를 돌려 장소중을 바라보았다. 「장 대형, 제가 방금 단검을 풀어 놓아야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다시 한 번 살펴봐 주세요.」 장소중은 진가락과 고금표 두 사람의 몸을 뒤졌다. 「고 형, 암기도 꺼내 놓으시오.」 고금표는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며 10여 자루의 소차를 품속에서 꺼내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는 댕기를 머리 위로 틀어 올리며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이 하고 있다가 갑자기 곽청동의 면전으로 달려들며 껴안고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등을 잡고 번쩍 들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고금표는 평소 형제들과 함께 무예를 익혔기 때문에 형제간의 솜씨를 잘 알았다. 합합태 말고는 이렇게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합합태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둘째, 창피하지도 않으시오? 고금표는 넘어지는 바람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대갈일성 이리떼를 향해 달려 나갔다. 진가락은 두 발로 땅을 찍으며 경공의 재주를 펴 그를 앞질렀다. 이리 떼는 본래 불길 밖에서 울부짖으며 맴돌다가 사람이 달려 나오자 덮쳐들었다. 고금표는 평생 겪어 보지 않은 이 같은 위험에 봉착하자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터 보기로 했다. 그는 두 마리의 사나운 이리가 동시에 달려들자 몸을 살짝 돌리며 왼손을 뻗어 이리의 목을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꼬리를 잡아 번쩍 들었다. 무학 가운데 등괴라는 무공이 있다. 무림의 한 선배가 어느 여름 밤 등나무 밑에서 웃통을 벗은 채 바람을 쏘이고 있는데 갑자기 적이 습격을 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사면팔방에서 손에 병기를 든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 집히는 대로 긴 걸상을 잡아 휘둘러 적을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이 무공이 전해져 내려와 무림 가운데 이 재주를 배운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맨손으로 적을 만났을 때 쓰는 호신 수단이었다. 긴 걸상은 어디나 다 있기 때문에 이 무술은 어디서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고금표는 이리를 잡아 긴 걸상인 양 병기로 삼아, (등괴) 가운데의 초술을 펴 휘두르고 내려치는 것이었다. 이리의 몸의 길이가 긴 걸상과 비슷하고, 또 네 다리까지 있어 쓰기에 편했다. 쉿쉿 바람이 나도록 휘두르는 바람에 이리 떼가 접근을 하지 못했다. 진가락이 쓰는 재주는 팔괘유신장이었다. 이리떼 가운데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방을 오락가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래 위진하삭 왕유양의 특기다. 항주의 사자붕에서 이 재주를 펴 장소중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진가락은 당일, 철담장에서 주중영과 대결을 할 때에도 쓴 적이 있었다. 그의 조예가 왕유양에 미칠 바는 아니지만, 발걸음이 날쌔고 몸놀림이 변화무쌍했다. 굶주린 이리떼는 처음에는 쫓아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필사적으로 몰려와 물샐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달아날 만한 여지가 없었다. 진가락은 (팔괘유신장)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즉시 품속에서 부시와 부싯돌을 꺼내 쑥방망이에 불을 붙여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쑥방망이의 불이 미약했지만, 이리떼는 불이 무서워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이었다. 비록 사나운 이와 앞발을 들고 대들려고는 했지만,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하고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기만 했다. 향향 공주는 진가락이 갑자기 이리 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곽청동의 면전으로 뛰어가 물었다. 언니, 저분이 왜 그러시죠? 곽청동은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저분이 우리 자매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고 그러는 거야.」 향향 공주는 처음에는 놀랐지만 금방 담담하게 웃었다. '저분이 죽으면 나도 살지 않을래요.」 곽청동은 그녀의 태연자약한 모습과 이 말을 할 때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고 속으로 매우 놀랐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격동을 할 것도 고려를 할 것도 없다는듯한 그런 태도였다. 곽청동은 진가락에 대한 향향 공주의 사랑이 매우 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소중은 진가락과 고금표 두 사람이 삽시간에 이리떼에게 포위되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진가락이 쑥방망이에 불을 붙여 사나운 이리를 쫓는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쑥방망이는 오래 타지 않고 꺼질 것이다. 시간을 끌다 보면 해결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등일뢰와 합합태 두 사람은 고금표만 지켜 보았다. 그가 용맹을떨치며 커다란 이리를 한 마리 들어 휘두르는 것을 보고, 각자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나한산문의 재주로 큰 이리를 들어올려 맞은편에서 대드는 이리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을 보았다. 다급해진 12마리의 이리가 서로 앞뒤 가릴 것 없이 상대방을 확 물어 버렸다. 한 마리는 얼굴이 물려 뼈가 드러나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줄줄 흘렸다. 이리 떼는 피를 보자 더욱 벌떼처럼 몰려들어 너나 할 것 없이 물어뜯었다. 고금표의 수중에 있던 이리는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겼다. 마침내 그의 왼손에 들렸던 이리는 머리만 남았고, 오른손에 들렸던 이리는 꼬리가 달린 엉덩이만 남았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위급하게 변했다. 고금표가 다시 한 마리를 잡으려 했지만, 사나운 이리 한 마리가 고개를 꼬고 그를 물었다. 만약 재빨리 손을 움츠리지 않았더라면 왼팔이 물려 잘려 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오른쪽에서도 2마리의 이리가 덤벼들었다. 합합태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강철로 만든 채찍을 끄르며 말했다. 「큰형, 내가 가서 구해야겠어요.」 등일뢰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곽청동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관동호걸은 체면도 없나요? 합합태가 찔끔하여 다시 이리 떼 속의 두 사람을 바라다보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진가락은 쑥방망이가 거의 다 타들어가자 장삼의 앞섶을 찢어 불을 붙여 가지고 재빨리 관목 숲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주춤하는 틈을 타 2마리의 사나운 이리가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그는 몸을 낮추고 2마리의 이리 사이를 뚫고 나가 나뭇가지를 꺾어 잡고 손을 뒤로 돌려 힘껏 갈겼다. 앞섰던 이리가 맞아 머리가 깨졌다. 이리 떼가 달려들어 뜯어먹는 바람에 그를 쫓아오던 기세가 약해졌다. 그는 황급히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들어 불을 붙인 뒤, 휘둘러 이리 떼를 쫓았다. 틈만 생기면 즉시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붙였다. 이렇게 되자 순식간에 그의 몸 주위에 작은 불길로 된 원이 그려지며 이리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곽청동과 향향 공주는 그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미칠 듯이 좋아했다. 반대로 고금표는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도 진가락과 같은 방법을 쓰고 싶어했지만 몸에 불씨를 지니고 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이리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에 대항하느라 몇 번이나 손목을 물렸다. 합합태가 대경실색하여 곽청동을 바라보았다. 「진 당가가 이긴 것으로 합시다. 그녀의 몸에 있는 단검을 뽑아 그녀의 손과 발에 묶인 오랏줄을 끊어 주며 말했다. 「이제 내가 저 사람을 구해 줘도 되겠지요? 쇠채찍을 휘두르며 질풍처럼 달려나갔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해서 이리 떼가 겹겹이 둘러싸 다리를 두 번이나 물렸다. 비록 2마리의 이리를 때려 죽이기는 했지만 전진할 방법이 없었다. 등일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넷째, 돌아오시게. 합합태가 물러나 불붙은 나뭇가지를 들고 다시 뛰쳐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고금표가 이리에게 잡아 먹힐 판이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진가락에게 외쳤다. '진 당가님, 당신이 이겼소. 우리가 당신의 친구를 풀어 주었으니 대인대의(大仁大義)로 우리 고 형을 구해 주시오. 진가락이 멀리서 바라다보니, 과연 곽청동이 이미 풀려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생각했다. (사나운 이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돕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좋다.) 불붙은 나뭇가지를 고금표에게 던지며 외쳤다. 「받으시오. 고금표의 두 팔과 다리는 피투성이다. 나뭇가지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몸을 솟구쳐 공중에서 받아 쥐고 휘두르며 원을 그렸다. 이리가 불을 무서워하는 것은 수만 년 동안 내려오는 그들의 습성이다. 그의 수중에 불이 있는 것을 보자 즉시 물러났다. 고금표는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서서히 진가락을 향해 걸어왔다. 진가락이 다시 또 하나의 나뭇가지를 던져 주었다. 고금표는 두 손에 불을 들고 나무 숲으로 들어왔다. 「빨리 땔감을 주우시오. 진가락이 명령을 했다. 두 사람은 즉시 나뭇가지를 다발로 만들어 등에 지고, 손에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들고 휘두르며 곽청동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리 메가 계속 울부짖으면서 길을 비켰다.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졌다. 진가락이 앞장 서서 걸었다. 향향 공주가 불 가까이 접근하여 두 팔을 벌리고 그를 반기려 했다. 진가락이 미소를 띠며 뛰어들어오려고 하자 곽청동이 외쳤다. 「잠깐만, 그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세요.」 진가락이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나뭇단을 내려놓은 채,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고금표를 먼저 들여보냈다. 먼저 불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지기로 쌍방간에 이미 약속을 했었다. 비록 자기가 그의 생명을 구해 주기는 했지만, 이런 무뢰한은 항상 억지를 쓰는 법이다. 고금표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등에 진 나뭇단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불붙은 나뭇가지를 진가락의 면전에서 휘둘렀다. 그가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하자 손바닥을 들어 그의 등을 힘껏 밀었다. 그를 불길 속에 밀어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진가락이 몸을 옆으로 빼며 피하자 이 일 장은 그의 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금표는 오른손을 휘둘러 불붙은 나뭇가지를 그의 얼굴을 겨냥하고 던졌다. 진가락이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그 불붙은 나뭇가지는 곧장 불구덩이 속으로 날아갔다. 고금표가 진가락의 얼굴을 향하여 주먹을 날렸다. 그의 81로의 장권은 힘차고 예리한 것으로 유명했다. 솜씨가 날렵하여 주먹이 하나 날아가면 즉시 다음 주먹이 따랐다. 진가락은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자 매우 화가 나 오른손을 뻗어 그의 맥문을 잡으며, 왼손은 금침도겁으로 그의 얼굴을 향해 찔렀다. 이것은 백화착권 가운데의 일 초로서, 손가락을 칼 대신 쓰는 것이었다. 고금표는 이런 괴상한 권법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어리둥절해 급히 물러서다가 왼발이 한 마리의 굶주린 이리를 밟았다. 이리가 아파 울부짖으며 입을 벌려 물려고 했다. 진가락은 일 초가 득세하자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다시 손바닥으로 치고 손가락으로 찔렀다. 이 모두가 백화착권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초술이었다. 등일뢰와 합합태는 불길 옆에 서서 관전을 하다가 이 권법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가락이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태양 혈(太陽穴)을 찍자 고금표가 팔을 뻗어 막으며 주먹으로 반격했다. 이렇게 하면 진가락이 틀림없이 물러설 줄 알았는데, 그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왼발을 들어 고금표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고금표가 비틀비틀하다가 오른쪽 주먹을 잡혔다. 진가락이 힘껏 낚워채자 상대방이 끌려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진가락이 끄는 척 하다가 다시 밀어붙였다. 고금표는 뜻밖의 역습을 받고 뒤로 밀려 넘어지려고 했다. 이러다 넘어지기만 하면 사방에서 노리고 있던 이리 떼가 즉시 달려들 테니, 어찌 목숨이 온전할 수 있으랴? 불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놀라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고금표는 위급한 가운데 이어타정의 묘기를 부려 갑자기 몸을 뺌과 동시에 좌장을 휘둘러 내려쳤다. 위로 뛰어오르며 덮치려던 이리가 맞았다. 이 기세를 타고 그는 공중제비를 돌아 머리를 위로, 다리를 아래로 해서 떨어져 내려왔다. 진가락은 왼발로 땅을 찍으며 그의 몸 옆으로 날아가 오른손을 계속 휘둘러 그의 왼쪽 정강이의 혈도를 눌렀다. 그러니 고금표의 두 발이 땅에 닿을 때 어디 꼿꼿이 설 수 있겠는가? (끝장이로구나.) 고금표는 속으로 외치며 두 손을 땅에 대고 버틴 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이리 떼가 사면팔방에서 몰려들었다. 진가락이 그보다 빨리 대들며 오른손을 뻗어 그의 등을 잡아 한 바퀴 휘둘렀다. 고금표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하반신은 꼼짝달싹 할 수 없었지만, 대갈일성 쌍권을 뻗어 진가락의 가슴을 후려쳤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것이다. 「고약한 놈. 진가락이 욕을 하며 왼손의 손가락을 바람처럼 놀려 또다시 그의 중부(中府),선기 두 혈을 눌렀다. 고금표는 쌍권이 나가다가 도중에서 갑자기 팔이 마비되며 축 늘어졌다. 진가락이 그의 몸을 휘둘러 원을 그리며 대드는 굶주린 이리를 쫓고, 그를 먼 곳에 있는 이리 떼를 향하여 던지려고 했다. 「죽이지는 마세요. 곽청동이 외쳤다. 진가락은 즉시 그 뜻을 알아차렸다. (설사 이 사람을 죽여 없앤다 하더라도 적은 많고 우리 편은 적다. 오히려 등일뢰나 합합태와 원수만 될 뿐이다. 잠시 그를 용서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와 장소중이 싸울 때 그들이 어쩌면 어느 쪽도 편을 들지 않겠지.) 진가락은 팔을 휘둘러 방향을 바꾸고 고금표를 불길 안으로 집어 던진 뒤에야 비로소 뛰어 돌아왔다. 합합태가 고금표를 받아 내려놓은 뒤 진가락이 땅을 밟았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건 이 시합은 마침내 진가락이 이긴 것이다. 그가 막 곽청동과 향향 공주에게 가서 말을 걸려고 할 때 곽청동이 외쳤다. 「뒤를 조심하세요. 뒤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었다. 굶주린 이리 2마리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원래 2마리의 이리는 입 가까이 온 맛있는 음식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자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들어왔던 것이다. 그 중 한 마리가 향향 공주에게 덮쳐들었다. 진가락이 재빨리 덤벼들어 꼬리를 잡고 힘껏 낚워챘다. 이리가 통증에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울부짖었다. 동시에 또 다른 한 마리가 덮쳐들었다. 진가락은 손바닥을 세로로 세워 후려쳤다. 이리가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일 장이 목에 가 맞았다. 이리는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다시 달려들어 물려고 했다. 곽청동이 단검의 날을 잡고 진가락을 향해 던졌다. 「받으세요. 진가락이 손을 뻗어 단검 자루를 잡고 왼쪽에 있는 이리를 향해 찔렀다. 이 이리는 몸집도 크거니와 기민하고 교활했다. 진가락이 두 번이나 찔렀는데도 피했다. 이때 불길 밖에서 또 5마리가뛰어 들어왔다. 한 마리는 합합태가 씨름하는 솜씨로 목을 잡아 밖으로 집어 던지고, 다른 한 마리는 장소중의 검에 맞아 두 토막으로 났다. 세번째 뛰어든 이리는 등일뢰와 맞붙어 싸웠다. 합합태는 고금표가 가지고 온 나뭇가지를 주워 불길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되자 이리 떼가 다시는 뛰어들어오지 못했다. 이쪽의 진가락은 단검을 들고 왼쪽을 찌르는 척했다. 이리는 그것이 허초인 줄 모르고 오른쪽으로 피했다. 진가락은 벌써 단검을 거둬들인 후 오른쪽을 향해 힘껏 찔렀다. 이리는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급하면 꾀가 생기는 법이라고 하더니, 이리는 그 큰 입을 벌린 채 칼날을 물었다. 진가락이 칼을 안쪽으로 힘껏 밀었다. 이리의 혀가 찢어졌다 그러나 이리는 여전히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진가락이 칼을 뒤로 뽑았다. 이리가 죽어도 입을 벌리려고 하지 않다가 몸이 번쩍 들렸다. 두 줄의 날카로운 이가 마치 칼날 위에 뿌리를 내린 것과 같았다. 초조해진 진가락은 몸을 옆으로 빼며 발을 들어 덤벼드는 다른 한 마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 이리가 울부짖으며 불길 밖으로 날아갔다. 진가락은 왼손의 일 장으로 그 큰 이리의 두 눈사이를 쳤다. 이리가 뒤로 넘어지며 손이 가벼워졌다, 단검이 마침내 뽑혔다. 사람들은 순간 한광(寒光)이 번뜩이는 것을 느꼈다. 단검에서 발산된 빛이 사방으로 퍼진 것이다. 진가락의 이 일 장에 맞은 이리는 머리가 터져 죽었다. 그런데 이리의 입에는 아직도 칼날이 물려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단검은 분명 진가락의 수중에 있었다. 또 부러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리의 입에 물린 칼날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진가락은 앞으로 나가 왼손의 세 손가락으로 칼날을 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 이리가 죽기는 했지만 마치 쇠집게처럼 칼날을 왁 물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쥔 단검으로 이리의 턱을 갈랐다. 이리의 턱이 두부 잘리듯 잘려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고 단검을 들어 살펴 보았다. 갑자기 얼굴에 한기가 엄습해 자기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칼날에서는 영롱한 빛이 발산했다. 곽청동이 선물한 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칼날은 완전히 같은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이상해 몸을 숙이고 이리의 입에 물렸던 칼날을 들어 살펴보았다. 칼날 가운데가 비어 마치 칼집처럼 생겨 단검이 그 칼집 안에 들어가 밀착되어 있음을 이때야 비로소 발견했다. 원래 이 단검은 2개의 칼집이 있고, 안에 있는 칼집이 열리면 그 안에 또 하나의 칼날이 있었던 것이다. 칼날이 워낙 날카로워 일반 사람은 그것이 보통 칼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칼 안에는 금과 옥을 자를 수 있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보검이 또 하나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곽청동이 단검을 선사할 때, 이런 말을 했다. 이 단검 안에는 크나큰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 만약 기연이 아니고 또 이리가 물고 죽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양쪽에서 서로 잡아당겨 안에 있는 칼이 뽑아지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이 날카로운 단검 가운데 또 하나의 칼이 숨겨져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때 등일뢰는 마지막 남은 이리를 때려 죽이고 고금표의 눌린 혈도를 풀어 준 뒤에 비수를 뽑아들고 이리의 네 다리를 잘라 불 위에 굽고 있었다. '빨리 치우지 못해요? 살고 싶지 않은가 보군요. 곽청동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등일뢰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왜요? '이들 굶주린 이리가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면 그냥 참고 있을 것 같아요? 등일뢰가 들어도 그럴듯한 이야기라 황급히 이리의 다리를 불 위에서 치웠다. 고금표는 앉은 채 숨을 헐떡이며 이리에게 물린 상처를 싸매고 있었다. 비교적 작은 상처는 거들떠볼 여유도 없었다. 등일뢰는 배고픔에 견디지 못하고 굽다 만 이리 다리를 들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먹고 있었다. 향향 공주가 단검을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안에 있는 칼집의 설계가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었다. 수공이 비할 수 없이 정교하여 전연 탄로가 나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극찬을 했다. 그녀는 칼집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 안에 흰색의 작은 물체가 있음을 발견했다.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빠져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가늘고 긴 나뭇가지를 주워 칼집 안에 넣고 이리저리 돌렸다. 흰색의 작은 환약 같은 것이 굴러 나왔다. 진가락과 곽청동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되어 머리를 맞대고 살펴보니, 그것은 하나의 초로 만든 환약이었다. 진가락이 곽청동을 향해 물었다. 「펴 봐도 될까요? 곽청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손가락에 힘을 살짝 주자 초로 만든 환약이 터지며 그 안에서 작은 종이 뭉치가 나왔다. 종이 뭉치를 펼치니 매미 날개처럼 얇은 종이다. 종이 위에 위구르의 고문자가 씌어 있었고, 옆에 거미줄 같은 지도가 한 장 그려져 있었다. 장소중은 그들이 종이를 한 장 발견한 것을 보고 땔감을 얹어 놓는 척 하며 가까이 다가와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종이 위의 글씨가 모두 위구르 문자라 한 자도 몰라 실망했다. 진가락이 위구르 문자를 약간 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기초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 종이 위에 씌어진 글씨가 고문자라 전연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이를 펼쳐 곽청동의 면전에 내밀었다. 곽청동은 보면서 생각했다.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종이를 접어 도로 챙겨 넣었다. 진가락이 물었다. 「뭐라고 씌어 있습니까? 곽청동은 묵묵부답 고개를 숙인 채,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향향 공주는 언니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웃었다. 「언니가 지금 무슨 난제를 생각하고 있나 봐요. 번거롭게 하지 마세요. 곽청동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이리저리 원형을 그렸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또 그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몸도 약하신데 너무 여러 생각 하지 마세요. 종이에 관한 일이 생각나지 않거든 다음에 또 생각하시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를 빠져 나갈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진가락이 말했다. 「저는 지금 사나운 이리로부터 피할 방법과 또 이리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피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곽청동이 이렇게 말하며 장소중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향향 공주는 언니가 그들에게 (이리 같은 사람)이라고 하자 재미있다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곽청동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진가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 등에 올라서서 서쪽을 바라보세요. 흰색의 산봉우리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세요.」 진가락은 그녀의 말에 따라 백마를 끌고 와 그 위에 올라서서 서쪽을 바라다보았다. 아득히 먼 곳에 많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있었지만, 백색의 산봉우리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보아도 여전히 보이지 않아 곽청동을 향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림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는 그 옛 성이 여기서 멀지 않아요. 봉우리가 꼭 보일 텐데요.」 곽청동이 이렇게 말했다. 진가락이 말 등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옛 성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어렸을 때 사람들한테 들었는데, 이 큰 사막 안에는 옛 성이 하나 묻혀 있다더군요. 이 성에는 본래 백성이 많고 번화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큰 풍사가 불어 작은 산과 같은 모래언덕이 하나씩 하나씩 생기더니 마침내 옛 성을 덮고야 말았다더군요. 성 안에 있던 수만 명 가운데 달아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고개를 돌려 향향 공주를 바라보았다. 「얘, 너도 이 이야기 잘 알지? 말씀을 드리렴.」 향향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 옛 성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답니다. 아니에요. 여러 사람이 가 보았지만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별로 없대요.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금은보화가 굉장히 많다나요. 누군가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뜻밖에 이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대요. 많은 금은보화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었겠어요? 금은보화를 낙타 등에 가득 실어 가지고 나오려고 했지만, 그 옛 성을 아무리 다녀 보아도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더군요.」 외 그랬을까요? 진가락이 묻자 향향 공주가 계속 이야기했다. 「그들 말에 의하면, 옛 성에 살던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모두 귀신으로 변해 버렸다더군요. 그러나 그들이 워낙 이 성을 좋아해서 죽은 뒤에도 여전히 떠나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이들 귀신들은 다른 사람이 금은보화를 가져 가는 것이 아깝기 때문에 그들을 홀려 나가지 못하게 한답니다. 금은보화를 내려놓고 하나도 가지지 않으면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다더군요.」 「사람의 욕심에 어디 빈손으로 나오고 싶겠습니까? 진가락의 말이었다. 곽청동이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그 많은 보화를 보고 누가 가지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말에 따르면 만약 금은보화를 하나도 가지지 않고, 반대로 옛 성에 있는 건물 안에 몇 냥의 은자를 모아 두면, 우물 가운데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와 마시게 해 준답니다. 은자를 많이 놓을수록 맑은 물도 많이 나온다더군요.」 「그 옛 성의 귀신들이 욕심이 어지간하군요.」 진가락이 웃으며 말했다. 향향 공주가 나섰다. 「우리 부족 가운데 어떤 사람이 빚을 많이 지고 갚을 길이 없자 그곳을 찾아갔다가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답니다. 어느 때인가 한번은 한 메의 대상(隊商)들이 사막을 지나가다가 거의 다 죽게 된 사람을 구해 준 적이 있답니다. 그 사람이 옛 성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나올 때 아무리 돌아다녀도 한 장소아서만 맴돌게 되더래요. 그는 사막 위에 있는 발자국을 보고, 누군가가 걸어 나갔구나 싶어 필사적으로 그 발자국을 쫓아가 보았대요. 그런데 그 발자국은 기실 그 자신의 것이었답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다가 마침내 기력이 다 하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답니다. 대상들은 그보고 자기들을 그 옛 성으로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죽어도 응낙할 수 없다고 하더래요. 옛 성 안에 있는 모든 재물을 몽땅 그에게 준다 하더라도 한 발짝도 그곳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더래요.」 「사막에서 자기 발자국을 따라 맴돌다니,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 진가락의 말을 향향 공주가 다시 받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도 있는걸요. 혼자 사막을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기의 이름을 부른답니다. 그래서 소리를 따라 쫓아가다보면 소리는 없어지고, 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대요.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래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많은 금은보화를 보면 너무나 기뻐 실성을 할 수도 있겠지요.ㅣ 사막 가운데 길이라는 것이 원래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니 돌아 나오기가 어렵겠지요. 만약 그가 재물을 하나도 갖지 않겠다고 결심만 하면 머리가 맑아져 쉽게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에게 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진가락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곽청동이 입을 무겁게 열었다. 「칼집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옛 성으로 가는 길을 그린 지도예요.」 진가락이 그러냐고 (아!)소리를 가볍게 질렀다. 향향 공주가 웃었다. 「우리는 그런 금은보화는 가지고 싶지 않아요. 가지면 그 귀신들이 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면서요? 그러니 이 지도는 아무 쓸모가 없구요 이 칼이 훨씬 좋아요. 이렇게 날카로우니 적의 병기와 부딪 치기만 해도 그것들은 금방 부러지거나 잘라지겠지요.」 머리카락 세 개를 뽑아 단검의 날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좋은 보검은 터럭을 불어도 잘라진다고 아빠가 그러시던데 이 칼도 그렇게 될까요? 단검의 날을 향해 입김을 불자 3개의 머리카락이 즉시 6개로 잘라졌다. 그녀는 너무나 좋아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곽청동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위로 던졌다. 비단 손수건이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데 단검을 들어올리니 수건이 금방 2개로 잘렸다. 장소중과 관동삼마가 이구동성으로 갈채를 보내며 침을 흘렸다. 진가락이 한숨을 쉬었다. 「보검이 날카롭다지만, 이 많은 이리 떼를 다 죽일 수 없으니 아무 소용도 없지요.」 「지도 위에는 분명 빗 성이 하늘 높이 옥봉을 끼고 있다고 했어요. 그림으로 보건대, 그 산봉우리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 보여야 할 텐데 어째서 그림자도 없지요?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군요.」 곽청동의 말을 향향 공주가 받았다. 「언니, 쓸데없이 한가한 생각 그만두세요. 산봉우리를 찾는다 해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니야. 우리가 그 옛 성 안으로 달아나면 되지 않겠니? 성 안에는 집도 있고 보루도 있으니 이리 떼를 피한다면 여기보다 훨씬 나을 것이야.」 「그렇습니다.」 진가락이 외치며 다시 말 등에 뛰어올라 서쪽을 주시했다. 그러나 하늘은 망망할 뿐 어디 산 그림자가 보이는가? 장소중 등은 그들이 계속 말을 주고받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진가락이 두 번씩이나 말 등 위로 올라가 서쪽을 살펴보는 것도 궁금했다. 네 사람은 이리 떼의 포위로부터 달아날 방법을 상의해 보았지만, 아무런 묘안도 나오지 않았다. 향향 공주가 비상 식량을 꺼내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향향 공주는 이때 그녀가 기르던 그 새끼 사슴을 생각했다. 사슴이 배불리 먹고나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다보다가 갑자기 외쳤다. '언니, 저걸 좀 보세요? 곽청동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흑점이 하나 보이는데 전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게 뭘까? '매 한 마리예요. 이쪽에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공중에 멈춰 날아가지 않을까? 향향 공주의 대답이었다. '네가 잘못 본 것 아니니? '그럴리 없어요. 분명히 매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어요. 진가락이 나섰다. '만약 매가 아니라면 저 흑점은 뭘까요? 그러나 매라면 공중에서 날지 않고 있을 수 있지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세 사람이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흑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워 질수록 커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마리의 검은 매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향향 공주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어루만졌다.진가락은 그녀 의 백옥 같은 섬섬옥수가 눈처럼 흰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깨닫는 바 있어 곽청동을 향해 말했다. 「저 손을 보세요. 곽청동이 동생의 손을 바라보았다. '객사려, 네 손이 정말 예쁘구나! 향향 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이 예쁜 것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손이 희기 때문에 흰옷 앞에서는 어느 것이 손인지 어느 것이 옷인지 구별할 수가 없군요. 진가락이 웃으며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곽청동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향향 공주는 그녀의 손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있었다. 진가락이 말을 이었다. 「그 매가 흰색의 높은 산봉우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아! 그래요. 그렇군요! 저쪽의 하늘이 양젖처럼 흰데, 그 봉우리도 같은 색깔일는지도 몰라요. 멀리서 바라보니 보이지 않는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곽청동이 외쳤다. 「바로 그렇습니다. 매가 검은색이었기 때문에 똑똑히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향향 공주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자기의 손이 아니라 그 옛 성을 두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가지요? 「잘 생각해 봐야 해. 곽청동이 대답하고, 다시 한 번 지도를 꺼내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를 기다려 보자. 만약 그것이 진짜 산봉우리라면 틀림없이 그림자가 땅 위에 드리울 것이다. 그러면 그 성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저 못된 것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각별히 조심합시다.」 진가락의 말을 곽청동이 받았다. 「그래요, 우리 이리 떼를 두고 이야기하는 척하지요.」 진가락이 죽은 이리를 한 마리 들고 와 그것을 가운데 두고 세 사람이 둘러앉아 상의를 했다. 손으로 이리의 코를 가리켜 보기도 하고, 털을 뽑아 살펴보기도 하고, 입을 벌리고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며 사막의 서쪽에 과연 한 줄의 긴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더니 마치 한 노인이 사막 위에 누워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세 사람은 이것을 보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곽청동이 땅에 도형을 그려 놓고 계산한 뒤에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저 산봉우리까지는 대략 20리 내지 22리가 되겠군요. 이렇게 말을 하며 죽은 이리를 뒤집어 놓았다. 진가락이 이리의 다리 한 짝을 손에 쥐고 날카로운 발톱을 건드리며 말했다. '만약 우리들에게 말 한 필만 더 있다면, 저 백마와 함께 세 사람이 단숨에 20리는 달려갈 수 있을 텐데........ '저 사람들이 달가운 마음으로 우리를 내보내도록 생각해 보세요.」 곽청동의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제가 어디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는 단검으로 이리의 배를 갈랐다. 장소중과 관동삼마는 그들이 죽은 이리를 이리저리 뒤척이며 계속 위구르 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자 몹시 답답했다. 장소중이 입을 열었다. '죽은 이리가 무엇이 이상해서 그럽니까? 어떻게 잘 묻어 줄까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 말을 들은 진가락의 머리에 꾀가 하나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이 위험한 곳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상의를 한것이오. 보세요, 이 이리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겠소? 장소중의 말에 관동삼마가 껄껄 웃었다. 합합태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난번 이리 떼를 만났을 때는 나무 위에 올라가 끈냈지요. 그때는 나무 밑에서 몇 바퀴 돌다가 가 버렸는데 이번에는 어찌나 지독한지 전연 물러갈 생각을 않는군요.」 이 말을 듣고 등일뢰가 나섰다. 「지난번에는 다행히도 황양과 낙타가 이리 떼를 유인해 주었지만 이번에는 먹을 것이 없지 않은가? 주위의 수백 리 안에 있는 짐승은 이놈들이 깨끗이 잡아먹고, 우리 몇 사람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가락이 다시 말을 받았다. 「이놈들의 뱃속이 이토록 텅 비었으니 무엇인가 채워 넣어야 할 텐데 우리를 그냥 놔 두겠습니까? 「죽은 이리를 반나절이나 주무르며 살펴보더니, 그런 큰 이치를 발견하였군.」 장소중이 빈정거렸다.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아무래도 이 이치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진가락의 대답이었다. 관동삼마가 벌떡 일어나 가까이 와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진 당가, 그래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시오? 장소중의 물음에 진가락이 대답했다. 「모두들 이곳을 지키며 나뭇가지가 다 타면 또 가서 주워 오지만, 다 태워 버리고 나면 그때 우리 일곱 사람은 함께 죽을 것이 아닙니까? 장소중과 관동삼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가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무림의 인물들은 의리를 중히 여겨서, 자기를 죽이고 남을 구하지요. 지금 이 시간 똑같은 위험에 봉착했는데, 이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릴 각오로 말을 타고 달려나간다고 합시다. 이리 떼들은 여기에 불이 있으니 감히 들어 오지 못하다가,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것을 보면 자연히 떼처럼 그쪽으로 쫓아갈 것이 아니오? 그 사람이 이리떼를 유인하여 멀리 가 버리면 그 나머지 여섯 사람은 살려 주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한다는 것이지요? 장소중이 물었다. 「그가 다행히 청병이나 위구르 병사의 대대인마와 만나게 된다면 살아날 수 있는 것이요, 만약 불행히 죽게 된다면 사람을 구하려다 죽는 것이오. 여기서 함께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등일뢰가 나섰다. 「방법은 그럴듯하오만 죽을 것이 뻔한데,,,,,,」누가 이리떼를 유인하러 나선단 말이오? 「그럼 등 대형, 달리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진가락의 질문에 등일뢰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합합태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 제비를 뽑아 결정합시다.」 장소중도 이런 방법밖에는 다른 묘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합합태가 제비를 뽑자는 말을 하자 머리를 스치는 꾀가 하나 있었다. 「좋습니다. 제비를 뽑읍시다.」 진가락은 본래 자청해 나서고 싶었다. 그래서 곽청동 자매와 세 사람이 함께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비를 뽑자고 하자 자청을 하고 나섰다가 공연히 의심만 살 것 같아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아가씨는 빼놓고 우리 다섯 사람이 제비를 뽑기로 합시다. 「다 같은 사람인데 왜 뼁니까? 고금표가 반대했다. 「남자 대장부가 그래 아가씨 둘도 보호하지 못한다니 창피스럽지 않소? 어떻게 아가씨들에게 위험한 곳으로 나가 우리를 구해 달라고 한단 말이오? 내 차라리 굶주린 이리 뱃속으로 들어가 죽을 망정 살아 남아 평생 강호의 친구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으렵니다.」 합합태의 단호한 말에 등일뢰가 나섰다. 「비록 남녀 유별이라고는 하지만 남자도 목숨이 하나요, 여자도 목숨이 하나요. 제비를 뽑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뽐는다면 다 같이 뽑읍시다. 그는 두 사람이 더 뽑으면 자기가 뽑힐 확률이 그만큼 적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고금표는 곽청동이 사랑스럽고도 미웠다. 이 미인을 자기 수중에 넣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차지할 바에야 차라리 이리에게 먹히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장소중을 바라보다 그가 의견을 내놓기를 기다렸다. 장소중은 꿍꿍이 속이 있어 자기가 쁩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 두 미인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하나는 황상이 필요로 하는 여자요, 다른 하나는 나라고 해서 차지하지 말란 법이 있나?) 이렇게 생각한 장소중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름을 남겨야 하는 것이오. 장 모 떳떳한 남자 대장부로, 어찌 아가씨더러 생명을 구해 달라고 하리요. 등일뢰와 고금표는 그의 당당한 말에 다시 반박하지 못했다. 「좋습니다. 이 두 아가씨는 랩시다.」 고금표가 단안을 내리자 등일뢰가 나섰다. 「내가 제비를 만들지.」 몸을 숙이고 나뭇가지를 주웠다. 「나뭇가지는 농간을 부리기 쉬우니 동전으로 합시다.」 장소중이 이렇게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10여 개의 동전을 꺼내 크기가 비슷한 것 5개를 고르고 나머지는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이 네개는 옹정통보고, 다른 하나는 순치퐁보요. 다들 자세히 보시오.」 등인뢰가 하나하나 검사해 보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순치통보를 집는 사람이 나가 이리를 유인하기로 합시다. 등일뢰의 말에 장소중이 찬성했다. '바로 그렇게 해야 하오. 등 대형, 그것들을 당신의 주머니에 넣으시오. 등일뢰가 5개의 동전을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누가 먼저 뽑겠소? 장소중이 물으며 고금표를 보니 그의 오른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고 형, 무서워할 것 없소. 생사는 유명이요, 부귀는 재천이라 했소. 내 먼저 뽑으리다. 손을 뻗어 등일뢰의 주머니 속에 넣고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두껍고 얇은 것을 알기 때문에 옹정통보를 꺼내 들고 웃었다. '애석하구나! 영웅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게 되었으니.. 그가 오른손 바닥을 펴며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원래 4개의 옹정통보는 비록 순치통보와 크기는 같았지만, 옹정 말년에 주조한 것이라 순치통보를 주조할 때와는 80여 년이나 차이가 있었다. 순치통보가 민간에서 80여 년이나 쓰였으므로 자연 닳아서 약간 얇아졌다. 다만 두껍고 얇은 차가 별로 없어 보통 사람들은 식별하기 어려웠다. 장소중은 무당파에서 부용금침을 익히기 전에 먼저 전표부터 익혔다. 전표를 겨냥할 때의 손의 힘과 동전을 다루는 경중(輕重)은 비슷했다. 그는 동전을 많이 만졌기 때문에 손가락을 대기만 하면 금방 식별해 낼 수가 있었다. 비밀의 궁전 그 다음은 진가락의 차례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순치통보를 고르고 싶었다. 그래야만 두 여자를 데리고 이곳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원하던 것과는 반대로 옹정통보를 잡았다. 「고 형이 집으시지요.」 장소중이 말하자 고금표는 호차를 들어 잴그렁쩔그렁 흔들며 화를 냈다. 「하나밖에 없는 순치통보는 우리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잡게 되었소. 이건 완전히 농간이오, 농간! '각자 천명에 따르기로 했는데, 무슨 농간을 부린단 말이오? 장소중이 반박했다. 「돈도 당신 것이거니와 당신이 맨 처음 집지 않았소? 누가 동전 위에 표시를 해 놓지 않았다고 장담하겠소? 고금표의 말에 장소중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면 당신이 돈을 내놓고, 우리 다시 집기로 합시다.」 「각자 동전을 하나씩 꺼내 놓읍시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못할 것 아니오? 고금표의 말에 장소중이 찬성했다. 「좋소! 죽으면 죽는 게지, 남자 대장부가 무서울 것이 뭐 있겠소? 등일뢰가 주머니 속에 남아 있던 3개의 동전을 꺼내 장소중에게 되돌려 주고 따로 다시 옹정통보를 꺼냈다. 고금표와 합합태가 꺼내 놓은 것도 옹정통보였다. 그때는 옹정의 시대와 별로 많이 떨어지지 않아 민간에서는 옹정통보가 순치통보보다 많이 통용되었다. 「저는 지금 동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장 대형의 것을 빌려 쓰기로 하지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과연 진 당가의 도량은 다르시오. 옹정통보는 4개가 있으니, 이 순치통보를 쓸 수밖에 없군요. 고 형, 그렇게 하면 되겠소? 장소중의 말에 고금표가 화를 냈다. 「순치통보는 쓰지 맙시다! 동전 위에 있는 순치와 옹정이란 글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만지기만 하면 알 수 있으니까요. 사실 눈 깜짝할 사이에 손가락으로 동전을 더듬어 거기에 있는 글자를 알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금표도 이 점을 분명히 알지만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어 다시 말을 꺼냈다. 「당신의 수중에 있는 옹정통보는 백동(白銅)이요, 나머지 4개는 황동이니, 백동을 집은 사람이 가기로 합시다.」 장소중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즉시 웃음을 띠었다.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합시다. 그래도 당신이 이리의 밥이 될 것이오.」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주어 백동으로 된 동전을 약간 휘어 놓았다. 그리고 황동으로 된 4개의 동전과 섞었다. 고금표가 장소중을 노려 보았다. '만약 당신과 내가 가지 않게 된다면 둘이 한바탕 겨루어 봅시다. 「분부에 따르리다.」 장소중이 이렇게 말하며 5개의 동전을 합합태의 주머니 속에 넣고 말했다. '당신들 세 분이 집은 뒤에 내가 집겠소. 진 당가는 맨 나중에 집으시오. 그러면 다른 말은 없으시겠지? 그는 혼자 생각했다. (설사 두개만 남았다 하더라도 나는 황동으로 된 것을 집을 자신이 있다. 이 진가 성을 가진 어린 녀석이 교활하게 나더러 차례를 바꾸자고 떼를 쓰지는 않겠지.) 그가 이렇게 말하자 관동삼마는 자연 다른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넷째, 당신이 먼저 집으시오.」 「그래도 큰형이 먼저 집으셔야지요.」 합합태의 말에 장소중이 웃었다. 「먼저 집으나 나중에 집으나 모두 마찬가지요. 관동삼마는 그가 생사의 기로에서도 여전히 태연자약할 뿐만 아니라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고 그 담력에 탄복을 했다. 합합태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려 하자 곽청동이 갑자기 몽골 어로 외쳤다. 「휘어진 동전은 집지 마세요.」 합합태가 어리둥절해하면서 만지니 과연 약간 휘어진 것이라 빨리 다른 것으로 바꾸어 꺼내 보니 황동으로 된 동전이었다. 원래 다섯 사람이 제비를 뽑는 방법을 가지고 갑론을박할 때 곽청동은 옆에서 냉정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다 장소중이 내력을 써서 동전을 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관동삼마 가운데 합합태의 위인이 가장 정직함을 알았다. 지난번 고금표가 그녀에게 욕을 보이려 할 때마다 합합태가 극력 말려 준 것이 고마웠다. 게다가 또 이번에 그녀의 손발을 묶은 오랏줄을 끊어 풀어 주었기 때문에 몽골 어로 주의를 주어 이에 보답한 것이다. 고금표가 두번째로 집을 차례다. 합합태가 요동의 속어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휜것은 집지 마시오.」 고금표와 등일뢰가 장소중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녀석이 끝끝내 농간을 부리는군.) 이미 함정을 알고 있으니, 자연 황동으로 된 동전을 집을 수밖에 없었다. 진가락과 장소중은 곽청동이 한 몽골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합합태가 하는 이상야릇한 소리를 들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진가락이 곽청동을 바라보는데, 향향 공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휘어진 동전은 집지 마세요.」 곽청동도 위구르 어로 말을 꺼냈다. 「백동으로 된 동전은 저자가 벌써 휘어 놓았어요.」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이곳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제 이 간사한 사람의 차례가 되었으니, 틀림없이 황동으로 된 동전을 집겠지. 그리고 백동으로 된 것을 남겨 놓을 것이다. 나는 도리상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나가는 체하며 저들 자매를 데리고 가자. 우리가 마지못해 떠난다면 결코 다른 의심은 하지 않겠지.) 장소중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자청한 것이니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손을 뻗어 합합태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진가락은 고금표가 이글이글한 눈초리로 곽청동을 바라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놈들이 강제로 나와 저들 자매를 함께 가지 못하게 한다면 큰일이로구나.) 이때 장소중의 손은 벌써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진가락은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휘어지지 않은 것을 내게 주시고, 휘어진 것을 집으시오.」 장소중이 어리둥절하여 손을 움츠리고 물었다. 뭘 휘어졌느니, 휘어지지 않았느니 야단이오? '주머니 속에 두 개가 남았는데 당신이 그중 하나를 휘어 놓았으니 내게는 휘어지지 않은 것을 주어야 옳지 않소. 진가락은 손을 뺀어 합합태의 주머니 속에서 황동으로 된 동전을 꺼내 들고 웃었다. 「당신이 농간을 부렸으니, 백동으로 된 것은 당신이 가지시오.」 장소중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며 장검을 뽑아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먼저 집기로 되어 있는데, 어째서 먼저 나서시오? 춘풍불유의 솜씨를 발휘하며 진가락의 목을 향해 장검을 내려쳤다. 진가락이 머리를 낮추며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목 옆에 있는 천정혈을 찔렀다. 장소중이 피할 생각도 않고 장검을 비스듬히 돌리며 사양일말의 재주로 그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다. 진가락도 움츠림이 없이 팔꿈치를 뒤집어 오른손의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에 단검을 끼고 흔들었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장소중의 장검이 부러지고 단검이 뻗어 왔다. 장소중은 한기를 느꼈다. 단검은 파란빛을 번쩍이며 그의 목을 노렸다. 그는 위험에 봉착해서도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왼손의 다른 손가락으로 진가락의 두 눈을 찌르려고 했다. 이 일 초는 매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진가락이 왼팔을 들어 막으며 단검으로 장소중의 배를 노리고 찔렀다. 이렇게 주춤하는 사이 장소중은 벌써 위험한 고비를 벗어나 몸을 뒤로 돌리고 세 발짝 뛰어 물러섰다. 관동삼마와 곽청동은 번개같이 빠른 두 사람의 동작을 보며 자기들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진가락은 이 틈을 타 돌격해 들어갔다. 장소중은 수중에 병기가 없자 부러진 반 토막의 장검을 곽청동을 향해 던졌다. 진가락은 그녀가 병중에 허약하여 피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화살처럼 몸을 날려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장검의 자루를 내려쳤다. 반 토막의 장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장소중의 이와 같은 태도는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진가락을 곽청동 옆으로 유인한 뒤에 즉시 향향 공주를 향해 달려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가. 진가락이 깜짝 놀라 발길을 멈췄다. 「네놈이 나가지 않으면, 내가 이 여자를 던져 이리에게 먹이리라. 향향 공주를 번쩍 들어 허공에 돌렸다. 손만 놓으면 그녀는 즉시 이리 떼 속으로 날아 떨어지는 것이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변화라 진가락은 한 줄기 뜨거운 피가 가슴에 솟구쳐 오르며 머리가 혼란하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신이 빨리 말을 타고 나가 이리 떼를 유인하시오. 장소중이 또 소리를 질렀다. 진가락은 이자가 마음이 흉악하고 수단이 악랄하여 한 말은 꼭 실현하고 마는 성미임을 잘 알았다. 위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백마를 끌어다 놓고 천천히 올라 탔다. 장소중이 다시 향향 공주를 들어올려 허공 중에 돌리며 외쳤다. 「내가 셋을 셀 때까지 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이 여자를 집어던지겠소. 하나-둘-셋- 그가 셋!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두 필의 말이 쏜살같이 불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원래 곽청동은 삼마가 진가락과 장소중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벌써 말고삐를 잘라 놓고, 그 위에 올라 손에 든 횃불을 휘두르며 달려나간 것이다. (저분이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아끼지 않고 이리 떼 속으로 -- 성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알 바 아니다. 사막 가운데에서 이리에게 물려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저분과 객사려가 위험에서 벗어나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기를 빌 뿐이다.) 바로 이때 진가락도 말을 달려나간 것이다. 관동삼마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진가락은 벌써 자기를 향해 덤벼드는 이리 두 마리의 목을 잡았다. 오른쪽 다리로 백마의 목을 밀며 왼쪽 다리로 말의 배를 건드렸다. 말은 주인의 뜻을 알고 방향을 되돌렸다. 진가락이 발끝으로 말머리를 가볍게 차자 말은 투레질과 함께 네 발을 허공에 띄운 채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진가락이 대갈일성 사나운 이리 두 마리를 장소중을 향해 던졌다. 장소중은 이리 두 마리가 무서운 입을 벌린 채 자기를 향해 덮쳐들자, 어쩔 수 없이 향향 공주를 내려놓고 피했다. 진가락이 2개의 바둑돌을 동시에 발사하면서 목을 숙이고 팔을 뻗어 향향 공주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두 다리를 모으자 백마는 또 허공에 뜬 채 불 밖으로 달려나왔다. 장소중이 손을 들어 맹렬하게 내리치자, 이리 한 마리가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앞을 향해 몸을 숙였다. 진가락이 그에게 발사한 바둑돌이라 겨냥이 정확하지 않아 그를 맞추지는 못했다. 장소중이 왼손을 뻗어 백마의 꼬리를 잡고 힘껏 뒤로 잡아당겼다. 백마가 다시 끌려갈 판이다. 그러나 장소중의 몸이 허공에 떠 있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또 백마의 힘이 센데다 앞을 향해 달리는 바람에 장소중의 몸이 오히려 불 밖으로 끌려나왔다. 장소중은 두 다리로 버티며 공중제비를 넘어 말 등에 올라탄 뒤에 다시 향향 공주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반공에서 다시 한 번 공중제비를 돌았다. 진가락의 단검이 그의 등을 찔렀다. 승산이 있을 것으로 자신했는데 이 사람의 무공이 워낙 막강했다. 몸이 허공에 뜬 상태에서도 여전히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오른발로 이리의 머리를 살짝 밟으며 다시 불길 안으로 뛰어 돌아갔다. 곽청동은 횃불을 휘두르며 벌써 이리 떼 속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진가락이 말을 달려 쫓아가는데 사나운 이리가 계속 대들었다. 그러나 그가 단검을 휘두를 때마다 목이 찔리거나 입 부위가 잘려 나갔다. 정말 호박이나 채소를 썰 듯 날카롭기 그지없는 보검이었다. 두 필의 말은 순식간에 이리 떼를 벗어나 서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이리 떼가 결사적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두 필의 말이 달리는 속도는 이리 떼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이리 떼를 몇 리 밖에 떼어 놓을 수가 있었다. 이리 떼 속에서 당장 벗어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들 굶주린 이리 떼의 끊임없는 추적으로부터 벗어나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큰일이었다. 세 사람은 위험에서 벗어나자 너무나 기뻐 모르는 사이에 서로들 얼싸 않았다. 그러나 곽청동은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진가락의 팔을 밀고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두 필의 말에 세 사람이 타고 얼마를 달렸다. 돌들이 점점 많아지며 길이 꼬불꼬불해졌다. 공중에서 본 산붕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땅으로 가는 길은 꾀나 멀었다. 날이 어두울 때까지 달리자 우뚝 솟은 그 백색의 산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도 가운데 그림으로 보아서는 이 옛 성은 이 산봉우리를 끼고 돌며 세워져 있으니, 멀어 봐야 여기서 10리 정도에 불과할 뿐이예요. 곽청동의 말이었다.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물을 길어다가 말에게 먹였다. 진가락은 계속 백마의 깃털을 어루만졌다. 만약 이 준마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도 자기는 비록 뚫고 나올 수 있었겠지만, 향향 공주는 여전히 적의 수중에 잡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은 떠날 수 없어 또다시 불길 속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곽청동은 방금 진가락과 포웅했던 생각을 하며 얼굴이 또 한 번 화끈거렸다. 세 사람이 잠시 쉬는 동안 말은 힘을 되찾았다.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가 멀리서 다시 들려왔다. 「이제 갑시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며 다른 말에 올라탔다. 곽청동은 그의 의도를 알았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백마를 타고 다시 서쪽을 향해 떠났다. 밤 공기는 물처럼 시원했고, 밝은 달은 중천에 걸려 있었으며, 흰 산봉우리는 옥같이 깨끗했다. 향향 공주가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언니, 산 위에 신선이 있을 것 같은데, 언니 생각은 어때요? 곽청동은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왼손으로 그녀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우리 올라가 보자꾸나. 남자 신선인지 여자 신선인지 모르겠네.」 웃는 사이에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그들 몸에까지 드리워졌다. 세 사람이 고개를 젖히고 봉우리를 바라다보니 은연중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은 우러러보게 된다더니, 우리 세 사람이 큰 환란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니 산천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구나. ) 산봉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 몇 리의 길은 험해 정말 가기 힘들었다. 이곳의 지세는 사막과는 완전히 달랐다. 온통 황사 가운데 굵고 큰 돌이 섞여 있는 언덕과 골짜기라 말이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다시 몇 리를 나가니 10여개의 갈림길이 보였다.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갈림길이 많으니 사람들이 길을 잃을 만도 하군요. 진가락의 말에 곽청동이 지도를 꺼내 불資 아래서 한참 들여 보다가 말을 꺼냈다. '지도 가운데 옛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좌삼우이(左三右二)라 했어요. 「좌삼우이라니, 무슨 말이죠? 진가락의 반문에 곽청동이 이렇게 대답했다. 「지도 위에도 다른 설명은 없군요.」 갑자기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 왔다. 세 사람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왜 저렇게 슬프게 우는지 모르겠군요.」 향향 공주의 말에 진가락이 웃었다. 「배가 고파서 그러겠지요.」 곽청동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시간이 자시(子時)라, 이리들이 멈추어 달을 보고 울부짖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울다가 멈추고는 즉시 발작을 해 쫓아올 것이니, 우린 빨리 길을 찾아 나서야 해요.」 '여기 왼쪽에 길이 다섯 개가 있는데 지도 위에 좌삼우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세번째 길로 가야겠군요. 진가락의 말을 곽청동이 받았다. 「만약 앞길이 막혔다면 돌아올 시간이 없을 텐데요.」 「그러면 세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겠군요. 「좋아요. 언니! 우리 갑시다.」 곽청동은 (세 사람이 함께 죽는다)는 말을 듣자 가슴은 따뜻했지만 눈동자는 오히려 축축하게 젖었다. 고삐를 채 세번째 길로 앞장 서 나갔다. 길은 갈수록 좁아지며 양쪽의 바위가 직립되어 있었다.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한참 가다 보니 또 오른쪽으로 3개의 갈림길이 나왔다. 곽청동이 반가워 외쳤다. 「살 수 있겠군요, 살 수 있겠어요. 세 사람은 새로운 정신으로 말을 재촉해 두번째 길로 들어섰다. 오랫동안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어 어떤 곳은 풀이 사람의 키를 가리고, 또 어떤 곳은 완전히 모래로 막혀 있었다.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갔다. 진가락은 잡히는 대로 바위를 들어다가 막힌 모래 위에 놓고 이리 떼가 추적해 오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전면의 왼쪽에 또 세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향향 공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입구에 백골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가락이 살펴보니 사람과 낙타의 해골이었다. 「이 사람은 여기서 방황하다가 죽었군.」 세 사람은 세번째 길로 들어섰다. 이때 길은 갑자기 가파라지며 한 줄기 광선이 석벽 사이로 비쳐 들어와 음산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길 옆에 백골이 또 나타났다. 해골 주위에 많은 보석이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은 보석을 가지고도 끝끝내 나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었군요.」 곽청동의 말을 진가락이 받았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데도 해골을 볼 수 있으니 다른 길에는 더 많은 백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올 때 아무도 보물을 갖지 말기로 해요.」 향향 공주의 말에 진가락이 웃었다. '저 귀신들이 우리를 나오지 못하게 할까봐 무서워서 그러시나요? '보물을 가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진가락은 향향 공주의 애걸하는 듯한 부드러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도 가지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아름다운 자매와 동행하니, 전세계에 있는 진귀한 보물을 다 받는 것보다도 좋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내가 왜 이 두자매를 생각했지?) 세 사람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밤새도록 걸었다. 날이 샐 무렵에는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좀, 쉬어요.」 곽청동이 쉬자고 했다. '차라리 집을 찾은 뒤에 안심하고 푹 자기로 해요.」 진가락의 말에 곽청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가지 않아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며 시원하게 터졌다. 해가 막 솟아올라 경치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었다. 백옥같은 산봉우리가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있고 봉우리 앞에는 집들이 즐비했다. 천 개도 넘는 건물의 벽이 허물어지고 기와가 내려앉아 엉망으로 부서져 온전한 것은 한 채도 없었다. 그러나 건축의 규모는 웅장하여 당년에는 번화했던 도시임을 십분 알 수가 있었다. 바라보니 높고 낮은 건물이 즐비한데도 인적은커녕 참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세 사람은 이토록 이상하고 무서운 경치는 본 적이 없었다. 무덤처럼 적막한 분위기에 위축되어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다가 진가락이 앞장을 선 채 말을 달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지방은 건조한 곳이라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건물 안의 물건들이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완벽한 상태로 보존E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가장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향향 공주가 여자의 꽃신 한 쌍을 발견했다. 색상이 변하지 않은 상태로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집어 드는데 손에 닿자마자 금방 재와 먼지로 변해 버렸다. 깜짝 놀라 그 자리를 피했다. 「이곳은 분지로,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과 비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 묵은 물건이 이렇게 완벽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지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세 사람은 길을 따라 돌아다녀 보았다. 가는 곳마다 백골과 창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 옛 성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황사에 의해 묻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상황으로 보아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진가락의 말을 곽청동이 받았다. 「정말 그렇군요. 어디 모래에 매장된 흔적이라도 있습니까? 몇 차례 큰 전쟁을 겪고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적에 의해 전멸당한것 같군요. 「성 밖에 천 개도 넘는 갈림길이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길을 잃을 수 있는데 만약 적이 그 비밀을 모른다면 적이 어떻게 왔는지 모를 일이로군요.」 향향 공주의 의견이었다. 「그야 틀림없이 첩자가 있었겠지.」 곽청동이 말했다.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려 했다. 그런데 외형으로 봐서 멀정하던 탁자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그녀가 두 손을 대자마자 무너져 내려앉았다. 곽청동이 지도를 들고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들 건물이 이렇게 썩었으니, 이리 떼의 습격을 당해 내지 못하겠군요. 그녀는 지도 안의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이 성의 중심이에요. 많은 기호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장소 같군요. 만약 궁전이나 보루라면 틀림없이 견고하게 지었을 거예요. 그곳으로 가서 이리 떼를 피하지요.」 곽청동의 말에 진가락이 찬성했다. 세 사람은 지도 가운데 그려진 길을 따라 앞을 향해 나갔다. 성 안의 길도 마치 미로와 같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지도가 없다면 정말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반 시간쯤 걷자 지도 가운데 그려진 중심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봉의 산허리일 뿐 무슨 궁전이니 보루니 하는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옥봉을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다울 뿐이었다. 온통 눈처럼 흰 투명한 광선이 맑게 비치고 있었다. 옥을 다루는 장인은 콩알만한 백옥 한 덩어리만 구해도 평생 쓰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곳은 산봉우리 전체가 백옥이었다. 세 사람은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마음이 환해지고 기분이 즐거워져 온갖 근심이 다 사라지는 듯했고, 조물주의 기막힌 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멀리서 갑자기 이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향향 공주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리 떼가 오고 있군요. 이리들도 지도를 가지고 있나? 정말 이상하군요.」 「이리의 코가 바로 지도지요. 우리가 지나온 곳에는 우리들의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이리 떼는 그 냄새를 맡으며 쫓아오는 것이지요. 진가락이 웃으며 하는 말에 곽청동도 따라 웃었다. 「네 몸에서 이렇게 향기가 나니 이리는 그만두고 사람이라도 쫓아올 수 있겠구나,,,,,,.」 곽청동은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지도를 가리키며 진가락을 바라보았다. 「이걸 보세요, 이건 분명히 산봉우리인데 이 안에 어째서 많은 길이 그려져 있지요? 「산봉우리 안이 텅 비어 있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진가락이 곽청동을 보며 말했다. 「그것밖에는 다른 까닭이 없겠지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지도 위에 있는 문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한어로 읽어 내려갔다. 「만약 궁으로 들어가고 싶거든 큰 나무 위로 올라가 신봉을 향해 애룡아파생(愛龍阿巴生)하고 세 번만 부르라. 「애룡아파생이라니, 무슨 뜻이죠? 향향 공주가 물었다. 「그건 암호야. 하지만 어디 큰 나무가 있어야지. 곽청동이 말했다. 이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이 들려왔다. 「우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숨어요. 세 사람이 몸을 돌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진가락이 앞서 두 발짝 걷다가 갑자기 땅 위에 솟아 올라온 괴이한 물체를 발견했다. 모양이 이상해 몸을 숙이고 보니, 이리저리 얽힌 큰 나무의 뿌리였다. 「큰 나무가 여기 있었군요. 진가락이 외치는 소리에 두 자매가 가까이 와 보았다. 「큰 나무의 뿌리가 이렇게 남아 있군요.」 향향 공주의 말을 곽청동이 받았다. 「나무 위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면 궁전의 문이 열린다니 이상하군요. 이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되나? 아니면 무슨 신선이 요술이라도 부린단 말인가요? 향향 공주는 신선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선법이란 물론 있는 것이지요.」 「그때는 산봉우리 안에 사람이 있어 암호 소리만 들으면 문을 열어 줄 수도 있었는지 모르지요.」 진가락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안에 있는 사람도 죽었을 거예요. 향향 공주가 한숨을 쉬며 말하고 산봉우리를 바라다보았다. 「입구가 저쪽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저걸 보세요. 그 위에 판 흔적이 있지 않아요. 진가락과 곽청동도 산봉우리 위에 도끼나 끌 같은 것으로 파놓은 것 같은 흔적을 보고 매우 반겼다. 재가 올라가 보겠습니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고,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달렸다. 일 장쯤 올라가다가 단검으로 옥봉을 찌르고 그 힘을 이용해 다시 일 장쯤 더 올라갔다. 그러자 벌써 흔적이 있는 곳으로 와 있었다. 곽청동과 향향 공주가 환호성을 질렀다. 진가락이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들고, 다시 봉우리를 살펴보았다. 동굴 입구의 흔적이 분명했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 동굴 입구가 모래 같은 것으로 막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옥봉을 쥐어 불거져 나온 바위를 꽉 잡고 오른손의 단검으로 모래를 파냈다. 그리고 동굴 옆에 있는 옥석을 한 덩어리 한 덩어리 떼어내어 던졌다. 잠시 후에는 떼어낸 입구 안이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졌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 앉아 품속에서 점혈주색을 풀어 가지고 한 가닥 한 가닥 연결한 뒤에 이것을 아래로 내렸다. 곽청동이 그 주색으로 동생의 허리를 붙들어 맸다. 진가락이 두 손을 움직여 그녀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거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향향 공주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진가락이 왼손을 위로 휘둘러 그녀를 끌어올린 뒤에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껴안고 위로했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향향 공주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리예요. 이리. 진가락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6, 7마리의 사나운 이리가 달려들자 곽청동이 장검을 휘둘러 결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의 백마는 긴 투레질을 하면서 옛 성의 건물 사이로 내달렸다. 진가락이 동굴 입구에서 옥석을 몇 덩어리 집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중수법(重手法)으로 던져 곽청동 주위에 있는 몇 마리의 이리를 때려 사방으로 쫓은 뒤에 즉시 주색을 내려뜨렸다. 곽청동은 병후에 쇠약하여 주색을 꽉 잡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칼을 왼손에 바꾸어 쥐고 계속 휘두르며 오른손으로 주색을 허리에 묶었다. 「이제 됐어요. 진가락이 힘껏 잡아당기자 곽청동의 몸이 허공에 떴다. 굶주린 이리 2마리가 대들었다. 곽청동이 장검을 휘둘러 그중 한 마리의 목을 내려쳤다. 다른 한 마리의 이리가 그녀의 신을 물고 늘어졌다. 향향 공주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곽청동이 공중에서 다리를 오므려 이리를 끌어 올림과 동시에 장검을 휘둘러 그 이리의 허리를 두 토막으로 잘랐다. 이리의 상반신이 그녀의 신을 문 채 끌려 올라왔다. 진가락이 그녀를 부축해 앉힌 뒤에 죽은 이리의 상반신을 잡아 당겼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물리지 않으셨어요? 「괜찮아요.」 곽청동이 이마를 찡그리며 그의 수중에서 단검을 받아 이리의 입을 잘랐다. 가지런하고 날카로운 두 줄의 이가 신 속에 박혔고, 그 구멍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언니. 발을 물렸군요.」 향향 공주가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신발을 벗기고 옷깃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었다. 진가락은 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맨발을 보기가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향향 공주는 상처를 다 매준 뒤에 아래에 있는 수천 마리의 이리가 여기저기 건물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을 가리키며 욕을 했다. '이 못된 것들! 우리 언니의 발을 물다니, 내 다시는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진가락과 곽청동은 자신들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돌려 굴 속을 들여다보니 어둠침침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곽청동이 부싯돌을 쳐 밝혀 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닥과의 거리가 17, 8 장이나 되었다. 봉우리 안의 지면이 밖의 지면보다 훨씬 낮았다. 「오랫동안 통풍이 되지 않은 굴이니 지금 내려가서는 안되요.」 곽청동이 이렇게 말하고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다. 굴 속의 공기가 지금쯤은 다 흘러 나왔겠지 생각한 진가락이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일단 내려간 뒤에는 올라오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곽청동의 말이었다. 「올라올 수 없으면 그만두지요.」 진가락이 웃었다. 곽청동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진가락이 주색의 일단을 돌에 묶어 놓고, 그 주색을 따라 내려갔다. 주색 끝에서 바닥까지도 10여 장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바닥이 대단히 딱딱했다. 그는 손을 뺀어 품속에서 부시를 찾았다. 어제 고금표와 이리 떼 속에서 목숨을 걸고 버틸 때 이미 다 써 버려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불씨가 있습니까? 곽청동이 꺼내 던져 주었다. 그가 받아 불을 밝히고 보니 석벽은 번쩍번쩍 빛나는 백옥이었다. 바닥에 몇 개의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손을 뻗어 탁자를 건드려 보니 대단히 견고했다. 원래 굴이 밀폐되어 침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의자의 다리를 뜯어 거기에 불을 붙였다. 곽청동 자매는 계속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이 갑자기 밝아지며 내려오라고 외치는 진가락의 소리가 들렸다. 「네가 먼저 내려가거라.」 곽청동의 말에 향향 공주가 주색을 잡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진가락이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꼭 감은 뒤에 뛰어 내렸다. 튼튼한 두 팔이 자기를 안아 가볍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어서 곽청동이 뛰어 내렸다. 진가락이 그녀를 껴안을때 그녀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산봉우리 밖에서 나는 이리 떼의 울부짖는 소리도 이젠 잘 들리지 않았다. 진가락은 백옥의 벽에 비친 세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자기 옆에 2명의 절세미인이 있어 옥의 빛에 반사되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세 사람이 봉우리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으니 길흥화복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평생 여러 가지 일을 당해 보았지만, 지금 이 시간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향향 공주는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나무 다리에 붙인 불을 들고 앞으로 나가 보았다. 진가락은 또 7개의 의자 다리를 뜯어 손에 쥐었다. 세 사람이 길고 긴 좁은 길을 걸어 나갔다. 앞에 돌이 막힌 것으로 보아 끝까지 온 모양이었다. 진가락은 뜨끔했다. (과거에 길을 뚫어 놓지 않은 것일까? 진퇴양난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자세히 보니 그 끝에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가 있었다. 황금 같아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황금으로 만든 투구와 갑옷이었으며, 그 옆에는 해골이 하나 있었다.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투구와 갑옷이었다. 「이 사람이 생전에는 고관귀족이었던 모양이지요? 향향 공주의 말이었다. 곽청동은 갑옷 위에 날개가 돋힌 낙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어쩌면 국왕이거나 왕자였음이 분명해. 오래된 나라에는 국왕만이 낙타의 휘장을 쓸 수 있다고 들었거든.」 「그러면 중원의 용과 같은 것이로군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향향 공주의 손에서 횃불을 받아 옥벽을 비춰 보았다. 문 틈에서 그 어떤 장치가 있는 흔적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횃불을 받아들자 금으로 만든 갑옷이 있는 장소에서 6장쯤 떨어진 곳에 자루가 달린 금도끼가 대문 고리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문이 있어요.」 곽청동이 반가워 소리를 질렀다. 진가락이 그녀에게 횃불을 런겨주고 가서 금도끼를 빼려고 했다. 그러나 고리 위의 쇠가 도끼 자루에 붙어 빠지질 않았다. 그녀는 단검을 빼 녹을 제거한 후 두 손으로 금도끼를 뽑았다. 아주 묵직한 금도끼였다. 「만약 이 금도끼가 그의 병기였다면, 이 국왕 폐하의 힘이 대단했겠는걸. 진가락이 웃었다. 돌문의 상하와 좌우에 4개의 문고리가 있었는데, 모두 길고 굵은 쇠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녹을 제거하고 그 고리를 들어올렸다.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손을 문에 대고 힘껏 밀자 옥석으로 된 커친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이 문의 두께는 1뼘 정도 되어 문 같기는커녕 거대한 바위 덩어리였다. 세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진가락이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 단검을 들고 앞장 서서 들어갔다. 한 발짝 디디자 발끝에 해골이 하나 걸렸다. 그는 횃불을 높이 들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사람 하나가 겨우 다닐 만한 길고 좁은 통로에 도검(刀劍)과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곽청동이 대문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좀 보세요. 불빛 아래서 보니 대문 뒤에 여기저기 칼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국왕에 의해 갇혔었군요.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뚫고 나가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문이 너무 두껍고 또 옥석이 이렇게 견고해서 나가지 못한 것 같군요.」 진가락이 말을 하자 곽청동이 받았다. 「그들이 수십 자루나 되는 이런 날카로운 단검을 가지고도 작은 산만한 이 옥석의 문을 끝내 깨지 못했군요.」 「그들은 여기서 온갖 방법을 다 강구해 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절망으로 하나하나 죽어 간 모양이지요,,,"' 진가락의 말을 향향 공주가 막았다. 「그만 이야기하세요. 무서워요. 처참한 광경을 보며 차마 더 들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진가락이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 국왕이 어째서 문만 지키고 나가지 않고 있다가, 그들과 함께 죽었을까요?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곽청동이 이렇게 말하며 지도를 꺼내 보았다. 「통로가 끝나면 앞에 큰 방과 대청도 있는데요.」 세 사람은 앞으로 향했다. 백골을 타고 넘으며 2개의 모퉁이를 돌자 과연 커다란 대청이 나타났다. 그 대청 안에도 도처에 해골과 도검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당시 한 차례 격전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향향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험악하게 싸웠는지 모르겠군요. 모두들 편안하고 즐겁게 산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세 사람이 대청으로 들어서는데 진가락은 갑자기 한 줄기 어마어마한 힘이 그가 쥐고 있는 단검을 흔드는 것을 느꼈다. 쩔그렁 소리와 함께 단검을 놓쳤다. 동시에 곽청동이 차고 있던 장검도 끈이 끊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곽청동은 몸을 숙여 장검을 집으려고 했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갑자기 주머니속에 있던 수십 개의 철련자(鐵蓮子)가 날아가 쨍쨍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진가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왼손으로 향향 공주를 잡아당겨 곽청동과 함께 뒤로 뛰어 몇 발짝 피했다. 그리고 쌍장을 교차시킨 체 적이 재차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앞을 바라보아도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후배 세 사람이 이리를 피해 들어왔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가락이 위구르 어로 이렇게 말하고, 한참 동안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가락은 생각해 보았다. (이곳의 주인이 어떤 무공을 사용하였기에 우리들의 병기를 허공에서 쳐 떨어뜨렸을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녀의 주머니속에 있던 철련자를 떨어뜨린 점이다. 이토록 심오한 무공을 본적도 없지만 말조차 들어 본 일이 없다.) 「주인께서는 나오시기 바랍니다. 후배들이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진가락이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외쳤다. 대청 뒤쪽에서 그의 큰 소리만 들려 올 뿐 다른 소리는 없었다. 곽청동은 놀란 가슴이 다소 진정되어 다시 나가 단검을집으려 했다. 그런데 장검은 바닥에 못으로 박아 놓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안간힘을 다해 겨우 주워 들었는데 또 한번' 땅'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빨려들 듯 떨어졌다. 진가락은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바닥이 자석산(磁石山)이로군요.」 「자석산이라니요? 곽청동이 반문했다. 「먼 곳의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북쪽 끝에 큰 작은 석산이 있는데 허공에 떠 있는 쇠들을 모두 흡수하여 남북을 가리키게 한다더군요. 그들이 망망한 바다를 떠돌아다닐 때 나침반을 이용해 방향을 확인한다던데, 바늘이 남쪽을 가리키는 까닭은 바로 이 자석산의 힘 때문이라더군요.」 「이 땅바닥에 자석산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병기와 암기를 모두 흡수해 버렸다는 뜻인가요? 곽청동이 반문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시험해 보지요.」 그는 단검을 주워 의자 다리와 함께 왼손 바닥에 수평으로 놓았다.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다가 손을 떼자 단검이 아래로 빨려들 듯 떨어지며 비스듬히 돌 위에 꽃혔지만, 나무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보세요, 이 자석산의 흡인력이 대단하군요.」 진가락이 말하고 단검을 다시 주워 잡았다. 「황제가 당년 지남차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 적을 대파한 것은 바로 자석산의 흡인력의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지요. 옛 사람의 총명과 재주가 놀랄 만합니다.」 그들 자매는 황제의 이야기를 몰랐다. 그래서 진가락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곽청동이 몇 발짝 걷다가 또 소리를 질렀다. 「빨리 와 보세요, 빨리. 진가락이 쫓아가 보았다. 그녀가 직립해 있는 해골을 가리켜 보였다. 해골의 몸에는 너덜너덜한 의복 자락이 걸쳐져 있었다. 골격의 형상도 완벽했다. 해골의 오른손에 흰색의 장검이 쥐어져 있는데 그 끝이 다른 한 구의 해골에 찔려 있었다. 당년 이 흰색의 장검으로 이 사람을 죽인 것 같았다. 「이것은 옥으로 만든 검 이로군요. 진가락이 옥으로 만든 검을 그 해골의 손에서 살며시 뺐다. 두 해골이 동시에 무너져내렸다. 그 옥검의 날은 예리하게 갈려 있어 강철로 만든 병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옥의 질이 견고하다고는 하지만 다른 금속으로 만든 무기와 부딪치면 쉽게 부러질 것이라 별로 쓸모는 없을 것 같았다. 대청 바닥에는 도처에 크고 작은 옥으로 만든 무기가 흩어져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활과 창, 검과 갈라진 창이었다. 생김새가 이상하여 중원에서 흔히 본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진가락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곽청동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알겠어요.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이 산봉우리의 주인이 용의주도하게 오랫동안 생각하였군요.」 「어째서요? 「그가 이 자석산에 의지하여 적의 병기를 뺏고, 옥으로 만든 병기로 이들을 섬멸했음에 틀림없어요.」 향향 공주가 철갑에 싸인 해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공격해 온 사람들이 철갑을 입었으니 더욱 힘차게 달려 들어가, 기어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날 수 없지 않았겠어요? 향향 공주는 언니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이건 아주 분명한 사실 아니에요? 뭘 더 생각할 것이 있어요? 「아무래도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들 옥으로 만든 칼을 쥔 사람들이 적을 살해했다면 어째서 또 하나하나 적의 옆에 있는 걸까? 진가락도 곽청동의 말을 듣기 전부터 이 점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뒤쪽도 가서 보지요.」 곽청동의 말을 향향 공주가 받았다. 「언니, 가지 마. 곽청동은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애태우는 표정을 보고 곽청동이 동생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무서워할 것 없다. 저쪽에는 죽어 있는 사람이 없을 거야.」 대청 뒤로 나와 보니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안의 상황은 더 무서웠다. 수십 구가 넘는 해골이 서로 엉켜 있었다. 해골은 대부분 직립한 상태로,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어떤 사람은 손에 병기를 들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맨손이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이렇게 죽어 간 데에는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진가락의 말을 곽청동이 받았다. '이 사람들이 대개 이쪽에서 칼로 찌르면 저쪽에서는 주먹으로 치다가 동시에 죽었군요.」 '무림 가운데 고수끼리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여러 사람이 모두 이렇게 죽었으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요.」 세 사람은 계속 안으로 들어가다가 모퉁이를 돌아 거기에 있는 작은 문을 밀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한 줄기 햇빛이 수십장이 넘는 높은 곳에서 벽 틈으로 비치고 있었다. 햇빛이 비치는 곳은 옥실이었다. 당년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이 천연 광선에 의지하여 정확한 위치에 파서 만든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갑자기 햇빛을 보자 정신이 새로워졌다. 석실 안에는 옥으로 만든 침대와 탁자, 의자가 있는데 조각이 정교했다. 침대 위에는 비스듬히 누워 있는 해골도 있었다. 석실 한 모퉁이에 크고 작은 2구의 해골이 있었다. 진가락이 횃불을 껐다. 「여기서 좀 쉽시다.」 비상 식량과 물을 꺼내 각자 조금씩 먹고 마셨다. 그 굶주린 이리들이 언제까지 봉우리 밖을 지키고 있을지 모르니 양식과 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아껴요. 곽청동의 말이었다. 세 사람은 이 며칠 동안 긴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용한 방에 들어오자 피곤이 조수처럼 밀려와 의자위에 앉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쫓는 자 쫓기는 자 장소중과 관동삼마는 이리 떼가 벌떼처럼 진가락 등 세 사람을 쫓아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꽃과 같이 아름다운 두 미녀가 이리에게 잡아 먹히게 된 것이 비록 애석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네 사람은 앉아 휴식을 취하며 죽은 이리고기를 구워 먹었다. 고금표는 나뭇가지가 거의 다 타 없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다시 주우러 가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이리 똥을 불 속에 넣어 태워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얼마 후에 한 가닥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바람이 불었지만 여전히 모락모락 피어 오르며 흩어지지 않았다. 이리고기로 포식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동쪽에서 먼지가 크게 일어났다. 네 사람은 이리 떼가 또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말을 끌려고 달려갔다. 이때 겨우 두 필의 말이 남아 있었는데, 모두 관동삼마가 타고 온 것이었다. 장소중은 손을 뻗어 그중 한 마리의 고삐를 잡았다. 합합태가 몸을 날려 덮쳐 들며 고삐를 낚워챘다. 장소중이 손바닥으로 때리려고 하는데 등일뢰와 고금표가 병기를 들고 쫓아왔다. 그의 장검은 벌써 진가락에 의해 부러져 수중에 병기가 없었다. 「서두를 필요가 있나요? 이리 떼도 아닌데 . 관동삼마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장소중은 벌써 말에 올라탔다. 그가 바라보니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가운데 낙타와 양만 있었지, 굶주린 이리 떼가 쫓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 적중했다. 그는 본래 말에 올라 동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난처한 처지에서 말머리를 돌리고 먼지가 일어나는 곳을 향해 달렸다. 「내 가서 보리다.」 1리쯤 달리자, 맞은편에서 한 필의 말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장소중 앞에 이르러, 말에 탄 사람이 고삐를 채자 그 후로 순간적으로 정지하여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단한 기마술이로구나.) 장소중이 마음속으로 감탄을 하는데 말에 탄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그의 청군 군관에게 한어로 물었다. 「이리 떼는 어디로 갔소? 장소중이 서쪽을 가리켰다. 이때 낙타와 양 떼가 벌써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 뒤로 홍안의 대머리 영감과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말을 타고 낙타와 양을 몰며 나타났다. 양이 맴맴거리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다. 장소중이 누구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관동삼마가 벌써 말을 타고와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을 보고는 정중하게 절을 했다. 「또 영감님을 뵙게 되었군요.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노인이 흥 소리를 냈다. '안녕하시지 못할 것도 없지.」 천지괴협 원사소가 나타난 것이었다. 천산쌍웅은 그날 새벽 진가락과 향향 공주를 놔 둔 채 병든 곽청동이 궁금해 그녀를 보려고 길을 재촉했다. 이틀 후 그들은 낙타와 양 떼를 몰고 가는 원사소를 만났다. 진정덕은 사랑하는 아내의 호감을 사려고 친절하게 그를 대했다. 원사소는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관명매는 옆에서 웃기만 했다. 「원 대형, 낙타와 양을 몰고 어디로 가시오? 진정덕이 묻자, 원사소는 하얗게 눈을 흘겼다. 「당신이 내 가산을 탕진하게 만들어 놓았소.」 어째서요? 「지난번 내가 낙타와 소, 양을 많이 사서 이리떼를 함정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 늙은이가 끼여드는 바람에 큰일을 그르쳤단 말씀이로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게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어쩔 수 없이 다시 돈을 마련하여 이 낙타와 양들을 샀소. 진정덕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원 대협, 그래 돈을 얼마나 쓰셨습니까? 제가 배상해 드리지요.」 그날 저녁부터 관명매는 그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부드럽게 바러어졌다. 걸핏하면 신경질만 내던 그의 성격도 크게 변했다.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사소에 대해서도 저자세로 나왔다. 정말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당신보고 배상을 하라고 합디까? 그러면 우리가 무얼 좀 도와 드리지요. 당신이 분부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함께 이리를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원사소가 관명매를 바라보니,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소. 그래서 세 사람이 낙타와 양을 몰아 이리의 똥을 찾아 다녀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이날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검은 연기를 보늰 바닥의 이리 똥도 갈수록 많아졌다. 이리 떼가 근처에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이리 떼에 포위되어 살려 달라고 피운 연기인 줄 알고 달려오다가 장소중과 관동삼마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장소중은 이 노인이 어떤 인물인지 몰랐다. 다만 삼마가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사소는 사방을 살펴보다가, 네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리를 잡으러 가니, 당신들도 따라 오시오.」 네 사람은 깜짝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영감이 미친 건 아닐까? 이리 떼를 보면 피하기에도 급급한데, 이리를 잡으러 간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관동삼마는 그에게 구원을 받은 바 있고 그가 일신에 놀랄 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소중이 어림없다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나는 몇 년 더 밥을 먹고싶소. 동행할생각이 없소.」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진정덕이 화가 나서 그를 낚워채려고 했다. 「이 원 대협의 분부를 어기려 하다니,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장소중이 오른손을 들어 흥운탁월의 재주를 폈다. 손을 뒤집어 팔꿈치로 작은 원을 그리며 진정덕의 손을 치려고 했다. 햇빛 아래 그의 다섯 손가락이 매의 발톱 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거두며 주먹으로 바꾸어 쥐고 그의 팔을 후려쳤다. 두 사람의 팔이 미치는 순간, 상대방의 공력을 알았다. 우열을 가릴 수 없자, 뒤로 한발짝씩 물러나, 어떻게 해서 사막 한가운데서 이토록 무서운 고수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고 서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여보, 친구. 이름을 대시오.」 장소중의 말에 진정덕이 욕설을 퍼부었다. 「네까짓 주제에 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도대체 이 원 대협의 분부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장소중은 한 차례 대결을 하여 이 노인의 무공이 자기와 엇비슷함을 알았다. 그가 입만 벌렸다 하면 그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을 (원 대협)이라 부르며 십분 존경하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의 무공이 더욱 높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대체 원 대협이 누구란 말인가? 금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림 가운데 허명만 있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사람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 버티다가 그들 여섯 사람이 손을 맞잡고 대항한다면 자기 혼자서는 결코 대항할 수 없는 일이라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굽실거리지도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 대협이라 하는 분의 존함을 알고 싶은 것이오. 만약 그분이 확실한 선배 도인이라면 그분의 분부에 따르겠소.」 원사소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네가 이 영감을 시험하고 싶은 게로군. 이 영감은 평생 다른 사람을 시험해 보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험을 당해 보지는 않았네. 내 하나 물어 보겠는데, 방금 자네가 흥운탁월을 쓴 뒤에 곧 설옹람관으로 변했는데, 내 만약 왼쪽에서 하산참호를 쓰고 오른쪽에서 신정혈을 찍으며 동시에 오른발로 자네의 무릎 밑 3촌쯤의 부위를 찼다면 자네는 어떻게 대항하겠나? 장소중이 듣고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하체를 반궁사조의 자세를 취하고, 두 손을 나법으로 하여 당신의 맥문을 잡아 버리겠습니다.」 「방어 가운데서 공격을 편다. 그것도 무당파의 솜씨렷다.」 장소중은 깜짝 놀랐다. (내 저 대머리 영감과 일 초를 대결했고, 이 영감에게 한마디 답만 했을 뿐인데 내 출신 성분을 알아내다니.) 다시 원사소의 말이 들렸다. 「당년 내가 호북(湖北)에서 마진 도장과 무공에 관해 절차탁마를 한 적이 있네.」 장소중은 가슴이 뜨끔했고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원사소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오른손의 면장(綿掌)을 음수(陰手)로 하여 자네의 금나술을 깨고, 왼쪽 팔꿈치로 자네의 앞가슴을 친다면,,-- 「그것은 대공권의 주추가 아닙니까? 원사소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장소중이 성급하게 대답했다. 「옳거니. 그러나 이 주추는 허초요, 자네가 앞가슴을 움츠리며 뒤로 뺄 때, 나는 좌장으로 자네의 얼굴을 칠 판이야. 당년 마진 도장도 이 일 초를 피하지 못했네. 뒤에 내가 그분께 설명을 해 주었네. 자네가 어떻게 깰지 한번 들어 보세.」 장소중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만약 변초가 빠르다면, 그야 물론 피할 수 없었겠죠 그러나 재가 원앙퇴로 당신의 왼쪽 옆구리를 공격해 당신으로 하여금 손을 거둬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 것입니다.」 원사소가 껄껄 웃었다. 「그럴듯하군. 당금의 무당파 중에서는 자네의 무공이 제일이겠군. 「그리고 제가 즉시 당신의 가슴에 있는 현기혈(玄機穴)을 찍을 것이오. 「좋아! 그러면 내가 서북쪽의 귀매를 발고 자네를 하체를 공격하지. '그러면 제가 송(訟) 부위로 물러서며, 기망을 공격하고 천천(天泉)을 料겠숨니다.」 고금표와 합합태는 두 사람이 괴상한 이야기를 주고받자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합합태가 등일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저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입니까? '복희씨의 64개 괘의 방위와 인신에 있는 혈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오.」 등일뢰가 대답하자 고금표와 합합태 두 사람은 그제야 알았다. 원래 이들 두 사람은 말로 대결하는 것이었다. 그전부터 지상담병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입으로 대결하는 것은 종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원사소의 말이 다시 들렸다. '오른쪽으로 명이(明夷)로 나아가 기문을 잡겠네.」 '중부로 피하며 붕안수로 깨겠습니다.」 '기제로 나아가 환도(環跳)를 찍고, 다시 좌장으로 곡원을 누르겠네.」 장소중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진위(震位)로 피했다가 복위指찬긴로, 다시 미제로 피하겠습니다. '어째서 늘 피한다고만 하오? 합합태가 낮은 소리로 물었지만, 등일뢰는 그를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주고받는 말이 갈수록 빨라졌다. 원사소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나왔지만, 장소중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동안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더듬더듬 대처해 나갔다. 관동삼마는 다같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약 정말로 대결한다면 언제 생각할 여유를 주나? 순간적으로 멈칫하기만 해도 벌써 맞고 쓰러졌겠다.) 두 사람은 입으로 또 수 초를 대결하였다. 장소중이 말했다. 「옆으로 소축을 향해 나아가 중반신을 보호하겠습니다.」 원사소가 손을 가로로 저었다. 「그럼 자네가 지네. 「가르쳐 주십 시오.」 「내가 비위로 뚫고 나가 발로 음시(陰市)를 차고, 다시 신봉(神封)을 찍으면 자네는 꼼짝 못해.」 「말은 그럴듯 합니다만, 당신이 비위에 있으면 팔꿈치가 내 신봉혈(神封穴)을 치지 못할 것입니다.」 「팔꿈치를 쓸 필요도 없네. 믿지 못하겠거든 어디 한번 보게. 조심 하라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그의 무릎 위 3촌쯤에 있는 음시혈을 차자 장소중이 뒤로 펄쩍 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나를 다치게 하려고,,,,,,.」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원사소가 오른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있는 신봉혈을 찔렀다. 장소중은 가슴이 뜨끔하며 계속 기침이 나왔다. 급히 손을 뻗어 왼쪽 가슴을 두드리고 주무르자 기침이 겨우 멎었다. 「그래, 어떤가? 원사소가 웃었다. 사람들은 그가 몸을 살짝 움직이며 손가락을 가볍게 떠는 사이에 벌써 상대방의 혈도를 찍은 것을 보고, 무공이 정말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고 느껴 입을 헤 벌렸다. 장소중은 의기소침하게 기가 죽였다. 「제가 원 대협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진정덕이 나섰다. 「이런 무공을 가지고 무림 가운데서 내노라 행세를 하였단 말인가? 이름이나 대 보시오.」 「제 성은 장이요, 이름은 소중이라 합니다. 감히 세 분의 존함을 여쭈어 봐도 될는지요? 「아, 원래 화수판관이었군. 원 대형, 저 사람이 마진 도장의 사제요. 진정덕의 말에 원사소가 끄덕거렸다. 「음, 저 사람의 사형이 저 사람만 못해요. 우리 갑시다.」 말을 타고 앞장 선 채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낙타와 양떼 사이에 적지않은 말이 섞여 있었다. 장소중과 합합태가 두 필의 말을 골라 탔다. 여섯 사람이 낙타와 양 떼를 몰며 원사소를 따라갔다. 한참 달리다가 장소중이 진정덕을 향해 물었다. 「영감님, 이리가 굉장히 많던데 어떻게 잡지요? 관동삼마도 불안에 떨며 그 점이 몹시 궁금했었다. 「당신들은 원 대협의 솜씨나 구경하면 그뿐이오. 이리 몇 마리쯤 무서울 것이 무엇이오. 못난 사람 같으니라구.」 진정덕이 말했다. 장소중은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이토록 자신만만한데 나도 약한 체해서는 안된다.) 사실 진정덕도 원사소가 이리를 어떻게 잡을는지 몰랐다. 다만 나이 들었다는 행세로 거드름을 피우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큰소리만 친 것이었다. 흉악한 이리 떼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다. 관명매는 그가 떠벌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만 웃었다. 한참 달리던 원사소는 말머리를 돌리고 진정덕 등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이리 똥은 눈 지 얼마 되지 않는군. 이리떼가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오. 서쪽으로 20여 리만 가면 이들 이리 례와 만나게 될 것이오. 10리쯤 더 가서 모두 말을 밖워 타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원사소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리 떼와 만나면 내가 앞장을 설 것이오, 그러면 당신들 여섯사람 가운데 세 사람은 왼쪽에서, 세 사람은 오른쪽에서 낙타와 양을 가운데로 모시오. 함부로 달아나게 놓아 두면 이리 떼도 분산이 되오. 등일뢰가 자세히 물어 보려 했지만, 원사소는 벌써 말머리를 돌리고 앞으로 가 버렸다. 각자 8, 9리를 달렸다. 이리의 똥이 갈수록 젖어 있었다. 「이리 떼가 앞에 있군요. 이렇게 많은 낙타와 양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째서 쫓아오지 않을까요? 「정말 이상한 일이오.」 관명매의 말을 진정덕이 받았다. 다시 몇 리를 가자 지세가 갑자기 변했다. 많은 산이 둘러싸인 가운데 백옥의 높은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천산쌍응은 사막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벌써부터 이 옥봉에 관한 여러 가지 신기한 전설을 많이 들었다. 뜻밖에도 오늘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양광이 비스듬히 옥봉을 비쳐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원사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떼가 미궁 안으로 들어갔으니, 모두들 채찍으로 낙타와 양을 떼리시오. 각자 채찍을 들어 낙타와 양을 닥치는 대로 때렸다. 낙타와 양 울음소리가 크게 일어났다. 잠시 후에 커다란 회색빛 이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원사소가 긴 채찍을 휘둘러 허공을 치며 남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천산쌍응,장소중, 관동삼마 등 여섯 사람이 낙타와 양을 몰며 그 뒤를 쫓았다. 몇 리를 가자 뒤에서 이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크게 일어났다. 진정덕이 고개를 돌리니 수만 마리가 넘는 굶주린 이리들이 사나운 어금니와 무서운 발톱을 번득이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말을 달려 장소중과 관동삼마를 쫓아갔다. 네 사람이 억지로 진정을 하고 있지만 얼굴은 모두 흑빛이었다. 합합태는 눈에서 피라도 쏟을 듯이 고함과 호통을 치며 낙타와 양을 몰았다. 그는 목동 출신이라 낙타와 양의 성질을 잘 알았다. 여러 필의 낙타와 양이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가 소리를 지르거나 채옌으로 때려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한 마리도 뒤떨어지거나 이탈하지 못했다. 「가축을 모는 솜씨가 대단하군요. 관명매가 이렇게 칭찬했다. 이리 떼가 비록 흉악하고 사나웠지만 힘은 역시 부족해 10리쯤 간 후에 보니, 멀리 떨어져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다시 10여 리를 달리자 원사소가 말했다. 「잠시 쉬십시다. 사람들이 말에서 내려 물을 마시고, 비상 식량을 꺼내 먹었다. 합합태는 낙타와 양을 한쪽으로 몰아넣었다. 「수고를 너무 많이 하시는군.」 원사소는 그가 가축을 잘 모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칭찬했다. 이리때가 다시 접근했을 때, 낙타와 양은 이미 한 차례 휴식을 취한 뒤였다. 이렇게 쉬다가 달아나고, 달아나다가 쉬며 남쪽으로 7, 80여리를 왔다. 앞에서 위구르 사람 두명이 먼지를 내며 달려왔다. 「원 영감님, 성공하셨습니까? 「됐네, 됐어 ! 다들 준비하라고 해.」 두 사람이 먼저 말머리를 돌려 앞서 떠났다. 사람들은 앞에 적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자 상당히 마음이 놓였다. 좀 달리다 보니, 사막 위에 커다란 원형의 모래성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니 모래성의 높이가 40여 장이며, 그 위에 작은 입구가 있었다. 원사소가 먼저 그 문으로 들어가고 그 뒤로 천산쌍응과 합합태가 낙타와 양 떼를 몰고 들어갔다. 낙타와 양 례가 거의 들어갈 무렵, 이리 떼도 쫓아왔다. 장소중은 입구까지 달려와 잠시 망설이다가 고삐를 채 성을 끼고 돌아갔다. 등일뢰와 고금표도 이리를 보고 돌아갔다. 수천 수만 마리의 굶주린 이리들이 벌떼처럼 모래성 안으로 들어와 낙타와 양을 향해 덮쳐들어 물었다. 이리 떼가 거의 다 성 안으로 들어오자 호가 소리가 크게 일어나며 양쪽의 모래 구덩이 속에서 수백 명이 뛰어나왔다. 각자 등에 모래 부대를 짊어지고 성문으로 달려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문을 막아 버렸다. 장소중은 그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자, 웬일인가 해서 바라다보았다. 수십 명이 모래성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뛰어내려 계단을 밟고 올라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손에 긴 줄을 들고 때마침 원사소 등 네 사람을 매달아 끌어올리고 있었다. 장소중은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모래성의 지름이 10여 장이나 되고 안쪽의 벽은 가파른 것이, 모래 벽돌로 쌓아 올린 듯 미끄러워 발붙일 곳이 없었다. 수백 마리의 낙타와 양이 수만 마리의 굶주린 이리 떼와 섞여 물어뜯기고 울부짖는데, 여기저기에 피가 낭자했다. 원사소와 천산쌍응이 성 위에 서서 껄껄 웃었다. '이리 떼는 천산 남북의 두통거리로서, 잡아 먹힌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수백 년 동안 그것들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원 대형께서 일거에 이놈들을 전멸시켰으니 이 큰 공은 길이 남을 것입니다. 백성을 위해 이런 일을 하셨으니, 참된 대협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진정덕의 말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위구르 친구들의 밥을 수십 년 동안이나 얻어 먹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작은 보답이라도 됐는지,,,,,,. 만약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저 혼자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래성만 하더라도 3천여 명이 꼬박 반년 동안 쌓아 올린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도움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원사소의 말에 관명매가 나섰다. 「이 사나운 이리가 굶어 죽자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누가 아니랍니까? 여기 있는 많은 낙타와 양으로 이놈들을 한차례 배불리 먹여야겠지요.」 많은 위구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의 수령이 원사소를 향해 극구 칭찬하면서 양고기와 마유주 (馬乳酒)를 꺼내 접대하였다. 「취우황삼이 흑수에서 청병을 포위하고, 우리는 여기서 이리 떼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이리 떼는 이미 해결이 되었으니, 모두들 그녀를 도우러 가지요,,,,,,.」 한 수령의 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먼 곳에 서 있는 장소중을 발견했다. 청군의 군관 복장이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원사소와 동행한 사람이라 더 묻지는 않았다. 「원 대형, 제게 한 가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는데,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진정덕의 말에 원사소가 웃었다. 「늘그막에 겸양을 다 배우셨군.」 「원 대형의 제자 인품이 틀려먹었으니, 잘 타일러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요? 진가락 그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진정덕이 그를 옆으로 끌고가서, 진가락이 곽청동을 좋아한 일과 그 뒤에 변심을 해, 그녀의 동생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플려 주었다. 「그 녀석은 신의를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놈이라, 결코 그럴리가 없습니다.」 원사소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직접 보았는걸요.」 관명매가 나서며 진가락과 향향 공주를 만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원사소는 잠자코 있었다.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그놈의 의부의 부탁을 받고 어려서부터 키웠는데, 그놈의 인품이 그토록 비열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일후에 무슨 면목으로 우 대형(于 大兄)을 지하에서 만난단 말입니까? 관명매는 그가 격분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글썽하는 것을 보구 실망이 너무나 커 괴로워하는 것 같아 위로의 말을 건넬까 했다. '우리 이 세 사람을 찾아가 대질을 시킵시다. 나는 절대 의를 배반한 녀석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원사소의 단호한 말이었다. '누구나 할 말은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아요. 할 말을 마음에 숨겨 두면 몇십 년 동안 자신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는 것이레요. 관명매가 속삭이듯 말했다. 원사소는 이 말의 뜻을 분명히 알아들었다. 이 수십 년 동안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소년 시절의 고집을 후회했다.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관명매와 백년해로하는 부부가 되었을 것이었다. 눈앞의 관명매는 백발이 성성했지만, 그의 마음속의 눈은 여전히 8, 9세 때의 귀여운 모습과 천진난만하던 처녀로만 보였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오늘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합니다. 재 평생 헛되지는 않았어요.」 관명매는 사막 저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태양을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무엇이나 다 인연이에요. 전에는 저도 언제나 괴로웠지만, 근래에 와서는 갑자기 모든 것이 즐거워졌답니다.」 손을 뻗어 진정덕의 떨어진 단추를 꾀매 주며 말했다. 「한 사람이 날마다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행복인 줄은 모르고 언제나 잡을 수도 없는 무지개나 잡으려고 해요. 가장 귀한 보배는 언제나 자기 곁에 있는 법이랍니다. 이제 저는 그것을 알았어요. 진정덕은 얼굴을 붉히며 만족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관명매가 원사소의 옆으로 걸어갔다.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다면, 그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속죄가 되었을 것이에요. 하물며 본래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아주 즐겁답니다. 그러니 다시는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원사소는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 탔다. 「가서 그들을 찾아 봅시다. 천산쌍응도 말을 타고 그의 뒤를 쫓았다. 장소중은 강적이 떠나자 정신이 새로워졌다. 황제가 자신을 파견한 것은 진가락과 향향 공주를 찾아보라는 특명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이리에게 잡아 먹혔을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조사를 하고 나서야만 황제에게 보고할 수가 있었다. 장소중은 생각했다. (진가 성을 가진 녀석이 만약 그 두 소녀와 함께 이리에게 잡아 먹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그 녀석의 무공은 나에게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곽청동이 돕고 나선다면 내가 미찔 것이다. 이 삼마를 꾀어 동행하는 것이 낫겠구나.) 그래서 고금표의 소매를 끌고 구석으로 갔다. 「고 형, 그 미인 생각이 있으시오, 없으시오? 장소중이 낮은 소리로 묻자, 고금표는 자기를 놀리려는 줄 알고 화를 냈다. 「그래, 생각이 있다면 어떻다는 말이오? 「내가 그 진가 성을 가진 녀석과 원한이 있어, 가서 죽이려 하오. 당신이 만약 동행한다면 그 미인은 당신의 것이 되오.」 고금표는 망설였다. 「그 세 사람은 벌써 이리에게 잡아 먹히지나 않았을까요,,,,,, ? 큰형 이 가려고 할까요? 「만약 이리에게 잡아 먹혔다면 당신에게는 복이 없는 것이오, 당신의 형님에게는 내가 가서 말해 보리다.」 고금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형님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가려고 하지 않을걸.) 장소중은 등일뢰의 앞으로 갔다. 「등 대형, 내가 진가 성을 가진 녀석을 찾아가 사생결단을 낼 것이오. 만약 도와 주시기만 한다면 그 단검을 등 형께 드리리다.」 무예를 하는 사람이 그 같은 보물을 어찌 탐내지 않으랴? 진가락이 이리 뱃속에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단검은 삼키지 못했겠지 생각하며 얼른 대답해 버렸다. 장소중은 기뻤다. 「넷째, 우리 갑시다.」 등일뢰가 그를 불렀다. 합합태는 때마침 성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다가, 큰형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가자구요? '홍화회의 진 당가를 찾아가잔 말일세. 만약 이리 떼가 시체를 다 먹어치우지 않았다면 장사를 지내 주자는 말일세.」 합합태는 여어동과 진가락 등을 알게 된 뒤부터 홍화회의 인물들을 대단히 존경했다. 등일뢰가 가서 진가락을 안장해 주자는 말을 듣고 찬성했다. 네 사람이 위구르 사람들에게 비상 식량과 식수를 구하고, 말에 올라 북쪽으로 원래의 길을 따라 출발했다. 밤이 깊도록 가다가 등일뢰는 이쯤에서 쉬고 싶었다. 장소중과 고금표는 계속 가자고 주장했다. 반공에 뜬 달이 대낮처럼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길 옆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돌로 쌓아 만든 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네 사람은 이상해서 묘지 앞으로 쫓아갔다. 「누구냐? 장소중이 소리를 질렀다. 한참 있다가 꽃모자를 쓴 위구르 사람의 머리 하나가 묘지 구멍 속에서 삐어져 나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이 묘지 속에 있는 죽은 사람이오. 그가 한어로 말하자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다니나? 고금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람 좀 쏘이려구요.」 「죽은 사람이 바람을 쏘이다니? 고금표가 화를 내자, 그 사람은 머리를 조아렸다. 네, 네. 여러분 말씀이 옳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움츠려 숨겼다. 고금표는 화를 내며 말에서 내려 묘지로 들어가려고 했다. 「고 형, 거들떠볼 것 없이 우리 갑시다.」 장소중의 말에 따라 네 사람이 말머리를 돌리고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말라빠진 당나귀 한 마리가 묘지 옆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상 식량은 신물이 납니다. 당나귀고기나 구워 먹는 것이 좋겠군요. 하늘에는 용고기, 땅에는 당나귀고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고금표가 반기며 쫓아가 고삐를 잡으려고 하는데, 당나귀 엉덩이가 빤질빤질한 것이 꼬리가 없었다. 「누가 당나귀 꼬리를 잘라 먹었는지 모르겠군-""'.~ 고금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쉭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당나귀 등 위에 올라탔다. 달빛 아래 보니, 방금 묘지 속으로 들어간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찌나 몸이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묘지에서 빠져 나와 당나귀 등 위에 올라탄 것이다. 네 사람은 그를 가볍게 볼 수 없어 경계를 하며 말을 급히 뒤로 뺐다.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품속에서 당나귀 꼬리를 꺼내 들고 흔들었다. 당나귀 꼬리에 더러운 것이 많이 묻어 보기 흉하기에 내가 뽑아 버렸소.」 장소중은 이 사람이 덥수룩한 수염에 미친 듯한 태도가 두려웠다. 그래서 말고삐를 채고 갑자기 당나귀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오른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그 사람이 피했다. 장소중은 왼손으로 당나귀의 꼬리를 낚워챘다. 당나귀의 꼬리는 워낙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서늘해 만져보니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자기의 모자를 들고 뿐쌌 「당신은 청병 군관. 우리를 치러 왔군. 이 모자 참 보기 좋구나! 새털도 있고 구슬도 달렸네.」 장소중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났다. 되는 대로 당나귀 꼬리를 집어 던지자 그 사람이 받았다. 장소중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쌍장을 교차시켰다. 「도대체 누구요? 와서 대결을 합시다. 그 사람이 장소중의 모자를 당나귀 머리에 씌우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둔한 당나귀가 관모를 썼구나. 두 다리를 모으고 당나귀를 타고 달렸다. 장소중이 뒤를 쫓는데 쉭 하는 소리가 나며 공기를 찢고 암기가 날아왔다. 손을 뻗어 받아 쥐니 차디차고 미끈미끈한 것이, 자기 모자 위에 있던 보석이라 더욱 화가 났다. 이렇게 주춤하는 사이에 당나귀는 벌써 멀리 가 있었다. 돌을 주워 들고 그의 등을 향해 던졌다. 그 사람은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장소중은 적중된 것으로 알고 기뻐했다. 그런데 땅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쇠붙이에 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징이나 꽹과리 같은 악기에 맞은 것처럼 여운을 남겼다. 「아이쿠, 내 솥을 때려 죽였으니 야단났군. 이 쇠솥은 살릴 수가 없겠네.」 그 사람이 떠들어댔다. 네 사람이 어리둥절해 서로 바라다 보고 있는 사이에 그 사람은 멀리 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장소중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 녀석이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말 모르겠군.」 삼마는 머리만 흔들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갑시다. 이곳은 정말 괴상한 곳이로군. 무엇이든 다 이상해.」 장소중의 말에 네 사람은 말을 달렸다. 도중에 그들은 두 시간쯤 잤고, 이튿날 아침 도착한 곳이 미궁 밖이었다. 갈림길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깔려 있는 이리 똥이 좋은 안내자가 되었다. 이리 똥과 발자국을 따라 백옥 같은 봉우리 앞에 이르렀다. 고개를 들자마자 진가락이 파 놓은 굴의 입구를 볼 수 있었다. 한잠 잘 자고 난 진가락은 정력이 회복되었다. 한 가닥 달빛이 비쳐 들어왔다. 곽청동과 향향 공주는 백옥 위의 의자에 앉아 비스듬히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조용한 밤, 두 자매의 숨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석실 안에는 맑은 향기가 가득했다. 꽃향기가 이보다 더 진하며, 사향이 이보다 맑고 그윽하랴! 그것은 향향 공주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는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봉우리 밖에 있는 이리 떼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세 사람은 능히 이 위험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위험에서 빠져 나간 뒤 그 황제 형님은 약속대로 만주 오랑캐를 관외로 축출할까?) 갑자기 향향 공주의 가벼운 탄성이 들렸다. 탄성 가운데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녀는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도 저토록 편안한 까닭이 무엇일까? 내가 그녀를 데리고 위험을 벗어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 평생토록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내 마음속으로 진정 사랑하는 이는 누구일까?) 이러한 생각은 며칠 동안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가? 만약 내가 죽는라면 그녀는 따라 죽겠지만, 곽청동은 살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객사려가 나를 더욱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고금표와 대결을 할 때 곽청동은 내가 걱정되어 나를 극력 말렸파. 그녀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녀의 여동생은 내가 틀림없이 이길 것으로 알고 개의하지도 않았다. 그날 장소중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희희낙락하며 내가 그들을 쓰러뜨리면 함께 가자고 했다. 그녀는 내가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 만약 내가 곽청동을 좋아한다면 객사려는 틀림없이 상심이 되어 죽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이토록 어질고 고우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괴로웠다. (우리는 서로 분명히 말을 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곽청동과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일이 없다. 곽청동이 이렇게 재주가 많고,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심지어 그녀를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객사려는,,,, 그녀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곽청동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정말 나도 모르겠구나. 그녀가 이렇게 온순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그토록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 그녀가 피를 토하고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도 모두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한 사람은 존경스럽고 감사하며, 한 사람은 사랑스럽고 귀엽다. 이때 달빛은 곽청동의 얼굴을 또렷이 비춰 주었다. 예쁜 얼굴이 무척 초췌하고, 달빛 아래 더욱 창백해 보였다. (우리는 마음속의 말은 나눠 보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하였을 때 남장 여인 이원지가 나타나 내 꿈을 깨 버렸다. 그래서 내 마음이 변하기는 했지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만 리를 멀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나에게 단검을 선사한 것도 다만 내가 성경을 되돌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우리가 마음속의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지만 이것이 천 마디 만 마디 나눈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또 생각했다. (이후 한실을 광복하자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는지 모른다. 그녀의 지모는 칠가를 능가하고도 남는다. 만약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유익하랴,,,,, 혹시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녀의 재주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진가락, 진가락! 네 흉금이 어쩌면 이토록 좁단 말이냐?) 다시 반 시간쯤 흘렀다. 달빛이 점점 향향 공주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객사려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머리 위의 달빛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달빛이 햇빛처럼 환하여 방 안이 점점 밝아졌다. 향향 공주가 하품을 하며 깨어 일어나 그를 바라보며 웃는다. 얼굴이 갓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았다.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놀라 외쳤다. 「저 소리 좀 들어 보세요. 외부의 복도 위에 몇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수천 수백 년 묵은 고궁에서 누가 걸어다닌단 말인가? 정말 귀신이 나타난 것인가?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비록 거리늘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정적 가운데 한발한발 내딛는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향향 공주가 두려운 눈으로 진가락을 바라다보았다. 진가락은 곽청동의 팔을 당겼다. 곽청동이 놀라 깨어 일어났다. 세 사람이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대청에 이르러 진가락은 세 자루의 옥검을 주워 각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옥검은 귀신을 쫓을 수 있어요.」 이때 발소리는 이미 대청 밖에 와 있었다. 세 사람은 컴컴한 복도 뒤에 숨어 움직이지 않았다. 불빛 아래 네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앞장 선 사람이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 장소중과 고금표였다. 갑자기 정그렁정그렁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장소중 등 네 사람의 병기가 손에서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등일뢰의 독각동인은 손 안에 있었지만 주머니 안에 있던 12개의 강표는 날아가 버렸다. 이러한 기회를 놓칠 진가락이 아니다. 그들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을 때 대갈일성, 손에 옥검을 들고 어둠 속에서 뛰어 나가며 퍽퍽 장소중과 고금표의 손에 들린 횃불을 쳐 떨어뜨렸다. 대청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장소중이 쌍장으로 몸을 막으며 달아났다. 관동삼마가 그 뒤를 따라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쿠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 왔다. 누군가가 돌벽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는데, 곽청동이 놀라 갑자기 외쳤다. 「아이구 야단났군요. 빨리 쫓아가요, 쫓아가. 진가락이 얼른 깨닫고 더듬어 쫓아 나갔다. 복도의 끝에 이르기 전에 삐거덕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돌문이 닫혀 버렸다. 진가락이 몸을 날려 대들었지만 결국 한 발짝이 늦었다. 미끈미끈한 돌문 뒤에는 손잡이가 없으니 어떻게 잡아당길 수 있었겠는가? 곽청동과 향향 공주가 앞뒤로 달려왔다. 진가락이 바닥에서 나무를 주워 들고 불을 붙였다. 돌문 위에는 칼과 도끼로 찍은 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이것들은 생전에 결사적으로 몸부림쳤던 자국이었다. 「끝장이로군요! 곽청동이 참담하게 말했다. 향향 공주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니, 무서워하지 마. 「여기서 우리 세 사람이 죽게 되다니,,,,,,.」 진가락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된 까닭인지 갑자기 마음 속이 홀가분해졌다.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기분이었다. 바닥에 있는 해골을 주워 들고 말했다. 「노형, 새 친구가 세 사람이나 생기셨소.」 향향 공주가 킥 하고 웃었다. 곽청동이 두 사람을 향해 눈을 하얗게 흘겼다. 「우리 옥실로 다시 돌아가 조용히 생각해 봐요. 세 사람이 옥실로 돌아왔다. 곽청동은 엎드려 기도를 올린 뒤에 지도를 꺼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심에 빠졌다. 진가락은 이곳이 막다른 곳이라 만약 여기서 벗어 나려면 밖에서 누가 나타나 구출을 하거나, 아니면 장소중 등이 생각을 바꾸고 자기들을 잡아가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이 이렇게 은밀하니 누가 나타나 구출한단 말인가? 또 장소중 등도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십중팔구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것으로 알았다. 「저 노래를 부르고 싶군요.」 향향 공주가 말했다. 「부르시지요. 진가락의 말에 그녀는 백옥의 의자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곽청동은 그녀의 노랫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이마를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향향 공주가 한 곡을 부르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언니, 언니도 좀 쉬세요. 이렇게 말하며 일어나 백옥으로 된 침대 옆으로 가서 해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자리 좀 비켜 주세요. 우리 언니 좀 앉으시게요. 그리고 해골을 침대 구석으로 치우다가 갑자기 (이!)하며 한 가지 물건을 주워 들면서 말했다. 「이게 뭐지요? 진가락과 곽청동이 가까이 가서 보니 양가죽으로 된 책이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 까맣게 변해 있었는데 햇빛에 비춰 보니 책 가운데는 위구르 고문자가 가득 씌어 있었다. 양가죽도 까맣고, 글자도 까맣게 변해 있었지만,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곽청동이 몇장을 들쳐 보다가 침대 위의 해골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여자가 피로 쓴 것이에요. 이 여자는 이름을 '마미아'라고 했군요. 「마미아? 진가락이 반문했다. 「그것은 아름답다는 뜻이에요. 생전에 꾀 예뻤던 모양이지요? 향향 공주의 말이었다. 곽청동은 양피로 된 책을 내려놓고, 다시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도 위에 다른 출로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진가락이 물었다. 「어디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제가 잘 모르겠군요. 곽청동의 대답에 진가락이 한숨을 쉬고 향향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 마미아 소저의 유서를 해석해서 들려 주시겠습니까? 향향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녀의 유서 「성 안의 수천 수만 명이 다 죽었다. 신봉 안의 폭군의 호위에 이슬람의 용사들도 다 죽었다. 나의 아리도 신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의 마미아도 가야 한다. 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써서 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해야겠다. 승패를 ?◎ 하고 우리 이슬람의 용사들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원래 이 아가씨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용감하기도 했군요. 진가락이 말했지만 향향 공주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폭군 응아는 우리를 다년간 괴롭혔다. 그는 수천만 명의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 신봉을 파고 궁을 만들었다. 이들 백성도 모두 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쌍라파는 더욱 악랄했다. 이슬람 교도들은 10마리의 양을 길러 4마리를 바쳐야 했고, 5마리의 낙타륵 바쳐야 했다. 우리는 해마다 더욱 가난해졌다. 어느 집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으면 이 미궁으로 끌려왔다. 미궁으로 끌려온 뒤에 한 사람도 살아 남은 사람이 없다.」 향향 공주가 잠시 쉬었다가 계속 읽어 내려갔다. 「우리 이슬람교의 용감한 아들딸이 이 억압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건 물론 안 된다! 20년 동안에 우리 전사들은 다섯 차례나 이 미궁을 공격했다. 그러나 길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나올 수 없었다. 두번은 이 신봉까지 쳐들어왔는데 폭군 쌍라파가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전사들의 칼과 도검을 압수하고 호위병을 시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야 물론 대청 밑에 있는 자석산 때문이지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그때 나는 17세였다. 아빠와 엄마가 쌍라파의 손에 살해당했다. 우리 오빠는 이슬람 교도의 추장이 되었다. 봄에 나는 아리를 만났다. 그는 우리 부족 가운데 영웅이었다. 그는 세 마리의 호랑이를 때려 잡은 일이 있고, 이리 떼는 그를 보면 사방으로 달아났으며, 천상 정상의 매도 감히 내려오지 못했다, 그는 10명의 호한을 당해 낼 수 있었다. 아니, -백 명의 호한을 당해 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노루나 사슴처럼 부드러웠고, 그의 몸은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러나 그의 위엄은 사막에 부는 태풍과도 같았지------.」 진가락이 웃었다. 「이 아가씨가 얼마나 좋아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이렇게까지 표현했을까? 향향 공주의 표정은 엄숙했다. 「무엇 때문에 과장했다고 그러시죠? 설마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을까요? 그녀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아리는 우리들의 장막으로 와서 오빠와 미궁 공격에 대하여 상의했다. 그는 한인이 쓴 책을 하나 입수했는데, 1년 동안 공부를 하고 나서 무공에 대한 이치를 깨우쳤다고 이야기했다. 손에 포검을 가지지 않고도 쌍라파의 무사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5백 명의 용사를 모집, 그가 깨우친 이치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1년 동안 훈련을 거듭했다. 이때 나는 벌써 아리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 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의 마음이요, 나의 피였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틀림없이 이길 것을 믿었다고------. 그들이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미궁으로 들어가는 길은 몰랐고, 신궁의 비밀은 더욱 몰랐다. 아리와 나의 오빠가 열흘이나 상의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외부 사람이 미궁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에 의해서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도 살아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함께 열흘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여전히 방법이 없었다.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무공이 있고 용감하다고는 하지만 미궁에 들어갈 수 업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말했다. (오빠, 나를 보내 주세요)◎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아리는 용사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는 1백여 마리의 양을 몰고 성 앞으로 가서 풀을 뜯고 놀게 했다. 나흘째 되던 날, 쌍라파 수하에 있던 사람이 나를 잡아 그에게 바쳤다. 나는 사흘 낮과 밤을 울고서 비로소 그에게 순종했다. 그는 나를 몹시 좋아해 내 요구라면 무엇이나 다 들어 주었다.」 진가락은 여기까지 듣다가 이 옛날 아가씨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엄숙하게 공경하는 감정이 생겼다. 18세의 소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니, 그것도 고귀한 자신의 애정까지 포기하다니 더욱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향향 공주의 읽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처음 쌍라파는 나를 방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가면 갈수록 나를 더욱 좋아했다. 나는 매일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넓은 초원에서 양을 부리며 노래를 부르던 때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아리였다. 쌍라파는 하루하루 내가 야위어 가는 것을 보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저기로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화를 내며 갑자기 내 뺨을 때렸다. 그래서 나는 그와 7일 낮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7일 밤을 그를 향해 웃지 않았다. 여드레째 되던 날, 그는 나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 그후로 사흘에 한 번씩 나를 데리고 나갔다. 처음에는 미궁의 안에서만 돌아다니다가 뒤에는 미궁의 입구까지 나왔다. 나는 나올 때마다 도로를 하나씩 눈여겨 두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눈을 감고도 미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만큼 되었다. 이렇게 반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오빠와 아리가 기다리다가 지쳤을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신봉의 비밀을 다 알지 못했다. 그러다 나의 뱃속에 아기가 생겼다. 그것은 쌍라파의 죄 많은 씨였다. 그는 굉장히 좋아했지만, 나는 날마다 울기만 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아기를 가졌지만, 당신은 전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다니? 당신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지 않았소? 당신은 바다 밑의 붉은 산호를 원하는가, 아니면 남방의 푸른 보석을 원하는가?>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당신에게는 비취 연못이 있다면서요? 아름다운 사람이 목욕을 하면 더욱 아름다워지고, 미운 사람이 목욕을 하면 더욱 미워진다던데요.)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목소리까지 떨리며, 누구에게서 들었느냐고 했다. 나는 신선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고 그를 속였다. 사실 나도 비취 연못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몰랐다. 다만 궁안에 있는 여인들이 나에게 몰래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쌍라파는 아무도 보지도 못하게 하고 말조차도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서 목욕이야 할 숱 있지. 그러나 누구나 연못을 본 뒤에는 혀를 잘라야 해. 그래야만 비밀이 새나가지 않을 테니까. 그것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이 있어 그는 날 보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내가 미워서 그러시지요. 내가 비취 연못에서 목욕을 하면 더욱 미워질까봐 그러시지요?>마침내 그는 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이 비취 연못으로 가려면 반드시 신봉의 궁전 안을 통과해야만 했다. 나는 몸에 작은 칼을 하나 휴대했다. 비취 연못에서 그를 찔러 죽일 각오였다. 그것은 궁 안의 도처에는 사나운 호위병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취 연못 주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갑자기 칼이 대청 아래에 있는 무엇엔가로 빨려들어갔다. 이리하여 나는 자석산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목욕한 뒤에 정말 더 예뻐졌는지는 모른다. 그후, 그는 나를 더욱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혀를 자르고야 말았다. 비밀이 새나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았지만 오빠와 아리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밤낮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신은 마침내 이 가련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신은 나에게 총명과 지혜를 주셨다. 쌍라파에게는 한 자루의 단검이 있었는데 늘 끌러 놓지를 않았다. 이 단검은 칼집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안에 있는 단검도 밖에 있는 단검과 똑같이 생겼다. 내가 그것을 달라고 하자 그는 망설이다가 나에게 주었다. 나는 미궁에 관한 지도를 그려 출입로를 자세히 그려 놓았다. 그 지도를 밀랍 안에 봉하여 안에 있는 칼집 속에 숨겼다. 내가 아이를 낳은지 석 달 만에 그는 나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나는 사람이 없는 틈을 이용해 미궁 밖 등박호에 단검을 던졌다. 사냥에서 돌아온 뒤 나는 많은 매를 날려 보냈다. 매의 다리에 등박호라고 써 놓았다. 곽청동은 지도를 내던지고, 여동생이 번역해 들려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몇 마리의 매는 쌍라파 수하의 사람들이 쏘아 떨어뜨렸다. 그들은 등박호라고 쓴 것을 보았지만, 등박호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 사막에 사는 어린아이까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많은 매 가운데 한두 마리는 우리 부족 사람에게 잡힐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되면 오빠와 아리가 등박호에 와서 단검을 발견하고 미궁의 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비록 단검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단검 가운데 비밀은 알아내지 못했다. 칼집 속에 또 하나의 칼집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오빠와 아리는 내가 이 단검을 보낸 이유가 공격을 해 폭군 쌍라파를 처단하라는 것으로 알았다. 그들은 공격을 했다. 대부분의 용사들으 길을 몰라 오락가락하다가 영원히 빠져 나가지 못했다. 나의 오빠, 두 마리 낙타보다도 기운이 센 오빠는 이렇게 해서 실종된 것이었다. 아리와 나머지 용사들은 쌍라파 수하의 사람들을 위협해 쌍라파의 신봉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대청 위에서 그들의 도검은 자석산에 빨려들어갔고, 쌍라파의 무사들은 옥으로 된 무기로 그들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아리와 용사들은 무공을 배웠기 때문에 빈손이지만 여전히 하나하나 그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쌍라파는 그의 수하의 무사들이 모두 죽은 것을 보았는데, 아리가 바짝 쫓아와 할 수 없이 옥실로 달아났다. 그는 나를 데리고 비취 연못 옆으로 해서 빠져 나가려고 했덜 것이다........」 곽청동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 그들이 비취 연못 옆으로 해서 달아나려고 했군.. 향향 공주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아리가 쫓아왔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우리는 포옹을 했다. 아리는 다정하게 몇 번이나 불렀지만 나는 혀가 없어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마음속의 소리를 알아들은 것이다. 그 비열한 쌍라파, 흉악한 쌍라파, 천 명의 마왕보다도 만 배나 고약한 쌍라파는 갑자기 뒤에서 그만 도끼 로"""~ 향향 공주는 여기까지 읽다가 격렬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양가죽으로 된 책을 던지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곽청동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뒤에서 내려친 도끼에 아리의 머리는 부서지고 피가 내 몸에 튀겼다. 쌍라파는 침대에서 아기를 들어 내게 안겨 주며 외쳤다. 우리 빨리 갑시다.나는 그 죄의 씨를 안아 바닥에 던졌다. 아리는 선혈 속에 파묻혀 죽었다. 쌍라파는 내가 자기의 아이를 죽이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황금으로 된 도끼가 번쩍 들리는 것을 보고 나는 목을 길게 빼어 찍으라고 내밀었다. 그는 갑자기 절망적인 한숨을 내뿜으며 왔던 길로 달려나갔다. 아리는 신의 옆으로 간 것이다. 나도 그의 옆으로 쫓아가야만 한다. 우리들의 용사는 많다. 쌍라파의 무사들이 용사들에게 모두 살해되었으니 그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우리 이슬람 교도를 억압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아들도 내가 죽였으니 그의 후손도 우리를 억압하지 못할 것이다. 억압할 후손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들의 사람은 사막의 초원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아가씨들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속예 누워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나의 오빠와 아리, 그리고 나는 죽지만 우리는 마침내 폭군을 타도했다. 폭군이 보루를 그토록 견고하게 지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쳐부됐다. 알라 신은 우리의 인민을 보호해 주셨다.」 곽청동은 마지막 글자까지 다 읽고 서서히 그 책을 덮었다. 세 사람은 마미아의 용기와 정열에 감동되어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향향 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폭군의 압박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다니,,,,,, 혀를 잘리면서까지도 비밀을 캐내고, 자기 자식까지 던져 죽이다니,,,,,,.」 진가락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식은땀이 흘렀다. (이 옛날의 소저에 비한다면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 한실 광복이라는 대업의 성패가 내 한몸에 달렸는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고작 자신의 애정 문제뿐이니,,,,,,. 무슨 방법을 강구하여 오랑캐를 내몰고 금수강산을 되찾으려고는 하지 않고 언니를 사랑할까, 동생을 사랑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니,,,,,,. 이러다 한실 광복의 대업을 영원히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이 산허리에 갇혀 있으니 나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 없지만, 어찌 홍화회 수만의 형제들 앞에 떳떳할 수 있으며, 또 어찌 오랑캐에게 집밟혀 신음하고 있는 부모와 형제 자매에게 떳떳할 수 있단 말이냐?)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워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향향 공주는 그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 주려고 했다. 진가락이 손수건을 뿌리쳤다. 향향 공주는 갑자기 진가락이 자기를 혐오하는 듯한 표정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진가락이 정신을 차리자 다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손수건을 받아 땀을 훔치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광복의 대업을 달성하기 전에는 결코 나 자신의 애정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자매는 오늘부터 나의 좋은 친구요, 나의 여동생들이다.) 단검을 뽑아 원탁 위에 꽂았다. 정신이 맑아지며 연일 번뇌하던 것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향향 공주는 그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자 그제야 안심했다. 이 모든 것을 곽청동은 본 체,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지도를 살펴보며 양가죽 위에 씌어 있는 말을 헤아려 보았다. 이 유서 가운데서는 쌍라파가 이 옥실까지 와서 그녀와 비취 연못 옆으로 달아나자고 했다. 그러나 이 옥실은 막다른 곳이라 다른 통로가 없지 않은가?. 뒤에 쌍라파는 결코 달아나지 않고 온길로 다시 나갔다. 그에게 이상할 정도로 힘이 있어서 이슬람 병사들이 그를 막아내지 못해 그가 대문 밖으로 뚫고 나간 것이 아닐까? 이슬람 전사들은 오히려 그 안에 갇혀 있다가 죽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지도 위에는 다른 통로가 연못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분명히 그려져 있다.」 진가락은 어느새 애정의 고뇌에서 빠져나와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만약 통로가 있다면 반드시 이 옥실 가운데 있을 것이다.」 진가락은 항주의 제독부 지하실에서 문태래를 구하던 광경이 생각났다. 장소중은 그때 벽 위에 있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달아났었다. 그래서 횃불을 밝히고 옥실 벽에 틈이 있는가 없는가 살펴보았다. 상하좌우를 살펴보았지만 결코 그 어떤 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곽청동이 옥으로 된 침대 밑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 이상도 없었다. 진가락은 또 문태래가 철담장에 숨었다가 체포되었던 것을 생각했다. 「혹시 탁자 밑에 지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손을 뻗어 원탁을 번쩍 들어 보았지만 돌로 된 탁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탁자가 아무래도 이상한걸.」 그의 힘이라면 원탁이 천 근이 나간다 하더라도 움직였을 것이다. 옆으로 밀거나 잡아당겨도 원탁은 땅에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시종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곽청동이 횃불로 탁자 밑을 비춰 보았다. 원래 원탁은 한 덩어리 옥석을 조각해 만든 것이라 지상과 붙어 있어서 자연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세 사람은 반나절 동안 수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이 배만 고팠다. 향향 공주가 소금에 절인 양고기와 비상 식량을 꺼내와 함께 먹고 모두 의자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으로 움직이면서 원탁 위를 비추었다. 「아, 탁자 위에 꽃문의가 새겨져 있군요.」 향향 공주가 말했다. 가까이 가 보니, 등에 날개가 돋친 한 떼의 낙타가 새겨져 있었다. 문의가 너무 섬세하여 햇빛이 정면으로 비치지 않을 때면 전혀 알아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낙타의 머리와 몸은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한 자쯤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원탁의 모서리를 잡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젖혀 보았다. 원탁의 모서리와 원탁의 중심이 원래 양쪽으로 갈라져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치쯤 들어 올리자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가락과 곽청동이 대들어 힘을 쓰자 천천히 모서리가 젖혀졌다. 모서리에 새겨져 있던 낙타 머리와 원탁의 중심에 있던 낙타의 몸이 일체가 되었다. 삐거덕 소리가 들리며 옥으로 된 침대 위에 하나의 큰 굴이 나타났다. 그 아래는 계단이었다. 세 사람은 놀랍고도 반가워 소리를 질렀다. 진가락이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서고, 두 자매는 뒤를 따랐다. 4, 5개의 모퉁이를 돌아 다시 10여 장을 나가자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터지면서 넓은 평지가 나왔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져, 마치 하나의 대야처럼 생겼고, 그 안에도 푸른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푸른 물이 마치 비취 같았다. 그것은 원형의 연못으로, 수천 년을 지나 오는 동안 말라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바닥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세 사람은 이상한 경치를 보자 놀랍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곽청동이 웃었다. 「객사려, 유서에 아름다운 사람이 목욕을 하면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했으니 네가 먼저 목욕을 해 보렴.」 향향 공주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언니가 손위니 먼저 하세요.」 '야, 그러다가 점점 더 미워지라고. 곽청동이 웃자, 향향 공주가 고개를 돌려서 진가락을 바라다보았다. 「어디 한번 말씀해 보세요. 언니는 자기가 예쁘지 않다고 그러는데요. 진가락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객사려, 도대체 목욕을 할래, 안할래? 곽청동이 재촉을 했지만 향향 공주는 머리를 흔들었다. 곽청동이 연못가로 가 손을 넣었다. 뼛속까지 시원해 두 손으로 물을 길어 올렸다. 맑고 깨끗하여 이끼 하나 없었다. 원래 연못의 사방이 비취색이라 연못의 물이 녹색으로 반사되었던 것이다. 물을 마시니 뼛속까지 시원했다. 세 사람은 물을 실컷 마셨다. 깨끗하고 흰 옥봉이 녹색의 연못에 비쳤다. 흰 가운데 푸르름이, 푸르름 가운데 흰빛이 뒤섞여 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향향 공주는 물장난을 치느라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제는 어떻게 밖에 있는 네 악귀를 쫓아 버리느냐가 문제예요. 곽청동의 말을 진가락이 받았다. 「우리 우선 마미아의 유골을 이 연못가에 묻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향향 공주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하였다. 「그녀의 아리와 그녀를 함께 묻어 주면 더욱 좋겠군요.」 진가락도 찬성했다. '좋습니다. 옥실 귀퉁이에 있는 것이 바로 아리의 유골일 것입니다. 세 사람은 다시 옥실로 돌아와 해골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리의 해골 옆에 한 다발의 죽간(竹簡)이 보였다. 진가락이 들어 올리자 죽간을 매어 놓은 가죽끈이 썩어 꾼어지며 죽간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죽간 위에 검은 칠을 하고, 그 위에 빨간 글씨의 한자가 빽빽하게 씌어 있었다. 진가락은 반가웠다. 첫 줄은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이라)고 씌어 있었다. 일일이 살펴보니 장자(莊子)였다. 그는 처음에 이상한 책인가 했는데 어려서부터 읽던 책이라서 다소 실망했다. 「그게 뭐예요? 향향 공주가 물었다. '우리 한인들이 읽는 옛날 책입니다. 이들 죽간이 골동품이라면 몰라도 별로 쓸모가 없군요. 다시 바닥에 버리자 죽간이 흩어지며 중간에 다른 것이 보였다. 매 글자 옆에 빽빽하게 점을 찍었고, 그밖에 몇 개의 위구르 고문자가 씌어 있었다. 生主 가운데 있는 포정해우의 일단이었다. 위구르 문자를 가리키며 향향 공주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글자입니까? 「적을 깨는 비결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씌어져 있군요.」 진가락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그것이 무슨 뜻이죠? 곽청동이 나섰다. 마미아의 유서 가운데 아리가 한인의 책 한 권을 입수하여 맨몸으로도 적을 깨는 법을 깨우쳤다고 하였는데, 혹시 이 죽간이 그것이 아닐까요? 장자는 사람들에게 달관(達觀)과 순천(順天)을 가르쳤으니 무공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죽간을 버리고 유골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세 사람은 2구의 유골을 비취 연못가에 함께 묻고 기도를 드렸다.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우리 나갑시다. 그 백마가 이리떼의 위험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군요. 그 백마가 우리 생명을 구해 주었지요. 총명하고도 빨리 달렸는데... 향향 공주의 말이었다. 진가락은 이리 떼의 사나움과 백마의 총명함을 생각하며 측은하게 여겼다. 곽청동이 갑자기 물었다. 「그 장자에는 무슨 말이 씌어 있나요? 「한 백정의 소 잡는 솜씨가 대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손과 팔이 뻗었다 움츠리고, 다리와 무릎이 나갔다 물러서며, 칼이 살을 써 내는 소리가 공교롭게 일치되어 음악의 박자와 조화를 이루었으며 거동은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진가락의 대답이었다. 향향 공주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참 보기 좋았겠네요.」 이 말에 곽청동이 나섰다. 「임전하여 적을 살해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진가락이 듣고 생각했다. 장자란 이 책은 그가 언제라도 줄줄 외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별로 새로운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지금까지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 책에 대해서 언급을 하자, 생각이 갑자기 열리며 어떤 새로운 도리를 깨닫게 되는것 같았다.포정해우의 일단가운데 있는 말이 한자한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저는 영감(靈感)으로써 대할 뿐, 눈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곧, 감관은 멈춰 버리고 영감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 몸뚱이 조직의 자연적인 이치를 따라서 뼈와 살이 붙어 있는 틈을 젖히는 것이나, 뼈마디에 있는 큰 구멍에 칼을 집어 넣는 것이나, 모두 자연의 이치를 따라 갈라져 나갑니다. 그래서 그 기술은,,,,,,.) 다시 생각이 났다. (행동을 천천히 하며 칼을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헤집니다. 그때야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머뭇머뭇 만족해하며 --,,, 칼을 잘 닦아 집어 넣습니다.) (만약 진정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눈으로 보지도 않고 칼을 약간 움직여 그 간적 장소중을 살해할 수 있을 텐데.......) 곽청동 자매는 그가 갑자기 무엇을 생각하는지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진가락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걱정이 되어 함께 들어가 보았다. 그는 희색이 만면하여 대청의 해골 옆에서 손을 휘두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향향 공주는 그가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며 걱정이 되어 외쳤다. 「왜 그러세요? 진가락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참 동안 손발을 허우적거리다가 다른 하나의 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람 무섭게 하지 말고, 그만 오세요.」 향향 공주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 구의 해골이 취한 자세 그대로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곽청동은 그가 손발을 쓸 때마다 강한 힘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원래 그는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의 손을 잡고 나가자고 했다. 「무서워할 것 없다.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밖에 나가 기다리자. 두 사람이 비취 연못으로 돌아오자 향향 공주가 물었다. 「언니, 그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분이 그 죽간을 보고 무공에 대한 기묘한 초술을 깨달았나 보다. 해골이 취한 자세에 의하여 무술을 연마하고 있으니 그를 방해해서는 안되. 향향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한참 만에 다시 물었다. 「언니, 언니는 왜 연마하지 않아? 「죽간 위에 있는 한자가 너무나 이상해서 나는 잘 모르겠어. 또 그가 연마하고 있는 무공이 높고 깊어 나는 아직 연마할 수 없단다. 향향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나도 알겠어요.」 「뭘? 「대청 위의 그 많은 해골들은 생전에 그 높고 깊은 무공을 다 할 줄 알았군요. 그들의 병기가 자석산에 빠져 들어간 뒤에 그들은 맨손으로 쌍라파의 무사들과 대결을 한 것이지요.」 「맞아, 그러나 이들의 무공이 훌륭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 그들이 몇 가지 무서운 살수를 배우고 있다가 긴급한 상황에서 적과 함께 죽은 것 같구나.」 「이들이 다 용감했는데,,,,,, 그분은 왜 무공을 배우시지요? 혹 그분도 적과 함께 죽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야, 무공이 훌륭한 사람은 적과 함께 죽는 법이 없어. 그분은 이들 초술의 기묘한 점을 연마해 보고 있을 뿐이야.」 향향 공주는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 안심해도 되겠군요. 파란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언니, 우리 함께 들어가 목욕하면 안될까? 「바보같이 ! 그분이 나오면 어떡하니. 곽청동이 웃자 향향 공주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난 정말 내려가 목욕하고 싶다.」 그리고 차디찬 호수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혼자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 세 사람이 이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곽청동은 가슴이 철렁하여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백옥의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진가락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향향 공주는 가죽신을 벗고 물속에 발을 담갔다. 언니의 다리를 베개삼아 하늘 위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여어동과 이원지는 함께 곽청동을 찾으러 나섰다. 물론, 칠가가 왜 그 두 사람을 동행시켰는지 그 의도를 알았다. 이원지는 일편단심 몇 차례나 그를 구출해 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감격했지만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피하기만 했다. 무슨 까닭인지 자신도 꼭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도중 이원지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는 도리어 냉랭했다. 이원지도 화가 났다. 어느날 아침 몰래 모래언덕 뒤에 숨어 그가 조급해하는지 안하는지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보이지 않자 몇 번 부르다가 대답이 없으니까 혼자 앞을 향해 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원지는 너무나 화가 나서 모래언덕 뒤에서 한바탕 실컷 울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쫓아갔다. 「뒤에 처져 계셨군요. 나는 먼저 가신 줄 알았습니다. 여어동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원지가 영리하고 꾀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 목석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끝까지 나를 거들떠보지 않으면 이 칼로 자살을 하고 말겠다.) 점심때까지 걸어가자 맞은편의 사막 가운데 말라빠진 당나귀 한 마리가 절뚝절뚝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나귀 위에 한 사람이 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접근했을 때 보니 그 사람은 위구르 복장에, 등에는 커다란 솥을 메고 있었다. 그는 또 오른손에 당나귀 꼬리를 들고 있는데 당나귀의 엉덩이에는 꼬리가 없었다. 당나귀 머리 위에 청병의 효기영 군관의 관모가 씌워져 있는데, 남보석 대신 작은 돌이 매달려 있었다. 그 사람의 나이는 40여 세로 보였고 턱에는 온통 덥수룩한 수염투성이였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싱글벙글 웃었다. 여어동은 곽청동이 워낙 사막에서 명성을 날리는 사람이라 위구르 사람 가운데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말을 멈추고 물었다. 「아저씨, 혹시 취우황삼을 보셨습니까? 한어를 알아듣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한어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녀를 찾으시나? 「못된 몇 사람이 그녀를 해치려고 해요. 우리가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려고 합니다. 만약 아저씨께서 그녀를 만나게 되거든 소식을 전해 주실 쑤 있겠습니까? 「좋지. 그 못된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데? 이원지가 나섰다. '한 남자는 독각동인을 들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호차를 들고 다녀요. 세번째 사람은 몽골 복장을 했구요.」 그 사람이 끄덕였다. 「그 세 놈들 돼먹지 않았어. 내 이 당나귀를 잡아먹으려 해서 이 모자를 뺏어 왔지.」 여어동과 이원지가 서로 바라보았다. 여어동이 물었다. 「그들에게 또 동행이 있던가요? '바로 이 모자 임자야. 그런데 자네들은 누군가? '우리들은 목탁륜 노영웅의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그 못된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과 취우황삼이 만나서는 안 되는데요.」 '곽청동 그 아가씨, 사람이 괜찮다고 들었어. 그 네 놈이 내 당나귀를 잡아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파 그 아가씨를 잡아 구워 먹으면 큰일나겠는걸. 이원지는 관동삼마가 용감은 하지만 미련함을 알았다. 청군 군관이 동행을 한다지만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그들을 찾아가 요절을 내는 것이 좋겠구나. 사람 깔보기 좋아하는 여 사가를 깜짝 놀라게 해 주어야겠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저씨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 주신다면 1정의 은자를 드리겠습니다.」 '은자 같은 것은 필요 없네. 하지만 내 당나귀에게 갈는지 안 갈는지 물어는 봐야겠는걸.」 그는 당나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중얼 지껄였다. 그러고는 귀를 당나귀 입에 대고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럴싸하게 꾸미는 그의 모자라는 듯한 태도가 재미있어 웃었다. 그 사람이 당나귀의 말을 듣고 나서 이마를 찡그렸다. 「이 당나귀가 관모를 쓰고 나서는 꾀 거드름을 피운단 말이야. 자네들이 탄 말을 깔보고 함께 가려고 들지 않네. 체면이 손상된다는 게야. 여어동은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의 행위가 괴상하고 말도 대범한 척하면서 권세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을 날카롭게 꼬집는구나. 혹시 기인이 아닐까?) 이원지는 그의 당나귀가 말라빠지고 절룩거리는 주제에 거드름을 부린다니 너무나 가소로워 킥 하고 웃었다. 그 사람이 눈을 흘겼다. 「믿지 못하겠나? 그러면 내 당나귀와 자네들의 말을 비교해 보세. 여어동과 이원지,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말은 목탁륜이 준 준마다. 그래서 이 절룩거리는 말라빠진 당나귀와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좋아요. 우리가 이기면 우리를 데리고 그 못된 세 사람을 찾아 가셔야 해요. 이원지의 말이었다. 「세 놈이 아니라 네 놈이야. 만약 자네들이 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보세요.」 「그럼 내 이 당나귀를 깨끗하게 씻겨 주게. 체면이 서게 말이야.」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우리 어떻게 비교해 보지요? 어떻게 비교하면 좋을지 어디 그쪽에서 말해 보라구. 이원지는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절룩거리는 이 당나귀가 정말 빨리 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한 가지 꾀가 생각나서 웃었다. 「손에 들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당나귀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당나귀 꼬릴세. 관모를 쓰더니 자기 꼬리가 더러워 싫다는 게야. 여어동은 그의 말이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의미심장하여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원지를 향해 조심하라는 눈짓을 했다. 「좀 보여 주세요.」 이원지의 말에 그 사람이 당나귀 꼬리를 던졌다. 이원지가 받아 만져 보다가 먼 곳에 있는 모래언덕을 가리켰다. 「우리 여기서부터 저 언덕까지 달려요. 아저씨의 당나귀가 먼저 도착하면 아저씨가 이기고, 내 말이 먼저 도착하면 제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 당나귀가 먼저 도착하면 내가 이기고, 말이 먼저 도착하면 그쪽에서 이긴다, 이거지? 이원지가 여어동을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가셔서 증인이 되어 주세요.」 여어동이 좋다고 하면서 먼저 저쪽으로 달려갔다. 「가시지요. 이원지가 이렇게 말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10여 장 달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당나귀는 절뚝거리며 먼 곳에 뒤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호호 웃으며 말을 재촉해 나가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자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이 당나귀를 어깨에 짊어진 채 나는 듯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다시 채찍질을 하며 급히 쫓아갔다. 그 사람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전광석화 같아 시종 말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언덕에 도착했다. 마침내 당나귀를 태운 사람이, 사람이 탄 말보다 10여 자나 앞서서 도착했다. 이원지는 손에 들고 있던 당나귀 꼬리를 힘껏 뒤로 던지며 외쳤다. 「말이 먼저 도착했어요. 그 사람과 여어동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다보았다. 분명 당나귀가 먼저 도착했는데 어째서 그녀는 말이 먼저 도착했다고 하는가? 「여보, 아가씨. 우리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당나귀가 먼저 도착하면 내가 이기고, 말이 먼저 도착하면 아가씨가 이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원지는 바람에 흩어진 예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랬어요.」 「그러나 반드시 사람이 당나귀 위에 타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지. 「그래요.」 사람이 당나귀에 타거나, 당나귀가 사람을 태우거나간에 당나귀가 먼저 도착한 것만은 사실이야. 이 당나귀가 군모를 썼거든. 미련한 당나귀가 관리가 되었으니 사람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는 점을 알아야해.」 우리가 사전에 당나귀가 먼저 도착하면 아저씨가 이기고, 말이 먼저 도착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우리는 결코 당나귀의 일부분만 도착해도 된다고는 하지 않았지요. 그 사람은 수염을 한 번 어루만졌다. 「나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네. 무엇을 보고 (당나귀의 일부분이 도착했다)고 하는 것이야? 이원지는 뒤에 멀리 집어 던진 당나귀 꼬리를 가리켰다. 「저의 말은 전체가 도착했지만, 아저씨의 당나귀는 일부분만 도착했다는 것이에요. 저걸 보세요. 당나귀 꼬리가 아직도 저기 그냥 있잖아요. 그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껄껄 웃었다. 「옳아, 옳거니! 아가씨가 이겼네. 내가 자네들을 데리고 그 못된 네 놈을 찾아감세.」 그는 꼬리를 집어 들고 당나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미련한 당나귀야, 너 관모 썼다고 더러운 네 꼬리가 싫다고 했지. 네가 싫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네 뜻대로 쫓을 수가 없어.」 그는 몸을 날려 당나귀의 등 위에 올라탔다. '미련한 당나귀야, 네가 사람의 머리 위에 얼마 타지도 못했는데 사람이 다시 네놈을 타게 되었구나. 여어동은 당나귀의 무게가 몇십 근 정도로, 큰 개만함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어깨에 메고 질풍처럼 달리자면 심오한 무공이 없으면 안되는 것임을 잘 알았다. 급히 그의 앞으로 가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의 이 사매가 너무 까불기를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노선배께서는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길만 가리켜 주시면 후배들이 찾아가겠습니다. 어찌 감히 노선배님께 수고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졌으니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당나귀 쪽으로 돌렸다. 날 따라 오시게. 여어동은 그가 동행하려고 나서자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다. 관동삼마의 무공이 놀랄 만함을 알았다. 게다가 자기와는 원한이 또한 컸다. 만약 사막에서 마주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와 준다면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 사람이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길을 떠났다. 여어동이 그 사람의 이름을 물었지만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약간 모자란 듯, 미친 듯 계속 웃고 떠들었지만 묘한 말이 많이 나왔다. 이원지조차 마음속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절룩거리는 당나귀는 너무나 느렸다. 반나절을 갔는데 겨우 30리 밖에 가질 못했다. 그때 뒤에서 방울 소리가 울리면서 서천굉과 주기가 쫓아왔다. 여어동이 그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이분은 당나귀를 타신 대협입니다. 이 어른께서 우리를 데리고 관동삼마를 찾아가시겠다고 합니다.」 서천굉은 여어동이 공손하게 나오짜 급히 말에서 내려 절을 했다. 그 사람이 답례를 하며 웃었다. 「자네 부인은 좀 쉬어야 할텐데, 무엇 때문에 고생하며 쫓아 다니나? 서천굉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주기는 얼굴을 붉히고 채찍을 들어 말을 재촉하여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 사람은 사막길을 잘 알았다. 저녁 무렵 그들을 데리고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가까이 가니 닭이 날고 개가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먼지가 크게 일어났다. 원래 대대의 청병이 막 도착하자, 사람들은 아이들을 안거나 업고 사방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서천굉은 이상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청병의 대부분이 이미 전멸했고, 소수의 패잔병도 포위되어 있는데 어디서 또 청병이 나타났을까? 말을 하는 사이에 맞은편에서 20여 명이 달려오고, 그 뒤에는 10여명의 청병이 큰소리를 지르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 사람들은 갑자기 당나귀를 탄 그 사람을 발견하고 몹시 반기며 달려들었다. 「납사이정 아범제! 빨리 우리를 살려 주세요. 서천굉 등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납사이정 아범제)라고 부르는 소리가 그의 이름이려니 생각했다. 「모두들 달아나자. 아범제가 소리를 지르며 고삐를 채 사막으로 달아나자 많은 사람들과 청병들이 쫓아갔다. 한참 달리다 보니 마을과의 거리는 멀어졌지만 몇 명의 부녀자가 뒤에 처져 청병에게 그만 잡히고 말았다. 주기는 참을 수가 없어 칼을 빼들고 말머리를 돌려 쫓아가 휘둘렀다. 한 청병의 머리가 반쯤 날아갔다. 나머지 청병들이 화를 내며 주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천굉 , 여어동 , 이원지가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주기는 갑자기 가슴이 막히고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했다. 한 청병이 그녀가 갑자기 칼을 거두고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을 보고 덮쳐들어 사로잡으려고 했다. 주기가 웩 하고 토했다. 재수가 사나웠던지 토한것이 모두 청병의 얼굴에 맞았다. 그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틈을 타 주기가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러나 주기도 손발에 맥이 빠져 몸을 비틀거렸다. 서천굉이 달려들어 부축하며 놀라 물었다. 「왜 그래요? 이때 여어동과 이원지도 각자 청병 3, 4명을 처치했다. 나머지 청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아났다. 아범제가 등에 지고 있던 솥을 내려 손에 쥐고 있다가 한 청병의 머리를 덮어 버렸다. 「그래, 솥바닥 맛이 어떠냐. 이원지가 칼을 들어 찔렀다. 그 청병은 눈이 가려 있으니 어찌 볼 수 있었겠는가? 그 자리에서 죽어 넘어졌다. 아범제가 솥을 들어 다시 두번째 청병의 머리에 씌웠다. 이원지가 쫓아가 찔렀다. 무슨 수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쇠솥을 씌우기만 하면 청병은 꼼짝달싹 못했다. 그가 솥을 씌우면 이원지는 쫓아가 찔러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10여 명의 청병을 깨끗이 죽여 없앴다. 이원지는 너무나 즐거웠다. 텁석부리 아저씨, 아저씨 솥이 정말 좋으네요.」 아가씨 부엌칼도 쓸 만하구먼.」 아범제가 웃으며 말했다. 여어동은 이원지가 많은 칭병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만청의 제독인데, 전연 거리낌이 없이 청병을 죽이다니, 그렇다면 그녀는 끝까지 내게 오기로 결정을 내렸나 보다. 마음이 괴로워 자기도 모르게 긴 탄식을 했다. 이때 서천굉은 청병 하나를 사로잡아 그들 대대의 관병이 어디 왔느냐고 물었다. 그 청병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두 손을 비비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가 한참 만에야 분명한 말을 했다. 그들은 동부에서부터 온 지원군으로서 조혜의 대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러 오는 중이었다고 했다. 서천굉은 키 큰 사람 가운데 건장한 장정을 둘 쁩아 그들에게 섭이강성 밖으로 가서 목탁륜에게 이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두 사람이 대답하고 갔다. 서천굉이 그 청병의 엉덩이를 차며 호통을 쳤다. 꺼져 . 그 청병은 죽자 하고 달아났다. 서천굉은 고개를 돌려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그녀가 왜 갑자기 정신을 잃었는지 몰라 물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그러셨소? 주기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범제가 웃었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으려 하니 풀 뜯던 황소는 좋아서 이리저리 뛰는데, 밥 먹는 황소는 그것도 모르고 동문서답만 하고 있나? 서천굉은 너무나 반가워 얼굴에 웃음이 함빡 퍼졌다. 「노선배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으려고 하는데 황소는 까맣게 모르고 오히려 당나귀가 알고 있다니.」 아범제가 웃으며 하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크게 따라 웃었다. 모두들 말에 올라 작은 마을을 끼고 돌아갔다. 저녁때가 되자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휴식을 취하였다. 서천굉은 아내를 향해 슬그머니 물었다. 「몇 달이나 되었소? 왜 내가 그것을 몰랐을까? 「당신같이 미련한 土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주기가 웃었다. 한참 있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만약 아들을 낳으면 그 성은 주씨예요. 아빠와 엄마가 기가 막히게 좋아하시겠지요. 하지만 당신처럼 교활하고 괴팍한 성격은 닮지 말아야 할 텐데.」 「앞으로 몸조심하시오. 다시는 칼이나 창을 쓰지 말아야 하오. 주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방금 청병을 살해하다가 피비린내를 맡으니 구토증이 일어나 혼이 났어요.」 이튿날 아침, 아범제는 서천굉을 향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30리만 더 가면 우리 집이오. 아름다운 아내가 거기에 있소. 이원지가 말참견을 했다. 마님이세요? 그럼 내가 가서 꼭 만나 뵈어야지요. 그분이 어째 텁석부리 영감을 좋아하는지 물어 봐야겠군요.」 하, 그것은 비밀인데.」 아범제가 웃으며 서천굉을 바라다보았다. 자네의 부인이 말 타고 왔다갔다 하느라 뱃속의 송아지가 좋지 않을까봐 염려되네. 우리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좋아. 우리가 그 못된 놈들을 찾아 처치한 뒤에 부인을 모셔 가도록 하게. 서처굉은 연방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주기는 본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두 오빠와 남동생 하나가 죽었기 때문에 뱃속에 있는 아이는 장래 주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러마고 대답했다. 텁석부리 영감 마을에 도착하자 아범제는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그가 솥을 들어 땅땅땅 한바탕 쳤다. 내당에서 30여 세쯤 되어 보이는 그의 아내가 나왔다. 예쁜데다가 피부도 희고 고왔다. 아범제를 보더니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입으로는 욕을 퍼부었다. 「텁석부리 영감이 어디로 굴러 갔다가 이제야 돌아오시나요? 그래, 내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아범제가 웃었다. 「떠들지 마오. 내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소? 먹을 것 좀 내오시오. 당신의 텁석부리 배고파 죽을 지경이오.」 아범제의 아내가 따라 웃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을 보고도 배가 고프세요? 「당신 말이 옳소.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은 배추 같아. 그렇지만 밀떡 같은 것이 있어 이 배추와 함께 먹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남편의 귀를 잡고 사납게 비틀었다. 「다시는 나가지 마세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밀떡 ,수박,양고기 등을 가지고 나와 손님을 대접했다. 이원지는 그들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금슬 좋은 모습을 보자 마음이 쓸쓸해졌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밖이 떠들썩해지며 한 떼의 사람들이 들어와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다투어 가며 아범제를 향해 자기의 입장을 하소연했다. 아범제가 이런저런 말로 어르고 달래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자 사람들이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또 두 사람이 들어섰는데 하나는 동자요 하나는 짐꾼이었다. 납사이정, 호(胡) 영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려간 솥을 되돌려 달라고 하시는군요.」 동자의 말에 아범제가 주기를 바라보고 웃었다. 「너 가서 호 영감님께 그분의 솥이 애를 배 새끼 솥을 낳아야 하기때문에 지금은 움직일 수 없다고 말씀드려라.」 동자는 어리둥절해하며 가 버렸다. 아범제가 짐꾼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아왔느냐? 작년에 제가 마을에 있는 객점에서 닭을 한 마리 사 먹은 일이 있었어요. 얼마냐고 물어 값을 내고 가려고 했지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장궤가 (뭐 그리 급하오. 다음에 계산합시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장궤가 꾀 사람이 좋다고 생각해 고맙다며 길을 떠나고 말았지요. 두 달이 지난 뒤에 외상을 갚으러 갔더니 장궤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입으로 중얼중얼 굉장히 어려운 계산을 하는 것 같았어요. (그 닭값이 도대체 얼마인지 말씀을 하시구려.) 제가 이렇게 말을 했더니 장궤는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저를 항해 손을 흔들더군요.」 아범제의 아내가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까짓 닭 한 마리, 제아무리 살진 것이라 하더라도 동전 백 개면 고작이겠지. 짐꾼이 말을 받았다. 「저도 본래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장궤가 한참 동안 계산해 보더니 (은자 12냥을 내놓아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범제의 아내가 말도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무슨 놈의 닭이 그렇게 비싸? 은자 12냥이면 몇백 마리라도 사겠다. 「글쎄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말했죠. 그런데 그 장궤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틀림없소. 당신도 계산해 보시오. 만약 당신이 내 닭을 먹지 않았다면 이 닭이 알을 몇 개나 낳았겠소? 이 알이 또 병아리가 될 것이 아니오? 그래서 이 병아리가 크면 또 얼마나 많은 알을 낳겠소,,,,,,?>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은자 12냥이면 그래도 싸지 싸!>이러지 않겠습니까. 저야 물론 내놓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를 끌고 부자인 호 영감님께 따져 달라고 갔지요. 그랬더니 호 영감님이 장궤의 말을 듣고 일리 있다며 저보고 빨리 갚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빨리 외상값을 갚지 않으면, 그 알들이 다시 병아리가 된다고 야단을 치시더군요. 저는 어떡하면 좋습니까? 납사이정 아저씨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여기까지 말을 하는데 방금 나갔던 동자가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호 영감님이 솥이 무슨 아이를 낳느냐고 하시는군요. 믿지 못하겠다며 빨리 쇠솥을 되돌려 달래요. 아범제는 부엌으로 들어가 작은 솥을 들고 나와 동자에게 주었다. 「이것이 분명 솥의 아들이니 네가 가지고 가서 호 영감님께 드려라. 동자가 반신반의하며 솥을 가지고 나갔다. 아범제가 다시 짐꾼을 처다보았다. 많은 사람 앞에서 호 영감을 불러다 따져 보자는 말이렷다? 제가 만약 지면 24냥의 은자를 배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걱정 말게. 절대로 지지 않네.」 한 시간쯤 지나 그 짐꾼이 다시 들어왔다. 납사이정 아저씨, 호 영감님이 사람을 모아 놓고 따져 보자고 하십니다. 빨리 가시지요.」 내 이곳에 일이 있으니, 좀 있다가 가지.」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아내와 웃고 떠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 짐꾼은 동동거리며 몇 차례나 달려와 재촉했다. 아범제는 그제야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서천굉 등은 구경을 하기 위해 쫓아 나갔다. 저자에는 7, 8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뚱뚱보가 중간에 앉아 있는데 그가 바로 호 영감이라는 사람 같아 보였다. 이때 사람들은 아범제를 기다리느라 지쳐 있었다. 「아범제, 이 짐꾼을 도와 말을 하겠다며 어째 지금에서야 나타나나? 호 영감의 말에 아범제가 인사를 하며 웃었다. 「미안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리 있나? 「물론이지요, 들어 보세요. 내가 내일 밀을 심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종자를 다 볶지 못해 먹지도 못했으니, 이거 되겠습니까? 밀 종자를 서 말이나 볶았는데, 그렇게 많으니 어떻게 금방 먹겠습니까? 그래서 늦어졌습니다.」 말을 하며 연방 허리를 굽신거렸다. 호 영감과 객점의 장궤가 동시에 큰소리를 쳤다. 「허튼소리 작작 하오. 밀 종자를 다 먹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심나? 이 미친 놈. 그 주제에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겠다고 나서는가. 옆에서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범제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지나 떠들썩한 소리가 가라앉자 그제야 아범제는 입을 열었다. 「이미 먹어 버린 밀은 심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짐꾼이 먹어 버린 닭이 어떻게 알을 낳을 수 있습니까? 「옳소, 옳소. 먹어 버린 닭이 어떻게 알을 낳을 수 있답니까? 여러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아범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호 영감은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음을 보고 이렇게 선포했다. 「짐꾼이 먹은 객점의 닭 한 마리는 동전 백 개로 변상하시오.」 짐꾼은 너무나 좋아서 한 꾸러미의 동전을 장궤에게 던져 주며 웃었다. 「앞으로 당신의 닭은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겠군.」 장궤가 동전을 받고 한마디 말도 없이 가 버렸다. 사람들은 빈정거리고 아이들은 그를 향해 돌까지 던졌다. 호 영감이 아범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당신에게 빌려 준 솥이 아이를 낳았다니 그것은 반가운 일이오. 그래 언제쯤 둘째를 낳을 것 같소? 아범제는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호 영감, 당신의 솥은 죽었소.」 「솥이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 호 영감이 화를 냈다. 「솥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당연히 죽을 수도 있을 것이오.」 「이 사기꾼! 내 쇠솥을 빌려 가서는 딴소리를 하는군.」 「좋소, 여러 사람 앞에서 따져 봅시다.」 호 영감은 작은 쇠솥을 거저 받았는데, 이제 여러 사람 앞에서 따진다면 체면을 잃을 것 같았다. 그래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람들 틈으로 달아났다. 아범제는 평소 가난한 사람들만 골라 전문적으로 속여 오던 부자 호 영감을 궁지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득의양양하여 앙천대소를 했다. 「텁석부리, 또 무슨 못된 짓을 하였나? 갑자기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철지괴협 원사소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하나는 한인이요, 하나는 위구르 사람으로서 천산의 남북에 나뉘어 살았지만,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 주고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며 의로운 일만 하는 사람이라 평소 친하게 지냈다. 아범제는 원사소의 팔을 덥석 잡고 웃었다. 「하하하, 주책 없는 영감께서 오셨군. 빨리 우리 집에 가서 내 아내를 만납시다. 「당신 아내가 뭐가 대단하다고 이 야단을 부리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서천굉과 여어동이 달려와 그를 향해 절을 했다. 「그만둬, 그만둬. 내 자네들 사부도 아닌데 이마를 조아리나? 진가락은 어디 있나? 「총타주님은 우리보다 한 발 먼저 떠나셨는데,,,,,, 아, 진 노영감님과 마나님도 오셨군요. 서천굉이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원사소 뒤에 서 있던 천산쌍응을 향해 인사를 하다가 관명매가 진가락이 타고 다니던 백마의 고삐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노선배님은 어디서 이 말을 만나게 되셨습니까? 관명매가 대답을 했다. 「나도 자네들 총타주가 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이 그의 것임을 알았네. 방금 이 말이 사막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우리 세 사람이 한참 쫓아다니다가 겨우 잡았네. 서천굉은 깜짝 놀랐다. 「총타주님이 혹시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닐까? 우리 빨리 구하러 갑시다. 사람들이 함께 아범제의 집으로 와 배불리 식사를 한 뒤에 주기와 작별했다. 서천굉과 주기는 부부가 된 뒤 처음 헤어지는 것이라 대단히 섭섭했다. 아범제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나가겠다고 하자 그의 수염을 잡고 울며 법석을 떨었다. 아범제는 시시덕거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내가 부인을 하나 데리고 와서 당신을 모시도록 해 놓았잖소? 그분도 당신처럼 젊고 또 예쁘다네. 뱃속에 아이까지 있으니 두 사람이 당신을 모시는 셈이야. 이 텁석부리 하나보다야 낫지 않겠어? 그러나 그의 부인은 계속 울기만 했다. 「텁석부리, 가지 마세요 가면 안 돼요. 아범제는 웃었다. 「내 텁석부리 수염을 보고 가지 말란 말인가? 좋아. 갑자기 10여 개의 수염을 뽑아 주고 대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범제가 큰 개만한 당나귀에 올라타자 두 발이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당나귀의 다리가 개로 보였다. 「텁석부리, 당신이 타고 있는 것이 뭔가? 쥔가, 아니면 고양이인가? 원사소가 물었다. 「쥐라면 어떻게 이렇게 크겠는가? 「그럼 큰 쥐인 모양이군.」 서천굉과 여어동은 두 사람의 농담을 듣고도 진가락이 걱정되어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원지는 낙빙의 백마에 올라 고삐를 놓아둔 체 제멋대로 가게 내버려두었다. 아범제의 당나귀는 정말로 너무나 느렸다. 저녁나절이 되도록 겨우 30리밖에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더욱 조바심이 일었다. 서천굉이 아범제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노선배님! 우리 총타주가 아무래도 위험한 지경에 빠지셨나 봐요. 우리가 먼저 가 보고 싶습니다.」 좋아 좋아. 앞에 있는 고을에 도착하면 쓸 만한 당나귀 한 마리를 사야 되겠어. 이 미련한 놈은 쓸모도 없는데 저 혼자 잘난 체하고 있단말이야. 아범제는 당나귀를 재촉해 쫓아가 이원지와 나란히 갔다. 백마는 당나귀보다 두 배나 더 컸다. 아범제는 목을 젖히고 이원지에게 물었다. 「아가씨, 어째서 온종일 즐거워 보이질 않나? 이원지는 이 괴짜 영감이 바보인 체하지만 사실은 총명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위구르 사람들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와 부탁만 하면 척척 해결이 되는 것이었다. 「텁석부리 아저씨,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을 상대할 때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내가 솥으로 그자의 머리를 덮어씌울 테니 아가씨가 칼로 찔러 죽이면 되지 않겠나? 이원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안돼요. 예를 들어 말한다면 그 사람을 이쪽에서------ 아주 좋아한다고 가정을 해 보지요. 이쪽에서 잘 대해 주면 대해 줄 수록 그쪽에서는 당나귀 고집을 부리는 그런 경우 말이에요.」 아범제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내 날마다 당나귀를 타고 다니니, 미련한 당나귀의 고집스런 성질쯤이야 얼마든지 고칠 방법이 있지. 하지만 이런 방법을 함부로 아가씨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않겠나? 「텁석부리 아저씨, 제가 어떻게 해야만 가르쳐 주시겠어요? 이원지의 말이 더욱 부드럽게 나왔다. 「우리 또 내기를 하세. 아가씨가 이기면 그때 내가 가르쳐 줌세.」 「좋아요, 그럼 우리 다시 달리기를 해요.」 「우리 다른 것으로 하세. 달리기를 한다면 분명 아가씨가 지게되네. 당나귀 꼬리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이번에는 속지 않을 테니까.」 이길 자신이 있어요. 어디 한번 해 보세요.」 '좋아, 이번에는 또 어떤 괴상한 수작을 부리나 보세.」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앞에 보이는 작은 마을을 가리켰다. 「누가 먼저 첫째 집에 도착하는가 하는 내기야.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야. 좋아요, 텁석부리 아저씨. 이번에도 아저씨가 질걸요. 두 발을 모으고 고삐를 채자 백마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려 나갔다. 아범제가 당나귀를 둘러메고 쫓아갔다. 이 백마는 보기 드문 준마였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바람처럼 빨랐으니 그가 어떻게 쫓아올 수 있겠는가? 반도 쫓아가지 못했는데 백마는 벌써 마을에 들어가 있었다. 아범제가 당나귀를 내려놓고 껄껄 웃었다. 「오, 저놈의 아가씨에게 또 속았군. 좋은 말인 줄 생각은 했지많 저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는걸.」 서천굉 등은 그가 이렇게 막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탄복했다. 몇십 근짜리 작은 당나귀를 짊어지는 것이 대수로을 것이 없었지만, 이상스러운 것은 그가 발걸음이 무척 빠른 것이었다. 백마가 아니고 보통 말이었다면 벌써 그가 추월했을 것이었다. 마을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백마가 투레질을 하며 미친 듯 펄쩍펄쩍 뛰었다. 크게 놀란 이원지가 고삐를 챘지만 백마는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백마가 발광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그 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백마는 곧장 사막의 중간을 향해 달려들어가 몇 사람 앞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이원지가 말에서 내려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백마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이쪽으로 달려왔다. 서천굉과 여어동은 말에 탄 사람이 낙빙임을 알아보고 반기며 맞이했다. 쌍방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뒤로 문태래 ,위춘화-장진-심연 등 네 사람이 보였다. 맨 뒤에는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장검을 등에 메고 이원지의 손을 잡은 채 이것저것 묻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무당파 선배인 면리침 육비청이었다. 원래 백마는 옛 주인을 그리워하다 먼 곳의 낙빙을 발견하고 죽자고 쫓아왔던 것이다. 여어동은 육비청의 앞으로 달려가 두 무릎을 꿇었다. 「사숙님 ! 땅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울었다. 육비청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오열했다. 「나는 네 사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는 도중에 문 사야 등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그분들도 그놈을 잡으려고 하는 중이니,,,,,, 안심해라. 너와 나, 두 사람이 네 사부님을 대신하여 복수를 하자꾸나. 서천굉은 아범제를 소개했다. 문태래 등도 인사를 나눈 뒤 진가락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마을에 이르러 식사를 하는 동안 아범제는 당나귀를 사러 갔다. 이원지가 슬그머니 그 뒤를 쫓아갔다. 아범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크고 건장한 당나귀 한 마리를 골라 샀다. 그것은 타고 다니던 꼬리 없는 당나귀보다 두 배나 컸다. 아범제는 꼬리 없는 당나귀를 싸구려 값에 팔며 웃었다. 「관모가 이 미련한 당나귀를 해쳤으니, 다시는 이놈에게 씌울 수가 없다. 관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아 버렸다. 이원지는 그가 당나귀 값을 지불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신 끌고 킬킬거리며 그와 나란히 갔 다. 아범제가 말을 꺼냈다. 「내가 전에 당나귀를 한 마리 길렀는데, 성질이 너무 괴팍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네. 내가 가라면 서고, 서라면 가곤 했지. 어느날 연자방아를 돌리게 했더니 몇십 보 가다가는 딱 멈추고는 죽자 하고 가지 않는 게야. 몰수록 뒤로 물러나며 달래도 안되고, 때려도 소용이 없더란 말일세. 내가 어떻게 했겠나? 어디 한번 맞춰 보게.」 이원지는 그가 묘한 말로 사람은 웃기기는 했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잘 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 듣느라 웃지 못했다. 「아무래도 영감님께 무슨 방법이 있으셨겠지요.」 「얼씨구, 이 아가씨 왜 시집을 가고 싶은 것이로군. 본래는 날보고 텁석부리 아저씨라고 하더니 지금 와서는 (영감님)이라고 불러. 이원지는 얼굴을 붉혔다. 「당나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옳아, 옳아. 뒤에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나는 그 미련한 당나귀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놓았지. 연자방아가 동쪽에 있어 당나귀를 서쪽으로 돌려 놓았단 말이야. 그러고는 힘껏 몰았지. 그러자 이놈이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지 않았겠나. 계속 물러나다 보니까 맷돌질을 끝낼 수 있었어.」 「당나귀보고 동쪽으로 가라면 오히려 서쪽으로 간다------. 그럼 차라리 서쪽으로 가라고 그러지요.」 이원지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아범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래, 바로 그렇게 했단 말이야. 뒤에 나는 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지.」 「뭔데요? 이원지가 다급히 물었다. 「내가 채찍 위에 무를 매달아 미련한 당나귀 앞에 내밀었네. 미련한 당나귀는 무가 먹고 싶어 계속 앞으로 가지 않았겠나. 몇십보를 이렇게 가 내가 가려고 했던 곳에 이르면 그제야 무를 당나귀에게 먹였지. 이원지는 즉시 알아듣고 웃었다. 「영감님, 가르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아가씨는 아가씨의 무를 찾아가면 돼. 이원지는 생각해 보았다. (여 사가가 가지고 싶은 것이 무얼까? 방금 그가 내 사부님을 보고 그렇게까지 울었으니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장소중을 죽여 마 사백의 원수를 갚는 것이겠구나. 그렇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장소중을 죽여야 해.)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장소중의 무예가 막강한데 내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죽였다 하더라도 감사하게만 생각하고 당나귀처럼 무를 쫓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어렸을 때 하인의 아들이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달라고 했지만 주지 않자 나는 울며 떼를 써 결국 가지고야 말았다. 이 텁석부리 아저씨의 말씀은 옳다. 내가 자기에게 잘 대해 주면 줄수록 그는 피하기만 한다. 앞으로는 냉담하게 대하며 그가 나를 좋게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가서 나를 향해 애걸복걸하도록 만드는 재미도 괜찮을 것이다. 고집 세고 미련한 당나귀를 다스리려면 텁석부리 아저씨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구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작정한 그녀는 정말 여어동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낙빙과 서천굉은 냉정한 눈으로 관망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범제만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아범제는 당나귀를 밖워 타자 몇 배나 빨라졌다. 일행은 황사를 밟으며 백마를 따라 백옥의 봉우리 앞에 이르렀다. 그 백마는 이리떼에 대한 공포가 그때까지 남아, 옛 성의 갈림길이 있는 곳까지 와서는 더 가려고 하지 않았다. 낙빙이 몇 번이나 재촉을 하였지만 백마는 한 발짝도 더 나가려 들지 않았다. 원사소가 말을 꺼냈다. 「이리 떼들이 여기 모였던 모양이니, 우리 이리 똥을 따라 찾아가 봅시다. 사람들은 이리 똥이 많음을 보고 진가락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불이 붙듯 마음이 급해졌다. 낙빙은 백마에서 내려 문태래의 말을 같이 타고 갔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반나절을 가자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나며 갈림길에서 네 사람이 돌아 나오는데, 앞장 선 사람은 바로 장소중이었다. 서천굉이 휘파람을 불며 위춘화,장진,심연과 함께 흩어져 네 사람의 뒤로 가서 막았다. 장소중은 갑자기 군웅들이 나타난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욱이 사형인 육비청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식은땀을 흘렸다. 여어동이 금피리를 휘두르며 대들어 사생결단을 내려고 했다. 원사소가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여어동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끌렸다. 원사소가 장소중을 가리키며 욕을 했다. 「며칠 전 자네를 만났을 때만 해도 무당파의 한 고수로만 알았다. 그런데 네놈이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데 네놈의 사형까지도 죽였다니 여기서 스스로 네 목숨을 끊도록 해라.」 장소중은 상대방 가운데 최소한 다섯 사람은 자기와 공력이 비슷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도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힘으로 대결을 해 봐야 불행한 결과만 있을 것 같아 오히려 뻣뻣하게 나왔다. 「우리 이쪽은 네 사람뿐이오. 여러분이 숫자가 많은 것에 의지해 우리를 이겨, 장 모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무엇이 부끄럽겠소? 원사소는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았다. (저 세 사람이 이리 떼와 맞선 것을 보니 상당한 고수이다. 저들 페 사람이 함께 대든다면 나 혼자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텁석부리가 도와 주려고만 한다면 문제가 없겠지.) 코방귀를 뀌고 이렇게 말했다. 「네까짓 놈 하나 죽이는 데 많은 사람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너희 네 사람이 동시에 대들거라. 나는 이 텁석부리와 둘이서 상대해 주겠다. 너희 네 명이 만약 우리 둘과 팽팽하게 맞설 수만 있다면 네놈들을 보내 주겠다.」 장소중은 아범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반 이상 텁석부리 수염에 가려져 있고, 웃느라 실눈이 된 얼굴을 보니 전혀 절기를 지닌 고수 같지가 않았다. (이 원가 성을 가진 자의 무공은 확실히 놀랄 만하여 나를 능가할 것이다. 설마 이 텁석부리야 그 정도는 아니겠지. 관동삼마 가운데 한 사람만 나를 돕는다면 내가 이 원가 성을 가진 자와 막상막하로 대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두 사람이 이 텁석부리를 상대하면 되겠지.)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 한번 대결을 해 보십시다. 원-원 대협께서는 사정을 좀 보아 가며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내 손은 인정이고 사정이고 보지도 못하오.」 원사소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고개를 돌려 아범제를 바라보았다. 「텁석부리, 우리 새로 사귄 친구들 앞에서 추태는 보이지 맙시다. 「이 시골 영감 관가 사람을 보니 겁이 나는걸. 몸을 흔들며 당나귀 위에서 내렸다. 장소중은 그의 몸놀림을 보고는 즉시 그날 밤 묘지에서 자기 모자를 뺏어 간 괴짜임을 알아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모두들 덤벼 보라구. 달아날 생각은 버려. 이 영감 손 안에 들어온 이상 달아나지는 못할걸.」 원사소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합합태가 한 발짝 걸어 나와 원사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원 대협께서는 우리 3형제의 목숨을 건져 주신 은인이십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은인과 대결할 수 있겠숩니까. 또 이 장씨와는 최근에 인사를 했을 뿐, 무슨 우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도울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그는 장소중의 행위가 너무나 비열한 것을 보고 벌써부터 그를 깔보고 있었다. 다만 이 순간 막강한 적을 만나 그를 말로라도 깎아내리는 것이 상대방의 호감을 사려는 듯한 오해를 받을까 봐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삼마는 옆으로 비켜 섰다. 수수방관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한 것이다. 원사소가 이마를 찡그렸다. 「저들이 나서려고 하지 않으니 자네 하나만 남았네. 이를 어떻게 한다? 내가 서른이 되던 그해, 조 사야를 향해 앞으로는 절대 1대1로는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거든.」 이렇게 말을 하며 곁눈질로 천산쌍응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는 불 같은 질투심으로 발작을 했다가 진정덕을 때려 죽이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이러한 맹세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굳게 약속을 했던 것이다. '텁석부리, 어쩔 수 없으니 수고를 대신해 주시게.」 아범제는 등에 지고 다니던 쇠솥을 끄르며 웃었다. 「좋아, 좋지.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솥을 들어 장소중의 머리를 향해 덮어 씌웠다. 장소중은 왼쪽으로 뛰어 피하며, 그가 무슨 병기를 쓰나 살펴 보았다. 거무튀튀하고 둥글둥글한 것이, 한쪽은 쑥 들어가고 한쪽은 붉어져 나왔다. 불거져 나온 한쪽에는 연기에 그을려 새까만 검정이 ,취사를 할 때 쓰는 솥이다. 아범제가 웃었다. 「이게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겠지. 솥 같아 보이지 않나? 솔직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틀림없는 솥일세. 자네들 청병이 아무 까닭도 없이 쳐들어와 많은 솥을 망가뜨려 우리로 하여금 밥도 먹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네. 그러니 이제 내가 솥으로 청병을 쳐야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솥을 들어 장소중의 머리를 향해 덮어 씌웠다. 장소중은 선학양시의 재주를 펴 갑자기 비스듬히 뛰어 피하고, 수장을 돌려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아범제는 몸을 살짝 숙이며 왼손을 솥바닥에 문지르고, 그을린 검정을 그의 얼굴에 묻혔다. 장소중은 무림에 나타난 이래 수많은 적과 싸워 보았지만 여태까지 이런 괴짜는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솥을 들고 왼손에 검정을 묻히며 삐뚜름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전연 법도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기가 공격하는 매서운 초술을 그는 매번 힘 안 들이고 피하고 있으니, 어찌 소홀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 즉시 무극현공권을 쓰며 온몸의 급소를 철통같이 가렸다. 길이 원래 좁은데다가 바닥에는 어지럽게 돌이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은 이 험악한 장소에서 공격과 방어를 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원사소가 탄식을 했다. 「이 간사한 녀석아, 네가 지닌 무공이 이만하기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네놈의 마음이 악독하지만 않다면 이 영감은 네놈의 재주를 아끼고 싶구나.」 「안됩니다. 영감님, 절대로 안됩니다.」 여어동이 황급히 말했다. 심연이 위춘화를 향해 물었다. 「저 텁석부리 영감께서 쓰고 계신 초술은 무엇입니까? 위춘화가 모른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쪽의 천산쌍응 , 육비청 , 문태래 등도 아범제가 쓰는 초술의 무공을 몰라 모두들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범제가 왼쪽 다리를 들며 솥을 들어 옆으로 치자 장소중은 피할 곳이 없어 급히 솥 밑으로 빠져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범제는 좌장을 벌리고 솥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중이 깜짝 놀랐지만 피할 여유가 없어 왼손 주먹을 충천포로 솥 밑을 맹격했다. 「밥 짓는 솥을 깨면 안 돼. 아범제가 이렇게 말하고 솥을 위로 들며 장소중의 얼굴에 다시 검정칠을 했다. 두 사람이 각자 펄쩍 뛰어 물러섰다. 「덤벼, 덤비라고, 덤벼!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겨루어 보자구. 아범제가 이렇게 말했다. 장소중은 그의 손에 들린 쇠솥을 노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아, 그렇군. 자네가 병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 지더라도 승복을 못 하겠단 말이지? 고개를 돌려 이원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아가씨의 부엌칼을 이 못난 무에게 빌려 주시게.」 두 사람이 대결을 하고 있을 때 이원지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가 있었다. 장소중을 솥으로 가리기만 하면 즉시 대들어 찌를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속마음을 이 괴짜가 말해 버리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범제의 말은 평소 미친 듯도 하고 모자란 듯도 해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장소중을 보고 못난 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속에 한 처녀의 연정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범제는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입을 그녀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아가씨가 부엌칼을 그에게 주어도 난 이길 자신이 있어.」 이원지가 아범제의 말을 듣고서야 장검을 던져 주며 외쳤다. 「칼을 받으세요. 장소중이 날아오는 장검의 자루를 오른손으로 잡은 뒤에 갑자기 몸을 돌이켜 세우며 왼손을 번쩍 들어 퇴로를 막고 서 있던 서천굉과 위춘화 등의 얼굴을 겨냥하여 한움큼의 부용금침을 던졌다. 서천굉 등은 부용금침이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급히 몸을 숙이고 피했다. 갑자기 머리 위로 바람 소리가 찢어지며 장소중이 벌써 그들 머리 위를 뚫고 나갔다. 장소중은 합합태의 옆으로 달려가 왼손을 뻗어 그의 오른손에 있는 맥문을 잡고 외쳤다. 「빨리 갑시다! 합합태는 맥문이 잡힌 채 그가 이끄는 대로 미궁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등일뢰와 고금표는 자세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 뒤를 쫓아갔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변화였다. 서천굉 등이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는 네 사람이 벌써 모퉁이를 돌아간 후였다. 원사소와 아범제는 화가 나서 갑자기 몸을 날렸다. 마치 두 마리 학처럼 서천굉 등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천지괴협은 몸놀림이 굉장히 빨랐다. 사람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벌써 등일뢰의 뒷덜미를 낚워챘다. 등일뢰는 자기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몸이 허공에 떠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다만 독각동인을 들어 뒤를 향해 찌르는데 갑자기 자기의 몸이 강력한 힘에 의해 던져짐을 느꼈다.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산허리를 받고 머리가 터져 죽었다. 원사소는 등일뢰를 던져 죽인 뒤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모퉁이를 돌았다. 눈앞에 갈림길이 3개나 나타났다. 장소중이 어느 길로 달아났는지 몰라 오른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텁석부리, 이쪽으로 쫓아가 보시게.」 다시 왼쪽을 가리키며 천산쌍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이쪽으로 쫓아가 보시지요.」 그리고 자기는 중간에 있는 길로 쫓아갔다. 잠시 후에 네 사람은 다시 원위치에 돌아와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앞에 또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나 어느 쪽으로 쫓아가야 좋을지 몰랐다. 서천굉은 길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이 이리 똥을 누가 방금 밟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리 똥을 따라 안으로 달아난 것 같습니다.」 '틀림없으니 빨리 쫓아갑시다.」 원사소가 외치자 사람들은 이리 똥을 따라 백옥의 봉우리 앞까지 달려왔다. 그러나 장소중 등 세 사람의 그림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처로 나뉘어 돌아다니며 건물을 샅샅이 뒤졌다. 얼마안되 위춘화가 산허리에 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원사소와 진정덕이 먼저 들어가고 그 뒤로 육비청 ,문태래 ,관명매 등이 쫓아갔다. 경공이 비교적 뒤떨어지는 사람들은 육비청과 문태래가 일이리 끈을 이용해 끌어올리고 마지막에 심연만이 남았다. 아범제가 웃었다. '내 자네의 담력을 시험해 보겠네. 그의 뒷덜미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받으시오. 심연의 몸이 동굴 입구로 뜨자 문태래가 받았다. 이어 아범제도 곧이어 뛰어 올라왔다. 이때 원사소가 막 돌문을 밀어 열어 놓았다. 그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만약 밖에서 사람들이 막고 있다면 안에 천군만마가 있어도 뚫고 나가기 어려웠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기는 오히려 쉬웠다. 원래 당년 그 폭군이 산허리를 파 옥봉을 만들 때 미궁의 통로가 천 갈래 만 갈래라 밖에서 침입해 들어오기는 어렵다고 믿었던 것이다. 걱정했던 것은 오히려 내란과 반란이었다. 그래서 궁문을 이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사소가 앞장 서서 달리고 사람들이 통로로 우르르 쫓아갔다. 서천굉이 탁자와 의자의 다리를 떼어내 불을 붙여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청에 이르렀을 때 각자의 병기가 자석산에 의해 빨려들어가 모두들 깜짝 놀랐다. 아범제는 행동이 민첩하여 날아 떨어지는 쇠솥을 잡아 겨우 깨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쫓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 원인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다시 병기를 주워 들고 옥실로 뛰어들었다. 침대 옆에 또 하나의 지하 통로가 있었다. 사람들은 갈수록 더욱 이상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원사소의 뒤만 따라나갔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짙은 녹색의 연못가에 여섯 사람이 물을 격하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바라다보니 연못 저쪽에는 진가락과 곽청동 및 향향 공주가 있었으며 이쪽에는 장소중과 고금표 , 합합태가 서 있었다. 모두들 반가워하는데 심연이 제일 먼저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도련님. 우리 다같이 왔어요. 문태래 등이 재빨리 달려나갔다. 「얘, 동아! 괜찮으냐? 관명매가 곽청동을 불렀다. 「사부님, 사공님. 안녕하세요? 빨리 이자를 처치해 주세요.」 곽청동이 이렇게 말하며 고금표를 가리켰다. 진정덕은 지난번 맨손으로 이들 삼마와 대결을 하다가 하마터면 큰 골탕을 먹을 뻔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깔보지 못하고 장검을 뽑아 고금표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고금표는 두번째 들어올 때 대청에서 병기를 주워 들었기 때문에 호차를 흔들며 진정덕과 어울려 싸우기 시작했다. 이쪽의 관명매와 합합태도 서로 뒤엉켜 싸웠다. 군웅들이 각기 병기를 들고 서서히 포위하며 장소중을 감시했다. 이원지는 자기의 장검을 장소중에게 빌려 주었기 때문에 병기가 없었다. 이를 본 육비청이 항조의 사자봉에서 장소중으로부터 빼앗은 응벽검을 그녀에게 주었다. 고금표와 합합태 두 사람은 상황이 긴박하여 결사적으로 나와 10여 초를 버터 나갔다. 쌍응의 삼분검술이 숨돌릴 틈 없이 공격해 와 두 사람은 반격은커녕 방어하기에만도 급급했다. 검광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정덕의 대갈일성이 들리고 고금표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진정덕이 다시 한 번 상대방의 하체를 공격했다. 고금표가 왼쪽으로 피하자 진정덕이 발로 걷어찼다. 풍덩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기며 고금표가 비취 연못에 빠졌다. 한줄기 붉은 피가 연못 속에서 떠올라왔다. 저쪽의 합합태도 관명매의 검광에 에워싸여 있었다. 여어동은 합합태가 몇 차례나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했다. 사숙과 천산쌍응의 우정이 돈독한 것을 알고 육비청을 향해 이렇게 부탁했다. 「사숙님,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좀 구해 주세요.」 「좋아.」 관명매의 칼이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찌르자 합합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색이 되어 계속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육비청이 갑자기 뛰어들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백룡검이 관명매의 장검을 막았다. 「형수님, 이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니 용서해 주십시오.」 관명매는 육비청의 말을 듣고 체면을 보아 장검을 거두어들였다. 육비청이 고개를 돌려 합합태를 바라다보았다. 합합태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비틀거렸다. 「빨리 관 대협께 고맙다고 인사드리게.」 합합태는 의형제 여섯이 다 죽었는데 자기 혼자 살아 남아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살려 달라고 애원하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때 갑자기 물 소리가 나며 고금표가 수면 위로 솟아올라 천천히 수영을 해 연못가로 접근했다. 합합태가 완도를 버리고 잡아 끌어올렸다. 고금표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데다가 또 많은 물을 삼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합합태는 그의 가슴을 문지르며 인공호흡을 시키느라 옆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간사한 녀석아. 곽청동이 욕을 하며 달려가 고금표의 가슴을 찔렀다. 다급한 합합태가 팔을 들어 막았다. 곽청동의 칼에 맞아 그의 팔이 잘릴 판이다. 원사소는 그가 이리 떼를 유인할 때의 수고를 생각하며 작은 돌을 집어 던졌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곽청동의 팔이 마비되며 장검을 놓쳐 땅바닥에 떨어졌다. '우선 먼저 저 장가 놈을 처치하고 보세. 이 두 사람은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군웅들에 포위된 장소중은 고금표와 합합태 두 사람의 낭패한 꼴을 보며 모든 것을 포기했다. 문태래 ,아범제 .진가락.육비청 등이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으니 몸을 뺄래야 뺄 수도 없었다. 장탄식을 하며 자결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육비청의 뒤에서 한 사람이 번개처럼 뛰어나왔다. 이원지였다. 그녀는 손에 장검을 들고 달려들며 욕을 했다. 「이 간사한 놈아!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이원지가 벌써 장소중을 향해 덮쳐들었다. 「내가 구해 드리지.」 쉭쉭쉭 장검을 들어 찔렀다. 장소중은 그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원지가 갑자기 미끄러지는 척하며 앞으로 넘어졌다. 「빨리 나를 잡으세요.」 낮은 소리로 속삭이자 장소중은 알아차렸다. 그녀가 뻗는 칼을 장검을 들어 막으며 왼손으로 그녀의 팔을 확 잡았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의 장검이 부러졌다. 얼핏 보니 그녀의 수중에는 자기의 응벽검이 들려 있어 더욱 기쁘고 반가웠다. 이때 문태래,여어동,위춘화,진정덕 등이 동시에 그녀를 구출하기 위하여 달려들었다. 장소중이 응벽검을 휘두르자 여어동의 금피리가 부러져 나갔다. 문태래와 진정덕은 병기가 손상될까봐 급히 공세를 거둬들였다. 장소중은 응벽검을 이원지의 등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길을 비키시오. 사람들은 이제 장소중을 잡게 된 줄 알았는데 너무 갑자기 이원지가 웅심으로 나섰다가 오히려 그의 호신부가 되었다고 안타깝게 여겼다. 이원지는 의식적으로 사지에 맥을 빼고 장소중의 어깨에 축 늘어져 혈도를 찍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소중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길을 찾아 나가려고 하는데 이원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소근거렸다. 「산허리로 다시 돌아가요.」 그가 생각해 보아도 그럴듯한 말이라 지하 통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원사소와 진정덕은 너무나 화가 나서 하나는 돌을 주워 들고, 또 하나는 3개의 철보살을 꺼내 장소중의 등을 향해 던졌다. 장소중이 등을 구부리고 허리를 숙여 암기를 피한 뒤에 발길을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아이쿠! 이원지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육비청이 깜짝 놀랐다. 「모두들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우리,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그도 장소중이 정말 그의 제자를 해칠까봐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장소중의 뒤를 거리를 두고 쫓아갔으며, 곽청동은 장검을 든 채 고금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합합태가 서둘러 고금표의 상처를 싸매 주며, 그밖의 일은 전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다. 진가락은 곽청동이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여 지하도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향향 공주를 향해 말했다. 「우리 여기서 언니와 같이 있읍시다.」 장소중이 이원지를 끌고 앞으로 달려나갔지만 사람들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통로는 꼬부라진데다 워낙 많아서 암기를 쓸 방법도 없었다. 이제 통로가 끝나고 장소중이 돌문을 빠져 나갈 판이었다. 원사소가 몸을 꺾으며 대들어 그의 등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캄캄한 가운데 한바탕 칙칙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돌벽에 몸을 붙이고 소리를 질렀다. 「텁석부리, 솥! 아범제가 앞으로 두 발 나서며 쇠솥을 거꾸로 돌렸다. 쨍쨍 가벼운 소리가 나더니 솥 안에 수십 개의 부용금침이 모였다. 「바늘을 볶아 먹자, 바늘을 볶아 먹자! 아범제가 떠들어대는 틈을 이용해 장소중과 이원지는 돌문 밖으로 달려나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문을 닫은 뒤에 쇠고리로 잠갔다. 원사소,진정덕이 대들어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 안쪽은 미끄러워 손을 댈 곳이 없었다. 두 사람은 화가 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만 퍼부었다. 장소중은 다시 금도끼 자루를 쇠고리에 꽃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원지를 바라보았다. 「이 소저, 구해주셔서 고맙소. 이원지가 웃었다. 「우리 아버지와 장 사숙이 모두 조정의 관리이니 제가 당연히 구해 드려야지요.」 「이 군문과 부인께서도 다들 안녕하시지요? 이렇게 말하며 이원지를 향해 군례(軍禮)를 했다. 「저를 향해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장 사숙! 우리 빨리 달아날 방법이나 생각해요.」 「저쪽 사람들이 많으니 우리 빨리 내지로 돌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잡으러 옵시다.」 「저들이 틀림없이 연못가로 돌아서 추적할 것이에요. 장 사숙, 빨리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이 넓은 사막에서 달아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장소중은 무공도 막강하고 위인이 교활했지만 꾀는 별로 없었다. 이마를 찡그린 채 생각해 보았지만, 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원지는 불안하고 초조해 못견디겠다는 듯 돌 위에 엎드려기 울기 시작했다. 「이 소저, 두려워할 것 없소 우린 틀림없이 달아나게 됩니다.」 장소중이 이렇게 위로했다. 「이 미궁에서는 달아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루이틀 뒤에는 그들에게 또 잡히게 돼요. 엄마야,,,,,, 엉엉,,,,,, 엄마야! 이원지는 계속 울기만 했다. 장소중은 난처해 연방 손만 비비고 있었다. 이원지가 울다가 눈물을 닦고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 「어렸을 때 술래잡기 해 보셨지요? 장소중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다섯 살 때부터 사부에게 무예를 배우며 자랐다. 마진과 육비청이 모두 손 위라 이런 어린이의 장난을 해 본 일이 없었다.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이 미궁 안에 숨어요. 그들이 우리를 못 찾으면 달아나 버린 줄 알고 밖에서만 찾아 다니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3, 4일 동안 여기에 있다가 그때 나가면 돼요.」 장소중이 엄지손가락을 뻗었다. 「이 소저, 정말 총명하시군요. 조금 있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먹을 것이 없으니 3, 4일을 어떻게------.」 「밖에 있는 말 위에 먹을 것도 있고 물도 있지 않아요. 장소중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좋습니다. 우리 빨리 숨읍시다.」 두 사람은 밧줄을 타고 산허리의 입구로 을라왔다. 이 밧줄은 장소중과 삼마가 지난번 들어왔다가 나갈 때 놓아 두었던 것이다. 합합태는 목동이라 늘 몸에 밧줄을 가지고 다녔다. 두 사람은 굴에서 나와 다시 산을 끼고 미끄러져 내려와 각자 말 한 필씩을 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갈림길에 이르러 이원지가 이렇게 말했다. 「이걸 보세요. 바닥의 이리 똥들이 본래는 왼쪽에 있으니 우리는 오른쪽으로, --, , ,.」 여기까지 말을 했는데 끌고 온 그 말이 꼬리를 들고 똥을 싸려고 했다. 말 등에 매달린 양식 부대와 물주머니를 급히 끄르고 두 필의 말머리를 왼쪽으로 향하게 한 뒤에 채찍으로 힘껏 후려갈겼다. 두 필의 말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달려나갔다. 장소중은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래요? 이원지가 웃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왔다가 말발굽과 방금 눈 똥이 왼쪽에 있는 것을 보면 자연 왼쪽으로 쫓아갈 것입니다.」 「묘하군요, 묘해요. 장소중이 좋다고 감탄했다.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이원지는 작은 돌 3개로 몰래 표시를 해 놓았다. 「여긴 길이 천 갈래 만 갈래라 만약 이 표시가 없으면 우리 두 사람이 정말 길을 찾아 나갈 수 없겠군요.」 장소중이 이렇게 말했다. 궁지에 몰린 장소중 두 사람은 반나절이나 걸었다. 산길은 갈수록 가파랐다. 얼마나 많은 모퉁이를 돌았는지, 얼마나 많은 갈림길을 걸었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험한 길이었다. 이원지는 날이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쉬기로 하지요.」 두 사람은 비상 식량을 먹고 물을 마시며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다른 한 필의 말에 있던 양식과 물을 가져 오지 못해 아쉽군요. 장소중의 말에 이원지가 아껴 먹을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이원지가 양식 부대와 물주머니를 장소중 엮에 놓았다. 「이걸 잘 지키셔야 해요. 우리 두 사람의 생사가 여기에 달렸어요. 장소중이 머리를 끄덕여 대답했다. 이원지는 10여 장 떨어진 곳으로 가 깨끗한 장소를 골라 잠을 청했다. 깊이 잠이 들었는데 장소중은 갑자기 이원지가 놀라 외치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이원지가 왔던 길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큰 이리가 한 마리 나타났어요. 빨리, 빨리. 장소중이 응벽검을 뽑아 들고 나는 듯 쫓아갔다. 모퉁이 두 개를 돌아도 이리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을까봐 더 쫓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니 이원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 소저! 이 소저! 부르며 보니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고 물주머니가 넘어져 있었다. 급히 주워 들었지만 주머니 속에는 물이 몇 방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난감해 있는데 이원지가 저쪽의 산길에서 돌아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저쪽에서 또 이리 한 마리가 나타나 물을 훔쳐 먹었어요.」 「그놈들이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어디에 남아 있었을까? 이원지는 풀썩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물이 없으니 여기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겠군요. 하루만 더 버티고, 모험을 하며 나가 봅시다.」 장소중의 말에 이원지가 일어나 섰다. 「제가 나가 살펴볼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우리 같이 갑시다.」 「안되요. 다시 그들을 만나면 살아 남을 것 같아요? 저는 아무래도 좋지만요.」 장소중이 들어 봐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이 소저, 각별히 조심하셔야 해요.」 「염려 마세요. 그리고 그 응벽검을 제게 빌려 주세요.」 장소줌은 응벽검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원지는 응벽검을 받아 쥐고 표시를 해 놓았던 원래의 길로 나왔다. 갈림길에 이르면 먼저와 같이 다시 3개의 돌을 늘어놓았다. 다만 원래 표시해 놓았던 곳에는 모래를 뿌려 놓았다. 장소중이 만약 혼자 나오다 이 표시를 보면 틀림없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이렇게 배치를 해 놓으며 속으로 혼자 웃었다. 이리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물주머니까지 쏟아 버렸지만 장소중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장소중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방법이 없게 되어 버렸다. 날이 샐 무렵 큰길로 나왔다. 그런데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놈의 힘줄을 뽑고 가죽을 벗기나 안 벗기나 두고 보시오. 또 다른 사람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힘줄을 뽑든 가죽을 벗기든간에 그놈을 우선 찾아내야 할 것 아니오? 이원지는 이들의 말을 듣고 (아이쿠!)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저이신을 잃은 체했다. 말을 나누던 사람은 바로 원사소와 아범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돌문을 열 수 없자 할 수 없이 연못가로 되돌아왔다. 곽청동이 지도를 보고 비밀 통로를 찾아내 뒷산을 돌아 나왔지만 장소중과 이원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사소가 성질을 내고 있을 때 갑자기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와 보니 이원지가 쓰러져 있었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숨을 쉬나 안 쉬나 확인해 본 뒤에 보니 다친 곳은 없어 안심을 했다. 그러나 이원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사소가 당황해하는데 아범제는 오히려 웃기만 했다. 「이 까불이 아가씨. 만약 내 딸이라면 한 차례 실컷 두들견 패겠다. 그녀가 그때까지도 그럴싸하게 꾸미며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정신을 잃었다면 내가 채찍으로 열 번 때려도 일어나지 못할 게요.」 당나귀를 몰던 채찍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후려쳤다. 원사소가 거칠게 굴지 말라고 말리려고 하는데 이원지는 또 맞을까 무서워 (아!)소리를 내며 두 눈을 떴다. 아범제는 득의양양해 웃었다. '내 채찍이 당신의 어죽잖은 치료법보다 몇 배나 고명하지 않은가. 한 번 때리니 정신을 차리는군.」 (텁석부리 솜씨가 대단하단 말이야.) 원사소가 이런 생각을 하며 몸을 숙이고 이원지를 향해 물었다. '다친 데는 없나? 그놈은 어디로 갔지? '제가 그놈에게 잡혀 무서워서 죽을 뻔했어요. 어젯밤 그놈이 잠들어 있을 때 몰래 달아났지요.」 이원지의 말에 원사소가 물었다. 「그놈이 어디에 있나? 빨리 우리를 데리고 찾아가세.」 「좋아요.」 이원지가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며 비틀거리자 원사소가 그녀를 부축했다. '당신들 두 사람이나 가시게. 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범제의 말에 원사소가 눈을 부라렸다. '털석부리, 무서운 게로군. 좋아, 자네가 없어도 내 그놈쯤은 상대할 수 있네.」 두사람이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육비청,진정덕,진가락, 문태래 등이 각처로 나뉘어 찾다가 계속 몰려들었다. 아범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말도 꺼내지 않고 그들이 분분히 의논하는 말만 들으며 미소를 날렸다. 장진과 심연은 고금표와 합합태를 압송하며 먼 곳에 앉아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원사소와 이원지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반기는 가운데 육비청과 낙빙이 달려들며 이원지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원사소가 아범제를 바라보았다. 「텁석부리, 자네만 혼자 수지맞았네. 나만 공연히 헛걸음 쳤지. 길을 몰라 우리 두 사람은 왔다갔다하다가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 했네. 사람들은 장소중을 잡지 못하면 절대로 돌아가지 말자고 상의했다. 그러나 이 미궁의 도로가 이토록 복잡하니 어떻게 그자를 찾아 낸단 말인가. 서천굉과 곽청동이 비록 꾀가 많다고는 하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천굉이 말을 꺼냈다. 「만약 맹견 두 마리가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 집에 맹견이 있지만 너무 멀어서 소용이 있나.」 진정덕이 이렇게 말하는 사이 서천굉은 아범제의 입가에 미소가 맴도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갔다. 「저희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께서 감히 가르쳐 주십시오.」 아범제가 여어동을 가리키며 웃었다. 「밝은 길은 저 사람에게 있는데, 왜 저 사람에게 물어 보지 않나? 여어동은 어리둥절했다. 「저요? 아범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앙천대소를 한 뒤에 당나귀에 올라 타고 표연히 가 버리는 것이었다. 서천굉은 처음에 그 노인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원지의 말과 행동에 이상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이 일이 그녀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슬그머니 낙빙에게 가서 말을 했다. 낙빙이 생각해 보아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물 한 사발과 구운 양고기 한 덩어리를 가지고 와 이원지에게 주며 말을 꺼냈다. '정말 재주가 대단해요. 어떻게 그 못된 놈의 독수에서 빠져 나왔지요? 「그때 저는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어어요. 죽자하고 달렸지요. 그놈에게 잡힐까봐 무서워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길도 잘 몰랐어요. 정말 하늘이 도와 주셨지요. 이렇게 나와 여러분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낙빙이 추궁을 할까봐 그녀가 먼저 수다를 떨어 말을 막아 버렸다. 낙빙은 원래 그녀가 정말 장소중이 숨은 장소를 알까 모를까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빈틈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자 확신이 생겼다. (이 소저는 어지간히 교활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잘 좀 생각해 봐요. 온 길은 틀림없이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이원지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만약 혼비백산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전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이 소저의 고민을 내가 잘 알아요. 다만 이 일을 도와만 준다면 모두들 함께 아가씨의 소원을 풀어 주도록 힘쓸께요. 낙빙은 다른 사람이 들을까 염려스럽다는 듯 낮은 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이원지는 얼굴을 붉히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차라리 장소중의 손에 죽는 편이 훨씬 나은걸요.」 낙빙은 그녀가 그래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나오자 자기로서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 「피곤한 모양이니 물 좀 마시고 쉬도록 해요.」 이원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낙빙은 여어동을 한쪽으로 끌고 가 조용히 말을 나누었다. 여어동은 처음에 난색을 보이다가 뒤에 이를 꽉 물고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은사님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응하겠습니다.」 이원지는 눈을 꼭 감은 채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참 뒤에 여어동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꺼냈다. '사매, 몇 차례나 내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내 어찌 고마움을 모르리오. 그러나 한 가지 일만 더 도와 주셔야겠어요.」 여어동이 이렇게 말하며 절까지 했다. 「아이구, 여 사가님, 무엇 때문에 저에게 절까지 하세요? 우리는 동문인데 내게 시킬 일이 있으면 분부만 하면 되잖아요. 여어동은 그녀의 남 말하는 듯한 말투를 들었지만 그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간악한 장소중이 내 은사님을 살해했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아야겠는데 누구든지 나를 돕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평생 그를 위해 소나 말이 되어 보답할 것입니다.」 이원지는 이 말을 듣자 화가 났다. (만약 네가 나를 아내로 맞으면 평생 소나 말처럼 괴롭다 이거지?) 이원지가 고개를 돌리는데 표정이 서릿발과 같았다. 「눈앞에 이렇게 대단한 영웅 협객이 있고 또 당신의 무슨 총타주인가 타주인가까지 있는데 왜 그분들께 부탁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도중 계속 나를 피하기만 했잖아요? 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아서입니까?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돕습니까? 빨리 비켜 나세요. 비켜 나지 않으면 욕을 퍼부을 거예요.」 사람들은 장소중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상의하면서 계속 낙빙,여어동, 이원지 세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원지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벌컥 화를 내는게 보였다. 또 여어동이 고개를 떨군 채 풀이 죽어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서천굉과 낙빙은 여어동이 야단맞는 것을 보고 바라다보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진가락을 한쪽으로 끌고 가 나지막한 소리로 이 일을 상의했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 육 선배님께 부탁해서 그녀를 설득시키도록 합시다. 그녀가 사부님의 말씀이야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심연과 장진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고금표가 곽청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진가락이 깜짝 놀라 달려갔지만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위춘화가 달려들며 막았지만 고금표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고금표가 곽청동을 향해 덮치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를 죽여라! 곽청동은 놀랍고도 화가 나 장검을 들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을 내밀었다. 푹 하는 소리를 내며 장검이 가슴에 박혔다. 곽청동이 장검을 뽑자 그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그녀의 노란 옷을 적셨다.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는 고금표가 벌써 쓰러진 뒤였다. 합합태가 엎드려 지혈을 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워낙 샘물처럼 뿜어 나오는 피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합합태는 호흡이 약해져 가는 고금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둘째, 뭐 남겨 둘 말이라도 있소? 「저 여자의 손에 입이라도 맞출 수 있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소.」 안간힘을 쓰며 곽청동을 멀거니 바라다보았다. 「아가씨, 이제 죽을 사람이니 불쌍히 여겨-""'~ 합합태의 간청에 곽청동은 아무 말 없이 창백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고금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고 죽었다. 합합태는 눈물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 곽청동의 등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여자가 너무 지독하오. 죽인 것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손에 입을 한번 맞춘다 해서 뭐 그리 큰일날 것 있소?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입 닥치지 못할까. 장진이 호통을 쳤지만 합합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장진이 합합태를 때리려 하자 여어동이 말렸다. 육비청이 나섰다. 「자네들 초문기 초 삼야는 내가 죽였네. 그 뒤의 분규는 이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이야. 관동 육 형제 가운데 이제 자네 하나만 남았어. 우리는 모두 자네의 위인됨이 정직해서 죽일 마음이 없으니 가도록 하게. 일후 만약 복수를 하려거든 나만 찾아오면 돼네.」 합합태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금표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여어동이 물주머니와 비상 식량이 있는 부대를 말 위에 붙들어 맨 뒤에 그 말을 끌고 나왔다. 「합 형, 나는 합 형이 훌륭한 사나이라 존경하오. 이 말을 타고 가시오.」 합합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금표의 시체를 말 위에 올려 놓았다. 여어동이 물주머니에서 한 그룻의 물을 따라 자기가 반을 마시고 합합태에게 넘겨 주었다. 「물을 술로 삼아 이렇게 작별하십시다.」 합합태가 고개를 젖히고 그 물을 받아 마셨다. 여어동이 금피리를 꺼냈다. 그 금피리는 장소중에 의해 반 토막이 잘려 나가 피리 안에 있던 단전은 다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불 수는 있었다. 그래서 구멍을 눌러가며 한 곡을 뽑았다. 합합태가 들어 보니 몽골 가락이었다. 여어동이 한 곡을 끝내자 품속에서 호각(號角)을 꺼내 답례로 불었다. 원래 그날 합합태가 맹진의 황하 가운데서 호각을 불 때, 여어동은 그 곡조를 기억해 두었었다. 지금 그 곡조를 불어 환송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의 이별하는 장면을 묵묵히 바라다보았다. 한 곡을 끝낸 합합태가 호각을 챙겨 넣은 뒤에 머리도 돌리지 않고서 말에 올라타고는 가 버렸다. 낙빙은 합합태와 여어동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이원지를 향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저들 두 사람은 훌륭한 남자 대장부야.」 「그런가요? 이원지가 반문 비슷하게 대답을 했다. 「왜 그 사람을 도와 주지 않아요? 낙빙의 말에 이원지가 한숨을 쉬었다. 「도울 수만 있다면 돕겠어요.」 낙빙이 웃었다. 「참된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요? 말을 하려 하지 않다가 육 사백께서 나서신다면 아무래도 거북할 텐데.」 「제가 길을 모르는 것은 그만두고, 안다 하더라도 제가 말하기 싫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자고로 여자는 삼종사덕해야 한다지만, 이 삼종 가운데 사부님을 쫓으란 말은 없지 않습니까? 낙빙이 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칼 쓰는 방법과 물건 훔치는 방법만 가르쳐 주셨지, 공자의 말씀은 한마디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답니다. 삼종사덕이란 무엇인지 내게 말을 해 줘요.」 '사덕이란, 마음씨, 말씨 ,솜씨 ,맵시인데, 여자보고 이 네 가지 덕을 가지고 살림을 잘하라는 것이에요.」 '다른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맵시만은 타고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빠, 엄마가 밉게 낳아 놓으면 그걸 어떻게 하나요? 그럼, 삼종은 또 뭔가요? 낙빙이 웃으며 또 물었다. 「알면서 공연히 그러시네. 대답하지 않겠어요.」 육비청이 나섰다. '삼종이란 예의에서 나온 것인데, 어려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쫓으란 뜻이지요. 이것은 그들 관가 사람들이나 따질 일이지 우리 강호의 남녀들은 이걸 그렇게 일리리 따질 수는 없지요.」 '어려서는 아버지를 쫓으란 말은 옳은 말이군요. 그러나 남편에게 쫓느냐, 안 쫓느냐 하는 문제는 남편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쫓으란 말은 말도 안되요. 만약 남편이 죽었을 때 아들이 겨우 세 살인데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지도 말란 말인가요? 낙빙의 항의에 육비청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저의 이 제자가 정말 얄궂고 괴팍한 성미인데, 그녀가 왜 길을 안내하려 하지 않는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아버지께서 안내하라면 순종할까요? 하지만 이 군문께서 멀리 항주에 계시니 소용이 없겠지요. 또 여기 계신다 하더라도 그분이 우리 일을 도우시겠어요? 이제 두번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요.」 「두번째 방법이라니, 남편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지금 당장이라도 남편을 정해 주지요. 남편이 길을 안내하라면 꼼짝없이 안내하겠지요.」 낙빙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육비청은 그녀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제자의 속마음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고, 또 사질인 여어동도 어울릴 만한 상대라 본래 큰일을 끝낸 뒤에 이 일을 주선하려고 했었다. 이제 상황을 보건대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웃었다. 「삼종이니 사덕이니 한참 떠든 까닭이 여기 있었군요. 그것도 모르고 남의 다리만 긁었네.」 그래서 두 사람은 진가락과 상의를 한 뒤에 다시 여어동을 불러 결정을 내렸다. 원사소는 신랑 편에, 천산쌍응은 신부 편에서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이때 원사소와 천산쌍웅은 산 위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다보며 장소중이 숨은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에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육비청은 그들을 불러 내려 여어동과 이원지의 일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원사소가 껄껄 웃었다. 「육 형, 정말 훌륭한 제자를 두셨군요. 우리의 모든 일이 그 아가씨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 사람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원지 앞으로 갔다. 육비청이 말을 꺼냈다. 「지야, 나와 네가 여러 해 동안 사제로 지내 그 정이 부녀와 같구나. 네 어린 여자의 몸으로 밖에 나와 있으니 나는 모든 것이 걱정이다. 또 아버님께서도 여기 계시질 않으니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버님 대신 네 신랑감을 구해 주마.」 이원지는 머리를 파묻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육비청이 말을 이었다. 「네 여 사가는 마 사백께서 살해되신 후부터 당연히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한다. 너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서로 의지함으로써 내 짐을 덜어 주어야겠다.」 이 모든 일을 그녀는 예견하고 있었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하자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파묻었다. 「아버지와 사부께서 하시는 일이라 저는 모르겠군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빠른 장진이 참다 못해 나섰다. 「아니, 싫단 말인가? 천목산에 있을 때 모두들 아가씨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더니, 원래 그 사람 있는 곳에 가 숨어 있을 줄, 위춘화가 왼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육비청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 네 여 사가를 오랫동안 집 안에 머물게 하였던 것도 다 사위 삼을 생각이 있으셔서 그랬던 것이야. 우리가 여기서 결정을 한 뒤에 장래 아버님께 말씀드려도 아버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이원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낙빙이 나섰다. 「됐어요, 됐어. 이 소저가 대답을 했어요. 십사제, 무슨 선물을 하겠어요? 여어동이 몸을 뒤졌지만 몇 푼의 동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난처해 있는데 갑자기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장소중에 의해 부러져 나간 반 토막의 금피리였다. 일후 금은방에 가서 다시 붙여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사숙님, 제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하지만 이 피리는 순금이랍니다.」 육비청이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군. 장래 자네들의 혼인날에 온전한 금피리로 만들면 되겠군.」 군웅들이 두 사람을 향해 축하의 인사를 했다. 이원지가 받으려 하지 않자, 낙빙이 억지로 반 토막의 금피리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며 웃었다. 「답례로 무엇을 내놓으시겠습니까? 이원지는 흐뭇한 마음에 표정까지 환해져 있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지야, 네가 쓰는 암기도 순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육비청의 말에 낙빙이 손뼉을 쳤다. 「좋아요.」 그녀의 손에서 암기 주머니를 뺏어다가 10여 개의 부용금침을 꺼내 여어동에게 주었다. 「천생연분임을 모르고 있었군요. 진가락도 웃으며 축하를 했다. 향향 공주는 모두들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고 진가락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진가락이 설명을 해 주자, 향향 공주도 반기며 한 손으로 진가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언니를 잡고 나와 자기가 끼고 있던 백옥 반지를 빼내 이원지에게 끼워 주었다. 「우리 세 사람이 선물로 드려요. 정말 축하해요.」 곽청동은 순간적으로 속이 상했다. (네 만약 남장만 하지 않았더라도 일이 이 지경으로는...) 진가락이 웃었다. 「우리가 만약 옥궁에서 옥도와 옥검을 몇 자루 가지고 나왔더라면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곽청동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사소와 천산쌍응은 벌써 곽청동에게 물어, 세 사람이 이리 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함께 옥궁에 들어갔던 경위를 알고 있었다. 또 세 사람이 서로 친밀한 것도 보았다. 진가락이 결코 배은망덕하여 옛날 좋아하던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곽청동도 자기 동생에 대하여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하여 세 사람 모두 마음이 즐거웠다. 천산쌍응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날 두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로군. 만약 죽였더라면 우리들의 제자까지도 .) 그뒤 어떻게 되었을까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약혼에 대한 축하의 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피했다. 여어동은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고 얼른 이원지에게 말했다. 「사매, 장소중 그놈 어디 있소? 이원지는 그가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대뜸 묻는 말이 장소중에 대한 것이라 몹시 실망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여어동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며 울었다. '당년 우리 집안이 망해 혼자 살 수 없게 되자, 사부님이 불쌍히 여겨 나를 거두어 길러 주시고 무예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은사의 은혜에 보답도 하지 못했는데 장소중에 의해 살해되셨습니다. 사매, 내게 사람 노릇 할 수 있도록 밝은 길을 가르쳐 주시오.」 이원지는 너무나 뜻밖에도 그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리자 당황했다. 그를 부축해 일으키고 손수건을 꺼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빨리 눈물을 닦으세요. 내가 모시고 가면 될 것 아니에요. 이때 갑자기 화다닥 소리를 내며 낙빙이 산 뒤에서 나타나 손뼉을 치며 놀렸다. 「수재님, 부끄럽지도 않으신가. 벌써 마누라가 무서워 무릎 꿇고 애걸복걸하다니 . 이원지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달아나 버렸다. 「빨리 쫓아가요. 낙빙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자 여어동이 즉시 알아차리고 쫓아갔다. 낙빙이 여러 사람을 불러 함께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장소중은 아무리 기다려도 이원지가 돌아오지 않자, 혼자 비상 식량을 꺼내 먹었다. 위험에서 벗어난 후, 어떻게 지원자를 소집해 홍화회를 대파시킬까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또 이원지가 제독의 딸이요, 미모인데다 자기는 장년이 되었어도 아직 미혼이니 만약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부귀영화의 전도에 크게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여기서부터 항주까지 가자면 먼 길이니 가는 도중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 보자는 생각도 했다. 제멋대로 즐거운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앞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이원지가 웃으며 돌아온 것이다. 장소중은 반기며 맞으러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원지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자기를 향해 덮쳐 들었다. 장소중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짝 피하며 좌장을 발운견일으로 펴 옆으로 쳤다. 그 사람이 그의 손바닥 밑으로 빠져 나가며 오른손에 든 부러진 피리로 찌르고, 왼손의 두 손가락을 펴 자기의 가슴을 노렸다. 장소중은 그가 바로 마진의 제자인 여어동임을 알아보자 마음이 뜨끔했다. 우장의 백로횡강으로 막고, 왼손으로 반격을 했다. 그가 피하자 오른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잡아 큰소리를 지르며 바위를 향해 집어 던졌다. 이원지가 깜짝 놀라 대들어 안았다. 그러나 장소중이 워낙 힘차게 집어 던져 그녀도 함께 끌려갔다. 갑자기 누군가가 쌍장으로 막고 밀었다. 그녀와 여어동이 함께 땅바닥에 넘어졌다. 비록 뜻밖의 일에 당황했지만 다행히 부상은 입지 않았다. 두 사람이 뛰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육비청이 구해 주었음을 알았다. 「사매, 또 한 번 구해 주셔서 고맙소.」 여어동이 말하자 이원지가 하얗게 눈을 흘겼다. 「아직도 내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장소중은 강적이 동시에 나타난 것을 보고 몸을 돌이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런데 쉭쉭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벌써 자기 옆을 스치고 지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원사소와 진정덕이었다. 그런데 등뒤에서 육비청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장가야, 무얼 기다리고 있나? 우리와 같이 가자. 장소중은 앞이 캄캄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을 내려뜨린 채 걸어 나갔다. 육비청 ,진가락,문태래,곽청동 등이 앞에 서고, 원사소,진정덕,관명매 등이 뒤에 선 채 그를 가운데 두고 걸어 나갔다. 장소중은 본래 이원지가 조심하지 않고 있다가 적에게 발각되어 사람들이 슬그머니 쫓아온 것으로 알았다. 재수 없다고 포기한 채 쫓아가다 보니 앞에 있는 이원지가 낙빙과 더불어 환한 얼굴로 말을 나누는 것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 가슴이 터질 듯 화가 치밀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원래 저 계집년이 나를 팔아먹었구나. 사람들은 이 원흥을 잡아 더할 수 없이 기뻤다. 해가 서산에 질 무렵에는 벌써 미궁을 나왔다. 진가락이 점혈주색을 꺼내 들고 장진과 심연을 바라보았다. 「저놈을 뒤로 묶으시오. 장진이 주색을 받았다. 장소중이 갑자기 대갈일성 달려 나가며 왼손을 뻗어 이원지의 팔을 나꿔채고 응벽검을 뺏은 뒤, 우장을 백홍관일로 해서 이원지의 등을 힘껏 가격했다. 이원지가 급히 몸을 옆으로 뺐지만 피할틈이 없었다. 정통으로 왼쪽 팔을 맞아 우지끈 팔이 부러졌다 장소중이 두번째 가격을 했다. 육비청은 그가 응벽검을 뺏을 때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일 장을 가격할 때는 미처 구할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바람처럼 대들어 일 장을 날려 그의 태양혈을 후려쳤다. 장소중이 우장을 들어 막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쌍장이 맞고 각자 몇 발짝씩 물러섰다. 두 사람은 사문에서 함께 무예를 익힌 이래 20여 년 동안 대련을 한 적이 없었다. 각자 나름대로 노력을 하다가 이제 쌍장이 부닥치는 순간, 상대방의 공력이 심오하여 사문에 있을 때와는 크게 달라져 있음을 알았다. 이원지는 중상을 입고 땅에 떨어졌다. 낙빙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지만 그녀는 지독한 통증으로 정신을 잃었다. 원사소가 환약 한 알을 꺼내 그녀의 입 안에 집어 넣었다. 군웅들은 장소중의 이와 같은 발악을 보고 화를 내며 그를 포위했다. 옹정의 편지 장소중은 생각했다. (사람마다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나 화수판관만은 영웅답게 죽어야 해. 응벽검을 가슴에 댄 채 거만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들 하나씩 덤비려오, 아니면 순서대로 덤비겠소? 내가 보기에는 함께 덤벼드는 것이 그래도 좋겠소. 진정덕이 화를 냈다. 「무슨 재주가 있기에 감히 큰소리를 치느냐? 어디 나하고 한번 해 보자.」 그러자 문태래가 나섰다. 「진 영감님, 이 간사한 녀석이 저를 너무나 괴롭혔습니다. 제가 먼저 나서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여어동이 아니라고 나섰다. 「저자가 은사님을 살해했습니다. 저의 재주 비록 저자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제가 나서야만 합니다. 사가께서는 제가 당하지 못할 때 나서십시오.」 사람들은 뼈에 사무치도록 그를 미워하기 때문에 서로 앞을 다투었다. 「우리, 제비를 뽑지요.」 진가락이 제안했다. 「저자는 내 적수가 아니니 나는 그만두지요. 원사소가 말했다. '우리도 저자의 적수가 아닙니다. 저와 넷째형수,구제,십제, 십사제,십오제가 함께 제비를 뽑겠습니다. 우리 여섯 사람이 함께 저자와 싸우지요.」 서천굉이 이렇게 말했다. '진 당가, 우리 항주에 있을 때 무예로 대결하자고 약속한 바 있는데 이 약속을 지킬 거요, 말 거요? 장소중의 말이었다. 진가락은 그가 자기에게 도전함을 알았다. '옳소, 지난번 사자봉에서 당신이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3개월 뒤에 대결하자고 연기했으니 이제 그 약속을 지킵시다.」 「그러면 내가 먼저 진 당가와 대결을 할 테니 다른 분은 좀 양보하심이 어떻겠소? 장소중의 말이었다. 그는 진가락과 여러 차례 대결을 했기 때문에 그의 무공이 자기에 비해 한 수 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를 이용해 혹시 이 사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잡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홍화회의 큰 두목을 때려 죽일 수만 있다면 자기가 죽어도 밑질 것 없다고 생각했다. 서천굉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너 같은 간사한 녀석을 잡아 놓고 만약 우리 총타주님이 직접 나서신다면 우리 홍화회의 여러 형제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구제,십제,십사제,십오제 우리 같이 대듭시다. 위춘화,장진,여어동,심연이 두 발짝씩 앞으로 나섰다. 장소중이 껄껄 웃었다. 「나는 홍화회가 비록 반역도배이지만 그래도 강호상의 도의만은 아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결국 신의도 모르는 도둑들이었구나. 진가락이 서천굉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칠가, 저자가 나와 승패를 겨루지 않고는 죽어도 승복을 하지 않을 것이오. 당신이 어떤 간사한 꾀를 써서라도 오늘 달아나려고 한다면 그런 망상은 일찌감치 버리고 대드시오. 장소중이 응벽검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도 총타주가 좀 낫군. 병기를 꺼내시오. 「병기를 써서 이겨서야 무슨 영웅이라 하겠소? 나는 맨손으로 대결하리다.」 장소중은 매우 기뻤다. 이와 같이 좋은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다. 「만약 내가 응벽검을 써서도 당신의 맨손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이 나설 것도 없이 내 당장 자결을 하리다. 허나 내가 당신을 이긴다면 어찌하겠소? 「그야 물론 다른 선배님이나 형제들이 나설 것이오. 당신은 내가 (그럼 보내드리지) 하는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러지만 어림없는 수작이오. 오늘에 이르러서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죄악이 극에 달해 천벌을 받을 때가 되었음을 모르오? 장소중이 응벽검을 빼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이 장모, 삼사 문제를 초월한 지 오래오.」 「항주 제독부의 지하 감옥에서 문 사야와 내가 당신을 사로잡아 놓고도 죽이지 않았으며, 사자봉과 조혜의 대영 밖에서도 두 차례나 당신을 용서해 주었소. 그리고 또 일전에도 이리 례 가운데서 당신의 생명을 구해 주었소. 홍화회가 그래도 당신에게는 하느라고 했소. 그런데 오늘 죽는 마당에서도 뉘우치기는커녕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니 오늘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오. 진가락의 말이었다. 「이제 그만 하고 대드시오. 나도 당신에게 4초를 양보하며 반격하지 않으면 그만이오.」 「좋소. 진가락이 몸을 날리며 주먹을 두 번 휘둘러 얼굴을 후려쳤다. 장소중이 몸을 숙이고 피하면서도 자기가 말한 대로 반격을 하지 않았다. 진가락이 오른발로 옆차기를 하자 장소중이 펄쩍 뛰었다. 그 틈을 이용해 갑자기 왼다리를 원앙연환으로 하여 다시 한 번 옆차기를 했다. 일반 전술에 의한다면 상대방이 뛰어올랐을 때 계속해서 그를 공격하면 몸이 허공에 떠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진가락의 옆차기는 먼저 그의 다리 아래 허공을 치고, 다시 적이 땅으로 내려왔을 때 얻어맞기 알맞은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백화착권 가운데의 정교한 초술로, 적이 예측하기 어려웠다. 원사소는 사랑하는 제자가 자기가 창안한 전술을 교묘하게 이용하자 몹시 흐뭇했다. 「어떻소? 고개를 돌려 대견스럽다는 듯이 관명매를 향해 물었다. 「과연 보통이 아니오.」 진정덕이 말했다. 장소중은 진가락이 괴상하게 공격하여 피할 겨를이 없자, 어쩔수 없이 응벽검으로 두병남지의 자세를 펴 그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진가락이 다리를 거두어들이며 피했다. 그러자 장진이 욕을 했다. 「염치 없는 놈 같으니라구 4초를 공격하는 동안 반격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왜 반격을 해? 장소중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응벽검을 휘둘렀다. 차디찬 바람이 공기를 갈으며 진가락의 좌우를 연속해서 찔렀다. 육비청은 속으로 놀랐다. (이 녀석의 검법이 정말 대단하구나. 당년 사부님의 기력이 왕성할 때도 이렇게 재빠르지는 못했는데.) 장검을 손에 든 채 진가락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즉시 나서서 구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갈수록 더욱 치열하게 싸웠다. 진가락의 그림자가 검광 가운데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유운검술에 정통한 장소중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옆에서 여어동과 낙빙은 이원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 다만 팔과 가슴에 상당한 진통이 왔지만 여어동이 자기를 부축하고 서 있는 것을 확인하자 기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많이 아파요? 이따가 육 사숙님보고 접골을 해 달라고 할 테니 조금만 더 참아요. 여어동의 말에 이원지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향향 공주가 언니의 손을 잡고 물었다. 「왜 저분은 병기를 쓰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편 사람이 많으니 걱정할 것 없어.」 곽청동의 말이었다. 심연은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달려들어 돕고 싶기는 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 답답해 곽청동을 향해 물었다. 「아가씨, 우리 도련님 위험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지요. 곽청동은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눈을 한 번 흘긴 뒤에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심연은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두 눈을 진가락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문태래는 호랑이 같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응벽검의 끝만 주시하고 있었다. 위춘화의 쌍구는 끝이 벌써 잘려 나갔지만 여전히 그것을 꽉 잡고 있었다. 온몸이 마치 시위를 당길 때의 당긴 화살과 같았다. 낙빙은 3개의 비도를 손에 쥔 채 눈초리는 장소중의 등을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이원지가 다시 눈을 뜨고는 갑자기 동쪽을 가리키며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여어동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앞에 아름답고 이상한 경치가 나타나 있었다. 먼 곳에 파란 호수가 있고 물결이 출렁거리는데, 호수 옆에 하얀 탑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건물이 즐비한 커다란 성이었다. 여어동은 순간 깜짝 놀랐지만 이내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라는 것을 알았다. 경치가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 모두가 환상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관전을 하기에 바빠 미처 그 신기루를 보지 못했다. 「저게 뭐예요? 우리가 항주로 돌아왔나요? 이원지가 물었다. '저것은 태양 광선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환상이오. 눈을 감고 쉬시오. 여어동이 낮은 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아니에요, 저 탑은 항주에 있는 뇌봉탑이에요. 나와 아빠가 놀러 갔던 곳이에요. 우리 아빠는 어디 계시죠? 여어동이 그녀와의 혼사에 응낙을 한 것은 본래 억지에 의해서였다. 은사의 복수를 위해 전연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녀가 중상을 입어 정신이 혼미해진 것을 보자 가련한 생각이 일어나 가볍게 그녀의 팔을 토닥거렸다. 「우리 곧 돌아갑시다. 가서 함께 아버님을 뵙지요.」 이원지가 입가에 가냘픈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갑자기 또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여어동은 혈색 하나 없이 그녀가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신의 여 사가요. 오늘 우리가 약혼을 했으니 앞으로는 다정하게 대하리다.」 이원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마음속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요. 나를 데리고 아버지께로 가요. 죽더라도 아버지를 뵙고 죽어야겠어요.」 먼 곳의 신기루를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건 서호로군요. 우리 아빠는 서호의 제독이신데 아빠를----- 우리 아빠를 아시나요? 여어동은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그녀가 몇 차례나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했다. 그녀가 자기를 그렇게나 좋아하는데도 자기는 오히려 차디차게만 대했으니, 만약 그녀가 부상으로 인하여 죽기라도 한다면 자기는 대체 어찌해야만 옳단 말인가? 그녀를 품안에 끌어안고 이렇게 속삭였다. 「내 정말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은 죽지 않아요.」 이원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었다. 公생! 죽지 않는다고 빨리 말을 하시오.」 이원지는 더욱 가슴이 아파 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장소중의 일장이 너무나 강렬해 그녀의 팔이 부러졌을 뿐만 아니라 가슴은 더욱 아팠던 것이다. 이때 장소중과 진가락은 엎치락뒤치락 1백여 초 이상을 싸웠다. 진가락은 처음에 백화착권의 변초를 맹렬하게 썼다. 장소중은 강적의 감시 아래 기가 죽어 있었다. 수중에 병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용감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진가락의 복잡하고도 괴상한 변초에 대응하면서도 틈만 생기면 그를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또 육비청,낙빙 ,곽청동 등이 모두 수중에 암기를 들고 있는 것 같아 방비를 하며 헛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쪽에도 신경을 썼기 때문에 막상막하로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수 초를 대결하면서 장소중은 이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구나. 이 진가 녀석을 이긴다 하더라도 저들이 계속 대든다면, 나를 때려 죽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이제는 백화착권이 변화무쌍하게 나와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처음처럼 두렵지 않았다. 대담해진 그의 검법이 갑자기 변했다. 그의 유운검술은 쓸수록 가속화되어 공격할 때마다 상대의 급소를 위협했다. 즉시 수세에서 공세로 나오자 진가락이 계속 뒤로 밀렸다. 장소중의 응벽검이 경경은하의 자세로 나오며 어지럽게 찌르고 치는 것이, 하늘의 뭇별이 쏟아져 내려오는 듯했다. 진가락은 급급한 방어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장외로 뛰어나왔다. 이 급박한 공세를 우선 피한 뒤에 재차 공격을 할 태세였는데, 이때 위춘화와 장진이 장소중을 향해 덤벼들었다. 장소중은 응벽검의 경경은하를 멈추지 않고 계속 썼다. 위춘화와 장진 두 사람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문태래가 대갈일성 덤벼들려고 하는데 진가락이 벌써 그를 스치고 나가 양장을 가볍게 뻗어 장소중의 얼굴을 쳤다. 이 양장은 보기에 아무 위력도 없어 보였으나 공교롭기 짝이 없었다. 상대가 머리를 숙이거나 검을 들어 막거나 간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철썩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장소중이 따귀 두 대를 맞았다. 장소중은 놀랍고도 화가 나 응벽검을 들고 세 발짝 뒤로 피한 뒤 진가락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은 진가락이 열세에 밀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가볍게 대들어 그의 따귀를 두 번이나 때리자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위춘화와 장진 두 사람이 이 틈을 타고 물러났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상을 입지 않은 것이었다. 낙빙과 심연이 각기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진가락이 여어동을 바라보았다. 「십사제, 수고스럽지만 피리를 한 곡조 부러 주오.」 여어동은 얼굴을 붉히며 이원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피리를 입에 댔다. 「무슨 곡을 불어 드릴까요? 진가락이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패왕이 용감하기는 했지만 결국 오강(烏江)에서 목숨을 잃었소. 십면매복을 부시오.」 여어동은 그의 의도를 몰랐지만 총타주의 명령이라 정신을 가다듬고 불기 시작했다. 금피리는 아무래도 대나무 피리보다는 음색이 원래가 격렬했다. 이 곡조는 더욱이 드높은 음색이라 불자마자 은은히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진가락이 쌍장을 교차시키고 말했다. 「덤비시오. 몸을 돌리며 헛발길질을 하는데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장소중은 그의 등에 헛점이 보이자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장검을 뻗어 찔렀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가운데 진가락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왼손으로 장소중의 댕기를 잡아 끌었다. 순간 여어동이 부는 피리 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장소중의 그 큰 댕기가 응벽검에 닿자마자 잘려 나갔다. 진가락의 오른손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장소중의 어깨를 맞췄다. 그는 계속해서 세 차례나 얻어맞은 셈이다. 비록 장력이 매섭지 않아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피하지도 못했고 또 상대방의 솜씨도 똑똑히 보지 못했다. 게다가 댕기까지 잘렸으니 보통 큰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그도 내가의 고수라, 패하기는 했지만 흐트러짐이 없이 뒤로 물러나 상대방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가락은 박자에 맞추어 서서히 공격하며 여유있게 덤벼들었다. 곽청동은 너무나 좋아 향향 공주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걸 봐라. 저것이 바로 굴 속에서 배운 무공이야. 향향 공주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정말 보기 좋군요.」 진가락이 손을 뻗어 치자 장소중이 응벽검을 들어 막고 반격을 해 두 사람은 다시 어우러져 싸웠다. 장소중은 응벽검으로 철會 같은 방어를 하다가 적이 접근만 하면 전광석화처럼 반격을 하고, 반격을 한 뒤에는 응벽검을 거두어 방어 태세를 취했다. 진정덕이 원사소를 바라보았다. 「원 형, 내 오늘에서야 원 형을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존경하게 되었소. 원 형의 제자가 저러니 저와 원 형은 정말 천양지차로군요. 그러나 원사소는 침묵을 지키며 어리둥절해 있었다. 진가락의 이 무공은 자기가 가르쳐 준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무림에서도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본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았다. 무공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진가락이 쓰고 있는 권법에 대해서는 전연 아는 바가 없었다. 그 어떤 문파나 문호와도 닮은 데가 없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가르친 것이 아니오. 또 가르칠 만큼 아는 바도 없소.」 천산쌍응은 그가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음을 알았다. 또 이것이 결코 겸양의 말 같지도 않아 속으로만 이상하게 여겼다. 여어동의 가락은 갈수록 빨라졌다. 피리 소리 가운데 칠기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북과 징 소리가 일어나는 듯했다. 진가락의 권법도 처음에는 다소 어색해 보이더니 이제 갈수록 숙달이 되는지 마지막에 와서는 행운유수와 같이 자유자재로 진격했다 후퇴했다 하며 1백여 초를 대결해 나갔다. 장소중의 전신에 땀이 흐르며 옷까지 흠뻑 젖었다. 갑자기 피리 소리가 드높아져 마치 유성이 반공에 나는 듯하더니 갑자기 장소중이 비명을 질렀다. 오른팔을 진가락의 두 손가락에 맞고 응벽검을 놓쳤다. 진가락이 양장으로 그의 어깨를 치고, 웃으며 물러섰다. 이 양장은 무한한 힘을 숨기고 있어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장소중이 고개를 숙인 채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장진이 중얼중얼 욕을 하며 장소중을 치려고 달려나가려 하자, 낙빙이 그를 붙들었다. 장소중이 비틀비틀 몇 발짝 걷다가 마침내 땅바닥에 쓰러졌다. 군웅들이 반기는 가운데 서천굉과 심연이 달려들어 그를 묶었다. 장소중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저항을 하지 못했다. 여어동이 입에서 피리를 떼고 이원지를 바라다보니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부님, 육 선배님. 우리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여어동이 이를 갈았다. '데려다 이리에게 먹입시다. 이자가 독수로 제 사부님을 살해하고 지금 또,,---또------.」 '좋아, 데려다 이리에게 먹이자. 지금 우리 그 굶주린 이리 떼가 어찌 되었나 가 봐야 하거든.」 원사소의 말이었다. 사람들은 만악의 괴수를 이렇게 처단하는 것이 그의 죄값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육비청이 이원지의 부러진 골격을 맞춰 주고 천으로 꽁꽁 붙들어 맸다. 원사소는 다시 한 알의 설삼환을 꺼내 먹인 뒤에 맥을 짚어보며 여어동을 바라다보았다. 「염려 말게 자네 아내는 죽지 않네.」 「그녀를 안아 줘요. 훨씬 빨리 나을 거예요.」 낙빙이 여어동을 놀렸다.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모래성에 들어간 이리 떼를 보러 출발했다. 도중에 원사소는 진가락에게 권법의 내력을 물었고, 진가락은 자세한 보고를 했다. 「이것은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것이지, 구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사소가 이렇게 말했다. 며칠 뒤에 사람들은 모래성에 도착했다. 성 위에 올라 이리 떼를 바라보니 이리는 낙타와 양을 다 먹어 버리고 때마침 이미 죽은 이리 시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너무나 비참한 광경에 대담한 군웅들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향향 공주는 차마 더 바라다 볼 수가 없어 성 위에서 내려가 파수를 보던 위구르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다. 여어동은 장소중을 성 위로 끌고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 「저 세상에 가 계신 은사님. 은사님의 친구들과 제자가 오늘 드디어 은사님을 위해 복수를 하게 되었나이다.」 서천굉의 손에서 단도를 받아 장소중의 손발을 묶었던 오랏줄을 끊고 발로 차 떨어뜨렸다. 이리 떼는 그의 몸이 땅바닥에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와 물고 늘어졌다. 장소중은 진가락에게 두 번 얻어맞았지만 내공의 심오함에 의지하여 모래성으로 오는 며칠 동안 쉬는 바람에 회복이 다 되어 있었다. 그가 여어동의 발길에 차여 이리 떼 속으로 떨어져 내릴 때 벌써 살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그러나 죽는 마당에서도 그냥 죽을 수는 없었다. 두 발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서 7, 8마리의 굶주린 이리가 덮쳐 들자 그는 충혈된 눈으로 두 손을 뻗어 각기 한 마리씩 이리의 목을 잡고 휘둘렀다. 순간 이리 떼가 몇 발짝씩 물러섰다. 그는 천천히 벽으로 물러나 등을 벽에 댄 채 2마리의 이리를 잡고 무당파의 쌍추의 솜씨를 쓰기 시작했다. 쉭쉭 이는 바람 소리에 이리 떼는 한순간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군웅들은 그가 죽을 것을 확신했다. 뼈에 사무치도록 그를 증오했지만 진가락과 낙빙 등 마음이 비교적 연약한 사람은 더 볼 수가 없어 성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육비청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증오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장소중이 이십사로의 파금추를 쓸 때 굶주린 이리 한 마리가 달려들며 그의 다리를 물었다. 장소중이 다리를 움츠리자 사나운 이리의 이빨이 그의 바지를 길게 찢어 놓았다. 육비청의 뇌리에는 갑자기 30여년 전의 옛 일이 떠올랐다. 그날 그와 장소중, 두 사람은 사부님을 속이고 몰래 산 아래로 내려와 사탕을 사 먹었다. 사제가 넘어지며 바지가 바위에 걸려 찢어졌었다. 장소중은 찢어진 바지도 아깝거니와 사부의 꾸중이 두려워 엉엉 울었다. 그는 계속 그를 위로하며 산으로 돌아온 뒤에 즉시 바늘을 찾아 찢어진 사제의 바지를 꾀매 주었다. 그리고 또 이 파금추의 솜씨도 직접 자기가 가르쳐 준 것임을 생각했다. 당년 장소중은 뛰어나게 총명한데다 부지런히 무예를 익혔다. 사 형제간의 정이 수족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부귀를 탐내다 이 지경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사제의 이와 같은 참상을 보자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에게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육비청은 소리를 질렀다. 「사제, 내가 구해 주지. 육비청은 이리 떼 속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의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백룡검이 눈부신 원을 그리자 이리 떼가 분분히 물러났다. 그는 장소중 옆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사제, 두려워 말게.」 장소중의 눈에서는 불이라도 뿜어 나올 것 같았다. 갑자기 손에 들었던 이리를 이리 떼를 향해 던져 버리고, 두 손으로 육비청을 껴안았다. 「어차피 죽는 마당에 동행이 있으면 더욱 좋다.」 육비청은 뜻밖의 말에 그만 백룡검을 놓치고 말았다. 장소중의 두 팔에 감긴 채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장소중이 짐승처럼 대들어 함께 죽을 속셈으로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으니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이리 떼는 두 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져 엎치락뒤치락하자 대들어 물어뜯었다. 사 형제는 각자 내가의 공력을 이용해 상대방을 위에 올려놓아 먼저 이리에게 물리도록 하려고 했다. 진가락 등은 성 아래에 있다가 성 위에서 나는 비명을 듣고 나는 듯 다시 위로 올라왔다. 이때 육비청은 호의를 베풀었다가 참담한 결과로 나타나자 기가 막혀 손발에 맥이 빠져 있는데 장소중이 금나수법으로 자기의 맥문을 틀어 잡는 바람에 꼼짝달싹을 못했다. 장소중은 왼손으로 육비청을 끌어당겨 오른손을 들어 육비청의 몸으로 자기의 몸을 가렸다.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데 문태래와 여어동이 동시에 뛰어내렸다. 문태래가 단도를 휘둘러 이리 몇 마리를 죽였다. 이리 떼가 몇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여어동은 서천굉의 손에서 받아 든 강도를 잡고 뛰어내릴 때 너무나 높아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곤두박질을 하고야 겨우 일어나 섰다. 그리고 장소중의 어깨를 겨냥하고 강도로 찔렀다. 장소중이 비명을 지르며 육비청을 안았던 팔을 풀었다. 이때 군웅들이 긴 밧줄을 내려뜨려 먼저 육비청과 여어동을 끌어올린 뒤에 다시 문태래를 잡아올렸다. 사람들은 가슴이 두근거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낙빙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의 백룡검이 아래에 있는데 아까워 어떡하지요? 「한두 달 뒤, 이리 떼가 다 죽어 버리면 그때 와서 찾아가지요.」 원사소의 말이었다. 저녁 무렵 천막을 친 뒤에 진가락은 사부에게 권륜 황제와 몇차례 만났던 경과를 보고했다. 원사소는 사연과 곡절을 듣고, 이상하다며 품속에서 노란 보자기를 꺼내 그에게 주며 말했다. 「금년 봄 자네의 의부가 상씨 형제를 보내 나에게 이 보자기를 잘 보관하라며 두 가지 중요한 물건이 있다고 하더군. 그들은 무슨 물건이란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풀어 보지 않았네. 이것이 바로 황제가 필요로 한다는 무슨 증건가 보군.」 「틀림없습니다. 의부의 유언이 있으나 제자가 풀어 보겠습니다.」 보따리를 풀자, 안에서 기름 종이로 세 번이나 싼 물건이 나타났다. 기름 종이 안에 흥목으로 짠 작은 상자가 있었다. 상자 뚜껑을 열어 보니 두 통의 편지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누렇게 바랬지만 봉투에는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진가락이 처음의 봉투 안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그 위에 두 줄의 글씨가 씌어 있었다. (세관 선생 귀하. 며칠 전 낳은 아들을 데려다 내게 보여 주어도 좋소.) 그 아래 옹저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원사소는 보고도 몰라 물었다. 「이 편지가 무슨 뜻인가? 무슨 소용이 있기에 자네 의부가 그렇게나 중요시했지? 「이것은 옹정 황제가 쓴 것입니다.」 「자네가 어떻게 아나? '제자의 집에는 청정의 황제가 쓴 편지가 많습니다. 강희,옹정,권륜의 것이 모두 다 있기 때문에 그들의 필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원사소가 웃었다. '옹정의 글씨는 그럴듯하네만, 문구는 어째 이리 조잡한가? '제자가 선부께서 올리신 상소문 가운데 결재를 한 글씨를 보았는데 어떤 것은 (알겠네) 하고 쓴 것도 있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말할 때면, 늘 (이 사람 뻔질뻔질한 얼굴이니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쓴 것도 있었습니다.」 원사소가 껄껄 웃었다. '자기 자신이 뻔질뻔질한 얼굴이니 과연 조심을 해야 할 인물이었지.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편지가 옹정이 썼다면 쓴 것이지 뭐 그리 대단할 것이 있나? '이 편지를 쓸 때는 그가 아직 황제가 아니었습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원사소가 물었다. 「그가 옹저라고 두 자만 쓴 것은 왕자 때의 저택이란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약 황제가 되었다면 선부를 선생이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원사소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진가락이 손가락을 짚으며 세월을 계산해 보았다. '옹정이 황제가 되기 전인 그때 나야 물론 태어나지 않았고, 둘째형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누나는 이때 태어났지만 편지 위에는 (며칠 전에 낳은 아들) 이렇게 씌어 있으니 음.......」 문태래가 지하실 안에서 한 말과 권륜의 여러 가지 모습이 생각났다. 「이것이 바로 좋은 증거지요.」 「어째서? 원사소가 물었다. 「옹정이 제 형님을 안아 들여 가고, 안아 내온 아이는 반대로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 아이가 바로 제 큰누님인데 뒤에 상숙의 장 각로 댁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기실 옹정이 낳은 아이는 공주였던 것입니다. 제 진짜 형님은 지금 황제가 되어 있구요. 권륜 말인가?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두번째 봉투를 뜯었다. 그는 필적을 보자마자 코끝이 시큰해 눈물을 떨구었다. 「왜 그러나? 원사소의 물음에 진가락이 흐느꼈다. 「이것은 돌아가신 제 어머님의 친필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정가! 보십시오. 오빠와 나의 인연이 금생에서 다함에 팔자 소관이 그렇게 된 것을 탓해 무엇하리까. 제가 날이면 날마다 걱정하는 바는, 우리 오빠는 기개가 호탕한 영웅으로서 나 때문에 사문의 용납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세 아들을 두었으니 하나는 깊은 궁중에 들어가 있고, 다른 하나는 사막에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날마다 조석으로 데리고 있는 아이는 둘째인데 용렬하고 미련하여 사람의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세째는 총명해 훌륭한 스승께 부탁해 놓았으니 내 비록 애지중지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자기 신세를 모른 채 엄연히 오랑캐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정가, 제게 어떤 감화를 주실는지요? 그 아이의 왼쪽 궁등이에 은홍색의 붉은 점이 있으니, 이것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저는 정신과 기력이 날로 쇠하는데 조석으로 생각나느니 모두가 어렸을 때 오빠와 같이 지내던 정경뿐입니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사 내세에는 영영토록 부부가 되십시다. 동생 조생(潮生) 올림 진가락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사부님 이 편지가,,,,,, 편지 위의 (정가)라는 사람이 혹시 제 의부가 아닙니까? '누가 아니라더냐? 그는 어렸을 때 너의 어머니와 서로 사랑했는데 뒤에 와서 하늘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이들 원앙새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그는 평생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았느니라.」 원사소의 우울한 대답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당년 무엇 때문에 의부에게 나를 데려가라 했나요? 또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의부를 친아버지처럼 대하라고 했나요? 설마,,,,,,.」 '내 비록 네 의부와는 막역한 사이였지만 그가 소림파의 법규를 어겨 사문에서 쫓겨났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일을 자기가 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묻기도 거북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나는 그가 당당한 남자 대장부임을 확신한다. 떳떳한 사람으로서 결코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넓적다리를 탁 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당년 그가 소림에서 쫓겨난 것은, 생각건대 억울한 누명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무림에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소림사로 가 장문인(掌門人)을 만나 따져 보기도 하겠다는데 하마터면 무림의 일제 풍파를 일으킬 뻔하기도 했지. 뒤에 네 의부는 모두가 자신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마땅히 죄를 받아야 한다고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말았지. 그러나 나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미안한 짓을 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소림사의 스님들 가운데 다른 어떤 얄궂은 규율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로서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까지 말하다가 뚝 멈추었다. 「사부님, 제 의부의 일을 이것밖에는 모르십니까? 「그가 사문에서 쫓겨난 뒤 몇 년 동안 은거하다가 뒤에 홍화회를 조직하고 마침내 혁혁한 사업을 했느니라.」 진가락은 자기 신상을 묻고 있는데 원사소는 당년에 우만정이 어떻게 공로를 세웠다는 말만 반복해서 했다. 진가락이 또 물었다. 「의부와 제 어머님이 무엇 때문에 제자를 집에서 떠나게 했는지 사부님은 알고 계십니까? 원사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람들을 소집해 가지고 네 의부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고 했는데 뒤에 와서 그가 갑자기 자기 잘못 때문에 그랬다고 태도를 바꿨다. 여러 사람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으니 내 체면은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냐?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일에 대해서 그 뒤로는 전연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너를 내게 보냈으니, 나는 네게 무예를 가르쳐 준 것으로 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진가락은 다시 물어 보아도 같은 결과일 것임을 알았다. (한실의 광복을 도모하는 관건은 큰형의 출신에 달려 있다. 중간에 한치의 잘못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전에 이룩한 공로조차 망치는 것이다.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나 시간이 다소 지연되는 것은 무방하다. 내 우선 복건성의 소림사로 가서 분명히 물어 보아야 하겠다. 옹정이 당시에 무엇 때문에 어린아이를 밖워치웠나? 내 큰형님은 분명 한인인데 옹정이 어째서 황위를 그에게 계승해 주었나? 거기 가서 알아보면 무슨 단서라도 찾게 되겠지.) 즉시 이와 같은 뜻을 사부에게 밝혔다. 「그렇다. 가서 자세히 물어 보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노스님이 괴상해서 말하려 들지 않을걸.」 '가서 기회를 보아 가며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겠지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나눈 뒤에 진가락이 다시 옥봉에서 배운 무공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대련을 해 증명함으로써 진가락은 먼저보다 더욱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흥이 나면 천막 밖으로 나와 대련도 하고 의견도 나누느라 날이 밝는 것조차 몰랐다. 원사소가 물었다. 「그 위구르 소녀 둘 다 인품이 훌륭하던데 너는 도대체 그중에 누구를 취하겠느냐? '한나라 때 곽거병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흉노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어찌 집을 이루랴? 제자도 같은 생각입니다. 원사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기가 있어서 좋구나. 내 쌍응에게 다시는 내가 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해야겠다.」 진가락은 득의만면해서 이렇게 말했다. '진 노선배 부부께서 제자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원사소가 껄껄 웃었다. 「그들이 너보고 새것이 좋아 옛 것을 버린다고 그러면서, 동생을 보자 언니를 버렸다는 것이야. 하하하! 진가락은 그날 밤 쌍응이 아무 말도 없이 가 버리며 모래 위에 써 놓았던 글자를 생각했다. 원래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튿날, 진가락은 군웅들에게 복건성 소림사에 가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즉시 원사소, 천산쌍응, 곽청동 자매에게 하직을 고했다. 향향 공주는 매우 섭섭해했다. 진가락도 마음속으로는 그지없이 괴로웠다. 이렇게 한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난단 말인가? 만약 하늘이 도와 큰일을 이룩하기만 한다면 장래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지만, 여의치 못하여 형제들을 중토에 묻게 된다면 다시는 이곳에 올 수 없겠지, 곽청동 역시 멀리까지 전송을 하면서도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동생을 보고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했지만 향향 공주가 언니의 말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진가락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언니를 따라 가시오. 향향 공주가 눈물을 떨구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향 공주가 다시 말을 꺼냈다. '10년을 오시지 않으年 10년을 기다릴 것이요, 평생 오시지 않으면 평생을 기다리겠습니다.」 진가락은 무슨 물건이라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더듬다가 권륜이 해당 위에서 자기에게 준 그 온옥을 찾아내 향향 공주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옥을 볼 때마다 나를 대하듯 하시오.」 향향 공주는 눈물을 삼켰다. 「저는 꼭 다시 만나 뵈어야 해요. 죽게 되더라도 다시 뵙고 죽겠어요. 진가락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상심을 하십니까? 큰일을 끝낸 뒤에는 우리 함께 북경 성 밖의 만리장성으로 놀러 갑시다.」 향향 공주가 넋을 잃고 있다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하신 말씀은 꼭 지키셔야 해요.」 '제가 언제 속인 일이 있던가요? 향향 공주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따라 오지 않았다. 진가락은 수시로 머리를 돌렸다. 두 자매의 그림자가 점점 모호해 지더니 마침내 사막의 지평선 속으로 사라졌다. 군웅들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번에 비록 장소중은 제거했지만 이원지와 위춘화,장진 세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서도 이원지의 부상이 가장 심각했다. 여어동은 원수를 갚아 마냥 기쁘기만 했다. 이원지에 대해서도 감사와 함께 연민의 정으로 거리낌없이 다정하게 보살펴 주었다. 사람들은 며칠 동안 걸어 다시 아범제의 집에 이르렀다. 그 당나귀를 타고 솥을 짊어진 괴협은 또 외출했다는 것이다. 주기는 장소중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동생의 원수를 이제야 갚았다고 좋아했다. 진가락은 서천굉에게 그녀와 함께 이곳에 머물고 있다가 아이를 낳고 몸이 회복되거든 그때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주기는 답답도 하거니와 모두들 복건의 소림사로 간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와 만날 수도 있다고 떼를 쓰며 가겠다고 우겼다. 사람들은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서천굉은 큰 수레 하나를 대절해서 아내와 이원지를 태웠다. 옥문관으로 들어오자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봄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일로 남하했다. 갈수록 날씨가 더워지자 주기는 더욱 피곤해 했지만 이원지의 상처는 크게 호전되었다. 그녀는 수레에서 내려와 말에 타고 낙빙과 더불어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끝없는 수다에 혀를 찼다. 소림사의 방문객 이날 복건 경내로 들어오니 만산에 붉은 꽃이 만발해 있고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만약 객사려가 여기에 있어 이 많은 꽃을 본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다시 며칠을 걸어 덕화성(德化城)에 도착할 무렵에는 무성한 숲속을 지나가게 되었다. 장진이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며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저쪽 나무 위에 두 발을 허공에 띄운 채 목을 맨 남자가 있었다. 장진이 그 사람의 두 다리를 얼싸안고 치켜 들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들 오세요, 빨리 . 낙빙이 두 자루의 비도를 던져 나뭇가지에 매달린 끈을 잘랐다. 장진이 그 사람을 바닥에 눕히자 육비청이 인공호흡을 해 주었다. 한참 뒤에 그 사람이 서서히 깨어 일어나다가 통곡을 했다. 그 사람의 나이는 24, 5세 정도였고 그 차림새로 보아 목수 같았다. 장진이 벌컥 화를 냈다. 이 나리가 네놈을 구해 주었는데 울기는 왜 울어? 복건성의 말은 본래가 특이했지만 이 사람은 다른 성에도 가 본 적이 있는지 반은 알아들을 만한 북경 말로 이렇게 말했다. 「나리님들, 저를 죽게 내버려두세요.」 '너 돈이 없어서 그러느냐, 아니면 억울한 일이 있어서 그러느냐? 우리가 너를 도와 주마.」 위춘화가 물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서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다시 울었다. 낙빙은 그의 목에 연꽃을 수놓은 예쁜 보자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색깔도 선명한데 튼튼한 끈으로 꼭꼭 잡아맨 것이, 죽은 뒤에라도 누가 가져갈까봐 염려스러워 그렇게 해 놓은 것 같았다. 분명 이 일이 여자와 관계 있다고 생각한 그녀가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시집을 오려 하지 않아서 그랬나요? 그 사람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는 죽는 길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저도 죽어 버리는 것이 통쾌하겠지요.」 「그 여자가 왜 죽는 길 하나밖에 없다고 하나요? 「방 대인이 금년에 나이 들었다며 고향으로 돌아와 은봉이 예쁘게 생긴것을 보고는 11번째 첩으로 삼겠다고------.」 그는 말을 하며 또 울었다. 장진은 무슨 말인지 몰라 호통을 쳤다. '뭐라고 떠드는지 못 알아듣겠다. 무슨 은봉이 어떻고 방 대인이 어쨌다고 그러는 것이냐? 낙빙이 웃었다. '은봉이라는 사람이야 물론 이 사람의 연인이지요. 웬 정이 그리도 많담. 「그 방 대인이란 사람은 어디 있느냐? 그가 은봉이라는 여자를 데려갔느냐? 장진이 또 물었다. 「덕화성 안에서 제일 큰 집이 바로 방 대인의 집입니다. 작년에 그 집에서 새 집을 지을 때 소인도 가서 일을 했는걸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오늘,,,,,, 오늘 은봉을 데려가려고 해요.....,.」 '이 못난 사람아 그 방가 녀석을 찾아가 사생결단을 낼 일이지, 이게 무슨 짓이냐? 장진이 호통을 치자 낙빙이 웃었다. 「장 십야의 재주 10분의 1만 있어도 그렇게 하게요. 다시 그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래,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그리고 무슨 재주를 가졌나? 「소인은 주아삼이라고 하는데, 목수입니다.」 주기는 이 사람의 성이 주씨란 말을 듣고 호감을 가지고 말했다. 「우리와 함께 그 방가를 찾아갑시다.」 주아삼은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천굉은 아내의 성격이 장진과 비슷해 속으로 웃었다. 네가 우리를 데리고 우선 네 집으로 가자. 그 방가가 네 은봉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책임을 지마.」 주아삼은 반신반의하며 사람들을 데리고 덕화성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 왔다. 그 은봉은 성이 포(包)씨인데 두부집을 하고 있었으며, 바로 주아삼의 옆집이었다. 문 밖에 청사초롱을 매단 것이, 경사를 치르는 것 같았다. 서천굉은 주아삼에게 은봉의 부친인 포 영감을 청해 오라고 했다. 포 영감은 수심에 찬 얼굴로 나타났다. 사위를 얻는다는 기쁜 표정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방 대인이란 사람이 금년 70여 세로, 본래는 안휘성에서 번태로 있다가 최근 낙향을 했는데, 그 지방에서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포 영감의 딸은 겨우 18세로, 어려서부터 주아삼과 서로 생각과 감정이 잘 맞아 일찍부터 흔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곧 죽을 늙은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물론 그녀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무서워 거역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장진과 주기는 당장 가서 그 방가를 죽이자고 했지만 진가락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큰일이 있으니 다른 일은 저지르지 맙시다.」 심연을 시켜 1백 냥의 은자를 꺼내 포 영감과 주아삼에게 주며 은봉을 데리고 이곳에서 달아나라고 했다. 포 영감과 주아삼은 백배 사례를 하고 짐을 챙기러 나갔다. 주기는 이때 아이를 가진 지 7개월쯤 되었을 때라, 오는 도중에도 서천굉과 낙빙이 많이 움직이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고, 술은 한 방울도 대지 못하게 하여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진가락이 또 그 방가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자 더욱 화가 나 서천굉이 딴전을 피우는 틈을 이용해 밖으로 빠져 나와 마음 내키는 대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덕화성은 본래가 큰 고을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 방가의 집 문 앞에 이르렀다. 대문으로 하인들이 들락날락하며 고기,생선, 닭,오리와 단지에 든 술을 지고 드나들었다. 주기는 술 생각이 간절해 쫓아 들어갔다. 방가네 집은 이날 하객이 성시를 이루었다. 하인들은 그녀가 대담하게 들어서자 옷은 비록 호화롭게 입지는 않았지만 소홀히 대할 수 없어 내당으로 안내하고 우선 차부터 내놓았다. 주기는 그래도 이들이 자기를 대접한다고 생각하며, 내놓은 무이의 청차와 호박씨를 까며 혼자 맛있게 먹었다. 잠시 후에 술상이 나왔다. 방가네 집에서는 비록 첩을 맞아들이는 것이었지만 방 영감 방유덕이 외지에 나가 수십 년 동안 관리를 지내다 금의환향했기에 위풍을 드러내느라 푸짐한 잔칫상을 내놓은 것이다. 주기는 그곳에 있는 아가씨들이나 부녀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혼자 술잔을 채우며 통쾌하게 마셨다. 얼마 후 방 영감이 두 아들의 부축을 받고 손님 상으로 나와 술을 권했다. 주기는 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흰 주제에 남의 젊은 딸의 신세를 망쳐 놓으려 하자 속으로 욕부터 했다. 그가 가까이 왔다. 왼쪽 뺨 위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데 그 사마귀 위에 긴 털이 몇 가닥 듬성듬성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남편이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날 그녀의 어머니가 그에게 출신을 묻자, 그는 온 집안 식구가 방가 성을 가진 부태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부태의 왼쪽 얼굴에 크고 검은 사마귀가 있다고 대답했었다. 이 자가 혹시 그 사람은 아닐까? 서천굉은 절강성 소흥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었다. '방 영감님, 소흥에서 부태를 지내신 일이 있으신가요? 방 영감은 그녀의 북방 사투리를 듣고 약간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이 부인은 낯이 익지 않은데, 이 영감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오. 소흥에서 나를 본 적이 있나요? 이 말은 바로 소흥에서 관리를 지냈다고 시인하는 말이었다. 주기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영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른 술좌석으로 옮겨 갔다. 주기는 당장 대들어 한주먹에 때려 죽임으로써 남편 대신 원수를 갚을까 했다. 몸을 움직이자마자 가슴에 통증이 오고 손발에 맥이 풀렸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이 어지간히 나를 괴롭히는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젖히고 연거푸 석 잔을 마신 뒤에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다른 여자 손님들은 이 여자의 거칠고 무례한 태도를 보고 귓속말로 소근소근 비웃었다. 주기가 주아삼의 집으로 돌아오자 얼마 뒤에 서천굉과 낙빙도 밖에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다가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그녀를 보자 안심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이 불그레한 것이 술을 마신 듯해 몇 마디 나무랄까 하는데 주기가 먼저 방 영감을 만나게 된 경의를 설명했다. 서천굉은 부모 형제가 참사를 당한 정경을 생각하며 눈에서 이글이글 불을 뿜었다. 그러나 혹시 사람을 잘못 죽일까봐 이렇게 말했다. 「내 나가서 한번 알아보겠소.」 반 시간쯤 지나자 그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총타주님, 제 원수가 확실히 이곳에 있습니다. 제가 원수를 갚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진가락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칠가의 이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하오. 그놈이 70여 세라니 우물쭈물하다가는 자연사( 自然死)를 하고 말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들 필생의 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큰일이 있으니 이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 홍화회를 의심하는 일만은 없어야 하겠소.」 여기까지 말을 하는데 포 영감이 딸과 주아삼을 데리고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두 시간만 있으면 방가네 집에서 맞으러 올텐데, 이제 보따리도 챙겼으니 재빨리 달아나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원지의 머리에 꾀가 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차라리 이 일을 저들에게 뒤집어씌우지요. 어쨌든 저들은 달아날 것이 아니예요. 「어떻게요? 여어동이 묻자 이원지가 웃었다. 「오늘 하루 신부가 되시는 거예요. 낙빙이 웃었다. 「그래도 여 사가가 신랑이 되고, 아가씨가 신부가 되는 것이 좋겠는데. 이원지는 얼굴을 붉혔다. '꼭, 다른 사람은 좋은 의견이라고 내놓았는데 농담만 하시려 해요. 「미안해, 어디 말을 해 보시지.」 이원지가 웃었다. '저이가 신부로 차리고 있다가 가마가 오면 타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모두 신행을 가는 사람으로 꾸미고 쫓아가면 돼요.」 낙빙이 손뼉을 치며 좋다고 했다. '참 좋군요. 맞절을 한 뒤, 신방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일제히 손을 쓴단 말이죠. 다른 사람은 모두 신부 집에서 꾸민 일로 알지 그 누구도 우리 홍화회를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서천굉은 이때 심사가 어지러워 아무 묘책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원지의 이 계책을 듣고는 좋다고 했다. 진가락은 위춘화와 심연에게 포씨 부녀와 주아삼을 호송하여 성 밖으로 나가 그들을 멀리 달아나게 하라고 명령했다. 다들 의복을 사다가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여어동은 여자로 분장한 것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이원지가 내놓은 의견이라 어기기가 거북했다. 게다가 칠가의 복수를 하는 마당에 다소 억울해도 할 수 없다고 체념했다. 신부의 빨간 옷과 머리가리개는 모두 기성품으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큰 발만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치마가 길다보니 잠시 가릴 수도 있었다. 신시(申時)가 되자 방가네의 가마와 신부를 맞으러 온 사람들이 도착했다. 낙빙과 이원지는 머리에 빨간 수건을 쓴 여어동을 부축해 가마 안으로 들여 보냈다. 사람들이 긴 옷 안에 각자 병기를 숨기고 방가네 집을 향해 따라갔다. 남자가 첩을 얻을 때는 그 첩이 남편과 본부인을 향해 절을 하는 법이다. 여어동은 어쩔수 없이 예쁘고 단정하게 절을 했다. 방유덕은 너무나 좋아 껄껄 웃으며 2개의 금팔찌를 꺼내 예물로 주었다. 여어동은 거침없이 받아 넣었다. 잔치가 끝나자 이어서 신방을 엿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신방으로 몰려들었다. 서천굉은 방유덕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아, 오른손으로 주머니 속의 비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손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슴 하나가 총총 방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성 총병(成總兵)과 몇 분의 손님이 대인께 축하의 예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 덕화까지 왔는가? 방유덕이 이렇게 말하며 맞으러 나갔다. 서천굉은 그 옆에서 촌보(寸步)도 떠나지 않았다. 대청에 무관 하나가 앉았고, 아랫자리에 네 사람이 있는데 내정의 시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서천굉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황하의 나루터에서 대결을 한 적이 있는 청궁의 시위인 서대림임을 알아보았다. 막 여러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데 문태래가 대갈일성, 벌써 무관을 향해 덤벼들었다. 원래 그 사람은 장소중과 함께 철담장으로 와 자기를 잡아갔던 성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기명총병(記名總兵)에서 실수로 승진, 민남에 가 있었다. 이날 서대림 등 4명의 시위는 황제의 밀지를 받들고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들 다섯 사람이 영안부(永安府)에서 덕화로 왔는데, 방유덕이 첩을 얻어 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경사 술을 먹으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재수 사납게도 홍화회의 군웅들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성황은 뜻밖의 일을 당하자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를 들어 막았다. 우지끈 하는 소리에 배나무로 만든 걸상 다리가 문태래의 일장에 맞고 두 토막으로 부러졌다. 성황은 험악한 분위기를 보고,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 보니 문태래였다.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달아났다. 군웅들은 병기를 꺼내 들고 서대림 등 4명의 시위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시위들이 어떻게 당해 내겠는가? 사람 틈을 비집고 나가 마루에 올라 나는 듯 달아났다. 문태래 등은 이리 넘어지고 저리 쓰러진 하객과 여자 손님들을 밀어붙이며 밖으로 쫓아 나가니 다섯 사람은 벌써 멀리 달아나 버렸다. 내당은 비명과 울음소리로 뒤범벅이 되었다. 여어동은 크고 붉은 여자의 옷을 입은 채 금피리를 휘두르며 옆에 낙빙과 이원지를 데리고 내당에서부터 달려나왔다. 군웅들이 방유덕을 찾아 보니 어디로 달아났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주기가 욕을 퍼부었다. 「늙고 교활한 녀석이 빨리도 달아났네.」 위춘화,장진,심연 등이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그림자도 없었다. 서천굉이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총타주님, 어째서 청궁의 시위들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을까요? 혹시 다른 음모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요, 확실한 조사를 해 봐야겠군요.」 「사사로운 감정으로 복수를 하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먼저 시위들이 왜 나타났는지부터 조사해야겠어요.」 「칠가는 대의를 분명히 아시는 분이오.」 진가락이 칭찬을 한 뒤 즉시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쫓아 나갔다. 도중에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그들 무관이 동쪽으로 달아났음을 알았다. 군웅들은 분분히 말에 올라 덕화성의 동문을 나와 질풍같이 추적을 했다. 3, 40리를 달린 뒤, 한 식당에 들어가 요기를 하며 점훤에게 물어 보고 성황 등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문태래가 말을 꺼냈다. 「제가 탄 이 말이 빠르니 먼저 달려가 그들 다섯 놈을 막아야겠어요. 「그놈들은 다섯인데 혼자 가지 마세요. 이번에는 놓칠 리가 없어요. 낙빙의 말이었다. 문태래는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다소 늦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기로 했다. 그날 밤 군웅들은 선유에서 묵고, 이튿날 교미에 도착했다. 시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5명의 무관이 벌써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 진가락이 웃었다. 「그들이 북쪽으로 달아났다니, 그것 참 잘됐군요.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복건의 소림사로 연결되니, 우리가 사람을 쫓아 가면서도 헛걸음은 하지 않게 되었군요.」 몇십 리를 달리자 날이 저물었다. 소림사가 멀지 않은 곳이라 군웅들은 망해진에서 객점을 찾아 쉬기로 했다. 육비청 , 문태래,위춘화,서천굉,심연 등 다섯 사람이 밖으로 나가 각자 시위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문태래는 성황 등의 종적을 찾지 못하자 마음이 한없이 초조했다. 날이 어두워지며 매미 소리는 멈추었지만, 더위가 가시질 않아 앞가슴을 풀어 헤친 채 부채질을 하며 걸었다. 바람을 타고 술냄새가 풍겨 앞을 보니 작은 술집이 있었다. 가게문이 아직도 열려 있어 들어가 몇 사발의 차디찬 술이나 마시며 목을 축이려고 했다. 술집 안으로 들어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애를 태우며 찾아다니던 성황과 서대림 및 3명의 시위가 때마침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섯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자 깜짝 놀라 술잔을 내려놓은 체 입을 다물었다. 문태래는 못 본 체하고 점원을 불렀다. 「여보! 술 가져오시오. 점원이 대답하고 술 주전자와 잔, 젓가락 등을 그의 면전에 가져다 놓았다. '술잔이 무슨 소용 있나? 큰 사발을 가져오게. 땅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덩어리의 은자를 식탁 위에 집어 던졌다. 점원은 허막한 기세에 눌려 말을 못 하고 다시 큰 사발에 술을 가득 부었다. 문태래가 술사발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술맛 좋다! '이 술은 본지의 유명한 삼백주(三白酒)인뎁쇼. '돼지 한 마리 잡으면 몇 사발이나 마실 수 있겠나? 점원은 그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세 사발이라고 대답해 버렸다. '좋아, 큰 사발 15개만 가져다 가득 따르게. 긴 칼을 뽑아 탁자를 내려쳤다. 점원은 깜짝 놀라 그가 시키는 대로 15개의 사발을 가져다가 탁자 위에 늘어놓고 술을 따랐다. 성황 등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문태래가 입구를 막고 있기 때문에 감히 나올 수도 없었다. 성황과 서대림은 슬금슬금 일어나 뒷문으로 빠져 달아나려고 했다. 문태래가 대갈일성, 마치 반공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나리, 술도 다 마시지 않았는데 뭘 그리 급히 서두르나? 성황과 서대림, 두 사람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문태래는 왼쪽 발로 긴 의자를 밟고 한 사발의 술을 두 모금에 비웠다. 「술맛 좋다. 다시 또 두번째 사발을 들어 마셨다. 점원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쇠고기 두 근을 썰어 쟁반에 받쳐 들고 나왔다. 문태래는 순식간에 열다섯 사발의 술과 두 근의 쇠고기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성황과 서대림은 놀랍고 두려워 서로 바라보았다. 나머지 3명의 시위가 서로 눈짓을 하며 각자 병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문태래는 술기운이 올라와 전신에 땀을 흘리고 있다가 세 사람이 덤벼들자, 오른발을 들어 탁자를 차 버렸다. 탁자 위에 있던 술 사발과 접시들이 쩔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칼을 뽑을 여유가 없자, 긴 걸상을 번쩍 들어 3명의 시위를 향해 후려쳤다. 그 3명의 시위의 솜씨도 대단해 하나는 화창을 쓰면서 긴 의자를 피하며 찌르고, 다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칼을 쓰고, 또 하나는 아미강자를 두 손에 잡고 덤벼들었다. 문태래는 긴 의자로 세 사람을 상대했다. 혼전 가운데 칼을 쓰는 그 자의 칼이 걸상에 박혀 뽑히지 않았다. 문태래가 좌장을 뒤집어 그의 코를 쪼개자 오관의 살과 피가 엉망이 되고 두골이 터져 즉사했다. 이때 아미강자가 문태래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렀다. 그는 걸상에 박힌 단도를 뽑아 막았다. 그 사람의 쌍자가 거의 문태래의 옆구리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강한 힘을 느끼고 왼쪽 발을 급히 오므리며 곤두박질해 피했다. 창을 쓰는 자가 갑자기 긴 창을 들어 독룡출동의 자세로 문태래의 배를 향해 찔렀다. 문태래가 왼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버리고 창자루를 잡았다. 그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뽑으려고 했지만 어찌 호랑이 같은 힘을 당해 낼 수 있으랴. 이렇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오히려 비틀비틀하며 넘어지려고 했다. 문태래가 왼손으로 긴 걸상을 들어 그의 가슴을 치며 힘껏 밀자 그 사람이 벽에 부딪쳤다. 벽이 무너져 벽돌과 돌에 그 사람이 깔렸다. 술집 안은 먼지가 일어나며 지붕 위에서도 진흙덩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태래가 보니 아미강자를 쓰던 뚱뚱한 시위가 꼼짝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잡아 일으키니 하얗게 질린 채 벌써 죽어 있었다. 때리지도 않았는데 놀라 죽은 것이다. 문태래가 성황과 서대림을 찾아보니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지러운 틈을 타 달아난 모양이었다. 술집에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드니 샛별이 보였다. 벌써 초경(初更)이 된 것이다. 다시 술집으로 돌아와 단도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 높은 집과 지붕 위로 올라섰다. 사방을 휘둘러 보니 2개의 검은 그림자가 북쪽을 향해 달아나고 있었다.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쫓아갔다. 몇 리를 쫓아가자 눈앞에 넓은 삼 밭이 나타났다. 삼대가 자랄 대로 자라 사람의 키를 가렸다. 두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이 삼밭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그도 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헤치고 들어갔다. 삼밭을 뚫고 나오자 앞에 침침한 숲이 나타났다. 숲속을 한참 동안 뒤져도 보이지 않자, 몸을 솟구쳐 비스듬히 뻗은 가지를 잡고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먼 곳에 작은 마을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건물이 모두 높고 컸다. 2개의 검은 그림자가 건물 가까이 달려가고 있었다. 만약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캄캄한 밤이라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태래는 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숲속에서 반나절이나 뒤지다 하마터면 그들을 놓칠 뻔하지 않았는가? 즉시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그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귓가에 바람 소리를 들으며 힘껏 달리자 두 사람이 담을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달아나느냐? 문태래가 외치며 담 옆으로 달려들었다. 희미한 별빛 아래 보니 이들 건물은 모두 청기와에 노란 창으로 된 큰 사찰이었다. 절문 앞으로 돌아와 고개를 쳐드니 산문의 중앙에 소림고찰이라는 금으로 쓴 4개의 큰 글자가 보였다. (소림사에 도착했구나. 복건 소림사가 비록 숭산 소림사의 말사라지만 평소 절 안에 있는 스님들의 무공이 숭산의 본사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들었다. 이곳은 고 총타주께서 출생한 곳이니 함부로 굴 수는 없다.) 그러나 성황과 서대림, 두 사람이 지난날 너무 심하게 굴어 결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절문이 확 닫혀 있어 칼을 들고 담 위로 뛰어올랐다. 담 밑은 텅 빈 널따란 마당이었다.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성황과 서대림은 어디로 달아났단 말인가. 납작 엎드린 체 사방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대전의 문이 열리며 뚱뚱한 스님 하나가 걸어 나왔다. 일곱 자 정도 되는 괭이를 끌고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대담한 놈 같으니라구. 불문의 성지에 함부로 뛰어들다니. 문태래가 합장을 했다. 「제자, 두 명의 관청의 끄나풀을 쫓아오느라 대사님을 놀라게 했으니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무공을 할 줄 안다면 소림사가 어떤 곳인지 알 만할 텐데, 어째서 병기를 들고 들어와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가? 문태래는 화가 났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캄캄한 밤에 칼을 들고 사찰에 들어섰으니 확실히 이쪽에서 잘못한 것이었다. 다시 합장을 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즉시 담 밖으로 뛰어내리며 앞가슴을 풀어 헤친 채 나무 밑에 앉았다. (그 두 놈, 기다리다 보면 언제고 나오겠지. 여기서 기다리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뚱뚱한 스님이 담 위에서 뛰어올라 오며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 아직도 가지 않고 뭘하나? 여기 있다가 무슨 물건이라도 훔칠 생각인가? 문태래는 화가 났다. 「나 혼자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게 스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호랑이의 간과 표범의 쓸개를 먹었나, 소림사에 와서 야료를 부리다니! 빨리 가게, 빨리 가. 문태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안가면 어쩔 테요? 뚱뚱한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괭이를 들고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담 위에서 뛰어내렸다. 괭이 위에 달려 있는 쇠고리가 쩔렁쩔렁 소리를 냈다. 괭이 위에 있는 한 자 정도 되는 월아가 벌써 자기의 가슴을 밀고 있었다. 문태래가 칼을 들고 대항을 하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총타주께서 아득한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에 온 것도 부탁할 일이 있어서인데 자기가 일시 분을 참지 못해 큰일을 그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괭이 끝을 피한 뒤에 단도를 거꾸로 들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몇 발짝 가지 않았는데 눈앞에 백광이 번쩍하며, 스님 하나가 두 자루의 계도(戒刀)를 들고 덤벼들었다. 문태래는 대결할 생각이 없어 비스듬히 옆으로 빠져 피했다. 두 스님이 함께 외쳤다. 「병기를 버리면 당신을 보내 드리겠소. 문태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왼쪽으로 피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선장이 땅 위에 맞고 흙이 사방으로 튀며 키가 작달막한 스님이 선장을 옆으로 들어 길을 막는 것이었다. 「악의가 있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세 분 대사님께서는 저를 보내 주십시오. 내일 이른 아침에 사죄를 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키가 작달막한 스님이 말을 꺼냈다. 「야밤에 소림사로 뛰어들었다면 틀림없이 놀랄 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 아닌 가. 어디 재주나 보여 주고 가오.」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선장을 비스듬히 들어 쳤다. 문태래는 고개를 숙이고 선장 밑으로 빠져 나갔다. 「훌륭한 솜씨오. 계도를 쓰는 스님이 탄사를 발하며 쌍도를 들어 치자 괭이를 든 스님도 공격에 합세했다. 문태래는 세 차례나 양보를 했다. 상대방의 병기가 모두 아슬아슬하게 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소림사의 고수임을 알았다. 다시 더 양보를 하다가는 캄캄한 밤중에 죽지 않으면 다치기라도 할 것 같았다. 세 사람의 스님이 자기를 살해할 의사는 없다 하더라도 일세의 영명에 오점이 남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쉭쉭쉭 세 차례나 병기를 쪼개며 네 가지 병기의 틈을 뚫고 들어가 반격을 했다. 행동이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세 스님이 갑자기 동시에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장외로 뛰어나갔다. 선장을 쓰던 스님이 말을 걸었다. '우리는 본사 달마원 상좌 삼승이오.」 계도를 쓰던 스님을 가리켰다. 「저 스님의 본명은 원비오.」 다시 괭이를 쓰던 스님을 가리켰다. 「저 스님의 본명은 원통(元痛)이요, 소승은 원상(元傷)이라 하는데 거사의 존함은 뉘시오? 「제 성은 문이요, 이름은 태래라 합니다.」 「아, 원래 분뢰수 문 사야시군요. 어쩐지 솜씨가 대단하시더라니. 문 사야께서 밤에 폐사에 들어오신 것은 귀회의 우만정 노당가의 유명을 받으셨기 때문입니까? 원통이 묻는 말이었다. 「우 노당가께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못된 관가의 끈아풀을 쫓아 귀사에 잘못 들어온 것이니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스님이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상의를 한 후 원통이 말을 꺼냈다. 「문 사야의 명성이 천하에 떨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오늘 다행히도 이렇게 뵙게 되었군요. 소승 훌륭한 솜씨를 받들고 싶습니다. 「소림사는 무학의 성지인데 제 어찌 방자하게 굴 수 있겠습니까? 이만 하직을 고하겠습니다.」 칼을 칼집에 꽃고 합장을 한 뒤에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세 스님은 그가 겸양을 하며 물러가려고 하자 무슨 숨은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홍화회의 고 총타주 우만정은 소림사의 제자로 있다가 쫓겨난 사람이다. 혹시 자기 수령을 대신하여 분풀이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닐까? 서로 눈짓을 하더니 원통이 괭이에 달린 쇠고리를 흔들며 대들어 찔렀다. 문태래가 당세의 영웅이니 그 어찌 적의 병기 아래서 달아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칼을 휘둘러 방어했다. 원통이 괭이를 쓰자 월아에서 찬란한 빛이 나며 한기가 사람을 위협했다. 문태래는 이때 주기가 사라지며 기력이 왕성해져 칼 쓰는 솜씨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원통이 점점 열세에 몰리자 원상이 선장을 들고 나와 둘이 덤벼들었다. 한참 치열하게 싸우는데 원비가 또 계도를 들고 합세했다. 문태래는 1대 3으로 대결을 하면서도 방어보다는 공격이 더 많았다. 그런데 달빛 아래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의 그림자가 땅에 비쳤다. 상대방의 스님들이 많이 몰려 드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바로 이렇게 놀라는 순간 원상이 선장을 비스듬히 들어 쳐 문태래의 칼등에 맞고 불꽃을 튀기며 칼이 날아 숲속에 떨어졌다. 문태래가 몸을 꺾었다. 분뢰수의 솜씨가 정말 전광석화와 같았다. 오른손이 벌써 자기를 내려치는 원통의 괭이자루를 잡고 비틀자 원통이 그만 괭이를 놓쳤다. 문태래가 다리를 들어 그의 무릎을 걷어차자 원통의 뚱뚱한 몸집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때 원상의 선장과 원비의 계도가 동시에 공격을 했다. 문태래가 괭이를 휘두르자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선장에 가 맞았다. 두 가지 정강으로 만든 길고 큰 병기가 부딪치자 그 소리가 산골에 울려 퍼져 메아리졌다. 원상의 호구가 찢어져 손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쨀그랑쨀그랑 선장을 놓쳤다. 문태래가 몸을 옆으로 하여 계도를 피하고 원비에게 달려들었다. 원비가 놀라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방어 태세를 잃었다. 앞이 활짝 열려 괭이의 월아가 벌써 얼굴 앞에 와 있었다. 문태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괭이를 거둬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칙칙 바람을 쪼개며 암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하려고 하는데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떨리며 괭이가 무거운 물건에 맞아 한 자쯤 밀려났다. 또 퉁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두 사람이 떨어져 내려왔다. 문태래가 괭이를 거두어들이고 뛰어 피하며 고개를 돌리니 진가락 등이 도착해 있었다. 진가락이 반가워 몸을 돌리니 맞은편 사람 가운데 키가 크고 흰 수염을 펄럭거리는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껄껄 웃었다. 「문 사야, 모두들 왔소.」 「아빠! 주기가 외치며 달려갔다. 그 사람은 바로 철담 주중영이었던 것이다. 문태래가 고개를 숙이고 보니 괭이 끝 한쪽이 맞아 떨어져 나가고 월아도 구부러져 있었다. 마음속으로 철담 주중영의 이름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탄복했다. 바닥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중 하나는 성황이요, 다른 하나는 서대림이었다. 원래 두 사람은 절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쫓겨나 몰래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었다. 문태래가 스님 셋과 싸우다 이기는 것을 본 서대림이 나무 위에서 몰래 수전을 발사했는데 대치 선사에게 발각되었다. 대치 선사가 철보리로 암기를 맞추어 떨어뜨리고, 다시 두 사람을 맞춰 나무에서 떨어지게 했던 것이다. 주중영은 즉시 홍화회의 군웅들을 소림사 여러 스님에게 소개했다. 원래 당일 주중영은 맹건웅,안건강,아내와 함께 천목산을 떠난 뒤 남하하여 복건에 이르러 소림사로 와 방장인 천흥 선사를 찾아뵈었다. 남북 소림은 본시 일가로 무공의 초술도 대동소이했다. 주중영은 무림 가운데 명성이 드높아 남소림의 스님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쌍방간에 무공을 절차탁마하며 의기가 투합되었다. 천홍 선사가 머물라고 간청하여 주중영이 묵게 된 것이 어느덧 수개윌이 지났다. 이날 밤 계속 경보 소리를 들었는데 어떤 고수가 야밤에 산문으로 들어와 벌써 달마원의 상좌 삼승과 교전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쫓아 나온 것이 그만 문태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문태래는 절을 지키고 있던 대고 대사(大告 大師)에게 소란을 부린 죄에 대하여 즉시 사죄를 하고 성황과 서대림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대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두 분 시주가 본사로 피난을 했는데 불문은 광대하고 자비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니, 문 시주께서는 소승의 체면을 보아 그들을 그냥 보내 주시지요. 문태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의사에 따랐다. 대고는 성황과 서대림을 보낸 뒤에 군웅들을 절 안으로 안내했다. 천홍 선사가 벌써 달마원 수좌 천경 선사 계지원(戒持阮) 수좌 대전 장경각(藏經閣) 수좌 대치 등을 데리고 대전으로 나와 그들을 영접했다. 서로 통성명을 한 뒤에 천흥이 육비청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무당파 금리침 육 사부님의 큰 이름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다행히 뵙게 되어 참으로 폐사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육비청은 겸양을 했다. 천홍이 군웅들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여 차를 대접하며 내의를 물었다. 진가락은 가슴이 뭉클하여 갑자기 천홍의 면전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천홍이 깜짝 놀라 황급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진 총타주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실 일이지 무었 때문에 이런 대례를 차리십니까? '제게 염치없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림의 법도에 따른다면 원래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그러나 억조창생을 위하여 대담하게 노선사님께 부탁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하셔도 무방합니다.」 「우만정 우 영감님은 제 의부------.」 우만정의 이름을 듣자 천홍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하며 하얀 눈섭이 치켜 올라갔다. 진가락은 즉시 자기와 권륜의 관계를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한실 광복과 만족의 축출에 대하여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천홍에게 자기 의부가 소림사에서 축출된 까닭을 말해 달라고 했다. 이 일이 권륜의 출신 성분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야 되겠다고 했다.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소리가 오열로 바뀌었다. 「노선사님께서는 천하의 백성을 위하여,,,,,,.」 천홍은 묵묵부답 긴 눈썹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두 눈을 감은 채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차 한잔 마실 만한시간이 지나자 천흥이 실눈을 떴다. 그러나 두 줄기 빛이 직사해 나왔다. 육비청 , 진가락, 문태래 등의 마음이 뜨끔했다. (이 노방장의 내공이 대단하구나.) 이윽고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소림사의 관례는 본사의 제자가 계율을 위반한 까닭을 외인에게 발설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진 총타주께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축출된 제자 우만정의 속세의 인연을 물어 보시니 참으로 난처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일은 본사의 법도에 따라서는 본래 불가능하나,,,,,,.」 군웅들은 여기까지 듣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일이 천하의 억조창생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므로 폐사의 관례를 깰 수밖에 없습니다. 총타주님께서는 사람을 계지원으로 파견하여 직접 자료를 가져오도록 하십시오.」 진가락은 허리를 굽히고 고맙다고 했다. 지객승이 군웅들을 객사로 안내하여 쉬도록 했다. 진가락은 마냥 즐겁기만 한데 주중영은 이마를 찡그린 채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서천굉이 물었다. 「아버님, 그 안에 다른 어려운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방장 사형께서 진 총타주에게 사람을 시켜 자료를 가져오라 했지만 계지원으로 가자면 다섯 채의 전당을 지나야 하네. 한 채마다 무공이 대단한 대사가 지키고 있는데 그 다섯 채를 다 뚫고 나가야 하니 어렵지, 몹시 어렵지! 사람들이 듣고 그제야 비로소 한바탕 난관을 돌파해야 함을 알았다. 문태래가 말을 꺼냈다. 「주 영감님께서는 어느 편도 도우실 수 없을 테지요. 우리 몇 사람이 억지로라도 해 보겠습니다. 주중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어려운 점은 반드시 한 사람이 이 다섯 채를 뚫고 나가야 하는 것이오. 만약 누군가가 도우려 한다면 절에서도 사람을 파견해 도울 테니 혼전이 벌어질 것이오. 혼전을 벌인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하오. 이 다섯 채에 있는 호법 대사(護法大師)는 한 채를 지날 때 마다 더욱 강한 사람이 지키고 있다오. 앞에 있는 몇 채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힘이 빠져 마지막 한두 채는 정말 돌파하기가 어렵다오. 진가락은 한참 생각해 보다가 말을 꺼냈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일인데 혹 부처님이 자비로우셔서 어쩌면 제가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즉시 긴 옷을 벗어 버리고 주머니에 바둑돌을 넣은 후 허리에 단검을 찌르고 주중영의 안내를 받으며 묘법전(妙法殿)으로 왔다. 주중영이 입구에 이르러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진 당가, 만약 돌파할 수 없거든 즉시 돌아오시오. 우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다. 절대로 억지를 부리다가 손상을 입히거나 손상을 입어서도 아니 되오.」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만사여의하시길 빕니다! 주중영이 말하고 한쪽으로 비켜 섰다. 진가락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촛불이 대낮같이 밝은데 스님 한 분이 부들풀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바로 절을 지키는 대고 대사였다. 대고 대사가 일어서며 웃었다. '진 총타주께서 직접 나서시니 더할 나위 없이 좋군요. 몇 가지 권법을 배우렵니다.」 진가락이 합장을 했다. 「자. 대고가 왼손 주먹을 뻗으며 크게 원을 돌고 우장을 위로 받쳐 들었다. 진가락은 이 초술이 척수경천임을 알았다. 이 스님은 취권으로 자기와 대결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도 일찍이 이 취권을 배운 바 있지만, 당일 주중영과 철담장에서 대결을 할 때 자기가 소림권으로 그의 소림권을 상대하다가 하마터면 대패할 뻔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즉시 두 손을 탁 치고 떼며 뻗은 것이 (백화착권)의 절초였다. 대고는 뜻밖의 공격에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 괴조수운으로 나와 바닥에 벌렁 누웠다. 수족을 뻗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이 한쪽으로 기울고 두 손을 마구 휘두르며 동서남북과 상하좌우를 이리 쳤다 저리 쳤다 하는 것이 술취한 사람과 같았다. 진가락도 이 취권을 알기 때문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두 사람의 권법이 모두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독특했다. 대고의 (취권)이 16로뿐이라지만 하체가 허한 듯하면서도 실하고, 권초가 느릿느릿해 보이면서도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우는데 대고가 갑자기 몸을 솟구쳐 오르며 허공에 떴다가 내려올 때 철우경지(鐵牛耕地)의 자세를 취해 우권으로 상대방의 하체를 맹격했다. 진가락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뒤로 움츠렸다. 이 일격이 맞지 않으면 그는 다시 허공으로 뛰어올 올라 요자번신의 자세를 취할 것을 알았다. 진가락은 위치를 확인한 뒤에 그의 왼발이 땅에 떨어질 때 갑자기 오른발을 구부려 뻗으며,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가볍게 눌렀다. 대고는 몸을 뒤척일 수 없자 엎어진 상태로 떨어져 내려왔다. 진가락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받쳐 주자 그 힘을 빌려 일어나서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며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십시오. 진가락이 합장을 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 채로 들어섰다. 계지원의 수좌인 대전 대사가 중앙에 앉아 있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일어섰다. 옆에 세워 놓았던 굵은 선장을 들어 땅바닥을 찍었다. 벽이 흔들리며 지붕 위에서 우수수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진가락은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의 힘이 무지무지하구나.) 그런데 그가 왼손으로 선장을 짚은 채 오른손으로 좌우 양측을 한 번씩 치더니 왼손으로 비스듬히 선장을 들어올린 뒤 오른손으로 받아 쥐며 두 발짝 앞으로 나섰다. 바로 풍마장의 수법이었다. 진가락은 그가 수장을 뻗을 때 시원한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발걸음을 무겁게 내딛는 것을 보고는 가벼이 상대할 수 없어 단검을 쁩아 들었다. 단검에서 차디찬 빛이 눈부시도록 반사했다. 대전은 검광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듯하다가 왼손으로 비스듬히 치며 선장을 옆으로 돌려 쳤다. 이 호미편세는 빠르고도 묵직했다. 진가락이 몸을 낮추떠 선장 아래로 빠져 나가 단검으로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의 병기가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았다. 빙빙 돌아가며 격투를 벌였다. 진가락은 장사근의 장법을 보았기 때문에 이 풍마장법이 맹렬하기가 미친 호랑이 같고, 갑작스러운 것이 천마의 출현과 같음을 알았다. 이 풍마장법은 소림사 긴라나왕이 전해 준 108로의 곤법에서 본을 받고, 또 크고 작은 야차곤과 취경곤법 등의 정수를 가미한 것으로,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자고 이래로 장법은 대부분 손이 긴 사람이 잘 썼다. 쓰는 사람은 반드시 막강한 용기와 힘을 구비해야만 했다. 그가 번신벽산, 야차탐해, 뇌침굉목 등의 온갖 재주를 부리며 무섭고 맹렬하게 수십 근이 넘는 빈철의 선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진가락은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이렇게 장법을 써야만 풍마라는 두 글자가 어울리는 것이다. 감히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며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이다. 그의 예기가 다소라도 꺾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공격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전의 내공이 심오할 뿐만 아니라 기초가 단단하여 치열한 공격을 하면서도 장법 가운데 추호의 헛점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맹렬해져 전연 누그러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진가락은 모퉁이로 몰리기만 했다. 대전은 그가 피할 곳이 없음을 보고 두 손으로 선장을 휘두르며 회룡장(廻龍杖)의 자세로 그의 하체를 가격했다. 진가락은 앞으로도 3명의 고수와 대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끌며 체력을 소모할 수가 없었다. 위험한 가운데 승리를 거둘 틈을 노리며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 대전은 비록 용감무쌍했지만 평소 살생을 해 본 일이 없었으니 어찌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려 하겠는가? 선장이 그의 머리 위의 두 자쯤의 거리에 이르자 갑자기 들어올려 옆으로 후려쳤다. 그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어려움으 알고 물러가려니 했던 것이다. 진가락은 본래 선장이 머리 위에 떨어지기만 하면 불시에 상대방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근공을 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도중에서 자세를 바꾸느라 힘이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임기응변으로 선장의 한쪽 끝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단검을 휘둘렀다. 선장이 즉시 두 토막으로 부러지자 각자 한 토막씩 잡았다. 황궁(皇宮) 안의 사막 대전이 화가 나서 다시 덤벼들자 진가락이 멀찍이 뛰어 피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대사님, 사정 좀 봐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대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 토막의 선장을 비껴 들고 다시 대들었지만, 손에 익숙지 않아 다시 수 합을 겨루는 사이 선장이 또 단검에 부러졌다. 진가락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맨손으로 계속 대들까봐 곧장 뒤채로 달아났다. 대전은 어진 생각을 지니고 있다가 좌절을 당하자 화가 나서 몇 발짝 쫓아오다가 쫓아올 수 없자 큰소리를 지르며 반 토막의 선장을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가락은 세번째 관문으로 들어섰다. 눈앞이 갑자기 환해져서 보니 양쪽에 초와 향이 가득 있었다. 백 개가 넘는 수였다. 장경각의 수좌인 대치 대사는 싱글벙글하며 그를 반겼다. 「진 당가님, 우리 암기로 겨루어 보십시다.」 진가락이 허리를 숙였다. 「대사님,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대치가 웃었다. 「진 당가와 내가 각자 한쪽씩 지킵시다. 한쪽마다 아홉개의 촛불과 구구는 81, 81개의 향이 꽃혀져 있는데 누가 먼저 상대방의 향불과 촛불을 전부 끄거나. 먼저 끄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합시다. 이렇게 겨룬다면 피차간에 우의는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불탁을 가리켰다. 「수전,철련자,보리자,표창 등 여러 가지 암기가 다 탁자 위에 있습니다. 다 쓰면 다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진가락은 주머니 속에서 바둑알 하나를 꺼내며 생각했다. (이 대사는 암기예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나 보구나. 내 만약 평소 조 삼가로부터 더 많이 배웠다면 자신이 있을 텐데------.) 「자, 어서 !」 이렇게 말하자 대치가 웃었다. 「손님 먼저.」 진가락은 생각했다. (내 먼저 사부님께 배운 만천화우의 솜씨를 발휘해 기선을 잡자.) 바둑알 5개를 들고 한꺼번에 던지자 맞은편 벽 밑에 있던 5개의 향불이 즉시 꺼졌다. 「훌륭한 솜씨요.」 대치가 칭찬을 하며 목에 걸었던 염주를 떼어내 구슬을 연결한 줄을 끊었다. 5개의 염주알을 손에 들고 던지자 이쪽에 있던 5개의 향불이 동시에 꺼졌다.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진가락은 또 5개의 향불을 껐다. 대치가 두 번 손을 휘둘러 9개의 촛불을 일제히 꺼 버렸다. 촛불이 꺼지자 캄캄한 가운데 향불이 더욱 똑똑히 보였다. 이렇게 되자 겨냥은 오히려 쉬워진 것이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이래야 하는 걸 나는 어째 생각하지 못했을까?) 9개의 바둑알을 세 번에 나누어 던졌다. 촛불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데 딱딱딱 하는 소리가 한바탕 들리더니 촛불이 꺼지지 않고 그냥 있었다. 9개의 바둑돌을 대치가 도중에서 쳐서 떨어뜨린 것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대치가 그 틈을 타 4개의 향불을 꺼버렸다. 그가 다시 던지려 하자 진가락도 바둑돌을 염주를 향해 던졌다. 그러나 자기 쪽의 촛불이 이미 꺼져 향불이 희미한데 어떻게 작은 염주를 정확히 겨냥하겠는가. 상대방의 염주알 5개 가운데 2개만 맞아 떨어지고 나머지 3개가 또 향불 3개를 껐다. 비교를 해 보면 대치는 벌써 9개의 촛불과 2개의 향불을 이긴 셈이었다. 그는 염주로 9개의 촛불을 지키며 계속 틈을 타 향불을 꺼 나갔다. 다시 수 합을 대결하는 동안 또 14개의 향불을 껐다. 진가락도 전력을 기울였지만 겨우 2개의 촛불을 껐을 뿐이었다. 그는 마음이 조급했다. 대치가 이 틈을 노려 단숨에 19개의 촛불을 껐다. 진가락이 보니 맞은편의 촛불은 휘황한데 자기 쪽은 겨우 20여 개의 향불만 남아 있었다. (이러다 세번째의 관문은 통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위급한 가운데 갑자기 조반산의 비연은사를 생각했다. 즉시 방위를 조준한 뒤에 3개의 바둑알을 창 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대치는 함부로 던지자 속으로 웃었다. 젊은 사람이라 인내심이 부족하여 한번 졌다고 성질을 부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3개의 바둑알이 벽에 맞자 다시 퉁겨 나왔다. 한 알은 그냥 떨어졌지만 나머지 두 알이 2개의 촛불을 쳐 꺼지게 했다. 대치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진가락은 계속해서 이렇게 바둑알을 날렸다. 창에 맞아 퉁겨 나오니 대치로서도 촛불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가 먼저 수십 개의 향불을 꺼 버렸다는 점뿐이었다. 이제 상대방이 촛불을 끄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연방 휘둘러 향불을 끄기에 바빴다. 갑자기 실내가 캄캄해졌다. 진가락이 벌써 촛불을 있는 대로 다 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쪽에서 타 들어 가던 향불은 모두 7개가 남았고 맞은편의 향불은 반짝반짝 30여개가 넘었다. 의기소침해 있는데 갑자기 대치의 말이 들렸다. 진 당가님, 제가 암기를 다 썼습니다. 우리 잠시 멈추고, 불탁의 암기를 가져다 다시 시작하지요.」 진가락이 주머니를 뒤져보니 자기의 바둑알도 5,6개밖에 남지 않았다. 「먼저 가서 가져오세요.」 대치의 말을 들은 진가락이 불탁 앞으로 가는데 머릿속에 꾀가 스치고 지나갔다. (큰일과 관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왼손으로 장삼의 아랫깃을 잡아 올리며 오른손으로 불탁을 더듬어 그 위에 있던 모든 암기를 옷깃에 담은 뒤에 다시 자기의 위치로 뛰어 돌아와 웃었다. 「하나 둘, 셋! 암기를 던지겠습니다.」 대치가 불탁 앞으로 가 더듬어 보니, 암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가락은 철련자와 보리자를 계속해서 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맞은편의 향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꺼 버렸다. 대치는 수중에 암기가 없어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손을 쓸 방법이 없어 껄껄 웃었다. 진 당가님, 대단하십니다. 이를 일러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꾀로 싸우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기셨습니다. 자,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부끄럽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제가 본래 진 셈이지만, 일이 워낙 중요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대치 대사는 성격이 워낙 좋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두 채에는 저의 두 분의 사숙께서 지키고 계십니다. 이 두 분의 무공이 심오하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대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며 다시 내전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한 채에도 촛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실내는 이미 통과한 3개의 관문에 비해 상당히 좁았다. 바닥에 2개의 부들풀 방석이 깔려 있는데 달마원 수좌인 천경 선사가 왼쪽 방석 위에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 있다가 진가락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맞이했다. 「앉으시지요. 진가락은 그가 어떤 방법으로 겨루자고 할는지 몰라 그가 시키는 대로 오른쪽 방석 위에 앉았다. 대전이나 대치의 공력이 이렇다면 천경은 그분들의 사숙이고, 또한 달마원의 수좌이니 무공의 정통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는 상대의 적수가 아니니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천경 선사는 키가 커서 방석에 앉아 있는 키가 보통 사람에 비해 작아 보이지 않았다. 움푹 들어간 두 볼이며, 전신에 살이라고는 없어 보였지만 위엄만은 당당했다. 천경이 말문을 열었다. 「자네가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보아 고명함을 충분히 알겠네. 비록 자네 의부가 소림의 문하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자네는 후배임엔 틀림이 없네. 내 어찌 자네와 똑같은 입장에서 겨룰 수 있겠나. 이렇게 하세. 자네가 내 10초를 받고도 패하지 않으면 통과시켜 주겠네.」 진가락이 일어나 절을 했다. 「노선사께서는 자비를 베푸소서. 천경이 (흥!)소리를 냈다. '자, 앉아서 받아 보시게 . 진가락이 막 방석에 앉자 한 줄기 강한 힘이 엄습했다. 쌍장을 움직여 막으려는데 그의 수장과 부딪치는 순간 너무나 맹렬하여 막아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만약 이렇게 억지로 받다가는 방석에서 밀려날 것만 같아 급히 분수(分手)의 수법으로 바꾸어 그의 강한 힘을 옆으로 돌려 풀려고 했다. 그러나 천경의 장력이 너무나 강해 이 분수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전신의 힘을 다 기울여 억지로 받아 냈다. 진가락이 이 일 초를 받아 내기는 했지만 왼쪽 어깨가 얼얼하게 아팠다. 「두번째 공격을 받아 보게. 천경 선사의 말이었다. 진가락은 다시는 억지로 받을 수가 없어서 수장이 이르자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반격했다. 이는 백화착권 가운데의 묘기로, 상대는 수장을 거두어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경의 오른팔이 횡소천군으로 바뀌며 팔꿈치로 그의 주먹을 노리고 옆으로 밀어쳤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변화였다. 진가락의 주먹에는 미처 힘이 실리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팔꿈치에 부딪치려 하자, 급히 팔에 힘을 주며 몸을 위로 뽑아 피했다. 허공에 떴다가 다시 방석 위에 안전하게 내려앉았다. 천경은 그의 변초가 신속하여 앉아 있다가도 몸을 허공에 띄울 수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장을 뻗어 낚워채려고 했다. 진가락은 그의 초술이 갈수록 매서워지자 이 10초를 다 받지 못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땅땅 종 소리가 들렸다. 원래 날이 새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가락은 절 안의 큰 종 소리가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나는 바 있어, 좌장을 사뿐히 뻗어 종 소리를 따라 함께 내쳤다. 천경이 (이!)하는 소리를 내더니 수장을 뻗어 막았다. 진가락은 옥봉에서 배운 장법을 쓰는 것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선회하며 종소리에 맞추어 일 장또 일 장쳐 나갔다.천경은 온 신경을 집중하고 수장을 뻗어 방어했다. 종 소리가 멎자 진가락이 수장을 거두어들였다. 「다시 더 계속된다면 후배는 받을 재간이 없습니다.」 '좋아, 좋아, 벌써 40여 초가 넘었네. 과연 장법이 절묘하시군. 자, 어서 안으로. 진가락이 일어서서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몸이 비틀거렸다. 급히 벽에 의지하자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했다. 천경이 그를 부축해 앉혔다. '내 처음 뻗은 일 초를 억지로 받다가 충격을 입은 모양이로군. 조용히 앉아 호흡을 조절하면 괜찮네.」 진가락은 눈을 감은 채 방석 위에 앉아 운기를 했다. 잠시 후에 호흡은 순조로워졌지만 쌍장과 두 꺼깨가 가볍게 부어올라 은근히 아팠다. 이 노선사의 위력을 알 만했다. '자네, 이 장법은 어디서 배우셨는가? 천경이 묻자 진가락은 사실 그대로 말해 주었다. '서역에 이토록 묘한 장법이 있다니 정말 놀랐는걸. 자네가 처음부터 이 장법을 썼더라면 팔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 '제가 부상까지 입었으니 마지막 관문은 통과하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노선사께서 밝은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통과할 수 없거든 그냥 되돌아오는 게지.」 천경의 말에 진가락은 생각했다. (석가모니는 사람을 보고 고개만 돌리면 언덕이라 했지만, 우리 무림의 협객들이야 용감하게 나갈 줄만 알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법인데.) 그래서 그는 천경 대사에게 절을 한 뒤에 용감하게 다시 뒤채를 향해 갔다.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원래 안은 작디작은 한 칸의 조용한 방이었다. 소림사의 방장 천흥 선사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천경이 벌써 이와 같이 무서운데, 천흥은 소림사의 으뜸가는 고수이니 자기가 어찌 그를 당해낼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을 했다. 방은 너무나 좁아 대결을 한다 해도 권각이나 암기는 아닐 게고 그렇다면 내공으로 대결을 하자고 할 테니, 더욱 자신이 없었다. 천흥 선사가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앉으시오. 진가락이 한쪽 구석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하나 있었으며, 탁자 위의 향로 가운데서 단향의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한 폭의 한산습득도 (寒山拾得圖)의 묵화가 걸려 있었다. 붓끝이 많이 가지도 않았는데 두 고승의 늠름한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 천흥 선사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옛날 양을 잘 기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열심히 양을 길러 부자가 되었다오. 그러나 그 사람은 어찌나 인색한지 돈을 한 푼도 쓰려고 하지 않았어요」""'~ 진가락은 그가 갑자기 옛날 이야기를 꺼내자 의아하게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교활한 사람이 하나 있었지요. 그런데 그는 그 부자의 어리석음도 잘 알았지요. 부자는 몹시 장가를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속이기로 했답니다. (제가 한 여자를 알고 있는데 대단히 아름다우니 제가 중매를 서겠습니다.) 양 치는 사람은 너무 좋아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지요. 1년이 지난 뒤에 그 사람이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부인이 당신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양 치는 사람은 아내를 본 적은 없지만,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 더욱 좋아 또 재물을 많이 주었지요. 뒤에 그 사람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죽었습니다!)양 치는 사람은 울며불며 슬퍼 했지요.」 진가락은 상식이 많기 때문에 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도 벌써 그가 불가에서 대승법의 백유경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기실 세상의 일이란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는 법이지요. 황위나 부귀나, 그 양 치는 사람의 처나 아들이나 다같이 허황된 것이오. 그러니 무엇 때문에 고생고생하며 무엇을 구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얻으면 기쁘고, 잃으면 슬플 텐데요.」 이번에는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옛날 한 쌍의 부부에게 떡 세 개가 있었습니다. 각자 하나씩 먹고 하나가 남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약속을 했지요.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그 떡을 먹지 못한다구요.」 천홍은 진가락도 백유경을 인용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도둑이 하나 들어와 그들 집안의 재물을 모두 다 가져 가 버렸습니다. 부부는 사전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도둑은 그들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자 대담하게도 남편의 면전에서 그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남편은 그래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둑은 재물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지요. 그러자 남편이 손뼉을 치며 웃었습니다. (좋아, 당신이 졌으니 이 떡은 내가 먹겠소.) 이랬다는 것입니다. 천홍 선사는 본래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듣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진가락이 다시 말을 꺼냈다. 「작은 편안함과 향락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크나큰 고난을 당하기 마련이지요. 입과 배를 채울 욕심으로, 도둑이 재물을 훔쳐가는 데도, 겁탈당하는 자기 아내도 거들떠보지 않다니 있을 법이나 한 일입니까? 불가에서는 중생을 제도해야지, 자기 한 사람만 돌볼 수는 없겠지요.」 「제행은 무상이요, 제법은 무아라. 사람의 모든 것이 허망할 뿐이오. 천홍이 한숨을 쉬었다. 「중생이 지금 큰 고난에 빠져 있습니다. 고승 지도림께서는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걸왕과 주왕이 백성을 괴롭히는데 어찌 유유자적 소요만 할 수 있으리요.) 천홍은 그가 전력을 다해 백성의 질곡을 풀어 주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알고는 존중해 마지않았다. 「진 당가의 만강의 열혈은 존경할 만하고, 탄복할 만합니다. 빈승도 한 가지 일만 다시 물어 볼 테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노선사께서 미욱함을 밝혀 주옵소서.」 천홍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한 노파가 나무 밑에 누워 쉬고 있는데 갑자기 큰 곰이 대들어 그녀를 잡아먹으려 했지요. 노파는 나무를 한 바퀴 돌아 달아나려고 하자 큰 곰이 앞발을 뻗어 나무 뒤에서 그녀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노파는 이 틈을 타 큰 곰의 두 앞발을 나무 기둥에 대고 누르자 곰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파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 길 가는 사람이 있어서 노파가 그의 도움을 청했지요. 함께 곰을 잡아 고기를 반씩 나누자고요. 그 사람은 노파의 말을 믿고 곰의 앞발을 눌렀습니다. 노파는 몸을 빼 멀리 달아나고 그 사람만 오히려 곰 때문에 묶여 몸을 뺄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진가락은 이 우화의 의미를 알았다. 「다른 사람의 위급함을 구해 주려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후회함이 있어서는 아니 되지요. 진가락의 말에 천홍은 불진을 들었다. 「자, 들어 가시오.」 진가락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제자 무례하게 들어가겠사오니 방장께서는 용서하여 주십시오.」 천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가락이 안으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가벼운 탄식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다. 긴 복도를 돌아 한 전당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2개의 큰 촛불이 켜져 있었으며 불꽃이 가볍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사면 벽은 하나 하나 목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목궤 위에는 노란 종이의 표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촛대를 들고 계속 찾아 나갔다. (천(天)자 학렬의 목궤를 찾아 뚜껑을 여니 노란 천으로 된 3개의 보따리가 보였다. 왼쪽에 있는 보따리 위에 빨간 글씨로 (우만정)이라는 3개의 글자가 씌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려 몇 방울의 촛농이 그 위에 떨어졌다. 즉시 마음을 진정시키며 가볍게 보따리를 들어 내고, 묵도를 한 뒤에 끈을 풀었다. 보따리 속에는 꽃을 수놓은 남자의 조끼와 여자의 찢어진 하얀 옷이 있었다. 그 위에 간간이 얼룩이 져 있는데 핏자국 같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는지 까만 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그밖에 노란 종이를 접은 또 하나의 얇은 책자가 있었다. 진가락이 책자를 열어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위예 씌어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의부의 필적이었다. 진가락은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복건성 보전 소림사 하원문하(下院門下) 제21대 천자 항렬의 제 우만정은 삼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바입니다. 제자는 농가 출신으로 곤궁하게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왼쪽에 있는 서씨 집안의 조생(潮生)과 친하게 지내다가 성장한 후에는 서로 사랑을 하게 1었습니다,,.> 진가락은 여기까지 읽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의부가 규율을 범한 일이 우리 어머님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읽어 내려갔다. (,우리 두 사람은 뒤에 평생을 약속했습니다. 제자는 서씨 집 따님이 아니면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고, 서씨 집 따님은 제자가 아니면 출가하지 않기로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해마다 흉년이 들어 수확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제자는 외지로 나와 삶을 도모하다가 은사님의 자비로우심에 힘입어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꽃으로 수놓은 조끼를 내놓는데, 이것은 제자가 고향을 떠날 때 서씨 집 따님이 선물로 준 것입니다.) 진가락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계속 읽어 내려갔다. (제자가 본파 무학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기도 전에 즉시 하산한 것은 서씨 집 따님과의 연정이 그리워서요, 속세의 인연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 여자의 부친이 그녀를 당지의 부호인 진씨 댁에 출가시켰음을 알고 놀랐습니다. 제자는 마음이 아파 밤에 진씨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문에서 익힌 무예를 믿고 자신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민가에 뛰어들었으니 이것이 계율을 범한 죄 중의 하나입니다. 그뒤 서씨 집 따님은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제자 연정을 버리지 못해 3년 뒤에 다시 가 보았습니다. 그날 밤 서씨집 따님은 출산을 했는데 남자 아이였습니다. 부산스런 가운데 제자는 다만 창 밖에서 몇 번 바라다보았을 뿐입니다. 나흘 뒤에 다시 갔다가 서씨 집 따님과 만났습니다. 그녀는 당혹한 표정으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벌써 넷째황자인 윤정이 밖워 가고, 딸을 하나 되돌려 주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자세한 말도 나누기 전에 건물 밖에서 갑자기 옹저에 있는 4명의 졸개가 뛰어들어왔습니다. 모두들 고수로, 윤정이 감시를 하라고 파견한 사람들이었지요. 혹시 진씨 댁에서 누군가가 기밀을 누설하면 죽여 입을 막아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제자는 놀라 달아났지만 그들이 쫓아와 격전을 하는 바람에 이마에 칼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결사적으로 대들어 그놈들을 다 처치하고 돌아와 정신을 잃었습니다. 서씨 집 따님은 속옷으로 제자의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이 피 묻은 옷이 바로 그 속옷입니다. 제자 황실의 기밀에 관여하고 소림의 무공을 들어내 사문에 화를 불러일으켰으니, 이것이 계율을 범한 죄 중의 둘째입니다. 진가락은 여기까지 읽다가 어머니의 옛날 옷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뒤 10여 년간 제자는 비록 북경에 있었지만 무학에 전력을 기울이며 다시는 서씨 집 따님과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옹정이 횡사하고 권륜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제자가 날짜를 계산해 보고 권륜이 바로 서씨 집 따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옹정이 음험하고 악독하여 자객을 보내 서씨 집 따님을 죽여 입을 봉해 버릴 것 같아, 그날 밤으로 진씨 댁으로 들어가 그녀의 방에 숨었습니다. 그날 밤 예측한 대로 두 명의 자객이 나타났지만 모두 제자가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옹정의 밀지를 찾아냈는데 함께 바치는 것입니다.) 진가락이 마지막 장을 넘겨 보니, 과연 노란 종이 끝에 한 장의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세관과 그의 아내 서씨가 죽지 않았거든 속히 살해하라. 옹정의 친필이었다. 그 밑에 작은 도장이 찍혀 있는데 '무위' (武威)라는 두 글자였다. 진가락은 의부로부터 옹정의 수하에 밀정과 자객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들은 황제를 위하여 살인을 전담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옹정이 그들에게 살인을 밀령할 때는 무위란 도장을 찍었다. 그때 의부의 무공은 상당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으니 2인의 자객은 물론 그의 적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은 내 어머님을 구하려다 아버지까지 구한 셈이다. 옹정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모님이 결코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것으로 믿어 자기가 죽은 뒤로 연기했음에 틀림없다.) 즉시 책자를 읽어 내려갔다. '권륜은 이 일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객을 파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안심할 수 없어 하인으로 변장하여 진씨댁으로 들어가 잡일을 하면서 5년을 보냈습니다. 후환이 없을 것을 확신하고서야 그곳을 떠났습니다. 제자는 명문의 제자로서 대담하게 망동을 했으며 만약 다른 사람이 안다면 소림의 명예를 비웃을 것이니, 이것이 제자가 규율을 범한 세번째입니다.) 진가락은 여기까지 읽다가 눈앞이 흐릿해졌다. 과거의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어째서 자기에게 의부를 따라가라고 했는가?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유서를 썼다가 다시 그것을 불태워 버렸는가? 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의부는 그토록 슬퍼했는가? 어머니의 유서 가운데는 (강제로 진씨 집으로 출가를 한다) 또 (반생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등등의 말을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감개에 사로잡혔다. 마음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연민인지는 몰랐다. 의부가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5년 동안이나 우리집의 하인으로 있었다니 참으로 놀랄 만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때 그는 나이가 어려 집안의 수십 명 하인 가운데 이같이 훌륭한 인물이 있었음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눈물을 훔치고 다시 읽었다. (제자가 계율을 세 가지나 범했으니 황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 경과와 시말을 은사님께 아뢰고 은사님의 처벌을 달게 받으렵니다.) 우만정의 진술은 여기에서 끝났다. 아래는 두 줄의 빨간 글씨가 있었다. 그분의 사부가 쓴 것임이 틀림없었다. (우만정이 세 가지 규율을 범했으나 회개하고 삼보에 귀의한다면 십악을 용서하시는 부처님께서 어찌 이를 용서하지 않으랴? 만약 속세의 인연에 연연하여 슬기와 지혜로 그 인연을 끊을 수 없다면 즉시 불문에서 축출할 것이로다.) 책자는 여기서 끝났고, 그 뒤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내 의부께서는 어머님을 잊지 못해 출가했다가 스님이 되지 못하시고 마침내 소림에서 쫓겨나셨구나.) 이제 궁금해하던 일들이 다 풀리자 고개를 들었다. 하늘가에 새벽별이 지며 벌써 동녘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촛불을 불어 끄고 의복과 책자를 노란 보따리에 싸 들고는 궤 뚜껑을 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맞은편에 있는 미륵불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나가고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당년 의부께서 사문을 쫓겨나실 때 계지원을 나오다 이 미륵불이 웃는 모습을 보셨을 텐데,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들어갈 때와는 달리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건물에서 나오자 주중영 , 육비청 및 홍화회의 군웅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밤새 기다리다가 그가 무사히 손에 보따리를 들고 나오자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가까이서 보니 진가락의 표정은 너무나 지쳐 있었고 두 눈까지 충혈이 되어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진가락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해 주었지만 의부와 어머니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 일은 이제 끝났으니, 우리 그 두 놈을 찾아내 칠가를 위하여 복수나 하러 가십시다.」 사람들이 좋다고 했다. 주중영은 진가락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천홍,천경 두 분의 사형께 하직 인사를 하고 나왔다. 막 절문을 나오는데 주기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며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주중영이 급히 딸을 부축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쉬도록 했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여행을 하여 피곤한 모양이었다. 전일 또 방가네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셔 태중의 아이가 놀란 모양이었다. 소림사에 있는 의술에 정통한 스님이 진맥을 하고는 여행은 할 수 없겠다고 했다. 이곳에서 정양을 하고 있다가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주기도 할 수 없다는 듯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중영 부부와 그들의 제자 및 서천굉 다섯 사람이 이곳에 남아 그녀의 출산을 보살펴 주고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북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주중영은 절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민가를 빌려 지내기로 했다. 육비청 , 진가락 등 일행은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군웅들은 덕화에서 크게 소란을 부린 뒤라 감히 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밤이 되어 문태래,위춘화,여어동,심연 네 사람이 변장을 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서대림과 성황의 소식도 들을 수 없었거니와 방가네 집에서도 온 가족이 화를 피해 어디로 달아났는지 아무도 없었다. 일로 북행을 하다가 산동성 태안에 도착했다. 분타에서 형당 향주로부터 석쌍영이 북경에서 이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웅들이 듣고 반기며 그를 만나러 갔다. 심연이 먼저 달려가 외쳤다. 「십이야, 그 간사한 놈이 죽었습니다. 석쌍영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장소중, 장소중 말이에요. 「뭐라고, 장소중이 죽었다고? 「그래요, 굶주린 이리들이 그자를 깨끗이 먹어 치웠답니다.」 석쌍영이 좋아하면서도 자세히 묻지 않고 먼저 진가락 등을 향해 절을 하고 함께 내당으로 들어왔다. 「십이가, 상처는 다 나으셨습니까? 진가락이 물었다. 「총타주님께서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완전히 나았어요. 육 선배님, 총타주님, 형제 여러분, 일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서울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나요? 진가락이 다시 물었다. 석쌍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울에는 별일이 없었습니다. 목탁륜 노영웅의 전군이 섬멸당했다는 소식을 알리러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뭐라구요? 진가락이 듣고 대경실색하며 벌떡 일어나 물었다. 군웅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우리가 위구르를 떠날 때 조혜의 패잔병이 혹수영에서 철통같이 포위되어 있었는데 청병이 어떻게 해서 또 이겼단 말씀입니까? 낙빙의 말에 석쌍영이 한숨을 쉬었다. 청군이 갑자기 증원이 되었답니다. 남강에서 지원군이 와 포위되어 있던 조혜의 패잔병과 내외로 공격을 했다더군요. 목숨을 건져 도망쳐 온 위구르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곽청동 소저는 병상에 누워 지휘할 수가 없었다는군요. 목탁륜 노영웅과 그분의 아드님은 역전을 하다가 전사했고, 곽청동 소저는 소식이 끊어졌답니다. 진가락은 이 말을 듣고 괴로워 풀썩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곽청동 소저의 무예가 그토록 훌륭한데 청군의 병사들이 어떻게 그녀를 해칠 수 있었겠습니까? 육비청의 말이었다. 진가락 등은 그가 위로를 하기 위해 일부러 꺼낸 말인 줄 알았다. 난군 가운데서 병든 여자가 어찌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겠는가. 「곽청동 소저에게 향향 공주라고 부르는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의 소식도 들어 보셨나요? 낙빙이 물으며 눈짓을 했다. 석쌍영 등이 눈치를 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못 들었는데요. 그 여자는 유명하니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곳에서도 무슨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아무 소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일은 없겠지요.」 진가락은 그들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인 줄 알았다. 「전 들어가 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진가락이 안으로 들어가자 낙빙이 심연을 바라보았다. 「빨리 들어가 보살펴 드리게.」 심연이 쫓아 들어갔다. 사람들은 목탁륜과 곽아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음이 울적했다. 곽청동 자매의 생사가 불분명하다지만 아무래도 십중팔구 좋을 리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의기소침하여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진가락이 주렴을 들어올리며 나왔다. 「우리 서둘러 식사를 하고, 일찍 북경으로 갑시다.」 군웅들은 갑자기 명랑해진 그를 보고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육비청이 문태래를 향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에 내가 총타주를 뵐 때는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인 데가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랑한 모습을 보니 과연 영수다운 데가 있군요. 정말 탄복했습니다.」 문태래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식사를 했다. 가는 도중 군웅들은 진가락이 억지로 웃으며 말도 꾀 많이 했지만, 날마다 초췌해 가는 모습을 보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적당히 위로할 말이 없었다. 마침내 북경에 도착했다. 석쌍영이 벌써 쌍유자 거리에 큰 저택을 한채 사놓고 있었다. 무진,상씨쌍협,조반산, 양성협 등 다섯 사람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헤어져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대강 말했다. 진가락이 입을 뗐다. 「조 삼가, 심연을 데리고 가셔서 백진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제게 준 내봉(來鳳)금과 넷째형수님이 훔쳐 온 옥으로 된 병을 보내 백진으로 하여금 황제에게 전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황제가 우리가 온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반산과 심연이 분부를 받고 갔다. 반나절 뒤에 돌아와 복명을 했다. 심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와 조 삼야가,,,,,,.」 조반산이 웃었다. 아직도 나를 나리라고 하는가? 그렇군요. 저와 조 삼,,,,,, 조 삼가가 백진의 집으로 그를 찾아갔지요. 그는 마침 집에 있다가 삼가의 명함을 받아 보고는 달려 나왔습니다. 우리를 끌고 문 밖으로 나가 술 대접을 한 뒤에 돌려보냈습니다. 굉장히 친한 체했습니다.」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전당 강변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고마워 전과는 완전히 다름을 알았다. 이튿날 아침 백진이 답례차 왔다. 조반산과 수인사를 한 뒤에 진가락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황상께서 제게 진 공자를 모시고 입궁하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공손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백 노선배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육비청 등과 상의했다. 군웅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각별한 방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육비청,무진,조반산,상씨쌍협,위춘화 등 여섯 사람이 진가락을 호위하여 입궁하기로 했다. 문태래는 나머지 사람들을 인솔하여 궁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일곱 사람이 백진의 안내로 궁 안으로 들어서자 각처에 있던 시위들이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황궁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또 방비가 삼엄하자 숙연해졌다. 한참 걸어가니 2명의 태감이 급히 나와 백진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백 대인, 황상께서 지금 보월루에 계십니다. 진 공자를 모시고 그리로 오시라는 분부입니다.」 「알겠네.」 백진이 대답하고 진가락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여기서부터는 금궁입니다. 공자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병기를 풀어 놓도록 하시지요.」 사람들은 이 일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도검을 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백진이 그들을 데리고 이 건물 저 마당을 건너 한 누각 앞에 이르렀다. 그림을 그린 대들보, 조각을 한 기둥 등 건축물이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5층의 누각이었다. 2명의 태감이 누각에서 내려와 외쳤다. 「진가락, 들어오시랍니다.」 진가락이 의관을 정제하고 따라 들어가는데 무진 등 여섯 사람은 저지당해 들어가지 못했다. 진가락이 태감을 따라 5층으로 올라와 방으로 들어가니 권륜이 앉아서 빙그레 웃었다. 진가락은 꿇어앉아 공손하게 군신의 예를 올렸다. 「잘 오셨소, 앉으시게.」 권륜이 웃으며 손짓을 하자 태감들이 모두 물러나갔다. 진가락은 여전히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권륜의 말에 진가락이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앉았다. 「자네가 보기에 이 누각은 어떤가? 권륜이 웃었다. 「황궁의 내원이 아니고야 어찌 다른 곳에 이토록 훌륭한 건물이 있겠습니까? 「목수를 총동원해 두 달 만에 지은 것이오. 시간이 충분했다면 잘 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만 해도 쓸 만하오.」 그렇습니다.」 진가락은 입으로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이 보월루를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렸으며, 부족한 시일에 만들어 내느라 목수와 감공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권륜이 일어섰다. 자네가 위구르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사막의 광경을 닮았는지 좀 보아 주시게.」 진가락이 그를 따라 창 앞으로 가 밖을 바라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곳은 본래 온갖 꽃이 만발하여 울긋불긋하고, 회랑이 이리 꾸불 저리 꾸불한 어화원(御花園)이었다. 방금 동쪽에서 올 때는 호화로운 경치와 부귀한 기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높이 올라와서 바라보니 그 정경이 완전히 달랐다. 10리도 넘는 땅에 전부 모래를 깔았으며 그밖에 작은 모래언덕까지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자와 누각을 뜯어내고, 연못을 메우고, 화목을 캐낸 여러 가지 흔적도 보였다. 물론 넓은 사막과 같이 끝도 없이 아득한 그런 느낌은 없었지만 갖추어야 할 것은 대체로 갖춘 사막의 모양이었다. 「황상께서도 사막의 경치를 좋아하시나요? 진가락이 묻자 권륜이 웃기만 했다. 「그래, 근사해 보이나? 「인력을 많이 쓰지 않고서야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가 없겠지. 모래 위에는 그밖에 위구르 사람들이 쓰는 천막까지 쳐져 있었다. 천막 옆에는 세 마리의 낙타까지 매어져 있었다. 곽청동 자매를 생각하며 심란해하다가 다시 앞을 바라다보니 수백 명의 인부들이 아직도 건물을 헐고 있었다. 황제가 좁다고 여겨 다시 확장을 하는 것 같았다. 진가락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살벌하고 메마르기만 한 사막이 무엇이 좋다고 이 야단일까? 비단 같은 온갖 꽃이 만발하는 화원에 위구르 사람의 천막을 다 치다니 모를 일이로구나.) 권륜은 창 앞에서 떠나 탁자 위에 있는 내봉금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를 위해 다시 한 곡 들려 주면 어떨까? 진가락은 그가 시종 딴말만 하자 자기가 먼저 꺼내기도 거북했다. 그래서 단정히 앉아 줄을 고르고 조천자라는 곡을 탔다. 권륜이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가락은 연주를 하며 고개를 돌리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위구르에서 보낸 한 쌍의 옥으로 만든 병을 보게 되었다. 병 위에 그려진 향향 공주가 자기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끊어졌다. 「왜 그러시나? 궁중에 들어오니 좀 무서운가? 권륜이 웃었다. 진가락이 일어섰다. 「천자 앞에서 신 무례를 범했나이다.」 공손하게 사죄를 하자 권륜이 껄껄 웃었다. (네놈이 결국 나를 무서워하는구나.) 진가락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권륜의 왼손에 흰 천이 감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권륜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손을 등뒤로 돌렸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 가져왔는가? 「제 친구가 가져왔는데, 밖에 있습니다.」 권륜은 반기며 탁자 위에 있는 작은 방망이를 들어 운판을 두 번 가볍게 치자 태감이 한 명 들어왔다. 「진 공자와 동행한 사람을 들라 이르라.」 태감이 대답하고 내려갔다. 육비청 등은 아래에서 기다리며 진가락과 황제의 대화가 어떻게 진전되는지 궁금해했다. 잠시 후에 위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 다들 안심이 되었다. 태감의 전갈을 듣고, 여섯 사람이 그를 따라 올라왔다. 2층까지 올라왔는데 뒤에서 갑자기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올라왔다. 무진과 위춘화가 맨 뒤에 있다가 양쪽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 가운데로 올라가는데 상씨쌍협이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비켜라. 낮은 소리로 꾸중을 하며 각기 팔을 뻗어 상씨쌍협의 허리를 잡고 옆으로 힘껏 밀었다. (어느 놈이 이렇게 무례한가?) 상씨쌍협은 이렇게 생각하며 즉시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그 사람은 상씨쌍협이 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한 힘으로 반격하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이때 상씨쌍협도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양보해 주었다. 태감 차림을 한 이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빈손이요, 다른 한 사람은 상자를 받쳐 들고 있었는데 방금의 솜씨로 보아 무공이 막강한 것 같았다. 내시 가운데 이런 고수가 있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두 태감이 벌써 육비청과 조반산 뒤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바라다보고는 각기 우장을 뻗어 육비청과 조반산의 어깨를 잡았다. 「비켜라. 육비청과 조반산은 누군가가 습격함을 알았다. 육비청은 첨의십질, 조반산은 단편의 자세로 오는 힘을 막았다. 2명의 태감은 잡아 보지도 못하고 강한 힘에 의해 밀려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돌리고 육비청과 조반산을 노려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백진에게 물었다. 「황상께서 또 시위를 선발하나? 백진이 웃었다. 「이분들은 무학의 도인들이오. 어찌 우리와 같겠소? 2명의 태감은 코방귀를 뀌며 올라가 버렸다. 육비청 등은 이들 두 태감이 절기를 지니고도 이와 같은 천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백진에게도 거만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어떤 사람들인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에 5층으로 올라왔다. 「진 공자의 수행원 여섯이 여기 대령했습니다.」 백진이 주렴 밖에서 아뢰자, 태감 하나가 주렴을 걷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잠시 후에 무공을 할 줄 아는 2명의 태감이 빈손으로 나오다가 이들 여섯 사람을 훑어본 뒤에 내려가 버렸다. 「들어갑시다.」 태감이 말했다. 여섯 사람이 백진을 따라 들어갔다. 권륜은 가운데, 진가락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진가락이 눈짓을 하며 일어나 섰다. 육비청 등은 어쩔 수 없어 권륜을 향해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못난 황제 같으니라구! 그날 육화탑 위에서는 혼비백산 무서워 부들부들 떨더니 오늘은 거드름을 피우는구나. 만약 총타주의 체면만 아니라면 내 네놈의 몸에 칼로 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무진이 마음속으로 욕을 했다. 진가락이 조반산의 손에서 밀봉한 작은 나무 상자를 받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모두 여기 있습니다.」 「좋소, 먼저 가 보게. 내가 본 뒤에 다시 부를 테니.」 권륜의 말에 진가락이 이마를 조아리고 나오려고 했다. 「이 거문고는 도로 가져가게.」 권륜의 말에 진가락이 대답하고 거문고를 들어 위춘화에게 넘겨 주었다. 「황상께서 이미 위구르를 대파하셨으니, 성은을 베풀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기를 신 간청하나이다.」 권륜이 대답도 하지 않고 모두들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진가락은 어쩔 수 없이 일행을 데리고 백진을 따라 그 방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무공을 할 줄 아는 두 태감이 이들 앞으로 다가섰다. 「어떤 친구들인지 우리에게 소개를 하게.」 백진은 이들 두 태감을 무서워하는 듯 진가락을 향해 말을 꺼냈다. 「제가 여러분에게 궁 안에 계신 두 분의 고수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지현 어른이시고, 또 이분은 무명부 어른이십니다. 진가락은 큰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아 두 손을 공손히 잡고 웃었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백진이 지현과 무명부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진 공자신데 황상께서 강남을 순행하실 때 아시게 되었어요. 황상께서 총애하십니다. 머지않아 크게 쓰실 모양입니다.」 「이렇게 예쁘고 어리게 생긴 사람이 대학사(大學士)가 된다면 너무 이른걸. 진가락은 지현의 경솔한 말을 듣고 울컥 화가 났지만 참았다. 상씨 형제가 눈이 찢어지게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부을 것 만 같았다. 백진이 다시 육비청 , 무진 등을 소개했다. 원래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옹정 수하에 있던 자객의 아들이었다. 옹정은 이들의 아버지를 시켜 왕공 대신들을 살해하라고 한 뒤 비밀이 누설될까봐 다시 이들 2명을 몰래 제거하고 이들의 아들들을 거세시켜 태감으로 삼은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어려서 궁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생전에 가까이 하셨던 친구들의 지도로 무예를 배웠다. 그러나 강호상의 유명한 인물은 한 사람도 몰랐다. 무진 등의 당당한 이름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 가까이 지냅시다.」 무명부가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이 각기 육비청과 조반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이 보월루에 오를 때 육비청과 조반산의 어깨를 잡으려다 놓친 것이 못내 분해 지금 그들을 다시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현은 육합권을 배웠고, 무명부는 통비권에 정통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자 힘을 주어 비틀었다. 육비청이나 조반산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현이 비틀었지만 조반산의 손이 미끄러운 고기처럼 자기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육비청의 별명이 금리침, 그의 무공은 외유내강이었다. 무명부는 힘을 쓰자마자 마치 솜뭉치를 잡은 것 같아 놀라며 급히 손을 놓았다. 손을 급히 뽑았기 때문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육 형의 내공이 대단하시오.」 무명부는 억지로 웃었다. 이 두 분은 생김새가 이상한데, 무공이 놀랄 만하시겠지요. 우리 가까이 지냅시다.」 지현이 상씨 형제를 향해 말했다. 상씨 형제는 지현과 무명부에게 손을 잡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 거만한 두 친구의 힘이 상당하구나.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 줘야지.) 즉시 흑사장을 썼다. 지현과 무명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이마에 콩알만한 땀방울이 맺혔다. 지현과 무명부 두 사람은 황태후를 가까이 모시는 심복이었다. 황태후의 총애를 믿고 거드름을 부려 평소에도 시위들과 겉으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마찰이 심하였다. 이때 백진은 그들의 난처한 처지를 보고 못 본 체 고개를 돌렸지만,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외쳤다. 상씨 형제가 웃으며 손을 놓았다. 지현과 무명부는 뼛속까지 앞음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 손을 보니 손가락 자국이 검게 나 있었다. 그래서 상씨쌍협을 향해 눈을 한번 흘긴 뒤에 가 버렸다. 위춘화는 생각했다. (장소중의 그 같은 무공으로도 그날 오소령에서 상 오가에게 잡혀 중상을 입었는데 네놈들 둘이야 오죽하랴?) 백진이 궁문 밖까지 배웅을 했다. 문태래와 양성협, 장진 등이 궁 밖에서 기다리다가 그들을 맞이했다. 사랑과 대의(大義) 사이 권륜은 진가락이 나가자 태감들도 내보내고 나무상자를 열었다. 옹정의 유지와 생모가 직접 쓴 편지를 보았다. 확실히 자기의 왼쪽 엉덩이에 은홍색의 반점이 있는데 만약 친어머니가 아니라면 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이 일은 너무나 확실하여 더 의심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한참 동안 탄식을 했다. 태감에게 화로를 가져오라 명하여 편지와 증거물을 하나하나 그 화로 속에 집어넣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나무상자까지도 다 태워 없앴다. 권륜은 탁자 위에 놓인 그 옥으로 된 병을 넋을 잃고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태감을 불러들였다. 「그 사람을 들라 이르라.」 태감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한참 만에 다시 올라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신 죽어 마땅하옵니다. 그분이 올라오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권륜이 빙그레 웃고는 다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탁자 위의 옥으로 된 병을 손으로 가리키고 일어나 아래로 내려갔다. 2명의 태감이 옥으로 된 병을 안고 그 뒤를 따라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문 밖에 서 있던 궁녀가 주렴을 걷어 올렸다. 권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온 방 안에 생화가 가득했다. 내실에 들어가자 2명의 궁녀가 태감의 손에서 옥병을 받아 가볍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방 안에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방 밖을 향해 앉아 있다가 발소리를 듣고 갑자기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권륜이 손짓을 하자 궁녀들이 물러나왔다. 막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주렴이 들리며 지현과 명부가 안으로 들어와 문 앞에 섰다. 무었 때문에 왔느냐? 빨리 나가라.」 권륜이 벌컥 화를 냈다. 「신, 태후의 분부를 받들어 황상을 보호하겠습니다.」 지현의 말이었다. 「난 멀정하게 잘 있는데 무슨 보호란 말이냐? 「황태후께서 이 여자,,,,,, 성질이, 사나워 황상의 옥체를 또 다치게 할까봐 걱정스러우시답니다.」 권륜은 다친 왼쪽 손을 바라보다가 벌컥 화를 냈다. 「필요 없어, 빨리 나가. 지현과 무명부는 이마만 조아릴 뿐 물러가지 않았다. 권륜은 그들이 태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가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들이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흰 옷을 입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할 말이 있으니 고개를 돌려라.」 권륜이 위구르 말로 했다. 그 소녀는 오른손에 한 자루의 단검을 꼭 잡은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보시오.」 권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소녀는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가 궁금했던지 살짝 고개를 돌리며 곁눈질로 그 양지 백옥병을 쳐다 보았다. 土녀가 고개를 돌리자 권륜과 지현 , 무명부는 갑자기 눈이 부셨다. 원래 이 소녀가 바로 향향 공주였던 것이다. 목탁륜이 패배를 하자 향향 공주는 조혜의 부하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조혜는 장소중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황제가 이 여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특별히 청병을 파견하여 예쁜 가마에 항향 공주를 태워 정중하게 북경의 황궁으로 보냈다. 당일 권륜은 옥병 위에 있는 향향 공주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졌던 것이다. 뒤에 이 옥병을 낙빙이 훔쳐가자 권륜은 크게 화가 나서 옥병을 지키던 2명의 시위를 처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병 위에 그려진 미인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장소중을 위구르로 파견하여 이 미인을 찾아 북경으로 보내라는 밀령을 내렸었다. 장소중을 보낸 뒤에 날마다 소식을 기다렸다. 미인이 와도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선생을 불러 위구르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총명한데다가 또 열심히 배워 몇 달뒤에는 웬만한 말을 할수 있게 되었다.통역을 해 주지 않아도 의사를 전할 수 있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녀가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향향 공주의 마음은 벌써부터 진가락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또한 권륜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 원수가 아닌가! 어찌 그의 말에 쫓겠는가? 그녀는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때마다 진가락이 그녀를 데리고 만리장성으로 놀러 가겠다고 한 약속이 생각났다. 그녀는 진가락과 만나 함께 설련을 따고, 청병을 무찌르고, 새끼사슴을 구하고, 이리떼를 쫓고, 적진에 동행하고, 옥붕에 들어가는 등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그래서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믿었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만리장성에 가겠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권륜이 부드럽게 유인을 하거나, 협박을 해도 그녀는 시종 신념에 가득 차 완강하게 저항했다. (내가 당시 이리 떼에게 포위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리가 나를 잡아먹으려고는 하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나를 구하러 오실 것이다.) 권륜은 그녀가 나날이 초췌해 가자 이러다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위협을 할 수도 없었다. 또 북경에 있는 솜씨 좋은 장인들을 불러다 이 보월루를 지어 그녀가 살도록 해 주었다. 보월루가 완성되자 그는 득의만면해 손수 '보월루기'를 짓기까지 했다. 보월이라 이름한 것은 또한 달의 궁전을 닳자는 뜻 아니랴, 다시, 푸른 잎과 붉은 꽃 어우러져 달의 궁전이 바로 요지가 된 듯하구나, 이 보월루기에서 향향 공주를 상아와 선녀에 비교하며 그녀를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향향 공주는 전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보윌루 가운데는 진귀한 장식과 보물도 못 본 체했다. 다만 사면 벽에 가득한 「난세령(郞世寧)이 그린 위구르의 풍광을 넋을 잃고 바라다보며 진가락과 함께 지냈던 아름다운 그날만을 회상했다. 권륜은 틈만 나면 그녀의 옆에 와서 지켜 보았다. 그녀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그러다 이날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광이 번쩍하며 단검으로 자기를 찔렀다. 향향 공주는 무예를 몰라 서툴렀고, 권륜은 민첩하여 급히 뛰어 피했다. 그러나 왼손이 단검에 찔려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그는 깜짝 놀라 하얗게 질려 전신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후로는 감히 그녀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을 안 황태후가 태감에게 명하여 그녀의 단검을 뺏으라고 했다. 향향 공주는 누군가가 접근하기만 하면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했다. 권륜은 어쩔 수 없어 그냥 놓아 두라고 했다. 향향 공주는 그들이 음식에 마취약을 쓸까봐 신선한 과일을 직접 깎아 먹을 뿐 다른 음식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권륜은 무영전 옆에 위구르 사람들의 목욕탕을 지어 놓고 그녀에게 목욕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자기가 입은 옷을 벗을 수 없도록 실로 꿰매 버렸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상한 증세가 있어 목욕을 안 할수록 더욱 진하고 강한 향기를 풍겼다. 본래 세상 일도 모르고 천진난만하던 소녀가 수십 일 동안 혼자 궁중에서 간사하고 사악한 사람들의 시달림에 대항하는 사이에 강인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이때 얼핏 옥병을 보더니 권륜이 또 무슨 흉계를 쓸까봐 고개를 돌리고 다시 칼자루를 잡았다. 권륜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전에 옥병 위에 있는 그대의 초상을 보고 세상에 이런 미인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만나 보니 정말 천하의 어떤 화공도 그 아름다움의 1만분의 1도 그려 내지 못할 것으로 믿게 되었소.」 그러나 향향 공주는 계속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온종일 번민만 하다가는 병이 나겠소. 고향이 그립거든 이 창 앞으로 와 보시오.」 태감에게 분부를 하여 망치를 가져다가 창에 박힌 못을 빼고 창을 열게 했다. 원래 권륜은 그녀가 상심과 분노로 뛰어내려 자살할까봐 그녀가 묵고 있는 이 1층의 창문을 모두 못질해 두었던 것이었다. 향향 공주는 권륜과 태감이 창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흥!) 하고 소리를 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권륜이 눈치를 채고 일어나 동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두 태감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향향 공주는 그들이 창 앞에서 멀리 떠나자 서서히 다가와 밖을 바라다 보았다. 널찍한 모래 위에 위구르 사람들의 천막이 쳐져 있고 먼리 이슬람교의 사원까지 보였다. 가슴이 뭉클하며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수많은 동족들이 권륜이 파견한 병사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생각하자 분노가 끓어올라 고개를 돌리며 탁자 위의 옥병을 들어 권륜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다. 무명부가 쏜살같이 대들며 왼손을 뻗어 받았지만 옥병이 너무나 미끄러워 놓치는 바람에 땅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하나가 깨지자 두번째 병이 날아왔다. 지현이 두 손으로 잡았지만 옥병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맑은 소리를 내며 깨졌다. 무명부는 그녀가 또 황제를 해칠까봐 달려들어 잡으려고 했다. 향향 공주가 자신의 목에 단검을 댔다. 「게 섰거라. 권륜이 다급히 외치자, 무명부는 우뚝 서며 손을 움츠렸다. 향향 공주가 몇 발짝 급히 뒤로 피하는데 땡그랑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무명부는 혹시 암기가 아닐까 해서 급히 주워 보니 패옥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황제에게 바쳐 올렸다. 권륜이 받아 보고는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바로 자기가 해령의 마당에서 진가락에게 주었던 그 온옥이었다. 그 위에는 금색으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정이 깊으면 오래 살지 못하고 억세고 강하면 오히려 욕이 되는 법 겸손한 군자는 온화하기 옥과 같다. 그가 이 온옥을 진가락에게 줄 때 장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정표로 주라는 말을 했었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랑의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을 아는가? 권륜이 다급히 물었다. 잠시 후에 다시 물었다. 「이 옥은 어디서 났는가? 「되돌려 주세요.」 향향 공주가 왼손을 뻗었다. 권륜의 마음속에 질투심이 일어났다. 「누가 주었는지 말을 하면 되돌려 주마.」 「제 남편이 준 것이에요.」 향향 공주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시집을 갔는가? 「제 몸은 아직 가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벌써 갔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고 가장 용감한 분이에요. 당신이 이렇게 나를 잡고 있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나를 구출할 것이에요. 당신이 황제라지만 그분은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며, 나도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권륜은 들을수록 거북했다. 「나도 그 사람이 누군지 잘 안다. 그는 홍화회의 총타주 진가락이다. 강호의 못된 무리의 두목인데 뭐 대단할 것이 있겠느냐? 향향 공주는 그의 입에서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진가락의 이름이 나오자 너무나 즐거워 표정까지 환해졌다. 그래요? 당신도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나를 내보내 주는 것이 좋을 텐데요.」 권륜은 고개를 들다가 맞은편에 있는 화장대의 큰 거울에 비친 자띠의 용모를 보게 되었다. 진가락의 잘생긴 모습과 문무에 어찌 자기를 비교한단 말인가?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온옥을 힘껏 집어 던졌다. 쨍그렁 소리와 함께 거울 속에 비치던 자기의 얼굴이 깨지며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향향 공주가 잽싸게 달려들어 패옥을 주워 옷깃에 문지르고 어루만졌다. 권륜은 더욱 화가 나서 발을 구르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는 평소 글을 읽거나 시를 지을 때 쓰던 조용한 방으로 돌아갔다. 쓰다 만 (보윌루기)가 책상 위에 있었다. 누각의 이름은 보월, 상아가 있다네. 천자는 지난날 꿈에서 보았지,-- 평측도 맞지 않았고 표현이 어딘가 아쉬워 본래는 천천히 퇴고 하려던 참이었다. 만약 성천자의 홍복이 하늘에 닿아 백신 이 가호할 것이라는 몇 마디 묘한 문구가 붓끝에서 나왔으면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권륜은 그 종이를 빼앗듯 주워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한참 동안 앉아 있으니 끓어오르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 천자의 몸으로 그 권위가 사해를 떨치거늘, 어찌하여 이 이민족의 여자는 이토록 고집을 부리며 순종하지 않는가? 원래 진가락 그 녀석이 중간에서 장난을 치기 때문이로구나,,,,,, 그는 나에게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실의 천하를 회복하자고 하고 있으니 그야 물론 좋은 일이지만,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다는 말처럼, 큰일을 이루기는커녕 그러다 내 목숨만 잃는 것이 아닐는지? 이 일로 말미암아 몇 달 동안 고심을 했지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우니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속으로 백 번도 천 번도 생각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유스러운가, 만약 그 큰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마다 타인의 제동을 받게 된다면 나는 허수아비로 변하는 것이 아닐는지. 내 무엇 때문에 신의를 버리고 허명을 차지한단 말인가?) 다시 또 생각했다. (이 위구르의 여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그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니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끝내 버리자.) 즉시 결정을 내리고 태감에게 명령하여 백진을 들여보내도록 했다. 잠시 후에 백진이 들어섰다. 「보월루의 각 층에 시위를 4명씩 배치하라. 그리고 건물 밖에도 20명의 시위를 배치하되 아무도 눈치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렷다. 백진이 대답하자 권륜이 또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진가락을 들여보내되 다른 사람은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 백진이 분부를 듣고 먼저 시위를 배치한 뒤에 진가락을 부르러 갔다. 진가락은 통지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 여러 사람과 상의해 보았다. 육비청,문태래 등은 왜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는지 음모가 있을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진가락이 말을 꺼냈다. 「위구르와 소림사에서 가져온 증거물을 내 벌써 황상께 주었소. 지금 막 나를 보고도 또 오라고 하니 틀림없이 이 일을 상의하자는 것일 게요. 이는 우리 한실의 강산과 부흥의 대업이 달린 것이니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무진을 바라보았다. 「도장님, 만약 제가 돌아오지 못하거든 홍화회를 도장님께서 맡아 주시고 또 제 원수도 갚아 주시기 바랍니다.」 「총타주님은 안심하십시오.」 무진이 분연히 대답을 했다. 진가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서는 이번에는 지원할 생각을 마시오. 만약 그가 나를 해친다 하더라도 궁 밖에서는 손도 쓸 수 없거니와 오히려 피해만 있을 것이오. 군웅들은 정세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그러마고 대답했다. 진가락과 백진은 다시 금성으로 돌아왔다. 벌써 초경이라 2명의 태감이 등불을 들고 앞에서 이들을 안내했다.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땅바닥에 꽃그림자를 비춰 주고 있었다. 진가락은 태감을 따라 보월루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4층이었다. 태감이 통보를 하자 즉시 들라는 권륜의 명이 전해졌다. 작은 방 안의 침상 위에 권륜이 앉아 있었다. 진가락은 꿇어앉아 절을 했다. 권륜이 앉으라고 하고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진가락은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구십주가 그린 한 폭의 多궁춘효도를 바라다보았다. 세필로 그린 정원과 인물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 옆에는 권륜이 쓴 대련까지 있었다. 성왕을 본받으려고 애를 쓰며, 날마다 달마다 부지런을 떨지만 오히려 신에게 부끄러워라. 권륜은 자기가 쓴 글씨를 진가락이 바라보자 웃으며 어떠냐고 물었다. 「황상의 흉금이 바다와 같고 뛰어난 무용이 천자의 기상에 조금도 손색이 없으십니다. 장래 큰일을 이룩하신다면 한이 포악한 진을 무찌르고, 명이 원의 오랑캐를 축출한 업적도 황상의 덕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 공은 만대에 퍼질 것입니다.」 권륜은 그가 공덕을 칭송하는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흐뭇해져 수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머금었다. 「너와 내가 군신 사이라지만 정은 형제와 같으니 이후로는 나를 잘 보좌해야만 하네.」 진가락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여러 가지 증거물과 편지를 읽은 뒤에 두 사람이 형제라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말 가운데 약속을 저버리지 않은 것 같아 매우 기뻤다. 또한 그와 함께 대사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게 되자 의심하고 있던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렸다. 「황상의 영명한 결단은 참으로 만민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권륜은 그가 일어서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 비록 천자라 하지만 복만은 자네에게 미치지 못하네.」 진가락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권륜이 말을 이었다. 「작년 8월 내가 해령에서 자네에게 준 패옥은 지금도 몸에 지니고 다니나? '황상께서 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기에 이미 주어 버렸습니다.」 '눈이 높은 자네의 마음에 들었다면 틀림없이 절세의 가인이겠군. 진가락의 눈언저리가 붉어졌다. '지금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로 떠도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상께서 대업을 이룩하시는 날, 신은 하늘 끝 바다 끝이라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그 소저는 자네가 매우 사랑하는 사람인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진가락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가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자네는 알고 있는가? 예. '나는 황후를 오랫동안 모셨네. 위인도 어질고 덕이 있다네. 만약 내가 자네와 대사를 함께 도모한다면 그녀가 결사적으로 막을 텐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진가락이 무슨 수로 이 말에 대답한단 말인가? '황상은 영명하신데, 신은 우둔하여 뭐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가정과 나라를 모두 온전하게 할 수 없다면 주저하지 않을 수 없겠지. 지금 내게 고민이 하나 있는데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유감일세.」 '황상께서 분부만 하신다면 신은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으렵니다. 권륜이 한숨을 쉬었다. 「본래 군자는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탐하지 않는 법이라 했는데 이는 팔자소관이라 도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자네 저쪽에 가서 좀 보게나! 이렇게 말하며 손으로 서쪽에 있는 문을 가리키고 일어나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진가락은 그의 괴상하고 얄궂은 말을 듣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두꺼운 휘장을 걷어 올리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침실인데 모퉁이에 붉은 초가 환하게 밝혀져 있고, 흰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넋을 잃은 듯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심궁 가운데서 갑자기 향향 공주를 만나자 뜻밖의 일에 어리둥절하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향향 공주는 발소리를 듣고 칼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은 자기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임이 아닌가! 화가 나 있던 얼굴이 기쁨으로 변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틀림없이 저를 구하러 오실 줄 알았어요. 참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오셨군요.」 진가락은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을 꼬옥 안고 물었다. 「객사려, 우리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향 공주가 얼굴을 번쩍 들고 흔드는데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진가락은 감격했다. (황제 형님은 너무나 훌륭했다. 그녀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고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데려다 이렇게 만나게 해 주다니.) 그는 향향 공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숙인 채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감미로운 분위기에 취하여 모든 것을 잊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흘렀다. 진가락이 서서히 그녀를 풀어 주며 상기된 볼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뒤에 있는 깨진 거울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그림자가 깨진 유리조각마다 반사되고 있었다. 「보세요. 천 개의 내가, 이 천 개의 내가 당신을 포옹하고 있지 않아요! 향향 공주도 곁눈질로 깨진 거울을 바라다보며 주머니 속에서 그 패옥을 꺼내 들었다. 「그가 내 이 패옥을 빼앗아 던져 버렸어요. 깨지지 않아 다행이예요. 「누가 그랬습니까? 향향 공주의 말에 진가락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 못된 황제.가 「왜요? 진가락은 더욱 놀라 물었다. 「그가 나를 위협했어요. 나는 무섭지 않다고 했지요, 당신이 틀림없이 구하러 오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가 화를 내며 나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 칼 때문에,,,....」 「칼이라니? 진가락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해 이렇게 물었다. '우리 아빠가 그들에게 살해될 때 나는 옆에 있었어요. 아빠가 '이 칼을 주시며 적이 나를 해치려거든 이 칼로 자결을 하라고 하셨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여자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해도 알라 신은 우리를 책망하지 않아요. 다른 이유로 자살을 하면 불구덩이에 던져지구요.」 진가락이 고개를 떨구다가 그녀의 옷이 촘촘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연약하고 천진한 여자가 폭력에 저항하느라 몇 차례나 생사의 고비를 넘겼을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다시 그녀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정신을 가다듬고 눈앞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황제가 객사려를 궁으로 데려온 것은 원래 자기가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구나. 그가 어화원에 사막을 설치하고, 위구르의 천막을 세우고, 이슬람의 사원을 지은 것도 모두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겠지. 그러나 객사려는 목숨을 잃을망정 그를 쫓지 않았구나. 그가 위협과 유혹 등 온갖 수단을 다 썼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 그가 방금 한숨을 쉬며 나보다 복이 없다 한 것도 결국은 이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향향 공주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며칠 동안 혼자 몸으로 저항을 하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리운 사람을 만나자 긴장이 풀려 더 버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가 무슨 의도로 그녀를 만나게 했을까? 그가 황후와의 관계를 말하며 큰일을 도모하려면 황후를 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집이냐, 나라냐, 양자 택일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식은땀이 나며 몸이 떨렸다. 향향 공주의 몸도 따라서 흔들렸다. 그녀는 꿈속에서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내 객사려를 위하여 황제와 결별을 하나, 아니면 큰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순종하라고 해야 하나?)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오락가락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결정이라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너무나도 깊다. 나를 위해 결사적으로 자기의 순결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자기를 구출하러 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내 어찌 이 여자를 버릴 수 있을 것이며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만약 객사려와 나, 두 사람의 애정을 위해서라면 형님과는 결별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몇백 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기회를 이 때문에 놓친다면 우리 두 사람은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머릿속만 어지러울 뿐 어찌해야 좋을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향향 공주가 갑자기 눈을 떴다. 「우리 떠나요. 그 못된 황제를 다시 볼까 두려워요.」 「그럽시다. 우리 지금 떠납시다.」 그녀의 손에서 단검을 받아들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천고의 죄인이 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여기서 함께 죽으면 그만이야. 만약 요행히 뚫고 나갈 수 있다면 나는 이 여자와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리라.) 창 옆으로 가 시위와 태감들이 어느 곳에 배치되어 감시하고 있는지 사방을 살펴보았다. 주위는 고즈넉했고 먼 곳에 등불만 어른 거리고 있었다. 권륜의 지시에 따라 이 가짜 사막을 확장하기 위하여 동원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철야 작업을 하느라 켜 놓은 불이었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민가를 제멋대로 철거하고 있었다. 이를 바라다보는 진가락의 눈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백성이 살 곳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그러다 또 이렇게 생각을 바꾸었다. (이 황제는 일 벌리기만 좋아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가엽게 여길 줄 모르는 구나. 그가 오랑캐의 우두머리로서 한인을 계속 괴롭힌다면 천하의 수만 수천의 백성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도탄 속을 헤매야 한단 말인가? 만약 하늘의 뜻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이 같은 고통을 차라리 나와 객사려가 짊어지기로 하자.) 여기까지 생각하자 창자가 끊어지는 듯 아팠다. 정신을 가다듬고 향향 공주를 바라다보았다. 「여기서 좀 기다리세요. 내 잠시 나갔다 올테니.」 향향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에서 단검을 받아 들고 미소를 지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권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사(國事)는 무겁고 사정 (私情)은 가벼운 것이니, 제가 순종하라고 타이르겠습니다.」 「정말인가? 권륜은 너무나 기뻐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 맹세를 하셔야겠습니다.」 말을 하며 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권륜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무슨 맹세를 하란 말인가? 「만약 성심성의로 온갖 힘을 다하여 만주 오랑캐를 내쫓지 않으신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요? 권륜은 한참 생각해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 생전의 영화는 어쩔 수 없겠지만 내 죽은 뒤에 사람들이 내 묘지를 파헤치고 내 시체를 찢어 버리면 되지 않겠나. 황제들이 꿈꾸는 것은 만세에 누리는 영화였다. 자기의 묘지를 두고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제가 그녀를 타이르지요. 그러나 저와 그 여자는 궁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궁에서 나가다니? 권륜은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금 황상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있으니 궁 안에서는 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녀를 데리고 만리장성에 나가 생각을 바꾸도록 잘 타이르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는가? 권륜으로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그녀를 데리고 만리장성에 놀러 가겠다고 약속을 한 바 있습니다. 이 약속을 지킨 뒤에 저는 앞으로 영원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지 않으렵니다.」 「그 여자를 데리고 다시 돌아올 자신이 있는가? 「우리 강호의 사람들은 신의라는 두 글자를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군자일언은 중천금이오! 권륜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자가 그 미인을 데리고 멀리 달아난다면 어디에 가서 찾는단 말인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이 그녀를 타이르는 방법 이외에는 그녀를 순종시킬 묘책은 없다. 이자가 큰일을 도모할 결심으로 여자 하나 때문에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탁자를 황 하고 내려쳤다. 「좋다. 나가도록 하라. 진가락이 하직하고 아래로 내려가자 권륜은 자기 뒤에 있는 휘장 안을 향해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40명의 시위를 데리고 이들을 미행하라.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된다. 휘장 뒤에 있던 백진이 대답을 했다. 진가락이 4층으로 돌아와 향향 공주의 손을 잡았다. 「우리 갑시다.」 향향 공주는 너무나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궁 밖으로 나왔다. 궁중의 시위들은 벌써 황제의 분부를 들었기 때문에 막으려 하지 않았다. 향향 공주는 마냥 즐거웠다. 평소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이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믿었다. 일마다 순조로워 쉽게 궁문을 나오면서도 전연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궁에서 나오자 날이 희미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심연이 백마의 고삐를 잡은 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진가락을 보고는 반기며 달려왔다. 향향 공주가 그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놀라며 기뻐했다. 「내가 하루만 성 밖에 나갔다가 날이 저물면 돌아올 테니 여러분들께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게.」 심연은 그들 두 사람이 함께 말에 올라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막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수십 명의 시위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앞장 선 깡마른 사람이 백진이라, 깜짝 놀라서 달려와 군웅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백마는 성 밖으로 나오자 점점 더 빨리 달렸다. 향향 공주는 진가락의 품에 기대어 길 옆의 나무들이 쏜살같이 뒤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몇 달 동안의 슬픔과 근심이, 스쳐 지나가는 나무 그림자를 따라 일시에 사라졌다. 그 말은 보통 말이 아니라 반나절도 되지 않은 동안에 벌써 청하 , 사하(沙河) , 창평(昌平) 등지 를 지나 남구(南口)에 이르렀다. 「우리, 명 황제의 능묘에 가 볼까요?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며 천수산(天壽山)을 향해 달렸다. 옥석교 (玉石橋)를 지나자 큰 비석이 보였다. 대명장룽신공성덕비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 왼쪽에 권륜이 쓴 몇 줄의 제자(題字)가 보였다. (명의 멸망은 도적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종의 어리석음 및 환관들의 방종에 있었다. 대신들은 작위와 금전을 탐냈으며, 환관들은 아첨만 일삼았다. 신종이 즉위하여 환관을 제거했지만 천지의 대세를 어찌 다시 되돌릴 수 있으며 부정과 부패를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가혹한 수사에 사람들이 자기만 면하면 된다는 기음을 품고 백성들이 질고에 시달리면서도 서로 모여 도적이 되었으니, 오호라! 천하 사람이 두려운 바를 모르는구나. 진가락이 몇 줄을 읽다가 생각에 잠겼다. 백성들이 질고에 시달리면서도 고하지 아니하고 서로 모여 도적이 됨을 알았으니 그를 무식하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 무얼 그리 보세요? 「저것은 황제가 쓴 글씨요.」 향향 공주의 물음에 진가락이 대답했다. 「이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보실 것도 없어요.」 향향 공주가 이렇게 말하고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양쪽에 사자며 코끼리 ,낙타,기린 및 문무백관의 석상이 서 있었다. 향향 공주는 돌로 새긴 낙타를 보자 고향 생각이 나 눈물을 글썽거렸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이 여자와 같이 있는 것도 오늘 하루뿐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기쁘게 해 주어야만 한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 두 사람은 평생 즐거운 날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상념을 떨쳐 버리고 웃었다. 「낙타를 타고 싶어서 그러시나요? 그녀를 번쩍 안아 가볍게 뛰어 낙타 등에 올라탔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는 낙타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앞으로 가려고 했다. 향향 공주가 자지러지게 웃다가 한숨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 낙타가 정말 달릴 수 있어 우리를 천산 아래에 데려다 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거기 가서는 무얼 하시게요? 진가락이 묻자 향향 공주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다보았다. 「그때는 제가 꾀나 바쁘지요. 꽃을 따다가 당신에게 드려야 하고, 양털도 깎아 주어야 하며, 새끼사슴에게 양젖도 먹여야지요 또, 아빠, 엄마, 오빠의 묘지에도 가야 하구요. 또 언니도 찾아야 하구요. 진가락은 가슴이 철렁하여 급히 물었다. 「언니가 어떻게 되었어요? 「그날 밤, 청병이 갑자기 사면팔방에서 공격을 해 오는데도 언니는 몸이 아파 꼼짝 못했답니다. 난군 가운데서 모두들 뿔뿔이 헤어진 뒤로는 시종 언니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향향 공주는 슬픈 소리로 말했다. 진가락은 한참 동안 암담해 있다가 다시 말을 타고 출발했다. 산 위로 올라가 얼마 후에는 거용관에 이르렀다. 양쪽에 깎아지른 절벽, 겹겹이 싸인 산봉우리, 성벽이 끝없이 연결되어 긴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산과 산 사이에 뻗어 있었다. 향향 공주가 물었다. 「이런 노력을 기울여 무엇 때문에 성벽을 만들어 놓았지요? 「그것은 북쪽의 적이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답니다. 이 장성의 남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남자들은 정말 이상해요. 모두들 즐겁게 노래하며 춤추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무슨 재미가 있다고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만약 황제가 당신의 말을 듣게 된다면, 변경에 있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다시는 괴롭히지 말라고 해 주세요.」 「저는 영원히 그 못된 황제를 만나지 않을 겁니다.」 진가락의 말은 정중해졌다. '만약 그가 당신의 말을 듣게 된다면 그에게 나쁜 일은 그만 하고 백성을 위해 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충고해야 합니다. 이에 승낙을 해 주세요. '정말 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당신이 내게 시키시는 일을, 그래 내가 어길까 봐 그러세요? 향향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객사려, 정말 고마워요.」 진가락의 말에 향향 공주가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장성 위를 거닐었다. 「갑자기 한 가지 일이 생각났어요.」 「뭡니까? 향향 공주의 말에 진가락이 물었다. '저 오늘 정말 즐거워요. 여기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인 줄 아세요? 당신과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내 곁에 있기만 한다면 아무리 경치가 좋지 않은 곳이라 하더라도 저는 좋아할 수 있어요. 진가락은 그녀가 즐거워하면 할수록 괴롭기만 했다. 「내게 시키고 싶은 일은 없나요? 향향 공주는 어리둥절했다. '내게 정말 잘해 주시지 않았어요? 당신은 뭐든지 다 제 소원대로 해 주셨어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가져다 주시지 않았어요.' 하고 말하며 품속에서 그 설중련을 꺼냈다. 연꽃은 말라 버렸지만, 注기만은 그윽하게 풍겼다. 「다만 한 가지 일만은 하시려고 하지 않더군요. 제가 노래를 부르시라면 못 부른다고 핑계만 대시던데. 「저는 정말 여태까지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습니다.」 향향 공주는 화를 내는 체했다. 좋아요. 앞으로는 저도 노래를 부르지 않을 거예요.」 진가락은 생각했다. (우리 두 사람은 금생에 겨우 오늘 하루만 함께 있을 수 있다. 내가 노래를 불러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준다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의 하녀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는데 지금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부를 테니 웃지 마세요.」 「좋아요, 좋아! 빨리 부르세요. 향향 공주가 손뼉을 쳤다. 진가락이 가사를 생각해 보고는 부르기 시작했다. 가랑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이따금 산들바람 부는데 누군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네. 혹시나 내 임일까 밉다고 중얼중얼 욕을 했건만 자세히 살펴보니 날씬한 내 임이 아니라 공연히 부끄러워 몸을 숨겼네. 진가락이 노래를 다 부른 뒤에 가사를 위구르 말로 해석해 들려 주었다. 향향 공주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처녀 어지간히 눈이 나빴나 보지요.」 혼자 달콤하게 즐기고 있다가 진가락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속이 상하셨나요? 아, 어머니와 함께 옛날 이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생각나시나 보군요. 우리 이제 그만 불러요.」 두 사람은 장성 안팎을 두루두루 돌아다녔다. 성의 바깥쪽은 요형의 여장(女場)으로 싸여 있었으며, 안쪽은 돌로 된 난간 가운데는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30자를 간격으로 조금 높은 평지로 되어 있었다. 진가락은 봉화를 놓는 높직한 평지를 보자, 곽청동이 위구르에서 이리 똥을 태워 청병을 대파한 일이 생각났다. 이제 그녀의 생사도 모르고 있으니 더욱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억지로 웃고는 있었지만 마음속의 수심만은 감출 길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전 알아요.」 향향 공주의 말이었다. 「그래요? 「지금 우리 언니를 생각하고 계셨죠?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 「우리 세 사람이 옛 성에 들어가 있었을 때 위험은 했지만 나는 당신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진가락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객사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향향 공주는 한숨을 쉬었다. 「전에는 제가 어린아이라 아무것도 몰랐답니다. 하지만 제가 궁궐에 잡혀 있는 기간 동안 저는 날마다 당신과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지요. 전에 모르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다 알게 되었답니다. 제 언니가 줄곧 당신을 좋아했고, 당신도 제 언니를 좋아했지요.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본래 당신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진심으로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당신 없이는 저도 살 수 없답니다. 우리 빨리 언니를 찾으러 가요. 찾은 뒤에 우리 세 사람이 영원히 함께 즐겁게 지내도록 해요.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기까지 말하다가 눈앞이 환해지며 얼굴에 기쁨이 넘쳐 흘렀다. 진가락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객사려, 정말 좋은 생각이오. 당신과 당신의 언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인가 보오.」 향향 공주는 일어서서 먼 곳을 바라다보았다. 서쪽 끄트머리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 물빛이 반짝했다. 귀를 기울이니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줄이 퉁기는 듯했다. 「저 소리 좀 들어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거기가 탄금협 (彈琴峽)이오.」 「우리 가서 봐요. 두 사람은 산 사이를 지나 가까이 가 보았다. 한 줄기 맑은 물이 돌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물 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하는 게 음악과 같았다. 향향 공주가 물 옆으로 다가서며 웃었다. 「저 여기서 발을 씻어도 될까요? 「씻으세요.」 그녀는 신발과 버선을 벗고 물 속에 들어가 섰다. 시원하고 맑은 물이 그녀의 백옥 같은 발등을 어루만지며 흘러갔다. 진가락은 자기의 그림자가 물 속에 비친 것을 보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비상 식량을 꺼내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향향 공주는 그의 몸에 기댄 채 음식을 먹으며 수건으로 발을 닦고 있었다. 진가락이 입술을 깨물었다. 「객사려, 내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두 손으로 그를 껴안고 자기의 머리를 그의 품속에 숨긴 채 속삭였다. 「저는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줄을 알아요,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말하지 마세요.」 그는 마음속이 뜨끔했다. 막 나오려던 한마디 말을 꿀꺽 삼켰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옥봉에서 그 마미아의 유서를 읽었는데 아직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지금 그녀의 아리와 함께 하늘에서 살 거예요.」 「당신들 이슬람 교도들은 죽은 뒤에 영원히 낙원에서 행복을 누린다고 믿고 있지요? 「그야 물론이지요.」 「내가 북경으로 돌아간 후에 즉시 당신들의 이슬람 교주를 찾아가 나도 이슬람 교도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향향 공주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가 스스로 이슬람 교도가 되려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뜻밖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이렇게 훌륭한 분일 줄은 몰랐어요.」 「내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 이슬람 교도가 되려고 하시다니, 정말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금생에서는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은 뒤에 날마다 그대와 함께 지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진가락이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무겁게 말했다. 향향 공주는 이 말을 듣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해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금생에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없다니요? 「그렇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향향 공주가 놀라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두 줄기 눈물이 진가락의 옷에 뚝뚝 떨어졌다. 진가락이 부드럽고도 힘차게 그녀를 포옹했다. 「객사려, 다만 그대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먹지 않아도, 입지 않아도 좋아요. 또 날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달갑게 받으려오. 그러나 당신은 마미아를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 마미아는 동족들이 폭군의 탄압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리를 떠나 그 폭군의 아내까지,,,,,,.」 향향 공주의 몸이 맥을 잃고 축 늘어지다가 그의 발 위에 쓰러져 흐느꼈다. 「저보고 황제에게 순종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찔러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그는 나의 친형이오.」 그래서 자기와 권륜의 관계, 홍화회의 도모, 육화탑에서 있었던 맹세 및 오늘 권륜이 자기에게 요구한 바를 하나도 숨김없이 고백했다. 그녀는 끝까지 듣고 자신이 오매불망 추구하던, 그리고 벌써 손 앞에 와 있는 행복이 다시 손 안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듯해 그만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진가락이 자기를 꼭 껴안고 있었다. 진가락의 옷이 그녀의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녀가 일어섰다. 「좀 기다리세요.」 그녀는 천천히 먼 곳에 있는 큰 돌 위로 올라가 서쪽을 향해 꿇어 엎드려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다. 그녀가 어찌해야 좋을지 알라 신이 계시를 내려 달라는 간곡한 기도였다. 담담한 햇빛이 그녀의 옷 위에 쏟아졌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뒷모습 속에 무한한 고뇌와 우수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되돌아왔다. 「당신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어요.」 진가락이 왈칵 그녀를 껴안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밖에 없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것도 없었지요. 온종일 저만을 껴안고 있어 달라고 했을 텐데요.」 진가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고향을 떠나 온 이후 여태까지 목욕을 못했어요. 지금 목욕을 하렵니다.」 단검을 빼 의복을 봉했던 실을 끊고 겉옷을 벗었다. 「내 저쪽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리다.」 진가락이 일어나 섰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를 지켜 보셔야 해요. 제가 목욕하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셔야 해요. 저를 보셔야만 영원히 저를 잊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객사려, 그래 내가 설마 당신을 잊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러니 저쪽으로 가시지 마세요. 진가락은 할 수 없이 다시 앉았다. 그녀가 옷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벗었다. 물 소리 졸졸거리는 산골짝에 황금빛 놀이 절세의 아름다운 몸을 비춰 주고 있었다. 진가락은 어지러워 똑바로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니 갑자기 서너살 먹은 발가벗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아름답고, 또 그토록 순결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만들어 내다니, 하늘 위에는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 계신 것이 아닐까?) 마음속에 갑자기 경건함과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찼다. 향향 공주는 몸의 물방울을 닦고 천천히 옷을 챙겨 입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이 몸을 다시는 영원히 내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없다니.) 머리를 말린 뒤에 다시 진가락의 품에 안겼다. 「내가 전에 견우 직녀의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아직도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노래도 하나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나요? 비록 1년에 한번밖에 만날 수 없지만, 인간 사회의 헤아릴 수도 없는 집회를 능가한다고요.」 「그래요. 우리 영원히 함께 있을 수는 없지만, 신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줄 것이오. 사막에서, 또 여기서 우리 둘은 이렇게 즐겁지 않습니까? 비록 시간은 짧지만 수십 년을 산 부부보다도 우리 두 사람의 즐거움이 더욱 크지요.」 향향 공주는 그의 부드러운 위안의 말을 들으며 서산에 기우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태양을 따라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통곡을 했다. 「태양이, 태양이 완전히 져 버렸어요! 진가락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객사려, 내가 당신을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향향 공주는 태양이 진 곳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태양이 만약 다시 떠오를 수만 있다면, 짧은 시간만이라도 다시 떠오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내 동포를 위해서 당하는 고생이니 말할 것도 없다지만, 당신은 그들을 본 적도 또 그들을 사랑한 적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 그들도 우리들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든 위구르의 형제를 당신은 사랑하지 않으셨나요?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태양은 끝내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도 식어 갔다. '우리 돌아가요, 전 아주 즐거워요, 인생에 이 정도의 즐거움이면 충분해요. 진가락은 암울한 마음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돌아가기 위해 말에 올랐다. 향향 공주도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금 두 사람이 함께 즐겼던 아름다운 경치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반 시간쯤 오니 갑자기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일어나며 저녁 놀 맞은편에서 수십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바로 금구철장 백진이었다. 그는 진가락과 향향 공주를 보더니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왼손을 뒤로 향해 휘두르며 말에서 뛰어내려 길 옆에 피해 섰다. 뒤에서 쫓아오던 수십 명의 시위들도 분분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백진은 두 사람을 감시하라는 밀지를 받았지만 그들 두 사람이 탄 백마가 워낙 빠르다 보니 보통의 말을 타고는 쫓아올 도리가 없었다. 물어 가며, 말을 밖워 타며, 식사는커녕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었다. 저녁 나절까지 쫓아 헤매다가 이들 두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진가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재촉하며 앞을 향해 갔다. 갑자기 남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일어나러니 위춘화가 앞장 서서 달려왔다. 「총타주님, 우리 모두 왔습니다.」 이어 육비청 무진 ,조반산, 문태래 , 상씨쌍협 등이 앞뒤로 도착했다. 순결한 가슴에 꽂은 비수 권륜은 진가락이 향향 공주를 데리고 떠난 뒤 안절부절못했다. 아침이 되자 태감이 산해진미로 가득 찬 수라상을 들여 왔지만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날 그는 백관들도 만나지 않았다. 온종일 일어나 앉았다가는 잠을 자고, 잠을 자다가는 또 일어나 앉아 몇차례나 시위들에게 나가서 소식을 알아보도록 했다. 날이 저물고 달이 떠올랐지만 와서 보고를 하는 시위는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보월루에서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면서도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했다. 벽 위에 걸린 (한궁춘효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계집이 그를 좋아하니 한인의 복장도 좋아할 것이다. 그들이 궁으로 돌아올 때는 그가 벌써 내게 순종하라고 그녀를 타일렀을 것이다. 한인의 복장을 입고 그녀를 놀라게 해 주어야지.) 그래서 태감에게 명령하여 한인의 옷을 내오라고 했다. 그러나 깊은 궁궐 안에 한인의 복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똑똑한 태감이 하나 있어 배우들에게 달려가 무대에서 입는 복장을 얻어다 그에게 입혀 주었다. 권륜은 좋아하며 거울에 비춰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귀밑머리에 있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태감을 시켜 가위를 가져다 잘라 버리도록 했다. 태감이 권륜의 흰 머리를 골라 자르는데 등뒤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나며 태감 하나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아뢰었다. 「황태후께서 드십니다. 권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거울 가운데 태후의 모습이 비쳤다.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권륜은 급히 몸을 돌이켰다. 「태후께서는 아직 잠자리에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얼른 그녀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태후가 손짓을 하자 태감들이 물러갔다. 한참 있다가 태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몸이 불편해 정사도 보지 않고 수라도 드시지 않았다기에 뵈러 왔소. 「이제 좋아졌습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었더니 속이 거북했을 뿐 아무 일도 아닙니다. 태후를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태후가 (흥!)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위구르의 기름기를 드셨나, 아니면 한인의 기름기를 드셨나? 「어제 양고기를 구워 먹은 것이 그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권륜이 깜짝 놀라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우리 만주 요린데, 그렇다면 만주 사람 노릇 하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군.」 권륜은 감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위구르의 여자는 어디 갔나? 「그 여자 성질이 좋지 않아 데리고 나가 타이르라고 내보냈습니다. 「그 여자가 칼을 지닌 채 죽어도 복종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데, 다른 사람이 타이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가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갔는가? 권륜은 그녀의 날카로운 추궁에 몸둘 바를 몰랐다. 「나이 지긋한 시위입니다. 백진이라구요.」 태후가 고개를 들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채 냉소만 지었다. 「자네, 나이 사십이 넘었는데 후궁은 두어서 무엇하려나? 권륜은 깜짝 놀랐다. 「태후께서는 고정하시기 바라옵니다. 이 아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거든 잘 타일러 주십시오.」 「자네는 황제로서 천하의 주인이 아닌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일이요, 거짓말하고 싶은 대로 거짓말하는 게지.」 권륜은 태후의 이목이 넓어 이 일도 그녀를 속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여자를 타이르겠다고 데리고 나간 사람은 제가 강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선비인데, 그 사람의 재주와 학문이 매우 훌륭,, 「해령의 진가가 아닌가? 태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권륜은 고개를 파묻은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어쩐지 한인의 복장까지 입고 있더라니! 왜 나를 아직까지 죽이지 않는가? 이 말을 할 때 태후의 목소리나 얼굴빛은 추상과 같았다. 권륜은 깜짝 놀라 두 무릎을 꿇고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만약 불효막심했다면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후가 소매를 뿌리치며 내려가 버렸다. 권륜이 그 뒤를 쫓아 가다가 자기가 한인의 복장을 하고 있음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체통이 말이 아니라 촹급히 밖워 입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태감에게서 태후가 무영전의 편전에 있다는 것을 들어 알았다. 그래서 재빨리 편전으로 들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고정하십시오. 이 아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옳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자네가 연일 그 진가 녀석을 궁 안으로 불러들이는 까닭이 무엇인가? 또 해령에서는 무슨 짓을 했는가? 자네 정말 한실을 회복할 생각인가? 그래서 우리 만주 사람을 다 죽여 없앨 생각이지? 태후가 무섭게 추궁했다. 「태후께서는 소인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이 아들에게 어찌 그런 생각이 있겠습니까? 권륜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그 진가 녀석을 어떻게 처치할 생각인가? 「그를 쫓는 무리가 많은데다가 수하에는 무공이 막강한 망명지도 (亡命之徒)가 적지 않습니다.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기회를 기다릴 뿐입니다. 일망타진하여 뿌리째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끝내 후환이 될 것입니다.」 태후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거짓이 아니렷다? 권륜은 태후의 이 말을 듣고 벌써 비밀이 누설되었음을 알았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홍화회의 군웅을 일망타진하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3일 내로 그 진가 녀석을 처단하겠습니다.」 태후의 차디찬 얼굴에 한가닥 미소가 스쳤다. 「좋아. 그래야만 조종의 유훈을 그르치지 않겠지.」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나를 따라 오게.」 일어나 무영전으로 향했다. 권륜은 꼼짝 못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태후가 무영전으로 가자 태감이 소리를 질렀고, 문이 활짝 열렸다. 대전 안에는 등불이 휘황하고 집사 태감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으며 8명의 왕공(王公)이 꿇어앉아 그들을 맞이했다. 태후외 권륜은 대전의 두 의자에 앉았다. 권륜이 내려다보니 8명의 왕공은 황실의 가족으로서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형제인 화친왕 홍주(弘晝)였다. 그밖에 장친왕 윤록(允祿),이친왕 윤도,이친왕,흥효,과친왕(果親王) 홍첨,유친왕, 광록,현친왕,연황 및 신군왕(信郡王) 덕소 등으로, 모두 황실의 근친이었다. 권륜은 심신이 불안하여 태후가 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후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선제가 붕어(崩御)할 때 팔기의 기병을 종실의 여덟 사람이 나누어 통솔하라는 유명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변방에서 해마다 전쟁이 있어 선제의 유명을 여태까지 따르지 못했다. 이제 조종의 은덕과 황상의 총명에 의지하여 위구르를 평정했으니, 오늘부터는 팔기의 기병을 너희 여덟 사람이 분담하도록 하라. 열심히 일해 황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느니라.」 여덟 사람은 이마를 조아리며 사례를 했다. 권륜은 생각했다. (원래 태후가 안심이 되지 않아 내 병권을 분산시키려고 하는구나.) 「황상은 분담을 해 주시오.」 권륜은 생각했다. (지금 비록 열세에 몰리지만 이미 거사를 하지 않기로 했으니, 잠시 병권을 분산해 놓는 것도 무방하겠지. 워낙 치밀한 태후라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래서 이 정황,양황,정백(正白),양백,정경(正經) ,양홍,정람(正藍),양람 등 팔기병을 이들 여덟 왕공에게 분담 , 통치하도록 했다. 8명의 왕공은 그 뜻을 몰라 답답했다. 본조 개국 법도에 따르면 정황, 양황 정백 3기는 황제가 직접 총수가 되어 다스리기 때문에 상삼기라 하고, 나머지 5기는 하오기라 불렀다. 매 1기마다 만주의 도통(都統)이 통솔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 태후가 8명의 왕들에게 분담시켜 통솔하라는 것은 조종의 유훈과는 크게 다른 것1다.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 같아 보였지만 태후의 명이 준엄하니 사양할 수도 없었다. 즉시 이마를 조아려 사은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내일 상소를 해 병권을 반납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겠구나.) 태후가 손을 흔들자 지현이 쟁반 하나를 받쳐 들고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쟁반에는 노란 비단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쇠로 만든 상자가 있었다. 태후가 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에서 두루마리로 된 쌓은 문서를 집어 들었다. 권륜이 머리를 돌리고 보니 문서의 겉에 옹정이 직접 쓴 '유조'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그 옆에 한 줄의 글자가 있었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팔기 친왕이 회동하여 열어 보도록 하라.) 권륜의 표정이 갑자기 흑빛으로 변했다. 원래 부황이 일찍부터 기밀이 누설되었을 때의 방비를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만약 조종의 유훈을 어기거나 심지어 반청흥한을 꾀할 기미가 보인다면, 이 유조 가운데서 반드시 팔기의 친왕이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라는 명령이 있을 것만 같았다. 즉시 진정을 하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 「선제께서 주도면밀하셔서 먼 장래까지 생각해 주셨군요. 이 아들이 만약 선제의 1만분의 1만 닮았다 하더라도 태후께서는 이 아들 때문에 걱정을 하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입니다.」 태후가 유조를 화친왕에게 넘겨 주며 말했다. 「자네가 선황의 유조를 모시고 옹화궁 수성전으로 가서 백 명의 친병을 파견하여 밤낮으로 지키도록 하라.」 태후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황상의 분부가 있다 하더라도 한 발짝도 떠나서는 아니 됨을 명심하렷다. 화친왕은 분부를 받들고 유조를 옹화궁으로 가져갔다. 옹화궁은 북경의 서북쪽 안정문 안에 있으며, 본래 옹정이 황제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패륵부였다. 옹정이 죽은 후에 권륜이 부황을 추념하는 뜻으로 라마교의 사원으로 확장했던 것이다. 태후는 모든 조치를 끝내자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하품을 했다. 「이 만세의 기업을 잘 보존해야 하느니라. 권륜은 태후를 모시고 무영전에서 나온 뒤 즉시 시위를 불러서 물었다. 「진 공자가 벌써 그녀를 모시고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보월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진이 이렇게 아뢰자 권륜은 매우 기뻐하며 문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노상에서 다른 일은 없었는가? 「신, 홍화회의 인물들을 만나기는 했습니다만 진 공자가 말리는 바람에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권륜은 보원루로 올라왔다. 과연 향향 공주가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장성에 가서 재미있게 노셨소? 그러나 향향 공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권륜은 생각했다. (큰일을 끝낸 후에 다시 와서 물어보자.) 옆방으로 가서 복강안(福康安)을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후에 복강안이 총총 들어섰다. 권륜은 그에게 효기영 군사들을 데리고 옹화궁의 각 전에 매복을 하라고 명령하고 또 한바탕 밀령을 내렸다. 복강안이 임무를 부여받고 나갔다. 권륜은 다시 백진에게 명령하여 시위들을 인솔하고 가서 옹화궁 안팎에 매복을 하라고 했다. 「내일 저녁 내가 옹화궁 대전에서 연회를 베풀 것이니 너는 진 공자와 홍화회의 모든 인물들을 이 잔치에 나오도록 주선하라.」 백진은 이 말을 듣고 홍화회를 일망타진하려는 줄 알았다. 틀림없이 한바탕 피를 보게 되었다는 생각과 함쩨 절을 하고 나오려 했다. 「잠깐만. 백진은 권륜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옹화궁의 라마승 호음극을 불러 오너라. 잠시 후 호음극이 들어와 절을 하자 권륜이 물었다. 「북경에 온지 몇 년이나되었나? 「신, 황상을 모신지 21년이 되었습니다.」 「티베트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나, 없나? 호음극은 이마만 조아릴 뿐 대답이 없었다. 권륜이 다시 말을 꺼냈다. 「티베트에는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두 활불(活佛)이 있는데 세번째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 「황상께 아뢰옵나이다. 이는 처음부터 만들어진 법도로서, 세번째 인물은,,,,,,.」호음극의 말을 권륜이 막았다. 「만약 내가 자네를 세번째 활불로 봉하고 한 지방을 다스리게 한다면 감히 내 뜻을 어길 사람은 없겠지? 호음극은 너무나 기뻐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 분골쇄신하여 보답하겠나이다.」 「이제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일을 시켜야겠네. 자네 돌아가서 신복하는 라마승을 소집해 초황과 기름 등 인화 물질을 준비하고 있다가 저 사람이 자네에게 연락을 하거든,,,,,,.」 이렇게 말하며 백진을 가리켰다. 「불을 질러 궁을 태워 버리되 옹화궁의 대전과 수성전부터 타야 하네.」 호음극은 깜짝 놀라 이마를 조아렸다. 「이는 선황의 저택이라 선황의 유물이 많습니다. 신은 감히 그렇게는. 「네 감히 내 뜻을 어기려 드느냐? 권륜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호음극은 놀라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신,,,,,, 신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이 일이 만약 조금이라도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네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옹화궁의 8백 명 라마승은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니라.」 잠시 후 권륜은 다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수성전엔 기병의 간수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게. 그때 가서 이들 병사들도 함께 불에 타 죽어야 하네. 일이 성사되면 자네는 세 번째 활불이야. 나가 보도록 하게. 손짓을 하자 호음극은 놀랍고도 반가워 감사를 드리고 백진과 함께 물러나왔다. 권륜은 조치를 끝내자 일석이조로, 홍화회와 태후의 세력을 단번에 없애 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편안히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책상 위에 거문고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 치기 시작했다. 곡목은 '사명오롱'이었다. 땅땅 뜯는 그의 거문고 소리는 살기가 등등해 있었다. 반쯤 치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일곱번째 줄이 뚝 끊어졌다. 권륜이 어리둥절해하다가 껄껄 웃으며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나 내실로 들어갔다. 향향 공주는 창 앞에 앉아 달을 바라다보다가 발소리를 듣고 다시 단검을 뽑아들었다. 권륜이 눈썹을 찡그리며 멀리 떨어져 앉았다. 「진 공자와 함께 장성에 갔었는데 나를 찔러 죽이라고 하던가? 「당신에게 복종하라고 하더군요.」 「그럼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셈인가? 「그분의 말씀은 아무래도 따라야 하겠지요.」 권륜은 반가워하면서도 샘이 났다.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 단검을 가지고 있나? 이리 주게. '안됩니다. 먼저 훌륭한 황제가 된 뒤에나------.」 권륜은 생각했다. (네가 원래 이렇게 내게 제동을 걸려고 하는군.) 순간 권륜의 머릿속은 분노와 질투, 색욕과 번뇌가 교차했다. 「난 지금도 훌륭한 황제인걸.」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웃었다. 「흥, 방금 거문고 소리를 들으니 살기가 등등하시던데요.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니고 많은 사람을요. 당신은,,,,,, 당신은 정말 악독해요. 권륜은 깜짝 놀랐다. 원래 자기의 마음속에 갖고 있던 생각들이 거문고 소리 속에 섞여 나간 모양이었다. 「그렇소, 나는 사람을 죽여야 해. 그대의 진 공자를 방금 잡아 놓았네. 내게 복종하면 그대 체면을 보아 풀어 줄 것이로되,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많은 사람을 죽여 버릴 것으로 알아도 되네.」 향향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친동생을 죽이려고 하다니? 떨리는 소리로 말하자 권륜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 모양이로군. 「나는 당신이 그분을 잡았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분은 당신보다 능력이 있으니까요.」 「능력이 있다고? 흥, 오늘 못 잡았으면 내일 잡아도 되지.」 향향 공주는 아무 말 없이 혼자 생각에 빠졌다. 권륜이 다시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을 포기하시지, 내가 훌륭한 황제라도 좋고 나쁜 황제라도 그만이야. 하여튼 영원히 그를 만나지 못할 테니까.」 「좋은 황제가 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왜 또 생각을 바꾸었나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지, 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가? 권륜이 울부짖듯 하는 말이었다. 방금 태후에게 당한 일이 만강의 분노로 변해 폭발한 것이다. 순간 향향 공주는 누군가에게 가슴을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원래 황제가 그분을 속였구나. 내 진작 알았더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오랴?) 회한이 극에 달해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권륜이 그녀의 표정에서 혈색이 사라진 것을 보고 너무 거칠게 다루어 왔음을 후회했다. '다만 네가 내게 순종하면 나도 자연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높은 자리를 주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겠다. 향향 공주는 평생 이렇게 심하게 속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도 황제가 흉악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흉악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가 이렇게 악랄하니 틀림없이 그분을 살해할 것이다. 그분의 능력이 황제를 능가한다지만 친형님이 자기를 해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분께 알려 황제의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그분께 알리나?) 권륜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향향 공주는 생각했다. (궁 안에는 황제의 수하 사람만 있으니 누가 나를 위해 연락을 취해 주겠는가? 일이 긴박하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면 그분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겠어요? 「물론이지 ! 권륜은 반가운 김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향향 공주는 그의 말에 성의라고는 전연 찾아볼 수 없음을 알았다.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소녀가 황궁에서 며칠 묵었다고 적을 상대하는 방법까지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내일 아침 이슬람 사원에 가야만 해요. 가서 알라 신에게 기도를 드린 뒤에야 복종을 하겠어요.」 권륜은 반가워서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일 다시 다른 핑계를 대지는 않겠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궁 안에도 이슬람교의 사원이 있다네. 내가 그대를 위해 특별히 지은 것이야. 며칠 지나 모든 것이 완비되면 그 뒤로는 궁 밖으로 나가 예배를 드리겠다고 해서는 아니 되오.」 향향 공주는 그가 기분 좋게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종이와 붓을 찾아 진가락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황제가 가해할 뜻이 있으니 경계를 하고, 반청흥한을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모두가 거짓이니 속지 말고 빨리 자기를 구출하여 궁 밖으로 나가자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쓰자, 백지로 싸고 백지 위에 위구르 문자로 이렇게 썼다. (속히 이 편지를 홍화회의 총타주 진가락에게 전해 주기 바랍니다.) 그녀는 위구르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를 십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해서도 꾀나 존경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예배를 보는 도중, 기회를 틈타 그 어느 위구르 사람에게 주어도 진가락에게 전달될 것을 믿었다. 그녀는 편지를 다 쓰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황제가 신의를 저버리고 의리를 배반하는 바람에 오히려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즐겁기 한이 없었다. 진가락은 무소불능이라 자기를 구출하여 궁을 나가는 일도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은 한없이 달콤했고, 온종일 피곤한 뒤라 침대에 기대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몽롱한 의식 가운데 궁중에서 치는 종 소리를 듣고 눈을 뜨니 벌써 새벽이었다. 급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그녀를 모시는 궁녀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환한 표정을 보자 자기도 기쁜 모양이었다. 향향 공주는 편지를 소매 속에 숨기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가마를 지는 태감들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뭇 시위들이 앞뒤에서 그녀를 호위해 서장안가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 입구에 이르렀다. 향향 공주는 가마에서 내려 이슬람교 사원의 둥근 지붕을 보자 반갑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에 각기 한 사람씩 그녀와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2명의 위구르 사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매 속에 숨긴 편지를 주려고 만지다가 오른쪽에 있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자 멈칫거리며 손을 움츠렸다. 그 사람은 위구르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이나 표정이 그녀의 동족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다시 왼쪽에 있는 사람을 보니 그도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었다. 「당신들은 나를 감시하라고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지요? 그녀가 위구르 말로 속삭이듯 물었다. 예측한 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되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매우 실망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뒤에도 8명의 시위가 위구르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따라 오고 있었다. 진짜 위구르 사람들은 멀리 동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가 교주 앞에 접근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그 교주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향향 공주가 편지를 그의 손 안에 쑤셔 넣었다. 시위 하나가 갑자기 대들며 교주의 손에서 편지를 뺏고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붙였다. 교주가 비틀거리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 바라다볼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뭐하는 사람들이오? 교주가 화를 냈다. 그 시위가 교주의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말했다.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우리는 황궁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오.」 그 교주는 깜짝 놀라 말을 못하고 예배를 인도해 나갔다. 향향 공주도 꿇어 엎드렸다. 눈물이 샘처럼 솟았다. 절망 가운데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그에게 알려 방비하도록 하나? 내가 죽는 한인 있더라도 그에게만은 알려야 하는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그 소식이 금방 퍼지겠지. 그러면 그도 알게 될 거야. 그래, 이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즉시 코란 경 제4장에 있는 말이 생각났다. (너희는 자살하지 말라. 알라는 너희를 불쌍히 여긴다. 누구든지 불의로 이 금기를 범하면 나는 그를 불구덩이에 빠뜨리겠다.) 마호메트의 말이 그녀의 귓속에서 벼락처럼 울렸다. (자살한 사람은 영원히 불구덩이에 떨어져 다시는 나오지 못하리라.) 그녀는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죽은 뒤에 다시 낙원으로 올라가 장래 좋아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믿었다. 코란 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낙원에서 순결한 배우자를 만나 영원히 그 안에서 살리라.) 그러나 만약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무궁무진한 고생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몸이 차가워 견디기 어려운데 사람들의 경전 읽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교주는 때마침 낙원의 영원과 희열을 큰소리로 강론하며 불구덩이에 떨어진 영혼의 비참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경건하게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구제받을 수 없는 영혼이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애정은 가장 큰 공포를 능가하는 것이다.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성스러운 알라 신이여, 저는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내 몸의 선혈 이외에는 그를 위험에서 구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옷 소매 속에서 단검을 꺼내 바닥의 벽돌 위에 (황제를 믿어서는 아니 된다.)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진가락의 이름을 부른 뒤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가슴에 단검을 꽂았다. 홍화회의 군웅들은 이날 대청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장사근이 막 광동(廣東)에서 돌아와 때마침 여러 사람과 남방의 각지에 있는 영웅호걸의 근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진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진가락이 단독으로 나가 접견을 했다. 백진은 황상의 뜻을 전달했다. 저녁에 옹화궁에서 연회가 있으니 홍화회의 여러분이 꼭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오시기는 하나 태후와 만주의 귀족들이 의심을 할까봐 특별히 궁 밖에서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진가락은 고마운 인사를 전달해 달라고 했다. 객사려가 황제에게 순종하겠다고 말해 한실 부흥에 대한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자 말할 수 없는 희비가 교차했다. 백진을 보낸 뒤에 군웅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황제가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흥분했다. 무진,육비청,조반산,문태래 등은 만청 정부의 관원으로부터 적지않은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권륜의 말을 크게 믿지는 않고 있었다. 이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자 모두들 황제가 결국은 한인이요, 또 총타주 친형님이라 과연 다르다고 좋아했다. 다만 진가락만이 한실 광복의 대업으로 인하여 향향 공주에 대한 애정을 버려야 했기 때문에 혼자 괴로워 했다. 진가락은 자기 한 사람의 고통 때문에 다른 사람의 흥을 깰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군웅들과 세상사를 논하다가 화제가 무예에까지 미쳤다. 무진이 말을 꺼냈다. '총타주님, 이번 위구르에서 배우신 그 무공을 우리에게 구경시켜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고 가르침을 부탁할까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심오한 경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고 여어동을 바라보았다. 「십사제, 피리 좀 불어 주시겠소? 좋습니다. 이원지가 웃으며 내실로 들어가 금피리를 내왔다. '좋군요, 다른 사람의 보배까지 챙기기 시작했네.」 낙빙이 놀리자 이원지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날 이원지가 장소중에게 맞아 왼쪽 팔이 부러진 뒤부터 여어동은 극진히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 처음에는 연민의 정으로 시작한 것이 애정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원지의 한결같은 정이 마침내 원만한 결과를 거둔 셈이다. 두 사람은 이날 감량에 있는 노상의 객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원지는 그가 금피리로 관리들의 혈도를 눌러 쓰러뜨린 것을 대단히 부러워했다며, 사부가 자기에게는 점혈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육 사숙께서 비록 연세가 드셨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몸에 손을 대기가 거북하셨겠지. 또 이쪽에서도 사부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이 어렵지 않겠소. 혈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가르친단 말이오? 장래 우리가 부부가 되면 그때 내가 가르쳐 드리리다.」 여어동이 웃으며 말하자 이원지도 따라 웃었다. 「그럼 제가 사부님을 원망한 것은 잘못이었군요. 「내게서 점혈무공을 배우고 싶거든 꿇어앉아 절을 하고 사부로 모셔야만 되오.」 「흥, 절을 꽤 받고 싶은 모양이군요? 그날부터 여어동은 피리로 점혈을 하는 입문의 무공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이원지는 피리로 연습을 하느라 이 며칠 동안 계속 그 피리를 가지고 있었다. 진가락은 피리 소리에 맞추어 장법을 휘두르고, 군웅들은 둘러 서서 관찰했다. 「총타주님, 이 장법으로 장소중을 쓰러뜨렸는데 제가 검을 쓸 테니 어디 한번 대련을 해 보시렵니까? 무진이 웃으며 검을 들고 나섰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 보시지요. 진가락이 수장을 휘둘러 그의 어깨를 쳤다. 무진이 비스듬히 찌르며 진가락의 수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대방의 허리를 노렸다. 진가락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피리 소리와 함께 그의 등을 공격했다. 무진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칼끝만 거꾸로 돌려 뒤로 찔렀다. 겨냥과 시간이 공교롭게 맞아떨어졌다. 이것은 바로 추혼탈명검 가운데 절초로, 망향회고(望鄕回顧)라는 것이었다. 진가락이 몸을 옆으로 옮기며 수장을 뒤집어 그의 팔을 잡았다. 무진도 칼이 적중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상대방의 반격이 이토록 신속할 줄은 몰랐다. 발로 땅을 찍으며 세 발짝 앞으로 달려나가 팔을 흔드는 사이 장검이 또 한 번 뻗어 나왔다. 옆에서 구경하던 군웅들이 동시에 갈채를 보냈다. 두 사람은 비록 절차탁마를 위한 대련을 하면서도 전연 양보함이 없이 치열한 대결을 했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 밖에서 처량하고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군웅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수천 명이 합창을 하듯 슬프게 울려 퍼졌다. 심연은 사막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위구르 사람들이 부르는 만가를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 일어나 구경을 하러 나갔다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지고 허둥지둥 달려와 떨리는 목소리로 진가락을 불렀다. 「도련님 ! 무진이 장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무슨 일인가? 진가락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향,,,,,, 향,,,,,, 향향 공주가 죽었어요! 군웅들의 얼굴도 흑빛이 되었다. 진가락은 눈앞이 캄캄해져 나무 토막처럼 쓰러졌다. 무진이 장검을 땅바닥에 버리고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떻게 해서 죽었대요? 낙빙이 황급하게 물었다. 「제가 위구르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슬람교 사원에서 기도를 하다가 단검으로 자살을 했다더군요.」 「그들이 뭐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황태후가 그녀의 시체를 궁중으로 들여 오지 말고 이슬람교 사원에서 장사를 지내라고 했답니다. 그들이 지금 막 그녀를 안장하고 돌아오며 만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황제가 선량하고 순결한 소녀를 죽게 했다고 욕을 했다. 낙빙은 너무나 심란해 눈물을 떨구었다. 진가락은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상심할까봐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도장님, 제가 배운 방법은 아직 다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 다시 대련을 하지요.」 진가락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며 천천히 무진 앞으로 갔다. 사람들은 엉뚱한 그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무진은 생각했다. (그의 슬픈 마음을 잠시라도 잊게 하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장검을 주워 들고 다시 대결에 나섰다. 군웅들은 진가락의 일사불란한 발걸음과 정교한 장법을 보고, 방금 들은 소식이 그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은 것 같아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이원지가 여어동의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남자들은 정말 양심도 없어요. 나라의 큰일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눈도 깜짝하지 않으니까요.」 여어동은 피리를 불며 생각했다. (총타주님의 인내심이 대단하구나. 만약 나라면 당장 미쳐 버릴 것이다.) 무진은 진가락의 심신이 불안할 것 같아 위험한 공격은 가능한한 피했다. 두 사람은 본래 막상막하의 호적수로서 공격도 비슷했다. 그러나 무진이 그의 입장을 돌보다가 즉시 열세에 몰렸다. 검광과 장영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진이 계속 뒤로 밀렸다. 진가락의 오른손 세 손가락이 벌써 그의 팔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은 피부가 맞닿자 동시에 펄쩍 뛰어 물러섰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무진이 외쳤다. 「도장님께서 의식적으로 양보를 하셨지요.」 진가락이 이렇게 웃으며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피를 두 번이나 왈칵 토했다. 군웅들이 놀라서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괜찮습니다. 진가락이 처량하게 웃으며 심연의 등에 기댄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진가락은 방으로 돌아와 한 시간쯤 잠을 잤다. '오늘 밤도 황제를 만나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한탄을 했다. 향향 공주의 참사를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객사려가 분명히 순종하겠다고 내게 약속을 했는데 어째서 자살을 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었단 말인가? 그녀는 이 일이 매우 중대함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떤 변고가 없었다면 결코 자살을 하지 않았으리라. 여기에는 틀림없이 다른 곡절이 숨어 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아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진가락은 위구르에서 가져온 위구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향향 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옷이다. 그리고 얼굴에 검은 칠을 한 뒤에 심연을 바라다보았다. '내 잠시 나갔다 돌아로겠네.」 심연은 말릴까 하다가 소용없는 것인 줄 알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걱정이 되어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진가락도 그의 충직함을 알기 때문에 따라오도록 내버려두었다. 큰 거리에는 사람들이 떠들썩하고 수레와 말이 오락가락 번잡했지만, 진가락의 눈에는 이 모두가 쓸쓸한 광경으로 비쳤다. 그는 서장안가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 안으로 들어와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객사려, 그대는 하늘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내가 이슬람 교도가 되겠다고 했으니 결코 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소.」 고개를 들다가 다섯 자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파란 벽돌 위에 무언가 글씨가 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칼끝으로 새겨 놓은 위구르 문자였다. 「황제를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글씨 위에 은홍색의 흔적이 있었다. 진가락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살펴보았다. 벽돌 위의 색깔이 다른 곳과는 달랐다. (객사려의 피가 아닐까?) 몸을 숙이고 냄새를 맡아보니 과연 피비린내가 났다. 그는 털썩 그 자리에 엎어지며 흐느껴 울었다. 한참 울고 있는데 누군가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 번 쳤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좌장을 들어 막았다. 진가락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눈물이 또 한 번 왈칵 쏟아졌다. 그 사람은 위구르의 남자 복장을 했지만 이목구비가 수려한 취우황삼 곽청동이었다. 원래 그녀는 오늘 천산쌍응을 따라 북경에 도착해서 여동생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동족을 만나 여동생이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그녀는 급히 사원으로 달려와 동생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려다가 누군가가 엎드려 울며 객사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본 것인데 공교롭게도 진가락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막 헤어져 있었던 동안의 일을 꺼내려고 하는데, 진가락이 갑자기 안으로 들어서는 청병 시위 2명을 발견했다. 잽싸게 곽청동의 소매를 잡아당겨 함께 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 2명의 시위가 진가락의 옆으로 와서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2명의 시위가 글씨가 씌어진 벽돌을 괭이로 파내어 가지고 가 버렸다. 「저게 뭐지요? 곽청동이 물었다. '만약 제가 한 발짝만 늦게 왔더라도 객사려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써 놓은 경고를 못 볼 뻔했습니다.」 진가락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무슨 경고인데요? 「여기는 이목이 많으니 우리 다시 엎드립시다.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엎드린 채 진가락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간추려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곽청동은 속도 상하고 화도 났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멍청합니까? 황제를 믿다니요? 진가락은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가 한인이요, 또 제 친형님이라 그만.. 「한인이 어떻단 말이오? 한인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답디까? 그 따위 위인이 무슨 수족의 정이 있겠어요? 진가락은 흐느껴 울었다. 「제가 객사려를 죽였습니다! 제가-, 제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따라 죽어야,,,,,,.」 곽청동은 그렇지 않아도 슬퍼하고 있는 그에게 자기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백성을 위해 그렇게 했으니 잘못했다고도 할 수 없겠지요. 그녀는 부드럽게 진가락을 위로한 뒤에 다시 물었다. 「오늘 밤 옹화궁의 연회에는 참석하시렴니까? 진가락이 이를 갈았다. '황제도 참석하겠다고 했으니 제가 가서 그를 죽여 객사려의 원수를 갚아야겠습니다.」 「그래야 해요. 제 아빠와 오빠, 그리고 수없이 죽어간 동포를 위해서도 원수를 갚아야 해요.」 「청병이 야간에 습격했을 때 어떻게 도망쳐 나오셨습니까? 진가락이 물었다. 「그때 저는 심하게 앓고 있었어요. 청병이 돌격해 들어오자 내 호위병들이 결사적으로 막아 나를 사부가 계신 그곳까지 데려다 주었답니다.」 진가락은 한숨을 쉬었다. '객사려는 나에게 하늘 끝까지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언니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곽청동의 두 눈에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두 사람이 사원에서 나오자 심연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곽청동을 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아가씨, 저는 계속 아가씨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곽청동은 이 반 년 동안에 부모와 오빠, 여동생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래서 심연에게 가지고 있던 작은 혐오감 같은 것은 잊어버린지 오래다. 「나는 잘 지냈어요. 그동안 키가 많이 컸네요. 심연은 부드러운 그녀의 말을 듣자 더욱 기뻤다. 세 사람이 쌍유자 거리로 돌아오니 천산쌍응과 군웅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가락은 눈물을 흘리며 사원에서 본 글자의 이야기를 했다. 진정덕이 탁자를 내려쳤다. 「내가 한 말이 틀렸단 말인가? 그 황제야 물론 우리를 가해하려고 할 것이야. 그러니까 그 여자 아이가 궁중에서 확실한 소식을 듣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알려 준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듣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관명매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꺼냈다. 「우리 두 늙은이, 아들딸이 없어 그들 자매를 수양딸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이럴 줄은,,,,,,.」 「그애가 무공은 할 줄 모르지만 협기가 있으니 매우 갸륵하구나. 진정덕의 한숨 섞인 말이었다. 「이따가 옹화궁의 잔치에 갈 때, 긴 병기는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각자 짧은 병기와 암기를 준비해 갑시다. 술이나 반찬에 독이나 마취약을 탔을지도 모르니 절대로 입에 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진가락의 말에 군웅들이 모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오늘 밤 황제를 죽여야 한이 풀릴 테지만, 여하튼 달아날 방법도 미리 강구해야 됩니다.」 진가락의 말을 진정덕이 받았다. 「중원예는 다시 살 수 없을 테니 모두들 위구르로 갑시다.」 군웅들은 강남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몹시 섭섭했다. 그러나 황제가 너무도 간사하고 악랄하여 사람마다 치를 떨고 있으니 이자를 처치한 뒤에는 멀리 이역에 가 살자고 했다. 진가락은 문태래에게 양성협 , 위춘화, 석쌍영 , 장사근을 데리고 성문 밖에 매복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을 해치워 모두들 서쪽으로 갈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심연에게 홍화회의 두목들을 인솔하여 말을 준비한 뒤에 화살과 활을 가지고 옹화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또 여어동에게는 즉시 북경에 있는 홍화회의 두목들에게 통지하여 각 성에 있는 홍화회 회중들에게 총타를 위구르로 옮기니 각지에 있는 회중들은 즉시 숨어 관병들의 수색과 체포에 대처하도록 하라고 했다. 임무를 부여한 진가락이 천산쌍응과 육비청을 바라다보았다. 「그 간악한 자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세 분 선배님께서 좋은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야 쉬운 일이지. 내가 대들어 그놈의 목을 비트는데도 설마 제놈이 죽지 않을 리 있나? 진정덕의 말에 육비청이 웃었다. 「그자가 우리를 해칠 생각이 있는데 그의 신변에 시위가 오죽이나 많겠습니까? 방비가 삼엄할 겝니다. 정덕 형이 그자의 목을 비틀기만 하면야 끝장이 나겠지요. 그러나 그자의 목을 어떻게 잡습니까? 「그러면 삼제가 암기로 그를 해치우지.」 무진의 말이었다. 천산쌍응은 육화탑에서 조반산의 신기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의 암기를 쓰는 솜씨에 탄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다고 찬성했다. 조반산은 암기 주머니 가운데서 그날 용준에게 발사했던 3개의 독질려를 꺼내 들고 웃었다. 「한 발만 맞추면 문제가 없겠지요. 심연은 독질려를 보자 화살에 놀란 새처럼 몸서리를 쳤다. 「아마 그 용준이 지금도 궁 안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해약만 있으면 치료가 될 테니까요.」 진가락의 말이었다. '괜찮아요. 내가 다시 학정홍(鶴頂紅)과 공작담을 묻혀 놓았으니 한 가지 약이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두 가지는 쉽지 않을걸요.」 조반산의 말이었다. 육비청이 낙빙을 바라다보았다. 「그 비도와 내 금침에도 독약을 묻힙시다.」 낙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몇십 개의 암기를 일제히 발사하면 시위가 많다 하더라도 몇 놈은 맞힐 수 있겠지. 진가락은 사람들이 화로 위에 있는 독약 단지에 암기를 묻히는 것을 보고 황제와 자기는 친형제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러나 그의 간사함과 악랄함을 생각하자 자기도 단검을 뽑아 독약 단지에 담갔다. 참영웅이 가는 길 신시(申時) 삼각이 되자 군웅들은 모두 병기를 챙긴 뒤 배불리 요기를 하고, 시위들이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뒤, 백진이 4명의 시위와 함께 그들을 데리러 나타났다. 군웅들은 각자 비단옷을 입고 말에 올라 옹화궁으로 갔다. 백진은 그들 모두가 병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궁문 밖에 이르러서 군웅들은 말에서 내려 백진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성전 아래 잔칫상 3개가 마련되어 있었고 백진이 좌석으로 인도했다. 중간에 있는 식탁의 상좌에 진가락이 앉고, 왼쪽에는 진정덕이, 오른쪽에는 육비청이 앉았다. 불상 밑의 중앙에 별도의 상이 놓여 있는데 바깥쪽을 향한 큰 걸상은 비단으로 덮인 것이, 황제의 어좌임에 틀림없었다. 육비청 , 조반산 등은 조금 있다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어좌를 향해 암기를 쓸 것인지 미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요리가 계속 올라오고 사람들은 황제가 도착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발걸음 소리가 나며 2명의 태감이 걸어 들어왔다. 진가락은 지현과 무명부임을 알아보았다. 태감의 뒤에는 고관 차림을 한 사람이 따라 들어왔는데, 그는 전임 절강수륙제독 이가수였다. 언제 서울로 전임이 되어 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원지는 옆에 있는 여어동의 손을 잡고 있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명이오! 지현이 외치자 이가수 , 백진 등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진가락 등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지현이 칙서를 펴고 읽었다. 「나라에서는 은혜를 베풀어 어질고 재간 있는 인재를 채용하니 신민은 공을 세우도록 분발할지어다. 진가락 등은 공정하고 충실하며 지극히 나라를 사랑하므로, 합당한 영예를 하사하는 바이다. 이에 진가락에게는 진사 급제를, 나머지 사람들은 예부와 병부에 특별히 우대 채용하는 바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옹화궁에서 잔치를 베푸니 직례 고북구 제독 이가수는 이들을 접대할 지어다. 다 읽고 난 지현이 사은을 하라고 외쳤다. 군웅들은 듣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간사하고 교활한 권륜은 결국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가수는 진가락 앞으로 나아가 절을 했다. '축하합니다. 진 형께서 황상의 이런 은총을 받으신다는 것은 예사로운 우대가 아닙니다.」 진가락은 몇 마디 겸사를 했다. 「아빠! 이원지가 여어동과 함께 다가와 자기의 아버지를 불렀다. 이가수는 깜짝 놀랐다. 몇 년 동안 실종되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무남독녀이다. 너무나 반가워 딸의 손을 잡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원지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이가수는 말소리까지 떨렸다. 「아빠,,,,,,.」 이원지도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리 와서 나와 같은 상에 앉도록 하자.」 이가수는 딸을 자기의 식탁으로 데려갔다. 이원지나 여어동은 그가 딸을 금지옥엽으로 애지중지하기 때문에 혹시 다칠까봐 미리 방비를 하는 것임을 알았다.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하고 다른 식탁에 앉았다. 지현과 무명부는 가운데에 있는 식탁으로 와 진가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장래 고관이 되시더라도 우리 두 사람을 잊으시면 아니 되오. 「결코 두 분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지현이 손짓을 하자 젊은 태감 둘이 쟁반을 받쳐 들고 나왔다. 쟁반 위에는 술 주전자와 잔이 놓여 있었다. 지현이 주전자를 들어 2개의 잔에 술을 가득히 붓고 하나를 들어 자기가 마셨다. 「자, 한 잔 드시지요. 빈 잔을 내려놓고 다른 잔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쳐 진가락에게 건네 주었다. 군웅들이 주시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황제가 오지 않았는데 우리가 만약 먼저 손을 쓴다면 놀라 방비를 할 것이니 오히려 황제를 죽이기만 어려워질 것이 아닌가. 이 잔의 술이 같은 주전자에서 따랐다고는 하지만 저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총타주가 마시나 안 마시나 보자.) 진가락은 벌써부터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과연 주전자의 손잡이 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었다. 지현이 첫번째 잔에 술을 따를 때 엄지손가락으로 왼쪽의 작은 구멍을 막고 있다가 두번째 잔에 술을 따를 때는 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의 작은 구멍을 막고 있었다. 진가락은 벌써 주전자 안이 이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왼쪽의 작은 구멍을 막으면 왼쪽에 있는 술은 나오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술이 나오는 것이었다. 오른쪽의 작은 구멍을 막으면 이와 반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지현이 내미는 이 술잔은 오른쪽에 있는 것을 따랐으니 이는 물론 독주임에 틀림이 없었다. (형님이라는 사람이 악랄하기 짝이 없구나. 나를 해치고 싶은데 혹시 방비할까봐 먼저 내게 진사란 직함을 주어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구나. 만약 객사려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잔을 마셨을 것이다.)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잔을 들어 마시는 척 했다. 지현과 무명부는 일이 성공되는 줄 알고 내심 기뻐했다. 진가락이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고 주전자를 들어 다른 잔에 술을 따랐다. 따를 때, 오른쪽에 있는 작은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그 잔을 들어 목을 젖히고 다 마셔 버린 뒤에 지현이 자기에게 주었던 원래의 술잔을 다시 무명부에게 내밀었다. 「무 나리도 한잔 하시지요. 무명부와 지현은 탄로가 난 것을 알자 표정이 변했다. 진가락이 왼쪽 구멍을 막고 독주 한 잔을 따랐다. 「지 나리도 저의 잔을 받으시지요. 지현이 왼발을 들어 진가락의 수중에 있는 술잔을 차 버린 뒤에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을 잡아라. 대전의 전후좌우에서 손에 병기를 든 수백 명의 어전 시위와 어림군이 우르르 달려왔다. 진가락이 껄껄 웃었다. 「두 분께서 술을 못 하시는 모양이군요. 그럼, 자시지 말면 그만이지 왜 화를 내십니까? 「성지를 받았으니 홍화회의 역적들을 당장 체포해라.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무명부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진가락이 손을 흔들자 상씨쌍협이 지현과 무명부의 등뒤로 달려가 오른손을 뻗어 두 사람의 목을 잡았다. 두 사람이 저항을 하려 했지만 벌써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가락이 다시 독주 한 잔을 따랐다. 「올리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는 마신다는 말이 있더니, 정말이로군요. 낙빙과 장진이 각기 술잔을 들어 지현과 무명부의 입에 부어 버렸다. 시위와 어림군은 이들 두 사람이 적에게 잡혀 꼼짝 못하자 소리만 지를 뿐 감히 접근할 생각을 못 했다. 홍화회의 군웅들이 벌써 옷 속에 숨긴 병기를 꺼내 들었다. 무진은 한 자루의 단도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쓰기가 불편해 시위 틈으로 달려들어가 그들의 장검을 빼앗아 세 사람을 죽이고 곧 앞장을 서 후전으로 달려가자 군웅들이 그 뒤를 쫓아 들어갔다. 이가수가 딸의 손을 잡았다. 「너는 내 곁에 있거라. 그는 백진과 더불어 시위들을 통솔, 쫓아가며 딸이 혼란 가운데 다칠까봐 그녀를 보살폈다. 여어동은 이런 광경을 보고 장탄식을 했다. (나와 그 여자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적이니 그녀는 결국 내 배우자가 될 수 없다.) 괴로운 마음을 안고 피리를 흔들며 쫓아 들어갔다. 이원지가 오른손을 힘껏 뿌리쳐 아버지의 손에서 빠져 나왔다. 「아버지, 몸조심하세요. 딸은 갑니다! 펄쩍 뛰어 군웅들의 뒤를 쫓아갔다. 「원지야, 원지야. 너는 돌아와! 이가수는 뜻밖의 일에 다급히 딸을 불렀다. 그녀는 벌써 후전으로 들어가 여어동이 때마침 피리를 휘두르며 5명의 시위와 붙어 악전고투하고 있음을 보고 대들어 함께 싸웠다. 「사가, 제가 왔어요. 이원지의 부르는 소리를 듣자 여어동은 반가워 새로운 힘이 솟았다. 쉭쉭 금피리를 휘두르고 또 이원지가 옆에서 도와 시위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낙빙을 따라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불빛이 대낮처럼 밝고,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 속에 진가락 등은 벌써 수성전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수십 명의 라마승과 한 떼의 청병이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심히 의아하게 생각했다. 라마승들이 열세에 몰려 있는데 백진은 오히려 시위들을 통솔, 라마승을 도와 청병들을 불길이 왕성한 수성전 안으로 모는 것이었다. 진가락이 권륜과 태후 사이의 암투와 알력을 알 리가 없었다. 이상한 일로 여기기는 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군웅들에게 담을 넘어 궁 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가수와 백진은 벌써 권륜의 밀지를 받아 홍화회의 회중과 수성전의 기병을 일망타진하려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딸을 염려하고 또 한 사람은 진가락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홍화회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수성전을 지키던 기병들에 대한 공격을 도와 주었다. 잠시 후에 기병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수성전에는 불길이 이글이글 치솟아 옹정의 유조도 불에 타 재로 변해 버렸다. 군웅들이 궁 밖으로 뛰어나왔다. 모두들 간담이 서늘해졌다. 옹화궁 밖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병이 활에 시위를 먹이고 또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든 채, 수천 개가 넘는 횃불을 들고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철통 같은 배치를 해 놓았구나. 독약으로 우리를 해치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이렇게 해 놓았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진과 진정덕이 어림군의 대오로 돌격해 들어갔다. 사방에서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군웅들을 향해 날아왔다. 「모두들 돌격하세요. 곽청동이 큰소리로 외쳤다. 군웅들은 서로 꼭 붙어 선 채 무진과 진정덕을 따라 충살해 들어갔다. 청병은 갈수록 많아져 한 겹을 뚫고 나가면 또 한 겹이 그들을 포위했다. 무진의 검광이 번쩍이며 10여 명의 어림군을 쓰러뜨리고 포위망을 뚫고 나와 보니 뒤를 쫓는 사람이 없었다. 다급해진 그가 다시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니 7, 8명의 시위가 때마침 장진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장진은 전신에 피를 묻힌 채 미친 듯 그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십제, 당황하지 마시오. 내가 왔소. 무진이 외치며 쉭쉭쉭 칼을 휘둘렀다. 3명의 시위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나머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십제, 아무 일 없나? 무진이 이렇게 묻는데 갑자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장진이 낭아봉을 휘둘러 그를 후려쳤다. 무진이 깜짝 놀라 옆으로 피했다. 「네놈들이 내 여러 형님을 해쳤으니 나도 살지 않을란다! 장진이 미친 듯 외치며 낭아봉을 소경의 몽등이처럼 휘둘렀다. 「십제, 십제. 나야, 나! 장진이 두 눈을 까뒤집은 채 갑자기 낭아봉을 집어 던졌다. 「이가, 나는 틀렸어요! 무진이 불빛 아래서 보니 그의 가슴이며 어깨며 팔이 모두 상처 투성이로 여기저기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는 외팔이라 그를 부축할 방법이 없었다. 「내 등에 업히게, 그리고 꼭 잡으라고. 몸을 움츠리자 장진은 그가 시키는 대로 업혀 그의 목을 잡았다. 무진은 뜨거운 피가 도포 속으로 흘러 들어감을 느꼈다.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칼을 든 채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의 칼끝이 미치는 곳에서 청병들이 분분히 물러섰다. 갑자기 앞에서 관병들이 하나둘 계속해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들을 잡아 집어 던지는 것이었다. (사제 이외에는 이렇게 힘쓸 만한 사람이 없는데, 성문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무진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과연 문태래 ,낙빙, 여어동,이원지 등 네 사람이 시위와 더불어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총타주 일행은 어디 계신가? 무진이 물었다. 「보이지 않아요, 우리 저쪽으로 가서 찾아보지요. 무진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장진이 중상을 입고 잘 몰라 다 죽었다고 지껄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태래가 칼과 수장을 휘두르며 혈로를 뚫자 네 사람이 그 뒤를 쫓아갔다. 무진은 문태래 옆으로 달려가 물었다. 「성문은 어떤가? 「그쪽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걱정이 되어 제가 이쪽 사정을 보러 왔을 뿐입니다.」 「참 잘 오셨네. 그가 비록 장진을 업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한칼에 한 명씩은 죽일 수 있었다. 장검이 들리기만 하면 청군의 장병들은 하나도 빠져 나가지 못했다. 「총타주님 ! 이원지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 진가락이 불빛 가운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육비청이 서쪽으로 뚫고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담 쪽으로 퇴각하시오. 멀리 불빛 가운데 파란 깃털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보였다. 「총타주님, 여러분과 함께 담 밑으로 퇴각을 하십시오. 제가 그녀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장검을 휘두르며 곽청동이 있는 쪽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진가락과 문태래가 앞장을 선 채 길을 뚫고 담 밑으로 퇴각했다. 「십제, 내려서시오. 무진이 말했지만 장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낙빙이 그를 부축하니 몸이 뻣뻣했다. 벌써 숨이 끊어진 것이다. 낙빙은 시체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문태래는 시위와 대결하면서 조반산,상씨쌍협 등과 함께 나와 낙빙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몇 방울의 눈물을 떨구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다시 칼을 휘둘러 5명의 시위를 쓰러뜨렸다. 군웅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이때 육비청과 곽청동도 함께 있었다. 사람 틈에서 그 파란 깃털이 서서히 이쪽으로 접근했지만 수십보 사이를 두고는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상씨쌍협이 장창 두 자루를 빼어 들고 쫓아가 그들을 데려왔다. 곽청동의 표정은 창백했고 옷에도 이곳저곳 선혈이 묻어 있었다. 「우리 다시 뚫고 나갑시다. 이번에는 절대로 흩어지지 마십시다. 진가락이 말을 마치자 옹화궁 안에서 쉭쉭쉭 소리가 나며 몇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원래 이가수와 백진의 수하 사람들이 수성전을 지키던 기병들을 섬멸한 뒤에 벌떼처럼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홍화회는 앞뒤로 적을 맞아 험악한 지경에 빠졌다. 위급한 가운데 정면의 어림군이 갑자기 분분히 물러서며 불빛 가운데 노란 장삼을 입은 수십 명의 스님들이 뚫고 들어왔다. 앞장 선 사람의 흰 수염이 나풀거리며 금도를 들어 치고 찍는 기세가 당당했다. 바로 철담 주중영이었다. 군웅들이 반기는데 주중영이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빨리 나를 따라 오시요. 문태래가 장진의 시체를 안고 모두들 함께 뚫고 나왔다. 천경 대사가 대고,대전,대치,원통,원비 원상 등 소림사의 스님들을 통솔하여 어림군과 접전을 하고 있었다. 곽청동은 사람들이 적을 많이 살해했지만 어느 쪽으로 뚫고 나가든지 적병이 반드시 쫓아와 포위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 사방을 살펴보았다. 과연 망루 위에 10여 명이 서 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손에 붉은 등을 들고 사방에 서 있었다. 군웅들이 서쪽으로 뚫고 나가면 서쪽에 있는 사람이 붉은 등을 높이 들었고, 동쪽으로 뚫고 나가면 동쪽에 있는 사람이 역시 붉은 등을 높이 쳐들었다. 곽청동이 진가락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붉은 등을 꺼 버리면 좋겠는데요. 조반산이 이 말을 듣고 바닥에서 활 하나와 화살을 몇 개 집어 들었다. 쉭 소리가 나며 4개의 등이 모두 꺼졌다. 군웅들이 갈채를 보냈다. 청병들은 등불이 없어지자 즉시 어지러워졌다. 곽청동이 다시 말을 꺼냈다. 「저 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분명히 주장이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자부터 먼저 잡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위구르에서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4만여 명에 달하는 조혜의 정병을 섬멸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여인중의 손무와 오기로 여겼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라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사제, 오제, 육제, 우리 네 사람이 가도록 합시다. 무진의 말에 문태래와 상씨쌍협이 대답을 하고 나섰다. 네 사람이 마치 네 마리의 맹호와 같이 달려드는데 어림군이 어찌 이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진가락과 천경 선사 등도 그들을 쫓아 충살해 나갔다. 이제 막 포위망이 뚫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어나며 이가수와 백진이 청병과 시위들을 인솔하고 달려들었다. 혼전이 벌어진 가운데 군웅들이 다시 포위되었다. 이원지 , 낙빙, 그리고 7, 8명의 소림사 스님들이 부상을 입었다. 무진 등이 담으로 올라가 망루로 뛰어오르려 하자 일곱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막았다. 이들이 모두 무공의 고수라, 상씨쌍협은 세 사람을 상대로 싸웠으나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았다. 무진과 문태래는 1대 1로 치열하게 싸웠다. 무진은 초조했다. (이곳에 어찌 이런 고수들이 많이 있을까?) 망루 위에서 많은 사람의 포위를 받으며 빨간 모자를 쓴 관원 하나가 패도와 영기를 들고 독전을 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다 내게 맡기시오. 무진이 외치며 왼손은 심상혈오지로 적의 앞가슴을 찌르고, 오른손은 담렬나하교로 상대방의 두 다리를 베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혹은 펄쩍 뛰어 피했다. 무진의 장검이 벌써 문태래에게 달려드는 2명의 시위를 겨냥하고 천인도산으로 왼쪽 넓적다리를 찌르고 만곡유과로 오른쪽 허리를 노렸다. 문태래는 빠져 나오며 그 빨간 모자를 쓴 고관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험악한 기세를 보고 좌우의 호위병 네 사람이 칼을 들고 막았다. 문태래는 불빛 가운데 그 고관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총타주님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고관의 얼굴이 진가락을 매우 닮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복장만 다르지 않았더라면 정말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는 갑자기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서천굉이 옥병을 훔치고 왕유양을 잡을 때 총타주가 관리로 분장을 했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그를 효기영 통령 겸 구문제독 복강안으로 착각을 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의심할 것도 없는 복강안이다. 지금 군웅들이 위기에 빠졌는데 이 사람을 잡지 않고는 빠져 나갈 방법이 없을 것만 같았다. 문태래는 즉시 몸을 움츠리고 두 자루의 칼날 밑으로 빠져들어가 복강안을 향해 덮쳐 들었다. 어림군을 지휘하여 홍화회의 군웅을 체포하려던 이자는 권륜의 총애를 받는 복강안이었다. 권륜은 옹화궁을 태워 버린 기밀이 누설될까봐 그에게 총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위험한 일이라도 당할까봐 특별히 16명의 시위를 뽑아 전적으로 그 하나만을 호위토록 했던 것이다. 여러 시위 가운데 또 2명이 나타나 그를 막았다. 나머지 사람들이 복강안을 호위한 채 다른 장소로 피했다. 무진이 칼을 휘둘러 시위 2명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갑자기 옆으로 빠져 나왔다. 시위들 틈을 이리저리 헤쳐 나가며 칼로 찌르고 발길로 찼다. 이 틈을 노려 문태래는 다시 두 발로 땅을 찍고 반공에 솟아오름과 동시에 복강안의 머리 위로 덮쳐 들었다. 이때 아래에 있던 효기영 관병과 시위들은 주장이 위험에 봉착한 것을 보았다. 그의 옆에서 10여 명의 고수가 호위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납게 날뛰는 이 두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자 다시 7,8명이 뛰어올라 그들을 도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잠시 홍화회의 군웅들을 추적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망루의 격돌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태래가 날아 덮치는 것을 보고는 놀라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복강안은 무공을 몰랐지만 위급해지자 패도를 들어 막았다. 동시에 두 자루의 장창과 두 자루의 대도가 문태래를 겨냥했다. 문태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번에 이놈을 잡지 못하면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팔을 휘두르자 두 자루의 장창이 하늘 높이 날았다. 한 발로 왼쪽에 있는 시위의 가슴을 걷어차고 오른손 주먹으로 오른쪽에 있는 시위의 얼굴을 후려치며 대갈일성하자, 막 망루로 뛰어오르던 2명의 시위가 놀라 떨어져 내려왔다. 복강안은 그만 손발에 맥이 풀렸다. 문태래가 그의 앞가슴을 틀어잡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사방에 있는 청병들이 약속이나 한 듯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이때 상씨쌍협은 벌써 3명의 시위를 쓰러뜨린 뒤에 달려와 문태래의 옆에 서서 비조를 꺼내들었다. 번쩍번쩍하는 비조가 20 자 정도의 큰 원을 그리고 있으니 청병들이 어찌 감히 대들 수 있겠는가. 「모두들 손을 멈춰라! 각 영의 관병과 시위들은 급히 본대로 돌아가라. 복강안이 영기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효기영 관병과 시위들은 주장이 체포되자 모두들 대경실색했다. 복강안을 호위하라고 하는 황제의 지시를 받은 시위 가운데 세 사람이 상씨쌍협이 휘두르는 비조를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대들었다. 「오제, 육제, 그 세 놈을 놓아 두고 이쪽으로 오시오. 무진이 외치자, 쌍협이 비조를 거두고 뛰어 물러섰다. 그들은 무진이 직접 그들의 생명을 뺏을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무진은 장검을 들어 복강안의 목에 대고 웃었다. 올 테면 와라. 3명의 시위가 발길을 멈추고 멈칫거리다가 서로 눈짓을 한 뒤에 뛰어 물러섰다. 문태래가 두 손에 힘을 주자 복강안은 팔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빨리 병사를 거두고 물러나라. 복강안의 비명 섞인 소리를 들은 청병의 시위는 분분히 자기 자리로 물러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갑시다. 진가락이 외치자 군웅들이 담 밑으로 달려가 각기 담 위로 뛰어 올랐다. 조반산이 확인해 보니 장진만 목숨을 잃었을 뿐 나머지 8, 9명은 부상은 당했어도 다행히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불빛 가운데 맹건웅과 서천굉이 주기를 부축하고 뛰어 올라왔다. 그녀는 산발을 한 채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있었다. '너 무엇하러 왔느냐? 자기 몸을 돌봐야지! 주중영이 꾸중을 했다. '제 아이를, 제 아이를 찾아야 해요. 주기가 울부짖었다. 진가락은 그녀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고 황급한 가운데 자세히 물을 것도 없이 홍화회의 암호로 명령을 전달했다. '우리 궁 안으로 공격해 들어가 황제를 죽여 십가의 원수를 갚읍시다. 군웅들이 좋다고 했다. 낙빙이 이 말을 육비청,천경 선사,천산쌍응, 곽청동 등에게 해석을 해 주자 사람들이 칼을 들어 호웅했다. '소림사가 그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빈승도 오늘만은 살계(殺戒)를 크게 열어야겠소. 천경 선사의 말에 진가락이 놀라 물었다. '뭐라고요? 소림사가 파괴되었다니요? 「그렇소, 벌써 타서 재가 되었소. 천흥 사형이 호법(護法)을 위해 원적하셨소.」 진가락은 괴로움과 함께 다시 한 번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람들이 복강안을 포위한 채 어림군의 칼과 창, 검과 극의 포위망을 지나 한 겹 또 한 겹 걸어 나왔다. 옹화궁을 포위하며 지키는 병사들이 어찌 수만 명뿐이랴, 군웅들이 대담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그놈들의 두목을 사로잡지 않았다면 무슨 방법을 써도 뚫고 나갈 수 없는 포위망이었다. 마지막 한 겹의 청병을 젖히고 나오자 심연이 홍화회의 두목들을 데리고 수십 필의 말을 준비해 놓고 멀찍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분히 말에 올랐다. 어떤 사람은 혼자 타고 또 어떤 사람은 둘이 함께 타고 고함을 지르며 바람처럼 황궁을 향해 달렸다. 서천굉이 진가락 옆으로 달려와 물었다. '총타주님, 퇴로는 마련이 되었나요? 「구가가 성문에서 지원을 하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공교롭게 도착했소? 서천굉이 이를 갈았다. '방유덕 그놈이, 바로 그놈이! 「뭐라고요? 「그놈이 성황, 서대림과 결탁하여 밤에 병사들을 데리고 소림사를 습격했습니다. 천홍 선사는 절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하다가 불에 타 돌아가셨습니다. 그놈들은 또 제 아들까지 뺏어 갔습니다.」 진가락은 그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 축하한다는 말이 목까지 나오는 것을 꿀꺽 삼켰다. 「천경 선사는 여러 스님들을 인솔하여 이들 간사한 녀석들에게 복수하려고 북경까지 쫓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쌍유자 거리로 총타주님을 찾아갔다가 옹화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금성 가까이 와 있었다. 어림군과 시위들이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비록 대결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천굉이 고개를 돌려 천산쌍응을 바라다보았다. 「만약 황제가 소식을 듣고 숨어 버린다면 그 넓은 궁중 어디에서 그자를 찾아낸단 말입니까? 먼저 두 분 선배님께서 가셔서 알아봄이 어떨는지요? 그들 두 노인은 승부욕이 강했다. 방금 무진과 문태래가 복강안을 잡아 공로를 세웠지만, 그들 부부는 아무 공도 세우지 못했다. 「좋소! 우리가 당장 가 보지요.」 천산쌍응이 좋다고 대답했다. 서천굉이 주머니 속에서 4개의 유성화포를 꺼내 진정덕에게 건네 주었다. 「황제를 보시고 죽일 수 있거든 죽여 버리시되 만약 호위병이 많거든 이 유성화포로 연락을 해 주세요.」 「그러지요. 관명매가 대답을 하고 쌍응이 금궁의 담을 뛰어넘어 곧장 내원으로 들어갔다. 몸놀림이 민첩한 것이 날으는 매의 동작과 흡사했다. 내일 떠오를 태양 천산쌍응은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갔다. 궁문이 여기저기 있고 곳곳마다 정원이니 어디에 황제가 숨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태감을 잡아 물어 봅시다.」 관명매의 말에 진정덕이 그러자며 두 사람이 바닥으로 뛰어내려와 캄캄한 곳에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인기척이 나면 가서 잡을 생각이었다. 이때 갑자기 재빠른 발걸음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이 곧장 달려왔다. 「쉿! 이 두 사람 다 무공을 하오.」 진정덕이 조용히 하라고 소근거렸다. 「그렇군요, 우리 쫓아가 봅시다.」 관명매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쌍응은 살금살금 그들 두 사람의 뒤를 미행했다. 앞서 간 사람은 깡마른 체구에 무공이 대단했으며, 뒤의 사람은 뚱뚱보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앞서 가는 사람이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재촉했다. 「빨리, 빨리. 우리가 제일 먼저 황상께 이 소식을 전해야 하오.」 쌍응이 듣고 좋아했다. 그들이 황제를 보러 간다면 공교롭게도 그들을 안내하는 셈이 된다. 마음속으로 뒤에 가는 뚱뚱보에게 감사를 했다. 만약 그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면 부부가 미행하고 있는 사실을 앞서 가는 사람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네 사람은 건물과 정원을 지나 보윌루 앞에 이르렀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앞서 가는 사람이 말하자 그 뚱뚱보가 그 자리에 섰다. 깡마른 사람이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쌍응은 손짓을 한 뒤에 건물을 타고 올라가 맨 위층에서 두 다리를 처마 끝에 댄 채 몸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온통 긴 창문인데 밖은 복도였다. 난간을 새로 칠한 것 같은데, 거기서 꽃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창호지를 통해 담담한 촛불이 비쳐 나왔다. 두 사람은 그 복도로 내려섰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른거렸다. 관명매는 식지에 침을 묻혀 창호지를 적셔 찢고는 눈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권륜은 의자에 앉은 채 부채를 흔들고 있었고, 바닥에 엎드려 보고를 하는 깡마른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백진이었다. 백진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수성전을 태워 버렸으며 파수를 보던 친병들은 하나도 남아 나지 못했습니다. 「잘했네 ! 권륜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감돌았다. 백진이 또 이마를 조아렸다. 「신 죽어 마땅하옵니다. 홍화회의 반도들은 잡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권륜이 깜짝 놀라 물었다. 「태후 신변의 지현과 무명부가 무슨 독주를 마시라고 하다가 탈로가 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신은 그때 수성전의 일을 살피느라 매우 바빴습니다. 지현과 무명부가 그들을 내보낸 셈이지요.」 권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진정덕이 백진과 권륜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아내를 바라다보았다. 내가 백진과 싸울 테니 당신이 황제를 찔러 죽이라는 뜻이었다. 관명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막 창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백진이 갑자기 손뼉을 두 번 쳤다. 관명매가 남편의 팔을 잡아당기며 왼손을 흔들었다. 무슨 이상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좀 더 살펴보자는 뜻이었다. 과연 침대 뒤, 옷장 뒤, 병풍 뒤에서 12명의 시위가 병기를 들고 나타났다. 천산쌍응은 이렇게 생각했다. (황제를 호위하고 있다면 고수가 틀림없을 텐데. 우리 두 사람이 함부로 나섰다가 황제를 찌르지도 못하고 달아나게 한다면 찾지도 못할 것이 아닌가. 차라리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구나.) 백진이 시위 하나를 향해 뭐라고 수군거리자 그 시위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뚱뚱보를 데리고 올라왔다. 그 뚱뚱보는 노란 옷을 입었는데 황제를 향해 이마를 조아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원래 그는 라마승이었다. 「호음극, 자네 일을 잘 처리했네. 무슨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으렷다? 「모든 것을 황상의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수성전에서는 사람이고 기물이고간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좋아, 좋아! 아주 잘했네. 백진, 내가 이 사람을 활불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자네가 처리해 주게.」 호음극은 너무나 좋아 이마를 조아리며 사은을 했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호음극, 자네 황제께 사은을 하게 . 호음극은 어리둥절했다. 벌써 사은을 했는데 또 무슨 사은을 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황제의 시위 총관이 이렇게 말을 하니 어쩔 수 없이 다시 보월루를 향해 꿇어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그런데 갑자기 목이 차디차 깜짝 놀랐다. 시위 2명의 칼이 목에 와 닿았다. 「왜, 왜 이러십니까? 호음극이 놀라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백진이 냉소를 날렸다. 「황상께서 자네를 활불로 만들어 주시기로 했지 않았나. 이제 내가 자네를 서천으로 보내 활불이 되게 하지.」 손을 흔들자 그들 2명의 칼이 일제히 그의 목에 떨어졌다. 2명의 태감이 담요를 들고 와 호음극의 시체를 둘둘 말아들고 나갔다. 갑자기 먼 곳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나며 수십 명이 손에 등불과 횃불을 들고 몰려들었다. 백진이 위층으로 달려 올라가 이렇게 보고했다. 「반도가 소란을 부리고 있으니, 황상께서는 내궁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권륜은 항주에서 홍화회 군웅들의 재주를 보았기 때문에 이들 시위가 그들의 적수가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즉시 일어섰다. 진정덕이 유성화포 한 발을 쏘았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흰 빛이 지붕 위에서 일어나 캄캄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로 달아나려고! 두 사람은 군웅들이 도착하려면 좀더 시간이 걸려야 함을 알았다. 우선 황제를 잡아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소리를 지르며 창문을 뚫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위들은 적이 몇 명이나 도착했는지 몰라 깜짝 놀랐다. 계단 입구에 홍안의 노인과 백발의 노파가 서 있었다. 2명의 시위가 앞장을 서서 그들에게 대들었다. 백진이 권륜을 등에 업자 4명의 시위가 칼을 뽑아들고 앞뒤에서 포위를 하며 난간에서 뛰어내려 3층으로 달렸다. 관명매가 손을 들며 3개의 철련자를 발사했다. 상대방이 피하는 순간을 이용해 그녀는 벌써 3, 4층 사이의 난간으로 달려가 칼로 권륜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백진이 놀라 두 발짝 뒤로 피하자 2명의 시위가 달려들며 관명내의 칼을 막았다. 진정덕은 3명의 시위와 수 합을 겨루며 모두 강적이요, 고수임을 알고 즉시 경신의 무공을 펴 방 안의 사방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백진이 휘파람을 불자 4명의 시위가 네 모퉁이에서 진정덕을 포위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뒤로 또 3명이 나타나 일곱 사람이 즉시 진정덕을 중앙으로 몰아넣었다. 10여 합을 싸우는 동안 진정덕이 칼을 휘둘러 왼쪽에서 자기를 향해 찔러 오는 단창과 연자추를 막았다. 오른쪽에서 튀어나온 채찍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팔을 적중시켰다. 진정덕은 수십 년 동안 적과 상대를 하면서도 부상을 당한 일조차 없었다. 이렇게 맞고 보니 아프기도 하거니와 화가 났다. 즉시 칼을 왼손에 바꾸어 들고 선풍권황사의 재주를 부렸다. 그 기세에 눌린 사람들이 주춤 물러서는 틈을 타 머리를 숙이고 칼을 뻗어 자기를 채찍으로 때린 시위를 찔러 죽였다. 관명매는 남편이 부상당한 것을 보고 이쪽으로 달려와 도우며 두 사람이 함께 2층으로 후퇴했다. 진정덕은 군웅들이 도착하지 않자 자기들 부부가 이 10여 명의 시위를 상대로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들에게 쫓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다시 한 번 유성화포를 발사했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내가 수 합을 대결하다가 한 계단씩 뒤로 물러서는데,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계단이 좁아 많아야 3, 4명의 적이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점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하는 공격을 아래서 방어하자니 자연 힘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덕은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해야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시 권륜을 향해 덮척 들었다. 시위들이 대들자 그는 재빨리 물러서며 관명매를 공격하고 있는 시위의 등을 찔렀다. 누군가가 그를 도우러 나오면 그는 다시 권륜을 공격했다. 그러면 또 시위들이 권륜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되자 즉시 기선을 잡을 수가 있었다. 시위들이 어수선하게 왔다갔다하는 틈을 타 그는 벌써 2명의 시위를 칼로 찔렀다. 관명매도 4개의 계단을 밟고 다시 올라왔다. 백진은 정세가 불리함을 보고 한 시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 형, 황상을 업으시오.」 이 사람은 바로 항주에서 홍화회에 잡혀 갔었던 마경협이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황제를 등에 업었다. 백진이 소리를 지르며 진정덕을 낚워채려고 덤벼들었다. 두 사람이 마주 붙자 진정덕은 몸을 뺄 수가 없어 야단났다는 생각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른팔의 상처가 갈수록 아파 왔다. 혼자서 백진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힘에 겨운데 4,5명의 시위가 동시에 그에게 덤벼들었다. 백진의 쌍장이 난무하며 진정덕의 급소를 노렸다. 진정덕은 온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고 방어에 전념했다. 그런데 등뒤에 있던 시위가 갑자기 습격해 그의 등을 찔렀다. 그 시위가 잘 되었다고 좋아하는데 진정덕이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힘껏 쳤다. 그자의 머리가 박살이 나 그 자리에서 죽었다. 진정덕은 그자의 칼에 급소를 찔린 것이다. 이러다가 여기서 죽는 것이 아닌가 하여 앞이 캄캄했다. 그러다 대갈일성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백진이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진정덕이 권륜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하여 장검을 집어 던졌다. 마경협은 장검이 날아오자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겨를이 없었다. 혹시 황제가 다칠까봐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진정덕이 죽을 힘을 다해 던졌으니 그 힘이 오죽이나 막강했으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반 이상 잘려 나가며 장검이 그의 앞가슴을 뚫고 빠져 나갔다. 진정덕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장검이 권륜의 앞가슴에 구멍을 뚫었으니 자기의 생명과 황제의 목숨을 바꾼다 하더라도 손해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백진과 시위들은 장검이 마경협의 가슴에 꽃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관명매도 남편이 중상을 입고 장검을 집어 던지는 것을 보자, 각각 대경실색 서로 싸울 생각도 못 하고 각자 구출을 하러 나섰다. 백진이 황급히 권륜을 안았다. 「황상, 어떠십니까? 권륜은 벌써 놀라 얼굴이 창백했지만 억지로 진정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네.」 백진은 그 칼이 마경협의 등에서 반 자쯤 나와 권륜의 앞가슴에 입은 옷이 몇 겹이나 찢어진 것을 보고는 놀랐다. 그러나 황제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니 놀랍고 반가웠다. 「황상의 홍복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정말 성천자시라 백신의 가호가 있었군요.」 권륜은 진가락을 배신한 뒤, 홍화회가 보복을 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20여 년 전 옹정 황제가 밤에 자객에게 머리를 잘린 일을 상기하자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며칠 동안 속에 금사연갑(金絲軟甲)을 입고 있었는데 과연 그의 생명을 건져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백진으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백진은 권륜을 다시 업었다. 계단에 막을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앞뒤로 시위의 호위를 받으며 아래층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보월루 문 앞에 이르자 권륜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내려섰다. 아래층 입구를 막고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진가락이었다. 그의 뒤에 불빛과 칼 그림자가 어지러운 가운데 수십 명의 영응과 호걸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권륜은 황급히 몸을 되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시위들도 벌떼처럼 그를 에워싼 채 달려갔다. 2명의 시위가 행동이 좀 늦어 상씨쌍협에게 잡혔다. 수 합을 겨루는 사이 3명의 소림사 스님이 앞뒤로 공격하다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진가락 등은 유성화포를 보자 급히 보월루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오는 도중 시위들이 막아 그들과 싸우며 오느라 다소 시간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보월루까지 왔을 때 황제는 천산쌍웅에게 시달림을 받느라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것이다. 군웅들은 권륜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 올라왔다. '하하, 원래 네놈들이 여기 있었구나. 문태래의 포효가 터졌다. 원래 성황과 서대림이 손에 병기를 들고 침대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진가락은 위층으로 올라오자 즉시 통로를 차단, 사수하라는 임무를 사람들에게 부여했다. 무진은 장검을 잡고 3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지키고, 상씨쌍협은 올라오는 계단을 지켰으며, 조반산,대고,대전,대치는 각기 동서남북 사면의 창을 지켰다. 곽청동은 사부가 사공을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진정덕의 등에 난 상처에서 피가 샘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육비청도 달려와 금창약을 꺼내 발라 주었다. 진정덕은 입가에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고 관명매를 바라다보았다. '내 당신에게 미안하게 됐소. ,,-,몇십 년 동안 고생만 했으니 위구르로 돌아간 뒤에는,,,,,, 원 대,,,,,, 원 대형에게...... 재가를 하시오. 그래야만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겠소. 육 형, 내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오,, 관명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몇 달 동안 당신은 내 일편단심을 정녕 몰랐단 말이오? 육비청은 생각했다. (아니, 이들 부부는 이제 죽을 마당에 와서까지 말다툼을 한단 말인가? 몇 마디 뭐라고 나무라 주어도 무방하겠지?) 막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관명매가 소리를 질렀다. 「이러면 안심할 수 있겠지요? 칼을 목에 대고 찔러 그 자리에서 자결을 했다. 곽청동과 육비청이 그들 옆에 가까이 있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막을 겨를이 없었다. 진정덕이 통곡을 하다가 갑자기 울음소리가 멈췄다. 육비청이 몸을 숙이고 보니 그가 아내의 몸을 끌어안은 체 두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곽청동이 쌍응 위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진가락이 손에 단검을 들고 권륜을 노려보았다. 「육화탑에서의 맹약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우리가 해령에서 서로 손바닥을 쳐 가해하지 않기로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 당신은 오늘 술에 독을 타 나를 죽이려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말을 하면서 두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단검의 칼끝에서 한광이 번쩍번쩍하는데 그것을 그의 가슴에 댔다. 「네놈은 원수를 아비로 삼고, 백성을 해쳤으니 천하의 어진 사람, 의로운 사람의 공적이다. 너와 내가 친형제라고는 하지만 형제의 정을 다시 말해 무엇하랴. 오늘 내 네놈의 피를 마셔, 네놈 손에 죽어 간 많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겠다.」 권륜은 놀라 혈색을 잃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천경 선사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소림사에서 수도를 하며 세상과는 다투는 일이 없거늘, 네놈이 무엇 때문에 나쁜 놈들을 파견하여 불문의 성지를 태워 버렸느냐? 오늘 나도 살계를 버리리라.」 성황이 갑자기 뛰쳐나오며 제미곤을 들어 천경 선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천경은 피하지도 않고 오른손으로 제미곤의 끝을 잡아 끌어당겼다. 성황이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넘어졌다. 천경이 일 장을 날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쑥 들어가 자라목이 되어 죽었다. 천경이 오른손에 힘을 주자 제미곤이 세 토막으로 부러졌다. 시위들은 이 노스님의 기세에 풀이 죽어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백진은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나왔다. '내가 선사와 대결을 하리다.」 천경이 코방귀를 뀌는데 진가락이 나섰다. '사숙님, 제자가 나서겠습니다.」 「어디 그래 보시오. 「자, 대결을 합시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일 장을 비스듬히 쪼갰다. 백진이 팔을 들어 막으려고 하는데 진가락의 수장이 갑자기 꺾이며 팍 하는 소리와 더불어 그의 어깨를 쳤다. 백진은 깜짝 놀랐다. (내가 이자와 항주에서 대결할 때는 실력이 막상막하였는데 어째서 반 년도 되지 않아 그의 공력이 이토록 향상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진가락이 또 양 장을 날렸다. 백진은 일 장은 피하고 일 장은 맞았다. 적수가 아님을 알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잠깐만! 권륜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백진은 황제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시위의 손에서 칼 한 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진 총타주, 나는 당신의 적수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남자 대장부라고 존경해 왔소. 다시 황제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면 가고 싶은 대로 가 보시오. 조반산이 동쪽의 창을 지키고 있다가 한쪽으로 피해 주었다. 백진이 처연하계 웃었다. 두 분의 호의는 고맙습니다. 제가 황상을 보호하지 못하니 그것은 불충이요, 귀하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보답할 수 없으니 그것은 불의입니다. 불충불의한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산단 말입니까? 칼로 자기의 목을 내려치자 머리가 번쩍 들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진가락은 곽청동을 부축해 일으키며 단검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동생, 두 분의 사부, 그리고 무수한 동족이 모두 이 사람의 손에 죽었으니 당신이 직접 이자를 죽이시오. 곽청동이 단검을 들고 권륜 앞으로 다가섰다. 서대림이 거치도를 들고 나와 그녀의 앞길을 막자 문태래가 옆에서 뛰어나와 왼손으로 그의 등을 잡아올리며 오른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10여 번이나 쳤다. 그러다 손을 놓자 서대림은 늑골이 부러져 솜뭉치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날 그가 7명의 시위와 함께 문태래를 잡아 그에게 중상을 입혔던 원한을 이제야 갚은 셈이다. 문태래는 곽청동이 칼을 들고 나서는데도 권륜의 옆에는 겨우 5, 6명의 시위가 남아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껄껄 웃었다. 곽청동이 몇 발짝 다가서는데 갑자기 건물 밖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조반산이 고개를 돌려 보니 보월루 밖에 횃불이 대낮처럼 밝고 어림군 시위 , 태감 등 3, 4천 명의 사람들이 황제를 구출하기 위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문태래가 창 앞으로 가 소리를 질렀다. 「황제는 여기 있다. 누구든지 올라서기만 하면 이 나리가 황제부터 먼저 죽이겠다.」 그의 당당하고 늠름한 태도, 우레와 같은 목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즉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서천굉과 심연이 백진, 서대림 ,마경협 ,성황등의 시체를밖으로 집어 던졌다. 시위들은 이들 고수들이 모두 비명에 횡사한 것을 보자 더욱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보월루 위의 군웅들도 곽청동이 한광이 번쩍거리는 단검을 든 체 한 발짝 한 발짝 권륜 앞으로 다가가는 것을 묵묵히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침대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한 사람이 달려 나와 권륜의 앞을 막아 섰다. 곽청동이 발길을 멈추고 이 사람을 보니 흰 수염의 노인인데, 손 안에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 늙은이는 오른손으로 아이를 얼굴 앞에 쳐들며 냉소를 머금고, 왼손의 다섯 손가락으로 아이의 목을 누르는 신융을 했다. 아이는 통통하고도 옥같이 희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내 아이를 되돌려 줘요! 주기가 달려들며 아이를 뺏으려고 했다. 「어디 대들어 보라구, 아이를 죽이겠으면 대들어 보라구.」 그 늙은이의 말이었다. 주기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이 늙은이는 바로 안휘성 순무를 지냈던 방유덕이었다. 그날, 복건성의 덕화에서 첩을 얻으려다가 군웅들이 대드는 바람에 달아났던 자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극히 간사하고 교활한 위인이었다. 그는 사람 틈을 비집고 달아난 뒤에 성황과 서대림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황제가 홍화회의 군웅들을 처치해야만 안심하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간사한 꾀를 써 군사를 이끌고 밤에 소림사를 습격, 천홍 방장을 태워 죽이고, 또 주기의 아들을 빼앗아 갔던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큰 공임을 알고 서대림 등과 북경으로 달려와 황제를 알현하게 된 것이었다. 권륜은 밤마다 그를 불러들여 소림사에 아직도 자기의 신분과 관계가 있는 흔적이 남아 있는가 상세히 물어보았다. 그들 세 사람이 보월루로 올라올 때 공교롭게도 진가락 등이 도착한 것이었다. 방유덕은 침대 뒤에 숨어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가 워낙 일이 긴급한 것을 보고는 아이를 안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비록 무예는 할 줄 몰랐지만 음흉한 것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그런 위인이었다. 잠시 이렇게 버티고 있다가 방유덕이 말을 꺼냈다. 「모두들 궁 밖으로 나가면 아이를 돌려 주지 . 「이 마귀 같은 놈, 우리를 속이려고. 곽청동이 욕을 했지만 격한 감정 때문에 위구르 말로 해 방유덕은 알아듣지 못했다. 군웅들은 이제 손 안에 들어온 권륜을 천하의 모든 청병이 일제히 대들어 구출하려 해도 우선 이 황제를 죽이고 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예도 모르는 늙은이가 아이를 안고 나와 그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놓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웅들은 진가락을 바라다보며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진가락은 곽청동을 바라보며 향향 공주가 권륜의 핍박에 의해 죽어 간 사실을 상기했다. 곽청동의 온 가족의 철천지 원수를 어찌 갚지 않는단 말인가! 다시 천산쌍응과 장진의 시체를 바라다보며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근심과 경악으로 일그러진 서천굉의 표정을 보고 다시 방유덕의 손 안에 안긴 어린아이를 바라다보았다. 아이는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방그레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자기의 목에 대고 있는 방유덕의 말라빠진 큰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진가락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천경의 눈에는 자비의 빛이 역력하고, 육비청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 있었으며, 주중영은 흰 수염이 그의 몸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넋을 잃고 입을 헤 벌린 주기의 모습은 차마 더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진가락은 생각했다. (주 노영웅은 홍화회를 위하다 혈통까지 끊긴 분이다. 이 아이는 그가 대대로 자손을 이을 씨앗이다,,,,,,. 그러나 오늘 황제를 살해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 철통같이 방비할 것이니 이 원수를 갚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주기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낙빙과 이원지가 그녀를 잡았지만 결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빠져 나가려고 했다. 무진,문태래 ,상씨쌍협 등 평소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호걸들의 표정에서도 차마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 보였다. 조반산은 손에 암기를 든 채 여차하면 발사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방유덕을 처치할 자신은 있었지만 이 어린아이가 너무나 연약했다. 만에 하나 방유덕이 죽을 무렵에 손가락으로 아이를 눌러 죽인다면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암기를 쥔 손을 가볍게 떨었다. 몸에 수십 종의 암기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곽청동이 고개를 돌리고 단검을 진가락에게 되돌려 주었다. '죽은 사람은 벌써 천국에 가 있어요. 이 아이가 장성한 후 우리들의 철천지 원수를 잊지만 않으면 되겠지요. 진가락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유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좋소, 우리가 황제의 목숨을 해치지 않을 테니 아이를 이리 주시오. 말을 하며 칼을 칼집에 꽃고 팔을 뻗어 아이를 받으려 했다. 「흥, 누가 당신을 믿겠소? 당신들이 궁에서 나가야만 아이를 돌려 주겠소.」 진가락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 홍화회는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데, 어찌 짐승 같은 당신을 속인단 말이오. 「나는 믿지 못하겠어요.」 「좋소. 그러면 당신이 우리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갑시다.」 방유덕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권륜은 진가락이 자기의 목숨을 용서한다는 말을 듣자 너무나 기뻤다. 방유덕이 죽거나 말거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네가 이 사람들과 함께 궁 밖으로 나가거라. 네 오늘 이렇게 큰 공을 세웠으니 내 어찌 모른다 하겠느냐.」 방유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했다. 황제의 말투로 보아 그가 죽은 뒤 그에게 후장을 해 주고 봉작이라도 내려 줄 것 같은 눈치였다. 「황상의 은전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방유덕은 고개를 돌려 진가락을 돌아다보았다. 「내가 여러분을 따라간다면 이 늙은 목숨도 뺏을 생각이오? 그는 진가락으로부터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진가락도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너는 온갖 못된 짓을 다 했으니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할 몸이 아니던가.」 권륜은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상대방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까 불안했다. 「빨리 저들을 따라 나가거라.」 「내가 일단 나가면 당신들이 여기 몇 명 남아 황상을 또 해치려고 할 것이 아니오? 진가락은 화가 났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황상이 먼저 이곳에서 나가신 후 내가 당신들을 따라 나가리다. 진가락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권륜을 바라다보았다. 「좋소. 먼저 가시오. 권륜은 황상의 체통 따위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 나는 듯 문 밖으로 달아났다. 진가락이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그를 잡고 왼손으로 그의 따귀를 네 번이나 때렸다.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금세 권륜의 두 볼이 부어 올랐다. 사람들은 너무나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한참 뒤에야 갈채를 보냈다. 「당신은 당신이 한 맹세를 기억하는가? 권륜이 무슨 말로 대답을 하랴. 진가락이 손으로 뿌리치자 권륜은 비틀비틀 급히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이를 내놓아라. 진가락이 소리를 질렀다. 조반산은 독질려를 꽉쥔 채 창 밖을 응시했다. 진가락이 아이를 받고 권륜이 건물 밖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자기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권륜을 죽여 없앨 심산이었다. 방유덕은 사방을 휘둘러보며 달아날 궁리를 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황상이 무사하심을 보아야만 아이를 내놓겠소.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창 앞으로 걸어갔다. 「이놈의 영감이 죽을 마당에서도 말이 많군.」 욕을 하며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아이만 내놓으면 즉시 때려 죽일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권륜이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자 시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그를 호위했다. 「간사한 놈 같으니라구! 조반산이 혼자 중얼거리듯 욕을 했다. 방유덕은 수십 명의 시위가 아래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위에서 죽느니 차라리 뛰어내리겠다고 결심했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시위들이 자기를 받아 줄 것 같았던 것이었다. 아이를 안은 채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군웅들은 뜻밖의 일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상백지가 비조를 휘둘러 방유덕의 왼쪽 다리를 감아 잡아당겼다. 방유덕은 몸이 허공에 뜨자 아이를 놓쳤다. 조반산이 두 발로 땅을 찍으며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공중에 뛰어올랐다.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든 채 왼손을 뻗어 아이의 한 쪽 다리를 잡음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3개의 독질려를 날려 방유덕의 머리와 가슴을 노렸다. 이때 건물 위층에 있던 군웅이나 아래에 있던 시위들이나 모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조반산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왼손을 안으로 구부려 아이를 품에 안고 땅바닥으로 내려서며 태극권의 운수로 달려드는 2명의 시위를 밀어붙였다. 나머지 사람들이 분분히 조반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씨쌍협 , 서천굉 , 주중영 , 문태래 등이 일제히 뛰어내려 그를 호위했다. 조반산이 아이를 살펴보니 아무 이상 없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진가락이 복강안을 끌고 창 앞으로 가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의 목숨은 잃어도 좋은가? 권륜은 시위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불빛 가운데 복강안이 체포된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손을 멈춰라. 권륜의 명령이 떨어지자 시위들이 조반산으로부터 물러섰다. 주중영 등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원래 권륜의 황후는 대신 부항의 누이였다. 부항의 아내는 상당한 미모였다. 궁에 들어와 황후에게 문안을 드릴 때 권륜이 보고 반해 사통을 하여 복강안을 낳은 것이다. 부항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세 아들은 모두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부항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황제에게 공주를 복강안의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권륜은 웃기만 할 뿐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사생아를 특별히 총애했다. 복강안과 진가락의 모습이 비슷한 것도 두 사람이 원래 숙질간으로 혈통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진가락은 이런 내막을 몰랐다. 황제가 다급해하자 이미 계책을 생각해 놓았다. 즉시 복강안을 데리고 여러 사람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주기가 조반산에게 달려가 아이를 받아 안고 미칠 듯이 좋아했다. 한쪽엔 홍화회의 군응과 소림사의 스님들이 서고, 다른 한쪽에는 청궁의 시위와 어림군이 섰다. 보윌루 앞은 본래 넓은 공지였는데 지금은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싸움터와 같았다. 다만 쌍방의 숫자만 현저하게 다를 뿐이었다. 이가수는 황제의 속셈을 알았다. 「진 총타주, 복 통령을 풀어 주시면 평안히 성 밖으로 나가시도록 하겠소. 「황제의 뜻은 어떠시오? 진가락이 물었다. 권륜은 방금 그에게 네 번이나 얻어맞은 뺨이 익어 터진 복숭아처럼 부어 있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그의 수중에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보내 주지 . 복 통령이 우리를 성 밖으로 안내하시오.」 진가락이 이렇게 말하며 다시 권륜을 바라다보았다. '천하 백성들이 네놈의 고기를 먹어야만 한이 풀릴 것이다. 네가 백 년을 더 산다 하더라도 이 백 년 동안 네놈은 날마다 밤마다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고개를 돌려 군웅들을 바라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 우리 떠납시다. 사람들이 복강안을 가운데 둔 채 천산쌍응과 장진의 시체를 안고 궁 밖으로 나왔다. 시위와 어림군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감히 쫓아올 생각을 못했다. 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필의 말이 나는 듯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이가수가 말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진 총타주, 상의할 말이 있소.」 군웅들이 발걸음을 멈추자 이가수와 증도남이 가까이 왔다. '복 통령을 편안히 되돌려 주기만 한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황상의 어명이 계셨소.」 이가수의 말이었다. '흥, 누가 황상의 거짓말을 믿는답디까? '말씀만 하시면 소장이 돌아가 황제께 아뢰겠습니다.」 '좋소! 첫째, 황상이 금은을 풀어 소림사를 복건해야 하오. 불상 등은 과거보다 더 커야 하오. 그리고 조정의 관헌들은 소림사에 나타나 야료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하오.」 「그 일은 어려울 것 없습니다.」 '둘째, 황제는 위구르의 각 부족을 정벌하지 말아야 하오. 포로가 된 위구르 남녀는 무조건 석방해야 하오.」 「그 일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셋째, 홍화회의 회중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데 황제는 이들을 탄압하거나 체포해서는 아니 되오.」 이가수는 잠자코 있었다. 「흥, 정말 체포를 한다 해도 우리는 무섭지 않소. 이 분뢰수 문 사야도 이 군문의 영문에서 한동안 살지 않았소? 「자, 좋습니다. 약속을 하겠습니다.」 「내년 오늘, 우리는 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확인한 뒤에 복 통령을 죄돌려 줄 것이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이가수가 복강안을 바라다보았다. 「복 통령, 진 총타주의 말씀이 틀림없으니 안심하십시오. 황상께서 반드시 이 세 가지 일을 그대로 시행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소장은 복 통령께서 평안히 돌아오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쩌면 진 총타주께서 보다 일찍 복 통령을 풀어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강안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었다. 진가락은 백진과 이가수가 수성전의 기병을 공격한 까닭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분명 무슨 곡절이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 번 더 겁을 주고 싶었다. 「수성전에서 일어난 일, 우린 다 알고 있다고 황제에게 전하시오. 다시 또 무슨 흉계를 꾸민다면 좋지 않을 게요. 이가수는 깜짝 놀랐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가락이 자기의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았다. 「이 군문, 우리 여기서 하직합시다. 진급도 하고 돈도 벌되 백성을 해치는 일은 없도록 하시오.」 「고맙소. 이가수도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원지와 여어동이 말에서 내려 이가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이가수는 코끝이 시큰했다. 이제 딸을 만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몸조심하거라!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진 뒤에 말머리를 돌려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원지는 엎드린 채 흐느껴 울었다. 여어동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말 위에 태웠다. 군웅들은 성문으로 달려와 양성협 , 위춘화 등과 만났다. 복강안이 성문을 열라는 명령을 내렸다. 종루의 커다란 종이 땅땅 사경을 알렸다.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오자 물가의 갈대숲에 새벽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다시 더 가자 눈앞에 황량한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울며 위구르의 만가를 부르고 있었다. 진가락과 곽청동이 깜짝 놀라 달려가 물었다. 「누구를 애도하고 계십니까? 나이 든 위구르 사람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향향 공주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향향 공주가 이곳에 묻혔습니까? 그 사람은 미처 마르지도 않은 황토흙 더미를 가리켰다. 「바로 여기입니다.」 곽청동도 눈물을 흘렸다. 「동생을 여기에 묻을 수는 없어요.」 「그래요, 그 신봉의 비취 연못 옆에 안장합시다. 이런 말이 있지요. (나 여기 있기에 영원히 즐겁노라!)우리, 그녀의 시신을 그리로 옮깁시다.」 「그래야겠어요. 곽청동이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두 분은 누구십니까? 나이 든 위구르 사람이 물었다. 「저는 향향 공주의 언니입니다. 「아, 취우황삼이시군요.」 다른 위구르 사람이 놀랍다는 듯이 외쳤다. 「우리 이 무덤을 파요.」 곽청동의 말에 진가락과 심연 , 장사근 등이 위구르 사람과 함께 무덤을 팠다. 소림사 스님 가운데는 괭이를 병기로 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방 무덤을 파고 돌을 들어올렸다. 그윽한 향기만 풍길 뿐 무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가락이 횃불을 받아 들고 광중을 비춰 보았다. 검붉은 피가 고여 있고 그 옆에 자기가 그녀에게 준 그 온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우리들이 직접 향향 공주를 여기 안장하고 온종일 떠난 일이 없는데 어째서 그녀의 유해가 보이지 않을까요? 위구르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더니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군요. 이제 다시 하늘로 올라간 것이니, 총타주님이나 곽청동 소저는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낙빙의 말이었다. 온옥을 주워 든 진가락의 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때 갑자기 미풍이 불며 더욱 진한 향기가 풍겼다. 사람들이 감탄을 하며 다시 무덤을 덮었다. 옥처럼 희고 큰 나비 한 마리가 무덤 위를 날아다니며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진가락은 나이 든 그 위구르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가 몇 자 써 드릴 테니 석수장이에게 부탁하여 이곳에 비석을 세워 주십시오.」 그 사람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심연이 열 냥의 은을 내주며 비석을 세우는 데 쓰라고 했다. 다시 보따리 속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어 무덤 앞에 펼쳐 놓았다. 진가락이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우선 향총이라는 두 글자를 쓴 뒤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명문(銘文)을 써 내려갔다. 한없는 시름, 끝없는 재난, 짧은 노래 끝나자 밝은 달도 이지러지네. 우울하고 아름다운 작은 성 안에 멍든 피가 고였네 멍든 피가 마르고, 핏자국 또한 사라지겠지만 한 가닥 향기 나는 혼이야 끊어질 리 없으리! 그대 한 마리 나비로 변신을 했는가? 군웅들은 우두커니 오랫동안 서 있다가 동녘이 활짝 밝아 오자 비로소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작가후기 (作家後記) (소설 청향비)인 서검은구록은 내 처녀작이다. 1955년 작이니 어언 30년이 된 셈이다. 내 고향은 절강성 해령이다. 권륜 황제에 관한 전설은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다. 소년 시절 보이 스카우트로 있을 때도 권륜이 만들어 놓은 해령의 석당에서 야영을 했다. 성이 나 밀려 오는 것 같은 사나운 조수도 밤에 보았다. 처녀작을 인상이 짙은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엮어 쓰게 된 셈이다. 그러나 진가락은 내가 설정한 가공의 인물이다. 향향 공주도 전설이나 역사상의 향비가 아니다. 향향 공주는 향비보다 훨씬 아름답다. 이 책의 표지나 삽화에 나오는 향비의 그림도 권륜에게 이와 같은 빈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어 수록했을 뿐이다. 해령은 청나라 때에는 항주부에 소속된 바닷가의 작은 고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조수만은 유명했다. 근대의 저명한 인물인 왕국유(王國維) , 장백리 , 서지마 등의 성격을 보면 어딘가 우울한 색조와 비극적 요소를 가미한데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아집을 가지고 있다. 진가락의 성격에도 어쩌면 이들 몇 사람의 그림자 비슷한 것이 있는 듯하다. 해령에서는 무인(武人)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군사학의 대가인 장백리 씨도 이론가일 뿐이다. 역사학자인 맹삼은 고증을 거쳐 권륜이 해령 진씨 가문의 후예라는 전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고, 또 향비가 황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전설도 사실이 아니라 했다. 역사학자들은 물론 전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전설을 좋아한다. 권륜이 해령의 해당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일은 일반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준 것이다. 내가 책에서 그를 엉망으로 묘사해 놓았으니 정말 미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시를 잘못 짓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해령과 항주 등 도처에서 그가 쓴 어제시(御製時)의 석각(石刻)을 보면 늘 묘한 반감을 느꼈다. 지금 볼 수 있는 명화의 복제품 가운데 그가 제자(題字)한 것이 눈에 될 때마다 못마땅하니 한번 꼬집어 주어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아서 그렇게 하였다.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했는데, 단행본으로 나올 때마다 수정을 거듭했다. 원본에 삽화를 많이 삽입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중국의 인물과 예술 작품에 접할 기회를 보다 많이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이 재미 없다고 느껴지면 그림 구경이나 하시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