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 강호성검 하나의 소문- 작금의 무림과 같은 상황하에서, 그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러한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왜냐하면, 작금의 무림정세는 지극히 불안전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대하고 있는 듯한.... 아니면 폭풍전야의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을 보고 있는 듯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전 무림인들은 은연중 불안한 심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곧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따위였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사람은 이러한 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의지할 존재를 찾게 되기 마련이었다. 자신들을 적절하고도 완전하게 지켜줄 그 어떤 존재를...... 그러나, 결국 자신만큼 자신을 안전하고도 각별하게 지켜줄 존재는 없을 것이 다. 스스로 강자만 될 수 있다면..... 그러한 의미에서, 작금의 무림에 퍼진 그 소문은 매우 충격적이고도 고무적인 사건임이 분명했다. 그 소문은 강자가 되는 방법을 가장 쉽고도 확실하게 가르켜주는 것이었기 때 문에... 소문의 내용은, 어떤 전설적인 영물에 관한 것이었다. 만일, 보통때였다면, 이 소문은 그리 커다란 의미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만년금구가 나타났다!! 소문이 일자, 전 무림인들은 일제히 탐욕의 눈을 번쩍 떴다. 소문의 출처인 호남성 악양땅을 향해.....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은밀하고도 빠르게 그곳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대풍운의 조짐이 아닐는지. 불확실한 시대를 마감하는...... 악양. 이곳은 거대한 동정호의 연변에 위치한 고도이다. 옛부터 그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늘상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그 광경의 수려함에 대해선 달리 설명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풍경속에 언제부턴가 살풍경한 움직임과 긴장감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미가 보다 본격화 된것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부터였다. 눅 눅한 습기가 가득찬 안개가 동정호 전역을 온통 뒤덮었었던.... 오후 무렵, 그들은 악양성 내에서 다소 떨어진 동정호변의 작은 주막으로 찾아 갔다. -불망헌 이 고상한 이름의 주점은 사실 알고보면 냄새나고 더러운 통나무 술집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불망헌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끄 럽지 않고 매우 조용했다. 갑자기 찾아든 두명의 절세미녀와 한명의 중년인으로 구성된 이들 일행에 대해 전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날이 시퍼렇게 보이는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창가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창밖의 사정에 몹시 이목을 곤두세우고 있는 눈치 였다. 허나, 일행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그다지 의아해 하지는 않았다. 불망헌의 주인은 일행을 반기기는 커녕 모 습을 드러내지조차 않았다. 실내에 비어있는 탁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두명의 서생이 앉아있는, 안쪽 가운데에 위치한 탁자가 그래도 가장 사람이 적어 보였 다. 그쪽을 한차례 훑어본 백의 궁장 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린 저들과 합석하는 것이 좋겠어, 봉매...." 자삼미녀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언니.." 자삼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의 궁장 미녀는 즉시 걸음을 옮겼다. 맨 뒤에 있 던 금포 중년인은 말없이 두 절세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들이 실내에 들어서 자 사람들 사이에 가벼운 소요가 이는 듯 했다. 허나, 백의궁장미녀는 그러한 시선들을 무시하며 중앙의 탁자로 걸어갔다. "실례해요.. 잠시 동석해도 되겠어요?" 그녀의 말에 두 서생중 하나가 고개를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결이 유난 히 희고 이목구비가 몹시 아름다운 그는 마치 여인처럼 곱게 생긴 미서생이었다. "아... 그러십시오!" 미서생이 자리를 조금 비켜주자 그녀들은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금포중년인은 같이 앉지 않고, 백의궁장미녀의 뒤에 시립하듯 섰다. 헌데, 그때 다른 서생이 수그렸던 고개를 마악 들다가 그녀들을 바라보고 일시 흠칫했다. 일순 놀란 것은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다시한번 살펴본 결과, 그는 전혀 그들과 안면이 없는 낯설고 평범한 용모 의 서생이었다. 어째서 그가 갑자기 낯익은 사람처럼 느껴졌을까... 그녀들은 그 이유를 알수 없었다. 서생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술을 마 시기 시작했다. 백의궁장미녀는 그모습을 한차례 더 주시하다가, 미서생을 향해 물었다. "이 분은 친구이신가 보죠?" 헌데 미서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친구라고요? 천만에요 그와 난 오늘 처음본 사이입니다. 우연히 동석하고 있었 지요." "......." 백의궁장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들에게 털복숭이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술통째 술을 쏟아붇듯이 들이키고는 길게 트림을 하며 다가와 물었다. "이봐, 술이 필요해서 왔나?" 그 태도는 얼핏 느끼기에도 몹시 무례해 보였다. 이에, 금포중년인이 이맛살을 길게 찌푸렸다. 저 술주정뱅이가 술에 취해 수작을 걸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급히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헌데, 그의 행동은 백의궁장미녀에 의해 제지되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백의궁장미녀는 털복숭이 사내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질문 에 대답한 사람은 사내가 아니라, 미서생이었다. "그는 이곳 불망헌의 주인이오.." 그말에, 그녀들과 금포중년인은 다같이 놀랐다. 일개주점의 주인이 저런 술주정 뱅이일 줄이야..... 극히 무례한 행동은 둘째치고라도, 주인 자신이 곤드레가 되면 장사는 누가 한 단 말인가? 하긴, 저 지저분한 몰골은 이 불망헌의 더러움과 걸맞는 것이기는 했다. 그녀들 이 내심 어이없이 하는 사이에, 사내는 술통을 기울여 나머지 술을 모두 마시고 는 긴 트림과 함께 그녀들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그 시선은 기이하게도 잿빛의 무거운 앙금을 담고 있는 듯 했다. 누구라도 그러한 시선을 받으면 좋았 던 기분도 금새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백의궁장미녀는 내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죽엽청 한병과 안주될만한 것을 가져다 줘요." 그 말이 떨어지자 사내는 말없이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자삼미녀 가 나직히 한숨을 쉬며 백의궁장미녀에게 물었다. "과연 그 분이 여기에 나타날까요?" "아마 오실꺼야. 무림인들치고 그것에 관심없는 사람은 없다니까..." "......" "야속한 사람.....곧 오신다고 하고선 지난 삼년동안 단 한번의 연락도 안하시다 니....." 그녀의 음성은 애조에 젖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자삼미녀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말했다. "대체, 그것이 어떤 것이길래 다들 이렇게 난리죠?" 그때, 그녀들의 앞 탁자 위에 돌연 가볍게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털복숭이 사내 가 죽엽청 한병과 통닭 한마리를 던지듯 올려놓은 것이다. 그런후, 사내는 아무 런 말도 없이 한쪽으로 가버렸다. 그로 인해 좌중의 우울한 분위기가 잠시 깨졌 으나, 자삼미녀는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핫핫핫핫핫........" 일진의 거대한 대소가 울려퍼지며 한사람이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핫핫... 제가 그 만년금구에 대해 설명해 드리지요.." 홍의청년, 매우 준수한 용모에 입술은 붉디 붉고 이마 정중앙에 역시 붉은 점이 하나 있었다. 체격 역시 헌칠한 것이 일면 기린아를 연상시켰는데, 단지 흠이라 면 다소 오만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그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가까이 다가와 포 권하며 말했다. "말씀도중 실례했소이다! 소생은 도대금입니다." 백의궁장미녀는 이마를 가볍게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요?" "하하....." 홍의청년 도대금은 웃으며 손을 벌려보았다. "무슨일이야 없습니다만....소생은 여러분께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두분 과 같은 절세의 미녀들을 소생은 아직 본적이 없지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께 특별히 봉사를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봉사라는 것이 뭐지요?" 자삼미녀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핫핫....뭐든지 다 포함됩니다.." 도대금은 인상좋게 웃어보였다. 백의궁장미녀는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즉시 사라져주길 바래요." "핫핫......무슨 말씀을.." 도대금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성급하시군요. 소생은 절대 악의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핫핫.. 우선 그 만년금구에 대해 설명해드리지요." "........" "하하...만년금구는 그야말로 인세의 지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무가지보지요. 특히 무림인에게는..." 도대금은 문득 자삼미인에게 물었다. 굳이 그녀에게 물은 이유는 그녀가 조금 덜 까다로와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만년성형삼왕에 대해 아십니까?" 헌데, 자삼미인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도대금은 조금 무안한 신색 이 되었으나, 그는 곧 웃어넘겼다. "핫핫, 본래 말이 없으시군요. 일명 만년동자삼이라고 불리우는 만년성형삼왕은 인세 최고의 영약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거의 불치의 절증으로 알려진 삼 음절맥같은 것을 쉽게 고쳐주니까요. 그러나 , 이 만년금구는.." 도대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년금구의 내단을 복용하게 되면, 하하... 대번에 아무 부작용도 없이 무려 삼 갑자의 내공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효능은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죠. 만년성형삼왕만해도 겨우 이갑자의 내공을 증진시켜줄 뿐이니까요. 그러니 까, 만년금구의 내단만 복용하면 초보자라도 내공이 단번에 노화순청의 경지에 오른다는 말이죠.하하..." 도대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만년금구란 놈이 잠시후면 나타난단 말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 "만일 제가 그걸 잡게 된다면 그걸 두분에게 드리겠습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백의궁장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에, 도대금은 안색이 변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필요가 없다니요? 설마, 정말로 그럴리야 없 겠고 당신은 지금 나를 놀리는 겁니까? 아니면 나의 능력을 우습게 여기고서" 백의궁장미인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내겐 그것을 받을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아요." 도대금은 능글맞게 웃었다. "명분때문에 그러시는군요. 흐흐.... 역시 명문의 규수들은 명분을 중요시 여기 죠. 허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당신들이 나와 어울려 주기만 한다면, 아니 .... 좀더 솔직히 말하죠. 내가 댁으로 매파를 보낼까요?" 그말에 자삼미인이 싸늘하게 냉갈했다. "무례한 놈! 감히... 닥치지 못하겠느냐?" 그녀의 한 마디는 도대금의 의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따라서, 도대금은 정말로 안색이 변했다. 그는 안면을 험악하게 일그리면서 음산한 흉소를 날렸다. "흐흐흐...권주는 마다하고 곧이 벌주를 마시겠단 말이로군! 정히 그렇다면 할수 없지." 말과 동시에, 그는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휙! 휙! 휙! 휙! 일진의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며, 서너 명의 장한들이 비호같이 그의 곁에 날 아내렸다. 그들은 방금전까지만 해도 구석진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장한 들로 도대금과는 미리 약정한 한패가 분명했다. "무슨일이시오? 대형!" 네 장한들 중 하나가 두 눈을 흉악하게 부릅뜨고 도대금에게 물었다. 도검의 시 퍼런 날을 이리저리 비춰보이는 그들의 태도는 흉흉하기 이를데 없었다. 도대금은 그들을 향해 음산하게 웃어보이며, 한쪽에 시립하듯 서 있는 금포중년 인을 가리켰다. "그녀들은 저자를 믿고 있는가 본데, 너희들이 한번 잘 터일러 보는게 어때?" "알겠소...흐흐!" "클클클...정말 불쌍한 놈이군!" 장한들은 음산한 흉소를 날리며 금포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금포중년인 을 에워싸게 되자, 장한들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이봐.!" "......" "우리 대형께선 한번 타일러 보라고 하셨지만, 보다시피 우린 말을 잘 할줄 몰 라. 조금 거친 편이지." 말을 하면서 장한은 검날을 둥글게 휘었다 펴보였다. 그러자 검신에서는 가벼운 기음이 일었다. 웅웅웅웅웅...... 허나..... 장한은 스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한번의 기회를 주겠어. 그건.. 네가 즉시 꽁지가 빠져라하고 이 불망헌 밖으로 달아나는 거야. 어때? 나는 지금부터 열을 세겠어...." 금포중년인.. 그는 청수한 용모에 다소 마른 듯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가늘게 찢긴 듯한 두 눈에서는 예리한 안광이 흐르고 있었다. 장한의 말이 끝나자, 그는 두 손을 자연스럽게 늘여뜨린 채 그들을 둘러보며 미소했다. "굳이 열까지 셀 필요 없다. 너희들은 지금 공격하도록 해라.." 그 말에 장한들은 눈을 살벌하게 부릅떴다. "놈, 명을 재촉하는구나..!" 금포중년인은 싸늘한 웃음을 날렸다. "어리석은 놈들! 너희들은 졌다. 명색이 무림인이면서 고수도 못알아본단 말이냐?" "뭐, 뭐라고?" "쳐,쳐라.....!" 장한들은 마침내 노화가 폭발했다. 그들은 안색을 검붉게 물들임과 동시에 발작적으로 금포중년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와함께, 금포중년인을 향해 검광과 도기가 살벌하게 짓쳐들었다. 파츠츠츠츠츠츠츳....! 시퍼런 검광도기가 비쾌하게 짓쳐드는 광경은 누구라도 공포에 질릴지경이었다. 장한들의 위세가 결코 허장성세가 아니었음을 나타내주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때 돌연 불가사의한 광경이 벌어졌다. 시퍼런 검광도기가 마악 금포 중년인의 전신으로 파고드는 순간, 금포중년인의 허리춤에서 일순 한줄기 뚜렷 한 검광이 일었다. 번__쩍__.....! 그 일초식의 검법이 지극히 빠른것도 그렇다고 특별하게 무슨 커다란 위력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금포중년인은 한차례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갑자기 장한들 이 그 검광에 일제히 목줄기를 들이민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났다. 그들은 느닷없이 자살이라도 결심한 것일까? 환각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실제상황이었다. 한줄기 격렬한 공포의 기색이 장한들의 얼굴에 급격히 떠오르고, "크아아아아악...!" 네장한이 터뜨린 단발마의 비명소리는 거의 동시에 울려퍼졌다. 이어, 쿵! 쿵! 쿠당탕! 새로 생긴 네구의 시신이 한결같이 목줄기에 선혈을 내뿜으며 바닥에 나동그라 졌다. 똑, 또르르륵...... 선혈이 흘러내리는 한자루의 검. 금포중년인이 들고있는 그 검은 검신이 얇은 연검이었다. 장내는 아주 조용해졌 다. 본래부터 조용하긴 했으나, 모두들 이 새로운 강자의 출현에 다소 경악하는 눈치였다. 툭, 선혈 한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금포중년인은 신형을 날렸다. 도대금이 당황하여 급히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다. 금포중년인의 신법은 역시 빨랐다. 도 대금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신형을 떠올렸으나 어느새 그의 앞엔 금포중년인이 있었다. "제기랄.." 도대금은 순간적으로 상황판단을 하고, 방향을 돌려 날벼락처럼 그를 향해 출수 를 했다. 그의 임기응변엔 방향전환이 너무도 빨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출수한 검초 역시 극쾌했다. 스팟, 단 한번의 검광이 번쩍인 찰나에 검끝은 어느새 금포중년인의 목줄기 인후부를 찔러들어가고 있었다. 금포중년인은 아직 무방비 상태였다. 도대금은 일순 쾌재 를 불렀다. 허나, 다음순간 그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느닷없이,그의 검끝이 환각처 럼 금포중년인의 인후부를 비켜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검에 귀신이라도 들린 것 일까? 도대금은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그의 안색은 공포로 변해가고 있었다. 섬칫한 차가운 느낌과 함께 금포중년인의 검끝이 그의 인후부에 닿았다. 도대금은 안색 이 시커멓게 변해가며 사색이 되었다. "네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주겠다." 금포중년인은 여전히 검을 겨눈 채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사람을 잘못본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도대금은 혼비백산하여 말했다. 금포중년인은 자삼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누구인줄 아느냐?" "그, 그걸 내가 어떻게...." "호북성 지부대인의 무남독녀인 유운봉소저이시다." "뭐, 뭐라고요?" 도대금은 두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금포중년인은 이번엔 백의궁장미인을 가리켰다. "하물며 이분은...." "........." "당금 황실의 자하군주이신 주벽군 군주님이시다." 도대금은 아예 정신이 멍해졌다. "군주님의 신성을 욕되게 한 자는....." 금포중년인은 도대금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죽는다....!" 도대금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전신을 벌벌 떨었다. "다, 당신은....." 금포중년인은 품속에서 패를 하나 꺼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나는.....바로 그런 사람이다." ---금군부교두 신연. 도대금은 절망에 빠졌다. 금군이란 당금 황실의 친위조직이다. 인원이 십만명이나 되는 그 친위대의 부교 두라면 서열 제이위의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이 유사시에 살인면허를 가지게 된 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인 것이다. 재수에 옴이 붙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대금은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하,하지만... 나, 나는 그녀들이 누군지 몰랐고, 이,이제 다시는 그,그런 짓 을...." 신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냐?" 도대금은 안간힘을 다했다. "실, 실은 저의 집엔 처자와 노모가..." 헌데, 이때 한쪽에 앉아있던 미서생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믿지 마시오. 그는 자칭 풍류문이란 것을 조직하고서, 근 일년동안 부녀자들을 상대로 온갖 추악한 짓을 일삼아온 천하의 색마요. 집에 처자와 노 모가 있을리가 없지요." 도대금은 그를 향해 안색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네놈은 나와 원수진 일도 없는데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느냐?" "하하하..." 미서생은 신비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자신이 죄를 지었으면 그 죄값을 치르면 그만인 것을, 사내대장부가 무얼 그리 죄값을 두려워 하는가..?" "이,이런......" 도대금은 안면을 시뻘겋게 물들이다가, 신연을 향해 다시 한번 간청했다. "저, 정말 안된단 말이오? 호생지덕을 생각해서라도 대신 한번의 개과천선할 기 회를....." "안돼.." 신연이 고개를 젓자 도대금은 그 즉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은 그의 최후의 방 법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신연이 혹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다. 허나, 그것은 그의 오산이었다. 스윽, 예리하게 목젖을 파고드는 통증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신연의 검끝엔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흑...." 도대금은 점차 가중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두 눈을 부릅떴다. 거의 안 색은 점차 거뭇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멈춰랏!" 장내에 느닷없이 짤막한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도대금의 목을 찔러가 던 연검이 돌연 거짓말처럼 두동강이 나버리는게 아닌가?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고수도 아닌 신연이 찔러가던 병기가 도중에 절단나다니.. 쨍그랑....! 부러진 반토막의 검편이 바닥에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에 중인들은 그제야 제정 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신이 맑아질수록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그것은, 덕분에 간신히 지옥문에서 돌아온 도대금보다도, 검의 주인인 신연이 더할 것이란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신연 자신이 스스로 검 을 부러뜨린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신연은 이렇게 된 현실을 내심 반쯤 부정하면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때, 그의 전면에 유령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슷... 금의 청년. 지극히 준수하고 헌칠한 용모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너무도 불가사의한 신법으 로 나타나 마치 사람이 아닌 허깨비처럼 보였다. 허나, 허깨비가 이토록 훤한 대낮에 공공연하게 나타날리는 없는 것이다. 신연은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헌데 그때, 가벼운 미풍과 함께,다시 세명의 청년들이 그주위에 나타났다. 하나 는 평범하고, 또 하나는 뚱뚱하며 다른 하나는 홀쭉하고 다소 왜소하다. 그들 세 청년은 나타나자마자 금의 청년의 뒤에 서더니, 곧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 이제 소종사께서 출관을 하셨으니, 뜻이여 이룩될 지어다...!" 그 합창은 몹시 엄숙했고, 일면 성스러워보이기까지 했다. 중인들은 저마다 눈 을 크게 떴다. 이 희안하고도 거창한 의식은 뭐고, 또 소종사란 누구란 말인가? 장내는 매우 조용해졌다. 중인들이 크게 의아해 하고 있을 때, 금의청년은 우수 를 앞으로 내밀며 신연을 향해 말했다. "저항력을 상실한 자를 죽인다는 것은 옳지 않소." 부러진 반토막의 검편. 그것이 어느새 그의 우수에 들려있었다. 신연은 자신 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내 검을 부러뜨린 것은 바로 당신이...." "그렇소." 금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금의청년이 내민 검편을 받아들지 않고 신연은 극도로 경악한 표정이었다. 그는 설마하니 자신조차 감지 하지 못할 정도로 기척도 없이 연검을 두동강낸 장본인이 이런 불과 약관의 청 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하자, 금의청년은 검편을 다시 거둬들이며 입 을 열었다. "관부의 인물이라도 일단 강호에 나왔으면 무림의 법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 예 의가 아니겠소?" 신연은 정신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고개를 한 차례 흔들었다. "믿을 수가 없군! 허나, 믿어야 하겠지. 역시 강호엔 인재가 많아..." 이어 그는 금의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나, 당신의 말은 틀렸소. 이는 황실의 공무집행에 관한 일이니, 무림과 관부 를 구분한다면 당신은 이 일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소." "어리석은 자로군." 금의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법도 힘이 있어야 통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군!" "뭐라고.....?" 신연은 노하여 말을 이으려다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반토막 뿐인 그의 검. 그것이 어느새 금의청년의 손아귀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급히 자신의 허리춤을 살폈지만, 허리띠 대용으로 쓰던 연검 반토막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수가...." 신연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런 정도로 쾌속한 손속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신연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자 금의 청년은 미소 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울상을 질 필요는 없소.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이어 그는 한쪽에 여전히 멍청히 서 있는 도대금을 향해 말했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예?" 도대금은 일순 눈을 크게 떴다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도대금입니다." 그 말은 그가 여태껏 했던 말중에서 가장 공손한 말이었을것이다. 금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도대금 아주 좋은 이름이군!" "고, 고맙습니다." 도대금은 만면 가득 희열에 들뜨며, 허리를 다시 깊숙히 기울였다. 이런 사람의 눈에 뜬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자 금의청년은 미소하며 말했다. "네가 그에게 진 이유를 말해줄까?" 도대금은 눈을 번쩍 떴다. 여기서의 그란 바로 신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의 검법은 상대의 맥을 끊고, 허점을 찾아 역습하는 후발선진의 기예다. 그 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보다 완벽한 검법을 펼치거나, 아예 선공을 하지 않아야 만 하지." 상대의 헛점을 찾고, 맥을 자르며 공격하는, 후발선진의 비예. 그 말은 일종의 심오한 검도의 도리였다. 그 말을 들은 도대금은 희열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털썩 그를 향해 무릎을 꿇 었다. "아, 알겠습니다. 앞으론 보다 절차탁마하여 차후엔 반드시 그를..." 헌데, 그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니야...." 금의청년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너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 "예, 예?" 도대금은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금의청년은 정색을 하며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방금 그 얘길 해준 이유를 아느냐?" "에에..?무슨..." 도대금은 더욱 의아해 했다. 금의청년은 안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내가 그 얘길 해준 이유는 곧 있을 네 운명에 대한 보답이다." "우, 운명이라뇨?" 금의청년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럼 너는 내가 너같은 자 때문에 관부와 원한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단 말 이냐?" "뭐, 뭐라고요? 그, 그럼 나를..." 금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는 죽어야 한다." "이, 이럴수가....." 도대금은 대경실색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헌데 그가 막 몸을 일으킨 순간, 슈팟, 그의 목줄기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선혈...... 그것은 너무도 느닷없었다. 또한 그 누구도 금의청년이 출수하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다만, 툭...... 몇방울의 선혈이 그가 든 부러진 연검 끝으로 흘러내림으로써, 그것을 입증해줄 뿐이었다. 쿵.! 잘려나간 수급은 피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런데 한을 삭이지 못 했기 때문인가? 두 눈은 퉁방울처럼 부릅떠져 있고, 입에선 아직도 가느다란 음 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악.....마....." 허나, 최후의 몸부림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쿠당탕....! 나머지 동체가 그 위에 쓰러져 뒹굴자 도대금이란 사람은 완전한 시신으로 화 해버리고 말았다. 그 광경은 정말 처참해 보였다. 대부분 무림인들인 중인들도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떻소.이젠 만족하시오?" 금의청년은 신연에게 검을 돌려보며 말했다. 신연은 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법도 힘이 있어야 통한다는 말에는 인정하겠소." 신연은 검을 갈무리하며 탄식과 함께 대꾸했다. "핫핫핫핫핫핫핫......" 금의청년은 낭랑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좋소, 좋아.! 당신은 역시 시원시원하군.." "......" 신연은 다시 탄식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는 무예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 서도 패배한 것이다. 허나 군주의 신변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웃고 난 금의청년은 돌연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난 신도운형이란 사람이오. 잘 사귀어 봅시다." 신연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뜻은 고맙지만, 난 그럴 수가 없소." 그는 악수를 거절했다. 그러자 금의청년, 신도운형은 눈썹을 길게 찌뿌렸다. 그 의 두 눈에서 빛나는 안광은 그냥 보기엔 그저 담담하고 평범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기도는 태산같은 위세로 신연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신연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문득 뒤에 서 있던 평범한 용 모의 청년이 신도운형을 향해 말했다. "소종사님!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냉겸" 신도운형은 우수를 거두며 그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종사. 이로서 그의 신분이 확인된 셈이다. 냉겸이라는 청년은 의미깊게 웃어보이며 신 도운형에게 말했다. "소종사께선 천상삼화를 거두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런데, 그 천상삼화는 간곳을 모르니.. 우선..." 신도운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날더러 황제의 부마가 되란 말이냐?" 냉겸은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실은 이미 정해졌으니, 지금 필요한 것은 첩실이지요. 헌데, 군주 를 첩실로 삼을 수는 없고... 마침 그에 못지 않는 미색의 계집이 있지 않습니 까? 이번에 아예 첩으로 삼아버림이......" "음....." 신도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야. 허나 네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흐흐, 맡겨만 주십시오." 냉겸은 음산하게 웃더니, 주벽군, 유운봉 두여인들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이 광경을 보고 신연은 대경실색을 했다. "멈춰랏! 그 분은 호북성의 지부대인의 무남독녀시다. 함부로....." 신연은 급히 신형을 날렸으나, 그순간, 백광이 번쩍이며 동시에 전신이 마비됨 을 느꼈다. 신도운형에게 전신대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신도운형은 갑자기 빳빳 하게 서버린 그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그런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허나 군주는 아니지 않는가? 나는 차제에 지부 대인과 사돈을 맺으려 하는데, 그대는 어째서 방해하려고 하지? 그냥 그렇게 보 고만 있게." 미리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그의 손속에 당하고 나자, 신연은 신 도운형과의 무예수준차이를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아득한 절 망감이 그의 뇌리를 엄습했다. "멈춰라! 감히...." 유운봉은 우뚝 선 채 다가오는 냉겸을 향해 꾸짖었다. 허나, "후후후후...." 냉겸은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들었다. "훌륭하신 분께서 중신을 선다는데 그렇게 앙큼을 떨건 또 뭔가?" 이에, 유운봉은 그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네놈이 내 동생을 희롱한다면 장차 무사할 줄 아느냐?" 주벽군이 나섰으나, 냉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혼인은 황제라도 못 말리는 법. 당신은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소." 주벽군은 내심 탄식했다. 대내에서 이름높은 신연의 무예실력을 알고 있는 그녀 는 신도운형이란 자의 무예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신도운형의 무예실력은 중원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리라. 그렇다면 오늘 그녀들이 횡액을 모면할 방법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애초 에, 자신들이 신연만 믿고 강호에 나온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헌데 그때였다. "잠깐!" 짤막하게 소리치며 유운봉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흡사 여인같이 생긴 미서생. 바로 그였다. 그의 출현에 냉겸은 다소 움찔한 기색을 보였다. "웬 놈인가?" 미서생은 안광을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나는 여모요. 당신들은 이 행동을 무맹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으리라 생각하오? 특히 이번엔 그곳에서 많은 인원들이 파견되었을 텐데, 그들이 두렵지 않소?" "크핫핫핫핫......!" 냉겸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무맹의 끄나풀인가 보군! 허나 맹룡과강,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이에, 미서생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네놈들은 이미..." "그렇다. 목숨이 아깝다면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멀찌감치 피해 있는게 상책일 것이다." "하하하하하핫.." 그 말에 미서생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마집단과 우리가 같은 줄 아느 냐? 최소한 불의를 보았을 때는 비겁하게 몸을 돌리지 않는 것이 우리 정파의 무인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을 희롱하려면 우선 나를 이겨야만 할 것이다." 그의 음성은 낭랑했고 확고한 신념이 깃들여 있었다. "흐흐흐.." 냉겸은 음산한 흉소를 날렸다. "그래?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성인군자 나으리시군! 그렇다면 섭섭하게 대해줄 내가 아니지." 말과 동시에, 냉겸은 별안간 쌍장을 비쾌하게 뒤집었다. 그러자, 츠츠츠츠츳...! 청색의 칼날같은 강기가 일며 미서생의 면전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게 아닌가? 그것을 본 미서생은 안색이 대면했다. 강기란 장력과는 또다른 성질의 것으로서, 파괴력이 강한 강기에 대항하는 방법 은 오직 똑같이 강기를 발출하는 것 뿐이다. 다행히, 냉겸이 암암리에 급습을 준비했던 것처럼, 미서생 역시 그에 대한 대비 로 진기를 가득 끌어올린 상태였다. 따라서 냉겸이 강기를 발출하자, 그 역시 입술을 깨물고 섬세한 쌍수를 어지러 이 흩뿌렸다. 순간, 쩌러러렁..! 그의 장심에서 무색투명한 강기가 부챗살처럼 일며 냉겸의 청색 강기에 맞서갔 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각은 그야말로 촌각에 불과했다. 두 가지 강기가 한 순간 어우러지자, 콰콰콰쾅...! 흡사 금속이 터져나가는 듯한 굉렬한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거대한 압력이 회 오리처럼 일어 장내의 공기를 휘감고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헉!" "윽..." 쿠당탕..... 통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따위가 날아감은 물론이고 그 주위에 있던 주벽군 등 모든 사람들이 분분히 구석으로 날라가거나 몸을 피했다.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격돌과 동시에 냉겸과 미서생이 똑같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곧 서로의 무예가 엇비슷하다는 말과도 같았다. 흐흐흐,제법이군!" 냉겸은 자신이 급습을 했는데도 실패하자 안색을 더욱 음산하게 굳혔다. 그는 설마 상대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과찬의 말씀. 당신도 대단하오." 미서생은 냉겸을 향해 짐짓 포권해 보였다. "흐흐! 그렇다고 내가 네놈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냉겸은 살소와 함께 쌍장을 다시 뒤집었다. 츠츠츠츠츳..! 위맹한 청색 강기를 다시 발출함과 동시에, 냉겸은 미서생의 면전을 향해 급격 하게 신형을 떠올렸다. "좋으실대로!? 미서생 역시 쌍장을 흩뿌리며 지체없이 그에 맞서갔다. 쩌러러러렁! 자연, 그들은 통나무 대들보가 있는 천정 부근에서 다시 격렬하게 격돌했다. 콰콰콰콰쾅..! 굉렬한 폭음이 일며, 이번엔 건물의 천정부분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후두두두둑....! 통나무 파편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두사람은 허공에서 잠시 움찔했 다가 다시 격렬하게 부딪쳐 갔다. 콰콰콰콰쾅...! 허공에서 눈부시게 휘돌아가는 신법과 도법. 어지러이 내두르는 쌍수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도 않은 채, 그들은 한덩어리로 뒤엉킨 채 무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쾅쾅쾅.... 사람이 땅에 발도 딛지 않은 채,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격전을 벌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경이였다. 아까의 격돌의 여력에 구석으로 형편없이 쳐박혔던 주벽군과 유운봉은 잠시 자 신의 처지도 잊고 아연 눈이 동그래졌다. 허나, 현실은 그녀들로 하여금 결코 한가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임방, 강소평! 냉겸은 다소 일이 지연될 것 같다. 허나 나는 그리 한가한 사람 이 못돼!" "흐흐흐... 알겠습니다." 두 청년은 음산한 웃음과 함께 허리를 깊숙히 수그렸다. 이어, 그들은 유운봉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에 그녀들은 안색이 핼쓱해졌다. 냉겸의 능 력만 해도 놀랍거늘 이젠 누가 그들을 막아준단 말인가? 구석에 몰린 채 구경만 하고 있는 중인들도 슬슬 눈치만 살필 뿐 누구하나 나 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간 무림에 공공연하게 통해왔던 협의지심. 그것도 거 대한 힘 앞에선 쓰레기보다 못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란 말인가? 금세 유운봉의 앞에 이른 두 청년중, 뚱뚱한 청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봐, 순순히 우릴 따라가는게 어때? 아무래도 그게 피차 속편한게 아니겠어?" 유운봉은 안면을 싸늘하게 굳히고 차갑게 내쏘았다. "흉악한 놈들! 나를 죽일 순 있어도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후!후!후! 대단한 걸! 역시 명문의 자식들은 다른가? 소종사님만 아니라면 내가 그녀에게 장가가고 싶은걸!" 마른 청년이 툴툴 웃으며 비양거리듯 말했다. 이에 뚱뚱한 청년은 눈살을 가볍 게 찌푸렸다. "강소평.." 마른 청년 강소평이 뚱뚱한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여자는 다소 쏘는 맛이 있는게 좋아. 그녀는 얼굴마저 천하절색이니 그야 말로 안성마춤이 아닌가?" 뚱뚱한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허나 그 일에 소종사님을 들먹인 것은 잘못이야." 이어, 그는 유운봉에게 말을 이었다. "나는 임방이야. 네가 소종사님의 첩이 된다면 난 너를 모셔야 하겠지. 그 전에 서로 좋게 대해 주는게 어때?" "닥쳐랏!" 유운봉은 싸늘하게 냉갈했다. "후후후....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임방은 툴툴 웃음을 흘림과 동시에 양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러자, 흡사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유운봉의 교구가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허공섭물의 절기였다. "아앗!" "악....." 일진의 짤막한 경호성과 함께, 유운봉의 교구는 어느새 임방의 두 손안에 들려 지게 되었다. "놔랏!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유운봉은 즉시 벗어나려고 심하게 발버둥을 쳤으나, 곧 맥없이 축 늘어지고 말 았다. "후후후....." 임방이 툴툴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전신대혈을 점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녀 는 이제 움직이기는 커녕 말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놀라 휩떠진 그녀의 봉목을 바라보며, 문득, 강소평이 기이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봐! 그녀를 나에게 건네주는 게 어때?" "......." "뭐, 다른 짓 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단지 그 살결 좀 만져보겠다는데 안될 것 도 없겠지. 아, 물론 소종사님의 추궁은 모두 내가 받도록 하지." 임방은 다소 이마를 찌푸렸으나, 곧 유운봉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흐흐흐..." 강소평은 그녀를 받아들이자마자,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우수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흡사 소름이 돋는 듯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이에, 보다못한 주벽군이 소리를 질렀다. "멈춰랏! 짐승만도 못한 놈들 같으니." 허나, "너도 당하고 싶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가만히 있는게 좋아." 강소평은 말과 함께 그녀의 앞섶을 헤쳐 버렸다. 마침 한여름이라 유운봉은 옷차림이 간단했다. 앞섶이 헤쳐지자 속옷, 속옷이 열리자 금방 젖가리개가 나타났다. 하얀색의 젖가리개를 그는 손으로 잡고 단숨 에 찢어버렸다. 찌이익.... "흐흐흐흐...." 탐스럽고 백옥같은 두 개의 수밀도가 드러나자, 강소평은 두눈의 흰자위를 번뜩 이며 음탕한 음소를 흘렸다. "아아....!" 주벽군은 그 광경을 보고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탄식을 발했다. 정말 이토록 쉽사리 강호행을 하는게 아니었다. 강소평은 음탕한 시선으로 유운봉의 수밀도 를 바라보더니 이번엔 아랫도리로 손길을 옮겼다. 찌이이익.....! 자색의 비단치마는 쉽게 찢겨져 나갔다. 강소평은 보란 듯이 이번엔 마지막 남 은 고의를 행해 손을 가져갔다. 툭, 빨간색의 작은 고의는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 최후의 보루가 떨어져 나가자 유 운봉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녀의 고이 간직해왔던 비지가 적나라하게 드러 나는 순간이었다. 백옥빛 아름다운 두개의 옥주사이로 앙증맞게 돋아난 검은 숲. 그리고 그 아래로 음밀한 검붉은 샘.... 천하절색의 용모에 걸맞게 그녀의 나신은 기막힐 정도로 황홀했다. "후후후!" 강소평은 음탕한 침을 흘리며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무기력하게도, 이십 년 간이나 순결을 지탱해 왔던 그녀의 두 다리는 맥없이 열리고 있었다. "꿀꺽....!" 강소평은 음탕하게 입맛을 다시며 그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헌데 바로 그때, 그 의 손길을 주춤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멈춰...!" 누군가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냉겸과 한창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미서생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 는 냉겸에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에 신경쓸 처지도 못되는 상 황이었다. 막상막하의 격전에서는 한치의 실수가 곧 치명적인 패배로 연결될 수 가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음성이 귀에 익은 것이라고 느꼈 다. 강소평은 손길을 거두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장내의 구석진 곳. 의외에도 방금 소리를 낸 사람은 이 불망헌의 주인인 털복숭이 사내였다. 늘상 술통을 들고다니던 그는, 기이하게도 지금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이었다. "웬놈이야! 지금 한창 분위기 돋구는데.....임방!" 강소평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임방을 불렀다. 그더러 처리해 달라는 뜻이었다. "알았어." 임방의 대답에 강소평은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이어, 그는 고개를 돌려 아까 하던 유희를 마저 계속하려고 했다. 헌데, 그가 무심코 손길을 옮기려는 그 때였다. "멈춰!" 이 음성은 그의 코앞에서 들려오는게 아닌가? ".....!" 강소평은 그만 화들짝 놀랐다. 옆에 있던 임방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털복숭이 사내. 그는 어느새 강소평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그럼, 그가 무림의 숨은 고수였 단 말인가? 임방은 그를 주시하다가 돌연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이 작자는 바로..!" 임방의 경악성에 강소평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왜그러지? 이 자가 누군데 그래?" 임방은 놀란 음성으로 대답했다. "모르겠냐? 잘봐! 그는 바로.....장우야!" "뭐라구?? 강소평은 그만 대경실색했다. "그, 그럴리가! 그는 이미 삼년전에 죽었는데...." "아,잘 보라니까...!" "아니! 이,이럴수가......!" 강소평은 일순 눈을 부릅뜬 채 헛바람을 들이켰다. 털복숭이 사내가 장우라는 말에 놀란 것은 한쪽에 서서 관전하던 신도운형도 마찬가지였다. 슷...... 그 역시 너무도 놀란 나머지 급히 신형을 날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허나, 그는 즉시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여전히 한쪽에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키는 팔척, 얼굴 아랫쪽은 고슴도치처럼 돋아난 시커먼 털로 가득하며, 장대한 체구에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 허나, 그 부리부리한 두눈은 지금 잿빛 암울함 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를 내려놔!" 강소평은 일시 너무도 놀란 나머지 미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 뭐라고?" 장우는 억양없는 굵은 목소리로 똑같이 대답했다. "그녀를 내려놔!" 그제야 강소평은 그 말을 알아듣고 히죽 웃음을 흘렸다. "내려놓으라고? 흐흐.... 그야 못할 것도 없지." "그녀를 내려놔!" "아, 알았다니까! 그렇게 서두를건 또 뭔가? 내려놓으면 될것 아닌가." 강소평은 짐짓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며 유운봉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벽군이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안고 구석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 광경을 힐끗 바라본 강소평은 장우를 향해 조소하듯 입을 열었다. "어때, 이제 됐나?" "......." "아, 이제 됐냐니까?" "......." 장우는 말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강소평을 지켜보다가 돌연 몸을 돌려 걷기시작했다. "아니, 장우!" 강소평이 불렀으나, 그는 마치 귀머거리가 된 듯 그저 걸어가기만 했다. 이에, 강소평은 만면에 악독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음산한 괴소를 터트린 순간, 그는 느닷없이 장우의 등뒤를 향해 기습적으로 날 아갔다. 뒤이어, 그의 허리춤에서 날벼락처럼 솟구쳐나온 한 자루의 검. 쾌검. 번쩍, 도대체 그 쾌검이란 것은 너무도 빨랐다. 방금전에 죽은 도대금의 쾌검도 빨랐지만, 이 쾌검의 빠르기는 아예 그 류를 달리하고 있었다. 단 한번 번쩍였 을 뿐, 그것이 검이라는 것은 단지 느낌 뿐이었다. 소리없는 비쾌한 기습과 그에 걸맞는 괘검법. 중인들은 누구나 이 기습이 성공 하리라고 의심치 않았다. "앗!" 누구의 입에선가 튀어나온 이 경호성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당 사자인 강소평은 그 순간 내심 크게 곤혹해 있었다. 사실 삼년전에도 그의 무예는 자신보다 월등했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 기습을 하는 이유였다. 지금에 이르러선 더욱 강할 것이기에....... 따라서, 그의 기습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뒤늦게나마 그 기습을 알아차 리고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그는 실상 이 짧은 순간에도 그럴 경우를 미리 대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장우는 믿을 수 없게도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등 부위 를 그냥 무방비 상태로 둔채........ 이 자는 그새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강소평이 크게 우려하고 있던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장우는 그간 어떤 불가사 의한 무예를 닦았을지도 모르며, 자신의 이 기습이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 허나, 생각은 길었지만 현실은 매우 짧았다. 어느새 그의 눈부신 쾌검은 장우의 등부위로 그대로 쑤셔들고 있었다. 부욱...팍... 등뒤에 한 곳에서는 어느새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절꺽, 습관처럼 강소평은 검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의지가 이니었다. 그의 정신은 실상 멍청해져 있었다. 분명 자신이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앗!" 짤막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그 비명소리는 주 벽군이 그 광경에 놀라 지른 것이 었지, 장우가 발한 것은 아니었다. 장우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등에 피를 철철 흘린 채 말없이 강소평을 돌아다 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마치 아무런 감각도 없는 사람 같았다.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잿빛으로 암울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때문에 강소평은 다시금 현실을 의심해야만 했다. 툭,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아니었다면 강소평은 아예 정신이 이상해졌을지도 모 른다. 겨우 정신을 차린 강소평은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아니, 이자식 이거 미쳤잖아!" "........" 문득 그는 장우의 시선을 대하기가 거북함을 느꼈다. "흐흐, 그렇지만....확인은 해봐야겠지." "이렇게 말야!" 말과 동시에, 강소평은 검을 다시 뽑았다. 역시 그 눈부신 쾌검을... 허나, 이번엔 보란듯이 정면에서였다. 번쩍. 푹..... 검끝이 살갗을 꿰뚫은 그 느낌. 선혈은 다시 눈부시게 솟구치고, 장우는 여전히 비명 한 마디도 없이 그저 암울 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이에, 강소평은 안면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 이 자식이 정말......!" 강소평은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네놈은 정말 찔려도 죽지 않는단 말이냐?" 말과 동시에, 그는 또다시 일검을 발출했다. 번쩍, 푹...... 그러나 장우의 태도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강소평은 그 태도에 불가사의하게 도 공포를 느꼈다. "이, 이......!" 그는 이빨을 갈아붙이며 마구 검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푹! 푹! 퍽! 퍽! 그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선혈은 장내를 온통 뒤덮었다. 그 속에서 검을 휘두 르는 강소평은 마치 악귀 아수라 같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장우는 여전히 표정하나 일그러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는 설마 철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 광경을 보다 못한 임방이 나섰다. "이봐! 강소평! 내가 처리할테니 넌 잠시 물러나 있어!" 보통때였다면, 성격상 강소평이 도중에 물러날리가 없었다. 허나, 그는 지금 공 포에 질려 있었다. "그, 그래주겠어?" 안색이 창백해져서 피를 전신에 뒤집어 쓴 채 물러나는 그는 마치 탈진한 사람 처럼 보였다. "정말 대단하군!" 가볍게 탄성을 터뜨린 임방은 장우의 앞에 서자, 지체없이 일장을 날렸다. 우르르릉..... 거대한 우뢰음과 함께 푸른빛을띤 장력이 우뚝선 장우의 전신을 향해 날아갔다. 펑...! 역시 가만히 있던 장우는 그 거대한 장력을 맞고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 통에 강소평에게서 찔린 무수한 검상으로부터 선혈이 분수처럼 뿌려지니, 그 광경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체, 인간의 몸에 있는 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의문이 갈 정도였다. 털석! 쿠당탕..... 장우의 육신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졌다. 온통 피에 잠긴 그의 육신은 벌써 시신이 되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 었다. "저, 저런...."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운 장우를 향해 임방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때, 슷..... 신도운형이 장우의 앞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우뚝 서 있는 장우의 전신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단지, 두 눈만 살아있고, 그 눈만이 잿빛의 무겁고 암울한 빛을 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장아우!" 신도운형의 그 말에, 처음으로 장우의 시선에 표정이란 것이 떠올랐다. "........." 허나, 그것은 그의 시선을 더욱 암울하게 보이게 했다. 이에, 신도운형은 짧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훗...! 나는 이미 자네를 잊었는데, 자네는 아직 나를 잊지 못하고 있군. 설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 "허나, 설사 그런 뜻이 있다해도 이미 그럴 능력을 잃었음을 자네도 잘 알고 있 겠지? 미련을 버리게! 그것이 어렵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암........!" 신도운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내가 자네에게 일장을 가해서 자네가 죽으면 그만 미 련을 버리기로. 아.... 자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땐 다시 미련을 가져도 좋아! 후후......!" "........" "자네는 말을 잘 안하는군. 허나 결정권은 내게 있으니 자네의 대답은 없어도 무방하네. 그리고, 혹시 살아날 희망도 버리게. 나는 정말 놀라운 고수가 되어서 돌아왔다네. 나의 일장을 맞고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정말로 살아난다면 그땐 정말로 감탄할거야." "......" "내 마지막으로 충고 한마디 하지. 저승에 가더라도 새겨듣게! 자네는 너무도 어리석어. 삼년 전에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도... 복수를 하려면 좀더 그럴듯 하 게 힘을 기른 후에 좀더 은밀하게 날 찾아왔어야 하지 않은가? 어쨌든 기왕 이 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군! 그럼.. 잘가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도운형은 가볍게 우수를 내뻗었다. 우우우웅..... 그의 우수가 뿌옇게 흐려진다 싶은 찰나, 그 가운데에서 눈부신 백색의 광채가 극쾌하게 뻗어나갔다. 쿠쿠쿠쿠쿠......콰콰쾅...! 한낱 장풍이 인간의 몸에서 부딪쳐 나온 소리가 이렇다는 것은 불가사의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아무튼, 백색의 공포스런 장력을 맞은 장우의 육신이 가랑잎 처럼 날아갔다. 쾅...! 그의 육신이 통나무 벽에 부딪치자, 그 벽이 통째로 부서져 날아갔다. 그런 정 도이니, 사람의 육신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쿠당탕....! 바닥에 몇번이나 나동그라진 그의 육신은, 과연, 시커멓게 죽어버린 채 더이상 눈을 뜨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호홉과 심장의 박동마저 정지된.... 장우의 최 후. 그것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아......" 그 죽음에 주벽군만이 달려가 탄식할 뿐이었다. 중인들은 이제 그 죽음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바로 그때, 콰콰콰콰쾅.....! 광렬한 폭음과 함께 냉겸과 미서생이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두사람은 아직도 승부를 가르지 못한 것이다. "우욱......" "윽...!" 치열한 격전속에 두 사람 모두 내상이 심한 듯, 창백해진 안색으로 각각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한 뒤, 잠시 심하게 비틀거렸다. 허나, 곧 그들은 발작적으 로 서로를 향해 짓쳐들려고 했다. 스스스슷.... 이를 바라본 신도운형은 가볍게 이맛살을 삐푸렸다. "물러나라! 쓸데없이 시간만 끌 셈인가, 냉겸!" 마침,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냉겸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급격히 신형을 뒤집어 세웠다. "죄송합니다. 소종사님!" 그러자, 어이없게도 그는 미서생의 공격을 무방비상태로 고스란히 받는 꼴이 되 어 버렸다. 쩌러러러렁..... 전력을 다하고 있는 듯 미서생의 무형강기는 거대한 위력으로 냉겸의 전신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아앗, 저것....." 중인들 가운데 놀란 외침이 절로 터져나왔다. 허나 다음 순간, 슷..... 그들은 신도운형의 신형이 유령처럼 그 사이로 파고듬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 신법은 정녕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마치 환상과도 같은 신법으 로 그 사이로 스며든 신도운형은 그와 거의 동시에 느릿하게 일권을 격출했다. "가랏!" 번쩍.... 흡사 찬란한 햇살같은 백색의 광채가 미서생을 향해 눈부시게 폭사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일지 않던 것이 나중에는 가공할 벽력음으로 바뀌었다. 콰콰콰콰콰르르릉......! 그것은 결코 인간의 몸에서 발출될 수 있는 무예가 아니었다. 미서생이 발출한 무색투명한 강기는 그 미증유의 거력속에 흔적도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윽!" 미서생의 안색이 잿빛으로 죽어드는 찰나, 그의 전신이 마치 휴지조각처럼 구석 으로 날아갔다. 쾅! 그 여력으로 통나무 벽면이 거의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콰르르르....쿠당탕..! 미서생의 신형은 자연 그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 속에서 한 순간 세상을 달리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신도운형 뿐만 아니라, 그 광경 을 지켜본 중인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연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무너져 쌓인 통나무더미가 흔들리 더니, 믿을 수 없게도 그속에서 사람이 하나 걸어나오는게 아닌가? 그는 분명히 미서생이었다. "저,저럴수가....!" 중인들은 크게 놀라 저마다 경악성을 발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대체로 두 가 지였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이미 전신이 파열되어 죽었으리라 생각했 던 미서생의 온몸이 그와는 반대로 아주 멀쩡한 것이, 오히려 방금전의 내상마 저도 말끔히 치유된 듯 안색이 홍조로 가득했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뒤로 모아 묶은 머리끈이 떨어져 나가서인지, 구름같은 수발이 그의 등뒤로 흘러내 렸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절세미녀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서생이 아니라, 서생으로 분장한 절세의 미녀였음이 드러난 것 이다. 장내는 잠시 아주 조용해졌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신도운형 쪽은 보지 않 고 장내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슷..... 신도운형이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는 일순 크게 경계하는 빛을 보 였다. 그녀를 바라보며 신도운형은 음산한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훗.....! 과연 대단하군! 대단해." 이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물론, 그렇겠지!" 신도운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그 일은 당신의 짓이 아니야! 단지 내 말은.. 당신의 신분이 아주 의외였 다는 말이지." 그 말에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당신이.....내 신분을 알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소!" 신도운형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용모가 내가 잘 아는 어떤 여자와 닮았기 때문이지. 그녀의 이름이.... 여몽청이었지, 아마..?"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나의 쌍둥이 언니를 어떻게 알죠? 나의 언니는 이미 삼년전에..." "후훗....!" 신도운형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거, 한때 나는 그녀에게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 그리고.. 아주 좋은 인 연도 맺을 수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은 보아하니 사마의 인물 같은데 내 언니가 당신같은 사람하고.....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아나요?" 신도운형은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훗! 굳이 믿을 필요는 없소. 그러나 쓸데없이 그 내막을 알려해선 안되지. 나는....당신에게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소. 과거의 그녀처럼 말이오. 그러나, 그 호감이 깨진다면...." "........" "안좋은 일이야, 별로. 그렇지 않겠소? 공공문의 소문주이며 과거 한때 항주 운 향소축의 천하제일기녀였던 옥류향, 여몽향 소저! 후후훗......" 그녀는 안색이 하얗게 굳어졌다. "과연 당신은 나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허나, 당신의 호감을 바 라진 않아요. 이제... 당신은 나를 어찌할 셈이죠?" "핫핫핫핫!" 신도운형은 대소하며 손을 흔들었다. "죽은 언니보다 똑똑한 것 같은 걸. 핫핫! 그렇다고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소. 지금 나의 급한 볼 일은 딴곳에 있으니까.? 이어 그는 중인을 한차례 세밀하게 둘러보더니 돌연 음성을 높여 입을 열었다. "나 신도운형이 정중하게 청하는 바이오. 암중인은 나서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중인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 그런데, 중인들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 들 모두는 지금 신도운형이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았다. 신도운형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고 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군. 내 생각이 잘못됐단 말인가? 하긴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 면 대체 이제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정말 알 수 없군..." 신도운형이 고개를 가로젓는 동안, 냉겸등 삼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소종사님!" "아무것도 아니다." 냉겸의 질문에 신도운형은 곤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에, 냉겸 등 삼인의 표정 역시 곤혹하게 변했다. 그들 역시 상황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허나 그들이 알기로는, 그러한 상황은 현실적으로 벌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암중인물이 있다면 신도운형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 사, 그가 현 무맹의 맹주인 중원검신 남궁벽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사인의 표정이 굳어지자, 장내의 조용한 분위기는 점차 살벌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떤 의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중인들을 내버려 둘 리가 없겠기 때문이었다. 마치 집행자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장내의 모든 중인들은 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신도운형은 잠시 깊은 생각속에서 침묵했다. 그러한 그 침묵은 모든 사람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아서, 중인들은 그 짧은 시간이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벌어져 버리는 것이 훨신 속 편할 것 같았다. 헌데, 그 지루하고 숨막히는 시간은 돌연 느닷없이 생긴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왔다.! 이 소리는 밖으로부터 들려온 것으로 아주 짤막했고 나직했다. 그런데, 이 소리 가 울리는 순간,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와, 왔단 말인가? 그것이.....!" 누군가의 들뜬 외침. 그리고, 방금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대번에 격렬한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옆에서 강소평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왜들 갑자기 지랄이지? 갑자기 돌기라도 했나?" 그에게 임방이 설명을 해주었다. "이봐, 그게 왔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작자들이 죽음도 우습게 여기는 거지." 강소평은 눈쌀을 더욱 찌푸렸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 자식들이 감히...." 이때, 신도운형은 더이상 생각에만 잠겨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냉겸의 재촉하는 듯한 질문에, 신도운형은 다시 한번 중인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예, 알겠습니다." 냉겸 등 삼인은 허리를 깊숙히 굽혔다. 이어, 그들은 신형을 날렸다. 스스스슷.....! 그들이 사라지자, 여태 그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중인들이 연달아 신형을 날 렸다. 휙!휙!휙!휙! 금세 폐허가 되어버린 이 불망헌의 내부엔 거의 텅 비다시피 하여 피비린내나 는 여운만이 남았다. 이제,불망헌에 남은 사람은 네 사람 뿐이었다. 여몽향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주벽군에게 다가갔다. 주벽군은 아직도 전 신이 마비된 상태로 있는 유운봉을 보살피다가, 여몽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의 도움은 정말 감사했어요.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여몽향은 미소했다. "은혜랄 게 뭐 있나요? 오히려 무림의 한 사람으로서, 황궁의 군주님께서 욕을 보시게 되었던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주벽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에 대해 그대가 죄송스럽게 여길 것은 없어요. 미처 대비를 하지 않은 우 리의 잘못도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걱정이로군요. 무림인은 벼슬이나 재물, 명리 에서 떠나 있다고 허던데,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자꾸 은혜 운운하시니 낯이 뜨거워지네요. 허나...." 여몽향은 잠시 말을 끊고 눈빛을 반짝 빛냈다. "정히 마음에 걸리신다면, 한가지...부탁드릴 일이 있긴 해요." "아,그래요? 어서 말해보세요." 주벽군은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반색하며 말했다. "대체 그게 뭐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내에 서 뭐든지 다 해드리겠어요." 여몽향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것은 대의에 어긋나지는 않으나 다소 어려운 일이에요." "....." "사실 저는 과거 자하군주님의 명성을 많이 들어왔었지요. 따라서 그 분과 의자 매를 맺는 것이 평소의 소원이었어요." 주벽군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렇다면...."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 부탁은. 제가 군주님을 언니로 모실 수 있게 해주시겠지요?" 주벽군은 일순 놀라와 하다가 미소했다. "그야 원래 내가 바라던 바였는데 부탁이 그것뿐이라면 손해보는것 아니에요?" "이미 군주님의 동생이 되었다면 더 바랄게 뭐가 있겠어요?" 여몽향은 미소하며 고개를 젓다가, 곧 주벽군을 향해 대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동생 여몽향이 언니를 뵈어요." 주벽군도 마주 답례했다. "고마와요. 못난 나를 언니로 삼아주니..."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이윽고 서로의 수인사가 다 끝나자, 여몽향은 유운봉의 혈도를 풀었다. 그러자, 유운봉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눈물을 흘렸다. "언니!" 여몽향이 손을 잡아주자, 유운봉은 억지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서 미안해요. 그리고, 언니란 칭호는 가당치 않아요. 마땅히 제가 동생이 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제가 먼저 선수를 쳤으니, 언니는 하는 수 없이 언니가 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세요? 호호호...." 여몽향은 짐짓 밝게 웃고는 그녀를 향해 역시 대례를 올렸다. "유언니! 이 동생을 잘 봐주어요" 유운봉은 하는 수 없이 답례했다. "미안해, 내가 언니가 되어서....." "호호호! 미안하긴요. 동생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시나봐! 호호호호..." 여몽향은 환하게 웃으며 신연에게 달려갔다. 신연. 그는 여전히 전신혈도가 제압당한 채, 한쪽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여몽향 은 즉시 그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 보았다. 그것은 혈도를 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눈빛이 곤혹하게 변했 다. 그 표정을 본 주벽군이 다가와 물었다. "여동생! 무슨 일이지?" "저는 이 혈도를 풀 수가 없어요. 언니와는 달리 이분은 그 신도운형이 직접 제 압했기 때문에...." "......" "저의 공공문은 점혈과 해혈수법에 능하기는 하지만, 저는 아직 화후가 높지 않 고, 점혈수법은 무예가 높을 수록 고도화 되는지라.." 그 말을 들은 주벽군과 유운봉은 착찹한 심정이 되었다. 허나, 주벽군은 미소하 며 여몽향을 위로했다. "동생, 너무 애쓰지마. 우선 관부에 연락하여 부교두를 관아에 옮겨다 놓고 그 뒤에 무슨 수가 생기겠지." 유운봉과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방법 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언제, 신도운형과 같은 고수가 나타나 해혈을 해줄지는 모르지만... 돌연 그녀들의 등뒤에서 한줄기 맑은 음성이 들렸다. "명문혈에 오성의 내공으로 연달아 다섯번을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치시오! 그럼 해혈될 것이오." 남자의 음성.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하듯이, 주벽군과 유운봉은 이곳 에 또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놀라 얼른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녀들보다 더욱 놀란 것은 사실 여몽향이었다. 아까 이곳에 다른 사람 이 없음을 확인까지 했던 그녀는 얼핏 위기의식까지 느꼈다. 그런데, 그녀들의 추측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평범한 용모의 서생. 그는 아까 그녀들과 같은 탁자에 앉아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엉뚱하게도 그 는 지금 바닥에 누워있다가 지금 마악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여몽향이 아까 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그가 바로 시체처럼 보 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식으로 대충 생각을 정리한 여몽향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입을 열었다 "아, 바로 당신이로군요. 헌데 지금 뭐라고 그랬지요?" 서생은 무심히 그녀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해혈수법에 대해 말해주었소." 여몽향은 아미를 살풋 찌푸렸다. "명문혈을 오성의 공력으로 다섯번 치라고요? 당신은 나의 내공화후가 어느 정 도인지 아시나요? 오성의 공력이면, 삼갑자의 절반이니 일갑자반의 공력인데, 그 공력으로 중요사혈인 명문혈을 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고 하는 말인가요?"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질문을 쉴새 없이 퍼부었다. 헌데, 서생은 고 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소. 비록 사혈이지만 지금은 죽지 않소." 여몽향은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죽지 않는다고요? 그걸 어떻게 믿죠?" "그가 죽으면 나를 잡아가면 될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서생은 태연히 대꾸했다. 이에 여몽향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말이야 옳고, 이치야 합당하지만 그것이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인가? 물론 해혈수법으로 사혈을 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점혈과 해혈에 어느 정도 통해 있는 그녀이기에 당연히 주저함은 더욱 컸다. 그녀는 내심을 갈등을 일으 키며, 서생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평범한 용모에 보통의 체구. 게다가 눈빛마저 지극히 평범하며 무공을 익힌 흔 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으며, 다른 특별한 점도 하나도 느꺼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상대방의 내공수위를 알아보고, 무예와 의술의 병합이라고 할 수 있 는 고도의 해혈수법에 대해 안단 말인가? 여몽향은 그를 보면 볼 수록 의심이 더해만 갔다. 아까 그런 말을 한 것이 오히 려 이상할 정도로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그. 그는 혹시 저 신연과 특별한 원한 관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몽향은 갈등을 일으키며 주벽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의견을 묻는 것이 다. 주벽군은 그녀의 내심을 환히 짐작하고 미소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게 좋겠어요." 그 말에, 유운봉과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명했다. 그 방법이 가장 합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주벽군은 신연의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물었다. "만약 싫으면 눈을 한번 깜빡거리고 좋다면 눈을 두번 깜빡거리세요. 이것은 당 신의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니,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해야 해요. 관아에 돌아가 면 분명 다른방법이 있을 테니까요. 자 그럼 저 사람의 말대로 혈도를 풀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연은 눈을 두번씩 두번이나 깜빡거렸다. 관아에 가더라도 사실 평생동안 혈도를 풀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설령, 나 중에 해혈이 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호랑이는 역시 끝까지 호랑이로 남기를 원하는 것처럼... 주벽군은 내심 탄식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의 뜻대로 해혈을 해보겠어요." 그말에 신연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은 곧 자신의 몸을 그녀들에게 맡긴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그의 뜻이 명백히 확인되자, 여몽행은 그의 등뒤로 돌아가 손 가락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어, 일순지간 그녀의 손가락이 정확히 퉁겨졌다. 파파파파팍....! 무색투명한 다섯줄기의 지풍은 정확히 신연의 명문혈에 작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신연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맥없이 앞으로 쿵 나 가 떨어지는게 아닌가? "앗...!" 이에 그녀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여몽향이 급히 맥을 짚어보았으나 신연의 맥박은 물론 호홉마저 끊긴것 같았다. 게다가 칠공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 "이..이럴수가..." 여몽향은 아득한 낙망과 함께 어떤 분노를 느꼈다. 즉시, 그녀는 서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헌데, 서생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그녀들이 신연에게 시 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이에 달아난 것 같았다. 여몽향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그녀는 거대한 분노 가 전신에 불타오름을 느꼈다. 정말 그녀가 이렇게 진정으로 분노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이작자를 그냥....!" 울먹이는 음성으로 한차례 외친 그녀는, 스슷, 그자리에서 바람같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철면피하고 악랄무비한 서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야말로 최대의 신법을 발휘하여 이 불망헌 주위를 이잡듯 샅샅이 뒤 져보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서생의 종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무공도 없어 보이던 그가, 설마 날개가 있어 하늘로 도망을 갔단 말인가? 결국, 그 자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무공을 익힌 것마저 의도적으로 숨긴 채 일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다. 하기사, 세상에 마음만 먹으면 못해 낼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서생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불망헌으로 돌아온 여몽향은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을 겪어야 했다. "소저, 구해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소." 이렇게 말하며 허리를 구부리는 사람. 그는 방금전만 해도 죽었다고 판정했던 신연이 아닌가? 여몽향은 자신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어안이 벙 벙해진 그녀에게, 유운봉이 웃으며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여동생이 마악 달려나가자마자, 이 분은 기력을 되찾으셨어. 그분은 아무래도 신의가 분명해! 동생은 그 분을 만나고 왔나?" 여몽향은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상황판단을 잘못 했음을 알아차렸다. 만약 방금 자신이 그 서생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될 뻔 했는가? 그녀는 다짜고짜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호오.....!" 여몽향은 나직히 한숨을 불어낸 뒤, 방긋 미소와 함께 신연에게 말했다. "아뭏든 쾌유되어서 다행이에요, 부교두님!" "소저의 덕분이오!" 신연이 다시한번 치사하자, 여몽향은 안색이 다소 붉어졌다. 다시 그 서생의 얼 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주벽군이 문득 그녀를 불렀다. "여동생, 이리 좀 잠깐 와봐!" 그녀는 지금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곳은 서생이 누워있던, 그러니 까 장우의 시신이 있는 자리였다. "무슨 일이지요?" 여몽향이 다가가니, 주벽군은 장우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좀 살펴봐!" "......?" 주벽군의 말에 여몽향은 장우의 시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우의 시신. 그것은 한마디로 처첨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주벽군은 그 처참한 시체의 무엇을 더 보라는 것일까? 여몽향이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자, 주벽군은 다시 말했다. "피가 완전히 멎었어. 그리고 맥박이....다시 뛰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주벽군의 음성은 매우 침착하고 엄숙해 보였다. 여몽향은 일순 놀라기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말은 지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피가 멎은 것은 더이상 흘러나올 피 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맥박이 다시 뛴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혹 장우의 죽음에 대해 너무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다소 정신이 이상해 진 것이 아닐까?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여몽향은 그것을 직접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형식적으로나마 장우의 맥박을 재보는 시늉을 했다. 대충 그런뒤에 아니라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맥문은 잡은 여몽향은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다. "이.. 이럴수가.....!" 약동하는 생명의 느낌. 비록 미미하게 겨우 이어지는 것이었지만, 분명 맥박은 가늘게 뛰고 있었다. 그럼 장우는 다시 소생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일순 정신이 번쩍 든 여몽향은 장우의 안색을 세밀히 살폈다. 안색은 비록 시체 처럼 거무죽죽했지만 그 가운데 어떤 생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호홉도 조금씩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끈질긴 생명력...... 이를 두고 기적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사, 살아났어요!" 여몽향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며 들며 들뜬 음성으로 소리쳤다. "정말이야?" 유운봉이 옆에 있다가 울먹이는 어조로 되물었다. 그녀에 있어서 장우는 그야말 로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정말로 순결을 잃 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이에요, 언니!" "아, 정말.....!" 한줄기 이슬이 그녀의 눈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에 주벽군 역시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정말." "그래요 언니." 유운봉은 그녀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그렇다. 어떤 의미의 은혜는 원한보다도 오히려 부담스러운 법이다. 비록 지금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대로 죽었다면 유운봉은 평생 가슴아픈 기억을 지닌 채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 이분을 빨리 치료하도록 해요!" 유운봉의 말에 주벽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허나, 다음 순간 그녀들은 실로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장우는 기실 살아있긴 해도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살아있다고 말 하기 보다 죽었다고 표현하는게 옳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를 어디가서 누구에게 치료를 받는단 말인가? 비록 황궁에 유명한 전의가 많다고 해도.가는 도중에 죽 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주벽군은 실상 이런 시체와 다름없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전의의 이름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주벽군은 문득 두 눈에서 아련한 빛을 떠올렸다. "그분, 백오빠가 있다면 능히 치료할 수 있을 텐데..." "그래요.." 유운봉이 그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이 대체 누구죠?" 여몽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여동생은 모르겠군!" 주벽군이 미소하며 설명해 주었다, "그분은 나의 고종사촌이며, 나의 선천절증인 만절산맥을 치료해 주셨던 천하제 일의 신의셔." "만절산맥을 말인가요?" 여몽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불치로 알려진 만절산맥을 치료한 분이 있단 말인가요? 나는 천하제일의 신의는 소요곡의 소요성수인줄 알았는데..." "소요성수는 나의 만절산맥을 고치지 못하셨어. 그러니 그분이야말로 천하제일 의 신의가 아니겠어?" "대체 그분이 누구죠?" 주벽군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바로 나와 유동생이 기다리다 못해 찾으러 나선 사람이지. 이름은 백상인이야." "백, 백상인이라고요?" 여몽행은 일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아는 사람이야?" 주벽군이 의외의 시선으로 여몽향을 바라봤다. 여몽향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 지 탄식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요! 그분은 나의 쌍동이 언니의 사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지금 역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에요." "......!" "과거, 삼년 전 나의 언니는 공공문의 소문주로 장차 문주가 되기로 예정되었던 사람이었죠. 헌데 언니는 당시 살해되었고, 그때 언니의 연인이었던 그분만이 그 사인과 원흉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죠... 저는 그후 삼년간 폐관수련 하여 문의 비전절기를 연마하고 마악 출관한 거에요. 과거 언니 대신 내가 소문 주가 되었으니, 나는 언니를 살해한 원흉을 알아내기 위해 그분을 찾고 있는 중 이에요." "동명이인이 아닐까?" 유운봉의 말에 주벽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우선 백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 뿐만 아니라, 우리 가 그분을 본 것도 삼년 전이었고, 게다가 그분 역시 무림인이라고 했잖아."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분의 무예는 아주 높았죠. 게다가 재질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였다고해요. 과거.. 십여년 전, 정파의 무림인들이 사마세력의 종주격인 지옥마 성을 궤멸시키고 무맹을 세운 이후, 무맹에서는 무림의 신진 최고 정예를 양성 하기 위해 천하에서 일만명의 기재들을 선발한 후 거기에서 다시 일천명의 최 고 기재들을 추출해 냈지요. 그것이 과거의 잠룡회라는 것인데...." "........." "잠룡회는 일명 천외삼별부라고 불리우는, 지옥마성의 원류인 지옥별부를 제외 한 신선별부와 귀곡별부의 모든 힘을 기울여 십년간의 수련으로 들어갔었지요. 그런데, 그분은 특별히 수련기간을 삼년 남겨두고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백 면서생의 몸으로 잠룡곡에 입곡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것은 현재 무맹의 만박전 주인 천지통 제갈박 어른의 친구인 죽림거사 고홍광의 요청에 의해 그렇게 되 었다고 해요." 주벽군등은 무림에 관한 그러한 사정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여몽향은 자신의 얘기에 취한 나머지 꿈꾸듯 몽롱한 시선을 한 채, 이야기를 해나갔다. "헌데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자질을 오히려 너무 형편없이 본 나머지, 그분만은 잠룡회에 절대 가입할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했죠. 허나, 정해진 삼년간 의 기간이 지났을 때, 그분의 무예는 그 기재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추측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고 해요... 어마, 내가 이거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군요?" "아냐, 아주 유익하게 잘 들었어." 주벽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동생과 우리가 찾는 사람이 똑같다니, 정말 우연의 일치고는 너무 공교롭군! 허나, 지금은 저 장씨 대협의 치료를 하는 것이 급한데..." 이때, 신연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까 해혈방법을 일러준 그 서생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맞아, 그라면 혹시 가능할지도......" 유운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몽향을 바라보았다. 허나,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럼, 어쩌지..?" 주벽군은 낙심하여 탄식했다. 여몽향은 잠시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한가지 길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뭐지 여동생?" 유운봉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리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에요. 실은... 이곳 악양에 요새 들어 유명한 신의 하나가 나타났다고 그러던데, 그리로 가보는게 어떻겠어요?" "그 사람의 의술이 정말로 신통하다던가?" 유운봉의 말에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공공문의 인물들은 사실 천하 곳곳에 모두 퍼져있지요. 이곳에 있는 자들 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이삼 년 전에 이곳에 나타났는 데 그를 일명 악양성수 라고까지 부르고, 그가 사는 곳을 성수장이라고 한다 해요." "그렇다면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주벽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연은 곧바로 장우를 들쳐 업었다. "그럼, 어서 가보도록 해요!" 곧이어, 그들은 바쁘게 불망헌을 떠났다. 불망헌을 나서면서, 주벽군이 문득 여몽향에게 말했다. "참, 아까 그들이 모두 갑자기 달려나가던데 그건 무엇 때문이지? 무엇이 왔다 고만 하던데..." 여몽향이 미소하며 말했다. "만년금구의 소문을 들으셨어요? 그것이 나타났기 때문일거에요" "아아, 그랬었군!" 주벽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헌데, 그렇다면 그냥 나타났다고 하면 될것을 그들은 왜 왔다고만 했을까?" 여몽향은 미소했다. 그건 만년금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는 것이라고?" 주벽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이엇다. "다들 열심히 달려가던데, 여동생은 우리때문에 일부러 가지않은 것이겠지?" "아니에요..."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예로부터 영물의 주인이 되려면 덕이 있어야 한다던데, 제가 그러한 덕이 있겠 어요? 하물며, 기라성같은 무림의 고수들이 거의 몰려 왔을 텐데..." "여동생은 매우 현명할뿐만 아니라, 겸손하군!" 주벽군이 여몽향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이때, 여몽향이 앞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 그들이 전부 저기에 있네요. 우리 저기에 가볼까요?" 그들이 향하고 있는 길의 전면. 넓고 푸른 동정호의 연변인 그곳에는 지금 구름같은 인파가 둥글게 모여 있었 다. 주벽군들이 먼저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안개가 워낙 짙게 깔려 있기 때문 이었다. "음... 하긴 우리는 그곳을 지나야할 입장이니, 헌데 위험하지 않을까?"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모두 만년금구에 정신이 팔려있는 상황이니, 우리가 그 만년금구를 갖 지 않는한 별 위험은 없을거에요" "그래? 그렇다면..." 전설의 영물이라는 만년금구에 궁금증을 느끼며 그들은 발걸음을 좀더 빨리했 다. * * * * * * 소년. 얼핏 느끼기에 대략 십이세 가량 되었을까? 나이에 비에 체구가 매우 다부지게 보이는 이 소년의 용모는 매우 영준했다. 특히 유난히 초롱초롱해 보이는 소년 의 두 눈에선 늘상 맑은 혜지가 번뜩이는 듯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소년이 매 우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대고 있었다. "돌아가! 돌아가라니까!" 그는 길을 막고 앞을 향해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광경 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그의 주위로 무수한 사람들이 둘 러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에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서 그를 향해 다가들고 있는 존재는 다름아닌 만년금구 였기 때문이다. ----만년금구. 그것의 크기는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았다. 등판의 직경이 대략 한자쯤 될까? 단 지 전신이 온통 금칠을 한것처럼 황금 빛이었다. 툭 불거져 나와 있는 두개의 눈알까지....... 헌데, 기이하게도 그놈은 입에 아주 작은 단검 한자루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황금 빛이었다. "돌아가라니까, 소금! 넌 물속에 들어가지 못해. 들어가면 넌 무거워서 다시 나 오지 못해. 옛날과 다르다니까!" 소리치는 소년은 둘러선 사람들을 의식한듯 안색이 시뻘개져 있었다. 정말 그의 뒤로 조금만 더가면 동정호였다. 그는 만년금구가 동정호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 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그런데,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은 듣기 에 매우 이상했다. 하기야 만년금구는 영물이니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손 치더라도, 그놈은 일명 수중의 제왕 이라고 불리우는 놈이 아닌가? 하나, 만년금구는 막무가내였다. 고개를 다소 숙인 상태에서 어기적 거리며 느 릿하게 자꾸만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놈은 매우 힘 겹게 걸어가는 태도가 역력했다. 중인들 틈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주벽군이 여 몽향에게 속삭이듯 물엇다. "저 거북이가 왜 저렇게 힘들어하지? 만년이나 묵은 것이라면 그 힘이 대단할 텐데, 아마 어디 병이라도 걸렸나보지?" 여몽향이 고개를 져었다. "아니예요. 병에 걸린것이 아니라 몸이 워낙 무거워서 그렇대요" "몸이 무거워서 그렇다고? 덩치는 별로 커보이지 않는데?" 주벽군이 의아해하며 묻자, 여몽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그건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아직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해요" "불가사의.......?" 주벽군은 내심 곤혹해 하다가 다시 물었다. "헌데 저 소년은 왜 저러고 있지?" "호호호.....!" 여몽향은 한차레 교소를 터트린후,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저 만년금구는 성수장에서 나온 거에요. 그리고 저 소년은 성수장의 소 공자구요." 주벽군은 눈을 크게 떴다. "성수장이라면 바로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악양성수의 성수장이지요." 주벽군은 내심 아연했다. "그렇다면 저 만년금구는 악양성수의 소유?"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헌데 기이하게도 저만년금구는 하루에 한번씩 꼭 이맘 때면 여기에 오곤 해요. 뭐 동정호가 그리워서 그렇다나요." ".........." "하지만 늘 저렇게 저 소년에게 가로막혀 동정호의 지척에서 되돌아 가고 말죠. 저 만년금구는 너무 무거운 나머지 물에 한번 갈아앉으면 다시 떠오를 수 없대 요. 아마 오늘도 잠시후면 그냥 돌아갈거에요" "그럴수가!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주벽군은 아연 탄성을 발했다. 이때, 만년금구는 마침 동정호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소년이 자꾸만 말리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된 것이다. 뒤를 힐끔 돌아본 소년은 내심 다급해져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결사적으로 만년금구를 막아내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만년금구는 쉬지않고 다가 왔다. "소금, 됐어 됐어! 이제 돌아가자구. 거의 끝까지 왔잖아! 미련을 버려! 잘못하 면 물속에 빠진단 말야!" 그러나, 꾸루꾸루.... 한차레 괴성을 지른 만년금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계속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에, 할수 없이 손으로 그놈의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어어, 너 정말 이럴거야....!" 허나, 보기보다 소년의 힘이 약한지, 만년금구의 걸어오는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고 오히려 소년의 몸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주르르 뒤로 일장이나 밀려나간 소년은 이제 불과 석자 뒤가 물속임을 알아차 리자, 돌연, 그앞에 길죽하게 벌렁 드러누었다. 그리곤 탄식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소금 네가 정 가고 싶다면 나를 밟고 넘어서 가. 그러면 나는 죽게 되겠지? 살아서 사부님께 면목이 없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거야. 자 어서 가!" 그러자, 만년금구는 오른쪽으로 피해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원래가 느려 터진 그놈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 에, 오른쪽으로 음직이면 오른쪽에 이미 소년의 몸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꾸루루루룩.....! 만년금구는 괴성을 지르며 멈춰서더니 두개의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이어 고 개를 자꾸 내두르는 것이 가지 못해 안달이 난것이 분명했다. 허나, 결코 소년 의 몸을 타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만년금구는 영물이 분명했다. 꾸르르르룩...! 만년금구는 더 이상 가지 못하자 동정호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괴상한 소리만 질러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놈은 잠시 후면 포기하고 돌아설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이때, 가득 둘 러선 사람들의 속에서 한 대한이 걸어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꼬마야! 내가 그 거북을 데려다 줄까?" 이에, 중인들의 시선은 자연 그 대한을 향해 집중 됐다. 그 대한은 정말 거인이 었다.그 키가 얼마나 되는가 하면, 무려 십 척에 달했고 장내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최소한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또한 체구가 그 키에 못지않게 우람했 는데, 그 우람한 몸체가 전부 탄탄한 근육질로 되어있는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 불가에서 말하는 사천왕을 닮아보이는 그 대한은, 엄청나게 우람한 체구 만큼이 나 목소리가 컸다. 그저 담담히 말하는 것 같은데도 그 음성은 장내에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그가 다가가자, 소년은 누운채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아저씨는 누구죠?" 무섭게 생긴 거한을 대하는 나이 어린 소년의 태도답지 않게 매우 침착하기 그 지없었다. 대한은 그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핫핫핫------! 나는 헌원백이란 사람이다. 너는 무맹의 백호당주인 혼원벽력 수의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 그 말에,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대한이 말한 그신분은 정말 놀라운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무맹의 백호당주인 혼원벽력수 헌원백이란 말이군요?" 소년의 말에, 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꼬마야"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꼬마가 아니라 손범이에요." 대한은 눈빛을 번쩍 빛냈다. "손범? 좋은 이름이군!" 이에 소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이름도 훌륭해요" "핫핫핫핫-----!" 대한은 크게 대소를 터트리더니, 소년에게 말했다. "애야 너는 일어나지 겠느냐? 나는 여태까지 누워있는 사람과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소년 즉 손범은 누운채로 만년금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미소했다. "보시다시피, 저 소금 때문에 나는 일어날 수가 없어요" 대한, 헌훤백은 눈을번쩍떴다. "저, 거북이의 이름이 소금이냐?" 손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헌데 내게 할 말이란 뭐죠?" "그것은...." 헌원백은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물었다. "너는 혹시...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없느냐?" 손범은 씨익 미소했다. "그럴 생각은 있지만 아저씨에겐 싫어요" 그 말에 헌원백은 눈을 휘둥그래 하게 떴다. "내게는 싫다니....그건 왜지?" 손범은 미소하며 말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사부님께 면목이 없잖아요." "너는 이미 사부가 있단 말이냐?" 손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헌원백은 미소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부 몰래 한두 수 정도는 배울수 있지 않느냐? 너무 고지 식한 것도 다소 흠이 된단다." 손범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는 싫어요." "그건 또 왜지? 설마 나의 무예가 너무 형편없을까봐 그런단 말이냐?" 그 말은 헌원백이 짐짓 해본 소리였다. 손범이 고개를 저을 것을 미리 예상하면서..... 헌데, 의외에도 손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실, 나의 사부님은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시거든요." 손범은 말하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맑고 순진무구해 보여 서 헌원백은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알겠다. 허나 나는 한 가지만은 해야겠다." 손범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건 뭐죠?" 헌원백은 짐짓 안색을 무섭게 굳히며 말했다. "내가 아까 너를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걸 지켜야겠다." "그러세요." 손범은 이외로 쉽게 대답했다. 이에, 헌원백이 오히려 멍해졌다. "너는 내가 저 거북이를 들고 가버릴까봐 걱정되지도 않느냐? 나는 저 거북이 를 데려다준다고는 했지만 언제까지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손범은 미소했다. "난 아저씨를 믿어요." "그래?" 헌원백은 잠시 곤혹한 표정을 짓다가, 곧장 만년금구에게 다가갔다. 만년금구는 헌원백이 다가오자, 얼른 머리와 다리를 등판 속으로 숨겨 버렸다. 마치 둥근 공같이 변한 만년금구. 헌원백은 그 앞에 서자 심호홉과 함께 내력을 끌어올렸다. 만년금구가 기이하게 무겁다는 말을 그도 이미 들었으나, 실상 내력이 이미 노화순청의 경지에 올라 있는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 문제거리도 아니었다. 다만,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 해 그는 두 손으로 만년금구를 잡고 오성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만년금구는 마치 땅에 붙어 있기라도 한 양, 전혀 움직이 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일시 당황한 헌원백은 즉시 내공을 십이성 최고로 끌 어올렸다. 너무나도 급하게 내공을 운용한 탓에 그의 안색은 금방 시뻘겋게 물 들었다. 그제야, 만년금구는 위로 들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와아.....!" 그 광경을 본 중인들이 일순 탄성을 질렀다. 그들은 사실 만년금구가 들리는 것 을 처음 본 것이다. 허나, 헌원백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만년금구를 다시 땅에 내 려놔야 했다. 그의 내력으로서도 만년금구를 들고 오래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헌원백은 만년금구의 무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어린 소년이 그토록 태연한 이유를 환히 알 것 같았다. 이때, 가벼운 옷자락 스 치는 소리가 들리며, 대여섯 명의 인영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스스슷.... 땅에서 솟아난 듯한 놀라운 신법으로 미루어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들임에 분명했다. 그들은 모두 오남일녀였다. "헌원형, 무슨 일이오? 설마 그것의 무게가 백만 근이라도 나간단 말이오?" 질문을 한 사람은 화의를 입은 다소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그렇소. 최소한 백만 근 이상이오." 그 말에, 그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유일한 홍일점인 중년미부가 회의어린 시 선으로 말했다. "믿을 수 없군요! 혹시, 산공독 따위에 당한 것은 아닌가요?" 헌원백은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만년금구를 가리켰다. 직접 시험해 보라 는 말이었다. 중년미부는 내심 어이없어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몹시 강인 해 보이는 인상의 초로인이 입을 열었다. "갈단주!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말상의 중년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저 거북이 전체가 설사 납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강단주는?" 초로인의 질문에 이번에는 자면의 중년인이 대답했다. "저도.....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지오." 초로인은 고개를 끄덕인후, 아직도 땅바닥에 누워있는 손범을 향해 말했다. "저 거북이는 네것이냐?" 손범은 고개를 저었다. "제것이 아니라 저의 친구에요. 헌데, 아저씨는 누구죠?" "허허, 아저씨라.....내 나이는 이미 환갑이 넘었단다." 손범은 눈을 크게 떴다. "환갑이 넘었다고요? 그럼....." "아니,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구나. 허허허..." 초로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손범도 따라서 빙그레 웃었다. 이를 보고, 헌원 백이 그를 향해 말했다. "얘야, 이젠 너의 거북이가 달아날 위험이 없으니 그만 일어나라!" 그 말에, "아, 그렇군요!" 손범은 머리를 툭툭치며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초로인을 향해 말했다. "저는 손범이에요.아저씨는 누구죠?" 헌데, 초로인은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손범의 전신골격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대경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런데 손범의 전신골격을 보고 놀란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양신무지체입니다 전주!" 헌원백이 웃으며 초로인을 향해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초로인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맹주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절세신골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사실, 그들은 만년금구의 심각성 때문에 손범을 건성으로 대하다가, 그가 몸을 일으키자 그때에야 그의 골격의 비범함을 알아본 것이다. "헌원형! 알고보니, 평생 제자를 두지 않던 당신이 왜 마음이 변했나 했더니.." 화의중년인이 헌원백에게 말하자, 헌원백은 검고 험상궂게 생긴 안색을 다소 붉 혔다. "자네는 주위를 살피는 척 하면서 노상 나만 바라보고 있었군.. 허나, 사실 이 아이는 사부가 있다네." "사부가 있다고? 허나 이런 인재는 빼앗아서라도 제자로 삼아야지. 저 만년금구 에 비하면, 이건 꿩 대신 닭이 아니라 차라리 봉황이네." 화의중년인이 웃으며 말하자 헌원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모림의 공도를 어길 수야 없는 법이야." 중년미부가 문득 손범에게 말했다. "그럼 너의 사부가 악양성수냐?" 손범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요." "사부가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할 수 없군." 초로인은 짧게 한숨을 쉬며 손범에게 말을 이었다. "나는 무맹의 만무전주, 광무자 단목무광이란 사람이다. 그리고..." 이어 그는 한쪽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냉막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무맹의 오단중의 하나인 천왕단주, 섬전일비 악탄이란 사람이다." 손범은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나는 말없이 묵묵한 사람을 좋아해요! 말이 없는 사람은 진실하다고 했거든요." 그 말에, 그 중년인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허허....." 초로인, 즉 단목무광은 너털웃음을 흘린 뒤 계속 다음사람을 소개했다. "저 말상의 아저씨는 역시 오단 중 하나인 금사단의 단주, 금사신군 갈천홍이란 사람이고, 저 아름다운 아줌마는 역시 오단 중의 하나인 봉황단의 단주인 봉황 선사 상관연이다." "어마, 전주님도! 아직 시집도 안간 사람에게 아줌마라니 너무해요. 나는 아직 처녀라니까요!" 중년미부의 농담에 단목무광은 무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저 얼굴이 자색빛깔나는 아저씨는 역시 오단 중 하나인 자하단의 단주 천독서생 강석초이고, 화의를 입은 뚱보 아저씨는 역시 오단 중의 하나인 만화단의 단주 팔비나타 당문량이란 사람이다." 만목무광의 설명이 끝나자, 손범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저씨들은 모두 무맹에서 나왔다는 말이군요? 저는 무맹의 아저씨 들을 좋아해요. 그분들은 모두 정의협객들이거든요." "그래?" 만목무광의 얼굴에 은연중 희색이 떠올랐다. "사실 우리는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가 우리를 좋아한다니 다행이구나!" "부탁이라니, 그게 뭐죠?" "그것은....." 단목무광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름 아니라, 저 거북이를 우리가 잠시 데려갔으면 해서란다." "......." "너도 알겠지만, 저 거북이에게 욕심을 내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이 있단다. 따라서, 그대로 놔두면 나쁜 사람들이 저 거북이는 물론 너까지 해치게 될지 모른단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맡았다가 나중에 돌려주마!" "....." 손범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했다. 이에, 단목무광과 오대단주 그리고 백 호당주인 헌원백은 물론, 장내를 둘러싼 구름같은 군중들이 아연 긴장한 빛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중 대부분은 설마하는 빛을 보였다. 그런데, 의외에도 손범은 고개를 끄덕이는게 아닌가? "좋아요. 허나 나중에 제가 달라고 하면 그땐 돌려주셔야 해요?" "아, 알았다. 물론 보내주고 말고!" 단목무광은 희열에 들뜬 채, 혹시 손범이 말을 번복할새라 얼른 대답을 했다. 동시에, 장내에는 커다란 소요가 일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풀리자 중인들은 모 두 크게 놀란 것이다. 허나, 단목무광은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즉시 지시를 내렸다. "오대단주는 어서 운반을 서두르시오!" "예!" 오대단주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급히 신형을 움직였다. 그들이 만년금구를 들기 는 어렵지 않았다. 둥그런 만년금구의 등판에는 그 놈이 움추려든 탓에 여섯 개 의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일신의 내력이 하나같이 헌원백과 비슷한 그들 은 각각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등판을 움켜쥐었다. 이어, 그들은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헌데, 그들이 마악 만년금구를 들어올리려고 할 때였다. "핫!핫!핫!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을 속이고 물건을 강탈하다니, 그러고서도 어디 정인군자라 할 수 있겠소?" 돌연, 낭랑한 음성과 함께 서너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금의 청년 하나와 그 뒤를 따르는 삼인.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신도운형과 냉겸 등 이었다. 단목무광은 내심 크게 놀랐다. 신도운형의 음성엔 내력이 가득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마악 만년금구를 들어올리려던 오대단주는 흠칫 움직임을 멈 추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단목무광은 내심 경악하며 물었다. 신도운형은 싸늘하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후후훗! 최소한 양심을 팔아먹는 위선자들은 아니지!" "네놈들은 바로 아까 불망헌이란 주루에 나타났었다던 그놈들이로구나!" "후훗, 이제야 나를 알아차리다니 소식이 별로 빠른편은 아니군!" 신도운형은 비꼬듯 말했다. 이에, 단목무광은 두 눈을 번쩍 빛냈다. "네놈들은 바로 지옥마성의 후예들이겠지?" "핫핫핫핫핫핫.....!" 신도운형은 대답없이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이어, 그는 독백하듯 말했다. "무맹의 사람들이 소문처럼 그렇게 정정당당한 인물들이 못되는군!" "그게 무슨 말이냐?" 단목무광이 안색을 찌푸리며 물었다. 신도운형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사정이 있어서 신분을 밝히지 못할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를 다짜고짜 사마의 인물로 몰지를 않나, 어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말이오! 게 다가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을 이용하여 천고의 영물을 강탈하다니,후후....." "뭐라고..?" 단목무광은 안색이 변했다. "네놈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후후..." 신도운형은 조소하듯 웃으며 주위에 둘러싼 군웅들을 가리켰다. "이 일은 저들 모두가 증명해줄 것이오!" "....." 단목무광은 할 말을 잃었다. 평소 때라면 그들은 무맹을 열심히 지지했을 것이 다. 여태까지 십여년간 무맹은 무수한 공적과 협행을 쌓아왔으므로. 그러나, 지 금은 아니었다. 희세기보에 대한 탐욕이 그들로 하여금 무맹에 등을 돌리게 만 든 것이다. 그와 오대단주를 향한 적의띤 시선이 그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었으 며, 단목무광은 아연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향해 신도운형은 비양거리듯 말을 이었다. "이래도 아직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우길 생각이오? 그간의 명성을 생각 한다면 이쯤에서 용서를 빌고 물러나야 할 것이 아니오?" 단목무광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지금 탐욕에 눈이 멀어 있다. 이 일의 시비는 차후 무림의 사가들이 결 정해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후후후...." 신도운형은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 주인이 직접 되돌려 달라는데도 말이오? 그래도 당신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강제로 빼앗아갈 생각이시오?" "무슨 말이냐? 주인이라니..." 신도운형은 여전히 한쪽에 서 있는 손범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가 당신들의 진정한 속셈을 알고 나면 그 거북이를 되돌려 달라고 하지 않 겠소?" 단목무광은 두 눈을 부라렸다. "교활한 놈! 허나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느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하기 때문에, 결국 그아이는 이해할 것이다." "후후훗! 그래요?" 신도운형은 음산하게 조소하더니, 돌연 손범에게 돌아섰다. 이어, 그는 친근한 미소와 함께 손범에게 입을 열었다. "얘야, 네 이름이 손범이라고 했던가?" 손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아저씨의 이름은 뭐죠?" "아, 그것은 나중에 자세히 가르켜주지." 신도운형은 미소한 뒤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손해를 보고 있단다. 거기에 대해 일러줄테니 잘 듣고록 해라." "알았어요." 손범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신도운형은 단목무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들을 좋은 사람인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나쁜 사람이란다. 왜냐하 면 너를 속이고 너의 거북이를 빼앗아가려고 미리 작정을 하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처음에... 그들은 모두 와 있었으면서도 저 헌원백 혼자 나타나 네게 선심을 베푸는 척 했단다." "......." 손범은 맑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들었다. 신도운형은 말을 계속했다. "헌원백은 실상 그 거북이에게 마음이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네게 무공을 가 르치겠다는 말만 했지. 그 무공은 나에 비하면 사실 형편없는 것이었는데도 말 이야. 그러다가 그는 때를 기다려 정말 거북이를 들고 가려고 했지. 그런데 거 북이가 너무 무겁자 저들이 다 나타난 것이란다. 그들은 나타나자 마자 네 자질 이 훌륭하다고 하며 너를 부추켰어. 모종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이야...." 이때, "그 아이가 천상의 신골인 천양신무지체란 말은 사실이다. 네놈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라고 단목무광이 차갑게 소리쳤다. 이에 신도운형도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맞아, 그의 말대로 네가 천양신무지체인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그들은 너에 비 해 저 거북이가 아주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단 말이야. 사실은 거북이에게 전 관 심이 쏠려 있었으면서도 말이야. 그것이 너를 속인 점이다. 그들은 너를 아예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지....." 이어, 신도운형은 손범을 향해 미소하며 말했다. "어때, 너는 사내대장부로서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 기분이 좋으냐?" 그때 헌원백이 나서서 말했다. "사실, 거북이가 필요하긴 했지만, 네가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자, 손범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더군다나 나는 원래가 바보에요. 사부님의 기대에도 못미칠 뿐만 아니라, 늘 누나는 그러는걸요. 바보라고. 그러니 아저씨들이 저를 바보취급 한다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이 말은 모든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의외였다. 그들은 설마 이 어린 소년이 그 런 말을 할줄 몰랐는지라 저마다 가볍게 놀랐다. 그것은 단목무광 뿐만 아니라 신도운형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신도운형은 포기 하지않고 손범을 향해 미소했다. "좋아! 좋아. 너의 그 자세는 마음에 든다. 알고보니 너는 정말로 마음이 넓은 대장부로구나!" "하하, 그런가요?" 손범이 웃자, 신도운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암, 그렇고 말고! 허나, 너는 내말을 잘 들어야 한다. 너도 사내대장부라면 친 구의 의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 친구가 위기에 처하면 목숨도 불사하고 그를 구하겠다는 그 정신 말이야." "예." 손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신도운형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핫핫!좋아 좋아! 그래야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거북이는 네 친 구가 맞겠지?" "......" 손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운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헌데, 그들이 거북이를 가져가려는 이유를 아느냐? 그 거북이를 죽여서 내단을 빼앗으려는 것이란다. 나중에 네가 다시 돌려달라고 해도 그러지 못할 것이 분 명해! 그러니 너는 어서 친구를 구해야 하지 않겠니? 친구가 위험한데 가만히 있다는건 정말 의리가 아니야!" "....." 손범은 묵묵했다. 신도운형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말은 교묘하게 도 그 또래의 소년들이 흥분하게 만들기에 족했기 때문이다. 손범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문득 단목무광 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일에 대한 그들의 답변을 바라는 것이었다. 허나,그들은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신도운형의 말은 교묘하게도 꾸며지긴 했으나, 사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할말이 없어진 단목무광 등은 내심 탄식만 할 뿐이 었다. 이에, 손범은 다시 신도운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신도운형은 내심 회 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이런 상 태에서의 손범의 대답이란 그야말로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정작 손범의 대답은 또다시 의외였다. "나는 저 아저씨들의 말을 믿어요. 틀림없이 내가 필요할때 다시 소금을 내게 데려다 줄거에요. 허나, 만일 아저씨들이 소금을 죽이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어 쩔 수 없이 무림을 위해 희생되는만큼 소금도 아무 불평이 없을 거에요. 사실 소금은 너무 늙어서 곧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사부님이 말씀하셨거든요." "뭐라고?" 신도운형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허나, 그는 곧 안색을 바로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 허나 그건 너의 잘못된 생각이다. 네 사부님도 이 사실을 알면 화를 낼 거야. 더군다나, 그들은 정말 무맹의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아!" 그러나 그는 다시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손범이 다시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나는 저 아저씨들이 무맹의 사람들이란걸 믿어요.확신해요! 더구나 사부님도 이 사실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에요." 이어, 그는 단목무광을 향해 제촉하듯 말했다. "어서 소금을 데려가세요! 허나, 가능하면 소금을 죽이지 말길 부탁드려요." "아, 알았다." 단목무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즉시 오대단주들에게 지시했 다. "어서 운반을 서두르시오!" "예...." 오대단주들이 곧 만년금구를 들고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군웅들을 향해 포 권하며 말했다. "여러 무림의 동도들에겐 죄송하게 되었소! 허나, 이는 무림이 혼란해지는 것을 대비한 맹주의 선처이며, 결코 나 자신이 이 영물을 독차지하는 것은 아니오. 그 점, 동도 여러분들의 양해 바라고.. 만일, 오늘의 이 일에 불복하시는 분이 있다면 차후 맹에 직접 오셔서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소!" 이어, 그는 손범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오늘의 이 일은 내가 따로 성수장을 찾아가 너의 사부님께 말씀드리마! 너의 성의는 정말 고마왔다!" "과찬의 말씀이에요!" 손범은 씨익 미소했다. 헌데, 바로 그때, 신도운형과 냉겸등이 마악 떠나려는 그 들을 가로막았다. "후후훗! 멈추시오!" "네놈이....." 단목무광은 두 눈에 싸늘한 살광을 뿌렸다. 신도운형은 그를 행해 음산한 흉소 를 터트렸다. "후훗, 말로만 해서는 들은척도 않더니 이거 정말 관을봐야 눈물을 흘리겠단 말 인가?" "네놈이 정말 본 무맹과 대적하겠단 말이냐!" 콰우우우.... 백색의 강기가 빛살처럼 날아드는 그 일장의 위력은 정말 가공지세였다. 단목무 광은 그만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설마 신도운형의 무예가 이정도일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함을 느낀 그는 즉시 신형을 날려 그 일장을 피하면서, 뒤 쪽의 오대단주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움직이시오! 이자는 내가 맡을테니..." 허나, 그는 곧 눈을 부릅떴다. "흐흐흐!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신도운형이 비쾌하게 다가들며 재차 일장을 날려왔던 것이다. 콰우우우우우....! 그 예리한 공격의 각도와 불가사의하게도 쾌속한 수법은 단목무광에게 더이상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맞받았다. 파츠츠츠츳..... 진홍빛 강기가 그의 쌍장에서 일며 비쾌하게 백색강기에 맞부딪쳐 갔다. 콰콰콰콰쾅.....! 광렬한 폭발음이 일며, 엄청난 압력을 동반하고 땅거죽들이 분분히 하늘높이 솟 아올랐다. "윽!" 그 가운데, 단목무광은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러는 그의 안색은 핼쓱하 게 질려있었다. 그의 무예가 신도운형에 비해 한수 아래인 것이다. 그는 일시 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무려 일갑자가 넘도록 살아온 그보다 불과 약관의 나이인 작자의 무예가 더 높을 수가 있다니..... 더군다나 그는 광무자란 별호 그대로 일평생 오직 무예에만 미치다시피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따라서, 무맹 맹주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만무전주를 맡고 있거늘... 단목무광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허나, 신도운형은 그에게 조금의 생각할 여유 도 주지 않고 재차 무섭게 짓쳐들었다. 콰우우우.... 단목무광은 맞받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파츠츠츠츳....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단목무광은 또다시 두걸음 뒤로 밀렸다. "음...." 그를 향해 신도운형은 다시 숨쉴틈없이 덮쳐들었다. 콰우우우.....! 얼핏 단목무광은 위기에 몰린 듯 했다. 허나 역시 그는 무수한 실전을 몸으로 겪어온 노강호답게 노련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내공력과 신공은 분명 신도운형의 우세지만, 단목무광은 실전에서 터득한 잔기 술과 임기응변에 능했다. 비록 신도운형이 확실히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금방 승패가 판가름 날 상황은 아니었다. 콰콰콰콰쾅.......! 이때, 오대단주는 단목무광의 말대로 신형을 움직이려 했다. 허나, 그들은 곧 냉 겸등 삼인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무겁디 무거운 만년금구를 들고 있었는지라, 그들은 일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국면에 처하고 말았다. "피라미같은 놈들! 감히 무맹에 도전해 오다니..." 오직 혼자 한가한 헌원백만이 눈알을 무섭게 굴리며 앞으로 나섰다. "흐흐흐... 피라미라고?" 강소평이 돌연 그 거구를 향해 단신으로 덮쳐들었다. 그 행동은 몹시 분개한 듯 발작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같은 편인 냉겸과 임방마저도 일순 흠칫 놀랐다. 신도운형이야 워낙 무예가 강했지만, 그들 삼인의 무예는 기실 헌원백보다 못미 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좀더 조직적인 협공을 시도했어야만 옳았다. 허나, 상황은 이미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과도 같은 것. 늦게나마, 냉겸과 임방은 동시에 헌원백을 향해 날아갔다. 헌데, 다음 순간 장내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것은 헌원백의 뒤에 오대단 주가 만년금구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헌원백은 최초 강소평이 덮쳐오자 볼것 없이 그대로 일장을 갈기려고 했다. 그 런데 마악 일장을 날리려는 순간, 그는 그 뒤에 달려드는 냉겸과 임방을 보게 되었다. 만일 그가 강소평을 처치하게 되면, 다음에 오는 적을 상대하기가 곤란 해진다. 더구나, 비록 그가 그들 중 한 사람보다는 강하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가 다소 곤란하다고 볼 때, 그 곤란한 순간에 두 사람 중의 하나는 바 로 뒤쪽의 오대단주를 향해 날아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는 지금 전 내공 을 일으키고 있는 그들이 다치거나 혹은 주화입마에 걸릴 우려가 있을지도 모 르므로, 헌원백은 일순 주춤했다. 동시에 그는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강소평을 처치하고 난 후의 다급해질 상황을 미리 늦추기 위해 일순 신법을 발휘했다. 스슷, 좌측으로 가볍게 몸을 튼 다음, 그는 쌍장을 벌려 하나는 강소평에게, 다 른 하나는 냉겸을 향해 비쾌하게 강기를 발출한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은 길었으나,그 상황변화에 따른 시간의 흐름은 매우 짧았다. 그 리고, 얼핏 느끼기에 매우 절묘한 임기응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쿠쿠쿠쿠......! 쌍장을 발출한 순간 헌원백은 크게 놀랐다. 강소평이 그의 가공스런 일장은 아 예 무시하고, 드러난 오대단주를 향해 일장을 날리고 있는게 아닌가? "저, 저런 미친....!" 헌원백은 순간 두눈을 있는대로 다 부릅떴으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수가 없었다. 두 차례의 강렬한 폭음이 울린 순간, 일은 이미 벌어졌다. "으악....!" 강소평의 몸이 피를 화살처럼 뿜으며 날아감과 동시에, 만년금구를 들고 있던 오대단주의 몸 역시 뿔뿔이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동시에, 만년금구는 동 정호의 깊은 물위로 날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풍덩....! 흰 포말을 일으키며 만년금구를 삼켜버리는 수면을 바라보며 냉겸 등도 공격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놀란 것은 헌원백이 더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다섯 명이 전력을 다해 들고 있는 만년금구를 저토록 멀리 날려보낼 수 있다니.... 저자의 공력이 그만큼 강했단 말인가? 아니야, 이것은 불가능해.....' 헌원백의 어이없는 독백이 덧없이 울려퍼지는 순간, 콰콰콰쾅! 강내에 엄청난 굉음이 터지면서 한 사람이 극쾌한 신법으로 신형을 날려 만년 금구의 뒤를 쫓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바로 단목무광과 격전을 벌이던 신도운형으로, 그 신법이 얼마나 불가사의한지 물속으로 들어가는데도 작은 소 리하나 일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어, 슷..... 미약한 파공음과 함께 단목무광이 뒤따라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장내의 상 황이 이토록 급변하자, 구름같이 몰려든 군웅들은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물속에 빠진 만년금구의 행방이 궁금해졌으나, 신도운형과 단 목무광의 신기에 가까운 무예를 본터라 아무도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냉겸과 임방은 강소평의 거의 치명상에 가까운 상세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고, 헌원백 역시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유하는 오 대단주의 호법을 서야 옳으므로 물속으로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그들 모두는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과연, 누가 만년금구를 다시 잡아올 것인가? 이미 극상승의 무예를 지닌 그들이라, 아무리 물속이라도 만년금구를 잡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누가 잡아올 것인가가 문제인데, 중인들은 당연 히 신도운형에게 그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그것 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신도운형의 무예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무 맹 전체와 대항해서 싸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매우 지루했고 또 오래 걸렸다. 중인들이 너무 지루하다 못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할 무렵 돌연 수면 한가운데 파문이 일었다. "앗....!" 누군가의 비명섞인 외침이 들려와 모두들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그 부근에 핏 물이 번지더니, 둥그런 물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단목무 광의 수급이 아닌가? "아..." 헌원백이 대경하여 급히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물속에서 한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슷.... 그는 바로 신도운형이었다. 물속에서 장시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에는 물기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헌데, 의외에도 그는 빈손이었다. "죽일 놈! 네놈이 전주님을....!" 헌원백이 대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자, "당신도 따라가시오!" 신도운형은 귀찮다는 듯 그를 향해 일장을 날려버렸다. 콰우우우우......쾅..... "윽......." 허공으로 훌훌 날라가는 헌원백의 육신을 뒤로 한 채, 그는 곧바로 냉겸 등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쿵! 중상을 입고 땅바닥에 처박힌 헌원백을 아직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오대단주들 이 안아들고 달아나는 동안, 신도운형은 아직도 기식이 엄엄한 강소평의 부상을 살폈다. 이윽고, 강소평이 서서히 의식을 차리자, 그는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 자세히 말해라!" 그러자, 강소평은 희미한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려서..." "어떤 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강소평!" 임방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으나, 강소평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순간 정신을 잃어...." 강소평이 말한 내용은 정말 기이했다. "그렇다면 제 삼자가 있다는 말인데..." 신도운형은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허나,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해할 수가 없어....." 이때, 냉겸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만년금구는 잡으셨겠지요?" 헌데, 신도운형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지다니요? 그게 무슨.....!" 냉겸은 질문을 하다가 중단했다. 그는 신도운형의 말뜻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 신도운형의 능력이라면 만년금구를 못찾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만년금구는 물속에서 갑자기 증발이라도 했단 말인가? 냉겸이 몹시 곤혹해 하는데, 신도운형이 문득 물었다. "그 꼬마는 어디 있지?" 바로 손범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냉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소종사께서 물에 들어가시고 난 다음에 둘러보니 갑자기 사라지 고 없었습니다." "그래.....?" 신도운형은 문득 눈빛을 음산하게 빛내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자!" "어디로 말입니까?" 냉겸이 묻자, 신도운형은 다소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즉시 신형을 움직였다. "성수장으로....." 슷..... 이에, 강소평을 부축해든 그들은 급히 그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제야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들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신도운형을 은밀히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수장. 그것은 악양성내에서 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울창한 단풍나무 숲속에 위치하 고 있었다. 일행이 그쪽으로 길을 가던 도중, 여몽향이 문득 주벽군에게 물었다. "언니!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주벽군이 시선을 돌리자, 여몽향은 아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그 꼬마소년 말이에요. 뭔가 의도적인 것 같지 않아요?" "....." "나이 어린 것이 설마 하는 마음도 들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녀석은 의도 적으로 만년금구를 떠맡기려고 했던 것 같아요." 주벽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암중의 인물이 있는 것 같아!" "암중의 인물요?" "응! 내가 보기에도 그 강소평이란 사람의 행위는 너무 어이가 없는 것이었어. 그리고 나중에 신도운형도 빈손으로 나오고... 게다가, 아까 주루에서 그가 이렇 게 소리치기도 했잖아. 암중인은 나오라고!" "그렇겠군요!"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헌데, 암중의 인물이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왜 좀더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 하고 그렇게 숨어 있기만 하는 걸까요?" "글쎄..."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겠지요?" "......." 주벽군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질문을 하려던 여몽향은 문득 유운봉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일행의 맨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일행 중에서도 가장 초조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아까 호변에서 구경을 하는 동안 장우의 상세를 살피며 빨리 가지 못해 몹시 안달나 있었다. 장내의 상황이 그때 그토록 기이하고 심각하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들 일행은 곧장 이리로 향했을 것이다. 여몽향은 몹시 초조해 하는 유운봉을 향해 슬쩍 미 소하다가, 주벽군을 향해 말했다. "언니, 우리 좀 빨리 갈까요?" 그 말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과연 유운봉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여동생?" 유운봉은 고개를 돌리고 멈춰서서 물었다. 여몽향은 대답 대신 그녀들의 손을 각각 하나씩 잡았다. 그리고는 내력을 끌어올려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스슷...... 그러자, 신연도 신법을 펼쳐 그녀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일행의 이동 속도 는 자연 나는 듯 빨라졌다. 달리면서 여몽향은 유운봉에게 물었다. "어때요? 언니!" "고마워! 동생....." 문득 이슬 한 방울이 그녀의 두 눈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 * * 울창한 단풍나무 숲. 자욱한 안개속에... 드문드문 붉거나 노란 단풍이 든 그 숲의 풍경은 일면 환상 적이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웠다. 일행은 그 수려한 경치에 취해 잠시 본래의 목적도 잊고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소롯길은 그 사이로 나 있었고, 그 넓이는 겨우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였다. 그 길을 따라 일 각 정도 걸어 들어가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담장과 둥근 월 동문이 나타났다. 일행이 그 앞에 이르자, 문 뒤에서 귀엽게 생긴 동자 하나가 나타나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폐장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무료로 환자 분들을 치료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동자는 뒤쪽에 나 있는 작은 소롯길을 가리켰다. "성수께선, 지금 안에 계신가요?" 여몽향이 예를 갖추어 묻자, 동자는 신연의 등뒤에 업힌 장우를 힐끗 바라보더 니, 미소하며 말했다. "장주님을 찾아오셨나 보군요?' "......." "장주님께서는 처소에 안계실 경우가 많은데.... 손님들께서는 운이 좋으시군요. 마침, 장주님께서는 방금전에 돌아오셨습니다." "아, 정말이에요?" 유운봉이 반색하며 붇자, 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그렇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말이 끝나자, 동자는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정문 뒤 쪽으로 난 소롯길을 따라 대략 십여 장 정도 걸어 들어가자, 하나의 갈림길이 나왔다. 동자는 그 앞에 이르자, 우측을 가리키며 일행에게 말했다. "저쪽에서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안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동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하나의 넓은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 들이 줄지어 앉거나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앞쪽에는 거대한 규모의 삼층전각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동자가 그 말을 남기고 좌측의 소롯길로 사라지자, 일행은 동자의 말대로 정자 를 향해 걸어갔다. 정자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상인이나 관부인,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태도는 어떠한 불평도 없이 아주 조용 해 보였다.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그들이 이렇듯 조용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곧 이곳 성수장의 주인이 매사를 얼마나 공평하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저것이 바로 의원 본 건물인가 보죠?" 여몽향은 문득 줄의 맨 뒤에 앉은 한 상인행색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그 중년인 은 질문한 사람이 절세미모의 낭자임을 알아차리자 안색을 활짝 폈으나, 곧 신 연 등을 알아보고 고개를 다소 수그리며 말했다. "그, 그렇소. 저 안에는 많은 의생들과 약사들이 상주하고 있고, 진료실은 물론 처방실, 수술실과 입원실까지 구비되어 있소. 낭자는 잠시 앉아서 기다리면 금 방 차례가 돌아올 것이오." 여몽향은 그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는 쓸데없는 호의를 보이는 것을 보고 내 심 웃으며 말했다. "우린 실은 악양성수를 만나러 왔어요. 헌데, 이곳은 경우에 따라선 치료를 공 짜로 해주기도 한다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그 말에, 중년인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성수께선 치료를 하긴 하지만, 누군가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시고, 또한 가난한 자들의 치료비는 거의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요......?" 여몽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처럼 존경을 받는 의원이 있다는 사실이 자뭇 신기롭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좌측의 소로쪽에서 아까 그들을 안내했던 동자가 되돌아왔다. "장주님께서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저를 따르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동자는 좌측의 소로로 다시 향했다. 일행은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가산으로 만들어진 한 모퉁이를 돌자, 돌연 주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 특별히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단풍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주변의 나무들이 완 전한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 현란한 빛깔을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지각색의 단풍잎에 자욱한 안개가 스며들자, 그것들은 마치 오색영롱한 광채 를 찬연히 토하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정경은 필시 누군가의 정성어 린 손길이 닿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행은 절로 탄성을 토하다가, 우연히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모으게 되었다. 가산의 한 곳, 그것에 있는 단풍의 아름 다움은 가히 절정에 다다른 것으로, 이곳에서도 최고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곳 을 보고 있자니, 이 주변의 아름다운 광경은 그곳을 위한 한낱 들러리밖에 안되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연히 일행의 시선이 모아졌던 이유는 바로 그러한 까닭에서 였을 것이다. 그 런데, 일단 그곳에 시선을 모은 일행은 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무덤. 그곳의 한가운데에는 아주 작고 예쁘게 가꿔진 무덤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묘비는 희고 깨끗한 대리석이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망처 여몽청, 여기에 고이 잠들다. 백상인 읍립- 여몽향의 놀란 외침에,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몽향 은 묘비명을 가리켰다. "저, 저것! 언니의 무덤이...." 그러는 그녀의 두눈은 어느덧 빨갛게 변해 있었다. "......." 이에, 뒤따라 묘비명에 시선을 보낸 일행은 다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묘비 를 세운 자로 되어 있는 이름. 그것은 바로 그녀들이 찾고 있던 백상인이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이죠?" 유운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주벽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단지, 우리는 이곳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이 들어...." 그녀의 말에 유운봉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녀의 눈빛은 가볍게 흐려져 있었다. 삼년 전, 처음 본 순간부터 깊은 사랑에 빠져 버렸고, 이제는 그를 기다리다 못 해 주벽군과 함께 모시기로 결정하고 이 험한 강호에까지 애타도록 찾아나서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이제 그를 만날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기쁜 마음은 커녕 무거운 심사만 앞서는 것일까? 지금 당장 치료를 하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장우를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오늘 불망헌에서 있었던 그 수모스럽던 광경을 상기했기 때문인가? "혹시, 성수님의 이름을 말해줄 수 있어요?" 여몽향이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동자에게 물었다. 헌데, 동자는 고래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장주님의 이름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른다고요?" 여몽향은 동자의 말을 되뇌이며, 독백하듯 아미를 쌀짝 찌푸렸다. 허나, 그녀의 내심은 더욱 격렬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악양성수가 백상인일 확률 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되자, 그녀는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언니, 어서 가요!" 그녀의 말에 주벽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은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십여장을 걸어가자, 단풍나무 숲 가운데 한 채의 아담한 누각이 나타났다. 누각의 앞에 이르자, 동자는 안쪽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 "소공녀님! 그들이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에 주벽군등은 일순 흠칫했다. 소공녀라니....... 그럼, 이곳의 주인인 악양성수는 여인이었단 말인가? 그러한 사실에 일행은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누각의 문이 열리더니, 한 소녀가 조용히 걸어나왔다. 대략 나이가 십 오세 가량이나 될까? 전신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그 소녀는 정말 보기 드물게 예뻤다. 지극히 순결해 보이면서도, 사춘기적 정염이 막 피어오르는 듯한 그녀의 용모는 마치 방금 하 늘에서 내려온 성녀같았다. 특히 유난히 깊게 느껴지는 그녀의 두 눈은 마치 푸 른 보석이 박힌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출현에 일행은 잠시 멍해 있다가, 주벽군이 대표로 한 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이곳의 주인이 바로....?" 헌데, 홍의 소녀는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 손빈아에요. 이곳에서는 흔히 소공녀라고들 부르 고 있죠." 그 말에 일행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악양성수는 따로 있다는 말인가요?" 유운봉의 질문에 홍의소녀, 손빈아는 조용히 미소했다. "물론이에요! 장주님은 지금 죽림정사에 계시니, 제가 그곳까지 안내하겠어요. 그리고...." "........." 손빈아는 신연이 업고 있는 장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환자분은 여기에 두고 가세요." "아니, 그건......" 신연이 다소 우물쭈물하자, 손빈아는 미소하며 다시 말했다. "이곳은 성수장입니다. 그분이 이미 이곳에 오셨으니 돌아가실 염려는 없습니 다. 안심하세요! 그리고, 그분과 여러분과는 달리 인연이 없으니, 단지 그분이 무사히 치료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아니, 우리와 그와의 관계를 아가씨는 어떻게 그리 잘 알이죠?" 여몽향이 크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손빈아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장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기다리시 니, 그런 것은 나중에 알아도 무방해요." 주벽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연에게 장우를 내려놓을 것을 지시했다. "부교두, 그 분을 건네주세요!" "예, 군주님!" 신연이 장우를 내려놓자, 누각에서 서너 명의 사람이 나와서 장우의 육신을 둘 러메고 들어갔다. 그 광경을 바라본 손빈아는 누각 뒤쪽으로 나 있는 월동문으 로 걸음을 옮기며 일행에게 말했다. "자, 그럼..... 소녀의 뒤를 따라오세요!" "......." 일행은 다시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그녀의 뒤를 따르 며 주벽군이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는 아까 그분을 치료하러 이곳에 왔는데, 그분도 없이 우리를 부르는 이유 는 뭐죠? 그리고,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장주님은 우리를 알고 있단 말인가요? "지금 대답해 드릴 수는 없어요. 허나, 곧 장주님을 만나시게 되면 모든 것을 아시게 될거에요." 손빈아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누각의 뒤쪽은 다시 아름다운 단풍나무 숲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푸릇한 대나무밭이 보이고, 그 가운데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신비감과 의아함, 그리고 가슴 설레임에 벅차게 주방망이질 치는 심장의 고동을 겨우 억누르며, 일행은 발길을 재촉했다. -죽림정사 현판에 새겨진 필체는 용사비등하는 듯한 달필이었다.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자 욱한 안개는 대나무밭 전체를 온통 뒤덮고 있었고, 그 가운데 그린 듯 솟아있는 정자는 고요한 침묵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백삼인. 그는 입구쪽으로 등을 돌린 채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며 고요히 서 있었다. 정자 의 앞에 이르자, 손빈아는 일행을 남겨두고 혼자 정자 위로 올랐다. "그들이 왔습니다. 장주님...." ".........."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어, 나직한 음성을 흘려냈다. "수고했다, 빈아!" 헌데 그 음성을 무심코 듣는 순간 일행은 모두 가볍게 흠칫 놀랐다. 의외에도 매우 귀에 익은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예....." 손빈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되돌아 정자를 내려왔다. "어서들 올라가 보세요!" 손빈아는 일행에게 그렇게 말한뒤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일행은 잠시 머 뭇거리다가 손빈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주춤주춤 정자위로 올랐다. 백삼인은 그때까지도 몸을 돌리고 있다가 일행이 가까이에 이르자 그제야 서서 히 신형을 돌렸다. 그 순간, "앗....!" 그는 바로 불과 얼마전에 불망헌에서 기이한 해혈수법을 가르쳐 주고 사라졌던 평범한 용모의 서생이 아닌가? 설마 그가 신비의 악양성수였단 말인가? "어서들 오십시오.여러분이 폐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일행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못하다가 여몽향이 겨우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이 악양성수란 말인가요?" "그렇소." 백삼인이 너무도 간단히 대답하자 여몽향은 더욱 어이가 없어했다. "이럴 수가,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그때, 주벽군이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악양성수였군요. 아까의 그 도움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신연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신연도 그를 향해 정중히 고 개를 숙여보였다. "성수의 은혜 잊지 않겠소!" 이에, 백삼인은 조용히 미소했다. "별 말씀을, 그거야 의당 그래야 하는 일이지요." "이미 아실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불망헌의 주인을...." 유운봉의 말에 백삼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한 이제는 안심하셔도 좋 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유운봉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마와 했다. "의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그렇게 마음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보다......." "제가 여러분을 이리로 초청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백삼인의 말에, 일행은 가볍게 흠칫했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요? 우리는 전에 달리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물론 소생은 여러분을 오늘 처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여러분 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혹시, 아까의 제 행동을 나무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요?" 여몽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백삼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물론입니다" "대체, 그 이유란 것은 무엇이죠?" 주벽군이 눈빛을 빛내며 묻자, 백삼인은 가볍게 미소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잠시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그는 말과 동시에 정자의 난간 한 부분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무심코 취한 듯한 그의 행동에 돌연 장내에 기변이 일어났다. 그그글...! 일진의 돌 마찰음과 함께 정자의 바닥 한부분이 스르르 한쪽으로 밀려나는게 아닌가? ".....?" 일행이 잠시 흠칫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백 삼인은 그 지하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잠시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좋아요." "그럼....." 백삼인은 말과 동시에 앞장서서 지하로 내려갔다. 일행은 즉시 그의 뒤를 따랐 다. 일행이 모두 내려가자, 기관장치는 다시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어느덧 정자위는 다시 침묵 속에 잠기고, 백삼인과 일행이 서 있던 자리는 자욱 한 안개가 다투어 몰려와 메워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스스스스슷....! 미미한 파공음과 함께 돌연 사인의 인영들이 정자위로 나타났다. 헌데 그들은 바고 신도운형과 냉겸 등이 아닌가? "악양성수가 바로 그놈이었을 줄이야...! 허나 일단 내눈에 걸린 이상은 더이상 신비한 척을 할 수가 없지." 신도운형은 잠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다가 유령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자 냉겸등도 비쾌하게 그 뒤를 따랐다. 스스슷...! 그들의 신형은 흡사 안개속으로 녹아드는 듯 했다. 지하석실. 사방 서른 자 정도의 정방형으로 생긴 제법 널찍한 곳이었다. 악양성수를 따라 석실에 이른 일행은 저마다 흠칫 놀랐다. 석실의 전면에는 두 개의 촛불이 은은히 사위를 밝히는 가운데 검은 휘장이 드 리워진 제단이 하나 놓여 있었다. 따라서 장내의 기운은 어둡고 음산했다. 게다가, 검은 천이 덮인 제단 위에는 두개의 위패가 흔들리는 촛불 아래 은은히 드러나 있는데, 그 두개의 위패에 적힌 글귀는 바로 다음과 같았다. ---현백공상인지신위. ---현여몽청지신위. 그러니까 이곳은 죽은 백상인과 여몽청의 혼백을 모셔놓은 곳이란 말이 아닌 가? 그러한 글뒤를 본 일행은 저마다 한 순간 크게 놀랐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몸 이 굳어지고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이럴 수가...." 유운봉은 일시 넋을 잃은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주루루 흘렸고, 여몽향 은 그 글귀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제단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주벽군은 그 자리에 선 채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허나 그녀는 일행들 중에서 가장 이성이 강했기에 곧 감정을 추스리고 한쪽에 서 있는 악양성수를 향해 물었다. "저것은 무슨 뜻인가요, 설마 정말로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인가요?" 이에, 악양성수는 안색이 다소 침울해지며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가 묻는 것이 여여인의 죽음이 아니라 백상인, 그분이 돌아가셨느냐 하는 거에요!" 어느새 여몽향이 다시 되돌아와 눈시울을 붉히며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악양성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 그러다가 으윽고 그는 제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제단 앞에 이르러 두 개의 위패를 가리키며 분명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백상인은 죽었소. 제가 여러분을 특별히 초대한 까닭은 바로 이 사 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말에, "악......." 유운봉이 충격을 견디다 못해 짧은 비명을 지르며 혼절하여 쓰러졌다. "언니.....!" 여몽향이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울먹이는 어조로 흐느꼈다. 단지 주벽군만은 아 직 침착했다. "당신의 말은 어패가 있어요. 비록 당신이 우리가 찾는 그분을 찾고 있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헛되이 찾는 것을 단념시 키기 위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겠지만 분명 당신의 말에 분명 어패가 있어요." "그것은 어째서 그렇소?" 악양성수는 다소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중요한 사실이란....." "백상인, 그분은 천하의 보기 드물게 고강한 무예를 익히신 분이에요. 들리는 바로는 당금 천하의 맹주마저도 그를 어쩔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런 그분이 아 무런 소문도 없이 이토록 허무하게 돌아가실 수가 있을까요?" "....." "그건 불가능해요.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그분만은 결코 돌아가시게 할 수 없을 거에요! 그런데.... 한낱 악양의 의생 하나가 저런 위패를 차려놓고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한다고 해서 누가 그대로 믿어줄까요? 당신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 을 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분에 대한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자에 대해선 결코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주벽군의 안색엔 군주로서의 서릿발같은 위엄마저 흘렀다. 그녀 가 이렇게 감정이 격렬해지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이에, 악양성수는 한차 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탄식하듯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굳이 이 사실을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소이다. 나는 다만 어떤 의무감에서 그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릴 뿐이니, 그것은 한때나마 진정 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오." 주벽군은 눈빛을 빛냈다. "당신이 그의 친구란 말인가요?" 악양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서로 완전하게 우정을 나누었던 참다운 지기였소." "거짓말! 당신같은 자가 어떻게 그분과 감히..." 그렇게 갑자기 소리친 사람은 여몽향이었다. 허나 그녀는 곧 자신의 말이 실언 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안색을 붉혔다. 이에 대해 악양성수는 씁쓰레한 고소를 떠 올렸다. "맞소. 용모를 따지자면 당연히 나와 그는 서로 어울리지가 않지요." "미안해요. 내말은 단지....." 여몽향의 사과를 곁들인 변명에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인간을 단순히 외모로만 평가하는 사람이었다면 나와 그는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오. 당신의 그러한 생각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소." "....." 악양성수는 일행을 서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해서, 나는 기왕에 조금더 성의를 기울이기로 하겠소. 즉 내가 그의 친구였다 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말이오." 주벽군은 아미를 모으며 물었다. "그 증거란 것은 어떤 것이지요?" 악양성수는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와 나는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서로가 뜻이 통하는 지기였을 뿐만 아니라 서 로에 대해 모르는 바가 없었소. 아마 나처럼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 은 없을 것이오.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해볼테니 여러분들도 그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만큼 내 말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증거해 주시겠소?" 주벽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방법은 아주 좋군요." "...." 일행 모두가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악양성수는 일행을 조용히 둘러보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백상인... 그는, 이미 사라진 절세적인 가문 백가신화의 마지막 후예로 태어났 소. 백가의 가문은 인세 최고의 천형이라고 할 수 있는 무혈신마맥을 숙명적으 로 지닌 채 태어나는 가문이었으며, 한때는 무림에 신화적인 업적을 이루기도 했으나 결국 수명이 이십세 이하로 단축되어 스스로 무림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엇던 것이오. 그러나 그들의 천형을 벗기 위한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었으며, 그것은 그의 부친인 백군령이란 분의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결실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오." "........" "백군령, 그 분은 당시 만절산맥이란 절증에 걸려 있던 천향공주 주소혜와 혼인 을 하셨고, 각종의 대법을 베푼 결과 가문에서 비로소 천형을 벗어난 아이가 태 어나게 되었으니 바로 그가 백상인이오." "맞아요. 나도 그 얘길 언니에게 들었어요." 듣고 있던 여몽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시했다. 악양성수는 잠시 그녀에 게 시선을 보낸 뒤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모의 희생 뿐만 아니라 가문 대대로의 피맺힌 염원 끝에 태어난 그였기에 그의 타고난 자질은 과연 남달랐소. 그는 불과 열 살의 나이에 학문의 도에 대 해 배우기 시작하여 십 오세가 되어서부터는 더이상 알지 못하는 학문이 없게 되었소. 따라서 그는 이번엔 선조들의 자취가 어린 무림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되었소. 때는 그의 나이 십 칠세가 되던 해, 그는 죽림거사 고홍광의 도움으로 당시 무맹에서 천하기재들 일천명을 뽑아 신진양성을 위한 특수훈련을 시키던 잠룡곡으로 들어가게 되었소. 그때는 이미 십년 기한의 훈련이 팔년 째로 접어 드는 해였고, 아직 무공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그로서는 나머지 삼년동안 다른 수련생들을 따라가기란 정말 무리라고 누구나 말하곤 했지만, 그는 오히려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그 삼년동안 중원무림사에 파천황이라고 할만한 무예성취 를 이루어 내었던 것이오." "......" "이에 경악한 잠룡곡의 열 두 사부 불성십이무왕과 맹주, 그리고 봉공 원로원의 원로들은 그를 성급히 붙잡아 두려고 했지만 그는 주저없이 떠나고 말았소. 그 것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숙원이라고 할수 있는 무도의 궁극을 연구해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소." 악양성수의 말은 조용하고 나직하게 울렸지만 매우 깊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 다. 때문에 여몽향 등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의 내용에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끼 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 장내엔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악양성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 다가 주벽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계속했다. "헌데 그는 우연히 호북성 무창땅을 지나던 중 자신과는 사촌지간인 자하군주 주벽군 군주가 만절산맥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구해주었소." "......." 주벽군은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누구라도 그녀가 수긍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이에 악양성수는 이번엔 여몽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향주로 향했소.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서였지만, 사마 세력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 화화장의 진정한 주인인 신비노인을 만나게 되 었고, 지옥마성의 후예이자 대종사의 둘째아들인 신도운형이 실은 잠룡회의 석 장형으로 변장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공적을 올렸 소. 그런데 잠시 방심한 순간 그 신비노인이 나타나 신도운형 일당을 구해갔으 며, 그 외에도 그들은 만년화리의 태양내단과 그것을 지니고 있던 여몽청낭자를 납치, 폭행한 뒤 강간살해했던 것이오. 그는 뒤늦게나마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 고 그들을 추적했으나 그들은 이미 흔적없이 도주한 뒤였소. 더욱이 그 신비노 인의 능력이야말로 불가사의하다고 짐작되는 것이었기에 결국 그는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오....." 이렇게 악양성수의 설명은 끝났다. 여몽향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신도운형이였단 말인가요?" 악양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냉겸, 임방, 강소평이었소." "그럴 수가..." 여몽향은 신형을 가볍게 비틀거렸다. 악양성수는 그녀를 정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나의 말은 사실이며 여러분도 충분히 그것을 느꼈으리라 믿소." 여몽향은 처량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각종의 역용술에 정통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의 용모는 결코 변조된 것이 아니니 당신은 백상인, 그분이 아니고, 그분에 대해 그토록 소상하 게 알고 계시다면 친구가 분명하겠죠." 그 말에 주벽군은 비로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 각도 하지 않고 악양성수를 향해 물었다. "그 뒤 그분은 어찌되셨죠?" 악양성수는 탄식과 더불어 대답했다. "그는 그 뒤 삼년동안 그 흉수들을 찾기 위해 천하를 다 뒤지다시피 했소. 그러 던 어느날.... 그는 내게 느닷없이 찾아왔는데, 이미 그의 전신은 산 자의 몸이 아니었소. 내장이 이미 녹아버린 뒤였고 육신도 서서히 가루로 화해가는 중이었 소. 나는 결국 그의 치료를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 을 남기고 죽어갔소. 여몽청의 무덤을 잘 돌봐줄 것과 자신의 뼛가루를 그녀의 무덤에 뿌려달라고......" "진정한 영웅하나가 너무도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구려!" 듣기만 하던 신연이 긴 탄식을 불어내며 말했다. 악양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부신 자질에 비하면 실로 아깝다고 할 수 있지요. 허나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니 너무 지나친 미련은 버려 야 하겠지요." "하긴 그렇군요." 신연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긴 상념에 잠겨 있던 주벽군이 고개를 들고 처량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을 돌아가시게 한 자에 대해선 알 수가 없을까요?"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내 생각 같아서는.. 여러분 은 지금 일단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맞아요. 그분을 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주벽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간신히 혼절에서 깨어난 유운봉이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자, 주벽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봉매, 우리가 지금 나서보았자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해. 나중에 황제폐하께 이 일을 말씀드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길일거야." "언니......." 유운봉은 흐느끼며 울기만 했다. "이만 돌아가자, 봉매!" 주벽군은 유운봉을 부축해 일으킨뒤 악양성수를 향해 작별의 인사를 했다. "성수께서 보여주신 호의에 깊은 감사를 드려요. 사례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은 이만..." "사례라니 당치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걸 가지고." 악양성수의 겸가의 말을 들으며 그녀들 일행은 정자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듣자니 지나치게 어리석군! 그따위 헛수작에 속아 넘어가다니.." 한줄기 음소와 함께 장내에 느닷없이 서너 명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스스스슷..... 이런 돌변한 상황에 일행은 하나같이 크게 놀랐다. 더욱이, 방금 나타난 자들은 바로 신도운형과 그 수하들이 아닌가? "네, 네놈들은 바로....!" 여몽향이 신도운형을 향해 원한의 눈빛을 빛내며 소리쳤다. "흐흐흣! 그렇다. 이제야 알았으니 어리석군! 내가 바로 너와 닮은 계집을 해치 우고 태양내단을 취한 장본인이지. 비록 그와 상극인 빙정내단을 구하는데 시간 이 근 삼년이나 걸렸지만....." 신도운형의 말에, "내 네놈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여몽향은 치를 떨며 마악 발작을 하려는 듯 했다. 허나 신도운형은 음사한 미소 를 만면 가득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그렇게 서두를 것은 없어! 나는 보다 급한 볼일이 있으니 그 일부터 해결 한 다음에 보자구." 이어 그는 악양성수를 행해 고개를 돌렸다. "이봐, 고명하신 악양성수 나으리!" "......." "터무니없이 그런 낭설을 퍼트리는 이유가 뭐지?" 악양성수는 무심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터무니 없는 낭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하니 그게 낭설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신도운형은 악양성수를 향해 음험하게 냉갈했다. "......." "설마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면.. 후훗, 백상인, 그 작자의 지시를 받고 이러는 것인가? 나를 다시 마주보기가 두려워서 말이야."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에게 달리 할 말이 없소. 내 말을 믿고 안믿고는 오로지 당신의 자유 인 것이오." "뭐야?" 신도운형은 눈빛을 새파랗게 빛냈다. 그는 흡사 무쇠라도 꿰뚫을 듯한 지독한 안광을 줄줄이 뿜어내며 악양성수를 윽박질렀다. "끝까지 그렇게 우기겠단 말인가? 감히 나까지 놀림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단 말이냐?" "........" 악양성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은 신도운형더 러 마음대로 해보라는 뜻이었다. 이에 신도운형은 안광을 더욱 거세게 빛내다가 돌연 잔인하고 음산한 웃음을 떠올렸다. "흐흣! 좋아 좋아, 그건 그렇다고 하지. 그 놈이 있다고 해도 두려울 것은 없지 만 미리 죽어버렸다고 한다면 그리 손해될 것도 없겠지. 허나, 허나 말이야.... 네놈의 그 만년금구는 지금 어디에 있지?" "........" "그 손범이란 꼬마놈하고 네놈이 미리부터 짜고 한 짓이겠지? 흐흐, 그렇다면 네놈은 그 만년금구를 순순히 내게 바치도록 해라!" 허나, 악양성수는 여전히 묵묵부답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이에 신도운형은 안면근육 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심하게 안색을 몇차례 변화시키다가 돌연 고개를 끄덕이며 신형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물건이니 상관말라는 말인가? 좋아! 그건 그래. 사실 나는 네것 을 달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 그건 인정하겠어." 그가 그런 말을 하고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전혀 이외의 일이었다. 신도운형 은 그런 말을 하면서 안색이 부드러워지고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헌데, 그가 거의 습관처럼 옆으로 한 발자욱 걸음을 옮겨가는 순간의 일이었다. 오른 발이 땅에 닿으려는 순간, 왼발이 거짓말처럼 쾌속하게 미끄러지며 느닷없이 악 양성수의 면전으로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더욱 의외의 일이었다. "앗!" 그 돌변한 광경에 주벽군등 일행은 한결같이 놀란 외침을 했다. 허나, 그 놀란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신도운형의 신형은 악양성수의 면전으로 이미 쇄도해 있었다. 동시에 그의 허리어름에서 순간적으로 분출되는 공포의 쾌 검! 슈슉, 그러한 일련의 동작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처럼 아무 런 기척도 일지 않았다. 때문에 악양성수는 여전히 멍청하게 눈을 감고만 있었 는데, 지옥에서 솟아오른 악마의 혓바닥처럼 공포의 쾌검은 그대로 그의 인후부 를 향해 발작적으로 파고들었다. 뒤이어 푹, 붉은 선혈이 피어오르는가 싶었다. 아니, 누구나 그렇게 되리라고 예 상을 했다. 헌데, 현실의 상황은 또다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어 버렸다. 슷, 미미한 파공음과 함께 검끝은 악양성수의 목젓 부위에서 급격하게 멈춰서더니 그대로 살갗에 그저 닿기만 했던 것이다. 시퍼런 검날이 닿는 섬뜻한 촉감에 놀 랐음인가? 악양성수는 그제야 눈을 조용히 떴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엔 전혀 놀 라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 신도운형은 검날을 들이댄 채 멈춰서서 악양성수의 시선을 냉혹하게 들여다보 다가 문득 스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는 왜 피하지 않았지? 살기가 지겨워졌단 말인가?" "......" 그런데도 악양성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신도운형은 두눈 가득 살기를 내뿜었다. "후후!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단 말이군.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단 말인 가?" 그러자, 악양성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소. 그리고 나는 더이상 할 말이 없는 만큼 당신은 이제 마음대로 하시오. 나를 죽이든 살리든..." 악양성수. 그의 태도는 정말 상상외로 완고했다. 신도운형은 잠시 멍하니 그를 노려보다가 일순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훗훗, 그러니까 의원 특유의 고집을 부려보시겠다 그말인가? 만년금구에 대해 선 전혀 아는 바가 없고?" "....." 신도운형은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나... 나는 너를 살려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너는 정말로 만년금구의 행방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또 무예에 대해선 백지상태인 한낱 의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도운형은 문득 옆에 있는 냉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냉겸! 나 신도운형이가 과연 저런 한낱 의생의 고집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졸장 부일까?" 냉겸은 즉시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저었다. "천만부당입니다. 소종사께선 장차 천하를 이끌어 나가실 대영웅이십니다." "그렇고 말고!" 신도운형은 그렇게 소리치며 겨누었던 검을 거두었다. 동시에, 그는 좌수로 일 장을 갈겨버렸다. 핑-----! 쿠당탕.....! 일장을 맞고 한쪽 구석으로 뒹구는 악양성수를 바라보며 신도운형은 잔인한 음 소를 터트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음 차례는 당연히 주벽군등 일행이었다. 그녀들은 악양성수가 너무도 맥없이 당하는 것을 본 후라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지 목숨 뿐이라면 그만이겠으나, 여인의 순결이란 것은 왕왕 목숨보다도 귀중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의 본능적으로 신연은 주벽군의 앞을 막아섰고, "이 흉적, 덤벼랏!" 여몽향이 전신의 진기를있는대로 끌어올리며 신도운형을 향해 표독하게 외쳤다. 그러자, "흐흐, 그렇게 앙칼지게 달려들 것은 없어. 나는 말이야 너를 잠시 귀여워 해 주려는 것일 뿐이니까. 마침 여기는 장소가 아늑한 것이 아주 좋군." 신도운형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여몽향 등은 그 만 치를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 한 가지 의외의 사태가 벌어져 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장주님!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한줄기 앳된 음성과 함께 좌측의 벽면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보아하니 그것은 이곳 밀실의 비밀통로인 것 같았다. 벽면이 열리자 널찍한 통로가 생겨났고 그 속에서 한 동자가 걸어나왔다. 그 동 자는 장내의 상황에 전혀 의외였는지 돌연 멈처서서 눈을 동그렇게 떴다. 그러나, 그 동자보다 더 놀란 사람들은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동 자의 뒤쪽 통로 밖에는 지금 수십명의 금빛 관복을 입은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 던 것이다. "금군 친위대가....!" 주벽군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흡사 구세주라도 만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러한 표정은 그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미리 연락을 취한 것도 아닌데 저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모르겠습 니다." 신연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상 그들은 이번에 신연과 같이 파견된 암중세력으로 반드시 신연의 지시가 있어야 그 보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것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지시없이 이렇듯 적시에 출현했다는 것은 공교롭고도 기이한 일 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기랄! 이건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군." 신도운형은 신경질적으로 안면을 크게 일그러 뜨렸다. 수십 명의 관군. 그들의 무예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보고에 의해 황실에서 들고 일어날 것이 두 려운 것이다. 신도운형은 신경질적으로 대충 그들을 둘러본 다음 냉겸을 향해 말했다. "가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유령같이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그에 뒤질세라 냉 겸등도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스스스스슷...... 때아닌 금군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모면하자 주벽군 등은 안색을 폈다. 이어 떠 나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악양성수가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단지 안색이 파리할뿐 상처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듯 했다. 주벽군이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했다. "떠나시겠습니까?" 구벽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은 이대로 돌아가서.... 황궁에 도착하면 달리 방도가 생각나겠지요." 악양성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주벽군 일행은 성수장을 떠너갔다. 여몽향 역시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언니인 여몽청의 무덤은 옮길 수가 없고 위 패 역시 한번 본 것으로 족할 테니까. 평범한 용모의 서생. 악양성수는 묵묵히 선 채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그의 시선은 고요 했다. 어둠. 칠흑같은 어둠. 그 어둠속에서 밤하늘의 무수한 뭇별들은 차갑고 투명한 빛을 뚜렸다. 그 투명 한 별빛들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되어 가슴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 듯 했다. 그것은 곧 고통이였다. 세상에 고통을 일부러 자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별 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곧 고통이라면 그는 별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여기 한 사람....... 그는 계속해서 별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남다른 사람이어서 그 고통들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밤하늘의 별빛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희미하게 흐려져 갔다. 대신 동쪽 하늘에는 뿌옇게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다. 간밤의 어둠이 고통이었다면 이 여명 은 축복이라도 되는 것일까? 점차 뚜렷하게 밀려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그는 느릿하게 신형을 일으켰다. 죽림정사. 그가 간밤에 밤새도록 앉아 있었던 이 정자의 곳곳에는 눈물의 흔적처럼 이슬 방울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죽림정사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푸른 대나무밭을 지나 단풍나무숲으로 들어서자 그의 발길은 자연히 어느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 성수장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울긋불긋 흐드러지게 피어난 오색백화처럼 아름다운 울타리를 헤치고 들어서면 그 자연적인 단풍나무 울타 리 한가운데 소담스럽게 솟아오른 무덤 하나. "청매....." 그때, 문득 그의 뒷전에서 인기척이 일어 그를 어두운 상념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는 서서히 신형을 돌렸다. 이어 그의 전면엔 십이세 가량의 영준한 소년의 모 습이 보였다. 그는 바로 손범이었다. "범아, 무슨 일이냐?" "저어, 사부님....." 말을 하다말고 손범은 우물쭈물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새벽운기 도중 갑자기 구결이 생각나지 않아서....." "금단선공 말이냐?" "예." 손범은 대답한 뒤 안색이 빨갛게 변해 고개를 숙였다. "금단선공을 가르친지 벌써 삼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암기를 못했단 말이냐, 공연히 이러라고 빈아가 시킨 것은 아니고?" "그, 그것은...." 손범은 내심이 들통나자 더욱 안색을 붉혔다. "하하......" 악양성수는 한차례 맑은 웃음을 터뜨린 뒤 말했다. "내가 이러는 것을 네 누이는 공연한 청승이라고 이제는 꼼짝도 못하게 하는구 나. 알았다. 내 곧 갈테니 새벽차나 준비하라고 일어라!" "예, 알았습니다." 손범은 그제야 난처한 처지에서 해방된 듯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늘 이렇게 훤히 아시는데 누나는 공연히 나만 난처하게 만든단 말이 야." 달리며 중얼거리는 손범의 음성을 들으며 악양성수는 미소했다. 손범과 손빈아. 그들 두 남매야말로 그가 한동안 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존재 였다. 그는 거처인 누각을 향해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X X X 여몽향. 그녀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누각이 바라다 보이는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 다. 악양성수는 놀라지는 않았지만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웬일이시오? 당신들은 이미 떠나지 않았소?" 여몽향은 소롯길을 가로막고 허리춤에 두 손을 턱하니 올려놓았다. 밝아오는 아 침햇살에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몹시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특히 지금 악양성 수는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주언니와 유언니는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갔지만 저는 가지 않았죠. 웬줄 아세 요?" "글쎄요. 그것 아마 관부와 무림의 차이 때문이 아니겠소?" "아마 그런 이유도 있었겠죠." 여몽향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허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어요." "........" "궁금하지 않으세요?" 여몽향은 미소하며 물었다. 악양성수는 역시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는 별 흥미가 없소. 모든 사람의 행동에 궁금해한다면 정작 내가 해 야할 일을 하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소?" 여몽향은 잠시 새침해지더니 말을 이었다. "허나 이 이야기는 당신이 필히 유의해서 들어야 할 거예요. 왜냐하면, 이 이야 기는 전적으로 당신에 관한 것이니까요." "내 얘기란 말이오?" 악양성수는 짐짓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어제 저녁 주언니 등과 헤어져 악양성내에서 잤어요. 그런데 잠을 자면 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더군요." "........." "나는 본래 의문이 생기면 잠을 못자는 성미라 밤새워 그 의문에 대해 생각을 거듭했죠. 결국 새벽녘에 나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가 있게 되었어 요.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이렇게 달려온 것이에요. 당신을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줄은 뜻밖이었지만요." 악양성수는 미소하며 물었다. "그래, 그 의문이란 대체 무엇이오?" "그것은......." 여몽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악양성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최초의 의문은 불망헌에서부터에요. 신도운형은 처음에 나를 죽이려 했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알 수 없는 암중의 방해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장우는 거의 죽은줄 알았는데 살아났어요. 그 옆에는 당신이 있었어요. 또한 동정호변 에서의 암중인물과 황실의 금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점. 그들은 누군가 가 서찰로 알려주었다고 했는데... 이 모든 의문의 내용은 사실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신은 그 암중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여몽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바로 그 암중인이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그 서찰의 필체라도 대조해 보았단 말이오?" 여몽향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서찰은 읽자마자 소각되는 특수한 것이었다고 하니 아무리 해도 필체를 대 조해 볼 수는 없었지요. 단지 나는 다른 곳에서 그 증거를 찾아냈어요." "그 증거는 단지 추측에 불과하겠군요." "하지만 나는 확실할 수 있어요." 악양성수는 미소하며 물었다. "그럼 그 증거란 것은 무엇이오?" "우선 당신은 불망헌에 있었고 장우가 거의 죽었을 때 아무도 모르게 그를 되 살려 놓았어요. 그리고 은밀히 장우를 성수장으로 데려오도록 유도했지요. 동정 호변에서의 그 일 역시 만년금구는 당신의 것이었으니 당신의 암중행동이었음 이 분명해요. 그리고 물론 당신은 성수장에서 모든 일을 예측하고 미리 금군에 게 연락을 취해 놓았던 것이에요." 악양성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절세의 무공이라도 지녔다는 말인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오? 당신은 물론 신도운형까지도 내가 백면서생이라는 것을 인정 했지 않소?" "물론 그랬었지요. 허나......." 여몽향은 힘있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당신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확보하고 있어요." "......." "바로 당신이 신연부교두의 혈도를 풀 수 있는 해혈법을 일러준 것 때문이에요. 당신은 그것이 의술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의예와 무공이 다르다 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에요. 당신은 달리 할 말이 있나 요?" 악양성수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무슨 범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구려. 허나 내가 그 해혈법을 알게 되었 던 것은 우연히 그에 관한 공부를 했었기 때문이니 반드시 내가 무공을 알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겠소?"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런 우연도 있을 수가 있겠지만, 전후사정을 검토해보면 그런 우연은 너 무도 많이 겹치고 있어요. 계속되는 우연이란 없는 거에요. 그건 필연일 뿐이죠. 즉, 당신은 자신이 심오한 무예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숨기고 암중에서 여러가지 일을 유도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가장 결론적인 말인데...." ".........." "천하가 비록 넓다해도 젊은 나이에 당신같이 높은 무예를 소유한 사람은 오직 하나, 백상인 그 자신 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바로 백상인이에요." 그 말에, 악양성수는 어이없는 듯 웃었다. "그의 얼굴이 나와 닮았단 말이오?"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용모는 그와 전혀 달라요. 그리고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의 용모가 전혀 변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구요. 허나... 그때는 당신의 무예를 고려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죠. 무예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변장술도 불가사 의해진다는 이치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특히 백상인 그 분은 의술도 당신에 못지 않은 사람이니 모든 상황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하하....." 악양성수는 웃으며 말했다. "좋소. 내가 그럼 백상인 본인이라고 합시다. 이제 됐소?" 그러자, 여몽향은 돌연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아니에요. 당신이 백상인이라면 당신은 나의......" "낭자의 언니를 말하는 것이오?"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본문에는 이런 규칙이 있지요.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가 있다면 죽은 언니의 남편 즉 형부에게 시집을 가도록... 이것은 전통적으로 본문의 세력다툼을 방지 하기 위한 것인데 당신은 결국 나의 남편이 되는 셈이죠." "그것은 너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겠소?" 악양성수는 눈쌀을 다소 찌푸렸다. "아니에요." 여몽향은 두눈 가득 애정을 담뿍 담고 말했다. "그것은 제게 있어 희생이 아니라 축복이에요. 저는 기꺼이......" 악양성수는 탄식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백상인이 아니오. 만일 내가 무예가 고강하고 백상인 본인이 었다면 왜 신도운형을 그냥 돌려보냈겠소? 특히 이 모든 일을 굳이 암중으로 할 필요가 있었겠소? 그냥 드러내놓고 해버리면 간단한 것을. 더욱이 어제는 신 도운형에게 죽음을 당할뻔 하기도 했는데, 낭자 같으면 원수에게 목숨을 그렇 게 함부로 맡기겠소?" 여몽향은 그가 갑자기 완강하게 부인하자 잠시 안색이 흐려졌다. 허나 그녀는 곧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신도운형을 그냥 돌려보내고 모든 사람들을 속인 것은 황궁의 인물인 주언니와 유언니를 이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죠. 그리고 보다 원 흉인 그 신비노인을 끌어내기 위해서일 거에요. 신도운형의 공격을 피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당신은 그의 내심을 미리 짐작했던 것이 틀림없어요."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가 막 말을 하려는데, 여몽향이 얼른 다시 말을 이어갔다. "특히, 나는 그래도 강호에서도 알아주는 미모를 가지고 있어요. 나같은 여자라 면 남자들은 누구나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취하려고 들죠. 일단 쌀이 익어 밥이 되면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그야말로 손에 쥐어준 떡도 마다하 니, 세상에 그런 사람은 오직 백상인 그분밖에 없어요." "그 모두가 사고의 맹점일 뿐이오."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아무리 추론을 펼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 생각 엔 우리가 모르는 제 삼의 암중인이 있다고 보오. 그럴 경우에도 모든 상황은 거의 틀리지 않는데 낭자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았소?" "........." 여몽향은 그 말에 대답을 못했다. 악양성수는 그녀를 향해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낭자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이젠 그만 물러서 주었으면 좋겠소. 자, 이제 나는 아침밥을 먹으러 가야 하니까요." 악양성수는 말과 동시에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여몽향은 살짝 앞을 비켰다가 얼른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할 말이 없어서 그렇지 당신을 포기한 것은 아니 에요. 당신은 제게 아침 한끼 대접할 수 있겠죠?" 악양성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만약 이렇게 나를 자꾸만 따라다니다가 내가 정말 마음 이 변해 쌀을 밥으로 만들어버리면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그렇다면 함께 사는거죠 뭐. 당신이 나를 제압할 정도로 무공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백상인이라는 말이 되고,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일이니까요." 여몽향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하자, "하하......" 악양성수는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말없는 가운데 여몽향은 바짝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덧 동녁하늘엔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X X X 누각. 그곳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한 정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주인인 악양성수 의 성정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누각 안은 조용하기는 커녕 다소 분주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그것은 누각 안에 언제부턴가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은 여자였고 용모가 하나같이 절세적인데다 가 무려 세명이나 됐다. 그러니 아무리 목석이라고 한들 분위기가 들뜨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 악양성수는 들어서다말고 안색을 다소 찌푸리며 물었다. 마침, 그녀들을 손빈아 가 상대하고 있다가 얼른 다가와 대답했다. "천상삼화입니다. 방금전에 오셨는데 장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악양성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각의 아래에는 지금 세 여인이 고요히 선 채 악양성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 양성수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다가갔고, 여몽향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 랐다. 한데 걸어가면서 여몽향은 갑자기 눈이 부심을 느꼈다. 정말 그 세여인들은 아 름다왔던 것이다. 그녀 역시 절세적인 미모로써 이름을 날려오긴 했지만 지금 그녀들을 보고 나니 이건 마치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 같았다. (세상에......!) 그녀는 맹세코 이러한 아름다운 용모를 전에 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아 름다움이 아닌 신의 조각품 같았다. 그런데, 이 세상엔 그러한 아름다움을 그저 건성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실로 기이했다. 악양성수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다가가더니 지극히 사무적이고 일상적인 어투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오. 세분은 무슨 일로 오셨소?" 그러자, 세 여인들 중에서 눈빛이 유난히 푸르도록 투명하고 용모가 흡사 요정 처럼 아름다운 녹의여인이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성수께 한가지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악양성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에, "당신은 만년금구를 지금 가지고 있나요? 우리는 그 말에 대한 당신의 명확한 대답을 원해요." 헌데,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말씀드릴 수가 없소." "그건 왜죠?" 녹의여인이 아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만년금구는 이미 동정호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소. 그런 것을 느닷 없이 내게 와서 그 행방을 말하라니 내가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소?" "그렇다면 당신은 만년금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단 말인가요?" 녹의여인이 다시 묻자, 악양성수는 그 말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내 저었다. "보다시피 나는 지금 식사전이라 몹시 시장한 편이오. 게다가 식후엔 중요한 환 자들을 돌봐야 하니 당신들은 그만 이곳을 떠나주었으면 고맙겠소." 그때, 전신이 마치 황홀한 장미처럼 아름다운 홍의여인이 음성을 높여 옥음으로 소리쳤다. "이봐요, 백상인! 당신은 정말 우리들을 모른척 하긴가요?" 악양성수는 가볍게 눈쌀을 찌푸렸다. "백상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아니란 말인가요?" 홍의여인의 말에 악양성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백상인은 백상인이고 나는 나일 뿐인데 어찌 내가 백상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오?" 허나, 홍의여인은 지지않고 말했다. "당신이 데리고 있는 남매 손범과 손빈아는 과거 백상인이 손노인에게 부탁받 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당신과 함께 살고 있죠?" 악양성수는 더욱 어이없어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 아이들을 다시 맡았기 때문이오. 그런다고 내가 백상인이 될리가 있겠소?" "흥, 당신의 변장술은 그럴 듯하지만 환왕사부가 오시면 금방 들통날 거에요." 이에,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겠소." 그 말과 함께 악양성수는 몸을 비켜 누각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였다. 그순 간 나머지 한 여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의여인. 녹의여인이나 홍의여인과는 달리 그녀는 지극히 성결스런 아름다움을 지닌 여 인이었다. 마치 어둠가운데 피어오른 한떨기 꽃처럼 그녀는 차라리 마력적이라 고 해야 옳았다. "무슨 짓이오?" 악양성수는 앞길이 가로막히자 다소 짜증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죄송해요. 성수께 무례한 점 사과드리겠어요." "......." 그제서야 악양성수는 태도가 다소 누그러지며 백의여인을 바라보았다. 백의여인 은 악양성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실은 우리는 그간 한 사람을 너무도 오랫동안 찾아헤맸기에 잠시 이성을 잃었 던 거에요. 성수의 너그러우신 양해 바래요." "그러면서 결국 만년금구의 행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악양성수의 말에 백의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그 이야긴 하지 않으셔도 되요. 아, 먼저 우리 소개를 해야겠군요?" 백의여인은 녹의여인과 홍의여인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제갈청하라고 해요. 모두들 우리 세 명을 가리켜서 흔히 천상삼 화라고 부르곤하죠." "......." 악양성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여인, 즉 백리유는 이번에는 여몽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분은......." 이에 여몽향은 얼른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는 여몽향이에요. 천상삼화의 말은 많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세분을 직접 뵙 고 보니 영광이에요." 그 말에 백리유를 비롯하여 제갈청하, 그리고 남궁려려는 눈빛을 빛내며 여몽향 을 바라보았다. "알고보니 공공문의 새로운 소문주였군요. 헌데 실례지만 성수와는 어떤 사이신 지 물어봐도 될까요?" 백리유의 말에 여몽향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다른 것은 없어요. 언니들이나 똑같다고나 할까요? 저는 어제 저녁에 이분을 처음 보고 오늘은 이렇게 아침식사에 초대받아 가는 길이거든요." "아, 그랬었군요! 나는 여낭자를 보고..........." "내 쌍둥이 언니 생각이 났었겠군요? 내 언니가 언니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었 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여몽향이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붙임성있게 대답해주자 천상삼화는 다같이 미 소하며 그녀에게 호의를 보냈다. "그래요?" 백리유의 이 말에 그녀들은 다시 한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헌데 이때, 그녀 들은 급히 미소를 거두어야만 했다. "다른 볼일이 없다면 나는 이만 실례하겠소!" 악양성수가 그 말과 함께 누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천 상삼화는 잠시 흠칫했다. 그녀들은 따로 명분이 없는지라 잠시동안 주춤하면서 얼른 그를 막아서지 못했 다. 그러는 동안에 악양성수가 누각의 계단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전혀 예측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홀연 한줄기 싸늘한 음성이 들림과 동 시에 한 사람이 유령같이 계단위에 나타났던 것이다. "흐흐, 네 명의 여협들께서 고작 한명의 백면서생을 당해내지 못해 쩔쩔매다니 정말 볼만한 일이군!" 이에, 천상삼화와 여몽향은 다함께 크게 놀랐다. 다름아닌 그는 바로 신도운형 이었던 것이다. "앗!" 여몽향은 순간 비명을 내질렀고, "아니, 저자가......?" 천상삼화는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했다. 신도운형. 그는 그녀들을 향해 조소하듯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천상삼화! 그리고 여낭자는 이렇듯 자주 보게 되는 걸 보니 나와 는 필시 인연이 많은가 보군!" 여몽향이 한기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소리치자, 신도운형은 여유있게 음소를 터 뜨리며 말했다. "흐흐, 파렴치하다니. 그런 욕설은 과히 듣기에 좋지가 않군! 나는 지금 이 성수 나리를 모셔가려고 왔는데 정 마음이 나빠지면 당신까지 데려가는 수도 있어." 이어, 신도운형은 악양성수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렇지 않소, 성수?" 이에 대해 악양성수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 허나...나는 당신이 모셔간다고 해도 따라갈 마음이 별로 없소." "핫핫핫......" 신도운형은 일진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과연 명언이군! 따라갈 마음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설사 따라갈 마음이 전혀 없 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모르나? 이 양반아!" "......" 신도운형은 두눈 가득 불길같은 안광을 내쏘다가 돌연 안색을 부드럽게 고치며 말을 이었다. "허나, 쥐뿔도 없으면서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당신의 그 태도는 정말 마음에 들어. 어제도 그래서 반했지만 말이야. 어때? 기왕에 가는 바에야 순순히 따라 나서는 것이........." 악양성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소." "이유! 그런 것도 미리 말해줘야 하나?" 신도운형은 두 눈을 통방울같이 뜨면서 짐짓 의아해 하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좋아 좋아, 이유를 말해주면 생각을 달리 해보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무 심할 수야 있나? 좋아, 들어보라구! 그러니까 말이야....." 신도운형은 일부러 중요한 말이라도 하려는 듯 말을 길게 끌었다. 이에 자연히 악양성수가 좀더 자세히 들으려고 고개를 드는 바로 그때였다. 슥, 신도운형의 우수가 앞쪽으로 쭉 뻗어나오면서 환상처럼 비쾌하게 흔들리는게 아닌가? 동시에 흡사 거짓말처럼 무수한 그물을 형성하고 덮쳐드는 백색광채의 지풍들. 슈슈슈슉! 도대체 이러한 기습공격은 너무나도 의외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극쾌했다. 도무 지 악양성수가 그 지풍을 피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헌데 과연, 악양성수는 멍청히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퍼퍼퍼퍽........ "윽" 그 무수한 지풍들을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받은 악양성수는 갑자기 전신이 기이하게 굳어지며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쿠당당........! 아혈마저 짚혀 일시 말도 못하게 된 악양성수는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이상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그를 향해 신도운형은 우수를 거두고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흐흐, 가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당신에게 만년금구가 있을 것 같단 말이야. 아니 설사 없다고 해도 당신은 있다고 해야만 해! 그래야만 나를 쫓는 자들이 없어질 테니까 말이야." "..........." 물론 악양성수의 대답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엉겁결에 당해버 린 그의 시선은 여전히 놀라는 기색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그에 대해 신도운형은 은은한 흉소를 떠올렸고, 오히려 크게 놀란 사람은 천상 삼화와 여몽향이었다. "비열한 자식! 무예도 모르는 분에게 기습을 가하다니...." 여몽향은 한쪽에 선채 어쩔 줄 모르고 치를 떨었으나 그렇다고 달려들어 악양 성수를 구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천상삼화는 천천히 신도운형을 향해 다가들었다. 그녀들이 좀더 일찍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은 신도운형의 공격이 워낙 빨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악양성수가 그토록 쉽게 당할 줄은 전혀 예측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흐흐, 네년들이 내게 덤벼보겠다는 말이냐?" 다가드는 천상삼화를 보고 신도운형이 그렇게 말하자, 제갈청하가 싸늘한 음성 으로 대꾸했다. "악적, 낯짝도 두껍구나! 감히 대낮에 우리 앞에 나타나다니." 그녀들은 어느덧 신도운형의 삼 장 앞에 와서 섰다. 그 거리는 그들로 볼때 누구도 쉽게 공격이 가능한 거리였다. 허나 신도운형은 위축이 되기는 커녕 흉소를 날렸다. "흐흐, 어리석군! 이젠 상황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느냐? 내가 네년들이 두 려워서 이 자에게 기습을 한 줄 아느냐?" "그럼 뭐지? 천성이 원래부터 비열하기 때문인가?" 제갈청하는 앞에 팔짱을 낀채 차갑게 내쏘았다. "뭐라구?" 신도운형은 일순 크게 노한 듯 눈을 부릅떴다. 그를 향해 노화를 돋구기라도 하듯 제갈청하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색마에다 좀도둑이라고 말해줄까? 설마 그것마저 부인할 정도로 낯짝 이 두꺼운 건 아니겠지?" "이런, 빌어먹을 계집이.......!" 신도운형은 그녀가 자신의 치부를 끄집어내자 참을 수 없는 노화에 안면을 흉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일순 살광을 뿌렸다. 그를 향해 제갈청하는 조소하듯 말 을 이었다. "이봐, 신도운형! 아니 석장형이라 불러줄까? 웬만하면 과거 잠룡회 때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회주님, 부회주님하고 불러보는게 어때?" "이,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군!" 신도운형은 돌연 빽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그는 정말 참을 수가 없는 듯 험하게 일그러진 안면 가운데 두눈을 흉흉하게 부릅뜨더니 갑자기 제갈청하를 향해 벼락같이 일장을 쳐왔다. 쿠쿠쿠쿠......... 그것은 눈부신 백광. 그 위력은 가공스러우면서도 또한 빨랐다. 이에 대해 너무나도 급작스런 상황이 라 피할 도리가 없어진 제갈청하는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우우웅, 그녀의 쌍장이 둥글게 원을 그리자 기이한 파공음이 울리며 그 속에서 맑고 투명한 묵광이 덮쳐오는 백광을 향해 눈부시게 폭출되었다. 콰우우우...... 찰나지간, 그 두 가지 가공스런 장력은 도중에서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콰쾅....... 츠츠츠츳........ 그 굉음과 압력이 어찌나 강렬한지 근처의 누각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뒤흔 들렸다. 이에, "윽!" 신도운형은 그 압력을 견디다 못해 무의식중에 뒤로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헌 데, 상대 제갈청하 역시 뒤로 한 걸음만 물러섰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 해 두 사람은 똑같이 놀란 표정을보였다. 신도운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했고, 제갈청하는 안면 가득 희열의 빛을 떠올렸다. "호호! 태양내단과 빙정내단을 복용했다던 네 무공이 사실은 별게 아니었군! 단 지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어!" 이어 그녀는 나머지 두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두분 언니! 어서 이 악적을 협공해서 끝장내 버려요!" 말을 함과 동시에, 그녀는 가장 먼저 신도운형을 향해 덮쳐갔다. 우우우웅! 콰우우우우........ 비쾌하게 원을 그리는 그녀의 쌍장에서 눈부신 묵광이 폭출되자 신도운형은 일 순 주춤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지체없이 반격을 개시했다. 백색의 가공스런 장력. 쿠쿠쿠쿠쿠..... 상황은 아까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묵빛과 백색의 두 장력은 아까처럼 허공에 서 격렬하게 뒤엉켜들었다. 헌데 이때였다. 갑자기 신도운형이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더니 우수를 돌연 앞으로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는게 아닌가? 그러자, 그의 좌수는 막대한 두가지 장력을 흐트러뜨렸고, 우수에서 이는 가공스런 흡인력이 제갈청하의 신형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헉!" 제갈청하는 눈을 크게 떴으나 그녀는 이 돌변한 사태에 대한 대비책이 미리 마 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백리유와 남궁려려가 뒤늦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앗!" "아니!" 그녀들이 하릴없이 비명만 질러대는 가운데, 제갈청하의 전신은 맥없이 신도운 형의 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뒤어어, 슈슈슈슈슉! 신도운형의 손끝에서 무수한 백색의 지풍이 날며 제갈청하의 전신으로 파고들 었다. 파파파파팍....... "악!" 지풍을 맞는 순간 제갈청하의 전신은 학질걸린 것처럼 부르르 떨리더니 신도운 형의 앞 불과 석 자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이어, 통제능력을 상실한 그녀의 나 무토막처럼 굳어버린 육신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신도운형의 전면으로 안겨들 듯 넘어져 갔다. 천상삼화의 하나, 화중성 백리유, 화중화 남궁려려와 함께 그녀를 화중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설명은 나무토막 운운했지만 그것은 그녀 본인의 느낌일 뿐, 그녀의 몸이 어찌 갑자기 나무토막으로 변하랴. 다소 마른 듯 하면서도 풍만하고 탄력있는 그녀의 육신은 그야말로 요정과 같 고 꿈과 유혹의 덩어리인 것이다. 천하의 기재 중의 기재들만 모인 잠룡회에서 도 아무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그 옥체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품속으로 안 겨든다고 생각해 보라! 필시 누구든 막론하고 우선 정신이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예외는 있었다. 신도운형은 흥분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냉철해졌으며, 더욱이 번개처 럼 우측으로 몸을 피하면서 다시 한번 무수한 지풍을 날렸던 것이다. 슈슈슈슉......! 이번의 지풍은 아까와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천라지망. 마치 천지를 온통 뒤덮은 그물처럼 백색지풍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더니 일순간 소리없이 전신대혈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비록 소리는 없었지만 그것을 맞는 즉 시 제갈청하의 두눈은 크게 부릅떠졌다. 쿠당.....! 맥없이 땅바닥으로 나뒹구는 제갈청하를 바라보며 신도운형은 득의의 흉소를 날렸다. "흐흐, 너는 본래 천상삼화 가운데에서도 머리가 비상하기로 유명했지. 그 많은 안건들이 거의 네 머리속에서 나오곤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그런 머리도 내 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나의 속임수에 그냥 속는 척하면서 뒤에 역습을 하려고 했겠지만 말이야.. 내가 너의 의도를 환하게 읽고 있는 줄 은 몰랐을 것이다. 후후... 공연히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걸 미리 말해주지!" 신도운형의 말에,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하고 급히 달려들려고 했다. 허나, 그녀들은 곧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도운형이 손가락으로 제갈청하 의 천령혈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잠깐, 그녀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게 좋아!" 백리유는 내심 크게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너는 그럴리가 없다. 너는 우리 세 사람을 늘 장차....." 신도운형은 미소하며 말을 잘랐다. "장차 너희들 세 명을 부인으로 맞으려고 생각중이었지. 그러나 사실 나는 너희 들이 남에게 가지 않는다면 굳이 세 명 전부가 아니라 두명이나 단 한명이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내 말을 정히 못믿겠다면 한번 시험해봐도 좋아." 백리유는 그만 질색을 했다. "너, 너는 이제 어쩔 셈이냐?" 신도운형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빙긋 미소했다. "본래 나는 저 성수라는 의원녀석이나 데려가려고 했었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 졌지. 지금 나의 생각은 아예 천상삼화까지 데려가 내 부인으로 삼아버리겠다는 거야!" "미친놈! 누가 순순히 응할 줄 아느냐?" 남궁려려의 차가운 냉갈에 신도운형은 음소를 날렸다. "흐흐,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 보시지!" 그는 말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더니 이제는 바로 앞에 누워 있는 제 갈청하의 목젖에 검끝을 겨누었다. 이어 그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음랭한 음성 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셋을 세겠다. 그때까지 너희 두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혈도를 찍지 않는다면 이 여자의 생명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그 말에,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똑같이 안색이 홱 변했다. "더, 더럽게 비열한 놈....!" 남궁려려가 치를 떨며 소리쳤지만 신도운형은 다만 흉소로 대꾸할 뿐이었다. "흐흐, 내가 너희들을 직접 상대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편리한 방법을 두고 왜 하필 어려운 방법을 택하겠나? 하나.....!" 신도운형이 하나를 세자, 그녀들은 더욱 곤혹한 표정이 되었다. "저, 정말 그럴 셈이냐?" 남궁려려의 말에 신도운형은 득의의 흉소를 날렸다. "흐흐, 너희들 세 사람은 유달리 우의가 깊다고 들었다. 내 말을 순순히 듣는게 어때? 둘...... 후후......" 이에 대해 백리유가 문득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나무토막처럼 누워있는 제갈청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하매도 바라지 않는 일일거야. 따라서 우리는 지금 물러나서 다음의 기 회를 노리겠다." "뭐라고?" 신도운형은 뜻밖이란 표정을 짓다가 다시 음충맞게 웃었다. "후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백리유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옆의 낭굼려려를 향해 말했다. "려매, 우리는 이만 물러나기로 하자! 이미 맹주께서도 오셨으니 그녀를 구하기 란 그리 어렵지는 않을거야." "예, 언니!" 남궁려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악 신형을 날리려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백리유 역시 뒤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진기를 끌어올렸다. 이때, "흐흐흐흐......." 신도운형은 음침한 괴소를 날리면서 그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좋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 응분한 실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지!" 그 말에, 마악 신형을 날리려던 그녀들은 흠칫하여 신형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남궁려려의 말에 신도운형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별거 아니야! 그냥 가보라구. 나는 단지 천상삼화 중 한명의 나신이 얼마 나 황홀한지 알아볼 셈이니까." 그 말은 제갈청하를 희롱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이 아닌가?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자연 안색이 대변했다. "비, 비열한 놈!" 신도운형은 심한 갈등 속에서 우물쭈물하는 그녀들을 향해 음산하게 말을 내뱉 았다. "셋! 결국 나는 실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군, 흐흐....." 말과 동시에 그는 겨누었던 검을 거두더니 제갈청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제, 이 뒤에 벌어질 일이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이에, 결국 보다 못해 백리유가 소리쳤다. "머, 멈춰라!" "뭐냐?" 신도운형은 음산한 눈길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너의 뜻대로 하겠다! 제발 그것만은....." 백리유의 애원하는 듯한 어조에 신도운형은 피식 음소를 날렸다. "후후..... 그러니까 우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이건가?" "그, 그렇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 우정을 무시할 수는 없지. 우선, 혈도를... 아니, 혈도는 내가 직접 제압해주는 것이 좋겠지! 두손을 높이 쳐들고 내 앞으로 천 천히 다가오도록 해!" 신도운형은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로 고개만 들어서 음흉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치, 치사한 놈! 내 언젠가는 네놈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남궁려려의 분에 젖은 음성과 함께 그녀들은 신도운형의 주문대로 두 손을 높 이 든채 서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본 신도운형의 입가엔 절로 득의한 웃음이 번졌다. "흐흐, 정파의 무리들이란 족속들은 이렇게 어리석단 말이야! 한사람의 생명때 문에 다른 두 명까지도 서슴없이 희생하다니.... 어쨌든 나 신도운형이 정말로 천상삼화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그녀들은 나중 어쩌구 하지만 정말 쌀이 이미 익어 밥이 되었을 때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흐흐...." 이윽고 그녀들이 그의 삼장 앞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그 자리에 멈춰서!" 신도운형은 일갈과 동시에 허리를 폈다. 동시에 그의 쌍수가 환상처럼 비쾌하게 그녀들을 향해 움직였다. 슈슈슈슈슉........! 무수한 그물처럼 뻗어나가는 백색의 지풍들. 그 위력은 오히려 아까 제갈청하를 제압할 때보다 더욱 위력적인 것이어서, 그 가 그녀들의 무공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비록 무예차 이가 생사를 판가름하는 것이긴 해도 이미 경지에 오른 천상삼화의 무예를 결 코 경시할 수 없기에 그는 이 순간 신중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윽!" 신도운형은 두눈을 부릅떴다. 그는 일시 자신이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펼쳐가던 지풍을 급히 거두고 고개를 아래쪽 으로 숙였다. 한 자루의 장검. 그것은 지극히 그의 눈에 익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자신의 검을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툭, 툭......... 점점히 솟구치는 선연한 핏물속에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어이없게도 백색의 광 채를 뿜어내는 그 검을..... 갑자기 검이 마성을 일으켜 주인을 배신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그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한 백옥같은 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도 충분히 입증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악---!" 갑자기 미칠 듯한 심정이 되어버린 신도운형은 괴성을 지르며 신형을 벼락같이 뽑아올렸다. 슈파앗..... 그러자 그의 심장부위를 꿰뚫었던 장검이 날벼락처럼 뽑혀나가며 그 자리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신도운형은 그 상태로 뒤쪽으로 오 장이나 날아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이러한 사건. 이렇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련의 홍두깨같은 현실에 대해 제대로 정신을 차리 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을 일부러 그렇게 만든 장본인을 제외하고는...... 백리유와 남궁려려도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콸콸 솟구치는 선혈은 그러한 현실을 충분히 입증해주고 있지 아니한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검을 쥔 손의 임자. 즉, 제갈청하는 서서히 신형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그녀는 본래부터 거짓 제압당한 척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싸늘한 신색으로 걸어오자, 신도운형은 선혈이 솟구치는 검상 자리를 손 으로 틀어막으며 부르짖듯 말했다. "나,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나의 독문점혈수법은 설사 무맹의 맹주라도 풀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이에 제갈청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너는 내가 이혈대법 따위를 펼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상태였 겠지." 신도운형은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어째서......" 제갈청하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너는 과거에 잠룡무고 안에 우리가 모두 연성한 천지양극귀원공에 못지 않은 신공이 무려 다섯 가지나 있다는 걸 기억하겠지?" 신도운형은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 제갈청하는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계속했다. "그 도가오대신공들 중에 백리언니는 적양선단공과 미천대연신공을, 남궁언니는 건공미허공을, 그리고 나는 도반삼양공과 헌원전단공을 지난 삼년간 연성했는데 그것은 천지양극귀원공의 결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지. 그 중에서 도반삼양공 은 전신의 진기를 일반 상례와는 전혀 다르게 거꾸로 돌리는 것이었는데......" "........" "이것을 병행해서 연성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혈도를 짚어도 소용이 없어. 진기 를 거꾸로 돌려서 금방 금제를 풀어 버리기 때문이지." "그럴 줄이야....!" 신도운형은 안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여태 거짓 연극을 해왔단 말이냐?" 신도운형의 고개가 백리유와 남궁려려를 향해 돌려지자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 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누워있으면서 전음으로 작전을 일일이 말해주었으니까. 그러다 가 나는 네가 언니들을 제압하려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기습을 감행 했던 것이다. 너는 더 이상 할 말이 있느냐?" "흐흐흐흐......" 신도운형은 흉흉하게 웃었다. "백리유는 신성제일이고, 남궁려려는 미모제일이고, 제갈청하는 지혜제일이라 했던가? 나, 신도운형이 너의 꾀에 넘어갈 줄이야....." "호호, 너는 이 모든 것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리석 음은 다시 만회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 너는 어서 죽을 죽을 준비나 해라!" 싸늘하게 교갈한 제갈청하는 피묻은 신도운형의 검을 비켜잡고 비쾌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헌데, 그때였다. "크핫핫핫핫......." 신도운형이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리더니 신형을 번개처럼 떠올리는게 아닌 가? "앗.......!" 제갈청하 등이 놀란 경호성을 터뜨리는 사이에 신도운형의 신형은 절쾌한 속도 로 허공을 날아 단풍나무숲 저 너머로 사라져 갔다. "내가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겨우 이따위에 목숨을 잃을 것 같으냐? 다 음에 보자! 크크큽..." 그러한 음성은 일시 망연해 있는 천상삼화의 정신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그러한 치명상에도 이런 무공을 펼칠 수 있을 줄이야. 그의 진실한 무예 는 생각보다 더욱 대단한 것 같다." 백리유의 탄식하듯 하는 말에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저의 일검은 그의 심장에 다소의 상처를 남겼어요. 지금 추격하면 우리는 충분 히 그를 제거할 수 있을 거에요....." "그래? 그렇다면...." 그녀들은 잠시 의견을 맞춘뒤 급히 신도운형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신형을 떠 올렸다. 스스스스슷! 그녀들의 신형 역시 세점의 환상같은 인영으로 화해 단풍나무 숲 저 너머로 사 라져 갔다. 이리하여, 자연 장내엔 여몽향 혼자 남았다. 그녀는 잠시 격변한 사 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곤 흠칫 놀랐다. 악양성수. 그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신도운형에게 혈도까지 짚히 고 쓰러져 있던 그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은 실로 기이 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그도 제갈청하처럼 도반삼양공이라도 연성했단 말인가? 아니면 어느 누가 그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를 납치해서 데려갔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암중인은 대체 누구이며 또한 악양성수의 진실한 정체는 대체 무 얼까? 여몽향은 이러한 의문으로 잠시 골치를 썩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 녀는 잠시 고개를 내젓다가 이윽고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악양성수가 없는 한 이곳에 더이상 머무른다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스스슷................ "헉, 헉, 헉, 헉........!" 한여름 대낮의 뙤약볕은 유난히 무더웠다. 무예가 심후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지혈을 한 탓에 피는 더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진력이 고갈되고 지쳐서 숨이 턱에까지 차 있었다. 이제까지 무려 한시진 동안을 천상삼화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 쳤던 것이다. 물론 그의 목적지는 가까왔다. 그는 추적자들의 눈을 혼란시키기 위해 일부러 먼길을 무수하게 돌아왔던 것이 다. 이러한 것은 그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비록 한번의 패 배는 그를 치명적인 최악의 상태에까지 몰고 갔지만 그러한 패배가 두번째로 연결되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니까. 따라서 그의 성 격이 치밀한 만큼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의 상처는 대단 히 위중했다. 워낙에 치명적으로 깊숙이 찔린데다가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탓이 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도 이미 수십번을 죽었어야 할 치명적인 상처. 아무리 그라도 이제는 잠시 쉬어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는 겨우 수하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가까와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강소평을 치료하기 위해 수하들을 다른 곳에 남겨둔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신도운형은 아마 절망했을는지도 모른다. "헉, 헉, 헉, 헉........!" 신도운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신법의 속도를 배가했다. 이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느려진 속도로....... 그는 겨우 수하들이 머물고 있는 은밀한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스슥, "아니, 소종사님!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게 묻는 냉겸 뿐만 아니라 임방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향해, "나를 어서 안으로..." 신도운형은 그 말을 하고는 그대로 혼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앗, 소종사님!" "아니.......!" 냉겸 등의 놀란 경호성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X X X 잡초가 키를 넘을 듯 무성한 호변의 분지. 바람이 불면 꽃잎이 고개를 숙이고 스산한 소리를 내는 것은 당현한 일이다. 그런데, 이곳의 정경은 그저 바람이 불어서 생겨나는 그런 평범한 풍경이 아니었다. 살기. 햇빛에 번쩍이는 병장기들의 섬칫한 분위기와 은밀한 움직임...... 기이한 열기가 분지 전체를 휩싸고 있었다. 스스스슥! 분지 전체의 키를 넘을 듯한 잡초들은 일제히 한쪽으로 신속한 움직임을 보이 고 있었다. 바람이 가끔씩 불긴 했지만 그 움직임은 바람이 없음에도 계속되곤 했다. 그것은 바람이 아닌 그 어떤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군웅들. 실로 수백 수천이나 되는 수많은 군웅들이 일제히 어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분지가 끝나는 곳엔 작은 곡구가 보이고 그 계곡의 입구를 향해 군웅들의 행진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계곡안에 무슨 신비로운 괴물이라도 나타난 것일까? 모두들 소리없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나가는 이 거대한 규모의 기이한 행진은 얼핏 장엄경으로 보이 기까지 했다. 스스슷.........! X X X 신도운형은 깨어나면서부터 그 기이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무슨 일이냐?" 한 옆에 등을 기댄채 앉아 있던 강소평이 다소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적입니다. 소종사님!" "적이라고?" 신도운형은 흠칫 놀란 기색으로 강소평을 바라보았다. 강소평. 동정호변의 그 치명적인 내상으로 인해 그는 전신의 심맥이 무수히 끊겼었고 얼마전에 신도운형이 내공으로 이어준 탓에 겨우 임방 등의 등에 업혀 거동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그것 때문일까? 그는 지금 매우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거의 광적이다시피 했던 그의 성격이 이렇게 침울하게 변모될 줄이야. 인간은 역시 환경과 현실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신도운형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쾌유한 상태의 그라면 이렇게 적이 다가왔다는 사실에 대 해 흠칫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놀라기는 커녕 가소로운 조소를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냉겸과 임방은?" 강소평은 고개로 동굴의 입구쪽을 가리켰다.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 신도운형은 사태가 더욱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가 극심한 부상을 당한 이상 커다란 문제가 없는 한 냉겸이나 임방중 한 사람은 자신의 곁에 있어주어야 하 는 것이다. 헌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지금 상황이 매우 심상치 않음을 말해주 는 것이었다. "그들이 어느새 뒤쫓아왔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군!" 신도운형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말했다. "나를 좀 일으켜라!" 그런데 강소평은 다소 우물쭈물했다. "저는....." 그 광경을 보고 신도운형은 내심 아차했다. 강소평은 지금 엄중한 내상하에서 누구를 부축할 입장이 못되는 것이다. "아, 내가 직접하지!" "........" 신도운형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을 관통한 상처가 매우 깊은 탓에 몸을 일으키는 도중 무서운 고통이 몰려들었다. 때문에 그는 심한 짜증이 들었으나 곧 몸을 일으켜 앉을 수가 있었다. "윽....." 동굴의 입구는 기역자로 꺾여있는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소종사님.......!" 얼핏 보기에도 그들의 기색은 몹시 어두워 보였다. "적은 몇명인가, 냉겸!" 신도운형의 물음에 냉겸은 안색이 굳어진 채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아니, 수천명 쯤 되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신도운형은 크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임방이 옆에서 부연설명을 했다. "그들은 현 무림의 고수들과 무맹의 인원들이 가세된 군웅들입니다." "이럴 수가...." 신도운형은 어이없는 듯 중얼거렸다. "그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떼거리로 몰려왔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군! 이건 마치 내가 이렇게 되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들이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냉겸의 질문에 신도운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의 생각은?" 냉겸은 굳은 안색으로 대답했다. "혈로를 뚫어야 합니다." "혈로를........? 좋아, 그렇게 해야겠지." 신도운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가 이번 강호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런 한심한 처지가 되어버릴 줄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냉겸이 우물쭈물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자면, 우리는 인원을 줄여야 합니다." "인원을.....?" 신도운형은 의아해 하다가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다. 혈로를 뚫기 위해선 아무 래도 최소한 한 사람의 호위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환자가 두 사람이나 되니 그 최소한의 호위마저도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신도운형은 그렇게 말하며 냉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 냉겸은 말없이 강소평을 바라보았다. 요컨데 그 뜻은 간단했다. 한 명의 호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두 환자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신도운형이 희생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순간, 강소평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의 의도를 직감 한 그는 대뜸 전신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 그럼 저, 저를........" 신도운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후 장례는 잘 치뤄주겠다, 소평!" "저, 저를....." 인간은 나약해질 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 느끼게 되는 것일까? 강소평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안색이 아예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일까? 거의 움직임이 불가능하던 강소평은 다음 순간 신도운형의 발아래 엎드렸다. 전신을 벌벌 떠는 그 모습은 이미 과거의 잔인악 랄했던 그가 아니라 몹시 가련해 보였다. 신도운형은 안면을 크게 찌푸렸다. "강소평! 우리를 실망시킬 참이냐?" "하지만...... 저는 죽기 싫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소종사님!" 강소평은 안면근육을 부르르 떨면서 식은땀까지 줄줄 흘렸다. "그렇게 살고 싶단 말인가? 하지만 너는 지금 네 발로 갈 수가 없지 않느냐?" 신도운형의 말에서 일말의 희망이 느껴져서인가? 강소평의 두눈에는 일순 백광 이 번뜩였다. 그것은 일종의 처절한 광기와도 같았는데... 그는 다음 순간 벌떡 신형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나는 갈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정신이 강해졌다 해도 그것은 어느 정도일 뿐이다. 겨우 일어났 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한번 크게 휘청하더니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 았다. 쿠당당.....! "으악!" 대번에 그의 입속에선 붉은 피가 솟구쳐나왔다. 그 고통이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일텐데도 강소평은 여전히 몸을 일으키려고 몸을 바둥거렸다. 그 모양을 보고 냉겸이 소리쳤다. "냉겸, 네가 아무리 일어설 수 있다해도 너는 갈 수 없다! 소종사님을 위해 죽 음을 달게 받아라!" 그 말에, 과연 강소평은 바둥거리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허나 그는 곧 다시 소 리쳤다. "그렇다면 나를 그냥 놔두고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냉겸은 대답을 못하고 신도운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연 강소평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 신도운형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에 강소평은 눈에 불을 켰다. "왜 안됩니까?" 신도운형은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네가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었다면 나는 너를 그냥두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너를 믿을 수가 없다. 너는 무맹에 끌려 가면 필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불어버릴테니까." "뭐, 뭐라고!" 강소평의 두눈에 다시 예의 광기가 진하게 떠올랐다. "그럴 수가 있느냐, 신도운형!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 나 를 이렇게 대접할 수가 있느냐?" "미쳤군!" 신도운형은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래, 미쳤다! 나는 미쳤다, 이자식아!" 강소평은 다시 신형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미처 일어서지 못하고 또다시 험하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우왁!" 그의 입속에선 다시금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광기속에서 쉬지 않았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너를 위해 내가 죽어야만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 느냐! 개자식! 신도가야, 내가 너를 죽여 심장을 씹어먹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 다. 우와왁! 개자식, 죽일테다!" 그러더니 그는 정말로 험악한 기세로 죽일듯이 신도운형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신도운형은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때, 퍽----- 둔중한 파육음이 울리면서 강소평의 몸뚱이가 맞은편 벽쪽으로 날아갔다. "우왁!" 퍽! 쿠당당..... 옆에 있던 냉겸이 그에게 발길질을 가한 것이다. 당연히 강소평의 온몸은 이미 말이 아닌게 되어버렸다. 입속에선 연신 시뻘건 핏덩이가 꾸역꾸역 밀려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은 이미 지각을 상실하여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기 시 작했다. 더욱이 그의 두 눈은 그 무서운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하얗게 돌아갔 다. 그런데도, 그는 천천히 기어오더니 두 손으로 냉겸의 두 다리를 붙잡고 매 달렸다. "이봐, 나는 죽어선 안돼! 귀,귀신들이 나를.. 나를 잡아가려 한단 말이야. 전에 내게 죽은 그 자식들이 무서운 귀신이 되었는데 말이야... 나는, 크캇캇캇캇..." 그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것 같았다. 냉겸은 두 눈 가득 냉혹한 빛을 번쩍 빛냈다. 동시에, 스팟! 그의 허리춤에서 한 순간 예리하고 쾌속절륜한 광채가 환각처럼 한바탕 허공을 그었다. "컥!" 그 쾌검에 강소평의 목은 대번에 떨어져나갔다. 두 눈 가득 부릅뜬 수급이 한쪽 으로 뒹구는 동시에 목 부위에선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파아앗.... 허나 그것도 잠시, 곧 그 기세가 줄어들더니 그 자리에는 검붉은 피가 뭉클뭉클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 처참한 광경에 절로 눈살을 찌푸린 신도운형은 고개를 돌리며 지시했다. "이만, 떠나자!" 그말에, 임방이 즉각 그의 앞에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제게 업히십시오, 소종사님!" "좋다!" 신도운형이 임방의 등에 업히자 냉겸이 앞장을 서서 그들은 동굴을 떠나기 시 작했다. 그 뒤에 진득한 피비린내만이 가득 남았다. X X X "앗, 온다!" 스스스슥.......! 동굴 밖에는 무수한 군중들이 모여 있다가 우르르 신형을 날려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은연중 동굴에서 나오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은밀하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들 삼인이 동굴입구에 나타났다. 그러자, 주위는 금세 살벌 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냉겸은 냉랭하게 굳은 안색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 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임방이 신도운형을 업은 채 뒤따랐다. 그들이 걸음을 옮겨감에 따라 장내의 살벌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바로 그때, "크하하하핫...." 한줄기 앙천대소와 함께 키가 구척이나 되는 장한 하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 았다. "과연 저 신도가는 심한 중상을 입었구나! 하핫, 너희들은 얌전히 내게 그 물건 을 바치도록 하여라!" 장한의 얼굴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게 그는 한자루 날 이 시퍼렇게 선 감산도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족했다. 그러나 냉겸은 음산한 살소를 머금었다. "흐흐, 네 이름이 뭐냐?" 느닷없이 묻는 바람에 장한은 일순 의아해 하다가 곧 안면을 실룩거리며 대답 했다. "나는 관동의 왕대라는 사람이다. 너는 나를 본적이 있느냐?" 냉겸은 고개를 저었다. "무턱대고 달려드는 네놈의 조상이 의심스러워서 한번 물어본 것 뿐이다." 냉겸은 말과 동시에 그의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에, 장한은 안색이 부아 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어버렸다. 상대는 자신의 조상을 욕했을 뿐만 아니라, 자 신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다가들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 죽일 놈이!" 한번 벼락같이 씨부림과 동시에 그의 감산도가 비호같이 허공을 갈랐다. 휘익......... 몸을 날림과 동시에 날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그의 이 일초식의 도법은 매우 위 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크게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냉겸의 신형이 별안간 그의 전면으로 갑작스럽게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허나 다음 순간, 냉겸의 허리춤에선 어느 틈엔가 쾌속절륜한 백광이 폭출되고 있었다. 슉! "크왁!" 장한은 목구멍이 불에 데인 듯 화끈해짐을 느끼며 크게 비명을 질렀다. 냉겸의 쾌검이 그의 인후부를 찌르고 다시 돌아간 것이다. 쿵! 냉겸은 썩은 고목처럼 쓰러지는 장한의 시신을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헌데, 이 광경을 본 궁중들이 이번엔 무더기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죽여랏!" "흐흐흐흣!" 냉겸은 그들을 바라보며 음산한 웃음을 머금었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허공위로 떠올라 부유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슷! 파츠츠츠츳...... 그와 검이 하나가 되었다고 느껴질 찰나 허공엔 수십 개의 무지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혈우였다. "우와왁!" "아 악 !" 후두두둑..... 쿵! 쿠당당..... 수십 명의 군웅들과 어우러져 돌아가는 냉겸의 신형은 눈부신 검기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단지 잘려나간 육신의 토막들과 자욱하게 뿜어지는 선 혈.... 그리고 시신들만이 땅바닥위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싸움이라 하 기에는 너무도 잔인악랄한 일장의 도살극 같았다. 이때였다. "멈춰랏!" 한줄기 웅후한 음성이 사위를 진동함에 따라 장내의 사람들은 일단 그 움직임 을 멈추었다. 스슥! 얼른 임방의 앞에 내려선 냉겸은 전신에 온통 피에 젖은 몰골이 마치 아수라를 연상시켰다. 허나 그의 냉혹하게 빛나는 두 눈은 도저히 꺼질줄 모르는 지옥의 마화처럼 가일층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앞에 홀연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전에 동정호변에서 마주쳤던 헌원 백과 오단의 단주들이 아닌가? 특히 헌원백은 신도운형이 중상을 당한 것을 알 자 두 눈을 부릅뜨고 다가왔다. "잔인무도한 놈들 네놈들은 하늘도 무섭지 않느냐?" "흐흐, 하늘이라?" 냉겸은 흉흉한 음소를 날리다가 헌원백을 향해 내뱉듯이 물었다. "너도 덤벼볼 작정이냐?" 헌원백은 일시 안면을 꿈틀거렸으나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네놈들이 가져간 만년금구는 어디에 있느냐?" "뭐라구?" 냉겸이 되묻자 헌원백은 안면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당시 신도가는 물속에서 그냥 나왔지만 사실은 이미 만년금구의 내단을 그때 가져갔었음을 알고 있다. 만년금구는 비록 무겁지만 내단은 그럴리가 없을 뿐더 러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으니까. 더욱이 신도가는 당시 이것을 제지하려던 본 맹의 전주님을 살해하지 않았느냐?" "흐흐흐...." 냉겸은 음산하게 웃더니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래서 네놈들은 어쩌겠단 말이냐?" "하룻강아지 같은 놈!" 헌원백은 두눈을 번쩍 빛내더니 역시 앞으로 쭈욱 다가들었다. 그의 별호는 혼 원벽력수이다. 앞쪽으로 다가듬에 따라 그의 솥뚜껑같은 쌍수에선 점차 푸른 기 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허나 그것을 바라보는 냉겸의 시선엔 전혀 위축감이 들어 있지 않았다. 쌍반간 의 거리가 삼장 이내로 좁혀지자, 그는 오히려 번쩍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스슷! 급작스럽게 덮쳐드는 냉겸의 신법은 몹시 빨랐다. 이에 헌원백은 일순 흠칫했으 나 곧 두눈 가득 무쇠라도 녹일 듯한 안광을 내뿜었다. 콰르르르릉! 벼락같은 뇌음을 동반하고 푸른 빛의 강기가 거대한 회오리를 동반하고 냉겸을 향해 덮쳐갔다. 그것이 바로 헌원백의 성명절학인 벽력수. 이런 상황하에선 누 구나 일시 주춤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헌원백으로선 전혀 예측못한 상황이 벌 어머다. 다가들던 냉겸의 신형이 한차례 희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오히려 더 욱 쾌속한 속도로 쏘아오는게 아닌가? "이런 무모한....." 헌원백이 일순 당황해하는 찰나, 슈팟! 냉겸의 허리춤에서 일순 쾌검이 불을 뿜었다. "헉!" 그 쾌검은 헌원백이 느끼기에도 지극히 빨랐다. 일순 크게 놀란 헌원백은 본능 적으로 고개를 좌측으로 틀었다. 슥! 다행히도 냉겸의 쾌검은 그의 우측 목부위에 화끈한 느낌과 함께 기다란 혈흔 만을 남겼다. 이와같은 일은 실로 찰나지간의 일이라 헌원백은 절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허나 그는 이미 오랫동안 무수한 격전을 거친 백전노장인지라,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쾌검은 발검과 수검의 연결동작인데, 그것이 필사적 인 한수였을 경우 반대적으로 수검동작은 그만큼 늦어지게 되고 잠시 주춤하게 된다. 지금 냉겸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자신의 부상과 동귀어진도 불사하고 필사의 한초를 전개했었는지라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다음 동작으로의 연 결에서 잠시 허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칠 헌원백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잠깐 주춤해있는 냉겸을 향해 날벼락같은 벽력수를 내갈겼다. 콰르르르릉! 푸른 빛의 뇌기를 동반한 강기는 쾌속절륜하게 냉겸의 전신을 향해 휘몰아쳐갔 다. 이를 본 냉겸은 안색이 대변했다. 피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왔을 뿐만 아니라 그 위력의 강대함은 그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냉겸은 저 도 모르게 눈을 감고야 말았다.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이다. 그 모양을 바라본 훤 원백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가 죽지 않는다면 내 성 을 갈고 말리라!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느 닷없이 그의 면전에 희끗한 금빛이 어른거린 것은... 동시에 헌원백은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강대한 저항력을 느꼈다. 콰콰콰쾅! 흡사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터져나오고, 헌원백은 일순 현기증을 느끼며 왈칵 선혈을 토해냄과 동시에 뒤쪽으로 무려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윽!" 내심 신음을 토하며 헌원백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두 눈을 부릅뜨고 전 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냉겸. 그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대신 그의 옆에는 지금 한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금의 청년. 그는 바로 임방의 등에 업혀있던 신도운형이 아닌가? "목숨을 쉽게 포기하다니 어리석군, 냉겸! 목숨이란 최후의 한순간까지 이를 악 물고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냉겸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음성까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신도운형은 지금 중상을 당한 상태가 아니란 말인가? "이, 이럴수가......!" 헌원백은 내심 아연실색했다. 그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상태라면 그들의 지금 이러한 행위는 흡사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든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만무전주마저 살해한 그를 누가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인가? 맹주나 원로들이 특별히 오지 않는 한...... 그런 생각을 하며 헌원백은 내심 안색을 무겁게 굳혔다. 신도운형. 그는 냉겸에게 가벼운 질책을 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헌원백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다소 창백해 보일 뿐 그의 태도는 전혀 중상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 너는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헌원백은 굳은 안색으로 무의식중에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신도운형은 여전 히 다가가며 음산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럼 당신이 보기엔 어떻소?" "나, 나는...." 헌원백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허나 그는 더이상 물러나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 흥, 대단한 장부이시군!" 신도운형은 나직하게 뇌까림과 동시에 미간 가득 은은한 살기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이때, "헌원형, 걱정마시오! 그는 단지 겉으로 부상이 없는 척 할 뿐이오." 싸늘한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냉막하고 강인한 인상 을 주는 무뚝뚝해 보이는 사내. 그는 바로 오단 중 천왕단의 단주인 섬전일비 악탄이었다. 이에, 신도운형은 그를 향해 살광을 번쩍였다. "네놈이 대신 죽겠단 말이냐?" "후후후, 못할 것도 없지!" 악탄은 냉막하게 웃으며 느릿하게 신도운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쌍방간 의 간격이 삼장 가량으로 가까와지자 그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네놈이 감히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신도운형의 음산한 음성에 악탄은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이다." "그래?" 신도운형은 음산한 살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그는 문득 다시 악탄을 향해 다 가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의 걸어가는 모습이나 보조는 일반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 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결코 평범하게 볼 수가 없었다. 특 히, 당사자인 악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그들과 같은 고수의 경우에는 삼 장의 거리란 결코 넓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거리였다. 얼마든지 출수나 선제공격이 가능한 거리인 것이다. 그런데 도, 악탄은 걸어오는 신도운형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섣불리 공격을 하 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신도운형의 전신이 모두 헛점투성이였기 때문이다. 그리 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신도운형의 진실한 무예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탄은 신도운형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진땀만 뻘뻘 흘렸다. 그러다가, 신도운 형이 드디어 일장 안에까지 다가오자 그는 출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 지 않을 경우 그는 도저히 이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므로...... 따라서, 그는 이를 악물고 출수를 감행했다. 발검. 그는 쾌검의 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천왕단은 쾌검고수들만 소속되어 있는 비밀저격집단이며 악탄은 그곳의 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발검 정도는 남들보다 눈부시게 빠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결코 지금까지 발 검을 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발검이란 단순한 동작이 얼마나 힘겹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해야 했다. 내심 이를 악물고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나서야 그는 비로서 진성한쾌검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찰나가 일겁이라도 되는 듯했다. 슉! 과연 그가 펼친 쾌검은 지극히 빨랐다. 소리도 일지 않았고, 한줄기 빛살은 그 저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정확했다. 그의 쾌검은 정확히 신도운형의 미간 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어 그것이 거의 반쯤 날아갔을 때 그는 거의 성공 을 확신했다. 신도운형은 여전히 피할 엄두도 못내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검끝이 거의 신도운형의 미간에 닿을 무렵, 그는 갑자기 목표물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흩어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 그러한 광경은 차라리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동시에, 그는 상대의 우수 끝에서 무엇인가 한줄기 번쩍이는 것을 발견했다. 백광 그것이 백색을 띤 광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다음의 일이었고, 실로 섬뜩한 공포 속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좌측으로 돌림과 동시에 번개같이 신형을 떠올렸다. 그러나, "윽......." 그는 목젖부위가 갑자기 화끈함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그뒤로는 그의 의식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악형" 뒤로 날아오는 악탄의 몸을 받아든 사람은 금사단의 단주인 금사신군 갈천홍이 었다. 그는 급히 받아든 즉시 악탄의 상세를 살폈다. 상흔. 그것은 목젖의 인후부가 있는 곳을 반치 정도 비켜나가 관통하고 있었다. 상처 의 자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끈했다. 그나마 바로 인후부를 관통하지 않은 것은 악탄의 행운이라 할만했다. 비록 혼절해 있기는 하나, 치명상이 될 뻔한 상처는 실제로는 치명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갈천홍은 내심 안도감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며 신도운형을 주시했다. "이것이 바로 일선지로구나!" 갈천홍의 놀란 어조에 신도운형은 음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견문이 그리 모자라지는 않군!" "믿을 수가 없다. 한낱 지풍이 이런 위력을 내다니.......!" "정 믿을 수가 없다면 네가 직접 경험하게 해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말이다!" 신도운형의 그와 같은 말에 갈천홍은 내심 흠칫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신도운형. 그는 방금 결전에서 안색이 좀더 창백해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너, 너는 그럼 어쩔 생각이냐?" 갈천홍은 내심 갑갑한 마음이 앞서서 소리쳐 물었다. 이에 신도운형은 음침하게 미소하며 대꾸했다. "물론 나는 보이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이는 그런 살인마는 아니지." "그, 그렇다면......" 말끝을 흐리며 갈천홍은 상관연과 강석초, 당문량 등을 돌아보았다. 이 일의 진 퇴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헌데 이때, "죽음이 두려워서 이자와 타협한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못하겠소!" 거대한 덩치의 헌원백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헌원형! 타협하자는 것이 아니라 악형의 치료도 해야 하니, 일단 다음의 기회 를 노리자는 것이오. 그때는 우리는 보다 나은 방법으로 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 오." 갈천홍은 설득하듯 말했다. 그러나, 헌원백은 고개를 저으며 막무가내였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 자리를 떠서 다른 방법을 연구한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소! 그것이 목숨을 아끼는 비겁한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이에 상관연이 나섰다. "승패는 병가지상사고 진퇴를 아는 자라야만 군자라고 했어요. 헌원대협께선 괜 한 고집을 그만 부리고 맹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때요?" 상대가 있는 곳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지만, 신도운형의 무예가 불가사의하다는 점을 두고 볼때 그들의 이러한 판단은 실상 수긍이 가는 것이 었다. 허나 헌원백은 끝내 고집을 부리고 고개를 저었다. "싫소! 그렇게 하려거든 당신들이나 하시오! 나는 혼자 이자들을 상대해서 만년 금구를 받아내고 전주의 복수를 하고야 말테니....." 그가 이렇게 하는데에는 아까 악탄의 용기있는 행동에 대한 자기자신의 가학적 인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본래가 이런 호걸다운 면모를 극도로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의 그러한 마음과 고집을 아는 갈천홍 등은 내심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 다. 헌데, 한걸음 내딛은 헌원백이 마악 신도운형을 바라보며 뭐라고 입을 열려 고 할 때였다. 돌연, 번쩍--- 아까와 같은 백광이 번쩍이며 그의 미간 사이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헉!" 헌원백은 그만 어쩔줄 몰라 입을 딱 벌렸다. 그와 같은 것은 갈천홍도 마찬가지 였다. 도대체 이 백광은 아무런 소리나 기척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 을 만큼 빨랐다. 따라서, 헌원백이 그 백광을 보았을 때는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도운형이 다시 급작스럽게 일선지를 전개한 것이지만, 헌원백은 그것의 위력이 설마 이정도일줄을 몰랐던 것이다. 찰나지간, 그 백광은 헌원백 의 미간에 하나의 뚜렷한 구멍을 만드는가 싶었다. 헌데 이때 또다시 하나의 이변이 발생했다. 마악 기세좋게 헌원백의 미간에 구 멍을 뚫으려던 그 백광이 돌연 바로 그 앞에서 안개처럼 흐려지더니 사라져 버 리는게 아닌가? "앗!"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쌍방은 모두가 놀랐다. 그들은 처음엔 시전자인 신도운 형이 스스로 지풍을 거둔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신도운형에게 쏠 린 순간, 그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신도운형의 표 정은 극도의 불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더욱이, 한 순간 그의 안색은 무섭게 창백해지더니 돌연 고개를 숙여 선혈을 한 모금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우욱!" 그러더니 그는 즉각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냐, 나와라!" "............"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이 일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럼, 그 어떤 암중인이 있 어서 헌원백을 도왔단 말인가? 물론 헌원백 자신이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소 멍한 표정이다가, 신도운형의 말을 듣고는 곧 사방을 바라보며 포권 의 예를 취해보였던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헌원가의 목숨을 건져주다니 고맙소! 나타나 주신다면 나 는 당신께 충분히 사례하리다!" "........." 허나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방이 마치 쥐죽은 듯 고요해지자 방 금전의 이변은 흡사 꿈이 아니었나 여겨졌다. 헌원백은 고개를 휘휘 젓더니 다 시 포권하며 말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나 헌원백에게 사례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 나를 이렇게 은혜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인간으로 만들 참이시오?" ".........."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대신 이때, 헌원백이 사방을 향해 한눈 을 파는 사이에 신도운형은 두 눈을 음침하게 빛내더니 돌연 주위에서 장검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상관연이 알아보고 헌원백에게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헌원대협!" "응?" 그 소리에 헌원백은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때는 이미 신도운형의 신 형이 한 마리 비조처럼 그를 향해 덮쳐들고 있을 때였다. "네놈은 제기랄 야비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일순 눈을 부릅뜬 헌원백은 급급히 소리치면서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신 도운형의 공격이 단순히 피하기만 한다고 되는 일인가? "상대를 앞에 놓고 한눈을 팔다니 어리석군! 후후......" 음산한 실소와 함께 신도운형은 곧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스스스슷..... "이런 제길......" 헌원백은 두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안색이 창백해졌고 그의 절기인 벽력수를 끌어올릴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무예 차이는 너무 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 여유도 갖기전에 그 두 사람의 간격은 급속도로 좁혀졌 고 그 거리가 일장이내로 접어든 순간, 번쩍! 신도운형이 들고 있던 장검이 불을 뿜었다. 헌원백의 심장부위를 향해......... 신도운형이 굳이 심장을 노린 이유는 미간 따위를 노리기엔 헌원백의 키가 너 무 컸고 거리가 그만큼 멀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검초는 빨랐다. 단지 빠르다는 말 외에, 그 빠르기를 달리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있을까? 냉겸 의 쾌검이나 악탄의 쾌검도 빨랐지만 결코 이것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그것은 절대의 빠르기였다. 헌원백은 분명 그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쾌검을 보았다. 허나 안색만 그저 핼쑥 하게 질릴 뿐 전혀 피할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헌데 바로 그때, 헌원백의 신형이 좌측으로 급격하게 이동했다. 그 순간의 갑작 스런 움직임에 대해서 헌원백은 뭐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초 인간적인 보호본능과 잠재력이 한순간에 발휘된 것 같았고, 어쩌면, 그 누군가 의 힘에 의해 움직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평소 그런 잠재력이 전혀 없었다 는 점을 미루어 볼때 아마도 후자의 추측이 더욱 신빙성이 있으리라. 아무튼, 이 갑작스런 변화에 의해 신도운형의 극쾌한 검초는 원래의 목표가 아 닌 헌원백의 우측 가슴을 찌르게 되었다. 게다가, 그순간 또 한가지의 이변이 생겨났으니...... 푸스스........ 이게 웬일인가? 신도운형이 찔러가던 검이 돌연 가루로 화해 부서져 내리는게 아닌가? 그만 신도운형은 두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은 둘째치고라도 그는 우 선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모처럼 마음먹고 공격한 것이 무위로 끝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다음 순간 비쾌하게 일장을 날렸다. 쾅! "우왁!" 헌원백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훌훌 날아갔다. 입에서 분출되는 한무더기의 선 혈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내상은 매우 심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명백했다. "헌원형!" 당문량이 즉시 헌원백을 받아드는 것을 바라보며 신도운형은 안색이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변해 버렸다. 그는 소름끼칠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한차례 바라본 후 곧 다시 앞으로 다가들기 시작했다. 이때, 갈천홍이 나서서 소리쳤다. "잠깐, 기다리시오!" "뭐냐?" 신도운형은 어둠같이 냉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갈천홍은 그가 멈춰서길 기다려 대답했다. "당신은 아까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 "특히 당신은 일문의 소종사란 신분인 만큼 한번 한 말에 책임을 지리라 믿소!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타협을 하도록 합시다! 당신도 보아하니 정상이 아닌 것 같고, 우리도 부상자가 둘이나 되니 이만 싸움은 다음으로 미루는게 어떻소?" "......." 신도운형은 대답없이 그들을 쏘아보기만 했다. 이에 갈천홍 등은 그가 헌원백 때문에 화가 난 것으로 짐작하고 안색이 대변했다. "다, 당신은 정말 악랄한 살인마가 될 생각이오?" 갈천홍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에, 한쪽에 서 있던 냉겸이 그 특유 의 음성으로 냉랭히 소리쳤다. "당신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당장 사라지면 그만이지 웬 말이 그리 많은가? 기 어코 소종사님의 노화를 건드릴 생각인가?" 그 말에 갈천홍은 즉시 포권했다. "알겠소. 그럼, 다시 봅시다." 말과 더불어 그들은 떠나가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다른 군웅들도 모두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휙, 휙, 휙, 휙........ 따라서 잠시 후엔 이 작은 계곡 안에는 한 사람의 군웅들도 남아있지 않게 되 었다. 휘이이이잉...... 한줄기 바람이 새삼 요란하게 느껴졌다. 신도운형. 그는 그런데도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임방이 다가와 그런 그를 등에 다시 업었다. 그제야 신도운형은 비로소 인간다운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욱.....!" 행여 누가 볼세라 임방의 등뒤에 고개를 파묻고는 피를 토하는 것이다. 그러는 그의 시야는 점차 뿌옇게 흐려져 왔다. 사실, 방금전의 그의 모든 행동은 무리 에 무리를 거듭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다가갈 때 갈천홍이 지레짐작하고 스스 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는 얼마가지 못해 제풀에 그냥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안간힘을 다해서 버티었고, 그것은 실 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갈천홍 등이 근본적으로 그를 두려워하여 피한 것은 아닌만큼, 그가 다시 새로운 형태로 도전해 오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다만 잠시나 마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점만으로도 그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부를만 했다. 그 잠시의 시간이 이제 그의 무예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므로..... 정말이지, 신도운형의 상세가 어느 정도로 위중한지를 알았었다면 갈천홍 등은 결코 맥없이 그냥 물러가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스스슷......... 냉겸과 임방은 이제 신법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귓가에 스쳐가는 파공음을 들으며 신도운형은 다시금 아득해지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X X X 누군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우선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땅속으로 꺼지는 것, 그리고 물 위로 달아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배. 동정호엔 무수한 배들이 늘상 떠다니곤 한다. 무더운 한여름이라, 시원한 강풍 을 즐기는 유람선이 대부분이고 고깃배들도 더러 눈에 띄곤 한다. 그 많은 배 들 가운데 새로 한 척이 그 속에 끼어들었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 을 것이다. 안개가 자욱한 동정호의 저녁무렵. 자욱한 안개 탓으로 황혼이 짙붉 은 혼돈처럼 여겨지는 그 시각에 이 동정호에서 전혀 낯설지 않은 어선 한 척 이 조용히 호심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 배는 전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끈다면 그것이 기이 할 것이다. 배와 그 배에 승선한 어부들의 행색도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그리 고 동정호는 넓으니까 철썩! 쏴아아아...... 뱃전에 와닿는 물결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지만 그래도 주위는 몹시 고요하 게 느껴졌다. 끼룩! 끼룩......... 가끔 물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워지고 더러는 그 물갈매기들이 배의 돛대위 를 빙빙 날아다니기도 했다. 두 사람. 그들은 철저하게 어부의 복장을 하고 각각 서로의 낚싯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러나, 그들의 낚싯바늘에는 미끼가 걸려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상 어 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두워가는 동정호. 짙은 밤안개가 깔려가는 사위는 마치 죽음처럼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임방. 그는 미끼가 걸려있지 않은 낚싯줄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진기를 약간 끌 어올렸다. 전음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냉겸! 소종사께서는 언제쯤 완쾌되실까?" "내일 아침쯤." 냉겸의 대답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임방은 선실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참으로 대단하군! 그런 심한 중상을 입었는데 그토록 기적적인 회복을 보이시 다니.... 그렇지 않나?" ".........." 냉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 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임방은 쓸쓸하게 웃다가 문득 말했다. "소평이 생각나지 않아?" "........" "그녀석은 그래도 의리하난 있는 놈이었는데 어쩌자구 막판에 그런 행동을 했 는지 몰라!" "......." "깡도 가장 강했는데...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싫었을까?" 이에, 문득 묵묵히 듣고만 있던 냉겸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녀석은 잊어버려!" "뭐라구?" "그놈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어! 나는 그런 비겁한 녀석을 가장 혐오해! 그 래서 나는 녀석의 목을 자를때 우정도 같이 베어버렸지!" "....." "그런 녀석을 생각할 바에야 주위 경계에나 신경을 쓰라구!" 임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 "하지만 놈들이 그렇게 쉽게 우리를 찾아낼까? 최소한 우리는 내일 아침까지는 안전할 것 같은데....." 냉겸은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소리는 집어치워! 소종사님의 말씀도 못들었나? 암중인이 있다는 그 말. 우리는 놈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니 주의해야해! 더구나 지금은 소 종사님께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그, 그렇군....." 임방은 그렇게 대꾸하면서 내심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들이쉬는 숨속으 로 죽음의 냄새같은 칙칙한 기류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위는 다시 눅눅한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X X X 한 척의 배. 그것이 그들의 시야에 잡힌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안개에 의해 시야가 제한을 받는 까닭에 그들은 그배가 거의 삼십 장 밖에 이 르러서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는 아주 작은 편이었다. 게다가 승선 인원은 대략 세명정도. 그들은 그 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배는 의외로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고, 이어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순간 그들을 내심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천상삼화 였던 것이다. 낮에 군웅들에 의해 심한 꼴을 당한 그들은 내심 심장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일단 그녀들을 속일 수 있는데까지는 속여보기로 했다.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마침 쓰고 있던 커다란 삿갓을 깊숙이 눌러 썼다. "이봐요! 당신들은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인가요?" 그것은 남궁려려의 음성이었다. "........." "이봐요!" "그렇소. 헌데 왜 그러시오?" 냉겸이 변성을 해서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것은.... 우리는 지금 사람을 찾고 있는데 이곳에 없나 하고요!" 남궁려려의 대답에 냉겸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엔 아무도 없소!" "그래요......?" 다가오던 배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수고하세요!" 라는 남궁려려의 음성과 함께 방향을 돌려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건 전혀 의외였다. 이렇게 해결이 쉽게 될 줄이야. 냉겸과 임방은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가 다시 주위를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그녀들이 되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펑! "으아악!" 이 느닷없는 소리는 어이없게도 선실안에서부터 들려왔다. "앗!" "이럴수가.....!" 그 소리에 대경실색한 두사람은 일순 자리를 박차고 선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쾅! 선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자, 그 안의 정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그리 넓지 않은 선실의 한 구석. 신도운형. 그는 구석에 쓰러진채 창백한 안색으로 피를 왈칵왈칵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세사람. 그들은 바로 천상삼화가 아닌가? 이사실에 냉겸과 임방은 일시 어리둥절했다. 이미 가버린줄 알았던 그녀들이 돌 연 선실속에서 나타날 줄이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 는 말일 것이다. 두사람은 대경실색 경악을 거듭하다가 천상삼화가 자신들을 바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내심 찬바람을 느꼈다. 동시에, 냉겸과 임방은 급히 신도운형 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멈춰라!" 이에 남궁려려가 까르르 교소하며 말했다. "호호! 당신들은 동작이 제법 빠르군요. 웬만하면 좀더 놀다오지 그랬어요?" "제기랄!" 웬만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겸도 안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네년들이 그따위 술수를 부릴 줄이야.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정말인가요?" 남궁려려가 오히려 상냥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에, 냉겸은 두눈 가득 흉흉한 살광을 내뿜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말에 남궁려려는 샐쭉 토라진 표정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상당히 입이 험하군요! 헌데 나를 어떡할 참이죠?" "죽여버리겠다!" 냉겸은 악귀처럼 소리치며 우수를 검의 손잡이로 가져갔다. 그러자, 남궁려려는 지극히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다가갔다. "호호, 정말 그럴 생각인가요?" "......." "그럴 능력은 있구요?" 냉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와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와졌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빨을 깨물었고, 그녀를 향해 일검을 발출했다. 푸슉! 쾌검. 그의 쾌검은 여전히 지독히도 빨랐다. 그리고 정확했다. 그 쾌검은 빠르고 정확 하게 그녀의 학같이 아름다운 목부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가 미색이나 욕정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이 갑자기 안개처럼 흐려지며 사라지는 것 을 목격해야 했다. 동시에, 스으으...... 남궁려려의 신형이 그의 우측에서 돌연 나타나더니 곧 파도같은 일장이 밀려왔 다. 콰우우우우....... 쾅.....! "우왁!" 가슴에 일장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냉겸은 비명을 내지름과 함께 뒤쪽으로 훌훌 날려갔다. 쿠당탕! 선실벽에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졌을 때에는 그의 입가엔 진한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것이다. 이 광경을 보며 남궁려려는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시 빠르 게 다가갔다. 냉겸은 급히 고개를 들었으나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장검도 이미 뒤로 날려올 때 손을 벗어나고 없는 것이다. "잠룡회의 인원들을 대신하여 너를 처단한다!" 싸늘한 일갈. 백옥같은 남궁려려의 일장이 날아오는 것을 냉겸은 다소 공포에 젖은 시선으로 망연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때, "잠깐!" 한줄기 음성이 남궁려려의 출수를 멈추게 했다. "뭐죠?" 남궁려려는 손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리쳐 그녀를 제지한 사람은 바로 신도운형이었다. 그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있다가 소매로 피묻은 입 술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한가지 제안이 있소!" "제안이라고요?" 남궁려려는 어이없는 듯 말을 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제안이라니 지나던 개가 다 웃겠군요! 허나 일단 말은 해봐요." "후후.....!" 신도운형은 음사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물론 쌍방간에 이익이 있는 일이오. 우리 서로 내기를 한번 해보는게 어떻겠 소?" "내기요?" 남궁려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소." "어떤 내기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도운형은 사이하게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한가지 문제를 놓고 서로가 각기 답을 정하는거요. 그래서 그 답을 맞 춰보는 것인데.... 만일 내가 지게 되면 우리 지옥마성 후예들의 본거지를 말해 주겠소!" 남궁려려는 눈빛을 빛냈다. "당신이 이긴다면요?" 신도운형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우리에게 두 시진의 여유를 주시오." "두시진의 여유를 달라고요?" "그렇소." 남궁려려는 잠시 곤혹한 표정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대체 그 문제란 것은 어떤거죠?" "그것은...." 신도운형은 음침한 미소와 함께 냉겸을 가리켰다. "바로 그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오." "뭐라구요?" 남궁려려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죽는 것은 나나 당신 중 아무나 죽이면 죽는게 아닌가요?" 신도운형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자살이오." "........" 남궁려려는 일순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을 잊었다. 한사람의 생명을 놓고 자살을 할 것인가를 점치자는 것이 아닌가? "답은 단 두 가지 일텐데, 그 답이 똑같을 때는 어떻게 하죠?" 남궁려려는 다소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나는 우선 당신들에게 선택권을 드리겠소. 그리고 그 나머지 답은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되게 하면 되지 않겠소?" "......" 남궁려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백리유와 제갈청하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녀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이에, 백리유와 제갈청하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기왕에 려매가 주도하기로 한 일이니 소신껏 해봐!" "설사 져서 두 시진의 여유를 주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가 무슨 다른 방도가 있으리라곤 생각 안해요, 언니!" "고마와요, 언니! 그리고 하매!" 그녀들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남궁려려는 눈빛을 빛내며 신도운형에게 시선을 돌 렸다. "흐흐, 어떻소?" 음침하게 웃으며 묻는 신도운형을 향해 남궁려려는 옥음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흐흐, 그렇다면 어서 답을 말해보시오!" 남궁려려는 잠시 신중하게 생각을 굴린 뒤 짤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미련스럽게 자살을 할리가 없겠죠! 설사 남이 시 킨다고 할지라도.... 목숨이란 소중한 것이니까요." "정말이오?" "물론이에요!" "흐흐......!" 신도운형은 음충맞게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한 것처럼 나는 그가 자살을 한다고 말하겠소.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 렇게 할 것이오." 이어, 신도운형은 시선을 냉겸에게 돌렸다. "냉겸!" "......" "나는 긴 말을 하지 않겠다!" 냉겸. 그는 잠시 멍한 태도로 신도운형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 다. 그리고 앞으로 몇걸음 걸어가서 자신의 장검을 주워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 남궁려려가 급히 말했다. "당신은 그의 말대로 자살을 할건가요?" "........." "그럴거라면 항복해요! 그러면 우리는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도록 애써보겠 어요!" 이에 냉겸은 얼음장같은 웃음을 떠올렸다. "크?! 선심을 쓸 작정인가?" "내 말은 정말이에요!" "관둬!" "......" "그래도 나의 상관이다. 그가 원하는데 이 한목숨쯤 바쳐야 하는 것 아닌가? 더 군다나 내가 살면 모두가 죽고 내가 죽으면 그는 살 수 있다고 하잖아!" 이어 그는 신도운형을 향해 돌아섰다. "잘있으시오!" "고맙다. 냉겸!" 신도운형의 그말을 듣는 순간, 냉겸은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캇캇핫핫핫핫.......!" 그는 갑자기 미쳐버리기라도 한듯 광소를 터뜨리며 온몸을 마구 뒤흔들었고, 그 광소는 끝내는 울부짖음으로 변해갔다. 그러더니, 어느 한순간 그는 한쪽에 서 있는 임방을 향해 광소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무심한 한마디. "사실 나도 소평이 보고 싶었다. 아까는..... 거짓말이었어, 제기랄!" 그와함께, 그의 우수가 예리하게 호선을 그었다. 스팟! "큭!" 한차례 피가 튀더니 수급이 느닷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 그것들은 곧 동체가 바닥으로 뒹굼에 따라 바닥 전체를 시뻘겋게 물들여 놓았다. 쿠당당....! 아직도 콸콸 쏟아지는 피만 아니라면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장면이었다. "아아......!"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남궁려려는 일시 현기증을 느끼며 신형을 휘청거렸다. 그녀를 향해, 신도운형은 사악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어떻소? 이 내기는 내가 이겼소이다." "........." 남궁려려는 대답할 마음이 되지 못했다. 이에 그녀대신 백리유가 나서서 말했 다. "좋아요. 우리는 이만 물러가죠! 당신이 이겼으니까요." "아, 잠깐!" "......?" "두시진 동안은 당신들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한명의 수하를 희생한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 소?" "알았어요!" 천상삼화는 그렇게 대답한 후 떠나갔다. 이에, "핫핫핫핫핫....!" 신도운형은 한바탕 통쾌한 대소를 터뜨리더니 임방을 향해 말했다. "핫핫! 두 시진의 시간이면 나는 능히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걸 그녀들은 몰 랐을 것이다. 아까 그녀들의 일장을 받을 때 실은 죽은 피만 쏟아져 나왔었거 든. 그것은 상세에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 내가 완전히 회복만 된다면 흐흐, 이런 꼴을 당할 것 같으냐?" "......." "냉겸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 그리 깊게 생각할 것 없다. 냉겸은 사실 너무 융통성이 없는게 흠이었다. 하지만 너와 나는 잘 맞을거다!" 그런 말을 한 다음, 신도운형은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임방. 그는 말이 없었다. 방금 죽은 냉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윙윙거리고 그의 시선 은 냉겸의 시신을 향해 텅 빈채로 열려 있었다. 실내에 가득한 피비린내도 그에 겐 느껴지지 않았다. X X X X 그런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다. 두시진이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여기 한사람, 임방에게 있어서의 그 두시진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 이 아니었다. 철썩! 쏴아아아....! 미미한 배의 진동과 함께 밖에서는 연신 뱃전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일고 있 었고, 눅눅한 습기를 담은 호풍은 열려진 선실의 문을 통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임방에겐 그러한 현실적인 모든 현상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 다. 오직 눈앞에 참혹하게 드러누워 있는 냉겸의 시신과 그가 남긴 마지막말... 그것이 지금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보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시간이 정지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임방, 그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허리를 굽혀 쓰러져 누운 냉겸의 시신에 떨어져나간 수급을 정성스 레 붙이기 시작했다. 한번 떨어져나간 수급이 저절로 쉽게 붙을리는 없으므로, 당연히 그는 수급의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간신히 동체에 부착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그는 묵묵히 그 시신을 들어올렸다. 임방은 무심한 시선을 한번 던지고는 선실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실을 나서자, 곧 눅눅한 호풍이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휘날렸다. 그러나 그 의 마음은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전면의 자욱한 안개에 시선 을 던지던 그는 문득 냉겸의 시신을 호수의 물속에 집어넣었다. 첨벙! 시신은 곧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저 시신을 수많은 물고기들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즐길 것이다. 몸을 돌려 선실 안으로 다시 들어 서자, 한쪽 구석에서 신도운형이 여전히 운공조식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미미한 기음과 함께 자욱한 백색기류가 그의 전신을 감싼 것으로 보아 그의 운 공조식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고비로, 만약 이 때 누군가의 암습이나 충격을 받으면 신도운형은 아마 주화입마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임방은 잠시 주춤거리다 신도운형에게 다가갔다. 본능적인 느낌에서인가? 신도운형은 운공조식 중에서도 눈을 떴다. 그는 다가오는 있는 임방을 바라보며 그를 힐책하고 다소 의아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방은 그에 게 바짝 다가섰다. 문득 그로부터 발산되는 기이한 죽음의 기운에 놀랐음인가? 신도운형은 돌연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바로 그 순간, 임방은 그를 향해 날벼락같이 일장을 내갈겼다. 쾅....! "크왁!" 허공에 일순 흩어지는 뜨거운 피..... 실내의 공기는 한차례 놀란 회오리를 일으켰다...... 새벽. 동녘하늘에 희미한 여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욱한 안개때문에 호수 위는 여전히 어두었다. 천상삼화. 그녀들은 작은 어선을 움직여 그 배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제 약속한 두 시진 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아.... 그 배는 여전히 짙은 안개속에서 가볍게 물결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그리고 주 위는 아주 조용했다. "그들이 벌써 달아나버린 것이 아닐까요?" 남궁려려가 고개를 저으며 그러한 말을 할 정도였다. "아니야, 이곳은 계속 포위된 상태였으니 부상입은 그들이 달아날 수는 없었을 것야." 백리유의 말과 함께 그녀들은 그 배위로 올랐다. 이어 전신에 진기를 가득 끌어 올리고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그녀들은 곧바로 선실로 향했다. 선실의 문은 닫혀 있었다. 남궁려려가 앞에 나서서 그 문을 열었다. 덜컹! 문이 열리자, 희미한 여명의 햇살이 물밀듯이 선실안으로 몰려들어갔다. 그순간, 천상삼화는 아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방. 그는 선실 한 모퉁이 구석진 곳에 시체처럼 기다랗게 서 있었다. 주위의 칙칙한 어둠 때문인가? 덩그러니 서 있는 그의 주위엔 음산한 죽음의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는 어이없게도 신도운형이 기다랗게 누워있 었다. 신도운형의 얼굴은 몸서리쳐지도록 창백했고, 그것은 곧 그가 여지없는 시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만일 임방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둘다 시체로 착각했을 것이다. "어서오시오, 천상삼화!" 임방의 음성은 삿갓속에서 다소 음울하게 울려나왔다. "당신이 그를 죽였나요?" 남궁려려가 다가가며 물었다. "보시는대로요." "그런데 당신은 왜 거기에 그러고 서 있죠?" "나는 지금 그의 제사를 지내고 있소." "제사를요?" "그래도 그는 나의 상전이었던 사람이 아니겠소." ".........." 남궁려려는 잠시 당혹한 표정으로 주춤했다. 그러다가 다시 다가가며 말을 이었 다. "음..... 당신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항복을 결심했겠지요?" 임방은 즉시 대답했다. "물론이오." "잘 생각했어요! 우리는 책임지고 당신의 생명을 구해드리겠어요." "허나, 그 전에 나는 할 일이 있소." 남궁려려는 다시 주춤했다. "그건 뭐죠?" "장사를 지내야 하오." "........" "왜 그러고 서 있소? 이리와서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소?" "나, 나는......" "정 하기 싫다면 하는수 없지!" 임방은 말과 함께 돌연 신도운형의 시신을 등에 둘러매었다. 그리고는 다소 흐 느적거리며 선실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오자, 천상삼화는 보다 밝은 곳에서 신도운형의 시신을 검토할 수 있 었다. 희미한 햇살아래, 신도운형의 안색은 유난히 음산한 빛을 띠고 있었다. 흡 사 무덤 속에서 갓나온 시체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살아 생전의 그의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흠집하나 상처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심지어 얼굴에 핏자국 하나 없이........... 임방은 자욱한 안개를 일별하더니 곧 신도운형의 시신을 호숫물 속에 던져넣었 다. 풍덩! 시신은 금방 물위로 파문을 일으키더니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임방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남궁려려를 향해 서서히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 그는 여전히 음울하고 음산한 음성으로 남궁려려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는 나를 제압하시오!" "........." 임방의 태도는 너무도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남궁려려는 일시 주춤했다. 허나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차피 그래야 하겠군요!" "그렇소." "그럼, 실례해요......" 남궁려려는 말과 더불어 가볍게 한숨을 불어낸뒤 임방의 전면으로 다가갔다. 이 어, 그녀의 우수가 허공중에 환상적인 호선을 그리며 백색의 무수한 지영으로 펼쳐졌다. 슈슈슈슉! 그것은 지법공부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일선지라고 하는 것. 비록 임방의 태도가 기이할 정도로 우울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결코 경계심을 늦 추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러한 일수는 평 소의 임방이 아무리 해도 피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헌데 그때였다. 틀림없이 제압될 것 같았던 임방의 신형이 돌연 그 자리에서 유 령같이 흔들리더니 거짓말처럼 미끄러져오는 것이 아닌가? 말이 미끄러져 오는 것이지, 한순간 그 무수한 지영들을 피해냈다고 느낀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남궁려려의 코앞에 이르러 그녀의 맥문을 틀어잡고 있었다. 그 손속의 쾌속함도 놀랍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남궁려려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해 정신이 혼란해졌다. 임방의 진재절학이 정말 이 정도란 말인가? 놀란 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한쪽에 서 지켜보고 있던 백리유, 제갈청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일시 너무도 어 이없고 놀란 나머지 멍한 표정만 보일뿐 전혀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흐흐흐......." 임방은 음산한 기성을 흘림과 동시에 남궁려려의 등뒤로 돌아갔다. 그제야 남궁 려려는 비명을 내지르며 안색이 대변했다. "악!" 임방의 우수가 그녀의 명문혈을 가볍게 꾹 찔렀기 때문이다. 명문혈은 인체의 중요사혈 중 하나라서 그녀는 가볍게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예리한 극통을 느낌 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제야, 백리유와 제갈청하도 흠칫 정신 을 차리고 그녀 가까이로 몸을 날려왔다. "무슨 짓이냐, 임방?" 백리유의 놀란 외침에 임방은 여전히 남궁려려의 명문혈에 손을 땐 채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으흐흐흐흐.........!" "미쳤느냐? 너는 이미 우리에게 항복을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궁려려의 말에 임방은 음충맞은 음성을 토해냈다. "흐흐, 생각이 바뀌었다. 천하의 천상삼화가 그런 것도 몰랐단 말이냐?" "비열한 놈! 네놈이 이렇게 한다고 우리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더욱이 네놈은 상관마저 죽였으니 고립무원의 처지일텐데." "흐흐흐, 아무래도 좋아! 난 단지 그녀들이 단지 너의 목숨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알아보려는 것 뿐이니까." "더, 더러운 놈!" 남궁려려는 그만 치를 떨었다. 이때, 제갈청하가 임방을 예리하게 쏘아보며 말 했다. "너는 임방이 아니구나!" 이에 임방은 일시 흠칫했다. "흐흐, 나더라 내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우선 임방은 무공이 그 정도에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너처럼 교활하고 사악하지 않으니까." "크크크, 아주 좋은 말이군! 그럼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 제갈청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흐흐, 나는 혹시 너의 아비가 아닐까?" "너는...... 신도운형이야." "뭐라구?" 임방은 일시 크게 놀란 듯 했다. 아니, 정작 놀란 사람은 백리유와 남궁려려라고 해야 옳았다. 그가 정말 신도운 형이라면 사태는 정녕 비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이야, 하매?" 백리유의 물음에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언니!" "하지만 그는 이미 죽어서 그 시체를 우리가 직접 봤잖아!" 제갈청하는 탄식을 하며 대답했다. "그의 능력으로 시신을 조작해 내기란 어렵지 않은 것이에요. 그리고 그는 자신 이 임방으로 분장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그가 꾸민 심각한 분위기 때문에 그 사 실을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어요." "그럴수가......!"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어이없어 하며 내심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때, 임방이 음 흉한 괴소를 터뜨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목소리는 신도운형 본래의 것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크흐흐, 과연 화중비는 다르군! 나는 너에게만은 패배를 자인하지! 맞아, 나 는 바로 신도운형이야!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았는가?" "........." "내가 운기하는 도중 임방 그녀석이 분수도 모르고 내게 달려들었지. 과연 나는 그때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어. 허나 나는 사량발천근지법을 이용하여 그놈을 제거했지. 크흐흐......." 이에, 남궁려려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다. 이미, 저 교활하고 잔악한 신도 운형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그녀의 처지는 이제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것이다. "언니! 그리고 하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여기를 떠나요. 다른 분들께 알려서 복수를......!" 허나, 그녀는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휘리리릭! 신도운형의 좌수가 번개같이 움직이며 그녀의 아혈은 물론 전신대혈까지 한순 간에 점혈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론 제갈청하처럼 도반삼양공을 연성하지 못했으므로 그 금제를 스스 로 풀수가 없었다. 이에 백리유는 탄식하며 말했다. "대체 당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크흐흐흐흐...." 신도운형은 흉소를 흘리더니 제갈청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똑똑하니 그녀에게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백리유의 시선이 다가오자 제갈청하는 내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당신은 지금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고 싶겠지요." "크하하하핫......." 신도운형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녀 말이 맞아! 나는 지금 한시바삐 안전지대로 대피해야 하겠지. 현재 이곳은 무맹에 의해서 완전 포위되었을테니까 말이야. 따라서, 당신들은 내가 우선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말아야 해! 이 계집의 목숨이 온전하길 바란다면 말이야." "..........." "우선, 너희 두 사람은 배를 악양쪽으로 몰도록 해! 최대한으로 빠르게 움직여 야 한다는게 조건이야." "그 후엔 어쩔거죠?" 백리유의 질문에 신도운형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후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어서 배나 몰아!" "좋아요!" 제갈청하는 대답한 뒤 물위로 쌍장을 날렸다. 펑, 펑! 장력이 호숫물에 부딪치자, 그 반작용으로 배는 갑자기 쏜살같이 악양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제갈청하의 내공은 지극히 정순한 편인지라 그만큼 배가 나아가는 속도는 빨라 서 즉각 사방으로 요란한 파공음이 울리고 흡사 호숫물을 쪼개며 나아가는 것 같았다. 파아아앙! 배의 양 옆으로 피어오르는 무수한 물보라들을 바라보며 백리유는 제갈청하에 게 전음으로 물었다. "하매, 이제 우리는 어쩌지?" "지금 이 소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이 앞으로 몰려들고 있을 거에요. 나중의 일은 그때가서 상황을 보아가며 생각해보지요." "하긴 그렇겠어, 하매." 제갈청하는 이어 묵묵히 쌍장을 날려 배의 속력을 배가시켰다. 펑, 펑.......! 그러는 그녀의 시야에 방금전까지만 해도 배가 있었던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우우우우웅.......... 배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금 짙은 안개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X X X 아직 여명이 완전히 트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림고수인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이상의 시야를 제한하는 요인이 될 수가 없었다. 전선들.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그 무수한 전선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멈춰!" 신도운형의 외침에 제갈청하가 급히 배를 멈춰세웠을 때에는 이미 그 무수한 전선들 가운데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허공을 날아다닐 수가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림인이 지극히 심오한 경지의 무예를 닦아 반박귀진이란 경지를 넘어서게 되면 어풍비행술과 같은 신법을 펼칠 수가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글자 그 대로 허공을 날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모두 십 삼인. 그들은 천상삼화 뿐만 아니라 신도운형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무맹의 맹주와 불성십이무왕이었다. "멈춰랏!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의 목숨이 날아갈 줄 알아라!" 신도운형은 그들이 다가오자 악을 쓰며 그렇게 말했다. 이에, 남궁벽과 불성십이무왕은 배의 전면 물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스으으...... 불성십이무왕은 물위를 밟고 선데 반하여 남궁벽은 여전히 허공중에 붕붕 떠 있었다. 아무래도 물위를 밟고 서 있는 것보다는 허공에 떠 있는 것이 훨씬 어 려운 법이다. 남궁벽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신도운형은 일순 크게 흠칫한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며 남궁벽은 고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신도운형이란 아이냐?" 이에 신도운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바로 이 순간, "려아를 놓아라!" 짤막한 일갈과 함께 남궁벽은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왔다. 그 순간의 빠르기라는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기이하게도 느닷없고 무모해 보이는 남 궁벽의 행동에 대한 신도운형의 태도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는 잡고 있던 남궁려려를 미끼로 자신을 방위하기는 커녕 그녀를 그대로 둔 채 신형을 하늘 높이 솟구쳐 올렸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천적을 만난 강아지 가 머리를 싸매고 급히 달아나는 모양과 흡사했다. 헌데, 이에 대한 남궁벽의 태도 또한 기이했다. 그는 신도운형의 뒤를 쫓아가 기는 커녕, 오히려 남궁려려의 몸을 감싸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던 것이다. "모두 피해랏!" 이런 일련의 사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허나 맹주의 말을 믿는 백리유는 급히 신형을 날려 자리를 피했고, 다음 순간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환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다름아닌, 신도운형. 그의 전신이 허공에서 폭발하듯 그대로 터져버렸던 것이다. 콰쾅....! 그 굉음은 마치 수개의 벽력탄이 터지는 것처럼 요란했으며, 터져나간 혈육조각 의 위력은 능히 뱃전에 구멍을 뚫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리유가 잠시 어리벙벙 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남궁벽이 그녀에게 급히 다가와 물었다. "그자는 어디로 가자고 했는가?" "그자는 악양쪽으로 달리라고 했는데....." 백리유는 이미 자폭한 신도운형의 이야기를 묻는 맹주의 행동을 크게 의아해 하는데 남궁벽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인 후 불성십이무왕과 함께 다시 신형 을 날리는 것이었다. "어서 갑시다. 놈은 군산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스스슷....... 그에 따라 무수한 전선들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야....." 백리유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몹시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보니 남궁려려도 어느새 혈도가 풀린 채 역시 크게 곤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제갈청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제갈청하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것은 곧 그녀가 이 사태의 내막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들은 내심 불신감을 느끼며 급 히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이 도깨비 장난같은 일은 뭐지?" "어째서 그는 자폭하여 죽은걸까, 하매?" ".........." 제갈청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는 그녀들이 타고 온 배가 아까의 폭발에 산산이 부서져 물위에 떠다니 고 있었고 그녀들은 지금 그것들 중 한조각에 신형을 의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갈청하는 멀어져가는 뭇 전선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 모두가 신도운형 그 작자의 속임수에 의한거에요. 혹시, 절대금마령 이란 사공을 알고 있나요?" "그것은 환왕사부의 서고에서 본적이 있는 마교의 대법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그래요. 신도운형은 바로 그 절대금마령을 펼친 것이지요." 남궁려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의 그 임방은......?" "그래요. 그는 정말로 그냥 임방 자신이었죠."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우리가 배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때는 임방은 살아 있고 신도운형은 죽 어 있었죠. 우리는 임방에게만 신경을 썼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우리는 다시 임방을 신도운형으로 오인을 했고....." "........." "허나 사실 시체로 물속에 던져진 신도운형 본인은 살아있었던 거에요. 그는 특 수한 강시공을 이용하여 우리를 현혹시킨뒤 사라졌던 거에요." "헌데 아버님은 왜 하필 군산쪽으로 가셨을까?" "군산은 이곳 악양쪽과는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요. 신도운형은 우리들 모두 를 이쪽으로 유인하고 자신은 그쪽으로 도망친 거죠." "하지만 그는 오히려 허를 찌르기 위해 이쪽으로 달아났을 가능성도 있잖아." 제갈청하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건 일반적은 경우죠. 허나 이번의 경우는 달라요." "뭐가 다르다는거지?" "절대금마령의 특수성 때문이에요. 그것은 시전자가 달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높고 먼곳에 있어야 하는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천조신광령을 연성한 사람에게 금방 붙잡히고 마니까요. 즉, 이곳에서 가장 멀고 높은 지대는 군산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죠." 남궁려려는 내심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모든 의문이 풀 린 것이다. 허나, 백리유는 아직도 개운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 시 생각해 보다가 제갈청하에게 물었다. "하매! 너는 설마 이제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닐테지?" 그말에, 제갈청하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호호, 사실, 전 거의 처음부터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어요." ".........." "허나 그땐 이미 어느 정도 신도운형의 마수에 걸려든 때였고, 저는 설마 그가 그런 방법을 쓰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었거든요. 허나 막상 걸려들고 나자 기왕 에 당한 것 끝까지 당한척하자고 생각했고, 그땐 또 다른 방법도 없었구요. 그 래서 언니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신도운형의 속임수에 넘어간척 해준 거죠. 그점 은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아마 그랬으면 그 작자가 금방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채고 우리는 더욱 위험해 졌을걸......"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고개를 저었다. "헌데, 맹주님께서 쫓아가셨으니 그 작자는 틀림없이 붙잡히겠지?" 백리유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제갈청하는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맹주님께선 결코 그자를 잡지 못하실 거에요." "뭐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서 그자를 뒤쫓아가봐야 하지 않을까?" 헌데 제갈청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 "그자는 원래 맹주님의 무공수위는 미리 예상하지 못했어도 어느 정도 상당한 대비는 해두었을 거에요. 즉 그는 맹주님이 자신을 뒤쫓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 다는 말이에요. 그 증거는 그가 임방을 그토록 단호하게 자폭시켰다는 점이 말 해주고 있어요. 그 말은 임방이 아니라면 맹주님도 결코 자신을 찾지 못한다는 뜻이죠." ".........."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근거는 신도운형 그자의 성격이 실로 치밀하고 허점 이 없기 때문이죠. 허나 이제 그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백리유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갈청하는 눈빛을 반짝 빛냈다. "맹주님이 아니더라도 그를 제거할 인물이 있기 때문이죠." ".......?" "나는 방금전에야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는 신도운형에게 있어서는 그야 말로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죠. 그는 과거에 충분히 그를 제거할 수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를 살려주어 그로 하여금 무한한 고통을 느끼게 한 인물이죠. 아마 지금쯤 때가 되었을테니 신도운형은 결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거에요." "대체 그가 누구지?" 남궁려려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 제갈청하는 묵묵히 미소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서 가요!"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의아해졌다. "어디로 가자는거지, 하매?" 제갈청하는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미소했다. "바로 신도운형을 잡을 그분의 집으로요." "..........?"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몹시 어리둥절해졌다. 한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는가 싶은 순간 다시금 미혹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순순히 제갈청하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모든 사건들을 뒤에서 조종한 그 사람은 누구인지? 스스슷...... 그녀들이 모두 떠나간 잠시후, 이 동정호엔 간밤에 있었던 모든 흔적은 지워졌 다. 단지 부서진 배의 파편만이 이리저리 물결따라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군산. 동정호의 북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그 산세가 우아하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게 특징이다. 따라서, 특별하게 뛰어난 명승이 없는지라 세인의 이목을 별로 끌지 못하는 그런 평범한 산들 중 하나에 속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새벽 무렵. 이 군산에 안개를 헤치고 한 명의 금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발걸음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날렵했는데, 이곳 의 지리를 이미 훤하게 알고 있는 듯 주저없이 산의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산의 정상. 그곳은 이 산의 이름과는 달리 무척 삭막하고 풍경이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거 대한 암벽의 꼭대기처럼 보이는 이곳 정상에는 단 한그루의 나무도 자라고 있 지 않았고, 온통 여기저기에 늘어선 기암괴석의 암석군들 뿐이었다. 다만, 이곳도 특별한 것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것은 암석군들 사이에 있는 하 나의 거대한 석불상이었다. 그 석불상의 크기는 얼마나 큰지 그 높이가 무려 십 여 장이나 되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이 만들어진지는 매우 오래된 듯 석불상의 전신은 여기저기 심한 풍화작용으로 인해 제대로 그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니, 그 역시 별볼일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금의청년은 산의 정상으로 치달아 곧장 이 석불상 앞에 이르렀다. 그리 고는 그 석불상을 무슨 기이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밀히 주시하더니 다 음과 같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과연 남궁벽의 무예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형님과 산인께서 중시할 만도 해! 나는 이번에 멋대로 능력을 과시하려다가 하마터면 잘못될 뻔 했으니 앞으 로는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해!" 이어 그는 안면 가득 득의의 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놈들은 내가 여기에 온 것이 바로 이 집마부 때문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긴 이미 죽은 냉겸이나 강소평, 임방도 그러한 사실을 몰랐으니... 놈들은 그 저 내가 만년금구에 눈이 어두워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강호에 뛰어든 줄로 만 생각하겠지? 흐흐흐! 이제야말로 우리 지옥마성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이 제 이 집마부로 인해 천하의 마도인들이 몰려들면 그때부터 강호가 온통 혈풍 에 잠긴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때에 우리 우리 지옥별부의 사람들이 나타나 강 호를 일거에 휩쓸 것이란 사실을, 네놈들은 아느냐 모르느냐? 흐흐흐! 나 신도 운형이 바로 마도의 소종사인 동시에 천하정벌의 선봉장이니라.........!" 신도운형은 잠시 득의의 흉소를 날리다가 이윽고 석불상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어, 그는 서서히 전신의 내력을 두팔에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석불상은 언제 보아도 지극히 볼품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일부러 그 불상을 부셔버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신도운형은 돌연 그 불상을 향해 전 력을 다해 쌍장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콰우우우우우......! 그러자, 장내에 실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태양빛을 무색케 할 가공할 백색 빛의 소용돌이가 그의 쌍장에서 발출되어 한순간 석불상 전체를 휘감아 버리더 니, 돌연, 쿠쿠쿠쿠쿠............. 우뢰와 같은 기음과 함께 그 석불상 전체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게 아닌가? 그리고, 그가 재차 일장을 가하자 그 무수한 돌조각들은 금세 허공 높이 날려가 버리고 만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 우우우우우우............ 기이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암봉 전체가 미미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지진 같기도 했으나 사실은 모종의 기관장치가 움직이는 소 리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마악 끝나는 순간, 돌연 신도운형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갑자기 땅속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 그는 불가사의한 속도로 허공을 날아 이미 어느 폭포수 위에 당도해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수백장의 암벽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의 굉음은 몹시 요란했다. 허나 떨어지는 물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에 따라 폭포수의 경관도 그리 좋지 못했다. 단 지 폭포수 아래에 형성된 연못은 매우 깊은 듯 푸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신도운형은 이 연못을 한차례 살펴본 후 지체없이 그 안쪽을 향해 뛰어 내렸다. 일단 물속에 떨어지자 하강하던 속도의 힘에 의해 그의 신형은 자꾸만 아래쪽 으로 잠수해 내려갔다. 과연 연못은 깊고도 깊었다. 그가 한참을 내려가도록 바닥은 보이지 않았는데 보통사람이었으면 벌써 압력에 눌리거나 질식하여 숨졌을 것이다. 그러나 신도 운형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장애가 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유있게 진기를 운용해 가면서 빠르게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이 윽고, 그는 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바닥은 매우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땅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다고나 할까? 그 안으로 물이 스며들지 않는 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헌데, 지금 그 입구는 서서히 닫히고 있는 중이었다. 마악 입구가 닫히는 순간 신도운형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다음 순간, 입구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닫혔다. 이제 그 입구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다시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X X X 그그긍.......... 석문이 열렸다. 그러자 전면에 거대한 대전이 나타났다. 대전은 직경이 무려 삼 십여장이나 되는 거대한 원형석실로서 가운데에는 높이 십 장 정도의 원통형 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거대한 회의실처럼 느껴지게 하는 이곳의 천정은 사방으로 돌아 가며 거대한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 거울에는 이 군산의 전 역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신도운형은 내심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과거 천년 전 마도의 최대 부흥기 때 그 마도세력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교의 비밀본부이다. 후대에 와서 집마부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지. 헌데 당시의 기관토목지술이 설마 이정도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는 걸. 어쨌든!" 신도운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형을 도약시켰다. 슷! 짧은 순간 그는 십장 위의 원통형 단 위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단 위에 올라 보니 그곳엔 다시 작은 단이 있었고, 그 위엔 하나의 작은 구멍과 붉은 색의 구 슬 하나가 박혀 있었다. 신도운형은 눈빛을 번쩍 빛내고는 품속에서 붉디 붉어 마치 핏빛처럼 보이는 작은 소검을 하나 꺼내들었다. 검의 시뻘건 날 위에는 양면으로 금방이라도 튀 어나올 듯한 악마상이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 부분엔 역시 붉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양각되어 있었다. ---- 마교지존 집마령부.. "흐흐, 오백년 전 본문의 조사이신 상승지옥마께서 마교의 모든 비전을 얻으신 이후 여태 이 집마령부를 단 한번도 활용해 볼 시간이 없었단 말은 사실일까? 하긴, 이 집마령부도 잘못 사용하면 마도인들의 도움을 얻게되는 것은 커녕 오 히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가 쉽지. 과거의 의리는 멀고 현실의 욕망은 가 까우니까. 허나 지금 우리는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있는 힘과 세력이 있다. 이제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신도운형은 흥분한 듯 가볍게 중얼거린 뒤 소검, 집마령부를 단 위에 있는 작은 구멍에 끼워 넣었다. 스르르릉! 신기하게도 집마령부의 검날과 구멍의 크기는 딱 들어맞았다. 그것들은 원래부 터 제짝을 만난 듯 곧 완전하게 결합되었다. 바로 그 순간, 우우우우웅........ 십장 높이의 단 전체에서 기이한 음향이 일더니 붉은 구슬이 유난히 핏빛 광채 를 발하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흐흐흐, 과연 놀라운 기관장치란 말이야!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틀림 없는 성능을 발휘하다니......" 그는 음충맞은 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그 붉은 구슬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그 붉은 구슬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단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헌데, 바 로 그때였다. 쿠쿠쿠쿠쿠........ 사방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돌연 대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신도운형은 가볍게 흠칫하며 시선을 천정 위로 향했다. ".........!" 천정 위. 본래 천정에 설치된 거대한 거울에는 군산 전역을 살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는데, 현재 거기에 나타난 군산 전체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시뻘건 화 염 속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온통 불덩이 속으로 변해버린 군산 전역을 바라보며 신도운형은 문득 통쾌한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이로서 집마의 명령은 하달되었다. 저 불들은 사흘동안 꺼지지 않 을 것이며, 그것을 본 천하마종들의 후예가 이곳으로 몰려들겠지! 그러면 내가 집마령주가 되고 형님은 지옥마종주가 되어 천하를 일거에 휩쓸어 버린다? 크 핫핫핫...! 남궁벽이 아마도 나를 뒤쫓아 왔겠지만 이런 불바다 속에서 더이상은 어려울 걸! 사흘이 지난 후 그들은 아예 나를 잊어 버리고 말겠지, 포기하든가. 크큽......" 신도운형은 광소를 터뜨리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최소한 사흘은 있어야 하다니 정말 따분한 일이군! 먹을거 나 있을지 알아봐야겠군." 신도운형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집마령부를 뽑아들기 위해 손을 움직였 다. 헌데 이때, 돌연 그의 눈앞에서 환상같은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집마령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엇!" 신도운형은 내심 경악성을 발했으나 다음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 다. 세상에 이렇게 빠른 신법의 소유자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것이 사람이 아 니라면 귀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분명히 사람일 것이며,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어느 놈이냐? 나와랏!" 신도운형은 급히 소리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사방은 쥐죽은듯 조용 해서 그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기이한 이 사실에 신도 운형은 자신이 잠시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이 갈 정도였다. 허나 착각을 일으키기에는 그의 나이는 너무도 젊고 시력은 뛰어났으며, 더군다나 현 재 집마령부가 없지 않은가? 신도운형은 마음이 급해져서 눈을 크게 뜨고는 이 번엔 청력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두귀에 진기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 발자국 소리는 마치 자신의 심장을 밟고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신도운형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래 이 대전의 사방에는 수많은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그것은 이 대전이 이 지하세계의 중심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발자국 소리가 좌측 통로쪽에서 들려왔다. 그리하여 신도운형이 마 악 그쪽으로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이번에는 그 소리가 우측에서 들려오는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 소리는 앞쪽과 뒤쪽은 물론 심지어 천정에서까지 들려 왔다. 사람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이렇게 빠를 수가 있을까? "이, 이것은 공곡회음이다!" 신도운형은 내심 가볍게 부르짖고는 안색이 대변했다. 공곡회음이란 전설의 회 음술로 육합전성보다 훨씬 심오한 무예에 속하며 이것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 시 전음술에 관한한 신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따라서, 지금 상대는 상당히 심 오한 무예의 소유자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신도운형은 상대의 무예에 대한 실감이 어느 정도 느껴지자, 문득 늘상 자신의 뒤를 따라 다니며 방해하던 암중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암중인. 그토록 치밀하고 머리 좋은 신도운형에게 있어서, 그 자에 대한 생각이 왜 하필 이면 이제야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늘상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다녔어야 옳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집마령부 때문에 그 흥 분속에서 그자에 대한 생각을 망각했었다. 아니, 늘상 신비롭고 불가항력적이며 두려움을 주는 그 찰거머리와 같은 존재에 대해 그의 잠재의식은 일시적으로나 마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도운형은 두눈 가득 혈기를 끌어올렸다. 상황은 이제 말할 수 없이 다급하게 변했다. 우선 집마령부를 빼앗겨 버린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 암중인은 이제 자 신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그는 지금 그 자가 자신을 꼭 죽일 거라는 예감 속에서 섬뜩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허나 지금 죽을 수는 없다. 그가 누군가? 더구나 지금은 이제 마악 시작하려는 단계가 아닌가? "누구냐? 나와라! 우리 협상을 하자!" 신도운형은 다소 떨리는 어조로 암중인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저벅, 저벅, 저벅....... 괴기로운 발자국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신도운형은 안면을 크게 일그 러뜨렸다. 그는 시뻘겋게 변한 눈알을 한 차례 굴려보더니 돌연 체념한 듯 한숨 을 내쉬었다. "좋다! 내가 네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네 뜻대로 해라!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으니 내가 어찌 더이상 미련을 가지겠는가?" 저벅, 저벅, 저벅........ 신도운형은 아예 단 위에 벌렁 누우며 소리쳤다. "어서 나와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마음이 변해 자결할지도 모른다. 난 신경이 매우 예민하여 이런 고통은 못참는 성미거 든!" 저벅, 저벅, 저벅.......! "에잇 좋다! 나는 자결하겠다." 바로 그때, 발자국 소리가 돌연 뚝 그쳤다. 동시에 신도운형은 어느 한쪽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는 급히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 한사람. 그는 손에 한자루 핏빛 소검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바로 장우가 아닌가? 장대한 체격과 털복숭이 수염 등 평상시의 장우의 모습과는 다른 점이 전혀 없 었다. "아니, 너는.........?" 신도운형은 죽은 줄만 알았던 장우가 살아있자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그는 급 히 퉁기듯 장우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스슷! 헌데, 그순간 장우는 돌연 뒤의 석문을 열더니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게 아닌가? "놓칠 수 없다!" 신도운형은 날아가는 속도를 배가시켰다. 쾅! 석문이 그대로 부서져 나가며 저만큼 앞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장우의 모습이 보였다. 신도운형은 전신의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스슷!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장우는 이미 이 지하세계의 구조를 환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본래 이곳은 집마령부가 꽂힌 이후부터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전체 비밀통로의 기관이 전부 풀려 있는 상 태였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기관장치를 알지 못하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 는 것이다. 헌데 기이하게도 장우는 마치 제집이라도 되는 듯 기관장치를 열고 밖으로 달아났고 신도운형은 그를 추적하기만도 바빴다. 그는 정말로 장우가 분명할까? 신도운형은 내심 회의가 일어났으나 그렇다고 그의 뒤를 쫓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마령기. 그리고 그는 이 암중인에 대한 단서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도운형 은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장우의 뒤를 쫓았다. X X X 그곳은 바로 군산의 최정상인 암봉이었다. 사방 전체의 산들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곳만큼은 나무들이 없는 까닭에 폭발의 흔적만이 군데군데 보였다. 신도운형은 비밀통로에서 솟구쳐 나온 뒤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장우는 아직 도망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입구에서 십여장쯤 떨어진 장소에 쓰러져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흐........" 신도운형은 음산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에, 그를 발견한 장우는 흠칫 놀란 표정을 보였다. 일단 싸움에 들어가면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 다. 신도운형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장우에게 덮쳐들면서 쌍수를 휘저었다. 슈슈슈슉! 금세 무수한 백색광채가 그물처럼 장우의 몸을 뒤덮더니 그는 곧 신형이 나무 토막처럼 굳어졌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다소 이상하긴 했지만, 그런 것은 이런 상황에서 신경을 쓸 게재가 아니라고 생각한 신도운형은 즉시 그의 전면으로 다가들었다. 다행히 장우는 아직도 집마령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내심 기뻐하며 신도운형은 얼른 집마령부를 손으로 잡았다. 헌데 그때였다. 전 신대혈이 제압되었으리라고 생각한 장우가 돌연 그의 맥문을 덥썩 잡아버리는 게 아닌가? "헉!" 신도운형은 크게 놀라 급히 진기를 끌어올렸으나 이미 전신은 나무토막처럼 굳 어지고 단 한줌의 진기도 모이지 않았다. 신도운형은 눈을 부릅뜬 채 아무런 말 도 못하고 땅바닥으로 뒹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장우는 신형을 일으켰다. 그는 아주 고요한 시선으로 신도 운형을 바라보더니 문득 한쪽을 향해 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암석군들 사이에서 또 한사람의 장우가 나타났다. 겉보기에 그 장우는 먼저번 장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기질면에서 그의 시선 엔 퇴폐적이고 음울한 기운이 흐른다고나 할까? 나중에 나타난 장우는 먼저 나타난 장우에게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한가지 부탁이 있소!" 처음 장우는 나중 장우에게 시선을 묵묵히 보냈다. "......" 그것은 곧 긍정의 뜻이었다. "고맙소! 당신의 이 은혜는.. 내세에서나 갚을 수 있겠습니다. 나의 부탁이란.." "........." "저자를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처음 장우는 일시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위험하지 않겠소?" 그의 음성은 다소 조용했다. 나중 장우는 고개를 저었다. "부탁입니다." "알겠소." 처음 장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우수를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윽!"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신도운형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선 직후 두 장우를 바라보며 일시 어쩔줄 몰라하는 모양이었다. 그를 향해 나중 장후가 천천히 다가갔다. "너, 너는......." 놀라는 신도운형을 향해 나중 장우는 자신의 검을 빼서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은 이것을 가지고 나를 인질로 하여 달아나시오." "크흐흐흐흐......" 신도운형은 음산하게 웃더니 갑자기 그의 검을 받아들고 그의 심장부위를 겨누 었다. "흐흐, 하라는데 못할 바보는 없지! 자, 이 녀석이 죽기전에 꼼작마라!" "........" 처음 장우는 그 광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에 어느 정도 공포 를 느낀 신도운형은 문득 검으로 나중 장우의 오른쪽 가슴을 푹 찔러 버렸다. 그러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욱!" 그 고통으로 나중 장우는 몸을 앞쪽으로 다소 웅크렸다. 이에, 신도운형은 문득 의기양양해져서 소리쳤다. "어서 빨리 집마령부를 내놓아라!" 처음 장우는 즉시 그에게 집마령부를 던져주었다. "흐흐........" 신도운형은 집마령부를 받아들고 좋아하다가 문득 안면을 찡그렸다. 우선 이 자 리를 벗어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향해 나중 장우가 허리를 구부린 채 말했다. "당신은 나를 죽이시오! 그러면 그는 당신을 최소 한 시진 동안은 쫓지 않을 것 이오." "뭐라구?" 신도운형은 의아해하며 처음 장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헌데 의외에도 처음 장우 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알 수 없는 것들이군! 허나 그런 것을 못할 나도 아니지." 신도운형은 말과 동시에 검으로 나중 장우의 심장을 푹 찔러 버렸다. 촤아앗...... "욱!" 순식간에 피가 주위를 완전히 적시며 나중 장우는 숨이 끊어져 갔다. 쿠당당..... 신도운형은 급히 나중 장우의 몸을 내려놓은 뒤 줄행랑을 쳤다. "나는,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소. 죽을 때까지 변치 말기로 한 맹세를 나는 저버리지 않았소. 그야 어떻게 하든 간에... 이로서 나와 그와의 인연은 끊 어졌으며 내세에도 결코 만나지 않겠소.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소. 그가 어찌 됐든 나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으니까....." 그런 말을 끝으로, 나중의 장우는 숨이 끊어졌다. X X X 신도운형. 그는 곧바로 집마부로 도망을 쳤다. 이곳 집마부야말로 내부에서 통 제하면 외부인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으므로 이곳은 그야말로 천리를 달아나는 것보다 안전했다. 그렇지만, 성격이 세심한 그는 그 한시진동안 내부의 비밀통로와 기관장치를 엄 격히 점검하고 모든 통로를 거의 패쇄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안전해진 것이다. 이제 그 어떤 설사 신이라 해도 이곳을 침범할 수 없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한시진이 지나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신도운형은 그래서 마음이 내심 통쾌해졌다. "흐흐흐, 이를 두고 그림 위의 떡이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핫핫핫!" 그는 대소하며 지금쯤 통로를 찾기 위해 헤매는 그 작자의 광경을 머릿속에 떠 올리는 것이었다. 그 작자가 지금쯤 땅을 치며 후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 는 배꼽이 다 빠져나가도록 우스웠다. 헌데, 그가 한참 웃고난 다음의 일이었다. 돌연 그의 등뒤에서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신도운형......." "........!" 신도운형은 그만 심장이 튀어나올만큼 놀랐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신도운형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등뒤에는 어느새 그 처음의 장우가 조용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너, 너는......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지?" "세상에 절대란 것은 없는 것이네." 장우는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신도운형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대, 대체 너는 누, 누구냐?" "............." 장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신 문득 그의 얼굴 모양과 신체구조가 조금씩 움 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움직임이 한순간 멈춰졌을 때, 신도운형은 돌연 입 을 딱벌렸다. "너, 너는 바로.......!" 그때, 신도운형은 천지가 갑자기 황금빛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실로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빛깔. 그 속에서 그는 문득 아찔한 충격을 맛보았다. "아.........!"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의식이 사라진 그의 육신은 시신의 되어 대전 바닥 에 거세게 부딪쳤다. 쾅! 황혼. 핏빛같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노을은 안개가 자욱한 이곳 단풍나무숲을 처절하 리만큼 아름다운 진홍빛으로 물들여 놓고 있었다. 무덤은, 그 가운데 그렇게 적막해 보였다. 아름다운 단풍잎들에 둘러싸여 화려해 보이건만 역시 저세상과의 거리는 멀고 도 먼 것인가? 차라리 이 무덤 주위가 쓸쓸한 것이 더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황혼속에 서서 망연히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혼이 짙어질수록 그 는 마치 그 황혼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입술 이 무심히 열렸다. "장우는.....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여한을 남가지 않았소. 그는 자신의 신념만 으로 마침내 불의는 물론 죽음마저도 이겨내었던 거요. 그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소. 나는, 끝까지 신도운형 그자를 괴롭히려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소. 마지막에는 그저 고통없는 죽음을 주었던 것이오. 이점 당신이 이해하 길 바라오....." 그는 말끝을 흐리다가 황혼의 석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당신의 영혼도 아무런 여한없이 훨훨 떠나가 버리길 바라오. 아직 한 사람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는 내몫이라 여기기 때문이오. 따라서 나는 이 황혼 에 당신을 보내는 바이오......" 말을 끝내면서 그의 시선은 다시 무덤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무덤 전체가 느닷없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묘비 등은 모두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오직 목관 하나만 남았다. 그 목관은 천천히 한쪽으로 날아가더 니 홀연 어느 장작개비들을 쌓아올린 곳 위에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밑에서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륵...... 마른 장작더미는 잘도 타올라갔다. 금세 거대해진 불덩이는 장작더미 모두는 물 론 그 위의 목관까지 집어삼켰다. 이때의 황혼은 마악 그 절정기에 이르러 있었 다. 사위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인 황혼은 그 불빛을 받아 더욱 붉어 보였다. 화르르르륵....... X X X X 여몽청의 유해는 동정호의 물위에 뿌려졌다. 그가 다시 성수장으로 돌아왔을 때 에는 새벽무렵이었다. 그는 버릇처럼 죽림정사에 둘렀다가 처소인 누각으로 향 했다. 그때, 홀연 그의 앞에 손빈아가 나타났다. "장주님, 아......" 손빈아는 말을 하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문득 넋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냐? 빈아!" 그의 말에 손빈아는 귀여운 얼굴을 가득 붉히며 대답했다. "손님들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셔요. 헌데 그보다.... 본 모습을 회복하셨군요?" 그는 가볍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빈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얼굴을 보아왔으면서 새삼 그런 표정을 짓다니 바 보같군! 그래, 그간 장원내에는 별일 없었겠지?" 이때, 홀연 어디선가 한줄기 개구진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누나는 지금 그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모하고 있대요. 가끔씩 혼자 한 숨짓곤 하는 것을 제가 봤거든요!" 동시에, 한쪽의 소롯길에서 손범이 갑자기 나타났다. "뭐얏, 너..... 너.....!" 그말을 들은 손빈아는 돌연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잠시 어쩔줄 모르더니 급히 손범에게 달려들었다. "범아, 너 정말 그럴래? 이 누나를 그렇게 놀릴 수가 있어?" 허나, 손범은 즉시 신법을 펼쳐 옆으로 피하며 지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나? 누난 할말이 없으니까 괜히 내게 달려드는 거지? 흥! 그렇다고 내가 잡힐줄 알고?" 확실히 손범의 신법은 손빈아보다 빨랐다. 손빈아는 도저히 손범을 잡을 수가 없게 되자 안색이 더욱 빨개져 목덜미까지 붉게 보였다. "범아, 너 이리오지 못해! 잡히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거야!" "흥! 잡히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냥 잡혀줄 바보가 있을까? 그리고 누 난 아무래도 그분에게 말도 못해볼테니 일단 내게 잘보이는게 좋을걸! 일단 내 게 잘보이면 내가 알아서...." 그때, 손빈아는 더이상 쫓아갈 수가 없자, 갑자기 멈춰서더니 돌연 눈물을 주르 르 흘렸다. 이에, 손범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신형을 멈추었다. "어...? 내가 너무 심했나? 이러한 일에도 눈물을 흘리다니 누나는 요새 부쩍 약해진게 틀림없어. 도대체 여자들이란....!" 그는 고개를 휘휘 젓다가 천천히 손빈아에게 다가갔다. "누나, 갑자기 왜 그래? 내가 정말 너무 심한 말을 한거야?" 헌데 바로 이때였다. 손범이 가까이 다가간 순간, 손빈아는 갑자기 눈물을 뚝 그치더니 느닷없이 손범에게 쌍수를 뻗어오는게 아닌가? 휘리리릭! 신법은 다소 느렸으나 그녀의 그러한 일수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고, 마침 손범 은 잠시 한눈을 팔다가 꼼짝없이 그녀의 쌍수에 제압당하고야 말았다. "엇! 아니 누나! 이, 이건 반칙인데....!" 허나 손빈아는 언제 울었냐는 듯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너 이녀석 이젠 내게 꼼짝없이 잡혔지?" "어어, 이건 정파인들이 가장 꺼리는 지독히 비열한 수법인데......" 손범은 순간 뻣뻣하게 굳어진 몸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한쪽에 서 있는 사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사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일뿐, 그를 도와주려 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 사부님!" 그러나, 그의 아혈은 금새 손빈아에 의해 막혀졌고, 그녀는 곧 손범의 몸을 둘 러매고는 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범아, 너 이제 내게 혼나봐라! 감히 누나인 나를 놀렸것다? 호호...." "........." 그 두 사람은 곧 단풍나무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는 조 용히 미소하며 다시 누각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X X X X 열 세 사람. 그들이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손님들이었다. 대청. 다소 고풍적으로 안온함을 느낄 수 있게 꾸며진 그 대청에 들어서자, 그는 곧 그들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 이다. 즉, 그들은 무맹의 맹주 남궁벽과 불성십이무왕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다가가 포권하자, 남궁벽이 미소하며 답례했다. "그간 많이 달라진 것 같군! 헌데 자네의 그 용모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고 하던데, 혹시 자네가 이곳 성수장의 악양성수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 그는 미소하며 대꾸했다. "그래서 저의 신분을 확인하러 오셨습니까?" "그야 이를 말인가? 천하에 다시없는 변장술도 소용없는 사람은 나와 맹주 두 사람뿐이니 이렇게 우리가 직접 올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사람은 불성십이무왕 중에서 용모가 매우 평범하게 느껴지는 환왕 이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했다. "그래, 결국 저의 신분을 알아내셨습니까?" 환왕은 문득 두 눈에 신묘로운 백광을 뿜어내며 대꾸했다. "아무렴! 자네는 바로 백상인이 아닌가?" "......" 그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여러분의 이목은 속일 수가 없군요...." "핫핫핫, 자네는 역시 솔직해서 좋군! 나는 처음부터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었네. 핫핫핫핫...." 패왕. 불성십이무왕 중 덩치가 가장 커서 키가 무려 십척이나 되는 우람한 육체의 그 였다. 그가 한번 크게 웃자 마치 대청 전체가 떠나갈 듯 했다. 이에, 남궁벽은 미소하더니 백상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우리가 여기에 온 주된 이유는 자네와 한가지 일을 상의해 보기 위해서 였네." "......" 남궁벽은 문득 눈빛을 번쩍 빛냈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 신도운형, 그 자에 대한 이야기를." 백상인은 잠시 말없이 남궁벽을 바라보았다. 남궁벽. 굳이 지극히 준수하고 신태비범한 용모의 중년인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더 라도, 그가 가히 믿음직한 정도인이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서, 그의 사부들인 불성십이무왕들도 자청하여 수하로 행동하는지도 모른다. 백 상인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를 뒤쫓다가 놓치고 말았다네. 그 신도운형은 아주 교활한 자 여서 우리가 나타날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렸던 것이네." "........." "게다가 자네도 들었겠지만 군산 전역에 느닷없는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당분간 그에 대한 추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네. 허나 그 자 는 결코 추적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인물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네." "그렇겠군요. 그는 만무전주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사마세력의 중 요한 인물이니까요." "그렇네."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해서 말인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 도움이라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어있다네." 백상인은 미소하며 물었다. "맹주께선 제가 그에 관한 만족할만한 해답을 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네." 남궁벽의 시선은 깊게 빛났다. 그는 힘주어 대답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은 확인된 바는 아니네만, 나는 자네라는 위인을 놓고 볼때 한가지 이와같 은 확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네. 자네는 결코 그자를 그냥 놓아주지는 않았으 리라는 것을! 즉 그자의 그후의 운명은 오직 자네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말이지." 백상인은 미소했다. "확신이라 하심은 곧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란 말이군 요."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에 백상인은 문득 맑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그말은 너무 지나치시군요. 천하의 맹주님께서도 놓치신 그자를 내가 반드시 잡았을 것이란 그 말은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남궁벽은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시선으로 백상인을 바라보며 태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너무 겸손하군. 아니면 지나친 자만이던가. 그러한 자만으로 이 맹주를 놀린다면 그 죄가 가볍지 않다는걸 모르는가? 자네는 이미 삼년전에도 나의 무 예경지를 넘어서 있었네. 그 증거로 자네는 그때 나의 손아귀에서 마치 장난하 듯 달아나 버렸지 않았는가? 하물며, 그후 삼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 만일 자네가 더이상 고집을 부린다면 이것은 우리 무맹 전체를 능멸하는 것으 로 알고 지금 즉시 자네를 잡아가도록 하겠네. 과거의 그 도망죄도 있고 하니 말이야." 이어, 남궁벽은 불성십이무왕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 사부님들." 이에 여태 잠자코 있던 장왕을 비롯하여 권왕, 겁왕, 독왕 등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이요, 맹주!" "백가 애송이야! 네가 만일 옛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함부로 건방지게 군다면 나 권왕이 너를 가만 둘 수 없다." "클클클! 나는 아직도 너의 능력을 믿을 수가 없어! 어때 이번에 나와 한바탕 해보는 것이...." "크하하하... 백상인! 네가 감히 우리를 얕볼 수가 있단 말이냐? 공연히 우리에 게 끌겨가지 말고 순순히 부는게 어때?" 불성십이무왕. 그들은 바로 천외삼별부 중의 하나이며 일명 신선별부라고 불리우는 불성문의 살아있는 신화 그 자체인 사람들이다. 비록 스스로 잠룡회의 인원육성에 뛰어든 탓에 그 신비감이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그들의 무예는 하나같이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 바로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자, 백상인은 일순 흠칫한 표정을 보였 다. 그는 잠시 휘둥그래진 눈으로 불성십이무왕을 둘러보더니 이어 조용한 음성 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드리죠." 그러자, "크하하하하핫! 그게 정말인가?" 패왕이 크게 대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불성십이무왕의 다른 사람들이나 남궁벽도 크게 기뻐하는 빛을 보였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허나 거기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게 뭔가?" 남궁벽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에 백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답이 없다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답이라....?" 남궁벽은 잠시 생각을 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도의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들어주 지!" 옆에 있던 독왕이 나서서 한마디를 더했다. "맞아! 그는 제 딸인 남궁려려도 자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니 어서 조건이나 말해보게! 허나 너무 어려운 것이라면 나 독왕을 다시 봐야할걸?" 독왕의 말은 호의 반, 협박 반이었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조건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 닐뿐만 아니라 도의에 어긋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선 첫번째 조건은 앞으로 제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조건은 들어주겠네. 자네는 너무 나를 무시하는 것 같군! 설마하니 내 가 자네에 대한 믿음도 없이 이런 질문을 하겠는가? 우리는 앞으로 자네가 지 금 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음과 동시에 더이상 왈가왈부 거론치 않을 것을 맹세하겠네. 물론 자네가 모든 이야기를 성실히 말해줄 경우에 한해서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조건은.. 저도 기왕에 어렵게 이 일을 이야기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이익이 있어야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만......" ".........." "앞으로 지금 이전에 있었던 저의 모든 잘못을, 말하자면 제가 과거 무맹을 무 단으로 도망나왔던 죄와 그밖의 모든 유감에 대해서 지금 이 시간 이후로 깨끗 이 잊어달라는 것입니다." 백상인은 불성십이무왕을 둘러보다가 남궁벽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자, 어떻습니까?" 이에 대해 불성십이무왕의 태도는 몹시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두가지 조건 이란 것들은 애초부터 조건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쉬운 것이었기 때 문이었다. 그런데, 그에 반해 기이하게도 남궁벽의 안색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잠시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깊은 생각을 해보는 눈치이더니 돌연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안되네." "......." "그 조건만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어! 우리는 과거 십년동안 잠룡회를 육성했 네. 이에 기울인 심혈이란 것은 실로 상상을 불허할 정도네. 물론 그결과 많은 인재를 육성하긴 했지만 실상 거기의 노른자는 오직 자네 하나뿐이라고 할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실수하여 자네를 잠룡회에 가입시키지 못했는데, 그나마 자네를 제지할 수 있었던 어느 정도의 근거를 단순히 이번일 한번으로 없애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열 개의 잠룡회를 한꺼번에 잃는 것과도 같으니, 나는 자 네의 이야기를 설사 못듣는 한이 있더라도 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네. 자네는 혹시 다른 조건이 있다면 말해보도록 하게!" 남궁벽의 이 말은 다소 의외이긴 해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맹주!" 장왕이 급히 말렸으나 남궁벽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됩니다! 만일 정 그렇게 하시고 싶으면 사부님께서 직접 맹주가 되십시 오.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허허, 이것 참...." 장왕은 백상인을 바라보며 머리를 툭툭 치더니 물러났다. 이를 보고 백상인은 미소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십니까?" "그렇네." 남궁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저는 본래가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맹주님 께서 그러한 구속도 풀어주지 않으신다면 더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다. 물 론, 다른 조건도 없고요..." 백상인은 미소하더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련없이 몸을 둘렸다. 그러자, "핫핫핫핫.....!" 남궁벽의 입에서 느닷없이 앙천대소가 터져나왔다. "핫핫, 알았네! 마음이 이미 떠나 있다면 부질없이 형체만 잡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단지 자네가 마음만은 대의를 벗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네." "고맙습니다." 백상인은 즉시 돌아서며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되었네. 자, 그럼 그 얘길 들어보기로 할까?" 이에, 그들은 다시 자리를 정해서 앉았다. 마침 동자가 다시 찻잔을 날라왔으므 로 장내의 분위기는 다소 진정되었다. 이윽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 을 바라보며 남궁벽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정말로 신도운형, 그 자를 처치했는가?"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제거하였고 그 시신은 화장하여 동정호에 뿌렸습니다." "음, 믿지."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그를 죽였는지에 관해서는 묻지 않겠네. 아깝게 살해되었던 만무전주의 복수운운하는 말도 물론 않을 것이고. 단지 우리 가 바라는 것은....." 문득 백상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지옥마성의 후예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 남궁벽은 묵묵히 깊은 시선으로 백상인을 주시하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네." "지옥도입니다." "뭐라고?" 남궁벽을 비롯하여 불성십이무황은 흠칫 두눈을 크게 떴다. 백상인은 조용히 말 을 이었다. "이것은 제가 특수한 방법에 의해 신도운형 본인에게 직접 알아낸 사실입니다 만, 이 지옥도는 과거 오백 년 전 상승지옥마가 세운 지옥별부의 원류가 되는 곳으로, 항주에서 정동방향으로 배를 타고 십여일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거 대한 섬이랍니다. 그들은 지금 그곳에서 모종의 준비를 이미 마쳤으며 신도운형 이 연락을 취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항주에서 동쪽으로 십여일이라....? 그래서 지난날 화화장이 항주에 있었었군. 그간 그들의 행적이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도 이해가 되고...." 남궁벽은 눈빛을 깊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상인은 그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궁벽은 일순 두 눈 가득 강렬한 안광을 내쏘며 대답했다. "당연히 우리가 그쪽으로 가야지!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란 말은 병법의 기본 이 아닌가? 그것도 반드시 기습공격으로 해야겠지." "그렇다면, 그 시기는 대체로 어느 정도로 하시겠습니까?" 남궁벽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대답했다. "출발일자는 아무래도 앞으로 열흘은 있어야 하겠지? 최소한 각파에 알려 비상 소집을 하는 기간이 일주일은 걸릴테니까. 그렇다고 우리만 떠날 수는 없는 노 릇이 아닌가?" "......" 남궁벽은 백상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열흘 후 항주에서 만나기로 하는게 어떻겠나?" "좋습니다." 백상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벽은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젠 촌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그러자, 백상인이 문득 그에게 입을 열었다. "맹주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남궁벽은 마악 신형을 움직이려다 멈칫하고 물었다. "뭔가?" 백상인은 그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맹주님께선 과연 저의 말에 단 한점의 의문도 없으십니까? 이일은 실로 무림 의 중대사이니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단 한점의 의혹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 다." "......." 남궁벽은 잠시 묵묵히 백상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가볍게 탄식했다. "자넨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군! 이 일이 나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내가 무엇을 주저하겠나? 허나 전 무림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에 나는 솔직히 다소 그런 면이 없지 않았네. 그러나 지금 자네의 그런 말을 들으니 모든 의심이 다 달아 나는군! 이제는 마음 놓고 일을 추진할 수 있을 것 같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허나 제가 한가지 맹세를 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야.... 만일 자네의 그 말이 거짓이었다면 자네는 무림사에 두고 두고 지탄을 받는 인물이 될텐데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백상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험악한 세상이니 무슨 일인들 벌어지지 않겠으며 무슨 생각 인들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맹세하겠습니다.." ".........." "만일 나의 말이 거짓이었다면 하늘과 땅이 동시에 나를 버릴 것이며 영원무궁 토록 나는 지옥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빛이 없는 암흑속 에서 살아가게 되리라. 이것을 백가신화의 이름을 걸고 엄숙히 맹세하노니 천지 신명이여 들으소서!" 백상인의 맹세가 끝나자 남궁벽은 지극히 감동한 시선으로 백상인의 두손을 마 주잡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로 무림의 구성이 분명하네! 나는 더이상 자네를 의심하지 않을테 니 이제는 마음을 놓게." "고맙습니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럼...." 남궁벽 등은 떠나가기 시작했다. 스스스.......! 최초에 남궁벽이 사라지고, 그 뒤를 따르는 불성십이무왕의 감동적인 시선만이 대청안을 감돌았다. 다시금 조용해진 실내. 백상인은 그 대청을 두루 둘러본 뒤 서서히 내실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침실. 그가 침실에 들어섰을 때, 의외의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상. 하나뿐인 그의 침상 위에 이미 어떤 한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백상 인은 가볍게 흠칫하는 듯 하더니 다가가며 말했다. "뉘신지는 모르나, 지금 남의 침상 위에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은 비켜주시오. 나는 지금 매우 피곤하여 쉬어야겠소이다." ".............." 허나 그 자는 이불을 뒤집어 쓴채 깊이 잠든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상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 이거 깊이 잠든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가 다른 잠자리를 찾는 수밖에....." 이어, 그는 침실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헌데 그때였다. 돌연 침상 위에서 한줄 기 음성이 들려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잠깐 멈춰요!" 그런데 그 음성은 바로 여인의 음성이 아닌가? 백상인은 서서히 신형을 돌렸다. 마침, 침상 위의 여인도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당신은.........?" 백상인은 가볍게 놀란 외침을 발했다. "왜요? 설마 저인 줄은 몰랐나요?" 여몽향. 바로 그녀가 아닌가?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솔직히......" 허나 여몽향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흥! 솔직히라고요? 당신같은 무예의 소유자가 이불 하나 꿰뚫어 볼 수 없단 말 인가요? 어디 다시 한번 자신이 백상인이 아니라고 말씀해 보시죠?" "아, 그것은......." 백상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낭자를 놀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 증거로 지 금은 이렇게 본 모습으로 나타났지 않소?" "흥! 그래서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말인가요?" 여몽향은 발딱 신형을 일으키며 두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채 소리쳤다. "어찌 잘못이 없다고 하겠소? 이렇게 우선 잘못을 빌겠소." 백상인이 그녀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사정을 봐서라도 이쯤에서 그만 용서해 주시는 것이..." "그건 안돼요!" 여몽향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 "당신은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군요! 내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조금도 생 각하지 않는단 말인가요? 나는 이미 당신의 침대에서 잠을 잤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시집을 가죠? 당신은 그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인가요? 철면피같 이.... 흑, 흑흑.......!" 이에, 백상인도 안색이 붉어졌다. "당신의 정신적인 피해는 내가 보상해 주겠소. 허나 당신이 내 침대에서 잠을 잔 것은 내가 특별히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또 나와 함께 누워 있었던 것 도 아니니 구태여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그러자, 여몽향은 돌연 울음을 뚝 그쳤다. "그러니까 당신 잘못은 없고 순전히 내 잘못이란 말이죠? 좋아요! 그렇다면 나 하나 죽어 버리면 그만 아니겠어요!" 말과 동시에 그녀는 돌연 서슬이 시퍼런 비수 하나를 꺼내들더니 자신의 목을 겨누는게 아닌가? 백상인은 그만 깜짝 놀라 소리쳤다. "멈추시오!" "왜죠?" 여몽향은 백상인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왜, 왜라니 그렇게 갑자기 죽을 이유가 뭐가 있겠소?" 다소 더듬거리는 백상인의 말에 여몽향은 돌연 쨍하는 어조로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로 철면피로군요!" "........." 백상인이 잠시 어이없어 하는 동안 여몽향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정말 저같은 여자에게는 정조란 것이 필요없다고 여기시나요? 저같은 여자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시겠죠?" "그, 그럴 리가 있겠소?" 헌데 그때였다. 돌연 여몽향이 비수로 자신의 좌수를 그어 버리는게 아닌가? 다 행히 피는 나지 않았지만 그 바람에 옷이 잘려나가서 그녀의 좌수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무슨 짓이오?" 백상인이 안색이 변해 묻자, 여몽향은 자신의 좌수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길 한번 보세요!" "........." 무심코 시선을 던진 백상인은 가볍게 흠칫했다. 그녀의 팔뚝 부위에 찍혀 있는 작고 붉은 점 하나. 그것은 그녀가 아직도 순결한 처녀임을 상징하는 수궁사가 아닌가? "내가 과거 기녀 옥류향이었다고 해서 막되어먹은 여자라고 생각하셨나요? 우 리 공공문의 가문에는 이렇게 수궁사를 찍어 순결을 표시하는 전통이 있죠. 방 회의 일을 하자면 타인으로부터의 숱한 오해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 "그러나 저는 맹세코 과거 어떠한 사람과도 잠자리는 커녕 손목 한번 잡혀 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흑흑, 제 낭군될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 을 했어요. 딴 남자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는 것은... 이런데도 제가 살아야 하나 요? 저는 이제 일찌감치 죽는게 타당해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비수를 목으로 가져가는게 아닌가?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은 타당하지 않소. 그리고 당신은 그렇다고 해서 순결을 잃은 것도 아 니지 않소?" 이에, 여몽향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비겁하게도 이 일을 두 사람의 비밀로 묻어두잔 말인가요?" ".........." 백상인이 잠시 말을 잊은 사이에 여몽향은 음성을 갑자기 낮추었다. "물론 당신의 잘못은 없어요. 모두가 제 스스로 한 짓이니까요. 따라서 저는 당 신에게 이 일에 대해 일절 책임을 묻지 않겠어요. 그러나, 당신 역시 제가 죽 는 것에 대해 함부로 방해하지는 말아야 해요. 설마 능력이 있다고 저를 죽지도 못하게 하지는 않겠죠?" 백상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말려야겠소." 그말에 여몽향은 다시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이렇게 나를 우습게 여기긴가요?"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긴 내집이기 때문이오." ".........." 순간, 여몽향은 갑자기 흠칫하고 정색했다. "당신..... 그게 무슨 말이죠?" 백상인은 무심히 대답했다. "나는 결코 개개인의 근원적인 자유를 속박하는 사람이 아니오. 즉, 아무도 당 신이 죽는 것을 말릴 수 없으며 나 역시 그러하오. 다만 이곳은 내 집이오. 강 호의 거대문파 중 하나인 공공문의 소문주가 여기에서 죽었다고 한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내게 의심을 품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가령 죽더라도 일단 이곳을 떠나주기를 바랄 뿐이오." 여몽향은 두눈이 동그래지며 문득 눈물이 핑돌았다. "당신은 정말..... 어쩌면 그럴 수가 있나요?"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나 백상인의 진면목이오. 겉으로는 여유만만하고 다정스럽게 보이 지만 사실 나의 삶 하나조차 다스려 나가는 것이 힘겨운 사람이오. 어찌 타인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있겠소? 당신이 나를 어떤 우상처럼 보았 다면 그건 착오가 분명하니 지금 즉시 마음을 고쳐먹고 떠나주길 바라오." 그 말에, 여몽향은 소리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렇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나는 나의 잘못을 시인하겠어요. 하지만 그건 단 지 방법에 있어서일뿐 당신의 인상이 달라졌다거나 실망했다거나 하는 말은 하 지 않겠어요. 나는 이미 사춘기를 벗어난 나이니까요." "......" "당신의 뜻을 알았으니 나는 이제 죽지 않을 거에요. 죽지 않을테니 당신은 그 만 마음을 놓으셔도 괜찮을 거에요. 허나, 저는 이제부터 더이상 남자를 생각하 지 않겠어요. 당신이 나를 형편없게 여기고 정을 주지 않는 것을 어쩔 수가 없 듯이 제가 당신을 사모하는 마음은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 여몽향은 처연히 말한 뒤 침상 위에서 걸어나와 비수를 갈무리하고 침실 밖으 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의 뒷모습은 몹시 초라해 보였다.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을 발했다. 이어 그녀의 발길이 막 문을 벗어나게 되자 그 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소. 당신은 여기에서 죽어도 좋소. 내 사람이 된다 면 말이오...." 순간, 여몽향은 발걸음을 우뚝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것은 가득한 환희의 물결. "저, 정말인가요?"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허나 지금은 안되오. 한가지 중대한 문제를 끝낸 연후에......" "아아.....!" 여몽향은 곧바로 달려와 그의 품속에 안겨 버렸다. "물론이에요! 지금이 아니라도, 당신의 마음만 확고하다면... 전, 정말..!" 외치듯 말하는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덧 구슬같은 눈물이 마구 흘러 내리고 있었다. 백상인은 그녀의 눈물을 씻어주며 탄식하듯 미소했다. "나같은 사람이 무얼 그리 대단하다고 당신이 이토록 애쓰는지 모르겠소." 여몽향은 그의 품속에서 아이처럼 도리질쳤다. "아니에요, 당신은.... 훌륭해요." "....." "그리고, 정말 고마와요." "부부 사이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오." 백상인은 그녀의 얼굴을 매만져준 뒤에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 "사실, 어제 저녁 언니의 유골을 동정호에 뿌렸소. 그때 그녀의 마지막 말이 생 각났지, 당신을 대신 사랑해달라고 하더군." "단지 그것때문에 저를 이렇게.......?" 여몽향은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당신은 충분히 사랑스러운 여인이오." "정말인가요?" "그럼......" "아아..........!" 여몽향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더니, 문득 말을 이었다. "저어,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 "저... 날 지금 데리고 자줘요."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건......." 여몽향은 발돋움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눌렀다. "혼인은 나중에라는 뜻은 잘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사이니 미리 이런다고 해도 흉이 될건 없잖아요. 당신의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백상인은 손가락을 피하며 말했다. "나의 결심은 확고하며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됐어요, 안그런가요?" "하긴....." 백상인도 피끓는 욕망이 잠재해 있는 젊은이다. 아니, 신체적인 특수한 능력 때 문에 그의 욕망은 오히려 범인들보다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직 자신의 타고 난 강한 이성으로 욕망을 눌러왔을 뿐인데.... 백상인의 안색이 다소 상기되자, 여몽향은 즉각 백상인의 품속을 벗어나서 침상 으로 날아가며 소리쳤다. "흥! 응큼하긴, 어서 고개를 돌리지 못해요!" "아, 알았소." 백상인이 더듬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다시 소리쳤다. "저문은 닫지 않을 건가요? 창피하게 남들에게 다 보여줄 셈인가요?" "아........." 백상인은 진기를 운용하여 즉시 문을 닫았다. 이윽고,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 리가 잠시 일더니 곧이어 은은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젠, 고개를 돌려도 돼요." 백상인은 고개를 돌렸다. "........." 그는 순간 이불 속에 얼굴만 내밀고 앉아 있는 새빨개진 얼굴의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침상 옆에 그녀의 옷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지 금 벌거숭이가 분명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인가? 백상인은 문득 그녀가 한층 매혹적이고 요염하다고 느꼈다. "뭘 그렇게 자꾸만 봐요? 창피하게..." 그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곧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남 자의 옷차림은 여자에 비해서 간단한 편이다. 잠깐 사이에 백상인은 금세 나체 가 되었다. 평소의 그의 몸은 다소 후리후리하게 보인다. 그러나 지금 옷을 벗 은 그의 육체는 강인하고도 탄탄한 근육으로 잘 조화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의 피부는 남자의 것 같지 않게 백색의 투명한 빛을 뿌리고 있는데..... 무심코 그의 한 부분을 훔쳐본 여몽향은 일순 안색이 가볍게 굳어진 듯 했다. 그것은 그녀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녀에게 다소의 두려움을 안겨 준 것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 백상인은 곧 바람처럼 몸을 날려 그녀의 이불 속 으로 스며 들어왔다. "아....." 서로의 살갗이 닿자 여몽향은 잠시나마 굳어졌던 몸이 풀어지며 다시 전신이 흥분속으로 치닫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곧 뜨거워졌다. 그 위에 서서히 백상인의 손길이 스며들기 시작했 다. 백상인의 손길은 마치 악기를 가장 잘 다룰 줄 아는 훌륭한 악사같았다. 다소 마른 듯 하면서도 탄력있고 풍만한 여몽향의 나신은 실로 빙기옥골이란 말 그대로였는데, 아직 전인미답의 처녀인지라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늘게 떨리 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길이 스며들자 그녀의 전신은 곧 뜨겁게 불붙기 시작했고, 훌 륭한 악기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 실로 그녀의 전신 어디엔가 그런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었는지 의문이 갈 정도 였다. 백상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침범하고 두 개의 도발적으로 솟은 젖무 덤을 지나 그의 손길이 풍만한 엉덩이를 돌아 비로서 어두운 비소에 도달했을 때, 여몽향은 전신을 그에게 밀착시킨 채 가벼운 교성을 지르며 그를 끌어안기 도 했다. "아아......." X X X 그녀가 눈을 뜬 것은 아마 자정 무렵쯤 되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백상인은 그녀 의 옆에 누워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오 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소 기이하게 여겼으나 곧 그 이유를 추 리해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일시 의식을 잃자, 그가 곧 그녀의 수혈을 짚어 잠들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무예가 고강한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잠 을 자고 있다니. 너무도 잘 생긴, 한마디로 신의 걸작품이라고 할만한 백상인의 용모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를 한번 깨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백랑......!" 다행히 그는 금방 깨어났다. "왜 그러지, 향매?" 깊고 고요하며 더없이 맑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황홀한 눈동자. 그리고 그의 음 성이 한층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에 전신으로 깊은 희열을 느끼며 여몽향은 고 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왜 아직까지 자고 있지요?" "응.....? "나는 그렇다구 치구 당신은 어째서 아까 아침나절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백상인은 미소하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는 지난 삼일간 단 한 숨도 자지 못했으니 당연하지 않아?" "어머나?" "그보다 몸은 좀 괜찮아?" 백상인은 나직하게 물어보면서 그녀의 알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순간, "아........" 여몽향은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예리한 극통이 마치 하 복부를 찌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다음 순간 백상인의 손끝에서 부드 러운 진기가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고통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었다. 이에 여몽향 은 백상인의 몸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의 몸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백상인은 그녀를 더욱 사랑스런 손길로 어루만져 주었다. "사랑해요, 백랑!" "그건 나도 그래, 향매!" 문득 파고들던 여몽향의 손에 그의 상징이 잡혔다. 여몽향은 공연히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끼며 안면을 찡그렸다. "당신은, 너무 강한 것 같아요." 백상인은 미소했다. "앞으론 좀더 좋아질거야." "그래도 당신에겐 뭔가 대책이 필요해요." "글쎄......." 여몽향은 문득 미소하면서 물었다. "옛날 언닌 어땠지요?"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당신과 같았소." "설마?" 여몽향이 못믿겠다는 표정을 하자 백상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언니가 좀더 나았었소. 그녀는 최소한 당신처럼 오랫동안 잠을 자지는 않았으니까." "흥!" 여몽향은 예쁘게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언니처럼 되지는 않을거에요." "물론이오.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소!" 백상인은 힘주어 말했다. "아.... 백랑!" 여몽향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순간, 또다시 무거운 피 로가 그녀의 몸을 엄습했다. 그녀는 곧 사랑하는 그의 품 속에서 한없이 평온한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제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껴안은 채.... 그리고, 밤은 더욱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백상인은 잠에서 깨자마자 평소의 습관대로 새벽이슬을 밝으며 죽림정사에 올 랐다. 간밤의 격렬한 정사와 아름다운 여몽향의 알몸이 눈앞에 아른거려 처음에 는 마음이 허공으로 부유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곧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수양이 이미 경지에 이르렀음 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반시진이 지나지 않아서 주위에 문득 기척이 일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가 명상에 잠길때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불문 율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깊은 명상속에 있었지만, 고도의 무예로 인 한 그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밝은 청력은 그를 명상속에서 깨어나 현실의 눈을 뜨게 했다. 자신이 몹시 역점을 두고 있는 일이 타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아 깨어 졌다면 대부분 몹시 짜증스럽기 마련이다. 허나, 그는 곧 조용히 미소하여 그 침입자를 기다렸다. 그 침입자는 다음아닌 간밤에 너무도 사랑스럽게 변모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과연, 이윽고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여몽향이 단풍나무 숲을 헤치고 신법을 펼 쳐 다가왔다. 스슷......... 희미한 아침햇살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은은한 홍조로 물들어 해사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발길을 옮길때마다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하체는 그녀가 이 미 완전한 하나의 여인이 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어서 오시오, 향매!" 백상인은 정좌한 채 미소하며 그녀를 맞았다. 슷! 가볍게 정자위에 내려선 그녀는 얼굴을 화사하게 빛내면서 짐짓 토라진 듯 말 했다. "정말 그럴 수가 있나요! 나를 깨우지 않고 혼자서만 이런 곳엘 오다니!" 그녀는 말을 하고는 마치 화라도 난 듯 두 손을 허리위에 턱하니 걸쳤다. 헌데 그 광경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귀엽고 앙증맞았다. 백상인 은 웃으며 변명했다. "사실은 향매가 너무 곤하게 자는지라 깨우기가 안되었어서 그랬소." "흥! 정말인가요, 백랑?" 여몽향은 위압감을 더욱 조성하려는 것처럼 짐짓 눈을 부릅떴다. "정말이라니까. 헌데 아이구 이건 무서운 여마가 아닌가?" 백상인이 짐짓 무서운 듯 두 손을 번쩍 들자, 그들은 일순 다 같이 폭소를 터뜨 렸다. "호호호!" "하하...." 이어, 여몽향은 백상인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두 팔을 턱에 고이면서 물었다. "저, 나 예뻐요?" "그럼." 백상인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여몽향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면서 또 물었다. "얼마만큼?" "이 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답소." 여몽향은 그 말에 환하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요? 그럼... 나 안아줘요." 백상인은 애정이 담뿍 실린 얼굴로 두 손을 벌렸다. "물론이오, 향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몽향은 나비처럼 날아서 그의 품속에 안겨버렸 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른 아침, 여명이 터오는 새벽공기를 맡으며 취하는 그들의 입맞춤은 깊고도 농밀했다. 어제의 정사가 있었기 때문인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여몽향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주위에 맺혔던 이 슬방울들은 금방이라도 수증기로 화해 날아갈 듯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들 은 아쉬운 느낌을 남기며 조용히 떨어졌다. 안색이 완전히 도화빛으로 물든 여 몽향. 그녀는 문득 부끄러움을 느낀 듯 시선을 내리깔며 여전히 그의 품속에 안 긴 채 말했다. "저어,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백상인은 그녀의 고운 머릿결을 쓸어주며 말했다. "어서 말해보시오. 이제 당신은 내게 못할 말이 어디 있겠소?" 이에, 여몽향은 그의 얼굴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저어....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그래요. 헌데 당신이 곡 들어주셔야 해요."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다." "........" 여몽향은 잠시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느닷없이 말 을 이었다. "저, 천상삼화를 기억하고 있겠죠?" "물론이오." "실은........" 여몽향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당신에게 했던 행동은 사실 천상삼화가 일러준 계교에 의한 것이었 지요. 그녀들은 그러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틀림이 없을거라고 했 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고 과연 당신은 저에게 마음을 주셨어요. 저는 정 말로 얼마나 기뻤는지...." "........" "헌데 그 전에 저는 그녀들과 한가지 약속을 했지요. 제가 만약 당신의 여자가 되면 그녀들도 함께 당신의 여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그러니까 제가 당신의 네 번째 부인이 되는 셈이지요." "......." "어젯밤 그리고 오늘 아침내내 그 일을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저혼자 당신을 감 당하긴 어려울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부탁을 드리는 거에요. 아, 당신 화났 나요?" 여몽향은 돌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백상인의 안색이 어느덧 가볍게 굳어 있 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래서 그 부탁이란?" "천상삼화를 아내로 맞아주세요." 그런 말을 하는 여몽향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갑자기 비맞 은 참새처럼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그렇게도 내가 당신에게 있어 대단한 존재였단 말이오? 그러한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그렇게도 내가 중요했소?" 순간, 여몽향은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다, 당신은 정말, 나를 용서하시는 건가요?" 백상인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전후사정이야 어찌됐든 그때의 당신의 마음은 진실했었으니까. 진실 한 마음처럼 위대한 감동을 주는 것도 드문 법이오." "고마와요." 여몽향은 소리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백상인은 다시 그녀를 힘있게 안아주 며 말을 이었다. "허나, 당신의 그 부탁은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여몽향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역시 당신은 마음으론 저를 용서하지 않으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여몽향은 애조띤 시선으로 백상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럼 왜 갑자기 제 부탁을 거절하는거죠?" 백상인은 탄식하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당신을 위해서요."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저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그녀들이 꼭 필요하고, 그리고 그녀들은 매우 현명하고 좋은 여자들이에요." "........" "특별히 그녀들이 싫은 이유라도 있나요?" 백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반드시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것은 제 소원이에요." 백상인은 탄식하며 물었다. "당신은 질투가 나지도 않소?" 여몽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금방 질투를 했을거에요. 그러나 당신은 저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도 크신분, 만일 제가 질투한다면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거에요" "당신은 정말 좋은 여자요." 백상인은 거듭 탄식했다. "그럼, 이제는 저의 부탁을 들어주실 건가요?" 여몽향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알겠소." 순간, "고마와요, 백랑!" 여몽향은 소리치며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은 그녀들은 오직 당신과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자들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녀들만한 여자들도 다시 없구요. 저는 그런 여자들을 당신께 인도했다는 사실 에 더없이 행복한 자부심을 느껴요." "......." "사랑은 그녀들과 똑같이, 아니 저에게는 조금만 주셔도 되요. 그녀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내 자신을 아니까요." 백상인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그의 태도엔 더없는 사랑의 빛 이 가득했다. 여몽향은 행복한 표정으로 안색을 붉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의 품속에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어서 이 사실을 그녀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건데..... 사실은 어제 저녁부터 그녀들은 기다렸을거에요." 이어 그녀는 마악 신법을 펼쳐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헌데, 돌연 백상인이 그 녀의 행동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여몽향은 두눈이 동그래졌다. "왜죠?" "그녀들은 이미 이곳에 와 있기 때문이오." 말과 동시에 백상인은 고개로 한쪽을 가리켰다. "........." 과연, 그때였다. "정말 당신의 무예는 명불허전이군요! 우리는 들키지 않으려고 몹시 애썼는데." 그말과 함께 제갈청하가 앞장서고, 백리유, 남궁려려가 그 단풍나무 숲에서 천 천히 걸어나오는게 아닌가? 천상삼화. 말그대로 그녀들이 나타나자 일순 사위가 더없이 밝아진 것 같았다. 여몽향은 일시 어안이 벙벙했다. "구태여 이렇게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하지만 사실 우리도 겨우 방 금전에야 도착했는걸. 이해해 주겠지? 향동생!" 백리유의 그같은 변명이 아니었다면 여몽향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이에요. 어서와요 언니들!" 여몽향은 금세 안색을 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나가 그녀들을 반겼다. "어머, 더 예뻐졌네! 어쩜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달라질 수가 있어? 향동생?" "호호호호호....!"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갑자기 주위가 대낮보다 환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이윽 고, 그녀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백상인 앞으로 다가갔다. 제갈청하가 먼 저 입을 열었다. "우선 저의 잘못을 사과드리겠어요. 허나 우리도 실은 진실로 당신을 원했기 때 문에 그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만 일을 그렇게 한 것은 그 방법이 좀더 자연스러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아직도 불쾌한가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음은 이미 잊은지 오래요." 이에, 남궁려려가 나섰다. "그럼 당신은 우리를 정말로 아내로 맞이해줄건가요?" "그렇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유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 과거의 묵은 감정이 남아 있나요? 그런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 간부터 깨끗이 잊어주길 바래요. 우리는 당신에게 좋은 아내가 되도록 노력하겠 어요." 백상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감정의 찌꺼기 또한 없소. 오히려 내가 당신들 모두와 혼인하기에 모자란 것 같은데 당신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소?" 백리유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에요. 우리는 이후 당신을 성심껏 모실 생각이니 당 신의 보다 애정있는 태도를 바래요." "야호!" 짝,짝,짝! 옆에서 여몽향이 박수를 쳤다.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된 셈이군요? 축하해요!" 남궁려려는 덩달아 옥음으로 소리쳤다. "고마와! 이 모두가 향동생의 덕택이야." "그럼 나중에 좋게 한턱 내면 되잖아요." "아아, 그렇지? 호호...." "호호호......" 헌데 이때, 백상인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는데..... 나는 지금 몹시 바빠서 그만 가봐야겠소!" 말과 동시에, 그는 급히 신형을 움직였다. 번개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신형을 날려가는 그를 향해 제갈청하가 급히 소리쳤다. "아니 무슨 짓이에요? 우리는 어떻게 하고!" 이에, 아득한 곳에서 백상인의 천리전음이 울려왔다. "이미 장내의 사람들에게 모두 일러놨으니 걱정마시오!" "......?" 순간, 그녀들은 일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신형을 날려 누각쪽으로 사라 진 후 텅 비어버린 죽림정사. 스스스스슥.......! 한줄기 안개가 이는가 싶더니, 홀연 그 자리에 다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 은 바로 손빈아와 손범이었는데, 그중 손빈아의 안색은 온통 처연함으로 물들어 있었고 두 눈엔 눈물이 그득했다. 손범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누나는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내가 사부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니까 못하게 말리고서 이제는 쓸데없이 눈물이라니." 손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사람의 감정은 결코 인위적으로 되 는게 아니야. 내가 그분을 사모하지만 그분은 단지 나를 어린 꼬마 계집애로 밖 에보지 않을 수도 있는거야." "그렇지 않아. 사부님은 누나가 굳이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누나의 마 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내가 보기에도 누나는 아까 그 여자들보다 결 코 못하지 않을 것 같고, 그리고 내가 누나를 적극 도와준다고 하잖아!" "......" 손빈아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말없이 백상인이 사라졌던 방향을 주시 하면서 한숨만 짓는 것이었다. 이에, 손범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대체 어쩌려고 그래?" ".........." "참내! 누나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어느 정도 앞을 내다볼 줄 안다고 하던데, 이 거 사랑을 하면 그런 눈까지 머는 것일까?" 이렇게 중얼거린 손범은 답답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가슴을 몇번 두드린 뒤 제풀에 지쳐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스슷! "그래. 아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는 이미 눈이 멀어버린 것 같애.." 손빈아는 처연한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녀도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 빈자리에 다시 자욱한 안개가 밀려들더니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가벼운 파 동을 일으켰다. 그 햇살은 눈부셨다. X X X X 마교. 이미 천년 전에 사라졌던 그 마교의 뿌리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이며, 또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그것은 실로 의문이었 다. 자칫하면 그들로 인해 차후의 무림정세가 좌지우지 될지도 모르기 때문 에...... 과거, 마교에는 모두 아홉개의 서로 다른 세력이 존재했다. 그것을 바로 마교구 문이라 칭했거니와, 마교의 중추세력인 마문, 그리고 사문, 혈문, 독문, 요문, 귀문, 유령문, 수라문, 잔결문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자중지란을 일으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고 하거니와, 지금 그들 중 남아 있는 문파는 대체 어느 정도나 될까? 이러한 모든 의문을 떠올리며, 백상인은 곧바로 집마부로 향했다. 죽은 신도운 형에 의해서 집마령이 내려진지 이미 이틀이나 지났다. 따라서 마교의 후예들 중 일부가 이미 집마부에 당도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백상인은 신법의 속도를 좀더 빨리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마치 연기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비쾌한 속도로 군산쪽을 향해 날아갔다. 스으으... 군산 전역에 일어난 불길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정상에 다다른 백상인은 일순 눈빛을 빛냈다. 군산의 최고봉 정상, 집마부의 비밀통로 가 있는 자리 위에 얼핏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좀더 분명히 말하면 두 명의 괴노인들. 백상인은 소리없이 그들의 주위로 잠적해 들어갔다. 두 노인. 일신에 각각 평범한 청의와 홍의를 걸친 그들의 용모는 역시 평범했다. 다른 곳 에서 보았다면 아마도 시골노인 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기도. 그들의 전신에서 구름 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음습하고 귀기어린 기도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 의 평범한 용모는 마치 지옥의 아수라 야차쯤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청의노인. 그의 특색이라면 이 순간 두눈자위가 다소 백태낀 것처럼 회백색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귀화가 부유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는 찬찬히 과거 석불상이 서 있던 자리 등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에 그의 맞은 편에 서 있는 홍의 노인은 다소 초조한 모습이었다. 헌데, 이 순간 그의 신형은 형태없는 그림자처 럼 흐느적거리는 것 같지 않은가? "이, 이봐 귀노사! 어때? 정말로 그 집마령이 발동된거야? 틀림없어?" 홍의노인의 음성은 창로했으나 예상대로 몹시 초조함을 담고 있었다. "............." 청의노인은 잠시 묵묵했다. 그러자, 홍의노인은 더욱 초조한 모습이 되었다. "이봐! 어떻게 된거냐니까! 정말로 그 전설의 집마령이 발동된거야?" "음....." 청의노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네. 믿을 수 없게도, 아니 불행하게도..." "......" 그 말에 홍의노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는 곧 세차게 부인했 다. "아냐, 그럴리가 없어! 이미 천년이나 지났는데...혹시, 착각한 것 아냐?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틀림없네." "이이....! 이런 빌어먹을!" 홍의노인은 두 눈 가득 저주에 찬 분노를 드러냈다. 그를 향해 청의노인은 음울 한 어조를 내뱉듯이 말했다. "어서 입구나 찾아보세. 누군지는 몰라도 그 집마령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홍의노인은 버럭 화를 냈다. "제길헐! 보나마나 놈은 우리를 그런 목적으로 불렀겠지.!" 청의노인은 그를 향해 자조어린 실소를 흘렸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일이 아닌가, 유노사! 소용없는 일이니 우 리는 어서 집마부로 들어가는 입구나 찾아보세." "빌어먹을! 요즘은 다 잊어버리고 제자나 키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천 년이나 지난 일이 내대에서 터질 건 또 뭐람! 육시럴!" "........." "헌데, 그 입구는 대체 어디에 있는거지?" 그때, 그들의 전면 석불상이 있던 자리에 돌연 미미한 진동음이 일었다. 그그그그긍..... 갑자기 돌바닥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아래로 뻗은 지하계단이 나타나는게 아닌 가? "......!" 이에 흠칫한 그들은 두 눈 가득 흉흉한 안광을 내뿜었다. 드러난 입구를 세밀하게 조사하는 청의노인을 바라보며 홍의노인은 다소 불안 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 그들 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을까?" 청의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일세." "그렇다면 굳이 우리만 먼저 들어갈게 뭐가 있겠나?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 께......" "아니야, 이미 그 집마령주는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을 걸세. 이렇게 초대를 하 는데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를 겁장이로 생각할 걸세." "제기랄! 그렇다면 가 봐야지!" 홍의노인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앞장을 섰다. 스으으....... "조심하게!" 청의노인은 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스슷! 그들이 지하계단으로 사라지자, 그그긍........ 돌바닥은 다시 원래의 본모습을 회복했다. 그냥 보아서는 결코 입구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실로 절묘한 기관장치였다. 쿵....! X X X X 원형대전. 직경이 무려 삼십여 장이나 되는 거대한 원형대전의 중앙에 위치한 원통형의 거대한 석단. 그 위에 그는 조용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스슷! 석문의 입구에 흡사 유령이 솟아나듯 나타난 예의 두 노인은 그를 바라보자 일 순 크게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백의인. 석단 위에 고요한 태도로 돌아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매우 신비롭게 느껴졌 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바로 집마령주요?" "......" 백의인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치 깎아놓은 석상인양 움 직임은 커녕 심장의 박동마저 멎어 있는 사람 같았다. 이에 홍의노인은 매우 짜 증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다니 꽤나 신비한 척 하는군. 이거 우리가 어이없게도 귀신을 대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때, 그 백의인이 돌연 그들을 향해 신형을 돌렸다. "나는 귀신이 아니니 염려마시오." 도대체가, 그의 이 한 수 몸놀림은 마치 홍두깨처럼 느닷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 이했다. 그것은 마치 그는 그대로 있는데 원형단 자체가 돌아온 것처럼 그의 움 직임은 거짓말처럼 한점의 군더더기도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백의인은 고작 약관의 준수한 청년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 용모는 이제껏 그들이 보지 못했으리 만큼 눈부신 것이었지만, 결코 방금전의 그 절묘한 한 수를 펼쳤으리라고 여겨 지지 않는 백면서생이었던 것이다. "엇!" 청의노인은 가볍게 경호성을 터뜨린 후, 시선을 괴이하게 빛내며 물었다. "네가 바로 집마령주냐?" 백의인, 즉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보다시피." "믿을 수가... 없다. 집마령을 발동하기 위해선 최소한 반박귀진의 무예에 올라 야 하는데...." 홍의노인이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리자, 백상인은 즉시 품속에서 집마령부를 꺼 내들고 말했다. "이것을 보고도 모르겠소?" "헉, 그건 바로.." 집마령부를 바라본 두 사람은 일순 경악성을 발했다. 붉은 소검. 그곳에서 문득 붉은 핏빛 광채가 폭사되더니 돌연 검날 위에 새겨진 악마상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듯 허공에 공포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우우우웅....... "이젠 인정하겠소?" 백상인은 소검에 주입한 진기를 거두고 묻자, "음......" 청의노인은 침음성을 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것은 정말로 집마령부다. 과거 마교의 무상지존령부였기도 하지. 허 나......" "......." "그렇다고 네가 집마령주라는 말은 아니다." "무슨 소리요?" 백상인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청의노인은 집마령부를 다시 한번 바라본 뒤 음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일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군" "과거의 일이라면......." "천년 전..... 자네는 마교가 왜 멸망의 길을 걸었는지 아는가?" "그거야 자체분열 때문이 아니오." 청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허나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 사, 수라, 잔결문에 대한 혈, 독, 요, 귀, 유령문의 격돌이었지 그 이유는 여러가지 있었지만, 결국 마교사문은 다른 오 문에게 패하여 전멸하고 말았네." "그렇다면 그 오문은?" "혈, 독, 요, 귀, 유령문의 오문은 그 싸움에서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그 자신 역시 무사하질 못했네. 특히 한가지 치명적인 실책은 당시 마교지존령부인 집마 령부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지. 그 집마령부는 과거 마교대종사의 유물이었 기 때문에 모든 마교인들은 아무리 오문소속일지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 사실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지." "......." "만일, 사문의 잔당들이 그 집마령부를 입수하게 된다면 사태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결국, 오문은 강호에 잠적하는 수 밖에 없었네. 그리고 만 일 집마령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이득을 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제자 수를 급격히 줄였고 종래에는 죽기 전에 오직 한 명의 제자만을 선정하여 단맥 으로만 이어지게 되었지. 대신 나타날 집마령주에 대항하기 위해 무예연마는 게 을리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청의노인은 백상인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 집마령부를 부인하지는 않네. 다만 어중이 떠중이가 집마령주가 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자네의 능력 정도를 시험해 봐야 하겠다는 것일세. 자네가 만일 우리를 이겨낼 수 있다면 당연히 집마령주가 되는 것이지." "........" 다 듣고난 백상인은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이오?" 청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설사 자네가 마교의 후예일지라도.. 그리고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하 도록 되어 있지. 자네가 우리에게 그 집마령부를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일세." "아주 흥미있는 내용이구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해주는 것을 보니 나에 대해 대단한 자신이 있는가 본데, 혹시 잘못하 여 내게 지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 말에, 여태 아무말도 없던 홍의노인이 돌연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우린 그간 결코 무예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설마 너같은 애송이에게 당할 것 같으냐? 어서 이리로 내려와라!" 소리침과 더불어 홍의노인은 전신의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홍 의가 대번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돌연 투명한 빛깔로 변해갔다. 그야말로 그가 자신의 진재절학을 십분 발휘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헌데, 백상인은 갑 자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싸움을 하기가 싫소!" 이에, 홍의노인은 문득 공력을 거두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 도망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있겠소. 나는 다만 지금 불공평하게 유리한 입장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 뿐이오." "뭣이!" 다소 신중한 표정이던 청의노인이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리하다니! 우리는 지금 두 사람이 자네에게 합공을 펼칠 걸세. 그런데도 자 네가 유리하단 말인가?" "물론이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당신이 말한 바에 의하면 당신네 오문은 단맥으로 이어져 적어도 세 사 람의 동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따라서 내 말은 잠시 후면 당신들의 동료 가 올테니 그때 함께 승부를 겨뤄보잔 말이오." "하하하... 네 뜻이 정말 그렇다면 결코 마다할 우리가 아니지." 홍의노인은 이어 아주 희희낙락한 표정이 되었다. 다만 청의노인은 두눈 가득 몽롱한 그림자를 더욱 짙게 뿌렸다. "자네는 아주 어리석군."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단지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을 뿐이오." 청의노인은 눈썹을 좁혔다. "대체 자네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뭔가?" 헌데, 백상인은 다시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합시다. 이미 당신들의 동료가 온 것 같으니." 그말에 흠칫한 두 사람은 급히 입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바로 그들이 들어왔던 뒤쪽의 통로로, 아니나 다를까. 스슷..... 흡사 안개가 번져나오듯 희뿌연 그림자가 일며 세 사람의 신형이 나타나는 것 이 아닌가? 세 사람. 그들의 용모는 일견하기에도 서로 각각이었고 그 느낌마저도 서로 상반된 감을 주었다. 금포노인. 그의 체구는 다소 작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는데, 얼굴이 기이하도록 붉 고 그 눈빛마저도 은은한 붉은 기운이 돌았다. 남의중년인. 그의 체구는 평범했고 단지 조금 우람한 몸집 위에 놓은 얼굴은 은은한 자색 광채가 돌고 검은 동공도 자광이 흘렀다. 홍의소녀 대략 나이가 십 칠팔 세 가량이나 될까? 그녀의 체구는 다소 마른 듯 하면서도 매우 풍염해 보였다. 그들 삼인은 두 노인을 보자 즉시 가까이 다가갔다. "호호호! 오랜만이에요, 귀노사, 유노사!" 홍의소녀의 음성은 흡사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지극히 영롱했다. 헌데, 그 녀는 지금 먼저 와 있던 두 노인을 마치 동배의 사람 대하듯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홍의노인 역시 그와 다름이 없었다. "하하, 요노사의 용모는 늘 변함이 없군." 이에, 홍의소녀는 고혹적인 두 눈을 교태롭게 흘기며 말했다. "흥! 유노사는 또 잊은 모양이군요. 저는 그저 요매가 좋다니까요!" "아, 미안하오. 요매의 주안술은 정말 놀랍단 말이야. 나는 늘 탄복을 금치 못하 는 바이오." "흥, 또 그 얘기... 이미 다 늙은 당신이 설마 내게 다른 생각이라도 있단 말인 가요? 그렇담, 이리 가까이 오세요." 홍의소녀는 말과 함께 홍의나삼치마를 다소 걷어보였다. 그러자, 유백색의 새하 얀 두개의 다리가 드러나면서 짙은 교태와 현란한 유혹을 뿌렸다. 빙기옥골이라 고 하던가? 마치 두개의 옥주같은 그것들은 실로 처절한 유혹을 극한 결정체였다. 이에 홍 의노인은 순간 얼굴이 심하게 붉어졌다. "시, 싫소! 요매의 그 대법에 걸려들긴 싫으니까." 홍의노인이 허둥대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홍의소녀는 치마를 내리며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다 늙은 영감이 그래도 생명에 대한 애착은 있어가지고, 알았어요. 당신같은 사람을 누가 거들떠나 본대요?" 이어, 그녀는 단 위에 올라있는 백상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헌데, 저 사람은 누구죠?" 이때, 그들 모두의 시선은 은연중 백상인을 향해 쏠려 있었다. 비록 태연히 인 사를 교환하는 듯 해도 결국 모두의 관심은 당연히 집마령주란 존재에 대해 집 중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내의 분위기는 자연 싸늘하게 굳어졌다. 청의노인이 잠시 침묵하자, 홍의소녀는 장내의 분위기를 의식하고 더욱 간드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정말 집마부령주인가?" 청의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에 홍의소녀는 요염한 눈빛을 빛냈다. 게다가 그가 천하에 다시 없을 정도로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람임을 확인하자 일순 그녀의 두 눈에는 사람을 녹일 듯 한 달콤한 교태가 넘쳐 흘렀다. "호호호......!" 그녀는 요염한 교소를 흘리며 백상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집마령주가 당신처럼 나이어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정말인가요?" 그녀는 어조엔 전혀 적의가 깃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혹하는 듯한 인상이 길게 느껴졌다. 허나 백상인은 상관하지 않고 미소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그렇소. 내가 집마령주요." "믿을 수가 없군요! 그 나이에 벌써 그런 무공을 성취하다니......" 홍의소녀는 잠시 멈칫하다가곧 다시 교소를 토하며 입을 열었다. "호호, 이거 내가 소개도 하지 않고 주책을 부렸군. 음, 나는 요문의 요매야, 그 리고 저 혈노사, 독노사, 귀노사, 유노사는 각각 혈문과 독문, 귀문, 유령문의 사 람들이지." 백상인은 담담히 미소했다. "이미 알고 있소." "그래?" 홍의소녀 요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내가 말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동생은 아주 신기한 재주가 있나본데?" "별것 아니오." "헌데 동생의 이름은 어떻게 되지?" 요매가 연거푸 두번이나 동생 운운하자 백상인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당신들은 모두 나이가 백세에 가까운 것 같은데 나를 그렇게 다정하 게 부를 필요가 뭐가 있겠소?" 이에 요매는 일시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으나 곧 교소하며 말했다. "호호, 그건 맞아. 나는 당연히 그대를 령주라고 불러야 옳겠지. 헌데 그대의 이 름은?" "백상인이오." "백상인? 아주 좋은 이름이야." "고맙소." "헌데 령주께선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요?" 이때, 독노사가 나서며 차갑게 내뱉았다. "요매 정신차리라고! 그를 령주로 인정한단 말인가?" 요매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럼 당신은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독노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물론이오. 그건 조사님들의 유시가 아니오? 당신은 지금 저 번드레하게 생긴 용모에 반해서 혹하고 있는가본데, 정신차리시오! 우리 모두는 그와 당연히 일 전을 겨뤄야만 하오." "흥! 어쨌든 나는 찬성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든가 마음대로 해요!" 요매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뒤 곧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네 명의 위인들이 백상인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 들었다. 그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일촉즉발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스슷..... 이윽고 백상인을 둥글게 둘러싸자, 그들 가운데 귀노사가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네게 협공을 펼칠 것이다. 너는 계속 그 자리에 있겠 느냐?" 사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러한 조건은 불합리한 것이엇다. 세상에 어느 우두머리 가 수하들의 합공을 이겨내야 한단 말인가? 따라서 이러한 조건은 책임을 회피 하기 위한 억지조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백상인은 조용히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들은 어서 공격해 보시오." 그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일순 금포노인 혈노사가 두눈 가득 혈광을 떠올렸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일성대갈과 함께 그는 두 팔을 좌우로 넓게 벌렸다. 그러자, 쿠쿠쿠쿠쿠! 그의 전신 가득 시뻘건 혈광이 구름같이 일며 돌연 백상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신형이 한꺼번에 단 위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장내의 공기 는 갑자기 거센 파동을 일으켰고, 혈노사가 펼친 붉은 장력은 일시 백상인의 전 신을 뒤덮는 듯 했다. 헌데 그때, 돌연 백상인의 코앞까지 다가든 강기가 흔적 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게 아닌가? "헉!" 돌연한 괴변에 혈노사는 일순 헛바람을 들이켰다. 혈노사는 너무도 경악한 나머 지 일시 주춤했고, 그 바람에 그의 전신에는 순간적인 헛점이 드러났다. 이에 혈노사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때 때마침 독노사의 자색빛 을 띤 강기가 백상인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쿠우우우우우......... 혈노사는 이를 보고 얼핏 희열의 빛을 떠올렸다. 허나 다음순간, 독노사의 자객 강기 또한 흔적없이 허물어져 버리는게 아닌가? "앗!" 때마침 눈에 보이지 않는 빠른 신법으로 백상인에게 다가들던 유노사는 급히 신형을 주춤했다. 때문에 그의 신형은 허공에 무수한 그림자를 남기고 나타났는 데, 그때, 귀노사가 짧게 대갈일성을 했다. "한꺼번에 공격하시오!" 말과 더불어 그는 쌍수를 흡사 풍차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콰우우우우! 그의 전신에서 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암기더미 가 백상인의전신을 향해 밀려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전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쿠쿠쿠쿠! 쿠우우웅...... 스스슷! 번쩍!!!! 그 가공스런 기세로 보아 그들은 이미 전력을 다한 것 같았다. 때문에 백상인의 전신은 삽시간에 붉고 검으며 자색의 공포스런 광채에 휩싸여 지극히 위태로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헌데, 정작 본인인 백상인의 표정은 결코 초조하거나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 다. 더구나 그러한 무시무시한 공세를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태 연히 있었고, 오히려 놀라고 두려워한 사람은 한쪽에 서 있던 요매였다. "위험해요!" 한소리 경악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신형은 백상인에게 덮어씌우듯 날아갔다. 그 녀의신법은 매우 빨랐다. 때문에 그녀는 다행히도 그들의 공세가 미치기도 전에 백상인의 근처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허나 상황은 더욱 위급하게 변해버렸다. 그들 사인은 그녀를 보면서도 공격을 늦추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흉악하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순간 요매의 안색은 두려움에 질려 창백하게 변해버렸고, 그렇게 되니 그녀는 오히려 백상인의 앞을 가로막고 방해가 되어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이제 백상인은 그 무서운 공세하에서 자신은 물론 요매까지 지켜야 하는 입장 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상황은 워낙 다급했다. 요매는 순간 어찌해볼 사이도 없 이 그대로 백상인의 품속으로 오들오들 떨며 파고들었다. 그때, 장내에 일순 화 려한 광채가 일었다. 금광. 그 황금빛 광채는 은은하고도 장엄한 기운을 뿌리며 백상인의 몸에서 솟아나왔 고, 불가사의하게도 그 금광에 부딪친 사인의 무서운 공세는 그대로 허물어지듯 사라지는게 아닌가? 그 흔한 파공음이나 마찰음 하나 일지 않고서...... 때문에 일시 중심을 잃어버린 사인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앗.....!" "윽, 이럴수가!" 분분히 바닥에 떨어져 내린 그들의 안색엔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 올라 있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실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두려워서 백상인의 품속에 파고들었던 요매의 우수가 돌연 백상인의 좌측 심장 부위로 경쾌하게 파고드는게 아닌가? 물론 그녀의 우수엔 날이 시퍼런 비수 하나가 어느 틈엔가 들려 있었다. 푹! 예리한 비수의 날은 대번에 여지없이 백상인의 심장부위를 꿰뚫고 깊이 들어가 박혀버렸다. 그러니까 요매, 그녀는 처음부터 백상인에게 친근한 척 하면서 이 런 살수를 노렸던 것이다. 백상인의 심장부위에 비수를 박아넣은 요매는 재빨리 신형을 되퉁겨 뒤로 날아 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스슷! 이어 분명히 백상인의 심장부위에 박혀있는 비수를 재확인하며 그녀는 일순 짤 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어리석은 아이야. 네가 비록 무예가 아무리 높다해도 내가 너를 주인 으로 모실줄 알았단 말이냐? 그 얼굴이 정말 아깝기는 하지만 내 물건이 아닌 이상은 미련이 없지." "크하하하하!" 혈노사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정말 잘했어, 요매! 저녀석의 무예는 실로 상상외로 높은 것이 하마터면 우리 가 당할뻔 했단 말이야! 안그래 독노사?" 옆에 내려선 독노사는 두 눈에 자광을 번쩍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소리야. 요매의 공이 컸어!" 이에 뒤질세라 유노사도 한마디를 했다. "하하하! 이젠 만사가 잘됐군! 그간 우리는 쥐죽은 듯 살아왔지만 이제부턴 집 마령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기르고 무림제패의 대업을 위해... 헌데 우리의 주장 은 누가 되지, 귀노사?" 그런데 귀노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말에 나머지 사인은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유노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귀노사는 손가락으로 백상인을 가리켰다. "그를 자세히 보라구." "뭣이?" 오인의 시선은 일제히 백상인을 향해 집중되었다. 백상인. 그는 실로 기이했다. 분명 그의 좌측 심장부위엔 서슬이 시퍼런 비수가 제대로 꽂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심장부위에선 한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는게 아 닌가? 게다가 백상인의 표정은 결코 엉겁결에 기습을 당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 다. 그의 안색에선 온화하고도 고요한 미소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아니....!" 놀라는 그들의 시선이 모이자, 백상인은 더욱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면 서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 뜻대로 되지 못해서 유감이오." "너, 너는 정말로 괜찮단 말이냐?" 요매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렇소." 백상인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 어떻게 그, 그럴수가....." 요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요란하게 벌렸다. 바로 이때, 그들의 앞에서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깊숙이 심 장부위까지 파고들었던 비수.... 그것이 흡사 살아있기라도 하듯 서서히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종래에는 완전히 백상인의 몸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쨍그랑! 비수가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혈노사가 번쩍 신형을 날렸다. "뒈져라!" 일갈괴성과 함께 그는 자신의 독문절기인 혈영마공을 벼락같이 퍼부었다. 쿠쿠쿠쿠! 혈영마공. 그것을 극성으로 펼치자 장내는 일순 핏빛 공포스런 광채의 소용돌이 속으로 화해버렸다. 그러나, 번쩍! 한줄이 장엄한 금광이 일자, 그 공포스런 핏빛 광채는 씻은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에, "으악!" 혈노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전신을 한번 부르르 떨더니 곧바로 바닥으로 심 하게 떨어져 내렸다. 쿠당당! 이것을 보고 나머지 사인도 동시에 자신의 최후절초를 펼쳐 달려들었다. 허나, 역시 한줄기 금빛광채가 일자 그들의 신형도 혈노사와 다름없이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쿵, 쿠당당! 거칠게 바닥에 떨어져내린 그들은 일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워낙 충 격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이미 그들의 전신대혈이 제압당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백상인은 고요히 앉은 채로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소? 이젠 수긍할만 하오?" "....." 아혈만은 제압당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일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을 향해 백상인은 재차 말을 이었다. "정히 수긍할 수 없다면 할 수 없지. 그대들을 제거하는 수밖에." 그 말이 떨어지자, 그들 오인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동시에 유노사가 급급히 입 을 열었다. "아, 알겠소.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겠으니 어서 이 금제를 좀 풀어..." 유노사는 급히 말을 던져놓고 주위를 의식한 탓인지 말끝을 흐렸다. 허나 백상 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헌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백상인의 시선이 닿자, 요매는 하는 수 없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도... 그렇게 하겠어요." 뒤이어 혈노사와 독노사 역시 입을 열었다. "아, 알겠소이다. 그대는 지금부터 나의 주인이오." "나도 마찬가지외다." 이제 남은 사람은 귀노사 한 사람 뿐이었다. 그는 백상인의 시선이 와닿자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 당신의 무예도 시험해본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당신은 진정한 집마령주이며, 이제는 엄연한 지존이오." "하하....." 백상인은 하늘을 쳐다보고 한차례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됐소. 이제 그대들은 나의 정식수하들이니 지금 곧 예식을 올리도록 합시다." "이 금제는?" 백상인은 그저 미소만 했다. 이에 유노사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하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의 금제는 풀려 있었던 것이다. 유노사도 뒤따라 급히 신형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다 같이 백상인을 향해 수하로서의 예를 올리기 시작했다. "노신 등이 지존을 뵈옵니다.!" 그 소리는 제법 우렁찼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똥씹은 듯한 얼굴로 마지 못해 허리를 꺾고 있었다. 그 원망 가득하고 살기어린 시선들..... 만일 시선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가 있다면 백상인은 벌써 수백번은 죽고 말 았을 것이다. 허나, 그의 태도는 시종 온화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X X X X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한가하다는 것은 아 니었다. 다름아닌 감정상의 문제가 아직 남은 것이다. 백상인. 그는 이번의 행로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험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삼 년 전에 화화장에서 만났던 신비노인 때문인데, 만일 이번 출전에서 그와 맞부 딪친다면 백상인은 스스로도 승리를 낙관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삼년 전 다른 사람에게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 같은 것을 그에 게서 은연중 느꼈었던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이 결전을 피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승리하거 나 패하거나, 그는 이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 그이기에 다소의 감정상의 정리가 필요했 다. 나중에 후회됨이 없도록..... 그래서 악양의 성수장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길은 다소 무거운 듯 보였다. X X X X 백상인은 사흘만에 성수장으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하나 뿐인 제자 손 범이 달려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빈아는 어딜 갔느냐?" "누나는 요 며칠동안 자기 방에 누워서 나오지 않아요." "그래?" 다소 우울해 보이는 손범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상인은 미소와 동시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혼이 짙게 물든 성수장의 전경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었 다. 늘상 그러한 것을 느껴왔으면서도 새삼 감동에 젖으며 백상인은 그 황혼을 밟으며 누각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손범은 그의 뒤에서 조용히 뒤따랐다. "저어....." 문득 손범이 입을 열었다. "누나는 무슨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요? 사부님?"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걱정에 가득한 손범의 얼굴을 보며 백상인은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손범과 손빈아 남매는 과거 그가 장강을 경유하던 당 시 인연을 맺었던 이인 손노인의 손자와 손녀로서, 남매간의 우의가 깊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씀씀이 또한 충직하고 총명했다. 때문에 백상인은 그를 특별히 제자로 거두었고 남달리 아끼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병에 걸리게 되는 거란다." "누구나요?" 무척 의아해하는 손범에게 시선을 거두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백상인은 다시 말했다. "그녀들은 아직 이곳에 있느냐?" 그가 그녀들이라 말한 것은 천상삼화와 여몽향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 헌데 그녀들은 장차 사부님의 부인들이 되실 것입니까?" 백상인은 고개를 돌려보며 웃음을 지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손범은 갑자기 안색이 쾌활해졌다. "저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누나한텐 미안하지만 그분들은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 들 같거든요. 헤헤....." "그래......?" 백상인은 다시 시선을 거두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누각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X X X X 대청에 들어서자 어느새 알았는지 천상삼화와 여몽향 등이 달려와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백랑!" 백리유가 먼저 반갑게 입을 열었고, 뒤이어 남궁려려가 다소 토라진 듯이 말했다. "흥, 정말 너무해요. 겨우 이제 오시다니." 여몽향은 눈을 하얗게 흘기면서 거들었다. "정말 나빠요! 그간 우리가 얼마나 눈치를 보며 살았는지 알아요?" 백상인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이제 이곳의 주인이나 마찬가진데 눈치볼 것이 뭐 가 있겠소?" "호호, 정말 그렇군요." 그녀들은 까르르 웃으며 곧 달려와 그의 품속에 안겼다. 도망치듯 달아났다가 사흘만에 나타난 사람에 대한 예우치고는 매우 순한 편이었다. 백상인은 다정하 게 그녀들을 안아주다가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제갈청하. 그녀는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눈길이 향하자 문득 입을 열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백상인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헌데 당신들은?" 제갈청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도 아직...." 이어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쪽 입구에서 홀연 서너 명의 시녀들이 음식상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견하기로도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 한 음식상이었다. 백상인은 비록 이곳의 주인이긴 해도 사실 검소한 생활을 해 온 탓에 이렇게 호화로운 음식상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백상인은 눈을 휘둥그 레 뜨고는 제갈청하에게 물었다. "아니, 어떻게 내가 지금 올줄 알고 이런 음식상을 미리 준비한 거요?" 제갈청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늘 이런 음식상을 만들어 놓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지난 사흘간 계속.... 당신이 이 음식상을 대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아, 그랬군." 백상인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것을 보고 백리유가 말했다. "미안해 하실 것은 없어요." "......" "영웅의 아내는 고달프다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하...." 백상인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뒤 말햇다. "그건 그렇고 우선 식사나 합시다. 나는 사실 허기가 져서 꼼짝도 못할 지경이오." "호호호, 그래요. 백랑!" "호호호....." 그녀들은 대뜸 환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앞을 다투어 백상인의 주위로 몰려들었 다. 식사가 끝나자, 시비들이 차를 날라왔다. 차를 들면서 그들은 오랜만에 담 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만 제갈청하만큼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는 가운 데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밤이 깊자 백상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들어가서 자도록 합시다. 야심한 시각이오." 그녀들은 다소 서운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백상인과 작별한 뒤 침실로 향했다. 침실의 한쪽에선 팔뚝만큼이나 커다란 황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르르르...... 한줄기 바람이 일었는가. 촛불은 한순간 소리없이 꺼졌다. 한줄기 흰 연기가 여 운을 남기는 가운데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일시 너무도 고요해서 숨이 다 막힐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적막은 결코 불안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숨막히는 황홀감이 실내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사라라락...... 일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것은 바로 옷을 벗는 소리였다. 천상삼화. 그녀들이 지금 한 사람을 위해 옷을 벗고 있는 것이다. 여몽향은 이미 자청해서 옆방으로 물러가버린 뒤였다. 원래 잠옷만을 입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들이 옷을 벗는 동작은 금방 끝나 버 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여인은 다소의 옷을 걸치고 있을 때가 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황홀한 신비감과 교태가 그속에서 함께 우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여인이 완전 나체로 변한다면 그 황홀감은 의외에도 감소하는 법 이다. 신비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여기 이 세 여인들의 육신은 그러한 종래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완벽한 아름다움. 그 불가능한 모순이 여기 재현되고 있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황홀한 나신의 빛깔과 다소의 부끄러움이 실내 전체에 파도처 럼 흐르고 있었다. 그 부끄러움을 참다 못했음인가. 남궁려려가 먼저 백상인의 품속으로 얼굴을 숙 인 채 날아들었다. 마치 그녀는 오늘의 이 한수를 위해 오랫동안 신법을 연마해 온 것이 아닐까. 백상인도 이미 완전한 나신으로 화한 뒤였다. 천상삼화가 여인의 완전함이라면 그의 나체는 남성의 건강하고도 우아한 완벽함이었다. "백랑, 아......" 품속으로 남아든 남궁려려의 얼굴은 마치 홍시처럼 붉어진 채 헛소리를 하듯 중얼거렸다. "려매!" 백상인은 나직이 소리친 후 그녀를 보듬어 안고 침상으로 향했다. 남궁려려는 마치 구름 위에 붕 떠오른 표정이였다. 헌데 마악 침상 위에 올려진 순간, 그녀는 교묘하게 그의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호호호....."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일시 백상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이미 그녀 는 백리유의 뒤쪽으로 숨은 뒤였다. "호호, 나를 잡아봐요, 그러면 용치!" 그녀는 알몸으로 백리유의 황홀한 나신 옆에 숨어서 까르르 교소하며 놀려댔다. 백상인은 그녀를 잠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방 향을 전향했다. 제갈청하. 그녀는 여전히 차갑고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차가운 표정은 그녀의 눈 부신 나신과 어울려 실로 숨막히는 유혹을 자아냈다. 더욱이 살며시 벌리고 선 그녀의 두 백옥같은 다리 사이의 그 은밀한 빛깔이란........ 백상인은 그만 충동적으로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하매!" 그가 그녀를 붙잡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매라고 외친 다음 순간, 그는 그녀의 눈부시게 희고 탄력있으며 날씬한 나신을 부둥켜 안고 있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반항을 하지 않았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는 그를 반겨 맞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까처럼 냉랭한 표정 그대로였다. "하매....." 백상인이 행동을 잠시 주춤하자, 제갈청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 백상 인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알았소, 하매!" 백상인은 감격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한뒤 신형을 그대로 백리유를 향해 날렸다. 허나 그는 그 순간에도 제갈청하의 한쪽 수밀도 위의 젖꼭지를 슬쩍 건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결코 변할것 같지않던 제갈청하의 안색이 언뜻 홍시 처럼 붉어졌다. "아......" 나직한 탄식같은 신음이 그 뒤를 이었다. 백리유의 나신 역시 조금의 손색도 없 었다. 다만 그녀의 전신에 피어오르는 기도는 다소 성결함을 겸하고 있었기에 그저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나신은 셋 중 가장 풍만한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었고 또 탄력적이었다. 두 다리 사이의 비림은 성결한 가운데 악마의 유혹처럼 어두웠다. "유매! 사랑하오." "저도 그래요, 백랑!" 백리유는 한없이 온화하고 애정 깃든 표정으로 그의 품속에 안겼다. 그러다가 밀착된 그의 육체가 온몸으로 느껴지자, 그녀는 일순 안색을 온통 붉히며 전신 을 파르르 떨었다. 백상인은 그녀를 껴안고 부지불식간에 침상 위로 올랐다. 백리유는 즉시 그의 밑에 깔렸다. 육중한 백상인의 체중을 느끼는 순간, 그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입술로 침범했다. "아!" 그녀는 짤막한 비명같은 신음을 토하고 입술을 점령당했다. 뒤이어 지극히 황홀 한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파도처럼 휩쓸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거침없이 그 녀의 비지로 향했다. 그때 백상인은 불의의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백랑......!" 제갈청하와 남궁려려의 나신이 그의 등 뒤로 덮쳐들었던 것이다. 백상인은 일순 전신을 파도처럼 움직였다. 한 남자와 세 여인. 각기 눈부신 용모를 갖춘 이들은 그간의 갈증을 해소하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한 율동은 격렬했다. 실내의 공기는 금세 뜨겁게 가열되었고, 그녀들의 백 옥빛 나신은 붉게 달아올랐다. 거세게 타오르는 갈증.... 그 속에서 일순 백리유는 전신을 흠칫 경직시켰다. 갑자기 그녀의 하복부를 파 고드는 격렬한 통증을 느낀 것이다. 거세게 타올랐던 열기는 일순 찬물을 끼얹 은 듯 사라지고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허나 내심 얼마나 기다렸던 고통이었던가? 비록 예상외의 심한 고통을 수반하 긴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부드럽게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격렬한 고통을 전 신으로 받아들였고 황홀한 듯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자, 고통은 잠시 후 물러가고 대신 진짜 쾌감이 그녀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나신을 부둥켜 안았다. 이때 백상인은 점점 격렬한 움직임 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백리유의 전신은 격한 쾌감을 견디지 못해 물결처럼 뒤 흔들렸다. 그러한 쾌감은 실로 고통보다 참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허나 그녀는 결코 이번에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주 위의 제갈청하와 남궁려려에게 참을 수 없는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할 수 없이 그녀들은 기다려야 했다. 백상인과 백리유. 두 사람의 움직임은 너무 격렬하여 제 삼자가 끼어들 여지를 조금도 없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마치 그들은 남은 최후의 열기까지 남김없이 불사르려는 것 같았다. 백리유는 수없이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넘었지만 혼절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정력은 마 르지 않는 바다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바다라면 백상인은 하늘이었다. 하늘은 끝없이 바다를 희롱했고 마침내 바다가 그 힘을 다할 순간이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태양이 너무 도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급기야는 바다는 한 점의 물방울도 없이 매말라 버렸 고, 그 열기에 못이겨 통째로 터져나가려고 했다. 여기에 이르러 마침내 바다는 공포에 젖은 표정을 했다. 지극한 두려움으로 그 녀는 결코 폭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태껏 많은 폭발을 겪어왔지 만 이 폭발만은 자칫 그녀 전체를 그대로 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결국 그 순간은 원하지 않았지만 다가왔다. 백리유는 하늘이 갑자기 빙빙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생각이 갑자기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의 내부에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미증유의 거대한 폭발. 그녀의 의식은 순간 갈가리 터져나갔고,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할 빛무리 속에 잠 겨버렸다. "아악.....!" 백리유는 혼절했고 얼굴은 지극히 황홀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언니....!" 남궁려려가 놀라서 그녀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허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금 방 깨어났다. "괜찮아, 려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안색이 더욱 붉어졌다. 이때, 백상인이 그녀에게 제 이차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 그만 백리유는 질겁한 표정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녀 대신 그에게 잡힌 사람은 남궁려려였다. 마침 오랫동안 기다리느라 흥분할 대로 흥분해버린 그녀의 나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백상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갓 잡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백상인의 마음은 급해져 있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애무하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곧바로 진입을 시도했다. "아욱.....!" 남궁려려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그런 고통일줄은 몰랐는지라 급 히 달아나려고 했다. 허나 달아나려고 파닥거리는 그녀의 사지는 백상인의 무게 에 눌려 조금도 그 뜻을 실행하지 못했다. 백상인은 마치 폭군처럼 움직였고 그녀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남궁려려는 계속 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었 을 때, 그녀는 겨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황홀한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 듯, 그녀는 곧이어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신음했다. 잠시 껴안았던 그녀의 사 지는 그의 나신에서 다시 풀리며 허공으로 마구 물결쳤다. "아흑! 학!" 그런 상태로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잔혹하다고 할 쾌락에 그녀는 금방 이라도 혼절할 듯 했지만 의외로 오랫동안 시간을 견디었다. 그러다가 그녀도 마침내 속절없이 최후의 폭발과 함께 혼절하고 말았다. "악..!" 백상인은 그녀의 몸 위에서 비로소 떨어져 나갔다. 허나 그의 상징은 이순간 더 욱 맹령하게 성을 내고 있었다. 그녀석의 능력은 마치 한이 없는 것 같았다. 백상인은 이어 제갈청하에게 달려갔다. 처음과는 달리, 그녀의 전신은 이미 심 한 흥분으로 인해 분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전신을 점령하 자, 그녀의 처녀지는 심한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렸다. 한쪽에서 백리유와 남궁려려는 이미 심하게 지친 모습으로 반쯤 혼절한 채 잠 들어 있었다. 백상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원래, 제갈청하의 나신은 충분히 흥분 된 상태였고, 그 흥분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백상인은 곧바로 그녀의 몸속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무예가 고강해도 처녀지신 파과의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는 것 인가? 제갈청하의 전신이 갑자기 경직되는 듯 하자 백상인은 일순 속도를 늦 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매.." "예, 백랑...."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는 그녀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그 녀의 붉어졌었던 안색은 어느덧 차가운 기운이 돌고 있었다. "괜찮겠소...?" 제갈청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몰론이에요..." 그녀는 말과 더불어 백상인에게 안겨왔다. 백상인은 그녀를 안은 뒤 부드럽게 애무를 시작했다. "사랑하오, 하매! 당신은 정말 사랑스런 여인이오." "저도......" 그런데, 한번 굳어진 그녀의 몸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매사에 치밀하고 지 혜로운 사람일수록 이런 일에는 잘되지 않는 것일까? 백상인은 그만 고전을 면 치 못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도 부드럽게 애무를 계속했으나 오히려 그녀의 몸은 더욱 긴장으로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하매...." 백상인은 내심 가벼운 탄식을 발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상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수치심에서인가, 두려움 때문인가? 제갈청하의 나신 은 어느덧 싸늘한 얼음으로 화해버린 듯 싶었다. 물론 자신의 신체변화를 알고 있는 그녀의 눈꺼풀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백 상인은 그녀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뜨거운 입술을 그녀에게 가져갔다. 그녀의 입술은 역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백상인의 입술이 뜨거운 열기를 동반하고 스며들자 그녀의 입술은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따사로운 봄바람을 맞아 녹아내리는 것과 흡사했다. 헌데 한번 녹아 흐르기 시작한 열기는 금세 그녀의 전신으로 번져나 가기 시작했다. 흡사 홍수가 범람하듯...... 이제 그녀의 입술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전체 나신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사지가 휘감겨오자 백상인은 그 속 에서 분명 그녀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 었다. 차가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 내심은 뜨겁다는...... 이제, 그 둘 사이의 장애요소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불덩이같은 열기 속 에서 뜨겁게 엉켜들었고 그것은 열락의 환성이었다. 그녀의 전신은 활짝 개방되 었고 분홍빛으로 변한 빙기옥골 나신에서는 황홀한 기운이 스물스물 피어오르 고 있었다. "아......." 제갈청하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그때, 백상인은 조심스 럽게 진입을 시도했다. 그녀는 순결한 처녀지신. 당연히 첫 진입은 어려웠다. 그 리고, 그만큼 그녀에게도 고통은 가중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한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가시질 않았 다. 그녀는 신음도 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지 눈을 한번 살며시 감았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고통에 못이겨 그녀의 전신에 경직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고통은 오히려 깊은 흥분이나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 같았고 그녀는 힘껏 백상인의 나신을 끌어안았다. 이 광경에 가볍게 놀란 백상인은 순간 정신 이 아득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부드럽게 사랑의 행위를 시작했다. 인내심이 크고 사랑의 강도가 큰만큼 그녀의 쾌락은 쉽게 찾아들었다. 쾌락은 고통만큼이나 참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능히 그 쾌락마저도 참아 넘김으로써 고요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체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빙기옥골의 나신 곳곳에선 한없는 쾌락의 폭죽을 터 뜨리건만 그녀의 얼굴은 냉정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쾌락 이 가속화되고 들끓는 열기가 전신을 휩쓸고 뒤흔들자 그녀의 얼굴은 마침내 붉게 상기되어 혼몽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온통 쾌락의 와중. 그속에서 이번엔 제갈청하 그녀가 스스로 격렬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것은 냉정했던 만큼이나 뜨거웠고 마치 활화산의 뜨거운 용암분출 같았다. 그 열락의 무아지경 속에서 그들은 마침내 최고 정점에 올랐다. 그곳은 더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찬야만야한 아득한 벼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섬칫한 느낌이었다. 일말의 두려운 황홀경 속에서 그들은 최후의 숨가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음!" 두 사람은 마침내 조용해졌다. 제갈청하는 깊은 쾌락 속에서 혼절처럼 깊은 잠 에 곧바로 빠져 들었고 백상인은 백상인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희미한 새벽의 여명 속에서...... 침상 위는 완전히 붉은 선혈이 낭자하고 있었다. 그것은 간밤에 세 명의 처녀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백상인은 내심 고소를 지으며 잠들어 있는 세 여 인을 둘러보았다. 이미 나이에 비해 절정의 무위에 오른 그녀들이 저토록 정신없이 잠들었다는 것은 그녀들에 비해 그의 정력이 그만큼 우세하다는 말이었다. 사실 무공과 정 력이 그만큼 우세하다는 말이었다. 거의 무한한 공력을 가진 백상인은 기실 얼 마든지 조절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가 마악 욕실의 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느닷없이 문이 덜컹 열렸다. 그 문은 욕실의 문이 아닌 바로 대청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백상인은 내심 당황 했다. 지금 자신은 물론이고 세 여인도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아닌가? 더욱이 침상위의 그 난잡한 광경과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운 그녀들의 그 도발 적이고 적나라한 자태는...... 다행히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옆방에서 자고 있던 여몽향이었다. 그녀는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낯뜨거운 풍경을 보고 절로 얼굴을 홍시처럼 붉혔다. "어마...." 아무리 머리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러한 광경을 예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몽향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백상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그에게 다가 왔다. "백랑......!" 그녀의 얼굴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침 백상인은 옷을 벗은 그대 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앞에 아직도 성을 크게 내고 있는 그의 상징이 보였던 것이다. "무슨 일이오, 향매!" 백상인의 물음에 여몽향은 붉어진 얼굴 가운데에서도 얼핏 새침한 표정으로 그 를 흘겼다. "흥, 나는 뭐 당신의 침실에 오면 안되나요?" 곱게 눈을 흘기는 그녀의 자태는 천상삼화 못지 않게 매우 자극적이었다. 지금 그녀는 거의 들여다 보일 정도로 얇고 투명한 나삼잠옷만을 걸친 상태...... 백상인은 내심 실소를 날렸다. "그럴 리가 있겠소?" "흥! 정말 섭섭해요. 나도 똑같이 당신의 아내인데 나를 마치 다른 사람인 양....." "......" 여몽향은 안색을 더욱 붉히며 한 손으로 침상 위를 가리켰다. "저들은 저지경으로 만들어 놓구서.... 당신은 아주 나빠요." "아니, 무슨 말이오? 나쁘다니....!" 백상인은 절로 의아해져서 물었다. 이에 여몽향은 얼굴을 푹 수그렸다. "당신은 아주 강하고, 나는 당신에 비해 약한 편이지만 나도 여자라구요. 그렇 다고 당신더러 그짓을 해달라는 말은 아니지만." 백상인은 그녀를 정시했다. "그럼 대체 뭐가 나쁘단 말이오?" "아무튼 나빠요!" "하하....." 백상인은 일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나는 이제 알만하오." 여몽향은 이에 흠칫하여 고개를 들었다. "뭐가 알만하다는 거죠?" 백상인은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벌렸다. "이리 오시오, 향매!" ".......!" 여몽향은 그의 불끈 치솟은 상징을 보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이어 고개를 저었다. "흥, 싫어요! 나는 안할래요." "고집부리지 말고 이리 오시오." "저는 안한다니까요!" 백상인은 미소했다. "그렇소? 정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말과 동시에 그는 몸을 돌려 욕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 때, 그의 눈 앞에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여몽향이 그보다 먼저 욕실 안으로 들 어가 버렸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목욕시중을 들어드리겠어요...." 이 광경에 백상인은 가볍게 실소했다. 욕실의 물은 알맞게 데워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청결한 욕실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여몽향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니, 당신이 목욕할 것도 아니면서 옷은 왜 벗소?" 여몽향은 곱게 눈을 흘겼다. "도와주는 사람은 뭐 옷이 젖지 않는 줄 알아요. 더군다나 나는 잠옷이 이것 하 나 뿐인데 젖어버리면 당신이 새로 하나 사줄테야요? 하긴 당신은 부자니까 그 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부자는 오히려 당신쪽이 아니오? 공공문의 소문주이니..." 여몽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금은 내가 소문주직을 맡고 있지만 우리가 혼인식을 올리면 공공 문은 이미 당신거에요. 아니 지금도 당신거나 진배없는데 어째서 나더러 부자라 고 하지요?" 여몽향의 안색은 잠시 신중해져 있었다. 백상인은 다만 미소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아니, 굳이 그런 잠옷이 필요하겠소? 당신은 아예 홀딱 벗 고 사는 것이 더 어울릴텐데..." "뭐라구요!" 여몽향은 달려와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백상인은 짐짓 엄살을 부렸다. "아, 하나 사주면 될거 아니오! 헌데 당신, 정말 아름다운데?" 이때 여몽향의 모습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녀는 수치감에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였다. 그러한 그녀의 나신은 정말로 천상삼화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어서 몸을 돌리지 못해요!" 여몽향은 부끄럼을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알았소!" 백상인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급히 몸을 욕탕쪽으로 돌렸다. 순간, 여몽향은 그의 뒷등에다 부드러운 일장을 기습적으로 가격했다. 펑....! "으앗......" 백상인은 질겁한 비명소리를 내며 욕탕 속으로 첨벙 빠져들었다. 그러나 정작 놀란 사람은 여몽향이었다. 그녀는 그가 욕탕 속에 빠진 순간 어느새 그의 손에 붙잡혀 자신의 몸이 욕탕 속에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전혀 느끼지도 못한 이 한 수. 여몽향은 일순 그의 신비롭도록 극고한 무예의 깊이를 절감했다. 헌데 남편될 사람의 뛰어남은 곧 그녀의 자랑이다. 그녀는 일순 마음 깊숙이 행복감을 느끼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백상인은 짖 굳게 그녀의 나신을 껴안으려다가 가볍게 흠칫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갑자기 왜 울고 있소?" "아니에요." 여몽향은 엄숙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어서 몸을 돌리세요. 제가 씻겨드릴께요." "응? 알았소...." 백상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여몽향은 그의 뒤에 다소곳이 앉아서 그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이미 무공이 불가사의한 경지에 오른 백상인은 당연하게도 몸에 때가 거의 생겨날 리가 없었다. 따라서 백상인의 몸은 밀 때도 없이 그저 매끈하고 눈부시게 흰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 피부는 세상 어느 여자들 보다도 맑고 희었고, 그 가운데 우람하게 솟은 전 신근육은 절로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만큼 황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정말로 완벽한 신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때문에 여몽향은 몇번 손질을 하다가 잠시 후엔 넋을 잃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금 그 와 맑은 욕탕속에 나신으로 단둘이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곤 마음이 절로 황홀 하게 흥분되어 살며시 그의 등을 뒤에서 껴안았다. "......." 백상인은 조용히 몸을 돌리고 그녀를 부드럽고 애정깊게 안아주었다. "아아, 백랑......!" 절로 신음을 토하는 그녀는 흥분이 짙어가는 모양이었다. 여몽향의 시선은 점차 아득하게 변해갔다. 백상인은 곧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손길과 그녀의 몸짓은 점점 농도짙고 능란하게 변해갔다. "하아아....." 여몽향은 이미 쾌락을 체험한 여인이었다. 백상인의 진입은 처음에 비해 순조로 왔고, 여몽향은 금방 열락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욕실내는 금세 뜨거운 열 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여몽향은 천상삼화처럼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대로 백 상인에게 만족을 주었다. 그것은 애정 깊은 만족이었다. "아악....!" 절정의 쾌락으로 자지러지는 여몽향의 나신을 부드럽게 안아주며 백상인은 한 동안 사랑에 가득한 애무를 계속했다. 여몽향은 파김치처럼 늘어졌고, 지극히 황홀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나누는 이 욕실내부는 그 어떤 호화로운 침실보다도 훌륭했다. 헌데 그때, 욕실이 문이 별안간 벌컥 열렸다. 만일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내심 크게 흠칫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무슨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백상인과 여몽향도 그러한 심정이 되 어 급히 떨어졌다. "어마!" 헌데 지금 들이닥친 사람은 결코 얌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문을 열 자마자 폭풍처럼 욕실내로 덮쳐들었다. 휙! 휙! 휙! 휙....! 그러한 기세에 크게 놀란 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당신들은....?" 백상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일순 소리쳤다. 그녀들은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늘어지게 잠자던 천상삼화가 아닌가? 백상인은 그만 정신이 번쩍드는 기분이었다. 죽림정사. 이곳은 백상인이 즐겨찾는 휴식처이지만 더러는 손범에게 무예를 전수하기 위 해서도 많이 이용되었다. 지금. 햇살이 영롱한 이른 아침. 백상인은 유일한 제자인 손범을 앉혀놓고 무예전수에 여념이 없었다. 동해 지옥 도에 가기 전에 최소한 자신의 온갖 기예를 그에게 암기시켜야만 안심이 되겠 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예는 모두 열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곧 무예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공심법인 금단선공을 비롯하여, 금단선공의 불가사의한 내력을 강기공으 로 유형화시킨 금단강기, 장법 무아수, 권법 금단권, 지법 일선지, 보법 무아보, 신법 무아행, 쾌검법인 무아섬과 중검인 무아중, 변검인 무아변 그리고 암기수 법인 무아혼과 음공인 금단후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밖에도 그의 무예는 다방면에 걸쳐서 두루 정통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각 종 독공이나 의술 학문 진도지학 등에 있어서도 이미 대가의 경지에 올라 있었 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상인의 무예가 이 모든 잡다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 은 아니었다. 광검.... 그 모든 무예를 정통하고 하나로 꿰뚫었다고 할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무예 를 그는 이미 연성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 신비의 가문이었던 백가신 화에서 유래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 무예는 천축의 대설산에서 유래되었다고 그의 조상들은 밝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천축인들의 무예수준은 어느 정도 나 될까? 이 광검을 연성하고 그 뿌리를 캐어보라는 것이 바로 차원높은 가문 의 숙원이었었다. 거기에 비하면 가문의 옛 영광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작다고 도 말할 수가 있었다. 실로 그의 가문인 옛 백가신화는 초인들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과거, 삼년 전 화화장에서 그가 그 신비노인과 대면할 당시에는 이 광검을 완전 히 연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백상인은 현재 이 기이한 무예에 대단한 기대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님!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그리 서두르십니까?" 손범이 그를 보며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사부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음을 눈치채고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백상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보이느냐?" 손범은 눈빛을 영악스럽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백상인은 가상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일순 정색한 뒤 말했 다. "나는 바로 내일이면 먼곳으로 떠나게 되느리라. 어쩌면 오늘이 나와 너의 마지 막 대면일는지도 모르느니라." "옛, 떠나신다고요?" 손범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 손범의 두눈은 점차 휘둥그래졌다. "설사 그렇더라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설마 세상에 사부님보다 고강한 무예를 연성한 자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백상인은 근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천하제일인은 없느니라. 그리고 강호인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니, 항상 앞일에 대한 대비를 해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부님보다 강한 자가 있다는 말씀은 정말 믿기가 어렵습니다. 저어... 이번에는 저도 따라가면 안됩니까?" "그건 안된다." 백상인이 고개를 가로젓자 손범은 그만 풀이 죽었다. 백상인은 그를 향해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네게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무예를 전수해줄 생각이다." "하지만 저는 이제 겨우 금단선공만을 전수받았을 뿐인데..." 손범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백상인은 그를 정시하며 물었다. "범아, 너는 금단선공을 어느 정도나 연성했느냐?" 손범은 안색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는 겨우 일성 정도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금단선공은 한단계를 뛰어오르려면 반드시 일갑자의 내공이 필 요한 법이다. 지금 너의 내공은 겨우 일갑자의 경지이니 그 정도인 것은 당연하 다." "........" 백상인은 다시 물었다. "범아, 너는 내가 왜 그간 네게 다른 무예는 일절 가르치지 않고 금단선공의 수 련만 강조해 왔는지 아느냐?" 손범은 공손히 그 물음에 대답했다. "그것은 금단선공은 내용이 워낙 방대할 뿐만 아니라 심오하기 짝이 없어 그것 을 이해함에 있어 어지럽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헌데 너는 금단선공의 구결을 이미 다 암기하고 있겠지?" 손범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전에야 겨우......" "부끄럽게 생각할 것은 없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너처럼 삼년동안이라도 결코 암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 분량은 능히 보통서책의 스 무배가 넘는 것이니까..." 백상인은 그를 위로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간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이 있다. 이른바 기초무예를 닦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백상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품속에서 여러 권의 책자를 꺼내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가 손수 제작한 것인 듯 새책들이었고 필체가 수려하기 그지 없었다. "이것들은 내가 과거 잠룡곡에서 불성십이무왕에게 기초무예로 배운 것들을 그 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강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보법과 신법, 장법, 지법, 검법, 권법, 암기술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무예들은 누구 나 한번은 거쳐야 하는 것이니 너는 필히 이 비급들을 암기한 후 태워버려야 한다." 손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것들은 언젠가 얘기하신 불성문의 절학입니까?"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불성문의 절학은 비록 알고는 있지만 그들과의 약속이 있으니 네게 전 수해줄 수가 없다. 그것들은 그들이 추려놓은 강호의 특징있는 절예들이다. 사 실 그것들만 해도 강호에선 최고의 절기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비급들을 암기한 후 소각해 버리라고 한 것이다. 필부는 잘못이 없어도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왜, 너는 그 불성문의 무예를 배울 수 없어서 서운하느냐?" 손범은 내심을 사부에게 들킨 듯 하여 얼굴을 붉힌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선 반드시 그보다 훌륭한 무예를 전수해 주실 것 이니까요."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러하다. 내가 네게 차후에 전수해줄 십대절학은 불성문의 그 절학을 보 고 창출한 것이나 기실 그 내용이나 위력이 판이하게 차이가 있고 다른 것이다. 따라서 나의 십대절학을 연성한 사람은 달리 불성문의 절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 "........." 백상인의 그 말에 손범은 절로 흥분하여 두 눈을 꿈뻑거렸다. 그는 자신의 사부 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예가 고강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재삼 믿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백상인은 말을 이었다. "허나, 아쉬운 것은 이제 시간이 많지 않아 네게 그 십대절학을 모두 가르쳐주 지 못하고 떠난다는 사실이다." 이에, 손범은 문득 시무룩한 안색이었으나 곧 안색을 펴고 씩씩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사부님이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시리라 믿어요." 백상인은 미소했다. "좋다. 그럼 네게 절기를 전수해주겠다. 내가 네게 전수해 주려는 무예는 바로 무아수로, 이것은 천하의 현존하는 장법들 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이 절기를 택한 이유는 공격이 곧 최상의 방어이기 때문이다." "........." "물론 네가 오늘 안에 이 구결들을 모두 다 암기할 수 있다면 다른 절기도 가 르쳐주겠다. 그럼, 구결을 말해줄테니 잘 듣고 기억하도록 해라." 이어, 백상인은 무아수의 구결을 말하기 시작했다. ..... .............. ...................... 구결은 매우 길었다. 백상인은 평소보다 다소 빠른 발음으로 구술했는데도 한번 외는데 무려 한시진이나 걸렸다. 손범은 총명한 눈을 크게 뜨고 처음부터 끝까 지 단 한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천 하의 기재라 해도 무려 한시진이나 걸리는 구결의 내용을 단 한번에 걸쳐 암기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손범의 안색은 우울하게 변해갔고 의기소침한 눈빛이 되 어갔다. 그는 자신이 오늘 이 무아수 하나만이라도 완벽하게 암기하기가 어렵다 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백상인은 그를 위해 구결을 연거푸 세번이나 들려주 었다. 그때는 이미 태양이 중천에 떠서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백상인은 이어 몸을 일으켜서 행동시범으로 들어갔다. "자, 잘 보아라." 백상인은 근엄하게 말한 뒤 앞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손범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순간, 백상인의 우수가 활짝 펼쳐진 채 그림처 럼 움직였다. 스슥! 처음에 백상인의 우수는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가 싶었다. 그런데, 다음순간, 손범은 일순 아연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환영. 마치 환영과도 같은 그림자가 손바닥 주위로 일어나며 무수한 금빛 수영이 나 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소리나 기척도 없이..... 수영의 숫자는 능히 수백, 아니 수천이나 수만개쯤 되는 듯 했다. 그러한 수많 은 금빛 수영들은 저마다 살아있기라도 한듯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손범은 대경실색했다. 대체 인간의 능력으로 저 많은 변화를 어떻게 일일이 파 악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백상인이 입을 열었다. "지엽을 보아서는 안된다. 중심을 보아라. 갖은 변화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이 치를 하나로 꿰뚫어야 한다." "......." 그 순간, 실로 믿기지 않는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그 무수하던 장영들이 하 나로 합쳐지더니 거대한 금빛 수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일순 갖은 변화를 보이더니 돌연 기척도 없이 지 면의 바위를 향해 뻗어갔다. 고오오오.....! 아무런 파공음도 일지 않았다. 때문에 거대하게 밀려가는 그 수영은 마치 한순 간의 환상같았다. 그리고, 그 수영은 한순간 바위를 일제히 휩싸는가 싶더니 갑 자기 꺼지듯 사라졌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손범은 자신이 환각을 본듯 하여 두 눈을 껌뻑거렸다. 대체 그 신비한 일장을 맞은 바위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때, 그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한듯 한줄기 미 미한 바람이 바위 위로 불었다. 그러자, 스으으으으..... "앗....!" 손범은 눈을 부릅떴다. 그 집채만한 바위가 홀연 연기처럼 꺼지더니 소리없이 가루로 화해 무너져 내리는게 아닌가? 손범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아연하 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상인은 그의 그러한 표정을 보고 다만 미소할 뿐이었다. "사부님, 이것은, 이것은 현실입니까?" "믿기지 않느냐? 너도 이 절기를 대성하면 능히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도무지...." "자, 다시 펼쳐보일테니 잘 보도록 해라." 이어, 백상인은 두세번 반복하여 시범을 보여주었다. 손범은 크게 놀라면서도 그 변화를 알아내기에 내심 총력을 기울이는 듯 했으나 아직은 아무래도 무리 였다. 시전이 끝나자 백상인은 손범에게 다시 물었다. "구결암기는 다 끝냈느냐?" "아직은......" 손범이 뒤통수를 긁적거리자 백상인은 다시 구결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가 다 시 구결을 두세번 반복해서 들려주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저녁노을이 사위에 물들고 있었다. 하루종일을 무공전수에 소모한 것이다. 이쯤 되어서야 손범은 구결의 십중 팔구는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되었다. 나머지는 네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 보아라. 자 마지막으로 네 게 줄 것이 있다." 말과 더불어 백상인은 품속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사위에 이 루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향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백상인은 그 옥합의 뚜껑을 열었다. 옥합안에 든 것은 다름아닌 하나의 황금빛 알이었다. 마치 메추리알만한 그것은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사위를 진동시키는 기이한 향기도 그곳에서 풍겨나오는게 분명했다. 결코 그것은 평범 한 물건이 아닐 것이다. 손범이 기이하게 생각하며 궁금해 하는데, 백상인이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만년금구의 내단이다." 순간, 손범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소금은 죽었단 말이에요? 사부님!"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며칠전에 그 만년금구는 이미 수명이 다했었느니라. 네가 그녀석과 평 소에 각별히 친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정해진 일이었으니 이젠 잊어야 하 느니라." "......" "네가 이 내단을 복용하게 된다면 그녀석도 매우 기뻐할 것이다. 이것을 그녀석 의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손범은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와 만년금구와는 진짜 친구와 같은 사이였던 것이다. 손범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다가 문득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것을 복용할 수 없어요. 제가 어떻게 소금의....." 순간, 백상인은 준엄하게 손범을 꾸짖었다. "못난 녀석, 어찌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너는 이것을 복용하고 장차 무림 정의를 위해 힘쓰면 되는 것이다. 네 친구의 내단을 다른 사람이 복 용해야 속이 편하단 말이냐?" "......." "어서 앉아서 금단선공을 운기하도록 해라!" 손범은 그제야 눈물을 거두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이어, 손범이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백상인은 그에게 내단을 건네주었 다. 손범은 주저없이 그 내단을 삼켰다. 입안에 들어가자, 내단은 타액과 어울 려 부드럽게 녹더니 목구멍으로 무리없이 넘어갔다. 그 순간, 손범은 일순 불길같은 열기가 가슴으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손범은 내심 흠칫했다. 그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구결대로 운기하도록 해라!" 백상인의 고요한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천령혈로부터 맑고 지극히 청량한 기운 이 스며들어왔다. 그것은 분명 백상인이 본신의 진기를 이용하여 그에게 도움 을 주려는 것이리라. 손범은 내심 침음하며 정신을 한곳에 모으고 운기행공으로 들어갔다. 내단에서 발해지는 열기는 실로 대단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령혈로 부터 들어오는 백상인의 청량한 진기는 능히 그것을 제압하고 본신의 진기에 합류하도록 했다. 그것은 마치 길을 잘 아는 신선이 대중에게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조금의 무리도 없었다. 무리가 없었으므로 손범은 쉽게 무아지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한 지극히 황홀한 무아지경이었다. 투투투툭...... 임독양맥이 자연스럽게 타통되고, 이제 도달하게 될 사갑자의 공력. 그것은 항 차 소년기인의 한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늘은 진홍빛으로 붉었다. X X X 그날 저녁. 이제는 백상인의 부인이 된 천상삼화와 여몽향은 푸짐한 잔칫상을 마련했다. 백상인이 손범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동안 그녀들은 손수 소매를 걷어 부치고 한데 어울려 음식은 장만했던 것이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장만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 다면 남자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때가 가장 행복할 것이 다. 다행한 것은, 손빈아의 얼굴도 그녀들과 함께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미 천상삼화와 친해진 듯 서로 쉴새없이 재잘거리고 웃곤했다. 그리하 여, 그날의 만찬은 몹시 풍성했다. 그것은 백상인에게도 가장 풍성했던 식사였 을 것이다. 그 다음날 새벽. 네 명의 부인들이 깨기 전에 백상인은 소리없이 성수장을 빠져나갔다. 기실 그 녀들이 자고 있던 침대는 그 순간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x x x 무림.... 무림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아주 은밀했다. 그것은, 당금무림 의 핵이라고 할수 있는 무맹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이었다. 일곡일궁일방사문육가구파. 현 무림의 중추세력인 이들이 어느 사이엔가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방내에서도 대체로 핵심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항주였다. 이는, 장차 벌어질 무림의 일대변혁을 말해주는 조짐이었다. X X X 항주. 절강성 북단에 위치하며 동해로 흐르는 전당강을 끼고 있는 유명한 항구도시이 다. 특히 서쪽으로 서호를 끼고 있어 풍경이 수려하고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 이지 않으므로 강소성의 소주와 더불어 천하의 이대향락의 도시로 손꼽힌다. 명승지로는 남쪽으로 전당강 주위에 세워진 육화탑이 유명한데, 이곳에서 바라 보면 전당강은 그야말로 한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헌데, 그 육화탑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 그러니까 북쪽으로 항주시와 중간쯤 되는 곳에 위치한 하나의 고적한 험산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 산의 이름은 옥 황산이라 했다. 그 이름이 굳이 그러한 이유는 단지 근방에서 가장 높게 우뚝 서 있기 때문이 며, 실상 그 이름만큼 별볼일이 없는 산이었다. 항주에서 육화탑으로 가더라도 이 산만은 돌아가는 것이 상례인 것으로 미루어 그것은 가히 짐작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근간 며칠 사이에 유독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이 옥황산에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림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시각은 자시 무렵. 옥황산의 정상에는 지금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진을 치고 있 었다. 그들 중에서도 유달리 두드러진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무맹의 맹주 인 중원검신 남궁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옥황산 일대에는 무림의 모든 정 예인물들이 웅거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벽의 주위에는 지금 불성십이무왕과 일곡일궁일방사문육가구파의 수뇌들이 모여있었고, 그밖에 봉공원로원의 원로들과 만박전주인 천지통 제갈박이 둘러서 있었다. 특히, 광무자 단목무광이 죽은 이후 만무전주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던 소림사의 장로 천뢰선사의 모습도 보였다. 장내의 분위기는 매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만일 그들이 이번일에 실패할 경우에는 자칫 강호의 질서가 완전히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중압감이 그들을 짓 누르고 있었다. 이번의 이 일은 정말로 거사였다. 만일 성공하면 그들은 차후 무림을 평화의 반석 위로 올려놓는 주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렇다고 주눅 이 들기는 커녕 신념과 의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지, 다소의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궁벽 등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장내의 분위기는 다소의 초조할 속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자정이 되려면 아직 일각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들 수뇌진들은 저마다 이 목을 사방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이번 거사에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득 소리쳤다. "왔다....!"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 어두운 하늘의 한 곳에 어느 틈엔가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나 있었다. 그 인영들 은 물론 사람들이었다. 중앙의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다섯 사람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같이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하늘을 떠다 니는 무예는 무공수위가 반박귀진의 단계를 넘어서서 능히 능공허도, 어풍비행 술을 시전할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에 모인 여러 명의 수뇌급 인원들 중 그러한 경지에 올라있는 인물들 도 있었지만 그들 말고도 그런 사람들이 여섯 명이나 더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왔군." 남궁벽이 나직이 뇌까린 후 손을 흔들어 공중에 떠 있는 인물에게 신호했다. "이쪽일세!" 공중에 나타난 인물들은 바로 백상인과 오노사였다. 남궁벽의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은 즉시 중인들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스스슷...... "반갑네, 어서 오게!" 남궁벽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자네는 약속을 썩 잘지키는 편이로군." 백상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죄송할 건 없네. 자네가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니까. 다만 자네가 약속 시간에 너무 빠듯하게 오는 바람에 나는 그야말로 속이 타서 애가 닳았지 뭔가." "죄송합니다." 백상인은 다시 정중히 답례했다. 어쨋거나 그는 잠룡회를 인연으로 하여 무예를 연성했고, 따라서 남궁벽은 말하자면 윗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남궁벽은 미소하며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늦었는가?" 백상인은 웃으며 오노사를 가리켰다. "바로 이들 때문입니다." 남궁벽은 문득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백상인과 수인사를 나누느라 미처 그 들을 주목할 여유는 없었지만, 아까 나타날 때의 그 기고한 신법으로 미루어 볼 때 대단한 자들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내가 처음뵙는 분들이로군." 남궁벽은 눈빛을 빛내며 백상인을 직시했다. "내게 저분들을 소개해 줄 수는 없겠나?" "물론입니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바로 저의 수하들입니다." 남궁벽은 눈빛이 기이해졌다. "내가 저번에 보기에는 자네는 결코 저런 수하들이 없던 것 같던데..?" 백상인은 미소했다. "맹주께선 그들의 무예가 정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남궁벽은 힐끗 오노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네, 그리고......" "......" 남궁벽은 주위에 둘러선 중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자네가 보다 확실한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이때, 중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나서서 그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그렇소! 만일 그의 신원이 불확실하다면 이번 거사는 처음부터 다시 수 정되어야 할 것이오. 나는 저 다섯 사람이 아까 펼친 신법이 과거 천년 전의 마 교의 무예라고 보았는데 거기에 대한 해명을 바라오." 노인. 그는 일신에 검은 장삼을 청수하게 차려입은 사람으로 머리와 수염은 칠흑같이 검은데 대신 귀밑 머리는 눈부시도록 희었다. 그것은 곧 그가 반박귀진의 경지 를 넘어선 고인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그의 품속에는 하나 의 작은 소금이 들려 있었다. 칠흑빛의 광택이 은은히 흐르는 그 작은 악기는 몹시 진귀해 보였다. 백상인은 내심 그의 견식에 감탄하며 그에게 시선을 보냈 다. 남궁벽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분은 바로 봉공원로원의 원로이신 곤륜의 천금상인이시네." 백상인은 즉시 그에게 포권하며 정중히 예를 취해보였다. 천금상인은 고개를 저 었다. "공자의 얘기는 이미 맹주에게 많이 들었으니 내게 그리 예를 취할 필요는 없 소. 단지 사실을 밝혀주길 바랄 뿐이오." "물론입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남궁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맹주님께선 신도운형을 기억하십니까?" 남궁벽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바로 얼마전에 자네에 의해 죽었다던 자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헌데 그가 강호에 무엇 때문에 나왔었는지 아십니까?" 남궁벽은 눈썹을 가늘게 찌푸렸다. "그건 자네의 그 만년금구 때문이 아닌가?" 백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건 단지 명목상의 이유에 불과하고, 비록 무공이 과거에 비해 급 증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같이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가 위험을 불사하고 무림에 나왔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 백상인은 품속에서 집마령부를 꺼내들었다. "그 이유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저것은.....!" 중인들 중 더러는 집마령부를 알아보고 일순 대경한 빛을 보였다. 그들을 향해 백상인은 그 집마령부에 얽힌 이번의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중인들 중에는 비로소 아연실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설마하니 과거 천년 전의 마교의 후예가 아직까지 잔존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바로 마교의 후예들인 그들이란 말이지?" 남궁벽이 어이없어하는 물음에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백상인은 오노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마침 이번에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는지라 그들을 이번 일에 데려가려고 합니 다." 그들은 저마다 싸늘한 표정으로 뒤쪽에 물러선 채 먼산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들의 태도엔 지극히 불유쾌하고 짜증스러우며 노화의 기색이 가득했다. 남궁벽 은 눈빛을 빛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좋은 생각일세. 하지만 이번에 가는 곳은 다름아닌 마도의 소굴인 지옥도인데, 그들이 혹시 변심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만일 그들이 변심을 한다면 이는 혹을 떼려다 도로 혹을 붙인 결과가 될 것이다. 헌데, 백상인은 태연히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늦게 도착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아, 그런가?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대비가 단단히 되어 있다는 말인데, 대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겠나?" 백상인은 문득 미소하며 대답했다. "무적지독을 아십니까?" "뭐라고! 그, 그럼.....?" 남궁벽은 대경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 무적지독은 고금을 통틀어서 오직 전 설로만 전해오는 것인데......" "저는 우연한 기회에 그 비법을 터득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시 전을 한 것인데... 그들은 결코 변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백상인은 마지막 말은 오노사를 돌아보며 말을 맺었다. 그러자, 요노사의 안색 은 그야말로 똥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네, 네놈을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나이가 불과 방년으로 보이는 요노사. 독살스럽게 소리치는 그녀의 악독한 표정 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백상인을 저주하고 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하하, 역시 자네답군!" 남궁벽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이제 충분한 해명이 된 것입니까?" 백상인이 묻자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자, 이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볼까?" 헌데, 그때였다. 홀연 중인들 중에 한 사람이 나서더니 한줄기 무거운 불호소리 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노납은 만공이라 하오. 백시주께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왜소하고 작달만한 키에 안면이 온통 주름살 투성이인 노화상. 만공성승. 현재 이곳에는 지금 각파의 수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들의 은연중 영도자격 인 소림사의 장문방장 천심선사보다도 한 배분이 높은 고승. 전대에 소림장문인 직을 맡았었으나 이제는 뒤로 물러나 무맹의 봉공원로원의 원로로 있는 사람이 었다. 말하자면 봉공원로원의 원로들은 대개 최고의 배분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 다. 백상인은 즉시 그를 알아보고 정중히 포권했다. "미거한 소생이 성승을 뵙습니다." "나이든 땡중을 성승이라니 당치 않소." 만공성승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노납이 맹주에게 듣기로는 시주가 지옥도를 알아냈다고 하는데, 그 경과를 일 러주지 않겠소? 그러니까, 시주는 그 신도운형에게 직접 그 말을 들었는지...." 백상인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들었습니다. 순간, 장내에 가벼운 소요가 일었다. 그 소요를 진정시키고 만공성승이 다시 말했다. "시주는 신도운형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단 말이오? 그가 시주에게 거짓 말을 했으리라는 가능성은 없겠소?" 백상인은 자신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만공성승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소?" 백상인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저는 들었지만 실상 그는 제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남궁벽이 듣고 있다가 말참견을 했다. "이보게, 그는 말하지 않았는데 자네가 들었다니, 그건 모순된 말이 아닌가?" 그런데, 의외에도 만공성승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아니오, 맹주! 그의 말은 모순이 아니오. 이런 말을 들어보셨소? 타심통이라 고." 남궁벽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불가에서 전하는 신비의 능력이 아닙니까? 성승께선 설마 그가 그런 능 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만공성승은 미소하며 말했다. "사실 타심통에 이른다는 것은 정말로 희한한한 일이오. 그것은 우리 불가에서 도 거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소. 아마 그는 정말로 타심통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오. 허나 무예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보이는 경지가 있다고 들었소이다. 따 라서 나는 그에게 지금 약간의 시험을 해보고자 하오." 이어 그는 백상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주는 나의 시험에 응해줄 수 있겠소?" 백상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만공성승은 잠시 시간을 둔 다음 백상인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묻겠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 백상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공입니다." 그 말에 만공성승은 눈을 크게 떴다. "아미타불, 좀더 세밀하게 말해줄 수 있겠소?"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의 입속에서는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있고 없음을 초월한 것이다. 즉, 모든 법은 공이니,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으며 색수상행식은 오온이 모두 없음이라..." "아미타불! 아미타불...!" 만공성승은 연신 불호를 외웠다. 이에 중인들은 이 일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자신의 생각을 알아맞추라는 질문을 하고 또 그에 대한 대답을 한다. 백상인은 정말로 남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일까? 그들은 이 결과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맹주인 남궁벽조차 내심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마악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이윽고, 만공성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맹주! 그의 말은 모두가 진실이오. 내가 그를 보증하겠소." "아아......!" 중인들은 그 말에 절로 탄성을 발했다. 만공성승의 보증이라면 그보다 확실한 것은 없으리라. 그들은 마침내 이 젊은 기인이 소문보다도 오히려 더 신비롭다 는 것을 깨닫고 내심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이것 놀라운 일이군. 정말 자네는 나의 마음도 읽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남궁벽의 질문에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하하, 죄송할 것 까지야 있겠나! 나는 그저 오늘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음을 실감하는 기분일세."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백상인이 겸사의 말을 하자, 남궁벽은 미소한 뒤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우리 이제 정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해 보세." "좋습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벽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저의 생각으론 이미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자네는 속일 수 없다는 걸 깜빡했군. 좋네, 우리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일세. 사실 자네를 기다린 것은 그 말에 대한 진위를 확실하게 가리기 위해서였지." "그렇다면 그 계획은 어떠합니까?" "자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이 아닌가?"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사자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한해서 입니다." "하하, 그렇다면 내 말해주지." 이어, 남궁벽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전당강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갈 생각이네. 우리의 인원은 모두 일 만 정도이고, 지금 전당강변엔 백여 대의 선박이 정박해 있다네. 정동쪽으로 십 여일 가면 된다니 이는 우리 원로들 중 한분이신 동정어은의 능력을 빌리면 어 렵지 않을 걸세. 헌데... 그 지독도의 특징을 알 수 있을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옥도는 거대한 화산섬이라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화산이 불을 뿜고 있지는 않으나 언제 용암을 분출해낼지 모르고, 섬 주위는 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서 멀 리서는 보일지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곳이랍니다." "아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니?" 남궁벽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백상인은 차분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섬의 사방은 온통 심한 암초로 가득하고 그 거리가 가히 십여 리에 달한다고 하니 특별히 수로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음, 그랬었군."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좀더 확실한 특징이 없을까? 자네도 알겠지만 바다엔 그런 비슷한 섬들이 매우 많을 걸세." "그렇습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미소하며 말했다. "허나 이름이 지옥도인 만큼, 섬 전체가 대단히 황폐한 상태임에 틀림없을 터이 니 구별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아, 그리고 섬의 가장 높은 봉 우리에는 마치 누가 조각해 놓은 것처럼 생생한 악마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악마상이라...." 남궁벽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군. 자네도 우리와 함께 가겠지?" 헌데,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따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말인가. 따로 가다니? 혹시 저들 때문에...." 남궁벽은 오노사를 가리켰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계시겠지만 저들은 실로 무시못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 들로 인해 전체 인원에 피해가 간다면 문제가 클 것입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서서 냉랭하게 코방귀를 날렸다. "흥, 자네는 혹시 뒤에 남아서 관전이나 하고 있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 백상인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노파. 허나 노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안색은 매끈하고 탄력이 있 어 보였다. 허리도 꼿꼿하고, 무엇보다도 기이한 점은 그녀의 전신에선 연신 숨 막힐 듯한 냉기가 풀풀 날린다는 사실이었다. 젊었을 때 미모에 관한한 꽤나 이름을 날렸음직한 용모였다. "노선배님께서는.......?" "나는 광한신모란 사람일세. 나는 솔직히 자네의 그 모든 말을 믿을 수가 없네." 광한신모는 역시 봉공원로원의 한 원로이다. 백상인이 미소하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문득 장내에서 한 고승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서는 고정하십시오. 이는 저의 사부님께서 보증하신 것입니 다." 눈썹이 희고 미목이 청수한 노승이었다. 만공성승에 비해 키도 훤칠하고 붉은 색 가사를 걸쳤으며 그의 만면에는 맑고 자애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흥, 소림의 방징이군." 광한신모는 잠시 흠칫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사부 만공의 눈이 고명하다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어. 허나 이번의 일은 워낙 중대사가 아닌가? 만일 이 모든 것이 저 녀석의 음모라면 우린 잘못 하면 천추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게 되는 걸세." "아미타불.....!" 소림방장 천심선사는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만일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사부님 뿐만 아니라, 저희 소림사도 책임을 지겠습 니다. 그땐 노시주께서 어떠한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에, 광한신모는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방장이 그렇게 나온다면야 내가 더 할말은 없지. 헌데, 저 녀석의 어디가 좋다 고 그렇게 무조건들 믿겠다는 것이지? 내가 보기에는 그저 기생오라비처럼 미 끈하게 생긴 것 뿐인데."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거듭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사람에게는 본래의 타고난 천성과 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헌데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저 백시주는 저희 불가에서 말하는 완전무결한 대인상, 전륜성제상과 흡 사합니다. 설사 전륜성제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체로 이런 상의 사람은 결코 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그는 정법을 수호하는 제왕의 상이니, 그를 믿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타당합니다." 전륜성제상. 이말이 나오자, 중인들은 일시 흠칫 놀라 백상인을 거듭 다시 보았다. 말 그대로, 백상인의 상호는 그야말로 맑고 원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심선사 의 말을 듣고나니 그것은 속세에서 말하는 준미한 것과 또 다른 것 같았다. 이러한 일 때문에 장내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서며 적막을 뚫고 소리쳤다. "나도 그 말에 찬성하오. 제기랄! 한번 믿으면 그만이지 무슨 그리 이유가 많담. 대체 여자들이란 이래서 탈이란 말이야!" "뭐라고?" 광한신모는 본래 이쯤에서 물러나려다가 그가 여자 운운하는 말을 듣고 돌연 노화를 버럭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이 주귀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한 사람. 그는 분명 노인이다. 그런데, 그 머리는 까치집처럼 온통 어지럽게 엉 크러져 있고, 얼굴은 마치 술에 취한 듯 시뻘갰다. 게다가 그는 등뒤에 작달막 한 키보다도 더욱 커다란 술호로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서 풍 겨지는 인상은 모든 것이 제멋대로인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의 허리에 무려 열 개의 매듭이 매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개방의 태상방주라는 말이나, 그는 다름아닌 원로의 하나이기도 한 주선개였다. 주선개는 광한신모가 눈이 새파랗게 되어 쳐다보자, 일순 크게 움찔하여 안색을 더욱 붉힌 채 두 손을 흔들었다. "아아, 그 여자 얘긴 없던 것으로 하지. 내 말은 저 소형제가 매우 마음에 든다 는거야. 결국은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거라구! 당신에게 내가 무슨 불만이 있겠 어?" "흥! 나이값을 못하는 늙은이 같으니라구! 내 이번만은 특별히 참겠어요" 주선개는 그 커다란 눈알을 위아래로 뒤룩뒤룩 굴렸다. "내 참, 속좁긴...." "뭐라구요!" "아, 아니야....!" 주선개는 마침내 멀찍이 달아났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좀처럼 쉬지 않았다. "제기랄, 이 일에 찬성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분명히 세 명이나 더 있단 말이 야. 그게 누구냐 하면....." 주선개는 이어 손가락으로 세 사람을 가리켰다. "저 의원하고, 공공문주, 그리고 제갈노괴야." 의원이란 다름아닌 소요성수다. 불과 중년의 나이에 봉공원로원의 원로가 된 인 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의 능력은 기실 맹주인 남궁벽과 별반 차 이가 없다고 하는데..... 지극히 준수하고 청수한 용모의 자삼중년인. 소요성수는 주선개의 말에 깊은 두 눈에 미소를 떠올렸다. 기실 주선개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가 말한 세 사람 이란 맹주를 제외하고 이번에 백상인의 장인이 된 사람들을 모두 말한 것이었 던 것이다. 그리고 보면 개방의 소식통은 실로 기막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 요성수는 미소하며 말했다. "선배님이 그토록 소생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니 저로서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말의 선후야 어찌 되었든 옥을 돌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소요성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대견한 시선으로 백상인 을 돌아보았다. 백상인은 즉시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일찍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무슨 말을... 내 자네의 얘기는 많이 듣고 있었네. 내 딸은 미거하니 잘 부탁 하네." 소요성수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청아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배님." 이때, "아직도 선배님인가?" 낭랑하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청포중년인. 미목이 청수하고 두 눈에서 예리한 정광이 연신 빛나고 있었다. 공공문주 묘수 공공 여절생. 바로 그였다. 현재 그는 무맹의 등사당주를 맡고 있기도 했다. 백 상인은 그를 보자 고개를 숙였다. "청매의 일은 죄송합니다." 여절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 아이의 운이 박했던 까닭이니 자네가 죄송할 것은 없네. 다행히 자네 가 향아를 맡아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네. 여러모로 부족한 아이를 너그러이 대해 주게." "별말씀을..." "아니네. 분수를 모른대서야 어찌 그게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자네를 믿네." 백상인의 손목을 잡고 그렇게 말하는 여절생의 어조엔 어느덧 애틋한 부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내심 여몽청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백상인은 그 부정의 깊이에 탄복하면서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때, 사람들의 시 선은 마지막 사람인 제갈박에게 향했다. 천지통 제갈박. 나이는 이미 원로급이면서도 그 공로는 능히 맹주인 남궁벽에 버금가는 인물. 특히 그 지혜가 출중하여 과거 사마의 평정 때 지대한 공로를 세운 그가 아닌가. 평상시는 늘 그가 뒷전에서 일을 처리하면서 평범하게 보이지만 아무도 그를 평범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름아닌 천외삼별부 중 하나인 귀곡별부의 후계자인 것이다. "내, 자네에게 한가지 물을 것이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백상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제갈박은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며 말했다. "자네는 하아를 사랑하는가?" 백상인은 내심 실소했다. 그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의 말도 결코 다를 수가 없 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하매는 매우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제갈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아이는 사실 부모의 얼굴도 모른채 자라온 불쌍한 아일세. 과거 지옥 마성에 당했었지. 그 아이의 부모는. 그래서 내가 유독 이 일에 앞장서는 것일 세. 그리고, 과거 내가 자네를 섭섭하게 대했던 점은 잊어버리게." 백상인은 담담히 미소했다. "그 일은 이미 잊은지 오래입니다." 그 일이란 과거 잠룡곡에 입곡할 때 제갈박이 그를 잘못 평가한 것이다. 제갈박은 시선을 중인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그가 노부의 사위가 아니라도 그는 믿을만한 무림의 기재입니다. 그리고 이번 의 이 일은 가히 승부를 걸어도 좋은 호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명쾌한 말은 중인들에게 한결같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러한 신뢰감은 실로 드문 것으로 이는 출전에 있어서 대단히 좋은 징조였다. 이에, 그들 모두의 시 선을 살핀 남궁벽이 호쾌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자, 그럼 우리 더 이상 주저할 것 없이 이만 출발하기로 합시다." "좋소이다!" 명령일하,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궁벽은 떠나면서 백상인 에게 다가와 이 한마디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말이 늦었지만, 내 려아도 잘 부탁하네. 자네는 이미 내 사위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하...!" 그렇게 모두들 옥황산을 떠나갔다. 무려 일만 명의 인원들이 한꺼번에 신형을 날리는 광경은 실로 장엄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중원의 웅대한 혼을 보는 듯 했다. 저멀리, 산 아래 육화탑이 있는 전당강변에 백여 척의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중인들은 지금 그곳으로 이동해 가고 있었다. 소리없이.... 모두들 이번의 거사 에 성공을 비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도 이만 갑시다." 오노사에게 한마디를 던지며 백상인도 신형을 움직였다. 백상인과 그 일행은 곧 바로 항주 시내에 있는 객점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달려 온 여독을 풀었다. 물론, 요노사는 백상인이 묵은 객방의 옆방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세수를 마치고 그들은 객점에 딸린 주루에 올라 식사를 주문했다. 주루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백상인은 주루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를 유독 미워 하는 오노사는 일제히 구석진 곳으로 자리했다. 이윽고 음식을 시키고 시킨 음식이 거의 날라져 올 때가 되자 요노사는 참다못 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상인의 눈을 의심한 나머지 전음으로 속삭였다. "이봐요! 독노사! 그 무적지독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거죠?" 그녀의 전음수법은 고명하여 독노사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명도 함께 들을 수 가 있었다. 독노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음식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치켜들고 무뚝 뚝하게 대꾸했다. "아니, 아직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요매?" 헌데, 독노사는 전음을 쓰지 않고 그냥 말했기 때문에 일순 요노사는 기겁을 했 다. "이봐요! 전음으로 해요. 그가 들으면 어쩌려구!" 그녀는 얼굴을 창백하게 굳히며 급히 백상인을 바라보았다. 요노사는 내심 안도 의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붉히며 다시 전음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처럼 독의 전문가가 아닌데 어찌 무적지독을 알겠어요?" 이에, 옆에서 심하게 안색을 찌푸리며 짜증만 부리던 혈노사가 동조했다. "이봐! 그건 나도 몰라. 아니, 우리 전부 다 모를거야! 그러니 어서 속 시원하 게 그 내막을 말해보게!" 독노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는 안면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이미 짜증이 심 한 판에 신경질까지 난다는 투였다. "귀노사에게 물어봐! 그는 반드시 알고 있을거야." 혈노사가 화를 벌컥 냈다. "넌 왜 말하지 않지? 그거 하나 알고 있다고 폼재는 거냐?" 독노사는 두 눈을 부라렸다. "이런 제기랄! 난 지금 그 얘길 하면 십년 묵은 찌꺼기가 다 토해질 것 같단 말이야. 제발 나 좀 내버려 둘 수 없어? 강호의 종주급이라는 사람들이 아직 무 적지독도 모르다니 그것도 모르는게 자랑인가?" "뭐야.......!" 혈노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순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때문에 얼마 안되는 좌중의 시선이 모두 이쪽 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백상인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이쪽은 쳐다볼 생 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독노사를 달래려고 했다. 유난히 성질이 화 급한 혈노사는 어쩔수 없더라도 독노사는 진정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이 독노사는 오늘 기분이 아침부터 몹시 잡쳐 있었다. 아니, 그러한 현 상은 이미 며칠 전부터였다. 바로 그것 때문에 독노사는 평소와는 달리 요노사 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참아, 독노사!" "제길, 이거 미칠 것 같군!" 독노사가 안색을 푸르락 붉으락 하는데 거기에 유노사가 말참견을 했다. "이것들 봐! 놈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순간, 독이 오른 혈노사의 화살은 유노사에게로 향했다. "빌어먹을! 그가 그렇게 겁난단 말인가? 한번 죽으면 그만이야!" "아아, 누가 아니래? 난 단지 저 백가놈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자는 거야. 그 놈 신경 건드려서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잖아!" 혈노사는 두 눈에 혈광을 쭉 뿜었다. "빌어먹을, 함께 죽어버리면 될거아냐!" "그, 그건 그래....." 이때, 여태 잠자코 있던 귀노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무적지독에 대해 설명해 주지." 과연 그 말은 그 요란을 진압하는데 지대한 효과가 있었다. 혈노사는 일시 흠칫하여 노화를 거두었고, 독노사는 안면을 잔뜩 찌푸리며 창밖 으로 시선을 던졌다. 요노사와 유노사는 마침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귀노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귀노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무적지독"이란 것은, 누가 그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사실상 무림 최고의 독술이라고 전해지는거야." "전해진다고? 그럼 진짜 있는 것이 아니잖아!" 유노사가 사이에 끼어들자, 요노사가 즉시 그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진짜 있는 것이 아니긴! 우리가 당하고서도 몰라? 그걸 가리켜 바로 전설의 시현이라고 하는거야." "어, 요매는 갑자기 유식해졌네?" "흥,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듣기나 해!" "아, 알았어....." 귀노사는 설명을 계속했다. "무적지독의 특징은 평소엔 전혀 느낄 수가 없다는 거야." "맞아! 나는 지금 전혀 중독된 것 같지 않아!" "어서 듣기나 하라니까! 자꾸 말을 끊어 놓을 거야?" 요노사는 유노사가 또다시 말참견을 하자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유노사는 그만 목이 자라처럼 쑥 들어갔다. "아, 알았다구..." 귀노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단 발작을 시작하고 나면, 전신이 기이할 정도로 무기력증에 빠지 며 실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돼. 그렇게 일주일간 을 당하고 나면 그 고통에 못이겨서 누구나 마지막엔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되 고, 마침내 백치가 되어 처참한 일생을 마감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일단 발작 을 시작하면 그 누구도 이를 해독시킬 수가 없어." "제, 제기랄......" 유노사는 요노사를 의식한 듯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로 무서운 독이잖아... 혈노사 그것 보라구.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고 그러 잖아!" 혈노사는 안면을 있는대로 찡그렸다. "빌어먹을! 그땐 네가 나를 죽여줘!" 유노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안돼! 그땐 나도 너와 똑같은 신세일텐데?" "비, 빌어먹을.......!" 혈노사는 이빨을 뿌드득 갈아부쳤다. "이, 이럴수가! 나, 나의 최후가 백치가 되어 죽는 거라니..." 유노사는 크게 당혹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했다. "그, 그렇다고 지금 미리 죽어버릴 수도 없고..." 유노사도 놀란 듯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유노사는 급히 혈노사를 향해 말했 다. "이, 이봐! 우리 먼저 저녀석을 죽여버릴까?" "우린 다 합쳐도 그와 상대가 되지 않아!" 혈노사는 버럭 화를 냈다. "그렇다면 이, 이걸 어쩌지...." 유노사는 그만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때, 귀노사가 말을 이었다. "헌데, 단지 그것만으로는 천하제일독이 될 수 없어. 이 무적지독엔 다른 특징 이 있지." "........." "이 독을 당한 자는 시전자와 결코 백 장 밖으로 떨어져선 안된다는거야. 그렇 다면 그 즉시 독이 발작을 시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 만일 시전자가 죽어도 그와 같은 결과가 벌어지고... 그리고, 물론 시전자의 뜻에 따라서도 독이 발작 하게 된다구." 유노사는 놀라 소리쳤다. "그럼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저 녀석의 종이 되어야 하잖아?" 요노사가 동조했다. "맞아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우린 목숨을 걸고 그의 목숨을 구해야 해요." "목숨을 걸구?" 혈노사는 눈을 퉁방울같이 떴다. "그래도 백치가 되어서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요노사의 말에 혈노사는 노화를 터뜨리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백가는 지독한 악당이구나! 우리를 그러한 독에 중독시키다니... 우린 마 침내 당하고 말았어!" 유노사는 마침내 울음섞인 목소리가 되었다. 귀노사가 탄식하며 말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무적지독이란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지. 바로 그것 이 무적지독의 가장 무서운 점이야. 그 이점을 살펴 과거 이 독을 창안해낸 우 내제일광은 한때 무림제패를 꿈꾸기도 했다는 거야." "아니, 백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데 어떻게 무림을 제패하지?" 유노사의 물음에 귀노사는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시 그는 독의 발작을 지연시키는 일종의 해독제를 만들어낸 것이었지. 그것 으로 인해 무림은 한때 정말로 제패될 뻔 했었지."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됐어?" 유노사는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우내제일광은 그 아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어. 설마 하다가 기습을 당하고 는 어쩔 수가 없었던 거지. 그후.. 우내제일광의 수하였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 를 기습했던 그의 아들도 무적지독이 발작하여 처참하게 죽어 버렸지. 그것은 무림사에 있어서 기억하기 싫은 일대 참사로써, 그후 무적지독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었지." 유노사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다시 물었다. "정말로 이 독은 해약이 없는 걸까? 저, 그러니까 하다못해 이독제독의 방법이 라든가......" 귀노사는 힐끗 독노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인정한 것이니 틀림없을거야." "맞아!" 유노사가 덩달아 거들었다. "아마도 우리는 놈이 토굴 속에 가두었을 때 중독되었을 거야. 그때 이틀동안 사실 나는 그 토굴 속에서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여 하마터면 질식할 뻔 했었다 니까. 아마 그때였을거야." "......" 혈노사와 요노사는 독노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독노사는 눈을 감고 말이 없 었다. 그것은 곧 귀노사의 말이 옳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광경을 보고 유노사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것 보라니까. 게다가 나는 어젯밤에 일부러 도망치려고 한 적이 있었어. 그 런데 정말로 백장쯤 가니까 전신에 갑자기 힘이 없어지지 않겠어? 나는 이것이 백가놈의 수작이라고 얼른 알아차리고 되돌아왔지. 이제 생각하니 나는 정말 큰 일을 당할 뻔 했던 것이군..." 유노사는 말을 끝낸 후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따라서, 좌중의 분위기는 매우 참담하게 되어 버렸다.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다 놓은지 이미 오 래되었건만 아무도 그것을 건드리지 않아 음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무거 운 침묵을 끊고 유노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잘 해주면 정말 저 백가놈이 독을 해제시켜 줄까?" 헌데, 그때였다.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백상인이 어느덧 식사 를 끝내고 마악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오노사는 이에 황망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휙! 유노사가 얼른 달려가 계산을 끝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X X X X "어, 어디로 가는 것이오?" 거리로 나서자마자, 유노사는 백상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배를 한 척 구해야겠소." 백상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하며 말했다. 유노사는 그 미소에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귀노사를 돌아보며 얼른 말했다. "배를 다루는 것은 자네 전문이 아닌가? 어서 쓸만한 것을 골라봐!" 귀노사는 눈쌀을 찌푸렸다. "선착장에 도착을 해야 배를 고르든지 말든지 할게 아닌가?" "그, 그렇군." 문득 요노사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먹을 것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귀노사도 나섰다. "나도 가져가야 할 것이 있으니 같이 가겠소." 백상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그들 두 사람은 백상인이 지나는 주위의 상점 안으로 뻔질나게 드나들며 물건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머 지 유노사와 혈노사, 독노사 등은 당연히 그 물건들의 운반을 맡아야 했다. 배. 그러한 배를 만난 것은 실로 그들에게 있어서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누 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배는 전체가 온통 두터운 철갑으로 덮여 있었다. 비록 오랫동안 방치하여 전체에 녹이 심하게 슬어 있고, 거의 폐물이 되다시피 했지만 귀노사가 대여섯 시진동안 손을 보자 그것은 마치 새것과 같게 되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황혼이 가득 물든 저녁무렵이었다. X X X X 항해는 순조로웠다. 바람은 잔잔했고 햇살은 뜨거웠다. 가끔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다가도 바람이 자면 그들은 교대로 노를 저었다. 물론 노를 젓는 것은 오노 사 중 네 사람이고 요노사는 당연히 요리담당이었다. 그렇게 배는 오직 정동향 으로만 나아갔다. 헌데, 사흘 후. 항상 좋은 일이 계속 되라는 법은 없는 것인가? 드디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갑자기 주변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태풍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휘이이잉......! 흡사 갑자기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다가오는 것처럼, 몹시 기분나쁜 바람이 사 방을 뒤덮으면서 격랑이 차차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의 먹구름은 점점 멀어져 마침내는 한 점의 햇빛도 통과하지 못할 만큼 천지가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급기야, 후두두두둑.....! 갑자기 장대같은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대하게 쏟아지는 빗발. 그로 인해 마치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이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바 다는 더욱 거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비교적 작은 배인 그들의 배는 그 격랑에 따라 마치 가랑잎처럼 위태롭게 흔들 렸다. 그 때문에 평상시같으면 고물 근처에서 한가하게 낚시나 즐기고 있을 오 노사는 저마다 파도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배를 가누기에 바빴다. 다행히 선체가 철갑으로 이루어진 배라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일 파도속에 휘말려 한번 뒤집히는 날이면 영락없이 그 형체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제기랄! 우리 이거 배를 버리고 그냥 신법으로 날아갈까?" 배는 파도에 휘말려 공중 높이 치솟았다가 바다 깊숙히 떨어지자, 유노사가 짜 증섞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랬다가는 우린 이 폭풍우 속에서 공력이 탈진되어 반드시 백 리도 못가서 바다 속에 빠져 죽을거에요." 요노사가 소리치며 대꾸했다. "아니, 그 전에 섬이라도 하나 나타날지 모르잖아!" "흥, 당신이나 어서 그 모험을 시도해 보아요. 우린 어제부터 그저 망망대해 속 에 있다는 것을 모르나요?" "그, 그렇군. 제기랄!" 눈 앞에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자, 다급하게 일장을 뿌리며 유노사는 짜증스럽게 연신 욕을 해댔다. 콰우우우우.....! 쾅....! 그의 일장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으나 그렇다고 그 파도를 다 물리치지는 못했 다. 허나, 대신 그가 타고 있던 배가 그 여력에 의해 높이 솟구쳤으므로 그는 단지 가벼운 물벼락을 맞았을 뿐이었다. "빌어... 먹을....!" 바닷물을 뒤집어쓰게 되자, 유노사는 연신 욕을 내뱉았다. 그러나, 이렇게 장대 같은 비가 오고 있는 상황에서 온몸이 젖지 않고 무사하기란 바랄 수 없는 노 릇이었다. 그래도 그는 옷을 두툼하게 차려입은 편이니 괜찮은 편이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그저 가벼운 나삼과 속옷 정도만을 걸친 요노사는 전신이 빗물에 젖어들자 온 몸의 굴곡이 마치 나신처럼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그러한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이물쪽에는 요노사와 유노사 외에도 혈노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물쪽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귀노사와 독노사는 뒤쪽으로 간 것이다. 바다의 파도는 더욱 심해졌다. 천지는 마치 말일을 향해 치닫는 듯 하고, 광풍 폭우 속에서 그 광란의 극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미 배 안에도 절반쯤 물이 차 기 시작했다. 이때, 또다시 전면으로 무시무시한 파도가 밀려왔다. 이러한 파도는 그들이 아 직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런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혈노사 가 다가드는 파도는 본척 만척 하고 시선을 요노사에게 돌렸다. 그리고는 무어 라고 전음을 날렸다. 그런데, 광풍폭우가 너무도 거세어서 요노사는 미처 그 전음을 다 듣지 못했다. "뭐라고 하는 거에요....?" 요노사가 소리치자, 혈노사는 즉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헌데 이미 파도가 덮쳐 드는 상황이라 결코 그가 자리를 떠서는 안될 입장이었다. 다섯 사람이 배의 균 형을 잡고 있었는데, 그가 자리를 뜨자 그 균형이 깨어지고 있었다. "앗, 무슨 짓이에요?" 요노사는 일순 놀라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 거대한 파도는 그 즉시 작은 배를 덮쳤다. 콰콰쾅......!! 배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만일 그들이 모두 절정의 무예를 지닌 고수가 아니었더라면 그 배는 이미 수십번도 더 나동그라졌을 것이다. 전신이 하얗게 탈색된 채 지친 모습으로 겨우 배의 방향을 바로잡은 요노사는 다소 화난 표정으로 혈노사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위험하게 해요?" "중대한 일이야." 혈노사는 일말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글쎄, 그 중대한 일이란게 뭐죠?" 혈노사는 눈을 굴리면서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지금 그 자식에게 가서 따져보자구!" 요노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따지다니요? 또 갑자기 그 자식이란 누구죠?" 혈노사는 두 눈에 혈광을 쭉 내뿜었다. "지금 우리의 주인 말이야." 요노사는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 따지자구요?" "협박하잔 말이야!" 이때, 전면에 다시 거대한 파도가 몰려왔으므로 요노사는 일장을 내갈겨 그 파 도를 후려치면서 소리쳤다. 콰콰콰콰콰.....! 펑.......! "뭐라구요.....?" 혈노사는 다가드는 파도엔 꿈쩍도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그녀석에게 협박하잔 말이야. 만일 우리의 독을 해제시켜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배를 몰지 않겠다구." 그때, 옆에 있던 유노사가 일순 손뼉을 쳤다. "맞아!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가 만약 우리의 협박을 들어주지 않는 다면 같이 죽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우린 그가 독을 발동시키기 전 에 익사해 버릴 것이니 좋고, 또 그자도 또한 우리를 따라 죽을 것이니 공평하 지 않는가? 맞아! 그가 이같은 경우를 생각한다면 우릴 해독시키지 않을 수는 없을거야." "그렇지?" "정말 그렇다니까!" 유노사는 다시 한번 맞장구를 쳤다. 허나, 요노사는 이 말을 듣고 실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봐요! 그가 배가 없다고 해서 우리와 같을 줄 아나요? 더욱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이곳에서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나요?" "그, 그렇구나......!" 유노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혈노사는 잠시 고개를 수그리고 생각을 해보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허나 그는 미처 실망할 사 이도 없었다. 거대한 해일같은 파도가 연속해서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오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가공할 파도의 숲과 퍼붓는 빗줄기..... 휘몰아치는 광풍속에서 그들은 점차로 지쳐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림의 초절 정고수라고 해도 그들 역시 인간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연의 힘에 대항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모한 노릇인가? 그 열두 시진의 사투는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괴로운 것이었다. 아마 그 어떤 힘겨운 격전도 이처럼 공포스럽고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마침내 지치고 탈진하여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을 때, 요노사는 의아한 마음으로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우리의 주인은 무엇을 하느라고 선실 안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이지?" 혈노사도 마침내 부르짖었다. "제기랄! 이놈의 폭풍우는 점점더 심해지잖아, 이거! 빌어먹을......" 그때, 돌연 유노사가 눈을 놀란 토끼처럼 뜨고 어느 한쪽을 보며 소리쳤다. "앗, 저기 좀 봐!" 혈노사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또 무슨 실없는 수작이야! 난 네가 밀가루로 만두를 빚는다고 해도 믿지 않겠 다!" "그래요, 유노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요노사도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지금 상황 은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또 몹시 피곤하고 지쳐있었던 것이었다. 헌데, 그들의 말에도 아랑곳 없이, 유노사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야! 정말 아니라구. 저것 좀 보라니까...!" 그제야, 요노사와 혈노사는 뭔가 다른 느낌을 받고 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순간, 그들은 다같이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 광채. 그것은 마치 거대한 우산처럼 공중에 펼쳐져 이 무서운 폭풍우 속에서도 찬연 히 빛나고 있었는데, 불가사의하게도 장대같은 빗줄기나 휘몰아치는 바람은 그 금빛 광막을 뚫지 못했고, 그 안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그 가 운데 한사람이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백상인이였다. 선실 속에 있었던 그가 언제 그곳으로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그림 같았고, 성자의 현신같았다. 그 고요하고 적정한 모습은 설사 이 모 진 태풍하에서도 절로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백상인이 떠올라 있는 십 장 밖의 허공을 바라보며, 요노사는 놀란 마음 속에서 도 내심 의아한 음성을 흘려냈다. 놀란 것은 혈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상 띄우던 눈 속에 혈기도 한 순간 가라앉힌 채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유노사가 다시 외쳤다. "이봐! 저쪽을 보라구!" 요노사와 혈노사는 무의식적으로 유노사가 가리킨 좌측의 전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크게 떠졌다. "앗, 아니 저것은....!" "저것....?" 산. 하나의 거대한 산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해일이 밀려드는 것 같았 다. 거대한 백색의 산. 그것은 사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백색의 고래가 아닌가? 그들은 일시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백경의 몸통 직경은 무려 십여 장이 넘었고, 그 길이는 삼십여 장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몸뚱이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광경은 필경 해일 보다 못하지 않았다. "위험하다!" 요노사가 급히 부르짖는 순간, 뒤쪽에서 귀노사와 독노사가 날아왔다. "이런, 제기랄! 정신들 바짝 차려....!" 독노사가 외친 소리에 그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고 바짝 긴장했다. 거센 파도는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염두에 둘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저 무지막지한 백경에게 날아가 버릴 공산이 더욱 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백경은 배의 뒤쪽으로 접근해 왔다. 그러더니 돌연 배의 밑부분을 들어올리 는게 아닌가? "앗, 모두 공격해라..!" 독노사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일제히 그 거대한 산을 향해 혼신의 장력을 격출 했다. 쾅! 펑퍼퍼퍼펑...! 그러나, 이는 겉으로만 요란스런 소리를 낼 뿐, 실제 백경에게는 아무런 장애 를 일으키지 못했다. 마침내, 배는 백경의 등 위에 올려진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 자신들의 목숨은 저 백경의 행동 여하에 달린 것이다. 만일 이렇게 심한 폭풍우만 몰라치지 않았다면 달리 해볼 수도 있겠지만, 저놈이 이 작은 배를 바 다 가운데로 끌고가면 그들의 목숨은 여기서 끝인 것이다. "아, 대체 우리의 주인은 뭘하고 있는거지?" 유노사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백상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오직 그의 힘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 었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백상인의 신형이 허공에 서 그냥 퍽 꺼지듯 사라져 버리는게 아닌가? 물론 그 눈부시던 장엄한 금광도 마찬가지였다. 오노사는 아연 놀라움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앗, 저럴 수가....!" "주인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지?" "우리의 위기를 이렇게 모른체 할 수 있을까? 정말 너무 하는데?" 그때였다. 그들은 또 한가지 기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의 배를 들어올린 백 경은 배를 전복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빠르게 어느 한쪽 방향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그 속도도 빠르기 그지 없었지만 배는 조금도 유동이 없 이 조용하기만 했다. 이 무서운 폭풍우의 광란 속에서 이러한 광경은 그들이 직 접 겪으면서도 실로 희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일시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와서 말을 잊었다. 그러다가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역시 말이 많은 유노사였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귀노사?" 그는 그중 가장 생각이 깊다고 할 수 있는 귀노사에게 물었다. "........" 귀노사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대신 혈노사가 입을 열었다. "이놈이 우릴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잡아먹으려고 하는게 아닐까?" 유노사가 즉시 손뼉을 쳤다. "맞아! 우리가 시끄러운 곳에서 식욕이 나지 않는 것처럼 이놈도 그런 기분일거 야. 그나저나 이 놈은 우리가 조용한 곳에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혈노사가 대뜸 고함을 쳤다. "어리석은 놈아! 이놈이 그걸 알면 우리를 이렇게 데려가겠느냐? 좀 조용히 하 란 말이야! 이놈이 너의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 먹을지도 모르니까." 유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운기조식이나 좀 해둬야 하겠군. 마침 조용한 것 이 그러기도 적당하고.... 헌데 혈노사! 네가 나보다 더 시끄럽게 하는 것 같은데 나처럼 운기조식이나 하라구!" 이때, 요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 고래는 지금 우리를 너무도 안전하게 모셔가 고 있잖아요. 우리를 도와주려는게 분명해요." 유노사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이놈은 그저 나처럼 음식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잘 가져가려고 하는거라구!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고 요매도 운기나 해!" 요노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고래가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요? 바로 우리가 가려고 하는 정동향이라구요. 더군다나 이 고래는 우리가 공격했을 때, 최소한 몸의 진동은 느꼈을 텐데도 조금도 대항하지 않았어요." "음, 그거야... 우연히 그 방향이 같을 수도 있고, 또 누구든지 자신의 음식은 손 상시키지 않는 법이라구! 아, 생각해봐! 여기 맛좋은 통닭이 한마리 있다면 요 매는 먼저 부숴놓고나서 먹겠어, 아니면 흠집이 하나도 안나게 요리하여 먹고 싶겠어? 이 고래도 마찬가지 심정이라구!" 유노사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열심히 변명을 했다. 요노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우리 귀노사에게 그 판결을 물어보기로 해요." 허나, 유노사는 다시 우겨댔다. "아니, 그럴 것 없이 너는 이 고래가 마음에 드는가 본데 아예 이 놈에게 시집 을 가버리는게 어때?" 요노사가 마악 화를 내려고 하는데, 귀노사가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요매의 말은 옳아!" "엉....?" 유노사는 그제야 귀가 솔깃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사실, 귀노사는 매사에 생각 이 깊고 심계가 뛰어난 위인으로 그들은 여태까지 모든 일을 그의 결정에 따라 왔으며 또 그것들은 아직 단 한번의 실수도 없었던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어서 설명 좀 해봐, 귀노사!" 유노사는 크게 놀라서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하 게 입을 열었다. "육식통령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유노사가 의아해 하는데, 문득 독노사가 입을 열었다. "그건 신의 특질이라고 말하는 전설의 경지가 아니야?"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나 그건 단순한 전설이 아닐 수도 있어." 독노사는 눈빛을 빛냈다. "단순한 전설이 아닐 수도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귀노사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즉, 어떤 사람이 육식통령에 이르면 이런 백경을 부릴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이 지." 독노사는 흠칫 놀랐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이 육식통령에 달한 사람이어서 이 고래를 불렀단 말인 가?" "그렇지." 독노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닐가? 설사 주인이 이 고래를 부리고 있다고 해도 그건 그저 방문의 비술일 수도 있을텐데...." 귀노사는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 방문의 비술이라는 것은 육지의 일반 금수들에게나 써먹을 수 있는 것일 뿐이네. 즉, 이 백경에게는 그 금수통령대법 따위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 "왜냐하면 이 고래는 필시 동해의 제왕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네. 아니 전 바 다의 제왕일지도 모르지. 이와 같은 놈은 이미 해룡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 독노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이제까지 이만한 놈이 있다는 말을 문헌에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 네. 헌데, 정말로 그가 육식통령의 경지에 올랐을까?" "음,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이제껏 의문을 가졌었지만....."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틀림없는 것 같네. 솔직히 우리는 아직 그의 무예 정도를 확실히 모르 는 상황이 아닌가? 우리 정도의 무예를 지니고서도 아직 그의 무예 정도를 몰 랐다는 사실이 확실히 불가사의하네. 그가 육식통령에 올라있다는 것이 일리가 충분히 있지." 독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헌데, 그는 이번의 출전을 위하여 매우 많은 준비와 신중을 기하는 것 같더군. 그가 만일 그런 전설적인 무예를 완성했다면, 그 어떤 일도 거슬릴게 없을텐 데... 혹시, 세상에 그보다 무예가 고강한 인물도 존재한단 말인가?" 귀노사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글쎄.... 세상은 넓으니까." 독노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천하가 넓다 해도.... 자네는 과거 천년 전의 마교대종주가 그런 경지에 는 오르지 못했었음을 알고 있나?" 귀노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긴, 그렇네만...." 이때, 유노사가 다시 나섰다. "그럼 그가 저 고래를 부리고 있다고 치고, 헌데 그는 왜 오랫동안 있다가 이제 야 우리를 도와준거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처럼 뛰어난 사람이.. 이 거 필시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서 한 짓이 아닐까?" "그건 아닐거에요." 요노사가 즉시 반박했다. "아닐거라니?" 유노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주시했다. "넌 이번엔 그의 각시가 되려고 그렇게 편을 드는거냐? 하긴 고래쪽보다는 좀 더 가능성이 있지만......" "뭐라구요?" 요노사는 안색이 빨개지며 발작하려고 했다. 이에 귀노사가 나서서 입을 열었 다. "그가 만일 육식통령의 무예를 완성했다면 솔직히 우리를 안중에 두지 않을 만 도 하지. 그에 비하면 우리의 무예란 고작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할 테니까." "그것 보라구! 귀노사도 내편을 들잖아!" 유노사가 의기양양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헌데, 귀노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것 같지 않아. 반드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거야. 아마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을 거야." 요노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구요?"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던 무맹과 각파의 인원들 있지 않은가? 그들이라고 이 폭풍우를 만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을 테니, 아마도 그는 그들은 우리보 다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했을테지. 그래서 그들을 먼저 구했을 것이네." 요노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과는 매우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을텐데 어떻게........." "그래서 그는 저 백경을 이용했던 것이지. 그리고 내친김에 백경을 이용하여 우 리도 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네." "실로 그렇겠군요." 요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내심엔 아직도 의문이 완전히 풀린 상태는 아니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특정한 근거가 없는, 단지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미를 다소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헌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그때, 배가 밑으로 가라앉는 듯 하여 그들 모두는 시선을 아래로 주었다. 일순 그들은 내심 몹시 긴장했으나, 그것은 실로 기우였다. 귀노사가 추측한 그대로 백경은 그들이 타고 있는 배를 바다 위에 내려놓더니 그 즉시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정말 믿을 수가 없는 노릇이구나.....!" 유노사가 내심 감탄한 외침을 발했다. 어느새 그들이 탄 배는 폭풍지대를 완전 히 벗어나 있었고, 따라서 사위는 산들바람만이 오가고 더이상의 비바람은 불지 않았으며 파도도 거의 잠잠한 편이었다. 푸르게 보이는 하늘. 그사이로 흰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아까의 그 폭풍 우 속의 지옥같은 정경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로 천국과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는 그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발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변화를 낳게한 주인공의 행방에 대해 궁금증이 일게 되 었다. 그들과 배를 구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백상인.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때 문득 유노사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자, 돌연 혈노사가 벌컥 화를 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 나는 네 말은 밀가루로 만두를 빚는다고 해 도....." 헌데, 유노사도 이번엔 지지 않았다. "안 믿어도 좋아! 하지만 이번의 내 추측은 정확해!" 요노사가 보다못해 입을 열어 물었다. "좋아요. 그래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이에, 유노사는 자신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간단해! 그는 결코 우리의 백장을 벗어날 수 없을테니, 지금 바로 이 근 처에 있을거야. 즉, 이 배의 선실 안에 있다는 말이지." "이봐! 백 장 밖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우리지 그가 아니야! 그가 그토록 신비 스럽게 사라지고서 겨우 선실 안에 쳐박혀 있을 것 같아?" 혈노사가 다시 끼어들어 화를 냈다. 그런데, 귀노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이는 것이었다. "하하, 그건 유노사의 말이 맞아. 우리는 간단한 문제를 너무도 어렵게 생각한 거지." 요노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가 백장 밖에 있다면 지금 우린 몸에 이상이 있었을테지..." 그말에 우쭐해진 유노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혈노사를 노려보았다. "그것 좀 보라구! 아예 말을 못하게 하다니!" "이런 빌어먹을.......!" 혈노사는 같이 노려보며 안면을 심하게 구겼다. 요노사는 얼른 그들 두 사람을 만류했다. "그만하고 우리 어서 그 사람이나 보러가요." "음...." "그, 그려." 이어, 그들 모두는 다함께 선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X X X X 백상인. 그는 과연 선실 내부에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침상 위에 단좌한 채로 그는 미소하여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 오시오?" 오노사와는 달리, 백상인의 용모는 여전히 맑고 단정했다. 그 모습은 결코 폭풍 우 속을 거쳐나오지 않은 사람같았다. "한두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서 왔소이다." 귀노사가 그들을 대표하여 말했다. "그 질문이란 무엇이오?" 귀노사는 백상인의 얼굴을 세밀히 살피면서 말했다. "우선, 당신은 그 백경을 이용하여 무맹과 각파의 사람들을 구했소이까?" "글쎄요....."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백경이 그들을 구한 것은 그저 그가 구한 것일 뿐, 어찌 내가 거기에 연관이 되겠소?" 귀노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정말 육식통령에 이르렀소이까?"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연허합도에는 이르렀지만 그것을 어찌 육식통령이라 하겠소?" "......" 귀노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윽고 뒤돌아서서 선실 밖으로 물러나왔다. 그렇게 되자, 자연 나머지 사람들도 되돌아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육식통령이 아니라고 하잖아." 선실을 나서자마자, 유노사가 소리쳤다. "....." "더군다나 그는 백경을 부리지도 않았다는데?" 유노사는 나머지 사인을 돌아보며 동조를 구하는 듯 소리쳤다. 그런데, 독노사 가 문득 그에게 말했다. "육식통령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그의 겸손이야." 유노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건 어째서 그렇지?" 독노사는 고개를 들어 흘러가는 구름 한 송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연허합도가 바로 육식통령이니까." "뭐, 뭐라구?" 유노사는 입을 크게 벌렸다. "미, 믿을 수가 없어...."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백경은?" "......" 독노사가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하자, 유노사는 그의 옆구리를 찌르 며 다시 말했다. "그건 내 말이 맞겠지? 그는 솔직히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독노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뭐라구....?" 유노사는 아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것은 혈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독노사는 다시 말했다. "그는 어진 사람이야. 자신의 공을 모두 백경에게 돌리다니. 그 무리들 중 아무 도 자신을 보지 못했으리란 생각에 그는 아예 자신의 공을 인정하지 않은거야." 말을 마친 후, 독노사는 휘적휘적 고물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귀노사도 이미 그 쪽으로 사라진 듯 보이지 않았다. 뒤에 남은 유노사와 혈노사는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내둘렀다. "이상하군. 저 두 사람의 말은 가끔 이해할 수 없다니까." "흥!" 요노사가 나직이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비꼬았다. "늘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는 말이나 싸움질만 일삼으니까 그리 멍청하죠. 생각 해봐요. 귀노사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면 그냥 그렇게 쉽게 나왔겠어 요?" "하긴..." "그렇구나!" 요노사는 다시 멍청하게 고개를 흔드는 그들에게 요염하게 흘겨본 뒤 선실쪽으 로 신형을 옮겼다. "난 어서 음식이나 만들어야지." 일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유노사와 혈노사는 하던 생각을 즉시 중단하고 급히 소리쳤다. "앗, 요매! 그 음식 빨리 좀 해줘! 지금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아이구, 이거 알고보니 하루종일 굶었구나!" 그들은 요노사의 뒤를 졸졸 쫓아 들어가며 연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한낮의 열기로 이루어진 정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적어도 한끼의 식사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황혼. 태풍이 지나간 후의 황혼은 죽음처럼 아름답다. 바다는 고요했다. 그 고요한 바 다 위에 저녁이 찾아들자, 온 사방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사위가 둥그런 수평선으로 가로막히고, 그 가운데 충만하게 가득찬 황금빛 노을의 광채는 어쩌 면 죽음보다도 황홀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오노사는 그 황혼속에서 낚시 등을 하며 각각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점차로 어둠이 몰려오자, 더러는 고물쪽에 남고, 더러는 선실 로 들어가 버렸다. 너무도 숨막힐 듯한 고요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다. 요노사. 그녀는 요리담당이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노를 젓는 사람만을 남겨둔 채 모두가 잠들어버린 시각, 그녀는 한잔의 차를 준비했다. 차의 이름은 단봉용향이란 것 으로 중원에서도 매우 희귀하며, 그녀는 이 배를 타기 전에 미리 그 차를 준비 해둔 바가 있었다. 물론, 그 양은 극히 소량이라 여태 감춰두고서 그녀는 꺼내 지를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 그녀는 비로소 그 아끼던 단봉용향의 차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특유한 향기에, 혹여 다른 선실 방에서 잠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챌까봐 지극히 조심을 하면서 그녀는 정성을 다하여 차를 다렸다. 그리고, 깨 끗이 씻은 다기들을 쟁반 위에 담아가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부엌 의 모든 정리를 끝내놓는 것을 잊지 않고서. 스르르르르.... 그녀의 옷깃이 선실 바닥에 부딪쳐 미묘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지금 그녀가 겨 우 한 장의 얇은 나삼만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도 그 녀의 투명한 나삼 속으로 간단한 젖가리개와 작은 속곳이 언뜻 비쳐졌다. 거기 에 어울리게 그녀의 얼굴도 오늘밤 매우 고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선실의 방밖이었다. 그녀는 오늘 낮에 이곳으 로 한번 와본 적이 있다. 허나, 그때는 여럿이었고 지금은 그녀 혼자이다. 그녀는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밀 자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문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렸다는 것은 다행이 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작 어려움은 앞으로 부딪쳐올 것이기에 그녀는 긴장으로 인해 얼굴 을 다소 경직시켰다. 허나 미소를 지어야 했으므로 그녀는 억지로 고혹적인 웃 음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안으로 바람처럼 스며 들어갔다. 스으으..... 얼른 들어가서 소리없이 문을 닫고나자, 그녀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런 종류의 일이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녀는 내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비록 그녀가 사내는 아니지만 한번 칼을 뽑았으 면 한번쯤은 휘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찻잔속의 찻물이 넘치지 않았음을 확인 한 다음, 그녀는 시선을 조심스럽게 전면으로 던졌다. 침상 위. 지금 그곳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죽은 듯이...... 지극히 평온하게 잠든 그 모습은 어떤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그녀는 아미 를 살풋 찌푸렸다. 잠시 주저하다가, 그녀는 찻잔을 담은 쟁반을 한쪽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그녀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마치 발걸음 이 천근이나 만근쯤 되는 것처럼, 걸어가는 그녀의 얼굴엔 불안함과 초조, 그리 고 일말의 깊은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침상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돌연 우뚝 멈춰섰다. 다시 한번 주저하던 그녀는, 이어 소리없이 침상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불 속은 더없이 편안 한 것 같았다. 더욱이 한 남자와 자신이 거의 알몸으로 함께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전신이 마구 확확 달아올랐다. 심장은 주착없이 마구 쿵쾅거리고, 가쁜 호흡은 정말이 지 가누기 어려웠다. 그녀는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참동안 그대로 있어야 했다. 그리하 여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침상 속으로 파고든지도 벌써 일각이나 지났는데 그는 어째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일까? 겉보기에 그는 아직도 곤하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는 잠을 자고 있는게 아닐 것이다. 그는 아주 이목이 예리한 사람이므로..... 그렇다면?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다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어,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어... 지금 자나요?" "....."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녀는 문득 사춘기의 소녀처럼 설움이 왈칵 솟구쳤다. "당신은 아주 나빠요. 이렇게 모른 척 하다니....." 그녀는 소년처럼 서럽게 흐느꼈다. 그러자, 백상인은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그 는 누운 채 그대로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냈다. "요노사는 취미가 아주 기이하구려. 이렇게 야밤에 기습을 하다니." 그 말에, 그녀는 일순 설움은 간 곳 없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었으니 이 기습은 성공적인 것이 못되었어요." "아니, 나는 지금 분명히 눈을 감고 있는데?" "풋...." 그녀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아주 달콤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응큼하군요? 겉보기와는 달리....." "음, 그런가?" 백상인은 나직이 뇌까리더니 곧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헌데 그때, 그의 몸을 휘감는 나직한 손길이 있었다. "안돼요, 일어나시면." 일어나는 도중 저지를 당하자, 백상인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무슨 뜻이지? 요노사!" "흑.....!" 요노사는 나직이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저를 천하다고 여기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실 그렇지 않아요. 소녀 청정대법을 아세요?" "........" "저의 사부께서는 과거의 채양보음술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시고 그와 겉보기에는 비슷하나 그 내용은 기실 천양지차인 소녀청정대법이라는 것을 창 안하셨어요. 그것은 처녀성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대법이 에요. 그래서...." "....."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에요." 요노사는 말을 하고 나서 수치감에서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백상인은 미소하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사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소." 요노사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왜....?"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왜라니? 그럼 당신은 나와 함께 자잔 말이오?" "그래요." 요노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되오." "왜 안되죠? 내가 아직도 천하게 보이나요?" 요노사는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그런게 아니라.. 당신 내 물음에 대답해 주겠소?" 백상인은 아주 정색을 했다. 요노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세요."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약 처녀성을 상실한다면 갑자기 늙어버릴게 아니오?" "그, 그래요." 요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미미한 고통의 빛이 스쳤으나, 그녀는 곧 아무 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했다. 백상인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노파가 되어서도 살 수가 있겠소?" 요노사는 한숨을 불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살 수 없을 거에요." 백상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고초를 자초한단 말이오?" "......." 요노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들고 물었다. "당신은 내가 여태 이렇게 처녀로만 지낸 것이 단순히 오래 늙지 않기 위해서 였으리라고 생각하나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요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여자로서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누구나의 공통된 바램이지 만 그것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아요. 때가 되면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죠. 따라 서,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차라리 그의 품속에서 죽게 되기를 바랬을 거에요." "....."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처녀로 남은 것은 내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기 때 문이에요. 물론 강호엔 사람도 많고 또 준걸과 기린아들도 많았어요. 허나 사 랑이란 결코 계산된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 "나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요노사의 음성은 단호했고 또 사랑의 열정에 가득차 있었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그러한 열정적인 고백을 듣는다면 거절할 수 없으리라. 적어도 지금 그녀의 모습은 싱싱한 사춘기적의 아름다움 그대로이고, 자고로 미 인의 호의는 거절하기 어렵다고 했으므로. 그러나,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허락할 수 없소. 어쨌거나 이것은 한 사람의 목숨을 빼 앗는 행위이므로." 백상인의 어조는 매우 단호하여 그 뜻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에, 요노사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이어 서럽게 말했다. "당신은 그런다면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나요? 나는 당신이 지금 거절 한다면 자결하고 말거에요. 여기에 오기까지는 많은 고민을 했었거든요." "........." "당신은 앞으로의 나의 도움을 기대하고 나를 데려왔겠지만 정말 안됐어요. 나 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네요. 아아...." 요노사는 한서린 탄식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그녀의 눈 부신 동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투명한 나삼은 어둠 속에서 하릴없이 흔들렸다. "많이 주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확실히 너무 나의 주제를 몰랐어요. 나는 올해로 꼭 구십 살. 당신은 지금 새파란 이십대니 어찌 나같은 사람이... 나는 너무 주제를 몰랐어요. 미안했어요, 그럼..." 한줄기 처연한 음성과 함께 그녀는 서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걸 이에는 짙은 애환이 묻어나는 듯 했다. 헌데, 마악 침상을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요노사는 한가닥 부드러운 손길이 그 녀의 허리를 휘감아옴을 느꼈다. "아...!" 그녀는 일순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백상인의 부드러운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신을 지금 그냥 보낼 수는 없소. 기왕 들어왔으니 나와 오늘밤은 함께 자도 록 합시다. 요매!" 요노사는 급격히 몸을 돌렸다. 눈앞의 백상인이 부드럽게 미소하며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더이상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말이 필요없이 그녀 는 바람처럼 날아가 그의 품속에 안겼다. 이어, 그들은 자연스럽게 침상 위로 나란히 누웠다. 백상인은 요노사를 다정하 게 안으며 말했다. "사랑을 반드시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소?" "그, 그래요." 요노사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날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노사는 맹세코 행복했다. X X X X 다음날 아침. 유노사는 자신이 커다란 고기를 잡았다고 소리소리 자랑을 하며 선실내를 돌 아다녔다. 확실히, 그가 낚시질로 잡아서 끌고온 그 놈은 그 크기가 무려 일장 여에 달했다. 사람들은 그 물고기가 유달리 맛좋은 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 으므로 다함께 유노사를 오랜만에 성원해 주었다. 때문에 유노사는 더욱 신이 났고, 요노사는 화사해진 안색으로 그 물고기를 손수 요리해서 온 인원이 다함 께 포식하도록 했다. 오늘따라 그녀가 만든 음식은 유난히 맛이 있어서 모두들 다 먹고도 입맛을 다실 정도였다. 따라서, 식사가 끝나자 오노사는 저마다 그같 은 물고기를 낚아올리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배 안의 분위 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이 배 전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지금 지옥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실컷 떠들고 겉으로는 요란하게 웃고들 있었지만, 그들은 내심 음울한 그 림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 더욱 요란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그후, 그들의 항해는 순풍에 돛을 달고 비교적 순조로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X X X X 지옥도. 그 섬은 과연 말 그대로 거대하고 황폐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안개에 뒤덮 인 산봉우리만 보이더니, 차차 다가갈수록 그 모양이 뚜렷해졌다. 악마상. 온통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섬의 정상에는 그야말로 풀 한 포기 하나 나지 않고 삭막했는데, 그 모양이 정말 거대한 악마상을 닮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짙 은 안개가 사위를 감싸면서 험한 암초지대가 나타났다. 다행히 귀노사는 배를 귀신같이 모는 재주가 있었는지라, 다른 네명이 사방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동안 그는 요리조리 암초를 잘도 피하며 전진했다. 그렇건만 그들 모두는 심하게 긴장을 했다. 콰르르르.....! 철썩! 쏴아아아..... 암초에 부딪쳐 세찬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물결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 어디에도 인적은 없었다. 혹시 그들은 이 천연의 험지를 너무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니면 워낙 사람들의 발길이 없었던 탓에 방심하고 있는 것일까? 허나, 그 어느 것도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안개를 헤치고 파도를 가르며 암초 를 피해서 조심스럽게 긴장해서 나아갔다. 헌데, 그로부터 일각여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돌연 유노사가 어느 한쪽을 가 리키며 나직이 소리쳤다. "앗, 저기.... 사람이 죽어 있다!" 시체. 흡사 물고기의 비늘같은 검은 가죽으로 전신을 싸맨 대한으로 얼굴부위만 밖으 로 나와 있을 뿐이었다. 중원의 사람같지는 않고, 보아하니 그는 이곳의 졸개들 중 하나였던 것 같았다. "무맹의 인원들이 먼저 지나갔군." 귀노사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체의 부패가 아직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되지는 않았어." 독노사가 거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창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군!"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쪽에 서 있는 백상인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서 가봅시다." "어서 가요, 귀노사!" 요노사는 백상인의 옆에 서서 앵무새처럼 그 말을 되풀이 했다. "좋습니다."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좀더 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과연, 앞으로 갈수 록 그러한 시체의 숫자는 점차 불어났다. 그에 반해 무맹의 인원들의 시신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곧 무맹의 힘이 월등히 우세하든가, 아니면 그들 중 수리를 잘 아는 사 람이 있어서 전격적인 기습이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아니, 혹 그 두 가지 다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미 이 주위에는 더이상의 매복이나 경비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노사는 더이상 시신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배의 전진속도를 배가시켰다. 안개가 자욱한 이 암초지대는 대략 십여 리 정도에 달했다. 그 마지막 부근에 도달하자, 암초의 여기저기가 많이 부숴져 있고, 게다가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그럼에도 무맹의 시신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지금까지도 무맹은 압도적 으로 우세한 듯 했다. "그들도 모두 이길로 왔을까?" 유노사의 말에 귀노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그들은 아마도 섬을 포위하고 한꺼번에 기습공격을 감행했을거 야. 즉 이 흔적은 고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말이지." "대단한데?" 유노사는 눈을 크게 뜨자, 독노사가 말을 받았다. "대단하구말구. 맹주인 남궁벽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 밑에도 무수한 인재 들이 있고, 그러니 이 첫관문을 이처럼 쉽사리 통과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 지." "헌데...." 유노사는 백상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는 왜 급히 그들을 도와주러 가지 않는 것일까?" "글쎄...." 독노사는 미간을 모으더니 말했다. "아마도 무슨 까닭이 있겠지." "까닭이라고?" 유노사는 눈을 크게 떴다. "말하자면, 아직은 도움이 필요없는 상태라는 그런 말이지." 독노사의 말에, 유노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필요없다구? 그럴까?" 몇 마디의 말이 오가는 가운데, 드디어 그들은 목표하던 섬의 한 부분에 도달했 다. 역시 섬 전체는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황폐한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물론 이 섬 어딘가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있기야 하겠지만 급히 주위를 둘러본 결과, 황폐한 섬 주위가 온갖 늘어진 시체와 격렬한 격전의 흔적으로 더 욱 황폐하게 변해 있었다.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이 길을 지나간 무리들이 너무도 선명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길은 거대한 암벽의 중심부를 꿰뚫 는 계곡같이 생긴 통로쪽으로 나 있었다. 모래사장도 없는 온통 암벽 뿐인 해안에 배를 귀노사가 은밀하게 숨기고 나자, 백상인이 앞장서서 그 길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갑시다." 그들은 신법을 펼쳐 나아가는 속도를 빨리 했다. 스스슷...... 무려 열흘간이나 배 안에 갇혀 있다시피한 그들이 펼치는 신법이라 몹시 빠르 고 신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감상적이지 못했다. 대략 일각 정 도 나아가자, 그들은 요란한 격타음, 비명 소리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그들이 지나는 통로는 길었다. 그것은 아마도 거대한 병풍처럼 생긴 암 벽을 가로지르는 편리한 통로 같았다. 허나, 아무리 통로가 길어도 그것은 곧 끝이 났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음이 크 게 느껴지면서 전면의 공간이 드넓게 확대되었다. 그들은 즉시 신법의 속도를 늦추었다. 순간, 그들은 눈을 크게 떴다. 너무도 의 외이면서도 평범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대분지.... 이곳은 한마디로 호리병의 형상처럼 생긴 거대한 분지였다. 아마도 이 섬의 중 심부가 틀림없을 텐데 사방으로 나 있는 천연적인 통로쪽을 제외하고는 하늘은 병풍같이 생긴 거대한 암벽에 의해 겨우 손바닥만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 드넓은 대지 한쪽에는 커다란 호수와 완만한 경사의 야산들도 있었 고, 그리고 그 사이에는 많은 논과 밭들이 일률적으로 개간되어 여러가지 작물 을 키워내고 있었다. 집들은 대부분이 갈잎으로 엮은 모옥들이었고, 그것은 중 앙에 솟아있는 가장 높은 야산을 중심으로 둥글게 혹은 일직선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그 집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형상이 괜찮았고, 가장 위쪽에 지어진 어떤 집 들은 이 곳의 석질인 화산암으로 육중하게 지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야 산의 가장 꼭대기. 그 곳에는 마치 섬의 정상에 새겨진 것을 그대로 본딴 것 같 은 생생한 악마상이 흉측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만일 그것만 아니라면 그 누 가 이곳을 흉적들의 소굴로 의심하겠는가? "아주 훌륭한 곳이오." 백상인이 감탄하듯 말하자, 옆에서 귀노사가 거들었다. "이런 훌륭한 장소가 악인의 소굴로 쓰여진다는 것이 아까울 뿐입니다." "하긴....."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하며 시선을 한창 격전 속에 어우러져 돌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돌렸다. "아....악....!" "으...아.....악..!" 흑의인들. 그들의 수효는 정말 많았다. 대략 오만쯤 헤아리는 그들은 격전지의 대부분을 메우며 어우러져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잘 비명을 올리며 쓰러져가는 사 람들은 대부분 그들 무리였다. 이에 비해 훨씬 소수인 무맹측은 모두가 정예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이곳에서 피나는 수련을 쌓아왔던 그들이라고 해도 오랜 전통과 연륜을 가지고 있는 무 맹과 강호 각파의 정예들에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격전의 양상은 강호의 일만 고수들이 사방에서 둥글게 포위한 채 그 오 만여의 흑의인들을 주살하며 진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주위의 논밭에 무수한 시신들이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흑의인들의 숫 자는 그보다 더욱 많았으리라. 정말 일견하기로도 지옥도의 오랜 야망이 한 순 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 보였다. "정말 이상하군요." 요노사가 백상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고 또 무맹에 대단한 위협이 된다고 했었는 데 어째서 저렇게 쉽사리 무너지는거죠?"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렇게 보일 뿐이오." 요노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보일 뿐이라니요?" 백상인은 다시 대답했다. "아직은 그들의 정예가 나타나지 않았소. 그래서 상황은 좀더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이오." "아, 역시....." 요노사는 내심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까 백상인이 서두르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아까 벌써 자신의 능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을 것이고, 그래서 다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죠?" 요노사의 물음에 백상인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합시다." "맞아요, 아직은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에요." 요노사는 맞장구를 치며 시선을 전면으로 주었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자리와 그 격전지와는 대략 백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공이 하나같이 반박 귀진을 넘어선 그들은 그 광경을 마치 눈앞에 펼쳐놓은 것처럼 환하게 바라볼 수가 있었다. 이때, 장내의 상황이 갑자기 급진전되었다. 홀연 중원의 무인들 중에서 한 노승 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폭죽같은 신호탄을 터뜨린 것이다. 그는 얼마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 새로 임명된 만무전주인 천뢰선사였다. 펑....! 신호탄은 허공중에 오색의 연막을 흘리며 흩어졌다. 그러자, 홀연 군웅들 속에 서 다섯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홍황녹청자. 다섯 가지 색깔의 옷을 일률적으로 차려입은 그들은 알고보니 다름아닌 무맹의 오단소속의 고수들이었다. 천왕단은 청의를 걸친 인물들로 파상적인 침투공격을 감행했고, 금사단은 황의를 걸친 사람들로서 흑의인들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각 각 사나운 맹수들을 앞장세워서 적을 부지기수로 무너뜨렸다. 그리고 홍의를 입 은 여인들의 집단 봉황단은 갖가지 용맹스런 독수리나 학 등을 타고 흑의인들 이 구축한 방어선의 후방으로 파고들었다. 자색 옷을 걸친 자하단의 무리들이 가는 곳에는 느닷없이 흑의인들이 갑자기 쓰러지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절 독에 의한 공격이었다. 또한 녹의를 걸친 만화단의 인물들은 사방에 무수한 암 기들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흑의인들은 정신없이 혼란된 데다가, 강호각파의 고수들이 이를 놓칠 세라 달려들자 금세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크...악..!" 단말마의 비명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흘러 강물처럼 범람했다. 흑의인들의 숫자는 비록 많았으나 체계적이고 잘 숙련된 무맹의 공격 을 받자 오히려 더욱 거대한 혼란을 가져와서 그들 중 서로 밟혀 죽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추풍낙엽처럼 무수한 생명들이 그 생을 달리했다. 백상인 등은 야산의 정상으로만 향해 달렸다. 도중에 가끔씩 달려드는 적들은 오노사가 각각 알아서 처치했다. 오노사 중 귀노사는 암기와 귀계에 능하고 혈 노사와 유노사는 각각 장공과 신법에 능했으며 독노사와 요노사는 독공과 수공 에 각각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들이 한번씩 스칠 때마다 흑의인들은 가벼운 대항 한번 하지 못했다.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날아가면서 귀노사는 문득 백상인에게 물었다. "이상하군요. 어찌해서 놈들은 자신들의 수하가 이토록 당하고 있는데도 나서지 않는 것일까요? 혹시 세불리를 통감하고 다른 곳으로 달아난 것이...." 백상인은 날아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들은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귀노사는 의아한 빛으로 물었다. "때를 기다리다니요?" 백상인은 앞쪽을 주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과거 신도운형에게 이런 마음을 읽은 적이 있소. 이제 한 달 후면 형님은 대공을 이루게 된다. 그 전에 나는 이 일을 마무리하여 빨리 연락을 취해야 하 겠다고. 여기서 이 일이란 바로 당신들을 포섭하는 일이고, 그 대공이란 바로 어떤 중요한 무예의 연성일 것이오." 귀노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때로부터 고작 스무날 정도 지났을 뿐이니, 아직도 열흘이 란 기간이 남아 있겠군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그때의 상황이오. 그들은 신도운형이 아직 연락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대공 연성의 날짜를 좀더 앞당겼을지도 모르오. 즉, 오늘일 수도 있소." 귀노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공 날짜를 그렇게 쉽게 조절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해서 당신 은 보다 빨리 그가 대공을 이루기 전에 그를 제거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도운악 말고 이곳에 다른 강자가 있기 때문이오. 그는 그 어떠한 일 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며, 내가 여기에 온것은 사실 그 사람에게 목적 이 있소. 그 외에 어떤 사람도 나에겐 관심이 없소." "그렇다면 그가 이곳의 대종사라는 신도운악의 사부란 말입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오." "대체......" 이때, 귀노사가 다시 질문을 던지려 할 때 그들은 이미 중심부의 건물에 도착했 다. 순간 그들은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그들이 심하게 패퇴하는 광경은 마치 모래로 정교하게 만든 성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사람의 생명이란 이리도 허망한 것인가? 그들 흑의인들이 죽어가는 광경은 흡 사 벌레와 같았다. 한번 비바람이 몰아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무수한 꽃잎과도 같은.... 비록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살이라고는 하나, 그 광경은 실로 참혹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 많던 인원들이 삼만에서 다시 만 명여로 줄어들더니, 어느새 그들이 구축한 포위망은 완전히 뚫려 버렸다. 그 사이를 중원의 강호인 들은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와...아!" 이곳은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자들의 아수라지 옥 같았다. 물론, 그 와중에 흑의인들만 죽어간 것은 아니었다. 중원인들도 무수히 희생되 어 이제 남은 인원은 겨우 오천여를 헤아렸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사기가 충 천했다. 그들은 기세와 함성을 올리며 파도처럼 적의 심장부를 향해 달렸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그들의 행위는 일면 너무도 장엄하게 보이기도 했다. 바로 이때, 군웅들의 선봉에 서서 비쾌하게 날아오르 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상인이 항주의 옥황산 정봉에서 보았던 각파의 수뇌들과 맹주를 위시한 무맹의 십이원로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용맹스런 무맹의 금은백의 삼대 소속 인물들이었다. 그 금은백의 삼대인물들은 무맹의 수호자와 같은 인원들로서, 맹주인 남궁벽은 이번에 맹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 오당의 고수들을 제외한 전 인원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백상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오노사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갑시다." "예." 스스스슷......... 백상인을 필두로 그들 육인은 바람처럼 백여 장의 거리를 날아 지났다. 사실 오 노사의 무예 정도만 해도 거칠 것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단의 고수들이 나 머지 잔여 흑의인들과 격돌하고 있는 격전지를 지나 가옥들의 중심부로 파고 들었다. 맹주 남궁벽 등은 이미 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곳에서도 치열한 일단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흑포인들. 그들의 수효는 대략 일만이나 될 듯 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도 그들의 무예는 밖에 있던 흑의인들보다 월등해 보였다. 밖에 있던 모옥들과는 달리, 이곳의 건물들은 대부분 석재로 지어져 마치 거대한 성곽처럼 야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흑포인들이 나타난 곳은 바로 이 성곽의 바깥 부분이었다. 따라서 무맹의 인원들은 성곽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그들과 밀고 밀리는 접전 을 계속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그 흑포인들의 저항은 막강했다. 그들은 숫자면 에서도 두 배 가량 앞섰지만, 무엇보다도 먼저의 싸움에서 강호의 군웅들은 다 소 지친 상태였다. 따라서 금세 강호인들의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금의위대, 은의위대, 백의위대 등 삼대는 즉시 그들과 어울리느라 발이 묶였고, 다른 각파의 수뇌급 인물들도 이에 가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아아... 악...!" "아....아.... 악!" 이 지옥도의 정예로 보이는 흑포인들의 저항이 막강한 만큼 이 격전은 더욱 치 열했고 살벌무쌍했다. 허나, 아무리 흑포인들의 저항이 극심하다고 해도 그들이 감당해낼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말 그런데? 저들이 저렇게 무조건 저지하려고 하는 걸 보면 저 안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음이 분명해. 주인의 말이 옳은 것 같아." 유노사가 주절거리듯 말을 하고 났을 때, 순간 흑포인들의 저지를 뚫고 날아오 르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맹주인 남궁벽과 만박전주 제갈박, 그리고 십이원로와 불성십이무왕 등이었다. 그들은 당금 강호의 명실공히 최고수로 이름난 사람들로서 십장 가량의 성곽을 가볍게 날아 넘고서 안으로 비쾌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따라갑시다." 백상인이 말과 함께 신형을 날리자, 오노사도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스스슷..... 의외로 부근의 건물 속엔 경비나 사람들이 없었다. 밖의 그 격렬한 저항에 비해 이곳은 마치 텅 빈 것 같았다. 백상인 등은 대충 그곳을 둘러보고 다시 위쪽으 로 신형을 움직였다. 위쪽이란 바로 야산의 정상, 악마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마침 남궁벽 등도 그쪽을 향해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백상인 등은 신법의 속도 를 다소 빨리했다. 악마상. 그것은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하나의 암봉이었다. 그 흉악하게 생긴 입부분은 어 두운 동굴이었고, 그 안을 들여다 보자니 마치 지옥의 입구를 보는 양 공포스러 웠다. 그리고, 이 동굴의 앞에는 제법 널찍한 공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지금 동굴을 감싸고 백여 명의 복면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자연 먼저 그곳에 당도한 남궁벽 등은 그들로 인해 저지되었다. 남궁벽이 눈쌀 을 찌푸리며 멈춰서자, 제갈박이 말했다. "그들은 보아하니 전대의 마두들이 분명하오. 놈들은 아마도 이들로써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 같으니, 빨리 돌파하는게 좋겠소이다." 남궁벽은 눈빛을 빛냈다. "그렇다면?" 이에 원로들을 대신하여 만공성승이 말했다. "말씀하시오, 맹주. 우리는 무림정의를 위해 파계도 서슴치 않을 것이오. 아미타 불......"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말했다. "그럼 수고스럽지만 여러분들은 그들을 맡아주십시오!" "아미타불!" "존명...!" 우렁찬 외침과 함께 십이원로는 백여 명의 복면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쳐라...!" 복면인들 중에서도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자 그들은 비쾌하게 원로들을 에워 쌌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이곳의 정예라고 해도 원로들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펑....! 콰콰쾅....! "크... 아....악....!" 자욱해진 먼지와 굉렬한 파공음. 그리고 단말마의 비명소리 속에 그들은 속속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의 무예는 앞서와 비교하면 일류 중의 일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내뻗는 일장은 각각 산악이라도 쪼갤 듯 했고, 그 치 열한 검기는 사위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 속에서는 설사 신이라 해도 전신이 갈 가리 찢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촌각의 사이를 헤집으며 스며드는 원로들의 몸은 아예 보이지도 않 았다. 그들은 그야말로 강호무림의 자존심이 아닌가? 쾅! 콰르르... 번....쩍...! 번쩍...! "윽, 크아악....!" 한번 그들이 어울리기 시작하자 장내는 온통 시커먼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분 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만공성승은 아까 복면인들에게 명령 을 내린 그들의 우두머리, 흑포복면인의 앞에 다가갈 수가 있었다. 만공성승은 눈빛을 번쩍 빛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는 바로 그 유명한 흑천수가 아니오?" 그 흑포복면인은 그가 자신의 면사를 꿰뚫어 봄을 알고는 내심 크게 흠칫했다. "늙은 땡중이 말이 많군. 어서 이 일장이나 받아라!" 흑천수는 일갈한 뒤 쌍장을 날벼락같이 가격해 왔다. 파츠츠츠츳..... 흑천수라면 예로부터 그 심성이 악랄하고 심계가 뛰어나기로 소문났던 일대의 마두였다. 그 이름에 어울리게 그는 무형중에 일장을 날리고 나서야 소리치며 다시 허장성세를 펼치는 척 했다. 허나, 만공성승은 이미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 대비를 하고 있었다. 흑천 수의 일격이 당도하기 전에, 그는 전신에 소림의 전설적인 비공인 대반야금강공 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웅..... 가벼운 기음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담담한 황금빛 서광은 그의 대 반야금강공이 이미 최고경지에 이르러 금강반야대능력이란 가공할 거력을 발휘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이 금강반야대능력은 대반야금강공과 함께 소림비전인 달마역근경의 가장 후반 부에 적혀 있는 것으로 그 묘용과 위력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흑천수와 같은 사람의 무예가 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흑천수는 이같은 사 실을 뒤늦게 깨닫고, 일순 안색이 대변했다. 허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쿠우우우.....! 만공성승의 면전에 닿는 흑천수의 장력에서 일순 기이한 광채가 번쩍하더니, 돌 연 기음을 토하며 극쾌하게 흑천수를 향해 도로 덮쳐갔다. 번....쩍...! 콰르르르릉....! 흑천수의 전신이 터져나가는 듯 가공할 굉음이 진동하더니 그의 단말마의 비명 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구웨에엑....!" 기이한 괴성과 함께, 흑천수의 육신은 급작스럽게 허공을 날아 뒤쪽의 암벽에 심하게 부딪치고 떨어져 내렸다. 쿵! 쿠당당..... 그러나 비명은 없었다. 그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시신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말 그의 악명에 걸맞는 적당한 최후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자신의 꾀 에 의해 자신이 죽어간 것은..... "아미타불...." 만공성승은 그 처참한 시신을 보고 한차례 불호를 외웠다. 허나 지금은 결코 그 런 나약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일 그에게 분합탄의 묘결이 있는 금강반야대능력이 없었다면 저렇게 뒹구는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일는지도 모 른다. "아미타불......" 다시 한번 불호를 외운 후 만공성승은 다시 다른 사람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스으으.... 자허상인. 그는 무당파의 태상장로의 신분으로 현 장문인인 운학진인보다 한 배분이 높은 사람이다. 무당파의 태극양의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는, 이미 십이성 연성 한 진산비기 태극혜검을 이용하여 적도들을 무수히 베어 넘기고 있었다. 가끔씩 날리는 천뢰기란 강기공에선 연신 벽뢰음이 일고, 콰르르르......! 그의 손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구음신마, 잔지풍, 인도광 등 모두 전대의 흉악한 거마들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흑천수를 비롯하여 여러명이 분분이 유명을 달 리하자, 백여 명의 복면인들의 상황이 더욱 불리해졌다. 그리고 마음이 다급해 진 나머지 그들은 점차 패색이 짙어져갔다. 헌데,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제갈박은 문득 안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남궁벽이 이를 눈치채고 물었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갈박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남궁벽은 눈을 크게 떴다. "예감이라고요?" 그는 세상이 알아주는 무예와 지혜를 겸비한 기남아이다. 허나 그런 그라도 귀 곡별부의 출신인 제갈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갈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분명 저들은 패색이 짙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낭패의 기색은 커녕 오히려 희망의 빛이 보이고 있 습니다. 더군다나 저들이 굳이 목숨까지 걸고 동굴을 지키려고 하는데에는 평 범한 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 남궁벽은 제갈박의 말대로 그들을 돌아보다가 일순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제갈 박의 말은 그대로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이것은 과거 지옥마성을 쳐부술 때와 흡사했다. 평상시에는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지만, 이런 유사시가 되면 아무래 도 그는 군사격인 제갈박의 조언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제갈박은 지혜로운 눈을 깊게 빛내며 대답했다. "지금 즉시 돌파해야 합니다. 더 지체하면 어쩌면 늦을는지도 모릅니다." "알겠소." 남궁벽은 과연 과단성이 있었다. 그는 지혜가 제갈박만은 못되도 그의 말을 들 어줄만은 하기 때문이었다. "자, 갑시다!" 짧게 일갈한 후, 남궁벽은 과감하게 전면의 동굴입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마 침 그곳 부근에 많이 몰려있던 복면인들은 남궁벽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크게 흠칫하며 막아섰다. 그러나, 기실 그들은 남궁벽의 상대가 아니었다. "물러서라....!" 대갈일성과 동시에 쌍권을 일제히 내뻗으니, 콰콰콰콰콰콰.....! 번.....쩍.....! 눈부신 백색광채가 번쩍임과 동시에, 천지를 떨어울리는 벽력음이 사위를 뒤흔 들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문인 불성문에서 자랑하는 천하제일권 천왕삼권의 제 일식 천왕래현..... "크아아아악...!" 콰콰콰콰쾅.....! 남궁벽이 펼친 백색의 광채는 말 그대로 미증유의 거력이었다. 그 광채에 부딪 친 앞쪽의 복면인 칠팔 명이 한 순간 비명을 내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허나 그들은 끈질겼다. 사삭....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남궁벽의 좌우에서 십이원로와 싸우던 복면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쿠콰콰콰콰콰....! 그들은 이 순간 자신들의 안위도 돌보지 않는 듯 했다. 전심전력을 다한 그들의 합공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벽은 내심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그들의 공세가 두려워서가 아니 라, 저 동굴 속에 그 무엇이 있길래 이 마도인들이 자신의 목숨마저 초개같이 버리는가 하는 점이었다. 제갈박의 말처럼, 그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때, 그의 주위로 따라온 불성십이무왕이 복면인들의 합공을 향해 일제히 반격 을 개시했다. 콰콰콰콰콰쾅....! 꽈르르릉....! "크아아아악....!" 한 순간의 격돌로 복면인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더군다나 뒤에 원로들이 있었 기에 한번 쓰러진 그들은 곧장 황천행이었다. 허나, 그들과 격돌한 불성십이무왕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했다. 안색이 창백해지 고 다소 비틀거리는 것이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이 순간, 남궁벽은 잡념 을 제거하고 다시 전면을 향해 두번째의 공격을 감행했다. 번...쩍....! 번쩍...! 콰콰콰콰콰콰....! 쿠쿠쿠쿠쿠....! 번...쩍..! 그것은 천왕삼권 중 제 이식인 천왕탁천과 천왕래현을 동시에 전개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위력은 아까보다도 더욱 거대했다. 도저히 말로는 설명을 불허하는 그 거대한 위력은 일순간 전면을 태풍처럼, 아니 벼락처럼 휩쓸었다. "크아아아아...아...악!" 꽈르릉....! 꽈꽈꽝......!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마치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양, 폭음을 동반 한 회오리가 일었다. 동시에 대번에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가랑잎처럼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팔다리가 부서지고 끊어지던가 혹은 머리통이 터져나가고 내장 이 터져나가는 등.... 그 광경의 처참함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들이 흘린 피로 바닥이 갑자기 붉게 변했을 정도였다. 이에, 복면인들은 마침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도의 인물들은 모든 가치 기준을 자신의 이익 여하에 두곤 하는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이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지금 당장 죽어버리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남궁벽이 발휘한 일권의 공포스런 위력은 마침 적절한 효과를 발휘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남궁벽이 앞으로 급히 전 진하자, 전면에 남아 있던 복면인들이 혼비백산하여 옆으로 달아났다. 이에 그 자리를 불성십이무왕과 제갈박이 차지하자, 이로서 동굴의 저지벽은 완전히 뚫 어버린 셈이었다. 나머지 복면인들은 십이원로들이 충분히 처리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남궁벽은 급히 정세를 살핀 후,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어서 가봅시다!" 말과 동시에 그가 마악 신형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크흐흐핫핫핫.......!" 사람의 심장을 헤집는 괴소성과 함께, 돌연 동굴의 안쪽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 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일견하기로도 그들은 밖의 복면인들과 그 기도가 또 달랐다. 남궁벽은 안색이 크게 일변했다. (늦었구나......!) 그는 내심 그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 동굴 안에서 유유히 걸어나오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기이하다고 할 수가 없었 다. 오히려 그의 용모는 대단히 준수한 편이었다. 이십대의 강인한 위엄마저 감 도는 헌걸찬 위풍의 청년. 만일 그가 괴소만 터뜨리지 않았더라도 그 어떤 기이 함도 느낄 수가 없었으리라... "그대가 바로 신도운악인가?" 남궁벽은 안색을 바로하고 물었다. "흐흐흐......" 청년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알고 있소?" 남궁벽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자네를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네. 왜냐하면 자네의 동생이 자네와 매우 닮았을 뿐만 아니라, 내게 자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 문이지. 그리고 지금 세상에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보는데, 자네는 어째서 나를 모르는가?" 신도운악은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그럼, 당신이 바로 맹주인 남궁벽?" "그렇네." "좋아..." 신도운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헌데, 당신들은 매우 근사한 짓거리를 하셨군! 대체 당신들은 내게 무엇을 바 라고 있는 것이오? 날 잡으러 왔소?" 남궁벽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대들은 허황된 무림제패의 꿈을 꾸고 있다. 우리는 무림의 앞날을 위해 자네 들을 제거하러 왔네." "크핫핫핫핫핫....!" 신도운악은 앙천광소를 터드린 후 말을 이었다. "무림의 앞날이라? 좋지, 좋아! 어쨌거나 당신은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니 거 두절미하고 우리 통쾌하게 한판 붙어보는게 좋지 않겠소?" "좋네. 허나 그 전에......" 남궁벽은 신도운악의 뒤에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을 내게 소개시켜주지 않겠나?" 십여 명의 사람들. 그들은 얼굴에 하나같이 흉측한 귀면탈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정확히 십일 명. 일견하기로도 그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도는 결코 범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오히려 불성십이무왕 등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흐흐, 당신은 보기보다는 겁이 많군." 신도운악은 음충맞게 웃더니 곧 뒤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젠 그 탈을 벗으시오. 어차피 이번 싸움이 고비가 될테니." "존명!" 귀면인들은 동시에 읍하고는 귀면탈을 벗어들었다. 그러자, 일순 불성십이무왕 등은 경악한 외침을 발했다. "지옥이로! 너희들이 아직 살아있다니.....!" 지옥이로. 그들은 바로 신도운악의 바로 뒤에 시립하고 서 있는 두 늙은이였다. 매부리코 에 매서운 눈빛, 강퍅하고 깡마른 용모에 전신으로부터 스물거리며 일어나는 음 사하고 공포스런 기도 등..... 그들 두 사람의 용모는 그야말로 똑같았다. 쌍둥이 인 것이다. 그런데, 이 쌍둥이인 두 사람의 내력은 실로 심상치 않은 것이니, 그들은 천 외삼별부의 하나인 지옥별부의 전수자이며, 과거 지옥마성의 성주이자 대종사였 던 지옥마종 신도유광의 사부였던 사람들로 말하자면 불성문의 불성십이무왕과 위치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허나, 그들의 무예는 결코 그와 같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옥천로, 지옥 지로로 불리우는 두 사람의 합격술은 실로 대단하여 과거 신도유광에 결코 못 지 않았던 것이다. 지옥천로는 음산하게 웃음을 흘려냈다. "흐흐흐! 의외인가? 그때 우리가 죽은 척하고 이렇게 대종사의 후예를 길러 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니까." 불성십이무왕중 대형격인 장왕이 탄식하며 나섰다. "그 결과는 겪어봐야 알겠지만, 우선 다른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겠나?" 그렇다. 기실 열 한명이 똑같이 탈을 벗었지만 그들 중 알려진 사람은 고작 지 옥이로 두 명 뿐이었던 것이다. "흐흐흐, 그 정도 선심을 베풀지 못할 우리가 아니지." 이번엔 지옥지로가 나섰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나 음성, 심지어 그 표정까지도 지옥천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합격술이 이미 이심전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공포스러운 의미였다. 지옥지로는 옆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흐흐, 이분들은 바로 남해쌍성과 혈혈삼패, 그리고 신강사성 등이시다." "앗, 저들이 바로...." 불성십이무왕 등은 내심 크게 놀랐다. 지옥지로가 방금 소개한 그들은 그야말로 당금의 세외 최고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남해쌍성.... 그들의 본래 이름은 남해쌍흉이다. 허나 그들은 자신들의 그 별호를 매우 싫어 하며 흉악하다는 말 대신 성스럽다는 말로 항상 금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다. 그 평소의 행색을 본다면 세상의 악행이란 악행은 모두 도맡아서 행한다는 표본적인 악인들. 특히 그들은 부녀자 납치와 강간 등을 가장 취미로 삼는다고 했는데, 그들의 이 러한 무수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 만큼 그들의 무예가 고강하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악인의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그들은 동시에 무예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도 함께 지닌 채 태어났던 것이다. 그들의 용모는 작고 뚱뚱하며 상의는 벗 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의 두 눈에서는 연신 음란하고 흉흉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혈혈삼패...... 흔히들 동해의 해적이란 말을 많이 쓴다. 이 혈혈삼패는 바로 해적단의 총두목 들이었다. 흔히 해적단 하면 소규모로 연상하기 쉬우나 전체적으로 그들이 세운 나름대로의 왕국을 생각하면 그러한 속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실 이 지옥도의 수많은 졸개들 중 대부분은 그들 해적의 무리라는 말을 생각 해보면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버릇을 잊지 못해 전 신에 각각 핏빛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신강사성... 일명, 신강사사성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곧 신강땅의 네 명의 죽음의 별이란 뜻 이니, 거대한 사막 탑리목분지를 가운데 두고 광활한 황야의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검은 손, 죽음의 신..... 이 신강땅을 지나는 그 어느 상인의 행렬도 이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며, 이들은 곧 신강의 법이었다. 신강땅에서 나름대로의 뿌리를 내린 그들은 이번엔 중원에 대한 욕심으로 이렇게 지옥도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각기 검은 장포를 머리끝까지 두르고 있었다. 불성십이무왕 등은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같은 거대흉마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난 이상, 그들의 승리는 이제 장담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더구나, 그들에겐 신도운악의 출현으로 싸움을 멈춘 복면인들이 아직 삼십여명 이나 있었고, 그들은 지금 사기충천한 상태였다. 제갈박은 은근히 뒤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행여 무림각파의 고수들이 원조해 주길 바랬으나, 그쪽도 사실 승부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맹주인 남궁벽이 저 신도운악을 여하히 물리쳐 주느냐에 달려 있었 다. 모든 사람의 소개가 끝나자, 신도운악은 음산한 웃음을 머금으며 남궁벽의 앞으로 다가왔다. "흐흐, 이젠 시작해야 하지 않겠소?" 남궁벽은 가볍게 안색을 굳혔다. "자네의 아비도 과거 나에게 패했었네. 그대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신도운악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음충맞게 웃었다. "후후! 그 결과는 두고봐야 아는 것. 받으시오!" 말과 함께 그는 양팔을 좌우로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쌍수에서 뭉클한 묵기가 피어올라 남궁벽을 향해 쇄도해 갔다. 우우우우웅...... 기이한 기음이 일며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좋다! 상승마공이로군!" 남궁벽 역시 낭랑히 일갈하며 진기를 끌어올린 뒤 쌍장을 내뻗었다. 쿠우우우...... 천지양극귀원공에서 발하는 백색의 막강한 진기가 파도처럼 마주쳐 나갔다. 꽈꽈꽈꽝....!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흙먼지가 사위를 휩쓸었 다. 그 속에서 신도운악과 남궁벽은 각각 한 걸음씩 물러났다. "좋은 내공이로군!" "당신도 그렇소!" 서로 한마디씩 말을 내뱉은 후, 그들은 다시 서로를 향해 덮쳐갔다. 쿠쿠쿠쿠쿠.....! 콰우우우우우....! 이번에 그들은 진기를 끌어올린 채 서로의 약점을 찾기 위해 파고 들었다. "천불수.....!" "지옥악마수....!" 꽝! 꽈르르....꽝.....! 무수한 폭발음이 일며 사위가 온통 격렬한 강기막 속에 휩쓸렸지만, 그들의 모 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번....쩍..... 번..쩍! 파츠츠츠츳.....! 백광과 묵광이 서로 어울려 돌아가는 그 광경은 일순 현란하기조차 했다. 고수 자들의 무예는 심오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무예를 너무 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러한 점이 약점을 찾아내기에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온 통 십장 방원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그들의 격전은 오래갈 것 같았다. 이에, 지 옥천로가 장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우리도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이때, 제갈박이 앞으로 나섰다. 지옥이로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알고보니 제갈늙은이로군! 이거 네놈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흐흐........" 지옥이로는 과거의 일을 생각한 듯 눈에 광망을 뿌리며 제갈박에게 다가갔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지옥마성은 제갈박의 교란술에 의해 사분오열되었었던 것 이다. 제갈박은 무맹의 제이인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 역시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없이 진기를 가득 끌어올렸다. 그때, "우리들이 돕겠소!" 제갈박의 불리함을 눈치챈 만공성승, 자허상인, 적양자, 광한신모, 금정신니, 은 하노인 등 여섯 원로가 다가와 합세했다. "크흐흐! 모두 덤벼랏...!" 지옥천로는 악독한 어조로 소리친 후 산악같은 일장을 날렸다. 쿠쿠쿠쿠쿠......! 일단 그가 움직이자, 지옥지로도 반대편에서 똑같이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 사 이에서 태풍같은 회오리 강기가 일어 제갈박 등을 향해 휘몰아쳐 왔다. 콰우우우우우! 그 기세는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제갈박과 여섯 원로는 즉시 내공을 끌어올려 이에 맞서갔다. 꽝! 꽈꽝.......! 서로의 강기가 격렬하게 맞부딪치며 굉렬한 금속성을 울려냈지만, 지옥이로의 공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칠인의 강기를 휘감으며 더욱 극강하게 휘몰아 쳐 왔던 것이다. 그들의 무예가 이토록 극강하고 기이한 것은 가히 생각지도 못 했을 정도였다. 제갈박 등은 일순 당황했다. 기실, 그는 이미 여섯 원로에게 전음을 보내 지옥 이로를 합공하여 먼저 그부터 제거하려고 했었던 것이었으나 그들의 무예가 이 토록 진보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일곱 사람은 역시 강호의 명숙들이었다. 그들은 순간의 당황함을 일시에 억누르고 곧 냉정하게 공격에 맞서기 시작했다. 과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들은 곧 평수를 이루어 갈 수 있었다. 사실 그 것만도 경인할 일이지만. 한편, 그들이 서로 격돌하자, 동시에 신강사성, 혈혈삼패, 남해쌍흉 등이 불성십 이무왕을 향해 달려들었고, 또 나머지 복면인들이 남은 여섯원로, 즉 매화검옹, 천금상인, 주선개, 소요성수, 동정어은, 만독옹 등을 향해 포위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장내는 살벌무비하고 경기가 온통 난무하는 격전장으로 화 하고 말았다. 꽈꽈꽝.........! 꽝! 꽝! 꽝....! 번쩍....번....쩍....! 츠츠츠츳....! 콰르르르.......! 어찌나 치열한지, 얼핏 그 속에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러나 대충 살펴보면, 세외의 구인과 격돌하는 불성십이무왕들은 겨우 평수를 이 루고 있었고, 삼십여 복면인들을 상대하는 여섯 원로들은 다소 불리한 감이 있 었다. 복면인들은 우선 사기가 오른데다가, 원로들의 숫자가 줄어들자 마음놓고 협공을 펼치기 시작하여 여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아까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협공을 당하는 원 로들이 불리해짐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격전의 상황은 점차 무맹의 인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꽈꽈꽈꽝! 꽈르르릉.....! 꽝! 꽝! 꽝꽝꽝....! 백상인과 그 일행 오노사는 부근의 은밀한 곳에 몸을 은신시키고 있었다. 그것 은 장차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 어떤 존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내의 상황이 무맹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것을 모른척 할 수도 없 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요?" 귀노사는 백상인을 향해 전음으로 물었다. "......." 백상인은 잠시 말없이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우선, 당신들 다섯 명은 원로들을 돕도록 하시오." 귀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생각입니다." 백상인은 그에게 말을 이었다. "단, 그들을 빨리 제거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하오. 나는 여기에 이대로 있다가 상황에 따라 행동하겠소." "알겠습니다!" 오노사는 일제히 전음으로 대답한 후 바람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스스슷...... "앗, 누구냥! 으악....!" "크아.....악...!" 오노사가 장내에 뛰어들자, 과연 그 상황은 일변했다. 복면인들은 오직 원로들만 공격하다가 느닷없이 기습아닌 기습을 받고 매우 당 황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오노사의 무예실력은 결코 원로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새롭게 격전에 가담한 오노사의 원기왕성한 기세에 의해 복면인들의 포위망은 쉽게 끊어지고 협공체제는 금세 무너졌다. "아....아....악..!" 복면인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갈때마다 원로들은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반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쾅! 콰콰콰쾅....! 꽝꽝.....! "아....악....!" 요란한 단말마의 비명소리에 복면인들은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 다. 그들의 참혹하게 으깨어진 시신이 늘어갈수록 그 단말마의 이어지는 비명소 리는 거의 합창으로 변해갔고, 드디어는..... "아아아악...!" 최후의 비명과 함께 복면인들의 모습은 더이상 땅위에 서 있지를 못했다. 이것 은 불과 일각여의 사이에 일어난 돌연한 변화였다. 이 변화에 대해 지옥이로 및 세외의 아홉 마두들도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저들 승리자들이 자신들을 협공하기 위해 몰려들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그들은 잠시의 휴식도 취하지 않고 각각 두곳으로 분산되어서 덮 쳐오고 있지 아니한가? 저 갑자기 나타나 판을 온통 뒤바꾸어 놓은 다섯 사람 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물론 없었다. 그들은 내심 크게 당황하여 손발이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상 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바야흐로 한번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자 막바지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들로 보기에 너무도 어이없는 결과라 아니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안면에 일제히 흉악한 살기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장내의 모든 소음을 종결시킬만한 거대한 폭발음 이 터져오르며 사위가 마치 태풍에 휩쓸린 양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콰콰콰콰콰콰쾅..! 쿠쿠쿠쿠쿠쿠쿠쿠쿠......! 이것은 마치 천지가 일시에 대혼돈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모든 사람 들은 격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 가? 사람들은 저마다 경악과 의혹은 가지고 그 태풍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 속에서 마치 술취한 듯 비틀거리며 뒤로 연속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나 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욱!" "크윽....!"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각각 한 모금씩의 선혈을 토해내는 그들은 바로 남궁벽과 신도운악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과거 너의 아버지도 이렇지는 못했다. 너는 과연 대단하구나!" 남궁벽은 술취한 듯 겨우 몸을 가누면서도 경악과 감탄에 어린 음성을 토해냈 다. 신도운악의 상태도 그보다 낫지 않았다. 그 역시 전신이 심하게 고통스러운 듯 안면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남궁벽을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내뱉듯 소리쳤다. "너무 장담하는군 남궁벽!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실력을 겨루어 볼까?" 그 말에, 듣고 있던 남궁벽은 안색이 대변했다. "아니, 그럼 너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었단 말이냐?" "물론이오, 남궁벽!" 신도운악은 음험하게 웃었다. "믿을 수가 없다." "흐하하하하하...!" 신도운악은 앙천대소하며 말했다. "나는 본래 좀더 신중히 당신의 무예를 연구하려고 했었지. 허나 상황이 기왕 이렇게 되었는지라 나는 서두를 수 밖에 없다. 당신에겐 안됐지만 말이야! 흐 흐...!" "....." 남궁벽은 내심 침음했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본래 좀 더 오랫동안 격전을 끌어갈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신도운악이 일부러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도 정면으로 부딪쳐 왔었던 것이다. 그때는 다만 기이하게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이젠 그 이유를 똑바로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신도운악은 자신의 최후절학을 펼칠 것이다. 남궁벽은 내심 크게 난처해 졌다. 그는 방금의 격돌에서 이미 자신의 진재절학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난 뒤 였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 더이상의 숨겨놓은 절학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의 당 황한 내심을 읽은 신도운악은 음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이제와서 말하지만, 당신들은 결코 오늘 이 시각에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하루나 이틀쯤 먼저 오거나 아니면 아예 오지말고 영원히 산속에 묻혀서 살았어야 옳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방금전에야 비로소 최고 의 절예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시간을 벌기 위해 많은 수하들을 희 생시키기도 했지만, 그것은 하등의 아까움도 일지 않는다. 당신과 여기있는 모 든 사람들을 죽이고 나면 중원은 이미 나의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이지." "......" "내가 굳이 일을 빨리 끝내지 않고 당신과 좀더 어울려 보려고 했었던 것은 바 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 너무 쉽게 중원을 얻게 된다면 실증을 느끼게 될까 봐 그랬었던 것이지. 허나, 지금은 흐흐....." 남궁벽은 내심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만은 역시 금물이 아닐까? 자네의 그 절학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내가 받아내지 못하리란 보장이 없지." 신도운악은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당해보면 알게 되겠지." 남궁벽은 그의 자신있는 태도에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그대의 지옥문 절기를 이미 환하게 알고 있네. 자네의 그 절기는 지옥문 의 절기가 아니겠지?" 신도운악은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옥별부의 절기는 아니다. 만일 그 정도였었다면 나는 결코 이렇게 자 신만만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절기는 보다 차원 높은 것이지. 당신은 이 절학에 의해 처음으로 죽게 되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흐흐흐....!" 한차례 음악한 음소를 날린 후, 신도운악은 돌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벽 은 그것이 그가 절학을 전개하려는 전조임을 알고 내심 마음을 긴장시키고 진 기를 최고로 끌어올렸다. 그때, 신도운형의 몸엔 벌써 기이한 변화가 일기 시작 하고 있었다. 웅우우우우웅웅.....! 환각인가? 돌연 신도운악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갑자기 거대한 악마상이 나타난 것이 다. 크기가 무려 십 장여는 됨직한 그 가공스런 악마상은 전신이 새빨간 핏빛으 로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모양은 꼭 앞의 악마상과 일치했다. 이런 무예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중인들이 경악하는 사이에 그 거대한 악 마상은 시뻘건 두 눈알을 한차례 굴리더니 입을 크게 벌려서 소리치는 것이었 다. 그 음성은 마치 지옥의 유부에서 들려오는 듯한 저음이었고, 실로 듣는 이 로 하여금 가슴을 갉아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암흑장........!"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람에게 원초적인 두려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 공포스런 광경에 저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마치 섭혼술에 걸린 양 멍청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그 악마상이 암흑장이라고 소리치자 마치 정말로 세상에 암흑이 도래할 것 같은 충동감과 공포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공포감이 너무도 심해 도 저히 형용을 불허하는 것이었기에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정말로 그것은 차원높은 무예가 아닐 수 없었다. 남궁벽은 전신에 진기를 가득 끌어올린 채, 절로 아득해진 정신속에서 식은땀을 마구 흘렸다. 그가 받고 있는 무형의 압박감은 실로 지대하여, 그는 자신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마치 악마상이 예언한 말이 사실로 나타나 듯.... 갑자기 해가 숨어버렸거나 구름이 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악마상. 그 거대한 악마상이 빛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환각이 아니었다. 이 거짓말같은 사실은 중인들 앞에 정말로 펼쳐지고 있었고, 주위는 삽시간에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마치 일 장 앞의 사물도 구분할 수 없을 것 같 은..... 그런데, 그 속에서 핏빛 악마상만은 더욱 소름끼치는 광망을 내뿜는 것이 아닌 가? 그러더니 악마상은 점점 그 형체가 커졌다. 이루 형용할 수 없을만큼 커진 그 악마상은 그 흉측한 눈알을 부릅뜨면서 남궁벽을 향해 덮쳐왔다. 그 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랐다. 남궁벽은 전신이 마치 무저의 진흙속에 가라앉은 듯 무기력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악마상을 바라보며 경악해하다가, 마침내 탄식하며 눈을 감아버 리고 말았다. (끝이구나....!) 헌데, 그때였다. 홀연 한쪽에서 밝은 빛무리가 일었다. 마치 태양과도 같은.... 그리고 한소리. "멈추어라....!" 그 음성은 맑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으로 매우 귀에 익은 것이었다. 만일,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한무리의 태양의 광휘가 일었다면 그 존재는 유난히 두 드러져 보일 것이다. 지금의 경우도 바로 그러했다. 한 무리의 태양광이 솟아나듯 나타나자 모든 사 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연히 시선을 돌리게 되었으며 그들은 저마다 눈이 부심 을 느꼈다. 그 악마상도 마찬가지여서 그 놈은 마악 남궁벽을 끝장내려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고 악독한 마소를 흘렸다. "크흐흐...... 죽고 싶은 놈이 또 하나 있군." 눈부신 태양광... 그 가운데에는 알고보니 한 사람의 절세준미한 백의서생이 장 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치 성자를 보는 듯한 그는 다름아닌 백상인이었다. 그는 장내의 상황을 살피면서 예의 그 신비노인의 출현을 기다렸었으나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흘러가자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쳐나왔던 것이다. 백상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요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 마공을 거두시오. 그것은 사람의 심성을 해치는 것이오. 만일 그런 다면 나는 당신을 살려줄 수도 있소." "크카카카......" 악마상은 괴소를 터뜨리더니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으로 말했다. "허튼 소리마라. 네가 어떻게 감히 나를 살리고 죽일 수가 있단 말이냐?" 백상인은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럼...." 말과 동시에, 홀연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태양광이 일제히 폭출되어 일순 사방 의 어둠을 깨뜨려 버렸다. "카아아악......" 그 바람에 악마상은 갑자기 괴로운 괴소성을 터뜨렸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했다. "어떻소? 이제 나의 말을 믿겠소?" 그 말에 악마상은 일순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교활하게 눈알 을 굴리면서 남궁벽의 전신을 나꿔채는 것이 아닌가? "앗! 맹주......" 불성십이무왕 등은 놀라 소리를 질렀고, 남궁벽은 온몸의 기력이 다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된 것으로 보아 그 는 이미 기력이 쇄잔해진 것 같았다. 악마상은 그의 몸을 집어들더니 흉측한 입 근처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흉악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자를 살리고 싶으면 꼼짝마라! 그리고 너는 자결해라!" 이 광경에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했다. "정말 마성이 골수에 든 자로구나. 어쩔 수가 없다!" "어떻게 할 테냐?" 악마상은 입을 크게 벌리면서 위협했다.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네가 초래한 바이니..." 말과 동시에, 돌연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태양광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화르르르륵......! 마치 하나의 거대한 빛무리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또한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악마상이 이것을 발견하고 입을 크게 벌려 남궁벽을 삼키 려고 했을때는 이미 그 가공할 빛무리가 그의 전신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케에에에엑......!" 소름끼치는 단말마, 그와 함께 거대한 악마상이 거짓말처럼 터져나갔다. 꽝! 콰우우우...... 그 파편들이 터져나가자 환각처럼 거기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자 리에 짓이겨진 참혹한 혈육이 하나 누워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제는 황천 길로 떠나버린 신도운악의 시신이었다. 마도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먼저 동생인 신도운형을 무맹에 파견하고 뒤이어 자신 스스로가 가공할 무예를 연마하기까지 온갖 심혈을 다 바친 그, 그의 최 후는 이렇듯 허망하고 초라했다. 장내는 다시 옛모습을 되찾고 환한 대낮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대세를 짐직 하고 달아나려던 지옥이로와 세외의 구마들이 무맹의 원로들과 불성십이무왕 그리고 오노사 등에게 포위되었다. 남궁벽의 몸을 살펴본 뒤, 제갈박이 그들에 게 다가가 말했다. "어찌 그리 급하게 가려고 하시오? 우리는 좀더 볼일이 남은 것 같은데?" 지옥이로는 연신 사방을 둘러보며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상인의 기이한 무예에 대한 경악감과 신도운악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실의 보다도 그 얼굴에 는 일종의 알수 없는 의문과 회의감이 감돌고 있었다. "뭘 그리 살피는가? 당신들의 희망은 이제 모두 사라진 것 같은데?" 제갈박이 다시 말하자, 지옥천로는 안면을 흉측하게 일그리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기고만장할 것 없다. 내 분명히 말하지만 네놈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잠시 후면...." 제갈박은 그에게 다가들며 조소를 흘렸다. "잠시후라? 그때가 오겠소? 당신은 그전에 당신 상전을 따라가야 할텐데." 지옥천로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뿌드득! 너는 나를 왜 죽이려고만 하느냐? 나는 당연히 포로로 될 수도 있는 데?" 제갈박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과거와 같은 오류를 다시 한번 되풀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과거 너희 들만 아니었으면 오늘과 같은 살륙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흔히 일벌 백계라고들 하지." "악독한 놈들!" 지옥이로는 다시 한번 이빨을 갈아붙이더니, 문득 사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정말 지금 너희들의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가 없다. 특히 저 너희들의 동조자는.. 그래서 얘긴데 우리에게 시간을 달라. 더도말고 일각의 시간만..." 그가 말한 동조자란 바로 백상인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때 백상인은 남궁벽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남궁벽은 다행히 약간의 내상과 기력이 탈진되었을 뿐 큰 상세는 없었다. 아마 신도운악이 펼친 암흑장의 마력 에 의해 전신의 기력이 모두 빨려나간 것 같았다. 제갈박은 백상인은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된다. 당신들은 너무 위험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줄 수가 없어." 지옥이로는 안면을 흉악하게 일그렸다. "악독한 놈들! 너희들이 정파를 자처하나 죽는 사람의 소원도 못들어준단 말이 냐? 나는 이대로 죽게 된다면 제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때, 마악 남궁벽의 응급조치를 끝낸 백상인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음, 그럴텐가?" 제갈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조금전의 그 백상인이 보여준 신위 때 문에 그를 바라보는 관념이 매우 많이 변해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백상인은 그 야말로 전대미문의 무예를 소유한 무림의 일대구성이요, 절세의 기재인 것이다. 제갈박은 지옥이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그러나 시간은 앞으로 꼭 일각뿐이오." "흐흐, 여부가 있겠느냐. 만약 일각이 지난다면 나는 그 즉시 스스로 심맥을 끊 어 자결할 것이다. 물론 여기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하여, 지옥이로를 비롯한 십일 명은 장내의 중앙에 둥그렇게 모여 시간 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일각의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들 열한 명의 안색은 어느 정도의 기대와 희망, 그리고 백 상인 등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안색은 눈에 띄게 변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 목숨만큼이나 소중 한 시간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것은 당사자에게 말할 수 없는 초조감과 공포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대체로 이러한 상상못할 공포를 견디어 낼 사람이 있을까? 마침내, 그 일각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지로는 그 일각 의 시간을 다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며 신형을 움직였다. "빌어먹을! 우린 그자에게 속았어!" 서로 뜻이 통하는 쌍둥이답게 지옥천로도 똑같이 신형을 날렸다. 스스슷..... "나중에 봅시다..!" 그것을 바라본 나머지 세외구마들도 거의 동시에 뒤따라 신형을 움직였다. 휘휘휘휙....! 원래가 강호경험이 노련한 노마들인지라, 그들이 달아나는 방향은 서로 달라서 무맹의 인원들로 하여금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자연 불성십이무왕 등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여기에서 그들을 놓치면 차후 어 디에서 그들을 잡을 것이며, 특히 세외의 구마들은 차후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 여 보복을 감행해 올시 그 문제가 결코 가벼울 수가 없는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 번.....쩍...... 한무리의 금빛 광채가 현란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백상인이 나선 것이다. 순간, 사방으로 날아가던 열한 명의 마두들은 일순간 멈칫하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크아아악...!" 마치 합창을 하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들의 육신은 그대로 허공 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땅에 닿기가 무섭게 그들의 육신은 그대로 가루 가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푸스스스..... 그것은 한 인간으로 볼때 참으로 허망한 종말이었다. 전체 무림으로 볼때에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짝짝짝짝.... 제갈박은 박수를 치며 백상인은 칭찬했다. "대단하네. 자네는 정말 대단하이." "과찬의 말씀입니다." 백상인이 겸사의 말을 하자 홀연 십이원로들이 나서서 제갈박의 말을 거들었다. "지나친게 아니야. 훌륭한 것은 그대로 인정을 해야 마땅하지. 흘흘...." "아미타불, 무림의 구성이외다. 노납은 여태 시주같은 기재를 본적이 없소." "기린아야, 그는. 이로써 무림은 또다시 평화를 되찾게 되었소." "무량수불, 우리 무당파는 시주의 공덕을 기리 기릴 것이오." 이때, 겨우 기력을 절반쯤 회복한 남궁벽이 일어서며 말했다. "하하.. 이제는 무림맹주직을 자네가 맡아야 하지 않을까." 백상인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저는 맹주가 될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맹 주님이 계시는데 제가 감히....."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 그럴 줄 알았네. 무림맹주의 직위마저 짐으로 여기다니, 역시 자네답네. 헌데 아까의 그 기이한 무예는 언제 연성한 것이지?" "가전의 무예입니다. 지난 삼년간 연성한 것이지요." "가전이라.. 그럼 바로 백가신화가 아닌가?" 남궁벽은 감탄을 거듭하며 말했다. "역시 용의 새끼가 이무기일 수가 없듯이 자네의 백가신화는 정말 위대하네." 이말에 백상인은 정중히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지나간 저의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의 하나 였지요. 그런데 한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걱정이 되는 것이라니, 그게 대체 뭔가?" 남궁벽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는 방금전에 세외의 아홉 마두들을 죽인바 있습니다. 헌데 이 일로 그들 세 외세력이 중원을 넘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화를 불러들인 것이 아닐지요?" "하하, 겨우 그 문젠가?" 남궁벽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을 말게. 그놈들은 모두 언젠가 없어져야 할 놈들이었으니 하늘도 결코 자네를 꾸짖지는 않을 것일세." 제갈박도 나서서 말했다. "그 말이 맞네. 그리고 그들 무리들은 일단 절대자가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좋 아하게 되어 있지. 자신들이 후계자가 되기위해 서로 권력확보에 여념이 없을 걸세. 왜냐하면 그들의 체계는 정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세." "그렇다면 걱정을 덜겠습니다." 백상인은 그에게 깍듯이 예를 표하고 답례했다. "하하, 설혹 그들이 감히 헛된 생각을 하더라도 자네만 있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 아닌가? 핫핫, 자 이제 모든 것이 종결된 듯 하니 이만 떠나기로 할까?" 남궁벽의 말에, 그들 모두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더이상의 문제는 없을 듯 했다. 주위는 조용했고, 더이상 나타나는 사람 은 없었다. 대종사인 신도운악이 죽은 지금, 이미 모든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허나, 한가지 의문은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 지옥이로 등은 도대체 누굴 기다린 것일까? 그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회의와 의문을 가진 채 죽어가야 했던가? 이 수수께끼는 정말로 답답하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더욱이 백상인의 경우는 그 답답한 기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했다. 그는 이 배 후의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신비노인은 어디로 왜 사라졌으며, 또 언제쯤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 낼 것인가? 일행은 서서히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이곳의 일은 종결되었지만 아직 산아래의 격전은 미지수인 것이며 당연히 분초를 다투어서 그들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악마봉의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며 내부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헌데, 그때였다. 마악 신법을 펼쳐 저마다 신형을 날리려던 그들은 일순 흠칫 하며 신형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가? 산 아래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어느 바위의 위, 마치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사람 하나가 그곳에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그가 워낙 사람 같은 느낌이 없었 기에 사람들은 겨우 이제서야 그를 발견했었는지도 모른다. 노인. 그는 이번엔 평범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백상인은 누구보다도 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가 찾고자하던 바로 그 신비노인이었기 때 문이다. "안녕들 하신가?" 노인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신비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심 그 음성에서 일종의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고 몸이 굳어졌 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 다. 왜냐하면, 노인의 그 기이한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으며, 용모 또한 선량해 보이고 아릅답게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평범한 마의를 걸쳤지만 노인의 용모는 정말 신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서 그 누가 사악한 기운을 읽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보면 볼수록 노인 의 온화하고 어린아이처럼 해맑으며 부드러운 안색은 선량하고 평온한 안식과 믿음을 주는 것이었다. 남궁벽은 앞으로 나서서 포권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노선배께선 누구십니까?" 노인은 은은히 미소하며 대답했다. "자네들이 찾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일세." "예....?" 남궁벽은 일순 의아해졌다. 자신들이 현재 찾고 있던 사람이 있었던가? 남궁벽 은 일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은 다시 말했다. "자네는 지옥이로등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는가?" 남궁벽은 이 노인의 말이 더욱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제가 어찌 알 수가..." 이때, 노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게 바로 나일세..." "......" 남궁벽은 가볍게 경악했다. 지옥이로 등이 최후에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그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와 그들과의 관계는 대체 어떠한 것일까? 남궁벽이 내심 크게 곤혹해 하고 있을 때, 노인이 다시 물었다. "자네는 신도운악의 사부가 누군줄 아는가?" 이 물음에 의해서 남궁벽은 퍼뜩 머리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남궁벽은 경악 하며 물었다. "그럼 그 최후의 절기를 전수해 준 사람은 바로....?"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장난삼아 한수 가르쳐 봤지." "그, 그렇다면....." 남궁벽의 안색이 대변했다. 대체 이 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노인이 정말 신도운악의 사부라면 그들과는 이미 적이 된다. "자넨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실로 그러했다. 이 노인과 그 공포스러운 저주의 악마절학과는 어떻게 연관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남궁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선배님께서는 제자의 복수를 하러 오셨군요?" 그런데, 의외로 노인은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자네는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듣는군." ".....?"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내가 신도운악에게 한수 가르친 것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고. 따라서, 나는 그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네. 자네는 내가 일 이 바빠서 미처 그 애들을 구해주지 못했는 줄 아는가?" "......" "내게 있어서 그들은 단순히 시험도구일 뿐이고, 일단 시험이 끝난 지금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네. 나는 일부러 자네들이 처리해주길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제야 남궁벽 등은 아까 지옥이로 등이 회의와 불신의 표정을 짓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끝까지 이 노인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모든 의리와 인명, 그리고 사제지간의 정분마저 간단하게 버리는 이 노인의 말은 그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런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 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남궁벽은 내심 치솟는 한기를 느끼며 물었다. "노선배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왜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가? 그런 비인도적인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느 냐고. 그리고 괴물같은 당신은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남궁벽은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노인이 그의 마음 속을 마치 들여다본 듯 말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안색이 붉어진 것은 결코 수치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남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다. 그는 바로 백상인으로, 그의 무예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초월한 가공무쌍한 것이었다. 만일 그 경지를 그가 이번에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노인 또한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고 있으며 그에게선 백상인 보다도 더한 일종의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현 무림의 맹주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모두 그의 책 임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전혀 속수무책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의 당혹감이란 일종의 자괴의식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남궁벽을 바라보며 노인은 말을 이었다. "나의 주의는 이른바 도에 있네. 도에 합당하다면 모든 일이 옳고 만일 도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적으로 생각하지... 그래서 사람들이 나 를 도성이라고 하네. 아니 도마라고도 부르지." "......" "그리고 나는 천축에서 왔다네." 천축. 이것이 주는 의미는 매우 컸다. 과거 백가신화에 전해진 광검도 실은 천축에서 전해진 것이라 하지 않던가? 듣고 있던 백상인은 내심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설마했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노선배께서는...." 남궁벽이 다시 입을 열었으나 노인은 그의 말을 잘라 대답했다. "내가 중원에 온 이유는 나의 도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네. 나는 중원을 정복하려 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험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일 뿐이네." "......!" 시험대상으로 삼는다. 그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단순히 정복이란 말은 인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이란 말은 그대로 악마의 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를 시험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단 말인가? 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것의 주된 목적은....." 노인은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 아이를 만나보기 위함이었네." 남궁벽은 한순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이 가리킨 것은 다름아닌 백상인이 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상인이 어떠한 존재인가? 그는 그야말로 남궁벽 그 자신이 생애 최고 의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무림최고의 보물이 아닌가? 그러나, 아직 은 미완성의 보물이었다. 비록 상상불허의 성취를 이미 이루고는 있지만 앞으로 그는 무한한 성취를 이 룰 것이 분명하며 그로 인해 차후 강호무림의 앞날은 찬연히 피어날 것이다. 지 금껏 말은 안했지만 남궁벽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자신의 목숨 이상이었다. 공인. 사람이되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힘을 합해서 목숨이라도 버려가 면서 지켜야 할 이 땅위에 가장 중요한 존재, 백상인은 바로 그러한 존재가 아 닌가? 그런데, 남궁벽은 일순 말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즉시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는 아직 어리니 모든 일은 소생이 책임지겠습니다." 남궁벽은 단호한 음성을 흘려냈다. 헌데 그때,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맹주님!" 바로 백상인이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가?" "예......" "자네는 결코 자네 혼자만의 사람이 아님을 명심하게." "저는 충분히 강합니다, 맹주님!" 남궁벽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그가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단 말인 가? 지난 세월동안 강호 최대의 기린아로서 알려져왔던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부쩍 늙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조심하게." "예."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노인 즉 도마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군요." 백상인이 다가가며 말하자 도마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오랜만이야. 자네는 그간 더 나아보이는군." 백상인은 정색하며 대꾸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헌데 지난 삼년 전의 일은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요?" "삼년 전의 일이라......" 도마는 빙그레 미소를 흘렸다. "자네는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군. 한낱 여자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대 장부의 할 일이 못되지. 자넨 보기보다 소심한 편이군." 백상인은 두 눈에 안광을 빛냈다. "여자도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제가 사랑하던 여인이었으며 착하고 선량하 며 매우 헌신적인 여자였습니다. 한낱 여자라 해서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는 노 릇입니다." 도마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손을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말아.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되면 머리가 아파지고 머리가 아파지면 번뇌가 생기는 법이야. 그래서는 결코 오래살 수 없게되지. 오 래살 수 없다는 것은 도에 합치되지 않아. 도에 어긋나는 행동은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네." 백상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도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옳아, 옳아. 다 알고 있다구. 나는 어째서 너만 만나면 이렇게 말다툼을 하게 될까? 우린 정말로 그런 비생산적인 얘기는 하지 말자구. 자네 혹시 내게 복수 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바로 그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영전에 제가 맹세한 일입니 다." "그래?" 도마는 두 눈을 번쩍 빛냈다. "이, 이거 미치겠군. 네가 나에게 복수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네, 내가 왜 자네를 그냥 보내주었는지 아는가? 그건 자네로 하여금 일의 어려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네. 지금의 이 모든 각본들도 사실은 모두 자네를 위한 거야. 그 런데도 자네는 내게 복수란 말이 나오나?" 백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자신은 도성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당신은 살인마이고 비인간적 인 도마 바로 그 자체입니다. 나는 당신을 복수에 앞서서 만인을 위해 처단하겠 습니다." "크하하하하......." 도마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눈빛을 붉게 물들이더니 안면을 악랄하게 일 그리며 말했다. "좋아, 좋아. 네가 그렇다면 어차피 생각했던대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아 니 이 지옥도 전체를 그대로 날려버리겠다. 난 흔적을 남기는 걸 원하지 않아." 백상인은 그의 공언에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그런다면 당신은 무거운 죄악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당하는 희생은 저 혼자로도 족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킬킬킬... 부탁이라고? 네가 나와 무슨 관계인데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준단 말 이냐? 만일 내가 말한대로 네가 나의 제자가 되어준다면 기꺼이 그 부탁을 들 어줄 수 있지." "광오하구나. 늙은이!" 불성십이무왕중 권왕이 참다못해 나섰다. 그것은 미처 백상인이 말리기도 전에 일어난 사태였다. "......." 도마는 말없이 권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얼핏 무심한 듯 보였으나 일순 도마의 입술 한쪽이 가볍게 말려 올라가는 것을 백상인은 보았다. 그것은 바로 소름끼치는 분노였다. 도마는 백상인과의 일이 안된데다가 그가 무 례하게 끼어들자 몹시 화가 난 것이리라. 대체로 이런 사람은 화를 내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백상인은 세상에서 그토록 무섭게 분노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의 표정변화 하나에 마치 세상이 싸늘 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라, 상황은 이미 백상인으로서도 말릴 수 없는 지경으로까 지 치닫고 있었다. "크하하! 네가 노려보면 어쩔 것이냐? 세상을 아주 우습게 아는 늙은이, 내 반 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 어서 덤벼라..!" 권왕은 일단 화가 솟구치자 광폭하여 연신 소리쳤다. 백상인은 내심 가슴이 덜 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도마의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 삼년 전에는 그저 미미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도마의 가공할 능력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느낌이라는 것은 무당의 영감처럼 무인에게 있어서 거의 필수적인 예감이었다. 하여 백상인은 권왕을 보호하기 위 해 암암리에 정신을 모았다. 헌데, 다음순간 도마는 기이하게도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나는 너와 싸울 수가 없다." 일순 크게 긴장했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의 긴장이 다소 풀어지면서 기 이하게 생각했다. 이 도마는 갑자기 흉악한 악마에서 성인군자가 된 것인가? 그 부드럽게 웃는 모습은 결코 화를 내는 사람같지가 않았다. 하기야 사람의 마음 은 고개를 한번 돌리면 피안이라고 했으니.... 그런데, 뒤를 이은 도마의 말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일시에 뒤흔들었다. "단지 너를 벌할 뿐이다." ---- 나는 너를 상대할 수가 없다. 단지 너를 벌할 뿐이다! 그리고 도마의 미소는 바로 더없는 살기라는 사실도... 백상인을 필두로 모든 사람들은 다시 아연 긴장하여 권왕을 주시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사라라랑......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단지 느낌이었다. 너무 빨라서 속도감각도 느낄 수가 없는 가공할 속도. 칠색영롱한 무지개빛 기류가 한순간 미미하게 권왕의 주위에 머물렀다 싶었다. 백상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 무지개빛이 도마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것이 라는 사실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고, 그것은 오히려 아름답기조차 했다. 아마 세상의 그 어떤 무지개도 이처럼 선연하게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라. 사람들은 일시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기까지 했다. 오직 백상인만이 자신의 출수가 늦었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당시, "너....!" 도마가 자신을 또다시 우롱했다고 여긴 권왕은 마악 욕을 퍼부으려고 도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그 아름다운 빛을 보았다. 그 빛은 충격적으로 황홀하게 그의 뇌리로 파고 들었다. 그는 일순 사고기능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런 비명도 없었다. 단지, 한차례 바람이 지나가자, 스르르르....... 마치 가공할 공력에 의해 흔적도 없이 박살난 바위가 가루로 흩어지듯 그의 육 신이 갑자기 가루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 그것은 실로 허망한 광경이었다. 불과 촌각 사이에, 권왕이 있던 자리에는 단지 소복한 먼지만이 남았다. "......" 잠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너무도 충격적이고 경악스런 광경에 모두들 얼어 붙은 듯 했다. 그러다가, 일순 장왕이 갑자기 폭발하듯 신형을 끌어올렸다. 그의 입술에서는 한줄기 비탄에 젖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우여, 그대는 갔는가? 아무런 말도 없이 이 복받치는 한을 다 풀지도 못하고 갔는가? 태어난 시각은 다를지라도 서로 한날 한시에 죽고자 했던 우리의 맹세, 이로써 통렬히 무너졌도다. 그러나 걱정을 마시라. 그 복수는 우리가 해주리라!" 그와 함께, "그 복수는 우리가 해주리라....!" 합창하는 듯 외치는 함성과 함께 나머지 불성십이무왕의 열명이 동시에 허공으 로 솟구쳤다. 이는 이미 백상인, 아니 누구도 말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도마의 위쪽 허공에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죽음으로서 복수를....!" 장왕의 한줄기 외침이 터져나가자, "복수를.....!" 똑같이 합장하며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최고절학을 펼쳤다. "천불수....!" "일선지....!" "무극섬혼....!" "우주만뢰....!" "조화검형....!" "천조신광령....!" "만겁지존독공....!" "만상조화지곡....!" "천지여의신력....!" "천왕삼권....!" "절대혼....!" "부신수형....!" "천리호정....!" 그것은 이른바 불성문의 최대최고의 절학들이었다. 왜냐하면 불성십이무왕은 살 아있는 불성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들 열한 명의 무예가 전력으로 펼쳐지 자 장내는 삽시간에 아우성을 쳤다. 쿠쿠쿠쿠쿠.... 콰콰콰콰......... 콰우우우우.... 번쩍.... 번......쩍......! 콰르르르릉...... 츠츠츠츠츠츳......! 사방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진듯 했고 그 아래 광풍이 휘몰아치며 마치 태고 의 혼돈이 재래한 것 같았다. 그것은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무쌍의 공격이었다. 그 아래 설사 거대한 금강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박살이 나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도마는 오히려 태연했다. 그는 태연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소하고 있 었다. 그 미소는 곧 살소였다. 그 광경을 바라본 백상인은 내심 경악했다. "멈추시오...!" 즉시 일갈하며 백상인은 불성십이무왕들 사이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사라라라라랑..... 그것은 마치 폭풍우 속의 장엄한 안식 같았다. 칠색영롱한 무지개빛 광채가 그 혼돈의 와중에 피어오르자 일순 그 어떤 움직임도 잠재웠다. 거대한 뇌성벽력 속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휘몰아치다가 돌연 거짓말처럼 그 모든 것들이 정적 에 휩싸이는 것처럼, 믿을 수 없게도, 불성십이무왕의 그 가공스럽던 공세는 한 순간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천지를 아득한 무지개빛 광채가 가득 채웠다. 그것은 일수유의 짧은 시간동안 벌어진 일이었으나 곧 일겁처럼 길게 느껴지기 도 했다. 백상인은 뒤늦게 자신의 광검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보 아야 했다. 스르르르르...... 마치 환각처럼 불성십이무왕의 육신이 가루로 변해 흩날리는 것을, 허공은 일시 그 먼지로 인해 자욱하게 변했다. 아.... 이게 대체 현실이란 말인가? 백상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토록 정정하던 무림 의 수호자, 과거 잠룡회를 만들어내고 무림의 온갖 신화를 창출해냈던 불성문의 살아있는 신화, 불성십이무왕은 진정 이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백상인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정말로 인정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그의 시야에 아직 가루로 변해 사라지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 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바로 불성십이무왕중에서도 가장 맏형이고 내공이 고강한 장왕이었다. 백상인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즉시 그에게 날아가 떨어져내리는 그를 받아 품속 에 안았다. 다행히 장왕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는 백상인을 알아보더니 자애 롭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조심하게, 무림을 자네에게... 부탁하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말을 하고 있는 장왕의 전신이 서서히 가루로 화 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스르르........ 점차 한줌의 가루로 화해 사라지는 장왕을 바라보며 백상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종래에는 그의 품속에서 장왕의 육신은 한줌의 가루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백상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휑한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장엄함도 아니었고, 숭고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허무였다. 십이원로와 제갈박, 그리고 남궁벽 등은 일시 너무도 어이가 없는 나머지 몸이 굳어 있었다. 그들은 흡사 석상이라도 된양 멍하니 불성십이무왕의 흔적을 바라 보기만 했다. 그때, 문득 백상인의 귓전에 다시 예의 그 도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자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네. 생각을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나?" 그제야, 백상인은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도마를 향해 신형을 돌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뜻을 바꾸지 않겠소." 도마는 눈을 기이하게 빛냈다. "여기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되는데도?" 백상인은 시선을 깊게 빛내며 말했다. "장왕께선 내게 무림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소. 그러나 그분도 내가 당신에게 굴복하여 당신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오. 비록 그 모두가 죽어갈 지라도....." 도마는 가볍게 탄식했다. "나는 일찍이 중원 곳곳을 모두 돌아봤어도 너만한 인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너 는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너를 나의 후계 자로 삼으려 했다. 나의 후계자가 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허나 네가 굳이 그렇게 반대를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아깝지만...." 말을 끝낸 뒤, 도마는 그자리에서 깃털처럼 신형을 떠올렸다. 이어 그는 장내의 중앙에 사뿐히 내려섰다. "자, 이제는 결말을 지어볼까?" 그렇게 말하는 도마의 시선은 어느덧 고요하게 변해 있었다. 백상인은 즉시 고 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어, 그는 십이원로와 남궁벽, 그리고 제갈박과 오노사를 향해 말했다. "지금 즉시 여러분은 이곳을 떠나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나중에 뒤따라 가겠습 니다." "자네..." 남궁벽은 말을 잇지 못했다. 허나,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이곳에서 더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백상인에게 짐이 될 뿐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가능한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서 유사시에 도마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일이다. 그래서 하루 빨리 무림에 이 만 행을 전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 을까?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하리라. 남궁벽은 십이원로와 제갈박을 대동하고 한 쪽으로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오직 모든 것을 백상인의 한번 승부에 거는 것이다. 백상인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헌데, 오노사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백상인은 그들에게 다시 말했다. "어서 가십시오. 사실 제가 무적지독 운운한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의술의 근본원리를 이용하여 여러분을 속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즉시 백장 밖으로 멀리 달아나십시오. 제가 무사할 것을 보증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오노사는 전혀 놀라는 빛도 없었고 또 전혀 움직일 생 각도 하지 않았다. 이어, 그들을 대표하여 귀노사가 말했다. "사실 우리도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소. 우리는 단지 속은 척 했을 뿐이오. 왜냐하면 당신이 좋았기 때문이오. 당신은 진정한 우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 소." "...." 이번에는 독노사가 말했다. "나는 실상 처음부터 당신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소. 나의 전문이 바로 독이 아니겠소? 허나 나는 당신의 인품에 깊이 감동되어 전의 생애를 내심 깊이 후 회하고 있었던 것이오. 이 나이에 삶을 후회한다는 것은 실로 뼈아픈 일이지만, 당신이 있으므로 해서 나는 비로소 그 고통을 덜 수가 있었던 것이오."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주인으로서 명령하겠습니다. 어서 지금 즉시 이곳을 벗어나 십시오." 헌데, 귀노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린 이번만큼은 당신의 명을 거역하기로 했소. 당신이 없는 세상이란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린 당신과 죽음을 함께 하려는 거요." 백상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모두의 생각이 그렇단 말이오?" 이때, 홀연 유노사가 나서서 말했다. "모두 다는 아니오. 단지 우리들 네 명 뿐이지." 말과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기습을 감행하여 옆에 있는 요노사의 마혈을 제압 했다. 본래 그의 특기가 신법과 보법이라 그의 기습을 막기란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전혀 요노사가 넋을 놓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앗! 유노귀, 무슨 짓이냐?" 요노사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놀라 소리쳤다. 그녀를 향해 유노사는 능글 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마음을 잘 알아. 그러니 당신은 살아남아 주인의 시중을 들어드 려야 하지 않겠소? 만일 주인이 돌아가신다면 그때 우리의 뒤를 따라와도 늦지 않아." 말과 동시에, 그는 요노사를 덥썩 안아들더니 번개같이 신형을 날렸다. 스슷! 이어 남궁벽의 근처에 다다른 그는 요노사를 내려놓고 남궁벽에게 말했다. "그녀를 부탁하오." 그리고 남궁벽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그대로 돌아왔다. 슷..... "어떠냐, 내 솜씨가?" 돌아온 유노사는 혈노사에게 물었다. 혈노사는 잠시 그 핏빛 눈으로 유노사를 쏘아보더니 문득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기랄! 꼭 그걸 말로 해야 한단 말이냐?" "하하하.... 내 그럴줄 알았어." 유노사는 유쾌한 듯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 더이상 사노사를 설득시킬 수가 없음을 알아차린 백상인은 서서히 도마에게 다가갔다. 도마는 조용한 미소 로서 그를 맞았다. 백상인이 그의 삼장 앞에 서자, 그들 사이에는 일순 억겁같 은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 처음에는 그들은 단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서로 격렬한 불길이 일었다. 그 불길은 무형의 것이었고, 그 무형의 불길은 주위에 무형의 거대한 기류를 형성시켰다. 우우우우웅...... 바람도 없는데 사위의 공기가 기이한 파공음을 일으켰다. 주위의 기류는 무겁게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먼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 다. 답답하고 지리한 시간, 실로 숨막히는 시간이 매우 오랫동안 흘렀다. 그런 데, 언제부턴가 백상인의 이마에 무수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평소에 아무리 더워도 땀이라곤 모르는 백상인이다. 그런 그가 땀을 흘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에 있던 바위조각들이 그 압력에 못이겨 푸석푸석 가루로 화하기 시 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시작된 백상인의 몸의 미미한 떨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호흡을 죽이고 숨을 멈추었다. 정말 백상인이 불리하단 말인가? 상대편 도마는 여전히 조용한 모습 그대로인데, 백상인의 이마에 흐르 는 땀방울의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그의 모습은 점점 불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시선들은 한결같이 두 눈에 애절한 기원 을 담았다. 신이여...! 바로 그때, 일진의 무지개빛 광채가 번쩍 빛났다. 사라라라라라랑........ 너무도 현란하고 아름답기조차 한 그 빛깔, 일시에 사방을 온통 뒤엎는 그 가공 스런 광채는 마침내 펼쳐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악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 리가 미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또 한줄기 빛이 번쩍 빛났다. 태양광, 그 황금빛 태양광은 바로 백상인이 발출한 것이었다. 말이 그렇지, 사실 두개의 광채는 거의 동시에 발해진 것이었다. 뒤늦게 발해진 태양광은 금세 칠색영롱한 무지개빛을 뒤엎고 세상을 감싸려는듯 보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그 광경을 바 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도마의 칠색광채가 이루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강렬해졌다. 번.....쩍....! 마치, 세상 전부가 그 광채속에 잠겨드는 듯 했다. 삼라만상 그 모두가 그 황홀 한 빛 속으로...... 그리고, 백상인의 태양광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황금빛 찬란하던 태양광이 그 칠색 가운데 녹아드는 찰나, 마치 허물어진 둑처 럼 무지개빛 광채는 노도같이 백상인을 향해 밀려들었다. "으악....!"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순 비명을 내질렀다. 백상인의 신형이 순간 실 끊어 진 연처럼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쿵! 쿠당당.... 백상인의 몸은 암벽 구석진 곳에서 처박혀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그의 신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잿빛처럼 창백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도마가 서 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도마가 삼장 앞으로 다가가자, 백상인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서 나를 죽이시오." 쓰러져 나뒹군 그의 몰골은 매우 흉했으나 그의 시선만은 여전히 맑았다. 이에 도마는 흠칫하는 표정이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자네는 역시 많이 성장했군. 자네같은 어린 나이에... 나도 믿을 수가 없을 정 도야. 그러나 자네는 아무리 해도 나의 상대가 될 수 없네. 왠지 아는가?" "......." "자네가 배운 것은 심검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광검이지만, 내가 연성한 것은 바로 도검일세. 특히 그 중에서도 나는 음양오행의 도리를 연성했으니, 과거 한 때는 나를 예홍산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네. 도검에 비하면 광검은 사실 장난 과도 같은 거지."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했다. 도검...... 그는 이 무예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도검이란 확실히 광검보다는 한 차원이 높은 것이었다. 백상인은 설마했지만 그가 도검을 정말로 연성했을 줄은 몰랐었다. 도검에 비하면 그의 광검은 어린아이 장난과 같은 것으로, 이렇게 되면 그에겐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다. 백상인은 내심 쓰라린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해야할 수많은 일들을 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괴로운 일이었 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란 때때로 의지로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 적인 것이기도 하다. 백상인은 한차례 긴 탄식을 불어낸 뒤 눈을 감았다. 도마는 조용히 미소한 뒤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럼 잘 가게." 어느덧 그의 주위에는 예의 그 칠색영롱한 무지개빛 광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이 백상인을 향해 날아가면 백상인은 일순간 가루로 화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전혀 저항할 수 없는 백상인은 이미 보통사람과 다를바가 없으므로... 헌데, 그때였다. 돌연 백상인의 몸위로 서너명의 사람들이 비호같이 날아들었다. 스스스슷..... 동시에 백상인의 신형을 빈틈없이 가로막고 서는 것이 아닌가? "그를 해할 수는 없다. 우리를 먼저 죽여라!" 그렇게 소리치는 그들은 바로 오노사, 아니 사노사였다. 백상인은 내심 안타까 운 빛을 띠었으나 그들의 뜻을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단지 한차례 장탄식 을 터뜨릴 뿐이었다. "괴물아! 어디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 두 눈알을 흉흉하게 부릅뜨고 소리치는 혈노사의 태도에, 도마는 일순 어이없는 듯 실소를 날렸다. "비켜서라! 그를 죽이기 전에 너희들을 먼저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혈노사는 도무지 한번 시작한 일에서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다 시 눈알을 부라리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개소리 마랏! 이 돼지같은 녀석아...!" 도마, 그는 전혀 돼지같지 않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가지고 돼지 운운하는 것은 한참 잘못된 표현이요, 그것은 혈노사가 무식해서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 랬을 것이다. 그런데 간혹 그런 황당한 표현은 기대이상의 효과를 내는 법이기도 하다. 도마 는 대뜸 이맛살을 크게 찌푸렸던 것이다. 그는 여태 그와같은 욕을 들어본 일이 없었고, 또한 그의 자존심은 그 얼마나 대단하였었던가? 그는 상대방의 황당한 표현에 내심 크게 분개하여 소리쳤다. "어리석은 놈들이로구나.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그렇게 죽기가 소원이란 말이냐?" 혈노사는 비록 무식했지만 즉시 자신의 욕이 먹혀들어간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곧 지지않고 다시 눈알을 더욱 크게 부라리며 소리쳤다. "아냐, 아냐. 너는 돼지도 못되니 그저 돼지새끼라고 해야 할 거다. 껄껄, 이 못 생긴 돼지새끼야! 네놈은 설마 나를 죽일 수가 없겠지?" 도마는 일순 분노가 폭발했다. 그러나, 과연 그답게 그는 다시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허허... 정말 상대를 못할 놈이군. 허나 정 원한다면 황천으로 보내주지...." 도마의 어조는 다시 조용해졌고, 그의 주위에서는 숨막힐 듯한 기운이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이에, 혈노사는 일순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자리에 떡 버티 고 서더니 배를 쑥 내밀고 소리쳤다. "자, 그럼 나를 황천으로 보내 보아라! 이 돼지....." 허나, 그는 뒤의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 순간 도마의 전신에서 예의 그 칠 색광채가 번쩍 빛났기 때문이다. 사라라라랑..... 혈노사의 모든 움직임은 즉시 중단되었다. 비명도 없었다. 단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가만히 서있기만 하더니, 돌연, 그의 머리 위쪽부터 서서히 가루로 화해 휘날리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혈노괴....!" 유노사가 급히 부르짖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혈노사의 육신은 머리와 몸 통, 그리고 양손과 두 다리에 이르기까지... 종래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 다. 그렇게 성질 급한 혈노사는 간 것이다. 그 수북한 가루더미를 바라보며 유 노사는 일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돼지 같은 자식아....!" 사람들은 잠시 그 말뜻을 몰랐으나 곧 그것이 혈노사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 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유노사는 혈노사에게 원이 없도록 그가 못다한 마지막 말을 대신 해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유노사는 얼른 혈노사가 섰던 자리에 날아가 섰다. 그는 도마를 바 라보며 잠시 움찔하더니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헤헤... 당신의 그 살인방법은 매우 고명하고 신기하오. 나 역시 기왕 이면 그 런 방법으로 죽고 싶으니 부탁 좀 해도 되겠소? 헤헤헤...." 도마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어리석은 놈들, 이러한 정이라는 것은 실로 골치아픈 것이지. 나는 일찍부터 정이라는 것을 끊고 살아온 사람이다. 네가 나에게 정으로 호소하려고 생각했다 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가랏!" "헤헤, 기왕이면 아프지 않게...." 사라라라랑..... 유노사 역시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굳어졌다. 그가 최후에 아픔을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 그것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이렇게 갔다. 스으으으..... 머리끝부터 차례로 가루로 화해 흩어지는 그의 최후는 역시 혈노사와 다르지 않았다. 항상 말이 많고 떠벌이였지만 그래도 내심은 선량했던 그의 모습을 이 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허무함이었다. 유노사의 육신마저 없어지 고 나자, 도마는 나머지 독노사와 귀노사를 향해 말했다. "보았느냐? 너희들도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겠지? 죽는다는 것은 어쨌든 괴로 우니까. 나는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만일 지금 옆으로 비켜선다면 내가 나 중에 너희들만 특별히 살려줄지도 모르겠다." 허나, 귀노사와 독노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똑같이 앞으로 나섰다. "친구들이 간 길은 숭고한 영광의 길, 어찌 따르지 않으리오. 우리는 두 사람이 동시에 당신을 상대해 보겠소." 이에, 도마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지금 너희들이 두려워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너희들이 아무리 백천만겹으 로 그를 둘러싼다고 해도 나는 단 한번에 그를 죽일 수가 있어. 그러나 그는 일 세의 기재, 나는 그를 대우해 주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너희들과 똑같이 그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어서 비켜라!" 허나 귀노사와 독노사는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를 죽이시오!" "좋다! 그럼 가랏!" 도마의 안면에 지극히 흉악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즉시 예의 그 무한한 기운 을 끌어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 "잠깐!" 나직하게 외치며 일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백상인이었다. 도마가 가볍게 흠칫하며 마악 하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백상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킨 후 도마는 돌아보지 않고 귀노사와 독노사를 바 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함께 그를 상대해 봅시다." 귀노사와 독노사는 염려에 가득찬 빛을 띠었다. "그 몸으로.... 괜찮겠소?" "어차피 잘못되면 함께 죽을 목숨이 아니겠습니까?"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나는 방금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말과 함께 그는 품속에서 한가지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세가지 신물, 금검, 금화, 백옥소 가운데 금검이었다. 그의 그 금검은 크기가 매우 작아 마치 하나의 비수같기도 했는데, 그것은 햇살 아래 투명한 금빛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본 도마는 실로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바로 검이 아닌가?" "그렇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는 조소하며 눈을 희번득거렸다. "자네는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광검도 나와 상대가 안되거늘 그런 재래식 무기로 나를 이기려 한단 말인가?" (재래식 무기? 황당한 말이네.....) "하긴 그렇소. 허나 이 두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닐것이오." "흐흐흐...." 도마는 괴소를 터뜨렸다. 그는 백상인이 최후의 발악으로 자신을 우롱한다고 생 각한 것이다. "좋아. 그러면 우선 그들을 제거하면 되겠군." 말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도검을 일으켰다. 사라라라라랑......! 그 빛깔은 여전히 황홀하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헌데 이때, 백상인 의 눈치를 받은 귀노사와 독노사는 동시에 비쾌하게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스슷!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떠오른 위치는 바로 백상인의 앞이어서 그의 전신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니나 다를까? 귀노사와 독노사의 신형은 어느 한곳에서 못 박힌듯 정지되었다. 그들 역시 단순간에 황천길로 떠나버린 것이다. 스으으으으...... 마치 눈가루처럼 휘날리는 그들의 육신들.... 헌데 그때, 그 무수히 휘날리는 가루 속으로 번쩍 떠오르는 일점 금광이 있었 다. 그것은 다름아닌 금검이었다. 그런데, 그 크기는 아까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마치 거대한 창처럼 길게 늘 어나 있는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불가사의한 속도로 지금 이 순간 엄 청나게 길어지고 있었다. 슈슈슈슉! 따라서 그것은 흩어지는 귀노사와 독노사의 시신을 뚫고 번개같이 도마의 전신 으로 뻗어나갔다. 그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도마는 그것을 보았다. 본 순간 그는 내심 몹시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아 무리 저 물건이 신기하고 그리고 빠르게 덮쳐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신을 상대하고자 한다는 것은 백상인으로 볼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것은 한마 디로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저 젊은이는 삶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자신의 도검아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일종의 배신감에.... 도마는 일순 흉악한 살소를 자아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는 분노로 인해 악독해진 심사에 의해 잠시 기다렸다가 저 금검이 근처에 도달했을 때 보란듯이 부서버리고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백상 인을 잔인하게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누구나 다 그러하지만, 그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백상인의 이 발악적인 배신행위에 커다란 분노를 느낀 것이다. 금검을 부셔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과거 그는 세상의 온갖 것들을 대상으 로 하여 자신의 도검의 위력을 시험해본 적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는 두터운 만년강모조차 여지없이 가루로 변해 버렸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가 부수지 못할 것이라곤 그보다 높은 무예를 닦은 사람의 육신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 금검은 그의 가슴 앞에 도달했다. 실상 여기까지 설명은 길었지만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도마는 주저할 것 없이 도검을 일으켰다. 사라라라라라랑....! 칠색영롱한 무지개빛 광채는 그의 마음대로 일어나 불가사의한 속도로 금검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그 광채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둥그렇게 집중된 막이었다. 그 막은 곧 금검을 간단하게 휩싸버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오차가 발생했다. 그것은 도마로 볼때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괴이하게도 그의 도검을 맞은 그 금검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것이 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곧 상상못할 상황을 유발시켰다. 퍽...! 미처 피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도마를 꼬치처럼 꿰뚫은 금검은 잠시 더 길 어지더니 우뚝 멈추었다. 마침 그 꿰뚫은 부위가 도마의 심장이었고, 따라서 도 마의 심장에선 곧 분수같은 핏물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쫘아아악.....! 도마는 그 순간에 당연히 엄청난 극통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전신을 뜨거운 불 로 지지는 듯한 극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극통도 그의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 도마는 말을 못하고 입만 벌렸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 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그리고, 세상에 무예가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심장이 터져나간 사람은 살수가 없는 법이다. 그는 그 금검과 금검의 자루를 잡고 서 있는 백상인을 번갈아 바 라보더니 일순 비명대신 장탄식을 터뜨렸다. "자네는 아주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군." 그 탄식성은 그의 모든 야망과 성취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세상에 비길데없이 높은 무예를 닦은 그도 이렇게 자신의 분노와 그 분노의 마음으로 흐트러진 잘못된 판단에 의해 허망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백상인은 이미 이 모 든 일들을 예측했던 것인가? "......." 백상인은 고요히 선채 바라보기만 했다. 도마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 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내 실수는 인정하지.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결과는 너무해. 고작 단 한번의 실 수로 내가 이렇게까지 터무니없게 끝장나야 한단 말인가?" "......." "크카카카캇..... 너희들은 모른다. 나만 죽고나면 만사가 그대로 끝인줄 아는가? 흐흐흐! 천축에는 나의 사부인 악마성자가 있다. 나는 그분의 명에 의해 중원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죽고 나면. 으으, 나의 사부는 결코 가만있지 않 을 것이다. 그는 나와는 달리 정복욕이 대단히 강한 사람... 크크! 이제 중원천 하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이렇 게 만든 너희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 단숨에 여기까지 말한 도마는 일순 전신을 크게 휘청거렸다. 전신의 피가 모조 리 터져나간 지금, 아무리 그라도 더이상의 기력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정 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그는 백상인을 바라보았다. 백상인은 여전히 검자루를 움켜잡은 채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 그 광경을 바라본 도마는 더욱 화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그는 최후의 힘을 동원 하여 검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금검이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슉! 금검은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하여 금세 아까처럼 아주 작게 변했다. 그 바람에 도마는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넘어질뻔 했다. 겨우 겨우 몸을 바로잡으며 그는 백상인의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의 발걸음은 몹시 느리고 지쳐보였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해 보였다. 그때, 스스스슷..... 일진의 파공음과 함께 물러나 있던 남궁벽과 십이원로 등이 그곳에 다가왔다. 그곳에 다가온 그들은 우선 이러한 상황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 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조용히 서있는 백상인을 둘러싸면서 도마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이렇게 되자, 도마의 시선에 그들이 보이게 되었다. 거의 생명이 꺼져가는 도마 는 눈을 부릅떠서 그들을 알아보더니 겨우겨우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소. 지금 저 젊은이에게 달리 할 말이 있 으니 누구든 전해주지 않겠소?" 마침 방금전에 악마성자에 대한 말을 들었는지라 남궁벽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좀더 그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비록 위험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국한될 것이고 잘만되면 무림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는 곧 제지당하고 말았다. 한사람이 그보다 앞서서 나가면서 그를 가 로막았던 것이다. "맹주는 아직 할 일이 많은 몸, 나는 고작 쓸모없는 늙은이외다. 그리고 임기응 변은 아무래도 내가 더 위이니 내가 가보겠소." 그는 바로 제갈박이었다. 남궁벽은 하는 수 없었다. 제갈박이 이미 도마의 앞으 로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씀하시오." 제갈박은 도마의 앞에 이르자 사무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도마는 일순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본래 나를 이렇게 만든 저 백가란 젊은이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번엔 맹주를 죽일 수 있기를 희망했어. 그런데 재수없게 늙은 네가 걸려들줄이야...." 제갈박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즉시 상대방의 의도를 깨닫고 뒤쪽으로 신 형을 날렸다. 스슷! 허나, "죽엇!" 도마의 저주에 가득찬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아까의 그 끔찍한 칠색광채가 또 번쩍 빛났다. 사라랑..... 동시에... "으....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제갈박의 육신이 허공에 뜬 그대로 터져나가며 부서져버 리는게 아닌가? 후두두두둑......! 마치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제갈박의 육신을 바라보며 도마는 문득 흥분한 빛을 보였다. "것 보라구! 크흐흐.... 내가 한 사람 정도 더 못죽일 것 같은가?" 그러다가, 그는 문득 미친 정신병자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 정말로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안 것이다. 그는 돌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핫핫핫... 내가 죽는다구? 내가! 내가 죽다니, 크캇캇....!" 허나, 그의 광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픽....! 홀연 그의 전신이 폭죽 터지듯 터져나갔던 것이다. 금세 그의 육신은 가루로 변 해 허공 가득히 흩날렸다. 남에게 자신의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꺼려해서인가? 과연 도마, 그다운 최후였다. "........" 도마가 그렇게 죽어버리고 난 후에도,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갈박까지 그렇게 죽고나자, 그들은 마음이 얼어버렸던 것이 다. 그때, 한줄기 가벼운 음향이 주위를 울렸다. 쿵......! 그 소리에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리고 일순 대경실색했다. 그 소리는 바로 백상인, 그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소리 였기 때문이었다. "앗, 공자!" 십이원로가 그를 에워싸는 동시에 남궁벽은 급히 그의 상세를 살폈다. 그런데 다음순간, 남궁벽은 안색이 별안간 홱 변했다. "전신의 심맥이 모두 끊기고 맥박이 정지했소. 그리고 호흡도...." 그 말에 십이원로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말은 곧 죽었다는 말과 똑같기 때 문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넋나간 표정을 했다. 백상인, 그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요노사가 나서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저, 내가 한번 그를 치료해 보겠어요" "당신이요?" 요노사는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안됩니다" 십이원로중 소요성수가 나섰다. "이 아이의 심맥은 사실 완전히 부서진 상태이오. 단지 끊어진 상태라 해도 어 렵거늘... 아마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이 아이의 목숨을 구할수는 없을 것이오. 실상, 그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이오." 문득, 요노사는 전음으로 소요성수에게 말했다. "저는 소녀청정대법을 연성한 사람이에요" 그말에 소요성수는 몸음 가볍게 흠칫했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은.....?" 요노사는 간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것은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대협!" "....." "저는 이미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해요." 마침내, 소요성수는 장탄식을 터트렸다. "나는 여태 당신들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소. 당신은 그야말로 그 어떤 정파인에 못지않은 사람이요. 당신을 만류하지 못하는 소생을 용서하십시오. 우 리는 이 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과분한 말씀이에요. 그럼....." 요노사는 엄숙하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백상인의 몸을 들어올렸다. 이때, 미처 요노사의 뜻을 알지 못한 남궁벽이 의아해하며 제지했다. "무슨 일입니까?" 소요성수가 나서서 고개를 저었다. 소요성수는 묵묵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자네, 소녀청청대법을 알고있나?" 남궁벽은 가볍게 흠칫했다. "알고 있다마다. 헌데....." 소요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로 소녀청청대법을 연성한 사람일세." "....." 남궁벽은 일시 눈을 크게 떴다. "소녀청청대법을 연성한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할수 있 네. 왜냐하면 그것이 드물게 존재하는 정도의 이술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 을 연성한 사람이 한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실로 기적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 지. 물론 소녀청청대법은 파괴되고 말 것이지만...." 남궁벽은 놀라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희생이 아닌가?" 소요성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원한 일일세." "....." "백상인 그 아이는 복이 많은 사람이지. 허나 그는 비록 살아날 지라도 다시는 무예를 펼칠 수가 없을 것일세. 확실히 도마의 무예는 놀라운 것이었으니까." 소요성수의 그 말이 적요하게 울려퍼지고, 장내의 원로들은 저마다 숙연하게 마 음에 젖었다. x x x 글쓴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백골의 임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백 상인은 아무런 탄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열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 백골을 양지바른 곳애 예쁘게 묻어주기 시작했다. --- 애처 요매지묘. ..... 백상인 읍립. x x x 강호무림 ----- 무림수천 년사에 있어서 온갖 혈우성풍이 그칠날이 없던 것이 그 얼마이던가? 비록 어느 때 한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서 무림에 정도의 기치를 세우는가 싶으 면, 실로 얼마가지 않아 무림은 다시 마의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곤 했다. 정고일척이면 만고일장이라. 그러한 속담은 무수한 무림인들 사이에 희자되어 왔고, 또 어느 덧 당연시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마교. 온갖 마도의 뿌리라고 할수 있는 마교의 온상 지옥도가 완전히 정도의 군웅들 에 의해 궤멸되었다고 했다. 실로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러한 쾌거는 그야말로 무림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강호의 무림인 들은 이에 환호했다. 이제 무림에 사마의 세력은 없어지리라. 앞으로 무림은 영 구히 태평성대를 누리리라. 무림은 크게 번창할 것이고..... 강호인들은 기뻐 날뛰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쾌거가 이룩될 수 있었는가 즉시 사람들을 파견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얼마 후, 무맹에 그 결과가 날아왔 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는지도 몰랐다. 멸문, 기대하고 있던 오파일방마저 깡그리 멸문을 당했던 것이다. 전해온 자의 말에 의하면,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 주위에는 연일 까마귀가 가득 날아다니고, 무당 산과 개방의 총타는 이미 무덤으로 화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곤륜파와 화산파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은 절망했고, 공포에 떨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무맹 뿐이었다. 아직까지 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악마의 군단, 그들은 어디에서 온 자들이며 또 언제쯤 무맹에 도전해 올것인가? 불과 얼마 전의 평화는 간곳없이, 무맹의 인원들은 억눌린 공포 속에서 저마다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일시에 불어닥쳐 수 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공포의 괴질처럼, 뙤약 볕이 뜨거운 한여름에 일어난 일이었다. 휙! 휙! 휙.....!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두운 밤,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머리에 이고 사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리고, 그 적요를 뚫고 비조처럼 신형을 날리는 사람들은 모두 아홉사람, 희미한 별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용모 는 하나같이 젊고 영기발랄한 젊은이들이었다. 그 나이는 대략 약관인 이십에서 서른 안팎인데, 그들의 행색은 저마다 각각이 라고 할 만큼 서로 대조적이었다. 중과 여승, 도사와 여도사, 그리고 속가의 청년과 소녀등... 그들의 신법은 그들 또래의 나이에 비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또한 그 용모나 기도로 보아 하나 같이 평범하지 않은 명문의 자제들임을 알 수 있었다. "곡형! 이번에 가면 그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일신에 청색도포를 걸친 청년도인이 도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그는 요 삼년간 이곳에서만 틀어박혀 있다고 하니 이번에 그를 만나 보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오." 이때, "그의 무예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우리는 모두 일파의 정통무예를 연성한 몸인 데, 굳이 그에게 가서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을까요?" 녹의나삼을 산뜻하게 걸친 미소녀가 물었다. 그말에, 홍의를 입고 얼굴마저도 붉어보이는 청년이 대답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오, 정매! 그는 삼년전 마교의 대종사도 제거했고, 도마라 는 자도 물리쳤다고 하오. 맹주께서도 그의 무예는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녹의소녀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거의 폐인이 다된 상태가 아닌가요?" 이에, 맨 처음 입을 열었던 매화무늬장삼의 청년이 말했다. "정매! 우리는 지금 그의 도움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무예를 배우러 가는 것이오. 그는 자신의 무예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한 폐인이 된것은 아니오." 그말에, 황의가사를 걸친 젊은 승려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미타불! 소문에 의하면 그분은 각자의 재질을 고려하여 각기 알맞는 무예를 전수하시고 계시는데,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문하에 드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 다고 들었소. 단지, 그 사람의 심성이 올바르기만 하다면 말이오." 일신에 백색도포를 걸친 청년도인이 말을 받았다. "지난 삼년동안 생겨난 금검문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로군요. 헌데 그가 자신의 문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무공을 전수해 줍니까?" "물론이오." 황의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곳으로 찾아가고 있는것이 아니오. 아무튼 우리의 이번 행동은 장차 우리에게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 틀림없소이다." 이때, 한 사람이 원한맺힌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는 단지 무예를 익혀 그 악마들을 쳐부술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그는 일신에 흑색도포를 입은 청년도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딱딱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원한에 눈을 부릅뜨자, 마치 금강야차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나머지 여덟 사람도 그와 똑같은 심정이 되어 침음성을 발했다. 이윽고, 그들은 단풍나무숲이 아릅답게 우거진 가운데 솟아있는 둥근 월동문 앞에 이르렀다. 월 동문과 이어진 담장엔 푸른 덩쿨이 무성하여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은 바로 당금 무림에 있어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잠시 문앞에서 기다리자, 문득 안에서 한 소년이 걸어나왔다. 그는 일신에 평범 한 백의를 걸쳤는데, 미목이 수려하고 나이에 비해 매우 비범하게 느껴졌다. 황 의승려가 대표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저희들은 각각 구대문파의 장령제자들로서 금화공자 백대협을 뵙기 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대협께선 안에 계십니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사부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아미타불! 그분께선 모르시는게 없으시군요." 이때, 청포도인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실례지만, 소협의 명호는 어떻게 됩니까?" 소년은 공수하며 대답했다. "저는 손범입니다." "아....." 아홉명의 사람은 가볍게 놀랐다. "그러니까 바로 금검문의 수제자 이시군요?" 청포도인의 물음이었다. 그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현재 손범은 백상인이 거느리는 문하인 금검문의 가장 수제자로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헌데, 웬일인지 손범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분의 대제자이긴 하나 수제자는 아닙니다." "수제자가 아니라고요?" 그들이 의아해 하는데, "그것은 차차 보시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럼....." 소범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구대문파의 장령제자들은 하는수 없이 따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넓은 대청 안, 백상인은 특수하게 만들어 진듯한 태사의에 등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구대문파의 장렬제자들은 다같이 나 아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협을 뵙습니다!" 황의승려가 나서서 그들 구인을 일일이 소개했다. 즉 자신은 소림의 장령제자 백행신승이며, 청포도인은 무당의 장령제자 곡허자, 회색가사를 걸친 여승은 아 미파의 일심신니, 매화무늬장삼을 걸친 청년은 화산파의 장령제자 태을신풍 주 작영, 백포도인은 곤륜파의 곤륜일학이며, 흑포도인은 공동파의 복마신도이었다. 그리고, 홍의청년은 점창파의 분광섬예 좌비홍이요, 백색도포를 걸친 여도사는 청성파의 장령제자 백운설화, 끝으로 녹의소녀는 종남파의 장령제자 은하신녀 정아경이었다. 이번 구대문파의 참사때 유독 그들만이 살아난 이유는, 그들이 이번 구대문파의 장령제자들로 이루어진 구룡회라는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무맹에 모였었기 때 문이었다. 그들은 무맹에서 자파의 참사소식을 알았고, 그리하여 전전긍긍하다 가 마침내 유명한 이 성수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성수장은 옛날과 다름없이 환자를 받고 있었다. 다만 누각의 후면에 건물을 더 지어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었다. 백상인은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다 받은 후에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 내 이미 그대들의 뜻을 알고 있소. 미리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둔바도 있으니, 그대들은 먼저 객사로 나아가 쉬면서 차후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시오. " 말을 마친후, 백상인은 의자를 움직여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보아하니 그 의자 가 바퀴가 달려있어서 저절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무슨 특별한 기관 장치가 되어 있는것 같았다. 백행신승 등은 그저 물러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뒤쪽 객사로 향하면서 곤륜일 학이 문득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손범에게 물었다. "저어,아까 손형이 수제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대체 수제자는 누구입니까?" 손범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마침 그리고 가고 있는 중이니, 잠시 후면 보게 될 것입니다." ".....?" 잠시 후, 그들은 뒤쪽의 연무장에 이르렀다. "마침 오늘은 네분 사모님들께서 연무시찰을 하시는 날입니다." 연무장, 그곳엔 지금 오백여명의 소년소녀제자들이 저마다 구슬땀을 흘리며 각 가지 동작을 연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비록 무더운 여름날이라 전신이 땀으로 목욕을 한듯 했지만, 그들의 열기와 간간이 토해내는 기합성은 장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밤중에 수련을 하는 이유는 무더운 대낮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무 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렇겠군요! 네분 사모님들은 그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밤눈이 밝지 못하 니 자신의 연습에만 몰두할 수 있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곤륜일학은 손범을 향해 다시 물었다. "헌데, 수제자는 저들 무리속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손범은 미소하며 연무청의 단상위를 가리켰다.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연무청의 단상위, 그곳에는 지금 네사람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절새가인들이 자 리한채 연무장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품속에는 각각 세살 쯤 된것으로 보이는 아이가 하나씩 안겨 있는것이 아닌가? 그 아이들은 모두 뛰어나게 잘생긴 용모에 몹시 총명하게 느껴졌고, 역시 제자 들이 연무하는 광경을 지루하지도 않은지 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앙증 맞고 귀여우면서도 매우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토록 잘생긴 아 이들을 본적이 없었다. 골륜일학이 놀라며 되물었다. "설마, 저 아이들이 그분의 수제자란 말입니까?" 손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삼년전에 네명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네명의 사모님들께서 각각 한명씩의 자식을 낳으셨지요. 대부인께서 낳으신 아들의 이름은 백자자, 이부인 께서 낳으신 아들의 이름은 백자비, 삼부인께서 낳으신 아들의 이름은 백자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부인께선 딸을 낳으셨는데 그 이름은 백자사입니다. 바로 저기에 있는 아이들이죠." "....." "저들 사남매는 사실 거의 같은 시각에 태어났지만, 사부님께서는 그중 가장 먼 저 탄생한 백자자에게 수제자를 명했지요." 곤륜일학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세살인 아이들인데 수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좀....." 손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저 아이들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아이들은 이미 천자문은 물론 사서삼경을 독파했을 뿐만 아니라, 사부님의 금단선공의 기초에 들어갔지 요. 게다가 지금 저들이 연마하고 있는 무예의 대부분은 펼칠수가 없을 뿐이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말에, 백행신승등은 대경실색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절세의 기재들이군요?" 손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헌데, 사부님께선 만족하는 눈치가 아니십니다. 자신의 못다한 일 을 그 아이들에게 물려주시려고 하시지만, 그러한 재질마저도 부족하다고 생각 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분은 원래가 초인적인 사람이었다니 그럴만도 하겠군요!" 백행신승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시했다. "자, 그럼 가시지요!" 손범의 인도에 따라, 그들은 곧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백상인은 그 안개속을 헤지고 자신이 특수하게 제작한 의자를 탄채 죽림정사에 올랐다. 안개는 한낮의 햇볕아래에서 부유하듯 흐느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가 너무도 뜨거운 나머지 푸른 대나 무들도 시들해 보였다. 백상인은 죽림정사에 오른후,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곳의 경치는 여전히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자신은.... 삼년전, 지옥도에서 요노사에게 치료를 받아 극적으로 목숨 을 건진 그는 사실상 불구나 다름없었다. 그때 요노사는 그의 부숴진 심맥을 이어놓으려 했으나, 그저 그의 생명력만 되 살리는데 그쳤을 뿐이다. 그의 심맥은 너무도 완전하게 파괴된 나머지 다시 회 복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것은 과거 그가 치료한바 있는 주벽군의 절증 만절산맥과 비슷했으나, 실상 그보다 백배 못했다. 만일, 백상인의 무예가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 나마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고도의 무예에 의해 백상인은 이렇게나마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으나 다시 는 더이상 무예를 펼칠 수가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문득 산들바람이 가볍게 스쳐지나자, 백상인은 부유하듯 흐느적거리는 안개속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살아있되 살아있는것이 아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 삶이 더이상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가문의 피맺힌 숙원과 나의 염원... 그 모든 것들이 다만 무지개처럼 잡을 수 없는 공상에 불과 하단 말인가?" 이때, 문득 한줄기 맑고 청량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당신은 틀림없이 다시 일어서실 거에요. 더군다나 우리 에겐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요?" 백상인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네 명의 여자들, 바로 그의 부인들이었다. 과거 한때는 천상삼화와 항주의 천하제일기녀 옥류향으로 불리우던 그녀들, 삼년전, 백상인이 이곳으로 돌아왔을때 그는 몸이 불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녀 들과의 혼인약속을 파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미 그와 그녀들과는 깊은 과 계가 있었기에 혼인을 파기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혼인을 파기하기는 커녕, 그녀들이 혼인날짜를 잡고 백상인을 생각하여 간단하 게 혼인식을 올려버린 것이다. 그후, 그녀들은 이곳 성수장의 대소사를 관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간 백상인 본인이 하는일은 거의 없었고, 그는 할 일이 없어진 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생각이 많으면 고민이 늘고, 고민이 늘면 불행해지는 것일까? "언제 왔소?" 백상인은 언제나 자신을 헌신적으로 섬겨주는 네명의 부인을 미소로 맞이했다. "방금요. 헌데 당신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여몽향이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소."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피이..... 거짓말!" 여몽향은 예쁘게 입술을 내밀었다. "당신 우리가 여기에 왜왔는지 아나요?" "글쎄.....?" 백상인이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남궁려려는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당신은 점점 머리가 둔해지는 군요! 오늘이 바로 우리의 세번째 결혼기 념일 이라는 걸 몰랐나요?" "아차.....!" 백상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머리를 툭툭 쳤다. 백리유가 빙그래 미소하 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대청에 조촐한 잔치상을 차려놓았어요. 당신은 이제 몸만 가면 되 요." "수고했고, 유매!" 백상인은 부드럽게 치사한뒤 문득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한데 오늘밤 나와 함께 잘 사람은 누구지?" 그말에, 여태까지 다소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말이 없던 제갈청하가 안색을 홍당 무처럼 붉혔다. "당신은 정말 낮짝이 두겁군요!" "핫핫핫....." 백상인은 대소한뒤 크게 소리쳤다. "자, 그럼 어서 가봅시다! 음식이 식으면 곤란하니까!" "호호....." 그들은 곧 함께 어우러져 누각으로 내려왔다. x x x "어서 오세요!" 대청에는 한사람이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그녀는 바로 손빈아였다. 이제 나이 가 십팔세에 이르러 용모가 더한층 수려하고 아름다와보이는 그녀는 마치 천상 삼화의 소녀시절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게다가 고고한 난초의 향기가 물씬 풍 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악 물이 올라 보는 이의 넋을 빼놓기에 족했다. 같은 여 자들인 백리유 등도 반할 정도였다. 손빈아는 백상인의 네 자식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그의 아이들은 백상인이 들어 오자 얼른 그의 의자위로 오르기에 바빴다. "아부지! 아부지....." "아빠.....!" 비록 대단한 천재여서 사서삼경까지 독파한 아이들이지만 그 천진스런 음성은 역시 어린아이들이 분명했다. 백상인은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 그 아이들을 번갈아 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각기 어미가 다르기 때문인가? 이 아이들의 성격도 제가끔이다. 맏이인 백자자 는 백리유의 온유한 성격을 닮았고, 둘째인 백자비는 남궁려려의 상냥하고 애정 넘치는 성격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그리고, 셋째인 백자희는 제갈청하의 성격 처럼 매우 신중하면서도 사려가 가장 깊고, 마지막 백자사는 여아로서 매우 명 랑하고 쾌활했다. "자, 자! 이젠 모두 엄마에게 돌아가야지? 이 아빠는 지금 식사를 해야 한단다." 백상인의 말에, "아빠, 뽀뽀.....!" 아이들은 백상인의 뺨에 몇번씩 뽀뽀를 더하고서야 각각 엄마의 품속으로 돌아 갔다. 그러자, 이제까지 그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손빈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일어나지? 같이 식사하면 좋을텐데....." 백리유의 말에, 손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오늘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알고 있어요. 저는 눈치없이 결혼 기념일 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말과 동시에 그녀는 조용히 대청을 나갔다. "훌륭한 처녀에요." 제갈청하가 문득 손빈아가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암, 훌륭하고 말고! 이미 처녀가 다 되었지! 그래서 얘긴데..." 백상인은 부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를 위해서 마땅한 혼처를 구해보는게 어때?" 이에, 제갈청하가 문득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음흉을 떨기는...그녀는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요?"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있었단 말이오? 난 정말 몰랐는데... 그렇다면 얼른 짝 지워 줘야지. 헌데 그가 대체 누구요?" 제갈청하는 안면을 사랍게 찌푸렸다.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요?" "아니, 나를 의심한단 말인가? 정말 모른다니까!" 백상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제갈청하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에요. 그걸 아직도 모른다면 당신은 여자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거나, 아니면 음흉을 떨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아니야, 아니라니까!" 백상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듯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 모양을 보 고 우스웠는지 백자비가 까르르 웃으며 재잘거렸다. "아빠는 바보야, 바보..... 까르르륵!" "뭐라구?" 백상인은 어이없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급히 의자를 움직였다. "아, 음식이 식겠소. 어서 식사나 합시다!" 백리유등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명이 아무말도 없다는 것은 사실 고역이다. 특히 그것이 특 별하게 차려진 만찬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네명의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식사는 정말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웠다. 백상인은 식탁에 자리하자마자 열심히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쩝쩝! 오늘의 이 자리는 결혼기념일의 만찬이다. 당연히 즐겁게 기분을 내야할 자리이 건만, 백상인은 도무지 즐겁게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마치 걸신들린 사 람처럼 백상인은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 웃고 떠들고 분위 기를 내는 것은 그의 네 부인들이 맡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있는 백상인의 모 습이 보기좋은지 연신 화사하게 웃어댔고, 또 가금은 까르르 교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었다. 또 매우 교양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음성이 아름다왔다. 세상에 그녀들과 같은 여자들은 다시 없었다. 백상인은 여 태 삼년간이나 그녀들과 살았지만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그만큼 훌륭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의 떠드는 음성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백여마리의 새가 우짖는 것보다도 더 듣기 좋았다. 세상에 그 어떤 듣기좋은 음악도 이에 비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백상인이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배가 터지도 록 계속해서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많은 음식에 질리게 되자, 이번에 는 한옆에 놓여있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은 소요곡 출신인 백리유가 손 수 빚은 설홍매로주라는 것이었다. 백리유는 아마 이날을 위해 단단히 준비한것이 틀림없었다. 그 만들기 어렵다는 설홍매로주를 무려 다섯통이나 준비해 놓았으니까. 삼년 전의 그날 이후, 백상인은 급격하게 술이 약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술맛 까지 잊은 것은 아니었다. 부드럽고 향긋하게 넘어가는 술맛을 일단 맛보게 되 자, 백상인은 두번째 부터는 아예 대접으로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콸콸콸..... 그의 목구멍에서 술이 넘어가는 소리는 네 여인들의 음성과는 아주 대조적이었 다. 그것들은 서로 어울려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코 그가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옆에서 교성으로 얘기하는 그녀들은 마치 딴세상의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백상인이 다섯통의 술을 모두 마시고 고꾸라졌을 때, 그 녀들의 눈에서는 한결같이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분은 너무 괴로와하는 것 같아요." 여몽향의 말에 백리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야. 더구나 이번의 그 무림을 휩쓰는 악마들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는 더 욱 괴로와 하시는 것 같아. 이것은 그 도마의 사부라는 악마성자가 천축에서 나 타난 것이 분명한데, 이 모든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시는 거지." "흑....." 여몽향은 설움이 복받쳐 고개르 숙이고는 나직이 흐느꼈다. "정말 이분이 괴로와하는 모습은 볼 수가 없어요." 제갈청하가 탄식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분은 머지않아 다시 일어서실 거야. 이것은 아까 손빈아 의 말이야. 사실 그녀의 예지력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그렇게 믿고 있었어. 이런 분은 결코 하늘이 그냥 놔두지 않거든." "맞아, 내 의견도 그와 같아!" 백리유가 동조하자, 남궁려려가 나섰다. 그녀는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예쁘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흥,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나는 이분이 늘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좋기만 하 더라. 만일 이분이 회복이 된다면 천하를 제마음대로 돌아다닐텐데 그런 생과부 가 되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가봐!" "호호..... 그건 그래!" "호호호.....!" 일순 까르르 교소를 터뜨린 그녀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치우고 백 상인을 침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몸이 쇠약하면 숙취도 오래가는 법이다. 백상인은 다음날 새벽무렵에야 눈을 떴 다. 전신이 천근 만근이나 되는 듯 무거움을 이겨내며 그는 의자에 몸을 실었 다. 숙취를 이겨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는 아침산책이다. 옆에 곱게 잠들어 있는 제갈청하를 깨우지 않고 그는 죽림정사로 향했다. 새벽안개는 여전히 자욱했다. 안개는 이곳 동정호변의 한여름 날씨에 의해 베풀 어지는 특징중의 하나로 그것은 정신을 노곤하게 만들기는 켜녕 오히려 이슬에 풀잎이 씻겨지듯 그 눅눅하고 서늘한 안개속을 바라보노라면 답답한 마음이 오 히려 씻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의 안개는 장애라기 보다는 차라리 풍광을 더해주는 요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죽림정사로 향하면서 안개는 더욱 자욱해지는 것 같았다. 죽림정사 는 푸른 대나무숲과 주위의 물오른 단풍나무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의 구름으로 인해 그 경치가 이 부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그곳에 오른다면 누구라도 안개덮인 세상의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스르르르르..... 의자의 기관장치는 매우 정교한 것이어서 거의 아무런 소음도 일으키지 않고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백상인은 천근만근이나 무거웠 던 가슴이 비로소 조금씩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 조용하고 적막한 아침산책, 세상에 이런 여유마저 없었다면 백상인은 이미 마음의 안정을 잃었을 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점차 죽림정사쪽으로 나아갈수록 이상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섬칫하면서도 칙칙한 매우 기분나쁜 그러한 느낌은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그 를 유인하는 것 같았다. 백상인은 일순 머리끝이 쭈삣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한 느낌은 일종의 살기였다. 삼년 전, 도마를 죽이고 난 이후 그는 전혀 이러한 기 분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는 일순 움츠러들었던 혈류가 돌연 용솟음치며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비록 그가 불구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무예까지 모두 잃은 것은 아니었 다. 그가 연성한 무공은 거의 정상적인 무공이며 그것은 지금 그의 육체적인 제 한 때문에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예지력은 완전히 사라 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살기는 죽림정사로 다가갈수록 강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무수한 안개속에 점점 이 묻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개가 그를 에워싸고 조여들듯 그 살기도 그를 점차 압축해들고 있었다. 백상인은 호흡이 가빠짐을 느꼈다. 그는 더이상 전진하기 어려움을 느꼈다. 그 러나 그는 그자리에 멈춰서거나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서서히 전진 했다. 그것은 이순간 그의 몸에서 피가 들끓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일컬어 무인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살기는 점차로 강렬해져 가고, 마침내 도달한 죽림정사의 모습은 어제의 그 모 습이 아니었다. 검은 안개가 가득 덮이고, 곳곳에 피빛 살기가 충천하며 사방이 온통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인..... 이런 곳은 세상에 악마의 소굴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죽림정사가 갑자기 악 마의 소굴로 변할리는 없다. 그것은 곧 이 죽림정사가 현재 어떤 무시무시한 악 마적인 존재가 당도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서서히 여명이 드러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그 풍경은 결코 옛날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그것은 죽음의 사신이 길게 드리워진 잿빛의 세계였다. 백상인은 가능한한 안색을 평범하게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정자위로 올랐다. 과거 출입구는 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완만한 경사의 비탈로 이루어져 있다. 스르르르..... 그를 태운 의자가 그 완만한 경사지를 가볍게 오르자, 전면에 그를 기다리고 있 는 한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다. "....." 그 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백상인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자는 아마 백상인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기괴한 침묵이 오가는 가운데 사방에서는 전신을 부숴버릴 듯한 끈적한 살기가 점차 가중되기 시작했다. 비록 그 그림자 에게서 나온 살기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류의 살기는 백상인이 방금 겪었던 그 것들보다 수백배나 강렬한 것으로 솔직히 그로서 견뎌내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백상인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가공스런 살기를 참아냈다. 그리하 여 마악 그의 전신이 그 살기에 의해 산산이 터져나갈 것 같았을 때, 문득, 전 면의 그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듣던대로군. 백상인....." 그 음성은 마치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공포의 저음이었다. 백상인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없이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검령자." 그림자의 대답은 짤막했다. "....." 백상인이 침묵하자 검령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홍산인을 알고 있겠지?" 백상인은 물론 에홍산인을 알고 있다. 예홍산인은 또한 도성이고, 그리고 그가 제거한 도마이기도 한 것이다. 저들은 그 도마를 예홍산인으로 부르는 모양이었 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크흐흐흐..... 그럼 우리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검령자는 핏빛이 뚝뚝 떨어지는 살기를 토해냈다. 백상인은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럼 당신은 악마성자와 어떤 관계이오?" "흐흐....." 검령자는 한차례 괴소를 터뜨린 후 대답했다. "악마성자께서는 우리 악마교의 위대하신 교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 악마교에 는 교주님 이외에 일산인, 오대호법존자, 십이악령, 일백사십악령비자등이 있다. 그들중 일산인은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신분인 후계자 예홍산인을 두고 한 말이 었는데 네가 죽였으니 지금은 없는 셈이다. 나는 바로 십이악령중의 제일령인 검령자이다." 악마교 ----- 이 엄청난 이름을 처음 듣게 되는 순간이었다. 백상인은 그들이 이미 모든 사실 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고 느꼈다. "당신들은 그 도마때문에 중원으로 온 것이오?" "크크크....." "....." "명목상의 목적은 그러하다. 허나 사실 교주님께서는 일찍이 중원땅을 마음에 두고 계셨었지.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우리는 교주의 명에 의거하여 중원땅 을 일거에 휩쓸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차피 그렇게 되어야할 일이고, 우리는 예 홍산인의 일을 그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너는 그렇게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들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백상인의 물음에 검령자는 공포스런 광소를 터트렸다. "크카카카... 그건 잔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몸소 악마신의 제물이 되었으니 죽어서도 행복할 것이다." 백상인은 내심 탄식했다. 이들 악마교는 비단 그 무예가 다분히 악마적인 데다가 또한 그 무리들이 악마 신이란 존재에 대해 맹목적인 광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백상인은 짤막한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오?" 검령자는 흉흉한 음성을 흘렸다. "우리가 아무리 예홍산인의 복수를 할 마음이 없다고 해도 나는 이미 본교의 기밀을 네게 말해주었다. 너를 그냥 살려둘 것 같으냐?" 백상인은 안색을 가볍게 굴렸다. "당신이 과연 그럴만한 능력이 있을까?" "크크....." 검령자는 음충맞게 웃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이미 너에 관한 모든 사항을 알고 있다. 과거 너는 도마와 겨루었다고 하니 보통때였다면 나는 너를 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네 가 시체와 다름없는 불구자란 사실을 알고 있다." 백상인은 싸늘하게 미소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물론이다. 너는 나의 수하들인 십이검령비자들중 하나만 써도 쉽게 저승으로 갈 것이다. 나를 놀리려는 생각은 버려라!" 백상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보시오." "....." 검령자는 잠시 망설이는듯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다가 일순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크흐, 너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구나.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다니, 그러나 나 는 너를 존중하여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내가 데려온 십이검령비자 모두 에게 너를 공격하도록 할 것이다. 만일 네가 그들을 이긴다면 그땐 내가 상대해 주지. 흐흐....."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령자는 주위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그것은 아마도 천 축어인 것 같았다. 그러자, 홀연 주위에서 미미한 기척이 일더니 음산한 기운을 부르며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스스슷..... 그들은 바로 방금전 백상인에게 살기를 쏘아내던 암중인들로, 그들의 가슴팍엔 하나같이 검을 든 악마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검령자가 말하던 십이검령 비자가 틀림없었다. 스슷!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백상인을 둥글게 포위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움직이며 짓 쳐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운 먹구름속에 갇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이러한 공격은 결코 아까의 그 살기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예상컨대, 이들에 의해 강호의 그 유수한 거대문파들이 맥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파츠츠츠츠.....! 어둠속으로 예리한 경기가 사위를 찢어 발기듯 요동하며 백상인의 전면으로 쇄 도해 들어왔다. 벌써부터 백상인의 상의가 바람에 찢길듯이 흩날렸다. 허나 백 상인은 침착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소?" 이에, "흐흐..... 별 수단을 다 쓰려고 하는군. 결코 후회하지 않을테니 염려마라." 말과 동시에 그는 우수를 번쩍 쳐들었다. 그 순간, 그의 신호에 의해 십이검령 비자가 밀물처럼 백상인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콰콰콰콰콰..... 콰르르릉.....! 콰우우우 ----- ! 이때의 백상인의 생명은 그야말로 바람앞의 등불 그 자체였다. 그의 신형은 금 세 그 가공할 검경강기 속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헌데, 바로 이때, 실로 기적같은 상황이 장 내에 벌어졌다. 번 ----- 쩍 ----- ! 장엄하도록 눈부신 금광이 그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터져올랐던 것이다. "아 ----- 아 ----- 악!" 합창하듯 단말마의 비명이 일제히 울려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거짓말처럼 터져 나가며 가루로 부서지는 십이검령비자들, 그들이 펼쳤던 그 가공할 공격이 언제 있었냐는듯, 사방은 다시 고요해지고 주위엔 십이검령비자의 시신이 흩어지는 가루만이 뿌연 안개속으로 융해되고 있었다. "....." 검령자는 일시 너무도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 광검이냐?" 검령자는 겨우 떨리는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백상인은 다소 창백해진 안색을 한채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보였다. "본것대로요. 당신도 한번 덤벼보겠소?" 백상인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그 말에, 검령자는 일시 크게 흠칫했다. "나는 이 일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믿지 않을수도 없으니 우, 우선은 인정하 기로 하지. 너, 너는 어쩔테냐?" 검령자는 너무도 말을 더듬는 나머지 아까의 그 공포스런 위풍은 전혀 간곳이 없었다. 백상인은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의 뜻에 따를 뿐이지. 당신은 이미 나와 싸우기로 했으니 이제 그 시작을 해 볼까? 자, 그럼....." 백상인은 말과 더불어 의자를 탄 채로 검령자의 앞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이 행동에 검령자는 금새 혼비백산했다. 그는 급히 신형을 뒤로 날리며 소리쳤다. "나는 네, 네가 승리한 것을 인정하겠다. 허나 나를 뒤쫓아 오지는 못할 것이 다." " ..... " " 나중에 보자. 오늘의 이 일은 결코 잊지 않겠다! " 천리전음으로 말한 듯, 검령자의 신형은 이미 아득히 사라졌다. 그는 정말로 백 상인에게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친 것이다. 헌데 그때, 갑자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백상인을 태운 의자가 그대로 균형을 잃은듯 난간을 향해 부딪쳐가는게 아닌 가? 의자의 기관장치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었다. 고장을 일으킨 것은 그 주인이었다. 백상인, 그는 어느새 의자 위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혼 신의 기력을 다해 검령비자들을 제거하고 검령자마저 쫓아보낸 뒤 의식을 잃어 버린 것이다. 만일, 백상인이 일부러 검령자를 격분케하여 십이검령비자를 합공하게 만들었 고, 또 조금전에는 백상인이 정말로 파리 하나 죽일수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을 검령자가 알았었더라면 그는 결코 그냥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는 도 망쳐 돌아갔다. 그것은 백상인의 무예가 워낙 충격적으로 의외적인 일이었고 또한 광검의 공포 가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광검과 같은 무예를 당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백상인은 자신의 초인적인 지혜와 의지로 생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정자의 난간으로 부딪쳐가는 백상인의 몸은 어찌될 것인가? 바로 그때, 스스슷..... 일진의 미풍이 일며 그 의자를 잡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상인 의 네 부인들이었다. "앗, 괜찮겠어요?" "우선 침실로 모셔가야 해!" 그녀들은 급히 의자채 백상인을 들고 신형을 날렸다. 침실,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는 백상인의 안색은 몹시 파리했다. "이를 어쩌지? 이분은 숨을 쉬지 않아." 백이유가 백상인을 진맥해 보고 초초해하며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나머지 여인 들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맥박은요?" 남궁려려가 급히 물었다. 백리유는 고개를 저었다. "점점 약해지고 있어" "아.....!" 남궁려려는 몸을 휘청거렸다. "맥박이 멎으면 죽는 것이 아닌가요?" 여몽향이 울먹이며 물었다. 백리유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여몽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왜.....?" 백리유는 탄식하며 대답했다. "이분은 본래 보통사람이라면 살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분이야. 비록 그 극고한 무예로 삶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결코 무예를 펼칠수는 없었어. 헌데 이 분은 그들을 향해 무예를 펼쳤고 이제는 보통 사람처럼 죽어가는 거야. " 여몽향은 절규했다. "왜 이분이 굳이 그 무예를 펼쳐야만 했죠?" "그들의 무예는 고강해. 비록 이분에게 일초에 모두 제거됐지만 우리들로선 상 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무림의 각대문파가 그토록 맥없이 당한 데에는 그만 한 까닭이 있는 거야. 비록 그자가 물러갔다고 해도 잠시뿐이겠지만, 이것이 이 분의 최선이었을 거야." 백리유의 대답은 온유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남궁려려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정말 이분은 다시 구할 수가 없나요?" 백리유가 고개를 저었다. "희세영약이 아닌 다음에는... 그것도 반드시 한시진 이내에 가져와야 해. 그렇 지 않으면 고목에 잎이 다시 돋지 않듯이 어쩔 수가 없게 돼." "만년금구의 내단은 이미 사용했다니 그런 영약을 불과 한시진 이내에 구할수 는 없겠군요." 남궁려려는 말끝에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문득 제갈청하가 차분하게 입을열었다.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 그 말에 나머지 세 여인은 눈이 번쩍 뜨여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뭐지, 동생?" 남궁려려가 급히 물었다. 제갈청하는 백리유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물었다. "만일, 지극순음지체의 여인이 있다면 치료가 되겠지요?" ".....?" 백리유는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얼른 입을 열어 대답했다. "물론이지! 헌데 그 지극순음지체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천상사신체만큼이나 나 기 어려운 거야. 그리고 처녀여야 하고, 더군다나 그녀는 이분에게... 헌신적이 어야해."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한 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어요." 백리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지? 그것으로 이미 이분은 치료가 된것이나 진배없는데." 남궁려려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전에도 왜 요노사란 언니가 이분을 그런 방법으로 치료했다고 했었잖아. 그때 그녀는 소녀청정대법을 연마했었다고 했지만, 지극순음지체의 여자라면 더 욱 효과가 있을 거야." 백리유는 고래를 끄덕였다. "그래. 지극순음지체는 그야말로 전설에나 전해져오는 순음의 여자를 말하는 거 야. 소녀청정대법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결코 지극순음지체에 당할 수는 없 지. 전설에 의하면 이 지극순음지체의 여자는 가장 신비롭다고 해." "정말 그렇겠네요." "헌데 뭐가 문제죠?" 여몽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갈청하가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만일 그녀가 이분을 치료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녀를 받아들여야 해." "아... 그렇군요. 그럼 이분의 부인은 모두 다섯이 되겠네요?" "그럼 어쩌지?" "어쩌기는? 지금 상황이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잖아." "하긴..... 그러나 만약 이분이 그 여자를 싫어한다면 어쩌죠?" "이분은 그럴리가 없어." 남궁려려와 여몽향은 서로 찧고 까불다가 남궁려려가 제갈청하를 보고 물었다. "헌데 대채 그녀는 누구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럼.....?" "손빈아." 제갈청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매우 큰 것이었다. 세 여인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한결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어쩐지 이상한 능력이 있는 것 같더라니....."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예지능력이 단순히 그것때문만은 아니야." "그래도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요." "하긴 그래. 조부의 그 예지능력이 손자인 손범에게는 이어지지 않고, 오직 그 녀에게만 이어졌으니 그 지극순음지체와 관계가 있겠지." 제갈청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려려가 백리유에게 물었다. "정말 그 아이가 지극순음지체가 맞나요? 하매도 잘 알겠지만 아무래도 언니가 더 정확할 것이 아니에요?" 백리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아." 남궁려려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제갈청하가 대답했다. "이미 예측하고 있을 거에요." "..... " "그녀는 아까 우리에게 죽림정사로 가서 반드시 삼십장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살필것과 그리하여 그 악마가 떠난 뒤에 이분을 구하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 런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 에요." 남궁려려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이 일에 찬성할까?" 제갈청하는 미소하며 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줄 아나요?" 남궁려려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바로..... 이분?" "그래요." 백리유가 나섰다. "그럼 이분은 그녀를 맞이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까?" 제갈청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거에요. 두군다나 그녀는 그와 사제지간도 아니잖아요." "그럼 대체 문제가 뭐지? " 남궁려려가 다시 물었다. 제갈청하는 차분히 말했다. "바로 우리들이에요." "우리들?"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기꺼이 그녀가 다섯째 부인이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에요." 백리유가 말했다. "하매! 그건 걱정마. 우리들 자매는 결코 바보가 아니야." 제갈청하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이제 그녀를 여러분에게 정식으로 소개시키겠어요." "아니, 그녀가 이미 이곳에 와있단 말인가? 하매!" 남궁려려의 질문에 미소로 응답하며 제갈청하는 한쪽의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은 바로 내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내실은 그녀들이 평소에 거주하는 곳이거늘..... "손동생, 이제 나와도 돼!" 제갈청하의 말이 떨어지자, 문득, 그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손빈아가 아닌가? 손빈아, 그녀는 지금 일신에 눈부시도록 희고 투명한 망사의를 입고 있었다. 만일 다른 여인이 그러한 차림새를 했다면 그녀는 다소 천박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손빈아의 모습은 한 점의 속기도 깃들지 않은 청정한 이슬, 그 자 체였다. 그녀의 안색은 다소 불그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망사의 속으로 그녀의 나신은 천신의 조각품처럼 완벽함을 자 랑하고 있었다. 다소 마른 듯 하면서도 탄력이 있고 풍만했으며, 그 나긋한 우 유빛 살결은 마치 양지유를 바른 듯 은은한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전신에서는 지순한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느낌은 백리유등이 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것으로, 그녀들은 이 손빈아가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되어버린양 착각이 일 정도였다. "어서 이리로 와!" 제갈청하의 말에 손빈아는 사뿐히 걸음을 옮겨 그녀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 고는 그녀들을 향해 날아갈 듯이 대례를 올리는 것이었다. "소녀가 언니들을 뵈어요!" 이에, 백리유는 그녀들을 대신하여 대표로 말했다. "나는 미처 동생이 이렇게 성숙했는지 몰랐어. 그래서 동생이 다섯째 부인이 되 는 것을 은근히 염려하고 있었는데, 이젠 안심이야! 동생은 그이의 다섯째 부인 이 될 자격이 충분해!" " 마와요. 큰언니!" 손빈아가 사례하자, 나머지 여인들도 미소하며 한 마디씩 했다. "손동생, 아니 빈매! 정말 아름다와! 같은 여자인 나도 반할 정도인데?" 남궁려려의 말에 여몽향도 입을 열었다. "축하해, 빈매! 사실 이 분의 부인이 된다는 건 축복이야!" 이때 제갈청하가 한 마디 했다. "사실 축하해줄 사람은 향매야. 아랫동생이 하나 생겼거든." 그말에, "호호, 그렇네요?" 여몽향을 비롯하여 나머지 여인들은 일순 백상인의 일도 잊고 까르르 웃었다. 그때, 손빈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것은 상관없지만 여러 언니들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아니, 이것은 조 건이라해도 좋아요. 그렇게 할수 없다면 나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이에 그녀들의 안색은 다소 굳어졌다. 백리유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대체 그게 무엇이지? 빈매!" "그것은....." 손빈아는 그녀들을 둘러보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분과의 혼례를 주선해 주는 일이에요. 물론 명목만 세워주시면 되어요." "그건 이미 약정된 일이 아닌가, 빈매!" 남궁려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손빈아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 혼례는 이 분을 치료하고 난 후, 그러니까 오늘밤에 행해져야 해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행해져야 한단 말이지?" 제갈청하의 말에 손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갈청하는 미소하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걱정마! 그 일에 관한 것은 내가 모두 책임지고 해줄께!" "고마와요." 손빈아는 비로소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맙긴, 우린 모두 한 자매나 마찬가진데 그런 수고를 못하겠어? 안그래요, 큰 언니?" "호호..... 그건 그래!" "호호호호호.....!" 이어, 그녀들은 백상인의 몸을 안쪽의 다른 침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 로 손빈아의 침실이었다. x x x 사라라락..... 여인이 옷을 벗는다. 그 광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다. 더욱이 그 여인 이 경국지색의 절색가녀로서 처녀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나, 정작 그 아름 다움을 보아줄 사람은 없었다. 적요한 실내, 실내는 깨끗하고 화사하며 은은한 처녀의 향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눈부시도록 흰 백색비단천이 깔린 침상 위, 그곳에는 백상인이 이미 알몸이 된 채 혼절한 채로 누워 있었다. 파괴는 일종의 아픔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오히려 행 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빈아는 눅눅하게 스며드는 슬품 을 느꼈다. 백상인의 몸은 점차 파리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체온이 식어가기 시작한 것이 다. 그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되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되살리 기 위해 그녀는 희생의 밑거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처녀로서의 수치감은 필요없으며, 첫날밤 누구나 갖게되는 조금은 두려운 듯한 흥분의 기쁨을 그녀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 이것은 단지 치료이며, 그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사랑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그녀는 그 슬품을 애써 자제했다. 사라락..... 투명한 망사의는 쉽게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어, 젖가리개와 작은 고 의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자, 그녀는 완전한 나신이 되었다. 아..... 아무리 의무라고 해도 그녀는 역시 순결한 처녀인 것이다. 수밀도 같은 두 개의 융기 위에 빨간 앵두는 소스라쳐 고개를 들고, 도발적으로 풍염한 두 개의 둔부 사이에 그 은밀한 숲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녀의 목 덜미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손빈아는 한숨을 나직하게 불어낸 후, 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백상인의 육신은 여전히 훌륭했다. 그것은 마 치 영원히 변치 않을 신상처럼 여겨졌다. 육 년 전, 손가구에서 처음 만난 이후, 그녀는 이 사람을 그 얼마나 사모해 왔던가? 그 열 정은 참으려고 할 수록 더욱 커지고, 숨기려고 할 수록 더욱 드러났으며, 마침 내는 그녀에게 하나의 병이 되기까지 했었다. 백상인은 마치 잠자는 듯 누워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이렇듯 온유롭다. 비록 소리내어 파안대소를 터뜨리지는 않으나, 가만히 미소짓는 그 얼굴은 더욱 신뢰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용하고 드넓은 그의 품 속..... 손빈아는 그에게로 향하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재확인했다. 그녀는 결코 후회하 지 않기로 결심했다. 설령 그녀가 이번 치료에서 목숨을 잃게될 지라도..... 이것이 사랑의 힘이다. 손빈아는 슬며시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나신을 포개어 갔 다. 몸의 각부분이 서로 닿게되자, 그녀의 전신은 말할수 없이 작은 경련을 무 수히 일으켰다. 그러다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과 그의 몸이 가 볍게 마찰될 때마다 거기에서 욕정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가져가 순음의 진기를 그에게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공력은 사실상 그리 큰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백상인의 각부분이 서서히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것은 바로 지극순음지기의 힘이었다. 그녀의 순음지기가 들어오자, 백상인의 체내에서는 그와 반대격인 극양한 기운 이 생기면서 순음지기와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한 충돌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 부조화의 산물로 갑자기 거센 욕정이 그의 내부에서 치솟았다. 그때는 이미 손빈아의 나신도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비록 정신을 바짝 차 리고 진기를 주입시킨다고는 하나, 그녀의 마음은 온통 구름을 타고 있는 듯 황 홀경을 해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상인의 체내에서 생성된 욕념의 기운이 그녀의 체내로도 스며들자, 그녀의 안색은 똑같은 욕념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 다. 실로 이와 같은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과거, 요노사도 이와 비슷한 행위를 한적이 있으나, 그녀는 지극순음지체가 아 니었기에 소녀청정대법에 의한 진기를 일으켰고, 비록 백상인의 생명을 되살리 는 데에는 성공을 했으나, 그녀의 육신은 그 부자연스러움의 결과에 의해 소녀 청정대법이 깨짐은 물론 그녀의 육신전체까지 백골로 화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것이 곧 진리에 순응한 자는 존 재하고 역행한 자는 망한다는 말이 아닐까? 서로의 욕념이 최고조에 이르자, 백상인은 무의식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리고는 자세를 달리하여 손빈아의 나신을 내리눌렀다. 손빈아의 우유빛 나신 역 시 조금도 저항하는 빛이 없이 아래에서 그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너무도 뜨거운 서로의 열기속에서 그녀 역시 완전한 무아지경이었다. 그리고 다 음 순간, 그녀는 아찔한 파과의 충격을 느꼈다. 그 고통은 일시 그녀의 정신을 해집고 모든 의식이 들고일어나게 만들었으나, 그것은 역시 잠시 뿐이었다. 현 재 그와 그녀는 똑같이 세상에서 가장 극랄한 춘약에 중독된 것과 똑같은 상황 에 처해있기 때문이었다. 무아지경, 그들은 그순간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은 물론 주변의 그 모든 것들도 잊었다. 그 들은 서로 미친 듯이 격렬하게 탐했다. 침대는 부서져나갈 듯 흔들리고, 손빈아 는 터져오르는 교성을 마구 질러댔다. 흡사 갓잡아올린 물고기처럼 그녀는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계속해서 흔들렸다. "아학, 학.....!" 무아지경 속에서 극렬한 괘락이 무섭게 그녀를 엄습했다. 손빈아는 터져나가는 괘락의 정점, 태양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태양마저도 일순 산산 이 터져나갔다. 그 일겁 같기도 하고 일수유같기도 한 순간, 손빈아는 의식이 하얗게 흐려짐을 느꼈다. "아아아아악.....!" 그녀는 흡사 단말마의 비명 같은 신음성을 내질렀다. 만일 그녀의 침실에 다소 의 방음장치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의아해 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백상인은 의식이 깨어났다. 먼저 느낀 것은 몸이 다소 가뿐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정도면 무예는 펼칠 수 가 없더라도 보통 사람처럼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으리라. 그리고, 곧 숨이 막힐 듯한 처녀의 향긋한 향취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그가 전 에 겪어보지 못했던 강렬한 방향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실내의 구조는 결코 그의 침실과 같지 않았다. 그는 이곳이 손 빈아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더군다나 그는 알몸..... 백상인은 벌떡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과연 생각대로 몸은 매우 좋아져 있었 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침상 위 그의 옆자리, 새하얀 백색의 비단천 위에 선명하게 수놓아진 붉은 앵 혈,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쳐녀지신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면, 이곳은 손빈아의 침실이니 필경 그녀의 처녀지신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백 상인은 이미 그녀가 지극순음지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손빈아는 자신의 지극순음지체를 이용하여 자신을 구했고, 그로인해 지금 그의 몸이 이토록 매우 좋아진 것이리라. 이러한 일련의 추축은 실로 어렵지 않았다. " 아.....! " 백상인은 나직이 탄식을 터뜨렸다. 문득, 그의 노리에 과거 손노인의 음성이 떠 오른 것은 그때였다. --- 손자와 손녀를 거두어 귀인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그것이 그들의 복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손빈아의 모습은 이미 실내에 없었다. 아마 지금쯤 시각이 자정을 앞에 두고 있으리라. 백상인은 우선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손 빈아의 욕실은 매우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이미 예 측이라도 한 듯 적당한 온도의 물이 알맞게 데워져 있었다. 탕 속에는 향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침상에서 맡았던 손빈아의 냄새였 다. 아마 그녀처럼 몸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것은 그녀가 지극순음지체의 여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될 그는 사실 행복한 것이었다. 백상인은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가볍게 몸 을 씻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어, 침실의 한쪽에 걸린 옷을 입고나자, 문득,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둥이! 잘 잤나요?" 그녀는 바로 제갈청하였다. 예쁘게 눈을 흘기는 그 모습에 백상인은 문득 더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일은 그녀가 손수 나서서 시행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명한 부인이 있다는 것은 그의 복이었다. 그래놓고서 그녀는 그를 보고서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무슨 소리요? 여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백상인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옷이오?" 그녀는 손에 한벌의 예복을 들고 들어왔던 것이다. "바로 당신이 삼 년 전, 혼인식 때 입었던 옷이에요. 기억이 안나세요?" "그런건 아니지만....." 백상인은 잠시 우물쭈물했다. 제갈청하는 영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예복을 지금 왜 가져왔느냐고요?" "그렇소." "호호호호호.....!" "....." 제갈청하는 한 차례 흐드러지게 웃고나서 백상인에게 옷을 던지며 말했다. "공연히 음흉떨지말고 어서 예복을 입고 밖으로 나와요.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까. " "으, 음....." 백상인은 얼떨결에 그 예복을 받아들며 안색이 붉어졌다. 그런 그에게, 홀연 제갈청하가 기척도 없이 다가들어 입맞춤을 했다. 쪽, "저는 당신이 다시 회복되어서 기뻐요. 그외의 사심은 하나도 없어요. 호호...." 짤랑짤랑한 교소를 남기며, 제갈청하는 다시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백상인을 그 모습을 잠시 넋을 잃은 듯 바라보다가 이윽고 예복을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x x x 대청, 그곳에는 이미 혼례식을 위한 준비가 완전히 구비되어 있었다. 백상인은 침실에 서 걸어나오다가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대청 안을 많은 사람들이 꽉 메우고 있었고, 그 중앙, 여러가지 음식이 차려진 하나의 커다란 상 앞에는 아 름답게 단장한 신부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손빈아였는데, 신부 의 예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백상인을 일순 다 른 절색가인을 대한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요?" 제갈청하가 그를 데려다가 신부의 맞은편에 서게 했다. 이어, 백리유가 성혼선 언문을 낭독하고, 신랑신부의 맞절..... 혼례식은 약식으로 간단하게 끝이 났다. 혼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백상인은 계속 멍청한 표정이었고, 손빈아는 수줍음을 못이겨하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있 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 기이한 혼례식은 끝이 났다. 곧이어, 많은 음식들이 들 어와서 대청에선 잔치가 벌어졌고, 모인 수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복을 진심 으로 축원해 주었다. 그리고 댜행인 것은 백상인의 네 부인둘중 아무도 질투의 기색을 나타내지 않 았다는 사실이었다. 혼례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화기애애하여 뜻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 시각이 자정을 넘었는지라, 그들은 바로 신방으로 향했다. 신방은 바로 백상인의 침실이었고, 그곳은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헌데, 그들이 마악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문득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바로 손범이었다. "범아, 무슨 일이지?" 백상인이 미소하며 묻자, 손범은 갑자기 그를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저의 누나를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이은혜는 이루 갚을 길이 없을 거에 요." "하하....." 백상인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상한 녀석이로구나! 내가 네 누나와 혼인한 것이 어째서 네게 은혜가 된다는 거지? 나는 단지 네 누나가 마음에 들어서 혼인한 것일 뿐이니라." 손범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부님은 과거 우리 손가구의 사람들을 모두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 라, 갈곳없는 우리에게 의지처가 되셨지요. 저는 제자로 삼고 그리고 누나는 이 렇게... 저는 이미 열다섯이고 또 바보가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사부님!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는 그의 말에 옆에서 보고있던 손빈아도 소리없이 눈시 울을 적셨다. 그러나, 백상인은 일순 안색을 굳히고 말했다. "범아! 너는 아직도 나의 제자가 틀림없겠지?" "예....." 백상인은 준엄하게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스승과 아버지는 같다고 하였느니라. 따라서 아버지에게 은혜를 말하 지 않듯이 스승에게도 은혜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구태여 내게 은혜운운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없는 짓이냐? 너는 나의 제자이다. 이 말을 항 상 명심하길 바란다. 알겠느나?" 손범은 눈물을 그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예." "그럼 어서 방으로 가서 자거라. 설마 이 사부의 신혼첫날밤을 망치려 는 것은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사부님!" 손범은 절을 한 번 한뒤 물러갔다. 그가 물러가고 나자, 백상인은 손빈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빈아! 범아는 정말 훌륭한 재목감이야. 장차 무림을 걸머지고 나갈 인재가 될 것이오." 손빈아는 눈물을 훔치고 만면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녀는 곧 안면을 새침하게 굳히며 말했다. "아직도 빈아인가요? 이제는 빈매라고 불러주세요!" 백상인을 눈을 휘둥그래 떴다. "빈매라고?" "그래요!" 손빈아는 대답하며 그의 무릎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러자, 백상인은 일순 매우 아픈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뛰었다. "아이쿠, 알았소 빈매! 내 귀여운 아가씨.... 내 그런 의미로 한 번 안아볼까?" 백상인은 아름다운 그녀의 몸을 덥썩 안아들었다. 헌데, 그때, "악....." 손빈아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그바람에 백상인은 침상 위에 그대로 나둥그라지고 말았다. 쿠당당..... 한순간에 어이없는 꼴을 당한 백상인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빈매?" "몰라요.....!" 웬일인지 손빈아의 안색은 홍당무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모르다니.....?" 백상인이 더욱 어이없어 하자, 손빈아는 겨우 소리죽여 말했다. "아까의 그것 때문에..... 나는 너무....." 말을 하면서 그녀는 은근히 자신의 하복부를 가리켰다. "핫핫핫.....!" 백상인은 그제야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첫순결을 파괴당한 그녀의 하복부는 얼마나 아프겠는 가? 실로 그를 갑작스럽게 떠밀어 낼만한 것이다. 백상인은 이제는 목덜미까지 붉어진 손빈아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나는....." 손빈아는 다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오늘 침상 아래에서 자겠어요. 당신은 침상위에서 주무세요!" "응? 그러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백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손빈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사실 당신은 범아보다도 훌륭한 아들을 원할텐데, 그리고 그 아들이 장차 정말 로 훌륭하게 되길 바랄텐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거죠? " "신혼첫날밤부터 따로 잔다면 그일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말이지. " "뭐라구요?" 손빈아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소리를 크게 질렀다. "난 그런 아들이 필요 없어요. 이미 언니들에게 많이 있는데....." 허나, 그녀의 그러한 모습도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백상인은 빙그레 웃었다. " 정말이오? 빈매! " 그가 이토록 정색을 하고 묻자, 손빈아는 내심 당황하여 안색을 붉혔다. "누가 전혀 필요없다고 했나요? 나는 그저 그렇게 빨리는 필요없다고 말한 것 뿐이에요." "그렇다면 오늘은?" "따로 자요." "오늘은 그래도 명색이 신혼첫날밤인데?" "그래도 안되요! 당신은 나를 죽일 셈인가요?" "....." 백상인은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결단코 신혼첫날밤에 따로 잘수는 없 는 노릇이다. 그는 계속 설득하여 함께 침상 위에서 자는 것에 성공했다. 허나, 정말이지 그는 그저 함께 자기만 했을 뿐 더이상의 행동은 결코 할 수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깜찍스럽고 아름다운 신부를 껴안고 하룻밤을 지새 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이..... 다음날 아침. 백상인이 대청으로 나갔을 때에는 이미 한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 에도 그는 무맹의 맹주인 남궁벽이었다. "그간 잘 있었는가? 신수가 더 나아보이는군." 백상인은 가볍게 놀라며 그를 반겼다. "아니, 장인어른께서 이렇게 웬일이십니까?" "장인이 사위집에 왔기로서니 그게 무슨 잘못인가?" "그런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아침 일찍이 오시다니 좀 뜻밖입니다." "하하....." 남궁벽은 웃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자네들이 보고싶기에 왔지. 헌데 자네는 어제 새부인을 하나 더 맞았다면서? 자네는 아주 여복이 많군!" 백상인은 안색을 붉혔다. "면구스럽습니다." 남궁벽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면구스럽다니? 이건 오히려 축하해야할 일이지. 영웅이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것은 흉이 될수가 없네. 오히려 자랑이지!" "고맙습니다." "허허, 고맙기는...." 남궁벽이 고개를 가로젓자, 백상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 려매를 불러올까요? " "아니 괜찮네." "....." 남궁벽은 안색이 문득 신중해지더니 말했다. "사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한가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세.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또 한가지 부탁도 할겸." "말씀하십시오!" 백상인 역시 안색을 바로 했다. 정녕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남궁벽이 그를 일부러 찾아왔다는 것은 결코 보통의 일일리가 없는 것이다. 남궁벽은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도 이미 무림의 현정새를 알고 있겠지. 실은, 어제저녁에 이것이 내게 전 달되었네." 말과 더불어 남궁벽은 품속에서 작게 말은 양피지 한장을 꺼내들었다. 백상인은 그 양피지를 받아들고 즉시 펼쳐보았다. --- 중원인들에게 고함 ! 사흘, 후, 그대들의 최강단체인 무맹에서 본인이 직접 심판을 내리겠노라. 만일 대항할 의사가 있는 중원인들은 이날 무맹에 모여 본인의 심판을 받으라.....! --- 악마성자. 백상인은 흠칫 놀랐다. "이것은 통첩장이 아닙니까?" 남궁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사흘 후라면 이제 겨우 이틀 남았을 텐데, 장인어른께선 그에 대한 준비가 계 십니까?" 남궁벽은 탄식하며 대답했다. "물론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리가 없지." 백상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한단 말입니까?" 남궁벽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모두 내가 모자란 탓이네. 허나 자네도 알다시피 그들에 무예는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것일세. 이것은 마치 중원의 거대한 운명인듯 하네." "....." 남궁벽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전혀 당하기만 하고 있지는 않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네. 또한 자네의 승낙을 받아야 할 일이고...." "그것은?" 남궁벽은 다시 말했다. "자네, 아직도 잠룡회를 기억하나?"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헌데 이미 해체된 상태라고 하던데?" 남궁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 "물론 외관상으로는 잠룡회는 당금의 무림에 존재하지 않네. 허나 말 그대로 그 것은 구름속에 숨었을 뿐이지.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네." "....." "나는 본래 그들을 과거 우리가 지옥도 공격에서 실패한 후 재기의 힘으로 이 용하려고 했었네. 그래서 겉으로는 잠룡회를 해체시킨것처럼 하고, 그들 모두를 다른 장소에 숨겨놓고 무예수련만 전념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네. 자네의 부인인 천상삼화를 내보낸 것은 세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함이었지." 잠룡회 --- 갑자기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듯한 의문이 여기에서 풀리는 순간이었다. 백상인 은 내심 감탄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회주는 현재 누구입니까?" 남궁벽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누구일것 같은가?" 백상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역시 저의 세 내자들이겠군요." 남궁벽은 웃으며 고래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녀들은 비록 이곳에서 자네의 부인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는 듯 하지 만 실은 암암리에 잠룡회의 인원들과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또한 무예 연마에 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일세."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런것도 같았습니다." "미안하네, 자네를 바보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네. 단지 삼년 전 지옥도의 일이 어느정도 마무리되자, 기왕에 시작한 것이라 고치지 않고 그냥 놔두었을 뿐이 네." 백상인은 담담히 미소했다. "괜찮습니다. 마음에 두고있지 않습니다." "고맙네. 내 그래서 말인데..... 이젠 자네가 그 회주직을 맡아줄 수 없겠나?"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말입니까?"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만일 자네가 잠룡회주가 된다면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수 있을 것이 고, 장래에 진정한 회천의 기회를 만들수가 있을 것일세. 이것이야말로 나의 간 절한 부탁일세. 들어주겠는가?"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룡회는 그녀들만으로도 잘 운영되어 나갈 것입니 다." 남궁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무공을 잃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이러는가? 나는 자네가 반드시 무예를 되찾으리라 믿네.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때를 기다릴 때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저의 무예를 내자들에게 거의 전수하였습니다. 그녀들은 내가 없더 라도 충분히 나의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그리고....." "....." "그 악마성자가 이끄는 악마교가 이곳에도 왔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있네. 려아는 잠룡회의 일때문에 항상 나와 연락을 취하곤 하지."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군요. 저는 최소한 한번의 광검을 펼칠 수 는 있습니다. 결코 옛날의 무예가 줄어든건 아니죠." 남궁벽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자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번 결전에 참가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도마와의 그때처럼....." "안되네!" 남궁벽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안됩니까?" 남궁벽은 침중하게 대답했다. "만일 그런다면 이번 격전에서 이기든 지든 자네는 죽고말걸세." "하하....." 백상인은 가볍게 파안대소했다. "무인으로서 일단 싸움에 임하게 되면 그 생사는 예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장인어른 께서는 자신의 따님이 과부 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남궁벽은 이미 백상인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장탄식을 토했다. "내 솔직히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이번 자네의 일은 무림에 있어 막대한 손실이 될걸세. 나는 자네에게 오늘 잘못온것 같으이." "아닙니다." 백상인은 웃으며 말했다. "비록 장인어른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도 저는 기필코 이사실을 알아내어서 무맹 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인어른의 잘못은 아닙니다." "할수 없군.....!" 남궁벽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호랑이는 결코 풀잎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잠시 잊었었지.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우리 한번 통쾌하게 싸워보세나, 사위!" "예, 장인어른!" 백상인과 남궁벽. 그들은 일순 두 손을 굳세게 마주잡았다. 그 가운데에는 진정 한 영웅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청이 온통 뜨겁도록 그들의 두눈이 불타오르 는 가운데..... x x x 다섯 부인들을 모아놓고 백상인이 자신의 의사를 말했을 때, 그녀들은 한결같이 내심 비통에 찬 표정을 했다. 특히, 혼인한지 겨우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 손빈 아는 쓰러질듯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코 울거나 만류하지를 않았다. 그것은 이미 백상인의 뜻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들은 그의 앞길에 어떤 기적적인 행운을 바랄 뿐이었다. "하루만 더 머물다 가시면 안되나요?" 여몽향의 애조에 찬 음성에,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 무맹까지의 길이 머니 지금 곧 출발해야 하겠소. 이후의 모든 일들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줄 것으로 믿소." "..... " 이어, 백상인은 손범을 불렀다. "너는 다른 문하생들과 함께 한눈팔지 말고 수련에 몰두하여라." "제가 무맹까지 사부님을 호송하면 안됩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마차 한대에 타고 무맹으로 향할 것이다."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상인은 무맹으로 향해 떠났다. 두두둑..... 평범하고 허름한 한대의 마차가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면 곧 눈물이 쏟아질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백상인은 그날 장강을 건너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리하여 이틀밤낮을 꼬박 달린 결과, 다음날 자정무렵 그는 무맹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무맹엔 이미 많은 정도의 기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멸문당한 무림각 파의 인물들이 모두 모여든 것이니, 이 무맹이야말로 사상 유래가 없는 철옹성 이 되었다고 할수 있었다. 그 어떤 존재라도 감히 넘볼 수가 없을 만큼..... 허나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와 같은 자들이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은연중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모든것이 끝장나버릴 것만 같은 내일은 오게되는 걸까? 인간과 악마와의 싸움. 정도와 마도와의 싸움은 그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 만약 중원이 이대로 무너진 다면...? 그것은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일은 정 말로 다가올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가능성이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백상인은 그들 모두와 간단하게 수인사를 교환한뒤 일단 침소에 들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일단 쉬어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x x x 다음날의 아침해는 밝았다. 이곳 대흥산은 동정호 부근과는 달리 안개가 끼지 않는다. 날씨는 정녕 구름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도 잔잔했다. 무맹에 있는 이곳은 산악지대라 가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니 허공을 날아다니 는 산새들과 더불어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그러나, 무맹의 사람들 그 누구도 평화로운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식사도 거른 채 연무장으로 모였다. 맹주인 남궁벽은 모든 인원들을 약간의 경비만 남겨두고 연무장으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어차피 아무 리 방어를 해도 소용이 없다면 차라리 한판승부를 해보자는 결의였다. 연무장에 늘어선 인원은 어림잡아 오만명을 헤아렸다. 그들이야말로 당금의 중 원무림의 중추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늘어섰지만 장 내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뽀뽀로로로롱.....! 무심한 산새들의 울음소리만이 허공 가득 울려퍼지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러한 시간은 마치 일겁이나 되는듯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지루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흡사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석상이 되어가는듯 했다. 드디어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둥, 둥, 둥.....! 바로 그때였다. "으흐흐흐흐흐.....!" 연무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땅속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듯한 그 음산 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마치 그 음성은 지옥에서 들려오는듯 공포스러웠 다. 그 소리를 듣고 아무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는 저마다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짐을 의식해야했다. 이윽고, 우우우우우..... 기이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서쪽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니, 일단의 검 은 구름이 쾌속하게 이쪽으로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연무장에 모인 군웅들은 한결같이 눈을 부릅떴다. 검은 구름. 그것은 알고보니 모두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대략 백오십여명을 헤아리는 흑의 인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반박귀진의 경지에 도달하여 어풍비행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저렇듯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닐수 있는 무예는 어풍비행술 이상일 것이므로, 군웅들은 내심 암담함을 느꼈다. 그제야 그들은 무림의 그 유수한 명문정파들이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 졌는지, 그 이유를 알수 있을것 같았다. 무맹에서 어풍비행술을 펼칠수 있는 사람은 십이원로등을 포함하여 겨우 스무 명 안팎이다. 아무리 무맹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이렇게 되면 이는 마치 어른과 아이들이 싸우는 꼴이 아니겠는가? 정말이지, 어린아이들로선 저렇게 당당한 어 른을 이길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웅들이 절망으로 잠시 웅성거리는 사이에, 스스스스슷.....! 백오십을 헤아리는 흑의인들은 군웅들의 앞 연무장에 내려섰다. 그들의 흑의 가 슴 부위에는 한결같이 각각 다른 무기를 든 붉은 악마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 는 것으로 보아 필시 검령자가 말한 바 있던 악령비자들이 틀림없었다. 백상인에게 십이검령비자가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숫자는 정확히 백 서른두명 이었으며, 그들의 가슴팎에 그려진 병기들은 검을 제외하고 도, 부, 편, 극, 곤, 구, 신 등 실로 가지각색이었다. 연무장의 군웅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을 지켰지만, 백서른 두명의 악령비자들 또한 시체처럼 지면에 내려선채 아무런 말 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서쪽하늘에서 또다시 일단의 흑운이 물려들더 니 악령비자들 앞에 내려섰다. 스슷..... 모두 열두 명의 흑의노인들. 가슴팎에 하나같이 황금빛 악마상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십이악령들이 틀림없었다. 그들 가운데 분명 백상인에게 쫓 겨 달아난 검령자도 끼어있었다. 헌데, 그들 역시 지면에 녀려선 다음 아무런 말도 없이 공손히 허리를 굽힌 채 서있기만 했다. 이때, "으흐흐흐흐흐흐!" 아까 들렸던 그 음산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리더니, 마치 환각처럼 그 전면에 사 람들이 늘어났다. 모두 육인. 군웅들은 한결같이 시선을 모았다. 그들중 다섯 사람들의 인상착의는 매우 기이 했다. 홍황청녹자. 이 다섯가지 색깔로 옷을 해입은 그들은 그 용모마저도 옷색깔과 조금도 다르 지 않고 있었다. 다만,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의 나이를 짐작할수 없을 정도로 안색이 불그레하며 동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외에 그들의 체구는 다소 왜소한 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군웅들은 저마다 이 한사람에게 시선을 모았으니, 일순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아 함을 금치못했다. 백의청년. 그는 다름 아닌 약관의 지극히 준수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 기도는 다소 신비롭 게 느껴지나, 기실 그 외모는 평범하기 그지없고 준수함으로 따지자면 백상인에 게 버금갈 정도로 잘생겼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니, 어찌보면 백상인보다 더욱 잘생긴것 같은 인상을 풍겼는데, 그것은 알고 보니 그의 머리가 온통 백발이기 때문이었다. 그 눈부시도록 새하얀 백발은 그 의 용모가 매우 신비롭게 느껴지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사실 매우 희안 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어떤 공포를 느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의 안면에 어려있는 온화한 미소는 도무지 그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헌데, 그가 나타나자 마자, "성자님을 뵈옵니다 ----- !" 십이악령을 비롯한 백여명의 악령비자들은 일순간 그를 향해 오체복지하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함께온 그 다섯괴인들도 한결같이 허리를 깊숙히 숙여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인간이 할수 있는 최상의 예우였다. "그대들은 그만 일어나라!" 백의백발청년은 옥같이 투명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가볍게 손 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감사하옵니다. 성자시여!-----" 백여명의 흑의인들은 다시한번 경건하게 소리친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광경 에 군웅들은 일순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비로소 그 백발백의청년이 바로 악마 성자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허나, 불과 약관의 나이에 그가 악마성자일 수가 있을까? 군웅들은 한결같이 의 혹속에서 저마다 경악을 거듭했다. 허나,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게속 생각에만 잠겨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백의백발청년은 슬며시 시선을 군웅들 쪽으로 돌 리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중 누가 맹주인가?" 일순 어떤 군웅들은 발작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오만의 군웅들을 향해 너희들이라고 대뜸 하대한다는 것은 실로 얼토 당토 않는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때, 군웅들 가운데에서 남궁벽 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맹주이오. 당신이 바로 악마성자이오?" 남궁벽의 말은 비교적 공손했다. 비록 상대로부터 터무니없는 하대를 들었지만 그는 무림의 안위를 위해 가능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백의백발청년의 다음 말은 그의 그러한 의도를 여지없이 묵살하는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악마성자이다. 헌데 너는 듣기보다 더욱 별볼일없는 녀석이 로구나!" 그말에, 일순 군웅들중에서 참지 못하고 노화를 터뜨리며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 었다. "건방진 애송이놈! 감히 맹주께 그따위 언사를 쓰다니 ----!" 혼원벽력수 헌원백. 무맹내에서도 덩치가 크기로 소문난 그였다. 그는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면서 악 마성자를 향해 덮쳐들었다. 무맹 오당의 백호당주의 신분인지라 그의 무예가 대 단한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파츠츠츠츳.....! 그의 거구가 허공에서 쏘아져내려오기 전에 파도같은 강기가 먼저 덮쳐왔다. 그 가 이토록 앞뒤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화가난 이유는 자신이 가주로 있는 육대 세가중 하나인 헌원세가의 멸문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차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화가 극에 오른 공세는 정말로 악마성자를 죽여버릴듯이 다가들었다. 그런데, 악마성자는 전혀 그일에 신경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제 삼자의 입장 에서 관조하듯 그 다가드는 공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신, "성자님께 무례한 자는 죽는다!" 짤막한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인영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슥, 그 인 영이 펼친 신법의 빠르기란 이루 헤아릴수가 없는 것이어서 맹주인 남궁벽도 일순 크게 흠칫했다. 그리고 때는 이미 늦었다. 우우웅..... 흑영의 품속에서 거의 동시에 한줄기 핏빛 검강이 무려 일장이나 뻗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지심마화처럼 공포스런 빛깔을 뿌리고 있었는데, "크왁 ---!" 찰나지간, 그 공포스런 검강은 그대로 헌원백의 몸통을 꿰뚫었다. 좌에서 우로, 너무도 간단한 그 일초식에 헌원백의 몸통은 두개로 분리되어 선혈을 사방에 뿌려냈다. 쿵! 쿠당당..... 분리된 상체가 먼저 땅바닥에 나뒹굴자, 나머지 하체가 그뒤를 따랐다. 사람들 은 이 거짓말 같은 사태에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헌원백은 그래도 무맹의 일류고수이다. 그런 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런 변변치않을 일개 흑의인에게 단 일초에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당한단 말인가? "검령자!" 악마성자가 돌연 눈썹을 찌푸리며 검령자를 불러세웠던 것이다. "예, 성자님!" 검령자는 급히 몸을 돌리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악마성자는 그에게 무심한 어조 로 말했다. "내가 네게 이런 명령을 내린 일이 있던가?" "예, 없었습니다." 검령자는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를 향해 악마성자는 다시 물었다. "아니면 내가 그자에게 맞아죽으리라고 생각했었느냐?" "아, 아닙니다." 검령자는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에게 악마성자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나의 일에 간섭을 했단 말인가? 나는 본래 이들에게 나의 법을 들려주려고 했건만 너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 았다.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죽, 죽여주십시오!" 검령자는 전신을 덜덜 떨며 그자리에서 오체복지했다. 이미 잿빛이 되어버린 그 의 안색은 그가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검령자는 악마성자의 신성유지를 위해 헌신적으로 나섰을 뿐이며, 그의 신 분이나 무예로 보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악마성자의 추궁은 다소 지나친 것이며, 군웅들은 악마성자가 곧 그를 용서해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헌데, 악마성자는 무심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말이 맞다.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에, 검령자도 일순 경악한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일순 놀라움도 잊어버 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악마성자에게 물었다. "저..... 정말로 저를?" 악마성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죽어라!" "아.....!" 검령자는 그제야 이 믿을수 없는 현실을 자각한 듯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며 식 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전신을 비맞은 참세처럼 덜덜 떨더니 홀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 나는 죽을 수 없어 ---!" 발악적인 고함이 터진 순간, 검령자의 신형은 눈에 안보이는 속도로 극쾌하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슷..... 어찌나 그 속도가 빠른지 군웅들의 눈에는 그저 희끗한 선만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검령자의 발악적인 도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 매우 힘겹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허공 백장 위에서 분수처럼 터져나가는 화려한 피의 폭발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빛 의 폭발이었다. 한순간 터져나간 핏물등은 곧 허공에 씻은듯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므로, 이러한 광경에 같은 흑의인들은 일제히 공포에 젖은 표정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표정이었다. 허나, 사실 군웅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특히 최고의 고수에 속하는 남궁벽의 경우에는 더더욱..... 검령자와 같은 고수를 마치 장난처럼 쉽게 죽이는 그의 무예는 대체 어느정도 인가? 더욱이 기이한 것은 아무도 그가 무예를 펄치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악마성자는 적과의 일전을 앞에 두고 실로 사소한 문제때문에 자신의 중요한 수하를 죽여버리는 우를 범했는데, 그가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간과할 정도로 어리석을리는 없고, 그 말은 곧 앞의 군웅들은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다 는 말이 아니겠는가? 양측의 사람들이 오직 악마성자 한사람 때문에 공포로 몸이 굳어져 있을 때, 돌 연 악마성자는 남궁벽의 뒤쪽을 한차례 유심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뜻밖에도 그의 어조는 약간 들뜬 것같았다. 그 속에는 놀라움을 억제한 기색도 다분히 깃들어 있었다. 굳어있던 사람들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여 시선을 그쪽 으로 모았다. 대체 악마성자같은 사람이 놀라움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나는 나요." 뜻밖에도 상대방은 그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여기에 또 한번 놀랐다. 악마성 자는 그 대답에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다시 한번 은근하게 물었던 것이다. "아이야! 나는 너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헌데, 상대방은 그런데도 계속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저 중원의 일개 무부일 뿐이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전혀 다르 지 않은, 헌데 굳이 내 이름을 당신이 알 필요가 어디에 있겠소?" 어이없게도, 악마성자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핫핫핫....." 그는 한차례 파안대소를 터뜨리더니 유쾌한 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겠다. 너는 바로 나의 제자 도마를 죽인 그 백상인 이란 아이가 아니냐?" 상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나를 백상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악마성자는 즐거운 듯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찍이 천축을 비롯하여 천하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지만 실로 너같은 인재를 본적이 없다. 전설의 전륜성제상의 인재, 세상에 너같은 인재가 어디 또 있겠느냐?" 상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내가 백상인이라고한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터무니없이 입이 벌어져있 는거요?" 그 말에, 악마성자는 다소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여태 남에게 어떠한 욕도 듣 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안색을 펴면서 웃으며 말했다. "본래 내게는 오직 한명의 제자가 있었을 뿐인데 그가 바로 네가 죽인 도마이 다. 그런데 사실 그는 내 마음에 흡족한 제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 고 해도 나는 별반 섭섭하지 않았다. 헌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너같은 인 재를 만났으니 이 아니 기쁜 일이냐? 너는 빨리 내게 구배지례를 올리고 제자 가 되어라. 나는 지금 솔직히 하늘을 얻은 기분이니라." "하하하하.....!" 백상인은 문득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에, 악마성자는 안색을 굳히고 물었다. "너는 왜 웃는 것이냐?" 백상인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비웃는 것이오." 악마성자는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비웃다니? 어떠한 이유에서 비웃었느냐?" 백상인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면서 말했다. "당신은 우리 중원인들을 무수히 학살한 흉마이오. 그리고 나는 동족들을 위해 당신과 싸우려는 이마당에 제자가 되라니, 어찌 비웃음이 나오지 않겠소? 이를 두고 중원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시오?" "....."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고 하는 것이오." 악마성자는 순식간에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여러번 바뀌었다. 그러다가, 그는 겨 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말했다. "나는 여태 그러한 모욕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너는 쓸데없이 나를 화나게 하지마라. 너와 나는 사제지간으로서 둘도 없는 천생연분이거늘 왜 이렇게 고집 을 부리느냐?" "....." 백상인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악마성자는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만일 이렇게 될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 중원을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에 비하면 그까짓 중원쯤은 아무래도 좋다. 네가 지금 나의 제자가 된다면 곧장 아 무 피해도 입히지 않고 이대로 물러갈 것을 약속하겠다."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되오." "그건 어째서냐?" "그것은....." 악마성자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내가 흉마이기 때문이냐? 흐흐, 그것은 이른바 잘못된 선입관이라고 하는 것이 다. 너희들이 우리를 흉적으로 보는 것처럼 우리 천축인들도 중원인들을 흉적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검령자를 이유도 없이 죽였다고 생각하는가 본 데....." "그는 본래 너의 성수장에 들어가 너를 생포해오라고 내가 분명히 지시했는데 도 그는 자신의 수하들만 희생시키고 목숨이 아까와서 혼자 도망쳤으며 그 잘 못을 은폐하기 위해서 은근히 나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 다가 그는 자신의 행위가 나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아부근성은 모든 사람의 심성을 좀먹는 것이다. 이래 도 내가 이유없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 백상인은 할 말을 잊고 묵묵했다. 사실 따지고보니 악마성자의 말은 매우 일리가 있었다.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 을 뿐만 아니라, 지금 악마성자를 상대할 인물이 없는만큼 차라리 그가 제자가 되어 이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설사 그들이 흉적의 무리라 고 해도, 만인을 위해 내가 지옥엔들 못가랴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만일, 백상인이 악마성자의 제자가 된다면 차후의 천하는 어쩌면 백상인의 의도 대로 될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백상인이 이토록 주저하고 있을 때, 군웅들 사아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안돼! 아미 그들에게 죽은 수만의 원혼들을 생각한다면 허락해선 안되네." 주선개, 십이원로의 한사람으로 유난히 협의지심이 툭츨하다고 알려진 열혈의 노인이었다. 그 말에 악마성자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일이 마악 잘되려는 찰나 그가 방해를 하자 정말로 벼락같이 화가 난것이다. "늙은이! 너는 누구냐?" "너같은 애송이는 알수 없는 사람이다." 주선개는 악마성자의 호통에 지지 않고 호통으로 맞섰다. 악마성자의 얼굴은 금 세 흉하게 일그러졌다. 허나 그는 그래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지 노화를 꾹 눌러참고 말했다. "중원이든 천축이든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원한만을 따진다면 중원과 천축은 영원히 화합 할수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주선개의 성격은 다소 급하고도 외골수적인 편이었다. 한번 노화가 충천 한 그의 마음에 악마성자의 말이 먹혀들리가 없었다. "좋다! 화합할 수 없다면 싸우면 될것이 아닌가? 싸우자. 이 애송아!" 소리침과 동시에, 주선개는 발작적으로 악마성자를 향해 신형을 덮쳐갔다. 이때, 스슷.....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남궁벽이었다. "잠깐만 참으십시오, 선배님!" 남궁벽에 의해 저지를 당하자 주선개는 일시 음찔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무모함을 깨닫고 안색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는 남궁벽에게 한마디 하 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네는 설마 저 백공자가 저 흉마의 제자가 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겠 지?" "물론입니다." 미소하며 대꾸한 뒤, 남궁벽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배님의 그 애송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선개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이 어째서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맹주도 보다시피 저 흉적은 나이가 고 작..." "아닙니다." 남궁벽은 그말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은 반노환동이란 말을 아십니까?" "반노환동? 반박귀진이란 말은 흔한 편이지만... 그건 전설에서나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설마....." 주선개는 점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의 무예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여 수명마 저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불사지체는 아니더라도 불노지경에는 도달해 있다고 봅니다." 주선개는 아연해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이때, 악마성자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 나이는 삼백 서른 둘이다." "뭐, 뭐라고.....?" 그 말에, 주선개뿐만 아니라 장내의 군둥들은 다같이 크게 놀랐다. 삼백 서른 두살이나 먹은 노인이 이제 겨우 약관의 청년으로 보일 수가 있다니, 이게 정말 사실일까? 하기야, 그의 불가사의한 무예성취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해 야할 것이다. 악마성자의 그 하얀 머리는 그 사실을 입증해 주는 좋은 증거였 다. 그렇다면 주선개가 애송이 운운한 것은 실로 어불성설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네는 저자의 말을 믿나? 사람이 정말 저토록이나 오래도록 살수가 있느냐 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악마성자가 남궁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자네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겠네. 자네는 그래도 쓸만은 하군." "과찬입니다." 남궁벽은 짐짓 포권한 뒤 말했다. "실례지만 당신이 중원에 온 까닭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악마성자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그건 어렵지 않지." "....." "나는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중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도를 전파시키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실 크게 감읍해야 할 것이다." 남궁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왜 이런 학살을 자행하는 것입니까?" 악마성자는 차갑게 대꾸했다. "대의를 위해서 소의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까짓 몇만명의 목숨쯤은 앞으로 교화를 받을 수천만 명에 비하면 적은 숫자인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이땅위에 나의 교화를 위한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죽어서도 만족해할 것이다." 남궁벽은 안색이 굳어졌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군웅들을 모조리 처치할 생각이시오?" "물론이다. 필요하다면..... 허나." 악마성자는 백상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만일 그가 내 제자가 된다면 이 시각 이후 중원은 평온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들이 죽고 살고는 모두 이 아이의 결정에 달려있다." 남궁벽은 할 말을 잊었다. 그때, "깔깔깔....." 군웅들 중 한 사람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중원엔 인재가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나는 비록 남자가 아니지만 절대로 그 일엔 따를수가 없다. 나는 비록 여자지만 목숨을 아깝게 여기는 소인배가 아니 야 ---!" 광한신모, 십이원로의 한 사람인 그녀였다. 일순 미친 사람처럼 소리친 그녀는 곧바로 악 마성자를 향해 신형을 날려왔다. 남궁벽은 그녀를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을 뿐만 아니라, 그 흉 흉한 기세는 도무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노화가 충천한 신형 은 십장 밖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번개처럼 악마성자를 향해 육탄돌격을 감행해 왔다. 그때 악마성자는 안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화령!" 그 말이 떨어지자, 여태까지 악마성자의 옆에서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하던 오대 호법존자 중 홍의노인 화령존자가 그 즉시 신형을 움직였다. 슷! 그 빠르기를 무어라고 설명할까? 악마성자의 말이 떨어지고, 화령존자가 신형을 움직이는가 싶은 순간 그는 이미 광한신모의 면전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 ----- 쩍 ----- ! 한줄기 눈부신 빛이 일었다. 그 빛은 백상인의 광검과 비슷했으나, 그 빛깔은 짙붉은 색이었다. 그리고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일순 무서운 열기가 휩쓰는 것 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지극히 짧았고, 아무도 그 열기에 상해를 입은 사 람은 없었다. 다만, "크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속에서 시뻘건 불덩이와 함께 녹아들어가는 광한신모를 목격할 수가 있을 뿐이었다. 화르르륵..... 광한신모의 전신은 삽시간에 녹아들더니 종래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 었다. 이것을 바라본 군웅들은 경악과 분노에 눈을 부릅떴다. 광한신모는 이미 음한기공을 그 정수까지 터득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 어느것도 그녀를 얼리거나 녹일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순간에 장난 처럼 그녀를 녹여버렸다는 것은 실로 공포스런 사실이 아닐수 없었다. 겨우 오대호법존자의 하나인 그가 이러할진대, 나머지 네 사람의 위력과 악마성 자의 무예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특히, 백상인의 놀라움은 가장 지대했다. 그는 그 화령존자의 무예가 자신의 광 검보다 한단계 위인 도검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도검 중에서도 오행의 다섯성질중 하나인 화령도검일 것이다. 여기에서, 백상인은 자신이 악마성자와 동귀어진하려던 최초의 계획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고 내심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로소 그는 악마성 자가 검령자를 그토록 쉽게 처치해버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검령자와 화령존자의 무예는 실로 천지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검령자와 같은 무 리가 아무리 많아도 필요없으며, 또 전혀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저 흑의인들이 그토록 공포에 젖은 이유는 바로 그러한 것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대체 악마성자의 무예는 어떤 경지에 올라있을까? 이때, 화령존자의 무예에 놀라 일시 몸이 굳어버린 군둥들을 바라보며 악마성자가 말했다. "보라! 너희들이 모두 덤벼도 저 화령존자의 무예조차도 당할수 없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런데, 악마성자의 이말은 군웅들의 정신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분 노심까지 일깨웠다. 돌연,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러분! 저 개만도 못한 흉적들을 쳐부습시 다! 천금상인이 크게 부르짖은 것을 필두로, "그렇소. 우리는 악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중원의 혼을 보여줍시다 ---!" "그들에게 중원의 무서움을 보여줍시다! 죽음으로서 중원을 지킵시다 ---!" "죽여랏 ---!" 매화검옹, 적양자, 만독옹등이 불길같이 들고 일어나 소리치니 장내는 일순 아 수라장이 되었다. "죽여랏 ---!" "흉적을 죽여버려랏 ---!" 마침내 연무장에 가득찬 궁웅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림의 선배 고인인 광한신모의 말과 그 죽음에 크게 자극을 받은 것이다. "자, 중원에도 인재가 있다는 걸 보여줍시다! 비록 죽어도 우리가 사내라 는 것을 보여줍시다 ---!" "와아 ---!" 본래 여기에 모여들 때부터 각오했었던 그들이다. 이미 친지와 동료를 읽은 슬 품에 원한이 골수까지 맺혔던 그들이었다. 일단 분노의 불길이 당겨지자, 그들 은 죽음마저도 불사하고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불과 백여 명의 사람들을 향해 오만여 명의 사람들이 밀려드는 광경은 마치 거 대한 해일처럼 무시무시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십이원로들 중에서도 만공성 승과 자허상인, 소요성수등은 내심 안색을 깊게 찌푸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자살행위인 것이다. 잘못하면 오 늘 이 오만의 인원이 깡그리 도살을 당할지도 모르며, 그로 인해 중원의 맥은 자칫 끊어질지도 모른다. 사문과 가문의 원한도 중요하지만 좀더 안목을 넓게 볼 필요가 있었다. 허나 이 제 그들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한번 원한이 터진 그들을 설사 신이라 해도 되돌릴 수는 없으리라. "아미타불....." "무량수불....." 한차례의 불호와 도호를 외운 뒤, 그들 역시 격분한 군웅들의 속에 끼이는 수밖 에 없었다. 백상인은 실로 참담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으 --- 아 --- 악!" 벌써부터 단말마의 비명은 터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악마성자의 신호에 의해 백 여명의 흑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군웅들을 주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예는 하나같이 십이원로들의 수준이며, 또한 십일악령들의 무예는 맹 주인 남궁벽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그 숫자가 많다고 한들 상대 가 될리가 없었다. "으아아악 ---!" 십이원로들은 십일악령들에 의해 허무하게 쓰러져갔고, 나머지는 백여명의 악령 비자들에게 무더기로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크 --- 아 --- 아 --- 악!" 콰콰콰콰쾅 --- 꽝 ---! 오만대 백여 명, 비록 오백대 일이라는 엄청난 숫적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은 악령비자들에게 있 어서 실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 한 사람은 능히 오천 명도 죽일 수 있는 능 력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중원무림은 무너져 가는가? 악마성자는 여전히 한쪽에 그냥 서있었 다. 그리고, 그의 주위로는 오대호법존자들이 호위하듯 빙 둘러서 있었는데, 그 들의 십장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 무엇이라도 형체를 찾을수도 없이 가루가 되 어버렸다. 홍황녹청자, 이 다섯가지 광채가 난무하는 곳에는 설사 십이원로들중 하나라고 해도 단 한 번에 가루로 화해 소멸되어 버리니 그야말로 무인지경이었다. 많은 군웅들중 대개가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었지만, 지금 그 십장 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실로 공포스러운 무예요, 그것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웅들은 발길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의 그 죽음을 넘어선 거대한 분노는 일면 장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허나, 이 처참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그런 미사려구를 쓸 수가 있단 말인가? 백상인은 내심 절망한 가운데 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 문득 남궁벽이 그 에게 다가왔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모자란 탓일세." 남궁벽의 안색은 비통해 보였다.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돌이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네는 나를 위로하는군." 남궁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악마성자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젠 자네에게 후사를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네. 나는 저 광경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네. 비록 불나방과도 같지만 말이야." 백상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인어른께서는 또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역시 장인어른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후사를 맡을 사람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 내가 잠시 또 착각을 했군. 허허....." 남궁벽은 허탈하게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는 먼저 가네. 우리 나중에 보세나!" "..... " 백상인은 악마성자를 향해 다가가는 남궁벽을 바라보며 가슴이 에이는 것 같았 다. 이제 십중팔구 남궁벽은 죽을 것이다. 그 화려했던 명성을 떨치던 일대기재 의 종말은 이토록 허망한 것인가? 하긴,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마련이다. 백상인, 그도 이제 잠시 후면 그 길을 가게될 것이다. 그때, 문득 남궁벽이 그에게 전음을 날려왔다. "부끄러운 이야기네만, 사실 나는 자네가 아까 저자의 제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 랬다네. 지금도 마찬가지고. 허나, 사태가 이렇게 변해버릴 줄은 몰랐네. 허허, 마지막으로 이말만은 하고 싶었다네. 자네는 부디 심사숙고해 주길 바라네." 마지막 말을 끝내면서 남궁벽은 걸어가다가 힐끗 백상인을 되돌아보았다. 그 표 정에는 어떤 영웅의 비운 같은 표정이 어려 있었다. 드디어, 남궁벽은 악마성자의 전면에 도달했다. 오대호법존자는 유독 그에게만 은 십장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악마성자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남궁벽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악마성자는 미간을 다소 찌푸렸다. "자네도 저들과 똑같이 내게 대항하겠다는 말인가?"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자네가 저들을 진정시켜서 좀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했었는 데?" 그말에, 남궁벽은 쓰디쓰게 웃었다. "물론 이치상으로는 그것이 현명할 것이오. 허나, 만사가 모두 이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서... 내가 저들 수 많은 영혼들의 뜻을 무시한다면 어찌 나더러 맹 주라고 하겠소? 설령 어리석더라도 나는 이길을 가는 수밖에 없소이다." "좋다!" 악마성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내가 중원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두 번째로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 지. 그 대우로 나는 그대에게 고통없는 죽음을 내리겠다! 수령!" 말이 떨어지자, 청색옷을 걸친 수령존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앞으로 나서자 마자 남궁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아직 중원어를 모르는 그인지라 남궁벽에게 선제공격을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고맙소! " 남궁벽은 그를 향해 포권했다. 이어 전신의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시작했 다. 우우우우웅..... 그 진기의 여파에 의해 바람도 없는데 주위 십장방원이 뿌연 먼지로 뒤덮였다. 동시에 남궁벽의 신형은 완전히 백색의 투명한 광채로 휩싸였다. 그것은 그의 최고절학이자 불성문의 최후절학인 천지여의신력이 최고도로 발휘되는 광경이 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슷, 그의 신형이 깃털처럼 지면을 박차고 수령존자를 향해 떠올랐다. 그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큼 쾌속했다. 보통사람이라면 아마 그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당할 것이다. 드디어, 남궁벽의 신형은 수령존자의 지척에 이르렀다. 찰나지간, 콰우우우우우 -------! 남궁벽의 몸에서 천지여의신력이 눈부신 백색광채를 발하며 수령존자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 위세는 가히 미증유의 거력, 사람들은 혹시 수령존자가 당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바로 그때, 자극히 짧은 순간, 이미 기대했던 대 로 청색의 화려한 광채가 사위에 작렬했다. 번 ------ 쩍 ------! 일순 근처의 사람들은 이루 형용을 할 수없는 거센 한기를 느껴야 했다. 만일 그 한기가 조금이라도 지속되었더라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동태가 되었을는 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은 지극히 짧았고, 그와 동시에, 수령존자 를 향해 밀려가던 그 가공지세의 백광이 돌연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일순 남궁벽의 일신이 부르르 떨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순 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수령존자의 도검에 당한 것이다. 정말로 아무런 고통도 없었는지 남궁벽은 비명 을 내지르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허나, 푸스스스스..... 그의 육신이 먼지처럼 부셔져 나가는 광경을 본 군웅들은 그의 죽음을 믿어야 했다. "아.....!" 궁웅들은 이 너무도 허망한 광경에 입을 벌리고 몸은 석상이 된 듯 굳어졌다. 허나, 그러한 적막은 오래가지 못했다. "으 ----- 아 ----- 악!" "크으으윽 -----! " 군웅들의 행동에는 상관없이 흑의인들이 죽음의 사자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이 다. "크 --- 아 --- 아 --- 악!" 군웅들은 대번에 추풍낙옆처럼 쓰러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한번 멈춰선 그들 은 다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남궁벽의 죽음에 의해 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아무리 해도 어쩔수 없다는 절망감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것일까? 흑의인들의 무차별살수에 의해 죽어가는 군웅들은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고, 그럼에도 살수를 멈추라는 악마성자의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때, 백상 인은 악마성자의 앞으로 나섰다. 그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무심했다. "너도 대항할 참이냐?" 악마성자는 안면을 흉악하게 일그렸다. 백상인은 조용히 미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러고도 내가 당신의 제자가 되길 바란단 말이오? 이제 당신과 나는 불공대천의 사이가 되었소. 어서 손을 쓰시오!" "너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용의는 없느냐?" 백상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더이상 그런말을 한다면 나는 당신을 염치없는 늙은이라고 말하 겠소!" "크흐흐흐.....!" 악마성자는 흉광을 번쩍 빛냈다. "정히 그렇다면 할수 없지. 너는 확실히 아까운 존재지만 그렇다고 살려둘 수도 없는 존재이다. 사실, 너의 자질은 너무 뛰어난 감이 있어!" "....." 악마성자는 백상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특별히 너는 내가 상대해 주겠다. 너는 어떤 방식을 원하느냐?" 박상인은 미소했다. "당신이 좋을 대로." "좋다!" 악마성자는 흉흉히 말을 이었다. "너는 이미 단 한 번밖에 공격할 수 없는 몸이니 달리 방법이 필요없겠지! 이렇 게 하자! 우선 네가 나를 공격해라! 그리하여 실패한다면 너는 그대로 두어도 죽어버릴 테니 좋지않겠느냐?" "좋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마음을 모았 다. 그때, 돌연 악마성자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면서 다시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게 있다. 너는 나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백상인은 담담하게 깊은 시선으로 대답했다. "당신의 도는 사이비요. 만일 당신의 도를 따르게 된다면 누구나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오. 아마 악마는 좋아하겠지요." "뭐라구 ---?" 악마성자는 그말에 정말로 크게 분노한 듯 노성을 질렀다. "애송이 녀석이 잘봐주었더니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어서 덤벼봐라! 나는 하지만 약속대로 네놈을 공격하지 않겠다!" "....." 백상인은 묵묵히 미소했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고, 일순 다시 눈을 떴다. 바로 그순간에 그의 광검이 발출 되었다. 번 ----- 쩍 -----! 태양광, 그 노을빛 광채는 눈부셨다. 생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것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그 광채는 오늘 따라 유독 휘황해 보였다. 마치 잔인한 살륙이 벌어지는 이곳 아수라지옥에서, 그것만은 신비한 광명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리 예 상했던 것처럼 그 광검은 악마성자에게 그 어떤 상해도 가하지 못했다. 노을빛 태양광이 그를 향해 폭사된 순간, 기이하게도 그 빛은 모조리 악마성자 의 전신으로 간단하게 흡수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 광검에 의해 누구는 가루로 변해 버리는가 하면, 악마성자는 오히려 흡수하면서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니... 그것은 마치 거대한 대해가 어떠한 빗줄기라도 무리없이 흡수해들이는 것과 흡 사한 광경이었다. 백상인은 일신의 모든 기운이 한꺼번에 악마성자에게 빨려가 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허탈했다. 마음이... 그리고 몸도 그러했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 하면서 그 암흑 속에서 거대한 파도소리가 이는 것 같았다. 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은 아득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얼마 전 죽림정사에 서 검령자를 쫓아보낼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더욱 심했다. 일순 백상인은 의식 한가운데 갑자기 둔기로 심하게 당한 듯한 거센 충격을 느 끼며 홀연 까마득히 의식을 놓았다. 끝이없는 나락으로 추락해가면서..... 쿵.....! 백상인의 육신이 땅바닥으로 나뒹굴자, 악마성자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정말, 아까운 놈이었다!" 헌데 그때였다. 일순, 숫.....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눈부신속도로 백상인을 채가는 것이아닌 가? 잠시 딴생각을 하고있던 악마성자는 일순 흠칫했다. 허나, 그는 곧 음산하게 미 소했다. 그리고는 옆의 목령존자에게 말했다. "그녀석은 이미 죽었다! 허나 좀더 확실하게 시체를 처리하고, 또한 그녀석을 데려간 녀석들 역시 살려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이번 거사는 아무도 아는 자 가 없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슷..... 목령존자가 그 인영이 달아난 방향으로 뒤쫓아간 후, 악마성자는 다시 나머지 네 명의 호법존자에게 지시했다. "이곳의 일을 그대들이 나서서 빨리 끝내도록 하라! 단, 역시 단 한 사람도 살 려두어서는 안된다!" "알겠습니다!" 사대호법존자는 그즉시 군웅들 속으로 날아갔다. 스슷..... 그들의 무예는 정녕 불가사의했고 미증유의 것이었다. "끄 --- 아 --- 아 --- 악!" 살륙의 아수라지옥도는 점차 그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비명소리는 중원의 무림이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그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악마성자는 분명 백상인이 이미 죽었다고 말했 다. 그러나, 기실 백상인은 죽지 않았다. 그의 의식은 허공 낮은 곳에 떠오른 채 자유롭게 부유하고 있었다.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된 다음 순간 이런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줄 은 절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체질의 특수성 때문일 는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하게 악마성자가 목령존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그리고 나머지 사 대존자에게 명령을 내려 군웅들을 말살시키는 것도 목격했다. 그러는 동시에, 그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육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일 련의 괴이한 현상은, 악마성자도 미리 예측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x x x 파아아아앙 -----! 목령존자의 신법은 빨랐다. 그의 신법에 구태여 어떤 신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다는 자체가 어리석을 정도였다. 그의 신법은 기척도 없이 허공을 주름잡 듯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백상인을 가로채간 인영을 따라잡는 것은 정말이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앞에 돌연 방해자가 나타났다. 전신에 백색무복을 걸친 위풍 당당한 호형의 중년인, 그는 분명히 목령존자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백의위대 대주인 일월태극도 나탁이다. 허나, 기실은 오래 전부터 금화 공자 백상인의 종복이 되리라고 약조한 몸이기도 하지. 비록 지금 그 시기를 놓 쳤으나, 나는 저승에가서 그 분을 모시려고 한다. 너는 나를 죽이고 지나가라!" 목령존자는 중원어를 알지 못한다. 그는 나탁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 심 어이가 없었다. 이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목숨을 자기에게 내던지려는 것이 분명한데, 중원인들 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목숨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지금 그는 그런 생각으로 시간을 소모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나탁의 위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물론, 이자를 살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무예인 목령도검을 발출했다. 번 ----- 쩍 -----! 허공에 녹생의 광채가 일었다. 그순간, "크악!" 나탁은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면서 뒤로 벌렁 넘어갔다. 이어, 나탁의 육신이 변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흡사 마른고목처럼 뻣뻣하게 몸이 탈색되더니, 곧 서서히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목령존자는 이미 저만큼 앞에서 달려나가고 있었고, 허공은 아무런 말도 없었 다. 두 사람, 그들은 마치 계획했던 것처럼 길목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하나는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이고, 다른 하나는 냉랭한 안색의 무표정한 중년인이었다. 그들이 땅 밑에서 솟아나듯 갑자기 나타났음으로 아무리 목령존자라 할지라도 일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우뚝 멈취선 그를 향해, 두 중년인은 뭐라고 소리 치기 시작했다. "나는 공공문의 묘수공공 여절생이오. 당신은 우리와 잠시 놀다가시오!" "나는 섬전극 여초량이다. 금의위대 부대주이고 금화공자의 시종이다. 너는 그 렇게 급히 가지말고 나와 함께 겨뤄보자!" 물론, 목령존자는 그들의 말뜻을 알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충 짐작컨대 그들이 지금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실로 어이없는 일이다. 허나, 그에게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 었다. 잠시 멈춰섰던 그는 다시 전면으로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연히도, 그 들은 그에게 파도 같은 공격을 퍼부어왔다. 콰콰콰콰콰.....! 콰우우우우우 -----! 그러나, 목령존자는 그러한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면서 다시 한 번의 도검을 전개했을 뿐이었다 번 ----- 쩍 -----! 눅색의 광채가 번쩍이는 순간, 스스스스스..... 가루로 화해가는 그들의 시신을 구태여 확인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벌 써 까마득하게 멀어져간, 백상인을 안고 사라진 그자를 추적하여 제거하는 것이 그에게는 시급했다. x x x 백상인을 안고 달리는 그는 바로 소요성수였다. 그의 신법은 매우 빨랐다. 그러 나, 지금 그를 추적하고 있는 목령존자의 신법은 그보다는 최소한 열배는 빨랐 다. 비록, 나탁과 여초량, 그리고 여절생이 얼마의 시간을 벌어주기는 했지만, 소요성수가 목령존자를 따돌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파아아아아.... 멀게 느껴졌던 거리가 삽시간에 껑충 가까워졌다. 그때, 쫓고있던 목령존자는 소요성수가 거대한 계곡의 윗쪽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계곡은 마치 거대한 잠룡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그 내부가 매우 넓고 지형이 복잡해 보였다. 목령존자는 안면을 찌푸렸다. 만인 소요성수가 이 계곡으로 뛰어내린다면 자칫 쉽게 찾기 어려울 수도 있고, 혹은 어떤 미로가 형성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다. 자고로 이런 계곡이나 울창한 숲등은 추적자에겐 금기시 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령존자는 신법의 속도를 빨리했다. 헌데 그때, 갑자기 소요성수가 백 상인을 안은 채로 절벽 아래도 뛰어내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목령존자는 일순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더이상 두고볼 것 없이 무서운 속 도로 다가들면서 자신의 목령도검을 전개했다. 번 ----- 쩍-----! 과연, 목령도검의 위력은 놀라왔다. 소요성수와의 거리가 아직도 삼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요성수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읔.....!" 짤막한 비명과 함께 소요성수는 허공에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곧 그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일대기재의 실로 허망한 최후였다. 헌데, 반면 그의 품 속에 있던 백상인은 아 직도 고스란히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신형을 날리면서 목령존자는 다시 한 번 도검 을 전개했다. 번 ----- 쩍 -----! 착각이었을까? 백상인의 전신이 한 차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은 순간이 지나자, 스스스스..... 예외없이 백상인의 시신 역시 가루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슷, 그순간 목령존자 는 그 앞에 도착했다. 이미 가루가 되어 먼지처럼 흩날리는 백상인의 시신을 바 라보며 그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무의식중에 행해진 일련의 동작들이었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일이 끝나고 보자 너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겨우 이렇게 당하려고 여기까지 도망쳐왔단 말인가? "....." 목령존자는 잠시 곤혹한 표정을 지은 뒤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당연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분명 백상인과 소요성수들이 모조리 죽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 연무장을 이탈한 자들은 방금 그가 죽인 다섯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백상인들은 정말로 죽은 것미며, 여기에는 그 어떤 술수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현실이다. 저들은 아마도 어떤 목적에 의해 백상인을 데리고 탈출하려다가 결국 무예가 여의치 못해서 당한 것이리라. 저들 이 이토록 쉽게 당한 이유는 그와의 무예차이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리라. 목령존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인정하고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러고 나자, 그는 기이하다는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는 악마성자의 명 령을 이토록 쉽게 처리할 수 있어서 개운한 기분이 되었다. "좋아.....!" 천축어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신형을 연무장쪽으로 돌렸다. 연무장의 일은 이 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 그는 연무장을 향해 신법을 빠르게 펼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앙.....! 그의 신형은 곧 아득히 멀어졌다. 휘이이이잉.....! 한줄기 바람이, 여기에서 소멸되어간 숭고한 넋들을 기리려는 듯 불어대기 시작 했다. 먼지가루를 휘날리며..... 백상인,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일까? 물론 그는 죽지 않았다. 최초, 그가 악마성자를 향해 광검과 금검을 동시에 사용하려다가 돌연한 탈진으로 쓰러졌을 때, 소요성수는 그를 구해서 달아났다. 그것은 거의 임기응변적인 행동이었으되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세명이나 더 있었다. 바로 나탁과 여초량과 공공문주인 여절생, 그들 모두는 목숨을 다해 서라도 백상인을 구하고자 했다. 백상인이야말로 차후 무림을 다시 찾을 수 있는희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또 한 그들은 나름대로 백상인과 모종의 인연이 있었다. 허나, 목령존자의 무예가 너무도 막강하여 도무지 그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 은 절박한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 의견에 동 의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심리와 공공문주 여절생의 특유한 환술을 이용하는 것이었 다. 먼저, 나탁이 희생양이 되어 먼저 목령존자에게 희생이 되었다. 그리고, 다 음에는 여초량과 여절생이 동시에 나타난듯 했으나 실은 그중 여절생의 모습은 다만 환술에 불과했다. 목령존자가 만일 보통때였다면 능히 그 구별을 해냈었겠지만 소요성수를 뒤따 르느라 미처 거기에 대한 주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당시 가루로 부서져 버린 여절생은 역시 환술이었으되 목령존자는 이를 당연히 사람일 거라고 생각 하고 지나쳤다. 그것은 이미 나탁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와같은 방법은 마치 최면효과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목령존자와 같은 사람을 속일 수가 없었 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최후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본래부터 행로를 잠룡 곡으로 잡았으며 모퉁이를 돌아가는 한순간 소요성수는 백상인을 잠룡곡의 절 벽 아래로 힘껏 내던졌다. 그러한 행위는 매우 위험했으나, 목령존자에게 잡히 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살아날 확률이 얼마되지 않을는지는 몰라도 거기에 기대를 거는 것이 더 욱 현명한 까닭이었다. 동시에, 여절생은 백상인으로 변장하여 소요성수에게 안 긴 채 달려갔다. 그러다가 소요성수는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행동을 보여 목령존자로 하여금 초 조한 마음을 일으키게 했고, 그로 말미암아 목령존자는 여절생의 환신을 백상인 으로 잘못 알고 얼떨결에 죽여버린 것이다. 이미 의식을 잃었던 백상인과는 달리, 여절생은 아무래도 살아있었으므로 최후 의 순간에 전신이 부르르 떨림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며, 다행히 목령존자는 그러한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가 만일, 그 순간에도 저멀리에서 아득하 게 떨어져내리고 있는 백상인의 진짜 육신을 보았었다면 사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향후 무림의 양상이 크게 달랐을지도 모른다. x x x 그럼, 천장절벽 아래로 세차게 곤두박질하며 떨어져내린 백상인은 어떻게 되었 을까? 그의 육신이 보통사람과 같았다면 아마 떨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목숨은 산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상인은 이미 금강불괴를 연성한 몸이었 고, 또한 우연히도 백상인이 떨어져내리는 바로 아래가 폭포수였다. 소요성수가 일부러 그를 그곳에 내던졌는지도 모르지만, 콰콰콰콰콰..... 허나 폭포수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세차게 부딪치면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 그 런데, 그의 육신이 세차게 마악 폭포수의 물줄기에 부딪치려는 찰라였다 슥! 돌연 하나의 금빛 인영이 유령같이 나타나 백상인의 몸을 허공에서 부드럽게 받아들었다. 헌데, 그 인영의 모습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구름같은 금빛수발이 아름답게 나부끼는 투명한 금빛나녀, 바로 과거 백상인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우담화의 정령이 아닌가? 전설의 무극지지에서 자라는 신비의 우담화, 그 정령과의 만남은 실로 운명적인 기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이미 육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우담화의 정 령은 백상인을 알아보는 것같았다. 정령은 백상인의 품속에서 과거 자신이 주었 던 정표, 금화를 꺼내들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이내 백상인을 안고 폭포속으로 사라졌다. 우연히도 이곳은 과거 백상인과 잠룡회의 거주지로 이용했던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정령은 폭포수 뒤의 동굴속으로 들어가 침상위에 백상인의 몸을 눕혔 다. 이 동굴은 과거 백상인이 사용했던 곳인데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 지금에도 여전히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백상인은 침대에 눕혀졌지만 깨 어날 생각을 못했다. "....." 애타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정령은 잠시후에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마치 꿀처 럼 끈적한 황금빛 물을 손에 담아와 그에게 먹였다. 이 황금수는 실로 기이한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정신을 맑게 하는 진한 향기가 흘렀고, 백상인의 입에 닿 자 절로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갔다. 그리고 대뜸 백상인의 전신에 온기가 돌 기 시작했다. 허나 쉽사리 그는 의식이 깨어나질 못했다. 그러자, 정령은 주저하더니 계속해 서 백상인에게 그 황금수를 떠다가 먹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깨어날 때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황금수는 끊임없 이, 그리고 꾸준하게 백상인의 체내로 스며들어갔다. 그렇게 많은 양의 황금수 를 마시고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백상인의 몸은 마치 물을 끊임없이 습수하는 특수한 스폰지같았다. 허나, 황금수에는 언젠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최후의 황금수마저 떠온 정령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기 시작했다. 비록 말은 하지 못하고 소리는 지르지 못했으나, 애절한 그 흐느낌은 실로 그 어떠한 슬품보다도 더해보였다. 그러다가, 정령은 백상인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백상인은 금새 태어날 때와 똑같은 알몸이 되었다. 그러자 정령은 그의 몸위에 자신의 영신을 실었다. 이어, 서로의 입을 맞추자, 홀연 정령의 입속에서 달콤한 향기가 흐르는 우유빛 타액이 흘러나와 백상인의 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타액의 양은 매우 많은 편이었다. 향 한자루 탈 동안의 시간이 흐르자 그 타액 의 양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정령은 이번엔 몸을 백상인과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럼에 따라서 기이 하게도 백상인의 나신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사지를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욕정에 굶주린 야수같았다. 이어, 정령은 잠시 주저하더니 백상 인의 상징을 자신의 비소로 가져가고는 힘주어 안았다. 순간, 그녀의 비소에서는 흡사 피처럼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헌데 그것들은 백상인의 피부에 닿자 거짓말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정령은 매우 황홀한 표정으로 입속에서 더욱 많은 타액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홀연 정령의 몸이 그대로 백상인의 몸 위에서 녹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환상처럼..... 서서히 자신의 몸이 녹아들고 있음에도 정령은 끝내 황홀한 표정을 거두지 않 았다. 그것은 진정 사랑하는 님에게 모든것을 바쳤을 때의 즐거운 자부심과도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정령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정령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백상인은 다시 홀로 남았다. 허나, 이순간 그의 육신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황금빛 서광,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서광이 점차 강렬해지더니, 어느 한순간 백상인의 육신이 저절로 깃털처럼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허공에서 천천히 가부좌를 트는 백상인의 모습은, 이미 그가 원래대로 회복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여기 한 애틋한 정령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채..... x x x 백상인, 그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허공에 떠오른 채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음을 느꼈다. 이는 그의 무예가 전과 다름없게 회복되었음 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몰론 그는 그 이유와 그간의 사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뜬 후, 동굴 바닥에 내려선 그는 동굴안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동굴의 끝에는 하나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그 빛깔은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었고 그것 은 다름아닌 금천령수라는 것이었다. 금천령수는 바로 무극지지의 특성중의 하나이다. 이미 알몸인 백상인은 축골공 을 발휘하여 금천령수의 비부로 스며들었다. 금천령수의 안쪽에는 크기가 주먹 만한 구멍이 하나 있다. 고무줄처럼 가늘게 늘어난 몸으로 그 구멍을 통과하자 거기에는 또다른 신천지가 펼쳐진다. 직경이 십 장 정도의 원통형 공간, 백상인이 올라온 아래쪽에는 금천령수가 가득하고 가운데에는 전설의 무극금황 정과 그위의 우담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황금빛 광채가 이 작은 공간을 가득 덮고 있을 것이다. 헌데, 사실은 그와는 달랐다. 동국속에서 이곳 무극지지의 중심으로 향하는 작 고 기다란 구멍을 통과하고 났을 때 우선 그 공간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만일 백상인의 무예가 어떠한 어둠속도 꿰뚫어볼 수 있는 허실생동의 경지에까지 이 르지 못했다면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칠흑같은 어둠도 백상인은 대낮같이 환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공간의 중앙, 무극금황정은 없었다. 다만 과거의 무극금황정이었음직한 얇은 껍질과 그 옆에 말라 죽어버린 우담화 의 형체가 보였다.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가득찼던 금천 령수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극금황정이 사라짐에 따라 무극지지 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세상에 더이상의 무극지지는 없을 것이다. 백상인은 내심 장탄식을 하며 우담화의 껍질을 집어들었다. 본래, 정령은 자신의 피와 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극금황정의 용해된 액체, 무극금장을 백상인에게 먹인 것이고, 그것이 완전히 바닥이 나자 마침내 자신의 정기까지 백상인에게 주입시킨것이다. 따라서 백상인은 완전히 무극지지의 결정을 체내에 받아들인 격이 되었으나 그 때문에 우담화는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 단순히 백상인을 애모하는 마음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을 희생시킨 것이다. 대체 이와같은 정성은 가히 인간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백상인은 내 심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허나, 이제와서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백상인은 연신 장탄식을 토했다. 그러자 그의 입김에 의해 우담화의 껍질은 완전히 가루로 변해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무극금황정 의 껍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곳은 무극지지였다는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백상인은 연 신 한숨을 내쉬다가 서서히 신형을 돌렸다. 금천령수도 이느틈에 모두 다 사라 지고 없었다. 이제 그 화려하던 이곳은 황폐한 유부처럼 변해버렸다. 헌데, 그가 이곳을 나가려고 무심코 금천령수가 모두 사라진 바닥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 백상인은 문득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금천령수가 가득차 있던 바닥, 그 바닥은 평탄한 암반으로 되어 있었는데, 다름 이 아니라 거기에 온통 기이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범어가 아닌가....." 백상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범어 ----- 그것은 천축어를 말함이다. 그리고 고대범어라고 하면 최소한 천년 정도 전에 쓰던 문자였다. 그러한 고대의 범어가 이러한 지극히 은밀한 곳에 새겨져 있다 는 것은 실로 기이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모든 학문에 능통한 백상인은 고대범어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그는 주위 를 둘러보다가 그 글자들의 첫머리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에 백상 인도 전혀 예측을 못한 엄청난 비사가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 연자에게 남김다..... 우리 반야문은 오직 단맥으로만 은밀하게 전해 내려왔다. 그것은 그만큼 본문의 무예가 심오하기 때문이었다. 본문의 무예를 연성할수 있은 기재를 찾기도 어렵 지만 만일 본문의 무예를 연성한 자가 자칫 악의를 품고 세상에 나간다면 장차 거대한 겁란이 일게 되리라. 하여, 우리 반야문의 제자들은 다음대를 이을 기재를 선별하는데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한데 마가 씌인 것일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제 자선별이 본인의 대에 이르러 엄청난 차질을 빚고 말았다. 제바다라, 그는 본인이 십 년이란 세월을 들여 겨우 찾아낸 실로 훌륭한 무학기재였다. 그 리고 당연히 그의 심성도 최초에는 선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무예연마도중 그가 심마에 빠져들 줄이야..... 그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나는 능히 그러한 사실을 헤아렸다. 그의 사고가 본문 의 교시와 전혀 다른방향으로 변해가자 나는 부득불 그를 제거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간의 정이 많이 들었던 까닭에 나는 다소 그러한 결단을 주 저하게 되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결과를 몰고올 줄이야..... 나의 제자인 제바다라는 나의 의도를 재빨리 간파하고서 어느날 은밀하게 나를 암습했던 것이다. 비록 무예가 그보다는 고강했으나 암습에 의해 나는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기고 중원으로 도망쳐왔다. 허나 만만치않 은 나의 반격에 의해 그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중원에 들어온 나는 다행히도 이 무극지지의 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본래 나는 이곳에서 우담화를 복용하고 상처를 회복하여 다시 천축으로 건너가 제바다라를 제거하 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나는 천기를 헤아려보게 되었다. 헌데 어이없게도, 그 천기에 의하면 나의 제자였던 제바다라는 의외로 나의 반 격에 의해 내상이 심해져서 죽어버리고, 지금은 그의 무예가 다른 사람에게 전 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문파명도 달라져서 악마교라 자칭한다고 했다. 이 러한 사실에 나는 고민했다. 지금 즉시 달려가 그 제가의 후예를 제거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나는 그때 마침 나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더욱이 사실상 우담화 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며 그 악마교의 피해도 당장은 없을 것을 알아차리 고 나는 마음을 돌리기로 작정했다. 나는 천년 후를 내다보았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 악마교의 해악이 천하에 미칠 것이며 또한 이 우담화와 인 연이 있는 자 역시 그 시대에 나타날 것이라고, 그리고, 이 우담화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그 심성도 훌륭하리라. 우담 화는 신령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연자를 위해 이곳에 본문의 절학을 모두 남기기로 했다. 동시 에 내가 해야할 과업도 그대에게 전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우담화와 무극금황정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그냥 죽어간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의문을 가질는지도 모른다. 천년 전의 본문의 무학을 연 성해 보았자 악마교의 무리들과 상대가 되겠느냐고, 허나, 그러한 의문은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시 나는 나의 제자인 제바다라에게 본문의 절학을 다 전수시킬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본문무공의 초고봉에 도달하면 어떠한 야욕도 품 을 수가 없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성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제바다라는 미처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견을 품어 마의 길로 들어섰으니 그의 제자들도 역시 그 수준일 것이다. 안심하고 본문의 무예를 연성하라. 그리 면 아무런 장애도 없으리라. 참고로 말하자면, 제바다라가 연성한 단계는 도검의 경지이고 본문최고의 경지 는 바로 도검을 넘어선 무검의 경지이다. 그 무검의 경지는 본문의 오랜 숙원인 성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아직 성검의 단계는 커녕 무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없 으니, 그것은 오직 말 그대로 숙원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굳이 본 반 야문을 계승해 달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본문의 숙원인 성검을 이루어서 만인에 게 가르침을 베풀어주길 바란다. 실상 그것이 바로 본 반야문을 잇는 실질적인 것이 될 것이니까. 헌데, 그대는 자칫 또다른 두려움에 접할지도 모른다. 자신 역시 제바다라처럼 마의 길로 접 어들게 되면 어쩔까 하고, 그러나, 역시 안심하라! 나는 천기에 의해 그대가 불세출의 가장 위대한 전설적인 신체인 완벽한 대인 상을 갖춘 전륜성제상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지식에 의하면 전 륜성제상의 인물은 결코 마의 길로 빠져들지는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대는 장차 어쩌면 본문의 숙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제 임종이 다가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금천령수가 덮혀있는 관계로 오 직 그대만이 볼 수가 있으리라 나의 이 글을 보는 즉시 지워줄 것을 당부하면 서, 차후의 일은 모두 그대에게 맡긴다. 모든 일은 정말 잘 되어가리라. 그럼, 천년 후에 나와 인연이 있을 친구여, 안녕히..... [ 이럴수가..... 그럼 내가 정말로 전륜성제상의 인물이란 말인가? ] 백상인은 내심 믿을 수 없어 반문했다. 허나, 지금 그러한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반야문, 이 생소한 이름..... 그리고 악마교와 제바다라, 이러한 것들이 얼키고 설킨 전래의 비사는 확실히 그에게 강렬한 충격과 어떤 진로를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뿐이다. 자신의 전륜성제상이 분명하느냐 아니냐로 주저할 시기는 아니었다. 전후의 이야기와 지금 현무림의 동태를 미루어 보건대, 이 이 야기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을 것이다. 백상인은 시선을 다음으로 움직였다. 다음으로 적혀있는 내용은 바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른바 무예구결이었다. 그 내용은 백상인마저 언뜻 이맛살을 찌푸릴 정도로 어려웠다. 백상인은 그 구 결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구결은 대체로 생각보다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한 자 한자에 숨어있는 심오한 뜻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백상인은 어렵게 읽어나가면서도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앞에 적혀있는 그대 로, 구결의 내용은 심검의 초보부터 시작하여 그 중간단계인 광검, 그리고 심검 의 마지막 단계인 도검과 마지막의 무검순으로되어 있었으며, 광검의 내용을 읽 는 도중, 백상인은 자신이 연마한 선조의 광검구결이 바로 이 반야문에서 나왔 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광검구결은 그의 선조들 에게 어떻게 전해진 것일까? 악마교에서 전해졌을 리는 없고, 아마도 과거 반야문에도 정식제자가 아닌 사람 들이 몇명 정도는 있었을 것이며, 그 방계의 사람들에 의해 구결이 전해졌을 것 이다. 도검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악마교의 오대호법존자들이 연성한 오행도검에서 부터 태극, 양의, 삼재, 사상, 육합, 칠효, 팔쾌, 구궁도검에 이르기까지 그 수효는 매우 많았다. 그러한 것들은 일정한 이치를 담고 있으니 태초의 우주가 무극에서 시작하여 다시 무극으로 돌아가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태극도검에서 구궁도검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연성한 다음에 야 비로소 무극도검이라는 도검최고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성자는 어느 경지에 도달해 있을까? 아마 무극도검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구결에 의하면 무극도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갖 사견과 마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를 연성하면 곧 무검의 위치에 당도하리라고 하였 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극도검을 연성하기가 가장 어렵고 또 마가 생기기 쉬운 것이다. 어 쨌든, 백상인은 적혀있는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로서도 모 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무려 수십여 가지나 되는 이러한 심오한 무예구결을 쉽 사리 이해하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 난해함은 마지막 무검의 구결에 이르러 확실히 더했다. 그리고, 모든 구결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서명이 적혀있었다. ----- 반야다라, 아마 이 글을 적은 사람이 바로 그인 모양이었다. 백상인은 그 모든 내용을 암 기하고 진기를 일으켜 바닥의 글씨를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그는 지 금 모든 무예구결을 완벽하게 빠짐없이 암기한 상태이며 어느곳이건 시간만 있 다면 연마가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연마는 가능하다. 허나, 만일 돌아간 목령존자가 깊이 생각해 본 끝에 자신의 허술함을 발견하여 다시 이곳으로 온다면 자신은 그들에게 암 습을 당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은 무맹이 완전히 무너진 지금, 최후 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성수장의 금검문과 잠룡회를 찾아봐야 하지 않겠 는가? 아무리 천상삼화라고 해도 그들의 눈을 피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다소 위험성이 있더라도 그가 그들을 돌봐주어야 한다. 세상에 그들마저 없어진다면..... 결국, 백상인은 즉시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모든 구결들은 완 벽하게 지운 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담화의 정령, 그 애틋한 체취는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았다. 백상인은 우담화가 있던 자리로 가서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힌 뒤, 서서히 떠나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을 다시 찾을 일은 없으리라. 안개처럼..... 그의 신형이 사라져간 뒤..... 이 은밀하고 어두운 공간에는 적요만이 남았다. 마치 자신의 해야할 일을 모두 마친 성자의 마음처럼..... 백상인은 성수장으로 돌아왔다. 떠날때는 무려 이틀 밤낮의 시간이 걸렸지만, 돌아올때는 겨우 한시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런데, 의외에도 성수장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온갖 환자들과 의원들을 비롯 하여, 수련에 힘쓰던 금검문의 문하생들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늘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던 이곳에 이토록 적막한 고요가 찾아들자 마치 무 덤속처럼 황량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모든 기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적의 침입으로 모조리 죽거나 잡혀간 것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원내의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그들이 만약 무 맹의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은둔한 것이라면 지금쯤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 이다. 아니, 어쩌면 이 부근에 은밀하게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백상인은 찾아내야 했다. 비록 그들이 백상인이 죽었는줄 알고 있더라도..... 백상인은 성수장 내부를 그야말로 샅샅이 뒤졌다. 그들이 은둔한 곳에 대한 단 서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백상인은 허탕을 쳐야 했다. 총명한 그의 부인들은 장원내에 어떠한 단서도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혹시 그보다도 적들이 머저 그 단서를 찾아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백상인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대체 그녀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는 반드시 적들보다 먼저 그녀들의 은거지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무시 무시한 머리싸움처럼 생각되었다. 그때, 그의 뇌리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는 제갈청하에게 과 거 천년 전의 마교의 온상인 집마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만일 이번의 잠적이 제갈청하의 의견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마도 그녀는 그곳을 은신처로 정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이곳과 거리도 매우 가깝 지 않은가? 일단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백상인은 주저하지 않고 집마부를 향해 신형을 날 렸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지기를 바라며..... x x x 집마부, 그곳은 외형상 전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백상인은 전에 이곳의 기관장치를 모 두 없애고 간단히 입구만 찾으면 안으로 그냥 들어갈수 있게 변조시켰었다. 그 러나, 그녀들이 지금 이곳에 은둔하고 있다면 이미 기관장치를 복원시키지 않았 을까? 입구. 그것은 암봉의 정상에 있는 무수한 암석군들 중에서 마치 코끼리와 같이 생긴 것을 옮기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드드드드..... 앞것이 옆으로 밀려나자, 곧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지하계단이 나타났다. 지하계 단은 어둡고 매우 긴 편이었다. 그 음산한 분위기를 말하자면 보통사람은 먼저 공포부터 느꼈을 것이다. 쿵..... 위의 입구가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백상인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 작했다. 과거, 대부분의 기관장치는 바로 이 계단을 지날때 작동되게끔 되어 있었다. 아 마 전같으면 백상인은 기관장치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있을 것이다. 일부러 모 든 계단들을 밟고 내려가고 있으므로, 헌데 그때, 돌연 백상인이 밟았던 계단이 갑자기 아래로 푹 꺼졌다. 그리고는 그속에서 무수한 암기들이 맹렬히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파파파팍.....! 쿠쿠쿠쿠쿠쿠 ----- 그와 함께, 나선형으로 정돈되어 있던 계단들이 마구 사방으로 회전하기 시작했 다. 파츠츠츠츳.....! 사방에서 비오듯 쏟아지는 암기의 숫자도 더욱 많아졌다. 마치 세상의 혼돈이 재현되는듯 했다. 이러한 기관장치는 오직 이곳 한군데에 있을 뿐일 것이며, 만 일 보통사람 이었다면 당장 전신이 각종의 암기군에 꼬치처럼 꿰어져 버리거나, 아니면 마구 뒤엉켜 돌아가는 계단에 맞아 전신이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겨졌 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백상인은 그런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떠한 암기 들도 그의 주위에 이르면 가루로 변해 흩어졌으며, 연쇄적으로 날아오는 계단들 역시 그와 다를바가 없었다. " 제법 세밀하게 설계된 기관장치로군! 하지만 낭군에게 대한 대접치곤 너무 무 뚝뚝 하군..... " 백상인은 담담히 미소하며 안쪽으로 전진했다. 헌데, 그는 얼마정도 더 걸어내 려가자, 돌연 무서운 기관장치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암기공격도 사라지고 계 단은 아까와 똑같은 정적을 회복했다. 대체 이것은 무슨 전조인가? 사실 이러한 흐름의 기관장치는 전에 그가 제갈청하에게 말해준 것이었다. 따라 서, 이안에 있는 사람은 필시 그의 부인들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얼마 나 다행한 일인가? 백상인은 그녀들을 만나면 좀더 확실한 은둔지를 향해 떠나 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악마성자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들과 정면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치는 격 밖에 되지 않으며, 차라리 그가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은둔잠적하여 반야문의 무예를 연성한 이후 강호에 다시 출도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대전의 입구에 이르는 동안까지 단 한번도 기관장치는 더 이상 움직 이지 않았다. 그리고 문은 소리없이 저절로 열렸다. 스르르르르..... 일순 대전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백상인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전안은 정말로 썰렁하게 비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통형의 단위. 그 곳에 다만 한사람만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백상인은 곧 그녀가 바 로 제갈청하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곧 바람같이 그녀의 곁으로 날아갔다. "하매.....!" 제갈청하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미소했다. "오셨군요." 백상인은 그녀앞에 마주앉았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 벡상인의 다소 급한 질문에, 제갈청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들 다른곳으로 이미 떠났어요." "다른곳으로?" 백상인이 재차 묻자,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들에 관한 것은 안심하셔도 되요. 헌데 당신은 정말로 무예가 회복되신듯 하 니 정말 놀랍고 기뻐요!" 백상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당신은 지금 결코 놀라운 표정이 아닌데?" "호호...." 제갈청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이렇게 멀쩡해져서 돌아오실줄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백상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당신에겐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을 텐데? 혹시 아까 장원내에서 나를 훔 쳐보기라도 했단 말이오?" 제갈청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보면 실은 아주 간단한 것인데..... 물론, 저는 이곳을 떠난적이 없어요." ".....?" "호호,우리의 막내동생이 어떤 기이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하!" 백상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손빈아의 예지능력을 말하고 있 는 것이다. "그래요. 허나 그것 뿐만은 아니에요." "....." 제갈청하는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당신이 장원을 떠나자마자 곧 앞으로의 모든 상황을 예견하면서 우리 모두가 잠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아니, 그럼 모두들 그때 떠나갔단 말이오?" "그래요."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인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더러 이곳에 남아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실로 기이한 일이군....." 백상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때 당신들은 그녀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단 말이오?" 제갈청하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허나 그녀가 당신이 죽림정사에서 악마교의 무 리에게 당할 것을 미리 예측했던 것을 상기하자, 그녀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 었어요." "....." "그래서 모두 장원을 떠나간뒤, 저는 이곳에서 강호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당 신을 기다렸죠. 헌데, 모든 상황이 그녀가 말했던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어 요? 저는 반신반의하며 강호에서는 이미 죽은것으로 알려진 당신의 귀환을 기 다렸죠.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돌아오실줄은 몰랐어요!" 백상인은 문득 기이하게 미소하며 물었다. "헌데, 내게 기관장치를 발동시킨 까닭은 무엇이었소?" "그것은....." 제갈청하는 안색을 발그레하니 붉히면서 대답했다. "당신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어요. 저는 당신이 입구를 들어선 순간부터 몸이 회복되었음을 알았지만 과연 어느정도나 무예가 회복되었는지 알아보려고.. 아 니, 사실은..." "....." "당신을 골려주려고 그랬어요. 당신..... 기억나나요? 우리가 맨처음 잠룡곡에서 만났을때 당신이 물속에서 비왕사부에게 당하던 그 모습....." 제갈청하는 잠시 옛일을 회상하는듯 눈빛을 굴리면서 호호하고 웃음을 터뜨렸 다. 그말에 백상인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갈청하는 옛날의 일에 대해 매우 감미로운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의 향수. 그것은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상인은 그녀의 그러 한 마음이 일종의 자신의 소홀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여 러명의 부인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녀만 편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또 자신 이 무예를 잃었던 요 삼년동안 다소 그녀에게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장말로 말하자면 실상 그녀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 이었다. 여러 부인들중 그녀와는 가장 처음에 만나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던 여인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백리유는 온화하고 포용력이 깊은 점은 장점이나 그것으로인해 다소의 거리감이 느껴지고 남궁려려는 단지 한송이 화려한 장미같아서 왠지 거리감이 다소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단지 그는 평소에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또한, 여몽향은 너무 헌신적인 나머지 부담감이 다소 느껴졌고, 손빈아는 너무 어린 감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비록 한 손에 달린 다섯손가락일지라도 그 길이가 각기 다르듯이, 이 제갈청하는 그의 취향에 있어서 가장 사랑을 느끼게 되는 여인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항상 절제하고 사려가 깊으면서도 늘 자신을 굽히고 양보하며 현명하게 정진할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한송이의 연꽃처럼 향기가 있었다. 혼탁함속에서도 전혀 때묻지 않은..... 백상인은 그간 그녀에게 늘 깊은 애정을 느껴왔었지만 항상 절제를 거듭해 왔 다. 그것은 그녀역시 마찬가지인것 같았다. 정말이지, 그녀만큼 그의 심중을 헤 아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 사실 또한 그녀의 깊은 매력이었다. 허나 지금 에 와서 굳이 그러한 사실을 들출 필요는 없으리라. "하하....." 백상인은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헌데, 빈매의 예지력이 설마 그정도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었소. 우리 아예 그 녀에게 장래의 일을 모조리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호호....." 제갈청하는 달콤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물론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녀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죠. 앞일을 미리 알 고 거기에 따라 대처해 나가면 좋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백상인이 재촉하자, 제갈청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천기는 누설할 수 없다는 거에요." "하하, 그녀는 이미 도사가 다됐군!" "호호....." 그 둘은 잠시 함께 대소했다. 그러다가, 백상인은 다시 정색을하고 물었다. "헌데,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대체 어디이오?" 제갈청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맞춰 보세요."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래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할수 없소." 제갈청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당신의 독심술은 회복된 것이 아닌가요?" 백상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회복은 되었소. 허나,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상대가 거기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어야만 알수가 있소. 당신은 지금 거기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니 내가 어찌 알수가 있겠소?" "호호.....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아니, 어디인지 가르쳐주지는 않고?" 백상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론이에요. 만일 알려주었다간 당신은 전번처럼 혼자서만 돌아다닐지도 모르 니, 모처럼의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저는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어이쿠.....!" 백상인은 짐짓 울상을 짓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자, 그럼 이만 가십시다. 주인마님!" "호호호....." 제갈청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다가 두손으로 그를 막으며 말했다. "잠깐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있어요." ".....?" 제갈청하는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제게 이제까지 있었던 일에 관해서 말씀해 주셔야죠." 백상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이미 빈매에게 들었다고 하지 않았소?"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단지 수박 겉핧기 식의 어느정도 줄거리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도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어디 이번엔 당신이 알아맞춰 보시오!" "뭐라구요?" 제갈청하는 일순 그의 가슴팎에 달려들더니 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콩 쳤 다. "이 엉터리.....!" "하하하.....!" 백상인은 파안대소하며 얼른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지난 며칠간에 일어 났던 일들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악마교도들의 출현과 무맹의 완전한 몰락. 그리고 자신이 회생하기까지. 마지 막으로 천축 고대의 반야문의 이야기등..... 이야기가 계속됨에 따라 제갈청하는 연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반야문의 이야기에 이르자, 그녀는 환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들을 충분히 쳐부술 수가 있게 되었군요!" 백상인은 미소했다. "아직은 아니오. 우선 무예를 연성해야하오." "그거야 문제없어요. 당신은 필히 해낼 것으로 믿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구말구요! 이제 앞으로는 오로지 무예연마에만 몰두해요. 제가 옆에서 도 와드릴께요. 우리는 단 한순간이라도 놓쳐서는 안되요." "알겠소." 백상인은 조용히 미소했다. "그럼....." "어서 갑시다!" 그들은 즉시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제갈청하는 백상인의 품속에서 아주 편안 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태고의 정적속으로 빠져드는 집마부를 뒤로 한체..... x x x 그들은 그날밤 동정호를 건넜고, 한밤중에 객점에 들었다. 그런데 제갈청하는 백상인이 침상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은 무예연마에 열중해야 해요. 나는 당신이 하룻밤쯤 자지 않았다고 해서 몸에 무리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어요." 백상인은 그만 울상을 했다. 허나, 제갈청하의 뜻이 워낙 완고한지라 그는 도무 지 어떻게 달리 해볼 도리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백상인은 그날밤을 정좌한 채로 무예연마에 몰두하면서 그냥 날밤 을 새웠다. 뿐만이 아니라, 제갈청하 역시 그날밤 잠을 자지 않았다. 자기만 혼 자 잠잘 수는 없다고 하면서 역시 운공조식으로 밤을 함께 지샌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만의 두사람의 여행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백상인이 두손두 발을 모두 다 들어버릴 정도로..... 다음날, 두 사람은 객점에서 간단한 요기를 마친후 다시 신법을 펼쳐 길을 떠났 다. 백상인의 신법은 워낙 신기막측하여 지나가는 행인들중 아무도 그들은 알아 볼 수가 없어서 길을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백상인은 제갈청하를 품속에 안고 최대한의 신법을 펼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하나의 경치가 절묘한 대산에 이르를 수가 있게 되었다. x x x 무룡산 ----- 호남성의 서북단에 위치한 명산으로 옛부터 그 산세가 수려하기로 이름나 있었 다. 동정호를 한번 찾은 문사라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서 가곤 한다는 말 그대로 이곳은 문사들의 산이라고들 말하기도 한다. 특히 초가을 단풍든 이곳의 풍경은 천하에서도 흔히 볼수 없는 절경중의 하나였다. 백상인과 제갈청하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날 오후무렵이었다. 그들은 이 곳에 이르자, 주위의 아름다운 단풍에는 신경을 쓰지않고 곧바로 심산 깊숙이 들어갔다. 이 무룡산이 비록 많이 알려진 산이기는 하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면 자연 태 고적 처녀림을 방불케하는 은밀한 계곡과 오지가 많았다. 아니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곳이 알려진 곳보다는 최소한 수십배는 더 많을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경치의 빼어남과 동시에 은자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일 누군가가 은거를 하고자 한다면 이곳 깊은 산중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들 에게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곳은 과거 한 위대한 가문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했으니, 바로 그것이 그 유 명한 백가신화였다. 비록 지금은 백년이란 세월이 흘려 폐허속에 잠겨있겠지만..... 백상인은 점차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당신은.....?" "그래요." 제갈청하는 살짝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정말 지금 우리의 가문이 있었던 그곳으로 간단 말이오?"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운무곡이죠." "그렇다면.....?" 백상인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제갈청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껜 미처 말씀을 못드렸지만, 그곳에는 이미 삼년전부터 우리 잠룡회의 인 원들이 은거하여 수련을 하고 있었어요. 굳이 그곳을 택한 이유는 바로 맹주님 의 뜻이었지요. 바로 당신을 상징적인 회주로 생각한다는.... 잠룡회의 모든 인 원들도 그 의견에 찬성하고 있어요." "....." "그리고, 지금 우리의 장원에서 온 사람들도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거에요. 이 렇게 합류하는 것만이 우리가 좀더 강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 백상인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를 향해 제갈청하가 사과조로 말을 덧붙였다. "미안해요. 당신의 의사도 묻지않고 함부로 이런일을 해서...." "아니오."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을 끝내고 찾아오려고 했었지만...뜻밖에도 이렇게 오게될 줄은 몰랐소. 갑자기 조상님들께 불효만 일삼아온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든것 뿐이오." "어릴때 한번 와 보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군! 이서 가봅시다!" "예, 백랑!" 제갈청하는 대답을 하며 백상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백상인은 즉시 신법을 배가시켰다. 슷..... 주위의 공기가 한차례 놀란 파동을 일으켰다. 저 멀리에서 운무곡이 급작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신비한 울림을 가지고..... 운무곡----- 무성한 원시림을 뚫고 가면 울퉁불퉁 난립한 기암괴석의 자연병풍이 보이고, 그 자연병풍이 둥그럽게 감싼 아담한 분지위에 그 운무곡은 있었다. 하늘은 그대로 트였으되, 어찌보면 호로병의 형상을 닮아 입구는 좁고 그대신 곡의 내부는 제 법 평탄하고 넓었다. 사면이 온통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오직 한군데 트여있는 곡구는 겨우 마차 두어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정문이 나 울타리는 없었다. 다만, 곡구의 좌우에 신상처럼 돌출한 두 개의 기형바위는 마치 곡의 내부를 수 호하듯 양쪽 절벽에서 가운데로 삐져나왔는데, 그 형상은 흡사 전설속의 용이나 호랑이등을 두루 닮았고, 특이하게도 각각 푸른빛과 붉은 빛깔을 은은하게 띠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과거에 음양쌍룡암이라고 불리우던 바위였다. 그 바위 입구로부터 시작하여 곡 전체는 항상 짙은 안개구름으로 가득 덮여있고 그 때문에 붙은 이 름이 바로 운무곡이다. 사시사철 짙은 안개가 가득 덮여있고 심하면 한치앞의 분간도 어려운 이 운무 곡이 바로 중원무림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던 위대했던 한 가문, 백가신화의 옛 터전이다. 곡의 내부로 들어서자, 먼저 푸르고 평탄한 초지가 눈에 들어왔다. 더도 덜도 아니고 알맞게 자라있는 드넓은 초지를 바라보노라면 이곳이 바로 지상의 낙원 이 아닐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안개에 촉촉하게 젖은 초지 곳곳에는 무수한 기화들이 만발하여 저마다 아름다 움을 다투고 있으니, 일순 그 향기에 의해 심신이 모두 후련해지는 듯했다. 곡 의 밖과는 너무도 다른 이 운무곡의 아름다운 풍경은 결코 쉽게 상상할 수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신은 이 운무곡을 만들어 놓고 타인의 시샘을 두려워한 나머지 짙은 운무로 가려놓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드넓은 초지의 북쪽 기슭, 그곳에 과거 사람이 살았음직한 자취가 역력한 넓은 집터가 세월의 풍화속에 삭혀진 채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 무너진 담장이라든가 어지러이 깨 어져 흩어져있는 기와조각들은 매우 황폐한 느낌만을 주었다. 도무지 인적이라 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이 황폐하게 버려진 폐가. 백상인은 내심 의아해하며 제갈청하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아무도 없지 않소." 헌데, 제갈청하는 고개를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면 내가 왜 당신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겠어요?" "인적이 아무것도 없지 않소?" 제갈청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말했다. "나를 따라오세요. 당신에게 그것을 증명해 주겠어요." ".....?" 놀란 토끼처럼 팔짝거리며 뛰어가는 그녀의 뒤를 백상인은 뒤따랐다. 제갈청하 는 달려가더니 이윽고 어느 한곳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돌사자, 그것은 과거 현 관의 입구였음직한 곳에 놓여 있는 오래된 석상이었다. 제갈청하는 그 돌사자를 가리켰다. "바로 여기에요 " 백상인은 즉시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이 밑에 지하석실이 있단 말이오?" 제갈청하는 배시시 웃었다. "당신은 정말 저의 마음을 읽을줄 아는군요. 그래요. 당신 말대로에요." "....." 이어 제갈청하는 돌사자의 눈알부분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그 부분이 유난히 반들반들한 것 같았다. 순간, 드드드드드..... 기묘한 마찰음과 함께 돌사자상이 돌연 회전하기 시작했다. 좌측으로 한바퀴 회 전을 하고나자 그것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갈청하는 그러한 돌사자상을 뒤쪽 으로 힘껏 밀었다. 그그그긍 ----- 가벼운 기음과 함께 돌연 돌사자상이 뒤쪽으로 밀려나고 대신 그자리에 아래로 향하는 지하계단이 나타났다. 그 지하계단은 매우 어두웠다. 제갈청하는 그 지 하계단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래도 의심이 가나요? 그들은 바로 이곳에....." 제갈청하는 문득 말을 하다말고 아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이상한데.....?" "....." "헌데 이 안이 왜 이렇게 조용하죠?" 그렇다. 지하석실쪽은 비단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매우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죽음의 세계같은 억겁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죠?" 제갈청하는 곤혹한 표정으로 백상인을 바라보았다. 백상인의 표정은 가볍게 굳 어 있었다.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 아닐까?"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어요. 그들은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른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만큼 당신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죠. " "그럼 무슨 일이 생긴것이 틀림없군." "그, 그래요, 가만보니 당신은 이미....." "그렇소. 나는 이미 이곳에 들어설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사실 아무리 지하 깊은 곳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나의 청력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 오." "....." 제갈청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홀연 급히 지하계단으로 내려갔다. "어서 가봐요." 백상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뒤를 따랐다. 지하석실, 그것은 이곳 운무곳의 지하암반인 화강암을 깎아만든 것으로 그 연대는 오래되 지 않았다. 대략 삼십여 개의 방에 주방, 서재, 그리고 제법 넓은 지하연무장까 지 갖추고 있었다. 그 크기로 말하자면 이곳 운무곳의 절반 크기만은 할 것이다. 또한, 그 내부는 더할수 없이 깨끗하고 가구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서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 도 일단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넓은 지하석실은 정말로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곳곳에 켜져 있 었던 유등마저 꺼진것으로 미루어 비록 깨끗하지만 마치 지하무덤 같았다. 그 광경을 둘러보며 제갈청하는 마치 넋나간 표정을 했다. "이, 이럴수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들은 지하석실 곳곳을 둘러보고 어느새 연무장에 이르러 있었다. 백상인은 침중히 대꾸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이오. 만일 누군가의 기습 을 받은 것이라면 그 기습한 자는 대단히 무에가 고강한 인물이 틀림없소." "그렇겠군요." 제갈청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일순 앗! 하며 한쪽 벽을 가리켰다. "저길 좀 봐요!" "....." 정면의 벽면, 그곳에는 한구절의 글귀가 거대하게 음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 한달 후, 본 악마교는 과거 무맹이 있었던 대흥산에서 중원지부 결성식을 갖는다. 백상인! 네가 만일 그때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들 모두는 그때 결성식에 앞서 피의 제물이 될 것이다. --- 악마성자. 그들은 일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 악마교라면 바로....." "....." "그들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군요?" 백상인은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예측했던 일이기도 하오. 사실 도검을 연성할 수 있는 사 람은 결코 어리석을 수가 없는 것이오." "목령존자 말인가요?" 백상인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제갈청하는 하얗게 변한 안색으로 다시 물 었다. "그자들이 이미 그들을 해치지 않았을까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단지 그들이 그리 급하게 그들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 을 것이오. 나중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피해를 가하지 않을까요?" "....." 백상인은 침묵했다. 그렇다. 비록 그들이 그들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예를 들어 겁탈이나 추행을 일삼 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백상인의 네명의 부인들은 하나같이 절륜할 미색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백상인의 네 아이들은.....? 백상인은 탄식을 불어냈다. "우리로선 지금 그것을 바랄 뿐이오. 그리고," "....." "지금 즉시 대홍산으로 가봅시다." 그런데, 제갈청하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 "당신은 지금 가선 안되요?" "그건 어째서 그렇소?" 제갈청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해요." 백상인은 눈을 번쩍 떴다. "우선은 그들은 구출해야 되지 않겠소?"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지금 그들 오대호법존자들중 하나와 싸워 이길 수가 있나요?" "아마 이길 수는 없을 것이오." "그들은 당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들중 하나가 그들 무리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요?" "아마도....."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 모두를 구해내기 위해서라면 만부득이 그들중 하나와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에요. 당신은 그들과 싸워서 불리하다면 능히 도망 쳐나올 수가 있나요?" "그럴 수가 없을 것이오." 제갈청하는 두 눈에 강렬한 빛을 내었다. "당신은 중원의 희망이에요. 물론 그들 모두의 생존도 중요하긴 하지만 설사 그 들이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결코 가서는 안되요. 이것을 가리 켜 소를 희생한다고 하는 거에요." "....." "당신이 그 반야문의 절학을 연성하기만 한다면 능히 그 악마성자를 제거할 수 가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 전 무림이 되살아나는 거에 요." 백상인은 나직이 탄식했다. "당신은 아들이 보고 싶지가 않소?" 그 말에 제갈청하는 일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비단 자희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죽도록 보고 싶어요. 하 지만 우리는 이 고통을 이겨내야만 해요. 상황이 너무도 어렵기 때문에.... 우리 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자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백상인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제갈청하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고맙소. 사실 그 얘기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소. 나는 당신같은 여자를 부인 으로 둔 사실에 감사하오. 모성본능을 이기기는 어려운 것인데... 나는 반드시 최선의 노력을 다하리다. 그리고....." "....." "모든 일이 원만하게 종결지어졌을 때 우리는 스스로 자결하여 그들의 넋을 달 래주도록 합시다. 그들도 결코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오." "흑....." 마침내, 제갈청하는 백상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빠른 시일내에 그 절학들을 모두 배워내리라 믿어요. 나는 이 일을 날마다 하늘에 빌겠어요." 백상인은 그녀의 몸을 조용히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밖으로 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 "갑시다." 잠시 후, 그들의 신형은 운무곡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x x x 하나의 인영, 그가 언제 이 운무곡에 나타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그의 신법은 전혀 종적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상인과 제갈청하가 떠난지 얼마 후, 그 인영은 소리없이 이 운무곡에 나타났다. 그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는 신법을 보노하면 마치 안개속의 귀영이 흐느적거리 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낯익지 않은가? 목령존자, 바로 그였다. "크흐흐흐..... 그 애송이 녀석이 감히 날 따돌리고 도망치다니, 비단 성자님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내 기어이 네놈을 찾아내어 주살하고 말리라! 성자님께선 그 녀석을 죽이지 못하면 내 목숨을 대신 내놓으라고 하셨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 이야. 내가 그녀석을 찾지 못한다면 이건 어불성설이지." 목령존자는 나름대로 천축말로 중얼거리면서 백상인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는, 눈빛을 악마처럼 빛내며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은 곧 쾌속히 허공속으로 사라졌다. 파아아앙 ----- x x x 무예란 것은 이루기가 어렵다. 그것이 상승의 무예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 다. 그 상승무예의 연성을 위해, 백상인이 최초로 찾아간 곳은 어이없게도 무수 한 사람들이 들끓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저자거리였다. 의아해 마지않는 제갈 청하를 향해 백상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 도검이란 한마디로 우주를 나타내는 것이오. 그 우주를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할 것이오. 왜냐하면 사람이야말로 하나의 소우주이므로. 제갈청하는 더욱 어이없어 했지만 달리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쩔수 없이 사흘간이나 저자거리에서 상거지의 행세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것 이 백상인에게 어떠한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으로 백상인과 제갈청하가 찾아간 곳은 어느 이름모를 농촌 촌락이었다. 백 상인은 거기에서 사흘동안 남의 밭에 나아가 김을 매주었다. 그리고 다음, 백상 인은 그 촌락에서 떠나 어느 깊은 산중에 들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그곳은 사방의 하늘이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원만하게 바라보이는 곳으로, 백상 인은 여기에서 역시 사흘동안 정죄한 채 멍청하게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그는 어느날 운무곡으로 다시 되돌아갈 것을 제의했다. 제갈청하는 물론 이 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날 바로 운무곳으로 돌아왔다. x x x 고행, 고행을 해내기만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고행 자체가 순수한 고통 그 자책이기 때문이다. 음식, 음식을 앞에 두고 내리 사흘 이상이나 굶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욕구는 가장 강렬한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지금 앞에 잘 구워진 통닭 한 마리가 놓여있고 자신은 하루 이상 을 굶을 사람이라면 대번에 미칠 것같은 식욕을 느끼게 되리라. 호흡, 인간으로서, 아니 어떤 동물이건간에 호흡을 하지 않기란 정말로 쉬운 노 릇이 아니다. 완전히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호흡을 점차 나아가 일각에 한 번, 혹은 한시진에 한번, 또는 단 하루에 한 번씩 해내기란 일반인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노릇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존재에게도 어렵고 고통스럽다. 사람은 결코 호흡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 수시로 자신의 살갗 또는 뼈를 찔러대면서 그 심한 고통을 참아내고 그러 한 생활을 잠시도 쉬지않고 계속해서 수행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만일, 이같은 고통이 일각 동안이라도 계속된다면 범인은 그대로 까무라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고통을 참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행 ----- 이러한 류의 고통은 정말로 어렵고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 운무곡의 한 지하석실에서 그러한 모든 고행을 한꺼번에 수행해 나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백상인, 바로 그였다. 무예가 이미 초극의 경지에 오른 그, 아무리 그라도 이러한 고행에 점차 그 모습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살가죽은 거칠어져갔고, 전신은 금강불괴의 몸마저 꿰 뚫는 금검에 의해 상처자국들이 무수했다. 그야말로,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의 전신은 시뻘건 혈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 도 그는 고행을 쉬지 않았다. 그의 고행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고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더 뜨거운 집념으로 불타올랐다. 그는 그야말 로 구도자의 화신이었다. 제갈청하, 그녀는 정신이 어지러움을 느꼈다. 오늘이 백상인이 고행을 시작한지 어느새 열 흘째 되는 날, 그와 고통을 같이 하리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오늘까지 같이 단식 하여 하늘에 정성을 다해 빌고 있었다. 그녀의 염원은 백상인의 집념만큼이나 강렬했다. 그녀는 그 하기 어려운 단식을 열흘간이나 단행하면서도 조금도 마음의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다만, 육체는 마음과 같을 수는 없는지라, 그녀는 의식이 혼미해져옴을 느끼고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돌연 백상인의 용태를 알아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열흘째 고행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신변에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벌어지 지 않았는지... 일단 걱정이 앞서자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즉시 열흘째 계 속하던 기도를 멈추고 신형을 일으켰다. 지금 그녀가 있는곳은 곡의 서쪽이요, 백상인이 있는 지하석실은 곡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지라 그녀는 바로 드넓은 초지를 가로질렀다. 헌데 그때, 그녀는 갑자기 전에 없던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작달막 한 녹색의 나무토막 같았다. 이 아름다운 초지에 그런 나무토막이 있을리가 없 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좀더 시력을 집중시켜 안계를 무시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나무토막 같은 물체가 어이없게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녹의인, 아니 옷뿐만 아니라 전신 피부색깔과 심지어 눈빛까지도 녹색인 그야말 로 녹색인간이었다. 제갈청하가 그 녹의인을 나무토막으로 오인한 까닭은 그가 전혀 사람같지 않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되 그는 전혀 기척이나 움직임이 없었다. 심지어 심장의 박동이나 미미한 호흡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서로간의 피흐름까지 일시에 멈춰진 인간같았다. 그 러한 상태로 녹의인은 흡사 나무토막처럼 대지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던 것이다. 이 이상한 인간, 이상하다는 것은 때때로 비범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가 인간 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순간, 제갈청하는 흠칫 놀라 심장이 마구 쿵쾅거림을 느 꼈다. 지금, 백상인이 열흘째 고행에 들어가 있고, 자신 역시 열흘째 고스란히 굶어있는 이 시각. 이런 이상한 존재가 이런 오지에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사실 은 절로 마음을 긴장되게 만들었다. 그가 만약 적이라면..... 아니 그가 적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느껴졌다. 그렇 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한순간 이런 생각을 굴린 제갈청하는 일순 현기증마저 날 정도로 긴장되었다. 무섭게 긴장된 그녀는 곧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고 그에게 물었다. "이봐요! 당신은 누구지요?" "....."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여기는 무엇때문에 왔나요?" "....." 녹의인은 기이하게도 눈빛만 괴상하게 굴릴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갈 청하가 아미를 찌푸리며 그에게 다시 질문을 퍼부으려고 했을 때, 돌연 녹의인 이 그녀를 향해 괴상하게 소리쳤다. "백상인은 어디에 있느냐?" 제갈청하는 일순 깜짝 놀랐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은 바로 천축어였다. 일찍이 모든 언어에 정통해 있던 그녀는 그 말뜻을 금방 알아듣고 안색이 자신도 모르 게 급변했다. 천축인, 이 녹의인은 천축인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발음이 분명한 천축어 를 구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천축인이면서 백상인을 찾는 이자의 정체는 무 엇인가? 이자는 아마 얼마전에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그 악마교의 무리가 분명 하리라. 그중에서도 이렇게 녹의를 걸친 녹색괴물이라면.....? 제갈청하는 즉시 최악의 사태가 닥쳐왔음을 알아차렸다. 이자는 백상인의 말에 의하면 목령존자, 바로 그자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갈청하는 내심 어쩔수 없 이 몸을 덜덜 떨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천축어로 물었다. "당신은 바로 목령존자가 분명한가요?" 녹의인, 그는 일순 나무토막처럼 무표정한 얼굴에 놀람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이유는 우선 제갈청하가 천축어를 할줄 안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나를 아느냐?" 녹의인, 목령존자는 무심한 시선으로 제갈청하는 쏘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이때, 제갈청하는 급히 머리를 회전시켰다. 이런 상황하에서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어 떤 특별한 기지가 필요한 것이다. 제갈청하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나는 당신을 알아요. 왜냐하면 바로 백상인이 당신에 대해 가르쳐주었 기 때문이죠." 그말에, 목령존자는 눈을 퉁방울같이 크게 떴다. "지금 그자는 어디에 있느냐? " 제갈청하는 주저없이 지하석실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안에서 운공하고 있어요." 목령존자는 그녀가 너무도 쉽사리 가르쳐주자 일순 눈썹을 길게 찌푸렸다. "정말이냐?" 제갈청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정 의심이 가면 당신이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되잖아요." 목령존자는 눈을 부릅떴다. "네가 만일 거짓말을 했다면 나는 너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영 원히 있도록 해주겠다!" 그의 어조에는 단순히 협박만이 아닌 진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누구라도 그 무서운 표정과 엄청나게 덮쳐오는 살기에 공포를 느낄 것이고, 최소한 주눅이 들것이다. 그러나, 제갈청하는 일순 싸늘하게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뭐냐?" 목령존자는 대뜸 기분이 상해서 소리쳤다. 그는 이들 중원인들은 정말 너무도 겁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번 무맹에서의 일이 그러하고, 또한 지금 이 여자는 자신이 직접 겁을 주는데도 이렇게 마냥 웃고있지 않은가? 그는 여태 천축에서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대담한 여자를 보지 못했다. "너는 내 말이 헛소리로 들리느냐?" 목령존자는 다시 한 번 노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제갈청하의 표정엔 여전히 주 눅든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왜그러죠? 나는 웃으면 안되나요?" 목령존자는 살기를 떠올렸다. "너는 정말 겁이 없구나!" 그러자 제갈청하는 다시 교소했다. "호호호... 우리 중원인들은 항상 떳떳하게 살기 때문에 겁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의 해야할 도리를 다했기 때문이죠. 헌데, 천축인들은 항상 공포속에서 불 안하게 살고 있나요?" 이말은 사실상 목령존자의 비위를 긁는 소리였다. 마치 불난집에 부채질하듯 그 의 화를 돋울 뿐인 말이었다. 헌데, 목령존자는 정말로 화가 나자 오히려 마음 이 침착해졌다. 그점이 바로 그의 특별한 점이었고, 무도수행자의 한 특질이기 도 했다. 제갈청하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바로 이점을 이용한 것이다. "흐흐흐....." 목령존자는 한 차례 싸늘하게 웃더니 말했다. "나는 솔직히 너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제갈청하는 두 눈에 이채를 번쩍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를 데리고 들어가보면 되겠군요! 나는 이미 당신의 인질이 되어있 으니 더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크크크...." 목령존자는 흉소를 날렸다. "너희들 중원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목숨마저 가볍게 여기니 나는 더욱 너 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너는 아마도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 분명 하다." 제갈청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서 어쩔 셈이죠?" "클클클....." 목령존자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본래, 나는 지하석실 안에 지금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의 청력을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내가 네게 물었던 것은 단지 그 자 가 백상인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바르게 일러주지 않았던가요?" 제갈청하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목령존자는 다시 말해다. "그러나 너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것을 뒷받침할 수있는 증거가 하나 있다. 그 것은, 지금 그자의 인기척은 과거 백상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그자는 매우 노쇠하고 기력이 빠진 늙은이일 것이다. 나를 속일 생각은 버려라! " 제갈청하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나를 어쩔 셈이죠?" "클클, 너는 빨리 진실을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제갈청하는 차갑게 말해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흐흐흐....." 목령존자는 안면을 흉악하게 일그리더니 말했다. "너는 정말 겁이 없구나! 하긴, 너의 서방을 위해서겠지. 좋다! 나는 더 이상 네 게 묻지 않겠다. 그래신, 댓가를 받아내지 않을 수가 없지....." "....." "흐흐, 나는 아까 말한 것처럼 네게 무한한 고통을 안겨주겠다! 나는 네가 그 고통속에서도 거짓말을 하는지 두고 보겠다." 말과 동시에, 목령존자는 살벌한 표정으로 제갈청하에게 다가왔다. 이 순간, 제 갈청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목령존자가 다가오기 전에 혀를 깨물고 죽을 결심이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 여섯, 그러나 아직은 갓 스무살로 보이는 꽃다운 나이 다. 더욱이 마치 요정같고 세상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우리만큼 아름다운 그녀 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단지, 위안이 되는것이 있다면, 저 목령 존자는 다시는 지하석실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백상인은 계속하여 수련에 몰 두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이제 자신의 존재는 거의 필요없으리라 생각되었다. 비 록 다시는 사랑하는 그이를 볼 수 없게된 것이 슬프지만... 그리고, 또 하나의 위안이 있다면, 이것은 단지 가정에 불과하지만, 장차 백상인이 이자를 이길 수 가 있으리라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백상인은 능히 그 어느 누구의 마음도 거의 읽고 있다. 아마 극소수 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앞에서 어떤 술수도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제갈 청하는 이것을 과거에는 단지 무예가 상승의 경지에 올라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 백상인보다 무예가 높은 이자는 전혀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헤매고 있지 아니한가? 물론 그는 천축인이고 그녀는 중원인이기 때문이라는 까닭도 성립할 수 있겠지 만, 허나, 본시 마음을 읽는데에는 문자가 필요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론적으 로 목령존자는 백상인보다 독심술의 능력이 부족한 셈이다. 헌데, 백상인은 자 신의 독심술이 무예를 연마해 나가는 도중에 자연히 얻을 수 있는 지엽에 불과 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무예가 높을 수록 그 능력은 증대되고, 백상인의 그 말은 결코 헛된 말 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현실은 대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 것은 곧 정공과 사공의 차이이다. 백상인은 정공을 연성했기에 당연히 나타난 현상이 사공을 연성한 목령존자에게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비록 그 진전이 느리기는 하지만, 그래서 정공은 위대한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정공의 위력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백상인이 목령존자와 똑 같은 수준의 무예를 연성한다면 비무에서 이기는 쪽은 당연히 백상인 쪽일 것 이다. 그리고, 이미 독심술까지 완벽하게 터득한 백상인이 저자를 이기는 것은 다만 시간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갈청하는 자신의 이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염려가 되는 것은, 백상인이 그녀에게 말했던 한 대목 때문이었다. "백랑!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그때문에 당신이 죽게 되어서는 안되요. 그것은 결코 위안이 아니라 근심이에요. 당신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도 살아 남아 여전히 중원무림을 구제해 나가야 해요. 나는 이말을 언젠가는 하려고 했 었지만 결국은 못하고 마는 군요....." 제갈청하는 직접 백상인에게 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내심 결연한 빛을 띠었다. 어느 새, 목령존자는 그녀의 일 장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와 같은 고수 자에겐 일 장이란 그야말로 지척과도 같은 것이다. 제갈청하는 더 이상 망설이 지 않았다. 혀를 내밀고 힘을 주어 이빨로 꽉 깨물었다. 언뜻, 목령존자의 얼굴에 놀란빛이 스친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그때, 홀연 그녀의 앞쪽에서 한줄기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멈추시오!" 그말은 목령존자에게 한 것인지, 아니면 제갈청하 그녀에게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청하는 순간 깨물어가던 이빨에 돌연 힘이 빠져나감을 느 꼈다. 때문에, 그녀의 혀는 끊어지지 않고 단지 얇게 상처만 나고 말았다. 그녀 의 입 속에서는 금세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허나, 그녀는 그런 것은 상관하 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 당신이....." 이를 두고 공든탑이 무너진다고 설명해야 하리라. 그녀는 전신에 맥이 다 빠져 나가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다름 아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로 백상 인이었던 것이다. 백상인, 다급한 순간에 나타난 백상인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얼굴은 헬 쑥하니 몹시 야위었고, 짧은 바지만 걸친 그의 전신은 빈틈없는 상처자국으로 인해 마치 혈인을 방불케 했다. 눈동자는 기력이 없어서 휑한 기색이고 겨우 서 있는 그의 전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후들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 데 그의 정신은 맑게 빛나고 있었고, 힘없는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 먼저 죽어서는 안되오. 모르시오? 내겐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도 당신 한 사람이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 순간, 제갈청하는 왈칵 눈물이 치솟아 눈 앞이 뿌옇게 흐려옴을 느꼈다. 사랑의 고백, 서로의 사랑하는 마음은 이런 절박한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제갈청 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래도. 제가 잘못했어요. 우리는 함께 이승을 떠나도록 해요!" 백상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당신은 자신이 없더라도 내가 그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본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아무런 희망도 없게 되오. 우리는 이제 함께 떠나게 되었으니 나는 행복하구려!" "백랑.....!" 제갈청하는 마침내 흐느껴 울었다. "....." 백상인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목령존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때 는 목령존자도 갑자기 나타난 백상인에 대한 놀라움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상인이 그를 바라보자 두 눈에 안광을 강렬하게 빛내며 말 했다. "오랜만이구나, 백상인!" 백상인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랜만이오." 목령존자는 다시 말했다. "너는 많이 변했구나!"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이오." 목령존자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간 너는 무슨 성과가 있었느냐?"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보다시피....." "흐흐흐...." 목령존자는 음소를 터뜨렸다. "너는 보기보다는 어리석구나! 상승의 무예가 어찌 그런 고행에 의해 성취되겠 느냐! 만일 그렇다면 세상에 상승무예를 익히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백상인은 길게 탄시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말은 옳았소." 목령존자는 비웃듯이 다시 말했다. "너는 혹시 이렇게 위안을 가질지도 모른다. 나는 최소한 상승무예가 고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노라고, 흐흐흐, 그렇다면 너는 세상의 모든 방법 을 다 동원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그리하여 한 번 꽃도 피우지 못하고 시드 는 나무처럼 될 것이다." 백상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은 옳소." "클클클....." 목령존자는 냉랭하게 비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는 또 한 가지 어리석은 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 이곳에 나오지 말았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너는 시들틈이 없이 하룻밤 사이에 배어지는 나무와 같 이 될 것이다." "그것도 그렇소. " 백상인은 다시 시인했다. 목령존자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나는 성자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너는 비록 자질은 쓸만 해도 이렇게 어 리석은 녀석인데 굳이 너를 중원전체와 바꾸려는 그 분의 진의를 모르겠단 말 이야? 내가 보기에는 너는 전의 그 예홍산인보다도 못한 것 같은데 말이야...!" "....." "바로 그때 내가 그 중원의 인물들에게 속아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긴 해도, 그 건 어디까지나 네가 한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너에 대해서 실망을 하고 또 이 렇게까지 너를 쫓아 다녔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있다." "확실히 그럴 것이오." 백상인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목령존자는 일순 기이한 빛을 떠올렸 다. "너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있군. 그것은 너무도 솔직히 시인을 잘한다는 것이 며, 그리고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는듯 하다는 것이다. 보통 무림인들은 최대 의 적수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최소한 인정은 받으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너 는 조금 특이하군." "....." "하긴, 그 특이한 점이 너의 장점일 수도 있겠지. 자, 그럼 이제 그만 끝내볼까?" 말을 하면서, 목령존자는 투벅투벅 걸어서 백상인의 삼 장 앞에 섰다. 백상인은 여전히 조용하게 서 있었다. 매우 나약하고 허술해 보이는 그의 자세는 일견하 기로도 그가 이번 열흘간 어떠한 수확도 거두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체력이 약화되어 무예가 퇴보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상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의 시선엔 죽음에 대한 일말의 두 려움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초조감이나 슬픈마음, 허탈감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단지 고요한 느낌만을 주었다. 그것은 무심에 가까운 것으로, 열흘간의 무서운 고행이 그를 이렇게 탈바꿈시켜 놓았을 것이다. 이제 죽음으로 가는 자의 표시인지는 몰라도, 백상인은 다만 제갈청하에게 시선 을 돌려 잠깐 미소를 보였을 따름이었다. "....." 제갈청하는 그 미소를 받자 가슴이 에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실로 처절한 비 통한 웃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한 차례 웃어보일 수밖에 없었 다. 그녀는 가능한한 밝게 웃어보이려고 노력하며 애정 깊은 신뢰의 미소를 보 냈다. 그러한 신뢰의 미소는 남자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는 비록 패배하더라도 편안하게 죽어가게 되기를... 백상인은 곧 다시 시선을 다가온 목령존자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 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무방비의 상태로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허용하 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에, 목령존자는 다소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인가? 이것은, 자네도 어서 준비를 하게! 나는 무방비한 자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싶지 않아!" 헌데, 백상인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여기에 없소. 당신은 어서 공격을 하시오." "....." 목령존자는 안면을 흉흉하게 일그렸다. "자네는 무예는 펼치지 않고 고집만 부리겠다는 말인가? 끝까지 나를 난처하게 만들겠다면 나도 자네에 대한 관대한 마음을 버릴 수도 있어!" "....." 목령존자의 다소 협박적인 말에 백상인은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 연히 목령존자는 안면을 신경질적으로 험하게 일그렸다. 허나, 그는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한 줄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하긴, 자네는 아무리 해도 나를 이길 수가 없어. 광검과 도검의 차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으니 자네가 그대로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할는지도 모르지." 목령존자, 그는 결코 마음이 흐트러져서는 안된다는 무도인의 금기를 어기지 않 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기자신에게 나름대로의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는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니 더 이상 나를 원망하지 말게!" "....." 목령존자는 두 손을 좌우로 들리고 또 허공을 향해 휘두르면서 말을 이었다. "도에 살고 도에 죽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네. 그것은 도야말로 어머니의 품 속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지. 따라서 도에 죽는자들이여! 이를 은총으로 생각 하고 신의 축복에 감사하고 행복감에 젖으라.....!" 이어, 그는 백상인에게 물었다. "자네는 준비가 되었는가?" 백상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잘 가게! 내가 자네를 죽이는 것은 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성자님의 지시 에 의한 것이라네. 내 원망은 말고 오히려 축복에 감사하는 것이 좋을 걸세!" "....." 이윽고, 목령존자는 정색을 했다. 이제 바야흐로 그의 목령도검을 펼치려는 것 이다. 일순 무거운 적막이 주위에 흘렀다. 부유하던 안개도 돌연 그 움직임을 멈추고 허공에 얼어붙은양 경직되었다. 한 차례의 무서운 살기어린 적막이 지나 간 후, 목령존자는 두 눈에 번쩍 녹광을 발했다. 바로 그 순간, 번----- 쩍-----! 주변 가득히 거대한 녹광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바로 전률할 목령도검, 그 빛들 이 일제히 백상인을 향해 몰려감을 보고 제갈청하는 순간 눈을 감아버리려고 했다. 차마 백상인의 최후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백상인의 몸 속에서도 빛살은 퍼져나왔다. 번쩍-----! 제갈청하는 일순 감으려던 눈을 갑자기 크게 떴다. 녹광, 그것은 바로 목령존자의 목령도검의 빛깔과 똑같은 녹색의 광채가 아닌가? 비 록 뒤늦게 생겨나왔지만 그것의 빛깔은 목령존자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 며, 격렬하게 상대편으로 맞부딛쳐갔다. 백상인은 어느 새 목령도검을 연성했었 단 말인가? 이것은 정녕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쩌러러러렁-----! 두 개의 광채가 부딪치자 중간에서 미묘한 금속성의 굉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자욱한 안개는 파도를 일으키며 물러나고 거대한 압력이 일어 사위를 일제히 뒤흔들었다. 꽝! 꽈꽈꽈꽈꽝.....! 굉렬한 폭음이 뒤를 이으며 안개대신 자욱한 흙먼지가 허공 가득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수십 개의 벽력탄이 일제히 터져버린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백상인의 신형이 뒤쪽으로 무려 십여 장이나 날아갔다. 쫘아아악..... 피분수가 그의 입 속에서 터져나오며 그는 곧 땅바닥에 거세게 나동그라졌다. 쿠당당.....! 제갈청하는 잠시 멍청하게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백상인에게 달려가 그 를 안아일으켰다. "백랑-----!" 그녀의 두 눈에선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헌데, 제갈청하에 의해 일어선 백상인은 눈을 뜨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울지 마시오. 하매! 이제 모든 일이 잘 된 것이오." 입 속에서는 연신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건만 그의 안색은 여전히 온화했 다. 제갈청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설움이 복받쳐서 울며 말했다. "백랑!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저도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이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은 곧 백상 인에 의해서 제지되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하매! 우리는 지금 진것이 아니오." ".....?" "당신은 죽을 필요가 없소. 승리는 우리의 것이오." 백상인은 말하며 눈짓으로 상대방 목령존자를 가리켰다. 제갈청하는 일시에 그 의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잠깐 자결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백상인이 자신의 자결을 어떡게든 막아보려고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녀는 그 의 도가 어리석다고 느끼면서도 그의 말대로 시선을 목령존자에게 돌렸다. 목령존자, 그의 안색은 대경실색한 표정이 역력했다. 안색은 창백했으며 그의 앞에는 어느새 깊게 찍힌 세 개의 발자국 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 그러니까 상 대인 목령존자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세는 백상인에 비하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고 해야 할 것이 다. 어찌 피를 한사발이나 쏟고 십여 장이나 날아간 백상인에게 비하겠는가? 제 갈청하는 그것을 보고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허나 마침 그에 대한 개대감은 없다시피 했었기에 실망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목령존자는 안색을 여러번 변화시키다가 도저히 이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듯 백상인에게 몇마디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백상인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곧 안 색을 사악하게 굳히고 물었다. "너의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꾸했다. "잘 생각해보면 당신도 알게될 것이오." ".....?" 목령존자는 백상인의 수수께끼같은 말에 의혹이 가득찬 표정을 하다가 다시 물 었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 백상인은 단지 미소하기만 했다. 목령존자는 그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자 안색 을 고치며 다시 물었다. "너는 그 목령도검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백상인은 담담히 되물었다. "세상에 목령도검을 연선한 사람은 몇이나 되오?" 목령존자는 일순 흠칫하며 대답했다. "그거야 예홍산인이 죽었으니 나와 성자님밖엔 없지." 백상인은 다시 물었다. "당신의 그 성자가 나에게 목령도검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하시오?" 목령잔자는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럴리가 없다. 그분은 절대 쓸데없는 짓을 하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에게 목령도검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뭐라구?" 목령존자는 대경실색하여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는 불신에 가득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럴리가 없다. 나는 그날이후 너를 아직 만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너와 만 난 일도 없는데 목령도검을 가르쳤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백상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물론 직접 대면하지 않고 목령도검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노릇이오." ".....?" "당신은 방금 내게 목령도검을 가르쳐주지 않았소?" 그제야, 목령존자는 사실의 전말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러니까 백상인은 지금 그가 펼친 목령도검을 보고 거기에서 한순간에 목령도검을 터득했다는 말이었 다. 목령존자는 불신에 가득찬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리가 없다. 이 목령도검이 무슨 삼류의 무공인줄 아느냐? 세상에 제아 무리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백상인은 담담히 미소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깨달음이 한순간에 온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한 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두쪽 다일거라고 생각하시오?" 목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두쪽 다일 것이다. 깨달음의 경과는 그 사람의 끈기에 의한 것이다. 이 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바로 그것이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한가지 문제로 오랫동안 고심을 해오다가 당신의 무공을 보는 순간 일순 영감을 얻어 갑자기 목령도검을 터득하게 된 것이오." "그, 그럴수가....." 목령존자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일평생에 걸쳐 완성한 절기를 이 청년은 겨우 일수유나 될까말까한 짧은 시간에 터득해 버리다니..... 허나, 백상인의 말은 정말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백상인은 그때 모 든 집착을 버리고 심한 고행의 결과에 의해 배신감을 느끼며 허탈감에 빠져있 었고, 그로인해, 우연히 그의 마음은 가장 평온한 경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실로 그것은 기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목령존자는 잠시동안 넋나간 표정 을 짓더니 한참 후 문득 생각난듯 입을 열었다. "좋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헌데 네가 아까 지껄인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네가 비록 어쩌다 목령도검을 터득하긴 했어도 아직 그 화후가 모자라 내게 패하여 형편없이 날려갔는데 어째서 네가 나에게 승리했다고 하느냐?" 백상인은 미소하며 대꾸했다. "그건 단지 겉모습만 그럴 뿐이오." "뭐라구?" 백상인은 미소하며 설명했다. "내가 날려간 것은 그 출수가 그만큼 늦었기 때문인데 거기에는 또 나의 몸이 고행에 의해 심하게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나의 몸은 나쁜 피만 모두 쏟아냈을 뿐 아무런 내상도 없다는 것이오. 거기에 비해...." "....." "당신의 몸은 비록 내색은 않고 있지만 안으로 적지않은 내상을 입은 처지이 오." "허튼소리마랏-----!" 목령존자는 안색을 흉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크흐흐, 네놈은 아마 시간을 벌어 내상을 치료하겠다는 수작같은데 어림도 없 는 짓이다. 똑같은 목령도검을 연성한 상태이고 또 네놈의 화후가 아직 모자랄 것이 분명한데 내가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며 이는 그야말로 삼척동 자도 생각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 목령존자는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은 지금 꼴을 보더라도 내가 단 한번만 공격을 하면 금세 가루로 변할 것 이 분명하다! 크흐흐흐..... 감히 나를 놀린단 말이냐?"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직접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목령존자는 일시 움찔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음악하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네놈의 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네놈은 우선 할 말이 있다 면 해보아라! 네놈의 생각을 말해보라는 말이다!" 백상인은 그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듣기를 원한다니 내 그 까닭을 설명해 주겠소. 이것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나에겐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우선 내 당신에게 한 가지 묻겠소." "좋다, 말해봐라! " 목령존자는 냉랭하게 소리쳤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목령도검과 나의 목령도검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에, 목령존자는 일순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럼, 다른 것이란 말이냐?" "물론이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믿을 수 없다!" 백상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증거로는 우선, 당신의 목령도검이 화후가 단연 월등할 것인데도 오히려 나 에게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로는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그 무예를 펼쳤으되 두 가지 무예가 서로 다른 성질로 인해 강 력한 반탄력을 형성시켰다는 사실이오. 즉, 당신과 나의 무예가 서로 각각 흑과 백의 성질을 갖고 있소." 흑과 백. 그것은 곧 정공과 사공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그렇다면 너의 것이 정공이고 나의 것이 사공이란 말이냐?" 목령존자는 다소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그의 안색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있었 다. 그는 아마도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사실이 백상인의 말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이 되자 그는 돌연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공은 위대하고 사공은 거기에 비하면 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오. 이제 당신 은 나를 이길 수가 없소! 이것은 사실이오." 그러자, 목령존자는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믿을 수가 없다! 너는 나의 무예를 보고 배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백상인은 고요히 대답했다. "청출어람이요, 타산지석이란 말도 있지 않소? 남의 돌도 잘 배우고 가꾸면 나 의 옥이 될 수 있는 것이오. 이를테면 당신의 그릇된 무예를 보고 나는 바른 도 리를 알아낸 것이오. 이제 이해가 가겠소?" "미, 믿을 수 없다!" 목령존자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백상인은 싸늘하게 미소했다. "당신은 이미 나의 말을 시인하고 있으니 더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은 것같소." 그 말에, 목령존자의 앙색은 하얗게 굳어졌다. "너는 나를 죽일 셈이냐? 엄격히 말하자면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냐?" "하하하....." 백상인은 일순 낭랑하게 웃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 나의 스승이 반드시 한 명은 있다고 했소. 우리 사 람은 설사 악인에게도 가끔은 배우는 것이오. 헌데 그 모든 사람들을 스승이라 고 말한다면 세상에 스승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조, 좋다! 확실히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하, 하지만 반드시 네가 우세하리 란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너는 지금 몸도 가눌 수가 없는 형편이 아니냐?" 목령존자는 사악하게 외쳤다. 이에 백상인은 태연히 대답했다. "상승의 무예는 움직임을 필요로 하지 않소. 나는 비록 이렇게 부축을 받고 있 지만 당신을 이기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오." "크흐흐흐흐....." 목령존자는 악독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그런 식의 협박은 설사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 명이 간들간들한 너의 목숨은 지금 내가 단지 가볍게 한번의 공격만 펼치면 하 루살이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허나, 흐흐흐....." 목령존자는 교활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의 그 불편한 점을 고려하여 오늘의 이 승부를 다음으로 미룰 것을 제 의하는 바이다. 너의 무공과 나의 무공에 대한 흑백논리도 그때 가리기로 하자!" "....." "왜냐하면 지금 싸워서 내가 이기면 이건 매우 불공평한 비무가 될 것이기 때 문이다. 그때가선 너는 부당함을 호소할 수도 없겠지만, 흐흐, 내가 굳이 이러는 것은 여태까지 비열하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상인! 너는 혹시 불공평 한 비무를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백상인은 고요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불공평한 비무를 윈치는 않소." "크흐흐, 그럼 우린 서로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진 셈이군!" 목령존자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지금 돌아가겠다! 너는 이의가 없겠지? 물론 나를 잡을 능력도 없겠 지만" 백상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대로 하시오!" "크하하하하.....!" 목령존자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네녀석은 매우 호탕하군!" 제법 친근한 말을 던진 다음에 그는 이윽고 신형을 돌렸다. 운무곡의 밖으로 나 가기 위함일 것이다. 이어, 목령존자는 기척도 없이 허공으로 쾌속하게 떠올랐 다. 밖을 향해 나가는 그의 신법은 가히 불가사의하다고 할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돌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목령존자가 밖으로 사라졌다고 느낀 찰나, 흘연 허공중에서 갑자기 눈부신 녹광이 번쩍 빛을 발한 것이다. 번----- 쩍-----! 목령도검. 이것은 바로 목령존자의 목령도검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사라진 것 이 아니라 아직도 허공중에 머물며 기습을 전개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홀연 그 허공중에서 목령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흐, 어리석은 애송이 죽어랏-----!" "앗-----!" 불현듯 발한 제갈청하의 외침. 제갈청하의 입장에서 보건대 이것은 정말 날벼락 과 같은 상황이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했더니 이렇듯 낮도깨비와 같은 사 태라니..... 바로 그때, 그녀는 홀연 자신이 안고 있던 백상인의 전신에서 실로 눈부신 녹색 의 광채가 거짓말처럼 피어오름을 느꼈다. 번쩍-----! 그 빛깔은 같은 녹색이었으되 얼핏 느껴지는 느낌이 달랐다. 목령존자의 것이 살벌하고 피를 부르는 악마적이라면, 백상인의 것은 포근하고 아늑한 대지의 품 속처럼 밝고 평온한 것이었다. 흑과 백. 사공과 정공의 만남, 바로 그것이었다. 제갈청하는 그 속에서 실로 거대한 피의 울림을 느꼈다. 쩌러러러러렁-----! 꽈꽈꽈꽈꽈꽝-----! 꽈르르르르릉-----.....! 꽝! 꽝.....! 일순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사위를 진동시켰다. 그런, 제갈청하는 거짓말처럼 그 속에서 아늑한 기분을 느꼈다. 뒤이어, 목령존자의 단말마가 꼬리르 물었다. "끄아아아--- 아--- 악!" 허나, 제갈청하는 귿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능히 불을 보 듯 환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안고 있는 백상인의 품속에 깊 이 얼굴을 묻었다. 진한 눈물이 소리없이 그녀의 두 볼에 적시고 있었다. 티져나갈 듯한 격정속에 서, 그녀는 도저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위를 이미 가루가 되어 버린 목령존자의 시신이 마치 꽃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x x x 다음 날, 백상인은 제갈청하의 정성깊은 간호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식 사와 명상을 하여 체력을 회복시켰다. 그는 더이상의 수행이 무도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과거에 배웠던 모든 무예구결들을 떠올리고, 또 반야문의 심오한 구결을 해독해 가면서 하루종일 내내 깊은 명상 속에서 보냈다. 보통의 무인들은 운기 조식을 하지만 그는 명상을 한다. 그에게 있어서 명상은 운기조식을 한 것과 거 의 같은 효과를 가져다 준다. 아니, 그 효능은 사실 그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 을 것이다. 백상인은 그 명상속에서 단 한나절만에 다시 예전의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미 목령도검을 연성하여 도검의 문턱에 들어선 그의 신수는 과거보다 더욱 뛰어나 보였다. 제갈청하 역시 기쁘게 식사를 함께 하고 체력을 회복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들은 함께 주위의 산봉 정상에 올랐다. 사위에 짙은 황혼 이 선명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붉은 황금빛 노을은 그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이토록 처절한 빛을 토하는 것일까.....? 두 사람은 그 장엄한 노을의 빛무리 속에서 잠시 말을 잊고 상념에 잠겼다. 노 을이 지는 이 순간만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때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 노을 빛 광휘속에서, 고요히 정좌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하 강한 천인들처럼 아름다웠다. 그때 문득, 제갈청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랑, 당신은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하실 셈이죠?" 백상인은 시선을 제갈청하에게 돌렸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미소했다. "나는 기왕에 고행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로 명상속에서 구결의 내용을 참오해 나갈 생각이오." "그 장소는요?" "바로 여기이오." 제갈청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이곳은 이미 그들에게 알려졌을텐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백상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과 같은 무예의 소유자들을 따돌리기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오. 그들은 언 젠가는 내앞에 나타나게 되어 있소. 그렇다면 그들이 조금 빨리 나타난다고 해 서 무슨 차이가 있겠소?" "하지만, 당신의 무예는 아직....." 백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무예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오. 시간에 관계없이 깨달음은 어떤 기연에 의한 것이 만큼, 나는 그 기연의 소지가 다분한 이곳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오." "....." "물론, 내게 그 기연이 무르익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은 사실 쉽게 바라기 어려운 것이오." "....." 제갈청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나는 당신이 반드시 그 기연을 얻을 것이라고 믿어요." "고맙소." 제갈청하가 이해해주자 백상인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애정깊은 미소를 지어보 였다. "당신은 내게 있어서 꼭 필요한 훌륭한 내조자요." "당신은..... 나의 자랑스런 남편이에요." "사랑하오!" "저도....." 사위에 가득찬 노을의 광채는 더욱더 아름다운 빛깔을 뿌리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다. 조용하고 은은한 분위기에 젖어있던 백상인이 돌연 가볍게 흠칫 놀라며 안색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 그 모습에 지레짐작하고 섬칫한 마음이 되어버린 제갈청하는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백상인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오." 제갈청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악마교의 무리들인가요?" 헌데, 백상인이 고개를 저었다. "악마교는 아니고 내게 있어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오." 그 말에 제갈청하는 다소 안심을 하면서도 의아해 물었다. "가까운 사람이 온다니 반가운 일이군요. 헌데 당신의 표정은 왜 그렇죠?" 백상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이 기습을 당했소." "기습을요?" "그렇소." "그렇다면 어서 구하러 가야 하겠군요?" "그래야 하오." "....."" "실로 개탄할 일이오. 무림의 정의협사들이 대거로 죽어간 이후 겨우 스무날이 되었을 뿐인데 그새 세상이 변하고 있는가 보오." "....." "어서 가봅시다!" 그들의 신형은 곧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 * * "크하하하! 이것 참 아주 훌륭한 사냥감이군!" "흐흐, 저도 세상에 이런 미녀들은 처음입니다." "후후! 오늘은 아주 재수가 좋아!" "그러길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산채를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 니까?" "하긴 그래! 세상은 변했어. 정말로 우리 흑도의 영웅들이 나설 차례이지!" "흐흐흐흐, 세상사람들은 다들 악마교를 욕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우리에겐 실로 구세주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얼마전 무맹이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만 해 도 우리는 깊은 산속에서 밭이나 갈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귀호! 너는 정말 똑똑하단 말이야!" 계곡. 그곳은 또한 이곳 무룡산의를 지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일명 호로협이라고 불리우는 이곳 계곡은 좌우측 깎아지른 절벽이 십여 리나 계속되고 있어서 지나가는 행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 게 되는 곳이었다. 이 호로협의 중각쯤 부근에 자그마한 공터가 하나 있는데, 사건은 지금 그곳에 서 벌어지고 있었다. 흑의대한. 그는 다소 키가 크고 그 키보다도 더욱 뚱뚱한 체구를 지닌 거한으로 한마디로 역사형이었는데, 그 얼굴의 상이 흉악했다. 그것은 본래부터 그렇게 흉악한 것 이 아니라 역겨울 정도로 안면 전체에 무수한 문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체구에 걸맞지 않게 교활하게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 었고, 자신이 호걸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 흑의대한은 전신에 값비싼 비단을 걸친 것으로 보아 그들 무리 중 우두머리 가 분명했다. 그의 옆에는 실로 간사하게 생긴 삐쩍마른 위인이 쥐눈을 하고 이 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바로 대한이 방금 말한 귀호라는 자가 분명 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앞에는 한 채의 허름한 마차가 있었는데, 말은 이미 한쪽에 쓰러져 뒹굴고 있고, 마차 안에는 두 명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헌데, 그 두 명의 여인의 용모가 실로 평범하지 않았다. 각각 방년의 나이로 보 이는 그녀들은 정녕 경국지색이란 어휘가 부끄러울 정도로 절세적인 미색을 소 유하고 있었으며, 그 기품과 위엄이 남달라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마차 주위에는 현재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에워싸고 있었지만 쉽사 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흑의대한은 귀호과 저희들끼리 몇마디를 나누더니 마차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것봐! 나는 이곳 호로채의 채주이신 흑대호 나으리시다. 너희들은 어서 나와 나를 받들도록 하라!" 그러자, 마차 안의 두 여인 중 자삼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황법이 두려운 줄도 모르느냐? 이 분이 어느 분이시라고 이런 대역 을 범하느냐?" 그 말에, 흑의대한은 일시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대역이라니. 그럼 네년들이 무슨 일국의 군주라도 된단 말이냐?" 자삼여인을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이분은 바로 당금 황실의 자하군주이신 주벽군 군주님이시다. 너희들 은 어서 죄를 빌고 물러나도록 해라!" 그렇다. 기실 그 두 여인은 바로 주벽군과 유운봉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안색 이 매우 초췌해지고 허약해 보였는데, 기실 그로인해 더욱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흑대호는 상대의 신분을 알고는 일시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흑도의 도적두목이고 또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이다. 흑대호는 음 악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황실의 군주가 이런 싸구려 마차를 타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더 군다나 나 흑대호를 그까짓 황법으로 누르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아예 이번 기회에 황실의 부마가 한번 되어보겠다! 크흐흐.." 이렇듯 흑대호가 막나가자 주벽군과 유운봉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허나, 이미 그녀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만큼 심하게 지쳐 있는지라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들의 이런 가련한 모습을 향해 흑대호는 한번 음침하 게 웃은 뒤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서 저년들을 마차에서 끌어내라!" 그러자, 십여 명의 수하들이 일제히 마차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 휙, 휙..... 바야흐로, 주벽군과 유운봉은 일개 산적들의 손아귀에 유린을 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바로 그때, 홀연 허공에서 한줄기 빛이 일었다. 번----- 쩍! 아름답고 현란한 녹색의 광채. 그 빛은 일명 장엄하기까지 했다. 주벽군과 유운 봉은 그 빛에 얼핏 황홀한 기분까지 느꼈다. 허나, 상대편인 흑의인들에게는 달랐다. "크아아아아--- 아--- 악!" 한 차례의 단말마가 꼬리를 물더니, 홀연 그 많은 흑의인들이 한 순간 가루로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게 아닌가? 주벽군 등은 이 사실이 꿈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정녕 꿈은 아니었다. 흑대호의 거구가 가루로 화해 바람에 날리는 광경 을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공중에서 두 명의 시선같은 사람들이 서서히 하강 했다. 헌데, 그들은 바로 백상인과 제갈청하가 아닌가? 주벽군과 유운봉은 일순 환호를 질렀다. "백오빠.....!" "백상인님.....!" 이에, 백상인은 이미 죽어버린 흑의인들의 영혼에 잠시 묵상을 하는 듯 하더니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아니, 무슨 일이오? 군매, 유소저!" "저어....." 주벽군이 안면을 붉히며 말을 더듬자, 유운봉이 나서서 대신 말해주었다. "우리는 당신의 소식을 들은 후 한번 찾아오려고 하다가 이번에 둘이 혼인을 앞두게 되었는지라 우선 급히 당신을 만나려고... 헌데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길래 우리는 믿지 않고 이곳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백상인은 눈빛을 가볍게 빛내며 말했다. "그대들이 혼인을 앞두게 되었다니 무척 반가운 일이오. 헌데 그간 무슨 일이라 도 있었소?" "흑....." 유운봉은 말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에, 주벽군이 대신 대답했다. "우리는 삼년 전의 경험도 있고 해서 일부러 이번에 많은 수하들과 시녀들은 대동하고 나왔지요. 그런데 용담하 부근을 지날 무렵, 느닷없이 일단의 도적들 이 나타나 급습하는 바람에 우리의 시위들과 시녀들은 모두 그곳에 갇히고 우 리들만 간신히 빠져나왔어요. 우리는 잘만하면 당신의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했었는데 여기에서 또다시도적떼를 만날 줄은..." 백상인은 그 이야기를 듣고나자 대강 짐작이 갔다. 보나마나 천하에 도적떼들이 들끊고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백상인은 즉시 제갈청하에게 말했다. "나는 곧 그곳에 다녀올테니 당신은 여기에서 이들을 보살펴 주시오." "알겠어요." 제갈청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상인은 즉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그 자 리에서 녹아들듯 사라졌다. 슷..... x x x 용담하. 무룡산의 기슭에 위치한 맑고 풍취좋은 호수로 늘상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 지 않는 훌륭한 명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그 훌륭한 명소는 결코 예전과 같지 못했다. 무성한 갈대밭. 평화로운 물새들이 날고 간혹 강태공들의 그림자 가 비치곤 하던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으로 돌변해 있었다. 시산혈하. 말 그대로 갈대밭 여기저기에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피는 흘러 용담하의 맑은 물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았다. 까아아아악-----! 까아악, 깍! 깍.....! 허공에는 까마귀가 무리지어 음산하게 날개짓하고, 사방은 온통 죽음의 기운으 로 가득차 있었다. 그 시체들의 대부분이 관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벽군 등을 호위하고 왔던 시위들인 모양이었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그들은 이렇 게 속절없이 죽어 있었다. "후후후! 고것 참 훌륭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걸....." "아아악! 살려줘요.....!" "크흐흐흐흐.....!" "흐흐, 이봐! 살살 다루라고. 뒷 사람도 생각을 해줘야지!" 갈대숲과 다소 떨어진 송림 숲. 땅바닥엔 갖은 잡초와 억새풀이 제멋대로 자라 있는데, 지금 그 잡초들이 일제히 으스러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인들 때문이다. 나녀들. 수십 명의 나녀들이 지금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겨진 채 그 풀잎 위로 뒹 굴고 있었다. 아니, 그녀들은 그 풀잎처럼 이지러지고 있었다. 네 개의 다리로 보이는 두 손과 두 다리는 지금 활짝 벌려져 개방된 채, 입에는 자결을 할 수 없도록 각각 갈대잎으로 틀어막았다. 이제 마악 사라져가는 저녁노을의 진홍빛 광채 아래 그녀들의 나신은 섬뜩하게 굳어졌다. 파르르르 떨리는 나신. 그 유두와 아래의 깊고 은밀한 숲으로 낯선 늑대의 손길 이 마구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의인들. 그들의 숫자는 대략 수천 명이나 됐다. 그들은 저마다 수십명씩 한 여인들을 둘 러싸고 있었고, 음탕한 말소리를 지껄여대며 음란한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그들은 윤간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안면이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비계덩이가 디룩디룩한 한 장한이 지금 마악 여인의 은밀한 숲을 헤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녀의 비소는 이미 붉은 선혈로 홍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무수히 당한 몸인 듯 두 개의 유방도 시퍼런 피멍이 가득 든 채 그녀는 지금 실신이라도 한 듯 의식을 놓고 있었다. ...................... .............................. .......................................... 번----- 쩍-----! "꾸에에에에----- 엑!" 천지를 진동하는 단말마의 비명만 없었더라면, 그 빛깔은 오히려 장엄하다고 느 껴졌을는지도 모른다. 푸스스스.....! 가루로 화해 부서져 가는 흑의인들과 나녀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백상인은 장탄 식을 터트렸다. "어느덧 세상이 악의 소굴로 바뀌었단 말인가.....?" 그 음성은 저무는 황혼빛을 따라 고독하게 울려퍼졌다. 밀려오고 있는 어둠 속 에서..... 백상인은 그 길로 곧바로 돌아왔다. 제갈청하와 두 여인들은 눈이 빠져라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죠?" 제갈청하는 백상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지금 백상인의 표정은 전례없이 심 각하게 굳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상황이 좋지 않소." "....." 이때, 주벽군이 다가와 물었다. "저의 시비들과 시위들은 어찌되었죠?"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 죽었소." "아....." 주벽군과 유운봉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들은 이 모든 일이 자신들의 책임이 라고 통감하는 모양이었다. 백상인은 그녀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흑의인들은 모두 악마교의 추종자들이라고 했소. 나는 그들을 제거했소." 유운봉이 흐느끼며 말했다. "그들의 무리는 이미 전 강호에 널리 퍼져 있다고 들었어요. 검정중원이라고 하 던 강호에 어떻게 갑자기 그런 무리들이 많아졌는지 모르겠어요." 백상인은 탄식했다. 옆에서 제갈청하가 그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과거 정파가 세력을 떨칠 때는 사파의 인물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그간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이제 때를 만난 듯 강호로 나선 것이며, 이에 강호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그들을 추종하고 나선 것이지요." "실로 정고일척이면 마고일장이란 말이 맞군요."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때, 백상인이 주벽군과 유운봉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당신들은 어찌할 생각이오?" "그것은....." 주벽군과 유운봉은 잠시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녀들을 향해 백상인은 정색하고 말했다. "물론, 당신들은 정혼자가 있다고 하니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오. 그럼, 이 만 떠나도록 하시오." 그 말에, 주벽군은 얼른 말했다. "백오빠! 저희들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필시 변을 당하고 말거에요." 이에, 제갈청하도 동조했다. "그 말이 맞아요. 그녀들은 지금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반드시 보호가 필요 해요." "그렇다면....." 백상인은 제갈청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도 그녀들을 어느 정도는 보호할 수가 있겠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당 신이 직접 황궁에까지 호송해주는 거에요. 현싯점은 그만큼 위험해요." "하지만....." 제갈청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지금이 매우 중요한 고비라는 사실을 잘 알아요. 허나 그 일 때문에 이 두사람의 위험을 모른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대협이라는 것은 만인을 위하는 것이지만 그 때문에 소수의 인원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요." 백상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그럼 갑시다!" 유운봉은 제갈청하가 안고, 주벽군은 백상인이 각각 안아들었다. 이어, 그들은 황궁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스스슷..... x x x 며칠 후, 그들은 개봉성에 도달했다. 그들은 오늘밤 성 안에 들어가 하룻밤 유 숙하기로 했다. 백상인과 제갈청하는 오히려 노숙이 편할는지도 모르지만, 전혀 무공을 모르는 주벽군과 유운봉은 그간의 노숙만 해도 여독이 깊이 스며든 상 태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 여독을 풀기 위해서라도 하나의 객점에 여장을 풀지 않을수가 없었다. 밤. 말은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백상인에게 있어서 요즈음의 밤은 결코 휴식일 수가 없었다. 낮에는 주벽군 등을 안고 달려야 했었기에, 밤이야말 로 그의 유일한 무도수련 시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상인은 그간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강행군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사람은 역시 무쇠가 아닌 것이라, 며칠 밤낮을 강행군을 해온 백상인은 다 소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피로는 고요한 명상에 있어서 다소의 장애 가 되기 마련이다. 하여, 백상인은 오늘 밤만은 무도수련을 쉬고 편안히 잠자기로 했다. 객점의 침 상은 매우 깨끗하고 푹신했다. 백상인은 옷을 벗고 누워 잠을 청했다. 제갈청하 와는 아예 처음부터 동침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침을 하게 되면 그만큼 무도수 련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제갈청하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상인은 막상 누워 잠을 청하게 되자 불현듯 억제했던 욕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미 여자의 몸을 겪은 건장한 남자에게 있어서 실로 당연 한 현상이었다. 헌데 이때, 문득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이미 밤이 깊은 야심한 시각이다. 사라라락..... 엷은 나삼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서 백상인은 그 사람이 바로 제갈청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은 그녀가 아니었다. 백상인같이 무예가 경지에 이른 사람 은 가벼운 기척만으로 상대를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백상인은 눈을 떴다. 유운봉. 바로 그녀였다. 헌데 그녀는 전신에 투명한 얇은 나삼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 은 그녀의 절세적인 용모와 더불어 실로 유혹적인 자테가 아닐 수 없었다. 백상 인은 몸을 침상 위에서 절반쯤 일으켰다. "무슨 일이오, 유낭자!" "저는....." 유운봉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그 자리에 무릎을 끓었다. "저, 부탁이 있어요." 백상인은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무슨 부탁이오?" "그것은....." 유운봉은 말을 심하게 떨면서 겨우 이었다. "주언니에 관한 일이에요." 백상인은 의아한 빛을 띠었다. "군매가?" "예....." 유운봉은 가늘게 대답했다. 백상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대체 군매가 어찌 되었다는 말이오?" 유운봉은 조심스럽게 떨리는 어조로 대답했다. "실은, 주언니는 공자님을 몹시 사모하고 계십니다. 과거 삼년 전 공자님이 돌 아가신줄 알고 황국에 돌아갔을 때, 황제폐하께서는 언니를 별궁에 가두고 강호 사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게 했지요. 그러다가 요근래 어떤 사람과 강제로 혼 인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은 주언니의 공자님에 대한 미련을 끊기 위한 조처 였어요. 헌데 요사이 혼인준비를 하는 통에 강호소식이 언니에게 알려져서, 언 니는 공자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말을 듣고....." "....." "저는 그간 계속 언니와 함께 지내온 터라 이번에도 함께 황궁을 빠져나왔지요. 허나 역시 도망치는 입장이어서 충분한 군사를 데려오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변을 당했던 것입니다." 백상인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부탁이란 무엇이오?" 유운봉은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언니를 거두어 주세요." 백상인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들은 아마도 훌륭한 사대부의 가문에 시집을 갈 것인데, 나같은 강호의 떠 돌이가 그녀를 취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일을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유운봉은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너무하신 말씀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선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허나, 백상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소!" 헌데 이때, "흥!" 홀연 난데없이 한줄기 코웃음이 들려왔다. "당신은 정말 응큼하군요!" 어느새, 방문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제갈청하와 주벽군이었는데, 주 벽군은 기이하게도 유운봉과 똑같이 매우 고혹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백상 인은 제갈청하를 항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하매!" 제갈청하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이미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으면서, 또 마음이 매우 흡족 하면서 겉으로는 안그런 척 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응큼한게 아닌가요?" "아니....." 백상인은 무어라고 변명을 하려 했으나 곧 제갈청하에 의해 가로막혔다. "당신에겐 이미 다섯이나 되는 부인이 있으니 거기에 다시 두 명의 부인이 늘 어난다고 해도 별반 차이는 없어요. 특히 당신은 그럴 능력이 있으며 부인을 많 이 둘 수록 좋아할 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설마 사랑이 신분의 귀천이나 부 귀영화에 의해 마음대로 매도될만큼 별볼일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요?" "그것은..... 아니오." 백상인은 안색이 붉어졌다. 제갈청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두 여자들은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지난 삼년간 온갖 고통속에서 세월을 보냈어요. 당신은 설마 그녀들의 사랑을 가치없는 것으로 매도하지는 않겠죠?" "그러나, 사랑과 혼인은 엄격히 다르게....." 제갈청하는 다시 말을 잘랐다. "그럼 당신은 그녀들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한평생을 함께 잠자리를 하라는 말인가요?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몸과 마음이 다른 곳에서 사는 그런 고통을 감수하라는 말인가요?" 백상인은 탄식을 발했다. 사실, 제갈청하의 그 말들은 별반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달리 반박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차라리 제갈청하가 그녀들에 대해 솔직하게 질투의 감정을 드러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때, 제갈청하의 눈짓을 받은 주벽군이 얼른 유운봉의결체 무릎을 끊 으며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백오빠! 육년 전 오빠가 나 를 치료할때 저는 이미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겼던 거에요. 부디 저를 물리치지 말아줘요!" 백상인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한다. 너는 왜 굳이 나같은 강호의 야인에게 그것도 후실로 들어오려 하느냐?" 주벽군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저는 후실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기 때 문이죠. 당신과 같은 분을 모시고 또 당신의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그까짓 후실이나 강호의 야인이란 말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것은 저의 평생 소원 이고,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저는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겠어 요." 주벽군이 이토록 완강한 자세로 나오자 백상인은 더이상 그녀를 말릴 수가 없 었다. 아니, 사실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중요 한 사실은 그녀는 몸과 마음 그 모두가 매우 사랑스런 여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백상인은 마침내 장탄식을 터뜨렸다. "좋소, 군매! 당신이 정녕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 말에, 주벽군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나비처럼 날아 백상인의 품속에 그대 로 안겼다. "고마와요, 백랑! 저는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거에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그야말로 백상인의 품속에서 엉엉 울었다. 백상인은 그녀를 달래느라 진 땀을 빼야 했다. 잠시 후, 주벽군은 울음을 그친 뒤 방긋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 다. "저어, 백랑!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백상인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부탁이라니, 그게 뭐요?" 주벽군은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유운봉을 가리켰다. "그녀도 맞이해 주세요!" 백상인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건....." 이때, 제갈청하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흥! 당신은 또 엉큼을 떠는군요! 그녀는 군매와 똑같은 처지이니 달리 반대할 이유가 없어요. 당신의 뻔히 알면서도 하는 그 능청은 정말 지겨워요!" "....." 백상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모든 음모는 제갈청하 그녀가 꾸민 것 이 분명했다. 그녀는 유운봉을 부촉해서 백상인의 품속에 안겨주고는 차갑게 말 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그 후실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아요. 우리는 그녀들을 당당히 우리와 똑같은 부인으로서 대접해 줄거에요." "언니....." 주벽군과 유운봉은 감격해서 목이 매었다. "오늘은 당신들의 신혼 첫날과도 같으니 잘 지내도록 해요! 그럼, 쓸모없는 나 는 이만 가겠어요!" 그말을 남기고, 제갈청하는 일순 신법을 일으켜 휑하니 사라졌다. 스슷..... 그 자리에는 한줄기 짙은 설레임만이 남았다. 방안에 불은 없었다. 어둠은 적당 히 두 여인의 수치심을 가려주었다. 그러나, 백상인에게 있어서 그 어둠은 대낮 의 밝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라라라락..... 하나 뿐인 나삼자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어, 젖가리개와 작은 고의가 흘러 내리자, 그녀들은 완전히 태어날 때와 똑같이 나신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물을 차고 솟구칠 듯한 인어처럼 아름다운 두 여인의 나신. 그것은 눈부셨다. 은은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자, 그녀들의 알몸은 마치 양지유를 바른 듯 은은한 향기를 토하고 있었다. 그것은 빙기옥골, 폐월수화 등의 형용구마저 부끄러울 정도로 황홀의 극치였다. 백상인이 바라보자, 그녀들은 부끄러운 나머지 알몸을 웅크리고 이불 속으로 스 며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해초가 바위에 감겨드는 것과 흡사했다. 백상인은 체 내에 일순 거대한 욕망이 솟구침을 느끼고 그녀들을 부드럽게 얼싸안았다. "백랑! 사랑해요!" 주벽군의 작은 음성이 달콤하게 그의 귓전으로 부딪쳐 왔다. "나도..... 사랑하오." 백상인은 말고 함께 주벽군의 앙증스러운 작은 나신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두 개의 융기에 이르러 가볍게 움켜쥐었다. "하악....." 주벽군은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그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백상인은 그녀 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드럽고 끈질긴 손길이 그녀의 속살 곳곳을 파고 들자, 그녀는 곧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얼마나 애태우며 그리워했던 님이었던가?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만큼 그녀의 마 음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은 금세 활활 타오르고 전 신은 부드럽게 개방되었다. 그리고, 가뭄에 목마른 사람처럼 비를 기다리기 시 작했다. 백상인은 비가 되었다. 그는 실로 알맞은 시기에 그녀에게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흠....." 주벽군은 절로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파과의 고통. 그것은 실로 무지막지했다. 그녀는 하마터면 길게 내지를 뻔한 비명을 이빨 사 이에 감추면서 참고 또 참아냈다. 이것은 사랑이요, 고통이 아니다. 사랑이 화하여 비가 되었는데 어찌 고통이라 고 말하랴.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전신으로 백상인의 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아학...." 고통은 의외로 빨리 사라지고 쾌락은 그녀의 전신을 엄습했다. 이것은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곧 전신으로 울기 시작했다. 입으로 소리내어 울 수는 없으되 몸은 파도 처럼 쾌락에 못이겨 울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쾌락의 강도는 점차 강렬해져 갔다. 그것은 한줄기 강렬한 백광이 머릿속을 꿰뚫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야 말로 무아지경속에서 쾌락의 극경을 맛보았다. "아아악-----...!"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의식은 지금 감 당못할 황홀한 쾌락속에서 곧 하얗게 멀어지고 있었으므로..... 백상인은 주벽군이 혼절해 버리자, 다른 상대를 찾았다. 유운봉. 그녀는 일면 극한의 흥분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심하게 경직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백상인의 손길이 닿자마자 그녀의 몸은 잘 마른 장작개비처럼 활활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언제 경직되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몸은 곧 활화산 처럼 뜨겁게 변해갔고, 온몸으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상인은 그녀의 봉긋 솟은 유방을 가볍게 쓸고, 또 한 손으로 그녀의 촉촉해진 비소를 슬며시 헤치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봉매! 당신은 정말 사랑스러운 여인이오." 그 말에, 유운봉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저는 사실 부족한 여자에요. 이렇게 당신의 아내가 되다니 기뻐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당신은 충분히 훌륭한 여인이오. 나는 당신이 몹시 사랑스럽소!" "아아..... 저는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유운봉은 감격에 겨워 오므렸던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백상인의 손길은 그 사 이로 교모하게 파고들었다. "하아악....." 유운봉은 곧 자지러지며 흐느꼈다. 새로운 비를 반기기라도 하듯 그녀의 깊은 숲속에서는 샘이 솟았다. 샘물은 맑디맑아 이슬처럼 영롱하고 향긋한 향기를 간 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순결의 상징이었다. 백상인의 상징은 그 사이로 조용히 들어갔다. 파과..... 그 벽은 두터웠고, 두터운 만큼 고통이 뒤따랐다. 유운봉은 하마터면 뾰족한 비 명을 질러댈 뻔 했다. 허나 그녀는 비명 대신 입숙을 꼬옥 깨물었다. 누구나 한 번은 거쳐가는 이 여자의 관문. 그녀는 깊은 사랑의 열락으로 그 고통을 감내해 나갔다. 그 고통은 주벽군에 비해 조금 긴 편이었다. 그러나, 일단 쾌락이 찾아들기 시 작하자 그녀는 오히려 쾌락이 더 참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쾌락에 못 이겨 그녀의 전신은 크게 경직되고 입술을 꽉 깨물리고 두 주먹은 침대의 이불 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은 파도처럼 움직이는 나신속에서 점차 의지를 잃어가기 시 작했다. "아하하악---.....!" 처음으로 비명같은 신음이 입술 새로 흘러나오고, 그녀는 마침내 무지개빛 눈부 신 빛살을 보았다. 그것은 환희의 극치였다. 그 환희는 곧바로 그녀의 의식을 먹어 버렸다. "학-----!" 어느새, 주벽군은 깨어서 백상인과 유운봉과의 정사를 바라보면서 다시 흥분하 고 있었다. 유운봉이 혼절하여 쓰러지자, 백상인은 다시 주벽군에게 덮쳐갔다. 이제 백상인 은 욕망의 화신이었다. 그는 처음과는 달리 주벽군을 거칠게 유린하기 시작했 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단지 약간의 고통이 다시 찾아들었을 뿐, 그녀는 그 거 친 움직임에 곧 익숙되어 오히려 그녀가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하악....." 광란의 몸부림. 그러나 애정깊은 사랑의 유희였다. 끝없이 달콤한 쾌락이 그들 의 의식을 지배하고, 그들은 그 속에서 사랑의 열정적인 환희를 맛보았다. 그것 은 주벽군이 다시 혼절할 때까지 께속되었다. "악-----!" 그녀가 다시 혼절하자, 다음 차례는 다시 유운봉이었다. 백상인의 정욕은 한이 없었다. 유운봉은 다시 거대한 쾌락속에서 혼절을 해야만 했다. 실로 그 뿐만이 아니라, 그런 반복은 그 뒤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사람의 체력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두 여인들 은 마침내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그녀들은 백상인이 부인이 많을 수록 좋다고 한 말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쾌락은 공포가 되었다. 더이상의 유희는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아직 백 상인의 기세는 욕망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녀들은 무섭게 긴장하기 시작했 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정랑의 신변에 누가 되어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 다. 그때, 문득 제갈청하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들은 탈진하여 어찌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으앗-----!" 백상인은 전신을 번쩍 차렸고, 그제야, 새로운 그의 부인이 된 두 여인은 혼절 한 듯 곤하게 쓰러져 잠들 수가 있었다. 백상인도 자신의 실수를 직감하고 즉시 마음을 가다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것은 너무 욕망을 억제하기만 하다가 한꺼번에 폭발한 탓이었다. 그들은 두 여인이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겨우 다음 날 저녁때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 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헌데 이날, 백상인 들이 묵고 있는 객점에 홀연 네 사람이 찾아들었다. 그날 저녁 늦게야 일어나 식사를 마친 그들은 돌연 점소이의 그같은 전갈을 듣고 일순 의아해 했다. "손님이 찾아왔다고? 우리에겐 찾아올 손님이 없을 것 같은데?" 제갈청하가 의아해 하자, 백상인이 물었다. "그들의 차림새는 어떻소?" 점소이는 일순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말입니다. 그게..... 하도 괴상한 것이라서, 그들은 한마디로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그랬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요 앞에 있는 주루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 걸요." 그 말에, 제갈청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악마교의 오대호법존자들 중 나머지 네 명, 그들이 분명했다. 이는 기어코 염려하던 일이 닥친 것이다. 백상인이 목 령존자를 이기기는 했지만 그들 네 사람을 동시에 이길 수가 있을까?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몰라도..... 허나, 그 기적이란 것은 그리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백상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염려마시오, 잘 될 것이오."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 될거에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그녀는 힘을 내어 말했다. 그러나, 그러는 그녀의 표정이 밝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고 주벽군이 물었다. "왜 그러지요, 언니?" 제갈청하는 쓸쓸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실은, 백랑의 최대의 적이 왔어요." "최대의 적이라고요?" 주벽군과 유운봉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다면 위험한가요?" 제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주 많이....." 일순 주벽군과 유운봉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비록 성숙한 여인이라고 해도 그녀들은 아직 겨우 하룻밤의 신혼을 보낸 풋나기인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강 호의 위험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많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저어, 가지 않으면 안되나요?" 주벽군이 다소 주저하며 물었다. 백상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들이 목표로한 이상 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는 없소. 그들이 직접 이리로 오지 않고 주루에서 기다린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오. 그들 은 내가 도저히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오." "흑....." 주벽군과 유운봉은 나직이 흐느꼈다. 그녀들이라고 이런 때의 미소가 남자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알기 보다도 더욱 어려운 것이다. 다만, 제갈청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어서 다녀오세요. 우린 당신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겠어요."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되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를 대신하여 그녀들을 황궁까 지 무사히 호송해 주어야 하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지 않겠소?" "아니에요." 제갈청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린 더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을거에요. 그러 니 차라리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것만 같지 못해요. 안그래, 금매 봉매?" "그, 그래요, 언니!"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요." 주벽군과 유운봉은 눈물젖은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청하는 백상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은 떠나세요. 우린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실 것을 믿어요." 백상인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제갈청하의 두 손을 잡았다. "고맙소. 그럼 나는 이만....." 그 말을 남기고, 백상인은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슷..... 그 뒤에 주벽군과 유운봉의 오열이 남았다. 제갈청하의 두 눈에도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x x x 예상했던대로, 사대호법존자들은 그 주루에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오대호법존자 에서 목령존자를 제외한 화령존자, 수령존자, 금령존자, 토령존자 등이었다. 주 루 안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백상인이 그 구석진 탁자 앞에 이르자, 수령 존자가 나서서 차갑게 내뱉았다. "네가 바로 목령을 죽였느냐?" 의외에도 그 말은 중원어였다. 발음이 다소 서툴긴 해도 수령존자만큼은 중원어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백상인은 그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천축어로 답변했다. "그와 나는 정당한 비무를 하였소. 헌데 불행히도 그가 나에게 패했소." 이에, 그들 사인은 일순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이 젊은 청년이 아주 능숙하게 천축어를 구사한다는 점이겠고, 무엇 보다도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설마하고 있었던 점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 었다. 그중에서도 성격이 다소 급한 화령존자가 괴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크흐흐흐..... 나는 네 말을 절대로 못믿겠다! 너는 혹시 무슨 술수를 썼던 것이 아니냐?" 백상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정 믿기 어려우면 당신이 직접 시험해 보면 되지 않소?" 그 말에, 화령존자는 크게 화를 내며 발작하려고 했다. "뭐라구----?" 이것은 또한 백상인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가능한한 일대 일의 비 무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허나, 세상만사는 그리 쉽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때, 수령존자가 화령존자를 제지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자네는 아주 수단이 훌륭하군!" 백상인은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별 말씀을. 단지 그의 수양이 부족했을 뿐이오." 그 말에, 화령존자는 다시 발작을 하려고 했다. 허나, 그는 다시 수령존자에 의 해 제지되었다. "자네는 아주 고명한 입심을 가지고 있군! 허나, 입으로 하는 싸움은 여인들이 나 하는 것일세. 그런 짓일랑은 그만두고, 우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지!" 보아하니 그 중에서 수령존자가 가장 현명한 듯 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 다. "좋소." 수령존자는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며 말했다. "우리는 오대호법존자이지만 달리 오행존자라고도 부르기도 하지. 우리 오행존 자는 사실 각기 무예가 다르지만 적과 대적할 때는 함께 협공하는 것을 좋아하 지.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말일세. 자네는 이 점을 어떻게 생 각하는가?" 백상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네 명 뿐이니 그 위력이 많이 감소되겠군! 안그렇소?" 이것은 백상인이 그 파렴치한 협공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령존자는 그 비웃음에도 오히려 웃음을 떠올렸다. "물론, 그 위력이 전만 못하게 된 것이 유감이기도 하지. 그 정도밖에 보여주지 못하게 된 사실에 자네에겐 미안하구먼!" "미안할 것은 없소." 백상인은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장소는 어디로 하겠소?" 수령존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십여 리를 가면 아주 넓고 경치가 좋은 갈대밭이 있더군. 그곳이 어떻겠나?"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헌데, 한 가지....." "....." 백상인은 수령존자 등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러한 행위는 당신들의 그 악마교주가 시킨 것이오?" 그 말에, 수령존자는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분은 이 일에 대해 모르고 계시지. 우리는 자네를 제거하고 나서 그분 께 사죄를 올릴 생각일세. 원래 그분은 며칠 후 결성대회 때나 자네를 제거할 생각이셨거든." 백상인은 내심 냉소를 떠뜨렸다. 그 말은 곧 악마성자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좋습니다. 그만 가죠!" "흐흐, 그러지." 백상인은 앞장을 섰고, 그들은 곧이어 뒤따라 나섰다. 헌데, 이때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백상인에게 주문을 받으려고 다가오던 점소이 하나가 돌연 실수로 화 령존자의 발을 밟아 버린 것이다. 당연히, 그 점소이는 화령존자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소인이 실수로 그만....." 그것은 화령존자 등의 모습이 마치 흉신악살을 닮아 있어서 절로 공포심이 들 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점소이는 다소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사죄를 했다. 그리고,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화령존자는 필시 그 의도를 알았음이 틀림없 었다. 세상에 사죄를 하는 자의 모습은 금방 봐도 알 수가 있으므로. 허나, 화령존자는 마침 크게 화가 나 있었다. 그 노화는 기실 백상인에게 비롯된 것으로, 마악 발작하려다가 수령존자에게 제 지되어 억눌려 있었던 것인데 점소이가 그 노화를 건드린 것이다. 이것은 운명 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무튼 그 점소이는 오늘 재수가 대단히 나쁜 것은 틀 림없을 것이다. "크흐흐,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화령존자는 흉광을 빛내며 수령존자를 향해 물었다. 수령존자는 싸늘하게 웃으 며 대꾸했다. "그는 지금 자네에게 용서를 부탁하는 것일세." "용서? 부탁이라구?" 화령존자는 눈알을 통방울같이 떴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점소이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용서를 해달라구? 내가 네녀석의 할아비라도 된단 말이냐?" 화령존자는 대뜸 무섭게 고함을 쳤다. 이에,점소이는 안색이 대번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사, 살려주세요!" 그는 온통 시뻘건 악마가 눈알을 부릅뜨고 뭐라고 알 수 없는 고함을 지르자, 본능적으로 무서운 공포심이 엄습한 것이다. 그의 바짓가랭이가 즉시 축축해진 것으로 보아 점소이가 지금 얼마나 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런데, 점소이의 그 본능적인 행위가 더욱 화령존자의 비위를 건드렸다. 들고 있던 점소이의 몸에서 지릿한 악취가 풍겨나오자, 화령존자는 더욱 노화를 터뜨 리며 마치 찢어죽일 듯이 점소이의 두 다리를 거꾸로 잡아들었다. 이에, 보다 못한 주루의 주인이 달려와 그를 말렸다. "아이구, 이거 왜 이러십니까요 호걸 나으리님들! 그 아이의 죄를 용서하십시 오." 허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화령존자는 들은척만척 했다. 그러자, 주인은 이번엔 수령존자에게 말했다. 그가 비교적 차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으리! 저 아이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사실, 저 아이가 무슨 큰 죄가 있겠습니 까?" 헌데, 수령존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럼 당신은 저 점소이에게 잘못이 없고, 단지 저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다는 말이오?" "그, 그런게 아니라....." 수령존자는 냉혹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죄가 있다는 말이군! 나는 저 사람이 하는 사적인 행동에 대해 이러구 저러구 간섭을 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는 마침 죄의 값을 치르려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어찌 이러구 저러구 하겠소?" 그 말에, 주인은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저, 사실 저 아이는 저의 조카입니다. 오늘의 음식값은 받지 않을테니, 아니 은 자는 있는데로 드릴테니 부디 저 아이를 풀어주십시오!" 수령존자는 안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나를 백주의 강도 취급을 한단 말이군! 나는 더이상 할 말이 없으니 어서 가보 시오!" "제발....." 수령존자는 냉혹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그저 물러나 있는게 좋을 것이오. 공연히 다치지 말고." 그러자, 주인은 낙담하고 이번엔 화령존자에게 직접 달려갔다. "그 아이를 내려놓아라!" 그러나, 그는 곧 알 수 없는 압력에 의해 도로 퉁겨나와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쿵, 쿠당당..... 바로 그때, "크하하하하.....!" 앙천광소를 터뜨린 화령존자가 돌연 악마처럼 눈을 부릅뜨더니 갑자기 들고 있 던 점소이의 가랑이를 사정없이 찢어 버리는게 아닌가? "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점소이의 단말마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후두두두.....!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 그 시뻘건 혈운이 일순 사위를 뒤덮었다. "크하하하....." 화령존자는 그 잘라진 점소이의 시뻘건 다리를 들고서 여전히 앙천광소를 터뜨 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피를 즐기는 악마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찌 인간으로서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한 폭의 지 옥도였다. 이때, 백상인은 설마하며 밖으로 나가다가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급히 되돌아 왔다. 허나, 이미 벌어진 일을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내심 낙망해 있 을 때, 돌연 장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군중들. 이곳 주루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이삼십 명의 군중들이 그 광경을 보고 분격하 여 들고 일어난 것이다. 드긍은 마침 사대호법존자들의 기이한 차림새와 용모, 그리고 괴행을 눈여겨 주시하고 있었던 참이라, 누구라도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런 악마적인 만행에 대해 그들은 분격할대로 분격하여 한꺼번에 우르르 화령 존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의 분노는 사실 거대하여 아무도 그것을 저지할 수 없을 듯 했다. "저 악마를 죽여랏-----!" "저 인간같지 못한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 "죽여 버려랏-----!" 그들의 분노에 찬 고함은 일순 주루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들 중 대체로 절반 이상은 무예를 가지고 있던 무림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각각 신법을 날려 사대 호법존자들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휙휙휙휙..... 만일 일반인이 이런 꼴을 당했다면 누구라도 공포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러 한 행위는 요사이 늘어나는 악마교의 만행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기도 했다. 허나, 그러한 것이 대체 저 네 명의 악마들에게 어떠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인 가? 화령존자 등은 그 모양을 보고 오히려 잘됐다는 듯 만면 가득 흥분한 기색을 띄었다. "멈추시오!" 백상인은 급히 달려드는 군중들을 말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번----- 쩍-----! 전율할 붉은빛 광채가 일었다. 그것은 당연히 화령존자가 발한 것이었다. 그 붉 은 광채는 마치 지옥의 겁화처럼 군중들을 향해 몰아쳐 갔다. 몰론, 그때 백상 인은 군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령도검을 발했다. 번----- 쩍! 허나, 그 순간을 미리 기다리기라도 한듯 금령존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 신의 도검을 전개했다. 번----- 쩍-----! 일순 한 무리의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류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동시에, 쩌러러러러렁-----......! 자광과 녹광이 서로 뒤엉키는 곳에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작렬했다. 꽈꽈꽈꽈꽝-----! 꽝! 꽝! 꽈르르릉-----.....! 후두두두둑-----.....! 화르르르륵.....! 갑자기 천지가 온통 뒤집어지는 듯 싶었다. 그 속에서 찢어질 듯이 울려퍼진 단 말마. "크아아아--- 악!" 스스스스스..... 주루. 그것이 통째로 가루로 화해 사라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사람 들이 모두 가루로 화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서 일어난 압력으로 이 주위의 백여 장 일대는 거센 회오리에 쉽싸였다. 휘르르르르르-----.....! 그 속에서 백상인과 금령존자는 서로 두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보아하니 그들 의 능력은 서로 백중지세처럼 보였다. 금령존자는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만면에 경악한 표정으로 안색이 창백해 져 있었고, 백상인은 이 급변한 사태에 일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길을 가던 사람들도 대피해 버리고, 이 부근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통채로 날아간, 그래서 이제는 텅 비어버린 주루의 자리에서 그들 오인만이 우 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일대 겁란이었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악마의 행위였다. 백상인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것은 불 가항력이었던가? 일순간, 덧없이 사라져간 수십 명의 목숨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일까? 이때, 수령존자가 그에게 다가들었다. "자네는 어떻게 목령도검을 연성했는가?" 백상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가 굳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 한단 말이오?" "아아, 꼭 그래야 한다는 범은 없지. 아암....." 수령존자는 고래를 설래설래 내젓더니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자네가 가능하면 말해주었으면 하는 것일세. 헌데 자네의 그 목령도검 은 다소 이상한 것 같던데? 왜냐햐면....." "....." 수령존자는 눈빛을 교활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자넨 이미 알고 있겠지? 오행상극의 이치를. 즉, 금극목인데 자네는 금령의 공 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점령했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자네는 이 일에 대해 해명을 해보겠나?" 백상인은 그제야 그들이 안색을 굳힌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허나, 그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바로, 정공과 사공의 차이인 것이다. 사공이 란 것은 무예를 보다 쉽고 빠르게 연성하기 위한 편법에 의해 생긴 것으로, 정 공에 비해 다소의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함으로 인해 진짜 정공을 만났을 때에는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백상인은 굳이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친절히 그런 설명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싸늘하게 둘러보면서 대꾸했다. "나는 지금 그것보다도 우리들의 비무가 더욱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당신들 은 혹시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오?" 그 말에, 사대호법존자들은 일순 안색이 대변했다. 수령존자가 냉기를 뿌리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방자해지다니 어리석군, 백상인!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하다니.. 그렇 다면 어서 앞장서라! 끝장을 내주겠다!" "좋소." 슷..... 백상인은 먼저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그 뒤를 따라 네 사람도 급히 신형을 날 렸다. 스슷..... 황폐해진 주루의 흔적. 그곳엔 허공에 떠올랐던 흙먼지가 싸이기 시작하고, 점 차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갈대밭. 스스스..... 한줄기 스산한 바람이 불어 드넓은 갈대밭을 한차례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한 광경은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는 광경과 흡사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웠다. 암천 의 상공에는 미인의 눈썹같은 초승달이 스산한 바람속을 가르며 미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한 빛은 외히려 스산한 분위기를 더해 줄 뿐이었다. 그 외 에 주위는 적막했다. 그렇다고 인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섯 사람. 백상인과 수령존자 등은 그 스산한 달빛 아래 갈대밭 속에서 둥글게 마주서 있 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인들은 백상인을 한가운데 두고 둘러싼 형국이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잠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흡사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그 들 사이에 흘렀다. 아니, 그러한 침묵은 바람과 함께 스산하게 휘몰아치는 무서운 살기였다. 살기 는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일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들 모두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또 그들은 마치 하나의 석상이 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수령존자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놀라운 일이군. 자네는 확실히 우리보다 한수 위이네. 자네의 기도는 확실히 우리보다 한 수 위야. 자네의 그 목령도검은 확실히 특이한 것이 틀림없네. 그 러나, 자네가 우리 네 사람을 동시에 이길 수가 있을까?" "....." 백상인은 침묵했다. 수령존자는 말을 이었다. "성자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히 당부하셨지. 본 교단에서는 자네와 같은 인재를 매우 필요로 한다고. 자네는 잘만 하면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르 게 될 걸세. 물론 그 자리는 우리보다 한 단계 높은 자리이지. 만일 그리만 된 다면, 과거 예홍산인의 죽음에 대해 양해를 했듯이 이번 목령존자의 죽음에 대 해서도 절대로 추궁하지 않겠네. 어떤가? 모든 생각을 다시 재고해 보는 것 이.....?" 백상인은 고개를 저으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치욕스럽게 백년을 사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하루를 살다감이 나으리라는 이야 기를 못들어 보셨소? 내 심정은 지금 그와 같소." 수령존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본 교단이 마치 시궁창과도 같단 말인가?" "그렇소." 백상인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일순 나머지 세 명의 존자가 벼락 같이 분노했다. "크하하하! 건방진 애송이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덤벼들다니!" 사실 말하자면, 수령존자가 그러한 그들의 분노심을 유발시겼다고 해야 할 것이 다. 교활한 그는 분노로써 긴장감을 무마시키고 일체감을 불러 일으키자는 생각 을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질이 가장 급한 화령존자가 제일 먼저 분노하 여 화령도검을 전개했다. 번----- 쩍-----! 이에 뒤질세라, 금령존자와 토령존자 역시 각각 금령도검과 토령도검을 전개했 다. 번----- 쩍----- 번----- 쩍.....! 백상인은 세 가지 광채가 자신을 향해 노도처럼 휘몰아쳐오자, 주저없이 본능처 럼 목령도검을 일시에 최대한 발출했다. 번----- 쩍! 그 광채는 일면 다른 것들과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세밀히 살펴본다면 백상 인의 도검은 밝은 기운이 있고, 나머지 도검의 광채는 어두운 기운이 있다는 사 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 위력면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하나의 도검과 세 가지 도검이 한 순간 무섭게 격돌을 일으키자, 꽝! 꽝꽝꽝꽝----.....! 꽈르르르르릉-----! 쩌러러러러렁.....! 곧 무서운 폭발음이 사위를 진동시키면서 갈대밭 전체가 움푹 파여 하늘높이 떠오르면서 전체가 온통 짙은 흙먼지 속에 파묻혔다. 미친 듯한 예리한 경기가 마구 난무하니 이곳이 바로 아수라지옥인 것 같았다. 허나, 그 와중에서도 대결의 결과는 거의 선명하게 드러났으니, 백상인의 도검 은 확실히 세 가지 도검의 위력을 거의 비슷하게 막아냈던 것이다. 이것은 일대 의 쾌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수령존자는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무리의 도검이 서로 부딪쳐 가까스로 무산되려는 그 순간, 번----- 쩍-----! 진한 푸른 빛을 띤 수령존자의 수령도검이 일시에 발출되었다. 그것은 가공할 기세를 몰아 백상인에게 노도처럼 덮쳐갔다. 허공에 떠오른 흙먼지나 휘몰아치는 광풍 등, 그 도검에 부딪치는 모든 것들은 일거에 소멸되거나 가루로 화해 사라졌다. 그 즈음 백상인은 이미 한번 최대의 힘을 기울여서 도검을 발출한 후였기에 재차 도검을 시전할 여유가 없었다. 그 냥 서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꽝-----.....! 광채가 백상인의 몸에 부딪치자, 굉렬한 금속성 굉음이 터져나왔다. "음." 짤막한 신음이 그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왔다. 허나 그는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신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옴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가 수령도검을 맞은 까닭이다. 수령도검은 수의 기운과 관계 있는 것으로, 그 속에는 실로 극한의 기류가 담겨져 있었다. 만일 보통사람이 맞았다면 백이면 백, 모두 일순 완전히 얼음이 되어 가루로 흩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차원높은 무예의 기운이 체내에 흐르고 있는 그에게는 완전한 치 명적인 일격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전신은 뻣뻣하게 얼어버린 것이다. 실로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령존자가 아니었다. "자, 공격을 계속하시오-----!" 말과 더불어 그는 자신이 직접 재차 도검을 발출했다. 번----- 쩍-----! 이에, 나머지 사람들도 뒤질세라 즉시 각각의 도검을 발출시켰다. 번----- 쩍----- 번----- 쩍-----.....! 홍황청자의 네 가지 색깔의 강렬한 광채. 그것은 속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아 름답다고 경탄을 금하지 못하리라. 그러한 광채는 일거에 백상인을 향해 휩쓸어 갔다. 이때, 백상인은 전신에 가공스런 추위가 느껴짐과 동시에 의식이 혼미해 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적들의 공격을 알아보고는 일순 경각하여 최대한 자신의 도검을 격출시켰다. 번----- 쩍! 그것은 전번보다는 다소 못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그 네 가지 도검 을 향해 맞서갔다. 헌데, 그때였다. 홀연 수령존자의 도검이 백상인의 목령도검 과 맞부딪치기 직전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 그 일에 대해 일순 백상인과 다른 금령존자 등도 크게 의아해 했다. 허나, 그러 한 일을 검토해볼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두 무리를 이룬 네 가지 도검 광채는 그 순간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꽝꽝꽝꽝꽝-----.....! 꽈르르르-----.....! 쩌러러러러러렁.....! 쿠쿠쿠쿠쿠우우우우우우우우.....! 휘류류류류류-----.....! 츠츠츠츠츠츠츠츳.....! 실로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거대한 광풍이 노도처럼 휘몰아치면서 흡사 아수라지옥과 같은 상황을 연출시켰다. 주위 백 장 이내의 갈대밭은 완전히 그 영향하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시뻘건 흙먼지만 자욱하게 허공을 뒤덮고 있었 다. 헌데, 바로 그때, 수령존자의 전신에서 다시 예의 그 도검이 펼쳐졌다. 번----- 쩍-----! 백상인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가는 푸른 빛의 강렬한 광채. 아.....! 이로써 의문은 저절로 풀린 셈이다. 그러니까, 수령존자는 이 기습을 재차 펼치 기 위해서 아까는 짐짓 허초식을 펼쳤던 것이다. 실로 교활한 그의 술수였다. 수령존자의 무서운 도검은 이미 기진맥진한 백상인의 전신을 향해 파도처럼 덮 쳐갔다. 꽝-----.....! 이런 것에 예외는 있을 수가 없었다. 백상인은 다시 둔탁하게 그 도검을 얻어맞 고 전신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신음소리는 없었다. 아마도 신음소리조차 일순간 얼어버린 듯 했다. 그의 눈동자도 이미 흐릿해졌고, 전신엔 하얗게 서리가 두텁 게 내려 마치 완벽한 설인을 보는 듯 했다. 수령존자의 도검을 두번씩이나 거푸 정통으로 맞았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신형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뒤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쿵.....! 그것은 이미 생명이 다한 고목나무가 쓰러져 버리는 광경과 흡사했다. 그러고도 그의 의식이 아직 붙어 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의 육신은 완전 히 새하얀 얼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반면, 넘어지는 그 충격과 불어오는 일 진의 바람에 의해 그의 의복이 가루로 화해 흩날리기 시작했다. 휘류류류..... 백상인의 전신은 금새 알몸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그 모습은 비록 하얗게 얼어버렸을 망정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면모가 있었 다. 허나, 이 광경을 바라보고 수령존자는 자신의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듯이 파 안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어리석은 백상인아! 성자님마저 침을 삼키는 최고의 인재인 너는 왜 그리 어리석어서 나의 계교에 걸렸단 말이냐? 너의 그 모습은 대로의 한쪽에 걸어놓고 만인에게 눈요기로 보여줄만 하구나! 아니, 그럴게 아니라 내가 다시 한번 일격을 가해줄까? 그러면 너의 육신은 금세 흔적도 없이 가루로 화해 사 라지고 말 것이다." 그 의기양양한 태도에 나머지 세 사람들도 동조하며 소리쳤다. "캇캇캇캇... 저 모습은 여자꽤나 울리겠는 걸! 수령! 너의 작품은 소멸시켜 버 리기가 아깝구나! 어때? 저 작품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금령존자의말에 이어 화령존자가 혈광을 쭈욱 뿌리며 소리쳤다. "그건 안돼! 수령은 확실히 나 화령보다 훌륭하지만 저기 저 녀석은 더욱 놀라 운 놈이야. 그놈은 불과 한 달 사이에 목령도검을 괴상하게 익혀냈거든. 저놈을 잘못 다루었다간 잘못하면 우리가 당할지도 몰라! 지금 즉시 제거해 버리자! 어 때?" 마지막으로 토령존자가 말했다. "헐헐헐...! 좋은 의견이야! 그러나 화령, 너는 이 일에 끼어들지 마라! 저자는 지금 수령의 공격에 얼어 있는데 네가 다시 공격하면 그 얼음이 풀려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수령! 자네가 다시 일격을 가해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네!" 수령존자는 그 말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구! 자네들 내가 정말로 이 녀석을 그냥 둘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 이지! 자, 다소 아깝기는 하지만 나의 작품이 멋지게 사라지는 광경을 다들 보 라구!" 말고 동시에, 수령존자는 미리 준비했던 자신의 수령도검을 시전했다. 번----- 쩍-----! 강렬한 푸른색의 광채. 그 수령도검이 가공할 위력을 담고 백상인을 향해 일시 에 파도처럼 덮쳐갔다. 꽝-----.....! 수령도검이 백상인의 몸에 맞자 다시 벼락치는 듯한 둔탁음이 일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백상인의 전신은 완전히 얼어버려 가루로 화해 사라지 기는 커녕 오히려 아까와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특별히 그의 피부가 더욱 얼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백상인의 전신은 아까 도검 을 맞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기이한 사실에 대히 수령존자는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크게 의아해 했다. 특해 화령존자는 대뜸 성질급한 욕설을 퍼 부었다. "제기랄, 어떻게 된거야? 수령! 너의 그 도검은 이미 녹슬어 버린게 아니냐?" 수령존자는 그만 오만상을 찌푸렸다. "쓸데없이 지껄이지 말고 가만 있어, 화령! 도검에 녹이 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나는 다시 한번 해보겠다." 말과 함께 수령존자는 다시 한번 도검을 전개했다. 번----- 쩍-----! 꽝-----.....!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대해 경악한 수령존자는 이내 연거푸 도검을 마구 백상인을 향해 날리기 시작했다. 허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 쩍----- 번----- 쩍-----.....! 꽝! 꽝! 꽝! 꽝-----.....! 백상인은 전혀 가루가 되려는 기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혼절한 것도 아 니었다. 그것은 그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도검마저 펼칠 수가 없어서 마구 공격을 당하 고는 있지만, 희미하게나마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수령존자는 이 놀라운 결과에 대해 아연실색하다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은밀하게 백상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 람이 있을 턱이 없다. 수령존자는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무예가 고강한 사람을 악마성자 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이런 지 대한 야망을 꿈꿀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 백상인의 능력이 다소 비상하게 되긴 했지만, 그 이외에 또다른 강자 가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도검이 정말로 녹이 슨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교활한 수령존자는 일시 이 일로 인해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망연히 서 있었 다. 그때, 홀연 토령존자가 나직하게 외쳤다. "수령! 저기 좀 보라구!" ".....?" 일순 수령존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토령존자는 늘 매사에 신중하고 너그러우 면서도 포용력이 있으므로 사실상 그들 중의 지도자격이었다. 그것은 나머지 사 람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이지만 수령존자는 늘 그가 단지 자신보다 더욱 교활 한 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허나, 토령존자는 매사에 잘 나서지 않으면서도 가끔 나설 때는 반드시 필요한 말을 한다. 그것은 거의 결정적인 말이거나 특이한 제안이었다. 따라서, 토령존 자를 늘 경계하는 수령존자도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 토령존자는 손가락으로 백상인을 가리켰다. "저쪽을 잘 살펴보라구!" ".....?" 수령존자는 일순 의아해 하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저것은.....!" 토령존자가 가리킨 것. 그것은 백상인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백상인의 몸 위였다. 금화. 그것이 언제부터 백상인의 심장부위 위에 올려져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단지 아까 의복이 모조리 가루로 화할 때 품속에 있던 그 금화가 자연스럽게 그 위 에 올려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백상인의 소지품은 비교적 간단하여 얼마간의 황금전표와 은자부스러기, 그리고 금화와 금검, 그리고 한 개의 백옥소가 고작이었다. 황금전표는 이미 수 령존자의 공격에 의해 가루로 화한지 오래이고, 몇 개의 은자조각과 백옥소, 그 리고 금검은 주변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유독 금화만이 그의 심장부위의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금화는 바로 우담화의 정령이 자신의 피와 살이라고 할수 있는 무극금황정을 깎아서 만든 정표로, 기실 무극의 정기가 가득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금화는 지 금 백상인의 몸 위에서 눈부신 금광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럼 저것이 지금 나의 공격을 무산시키고 있단 말이오?" 수령존자는 의아해 하면서 토령존자에게 물었다. 토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렇지 않고서야 달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그도 그렇군!" 수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헌제 그럼 이 일을 어쩌지?" 토령존자는 수령존자를 향해 깊은 시선으로 되물었다. "자네, 아직 삼류의 무공을 기억하나?" 수령존자는 재차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토령존자가 말하는 의도를 파악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삼류의 무공이라면 현재 중원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그 내공에 의한 장법 따 위가 아닌가?" 토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런 것을 왜.....?" 토령존자는 미소하며 설명했다. "내 말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의 무예는 거의 기척이 없는 것일세. 그것은 고 도의 무예이니 당연한 결과이지. 허나, 그것으로 저 금화를 떨어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삼류무예에 대해 물어본 것이네." "아하! 바로 그렇게 하면 되겠군!" 수령존자는 대뜸 안색이 밝아졌다. 이것은 마치 고도의 무예자가 아주 간단한 무예를 간과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삼류무공이야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수령존자는 껄껄 웃으며 즉시 백상인을 향해 가볍게 일장을 날렸다. 꽈우우우우우.....! 순간 먹구름같은 경기가 노도처럼 백상인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그것은 결코 과거의 남궁벽 등이 전력을 다한 위력과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백상인이 보 통의 무인이었더라면 아마 이 일장에 의해 즉시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리라. 꽝-----.....! 쿠당당.....! 백상인의 신형은 즉시 십 장 밖으로 날려가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기 이하게도 그 금화는 여전히 백상인의 몸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수령 존자의 안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상하군.....!" 그를 향해 토령존자가 말했다. "저 금화의 재질에 문제가 있는 듯 하네." 수령존자는 시선을 음산하게 빛냈다. "그렇다면 달려가서 직접 때어내야 하겠군!" 허나, 그는 곧 토령존자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다. "위험하네! 그는 지금 무예를 펼칠 수 있는지도 모르네. 만일 자네가 그의 기습 에 죽는다면 우린 그를 이길 수가 없을지도 모르네." 수령존자는 신형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그렇군! 그렇다면.....?" 토령존자는 눈빛을 깊게 빛내며 말했다. "우리 이번엔 함께 그를 공격해 보세! 그런다면 아마 그는 완전히 가루로 화할 는지도 모르네. 일거에 말이네!" "좋은 생각이오!" 수령존자는 즉시 찬성했다. 그러자, 나머지 두 명도 즉시 동조하여 준비를 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일순 토령존자가 짤막하게 외쳤다. "공격하세-----!"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번----- 쩍----- 번----- 쩍-----.....! 허공 가득 강렬한 빛무리가 일면서 백상인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그 위력은 가 히 미증유의 것, 그 앞에 놓인 백상인의 모습은 마치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와 보 였다. 그럼에도 백상인은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린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광 경에 사대호법존자들은 일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령존자의 도검 하나는 견딜 수 있었을지라도 네 명의 합공을 견딜 수는 없으 리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 거대한 빛무리는 백상인을 완전히 덮쳐 버리고 말았다. 꽝꽝꽝꽝꽝-----.....! 거대한 폭음. 그것이 어찌 인간의 몸에 부딪친 무공에 의해 나는 소리라고 말할 수가 있으랴. 일순. 백상인이 있는 주위의 바닥이 완전히 터져나가면서 흡사 혼돈같은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라 사위를 버섯구름처럼 뒤덮었다. 이에, 사대존자들은 일시 안심하는 눈치였다. 제아무리 강자라 할지라도 그런 공세하에 살아날 사람은 없으리라. 그가 금강불괴지신의 할아버지를 연성했더라 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리라. 그들은 그렇게 내심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런 안심만큼이나 그들은 다시 한번 크게 놀라 눈을 부릅 떠야 했다. 백상인. 그는 완전히 소멸된 흙먼지 속에서도 여전히 멀쩡하게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혼돈같은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그 금화는 더욱더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혹시 환각이 아닐까? 저 백상인은 이미 가루로 변했는데 자신들 이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럴 수가.....!" 사대존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만일, 자신들의 도검이 이토록 위 력이 별볼일 없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뿌드득.....! 수령존자가 일순 이빨을 소리나게 갈아붙이더니 안면을 악독하게 일그렸다. 그 러면서 그는 일순 뭔가 생각한 듯 백상인의 품속에서 나온 소지품들을 집어들 었다. 그것은 바로 백옥소와 금검이었다. "뭘 하려는 건가?" 토령존자의 물음에 수령존자는 안면을 융악하게 일그리며 말했다. "과거 예홍산인이 저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물론....." "그때 예홍산인이 무엇 때문에 저자에게 당했는지 아시오?" "....." 수령존자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이 금검이오. 아니, 이 만년온옥으로 만들어진 백옥소도 무슨 작용을 했 는지도 모르지! 따라서 나는 이것을 저놈에게 한번 시험해볼 생각이오. 저놈이 과거의 예홍산인보다 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 말에, 토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그것은 보아하니 유래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신검임이 분명한 데, 수령이 그것으로 놈을 토막낸다면 도검으로 가루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 을 것이오." 토령존자의 이 칭찬을 듣자, 수령존자는 내심 의기양양해져서 흉악하게 웃었다. "내가 만일 이 일을 성공하면 당신들은 이 공을 잊지 말아야 하오! 자, 그럼 해 보겠소!" 이윽고, 수령존자는 금검을 들고 백상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대략 십 장 밖 에 이르자, 수령존자는 신형을 멈추고 백옥소는 좌측 손에 든 채 금검을 우수에 들고 백상인에게 겨누었다. 그들과 같은 고수에게는 십 장의 거리라도 실로 지척과 같은 것이다. 이어, 수 령존자는 본신의 무한한 내공을 가득 끌어올렸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매우 신 중하기 이를데 없었다. 실로 이번의 이 일이 그들의 앞일에 중요한 변수가 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곧 그의 우수에 들린 금검에서 홀연 무한한 내력에 의한 검강이 일어 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그 흡사 검신처럼 늘어난 검강은 길이가 무려 십 장 가까이 됐다. 이것은 강호 의 일반 무인들이 보기에는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수령존자는 그 검강을 가지고 백상인의 육신을 향해 일순 빠르게 내리쳐 갔다. 슉, 그 기세와 빠르기는 형용을 불허하는 것이어서 백상인은 흡사 도마 위의 고기 처럼 곧 여러토막으로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홀연 누워있던 백상인이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미소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미 늦었소!" "헉!" 수령존자는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바로 이 순간 백상인이 깨어날 줄이야. 수 령존자는 무의식중에 내려치던 검강을 계속해서 움직였으나, 그것이 백상인의 몸 위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이 모든 사실에 수령존자는 일순 심장이 튀어나올만큼 놀라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다가온 놀라운 공포감에 그는 그만 자신의 도검을 본능적으로 전개하고 말았다. 번----- 쩍-----! 비록 다급한 순간에 전개한 것일망정 그 광채는 여전히 강렬했고 눈부셨다. 그 러나, 문득 자신이 실수했음을 느꼈을 때에는 상대방의 전신에서 기이한 황금빛 광채가 번져나옴을 볼 수가 있었다. 황금빛 광채. 그것은 맹세코 수령존자 본인이 생전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수 령도검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또 번쩍이지도 않았다. 다만 은은한 황금빛으로 번져나오는 노을의 움직임 같기도 했다. 아니, 그 빛깔은 단연코 성스러운 서기 였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아까 보았던 금화의 광채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들. 이러한 생각들을 수령존자는 일순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실 은 갑작스럽게 눈앞으로 닥쳐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느낌은 길었지만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마치 일수유같은 촌각의 시간이 지나가고, 수령존자는 자신의 푸른 빛 도검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그대신 황금빛 서광이 급격히 덮쳐 옴을 인식했다. 그는 위기의식속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비명소리는 결코 밖으로 새 어나갈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의식은 아득히 무저의 세계로 떨어지 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신이 하얗게 비는 충격속에서..... 지독히 교활한 만큼 허 망한 종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스스스스..... 머리부터 차례대로 가루로 화해 흩어지는 수령존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질식할 것 같은 침묵속에 사로잡혔다. 이윽고, 수령존자의 신형 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가 들고 있던 금검과 백옥소가 의지처를 잃고 바닥 으로 힘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백상인이 불쑥 솟아나듯 그 자리에 다가와 두 가지 그의 물건을 받아들였 다. 그것은 전혀 환상과 같은 몸놀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이번에 실로 괄목할만한 대성취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도검은 처음 시전하는 것이었는지라 완벽하지 못했소. 만일 당신이 먼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목숨은 해치지 않았을 텐데....." 백상인의 그 독백이 조용히 울려퍼지자, 그제야 삼대존자는 정신을 번쩍 차렸 다. "너의 그 무예는 뭐라는 것냐?" 토령존자가 정신을 차리고 처음으로 묻는 말이었다. 다른 두 사람 역시 신경을 곧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이 일이 매우 궁금한것 같았다. 백상인 은 웃으며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무극도검이오." "무극도, 도검?" 삼인은 눈을 있는대로 부릅떴다. "그, 그럴 수가! 믿을 수 없다!" 토령존자의 말에 백상인은 미소하며 물었다. "무엇이 그리 믿을 수 없다는 말이오?" 토령존자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무극도검이란 말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사실 불가능한 성취이 다. 무극이란 것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듯이 그러한 무예도 단지 전설 뿐이었다 는 말이다. 허나, 네가 직접 무극도검을 성취했다고 말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 고....." 백상인은 웃으며 말했다. "나의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소." "사실이겠지. 허나....." "....." 토령존자는 길게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자네가 그 무극도검은 연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겠나? 우리는 솔직히 마음으로 승복할 수 없어서 그렇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마지막이란 말은 당치않지만....." "....." 백상인이 승낙의 표시를 하자 그들 삼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성질 급한 화령존자와 무뚝뚝한 금령존자도 매우 온순해진 표정이었다. 그들은 백상 인의 너무도 가공한 무예에 주죽이 들어버린 것일까? 백상인은 그들을 둘러보 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시 수령존자의 두번째 공격을 받고 정말 위기에 물렸었소. 나는 더이상 무예를 전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마저 혼미해져 왔소. 그때 정말로 죽는 줄 알았소.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것이 나를 살린 것이오." 백상인은 말을 하면서 금화를 들어보였다. "....." "이것은 천하에서 유일한 무극지지의 정수인 무극금황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오. 따러서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순수한 무극의 결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 오. 물론 나도 과거에 무극의 기연을 얻긴 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나의 몸에 융 화되지 못했고, 또 융화되었더라고 하더라도 결코 순수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따라서 이 금화가 옷속에 숨겨져서 빛을 보지 못할 때에는 나는 그저 수령도검 에 의해 죽어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소. 그런데, 나는 마침 그때 옷이 전부 가루가 되었소. 그것은 실로 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소." "그것을 어째서 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토령존자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백상인은 조용히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이미 아시겠지만, 무극은 천하 우주의 시초이며 그 귀결점인 것이오. 따라서 그 힘은 온갖 우주 속에서 가장 강한 것이며, 제아무리 강한 무예라 할 지라도 즉시 그 속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오. 비록 이 금화가 무극의 무예 그 자 체는 아니었지만, 무극의 순수한 정화였기에 수령존자의 도검을 흡수할 수 있었 던 것이오. 수령존자는 나의 몸에 도검의 기운을 불어 넣었소. 그 때문에 금화 는 그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끝까지 붙어 있었던 것이오. 이것은 마치 언덕 위 의 바위가 조금만 힘을 가해주면 거대한 힘으로 낙하하는 이치와 같소. 즉, 수 령의 도검에 의해 이 금화는 영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오." 토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바로 당신이 우리의 공격에도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던 것이구려! 우 리는 우리의 무예가 잠시 녹이 슬었나 했소이다." 백상인은 빙그레 미소했다. "무예가 금속이 아닌한 녹이 슬리야 있겠소?" "???....." 토령존자는 기괴하게 웃더니 곧 눈을 깊게 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 무극도검을 연성 한 경위는 아니지 않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계속했다. "내가 미처 당신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내가 목령도검을 연성한 경위 는 이미 그 구결을 알고 있었고, 또 목령존자의 시전광경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 오. 따라서 그와 마찬가지로 실은 당신들의 무예도 그때에는 거의 터득한 상태 였소. 바로 그때, 금화의 빛이 나의 영감을 거세게 움직였소. 마침 그때는 금화 가 나의 몸속에 침투한 수령도검의 기운을 거의 흡수한 상태였는지라, 나는 누 운 채 그대로 그 구결에 몰입했소.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러한 영감은 일평생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이기에 나는 죽음의 위협마저도 불사했던 것이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을 끝맺었다. "그리하여 운좋게도 나는 제때에 맞추어 연성을 끝냈던 것이오. 허나, 나는 그 무극도검의 위력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소. 가볍게 방어만 한다는 것이... 수 령존자를 죽이고 말았소. 미안하오!" "미안하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토령존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헌데, 말씀 도중 구결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은 조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대해 해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백상인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문득 웃으며 되물었다. "당신은 혹시 반야문을 아시오?" "반야문이라.....?" 토령존자는 일순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있던 화령존자도 의아해하며 금령 존자에게 물었다. "이봐 금령! 반야문이 뭐지?" 금령존자는 무뚝뚝하게 되쏘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멍청아!" 화령존자는 그 말에 발끈 화를 내려다가 곧 가까스로 참고 중얼거렸다. "하긴, 네가 알고 있을 리가 없지... 헌데 그 반야문은 혹시 불문을 뜻하는 것 이 아닐까? 아니 도가의 문파일 수도 있지." 백상인은 그들이 반야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들의 집단인 악마교의 생성유래에 포함된 반야문의 이야기를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외였다. 아마 악마교는 자신들의 수치라고 여겨지는 그 대목을 일부러 감추어 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교주인 악마성자는 알고 있을 것인가? 백상인 은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구태여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웃으며 얼버무렸다. "나는 과거 우연한 기회에 그 구결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오." 토령존자는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그러셨군요?" 물론 그도 내심 백상인이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지만, 기실 이러한 무예에 관한 내용은 서로가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럼, 당신들은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소?" 토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 이어, 토령존자는 문득 백상인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헌데,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무엇이오? 말해보시오!" 백상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토령존자는 고개를 깊이 수그리더니 어렵게 겨우 말을 꺼냈다. "저희들의 자진을 허락해 주십시오." 백상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이제 당신들을 개과천선시켜 살려주려고 하는데?" 헌데, 토령존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됩니다!" 백상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왜 안된다는 거요?" 토령존자는 일순 숙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은 죽어갈 때 그 말이 진실되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을 결심한 몸. 남기고 감출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토령존자는 말을 이었다. 그의 어조는 매우 격정에 차 있어서 절로 감동하게 만 들었다. "당신은 지금 우리들을 살려준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들 은 이미 무수한 잘못을 저질러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렇 다고 의리를 저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의 도움에 의해 살아 날 경우, 우리는 차후 우리의 성자님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괴로움을 당하느 니 우리들은 차라리 자진하여 죄의 갚음을 하려고 합니다. 사실, 당신도 우리를 살려주기 보다는 차라리 자진하도록 그냥 놔두는 편이 속 펀할 것입니다. 그리 고, 이것은 우리가 무수한 원혼들에게 향하는 죄의 갚음이라고 생각하시고 우리 들을 그대로 놔두시기 바랍니다." 토령존자의 말은 그냥 듣기에도 깊은 진정이 어려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어 조였다. 누구라도 그 음성을 들으면 대번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 것이다. 백상인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 말은 진정이오?" 토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강호로 볼때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것입니다. 그리 고 이것은 저희들의 소원입니다." 토령존자의 어조는 매우 간곡했다. 백상인은 시선을 돌려 화령존자에게 물었다. "당신의 의도도 그러하오?" "그, 그렇습니다!" 화령존자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끓으며 소리쳤다. 시뻘건 그의 안광에서는 금방이라도 그의 진정이 튀어나올 듯 했다. 이에, 백상인은 끝으로 시선을 금령 존자에게 돌렸다. "나는 당신을 아끼고 싶소. 당신의 의도는 어떻소?" "....." 금령존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묵직한 음 성으로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 은혜는 내세에서나 갚기를 소망합니다. 만일내세 가 있다면 저는 당신의 종이 되기를 자처할 것입니다. 흑....." 마지막으로 금령존자는 진하디 진한 사나이의 눈물을 떨구었다. 그 뜨겁게 오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백상인은 거푸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리고 는 무겁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의도를 허락하오. 그러나 후회는 말아야 할 것이오." "후, 후회는 정말 없습니다!" 토령존자의 음성을 들으며, 백상인은 서서히 선형을 돌렸다. 그러자, 토령존자와 화령존자, 그리고 금령존자는 삼재의 위치로 둥글게 모였다. 그들이 둥글게 모 인 채 좌정하자, 일순, 그들의 신형에서 갑자기 각각의 광채가 현란하게 솟구치 기 시작했다. 홍황자. 그것은 바로 그들의 도검공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예를 안으로 되 돌려 소멸하려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곧 그들의 무예가 자신들의 육신을 볼태우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지독한 노린내와 함께 그들의 인상은 일순 무서운 고통속에서 한껏 찌푸러졌다. 그러나, 그 무예가 고강한만큼 그들이 소멸되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스스스스..... 한줄기 바람이 일자, 그들의 시신은 곧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들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허무하면서도 완벽한 자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백상인. 그는 이미 이 자리를 떠나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일진의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간 갈대밭엔 일순 정적만이 남았다. 죽음보다 더욱 깊은..... 세 사람. 그들은 분명히 죽었다. 그들의 육신이 소멸된 것은 사실이며, 상식적으로 생각 하기에도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희희낙락하며 어느 한쪽 방향으로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분명히 죽었으되 사실은 죽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영혼. 사후의 영혼이 있는지 알아내기란 정말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나, 여기 그 영혼과 비슷한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영이란 것이다. 원영----- 사람이 정통의 무예를 익혀 그 경지가 연허합도에 오르면 능히 육신 가운데서 원영이란 존재를 분리시킬 수가 있다고 한다. 허나, 거기에는 결코 육신이 파괴 되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뒤따르게 된다. 육신이 파괴되면 원영이 다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 육신이 완전히 파괴되어도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로 신비 로운 마교의 대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아수라환혼복체대법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연코 마법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원영이 되살아나려면 반드시 다른 육체의 영혼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즉, 아수라환혼대법을 펼친 원영은 육신의 영혼을 죽이고 자신이 다시 그 육체 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은 영구히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씨가 모두 마를 때까지..... "크핫핫핫핫.....! 통쾌하군, 통쾌해! 놈은 우리가 이 아수라환혼복체대법으로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겠지?" 화령존자는 가가대소를 터뜨리며 웃어댔다. 몰론, 그가 하는 말은 보통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심어전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원영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금령존자가 그에 동조하며 껄껄 웃어댔다. "이 모두가 토령의 공이 커! 그녀석이 얼마나 감격해 하는지 말야. 나조차도 갑 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더라구!" 토령존자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연기는 금령이 더 잘하더군! 나는 금령이 그토록 말을 잘하는지 오늘 처음 알 게 되었어. 이제부터는 금령을 다시 봐야 하겠어." "맞아, 맞아! 뭐 내세가 어떻다구? 크핫핫핫, 그녀석은 장차 내세에 종이 하나 생기는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말야! 캇캇....." 화령존자가 꺼리낌없이 마구 웃어댔다. 이에, 금령존자가 다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안된 것은 수령이야. 그도 잘만하면 우리처럼 될 수가 있었는데....." 그 말에, 화령존자가 돌연 빽 고함을 쳤다. "그자식 얘긴 하지도 말아! 너무 잘난척 하는 녀석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구! 내 가 그동안 녀석에게 놀림을 당한 일을 생각한다면 아직도 이가 갈릴 정도야." 이때, 토령존자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할 일은, 우선 몸뚱이를 빌린 다음 성자님을 찾아가 이 일에 관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는 거야. 그녀석은 이미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정도를 벗나났어. 이젠 성자님이 직접 해결해야할 문제야. 그리고....." "....." "나는 아까 녀석에게 무극도검의 구결을 알아내려고 하다가 의심을 받을 것 같 아 도중에 그만두었어. 다행히 그 관건이 금화에 있는 것 같으니, 차후 은밀하 게 그것을 취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겠어. 만약 그런다면 우리도 무극도검을 연성할 수 있을는지도 몰라." "그, 그렇군. 좋아, 찬성이야. 무극도검이라.. 이거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군!" 금령존자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화령존자가 입가에 기이한 웃음 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 이젠 어떤 녀석의 몸속으로 들어갈까? 물론, 젊고 잘생기고 머리좋고 건강 하며 자질이 좋아야 하겠지." 토령묘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런 조건을 빠짐없이 갖춘 사람을 찾으려면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거야. 우리 는 지금 상황이 다급한 편이니 우선 아무나 잡아가지고 들어가 있다가 시간이 나면 차후에 훌륭한 녀석을 고르는게 좋을거야." "그, 그도 그렇군." 화령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금령존자가 비꼬듯 입을 열었다. "이봐, 화령! 너는 아예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는게 어때? 그래서 심심할 때면 우리는 서로 으응.....?" 그 말에 화령존자는 자존심이 상한 듯 크게 소리쳤다. "개소리 마라, 금령! 그따위 짓은 너나 하라구! 나는 다른 것은 보지 않겠어. 오 직 사내녀석의 그 물건만 보겠어! 그래서 그것만 훌륭하다면 다른 것은 일절 보 지 않겠어." "크캇캇, 그렇다면 너는 매일 사내녀석의 바지가랭이만 벗길 참이냐?" "그게 뭐가 어때? 너 자꾸 내게 시비를 걸 셈이냐?" "아니야, 아냐!" 화령존자의 시퍼런 서슬에 그만 금령존자는 두 손을 싹싹 빌었다. 헌데, 그때였다. 홀연 그들의 전면에 마치 유령같은 인영이 땅속에서 솟아나듯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바로 백상인이 아닌가? 이 사실에 일순 삼인은 혼비백산했다. "앗, 저 저....." "으악!" 한차레 괴성을 지른후, 그들은 갑자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번개처럼 도주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싸매고 어마 뜨거워라 달아나는 그들의 정신은 지금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백상인은 정말로 귀신이 아닐까? 일순 그러한 의문까지 들면서 그들은 급급히 줄행랑을 쳤다. 거기에는 아무런 생각도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백상인에게서 달아난다는 의지마저 그들에게는 없었다. 단지, 이 순간 백상인으로부터 빨리 멀어져야 한다는 강렬한 정신적 압박감만이 그들을 짓누르며 줄행랑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문득, 백상인의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들은 이제 내가 당신들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오. 그리고 나는 아까 분명히 말했었소. 당신들의 이 의도는 허락하나 후회 하지는 말라고." "....." "나는 아까 수령존자를 죽일때 실수로 그러했다고 하였었소. 그러나, 지금은 당 신들을 일부러 죽여야 하겠소. 이것은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다만 만인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오. 이미 육신이 사라진 그대들은 죽어야 마땅 하지 않겠소?" 번쩍 -----! 황금빛 광채가 일순 사위를 가득 메웠다. 그 빛깔은 장엄하면서도 상서로운 서 기를 가득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채는 일순 아주 짧은 순간동안 사위를 번 쩍 밝히다가 사라졌다. 허나, 그 효과는 아주 분명했다. "크아아아 --- 아 --- 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토령존자 등 삼인의 원영은 그 순간 갈가리 찢겨 져 날아가고 있었다. 끝까지 음모와 흉계를 고치지 않았던 그들. 그들의 허망한 최후였다. 드디어, 동쪽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려는 것 같았다. x x x "정말 그 분이 돌아오실까요?" "그 분이 못돌아오시면 어쩌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죠? 언니...!" "그 분이 못돌아오시면 우린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언니! 우린 언제쯤 죽 어버릴까요? 사흘 뒤나 아니면 열흘 후, 그것도 아니면 한달 후.....?" 주벽군과 유운봉. 그리고 제갈청하는 그러한 이야기로 밤을 거의 지샌후 가까스 로 한 침상 위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제갈청하 등은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들의 몸을 더듬는 것을 느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잠버릇이 나쁜 것으로 오인하고 그냥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손길이 마침내 자신들의 옷을 한겹씩 벗겨내자 그녀들은 그만 대경 실색하여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이것은 그 어떤 치한일까? 그 녀들은 그만 일시에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불을 밝혔다. 그 순간 그녀들은 볼 수가 있었다. 온통 발가벗은 채 들어와 있는 자신들의 낭 군을. 그녀들은 일면 놀랍고 반갑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하에서도 눈 물부터 솟구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백상인의 알몸을 서로 다투듯이 끌어안고 한차례 기쁨의 눈물을 흘린 뒤, 그제 야 제갈청하가 이 괴상한 차림새에 대해 눈을 하얗게 흘기며 일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백상인은 가능한한 상세히, 그리고 거의 모든 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그가 무극 도검을 연성하고 사대존자들을 제거하기까지의 모든 경위등..... 제갈청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계속해서 흘렸다. 이제 희망이 비친 것이 다. 주벽군과 유운봉도 잘은 내용을 모르지만 연신 환호하며 백상인에게 입맞춤 을 했다. 그 열렬한 기쁨속에서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그 빛은 눈부시게 느껴졌다. 다음 날. 백상인과 그 일행은 북경에 도착했다. 당금 명의 황성인 자금성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백상인은 주벽군과 유운봉을 안으로 돌려보냈다. 악마교 의 결성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가 황궁을 찾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상인은 잠시 쉴틈도 없이 대홍산으로 다시 치달렸다. x x x 단풍. 창밖에는 서서히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진홍빛 노을속에서 이 대홍산의 단풍을 구경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떤 정취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곳은 객점의 어느 평범한 방안. 백상인은 창문너머로 그 러한 경치를 바라보며 잠시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들이 이곳 대홍산에 온 지도 벌써 사흘째. 그동안 그들은 과거 무맹이 있었고, 지금은 악마교의 결성식이 준비되고 있는 총단을 이미 수차례나 세밀히 검토한 바 있었다. 이제 더이상의 재검토는 필요 치 않았다. 그리고, 결성식은 바로 내일..... "당신은 정말 그와 싸우실 건가요?" 제갈청하는 침상의 모퉁이에 살짝 걸터앉아 백상인을 향해 그렇게 입을 열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제갈청하는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당신은 정말 그의 무예가 무극도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요?" "확실히..... 그렇소." 백사인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연히 당신이 그 자를 이길 것이고, 그러면 이제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 는 셈이로군요?" "그럴 것이오." 이에, 제갈청하는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며 물었다. "당신은 언제 가실 거지요?" 백상인은 고개를 제갈청하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바로 지금이오." 헌데, 제갈청하의 안색을 살피고는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소?" 제갈청하의 안색은 보기 드물게 잔뜩 그늘져 있었고, 또 파리하게 핏기가 없어 보였다. 백상인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빈매의 생각이 나서....." "빈매의 생각?" "그녀는 언젠가 제게 말했어요. 당신이 모든 일에서 성공할 확률은 거의 반반이 라구요." ..................... .............................. ........................................ ................................................... x x x 즉, 숨어있던 제갈청하가 감금된 잠룡회의 인원들을 구출하고 그들이 악마교도 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있는 소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소리는 얼마 가지 않 아서 끝이 나고 말았다. 주위는 다시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백상인은 피리소리를 그치지 않았 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x x x 한 사람. 그가 나타난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은 세상 그 어 디에도 찾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발의 청년. --- 악마성자. 그가 봉우리 위로 다가왔을 대, 백상인은 비로소 백옥소를 갈무리하고 몸을 일 으켰다. "오랜만이오. 악마성자!" 다소 겸허한 태도로 말하는 백상인의 말에 악마성자는 일순 기묘한 미소를 지 었보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줄 알고 있었다네." "....." "자네의 그 피리소리는 매우 훌륭하군!" 백상인은 미소했다. "고맙습니다. 헌데 당신의 그 수하들이 당한 것이 유감이오"" 악마성자는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네. 그런 아이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으니까." "그렇겠군요."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악마성자는 다시 기이하게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자네의 무예는 가일층 발전한 것 같군!" "과찬이오." 백상인은 겸사하며 안색을 다소 붉혔다. 이에, 악마성자는 다시 기묘하게 웃으 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우리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어차피 자네와 나는 적이니까." "그렇게 합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제 우리 두 사람 중 하나가 앞으로 중원, 아니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일세. 물론 승자에게 그 행운이 돌아가겠지." 말을 끝내면서 악마성자는 다시 기묘하게 웃었다. "....." 백상인은 그 기묘한 웃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한 가지 더욱 불길한 점은, 지금 이 시간에도 백상인은 악마성자의 마음을 읽을수가 없다는 사실이었 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오대존자들도 백상인이 그들보다 무예가 높아지자 능히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가 있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악마성자의 무공은 그보다도 오히려 높은 경 지에 있단 말인가? 문득, 저녁때 제갈청하가 말하던 구절이 뇌리를 엄습했다. --- 불길하다.....! 허나 과거 반야다라가 말한 것처럼 그가 무극도검을 연성했을 리는 없는 것이 다. 그렇다면 반드시 자신이 이긴다. 백상인은 내심 용기를 북돋우며 고개를 들 어 악마성자에게 말했다. "자,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오!" 이에, 악마성자는 다시 기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물론이오." 백상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악마성자는 느물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조심하게!" 말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일순 눈부신 빛이 폭사되었다. 번----- 쩍-----! 적주황녹청남자. 그것은 일곱 가지 빛깔이 너무도 선명한 무지개빛 광채였다. 이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오대존자 등이 펼쳤던 도검류와 비슷할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 자면 과거 도마가 펼치던 칠색영롱한 도검과 흡사했다. 사라라라랑..... 그것은 지극히 빠르면서도 감겨드는 듯 부드럽게 백상인을 향해 덮쳐왔다. 이 이상의 도검은 없다. 가히 도검의 최고최후경지. 번----- 쩍-----! 황금빛 서광. 확실히, 그것의 느낌은 악마성자가 펼친 칠색광채보다 더욱 부드럽고 웅후했다. 가히 도검최고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일순간, 두 개의 광채가 중간지 점에서 부딪쳤다. 허나 소리는 없었다. 황금빛이 일순 칠색광채를 흡수해버렸기 때문이다. 백상인은 이 찰나지간 그간의 불안감이 싹 가셔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됐다. 그는 이제 승리한 것이다. 내심 그렇게 외치고 있는 순간에 그의 황금광은 악마 성자를 향해 빠르게 덮쳐갔다. 이제 보나마나 그는 한줌의 재로 화할 것이다. 그런데, 백상인은 그 순간 악마성자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 했다. 악마성자는 그 순간 아까의 그 기묘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 아닐까? 바로 그때, 머리가 돌지 않았다는 증거가 일시에 명백하게 나타났다. 황금광은 마악 기세좋게 악마성자를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면전에 이르자 무엇에라도 막힌 듯 더이상 나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아니, 악마성자의 모습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삼두육비의 괴물. 그것은 황금빛의 공포스런 악마상이었다. 그것은 과거 신도운형이 평쳤던 암흑 장이란 무예와 흡사한 듯도 했으나, 기실 그 느낌은 정녕 하늘과 땅차이였다. 황금빛 등신 악마상. 그것은 백상인의 황금광을 입으로 흡수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일장, 이장..... 삼장..... 실로 이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상인은 악마상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자신의 기운이 그에게로 빨려들어감을 느꼈다. 분명 백상인의 기운은 한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기실 그 한계는 뚜렷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백상인은 기운이 점 차 빠져나가자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백상인은 자신의 기운이 모조리 탈진되었다고 느꼈다. 이제는 거짓말 하 나 없이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었다. 그나마 지금 그가 서 있는 것은 쓰러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무예가 있단 말인가? 그때, 악마상이 늘어나는 것을 멈추더니 돌연 기괴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흐흐흐흐! 백상인. 너는 매우 궁금할 것이다. 너의 최후에 앞서서 내가 너의 그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않을 수가 없지. 흐흐....." "....." 백상인은 대답할 힘도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 오는 악마성자의 음성은 가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흐흐, 내가 너의 성취를 모르고 있었는줄 아느냐? 너는 이미 반야문의 절기를 이어받았고 드디어는 무극도검을 터득했지? 그러는 도중 나의 오대존자를 해치 웠고..... 그러나, 그것이 모두 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 "너는 본래가 나와는 천적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따라서 너는 결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지. 헌데, 나는 그때 검령자와 함께 성수장으로 너를 보러 갔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너의 관상은 장차 훌륭하게 될 상이니 아예 너를 살려두어 너를 이용하자고. 그리하여 나는 그때 무맹에서도 일부러 너를 쫓지 않았고, 또 네가 반야문의 절기를 보는 것도 방관했다. 그것은 그러한 것 들은 이미 내게 있어서 소용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즉 나의 기초는 반야 문의 정통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너의 성취를 방관하고, 아니 일부러 도와주기 위해 목령과 오대존자의 나머지를 보내기도 했 지." "....." "과연, 너는 모든 위기와 난관을 기지와 자질로 극복해 내더군. 나는 정말로 탄 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하여, 나는 기다렸다. 네가 하루빨리 이곳으로 나를 찾아오기를.... 왜냐하면, 나의 지금 성취는 도검을 이미 뛰어넘어 무검에 매우 가까와졌다. 그런데, 결코 무검에 들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무극도검을 연성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나와같이 사공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 극도검을 연성한 자의 기운을 흡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지금 과 같은 방법을 썼던 것이다." "....." 그저 듣고만 있는 백상인은 내심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악마성자는 자신의 기 운을 끌어내기 위하여 일부러 낮은 칠색광채를 발했던 것이란 말이 아닌가? 그 것이 일종의 유인책이라는 것을 모르고 어리석게도 말려들다니..... 아니, 알고보니 말려든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상인은 결국 악마성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 아닌가? 백상인은 일순 완 전한 실의와 절망에 빠졌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자신은 여태 무엇을 했던 것인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백상인을 바라보며 악마성자는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네가 보다시피 무예 최고의 궁극인 무검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너는 이제 죽어줘야 하겠다. 왜냐하면, 너의 자질은 실로 너무도 뛰어난 것이었 기 때문이지. 비록 내가 최고의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나의 천적인 너에 대한 두려움은 떨칠 수가 없더군." "....." "자, 솔직히 자질이 아깝지만, 이만 가거라-----" 말이 끝나자, 무려 그 크기가 백장여나 되게 커진 악마성자는 입을 크게 벌렸 다. 그러자, 그 입안에서 홀연 시뻘건 불길이 백상인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화르르르륵.....! 그 불똥이 닿는 주위의 온갖 바위들이 일순 가루로 화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의 불이 아니었다. 지옥의 마화라고나 할까? 이제, 백상인은 정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것은 도무지 돌이 킬 수 없는 사태인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은 끝없는 절망과 끝없는 실의, 낙담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체념..... 그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이 몹시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힘이 없는 육신 이야 무거운 것은 당연하지만, 이 마음의 존재는 왜 이리 무거운가? 악마성자의 그 가공할 공세는 상관없이, 백상인은 일순 그자리에 주저앉아 편히 쉬고 싶어졌다. 바로 그때, 그의 뇌리에 문득 반야다라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 고 어느 고승의 모습이 직접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본능적으로 백상인은 그 고 승에게 내심 소리쳤다. ---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았소?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리라고. 헌데 이게 무슨 엉뚱한 결과란 말이오? 그런데, 그 고승은 그저 빙그레 미소만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 이미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네. 자네는 그게 보이지 않는가.....? 말과 더불어, 고승의 모습은 한순간 그의 노리에서 사라졌다. 실로 엉뚱한 말만 을 남기고..... 헌데 바로 그때, 백상인의 뇌리에는 섬전처럼 꿰뚫는 한줄기 영감 이 있었다. --- 저 고승의 모습은 환상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무겁기 이를데 없는 마음 은 환상이 아닐까? 이 육신도, 죽으면 그림자처럼 지워질 것을.. 그리고 나의 무예도, 무엇인가 얻으려는 노력도 사실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즉, 무검이란 것도..... 무검의 구결이 그의 뇌리속을 스쳐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무검이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없음이란 무엇인가? 곧 만유이다. 즉 있음 이 곧 없음이니, 모든 것이 사실은 실체가 없어서 환상과 같도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저도 없으니 모두가 평등함이로다. 그리고 그것은 둘이 아니라서 하 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을 떠나서 미망을 깨친다면 능히 최고의 경지 무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으리라..... 대 단 원 ( 아.....! ) 백상인. 그는 일순간 깨달았다. 그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더없 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비쳐졌다. 거기에는 그 어떤 번뇌도 없었다. 그의 마음은 유리알처럼 투명해졌고, 그는 더이상 무력감 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물론, 화르르르륵.....! 가공할 악마성자의 공격은 그 순간 거의 임박해 있었다. 그러나, 백상인은 단지 가볍게 미소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깨달은 성자의 미소였다. 이때, 악마성자는 일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격출한 마화가 돌연 백상인의 몸 을 마치 허깨비를 통과하듯 그대로 통과해버렸던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악마성자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데, 상황은 그에게 있어서 더욱 악화되었다. 백상인의 몸을 통과한 마화가 돌연 자신의 조종을 벗어나서 갑자기 자신에게 덮쳐오는것이 아닌가? 악마성자는 그만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급히 그것을 피하려고 움직이려고 했 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그 마화의 속도는 그의 어떤 움직임보다도 빨랐다. 이것은 또 어찌된 일인가? 자신이 이렇게 조종한 것도 아닌데..... 그 의문을 미처 풀기도 전에, 악마성자는 그 마화의 기운에 휩싸이고 말았다. 화르르르르륵-----.....! "아----- 아----- 아----- 악!" 자신이 펼친 마화에 의해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 악마성자는 그렇게 죽었다. 무서운 야망과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한때 천하를 마음대로 흔들어보려고 했던 그는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펑-----! 거대한 악마상은 허공에서 일시 대폭발을 일으켰고, 악마성자의 육신은 계속해 서 마화에 불타다가 마침내 갈가리 찢겨진 채 날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 이렇게 모든 일이 끝이 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백상인에게 제갈청하가 신법을 펼쳐 다가온 것은 그 로부터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백상인을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잘됐어요, 백랑! 다행히 악마성자는 어렸을 때부터 거세를 해야하는 악마교의 규칙때문에 성불구였어요. 그래서 언니들은 전부 무사했죠. 과거 도마나 오대존 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악마교의 심오한 무예를 연성하기 위해서 거세를 했는데, 남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싫어서 일부러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사는 것 처럼 했다는 거에요.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 여자들을 속일 수가 있었죠. 결국, 우리의 인원들은 모두 무사해요! 악마교도들도 잡아서 무공을 폐쇄시켰지 요. 이제 모든 일이 끝났어요." 백상인은 고요히 미소했다. "잘된 일이오." 제갈청하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누가 해주었는지 알아요? 바로 빈매였다구요. 그녀는 사태가 이렇게 될줄을 미리 알고 있었대요. 호호..... 약오르지 않아요?" 백상인은 여전히 미소하며 대꾸했다. "약오르지 않소." 그때, 산아래에서 한 인영이 빠르게 올라왔다. 그는 바로 손범이었다. "사부님!" 손범은 백상인의 얼굴을 한번 우러르더니 즉시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명의 황실에서 황제가 직접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부마를 보러 왔다나요? 저는 그게 무슨 소린지....." 백상인은 시선을 아래쪽으로 던졌다. 과연 산아랜 병기가 무수히 번쩍이는 가운 데 황제의 어가가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백상인.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갈청하와 손범은 숙연히 그의 뒤를 따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