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서문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08 19:03 읽음 : 68 관련자료 없음 -------------------------------------------------------------------------- ---- 서문 본저 곤륜문하는 구파일방 총서의 5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말 그대로 곤륜산맥을 배경으로 도가적으로 신선처럼 살아가는 곤륜파 사람들의 드넓은기상과 고전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하여 천부적으로 타고나게 되는 운명과 인간의 진정한 노력과의 관계를 심도있는 내용으로 다룬 것입니다.. 많으 애독바랍니다.. ID:수창 [1974]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서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08 19:44 읽음 : 67 관련자료 없음 -------------------------------------------------------------------------- ---- 서장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번화한 대성시인 북경성이나 혹은 금릉성에서 살고 있는 많은, 거부들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실은 그천하제일의 부자는 의외로 북경성이나 금릉성이 아닌 다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황보노야 라고 불렀다. [1985]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1-1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08 23:43 읽음 : 48 관련자료 없음 -------------------------------------------------------------------------- ---- 제1장 황보대장원 황산 중원에서도 가장 풍광이 수려하기로 소문난 안휘성의 남단에 동서로 길게 가로 누운 대명산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유혹해왔고 아름다운 천연의 송림과 절경을 자랑하는 기암괴석들, 그리고 마치 솜털처럼 끓임없이 펼쳐져 있는 안개구름들이 장관이라고하여 일찍이 황산삼해라고, 불리워온 그 황산의 북쪽기슭에 하나의 거대한 저택이 마치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황보노야의 황보대장원이었다. -황보노야 물론, 그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는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넓고 아름다운 저택이 이곳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는 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저택들을 두고도 유독 이곳을 사랑하며 줄곧 이곳에서 지내왔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이 이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루의 고되고 복잡한 일들을 모두 마친 그는 아주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주위에 어느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채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바삐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 황산에 지어진 황보대장원은 워낙에 크고 아름답게 설계되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궁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지만 말할것도 없이 주인인 황보금괴는 아주 손쉽고 빠르게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지금의 이 일이 그에게 있어서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눈빛과 얼굴의 표정만 봐도 알수가 있는 일이었다. 이윽고, 하나의 아주 아름답고 수려한 풍광속에 자리하고 있는 별채의 앞에 이르렀을 때 문득 황보금괴는 고개를 들어 현판의 글씨를 살폈다. ---백련거--- 보기에도 수려한 심성이 느껴지는 그 글씨체는 한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문득 인기척을 느꼈음인지 현관의 입구에서 한명의 시녀가 달려나와 반갑고 공손하게 그를 맞이했다. "나으리 .... 어서 오세요" 황보금괴가 일부러 신경을 써서 안배해 놓은 이 시녀는 나이도 이제 겨우 십칠세 정도로 어릴, 뿐만 아니라 용모도 청초하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총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황보금괴의 안색은 가볍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 아평 , 네가 아직 웬일이냐 어서 돌아가지 않고?" 시녀 아평은 그 말에 즉시 쩔쩔매며 은근히 얼굴을 붉혔다. " 죄,죄송해요. 소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마저 하려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어요, 앞으로는 주의할것이니 나으리께서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황보금괴는 그제서야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 좋다, 네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러다가 만일 안아의 글공부에 방해라도 된다면 이는 대단한 중죄가 되는니라 알겠는냐?" " 예, 나으리......... " 아평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어 황보금괴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어.....소녀가 들어가서 공자님께 연락을 드릴까요?" 황보금괴는 고개를 내 저었다. "그럴 것 없다. , 너는 이제 그만 네 숙소로 돌아사도록 해라." "예...." 시녀 아평은 주저하다가 힐끗 그쪽을 바라본 다음에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나의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 방에 가까이 다가갈 때부터 황보금괴의 만면에는 흐뭇하고 부드러운 기색이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그방안에서는 소년의 낭랑하고 듣기좋은 글읽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은 접어두고라도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그토록 편안해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평이라는 시녀 계집도 그 소리를 듣고 차마 발길을 뗄수가 없어서 여태까지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것이 뻔했다. 나이어린 소녀가 방심으로 훌륭한 소년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황보금괴는 그런 일에는 개이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안아에게 도움이 되도록 나이어리고 총명한 계집을 들여놓은 것인데 그것이 자칫 안아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봐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글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러한 기우나 하룻동안의 피로감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실로, 이 안아라는 소년이야말로 그의 최고의 보람이요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 나이는 이제 십구세이고 두뇌는 지극히 총명하며 용모는 누구라도 황보금괴의 손자가 아니라고, 할만큼 준미수려 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이 황보자안이 유일한 친혈육일 뿐만 아니라 심성이 아주 부드럽고 광명정대하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그러는 것이지만 황보금괴는 여태 자신의 이 친손자만큼 총명하고 훌륭한 인재를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 었다. 방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한명의 준수하고 호형으로 생긴 헌칠한 체구의 소년 하나가 글 읽는 것을 중단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할아버지 , 어서 들어오세요!" "그래 글공부는 잘되어 가느냐?" 황보금괴는 아주 흐믓한 표정으로 소년 황보자안의 얼굴을 자라보다가 그렇게 물었다. 황보자안은 몸을 일으키며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며 대답했다. "매일 그렇게 물으시는군요, 저는 항상 글공부가 재미있고 또한 방해되는 것도 없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그보다 할아버지의 일은 오늘도 잘 되셨나요? 저는 오히려 그것이 가끔 염려되고 걱정될 뿐이예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건강도 ..." 황보금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아니다,나의 건강은 앞으로 오십년은 더 살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나의 사업도 절대로 위험이 없어서 앞으로 더욱 번창할 것이고 ..하지만 나에게 네가 없다면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냐? 너는 그런 걱정은 하지말고 오직 네 일에만 신경을 쓰도록 해라." 황보자안은 웃으며 조부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었다. "또 그런 말씀이시군요,우선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헌데 황보금괴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나는 잠시 너를 보러 온것이지 너의 글공부에 방해하려고 온 것은 아니니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다. 그건 그렇고 혹시 원하는 것이라도 없는냐?"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바라는 것이 뭐가 더 있겠어요? 다만 이렇게할아버지와 오래도록 살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이예요." 황보금괴는 문득 두눈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얘야, 너는 항상 나를 감동시키는구나 하지만 너의 부모가 네가 태어난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모두 돌아간 뒤에 너는....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매우 외롭게 자라왔지.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이렇게 매일밤 찾아와 주시고 또 저에게는 사부님과 아평등이 계시는데 어찌 외롭겠어요? 그런 말씀은 다시 하지 마세요." 황보금괴는 손자의 두손을 덥석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볼 때 마다 항상 가슴이 아프단다. 내가 이렇게 많은돈을 가지고 있으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의 마음 하나 헤아려 주지 못하는데.." 황보자안은 조부의 손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할아버지,저는 지금 정말로 외롭지 않다니까요" 황보금괴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금방이라도 아래로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말해 보아라,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설령 달이라도 따다가 줄수가 있단다. 그리고 사실 이 할애비의 모든 것은 전부 네것이 될게 아니겠느냐?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전재산을 쓰게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예요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요. 제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할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갖추어 주시는걸요." ".........................." 황보금괴는 그 말에 잠시 손자의 잘 생긴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너는 원래가 돈에 관심이 없는 녀석이니 이 할애비의 요구가 터무니 없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중에 뭔가 필요한 것이 생긴다면 나에게 말해주지 않겠는냐?"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께요, 할아버지 그건 그렇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차 한잔을 끓여 드릴께요." 황보금괴는 굳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너의 글공부를 방해할수 있겠느냐? 이미 너에게 차를 얻어 마신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제 그만 가서 자야겠다." 황보금괴는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이와 같은 일은 늘상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황보자안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담담히 웃으며 조부를 배웅했다. 그런데, 밖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황보금괴는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혹시 너무 글공부에 전념하다가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냐? 요즘들어 너의 안색이 다소 창백하게 느껴지는구나?"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이예요. 내일은 밖에 나가서 바람을 쏘일테니 그런 것정은 하지 마세요." "그래?..........." 황보금괴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밖으로 사라졌다. [1993]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1장 1-2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09 01:06 읽음 : 40 관련자료 없음 -------------------------------------------------------------------------- ---- -----아평 그녀는 미처날이 밝기도 전에 황보자안이 거처하고 있는 백련거로 와서는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 황보대장원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불청객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높은 담장을 만들어 놓고 강호의 이름난 무사들을 고용해서 호위무사로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상 관련된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하인들과 시녀들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원래는 황보자안이 머물고 있는 백련거는 다른 시녀들이 모든것을 돌보아 주었던 것이었으나 특별히, 황보금괴가 황보자안이 심심하지 않도록 같은 또래의 어여쁜 시녀아이를 배속시켜 주었던 것이었다. 사실, 백련거의일은 그와같은 어린 소녀로서 하기 어려울 만큼 까다롭고 많은 것이었지만 아평은 전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즐겁게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몰락한 선비가문의 딸인데 부모가 심한 가난과 병으로 돌아가자 황보금괴가 우련히, 발견하고 그녀의 병을 고쳐준 다음에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다른 시녀들과는 달리 학문에 관한 수양도 매우 깊었고 또한 생각하는 바가 천하지 않아서 황보자안은 내심 그녀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좀 쉬어가며 하는 것이 어떻겠소?" 황보자안이 거실로 나와서 그렇게 말하자, 아평은 대뜸 안색이 붉어져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예요, 저는 힘들지 않아요..헌데 혹시 저 때문에 미리 잠에서 깨신 것이 아닌가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소, 새벽에 일어나서 산책을 즐기는 나의 습관은 이미 그대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니오?" (...........) 아평은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천하절색에 드는 미인은 아니지만 몸가짐이 단정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그 용모는 절로 미소가 일게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실로, 선비가문의 대쪽같은 고운 품성이 그녀에게서는 느껴졌다.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마침 사부님께 문안을 드리러 가는 날이기도 해서 바람을 쏘일겸 밖으로 나갈까 하는데 함께 가지 않겠소?" 순간, 아평의 두 눈이 샛별처럼 반짝 빛났다. 허나, 기대에 찼던 그녀의 눈빛도 다음 순간에는 금방 시무룩하게 굳어지며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해야할일이 있어서....." 사실, 백련거의 일이 많은 까닭은 주인인 황보금괴가 황보자안에게 소용되는 모든 것은 항상 최고로 이루어 지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즉, 최고의 훌륭한 음식과 최상의 의복 그리고 내부는 마치 거울처럼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어찌. 그것을 유지하기가 힘들지 않겠는가? 허나, 거기에 비해 정작 황보자안의 품성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고 담백하며 검소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평은 가끔 황보자안이 대충대충 일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매우 송구한 기분이었다. 공연히 황보금괴에게 지적을 받아서 다른 곳으로 배속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만일 할아버지께서 꾸중하시면 내가 책임을 지리다. 할 일은 나중에 돌아와서 마저 하도록 하시오." 지금, 황보자안이 굳이 아평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그녀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기 대문이었다. 게다가, 이 아평은 여러모로 행동거지가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부러울 것이 없는 처지에 비해 아평은 비단 고아일 뿐만 아니라 항상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히 그녀를 쉬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사실, 오늘같은 날이 아니라면 아평으로서는 장원의 밖에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의 말에, 아평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들며 상기된 안색으로 물었다. "제가 정말로 함께 따라가도 되나요?" 황보자안의 성품은 격의가 없는 것이어서 하인들과도 친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곧잘 어룰리는 편이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즉시 총관이 달려와서 빠르게 모든 준비를 해주었다. 사실, 황보자안은 워낙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잣집의 귀공자이기 때문에 쉽게 남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므로 보통의 사람들처럼 말을 타거나 한가롭게 걸어서 이동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나 어떤 사악한 자들이 납치행각을 벌일 것을 우려하여 단단하게 잘 만들어진 고급의 사두마차에, 황보대장원내의 일류급 무사들 서넛이서 수호를 하면서 움직여야만 했다. 워낙 단 하나뿐인 혈육이기 때문에 황보노야는 정말로 끔찍히도 자신의 이 친손자의 안위를 걱정했다. 황보자안이 그와같이 움직이는 것은 거의 정례해 되어 있었다. 기실, 그렇기 때문에 이 황보자안은 비록 학문에는 능통해 있을 지라도 세상의 험악한 물정에는 다소 어둡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편이었다. 보통때는 황보자안 혼자였으나 지금은 제법 단정하게 성장한을 한 아평을 데리고 마차에 오르자 즉시,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마차는 빠르게 장원의 문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둑....... 무슨 남의 눈이 무서워서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늘상 혼자서 마차안에 있곤 했던 황보자안은, 으레 이맘때면 말없이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러나, 옆에 아리따운 작은 숙녀를 태운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름답게 성장을 한 아평은 다소 상기된 듯한 표정이었고 너무나도 신이 나서 도저히 기쁨을 숨길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마차는 내부가 두 겹으로 되어 있기때문에 마차의 앞쪽과 뒤쪽에는 황보가의 무사들이 호위를 하고 함께 타고 가는 중이었다. "저어.....공자님께서는 사실 그렇게 행복하신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마음 놓고 나가지도 못하시니....안 그런가요?" 아평은 안에서는 그저 순종적이거 수줍어 하였었는데 지금은 장소가 바뀌어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주저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의 상기된 눈빛은 이상스럽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보이시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저는 원래 공자님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은 천하에 아무런 것정도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 한줄로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공자님께서도 걱정과 근심은 있으신 것 같이 보여요." 이에,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지금의 생각이야말로 잘못된 것이오. 사실 나는 거의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살고 있는 중이라오. 지, 어디나의 얼굴에서 그러한 것들을 느낄수가 있겠소?" 아평은 상기된 안색으로 부드러운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공자님은 하아상 웃는 얼굴을 하고 계셔서 걱정도 근심도 없으신 것 같기도 해요. 역시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 황보자안은 그저 담담히 웃으며 시선을 둘 곳을 몰라하는 아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글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말에 아평은 다소 어리둥절하다가 대답했다. "예,저는 어렸을 때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께 약간의 글을 배운적은 있지만 지금은.....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아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글공부를 하고 싶을 것이 아니오?" 아평은 다시 흠칫해하며 물었다. "그런 저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계셨죠?"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을 것잉오." 아평은 즉시 다시 입을 열어서 말하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느닷없는 일이 벌어져서 두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켜 놓았다. 원래, 황보자안등이 타고 있는 이 마차는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아주 특수하게 제작된 것이어서 아주 빠르고 편안하게 잘 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이 순간 마차는 별안간 급히 멈처섰고히히힝 하는 말울음 소리와 함께 앞쪽에 함께 타고 있던 황보자안은 그녕 등이 등받이에 닿았을 뿐이었지만 아평은 그만 몸이 훌쩍 날아서 맞은편의 황보자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꼴리 되었다. "어마!" 황보자안은 느닷없이 놀라는 가운데 난생 처음으로 청백한 소녀의 몸을 언싸안고 그 야릇한 체취를, 맡게 되었다. 아평은 엉겁결에 황보자안의 품속으로 날아들었다가 안색이 빨갛게 변해서 그야말로 어쩔줄을 몰라했다. 당황한것은 황보자안도 역시 마찬가지 였다. ............ 귿때, 다소 경황없는 듯한 목소리가 앞쪽에서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그것은 바로 마차를 호위하던 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음성이었다. 이에, 황보자안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아평의 몸을 맞은편의 의자위에 내려놓고 몸을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괜찮소만, 밖에 무슨일이라도 생겼소?" 이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무사가 대답했다. "사실 별 일도 아닙니다. 왠 늙은이가 대로의 중앙에 누워서 피하지 않고 있기에 그래서.............죄송합니다." 그 무사의 말은 그러니까 황보자안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 늙은이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황보자안은 말했다. "잘한 일이오. 이 대로는 우리가 전세를 낸것이 아니니 그 노인장에게 잘 설득해서 보내 도록 하시오." 사실, 일반의 사람이라면 이 일류급의 무사들을 곤혹해할리가 없는 것이었다.황보자안은 금방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그 노인이 필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무사의 음성이 앞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의 편안한 음성으로 보아 일이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어쩌죠 공자님?......." 아평이 아직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녀는 방금전에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생각하며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헌데, 정작 황보자안의 생각은 다른곳에 가 있어서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들의 무공은 평범한 것이 아니니 잘 해 Ь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로부터 다소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왠지 마차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더군다나 앞쪽에서 다소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잠시 나가봐야겠소." 사실, 황보자안은 말로만 들었지 강호무림계의 일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일었고 또한 이 상황은 주인된 입장으로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ID:수창 [1995]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2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09 11:50 읽음 : 212 관련자료 없음 -------------------------------------------------------------------------- ---- 第 2 章 百里老大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적이 없는 산중의 대로상에 각기 장검과 도를 뽑아들고 비호처럼 움직이고 있는 두명의 호위무사들 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쪽에 등을 돌리고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또 한명의 호위무사가 보였다. 그 무사가 말했던 늙은이의 모습은 아직 그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느다. 하지만 모습 대신에 걸쭉한 목소리부터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이쿠, 이놈들생사람을 잡는구나? 도대체 이곳에는 노인을 공경하는 법도 없고 그저 막되어 처먹은 놈들 뿐이란 말이냐? 나는 그저 누워서 낮잠을 자려고 한 것 뿐인데 이놈들이 다가와서 사람을 마구 패는구나, 아이쿠 죽겠다!" ........ 말을 들어보면 그 노인이 매우 곤경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스 음성을 들어보니 그렇게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황보자안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좀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무사 하나가 그의 출현을 알고 몸을 돌려 당황한 빪 뇨정으로 허리를 굽신거렸다. "공,공자님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는것이......." 황보자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많은 위협속에서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그는 정작 누구에게 무례를 당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에는 호기심 만이 있을 뿐 겁이 없었다. "상관없소, 이 일은 내가 처리할 것이니 염려마시오." "......." 이어, 검광이 어지럽게 번뜩이는 장내를 바라보다가 황보자안은 순간 놀라서 눙을 크게 떴다. -------노인(老人) 일신에는 이리저리 기운 구석이 있는 낡은 도복을 걸쳤는데 머리는 대머리이고 코는 딸기코에다가, 눈은 반쯤 뜨고 졸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한손으로는 연시 호로병을 기울이며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지금 좌우에서 두명의 호위무사들이 맹렬하게 날이 시퍼런 병기를 휘두르며 공격하고 있는데도, 마치 술주정을 하듯이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황보자안으로서는 아직 이와같은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지만 황보대장원에 초빙되어 호위무사 노릇을 하고 있는 무사들은 강호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일류급의 무사들로 그들의 무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이 평소에 예의를 다하며 허리를 굽신거릴 때에는 잘 알수가 없지만 실로 지금과 같이 상대를, 전력으로 공격하고 있을 때에는 검광(劍光)이나 도기(刀氣)가 사방으로 뻗쳐서 빽빽하게 그물처럼, 주변 이삼장 내외를 빈틈없이 에워쌀 정도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한번에 단 일장이라도 건너뛸 수가 없는 일이고 보면 만일 그들에게 걸려든다면, 누구라도 쉽게 무사하기를 바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술주정뱅이 노인은 두명의 무사들이 무섭게 펼치는 검광과 도기 속에서 꼼짝없이 전신이, 조각조각으로 갈라질 것 같은데도 여전히 술을 마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입술을 놀려서 거칠은 비명성을 마구 토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눈앞의 두명의 무사들이 거짓으로 허초(虛招)를 펼쳐서 노인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황보자안은 순간 적으로 노인의 모습을 살피다가 두 무사의 검광과 도기가 가까이 파고들자 문득, 노인의 호로병을 든 손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속도로 희끗하게 환상(幻像)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순간적으로 황보자안은 그 신기(神技)와 같은 동작이 바로 노인이 두 무사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뭔가 힘과 힘이 격돌하게 되면 소리가 날법도 한데도 전혀 아무런 음향도 들리지 않느나는 점이, 더욱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이었다. 노인의 호로병이 환상처럼 움직이는 순간 공격해 들어가던 두 무사의 움직임은 다소 멈칫거리는 것, 같았는데 이윽고 다음 순간 노인은 다시 호로병을 기울여 한모금의 술을 들이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이쿠------, 이 죽일 놈들이 기어코 이 힘없는 늙은이를 쳐죽이려고 하는구나! 이 늙은이는 아직 후사도 정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길가에서 횡사를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이쿠 이건 정말 억울한 일이야......." 황보자안은 이 노인의 엄살이 전혀 터무니 없이 지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가 있었다. 정말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오해할 정도로 이 노인은 낯두껍게 천연덕스러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안색이 시뻘겋게 변한 채 당혹해하며 억지로 공격을 계속 퍼붓고 있는 두명의 무사들의 표정과, 경악한 얼굴로 감히 합공조차 못하는 다른 무사의 행동만 봐도 능히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노인은 세명의 무사들이 합공을 한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못하는 엄청난 무림의 고수(高手)인, 것이었다. 비록 무공은 배우지 않았으나, 항상 무림인들의 호위를 받고 살아온 황보자안이었기 때문에 강호의 일에 관해서는 얻어들은 것들이 많았다. 이 노인은 아마도 십중팔구 최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으며 강호를 떠도는 무림의 기인(奇人)인 분명해 보였다. 실로, 이런 노인의 능력이라면 지금 황보대장원내의 모든 호위무사들을 불러모은다고 할지라도 이길 수가, 있을지 의문인 것이었다. 게다가, 황보자안은 아울러 이 노인이 이와같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옆의 무사르 향해 말했다. "어서 공격을 멈추라고 하시오." 이에, 그렇지 않아도 초조한 기색이던 그 무사는 놀라고 흠칫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무공은 대단하여 자칫 공자님께서........"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저 노인을 물리칠 수가 있다는 말씀이시오?" 이에, 무사는 랑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어, 가볍게 손짓을 하자 미친듯이 공격을 퍼붓던 두명의 무사는 마치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며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행여라도 노인이 황보자안을 해칠까 두려운 듯 급히 그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들에게 웃음을 보낸 다음에 이윽고 누워서 술을 마시고 있는 대머리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가 노인어른을 귀찮게 해드린 것을 용서하십시오. 혹시 존성대명(尊姓大名)을 말씀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존성대명이라고 한 것은 역시 황보자안이 무사들에게 얻어들은 말귀의 하나였다. 그런데, 황보자안의 말을 들은 그 노인은 문득 호로병을 손에 들고 묵묵히 그의 얼굴을 주시하더니 이렇게 느닷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제법이로군! 어떤가 했더니 황보가의 후예는 제법 예의범절을 알고 있군 그래..........클클클, 내 이름은 나중에 자연히 알게될 것이다......" 이게 왠 아닌 밤중의 홍두께같은 소리일까, 그렇다면 이 노인은 황보자안의 신분을 알고서도 그와같은 연극을 했었다는 말일까? 황보자안은 절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헌데, 그가 마악 입을 열어 다시 질문을 하려는 때의 일이었다. 노인이 문득 가볍게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는데. 다음 순간 마치 환영(幻影)이 일어났다 꺼져버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그 신형이 귀신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 황보자안은 크게 놀라서 급히 좌우를 살폈으나 이미 그 괴상한 노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 놀란 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세명의 호위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노인이 펼친 것이 강호에서 전하는 신법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실로 상상도 못할 절세신법임에 분명해 보였다. 무사들이 다소 넋을 잃고 서 있다가는 정신을 차리고 황보자안등을 향해 어서 마차에 오르기를 재촉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장원으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아니면 이대로 계속 가시겠습니까?" 황보자안은 그 괴이한 노인의 행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계속 가도록 합시다." 마차는 그대로 계속 달려서 용문(龍門)이라는 작은 읍성에 이르렀다. 이곳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번화한 곳은 아니지만 주변의 지형이나 산세가 수려하고 맑고 넉넉한 물줄기가 성의 주변을 흐르고 있어서 인심좋고 살기가 좋은 마을 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부유하고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같은 용문성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도 자연히 없을 수가 없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서 성내의 한 초라한 모옥앞에 세워졌는데 바로 그 모옥은 성내에서 얼마되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의 하나였다. 흙으로 빚어서 만들어 놓은 벽이나 지붕은 반쯤이 무너져서 하늘의 해가 보일 듯 하고 마당에는 잡초마저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실로 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는가가 의심스러운 지경인데 마차가 모옥의 앞에 도착하자 그래도 그 안에서 한명의 노인이 달려나와서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너라 안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글선생 말하자면 이 노인은 황보자안의 글선생이었다. 황보자안이 이 노인에게 사사를 받게된 것은 그의 조부인 황보금괴의 소새로 인해서였는데 조부의 말에 의하면 이 노인은 과거에는 많은 학문을 배운 선비였는데 가문이 몰락하여 어렵게 지내고 있는 황보금괴의 친구라고 했다. 어쨌는 천하의 황보노야의 친구라는 점만 보아도 이 노인이 실로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황보자안은 이 노인에게서 많은 글을 배우면서 그의 학식이 매우 깊고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생각을 해보건데 이 노인이 이렇게 빈한하게 살고 있는 것은 가문이 몰락하고 시운을 타고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의 그의 학식이라면 결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노인은 현재 황보가에서 주는 돈으로 겨우 생황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노인 역시 황보자안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는 편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를 백리노대(百里老大)하고 부르고 있었다. 백발에 허름한 옷파림을 하고 있는 백리노대가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스승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인사를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음, 음, 나야 그동안 잘 살고 있었지....." 노인 백리노대는 황보자안의 손을 잡고 흐믓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는 아평을 발견하고는 잠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바라보다가 황보자안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바로 너의 색시냐?" 이에, 황보자안 뿐만 아니라 아평도 금새 얼굴이 붉어졌다. 황보자안으로서는 원래 아무런 감정도 없었는데 아까 마차안에서 서로 한번 껴안아 보고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진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아평이라고 저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허나 백리노대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는 정히 그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허허, 서로 좋으면 그만이지 굳이 그렇게 변명을 할 것은 또 뭐냐? 그래 아이야 네 이름은 뭐지?" 아평은 그렇지 않아도 백리노대의 말을 달콤하게 듣고 있다가 크게 당황해져서 얼른 붉어진 얼굴로 공손히 인사를 했다. "소녀 아평이 노사부님께 인사 드려요." "음, 아평이라고? 아주 좋은 이름이로구나....." 백리노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평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금방이라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뛰놀았다. 옆에서 황보자안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혹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부님, 여기 조부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것이에요." 황보자안이 백리노대에게 내밀은 것은 은자가 담겨져 있는 작은 주머니였다. 그것을 보고 백리노대의 시선은 급속히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흠, 틀림없는 은자 열냥이겠지?" 흡사 빼앗듯이 받아드는 백리노대의 모습을 보고 황보자안은 웃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이 백리노대의 성품 또한 기이하고 고집이 강했다. 그는 자신이 스승으로서 받을 금액은 한달에 열 냥이면 족하다고 하여 결코 그 이상은 받지도 않는 것이었다. 백리노대는 급히 주머니의 입구를 풀어서 안의 은자를 확인하고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뒤에 감추며 방안을 가리켰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아평이 간신히 마음을 수습하고 그 방안을 살펴보니 여기저기에 서책이 널려 있고 며칠이나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인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어, 그녀는 급히 먼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들어가서 청소를 해놓을 테니 그때에 들어오도록 하세요!" .......... 황보자안이 다시 마차를 타고 아평과 함께 장원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기이하게도 뜻밖의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야께서 부르십니다!" 총관의 말이었다. 기실, 황보금괴는 일과중에 거의 황보자안을 부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뜻밖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고 총관의 종색한 표정으로 보아 반드시 어떤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을 아평을 한번 돌아보아 그녀를 기다리게 한 뒤에 총관을 따라서 조부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너라 안아!" 화려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황보금괴가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황보자안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 집무실의 안에는 조부인 황보금괴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그와 마주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매우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물론 사람이 살다보면 낯익은 사람을 많이 대하는 법이지만 유독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은 보다 기이하고 강렬한 것이었다. --------대머리 노도사(老道士) 그가 정말로 도사인지는 알수가 없지만 오전에 밖으로 나가다가 마차의 앞을 가로막고 호위무사들과 함께 괴상한 연극을 해보였던 그 대머리 노인이 지금 눈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공이 놀랍도록 뛰어나면서도 유독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뭔가 기이한 여운을 남겼던 괴상한 노인. 황보자안이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는 것을 보고 황보금괴가 웃으며 그 대머리 노도사를 가리켰다. "안아, 우선 이 분께 인사를 올려라! 앞으로 네가 많은 지도를 받아야 할 분이시다." .............. 헌데,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황보금괴는 다소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니, 두 사람이 이미 아는 사이였단 말이오?" 이에, 그 노도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핫핫, 원래부터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조금 일찍이 와서 귀댁의 손자분께서 어느 정도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을 해보았을 뿡니오." 황보금괴는 노도사의 말을 듣고는 대체 어는 정도의 안면이 있다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 도장께서 보신 소감을 어땠습니까?" 노도사는 잠시 기이하게 웃다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불끈 치켜세웠다. "하하, 최소였소!" 황보금쇠도 잠시 흠칫하다가 금새 따라서 껄껄 웃고 말았다. "핫핫핫..... 그렇다면 아직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은 모양이구려, 내 정식으로 소개해 주겠소." 이어, 황보자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바로 내 손자이자 하나밖에 없는 친혈육인 안아 황보자안이오." 그말에 활보자안은 즉시 노도사를 향해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황보자안입니다." 이에 노도사는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그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왠지 모르게 이 노도사의 안색은 오전에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부드러워져 있는 것 같았다. 황보금괴는 황보자안을 향해 노도사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분 노도장께서는 바로 강호무림의 태두(泰斗)격인 대곤륜파의 대장로이자 당금의 장문인의 대사형벌이 되는 분이신 적성자(摘星子)도장님이시다." ------대곤륜파 ------당금의 장문인의 대사형인 노도장. 그와같은 말을 듣자 황보자안을 일시 흠칫 놀라서 눈을 크게 뜨지 않을수가 없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곤륜파는 황보금괴가 설명한 대로 무림의 태두는 아니지만 전통있는 무림의 명문정파(名門正派)로서 그동안 강호에 출현하지 않아서 거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호전체를 주도하는 세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곳의 전통있는 고도의 무예는 강호를 떠도는 일반의 무사들과 비할 바가 결코 아니었다. 황보자안은 실로 자신이 이렇게 강호의 고인(高人)을 직접 구 눈으로 마주 대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금 장문인의 대사형이라니 황보자안은 일순 오전에 있었던 이 노도장의 놀라운 무예시현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그때 황보금괴의 더욱 놀라운 말이 뒤이어 흘러나왔다. "나는 원래 너를 가장 안전하게 키우려고 하였으나 그로 인해서 너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지는 듯한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에 우련히 곤륜파의 대도장과 알게 되어서 너를 한 일 년 정도 곤륜파에 심신을 단련하도록 보밸 생각이다." 이 말은 전려 뜻밖의 것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럼 황보금괴는 이미 황보자안을 곤륜파로 보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황보자안은 그제서야 이 곤륜파의 노도장이 무엇 때문에 나타나서 자신을 시험하고 이곳에서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것인지 훤하게 알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놀라서 절로 입이 벌어졌으나 반박할 시기도 아니었고 또한 반박할 이유나 생각도 없었다. 황보금괴는 이어 노도장 적성자에게 물었다. "만일 이 아이를 그곳에 일 년 정도 머물게 한다면 정말로 건강해질 수가 있겠소?" ID: 수창 지은이: 백상 [2012]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 3 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11 13:22 읽음 : 169 관련자료 없음 -------------------------------------------------------------------------- ---- 第 3 章 奇珍異寶 적성자는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기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불과 한달만 지내게 된다고 해도 한평생의 건강은 책임질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 년이 지나게 되면 약간의 무공도 익힐 수가 있게 될것이오." 그 말에 황보금괴는 다소 흥분이 되는지 황보자안을 향해 말했다. "들어봐라 너도 이제는 무공도 지닐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느냐? 사실 무림의 고수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서도 항상 건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간혹 어떤 일을 기력이 허약해서 하지 못하는 일도 있지 그러니 앞으로 네가 한평생 건강해질 수가 있다면 한 일 년 쯤이야 투자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황보자안은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을 굴려 보면서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 그가 이 잇점에 있어서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곤륜파로 가는 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변화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실로 어떤 풍운(風雲)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늘상 장원내에서 살아오다가 넓은 대곤륜산맥으로 나간다고 하자 일순 호기가 치밀고 흥미가 돌기도 하지만 반면에는 어떤 두려운 마음도 없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황보자안이라는 사람의 품성은 항상 두려움은 적고 호기심이나 즐거움이 많은 낙천적인 것이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록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주선하기는 했지만 만일 네가 싫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부담을 갖지 말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라. 생각할 수가 있는 시간을 며칠 주었으면 좋겠느냐?" 황보금괴의 질문에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후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바로 결정했습니다." 그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적성자가 흔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판단이 빠르다니 좋은 현상이군!" 황보금괴는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힘들겠지? 강호라는 곳은 아무래도 험난한 곳이니까. 너의 글선생과도 의논한 일이기는 하지만 역시 다른 무예선생을 불러다가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혼데 황보자안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곤륜파에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보금괴는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냐?"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많은 환난이 따르는 법이니 그것들을 일일이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곳으로 가서 힘을 길러서 그것들에 대비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왕에 배우려면 그런 곳으로 가서 한번 정식으로 배우는 것이 몇배의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적성자가 다시 기분이 좋은지 소리쳤다. "물론이지! 몇배의 효과가 있고 말고 그 생각 한 번 매우 마음에 드는군 마음에 들어!" 황보금괴는 적성자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황보자안에게 다시 물었다. "하지만 좀더 시간을 가지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 일은 워낙 모험이 따르는 것이라서....." 황보자안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한다고해도 역시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니까요." 그말에 황보금괴는 다소 표정이 굳어지더니 무거운 기색으로 정색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너의 판단을 항상 정확하고 빈틈이 없었으니 너의 생각대로 하기로 하자! 하지만 이거 공연히 내가 말을 꺼냈다가 너에게 어떤 화라도 닥치는 것이 아닌지 오르겠구나." 황보자안이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저는 결코 요절하는 상이 아니라고 했으니 결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헌데 적성자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니야 그것은 틀렸다! 간혹 상이 조은 사람도 요절하는 수가 있지 암 있고 말고!" 이에 황보금괴는 다소 눈쌀을 찌푸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보자안은 적성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앞으로 이분이 저의 사부님이 되시는 것입니까?" 황보금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의 사부가 되실 대도장은 따로 게시다. 옥허산인(玉虛散人)이라고.....바로 이분 도장보다 한배분이 높으신 대사부이시다, 그러니까 이분 도장은 앞으로 너의 사형이 되시는 셈이지." (옥허산인?) 황보자안은 물론 그 이름을 듣지 못했으나 쉽게 그 대도장이 당금의 곤륜파의 최고배분의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황보금괴는 말을 이었다. "내 그분 대도장과 안면이 있기 때문에 필시 너를 책임지고 잘 돌보아 주실 것이다." 적성자도 옆에서 거들었다. "원래는 내가 가르쳐도 되는 것이지만 나도 사형으로서 그대에게 많은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지. 암, 암....." 황보자안은 다시 물었다. "이 일을 저의 백리사부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황보금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이 일은 그분과 함께 의논한 것인데 모를 리가 있겠느냐?" 황보자안은 다시 물었다. "그럼 저는 이분과 내일 떠나는 것입니까?" 황보금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분 도장은 그 먼곳에서 오신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한 사흘 정도 편히 쉬시다가 떠나도록 해야지. 글고 거기까지 가는 방법은 이분 도장이 무공으로 너를 데려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느니라." ......... "내가 굳이 멀고먼 곤륜파를 택한 것은 중원의 여러문파들은 워낙에 많이 알려져서 혹시 재물을 노리는 자들이 너를 노릴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기왕에 결심한 일이니 네가 부디 일 년 동안 좋은 성과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황보자안이 자신의 백련거로 돌아가자 아평은 바쁘게 움직이며 하룻동안 밀린 일들을 해내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며 황보자안은 문득 마음이 가벼워졌다. 실로 이러한 전심(全心)을 다하는 여인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고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흐뭇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인은 본래 약하지만 이러한 여인은 그래도 강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어 황보자안은 곤륜파로 떠나기에 앞서서 준비해야할 것들을 생각하고 정리할 것을 정리해 놓기 위해서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가벼운 긴장감과 흥분속에서 사흘이라는 기간은 그야말로 물 흐르 는 듯이 흘러갔다.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준비할 것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는 하지만 황보자안에게는 거의 준비할것도 정리할것도 사실상 없었다. 늘상 흘러가는 일과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약정된 사흘이라는 시간이 다 흘러가고 드디어 곤륜파로 떠날 날이 바로 내일 아침으로 박두했다. 그동안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적성자는 장원내의 어느 곳에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인지 전혀 황보자안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인들도 늘 하던대로 대해주고 백련거의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는 아평 조차도 전혀 다른 내색을 하고 있지 않아서 마치 자신이 그동안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단지 황보금괴만이 다시 그를 불러서 곤륜파로 가는 것이 착각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오늘 황보금괴가 그를 부른 것은 몇 가지의 준비한 물건들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황보자안이 그의 집무실의 안으로 들어서자 황보금괴는 의자에 앉아서 탁자위에 놓여있는 여러개의 물건 가운데에서 하나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강호에 나가게 되면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위험하고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몇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 보았다. 이것들은 이 할애비의 정성이니 부디 모두 받아 주기를 바란다. 우선 이것은 금사 배심(金絲背心)이라는 것이다........" 황보금괴가 들고 있는 물건은 바로 하나의 금빛을 띠고 있는 상의(上衣)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옷인 것 같았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옷감의 재질이 다소 특이한 것 같아 보였다. 황보금괴는 말을 이었다. "이 금사배심은 말 그대로 속옷으로 껴입게 되면 몸으로 도검이 불침하게 되고 만일의 사태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원래는 강호에 전설처럼 떠돌던 물건이었는데 내가 이번에 신경을 써서 구해 보았다." "............" 황보자안은 조부의 이러한 정성을 보고 내심 미소를 떠올랐으나 감히 반박하거나 물리칠수가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고 있는 황보자안을 향해 황보금괴는 옆의 다음 물건을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물건은 하나의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보도(寶刀)였다. "이것은 바로 전설의 칠성보도(七星寶刀)라는 것이다. 전에 우련히 입수하게 되었었는데 이번에 네게 소용이 될 것 같+아서 가져와 보았다." 황보금괴는 말과 함께 칠성보도를 손자에게 건네주었다. 황보자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기실 칠성보도가 훌륭한 병기라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천하제일의 거부인 조부의 능력으로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구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이 칠성보도의 크기는 비수보다도 조금 큰 정도의 단도였는데 손잡이 부분에 일곱개의 서로 다른 색깔의작은 보석들이 박혀있었고 거기에서 어떤 신비로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강호에서 금사배심과 같은 것도 필요하지만 실로 이와같은 보도도 호신을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다. 긴 병기도 있었지만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그것으로 선택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일곱개의 보석들은 각기 피독(避毒),피진(避塵) 피화(避火),피수(避水),피사(避邪) 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황보자안은 손잡이의 보석들을 살피다가 한번 칼집에서 칼날을 뽑아보았다. 순간 고색창연한 손잡이 부분과는 달리 검고 예리한 칼날이 드러나더니 서릿발같은 한기(寒氣)가 구름처럼 일어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제아무리 명검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게 되면 날이 무뎌지고 녹이 슬게 되어 있는 법이거늘 전설처럼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전해져 내려온 병기가 실로 이와같은 예기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은 신비롭다고 아니할 수기 없었다. 황보자안이 칠성보도를 다시 칼집에 넣고 탁장위에 내려놓자 황보금괴는 이번에는 다시 탁자 위에서 하나의 주머니를 집어들더니 그속에서 다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물건의 크기는 고작 주먹만한 것인 반면에 형상은 발가벗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황보금괴는 말했다. "강호에 나가게 되면 자연히 먹는 것이 부실해져서 더욱 건강을 해치기가 쉬운 법이다. 설혹 남에게 해를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면 그게 무슨 득이 있겠느냐? 이것은 바로 만년동자삼(萬年童子蔘)이라는 것이다." ------만년동자삼 황보자안도 그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전설로 내려오는 지극히 희귀한 영약(靈藥)을 직접 눈으로 보게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것도 역시 전에 우연히 입수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자 이 물건을 밖에 오래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니 지금 즉시 복용하도록 해라!" 황보자안은 웃으며 다소 망설였다. "할아버지 저는 지금 젊고 건강합니다. 그러한 것은 나이드신 할아버지 께서 드셔야 하는것이 아닙니까?" 이에 황보금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이미 늙어서 설사 이런 것을 복용하더라도 몇십 년이나 몇백 년을 더 사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가끔 이와 비슷한 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복용할 수가 있는 것이니 나에게는 필요 하지 않다. 어서 복용하거라. 그래야 이 할애비가 겨우 마음을 놓을 것이 아니겠느냐?" 황보자안은 웃으며 다소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조부가 주는대로 받아서 입속에 뜯어넣고 씹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만년동자삼은 아주 깨끗하고 완벽하게 처리된 상태였다. 그 껍질은 다소 심하게 쓰고 강렬한 기운이 이를 시리게 하였으 나 뒤이어 그 속살을 그야 말로 꿀보다도 달콤하여 씹지 않아도 절로 녹아서 물이 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주먹만하여 결코 작지 않은 물건이었으나 그것이 황보자안의 뱃 속으로 들어가는데에는 불과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황보금괴는 자신의 손자가 희세의 영약을 복용하는 광경을 아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가 이어 주머니속에서 다른 물건들 을 꺼내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네개의 약병으로 보이는 작은 호로병들이었다. 황보금괴는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나는 또 호위무사들과 의논하여 강호상에서 의외의 일을 당하 는 수가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금창약이나 해독약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옥진산(玉眞散)은 천하에서 가장 좋은 금창약이고 이 흑옥단속고(黑玉斷續辜)는 외상성약 (外傷聖藥)이다......" "..........." "그리고 이 검은 병에 들어있는 것은 해독약인 천심해독단(天 心解毒丹)이고 이건 천왕호심단(天王護心丹)이라는 내상약이다. 각 ＂\기 사용하는 방법을 적어 놓았으니 그대로 따라서 하면 된다."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늘의 날씨와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네가 밖에 있는 동안에 어던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들을 품속에 지니기 좋고 물에 젖지 않으며 깨지지 않게 주머니에 잘 넣어둘테니 함께 가져가도록 해라. 별로 무겁거나 거추장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옥진산 -----흑옥단심고 -----천신해독단 -----천왕호심단 이러한 것들은 보지 않아도 천하에서 가장 귀중한 성약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일이었고 이렇게 짧은 시일에 그런 모든 것들을 신경써서 준비한 황보금괴의 정성은 대단하다고 아니할수가 없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조부의 탁자위에 아직도 소개하지 않은 물건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절로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보금괴는 이어 옆의 더미에서 전체의 길이가 족히 한자반은 됨직한 합죽선 하나를 집어들더니 말했다. "약도 준비하고 금사배심이나 보도도 준비했지만 항상 보도를 내놓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금사배심으로 사릴 수가 없는 얼굴을 가릴 수가 있는 것을 따로 준비했다. 합죽선이라는 것은 원래가 선비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이상할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황보자안은 물었다. "그 부채에 어떤 특이한 저이라도 있습니까?" 황보금괴는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넌 다르구나 금방 특수한 점을 발견해 내다니.....그렇다 이 합죽보선(合竹寶扇)은 아주 특별한 물건이지. 겉으로 보기에 는 잘드러나지 않으나 대나무는 강철보다도 강하다는 오죽(烏竹) 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또한 이 흰종이는 기실 종이가 아니라 백잠사라는 희귀한 재질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병기라도 이 합죽보선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며 군데군데 피진주(避塵珠)를 박아서 먼지를 타지 않게 했다." ------합죽보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다른 합죽선보다 산뜻하고 멋있게 느껴 진다는 것 외에는 특이하게 여겨지지 않는데 그러한 면모를 지 니고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합죽보선을 받아서 소리나게 펼쳐서는 몇번 부쳐보 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접어서 한쪽에 내려놓았다. 황보금괴는 이미 그 옆에 놓여있던 한쌍의 옥가락지를 집어들고 있었다. 헌데 옥지환들은 하나같이 맑고 투명한 색깔린데도 기이하게 하 나는 푸른 광채를 띠고 하나는 노을같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은은한 푸른 광채를 발하는 옥지환의 표면에는 봉황(鳳凰) 의 형상이 생생하게 양각되어 있었고 노을빛의 옥지환의 표면에는 용(龍)의 형상이 역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두개의 옥지환들은 그 재질이나 정교한 조각으로 보아 결코 범상한 물건들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하게 했다. 황보금괴는 말했다. "이 한쌍의 용봉쌍지환(龍鳳雙指環)은 아주 희귀한 보옥인 만년온옥(萬年溫玉)과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이 몸을 춥지 않고 덥지 않게 해준다고 하 지만 그보다도 여기에는 특별한 상서로운 전설이 있는 것 이다. 전설이라는 것은 믿어도 되고 안믿어도 그만이지..." 아마도 이 한쌍의 용봉쌍지환은 아주 값비싼 보물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황보금괴는 말과 함께 직접 그 한쌍의 옥지환을 황보자안의 오른 손의 손가락에 끼워주는 정성을 보였다. 황보자안은 확실히 노을빛의 지환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푸른 지환 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희귀보옥인 만년온옥과 만년한옥이 잔병을 물리쳐 준다는 얘기는 황보자안도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 황보자안은 항상 최상의 생활을 영위해 오기는 했지만 스스로 검소한 것을 즐겨서 지금처럼 희귀한 물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어 아직도 탁자위에 소개받지 않은 하나의 물건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조부에게 물었다. "저것도 제게 주실 것입니까?" ------현철지환(玄鐵指環)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볼품이 없고 고색창연하며 다소 음산한 느낌마저 주는 하나의 철지환 이었다. 황보금괴는 무엇 때문에 그런 볼품 없는 것을 준비했을까. 황보자안의 질문에 황보금괴는 다소 굳어진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현철지환을 들어서 황보자안의 왼손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정색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이다. 이것은 사실은 아주 중요하고 위험한 물건이지 나는 이 물건을 선택하기에 앞서서 다소 고민을 했다. 이 상서롭지 못한 물 건을 지니게 해서 혹시 어떤 화를 불러들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 고 말이다. 허나......... 어떤 물건이라도 지닌 사람이 바르게 사 용 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화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것을 준비했다. "........." "이것은 바로 암기의 제왕인 귀왕침(鬼王針)이라는 것이다." 황보자안은 놀라서 물었다. "그럼 이 지환에서 암기가 발사된다는 것입니까?" 황보금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내부에 아주 작고 정밀한 기관장치가 내재되어 있어서 한번 에 하나 혹은 수십개의 아주 가느다란 침을 소리없이 발사시킬 수가 있는 것이지. 그 침에는 그야말로 손을 쓸 수도 없는 극독이 묻혀 있 어서 상대는 그저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금방 절명하게 된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을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어 황보금괴는 여러번에 걸쳐서 귀왕침의 사용방법과 주의할 점등을 세세하게 일러 주었다. "너는 비록 여러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일단 유사시 에는 사용할 수가 없을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이러한 최후의 무 기를 항상 휴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황보자안은 비록 장원에서 곱게 자라났지만 황보금괴는 그야말로 세 상의 온갖 고초를 다 격어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세상에서 젊은이의 용기와 늙은이의 경험은 하나같이 소중한 것인 법이다. 황보자안은 이제야 탁자의 모든 물건을 소개받은 것을 생각하고는 웃 으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의외에도 황보금괴는 뒤를 이어 탁자의 아래에서 다시 하나의 주 머니를 꺼내서는 탁자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황보금괴는 웃으며 말했다. "허나 이 모든 것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사실 궁 극적으로 세상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은 돈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가 조금전의 그러한 물건들을 쉽게 구입할 수가 있었던 것도 모두 돈의 위력인 것이다. 따라서 너는 필히 돈을 휴대하도록 하지 않으 면 안되는 것이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황보금괴는 흡족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중원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기업들 가운데의 한곳으로 가서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의 은자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어떤 예외의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고 또한 곤륜산의 부근에는 유감스럽게도 나의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도록 보존하기 좋도록 약간의 금표와 은표 외에도 보석 들을 준비했다." 황보금괴가 들고 있는 작은 주머니의 안에는 보석들이 들어 있는 모양 이었다. 이어 황보금괴는 다시 품속에서 다시 품속에서 한장의 금표(金票)를 꺼 내서 황보자안에게 건네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일만냥짜리 금표였다. 이 일만냥짜리 금표는 바로 이십만냥의 은표에 해당하는 것이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물었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까?" 황보금괴는 대답했다. "이것은 바로 네가 장차 곤륜파의 옥허산인 대도장을 만난 후에 예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와 내가 다소의 안면이 있다고는 하나 그 것은 역시 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 이 정도의 사례는 의 당 필요한 것이다. 그 적성자에게도 천냥짜리 금표 하나를 줄 생각이니 그들은 모두 너에게 잘 대해줄 것이다." 금표나 은표등은 모두 황금이나 은자로 바꿀 수가 있는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의 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역시 적성자나 옥허산인등이 이쪽이 부유하기 때문에 직접 사람을 보내거 나 찾아온 것인 셈인 것이었다. 아무리 속세를 떠난 무림기인들이라고 해도 역시 최소한의 돈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2033]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 4 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13 14:00 읽음 : 331 관련자료 없음 -------------------------------------------------------------------------- ---- 第 4 章 江湖行 황보금괴는 황보자안을 바라보면 물었다. "내가 준비한 물건들은 모두 이것 뿐이다. 여기에 네가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서 말을 해 보아라. 내 틀림없이 준비해 주마!"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께서 너무나도 완벽하게 해주셔서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어요. 저는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요란하게 준비를 하고 출도 하는 강호인이 되겠군요." 황보금괴는 마주보며 웃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것은 네가 전혀 무공을 모르는 강호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가문의 대를 이어야 ㅎ 라주 귀중한 후손이기 때문이지. 네게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설령 앞으로 우리집의 재산이 십배가 많아진 다고 해도 조상에게 뵐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황보금괴는 수려한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내가 지금까지의 약간의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 음은 역시 마찬가지여서 다른 절정의 무사 하나를 고용해서 너를 보 호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만일 내가 곤륜파의 사람들을 믿지 못한다면 역시 그 고용한 사람도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고용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항상 너를 지켜줄 수도 없을 것이고......" "........." 황보금괴는 문득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이런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공연히 화만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황보자안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더욱 건강해져서 돌아올 거예요." 황보금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짐승의 왕인 사자는 자식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한번 절벽아래 로 굴려본다고 하던데 내 마음은 그 짐승만도 못한 모양이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야 할아버지께서 저를 그만큼 끔찍하게 위해 주시기 때문이죠." 황보금괴는 말했다. "내 그래서 그 적성자에게 요 며칠동안 갖은 선심을 베풀어가며 앞으 로 일 년 동안 너의 안전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책 임을 지겠다고 하고 있으니 믿어도 되겠지 하지만...." 환보금괴는 문득 고개를 돌려 황보자안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네가 마음만 돌려 준다면 나는 모든것을 무위로 돌릴수도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서 곤륜파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가까운 산에 다니며 수련을 하지 않겠느냐?" ".........." "이곳 황산의 주변은 경관도 좋아서 수련을 쌓기에도 적당하고 또한 북 쪽의 구화산(九華山)도 제법 수련을 쌓기에는 좋은 곳이다. 이렇게 좋은 주변의 경관을 놔두고 굳이 그 먼곳으로 가서 수련을 쌓아야만 하겠느냐?"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만약 이곳에만 머물러 있는다면 항상 다른 사람들의 보호속에 살아 야할 거예요. 그리고 결국에는 생각이 좁고 나약한 사람으로 되지 않겠지 요. 보다 용기를 가지고 모험 속으로 뛰어들 때에야 비로소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성숙해질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할수가 없는 일이로구나!" 황보금괴가 워낙에 잠시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여 오랫동안 황보자안을 붙잡아 두었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그곳에서 함께 하고 황보자안이 이윽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잠을 잘 시 갓이었다. 백련거의 내외에는 은은한 풍등이 켜져서 화려한 주변의 경관을 더욱 아름 답게 만들고 있었고. 게다가 맑고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실내는 라주 조용 했다. 황보자안이 이렇게 조용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잠시 거실의 안으로 들어가 서 그 정적의 즐거움을 즐기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이미 아평은 일을 마치고 하인들이 거처하는 곳의 자신의 숙소로 돌아간 모 양이었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다가 황보자안은 저도 모르게 서재로 발길을 옮기다 가 문득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여태 사흘동안이나 떠날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로서는 고작 마음의 준비 를 한 것 밖에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 사흘동안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서재의 서책을 읽거나 글공부 를 계속해 왔고 어제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버릇처럼 발길이 서 재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게 되는데 오늘만큼은 그간의 일상에서 벗 어나 뭔가 마음의 정리를 하면서 쉬어야할 것 같았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서재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려서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침실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다가 다시 문을 닫고 잠옷으 로 갈아입은 다음에 마악 침상에 몸을 뉘이려는 때의 일이었다. 무심코 침상위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기이하게도 평평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불의 한쪽이 다소 둥글게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일시 이불이 겹쳐져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손으로 가볍게 눌 러 보았으나 뒤의 감촉은 그렇지 않았다. 뭔가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 감촉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 황보자안은 순간 흠칫 놀라며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분명히 어떤 사람이 침상속에 누워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여태 그럴만한 일이 있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무슨 목적 으로 이렇게 남의 침상위에 누워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것은 혹시 어떤 심상치 않은 결과를 나을수도 있는 것이므로 황보자안 은 우선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린 다음에 낮은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어떤 분인데 이렇게 남의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오? 나는 바로 이곳 장 원의 소주인인데 이 침상은 바로 나의 것이라오. 그러니 어서 일어나서 신분을 밝히도록 하시오. 사정에 따라서 내 다른 잠자리를 마련해 보도 록 하겠소!" ............. 그런데 상대방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전혀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에 화보자안은 다소 용기를 내어 다 뇨 쐼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이 잠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댁과 같은 불청객을 신분도 모르는 채로 침상위에 놓아둘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라오. 정히 얼굴을 드러내기가 곤란하다면 단지 이름 석자라도 말하도록 하시오. 나는 곧장 다른 곳으로 자러 가도록 하겠소." "............" 상대방은 다소 가볍게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다시 말했다. "내가 이렇게 까지 말했는데 당신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곡절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오. 하지만 나로서는 그냥 물러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실례함을 무릅쓰고 서라도 굳이 귀하의 정체를 알아내지 않을 수가 없소. 그러니....... 말일 지금부터 열을 셀 때까지 어떤 말이라도 하지 않겠다 면 내가 이불을 젖혀서 귀하를 보게 되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라오." "............" 황보자안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 이와같은 일을 당해본 적이 없 었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떨리기 그지 없었다. 그는 여태 완전한 조부의 보호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누가 감히 그에게 접근하거나 침실로 침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말을 끝내자 약속대로 열을 천천히 세었고 그것도 부족해다고 생각되어 다시 느리게 스물까지 세었다. 그러나 역시 상대는 아무런 말도 없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다소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나는 이미 열까지 세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불을..... 젖혀보도록 하겠소. 귀....귀하는 준비하도록 하시오!"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말로 이불을 좆 혀버렸다. 그는 원래가 가볍게 젖혀서 얼굴 부위만 보려고 했던것인데 워낙 긴장하 고 있어서 그만 손에 힘이 들어가서 침상위의 이불이 절반이나 벗겨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불이 벗겨진 침상위를 내려다보다가 황보자안은 별 안간 크게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나신(裸身) 다름이 아니라 침상위에 비슴듬히 누워있는 물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는 여자의 몸뚱이였던 것이었다. 솔직히 황보자안은 여태까지 여인의 알몸을 이렇게 가까이서 정확히 본 적 은 한번도 없었다. 이 여자의 알몸은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눈부시 고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크게 놀람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듯이 그 나신의 이모저 모를 살피다가 절로 얼굴이 있는 곳으로 시선이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여자의 얼굴은 마침 이쪽을 향해 돌려져 있었는데 그 얼굴을 바라보다 가 황보자안은 다시금 놀라 소리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평! 네가 여기 웬.......웬일이지?" 그렇다! 은은한 방안의 불빛 아래 드러난 여장의 얼굴은 앳되고 순결한 소녀티가 나 는 아평의 얼굴이었던 것이었다. 아평은 이 순간 눈을 내리감고 기다란 속눈썹을 간헐적으로 파르르 떨고 있 었다. 며칠전에 아평의 몸을 한번 엉겁결에 안아보기는 했지만 정말로 황보자안은 아평의 알몸이 이처럼 버들가지와 같은 가느다란 허리와 풍성하고 탄력있는 엉덩이를 가지고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던 터였다. 아니 여인의 몸이라고는 모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란 말인가. 황보자안은 자신도 모르게 아평의 둥글고 앙증맞게 솟아오른 젖가슴에 시선 을 보내다가 흠짓하여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말했다. "대체.....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왜 그대는.......그대는 이렇게 알몸...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이지?" "............" 아평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않고 누운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황보자안은 당황해져서 어쩔줄을 모르다가 그만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미,미안하오. 나는 결코 그대의 알몸을 보려던 것이 아니었는데.......난 그만 나가겠소. 미안하오......" 헌데 그때였다. 황보자안이 몸을 돌리자마자 이내 아평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가지 마세요." "..........?" 황보자안은 흠짓하여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평운 여전히 아까의 그 자세로 누워있는 채였다. 하지만 지금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크게 놀라고 당황해져서 물었다. "아니 내가 뭇 ＂ 잘못이라도 범한 것이오? 만일 내가 그랬다면.......그랬 다면 나를 용서해 주시오 아마도 그서은 고의가 아니었을 것이오.그리고 만일 용서를 할 수가 없다면.......없다면 그럼 나중에 나에게 변상을 받도록 하시오. 나는.......나는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말에 아평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세요. 공자님 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황보자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럼 대체 누구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이오?" 그말에 앞여은 그만 울다가 말고 쿡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도.......아무도 잘못은 없어요." 그렇게 울다가말고 한번 웃게 되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다소 괴상하게 보였다. 황버자안은 더욱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럼 그럼 대체 이 일은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이오?" 아평은 손을 들어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 일은 오직 제가 일부러 꾸민 것이예요." "........." 황보자안은 이에 더욱 어리둥절해져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평은 이윽고 깨끗하게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일어나 알몸인 채로 그대로 침상위에 앉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이미 공자님께서 내일 아침에 떠나신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 었어요." 황보자안은 물었다. "내가 떠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험하게 대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이오? 그렇다면 내 잘 말해두고 갈 터이니 어서 옷을 입도록 하시오." 아평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기젖은 두눈을 들어서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그런 것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예요. 저는........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는 것이예요." "그 한가지 이유라는 것은 무엇이오?" 그렇게 물으며 황보자안은 이 아평의 눈빛이 오늘밤따라 유난히 빛난다고 생각했다. 항상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태도로써 대하던 그녀가 이렇게 깜찍하고 요염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을 줄은 황보자안은 미처 몰랐다. 아마도 그것은 항상 상전의 입장에서 무심코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그녀를 대해왔기 때문에 미처 그녀의 여자다운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은 때문일 것이었다. 사실 이 아평은 항상 힘들게 일을 하고 그늘진 구석이 있어서 그랬지 약간 의 화장을 하고 앉아 있는 지금의 그녀의 얼굴은 천하절색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평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대답했다. "이제 공자님께서 곤륜파로 떠나시면 앞으로 뵙지 못하게 될것이 괴로와요. 설사 공자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고 해도........저는 그때쯤에는 이미 다 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물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그 남편과 잘 살아가면 될 것이 아니오?" 아평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결코 다른 사람에게 갈 수가 없어요. 누가 저에게 억지로 시 집을 가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죽어버릴 거예요." "..........." 황보자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제서야 비로서 아평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그야말로 신분이 높은 가문의 소주인이지만 이 아평이야말로 고아로서 남의 일을 해주고 있는 하녀에 불과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 옆에서 압력 을 가하기만 하면 어쩔 수가 없이 인생이 뒤바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랑 타령을 하기에는 그여말로 먹고사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도 그렇게 어쩔 수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남의 소실로 들어 가서나 아니면 자결하고 말았다는 여자의 얘기를 몇번이고 들은 적이 있었다. 잠시 생각한 후에 황보자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내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그대가 내가 돌아 올때까지 결코 다른 곳 으로 시집을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겠소. 그러면 되겠소?" 아평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만일 공자님께서 무슨 일이 생겨서 몇년 후에나 돌아오시나면 저는 아마도 늙은 여자가 저어 있을 거예요. 그때는 아마도 너무나도 못났기 때문에 자결 해 버릴지도 몰라요, 그래서......." "............" "그래서 저는 오늘 저의 첫날밤을 공자님께 바치기로 했어요. 만일 그런다면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되더라도 참을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아평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보자안은 문득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이 아평은그야말로 요며칠 사이에 그를 끔찍히도 사모하게 된 것이었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드높은 신분의 벽과 여러가지 상황이 좋지않기 때문에 그녀는 감 히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여 사랑을 구하지 못하고 이렇게 자기 희생의 방법을 택해 위안으로 삼으려는 것이였다. 허나 그렇다고 어찌 황보자안이 이런 방법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또한 그녀가 불쌍하다고 해서 내일 곤륜파로 가는데 함께 데려갈 수는 더더욱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아평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죠? 그것은 제가 너무나도 못생겼기 때문인가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 오히려 그대가 아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사 실을 느끼고 있는 중이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오."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밖을 행해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아주 급박한 아평의 음성이 파를 떨리며 울려왔다. "가지 마세요. 만약 당신이 그대로 가버린다면 저는.......저는 이대로 죽어버리고 말 거예요." "............." 황보자안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아평은 어는새 준비했는지 한자루의 시퍼런 비수를 들고 자신의 목을 겨 누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물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오?" 아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냥.......그냥 저와 함께 한 침상에서 주무시기만 한다면 저를 갖지 않 으셔도 저는 좋아요.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이상은 요구하지 않겠어요." (...........) 황보자안은 다시 물었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들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까이 갈 수가 있다는 말 이오?" 아평은 황보자안이 절반쯤 승낙한 눈치가 보이자 즉시 바닥에 비수를 던져버 리고는 눈물을 쏟으며 달려와 그의 품속에 안겨버렸다. "미안해요. 공자님 죄송해요!.........다시는 그러한 무례를 저지르지 않겠 어요." 황보자안은 그만 그녀를 품속에서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잠시 아평이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 황보자안은 그녀의 알몸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잡시다." 황보자안은 옷을 입은 채로 아평과 함께 침상위에 누웠다. 그러나 옆에서 알몸의 그녀에게서 풍겨나오는 처녀의 체향에 마음이 두근거리 고 얼굴이 뜨거워져서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나긴 하룻밤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다음날 아침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어서 깨어났을 때에 는 이미 아침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이었는데 다소 부담을 줄것으로 생각되 었던 아평의 태도는 의외로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이 선선하고 자연스러워 보 였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조부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떠날 때에도 그녀는 그저 명랑한 얼굴로 황보자안을 배웅했다. 실로 여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황보자안은 곧장 조부의 집무실에 이르러 행장을 갖추고 적성자와 함께 곤륜파를 향해 길을 떠났다. 거의 황산의 부근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황보자안으로서는 이것이 태어 나서 가장 멀고 긴 여행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적성자는 자신의 경공술이 높기 때문에 황보가에서 준비해주는 말이 필요없 다고 했다. 과연 그의 신법은 놀랍고도 빨랐다. 황보자안의 허리를 한손으로 잡고 신법을 펼쳤는데 얼마나 빠른지 좌우의 물체들이 희미하게 변해서 순식간에 스쳐지나가고 앞으로 다가드는 압 력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황보자안은 태어나서 이러한 희안한 경험으 처음 해보았기 때문에 절로 입 이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성자는 구불구불한 관도를 아예 무시하고 험준한 산과 계곡을 가로질러 황산의 북쪽에 있는 구화산(九華山)을 가로질렀고 다만 간간이 쉬어서 황 보자안으로 하여금 계곡의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실로 이 적성자의 신법은 말이 달리는 것보다도 빠르고 안전했으며 그렇 게 오래도록 달려도 결코 피곤하지 않은 것 같았다. [2071]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 5 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21 02:07 읽음 : 31 관련자료 없음 -------------------------------------------------------------------------- ---- 第 5 章 崑崙門下 황보대장원이 있는 황산의 기슭에서 곤륜산으로 가자면 수만리의 길을 가야 하는데 우선 동릉(銅陵)의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적성자는 황보자안을 데리고 그날 저녁 무렵에 동릉나룻터에 이르기러서 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장강에는 손님들을 태우고 오르내리는 배가 자주 오가기 때문에 배를 타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의 배가 동쪽에서 거대한 장강의 물살을 헤치고 나룻터가 있는 쪽으로 올라왔다. 그 배를 기다리며 문득 적성자가 황보자안을 향해 말했다. "강호에는 보기보다 흉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네. 그래, 강호에는 처음으로 나간다면서 두렵지는 않나?" 황보노야가 그에게 황금 천냥이나 주었기 때문에 이 적성자는 처음과는 달리 제법 황보자안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손에 들고 있는 합죽보선을 소리나게 한번 펼쳐서 부치며 대답했다. "저렇게 넓고 아름다운 장강의 모습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모험을 할 만한데 사내 대장부로서 어찌 강호를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 황보자안의 겉모양은 제법 그럴듯하고 대장부의 풍도가 보이는 듯 했으나 그것이 빛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적성자는 내심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화려하게 차리고 나서 모든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흉수를 불러들이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나?" 이 적성자는 이미 황보자안이 여러모로 호신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필부는 죄가 없어도 보물을 가진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이었다. 강호에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은 별로 강호인들의 표적이 되지 않으나 오히려 온갖 준비를 하고 보물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만인의 주목을 받아서 위태로울 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황보자안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므로 일시 흠칫하여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것을 두고 올까요?" 적성자는 천천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내가 자네를 보호하고 자네가 조심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 것이네." 하긴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적성자가 미리 집을 떠나기 전에 얘기를 했었을 것이었다. 그때 배가 도착했으므로 두 사람은 몇 사람의 손님이 내린 다음에 배에 올라탔다. 이 배는 제벌 커다란 배로 지금 이삼십명의 손님들이 타고 있는데도 배위의 공간은 제법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이 배위에 오르자 배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유난히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황보자안에 대해서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그 옆의 괴이한 도사 적성자와 연관시켜서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일까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적성자와 황보자안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곧장 걸어서 배의 뒷머리에 공간이 넓은 곳으로 가서 자리했다. 적성자는 다소 초연한 듯한 표정으로 묵묵히 장강의 물줄기를 바라보았고 배가 떠나기 시작하자 황보자안은 몇차례 합죽선을 부치다가 그대로 깨끗한 자리를 골라서 앉았다. 이 배를 타고 이삼일간은 계속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잠시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어보는 그의 귓전에 문득 걸찍하고 왁자한 음성들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흐흐흐, 겉모양이 좋지 않다고 그 내용까지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것 은 잘못이야. 더러 겉모양과는 달리 아주 근사한 것들이 있거든."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껍질을 벗겨 보자는 말인가? 마치 석류의 껍질을 벗기듯이 말이야. 정말로 그 안에는 붉은 속살이.......흐흐 들어 있 을까?" 황보자안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금 대여섯명의 건장한 장한들이 각기 날이 시퍼런 병기들을 흔들며 괴이한 표정으로 각기 떠들어대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으나 왠지 그들의 시선이 그 옆을 은근히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바라보니 바로 거기에는 한명의 촌티가 물씬 풍기는 소녀 하나가 혼자서 흘러가는 강물 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에 황보자안은 어렵지 않게 저 장한들의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즉 저 대여섯명의 장한들은 강상의 여행이 다소 지루해지자 마침 눈앞의 한 소녀를 향해 짓굳은 농담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보기에도 장한들의 말처럼 그 황의소녀(黃衣少女)의 용모는 가히 추괴하다고 할 정도로 못생겼고 거의 혐오감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소녀의 체구는 상당히 아름답고 탄력적으로 느껴졌다. 원래는 이러한 소녀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지만 강상의 여행이 지루해지자 장한들은 서로가 그녀를 향해 한두마디씩을 하고 있는 것이 었다. 소녀는 지금 그러한 장한들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아무런 표정이 나 달라진 태도가 없이 여전히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장한들의 짖 돎은 소리를 듣고 내심 웃으며 이제 곧 그들이 싫증이 나면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장한들이 그렇게 옆에서 떠들어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황의소녀가 여전히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앉아 있기만 ㄲ자 돌연 장한들은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히히히 이거 알고보니 제법 뼈대가 있는 계집인 것 같은데? 우리 그렇 지 않아도 심심한데 정말로 저 계집을 한번 벗겨 보는 것이 어떻겠어?" 황보자안이 보기에도 그 장한들은 하나같이 많이 배우지 못한 무뢰한들 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한 동료가 그와같은 충동적인 말을 꺼내자 너나 할 것 없이 동조하며 몸을 일으켰다. "흣흣흣,좋아,좋아! 그럼 우리 한번 보자구 저런 계집도 아마 가진 것은 똑같지 않을까? 흐흐흐........." 황보자안은 그들의 말이 다소 지나칠 뿐만 아니라 직접 말도 되지 않는 추잡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자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 배를 타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 장한들의 지나친 행동 을 막을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웬걸 많은 사람들은 장한들이 흔들고 다니는 날이 시퍼런 병장기들을 보고 두려움에 질렸는지 아무도 간섭하려는 기색이 없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도 모르게 황의소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서 그자들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웬놈이냐?" 장한들의 하나가 한자루의 날이 시퍼런 대도를 고쳐잡는 것이 금방이라 도 칼을 휘둘러 황보자안의 목을 쳐올듯한 기세였다. 이에 황보자안은 다소 가슴이 떨렸지만 합죽선을 펼쳐들고 부치며 태연 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보다시피 여러분들처럼 길을 가고 있는 과갯일 뿐이오." 장한들중 하나가 안면에 흉한 주름살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네놈은 어째서 우리의 일에 방해를 하려고 하느냐? 혹시 저 계집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여전히 합죽선을 부치며 대꾸했다. "예로부터 천하의 강호인들은 동도(同道)라고 했소. 그녀와 나는 한결 같은 강호의 동도인데 어찌 아무런 관계도 없겠소?" ............. 이에 장한들은 다소 주춤한 기색을 보였다. 우선 황보자안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태연할 뿐만 아니라 용모도 무공 과는 거리가 먼 서생처럼 생겼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상대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호에는 예로부터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돌아다니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아녀자와 이린이 그리고 노인들과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특히 주의하라는 것은 그들이 의외에도 기이한 절공을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자칫하여 횡사를 당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황보자안이 전혀 무공을 모르는 티가 역력하지만 장한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꺼리는 마음이 생겼고 게다가 그와 동행인 적성자가 필시 무림 고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한 심증을 굳히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기이한 절공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저러한 무림고인과 동행할 리 가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황보자안은 의외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무림 고 인이라는 결론이었다. 물론 그와같은 생각은 장한들의 지나친 기우에 불과했지만 실로 강호에서는 이처럼 몸조심은 손해될 것이 없는 법이다. 장한들의 기색이 주춤한 것을 보고는 황보자안은 그들이 어색해 하는 것을 무마해 주기 위해서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들은 꽤나 심심한 모양인데 저런 힘없는 처자를 놀릴 것도 없이 저쪽에 앉아서 계속 술이나 마시는 것이 어떻겠소?" 장한들은 황보자안이 다소 얼르듯이 말하자 잠시 주저하다가 저마다 욕지 거리를 내뱉으며 아까의 자리로 도로 가버렸다. 황보자안은 비록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렇게 뜻밖에도 일이 쉽게 해결되 자 마음을 놓으며 고개를 돌려 그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의소녀는 의외로 그와같은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못들은 사 람처럼 흘러가는 강물만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다소 어리둥절해졌지만 혹시 저 황의소녀가 귀머거리여서 이제 까지의 일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그 황의소녀에게 스스로 나서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될까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 고 적성자의 옆으로 돌아왔다. 이때 적성자는 그를 향해 다소 싸늘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강호라는 곳은 험난하기 때문에 일부러 일을 만들 필요는 없네. 자신이 감 당하지 못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는 법이지." 황보자안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으며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실 환보자안이 그렇게 대담하게 나서게 된 이면에는 은근히 적성자의 도움 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성자는 그 뒤에 다른 별른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한 가운데 뱃전에 부딛히는 강물의 물결소리를 들으며 배는 계속 상류쪽 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뒤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길고 지루한 강상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가고 아침 무렵이 되 었을때 배는 어느새 동정호에서 가까운 망강(望江)나룻터에 이르러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음식물을 사기 위해서 나룻터에 내리거나 근처의 만두가게에 내려서 갔다오곤 했다. 하지만 황보자안과 적성자는 이미 충분한 양의 마른음식들을 준비했기 때문에 배에서 내리지 않고 배위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런데 조용히 강물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하던 황보자안은 문득 기이한 느 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다가 가볍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의소녀 미치 벙어리나 귀머거리처럼 밤새도록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서 망연히 강물만을 바라보던 그 소녀가 갑자기 사라져서 보이지 않 았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음식물을 사기 위해서 잠시 내린것일까 아니면 아예 이곳에서 배를 내려버린 것일까? 비록 못생긴 그녀에게 별다른 애착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소 기이한 느낌 을 주었던 그녀였기에 황보자안은 급히 그녀의 모습을 찾기 위해 나룻터의 주 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조금전까지만 해도 있었고 지금쯤 아무리 빨라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지 못했었을 법한 그녀의 모습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는 보기와는 달리 무림의 고인(高人)이러서 그야말로 순식간 에 나룻터의 언덕을 날아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자 황보자안은 강물만 고요한 태도로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증발하 듯이 사라져버린 못생긴 용모의 황의소녀 대체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니 황보자안이 일부러 공연히 그녀를 신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마침 적성자가 이쪽을 보고 있기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그는 황보자안을 향해 기이한 냉소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 표정을 보자 황보자안의 말은 금방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 다. 이때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예의 그 장한들도 배에서 내려서 떠나갔는 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 ........... 다소의 시간이 지나자 배는 다시 강의 상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무렵에는 무창성(武昌城)의 외곽에 이르렀다. 적성자는 이에 뭍으로 올라서 황보자안의 허리를 싸안고 경공술을 펼치기 시작했 다. 그는 북쪽으로 향하여 재홍산(大洪山)을 가로질러서 일절 들르지 않고 가끔씩 작은 현성에 들러서 마른 음식을 준비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거창하게 준비를 하고 강호출도를 생각했던 황보자안의 예측은 빗나갔고 그는 거의 낮에는 동굴이나 깊은 산중에서 잠을 자고 밤이나 아침저녁 으로 산속을 누비는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계속해서 여행을 한지 보름이 지났을때 두 사람은 종남산(終南山) 부근을 지나치게 되었고 이어 다시 한달여의 시일이 지나자 그들은 옥문관을 지나 서 거대한 사막위를 걸어가고 있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달여의 시일이 흘렀을때 마침내 그들은 목적하던 대곤륜산맥에 더달할수가 있었으니 그야말로 기나긴 여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대곤륜산맥 일명 대곤륜산맥으로 통하는 이 거대한 산은 그야말로 천하의 지붕이라고 말할 만큼 웅장한 기세로 동서로 뻗어 있으며 윗쪽으로는 멀리 대과벽(大戈壁)을 지 나서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두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청해성과 서장등지를 에워 싼 히말라야산맥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곤륜산은 그 길이만 해도 중원의 황하강의 길이만 하기 때문에 그저 곤 륜산이라고 하면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마치 강물속에서 바늘 하나 찾기와 비슷한 것으로 설령 무림에 잘 알 려져 있는 곤륜파(崑崙派)라고 할지라도 이 넓고 웅장하며 험준한 곤륜산 중에서 과연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바로 곤륜파의 사람으로서 곤륜파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적성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찾아가기가 상당히 곤란한 것이다. 적성자도 곤륜산중에 이르러 십여일이나 산중에서 노숙을 한 후에야 비로소 삼청(三淸)이라고 알려진 곤륜파에 이르렀다. 이 삼청궁은 바로 상청(上淸),옥청(玉淸),태청(太淸)을 말하는 것으로 전설 속의 서왕모(西王母)의 얘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곤륜파의 장문진인은 사부의 명령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상청궁에 들르 지 않고 황보자안을 하나의 이름모를 험준하고 거대한 절봉으로 데리고 갔다. "사부님 다녀왔습니다!" 하나의 어두운 동굴 앞, 적성자는 황보자안을 옆에 내려놓고 동굴쪽을 향해 오체투지하며 입을 열고 있었다. 이 동굴은 바로 근처에서도 가장 험준한 지형인 절봉의 잔설(殘雪)이 사방의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꼭대기의 한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실로 적성자와 같이 고절한 신법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면 올라올 수도 없는 곳이었고 그 증거로 산 아래에는 흰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보자안은 이처럼 높은 고지에 올라오자 다소 숨이 가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만년동자삼을 복용한 탓인지 몇달전부터 황보자안은 체내에서 열이 많이 나서 그 다지 이곳의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 이 부근은 아주 조용했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실로 이 동굴속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 었다. 이곳은 곤륜파의 삼청궁과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인적이 드문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적성자가 그와같은 예를 올린 뒤에 한참이나 지나도록 안에서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을 보고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어두운 동굴속에서 뭔가 순간적으로 희끗한 물체가 나타나는듯 하더니 전면에 한명의 노도사(老道士)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노도사 니 사람은 그야말로 용모가 청수하고 백학(白鶴)과도 같이 고고한 느낌을 주는 사람 이었다. 비록 수렴과 머리가 하나같이 은백색으로 물든 사람이었지만 황보자안은 일순 그 노도사의 두 눈에서 마치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섬광이 벅뜩이다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적성자는 노도사가 나타나자 공손히 절을 한 다음에 황보자안에게 예를 올릴 것을 지시했다. 황보자안은 필시 이 사람이 곤륜파의 최고배분의 사람인 그 옥허산인(玉虛散人) 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적성자의 뒤를 따라서 공손히 절을 한 다음에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옥허산인이십니까?" 이에, 예리한 시선으로 찬찬히 황보자안의 전신을 주시하고 있던 그 노도사는 즉시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 노도가 바로 옥허이니라. 네가 바로 황보가의 자손인가?" 황보자안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정의 이름은 황보자안입니다." 옥허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자안이라.........매우 좋은 이름이구나!" 이어, 옥허산인은 다시 물었다. "너는 나의 문하에 들어서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황보자안은 실로 말할 것도 없이 그서 때문에 자신이 이 멀고먼 곤륜산까지 온 것이므로 주저없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옥허산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에게 배사지례(排師之禮)를 올리지 않는냐?" 일반적으로 배사지례라고 하는 것은 공손히 엎드려서 아홉번의 작은 절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구배지례(九排之禮)였다. 이미 세상의 기본 예절에 통달해 있는 황보자안은 즉시 무릎을 꿇고 옥허산인 을 향해 배사지례를 올렸다. "제자 황보자안이 사부님을 뵈옵니다." "............" 옥허산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웃으며 구배지례가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어 적성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너에게는 사형이 되는 것이니 절을 올리도록 해라!" 이에, "사형을 뵈옵니다." 황보자안이 절을 하자 적성자도 웃으며 절을 받아 주었다. P.S 늦게 올려서 죄송해요....... 저도 읽으면서 올리느라.....그리고 서효원의 고전 사신마곡을 구해서 그것에 빠지다 보니.......헤 죄송... 이제부터 황보자안의 본격적인 무공 수련이 시작되는 군요... 그럼 재미있게 보세요.. 퓨 돌이 퓨 [2072] 제목 : [백상] 곤륜문하 제 6 장 올린이 : 수창 (김수원 ) 96/08/23 00:40 읽음 : 199 관련자료 없음 -------------------------------------------------------------------------- ---- 第 6 章 武功修鍊 그렇게 서로간의 수인사가 끝이 나자 옥허산인은 황보자안을 향해 말했다. "너는 앞으로 대략 일년정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약간의 무공을 배울 것 이지만 기왕에 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는 즉 곤륜파의 제자가 된 곳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다만 너는 다소 특별한 경로로 입문을 하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다른 점이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항상 자신이 곤륜파의 제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황보자안은 자신이 정식으로 곤륜파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옥허 산인에게 한두가지 무공을 배워 심신을 단련하는 목적으로 온 것이므로 겉으로는 옥허산인의 제자이지만 정식으로 곤륜파의 다른 제자들과 상견 례를 하는 것등의 절차를 모두 생략하겠다는 의미였다. 말하자면 약식의 제자라고나 할까, 황보자안은 미리부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부의 말에 대답했다. "예 사부님...." 이어, 눈짓으로 적성자를 향해 물러가서 쉬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옥허산인은 동굴안으로 몸을 돌리며 황보자안에게 말했다. "따라 들어 오너라!" 황보자안은 이제 이 동굴속이 자신이 일년간 생활해야할 거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옥허산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황보자안은 유심히 내부의 구조를 살폈다. 동굴의 안에는 등불을 켜놓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들어서자마자 익숙하지 않아서 내부를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두운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런대로 동굴내부 의 구조를 알아볼 수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밖에 보기에는 매우 좁게 느껴졌던 내부는 의외로 넓고 시원했고 얼마쯤 걸어들 어가자 마치 광장과도 같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광장의 쥐에는 양쪽으로 여러개의 석실(石室)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보아하 니 만들어진지 오래되지 않아서 황보자안을 위해서 새로이 만들어 놓은 것 같 았다. 광장의 안쪽으로는 다시 굽어진 동굴이 이어져 아마도 옥허산인의 거처는 그 뒤쪽에 있는것 같았는데 과연 옥허산인은 황보자안을 광장 옆에 있는 하나의 석실로 인도했다. 석실의 문을 열자 하나의 작은 침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돌침상이 만들어져 있고 그 옆에는 석탁과 정좌하고 참선을 할 수가 있는 포단도 마련되어 있었다. 옥허산인은 이어 말했다. "오늘은 이곳까지 오느라고 피곤할테니 그만 이곳에서 쉬도록 하고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밖의 석실에서 찾아서 쓰도록 해라." "예, 사부님" 옥허산인은 말과 함께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황보자안은 다시 피곤한 느낌도 있었으나 우선 광장의 좌우에 있는 남은 세개의 석실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새로 만들어진 이 석실들은 틀림없이 황보자안이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과여, 그 세개의 석실들은 예상대로 황보자안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채워두는 곳이었는데 하나는 서고(書庫)이고 또 하나는 병기고(兵器庫)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여러가지 물건들이 쌓여있는 창고였다. 서고에는 서생인 황보자안을 의식한 제법 많은 서책들이 꽂혀 있었고 검과 도창을 비롯한 십팔반의 병기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형병기들도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황보자안이 물론 그러한 무공들을 이곳에서 배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편리를 주기 위한 배려인듯 했다. 이곳 동굴속은 의외로 바깥과는 달리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건조하여 습기가 심하지 않았고 그다지 어둡지 않아서 생활하는데 커다란 불편은 없었다. 허나, 황보자안은 자신이 어둠속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창고 안에서 화섭자나 등잔 따위를 구해가지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서는 불을 켜놓았다. 창고안에는 그밖에 식용할수가 있는 마른음식이나 마실 물들이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것들로 식사를 마친다음에 푹신한 가죽들을 가져다가 침실의 돌침상 위에 겹겹이 깔고 이어 그것들을 이불 삼아서 덮고 누웠다. 곤륜산에서의 첫날밤은 이렇게 다소 싱겁게 시작되었다. 침상위에서 누워서 몸이 다소 훈훈해지자 오랫동안 피로에 찌들었던 황보자안은 이내 깊은 잠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나 깊은 잠속에 골아떨어져 있었는지 모른다. 황보자안이 잠에서 깨어나서 밖으로 나오니 동굴의 밖에는 이미 옥허산인등이 서성이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색이 제자된 몸으로 이렇게 사부를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이 송구스런 마음이 들어서 황보자안은 급히 밖으로 나가서 인사를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사부님!" "음......" 옥허산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제자의 인사를 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느냐?" 황보자안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불편하지 않았습니다,제자는 아주 단잠을 잤습니다." 옥허산인은 웃었다. "그것 참 잘된 일이로구나." 이때, 황보자안이 고개를 돌려보니 주위에 보지 못하던 두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그중 한사람은 백발에 백색도포를 걸친 사람이었고 또 한사람은 검은 머리칼에 역시 검은색의 도포를 걸친 사람이었다. 보아하니, 대략 그들의 나이는 육십 안팎인 것 같았다. 황보자안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하자 옥허산인은 웃으며 그에게 그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자안아, 너도 알다시피 너에게는 어제의 그 대사형을 비롯하여 두명의 사형이 더 있느니라. 바로 둘째사형 출진자(出塵子)와 세째사형인 장문인 현황자이니라." 황보자안은 이들이 바로 자신의 다른 두명의 사형이라고 듣자 절로 마음의 긴장이 되어 두 사람의 용모를 살폈다. 백발에 백색도포를 걸친 출진자의 용모는 마치 옥허산인의 용모와 비슷하여 청수하고 담담한 것이었고, 흑발에 흑의의 장문사형 현황자는 청수한 외모에 두 눈에는 왠지 깊은 현기(玄機)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황보자안은 원래 도가의 인물들은 나이를 먹어도 별로 늙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들이 실은 나이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먹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자 황보자안이 삼가 두분 사형을 뵙습니다!" 황보자안이 공손하게 두 사람에게 절을 하자 그들은 각기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이 나이어린 사제를 향해 호의를 보여주었다. 출진자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앞으로 사부님께서 연로하시어 내가 자네를 지도하게 될 것인데 많은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겠네!" 황보자안은 원래는 사부인 옥허산인이 직접 자신을 지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둘째사형인 출진자가 대신한다는 얘기를 듣고 왠지 다소 실망하는 기분이 되었다. 드러니까, 황보자안이 옥허산인의 제자이자 출진자등의 사제가 되는 것은 단지 그들이 황보 가에 보내는 일종의 허세요 호의인 셈이었다. 실제는 바로 출진자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앞으로 일 년동안 자신이 배우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상관 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을 풀며 대답했다. "예, 고맙습니다 사형!" 이 곤륜파에서는 황보자안을 옥허산인의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막상 가르치는 출 진자의 사제가 되기 때문에 황보자안을 제자가 아닌 친구로 대하려는 모양인 것 같았다. 이에, 장문사형인 현황자도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스다듬어 주며 말했다. "자네가 우리 곤륜파의 일원이 된 것을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기쁘게 생각하 는 바이네. 만일 생활하는 도중에 무엇이라도 필요한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사 제를 통해서 이야기를 해 주게. 이사형이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것을 약속 하겠네!" 그러니까, 황보자안은 엄격히 말해서 곤륜파의 제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려운 손님인 셈 이었다. 현황자의 말을 듣고는 끄덕이다가 황보자안은 문득 자신이 아직 조부님께서 전하 라고 했던 일만냥짜리 금표를 전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그리하여, 즉시 그는 품속에서 일만냥짜리 금표가 들어있는 봉투를 꺼내서 사부인 옥허산 인에게 바치며 말했다. "참, 제자가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것은 저희 할아버지께서 사부님께 전해드리 라는 것이니 받아주세요!" "그래?........" 옥허산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고는 그 안에서 일만냥이나 되는 액수 의 금표를 꺼내들고는 역시 웃으며 현황자에게 건네주었다. "허허 내 그렇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기어이 황보노야께서는 이와 같은 선물을 보내오셨구만, 장문인이 알아서 요긴하게 스시도록 하시게!" 현황자는 제자이기는 하지만 일파의 장문인이기 때문에 반쯤 경어를 써주는 것이 었다. 형황자도 일만냥짜리 금표를 보고는 일순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무림의 사람들은 세속의 혼탁한 생활이 싫어서 간혹 산속에서 생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물론 은자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이런 곤륜파에서는 따로 생활수단이 되는 비용을 벌어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 래도 아주 풍족하게 쓰고도 남아돈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은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황금 일만냥은 은자로 이십만냥에 해당되고 그것은 삼청궁의 일년 예산의 거의 절 반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황자는 일순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 할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반년 정도의 예산을 절약할수 있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쳤을 경우에는 은 자에 거의 구애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황자는 황보자안을 향해 절로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에 사부인 옥허산 인을 향해 궁신의 예를 올리며 금표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실, 곤륜파에서 황보자안을 일년간 제자로 받아들인 이면에는 이와같은 도움을 은연 중 기대하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현황자는 그렇게 인사를 올린 다음에 곧장 허공에 몸을 솟구쳐 올린 다음에 절 벽의 아래를 마치 새가 날아가듯이 빠르게 날아서 사라져 버렸다. 황보자안은 이미 적성자의 놀라운 신법을 보아온 터였지만 지금 다시 장문사형 의 신기에 가까운 경공술을 보게 되자 새롭게 개안을 하는 기분이었다. 옥허산인은 현황자가 사라지자 출진자의 인사를 받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출진자가 황보자안을 이끌고 동굴 옆의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리로 와보게!" 그곳에는 작은 부엌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지금 하나의 솥에 음식이 가득 끓으면 서 허연김을 뿜어올리고 있었다. 출진자는 자신이 직접 그릇에 밥을 떠서 황보자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생식(生食)을 해오신지 오래 되셨기 때문에 이런 익힌 음 식은 들지 않으신다네. 앞으로 자네는 스스로 밥을 지어서 먹어야 하는데 그런 생 활에 빨리 익숙해 질수록 유리해질 것이네. 자 시장할 것이니 어서 들게!" 그가 자신의 밥을 떠주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물었다. "사형께서는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출진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식사를 하고 왔으니 상관하지 말고 어서 들게!" 반찬은 역시 창고안에 준비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제법 영양이 풍부하고 가짓수가 많은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제까지 하인들이 해주는 밥만을 먹으며 자라왔는데 이제부터 이러한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해야 한다니 다소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 몇달간의 여행속에서 거친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수해졌고 또한 식욕이 생겨나 서 실상은 생각보다 심한 염려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황보자안은 빠르게 두어그릇의 밥을 비운 다음에 대강 그릇들을 치워놓고 출진자 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출진자는 기다리고 서 있다가 그제서야 웃으며 한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 작했는데 기이하게도 그쪽은 삼면이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공지의 바깥부분이었다. "따라 오게!" 황보자안은 그가 낭떠러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다가 낭 떠러지의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곳이 아래로 내려가는 가장 경사가 완만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순순히 출진자의 뒤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절봉은 깍아지른 듯한 절봉이어서 가장 내려가기가 수월한 길이라고 해도 역시 내려가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정신을 차리고 계속해서 한발자 국씩 아래로 움직인다면 결국에는 절봉의 아래쪽에 도달할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래로 시선을 던져보면 아득하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공포가 엄습 하여 비록 체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심장이 허약하거나 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전혀 내려갈 엄두도 낼 수가 없는 위험한 길이 었다. 황보자안은 비록 담력이 뛰어나게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옆에 마음 든든한 무림 고수인 출진자가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나, 비록 옆에 누가 있다고 해도 이 절봉의 높이는 실로 보기보다 더했다. 몇달동안 거친 생활을 해오면서 확실히 황보자안의 체력은 보다 강해져 있는 상 태인데도 그는 내려가면서 전신에 비지땀을 흘리고 수도 없이 쉬었을 뿐만 아니 아 겨우 절반도 내려가지 못하고 나중에는 힘이 달려서 몸을 떨며 위태위태하게 되었다. 사형인 출진자는 매우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태까지 암벽의 등걸이 부분을 밟고 마치 유람이라도 하듯이 황보자안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그제서야 번쩍 몸을 날려 그의 떨리는 몸을 안아들고 마치 비조처럼 암벽을 타고 날아서 맨 아래에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는 작고 맑은 계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이 기력이 탈진한 몸으로 계류의 물을 한모금 마시고 정신을 수습한 뒤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에는 이미 해가 서쪽 산마루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어이없게도 황보자안은 대략 서너시진 동안이나 지옥같은 암벽에 달라붙어서 죽을 고생을 다한 셈이었다. 이 사형인 출진자의 얼굴은 마치 신선처럼 담담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만 황 보자안은 수련 첫날 부터 이토록 심한 고생을 시킬 줄은 몰랐다. 황보자안이 도중에 쉽게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바로 부잣집 귀공자로서 체면과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그러한 오기가 아니었다면 그는 절벽의 십분지 일도 내려오지 않아서 포기를 하고 출진자에게 내려다 달라고 말했을 것이었다. 출진자는 거의 탈진하여 앉아서 쉬고 있는 그에게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만일 체력이 강해지고 무공의 기초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면 바로 조금전 처럼 절벽을 오르내리는 것이 좋을 것일세. 원래 무공이라는 것 은 골격이 아직 굳어지지 않은 십이삼세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지만 자 네의 골격은 제법 좋은 편이니 이와 같은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네." 황보자안은 자신이 곤륜파로 오는 데에는 특별한 수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수련이라는 것이 고작 이런 위험하고 어디서나 할 수가 있는 암벽타기라는 것을 알게되자 매우 실망하는 마음이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출진자의 도움을 받아서 절봉을 내려왔지만 나중에는 항상 그와 함께 있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항상 암벽타기를 하라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기분 이었다. 황보자안은 물었다. "저는 이 일을 매일 해야 합니까?" 출진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능한한 자네를 위해서 물을 위로 날라다 주지 않을 생각이네. 그러니 자네는 부지런히 암벽을 타는 방법을 배워서 스스로 물을 길어나를 수 있도록 해야겠지. 물론.......자네가 어렵다고 한다면 내가 물을 길어다 줄수도 있다네." 출진자는 말이 끝남과 함께 다소 조소하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황보자 안은 차마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대신 물었다. "제가 이곳에 와서 배우는 것은 고작 이곳 뿐이란 말입니까?" ".........." 출진자는 잠시 대답을 않고 묵묵히 황보자안의 전신을 바라보다가 다소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른바 체력을 증진시킨다고 하는 것은 어떤 무공기예를 배우는 것보다 이러 한 암벽을 타는것이 가장 좋다고 말할 수가 있네. 하지만......이런 암벽을 타는 것은 다소 힘겨운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 약간의 내공심법과 도인법(導 引法)등을 가미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 사부님께서는 이미 자네에게 가르쳐 줄 내공심법과 도인법을 정해 놓으셨네. 물론 자네가 거기에서 더욱 발전하 여 어떤 무공을 배우기를 원한다면 굳이 배우지 못할 것도 없네." 요컨대, 이 출진자의 말을 어느 것도 몸으로 배우지 않고 공짜로 습득할 수 없다는 말이 었다. 황보자안은 비록 무공은 배우지 않았지만 문학이나 언변에 있어서는 깊은 경지 에 들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몸이 허약하여 하루종일 절벽을 내려오지도 못하고 쩔쩔매었지만 출 진자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마저도 거의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결코 외형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황보자안이 곰곰히 생각에 젖어있자 출진자는 문득 다시 말했다. "자네의 얼굴과 피부는 원래부터 그렇게 붉은 색깔이었는가?"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이, 황보자안은 항상 집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피부색이 마치 백옥처럼 부드러운 것 이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일인지 지금의 그의 얼굴과 피부색은 조금전에 출진자가 말한 대로 혈기 가 넘쳐서인지 불그레하게 변해 있었다. 황보자안은 지난 몇달간 여행을 하면서 몸이 더욱 건강하고 활력이 넘쳤었다. 입맛도 늘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노숙을 하다시피 했고 햇볕을 많이 쬐었기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출진자의 표정을 보니 야릇한 것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출진자는 잠시 웃다가 말했다. "자고로 영약이나 독약을 막론하고 그것을 적당한 사람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써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가 있는 것이고 이득이 되는 것일세. 그런데 자네는 보아하니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영약을 복용한 것 같구만?" 황보자안은 그가 말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제가 만년동자삼(萬年童子蔘)을 복용한 것 말입니까?" 출진자는 어느 정도 짐작은 했으나 황보자안의 말을 듣자 다소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년동자삼이라구?"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이곳으로 떠난다고 하자 조부님께서는 일부러 그것을 구입하셔서 제가 복용하도록 하셨지요. 제에게 병마가 깃들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출진자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만년동자삼은 그로서도 본 적이 없는 희세의 영약인데 천하의 부잣집이라서 역시 그런 것을 능히 구입해서 먹였구나 하는 어이없다는 심정에서였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복용한 데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황보자안의 질문에 출진자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배경으로 희세의 영약을 복용한 것은 일대의 복덕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어찌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네는 그것을 복용함에 있어서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겠지?"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그것을 복용하는데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출진자는 대답했다. "물론이네. 설사 천하의 영약을 복용하더라도 그에 응분한 조처를 취하지 않는 다면 그서이 오히려 화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약 을 복용한 후에는 필히 내공심법을 운용하여 그 기운을 흡수하거나 아니면 금침 대법으로 약효가 고루 전신에 퍼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네. 자네는 요새 허리가 굵어지고 전신이 비대해지는 듯한 느낌을 느끼지 못했는가?" 황보자안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P . S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읽어 주시는 것 같아서 급히 쳤습니다.. 오타가 좀 있더라도 참고 봐주세요.... 진실한 무공 수련을 기대 하세요. 퓨돌 이퓨 번호:100/102 등록자:SOSUL 등록일시:96/12/29 03:38 길이:265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7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7장. 練氣의 術法 출진자는 다소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이 만년동자삼과 같은 희세의 영약은 제때에 맞춰서 내공심법을 운용 해서 진기로 소화시킨다면 가히 삼갑자(三甲子)에 달하는 막대한 공력을 얻 을 수가 있는 최고의 영약인 것이네. 하지만 자네가 그 영약의 기운을 제때 에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약의 기운이 체내에 굳어져서 허리가 굵어 지고, 또한 피부색이 붉어지며, 몸이 비대해지기 시작한 것이네." "……" 황보자안은 다소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삼갑자의 내공! 이것은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공력이라고 할 수 가 있었다. 여기에 어떤 한 무인이 있어서 그가 어려서부터 열심히 내공심 법을 깨우쳐서 조석으로 잊지 않고 꾸준히 내공을 연마한다면 일갑자의 세 월이 흐르게 되면 그 육십년에 해당되는 막대한 공력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런 일갑자의 공력을 소유한 무림의 명숙이라면 가히 일류의 고수로서 강 호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황보자안은 비록 여태 무공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호위무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서 이와 같은 이치는 거의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갑자도 아니 고 삼갑자의 공력을 한꺼번에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은 비단 이해하기가 어려 울 뿐만 아니라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삼갑자의 내공이라고 하면 가히 최절정(最絶頂) 고수의 공력에 해당되는 내공이 아니겠는가! 물론 한 사람의 내공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무공이 고강한 것이 아니고, 따 라서 비록 삼갑자의 공력을 쌓았다고 해도 모두 최절정의 고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원래 공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무예의 기반이 되는 것 이기 때문에 출진자의 그 말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황보금괴는 오직 손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다른 생각도 못하고 그냥 만년동 자삼을 먹였던 것이었는데, 이를 잘만 했으면 황보자안은 최절정의 무림고 수가 될 수 있는 발판을 쌓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황보자안이 물었다. "그럼 사람의 내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얻기가 쉬운 것입니까?" 출진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공이라는 것은 대다수의 무림인들이 얻기를 원하는 것인데 어찌 취득하 기가 수월한 것이겠는가? 다만 천하에는 아주 드물게 희세의 영약이 있어서 그것을 복용하면 내공을 크게 증진시킬 수가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아주 드문 일인 것이다. 그렇게 드물게 백 년 혹은 수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희세라는 말을 썼겠는가?" "……" "강호에는 그런 희세의 영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하여 영단(靈 丹)을 만들어서 내공을 높이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소림사의 대환단(大還 丹)이나 개방의 취옥환(醉玉丸), 그리고 본문의 소양단(小陽丹)과 같은 것 들이 거기에 해당되고, 그나마 그러한 것들은 아주 구하기 어려운 것들인 것이다." 황보자안은 비로소 자신이 천하에서 아주 귀한 희세 영약을 복용했다는 사 실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가 물었다. "그럼 저는 삼갑자는 아니더라도 한 이갑자의 공력은 얻을 수가 있는 것입 니까?" 출진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이미 희세 영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굳이 본문의 소양단과 같은 것 을 복용하여 내공심범으로 내공을 쌓을 필요는 없는 것이네. 오직 체내에 굳어진 진기를 풀어서 내공으로 사용한다면 몸도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고 공력도 얻어지게 될 것이네." "……" "다만 내공심법을 아직 익숙하게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커다란 영약 의 기운을 받는다면 이는 바로 작은 강물에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는 것 과 같은 현상이 나게 될 것이므로, 그대는 처음부터 천천히 도인술의 기초 를 닦아가면서 그것들을 흡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렇게 한다면 잘하면 대략 사오십년이나 일갑자의 공력을 얻게 될 수도 있네." 황보자안은 삼갑자의 공력의 얘기를 들었다가 이제 겨우 잘해야 일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소 실망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했 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것의 비슷비슷한 것이다. 오히려 높은 공력을 일시에 취득하려고 한다면 내공심법이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칫 주 화입마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출진자의 말을 듣고는 황보자안은 즉시 욕심 을 버렸다. 사실 불과 십몇 년의 공력만 해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을 낳을 수가 있는 무서운 힘이라는 것을 황보자안은 알고 있었다. 출진자는 마치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 다. "자네는 무한한 복덕을 타고나서 황보노야의 손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 은 희세의 영약을 복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네. 그러한 복덕을 생각할 때 자 네는 결코 자만하지 말고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여 보다 겸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네. 그리고 아직 체내의 약기운을 공력으로 환원시키지 못 한 상태에서는 그 혈액은 자칫 공력의 증진을 노리는 사마외도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영약을 복용했다는 소문을 낼 필요는 없는 것이네." 황보자안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저의 피를 마시면 그 사람도 공력이 높아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출진자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을 알아들으니 똑똑한 편이로군. 자네가 약기운을 공력으로 흡수하 기 전에는 그렇다는 말이네." 황보자안은 내심 생각했다. (하긴 내가 갑자기 몸에 기운이 넘치고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지. 만년동 자삼의 약기운이 아니었다면 어찌 저 암벽을 다만 절반이라도 내려올 수가 있었겠는가?) 황보자안은 눈앞에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이는 절봉의 꼭대기를 쳐다보며 다 시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보고 출진자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오늘은 비록 내려오는 데 나의 힘을 빌렸지만 아마도 도인술을 배 우고 내공심법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면 보다 수월하게 내려올 수가 있을 것이네." 황보자안은 이에 다소 흥분하여 물었다. "그 도인술과 내공심법을 지금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출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이쪽으로 다가와서 앉도록 하게." 출진자는 황보자안이 그의 앞쪽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편안하게 걸터앉 는 것을 보고는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으흠, 본문의 무공은 전설에서도 그렇듯이 선도수련(仙道修鍊)에서부터 시 작된다고 할 수가 있네. 물론 강호에 알려져 있는 본문의 무공은 성취가 빠 르고 쉽게 실용무예에 응용할 수가 있는 태청신공(太淸神功)과 그 밖의 무 공들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선도수련의 방법에 있어서 다소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네." "……?" 황보자안은 원래 이 곤륜파의 무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 출 진자가 하는 말이 대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 곤륜파는 원래 중원에 서 멀리 떨어진 서장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무예 역시 강호에 잘 알 려져 있지 않은 것이었다. 출진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히 자네는 무공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심신의 수양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니 다소 진척이 느리더라도 가장 정통적인 선공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리고 이것은 사부님의 생각이시니 자네는 그렇게 알도록 하 게." 황보자안이 물었다. "선도의 무공은 따로 있는 것입니까?" 출진자는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두 가지의 무공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다만 본래 의 무공은 선도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강호의 실용무예로 쓰이게 되고, 다시 보다 실용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취 속도가 빠른 편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편법은 선도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지." 황보자안이 다시 물었다. "만일 실용무예로써 무공이 높아진다면 보다 건강해지지 않겠습니까?" 출진자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무공이야 고강해지겠지만 자네처럼 순수하게 심신을 단련시키고자 하 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선도의 공부가 더욱 좋은 것이네. 왜냐하면 이 선도 의 공부는 심신의 조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무공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지."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 역시 뉘늦게 무공을 배우는 입장에서 그저 심신을 단련하고자 하는 것이지, 무슨 무림의 고수가 되고 싶은 생각 은 없었다. 그리고 기왕에 심신을 단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라면 가장 완전한 방법대로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보자안이 물었다. "그럼 그 선도의 무공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출진자는 다소 기이한 표정으로 황보자안의 신색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 다. "예로부터 본문은 무수한 전설과 함께 이어져 왔기 때문에 자연히 거기에서 생겨난 신비로운 선도 수련의 무공은 한두 가지가 아닌 법이네. 우리는 그 여러 가지의 무공들을 종합하여 무도 다섯 개로 정리했는데, 그것을 가리켜 오대선공(五大仙功)이라고 하네." 황보자안이 물었다. "그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출진자가 대답했다. "우선 이름만 말하자면, 금단선공(金丹仙功), 적양선단공(赤陽仙丹功), 미 천대연신공(彌天大衍神功), 도반삼양공(導反三陽功), 현원전단공 등이네." 황보자안이 물었다. "제가 그것들은 모두 다 연성해야 합니까?" 출진자는 이에 다소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이러한 선공들은 하나같이 선도 수행을 하여 마침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하기 위한 보다 궁극적인 비법들인 셈이네. 이것들을 연성하기 위해서는 보 통의 사람들은 한평생을 다 바쳐도 모자라는 지경이지. 자네는 다만 일년간 을 심신수양을 위해서 온 것이니 이와 같은 선공들을 배우기 전에 연성해야 하는 기초적인 무공을 배우게 될 것일세." 황보자안은 일시 선도무공에 대해서 호기심이 치솟았다가 금새 그러한 기대 와 흥분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아직 선 도 수행이나 우화등선이나 하는 말들이 그다지 솔깃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 담없이 미련을 지워 버릴 수가 있었다. 출진자가 다시 말했다. "이제부터 자네가 배우게 되는 무공은 팔단금(八段錦)이라는 도인술과 순양 기공(純陽氣功)이라는 내공심법이네." 황보자안은 호위무사들로부터 이 팔단금이라는 도인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이 팔단금은 강호에 어느 정도 유포되어 있어서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도인술이었는데, 출진자가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황보자안은 그것과 함께 배우게 될 순양기공의 수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러나 뒤이어 출진자가 찬찬히 일러주는 팔단금의 구결과 동작들을 듣고 보았을 때 황보자안은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출진자가 일러주는 팔단금과 강호에 유전되고 있는 팔단금과는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많은 차이가 있었고, 출진자가 일러주는 팔단금의 내 용이 보다 길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어서 복잡했다. 이 팔단금에는 수련의 기초가 되는 토납(吐納), 도인(導引), 연기(練氣)의 법문이 모조리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를 강건하게 만들고, 또한 음유 (陰柔)하고 정적(靜的)인 것이 위주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맑게 하 는 효과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가 이 팔단금의 수련은 뒤에 이어지 는 순양기공보다도 더욱 기초적인 무공인 셈이었다. 출진자는 구결을 설명하면서 황보자안은 아미 체내에 영약의 기운이 스며들 어 있기 때문에 토납 등의 방법으로 얻어지는 양기(養氣)의 과정이 빨라질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뒤이어 설명해 주는 순양기공은 바로 가장 기초적인 내공심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가장 정직할 뿐만 아니라 성취가 대단히 느리고, 그러나 가장 확실하고 성취하기만 하면 백병을 물리칠 수가 있다고 하는 최고의 건강요 법이었다. 선도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성을 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는 대략적으로 말해서, 양기(養氣), 연기(練氣), 운기(運氣), 용기(用氣)의 방 법이 있었고, 순차적으로 연마해 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사방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지가 오래였다. 황보자안은 내심 매우 배가 고프고 피로하여 쉬고 싶었지만, 출진자가 팔단 금과 순양기공의 구결을 거푸 일러주고 뒤이어 동작까지 한 차례 시전해 주 는 바람에 오래도록 말없이 보고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하늘에 둥 근 달이 두둥실 떠오른 다음에야 출진자는 비로소 두 가지 무예의 전수를 중단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예의 구결이라는 것은 원래가 난해한 문구로 되어 있기 때문에 헷갈리기 가 쉽고 암기하기가 곤란한 것이네. 그리고 이 각각의 형(形)이나 동작이라 는 것들은 더더욱 바르게 익히기가 어려운 것이지. 자네는 한꺼번에 너무 고심할 것 없이 내가 얼마간은 계속 옆에서 봐주며 가르쳐 줄 것이니 염려 말게. 나중에는 저절로 암기하게 될 것이네." 그러나 사실 황보자안은 무학에는 백치와도 같았지만 문학의 방면에는 거의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서 기억력이 뛰어나 출진자가 아까 두 번째로 구결을 말했을 때 벌써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새롭게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리고 복잡하고 기억하기 어려운 형이나 동작들도 그에게는 비교적 쉽게 이 해되고 기억이 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다만 자신이 모든 것을 기억했다 고 말한다면 이 출진자가 자신에게 어떤 오만한 불쾌감을 느끼게 될까봐 잠 자코 여태까지 듣고만 있었다. 기실 출진자의 말대로 이러한 구결들은 기억 하는 것보다는 직접 몸으로 연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고 내일 아침부터 팔단금과 순양기공 의 수련에 들어가기로 하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출진자는 황보자안의 손을 잡고 신형을 위쪽으로 뽑아 올렸다. 마치 깎아지른 듯한 절봉의 암벽을 밟고 한꺼번에 십 장 혹은 이십 여 장씩 마치 비조처럼 출진자는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은 눈앞에 강한 바람의 기운과 어두운 검은 암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사이에 자신의 몸이 마치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 다. 맹렬한 옷자락이 스치는 파공성이 울리는 가운데 불과 일각이 지나지 않아 서 황보자안은 이미 자신의 몸이 절봉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동굴의 앞에 내려서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바로 황보자안이 하루종일 노력해도 다 내려가지 못한 절봉의 위를 이 출진자는 너무도 간단하게 그를 안고도 오른 것이었다. "그럼 쉬도록 하게. 나는 내일 아침에나 다시 오겠네." 황보자안의 손을 놓자 출진자는 다시 절봉의 아래쪽으로 마치 비조처럼 신 형을 날려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동굴의 주변은 간간이 스쳐 지나 가는 산바람의 소리만이 들려올 뿐 아주 조용한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출진자가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혼자서 중얼 거렸다. "저와 같은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정말로 한 번 전심으로 무공을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부인 옥허산인은 자신의 거처에서 일찌감치 쉬고 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가서 감히 사부의 거처로 다가가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절을 하면서 말했다. "사부님, 제자 황보자안입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다소 침울한 듯한 옥허산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안이냐? 그래, 오늘 수련은 힘들지 않았느냐?" 황보자안은 사부의 음성이 오늘따라 갑자기 힘이 없게 느껴진다고 생각했 다. "다소 힘은 들었지만, 무공이 재미있어서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옥허산인은 천천히 대꾸했다. "그래? 다행이로구나." 황보자안은 자부의 음성에서 어떤 깊은 실망감과 절망감이 느껴지는 것을 느끼며 의아해하여 거기에 관해 질문을 던지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사부는 오늘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모양이었다. 옥허산 인은 나이가 매우 많아서 거의 백세에 가까우니 당연히 그가 시도하는 것은 일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었다. 옥허산인은 이어 말했다. "됐다. 그만 가서 쉬도록 하고, 앞으로는 일부러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릴 필요가 없느니라." 그 어조에는 왠지 모르게 어떤 강한 결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 한 추측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황보자안으로서는 섣불리 사부에게 뭐라고 질문할 수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무림인들은 일반적으로 한 번 폐관에 들게 되면 밖에서 누구라도 그를 방해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침실 로 들어가서 등잔불을 밝혔다. 근래 들어 만년동자삼을 복용한 탓인지 피로가 쌓이더라도 쉽게 풀리고 그 다지 심한 허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황보자안은 아침에 먹고 남아 있는 밥 을 몇 덩어리 반찬과 함께 서둘러 씹어서 삼키고는 물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낮에 너무나도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금방이라 도 쓰러져서 코를 골 것 같았는데, 막상 침상 위에 눕자 갈수록 정신이 맑 아지고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제1권 끝> --계속-- 번호:101/102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2 02:57 길이:383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8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8장. 공포(恐怖)의 암벽(岩壁) 오직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얼마 전에 출진자가 가르쳐 주었던 팔단금 과 순양기공의 구결과 동작들이었다. 황보자안은 무려 일각이 넘도록 잠을 청하려고 애를 쓰다가 이윽고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서 우선 팔단금의 구결에 따라서 몸을 움직여 보기 시작했 다. 그의 두뇌는 매우 총명해서 이미 팔단금의 그 복잡하고 어려운 동작들 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과연 생각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직접 몸으로 전개한다는 것은 많 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개가 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연기의 한 과정 인 마보참춘(馬步站椿)이라는 것만 해도 그 구결이나 동작은 그다지 어려울 것 없이 간단하지만, 기마 자세를 취하고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는 것이라서 실로 어렵고 힘들기 그지없었다. 팔단금의 모든 동작들은 대개가 그러한 동 작들을 연결해 가는 과정에서 정신을 모으고 고통을 참으며 마음의 눈으로 단전(丹田)을 응시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토납술을 병행하는 가운데 기식은 길고 가늘며 면면히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니 이 복잡하고 어려운 내 용들을 한꺼번에 수행한다는 자체가 어렵기 짝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적게 아는 사람은 차례차례 부담없이 수행해 나가는 법이겠지만 황보자안은 많은 내용을 이해한 후였기 때문에 욕심이 앞서서 여러 번이나 심한 고통과 곤욕을 치뤄야 했다. 이미 무공 수련에 몰두한 상황이기 때문 에 그는 어제의 암벽을 타는 일만큼이나 밤새도록 심한 고생을 하고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느라고 마치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 기도 했다. 그러나 새벽녘에 지쳐서 거의 쓰러지게 되었을 때 문득 체념을 하고 욕심을 버리게 되어 다만 한 가지 하나의 구결에 맞춰서 움직이게 되자 매듭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원래가 이러한 기초 무공뿐만 아니라 모든 상승 무예들도 마찬가지로 어떤 무리한 욕심도 버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너무나도 지쳐서 거의 포기한 상태로 무욕의 담담한 경지에서 팔단금의 수련을 하게 되자 우 연히도 그 이치가 맞아떨어져서 수련의 매듭이 풀려가고 하나씩 구결에 적 용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황보자안은 이미 심하게 지쳐서 곤드라져서 다음날 아침의 수 련에 나갈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하나씩 적용된 팔단금의 동작들을 순서대로 시행하다 보니 돌연 단전 부위에서 한 줄기의 따뜻한 기 운이 일더니 서서히 사방으로 퍼져나가서 금새 피로를 씻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스스로도 다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한 줄기의 따뜻한 기운은 바로 무공을 연성하므로 인해 서 발생하기 시작한 양기(陽氣)라는 것이었다. 이 양기느 다른 말로 진기라 고도 하는데, 천하의 인재들 가운데 무공을 배우자마자 이렇게 빨리 양기를 발생시키고 그것의 효능을 얻는 사람은 아마도 이 황보자안밖에 없을 것이 었다. 다름이 아니라 황보자안은 이미 천하의 희세 영약인 만년동자삼을 복 용했기 때문에 그 약력이 그의 체내에 굳어져 있다가 그가 팔단금법이라는 수련을 시작하자 마음과 기운이 하나가 되어 마침내 양기가 발생하기 시작 한 것이었다. 실로 그와 같은 상태의 사람일 경우에는 처음에 양기를 발생시키는 일이 어 렵지만 뒤이어 양기를 증가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은 법이었다. 다만 여기에 서 욕심을 부리고 마음이 흐트러지게 된다면 급격하게 증가되는 양기의 흐 름이 불순해져서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았다. 다만 이 황보자안은 이미 심하게 고통을 겪고 팔단금 가운데의 심오한 마음 의 비밀을 깨달은 데다가 총명하여 두 번 다시 어리석은 길을 밟지 않았다. 황보자안은 이미 팔단금의 중요한 이치를 깨우친 뒤여서 그 뒤에도 결코 마 음을 늦추지 않고 무욕의 경지 속에서 계속해서 팔단금의 다른 동작들을 시 행해 나갔다. 자연히 갈수록 체내의 양기가 격발되어 그의 단전 ㅜ위에는 금새 따뜻한 기 운이 마치 들끓는 것처럼 모여들기 시작했고, 따라서 자연히 그의 몸의 피 로감도 점차로 덜해져 갔다. 이것은 아주 좋은 조짐이었다. 심신의 피로가 줄어들수록 연공하는 것도 더 욱 미세하고 깊어져 갔으며, 그럴수록 더욱 결과가 좋았다. 황보자안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팔단금의 수련을 계속해서 거듭했다. 그 리고 나서 나중에는 단전에 모인 뜨거운 양기의 기운이 전신으로 번져서 오 히려 마음의 혼란이 생길 때까지 황보자안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미 양기를 성취하여 이렇게 단전에 가득차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서 전신이 뜨거워져서 의식까지 희미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순양기공 을 연마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보다 확실한 방법은 사형이자 사부격인 출진자에게 이 모든 현상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고 바른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 출진자는 그에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기는 해도 정 작 깊이 마음을 써주지 않고, 왠지 다소 꺼려하고 경계하는 것 같았다. 따 라서 이번의 이러한 현상들을 급히 사실대로 말해 준다면 그는 이내 그러한 현상을 불신하고 장차 그마저 불신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출진자는 분명히 그의 사형이기 때문 에 굳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 일일이 보고할 의무는 없었다. (원래 팔단금을 먼저 수련하는 이유는 아직 양기가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공을 수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양기 가 발생하여 전신이 혼미한 지경이니 즉시 순양기공을 연마하는 것이 좋겠 다.) 황보자안은 생각을 마치자 이어 즉시 순양기공의 수련에 들어가기 시작했 다. 원래 이 순양기공은 동작의 까다로움은 적고 난해한 구결의 내용을 정확하 게 해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미 대부분의 구결의 내용을 이해한 황 보자안아게는 별로 장애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거의 대다수의 무공들 이 마음의 처리를 강조하는 만큼 이미 팔단금의 수련에서 무욕의 경지를 깨 우친 황보자안이 그대로 순양기공에서도 맑고 담담한 마음으로 서서히 자연 스럽게 기공을 운용하자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쉽사리 분산되 었던 양기가 강하게 응집되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원래 다른 내공심법이나 무공 수법들은 이와 같지 않아서 십이정경(十二正 經)의 경맥의 흐름을 이용하거나 기경팔맥(奇經八脈) 중의 다른 어느 한 경 맥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유독 이 순양기공은 우선 기경팔맥 가운데에서도 먼저 임독양맥(任督兩脈)으로 진기를 순환시키도록 되어 있었 다. 그러니까 몸의 뒷면 등줄기를 따라서 올라가는 독맥(督脈)으로 돌려서 몸의 전면 가슴 부위를 곧바로 내려오는 임맥(任脈)을 지나 단전으로 다시 진기를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기실 이렇게 처음으로 양기를 경맥으로 순환시키는 일은 어렵고도 어려운 노릇이어서 일반적으로 많은 장애에 부딪치게 되어 있었다. 사람이 갓 태어 나서 영아의 몸일 때에는 이 기경팔맥은 서로 통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후 세속의 탁기를 받아들임에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기경팔맥은 그 경혈이 막 혀 버리게 되어 있는데, 특히 황보자안처럼 골격이 굳어진 뒤에는 그런 경 혈을 통하게 하기가 더욱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이미 체내에 축적된 양기가 비상하게 많고 강렬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수습이 훌륭해서 그러한 난관들을 하나하나 쉽게 돌파하여 구결에 적혀 있는 그대로 독맥에서 뜨거워진 양기가 백회혈(百會穴)의 이환 궁(泥丸宮)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임맥으로 흐르면서 서늘한 기운으로 바 뀌어서 단전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때의 기운은 처음과는 달리 아주 끈질기고 부드럽게 응축되어 있었는데, 실로 이것이야말로 양기와는 같은 기운이지만 다소 성질이 달라진 진기(眞 氣)라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렇게 한 차례의 소주천(小周天)을 완성함으로써 드디어 체내 에 진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이었다. 실로 이렇게 빠른 내공의 기 초를 이룬 일은 결코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한 차례의 소주천을 성공하자 구결에 있는 그대로 이어 계속해 서 신중하게 체내의 진기를 같은 경맥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신기 하게도 그럴수록 그의 심신은 갈수록 쾌적하고 즐거워지고 어젯밤의 그 심 했던 피로감도 마치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진기라는 것이 이토록 희안한 능력을 가지고 있은 것을 알게 되 자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기꺼운 마음에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만일 날이 밝아져서 출진자가 다시 나타날 시각이 되지 않았다면 황보자안은 쉽 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젯밤에 익힌 것을 복습할 겸해서 팔단금의 수련을 하 고 있으려니, 과연 출진자가 거의 기척도 없이 그의 등뒤에 나타났다. 황보 자안은 마침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향해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토납 법을 수련하고 있었는데,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출진자가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마음이 들떠 있군.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토납공을 수련하다가는 자네는 오히려 그것을 수련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게 될 것이네." 자칫하면 기혈이 엉켜서 주화입마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그러한 내용은 분명히 그가 가르쳐 준 구결 가운데에 있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순간 내심으로 크게 흠칫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이룬 성취에 다소 자만하고 들떠서 마음이 어수선해져 있는 것 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출진자의 그 말은 마치 예리한 화살과도 같아서 즉시 그의 가슴에 꽂혔고, 심한 고통과 함께 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냉각 시켜 놓았다. 황보자안은 즉시 토납공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서 그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사형, 지금 오십니까?" 출진자는 안면에 다소 기이한 웃음을 간간이 떠올리며 바라보는 듯하더니 이윽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팔단금이나 순양기공과 같은 것들은 무슨 커다란 깨우 침을 요하는 것이 아니어서 직접 몸으로 익히고 익숙하게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네. 그것들은 일시적으로 빨리 익히고자 한다면 도리어 장애에 부딪치 게 되어 있는 것이니 너무 마음으로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네. 자, 그 수 련은 다시 다음에 보기로 하고 이미 식사를 마쳤다면 다음의 수련으로 넘어 가도록 할까?" 황보자안은 즉시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어서 순양기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 고 곧장 묵묵히 출진자의 뒤를 따라갔다. 출진자가 말한 다음의 수련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제낮에 했던 그 지옥과도 같은 암벽을 타는 훈련이었다. 어제와 같은 길의 입구에서 출진자는 문득 다시 물었다. "우리와 같은 무림인들은 간혹 처음부터 무공을 빨리 연성하기 위해 까다롭 고 어려운 훈련은 피하고 곧바로 내공의 관문으로 접어들곤 하는 병폐가 있 지. 그러나 역시 건강한 육체에 강한 내력이 깃드는 것으로, 사실 육신을 단련하는 일은 중요한 효과를 낳는 것이네." "……!" "자네가 수련하고 있는 순양기공과는 달리 이 암벽을 타는 훈련은 육신을 강인하게 만들고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니,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데 훌륭 한 기초가 되는 것이네." 황보자안은 은근히 안색이 붉어졌다. 알고 보니 이 출진자는 이미 자신이 팔단금의 과정을 익숙하게 연성하고 순양기공의 수련으로 접어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담담하게 웃는 출진자의 표정에는 흡사 황보자안의 폐부 라도 꿰뚫을 듯한 신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출발하도록 하게." "예." 황보자안은 대답과 함께 정신을 가다듬고 어제와 같은 길로 천천히 아래로 암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과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어제 무리하게 근육을 움직였던 부분이 크게 시큰거리면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비록 순양기공을 수련하여 기운은 보다 왕성해졌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육신의 고통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어서, 황보자안은 갈수록 전신의 고통이 가중되어 손이 떨리고 금방이 라도 미끄러져서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으며, 식은땀이 흐르고 심한 공포감 과 함께 자신이 마치 지옥의 검림도산(劍林刀山) 속에 들어 있는 듯한 착각 을 느꼈다. 어제는 비록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으므로 몰랐으나 지금은 이러한 암벽을 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말로 표현할 수 도 없었다. 다만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출진자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 생각하여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하여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고, 그러자 나중에는 점차 전신의 고통이 가중되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공포심은 그럴수록 커져만 갔고, 마치 지옥 속을 헤매는 듯한 상태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제보다는 조금 발전했군." 출진자가 다가와서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자신이 이미 암벽의 삼분지이 이상이나 내려온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실로 하루만의 장족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도 힘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미처 그러한 감격과 기쁨에 젖 어 있을 수도 없었고, 잠시 혼절한 듯이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때 출진자가 번쩍 신형을 날려 그의 허리를 잡더니 어제와 같이 비조처럼 아래로 데려다 주었다. "고맙습니다, 사형!" 황보자안은 절로 그에게 포권의 인사를 한 다음에 계류의 물에 엎드려 몇 모금의 물을 마시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정신 몽롱해져 있었는데, 점차로 의식이 명료해지고 눈앞의 사물 이 뚜렷하게 보임에 따라서 황보자안은 출진자가 만면에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문득 황보자안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제가…… 제가 너무 우둔하지요?" 출진자는 기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처음에는 다 이렇게 고생을 하는 법인데, 자네는 제법 진전이 빠 른 편이지." "……" 황보자안이 멍하니 바라보자 출진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스스로 심신을 수련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만, 미리 말하건대 그것 은 자신이 심한 고통을 참아내지 않고는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명 심하게. 물론 나는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언제라도 자네가 그만두기를 원 한다면 보다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지." 황보자안은 다소 안색이 붉어졌다. 이 출진자는 자신이 훈련이 너무 고통스 럽기 때문에 도중에서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미 일침을 박아 놓 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다음에야 황보자안은 도저히 자존심 때문에 라도 그에게 훈련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출진자가 다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 훈련은 자네에게는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는 가?" 황보자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암벽을 내려오다가 힘이 든다면 잠시 쉬면 되는 것이고, 또한 탈진되면 그 가 나를 내려다 줄 것이니, 하루에 이런 고통을 한 번 당하는 것은 제법 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평생을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라면……) 그런 저런 생각으로 시간이 얼마쯤이나 흘러갔다. 황보자안은 묵묵히 휴식 을 취하는 중에 전신에 기력이 다시 생기자 땀에 젖은 부분이 서늘하게 느 껴지고 정신이 새롭게 맑아짐을 느꼈다. 그때 옆에서 묵묵히 그의 동태를 바라보고 있던 출진자가 문득 한 가지 물 건을 던져주며 입을 열었다. "자, 그것으로 물을 채우도록 하게." (……?) 황보자안은 의아해하여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하나의 물을 담는 가죽부 대라는 것을 알고는 집어들며 출진자에게 물었다. "이것을 저에게 주는 것입니까?" 출진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앞으로는 자네가 직접 물을 떠서 나르고 그것으로 식사를 해야 할 것이네. 석실 안에는 가죽부대가 좀더 있을 것이니, 가능하다면 나중에는 좀더 많이 가지고 내려오도록 하게." 황보자안은 내심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내가 이것으로 물을 담는다면 아무리 내가 몸에 두른다고 해도 그것은 역 시 당신이 나와 함께 옮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려면 나더러 이것을 짊 어지고 위로 오르라고는 하지 않겠지.) "예, 사형." 황보자안은 즉시 대답하고는 가죽부대에 계류의 맑은 물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가죽부대를 허리에 짊어지고 나자 황보자안은 출진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출진자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수련할 내용은 어제 가르쳐 주었으니 당분간은 가르칠 것이 없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바로 위로 올라가도록 하세." "예, 사형." 황보자안은 대다을 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주위는 짙은 황혼이 물들어서 황색의 노을이 가득차 있는 것이 다소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당연히 출진자가 자신을 위로 올려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가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문 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흠칫 놀라서 물었다. "사형, 사형은 혹시 저더러 혼자서 이 암벽을 오르라는 말입니까?" 출진자는 태연하게 미소하더니 대답했다. "물론이네. 자네는 그럼 내가 항상 자네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내 가 어제 자네를 올려다 주었던 것은 당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서 그랬었던 것일 뿐이네." 황보자안은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이는 절봉을 바라보며 일시 어이가 없었다. 아까 다만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지옥 속을 헤매는 것 같았는 데, 이제 다시 저 위로 올라가라는 말인가? "하, 하지만 저곳은 너무 높아서……" 황보자안이 다소 반발하자 출진자는 문득 안색이 싸늘해져서 냉랭한 음성으 로 말했다. "그럼 결국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사형으로서도 할말이 없네." 이에 황보자안은 절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다가 그의 지시에 응낙을 하고 말았다. "아닙니다. 제가…… 제가 혼자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출진자는 즉시 안면을 바꾸더니 기이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황보자안은 그의 태도를 보고 혹시 그가 잠시 장난을 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사형이 하시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출진자는 다시 냉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좋네.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니, 나는 자네가 필시 모든 고통을 이기고 무사 히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네. 자, 어서 시작하도록 하게." "……?" 황보자안은 일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일시 자신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출진자의 말대로 자신이 혼자서 올라가겠다고 말을 했 으니 이것은 이제부터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일시 감정으로 너무나도 엄청난 말을 했고, 또한 혹독한 벼랑가에 몰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절로 어이가 없고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저 출진자는 매우 냉정한 사람이어서 이 한 번 의 말을 번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비록 내려올 때에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실 누군가가 말했 던 것처럼 올라가는 것은 보다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황보자안은 출진자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만일 자신이 지금이라도 혼 자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는 주저없이 그를 위에 올려다 줄 것이다. 하지만 기왕에 고생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 통에 못이겨서 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황보자안은 입술을 깨물고 암벽의 앞에 섰다. 그리고 피곤하고 무거운 양팔과 두 다리에 힘을 주어서 서서히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까는 주변의 분위기가 황혼의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어서 장엄하다고까지 생각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잔혹한 피빛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었다. 황보자안은 다소 올라가는 것이 내려오는 것보다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시 작했으나 그러한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서 깨어지고 말았다. 정작 어느 정 도 시작을 해보니 올라가는 것은 비단 내려오는 것보다 쉽지 않을 뿐만 아 니라 오히려 더욱 어려운 것 같았다. 사지에 힘을 주어서 올라가다 보니 잠시 쉬면서 가라앉았던 전신 근육의 고 통이 다시금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려올 때는 미리 작심을 하고 공포감 을 이겼었으나 점차 올라갈수록 아래쪽을 의식하게 되어서 절로 심장이 벌 벌 떨리는 것 같았다. 금새 전신에는 식은땀이 오싹하게 흘렀고, 맥이 풀리며 사지가 떨려서 발을 옮기다가 일순 실수를 하여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 고 이를 악물며 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한의 인내력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일 황보자안의 자존심이 상당히 높지 않고, 또한 그의 인내력이 보기보다 매우 강한 것이 아니었다면, 불과 얼마 가지 않아서 황보자안은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옥같은 고통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한 발자국씩 위로 오르기 시작 하자 점차로 절봉의 동굴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야마롤 이는 죽음에 도전하는 인간 한계의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일시 고통스러운 느낌도 멎어버린 것 같았고, 제법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황혼이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들어서 황보자안은 자신의 강한 의지력도 중요하지만 앞을 보기가 곤란하여 손으로 더듬으며 아슬아슬 하게 올라가야 했다. 이것은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그에게 심각한 장애로 작 용하여 강한 공포심과 함께 그의 의지력을 벼랑쪽으로 밀어놓는 기분이었 다. 다행히 두 번이나 내려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을 크게 혼동하지 는 않았으나, 황보자안은 갈수록 전신이 벌벌 떨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 다. 하지만 그는 필시 옆에서 출진자가 바라보고 있고, 만일 자신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면 반드시 그가 구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가운데 대체 얼마나 올라간 것일까? 황보자안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사지의 힘이 점차로 빠져나가고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서 이제는 도저히 출 진자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신형을 멈추고 그의 도움을 기다리려다가 문득 그는 생각했다. (그는 지금 나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아까 절봉의 아래에서 바라보았던 출진자의 냉소어린 시선을 생각하자 황보 자안은 문득 도저히 그런 시선은 받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 서 마치 원한을 생각하듯이 커다란 분노감을 의식하며 황보자안은 다시 전 신에 안간힘을 다 쏟으며 멈추지 않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멈춰서는 안된다! 그에게 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태는 아마도 지금이 깜깜한 밤이고, 또한 그가 여태까지 강하게 의지력을 시험받아왔기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오 직 자신이 의식적으로 출진자의 냉소어린 도움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한 마 음으로 생각하고는 그야말로 죽어서 쓰러질 때까지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 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로 하여금 다시 얼마 동안의 암벽을 올라가는 힘을 주었 다. 황보자안의 자존심은 기실 아주 강한 것이었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의 지력 또한 극강하여 그러한 정신력으로 마치 꿈을 꾸듯이 그는 올라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더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점차 흐려지는 의식을 다시 강하게 불러일으키며 고개를 흔들어 눈을 크게 뜨다가 문득 눈을 휘둥그래 뜨고 흠칫 놀랐다. 그의 바로 위쪽에 는 깎아지른 암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편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 고 보니 그곳은 바로 그의 목적지인 동굴 앞의 공지가 아닌가! 황보자안은 일순 몇 번이나 자신의 눈을 의심하다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절로 마음에 강한 희열을 느꼈다. (나는 드디어 혼자서 위로 올라왔다!) 마음속으로 강하게 부르짖음과 동시에 황보자안은 즉시 사지를 움직여서 공 지 위에 올라가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황보자안은 일순 느닷없이 사지에 맥이 빠지고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즉시 아래로 거칠게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경악했다. (아……!) 출진자는 예상대로 여태까지 황보자안의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아 래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에 즉시 받아서 안전하게 공지 위에 올려놓았다. "수고했네." 출진자는 황보자안을 공지 위에 내려놓으며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칭찬의 말을 듣는 황보자안은 내심 미칠 듯이 분노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기이하게 웃고 있는 출진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감을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향 한 것이었다. (나는 조금 전에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자만에 빠지고 기쁨 에 젖어 있던 나머지 방심하여 기를 흐트러뜨렸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충분히 내 힘으로 여기에 올라왔었을 것인데, 이제 이렇게 그의 힘으 로 올라왔으니 내가 여태까지 한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황보자안은 심한 자괴의 마음이 일어서 안색이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창백하 게 변했다. 그의 전신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출진자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자네의 이번의 암벽 타기는 상당한 발전이 있는 것이네. 수고했으니 그만 식사를 하고 일찍 쉬도록 하게." 출진자의 그러한 말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으나, 황보자 안은 그의 냉소하는 듯한 표정을 보자 도리어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들었 다. 이어 출진자가 비조와 같은 신법으로 사라져 가자 황보자안은 몸을 돌려서 탈진한 사지를 이끌고 석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마음은 자괴감에 터져나갈 것 같았다. --계속-- 번호:102/102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2 02:58 길이:29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9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9장. 실수(失手) 황보자안은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부에게 문안인사를 올릴까 하다가, 문득 어제밤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고, 또한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 기 때문에 그냥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는 조용히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자 극심한 전신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자괴감을 누를 길이 없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내 팔단금과 순양기공의 수련을 하 기 시작했다. 심한 마음의 격동으로 처음에는 팔단금의 수련과 순양기공의 운용이 잘 되지 않았으나 거듭할수록 고통에 의해서 정신이 깨어나서 맑아 지고 원래의 평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비록 어제보다도 더욱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보다 일찍이 맑은 정신으 로 두 가지의 수련에 임하게 되자 황보자안은 생각보다 빠르게 피로감이 사 리지고 점차로 전신에 새롭게 기운이 넘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었다. 어제밤에는 새벽녘에야 비로소 순양기공의 수련을 시작할 수가 있었지만 오 늘은 일찌감치 두 가지를 익숙하게 수련했기 때문에 전신의 진기는 갈수록 왕성해지고 새벽녘이 되었을 때에는 극심하던 피로감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강인한 활력이 온몸을 휘돌고 있었다. 실로 이러한 진전은 연거푸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체내에 신비로운 만년동 자삼의 약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진기가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인 것이었다. 그런 모든 점에서 황보자안은 확실히 행운아라 고 말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팔단금의 도인술을 보다 세밀하고 정확하게 반복해서 수련하는 데 역점을 두었지만, 새벽녘 이후에는 순양기공의 수련에 보다 역 점을 두었다. 어제는 기쁨에 들떠서 몰랐지만 출진자의 냉소어린 지적을 들은 이후에는 마음이 서늘해져서 보다 냉정하게 순양기공을 수련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 황보자안은 그 구결의 보다 심오하고 세밀한 부분에까지 파고들어가서 하나 씩 그 깊은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하여 너무나도 열중한 나머지 무아지경 에 빠져 버렸다. 이것은 스스로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따라서 순양기공의 깊은 의 미를 하나하나 파헤져 나가다가 몸과 마음이 지극히 쾌적해지고 한 번 여유 있는 숨을 내쉴 수가 있게 되었을 때, 문득 황보자안은 자신이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실의 밖에서 이미 훤한 햇살이 밀려들고 있었 고, 아침해가 이미 거의 중천에 떠오른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출진자가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치 늦잠을 자다난 사람처럼 절로 얼굴색이 붉어져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 갔다. 황보자안은 급히 공지로 뛰어나가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소 의아해하며 고 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대로 이미 하늘의 해는 동쪽의 산허리를 벗어나서 중 천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벌써 나타났어야 할 출진자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혹시 그가 다른 석실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그 쪽으로 신형을 돌리려다가 문득 자신이 어제 정좌하고 앉아서 토납공을 수 련하던 평평한 자리 위에 하나의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두루마리를 들고 그 안의 내용을 읽어보니 과연 그것은 출진자의 서찰이었 다. 이것은 어제밤에도 분명히 없었는데 지금 여기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 명히 출진자가 이미 이곳을 다녀갔다는 증거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 었다. <오늘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이렇게 총총히 서찰만을 남기고 돌아가 네. 내일부터는 다시 수련을 하게 될 것이니, 수련 일정에 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도록 하게. 자네는 사실 어제밤에 너무 무리를 했으니. 사실 이러한 암벽타기는 대단한 담력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 서 자네와 같은 문약한 서생에게는 무리한 일이었지. 앞으로는 무리하지 말 고 적당히 수련에 임하도록 하게. 그리고 오늘은 푹 쉬도록 하고. 자네 혼 자서 암벽을 오르내린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니까 말이네. 자네의 둘째 사형이.> 서찰을 다 읽고 나자 황보자안은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확실히 이 무예를 익히는 일은 그야말로 험난하고 어려운 것이다. 나는 설 마 이러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지. 집에서 수련을 했었더라면 결코 이러한 수련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나라고 해서 결코 못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황보자안에게는 서찰의 내용 가운데에서도 문약한 서생에게는 무리라는 대 목이 마치 예리한 비수로 목줄기를 도려내는 것 같은 거부감을 주고 있었 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이미 팔단금과 순양기공의 기초를 완성하여 문약한 서생의 틀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출진자의 문약한 서생 운 운이나 어제밤에는 너무 무리를 했으니 오늘은 충분히 쉬라는 등의 얘기는 마치 그가 눈앞에서 냉소를 짓고 자신을 넘겨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어제밤의 어처구니가 없는 마지막의 실수에 대해서 심한 자 괴감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서찰의 내용은 그에게 일시적인 격분 이상의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황보자안은 서찰의 마지막 부분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다가 다시 생각했 다. (그는 어제밤의 나의 행동이 무리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기실 나는 어제밤에 조금만 더 신중하게 움직였었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위에 올라올 수가 있었 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꾸어 말한다면 내려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 한 나 혼자서 내려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는데, 실은 이러한 위험을 극복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수련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실로 황당하고 무모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평소에 차분하 고 조리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가 이 순간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지난 몇 달간의 여행 속에서 은근히 적성자의 무시를 받아왔었을 뿐 만 아니라 이곳에서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강력한 반발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적된 불만감의 강렬한 표출이며, 어제밤 의 극심한 자괴감에 대한 충동적인 반발심이었다. 황보자안은 양피지를 잘 접어서 품속에 갈무리하며 다시 한 번 까마득한 아 래쪽의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내려가는 도중에 의외의 변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고 무리를 하지 않으며, 간혹 쉬면서 순양기공을 운기한다면 무사히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만일 오늘 이 일을 성공한다면 사형이 다시는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아니겠는가?) 황보자안은 일시 목이 타고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이고, 또한 이런 한 번의 모험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우 선 신중하게 공지에서 순양기공을 운기하여 기식을 가다듬은 다음에 강하게 마음을 먹고 혼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장이나 아래로 내려갔을까, 황보자안은 일순 손끝에서 흘러내리는 땀으 로 인해서 튀어나온 돌조각을 움켜쥔 자신의 손이 조금씩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이미 그의 심장은 벌써 목 구멍에 올라와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벌럭거리고 있었다. --공포(恐怖). 황보자안은 어제도 그제도 이 암벽을 내려가면서 심한 공포 감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이 암벽을 내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필시 이번에는 다소의 공포감이 더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하니 이 정도의 공포감이 자신을 짓누를지는 미처 상상도 못한 상태였다. 아니 세상에 태어나서 이 정도의 엄청난 공포감을 스스로 느끼게 될 줄은 정말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황보자안은 스스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바로 그 대답이라고 한순간에도 쉴새없이 인정하고 있 었다. 어제와 그제 암벽을 내려가면서 어느 정도의 공포감을 느꼈었으나 그 것은 다만 형식적인 것이요, 겨우 맛만을 본 것이었다는 것을 황보자안은 실감했다. 출진자는 지금 주위에 없고, 만일 자신이 지금 조금이라도 실수 를 하여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몸뚱이가 돌바닥에 까마득한 높이에서 내동댕이쳐져서 흔적도 없이 짓뭉개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황보자안은 전신에서 식은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있건만 마치 전신이 한 꺼번에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도저히 아래쪽을 내려다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비록 간신히 이를 악물로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하고 있었다. 대체 어제와 그제의 공포감을 누르며 아래로 내려갔던 그 러한 힘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의 손에 힘이 빠지고 무의식적으로 실족할 위기에 몰리자 순간적으로 위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다행히 그가 내려온 거리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돌이킨다면 무난히 되돌아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실로 이 순간에는 출진자의 조소라든가 자괴감 등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있 었고, 어서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밖에 없었다. 깊이 생각하고 말고가 없었다. 일단 마음을 결정한 순간 황보자안은 최대한 의 남은 기운과 용기를 끌어안고 공포를 가능한한 억누르면서 조금씩 위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손가락에서 피가 흐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 그가 지난 밤에 올라올 때와는 달리 전신과 팔다리에 있는 대로 강한 힘을 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떨리는 심신을 가누면서 황보자안은 한발 한발 신중을 다해서 움직였고, 양 손아귀는 그야말로 잡은 돌조차 부서져라 하고 움켜잡았다. 점차 위로 올라갈수록 황보자안은 점차로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공 포감은 여전하지만 이런 식으로 올라간다면 실수가 없을 것이고, 마침내는 공지에 되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때였다. 갑자기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어야 할 몸뚱이가 암벽에서 벗어나면서 그대로 귀를 찢는 파공음이 엄습하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며, 공포와 경악 속에서 눈을 있는 대로 부릅떴다. 무서운 상황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있는 대로 부 릅떴건만 너무나도 빨리 스쳐지나는 암벽의 바위들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몸은 균형을 잡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나락으로 무너져 내리 고 있는 중이었다. 아득해지는 의식의 끈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황보자안은 급히 생각했다. (이것…… 이것은 내가 잠시 다시 방일하여 너무나도 약한 바위조각을 잡았 기 때문에 그것이 부러져서 균형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 황보자안은 스스로는 최대한으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긴장 한 나머지 약한 바위조각을 잡았고, 그것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몸의 균형 을 잃어서 다른 손에 잡았던 바위조각마저 순간적으로 놓게 되었기 때문에 그 뒤는 당연한 상황이었다. 실로 꿈같은 일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끔찍하게 떨어져서 죽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황보자안은 전신이 갑자기 있는 대로 크게 곤두서 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에 한쪽 허리와 어깨 부위에 거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이 암벽 은 완전한 직각이 아니라 다소의 경사가 있기 때문에 그의 몸이 암벽에 한 차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이에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황보자안은 생각했다. (바위를 잡아야 한다! 잡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그 순간에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극도로 곤두선 의식과 함께 오직 살아야 하겠다는 절박한 욕구밖에는 없어서 설사 죽음마저도 생 각나지 않았다. 쾅! 두 번째로 뒤이어 그의 몸이 암벽에 거칠게 부딪쳤건만 생각대로 손으로 바 위를 잡는다는 것은 어려웠고, 몸의 균형조차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황보자안은 다시 한 번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한 극 도의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이 통증은 금사배심이라는 보의 (寶衣)를 입었기 때문에 덜하다는 사실과, 이어 자신의 품속에 한 자루의 보도(寶刀)가 있다는 사실에 급속히 생각이 미쳤다. 황보자안은 생각했다. (혹시 보도를 가지고 바위를 찌른다면 몸을 멈춰 세울 수가 있지 않을까?) 아마 평소라면 아무리 신병이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바위를 찌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미처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급히 품속을 뒤져서 칠성보도(七星步道)를 꺼낸 다음에 눈을 크 게 뜨고 암벽을 직시했다. 마침 시커먼 암벽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 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그야말로 젖먹던 힘을 다해서 보도의 자루를 두 손으 로 잡고 암벽을 힘껏 찔렀다. 그런데 순간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보도가 뜻밖에도 암벽의 오목하 게 들어간 부분을 찌르는 순간 거기에 걸려서 황보자안의 몸이 한 차례 허 공으로 튕겨지더니 뭐라고 생각할 여유도 없이 뒤이어 그의 몸이 머리는 아 래로 몸뚱이는 위로 향하면서 그대로 암벽을 향해 들이받아가는 것이 아닌 가! 황보자안은 이미 보도를 찌르고 몸이 그 힘으로 튕겨지는 순간 양 손아귀와 손목, 그리고 어깨에 흡사 한꺼번에 부서져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 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시 한 번 그러한 고통이 강렬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도를 잡은 손을 놓지 않 았다. 아니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기이하게도 그때 황보자안의 몸은 허공에 고정되어 마치 기적처럼 우뚝 멈 춰서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극적으로 몸이 암벽에 고정되게 된 것을 알고 일시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두 손으로 결사적으로 잡고 있는 칠성보도는 지금 마치 거짓말처럼 암벽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 있 었고 자신의 몸은 그 바람에 허공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 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쉽게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잠시 후에야 황보자안은 한 순간에 모든 과정을 스스로 생각해 보고 알게 되었다. 원래 황보자안은 처음에 암벽을 찔렀지만 너무나도 급하게 손을 쓴 나머지 미처 보도를 도집에서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암벽을 찔렀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그의 실수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으 그러한 실수가 도리어 그의 목 숨을 살려놓는 결과가 될 줄이야! 기실 그가 보도를 이용해서 암벽에다 박고 추락하는 것을 멈춰세우겠다고 하는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보도가 순간적으로 암벽을 찌르고 박혀 든다고 하더라도 추락하는 힘이 작용하여 그것은 다시 아래로 미끄러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아무리 계속해서 보도를 암벽에 박는 다고 해도 그가 그것에 의지해서 몸을 멈춰세울 수 있는 확률은 그야말로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순간 미처 도집을 뽑아낸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으로 암벽 위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찌르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몸은 암벽을 베지 못한 도집 속의 보도의 탄력을 받아서 속도가 줄었고, 허공으 로 한 차례 회전하게 되었으며, 이때 공교롭게도 그의 머리가 암벽 쪽을 향 해 날아갔는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보도의 도집은 조금 전의 충격으로 인 해 이미 벗겨져 나간 상태였다. 그러니 밖에서 휘어들어오는 탄력에 의해서 보도를 쥐고 있던 그의 양손은 보도를 깊숙히 암벽 속에 박아넣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것은 천우신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공교로운 우연의 행운이 겹쳐지게 되어 이룩된 결과였다. 만일 그가 실수로 도집을 벗기지 않았고, 또한 그의 보도가 마침 오목한 부위를 찌르지 않았으며, 그가 극심한 통증 에도 보도를 놓치지 않아서 때마침 도집이 벗겨진 보도로 멋드러지게 회전 하며 암벽에 박아넣지 못했다면 결코 이렇게 그의 몸이 추락을 벗어나게 되 지 못했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일순간에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즉시 정신이 멍멍하고 아찔하며 심장이 벌컥벌컥 고동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알겠지만 다음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몽롱하고 정 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양 손아귀와 손목, 그리고 두 어깨가 끊어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황보자안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보도를 잡고 있는 양 손아귀는 크게 찢어져 있었고, 거기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내 리고 있었다. 그 고통은 상당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위쪽과 아래쪽을 번 갈아 바라보았을 때에 자신의 몸이 공교롭게도 절벽의 중간 부위에 위태롭 게 걸려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그 고통은 느낄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안색은 다시 창백하게 일그러졌고, 심장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 듯이 쾅쾅 소리내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역시 극심한 공포감이었 다. 이에 황보자안은 급히 손을 움직여 행동을 취하려다가 문득 절벽이 무너져 라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자안아, 자안아! 너는 지금 너무 생사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 비록 누구 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이렇게 너무나도 생사에 집착하는 것 은 결코 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만일 내가 조금 전에 보다 침착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행동했었더라면 이 와 같은 결과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황보자안은 내심 크게 후회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만 지금은 아주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전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고 한 번 생사를 초월하 여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사를 초월하게 되면 무엇에도 걸리 는 바가 없고 마음은 평온해져서 실로 지혜로워지는 것! 너는 그러한 이치 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에 옮길 수가 없다는 말인가?) 기실 황보자안은 알려지지 않은 대학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두뇌가 남달 리 총명하고 학문에 취미를 가져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가 배워온 학문 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것이었다. 그의 정신세계는 아주 거대하고 깊은 평온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 았다면 항상 그의 이제까지의 생활이 그렇게 원만하고 부드럽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헌데 요사이 들어서 심한 환경의 변화와 고난을 겪게 되자 그의 그러한 정 신세계가 다소 흔들리는 바가 있었으며, 지금은 거의 궁지에 몰려 있는 상 태였다. 따라서 아주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거 대한 정신세계에 최후의 희망을 걸어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원래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마음을 수습하고 생사를 초 월하는 심상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황보 자안은 집에 있었을 때에는 거의 매일같이 그러한 명상에 잠겨서 살아오다 시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극도로 절박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그러한 정신력으로 모든 육신의 욕망과 마음을 통제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격동했던 마음은 파도가 가라앉듯이 서서 히 가라앉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그의 눈빛은 다만 잔잔하게 떨리고 있을 뿐 대부분이 조용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실로 이것은 문약한 서생의 위대한 정신력의 승리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사람은 한 번 죽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설령 집착을 하더라도 이곳에서 죽게 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구태여 생사에 집착을 가질 것이 무엇이란 말 인가?) 황보자안은 아래쪽의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위쪽의 절벽을 마치 노려보듯이 무심하게 주시하면서 생각을 이었다. (이 육신이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면 이것은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이러한 허망한 것에 어찌 그리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무아(無我)에 안주하여 평온한 시선으로 세 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연거푸 생각하는 동안 그의 눈빛은 거의 완전하게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러한 평온함을 결코 쉽게 무너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수습하고 나자 황보자안은 이제는 지혈이 되어서 극심 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는 양 손아귀를 바라보다가 그 중 하나의 손을 풀어 서 근처의 튀어나온 바위조각을 잡았다. 이때 순간적으로 힘이 풀리면서 보 도를 잡은 한쪽 손이 늘어지고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이미 그는 매우 침 착하게 변모하여 끝내 하나의 바위조각을 움켜잡고 두 발과 몸을 암벽 위에 고정시킬 수가 있었다. 바위를 세차게 잡느라고 찢어진 손아귀에서 다시 피 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마치 그러한 고통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이 절벽면은 경사도가 직각에 가까워서 그가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아 니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한 손의 보도를 가끔씩 암벽 위에 박아가며 서 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올 수가 있었다. --계속-- 번호:103/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4 길이:275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0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0장. 용기구결(用氣口訣) 황보자안이 아래로 내려가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무사히 아래로 내려갈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들 림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목적하던 아래쪽의 계곡에 이르렀을 때에 는 황보자안은 다소 지친 듯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들고 있는 보도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주 좋은 칼, 아주 훌륭한 보도로구나." 그렇다. 황보자안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무려 수백 번은 암벽 위에 박았었을 이 보도는 놀랍게도 아직 전혀 조금도 흠집이 생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수가 전쟁터를 만나서 더욱 빛을 내는 것처럼 더욱 도신에 유리처럼 맑고 예리한 섬광을 서리서리 뿜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보도는 바로 금석을 두부 처럼 베는 신병이기인 것이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수백 번이나 암벽에 박아 넣었음에도 마치 두부 속으로 파고들듯이 거의 힘들지 않았으며, 나중에도 전혀 손상된 기미가 없는 것을 보고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이 보도를 그가 지니지 않고 있었다면 그의 운명은 또다른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갔을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보도의 도집은 바로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어서 황보자안은 그것을 찾아서 칠성보도를 도집에 넣어서 다시 품속에 잘 보관했다. 그리고 나서 맑은 계류의 물을 마시면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주머니 속의 약병을 꺼내서 그것으로 자 신의 찢어진 손아귀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바로 조부가 그를 위해서 준비해 준 것으로, 옥진산(玉眞散)이라는 금창약은 천하에서도 아주 귀하고 훌륭한 외상약으로, 한 번 바르자 금새 거품이 일더니 벌써부터 상처자국이 아물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몸에 금사배심이라는 보의를 입고 있어서 암벽에 부딪쳐서 생긴 상처 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만 내상을 입었을까봐 천왕호심단(天王護心丹)을 두 알 복용하고, 손목과 어깨의 뼈가 어긋난 부위에는 역시 외상성약인 흑 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바르고 뼈를 바르게 맞춰놓았다. 이러한 약들의 효과는 대단했다. 치료를 한 지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서 전신이 마치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쾌적한 것을 느끼고 황보자안 은 이어 약병들을 모두 갈무리하고 자리에 앉아서 순양기공의 방법대로 수 련에 임하기 시작했다. 기실 그가 제아무리 운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요 며칠 동안에 이룩한 내공의 힘이 없었다면 황보자안은 이렇게 무사히 내려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다 만 아까 내려오는 도중에 피로감을 느끼고 순양기공의 구결대로 운기조식하 려고 했었으나 그것이 잘 되지 않아서 더욱 정진하려는 것이었다. 사실은 운기조식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조용한 곳에서 외부의 방해가 전혀 없이 해 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잘 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어차피 혼자서 다시 절봉 위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한 최대 한의 상태를 보유하기 위해 황보자안은 순양기공의 구결대로 전신의 피로가 사라지고 쾌적하고 활력있는 몸이 되도록 오랫동안 운기조식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황보자안이 다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이미 사위에는 석양의 노을이 짙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의 몸이 이미 가장 좋은 상태라는 것을 확신하고 곧장 암벽 을 타기 위해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내려올 때에는 기적적으로 중간 지점에서 추락을 멈추고 거기에서부터 내려 왔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손아귀가 찢어져 있는데다가 처 음부터 맨 위쪽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실로 난관의 앞에 섰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생사를 초월하는 좋은 경험을 한 바 있 는 황보자안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공포감이 치솟으면 생기는 대로 강하게 억누르며 무심한 시선과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순양기공의 구결에는 운기의 구결 외에도 용기(用氣)의 구결이 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연성하지 않았지만 만일 그것을 사용하여 익숙해진다면 올라가 는 데 있어서 보다 수월하게 되지 않을까?) 이른 바 그 용기의 구결이라고 하는 것은 체내에 축적되어 있는 진기를 장 (掌), 권(拳), 지(指) 등을 이용하여 격출하거나 병기를 통해 작용하게 하 고 또는 강렬하게 내쏟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말하자면 실용무예 의 기초인 것이었다. 이 순양기공의 용기 구결에는 물론 장법이나 권법 등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고 그저 가장 기초적인 운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지만, 순양기공의 운 기의 구결이 그토록 효과가 있는 만큼 용기의 구결 또한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기실 황보자안은 오늘 아침에 심한 공포로 인해서 자신의 몸에 있는 최소한 의 근력도 사용하지 못하고 떨어졌었으나, 지금은 그러한 공포심을 억누르 고 마음을 평정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운기조식을 마치고 나서 그러한 점에 도 생각이 미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용기의 구결 역시 그의 마음이 평정되지 않은 상태라면 도리어 화를 불 러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었다. 구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마음을 써야지 힘을 써서는 안된다. 기를 연(淵)으로 가라앉히고 힘을 산 근(山根)에 모아라. 허(虛)와 실(實)을 분명히 구분해야 하며, 한곳 한곳마 다 하나의 허와 실이 있어서 모든 곳이 이와 마찬가지이다. 기를 움직여 정 신을 집중하며 결함이 없게 해야 하며, 오목하고 볼록한 곳이 없게 해야 하 며, 끊어지고 이어지는 곳이 없게 해야 한다.> 이 용기의 구결은 순양기공의 가장 뒷부분에 있은 것이며, 또한 가장 해독 이 난해하고, 마음의 수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만일 황보자안이 중간쯤이나 올라가다가 갑자기 공포심에 억눌려서 진기의 흐름을 놓쳐 버리게 되면 그 뒤는 어찌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아래로 부섭게 추락하게 될 것이고, 다시 아까와 같은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가 있다고 확신한 황보자안은 주저없이 용기의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마치 연습이라도 하듯이 담담한 심정으로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구결에 나와 있는 대로 진기를 운용하자 그는 전혀 힘을 쓰지 않는 데도 몸이 절로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으며, 손아귀에도 힘을 주지 않아서 찢어진 부분이 다시 덧날 염려가 없었지만, 오히려 바위조각들을 잡는 힘은 강해진 것 같았다. 사실 평탄하고 안전한 곳에서는 두뇌가 조금 총명하고 골격이 우수한 사람 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이 쉽게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었 다. 그러나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곳에서 가장 초보자가 그것을 익숙하게 펼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꿈만 같은 일이었으나, 황보자안은 비범하게도 침 착하게 그러한 것들을 착착 배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황보자안이 아주 중요 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경험은 수십 번의 강호 경험보다도 더욱 그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귀중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사람이 만일 생사의 절박한 순간에 그토록 냉정해질 수가 있다고 한다면 거의 기적처럼 형세를 만회할 변수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사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진기의 흐름이 순조롭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는 등의 실수가 계속되었으나, 점차 긴장을 풀고 초탈한 마음으로 묵묵히 구결 의 내용대로 움직여 감에 따라서 진기는 순조롭게 움직여지고 위로 올라가 는 일이 익숙하게 변해갔다. 황보자안은 어제만 해도 이 길을 아주 힘들게 올라갔었으나 정작 이렇게 진 지를 이용하게 되자 너무나 편안해서 정말로 절벽을 오르고 있는지 의심스 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체내에 모여 있는 진기의 양이라고 하는 것은 기실 아주 미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그것으로 무사히 동굴 앞에까지 올라간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미처 중간 지점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황보자안은 이미 자신의 체내의 진기가 고갈되어 흐름이 끊어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황보자안은 순간 크게 긴장되어 사지에 힘을 돋우었으나 문득 생각되는 바가 있어서 그 힘을 일제히 풀어 버렸다. 그리고 온 정신을 모아 서 무아지경 속에서 기공의 구결을 생각하는 한편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진 기를 불러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이것은 황보자안으로서는 새로운 시도이고 상당한 모험이라고 할 수가 있었 다. 그의 마음이 지금 초탈하고 대범한 상태가 아니라면 결코 이와 같은 모 험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우선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더욱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물론 황보자안이 그와 같이 시도하게 된 이유는 구결의 내용에서 어떤 강한 영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진기가 거의 바닥이 나는 순간에 어디에선가 새로운 기운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그의 단전을 채워가는 것이 아 닌가! 하지만 이런 양기로는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한편으로는 그 약기운들을 소주천하여 진기로 만드는 한편 이미 만들어진 진기로는 위로 올라가는 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극도의 정신력이 발휘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어서 설령 출진자가 옆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고여 있는 진기를 사용하기만 했기 때문에 올라가는 시간이 다 소 빨랐지만, 지금부터는 정신을 몰두해서 두 가지의 어려운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위로 오르는 시간은 상당히 많이 걸렸다. 황보자안은 도중에 진기를 거두고 힘으로만 올라간다고 해도 여기에서부터 는 거의 걱정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고집을 부려서 오랜 시간 동안 동굴의 입구에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올 라가고 말았다. 두 손과 두 다리를 동굴 입구의 평평한 공지 위에 올려놓는 순간 황보자안 은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인해 머리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번의 이 모험적인 암벽타기는 대단히 무모하기도 했 지만, 그에게 많은 깨우침을 갖게 만들었다. 순양기공의 운기와 용기의 구결에 대해서 거의 통달했으며, 그러나 이것은 작은 소득에 불과했다.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가장 침착하고 고요한 심성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영대가 맑고 지혜롭게 된 것은 가장 커 다란 소득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장사꾼이 장사를 해서 하나의 소득을 올 리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팔아먹을 수가 있는 기술을 배운 것이 더욱 훌륭 하다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미 자정은 넘은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오늘 지나치게 많은 심력을 한꺼 번에 소모했기 때문에 침실의 안으로 들어가자 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운기 조식을 한 다음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아주 단잠을 잘 수가 있었 다. 다음날 아침 황보자안은 거의 동이 터올 무렵에 아주 가뿐한 기분으로 잠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우선 찬밥 몇 덩이로 아침식사를 해결한 다음에 팔 단금의 수련을 하기 위해 동굴의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사형인 출진자가 벌써 공지에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 벌써 오셨군요?" 출진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지 그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의 인사말에 고개를 좌우로 내젓더니 이윽고 눈짓으로 동굴의 안쪽 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게. 사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 황보자안은 일시 무슨 뜻인지 잘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출진자의 표정이 너 무 무겁고 또한 그의 지시를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주춤거리며 다시 동굴 속 으로 들어갔다. 이 사부인 옥허산인의 거처는 그의 거처와는 달리 보다 깊숙한 곳에 위치하 고 있었고, 황보자안은 아직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침실과 창고 등이 있는 동굴의 광장을 지나서 좀더 안으로 들어가자 동굴은 기역자로 꺾여져 있었고, 그리고 다시 몇 번인가 안으로 꼬부라졌 다. 황보자안은 전에 그가 문안인사를 올릴 때는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아서 사부의 석실이 조금 안쪽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것 을 보고 다소 의아해졌다. (사부님의 음성은 이토록 먼 곳에서도 마치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들렸었구 나!) 무려 수십여 장이나 안으로 꼬부라져 들어가자 거의 천연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석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석실은 아주 단조롭기 그지없 었는데 다른 쪽의 절벽과 통해 있는 듯 반쯤 열려져 있는 두터운 돌문 사이 로 환한 빛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 빛살에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부비다가 문득 그 석실 안에 사부인 옥허산인 외에도 두어 명의 사람들이 더 있는 것을 보고 다소 흠칫 놀랐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옥허산인이 지금 며칠 전과는 달리 아주 앙상하게 마른 얼굴로 돌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부님께서 병환이 드셨다는 말인가?) 옥허산인의 침상 앞에는 적성자와 장문인인 현황자를 비롯한 못 보던 사람 들까지 모두가 아주 숙연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시립하고 서 있었다. 황보자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은 그를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서 있었는데, 옥허산인이 힘겹게 침상 위에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안아, 네가 왔느냐?" 황보자안은 이 옥허산인의 음성이 메마른 것일 뿐만 아니라 기력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생각도다도 사부님의 병환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 렸다. 따라서 실내의 상황을 살피다가 대례를 올리며 말했다. "예. 저에게는 내상약이나 해독약, 금창약 등이 있는데 사부님께서 몸이 불 편하시다면 그것을 써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옥허산인은 창백하게 깡마른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 다. "너는 아주 심성이 착하고 훌륭한 아이로구나. 나는 이미 신체의 원기가 다 하고 수명이 다했기 때문에 그러한 약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느니라." 황보자안은 사부의 말에서 수명이 다했다는 말을 듣자 일순 크게 놀라서 급 급히 생각하며 물었다. "그, 그렇다면 빨리 저의 조부님께 알려서 다른 의원이나 영약들을 구하도 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의 할아버지는 사실 못하시는 것이 것의 없 으신데……" 옥허산인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마음을 쓸 것은 없다. 지금의 나의 상태는 설사 대라금선(大羅金仙) 이 하강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느니라." "……" 황보자안은 사부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일순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사부 를 만난 지가 불과 열흘도 되지 않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운명하는 것을 지 켜봐야 하다니 실로 마음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생각해 보건대 사부는 지난 며칠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대공을 이 루려다가 실패하여 명을 재촉한 것이 틀림없었다. 실로 천하의 극상승의 무 예라는 것은 연성하기가 어려워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고, 십중팔구는 심마(心魔)의 방해를 받아서 실패하는 수가 많다는 얘기를 전에 호위무사들 에게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혹시 신선이 되시려다가 실패한 것이었을까?) 황보자안은 전에 출진자가 말한 곤륜파의 오대선공에 대해서 잠시 기억을 떠로려 보았다. 옥허산인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내 너의 사부가 되어서 그저 명목뿐인 사부로 정작 네게 한 가지도 신경써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래서 내 너의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 주기로 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 가지만 말해 보아라."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의 소원은 오직 사부님께서 빨리 쾌유하셔서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옥허산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제 잠시 후면 운명하게 되느니라. 그러한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는 다른 것을 말해 보아라." 이에 황보자안은 다소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는 부디 마음을 잘 수습하시고 이곳을 떠나시되 내세에는 반드시 극락정토에서 태어나도록 하십시오. 저의 소원은 그것뿐입니다." "뭐라구? 하핫……" 옥허산인은 일순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잠시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어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현황자를 향해 말했다. "이 아이는 워낙 심성이 착해서 어떤 소원도 말하지 않는구나. 내가 운명하 거든 장문인은 그를 잘 보살펴서 좋은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시게나." 현황자는 고개를 숙이며 엄숙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옥허산인은 이어 황보자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 너는 그만 나가 보아라." 황보자안은 이것이 실로 사부와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눈물을 떨구며 구배지례를 올리고 천천히 그 자리를 물 러나왔다. 황보자안이 밖으로 나가자 출진자는 여전히 공지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서성 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밖에서 찾아오게 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그에게 다가가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사형, 사부님께서는 어떤 대공을 연성하시려다가 실패한 것입니까?" 출진자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황보자안의 질문을 받고 다소 흠칫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금단선공(金丹仙功)의 수련을 하시다가 심마의 장애를 받으 신 것이라네." (금단선공?) 황보자안은 그 금단선공이 바로 곤륜파의 오대선공 중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출진자가 이어 말했다. "원래는 오늘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부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 니 한 이삼일 동안은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자네 혼자서 팔단금과 순양기공 의 수련을 하도록 하게." 출진자는 말과 함께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가 주는 여운이 매우 특이하여 황보자안은 혹시 어제의 그의 행동을 출진자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 쨌든 황보자안은 이제 다시는 충동적인 발상으로 그런 모험적인 행동을 하 는 사람은 아니었다. "예." 출진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황보자안은 더 이상 묻지 못하 고 즉시 대답을 한 다음에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자신이 근처를 어정댄 다면 도리어 출진자 등에게 부담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득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전에 상당히 초조하신 듯한 모습이셨다. 그렇다면 능력이 부 족함에도 무리하게 선공을 성취하려다가 주화입마에 걸리신 것이 아닐까?) --계속-- 번호:104/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4 길이:31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1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1장. 환우천하영웅대회(환宇天下英雄大會) 옥허산인은 자신의 예견대로 그날 밤 숨을 거두고 운명했다. 황보자안은 줄곧 자신의 침실에서 팔단금의 수련을 거듭하며 촉각을 그쪽으 로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제자들의 곡하는 소리와 함께 뒤이어 사부의 유체 가 밖으로 옮겨지는 소리를 들었고, 이어 그 유체는 화장되어 납골당에 모 셔진다고 들었다. 곤륜파의 제법 많은 제자들이 신법을 펼쳐서 이곳에 와서는 수근거렸는데 황보자안에게는 알릴 생각도 않는 것이 아마도 그를 정식제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실 황보자안은 정식으로 들어온 속가제자가 아니기 때 문에 성과 이름 사이에 붙는 배분의 돌림잠도 얻지 못했고, 좋게 말하면 그 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차별하는 것인 셈이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스스로 성심을 다해서 선사에게 작별인사를 올렸다고 생 각되었기 때문에 굳이 그러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또한 곤륜파의 정 식제자가 되는 일에 관해서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에 있어서 그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바로 하루 빨리 심신을 건강하게 수양시켜서 제법 괜찮은 상태로 집으로 복귀하는 것이었으므로, 황보자안은 선사의 유골이 납골당에 모셔지고 제사가 진행되는 이삼일간은 오로지 자신 의 침실 안에 틀어박혀서 무공의 수련에만 전념했다. 황보자안은 이미 자신의 내공이 일천하여 암벽을 오르기에도 부족하다는 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인술을 더욱 정밀하게 반복해서 실행하고 순양기 공의 구결과 깊은 의미를 스스로 깨우치려고 노력하며 내력을 길러갔다. 황보자안은 사실 자신이 선사의 제사에 참석하려고 해도 암벽을 내려가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팔단금과 순양기공의 수련만을 계속하자 누군가가 물자를 날라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창고 안에는 먹을 물 조차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이제 스스로 다시 아래에 내 려가서 물을 길어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아침에 출진자가 다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잘 지냈는가?" 출진자의 안색은 다소 수척한 듯 무거워 보이면서도 그를 향해서는 부드럽 게 웃고 있었다. "예. 선사께서 잠드신 곳에 제가 직접 가보지 못해서 그것이 다만 죄송스러 울 뿐입니다." 출진자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란 죽으면 육신은 덧없이 스러지고 그 식신(識神)은 다른 세계로 날 아가 버리는 것, 그런 유골에 굳이 미련을 둘 것은 없느니라." 이 곤륜파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윤회를 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 모양이 었다. 출진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 그간의 수련은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는가?"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이룬 것은 없고, 다만 오늘은 마실 물이 조금 부족해서 아래로 내려 갈까 하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고?" 출진자는 잠시 그의 얼굴을 직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로 일부러 무리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네. 만일 무엇이 부족하다면 즉시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되는 것이지. 자칫 실수하여 화라도 입으면 장 차 우리 곤륜파에서 어떻게 황보노야의 얼굴을 대할 수가 있겠는가?" "……" "이제까지는 다소 바빠서 미처 신경을 쓸 수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창고 안 의 물건이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네." 황보자안은 자신이 너무 재촉한 것 같아서 은근히 안색을 붉히며 공손히 허 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사형." 출진자는 미미하게 웃더니 곧장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입구로 그를 데려갔 다. "자, 보게!" 황보자안은 무심코 출진자가 가리키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눈을 휘 둥그래 뜨고 가볍게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암벽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십 수 가닥의 굵고 질긴 밧줄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 다. 출진자는 놀라는 황보자안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겠는가?" 황보자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묶고 내려가는 것이로군요?" 출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 허리에 묶은 밧줄은 유사시에 실족한 자네의 목숨을 구해줄 수가 있을 것이네. 앞으로 내가 조금 바빠져서 자네를 돌보지 못할지라도 자네는 저 구명밧줄의 도움을 받아서 암벽을 오르내릴 수가 있을 것이네." 그렇다. 이 굵은 밧줄들은 대략 수십 장의 간격으로 늘어져 있었는데 위에 서부터 차례차례 허리에 묵고 내려가거나, 아니면 아래에서 차례대로 허리 에 묶으면서 올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수십 장의 간격으로 구명밧줄을 바꾸는 것이니 물론 새로운 것을 허리에 맬 때에는 전에 묶었던 밧줄을 풀 어놓아야 한다. 이러한 장치는 실로 간단하면서도 안전하게 이용할 수가 있 는 것이었다. 황보자인이 며칠 전에 혼자 모험을 할 때 암벽에 이러한 밧줄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심한 공포감에 질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출진자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에 내심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 고, 이제부터 자신은 답답하게 동굴 속에서만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한번 내려가 보겠는가?" 출진자의 말에 황보자안은 즉시 허리에 첫 번째의 밧줄을 단단히 동여매고 지난 며칠간에 걸쳐서 수련한 진기를 끌어올려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 작했다. 이때는 황보자안은 순양기공의 용기 구결에 익숙해져서 진기로 몸 을 암벽 위에 바싹 붙이고 손쉽게 마치 무림인들이 벽호유장공을 펼치듯이 내려갔는데, 이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출진자는 뜻밖에도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황보자안은 공력이 전보다도 상당히 늘어난 데다가 용기의 구결에도 능숙해 져서 전에 비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암벽을 내려갔는데 도중에 쉬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사실 용기 구결을 이용한다면 체내의 진기가 고갈되지 않는 한은 힘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내려갈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황보자안이 무사히 맨 아래쪽에 발을 배려놓았을 때에는 두 시진 정 도가 흘러서 겨우 정오가 조금 지난 상태였다. 이것은 그가 처음에 서너 시 진 동안 절벽을 반밖에 내려오지 못한 것과, 그리고 며칠 전의 모험과 비교 를 해도 상당한 진척을 보인 결과였다. 출진자는 여태까지 묵묵히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황보자안이 짧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웃으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많이 늘었군. 자네가 만일 이렇게 팔단금과 순양기공의 수련, 그 리고 암벽타기를 매일 연습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수양이 될 것이네." 황보자안은 공손히 대답했다. "모든 것이 사형께서 돌보아 주신 덕분입니다." 출진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내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 말에 황보자안은 문득 이 출진자가 혹시 며칠 전에 자신이 모험을 하는 것을 몰래 숨어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의 이러한 괄목할 만한 성취에 다소 놀랄 만도 하건만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출진자는 다소 기이한 눈빛으로 황보자안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은 자네에게 최선은 다할 생각이었지만 선사께 서 특별히 자네를 부탁하셨기 때무네 우리는 앞으로 자네가 원하는 것은 가 능하면 들어주기로 했네. 그래서 말이네만, 지금 자네의 원하는 바가 있다 면 어서 말하도록 하게." 황보자안은 느닷없는 그의 말에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은 지 금 한창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고, 그것이 잘 되어 나가고 있는 상태이건 만 대체 무슨 다른 원하는 바가 있겠는가?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고 바라는 바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출진자는 순간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자네는 더욱 많은 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다는 말인가?" "……!" 황보자안은 일순 어리벙벙했다. 이것은 또 무슨 의도일까? 황보자안이 멍한 표정을 짓자 출진자는 다시 기이하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자네가 무공에 대해서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일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자네에게 무공의 기초를 확실하게 심어주려는 것이네. 즉, 우리는 자네가 원하기만 하면 보 다 적극적으로 무공을 전수해 줄 생각이네. 자네는 무공을 보다 착실하게 익힐 생각은 없는가?" 황보자안은 그제서야 대강 출진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출진자는 선사께 서 내리신 유시 가운데 황보자안에 관한 것을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실천하 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황보자안으로서는 상대방이 그렇게 바라는 데 있 어서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기실 황보자안은 무공에 열의가 있는 것 이 아니라 심신의 수양에 보다 관심이 있는 것이었지만, 그렇더라도 무공을 배우는 것은 싫은 기분이 아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공손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원래 사형께서는 이 사제를 위해서 깊이 신경을 써 주시는군요. 저는 물론 무공에 관심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형의 성의에 감동되어 무공을 배우고 싶 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무공을 배우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출진자는 잠시 그를 주시하다가 문득 한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게." 출진자가 황보자안을 데려간 곳은 바로 계곡 뒤쪽으로 한참이나 돌아가면 나타나는 하나의 제법 넓은 연못이었다. 이 연못은 깊ㄹ은 산중에 있어서 평소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그야말로 고적하고 물이 맑을 뿐만 아 니라 그러한 적막한 분위기를 지워 버리기라도 하듯이 한쪽의 드높은 깎아 지른 절벽의 위에서는 항창 기세좋게 거대한 폭포수가 내리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콰콰콰…… 워낙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의 영향으로 생겨난 연못이어서 그런지 연못물의 색깔은 짚푸르고 도저히 육안으로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가 없을 지경이었다. 출진자는 그 앞의 물에 씻겨서 윗면이 평편해진 바위 위에 황보자안을 세운 다음에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과거에 선사께서 자주 연공을 위해 들르시곤 하셨던 곳이라네. 내 가 자네에게 이곳을 소개해 주는 것은 바로 선사께서 마지막 유명을 달리하 시기 전에 자네를 내심으로 많이 아끼셨기 때문이네. 이곳은 본문의 다른 사람들도 거의 오지 않는 조용한 곳이니 자네가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는 데 아주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네." 이어 그는 물었다. "자네 혹시 헤엄을 칠 줄 아는가?" 황보자안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조금은 할 줄 압니다." 원래 황보대장원에는 작은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고 황보자안으로 하여금 여름이면 목욕이나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거 기에서 자여스럽게 헤엄을 배웠다. 출진자는 서생이 헤엄을 칠 줄 안다고 하자 다소 의외인 듯이 고개를 끄덕 이다가 이윽고 다시 말했다. "이 연못의 물은 깊고 소용돌이가 강하니 가급적이면 깊이 들어가서 헤엄을 치지 말기를 바라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새로운 무공을 전수하도록 하지." 출진자는 무공을 전수하는 데 있어서 매우 열성이었다. 황보자안 역시 본래 무엇에 열중하면 크게 몰두하는 성격인지라 금방 무공을 배우는 데 빨려들 어가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게 되었다. 출진자는 황보자안에게 팔단금과 순양기공에 이어 기초적인 권법과 장법, 지법, 그리고 보법이나 신법 따위를 가르쳤는데, 그것들의 수준은 물론 순 양기공의 범주에서 크게 웃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단순히 용기의 구 결만 배웠던 황보자안에게는 마치 새롭게 눈을 뜨게 하는 놀라운 무공들이 었다. 이제 겨우 소학과 천자문을 뗀 서생에게 새롭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문장학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오늘 출진자가 가르치는 그러한 무공들은 초식이 간단하고 매우 기초적인 것들이어서 빠르게 전수가 끝났고, 이어 순양검법(純陽劍法)의 기초를 가르 치고 나서 출진자는 한숨을 내쉬며 황보자안을 폭포수가 있는 곳으로 데리 고 갔다.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내리떨어지고 있는 것 과도 같고, 자욱한 물안개에 옷깃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는데, 출진자는 그 중 비교적 작은 갈래의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는 쪽을 가리켰다. "선사께서는 저 폭포수 아래에서 마음을 가다듬으시곤 하셨으니 자네도 앞 으로 순양기공을 운공할 때에는 저 아래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 작은 폭포수는 거대한 원줄기에 비하면 고작 백분지일이 될까한 크기였 지만, 그래도 제법 강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 아래의 물 속에는 평평 한 바위돌이 위치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운공을 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출진자의 지시에 따라서 즉시 그 폭포수의 아래로 들어가서 무 거운 폭포수의 압력을 받으며 순양기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황혼녘이 되었다. 이제는 동굴로 돌아 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황보자안은 몸을 일으켜서 품속에 지니고 있 었던 두어 개의 가죽부대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허리에 단단하게 짊어졌 다. 그리고 출진자와 함께 절봉 아래의 계곡으로 돌아와서 밧줄을 허리에 묶고 암벽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황보자안은 며칠 전에는 이 암벽을 다 오 르지도 못하고 진기가 고갈되었었으나, 이제는 암벽을 완전히 오를 때까지 전혀 진기의 부족을 느끼지 않았다. "오늘도 수고했네.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기이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출진자의 얼굴을 보며 황보자안은 자신의 성취가 기대 이상이라는 것을 조금씩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옥허산인 이 없기 때문에 다소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의 암벽을 타는 기술이 늘어감에 따라서 올라오는 시간이 단축되어 지금은 자정이 되려면 아직 한 시진 정도의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황보자안은 동굴 안에 등불을 밝혀 놓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 길어온 물로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맑은 정신으로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 즈음 황보자안의 내공은 거의 눈덩이처럼 매일 눈부시게 불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체내에 응고되어 있었던 약기운들이 그가 매일 도인술과 기 공을 연마해 감에 따라서 풀려나와 고스란히 진기로 화해가기 때문이었다. 오늘 황보자안은 내려가서 무공을 배우고 다시 물주머니를 차고 올라왔는데 도 거의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대력 한 시진 가량이나 운기조식을 했는데도 잠이 쉽사리 올 것 같지가 앉 자 황보자안은 이내 오늘 낮에 배운 무공들을 하나하나 연습해 보기 시작했 다. 그가 배운 것들은 가장 기초적인 구결과 동작들이었지만 그것들을 순양 기공의 총체적인 용기 구결에 따라서 운용하게 되자 색다른 힘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거의 지새고 새벽녘에야 조금 잠이 들었다가 한 시진도 못 되어 깨어나서 그는 다시 새벽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공지의 앞에 정 좌하고 앉아서 운기행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 세월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 한 것이 한달이 지나고, 다시 몇 달이 물 흐르듯이 스쳐지나가 버렸다. 살 을 에이는 듯한 한파와 거대한 눈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던 추운 겨울도 지니 가고 이제는 만물이 새롭게 약동하는 봄이 되었다. 그간에 물론 황보자안의 용모 역시 많이 변화해 있었다. 처음에 이곳을 찾 았을 때의 다소 불그레하고 허리가 굵은 서생의 용모에서, 지금은 관옥같이 하얗지만 후리후리한 허리에 잘 발달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건강한 대장부 로 변신해 있었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어서 이제 그의 나이는 스무 살인 것이다. 황보자안이 이곳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도 어언 십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었 는데, 그의 용모가 그렇게 변했다고 하는 것은 곧 이미 그의 체내에 응고되 어 있던 만년동자삼의 약기운이 모조리 그의 내력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 황보자안의 내력은 대강 일갑자의 수준이라고 출진자는 언젠가 그에게 말해 주었었다. 게다가 무려 십개월 동안아니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높은 암 벽을 오르내렸기 때문에 물렁살이던 그의 육신은 완전한 근육질의 청년으로 돌변해 있었다. 두 눈에서는 가끔씩 칼날처럼 예리한 신광이 번뜩이고, 내 력을 한 번씩 운용할 때마다 어떤 때는 마치 태산같은 장력이 밀려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아직 그에게 있어서 부족한 것은 무공 기예였다. 황보자안은 그 동안 팔단금을 완전히 끝내고 순양기공과 그 밖의 순양검법, 장법, 권법 등을 이 미 완벽하게 연성했으나 다른 것은 더 배우지 못했다. 출진자는 일부러 가 르쳐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다 기초를 튼튼하게 연마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미 가르쳐 준 무예들을 가장 숙달할 수 있도록 연마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오늘도 그는 습관처럼 아침 일찍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간단하게 식 사를 마친 다음에 운공조식을 하였으며, 이어 아주 빠르게 절봉 아래로 내 려가서 그 연못에 이르렀다. 물론 이때의 황보자안의 암벽을 타는 실력은 비록 출진자처럼 훌훌 날아서 십여 장씩 올라가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마 치 원숭이가 빠르고 익숙하게 나무 사이를 오락가락 하듯이 아주 손쉽게 암 벽을 오르내릴 수가 있는 상태였다. 이제는 그가 한 번 절벽을 오르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이각도 걸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황보자안이 연못가에서 목검을 휘두르며 순양검법의 수련을 마친 뒤 에 다시 폭포수 속에서 운기행공을 마치고 저녁 무렵에 공지 위로 올라왔을 때 기이하게도 출진자가 나타나서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원래 출진자는 요사이 그에게 별다른 위험도 없고, 또한 다른 것을 가르치려는 생각도 없 어서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터였다. "사형, 오랜만에 오셨군요." 황보자안이 웃으면서 반색을 하자 출진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무공이 더욱 정진되어 익숙해졌군. 나는 자네의 그러한 성취를 보 는 것이 마음에 흡족하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황보자안이 겸손해 하자 출진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과찬이 아니네. 자네는 만일 황보노야의 손자가 아니고 무공을 전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욕심을 부려서 한 십년 정도 무공을 가르 치고 싶은 사람일세." "……" 황보자안은 평소에 칭찬을 거의 하지 않던 사형이 오늘따라 웬 이렇게 낯뜨 거운 말만을 하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며 출진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출진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처음부터 말했듯이 자네에게 원하는 모든 무공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고, 다른 속셈은 없는 것이네. 내가 그 동안 자네에게 기본적인 무예만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연마하라고 지시한 것은 다른 무공들을 가르 쳐 주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더욱 기초를 튼튼히 해주기 위해서였네. 자네 는 내가 왜 이렇게 하도록 했는지 혹시 알고 있는가?" 황보자안은 잠시 깊게 생각해 보다가 문득 되물었다. "혹시 그것은 저에게 오대선공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황보자안이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출진자는 즉시 껄 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하하핫, 자네는 역시 총명이 과인하군 그래! 그렇네. 나는 바로 자네에게 도가 무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대선공을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이 네." "……" 황보자안은 설마하고 있다가 정말로 출진자가 그와 같은 대답을 하자 일시 놀라서 그만 입이 다 벌어졌다. 출진자가 말을 이었다. "원래 자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무공을 좀더 가르쳐 줄 수도 있었으나, 만약 그렇게 되면 순수한 조화를 잃게 되기 십상이어서 나는 오히려 충분히 기초를 닦을 것을 권한 것이네. 그리고 나서 이제야 자네에게 오대선공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게 된 것이네." 황보자안은 다소 흥분하여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는 제가 그 오대선공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까?" 출진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 오대선공은 비록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성실하게 연마하게 되면 지고무상의 능력을 얻을 수가 있는 도가의 가장 전 통적인 내공심법인 것이네. 자네는 이것을 배우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겠 지만, 거기에서도 꾸준히 연마하게 되면 장차 무병장수하고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될 것이네." "……" "하지만 오히려 가장 심오한 무학이기 때문에 내일부터 자네에게 전수할 수 가 없는 것이라네." 황보자안은 문득 그 말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일부터는 안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출진자는 가볍게 웃더니 대답했다. "사실 앞으로 얼마 후에는 중원에서 환우천하영웅대회( 宇天下英雄大會)가 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 --계속-- 번호:105/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5 길이:279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2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2장. 소사제(少師弟) --환우천하영웅대회. 이 소리를 듣게 되자 황보자안은 다소 놀라며 절로 두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실 그가 황보대장원에서 살던 당시에 호위무사들에게 그것에 관한 얘기를 가끔씩 구수하게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이 환우천하영우대회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당금 강호 무림의 무림맹인 구주 동심영웅지맹(九州同心英雄之盟), 줄여서 동심맹(同心盟)이라고 하는 거대 한 단체의 맹주를 선발하는 고작 십년에 한 번씩밖에 열리지 않는 가장 거 대한 대성회였기 때문이었다. 실로 무림인이라면 이러한 거대한 대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다만 참석하여 비무자들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예가 일취월장한다는 것이 호위무사들의 말이었다. 과거에 황보가의 호위무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강호의 일에 다소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오는 황보자안에게 이 환우천하영우대회의 일을 다소 과정되게 대단한 것으로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지금 황보자안이 절로 호기심을 느끼 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출진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 장문인을 모시고 함께 중원으로 가게 되었다네. 본파의 일은 따라서 당분간 대사형이 맡게 되었는데, 미처 자네를 돌보아 줄 틈이 없게 되었지. 원래는 선사께서 계셨다면 자네를 잘 돌봐 주셨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니……" 황보자안은 감히 중원으로 함께 따라가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두 달 동안은 저 혼자서 수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 까?" 이곳 곤륜파가 있는 곳은 중원에서 아주 멀어서 왕복하려면 몇 달은 걸릴 것이라는 것을 황보자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출진자는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자네의 기초 수련은 그것으로 되었고,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네. 그리고 그렇다고 내가 오대선공을 그냥 비급만 던져주고 떠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말이네, 나와 함께 중원으로 가면서 오대선공을 배울 수는 없겠지 만 이번에 함께 나를 따라가서 잠시 견문을 넓히다가 돌아와서 다시 두 달 간을 나에게 배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출진자의 말은 끝까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확실히 일 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득 황보자안은 생각하기를 이렇게 사형이 그에게 중원으로 함께 가자고 적극 권하는 까닭은 바로 이번에 그에게 다소의 도움을 받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합당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것이지 만, 억지로라도 황보자안이 적성자에게 가끔씩 지도를 받으면서 이곳에서 오대선공을 수련할 여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출진자가 이렇듯 함께 가자고 권유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이번의 중원으로 갔다 오는 경비를 그가 부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기실 곤륜파로서 는 이러한 거대한 원정길은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부담이 있는 반면, 황보 가로서는 그 정도의 비용이야말로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은 순간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을 예측했지만, 그러나 전혀 내색하 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저도 사실은 그 비무대회를 한 번 구경하고 싶었던 차였습니 다." "그런가?" 출진자는 다소 만족을 한 듯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출발하는 날짜는 언제입니까?" 출진자는 담담하게 따라 웃으며 말했다. "자네와 같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가? 바 로 그 나른 내일 아침이네." "내일 아침이라구요?" 황보자안은 절로 두 눈이 다시 휘둥그래졌다. 그에게 있어서 약간의 비용이 든다는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며, 오직 중원에 나가서 강호 무림인들과 교 분을 맺고, 그들의 신비로운 무예를 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던 것이었다. 출진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에 자네를 중원으로 데려가는 것은 약간의 모험이라고 할 수가 있네. 강호라는 곳은 언제나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고, 인심이 험악한 법이 지. 따라서 나는 항상 자네 옆에 붙어서 자네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 생각 이네." 황보자안은 기쁨에 들떠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본파의 모든 분들을 저의 집으로 초대해서 한바탕 잔치를 벌려볼 생각입니다." 출진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는 이번에 동심맹이 있는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 에 갔다가 빨리 그냥 돌아와야 한다네. 왜냐하면 이곳은 주변에 사악한 무 리들이 은근히 득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총단을 오래 비워둘 수가 없기 때 문이지." 황보자안은 말했다. "그렇다면 설령 저의 집이 아니더라도 저는 그쪽에 있는 저희 장원에 들러 서 반드시 크게 잔치를 벌릴 생각입니다." 출진자는 가볍게 파안대소했다. "하핫, 그거야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너의 생각대로 해도 상관없다." 이어 다소 신중한 표정으로 출진자는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번의 출정은 모험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만일 무사히 끝낸다고 한다면 자네에게는 아주 귀한 강호의 경험이 될 것일세." "그럴 것입니다. 사형의 은덕에 감사를 드립니다." 황보자안은 아주 기쁜 표정으로 즉시 출진자에게 공손히 포권의 예를 올렸 다. 이것을 보고 출진자 역시 기분이 흔쾌해져서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 다. "좋아, 좋아! 사실 자네의 지금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어서 원래 계획했었던 일년간의 성취를 크게 앞당긴 것이었네. 하지만 이번에 중원에 갔다가 몸조 심을 하고 돌아와서 그야말로 본파의 높은 무공을 가르침 받도록 하게나!" 황보자안은 이 사형이 사부와도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즉시 사부를 대하듯 이 그를 향해 깊숙히 적을 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에 출진자는 얼른 뒤로 도망치듯이 물러나더니 말했다. "그럼 자네가 그렇게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나는 그만 돌아가겠네. 내일 떠 날 준비를 하도록 하게. 아니 자네와 같은 사람은 굳이 준비할 것도 없겠 지. 어쨋든 나는 내일 아침에 자네를 데리러 올 것이니 기다리게." 말이 끝나고 출진자가 비조와도 같은 신법으로 절봉의 아래로 아득하게 사 라져 버리자 황보자안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깊은 감회를 느끼기 시작했 다. 비록 약정된 일년에서 아직 두 달이나 남은 상태이지만 워낙 어려웠고 힘들었던 수련을 해내었던 것이라 내일 아침에 중원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 자 깊은 감회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저히 오늘밤은 가 슴이 뛰어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고 무공 수련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황보자안은 먼저 자신의 침실로 들어와서 주위를 살핀 다음에 천천히 내일 떠날 차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운기행공에 몰두하다가 이른 아침에 몸을 일으켜 밖에 나가보니 어느새 출진자가 도착하여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이 나오자 출진자는 즉시 그에게 하나의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것은 본파의 도복이니 우선은 이것으로 갈아입도록 하게나." 기실 열달 전에 황보자안이 입고 왔던 의복은 이미 헤어져서 버린 지가 오 래되었고, 창고 안에 많이 쌓여 있었던 의복들도 대부분이 헌옷이 되어 있 었기 때문에 마땅히 입고 떠날 옷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렇게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는 사형의 배려가 매우 고마웠다. 알고보니 출진자 역시 지금은 푸른 빛이 감도는 새 도포로 갈아입은 상태였 다. 황보자안은 얼른 보따리를 받아들고 침실로 돌아와서 펼쳐보니 그 안에는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백색의 도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황보자 안은 미처 식사할 겨를도 없이 우선 깨끗하게 세수를 마친 다음에 새로운 도포로 갈아입고 모든 물건들을 챙긴 다음에 밖으로 다시 나갔다. 출진자는 황보자안의 새옷을 입은 준수하고 헌칠한 용모를 보자 잠시 대견 스러운 듯이 바라보다가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 그럼 어서 떠나세. 모두가 이미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출진자는 황보자안의 손을 잡고서 절봉의 아래로 비조처럼 훌쩍 몸을 날렸 다. 그것은 처음에 황보자안이 적성자에게 이끌려서 올라오던 그 신법과 동 일한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비록 곤륜파에서 열달을 머물렀지만 정작 곤륜파의 일반 제자들 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다. 따라서 지금 우선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대체 곤륜파의 일반 제자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비록 열달이나 무심하게 그들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내왔었지만 지금은 그 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매우 답답해져서 금방이라도 그들의 모습을 보아야만 시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 졌다. --작은 분지. 곤륜파의 연무장이 있는 곳에서도 훨씬 내려와 있는 위치의 그 작은 분지 위에 동료 제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도열 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진자는 옆에서 황보자안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이번에 본파에서 출정하는 인원은 너를 포함해서 모두 마흔한 명이다. 즉, 일대제자가 세 명이고, 이대제자가 삼십육천강(三十六天 ), 서른여섯 명이 며, 삼대제자가 두 명이다." 여기에서 출진자가 말한 일대제자라는 것은 바로 자신과 현황자 장문인, 그 리고 황보자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옥허산인이 생존해 있을 때 하던 말이 습관처럼 되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분지의 안쪽에는 삼십여 명의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는 중년도인들이 엄숙 한 표정으로 도열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대제자인 삼십육천강이라는 사람들인 것 같았고, 다시 그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총명준수하게 생긴 젊 은 도인들은 바로 두 명의 삼대제자들인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어렵지 않게 그 두 명의 젊은 도인들은 삼대제자들 가운데에서 도 발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각기 현황자와 출진자의 수발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번의 원정에 끼이게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나이가 어린 젊은 도인이라고 해도 하나같이 이십대 중반의 인 물들이어서 모두가 황보자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삼십여 명의 도열한 사람들은 배웅하러 나온 많은 동료 제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현황자로부터 여러 가지의 주의사항을 하달받고 있었는데, 출진자와 황보자안이 손을 맞잡고 언덕 아래에 나타나자 즉시 출발 대형으로 갖추더 니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일제히 소리치며 배웅하는 남은 제자들의 목소리가 일순 넓은 분지 전체를 찌르릉 하고 울리고 있었다. 현황자 장문인은 이때 일행의 앞으로 나와서 출진자와 황보자안이 오는 것 을 반겨 맞아 주었다. "사형,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소사제도." 현황자가 방금 말한 소사제라는 말은 실로 걸맞는 말일 것이었다. 좌우로 대형을 펼쳐서 미끄러지듯이 다가오는 삼십여 명의 곤륜파 제자들은 언뜻 보기에도 법도가 엄정하고 쉽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서 엄격 하게 훈련을 받은 정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도 얼핏 들어서 곤륜파의 이대제자에는 삼십육천강과 칠십이지살 (七十二地煞)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삼십육천강은 가장 정예화된 인원 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삼십육천강은 지금 장문인의 인솔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설령 황보자안을 앞에 두고도 감히 인사를 하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장문사형을 뵙습니다!" 황보자안이 공손히 현황자에게 절을 하자 현황자는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떠올리며 그와 출진자를 일행의 중앙에서 따라오고 있는 커다란 사두마차의 안으로 인도했다. 이 사두마차는 비단 마도 튼튼한 준마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외부의 구조 역시 고급품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우아한 정취를 풍겨주는 것이었 다. 비록 다소 연대가 오래되어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마 차의 성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곤륜파의 어떤 역사를 보여주고 있 는 것 같기도 했다. 마차의 내부는 밖에서 보기보다도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그리고 아까 분지 에서 보았던 그 두 명의 젊은 삼대제자들이 어느새 마치의 뒤쪽에 올라서 장문인 등이 앉을 자리를 단정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마차는 역시 삽십육천강 중의 두 사람이 마부석에 앉아서 몰고 있었고, 장 문인인 현황자와 출진자는 앞쪽의 자리에, 황보자안은 그들과 함께 앉으려 다가 문득 몸을 돌려 바로 뒷자리에 가서 혼자 앉았다. 현황자와 출진자는 담담히 서로를 바라보며 기이한 미소를 짓다가 앞쪽을 바라보며 묵묵히 아 무런 말도 없었다. 이에 다소 침묵에 짓눌려서 답답해진 황보자안은 뒤로 시선을 돌려서 두 명 의 삼대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했으나 그들의 표정이 어느 정도 불안한 기색이 떠올라 있는 것이 도무지 대화를 원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시선 을 창 밖으로 돌렸다. 이때 마차는 느릿하게 거의 흔들림도 없이 잔잔하게 미끄러지듯이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 옆의 좌우로 삼십육천강이 각기 신법을 발휘하여 나아가고 있 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난 듯 황보자안은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저들의 사숙이 되어서 거의 해준 것도 없는데, 우선 저들의 말을 각기 한 필씩 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무공을 연마하여 신법이 고절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이 달리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달릴 수가 있으나, 만일 장거리를 여행할 경 우에는 내력을 아껴야 할 입장이므로 말을 사서 타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장문인인 현황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됐네. 아마도 그들은 이미 선물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네." "……?" 황보자안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질문을 던지려고 무심 코 앞쪽을 바라보았을 때 일순 그의 두 눈은 가볍게 휘둥그래지고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미 산 아래쪽에 수십 필의 말들이 준비되 어 있었고, 삼십육천강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 곤륜파에서는 말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파의 명예를 존중하 는 의미에서 감히 위에서는 말을 타지 못하고 산 아래에 말을 대기시키도록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한눈에 파악한 황보자안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이로군.) 마차는 삼십육천강이 말을 타는 자리에서 잠시 멈추어졌으나 이내 말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이에 편승하여 마차의 속도 또한 눈에 띄게 빨라졌다. 좌우로 요한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뭉게구름과도 같은 흙먼지가 일어나면서 대곤륜파의 위대한 장정을 자랑하는 듯했다. 두두두둑…… 곤륜파가 위치하고 있는 대곤륜산맥은 너무나도 웅장하고 거대한 줄기이기 때문에 어이없게도 곤륜산맥을 벗어나는 데만도 실로 많은 시일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 곤륜파의 사람들은 이 부근의 지리에 정통해서 그 드 넓은 산맥과 고원지대에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먼 길로 돌아가는 일이 없었 다. 전에 항보자안이 곤륜파로 들어갈 때에는 적성자가 신법을 펼쳐서 가능하면 산맥과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가려고 했었지만, 사실은 보다 먼 거리를 여행 하는 데 있어서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이 곤륜파의 기동성은 상당히 우수한 것이어서 낮에는 계속해서 말을 달리 고 밤에는 숲이 우거진 안전한 장소에서 쉬어갔는데, 말이 피로하여 쉬어야 할 장소에는 아주 알맞게 새로운 말들을 준비하여 시간이 지체되지 못하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곤륜파가 이 근방의 일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전에 적성자가 그를 데리고 중원에서 곤륜파로 들어갈 때에는 거의 두 달이 라는 시일이 걸렸었지만, 이번에 곤륜파의 인원들이 말을 타고 대고원지대 를 지나서 청해(靑海)를 지나 중원의 길목인 난주성(蘭州城)에 가까이 도달 했을 때에는 불과 한 달여의 시일밖에 걸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 동안 황보자안의 처지는 상당히 우대를 받아서 풍족하고 즐거웠다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대제자들인 삼십육천강은 여전히 황보자안에게는 거의 말도 붙이지 않았 고, 은근히 그와 접촉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이것은 장문인 인 현황자 등이 주의를 주어서이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황보자안을 곤륜파의 정식제자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를 사숙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 이었다. 물론 그런 점에 있어서는 황보자안은 스스로의 무공이 그들에 비해 서 훨씬 뒤지는 것이라 별로 개의하고 싶지 않았다. 현황자와 출진자의 수발을 들어주는 두 명의 삼대제자 청화(淸和)와 청진 (淸眞)도인은 역시 항상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매일 좋은 음 식을 대접받고 편안한 여행을 할 수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기실 그는 동굴에서 오랫동안 혼자서 지내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런 무료함 정도는 상관없는 것이었고, 낮의 여행이 끝나고 수면을 취하는 한밤중에는 혼자 일어나서 은밀한 곳에서 오랫동안 검술과 권법 등을 연마 하고 운기행공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까닭에 황보자안의 무예는 여행중에 퇴보하지 않고 오히려 서서히 증대되고 있는 양상이었다. --난주성. 중원 대륙의 이대 젖줄 중의 하나인 황하강의 상류가 굽이치며 성의 북쪽 외곽을 흐르고 있는 이 거대한 성시는 고원지대인 서장과 청해성 등지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온갖 종 류의 물건들이 쌓이고 숙박업이나 교역업, 혹은 표행 따위가 성행하여 매우 번화한 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원래 처음 곤륜파를 떠났을 때에는 활기가 넘쳐 있었던 대부분의 제자들도 한달여의 오랜 여행 끝에 다소 피로에 찌들어 있었는데, 난주성의 부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제 드디어 중원의 땅에 한 걸음을 내딛고 번화한 거리를 구경할 수가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얼굴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 다. 그리고 다소의 기대에 들뜨기 시작한 것은 황보자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 실 그는 아무 것도 능력도 해준 일도 없이 이제껏 훌륭한 대접만을 받아왔 었는데 비로소 난주성에 들어가면 일행에게 뭔가 보답을 할 수가 있다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천하제일의 거부인 황보노야의 기업은 이곳 거대한 성시인 난주성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계속-- 번호:106/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5 길이:498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3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3장. 강호혈접(江湖血蝶) 일행은 난주성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백탑산(白塔山)의 기슭을 돌아서 나 룻배로 황하강을 건넌 다음에 난주성의 번화한 성내의 거리로 들어섰다. 오 랜 여정 동안의 피로도 씻을 겸하여 오늘은 난주성 내에 들어가서 편히 쉬 어간다고 장문인인 현황자가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원래 호화로운 대장원에서 자라온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간 일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너무나도 거칠은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이 렇게 번화한 대성시에 들어서게 되자 새삼 감회가 이는 것을 느낄 수가 있 었다. 황보자안은 여태까지는 여러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던 셈이어서 시종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제는 표정이 밝아지고 환해졌다. 그는 현황자에게 말했다. "장문사형, 제게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데 우리는 우선 하나의 주루에 들어 가서 식사를 한 뒤에 객점은 나중에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현황자는 일파를 이끌어가는 장문인인데 황보자안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사제의 뜻대로 하게. 그럼 우리는 우선 주루 하나를 정하도록 할까?" 장문인의 그 말은 즉시 주위에 전해져서 삽십육천강 중의 몇 사람이 앞장서 서 주루 하나를 골라서는 일행을 인도했다. 난주성 내 번화한 대로상에 있 는 거대한 하나의 이층 주루였는데, 이름은 용문주루(龍門酒樓)였고, 워낙 에 인원이 많기 때문에 이층 전체를 모두 빌렸다. 황보자안은 일행을 잠시 대기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자신은 용문 주루에 오르지 않고 곧장 난주성에서 가장 커다란 객점인 용화객점(龍華客 店)으로 찾아갔다. --용화객점. 실상 이곳은 바로 황보가의 난주성에 뿌리를 내린 여러 기업들 중의 하나였는데, 또한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곳이었다. 자체 내에 넓 고 호화로운 주루를 겸하고 있음은 물론 그 크기가 마치 작은 성(城)을 방 불케 하는 것이어서, 이 근방에서는 도저히 비교할 만한 객점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황보자안이 마치 성문처럼 붉은 칠을 한 거대한 문의 입구에 다가가자 입구 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중년인 서너 명이 그를 바ㄹ보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다가왔다. "공자, 무슨 일이오?" 비록 초면이지만 황보자안의 모습에 고귀한 기상이 어려 있고 절로 우러르 게 하기 때문인지 그 자는 다소 공손한 어조로 물어왔다. 황보자안은 그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나는 황보자안이라는 사람인데,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고자 하오." "……?" 상대방은 일시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에 황보자안이 다시 말했다. "당신의 윗사람에게 알리시오. 나는 지금 용문주루에 일행과 함께 머무르고 있는데, 빨리 나를 보러 오라고 하시오." 황보자안은 더욱 어리벙벙해 하고 있는 상대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용문주루를 향해 걸었다. 용문주루는 때마침 점심 나절이기 때문에 손님이 많이 찾아들어 몹시 붐비 고 왁자지껄 아주 시끄러웠다. 게다가 이층 전체를 이미 곤륜파의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으니, 아래층은 자연 더욱 붐비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끌복잡한 광경을 보는 것은 황보자안의 마음에 그리 귀찮 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지난 일년여의 세 월 동안 그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요란하고 번화한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삶의 생기를 느끼는 것이었 다. 원래 주루에서 적당한 인원만을 받아들여서 자리를 모두 채우고 장사를 한 다면 이렇게 요란스럽지는 않겠지만, 다름이 아니라 아래층에서는 지금 한 창 요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원래 담담한 심정으로 그러한 것들을 무시하고 이층으로 올라가 려고 하였으나 문득 무심코 장내의 상황을 바라보다가 다소 눈이 휘둥그래 지고 말았다. --여인(女人). 격전이 벌어져서 손란스러운 장내의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 은 알고 보니 이제 나이가 갓 스물을 넘었을까 한 검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었는데, 지금 주위에서 대여섯 명의 흉측하게 생긴 장한들이 날이 시퍼런 병기를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건만, 그녀는 전혀 끄떡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현의여인(玄衣女人)은 지금 중앙의 한 탁자 앞에 앉 아서 얼굴에 검은 면사를 쓴 채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장 한들이 그녀의 곁에 다가가기만 하면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하나같이 뒤로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처음에는 장한들이 이 현의여인의 아름다운 몸매와 백옥같이 투명 한 살결에 음욕이 동하여 수작을 걸기 시작한 것 같은데, 괴이하게도 흉신 악살같이 생긴 장한들 여럿이서 연약해 보이는 소녀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 자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어서 소리치며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 참 이상한 일이로군. 대체 그녀는 무슨 수를 쓰고 있길래 저놈들이 하 나같이 맥을 못추는 것일까?" "이봐, 혹시 사술(邪術)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쎄. 어찌 보면 저 자들이 함께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생각해 보면 그럴 리도 없을 테니."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말이었다. 확실히 황보자안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다소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도 저 현의여인이 무슨 수법을 쓰고 있는 것인지 보지 못했던 것이었 다. 그때 마침 한 명의 장한이 대도를 엄밀하게 휘두르며 현의여인의 뒤쪽을 향 해 쇄도해 가고 있어서 황보자안은 걸음을 멈추고 주시했다. ! 일견하기로도 장한의 도법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어서 황보자안 스스로도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장한이 한 번 이를 악물고 도법을 펼치자 일시 그의 주위에는 검푸른 도막 (刀幕)이 형성되어 버린 듯 사방으로 도광이 번뜩이며 엄밀하게 빈 공간을 헤집다가 문득 장한의 신형이 번쩍 현의여인의 뒤로 날아들자 순식간에 그 엄밀한 도막이 현의여인의 등을 갈갈이 찢어놓을 듯이 덮쳐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에 조금 앞서서 현의여인의 앞쪽에는 다른 한 명의 장한이 기다란 유성추를 휘돌리다가 뒤의 장한이 덮여가는 것을 보고 때맞춰 현의여인의 안면을 노리며 유성추를 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붕붕붕…… 장내에는 마치 일시에 수백 마리의 벌들이 울부짖는 듯한 요란한 파공음이 들리면서 현의여인의 안면이 일시에 유성추의 환영 속으로 가려진 듯한 느 낌이 들었는데, 이것은 황보자안이 비록 유성추에 대한 조예가 없다고 하더 라도 실로 놀라운 수준의 무예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재 사방에는 이미 서너 명의 장한들이 팔다리가 부러져서 크게 신음을 발 하고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두 명의 장한은 낭패한 심정에 그만 심중의 살기를 불러일으켜 최대의 공력으로 현의여인을 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 다. 이를 바라본 황보자안도 남자이기 때문에 가녀린 체구의 여인의 몸이 그렇 게 무지막지한 공격 속에 갇혀 버린 것을 보자 절로 아,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 에 그의 그러한 작은 신음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그런데 이때 괴이하게도 그 현의여인이 마치 그의 짧은 신음소리를 들은 것 처럼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이미 하나의 무시무시한 대도와 거대한 유성추가 그녀의 머리를 박 살내려고 하고 있건만, 그녀는 설마하니 자신의 머리가 박살나게 되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헌데 순간의 일이었다. 현의여인은 그저 황보자안이 서 있는 쪽을 향해 고 개를 돌렸을 뿐이건만 느닷없이 대도를 휘둘러가던 장한의 얼굴이 극심한 고통과 경악으로 크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튕겨지듯이 날아가 버렸으며, 이어 앞의 장한이 휘두르던 유성추가 별안간 마치 귀신에라도 들 린 듯이 현의여인의 머리는 놔두고 방향을 틀어서 오히려 그 장한의 이마를 그대로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악!" "윽!" 두 마디의 비명 소리는 거의 동시에 울려퍼졌으나 각각의 모습은 천양지차 였고, 그러한 두 장한의 끔찍한 광경은 주위의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아앗, 사람이 죽었다!" 설마하고 구경하고 서 있다가 두 명의 장한이 하나는 머리가 엉망으로 부서 지고 다른 하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입으로 선혈을 콸콸 내쏟으며 죽어 있 는 것을 보게 되자 저마다 크게 놀라서 뿔뿔이 달아났다. 구경꾼들 중의 더 러 담력이 강한 사람들은 조금 전의 현의여인의 그 귀신같은 괴이한 능력에 대해서 멀찍이 물러서서 동료들과 뭐라고 수근대로 있었으나 감히 그 옆으 로 다가가지는 못했다. 황보자안도 아까는 자신의 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의여인이 반드시 자신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일이고, 조금 전의 그 현의여인 의 놀라운 무예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굴리다가 공연히 옆에 있다가 화를 당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슬쩍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하기 시작했 다. 이 주루의 일이층은 계단으로 구분지어져 있지만 서로 트여 있어서 위층의 많은 곤륜파의 제자들도 이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래층의 상황은 일순간에 아주 살벌하게 변해 버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신 음을 하고 있던 장한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끔찍하게 죽어 버리자 크게 놀라서 아픔도 잊고 동료의 시신을 잡아 일으키더니 현의여인 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악독하게 소리쳤다. "네, 네년은 대체 누구냐? 그리고 어째서 여기에 와서 이런 잔혹한 살수를 쓰는 것이냐?" 이에 현의여인은 흥, 하고 가벼운 코웃음을 칠 뿐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 이 탁자 위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장한들은 그것을 보고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슬금슬금 주루 밖으로 시체를 안고 물러나며 재차 소리쳤다. "네년은 여기에서 꼼짝말고 기다려라! 만일 네년이 몰래 도망이라도 간다 면…… 그렇다면 필히 우리들의 맛을 보여줄 것이다!" 거의 일방적으로 당해서 물러가면서도 장한들의 기세가 죽지 않는 것을 보 면 역시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현의여인이 갑자기 장한들이 주루 의 입구까지 물러가자 신형을 일으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흥! 난주칠패(蘭州七覇)에게 이렇게 말해라! 내가 곧 찾아갈 것이라고!" 아주 매서우면서도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그 음성에 다소 넋을 놓고 있다가 괴이한 광경을 보게 되 었다. 현의여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우수를 가볍게 휘저었는데 일순 거기에 서 한 덩어리의 붉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마치 나비와 같은 환영을 이루면서 너울너울 날아서 장한들의 머리 위를 엄습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붉은 기운 은 즉시 주루의 벽을 뚫고 사라져 버렸으며, 장한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 히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장한들은 그것을 보자 마치 귀신에 홀리기 라도 한 듯이 안색이 새파래지며 경악하여 소리치는 것이었다. "앗, 혈, 혈접(血蝶)이닷!" --혈접. 황보자안은 장한들이 이토록 놀라서 소리치고 있는 혈접이나 앞에 그녀가 말했던 난주칠패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장한들이 급급히 시신 을 안고 달아나버린 후에 갑자기 그 현의여인이 장내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그녀의 무공은 그토록 놀라운 것이었구나!) 황보자안은 강호 무림의 일에 관해서 거의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었 기 때문에 무공의 극상승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도무지 상상도 못하는 상 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두 명의 장한이 죽은 것과 붉은 나비가 허 공으로 날아간 것 등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현의여인 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원래 무공에 대해서 그리 지나칠 정도의 호기심이 없었 기 때문에 그녀를 한 명의 무림기인 정도로만 치부하고 다시 몸을 돌려 이 층으로 올라와 버리고 말았다. 그때 문득 눈앞에서 이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바로 혈접이었다니……" 황보자안은 지금 그렇게 중얼거린 사람이 바로 창가의 난간 앞에 현황자와 마주 앉아 있는 출진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소 의아해하여 다가가서 물었 다. "혈접이라는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출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 다소 흠칫한 표정을 짓더니 황보자안 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도 대단한 존재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바로 소요 각(逍遙閣)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소요각?) 황보자안은 내심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실 그는 대사형인 적성 자나 이 출진자 등의 놀라운 무예를 수차례 보아온 터였고, 그들의 무예를 최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 다소 존경해 왔었는데, 지금 불과 한 명의 나이 어린 계집아이를 보았을 뿐인데, 저토록 무거운 표정으로 심각해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그녀의 무공이 사형들의 무공보다 뛰어난 말인가? 하하, 그럴 리 야 없는 일이겠지.) 황보자안은 또한 이 소요각이란 이름을 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마악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러한 강호의 기인들은 수 도 없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물었다. "소요각이라는 곳은 또 어떤 곳입니까?" 이때 앞쪽에서 바라보고 있던 현황자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사제, 강호에는 거론해서 좋은 얘기가 있고, 혹은 알게 된다면 좋지 않 은 얘기가 있는 법이라네. 자네는 사실 정식으로 강호에 출도한 것도 아닌 데, 굳이 그러한 것을 알아서 화를 자초할 필요가 있겠나?" (아는 것이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황보자안은 더욱 어리벙벙하여 의구심이 가득 들었으나 출진자의 심각한 표 정과 현황자의 차가운 표정 등을 보고는 감히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들은 보아하니 그 현의여인의 일을 생각하느라 지금 황보자안이 밖에서 돌아온 사실마저 잊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굳이 말하지 않고 빈 자리를 찾기 위해 이층 주루의 안 쪽을 둘러보았다. 헌데 그때 황보자안은 비로소 이 이층 주루 안에 감돌고 있는 다소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채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곤륜파의 사람들이 잠시 전세내어 다른 사람들은 오르지 못하 게 하고 곤륜파의 사람들만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던 곳이었다. 아니 황보 자안은 당연히 그럴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층에는 곤륜파 의 사람들 외에도 다른 한 명이 올라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사 람들의 시선이 은근히 못마땅하게 그 사람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장내의 분위기를 기이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주범은 그 사람인 것 같았다. --거지. 그 사람은 일신에 여기저기 심하게 많이 기운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고, 봉두난발의 머리를 한 데다, 게다가 술 한 병을 앞에 놓고 엎드려 서 잠을 자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실로 말도 못할 심한 악취가 술냄새와 함 께 풍겨나오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백설같이 흰 것으로 보아 나이를 많이 먹 은 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은 일행에게 이러한 사 람이 나타나서 엎드려서 잠을 자고 있으니 곤륜파의 사람들이 다소 못마땅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개방의 사람일까?) 황보자안은 문득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노인이 개방의 사람이라면 출진자 등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것이고, 이렇게 서로가 말없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 노인도 혹시 강호의 기인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황보자안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속으로 들어 와서 태연하게 잠을 잘 정도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 었다. 헌데 황보자안이 내심 그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아래층에서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호아저씨가 오신 것일까?) 황보자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두 눈이 가볍게 휘둥그래졌다. 지금 주루의 아래층에는 한 명의 홍의낭자(紅衣娘子)가 나타나 세 명의 대 한들과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네놈들이 감히 본 낭자를 희롱하려고 하다니, 모두 죽고 싶으냐?" 맑고 앙칼진 홍의낭자의 음성이 주루 전체를 울리는 가운데 그녀가 등뒤에 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들고 시퍼런 검날을 이리저리 휘저어 보이자 상대 편에 서 있던 세 명의 대한들은 다소 안면이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갸우뚱거 렸다. "아니, 빌어먹을, 오늘따라 여기는 왜 이렇게 암코양이 같은 계집들만 모인 다는 말이냐? 설마하니 이 계집도 그 혈접처럼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겠 지?" "흐흐흐흐……" 바로 조금 전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터졌음에도 이러한 광경을 보자 사람들 은 다시 구경하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보자안이 놀라고 있는 것은 그런 사건이 연이어 두 번씩이나 터지고, 또 한 명의 아리따운 낭자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기실 이 홍의낭자는 매우 눈에 익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조차 틀 리지 않아서 황보자안의 기억에도 그녀는 분명히 바로 황보대장원에서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던 아평이 아닌가! --아평. 그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보자안 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아평은 어느새 크게 노하여 정면에 있는 대한을 향 해 장검을 비스듬하게 찔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런 곳에서 아평을 보게 되어서 크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게다 가 그녀가 무공마저 연성한 듯 보이자 더욱 놀라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었 다. 그 세 명의 대한은 아평의 용모가 아름답고 깜찍하도록 귀여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어서 십분 마음속으로 음심을 품고 있다가 그녀가 장검을 휘둘러 오자 다소 경악한 표정을 보였다. 그런데 의외에도 그녀의 검초가 단순히 비스듬히 찔러오는 초식으로 변화가 단순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위력도 없어 보였으므로 이내 옆으로 슬쩍 피하며 만면에 음소를 피워 올렸다. 헌데 그때였다. 마악 옆으로 신형을 옮겨서 대응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대한 이 갑자기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더니 부르르 몸을 떨며 그만 입을 딱 벌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황보자안도 다소 마음이 의아해졌다. 아평의 장검은 분명히 조 금 전까지만 해도 그 대한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금 은 시퍼런 검날이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 순간에 장 검의 검신이 한 자 정도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하 지만 무쇠로 만든 장검이 갑자기 한 자나 늘어날 리가 없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아평의 손에 의해 펼쳐졌다는 사실이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아평은 원래 이런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인가?) 황보자안이 내심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순간에 질겁을 하고 있는 대한 을 향해 아평이 앙칼지게 소리치고 있었다. "네놈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해보아라! 흥, 이제는 감히 할 수 가 없는 것이겠지?" 이에 그 대한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황급히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가 엉겁 결에 대답했다. "나, 나는 잠시 방심했을 뿐이다. 이런 상태로는 굴복할 수가 없다." 기실 그러한 말은 강호상에서 정정당당하게 비무를 겨루던 중에 잠시의 방 심을 한 사람이나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평은 강호의 경험이 적은지 대한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목줄기에 겨누었던 장검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원래는 저 대한 들은 그녀를 희롱하려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강호의 공도(公道)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좋다. 그렇다면 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지." 아평이 그렇게 말하면서 장검을 거두어들이자 그 대한은 멍하니 서 있다가 이게 웬 횡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그래? 이 계집이 아주 나를 우습게 보는군 그래!" 한 차례의 흉악한 표정을 지은 후에 대한은 즉시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귀 두도(鬼頭刀)를 뽑아 들어 두어 번 앞에서 사납게 휘저어 보인 연후에 아평 을 향해 겨누었다. "이 계집! 한 번 맛을 보여 주겠다!" 그것을 보고 다소 옆으로 물러난 다른 대한 하나가 음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흐흐, 네가 그녀에게 맛을 보여주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마라. 네가 그러 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연후에야, 흐흐흐, 맛을 보여줄 것이 아니냐?" 이에, "좋아!" 한소리 크게 부르짖으며 그 ㄷ한이 귀두도를 강맹하게 휘두르며 아평을 향 해 일시에 덮쳐갔다. 이 순간 아평은 옆의 대한이 말한 지독한 음담패설에 그야말로 화가 나고 창피해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다가 뒤늦게 그 대한의 공격에 맞서 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직 옆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다른 대한 하나 가 슬그머니 아평의 등뒤로 다가서는 듯하더니 날이 허옇게 선 갈고리 같은 무기를 들고 소리없이 그녀의 하체를 습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로 아평이 다른 대한의 음담패설에 내심 크게 마음이 격분해져 있 는 상황이라 아주 악랄하고 피해내기 어려운 음독한 암습이라고 할 수가 있 었다. 설혹 아평이 어쩌다가 뒤의 암습을 알아챘다고 할지라도 그때는 이미 시기가 늦어서 양쪽으로부터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있을지 의문인 것이었 다.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황보자안은 내심 크게 놀라서 급히 신형을 날려서 그녀를 구하려고 했으나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다시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뒤의 대한의 갈고리는 거의 붉은 경장 차림의 바지를 입은 아평의 두 다리 를 쓸어 버릴 순간까지 이르렀다. 앞의 대한은 이것을 보고내심 득의의 광 망을 두 눈에서 발하며 사나운 공격으로 아평의 시선을 애써 자신을 향하도 록 묶어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대한은 갑자기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평의 시선을 유인하기 위해 귀두도로 바싹 그녀의 가슴 부위를 위협하면 서 목 부위를 노리는 순간 갑자기 아평의 장검이 가볍게 원을 그리는 듯하 더니 환상처럼 그녀의 신형이 위쪽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자신의 몸은 급격 하게 앞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아평의 신형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빙글빙글 회전을 보인다고 느껴진 순간에 이미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튀기고 장내의 상황은 끝나 있었 다. "죽고 싶으냐?"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는 아평은 어느새 날이 시퍼런 장검을 예의 그 옆에 서 음담패설로 그녀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던 대한의 목에 바싹 들이대고 있 었다. "와아, 잘한다!" 아평의 거의 신기에 가까운 임기응변과 검술에 일순 넋을 놓았던 주위의 구 경꾼들이 일제히 소리를 치며 탄성을 보였다. 이것은 황보자안이 보기에도 실로 신비로울 정도로 놀라운 검술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여협 나으리." 검날이 목에 ㄱ누어진 그 대한은 아평의 서슬푸른 눈빛에 크게 질렸는지 눈 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새파래진 안색으로 애걸을 했다. 바닥에는 지금 귀두도를 휘두르던 대한과 갈고리를 휘두르던 대한이 서로 일순간의 공세를 회수하지 못하고 상대의 팔과 다리를 찔러서 일시 일어나 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아평, 네가 여기에 웬일이지?" 아평도 마악 대한에게 차가운 어조로 대꾸를 하려다가 문득 황보자안이 다 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대한의 목에서 장검을 치우더니 검집에 넣 고 인사를 올렸다. "나으리…… 나으리,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마리의 성난 암호랑이 같던 그녀의 태도는 지금 너 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다소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때 그 세 명의 대한들은 아평의 주변에 다시 황보자안과 곤륜파의 도인들 이 있는 것을 알고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는지 즉시 주루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주위에 몰려들어 구경을 하던 많은 사람들도 이것을 보고 더 이상은 재미있 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어지럽게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황보자안은 아평을 보고 문득 깊이 감동되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대를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실로…… 실로 뜻밖의 일이야. 그런데 그대는 아주 대단한 무공을 배웠더군?" 아평은 황보자안이 갑자기 너라는 말에서 그대라는 말로 반푼쯤 올려서 말 해주자 안색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대답했다. "그것…… 그것은 사연이 있어요." 물론 불과 일년 전까지만 해도 무공을 모르던 소녀가 이렇게 대단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황보자안은 다소 궁금하기는 하 지만 그러한 사연은 차차 알아보면 되는 것이고, 지금 자신이 손ㅇ르 잡고 있기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문득 생각난 듯이 이층 으로 그녀를 끌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우선 이리로 좀 와봐. 그대에게 소개해 드릴 분들이 있어." 황보자안은 말할 것도 없이 곤륜파의 사람들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아평은 조금 전의 앙칼지던 태도와는 달리 아주 온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 그리고 얼굴을 반쯤 붉힌 채 순순히 황보자안의 손길이 이끌려 갔다. 이때 이층에서 출진자 등은 역시 아평의 무공과 또한 그녀가 황보자안과 상 면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실은 별로 개의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원래 황보자안은 천하 제일의 거부 황보노야의 손자이기 때문에 이런 재주 있는 하녀쯤이야 항상 있을 수가 있는 일이고, 더욱이 황보자안은 곤륜파의 정식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문사형, 그리고 둘째 사형! 이 사람은 바로…… 바로 저의 친구입니다." 황보자안은 아평을 자신의 하녀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들에게는 친 구라는 말로 소개해 주었다. 기실 이 친구라는 말은 그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삼십육천강들은 이를 보고 왠지 다소 괴이쩍은 웃음 을 짓고 있는 듯 보였다. 아평은 황보자안이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해 주자 매우 황송한 기분이 들어 서 얼른 공손히 그들에게 절을 했다. "저는 이분 나으리의 하녀이고, 이름은 아평이라고 해요." 출진자 등은 이 소녀가 비록 검법이 신기막측하기는 해도 막상 황보자안의 하녀라는 말을 듣자 왠지 흥미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음, 그런가? 함께 식사라도 들지 그래?" 황보자안은 아평이 많은 남자도인들이 있는 곳에서 식사하기가 거북할 것 같아서 그녀를 자리가 넓은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보낼까 하고 생각했다. 헌데 그때 갑자기 그의 뒤에서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하나의 손이 있었다. (……?)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왠 한 명의 낯익은 얼굴이 사람좋은 기색으로 웃으 며 바라보고 있었다. "소공자 나으리, 그 동안 기체 평안하셨소이까?" 불그레한 안면에 호형의 인상, 배가 다소 나오기는 했어도 그 때문에 더욱 관대한 느낌을 주고 포용력이 있어 보이는 중년의 호상(好相)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일순 깜짝 놀라서 크게 반가워서 소리치며 그 중년상인의 손을 잡았다. "호아저씨! 이렇게 금방 와주셨군요." 중년상인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소공자 나으리께서 부르시는데 빨리 오지 않을 수가 있겠소이까? 이 몸이 비록 날아오지는 못했지만 연락을 받는 즉시 힘껏 뛰어오는 길이죠. 헌데 어디로 무공을 배우러 가셨다던데 신수가 훨씬 훌륭해지셨습니다 그려?" 그렇다. 이 중년상인은 바로 아까 황보자안이 찾아갔었던 용화객점의 주인 으로 행세하고 있는 책임자 호대해(胡大海)라는 사람이었다. 원래 황보대장 원에서 가끔씩 천하의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연회를 베 풀어주곤 했었는데, 이 호대해는 바로 난주성 부근의 황보노야의 기업을 책 임지는 사람으로 그런 연회장에서 황보자안과 대면한 적이 있었다. 당시 황 보자안의 나이는 어려서 그가 소공자라고 불렀었는데 지금도 그런 습관이 남아서 여전히 황보자안을 소공자 나으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가요? 호아저씨, 우선 이리 좀 오세요. 제가 아주 대단한 분들을 소개 시켜 드리겠어요. 이분들이 바로 저의 장문사형과 둘째 사형으로 무림에서 지위도 아주 높고 무공도 대단하신 분들이죠." 황보자안은 아주 신이 나서 현황자와 출진자에게 다시 호대해를 소개시켜 주었다. "장문사형, 둘째 사형! 이분은 바로 저희 할아버지가 경영하고 계신 난주 지역 기업들을 총괄하여 관리하고 계신 호아저씨세요." 그런데 현황자와 출진자는 황보자안이 고작 황보노야의 하인이나 다름이 없 는 사람을 자신들에게 소개시켜 주자 다소 귀찮고 무료한 듯 그저 응, 하는 투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호대해는 여러 다른 지역의 책임자들과 마찬가지로 황보노야와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의형제의 관계를 맺어온 사이이기 때문에 비록 황보자 안을 나으리라고 올려부르고는 있지만 출진자 등이 생각한 하인같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황보자안이 지금 아저씨라는 호칭을 쓰며 반쯤 존대 하는 말투에서도 알 수가 있는 일이거니와, 출진자 등이 만일 무림인이 아 니라 장사꾼이었다면 이 지방에서의 호대해의 입김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알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호대해라는 사람은 생긴 대로 성격이 그리 모나지 않고 겉으로는 그저 허허 하고 웃어넘기는 편이어서 출진자 등이 자신을 무시한 것을 개의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아평을 바라보더니 기이한 눈빛이 되어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헌데 이분 소저께서는 바로 소공자님의 친구분이신가요? 아하, 정말 두 분 이 용과 봉황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시로군요!" 기실 이 호대해는 아직 아평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 아평의 용모가 대 단히 아름답고 깜찍스러우며 등뒤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황보자안의 곁 에 다정하게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에 아평은 얼굴이 금새 새빨갛게 변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저는 그저 이분의 하인일 뿐이예요." 허나 호대해는 여전히 의미깊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알겠소이다. 하지만 원래 하인처럼 정성으로 받드는 부인도 있는 법 이니, 그 말이 다 그 말이 아니겠소이까? 허허허, 이 호대해가 작은 소저께 인사를 드리는 바이오." 아평은 그가 무슨 정성을 다하는 부인 어저구 하는 말을 하자 절로 가슴이 쿵쾅거리고 목덜미까지 빨개져서는 간신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저는…… 저는 아평이라고 해요." "아평이라…… 아주 예쁘고 좋은 이름이로군!" 이어 호대해는 사람좋은 표정으로 껄껄 웃더니 다시 황보자안을 향해 말했 다. "소공자,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놓으라고 지시를 내 려 놓았으니 어서 여러분이 모두 저희 객점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소이 까?" 황보자안은 마침 자신이 그런 부탁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이미 알아 서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하자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호아저씨." 그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서 출진자 등을 향해 말했다. "장문사형, 둘째사형, 호아저씨께서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놓으셨다니 우리 모두 용화객점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우리 호아저씨는 발이 넓으시 니 여러분들을 조금도 섭섭치 안헥 해 드릴 것입니다." 이때 출진자 등을 비롯하여 곤륜파의 제자들은 호대해가 자신들을 향해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다가 오히려 아평이라는 작은 계집을 향해 인사를 나누며 이름을 밝히는 것을 보고 원인이야 어쨌든간에 다소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미 황보자안의 대접을 받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던 차였기 때문에 다소 거슬리더라도 그저 아까처럼 응, 하는 대답으로 결정짓고 말았다. 이것을 보자 호대해는 혹시 그들이 생각을 바꿀까봐 걱정되기라도 하는 듯 이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일행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 주루의 많은 음식값은 모두 호대해가 지불하겠다고 한 것은 물론이었다. 곤륜파의 사람들은 다소 주저하는 듯했으나 출진자와 현황자가 호대해의 뒤 를 따라서 앞장을 서자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갔다. 황보자안 역시 상기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려다가 문득 한 가지 기이한 느낌이 들어서 주루 안을 둘러보다가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거지! 불과 조 금 전까지만 해도 술냄새를 풍기며 곯아떨어져 있었던 그 거지가 이 순간은 돌연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계속 아래층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지가 내려간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아주 기이하게 생각했 다. (그 거지노인도 역시 무림의 한 기인이었다는 말인가?) 황보자안은 이제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연속적으로 신비로운 무 림의 기인들을 만나게 되어서 다소 경이로운 기분이 들었다. <제2권 끝> --계속-- 번호:107/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6 길이:100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4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4장. 영웅병기점(英雄兵器店) 보아하니 곤륜파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 늙은 거지를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었으나 아평과 호대해 등이 나타나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바람에 미처 그 가 사라진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잠시 그 거지노인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일행의 뒤를 따라 신형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용화객점은 정말로 보면 볼수록 거대하고 웅장했다. 번화한 길 옆에 위 치하고 있으면서 용화객점의 불과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용화주루만 해도 아까 보았던 용문주루의 두 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규모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며, 가구의 화려함이나 구조의 현란한 아름다움, 고급스러운 장식들을 비교한다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호대해는 곤륜파의 일행에게 하나의 작은 궁전을 방불케 하는 호화로운 별 채를 내주었으며, 그들에게 얼마든지 앞의 용화주루를 이요할 수 있도록 했 으며, 또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곤륜파의 사람들은 원래는 이 호대해에 대해서 별로 선입관이 좋지 못했었 는데 그가 최고급의 값비싼 주루를 마음껏 무료로 이용하도록 해주고, 또한 따로 아주 진귀한 요리들이나 고급 술 등을 대접하며 각별히 대해 주고 있 는 것에 대해서 다소 들뜬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이 곤륜파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엄격하게 수련을 받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리를 지키며 쉽게 앞의 주루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무렵 황보자안은 스스로 움직이며 곤륜파의 사람들이 별채에서 편안하게 쉴 수가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는 등의 일을 하느라 다소 바빴으며, 이어 그들과 함께 있어 주려고 했었으나, 이내 아평의 재촉에 못이겨서 두 사람 은 따로 번화가로 나오고 말았다. 그녀가 이제까지의 사연에 대해서 말해준 다고 했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기실 곤륜파의 사람들은 은근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꺼려하고 그 역시 그들과 함께라면 다소 답답할 것도 같아서 핑 계김에 나오고 만 것이었다. 한창 저녁나절로 치닫고 있는 오후의 햇살은 봄날답지 않게 화창하게 넓은 길거리 곳곳을 내리쬐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옷색깔과 주 변의 화려한 전각들의 단청빛에 어울려 현란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거리는 우선 대로상을 가득 메우고 바쁘게 오가는 많은 사람들 과 길 옆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번화가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아평은 황보자안과 함께 이런 번화가에 나오게 되자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지 연신 얼굴에 미소가 감돌며 주변의 물건들을 향해 손짓 발짓을 해가며 얘기를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황보자안은 비록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으며, 또한 그와 같은 신 기한 검법을 배우게 되었는지가 매우 궁금했지만 그녀의 이러한 좋은 기분 을 망치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 역시 웃으며 함께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평이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나으리, 우리 어서 한 곳의 조용한 찻집으로 찾아가도록 해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서 물었다. "찻집이라니? 그런 곳으로 가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지?" 아평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으리께서는 그럼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세 요?" 조용한 찻집으로 가서 지난 날의 사연에 대해서 설명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 가운데에는 왠지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어떤 우연 적인 일이 아니라 필연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황보자안은 다소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황보자안은 즉시 그 사연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을 생각해서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곳으로 가서 만일 어떤 괴한들의 수작에 걸려들게 되면 어쩐 다지? 음, 그대의 솜씨를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인가?" 아평은 그가 자신이 아까 용문주루에서 펼쳐 보였던 장면을 상기시키는 바 람에 다소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으리의 무공이 훨씬 높을 텐데 제가 어찌……" 그런데 아평을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황보자안의 허리춤을 보다가 고개 를 들며 놀란 듯이 입을 열어 물었다. "어? 나으리께서는 어째서 장검 대신 목검을 차고 계시나요? 설마 아직 장 검을 구입하지 못하셨단 말인가요?" 기실 황보자안이 곤륜산의 그 절봉에서 무공을 수련할 때에 출진자 등은 별 로 그의 무공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그저 그가 요행히 무공을 터 득하면 좋은 일이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황 보자안이 검법을 수련할 때에도 그저 곤륜파에서 처음 입문하는 제자들에게 연습용으로 쓰도록 만들어 놓은 목검 하나를 가져다 주었을 뿐 진검은 한 번도 갖다주지 않았다. 이번에 황보자안은 곤륜파를 떠나오면서 평소에 연 습하면서 쓰던 그 반쯤 삭아버린 모검을 차고 나왔었는데, 출진자 등은 그 에게 관심이 없어서 미처 장검 한 자루를 챙겨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아평이 질문하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으나 일시 대답할 말이 궁 해서 그저 담담히 웃고 말았다. "응. 하지만 나야 뭐 정식으로 무림인이 된 것도 아니니까." 그 말에 아평은 일시 얼굴이 붉어지며 화를 벌컥 냈다. "흥! 내 처음부터 그 말코도사들이 공자님을 이렇게 대할 줄 알았다구요. 세상에 우리 공자님이 얼마나 귀하신 분이라고 감히…… 감히 이렇게 소홀 하게 대할 수가 있다는 거죠? 알고보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것들이……. 대체 공자님께서는 너무도 마음씨가 좋으세요. 어째서 그런 자들에게 그토 록 잘 대해 주시려는 거죠?" 아평은 너무나도 크게 화가 난 듯이 얼굴이 붉어지며 말조차도 더듬을 정도 였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별로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은 것은 틀림이 없지 만, 그건 그들의 규율이 엄격해서이고, 또한 소탈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지. 게다가 그들의 무공은 매우 대단하여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 니지." 아평은 일시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했으나 황보자안이 그들에 대해서 열심 히 변명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우리 어서 그곳으로 가보도록 해요." 황보자안이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곳이라니?" 아평은 방긋 미소를 떠올리더니 그의 양손을 잡아끌었다. "공자님의 병기를 사려면 그야 병기점밖에 더 있겠어요?" --계속-- 번호:108/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6 길이:31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5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5장. 두 자루의 보검(寶劍) 이 아평의 정성은 실로 대단했다. 그녀는 즉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서 난주성내에서도 가장 커다란 병기점 하나를 찾아내었고 황보자안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 병기점은 영웅병기점(英雄兵器店)이라는 아주 그럴 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번화한 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나게 커서 황보자안이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떤 병기점보다도 커다란 것 같았다. 이 병기점에는 마치 천하에 있는 모든 병기들을 일시에 모조리 모아놓은 것 같았는데, 기실 그 이유라는 것은 이 부근은 워낙에 산세가 험하고 도적들 의 출몰이 잦을 뿐만 아니라 험악한 일이 자주 벌어지고, 또한 아주 먼 산 속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으로 병기를 사러 오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아평은 그 거대한 규모에 처음에는 다소 의외인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을 불러내었다. 주인은 키가 조금 땅딸하고 목이 매우 짧았으나 전신의 체구가 아주 다부지 고 두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마저 솟아나오는,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다만 거칠게 보이는 사내의 두 눈은 연신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그 의 성격이 외모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이 주인은 원래 사소한 손님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아평이 처음부터 워낙에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와서는 다소 못마땅한 어조로 이렇게 물 었다. "어떤 병기를 사겠다는 거요?" 아평은 이 주인이 처음부터 이렇게 뜨악한 태도로 나오자 다소 불쾌한지 아 미를 살짝 찌푸리더니 대꾸했다. "우리는 이 병기점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을 사러 왔어요. 어디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지 한 번 봐야겠으니 꺼내봐요!" 주인은 이 작고 아름다운 낭자는 이미 등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는 것 이 보이고, 고개를 돌려보니 낡은 도포를 걸친 황보자안이 허리에 목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병기를 구입할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 다. 하지만 지금 황보자안의 행색이 다소 초라한지라 아평의 말을 쉽게 믿 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평이 이를 보고 약이 바짝 올라서 소리쳤다. "이봐요, 우리가 은자가 없을 것 같나요?" "……" 주인은 아평의 앙칼진 음성에도 아랑곳없이 그저 형형한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황보자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열고 그 속 에서 은표 꾸러미를 꺼내서 그 주인에게 보여 주었다. 원래 황보자안은 일 년 전에 집을 떠날 때에 주머니 속의 보석 외에도 임시 사용할 수 있도록 수천 냥의 은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곤륜산으로 가는 도중에 적 성자가 주로 돈을 썼고, 다시 곤륜파에서는 전혀 돈을 쓸 일이 없었으니, 자연히 이렇게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은표들은 비록 세월이 지나서 다소 낡았지만 틀림이 없는 것이었고, 그 런 점은 한눈에 봐도 알 수가 있는 것이었다. 과연 이 무뚝뚝한 주인은 은표를 알아보게 되자 대번에 눈치가 달라졌다. 그가 만일 황보자안의 품속에 있는 작은 주머니 속의 온갖 보석들까지 보았 다면 아마 더욱 더 놀랐을 것이었다. "헤헤헤, 원래가 이분은 부잣집 도령이셨군? 헤헤헤……" 주인은 황보자안과 같이 초라한 행색의 사람이 그처럼 많은 은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아평은 그 괴상맞은 웃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얼른 소리쳤다. "어서 우리에게 병기를 보여주지 않고 뭘해요?" 주인은 이에 허리를 굽신거렸다. "물론 보여드려야 합죠. 암……. 헤헤, 어서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키가 작은 그가 허리를 굽신거리자 마치 아주 작은 어린애 같았는데, 그는 이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다음에 안쪽으로 두 사람을 인도했다. 이 병기점의 넓은 점포 안에는 그야말로 빽빽하게 많은 병기가 진열되어 있 었고, 수많은 종류와 수많은 양의 병기들이 빼곡하게 병기가에 들어차 있었 는데, 주인은 그 병기가를 오락가락하며 입을 열었다. "저희 영웅병기점이야말로 이곳 난주성 일대에서뿐만 아니라 중원 천하를 뒤지더라도 크게 손꼽을 수가 있는 병기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죠. 두 분께 서 저희 병기점을 찾아주신 것은 그야말로 두 분의 안목을 넓히시는 계기가 되는 것일 것입니다요. 그래, 두 분께서는 어떤 병기를 원하십니까?" 이어 황보자안의 허리춤에 걸린 목검을 슬쩍 바라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물론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는 검을 원하시겠죠?" 아평도 역시 황보자안이 검법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이 며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는 검을 살 거예요."' 주인은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며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십시오. 천하의 검이라는 것은 다 이곳에 모여 있는 셈이지요." 주인의 인도를 받아서 병기가의 한쪽을 돌았을 때 아평과 황보자안은 일순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사방을 빽빽하게 메운 병기가에는 실 로 수천 자루의 장검이 가득하게 진열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숫 자의 장검이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평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뭐가 못마땅한지 아미를 살짝 찌푸 렸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이 쓰다버린 중고품들이고, 새것이라고 해야 별 로 신통한 것이 보이지 않는군요. 다른 것들은 없나요?" 원래 아평은 처음부터 과장되게 최고로 값비싼 것 운운했기 때문에 기왕이 면 아주 좋은 것으로 사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여기에 있는 것들 중에서 절반은 네년이 가지고 있는 장검보다 도 우수한 것이다.) 주인은 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손님께서 원하시면 없는 것이라도 만들어 내는 것이 소인들의 재주입 죠. 그래, 보다 쓸 만한 것들을 구경하시겠소?" 아평은 눈살을 짙게 찌푸렸다. "당신은 쓸데없이 말이 많군요. 우리 공자님의 은표를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주인은 일시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는 듯했으나 이내 헤헤거리며 웃으며 고개를 굽신굽신했다. "그야 이를 말이겠소, 이를 말이겠소. 어서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주인은 병기점의 뒤쪽으로 걸어나가며 두 사람을 인도했다. 병기점의 뒤쪽 으로는 천정이 낮고 음침한 분위기가 감도는 복도가 이리저리 꾸불꾸불하게 나아가고 있었는데, 아평은 느닷없이 주인이 이런 곳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오자 은근히 등뒤의 검자루를 잡으며 경계의 눈빛을 했다. 사실 아평은 이곳 난주성까지 오면서 제법 많은 강호 경험을 했었을 것이었 다. 그녀는 지금 자칫하면 어떤 술수에 걸리게 될지 알 수가 없으므로 스스 로 황보자안의 하인을 자처하여 그를 보호해 주려는 것이었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갈지자 형의 꾸불꾸불한 복도를 얼마쯤 나아가자 문득 막다른 벽 앞에 이르렀다. 하지만 물론 그곳은 막다 른 곳이 아니었다. 주인이 앞에서 바닥의 한 면을 들어올리자 거기에는 어 두운 지하 계단이 아래쪽으로 내리뻗어 있는 것이었다. 아평은 혹시 그가 무슨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얼른 주인의 곁에 바싹 다가서며 차갑게 물었다. "이 안에 병기가 있다는 말인가요?" 주인은 아평이 등뒤에 검자루를 잡고 있는 데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아주 태연한 얼굴로 능글능글하게 대꾸했다. "물론 안에 병기가 있으니까 소인이 두 분을 모시고 들어온 것이 아니겠습 니까?" 아평은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능글맞은 것이 심한 혐오감을 주는지라 더 이 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럼 어서 우리를 안으로 인도하기나 해요!" "헤해, 예예." 주인은 다시 허리를 굽신거리다가 계단의 한쪽에서 하나의 등잔을 들어 불 을 밝히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평과 황보자안은 다소 주저했으나 이내 그 뒤를 바싹 따르기 시작했다. 만일 이 주인이라는 작자가 정말 생긴 대로 어떤 가증스러운 음모라도 꾸민 다면 그 뒤를 바싹 따르는 한은 얼마든지 그 난관을 극복할 수가 있으리라 는 생각에서였다. 이 지하실은 오랫동안 사람이 다녀가지 않았는지 곳곳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평은 주인이 계단의 좌우에 걸려 있는 등불에 불을 밝혀갈 때만 해도 다 소 긴장했으나 이내 그가 계단을 다 내려가서 하나의 철문을 열었을 때에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 석실의 내부는 바로 또 하나의 병기고였던 것이 었다. 다만 이곳 역시 사방에 먼지가 수북하고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평은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우리에게 골동품을 구경시켜 주려고 온 건가요, 아니면 진 짜 명검을 구경시켜 주려는 건가요?" 주인은 기이하게 웃으며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야 두 분께 그야말로 절세의 보검들을 구경시켜 드리려는 것이지요. 이 제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곳에는 바로 전대의 신병이기들만을 모아 놓았답 니다." (전대의 신병이기?) 아평은 주인이 그렇게 떠벌리자 내심 다소의 호기심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주인은 이어 장검들이 걸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한 자루의 고색창 연한 빛이 검집과 검ㅈ루에 어려 있는 한 자루의 장검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 보검이야말로 옛날에 그토록 이름을 떨쳤던 용천(龍泉), 태아(太阿) 두 가지 중에서 바로 태아검입죠." 아평도 귀동냥으로 태아검이 전대에 아주 유명했던 보검이었다는 얘기를 들 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즉시 놀라서 주인의 손에서 그 고색창연한 장검을 받아들고 검집에서 뽑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평의 손에 의해 검집에서 뽑혀나온 장검의 검날은 눈이 부시게 휘황찬란한 것이기는커녕 그저 이미 이가 무수하게 빠지고 녹 이 심하게 슬어 있는 쓸모없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에 아평은 일시 장검을 든 손을 한 차례 부르르 떨다가 즉시 차갑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감히 나에게 장난을 치자는 것인가요? 이게 대체 무슨 뜻이죠?" 그녀의 음성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자 일시 석실의 내부는 빙굴 속에 빠진 듯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인은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흐, 무슨 뜻이냐니? 보면 알게 될 것이 아니오? 그 보검은 원래는 아 주 좋았는데,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다보니 그 모양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 오. 두 분께서는 원래 보검을 원한다고 했으니 그것을 사시는 것이 어떻겠 소?" 아평은 검자루를 살펴보아도 전혀 태아검이라는 이름조차 없는 것을 보고 이 장검은 전대의 태아검도 뭣도 아닌 그저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결국 이 주인은 눈앞의 두 사람이 그저 돈많은 철부지 애 송이들이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아평은 일순 분노감에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지만 억지로 마음의 격동을 억 누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그것을 사지 않겠다면 어쩔 셈이죠?" 주인은 문득 흉폭한 본성을 드러내며 간악스럽게 웃어젖혔다. "흐흐흐, 굳이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지." 이어 주인은 사방을 바라보며 손뼉을 탁탁 쳤다. 그러자 뜻밖에도 사방의 천정이 갈라지면서 그 위에서 일순 서너 명의 장한들이 병기를 휘두르며 비 호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평의 표정이 일시에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그 주인은 득의의 흉소를 날리며 방금 나타난 장한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어서 그 년놈들을 제압해라! 다만 그 계집은 제법 쓸 만해 보이니 다치지 않도록 사로잡도록 해라. 흐흐흐……" 장한들은 즉시 대답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가운데에 에워싸며 살벌한 기세 로 질풍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평은 이 순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바로 그 녹슬은 고철장검이었는데,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본 주인은 즉시 장한들이 포위공격하고 있는 테두리에서 멀찌감치 벗어나서 그녀의 공세에 서 우선 벗어나려고 했다. 주인의 무공도 상당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원래 장한들을 시켜서 사람을 제압하게 하는 일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장한들이 맹렬하게 포 위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공격권 밖에 서 있는 자신은 안전하리라고 생각했 으나, 아평이 문득 앞으로 다가드는 장한을 향해 고철장검을 휘두르자 기이 하게도 그 장한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옆의 장한에게 부딪쳐 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은 놀라 내심 소리쳤다. (저, 저런 멍청이가! 저렇게 되면 포위망이 뚫릴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비틀거리는 장한 때문에 그 옆의 장한마저 행동반경이 좁아져서 바로 그 사이로 포위망을 벗어날 공간이 생겨났다. 마치 그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듯이 아평의 신형이 빠르게 포위망의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실로 그 순 간만 해도 주인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믿고 있었고, 설령 자신이 그녀에게 다소 밀린다고 해도 다시 장한들이 돌아와서 합세를 한다면 유리한 형세를 변화시킬 변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헉, 제법이로구나!) 주인은 내심 그렇게 외치며 몸을 옆으로 날림과 동시에 그쪽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 들어 아평에게 마주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요, 착각일 뿐이었다. 미처 그의 손이 장검을 검집에 서 뽑아내지도 못했는데 문득 목 부위가 서늘해서 내려다보니 느닷없이 아 평의 고철장검의 검날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장 밖에 있었던 그 고철장검이 어떻게 이토록 빨리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가 하고 믿을 수 없어 하며 경악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그가 후회를 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아평은 실로 신비로운 검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에 용문주루에서 펼쳤던 두 가지의 수법을 이번에는 거꾸로 펼쳤던 것이었다. "이 고철장검이 과연 그대의 목줄기보다 강한 것인지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할까?" 이미 작정을 하고 주인을 제압한 아평의 어조는 강한 살기가 어려 있었고 싸늘하여 순간 주인은 식은땀을 절로 줄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서너 명의 장한들은 아직도 황보자안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다가 문득 이 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급히 손속을 멈추고 멍하니 서 버렸다. "아, 아니오, 소저! 소인이 잘못했소이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살려 주 시오!" 제아무리 목줄기에 천하의 철갑신공을 연성했다고 하더라도 고철장검과 어 느 것이 강한지를 시험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웃으며 수작을 부리던 주인은 즉시 안면이 사 색이 되어서 벌벌 떨어댔다. 이 어여쁜 홍의낭자가 실은 아주 악착같은 면 이 있어서 자칫하면 정말로 자신의 목을 내리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평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살려달라고? 우리에게 감히 더러운 수작을 걸 때는 언제고? 좋아! 내가 만 약 너를 살려준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 거지?" (이익?) 주인은 순간적으로 두 눈을 재빨리 굴리며 생각했다. (비, 빌어먹을! 이 조그만 년이 제법 손익을 따리조 있군 그래.) 아평은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손아귀에 힘을 주며 다시 소리쳤다. "흥! 할말이 없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할 수가 없는 일이군!" 말과 함께 장검을 잡고 있던 손을 빠르게 움직이자 주인의 굵직한 목줄기에 한 줄기 혈흔이 길게 생겨서 선혈이 배어 나왔다. 원래 아평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당했기 때문에 노화를 참기가 어려워서 이 자를 한 번 심하게 골려주려는 의도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사 자인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시에 가슴 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인은 놀라서 급히 소리쳤다. "아, 아니올시다! 드, 드리겠소! 아주 엄청난 보검을 드리겠소이다!" 이 말은 주인으로서도 생각지도 않게 튀어나온 것이었는데, 막상 그 말을 꺼내고 나자 다시금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교활하게 생각해 보는 눈치였 다. 아평은 그가 뜻밖에도 그와 같은 대답을 하자 다소 흥미가 일어서 더욱 검 날을 그 자의 목줄기에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뭐라구? 또 우리를 속이자는 게 아니냐?" 고철장검이 주인의 베어진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검신에서 한 줄기의 설 혈이 뚝, 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리자 주인은 더욱 놀라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서…… 어서 너희들은 내 책상으로 가서 두 번째의 서랍을 열고 노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가져오너라!" 뒤의 말은 물론 주인이 장한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장한들은 이제까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주인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저마다 앞을 다투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불과 숨을 몇 번 쉬지도 않은 사이에 벌써 두 명이 각각 한 개씩의 노란 보 자기에 싸인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말했다. "나리, 그 두 번째의 서랍에는 이 노란 보자기에 싸인 것이 두 개나 있었는 뎁쇼. 그래서 우리는 두 개를 다 가지고 왔는데, 마, 맞습니까요?" 주인은 그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욕을 했다. (이 죽일 멍청한 놈들! 두 개가 있으면 하나만 가지고 올 일이지. 내가 오 늘 그것을 입수해서 둘로 갈라놓는 것을 잊었군. 하지만 내가 하나만 가지 고 오라고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지.) 주인은 장한들이 지금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가져온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아평에게 제압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것을 어서 이분 소저께 드리도록 해라!" 장한들은 주인의 말이 떨어지자 서로 앞을 다투어 아평에게 노란 보자기에 싸인 물건들을 공손히 갖다바쳤다. 아평은 그것들을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받아들고는 둘 다 한 자루씩의 장검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황보자안에게 입을 열었다. "나으리, 저 대신 이 물건들을 좀 확인해 주시겠어요?" 아평은 실로 이 주인이라는 녀석이 심보가 흉악하고 교활하여 이대로 놔주 면 필시 앙갚음을 해올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 자의 목 줄기에 겨눈 장검을 치우지 않았다. 황보자안은 담담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두 개의 보자기를 받아들고 그 두 개의 보자기를 풀자 두 자루의 검집에 채워진 장검들을 손에 들게 되었 다. 아평은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나으리, 어서 그 장검들을 검집에서 뽑아 보세요." 아평은 이미 조금 전에 주인에게 고철장검을 가지고 보검이라고 놀림을 당 했기 때문에 즉시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좋아."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우선 하나의 검자루를 쥐고 검신을 검집에서 뽑 아 보았다. 이 검신은 거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런데 황보자안이 검집에서 검을 뽑는 순간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은 기이 하도록 서늘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검의 형상을 보고 다시 한 번 어리둥절 해졌다. 검신은 까맣고 조금도 광택이 없어서 마치 한 토막의 검은 나무와 도 같았는데, 검의 끝부분도 뾰족하지 않고 뭉툭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 렇게 무딘 한 토막의 나무막대기와 같은 장검을 어디에다 쓸 것이며, 또한 어찌 보검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황보자안은 이어 다른 장검도 검집에서 뽑아 보았는데, 기이하게도 그 검의 형상 역시 앞의 것과 똑같았고, 다만 검신의 중앙에 군자(君子)와 숙녀(淑 女)라고 각각 새겨져 있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군자검과 숙녀검이라…… 과연 남을 해치지 않는 면에 있어서는 그 이름이 아주 걸맞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황보자안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아평은 다시 안색이 차갑게 변해 서 고개를 돌려 주인을 쏘아보았다. 비록 이름이야 멋진 장검이라고 할 수 가 있지만, 그러나 장검은 원래 남을 베기 위해서 만드는 것인 만큼 어찌 저런 것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주인은 아평이 자신에게 다시 속임수를 썼다고 여기는 것 같아서 심장이 튀 어나올 것처럼 놀라서 급급히 소리쳤다. "아니오, 아니오! 어서 그 검으로 바닥을 한 번 그어 보면 알게 될 것이 오." (……?) 황보자안은 이 주인의 어조에 거짓이 섞여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다소 기이 한 기분으로 그의 말대로 장검을 바닥에 그어 보았다. 원래 이 석실의 바닥은 두터운 청석으로 만들어져서 도끼로 한 번 내리친다 고 해도 잘 쪼개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보자안이 그저 무심코 장검 의 끝으로 바닥을 그었을 뿐인데 즉시 사악,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닥 에는 한 줄기 예리한 선이 길게 그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에 비단 황보자안도 놀랐을 뿐만 아니라 아평과 또한 부근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장한들도 덩달아 놀랐다. 겉으로는 뭉툭해 보이는 이 두 자루의 장검은 알고 보니 속에 신기를 감춘, 금석을 무우 베듯하는 절세 의 신병이기였던 것이었다. 무공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르기 이전에는 병기의 위력에 의존하게 되는 데, 이런 신병이기를 갖게 되는 것은 갑자기 무공이 수배는 높아진 것과 같 은 것이어서 두 사람은 마음으로 매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이 매우 신기한 느낌이 들어서 군자검으로 계속해서 바닥에 선을 그어 보는 것을 보고는 주인이 이때 소리쳤다. "자, 이제 보검을 드렸으니 어서 그만 나를 풀어주시오." --계속-- 번호:109/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7 길이:33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6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6장. 무명검초(無名劍招) 아평은 뜻하지 않게 이와 같은 신병이기를 얻게 되어서 마음이 크게 기뻤으 나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대꾸했다. "아직은 안돼요. 당신은 필히 우리를 안전하게 배웅을 해줘야 하는 것이 아 닌가요?" 주인은 아평의 일처리가 거의 빈틈이 없음을 보고 내심 다시 욕을 퍼부었 다. (빌어먹을!) 무슨 생각이 있는지 불쾌한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웃음을 떠올리며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좋소. 그럼 어서 밖으로 나갑시다." 아평은 한 차례 황보자안과 눈길을 주고받다가 여전히 주인의 목에 장검을 겨눈 채로 천천히 뒤따라 나갔다. 일행의 밖의 병기점에 도착하자 아평은 그제서야 주인의 목에서 그 고철장 검을 떼어내어 한쪽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이렇게 밖으로 나온 이상은 그 들이 제아무리 수단을 부린다고 해도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이 었다. "호호, 고마워요. 우리에게 이런 보검까지 선사하시고, 또한 이렇게 배웅까 지 해주셨으니. 그런데 이 보검은 어떻게 계산해 드릴까요?" 주인은 목에 장검이 치워지고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자 일순 두 눈에서 악독 한 안관을 번쩍 발출했다. 허나 이내 그는 기이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 대꾸하는 것이었다. "헤헤, 무슨 말씀을. 두 분께서 소인을 용서해 주셨으니 그 두 자루의 보검 은 그냥 드려야 합죠." 이것을 보고 황보자안이 웃으며 품속에서 예의 그 은표 다발을 꺼내서 앞으 로 내밀었다. "그럴 수야 없는 일이지. 자, 이 정도라면 됐소?" 무려 수천 냥에 달하는 은표를 보게 되자 주인의 두 눈에서 일순 강한 탐욕 의 불길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미처 그가 은표 다발을 받아들기 전에 먼저 아평이 손을 뻗어서 가로채 버렸다. 그녀는 작고 예쁜 손가락을 빠르 게 놀려서 전체의 은표에 적혀진 액수를 계산해 본 다음에 물었다. "보아하니 당신이 저 보검들을 입수하게 된 것은 제값을 받고 얻은 것이 아 닐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당신처름 강도가 아니니, 보검 하나에 은자 천냥 씩, 모두 이천냥이면 되겠지요?" 주인은 이에 내심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은자 천냥에 그런 보검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누구라 도 다 그런 보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보검 하나에 은자 천냥으로 치는 아평의 계산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만일 보검을 거리에 내다놓고 경매를 한다면 무려 수만 냥도 받을 수가 있는 희 귀한 것이어서 이 주인의 생각도 틀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주인은 왠일인지 묵묵히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조, 좋소." 따라서 아평은 은표 가운데에서 이천냥에 해당되는 액수를 그 자에게 나누 어 주고 남은 이삼천 냥에 해당되는 은표를 다시 황보자안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웃으면서 받지 않았다. "나는 아직 많이 있으니 그대가 갖도록 하구려." 황보자안은 자신이 이미 보검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알뜰하게 사용하여 남긴 것은 아평이므로 그것은 그녀의 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아평은 잠시 주저하며 생각하다가 다소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제가 감히 이 많은 돈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하지만 나으리께서는 공연히 이와 같은 물건을 지니고 계시기가 불편　 것이니 제가…… 제가 나 으리의 옆에서 대신 계산해 드려도 되겠어요?" 기실 이 아평은 비록 천하제일의 부자집의 하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 자신이 부자는 아니기 때문에 이번의 강호행에서도 그다지 몸에 지닌 은자 가 풍족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남자도 아닌 여자로서 강호를 떠도는데 몸에 지닌 은자가 떨어지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해 지지 않겠는가? 황보자안은 이 아평의 순간적인 눈빛에 뭔가 깊은 의미가 깃들어져 있는 것 을 알아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도록 하시오. 그대가 대신 써 줘도 좋고, 아니면 아예 그대가 모두 가져 도 상관없는 일이오." 아평은 이에 곧 공손하게 절하면서 답례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황보자안은 갑자기 그녀가 그와 같은 격식을 갖춘 절을 자신에게 하자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마침 들고 있던 두 자루의 장검 중에서 숙녀검을 그 녀에게 건네주며 다시 말했다. "참, 나는 두 개의 장검은 필요가 없으니 이 숙녀검은 그대가 갖도록 하시 오." 기실 이 숙녀검은 군자검과 아주 똑같아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므로 지 불한 금액 은자 일천냥이 아니더라도 아평이 따로 보관한 이삼천냥의 은자 보다 더욱 귀한 물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평은 아까는 다소 사양하는 기미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저없이 얼굴을 다소 붉히며 순순히 그 숙녀검을 받아서 허리춤에 소중하게 차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도 은근히 부드러운 기운이 이는 것이 아마도 이 숙녀검을 다소 특별하게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저는 이 검을 차고 다니다가 임자를…… 만나면 돌려드리겠어요." 항보자안은 일시 그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으나 개의 하지 않고 즉시 자신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목검을 뽑아 버리고 대신 그 자 리에 군자검을 검집째 채워 놓았다. 그러자 마치 그의 모습이 일순 아주 근 사한 영웅귀골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평은 마치 홀린 듯이 멍하니 그런 황보자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 각난 듯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이번에는 포목점으로 가도록 해요." 이때 병기점의 다소 으슥한 구석에서 주인이 아직 들어가지 않고 멀어져 가 는 두 사람의 뒷등을 기이하고 사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평은 즉시 황보자안을 근처의 커다란 포목점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낡은 백색도포를 새옷으로 갈아입힐 요량으로 주인에게 물어서 몇 벌의 아주 최 고급의 남자 비단옷을 샀다. 그녀는 이어 꼼꼼하게도 남자 속옷 몇 벌과 자 신이 입을 여자옷을 수수한 것으로 한 벌 샀는데, 붉어진 얼굴로 이렇게 말 했다. "우리 객방을 하나 얻도록 해요." 기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은 자신이 황보자안의 은표로 자기 옷을 한 벌 샀다는 데에 기이하게 마음을 설레고 있었던 것일 뿐 결코 객방에 가서 무슨 다른 짓을 하는 것을 상상하고 얼굴을 붉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목점의 주인은 이것을 보고 은표를 받아들어 거스름돈을 계산하며 내심 이렇게 욕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요즘 것들은 이런 훤한 대낮에도 그 짓을 하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는 말인가? 생긴 것과는 달리. 사람은 정말 겉만 보고 그 속을 알 수 가 없다는 말이야!) 처음에는 아평의 어여쁜 용모를 보고 은근히 음심이 동해서 입을 벌리고 웃 고 있던 그 주인은 이어 마치 아주 더러운 물건을 보기라도 한 듯이 손만 내밀어 거스름돈을 주고는 아예 그녀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평은 물론 한창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러한 주위의 상황을 아 랑곳할 리가 없는 상태였다. 황보자안은 그녀가 옷도 갈아입을 겸해서 사연을 얘기할 장소로 객방을 잡 자는 의도를 금방 파악하고는 즉시 함께 부근의 객점으로 향했다. 황보자안과 아평이 잠깐 동안 빌려서 들어간 그 객점은 이름은 알 수가 없 었지만 난주성 내에서 대략 중간쯤 가는 객점으로 호화롭지는 않지만 깨끗 하고 아늑한 면이 있었다. 아평은 우선 황보자안에게 욕실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씻도록 하고, 그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자신이 직접 손수 그의 얼굴에 돋아난 수염을 깎아 주는 등의 아주 세심한 정성을 보였다. 이 황보자안은 원래가 준수한 용모를 타고났고, 또한 지난 일년 동안 거칠 게 생활해 왔으나 그로 인해 더욱 대장부의 기질을 느끼게 해주어서 지금 이렇듯 새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하게 하자 그야말로 아주 준미수려한 귀공자 로 변해 있었다. 머리를 잘 빗어서 뒤로 묶어 깨끗하게 하고 이어 군자검까지 허리춤에 채워 주고 나서 아평은 잠시 물러서서 홀린 듯한 표정으로 황보자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평도 이미 조금 전에 새로 산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황보 자안은 이 아주 깜찍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계속 쉬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만 있자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참, 대체 그대는 어떻게 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 아평은 잠시 멍하니 꿈을 꾸는 듯한 환상에 빠져 있다가 황보자안의 말소리 를 듣고는 흠칫 놀라서 붉어진 얼굴로 황보자안의 다른 새옷과 자신의 의복 을 작은 보따리에 잘 싸 놓으면서 대답을 했다. "저는 사부님으 지시를 받고 나으리를 돌보기 위해 온 것이예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사부님이라니? 그대가 언제 무공 사부를 모셨었소?" 그 말에 아평은 오히려 더욱 의아한 듯이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이렇게 되묻 는 것이었다. "아니, 모르고 계셨었나요? 저의 사부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나으리의 사부님이세요. 저는 그분에게 무공을 배우게 되었어요." 황보자안은 문득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백리노대가? 설마 그가 무공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믿을 수가 없는 일 이군. 내가 만일 그것을 알았었다면 왜 굳이 머나 먼 곤륜파에까지 가서 무 공을 배웠겠소?" 이 백리노대는 바로 황보자안의 글선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평은 황보자안이 이렇게 말하자 더더욱 알 수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분은 말씀하셨어요. 당신께서는 무공을 알고 계셨지만, 나으리께서는 차 라리 곤륜파로 가는 것이 이로울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고. 하지만 그가 어째서 나으리께 무공에 대해서 숨기고 있었을까요? 정말 이상하네 요." "……" 황보자안이 다소 기이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아평은 이어 말했다. "저는 나으리께서 곤륜파로 떠나시자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서 가끔씩 시간 이 나면 그분께 음식을 갖다 드리며 나으리의 일을 생각하곤 했었지요. 그 런데 어느날 그분께서는 저에게 무공을 한 번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 "저는 무공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가 무공을 익히면 나으리께 도움을 드릴 수가 았다는 말씀에 그만 그분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무공을 배우게 되 었어요. 저는 그분께 몇 초의 장법과 검법, 내공심법 따위를 배우게 되었는 데, 그분께서는 저더러 총명하고 진전이 빠르다고 가끔씩 칭찬을 하시고는 했어요." 황보자안은 물었다. "그대가 얼마 전에 펼쳐 보였던 검초들이 바로 그에게 배웠던 것들이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분께서는 불과 몇 초의 무공만을 전수해 주셨지만 저는 이번에 이쪽으로 오면서 그 검초로써 능히 악적들의 손에서 충분히 몸을 지킬 수가 있었어요. 만일 그분께서 그 검초들을 좀더 가르쳐 주셨다면, 저는 이미 무 림의 일류고수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아평은 잠시 그 백리노대를 생각하는지 다소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황보자안은 다시 물었다. "그 검초의 이름은 뭐요? 그리고 어째서 그가 당신에게 검초를 모두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말이오?" 아평은 순순히 대답했다. "검초의 이름은 저도 그분에게 듣지 못했기 때문에 몰라요. 그냥 무명검초 (無名劍招)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리고 제가 그분께 검초를 마저 배우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분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예요." "돌아가셨다고?" 황보자안은 일순 더욱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분은 아마도 천하에 드문 현인(賢人)이셨던 것 같아요. 그분은 임종시에 제가 이쪽으로 오면 나으리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분은 강호의 일에도 훤한 무림인이면서도 굳이 자신 의 무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닐 거예 요." "……" 황보자안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평은 말을 이었다. "노야께서도 이미 제가 그분께 무공을 사사받은 일을 알고 계시고, 또한 이 번에 제가 나으리를 만나러 오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에게 만약 다른 뜻이 있었다면 어째서 노야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장례까지 치뤄 주셨 겠어요?" 황보자안은 천천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백리노대는 그의 글선생으로 내심 존경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부고를 받고는 어찌 놀라고 상심되지 않겠 는가! 아평이 옆에서 물었다. "나으리, 절대로 그분을 의심하지 마세요. 그분은 아주 좋으신 분이셨어요. 항상 나으리의 얘기를 하셨고, 나으리께서 잘 되기를 진심으로 빌고 계시는 분이셨어요." 아평은 이미 그 백리노대에게 감복을 당한 상태여서 그를 위해서 황보자안 에게 애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문득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를 의심하겠소?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소. 다만 그가 돌아가신 것이 상심될 따름이지." 말이 끝나자 황보자안은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아평도 보따리를 들고 뒤따 르면서 연신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문득 왠지 알 수가 없다는 복잡한 표정 을 지어 보였다. 황보자안과 아평이 용화객점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저녁 무렵이라 곤륜 파의 사람들은 용화주루의 한 호화로운 특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호대해가 갑자기 황보자안을 부르더니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쟁반 위에 황금 열냥짜리 금원보 오십개가 들어 있는 것을 손수 들고 가서 제자 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황금 오백냥이라고 하는 것은 은 자로 치면 만냥도 넘는 금액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금액 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기실 곤륜파의 제자들은 비록 엄격한 규율하에서 생활해 오고 있기는 하지 만 가끔씩은 스스로 은자를 필요로 할 때도 있는 법이어서, 이번에 그들에 게 은자 이백냥도 넘는 금액인 황금 열냥씩을 준다는 것은 아주 적적한 선 심공세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호대해는 이미 출진자 등이 자신을 처음부터 무시했기 때문에 자 신이 직접 그것들을 가져다 주기는 싫고, 황보자안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황보자안이 인심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때 아평은 은근히 곤륜파 사람들이 황보자안을 소홀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그들에게 각각 황금 열냥씩을 준다고 하자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평이 말굽 모양의 아주 예쁘게 생긴 열냥짜리 금원보를 보며 사랑스럽다 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보자안이 문득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예쁘다면 우선 그대가 하나 갖지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 허나 아평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며 펄쩍 뛰며 사양했다. "아니예요. 저는 이미 수중에 많은 은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저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갖기는 싫어요."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그녀와 함께 곤륜파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 다는 용화주루로 향했다. 곤륜파의 사람들은 호화로운 특실에서 많은 점원들의 시중을 받아가면서 식 사를 하고 있었는데, 시종 그 분위기가 매우 조용한 것 같았다. 이것은 실 로 명문정파 사람들의 잘 절제되어 있는 훌륭한 풍도를 느끼게 해주는 일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장문사형, 둘째 사형, 그리고 여러분들, 제가 없는 동안에 혹시 무슨 불편 하신 점이라도 있지 않았습니까?" 황보자안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고 안으로 아평과 함께 들어서자 출진자 와 현황자 등이 상석에서 식사를 하다가 미소하며 그를 맞이했다. 출진자가 말했다. "우리에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다만 나는 네가 거리에 나가서 혹시 위험을 당하지나 않았나 하고 그것을 걱정했었지." 이때 곤륜파의 삼십육천강 등은 묵묵히 식사를 즐기고 있다가 황보자안이 아주 화려한 복장으로 아평과 함께 나타난 것을 보고 비록 나서서 말은 하 지 못했어도 은근히 그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포권으로 감사의 예를 표시하며 말했다. "사형께서 그렇게 저를 생각해 주시니 저는 다만 감격할 따름입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호아저씨께서 여러분들을 만난 기념으로 여기에 있는 금원보 를 하나씩 나누어 드려 달라고 하던데, 지금 제가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 까?" 현황자는 황보자안의 손에 들려 있는 쟁반을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관없다. 선물이라는 것은 너무 사양하면 오히려 실례가 되는 법이 니, 소사제가 직접 모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도록 하게나." 황보자안은 장문사형이 그렇게 허락해 주자 내심 이는 삼십육천강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서 매우 기뻐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대답한 다음에 황보자안은 자신이 친히 걸음을 옮겨서 금원보 를 삼십육천강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 삼십육천강은 이전에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무뚝뚝하게 황보자안에게 대해 왔었는데, 지금 그와 같은 선물을 받게 되자 굳어진 표정은 절로 풀리 게 되었고, 가끔씩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보자안은 크게 기꺼운 마음에 일일이 인사를 하고, 이어 삼대제자인 두 명의 젊은 도인들에게도 각각 하나씩의 금원보를 나누어 주었다. 그 청화도인과 청진도인은 원래 곤륜파에 들어온 이후에 이처럼 큰 돈을 사 사로이 가져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얼굴마저 붉어지며 매우 좋아하는 표 정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어 남은 열두 개의 금원보가 담겨 있는 쟁반을 출진자와 현황 자의 탁자 중간에 올려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두 분 사형의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 현황자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그래, 소사제는 밖에 나가서 잘 놀았는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우 리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황보자안은 마치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얼른 비어 있는 자리에 가서 앉으며 뒤에 서 있는 아평을 불렀다. 그러나 아평은 그가 불러도 다소 안색을 붉히며 난색을 표명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황보자안과 한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곤륜파의 도사들이 있어서 싫은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몇 번 부르다가 그녀가 응하지 않자 할 수 없이 그냥 혼자서 식 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옆에서 바라보다가 문득 출진자가 황보자안에게 말했다. "소사제, 자네의 저 아름다운 여자 친구는 정말 재주도 있고 인상도 좋은 편이지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네. 우리 곤륜파는 얼마 전부터 여자 제자는 받지 않았는데, 만일 그녀가 우리와 함께 동행하게 된다면 그 것은 본파의 명예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 출진자는 판단력이 예리하여 이미 아평이 황보자안과 동행을 하려고 한 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헌데 출진자는 비록 낮은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거리가 멀지 않아서 아평도 그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말았다. 순간 그녀는 즉시 몸을 돌 려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급히 뒤따라 나가 보고 싶었지만, 그러나 출진자 등의 시 선을 의식하여 한참 동안 식사를 끝낸 다음에야 비로소 슬그머니 밖으로 나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평은 밖의 한 구석진 곳에서 혼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것이었다. "아평, 왜 울고 있는 거지?" 황보자안이 묻자 아평은 일순 몸을 돌려서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더니 울먹 이는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 쓸모도 없는 계집아이예요. 천지간에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만일 나으리께서 저를 떠나라고 하시면 저는 아마도…… 아마도 이름 모를 황야에서 쓸쓸히 죽어가고 말겠죠." 황보자안은 그녀가 다분히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절로 웃었다. 이러한 감상적인 여린 소녀가 어떻게 아까는 그와 같이 신기한 검초를 펼쳐 내었었는지 실로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그대가 이렇게 어여쁜데 내가 왜 그대를 떠나라고 하겠소. 다만 나의 사형 이 그렇게 말했으니 당신은 우리보다 조금 뒤에 떨어져서 나를 따라오다가 내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서 나를 구해주면 되지 않겠소?" 아평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제가 그래도 되나요?" 황보자안은 이 아평의 아름다운 두 눈에 이슬같은 눈물이 한두 방울 맺혀 있는 것을 보고 문득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물론 그래도 되고 말고. 참! 내 그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자,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 보시오." 황보자안은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보석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그녀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원래 이 보석과 주머니는 황보노야가 그에게 준비해 준 것이었다. 거기에는 묘아안(猫兒眼)이나 금강석(金剛石), 홍보석(紅寶石), 청보석(靑寶石), 흑 보석(黑寶石), 그리고 칠채보석(七彩寶石)과 흑진주(黑眞珠), 명주(明珠) 등의 그야말로 두 눈을 부시게 만드는 아름다운 보석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들의 대부분은 한 개로 하나의 작은 성(城)을 살 수가 있는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아평은 비록 보석을 보는 눈은 없지만 이 보석들이 하나같이 현란한 광채를 뿌리고 있어서 매우 귀중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다소 놀라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제가 정말로 이 중에서 하나를 가져도 되나요?" --계속-- 번호:110/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7 길이:300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7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7장. 음계(陰計)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것들은 내가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대에 게 하나 선물로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소." 기실 황보자안은 아평이 황금원보를 받지 않은 데다가 그녀가 자신을 그토 록 각별히 위해주고 있어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줄 겸 감사의 뜻으로 주 려는 것이었다. 아평은 일시 너문도 기쁜지 안색이 금새 발그레해진 채 한참 동안이나 주머 니 속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흑진주 하나를 집어들었다. "저는…… 저는 괜찮으시다면 이것으로 하겠어요." 황보자안은 다소 의외의 눈빛을 했다. 비록 이 새알만한 크기의 검고 빛나 는 흑진주는 매우 희귀하고 값비싼 보석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다른 묘안석이나 홍보석 따위에 비하면 그래도 가장 가치가 처지는 것이었다. 아평이 아무리 보석의 가치를 모른다고 해도 금강석이나 묘안석 등의 아름 다움은 한 번 보아도 흠뻑 빠질 정도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귀한 것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아평은 황보자안을 위해서 가장 허름한 보석 을 고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진주를 고름으로써 어떤 그녀의 진심을 얘 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증거를 보이기라도 하듯이 아평은 온 통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동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 다. 황보자안은 이에 주머니를 다시 갈무리하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대가 나를 그토록이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거야말로 정말로 신 기하고 희안한 일이로군 그래." 그때 출진자 등이 특실에 나오는 기척이 들렸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아평과 떨어졌다. 일행이 별채로 돌아가게 되자 얼마 후에 몇몇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당에서 연무(演武)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때는 황보자안도 출진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는 바로 출진자의 특별한 배려로서, 그는 황보자안에게 아직 곤륜파의 정통무예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미안감이 일어서 지금 한 차례 연무를 핑계삼아 보여주려는 것이 었다. 이것은 물론 황보자안이 그렇게 훌륭한 대접을 해주는 데에 대한 보 답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삼십육천강 가운데에서 출진자의 제자들로만 선정된 그들은 각기 한 사람씩 짝을 이루어 장, 권, 지, 혹은 검법 등으로 겨루었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치열한 비무인 것 같아도 제자들은 이미 출진자의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일 부러 황보자안이 보기 좋게 펼치는 약속된 무예 대결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것들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출진자는 옆에서 그들이 어울리는 것을 가리키며 그 명칭과 대강의 요지를 말해 주곤 했다. 이른 바 황보자안이 곤륜파의 무공에 대해서 겉핥기식이라도 알게 해서 전 혀 모른다는 발뺌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원래가 무공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서 출진자가 설명해 주는 얘기를 들으며 제자들의 비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었다. 출진자가 가르쳐 준 무공들을 대강 정리해 본다면, 파옥권(破玉拳), 섬전수 (閃電手), 요음장( 陰掌), 대응조(大鷹爪) 등의 도수 무예와 운룡대팔식 (雲龍大八式)과 금안공(金雁功) 따위의 경신술, 그리고 양의도법(兩儀刀 法), 소청검법(小淸劍法), 태청검법(太淸劍法) 따위의 병기 무예들이었다. 황보자안은 비록 그것들을 지금 수박 겉핥기보다도 더욱 미치지 못하는 방 법으로 거의 명칭만을 들어 배우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스스로 순양검법을 극성으로 연마하여 곤륜파의 절학들이 실전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어떠한 위 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대강의 추측은 할 수가 있었다. 출진자는 거의 반 시진 가량이나 이런 형식적인 연무를 시키고서, 이윽고 자리를 파하여 제자들에게 물러가서 쉬도록 했다. 황보자안도 역시 그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런데 그가 마악 하나의 건물을 돌아나오자 그곳에 마침 아평이 나타나서 미리부터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소매를 잡아끄는 것이었다. "호아저씨께서 우리의 잠자리를 이미 준비해 놓으셨어요." 황보자안은 비록 자신이 곤륜파의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자지 않게 될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이게 웬일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하나의 방(房)-- 이 방은 실로 너무나도 넓고 호화로워서 마치 이 방의 가 운데에 서 있자니 넓고 오색찬란한 화원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화려한 침대는 방의 한쪽 벽에 기대어 자리학 있었는데, 그 위에 눕자 마치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분위기는 다 누리고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황보자안은 아평에 의해 이 방으로 안내되어서는 이것이 바로 호대해의 배 려라는 것을 알고는 내심 가볍게 실소를 지었다. 사실 황보자안은 어려서부터 워낙에 화려한 곳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이 러한 화려한 자리는 별로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히려 아주 지저 분하고 삭막한 곳이 더욱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황보자안은 이미 아평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대도 이 방에서 나와 함께 자려는 것이오?" 이미 전에 황보대장원에서 두 사람은 함께 잠을 잤기 때문에 별로 그것은 신기할 내용이 못되는 것이었다. 아평은 얼굴을 다소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나으리를 보호해 드리려는 거예요." 만일 침상으로 몰래 숨어 들어오는 적이 있다면 그녀가 있는 것이 다소의 도움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황보자안은 그녀의 고집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막지 않고 웃으며 먼저 욕실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씻은 후에 잠옷을 걸치고 나와서 침상 위에 누웠 다. 그는 이제 아예 아평이 하는 행동을 모른 척하고 잠들기로 작정한 것이 었다. 아평은 황보자안이 나온 뒤에 욕실로 들어갔다가 한참이나 후에 나왔다. 황보자안은 이미 실내의 불을 거의 끄고 깊이 잠들어 버린 척하고 있었는 데, 문득 뜻밖의 사태에 도저히 가만히 누워 있으 수가 없었다. 아평이 그 의 침상으로 스며들어왔는데, 그녀의 몸은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그러한 현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 키며 물었다. "아니,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여기는 우리집도 아니고, 또한 내일 내가 그대의 곁을 떠나는 것도 아니지 않소?" 허나 아평은 부끄러운 듯이 두 눈을 감은 채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으리, 저는 이미 일년 전 그때 나으리께 저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쳤어요. 비록 나으리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셨지만 저의 마음에는 그것과 다름이 없어 요. 저는 이미 나으리와 이렇게 잠을 잤었는데 다시 이렇게 한들 이것이 무 슨 그리 특별한 일이 될 수가 있겠어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너는 어서 옷을 입는 것이 좋겠다." 아평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나으리께 알몸을 보였는데 나으리께서 저에게 다시 옷을 입으라 고 하시는 것은 저를 죽으라고 하시는 것과 같아요. 저는 정말로 나으리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하시고 싶으면 하시 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 뒤에 아무런 대가가 없다고 해도 저는 행복할 거 예요. 나으리, 남자분들은 원래 여자를 만지고 자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실로 엉뚱한 구석이 있어서 그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가 다시 그녀에게 옷을 입으 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다시 자결을 하겠다고 덤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내심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너의 이런 모습을 보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러 나 네가 정녕 이러기를 원한다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 너는 정말로 바보같 이 고집을 부리는구나!" 황보자안은 그 말을 남기고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아평의 나신은 일년 전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무예로 단련되어 군살 이 하나도 없이 훨씬 매력적인 것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은 근히 잠꼬대를 하는 시늉을 하면서 그의 품속으로 계속 파고들었으니 그가 천하의 군자라고 할지라도 어찌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황보자안은 너무나도 훌륭한 방에서 오히려 온밤을 거의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는 새벽녘에 몸을 일으켜 한쪽의 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아서 운기행공 을 했다. 그가 복용한 만년동자삼의 약력은 이미 모두 흡수되어 그의 내공 은 별로 늘어나는 것이 없었지만, 갈수록 그 진기가 정순해지고 운용하는 방법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은 어쨌든 유쾌한 일이었으며, 거기에다 순양권 법과 검법을 한 차례 연습해 보자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것이 아주 기분좋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황보자안은 순양검법을 펼친 후에 군자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려고 할 때 문 득 아평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참, 나으리, 제가 나으리께 사부님의 그 무명검초를 전수해 드릴까요?" 황보자안은 원래는 자신은 앞으로 곤륜파의 오대선공을 배워야 할 입장이므 로 그런 다른 유파의 무학은 배울 수가 없는 입장이라고 느긋한 마음에서 설명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아평이 알몸인 그 대로 그에게 다가와서 자신의 장검을 뽑아 든 채로 현란한 검무(劍舞)를 추 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실 그녀가 실전에서 사용하는 검초는 일면 느린 것 같았지만 지극히 빠른 변화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옆에서 보기에는 그저 신비롭게 보이지만, 지 금 황보자안이 배우기 쉽도록 천천히 풀어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섬세 하고 복잡하며 오묘한 변화가 한눈에 거의 다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스스로 검법의 기초가 매우 확실하게 잡혀 있는 사람임 에도 도무자 아평의 검초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검초가 보 이기는커녕 알몸으로 화려한 검무를 추고 있는 그녀의 현란하고 유혹적인 자태에 넋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욕실로 달아나며 말했다. "그대의 검초는 정말로 훌륭하구만!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 않으니 그만두도록 하게!" 황보자안이 욕실에서 땀에 젖은 온몸을 씻고 밖으로 나오자 아평이 어느새 의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그를 위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마악 의복을 모두 갖춰입고 밖으로 나가자 이미 거기에는 호대대가 웃는 낯빛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소공자, 간밤에는 잘 주무셨소이까?" 호대해는 당연히 잘 잤을 것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웃으며 물어왔다. 황보자안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지만 그의 기분을 존중해 주는 뜻에서 미소 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호아저씨의 배려에 편하게 지냈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새벽부터 저를 찾으시다니." 호대해는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대답했다. "아 글쎄, 이 우둔한 머리가 또 말썽을 부리지 뭡니까. 난 그 도사들만 보 면 갑자기 쥐구멍을 찾고 싶어서. 허허허, 그래서 말입니다만, 소공자께 다 시 한 번 부탁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황보자안은 내심 미소했다. 이 호대해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가까 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호대해는 한 차례 웃더니 품속에서 한 장의 금표(金票)를 꺼내서 그의 손에 쥐어 주며 다소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을 그들에게 좀 전해 주십시오. 아, 이 몸이야 감히 그들의 앞에 설 수가 없는 존재지만 소공자님이 계시니 그들을 또한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 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황보자안이 금표를 살펴보니 무려 황금 일만냥 짜리였다. 호대해가 아무리 이 근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다고 해도 불과 하룻밤 사이에 황금 일만냥을 만들어 내기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실 호대해는 계속 자신이 부탁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 황 보자안의 체면을 톡톡하게 세워주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곤륜 파에 들어갈 때 황금 일만냥을 증여했었지만 이제 다시 그들에게 이것을 선 물로 준다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요컨대 곤륜파의 사람들이 황보자안에게 예의를 다해주는 것은 그에게서 이런 이득을 얻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 는 것을 황보자안도 잘 알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호대해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호아저씨, 고맙습니다. 이렇게 저의 체면을 세워 주시다니……" 호대해는 이에 옆으로 펄쩍 뛰어서 인사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이거 감히 소공자의 절을 받다니 나의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인 지 모르겠군!" 소리치며 달아나는 호대해의 격의없는 행동을 보고는 황보자안과 아평은 동 시에 함께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하하……" 이어 황보자안이 별채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하자 문득 아평이 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저는 그곳에는 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나으리의 뒤를 쫓는 작은 도적이 될 테니, 그러니 주의하세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도적일까? 음, 그러고 보니 간밤에 나를 잠 못 하게 한 연도(戀盜)로 구만!" 황보자안이 웃으며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문득 아평이 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쫙…… 바로 그것은 전에 황보자안이 들고 다니던 합죽보선이었다. 황보자안은 원래 무공을 배우는 동안 합죽선을 들고 다니는 것은 걸맞지 않 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작게 접어서 품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었는데, 아평이 그의 소지품을 정돈해 주다가 그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 이었다. "이것을 들고 다니세요. 그러면 정말 멋있을 테고, 감히 그 말코도사들이 나으리를 우습게 여기지 않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속으로 이 아평이 무림인들은 무공이 아닌 다른 것은 우습게 보 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허나 어쨌든 그는 그녀 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 합죽선을 받아들고 한 번 소리나게 편 다 음에 천천히 부치면서 몸을 돌려 별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별채에 도착하니 그곳의 넓은 대청에는 온갖 종류의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 진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곤륜파의 사람들이 주루에 나가기가 귀찮아 하는 것을 알고 호대해가 일부러 음식상을 이쪽으로 가져가라고 시 켰던 모양이었다. 일행은 우선 간단한 아침의 수련을 마친 다음에 서열에 따라서 차례로 음식 상을 앞에 두고 앉았다. 황보자안도 그 뒤를 따라서 앉았다가 모두가 다 착석하기를 기다려서 문득 몸을 일으켜서 한마디를 했다. "여러분, 우리 호아저씨께서는 여러분들이 가능한한 오래도록 이곳에 머물 면서 좀더 친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소." 그 말에 출진자가 문득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이번에 산천 유람을 나온 것도 아닌데, 어찌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있겠느냐? 우리는 오늘 아침에 떠나야 하는데 어찌 그 와 사귈 수가 있겠느냐?" 황보자안은 이에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이로군요. 저의 호아저씨께서는 말씀하셨 죠. 이것은 비록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나 여러분이 이번의 여정에서 경비 로 사용해 주시면 고맙겠다고요."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호대해가 주었던 그 금표를 출진자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출진자는 금표의 액수를 살피고 그것을 현황자에게 넘기더니 싸늘하 게 코웃음을 쳤다. "너의 호아저씨는 정말로 임기응변이 빠르기도 하구나. 어느새 우리의 말을 알아듣고 이와 같은 선물을 보내왔으니." 허나 겉으로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액수가 엄청난 금표를 보게 되자 절 로 놀라고 마음이 흡족하여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지지 않고 다시 말했다. "물론이예요. 저의 호아저씨는 또한 말씀하셨죠. 여러분이 모든 일을 무사 히 마치고 곤륜산으로 돌아갈 때에는 필히 다시 들러서 놀다 가시기를 바란 다고요." 현황자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일만냥의 황금이라면 우리는 이번에 최대한으로 호사스럽게 생활한다고 해도 다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다시 그와 같은 폐를 끼칠 수 가 있겠느냐? 너의 호아저씨께 전해드려라. 그분의 이와 같은 후의는 결코 잊지 않겠다고." 황보자안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저의 호아저씨께서는 이미 그와 같은 장문사형의 뜻을 알고 계실 거예요. 그분은 바로 천리안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까요." 세상에 정말로 천리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황보자안이 우스개 소리 를 하자 일순 엄숙하던 장내는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흥겨운 웃음 소리가 터 져 나왔다. 기실 황보자안이 호아저씨 운 면서 그와 같은 우스개의 말을 했던 이유는 바로 호대해의 체면을 세워 주고, 아울러 그들 사이에 친밀감을 조성시켜 주자는 목적이었다. 이제 곤륜파의 사람들은 호대해를 친구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호사스런 성찬의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자 일행은 빠르게 출발 준비를 완료 하고 곧장 말과 마차를 달려서 용화객점을 떠나기 시작했다. 호대해와는 이미 작별인사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황보자안도 따 로 그를 만나볼 생각을 하지 않고 곧바로 마차에 올라서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한창 뒤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평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말과 사람이 이미 하룻밤을 잘 먹고 편안학 쉬었기 때문에 일행은 아침나절 에 아주 빨리 달려서 점심 무렵에는 농서( 西)라는 현성에 도착했다. 곤륜산의 부근에서는 미리 사람을 보내서 말을 교환하곤 했었지만 여기는 이미 중원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려워서 일행은 어차피 쉬어가야 했다. 따라 서 풀숲에서 쉬는 것보다는 주루나 찻집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일행은 농서라는 현성에 들어가서 그 마을에서 가장 커다란 주루에 잠시 여 장을 풀었다. 이 농서라는 현성은 밖에서 보기에는 다소 허술하게 보여도 막상 성 안으로 들어와 보니 상당히 교역이 성하고 문물이 발달되어 있는 곳이었다. 특히 주루의 주변에는 건달같이 생긴 장한들이 자주 왔다갔다하는 것이 어떤 커 다란 공사가 진행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용화객점에서는 다소 부드러워졌어도 습관적으로 엄숙한 행동에 길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길에서 어슬렁거리는 건달들 과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출진자 등이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황보자 안도 스스로 곤륜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는 조용히 이 마을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쓸데없이 벌집을 건드려서 곤륜파의 사람들을 귀찮게 만 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은근히 밖을 주시하며 밥을 먹고 있노라니 문득 주위에서 어슬렁거 리던 장한 하나가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이렇게 불 쑥 입을 여는 것이었다. "검을 쓰는 홍의낭자를 아시우?" 장한이 홍의낭자 운운하자 우선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아평으로, 그녀가 홍의를 입었었다. 황보자안은 대체 이 장한이 그녀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왜 그러시오?" 장한은 흉측하게 생긴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뭔가를 그의 앞으 로 내던졌다. "한번 읽어 보슈!" 그것은 바로 한 장의 작게 접어진 서찰이었다. 황보자안이 읽어 보니 거기 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서쪽 성문 밖 토신묘(土神廟).> 글씨는 남자의 글씨 같기도 했고, 여자의 글씨 같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대 체 무슨 소리인지 잘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계속-- 번호:111/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7 길이:292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8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8장. 흉심(兇心) 하지만 아평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불분명한 내용의 서찰은 곧잘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와 만나기 위해서 저 사람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말한 것일까?) 황보자안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그가 아직 아평의 글씨체를 본 적 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는 선비 집안의 딸이라고 했으니 서체가 제법 훌륭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것은 혹시 누군가가 그녀를 토신묘에 잡아두고 나 더러 그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단순한 거짓 함정으로 그를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떼어 놓고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황보자안은 천하 제일의 부잣집의 귀공자이기 때문에 만일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있 다면 그를 납치해서 무엇인가를 요구할 공산이 큰 것이다. 황보자안은 장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으나 그 장한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 러진 채 능글맞게 웃고 있는 것이 어떤 정직한 대답을 해줄 것 같지가 않았 다. 이 장한의 얼굴을 본다면 결코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 에게 위험이 따른다고 해도 일단은 이 서찰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강호에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고, 또한 여태 자신이 누 구에게 원한을 맺은 일이 없기 때문에 최악의 사태라고 해도 그저 재물을 약간 떼어주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보가문은 기실 세인의 상상을 불허하는 막대한 액수의 재물이 저축되어 있으며, 누구에게 얼마쯤 손해를 본다고 해도 아무런 지장도 없다고 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이 일이 약간의 위험 요소가 있는 것이니 곤륜산의 사람들 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이 일은 아평과 관련된 일이고, 그녀가 남몰래 뒤따라오고 있다는 사실 등을 굳이 출진자 등에게 알게 해서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서찰 을 그대로 탁자 위에 내려놓은 채 몸을 일으켜서 장한을 바라보며 다시 질 문을 던졌다. "지금 그곳에 그녀가 있다는 말이오?" 장한은 안면을 길게 가로지은 흉측한 흉터를 씰룩이며 한 차례 그를 보고 징글맞게 웃더니 동문서답식으로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가며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나를 따라 오슈!" 이 장한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교묘하면서도 심리를 자극하는 아주 교활한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어쩔 수 없이 그 장한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서찰을 서찰을 탁자 위에 그대로 놔둔 것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경 우에 출진자 등이 빨리 그 장소를 알아내고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나 황보자안의 그러한 의도와는 달리 그가 떠나간 직후에 출진자 등이 아직 보지도 않은 그 서찰을 조용히 집어드는 하나의 손길이 있었다. 장한은 처음에는 주루 안에 있는 곤륜파의 사람들을 의식한 듯 천천히 주위 를 살피며 걸어갔으나, 이내 걸음에 속력을 더하기 시작했다. 이 장한이 무 공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지금 간단하게 신법을 펼치고 있는 광경을 본 다면 능히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황보자안도 물론 기초적인 신법을 펼칠 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내 력이 이미 일갑자의 수위에 이르렀기 때문에 속력은 별로 나지 않을지언정 오래도록 가는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터였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아까 주루의 주변에서 어슬렁거 리던 건달들이 지금 모조리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기 이한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어떤 채석장의 공사장 등지에서 일 을 하는 잡부들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노리고 어슬렁거렸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신술은 모두가 앞의 장한의 것에 뒤지지 않는 상당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무림 고 수들은 이런 하류 무공을 지닌 자들의 눈빛만 봐도 그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황보자안은 능력이 부족하고 경험이 없어 서 그들을 모두 시정의 건달들로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십여 명의 건달들이 마치 포위망을 이루듯이 뒤따라오자 황보자안은 내심 섬뜩한 느낌과 함께 다소의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도저히 저들의 손아귀에서 달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음을 알고는 이내 마음을 태연하게 갖 고는 묵묵히 앞의 장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기실 황보자안은 곤륜산의 절봉에서 공포를 억누르는 수련을 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가 있었다. 그런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보니 그제서야 장한들이 자신을 성의 서쪽이 아닌 북쪽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순간 그 서찰의 내용은 자신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 서찰을 보게 되는 다른 사람까지도 속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저 장한이 직접 인도할 것이라면 구태여 무엇 때문에 그런 서찰을 써서 표적을 남겨 두었었 겠는가? 황보자안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때에 비로소 강호의 모략이 얼마나 무섭고 또한 인심이 얼마나 사나운지를 알게 된 것이었다. 성문을 벗어나서 대략 오리쯤 관도를 따라 달렸을까? 갑자기 소로로 접어들 어 하나의 산기슭을 따라서 돌아가자 계곡이 넓게 펼쳐져 있는 분지의 가장 자리에 하나의 토신묘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찰에 적혀 있는 것 도 토신묘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서쪽의 토신묘가 아니라 북쪽의 토신묘인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 토신묘의 부근에 몇 명의 범강장달같은 대한들이 사나운 기 색을 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드디어 적의 소굴로 들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아평이 그저 그를 만나려고 했다면 저런 대한들은 결코 필요치 않 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앞의 장한이 그 토신묘의 안으로 빨려들듯 들어가 사라지고 뒤의 장한들이 은근히 다가들고 있으므로 황보자안도 ㅈ연히 그 안으로 들 어가게 되었다. 토신묘를 지키고 있는 대한들은 황보자안을 한 번 보고는 입가에 잔인한 조 소를 떠올리고 있을 뿐 말리거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런 곳에 단신으로 들어가게 되면 가슴이 떨릴 것이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오히려 아주 태연하여 그들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안녕하시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 아니겠 소?" 대한들은 뜻밖에도 이 준수한 약관의 서생같은 자가 매우 담대한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흉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이쿠, 아이쿠! 내가 보기가 싫다면 사라지면 그만이지." 황보자안은 짐짓 무섭다는 듯이 엄살을 피우며 토신묘의 안으로 들어섰다. --토신묘. 그 내부는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다른 토신묘의 구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단 위에 모셔져 있는 신상은 흙으 로 빚어서 만들어 놓은 토지신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 토신묘의 내부는 밖의 환한 대낮과는 달리 다소 어두침치하여 처음 들어 온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적용된 눈으로 사람의 얼굴을 판별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단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한 명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아! 바로 당신이었군." 그 단 위의 사람이 말했다. "흐흐,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나? 혹시 나를 그 냄새나는 작은 계집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니었겠지?" 이에 단의 주변에 늘어서 있던 장한들이 일제히 흉악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당주님께서 그런 아름다운 계집이었다면 우리들은 하나같이 무 쇠같은 사내들인데 그냥 내버려두었겠습니까?" "흐흐흐흐……" 장한들 가운데에는 물론 황보자안을 데리고 온 그 장한도 섞여 있었는데 황 보자안은 이것을 보고 다소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그런 물건 하나 때문에 나를 여기까지 납치해 온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지금 단 위에 신상 대신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어제 저녁 무렵 에 황보자안이 아평과 함께 장검을 샀던 그 영웅병기점의 주인이었던 것이 었다. 당시 주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한 듯 참고 순순히 그들을 보내 주었었 는데, 알고 보니 이와 같은 일을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스스로도 그 두 자루의 보검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남에게 빼앗고 싶을 정도의 집착은 없었다. 그저 아평이 그를 위해서 구입해 주었기 때문에 차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서 이들이 이와 같은 짓을 자행해 오자 그는 절로 군자검에 대해서 미련이 없어졌다. 그는 즉시 허리춤에서 군자검을 검집째 풀어서 단 위에 앉아 있는 주인에게 던져 주며 씁쓸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당신이 이것 때문에 그런다면 도로 가지시오. 나는 사실 무공도 별로 강하 지 못한 사람으로 강호에 미련이 없는데 그런 보검을 억지로 갖게 된들 무 슨 이익이 있겠소?" 주인은 처음에는 험한 일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황보자안이 순순 히 군자검을 던져 주자 다소 어리둥절해져서 급히 검을 검집에서 뽑아 보았 는데 역시 틀림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 이거 아주 이상한 놈이 다 있군 그래. 이와 같은 보검을 쉽게 남에 게 넘겨주다니. 보검값으로 지불한 은자 천냥이 아깝지도 않은 모양이지?" 원래 황보자안이 신병이기인 군자검을 뽑ㅇ들고 대항을 했었더라면 어느 정 도의 악전고투가 예상되고 주인사내쪽의 사람들도 다치게 되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의외로 쉽게 군자검을 회수하게 되자 주인은 입을 벌리고 크게 득의 해지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깝지 않으니 당신들이 모두 가지도록 하시오. 자, 그럼 문제가 해결되었을 테니 나는 이만 가도 되겠소?" 말과 함께 황보자안이 토신묘의 밖으로 걸어나가려고 하자 휙휙 하는 옷자 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서너 명의 장한들이 몸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고 포위해 버렸다. (……) 황보자안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몸을 돌리고 주인 을 향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들의 이런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오? 나는 이미 그런 것에 미련이 없다고 했으니 볼일이 끝난 것이 아니오?" 주인사내는 단 위에서 아직 내려오지도 않고 군자검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음흉한 어조로 대꾸했다. "흐흐흐,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네놈은 기왕에 이곳에 붙잡혀 왔으니 우선 그 계집이 있는 곳을 불어야 할 것이다!" 황보자안은 그 말에 아평이 아직 이 자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 고는 저으기 안심이 되어 웃으며 물었다. "알고 보니 당신들은 거짓으로 나를 유인했었군. 하지만 내가 그런 거짓 서 찰에 속았을 정도라면 그녀가 있는 곳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되는 법인데, 당신들은 그런 이치도 모른다는 말이오?" 황보자안의 말은 논리가 정연하고 이해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주인도 문득 그러한 점을 납득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흉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내가 그런 것을 알게 무어야! 네놈이 만일 여기에서 살아서 나 가기를 원한다면 빨리 그 계집이 있는 곳을 불어야만 할 것이다!" 주인사내의 흉악한 본성이 드러나자 즉시 여기저기에서 병기를 뽑아드는 소 리가 들려왔다. 삽시간에 황보자안의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싼 장한들이 금 방이라도 덮쳐들듯 날이 시퍼런 병기를 꼬나들고 서서히 다가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어이가 없어서 다시 주인사내에게 말했다. "사람은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어야 하는 법이오. 당신은 내가 그 토록 순순히 보검을 돌려주었는데도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는 것이오?" 주인사내는 음흉하게 웃어댔다. "으흐흐흐! 어리석은 애송이 꼬마녀석아, 그러길래 네놈은 처음에 함부로 신병이기를 남에게 넘겨주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네놈이 만일 이 군자검 을 손에 들고 있었다면 나도 쉽게 네놈을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어떤 협상이라도 이루어졌을 것이 아니겠느냐?" "……" 황보자안은 비로소 이 자들은 도저히 말로는 상대할 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주인사내의 태도를 보건대 그가 아평의 얘기를 하건 말건 반드시 그를 이 토신묘에서 장사지내려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황보자안은 일순 서늘한 냉기가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으나 오 히려 다음 순간에 그의 신색은 더욱 맑고 조용해져 있었다. 실로 이러한 능 력은 황보자안 특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담담히 웃으며 수중의 합죽선을 쫙 하고 소리나게 펼쳐서 는 천천히 부치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좃소. 당신은 제법 매서운 데가 있는 사람이구려. 하지 만 당신은 한 가지 일을 간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주인사내는 이 준수한 서생의 안색이 갑자기 부드럽게 풀리면서 정말로 여 유가 만만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져서 물었다. "무엇을 간과했다는 말이냐?" 주인사내는 비록 쉽게 남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워낙에 황보자안의 표 정이 그럴싸해서 이는 필시 어떤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었 다. 황보자안은 그가 자신의 화술에 끌려드는 것을 보자 계속 합죽선을 부치며 담담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당신은 방금 전에 내가 어리석게도 아무런 방비도 없이 당신에게 보검을 넘겨준 것이 잘못이라고 했소. 하지만 당신도 생각해 보면 알게 될 것이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위험한 장소에 들어와서 살벌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런 대비도 없이 대담하게 그런 사심없는 행동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 소?" 주인사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음, 그러니까 네놈은 지금 나에게 보검을 건네준 것이 사실은 다른 대비책 이 있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제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자신의 앞에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 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와 같이 행동할 수가 있겠소?" "……" 주인사내는 한 번 황보자안의 화술에 말려들게 되자 일시 머리가 복잡해졌 다. 황보자안의 말은 전부 옳은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렇지 않은 허세에 불과한 것 같기도 했다. 따라서 주인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 가 싸늘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네놈이 준비하고 있다는 대비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 은 혹시……" 그가 말을 길게 끌자 황보자안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소. 바로 그거요!" 주위의 사람들은 황보자안이 말과 함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태도를 보이자 일제히 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황보자안의 신형은 이미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실로 황보자안이 강호에 나와서 직접 무공을 사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의 신형은 처음에는 마치 주인사내의 면전으로 다가서는 듯했으나 기실은 그의 신형은 튕겨지듯 몸의 자세를 낮추며 좌측으로 날아가고 있었 다. 번쩍! 뒤를 이어 황보자안의 손에서 뭔가 빛나는 물체가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그 쪽을 포위하고 있던 장한들의 면전을 엄습했다. 이때 장한들은 미처 이러한 급습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멍청하게 서 있 다가 절로 자신들의 몸을 방어하기 위해 병기를 앞으로 내밀게 되었다. 그러나 장한들의 그러한 무의식중의 행동이야말로 황보자안이 기대하고 있 던 바였다. 창창창! 예리한 소음과 함께 장한들이 앞으로 내밀은 병기들이 대도며 도끼, 철봉들 을 가리지 않고 일제히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는 광경이 모든 사람들의 눈 에 들어왔다. 이것은 실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변이었다. 장한들은 원래는 매우 날쌔고 사나운 무공을 연마한 사람들이었으나 일순간 에 어이없게도 병기를 잃어버리게 되자 잠시 당황해서 임기응변이 늦어졌 다. 바로 그 순간에 황보자안의 신형은 그들의 사이로 돌아가서 그 중 한 장한의 목에다 날이 시퍼렇고 무시무시한 한광(寒光)을 뿌리고 있는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것은 황보자안이 품속에 지니고 있 던 칠성보도였던 것이다. 이 칠성보도는 마치 유리처럼 조금도 흠집이 없이 매끈할 뿐만 아니라 기이 하게 예리한 한기를 폭출시키고 있어서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도 일순 얼음 굴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보도를 들이댄 장한은 공교롭게도 바로 그를 주루에서 이곳으로 유인해온 그 안면에 흉터가 있는 장한이었는데, 칠성보도의 한기를 받아서 인지 그의 안색은 그야말로 백지장보다도 더욱 창백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그 장한의 얼굴을 바로본 뒤에 이어 고개를 들어 주인사내 를 주시하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하, 잘 보셨소? 이것이야말로 내가 준비하고 있었던 대비책이라고 하는 것이오. 나의 이런 수법이 보기에 어떻소?" 원래 황보자안은 이런 상황이라면 주인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아니면 매우 좋지 않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순간 그의 예상은 보기 좋기 틀려 버렸으며 오히려 주인사내는 오히려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크게 벌어져서 웃고 있었다. "흐흐흐, 좋아, 좋아! 너의 그 수법은 제법 쓸 만하군!" 황보자안은 주인사내의 눈빛이 탐욕으로 가득찬 채 자신의 칠성보도에 쏠려 있음을 알아차리고 일순 가슴이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나를 내 보내 주어야 할 것이 아니오!" 주인사내는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물론이지. 그렇게 하고 말고." 하지만 이 주인사내는 말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이 순간 문득 신형을 날려서 황보자안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의 눈빛이 실로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크게 경계하 는 마음이 일었다. 주인사내는 이때 우수에 군자검을 뽑아 들고 있었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서 자 황보자안은 급히 소리쳤다. "그 자리에서 멈춰 서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나는 이 사람을 해치 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오." "알겠네, 알겠어." 주인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단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보자안의 앞에 이르렀을 때 군자검을 휘둘러 공격해 오는 것이 아 닌가! 이에 황보자안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그 장한을 방패삼아서 주 인사내의 공격을 피하고자 했다. 그렇게 한다면 이 주인사내는 당연히 자신 의 동료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빨리 검을 거둘 것이라고 황보자안은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황보자안의 오산이었다. 주인사내는 검신이 그 장한의 몸 근 처에 이르렀는데도 검세를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검세를 일으켜서 장한 의 아랫배를 베어 가는 것이 아닌가! "으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시뻘건 핏물이 토신묘의 내부에 뿜어져 나갔 고 내장이 징그럽게도 흩어져서 바닥에 뒹굴었다. 장한은 어이없게도 즉사 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것은 황보자안으로서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흠, 정말 슬픈 일이다. 도적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자칫 실수하여 한 사람 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구나!" 주인사내는 한 사람을 베었음에도 전혀 핏물조차 묻어 있지 않은 군자검의 검신을 쓱쓱 장한의 쓰러진 시신 옷자락에 닦으며 천연덕스럽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계속-- 번호:112/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8 길이:29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19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19장. 검의(劍意) 그제서야 황보자안은 조금 전에 자신에게 제압당한 그 장한이 왜 그렇게 안 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주인사내는 그야말로 인성이 악독무비하여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면 설사 수하라고 할지라도 그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죽여 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황보자안은 일시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인데 어떻게 당신의 동료를…… 함부로 해칠 수가 있다는 말이오?" 주인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함부로 해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는 다만 운이 없어서 눈이 달 려 있지 않은 검을 맞고서 죽은 것일 뿐인데, 내가 그를 해쳤다니 그게 무 슨 말인가? 애석하다, 애석한 일이야! 정말 애석하고 말고." 이어 황보자안을 향해 음흉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에게 내 한 가지 제안을 하겠는데, 지금 들고 있는 그 칼을 나에게 순 순히 바치는 것이 어떻겠나? 만일 자네가 그 칼을 나에게 바친다면 내 자네 를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지." 황보자안은 이런 말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가증스러운 주인사내의 얼 굴을 볼 때에 실로 불가사의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간 악스럽다면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이리라. 이 주인사내는 이런 간악함으로 흑도 무림의 작은 두목이 되었을 것이고, 또한 그의 간악스러운 마음에 무 고하게 목숨을 바쳐야 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를 수가 없소." 이미 인질작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오로지 실 력으로써 이 난관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칠성보도를 우수에 고쳐잡았다. 이 칠성보도는 그가 이미 암벽 에서 수백 번이나 사용을 했는데도 전혀 조그마한 흠집조차 생기지 않는 놀 라운 보검이기 때문에 능히 주인사내가 들고 있는 군자검과 대적할 수가 있 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사내는 그것을 보고 문득 아평의 신기에 가까운 검법을 생각했는지 스 스로 나서서 공격하지는 않고 장한들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어서 저놈을 잡아라! 죽여도 좋다! 만일 저놈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서 나 에게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 장한들은 이 순간 자신들의 동료가 무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자 동병상련의 마음이 되어서 다소 주저하고 있다가 주인사내가 상을 주겠다는 말에 즉시 자신들의 병기를 휘두르며 황보자안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물론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장한들이 잠시 주저하고 있 는 틈을 타서 그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먼저 주인사내의 면전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 주인사내를 제 압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자신이 무사히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인사내의 지시에 뒤늦게 장한 두 명이 그의 앞을 막아섰으나 황보자안이 칠성보도를 휘둘러 그 자들의 병기를 베어버리자 조금 전의 그 장한의 최후 를 생각했는지 절로 움찍하여 양 옆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인사내를 향해 자신이 알고 있는 순양 검법을 최고도로 펼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원래 이 순양검법은 곤륜파의 일반 무공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아주 기초적 인 검법으로, 남을 제압한다는 의도보다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수련의 의 도가 더욱 깊은 검법이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우연히 이 검법을 그야말로 대성의 경지를 넘어서서 그 야말로 십이성(十二成)의 경지까지 아주 완숙하게 연성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이 하나의 검법을 전개함에 있어서 자신의 검초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진기의 운용, 그리고 검초에 실려 있는 의도뿐만 아니라 상대방에서 그것을 알고 어떤 변화를 취해 올 경우에 대처할 방법까지 아주 세밀하게 연구해 두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 하나의 검법에 실려 있는 검의(劍意)를 극도로 이해하고 숙련하여 처음에 이 검법을 창안한 사람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 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검법에 있어서 그 검초의 변화도 중요한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검초에 스며 있는 검의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대개 하나의 검법을 창안한 사람이 그 검법을 펼치는 것과 이후에 그 검법 을 배운 사람이 검법을 펼치는 것을 비교해 본다면, 역시 전자의 경우가 똑 같은 검법을 펼치는 것인데도 훨씬 위력이 있고 살아 있는 초식이 된다고 할 수가 있다. 무릇 살아 있는 검초를 죽어 있는 검초는 당할 수가 없는 법인데, 여기에서 살아 있는 검초의 요지는 바로 그 초식에 실려 있는 검의를 바르게 이해하 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림인들은 간혹 초식을 익힘에 있어서 그 변화만을 기억하고 숙련 되게 할 뿐이지 검의까지 파악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하나의 초식을 만들어 놓으면 그 초식은 나중에는 죽어 있는 초식으로 변절되어 가는 것이다. 대 부분의 무림인들은 보다 높고 정묘한 변화를 가지고 있는 검초를 익히기 위 해서 하나의 검법을 그 검의까지 이해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이 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타의에 의해서 이 아주 기본적인 검법만을 계속적으로 수련하게 되었는데, 게다가 그의 두뇌가 매우 총명하여 다소 미련스럽게 검 법의 수련을 계속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검의까지 터득해 내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호에 처음 출도한 무림인은 처음으로 적과 대전을 함에 있어 서 자신의 검초를 자신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꾸 어지러워지는 경우가 흔 한데, 그것은 그 검법의 검의를 아직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 하나의 검법에 있어서 초식이 백팔개의 변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검의를 터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거기에서 다시 얼마든지 변화가 늘어날 수가 있어서 수백, 혹은 수천 개의 변화를 낳는다고 볼 수가 있었다. 그러 므로 이 검의를 이해하고 터득하는 일은 위대하고도 어려운 일인 것이다. 오직 황보자안처럼 미련스럽게도 하나의 검법을 가지고 오랫동안 배우고 익 히며 총명한 두뇌로 분석할 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비록 순양검법이라는 검초는 화려하고 복잡하며 정묘한 초식은 아니었지만 황보자안은 그것으로 인해서 웬만한 상대의 공격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 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일 황보자안이 도중에 다른 어려운 검초를 좀더 배우게 되었었다면 그가 이러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얘기는 황보자안과 비슷한 수준의 무림인을 만났을 때의 얘 기인 것이고, 출진자와 같은 상승무공을 터득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설령 검의를 터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해 보 는 것이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다소 당황하여 생각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주인사내도 처음에는 황보자안의 손에 들려 있는 칠성보도의 위력을 다소 두려워하였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군자검이 혹시 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일어서 미처 황보자안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황보자안의 검초식은 점차로 생각대로 움직이게 되었고, 보 다 완벽해지고 보다 훌륭하게 변해갔다. 이러한 실전은 확실히 황보자안에게는 훌륭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 다. 주인사내는 처음에는 군자검으로 황보자안의 보도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하 다가 나중에는 황보자안의 검초가 더욱 예리해지자 할 수 없이 서로의 병기 를 부딪치게 되었다. 쨍! 두 자루의 신병이기가 서로 부딪치자 허공에 파란 불빛이 번쩍하면서 아주 맑고 예리한 금속성이 귀청을 찔렀다. 동시에 두 사람은 스스로 놀라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기를 살펴보게 되었 는데, 기이하게도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기가 모두 아무런 흠집도 생기 지 않은 것이 아닌가! 칠성보도는 여전히 예리한 날이 조금도 무뎌지지 않 은 채 싸늘한 한광을 폭사시키고 있었고, 군자검은 역시 거무틱틱한 그대로 서늘한 검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둘 다 자신의 병기에 만족하고 안심하여 마음놓고 검법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 뒤의 광경은 마치 토신묘의 내부가 검광과 도기 속에 뒤덮이는 것 같았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장한들은 이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각기 구석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는데, 도무지 황보자안이 이와 같이 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지 예측하지 못했다는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장한들은 자신들의 상전이 우세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고, 주인사내는 다분히 공격적인 검초를 쓰고 있었고, 황보자안은 겉으로 보기에 수비에 급급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실 그가 검의에 통하고 있다고는 해도 순양검법은 그 변화가 매우 단순한 것이어서 도저히 남을 공격할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었고, 반면에 주인사 내의 검법은 그야말로 광풍폭우가 일거에 휘몰아치는 듯이 복잡하고 괴이한 변화를 일으키며 단번에라도 황보자안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이 공 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한들이 보기에 자신들이라면 대번에 주인사내의 검초를 당해내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죽었을 텐데도, 황보자안이 매우 오랫동안 엄밀하게 수비를 하 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원래 이 주인사낵 전개하고 있는 검초는 바로 백팔식의 광풍쾌검(狂風快劍) 이라는 것으로, 말 그대로 갈수록 검법이 빨라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광풍 이 휘몰아치듯이 엄청난 기우이 일고 굉음이 요란하게 사위를 뒤흔들어 마 침내는 주위를 거의 초토화로 만드는 가공할 검법이었다. 주인사내는 다른 사람에게서 이 검법을 사사받아서 비록 그와 같은 놀라운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금과 같은 휘력으로도 가히 강호의 이삼류의 인물들을 당해내기에 족한 것이었다. 만일 황보자안이 순양검법의 검의에 통하여 임기응변식으로 얼마든지 많은 변화를 일으켜 주인사내의 공격을 일일이 막아내지 않았다면 벌써 그의 몸 뚱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쨍! 쨍! 쨍!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그토록 무서운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황보자안이 아주 간단하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쉽게 막아내자 주인사내는 더욱 더 기세를 드 높여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황보자안이 수세에 몰려 있는 것 같 아도 이미 그가 검을 쓰는 동작이 숙달되어 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내력은 검법과는 달리 거의 일류고수의 수준이기 때문에 점차 기세로써 주 인사내를 압도하고 편해져가는 양상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은 오직 당사자들 외에는 옆에서 알기가 어려운 것이어 서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장한들은 그것도 모르고 오직 황보자안이 계속해 서 수세에 몰려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만일 이때 장한들이 정신을 차리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양쪽에서 협공을 펼쳤다면 황보자안의 손이 여러 개라고 하더라도 도저히 주인사내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때 주인사내는 점차 밀리는 상황에서 감히 다른 곳으로 의식을 분산시켜 입을 열 만한 여유가 없었고, 황보자안은 나름대로 내심 무아지경 속에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힘을 빌어서 기(氣)는 등에서 발사되다. 어찌하여 기가 등에서 발사되 는 것인가? 기가 아래로 내력면 양 어깨에서 등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허 리에 쏟으면 그 기가 오르내린다. 그것을 일러 합(合)이라 한다. 허리를 펴 등에 이르면 어깨에 힘이 가고, 손 끝에 그 힘을 펼치면 이 기는 내력가면 서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것을 개(開)라고 한다. 합은 거두어들이는 것이 고, 개는 놓아버리는 것이다. 능히 개합을 알고 음양(陰陽)을 알면……) 그것은 바로 순양기공 가운데에서의 가장 난해한 부분인 용기의 구결의 일 부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황보자안은 원래는 스스로 용기의 구결을 모두 이해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 는데, 이 순간 뭔가 다른 영감이 떠올라서 어이없게도 이런 급박한 와중에 도 그곳에 의식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기이하게 느끼고 있는 점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래 그가 처음에 용기의 구결을 사용할 당시에는 체내의 진기를 오랫동안 면면히 사용할 수가 있도록 하는 것에만 역점을 두었었는데, 그것은 당시 그가 암벽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암벽을 타는 일에는 물론 한꺼번 에 많은 진기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보자안은 그 뒤로 혼자서 검법을 연마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대련을 해보지 못했기 때 문에 진기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방법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히 생각해도 자신의 내력이 훨씬 고강하여 우세를 차지 하고 있는데도 보다 확실히 이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의문을 느껴 다시 순 양기공의 구결 가운데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내용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었다. 만일 자신이 한 순간에 내공의 힘을 강하게 발휘할 수가 있다면 상대 적으로 허약한 주인사내를 이길 수가 있지 않겠는가? 주인사내는 일순 황보자안의 검법에 허점이 생기고 그가 뭔가 다른 곳에 정 신을 팔고 있는 듯하자 이는 고의로 자신을 유인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우습 게 여기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여유를 되찾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녀석아, 네놈은 지금 뭘하는 거냐?" 주인사내는 아직 비무 도중에 이렇게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 를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황보자안은 문득 눈빛이 맑아지고 의식이 깨어난 듯하더 니 주인사내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졌소." "뭐라구?" 주인사내는 일순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비록 지금 다소 밀리 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가 완전히 패하려면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옆의 장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결국 황보 자안은 주인사내를 꺾을 수가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보자안 이 느닷없이 그와 같은 소리를 하자 주인사내는 혹시 이 젊은 녀석이 갑자 기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주인사내는 그런 불명예스러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정신을 더욱 모아서 매서운 검법으로 황보자안의 면전을 공격해 들어갔다. 쌕쌕쌕! 일시 일백팔식의 광풍쾌검의 검세가 구름같이 크게 일어나면서 황보자안의 전신을 뒤덮어 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황보자안이 다시 예의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검법으로 광풍쾌검의 요소를 정확하게 방비하자 주인사내의 공격 은 그의 장검과 서로 부딪치며 효력을 잃고 말았다. 쨍!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 개의 신병이기가 서로 부딪치는 순간에 주인사내는 마치 습관처럼 다시 새로운 검초로 공격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검 을 잡은 손아귀가 크게 찌르릉 하고 울리면서 화끈한 느낌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이 아닌가! (앗!) 주인사내는 경악했다. 그는 순간 이 젊은 서생이 갑자기 마술을 쓴 것이 아 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그가 정신을 차리고 황보자안의 공격에 대비를 하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손에 들려 있던 군자검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목줄기에 지독하도록 싸늘한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주인사내는 너무나도 크게 놀라서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어느새 황보자안은 그의 앞에 다가서서 들고 있 던 칠성보도로 그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까도 한 장한이 이 칠성보도에 의해서 목줄기가 겨누어졌던 적이 있었지 만, 그 장한은 주인사내의 악독한 심성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역시 주인사내도 안면의 근육을 떨며 심한 공포감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의외로 그가 자신의 목숨을 매우 아끼기 때문인 것이었다. 주인사내의 얼굴이 마치 썩은 돼지의 간처럼 시커멓게 변해가는 것을 보며 황보자안은 보도를 겨눈 채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래도 아직 승복을 하지 못하겠소?" 주인사내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승복할 수 없다. 그러니 다시…… 우리 공평하게 다시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 이 주인사내는 결코 어떤 기회라도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 만일 다 시 겨루게 된다면, 그는 뒤로 슬슬 피해 다니면서 장한들로 하여금 포위공 격하게 하여 마침내 황보자안을 제압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십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황보자안은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고, 설령 살 아난다고 해도 달아나는 자신을 쫓아오지는 못할 것 같았다. 다만 주인사내는 황보자안이 어떻게 해서 방금 전에 놀라운 마술같은 검법 을 터득하게 되었는지 그 내용과 원인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그러한 생각에 따라주리라고 믿소?" 주인사내는 순간 흠칫 하면서도 대꾸했다. "너는…… 너는 무림협사이기 때문에 간악하게도 그와 같은 사술을 써서 나 를 이기는 행동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정당당하게 당신과 겨루어야 한다는 말이오?" 주인사내는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 주인사내는 이 젊은이가 호승지심에 들떠서 자신의 말을 따라주기를 바랬 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한 가지를 잘못 알고 있소. 당신은 내가 무림협사이기 때문에 그렇 게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사실은 무림협사가 아니오. 따라서 당신의 말 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니고 오직 이 곳을 나가는 것일 뿐이오." 주인사내는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다가 말했다. "네가 만일 나를 놓아주면 나는 너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당신의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소?" 이어 주위에서 크게 당혹하여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장한들을 한 차 례 둘러본 다음에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차라리 이번에 당신의 저 수하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두고볼 생각이오." 황보자안은 바로 조금 전에 주인사내가 자신의 수하를 마치 파리 목숨처럼 베어버린 일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번의 인질은 꽤나 쓸 만하지 않겠소?"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황보자안은 우선 발끝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한 자루 의 보검 군자검과 검집을 차올려서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왼손에 잡았다. 이 신병이기라는 것이 무림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는 조 금 전에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이 만일 칠성보도와 같은 신병 이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장한들을 쉽게 물리칠 수가 있었겠으며, 반대로 만 일 군자검이 장한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일이 다소 귀찮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황보자안은 보도로 주인사내를 겨누고 서서히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인사내는 설마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다가 실로 이와 같은 상황이 되자 일순 얼굴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장한들도 감히 황보자안의 앞을 막을 생각도 못하고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 는 것이 이제 황보자안이 무사히 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인 듯했다. 그런데 다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거의 토신묘의 입구에까지 이르렀는데 문득 주인사내는 너무나도 황망하여 정신이 없는지 앞의 돌부리 걸려서 그 대로 엎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황보자안은 보도를 주인사내의 앞 쪽에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조금이라도 엎어지게 되면 그대로 그 예리 한 보도의 날에 목이 소리없이 잘라져 나갈 상태였다. 이 순간 황보자안은 내심 매우 긴장을 하여 주인사내의 작은 움직임이라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이와 같 은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것을 보자 다소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원래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있 었기 때문에 그가 그와 같은 실수로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가 없었 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일순 실소를 하는 한편 깜짝 놀라서 급히 그 자의 목에 겨누어져 있는 보도를 바깥으로 끌어당기게 되었다. --계속-- 번호:113/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06 10:08 길이:492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0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0장. 일곱 구의 시신(屍身) 헌데 바로 그때였다. 황보자안은 자신의 눈으로는 분명히 주인사내의 몸이 앞으로 굽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가 보도를 앞쪽 으로 끌어당기고 보니, 오히려 그의 고개를 상체와 더불어 뒤로 젖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의 가슴에 돌연 맹렬한 충격이 강 하게 느껴지면서 그이 신형이 한 순간에 뒤로 굽어지며 날아가 벽에 부딪쳤 다. 쾅! 실로 지금 벌어진 그와 같은 광경은 설명은 길어도 아주 찰나적인 순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주인사내는 마지막 순간에까지 간악스런 수법을 사용하여 황보 자안의 자비로운 심성까지 역이용한 것이니, 처음에 그가 놀라서 발이 돌뿌 리에 걸려서 앞으로 엎어지려고 한 모습은 그 스스로가 지어낸 연극이었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움직이는 듯했으나 실은 뒤로 상체를 젖히며 그 동작과 함께 한쪽 발로 황보자안의 가슴팍을 후려찼 던 것이었다. 만일 황보자안이 독심을 품고 그가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에 그대로 보도로 베어 버렸으면 주인사내의 노력으 수포로 돌아갔을 테지만, 당연히 황보자 안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인사내의 수법은 먹혀 들어갔 고, 아주 절묘한 계략이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이 주인사내가 걷어찬 곳은 비록 단전혈이나 기해혈 등에서 다소 벗어난 곳 이었지만 황보자안은 워낙에 느닷없이 당한 일이라 일시 정신이 멍멍하고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벽에 기대어 있는 상황에서도 몸을 일으키거나 보도를 휘두를 수가 없었다. 주인사내는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주위의 장한에 게 달려가서 한 자루의 대도를 빼앗아 들고 맹렬하게 황보자안의 면전으로 달려들어 그의 목을 후려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돌연 천정에서 무엇인가 붉은 물체가 황보자안과 주인사내의 사이로 뚝 떨어져 내리더니 그대로 다가드는 주인사내의 목을 일검으로 잘라버리는 것이 아닌가! "악!" 시커먼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일순 붉은 선혈이 쫙 뿜어져 올라서 대들보를 온통 시뻘겋게 물들여 놓았다. 그렇다.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황보자안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아평이었다. 원래가 아평은 언제라도 황보자안 의 신변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능한한 그의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는데, 황 보자안이 장한에게 속아서 주루를 떠날 때에도 그녀는 멀리 숨어서 그것을 보고 있다가 나중에 은밀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부근에 이르렀 을 때 그녀는 토신묘의 앞쪽에는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산의 뒤쪽으 로 몰래 돌아가서 토신묘의 뒤쪽으로 스며들어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공교 롭게도 바로 황보자안이 그 장한을 인질로 삼고 있었고, 주인사내가 악독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참이라 누구도 그녀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었 다. 이어 아평은 숨을 죽이고 천정의 대들보 위에 올라가서 상황을 살피고 있다가 이윽고 황보자안이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자 돌연 나타나서 주인사내 를 제거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인사내는 황보자안을 급습한 이후에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반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일념으로 대도를 휘둘러 황보자안을 공격하는 일만 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느닷없이 나타난 아평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하고 그대로 목이 잘려나간 것이었지, 그가 만일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렇 게 쉽고도 어이없게 단숨에 목이 잘려나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쨌든 황보자안은 이리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제야 겨우 가슴 의 기혈이 통하고 몸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자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순간 잠시 기혈이 막혔을 뿐이었지 내상을 입은 거도 외상을 입은 것도 안었다. "다정하고도 어여쁜 내 사랑, 그대가 왔구려." 황보자안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아평을 보고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듯이 말했 다. 이에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인사내의 목을 잘라 버렸던 서슬푸른 기색의 그녀는 일순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 것이었 다. 주위에서 황보자안의 노래를 들은 장한들은 일순 그가 아평을 향해 음탕한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평은 이 황보자안이 진 실로 음탕하지 않은 군자일 뿐만 아니라 그 노래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칭찬이었다. 다정하다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집요하게 그 의 뒤를 따라왔다는 것이고, 또한 어여쁘다는 것은 제때에 맞추어서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는 말이며, 내 사랑이라는 표현은 그 두 가지 일 때문 에 매우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아평은 이제까지 황보자안이 자신을 사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실로 그를 위해서 지옥까지 따라간다고 해도 보 람이 있을 것 같은 기쁨을 느꼈던 것이었다. "나으리께서 무사하시니 저는 매우 기뻐요." 아평은 고개를 숙이며 단지 그 말만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장한들은 이것을 보고 크게 흥분하여 두 사람을 향해 각기 병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죽여 버리자!" 황보자안은 이제 우두머리가 제거되었으니 남은 사람들은 모두 저절로 달아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있다가 이와 같은 공격을 받고 는 일순 놀랐다. 십여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포위해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 하자 이 좁은 토신묘의 내부가 일시에 병기의 그림자로 가득 뒤덮이는 듯했 다. 황보자안과 아평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맞아 싸우게 되었는데, 아마도 황 보자안이 아직 진기를 강렬하게 쏘아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면 다소 곤란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예리한 보도로 장한들의 병기를 하나씩 토막내면서 그 때 마다 진기를 폭출시켜서 충격을 주자 이 장한들은 내력이 주인사내보다도 못한지라 그만 하나씩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주인사내마저 일시 장검을 떨어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을 정도였는지라 이 장한들은 한 번 넘어지자 심한 내상을 입어서 입으로는 피를 흘리며 감히 더 이상 일어나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평의 상황은 황보자안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보검인 숙 녀검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장검으로 마주 싸웠기 때문에 대여섯 명의 장한들이 한꺼번에 결사적으로 덤벼오자 가까스로 그들을 모조 리 물리쳐 팔병신, 다리병신들을 만들기는 했지만 자신도 그만 장한들의 병 기에 두어 번이나 찔려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녀의 어깨와 다리 부위에서 피가 다소 배어나오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어째서 숙녀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오?" 아평은 장한들이 모조리 쓰러져서 더 이상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숙녀검은 제 것이 아니고 단지 제가 당분간 맡아서 보관하고 있는 것 이니까 감히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숙녀검은 내가 그대에게 이미 준 것인데, 어째서 다 른 주인이 또 있다는 말이오?" 그 말에 아평은 일시 아름다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감히…… 감히 숙녀검의 주인이 되어도 상관이 없 다는 말씀이신가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 보검은 비록 천하에 거의 없는 희귀한 것들이지만 결국은 신 외지물(身外之物)이오. 굳이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오. 하물며 그것 을 그대가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소." 아평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으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녀는…… 소녀는 이제부터 숙녀검을 사용 하다록 하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내심으로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이었다. 황보 자안이 군자검을 사용하고 자신은 다시 숙녀검을 사용하게 된다면 이 두 자 루의 장검이 어떤 깊은 인연을 암시해 주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아평이 등뒤에서 쓰던 청강장검을 검집째 내려서 바닥에 버리고 그곳에 다 시 허리에 차고 있던 숙녀검을 채우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 며 품속에서 금창약인 옥진산을 꺼내서는 그녀의 상처 부위에 직접 발라주 었다. 이 옥진산은 실로 외상성약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바르고 나자 금 새 피가 멎고 거품이 들끓어 일어나더니 이내 벌써부터 상처가 아물어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평은 황보자안이 직접 상처를 치료해 주자 잠시 통증도 잊은 듯이 부끄러 움에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옷자락을 찢어서 그녀의 상처 부위를 싸매고 나자 황보자안이 말 했다. "일행이 기다릴 것이니 이제는 그만 돌아가도록 합시다." 황보자안은 이어 칠성보도를 다시 칼집에 끼워서 품속에 집어넣었고, 군자 검 역시 그 전처럼 허리에 찼다. 아평은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이런 고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는 일 인지라 황보자안을 따라서 함께 토신묘를 나오고 말았다. 이 토신묘는 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있고, 또한 매우 낡았지만 방금 전에 실로 숨막힐 듯한 접전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아마도 장한들은 뒤에 남아서 그 죽은 주인사내의 시신을 수습해서 돌아가 게 될 것이다. 황보자안은 두 사람이 다소 느긋하게 산기슭을 돌아서 오던 길로 돌아가게 되자 문득 아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참,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점이 있지 않소? 그 영웅병기점의 주인은 원래 자신의 목숨만은 매우 아끼는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목숨을 걸었는가 하는 것이오. 원래는 그저 나를 무사히 보내주기만 한다면 어떤 위험도 없 었을 것이 아니오?" 아평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자신도 역시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마! 정말로 조금 이상하네요! 그가 만일 나으리를 해치려고 하지 않았다 면 저는 그 자의 목숨은 해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자검에 대해서 미련이 강해서 그랬다고 말하기도 문제가 있소. 왜냐하면 그는 지금 나를 보내도 나중에 다시 기회를 만들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오." 아평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에 그 사람들도 가만히 보니 자신들의 몸에 심한 상처가 생기자 비로 소 안심하는 눈치였어요. 왜 그랬을까요? 혹시……" "……" "그 사람들의 뒤에 엄청난 배경이 있어서 누군가가 그 사람들에게 당신을 필시 제압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때 두 사람은 이미 산기슭을 완전히 돌아서 관도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 있었는데 황보자안이 마악 입을 열어 아평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다가 문 득 입을 다물었다. 지금 관도상에는 아까 그들이 지나올 때에는 보이지 않 았던 어떤 물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지금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기 때무니었다. 아평도 일순 그것을 보았는지 즉시 그쪽으로 빠르게 달려가서 살펴보고는 문득 아, 하고 놀람의 음성을 토해냈다. 황보자안이 급히 뒤따라가서 살펴보니 그 물체들은 바로 일곱 구의 새로 생 긴 시체들이었다. 원래 강호상에는 하루에도 실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 이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새로 일곱 구의 시신이 늘었다고 해서 그다지 놀 랄 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시체가 누워 있는 사실이 아니라 바로 그 시체들의 모 양이 기이하다는 점에 있었다. 시체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마 위에 나비 모 양의 구멍이 뻥 뚫려서 즉사한 것 같았는데, 기이하게도 그들의 팔이나 다 리 등의 신체 일부가 대개 땅 속으로 파고들어간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시체의 몸 일부를 땅 속으로 곱게 묻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바로 관도상이기 때문에 비교적 땅이 딱딱 할 뿐만 아니라 부근에 흙을 파서 묻은 흔적이 없으니 어찌 누군가의 장난 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가? 마치 사람이 두부판 속으로 손이나 발을 집어넣듯이 그렇게 땅 속으로 깊숙 하게 들어간 시체의 팔다리를 보면서 아평이 놀라서 입을 열었다. "이건 마치 이 사람들이 죽기 전에 안간힘을 써서 일부러 자신의 팔다리를 땅 속에 박아 놓은 것 같군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혹시 자신의 시신을 가져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을까요?" 황보자안은 묵묵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상에 일부러 그와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런 것은 아닐 것 이오. 그리고 이들의 팔다리가 일부러 땅 속으로 박어 넣어진 형태라기보다 는 차라리 저절로 땅 속으로 들어가게 된 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소." 아평도 다시 한 번 시체들을 살피고는 황보자안의 말이 옳다고 느꼈는지 일 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더욱 놀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죽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그와 같은 깊은 자국을 남 길 정도였ㄷ면 이들의 무공은 굉장했었겠군요. 그리고…… 그리고 그런 일 곱 명의 사람들을 똑같은 수법으로 이토록 깨끗하게 죽인 사람은…… 정말 로 그는 무시무시한 무림의 고수가 아닐까요?" 아평은 시신들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려 있고 거기에서 아직도 핏물이 고여 나와서 마치 붉은 나비가 금방이라도 살아서 훨훨 날아오를 것 같은 모습을 보자 일시 현기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 일곱 명의 사람들을 죽 인 수법은 생각할수록 끔찍스러운 것이어서 그 흉수는 어떤 가공할 대마두 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때 관도의 남쪽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빠르게 나타났기 때문에 아 평은 그런 환상 속에서 깨어나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다. 지금 남쪽의 관도로 빠르게 신법을 펼쳐서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곤륜파의 사람들이었다. 출진자와 현황자 등은 지금 황보자안 이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자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닌가 하고 급히 말도 타지 않고 신법을 펼쳐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그들에게 심려를 끼치게 될까봐 빨리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들이 몸소 급히 나타나는 것을 보고 매우 미안 한 마음이 들어서 얼른 다가가서 맞이했다. "제가 공연히 여러분의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출진자와 현황자는 그가 무사함을 보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이내 관도상에 늘어져 있는 일곱 구의 시신들을 향해 모아지 고 있었고, 즉시 그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이들은 자네가 죽인 것인가?" 황보자안은 어리둥절해졌다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정체도 모르고 또한 누가 죽인 것인지도 모릅 니다. 저는 요 산기슭을 돌아가면 보이는 토신묘에 있었는데 조금 전에 돌 아와 보니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어서 조사해 보고 있었 던 중입니다." 황보자안은 강호상의 상당량의 은원 관계가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명료하게 대답을 했다. 출진자 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신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 득 출진자가 시신들의 이마에 나 있는 나비 모양의 구멍을 가리키며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혈접의 솜씨일세." "혈접이라고요?" 황보자안은 이미 혈접이라고 불리웠던 현의여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일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끔찍하고 무서운 솜씨를 보자 도 저히 그 아름다운 체형을 지닌 그녀의 솜씨라고 여겨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황보자안의 뇌리에는 다른 일면으로 그녀가 주루에서 사라질 때 펼쳤던 그 거대한 나비 모양의 붉은 기운이 지금의 상흔과 기이하게 연관되는 것이었 다. 황보자안은 다시 물었다. "대체 그 혈접이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짓을 벌였을까요?" 출진자는 황보자안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다소 굳어진 음성으로 시신을 가리 키며 대답했다. "저들이 바로 난주칠패(蘭州七覇)이기 때문이지." --난주칠패. 황보자안은 얼핏 이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전날 현의여 인이 주루에서 사라지면서 난주칠패를 찾아가겠다고 했었던 것을 들은 기억 이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혈접은 그때의 일을 보복하기 위해서 이와 같 은 일을 벌여놓은 것이었을까? 그때 문득 현황자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난주칠패는 이곳 일대를 장악하고 제왕처럼 행세하던 자들이었는데 이처럼 허망하게 당하다니 실로 혈접의 무공은 소문보다 훨씬 더하군요. 하지만 그 들이 본채가 아닌 이런 곳에서 변을 당한 것은 아무래도 소사제의 일과 연 관이 있는 것 같군요." 기실 현황자는 평소에 별로 말이 없고 안색도 부드러운 편이지만 생각하는 바가 매우 예리하여 사태를 꿰뚫어보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옥허산인의 제자 가운데에서 대제자도 아니면서 장문인이 된 것은 그러한 그의 탁월한 능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이에 출진자가 황보자안을 향해 물었다. "자네들은 그 토신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보아하니 원래는 황보자안과 아평이 토신묘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 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으나 아평이 이들에게 놀림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므로 이내 어제 저녁 때 두 자루의 보검을 손에 넣은 일로부터 오늘의 토신묘에서의 일까지 거의 하나도 빼지 않고 남김없이 설명해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별로 부끄러운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툴게 한두 가지를 빼먹 다가는 오히려 판단력이 예리한 현황자 등에게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겠기 때문이었다. 출진자 등은 잠자코 심각한 기색으로 듣고 있다가 황보자안과 아평의 몸에 매달려 있는 두 자루의 보검을 보고는 문득 이렇게 물었다. "그 병기점의 주인은 어떤 검법을 쓰던가? 혹시 이와 같은 검법을 쓰지는 않던가?" 말과 함께 출진자는 자신이 직접 장검을 뽑아들고 한 차례의 검법을 시전해 보였다. 그런데 황보자안이 그 검법을 보니 마치 그 주인사내가 펼치던 검법과 매우 흡사한 것인지라 다소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사형께서는 어떻게 그 자가 쓰던 검법을 알고 계십니까?" 말과 함께 황보자안이 그가 기억하고 있는 주인사내의 검법을 다소 검을 뽑 아서 시전해 보여주자 문득 출진자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이것을 보고 현황자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방금 자네가 펼쳐 보인 것은 바로 이 난주칠패의 하나인 검패(劍覇)의 독 문무공인 백팔식 광풍쾌검이라고 하는 검법이네. 그것은 원래 아주 패도적 이고 무서운 검법이었는데, 둘째 사형께서는 그저 조금 알고 있을 뿐이지. 아마 그 병기점의 주인은 검패에게서 광풍쾌검을 전수받은 난주칠패의 하수 인이었던 모양이네." 황보자안은 아까 그 장한들이 주인사내에게 당주 어쩌구 했던 것을 들은 기 억이 떠올라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어 일곱 구의 시신들 가운데에서도 검을 땅바닥에 거꾸로 꽂아 놓고 죽어 있는 사람의 시신을 힐끗 주시한 뒤에 문득 의아해져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사람들이 토신묘에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서 죽어 있는 것입니까?" 현황자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물론 토신묘로 가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지. 그러나 또한 이곳에서 혈접을 만나게 되어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네." 황보자안은 그것이 시기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일시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다시 현황자에게 물었다. "아니, 그럼 어째서 저런 난주칠패가 저와 같은 사람을 잡기 위해 한꺼번에 이곳에 나타났었을까요?" 비록 궁금한 것을 묻기는 했지만 황보자안의 질문은 두서가 없는 것인지라 현황자는 담담히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원래 그 병기점의 주인이 제아무리 대담하고 지략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우리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술수를 함부로 써서 자네를 납치해 가지는 못하는 법이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든든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 고, 그들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결론이네." 여기까지 듣자 황보자안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니까 배후자인 난주칠패는 병기점의 주인에게 우리를 핍박하게 하여 만일 곤륜파의 사람들이 알고 달려오더라도 보검으로 핑계를 대고 우리를 억류할 생각이었구나. 그런데 난주칠패가 병기점의 주인에게 자신들의 속셈 을 말하지 않고 이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병기점의 주인은 잘못 오해하여 나 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고, 그의 수하들도 역시 난주칠패에게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상처입기를 바랬던 것이로구나. 그런데……) 황보자안은 문득 내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만일 곤륜파의 사람들이 이치를 따지지 않고 억지로 우리를 데려가 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곤륜파에서는 나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 는 상태이니 십중팔구는 그렇게 할 것이 틀림없을 텐데. 그렇게 된다면 어 쩔 수 없이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설마하니 난주칠패가 곤륜파를 전 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난주칠패의 무공도 두 분 사형들에 버금가는 것일 테고, 결국…… 결국 혈접의 무공은 두 분 사형들 보다도 월등하다는 말이 되는데, 그게…… 그게 정말로 사실일까?) 황보자안은 나이도 어리고 가냘프게만 보이던 혈접 현의여인이 출진자 등보 다 무공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두 분 사형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이때 현황자는 역시 담담하게 웃으며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나 세력을 떨치고 있는 방파의 사람 들은 겉으로는 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기실은 알게 모르게 그 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라네. 보아하니 그 난주칠패는 병 기점의 주인에게 보고를 받고 자네를 조사하던 중에 자네가 황보노야의 손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지. 그래서 혈접의 공격도 피할 겸 자네 를 인질로 삼아서 황보노야에게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했었을 것이네. 그들 은 그래서 이곳에 한꺼번에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네." 현황자는 이어 문득 고개를 들어황보자안을 바라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둘째 사형이 무엇 때문에 지금 근심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는 가?"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출진자의 안색이 갑자기 크게 무거워져 있는 것 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현황자의 질문을 받고 의아해져서 되 물었다. "무슨 다른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현황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일은 없네. 다만 난주칠패와 같은 자들이 이미 자네를 노리다가 목숨 을 잃었기 때문에 그 소문은 틀림없이 강호로 퍼져나가서 전 무림인들이 알 게 될 것이네. 게다가 자네의 몸에는 신병이기까지 있는 상황이니 어찌 무 림인들의 표적이 되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는 자네의 신변 보호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절로 처지가 곤란해지고 근 심이 되는 것이네." 이에 황보자안은 이미 자신이 어이없게도 엄청난 환란 속에 휘말리게 되었 음을 알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사형. 저로 인해서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앞으 로 제가 어떤 방도를 취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차라리 이번에 제가 저 의 장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현황자는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곤륜파는 비록 강호를 쩌렁하게 울리는 무림의 태산북두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명문정파라네. 어찌 다소 환란이 있다고 해서 이미 약속한 일을 도중에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자네가 만일 우리에 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그저 앞으로의 사사로운 행동을 삼가고 우리의 의 도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면 되는 것이네." 황보자안은 고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현황자는 담담하게 미소하더니 문득 황보자안의 뒤쪽에 서 있는 아평을 손 짓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원래 둘째 사형의 말씀대로 우리와 동행을 할 수는 없는 일이네. 다만 현재의 상황이 다소 위험하니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그녀가 만일 남장을 하고 우리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응하겠다면 자네와 함께 앞으 로 동행을 한다고 해도 무방하겠네." 원래 아평은 자신이 은밀히 뒤따라온 것에 대해서 저 말코도사들이 따지고 들면 황보자안이 얼마나 곤란해질까 하고 은근히 근심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따지기는커녕 이제 앞으로 함께 동행을 해도 된다는 말을 하자 일순 너무나 도 기뻐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저는 앞으로 함부로 굴지 않겠으며 도사님들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르도 록 하겠어요?" 아평이 공손하게 절을 하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이 웃으며 말했다. "장문사형께서 그렇게 편리를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현황자는 이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한 조치는 비교적 특수한 상황하에서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것이기 때 문에 좋아할 필요도 없고 또한 고마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네. 저 작은 아가 씨가 적들의 불의의 암습에서 자네를 도울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 그 건 그렇고……" 현황자는 문득 황보자안을 바라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 다. "내 다른 것은 몰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네." 황보자안은 이렇게 사태를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현황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자 의아해졌고 또한 그것이 보아하니 자신과 관계된 일인 것 같아서 물었다. "무엇을 이해할 수 없으시다는 말씀입니까?" 현황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시신이 되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난주칠패의 시신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사실 혈접이 그간 강호에서 무수한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고 악명을 떨치고 있기는 해도, 내가 보기에는 그리 분별없이 무자비한 살인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네. 이번의 일만 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녀가 그저 난주칠패를 혼 내주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 "그녀는 이번에 그저 혼내주는 선이 아니라 아예 난주칠패를 모조리 몰살시 켜 버린 것이네. 어떤 깊은 원한이 있지 않는 한은 이럴 수가 없는 법인데, 어째서 그녀가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인 것일까?" 황보자안도 내심 주루의 상황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주칠 패가 몰살당한 이리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물었다. "그럼 그녀에게 혹시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현황자는 잠시 황보자안을 주시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지금 한 가지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네. 그녀가 혹시 자네와 어 떤 안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느닷없는 현황자의 말에 일순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에?" 현황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를 테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네. 이번에 그녀가 난주칠패를 몰살시킨 일은 아주 공교롭게도 자네의 신변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이었네. 만일 그녀가 난주칠패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자네의 처지는 아주 곤란해지지 않았겠는가?" 황보자안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현황자는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말했다. "기실 그녀가 난주칠패를 제거한 이유에는 반대로 그녀가 자네를 통해 무엇 인가를 취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는 혈접을 적으로 두게 되는 셈이지. 따라서 나는 가능하면 자네와 안면이 있어서 우리와 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네." 황보자안은 현황자의 그 어조에서 그가 혈접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는 것 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자신이 처음으로 현의여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자신을 바 라보는 것 같았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그것이 실없는 소리가 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황보자안이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이미 현황자의 지시에 따 라서 곤륜파의 사람들은 서서히 주루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난주칠패의 시신은 그대로 두었다. 그것을 잘못 처리하여 나중에 엉뚱한 오 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놔두기로 한 것이었다. 이곳은 그들의 세 력권이므로 얼마든지 그들의 수하들이 그들의 시신을 묻어줄 수가 있을 것 이므로. 황보자안도 아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행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혈접이라는 사람은 어떤 여자죠?" 아평이 신법을 펼치다가 문득 그렇게 물어왔다. 그녀의 눈빛은 이때 다소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아까 분명히 혈접이 여자라는 말을 들었던 모양 이었다. 황보자안은 따라서 그녀에게 그가 처음 혈접을 만났었던 일을 비교적 하나 도 빼놓지 않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평은 황보자안의 모든 설명을 듣고 나자 눈빛이 더욱 기이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그 혈접이라는 여자가 나으리께 반해서 이번 에 나으리를 위해 난주칠패를 제거한 것 같아요." 황보자안은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아니, 그녀는 나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도 알 수가 없는 판국인데 어떻게 나에게 반했다는 것이오?" 아평은 허나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라는 사람은 간혹 그렇게 훌륭한 남자를 보게 되면 한눈에 반하기도 하는 법이지요. 말하자면 꿈속에 그리던 왕자님과 같은 모습이었던가." 황보자안은 그녀가 일시 너무나도 심각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려주고 싶 어서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나는 그대에게 있어서 그 꿈속의 왕자님이었소?" 아평은 고개를 저으며 황보자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꿈을 꾸지 않아요. 어렸을 적에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기억이 희미하 지요. 다만 현실 속에서 가장 완벽하고 훌륭하신 분의 곁에 있기 때문에 어 떤 꿈도 필요하지 않은 거예요." (……!) 황보자안은 그저 그녀를 웃게 하려고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그녀가 더욱 심 각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만 흥미가 시들해져서 묵묵히 있기만 했다. 아평은 말을 이었다. "나으리는 정말이지 그렇게 한눈에 반할 수가 있는 훌륭한 분이세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바보같은 그대만의 생각이지 어찌 천하의 여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 겠소?" 아평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가 나으리께 어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은 사실일 거예요. 이것은 여자의 육감 같은 것인데…… 게다가 무림의 사 람들은 대부분이 강호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어서 그녀가 나으리의 신분 을 미리 알고 그 주루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정말 그럴까?) 황보자안은 아평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럴 듯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곤륜파의 사 람들은 하나의 무거운 짐을 덜게 되는 것이나, 자신의 입장에서는 대체 그 녀를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그것이 난감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황보자안은 문득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주루의 탁자 위에 놓아 두고 왔던 그 서찰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체 그 서찰은 누가 가져간 것일까? 출 진자 등이 미리 보았다면 이렇게 늦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었다. (혹시 그녀가 가져간 것이 아닐까?) 황보자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일행은 이미 그 주루에 이르렀다. 곤륜파의 사람들 가운데 그곳에 남아서 기다리던 제자들은 이미 마차와 말 을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의 일로 인해서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일행은 즉시 마차와 말을 타고 남쪽으로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평은 아직 남장으로 갈아입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의 현성에 들러서 그녀 에게 맞는 남자옷을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은 황보자안과 함께 마차에 올라 출진자 등의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갔다. 아평은 그날 오후에 하나의 현성에 들러서 남자옷을 구입하고 남장을 할 수 가 있었지만, 그러나 일행은 그날 저녁 때 마땅한 잠을 잘 만한 객점이 있 는 마을을 찾지 못해서 그냥 산기슭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아평은 남들의 눈이 있기 때문에 옷을 벗지는 못했지만 가까이에서 호위를 한다는 명목으로 황보자안의 곁에 바싹 붙어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옷차림을 단정하게 한 다음에 다시 남쪽으로 마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엄격히 말하자면 동남쪽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일행은 그날도 쉬어갈 객점을 찾지 못해서 그 다음 날 저녁 무렵에야 비로 소 한음(漢陰)이라는 현성에서 객점을 잡아 쉬어갈 수가 있었다. <제3권 끝> --계속-- 번호:114/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1 길이:10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1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1장. 납치(拉致) 이미 험준한 고원지대를 벗어나서 거의 평지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일행은 하루에도 많은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한음성에서 잡은 객점은 이름이 역시 한음객점이었는데, 이 현성에서 가장 큰 것이고, 또한 주루가 딸려 있어서 편리했다. 곤륜파의 사람들은 이미 황보자안에 의해 넉넉한 여비를 마련했기 때문에 객점에서 잠자리를 마련하는 데도 시원시원하게 돈을 썼다. 원래 이 한음객점에는 미리 손님들이 들어 있어서 곤륜파의 사람들이 모두 들기에는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곤륜파에서 숙박료를 두 배로 물어주겠다고 하자 주인은 두말없이 대부분의 손님들을 쫓아 버렸던 것이었다. 이미 며칠간의 노숙으로 다소 피로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현황자는 설마 이 좁은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랴 싶었는지 제자들에게 잠자리를 살핀 후 에는 주루에 나가서 마음껏 휴식을 취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한 지시는 비단 곤륜파의 제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이 아평이라는 남장소 녀에게도 희소식이 분명했다. 아평은 그간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과 함께 생 활하기가 다소 피곤했지만, 그녀의 심정은 오직 황보자안과 단둘이 있고 싶 다는 것이었는데, 현황자의 지시를 듣자 즉시 황보자안의 옷소매를 잡아끌 어 주루로 향했다. 곤륜파의 제자들이 많이 가는 곳이니 물론 사사로운 행 동을 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황보자안 등은 다시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아평의 손을 잡고 무심코 주루의 안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마음 이 흠칫하여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주루 안쪽의 구석진 자리, 거기에는 지 금 한 명의 현의여인이 등을 돌린 채 하나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국수 를 먹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이 전날 보았던 그 혈접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기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탁자에는 이미 많은 곤륜파의 제자들이 둘러앉아 서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조금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원래 곤륜파의 제자들은 전날 주루에서 그다지 현의여인을 유심히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서 혈접의 일은 그들에게 과거지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황보자안에게는 혈접의 일이 결코 과거지 사가 될 수가 없었다. 워낙에 혈접의 첫인상이 강렬했고, 게다가 혈접의 일 은 어딘가 자신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다소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이내 아닐 수도 있다는 생 각을 하고 천천히 걸어서 그녀의 뒤에 이르렀다. 아평도 이때 무엇을 느꼈는지 매우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다음에 입을 열어 그 현의여인 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저어 혹시…… 혹시 제가 아는 분이 아니십니까?" 황보자안은 차마 이곳에서 혈접이냐고 물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돌려서 물 어보았다. 그러자 그 현의여인은 마악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하고 이내 싸늘한 음성을 토해냈다. "내가 어째서 당신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죠?" 황보자안은 그 싸늘한 음성을 듣는 순간 일순 가슴을 무엇으로 강타당한 듯 정신이 멍해지고 전신의 피가 일제히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이 음성은 바로 그가 기억하고 있는 혈접의 음성이었으며, 그렇다면 이 현의여인은 정말로 혈접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론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만일 이 여인이 정말로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이 었다면 그가 질문을 던졌을 때 반드시 고개를 돌려서 그를 확인해 보려고 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으므로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보 는 의미에서 보다 정중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바로 소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습도 비슷하기 때문이오." "……" 현의여인은 잠시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그녀는 다시 입 을 열어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그녀를 만나려고 하는 거죠?" 황보자안은 이 현의여인의 음성이 너무나도 태연했기 때문에 혹시 본인이 아니라 혈접의 쌍둥이 자매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혈접의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므로 잘 생각한 다음 에 현의여인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헌데 그때, "바로 이것 때문인가요?" 현의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뭔가 하얀 물체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왔다. 이것을 보고 아평은 혹시 이 현의여인이 황보자안을 암습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얼른 우수를 등뒤로 돌려서 숙녀검의 자루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햐얀 물체가 바로 한 장의 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소 안도의 숨 을 내쉬었다. 허나 아평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과는 달리 황보자안은 그 종이를 받아들 고 일순 더욱 경악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종이쪽지는 바로 전날 그 가 주루의 탁자 위에 남겨두었던 그 장한이 주었던 서찰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로소 서찰을 가져간 사람이 밝혀진 것이며, 이 현의여인이 자신 을 도왔다는 것이 어느 정도 분명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서 소리쳐 말했다. "당신…… 당신은 정말로 혈접이로군요?" 순간이었다. 주위에서 무심코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곤륜파의 제자들이 저마 다 크게 놀라서 이쪽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 언제 돌아섰는지 현의여 인의 얼굴에 씌인 검은 면사가 강렬하게 확대되는 듯하면서 어느새 그녀가 황보자안의 앞으로 다가들어 그의 몸을 휘어잡고 번쩍 밖을 향해 신형을 날 리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 순간이 너무나도 빨리 일어난 변화여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앗, 멈춰라!" 아평의 깜짝 놀란 외침이 귓전에 들리는 순간에 황보자안은 문득 급속히 의 식을 잃어갔다. 혼수혈을 짚힌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정말이지 이렇게 느닷없이 납치를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황보자안이 의식을 되찾고 눈을 떴을 때에는 자신의 몸은 이미 어떤 낯설은 고봉(高峯)의 꼭대기에 있는 한 평평한 바위 위에 눕혀져 있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두운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의식이 깨어나고 자신의 몸이 혈도가 제압되어 있지가 않아서 일어날 수가 있었지만, 잠시 동안 누운 그대로 일어나지 않고 생각에 잠겼 다. 그때 문득 그의 전으로 들려오는 한 줄기의 싸늘한 음성이 있었다. --계속-- 번호:115/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2 길이:44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2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2장. 공포스러운 연심(戀心) "흥! 깨어났으면 어서 일어날 일이지 제가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라고 태연 한 척하는 거야? 내가 다가가서 따귀를 한 번 후려쳐야 일어날 작정인가 보 지?" (혈접이로군.) 황보자안은 씁쓸한 고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혈접은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바위 위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태도를 보나 자신의 혈도를 제압하지 않은 것으 로 보나 어떤 해칠 뜻은 없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너무나도 어이없게 그녀에게 납치를 당했기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곤란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색하게 계속 시간만 끌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할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당신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나에게 달리 할말이 있는가 본 데, 나는 뭐 그리 기분 나쁜 상태는 아니니 지금 말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 말은 그야말로 상대방의 기분을 의식해서 가능한한 자극을 주지 않으려 고 노력한 최대의 성의있는 말이었다. 허나 혈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싸늘한 음성으로 까르르 웃는 것이 었다. "호호호, 정말 꼴값을 하는군. 자기는 뭐 태어날 때부터 다른 종자였는 줄 아는가 보지? 그렇게 말끝마다 점잔을 떨다니!" 황보자안은 이 욕설을 듣게 되자 문득 어이가 없었다. 원래 그는 아주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욕같은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그가 곤륜파에 가서 다소 푸대접을 받는 상태에서도 곤륜파의 사람 들은 그에게 감히 욕설만은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단지 그가 얼마 전에 토 신묘에서 병기점의 주인에게 다소 상스러운 소리를 듣기는 했었으나 그때는 싸우던 중이었는지라 지금과는 달랐다. 이 혈접은 아까 주루에서는 제법 깍듯하게 대해 주었었는데 지금은 도대체 그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욕석을 퍼붓고 있는지 몰랐다. "……" 황보자안이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혈접은 다시 입을 열었 다. "좋아요.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강호에 사악하기로 소문난 혈접 이고, 당신은 그야말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군자같은 사람이죠. 그래, 군 자께서 이런 사악한 천녀를 만나게 되니 그 기분이 어떠신가요?" 이에 비로소 황보자안은 자신이 아까 마지막에 그녀를 혈접이라고 부른 것 이 그녀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혈접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는 이미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훤하게 알 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혈접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황보자안은 내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이 혈접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 곧 일어나 정중하게 그녀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부른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빴다면 용서해 주시오. 나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일 뿐이오." 황보자안은 이어 그녀의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여 자의 이름을 함부로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되기 때문이었다. 혈접은 다시 싸늘하게 웃더니 말했다. "흥! 혈접을 그럼 혈접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겠어요? 다만 당신은 지금 나와 같은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은근히 불쾌하겠죠?"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다만 당신과 같은 무림기인을 만나게 된 것에 얼 마간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소." 혈접은 다시 싸늘하게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경이롭다는 것이죠?" 황보자안은 대답했다. "나는 원래 곤륜파의 세 분 사형에 대해서 그들의 무공이 대단하기 때문에 속으로 매우 탄복을 하고 있었소. 그런데 며칠 전에 보니 당신은 나이도 많 지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나의 세 분 사형들보다 무공이 높은 것 같아서 자연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었소." 혈접은 아무래도 여자이기 때문에 황보자안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자 다소 기분이 좋아졌는지 약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어째서 내가 당신의 사형들보다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황보자안은 그녀가 다소 기분이 좋아진 듯하자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나의 사형들의 무공은 대단하지만 그 난주칠패는 나의 사형들의 무공 을 별로 겁내는 것 같지가 않았소. 그런데 당신이 바로 그 난주칠패를 모두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황보자안이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혈접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차갑 게 말을 잘라 말했다. "흥! 그들 난주칠패는 허명만 얻고 있었을 뿐이었고 나의 일초의 상대도 될 수가 없었어요." 황보자안은 어쩌면 이 여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래 난주칠패의 하나인 검패의 제자도 황보자안으로서는 이기기가 힘겨웠 는데 이제 그 난주칠패를 모조리 제거한 여인을 만나게 되자 황보자안으로 서는 도저히 혈접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다시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바로 그때 그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비로소 무사할 수가 있었 소. 따라서 나는 항상 당신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뵙고 보니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소. 정말 감사하오!" 이에 혈접은 차갑게 웃더니 대꾸했다. "호호호, 당신은 정말로 웃기는군요. 당신은 왜 내가 당신을 위해서 그들을 제거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쓸모없는 서찰 때문인가요? 호호호, 내가 이 리로 당신을 납치해 온 것을 보면 모르겠어요?" 황보자안은 일순 어리벙벙해졌다. "그럼 당신은 나를 납치해 온 것이란 말이오?" 혈접은 순간 뭐가 그리 우스운지 상체를 흔들며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이봐요, 호호호, 당신은 정말 똑똑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멍청한 사람인가요? 혹은 그도 저도 아니면……" 이때 황보자안이 말을 잘라서 대답했다. "나는 그리 똑똑한 사람은 못된다고 할지라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오." 혈접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이렇게 납치해 왔다가 당신의 일행에게 돌려주려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하죠? 그저 한 번 마음놓고 얼굴을 쓰다듬기 위해서 데려 갔었다고 말을 해야 할까요?" "……" "도무지 말이 안되지 않나요? 내가 만일 당신을 데리고 돌아간다면 당신의 그 말코도사들은 뭐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은 내가 당신을 납치한 것이 아니 라 잠시 빌린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될까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얘기가 다소 난잡하게 흘러가자 문득 분연히 말했다. "나의 사형들을 욕하지 마시오!" 혈접은 다시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호호, 당신은 제법 사형들을 비호해 주려고 하는군요. 하지만 사실 그들의 무공이라는 것은 개방구와 같은 거예요." 이 혈접과 같은 여자의 입에서 개방구의 얘기가 나오자 다소 희안한 느낌이 들었다. 황보자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자루로 옮겨갔 다. 그러나 이미 상대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감히 검을 뽑아서 그녀의 등을 찌르지 못했다. 이것을 보고 마치 뒤에도 눈이 달려 있어서 황보자안의 모든 행동을 낱낱이 알고 있는 듯이 혈접이 싸늘하게 말했다. "왜 검을 뽑으려다 그만두는 거죠?" 황보자안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오." 혈접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죽음이 그렇게도 두려운가요?" 황보자안은 일순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특히 아무런 가치가 없 이 죽게 되는 것은 괴로울 것이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나를 죽이고자 한다 면 지금 죽이시오. 나는 그래 봐야 당신에게 난주칠패를 죽이고 난 뒤에 다 시 한 명의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오." 황보자안의 어조에 다소간의 비감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혈접은 일순 싸늘 하게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책벌레답게 상당히 정서가 풍부하군요. 하지만 나는 굳이 당 신과 같은 피래미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두 사람 의 말코도사를 죽여 버리겠어요. 아니 당신의 그 작고 아름다운 여자친구를 죽여 버릴까요? 당신은 어서 가부간의 결정을 짓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렇 지 않는다면……" 황보자안은 물었다. "모두를 해치겠다는 말이오?" 혈접은 이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대꾸했다. "당신이 내 마음속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죠?" 혈접의 얼굴에는 여전히 예의 그 면사가 드리워져 있었다. 면사 속에서 그 녀의 두 눈은 이 순간 아주 맑고 시원한 광채를 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문득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신의 그런 능력이라면 능히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혈접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어째서 그런 악독한 마음이라면 능히 할 수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 죠? 내가 정말로 일을 저지를까봐 두려운가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사실 보기보다 마음이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니오." 혈접은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 이제는 아부까지 하는군요. 그건 어째서 그렇다는 거죠? 당신은 아 직 내가 그 난주칠패를 모조리 죽여버린 것을 보지 못했나요? 나는 분명히 그들을 살려줄 수가 있었지만, 일부러 죽여 버렸어요. 그것도 단 일초에 말 이죠." 황보자안은그녀가 단 일초에 난주칠패를 모조리 제거해 버렸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 니어서 그저 흘려버리고 대답했다. "당신이 그들을 죽인 이유야 어쨌든간에 나의 셋째 사형인 장문인께서는 이 렇게 말씀하셨소. 강호에는 당신에 관한 소문이 사악하게 나 있기는 하지만 당신은 그리 무분별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따라서 당신 그 난주칠패를 모조리 제거해 버린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것…… 그것은 혹시 당신이 나를…… 나를 생각해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는 것이었소." 황보자안은 기왕에 그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니 뒤에 다소 어색한 얘기가 나와서 절로 말을 더듬게 되었 다. 그러나 상대인 혈접은 전혀 그런 얘기에 개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흥! 당신처럼 구변이 좋은 사람도 말을 더듬는가요? 호호, 당신은 아마도 그들의 얘기를 해서 나로 하여금 차마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 하지만 과연 당신의 마대로 그들이 나를 좋게 생각할 리는 없어요. 그 현황 자는 아마도 내가 당신과 친하다면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테니까 좋아한 것일 테죠." 황보자안은 혈접이 자신이 말한 의도와 또한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도 훤하 게 꿰뚫어보는 것을 보고는 내심 생각했다. (혹시 그녀는 그때 주위에서 우리의 말을 모두 엿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 을까?) 당시 황보자안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로 대했었는데, 만일 그녀가 듣 고 있었다면 그녀에 대한 칭찬을 조금이라도 해둘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때 황보자안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서 말을 하지 않자 혈접이 냉랭하게 웃 으며 말을 이었다. "이봐요, 당신은 이제 그만 솔직해 지는 것이 어때요? 당신은 차라리 나에 게 그들 모두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편이 좀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요?" 황보자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그 말이 매우 옳소. 그럼 나는 이제부터 부탁을 할 테니 당신은 들어주기 바라오." 혈접은 매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야 내가 들어주고 않고는 당신의 성의에 달려 있는 거죠. 만일 당신이 조금이라도 장난의 기미를 보인다면…… 그때는 단숨에 달려가서 모두를 죽 여 버리고 와서 다시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어요." (모두를 죽이고 와서 다시 얘기를 하겠다는 것은 그럼 나의 할아버지의 목 숨까지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까?) 황보자안은 내심 지독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어찌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장난을 할 수가 있겠소? 나는 본시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잠시 발끈하여 분수도 모르고 그대의 심기를 노하 게 만들었으니, 이는 필시 죽어 마땅한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어서 나를 그 무서운 무공으로 단번에 죽여 버리되 다른 사람들은 부디 손을 대지 말 아 주시오." 혈접은 황보자안이 이렇게 엄숙하게 사정을 하자 그만 쿡, 하고 웃음을 터 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터져나온 웃음을 급히 거두고는 그녀는 싸늘하게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맨입으로 양손의 떡을 먹으려고 하는군 요. 더욱이 당신은 지금 내 앞에 무릎조차 꿇지 않고 있는데 그 부탁을 내 가 들어줄 것 같은가요?" (양손의 떡이라니?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양손의 떡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 을 것이다. 그저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황보자안은 즉시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나는 본래 당신의 그 신 공에 의해 넋이 황천으로 날아가고 육신은 바닥에 뒹굴어야 하는 것인데, 실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마능로도 많이 벌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 이오." 혈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당신은 그야말로 나를 웃기려고 작정을 하는군요. 하지만 내가 그 런 시시한 작전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오산이예요." 황보자안은 말했다. "사람이란 즐거워지는 것은 좋은 일이오. 모름지기 그 즐거움을 누리기 위 해서 사람들은 애를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너무 육신의 쾌락에만 전 념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오히려 너무 일방적으로 고통 속으로 가는 것도 어리석은 일인 것이오. 특히 그대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은 더욱 그러는 것이 보기 좋을 것이오." 문득 혈접은 눈빛을 싸늘하게 굳히고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내가 젊고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하죠? 내가 이렇게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실은 아주 추괴한 여인이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호호 백발의 노파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황보자안은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비록 당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확신할 수가 없지만 목소리나 다 른 부분의 생김을 보고는 그렇게 유추하는 것이오." 혈접은 문득 싸늘한 시선으로 황보자안을 쏘아보더니 물었다. "당신은 혹시 나의 얼굴을 보고 싶은가요?" 황보자안은 대답했다. "만일 보고 싶지 않다면 당신이 실망할 것이니, 나는 당연히 보고 싶은 것 이오. 나는 보고 싶소." 혈접은 다소 기이한 눈빛으로 황보자안을 주시하며 다시 말했다. "나의 얼굴은 실은 너무나도 추괴(醜怪)하여 만일 누군가가 나의 얼굴을 본 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맹세를 한 적이 있어요. 당신 은 그래도 볼 건가요?" 황보자안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어차피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을 사람이니 당신의 얼굴을 본들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오. 설마하니 당신은 나를 살 루 생각이란 말이 오?" 혈접은 일순 눈빛을 차갑게 빛내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나는 필시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황보자안은 이에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 보시오. 그러니 나는 왠지 그대의 얼굴이 더욱 보고 싶어지는구려. 자, 어서 주저하지 말고 얼굴을 나에게 보여 주시오." (……) 혈접은 일순 황보자안을 싸늘하게 주시하더니 한참 후에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당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어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꾸했다. "어째서 보여주지 않겠다는 말이오? 설마 보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데 보여주는 사람은 두려워졌다는 말이오?" 혈접은 냉랭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사람에게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요." 황보자안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그대는 어째서 나를 자포자기한 사람으로 생각 한다는 말이오?" 혈접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럼 당신은 어떤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나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경험일 것이니 즐거운 일이고, 게다가 내가 그로 인해서 죽는다고 해도 만일 당신이 나를 애처롭게 생각한다면 그 고운 손으로 정답게 묻어줄 것이니, 그 어찌 넋이 라도 즐겁지 아니겠소?" 혈접은 그 말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당신의 말은 아주 청산유수로군요. 하지만 한 가지 결함이 있기 때문에 당 신은 결국 위선자일 수밖에 없어요." 황보자안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아니, 어째서 내가 위선자라는 말이오?" 혈접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의 말은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시신을 어루만져 준다면 즐거워질 것이 라는 얘기는 바로 당신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지 않겠어요?"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것이오. 매우 싫은 사람이 시신을 어루만져 준다면 아무리 넋이 라도 기분이 즐거워질 리가 없을 테니까." 혈접은 기이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바로 거기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예요. 당신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 으면서 어째서 정작 나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 거죠?" (이름? 좋아한다고?) 황보자안은 일순 정신 번쩍 들며 크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럼 지금 내가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인가?) 황보자안은 대답했다. "그거야 마음속으로는 바라고 있었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일 뿐이 오. 내가 단지 검자루를 잡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크게 화를 냈는데, 어떻게 감히 그대의 이름을 내가 물어볼 수가 았다는 말이오?" 혈접은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과연 나를 좋아하기는 하나요?"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싫어한다고 말할 수도 없소." 혈접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미 목숨을 걸었으면서도 감히 나의 이름 을 물어볼 용기는 낼 수가 없나요?" 황보자안은 대답했다. "그거야 지금이라면 할 수가 있는 일이지. 대체 당신의 그 꽃같이 아름다운 이름은 뭐요?" 혈접은 앞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잠깐! 당신이 그 말을 하기 전에 내가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당신은 그 만 먼저 말하고 말았군요. 내가 해야 할 말이라는 것은 당신이 만약 나의 이름을 물어본다면 나는 즉시 당신의 일행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거 예요." 황보자안은 그만 안색이 변해서 소리쳤다. "나는 이름을 물어보지 않겠소!" 혈접은 입가에 기이한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내 이름을 물어본 것이 아닌가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취소하겠소." 혈접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취소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비록 당신이 귀를 막고 있는다고 해도 기필코 이름을 말한 뒤에 한 걸음에 달려가서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겠어 요." (……) 황보자안은 일순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자신이 여태 그녀와 무 슨 얘기를 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황보자안은 도저히 이 여자와 얘기를 해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좋소. 그럼 어서 가서 그들을 죽이시오." 혈접은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어째서 다시 그들을 죽이라는 거죠?" 황보자안은 말했다. "그들도 만일 나를 잃어버리게 되면 깊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오. 그럴 바 에야 차라리 당신에게 모조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소. 당신의 뜻이 그토록 완고한데 내가 굳이 헛수고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혈접은 눈빛을 싸늘하게 빛냈다. "그럼 만일 내가 약간의 보답을 바란다면 당신은 나의 요구에 얼마든지 응 하겠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지 않나요?" 황보자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이오. 당신의 요구 조건은 뭐요?" 혈접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내뱉었 다. "나는 그들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조건으로 당신의 전부를 원해요. 당신 은 앞으로 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 황보자안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의 상황에서 그녀를 다시 노하게 한다면 혹시 그녀가 정말로 살의를 느끼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 았다. "좋소. 그럽시다." 순간 황보자안은 자신의 의식이 급작스럽게 흐려짐을 느꼈다. 이 혈접은 이 미 흔적도 없는 수법으로 그의 혼수혈을 다시 제압한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이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에는 엉뚱하게도 그의 몸은 하나의 푹신 한 침상 위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 서 마음까지 편안하다고는 말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황보자안은 이곳이 어떤 거대한 객점의 화려한 별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황보자안은 주위에 전혀 인가가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의 고봉 위에 올 라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호화스러운 곳에 와 있는 상태이니 필시 그간에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지금쯤 그가 납치를 당한 사실에 대해서 곤륜파의 사람들과 아평은 또한 그 얼마나 고심하며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인가? 황보자안은 지금이라도 그들에 게 달려가서 자신의 무사함을 보여주고 걱정하지 말 것을 얘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황보자안의 전신은 역시 아무런 혈도도 제압당해 있지 않았다. 이것은 혈접 이 그만큼 그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의 무예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는 걱정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므로 황보자안은 즉시 마음을 편안 하게 하고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옆의 욕실인 듯한 곳에서 느닷없는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 다. 그리고 동시에 귀에 익은 예의 그 싸늘한 음성도 따라서 들려왔다. "벌써 일어나고서도 아직 기척도 내지 않고 있다니! 흥, 벌써 자신의 신분 을 잊은 모양이지? 어서 이쪽으로 오지 못해?" 황보자안은 내심 씁쓸하게 고소하고는 천천히 그쪽 욕실의 문을 열고 안으 로 들어갔다. 이 욕실은 호화로운 가운데 상당히 넓어서 중앙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 빛이 감도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혈접은 여전히 얼굴에 면사를 드 리운 채 겨우 목만 내놓고 등을 돌리고 물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은 아주 유혹적이고 자극적인 광경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누구 라도 혈접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결코 이러한 광경에서 어떤 유혹도 어떤 자극도 받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는 대신 공포감을 느끼게 될 것이므 로. 욕실의 사방의 벽은 입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깨뜻한 유리로 채워져 있었는 데, 황보자안은 이 혈접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이런 곳으로 불렀는지 알 수 가 없었다. 마치 그런 그의 의문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혈접이 문득 싸늘한 음성으 로 물었다. "너는 왜 자신이 이런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 황보자안은 고소하며 대답했다. "모르겠소." 혈접은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미 나에게 노예가 되겠다고 했으니 그것은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도저히 바꿀 수가 없을 것이며, 앞으로 나의 명령에 무엇이든 복종해야 할 것이다." 황보자안은 대답했다. "비록 노예라고 해도 보는 눈은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복종할 수는 없소. 그는 우선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면 따르게 될 것이 오." 혈접은 그 말에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좋아. 내가 지금 너에게 시키려는 것은 네가 능히 할 수 있는 아 주 쉬운 것이고, 또한 도의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자, 너는 이제부터 눈을 감아라." 황보자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혈접은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너의 두 가지 조건에 합당하는 일이라고 말을 했으니, 너는 무 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황보자안은 눈을 감았다. "확실이 이 눈을 감는 일은 두 가지의 조건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혈접은 다시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가 말을 할 때까지 결코 눈을 떠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 일 그렇게 할 경우에는 나는 지금이라도 너의 사형들과 여자친구를 죽여 버 리겠다!"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시 눈을 뜨지 않는 일은 역시 두 가지의 조건에 어긋나지 않는 일 이오." 그러자 혈접은 잠시 후에 그의 앞에 가까이 다가와서 등을 돌리며 입을 열 었다. "자, 이제부터 너는 나의 등을 안마하도록 해라. 이것은 결코 도의에 어긋 나지 않는 일일 테니, 너는 차분하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 다만 네가 도중 에 분수를 모르고 나에게 암습을 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녀가 이렇게 등을 돌리고 안마를 해달라는 것은 그야말로 황보자안의 공 격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 황보자안은 혈접의 주문이 끝났음에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전혀 안마를 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어이없게도 황보자안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혈접은 순간 놀랍고도 크게 분노하여 소리를 꽥 하고 내질렀다. "네가…… 네가 감히 나의 몸을 훔쳐보다니!" 이때 황보자안의 신색은 다소 기이하게 변해 있었다. 표정은 무심했고 그의 눈빛은 극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마치 그가 죽어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혈접의 말에 황보자안은 문득 무심한 표정을 조금 움직여서 담담하게 미소 하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대의 몸을 훔쳐보는 것이 아니오." 혈접은 여전히 분노하여 말했다. "네가 감히 지금 나의 명령을 어기고 나의 알몸을 보고 있는데 어찌 훔쳐보 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에게는 아평이라는 여자친구가 있소. 그런데 그 친구는 실로 버릇이 고약하여 밤마다 알몸이 되어서는 나와 동침을 하고자 하오. 그녀와 나는 여태 우런 관계도 갖지 않ㄴ았는데도 말이오. 나는 그래서 결 국 방새도록 한잠도 이룰 수가 없지만,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소." 혈접은 문득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안색이 변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너…… 너는 나를……"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의 그 알몸도 역시 다를 바가 없는 것이오. 내가 훔쳐보는 것 이 아니라 당신이 내 앞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 는 입장에서 그리 심정이 유쾌하지 못하오." (……) 혈접은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원래 이래서는 안된다. 너는 나에게 이미 약속을 했지 않느냐?" 황보자안은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은 도의라는 말을 모르는구려. 실로 대장부는 그에게 모욕을 줄 수가 없는 법이오. 당신은 지금 나에게 모욕을 주려고 하고 있으니 어찌 도의를 안다고 할 수가 있겠소?" 혈접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너희 친구들을 모조리 도륙한다고 해도 말이냐?" --계속-- 번호:116/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2 길이:319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3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3장. 취선거(醉仙居) 황보자안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로 대장부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하늘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는 것이오. 내가 비록 여태 그들을 비호해 왔지만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서는 나로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가 있으므로 이제 당신은 마음대로 하 시오." 혈접은 일순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나는…… 나는 그렇다면 우선 너를 죽인 다음에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도록 하겠다. 다만…… 다만 그 전에 너에게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말과 함께 혈접은 자신의 얼굴을 드리웠던 면사를 위로 걷어 버렸다. 그러 자 황보자안의 눈앞에는 계란형의 얼굴에 오똑한 코, 그린 듯한 아미에 서 늘하고 아름다운 두 개의 눈, 붉은 입술, 그리고 그러한 것들과 아주 극렬 한 조화를 이루는 창백하도록 흰 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한 떨기의 설원에 피어난 빙화(氷花)라고나 할까? 황보자안은 이 여인이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토록 빼어난 미 모를 소유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가 보기에 아평도 상당히 아름다운 미인이나 이 혈접의 미모는 그것보다 확실히 월등히 뛰어나고 있었다. 나이 는 대략 이십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혈접은 얼음장같은 두 눈으로 황보자안의 얼굴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나의 이 얼굴은 남자로는 네가 처음 보는 것이다. 너는 나의 이 얼굴을 보 았으니 어떠한 여한도 없을 것이다. 너는 이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 냐?" 황보자안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 말이 없소. 그대는 어서 손을 쓰도록 하시오." 혈접은 일순 다소 망설이더니 다시 말했다. "너는 마지막으로 나의 이름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 황보자안은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요?" 혈접은 대답했다. "내 이름은…… 모용릉파(慕容凌波), 모용릉파이다."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릉파, 상당히 좋은 이름이로군."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눈을 내리감았다. 순간 모용릉파의 우수에서 흡사 나비 모양의 붉은 기운이 일더니 공포스러 운 기세로 황보자안의 면전으로 덮쳐갔다. (……) 일순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황보자안은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곳은 지옥일까, 아니면 천상의 세계일까? 이미 죽었다면 넋은 구천을 떠 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점차로 의식이 명료해짐에 따라서 이곳이 어떤 지옥이나 천상, 혹은 구천도 아니고 인간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아직 그의 육신이 파괴되지 않은 채로. 어찌된 일일까? 옆에서 알몸으로 함께 누워 있는 모용릉파를 향해 황보자안은 다소 어리둥 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오?" 모용릉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죽었지만 새롭게 다시 태어난 거예요." 황보자안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 모용릉파는 얼굴에 면사를 쓰지 않은 채 알몸이었는데, 황보자안은 자 신의 몸 역시 알몸이라는 것을 알고 물었다. "아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모용릉파는 전과는 아주 다르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미 생각을 바꾸었어요. 우리는 이제 함께 사랑하며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숨어 살기로 해요. 저는 이제 당신을 죽이지 않 을 뿐만 아니라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내가 되도록 하겠어요." 황보자안은 씁쓸하게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맹세한 약속을 어길 셈이오? 당신은 원래 얼굴을 본 사람은 죽이게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모용릉파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는 물론 예외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장차 어떻게 시 집을 가겠어요?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와 혼인을 하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나의 얼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지도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어서 결정하세요." 황보자안은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설마하니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오?" 모용릉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저는 그야말로 당신에게 반한 셈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죽이지 않았겠어요?" 황보자안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그 요구에 응해줄 것 같소?" 모용릉파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하고 싶지 않은 일 이라면 하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저를 애처롭게 여기신다면 저의 부탁을 들 어주세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말했다. "누가 당신을 애처롭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소? 오히려 공포를 느끼겠지." 모용릉파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그럼 내가 그 동안 당신을 괴롭혔던 일이 나 자신을 위해서 그랬던 것 같은가요? 제가 이번에 무엇 때문에 당신을 납치하게 되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저로서는 불가항력적이었어요. 저는 당신을 죽이고 난 뒤에 저도 따라서 죽으려고 생각했으나 차마 당신을 죽이지 못했던 거예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불가항력적인 일이 있다는 것이 믿기가 어렵소. 그 렇다면 당신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 나를 일부러 납치한 것이란 말이오?" 모용릉파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해드릴 수가 없어요. 당신이 안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예요. 그래서 저는 빨리 우리가 은밀히 강호를 떠나자는 거예요." 황보자안은 비단 이 모용릉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나는 설령 우리가 몰래 도망쳐서 잘 살 수가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을 저버릴 수는 없소. 게다가 당신이라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소." 모용릉파는 이제 두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당신은 정녕…… 정녕 그렇게 고집을 부릴 것인가요?" 황보자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뭐라고 유혹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모용릉파는 이에 입술을 깨물더니 번쩍 신형을 날려서 알몸으로 탁자가 있 는 곳으로 걸어가서는 손에 약병 같은 것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말 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에게 이 음양화합산(陰陽和合散)을 복용시켜 저를 갖게 한 후에 나중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수밖에 없겠어요." 음양화합산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이라도 음욕을 품게 만든다는 아주 강 도 높은 음약이라는 것을 황보자안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에 즉시 황보자안의 안색은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모용릉파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 에 차가운 눈빛으로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잠깐! 당신이 만약 그렇게 하겠다면 나는 먼저 자결을 하고 말겠소. 당신 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모용릉파는 무심코 황보자안의 왼손가락을 살피다가 거기에 끼워져 있는 하 나의 현철지환을 보고는 문득 가볍게 놀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형을 멈 추었다. "아! 귀왕침(鬼王針)?" 그렇다. 기실 모용릉파는 황보자안의 의복을 벗길 때에 그저 다른 일만을 생각했지 전혀 그의 현철지환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모용릉파는 그것으로 비록 그가 그녀를 해칠 수는 없겠지만 자결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용릉파는 뚫어지게 귀왕침을 바라보다가 문득 기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그간에 그것으로 충분히 저를 해칠 수가 있었을 텐데 어째서 저를 해치지 않았었죠?" 황보자안은 냉엄하게 대꾸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당신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다만 당신이 이제 나에게 그런 음약을 사용하여 나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으므로 자결 을 하고자 하는 것이오." 모용릉파는 그 말에 문득 몸을 가늘게 떨더니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멍한 표 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 순간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 그렇다. 황보자안이 만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가운데 그녀를 떼어 놓을 순간이 여러 번이나 있었을 텐데도 어째서 여태까지 스스로 희생을 감 수하며 묵묵히 참아 주었겠는가? 모용릉파의 무공이 워낙에 고강하기 때문 에 이 귀왕침이 비록 일반인에게는 극랄한 암기가 될지 몰라도 그녀를 죽일 수는 없으므로 황보자안은 능히 그녀에게 귀왕침을 발사하고 도망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내심으로는 스스로 그녀를 사랑하여 떠나지 못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이 냉연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용릉파는 가늘게 떠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그의 사랑을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귀왕침은 저에게 해를 입힐 수는 있지만 저를 죽일 수는 없는 거예요. 당신은 설마하니 그것을 몰랐다는 말인가요?" 황보자안은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일찌감치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오." 모용릉파는 다시 물었다. "저의 목숨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요?" 황보자안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원래가 파리 한 마리도 죽이기 어려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오." 모용릉파는 재차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일일이 변명을 하고 계시는 거죠?" 황보자안은 지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일일이 물어오는 것이오?" 순간 모용릉파는 수중에 들고 있는 약병을 저멀리 내던져 버리더니 마치 한 마리의 기러기처럼 날아서 황보자안의 품속에 안겨 버렸다. 그런데 기이하 게도 이 순간만큼은 황보자안이 모용릉파의 알몸을 밀어내지 않고 조용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안아주는 것이었다. 모용릉파는 황보자안의 품속에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녀는 이 황보자 안의 생각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지만, 그러나 마음만은 기이하게 도 매우 평온하고 행복했다. (죽어도 좋아.) 모용릉파는 잠시 후에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서 황보자안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당신이라는 분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매우 평범한 사람 같으면서도 혹은 때로는 매우 비범해 보이기도 해요." 황보자안은 담담하게 웃었다.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이오." 모용릉파는 잠시 황보자안의 말을 음미해 보다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하죠?" 황보자안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말이오?" 모용릉파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원래는 이 고난에 대해서 당신과 함께 죽거나 아니면 은거하거나, 혹 은 다른 방법을 써야만이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황보자안은 물었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오?" 모용릉파는 잠시 몽롱한 꿈속에 젖듯이 가볍게 눈을 내리감더니 이윽고 대 답했다. "저는 이미 이 자체로서 만족을 하고 있고 더 이상 원하는 바가 없어요. 정 말로 이상하죠? 저는 제가 조금 전에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가 이상하게 느껴져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점점 이상해지는구려. 당신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렇게 마음이 갑자기 달라진 것이오?" "……" 모용릉파는 그 말에 문득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황보자안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하지 않았는데 금방 그 말을 듣자 다소 의심 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 아닌가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물론이지. 나는 원래 그대를 주루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약간의 호 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을 느낄 수가 있겠소? 음, 나는 당신이 그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아주었는데 그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오?" (그럼 나 혼자만의 환상이었나?) 모용릉파는 일순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의 그 황홀하던 즐 거운 기분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살을 에이는 듯한 한풍이 사 방에서 휘몰아쳐 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기이한 감촉에 고개를 숙여보니 황보자안이 다소 능글맞은 시선으로 자신의 비소를 내려다보며 젖가슴을 매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모용릉파는 왠지 전신에 소름이 오씩 돋는 것을 의식하며 급히 황보자 안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이불자락으로 알몸을 가렸다. 느닷없이 강렬한 수 치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불자락으로 자신의 알몸 을 가리는 것으로도 아직 부족하여 모용릉파는 이어 빠르게 자신의 옷을 모 조리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황보자안이 어이둥절하여 물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옷을 모두 입는 것이오? 그대의 알몸은 확실히 내가 여 태 보았던 누구의 것보다도 훌륭한 것이었는데. 누가 이곳으로 쫓아오기라 도 하오?" 정말로 지금 모용릉파의 안색은 매우 창백해져서 흡사 누구에게 급하게 쫓 기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모용릉파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모르겠어요." 모용릉파는 갑자기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마음은 찢 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황보자안은 그녀의 파리해져가는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하오?" 모용릉파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어서 옷이나 입으세요." "옷을 입으라구?" 황보자안은 잠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모용릉파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주섬주섬 자신의 옷을 하나씩 차례대로 걸치기 시작했다. 그의 보의라든가 모든 소지품들은 모용릉파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제자리에 다 있었다. 황보자안이 옷을 모조리 갖춰 입고 나자 모용릉파는 어느새 예의 그 면사를 얼굴에 드리운 채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리 이제 어서 밖으로 나가요." 황보자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밖으로?" 모용릉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일단은 여기를 떠나야 하겠어요." 황보자안은 일순 머리가 어지워러지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불감청이 언정 고소원이라, 하지만 이것은 뭔가 사태가 이상하게 풀력고 있는 느낌이 었다. 알고 보니 황보자안이 모용릉파에 의해 억류되고 있었던 곳은 바로 동심맹 이 있는 동정호 군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양양성(襄陽 城)의 어느 한 객점의 별채였다. 이 양양성은 대단히 번화하고 또한 대로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 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은 그들이 말을 들어보고서야 아직 환우천하영웅대회 가 개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모용릉파에게 이끌려 다니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지만 그래 도 워낙 거대한 명성있는 대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호기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모용릉파는 황보자안을 거리로 데리고 나오자 이내 그의 손을 잡고 빠른 걸 음으로 성의 외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모용릉파는 우선은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금의 그녀의 눈빛이나 태도는 실로 냉랭하고 차갑기 그지없었으나, 기이 하게도 황보자안의 발길을 무리하게 재촉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이 거의 서쪽으로 성문의 근처에 이르렀을 때, 문득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그 사람의 등뒤에 는 지게처럼 된 물건을 지고 있었는데 지게의 꼭대기에는 <상통천문(上通天 文) 하달지리(下達地理) 천상천하무불통지(天上天下無不通知)>라고 씌여져 있는 휘장이 걸려 있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대개 이러한 곳을 지나다 보 면 많이 마주치게 되는 점쟁이인 것이다. 이 노인(老人)은 용모가 그야말로 전형적인 점쟁이의 형상을 띠고 있었는데, 강퍅한 얼굴에 턱밑에는 얄미운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흐흐흐, 안녕하시오, 두 분 나리?" 음성 또한 간사스러운 쇳소리였다. 모용릉파는 느닷없이 이런 사람이 앞을 가로막고 나서자 매우 귀찮은 듯이 손을 휘저어 물리치려고 했다. 이 모용릉파는 일신에 놀라운 무예를 터득하 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사람이라면 감히 그 가벼운 몸짓이라도 감당 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교로운 일인지는 몰라도 그 염소수염의 노인은 어느새 황보자안의 옆으로 다가들어 모용릉파의 뿌리침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공자나리, 나리의 상(相)은 그야말로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군자의 상이 자만, 애석 게도 음살(陰煞)이 끼었구려. 내게 점 한 번 보지 않으시겠 소?" 황보자안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음살이 끼었다는 말은 맞는 것 같 은지라 다소 마음이 동하여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나는 지금 가진 돈이 없으니 안되겠소." 황보자안은 전에 아평에게 은표꾸러미를 준 다음에 보석 주머니를 빼고는 거의 은자가 없는 상태였다. 다른 일이라면 보석을 전당포에 맡겨놓고 은자 를 사용할 수가 있지만 지금은 보석으로 점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헌데 염소수염의 노인은 문득 구의 우수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한 쌍의 용봉쌍지환(龍鳳雙指環)을 보더니 기이하게 눈짓을 보내며 말하는 것이었 다. "흐흐, 은자가 없으시다면 그 가락지라도 내놓으면 점을 봐드리겠소. 그 노 을빛의 가락지가 마음에 드는걸?" 이에 황보자안은 내심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했다. (이 용봉쌍지환은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보석들보다도 더욱 귀한 물 건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내놓고 점을 볼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노인은 황보자안이 다소 망설이는 빛을 보이자 비꼬듯이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허허, 이제보니 이 공자나리는 너무나도 물욕이 강한 모양이로구만! 그까 짓 가락지 하나 아끼려다가 목숨마저 잃게 된다는 것을 모르시오? 자고로 보물이라는 것은 신외지물이거늘, 허허……" 동시에 은근히 노인은 황보자안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더욱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실로 이 노인은 가락지의 가치를 모르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듣기에는 매우 합당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노인의 세모꼴로 되어 있는 두 눈은 용모에 어울리 지 않게 맑고 투명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순 착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황보자안은 문득 노인의 행동 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용봉쌍지환 중에서 노을빛이 나 는 용환을 빼서 노인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이 노인의 말은 실로 옳은 것이다. 이런 보물은 신외지물이고 또한 임자가 있는 법인데, 구태여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만일 그가 횡재를 한 것 이라면 이 또한 그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럼 어디 한 번 점을 봐 보시오." 황보자안이 웃으며 용환을 쉽게 건네주자 노인은 일시 두 눈에서 한 줄기 기이한 광채를 번쩍 발하더니 굽신거리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이 공자나리께서는 그야말로 인심도 좋으시군. 이 작은 가락지가 제아무리 귀중한 것이라도 필시 나중에 그 몇 배의 귀한 이득을 보게 됨을 이 늙은이가 보증하겠소." 이어 노인은 등뒤에서 하나의 죽통을 꺼내들고 여러번 흔들더니 그 가운데 에서 하나의 대나무 가지를 꺼내 황보자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황보자 안이 그 대나무 가지를 받아들자 노인은 간다는 말도 없이 뒤쪽으로 부리나 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 황보자안은 다소 기이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이가 없어 하며 그 대나무의 중 간에 적혀 있는 점괘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기이하게도 점괘가 아 니라 한 줄기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을 보는 즉시 남쪽 취선거(醉仙居)로 가시오.> --계속-- 번호:117/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2 길이:288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4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4장. 주루풍운(酒樓風雲) 글씨는 수려하고 섬세하여 여인의 글씨 같은데 왠지 거기에서 담담한 난초 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남쪽의 취선거라고?" 황보자안이 어리둥절하여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문득 옆에서 다소 지루한 듯이 바라보고 있던 모용릉파가 뒤에서 그 글귀를 바라보고는 번쩍 그 노인이 사라져간 쪽으로 신형을 날려가는 것이었다. (……?) 황보자안이 더욱 어리둥절하여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잠시 후에 모용릉파가 거의 기척도 없이 그의 옆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녀의 안색은 다소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에는 어느 정도의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오?" 모용릉파는 앙칼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바로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날뛰는 계집이겠죠." 황보자안도 이미 어느 정도 느끼기는 했으나 모용릉파가 계집이라는 말에 문득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아평일까?) 허나 모용릉파가 그녀를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되돌아온 것을 보건대 아평 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누구일까?) 황보자안은 생각하다가 문득 그 대나무를 모용릉파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겠소?" 모용릉파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냉랭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리로 가도록 해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그쪽으로 간다면 당신은 그들의 계획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 아니 오?" 모용릉파는 잠시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발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대체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 당신을 데려갈 것인지 하넌 봐야 하겠어 요." 이에 황보자안은 문득 자신만이 보라고 주었던 대나무를 모용릉파까지 보게 되어서 앞으로 자칫 일행에게 무슨 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 다. 모용릉파는 상기된 표정 그대로 황보자안의 손을 잡고 남쪽의 취선거로 향 하기 시작했다. 과연 성의 남쪽에 취선거라는 작은 술집이 있기는 했다. 모용릉파와 황보자안은 몇 번이나 물어서 그 술집을 찾아갔는데, 이때 주위 는 오후도 지나가고 점차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상태였다. 아마도 이 런 때라면 술집에는 술을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어서 안은 발딛 을 틈도 없어질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이 취선거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그러한 당연한 일 이 당연하지 못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이 취선거라는 낡고 냄새나 는 술집은 십여 개의 탁자 중에서 대부분이 비어 있었고, 다만 하나의 탁자 만이 네 명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모여 앉아 있었다. 황보자안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 네 사람을 바라보고 일시 크게 놀라 고 반가운 마음이 일어 하마터면 소리치며 달려갈 뻔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탁자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 있는 네 사람은 바로 아까 그에게 대나무 를 전해 주었던 그 염소수염의 점쟁이와 세 명의 평복을 걸친 사람들이었는 데, 그 세 명의 평복을 걸친 사람들이 바로 곤륜파의 두 분 사형인 출진자, 현황자와 그리고 아평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은 옆에 모용릉파가 없었다면 당장에 달려가서 그들과 반갑게 인사 를 나누었을 것이지만, 지금 만일 그가 달려가서 그들과 아는 체를 하면 혹 시 모용릉파의 날카로운 성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황 보자안은 일단은 억지로 참고 묵묵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 출진자 등의 변장은 실로 허술하여 황보자안이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던 만큼 그들은 굳이 모용릉파를 속이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혹시 옆에 앉아 있는 점쟁이 노인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담하게 모용릉파 와 맞서고 있는 것일까? 황보자안은 출진자나 심지어 아평까지도 그에게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고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 각하여 묵묵히 모용릉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용릉파는 그들 네 명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일순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 다. 그녀는 그들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해도 자신이 만만하다는 태 도인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황보자안의 손을 잡아끌더니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창가에 위 치한 탁자를 잡아서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데 잠시 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는 주인이 나와서 주문을 받지 않 았다. 아마도 이곳에 손님이 하나도 없는 것만 봐도 이미 곤륜파에서 손을 써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모용릉파는 안으로 들어와서는 묵묵히 싸늘한 기색으로 앉아서 움직이지 않 고 있었고, 옆의 네 명도 역시 쉽게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이 두 개의 탁자를 간혹 번갈아 살피면서 다소 어색한 기분에 잠자코 있었다. 장내는 아주 조용해졌지만 매우 냉랭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일촉즉발 이라고나 할까? 만일 이 긴장된 침묵이 한 번 깨지게 되면 장내에는 피를 부르는 무서운 격전이 벌어지게 될 것 같았다. 헌데 그때 갑자기 주루의 밖에서 거칠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루 입 구 근처에서 멎었다. 아마도 누군가 지나가던 사람이 급히 술 한 사발을 마 시기 위해 이 술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이어서 머리에 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대한 한 명이 미 처 말을 말뚝에 매어 놓지도 않고 달려들어와서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주인! 술을 주시오! 술!" 보아하니 이 사람은 매우 성질이 급할 뿐만 아니라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은근히 기회를 노리며 침묵하고 있었던 출진자 등의 안색은 이 느닷없 는 불청객의 등장으로 가볍게 찌루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미처 제자 들에게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는 했는데, 제자들이 공공 연히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어서 이 성질 급한 대한의 침입을 막지 못한 것 같았다. "이보시오, 주인장! 주인장 없소?" 대한은 하나의 자리를 급히 차지하자 쉬지 않고 소리쳐서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제압되었을 주인이 그의 부르는 소리에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 고, 출진자나 아평 등도 지금 중요한 일전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 도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대한은 한참이나 소리쳐 주인을 부르다가 그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출 진자 등을 힐끗 바라보다가 왠지 이곳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불만스럽고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주인이란 작자가 술독에 빠져 죽었나? 험험, 주인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다른 곳에 술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곳의 죽엽 청(竹葉淸)이 항상 마음에 들어서 찾아왔더니, 빌어먹을!" 그 대한은 장내의 살벌한 분위기를 보고 감히 난동을 피우지는 못했으나 그 냥 나가려니 매우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걸음 을 옮기다가 문득 황보자안을 발견하고는 그의 눈빛이 험상궂지 않다고 느 꼈는지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형장, 혹시…… 혹시 주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만일 이곳에서 술을 마실 수가 없다면 그에게 부탁하여 술 두 근만 부탁하려는 것이오. 말을 타고 가면서 마시면 될 게 아니오?" "……" 대한은 장내의 분위기에 위축이 되었는지 주위를 한 차례 돌아본 다음에 말 을 이었다. "아, 당신들도 이렇게 술집에 왔으니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 오. 그러니 내 심정을 안다면 그 주인을 잠시 좀 보게 해주시오." 황보자안은 원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술에 집착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황보자안은 비록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술 한 근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에게 기 꺼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기실은 황보자안은 본인도 지금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옛말 에 술을 좋아하는 악인은 없다고 했으므로 황보자안은 절로 그 대한에게 호 감을 느끼게 되었은 것이었다. "우리도 방금 전에 왔기 때문에 주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 다." 대한은 황보자안의 말에 잠시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그렇 다면 황보자안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인 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ㄷ는 듯이 잠시 세세하게 황보자안의 얼굴을 뜯어보 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천천히 내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주인이 아무래도 잠시 뒷간에라도 간 모양이니 잠시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지." 대한은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주루를 떠나기가 섭섭한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는 황보자안의 바로 옆 탁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황보자안은 필시 조금 후에 살벌한 일전에 벌어질 것 같아서 급시 그 대한 에게 이곳을 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과 같은 상 황에서 자신이 그와 같은 말을 꺼낸다는 것은 왠지 시기상조이고, 양쪽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일이 될 것 같아서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대한은 마치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열심 히 입을 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형장! 내 비록 당신과는 초면이지만 이 얘기는 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 바로 요 아래 무창(武昌)에 있는 평통표국 (平通 局)의 표사, 장두표 나으리라는 말씀이오." 대한은 말을 하면서도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지 연신 주루의 안쪽을 살 펴보고 있었다. "하하하, 당신은 우리가 이번에 어떤 일을 해냈는지 알기나 하시오? 하하, 우리는 당시 은자 백만냥의 표물을 싣고 종남산(終南山)의 기슭을 지나고 있었소. 음, 흔치 않은 일이지. 암, 흔치 않은 일이고 말고. 천하의 녹림 도적들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한꺼번에 그 종남산의 계곡에 서 들이닥치는 것이었소. 그때…… 그때는…… 음, 이런 것은 말할 수가 없 는 것이겠지. 그래서 말이오……" 대한은 연신 입으로 침을 튀기며 얘기를 해대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횡 설수설이었지만, 황보자안은 금새 이 대한이 평통표국이라는 곳의 일원이 며, 지금 일을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리러 먼저 무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 혼자서만 떠드는 것을 보고 있기가 안되어서 슬 쩍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서 귀하들은 무사히 목적을 마치고 이렇게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니 오?" 순간 대한의 눈빛이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소 기이하게 번뜩였 다. "당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시오? 혹시…… 혹시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일에 말이오, 당신이 미리 그 사실을 알고……" 황보자안은 이 대한의 횡설수설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또한 그럴 필 요도 느끼지 않았지만, 왠지 이 순간 대한의 눈빛을 본 순간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여 황보자안은 잠시 대한의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 고, 과연 이 대한을 그가 어디에서 보았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했다. 황보자 안은 표국 사람들과 관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이 대한이 자신의 장 원의 호위무사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런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기기 위 해서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더욱 싸늘해졌음을 느 끼고 황보자안은 출진자 등을 바라보다가 이미 그들이 몸을 일으켜 이쪽으 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렸다. 점쟁이와 출진자 등은 이미 수중에 장검을 뽑아들었는데 그들이 모용릉파를 향해 다가오는 기세는 매우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어서, 여태 정신없 이 떠들던 대한의 입을 봉해 버리기에 족했다. 대한은 한참이나 득의만면하여 떠들어 대다가 그들 네 명이 자신이 있는 쪽 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즉시 새파랗게 변해서 엉거주춤 몸을 일 으키려고 했다. 그는 이제서야 장내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모용릉파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감 히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어색하고 몸이 굳어졌다. 황보자안은 이 순간에 자신이 몸을 일으켜서 일행의 편에 서야 하는지의 여 부를 두고 내심 수십 차례나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 네 사람의 신형이 자신의 옆에 이르러 모용릉파의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몸이 다소 굳어졌다. 이제는 일행의 편에 서려고 해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문득 옆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대한의 처지가 다소 부러운 느 낌이 들었고, 만일 그와 같이 아무런 고충도 없는 제삼자라면 이 곤란한 상 황을 피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실은 물론 그렇게 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었다. 문득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없던 모용릉파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호호, 지금까지 나를 기다려 왔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게 무어야? 어떤 일 이건간에 가능하면 빨리 치루는 것이 좋지 않겠어?" 황보자안은 모용릉파의 음성을 듣고 그녀에게 자신이 있는 만큼 이 싸움은 일행에게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근심이 되었다. (누구도 다치는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만일 누군가가 다친다면 그것 은…… 그것은……) 그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포위하고 있던 네 명의 사람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쌕쌕쌕쌕! 황보자안은 워낙에 근심을 하고 있던 판국이라 그것을 보고 일시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고 하지만 기실 정말로 공격을 개시한 사람은 출 진자와 현황자였고, 아평과 점쟁이는 다만 옆으로 몸을 움직이기만 했다. 이것은 어떤 진법에 의한 것으로 아마도 그들 네 명은 사전에 합공술에 대 한 모종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시 모용릉파가 앉아 있는 탁자 주위에 마치 공처럼 둥그레한 드넓은 검막 (劍幕)이 두 갈래로 펼쳐지면서 그녀가 앉아 있지 않은 의자들이 검기에 갈 가리 찢겨져 날아갔다. 출진자와 현황자는 당금 곤륜파를 대표하는 최절정급의 고수들이었기 때문 에 그들의 무예는 가공스러운 정도였다. 일순간의 그들의 신형이 검막의 속으로 사라져 희미해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 속으로부터 길쭉한 푸른 광채가 마치 기다란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이 빠 르게 모용릉파의 면전으로 양쪽에서 뻗어나갔다. 이것은 바로 무림에서 거의 전설처럼 전해지는 검망(劍芒)이라고 하는 것으 로, 태청검법에서 이룩된 태청검망이었다. 게다가 그 검망의 길이가 무려 한 자 반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또 한 그들의 검법이 최상승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모용릉파는 그들의 검막이 자신의 옷자락을 거의 스치도록 지나가고 있음에 도 전혀 끄덕하지 않고 있다가 이 검망을 보는 순간에 몸을 움직였다. 원래 이 검망이라는 것은 그 위력이 기이하게 강력할 뿐만 아니라 마치 살 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수천 수만의 변화를 낳을 수가 있기 때문에 도 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몸을 다소 아래로 낮추며 비스듬히 움직여서 두 개의 검망이 다가오 는 사이로 움직였는데, 마침 그쪽은 아평이 맡고 있는 곳이었다. 모용릉파 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자신의 무공만 믿지 않고 최대한의 임기응변을 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리 잘 짜여져 있는 연극처럼 아평은 이미 그 순간에 전력을 다해 서 모용릉파의 가슴을 향해 장검을 휘두르며 덮쳐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 한 수의 공격은 매서웠다. 게다가 숙녀검이라는 절세의 신병이기를 들고 있 는 상황이고, 또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살인적인 검초였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하기가 곤란한 형태였다. 이를 보고 있는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자 절로 아,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말 았다. 모용릉파가 아평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이 순간에 이미 상위를 점거하고 있는 출진자와 현황자의 검망에 상체가 갈가 리 찢겨나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용릉파는 그 순간에 아래 로 몸을 수그릴 수도, 혹은 아평의 공격에 대해서 되받아칠 수도 없는 상태 였다. 그러니까 황보자안이 보기에 이 합공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맨 나중에 공격 하는 점쟁이의 무서운 일격이 보다 실효를 거두게 하자는 데 있는 것 같았 다. 모용릉파가 아평과상대를 하거나 혹은 아래쪽으로 공격을 피한다면, 그 것은 그들이 바라던 바이며, 즉시 점쟁이가 뒤에서 무서운 공격을 퍼부어 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미 아까 모용릉파의 신법을 따돌렸던 점쟁이 였기 때문에 그의 실력의 가공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는 것 같았다. 모용릉파도 이 순간 그 점쟁이의 공격을 가장 신경쓰 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 있어서의 그녀의 임기응변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황보자 안이 보기에도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평이 기습적으로 덮쳐 오는 것을 보자 그대로 몸을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바로 그 순간에 그녀의 무 서운 발길질에 의해 아평의 숙녀검이 돌연 옆으로 날아갔으며, 모용릉파는 그 순간의 반동을 이용하여 마치 날아갈 듯이 허공을 가로질러 점쟁이의 면 전에서 목줄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 점쟁이는 다음 순간에 모용릉파를 기습적으로 덮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모용릉파가 아평의 힘을 빌어서 그 반동으로 극쾌하게 자신의 앞에 이르렀기 때문에 일시 크게 경악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일순간의 실수와 절묘한 임기응변 은 그대로 승패와 연관되는 법이었다. 게다가 이 모용릉파는 성품이 지극히 냉정하여 누구에게 쉽게 정을 두고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용릉파의 우수가 어느새 점쟁이의 정수리를 후려치기 위해 허공에 들린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아, 하는 놀라움에 찬 신음성을 발하고 말았다. 그는 기실 그 점쟁이가 남자가 아닌 여자가 변장한 것이라 는 사실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긴박하였고 도중에서 모용릉파의 손을 제지할 어떤 변수도 이미 생겨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모용릉파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빠르고 기이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아!" 마악 우수를 들어서 점쟁이의 정수리를 후려치려던 모용릉파가 일순 어찌된 일인지 손의 힘을 잃고 맥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혹시 그 순간에 점쟁이가 어떤 비장의 수법을 전개한 것이었을까? 황보자안 은 그 순간에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부릅뜨고 장내의 상황을 살폈으나 그의 추측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가 이제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 하고 있었던 사태가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대한. 이제까지 탁자의 옆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벌벌 떨고 있던 그 대한이 이 순간에 천천히 우수를 내리고 있었는데, 지금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모용릉파의 등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그 의 작품이었다.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자 마치 기절을 할 것 같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순히 이 대한을 표국의 한 건달같은 표사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지 금의 상황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자신이 어째서 이 대한의 눈빛을 보고 낯익은 느낌이 들었던지 깨닫게 되었다. 바 로 다름이 아니라 이 대한이야말로 아까 그에게 대나무를 주었던 그 점쟁이 였던 것이었다. --계속-- 번호:118/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3 길이:321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5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5장. 황의소녀(黃衣少女) 그러한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자 황보자안은 문득 머리속이 복잡하게 엉켜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곳의 점쟁이는 진짜 점쟁이 가 아니고 바로 조금 전에 나타났던 이 대한이야말로 진짜 점쟁이였던 것이 니, 진짜와 가짜가 이미 뒤바뀌어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천하의 혈접 모 용릉파도 한 순간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모용릉파는 이미 점쟁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주의하 지 않고 오직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쓰다가 당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진짜 점재이로 분장한 여인은 비단 그 변장술이 기막힐 정도로 놀라울 뿐만 아니라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두뇌가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조차도 그 대한이 진짜 표국의 건달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연인은 어떤 사람일까?) 황보자안의 의문은 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그의 생각은 일순간에 일어난 것으로서, 즉시 그의 관심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참한 형편의 모용릉파에게 모아지고 있었다. 그 녀는 원래 악명을 날리고 있는 상태인데다가 지금 이렇게 패하여 사로잡히 게 된다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 다시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다. 모용릉파의 신형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듯했으나 한 순간 마치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키더니 쌍장으로 붉은 기운을 대한을 향 해 휘몰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대한은 다소 놀란 듯했으며, 다음 순간 그의 쌍장에서는 흡사 노 을빛과 같은 광채가 빠르게 뻗어나와 이에 대항해 갔다. 꽈꽈꽈꽝----! 일시 눈앞에서 거대한 벽력탄이 폭발한 것처럼 강렬한 섬광이 일더니 엄청 난 압력과 바람이 일어 주위를 온통 암흑처럼 뒤흔들어 놓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의 신형은 그 바람에 공중으로 떠올ㄹ서 뒤로 이 장이나 날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보니 주루의 천정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사방의 흑벽도 터져나간 채 먼지가 수북하게 내리 쌓이고 있었다. 장내에 놓여 있던 탁자나 의자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사방으로 날려 간 뒤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아평이 엉금엉금 기어나오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내공은 그리 강하지 못해서 황보자안보다도 더욱 멀리 날려가 벽에 부딪쳤고, 이어 의자 등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 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고 다소 안심을 한 뒤에 뭐니뭐니 해도 최대의 관심사 인 모용릉파를 찾기 위해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지금 장내에는 그 대 한으로 변장한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모용릉파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용릉파는 한 순간에 벼락같이 기습을 펼쳐서 그 여력을 이용해 달아난 것일까? 출진자와 현황자, 그리고 점쟁이로 분장한 사람 역시 압력에 밀려서 뒤로 물러나 있었는데, 황보자안과 같지는 않았고 하나같이 크게 경악한 표정으 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때 아평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황보자안에게 달려와서 반갑게 안겼다. "나으리! 나으리, 그 동안 심하게 고생하지는 않았나요? 저는…… 저는 너 무나도 걱정이 되어서 그만 죽어 버릴 뻔했어요." 황보자안은 아평의 그러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 니, 기실은 아평은 원래는 황보자안을 만나자마자 와락 울음부터 터뜨릴 생 각이었는데 아까 처음 만나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격한 감정이 많이 수그러져서 눈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숙녀검을 줍지도 않고 정신없이 달려와서 그의 품속에 안기는 것을 보 면 그녀의 황보자안을 향한 정성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비록 아평을 만나서 매우 기쁘고 그녀가 사랑스럽기는 해도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고 주위에 두 분의 사형이 있기 때문에 웃 으며 그녀를 품속에서 떼어내었다. "나는 이제 괜찮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이에 일시 흥분한 아평도 금새 진정이 되는 듯 새빨개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소 물러났다. 그러다가 이윽고 다시 한쪽으로 번쩍 신형을 날리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심언니! 심언니! 그녀는 대체 어찌됐죠? 달아났나요?" "……" 아평이 심언니라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대한으로 변장한 예의 인물이었다. 그녀의 성이 아무래도 심(沈)가인 모양으로, 아평이 질문을 하 며 다가서는 데도 그녀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묵묵히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심언니, 그 혈접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평이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묻자 서야 그 대한은 음, 하고 깊은 생각 에서 깨어나 그녀를 쳐다보고 되묻는 것이었다. "아평, 뭐라고 했지?" 아평은 이것을 보고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대답했 다. "아이, 언니두! 그래, 그 혈접은 대체 어찌된 일이냐구요." 황보자안은 이때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평이 느닷없이 그 대한을 향 해 언니라고 친근하게 대한 것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아 평이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인 것 같지는 않고 요 근래 들어 새롭게 친해진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대한은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녀는 가 버렸지." 아평은 왠지 대한의 어조가 기이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물었다. "가 버리다니? 그 혈접은 달아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대한은 고개를 거의 건성으로 끄덕였다. "음, 겉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 이어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황보자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 아평은 다소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대한의 시선이 황보자안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웃으며 두 사람의 사이로 다가왔다. "나으리! 그녀는…… 그녀는 바로……" 아평이 대한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망설이자, 문 득 대한은 그 자리에서 한 차례 빙글 맴을 돌더니 어느덧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심황(沈凰), 심황이라고 해요." 황보자안은 앞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일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의소녀(黃衣少女). 지금 그의 앞에는 건장한 용모의 대한이 아니라 아 름다운 구름같은 머리를 기르고 체형이 섬세하며 아름다운 담황색의 장삼을 걸친 이십세 정도의 소녀가 서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일시 그 거칠고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쳐 말하던 대한이 이와 같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묘령의 소녀로 변신하는 것을 일시 믿을 수가 없 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세상에 이처럼 완벽하고 빠르게 변신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을 오 늘 처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황의소녀의 키는 아평보다도 다소 큰 것 같았으나, 허리가 거의 한 줌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게다가 그 용모는 더욱 아름다워 마치 용을 그릴 때 마지막의 중요한 부분을 그린 것처럼 절세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모용릉파의 빙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용모를 보고 매우 감 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황의소녀의 미모는 비단 모용릉파의 용모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완숙하고도 온화한 아름다움에 있어서 는 모용릉파를 능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용릉파를 설원에 한파를 이기고 피어난 매화(梅花)라고 한다면, 이 황의소녀는그 고고하고도 완숙한 자태를 자랑하는 빼어난 아름 다움의 난초(蘭草)라고나 할까? 이 한 송이의 매화와 한 그루의 수려한 난초는 각기 나름대로 장점을 가지 고 있었고, 실로 그러한 미모는 결코 인세에서 두 번 다시 보기가 어려운 것들이었다. 만일 천하의 신장이 옥을 깎아서 정교하게 조각해 내거나, 아 니면 천상의 신녀가 이슬이나 꽃잎만 먹고 산다면 이와 같은 환상적인 미모 를 지니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실로 아까 대한의 그 거칠은 행동과 음성 뒤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용모와 섬세한 기질,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음성이 숨어 있었을 줄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 황보자안은 워낙에 어려서부터 부유하고 화려한 환경 속에서 자 라나서 이와 같은 미모를 본 순간에 감탄하는 마음은 절로 일었으나, 그다 지 넋이 달아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에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황 의소녀 심황에 대한 어떤 아름다운 환상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기억은 다소 희미한 것이어서 비교적 기억력이 훌륭한 황보자안으로서도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으나, 그의 기억에 는 이 황의소녀가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자신이 초면에 너무 실례를 범하고 있다고 자각하고는 얼른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를 했다. "이거 제가 너무 생각에만 빠져 있었군요. 저의 이름은 황보자안입니다." 황의소녀 심황은 조용한 시선으로 황보자안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다가 문득 웃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대는 저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것은 묻지 않나 요?" 황보자안은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그녀의 말을 듣자 일순 저도 모르게 얼굴색이 붉어졌으나 할 수 없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저는 이것이 하하,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리지 않으려고 했으 나, 심낭자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혹 시 그대와 나는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심황은 아름다운 옥용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더니 도리어 되물었 다. "제가 낯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제가 전생에 공자와 알게 되었었나요? 그 것도 아니면 혹시 몰래 저를 훔쳐보신 것이 아닌가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일년 전에 장강의 나룻배에서 혹시 낭자를 본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비록 용모도 크게 다르고 또한 옷차 림 등이 모두 달랐지만 그 일이 지나고 나서 저는 많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심황은 그 말에 자신의 구름같은 머리결을 쓰다듬어 올리면서 한 차례 흐드 러지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결국 공자께서 그 일을 아시게 되셨군요. 그래요, 제가 바로 그 나룻배에서 무뢰한들에게 욕을 당할 뻔했던 그 촌스러운 소녀였어요. 공자 의 총명하신 점은 제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황보자안은 즉시 포권하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나중에 낭자께서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스스 로 분수도 모르고 일에 끼어들었던 것이 얼마나 낯뜨거웠었는지 모릅니다." 심황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당시 모종의 사건으로 다소 의기소침하여 번뇌를 느끼고 있었는데, 공자님의 그와 같은 대장부다운 의협심(義俠心)에 내심 얼마나 감동이 되었었는지 몰라요. 그 뒤로 저는 매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용기있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다방면에 있어서 많은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죠. 저는 그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 황보자안은 눈앞의 이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을 극도로 칭찬하고 또한 몇 푼 정도의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얼굴색이 붉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옆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아평이 웃으며 끼어들어 황보자안에게 말 했다. "이분 심언니는 그 뒤로 나으리를 한 번 더 보신 적이 있는데, 나으리, 그 일은 기억나지 않으세요?" 황보자안은 그 말에 일시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럼 그 난주성의 용문주루 이층에 앉아 있던 늙은…… 늙은 거지도 바로 이 심낭자께서 변장하신 모습이었다는 말이오?"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총명함은 저의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저는 저의 정신적인 스승이라 고 할 수가 있는 공자께서 요 근래에 강호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서 다만 몇 푼이나마 암중으로 도움을 드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 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남들의 시선을 가장 덜 받는 거지로 분장하는 것 이었어요." 그렇다. 심황의 이 말은 실로 대다수의 인간의 심리의 맹점을 찌르는 것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더러운 거지는 사람들의 눈길을 가 장 끄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단순히 처음의 몇 번에 그칠 뿐으로, 누가 세상에 그처럼 더러운 거지의 용모를 일일이 조사 하려고 생각이나 하겠으며, 더군다나 냄새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나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처음에 대강 살펴보고 내심 아는 듯이 생 각하게 되는 것이나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정곡을 찌르는 문제 인 것이다. 황보자안은 당시 그 늙은 거지가 느닷없이 빠르게 사라졌으며 그 때문에 기 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처럼 더러고 냄새나던 거지가 바로 이 아름답고 향기가 넘치는 소녀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일순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개 여자들은 더러운 것은 피하고 냄새나는 것 역시 피하기 마련인 데 그런 변장을 부담없이 해치울 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심황이라는 낭 자의 용기에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평은 이어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이분 심언니께서는 사실 귀수성심(鬼手聖心)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계시고, 강호에서 은밀히 활동해 오셨는데, 무공은 그 혈접에 비해 서로 비슷하신 정도라고 할 수가 있지요. 게다가 변장술은 이분 언니의 특기 중의 하나로, 나으리께서 납치를 당하신 후 어느날 이분 언니께서 저희를 찾아와서는 나 으리를 구해드릴 일을 논의하게 되었어요. 그 뒤에 나으리를 이렇게 구출하 게 된 것은 모두 이분 심언니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황보자안은 이 심황이 말로는 무공이 혈접보다 못하다고 겸손해 했을 것인 데도 아평이 일부러 올려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실 황보자안이 보기에도 이 심황이라는 낭자의 무공은 혈접에 비해 결코 뒤지 지 않는 것 같았고, 게다가 여러 가지의 재주와 슬기가 넘치는 여인이기 때 문에 정말로 혈접과 겨룬다면 서로 막상막하의 국면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아평의 말에 심황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것을 듣고 문득 그 녀가 자신과 모용릉파가 서로 옷을 벗고 있었던 광경을 본 것이 아닌가 하 여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정중하게 심황을 향해 재차 포권하며 감사의 말을 했다. "심낭자께서 불초를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정말로 고맙기 이를 데가 없습 니다. 만약에 제가 사례를 드릴 것이 있다면 좋겠으나, 원래가 심낭자와 같 은 분은 고고하여……" 헌데 심황은 문득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저의 성품은 그다지 고고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요. 저는 역시 다른 사람 들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대소변을 보는 그런 인간에 불과하지요." 지금 이 심황과 같은 아름다운 여자가 대소변의 얘기를 하자, 다른 아름다 운 여자들이 그 얘기를 했더라면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렸을 것이나, 이상하 게도 그녀가 말하는 지금의 대소변은 마치 황금덩어리처럼 더럽거나 냄새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실로 사람에 따라서 혹은 환경에 따라서 미추의 견해가 이렇게 달 라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절로 기이한 표정을 했다. 심황은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말을 계혹했다. "저는 원래 공자님께 어떤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이와 같은 도 움을 드린 것이었으나, 기실 공자님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수긍이 가지 않 는 도움을 받은 셈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남을 의술로써 치료할 때에도 그 렇지만, 만일 상대에게 어떤 능력이 있을 경우는 본인의 부담을 줄이기 위 해 어떤 대가를 받곤 하지요." "……" "그래서 이번에도 저로서는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었지만 공자님께 한 가지 의 보답을 받고자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황보자안은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말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편해졌다. 기실 천하에서 곤란한 것들 가운데의 하나는 이런 절세미인의 후의를 아무 런 대가도 없이 받는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만일 거기에서 시원스런 매듭이 지어지거나 합당한 대가가 치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도움을 받은 사 람은 거의 매일 그 절세미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피곤하지 않겠 는가! 황보자안은 이러한 심리를 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웃으며 물 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낭자께서 원하신다면 저의 황보가문의 재산 을 절반이라도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원래 황보가문의 재산이 얼마 나 되는 것인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녀만은 알고 있는 것일 까? "저는 겨우 약소한 힘을 보탰을 뿐인데, 그런 엄청난 대가를 받을 수는 없 는 일이지요. 저는 다만 이것을 저의 손가락에 끼울 수가 있는 것으로 만족 해요." 말과 함께 심황은 품속에서 노을빛 서광이 은은하게 빛나는 반지를 꺼냈는 데, 그것은 바로 아까 그녀가 점쟁이로 분장했을 당시 황보자안이 복채로 주었던 용봉쌍지환 가운데의 만년온옥으로 만들어진 용환(龍環)이었다. 기 실 이 용봉쌍지환은 천하에 으뜸가는 최고의 재질로 만들어진 최고의 상서 로운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황보자안도 당시 그것을 복채로 준 것이 아니라 점쟁이의 화술에 져서 그냥 주었던 것인데, 심황은 그것을 인정하고 지금 정식으로 도움의 대가로 받으 려는 것이었다. 아까 이 심황의 무공을 보니 노을빛의 색깔을 띠고 있어서 그녀가 유독 이 노을빛의 용환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황보자안은 물론 기왕에 주었던 물건인지라 흔쾌하게 즉석에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심낭자께서 그런 약소한 보답으로 만족을 하시겠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그럼 이제부터 그것은 심낭자의 것으로 하십시다." 심황은 이에 정중하게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고마워요." 이어 그녀는 즉시 자신의 손으로 용지환을 왼손의 무명지에 끼우는 것이었 다. 그 무명지는 일명 약지라고도 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청춘남녀들이 혼인 식을 올리고 나서 교환하는 예물반지를 끼우는 곳인데, 지금 그녀가 자신의 반지를 받고 그곳에 끼우는 것이 어떤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황보 자안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심황은 표정에 전혀 어색한 심정이 보이지 않았고, 노을빛 의 용지환을 손가락에 낀 그녀의 용모는 이 순간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일시 다소 넋나간 듯한 표정으 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놀랍게도 아직 두 분의 사형께 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크게 놀라고 안색이 변하여 즉시 그쪽으로 고개 를 돌리며 공손히 절을 했다. "두 분 사형, 이 어린 사제가 잠시 한눈을 팔다 보니 두 분 사형께 인사를 올리지ㅣ 못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이때 출진자와 현황자, 그리고 점쟁이로 분장했다가 이제는 본모습을 되찾 은 삼십육천강의 한 사람은 각기 황보자안과 심황의 대화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이 문득 고개를 돌려 엄숙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그와 같 이 말하자 일시 표정이 봄눈 녹듯이 풀렸다. 현황자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저 당초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너를 구하려고 노력한 것 일 뿐이니라. 그래, 자네가 그간 심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서 매우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황보자안은 물었다. "혹시 저로 인해서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닙니까?" 현황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혈접은 다행히도 우리들이 내려올 행로를 따라서 왔기 때문에 그리 날짜가 지연되지는 않았네. 앞으로 우리는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이곳 양양성 내의 한 객점에서 쉬도록 하고 다음날 무창성에 도달하여 배를 타면 제날짜에 도 착하게 될 것이네." 현황자가 말한 제날짜라고 하는 것은 물론 환우천하영우대회에 맞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현황자의 말 가운데 무창의 얘기가 나오자 아까 심황이 천연덕 스럽게도 평통표국의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며 다시금 그녀를 슬쩍 돌아 보았다. 심황은 이때 황보자안과의 거래도 끝났고 하여 다소 겸연쩍은 듯한 태도로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이때 문득 주루의 터진 안쪽에서 두어 명의 곤륜파의 제자들이 걸어나오며 현황자를 향해 공손히 읍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곳의 배상 문제는 주인과 완전하게 협의되었고, 모두 출발할 준비가 완 료되었습니다." 현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너희들 가운데 몇몇이 양양성 내로 들어가서 좋은 객점의 별채 하나를 예약해 놓도록 하여라. 우리는 오늘 그곳에서 묵어가야 하겠다." "알겠습니다." 그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아평은 비로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숙녀검을 수습하고 나서 떠날 준 비를 차리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난 듯 황보자안의 곁에 와서 이렇게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참, 나으리, 저기 있는 심언니는 그야말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온갖 재 주에 능통하고, 무공이 대단히 고강하여 우리가 만일 그녀와 앞으로 동행하 게 된다면 온갖 무림인들의 습격을 막을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혈접이 다시 공격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나으리께서 그 녀에게 동행을 하자고 권유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계속-- 번호:119/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3 길이:33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6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6장. 전음입밀(傳音入密) 황보자안은 아평의 그 말을 듣자 문득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원래 심황은 일년 전의 인연을 생각하여 스스로 나서서 황보자안을 도운 것 이었지만, 이제 그것으로 그 의미는 다했다고 볼 수가 있었다. 이미 서로간 의 계산을 산뜻하게 마친 상태이니 그녀는 아마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비록 그녀에게 아직 황보자안을 돕고 싶은 선심이 남 아 있을지라도 어찌 처녀의 몸으로서 다른 남자의 뒤를 항상 쫓아다닐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중요한 것은 명분이고, 또한 그 명분에 걸맞는 것은 황보자안의 성 의있는 부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아평의 말은 맞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 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심황이 만일 고맙게도 그의 주위에서 동행을 해주어서 얼마 동안 무림인들 의 습격과 혈접의 공격을 예방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황보자안으로서는 부 탁을 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심황은 품성이 일반의 여인들과 같지 않고 실로 아름답고 고고하여 곁에 항상 두고 싶은 아름다운 난초와도 같은 사람인지라 황보자안으로서는 성공한다면 더욱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가 잠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아평이 다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성수곡(聖手谷)의 사람이고, 무림에서 신선같은 의술로 크게 소문 나 있는 좋은 여자이기 때문에 틀림이 없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스스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서 굳이 아평이 무림에서 신선같 은 의술로 이름난 좋은 여자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만, 문득 아평의 말 가운데 처음 듣는 말이 있는 것을 알고 는 즉시 나직하게 물었다. "성수곡이라니?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이오?" 아평은 즉시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곳은 혈접이 소속되어 있는 소요각과 함께 세외팔 선(世外八仙)이 거주하고 있는 여덟 곳의 신비로운 장소 중의 하나라고 해 요. 심언니가 혈접과 맞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서로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이 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 황보자안은 문득 아평으로부터 다시 세외팔선이라는 처음 듣는 말을 듣게 되자 더욱 어리둥절해졌으나 이내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여덟 곳의 하나인 소요각이 바로 혈접 모용릉파가 소속되어 있는 곳이라는 말을 듣자 문득 전 신의 소름이 오싹 돋는 느낌을 받았다. 이른 바 소속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혈접이 소요각의 각주나 세외팔선의 하 나가 아니라는 말이며, 그것은 즉 혈접과 같은 초절정의 극고한 무학을 지 닌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세외팔선의 능력이 그만큼 가공스럽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황보자안은 스스로의 추측이 너무나도 가공스럽고 또한 더욱 아평에게 물어 서 알고 싶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렇지 못하고 또한 아평도 별로 아는 바 가 없는 것 같아서 내심 생각했다. (그렇다면 모용릉파가 말했던, 그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그 세외팔선을 가리키는 것일까? 세외팔선…… 그토록 놀라운 사람들 이 무려 여덟 명이나 있다는 말인가? 음, 이건 차차 사형들께 물어보면 알 게 되겠지.) 황보자안은 모용릉파의 일을 생각하며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두운 그물 같은 것이 자신의 몸을 죄어 오고 있는 듯한,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으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평이 다시 낮은 음성으로 그에게 재촉을 했다. "나으리, 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해보세요. 이것은…… 이것은 실로 나으리 께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거예요." 아평은 일순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을 반짝였는데, 그녀의 내심에는 이 순간 뭔가 영특한 생각이 떠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지금 깊은 생각을 학 있었던 참이라 미처 그런 그녀의 내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즉시 심황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어, 한 가지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 이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 니다." 심황은 부서진 주루의 한쪽에서 다소 서성이며 뭔가 깊은 생각을 곰곰히 하 고 있다가 황보자안의 말을 듣고 즉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웃는 얼 굴로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원래 천하의 장부이신데 어째서 이런 일개 여인을 보고 그토록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니 어서 말씀하시도록 하세요." 아까 대한으로 변장했을 때나 혹은 점쟁이로 변장을 했었을 때에는 그토록 엉뚱하던 여인이 원래는 이와 같은 아름답고 정숙한 요조숙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황보자안은 실로 우스운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정중하게 말했 다. "사실 이런 말씀은 드리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부득 이 낭자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소생의 부탁은 그러니까, 낭자께 서 앞으로 얼마간 저희 일행과 동행을 하며 저를 보호해 주십사고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실로…… 실로 염치없는 부탁이 되겠지요?" 심황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실은 공자께서 비록 한 순간의 위험을 벗어나시기는 했으나 부상을 입고 사라진 혈접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나, 혹은 다른 무림인들의 습격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면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여자의 몸으로 감히 주저하고 있었는데, 과연 공자께서는 장부답게 용 기 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실로 다소 어려운 부탁일지라도 무림의 동도 (同道)끼리는 서로 도우며 생활해 나가는 것이 좋겠지요." 황보자안은 심황이 이처럼 순순히 자신의 부탁에 응해주자 절로 마음이 상 쾌해져서 환해진 얼굴로 급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의 보수는 무엇으로 정할까요? 우리는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먼저 그 대가를 설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심황은 문득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 아까 제가 그 용지환을 받은 것은 사실 지나친 보수였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그럼 그것으로 앞으로의 보수를 모 두 받는 것으로 하지요." 황보자안은 자신에게 이와 같은 아름다운 능력자가 호위를 해주게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실로 즐겁고 마음 든든함을 느꼈다. 그러나 문득 심황의 말이 다소 기이한 것을 깨닫고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용지환을 받으신 것이 지나친 보수였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심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출진자와 현황자 등이 다 른 제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객방을 구하러 간 제자들을 기다리기 위해 다소 멀쩡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미소와 함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음성은 바로 곁의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소리도 들리 지 않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이었다. 황보자안은 강호에 전음술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 만, 지금과 같이 전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전음입밀을 펼칠 수 있는 사람 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강호에서는 가끔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腹 話術)을 이용하여 전음입밀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그녀의 수법은 그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인 것 같았다. "원래 아까 제가 아평 동생의 질문에 단지 그 혈접이 달아난 것이 아니라 기실은 스스로 떠나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어요. 사실 그녀는 달아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자님을 데려다 주고 떠나간 것이었으 니까요." 황보자안은 일순 놀라고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어째서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오?" 아직 전음입밀의 수법을 배우지 못한 황보자안은 당연히 지금 평소의 목소 리로 질문을 한 것이었다. 이에 주위의 사람들은 금새 심황에게 전음입밀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심황은 그러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담담히 미소를 떠올리며 전음입밀 을 계속했다. "지금 제가 굳이 육성으로 말을 하지 않고 전음입밀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 는 것은 바로 그 혈접의 성의를 생각했기 때문이예요. 그녀는 스스로 자신 의 내심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심사를 알려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물론 그녀가 그렇게 한 데에는 나름대 로의 이유가 있겠지요. 공자께서는 혹시 아까 제가 변장하고 드렸던 대나무 점괘를 그녀에게도 보였던 것이 아니었나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전음으로 말하자 다소 어색해져서 다소 궁금한 내용도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어떻게 그런 것을 아시오?" 심황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ㄷ. "그 후에 일어난 정황을 살펴보게 되면 과거의 일을 어느 정도는 유추해 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나중에 제가 굳이 그녀가 달아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간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아세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모르오.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 오." 심황은 기이한 눈빛으로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군요. 저는 아까 나름대로 계책을 세워서 혈접을 암습하고 그 녀를 제압하려고 했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계책은 만일 그녀가 미 리 알고 대비하지 않는 한은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요. 그런데 제가 막상 그녀를 암습했던 순간에 저는 문득 그녀가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등뒤에 상처를 입고 피까지 흘리지 않았소?" 심황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시 제가 사용한 무공이 어떤 것이었는 줄 아시나요? 저는 당시 그녀의 무예가 저에 못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신중하게 생각하여 저의 선천공 (先天功)의 내력을 무형장력(無形掌力)을 이용하여 그녀의 등뒤의 경맥 가 운데 서너 개쯤 끊어 놓으려고 했죠.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비록 목숨을 잃 게 되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무공을 쓸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예요. 헌데 그 녀는 당시 미리부터 저의 암습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묘하게 몸을 피 하여 그저 살갗에 다소의 상처를 입었을 뿐, 경맥에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황보자안은 놀라 말했다. "아, 그래서 그녀가 곧바로 당신에게 반격을 가해왔었던 것이로군요?" 심황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당시 거의 부상을 당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저에게 귀음혼(鬼 陰魂)의 장력으로 반격해 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요. 저는 당시 암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매우 놀라서 당황해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반격에 따라서 뒤늦게 반선수(反禪手)를 쓸 수가 있었어요." 갑자기 심황의 말 가운데 여태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무공의 이름들이 나오자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럼 혈…… 혈접이 사용했던 그 붉은 나비 모양의 무공이 바로 귀음혼이 라는 무공이었다는 말이오?" 심황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귀음혼이라는 절기(絶技)는 말 그대로 형체를 드러내지도 않고 기척 도 없는 무공이지요. 그녀가 붉은 나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나름대로 다소 의 변화를 가한 것이예요." 황보자안은 형체도 없고 기척도 없는 무공이 있다는 말을 듣자 내심 갑자기 소름이 오싹 돋는 듯한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녀가 그 원래의 형체도 없는 귀음혼이라는 장력을 쓰게 된다면 더욱 위력이 증대할 것이지만, 강호에는 이미 자신의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특징적인 변화를 구한 것 같았다. (귀음혼, 귀음혼이라…… 말 그대로 형체도 없는 귀신같은 장력이라는 말이 되겠군.) 황보자안이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심황은 다시 미소하며 말을 이 었다. "그리고 제가 펼쳤던 무공은 반선수라는 장력으로서, 저는 별로 거기에 변 화를 가하지 않았어요." "……" 심황의 말은 그녀가 아까 펼쳤던 그 노을빛의 장력은 그것이 반선수라는 진 면목임을 일부러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절기의 내력을 일일이 가르쳐 주는 것을 보아도 이 심황은 황보자안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 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황은 말을 계속했다. "당시 그녀와 나와의 장력의 격돌은 서로 형세가 비슷하여 우열을 가릴 수 가 없었어요. 그러나 다음 순간 저는 그녀가 나와의 격돌을 이용하여 떠나 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즉 그러한 의도는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그녀는 저의 계책을 모 조리 읽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죠." "……" 황보자안은 묵묵히 들으며 당시 모용릉파가 모든 계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속아 주는 척 움직이고 사라져 갔던 긴박한 장면을 상상하고는 아 찔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과연 모용릉파는 당시 어떤 심정으로 떠나 갔던 것이었을까? "그녀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만일 내가 당신에게 주었던 점괘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순순히 통하지 않았었을 것인데, 이미 당신에게 주었던 점괘를 본 이후였다면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죠. 저는 지금 당신에게 그 얘 기를 듣고 더욱 확신을 내리게 되었어요." 황보자안은 물었다. "그럼 대체 그녀가 무엇 때문에 나를 이곳에 데려다 주고 떠나간 것이었을 까? 일부러 그런 어려운 연극을 해 가면서 말이오. 그리고 만일 그게 사실 이라면 그녀는 이제 나의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 아니오?" 심황은 다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로서는 그녀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그녀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이곳에 데려다주고 떠났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녀는 앞으로 다시 나타나서 당신을 습격하고 납치하려고 할 것이예요. 물론 그것은 형식적인 일이 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녀가 일부러 그런 위험한 연극을 했어야 할 필요가 있었겠어요?" 황보자안은 심황의 이 얘기가 매우 의미심장하고 언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었으나 다소의 일리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모용릉 파의 마음이 그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가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 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제게 용지환을 받은 것은 지나친 보수였다고 말한 것이오?"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녀는 비록 제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수단을 써서 당신을 일행에게 인도했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무슨 그리 커다란 역할이 되었겠어 요? 다만 제가 앞으로 당신의 곁에서 보호해 준다면, 만일 그녀가 다시 원 군을 데리고 습격해 올 때에 적절한 변명을 할 수가 있고, 또한 당신의 안 전을 기할 수가 있으므로 그녀와 당신을 모두 위하는 길이 되겠죠. 그녀는 그래서 안심을 하고 떠나간 것이예요. 이런 면에 있어서 앞으로의 일은 제 가 용지환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말과 함께 심황은 문득 기이하고 다소 야릇한 표정으로 마치 가슴속까지 꿰 뚫어볼 듯 황보자안의 두 눈을 직시했다. 황보자안은 그녀가 이미 모용릉파가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 치챈 것이 아닌가 하여 절로 얼굴이 벌개졌다. 그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감 히 더 이상 그녀와 대화를 나눌 용기가 없었으므로 급히 포권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낭자께서 굳이 그렇게 저를 위해서 도움을 아끼지 않으시겠다는 점에 소생 은 거듭 감사를 드리는 바이올시다." 심황도 이에 비로소 전음입밀을 풀고 육성으로 단정하게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저는 다만 저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지 요." 이때 마침 곤륜파의 사람들이 객점을 예약해 놓고 돌아왔기 때문에 황보자 안은 다소 어색한 입장에서 벗어나 그들 일행과 함께 행동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이 현황자 등에게 심황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전에 아평 에게는 굳이 남장을 하라고 조건을 달던 그들도 감히 이번에는 그런 소리를 못하고 오히려 매우 반가워했다. 이미 혈접의 무서운 능력을 경험한 그들로 서는 무엇보다도 이번에 일행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며, 게다 가 이 심황의 귀수성심이라는 별호는 마치 강호에서 신비롭기가 구름 속의 신룡과도 같은 것이어서 함께 다닌다면 오해는커녕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폐를 끼치겠습니다." 심황이 나서서 그렇게 말을 하자 출진자와 현황자는 이에 서로 나서서 정중 하게 예의를 다해서 대답했다. "천만의 말씀. 귀수성심 심낭자께서 우리 일행을 도와주시겠다는 데에 대해 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심황은 다만 가볍게 미소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평이 나서서 말했다. "저도 이제는 굳이 남장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현황자가 담담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낭자는 저분 심낭자와 친교를 맺은 사이이니 누구라도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오." 즉 아평이 심낭자와 어울려 다닌다면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일행이 이미 예약을 끝낸 객점으로 향하게 되자 문득 아평이 여태까 지 궁금했는지 황보자안의 곁에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이듯 물었다. "나으리, 대체 그녀와는 무슨 말씀을 나누신 거죠?" 황보자안은 아평에게 그 얘기를 자세하게 해줄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 대답 해 주었다. "그녀는 매우 겸손하기 때문에 내가 준 용지환으로도 앞으로의 나의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고 했소." (……?) 아평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문득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녀도 혹시 저처럼 나으리와 한 방에서 자며 보호해 주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나요?" 보아하니 이 아평은 이미 자신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 심황에게 일일이 말 해 주었던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절로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 곤륜파에서 예약한 객점은 양양성 내의 번화가 한쪽에 위치하고 있는 양춘 객점(陽春客店)이라는 곳이었는데, 황보자안은 혹시 그곳이 모용릉파와 자 신이 묵었던 곳이 아닐까 하고 불안해 했으나 전혀 다른 곳임을 알자 내심 안심을 하게 되었다. 이 양춘객점은 아주 거대하고 화려한 객점이었는데, 이름처럼 지금은 화창 한 봄날이어서 더욱 내외의 화려한 구조가 돋보이는 듯했다. 일행은 객점의 후원에 위치하고 있는 한 채의 별채를 통째로 빌렸는데, 이 에 아평이 크게 우겨서 황보자안은 그 옆에 있는 보다 작은 별채에 묵게 되 었다. 현황자는 황보자안의 곁에 심황이라는 든든한 방패가 있기 때문에 별 로 개의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자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 아평은 지금 자신의 의도가 그대로 먹혀 들어가고, 또한 수중에 황보자 안이 준 수천 냥의 은표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 일 저 일을 획책했다. 그녀는 작은 별채 안에 있는 가장 커다란 침실을 황보자안이 사용하도록 하 고 그 맞은편의 보다 작은 침실을 심황에게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 처사는 황보자안에게 다소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아평은 내심으로 무슨 계획이 있는지 그저 미소만 짓고 아양을 떨 뿐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이 귀여운 아평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밉게 볼 수가 없어서 그저 웃고 말았다. 일행은 주루에 나가서 남의 이목에 띄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점원들에 게 음식을 별채로 날라오게 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곤륜파의 사람들 은 이미 곤륜파를 떠난 지 오래되었고 마음이 다소 흐트러져 있을 법한데도 여전히 엄정한 기풍을 잃지 않고 식사에 임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소 의 감동을 주었다. 황보자안의 곁에는 아평이 언제나 붙어 있어서 입을 쉬지 않고 갖은 아양을 떨고 시중을 들어주고 있어서 출진자나 현황자 등은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황보자안에게 별로 말을 걸지 않았다. 기실 그들에게는 황보자안의 안전이 문제되기는 하지만 원래부터 그를 곤륜 파의 정식 제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앞으로 곤륜파로 돌아가서 이 개 월의 수련만 끝나고 나면 곤륜파와 거의 인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 의 세속의 사람들처럼 대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생각에는 황보자안이 그들의 지시에 거스르지 않고 안전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심황은 시종일관 한쪽에 조용히 앉아서 식사를 했고 그 모습이 다소 외롭게 느껴져서 아평이 가끔씩 다가가서 말을 걸고는 했으나, 아평은 이내 돌아와 서 황보자안에게 이것저것을 집어먹여 주며 수다를 떠는 시간이 더욱 많았 다. 그렇게 식사가 모두 끝나고 나자 출진자 등에게 별로 지시할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아평과 심황을 대동하고 자신의 작은 별채로 돌아오게 되었다. 별채로 돌아오자 심황은 미소하며 가벼운 목례를 보낸 뒤에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아평은 이제부터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서두르며, 황보자안을 일면 으로는 욕실에서 목욕을 시키며, 일면으로는 그간에 갈아입지 못한 의복을 모조리 새것으로 갈아입게 하는 등의 세심한 시중을 들어 주었다. 황보자안은 새삼스럽게 이러한 아평의 모습을 보게 되자 절로 활력이 넘쳐 나는 것 같았고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황보자안은 그 동안 모용릉파에게 지독하게 시달렸던 몸을 미지근한 목욕물 에 담그고 피로를 풀어내자 육신이 매우 쾌적해졌다. 그러나 뒤를 이어 아평은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대로 침상 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대는 심낭자와 함께 자지 않소?" 아평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 며칠간은 심언니와 함께 잠을 잤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나으리와 함 께 자는 것보다도 편안하지 못했어요. 이제부터는 나으리와 함께 잘 거예 요." "……" 이미 거의 습관화되다시피 한 행동을 이제 와서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었으 나 황보자안은 일순 곤혹한 심사가 되었다. 심황은 이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근에 숙소를 정하고 있는 것인데, 혹시 그녀가 아평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 하지만 황보자안은 이미 모용릉파에게 너무나도 시달려서 심신이 매우 피곤 해져 있었고, 알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만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시 후에는 곤하게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혹시 밤 사이에 모용릉파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내 심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 --계속-- 번호:120/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4 길이:31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7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7장. 중원제일루(中原第一樓) 다음날 아침 황보자안은 깊은 단잠에서 깨어나서 일어나 순양기공을 수련하 려고 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자신의 몸을 살피고는 다소 기겁을 했다. 알고 보니 자신의 몸은 아평과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인데, 지금 아평의 나시을 깊이 껴안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황보자안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던 것 같았은데, 이것 이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혹시 내가 그 동안 모용낭자와 지내면서 마음과 몸이 음탕하게 길들여져서 밤새 그만 아평을…… 아평의 몸을 범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크게 놀라면서 은밀하게 아평의 몸을 살펴보니 그가 범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여 일시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 다. 따라서 아침에 매우 산뜻한 기분으로 순양기공을 수련하려고 생각했던 황보 자안의 생각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그의 내심에는 어떤 부끄러움과 함께 아 평의 알몸을 조사하면서 생긴 기이한 열기에 다소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데 아평이 문득 기척을 느꼈는지 부시시 눈을 뜨며 그의 손을 잡아 끌 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으리, 나으리. 사모하는 나으리님. 어째서 벌써 일어나시려고 하는 거 죠? 피곤하실 테니 좀더 주무세요." 다소 잠에 취해 있기는 해도 그녀의 어조에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하는 마음 이 꿀물처럼 녹아 있었다. 황보자안은 스스로 아평의 알몸을 음욕어린 시선을 바라보았던 열기가 일순 간에 사라짐을 느끼고 흠칫해서 대답했다. "다른…… 다른 사람들이 이미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 게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있겠소?" 아평은 천천히 고개를 내젓더니 대답했다. "이미 아까 심언니가 오셔서 그 도장분들께서 나으리께서 피곤하실 테니 좀 더 주무시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하고 가신걸요." 말과 동시에 아평은 황보자안의 손을 이끌어서 자신의 비소가 있는 다리 사 이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놀랍고 당혹스러워서 얼른 그녀에게서 손을 빼며 급히 신형을 날려 침대 밖으로 내려서며 소리쳤다. "아니, 그럼 그 심낭자가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자고 있는 광경을 보고 갔다 는 말이오?" 아평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신경쓰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이미 심언니에게 우리가 이렇게 잠을 잔다 는 얘기를 해드렸기 때문에 그 언니도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언 니는 앞으로 우리가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 광경을 보지 않을 수가 없을걸 요." 황보자안은 잠시 어이가 없어서 생각하다가 이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평이 이와 같은 잠자리의 습관을 계속한다면 자신을 지키는 입장에서 자 연히 이와 같은 광경을 심황이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요조숙녀에게 소녀의 알몸을 껴안고 자신도 알몸으로 자고 있는 광경 을 보였다니 이제 앞으로 그녀의 얼굴을 볼 일이 매우 걱정되었다. 황보자안은 거푸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긴 그녀에게 이 모든 사실을 보였는데, 더 이상 숨기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매일 여자들 사이에서 색탐이나 하는 호색한이니 굳이 더 무엇을 숨기겠는가?" 아평이 이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원래 나으리께서는 그냥 잠을 자고 계셨는데 제가 일부러 옷을 벗겨 드린 것이니, 나으리께서 호색한 것은 아니예요. 저의 생각에는 나으리께서 옷을 벗고 주무시면 좀더 피로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옷을 벗은 나으리의 곁에서 잠을 자기가 좋았어요." "……" "저는…… 저는 차라리 나으리께서 저에게만은 호색하셨으면 하고 바래요. 저는 나으리께 모든 것을 바치고 나으리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은데, 나으리 께서 너무나도 저에게 무관심하시니 속상하는 일도 많구요. 원래가 천하의 영웅호걸들은 저와 같은 계집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잠자리에서 품어주고 그 러는 것이 아닌가요? 이러한 것은 영웅호걸의 본색이기 때문에 심언니도 이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이에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대와 나는 아직 혼례를 올리지는 않았으나 부부간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오. 따라서 내가 그대와 잠자리에서 설혹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가 없겠지. 아니 우리는 피가 끓는 청춘남녀들이니 오히려 이렇게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더욱 이상할 것이오. 그렇소. 그 심낭자는 그 저 타인일 뿐인데, 우리가 잠자리에서 무슨 관계를 맺든 그녀가 우리의 일 에 무슨 상관이 있겠소?" 아평은 순간 너무나도 기쁜지 알몸인 그대로 펄쩍 침상 위에서 뛰어올라 황 보자안의 가슴 속으로 새처럼 날아들며 안기고 울먹였다. "나으리, 저는…… 저는 감히 나으리의 부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답 니다. 다만 저는 나으리의 첩실 자리 하나만이라도 차지할 수가 있다고 한 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거예요. 오직…… 오직 나으리의 부 인이 되실 분은 그 심언니와 같은 사람이어야……" 아평은 말을 도중에 그치고 일신을 파르르 떨며 황보자안의 몸에 빈틈없이 파고 들었다. 황보자안이 그녀에게 입맞추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록 여러 날을 벗고 생활해 왔으나 기이하게도 입맞춤을 하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고, 따라서 황보자안을 사모하는 마음이 골수에 맺혀 있는 아평으로서는 이 순간의 황홀한 기분이라는 것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하늘과 땅이 일시에 뒤흔들리고 자신의 영혼이 황보자안의 가이없는 고아한 성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나 할까? 아평이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열렬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최초에 가볍게 입 맞춤을 하려던 황보자안의 생각은 빗나가고 입맞춤은 깊어졌고 더욱 농밀해 졌으며, 황보자안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뜨거운 욕정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원래 이들은 매우 건강하고도 힘찬 청춘의 피끓는 남녀들이었기 때문에 이 렇듯 서로가 알몸으로 껴안고 입맞춤을 하게 되자 즉시 자연스럽게 서로의 알몸을 더듬게 되었고, 더욱 욕정의 나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황보자안의 손길이 그녀의 젖가슴과 탄력있는 아름다운 엉덩이를 지나서 비 소로 스며들어 그만 아평이 흥분과 심한 자극을 못 이겨 아아, 하는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황보자안은 이 새벽에 그녀의 알몸을 안고 바닥에 뒹굴기라도 했었을 것이었다. "……" 황보자안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는데, 이 순간 눈을 살며시 내 리감고 있는 아평의 전신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 는 것을 보고는 마치 불꽃 속의 작은 요정을 보는 듯하여 그녀의 이마에 다 시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그대, 사랑스런 그대, 지금은 아침이니 우리는 어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가 봐야 하지 않겠소?" 아평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저는 매우 아쉬워요. 이런……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이렇 게 행복한 것일 줄은 몰랐어요. 저는 좀더…… 좀더 이대로 있고 싶어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즉시 그녀의 알몸을 안아들고 침상 위로 걸어갔다. "나도 물론 그러고 싶은 심정이지만 지금 만약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온 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낯뜨거운 상황이 되지 않겠소? 이 잠꾸러기 내 사랑,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고 옷을 입도록 해요." 황보자안이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자 아평은 즉시 눈을 떴다. 동시에 자 신의 눈앞에서 황소처럼 성을 내고 있는 황보자안의 살덩이를 보자 그것을 한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더니 즉시 몸을 날려 욕실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 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는 금방 다시 나와서 나으리의 시중을 들어 드리도록 하겠어요." 황보자안은 일시 흠칫하여 얼굴이 벌개졌다가 이내 미소하며 간단한 의복을 걸치고는 바닥의 한쪽에 정좌를 하고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아평과 잠시 뜨거운 욕정에 젖어 있었던 터라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 나 황보자안은 이내 성공적으로 심신을 고르고 운기행공에 몰입해 갔다. 금새 나올 것이라고 했던 아평은 지금 황보자안이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것 을 알고 있는지 오랫동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황보자안은 운기행공을 거의 무아지경에서 마친 후에 다시 군자검을 뽑아 들어서 순양검법의 수련 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순양검법에 전에도 얘기한 바 있듯이 다른 사라과의 비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검법의 기본을 알게 하고 심신의 수련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 인 만큼 수련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이 샘솟듯 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의 육신은 그 동안 모용릉파에게 시달림을 당해서 많은 피로가 누 적이 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순양검법을 대여섯 번이나 계속해서 수련하고 이어 권법이나 장법 등을 수련하자 이내 그의 육신은 날 아갈 듯이 상쾌해지고 기력은 전신에 충만해졌다. 황보자안은 문득 움지임이 멈추고 마보를 취한 자세에서 쌍장을 가슴 앞으 로 모아서 진기를 운용함과 함께 앞으로 짧게 내뻗었다. 그러자 돌연 전과 달리 그의 쌍장에서 마치 구름같은 장력이 손바닥을 뚫고 뻗쳐나가서 이 장 밖까지 꽈릉, 하는 굉음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 방 안이 매우 넓어 서 한쪽 면의 길이가 사오 장에 달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 황보자안의 장력에 의해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쌍장을 수습하고 미소와 함께 손을 내렸다. 이것은 물론 전에 그가 난주성 밖의 토신묘에서 깨달았던 검에 진기를 내쏘 는 구결을 장력으로 시험해 본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의 시도가 크게 성공을 이루고 심신이 날아갈 듯이 상쾌해지자 미소를 띠며 군자검을 갈무 리했다. 이때 욕실에서 아평이 방금 전에 들린 굉음에 놀랐는지 급히 달려나와서 소 리쳐 물었다. "나으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요?" 황보자안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려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렇소. 아주 좋은 일이 있어났지. 나의 무예가 다소 진보되었소." 아평은 이때 욕실에서 한창 목욕을 하다가 달려나왔는지 전신의 알몸에 끈 끈한 우유같은 것들을 잔뜩 묻히고 있다가 미처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다소 우울한 표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원래 빨리 무예를 익혀서 나으리께 힘이 되어 드려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결국은…… 결국은 나으리의 짐이 되고 말았군요. 저는 정 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너무나도 자신을 위하는 일에 골몰하는 것을 보고 애틋 한 마음이 일어서 웃으며 말했다. "아평, 원래 그대의 무공은 초식은 신기하고 훌륭하지만 아직 내력이 다소 약한 듯하니 내가 며칠 안에 영단이초(靈丹異草)를 구입해서 그대의 공력을 높여 주도록 ㅎ겠소. 그러면 얼마든지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소?" 아평은 그 말에 일시 너무나도 좋은지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정말이신가요,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실로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으신 분이예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감격해 하는 것을 보고 함께 미소하다가 문득 그녀의 행 색을 보고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고 일단은 그 몸을 씻고 나와야 다시 내가 들 어가서 세수를 할 것이 아니겠소?" "어머나!" 아평은 그제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욕실로 달려 들어가서는 불과 엄마 지나지 않아서 맑은 물로 전신을 깨끗이 씻어내고는 황보자안을 욕실의 안으로 들어가서 땀에 젖은 몸을 씻게 했다. 이어 황보자안이 목욕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아평은 부지 런히 주위를 정돈하고 자신의 붉은 여자옷을 아름답게 걸치고 치장한 뒤에 황보자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아평의 시중을 받으며 새옷으로 갈아입고 모든 물품을 잘 갈무 리한 뒤에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 별채의 거실은 두 개의 침실 사이에 있었는데, 그 거실의 앞쪽으로 나가 면 이 별채의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넓고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황보자안은 아평과 함께 조성된 정원에 만나게 되어 있었다. 황보자안은 아 평과 함께 침실에서 나와서 거실에 이르렀을 때 문득 건넌방에서 아직 일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심황을 기다렸다가 함께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다소 주저하다가 공연히 그녀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마악 거실의 문을 열고 마당에 내려섰을 때였다. 밝아오 는 아침의 햇살이 아직 완전하게 주위를 비추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어스 르 안개가 휘감기고 있는 듯한 정원에 한 사람이 엷은 황색의 장삼을 걸치 고 조용하게 산책을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심황이었다. 황보자안은 미처 그녀가 이렇게 먼저 밖에 나와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을 줄 은 몰랐다가 다가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심낭자, 이미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군요. 우리가 이거 너무 늦게 나와서 그대의 시간을 빼앗은 것은 아닙니까?" 심황은 문득 고개를 돌려 가볍게 미소하더니 대답했다. "저는 늘 이렇게 새벽산책을 즐기는 것이 취미예요. 새벽의 산책은 정신을 맑게 해주고 내력의 증진을 가져다 주는 것이죠. 두 분 때문에 제가 여기에 서 산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공연히 미안하게 생각하실 것은 없어요." "그런가요?" 황보자안은 대꾸하며 공연히 기분이 어색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때 아평이 웃으며 심황에게 입을 열었다. "심언니, 아까 곤륜파의 도장님들이 늦게 출발하겠다고 하셨다는데 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황보자안을 납치당한 이후에 이 곤륜파의 사람들은 그간에 사방을 수색하느 라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휴식도 마음대로 취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 었다. 그러다가 이제 황보자안을 무사히 되찾게 되었고, 동정호 군산의 비 무대회의 날자도 다소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느지막히 떠나려는 모 양이었다. 심황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모두들 이미 일이났을 거야. 원래 곤륜파의 사람들은 엄격하게 수양 이 되어 있으니 지금쯤 다 함께 모여서 아침수련을 닦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평, 우리 그럼 함께 그쪽으로 가서 구경을 하도록 할까?" 아평이 일시 눈이 휘둥그래졌다. "만일 그러다가 그들의 무예를 훔쳐본다고 혼이라도 나게 되면 어쩌죠?" 심황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의 무공으로 보다을 해주면 되지. 그들이 아마 나의 무공을 보 게 되면 가히 싫다고 말하지는 못할걸?" 아평은 일순 까르르 웃었다. "어마, 정말로 그렇겠군요?" 황보자안은 뒷전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 두 명의 아름다운 소녀들이 함께 흐드러지게 웃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다소 어색하게 따라 웃다가 뒤를 따르 기 시작했다. 곤륜파의 사람들은 아평과 심황의 말대로 무예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 니라 의복을 단정하게 차리고 장검을 손질하는 등 바쁜 준비를 서두르고 있 는 상태였다. 출진자와 현황자는 옆에서 두 명의 삼대제자들이 시중을 들어주는 것을 잠 시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 세 명이 다가오자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 도 그들로서는 황보자안과 아평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더라도 이 심황에게는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심낭자, 그래 간밤에는 편안히 주무시었소?" 심황은 그들에게 마주 포권으로 응대하며 대답했다. "저는 잘 잤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밤새 충분한 휴식을 취하셨는지 그것 이 궁금하군요. 만일 여러분 가운데 어떤 환자가 생긴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현황자는 심황이 바로 천하에서 유명한 의원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폐를 끼치기로 하지요." 황보자안과 아평은 이들이 이러한 예의를 서로 나누는 동안 먼저 두 사형에 게 인사를 보낸 다음에 함께 한쪽의 비어 있는 탁자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 었다. 바야흐로 곤륜파의 제자들은 모든 떠날 준비를 완료하고 점원들을 불러서 아침식사를 차리려고 하고 있었다. 아평이 문득 황보자안에게 물었다. "나으리, 나으리는 두 분의 사형께 그야말로 정중하게 대한데 저들 제자들 은 모두 나으리를 본 척 만 척하는군요. 그렇다면 나으리께서는 어째서 그 들에게 그리 잘 대해 주시는 거죠?" 황보자안은 아평의 어조로 보아 그녀가 요 며칠 동안 그가 없는 사이에 곤 륜파의 제자들에 대해서 내심의 불만이 많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담담하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내가 무공도 형편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땅치는 않은 것이고, 그러나 저 두 분의 사형은 무공이 높아서 가히 나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지." 아평은 다소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원래 천하에서 가장 귀하신 분으로 저러한 무림인들을 상관 하실 필요가 없는데 이토록 고개를 숙여서 집착하고 계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앞으로 곤륜파로 돌아가면 대략 두 달 가량의 수련을 거치게 되어 있 소. 만일 그것이 끝나게 되면 곤륜파와 황보가 사이의 약속도 끝나게 되어 나는 곤륜파와는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저들이 나 에게 친근하게 대하히 않는 이유는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므로 미리 정을 쌓지 않자는 것이오." 그러나 아평은 그래도 불만이 가시지 않는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한참이 나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거대한 탁자 위에 호화로운 음식들이 차려지고 점원들이 물러가자 제자들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음으로써 식사가 시작되었다. 곤륜파의 제자들 은 여전히 엄격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출진자와 현황자 역 시 말없이 식사를 했으며, 심황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혼자 앉아서 다소곳한 태도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있었다. 음식은 매우 값비싼 것들로서 입맛을 돋구는 것들이었으나 아평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저 조금만 먹고 마시고는 묵묵히 황보자안의 시중을 들었다. 원래 아평은 처음부터 곤륜파의 사람들이 감히 황보자안을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좋지 않게 생각해 오다가 저번에 황보자안이 납치된 이후에 다시 찬밥 신세로 전락하였었고, 비록 그때는 황보자안을 찾기에 여념이 없어서 미처 그런 불만스러운 느낌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어제에 이어서 오 늘도 황보자안이 곤륜파의 제자들에게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는 마치 자 신의 일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말없이 식사가 진행되었는데, 왠지 거북하고 어색한 느낌을 떨쳐 버리기 어려운 아침식사였다. 기실 심황은 곤륜파의 사람들 못지 않게 무림에서 대우를 받는 사람이었으 나 지금은 황보자안의 신변에 묶여 있는 상태이고, 황보자안은 이어 곤륜파 의 두 사형을 따르는 입장이어서 모두가 현황자의 지시를 받는 것이나 다름 이 없게 되었다. 현황자는 아침 식사가 끝나자 이내 일행에게 서둘러 준비를 하게 한 다음에 말과 마차를 준비하여 무창으로 출발했다. 전에는 황보자안이 출진자 등의 마차에 함께 타고 갔으나 이제는 아평이 미리 호화로운 마차 하나를 구입하 여 그녀와 황보자안, 그리고 심황의 세 사람이 함께 타도록 했다. --무창. 이 거대한 성시는 바로 중원에서 가장 거대한 젖줄인 장강에 인접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문물의 교역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상업 이 발달하여 실로 양양성보다도 더욱 번화한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심황에게 이곳에 평통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떠나서, 거의 처음으로 강호의 대성 시에 들어서서 느끼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과 번화한 거리의 정경에 시선 을 빼앗겼다. 요 사이 이 무창성에는 특히 무림인들이 병기를 휴대한 채 많이 오가고 있 었는데, 그것은 물론 요 아래의 동정호 군산에서 펼치게 될 환우천하영웅대 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인 것이었다. 일행은 하루종일 말과 마차를 달려서 저녁 무렵에야 이 무창성의 외곽에 도 착하였는데, 장강을 마악 건너려고 하는데 문득 한쪽의 강가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달려오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거기에 오시는 분들이 바로 황보공자님의 일행이 아니십니까?" 일행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니 대략 십여 명의 대한들을 거느 린 한 명의 중년상인이 가까이 다가와서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소공자님, 이제야 오시는군요. 이 여보중(呂 中)은 소공자님이 오시기를 기다린 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여보중. 이 사람의 용모는 준수했고 기질이 청아하여, 만약 그가 상인의 복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저 책을 읽는 선비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일반적으 로 상인이라고 하면 전의 호대해처럼 다소 안면이 두텁고 껄렁껄렁한 성질 이 있어서 대인관계가 원만해야 하는 것인데, 이 사람은 그저 보기에는 어 떤 장원에서 집사의 노릇도 할 수가 없을 만큼 선량하고 고고해 보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사람의 신분은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하고 있는데, 황 보자안이 문득 깜짝 놀라며 여보중을 향해 소리치며 반갑게 다가가는 것이 었다. "아, 바로 여아저씨로군요! 제가 그만 깜빡 잊고 있었어요. 실로 너무나도 오랜만에 뵙는 것이라서……" --계속-- 번호:121/121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2 16:34 길이:144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8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8장. 헌원객점(軒轅客店) 여보중은 이에 함께 반갑게 황보자안의 두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예, 저번의 모임에서는 제가 한 가지 일이 있어서 그만 참석하지 못했었지 요. 그 바람에 소공자께서는 저의 얼굴이 기억에 희미하실 것입니다." 황보자안은 거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아저씨를 겨우 일곱 여덟 살 때에 한 번 보비고 다시는 뵙지 못했으니 기억에는 희미하지요. 하지만 제가 전번의 모임에서 아저씨가 오시기를 얼 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저는 이 한 분의 고아하신 선비께서 저를 찾아와 서 그 전에 가르쳐 주셨던 시를 함께 논하고 또한 제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술을 권해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지요." 사람들은 황보자안의 이 말을 듣고 여보중이라는 사람이 혹시 황보자안의 다른 글선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여보중은 이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님의 문장은 이미 어렸을 적에 제가 감탄했던 바이니 이제는 감히 함 께 논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만일 공자님께서 소인에게 아끼고 계 셨던 술을 주시려고 한다면 그거야, 허헛, 말릴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하 지만…… 하지만 소인은 당시 어쩔 수가 없어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황보자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할 수 없어요. 저는 당시 그 술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모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여아저씨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오시면 드리려 고 했었지요. 그런데…… 그런데 저는 결국 그 술을 한 달 후에나 혼자서 마셔 버리고 말았지요. 그때의 저의 심정이 얼마나 쓸쓸했었는지 아시나 요?" 여보중은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대답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그저 공자님의 처벌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에 황보자안은 문득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더니 손수 몸을 굽혀서 여보중 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다. "여아저씨, 여아저씨는 저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한 가닥의 아름다운 추억 과도 같은 향기를 심어주신 분이지요. 제가 어떻게 감히 여아저씨께 처벌을 내릴 수가 있겠어요. 오히려 제가 이렇게 느닷없이 떼를 쓴 것을 용서해 주 세요." 여보중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은 소인도 바로 그 때에는 공자님을 생각하며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황보자안하핫, 그랬었겠군요." 황보자안과 여보중은 한참이나 서로 손을 잡고 해후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 다가 이윽고 잠시 후에 여러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는 웃으며 황보자안은 먼저 출진자와 현황자 등에게 여보중을 소개시켜 주 었다. "여아저씨, 이분들은 바로 제가 근래에 새로 모신 두 분 사형들이시고, 그 리고 두 분 사형, 이 아저씨는 바로 제가 어렸을 적부터 매우 따르며 존경 하던 분입니다." 기실 황보자안으로서는 지금의 이 표현이 가장 여보중을 높여 주는 말이었 다. 그러나 출진자와 현황자는 내심 황보자안에 대해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나약한 문사 타입의 여보중에게도 태도가 소홀 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음, 하고 여보중의 정중 한 인사에 답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이를 전혀 개의하지 않고 이번에는 심황을 여보중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여아저씨, 이분 소저는 바로 무림에서 유명한 심낭자이세요." 이때 심황은 어느 정도 황보자안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얼른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어요. 저는 심황이라고 해요." 여보중은 이에 조용한 두 눈에서 일순 맑은 눈빛을 발하며 심황의 얼굴을 한 차례 주시한 연후에 답례했다. "아, 바로 귀수성심 심낭자이시군요.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순간 심황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여보중이 심황의 별호를 알고 있는 것을 보 고 다소 기이하게 생각했다. 원래 이 심황은 변장술에 뛰어나서 마치 구름 속의 신룡처럼 자취를 남기지 않는 신비의 여의선(女醫仙)으로 통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출진자 등은 이 중년상인이 혹시 우연한 기회에 심황의 진 면목을 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때 황보자안은 마지막으로 옆에 서 있는 아평을 여보중에게 소개시켜 주 었다. "여아저씨, 그녀는 바로 저의 친구인 아평이예요." 아평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다가 여보중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리 려고 했다. 헌데 이때였다. 기이하게도 전면에서 한 줄기의 부드러운 기운 이 엄습하는가 싶더니 마악 굽히려던 허리가 절로 펴지면서 꼼짝할 수가 없 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평이 이에 내심 크게 당혹해하고 있는데 여보중이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저와 처음 대면을 하는 것이니 저를 잘 모르고 계시겠지만, 사실 저는 이미 호형(胡兄)에게 연락을 받아서 아가씨의 일을 잘 알고 있답니다. 아가씨는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심성이 고우신 분이시지요. 따라서 이 여 모는 그저 아가씨를 모셔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아가씨께서 저에게 인사 를 하려고 하시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아평은 그 말을 듣자 문득 이 순간에 자신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는 이 기 운은 바로 눈앞의 나약한 선비같은 여보중이 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문득 놀라서 생각했다. (혹시 그는 무공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이라는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문득 안개같이 전신을 묶어 놓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 지며 여보중이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저의 이름은 여보중이고, 바로 헌원객점(軒轅客店)을 맡아서 경영하고 있 는 중이랍니다. 앞으로 아가씨께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책임지고 도와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아평은 원래 무림의 공력 가운데에서 공학공(控鶴功)이나 금룡공(擒龍功)처 럼 격공섭물의 묘기를 부리는 무공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도 훨씬 고도의 절기인 이와 같이 자신의 진기로써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무공이 있다는 얘기를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평으로서는 자신의 무공이 낮으므로 여보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판가름할 수 없지만, 필시 이 서생같은 중 년상인의 무공이 이미 노화순청(爐火純淸)의 경지에 이르러 평범한 모습으 로 되돌아가는 반박귀진(返撲歸眞)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아평은 아직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 했지만, 우선 눈앞의 중년상인에게 크게 친근한 정을 느꼈기 때문에 즉시 마주 답례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아저씨. 그리고 저는…… 저는 다만 나으리의 하인에 불과하 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러나 여보중은 여전히 굽힌 허리를 펴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가씨, 우리는 모두 황보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히 공자님의 말씀을 복종하고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공자님께서는 이미 아가씨를 그 분의 친구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는…… 이는 바로 우리의 상전이 되는 것입 니다." 아평은 금새 여보중의 말뜻을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여보중은 지금 그 녀와 황보자안과의 관계를 보통의 친구 사이가 아니라 연인 사이 혹은 장래 의 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평으로서는 일순 내심으로 크게 기 뻐서 가슴이 벅차 올랐으나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여보중의 손을 잡아서 올 리며 쩔쩔 매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싸, 아저씨! 저를 너무 놀리지 마세요. 만일…… 만일 이렇게 계속 저 를 놀리시면 저는…… 저는 그만 울고 말 거예요." 여보중은 그제서야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하, 우리의 아가씨께서 이 여모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게 된다면 그거야 내가 감히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지." "……" 이때 아평은 자신과의 대화로 여보중이 다소의 지루한 시간을 끌었기 때문 에 다른 사람들이 필시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태까지는 그저 무관심으로 여보중을 대했던 출 진자와 현황자 등이 갑자기 눈빛을 하나같이 기이하게 빛내며 여보중의 전 신을 이리저리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여보중이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헌원객점의 경영을 맡고 있는 사람이 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헌원객점. 천하에 무수하게 널려 있는 것이 객점이지만, 일단 강호에 발 을 한 번이라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것은 바로 이 헌원객점에 딸려 있는 하나의 주루가 바로 일명 중원제일루로 통하는 헌원주루(軒轅酒樓)이기 때문이었다. 이 헌원주루는 그야말로 강호에서 중원제일루로 소문이 났을 만큼 화려하고 거대하며 신비에 가려져 있는 곳이었는데, 바로 눈앞의 이 나약한 선비 모 습의 중년인이 그 중원제일루의 책임자이고, 기실은 황보가문이 그 주인이 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담담한 반응을 보이던 출진자 등 도 이 순간에 크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실은 그 헌원주루가 그저 일반인 의 주루가 아니라 강호무림인들의 활동과 어느 정도 긴밀한 연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4권 끝> --계속-- 번호:122/127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7 07:36 길이:49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29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29장. 세외팔선(世外八仙)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 내심 다소의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까 황보자 안이 만일 여보중을 그저 헌원주루의 책임자라고 소개해 주었다면 출진자 등은 더욱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일부러 여보중을 각별하게 생각하여 그렇게 소개한 것이 출진자 등의 실수를 유발시켰던 것 이었다. 그러나 이 여보중은 곤륜파 사람들의 그러한 결례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에 는 조금도 불쾌해 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아평과의 인사를 거창하 게 나누고 나자 슬쩍 곤륜파의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황보자안을 향해 이렇 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공자님, 그럼 이제 소인이 경영하고 있는 곳으로 모두 함께 가시기로 하 지요. 저는 이미 난주성에 있는 호형의 전갈을 받고 여러분들이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끝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보중이 말하는 난주성의 호형이란 바로 호대해를 가리키는 것임 을 알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고개를 돌려 출진자와 현황자를 향해 공손히 물었다. "두 분 사형, 저의 여아저씨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한 일부러 오랫동안 기다리신 듯하니 우리 모두 헌원객점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헌원객점은 물론 무창성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출진자와 현황자는 원래 자신들이 애초에 여보중에게 크게 결례를 했기 때문에 이 순간에 다시 그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비록 이 헌원객점이 천하의 세력있는 명문정파의 집단은 아니지만 그 정보 수집 능력은 놀라운 것이어서 그들과 공연히 등을 돌린다는 것은 이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황자는 곧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대협께서 우리를 그토록이나 생각해 주시는데 어찌 감히 성의를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어서 자네의 뜻대로 하게나." 이때 여보중이 웃으며 대꾸했다. "여대협이라니 당치 않소. 소생은 그저 돈을 버는 장사꾼일 뿐이외다." 그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일행의 눈앞에는 하나의 거대한 나룻배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나룻배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일행을 위해서 여보중이 미리부터 준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었 다. 일행은 그렇지 않아도 말과 마차 등의 짐이 많아서 여러 번에 걸쳐서 나룻 배를 타야 했던 참이어서 이런 커다란 배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게 되자 내심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나룻배에는 다시 십여 명의 대한들이 타고 있었는 데, 그들은 즉시 여보중의 지시를 받자 곤륜파 사람들의 말과 마차를 배 위 에 싣는 등의 빠른 움직임을 보여 일행이 쉽게 편리하게 배 위에 올라 모두 함께 강을 건너도록 했다. --헌원객점. 일행 가운데 곤륜파의 사람들은 내심 설마하고 있었으나 정작 이 객점의 입구에 도착하고 나자 문득 절로 입이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래지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 헌원객점의 규모는 전에 보았던 난주성의 용화객점의 그것에 비해 서 그다지 크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에 번화한 성시에 위치 하고 있는 객점이어서 그런지 이 객점은 그 입구부터 지극히 호화롭고 아름 다운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용화객점도 화려했지만 그보다는 무려 수 배는 더욱 호화로운 것 같았다. 마침 지금은 사방에 어둠이 밀려드는 초저녁 무렵이어서 객점의 사방에는 수많은 오색의 궁등을 내걸어 놓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마치 불야성과 같았다. 게다가 번화한 거리의한쪽에 위치하고 있는 헌원주루는 모두 오층으로 이루 어져 있었는데, 그 규모의 방대함과 건축물의 아름다운은 실로 상상을 불허 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곤륜파의 제자들은 이를보고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실로 이러한 건축물들을 지으려면 헤아릴 수가 없는 많은 돈이 들었을 것 이다. 저 헌원주루만 해도 정말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러나 황보가문에 제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호화로운 객점을 지어서 과연 수지가 맞을 수가 있을까?) 그러한 생각도 잠시, 일행은 이내 여보중의 안내로 헌원객점의 내부로 들어 서서 그 절묘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구조, 그리고 조각품들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여보중은 그들을 모두 헌원객점의 가장 조용한 후원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 하고 화려한 삼층의 별채로 안내했다. 생각대로 이미 이 별채의 내부에는 한 판의 온갖 음식들이 차려져 있어서 다소 허기져 있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일행이 손을 씻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여보중은 문득 일어 서서 좌중의 일행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들은 바로 우리 헌원객점의 아주 귀중한 손님이자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인색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으니 앞으로 무엇이든 원하시는 것은 부탁해 주십시오. 아울러 인사말과 함께 우 리의 약소한 선물을 여러분들께 각기 하나씩 드릴 생각이니 거절하지 마시 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 여보중은 대청의 입구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대청의 입구에서는 즉시 서너 명의 시녀들이 각기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쟁반에 백냥짜리 황금 대원보를 무려 오십개나 들고서 나타났다. 일행은 이미 용화객점에서 각기 열냥짜리 금원보를 하나씩 받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실로 이 백냥짜리 금원보는 일반사람들은 평생을 두고도 구경하기 어려운 것으로, 비단 그 액수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누구라도 이 백냥짜리 금원 보를 가지게 되면 작은 현성에서는 가히 부자라고 불리울 수가 있을 것이었 다. 곤륜파의 사람들은 내심 가슴을 두근거리며 설마했으나, 여보중은 정말로 시녀들에게 시켜서 그 금원보를 하나씩 일행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커다란 금원보를 받아들고 그 눈부신 누런 광채에 멍한 표정을 지었 으며, 과연 이곳 중원제일루의 주인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원래는 이곳 무창성 내에서 대략 사흘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객 점을 잡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렇게 훌륭한 대접을 받아가며 있게 되어서 썩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군산에서 열리는 환우천하영웅대회는 지금부터 나흘 후에나 열리게 되 어 있어서 천하의 각처에서 몰려든 무림들로 무창성 등지의 객점은 초만원 을 이룰 것이고, 그런 곳에서 어렵게 객점을 잡아야 했기 때문에 곤륜파의 제자들이 다소 즐거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 황보자안이 아니었다면 혹시 지금이라도 객점을 잡지 못해 서 사흘간이나 노숙을 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객점을 잡기도 어려운 판에 이런 천하제일의 호화로운 객점에서 사흘간이나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시녀들이 아직 황보자안과 아평 등의 신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금원보를 나누어 준다는 생가에서 출진자와 현황자뿐만 아 니라 황보자안과 아평에게도 각기 하나씩의 금원보를 주었는데, 황보자안은 이를 받아들자 즉시 옆에 앉아 있는 아평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아평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새빨개진 안색으로 황보자안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어째서 저에게 주시는 거죠?"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는이미 여아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보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인데 당연히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오?" 아평은 이에 더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아니예요. 나으리께서는 매우 짓궂으시군요."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자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윽고 여보중이 간단한 인사말을 마치고 나서 시녀들과 함께 물러가고 뒤 어어 점원들의 시중을 받으며 모든 사람들이 식사를 끝내자 깔끔하게 생긴 점원 하나가 황보자안의 앞으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이곳에서 거처하도록 안배가 되었습니다. 다만 여나으리 께서는 공자님과 두 분의 소저를 다른 곳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곤륜파의 사람들이나 아평 등도 이 복잡하고 번 거로운 상황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 마음놓고 사흘 동안 편하게 쉬고 싶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런 얘기를 듣게 되자 즉시 옆의 아평을 불렀다. 그리고 아평은 다시 그 옆에 앉아 있던 심황을 불렀으 며, 그들 세 사람은 즉시 점원의 뒤를 따라서 별채의 밖으로 나갔다. 이 헌원객점의 내부에는 워낙에 비슷비슷한 고층 전각들이 많고, 그것들의 구조가 조화있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마치 구중궁궐과도 같아서 처음 오 는 사람은 길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일 것 같았다. 점원은 몇 개의 전각들을 돌아서 세 사람을 가산을 옆에 두고 있는 맑은 연 못 옆의 비교적 작고 아담하며 전체가 대리석(大理石)으로 축조되어 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석옥(石屋)으로 안내했다. 이 석옥은 근처에 화려한 전각 들을 두고 있어서인지 다소 전원적인 풍경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 건물 자체 가 대단한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실로 조용하고도 아 늑한 분위기를 주는 곳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마치 이곳이야마롤 별유천지 (別有天地)라고나 할까? 세 사람이 점원의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서자, 그 내부는 역시 생각대로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중앙에는 작고 운치있는 거실 이 있고, 사방에는 침실이나 그 밖의 그야말로 최고급이라고 말할 수가 있 는 여러 용도의 방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점원은 거기까지 세 ㅅ람을 데려 다 놓고는 그만 물러가 버렸다. 아평이 잠시 내부를 두러보다가 입을 열어 황보자안에게 물었다. "그가 어째서 우리를 이런 곳으로 안내했을까요?"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아마 여아저씨의 최상의 대접일 것이오." 아니나 다를까, 미처 황보자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거실의 바깥문이 열 리더니 문득 한 사람이 양손으로 커다란 술통 하나를 들고 들어섰는데, 그 는 바로 여보중이었다. 아평은 서생같이 생긴 그가 그처럼 술통을 들고 들어서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고, 또한 반갑기도 하여 급히 달려가 술통을 받아들며 물었다. "어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여아저씨, 우리들을 모조리 술독에 빠뜨릴 생각이신가요?" 여보중은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분을 감히 술독에 빠뜨릴 수야 없는 일이죠. 하지만 오늘밤은 모두가 한 잔씩 해도 좋은 날일 것입니다." 황보자안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 말은 옳은 말이오. 아평, 어서 여아저씨께 그 술통을 받아서 이곳에 옮 겨놓아 주지 않겠소?" 아평은 별안간 황보자안까지 그런 말을 하자 다소 어리둥절해 하다가 할 수 없이 그 커다란 술통을 거실의 중앙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자 여보중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오더니 품속에서 하나의 옥으로 만든 술잔을 꺼내서 주걱으로 술통 속의 술을 따른 다음 황보자안에게 올리는 것 이었다. "공자님, 이것은 소인의 정성이고 또한 전에 뵙지 못했던 사죄의 뜻으로 올 리는 술잔이니 받아 주시겠습니까?" 보아하니 여보중은 이 술통을 손수 가져오기 위해 점원에게 세 사람의 안내 를 지시했던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껄껄 웃으며 즉시 그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물론이오. 열 잔이고 백 잔이고 상관이 없지. 음, 혹시 이것은 우리집에서 가져온 술이 아니오? 맛이 정말로 비슷한데?" 아평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이 황보자안은 장원에서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천하의 주당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 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다. 게다가 여보중은 다시 껄껄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하핫, 그것을 그토록 쉽게 알아차리시다니 그야말로 공자님은 천하에 모르 는 것이 없으시군요. 저는 사실 그날 모임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미리 사람 을 보내서 장원의 술을 연구하여 이렇게 공자께서 오시면 드리려고 준비하 고 있었던 것이지요." 말이 끝나자 그는 스스로 주머니에서 바가지며 온갖 종류의 술잔들을 꺼내 서 탁자 위에 줄줄이 늘어놓더니 즉시 바가지로 술을 떠서 한 잔을 맛좋게 들이키는 것이었다. "크흐! 역시 천하에서 가장 좋은 술은 바로 황보가의 술이라는 사실을 아마 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아평은 내심 어이가 없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어서 스스로 작은 주걱을 사용하여 술통 속의 술을 조금 떠서 맛을 보았다. 순간 아평은 심하 게 아미를 찌푸리며 내심 생각했다. (이것은 전에 맛보았던 죽엽청과 다르지 않는 것 같은데 어째서 이것을 특 별히 맛있는 술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때는 이미 황보자안과 여보중이 각기 서너 개씩의 술잔을 앞에 두고 서로 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읊어대며 계속해서 마셔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러한 광경은 매우 신기하고 사나이의 기개가 어려 있는 것 같았으며 문학적인 정서가 깔려 매우 아름답게 보였으나, 아평은 그들이 이 제부터는 두 명의 여자들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술을 마셔대기 시작하고 있으므로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마도 대장부끼리의 감회를 풀고 있는 것이니 우리와 같은 여자들 은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좋을 거야.) 아평은 문득 그렇게 생각하고는 몸을 일으켜 옆에서 뭔가 곰곰히 생각에 잠 겨 있는 심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심언니, 잠깐 나를 좀 보세요." "응?" 심황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평이 한쪽으로 손 짓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따라서 함께 침실이 있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 다. 이때 황보자안과 여보중은 이미 절반쯤은 취하여 그녀들 두 사람이 옆 방으 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침실의 내부에는 이미 사방에서 커다란 황촛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우아한 정취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심황은 아평의 손짓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서는 아평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평은 웃으며 대답했다. "심언니, 그들 두 분은 지금 한창 기분을 내고 계시니 아예 우리는 따로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는 것이 어때요?" 심황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이 어떠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행동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아평의 말을 듣고는 편 하게 생각을 하는 그녀를 보고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지금 그렇 다고 그녀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아평의 말대로 이곳의 구경을 하며 거실의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만일 그 두 사람이 한창 기분을 내고 있는 동안 적이라도 나타나게 되면 곤란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좋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할까?" 과연 이곳 석옥의 내부는 실로 천하에서 모아놓은 온갖 진기한 물건들의 창 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요란스럽고 화려 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이곳에 있는 물건들 가운데에서 하물며 촛대 하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보물이 아닌 것이 없었다. 아평은 그러한 물건들을 보며 가끔씩 탄성을 내질렀고, 심황은 그녀와 함께 내부의 이곳저곳의 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면서 계속해서 거실의 동정에 귀 를 기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별다른 변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은 여전히 흐트러진 음성으로 시를 주절거리는 음성과 술을 마 시는 소리들이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두 사람의 말소리가 끊어지고 거실이 조용해져서 급히 그 곳으로 달려가 보니 그곳에는 이미 그 커다란 술통을 모조리 비운 채 바닥 에 쓰러져 있는 두 명의 술주정뱅이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 은 바닥에 뒤로 벌렁 누워 있는 상태였고, 여보중은 앞으로 엎드려서 연신 가느다란 음성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횡설수설이라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평은 이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걸 어쩌죠, 심언니? 이분들은 이렇게 술을 너무나도 많이 드시고 인사불 성이 되셨으니 대체 이 일을 어쩌죠?" 심황은 잠시 두 사람의 상태를 살핀 후에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이분들은 이대로 두면 잠시 후에 저절로 술이 깨게 될 것이니 너무 걱장 하지마. 우리는 그때 이곳을 치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야." 황보자안은 마치 머리가 일제히 터져나갈 듯이 고통스러운 것을 느끼며 점 차로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절로 신음성을 발했기 때문에 어느새 아평이 부 드러운 손길로 그의 고개를 받쳐 주고 뭔가 꿀물 같은 것을 마시게 해주었 다. "나으리, 이것을 마시면 조금 괜찮아질 거예요." 황보자안은 그것을 마시고 나자 아평의 무릎 위에 다시 풀썩 쓰러졌으나 기 이하게도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내가 방금 전에 마신 것이 뭐지? 대단히 신통한데! 머리가 아픈 것 이 이렇게 말끔히 사라질 수가 있다니, 이것은…… 이것은 그야말로 신약 (神藥)이야!" 아평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주며 대답했다. "바로 심언니의 약이예요." "응?" 황보자안은 일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제 보니 신의의 손길이 두 명의 술주정뱅의 속을 푸는 데 사용되었던 것 이로군. 알 만해! 능히 알 만한 일이야!" 고개를 들어보니 그와 아평은 하나의 고풍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우아하고 정취있는 침실의 침상 위에 함께 앉거나 누워 있었는데, 오늘은 아평이 옷 을 입은 채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황보자안이 인사불성이 되었기 때문에 감 히 옷을 벗고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황촛불에 은은하게 빛나는 알평의 곱고도 깜찍스러운 얼굴을 미 소하며 바라보닥 문득 다시 물었다. "참, 나와 함께 술을 마시던 여아저씨는 어디로 가셨지?" 아평은 작고 예쁜 입술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흥, 그렇게 정신없이 술만 마셔대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그분은 나으리보 다 먼저 정신이 깨어서 쉬러 가셨어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내가 그에게 아평의 무공을 높일 수 있는 영단이초를 한 번 구 해 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정말로 구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군." 아평은 황보자안이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했으면서도 자신을 그 처럼 생각해 주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하여 온몸으로 그의 가슴 속으로 파 고들었다. 그러나 별안간 황보자안의 손길이 그녀의 속옷을 헤치고 다리 사이로 스며 들어오자 그녀는 일시 가슴이 크게 뜨거워져서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안되요. 우리는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해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말했다. "일어나다니? 아직 한밤중인 것 같은데 벌써 일어나서 대체 무엇을 하자는 거지?" 그 말에 아평은 문득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대답했다. "아직 한밤중이라구요? 호호호, 벌써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거라구 요. 여기는 다만 지하이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황보자안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그런가?" 하긴 그는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기는 했어도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아평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언니와 저는 이곳의 방들을 두루 구경하던 중에 이 지하석실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심언니는 이곳을 보자 이곳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좋은 곳이 라며 이곳에 머물 것을 권했어요. 이고은 분위긷 아주 좋지 않나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 자리에서 기습적으로 몸을 뒤집더니 신법을 전개하여 아평의 몸을 휘감아 다시 침상으로 뒹구는 것이 었다. "아니, 나으리…… 아니, 나으리……" 아평은 황보자안이 손으로 이곳 저곳을 마구 애무하자 그야말로 가슴이 크 게 뛰고 흥분하여 달아나려고 했다. 종내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고 할 수 없이 몸의 힘을 풀며 입을 열었다. "나으리, 실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 황보자안은 온통 새빨개진 아평의 전신과 얼굴을 쓰다듬으며 짓 게 물었 다. "중요한 일이라니? 또다시 달아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가?" 아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그는…… 심언니는 항상 나으리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애를 쓰 고 있는데, 어젯밤에는 나으리께서 그녀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아세요? 나으 리께서 좀더 그녀에게 잘 대해 주셔야 한다고요. 그녀는…… 그녀는 바로 나으리의 정부인이 될 사람이 아니겠어요?" "……" 황보자안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는 물었다. "아니, 아평! 그대는 여자로서의 질투심도 없는가? 어째서 한사코 그녀에게 정부인의 자리를 맡기려고 하지?" 아평은 고개를 밖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자격이 없어요. 제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만일…… 만일 제 가 욕심을 낸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까봐 두려워요. 저는 나으리를 한평생 모시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있어요." 황보자안은 혹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웃으며 물었다. "그 심낭자는 나에게 조금의 감정도 없는데도 말이오? 아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그분 심언니는 사실 매우 점잖은 분이어서 그렇지, 나으리께 상 당한 호감을 느끼고 계시는 거예요.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있어요. 나으리는 그녀에게 좀더 잘 대해 주셔야 해요. 저는 그녀 와 자매처럼 살고 싶어요." "흥, 가만히 보니 그대 마음대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로군." 황보자안은 아평의 몸을 덮치며 손으로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더듬었다. 그 러자 아평은 즉시 어마, 하는 소리와 함께 흡사 갓 잡아올린 생선처럼 전신 을 퍼덕이며 침상 위로 솟아올라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두 눈에 맺혀 있던 두어 방울의 이슬이 바닥에 떨어져 흔 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싫어요, 싫어요! 나으리는 너무 짓 으세요." 황보자안은 껄껄 웃으며 드디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 했다. 아평은 이에 즉시 옆에서 빠르게 시중을 들었고, 황보자안과 그녀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이미 정말로 해가 중천으로 치 닫고 있는 상태였다. 어젯밤에는 미처 몰랐었는데, 실로 이 석옥의 근처에 있는 가산이나 인공연 못들을 둘러싼 정원은 비단 이 헌원객점의 내부에서도 대단히 잘 가꾸어 놓 은 곳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조용하고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그리고 석옥의 일층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했던 심황은 이 순간에 인공연못 이 내려다보이는 정원수의 주위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중이었다. "심언니!" 아평이 먼저 심황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신법을 펼쳐 달려나갔다. 심황은 조용히 걸음을 옮기다가 이쪽으로 건너다보았는데, 그녀의 안색에는 다소의 우수가 깃들어 있는 듯하면서도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심언니, 우리가 너무 늦게 나와서 기다리시기가 지루하셨죠?" 아평이 가까이 다가가서 묻자 심황은미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난 다만 공자의 경호를 맡고 있는 상태이니 이렇게 아무런 일도 없 이 산책이나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지." 이때 황보자안은 심황의 면전에 이르렀으므로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심낭자, 간밤에는 폐가 많았소이다. 그래,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심황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대처럼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지도 않았는데 잠을 편하게 자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저는 편안하게 잠잤으니 걱정마세요." 황보자안은 다시 말했다. "조금 전에는 낭자께서 지어주신 약을 복용하고 금새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그야말로 신통하더군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심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에게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 그런 하찮은 재주들밖에 없는데 다만 그런 곳에라도 쓰일 수가 있다면 고마운 일이지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말했다. "아니, 심낭자에게 그런 의술뿐만 아니라 갖은 여러 가지의 재주도 있고, 게다가 놀라운 무공이 있는데, 어찌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십니까? 소생은 요사이 무공을 배우고는 있지만 잘 되지 않아서 속으로 은근히 심낭자의 무 공을 우러러보고 있었던 참입니다." 심황은 이에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저의 무공을 그렇게 칭찬히 주시다니 고마워요. 그럼 그 보답으로 ㅈ가 여 기에서 저의 무공 가운데 한 수를 보여드릴까요?" 아평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즉시 찬성을 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요, 심언니. 어디 한 번 보여 주세요!" 심황은 아평이 이렇게 열렬히 원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더니 문득 옆에 있는 맑고 깊은 인공연못의 물을 향해 좌수를 가볍게 휘저었다. 순간의 일이었다. 그녀의 좌수에서 일순 노을빛의 상서로운 광채가 마치 구 름처럼 뻗어나가더니 일순 연못의물과 부딪쳐 둥글둥글한 물줄기를 위로 서 서히 뽑아올리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바로 이 노을빛의 장력이 전에 심황이 모용릉파와 격돌할 때 사 용했던 그 반선수라는 장력임을 알아보았다. 황보자안도 물론 순양장력을 연마했기 때문에 스스로 진기를 장심 밖으로 뻗어낼 수가 있었는데, 그러나 이 순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이 휘 두으래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장력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좌우로 굽기도 하고, 혹은 흡인력을 발동하여 격공섭물의 묘기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심황이 펼치는 장력처럼 마치 살아서 움직이며 마음껏 조화를 부리는 장력을 그는 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반선수의 장력은 연못의 물을 위로 둥글게 뽑아 올려 마치 가부좌를 틀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만든 채 그것이 허공에 둥둥 떠 있게 했다. 사람의 무 공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것이 고 신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심황의 남은 우수가 가볍게 움직이더니 그녀의 다섯 개 의 손가락에서 역시 노을빛의 실처럼 가느다랗고 부드러우며 끈끈한 지력이 날아가더니 공중에 떠올라 있는 물인형의 전신 대혈을 맞추기 시작하는 것 이었다. 소리는 없었지만 이와 같은 광경은 마치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어서 일순 그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심황이 손을 거둔 다음에도 황보자안과 아평은 그만 벌리고 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황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가끔씩 수련하는 방법의 하나였는데, 무의식중에 펼쳐 보이게 되었으니 다소 실망이 되더라도 용서하세요." 황보자안은 그제서야 정신을 번뜩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실로…… 실로 무 공이라는 것은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로군요." 아평도 나서서 말했다. "심언니, 방금 전의 그 지풍을 날리는 법은 바로 사람을 치료하는 의술의 하나가 아닌가요"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평 동생은 정말로 머리가 총명해. 맞아, 바로 그대의 말대로야." 아평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세상에 그보다도 더욱 뛰어난 무공도 있나요?"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동생은 너무나도 나를 추켜세우는군. 실은 나의 무공은 최상의 무공에 비 하면 아직 걸음마도 내딛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가 있지. 나의 무공은 별게 아니야." "……!" 황보자안과 아평은 일순 어이가 없는 심황의 말에 너무나도 놀라고 황당한 느낌이 들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할말을 잊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 함께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그녀는 너무나도 겸손이 지나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세상에 어디 그와 같은 놀라운 무공이 있을라구!) 황보자안은 문득 생각난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세외팔선에 대해서 아십니까?" 전에 심황이 세외팔선과 관계가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한 지금 그녀의 말 을 들어 보기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여 물어본 것이었다. 심황은 웃으며 황보자안을 향해 이렇게 되물었다. "공자께선 세외팔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로군요?" 황보자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리 관심이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사람들이 굳이 그 세외팔선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으려고 하고, 또한 낭자의 말을 들어보건대 그들의 무공 이 높을 것 같아서 한 번 물어보는 것이오." 심황은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세외팔선은 대단한 존재이고, 감히 그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은 신상에 좋지 못하게 돼요. 그러나 사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예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말에 어딘가 여운이 깔려 있는 것을 느끼고 다시 물었 다. "그럼 세외팔선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는 말이오?" 심황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연못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보자 안과 아평이 그녀의 뒤를 따라서 걷기 시작하자 문득 고개를 돌려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세외팔선이라고 해서 인간의 경지를 완전히 초월한 사람들이 아니니 다소의 감정이 남아 있을 것이고, 좋고 나쁜 사람도 있겠지요. 공자께서는 그 세외팔선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으시나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매우 신중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 했다. "만일 낭자가 말하기가 다소 거북하다면 굳이 듣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심황은 가볍에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외팔선에 관한 얘기는 그저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이 지 무슨 특별한 비밀은 아니예요. 제가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씀을 드리 죠." "……"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내심으로 세외팔선에 관해서 궁금해하고 있었는 데, 이제 그 일원이라고 할 수가 있는 심황에 의해서 그 얘기를 듣게 되자 마음은 호기심에 가득차고 두근두근한 느낌까지 갖게 되었다. 심황은 천천히 연못의 주위를 돌며 말하기 시작했다. "세외팔선은 한 마디로 말해서 말 그대로 현실의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고 있는 여덟 분의 신선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여 당금에 있어서 최강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거예요." 아평이 문득 물었다. "그럼 심언니보다 훨씬 무공이 고강하다는 말인가요?" 심황은 가볍게 미소하여 대답을 대신한 뒤에 말을 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행동이 신비하고 능력이 탁월하여 보통사람들로서는 설사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을 거예요. 항간 에서는 혹시 그들이 이미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지 만,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들의 나이는 지금 대체 몇 살이나 되었는지 모르고, 강호에서는 제가 무슨 구름 속의 신룡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그들이야말로 그런 표현에 적합한 사람들이지요." 아평은 갈수록 심황의 얘기가 허황되어 보이고 기이해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그들은 정말로 전설의 신선과도 다름이 없다는 말인가요?"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신선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확실히 사람이 니 신선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요. 그들을 다른 말로는 일성(一聖), 삼존 (三尊), 사황(四皇)이라고 해요." 황보자안은 심황이 세외팔성을 무슨 일성, 삼존, 사황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심황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일성, 삼존, 사황 가운에에서 역시 가장 강한 사람은 역시 일성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요사이 그 일성이 승천했다는 얘기가 있기는 한데 그것은 확실히 믿기 어려운 얘기예요. 그리고 나머지 삼존과 사황은 서로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사 있지요." 황보자안이 문득 물었다. "혹시 낭자의 사부가 그 삼존과 사항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 아니오?" 황보자안은 심황의 무예가 워낙 고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물어본 것이었다.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의 무공의 근원은 삼존 가운데에 들어 있지요. 그러나 저의 사부가 삼존 의 하나는 아니예요." (그렇다면 그 삼존은 심낭자의 사부보다도 무공이 높다는 말일까?) 황보자안이 내심 곤혹하여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심황은 말을 계속 이어가 고 있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일성은 무성(武聖)으로 천수자(天隨子)라고 하는데 그 이름은 백일맹이고, 좌망봉(坐忘峰)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해요. 하 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ㅇ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황보자안은 이 세외팔선의 우두머리가 이름이 백일명이라는 말을 듣자 신비 로운 인물치고는 이름이 매우 평범하고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번호:123/127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7 07:36 길이:343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0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0장. 무명소졸(無名小卒) 심황은 다시 말을 이었다. "삼존은 모두 세 사람인데, 그 가운데 검존(劍尊)은 바로 검노사(劍老師) 상관봉(上官峰)이죠. 그는 검총(劍塚)이라는 곳에서 산다고 하는데, 역시 그곳은 신비에 가려져 있어요. 그리고 도존(刀尊)은 도조(刀祖) 곽오후라는 사람인데, 도종(刀宗)의 주인이라고 하죠." 황보자안은 말을 잘라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그대와 연관된 사람이겠군요?" 심황은 고개를 돌려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는 지존(指尊)이라고 하며, 별호는 산중노인(山中老人), 이름은 심병춘 (沈炳春)이죠. 성수곡(聖手谷)에서 살고 계세요." 황보자안은 이미 성수곡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산중노 인의 성씩 심씨로 심낭자와 같은 것을 알자 금새 이를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산중노인은 심낭자와 친척이 되는 것이 아니오?" 심황은 황보자안의 질문에 안색을 다소 붉히며 대답했다. "그분은 저의 선조세요. 그리고 저희 심씨 가문에 본인의 절학을 전수해 오 셨는데, 그것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황보자안은 그 산중노인이 심황의 할아버지도 아니고 선조라고 하자 대체 그 산중노인의 무공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 가 그에게는 다시 한 가지의 의문이 남았다. (어째서 그를 지존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 심낭자에게는 훌륭한 장력이 있 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무예도 훌륭한 것 같은데?) 심황은 마치 그의 그러한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웃으며 말해 주었다. "원래 이들 삼존은 병장기를 쓰는 무공이나 장, 권, 지 등의 무공을 초월하 고 있는 상태이지만 과거의 그들의 특징적인 무공을 얘기할 때에 그저 그렇 게 부르고 있을 뿐이예요. 저희 가문에는 선천공(先天功)과 반선수, 그리고 대운추, 천리호정(千里戶庭) 등의 무공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일양지(一陽指)라는 무공이 가장 특징적인 것이죠." 아평이 물었다. "방금 전에 심언니가 보여주신 그 지법이 바로 일양지라고 하는 것인가요?"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양지는 바로 선천진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무공으로서의 위력은 별로 신통할 것이 없겠지만 사람을 치료하고 체내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데 있어서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지요. 대운추라는 권법이나 반선수 등도 그와 같은 우리 가문의 선천공에 바탕을 두고 있지 만, 이 지력으로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저희 선조께 서는 지존이라고 불리우게 되신 것이예요." 이때 아평이 문득 생각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무공에 관해서는 타인에게 말해주지 않는 법인데, 이 심언니는 우리에게 이토록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으니,, 이는…… 이는 그야말로 그녀가 우리 나으리를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황보자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낭자께서 신묘한 의술로써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런 지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었겠구려?" 심황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푸른 인공연못의 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시 조용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황은 성숙해(星宿海)에서 일품당(一品堂)이라는 문파를 거느리고 있다는 장황(掌皇), 해로공(海老公) 적용통치(赤用通治)와, 소요각(逍遙閣)에서 기 거하고 있는 귀황(鬼皇), 현현괴로(玄玄魁老) 모용술계(慕容術桂), 그리고 신비의 극락도(極樂島)라는 곳에서 군림하고 있는 여황(女皇), 만화동모(萬 花童 ) 운산산(雲珊珊)과, 마지막으로 금마옥(禁魔獄)의 주인인 마황(魔 皇), 수라노자(修羅老子) 구양극서(歐陽克西) 등의 네 명이예요." 심황은 마치 자신의 가문 사람을 얘기하듯이 쉽고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 다. 아마도 세상에 세외팔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이 처럼 정확하고 분명하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 이다. 황보자안은 그녀가 일시에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의 장소와 이름 들을 한꺼번에 말하는 바람에 다소 정신이 어지러워졌으나, 문득 그 가운데 귀에 익은 이름이 있는 것을 알고 물었다. "그 소요각은, 그러니까…… 현현괴로 모용…… 모용……" 심황이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현현괴로 모용술계 말인가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현현괴로 모용술계는 아무래도 혈접과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 는 모양인데, 그들은 대체 어떤 관계인 것이오?" 황보자안에게는 그것이 그간에 품고 있던 커다란 궁금증이었기 때문에 시기 를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제대로 질문을 하게 된 것이었다. 심황은 문득 그 질문을 받고는 황보자안의 얼굴으 바라보더니 다소 의미깊 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용릉파, 모용낭자는 바로 모용술계의 자손이죠. 다만 그녀는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계속 살아 왔는데,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지 않고 어머니의 성씨를 사용해서 모용낭자가 된 것이예요. 그러니까 모용가 문은 그녀에게 있어서 외가에 해당되는 셈인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곳에 서 무공을 배우며 자라왔어요." 황보자안은 그제서야 모용릉파가 얼굴에 면사를 쓰고 다니는 이유 등에 대 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아평이 다소 놀라서 물었다. "아, 그럼 그 혈접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군요. 모용…… 모용낭자는 바로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군요." 말하면서 은근히 황보자안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혈접 모용 릉파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황은 담담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용낭자가 소속되어 있는 소요각은 무서운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황 가운데에서 가장 무서운 곳은 바로 극락도라고 할 수가 있어요." "……" "극락도주와 금마옥주는 하나같이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리고 그 중에서도 금마옥주 수라노자는 세외팔선 가운데에서 도 일성 다음가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가 있어요."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일성은 젖혀두고라도 남은 남존과 사황은 각기 별호에서 정사 의 구분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로 그런 것이오?" 심황은 황보자안을 돌아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총명하시니 금방 그 가운데의 사정을 아시는군요. 맞아요. 이 삼존과 사황이라는 구분은 정파와 사판간의 구분이라고 할 수가 있죠. 그리 고 지금은 일성이 있기 때문에 삼존이 사황을 누르고 있다고 봐도 좋아요. 만일 일성이 없다면 사황이 삼존을 능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일 어나겠죠." 일순 주위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담황색의 장삼을 걸친 그녀의 옷자락을 가 볍게 휘날리며 스쳐 지나갔다. 심황의 표정은 일순간 매우 경직되고 우려에 가득찬 것 같았으나, 정작 옆에서 이를 드는 황보자안이나 아평은 도무지 그런 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심황이 얘기를 하는 도중에 다소 피로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이제는 그만 화제를 돌려야 하겠다 고 생각했다. 기실 황보자안과 같은 정도의 무공으로는 출진자와 같은 정도의 무공도 상 상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다만 강호에 전설과도 같은 세외팔선이 있다는 얘 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평이 일시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아차, 우리는 너무 심언니의 얘기를 심취하느라고 미처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잊었군요!" 심황은 이에 굳어진 표정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강호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매끼의 식사를 찾아먹 으려고 욕심을 낼 수는 없는 일이지." 아평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떠한 황량한 들판도 아니고 첩첩산중도 아닌 헌원객점의 중심부이잖아요. 우리가 이런 곳에서 굶을 수야 있겠어요? 어마, 이거 벌써 점심때가 다 되었으니 그럼 우리는 아침을 그만두고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 겠군요." 황보자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아평은 다소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가볍게 흘겼다. "나으리께서는 항상 일행 일행 하시는데 정작 그들은 쇠귀신처럼 덤덤하게 아무런 보답도 없더라 뭐. 그런데도 나으리께서 그토록 사람 좋은 모습을 보이시는 이유를 저는 정말로 알 수가 없네요." 황보자안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야 거기에 가면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 이곳에 굳이 다시 차리는 번거 로움을 덜자는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일행이고 또한 다소 무뚝뚝하 기는 하지만 경우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라오." "알겠어요." 아평이 순순히 대답하고 나서자 심황도 만면에 조용한 미소를 띄우며 두 사 람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황보자안 등의 삼인은 곧장 곤륜파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별채로 향했으나 정작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곤륜파의 사람들은 그곳에 거의 보이 지 않았다. 몇몇 남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출진자와 현황자는 대부분의 제 자들을 이끌고 이미 헌원주루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떠났다는 것이었다. 따 라서 황보자안과 두 명의 여인은 내친 김에 역시 헌원주루로 향했다. --헌원주루. 이곳은 중원제일루라고 소문이 나 있는 만큼 대낮에 보아도 거 대하고 아름다운 규모와 구조, 그리고 갖은 금칠은장의 조각품들뿐만 아니 라 화려한 단청의 색깔로도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고 대단했다. 이 주루는 헌원객점의 안에서도 가장 높은 오층의 거대한 전각이었는데, 일층이 가장 넓고 오층이 가장 좁았지만, 그러나 이 좁은 오층만 해도 웬만한 넓은 주루 보다 더욱 넓을 정도였다. 게다가 위로 오를수록 호화로운 귀빈들을 모시는 상석들이 있는 것이며, 가장 위층인 오층에는 호화로움을 극한 특실들이 줄 줄이 늘어서 있었다. 황보자안과 아평, 심황 등은 점원의 안내를 받아서 주루의 일층에서부터 내 부를 둘러보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는데, 곤륜파의 사람들은 바로 삼층의 넓 은 공간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동심맹의 환우천하영웅대회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인지 이 헌원 주루는 각 층마다 많은 손님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손님들의 대다수가 병 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인 것 같았다. "두 분 사형, 이고에 계셨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황보자안이 다가가서 공손히 포권하며 그렇게 말하자, 출진자와 현황자는 마주 앉아서 얘기를 주고받다가 출진자가 그를 돌아보며 다소 싸늘한 음성 으로 대꾸했다. "그래, 자네가 보기에 우리는 식사도 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로 알았나?" 황보자안은 일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필시 이 출진자가 자신이 일찍 나탄나 서 문안을 드리지 않은 것을 탓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웃으며 대답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간밤에 술을 너무나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이제야 일어난 것이니 그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을 보고 현황자가 웃으며 말했다. "마침 우리도 아직 식사 전이니 자네도 어서 시켜서 함께 먹도록 하세." "예, 장문사형." 황보자안은 얼른 대답하고 점원을 불러 식사를 주문한 다음에 옆의 비어 있 는 탁자에 아평, 심황 등과 함께 앉았다. 출진자와 현황자는 이때 다시 뭔가 심각하게 논의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 것은 아마도 사훌 후에 벌어질 환우천하영웅대회를 대비해서 의논을 하는 것 같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점원들이 우선 날라다 주는 차를 마시며 아평 등과 함께 이 삼층 주루의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삼층 주루의 내부는 탁자나 의자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장식물이나 구조물들이 하나같이 값비싼 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들이라 자연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취를 풍겨내고 있었고, 지금 이곳에 올라와 있는 손님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래 이 헌원주루는 평소에는 그리 손님이 많지 않아서 일반사람들이 내부 를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은자를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싸늘도 들어온다 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음식값이나 기타의 비용이 값비싼 곳이었기 때문이 었다. 물론 이곳의 음식 맛이나 훌륭한 요리 등은 천하에 정평이 나 있는 것이 사 실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천하의 모든 차와 모든 술 가운데에 없는 것이 없다고 하던가? 하나같이 호화로운 의복을 걸치고 허리춤에 병장기를 차고 있는 사람들 가 운데 우선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건너편의 창가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대여섯 명의 청춘남녀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용모가 단정하고 영 기발랄했을 뿐만 아니라 연신 뭐가 그리 좋은지 대소를 터뜨리고 있어서 은 연중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역시 그들에게서는 젊은 사람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지금 그들 가운데에는 두 명 정도의 나이 어린 소녀들도 끼어 있는 것 같았 는데, 그녀들 역시 무공과는 무관하지 않은 듯 허리에 장검이나 다른 병장 기를 휴대하고 있었고, 활달하고 거침이 없어 일반의 요조숙녀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황보자안이 차를 마시면서 다소 홀린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청삼을 걸친 청년이 몸을 일으키며 등에 매달은 장검을 뽑아 드는 것이었다. "하하핫, 소제가 그럼 먼저 해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그 청삼의 청년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무예를 시범 보이겠다고 말 했던 모양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아진 가운데 좌우를 돌아보더니 탁자 위 에 놓여 있는 비어 있는 찻잔 하나를 들어서 허공에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황보자안이 내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돌연 청년의 우수에 들려 있던 장검이 마치 날벼락처럼 빠르게 움 직이더니 섬전처럼 허공에 떠 있는 찻잔의 위를 소리없이 갈랐다. 툭! 황보자안은 일순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가 그곳 주위 사람들의 환성 과 그리고 탁자 위에 떨어져 내린 찻잔을 보고서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와아, 과연 남궁가문의 검법은 녹슬지 않았구나!" "훌륭하오!" 알고 보니 탁자 위에 떨어져 내린 찻잔은 모두 네 조각이 나 있었는데 비단 그 잘린 부분이 매끈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직각으로 잘려져 있어서 보기 가 매우 좋았다. (대단하구나!) 황보자안은 스스로 자신이 장검으로 일순간에 소리없이 그와 같은 정확한 재주를 부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심 감탄했다. 그 청삼청년은 주위에서 환성이 일지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장검을 다시 검집에 꽂더니 포권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감당할 수 없소. 이 소제의 검법은 사실 우리 가문의 검법이 아니라 그저 약간의 재주를 보인 것에 지나지 않소." 말과 함께 그가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몸집이 조금 우람한 홍의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홍의청년은 허리춤에 날이 두터운 한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는 데, 이때 칼을 뽑아 들고 역시 비어 있는 찻잔을 허공에 던져올리더니 순간 적으로 우수를 빠르게 움직였다. 스악! 마치 모기가 기어가는 듯한 경미한 소음이 울린 것 같기도 했다. 황보자안은 이 홍의청년이 두텁고 무거운 칼을 가지고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찻잔을 후려치는 것을 보고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이 두터운 칼은 그야말로 중병기(重兵器)에 속하는 것인데, 이러한 중 병기로 가벼운 찻잔을 부셔뜨리지 않고 베어낸다는 것은 그가 이미 칼을 쓰 는 솜씨가 경지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찻잔이 떨어지고 홍의청년이 천천히 칼을 칼집에 거두었을 때 일순 간 그곳의 주위에서는 놀란 환성이 일었다. "우와, 여덟 조각이다!" 황보자안도 그쪽을 보고는 내심 놀랐다. 청삼청년의 경우와는 달리 이 홍의 청년이 잘라 놓은 찻잔은 똑같이 여덟 조각이 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여덟 개의 찻잔 조각들은 모두가 잘려진 면이 매끈하고 또한 상당히 크기가 고르 게 잘라진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들의 솜씨를 보고 일순 강호에는 정말로 인재가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점원들이 십여 명이나 줄지어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음식들을 날 ㄹ왔고, 이 즈음에는 이미 황보자안의 신분을 눈치채고 그의 탁자 위에 먼 저 갖은 음식들을 차려 놓고 있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가 조용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심황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두 사람의 무공은 대단하지요? 심낭자께서 방금 두 사람의 시범을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심황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는 한 사람은 좋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황보자안은 질문을 해놓고도 심황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가 그와 같은 시시 한 시범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는 데, 문득 그녀의 말을 듣고는 다시 물었다. "저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의 무공이 더 높다는 말씀입니까?" 황보자안은 홍의청년이 나중에 찻잔을 무려 여덟 조각이나 냈기 때문에 자 신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는 그렇게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심황은 의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좋다고 말한 사람은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예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졌다. "아니, 그는 장검을 가지고도 찻잔을 네 조각밖에 내지 못했지 않소? 하지 만 나중의 홍의청년은 두터운 칼로 찻잔을 여덟 조각이나……" 심황은 가볍게 미소하며 황보자안의 말을 잘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일 을 하는 데 있어서의 완숙도와 성실성이예요." "……" 심황은 눈짓으로 청삼청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는 비록 장검으로 찻잔을 네 쪽으로 만들었지만, 비단 찻잔을 자름에 있 어서 작은 소리도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네 조각의 찻잔을 모두 크기와 모양이 똑같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완벽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쉽게 해냈죠." 황보자안은 듣고 있다가 문득 수긍이 가는 바가 있어서 내심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군. 그가 만일 좀더 무리를 했더라면 능히 찻잔을 여 조각으로 만들 수가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심황은 마치 그의 내심을 읽고 있는 듯이 미소하며 말을 계속했다. "공자께서는 그도 찻잔을 여덟 조각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 겠지만, 아마도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다소 놀라 물었다. "아니. 그건 왜 그렇소?" 심황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사실 저렇게 찻잔을 여덟 조각으로 만드는 일은 어렵고 혹은 네 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쉽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예요. 공자께서는 그럼 저 붉 은 옷을 입은 사람이 찻잔을 네 조각으로 만들었을 때 아주 완벽하게 할 수 가 있을까요?" 황보자안은 그 질문을 받고 마치 뒤통수를 가격당한 사람처럼 멍해졌다. (그렇다! 홍의청년은 찻잔을 자를 때에 비단 어떤 소리가 났을 뿐만 아니라 여덟 개의 잘려진 조각들은 모두 같은 모양과 크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심황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저 홍의청년의 무공이 청의청년의 무공보다 못하다고 말하 는 것은 아니예요. 홍의청년은 날이 두터운 병기로 찻잔을 저렇게 만들 수 가 있으니 실로 그가 완벽하게 네 조각으로 자를 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죠." (……?)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 갑자기 그녀 의 말이 기이하게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하여 그녀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심황은 그 맑고 아름다운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미소가 ?와 같이 묻어 나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두 사람의 무공 수준의 고하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성실성과 태도를 말하는 것이예요." 황보자안은 불현듯 크게 깨닫고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저 청의청년이 보다 나은 시범을 보일 수가 있는데도 굳이 자신 의 손색없는 수법을 펼치는 것은 좋은 현상이고, 홍의청년이 다소 무리하게 행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이시오?" 심황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의청년이 찻잔을 완벽하게 자른 것은 쉬워 보이는 것이지만 매우 어려운 것이예요. 이를 테면 그 부근에 도달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만든다 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죠. 홍의청년이 반드시 그렇게 완벽하게 해낼 것이라는 보증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뜻하는 것이죠." "……" "두 사람의 무공을 보아하니 청의청년은 성품이 비교적 차분하고 무공에 있 어서 욕심을 내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에 비록 작은 수법일지라도 완 벽하게 배울 수가 있어요. 이런 사람은 나중에 점차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홍의청년은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고 자질은 있으나 욕심이 강하여 비교적 작은 수법에는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니 그런 것들을 완벽에 이르도록 배우지 않고 그냥 스쳐 지니가기 쉬운 것이죠. 대체로 이런 사람 들은 처음에는 빛을 발할지라도 나중에는 기초가 완전하지 않아서 발전하기 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제가 한 사람은 좋고 한 사람은 좋지 않다고 했던 것이예요." 황보자안은 심황의 비교적 긴 얘기를 듣고는 내심으로 크게 깨닫고 감탄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심황이 말하고 있는 것은 눈앞의 청의청년과 홍 의청년뿐만 아니라 천하의 무학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필히 명심해야 할 사항을 교훈적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저 홍의청년은 지금은 비록 주 위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 한 십년 정도만 흘러가면 저들 의 모임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인가? 황보자안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돌이켜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고는 작은 탄식과 함께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저 청의청년과 같은 무공에 대한 열정이나 차분한 성품도 없 고, 혹은 홍의청년과 같은 자질도 없으니 그저 강호에서는 무명소졸(無名小 卒)로만 남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심황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그 말에 미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공자님은 제가 여태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기이하고 알 수가 없는 분이시죠. 공자님께는 모든 사람들의 단점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또한 모든 장점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요. 게다가 공자님의 심 성은 그런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초월하고 계시죠. 저는 저의 무공이 앞으 로 제아무리 높아진다고 해도 그와 같은 심성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실로 천하에서 둘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아주 훌륭하 신 분이세요." --계속-- 번호:124/127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7 07:37 길이:31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1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1장. 후기제일지수(後起第一之秀) 황보자안은 이 심황이 갑자기 자신을 그처럼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게 칭찬 하자 일시 그만 어리둥절해져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낭자의 말대로 내가 다소 세상사에 대해서 초월하고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정신적인 문제인 것이지 무공은 아니지 않소? 그런 정 신적인 면을 높게 사려고 한다면 천하에 많은 학자들을 찾아갈 일이지 어찌 내가 그토록 대단하다고 하는 것이오?" 심황은 가볍게 미소하더니 그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대답했다. "물론 학문을 논하자면 유림에 많은 학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저도 많은 서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공자님의 정신적인 성취는 결코 일 반의 학문에서 온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마음의 공부라는 거죠." 황보자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음의 공부?" 심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마음의 공부라는 것은 물론 그대로 무공이 되는 것은 아니예요. 무공은 기 초적인 것에서부터 밟아 올라가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마음의 공부는 무 공의 증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의 무 공이 극상승의 경지에 올라섰을 때에는 도리어 그 사람의 자질보다는 마음 의 공부가 훨씬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황보자안은 심황이 정신적인 면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와 같은 얘기를 듣게 되자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웃으 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겨우 이제 무공의 기초를 시작한 셈이니 아마 평생 동안 노력 을 하더라도 극상승의 경지는 물론 일류고수의 수준에도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자연 나의 마음의 공부라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심황은 미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따져보자면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마음 공부의 문 턱에 들어섰을 뿐인데, 점차로 그 마음 공부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는 중 이예요. 제가 아직 뭐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공자님이 터득 하신 마음의 경지는 그 자체로도 이미 훌륭할 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능력 을 낳을 수도 있다고 봐요." 황보자안은 이 심황이 하는 얘기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난해하여 쉽게 이해 하기가 어려워지자 자신을 칭찬하는데 굳이 끝까지 맞설 필요가 없다고 생 각하고 포권하며 말했다. "낭자께서 그토록 저를 칭찬해 주시니 저로서는 믿기지는 않지만 기분이 나 브지는 않군요. 하하……" 심황도 황보자안과 언쟁을 나누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는지 다만 안면에 조용 한 웃음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공자님은 사실 너무나도 겸손하세요." 이때 아평이 여태 옆에서 듣고 있다가 두 사람의 얘기가 이제야 끝나는 듯 하자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으리, 그리고 심언니, 두 분이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훌륭한 음식들이 식어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면 미안할 것이니 어서 식사부 터 드시는 것이 어때요?" "아, 그렇겠군." 황보자안과 심황은 아평의 재치있는 말에 절로 미소를 떠올리며 즉시 식사 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아침식사를 굶었기 때문에 배가 고픈 상태 에서 절로 입맛이 나서 이 헌원주루의 음식들이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 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기실 이러한 맛있고 기름진 음식들에 대해서 어렸을 때 부터 평상시의 음식으로 길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금새 취미를 잃어버리고 시선을 다시 건너편의 탁자 쪽으로 보내게 되었다. (……) 이때는 그 건너편의 탁자 주위에는 한 명의 남삼청년이 옆 사람들의 권유로 마지못해 일어나서 어정쩡한 태도로 사양을 하고 있었다. "팽형(彭兄), 당형(唐兄)! 소제는 아다시피 여러분들처럼 특별한 무공을 배 운 것도 아니고 그저 잡학이나 조금 손을 대 보았을 뿐이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시범을 보이라니 이것은…… 이것은 실로 무리한 요구로군요. 제 가 벌주로 술을 석 잔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그가 마악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술잔을 집어들려고 하 자, 문득 한쪽에 앉아 있던 황의청년 하나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그쪽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쨍! 한 줄기 경쾌한 음향과 함께 황의청년이 날린 찻잔은 조금도 깨지지 않고 술잔이 있었던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술잔을 위로 튕겨올리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 황의청년이 술잔이나 찻잔은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고 이와 같은 기술을 발휘한 데 대해서 매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삼청년은 자신이 마악 잡으려던 술잔이 위로 튕겨오르자 그 자세 그대로 손목을 기이하게 휘둘러서 위에 솟아오른 술잔으 잡으려고 했으나, 이때 다 시 황의청년이 옆자리에 있는 찻잔의 뚜껑을 날려서 술잔의 방향을 옆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에 남삼청년의 손은 다시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하하하, 제갈형(諸葛兄), 어서 그만 항복하시고 한 수 보여 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황의청년은 남삼청년이 계속 헛손질을 하며 당혹한 표정을 짓자 그만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확실히 이 황의청년의 물건을 던지는 기술은 매우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 는 비단 탁자 위의 여러 가지 물건으로 허공에 떠 있는 술잔이 아래로 떨어 지지 않게 하고 어지럽게 방향을 바꾸도록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던진 물 건들도 술잔을 맞추고는 신기하게 그의 손으로 되돌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따라서 황의청년 주위에 있는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술잔의 방향을 돌릴 수가 있었기 때문에 남삼청년은 결코 술잔을 잡을 수가 없을 듯이 보였다. 주루 안의 많은 사람들은 이 황의청년의 묘기에 가까운 이러한 무공을 보고 저마다 넋을 잃거나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황의청년 주위에 있던 남녀들도 처음에는 매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그 남삼청년이 상당히 난처하게 되었음을 깨닫고는 옆에서 말했다. "당오빠, 이제 그만하세요. 그만하면 제갈오빠도 혼이 날 만큼 났잖아요." 황의청년은 주위에서 자신의 절기를 칭찬하는 듯하자 매우 득의해진 듯 연 신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 좋아! 하지만 이거 그만두려고 해도 내 손이 멈추지를 않는걸!" 헌데 그때였다. 즐겁고 다소 흥미롭던 장내에서 돌연 한 사람이 버럭 소리 를 질러서 갑자기 장내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저런 개자식이 육갑을 떨고 있네. 어서 당장 그 짓을 걷어치우 지 못해?" 주루의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흑의대한 하나가 커다랗게 소리를 내 지르며 옆에 있던 나무의자 하나를 그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끼어든 흑의대한이 나무의자를 내던진 수법은 얼핏 보기에 도 보통 괴이하고 기이한 것이 아니었다. 나무의자는 처음에는 그저 빙글빙 글 돌아가는 것 같더니만 나중에는 그 돌아가는 속도가 불갓의하게 빨라져 서 의자의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마치 한 덩어리의 폭풍같은 그림자로 화해서 그 대여섯 명의 남녀들이 앉아 있는 곳을 일순간에 휩쓸어 가는 것이었다. "앗!" "엇!" 워낙에 느닷없이 일어난 사건이었고 놀랍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기 때문에, 주루의 사방에서 일순 경악한 외침들이 절로 나왔다. 조금 전의 황의청년 등의 묘기에 가까운 수법들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실로 이 흑의대한의 솜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과연 황의청년은 이때 마악 다시 하나의 찻잔 뚜껑을 내던진 직후였는데, 자신이 던진 찻잔 뚜껑보다 그 나무의자가 먼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자칫하면 그들 중간의 탁자가 완전히 박살이 되어서 날아갈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의 한두 명이 심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 었다. 바로 그때 최초로 무예 시범을 보였던 청삼청년이 빠르게 몸을 일으킴과 동 시에 허리춤에서 장검을 발출하여 날아오는 나무의자를 향해 아주 신중한 표정으로 기이한 반원을 그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간단해 보였지만 이 청삼청년은 마치 자신의 전력을 다하고 있는 듯이 한 순간 얼굴색가지 창백하게 변모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주루 안에서 누군가가 크게 감탄한 듯 소리쳤다. "훌륭한 두전성이(斗轉星移)의 수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청삼청년이 장검을 휘두른 순간에 기이하게도 어떤 반력이 작용하여 그들을 향해 날아오던 나무의자는 즉시 방향을 바꾸어서 다른 쪽 으로 날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나무의자가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탁자 주위를 벗어나기는 했어도 그 여력에 휩쓸려서 하나의 술잔과 황의청년이 던졌던 찻단 뚜껑이 그만 원 래의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네 명의 청년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두 명의 소녀들이 앉아 있는 곳이 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녀들은 이 순간 나무의자가 옆으로 날아가는 것에 신 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자신들의 앞으로 날아오는 두 개의 물건을 피할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일순 나무의자의 여력에 휩쓸려 속도가 더해진 두 개의 물건들이 아리따운 두 명의 소녀의 얼굴을 무참하게 만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하나같이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휙! 휙! 갑자기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듯한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희미한 작은 그림자가 번쩍 하는 듯하더니 두 소녀의 면저능로 파고들던 두 개의 물건들 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다른 곳에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사람들은 일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다가 문득 아, 하는 탄성을 발하며 저 마다 안도와 경악의 탄성을 발해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두 개의 물건들은 놀랍게도 각기 하나씩의 나무젓가락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태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헛손질을 하던 남삼청년이 위기의 순간에 좌수에 들고 있던 한 쌍의 젓가락을 날려서 신기를 펼친 것이라 모 두의 경탄을 자아냈다. 실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겸손하게 당황한 척하고 있던 남삼청년은 실로 알고보니 그토록 짧은 순간에 나무젓가락으로 사기그릇들 을 소리없이 꿰뚫어서 나무기둥에 박아넣을 수가 있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 자였던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황의청년이 아까 펼쳐보였던 암기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이었 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두 소녀를 안전하게 구할 수가 있게 했다. 그러나 이때 장내에는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남 삼청년의 깊은 심기와 놀라운 무공에 감탄할 여유도 없이 숨가쁜 경악에 젖 게 했다. 바로 흑의대한이 내던지고 청삼청년이 장검으로 사량발천근(四兩 撥千斤)이 묘기를 발휘하여 그것을 튕겨내었던 나우의자가 이 순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주루의 입구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갑자기 그곳으 로 두 명의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위험한 장면이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다시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나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절로 아, 하는 외침을 발했다. 그런데 이때 더욱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나무의자가 처음에 비해 조금도 기세가 약화되지 않은 상태로 그야말로 폭풍같이 두 사람의 상체를 휩쓸어 가서 뒤이어 그 자리에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는데, 돌연 어이없게도 두 사람 중 하나가 가볍게 손을 내밀더니 의자를 간 단하게 받아드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완전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 들은 일시 놀랄 겨를도 없이 저마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혹시 자 신들이 지금 꿈을 꾸고 있거나 아니면 눈이 잘못되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청삼청년과 같이 무공이 뛰어난 청년도 겨우 장검 으로써 의자의 방향만을 돌려 놓을 수가 있었던 것인데, 지금의 이와 같은 일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의 맑고 낭랑한 음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순간의 혼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실로 그 사람이 무림의 놀라운 고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대단한 팔황육합유아독존공(八荒六合唯我獨尊功)이로군. 귀하는 성숙해(星 宿海)의 일품당(一品堂)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계신 분이오."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성숙해와 일품당에 관한 얘기는 이미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듣는 순간 매우 놀랐 다. (해로공 적용통치의 제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주루 안의 사람들이 크게 경악과 선망의 시선으로 입구에 나타난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청춘남녀들에게 의자를 집어던졌던 그 대한은 일순 안면을 크게 일그러뜨리더니 주먹으로 탁자 위를 가볍게 내리쳤다. "빌어먹을, 아냐! 난 그런 사람들을 모른다구! 제기랄, 저 사람은 상대할 수가 없어! 상대할 수가 없다구!" 말이 끝나는 순간 그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던지던 사람들은 일순 크게 놀랐 다. 가볍게 두드린 것 같았는데, 대한이 내리쳤던 탁자가 일순간 와르르 무 너지듯 가루로 변해서 사라져 버리고 대한의 신형도 마치 그 자리에서 꺼져 버리듯이 연기처럼 번쩍 창문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곳이 삼층 주루이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밖으로 뛰쳐나갈 수가 없다는 점은 젖혀 두고라도 지금 그 흑의대한이 펼쳐 보였던 신법과 재간들은 실로 경악스러운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장내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문득 고개를 돌려 심황에게 물었다. "저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은 성숙해의 무공이오?" 심황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세외팔선 가운데 하나인 해로공 적용통치의 절학이죠. 아까 그 사람 이 주먹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린 패권(覇拳)이나, 빠르게 잘를 빠져나간 순식천리(瞬息千里)의 경공 등은 역시 모두가 그 사람의 절학이예요."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 대한은 적용통치의 제자라는 말이오?" 심황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그의 절학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제자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황보자안은 실로 그 대한의 경악스러운 능력으로도 적용통치의 제자가 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심황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세외팔선의 무공은 어느 정도일까?) 황보자안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행패를 부렸던 의문의 흑의대한이 돌연 경악할 신법으로 마치 새처 럼 날아서 밖으로 사라져 버리자 이제 장내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 입구 에 나타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그 쪽으로 시선을 보내 보았다. 그런데 무심코 그 쪽을 바라보다가 황보자안은 일순 절로 눈이 크 게 휘둥그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놀라운 절기들이 펼쳐질 때에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실로 지금 입구에 나타나 있는 그 두 사람의 용모는 그야말로 아릅답고 눈부시기 그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이제 스물두 살 정도의 백의청년(白衣靑年)과 열여덟 정도의 자의소 녀(紫衣少女)였는데, 이 자의소녀의 용모는 그야말로 그린 듯이 아름답고 수려하며 눈부신 것은 둘째치고라고, 특히 이 백의청년의 용모는 그야말로 인중지룡(人中之龍)의 말을 새삼스럽게 실감케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대장부의 기개를 보여 주는 사각진 턱에 관옥같은 얼굴의 피부, 그리고 정 교하게 깎아서 만든 듯한 준수하고도 위엄있는 이목구비의 조화는 그야말로 절세적이었다. 게다가 체구는 헌칠하고 그 기상은 드높아서 마치 백색의 서 광이 사방으로 줄기줄기 내뻗치는 것과도 같으니, 황보자안은 스스로 세상 의 절세미남자(絶世美男子)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적어도 직접 이렇게 그 런 사람을 만나보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날아오는 의자를 놀랍게도 한 손에 간단하게 잡아 버린 사람은 물론 그 백의청년이었는데, 그는 이 순간 주루 안의 사람들을 향해 포권하며 이 렇게 말하고 있었다. "불초가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서 여러분의 흥을 깨뜨린 것이 아닌지 모르 겠습니다. 불초는 그저 이곳에서 몇 분의 무림 선배님들을 뵈오려고 하는 것일 뿐이니, 여러분들께서는 그냥 안심하시고 계속 즐겨 주시기 바랍니 다." 말소리가 비단 낭랑하고 청아할 뿐만 아니라 일시에 사람들의 전에 부드 럽게 와닿는 느낌이어서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목소리만 듣고도 멍하니 넋 을 잃을 정도였다. 백의청년은 이어 자의소녀와 함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며 근처의 사 람들과 포권으로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원래 이 백의 청년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상관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 시며 할 일을 하기를 바랬지만 주루 내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감히 그에게 눈길을 떼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황보자안은 여기까지 보다가 내심 매우 놀라서 고개를 돌려 다시 심황을 향 해 말했다. "저 사람들은 그저 보기에도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군요. 게다가 그는 나이 도 많지 않은데도 그와 같은 절기를 펼쳐내었으니 이는…… 이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황보자안은 사실 조금 전에 남삼청년 등을 보면서 그들도 대단한 젊은이들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나타난 백의청년을 보게 되자 너무도 감탄 하여 절로 아무런 생각도 없어질 지경이었다. 심황은 예의 그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묵묵히 백의청년의 모습을 지 켜보고 있다가 문득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는 당금 무림의 후기제일지수(後起第一之秀)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 요." 황보자안은 다소 놀랐다. "후기제일지수라고요?" 황보자안은 아직 후기제일지수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지만 그 말이 의미 하는 바가 어떤 비중일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심황은 미소하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옥면신통(玉面神通) 백능풍(白凌風), 당금 동심맹의 맹주인 환우일군자(環 宇一君子) 백무군(白武君)의 맏아들이죠." 황보자안은 솔직히 아직 동심맹의 맹주라는 환우일군자에 대해서도 들어보 지 못했었기 때문에 눈앞의 이 백의청년의 별호에 대해서도 잘 알 수가 없 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가 후기제일지수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수긍 을 ㅎ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옥면신통 백능풍 과 그 옆의 자의소녀는 마치 한 쌍의 용봉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다시 물었다. "참, 세외팔선 가운데의 하나인 일성 천수자의 이름도 백일맹, 백씨라고 했 었는데, 혹시 저들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오?" 심황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께서는 그야마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헤아리시는군요. 그래요. 천수자 백일맹과저기 있는 백능풍 공자, 그리고 당금의 동심맹주 등은 하나 같이 직계의 한 가족이라고 할 수가 있죠. 백대세가(白大世家)는 그래서 예 로부터 명성을 떨쳐왔고, 지금도 천하를 제패하고 있는 것이예요." 황보자안으로서는 심황이 말한 백대세가라는 말이 귀에 생소했으나, 그렇다 면 아까 그 흑의대한을 눈앞의 백능풍이 가볍게 물리친 것은 당연한 일이라 고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문득한 가지 생각이 다시 떠올라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저 백공자는 부친을 대신하여 각계의 사람들을 영접하고 있는 것 이겠군요? 그리고 심낭자와도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겠소?" 황보자안은 그녀 역시 세외팔선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심황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항상 상대방을 의식하고 있으니 서로를 잘 안다고 말할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친하다는 것은 아니예요. 말하자면 저기 백공자의 옆에 따라오는 상관소저는 그와 친하다고 할 수가 있겠죠." 황보자안은 그녀가 문득 자의소녀를 거론하자 급히 물었다.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이오?" 심황은 다소 기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역시 세외팔선의 하나인 검노사(劍老師) 상관봉(上官峯)의 직계자 손이예요. 이름은 상관수아(上官秀娥)이고, 별호는 일소천상화(一笑天上花) 라고 하는데, 직접 보시니 어떠세요? 저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않나요?" 황보자안은 그 자의소녀가 바로 세외팔선의 하나인 상관봉의 자손이라는 말 을 듣고 내심 놀라워하다가 그녀의 뒷 얘기를 듣고 문득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녀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거기에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듯하니 아무래도 겉과 속마음이 하나같이 아름다운 심낭자보다는 못한 것 같소. 내가 생각하기에는 왜 저런 훌륭한 청년이 심낭자와 같은 천하제 일의 미녀를 놔두고 천하제이, 혹은 천하제삼의 여인과 친하는가 하는 점이 다소 이상하구려." 기실 황보자안의 이 말은 농담이나 심한 과장이 아니었다. 심황은 비단 외 모로도 눈앞의 상관수아보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내면으로도 진정으로 성 숙된 인간미를 보이고 있는 최고의 여자였다. 그러나 심황은 황보자안이 느닷없이 자신을 그렇게 추켜세우자 얼굴이 다소 붉어지며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께서는 정말로 짓 은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한 번도 대해보지 않은 사람의 내면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으며, 또한 제가 천하제일의 미인이라면 어찌 공자께 이토록 소외당할 수가 있겠어요?" 황보자안은 도리어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내가 낭자를 멀리하다니? 나는 그저 내가 저 백공자처럼 뛰어나게 총명준수한 사람이 아니어서 감히 두꺼비가 하늘의 거위고기를 탐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분수를 지키고 있는 것일 뿐이지, 어찌 그대와 같 은 사람을 멀리할 수가 있겠소?" --계속-- 번호:125/127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7 07:37 길이:333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2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2장. 하늘의 거위고기 심황은 황보자안이 자신은 두꺼비에 불과하고 그녀는 하늘의 거위고기라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안색이 더욱 붉어져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당신은 너무 겸손하시군요. 당신은…… 당신은 결코 두꺼비가 아니고, 또한 백공자보다 못한 점이 없어요." 황보자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내가 저 백공자보다 못한 것이 없다는 말이오? 그런 농담을 내가 정 말로 믿어도 되겠소?" 심황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그에게 당신보다 훌륭한 점이 있다고 해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각 기 틀리게 마련이예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고, 저 백 공자보다도 훨씬…… 훨씬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이예요." 황보자안은 느닷없이 심황에게서 그처럼 사랑의 고백과도 비슷한 얘기를 듣 게 되자 일시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그는 문득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긴 나도 저 백공자만큼이나 잘생긴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잠시 서로간에 다소 어색하고 야릇한 감정의 기운이 흐르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이에는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이윽고 백능풍과 상관수아가 아까 묘기를 펼쳐 보이던 청춘남녀들과 헤어져서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능풍은 먼저 출진자와 현황 자를 보더니 곧 포권하며 아는 체를 했다. "아, 곤륜파의 두 분 선배님들께서 이렇게 오셨군요. 불초 백능풍이 뒤늦게 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출진자와 현황자는 백능풍이 다가와서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하자 웃으며 몸 을 일으켜서 정중하게 마주 답례했다. 기실 무림의 배분에 있어서는 그들이 앞선다고 할지라도 무공에 있어서는 백능풍이 한참이나 선배격이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감히 백능풍을 앉아서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림에서는 비록 배분이 중요하기는 해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무공 능력 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영존께서는 평안하시고 대회 일정은 잘 되어 가고 있는가?" 현황자의 말에 백능풍은 웃으며 대답했다. "예. 매사가 순조롭고 엄친께서도 건강하십니다. 그리고 엄친께서는 또한 일정이 바쁘신 관계로 직접 선배님들을 모시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여기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현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동심맹이 일을 맡아보려면 바쁘기 마련이지. 그래, 우리는 이곳에 서 이삼일 더 머물다가 대회일에나 가서 뵙겠다고 영존께 말씀드려 주시 게." 백능풍은 매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동심맹의 예산이 넉넉하고 그리하고 그곳에서 여러 선배님들을 한꺼번에 모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함이 한스럽니다. 선배님께 서 그렇게 하시겠다니 반드시 엄친께 그렇게 전해 올리겠습니다." 현황자는 눈앞의 이 백능풍이 매우 대견스럽고 또한 지극히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수고하게나." "다음에 뵙겠습니다." 백능풍이 현황자와 출진자에게 정중하게 포권하며 옆자리로 가자, 옆에 있 던 상관수아도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에 뒤따랐다. 그런데 백능풍이 걸음을 옮긴 바로 그 옆자리가 심황과 황보자안 등이 앉아 있는 탁자였다. 아평과 황보자안은 알아보지 못하는지 백능풍은 심황을 보 게 되자 일순 얼굴 가득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심낭자께서 여기에 계셨구려! 불초가 진작 알았더라면 이렇게 무례 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불초 등과 함께 군산으로 가시겠습니 까?" 백능풍은 아까 현황자 등에게는 그냥 인사말이라도 군산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심황에게는 이와 같이 적극 권하는 것을 보자 실로 그녀 를 더욱 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여기에 있겠어요." 백능풍은 심황이 거절을 하자 다소 실망스러운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혹시…… 혹시 다른 기분 나쁜 점이라도 있습니까? 불초는 일전에 심낭자 의 훌륭하신 소문을 들어서 한 번 만나뵈었으면 하고 바랬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매우 아쉬웠었는데 지금 이렇게 거절을 하시면, 저의 마음은 매우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황보자안은 아까 심황이 백능풍을 잘 알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제 백능풍의 말을 들어보니 기실은 두 사람은 정식으로 처음 만나는 것임을 알고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세외팔선은 서로 왕래가 빈번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 백능풍의 용모는 준수하고 또한 그 음성이나 눈빛은 절로 사람들의 마음 을 움직예 하는 것이어서 누구라도 그가 이처럼 간곡하게 말한다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옆에 다가온 상관수아 역시 기이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심언니. 우리 함께 군산으로 가서 오늘밤은 마음껏 어울려 보도록 해요. 그곳에는 이미 언니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 걸요." 그러나 심황은 시종 차분하고 동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담담하게 웃고 있 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미안해, 상관동생.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계속 이곳에 남아 있도록 하 겠어. 다른 삶들에게 그대가 안부를 전해 주었으면 좋겠어." 상관수아는 심황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 시 말했다. "심언니, 언니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것은 혹시…… 혹시 다른 무슨 일 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 일에 대해서 저희들이 대신 책임져 드리면 안 되겠어요?" 백능풍과 상관수아는 실로 상황 판단이 빨라서 어느새 심황이 함께 앉아 있 는 황보자안 등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심황은 문득 얼굴을 다소 붉히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여기에 남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오직 내가 원하기 때문이야." 상관수아는 그 말에 의아한 듯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언니는 이 가운데에서 어떤 훌륭하신 낭군감이라도 골라 놓으 셨다는 말씀인가요?" 상관수아는 물론 그저 농담으로 그렇게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심황은 문 득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맞아. 나는…… 나는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야. 그러니 그대들은 어서 그냥 돌아가도록 해." 상관수아는 일순 크게 놀라고 당혹하여 물었다. "아니, 그럼 그 사람은 대체 누구죠?" 이때 백능풍은 은근히 심황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보자안에 대해서 주의 를 기울이고 있다가 왠지 심황의 눈길이 그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쉽 게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심 짚히는 데가 있어서 황보자안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이분 공자께서는 불초께 존성대명을 말씀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 까?" 백능풍은 원래 무림의 선배들만을 상대해 오다가 이런 무공도 낮아 보이는 서생 타입의 황보자안을 대하게 되자 자연 그 태도가 다소 위압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물론 평소라면 그의 이러한 행동을 그저 웃으며 흘려보냈을 것 이고, 또한 오히려 그의 당당함에 박수까지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심황이 자신을 두고 낭군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크게 흥분되 어 있었기 때문에 백능풍의 그러한 고압적인 자세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 다. 그는 일어서지도 않은 채로 마주 포권하며 대답했다. "소생은 그저 무명소졸이오. 당신이 이름을 들어도 모를 테니, 내가 굳이 이름을 말해서 당신의 요구에 응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오?" "……" 백능풍은 처음에는 그저 부담없이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황보자안이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일시 어리벙벙하여 할 말이 없어졌다. 기실 당금의 무림에서 그가 한 마디만 하면 누구라도 감히 황보자안처럼 대꾸한다는 것 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어서 백능풍은 처음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 부딪치게 된 셈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비록 무공은 형편없이 약해 보이지만 심황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쓸 수도 없는 입장이었 다. 그러나 옆에 있는 상관수아는 이때 심황이 낭군감이 있다는 말을 한 것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을 뿐 황보자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서 앞뒤를 생각해 보지 도 않고 황보자안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흥, 주제에 거만을 떠는 것만 배웠군. 어디 그대가 감히 우리 풍가가(風哥 哥)에게 대들 수가 있는지 한 번 보기로 할까?" 그녀가 지금 말한 풍가가라는 것은 물론 백능풍을 말하고 있는 애칭이었다. 말과 함께 상관수아는 우수를 황보자안의 면전으로 슬그머니 내밀었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장심에는 푸른 광채가 마치 보석처럼 일어나며 황보자안의 목줄기를 죄어가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심황과 모용릉파 등의 무공을 본 적이 있었지만, 실로 이 상관수아의 무공 역시 그에 못지 않을 것이기에 그 한 수로써 황보자안의 목숨은 절로 경각에 놓이게 된 셈이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한 줄기 노을빛의 광채가 일어나더니 황보자안의 면전 을 완전히 감싸면서 상관수수의 푸른 광채에 부딪쳐 가는 것이 아닌가! 쩡, 쩌러러렁…… 흡사 아름다운 악기를 타는 것 같은 기묘한 맑은 음향이 주위를 찢으며 한 무더기의 먼지가 구름같이 일어났다. 동시에 장내의 공기가 크게 진탕되면 서 상관수아의 몸이 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기실 당사자인 상관수아는 더욱 놀라 안색이 일시 창백하게 변했다. 바로 조금 전에 그녀 의 공격을 나서서 막아낸 사람은 심황이었던 것이었다. 심황은 어느새 몸을 움직여 황보자안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에게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상관동생, 만일 그대가 그를 해치려고 한다면 필히 나를 먼저 제거해야 할 거야." 상관수아는 심황의 안색에 농담의 기색이 없고 매우 정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순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놀라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가 바로 언니의 낭군감인가요?" 상관수아는 손가락으로 황보자안을 가리켰다. 기실 조금 전에 심황에게 그녀가 다소 밀리기는 했어도 그것은 정식적인 대 결이 아니었고, 또한 그녀의 공격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 여파도 크지 않았 으므로 서로간의 의를 해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심황은 이 순간 얼굴이 심하게 붉어져 있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 그러니 그대들은 어서 돌아가 주었으면 해. 만일…… 만 일 그대의 귀결수(鬼決手)와 나의 반선수를 비교해 보고 싶다면 지금 얼마 든지 공격해도 좋아." "……!" 상관수아는 내심 설마하며 물었다가 직접 심황의 말을 듣고는 너무나도 놀 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원래 심언니는 우리 또래에서도 도도하기로 소문이 나서 어떤 남자도 거들 떠보지 않았었는데, 실로…… 실로 저런 서생같은 사람과 좋아지게 되었다 는 말인가?) 기실 심황과 같은 사람의 하나하나의 행동은 주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이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비록 아주 잘생기기는 했지만 무공도 형편없어 보이고 전신에서 대장 부의 기개도 느껴지지 않는데 어떤 점이 그녀에게 끌렸을까?) 황보자안은 사실 지난 일년간의 무공 수련으로 전신의 골격이 아주 조화있 게 발달하여 최고의 아름다운 건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서는 백능풍의 눈에서 느껴지는 신기(神氣)라든가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을 위압하는 기상이 없어서 그저 평범한 서생처럼 보였으 므로, 상관수아는 무공이 높은 심황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 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황이 아닌데 어떻게 황보자안의 가치와 그 훌륭한 점 등을 알 것이며, 또한 공감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 백능풍은 상황이 아주 어색하고 묘하게 변해가자 이래서는 자신들에게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즉시 안색을 가다듬고 심황과 황보자안에 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험험! 이 일은 불초가 미처 두 분의 관계를 몰라보고 실례를 한 것으로 치 겠소이다. 아무쪼록 두 분이 저희 군산의 대회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라며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백능풍은 이어 상관수아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걸어서 사층으로 올라가 버렸 다. 장내는 조금 전의 그 일로 인해서 다소 어색하고도 냉랭하고 살벌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백능풍 등이 어떻게 하고 사라졌든지간에 오직 두 사람의 가슴만은 지금 마악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평이 문득 미미하게 웃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식사도 거의 끝났으니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나 하는 것이 어때 요?" 황보자안과 심황은 즉시 아평에게 이끌려서 헌원주루를 나와서 다시 그들의 숙소인 석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 세 사람의 연인들에게는 이제는 시끄럽고 화려한 곳보다는 조용하고 보다 분위기가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 문이었다. 시끄러운 주루를 벗어나서 황보자안은 심황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 은 것 같았는데, 막상 셋이서 걷게 되자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한참이나 그 들은 말없이 걸어갔다. 그러다가 이윽고 석옥의 근처에 이르러 바람이 잔잔하고 정취가 풍기는 인 공연못가에 도달하자 문득 아평이 먼저 신법을 날려서 석옥 안으로 들어가 며 소리쳤다. "잠깐 제가 먼저 들어가서 술상을 준비해 놓을 테니 두 분은 이곳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며 기다려요!" 남은 두 사람은 사실 이 순간만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에 아평의 뒤를 따 라 들어가지 않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천천히 연못 주위를 거닐었다. 원래 둘만의 시간이 되면 할 얘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막상 이와 같은 시간을 갖게 되자 꿀먹은 벙어리처럼 얼굴만 서로 붉힌 채 그저 걸어가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대략 일각 정도 흘렀을까, 역시 용기 있는 것은 남자인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황보자안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의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까 그 상관낭자가 펼친 것이 귀결수라고 들었는데, 그것은…… 그것은 혹시 상관봉의 무공이었소?" 심황은 잔뜩이나 마음속으로 긴장을 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절로 웃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깊은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황보자안의 옆얼굴 을 훔쳐보다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검노사 상관봉은 과거에 검법에 관해서 거의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 도였지요. 하지만 그에게는 북두제검대구식(北斗帝劍大九式)만이 있었던 것 이 아니라, 북두신공(北斗神功), 귀결수, 구벽신권(九劈神拳), 삼합지(三合 指), 철혈사십팔퇴(鐵血四十八腿), 신행백변(神行百變) 등의 놀라운 절기들 도 많았지요. 아까 그 상관낭자가 펼쳤던 푸른 광채의 장법은 바로 그 가운 데의 귀결수라는 것이예요." "……" 심황은 황보자안의 말을 기다렸으나 그가 다시 묵묵했기 때문에 말을 이었 다. "그러나 지금의 상관봉은 사실상 그와 같은 무공들은 쓰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아요. 그는 지금은 보다 궁극적인 경지의 무공에 도달해 있는 것이 죠." 황보자안은 거기까지 듣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그 백능풍 공자도 무공이 대단할 것이 아니오?" 심황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음, 그들의 무공은 바로 백대세가의 무공이지요. 그 무공은 우선 금단신공 (金丹神功)을 위시로 하여 금삽수(金揷手), 쌍류금(雙流金), 일선지(一線 指), 여영수형퇴(如影隨形腿), 부동신보(不動神步), 빙허임풍(憑虛臨風), 무극검해(無極劍解) 등의 팔대신공인데, 아까 그가 나무의자를 받은 수법은 바로 그 금삽수라는 절기였어요." 황보자안은 이미 곤륜파에서 금단신공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 심황이 말하고 있는 금단신공과는 다른 것임을 눈치챘다. 황보자안은 다소 무거운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러나 그대도 보다시피 나는 그들과 같은 절세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오. 그대는 무공이 출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금전 따위에 현혹되는 일도 없을 것이니, 나는 그대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오?" 심황은 그제서야 황보자안의 이제까지의 말이 조금 전의 말을 유도해 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자신을 모르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일부러 저를 시 험하고자 하시는 것인가요? 저는 이제까지 세상의 그 어떤 남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일년 전의 그때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이미 마음이 끌렸어 요. 그것은…… 그것은……" 황보자안은 몸을 세우고 고개를 돌려 심황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잘라 물 었다.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오?" 심황은 이때 가슴이 심하게 떠리고 매우 불안해져서 음성도 흔들리고 있었 는데, 황보자안의 깊은 시선을 보게 되자 용기를 얻은 듯이 그의 눈을 직시 하며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마음만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아요. 무공이 있고 없고의 일은 그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죠. 사람들은 무 공이 고강한 사람을 제일로 치지만 저는…… 저는 오직 훌륭한 심성을 가지 신 그대만을 사모해요. 저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어요. 저는 앞으로 영원히 당신을 보필해 드릴 것이고, 또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당신을 영 원히 사랑할 거예요." 그것은 실로 뜨겁고 용기 있는 영혼의 고백이었다. 황보자안은 스스로 마음을 억제하고 침착하려고 했으나 그의 가슴은 뜨겁고 격해지는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눈앞에서 어려운 고백을 하고 마치 비맞은 새처럼 떨고 있는 심황을 보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달려가 단숨에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대가…… 그대가 그렇게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오?" 심황은 기실 매우 현명하고 강하며 도도한 여자였지만 이 순간만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그의 품속으로 한없이 파고들었다. "저는 당신이 저의 마음을 몰라줄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했어요." 황보자안은 힘차게 그녀의 몸을 껴안아 준 다음에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 흡사 하늘의 옥을 심혈을 기울여서 조각한 듯한 아름다운 용모에, 역시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심성이 스며 있는 천하 제일의 미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심황의 눈길은 넓고 아름다운 호수 속에서 스며나오는 물기 젖은 바람과도 같았고, 그녀의 입술은 난초 향기를 머금은 뜨거운 꽃잎과도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 사랑스러운 눈길과 입술을 바라보다가 그만 절로 참지 못하 고 탐하며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음……" 심황은 그의 뜨거운 입술이 와닿자 마치 영혼까지 일시에 녹아 버리는 듯이 그의 품속으로 늘어지며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들였다. 입맞춤의 시간은 길었고 농밀했으나, 정작 두 사람에게는 더없이 짧았고 부 족했으며, 오히려 더욱 안타까운 여운만을 남겼다. 황보자안은 다시 한 번 심황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탐하고 나서 정색을 하 고 말했다. "당신은 가장 훌륭한 여인이오. 나는 원래 용기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그대를 몰래 사랑하고 있었다오. 이것은 진실이며, 앞으로 나는 당신이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도록 해줄 생각이오." 심황의 그의 깊은 사랑으로 빛나는 두 눈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더 이상 감 당할 수가 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감으며 그의 품속으로 깊이 안겼다. 그러다가 심황은 문득 그의 품속을 벗어나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아평 동생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우리가 너무 우리 생각만 하고 있었 군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하니 홍조가 떠올라 있고 수줍게 웃는 것 을 보고 다시 한 번 더 껴안고 입맞추고 싶었으나 참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녀는 일부러 우리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녀를 소홀하게 대한다면 안되는 일이지." 황보자안이 심황의 손을 잡자 그녀는 즉시 몸을 움직여 그의 품속에 한 번 기대더니 스르르 앞으로 나아가며 황보자안의 몸을 앞으로 이끌기 시작했 다. 이미 이 두 사람은 영원한 연인이요 부부나 다름이 없다고 서로가 느끼 고 있었기 때문에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하며 황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마악 정원을 가로질러 마치 날듯이 석옥의 근처에 이르렀 을 때였다. 심황은 행복감으로 충만된 얼굴로 석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서려다가 문득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신형을 멈칫하며 안색을 굳히면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누구냐?" 황보자안은 옆에서 이를 보고 다소 의아해하다가 문득 아평이 먼저 안에 들 어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내심 웃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안에 무슨 기척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아평의 기척일 것이다. 혹시 이 아평이 우리를 놀라게 해주려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황보자안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순간 심황의 안색이 너무나도 싸 늘하게 굳어져 있기 때문에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여태까 지 그녀가 이렇게 심하게 긴장을 하고 표정이 굳어져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심황은 마침내 자신에게 사랑하는 낭군이 생기자 이는 천하의 무엇과 도 바꿀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즉각 그를 보호하려는 정성이 발동 된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심황의 표정이 장난인 것 같지는 않아서 우선은 그녀가 하는 대 로 바라보기로 했다.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없자 심황은 가볍게 우수를 내저었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일며 석옥의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계속-- 번호:126/127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7 07:37 길이:348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3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3장. 낭심귀견수(狼心鬼見愁) 지금은 점심때가 약간 지나간 오후 무렵인 대낮인자라 실내에는 부드러운 조명이 비춰들고 있었고,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는 조금도 어떤 이상한 느낌이나 살벌한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황보자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실내의 물건이나 모든 상황들이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을 보고 혹시 심황이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 했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긴장을 풀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했 다. (참, 아평이 이곳에서 술상을 보아 놓고 기다린다고 했었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갔고, 또한 술상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녀가 침실에 술상을 봐놓았 을 리는 없을 텐데?) 고개를 돌려 심황을 보니 그녀의 안색은 처음보다는 다소 차분해져 있었는 데, 그를 향해서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 염려가 없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투의 의사로 해석이 되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문득 달콤한 느낌이 들어서 그녀의 섬섬옥수를 잡아쥐며 앞으로 끌어당겨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순간 심황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지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처녀이니 남자의 입맞춤 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까는 그보다 더한 행동도 했었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심하게 얼굴을 붉히는 것은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 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고 있는데, 그가 그런 입맞춤을 했기 때문에 그녀가 더욱 부끄러워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거실에는 지금 그녀와 나 두 사람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그럴 까?) 황보자안이 잠시 주위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심황은 여전히 심하게 붉어진 얼굴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듯이 다가왔다. 황보자안은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달콤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일어서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얼싸안으려고 했다. 헌데 그 순간의 일이었다. 마악 다가와서 그의 품속에 안기려던 버들가지와 도 같은 가느다란 허리가 일순 안개와도 같이 희미하게 변하더니 어느새 저 만큼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순간 분명하게 깨달았다. 심황은 이 순간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전면의 벽쪽으로 다가서고 있 었으며, 쌍장은 이미 은은한 노을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심황은 이미 적이 이 거실의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 며, 황보자안과 얼싸안는 듯한 행동을 보이다가 기습적으로 공격해 가고 있 는 것이었다. 과연 심황이 다음 순간에 쌍장을 가볍게 휘젓자 그 속에서 눈부신 노을빛의 광채가 극쾌한 속도로 소리없이 뻗어나갔다. 그곳은 바로 거실의 벽이었다. 황보자안은 이 순간 심황의 기민한 움직임에 감탄하고 또한 그녀를 믿고 있 었지만, 그녀가 공격하는 것이 다만 멀쩡한 거실의 벽면임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뒤이어 심황의 장력에 의해서 거실의 벽이 통째로 부서져 서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황보자안의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 심황의 노을빛 장력이 마악 벽면에 부딪치려는 순간 느닷없이 멀쩡한 벽면 에서 한 쌍의 검은 손이 슬그머니 뻗어나오더니 노을빛 광채를 받아내는 것 이 아닌가! 꽝----! 황보자안은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 너무나도 상식과는 동떨어진 괴이한 일이 었기 때문에 착각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뒤를 이은 강렬한 폭음과 무섭게 밀 려드는 압력들은 그것들이 결코 환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 닫게 만들었다. 황보자안은 엄청난 압력에 의해 연신 뒤로 밀려나가면서 벌려진 입을 다물 지 못했다. 만일 이 석옥이 순전히 돌로 지어진 아주 튼튼한 집이 아니었다면 조금 전 의 강력한 격돌로 인해 완전히 날라가서 형체도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가슴에서 비릿한 기혈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나 그 순간에 확 실하게 볼 수가 있었다. 심황의 쌍장에서 나온 노을빛의 장력과 그 검은 손 에서 나온 무형의 장력이 크게 부딪치는 순간에 두 개의 손이 마치 현란하 게 춤추듯이 빠르게 움직였고, 다음 순간 벽 속에서 하나의 검은 인영(人 影)이 흡사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사 라지는 것을. "하하하, 놀랍군, 놀라워! 그대의 무공은 소문보다 훨씬 더하군!" 인영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아득하게 멀어지며 들려오는 그 음성 역시 마치 귀신의 음성처럼 냉랭하고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 은 그 음성은 남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 황보자안은 문득 손에서 따뜻하고 상쾌한 기운이 스며들어 정신을 맑게 일 깨우는 것을 느끼며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참, 그렇다면 아평, 아평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이지?) 심황은 어느새 황보자안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주입하여 그의 가벼운 내상 을 가라앉히면서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 아름답고 현숙하며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자 다시 그녀의 입 술에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심이 강렬하게 일었으나 이내 그런 욕심을 겨우 억제하고 입을 열어 물었다. "황…… 황매(凰妹), 아평…… 아평은 대체 어디에 갔을까?" 심황은 황보자안의 심리를 파악하는 듯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 윽고 내상이 완전히 치료된 듯하자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이곳에 없어요. 안…… 안오라버니, 당신은 반드시 그녀를 되 찾아 올 것인가요?" 황보자안은 문득 그녀의 말에 왠지 커다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심황은 원래 매우 침착하고 매사에 완벽을 기하는 훌륭한 여인인데 지금 그 어조가 다소 불안한 듯하고, 처음으로 부르는 안오라버니라는 호칭에도 수줍음이 많이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러한 심황이 이런 변화를 보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하고 불길한 조짐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녀의 눈빛이 맑고 고우며 헌신적인 빛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으며 대답했다. "나는…… 나는 반드시 그녀를 되찾아야만 하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제일부인으로 하고, 그녀는 제이부인으로 해서 우리가 함께 한평생을 해로 해야 할 것이 아니오?" 심황은 그가 이런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난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 만 피식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우리는 그녀를 구할 수가 있을 거예요." 심황은 힘주어서 말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왠지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일수록 아평을 구하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고난이 클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황보자안은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한 번 깊게 입맞춤을 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대체 아평은 어디로 간 거지? 우리는 어디로 가서 그녀를 찾아야만 하지?" 심황은 눈을 내리감고 조용히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다가 눈을 뜨고 미소 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 일단 그녀를 구하기로 결정하신 이상은 그녀는 안전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말과 함께 심황은 거실의 중앙에 있는 탁자 위에서 한 장의 종이 쪽지를 집 어드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보니 그것은 바로 하나의 서찰이었는데, 바쁘게 흘려쓴 글씨였 고, 여자의 글씨였으며, 제법 글씨체가 수렸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 있는 글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월호(月湖) 중앙의 용왕묘(龍王廟)로 오시오.> (월호? 월호가 어디에 있지?) 황보자안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바로 이곳으로 그들이 아평을 데려갔다는 말이오?" 심황은 황보자안의 표정에서 왠지 불안감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 다. "아평을 데리고 간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것이니, 그리 염려하지 마 세요. 그리고 그 목적도 바로 당신에게 있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심황이 마치 자신의 내심을 읽고 있는 것 같아서 절로 안색이 붉어졌다. 그는 사실 조금 전의 그 검은 인영과 일행인 사람들이 아평을 데 려갔다면 혹시 그녀를 해치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것이었다. 그렇다. 남겨진 서찰의 글씨체로 본다면 여자가 데려간 것일 것이고, 굳이 아평을 데려가고서 그 위치를 밝힌 것은 황보자안을 유인하기 위해서일 것 이다. 황보자안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우선 아평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고 여기고는 다시 물었다. "혹시 이 부근의 지리에 대해서 알고 있소?" 아평이 납치를 당한 일은 너무나도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황보 자안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고, 서찰에 적혀 있는 월호라는 곳보다는 차라리 이곳 석옥의 여러 개의 방을 뒤지다 보면 그 속에서 뛰쳐 나올 것만 같았다. 심황은 가볍게 웃더니 대답했다. "이 부근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월호가 장강을 건너 서쪽 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황보자안은 이에 안색이 밝아졌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 어서 그곳으로 가봅시다." "……" 심황은 문득 대답하지 않고 서두르는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은 여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의아해져 서 물었다. "그곳으로 가는 것이 그렇게도 위험한 일이오?" 심황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저는 상관없어요. 설령 죽는다 해도 당신을 위해 서라면 아무런 후회도 없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심황의 그러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말을 듣는 순간 일순 가 슴이 서늘하게 식어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황의 능력을 믿고 내심 있었던 터였으나, 이제는 아평을 구하러 가는 것이 얼마나 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아평을 납 치해간 사람들이 이미 심황의 능력과 또한 그 결과를 알고 있는 바에야 어 찌 분명한 목적과 결과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세워 놓지 않았겠는가? (월호…… 그곳이 설마 호랑이의 아가리라도 된다는 말일까?) 심황은 이윽고 차분하게 마음을 정하더니 황보자안의 손목을 잡고 월호를 향해 천천히 신형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륙의 이대 젖줄 중의 하나이며, 중원의 사람들이 크게 선호하는 이 장강 (長江)은 비단 그 길이가 끝없이 길고 강 폭이 넒어 마치 망망대해를 연상 시킬 뿐만 아니라 곳곳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호수들을 이루어서 그야말로 절경을 자아내고,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었다. 지금 이 아평을 데려갔다고 서찰에 적어 놓은 월호 역시 장강의 주변에 만 들어진 수많은 호수들 중의 하나이며, 그것은 남쪽 마가호(馬家湖), 북쪽의 양호(陽湖)와 더불어 장강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창성 외각의 명소였 다. 아직은 해가 지지 않은 오후 무렵이었기 때문에 심황은 신법을 일으키지 않 고 황보자안의 손을 잡고 무창성의 번화한 거리를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인적이 없는 장강의 앞에 도달했을 때에는 해가 거의 넘어가고 서쪽 하늘에 황혼의 노을빛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옆에 심황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별다른 도 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곤륜파의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않았 다. 황보자안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모두 헌원주루에서 즐겁게 식 사를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인간사가 참으로 무상하다고 생각되어 문 득 그 노을빛을 바라보며 심황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노을빛은 참으로 아름답구려. 그것은 그대의 무공과도 연관이 있는 것 이 아니오?" 심황은 문득 황보자안의 내심을 깨닫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의 무공은 빛깔은 비슷해도 선천공력이기 때문에 저 노을과는 별로 연관 이 없어요. 그보다 당신은 제게 아까의 그 검은 그림자에 대해서 묻고 싶으 신거죠?" 황보자안은 안색을 다소 붉히고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부드럽게 안아주며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도 현숙하고 아름다우니, 황매, 그대는 정말로 나의 보배이 고 내 사랑이 틀림이 없구려." 심황은 그의 다소 농도짙은 말에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가볍게 품을 벗어나 와 그의 손을 잡고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추측은 아마도 거의 틀림이 없을 거예요. 그 검은 인영은 바로 유 령백변(幽靈百變)과 귀음혼(鬼陰魂)을 썼어요." 황보자안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귀음혼은…… 귀음혼은 바로 혈…… 혈접이 쓰던 것이 아니오?" 당시 혈접 모용릉파는 귀음혼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나비 모양의 형상을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녀를 혈접이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그 검은 인영이 바로 혈접은 아니었어요." 그렇다. 황보자안이 듣기에도 그 검은 인영의 음성은 분명히 남자의 음성이 었다. 황보자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심황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강의 흘러가는 물살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혈접이 소속되어 있는 소요각에는 그녀 외에도 많은 고수들이 있지요. 특 히 아까 제가 겨루었던 사람은 우리의 또래였는데, 소요각에서 혈접의 고종 사촌으로는 낭심귀견수(狼心鬼見手) 모용극상(慕容克 )이 있지요." "낭심귀견수……" 황보자안은 일단 그 별호를 보더라도 어떠한 인물인지 상상이 가고도 남음 이 있었으므로 놀라서 중얼거렸다. 심황이 다시 말했다. "물론 저의 추측이고 확실한 것은 아니예요. 예를 들어 소요각에서 다른 사 람들이 나왔을 경우도 있는 거지요." 황보자안은 다소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그럼 아평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바로 그 모용낭자라는 말이오?"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중팔구는 틀림이 없어요. 소요각의 행사는 사실 매우 신비하고 치밀하지 요. 그들은 한 번 무엇이든 시도를 하면 도중에 멈춘 적이 없어요. 혈접이 비록 당신에게 해를 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명령을 감히 거 역할 수는 없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물었다. "그럼 우리는 무사히 아평을 구해 올 수가 있을까?" 심황은 잠시 생각한 뒤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잠깐 겨루어 보았지만 그 낭심귀견수 모용극상의 무공은 사실 저에 비해서 못하지 않아요. 그리고 모용낭자가 우리를 돕지는 못할 것이니 이번 에 우리 아평 동생을 구하지 못한다면 모두 함께 죽도록 해요." 심황은 맑고 고운 눈빛으로 황보자안을 바라보았다. 황보자안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절로 깊은 격정이 치밀어올라 서 와락 그녀의 몸을 껴안고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황매, 황매! 당신은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구려!" 심황은 즉시 마주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함께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순간 황보자안은 자신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 를 돌려 아래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자신과 심황의 몸이 이 순 간 마치 거짓말처럼 장강의 푸른 물 위를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다소 의심했지만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시원스런 강풍 은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황보자안은 강호에서 하늘 을 날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고, 또한 얼마 전에 헌원주 루에서 흑의대한의 놀라운 신법을 목격한 바가 있었지만, 실로 이 심황의 무공이 이 정도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다. "이…… 이게 혹시 꿈이 아니오?" 황보자안이 놀라서 말하자 심황은 더욱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몸을 껴안으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꿈이예요. 하지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이 미 장강의 건너편에 도달해 있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심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참 을 수가 없어서 격정어린 깊은 입맞춤을 했다. 이곳이 만일 허공이 아니고 어떤 침상이었다면 그는 결코 심황을 이대로 입맞춤만 하며 내버려두지 않 았을 것이었다. 일순 두 사람은 황혼의 아름다움 속에서 황홀경에 젖어 마치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월호. 이 작고 아름다운 호수는 아주 조용하고 적막했다. 아직 때가 일러 서인지 시인묵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놀잇 배 하나 띄워져 있지 않았다. 황보자안과 심황은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함께 손을 잡고 주변을 돌면서 용 왕묘를 찾으려고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많이 있을 것 같던 용왕묘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날은 점차로 어두워지고 월호의 주변을 날아단는 물새들의 울음소리 가 처량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보자안은 걸음을 멈추고 월호의 그러한 고요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보이는 점 하나를 발견하고는 소리쳐 말했다. "아! 저것이 혹시 섬이 아니오?" 심황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오라버니, 그대의 말이 맞아요. 원래 저런 곳에 작은 섬이 있었으니 우 리가 여태 찾지 못했던 것이로군요." 두 사람은 지금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서 거의 생사마저 초월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 부르는 소리도 더욱 다정하게 들리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월호의 중앙이라면 바로 저곳이 틀림이 없을 것이오. 헌데 우리가 배도 없이 어떻게 저곳으로 가지?" 심황은 가볍게 미소했다. "안오라버니는 다시 저를 시험하시는군요." 말과 더불어 황보자안은 자신의 몸이 부드럽게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 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기척이나 압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면 자신과 심황은 함께 얼싸안고 허공에 떠서 물 위로 날아가고 있었으며, 주위의 경관과 바람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눈앞에 마치 옥으로 깎아 놓은 듯한 심황의 아름다운 얼굴이 반 쯤은 어둠에 묻힌 채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물었다. "이것은 바로 그대 가문의 천리호정(千里戶庭)이라는 경공술이오?"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낭군께도 가르쳐 드릴까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만일 그것을 배우려면 한평생이 다 걸려야 할 것이니 나는 그 만두도록 하겠소." 순간 부드럽고 향기 가득한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아왔기 때문에 황보자안 은 가볍게 놀랐다가 미소가 얼굴 가득하게 피어올랐다. 심황은 이 순간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 고 있었는데, 그러는 그녀의 다소 부끄러운 듯한 모습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그만 가슴이 크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그녀의 가슴 옷 속으 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었다. 다소 마른 듯하면서도 탄력있는 그녀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게다가 둥그런 젖가슴에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작 은 돌기를 건드리자 심황은 그만 전신을 크게 움찔하고 말았다. 동시에 그 녀의 한 손이 무의식적으로 다가와서 그의 손을 잡았으나, 황보자안은 이내 다른 손으로 그녀의 하복부를 더듬어 가고 있었다. 심황은 지금 다른 한 손 으로는 황보자안의 몸을 받쳐들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도저히 사용할 수 가 없어서 놀라 몸을 움츠리며 입을 떼었다. "안돼요. 만일…… 만일 내가 움직이게 되면 당신은 떨어져요." 황보자안은 짓 게 대꾸했다. "나는 떨어져서 물 속에 빠져도 좋으니 어디 그대는 마음껏 움직여 보시구 려." 심황은 다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내 그녀의 입술은 황보자안에게 점령당했다. 황보자안은 마치 끝없이 흘러나오는 꿀물을 받아먹듯이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하보구를 서서히 더듬어갔다. 심황은 비록 엄포를 놓았으나 결국 그의 몸을 받치고 있는 손을 빼서 그 손을 막지 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 는 황보자안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순결한 여인의 처녀지를 더듬어 간다는 것은 실로 아찔한 탐험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손으로 그녀의 속옷을 젖히고 다리 사이의 은밀하 고 수줍은 부분을 더듬어 가는 순간에 전신이 일시 둥둥 떠서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은 심황의 온몸 역시 크게 달아올라 뜨거운 불길 속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음……" 황보자안에게는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순간이었지만 유희의 시간은 아주 짧 았고 다음 순간에 이미 발바닥이 지면을 딛고 있었고, 그녀의 받치던 손길 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껴안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이제 그 작은 섬에 다 왔다는 것을 알았다. 심황은 이제 다른 한 손을 사용할 수가 있으면서도 자신의 은밀한 다리 사 이를 애무하는 황보자안의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품속으로 안겨왔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지금은 중요한 순간이므로 계속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손수 그녀의 의복을 단정하게 고쳐준 다음에 다시 깊 숙히 입맞춤을 끝내고 고개를 들자 그녀의 두 눈은 마치 홍옥처럼 빛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한없는 사랑을 느끼고 말했다. "그대는 내 사랑이오." 심황은 얼굴을 그의 품속에 묻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그대는 이미 저의 주인이예요. 당신은…… 원하시는 대로 저를 소유하세요. 언제라도…… 저는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는 당신의 일 부로서 끝없는 행복감을 느낄 거예요." 그것은 열정적이고 거의 절대적인 사랑의 고백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러한 깊은 사랑을 전해주는 그녀를 감히 추호라도 소홀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내세에는 다시 태어나 부부가 되 어 행복하게 살도록 하면 되지 않겠소?" 엄숙한 한 마디의 말과 함께 황보자안이 다시 사랑 가득한 입맞춤을 하고 나자, 이윽고 심황은 그의 손을 이끌고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스스…… 가벼운 호수의 바람이 불어와서 메마른 갈대잎과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었 다. 지금은 초여름이지만 갈대잎은 아직 작년의 것들이 누렇게 남아 있었 다. 황보자안은 심황의 손을 맞잡고 함께 신법을 펼쳐서 나아가면서 이 작은 섬 의 형태를 대강 살폈다. 이 섬은 멀리서 볼 때에는 그저 작은 하나의 바위 섬에 불과할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막상 올라와 보니 제법 나무가 울창하고 구릉이 있는 명실공히 하나의 섬이었다. 구릉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계곡은 여기저기 주름이 잡힌 듯이 허다하게 펼쳐져 있었고, 섬 전체를 돌아보는 데에도 상당힌 시간이 걸렸다. 그리하여 이윽고 사방을 수색하며 다니다가 맞은편의 작은 분지에 이르렀을 때 호수의 앞에 하나의 용왕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계속-- 번호:127/127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17 07:38 길이:404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4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4장. 용왕귀신(龍王鬼神) --용왕묘. 본래 용왕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런 호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 라 넓은 바다 속에 궁전을 지어놓고 살고 있는 것이지만, 이곳에 용왕묘가 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 호수의 물이 장강과 통하고, 다시 그 장강의 물이 바다로 통한다는 이론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었다. 이 부근의 사람들은 이곳에 용왕묘를 지어 놓고 매년 고기를 잘 잡아서 생 활이 풍족하게 되도록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었을까? 이 용왕묘는 그다지 넓은 것이 아니었고 갖은 오색의 휘장과 금실 은실 등 이 온실 등이 아직 색깔도 바래지 않은 채 늘어져 있어서 적막한 한밤중이 라 다소 음산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안에 혹시 정말로 귀신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황보자안은 자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인 심황의 마음을 좀더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그런 우스개의 말을 했다. 심황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귀신은 귀신이지만 그것이 용왕귀신은 아니니 염려마세요." 황보자안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억제하며 크게 한 번 코웃음을 치며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흥, 설마 아무리 담력이 큰 귀신이라도 감히 나를 통째로 잡아먹지는 못하 겠지!" 이 용왕묘의 내부는 바깥보다 더욱 어두웠다. 황보자안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두운 장막이 마치 얼굴에 덮쳐드는 듯하여 다소 가슴이 섬뜩했으나 이내 바로 옆에 심황이 어느새 따라 들어와서 그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을 보 고 다소간에 안심이 되었다. 잠시 후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문 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별빛에 내부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가 있게 되자 황보자안은 전면에 있는 용왕의 신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이 용왕상은 제법 그럴 듯하게 생겼는걸? 이런 어두운 곳이 아니라면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황보자안은 이어 용왕신상의 좌우에 있는 우두마면(牛頭馬面)의 두 신상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두 개의 신상은 마치 유부(幽府)에나 있는 저승사자 같은데? 아니, 어 째서 이런 신상이 용왕묘에 세워져 있는 거지?" 그때였다. "조심해요! 그것들은 바로 현현사자(玄玄使子)들이예요!" 옆에서 심황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느닷없이 흙으로 빚어서 만들 어 놓은 것 같았던 그 두 개의 신사이 마치 기울어지듯 급속히 그의 면전으 로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것들은 신상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었으며, 늘어뜨렸던 쌍수 가 각기 허공에 무수하게 변화를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로 쇄도해 들고 있었 다. 게다가 신상인 척하며 서 있던 사람들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으며, 이 순간 사방에서 두 사람을 향해 덮쳐드는 괴인들의 숫자는 대략 십여 명이나 되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비록 순양검법을 연마하였으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중의 한 괴인도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혼비백산했다. (어이쿠!) 옆에서 심황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그 자들의 공격을 막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황보자안은 그 자리에서 상체를 구부리고 자세를 낮추며 앞으로 굴러나갔다. 이 자세는 강호에서 속된 말로 뇌려타곤이라고 말하는, 마치 게으른 당나귀 가 바닥에 뒹구는 것과도 비슷한 동작이었는데, 강호에서는 그러한 동작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알고 있었지만, 황보자안은 워낙에 다급한 순간인지라 이런 동작을 펼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첫째는 우선 장내가 워낙에 어두웠고, 또한 그가 아직 이런 동작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두어 명의 괴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 저리 다급하게 구르는 바람에 애초에 밖으로 달아나려던 의도와는 달리 그 의 몸은 엉뚱학도 가운데의 용왕신상이 있는 곳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이 용왕신상은 보통 사람보다 대략 두 배 정도는 크기 때문에 황보자안의 시야에는 금방 들어왔다. 황보자안은 뒤에서 여전히 무수한 귀신들이 난무 하고 벼락같은 섬광(閃光)이 여기저기에서 갈가리 찢어지는 등의 무서운 싸 움이 벌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저 중앙은 그야말로 지옥의 아수라장처럼 무시무시하구나. 하지만 내가 이 커다란 신상의 뒤로 피하게 되면 이 뒤쪽은 장소가 좁으니 저 귀신들이 빠 르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마치 한 덩어리의 빛살로 화해서 십여 명의 괴인들을 향해 흡사 몸이 수십 개나 되는 것처럼 눈부신 격전을 벌이고 있는 심황을 돌아보며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느꼈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그녀를 도울 수가 없지만 이제 만일 그가 효과적으로 몸을 피하여 그녀가 마음놓고 싸우게 된다면 혹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일단 마음을 정한 후에 즉시 몸을 움직여 용왕신상의 뒤 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보자안은 무심코 걸음을 옮기기 전에 용왕신상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그 신상이 그를 향해 웃고 있다고 느꼈 다. 그것은 아주 음산한 웃음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신상이 웃을 리는 없는 법이지!) 황보자안이 마악 고개를 내저으며 재차 걸음을 옮겨가려고 했을 때였다. "안오라버니, 그쪽으로 가지 마세요!" 다급해 보이는 심황의 음서이 뒤에서 들려왔다. (가지 말라고? 갑자기 왜 그러지?) 황보자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멈추고 전신을 크게 긴장시켰다. 바로 그때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기이하게도 웃고 있는 용왕신상에서 돌연 두 개의 팔이 길쭉하게 앞으로 뻗어나오더니 황보자안의 어깨를 잡아 가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크게 놀라고 가슴이 떨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용왕신상에서 뻗어나오는 두 개의 손은 워낙에 빨랐기 때문에 그는 이 마수(魔手)를 피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 순간의 일이었다. "끄왁----!" 등뒤에서 일순 커다란 노을빛의 광채가 크게 일어나는가 싶더니 처절한 괴 성이 마치 합창을 하듯이 들려오고, 심황의 신형이 어느새 옆에 도달하여 그 두 개으 괴이한 손을 쳐내고 있었다. 그러나 심황은 나중에 나타난 것이 고, 그 두 개의 주먹은 먼저 들이닥친 것이기 때문에 황보자안의 한쪽 어깨 는 그 손에 잡혀서 마치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순간 황보자안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내심 생각했다. (혹시 귀왕침을 쓰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은 길지만 행동은 그보다 빨랐다. 황보자안은 오른쪽 어깨를 잡혔기 때 문에 자연 왼손이 자유롭게 되었는데, 즉시 왼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서 자 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괴이한 손을 공격해 갔다. 이 귀왕침의 특성 중의 하나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번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자연 현철지환에서 발사 되는 귀왕침의 양은 소나기처럼 무수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용하는 것이니 아마도 보통의 손이라면 그것은 귀왕침에 벌집이 되고도 남음이 있 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실로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이 기다란 손은 괴이했다. 귀왕침이 무 수하게 쏘아져 나가자 그것은 마치 자체에 눈이 달린 것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게 늘어져서 안개처럼 흔들거리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놀랍게도 그 무수 한 귀왕침의 바늘이 거의 다 빗나가고 정작 그 손에 적중된 것은 겨우 한두 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과연 비록 한두 개를 맞았지만 이 귀왕침은 천하에 악독한 암기라서 금새 효과를 나타냈다. 이 순간은 심황이 옆에 나타나서 용왕신상의 모른손 과 한창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일순 귀왕침이 격중된 순간 황보 자안의 어깨 의복이 부욱 하고 찢겨나가며 기다란 손이 도로 수축되는 동시 에 옆에서 굉렬한 폭음이 터져나왔던 것이었다. 꽝----! 그 바람에 황보자안의 신형은 뒤로 두둥실 날려가게 되었고, 심황의 신형도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나게 되었으며, 용왕신상도 한 걸음 물러났다. 순간 황보자안은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아파서 필시 그가 보의를 입지 않았 더라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용왕신상이 말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비, 빌어먹을 귀, 귀왕침이로구나!" 황보자안은 그 커다란 신상의 얼굴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하는 것을 보 고 일시 가슴이 서늘해 졌으나 이내 그 음성이 매우 낯익은 것임을 깨닫고 는 흠칫 놀랐다. (아! 이 사람은 바로 낭심귀견수 모용극상일구나!) 그렇다. 바로 전에 석옥에 나타나서 심황과 격돌을 하고 사라졌던 그 검은 인영의 음성이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금새 이 용왕신상은 당시 모용극상이 벽 속에 숨었었던 것처럼 지금 이렇게 변장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가 어떻게 이처럼 커다란 신상으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눈앞의 이 모용극상이 몸을 비틀거리며 말이 떨리고 있을 때 심 황이 나서서 공격을 가한다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황은 조금 전에 뒤로 물러나서 서 있는 그대 로 신상을 주시하고 있을 뿐 도무지 나서서 공격하려는 기미가 없었다. (부상을 입은 것일까?) 황보자안이 크게 의아해하며 가슴에 들끓는 기혈을 억누르고 있을 때, 문득 눈앞의 신상에서 검은 연기같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괴이하게 중얼거리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매…… 사매, 나는 부상을 입었다. 네가…… 네가 나서야 하겠다." 황보자안은 그것이 바로 모용극상이 사라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전에 모용릉파가 귀왕침에 맞게 되면 비록 죽지는 않지만 무공을 쓸 수는 없다고 했던 말을 상기하고 이 모용극상도 바로 그 때문에 승리 바로 직전 에서 후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쿵! 문득 모용극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나자 용왕의 신상이 힘없이 앞으로 굴러떨어져 부서져 버렸다. 말하자면 모용극상은 스스로 신상으로 변장했던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서 상대를 현혹시켰던 것이 분명했다. 이미 용왕묘 전체가 조금 전의 거대한 대격돌로 인해 완전히 부서져 버리고 사방에는 그 잔해만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작은 흙벽조차 온전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황보자안이 겨우 가슴의 기혈의 가라앉히고 나서 주위 르 둘러보니 아까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십여 명의 괴물들이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ㅂ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마치 자신이 일 순간 헛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용왕묘의 철저하게 부서진 몰골을 본다면 그것은 결코 헛것이나 환상을 본 착각이 아니었다. 황보자안은 겨우 몸을 움직이기가 용이해지자 즉시 심황에게로 달려갔다. 심황은 여전히 눈을 뜬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그녀에게 서 사람의 호흡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 다. 알고 보니 그녀의 가슴은 이미 붉은 선혈로 뒤범덕이 되어 있었고, 어깨와 허벅지 같은 곳이 심하게 찢어져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심황의 고운 얼굴이 이미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서 싸늘해져 있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혹시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급히 그 녀를 얼싸안으려고 했다. 아마도 아까 황보자안이 용왕신상에게 잡히려고 할 때에 그것을 저지시키기 위해 그녀가 무리하게 괴인들과 부딪쳤고, 그 가운데 내외상이 깊었으나 계 속해서 모용극상과 싸우다가 극히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만 것 같았다. 그런데 황보자안이 마악 심황의 몸을 얼싸안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직한 탄식성이 들려와서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녀에게 손을 대지 말아요." (……?) 그것은 워낙에 아주 낯익은 음성이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일시 심황이 전 음으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심황의 음성은 부드럽고 맑으며 정숙했지 실로 이와 같이 서늘하고 날카로 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음성에도 역시 깊은 정을 담고 있는 것은 분 명했다. (모용…… 모용낭자?) 황보자안은 일순 크게 흠칫했다. 그렇다. 방금 전에 들려온 그 음성은 그의 기억에 도저히 잊혀질 수가 없는 모용릉파의 음성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전에 그녀에게 며칠 동안 시달리며 얼마나 그와 같은 음성을 많이 들었었던가? 안색이 일변한 황보자안은 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의 눈앞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현의여인이 무엇인 가 길쭉한 물체를안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혈접 모용릉 파였다. 황보자안은 그녀를 새삼 만나게 되자 가슴이 크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 오랜만이구려, 능파(凌波)!" 그 말에 모용릉파는 일순 상체를 가늘게 떨더니 물었다. "당신…… 당신은 나를…… 나를 능파라고 불렀나요?" 황보자안은 이 혈접이 아직도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 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크게 감동하게 되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부르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소? 능파, 아니 소파(小 波), 우리는 이미 서로가 알몸으로 한 침상에 눕기까지 했던 사이가 아니 오? 당신의 그 몸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였던지……" 모용릉파는 일순 황보자안의 말에 크게 전신을 떨며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 았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또 저를 놀리려고 하시는군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좋아요. 저 는 당신을 해칠 수가 없어요." 황보자안은 다소 처연한 신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것으로 나는 당신의 모든 행동을 용서할 수가 있다오. 그들은…… 그들은 아마도 당신에게 나를 데려오라고 시켰을 것이오. 그렇다면 어서 나를 데려가구려." 모용릉파는 문득 무릎 위에 있던 길쭉한 물체를 옆에 내려놓더니 기척도 없 는 신법으로 그의 앞으로 달려와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의 목을 양팔로 얼싸안고 품속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당신은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그러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데려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들은…… 그들은 나에게 당신을 납치하는 일을 협 조하라고 강요했어요.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의 동료를 참혹하게 만들 겠다고 했어요. 저는 당신의 동료를 보호하며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당신 을 도우려고 했어요." 황보자안은 문득 그녀의 입을 맞추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옷 속을 더듬어서 다리 사이의 비지를 애무했다. 과거의 황보자안은 이와 같지는 않았지만 요 사이 그는 아평과 심황 등과 애정을 나누면서 이와 같은 농도짙은 짓 은 행동에 습관화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용릉파는 느닷없이 황보자안이 이런 상황에서 그처럼 행동하자 내심 크게 흠칫했으나 이내 몸을 피하지 않고 계속 그의 손길이 그녀의 온몸을 만지도 록 놔둔 채 그의 목을 가볍게 껴안고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과거에는 수치심에 황보자안의 손길을 거부했으나 이제는 그의 손길 이 닿자 크게 감격하여 마치 그러한 손길에 굶주렸던 사람 같았다. 황보자안은 계속 짓 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지만 모용릉파는 시간이 갈수 록 더욱 진실되고 헌신적으로 그의 모든 행동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중에 너무나도 크게 몸이 달아올라 더 이상 참아내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 었으나 그래도 전혀 거부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문득 손길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얼굴 가득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황보자안의 시선이 느껴지 자 그녀는 울며 말했다. "당신은 저의 오직 하나뿐인 사람이예요. 저는 당신의 곁을 떠난 뒤에 그것 을 알았어요. 이제는…… 이제는 더 이상 만날 기회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저를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지금 당신이 어떻게 한다고 해도 좋아요." 황보자안은 문득 그녀의 어조에서 어떤 깊은 절망감을 읽었다. 내심 놀란 마음에 그는 물었다. "이번에 당신이 돌아가면 처벌을 받게 된다는 말이오?" 모용릉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저에게 당신을 납치하여 황보가의 재산을 손에 넣으라고 했어요.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저는 돌아가면 아마도 다시 당신을 볼 수가 없 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내심 격동하여 소리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돌아가지 않으면 되지 않겠소?" 모용릉파는 처연하게 웃었다. "세상에 감히 그들의 이목을 피할 사람은 없어요. 세외팔선의 다른 사람들 도 각자의 사생활은 존중하기 때문에 저 심언니도 나를 도울 수는 없어요. 저는 이제 곧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다시 나타나서 모두를 죽이게 될 거예요." 황보자안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모용릉파가 돌아가는 것이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 나 내심 분개하여 소리쳤다. "그 모용극상이 다시 나타나서 우리를 노린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나는 아 예 이번에는 그의 문을 찔러서 영영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들겠소!" 모용릉파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언니는 이미 그가 나의 사촌오라버니라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었군요. 하지만 그들은 지금 부상을 당해서 떠난 것이지 모두 하나도 죽은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당신의 귀왕침에 당하지 않을 거예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보의를 입고 있지 않고 귀왕침이 없었다면 그에게 죽거나 잡혔 을 것이오." 모용릉파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저는…… 저는 이제 가야겠어요." 황보자안은 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모용릉파는 처연하게 웃으며 뒤에 내려놓은 길쭉한 물체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당신의 작은 여자친구는 바로 저기에 있어요. 혼수혈을 제압해 놓았으니 앞으로 몇 시진 후면 깨어날 것이고, 또한 이제까지 제가 보호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저 심언니는 지금 심한 내상을 입어서 스스로 운기요상을 하고 있는 중이니 결코 그녀가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손을 대어 서는 안돼요. 저는…… 이제 가요." 황보자안은 모용릉파가 뒤로 사라지려고 하자 문득 격정이 치밀어서 소리쳤 다. "소파! 당신은 가지 마시오! 내가 대신 가겠소! 그러면 될 게 아니오?" 모용릉파는 뒤로 신형을 날리다가 멈칫하여 몸을 허공에 그냥 띄운 채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로군요. 하지만 당신이 만약 저를 따라간다면 폐인이 되고 말 거예요. 그럴 수는 없어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앞으로 달라가며 소리쳤다. "아냐, 아냐! 나는 폐인이 되어도 좋소!" "……" 모용릉파는 즉시 허공에서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조용한 눈길로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정히 괴로우시다면 그럼 저에게 정표 하나를 남겨 주세요. 저는 앞 으로 그것을 볼 때 당신을 본 듯이 하고 나중에 죽을 때에도 그것과 함께 묻힌다면 역시 당신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것이 될 테니까요." 황보자안은 일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역시 그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는 수 없이 오른손에 하나 남아 있던 용봉쌍지환의 봉지환(鳳指環)을 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것을 가지도록 하시오. 이것은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과 한쌍인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들어진 용지환은 내가 이 미 황매에게 주었고, 이 봉지환으로 그대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으로 하 겠소. 이것을 보고 항상 나를 대하듯이 하구려. 원래 이 반지들에는 어떤 상서로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길 런지 아오? 나는…… 나중에 반드시 그대를 구하러 가리다!" 만년한옥의 푸른 광채가 은은하게 떠올라 부드럽게 빛나는 이 봉지환은 희 미한 별빛 아래에서 그야말로 한 마리의 봉황이 날개짓을 하는 듯이 절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모용릉파는 일순 마치 홀린 듯이 그 봉지환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앞으로 다 가와서 그것을 받아들고는 자신의 왼손 무명지에 끼었다. 공교롭게도 그 봉 지환은 그녀의 손가락에 아주 잘 맞아서 부드러운 광채를 발하는 것이 그녀 의 슬픔을 어느 정도 위로해 주는 듯했다. 이에 모용릉파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른손으로 그 반지를 감싸더니 즉시 황 보자안의 면전으로 달려와서 그의 입에 깊은 입맞춤을 했다. "고마워요, 나의 낭군님! 사랑해요!" 모용릉파의 나중의 말은 깊이 속삭이고 있어서 황보자안은 일시 다소간 황 홀한 기분에 젖었으나,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용릉파의 신형은 사라지고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녀는 갔구나!) 황보자안은 그만 넋을 잃고 홀로 중얼거렸다. 아평은 과연 옷을 입은 그대로 아무런 탈이 없이 잠을 자는 듯이 누워 있었 다. 황보자안은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서 있다가 이윽고 아평의 몸을 들어서 심황이 서 있는 곳의 옆에 바닥을 고르고 반듯하게 눕혀 놓았다. 그리고 나 서 심황을 보니 다행히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상처의 피는 어느 정도 멎어 있었다. 황보자안은 즉시 자신의 품속에 있는 약품들을 이용하여 그녀 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으나 모용릉파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감히 그럴 수 가 없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몇 시진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황보자안은 모용극상 등의 무리가 다시 나타날 것이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이내 운기행공을 함으로써 그것을 이겨내려고 했다. 다행히 비록 기초적인 상태 이기는 하지만 황보자안의 순양기공은 완숙할 대로 완숙해져서 거의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일단 마음을 정하자 쉽게 무아지경에 들어갔 고, 몇 시진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았다. 황보자안이 오랜만에 깊은 무아지경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동쪽 하늘에 서 뿌연 여명이 밀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그는 우선 심황과 아평이 무사함을 보았고, 심황의 안색이 전보다는 무척 좋아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소파는 정말로 그들이 다시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만들었나 보다. 만일 그 녀가 마음을 좋게 쓰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 두 명의 여자를 지킬 수가 있었겠는가? 아! 나는 참으로 무능력하구나. 그녀의 희생으로 이렇게 근근 히 살아가야 하다니……) 황보자안은 일순 자괴의식이 일어나자 즉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나 아 내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허리춤에서 군자검을 뽑아 들어 검법을 수련 하기 시작했다. 이 순양검법은 비록 어젯밤에 그 험한 위기에서 그를 보호해 주지는 못했지 만 이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육체를 단련하는 데에는 매우 커다란 쓰임새 가 있었다.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간 검법을 수련하자 ㅂ로소 마음이 차 분하게 가라앉고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황보자안은 이에 연습하던 습관처 럼 장검을 거두고 장법과 권법을 수련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갑자기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맑고 투명한 음색으로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으리, 어째서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거죠?" 순간 황보자안은 마보에서 마악 일장을 앞으로 뻗어내려다가 주춤하고 내심 크게 흠칫했다. 기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느라고 미처 심황과 아평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만일…… 만일 아평이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먼저 깨어나서 황매를 건드린다면…… 그렇다면 이를…… 이를 어쩐다지?) 황보자안은 가슴속에 불길같은 불안감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도저히 자신의 눈을 돌려서 상황을 살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용릉파가 그에게 순정을 바쳐서 그가 내심 크게 감동하고 있다고는 하나 기실 그가 마음 편하게 진 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 심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심황은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이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고, 또 한 그의 훌륭한 내조자가 될 수가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불 행한 사태에 처해 있는 것을 황보자안은 차마 고개를 돌려서 볼 수가 없었 기 때문에 일장을 앞으로 절반쯤 내뻗은 상태로 몸이 굳어졌다. 아평은 이때 겨우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서 자신이 웬 낯설은 곳에 누워 있 고, 황보자안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질문을 했는데, 그가 대답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몸이 굳어져 버리는 것을 보고 내심 크게 당황해졌다. (그는…… 그는 혹시 나 때문에 주화입마에 걸린 것이 아닐까?) 실로 무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충격에 의한 주화입마에 걸리는 일 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지금 아평이 놀라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고 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일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를 어쩌지? 이럴 어쩌지? 심언니는 흔들어 깨워도 여전히 목석처럼 앉아 있고, 그리고 나으리는…… 혹시…… 혹시……) 아평은 내심으로 크게 당황해져서 발을 굴렀으며, 황보자안의 안색이 어떻 게 변하는가를 계속해서 살폈다. 그때 몸이 굳었는 줄로 알았던 황보자안의 입술이 열리며 문득 다음과 같은 음성이 다소 떨리면서 흘러나왔다. "아평, 혹시…… 혹시 그대가 황매…… 황매를 건드린 것은 아니오?" 아평은 느닷없이 그런 질문을 받게 되자 즉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 나으리는 완전히 주화입마에 빠진 것은 아니로구나!) 그녀는 일찍이 주화입마에 빠진 사람은 말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다만 지금은 황보자안이 절반쯤 주화입마에 걸린 상태라고 생 각했다. (황매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나으리와 심언니는 이미 아주 친하게 되 었나 보다. 그것은 잘된 일이야. 잘된 일이야.) 아평은 원래 진심으로 황보자안과 심황이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 나 여자의 마음은 항상 일정하기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금새 어떤 질투감 을 느끼고 다소 기분이 상해져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고개를 흔들며 다시 생각했다. (아니야! 내가 만일 어떤 질투를 느낀다면 나는 아마도 벌을 받게 되고 말 거야. 나는 나으리께서 건강하시면 그것으로 그만이야. 심언니는 아주 좋으 신 분이니까 내가 잘 모시면 이뻐해 주실 거야.) 아평은 원래 규범이 엄격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약간의 유교적인 학슴을 받 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하녀의 생활에 길들여져 있어서 스스로의 감 정을 다스리는 법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황보자안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다시 들려왔다. "아평, 그대는 정말로 황매를 건드린…… 건드린 것이 아니오?" 이번의 발음은 보다 분명했기 때문에 아평은 이제 황보자안의 상태가 더욱 좋아졌다고 생각하며 즉시 웃으며 대답했다. "예, 심언니는 제가 흔들어 깨웠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순간 황보자안은 놀라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흐, 흔들어 깨웠다구? 일어나지 않고 있다구?" 아평은 황보자안의 음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혹시 다시 그의 증세가 심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급히 말했다. "나으리,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나서 천천히 조식을 하도록 하세요." 황보자안은 문득 고개를 흔들었다. <제5권 끝> --계속-- 번호:141/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3 길이:182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5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5장. 주화입마(朱火入魔) "필요없소. 그대가 황매의 몸을 잡아 흔들어서 그녀가…… 그녀가 죽음을 당하도록 만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힐 수가 있겠소? 나는 차라리 이대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낫겠소." (……?) 아평은 이에 황보자안의 말이 이상하고 또한 그녀가 지나치게 심황만을 두 둔하는 것 같아서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으리는 정신이 다소 이상해져서 심언니를 나보다도 더욱 아끼고 있는 것 일까?) 그녀는 비록 자신이 스스로 원한 길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여태까지 헌신적 으로 그를 따르며 사랑했었는데, 이제 얼마간의 타박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평, 이리로 오시오. 내 절대로 그대를 탓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다 만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는 해도 황매의 죽음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것 은…… 그대가 실수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황매를 더욱 사랑하기 때문이 기도 하오. 맞았소. 나는 이미 그대보다도 황매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오. 만일…… 만일 그대가 이러한 내가 보기가 싫다면 즉시 일장에 나를 죽여 주시오. 나는 지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소." 아평은 듣고 있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서운하게 도 심황을 자신보다도 더욱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야속하여 즉시 그의 말대로 그를 일장에 쳐죽이고 자신도 따라서 죽을까 하고 생각했 으나, 이내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황보자안의 진실성 있는 말에 그만 감동 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 (맞아! 심언니는 확실히 세상의 어떤 여자들보다도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나 으리의 사랑을 한몸에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지. 나으리는 나도 사랑한다 고……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진실 어린 말은 믿어도 되는 거야. 원 래 나으리는 처음에 나를 사랑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이렇듯 사랑하시게 되었으니 나는 이미 크게 성공한 것이 아닐까?) 아평이 그렇듯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순간에 갑자기 장내에 한 줄기 의 나직한 탄식성이 흘렀다. "안오라버니, 나는 죽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순간 아평은 심황이 언제 일어났을까 하고 의아해했지만 황보자안은 너무나 도 크게 놀라서 몸을 펄쩍 뛰며 공중 높이 회전하여 그대로 한쪽에 그린 듯 이 서 있는 심황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 황매, 나의 황매! 살아 있었구려!" 그렇다. 기실 심황은 처음에는 내상이 지극히 엄중하여 초죽음이 되어 있었 으나 그녀 스스로가 의원이기 때문에 즉시 그 자에에서 움직이지 않고 운기 요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수법은 매우 효과가 뛰어난 것이었으나 모용릉파 의 말대로 누군가가 옆에서 건드리게 되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심황이 만일 그 당시의 상황이 그렇듯 좋지 않은 것이 아니 었다면 그와 같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심황은 실로 간밤에 위험천만한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긴 셈인 데, 기실 아침에 아평이 다소 그녀를 흔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그녀의 요상 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심황은 아까부터 황보자안의 말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그가 자신 의 회복을 크게 기뻐하는 것을 보고 내심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황은 커다란 덩치의 황보자안의 몸을 받아서 조용히 내려놓은 다음에 그 의 두 눈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몰래 그것을 닦아 주었 다. 그리고는 말했다. "안오라버니, 당신은 갑자기 어린액 되셨나 보군요? 저는 무공이 이렇게 대 단한데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있겠어요?" 황보자안은 연신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군. 하지만 그 상처들을 빨리 치료해야 하는 것이 아니오?"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제가 유명한 의원이라는 것을 잊으셨나요?" 이어 품속에서 뭔가 약병들을 꺼내 자신의 어깨와 다리의 상처에 바르면서 문득 전음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오라버니, 아평은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해준 사람이예요. 저 는 그녀를 좋아해요. 그러니 어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세요." 황보자안도 이때 자신이 일시 감정에 휩쓸려서 아평에게 서운한 말을 했던 것을 상기하고 미안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그는 즉시 아평에 게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아평, 아평! 그대는 밤새 더욱 아름다워졌군 그래. 하지만 그대는 밤 사이 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을걸?" 황보자안은 아평이 내심 화를 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그녀의 마 음을 돌리기 위해 지난 밤의 얘기를 어제 오후부터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 다. 거기에는 물론 그와 심황이 사랑을 나눈 대목은 빠져 있었지만, 모용릉 파의 얘기는 절로 가슴이 아파서 정색한 표정으로 사실대로 말하게 되었다. 아평은 처음에는 다소 우울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자신은 그 석옥에 들어가 자마자 붙잡혀서 정신을 잃게 되었다는 말을 했고, 이내 모용릉파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따라서 그녀의 마음은 금방 풀어져서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그 모용언니야말로 진실로 헌신적인 사랑을 하신 분이로구나! 그 언니는 실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나으리께서 돌보아 주시지도 않았는데도 그처럼 사랑을 보내시고 나를 또한 보호해 주셨으니 얼마나 훌륭하고 애처로운 일 인가? 그 언니는 그러한 심한 고난 속에서도 나으리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아아, 나는 정말로 나쁜 계집아이로구나! 나으리께서 심 언니를 조금 더 좋아하신다고 해서 나으리를 해칠 생각을 했다니……) 원래 아평은 모용릉파의 사연이 매우 슬프고 공감이 가서 눈물이 흐르고 있 었는 데다가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학하는 마음이 일어서 더욱 슬프 게 흐느끼게 되었다. (나는…… 아마 나같은 계집아니는 죽어야 할 것야! 아아, 하늘은 어째서 나같은 계집아이는 잡아가지 않고 그 훌륭한 모용언니를 잡아가신 것일까?) 아평의 심성은 본디부터 도덕심이 강하고 착했기 때문에 금방 자신을 극심 하게 학대하여 그만 엉엉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보고 치료를 대강 마친 심황이 다가와서 그녀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 다. "평동생, 어째서 그렇게 슬퍼하는 거지? 그 모용낭자는 사실 내가 앞으로 우리 선조께 말씀을 드려서 무사히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다. 심황은 원래 간밤에 운기요상을 하고 있었지만 주위에서 들리는 소 리는 다 듣게 되어 있어서 본의 아니게 황보자안과 모용릉파의 모든 음성을 다 듣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미 그녀는 그녀의 선조인 산중노인에게 연락하 여 모용릉파를 살리는 길을 알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평은 고개를 저으며 울며 말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저는 그 모용언니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 너무나도 못났기 때문에 우는 것이예요." "……?" "저는 나으리께서 언니를 더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하시자 즉시 마음에 나쁜 생각이 들어서 정말로 나으리를 죽이고 나도 따라 죽을까 하고 생각했었단 말이예요. 나는…… 나는 그야말로 은혜도 분수도 모르는 나쁘고 염치없는 계집아이예요." 아평은 소리치면서 계속 울부짖었다. 이에 황보자안과 심황은 다소 난처한 기색이 되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 게 되었다. 사실 여인의 마음에 질투심이 일어나기 쉬운 것은 당연한 일이며, 아평이 이만큼이라도 착하게 마음을 먹고 있다는 자체가 크게 신기한 일인 것이었 다. 황보자안이 웃으며 아평의 몸을 부드럽게 껴안고 말했다. "아평, 아니 그대는 이제 나의 사람이니 소평(小萍)이라고 불러야지? 사실 그대나 소파, 그리고 소황(小凰) 등 세 사람은 모두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 는 사람들로 거기에 어떤 우열을 논하기는 어려운 일이라오. 다만 아까는 소황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그녀에 대한 애틋한 생각이 일어나 서 그랬던 것이지. 만일 그대가 죽었다면 나는 역시 또한 따라서 죽으려고 했었을 것이오." 아평은 겉으로는 계속 소리내어 울고 있었지만 내심 황보자안의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으리는 지금 그저 저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사실은 역시 심언니를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은 모용언니, 그리고 마지막이 나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아평의 마음은 상당히 풀려서 자연 그녀의 울음소리도 그저 건성으로 울릴 뿐이고 눈물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황보자안은 금새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전에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대가 나타나서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 따라서 만일 그대가 나의 목숨을 취하려고 한다면 전 에 주었던 선물을 다시 돌려받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오." 그 말에 아평은 문득 생각했다. (역시 내가 나으리를 죽이려는 생각은 잘못되었던 것이었을까?) 황보자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소평, 그대는 소황과 혹은 소파와는 달리 친척이나 친구도 한 사람 없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유독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을 모른다는 말이오? 그대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나 역시 오직 그대만을 위해서 살 수가 있는 것이오." 황보자안은 말과 함께 이미 울음을 그치고 있는 아평의 얼굴을 들고는 그녀 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아평은 이슬같은 눈물 방울을 뚝 떨구더니 말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요?" 황보자안은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음, 그대가 나를 죽이고 함께 죽으려고 했던 것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가 있는 일이지만, 이제는 어엿한 나의 부인인데 계속해서 나를 나으리 하고 부르는 일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지." 아평은 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기실 그녀도 황보자안에게 나으리라는 호칭을 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었다. 아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만일…… 만일 제가 어쩌다가 실수로 나으…… 그…… 그대에게 나으리라 는 말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벌을 내려주실 거죠?" 아평은 지금 처음으로 황보자안에게 그대라고 호칭을 했기 때문에 그만 얼 굴이 더욱 빨개져서 온통 홍당무처럼 변해 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한 뒤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그대는 어엿한 나의 부인인데 감히 하인처럼 대하라고 한다면 그때는 이렇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놀려주는 수밖에 없지!" 황보자안은 말과 함께 돌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서 그녀의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매만졌다. 황보자안은 그가 이렇게 한다면 아 평은 필시 깜짝 놀라고 부끄러워서 뒤로 달아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제 정작 그가 그렇게 하자 아평은 일시 몸을 크게 움찔하는 듯하더니 더욱 뜨거워진 몸으로 황보자안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그대……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아무렇 게 되어도 행복해요." 황보자안은 문득 아평의 깊은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이 물클했다. 심 황의 앞에서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못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 을 해준 연후에 손을 빼며 말했다. "소평, 나는 사실 생각해 보면 그대의 헌신적인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정 작 변변한 선물을 해준 것이 없구려. 소황에게는 용봉쌍지환 가운데의 용지 환을 주었고, 또한 소파에게는 봉지환을 주었고, 그러니 이제 그대에게 는……" 아평은 황보자안이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서 자신에게 주려고 하자 고개 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 그대는 그러지 마세요. 이미 저에게 이 숙녀검뿐만 아니라 보석이 나 황금, 그리고 은표들도 많이 주셨잖아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러한 선물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황에게 용지환을 선물했던 것은 애초에 어떤 정이 실려 있었던 것인데, 그대에게는 아직 그런 정표를 주지 못했던 것이오. 나는 여러 가지 다른 선물보다는 정표를 주고 싶은 것 이오. 이것은 소평 그대가 나의 부인이라는 정표요." --계속-- 번호:142/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4 길이:422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6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6장. 기물금사(奇物金蛇)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품속에서 바로 칠성보도를 꺼내들었다. "음, 이 칠성보도는 실로 내가 어려울 때에 환난을 같이하고 죽음에서 몇 번이나 나를 구해준 적이 있소. 바로 그러한 이 보도의 마음이야말로 그대 의 성정과 비슷한 것이니, 비록 하찮은 병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늘 품속에 넣고 다니도록 하오." 아평은 이 칠성보도가 그 날카로움이나 강인함이 오히려 군자검을 능가할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도에 박혀 있는 일곱 개의 보석들 은 천하의 희귀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들이고, 또한 그 가운데에는 천하의 어떤 절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실로 지극히 희귀한 보 물을 받게 되어 그만 눈물이 글썽거렸다. "제가…… 제가 이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대는 또 다시 저를 나무라시겠지 요? 저는 받겠어요. 설사 천하의 모든 보물은 받지 않더라도 이 정표는 반 드시 받아서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도록 하겠어요." 황보자안은 아평이 칠성보도를 받아들고 너무나도 기뻐서 눈물을 흘리고 있 는 것을 보고 절로 마음이 유쾌해졌다. 그는 실로 이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 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아평은 칠성보도를 아주 소중하게 품속에 잘 갈무리하더니 문득 황보자안을 향해 날아갈 듯이 대례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이제 그대의 정표를 받고 부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항상 그대의 신 변을 보호하고 절대로 불측한 마음을 품지 않겠어요. 비록 그대에게 이제 칠성보도가 없으나 제가 앞으로 그 칠성보도가 되도록 하겠어요." 황보자안은 아평의 말에 매우 깊은 진실성이 있는 것을 알고 두 손을 잡아 서 일으켰다. "그대의 마음이 이미 알고 있으니 우리 앞으로는 잘 살아 보도록 합시다." "예." 아평은 공손히 대답을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심황을 향해 절을 했 다. "언니, 앞으로는 큰언니로 받들어 모시겠어요. 이 동생이 다소 실수를 하고 미운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심황은 미소를 띠고 있다가 아평을 향해 마주 절을 하요 답례하며 말했다. "평동생, 그대는 아주 귀엽고 아름다운 동생이야. 나는 이미 그대를 매우 사랑하고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마. 우리 이제 함께 안랑(安郞)을 모시 게 되었는데, 서로가 조금씩 마음으로 이해하고 양보를 한다면 아주 행복하 게 잘 살 수가 있을 거야." "언니……" 아평은 그만 감정이 격해져서 와락 심황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 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월호의 중앙에 있는 섬에서 아침을 맞는 세 사람은 부근에서 하 나의 작은 배를 찾아내어 무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 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사히 헌원객점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점도 없었다. 그들은 우선 점원을 불러서 간단하게 아침시사를 한 다음에 의복을 갈아입 고, 특히 심황은 잠시 운기요상을 하여 내상을 치료한 다음에 모용릉파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가문이 있는 성수곡으로 떠나갔다. 비록 보물을 노리는 무림인들의 습격에 대한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나 소요각의 습격에 대한 위험성은 일단 제거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선뜻 떠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심황이 아쉬운 발길을 뒤로 하고 떠나간 이후에 황보자안과 아평은 간밤의 피로를 씻기 위해 함께 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이미 두 사람은 부부 지간이 되기로 언약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평은 황보자안을 나으리라는 칭호 대신에 안랑이라고 불렀고, 욕실에도 함께 들어가서 등을 밀어주게 되 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몸을 씻은 다음에 서로간의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사랑을 나누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욕실에서 나와서 서로가 크게 상기되고 두근거리는 마 음을 안고 침상 위로 올랐을 때 문득 밖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 다. "소공자님, 안에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 헌원객점의 주인인 여보중의 음성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불 속에서 아평의 입술을 탐하며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문득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소평, 방해자가 나타난 모양이오." 아평은 스스로 매우 몸이 뜨거워져 있었고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을 하 고 있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는데, 밖에 방해자가 나타나자 내심으로 안도의 감정과 허전함을 함께 느끼면서 얼른 발가벗은 몸을 일으켜서 황보 자안의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아평은 원래 하인이었기 때문에 남의 옷을 입혀 주고 자신의 옷을 입는 속 도는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성격이 차분하고 치밀하 며 매사를 완벽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여 금새 황보자안과 자신의 복장을 아 주 단정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깊숙히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안아준 다 음에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중은 밖의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의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고 또한 옷들이 모두 새것들인지라 자신의 실수를 금방 알게 되었다. 따 라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곤륜파의 사람들이 공자님께서 보이지 않는다고 성화입니다. 그렇지 않았 음 소인이 감히 두 분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황보자안은 자신들이 어젯밤에 문안인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출진자와 현황자가 의문을 갖는 것이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 마악 돌아와서 식사를 마친 참이라 잠시 후에 별채로 가서 인 사를 할 참이었습니다, 여아저씨." 여보중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쿠, 아닙니다. 두 분이 간밤에 바쁘게 움직이시다가 이제야 돌아오셨 는데 다시 쉬지도 못하시고 별채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도사들 이야 소인이 전갈을 보내어 공자님께서 무사하시다는 말만 하면 아무런 상 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실 곤륜파의 사람들은 황보자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여보중이 지금 한 말은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할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그의 얘기가 그럴 듯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서 쉬도록 할까요?" 여보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두 분께서 기왕에 나오셨으니 그저 소인이 가 지고 온 물건을 한 번만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보중은 보아하니 두 사람의 눈빛이 전보다도 더욱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 는 것이 관계가 많이 진전된 것 같아서 이번에는 굳이 두 분이라는 말을 썼 다. 아평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다소 붉어지고 눈빛이 기 쁨으로 빛났다. 황보자안은 이미 여보중의 품속이 왠지 두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에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여어저씨께서 주시려는 것이니 무슨 일보다도 우선해서 보아야지요. 헌데 대체 무슨 것인지 궁금하군요." 여보중은 즉시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보따리와 또한 그보다도 더욱 작은 물 건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인이 전번에 술기운에 잘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공자님께서 공력을 높일 수가 있는 영단이초를 구하고 계신다고 하기에…… 하하……" 황보자안은 일순 가볍게 놀랐다. "아, 그 일로 이렇게 손수 신경을 써주신 것이란 말입니까?" 기실 여보중은 그 날 황보자안과 술을 마신 다음날부터 영단이초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겨우 이제서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와 황보 자안을 뵙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보중은 그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저 소인의 작은 선물이오니 아가씨께서 드시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 니다." 말과 함께 그는 가장 작은 물건의 보자기를 풀더니 거기에 드러난 작고 아 름다운 붉은 장식의 함을 열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마치 장난감과도 같은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옥병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 옥병은 겉표면 에 은은한 푸른 광택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비록 희세의 물건은 아닐지라 도 평범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안에 들어 있을 물건은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평이 궁금해 하다가 옆에서 물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지요?" 여보중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옥병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만년옥장(萬年玉漿)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년옥장?) 아평은 일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린 듯 놀란 눈 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겨우 한 방울만 복용해도 금새 공력을 일갑자나 증진시킬 수가 있으며, 여러 가지 좋은 효능이 무궁무진하다는 바로 그…… 그 만년옥장 말인가요?" 여보중은 빙그레 미소하며 대답했다. "소인이 사방에 연락을 취해 보았더니 마침 그러한 것이 있길래 가지고 온 것입니다. 두 분이 오셨는데 마침 이러한 것이 나타난 것은 바로 두 분의 흥복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만년옥장. 전설에 의하면 한 알만 복용하면 한달 혹은 칠일 이내로 신서 이 될 수가 있다는 금단(金丹)의 재료가 된다고 하기도 하며, 일명 도가의 성보(聖寶)로서 모든 무림인들이 그 놀라운 효능 때문에 단 한 방울이라도 얻기를 소망하는 신비로운 영약이었다. 속설에 의하면 천하에서 가장 지순 한 명옥이 지하 심청서 일만년 동안이나 정기를 흡수하여 탄생시킨다고 하 지만 아직 그 생성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그야말로 전설에 서나 있을 법한 영약이지 현세에서 구경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가 있는 것이었다. 아평도 오래 전에 전설로서 얘기를 들었었지만 이제 그 기억이 희미한 상태 에서 느닷없이 현실로 보게 되자 일순 크게 놀라고 만 것이었다. 기실 여보중의 말은 마치 이 만년옥장을 거저 구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로 요 며칠 사이에 그가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만한 노력을 기울였 고 끝내는 이 만년옥장을 구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능 히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여보중의 손을 잡으면서 감격하여 말했다. "여아저씨, 우리가 이번에 이곳에 머물면서 그야말로 여아저씨를 심하게 고 생시키는군요. 저는 이처럼 수고해 주시는 여아저씨의 정성을 정말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여보중이 정성을 다해서 만년옥장을 구한 것은 원래 그와 같은 황보자안의 한 마디의 칭찬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여보중은 실로 최상의 고마워하는 말을 듣게 되자 내심은 크게 기뻐하였으나 이내 표정을 엄숙하게 고치며 말 했다. "저는 고작 몇 방울의 옥장을 구한 것이지만 기실 이러한 수고쯤이야 공자 님을 위해 마땅히 해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험험, 그리고 소인은 스스로 생 각해 보건대 아가씨께서 공력이 늘어나게 되면 자연 어떤 무공도 따라서 필 요하게 될 것 같아서 그저 몇 권의 비급들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말과 함께 여보중은 옆에 있는 보다 커다란 보따리를 풀어 헤쳤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 안에는 몇 권의 아주 낡아빠진 서책들이 들어 있었다. 아평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무공이 허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비급들을 보자 매우 흥분되어 물었다. "여아저씨, 정말로 제가 저기에 있는 무공을 배워도 괜찮나요?" 여보중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천하의 공자님의 배필이신 아가씨께서 그러한 비급들을 보시 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그 비급들은 남의 눈에 띄이 게 되면 귀찮을 것이니 보신 다음에는 깨끗이 소각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 다." 이 여보중은 실로 이 거대한 헌원객점의 주인이고 중원제일루의 신비로운 주인이면서도 가상하게도 아랫사람으로서 주인에 대한 예의를 시종 잃지 않 고 있었다. 아평은 그의 무공이 기실은 아주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여아저씨, 우리를 위해 이렇게 깊은 정성을 다 쏟아주시니 저는 실로 뭐라 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만일…… 만일 나중에 여아저 씨께서 무슨 어려운 일이 계신다면 그때는 필히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저 는 우선 모든 것을 떠나서 여아저씨를 도울 거예요." 여보중의 정성도 훌륭한 것이었지만 기실 아평의 말 역시 과분한 정도의 깊 은 사의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여보중은 내심 매우 감격하였지만 감히 대꾸할 수가 없어서 황보자안의 얼 굴을 가볍게 훔쳐보다가 즉시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그저 두 분의 행복을 바 랄 뿐이지요. 허허, 소인은 늘그막에 가슴만 뛰는군요. 그럼…… 그럼 소인 은 그만 물러갔겠습니다. 두 분은 쉬십시오." 여보중은 짐짓 크게 당황한 듯이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나 사 라져 버렸다. 황보자안은 담담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아평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소평, 그대에게 아주 좋은 일이 생겼군. 그렇지 않소?" 그런데 아평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명랑하고 기뻐하는 기색이었으나 지금은 마치 두 눈이 몽롱해진 듯 모호한 표정이었다. 황보자안이 묻자 그 녀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죠?" 황보자안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것이오?" 아평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저 여아저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선비같으신데 방금 전에 늘그막에 가 슴만 뛴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저분의 무공도 대단했어요." 이어 아평은 전에 장강을 건너기 전에 그가 진기를 발하여 그녀에게 절하지 못하게 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황보자안은 그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나도 들은 얘기인데 저 여아저씨의 나이는 보기보다도 많다고 하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 여아저씨가 장원을 찾아왔을 때에도 그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오. 그는 어찌된 셈인지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소." 아평이 눈빛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그것은 혹시 그가…… 그가 무공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이 아닐까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사실 나는 장원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천하의 기업들에 관해서 는 잘 알지 못하는 편이오. 할아버지께서 그들을 모두 고용하신 것이니 거 기에는 무슨 연유가 있겠지." 아평은 황보자안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하여 그를 골치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여보중이 가져왔던 두 ㄱ지의 물건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우리 이제 그만 들어가요." 말을 하면서 은근히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것은 아마도 조금 전의 그 일을 생 각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이 석옥의 내부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녀 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아평의 몸 은 작고 가냘퍼서 그야말로 새처럼 가벼웠다. 황보자안에게는 이미 일갑자 의 공력이 있기 때문에 설사 일천 근의 무게라도 들어올릴 수가 있는 판인 데, 이런 오십 근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아평의 몸을 들고 있는 것은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녀의 몸을 안고 있는 두 팔 외에 얼굴은 고개를 숙여서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매어져 있는 그녀의 옷고름을 풀고 가슴을 애무하는 것이었는데, 아평은 일순 매우 간지럽고 흥분하여 소름이 돋았으나 일부러 저항을 하려 고 하지는 않았다. 그그긍…… 가벼운 소리와 함께 침실의 침상이 옆으로 빙그르르 돌아가며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지하계단이 나타나자 황보자안은 침상이 다시 돌아와서 입구를 막기 전에 이미 그 지하계단으로 내려가 황금빛 아름다운 문 앞에 섰다. "아음……" 황보자안이 가슴의 융기된 젖가슴의 중심을 침범했기 때문에 아평은 일순 심한 전율을 느끼고 가벼운 신음소리를 발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침실의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고 침상 위에 함께 뒹 굴게 되자 아평은 급히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안랑, 잠깐만요! 그가…… 그가 가져다준 것들이 망가지겠어요." 황보자안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띠며 그녀의 몸을 자신의 무릎 위 에 앉힌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럼 여아저씨가 가져온 물건들을 한 번 보기로 할까?" 아평은 이 황보자안이 시종 이렇게 잘 대해주자 그야말로 행복감에 넘쳐서 마음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으나 지금은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조심스럽게 가지고 있던 두 가지의 물건들을 자신의 무릎 위에 펼쳐 보였다. 우선 옥병의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마치 꿀처럼 끈끈한 만년옥장이 황금 빛의 빛깔을 띤 채 들어 있었는데, 들어 있는 양이 적어도 다섯 방울은 될 것 같았다. 실내에 기이하고도 심신을 쾌적하게 하는 맑은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아 평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너무 많아요. 그러니 우리 이것을 똑같이 나누어 복용하도록 해요!" 기실 여보중은 아평을 위해서 구한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함께 복용 해도 충분할 만큼의 많은 양을 구했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들은 원래 당신을 위해서 준비된 것인데 내가 복용할 수가 있겠소?" 아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저는 절대로 이 많은 양을 혼자서 복용하지는 않겠어요. 당신 은…… 당신은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마세요." 황보자안은 이에 웃으며 말했ㄷ. "그렇다면 나는 이미 일갑자의 공력이 있는 상태이니 내가 두 방울을 복용 하고 그대가 남은 세 방울을 복용하면 어떻겠소? 우리는 공력이 똑같아질 것이니, 그게 좋지 않겠소?" 아평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황보자안은 그녀를 보며 문득 물었다. "소평, 그대는 혹시 이 영약을 흡수할 수 있는 내공심법을 배운 적이 있 소?" 그는 그가 전에 만년동자삼을 그냥 복용했다가 많은 공력을 놓쳤던 일을 상 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공력으로 화하지 않은 일부의 약력은 그의 몸 에 흡수되어 좋은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사께서 제게 검법을 전수하실 때에 내공심법도 가르쳐 주셨어요. 다만 제가 그것을 올바르게 배웠는가가 의문인지만 말이예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당신은 매우 총명하니 틀림없이 실수가 없었을 것이오. 자, 그럼 마침 나 도 내공심법을 배운 바가 있으니 함께 약을 복용하도록 합시다!" 밤이 길며 꿈이 많다면 얘기가 있었다. 원래 이와 같은 희세영약을 옆에 두 고 시간을 끌게 되면 오히려 그것으로 화를 자초할 수가 있으므로 황보자안 은 두 사람이 보다 빨리 영약을 흡수하고 난 뒤에 다른 일을 처리하자는 말 이었다. 아평은 이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찬성을 하고 옥병을 들어 먼저 황보자안의 손에 올려놓았다. 황보자안은 이에 즉시 두 방울의 약을 복용하고 그것을 아평에게 건네주어 남은 세 방울의 약을 모두 복용하게 했다. 아평은 옥병에 남아 있는 영약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빨아 먹은 다음에 즉시 한쪽의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들어가 기 시작했다. 원래 아평은 거의 초식에 의존하여 검법을 펼쳐왔을 뿐, 내공이 매우 약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삼갑자에 해당되는 내공을 얻게 되면 그것을 조절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만일 아평이 전수받은 내공심법이 훌륭한 것이고 또한 그녀가 그것을 익숙하게 연성하고 있다면, 그녀는 능히 스스로 대공을 성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황보자안은 아평이 쉽게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우선 침실의 방문 을 안에서 단단히 자금 다음에 단저의 진기가 요동하기 시작함을 느끼고 스 스로 다른 한쪽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역시 운기행공에 들어가기 시 작했다. 지금 은 이미 일갑자를 상회하는 공력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그가 복용한 영약의 양도 두 방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황보자안에게는 이번의 운기 행공은 크게 부담이 없었다. 미리 예상을 하기는 했으나 이 만년옥장의 약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단전 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진기가 황보자안이 마악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시작하자 마치 노도와 같은 기세로 일어나서 그의 길을 이미 터놓은 임독양 맥을 따라서 빠르게 치솟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옥장 의 액체는 바로 어떤 공력의 결정이었다고나 할까? 황보자안은 이미 만년동자삼의 약력을 진기로 흡수한 경험이 있지만 이처럼 갑작스러운 강한 기운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순 다소 당황 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운공하고 있는 내공심법은 천하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기 초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순양기공이었기 때문에 그가 매우 익숙한 상 태였고 또한 어떤 무리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방 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무아지경에 들어간 다음에 그 거대 하게 점차로 늘어나는 진기의 흐름을 빠르면 빠른 대로, 혹은 거대하면 거 대한 대로 마음을 느슨하게 하여 임독 양맥으로 흐르게 했다. 이 진기는 처음에는 강했지만 나중에는 더욱더 강하게 일어나서 마치 임맥 과 독맥에 가득차게 흘러서 일시에 그 경맥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나가 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무아지경 속에서도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만일 황보자안의 심성이 강하게 단련되어 어떠한 상태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마음이 순간적으로 움직여서 진기의 흐름 이 불순해졌을 것이고, 이내 그는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이미 극도의 공포감 속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 웠기 때문에 고통은 고통으로 그냥 놔두고 마음을 더욱 느슨하게 만들면서 진기의 흐름을 가능하면 마음과 일치시켜서 부드럽게 만들려고 의식을 걸었 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진기는 점차로 진하게 응축되고 부피가 가늘어져서 끈끈 한 유액처럼 그의 의사에 따라서 서서히 경맥을 따라서 돌았다. 이로써 그 에게 닥쳐온 일단의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영약의 약효가 계속 발휘되면서 진기의 양은 증가되었지만 점차로 그 기운 이 응축되어 부피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고통은 여전했지만 경맥이 손상되지 않았고 진기는 더욱 그의 마음에 순종하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이로써 다소의 마음을 놓았고 삼갑자의 진기라는 것이 이토록 거대한 것인지는 몰랐다가 이제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약효가 빨리 다하기를 기다렸다. 과연 다행히도 옥장의 약력은 빨리 발휘되었던 만큼 잠 시 후에는 모조리 흡수되어 더 이상 진기가 늘어나는 일이 없어졌고 고통도 줄어들었으며, 황보자안은 비로소 평안한 마음 속에서 무아지경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순양기공의 구결대로 착실하고 엄격하게 따르면서 그 거대하고 엄청난 양의 진기를 보다 응축되도록 임독양맥으로 계속해서 돌렸다. 그 거대한 양 의 진기를 단전에 모두 가두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그의 의지에 길이 들어 있는 진기는 마치 순양 양처럼 부드럽게 끊임없이 경맥을 순환하여 보다 끈끈해지고 부드러워졌으며 가느 다랗게 변해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황보자안은 이제는 그 진기를 단전에 가두어도 될 것 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몸을 일으켜서 아평의 운공을 도와주기 위해 진기를 단전으로 유입시켰다. 그런데 순간 다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그의 단전에 진기가 가득 차게 되자 전신에 기묘한 전율같은 떨림이 일어나면서 심황 황홀감이 빛살 처럼 서서히 위로 치솟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러한 현상은 순양기공의 구결 속에 없던 현상이었으므로 급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식을 집중하여 단전을 응시했다. 그러자 단전에 모인 진기들은 순간 하나로 융합되어 황금빛의 찬란한 광채를 발하더니 느닷없이 스스로 단전을 벗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황보자안은 이와 같은 괴현상에 대해서 내심 크게 경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금빛의 진기는 마치 한 마리의 금빛 뱀처럼 화하여 천천히 임독 양맥 자 체를 벗어나서 슬금슬금 나머지 기경팔맥(奇經八脈) 중의 칠맥뿐만 아니라 뒤이어 십이정경(十二正經)의 경맥에까지 빠짐없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었다. 황보자안은 이것이 혹시 주화입마의 조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아무 리 그가 의념을 걸어도 이 괴이한 금빛 뱀같은 진기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 문에 그저 체념을 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 괴이한 것은 이 금빛 진기가 지나는 곳은 어떤 피해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짙은 쾌감과 함께 더욱 심신이 쾌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었다. 원래 그의 순양기공은 오직 임독양맥으로 진기를 순환시켜서 진기를 매우 유순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 나머지 다른 수많은 경맥들은 아직 길이 생기지 않은 것도 있었고, 길이 생겨 있었더라도 막혀 버렸거나, 아니 면 아예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가 만일 나중에 그러 한 경맥들을 일일이 트이게 하려고 해도 상당한 고련이 요구되는 상태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실로 믿기지 않게 이 금빛 진기는 아주 이상하여 느릿하게 움직이면 서도 여유있게 모든 경맥들을 완전하게 관통시키고 깨끗이 청소해 줄 뿐만 아니라 기운이 부족한 부분은 강화시키고 전신을 모두 황금빛의 진기로 가 득채워 가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어쩔 수가 없는 상태에서 다소 포기를 하고 있었지만 내심 유심 히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의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 중 하 나는 이 금빛 진기가 마치 스스로 영성을 지닌 살아 있는 물체와도 같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진기가 경맥을 따라 돌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미 경맥 속에 숨어 있던 어떤 기운들이 그 진기의 유입을 인도하고 있다 는 사실이었다. 황보자안은 또한 그 경맥에 숨어 있던 기운들이 바로 전에 그가 만년동자삼을 복용하고 아직 흡수하지 않은 약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도로 긴장된 무아지경 속에서 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금빛 뱀과도 같은 진기는 그의 경맥 속에 숨어 있던 모든 기 운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을 모조리 완전하게 관 통시킨 다음에 역시 느릿한 속도로 단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황보자안은 전신의 경맥이 사방으로 신원하게 트여 있는 상태였는 데, 갑자기 극렬한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황홀한 쾌감의 크기는 진기 가 단전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해졌는데, 이윽고 그것이 완전히 단전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단전에서 눈부신 황금빛 광채가 일어나더니 그의 심 안(心眼)을 뒤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 황보자안은 극도의 황홀감 속에서 완전한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 물론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황금빛의 광채나 뱀과도 같은 진기의 모습은 오직 그의 심안에 비춰지는 것으로, 결코 실제적인 빛과 모양은 아니었으 나,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황보자안은 서서히 의식을 되찾으면서 전신의 느낌 이 그야말로 더 이상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쾌적하고 상쾌할 뿐만 아니 라 부드럽고 강한 힘으로 충만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먼저 심안으로 자신의 단전을 바라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이때는 아까 보고 느꼈었던 그 괴이한 금빛의 진기는 단전에서 녹아버렸는지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다 만 한 가지 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전이 크게 확장되어 황금빛의 노을과 도 같은 빛이 담담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 황보자안은 일시 어리둥절해졌으나, 즉시 진기를 움직이니 단전에서 거대한 진기가 마치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손 안의 물건과도 같아서 이제 어떠한 위기도 끝나고 운기행공도 끝이 났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일어난 거대한 진기를 단전으로 모이게 했다. 그러자 진기 가 아주 부드럽게 움직여서 차분하게 단전에 가라앉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 은 반쯤은 편안하고 반쯤은 신기한 마음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계속-- 번호:143/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4 길이:308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7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7장. 환골탈태(換骨奪胎) "……!" 마악 눈을 뜬 황보자안은 문득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어서 고개를 갸웃거리 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침실의 천정이 낮아져서 바로 머리 끝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 동안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황보자안은 그제서야 아평이 자신과 함께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 기하고는 급히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더욱 괴이하게도 주변 에는 비단 아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침실의 가구들이나 심지어 침대까지 사 라져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어? 모두…… 모두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이지? 이것…… 이것은 정말 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로구나!) 황보자안은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의 체내에서 실로 이상하고도 야릇한 광경 들을 목격했었기 때무네 다시 한 번 심장이 덜컥 내려앉도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황보자안은 순간 이제까지 놀란 것보다도 더욱 크게 놀라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느닷없이 그의 아래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었다. "안랑, 안랑! 그대는 괜찮나요? 어서 말씀 좀 해 보세요!" "……!" 황보자안은 일시 혼비백산을 하도록 크게 놀라서 즉시 아래로 시선을 던지 다가 그만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황보자안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 여 손을 내밀어서 자신의 발밑을 만져 보았으나 분명히 그것은 허공이었다. 그렇다! 지금 황보자안의 몸은 놀랍게도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천정이 내려와 있다고 생각한 것이나, 아평 등의 모든 주변 물체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 두 그가 허공에 떠 있어서 아래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에 불과했 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이렇게 느닷없이 허공에 떠올라 있는 것일까? 그리고 대체 어떻게 인간의 몸이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란 말인가? 황보자안은 일시 너무나도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져서 크게 고민을 하게 되었 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그의 몸은 천천히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드디 어는 그가 최초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던 자리에 부드럽게 내 려앉았다. 황보자안은 결코 이와 같은 신법을 연성한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은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자신의 몸이 바닥에 내려앉은 것을 알고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 서서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평을 향해 물었다. "소평, 이……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 아평은 오히려 더욱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나는 모르겠어요." 황보자안이 문득 아평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미 그녀의 신색은 맑고 부드럽게 피어나고 있었고, 과거의 허약했던 눈빛은 지금은 조용한 가운데 맑고 예리한 광채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어느새 그녀의 내공 수 위가 어느새 삼갑자의 경지에 이르러 진기가 부드럽게 갈무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곤륜파의 최고수들인 출진자와 현황자 등의 눈빛이 실로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보자안은 놀라고 기뻐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은 성공했구려!" 아평은 이에 얼굴 가득 수줍은 듯한 미소를 피어올렸다. 대공을 성취한 지 금 그녀의 얼굴은 과거에는 다소 부석부석한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얼굴 의 피부가 해맑고 투명한 윤기가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피부 까지 백옥같이 하얗게 변하여 그야말로 미모가 더욱 뛰어나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대의…… 그대의 덕분이예요." 가느다랗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까지 더욱 맑고 아름다워진 듯하자 황보자안 은 절로 기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손을 내밀어서 와락 그녀를 껴안고 말았 다. "잘된 일이야, 잘된 일이야!" 그런데 황보자안은 정신없이 기뻐하면서 이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 려고 하다가 문득 자신의 손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보다가 저으기 의아해졌다. 자신의 한쪽 손뿐만 아니라 다른 쪽의 손에도 역시 그와 같은 무슨 꺼풀깥은 것이 잔뜩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 닌가! "어? 이게 뭐지?" 놀라는 황보자안을 향해 아평은 문득 한쪽으로 달려가서 구리거울을 가져다 가 그에게 보여 주었다. "한번 보세요." 황보자안은 그 끈끈한 거미줄같은 것이 자신의 손바닥과 손등뿐만 아니라 팔의 안쪽에까지 붙어 있는 것을 알고 손으로 떼어내려다가 문득 거울을 받 아들고 얼굴을 보고는 입이 딱 벌었다. (아니, 내 얼굴이 갑자기 왜 이렇게 험하게 망가졌지?) 그렇다. 느닷없이 그의 얼굴에 부스럼이 심하게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에 지저분한 것들이 잔뜩 묻어 있어서 그야말로 더럽기 짝이 없는 꼴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놀라서 아평에게 물었다. "소평,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 매우 심각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는 황보자안을 향해 아 평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손을 부지 런히 놀려서 황보자안의 전신의 옷을 모조리 벗겨 버리더니, 어이없게도 이 어 그를 욕실의 안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닌가! "씻으세요." 황보자안은 웃으면서 말하는 아평의 얼굴을 보고 일이 심상치는 않은 것이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멍청히 그녀의 손놀림에 당하게 되었다. 아평은 본래 여러번이나 그의 옷을 입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옷을 벗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게다가 욕실의 안에는 이미 맑은 물이 가득 들 어 있어서 황보자안은 자연 욕조 속에 들어가서 몸을 씻게 되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황보자안은 물 속에서 자신의 몸을 정신없이 씻으면서도 계속 그와 같은 의 문 속에서 골머리를 썩히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아평이 어느새 알몸이 되어서는 뒤따라 구리거울을 들 고 욕실의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무심코 그와 같은 광경을 보다가 내심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거 울이라면 밖에서 보면 되는 것이지 어째서 욕실 안으로 거울을 들고 들어오 는 것일까? 황보자안은 이미 운기행공 도중에 자신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는 괴이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따라서 뒤이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크게 머리가 혼란해지게 되어 있었다. 아평은 우선 구리거울을 한쪽에 내려놓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한 차례 웃으 면서 그의앞을 다가와서 말했다. "제가 깨끗하게 씻겨 드릴 테니 가만히 계세요." 황보자안은 그 말을 듣고서야 이제까지 무의식적으로 몸에 물을 끼얹던 일 을 중지하고 고개를 숙인 채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숙인 황보자안은 다시 욕조의 물을 보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 욕조의 물은 그의 선명한 기억에도 매우 깨끗한 것이었는데, 이 제 보니 아주 심하게 더렵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이 무수하게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내 머리가 다 빠져 버렸단 말인가?) 황보자안이 놀라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으나 역시 그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빠젼오는 것은 분명했다. 그때 아평이 반쯤 웃으며 말했다. "안랑, 가만히 계세요." 황보자안은 이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머리를 감기고 있는 아 평에게 심각한 어조로 질문을 했다. "소평, 대체……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아평은 잠시 손을 멈칫하고 생각하는 듯하더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아마도 당신께서는 몸도 건강하시고 그런 것을 보니 이는 필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신 것 같아요." (환골탈태?) 황보자안은 일순 마음으로 크게 놀라서 절로 운개행공 도중에 보았던 그런 이상야릇한 광경을 떠올리게 되었고, 즉시 단전을 의식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황보자안의 신형이 느닷없이 다시 허공으로 붕하니 떠올라 서 머리가 가볍게 천정을 들이받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자신의 그 금빛 뱀같은 진기를 생각하다가 느닷없는 상황을 맞 이하게 되자 금새 크게 혼비백산하여 양손과 양발을 마구 휘저으며 소리쳤 다. "앗, 앗! 이것, 이것! 이럴 수가! 빨리 나를 좀 내려 주시오! 떨어져서 죽 겠소!" 아평은 아래에서 역시 놀란 표정으로 이와 같은 느닷없는 변화를 바라보았 는데, 일순 그가 발가벗은 알몸으로 사지를 마구 휘저으며 소리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황보자안의 그와 같은 광경은 실 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정작 아평이 손을 가리고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마 음이 다급하게 되었다. "소평, 소평! 나를 좀 살려 주시오! 그렇게 웃고 있지만 말고 어서! 나는 사실 무서워요! 무섭단 말이오!" 아평은 황보자안이 그렇게 소리치는 것을 보자 감히 더 이상 웃을 수가 없 다고 생각하고는 정색을 하고 생각한 뒤에 말했다. "안랑, 당신은 아까 혼자서도 잘 내려오지 않았나요? 당신이 만일 방법을 모른다면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그 천정을 조금 밀어봐요." 황보자안은 그 소리에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 듯하군." 헌데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갑자기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황보자안의 신형 이 번쩍하고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욕조가 부서지며 그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겨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마!) 아평은 그만 깜짝 놀라서 무의식중에 날아오는 물벼락을 피하며 황보자안에 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다 음 순간 아평은 그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황보자안 은 이 순간 완전히 부서져서 물이 비워져 버린 텅빈 욕조 속에 비스듬히 누 워 있었는데, 계속 나직한 음성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골탈태…… 환골탈태라고?" 아평은 일순 멍하니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를 깨 닫고 그만 까르르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그렇다! 황보자안은 조금 전에 아평의 말대로 천정을 밀었는데, 사실 너무 힘을 주었던 나머지 몸이 벼락같이 아래로 떨어져서 욕조를 박살내고 말았 던 것이었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의 몸이 전혀 다치지 않고 멀쩡하다는 사실이었다. 황보자안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평이 까르르 소리내어 웃는 바람에 그제서야 문득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니, 외 그렇게 웃는 것이오?" 아평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겨우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예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제가 씻겨드릴 테니. 당신은 씻 지 않으실 건가요?" 원래 이 욕실은 다소 특수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지하수를 이용하고 있었는 데, 욕조가 있는 곳과 반대쪽에는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가득히 흐르고 있 는 상태였다. 황보자안은 비록 스스로 욕조를 박살내게 되었지만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 가 없는 상태였다. "그럴까?" 그가 다소 멍청한 표정으로 어기적거리며 다가오자 아평은 우선 그의 얼굴 의 물기를 씻어준 다음에 구리거울을 들어서 그에게 비춰주었다. 황보자안은 무심코 거울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안에 마치 담담한 금빛이 어 리는 아름다운 관옥으로 조각한 듯한 절세준미한 청년이 있는 것을 보고 놀 라 소리쳤다. "아니, 이 사람은 누구요?" 아평은 즉시 허리를 굽혀서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대답했다. "바로 당신, 안랑이세요." (……?) 황보자안은 일순 뒷머리를 크게 강타당한 듯이 멍하니 생각하다가 문득 자 신의 얼굴을 만져보고, 그리고 주위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때조각들을 살펴 본 연후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그랬었군. 갑자기 나의 내공이 높아지고 환골탈태를 겪었기 때문에 내 몸 이 그토록 편안하고 또한 허공으로 떠올랐던 것이었군." 그렇다! 황보자안이 운기행공의 마지막 순간에 무아지경에 들어가면서 그의 체내에 남아 있던 두 가지의 희세영약의 기운이 그의 몸을 환골탈태시켜 놓 았던 것이었으므로, 그의 골격은 아주 이상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그의 피 부나 머리카락이 일순지간에 많이 벗겨지고 빠져서 그렇게 더럽게 보였던 것이었다. 아평이 아까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갑자기 욕실의 안으로 밀어넣었으며 이 어 구리거울을 가지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직접 보여 주기 위 해서였던 것이다. "이제야 아셨나요?" 아평이 흐르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차근차근 몸을 씻겨주자 황보자안은 고 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음, 이제야 알겠소." (아!) 아평은 다음 순간 황보자안의 몸을 씻기면서 그의 몸이 그야말로 매미가 껍 질을 벗듯이 환골탈태하여 더할 나위 없이 피부가 곱고 아름다워진 것을 보 고 내심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평은 실로 남자의 몸이 이렇게 까지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사실에 다소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의 몸 역시 더욱 아름다워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내심 크게 행복해 했다. 그녀는 부지런히 황보자안의 머리를 감기우고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 다음에 자신도 손수 물을 떠서 목욕을 했다. 황보자안의 몸은 환골탈태를 했으니 말할 것도 없는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 운 남자의 몸이었지만, 그녀의 몸 역시 목욕을 하고 나자 백옥이 더욱 빛을 발하는 듯이 아름답고 눈부셨다. 황보자안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고 나서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평을 바라보며 미소를 하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으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소. 나는 대체 어째서 환골탈태를 하게 된 것이며, 또한 그렇게 공력이 높아졌을까? 그대도 아까 공중에 올라 가 있었소?" 아평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환골탈태도 하지 않았고, 또한 공중에서 깨어나지도 않았 어요. 저는 선사께서 가르쳐 주신 내공요결에 의해서 비교적 무사히 내공을 갈무리하고 몸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바라보니 당신의 몸에서 갑자기 금빛 이 번쩍 일어나는 거예요." 황보자안은 순간 아, 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내 몸에서 그런 빛이 일어나기는 했었소?"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혹시 당신께서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 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당신의 몸이 금빛에 은은하게 휩싸인 채로 공 중으로 둥둥 떠올라 가는 거예요. 저는…… 저는 그것을 보고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평은 지금도 매우 가슴이 뛴다는 듯이 젖가슴이 앙증맞게 드러난 가슴을 끌어안고는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황보자안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소?" 아평은 대답했다. "그래서 놀라면서도 감히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에 당신의 몸에서 금빛이 사라지더니 드디어 당신이 눈을 뜨신 거예요. 그 리고 이상하게 사방을 둘러보며 놀라와 했기 때문에 제가 소리쳐 불렀던 거 예요." 황보자안은 그 이후의 일들은 자신이 직접 겪었기 때문에 충분히 연결하여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 생각되는 것은 자신이 마음으로 느꼈 던 그 황금빛의 광채가 겉으로도 얼마간은 나타났었다는 것이고, 알 수 없 는 것은 어째서 그와 같은 변화를 자신만이 겪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오장을 세 방울 복용한 것은 그가 아니라 아평이었는데, 아평은 오히려 아 주 평범하게 연공에 성공할 수가 있었는데, 겨우 두 방울을 복용한 그 자신 은 어째서 그토록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황보자안은 물론 운기를 해보아 자신의 몸이 나빠지지 않고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고 불 안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문득 심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보다 시원하게 모든 얘기를 해주었을 텐데 ……) 그러나 지금 바란다고 없는 그녀가 금방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한숨을 내쉬며 우선 아평과 함께 침실로 돌아와서 새옷으로 갈 아입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했다. 이 석옥에는 이들을 위해서 실로 많은 옷들이 고급의 새옷으로 준비되어 있 었기 때문에 그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은 조금도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자 마치 눈부신 신룡과 봉황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이 아름다웠다. 여늬 때 같았으면 황보자안은 시간이 나자마자 아평의 몸을 탐하기 위해 정 신이 없었겠지만 조금 전에 실로 혼란스러운 일을 당해서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다시 그 금빛 뱀과도 같은 진기를 생각하여 공중으로 떠오르 는 일이 없도록 매우 주심을 하면서 침상 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단지 아평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도 눈길을 쉬지 않고 돌려서 마침내 여보중이 주었던 또 하나의 물건인 비급 보따리를 풀어보게 되었는 데, 그녀는 그것들을 뒤적이느라 정신이 없어졌고, 이 침실의 내부는 잠시 기이한 침묵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보자안은 문득 배가 고파 오는 것을 느끼고 아 마 시간이 벌써 저녁때가 가까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평과ㅏ 식사를 하러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악 그녀에게 입을 열려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평이 뭔 가 비급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남녀의 그림이 나 체가 되어서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것이 아닌가! (……?) 황보자안은 순간 아평이 혹시 어떤 음서(淫書)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에 다소 어이없고 흥분된 마음으로 그녀를 놀려주기 위해 천천히 그 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하여 마악 손을 내밀어 아평의 손에 들려 있는 책자를 빼앗아 들려고 하는 순간에 느닷없이 아평이 가볍게 옆으로 몸을 피 하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안랑, 안랑! 참으로 이상해요." 황보자안은 자신이 조금 전에 거의 기척을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녀가 알고 기이하게 몸을 피한 것을 보고 내심 그녀의 무공이 갑자기 늘 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생각해 보고는 내심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 책이 이상하다는 말이오? 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황보자안은 아까 환골탈태의 일로 인해 정신이 없었으나 이제 그와 같이 남 녀의 나체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자를 보게 되자 다시 음욕이 발동하여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다음 순간 아평은 저만큼이나 벗어나서 얼른 그 책자를 뒤로 감춘 뒤에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예요. 정말로 이상해요." 황보자안은 자신의 손이 연거푸 두 번이나 헛탕을 치게 되자 내심 놀랍기도 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멍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봅시다. 내가 어디가 이상한지 한 번 볼 테니." 그런데 아평은 고개를 내저으며 책자를 들지 않은 손으로 다른 쪽을 가리켰 다. "아니예요. 제가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저기에 있는 책자들을 가리키 는 것이예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바로 여보중이 건네준 모든 비급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 을 보고 웃으며 대꾸했다.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말이오?" 아평은 이에 황보자안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 다. 비급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가까이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원래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아평의 몸이 거의 가까 워졌다고 생각된 순간에 그는 그야말로 번개같이 진기를 일으키며 그녀의 몸을 향해 돌진했다. --계속-- 번호:144/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4 길이:30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8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8장. 부부봉황대법(夫婦鳳凰大法) 느닷없이 아평이 부끄러워하며 몸을 피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황보자안은 내 심 오기가 일어서 이번에는 필히 그녀를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황보자안이 체내의 진기까지 일으켜서 몸을 날린 회심의 일격이었 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다시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당 히 빠르게 몸을 날려 덮쳐 갔는데도 아평은 일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즉시 다가오던 몸을 돌리면서 흡사 환상처럼 석 자나 옆으로 비켜서 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설마하니 그녀가 그토록 빠르게 몸을 피할 수가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그녀를 잡으려던 양손은 허공을 헤집게 되었고 다시 허탕을 치게 되 었다. (소평의 무공은 정말로 갑자기 높아졌구나!) 황보자안은 내심 확실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황보자안은 갑자기 전면의 벽이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고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있는 대로 부릅떴다. 쾅! 그렇다. 황보자안은 유감스럽게도 이 순간에 또다시 자신의 공력이 전과 같 지 않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깜빡 잊고서 진 기를 일으켰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잘 되지 않아서 시작은 다소 느린 감 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나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황보자안의 능력으로는 지금 그러한 움직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 었기 때문에 그가 일순간에 석벽에 강하게 충돌하고 만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황보자안은 한 순간에 너무나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부딪쳤기 때문에 한 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치고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실로 만일 황보자안의 몸이 환골탈태를 하고 공력이 깊어져서 스스로의 반 탄력으로 충격의 강도를 완화시키지 않았다면 황보자안의 몸은 결코 무사할 수가 없었을 것이었고, 또한 이 지하실의 벽이 돌로 만들어진 석벽이 아니 었다면 이 침실의 벽 역시 무사히지 못했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한동안 바닥에 형편없이 나동그라져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 속 에서 금방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그는 한 순간 다시 흠칫하여 자신의 몸에 관한 생각을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어째서 이렇게 심하게 부딪쳤는데도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 일까?) 전설에 의하면 사람의 몸이 완전한 공력으로 가득차서 마침내는 도검조차 침범할 수가 없는 금강불괴라는 경지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황보자 안의 경지가 그러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며, 다만 지금 그의 상태는 호신강 기(護身 氣)가 저절로 발생하는 경지였다. 황보자안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웬만한 충격에도 상처를 받지 않고 있는 것이었는데, 그 자신은 그것이 어 찌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때 아평은 설마하니 자신이 그의 달려오는 것을 피한 것이 이와 같은 끔 찍한 결과를 낳을 줄을 몰랐다가 돌연한 변괴를 보고는 금새 두 눈에 눈물 이 글썽글썽해져서 빠르게 다가와서 황보자안의 몸을 안아들었다. "안랑, 안랑! 괜찮으세요? 저는 다만 부끄러워서 피했을 뿐이었는데, 이렇 게 될 줄은…… 정말…… 정말이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결코 피하지 않 았을 거예요. 안랑, 괜찮으세요?" 어느새 아평의 두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가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즉시 다시 정신 이 맑아져서 웃으며 그녀의 몸을 껴안고 말했다. "아니, 왜 그렇게 우는 거지? 내 몸은 괜찮은데?" 아평은 황보자안의 말을 듣고는 즉시 눈물을 그치며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 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심하게 부딪쳤는데도 괜찮은가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이어 황보자안은 이제야 제세상을 만난 듯이 마음껏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 게 시작했다. 아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전신을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정말로 그의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을 알고는 그제야 안심을 하며 그가 자신의 몸 을 만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가 자신의 몸을 가장 잘 만 질 수 있도록 부드럽게 무릎 위에 안아주며 그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해 주었다.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이예요. 저는 당신의 손길이 싫어서 피한 것이 아니라 다만 조금 부끄러워서 그랬을 뿐이예요." 황보자안은 젖가슴과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더듬다가 문득 그녀의 말을 듣 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소평, 당신의 무공은 정말로 갑자기 크게 늘어났더군. 그런데 참, 아까 들 고 있던 그 이상한 책자는 어디로 갔지?" 아평은 그가 그 야릇한 책자에 대해서 물어오는 것을 보고 이제 더 이상 숨 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뒤에서 책자를 집어서 그의 손에 넘겨 주었다. "이것…… 이것은 사실 부끄러운 것이예요. 하지만 한 번 내용을 읽어보니 도움이 되는 것이 있는 것 같아서……" 황보자안이 책자를 받아들고 제목을 보니 겉표지에 부부봉황대법(夫婦鳳凰 大法)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부봉황대법?) 황보자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첫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아평은 더욱 붉어진 얼굴로 그의 귓전에 속삭이듯이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알고보니 부부간의 사랑에 대해서 적혀 있는 것이었어요. 그것 을 읽으면 진기가 소모되지 않고 오히려 진기가 늘어나고 몸도 마음도 편해 진다고 했어요. 저는…… 저는 그것이 매우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평의 말은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책자의 거의 모든 장마다 남녀의 벌거 벗은 모습이 적나라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정사(情事)의 광 경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은 이것은 무공 비급이었다. 낯을 뜨겁게 만드는 그림들의 옆에는 그야말로 깨알같은 난해한 구결들이 가득 적혀 있 었고,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딘 사람의 모습에는 혈도가 표시되어 진기의 운 행까지 나타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처음에는 마음이 매우 뜨거워지고 아랫배가 뻐근해지는 것이 금 방이라도 함께 있는 아평의 몸을 탐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었으나, 아 평도 몸이 뜨거워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낯을 붉히고 읽고 있었기 때문에 내 용을 읽어 내려가다가 이 부부봉황대법을 연성하고 그대로 정사에 임하게 되면 비단 두 사람의 즐거움도 커질 뿐만 아니라 과도한 정사로 인해 소모 되는 진기의 유출을 막고 음양화합과 조화에 의해서 오히려 장수하고 무공 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는 말에 점차로 심취하게 되었다. 아마도 여보중은 두 사람이 아직 함께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 이 아주 훌륭한 방중술(房中術)의 책자를 비급 속에 끼워 놓았던 모양 이었다. 황보자안도 강호에 이와 비슷한 방중술의 책자들이 유전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이것은 물론 여보중이 생각을 하고 전해준 것인 만큼 내 용이 확실히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아평은 다른 비급들을 읽고 있다가 우연히 이 책자를 보게 되었고, 그리하 여 호기심과 함께 얼마간 부끄러움을 느끼다가 절로 시선이 가게 되었는데,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일이라서 자연 내용을 읽어보게 되었던 것이었다. 기실 강호에서나 엄격한 유교의 경전에서 이러한 남녀 사이의 방사에 관해 서 가르쳐 주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이 본능적인 관계 를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에 반해 이러한 서책을 읽고 연마한 사람은 가히 방중술의 달인이 될 수가 있다고 할 것이었다. 일반의 음서와는 달리 이 부부봉황대법의 구결은 매우 길고 복잡하며 난해 하여 한 번 터득하면 좋을 것이지만 쉽사리 터득하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황보자안은 얼마쯤 읽어 내라가다가 문득 몸이 뜨거워지고 눈빛에 열기를 담고 있는 아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이 책자를 배우고 익히도록 할까?" 아평은 그가 말하는 이 책자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즉시 더욱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오직 그대가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하하……" 황보자안은 그처럼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요염한 얼굴을 보게 되자 그만 부 부봉황대법의 책자마저 한쪽에 내려놓고 그녀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이미 그의 두 눈에는 욕정이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황보자안이 다소 거칠 게 옷을 벗겼지만 아평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움직여서 그가 행동하기에 편하도록 해주었다. 황보자안은 아평의 몸을 완전히 발가벗겨 놓자 이어 자신의 옷도 빠르게 벗 어던지더니 즉시 아평의 몸을 안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기실 이 두 사람은 매우 많은 날을 서로간에 살을 맞대다시피 해온 상태였 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행위에 접어든 적은 없었다. 비단 이 순간은 황보자 안뿐만 아니라 아평도 매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어서 두 사람은 똑같이 욕 정에 뜨거워져 있었으므로 이내 한바탕의 거친 폭풍이 침상 위에서 휘몰아 치기 시작했다. 아평은 작고 아름다운 배가 되었는데, 망망대해에서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 풍과 파도에 휩쓸려 마치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기도 했다. 황보자안은 더군다나 공력이 증가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것을 수습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욕정에 휩쓸려 버리자 마치 한 마리의 거칠은 황소와 도 같았다. 아평은 첫순결이 파괴되는 고통에 처음부터 수세에 몰려 있었는데다가 이와 같은 험한 일을 당하게 되자 시간이 갈수록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 았다. 그녀는 이 사랑의 행위가 실은 꿀같이 달콤한 것이 아니라 심한 고통 이 될 수가 있으며, 심지어 공포감조차 수반할 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헌신적인 사랑을 모두 바치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로 이러한 일로 죽음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의식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기이하게도 황보자안의 무서운 힘이 느껴지자 스스로 탄탄하다고 생각되었 던 체내의 삼갑자에 달하는 진기가 크게 흔들렸으며, 만일 그것마저 없었다 면 어찌되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니 아찔한 마음이 들었고, 이 황보자안의 공력이 생각보다 크게 늘어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점찰 심한 공포감과 함께 체내의 진기가 모두 빨려가는 것 같은 느 낌을 받고 있을 때 느닷없이 아평의 눈길에 바닥에 펼쳐져 있는 부부봉황대 법의 책자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 책자는 과연 우연히 공교롭게도 그녀 의 시야에 잘 들어오는 곳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평은 미처 그러 한 문제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부부봉황대법의 내용을 이미 어느 정도 읽은 후였기 때문에 마치 한 가닥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심정으로 그녀는 급히 책자에 적혀 있는 구결과 동 작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 부부봉황대법의 관건은 어떤 동작보다도 사실 마음의 처리에 있다고 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간절히 상대를 사랑하고 헌신하려는 마음이 주된 것 이었다. 아평은 지금 비록 궁지에 몰려서 마음이 매우 피폐되어 있기는 하 지만 마침 그러한 심상에 아주 걸맞는 상태여서 그녀는 보기보다 쉽게 구결 의 내용에 익숙해질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의 공포감으로 정신이 다소 산만되기도 했으나, 이내 그녀는 부부봉황대법의 구결과 그 동작에 몰두하여 무아지경에 도달할 수가 있었 고, 그녀의 온 마음은 황보자안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데 바쳐졌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기이하고 믿을 수 없게도 이미 황보자안의 몸으로 빨 려들어간 아평의 진기가 거의 바닥이 나 있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전신에 파 도처럼 희열이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몸 속으로 다시 되돌아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물론 놀랍게도 부부봉황대법의 신기한 위력이었다. 아평은 이미 체내의 공력이 거의 소진되어 탈진되어가는 상태에 놓여 있다 가 다시 진기가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금새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되 었고, 더욱 황보자안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지기 시작하게 되었다. 기실 몇 가지의 특수한 동작과 진기의 운행 외에는 그녀의 그러한 마음이 부부봉황대법의 요결이기 때문에 아평이 대법을 연성하는 것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고, 그런 순간에 이미 그녀의 몸에서 나갔던 진기는 모조리 되돌아 왔다. 그러나 부부봉황대법의 신기한 점은 그렇다고 해서 황보자안의 공력까지 빼 앗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평의 공력이 전부 되돌아온 이후에는 황 보자안의 공력이 빨려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체내의 진기가 더욱 순수해지고 화합하기 시작했으며, 이내 그것은 두 사람의 마음마저 안정시 켜 즐거운 쾌락에 젖게 만들었다. (……!) 황보자안은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욕정이 폭발하여 정신이 없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다시 맑은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되었고 금새 아평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흉폭했던 상태에서 아주 부드럽고 애정깊게 움직이기 시 작했으며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평,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려." 아평은 어떤 여자라도 첫날밤에 이런 심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황보자안의 사 랑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소평!" 황보자안은 그녀의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주며 더욱 농도짙게 움직이기 시 작했고, 사랑 가득한 시선을 보내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점차로 더욱 깊은 쾌락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두 사람이 함께 부부봉황대법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실로 이제야 부부간의 깊은 사랑과 그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조용한 아침바다에 찬란한 햇살이 내리비치 듯이 두 사람은 아주 조용하면서도 깊은 쾌락 속에서 부부봉황대법의 모든 과정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체내의 진기는 더욱 순수해지고 욕념은 오히려 사라졌으며, 정신이 맑아지고 전신에 활력 이 가득 넘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간에 애정이 깊이 담긴 시선으로 마주 보면서 깊은 쾌락 속 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가, 문득 황보자안이 깊이 입맞춤을 하고 으스러 지도록 아평을 껴안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게 되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겠소?" 아평은 지금 자신의 몸 속에 들어와 있는 그를 완전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 문에 절로 빨개진 얼굴이 되어서 대답했다. "이제…… 이제 우리 그만해요. 당신…… 당신께서 너무 힘드시겠어요." 황보자안은 다시 가볍게 움직여 쾌락을 유도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는 전혀 힘들지 않은데? 이렇게 평생 동안 살아가라고 해도 충분히 그럴 수가 있겠어." 황보자안의 지금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평은 더욱 황보자안과 쾌락을 느끼게 되어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며 고 개를 저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 수가 있겠어요? 저는…… 저는 얼마 든지 좋지만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세상에 낯을 들고 다니겠어요?" 황보자안은 아평의 말 그대로 두 사람이 붙어서 다니게 되는 경우를 상상하 고는 그만 우스워서 커다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아평은 지금 그가 자신의 말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작은 손을 들 어 콩콩, 소리가 나게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은 비록 그녀가 내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황보자안에게는 전혀 아프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실로 두 사람이 함께 붙어 있는 상태에서의 이러한 행동은 야릇하기 짝이 없는 것이 었다. 황보자안은 크게 흥이 치밀어서 그녀의 몸을 안고 벌떡 침상 위에서 일어나서 그 형태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이 욕실에는 욕조가 이미 망가져 버렸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즉시 한 덩어리가 되어 한쪽에 가득히 흐르고 있는 맑고 시원한 물 속 으로 첨범 뛰어들었다. 아평은 아직 그의 몸이 그녀의 몸 속에서 강한 힘으로 버티고 있고 빠지지 않은 것이 다소 민망하기는 했지만, 즉시 평소에 하던 그대로 손으로 물을 떠서 황보자안의 몸을 씻어주기 시작했다. 황보자안도 껄껄 웃으며 마치 애무하듯이 그녀의 땀에 젖은 몸을 씻어 주었 는데 괴이하게도 그의 아랫뿌리가 아직 힘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소평, 대체 이놈을 어쩌지?" 아평은 얼굴이 금새 다시 붉어지며 그의 가슴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녀는 황보자안이 이처럼 노골적인 말을 할 줄을 몰랐다가 드디어 참고 있었던 부 끄러움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녀는 눈일 내리감고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사실 무서웠어요. 제가 만일…… 만일 삼갑자 정도의 내공이 없었고, 또한 그 책을 보지 못했다면 그…… 그것은……"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물었다. "죽을 뻔했다는 말이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어요." 아평은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자신의 말이 매우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닫 고는 절로 다시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황보자안은 이것을 보고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야말로 한 순간에 생사가 교차되었던 것이로군 그래?" 그러나 내심으로는 그 역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여태 방사 도중에 여자가 죽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대 체 어째서 조금 전에는 그처럼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지? 자칫 잘못했으면 이 사랑스러운 소평을 영영 다시 보지 못할 뻔했지 않은가! 이것은…… 이 것은 역시 나의 그 괴상한 뱀같은 기운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황보자안은 마치 자신의 몸 속에 또 다른 괴상한 귀신같은 영물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위기의 순 간을 넘겼기 때문에 이 아평이 더욱 사랑스럽고 새롭게 느껴졌으며 크게 아 끼는 마음이 일어서 그녀의 몸을 정성껏 씻어주고 또한 어루만져 주었다. 아평은 매우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이에 겨우 용기를 얻어서 아랫 뿌리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정성껏 씻어 주었다. 아평은 원래 전에도 황보자안의 몸을 많이 씻어 주었었지만 그때는 감히 아 랫도리를 건드릴 마음도 먹지 못하고 그저 두어 번 물을 끼얹어 줄 뿐이었 는데, 이제 처음으로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자 다시 가슴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황보자안이 다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만지려고 하자 그만 화들짝 놀라서 저만큼 달아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평, 그 부부봉황대법은 참으로 신기하지 않소? 그리고 참, 아까 당신이 이상하다고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소?" 기실 황보자안은 아까 아평을 잡으려는 데 정신이 팔려 미처 그녀의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고 있었다. 아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제가 이상하다고 했던 것은 그 책자와는 다른 비급들이예요." 황보자안은 비로소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비급들? 아니, 그럼 거기에 있는 책자들이 모두 이상한 점이 있었다는 말 이오?" 아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것은 바로…… 바로 제가 선사께 배웠던 무공들이 모두 그 안에 들 어 있는 것이었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황보자안은 일신 그녀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가볍 게 놀라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당신의 사부, 아니 그 백리노대가 가르쳐 준 무공들이 비급에 모두 들어 있었다는 말이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주 이상하죠?" 황보자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그게 이상한 것일까? 천하의 무학은 그 뿌리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하는데, 혹시…… 혹시……. 이것이 이상한 일일까, 아니면 당여난 일일까? 알 수가 없는 일이로군.) 황보자안은 원래 무공에 관해서 오직 순양기공과 거기에서 파생된 무공밖에 모르기 때문에 일순 그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아평은 황보자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도록 해요." (그것을 내가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황보자안은 다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럽시다." 이에 아평은 자신의 손으로 앞을 가리며 빠르게 침실로 향했는데, 이는 오 히려 전보다도 더욱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이라 황보자안은 그녀의 벗은 뒷 모습을 보면서 문득 다시 야릇한 욕정이 치솟아서 즉시 그녀의 뒤를 따라나 가기 시작했다. --계속-- 번호:145/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5 길이:293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39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39장. 역근세수진경(易筋洗髓眞經) 아평은 매우 동작이 빨라서 황보자안이 뒤따라 방 안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대부분의 옷을 걸쳐입고 있는 상태였다. 기실 일반 사람들은 일단 정사를 치루고 나면 기력이 쇠퇴하고 몸이 피곤해 지는 법이지만,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정사를 벌였는데도 피곤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기력이 넘치고 얼굴은 더욱 맑고 뽀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아평의 그러한 요염한 얼굴에 크게 욕정이 일어 다시 그 녀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평은 아주 빠르게 옷을 마저 걸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돼요. 저는 사실 배가 고파서 이미 점원을 불렀기 때문에 지금은…… 지 금은 그럴 수가 없어요." 원래 이 석옥은 지내기가 아주 편하게 되어 있어서 한쪽에 있는 줄을 한 번 당기기만 하면 점원원이 즉시 달려오게 되어 있었다. 아평은 지금 자신이 배가 고프다고 했지만, 기실은 일단 다른 사람들이 찻 을 것을 염려했고, 또한 황보자안이 배고플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 동을 취한 것이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도저히 그녀에게 떼를 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 다. 아니 무엇보다도 어이없는 일은 이제는 그가 마음먹고 그녀를 잡으려고 해도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신법이 크게 증진되어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졌 다는 사실이었다. (저 비급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녀의 무공이 더욱 늘어난 것이었을까?) 황보자안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 밖으로 달아나는 아평의 아름답고 탄력 적이며 귀여운 뒷모습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아평을 어이없게도 놓치게 되자 황보자안은 자연 마음이 무료하게 되었고, 이어 그녀가 나가서 쉽게 돌아오지 않자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게 되었 다. 그가 시선을 모은 곳은 바로 여보중이 가져다 주었던 그 비급들이었다. 황 보자안은 우선 하는 수 없이 의복을 대강 걸친 다음에 일곱 여덟 권의 비급 들 가운데에서 가장 두터운 책자를 집어들어 표지를 살폈다. 황보자안은 기 실 장원에 있을 땡는 책을 읽는 귀신이었으며, 어떠한 책이라도 두터운 것 부터 읽어가는 습관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근세수진경(易筋洗髓眞經)> 표지에 적혀 있는 글씨는 아주 오래된 전자체였는데, 그와 같은 내용이 쓰 여 있었다. 황보자안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문에 듣기로 소림사의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은 무림제일의 내공구결이 라고 하던데 혹시 여아저씨가 나를 위해 그것을 구해온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일단은 글자가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추측하지 않고 이내 표지를 넘 겨서 안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황보자안은 원래 과거에는 책을 하나 보게 되면 밤낮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곳에 몰두하게 되는 책벌레였다. 비록 아까 부부봉황대법을 볼 때는 옆에 아평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흥분하여 책자의 내용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 았지만 지금은 아평도 없고 하여 무료하던 참이라 그야말로 그는 금방 책자 의 내용에 몰두해 들어가게 되었다. 소문에 훌륭하다고 하는 달마역근경의 내용은 알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이 역근세수진경의 내용은 처음에는 무공의 심오한 구결보다는 인간의 바른 심 성과 인체의 골격 등의 성질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진기가 흐 름에 ㄸ라서 전신의 골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기실 이와 같은 내용은 무공의 가장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황보자안 은 아직 전혀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즉시 자신의 신체의 의문스런 현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지루하고도 자세한 내용에 깊이 몰두해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이 서책을 보면서 아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 었지 무공 서적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출진자는 그에게 오대선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른 무공들을 배우는 것을 자제할수록 좋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러한 현실마저 잊 을 정도로 황보자안이 역근세수진경의 내용에 몰두하게 되자, 뒤이어 아평 이 들어와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을 정 도였다. "밖은 이미 저녁이예요. 일행에게는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게 하 고 거실의 탁자 위에 음식을 차려 놓게 했어요." 아평은 자신이 그와 같이 말했는데도 황보자안이 전혀 이를 듣지 못하고 여 전히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절로 흐뭇해져서 웃으며 되 돌아 밖으로 나갔다. 황보자안은 그 뒤에도 너무나도 크게 역근세수진경의 내용에 심취하여 아평이 다시 음식 그릇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하 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모습은 일찍이 아평이 장원에서 가끔씩 보았던 것이라 이상 하게 생각하지 않고, 마치 그녀가 훌륭한 대학자의 부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조용히 움직이며 조금도 그의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했다. 아평은 이어 거실에 있는 모든 음식들을 실내의 탁자 위에 옮겨 놓은 다음 에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서 황보자안이 책에서 눈을 떼기만을 기다렸는데, 황보자안은 누가 자신의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책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 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기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그토록 궁금해 하던 사항에 관해 서 아주 시원하게 배우고 혹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역근세수진경이라는 말 그대로 그 내용은 그가 환골탈태를 하게 되었 던 그 원인과 바른 결과에 대해서 주로 자세하고 완벽하게 기술하고 있었던 것이니,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사항은 무공을 익히는 사람에게 가장 근본이 되는 학문인 동시에, 또한 가장 궁극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다소 그 내용이 길고 복잡하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공을 배우는 사람 들이 그런 것을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로 이러한 인체의 바른 질서와 진기의 운용에 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가장 상승무공들은 배 울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책자에서는 지루하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 었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원래 책벌레였기 때문에 다소의 지루함은 개의하지 않는 사람이었는 데다가, 또한 그 내용이 그에게 있어서 지금의 가장 궁금한 점 을 해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이 책에 완전히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황보자안은 혹시 자신이 오대선공을 배워야 하는 입장에서 이 역근세수진경을 보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역근세수진경의 부피는 그가 이제까지 보아온 서책들 가운데에서 그리 많다고 할 수가 없을 만큼 두터웠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지금 보고 있 는 부분이 삼분지이 이상이나 차지하여 얼마나 방대하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이 책자의 내용에 부족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실로 책자를 읽어 가면서 자신이 궁금해하고 곤혹스러워 했던 모든 부분에 대해서 훤하게 깨 닫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원래 황보자안이 환골탈태를 하게 되었던 것은 물론 두 가지의 희세영약이 화합하여 조화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 환골탈태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어 떤 공력 이상이 되면 이루어진다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 려 무공의 성취도를 떠나서 언제라도 인연이 닿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고, 혹은 무공이 극상승에 도달해도 일워지지 않는 수가 많은 것이다. 역근세수진경에는 인체의 여러 가지 기능과 진기와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면 서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근골을 바꾸고 혼탁한 기운을 제거하는 역근벌모세수의 과정을 필히 거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이 역근벌모세수라 고 하는 것은 바로 환골탈태와 아주 흡사한 것이다. 무공이 극상승에 도달 하게 되면 심마에 자주 시달리게 되는데, 비교적 근골이 바로잡히고 벌모세 수가 이룩된 사람에게는 심마에 대항할 강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진경에 적혀 있는 바에 의하면 그 역근벌모세수를 이루는 방법에는 여러 가 지가 있는데, 바로 황보자안의 경우와 같이 약력에 의해서 자연스럽고 완전 하게 이루어지는 방법도 그 중의 하나였다. 기실 황보자안이 먼저 복용했던 만년동자심의 기운은 그가 미처 공력으로 흡수하지 못한 까닭으로 그의 임독양맥이 아닌 십이정경 등의 다른 경맥으 로 녹아들어가 굳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그 약력과 서로 기막힌 조화를 이 룰 수가 있는 만년옥장의 기운이 합쳐지자 굳어졌던 약력들이 신기하게도 한꺼번에 녹아 버리고 환골탈태라는 놀라운 현상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 다. 황보자안은 그 바람에 생각지도 않게 공력이 훨씬 더 증가하게 되었는데,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세세하게 알게 되었다. 마치 금빛의 뱀처럼 생겨서 그를 놀라게 했던 그 금빛의 진기 덩어리는 사 실은 바로 순양기공이 극에 달해서 생겨난 기물(奇物)이었다. 그는 원래가 일갑자의 공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평보다도 더욱 고생을 하게 되었던 이유는 바로 다름이 아닌 순양기공의 한계 때문이었다. 원래가 이 순양기공은 기초적인 무예를 닦기 위해서 가르치는 초보적인 것으로서, 출진자 등은 황보자안이 겨우 일갑자의 공력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미처 그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순양기공의 한계는 원래가 최대한으로 잡아서 이갑자의 수준이었고, 그 이상의 공력을 키우게 되면 반드시 보다 높은 경지의 신공으로 넘어가야 하 는 것이었는데, 황보자안은 미처 이러한 이치들을 모르고 오직 그가 배운 대로 순양기공에 의해 모든 진기들을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그 결과는 마치 작은 강뚝에 바닷물을 들이붓는 듯한 상태가 되어서 황보자안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실은 그가 마음의 수양이 깊어서 흔들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십중팔구는 주화입마에 빠 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황보자안은 실로 우둔하게도 그 엄청난 기운을 순양기공에 의해 서 억지로 어찌어찌하여 수습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극심한 심력이 소모되 었고, 또한 그렇게 깊은 정성을 기울인 나머지 삼갑자에 달하는 기운이 비 정상적으로 응축되어, 마침내 순양기공의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선도 공부의 요체(要體)라고 할 수가 있는 금단(金丹)의 종자가 만들어지게 되었 던 것이었다. 실은 선도에서는 이와 같은 금단의 종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일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었고, 만일 그것을 이루게 되면 선도공부는 절반 쯤 완성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황보자안이 여기에서 갑자기 그것을 이루게 된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 탄생되었던 금단의 종자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은 황보자안의 심리와도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황보 자안은 오직 임독양맥만 의식했던 것이었는데, 그 금단의 종자는 스스로 신 체를 바르게 잡고자 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사에 곧바로 반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마치 금빛 뱀처럼 그의 남은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으로 돌아다녔던 것은 그러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으며, 무리하게 순양기공을 운 용한 황보자안의 의사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의 신공으로 스스로 나아 가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 금단의 종자는 말 그대로 금단의 자식에 비유되는 만큼 신체에 여러 모 로 좋은 영향을 가져오는 것이었고, 실로 어떠한 불치의 병이라도 고칠 수 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만큼, 일단 그것이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을 돌아다니 게 되자 곳곳에 굳어져 있다가 다시 녹게 된 만년동자삼의 기운을 바로바로 흡수하게 되었고, 모든 경맥들을 거짓말처럼 개척해 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보자안의 몸은 전신의 커다란 경맥들이 모조리 타동되어 마치 중요한 신 공을 이룬 것처럼 되었고, 두 가지의 희세영약의 힘이 한꺼번에 작용하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쉽다면 아쉬운 것은 기연에 의해서 탄생되 었던 금단의 종자가 우선은 그의 의지와 격렬하게 부딪쳤고 또한 모조리 타 동되어 전신이 환골탈태를 하려는 그 순간의 진동으로 인해서 도로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단전이 넓어진 듯한 것은 환골탈 태의 덕분이고, 거기에 노을같은 빛이 감돌게 된 것은 바로 금단의 종자가 존재했다가 사라졌다는 증거였다. 황보자안이 만일 선도에 강하게 뜻을 두고 있었다면 실로 이 금단의 종자가 사라진 것을 땅을 치며 아쉬워했겠지만, 그러나 사실 황보자안은 그런 것에 그리 미련이 없었다. 금단의 종자를 키우게 되면 바로 선도의 궁극으로 치 닫게 되는 외길이며, 그는 굳이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하고 싶 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황보자안은 출진자도 가르쳐 주지 않은 일단의 괴이한 사건으로 인 해서 환골탈태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에 만년동자삼의 남은 약기운을 모조리 내공으로 흡수하여 그의 공력은 일약 사갑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의 몸이 일단 의식을 단전에 집중하거나 금빛 종자를 생각하면 위로 떠오 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증거였으니, 그 이유는 원래 삼갑자와 사갑자의 경 지는 크게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삼갑자의 경지와는 달리 사갑자의 경지에 오르면 대부분이 전신의 커다란 경맥들을 개통시키게 되고, 자연히 생각하지 않아도 호신강기(護身 氣)가 생겨나서 외부의 침입에 대해 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기운이 그야말로 완 전하게 형통하여 약간의 내력만 일으켜도 허공에 떠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갑자의 경지에 오르면 저절로 허공을 새처럼 날 아다닐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황보자안의 몸에 나타났던 현상들은 모두가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려는 조짐이었다. 다만 황보자안이 그렇한 기운을 바 르게 쓰기 위해서는 역시 또 다른 무공범문을 배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었다. 아평은 황보자안의 눈빛이 다시 평범해진 것 같아서 원인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지만 안광이 유형(有形)에서 다시 무형(無形)으로 돌아간 것 등은 모두 가 그의 공력이 완전한 사갑자에 도달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황보자안은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이 그야말로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의혹이 사라져서 그렇게 좋을 수 가 없었다. 이 역근세수진경에는 그야말로 어떤 고집을 하는 것이 없고, 모든 일반적인 세세한 사항까지 설명을 하고,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이어서 선도 에 관해서도 황보자안에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만일 그가 거부감을 일으켰다면 도중에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 역근세수진경의 내용을 몰두해서 한 번 완전히 읽자모든 사 항을 암기하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되어서 그야말로 천하에 보기 드문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이 많은 양의 내용을 모조리 기억할 수가 없 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는 것인데, 황보자안은 타고난 책 벌레여서 그런 관문이 무난히 해소되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렇게 신체의 비밀과 자신의 의문에 대해서 속시원히 알게 되 었ㅇ나, 이미 이 역근세수진경의 내용에 깊이 반하고 있는 상태였다. 미처 한숨을 내쉬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는 이어 마지막으로 남은 내용으로 넘 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음에 적혀 있는 것은 바로 내공심법(內功心法)이었다. 황보자안이 지금 정신을 차린다면 이러한 내공심법은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지만, 그는 이미 전의 내용에 푹 빠져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역근세수진경을 배우고 나서 자신이 연마한 순양 기공의 내용이 너무나도 빈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뒤이어 그 내공심법을 보게 되자 크게 흥미가 일었고, 그 깊고도 오묘하며 심오하 고도 난해한 법문을 읽으며 생각할 때마다 안색이 절로 크게 변하고 흥분하 기 시작했으며, 이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실로 그가 지금 읽고 있는 내공심법의 구결은 그야말로 순양기공처럼 임독 양맥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신의 크고 작은 경맥들 모두에 적용되 고 있었고, 지극히 세밀하고 미세하여 황보자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가히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내공심법인 것 같았다. 내공심법의 구결은 두터운 책자의 삼분의 일이나 차지하고 몹시 길고 지루 하며 난해하였지만, 황보자안은 이미 내용에 크게 심취하여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나 혹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 나올 때에는 다음과 같이 소리치곤 했다. "절묘하구나, 절묘하구나!" 따라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한달이 걸리더라도 다 보지 못하고 몇 년이 걸 리더라도 다 암기하지 못하는 난해하고도 기나긴 법문들을 그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내에 읽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암기까지도 하고 있 었다. 이것은 물론 그가 그처럼 깊이 몰두하고 빠져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 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이윽고 내공심법을 모두 읽고 나서 역근세수진경의 뒷장을 덮어 버린 황보 자안은 문득 숨도 쉬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음미하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일시 그의 뇌리에는 작은 우주의 신비가 모조리 기억되어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들고 있었고, 그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그러한 기억들을 한 차례 차 분히 정리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한 차례의 기다란 한숨을 내쉬고 눈을 뜬 그의 시야에 문득 멍 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아평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보자안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평, 알아냈소! 나는 그 이유를 알아냈다는 말이오!" 아평은 멍하니 그를 보고 있다가 즉시 정신을 차리고는 미소하며 말했다. "축하해요, 안랑! 대체 어떤 것을 알게 되셨죠?" 황보자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음, 내가 환골탈태를 해서 내공이 사갑자에 올라 있다는 것이오. 그래서 내 몸이 그렇게 이상했던 것이오." 아평은 내심 어떤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의 말을 듣고는 쉽게 대부 분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 그랬었군요!" 황보자안은 자신이 간단하게 얘기를 했지만 이 얘기를 지금 시작하게 되면 비단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평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되는 것이므로, 다행히 그녀가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하자 웃으며 생각을 돌렸 다. "헌데 어째서 그대는 그렇게 앉아만 있는 것이오?" 그렇게 묻다가 황보자안은 문득 실내의 탁자 위에 갖은 음식들이 완전히 식 은 채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하하, 나 때문에 아직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있었구려. 웬만하면 먼저 식사 를 하지 왜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소?" 아평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사실은 별로 배고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대가 책을 보고 계시는 광 경이 더욱 아름답고 저를 감동학 만들었어요." 이어 아평은 소매를 들어 글썽거리는 눈물을 찍어 내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녀가 실은 그를 기다리기 위해 무려 두어 시진이나 그렇게 기 다렸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격하여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원래가 이렇게 한 가지의 일에 쉽게 빠지는 습관이 있으니 그대가 조 금 이해해 주시구려. 지금 보니 당신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구려." 아평은 황보자안이 자신을 칭찬해 주자 문득 얼굴이 붉어지더니 말했다. "식사를 다시 데워 올까요?" 그러나 미처 그녀가 그릇들을 옮기기 전에 황보자안이 먼저 일어나서 젓가 락을 집어들고 있었다. "아니오. 나는 실은 매우 배가 고파서 무쇠라도 소화시킬 수가 있을 것 같 은데 이까짓 식은 음식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황보자안이 식은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자 아평도 뒤를 이어 그의 맞 은편에 앉으며 웃으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점원은 원래 두 사람이 식사할 것이면서도 이들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여러 가지의 음식들을 많이 보내 왔었기 때무네 양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황 보자안과 아평은 둘 다 실은 상당히 허기가 져 있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 들을 모두 배가 불룩하도록 먹어치우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안랑, 당신은 꼭 두꺼비와 비슷하네요." 황보자안은 이에 지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그야말로 암두꺼비와 같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궁합이 맞는다고 할 수가 있군. 아예 우리는 앞으로 두꺼비처럼 살을 찌우도록 할까?" 아평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호호, 저는 싫어요. 저는 항상 날씬한 몸으로 살아갈 거예요. 당신이나, 호호호, 두꺼비 낭군님이 되세요." 아평이 까르르 웃으며 이어 빈 그릇들의 밖의 거실로 나르기 시작했다. --계속-- 번호:146/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5 길이:32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0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0장. 무공(武功)을 잊어야 한다 아평이 빈 그릇들을 거실에 갖다 놓았을 때에는 시각은 이미 자정을 넘어서 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돌아와서 탁자 위를 깨끗하게 치우 고 나자 두 사람은 너무나도 배가 불러 있는 상태라서 소화를 시키기 위해 서로 탁장에 마주 앉아서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마침 의문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물었다. "참, 아까 당신의 무공이 모두 비급에 실려 있다고 했었는데, 그것에 대해 서 자세히 말해 보겠소?" 아평은 내심 그러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참이라 즉시 걸어가서 비급들을 싸 가지고 돌아와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말했다. "여기에 있는 이 일곱 여덟 권의 비급들은 각기 한 가지씩의 무공이 적혀 있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거기에는 제가 배운 내용들이 빠짐없이 기록 되어 있는 것이예요. 비록…… 비록 제가 배운 것은 기초에 불과한 것드리 었지만 말이예요." 아평은 이 비급에 적혀 있는 무공들이 자신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수준이 높은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은근히 안색이 붉어졌다. 황보자안은 흡사 요정같이 촛불 아래에서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은 원래 사부에게 무공을 다 배우지 못해서 서운해 했었는데, 잘된 일 이 아니오?" 아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일이 공교롭게 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요. 마치…… 마치 여아저 씨가 우리 선사님의 무공을 일부러 가져온 것처럼 말이예요."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웃으 며 대답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이한 인연들이 많아서 여아저씨와 그대의 사부가 옛날 에 어떤 인연이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 는 것이 아니오?"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이 일은 제게는 매우 좋은 일이니 굳이 따질 거야 없는 일이 지만, 나중에 여아저씨께 물어보면 알게 되겠죠." "그렇게 하시오."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말을 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나서 다시 물었다. "참, 그대의 무공이 전부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내공심법도 같은 것이었다는 말이오?" 황보자안은 자신이 내공심법에 관한 내용을 이미 읽은 후이기 때문에 그렇 게 물은 것이었다. 아평이 이에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른 무공들이 모두 들어 있기에 내공도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사를 해보았지요. 그런데 과연 그 책자의 뒷부분에 들어 있는 것이예요." 황보자안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가볍게 가슴이 뛰는 것을 의식했다. 왠지 모 르지만 그는 다소 갈증을 느끼고 아평에게 말했다. "그럼 그 구결을 한 번 내게 들려줄 수가 있겠소?" 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러겠어요." 말과 함께 아평은 눈을 살며시 내리감더니 자신이 외우고 있는 일단의 구결 들을 천천히 낭송하기 시작했다. 황보자안은 앞에서 이를 듣고 있는 순간에 저도 모르게 놀라기 시작했다. 실로 아평이 지금 낭송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그도 암기하고 있는 그 내공 심법상의 구결이었으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공심법 가운데에서 난해 한 부분은 교묘하게 제거하고 쉬운 방법만을 택했다는 점이었다. 그 분량은 원래의 내공심법의 십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황보자안은 이 렇게 절묘하게 축소해서 내공심법을 전수한 그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 감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축소했을망정 이 내공심법은 원래의 흐름을 잊지 않고 있으며, 여러 가지 우수한 점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 다. 기실 황보자안은 순양기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곤란을 겪었었으나 사실상 아 평은 단숨에 삼갑자의 공력이 생기는 마당에는 일반의 내공심법이었다면 어 느 정도의 혼란은 겪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아평이 바로 이러한 심 오한 내공심법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이제야 그녀가 어째서 그 렇게 쉽게 내공을 성취할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아울러 황보자안은 문득 아평이 알고 있다는 다른 무공에 관해서 어떤 종류 의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는 이쯤에서 다른 비급들은 보지 않으려고 했었으나, 왠지 그녀가 알고 있는 실용법문을 듣고 싶어서 그녀가 모든 구결을 말한 다음에 이어 말했다. "다른…… 다른 무공에 대해서도 한 번 말해 볼 수가 있겠소?" 황보자안은 기실 지금 내공심법의 근본에 대해서는 정통하게 꿰뚫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실용법문은 하나도 모르고 있어서 정작 사갑자의 내공을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어찌 그의 목에서 갈증이 생 기지 않겠는가? 아평은 이러한 그의 내심을 알고 있는 것인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장법에 대해서 말해 볼께요." (……) 황보자안은 잠시 눈을 감고 묵묵히 아평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이미 내공 심법에 관해서 통달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록 스스로 실용법문을 창 안하기는 어려워도 그녀가 말해 주는 구결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쉽고도 빨 랐다. 물론 아평이 말하는 것은 동작이 아니라 구결뿐이었지만, 그 구결만 들어도 거기에 해당되는 움직임이 눈에 선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아평은 이어 그를 위해 권법과 지법, 그리고 금나수법(擒拿手法)과 신법, 보법, 검법 등의 구결을 차례대로 모두 말해 주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일년간의 고된 수련을 통해서 기본적인 무공에 대해서 완 벽하게 터득한 이후이므로 거기에 역근세수진경의 내용과 내공심법의 구결 을 적용하게 되자 아평의 구결을 아주 쉽게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왠지 거 기에 더하여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작은 주걱으로 계속해서 물을 부어주는 격으로 더욱더 갈증 을 유발시킬 뿐이었다. 아평은 그의 그러한 심사를 아는지 모든 구결을 말하고 나서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무공들을 전에는 아직 공력이 부족하여 검법의 간단한 검식만을 배울 수가 있었을 뿐이예요. 그러나 저 비급들에는 제가 말한 것보다도 수 십 배나 깊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니 궁금하면 한 번 보도록 하세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나자 즉시 자신의 갈증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 지 알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곤륜파의 오대선공을 의식하고 다른 무공을 배우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 순간 보다 깊은 내용이 담겨져 있 는 비급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물밀듯이 치밀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따 라서 황보자안은 스스로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그저 한 번 비급을 보는 것은 아마도…… 아마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 다. 나는 익히지 않고 그저 한 번 비급을 보는 선에서 그치도록 하자.) 비급들은 바로 그의 눈앞에 너무나도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음, 한 번 보기로 할까?" 황보자안은 일순 한 차례 마른 침을 삼킨 연후에 우선 아평이 말한 순서대 로 장법이 수록된 비급인 반야장공보록(般若掌功寶錄)을 펴서 읽어가기 시 작했다. 실로 바로 그 순간부터 마치 억제되어 있던 본능이 한꺼번에 터져 나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황보자안의 눈빛은 푸른 광채마저 띠기 시작했고, 주위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이 경계하고 있었던 무공을 배우지 않는다는 생각도 완전히 잊어버린 채 깊숙히 몰두하여 빠르게 책장을 넘겨 가기 시작 했다. 확실히 비급을 보면서 황보자안은 비로소 자신의 갈증의 원인이 어디에 있 는 것인지 훤히 알게 되었고, 또한 그 갈증의 원인이었던 모든 미비점과 부 족한 아평의 구결들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는 내용에 마치 단비를 맞은 듯이 시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뻐하며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비급의 내용은 그가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흠을 잡을 수가 없을 만큼 완벽 했고, 그는 더욱 뿌듯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도 비급의 내용에 심취하여 읽는 도중 안색이 무수히 변모하거 나 혹은 한 손을 들어서 무심결에 이리저리 시험해 보기도 하고, 아예 자신 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의 감각마저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쉬운 한 권의 비급을 읽어 치웠고, 이내 권법인 대금강권신공보록 (大金剛拳神功寶錄)과 지법인 금강지공비결(金剛指功秘訣), 금나수법인 대 자대비천엽수경(大慈大悲千葉手經), 그리고 신법인 연대부운비요(蓮帶浮雲 秘要)와 보법인 금강부동신보급(金剛不動身步 ) 등을 차례로 거쳐서 끝으 로 달마검공비해(達磨劍功秘解)라고 적혀져 있는 검법까지 모조리 읽게 되 었다. 그러니까 황보자안은 이 일곱 개의 비급들을 단숨에 읽어버린 것이었는데, 마지막 일곱 개째의 비급을 읽고 나자 더 이상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자 그는 내심 크게 서운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그러다가 그는 다시 크게 흠 칫하여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고는 이렇게 놀라 생각했다. (아니! 내가 이러다가 혹시 이 무공들을 모두 배워버리는 것이 아닐까?) 황보자안은 내심 그러한 생각이 들자 문득 크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마치 어렸을 적에 서당 훈장의 지시를 어기고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절로 가 슴이 두근거리는 경우와 흡사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자신이 혹시 그런 무공을 배운 것인가 하고 가만히 돌이 켜 생각해 보았는데, 일시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어찌된 일인지 잘 알 수 가 없었다. 이것은 매우 불길한 조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서 자위 했다. (아닐 거야. 이건 결코 쉬운 무공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가 이미 배 워 버렸을 리가 없어!) 기실 황보자안은 처음부터 이 비급들이 어떤 불문의 무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달마삼검(達磨三劍)이 실려 있는 검보를 보고 드디어 소림사의 무공비급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원래 소림사에는 달마역근경을 위시로 하여 일흔두 가지의 신묘한 절예들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강호 무림의 태산북두가 되어 왔었고, 불문 무공의 한 원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비록 근간에 이르러 그 명성이 다소 퇴락하고 동심맹의 힘에 눌려서 태산북두를 자처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 무공의 정통성은 아직도 인정되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소림사의 무공은 워낙 고지식하고 어려워서 단시일내에 터득하기가 어렵고 성취도 느 리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예의 일부로 보 이는 이러한 절학들을 그가 단시일내에 터득했을 리가 없다는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휘휘 내저어서 마치 조금 전에 읽은 내용들을 모두 떨쳐버리려는 듯이 하다가 눈을 바르게 뜨고 전면을 살폈다. 앞을 보니 아평이 지금 그가 읽고 내려놓았던 비급들의 내용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실로 아평은 이와 같은 자신의 무공의 원조격인 비급을 만났었기 때문에 갑 자기 무공이 크게 진보되었었던 것이었다. 이제 이와 같은 비급들을 보게 되면 아평의 무공은 공력에 상응하여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 틀림 이 없었다. 황보자안은 아평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바 라보면서 아무쪼록 그녀가 여기에 있는 비급상의 무공을 모두 암기하고 터 득할 수가 있게 되기를 축원해 주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황보자안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경각하고 놀라 내심 소 리쳤다. (아니 소평은 이 비급들을 모두 배우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아 홉권의 비급들을 모조리 읽고 암기한 사람은 내가 아닌가!) 황보자안은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크게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아서 몸을 벌 떡 일으켰다. (안돼, 안돼!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잊어야 하겠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무공들은 불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 려 그가 모든 것을 잊으려고 하면 더욱 맑고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임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즉시 몸을 일으킨 상태로 모든 기억을 잊기 위해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고, 그리하여 잠시 후에는 머리가 맑아져서 모든 것을 잊은 것 같았으나, 그러한 행동은 그저 아평이 독서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안랑, 혹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황보자안은 아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다 시 자리에 앉으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단의 우려에 대해서 말해 주었 다. 아평은 이에 잠시 생각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전에 하나의 심오한 무예를 배우기 위해서는 다른 무공을 연성한 것 이 방해가 되어 모두 잊도록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러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아직 무공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저 비급을 한 번 본 것에 불과하니 그저 앞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저절로 잊혀지지 않 겠어요? 원래 무공법문이라는 것은 쉽게 잊혀지는 것이거든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말에 다소 위안을 받았다. 기실 자신의 기억력이 지극히 좋아서 한 번 기억한 것은 거의 잊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나는 그저 한 번 본 것에 불과히니 잊을 수가 있을 거야! 게다가 어 려운 무공법문이니 그 동작들을 모두 잊게 될 거야! 아니 지금도 벌써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듯한데?) 따라서 황보자안은 크게 기지개를 켜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됐어! 음, 이제는 모든 것을 잊은 것 같아. 머리 속이 말끔한데! 하하하, 이렇게 쉽게 잊을 수 있을 줄이야!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아평도 황보자안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잘된 일이예요. 당신께서 편안해지셨다니. 이제 그만 쉬도록 하세요." 황보자안은 기뻐하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아직 비급을 모두 보지 않았지 않소?" 아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께서 쉬려고 하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계속 책을 읽을 수가 있겠어요? 게다가 지금은 벌써 새벽이고, 내일은 바로 동심맹의 비무대회의 날이니 오 늘은 필히 우리가 나가서 일행을 만나보아야 할 거예요. 그러자면 우선 한 숨 눈을 붙여할 할 것이니, 저는…… 저는 내일 낮에 비급들을 다시 보도록 하겠어요." 말과 함께 비급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정성껏 싸놓는 아평을 보고 황보 자안은 그녀의 차분하고 치밀한 생각과 행동에 내심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뭔가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함께 잠을 자는 것이오?" 이에 아평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색을 크게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잠을 자야 하니 그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잠만 자야 할 거예요." 원래 황보자안은 이 순간에 다시 아평의 그 아름답고 탄력적인 나신과 그 즐거운 방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평이 이를 알고 먼저 선수를 치는 것 을 보자 일순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달아나면 잡을 수가 없는 처지이다. 그러므로 일단은…… 일 단은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만일 침상 위에 함께 눕 게 된다면 그때는…… 그때는 내가 부드럽게 힘을 주고 껴안고 있는데 그녀 가 감히…… 감히 어떻게 나의 품속을 벗어나겠는가?) 그와 같이 생각하자 이내 황보자안은 입가에 득의의 음흉한 웃음을 떠올리 게 되었다. 그러나 아평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는 이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험험, 그럼 자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야말로 군자와 숙녀가 되어서 잠을 자는 것이오. 잡시다!" 아평은 그가 자신과 그가 가지고 있는 두 자루의 장검에 비유하여 그렇게 말하자 절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평은 즉시 다가와서 그의 대충 입고 있는 속옷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오직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당신이 언제라도 저를 원 하시면 저는 항상…… 항상 당신의 말을 듣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심이 며칠 동안 잠을 주무시지 못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하자 은근히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서 얼른 입맞춤을 해서 말을 더 이상 못하게 해 놓고는 웃으며 천천히 침상으 로 걸어갔다. "하하, 아! 실로 이제는 피곤하군. 어디, 어디 시원하게 한 번 자 보도록 할까? 아, 상쾌하다!" 황보자안은 공연히 너스레를 떨며 소리쳤다. 그러나 문득 그는 침상 위에 앉으며 자신의 실수를 생각했다. (아니, 이런! 피곤하다면서 상쾌하다니 어디 그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잠 을 늘어지게 잔다고는 하지만 시원하게 잠을 잔다고는 하지 않지. 아, 나 는, 나는 어찌 그와 같이 바보같은 실수를 해서 그녀에게 의심을 산다는 말 인가?) 황보자안은 내심 생각을 하며 은근히 아평의 태도를 살폈다. 하지만 아평은 원래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조금도 얼굴 에 의심하는 구석이 없었다. 그녀는 겉옷을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놓고 부드 러운 나삼으로 되어 있는 속옷차림으로 그의 곁에 와서는 그의 몸을 침상 위에 잘 뉘어 놓고 뒤이어 자신도 그의 곁에 나란히 눕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어 하나의 얇은 이불을 덮은 다음에 가볍게 손을 휘저어 멀리 있는 촛불을 끄는 아평의 섬세한 손길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자앙, 자안, 너는 갑자기 치사해졌구나! 그녀는 너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 는데 이렇게 거짓말을 써서까지 그녀를 배신해야 하겠느냐?) 허나 뒤이어 떠오른 생각은 또 달랐다. (아냐, 아냐! 사내대장부라면 당연히 생각하는 바가 넓고 사소한 일에 구애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기왕에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 기기 시작했으니 마침내 무엇이든 끝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작 은 잘못이더라도 나중에 그것을 책임지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황보자안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입가 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린 다음에 슬금슬금 아평의 곁으로 접근했다. (호, 혹시 소평이 나의 행동을 눈치채고 미리 허공을 격하고 지풍을 날려서 나의 혈도를 제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잠시 멈칫했으나 황보자안의 뇌리에는 즉시 거울처럼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십중팔구는 몸이 뻣뻣해지고 움직이지 못하겠으나, 즉시 그 와 같이 진기를 순환시키고 그렇게 다른 경로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아니 그렇지 않고 그녀가 혈도를 제압하기 전에 미리 그녀가 제압할 혈도를 폐쇄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은 아무래도 마혈인…… 아냐, 내가 전신의 모든 혈도를 한 순간에 폐쇄한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을 것인가? 그녀 는…… 그녀는…… 아이쿠, 이런!) 황보자안의 뇌리 속에 마치 거울처럼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바로 심오한 내 용의 해혈대법(解穴大法)이나 폐혈대법(閉穴大法) 등이었는데, 다음 순간에 그는 자신이 무심코 역근세수진경상의 법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크 게 놀라 내심 소리친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스스로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기 억이 그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은 놀라서 즉시 머리를 맑게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나도 그 내용에 몰두했었기 때문에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하 긴 그러한 내용은 무공이라고 할 수가 없고, 또한 선도의 수련에 도움이 되 는 것일 테니 기억하고 있는다고 해도 커다란 장애는 없겠지. 음, 가능한면 잊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간혹 기억이 나도 상관없다고 할 수가 있어. 아 니, 이런! 내가 갑자기 행동을 하다 말고 무슨 헛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지?) 황보자안은 즉시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평은 벌써 잠이 들었는지 숨결이 고르고 부드러워져 있었는데 이렇게 은 밀하게 다가가려니 무슨 도적과도 같은 심정이 되어서 그는 왠지 마음이 다 소 떨렸다. 그는 혹시 그녀를 안을 때에 그녀가 미리 마음을 눈치채고 벗어나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가 아평의 가냘픈 몸을 부드 럽게 안자 그녀는 잠이 아직 들지 않았는지 오히려 다소곳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에 황보자안은 내심 얼씨구나 하고 좋아하며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부 드럽게 껴안으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헌데 그때엿다. "호호……" 갑자기 짧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아평의 가느다란 허리가 돌연 안개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기이하게도 그의 손을 벗어나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 순간에 이미 자신의 계획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평은 원래 알고보니 그의 심중을 눈치채고 잠을 자는 척하다가 이처럼 장난스럽 게 달아나 버렸던 것이었다. 실로 아평은 순종적이었지만 누구에게 쉽게 속 아 넘어가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미 아평의 아름다운 몸이 실내의 공간을 날아서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황보자안은 스스로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그냥 있을 수 가 없어서 즉시 한 손으로 반동을 주고 진기를 끌어올리면서 그녀가 있는 방향을 향해 뒤쫓아 몸을 날렸다. 비록 이 어두운 실내에서는 보통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내공 이 높아서 시력이 크게 향상된 그에게는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의 몸은 빠르게 허공을 날아서 아평의 바로 뒷부분에 이르렀고, 아 평은 순간 자신의 몸이 거의 잡힐 듯하자 얼른 허공에서 신형을 기우뚱하더 니 즉각 스르르 좌측으로 빠르게 비켜가는 것이 아닌가! 아평의 이 한 수는 실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아직 삼갑자 의 경지에 있기 때문에 허공에서 방향을 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 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에 순수한 마음에서 감탄하며 소리쳤다. "매우 좋소!" 헌데 그때였다. 황보자안은 뒤이어 자연히 아평이 옆으로 몸을 날리게 된 연유를 뇌리에 무심코 떠올리게 되었는데, 순간 어이없게 그의 신형이 역시 그쪽으로 방향을 꺾어서 날아가더니 깜짝 놀라서 방향을 다시 돌리는 아평 의 손을 마치 우수를 환상처럼 움직여서 잡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호호……" 아평은 이에 즉각 자신이 진 것을 시인하며 바닥에 내려서려고 했다. 그런 데 다음 순간 황보자안은 그녀를 잡은 손을 놓더니 그 자리에 쿵, 하고 떨 어져 내리면서 마치 뻣뻣한 목석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번호:147/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6 길이:317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1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1장. 괴인출현(怪人出現) 아평은 이에 깜짝 놀라서 그의 앞에 내려서며 물었다. "안랑, 왜 그러지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 그러나 황보자안이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아평은 더욱 놀라서 소리쳐 물었다. "안랑, 왜 그러죠? 왜 그러죠?" 그녀는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해서 감히 그의 몸을 만지지는 못했지 만 일순 뭔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벌써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때 비로소 황보자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것은 보기 드물게 처 량한 것이었다. "나는…… 나는 잘못되었소." 아평은 그렇지 않아도 놀라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자 잠시 안심을 하면서 도 급히 놀라서 물었다. "안랑, 뭐가 잘못되었죠? 갑자기 주화입마를 당하셨나요? 아니면…… 아니 면 갑자기 몸이 굳어져 버린 것인가요?" 아평은 일시 여러 가지 중상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대강 그렇게 물어 보았 다. 그러자 황보자안은 처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주화입마를 당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몸이 굳어진 것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만 잘못되었을 뿐이오." 아평은 그가 계속해서 그저 잘못되었다고 하자 스스로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내심 크게 답답해졌다. 원래 병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그 원인을 알 게 되면 절반은 고친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금 원인 을 모르는 병을 황보자안이 앓고 있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아평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나으리, 나으리!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아평은 너무나도 다급한 나머지 전에 부르던 호칭이 마구 입 속에서 튀어나 오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일순 그것을 알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만 무공을 쓰고 말았소." (……!) 아평은 문득 눈물을 뚝 그치고는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럼 나으…… 안랑께서 잘못되었다는 말은 바로 무공을 사용하 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황보자안은 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는…… 이는 실로 아주 크게 잘못된 일이라오." 아평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내심 생각했다. (알고보니 안랑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이로구나. 아, 나무관세음 보살! 그렇지만 안랑은 참으로 이상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구나. 어째서 남 들은 배우기를 갈망하는 무공을 저렇게 애써 버리려고 하시는 것이지?) 아평은 그 이유에 대해서 물론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저 골륜파의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면 배우지 않고 소림사의 무공을 배우면 더 낫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쉽게 황보자안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황보자안이 실은 너무나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문의 무공 외에는 익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내 그녀는 황보자안의 생각은 알 수가 없지만 모두 옳은 이유가 있 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안랑,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지금은 얼마 되지 않아서 쉽게 잊혀지지 않 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절로 잊혀질 것이예요." 그러나 황보자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오. 나의 이 기억은 바로 죽는 그 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 황보자안은 바로 조금 전에 아평의 무공을 생각하다가 절로 연대부 운(蓮帶浮雲)이라는 경공술 가운데의 절묘한 초식을 펼치게 되었고, 이어 아평이 옆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순간에 대자대비천엽수(大慈大悲千葉手)라 는 금나수법 가운데의 오묘한 초식을 사용하여 그녀를 제압하고 말았으며, 그러는 동안세 자신이 그 무공들을 그야말로 아주 정확하고 명백하게 기억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황보자안이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종류 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일종의 비극이었다. 그는 다소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이제 설사 두 손과 두 발을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그런 무공 들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아, 이는…… 이는 대체 어쩌면 좋을지 모 르겠군." 아평은 그가 갑자기 두 손과 두 발을 잘라낸다는 말을 하자 크게 두려운 마 음이 들어서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내심 생각 했다. (안랑께서 실로 저처럼 심하게 비관을 하고 계시니 나는 아무래도…… 아무 래도 빨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대체…… 대체 그 방법은 뭘 까?) 아평은 일순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그 녀는 황보자안에게 즉시 입을 열었다. "안랑, 나는 전에 무엇인가를 잊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잘 잊혀지고, 그리고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잘 잊혀지지 않았던 경우가 생각나요. 바로…… 바로 그처럼 당신도 일부러 너무 잊으려고 생각 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번 잊지 않으려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 을까요?" 이 아평의 생각은 다소 기발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 황보자안은 내심 생각했다. (나의 머리는 사실 그녀와 같지 않아서 한 번 기억된 것은 잊으려고 해도 혹은 잊지 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그러한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내가 정말로 그 비급 의 내용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내용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나 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게 될 것이며, 오히려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어차피 아무리 해도 잊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아예 잊으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초월하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무공을 배우게 된 것에 대한 불이익은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어차피…… 어차피 세상의 사람들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들이 아닐까? 내가 오늘 하나의 결함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내 마음으로 그것을 초월한다면 그것으로 마음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아아, 그렇군! 그렇다면 나는 이런 괴 로운 생각은 다시 하지 말고 어서 소평과 편안한 마음을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자 황보자안은 아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평, 나는 이제 걱정없이 되었소. 그러니 너무 염려마시오." 아평은 이에 자신의 기발한 생각이 먹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기뻐하며 물었다. "당신은 이제…… 이제 그 무공들을 잊을 수가 있을 것 같은가요?" 황보자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평은 문득 곤혹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이 낭군의 생각에 대해서 도무 지 추측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무공들을 배우시기로 하셨나요?" 황보자안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나는…… 나는 차라리 그 무공들에 관해서 초월하기로 했소." 아평은 순간 두 눈에 기쁨의 빛이 반짝 하고 피어올랐다. 비록 그녀로서는 그 초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이것으로 낭군이 무공에 대한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 같아 서 기쁜 마음이 든 것이었다. "잘됐어요, 잘됐어요! 당신은…… 당신은 일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이는…… 이는 실로 훌륭한 일이예요." 황보자안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소…… 다소 마음이 울적한 것 같군." 아평은 순간 황보자안의 속마음을 눈치채고는 살풋이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당신은 염려마세요. 제가…… 제가 다소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정말로 당신의 손길을 거부한 것 같은가요? 비록…… 비록 저의 의견이 아 무리 그러해도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항상 당신의 뜻을 따를 거예요. 이제는…… 이제는 또한 당신을 피할 수도 없게 되었군요." 황보자안은 아평의 말 가운데에서 마지막 부분을 듣고는 이제 자신의 마음 대로 하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내구 무공을 가지게 된 것은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것을 좋아 해서는 실로…… 실로 광명정대한 군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역시…… 역시 다소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좋겠다.) 생각과 함께 황보자안은 아평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평은 그 가 갑자기 안색을 기이하게 일그리고 있는 것을 다소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역시 방긋 웃으며 그의 품속으로 가볍게 안겨 들었다. 황보자안은 이제 아평을 다시 안게 되자 매우 흐뭇한 심정이 들어서 빨리 침상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 즉시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리게 되었다. 아평이 일순 눈을 휘둥그래 뜨는 순간에 이미 두 사람의 몸은 허공에 솟구친 뒤에 비스듬히 날아서 침상 위에 이르렀고, 이어 부드럽게 침상에 내려앉았다. 아평은 스스로도 고강한 무예를 터득하고 있으면서도 황보자안의 이렇게 갑 자기 놀라워진 무예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그의 품속으로 안겨들었 다. "아주…… 아주 훌륭한 무예예요, 안랑……" 아평은 이어 황보자안의 옷을 모조리 벗겨주고 자신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은 알몸으로 화했는데, 뒤이어 침상 위엣 벌어지는 황홀한 방사는 부 드럽고 조용한 가운데 실내 전체를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황보자안은 원래 무공을 펼친 이후에 스스로 얼굴을 일그려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얼싸안고 지극한 방사의 쾌락을 즐기는 동안에 이미 그의 얼굴은 부드럽고 환하게 펴졌고, 그의 그러한 생 각은 어디로 사라져 버렀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의 두 사람의 방사는 부드럽고 은밀했으며 조용하고 깊은 애정과 쾌락이 꿀물처럼 녹아흘러서 시간의 흐름을 잊게 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다시 몇 시진이 흘러서 밖에 새벽이 지나가고 훤한 아 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 얼싸안은 자세로 곤하게 잠들어 버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정오 무렵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는데, 아평은 역시 자신 이 알고 있던 내공심법에 의해서 운기행공을 했고, 황보자안은 버릇처럼 순 양기공의 방법으로 수련을 하려다가 문득 그것이 지금의 단계에서 좋지 않 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할 수 없이 역근세수진경상의 내공심법으로 바 꾸어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체내에 있는 진기는 기실 매우 부드럽게 순화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여기에다 완벽한 내공심볍을 운기하게 되자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 같은 놀라운 기능을 발휘했다. 황보자안은 갈수록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아주 쉽게 진기를 움직일 수가 있 게 되었으며, 게다가 ㄷ욱 다른 무공들에 대해서 세밀하게 깨달아지는 것을 느끼며 내심으로는 신기하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내공심법에 따라서 일주천을 하고 나서 진기를 단전으로 모으게 되자 황보 자안은 그야말로 심신이 날아갈 듯이 상쾌하며 실제로 얼마든지 허공에 떠 올라서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실로 그의 몸은 지금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는 상태였다. 아평은 이미 운기행공이 끝나고 자신이 알고 있었던 장법과 권법 등을 천천 히 연습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고 자신도 습관처럼 순양검법을 연습해 보려고 하였으 나, 막상 그것을 수련하려고 하자 절로 그러한 기초적인 무공에 대한 결함 들이 느껴지고 또한 지금의 상황에서 그러한 무공들을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을 알게 되어 다른 비급상의 무공을 떠올렸으나 이내 그러한 무공들도 감히 연마하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서 아평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먼 저 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아평은 뒤를 이어 욕실로 들어왔고 두 사람은 함께 의복을 단정하게 걸치고 거실에 나가서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사람의 점원이 달려와서 그들에게 말했다. "저어, 두 분의 일행이신 그 두 분의 도장님들께서 급히 두 분을 오시라고 하십니다. 강적(强敵)이 나타났기 때문에 도장님들께서 직접 여러분을 보호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곤륜파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별채에 소속되어 있는 점원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식사를 거의 마치고 별채로 가볼까 하고 생 각중이었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대체 어떤 강적이 나타났기에 그러는가?" 점원은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괴인이 많은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이내 달려왔기 때문에, 그저…… 그저 도장님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괴인? 그럼 적은 고작 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황보자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문득 아평이 다소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 도장들의 무예로는 이제는 당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당신의 도움 을 받아야만 할걸요. 감히 보호해 주겠다고 오라고 하다니! 만일 강적이 왔 다면 꼭꼭 숨으라고 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 기실 이미 아평의 무공은 그들 춘진자 등의 경지에 육박하고 있었 고, 또한 황보자안의 공력은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상태였다. 그러나 황보자안은 이미 그들을 오랫동안 윗사람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깨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혹시 이쪽에도 강적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여 오라고 하는 것인 데, 그것을 나쁘게만 생각해서야 되겠소?" 아평은 이미 훤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여전히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곳에도 강적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감히 그들이 우리를 도울 수가 있겠어 요? 사실 그들은 일단 당신을 데리고 있어야 명목 있는 싸움이 될 것이고, 또한 만일의 경우에는 당신을 그들에게 넘겨주려는 것이니까 당신을 부르는 것이지요." 황보자안도 내심은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들은 자신의 사형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일행이니 어찌 그렇게 심하게만 생각할 수가 있겠 소? 마침 당신과 나는 무공을…… 무공을 이미 다소 배우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가서 도움을 줄 수가 있게 된다면 그것이…… 그것이 보다 좋 지 않겠소?" 황보자안은 원래는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있었으나 무공의 얘기를 하는 도 중에 그만 다시 마음이 흐트러져서 얼굴이 다소 붉어지고 말을 더듬게 되었 다. 그런데 아평은 곤륜파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시종 불만을 느끼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의 말에 의하면 지금 그곳으로 가서 새로 증가된 무공을 시험해 볼 수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하자 문득 흥미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생각을 바 꾸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는 차라리 그들을 돕기 위해 어서 가보도록 해요." 아평이 앞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나가기 시작하자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그녀 의 뒤를 따랐고, 이어 그들의 신형이 석옥을 벗어나 비조처럼 날아가기 시 작하는 것을 보고 그 점원은 뒤에 쳐져 있다가 문득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아, 그들은 알고 보니 놀라운 무림의 고수들이었구나!" 이 별채에는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에 어울리게 화려한 조각품들과 넓 고 우아한 정원들이 당연히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기실 헌원객점엣 하 나하나 공을 들여서 가꾸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깊은 심혈과 많은 비용들을 들여서 정원을 가꾸어 놓은 헌원객점의 노고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지금 이 순간 그토록 아름답게 가꾸 어진 우아한 저원의 꽃밭과 나무들, 그리고 기암괴석들과 조각품들을 어지 러운 부숴뜨리고 망가뜨려서 마치 허허벌판의 연무장처럼 만들어 가는 일단 의 무리가 있었다. (……!) 황보자안과 아평은 함께 이 부근에 이르렀는데 일순 그 무리가 다름이 아닌 바로 곤륜파의 삼십육천강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소 놀랍고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곤륜파의 서른여섯 명의 이 제자들은 각기 여섯 명씩 조를 이루어 여섯 개의 조가 되어 마치 일부러 꽃밭들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 처럼 찬찬히 좌우로 혹은 둥글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얼핏 보기 에도 어떤 복잡한 현기(玄機)어린 규칙이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그들이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오랫동안 가꾸어 온 헌원객점의 아름 다운 정원이 쑥밭으로 변해가고 있기는 했지만, 모두 서른여섯 명의 중년도 인들이 각기 서리서리 차가운 검기(劍氣)가 일어나는 청강장검을 휘드르며 오후의 햇살 아래 그 찬연한 광채로 눈을 부시게 하는 광경은 실로 어떤 의 미에서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파괴한 보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는 멋진 것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황보자안이 자세히 보니 그 화려한 검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검진(劍 陣)의 중앙의 위치를 차지한 채 전체의 진을 지휘하고 있는 출진자의 모습 을 볼 수가 있었다. (아! 이것은…… 이것은 바로 그 비급책에 나와 있던 천강북두(天 北斗)의 심오한 진법이로구나!) 원래 소림사에는 백팔나한진이라는 상상불허의 놀라운 진법이 있었는데, 역 시 그런만큼 역근세수진경상에는 어떤 진법에 관한 역리(易理)와 진기, 인 성(人性)의 흐름 등에 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천강북두의 진법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었 는데, 실은 이것은 도가에서 성행하는 절기였다. 황보자안은 비로소 곤륜파의 이 제자들이 어째서 삼십육천강이라고 불리우 게 되었는가를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 서른여섯 명의 제자들은 천 강북두의 진법을 전개할 수 있도록 곤륜파에서 엄선한 요원들이었던 것이었 다. 곤륜파에서는 원래 당금의 무림의 득세를 의식하여 자신들의 최대의 무기라 고 할 수가 있는 이 천강북두의 진을 가지고 중원에 나왔던 것이었다. 이 천강북두의 진법은 비록 불가해의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백팔나한 진에는 비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나름대로 무서운 능력과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진법을 구성하는 요원들의 능력은 최소한 공력이 일갑자 수준에 이르 러야 하며, 그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하나의 조(組)는 마치 여섯 명의 공력 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 같은 가공할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천강북두진의 한 조에 속해 있는 여섯 명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법칙에 의거하여 장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강하 게 보이지 않지만, 일단 유사시에 그 중의 한 사람의 장검이 적과 부딪쳤을 경우에는 그 장검에는 여섯 명의 공력, 무려 육갑자에 해당하는 무서운 힘 이 한꺼번에 발출되어 적을 일거에 제압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 은 실로 이 진법이 여섯 명의 사람들의 의념과 진기가 하나로 흐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한 조의 사람들이 여섯 명이지만 원래 이 진법이 작은 천강북 두의 진으로 펼쳐질 때에는 중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더 늘게 되어서 모두 일곱 명이다. 지금은 여섯 개의 천강북두의 진이 다시 하나의 커다란 천강북두진을 형성 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그 힘이 엄청나게 증가되어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 의 일이었다. 이런 깊은 현기가 내포되어 있는 패도적인 진법은 그 위력이 막강한 대신에 나름대로의 어쩔 수가 없는 결점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한 그 진법을 시전 하는 사람들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 위력이 배가되기도 하고 결점이 늘어나 기도 하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서 작은 천강북두진의 이론에 의하면 대천강 북두진의 인원들은 하나같이 서른여섯 갑자에 해당되는 힘을 발휘할 수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그들 요원들의 신체가 그와 같은 공력을 수용할 수 가 없으므로 진짜 위력은 소천강북두진의 위력과 비슷하다는 것이지만, 원 래가 이 진법은 곤륜파에서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가공할 위 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파의 존망을 결정하게 되는 중대사가 발생하였을 경우에야 비로 소 사용을 고려학 되는 것이었는데, 지금 황보자안이 바라보니 그 진법의 가운데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은 겨우 단 한 사람에 불과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문득 알리러 온 점원의 말을 상기하고 내심 생각했다. (바로 저 사람이 침입한 강적이라는 말인가?) 진법의 변화에 대해서 거의 훤하게 알게 된 황보자안이었지만 지금 장내의 상황은 그가 보기에도 이해할 수가 없을 만큼 괴이했다. 청강북두진의 막강한 위력에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붉은 머리에 붉은 얼굴, 붉은 옷을 걸치고 있는 커다란 키의 우람한 괴인(怪人)이었는데, 우 선 그 사람은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이 괴이하고 상 궤를 크게 벗어나는 점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원래 지금 곤륜파의 삼십육천강에 의해서 펼쳐지고 있는 천강북두의 진법은 그들 요원들의 공력이 모두가 각기 이갑자의 수준에 올라 있는 관계로 그야 말로 위력이 극도에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괴인은 전혀 그런 것을 상 관하지 않았다. 황보자안은 이미 천강북두진의 결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일일이 뇌리에 그리고 있었는데, 괴인은 그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고, 그 진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렇 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헌데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괴인이 아무렇게나 걸음을 옮겨서 마침내 천강 북두진의 힘과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였다. <제6권 끝> --계속-- 번호:148/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6 길이:304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2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2장. 천의무봉(天衣無縫) 설사 황보자안처럼 사갑자의 공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만일 그 강한 힘과 부딪치게 되면 당하는 것은 바로 황보자안의 쪽일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순간 괴인은 다가오는 삼십육천강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한 손으로 집어서 밖으로 내던지는데, 조금도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무슨 특별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다른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곤륜파의 제자들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진 법의 능력도 발휘되지 못한 채 마치 거짓말처럼 나가떨어지는 광경은 실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의 곤륜파의 천강북두진은 요란하고 화려하 게 보이고 있지만, 기실은 너무도 형편없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괴인은 그저 주위를 슬슬 산보하듯이 걷고 있다가 가끔씩 제자들을 밖으로 집어던지고 있었는데, 실로 이와 같이 천강북두진에 무력한 치명적인 결함 이 있는 것이라면 무학의 이론은 어딘가 재정비되어야 할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내심 크게 어리둥절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별채의 바로 앞에서 장내의 이와 같은 광경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현황 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장문사형,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황보자안이 아평을 대동하고 그의 앞으로 걸어가자 현황자는 이쪽으로 고개 를 돌리고는 입가에 문득 씁쓰레한 웃음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음, 자네가 오는가?" 아평도 황보자안의 입장을 생각해서 현황자를 향해 예를 표해 보냈는데, 현 황자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다른 무공비급을 보았다는 말을 하기가 곤란하여 은근히 돌려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현황자의 주위에는 예의 그 두 명의 삼대제자가 묵묵히 시립하고 서 있는 상태였다. "지금 저 사람을 상대로 진법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까?" 현황자는 지금 제자들을 지휘하며 이마에 식은땀을 줄줄이 흘리고 있는 출 진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렇네. 그런데 상황이 아주 좋지 않군." 황보자안이 보기에는 상황이 그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의 절망 적인 상태였다. 괴인은 그리 악의가 없는 모양인지 제자들을 그저 집어던지 기만 할 뿐 해를 끼치게 하지는 않고 있었는데, 비록 그가 아무런 힘도 가 하지 않고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제자들은 일단 진법에서 벗어나게 되면 의념이 크게 흐트러지게 되고 기혈이 들끓어서 내상을 입게 되는 것이 었다. 비록 밖에 나가떨어진 제자들이 급히 다시 몸을 일으켜서 진법을 다 시 이루기는 하지만, 이제 모든 제자들이 내상을 입게 될 거슨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이라도 만일 저 괴인이 크게 성을 내어서 제자들을 하 나씩 제거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대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황보자안이 다시 물었다. "저 사람의 무공은 상당히 높은 것입니까?" 현황자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렇네. 원래 우리는 저 천강대라검진을 사용하여 저 자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네를 부른 것이었네. 만일 다른 강적들이 자네를 찾아 가면 자네가 곤란해 질 것을 염려한 것이지. 물론 자네는 그 심낭자를 믿고 있을 것이지만." 현황자는 아직 심황이 떠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말끝을 흐 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자네를 부르지 않을 것을 그랬네." 이때는 어찌된 셈인지 천강북두검진이 거의 제기능을 잃고 있어서 스스로 보호해야 할 출진자가 어이없게도 괴인의 앞으로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었 다. 출진자는 일순 크게 놀라서 번쩍 신형을 뽑아 올려 뒷자리로 물러나기 는 했지만, 금새 안색이 백지장보다도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장 내의 상황은 보기보다 훨씬 악전고투인 모양이었다. 황보자안은 출진자가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 며 문득 의기가 일어서 말했다. "하지만 저도 사실은 곤륜파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러한 본파의 위 기를 보고 혼자만 살겠다고 숨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침 저는 요 며칠 동안 무공을…… 무공을 다소 배우게 되어서 한 번…… 한 번 대결해 보고 싶었던 참입니다." 황보자안은 스스로 무공을 배웠다는 얘기를 하게 되어서 절로 얼굴이 벌개 졌다. 그러나 그가 대결을 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일 뿐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 현황자는 황보자안의 말을 듣고 다만 그의 얼굴을 한 차례 돌아보았을 뿐 크게 책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음, 자네의 무공이 증진되었다니 잘된 일이로군. 그러나 자네는 황보가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인데 어떻게 이런 위험한 일을 당하게 할 수가 있겠는 가?" 이때 말을 하는 현황자의 눈빛은 일순 기이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마침 감히 그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없어서 시선을 장내로 돌리고 있다가 다시 괴인의 몸이 기이하게도 출진자의 앞으로 다가들어 그 의 정수리를 손으로 내리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절로 아, 하는 경악성을 발 했다. 출진자는 그 순간에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들고 있는 장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멍하니 괴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고 당장에 달려가서 출진자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었지 만 지금은 이미 시기적으로 늦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괴인은 마악 출진자의 정수리를 오른손으로 내리 쳐서 그것을 마치 두부처럼 으스러뜨리려고 하다가 문득 이쪽을 향해 시선 을 돌리더니 하던 행동을 하슬아슬하게 멈추고 출진자르 내버려둔 채 번쩍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 황보자안은 그만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지금 그가 열심히 시선을 집 중해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괴인이 아슬아슬하게 출진자의 정수리를 내리치 지 않고 손을 거두어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 실로 괴인으 신법은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마치 그곳에서 사라졌는데 이미 다음 순 간에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심황의 놀라운 무공을 목겼했던 적이 있었지만 실로 이처 럼 기이한 신법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괴인은 멀리서 본 그대로 얼굴이 불그레하여 마치 화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두 눈에서는 역시 붉은 기운이 빛나고 있었고, 얼굴은 동자의 얼굴처럼 해맑으면서도 또한 어떤 연륜을 느끼게 만들었다. 실로 그 런 용모는 보는 사람에게 괴이한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 혀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황보가의 핏줄이 누구냐?" 황보자안은 일시에 귀를 멍멍하게 만들고 정신을 뒤흔들어 놓는 괴인의 그 와 같은 음성을 듣고 내심 놀라 생각했다. (그럼, 그가 장문사형의 말을 들었다는 말인가?) 현황자는 그와 나직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고 이 괴인은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의 말을 듣고 날아온 것인지 기이 하기 짝이 없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어쨌든간에 오늘 최대의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평이 즉시 날라서 황보자안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소리쳤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그리고 어째서 우리 안랑을 찾고 있는 거죠?" 괴인은 이미 아평의 행동과 말투에서 황보자안이 바로 황보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흐흐흐……" 괴인은 입 속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괴이한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황보자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아평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태도였다. 아평은 이에 이 괴인을 흉수로 단정을 하고 즉시 숙녀검을 휘둘러 자신이 알고 있는 달마삼검의 일초에서 몇 가지의 검식을 빠르게 전개하여 덮쳐갔 다. 이 검식들은 바로 놀랍게도 난주성의 주루에서 대한들을 두 번이나 제 압했으며, 뒤에 병기점의 주인마저 제압했던 그 신기한 초식들이었다. 그것 들은 원래 달마삼검의 가장 기본적인 검식들로서 이제 그녀가 내공이 크게 증가된 상황에서 여러 가지 검식을 비급에 나와 있는 대로 복합시켜서 발출 해 내자 실로 무궁한 위력을 자아냈고, 보검인 숙녀검에서는 싸늘한 냉광과 함께 소름끼치는 검기가 한 자 반이나 뻗어나왔다. 원래 아평은 조금 전에 괴인의 놀라운 무공을 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최선 을 다해서 공격한 것이었고, 필히 괴인이 이를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로 어처구니가 없고 믿을 수가 없는 결과가 나타났다. 괴인은 아 평이 무서운 보검인 숙녀검을 휘둘러서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는데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아평은 이것이 필시 어떤 술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고 계속 장검에 진기를 강하게 주입시켜 찔러 들어갔는데, 막상 그녀의 눈부신 보검의 검날이 괴인의 가슴에 부딪치는 순간, 쾅! 마치 벽력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폭음이 일어나며 아평의 몸이 뒤로 튕겨지 듯 훌훌 날려가는 듯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를 보고 절로 크게 놀라서 스스로 무의식중에 신법을 발휘하 여 아평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안전하게 받아주었다. 기이하게도 이때 아평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채 파리해져 있었고, 희미한 숨결을 불어 내며 혼절해 있었는데, 황보자안이 놀라 진기를 주입시켜 주자 그녀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의식을 차렸다. 보아하니 그다지 내상을 입은 것 같 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평은 마악 다시 몸을 땅에 세우고 괴인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려고 하다가 문득 몸을 멈췌세우고 아, 하는 경악성을 발했다. 황보자안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서 바라보니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녀가 들 고 있는 숙녀검이 검신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오직 그녀가 잡고 있는 자루뿐이었다. 시선을 들어 전면을 보니 괴인의 앞쪽에는 무수한 검 조각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바로 다름 아닌 숙녀검의 잔 해인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이처럼 천하의 신병이기라고 믿고 있었던 숙녀검이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리자 내심 크게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오히려 숙녀검에 맞은 괴인의 가슴은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은 채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황보자안은 이것을 보자 혹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숙녀검이 이미 오랫동안 사용하여 속으로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가 우연히 부서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몸이 동근철골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은 오히려 천하의 보검인 숙녀검이 부서지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 다. "……!" 이때 아평은 멍하니 자신의 손에 자루만 남긴 숙녀검을 보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고 즉시 자신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군자검을 뽑아서 그녀의 손에 대신 쥐어 주었다. "소평, 이것을 쓰도록 하시오." 아평도 이 순간은 자신의 숙녀검이 어째서 망가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 을 짓고 있다가 즉시 황보자안의 장검을 받아들고는 괴인을 향해 덮쳐갔다. 그녀는 조금 전에 다소 쓴맛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녀가 아 직 시전해 보지 않은 달마삼검의 절초를 사용하여 허공에서부터 아래로 내 리누르듯이 공격해 들어갔다. 쌕쌕쌕…… 일시 그녀의 장검에서 뻗어나온 싸늘한 검기가 사방 삼장 방원을 완전히 뒤 덮으며 하나의 엄밀한 검막처럼 괴인의 면전으로 쇄도해 들었다. 이 순간 아평의 장검은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그녀 의 장검이 수십 개로 불어나 괴인의 얼굴을 비롯한 요소요소의 급소를 공격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뒤에서 이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평의 검술이 이미 이 정도에 도달했음을 알고 내심 찬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괴인은 그런 와중에서도 역시 괴이한 시선으로 황보자안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순 아평의 장검이 눈앞을 가리게 되자 오른손을 들어 서 마치 귀찮다는 듯이 가볍게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그와 같은 광경 은 얼마 전에 그가 천강북두의 진법을 깨던 수법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았 다. 황보자안은 이것을 보고 일순 뭔가 잘못되는 것 같은 예감을 느끼고 안색이 일변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신기에 가까우리만큼 현란하던 아평의 검막이 일순 마 치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그녀의 장검이 어느새 괴인의 손아귀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아평이 아주 노력을 기울여서 자신의 장검을 괴인이 아무렇게 나 휘두르는 손아귀에 집어넣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실로 그럴 리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괴인이 지금 잡고 있는 것은 군자검의 손잡이가 아니라 검신 옆부분의 날이 예리한 부분이었는데, 다음 순간 어이없게도 괴 인의 손에 들려 있던 부분이 그의 손을 베기는커녕 오히려 아까의 숙녀검처 럼 형편없이 부서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이 군자검이 본래는 아주 낡은 형편없는 장검이어서 그가 단지 가볍게 쥐기만 했는데도 부서져 버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실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며 두 개의 신병이기가 공교롭게도 똑같이 낡아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비로 소 이 괴인의 능력이 생각보다도 더욱 거대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알 게 되었다. "……!" 아평은 이 순간 역시 심하게 놀라고 있었는데, 안색이 파리히져 있었고 마 치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순식간에 천하의 보기 드 문 두 개의 신병이기가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사실보다도, 이제 이 괴인의 능력이 이토록 무서우니 황보자안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평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품속에서 한 자루의 작운 칼을 뽑아들더니 재차 괴인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황보자안이 그녀 에게 주었던 칠성보도였는데, 그녀의 이와 같은 행동은 사랑하는 정랑을 위 해서 목숨이라도 버리려는 무모한 공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괴인은 문득 황보자안의 앞으로 서서히 걸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평은 이미 어떠한 검법이라도 이 괴인에게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직 보도에 내공을 주입시켜 최대한 빠른 속도로 괴인의 가슴을 향 해 찔러 들어갔다. 쨍! 아주 극도로 예리한 소음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아평의 몸은 다시 튕겨져서 뒤로 훌훌 날려져 갔다. 역시 괴인의 가슴 부위는 옷깃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는데, 다행히도 아 평은 이 순간에 스스로의 심맥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혼절하지 않 고 허공을 빙글빙글 돌아서 지면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리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자신의 보도를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 다. 숙녀검이나 군자검은 대번에 부서지고 말았지만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칠성보도는 아직 조금의 흠집도 없이 역시 그 찬연한 한광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었다. 괴인도 이 순간은 고개를 돌려 아평이 들고 있는 칠성보도를 바라보고 있었 는데, 곧장 그의 입 속에서 예의 그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좋은 칼이로구나!" 그렇다. 실로 좋은 장수는 커다란 전쟁을 치루어 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가 있다는 말이 있는 것과도 같이 평소에는 군자검, 숙녀검 등과 서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을 것 같던 이 칠성보도는 드디어 아주 강력한 적을 만나게 되 자 드디어 그 앞서의 두 자루의 보검과 차이점을 드러내고 오직 그 자신만 이 훌륭한 보검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평은 실로 막막한 상태였으나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고 있던 칠성보도가 이토록 건재하자 다소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칠성보도를 휘두르며 괴인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려고 하기도 전에 이미 괴인의 신형은 유령같이 움직이며 황보자안의 몸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아평은 이때 황보자안과 다소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일순 경각을 하 고 황보자안을 구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시기적으로 늦어 있었다. (……!) 황보자안은 이미 괴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와 같은 괴인의 신법 을 보고는 그것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떠한 이치의 신법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가 감탄을 하며 읽은 바가 있는 역근세수진경상의 이론이나 신체적인 상식을 완전히 무시하여 마치 사람의 몸이 형체도 없고 두 개의 공간에 동시에 있을 수가 있다는 말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이 불가 능한 현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괴인의 몸은 미처 그의 면전에 도달하기 전에 황보자안의 신형은 이 미 그가 선명하게 알고 있는 비급상의 내용을 따라서 미끄러지듯이 무의식 중에 움직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보통사람들로서는 평생 동안 배워도 터득하기가 어려운 역 근세수진경상의 모든 이치를 훤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그가 수십 년간이나 익숙하게 배워온 솜씨와도 같았고,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저 절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어떠한 정신적인 장애도 극복하고 있었다. 마치 무 아지경이라고나 할까? 괴인은 손을 내밀어 황보자안의 몸을 잡을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순 황보자안의 하체가 기이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벌써 그의 신형이 저 만큼 멀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놀라며 부르짖었다. "놀라운 무공이구나!" 칠성보도에 대해서 감탄을 터뜨린 이후 괴인이 놀란 음성을 발하기는 이번 이 두 번째였다. 그러나 괴인의 음성이 미처 다른 사람들의 귓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그 의 신형은 황보자안의 면전에 다시 육박해 있었으며, 이번에는 황보자안이 달아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위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떠한 인간이라도 그와 같은 수준의 무학으로는 도저 히 이번의 괴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기실 황보자안의 무공은 어떤 사고능력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무공은 생각에 의해 터득된 것이 아니라 마치 맑은 물 속에 비추듯이 절로 선명하게 알게 된 것이므로 생각과 의지를 초월하여 본 능에 가까웠고 완전히 무의식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펼쳐지는 완전한 무 예, 이상적인 무예였다. 바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나 할까? 비록 황보자안의 지금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괴인의 적수가 될 수는 없는 일 이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괴인의 예상을 뒤엎고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 위로 달아났다. 황보자안의 신형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순간 어느덧 뒤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한 괴인은 일순 두 눈에서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붉은 광채를 번 쩍 내뿜었다. 그것은 그가 크게 노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황보자안은 실로 이처럼 눈에서 불길을 토하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크게 놀랐으나 역시 그의 심상은 맑고 고요했다. 괴인의 신형은 어느새 한 덩어리의 붉은 구름처럼 허공에 떠올라 있었는데, 점차 그 붉은 기운이 크게 확산되면서 황보자안이 피할 수 있는 모든 가능 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실로 황보자안은 신법과 보법의 능란함으로 괴인의 손속을 피하고 있는 상 황이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괴인의 신법의 빠르기를 당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그가 땅 속으로 사라지는 재주가 없는 한은 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로 역근세수진경상에는 사람이 땅 속으로 귀신같 이 사라지는 것에 관한 법문은 다만 한 구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제 황보자안은 갑자기 무슨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은 이 괴인에 게 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마치 그러한 것을 입증이라도 해주듯이 황보자안의 신형은 순간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게 되었고, 일순지간에 괴인의 몸에서 피어나온 붉은 기 운이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이글거리며 황보자안의 전신을 빠르게 뒤덮었 다. 바로 그 순간에 황보자안의 신형이 불가사의하게도 흔적없이 십 장이나 밖 으로 이동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소림사의 무공 중의 하나인 금강부동신 법(金剛不動身法)이 극도로 전개된 불가사의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실 최 후의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펼쳐진 것이었고, 순간적으로 괴인의 추격 을 받게 되었다. 황보자안의 몸이 마악 허공을 날아가고 있는 순간에 괴인의 신형이 뒤따르 고 있었고, 이어 황보자안의 몸이 아직 지면에 내려서지도 않았는데 괴인의 신형은 그의 면전에 도달하여 시뻘건 쌍장을 귀신처럼 뻗어오고 있었다. 비록 황보자안의 몸이 얼마든지 허공에 떠 있을 수가 있다고는 해도 역시 지면에 있을 때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보자안은 이제 정말로 도저히 괴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계속-- 번호:149/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7 길이:344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3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3장. 노을 광채(光彩)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웬일인지 괴인의 귀신같이 빠르게 뻗어오던 두 개의 손이 황보자안의 몸에 이르기도 전에 멈칫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짧은 순간의 멈칫거림은 충분히 황보자안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내 그의 신 형이 다시 저만큼이나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괴인은 느닷없이 황보자안을 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서는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무공이다. 실로 놀라운 무공이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의 음성에 서역 지방의 사투리가 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까지는 그 음성이 주는 공포감과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기운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괴인이 쳐다보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쪽에 노을빛의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노을빛은 대체 언제 생겨난 것인가? 그리고 저 괴인은 갑자기 그것을 보고 놀란 것 같은데,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미처 더 이상의 생각을 굴릴 여유가 없었다. 멍하니 중얼 거리고 있는 듯하던 괴인의 신형이 어느새 반대편의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더니, 이윽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 가! 사람들은 이에 조금 전의 일을 완전히 잊고 크게 놀라서 일시간에 정신이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래 지상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것은 시선을 방해하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웬만큼의 빠른 신법을 가진 사람들은 능히 할 수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 다. 하지만 높은 하늘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고 또한 넓기가 한이 없을 정 도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다니, 이것을 보고 어찌 놀라고 멍해 지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혹시 정말로 귀신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 을 느끼며 괴인이 서 있던 곳을 계속 눈을 부비며 바라보기도 했다. 어쨌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공포스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괴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모든 사람들은 새로 생명을 되찾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 것이며 안심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괴인의 존재 자체가 워낙 귀신과도 같았기 때문에 감히 나서서 의문을 해결하려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소간의 공포스러운 기분 속에서 치묵을 유지하고 있을 때, 문득 아평의 맑고 고운 음성이 장내의 침묵을 일시에 깨 뜨렸다. "아, 언니, 언니께서 오셨군요." 기실 아평은 아까부터 황보자안을 향해 덮쳐드는 괴인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자를 아갈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황보자안 이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즉시 다가가서 그를 보살피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신형을 움직이는 순간 문득 저쪽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에 두 사람의 곁을 떠나갔던 심황이었는데, 심황의 안 색이 유달리 초췌해 보였기 때문에 아평은 먼저 그쪽으로 소리치며 달려가 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공포스러운 존재인 괴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아평이 소리를 질러서 침묵을 깨고 생각을 방해하는 바람에 이를 은근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심황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내 마음을 바꾸어서 그녀를 바라보며 괴인의 공포 스러운 기억을 잊으려고 했다. 그 괴인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마치 그들의 꿈속에서라도 다시 나타나서 괴롭힐 것 같은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심황은 먼저 한쪽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는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본 다음 에 웃으며 아평에게 마주 다가가서 손을 잡았다. "그 동안 잘 있었어?" 아평은 역시 반갑게 그녀의 손을 잡다가 문득 그녀의 안색이 지극히 초췌하 고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의아해하여 물었다. "언니, 혹시 어디 아프신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심황은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아니야. 나는 괜찮은 편이야." (……?) 아평은 심황의 말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어리둥절해졌다. 그저 괜찮 다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편이라는 것은 그럼 당연히 몸이 좋지 않은 상태 여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아평이 어리둥절해 하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심황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끌며 황보자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걱정하지마, 평동생." 심황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체내의 진기가 거의 탈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평은 느낄 수가 있었다. "언니, 대체 어째서 몸이 이렇게 되셨죠? 혹시 어떤 강적을 만나셨나요?" 심황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강적은 그대들이 만난 것이 아니야?" (……?) 아평은 심황의 말뜻을 일시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러나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비로소 다소 안심이 되 었다. 이때 황보자안은 조용히 서서 심황이 아평과 함께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라 보다가 문득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갔던 일은 잘 되었소?" 심황은 만면에 고운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마침 저는 운이 좋게도 빨리 선조를 뵈올 수가 있었어요. 선조께서는 반드시 모용낭자가 무사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 고……" 심황은 이어 안색을 다소 붉히며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계속했 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위험해 질것이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묘방을 가르쳐 주셨어요." 아평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심황이 선조에게 황보자안과의 관 계에 대해서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안색을 붉히는 것인가 하고 생각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보자안을 바라보니 기이하게도 지금 황 보자안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차로 안색이 창백해져 가 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창백한 얼굴로 웃으며 심황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선조께서 주신 그 묘방은 실로 훌륭한 것이었소." 아평은 그런 그의 말을 들었으나 오직 그의 몸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도무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평은 아까 황보자 안이 거의 무사하게 괴인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무사할 줄 알 았던 그가 실은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그것이 괴인에게 당했기 때문인 줄 알고 크게 놀라서 소리쳐 물었다. "안랑, 안랑! 당신의 몸이 왜 그러지요? 혹시 심하게 다쳤나요?" 아평은 즉시 두 눈에서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것이 만일 황보자안이 이 일 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즉시 그녀도 그를 따라서 죽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소평, 나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오." 아평은 이에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믿기지 않아서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의 얼굴은 그렇게 파랗게 질리렸나요? 그리고…… 그 리고 당신의 몸은 매우 허약해 보이는데 그것은…… 그것은 대체 어찌된 일 이죠?" 아평은 질문을 던지다 말고 문득 옆의 심황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그 녀의 이 허약한 증세가 지금의 황보자안의 증세와 아주 비슷한 것을 깨닫고 내심 크게 의아해져서 생각했다. (아니, 어째서 두 사람은 이제야 만나는 것인데도 이렇게 증세가 같은 것일 까? 혹시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능히 감염될 수 있는 무서운 전염병이 라도 되는 것일까?) 아평은 다시 오직 자신만이 그러한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 다. 설사 지옥으로 들어가거나 도산검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 녀는 황보자안과 함께할 수가 있다면 모든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황보자안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황과 나의 증세가 지금 비슷한데 당신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소?" 아평은 그렇지 않아도 그런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 즉시 놀라 서 소리쳐 되물었다. "그럼 정말로 두…… 두 분은 그와 같은 악독한 병에 걸리셨나요? 그렇다면 어서…… 어서 저에게도 그것을 조금 나누어 주세요." 아평은 만일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두 사람보다 늦게 죽게 된다면 그것은 가 슴 저리도록 괴로운 일이며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절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와 소황은 그대의 짐작처럼 어떤 병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니라오. 다만 두 사람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 소황, 그대가 한 번 말해 보구 려." 말과 함께 심황의 얼굴을 바라보자 심황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의 선조의 묘방이 비록 신묘한 것이었다고 해도 당신과 평동생의 무공이 갑자기 그렇게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시기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거예요. 특히 당신의 무공은 실로…… 실로 그 사람의 경악을 사게 만들었 어요." 아평은 이 두 사람이 왠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동안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럼 두 분은 정말로 어떤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요?" 황보자안은 그녀가 비로소 조금 안심을 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문득 장난기 가 발동하여 입을 열었다. "소평은 아무래도 우리가 어떤 악독한 병에 걸리기를 바라는 모양이지? 그 리고 설사 지옥에라도 쫓아올 모양이고. 하하, 소평, 그대는 그야말로 나의 가장 아름다운 보배덩어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군." 아평은 황보자안이 그녀를 이렇게 장난기섞인 말투로 놀려대는 것을 보고 일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것을 보고 심황은 더 이상 아평이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웃 으며 그녀를 향해 말해 주었다. "평동생, 나와 안랑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똑같이 기력이 탈진되어 버린 거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힘이 없는 것이지." 아평은 부끄러운 가운데에서도 순간 아차, 하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아, 그래서 안랑은 나에게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라고 했었구나. 아, 나는 어째서 그런 것을 미리 알지 못했을까?) 아평은 이어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두 사람은 함께 이렇게 기력이 탈진되어 버린 거지?) 아평의 의문을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심황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나의 선조께서는 원래 자신이 모용낭자를 구하러 가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 만 다른 사람이 하나 있어서 필시 안랑을 납치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고 하셨어. 그는 모용낭자 등이 실패를 했기 때문에 한 번 직접 나서 보려는 것이겠지." 아평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언니, 그 사람은 대체 누구죠?" 심황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해로공(海老公) 적용통치(赤容通治)." (……?) 아평은 잠시 어리둥절 여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한 가지 기억 이 뇌리에 떠올라서 소리쳐 물었다. "그는…… 그는 혹시 언니가 얼마 전에 얘기해 주었던 그 세외팔선 가운데 의 한 사람이 아닌가요?" 심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동생은 매우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로군. 그래, 그는 바로 사황의 하나이 며, 일명 장황이고 성숙해에서 일품당을 거느리고 있는 세외팔선의 한 사람 이지." 이때 장내의 사람들은 부근에 모여 있었는데다가 방금 전에 아평이 세외팔 선의 얘기를 소리쳐서 말했기 때문에 자연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멀리 가 지 않게 되었다. 심황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사황 가운데에서 수라노자(修羅老子) 구양극서(歐陽克西)는 우두머리격인 인물이니 직접 이러한 일에 나서지 않을 것이고, 두 번째로 만화동모(萬花 童 ) 운산산(雲珊珊)은 특별한 오기를 가지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역시 남의 지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현현괴노(玄玄魁老) 모용술계(慕 容術桂)는 나의 선조께서 맡겠다고 하셨으니, 사황 가운데에서는 오직 그 해로공 적용통치만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었지." 아평은 저번에 심황의 얘기 가운데에서 사황이 세외팔선의 사마외도격인 사 람들로 나쁜 생각을 꿈꾸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평은 의아한 점이 있어서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우리 안랑을 노리고 있는 것이죠?" 심황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무슨 안랑께 원수진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안랑의 가문이 천하제일의 부잣집이기 때문에 그곳을 제압해서 천하를 한 번 흔들어 놓자 는 생각이지. 그들은 별로 커다란 집착이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지만, 정 작 당사자들에게는 무서운 위협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 아평은 문득 심황의 얘기 가운데 정파의 기둥이라고 할 수가 있는 무성(武 聖) 천수자(天隨子) 백일맹이 죽었다면 천하에 커다란 위기가 닥칠 수가 있 다고 했던 생각이 나서 혹시 그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물으려다 가 그것은 너무나도 무겁고 깊은 얘기라고 느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묻 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생각을 돌리다가 문득 아, 하는 표정이 되었 다. 아평은 놀라서 물었다. "그럼 혹시…… 혹시 방금 전에 여기에 나타났던 그 괴상한 귀신같은 사람 이 바로…… 바로 그 해로공 모용통치였다는 말인가요?" 아평은 일순 아까는 너무나도 그 괴인에게 심하게 놀랐기 때문에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 크게 떨리고 있었다.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래. 실로 그가 아니면 누구이겠어?" 이때 주위의 사람들은 은근히 모든 행동을 중지한 채 조용히 서서 이들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는데, 마침 아평의 질문을 듣고 놀라다가 심황의 대답을 듣고는 더더욱 놀라서 일시에 안색이 대변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나도 놀라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지 억지로 입을 손으 로 틀어막고 있었다. 아평은 기실 보기보다 심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잠시 후에 마음을 진 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그는 어째서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을까요?" 실로 이와 같은 아평의 질문은 여기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 문사항이었기 때문에 장내는 심황의 대답을 듣기 위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심황은 그러한 주위의 분위기를 의식하고 미소하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 했다. "원래 나의 선조께서는 자신에게 두 개의 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적용 통치가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면 모용낭자가 희생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묘방을 내시게 되었어. 그것은 바로 두 사람 사이의 심리를 기묘하게 이용하는 것으로, 바로 자신의 표기를 나 타내는 것이었지." 아평은 문득 한 가지 일을 생각하고 놀라서 물었다. "그럼…… 그럼 아까 저쪽 하늘에 노을빛이 빛났던 것은 바로…… 바로 그 것이었나요?" 심황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 적용통치는 팔푼 정도는 나의 선조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표기를 보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 아평이 물었다. "그럼 그 선조께서는 이미 이곳을 왔다가 가신 것인가요?" 그러다가 문득 아평은 심황의 선조인 산중노인(山中老人) 심병춘(心炳春)이 만일 이곳에 올 시간이 있었다면, 그럼 묘방도 애써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고 생각을 하고는 안색을 붉히며 역시 ㅅ김황이 그런 표기를 만들었고, 그 리하여 저렇게 몸이 탈진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황은 아평의 마음을 파악한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선조께서는 오시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그것을 나타내게 되었 지. 그런데 실은 예상 외로 내가 이곳에 미처 도착하기 전에 그 적용통치가 벌써 나타나서 안랑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지. 나는 당시 이곳으로 오다가 이것을 발견하고는, 아마 그 적용통치는 안랑의 무예에 크게 놀라서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아, 나는 즉시 뒤로 달려가서 전력을 다해서 선 조의 표기를 만들게 되었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탈진되게 되었던 것이야." 아평은 절로 궁금해져서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적용통치가 속아서 달아난 것인가요?" 심황은 고개를 내저었다. "적용통치는 한 순간에 놀라서 공격을 멈추기는 했지만 이내 그것이 가짜라 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러나 그로 인해 그는 안랑을 공격할 의욕을 상실하 고 말았던 것이야. 우선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 안랑과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공격할 수가 없는 일이고, 또한 이 일은 그리 중대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지. 그들로서는 얼마든지 천하의 다른 부자들을 구할 수가 있는 일이 니까 말이야." 아평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그는 안랑을 그대로 두고 그냥 떠나가 버린 것인가요?"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원래 안랑은 조금 전에 자신의 공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훌륭 한 무공을 펼쳤었기 때무네 스스로 역시 탈진하고 말았던 것이지." 이때 황보자안과 심황의 안색은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아 가는지 혈색이 조 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아까 자신을 공격하던 괴인이 노을빛의 광채를 보고 크게 놀랐 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심황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유추해서 금방 알게 되 었던 것이었다. 아평은 이제서야 황보자안이 어째서 그토록 탈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어 저으기 마음이 편해졌고, 황보자안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밝아졌 다. 그러나 다시 무엇을 생각했는지 아평은 표정이 핼쑥해져서 물었다. "하지만 그 적용통치는 아마도 다시 나타나서 안랑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을 까요?"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는 이미 한 번 실패한 일을 두 번 다시 시도하는 일을 하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은근히 나의 선조께서 안랑을 비호하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굳이 나서려고 하지는 않겠지. 아마도 당분간은 염 려하지 않아도 좋을 거야." 아평은 실로 적용통치마저 두려워 하는 사람이 심황의 선조라는 것을 생각 하자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고, 아울러 오늘의 이 일은 그야말로 공교로 운 우연의 상황이 이루어져 기묘한 심리 속에서 그들이 무사하게 된 것이었 음을 알게 되었다. 아평은 스스로 그와 같은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되 는 절묘한 시간의 배합과 그리고 심리와의 연결을 통해서 그것은 하기 보기 드문 아찔한 광경이었다고 생각했다. 심황은 이어 담담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사태는 전혀 예측불허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나의 선조의 묘 방이 훌륭하다고 해도 안랑의 무공이 그토록 초절해지지 않았었다면 불가능 한 상태였지. 안랑의 무공은 사실 나도 흉내낼 수가 없는 것이었어." 말과 함께 심황은 은근히 여운을 남기면서 황보자안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이때는 황보자안은 충분히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어 있었기 때문에 먼저 한쪽에 제자들과 함께 서 있는 현황자와 출진자를 찾아 가서 인사를 했다. "두 분 사형, 소제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써 주신 데에 대해서 뭐라고 감사 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출진자 등은 이미 심황의 얘기를 듣고 그 괴인이 바로 적용통치였다는 것을 알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실로 자신들이 어이없게 당했던 것은 당연한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심황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가 다시는 자신들을 찾지 않을 것 같아서 저으기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황보자안의 무공이 갑자기 그렇게 높아졌기 때문에 놀라는 한편 다소 불편 한 심사가 되기도 했다. 황보자안은 황보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공력을 높이거나 하는 일은 그리 어 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출진자는 다소 의심의 눈 빛을 빛내며 말했다. "자네는 이제 그토록 무공이 높아졌는데 아직도 우리에게 얻을 것이 있다는 말인가?" 황보자안은 이에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 고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여아저씨가 영약과 비급 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무공이 다소 늘었지만 두 분 사형을 좋아하고 따 르는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형께서 그렇게 저를 생각하신다면 그 것은 실로 섭섭한 일이 되겠습니다." 옆에 있던 현황자가 담담히 웃으며 끼어들었다. "둘째 사형께서는 다소 피곤하셔서 그러는 것이니 자네는 너무 개의하지 말 게." 이때 심황이 앞으로 다가와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제가 두 분의 허락도 없이 다녀왔군요.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이 출진자와 현황자는 원래 심황을 자신들보다 높은 배분으로 보고 있는 상 태였기 때문에 즉시 정중하게 대꾸했다. "천만의 말씀을. 심낭자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 되는 것 이지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오늘은 심낭자의 선조께 서 귀한 도움을 주셔서 우리가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 커다란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출진자 등은 비단 눈앞의 심황뿐만 아니라 그 뒤의 배경인 산중노인을 매우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그녀에게 잘 대해줌으 로써 장차의 곤륜파의 앞날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천만의 말씀이예요." 심황은 이미 그러한 그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히 웃으며 그 렇게 겸사의 말을 하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이에 황보자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내상을 입었고, 또한 출진자 등도 쉬 고 싶어하는 눈치이기 때문에 마침 자신도 쉴 겸해서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했다. "두 분 사형,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 침 일찍이 와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출진자는 말이 없었으나 현황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우리들도 모두 쉬어야 할 테니, 그만 가 보게." 출진자 등은 비록 황보자안에게 심하게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이 무공 에 관한 것은 사실 그리 죄가 될 수가 없는 것이었고, 다소 못마땅하기는 해도 심황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황보자안에게 기분나쁜 내색 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역시 황보자안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보자안과 심황, 아평이 함께 석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즉시 주위를 정돈시키고 제자들의 내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계속-- 번호:150/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7 길이:351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4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4장. 생사현관(生死玄關) 아평은 세 사람이 되어 함께 석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문득 자신이 아직도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심황에게 물어 보았다. "언니, 대체 그 적용통치의 무공은 어느 정도인가요? 저는 군자검과 숙녀검 으로 그의 몸을 찔렀는데도 오히려 그 두 개의 보검만 부서져 버리고 말았 어요." 이어 당시에 일어났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자, 심황은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기실 그녀는 아평이 적용통치에게 달려들고 있었을 때에는 아직 장내에 도착하지 않았었다. "그 적용통치뿐만 아니라 세외팔선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완전한 금강불괴 (金剛不壞)의 몸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지. 그들의 몸에는 진기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두 개의 보검이 부서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야. 그러나 다만 나중의 그 칠성보도가 부서지지 않은 것은 실로 그 병기야 말로 수백만에 한 개나 나올까 말까 한 신병이기이기 때문일 거야." 아평은 당시 적용통치가 칠성보도를 가리켜 훌륭한 칼이라고 했던 것을 뇌 리에 떠올리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 적용통치의 무공은 정말 이상했어요. 그는 사람임에 분명한데 어떻게 그런 무공을 펼칠 수가 있는 거죠?" 아평은 적용통치가 곤륜파의 진법을 아주 우습게 파괴하던 것과 이어 황보 자안을 추격해 가던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뇌리에 다시 떠올리고 안색이 다 소 창백해졌다. 심황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사람의 무공은 대개 사갑자의 경지에 도달하면 전신의 대경맥이 두루 통하 게 되고 호신강기가 절로 생겨나서 몸을 보호하게 되며 진기가 그야말로 형 통하여 마음먹은 대로 그것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 따라서 이 이 후의 무공을 가리켜 심검(心劍)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심검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가 있을 만큼 고도의 상승무예이기 때문이야.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내공이 십갑자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진전은 바라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 아평은 일순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물었다. "내공이 그렇게 높아질 수도 있나요?" 심황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고지식하게 육십년을 수련한다면 고작 일갑자의 공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천지간에는 정기를 갈무리하고 자라나는 영약 이나 내공에 도움이 되는 영물의 내단 같은 것들도 있고, 하물며 여러 가지 약초를 잘 배합하여 그 공력을 높일 수도 있는 것이지. 혹은 특수한 정기가 흐르는 지하에서 내공을 흡수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많은 방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히 그와 같은 내공을 터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야. 간 단하게 예를 들어서 평동생도 이번에 비상하게 내공이 높아진 것이 아니야? 무림인들은 한평생 이 내공을 높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만큼 그들에 게 어떤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 아평은 심황이 자신의 내공이 높아진 것을 이미 알아보고 있었음을 알고 절 로 미안한 마음에 안색이 붉어졌다. "그, 그렇겠군요." 심황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천하에는 아주 예외적인 사람들이 가끔씩 있어서 그 절대적인 인간 한계의 관문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초인(超人)이나 선인(仙人)의 반열에 들 어서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 아평은 더욱 놀라 말했다. "그럼 그들의 내공은 십갑자를 넘어선다는 말인가요?" 아평은 이미 십갑자의 내공이라는 것도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실은 그보다도 더욱 공력이 높아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황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른 바 대주천(大周天)을 완성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사마저 초월하는 관문이라고 하여 생사현관 (生死玄關)이라고도 하지. 하지만 이것은 성공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우리 가문에서도 오직 선조만이 성공하신 채 살아계실 뿐이야." 아평은 다시 물었다. "그럼 언니의 선조께서는 바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로군요."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나이는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지 나도 모르는걸! 이 생사현관에 도전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할 수가 있지만, 다행히도 그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그때부터 작은 아기와 같이 생긴 원영(元孀)이라는 진기의 영물(靈物)을 키우게 되는 것이지. 이때부터는 그 원영의 힘으로 내 력을 마치 빛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발출할 수가 있게 되는데, 그것을 일 명 광검(光劍)이라고 하지." (과, 광검?) "그 광검은 역시 심검의 일종인데, 그 위력이 여늬 심검과 크게 다르기 때 문에 특별히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아까의 그 적용통치가 발출했던 무공은 바로 광검이라는 것이었 을까?) 아평이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심황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생사현관을 통과한 사람이 원영을 점차로 키워나가서 마침내 어느 시깅 는 그 원영이 그 사람의 크기와 비슷하게 되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인간으 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는 극한(極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는데, 내력은 가히 육십갑자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지." "유, 육십 갑자라고요?" 아평은 그만 너무나도 엄청난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한동안 다물 줄을 몰랐다. 세상에 육갑자라고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공 력이거늘 그것의 열 배인 육십 갑자의 공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좋은 것일까? 심황은 그저 담담히 말을 계속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면 그 사람은 완전한 진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원영의 작용으로 인해 금강불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 그대가 경 험을 했었겠지만 그 사람의 몸은 그 어떠한 신병이기로도 파괴할 수가 없는 것이지." 아평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럼 그 적용통치의 내공이 육십 갑자에 이르렀나요?"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 당금 무림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가 있는 세외팔선 의 무공은 대개가 육십갑자의 수준인데, 그 중에서 천수자만이 가장 완벽하 게 육십 갑자의 공력에 도달해 있다고 하지." 아평은 문득 아까 의문을 느꼈던 것이 생각나서 물었다. "그럼 그 천수자는 이미 죽은 것일까요?" 심황은 다소 안색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로서도 뭔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평은 굳이 그녀의 마음을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다시 재촉했다. "어서 그 뒤의 얘기를 해주세요." 심황은 찌푸린 얼굴을 다시 환하게 펴면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까지가 인간의 한계이고, 모든 얘기가 끝났는데, 더 무슨 얘기를 하라 는 거지?" 아평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물었다. "그럼 그 금강불괴의 몸을 가진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되나요?" 심황은 곰곰히 생각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이 비록 아주 오랫동안 장수를 누릴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원 영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역시 인간의 육인인 이상은 언젠가는 낡아서 부서지게 되고 말겠지." 아평이 다시 물었다. "그럼 역시 그들도 죽게 되는 건가요?" 심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게 될 거야.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육십 갑자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이후에는 스스로의 육신을 소멸시켜 가면서 원영에 의존하여 하늘로 승천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단계가 있다고 하지만, 나 는 사람이 신선(神仙)으로 변모하여 영원히 죽지 않게 된다는 얘기에 별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있어." 아평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도가에서 전해오는 얘기와 비슷한 것이로군요. 음, 역시 모든 무공 의 궁극은 그렇게 신선의 길로 나아가려는 것인 모양이죠?" 심황은 문득 옆에서 묵묵히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걷고 있는 황보자안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다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예를 들어서 불문의 무공은 신선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무공을 다 만 불도를 닦기 위한 하잘것없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서 어떤 사 람들은 무공이 높아지게 되면 불도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오히려 꺼려 하기도 하지." 아평은 놀라 물었다. "아니, 그러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불도를 닦고 있는 거지요?" 심황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깨달음이라는 거야. 불법에 있어서는 무공이라는 것은 다만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고, 무공이 아무리 높아지거나 설령 그가 나중에 신선이 된다고 해도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리 기는 하겠지만, 역시 영원히 죽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들은 신선이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불도의 수행에만 정진하고 있는 것이 지." 아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대체 그 마음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떠한 이득이 있다는 거죠? 신선이 되고 나서 오랫동안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요?" 심황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신선이라는 것은 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된다고 해도 불 도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가 봐. 게다가 마음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고 불가사의한 능력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그 런 것에 관해서는 실은 나도 잘 모르고 있어." "……" 아평은 잠시 곰곰히 생각하다가 화제가 너무 한쪽으로 깊이 흘러간 것 같아 서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음, 그럼 아까의 적용통치는 안랑을 해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었겠군요?" 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만 안랑을 인질로 잡아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살수를 쓰지 않 고 사로잡으려고만 했던 거야. 그가 만약 정말로 살수를 썼었다고 하면 안 랑은 아마도…… 단 일초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심황은 말을 길게 하면서 문득 옆의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때 두 사람의 얼굴은 제법 많이 걸어온 관계로 기력이 되살아나서 전과 같이 환하게 피어나는 상태였다. 아평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안랑의 무공도 정말로 대단했어요. 그는 실은 저와 함께 무공 을 배우기는 했지만 아까의 무공을 보고는 저는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지경 이었어요." 심황은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끄덕였다. "물론 안랑의 무공은 내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대단했지. 그 적용통치는 쉽 게 감정이 동하는 사람은 아닌데 안랑의 무공을 보고 놀라는 한편 크게 노 하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리고 평동생 그대의 무공도 대단했고. 그런데 참,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갑자기 무공이 그렇게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지?" 이때는 세 사람은 이미 석옥의 앞에 이르러서 마악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 었다. 아평이 잠시 멈칫하면서 여보중이 영약과 비급들을 가져다준 일에서 부터 시작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자연 혼 자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황보자안은 일단 거실의 의자에 앉아서 그녀 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렸는지 아예 석옥 입구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아서 함께 웃으며 서로 찧고 까부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미 공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이 비 록 나직하게 소근거리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그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주로 그녀들의 얘기는 아평이 황보자안과 함께 무공을 증진시키 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 아평은 매우 곧이 곧대로이고 순진하여 마침내 부부봉황대법에 이어서 두 사람이 우스꽝스럽 게도 정사를 나눈 장면들까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아 평은 매우 기억력이 뛰어나고 상황 설명이 아주 정확하며 묘사력도 대단했 기 때문에 황보자안은 스스로도 그 음성을 들으면서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온통 두 사람은 자신의 흉을 보 고 있는 것 같았고, 또한 자신을 놀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만 그 소리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혼자서 몸을 일으켜 서 지하에 있는 침실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운공조식을 해서 소모되었던 기력을 되찾아야 하는 상태였으므로 황보자안은 이어 침실 의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내력이라고 하는 것은 무공을 사용하게 되면 아예 밖으로 빠져나가 버 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보자안은 다시 전과 같은 사갑자의 내공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운기조식을 하여 소모된 기력을 보충시킨 다음에 아직도 두 사 람이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혼자서 오늘 낮에 우연히 펼치게 되 었던 소림사의 모든 무공들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법에서부터 마지막 의 검법인 달마삼검에 이르기까지 한 번씩 차례대로 펼쳐보기 시작했다. 원래 역근세수진경상에 적혀 있었던 바와 같이 이러한 무공들은 그 위력들 이 강할수록 불심으로 제압을 해야 하는 것이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심이 깊어질수록 저절로 깨칠 수가 있게 되는 무공들이었다. 불심의 요체 는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황보자안은 바로 그처럼 마 음이 무아지경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무공들을 있는 그대로 펼칠 수 가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생각에 의해서 무공들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태 소림의 무공은 점차로 위력이 약화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었다. 그것들은 원래 불심이 깊어질수록 천의무봉의 완벽한 능력을 낳을 수가 있 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황보자안이 오늘밤에 우연히 그것을 펼치게 되자 적 용통치마저도 크게 놀라게 되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자신이 배운 무공들을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천천히 시전해보고 그것들이 완벽하게 시전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기분이 시들해져서 연공 을 멈추었다. 벌써 시간은 저녁때가 다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이 두 명의 여자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길래 낭군에게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들어와 보지 도 않고 있는 것일까? 황보자안은 스스로 위로 올라가서 그녀들의 행동을 살피기도 뭣하고 그래서 우선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다시 나와서 운기행공을 하려고 하는데 문득 침 실의 문이 열렸다. 고개만 살짝 내민 사람은 귀엽고 깜찍하게 생긴 아평이 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올라오세요." 황보자안은 운기행공을 하려고 가부좌를 틀었던 다리를 풀며 시큰둥하게 대 꾸했다. "음, 나는 별로 생각이 없는데?" 그러나 아평은 역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흥, 그렇다고 내가 속을 줄 아시나요? 내가 안으로 들어가면 처를…… 저 를 골리시려고 그러는 거죠? 언니는 그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씀만 드리고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황보자안은 이에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아니, 그래서 그냥 돌아갈 생각이오?" 아평은 잠시 사랑 깊은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순간 아평의 몸이 사라지고 침실의 문도 닫혀 버리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그만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소황은 너무나도 총명하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그녀의 사야에 갇힌 꼴이 되었군 그래."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거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실에서는 심황이 어느새 운공조식을 마쳤는지 기력이 충만된 얼굴로 단정 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 아름다운 얼굴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셔서 식사하세요." 탁자 위에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가득하게 차 려져 있었다. "험, 모두 앉읍시다." 황보자안은 다소 어색한 마음이 들어서 헛기침을 하며 탁자 앞에 앉은 다음 에 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평은 마음껏 희롱하면서도 심황에 게만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평은 함께 자리하고 앉아서 식사가 시작되자 연신 입을 쉬지 않고 심황에 게 말을 걸었으며 이내 손을 가리고 까르르 웃기도 했다. 황보자안에게는 이 식사시간이 다소 개운하지 못했지만 그는 따라서 묵묵히 많은 음식을 들고 한쪽에 있는 서재로 물러났다. 이 서재에는 좋은 책자들 이 많이 있었지만 대개가 황보자안의 눈에 익은 것이었고, 그가 섭렵한 것 들이었다. 황보자안은 다소 무료한 생각이 들어서 그 책자들을 하나씩 뽑아서 펼쳐보 다가 절로 또다른 여자인 모용릉파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데 뒤를 이어 다시 기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이 그에게 닥쳐들게 되었다. 얼마 후에 아평이 그에게 멀찌감치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밤에 여자끼리 한 침상에서 자며 우의를 돈독하게 하기로 했어 요. 그러니 안랑 당신께서는 불편하시겠지만 이 일층의 침실에서 쉬시고 아 래층의 침실에는 내려오지 마세요." 침실의 이부자리는 아평이 손수 정성껏 깔아준 것이었지만 황보자안은 그 침상 위에서 한밤중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황보자안이 그래도 여태까지 잘 참고 밤을 기다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녀 들과 함께 맞이할 환상적인 하룻밤을 예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록 아무리 내일 아침에는 환우천하영웅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어서 다소간의 경 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룻밤을 맹숭맹숭하게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따라서 황보자안은 드디어 자정이 가까워진 무렵에 침상의 이부자리를 박차 고 일어서서 서서히 아래층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에는 그가 이미 터득하고 있는 고도의 무공수법이 발휘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지금 아래층의 침실에는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서로 다정하게 껴안고 잠이 들어 있을 것을 생각해서 그는 소리없이 그녀들의 사이로 파고들어갈 생각이었다. 실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심황의 무공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러한 생각 을 하지 못했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의 무예는 심황에 비해서 결코 뒤진 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황보자안은 게다가 자신이 이미 무공의 극 의(極意)를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그가 소리없이 안으로 침입해 들 어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황보자안은 허공에 둥실 떠올라서 연대부운(蓮帶浮雲) 의 경공을 극한으로 펼치자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소리없이 나아갈 수가 있 었다. 파공음은 물론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 없이 허공을 떠서 느릿하게 나아가 는 것이니, 만일 누군가가 이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귀신이라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정이 가까운 한밤중이고 점원이나 그 밖의 사람들이 나타 날 리가 없는 것이며, 설사 나타나더라도 그들은 이 어둠 때문에 잘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황보자안과 같은 무림고수의 밝고 예리한 눈과 일반인들 의 어둠에 약하고 흐릿한 눈과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그긍…… 기관창지에 의해 침상이 옆으로 돌아가고 지하계단이 나타나는 동안 황보자 안은 혹시 그 소리를 안에 있는 두 여자가 듣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 슴이 크게 두근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에서는 별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 았다. 이곳의 기관장치는 아주 정묘하고 잘 만들어져 있어서 소리가 나도 그저 부드럽게 들리는 정도였다. 황보자안은 다시 기관이 자동으로 움직여서 침상이 되돌아오려고 하자 즉시 미끄러지듯이 움직여서 침실의 문 앞에 이르렀다. 이 화려한 문은 닫혀 있었으므로 황보자안은 혹시 안에서 잠긴 상태라면 내 력의 힘으로 소리없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우수를 허 공에서 가볍게 한 차례 휘저어 보니 웬걸 그 문은 걸려 있지 않아서 저절로 부드럽게 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황보자안이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기 때문에 그녀들은 안심을 하고 문도 잠그지 않고 잠이 들은 모양이었 다. (흐흐흐……) 황보자안은 이것을 보고 내심 크게 득의하여 음흉한 웃음을 속으로 한 차례 흘린 다음에 숨을 한 번 깊에 들이켰다. 달콤하고 야릇한 여인의 체향이 벌 써부터 문 밖에 서 있는 그의 콧속에 아련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뒤이어 벌어지게 될 장면을 뇌리에 그리면서 서서히 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 방 안은 생각대로 아주 조용하고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가운데 우아한 정취 마저 가득 풍기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우선 소리없이 문을 닫은 다음에 허공에 둥둥 떠서 앞으로 나아 가면서 먼저 침상 위를 살폈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흐뭇한 표정으로 침상 위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크게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지금 침상 위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하나였다. 황보자안은 따라서 이미 심황이 그의 침입을 알아채고 먼저 몸을 피한 후에 오히려 그에게 역공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 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상 위에서 잠들어 있는 여인은 비스듬히 몸을 돌리고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길고 섬세한 체형과 매우 날씬하여 깡마른 느낌을 주는 몸매 등은 실로 아평의 몸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 뜻밖에도 지금 침상 위에 혼자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아평이 아닌 심황이었던 것이었다. 원래 이 심황은 비단 용모뿐만 아니라 체구도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아평보 다 훨씬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저렇게 등을 돌리고 잠을 자는 모습 또한 마치 전설의 어느 아름다운 공주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아 서 절로 보는 이로 하여금 도취하게 만들었다. 황보자안은 따라서 하마터면 자신도 도적의 본분을 잃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온몸을 껴안을 뻔했다. 그러나 잠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아도 역시 자신은 목적이 그런 만큼 그녀의 몸은 안지 않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 고 느릿하게 허공에 떠서 미끄러지듯이 그녀의 몸이 누워 있는 바로 위에 도착했다.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는 심황의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만큼 절세적이었고 향기에 도취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황보자안이 문득 절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매만 지고 싶어져서 슬그머니 손을 반쯤 내밀고 있는데, 갑자기 자는 줄 알았던 심황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향해 눈을 반짝 뜨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고 양손이 허공으로 떠 올라 그의 허리로 미끄러지듯이 감겨 오고 있었다. "안랑, 당신은 너무 짓 으시군요." 황보자안은 느닷없이 그녀의 포로가 되어 버렸으므로 내심 아뿔싸, 하고 소 리치며 부르짖었다. (그녀는 이미 내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기실은 그의 내심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한 황홀감으로 가득차 고 있었다. 이 천하제일의 아름다운 미소녀의 지극한 사랑을 오늘밤 가득하 게 받게 되었으니 그가 어찌 군소리를 할 수가 있으며 온통 넋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계속-- 번호:151/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8 길이:30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5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5장. 예쁜 계집아이 --아평. 이 아름답고 귀여우며 깜찍스러운 여인은 그때 바로 욕실에 들어가 서 열심히 여보중이 가져다 주었던 무공비급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황보자안이 오늘밤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심황에게 그를 양보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이었 다. 비록 그와 같은 일이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아평은 한 번 비급의 내용에 빠져들자 밤새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되었다. 옆의 침실에서는 황보자안과 심황이 그야말로 꿀물보다도 더욱 황홀한 느낌 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을 것이었다. 아평은 마치 그러한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듯 밤새도록 그 아홉 권이 비급들을 모조리 통독하게 되었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 고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미처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의 일이었다. 문득 욕실의 문이 소 리없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다름이 아니라 바로 황보자안이 벌거숭이가 되어서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평은 순간 왠지 복받쳐 오르는 깊은 사랑의 격정을 느끼며 즉시 그대로 몸을 날려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아아, 안랑……) 이 황보자안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 니라 또한 자신에게 그야말로 헌신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도 얻게 되었으 며, 밤새도록 이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 사이에서 지극한 풍류를 끝없이 누리게 되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아주 운이 좋은 녀석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아름답고 재기있는 심황과 부부봉황대법을 펼치면서 그야말로 전시의 뼈까지 다 녹아내리는 듯한 극도의 쾌락을 맛보았고, 이어 아평과 장난질을 치느라 날이 새고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미 오늘 아침에는 일찍이 별채로 가겠다고 미리 약속까지 했었기 때문에 아침이 되자 황보자안은 울며 불며 아평이 세수를 시켜주고 옷을 입 혀주는 대로 억지로 모든 풍류를 중지하고 따라야만 했다. 다만 이제는 그가 심황을 대하는 수법이 어젯밤보다도 훨씬 대담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갈 때에도 그는 일부러 심황에게 느닷없는 기 습을 펼쳐서 그의 전신혈도를 제압해 놓고는 그녀를 안고 온갖 애무와 희롱 을 하면서 올라갔다. 심황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그대로 황보자안의 품속에 기대어 있었는 데, 문득 그가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번쩍 신형을 날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 가는 것이었다. 기실은 그녀는 제압된 척하면서도 제압당하지 않았던 것이 었다. 이에 황보자안은 놀라서 크게 부르짖었다. "졌소, 졌소! 내가 당신에게 졌소!" 황보자안 등의 세 사람이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활기찬 모습으로 별채에 도 착했을 때에는 이미 출진자 등이 마악 출발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들은 마 차와 말들은 이곳에 그대로 남겨두고 사람들만 배를 타고 군산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두 분 사형." 황보자안이 웃으며 인사를 하자 출진자 등은 이번에는 어제와는 달리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심황에게 깍듯하게 대해 주는 것을 잊 지 않았다. 아평은 그것을 보고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앞으로는 심언니가 안랑의 부인이므로 안랑의 지위가 더욱 높아진 것은 명 백한데, 어째서 저들은 계속 우리 안랑보다 그녀를 더욱 위해 주는 것일 까?) 어쨌든 일행은 즉시 헌원객점을 떠나서 신법을 펼치게 되었고 장강의 나룻 터에 이르러서 거대한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군산에 환우천하영웅대회가 열리는 시각은 오늘낮 정오이기 때문에 어느 정 도의 여유가 있을 것 같았으나, 지금 그들은 장강을 따라서 한참을 서쪽으 로 가야 하기 때문에 자연 어느 정도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우천하영웅대회 때문인지 일찍이 배를 타기는 했으나 이 커다란 나룻배 전체가 이미 터져나갈 듯이 만원이었는데,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빠르게 강물을 역류하여 나아가서 사시(巳時) 무렵에는 용구(龍口)라는 나룻터에 이르렀고, 정오가 조금 못되었을 때에는 드디어 동정호(洞庭湖)로 들어서는 길목 나룻터에 이르렀다. 이 나룻배는 장강을 오가는 배이기 때문에 일행은 빠르게 배에서 내려서 신 법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오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들은 다소 서두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 신 법을 펼치는 것이 금새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황은 말할 것도 없고, 황보자안은 오히려 출진자 등보다 훨씬 여유가 만만하게 나아갔으며, 아평 도 간밤에 비급의 내용을 많이 깨우쳤기 때문에 출진자 등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수고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은 곤륜파의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보기에도 안스러울 만큼 얼굴에 땀을 뻘뻘 흘 리면서도 감히 천천히 가자고 하거나 쉬자는 말을 못하고 겨우 숨이 턱에 닿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황보자안은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곤란을 당하고 있는 삼대제 자인 청화도인과 청진도인에게 다가가서 각기 한 손에 하나씩 그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형씨들, 우리 곤륜파의 사람들이 이렇게 중원의 동정호변에 와서 산책을 하는 것도 실로 멋있는 일이 아니겠소?" 이 두 명의 삼대제자는 황보자안이 자신들의 손을 잡는 즉시 그곳으로부터 한 줄기의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 호흡을 부드럽게 하고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을 깨닫고 즉시 감격하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 고맙습니다, 사숙조." 군산은 장강에서 동정호로 들어가는 입구에 삐죽하게 나와 있는 작고 아담 하게 생긴 산봉우리였는데, 그것은 사방으로 교통이 원활하고 육지뿐만 아 니라 호수로도 다가갈 수가 있기 때문에, 지금쯤 아마 동정호로 군산을 향 해 몰려드는 군웅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것이었다. 동심맹은 이 군산에 있기는 하지만 보다 낮은 지형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이 영웅대회가 열리고 있는 비무대회장은 바로 군산의 한쪽 꼭대기 를 넓게 깎아서 만든 거대한 연무장에 설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처 음 오는 사람들이라도 그저 군산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면 되는 것이므로 찾아가기는 아주 쉬웠다. 일행이 신형을 날리고 있는 주변에 간혹 그들을 스쳐지나서 먼저 위로 올라 가거나 아니면 뒤로 처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곤륜파 의 현황자나 출진자 등은 그들과 거의 인사를 나누거나 아는 체를 하지 않 고 그저 묵묵히 나아가기만 했는데, 이것은 곤륜파가 중원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평소에 그들이 중원의 무림인들과 교분이 없었기 때문 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서 그들이 마악 봉우리의 꼭대기에 도달하기 전의 바로 밑에 있는 작고 비탈진 길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앞서서 달려갔던 사 람들이 모두 그 앞에 길게 줄을 서고 있는 것을 보고 일행은 다소 이상하게 생각을 하며 신형을 멈추었다. "앞에 바위가 내려와서 길을 막은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이렇게 줄 을 서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텐데?" 하기는 바위가 내려와서 길을 막았다면 무림인들이 사방으로 몸을 움직여서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이 작은 계곡을 올라가고 말았을 것이지 어째서 이렇 게 모두가 얌전하게 줄을 서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더욱이 지금의 시각은 약간 정오를 지나고 있는 상태여서 눈앞의 이러한 광경은 다소 의문을 느끼 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앞으로 나가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기로 해요." 아평이 그런 얘기를 마악 끝냈을 때였다. 마침 줄을 서고 있는 무리들 가운 데에서 등에 핏빛처럼 시뻘건 피풍을 걸치고 있는 세 사람이 흉악한 기세로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지 않고 옆의 절벽으로 몸을 날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마침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무네 우 선은 신형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헌데 그때였다. "흥, 누가 감히 이 모모( )의 지시를 어기고 다른 곳으로 돌아가느냐? 어서 이리로 오지 못하겠느냐?" 일행은 그 목소리를 듣고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음성은 마치 귀엽고 작은 꼬마 계집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풍겼는 데, 기이하게도 누구에게나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자아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줄은 아주 길어서 어림잡아도 수십 장은 되는 것 같았 는데,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은 꼬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혹시 어떤 꼬마가 숨어서 그와 같은 짓 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순간에 절벽으로 올라가려고 하던 예의 그 세 명의 혈의인(血衣人)들이 일순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그쪽으로 쭈르르 딸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그 앞쪽에서 누군가가 여러 개의 줄을 동시에 날 려서 세 사람을 얽어맨 다음에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게다 가, "으악!" 세 명의 혈의인들은 입 속에서 다 함께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선혈을 왕 창 쏟으며 앞쪽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이것을 보게 되자 감히 선뜻 옆으로 몸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사 라져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심황이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황보자안과 아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미처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은 무서운 고수예요." 황보자안은 그녀에게 왠 무림의 무서운 고수가 저 앞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호기심이 치솟아서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함께 앞으로 나가 보도록 할까?" 심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에 마주치게 되었으니 한 번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출진자와 현황자는 그렇지 않아도 일행의 진퇴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 었는데, 황보자안이 두 사람의 여인과 함께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슬그 머니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때 일행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앞쪽에서 예의 그 꼬마 계집아 이의 음성이 요란하게 울려 왔다. "아니, 이번에는 왠 녀석들이 한꺼번에 대오를 이탈하고 야단이냐? 모두들 혼이 나고 싶단 말이냐?" 황보자안은 그 꼬마 계집애의 음서이 제법 나이 많은 노인의 말투를 곧잘 흉내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알았다, 알았다, 요 귀여운 녀석아! 이 오라비가 곧 널 만나러 갈 테니 기 다려라!" "……" 황보자안의 짓 은 대꾸에 일시 상대인 그 꼬마 계집애는 어리벙벙한 모양 인지 금방 말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일행이 앞쪽으로 나아갔을 때에는 그 예상했던 꼬마 계집애의 모습 은 보이지 않고 웬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바로 좁은 협곡을 지나서 다시 양쪽으로 벼랑이 펼쳐져 있는 길목이었는데, 웬 이상하게 생긴 노인이 앉아서 길을 막고 있었다. 그 노인은 일신에 현의(玄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체구는 작았지만 머리는 마치 하나의 커다란 호박을 올려놓은 것 처럼 크고 둥글둥글했고, 그 얼굴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쭈글쭈글한 것이었다. 지금 쭈글쭈글한 두 개의 눈꺼풀을 가볍게 내리감고 있는 그 현의노인의 전 면에는 각기 크고 작은 바윗돌이 하나씩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또한 기이 하게도 그 하나의 돌 앞에 한 사람의 무림인이 각기 쪼그리고 앉아서는 한 참 동안 뭔가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바로 그 두 개의 바윗돌 앞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대한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 뒤의 사람들이 가지 못하고 줄을 서고 있 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의 이상한 점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아까 의 그 깜찍하게 말했던 음성의 꼬마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 다. (음, 저 괴상하게 생긴 노인이 그런 깜찍스러운 말을 했을 리는 없는 것이 고, 대체 그 작은 계집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황보자안은 그 조금 전의 음성의 주인인 꼬마 계집애에 대해서 귀여운 느낌 이 들었기 때문에 문득 친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좌우를 열심히 살피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현의노인이 앉아 있는 뒤 쪽의 위를 바라보니 길다란 하나의 장대 위에 한 명의작고 어여쁜 계집아이 하나가 덩그라니 올라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계집아이의 나이는 대략 열두어 살 정도로 보였는데, 생긴 것은 그야말 로 깜찍하기 이를 데가 없고, 게다가 마치 옥으로 깎아 놓은 것 같은 아름 다운 얼굴의 중앙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눈동자는 마치 오색의 찬란한 광채 를 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실로 생각했던 것보다도 수십 배는 더욱 예쁘고 귀여운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이에 보는 즉시 더욱 깊은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 그가 그 계집아이를 찾지 못한 것은 그녀가 바로 이토록 높은 장대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고, 더욱이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 아서는 두 다리를 흔들며 장난을 치고 있는지라 황보자안은 일순 불안한 생 각이 들어서 번쩍 그쪽으로 신형을 날리게 되었다. "앗, 꼬마야, 가만히 있거라! 위험하다!" 지금 장내의 분위기는 마치 무거운 돌을 하나씩 가슴에 매달고 있는 듯이 무거웠고 조용하기 짝이 없었는데, 황보자안은 그렇게 갑자기 소리치며 어 느새 계집아이의 면전에 이르렀다. 그 계집아이는 이때 그 장대 위에 올라 앉아서 기이하게 빛나는 두 눈으로 아래쪽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느닷없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황 보자안이 이토록 빠르게 자신의 면전에 다가오자 다소 놀랐는지 몸을 기우 뚱거렸다. 순간 황보자안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 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자 더욱 깜짝 놀라서 소리치며 그녀의 작은 몸을 껴안고 말했다. "위험하다!" "……" 원래 황보자안의 신법은 기이할 정도로 빨라서 전에는 적용통치마저 놀랐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의 그 계집아이가 다소 방심을 하고 있 었기 때문에 황보자안의 금강부동신법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번쩍 하는 사이 에 잡히고 말았는데, 일순 그 계집아이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다소 멍한 표 정이었다. 황보자안은 그런 계집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안고는 장대에서 벗어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자세로 아주 귀엽다는 듯이 계집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얘야, 너의 이름은 뭐냐? 이 오라비가 너를 집에 데려다 줄까?" 이때 장내의 분위기는 왠지 더욱 괴이하고 무겁게 긴장되고 있었는데, 황보 자안은 그러한 분위기를 알았지만 당장 자신의 손에 귀여운 계집아이가 들 려 있었기 때문에 전혀 그러한 것을 신경쓰지 않고 아주 흐뭇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 황보자안은 계집아이가 문득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 자, 너무나도 귀여워서 그녀의 한쪽 볼에 소리가 나도록 얼른 입맞춤을 하 고는 다시 말했다. "나를 무서워하지 마라, 이 귀여운 녀석아. 이 오라비는 아주 좋은 사람인 데, 커다란 집도 많이 가지고 있고 아름다운 보물들도 많이 가지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만일 원한다면 그런 것들을 선물로 주마."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계집아이는 일순 이 순간 기이하게도 얼굴 가득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감히…… 감히 나를 가지고 희롱하다니! 네놈의 이름은 뭐냐?" 황보자안은 계집아이의 앙증맞고 예쁜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바로 아까 들었던 것과 같은지라 더욱 기쁜 마음이 들어서 그녀의 한쪽 엉덩이를 한 손으로 찰싹, 하고 때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또 그와 같은 장난을 치는구나.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은 위험하니 절대로 올라와서 놀면 안되는 것이다. 얘야, 너의 부모가 누구냐? 내가 데 려다 주마." 계집아이는 설마하니 황보자안이 자신의 엉덩이마저 만질 줄은 몰랐다가 이 에 얼굴이 다소 붉어지며 더욱 분노해서 우장을 그의 머리에 갖다대며 말했 다. "네놈은 대체 정신이 없는 놈이냐, 아니면 멍청해서 분간을 못하는 놈이냐? 어서 나를 잡은 손을 놓지 못해!" 그러나 황보자안은 이 작은 계집아이가 장난을 치는 모습이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손을 놓지는 않고 오히려 더욱 계집아이를 부드럽게 꽉 껴안아 주며 다시 그녀의 볼에 소리나게 입맞춤을 했다. "나는 네가 너무나도 예쁘기 때문에 어쩐지 손을 놓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네가 싫다면 내 곧 아래로 내려 줄 것이니 너무 보채지 말아라." 계집아니는 가뜩이나 얼굴이 빨개져서 수치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황보자안 이 다시 그와 같은 행동을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장을 흔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미, 미친 놈! 네놈이 이렇게 멍청하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하지만 계집아이는 차마 자신을 향해 예쁘다고 귀여워하는 황보자안에게 혹 독하게 손을 쓸 수가 없는 듯 곧장 진기를 발출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황보자안은 이것을 보고 역시 장난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껄껄 웃으며 말했 다. "네가 과연 이 오라비를 치겠다는 말이냐? 그래, 이 오라비는 상관하지 않 을 테니 어서 한 번 쳐 보아라." 황보자안은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은 이렇게 서로간의 접촉을 하게 되면 금방 친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무공은 이 미 호신강기가 절로 발출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 작은 계집아이의 일장 쯤은 맞아도 상관이 없다는 계산이었던 것이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아주 귀에 익은 한 줄기의 음성이 바로 그의 옆에서 들려왔다. "노선배님, 그는 노선배님의 신분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부디 용서하세 요. 그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바로 다름이 아닌 심황의 음성이었다. 황보자안은 고개를 돌려 심황이 어느 사이에 자신의 곁에 이르러 앞쪽을 향 해 공손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급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황에게 물었다. "소황, 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노선배라니, 누가 나타난 것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신의 앞쪽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심황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그분은 바로 만화동모(萬花童 ) 운산산(雲珊珊), 운노선배님이세요. 그러 니 어서 그분을 내려놓으세요." "……?" 황보자안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은 심황이 바로 자신이 들 고 있는 그 계집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 다. "아니, 아니, 뭐라구? 그가…… 그가 노선배라구? 이 작고 아름다운 계집아 이가?" 심황은 황보자안이 계속 횡설수설을 하고 있은 것을 보고 내심 크게 놀라고 다급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요! 그러니 어서…… 어서 그분을 그 자리에 놓으세요." 이때 계집아이는 차마 손을 쓸 수가 없다는 듯이 우장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황보자안은 심황의 표정이 매우 심각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 득 계집아이의 그와 같은 얼굴을 보고는 웃으며 샘황에게 다시 말했다. "하하, 소황, 그대는 지금 나를 가지고 농담을 하고 있군 그래. 이렇게 작 고 아름다운 소녀가 어떻게 그와 같은 나이가 많은 노선배가 될 수가 있다 는 말인가? 그와 같은 장난은 그만두고 우리 이 깜찍한 아이를 데려다가 우 리들의 동생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심황은 일순 황보자안이 그와 같은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멍하니 대꾸도 못하고 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는 정말로 노선배예요." 이때 문득 계집아이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린 아이야, 네가 보기에 이 모모의 얼굴이 정말로 아름다우냐?" 황보자안은 고개를 그녀에게 돌리다가 이 작은 계집아이가 그야말로 마치 어른처럼 귀엽게 연극을 잘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말았다. "물론이지, 물론이지. 나이 많은 오라비가 보기에는 너는 그야말로 귀엽고 사랑스럽고 너무너무 아름답단다. 정말 나와 함께 우리집으로 가지 않으 련?" --계속-- 번호:152/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8 길이:323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6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6장. 공포스러운 함정 계집아이는 황보자안이 다시 요란하게 입을 맞추자 절로 다시 얼굴이 붉어 지며 마치 홍옥(紅玉)과도 같이 변한 얼굴로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런 짓을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내가 정말로 살수를 써야 제정신을 차리 겠느냐?" 황보자안은 이 계집아이가 문득 정말로 화를 내는 것 같아서 일시 가볍게 흠칫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다. 너는 벌써 제법 부끄러움을 아는구나. 그래, 비록 네가 너무나 도 어여뻐서 그런 것이지만, 네가 싫다면 나는 다시 하지 않으마." 이에 계집아이는 화를 내던 것을 멈추고 마치 천하에 다시 없는 신기한 물 건을 보듯이 황보자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너는 호호…… 정말로 내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너의 집에 함께 데려가고 싶다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이 계집아이가 갑자기 순순하게 나온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물론이지. 나는 너를 데려다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또한 가장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할 수 있게 해주겠다. 그리고 너와 나는 오누이 의 의를 맺어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즉시 품속을 뒤져서 보석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는 거기에서 묘아안(猫兒眼), 금강석(金剛石), 홍보석(紅寶石)이라든 가 그 밖의 다른 화려한 보석들을 와르르 그녀의 작은 손 안에 쏟아놓는 것 이었다. "봐라. 이런 것을 보면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나의 집에 가면 이런 것은 무수하게 많이 있단다." 계집아이는 문득 자신의 손에 들어 있는 보석들을 향해 시선을 보냈는데, 즉시 그것들이 하나같이 세상에서 보기 어려운 귀한 것들이며, 하나로도 능 히 작은 성(城) 하나를 살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실로 이러한 것들은 하나만 가질 수가 있어도 남에게 팔지 않고 애지중지할 것이 었다. 원래 이 계집아이는 어려서붜 남에게 이와 같은 진정어린 후의(厚意)를 받 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을 경계하고 지금과 같은 괴팍한 성격이 되었 던 것이었는데, 지금 막상 그와 같은 선물들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거 기에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글썽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자 실로 이 계집아이는 선물을 줄 만한 아이라 고 생각되어 아예 보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계집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 다. "우선 내 이것들을 모두 너에게 줄 테니 먼저 너의 이름과 부모님의 함자를 나에게 일러줄 수가 있겠니? 그리고 너의 집은 어디에 있지?" 순간 잠시 보석들을 들고 망연한 표정이 되었던 계집아이는 문득 황보자안 의 말에 정신을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 보석들 가운데 칠채보석(七彩寶石) 하나를 엄지와 집게의 작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잡고 가볍게 으스러뜨리는 것이 아닌가! (……!) 황보자안은 무심코 그것을 보다가 일순 크게 놀라서 안색이 다소 변했다. 실로 방금 그 계집아이가 마치 흙덩이처럼 부숴 버린 칠채보석은 그 강도가 금강석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것이었는데, 한낱 이런 작은 계집아 이가 그와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 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황보자안은 아직 이 계집아이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단순히 짓 은 계집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심황의 말도 개의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금새 심황의 말이 뇌리에 섬뜩하게 부각 되어 떠올랐다. (그, 그럼 이…… 이 아이는 바로 노선배라는 말인가?) 황보자안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옆의 심황과 자신을 번갈아 보고 있 는 것을 보고 계집아이는 입가에 득의한 웃음을 떠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야 알겠느나?" 황보자안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심황에게 돌려서 급히 물었다. "소, 소황, 정말이오? 그녀가 바로…… 바로 노선배라는 말이오?" 심황은 이제까지 옆에서 매우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모르고 있다가 이에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틀림없어요. 그는 바로 세외팔선의 하나인 만화동모 운산산이예요." 황보자안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일순 정신이 아득하고 멍해져서 내심 중얼 거렸다. (만화동모 운산산? 그럼…… 그럼 그녀가 바로 세외팔선에서도 악독한 사황 의 하나라는 말인가?) 하지만 황보자안은 다시 계집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손을 놓지 못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러나 이런 여자아이를 어떻게 그런 악독한 노선배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믿을 수가 없구나." 황보자안은 지금까지 하나의 어여쁜 동생을 두게 되어서 내심 크게 신이 나 있었는데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마음이 상심해져 있었다. 계집아이는 그것을 보고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수도 없는 사람을 죽여 왔고,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말한 그 악독하다는 말은 정말로 들어맞는 것이 지." 계집아이, 즉 만화동모 운산사은 말과 함께 문득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황보자안은 무심결에 그쪽을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실로 수많은 새로 생긴 시신들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는 조금 전에 대오를 이탈했던 그 세 명의 혈의인들의 시신도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운산산이 악독하다는 말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았고, 그럼에도 자신이 이제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하기도 했 고, 또한 꿈만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녀는 나의 옆에 있는 소황 때문에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일 까?) 운산산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황보자안을 다소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호호…… 네가 정말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대장부가 아 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아직도 나를 껴안고 입맞춤을 할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러는 운산산의 미소 뒤에는 어딘가 냉랭한 살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러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득 크게 섬뜩한 기분이 들 었고, 실로 이러한 사람은 가벼운 기분 하나로도 능히 살인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설령 그녀가 열 번 백 번을 양보하여 자신이 지은 대가로 하나의 팔이나 눈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황보 자안은 자신이 가벼우면 병신이 되고 무거운면 죽을 수가 있다는 현실을 섬 뜩하게 절감하면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만일……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오?" 황보자안은 아직 감히 그녀의 작은 몸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껴안고 있을 수도 없어서 어정쩡한 자세였다. 운산산은 다시 기이하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네가 나를 껴안으면 즉시 두 팔을 도려낼 것이고, 나에게 입맞춤을 하면 너의 혓바닥을 끊어버릴 것이다." 황보자안은 내심 놀라서 생각했다. (나는 이미…… 이미 그녀를 이렇게 안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의 이 두 기의 팔은 나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 황보자안은 즉시 자신이 운산산에게 대항해서 팔을 잃지 않는 방법을 떠올 렸으나 이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미 무예의 깊은 경 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아까 운산산이 가볍게 보석을 부순 공력에는 말 도 할 수 없는 심오한 능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을 것이오." 황보자안은 이제 자신의 두 팔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자신이 밥을 먹고 입맞춤을 할 수가 있는 혓바닥만큼은 결코 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운산산이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는 그렇다면 대장부가 아니로군. 방금 전에는 나를 두고 아름다우니 어 쩌니 해 놓고, 이제 와서는 목숨이 아까우니까 감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인 가?" 황보자안은 즉시 놀라며 대답했다. "그, 그렇소. 나는 실로 대장부가 아니라도 좋소. 아니 나는 대장부가 아니 오. 그러니 어서…… 어서 나를 온전히 살려만 주시오." 운산산은 그가 이제야 스스로의 처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야 분수를 아는군. 그러나 네가 그런다고 내가 너를 온전하게 살 려줄 것 같은가?" 황보자안혹시 소황의 선조의 얘기를 하면 나의 목숨을 온전하게 살려줄지도 모른다.) 황보자안은 문득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내 그것은 심황이 직접 말한 것도 아닌데 지극히 구차스러운 짓이라고 생각되어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황보자안은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의 목숨은 오로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오." 운산산은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그런데도 감히…… 감히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놓지 않고 있는 것인가!" 황보자안은 이에 급히 그녀를 잡고 있는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운산산은 입가에 야릇한 냉소를 흘리며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잠깐! 하지만 너는 지금 나를 놓는 순간 죽는 목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서 유언이라도 남겨라!" 황보자안은 이 운산산이 자신에게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기어이 목숨 을 빼앗으려는 것을 보고 내심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자신의 두 손에 들려 있는 그녀의 작고 깜찍스러운 요정같이 생긴 얼굴을 바라보니 그처럼 악의적으로 웃고 있는 모습이 더더욱 아름답 게 비치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이에 문득 자신은 앞으로 이 여자의 손에서 죽음을 당해야 할 판이니 마지막으로 소원을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물었다. "내가 만약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들어주겠소?" 운산산은 황보자안이 엉뚱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소 어 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소원 나름이겠지. 예를 들어 네가 만일 자신을 죽이지 말라든가, 아니면 내가 대신 죽기를 바라는 소원 등은 결코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 아 니겠어?" 황보자안은 이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같은 소원은 아니니 염려마시오." 말과 함께 황보자안은 아주 빠르게 그녀의 작고 아름다운 몸을 껴안음과 동 시에 그녀의 작고 홍옥을 조각하여 놓은 것 같은 입술에 깊숙히 입맞춤을 해버렸다. (……) 원래 운산산은 이렇게 쉽게 당할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지금 황보자안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다가, 이 황보자안은 지금 만일 실패하기라도 하면 영원히 그와 같은 작고 아름다운 입술에 입맞춤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무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제아무리 운산산이 방심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황보자안이 다른 무공으로 그녀를 암습했었다면 즉각 반격에 나서서 결코 성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지만, 황보자안이 취한 행동은 암습이 아니라 바로 애정이 넘친 입맞춤이었기 때문에 운산산은 크게 당황하여 반격할 기회를 잃었던 것이었 다. 기실 이 운산산은 용모가 지극히 귀엽고 아름답기는 했지만 어렸을 적에 무 공을 익히던 것이 잘못되어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되었고, 얼굴이나 용 모도 영원히 이와 같은 열두어 살 짜리의 계집아이로 남게 되었기 때문에, 정작 마음에 드는 남자의 사랑을 전혀 받아보지 못했었다. 따라서 운산산은 나이가 매우 많아졌어도 이렇게 느닷없이 입맞춤을 당하게 되자 크게 당황 하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첫 입맞춤을 하는 충격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이 운산산이 이미 나이가 많은 노파이기 때문에 얼굴은 이렇게 아름다워도 입 속에서 혹시 썩은 냄새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이 운산산의 입술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녀의 입에서는 깊고 은은한 오만가지의 꽃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실로 이것이 자신의 최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고 그 즐거움을 탐닉하는 데 모든 마음을 다 기울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최대한 달콤하고 황 홀한 입맞춤을 하게 되었다. 이때 장내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괴이쩍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또한 옆에는 심황이 다급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의 이와 같은 행동은 실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기실 황보자안은 생사에 관해 거의 초탈하고 있었고, 또한 그 작은 미련마 저 버렸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황보자안은 이 작고 귀여운 악마와도 같은 운산산을 황홀한 기분에 젖어서 깊이 입맞춤을 하다가 그야말로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껴안 았고 드디어는 마음에 크게 만족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는데, 다음 순간 왼 쪽 뺨이 화끈, 불이 번쩍 하면서 운산산의 손바닥에 맞아서 심하게 우측으 로 돌아갔다. 황보자안은 이미 이와 같은 것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하 게 따귀를 맞아서 얼굴의 한쪽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지만 개의하지 않고 그 대로 눈을 감은 채 있었다. 그러자 운산산의 다소 떨리는 듯하면서도 분노에 가득찬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 네놈은 어째서 눈을…… 눈을 뜨지 않는 거냐?" 황보자안은 이미 삶은 포기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심정은 상관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나는 이미 소원을 달성했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소. 이제 곧 죽을 목 숨인데 눈은 떠서 뭣하겠소?" 운산산은 다시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그럼 너의 소원은 바로…… 바로 그것이었다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문득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물론 나는 천하의 호색한도 아닌데 그와 같은 것이 소원일 리는 없는 것이 오. 그러나 실은 나는 오늘 그저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대가 아름답고 깜찍 스러우며 사랑스러워서 접근했고, 또한 나의 동생으로 삼으려고 했었소. 그 런데 나의 그와 같은 행위가 커다란 죄가 되었고, 또한 그대는 천하의 대마 두……" "……" 황보자안은 한 번 말하기 시작하자 감정이 복받쳐서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에야 다시 말을 이을 수가 있었다. "나는 그대가 노인네이기 때문에 크게 상심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괴로워 졌소. 그런데 그대는 거기에다 나를…… 나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또한 죽이 려고 하니, 이는…… 이는 나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었소.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사랑한 것이 죄가 아니면 그것은 설령 죽더라도 떳떳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에 오기를 가지고 그와 같은 원을 풀 었던 것이오. 아아, 그대와 나 사이에는 실로 거대한 장벽이 놓여 있는 것 이지만 나는 잠시 죽음 앞에서 그러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을 하였으니 이는 얼마나…… 얼마나 통쾌한 일이겠소?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 황보자안의 이 말은 기실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아까 그저 단순히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서 변명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앞이라서 그와 같이 절 절하게 꾸며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만일 운산산이 냉정한 상태였다면 결코 그의 이와 같은 허술한 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의 운산산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 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 "너는…… 너는 그렇게 계속 눈을 뜨지 않을 건가?" 황보자안은 이미 자신이 스스로 꾸며댄 얘기에 스스로도 감동이 되어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겠소. 내가 눈을 뜨면 나의 이상이 깨질까봐 두렵소." 운산산은 이에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만일 세 번 셀 때까지 눈을 뜨지 않겠다면 나는 즉시 너의 그 쓸모없 는 두 개의 눈알부터 파내 버리겠다!" 운산산의 그 말은 비단 이제는 떨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름끼치기 그지없 는 것이었다. 이에 황보자안은 혹시 운산산이 갑자기 다시 마음이 사나워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러나 역시 마음을 굳게 먹고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 황보자안은 곧이어 심한 고통과 함께 자신의 두 개의 눈알이 뽑혀 나가는 것을 상상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왠지 그 뒤로부터 다소 오랫동안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자신의 눈은 멀쩡하게 붙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운산산의 음성 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어느새 자신의 품속에 있었던 운산사 의 작고 귀여운 몸뚱아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고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운산산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의 옆에는 단지 심황만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 바라보고 있었는 데, 지금 그녀의 다정하고 기이한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 다. "안랑, 당신은…… 당신은 정말 대단하군요." 비록 운산산이 사라지긴 했지만 장내의 상황은 아직 여전히 그대로였고, 무 거운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괴이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그와 같은 광경을 지켜보다가 즉시 지면으로 내려서서 현 의노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현의노인은 문득 쭈글쭈글한 두 개의 눈꺼풀을 위로 밀어올려 자신의 앞에 나타난 황보자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두 눈에서는 검은 광채를 불쑥 말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내기를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과 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앞의 사람들이 내가 제시한 문제를 풀게 된다면 이곳을 통과할 수가 있 다." 커다란 머리통에 쭈글쭈글한 얼굴,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검은 광채가 번쩍 이는 이 노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황보자안이 보기에 이 노인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이곳을 통과한 사람 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왼쪽의 벼랑을 바라보니 그곳에 실로 수십 구의 새로 만들어진 시신들이 마구 쳐박혀 있는 것이 대부분의 시험을 당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간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실로 이 현의노인이 야말로 진정으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황보자안은 아직도 그 두 개의 바윗돌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두 명의 대한들을 한 차례 주시하며 다시 현의노인에게 물었 다. "그럼 그 내기라는 것은 무엇이오?" 현의노인은 현광(玄光)이 번뜩이는 시선을 들어서 황보자안의 얼굴을 바라 보며 손으로 앞의 두 개의 바윗돌을 가리켰다. "이 가운데에서 하나의 가벼운 것을 고르는 것이다." 황보자안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어리둥절해졌다. (저 두 개의 바위는 모두 화강암이니 작은 것은 비교적 가벼울 것이나 큰 것은 무거울 것은 뻔한 일인데 어째서 저렇게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황보자안은 이 문제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에 필시 그 안에 함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잠시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잠시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황보자안은 한쪽에 물러서서 앞에 쪼그리고 앉 아 있는 두 명의 대한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때 문득 그 중 청의대한 이 문득 무엇인가를 생각했는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것을 보고 현의노인이 다시 눈을 뜨며 기이한 음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시간은 얼마나 들어도 좋은 것이다. 다만 오랫동안 생각을 해서 실패를 하게 되면 결과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상당히 생각해 주는 것 같은 말투이지만 황보자안이 생각하기에는 그 같은 조건은 바로 이들 무림들을 군산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작 대회의 개최자인 동심맹에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란 말인가? 황보자안은 이곳 육지뿐만 아니라 호수로 통하는 길목에서도 필시 이와 비 슷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의노인이 다시 처의대한을 향해 말했다. "결정했으면 어서 말해 보아라." 이 청의대한은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차고 있었고 눈매가 차가우며 체구가 날렵해 보였는데, 일순 다소 망설이는 듯하더닌 손을 들어서 자신의 앞쪽에 있는 하나의 바윗돌을 가리켰다. "이것이 가벼운 것입니다." 현의노인은 이에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좋아. 너는 이미 결정을 했으니 어서 들어보아라." 황보자안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제서야 이 문제의 함정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상대가 아무리 가벼운 것을 고르더라도 그 현의노인이 가공할 능력으로 그 바윗돌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들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실패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현의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절로 가슴에 섬뜩한 공포감을 느끼는 듯 청의대 한은 다소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이어 말했다. "저는 그러나 저쪽의 것이 더욱 무겁다는 것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청의대한이 황의대한이 앉아 있는 쪽의 커다란 바윗돌을 가리키자 현의노인 은 즉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음대로 해라." 이에 청의대한은 매우 긴장된 안색에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즉시 그 자 리에 아주 납 하게 엎드렸다. 황보자안은 옆에서 보고 그가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고 의아 해졌다. --계속-- 번호:153/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8 길이:296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7장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7장. 아수라(阿修羅)의 마력(魔力) 그런데 이 청의대한의 의도는 금방 드러났다. 청의대한은 즉시 황의대한의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윗돌을 향해 조심조심 느릿하게 기어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그가 조금이라도 바람을 일으키게 되면 안되는 것 같은 아 주 긴장되고 야릇한 광경이었다. 분명히 눈앞에는 어른이 두 손으로 들어도 힘겨울 것 같은 커다란 바윗돌이 놓여 있는 것인데, 마치 이 청의대한은 그 것이 하나의 가벼운 깃털처럼 보이는지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척에 날아오를 까봐 천천히 자세를 아주 낮추어서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실로 이와 같은 광경은 그 속에 깔려 있는 의미를 모른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청의대한은 일견하기에도 몸의 작은 동작뿐만 아니라 숨을 쉬는 일에 있어 서도 지극히 미세하게 자제를 하는 것 같았으며,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심 하게 긴장되어 마치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이 청의대한의 기어가는 속도가 너무나도 느려서 설사 지렁이라 도 벌써 기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루해 하다가 너무나도 지쳐서 그만 자신이 대신 움직이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났다. 기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될 정도이니 정작 움직이 고 있는 청의대한의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한 일이겠는가? 미치 한 순간이 일겁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루하게 흘러간 뒤에 청의대한은 참을성이 있게도 드디어 그 커다란 바윗돌의 옆에 도달했다. 이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감히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의대한의 손이 드디어 천천히 바윗돌의 곁으로 내밀어져서 거의 닿게 되었을 때에는누군가 의 침을 삼키는 소리가 가슴에 덜컥, 하고 걸리는 것 같았다. 청의대한은 원래가 무공이 상당한 사람이었는데도 지금 겨우 일장도 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하여 전신과 얼굴에 땀을 그야말로 비오듯이 흘리고 있었 는데, 그렇지만 아직도 추호의 긴장감도 풀지 않고 있었다. 청의대한의 손은 바윗돌의 근처에 도달했을 때에는 더더욱 조심을 하여 마 치 거의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순간에는 정오의 태양이나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숨을 죽이 고 모두 긴장하여 그와 같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청의대한의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바윗돌에 닿게 되었는데 그것을 느끼는 순간 청의대한의 안면 근육은 너무나도 크게 긴장되어 일제 히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청의대한은 그와 같은 안면 근육의 움직임을 최대한으로 억제하며 다시 서서히 손을 밖으로 빼내기 시작했다. 역시 그와 같은 후퇴하는 동작 역시 느리고 조심스럽게 짝이 없었는데, 실로 바윗돌의 무게를 증명해 보인 다고 하면서도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희안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이었다. 하지만 청의대한이 조금이라도 바람을 일으키면 그것을 빌미로 현의노인이 내력을 이용하여 커다란 바윗돌을 들어올려 가벼운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 문이라는 것을 황보자안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의대한의 그와 같은 행동을 내심 수긍하고 있었다. 청의대한은 이어 한참이나 기어가서 드디어 작은 바윗돌의 앞에 이르렀는 데, 다소 표정이 밝아지더니 현의노인을 향해 입을 열어 물었다. "저는 조금 전에 저 커다란 바윗돌을 들어 보았는데 너무나도 무거워서 잘 들리지 않는군요.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이 청의대한의 말은 사실로 따지자면 억지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 의노인의 조건이 원래부터 억지로 겉에 드러나는 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 에 그것은 일리가 있게 되는 것이었다. 청의대한의 말에 현의노인은 눈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 다. "좋다." 이에 청의대한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이 작은 바위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제가 이기 게 되는 것이 되겠군요?" 현의노인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순간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번지는 것으로 보아 청의대한은 이미 승리를 확 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방심하지 않고 가벼운 바윗돌의 앞으로 다가가서 내력을 이용하여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이 작은 바윗돌은 정말로 조금 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옆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지켜보면서 내심 현의노인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현의노인과 그 작은 바윗돌과는 최소한 일장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도 청의대한의 전력이 담긴 충 격을 완전히 무위로 만든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공력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노인도 세외팔선의 하나가 아닐까?) 황보자안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청의대한은 그야말로 진땀을 흘려가며 내력을 쏟아도 바윗돌이 움직이 지 않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일시에 앞으로 달려들면 서 주먹으로 그 바윗돌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청의대한의 노력은 약간의 결실을 얻어서 그의 주먹이 그야말로 피곤죽이 되었지만, 그 바윗돌 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현의노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렇게 충돌할 때 생기는 미세한 흔들림마저 완저히 없게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청의대한은 자신의 주먹의 뼈가 탈골되고 살이 으스러져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즉시 크게 기쁨에 젖어서 현의노인에게 묻는 것이었다. "우, 움직였습니까?" 이때 현의노인은 기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움직였네." 순간 청의대한은 고통도 완저히 잊어버린 듯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당당한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성공을 했으므로 길목을 유 유히 통과해서 내부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가 현의노인의 앞을 지나지 않았는데, 문득 현의노인이 손을 들어 그의 발길을 막았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네. 자네는 졌네." "뭐라구요?" 현의노인은 대답 대신에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바 로 커다란 바윗돌이 있는 곳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그 커다란 바윗돌은 지금 이 순간 무려 옆으로 한 자 정도 밀려나 있었다. "자네는 거짓말을 했더군. 저 바윗돌은 자네가 조금 전에 몸을 날리는 바람 에 저절로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대체 어느 것이 더 가벼운 것인가? 자네는 애초에 힘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 청의대한은 자신이 너무나도 열심히 작은 바위를 움직이려다가 바람을 일으 키는 통에 저 커다란 바위를 움직이게 할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순간 청의대한의 안색은 극도의 공포감과 불안감, 그리고 고통 과 분노의 기색으로 넘쳐서 소리쳤다. "아냐, 아냐! 이와 같은 결과는 절대로 승복할 수가 없다! 거짓말이야!" 그러나 청의대한의 그와 같은 반발은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이어 그 가 마악 허리춤의 장검을 발작적으로 뽑아 들어 현의노인을 향해 덮쳐가려 는 순간에 이미, 펑! 가벼운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육신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일시에 터져나간 가슴에서 피와 내장을 한꺼번에 내쏟으며 역시 그 벼랑으 로 시신이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현의노인의 사람을 처리하는 수법은 비단 간단하고 깨끗하여 전혀 피를 묻히거나 손을 쓰지 않은 것 같았지만 공포감을 주기에는 족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현의노인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대체 청의대한이 어떤 수법에 의해서 죽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알지 못하는 사실은 더욱 공포감을 유발시키는 법이었다. 한쪽에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황의대한은 등뒤에 한 자루의 감산도를 메고 있었는데, 혈색이 붉은 사람답게 다소 성미가 급한 모양이었다. 그는 옆에서 함께 생각하던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현의노인은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너는 어떤 것을 결정하겠느냐?" 황의대한은 잠시 주저하다가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나는 이것이 가볍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소." 말이 끝나자 황의대한은 곧장 가볍게 걸음을 옮겨서 작은 바윗돌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이렇게 시원스럽게 움직여도 그 작은 바윗돌은 조금도 움직 이지 않는 것이 아마도 현의노인은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황의대한은 이어 두 눈에서 맹렬한 안광을 일으키며 작은 바윗돌을 노려보 다가 일순 쌍장을 바위의 윗면에 대고 있는 힘을 다해서 내리누르기 시작했 다. 그의 이렇게 누르는 것은 현의노인에게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황의대한이 이마에서 허연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순간에 이미 그 작은 바 윗돌은 돌바닥에 한 치나 깊이 들어갔는데, 실로 그의 이와 같은 내공의 힘 이라고 하는 것은 제법 훌륭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작은 바윗돌이 다시 반 치 정도 더 들어갔을 때였다. 황의대한이 돌 연 눈을 번쩍 뜨더니 누르던 힘을 일시에 제거하고 번쩍 다른 쪽의 커다란 바위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이러한 계책은 다소 쓸모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작은 바윗돌은 돌바닥에 박아 놓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면 현의노인이 미처 힘을 옮기기 전에 커다란 바위를 움직 일 수가 있을 것이었다. 과연 황의대한은 미처 몸이 닿기도 전에 커다란 바위를 향해 장풍을 맹렬하 게 날렸는데, 그 바위가 다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에 대단히 만족을 한 듯 황의대한은 우뚝 몸을 세워서 현의노인을 향해 물었다. "내가 저 큰 바위를 움직인 것은 틀림이 없소?" 현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황의대한은 이에 입을 크게 벌리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렇다면 내가, 내가 이긴 것이 아니겠소?" 기실 두 개의 바윗돌의 움직인 거리로 본다면 작은 돌은 한 치 반이나 움직 인 것이니 다소 길다고 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손으로 내리누른 것이고 다 른 하나는 손도 닿지 않은 것이니 어찌 함께 거리를 논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손이 닿은 것만 본다면 작은 바위는 짧은 순간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 았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의노인의 대답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 것이 아닌가! "아니네. 자네는 졌네. 자네는 어서 자네의 옆을 보게." 황의대한은 즉시 크게 흠칫하여 안색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 다. 순간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아까 그토록 힘들게 박아넣었던 그 작은 바 윗돌이 지금 바로 마치 귀신처럼 자신의 옆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황의대한을 향해 현의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는 보아하니 그 작은 바위에 너무 힘을 쓰지 않았더군. 그 바위가 그 토록 가볍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네의 신법에 영향을 받아서 거기까지 날아 갔겠는가?" 장풍에 조금 흔들린 것과 신법의 바람에 휩쓸려 날아간 것과는 아예 차원을 달리하는 내용인 것이었다. 황의대한은 즉시 안면이 시뻘겋게 변했다고 다시 시커멓게 변하면서 돼지 목 따는 듯한 괴성으로 부르짖었다. "이건 사기다! 이 늙은 귀신아, 어서 나와 자웅을 겨루어 보자!" 황의대한은 즉시 자신의 등뒤에 매어져 있는 감산도를 뽑아들고 현의노인을 향해 맹렬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 황의대한은 역시 아까의 경우처럼 전혀 힘을 쓰지도 못하고 일시에 가슴이 쇠북처럼 터져 나가며 피와 내장을 일시 에 뿜어내며 벼랑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진득한 피비린내와 함께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주위에 안개가 깔려 있 는 것 같아서 사람들의 허무한 죽음들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기실 눈앞의 이 문제는 합당하지도 않은 것이며, 또한 무공이 현의 노인과 대등할 만큼 고강하지 않는 한은 도저히 풀 수가 없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제야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내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날 뿐 무 모하게도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어리석게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기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바로 이 현의노인이 바라고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천하에는 상식을 따르지 않는 예외라는 것도 있는 법이 어서 바로 이 순간에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한 사람이 그 바윗돌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바로 그는 황보자안이었다. 황보자안이 앞으로 다가가자 비단 그 일행인 심황과 아평 등도 크게 돌라서 안색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 현의노인 역시 다소 눈살을 찌푸리는 표정 이었다. "네가 나의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냐?" 황보자안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낸 사람이 있으면 문제를 푸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어찌 그리 이 상하게 생각하시오?" 현의노인은 이에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네가 문제를 풀지 못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누구를 의식하고 봐주는 사람은 아니니 그것을 확실히 알도록 해라." 현의노인의 이 말은 조금 전에 떠나간 운산산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느 낄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만일 그렇다면 나의 흥미가 반감되지 않겠소?" 현의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나의 이 문제는 너라고 하더라도 결코 풀 수가 없는 문제이다. 나는 네가 감히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흥미를 느낄 것인지 한 번 보도록 하겠 다. 그래, 너는 무엇으로 결정하겠느냐?" 황보자안은 역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작은 바윗돌을 가리켰다. "역시 이것이 가볍지 않겠소?" 현의노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어서 그 점을 증명해 보아라." 황보자안은 이에 터벅터벅 걸어서 커다란 바윗돌의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바윗돌을 건드리자 그 커다란 바윗돌은 그야말로 마치 하나의 가벼운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공에 무려 두 치 정도나 둥실 떠올랐다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 물론 현의노인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황보자안은 천천히 미소하며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작은 바윗돌을 이보다 높이 들어올리게 되면 되는 것이오?" 현의노인은 싸늘하게 냉소하며 대꾸했다. "물론이다." 황보자안은 이에 역시 터벅터벅 걸어서 그 작은 바윗돌의 앞에 이르렀고 그 것을 잡고는 힘을 주다가 문득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현의노인은 냉랭하게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힘을 주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 군. 대체 어째서 하늘의 구름이 노란 색깔일까?" 현의노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야 저녁이면 노랗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황보자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저녁때도 아닌데 어째서 당신 뒤의 저 구름이 저렇게 노 란 빛을 보이는 것이오?" 순간 현의노인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두 눈에서 검은 광채를 한 자나 쭈욱 내뻗으며 급격하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다가 자신의 뒤쪽에 노란 구름은커녕 흰 구름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아 낸 현의노인은 다시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체 노란 구름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젓고 있있다. "아, 미안하오. 내 눈이 잠시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오. 내 눈은 별로 나이 도 먹지 않았는데 흐려진단 말씀이야!" 사람들은 그의 말이 워낙에 능청스러워서 자칫 긴장감을 풀고 웃음을 터뜨 릴 뻔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현의노인이 왜 그토록 노란 구름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 현의노인은 불과 얼마 전 에 그 노란 구름의 주인에게 아주 호되게 당했으며, 역시 마음 속으로 두려 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의노인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여러 말 하지 말고 어서 그 문제를 풀기나 해라." 그런데 황보자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큼직한 무엇을 즉시 현의노인에게 던 져주는 것이었다. "이것을 말이오?" "……!"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황보자안이 가리켰던 그 작은 바윗돌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같이 크게 놀랐다. 그들 중에서 아무도 황보자안이 그것을 집어 드는 것을 본 사람이 없는데 언제 그가 그것을 집어들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황보자안은 방금 전에 현의노인이 잠깐 동안 놀라서 바윗도를 누르고 있었던 진기를 거두는 순간에 아주 빠르게 그것을 집어올린 것이었다. 극상 승의 무예를 지니고 있는 황보자안에게 일단 그것을 누르는 힘이 없어진 상 태에서 돌을 들어올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의노인은 일순 그 바윗돌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황보자안을 주시하며 말했다. "좋다. 네가 이겼다고 하지. 헌데 너는 지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는 기왕이면 일행과 함께 모두 들어가려는 것이오." 현의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기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들어가도 좋아." 순간의 일이었다. 현의노인의 신형이 마치 허깨비처럼 바람에 날려서 형제 가 서서히 사라지며, 황보자안의 귓전에 문득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이 맹랑한 녀석아, 네놈이 정말로 나의 문제를 풀었다고 생 하느 냐? 내 그들을 생각해서 네놈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다. 알겠느냐?" 황보자안의 얼굴은 일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는 나의 말에 별로 놀라지도 않고 내가 바윗돌을 들어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이는…… 이는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속담과 걸맞는 상황이 아닌가!) 황보자안은 다시 생각했다. (혹시…… 혹시 이것은 이미 이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때는 이미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서 정오를 훨씬 지나서 미시(未時)에 거 의 도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위에서 장내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현의노인이 사라지는 것 을 보고 일순 저마다 신법을 펼쳐서 비무대회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곤륜파의 사람들도 그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옆에 있는 심황에게 물었다. "방금 전의 그 현의노인은 대체 누구요?" 심황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가 바로 현현괴로(玄玄魁老) 모용술계(慕容術桂)예요." (현현괴로 모용술계…… 그럼 귀황(鬼皇)이란 말인가?) 황보자안은 심황, 아평 등과 함께 사람들의 뒤를 따라서 비무대회장에 이르 렀다가 일순 크게 경악하고 말았다. 드넓은 비무대회장은 이미 무수한 사람 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는데, 바로 그 시신들은 동심맹 소속 사 람들의 시신이었고, 또한 그 시신들이 모두가 한 줄기의 글자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수라(阿修羅)의 마력(魔力)이 천하를 피로 씻을 것이다.> --계속-- 번호:154/154 등록자:SOSUL 등록일시:97/01/23 07:09 길이:230줄 제 목 : [백상] 곤륜문하 제48장 대미 타이핑: 양한우(hitel ID: hanwoo71) 제48장. 귀인(貴人)들 사람들은 그 거대한 글자를 보고는 너무나도 놀라서 감히 시신들을 치울 생 각도 못하고 이리저리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동심맹의 맹주이며, 일명 무림의 환우일군자라고 불리우던 백무군(白武君) 대협은 이 순간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어떤 무리들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도중에서 겪은 일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했었기 때문에 필시 백맹주가 납치를 당하거나 적도 들에게 척살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의 상황에서 아무도 어떤 무림을 위한 대책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드 디어 무림에 피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달아나기에 급급한 모습들이었다. 이것은 실로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기실 일반의 무 림인들이 어찌 감히 세외팔선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상대할 수가 있겠 는가? 황보자안은 점차로 텅 비어 가는 거대한 연무장을 바라보며 문득 이렇게 생 각했다. (아수라의 마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황의 우두머리나는 수라노자를 가 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혹시 천수 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 아닐까?) 황보자안은 다시 생각했다. (현현괴로가 모든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적당한 시기에 길을 터주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광경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실로 지금처럼 마도의 등장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 더 있겠는가?) 그때 현황자 등이 떠나려고 서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황보자안이 물었다. "어디로 가실 계획이십니까?" 현황자는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고, 또한 아직 우리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상황이네. 그러므로 우리는 일 단 본파로 돌아가서 앞으로의 정황을 보아가며 움직일 생각이네." 말은 제법 그럴 듯하지만 그것은 기실 도저히 당할 수가 없으니 일단 도피 하자는 생각인 것이었다. 하긴 다소 싸울 만한 상대가 되어야 싸우고 싶은 의욕도 생길 것이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물었다. "그럼 저도 곤륜파로 따라가야 되겠군요." 현황자는 눈살을 다소 찌푸렸다. "자네는 이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반드시 그래야 하겠나?" 황보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파의 선공을 배우는 것은 할아버지의 지시였고, 또한 저의 꿈이었습니 다. 도중에서 그만둔다면 매우 섭섭할 것입니다." 현황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도록 하게나." 기실 현황자는 자신들이 이제는 무사히 곤륜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딘가 세외팔선의 도움을 받고 있는 듯한 황보자안 등을 데려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던 것이었다. 황보자안 등은 그 뒤로 두어달의 기간이 흐르는 동안 곤륜파로 향했는데, 심황과 아평은 이때 황보자안의 옆에서 함께 따라다니며 보호자 겸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곤륜파에 다시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중원에서는 수라노자 구양극서의 세력이 크게 일어나서 천하를 거의 차지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실로 이곳 곤륜파가 위치하고 있는 곤륜산맥은 그야말로 끝도 없이 넓고 중원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원의 그와 같은 정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현황자 등은 일부러 중원의 얘기를 꺼내지 않고 곤륜파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으며, 미리 약속한 대로 황보자안에게 곤륜파의 오대선공 가운 데에서 금단선공(金丹仙功)을 전수해 주었다. 이때 심황과 아평은 황보자안이 머물고 있는 석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 은 암자를 지어 놓고 거주하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은 금단선공의 내용을 전 수받은 후에 그것을 보다 깊이 연마하기 위해서 남은 두 달 가량 폐관에 들 어가게 되었다. 항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심황과 아평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때부터 그녀들은 하는 수 없이 황보자안의 음식을 매일 작은 구멍으로 넣 어주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황보자안은 정말로 신선이 되기 위해 그처럼 선도 공부에 들어간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기이하게도 황보자안은 일단 폐관에 들어간 이후에 전혀 다른 사 람처럼 되어서는 공간과 공간을 훨훨 날아서 아주 낯설은 장소에 도착해 있 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신비로운 동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동굴의 내부에서는 상서(祥瑞)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또한 동굴의 입구에는 한 사람이 숙연한 자세로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닌 황보노야 황보금괴였다. "어서 오십시오, 소주인(小主人)님!" 황보자안은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안에 계시오?" 황보금괴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소주인님. 그분께서는 이미 소주인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황보자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동굴의 내부에는 아주 기이한 구름들이 가득차 있었는데, 그것들이 사방으 로 굽이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그러한 구름들이 일제히 에워싸고 있는 듯한 곳에 한 사람이 지금 아주 고요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백리노대(百里老大) 바로 그 사람이었다. 황보자안이 다가가자 백리노대는 만면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 다. "내가 한 아이를 네게 보냈었는데 그 아이가 어떠하더냐?" 아평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아주 좋습니다. 그보다 이제야 저를 부르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희 생되는 것을 방관하시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백리노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세상의 일은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돌아가는 것이므 로 간혹 혈겁은 필요하기도 하는 법이란다. 허허…… 너도 사실은 알고 있 겠지? 그래서 오늘은 너에게 모든 일을 맡기려고 한다." 황보자안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만 쉬시려는 것입니까?" 백리노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실로 나는 제법 많은 세월 동안 살아 오지 않았느냐?" 황보자안은 즉시 앞으로 손을 내밀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할아버지께서는 훌륭하신 분이셨으니 저는 항상 존경하고 그리워할 것입니 다." 백리노대는 가볍게 웃었다. "허허…… 너의 칭찬을 듣는 것이야말로 천하인의 칭찬을 듣는 것보다도 나 은 것이로구나." 순간의 일이었다. 백리노대의 얼굴에서 급격히 광채가 사라지더니 그의 주 위를 에워싸고 있던 신비한 구름들마저 돌연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가! 황보자안은 한참 동안이나 어두워진 백리노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입구에는 역시 황보금괴가 공손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아까와 다른 점은 지금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뒷일을 부탁하오." 황보자안은 그 말을 남기고 소리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황보자안이 다시 공간과 공간을 훨훨 날아서 도착한 곳은 바로 곤륜산이었 는데, 그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곳을 좌망봉(坐忘峯)이라고 부르고 있 는 곳이었다. 기실 이 봉우리는 신비하여 사방이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이고, 날아 가는 새나 그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쉽게 발견할 수가 없는 곳 이었는데, 하나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단 위에 한 사람이 황금빛의 살결을 가지고 황금빛의 눈빛을 한 채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 천수자라고 불리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 백일맹이 드디어 때를 얻게 되었는가? 천기(天機)의 흐름은 아무런 이 상이 없도다. 수라노자는 나의 말을 믿고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이고, 나 는 이제 그를 밟고 천하의 신전(神殿)에 올라 절대(絶對)의 신(神)으로 군 림(君臨)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 일을 많이 망설였었고, 또한 많은 생각을 하여 그 때를 기다려 왔다. 이제 시기는 무르익었고, 나는 천하에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하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한 나의 이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점이 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주위에서 느닷없이 한 사람의 음성이 울려 왔다. "비단 하늘이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그러한 선택은 올바르지도 않은 것이오." 천수자는 그 얘기를 너무나도 갑자기 들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 다. 그러나 뒤이어 그는 나직한 탄식을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공간과 공간의 장애를 마음대로 초월하고, 고요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 며, 그러한 움직임을 천기에서도 알 수가 없는 그대는…… 그대는 누구시 오?" 나타난 사람은 물론 황보자안이었는데, 그는 담담히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백리자안(百里子安)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황보가의 핏줄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 천수자는 잠시 그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물었다. "그대는 나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 온 것이오?" 말과 동시에 천수자의 전신에서는 일순 마치 거대한 태양과도 같은 황금빛 의 광채가 위맹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황보자안은 이것을 보자 일순 우 수를 들어 가볍게 원호를 그렸다. 그러자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 봉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가 일순 크게 주춤하더니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천수자는 그것을 보고 한 차례 깊은 탄식을 하더니 황금빛의 광휘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가 있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소." 황보자안은 우수를 가볍게 휘저었는데, 그러자 일순 다시 봉우리의 주위에 는 전과 같은 짙은 구름들이 감돌기 시작했다. 황보자안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문을 알고 있소. 그것은 바로 당신의 앞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오?" 천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우화등선을 믿을 수가 없소." 황보자안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능히 당신의 의문을 풀어줄 수가 있소. 그러나 내가 당신의 의문을 풀어주기 전에 우선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오." 천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알고 있소. 씨앗은 뿌린 사람이 거두어야 하는 것이지요." 황보자안은 그를 바라보며 문득 만면에 신비롭고 자애로운 미소를 가득 머 금었다. "나는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오." 두 달의 폐관 기일이 모두 흘러갔다. 황보자안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일 어나서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동굴의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기실 그는 두 달 동안 선도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했 고, 이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가에는 다시 예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동굴의 밖에 이르자 어느새 심황과 아평이 신법을 펼쳐서 달려오고 있 었는데, 기이하게도 그녀들의 뒤쪽에는 산중노인(山中老人) 심병춘(沈炳春) 이라는 이름의 초라한 의원같이 생긴 노인과 만화동모 운산산, 그리고 모용 릉파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 운산산의 얼굴에는 다소 수줍은 기색이 어려 있다는 점이 기이했다. 황보자안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절로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사방을 향해 소리소리를 내질렀다. "아이구, 이거 야단났군. 어서 밥부터 주시오! 배가 고파 죽겠단 말이오! 아이구, 아이구, 이를 대체 어쩌지?" 이때 심황과 아평이 먼저 동굴 앞에 이르러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는 이미 저 산 아래에 차려 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중원에는 다시 그 백맹주가 돌아오고 수라교(修羅敎)가 사라졌다고 하는 데, 그 얘기는 아직 모르시죠?" "저 뒤에 오는 운산산은 우리가 저번에 곤륜파로 돌아올 때 은밀히 주위에 서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기로 했어요." "곤륜파의 현황자 도장이 며칠 내로 안랑과 함께 중원에 한 번 더 나가보고 싶어하는 눈치이던데요?" "모용언니는 원래 산중노인께서 데리고 계셨는데, 이번에 함께 이리로 오게 되었어요. 그녀를 보게 되니 기분이 좋으시죠?" 이들 두 명의 여인들은 그야말로 황보자안을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게 되자 기쁘고 반가워서 품속에 뛰어들고 싶었으나 뒤에 오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저 말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에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사랑들 이 충만해 있었다. 황보자안은 따라서 즉시 그녀들을 한 사람씩 껴안고 입술에 입맞춤을 한 뒤 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소, 좋소. 그럼 우리 며칠 뒤에 이곳을 떠나기에 앞서서 근사하게 잔치 를 벌이는 것이 어떻겠소?" 이것으로 본 곤륜문하(崑崙門下)를 마칩니다. <大尾> ♣♣♣ 지금까지 성원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백상님의 다른 작품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던데, 이 작품도 이야기의 시작 이나 전개는 아주 훌륭한데, 끝에 가서 다소 흐지부지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좋은 작품 쓰시느라 수고하신 백상님께도 감사를 드립니 다. 다음에 연재할 작품도 역시 백상님의 작품입니다. 제목은 "종남사부"입니 다. 앞부분 조금 읽었는데 아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조금 쉬었다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올리느라 다른 일 을 못했거든요.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양한우(hanwoo71)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