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奇情武俠小說 공 동 도 성 (공동道聖) 저 자 : 百 象 발행처 : 도서출판 산호문화사 93.4.20 인쇄/93.4.25 발행 서문 본저 공동도성( 道聖)은 본인이 기획하여 제작하고 있는 일련의 구파일방총서 가운데의 여덟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전저였던 청성묵가(靑城墨家) 등의 흐름에 이어서 역시 강 호무림인들의 특색있는 생활상을 진한 맛으로 우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 다. 이른 바 강호상의 명문정파들이라고 자처하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다소 혼탁한 모습을 보이 고 정파답지 않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 공동파( 派)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다양한 흥 미를 자아내도록 하기 위해 다소 복잡하고 치밀하게 흘러가는 사건의 흐름 속에서 나름대 로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의 행동들을 부각시키고 그 가운데 주인공이 걸어가게 되는 바른 길에 대한 지표를 세워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백상(百象)---- 서장 --- 한 사람. 일신에 백색의 도포를 단정하게 걸치고 바닥에 넙죽하게 엎드린 목상 도장(木桑道長)은 백 발이 다 된 머리를 조아리며 아주 간곡하고도 공손한 음성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 그리하여 지금 천하는 신주팔패(神州八覇)의 무리들이 득세를 하고 본파를 비롯한 명문정파의 자제들은 마침내 그 설 땅마저 없어지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실 로 이것은 과거에 우리 명문정파들이 이루었던 업적과 그 명성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어이없는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아마도 그러한 사정은 태사숙조께서도 능히 잘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태사숙조(太師 叔祖). 이제까지 조용한 표정으로 묵묵히 목상 도장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는 문득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어 물었다. "그래, 당신이 나를 낮은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이오?" 목상 도장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소도(小道)가 어찌 감히 사사로이 태사숙조님을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소도의 뜻 이 아니라 본파의 장문사존의 뜻인 것입니다."그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곡허자(谷虛子) 장문인이? 그래, 그럼 그가 지금 나에게 원하고 있는 바는 대체 무엇이라는 말이오?" 목상 도장은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아시다시피, 천하의 대세는 그렇게 기울어서 설사 다년간 무림을 영도해 왔던 소림 과 무당이라고 해도 이제는 그것을 되돌리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오직 가능 성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곳은 다만 본파인 공동파뿐인 것이며, 그렇게 본파가 천하의 대사를 주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실로 옛부터 정확하게 예견되어 오던 것으로서……"목상 도장의 얘기가 길어지자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다가 목상 도장의 말을 자르면서 입을 열 어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장문인은 내가 공동산( 山)으로 가서 공동파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이 아니겠소?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장문인의 말이라고 해도 가지 않을 것이오. 당신은 그래 내가 이미 공동파의 속박에 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오?" 목상 도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태사숙조님은 설사 장문사존이라고 해도 간섭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태사숙조님께 서는 본파의 전설에 나오듯이 천하를 평정하고 본파의 위명을 크게 떨치게 하실 단 한 분 의 도성(道聖)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장문사존께서는 태사숙조님께 진심으로 부탁의 말씀을 드리는……"목상 도장의 말에 그는 어이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다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잘랐다. "당신들은 갈수록 생각이 더욱 더 허황되게 되는 것 같구려. 나는 그저 일개의 평범한 사 람에 불과할 뿐인데 성인이라니 그 무슨 천만부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 내 분명히 말 하지만 설사 장문인이 와서 설득을 한다고 해도 결코 내가 공동파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당신은 그만 단념을 하고 돌아가서 앞으로도 다시는 나를 이러한 목적으로 찾아 주지 말기 를 바라오.""……!" 이 순간 그의 태도가 워낙에 확고부동해 보였기 때문에 목상 도장은 일시 할 말이 없는 듯이 묵묵했다. 그러나 필시 그만 포기하고 돌아갈 것으로 생각되었던 목상 도장이 뜻밖에 도 잠시 후에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소도가 이곳으로 오면서 이미 태사숙조님의 그와 같은 의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의 일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정말로 그 일이 이루어지 지 않을 것이라면 소도는 역시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태사숙조님께서는 지금 비 록 그와 같은 고집을 부리시나 결국에는 강호에 나서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도액 오선(渡厄五仙)이 이미 출관(出關)했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문득 놀라서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액오선이?" 목상 도장은 놀라 안색이 변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소 득의한 표정으로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그들만이 태사숙조님을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장문 사존께서는 이미 그들을 출관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목상 도장의 그 말을 들은 그는 일순 마치 가슴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받은 표 정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 창 밖에는 투명한 달빛이 휘영청 밝아 오고 있었지만 반대로 그의 마음 속에 는 어두운 먹구름과도 같은 번뇌가 늘어 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 [백상] 공동도성 제1권 제1장 제1장 풍우정(風雨亭)에서 만난 사람들 눅눅한 새벽의 안개를 잠재우며 동쪽의 하늘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른 태양(太陽)의 빛살은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 문인천상(聞人天翔). 그는 자신의 정원 부근을 천천히 거닐면서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기울 이다가 이윽고 누각으로 들어가서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에 의복을 간편한 외출복 으로 갈아입었다. 어제 저녁 무렵에 큰숙부인 금산반(金算盤) 주운양(周雲陽)으로부터 이곳 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정자(亭子)로 아침나절에 나와 달라는 전 갈을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말하자면 지금 문인천상이 머물고 있는 누각도 비록 그의 소유이기는 하지만 역시 큰 숙부인 주운양이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설사 과히 내키지 않는 기분이라 고 해도 일단은 주운양의 의사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라도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는데, 하물며 오늘의 날씨는 매우 쾌청하여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운양이 부른 목적에 어떤 기분 나쁜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에 문인천상으로서는 지금의 이 외출을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약속이 되어 있는 그 작은 정자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 직 다소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마치 산책을 하듯이 느릿하게 걸 음을 옮겼다. 이 부근 일대에는 제법 짙은 수림이 조성되어 사위를 뒤덮고 있었는데 길가의 나뭇잎들이 이미 가을서리를 맞았는지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한 정경은 비단 보기에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그 가운데 영기 어린 서늘한 안개가 서려 있는 듯하여 그는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 흡사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보았 다. 좁은 길은 단풍나무숲이 그렇게 우거져 있는 수림과 계곡의 사이로 교묘하게 이리저리 구 불구불하게 나 있었는데, 그러한 굽어진 길을 한참이나 돌아가자 이윽고 작은 호수와 인접 해 있는 평지 위에 하나의 초라해 보이는 정자가 나타났다. 정자의 처마 밑에는 풍우정(風雨亭)이라고 제법 훌륭한 글씨체로 글자가 씌어진 현판 하나 가 매달려 있었는데, 문인천상은 문득 그 현판을 보게 되자 절로 걸음을 멈추었다. 다름이 아니라 본래 그 정자의 현판의 글자를 쓴 사람은 그의 선친으로서 말 그대로 이곳에 이르게 되면 인공적인 것을 떠나서 가장 자연적인 멋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해서 풍우정이라고 이름 을 붙였던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 선친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했 기 때문이었다. (……) 그때 다소 넋을 놓고 있는 듯한 그의 귓가에 느닷없이 한 줄기의 아주 맑으면서도 강한 기 질이 엿보이는 음성이 요란스럽게 울려 와서 그로 하여금 정신이 들게 만들었다. "상(翔) 오라버니께서 이제야 오셨군요! 그런데 어째서 일단 오셨으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그렇게 서 있기만 하는 거죠?" --- 자의소녀(紫衣少女) 십팔 세 정도의 나이에 눈빛이 날카로운 두 눈에서는 다소 싸늘한 기질이 엿보이지만 보 기 드문 미인형의 용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그녀는 지금 반가운 표정을 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자의 위에서 내려서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다름 아닌 주운양의 세 명의 자식 가운데 막내이자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인 주완청(周婉淸)으로 문인천상은 물론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기실 문인천상은 일신상의 사정이 생겨서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겨우 두어 달 전에야 비 로소 돌아오게 도었었는데, 비록 서로간에 친근한 대화조차 변변히 가져 보지 못하였는데도 그녀는 고맙게도 이렇듯 친오빠를 대하듯이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현판에서 시선을 떼고는 잠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가볍게 웃으 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이곳에 오게 되어서 잠시 옛날 생각을 하느라고 그랬던 것이오. 이곳은 정 말로 아름답지 않소?" 주완청은 그 말에 그의 앞에 이르러 어이가 없다는 것이 손을 벌려 보이며 대꾸했다. "뭐라구요? 이 황폐하고 지저분한 곳이 아름답다고요? 정말로 상 오라버니의 말씀은 이해 할 수가 없네요. 나는 솔직히 아버지께서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지 않았었다면 결코 이와 같은 낡은 정자에는 오지 않았을 거예요." 문인천상은 담담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청매(淸妹)가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관점의 차이 때문일것이오. 그러니 설령 서로간의 생각이 틀리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소." 기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풍우정이 주운양과 문인천상이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었으며, 문인천상은 뜻밖에도 이 주완청이 먼저 약속장소에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주운양은 보이지 않고 두 명의 낯익은 청년들이 보이는데, 그들이 바로 주완청의 두 명의 친오빠들 인 주원헌(周元獻), 주원학(周元鶴)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주씨 형제들은 각기 나이가 스물다섯 스물셋에 달하는 사람들로 비단 용모가 영준하고 체구가 당당할 뿐만 아니라 일신의 묵오이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어서 부근에서는 후 기지수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들이었다. 주완청과는 달리 그들은 다소 무뚝뚝하여 쉽게 문인천상과 친해지지 않았는데, 지금 두어 차례 이쪽을 건너다볼 뿐 다가오거나 말을 걸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주완청은 문인천상의 말에서 지독한 책벌레의 시큼한 냄새가 난다는 듯이 한 손으로 코를 잡고는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저는 상 오라버니의 말만 들으면 금방 머리가 다 어지러워지는 것 같 아요.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두고 함께 이 부근을 산책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문인천상은 비록 저 주씨 형제가 정자의 안에서 다소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 지만 자신과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굳이 정자의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대면하고 싶지가 않아서 즉시 그녀의 말에 찬성을 하며 그녀를 따라서 주변의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이 부근의 토질은 시뻘건 황토흙이 많았고, 그 때문에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해서 주위가 매우 황폐해 보였으며 또한 주변에 있는 호수의 물도 역시 혼탁하여 흙탕물에 가까웠으니 실로 이러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좋아하는 소녀가 그러한 풍경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 은 당연한 노릇ㅎ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기실 문인천상이라고 해서 특별히 그와 같은 황폐한 풍경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는 것은 아 니었지만 다만 그는 지금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는 것이었는데, 잠시 주완청의 뒤를 따라 서 호숫가를 걷다 보니 그러한 과거의 기억들이 좀더 분명하게 뇌리 속에서 되살아나기 시 작하는 것 같았다. (……) 주완청은 그러한 그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걷다가 이윽고 문득 고개를 돌려 그 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상 오라버니께서는 저희 아버지께서 무엇 때문에 갑자기 성 안으로 들어가셨는지 알고 계 시나요?" 문인천상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되물었다. "그대의 아버님이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이오? 나는 다만 그대의 아버님께서 이곳으로 오라고 해서 온 것일 뿐인데 어떻게 그와 같은 이유을 알 수가 있겠소?" 주완청은 그 말을 듣고는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상 오라버니의 말씀을 들으면 때로는 총명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숙하게 느껴지 기도 하여 대체 어느 것이 진짜의 모습인지 모르겠어요. 정말로 아직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계셨었나요? 저의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에게 저기에 있는 정자에서 기다리게 하시고는 아침 일찍이 둘째숙부님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셨죠." 문인천상은 다소 의외라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럼 둘째숙부께서 이미 돌아오셨다는 말이오?" 주완청은 문인천상의 그러한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 우스운지 어이없어 하던 상태에서 이 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오신 분들은 비단 둘째숙부뿐만 안라 셋째숙부, 그리고 그 외의 몇몇 사람들까지 있어요. 사실은 둘째숙부와 셋째숙부가 그 사람들을 모셔 온 것이었는데, 오늘 새벽에 셋째 숙부가 그들을 접대하는 동안에 둘째숙부가 아버지께 와서 그것을 알렸고, 그리하여 두 분은 그 사람들을 맞이하러 성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이죠." "아! 그랬었군. 원래는 셋째숙부께서도 이미 오셔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계셨던 것이로군." 문인천상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원래 그의 큰숙부인 금산반 주운양에게는 두 명의 의형제가 있었는데, 강호상에서는 그들 삼 인을 가리켜 농서삼걸( 西三傑)이라고 불렀고, 그 가운데 둘째는 철장무적(鐵掌無敵) 상 장풍(常長風)이었고, 셋째는 청망검 임옥룡(林玉龍)이었다. 과거 문인천상의 선친은 생전에 그들 삼 인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지금 문인천상이 그들을 숙부로 대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물론 의숙인 것이었다. 주완청의 말이 다소 앞뒤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 운 얘기는 아니었다. 농서삼걸의 둘째와 셋째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고 주운양과 함께 장 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함께 장원을 떠났다가 아마도 다른 손님들을 데리고 돌 아온 모양이었다. 문인천상이 다소 상황을 이해한 듯하자 주완청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이제 그 두 분의 숙부께서 어떤 사람들을 모셔 온 것인지 알겠어요?"문인천상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에 미소하며 대답했다. "내가 무불통지의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러한 일을 알 수 있을 리가 없겠지만, 아마도 그 들은 틀림없이 중요한 사람들일 것이오. 그렇지 않소?"주완청은 문인천상의 얼굴 표정을 살 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나는 아직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비단 이미 강호상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공이 최절정(最絶頂)의 경지에 이르러 거의 적수를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의 인물이라고 해요." 문인천상은 다소의 호기심이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큰숙부의 무공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이오?" 주완청은 이에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께서는 저의 아버지의 무공을 과대평가하고 계시는군요. 사실 저의 아버지의 무공은 이곳 일대에서는 그다지 적수를 찾아 보기 어렵다고는 해도 기실 아직 절정고수의 대열에 머물고 있어서 최절정 경지의 사람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문인천상이 묵묵히 생각에 잠기며 걸음을 옮기자 주완청은 다시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 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저의 아버지를 깎아 내릴 생각은 없지만 그 사람은 강호상에서의 위치는 가히 최고 명숙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저의 아버지의 체면이 깎이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러나…… 사리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람은 그 나머지 한 사람 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문인천상은 물었다. "그럼 숙부님들이 모셔 온 손님들은 모두 두 명이라는 말이오?"주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모두 두 명이죠. 그러나 실로 이 두 사람의 비중은 어떤 다른 사람들 수십 명보다 오히려 더욱 크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처음의 사람뿐만 아니라 나중의 한 사람 역시 매 우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죠."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나중의 사람은 무공이 앞서의 사람보다도 높다는 말이오?"주완청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니에요. 그의 무공은 오히려 못하여 심지어 저의 아버지보다 낫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 태이죠. 다만…… 다만 그는 아직 나이가 저처럼 어린 소녀예요." 주완청은 그 말을 하면서 마지막 말꼬리를 은근히 흘리며 문인천상의 옆얼굴을 바라보았 다. 문인천상은 다소 놀란 듯이 물었다. "아니, 그처럼 어린 여자의 무공이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말이오?" 사실상 이곳 난주성(蘭州城)의 일대에서 후기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저 주씨 형제들만 해도 기실은 아직 일류고수의 대열에 끼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일개의 소녀가 무공을 이미 절정의 경지에까지 연성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한 소녀의 얘기를 듣게 되면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완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원래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 갑자의 공력을 쌓아야 하고, 절정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 갑자의 공력, 그리고 최절정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는 삼 갑자의 공력을 쌓아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비록 공력 이 충분하다고 해도 초식이 정묘하지 못하다면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 고, 또한 비록 다소간의 공력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초식이 정묘한 상태에 이르렀다면 오 히려 이미 그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듣기에 그 여자는 비단 공력뿐만 아니라 초식에 있어서도 이미 명실공히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 같았고, 게다가 그녀의 얼굴은 아주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그녀가 보고 싶지 않나 요?" 문인천상은 주완청이 그런 말과 함께 다소 기이한 눈초리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비록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어이없게도 마치 자신이 부정한 짓을 하다가 마누라에 게 들킨 사람과 같은 상황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비록 그다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대의 아버님께서 나를 그들과 만나도 록 주선해 놓으신 것이 아니오?" 주완청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문인천상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 다. "그래요. 아버지께서는 그들과 상 오라버니를 대면시켜 주기 위해 상 오라버니를 이곳으로 부르셨던 것이죠.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구태여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일까 요?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겠어요? 이를 테면……" 주완청이 쉽게 말하지 않고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여운을 남기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즉시 물었다. "혹시 청매에게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도 있다는 말이오?"주완청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얼굴을 다소 붉히며 대답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저는 무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상 오라버니를 구태여 그들과 대면시키고 자 하는 데에는 뭔가 특이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물론 상 오라버니 를 그런 인물들과 소개시켜 주어서 견문을 넓혀 주고 장차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도록 하는 목적이 있겠지만, 특별히 우리까지 부른 것은 아마도…… 아마도 저와 상 오 라버니의 관계를 보다 친밀하게 하기 위해 혼약식과 같은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 표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주완청은 아직 순결한 처녀의 몸이기 때문에 차마 그와 같은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고 얼굴을 다소 붉히며 나중에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기실 문인천상은 선친이 십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이어 그의 모친마저 이 년 후에 심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마치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게 되어서 대부분의 장 원의 일들을 큰숙부인 주운양 등이 돌봐 주고 있는 상태였다. 주운양이 그를 대신하여 가업(家業)을 이끌어 온 지도 벌써 수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주완 청이 매우 친근하게 문인천상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이미 그 두 사람이 맺어 지게 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인천상은 기실 이곳 난주성의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라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설령 그가 무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해도 주운양이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할 리는 없 는 것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주완청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여 버리자 공연히 심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 게 되어서 구태여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제법 많이 걸어서 작은 호수의 반대편에 이 르러 있었는데, 건너다보니 정자 안의 그 두 명의 주씨 형제는 난간에 걸터앉아서 낮은 음 성으로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주변에는 호숫강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누렇게 물들기 시작하는 갈대잎을 가볍게 휘젓고 있었고 이름 모를 작은 산새들이 하나둘씩 날아다니며 우짖고 있어서 그야말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러서 지금과 같은 정경을 보았다면 그 평범한 한가로움에 젖어서 다소간의 권태로움까지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문인천상은 일면 너 무나도 황폐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 가운데 어떤 놀라운 일이 자신을 가디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인천상이 어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을 때 성 안으로 향하는 그 길목으로는 문득 서너 명의 인물들이 마치 하늘 위에서 뚝 떨어져 내리기라도 하듯이 나타나고 있었다. (……!) 주완청은 다소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이고 가죽신을 신은 발을 들어서 몇 차례 장난질을 치다가 이윽고 문인천상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여 고개를 들다 가 문득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어서 일순 환호성을 울리며 그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 다. "어마!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네! 상 오라버니, 우리 어서 가 봐요!"주완청은 부친의 일행이 나타나자 말은 함께 가자고 했지만 행동은 그와는 달리 문인천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 장 경공의 제종술을 펼쳐서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묵묵히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그쪽으로 천천히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 × × × 금산반 주운양은 생김새가 다소 뚱뚱한 체격에 사람좋은 인상을 풍기는 둥글둥글한 얼굴의 사람이었는데, 별호에서 알 수가 있듯이 그는 숫자를 계산할 때 쓰이는 금으로 만들어진 산 반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발출하는 암기술에 능했고, 또한 점혈과 해혈(解穴)의 능력 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절정의 무림고수였다. 일신에 호화로운 비단 화복을 걸치고 있는 그는 눈에서 가끔씩 보통사람들이 마주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안광을 발출시키고 있었는데, 지금 키가 훌쩍하게 크고 피부색이 다소 검으로 깡말라 보이는 중년인과 함께 두 명의 손님들을 정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가 고 있었다. 비록 그다지 친근하게 눈에 익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문인천상은 그 키가 크고 깡말라 보 이는 중년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체구에 비해서 가볍게 늘어뜨리고 있는 두 손의 장심 이 유난히 두터워 보이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그의 둘째숙부인 철장무적(鐵掌 無敵) 상장풍(常長風)이라는 사람이었다. 별호에서도 알 수가 있듯이 상장풍의무공은 철장 공(鐵掌功)이라고 하는 독특한 장력을 연성한 것이었는데,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의 전신 역시 고도의 외문의 횡련공(橫練功)을 수련하여 도검이 불침할 정도라고 했다. 그 두 사람은 조금 아까 주완청이 말했던 그 두 명의 손님들을 안내하여 정자 위로 오르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난간 위에 걸터앉아서 나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그 주씨 형 제가 즉시 아래로 내려와서 깊숙히 궁신의 예를 취하며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완청은 신법을 펼쳐서 뒤늦게 마치 품에 안길 듯이 부친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는데, 주 운양은 이에 다소 엄하게 꾸짖는 듯하면서도 딸이 그렇게 자신을 반기는 것이 그다지 싫 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문인천상은 문득 그들 일행 가운데에서 함께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셋째숙부인 청망검 임옥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웬일로 그가 다시 함께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이윽고 문인천상이 천천히 걸어서 정자의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그들 일곱 명은 서로 간의 간단한 수인사를 마치고 나서 정자의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아서 담소를 나 누고 있는 상태였다. 주운양은 한참 얼굴에 미소를 띄며 손님 중의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이윽고 문인 천상이 가까이 도달해 있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돌리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조카로군. 어서 이리로 올라오도록 하게. 오늘은 내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분들도 계 시고 하니……" 주운양은 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말투도 조카 운운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표 정만큼은 매우 각별한 성의가 엿보이는 것이어서 반감을 사지 않게 했다. 문인천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연후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정자의 위에 올랐고 이어 먼저 주운양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의숙, 진지는 드셨습니까?" 당시는 일반인들은 생활하기가 어려워서 굶어죽는 사람들도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것 때 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진지를 드셨느냐고 묻는 것이 인사말로 통용되고 있는 상태였다. 주운양은 웃으며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나야 뭐 항상 즐겁게 살고 있는 것이지. 그건 그렇고, 오늘은 내가 한 분을 자네에게 소개 시켜 주기 위해서 불렀던 것일세. 자! 어서 이분들과 인사를 나누게!" 말과 함께 주운양은 그의 맞은편의 상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손님을 가리키며 문인천상에게 미소를 보였다. (……!) 문인천상은 사실 주완청의 말을 듣고 비록 심한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궁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먼저 그는 주완청이 이른 바 강호상에서 최고의 명숙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극찬했던 사람 에게 시선을 보냈는데, 생각대로 일신에 깨끗한 백삼(白衫)을 걸치고 있는 그는 준수하고 담 담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중년인(中年人)이었는데, 등뒤에는 고색창연한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었고, 일면 평범해 보이는 체구에서는 실로 비범한 기상이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일면 담담해 보이는 눈빛에는 온화하고도 맑은 기운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어서 그것이야말로 최절정의 경지라고 말해 주는 유실반허(由實返虛) 자진귀박 (自眞歸樸)의 상태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소 놀라운 기분 이 들게 만들었다. [백상] 공동도성 제1권 제2장 제2장 백색(白色)의 검무(劍舞) 말하자면 이 최절정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그 일신의 무예가 이미 노화순청(爐火純淸)의 최 고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령 무림상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 는 유수한 대문파의 수뇌라고 할지라도 거의 도달한 사람이 없을 정도의 상황인 것이었다. 아까 주완청이 그렇게 정색을 하고 칭찬했던 이유를 이제야 실감할 수가 있는 기분이었다. 백삼중년인은 그저 의자에 앉은 채로 묵묵히 문인천상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는데, 잠시 그러 한 침묵이 계속되자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버리려는 듯이 주운양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 어 말했다. "조카, 이분은 바로 당금의 강호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하신 대협으로 존함은 화산일검(華山 一劍) 악불범(岳不凡)이시네. 흠흠…… 바로 당금의 대화산파의 장문인으로 계신 분이니 자 네는 오늘 이분을 뵙게 되어서 크게 견문을 넓혔다고 봐야 할 것일세." 주운양은 감히 상대의 이름을 발설하게 되어 크게 미안한 듯이 헛기침을 하며 웃는 얼굴로 추켜세우기에 바빴다. --- 화산장문인! 아닌 게 아니라 아직 중년의 나이에 무림 최고의 명숙의 위치에 도달한 그의 신분은 무엇 일까 하고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과연 아니나 다를까 무림의 명문정종 가운데의 하나인 화 산파의 지존이라는 신분인 것이었다. 화산일검 악불범은 여태까지 묵묵히 문인천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만 하다가 주운양이 그렇게 소개하자 이윽고 다소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바로 문인천상이로군! 오늘 만나서 만갑네." 문인천상은 묵묵히 그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며 낭랑하게 울려 오는 음성을 음미하듯이 듣 고 있다가 이윽고 포권하며 대꾸했다. "저도 오늘 화산파의 장문인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악불범은 그렇지 않아도 이 문약해 보이는 서생풍의 약관의 젊은이가 전혀 주눅이 들지 않 는 태도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여전히 동요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담담하게 응수하는 것을 보고 다소 기이하게 생각된 듯 유심 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인천상 역시 말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 받았는데, 다시 그와 같은 어색한 긴장된 분위기 가 계속되자 주운양은 얼른 나서서 말했다. "자! 그럼 다른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어야지, 조카. 그리고 이분은 바로 다름 아닌 악 대협 의 금지옥엽과도 같은 여식인 악채릉(岳彩陵) 악 낭자이시네.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하게." (여식이라고?) 문인천상은 주운양의 말을 듣고 옆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아까 주완청이 놀라운 사람이라고 얘기했었던 소녀가 바로 화산장문인의 여식이라는 말에 더욱 유심히 상대의 용모를 살폈다. --- 백의소녀(白衣少女). 그녀는 공교롭게도 그녀의 부친과 똑같은 색깔인 새하얀 백의로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다 만 그녀의 부친인악불범이 입은 옷은 산뜻해 보이는 백색의 장삼인 데 비해서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아주 고급으로 보이는 백색의 투명하도록 아름다운 비단 나삼이었다. 지금 이 정자의 주위에는 가벼운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는데, 선명하도록 아름다운 백 색의 나삼자락이 바람에 조금씩 나부끼자 마치 그녀의 얼굴은 백색의 서늘한 안개 속에 휩 싸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불러일으켰다. 문인천상은 기실 아까부터 주씨 형제를 비롯하여 주완청까지 이 백의소녀를 향해 선망의 눈 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실로 그녀의 용모가 이토록 아름다우리라고 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백색의 비단 나삼은 비록 고급의 옷감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아름 다웠으나 결코 그녀의 피부보다 맑고 희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 같지가 않았고, 게다가 계란형의 수척한 듯한 얼굴에 자리잡은 이목구비와 특히 그녀의 두 눈에서 번져 나오는 선 명한 호수의 물빛깔을 연상시키는 시선은 너무나도 서늘하여 차마 마주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일찍이 주완청의 용모가 보기 드문 미인형에 속한다고 인정하고 있었으나 솔직 히 이 백의소녀와 비교하자 자연히 그녀의 얼굴은 그만큼 추하게 보인다는 것을 부인할 수 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문인천상은 어려서부터 많은 고초를 겪으며 생활해 왔었고 게다가 지금도 가끔씩 많은 번뇌에 시달리며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가 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것이 결정적으로 그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먼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금방 생각나지 않아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백의 소녀 악채릉 역시 다소 특이한 시선으로 문인천상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이윽고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악채릉이라고 해요." 주완청의 음성은 맑고 낭랑하게 울리는 금방울과도 같은 음성이었지만 이미 모습에서도 예 측할 수가 있듯이 이 악채릉의 음성은 맑으면서도 물기 젖은 투명하고 조용한 음색을 가지 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역시 부친과 같이 등뒤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마치 그렇게 무공 을 지닌 것을 입증해 주기라도 하듯이 말을 하는 도중에 그녀의 물기 젖은 시선에서 강렬 하고도 서늘한 안광이 일시적으로 번쩍거렸다. 그런한 안광의 기운은 결코 주운양의 안광 에 비해서 약하지 않아서 실로 그녀의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 사실이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에 따라서 이 안광이 유난히 드러나거나 아니면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문인천상이 만약 악채릉의 그와 같은 강렬한 안광을 보지 못했다 면 아마도 그녀가 무공을 절정의 경지에까지 연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첫 마디에 쉽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는데 이는 그녀가 세속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강호의 여인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대가집의 요조숙녀나 시골의 처녀라고 해도 여인들은 자신의 방명을 마치 어떤 부끄러운 속살이나 되는 것처럼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인천상은 일단 그녀의 말을 듣자 이내 할 말이 생각나서 생각나는 대로 주저없이 입을 열어 대꾸했다. "좋은 이름이군요. 여러분이 저의 장원에서 즐겁게 노시다가 가시길 바랍니다."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말에 이내 쉽게 대꾸하지 못하고 다소 안색만을 붉혔는데, 이것을 보 고 있던 주운양이 웃으며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이분들은 잠시 놀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네. 그러니 자네가 그녀에게 놀다 가라고 한 말은 맞지 않는 것이지." 문인천상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주운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분들은 다른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오신 것이라는 말입니까?"주운양은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네. 게다가 그 일은 바로 자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 내가 자네에 게 오늘 이곳으로 나오라고 신신당부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네. 자! 자네는 이제 그 일이 대체 어떤 일인지 알 수가 있겠나?"기실 문인천상이 주운양에게 물은 것은 그저 의례 적인 것으로 구태여 무슨 목적인지 알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뜻밖 에도 주운양이 이번에 이 화산파의 부녀가 장원에 오게 된 것은 바로 문인천상 본인과 관 련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주완청의 말대로 혼약을 하기 위해서라면 주운양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지금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감지하고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 꾸했다. "저는 만사만박의 무불통지의 인물도 아닌데 어찌 그와 같은 이유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주운양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워낙에 중대하고 당연한 사안이기 때문에 굳이 자네가 만사만박의 무불통지의 인 물이 아니라고 해도 잠시 생각해 보면 곧 알 수가 있을 것일세." 문인천상은 다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의숙께서는 지금 저의 두뇌를 시험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하지만 저는 실로 그와 같은 수 수께끼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머리가 그리 좋은 편도 못됩니다." 주운양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결코 수수께끼가 아닐세. 자네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사안이지. 자네는 그래 벌써 선친의 혈구(血仇)를 잊었다는 말인가?"--- 선친의 혈구! 문인천상은 일시 마음을 놓고 있다가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마치 하나의 화살을 가슴에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주운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다소 떨리는 듯한 음성으 로 입을 열어 다시 물었다. "의숙께서는 그럼 저의 선친의 일 때문에 이분들을 모셔 온 것이라는 말입니까?" 주운양은 두 눈에서 안광을 번쩍이며 문인천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소 싱거운 표정으 로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의 선친의 의문의 죽음이야말로 자네와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했어야 하는 중대한 사 안이라고 할 수가 있지. 사실 내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가 집을 떠나서 공동파( 派)에 있을 때에도 나는 한편으로는 장원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의문을 캐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 보게 하였다네. 말하자면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라고나 할까, 요 근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그 단서를 찾게 되었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마음은 있지만 가진 바 능력은 보잘것이 없는 사람일세. 나 의 두 아우들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분 악 대협과 악 낭자를 초빙하기에 이르렀 는데, 물론 이분들은 하찮은 금전 따위로 움직이실 분들이 아니어서 비록 다소간의 예물 을 올리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간청하여 이곳으로 오시게 되었던 것일 세."이 주운양은 타고난 장사꾼의 기질이 있어서 중요한 사안을 말하는 도중에도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흉수(兇手)는 무공이 높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까?"주운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애석하게도 아직 그 진정한 흉수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다만 그 흉수가 어떤 거대한 집 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네. 자네의 선친은 전신에 아무런 상처도 없 이 돌아가셨으나 그것은 사실일월신교(日月神敎)의 무공 가운데의 하나인 월영인(月影印) 이라는 무공에 의해 돌아가신 것이었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결 코 그 신주팔패의 하나인 일월신교가 자네의 선친을 해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문인천 상은 물었다. "그렇다면 흉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주운양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표정 을 엄숙하게 하여 대답했다. "물론이지. 당시 자네의 선친이 당하셨던 돈황(敦煌)의 만불곡(萬佛谷)의 근처에서 일월신 교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출몰하지 않았었네. 당시 흉수는 아마도 자네가 일월신교에서 선 친을 해쳤다고 하면 감히 복수를 꿈꾸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겠지만 나는 이미 그 속사정 을 간파해 내었네. 당시 자네의 선친이 만불곡으로 들어가는 지도를 가지고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는데, 일월신교에서 미리 그와 같은 소식을 알고 매복하고 있다가 자네의 선친을 해쳤으리라고는 볼 수가 없는 것이지. 따라서 내 생각에는…… 당시 돈황의 근처를 떠돌던 무리들 가운데 하나가 자네의 선친이 가지고 있었던 지도를 노리고 그와 같은 암수를 펼쳤을 것 같네. 물론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입수해 놓았네." 문인천상은 격동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길게 숨을 불어쉬며 물었다. "그럼 그 무리의 이름도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주운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바로 대막의 천화궁(天花宮)일세." --- 대막의 천화궁. 그 얘기를 들은 문인천상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묵묵히 말이 없었다. 주운양은 그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원래는 처음부터 그 정보를 자네에게 가르쳐 주었어야 할 것이나 나는 나름대로 보 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얘기를 미루어 오고 있었던 것일세. 나는 사실 천화궁의 궁주를 의심하고 있는것이나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네. 비록 천 화궁이 일월신교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는 해도 역시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 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이번에 그쪽으로 가 보실 생각이십니까?" 주운양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기왕에 확실한 단서를 잡았으니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생각하네. 게다가 이번에 화산파의 악 대협께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내 미리 호언장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는 앞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전적으로 이 일을 나에게 일임해 준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네." 문인천상은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이 어찌 편안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의숙께서는 이미 그렇게 정해 놓으 셨다니 저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럼 출발하는 날짜는 언제입니까?" 주운양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처음부터 자네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은 미안한 일이네. 그러나 나는 오로지 자네의 선친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서 미처 그와 같은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군. 원래 자네는 아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고, 게다가 나는 그간에 혼자서 일을 결정하는 습관이 붙어서…… 허허허,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지금 즉시 자 네의 장원의 일에서 손을 떼고 모든 것을 자네에게 돌려줄 수도 있네. 역시 자네는 굳이 그러한 것을 원하지는 않겠지? 험험, 자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의 이번의 계획도 수월하 게 처리할 수가 있겠군. 나는 기왕이면 빨리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일 아침 에 바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네. 이번의 일이 끝나면 나는 모든 장원의 재산을 자네에게 돌려주고 물러날 것이네. 자! 어떻게 생각하는가?"문인천상은 이제는 다소 가라앉은 표정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주운양은 손을 내밀어 문인천상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하하! 자네가 그와 같이 말해 주니 나는 마음이 든든하게 생각되는구만. 어쨌든 자네가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네!" 이때 여태까지 말이 없던 주완청이 느닷없이 나서서 짤랑짤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마운 사람은 도리어 우리 아버지가 상 오라버니의 일을 돌봐 주고 있는 것이니 상 오라 버니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이 주완청은 아까 이번의 회합이 자신가 문 인천상의 혼인식을 약속하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일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지금은 그와 같 은 기대가 깨어졌음에도 도무지 조금도 섭섭하거나 기분나쁜 ㅛ정이 아니었다. 주운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엄하게 꾸짖었다. "청아! 네가 감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함부로 나서서 떠드는 것이냐? 나야 과거에 문 인운룡(聞人雲龍), 그 형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나서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나는 설령 다른 사람들이 나의 성의를 알아주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해도 당연 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기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답을 받 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주완청은 욕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흥! 하지만 누구는 사람도 아닌가요?" 그러나 주운양의 태도에는 겉으로는 엄하게 꾸짖었어도 내심으로는 그다지 심하게 책하는 기미가 없었기 때문에 주완청은 다만 그렇게 말하고는 뒤로 물러서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 다. 주운양은 악채릉을 가리키며 문인천상을 향해 다시 말했다. "자네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인천상은 그의 느닷없는 소리에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운양은 의미심장하게 악채릉의 얼굴을 한 차례 살핀 연후에 문인천상의 질문에 느릿하 게 대답했다. "그녀는 물론 천하에 다시 없을 정도로 훌륭한 낭자일세.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출중한 그녀의 무공 실력인 것이네. 그녀는 비록 나이는 자네보다도 적지만 무공 실력 은 오히려 나보다도 뛰어난 실정일세. 악 낭자, 그렇지 않소?" 악채릉은 이제까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자 가 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이때 그녀의 입술이 열리면서 박속같이 고르면서도 새하얀 치아가 드러났는데 여태까지의 조용하고 서늘한 기질과는 달리 갑자기 백색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 것 같은 자태였다. 확실히 이 악채릉의 용모는 지극히 아름다워서 과거에 나라를 기울게 했다는 경국지색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미색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주운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이 일은 중요한 것이니 결코 그렇게 겸손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오. 낭자 는 비단 화산파의 무학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따라 무산 신녀문(神女門)의 진전을 이었다고 하던데 죄송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수 보여 주실 수가 있겠소?" 워낙에 주운양이 정색을 하고 말했기 때문에 악채릉은 다시 사양을 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보잘것없지만 한 수 보여 드리겠어요!" 말과 함께 그녀는 주위의 사람들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인 다음에 느닷없이 뒤로 훌 쩍 신형을 날려서 정자의 밖으로 날아나가며 그와 동시에 등뒤에 메고 있던 검집에서 한 자 루의 장검을 뽑아 들었는데, 일순 사람들이 미처 그녀의 신형에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전에 벌써 허공에 떠오른 그녀의 전신에서는 눈부시고도 화려한 검기(劍氣)가 서늘한 백색의 한망(寒芒)을 뿌리며 발출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펼쳐져 나오는 검기들이었지만 마치 그녀의 저닌 에서 일시에 폭출되어 나오는 화려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는데, 때마 침 태양은 정오를 향해 치닫고 있었던 중이라 다소 따가운 가을날의 햇빛을 받은 그녀의 전신이 눈부신 백색의 검무(劍舞) 속에서 그대로 햇빛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이미 그녀의 신형은 이십여 장이나 날아가서 어느덧 한 그루의 낙엽송의 앞에 이르 러자, 일순간에 찬연한 검기를 허공 가득히 뿌려대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광경은 마치 백 색의 천의를 입은 선녀가 무수한 꽃을 뿌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잠시 그러한 화려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 순간에 어느새 다시 돌아왔는지 악채릉 은 다소 상기된 듯한 안색으로 아까의 그 자리에 내려서서 포권하며 이렇게 입을 여는 것 이었다. "저의 보잘것없는 재주가 여러분들의 눈을 더럽히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 그와 같은 모습을 보고 장내의 사람들 가운데 특히 주씨 형제와 주완청 등은 크게 경악해 하고 감탄하는 표정이었는데, 주운양 역시 깊이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직 전 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모습이 아닌 악채릉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했다. "과거에 영웅은 남자들에게서 나왔지만 앞으로는 여자들 가운데에서도 영웅이 나올 것 같소 이다. 신녀문의 그 유명한 산화검법(散花劍法)은 그저 이름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그 정수를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악채릉은 그의 칭찬이 다소 과장된 듯하여 얼른 겸손의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멈칫하고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기실 신녀문의 산화검법은 쉽게 터득하기 어려운 상승의 검학(劍學)이었기 때문에 조금 전 에 악채릉이 펼쳤던 것은 그 정수와는 많은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원래 여인들은 허리가 가늘고 몸이 유연하여 경공술을 펼치는 데 있어서 남자들보다 유리하 다고 하는데, 특히 이 산화검법은 보이는 그대로 검무와도 같아서 일단 검법을 펼치면서 허공에 떠오르게 되면 검기의 흐름에 의해서 보다 멀리 날아갈 수가 있는 것이고, 악채릉 은 그것을 이용하여 다소 여유있게 날아가서 낙엽송의 이제 떨어져내리기 시작한 잎들을 무수히 떨어뜨리고 신법을 펼쳐서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녀의 안색이 다소 상기되었던 것은 나중에 순순하게 경신술을 전개하여 이십여 장이나 날아오다 보니 진기의 운행상 다소간 의 무리가 생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주운양은 이어 문인천상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악 낭자의 이러한 무예는 어떻다고 생각되는가?"문인천상은 잠시 그를 바라 보다가 되물었다. "의숙께서 이러한 광경을 굳이 저에게 보여 주시는 이유는 혹시 그녀의 이러한 무공이 저 에게 소용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운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역시 자네의 선친을 닮아서 총명하기 이를 데가 없구만. 그렇네! 사실 그녀가 악 대협과 함께 이곳으로 온 까닭은 바로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자네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이 누구인 것 같은가?"문인천상은 숨을 불어쉬며 대꾸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주운양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자네는 사실 자신을 지나치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일세. 우리에게 있어서 자네는 아주 귀중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만일 흉수들이 뒤늦게라도 우리가 자신들 의 뒤를 쫓는 것을 알고 자네를 해치기 위해서 은밀히 악한이라도 보내게 되면 어떻게 하겠 는가? 이 일은 내가 많은 생각을 하고 내린 결정이니 자네는 더 이상 사양하지 말게. 그녀 는 무공이 오히려 나보다도 훌륭하여 자네를 옆에서 그림자처럼 호위하기에 충분할 것일 세." "……" 문인천상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묵묵히 말이 없었다. 주운양은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만약 자네에게 있어서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지금이라도 다른 호위무사를 구 해 볼 수도 있네. 시간이야 촉박하겠지만…… 사실 나는 내일 길을 떠남에 있어서 자네를 이곳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함께 동행을 하기로 했네. 우리에게는 악 대협도 계시고 하니 자네가 우리와 함께 간다면 오히려 더욱 안전하지 않겠는가?" 문인천상은 고개를 들더니 주운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주운양은 문인천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손뼉을 치며 매우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좋네! 내 자네의 성품이 호쾌하여 필시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사실 사내대장부가 일평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더러는 방법을 구할 수도 있는 것인데, 지금 과 같은 상황에서 구태여 복잡하게 따질 것은 없지 않겠는가? 안 그런가?" "……" 문인천상은 담담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한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 며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군요, 둘째숙부!" 거기에는 철장무적 상장풍이 길쭉한 체구를 한 채 묵묵히 문인천상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 었는데, 막상 문인천상이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 오자 다소 어색한 표정이 되어서 대꾸 했다. "험! 너는 그 동안 신색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 동안 잘 있었느냐?"기실 문인천상의 신색이 전보다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상장풍은 그저 인사치레로 말을 한 것이었는데, 문인 천상은 마치 그의 말을 믿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이때 장내의 분위기는 기이하게도 심하게 긴장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부자연 스럽고 또한 상당히 다들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악불범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고, 상장풍도 어색해 하였으며, 특히 주씨 형제들은 아예 외면을 하여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완청도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 듯이 자꾸만 밖을 주시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운양은 이것을 보고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대강 필요한 얘기는 마친 듯하니 이제는 그만 장소를 옮겨서 푸짐한 점심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카, 자네도 우리와 함께 식사하러 가겠는가?" 나중의 말은 문인천상을 향해 한 말이었다. 문인천상은 이미 스스로 자신이 이들과 함께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한 기분만 자아낸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따라서 구태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 었다. "저는 머리가 다소 무거워서 그만 돌아가서 쉬어야 하겠습니다. 의숙의 제안은 이미 받은 것으로 하지요." 주운양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일 떠나는 준비도 해야 할 것이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럼 자네는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고 내가 사람을 보내서 연락을 할 테니 내일 아침에 다 시 보도록 하세." …… ---<< 계 속 >>--- 제3장 아름다운 여자 호위(護衛) 마치 문인천상의 그러한 결정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사람들처럼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가 주 운양의 뒤를 따라서 그가 살고 있는 처소 쪽으로 사라져 버리고, 문인천상은 다소 씁쓸한 기분으로 혼자서 아까 그가 걸어왔던 길을 통해서 역시 느릿한 걸음으로 되돌아가기 시작 했다. 지금의 그의 심정은 기실 매우 괴로운 것이어서 마치 무거운 쇠뭉치에 얻어맞아서 가슴이 뻥하니 뚫려 버린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러나비록 심중에 많은 고뇌 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상당히 절제가 되어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그의 모습은 산책을 즐기고 있는 듯한 여유로운 고아한 서생과 흡사해 보이는 것이었다. …… 그런데 마치 그러한 조용히 유유자적하는 듯한 분위기에 감동되어 어쩔 수 없이 이끌리기 라도 하듯이 이 순간에 문득 문인천상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으니, 문인천상은 한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알아차린 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어째서 당신은 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오?"지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사 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악채릉이었다. 그녀는 다소 머뭇거리다가 얼굴에 약간 홍조를 떠올린 상태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저는 이미 당신의 호위를 맡은 사람이니 지금부터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 아니겠어요? 만약 당신이 내가 이렇게 공공연히 뒤따르는 것이 싫다면 앞으로는 은밀히 행동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겠어요."(……) 문인천상은 비록 주운양의 제의에 대해서 승낙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그가 이렇듯 빠 른 행동을 보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문인천상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이윽고 담담히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어 말했다. "하긴 그렇군! 좋소! 기왕에 나의 신변을 보호할 생각이라면 구태여 숨어서 행동할 필요가 있겠소? 게다가 당신과 같은 미인이 뒤를 따라와 준다면 누구라도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 이오." 문인천상은 말이 끝나자 다시 몸을 돌려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거처를 향해 느릿하 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일면너무나도 허허로워서 마치 조금 전에 보았던 악채릉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미인? 미인이라고?……) 악채릉은 원래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색을 지니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미인이라는 소리를 수 도 없이 들었지만 왠지 조금 전의 무심한 듯한 문인천상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무엇인가 상념에 잠기던 악채릉은 어느덧 문인천상의 신형이 저만큼 멀어지자 이윽 고 자신도 뒤따라 신형을 움직이면서 문득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문인천상이라는 한 사람 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 문인천상. 악채릉은 기실 무산의 신녀문에서의 무공 수련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서 화산파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엉겁결에 부친을 따라서 이곳 난주성의 일대에 서 대부호로 소문나 있는 문인가(聞人家)의 장원으로 오게 된 것이었는데, 당초의 계획대로 라면 그저 아무런 부담없이 일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인데, 정작 당사자인 문인가의 귀공자 를 보게 되자 몇 가지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그의 용모에 대해서도 악채릉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 으니, 비록 그녀가 여태까지 살아 오면서 적지 않은 준재들과 미남자들의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실로 그와 같은 절세적으로 수려한 용모와 고아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 었으니, 이 문인천상의 얼굴은 비단 이목구비가 지극히 수려하여 천상의 신장이 정성을 다하여 조각한 것 같을 뿐만 아니라 그 체구 또한 키가 매우 크고 다소 말라 보이는 헌칠 한 것이어서 그러한 수려하기 짝이 없는 용모의 가운데 조용하게 스며나오는 온화한 시선 을 받을 때에는설사 천하의 그 어떠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여자라고 할지라도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미리 전해 듣기로는 문인천상의 나이는 이제 갓 약관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이라고 했었는 데, 실로 그러한 절세적인 용모를 가지고도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 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비록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할지라도 세상에 이름이 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실 악채릉은 강호의 여인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남자의 용모를 중시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와 같은 용모를 보고 다소 놀라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그 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가 원하고 있는 장래의 남편감은 능력과 기백을 고루 갖춘 사람이어야 하는 데, 이 문인천상은 비록 용모가 눈부시게 수려하기는 하지만 비단 문약한 서생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무공을 얼마 터득하지 못한 서생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 었기 때문에 그녀가 처음에 느낌 감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한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를보 고 있는 듯한 관조적인 기분에 불과했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다만 그것뿐이었다면 상관이 없었겠으나 뒤이어 그녀가 느끼게 된 한두 가지의 의 외로운 점은 다소의 감정상의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바로 그의 행동거지와 음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 악채릉은 문약한 서생이 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그토록 태연하고 조용한 신색을 보일 수가 있는 그의 모습과 또한 맑고 담담하게 울려나오는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과연 이 사람이 문약하기만 한 서 생인가 하는 의아심을 품을 정도로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의 행동거지와 음성 은 일면 지극히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아주 거대한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한 순간에 장내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로 그러한 사람을 문약하기만 한 서생 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지가 의문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그렇게 기이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그의 수려한 용모에 미 혹되어서인지도 모르는 일이며, 설령 그에게 정말로 그와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하나의 장점에 불과한 것이며, 이 순간에 그녀가 구태여 신경을 써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서 골똘히 그 원인을 추적해 보고 이윽고 그 모든 사항들을 자 신의 현실에 유리한 방향으로 매듭을 지어 가고 있는 사이에 악채릉은 문득 자신이 이미 문 인천상의 뒤를 따라서 전혀 낯설은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것은 아주 넓고 아름다운 정원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한 누각의 앞이었는데, 악채릉은 금 세 그곳이 바로 문인천상이 지금 기거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은 이제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묵묵히 걸어오다가 이윽고 누각의 현관 앞에 이 르러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위의 경치가 비록 좋지만 식사도 해야 할 것이니 일단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 소?" 악채릉은 물론 그가 말하지 않아도 주위의 풍경에는 관심이 없고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인천상이 미리 그와 같은 마음을 알고 마치 자신이 그녀를 초대 하는 것처럼 말해 주었기 때문에 악채릉은 기꺼운 마음이 들어서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어쩔 수 없이 들어가서 식사를 해야 하겠군요." 문인천상은 해맑은 표정으로 대꾸하는 악채릉의 얼굴을 한 차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윽고 몸을 돌려 현관의 문을 열고 누각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 누각의 내부는 비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실은 그렇지 않아서 제법 많은 하인 들이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문인천상이 나타나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나이가 많은 늙은이들이었는데 아마도 전대의 주인이었던 문인운룡의 수발을 들 어 주던 하인들인 모양이었다. 대체적으로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은 일단 주인이 사라지게 되면 그 후예를 찾아가서 더욱 신명을 바치려고 하기 마련이었다. 앞으로 문인천상을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게 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구태여 그들에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악채릉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따라서 현관의 문 을 닫고 거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늙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외출복을 벗고 있던 문인천상은 이윽고 하인들에게 점심식사 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린 다음에 고개를 돌려 악채릉에게 말했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잠시 씻을 것이니 낭자는 이곳에서 그 동안 기다려 주겠소?" 아무리 악채릉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남자가 목욕을 하 는 욕실에까지 따라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알겠어요." 악채릉은 다소 붉어진 안색으로 거실의 푹신한 의자 위에 앉으며 내심으로 다소 질투가 어 린 듯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질투라고 하는 것은 남자는 남자에게 그리고 여자는 여자에게 느끼게 되는 것이 일 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여자도 아닌 문인천상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사람이고 또한 그의 용모가 아름다움을 제일 로 생각하는 여자의 신분인 그녀 자신보다도 오히려 더욱 뛰어나게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날마다 그렇게 목욕을 하고 온갖 고급의 향수를 온몸에 바르니 피부가 그와 같이 희고 광 택이 나는 것이 아니겠어!) 확실히 문인천상은 유약해 보이는 서생의 기질을 보이면서도 다소 야윈 듯한 얼굴이나 전 신의 피부는 오히려 마치 백옥에 담담한 노을빛의 광택이 나는 것처럼 깨끗했고 또한 완전 무결해 보였다. 물론 그러한 사람을 본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악채릉은 그의 그 러한 점에 있어서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매우 불쾌한 듯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우선 문인천상에게서는 사나이다운 패기 넘치는 기질이 보이지 않고 지나치게 섬세한 느낌 을 주며, 게다가 피부의 색깔마저 그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니 어찌 사내라는 냄새를 느낄 수가 있겠는가? …… 누각의 안에서 일하고 있는 하인들은 대부분이 누각의 한쪽에 딸려 있는 구석진 행랑방에서 기거하는 모양이었는데, 점심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주위를 오가는 가운데에서도 은근히 악채릉의 존재를 신경쓰는 눈치여서 악채릉은 그러한 것을 생각하자 자연 기분이 별 로 좋지 않았다. 당초에는 그저 굳게 마음먹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편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의 신경이 크게 곤두서 있는 것을 알고는 왠지 더욱 마음 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사춘기의 방황하는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실로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정신력도 그만큼 증강되는 셈이어서 주변의 일에 대해서 마음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었는데, 악채릉은 지금 그녀의 신경이 쓸데없이 곤두서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문인천상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라고 결론을 지었다. (나는 다만 주어진 일을 하고 나면 그만이야.) 내심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정신을 기울여서 한 차례의 내식을 순환시키자 비로소 마음 이 안정되고 신경이 편안하게 누그러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하인들은 거실의 옆에 딸려 있는 식당의 식탁 위에 음식들을 모두 차 려 놓고온갖 진귀한 냄새들을 풍기고 있었는데, 아직 욕실로 들어간 문인천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 혹시 욕실의 안에서 늙은 하인들의 시중이라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데 그제서야 이윽고 문인천상이 말쑥한 모습으로 다소 웃으면서 욕실의 문을 열고 나타났 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배가 고프면 먼저 식사를 하시지 그랬소?"문인천상은 새로 운 하늘빛의 비단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젖은 듯한 머리는 가지런히 뒤로 넘겨서 묶어 두고 있었고, 흡사 향수의 냄새가 나는 듯한 그의 깨끗한 얼굴에는 은은한 광택이 피 어오르는 것 같았다. 악채릉은 몸을 일으켜서 그를 맞으며 다소 미소하며 대꾸했다. "나는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데 당신은 그저 나를 밥 벌레로만 생각하는군요." 문인천상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을! 예로부터 무엇보다도 먼저 배를 채워야 일할 의욕이 생긴다고 했소. 설사 천하에 다시 없는 무공을 성취한 사람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악 낭자 께서는 기왕에 저를 보호하기 위해 오셨으니 사양하지 말고 아무 것이나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드시고 취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취하시기 바라오. 그렇게 일일이 따져서야 맡은 일을 편안하게 하실 수가 있겠소이까?" 악채릉은 그 말에 문득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포권하며 말했다. "그럼 폐를 끼치도록 하겠어요!"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안내를 받으며 식탁의 앞에 함께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식탁 위에는 그야말로 보기에도 그 맛을 느낄 수가 있을 정도로 훌륭한 요리들이 가득하게 차려져 있었 고, 악채릉은 그 가운데 절반도 이름을 알지 못할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고 하는 것은 요리들 가운데 기름진 음식은 아주 적고 두부나 소채로 만들어진 요리들이 많 다는 사실이었다. "자, 어서 드시오." 문인천상이 권함에 따라서 악채릉은 수저를 들고 몇 가지의 음식의 맛을 보았는데, 그 맛은 그녀가 이제까지 먹어 본 음식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가 항 상 즐기고 먹어 왔던 음식들을 먹어 봐도 어딘가 그 맛에 차이가 있었는데, 이에 그녀는 혹시 이곳의 주방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분위기에 이끌려서 착각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악채릉이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대강 두어 번씩 맛을 보고 나서 수저를 놓고 몸을 일으키자 그것을 보고 문인천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왜 드시지 않는 것이오?" 악채릉은 다소 새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를 돼지로 알고 있나 보죠? 저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일어난 것일 뿐인데 어째서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거죠? 방금 전에 제가 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지 못했나요?" 여인들은 대개가 살이 찌는 것을 두려워하여 식사를 하주 조금씩 하기 마련인 것이었다. 하 지만 악채릉은 원래가 소식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서 결코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식사 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 문인천상은 얌전하게 손수건으로 입술을 훔치고 거실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 문득 자신도 몸을 일으켜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것을 보고 악채릉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다가 멈칫하고 물었다. "헌데 당신은 어째서 더 이상 먹지 않는 거죠?"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꾸했다. "사실 나도 이미 식사를 끝냈소이다." (……?) 문인천상은 다소 어리둥절해 하는 악채릉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서재에 들어가서 책이나 잃을 생각인데 그것이 혹시 낭자의 거동에 불편함 을 주게 될지 모르겠소이다." 악채릉은 다소 붉어진 얼굴로 푹신한 의자 위에 앉으며 대답했다. "저의 임무는 당신을 보호하는 것이지 당신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니 어 떤 일을 하든간에 저의 동의를 얻으실 필요는 없는 거예요. 저는 계속 이곳에 앉아 있을 것이니 나의 일에 신경쓰지 마세요."문인천상은 이에 포권하며 말했다. "낭자께서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만일 나에게무슨 일이 생길 때에는 즉시 알 리도록 하겠소이다." 말과 함께 문인천상은 서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서재. 이곳은 그다지 넓은 방은 아니지만 방 전체가 온갖 종류의 서책으로 가득차 있었고 또한 그 서책들이 수준이 매우 높은 것들이어서, 말하기를 대부호이자 학자의 집안이라는 문인가의 진면목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기실 이 서재 안의 서책들은 과거의 그의 선친이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하인들이 그의 의 사를 짐작하여 대부분의 것들을 옮겨놓은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서책을 좋아했었지만 지금에도 그러한 습성은 변하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 요 몇 달간의 시간을 모조리 독서를 하는 것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정도였다. 문인천상은 십이 세의 나이에 집을 떠나서 우여곡절 끝에 공동파로 가게 되어 지금의 나이 가 되기까지 거의 서책에 접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오랜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 이 물을 만나게 되어 한없이 마시고도 아직 부족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독서 욕구는 강한 편이었고, 따라서 당연하게 생각되어 한없이 외로움이나 고독감 등을 많이 해도시킬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은 지금도 늘 그러했던 것처럼 서재의 안으로 들어서자 자신이 책상 위에 쌓아 놓 고 있던 서책들을 펼쳐 놓고 의자에 앉아서 읽으며 금세 몰아의 지경에 빠지기 시작했다. …… 오전에는 다소간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느낌은 일지 않 았으나 일단 독서를 시작한 오후에는 태양이 금세 서쪽으로 기울고 자심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저녁노을의 기운이 창문을 통해서 서재의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은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독서를 즐기는 것도 쉬운 노릇이 아니라고 여겨서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문인천상은 불과 서책을 아직 두어 권도 채 독파하지 못했는데 이미 해가 서쪽의 산마루로 기울고 있는 것을 보고 가벼운 탄 식을 터뜨렸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아쉬움의 탄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그러한 무의식중의 탄식이 일순간에 그의 정신을 일깨워 놓았고, 바로 그 순 간에 공교롭게도 문인천상은 고개를 들어 저녁의 노을빛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노을빛을 가리며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 아마도 그 검은 그림자는 열려져 있는 창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겠지만, 그야말로 신법이 놀라워서 거의 기척 하나 일지 않고 잠입한 것이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노을빛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 눈 빛마저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순간 장검을 뽑아 들고 문인천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마 도 그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인 것 같았다. 누구라도 느닷없이 이렇게 귀신같은 흉수가 침입하게 되면 너무나도 놀라서 심지어 입도 떨 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인천상은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어려서부터 심한 심신의 고난을 받아 왔었기 때문에 심정이 차분하였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 는 임기응변적인 기질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점이 그 흑의장한에게 는 불길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 확실해 보였다. 문인천상은 잠시 흑의장한의 복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인 흑의장한은 자신이 마치 귀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인천상이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문득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짧게 물었다. "너는 왜 한숨을 내쉬느냐?" 이 검은 그림자인 흑의장한은 아주 빠르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특이하게도 목소리가 쇠북 을 찢는 듯이 거칠고 탁하기 그지없었는데,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가 변성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했다. 그가 말을 아주 빨리 한 것은 조금이라도 어떤 시간적인 여유를 상대에게 주지 않겠다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문인천상은 이에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럴 만한까닭이 있어서 한숨을 내쉰 것이오. 그보다 당신은 기왕에 온 것이니 구태 여 그러한 것을 알 필요가 없이 손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러자 흑의장한은 두 눈에 일순 크게 의아한 기색을 떠올리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문득 결정을 내린 듯이 두 눈 가득히 무서운 살광(殺光)을 내뿜었다. "죽어라!" 한 줄기의 스산한 음성이 주위의 공기를 예리하게 찢는 순간에 이미 흑의장한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는 줄기줄기 마치 거대한 교룡과도 같은 어두운 검기(劍氣)가 일어나서 파도처럼 앉아 있는 문인천상의 전신을 향해 덮쳐 오기 시작했다. 문인천상의 몸은 보기에도 나약해 보여서 그저 시정의 잡배라고 할지라도 그저 한 차례 장검을 휘두르면 피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는데, 하물며 가공스럽게도 검기가 그와 같이 형 체를 이루면서 덮쳐드는 무서운 공격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어 보였다. 지금 흑의장한이 펼치고 있는 검은 교룡과도 같은 형체를 이루고 있는 검기의 덩어리는 실 로 허깨비와 같은 장난이 아니어서 일순 그것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쌓아둔 서책들이 분분히 가루가 되어 휘날리며 실내에 마치 자욱하게 눈이 휘날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 러일으켰다. 만일 그 검기에 사람이 맞게 된다면 그 사람은 보나마나 그 서책과 같이 갈 가리 찢겨져 나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 검기의 덩어리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허공을 가로질러서 문인천상의 면전으로 쇄도해 들었는데, 일견하기로 그 거기에 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든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그와 같은 검거의 덩어리가 자신의 면전으로 순식간에 덮쳐드는 것을 보고도 여 전히 다소 우울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것은 결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공포에 젖어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흑의장한은 그와 같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일순 크게 의아함을 느꼈는지 그대로 문인천상의 머리를 부수지 못하고 공격을 잠시 멈칫거렸다.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흑의장한이 공격을 늦추는 순간에 언제 날아 들어 왔는지 한 줄기 백색의 그림자가 문인천상의 앞을 가로막으며 동시에 그 흑의장한의 공격 을 맞받아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쩌러러러렁! 두 사람의 손놀림은 너무나도 빠라서 두 개의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자 마치 수십 개의 폭죽이 연달아서 터져나오는 것 같은 소음을 일으켰다. 지금 순식간에 서재의 안으로 날아 들어와서 흑의장한의 공격으로부터 문인천상을 구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악채릉이었다. 그녀의 검공은 아까 풍우정에서도 보았듯이 눈부시게 화려하기 짝이 없었고 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었으나, 실은 유감스럽게도 상대인 흑의장한의 무공 역시 그녀에 비해서 못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비록 그 교룡같이 일어나던 검기가 일순간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흑 의장한 역시 만만치 않게 악채릉을 맞이하여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일순간에 서재의 내부는 갈가리 찢겨져 날아가는 서책들과 부서져 뒹굴기 시작하는 목재가구들로 인 해 혼돈천지와 같이 변했다. 실로 그들 두 사람의 신형이나 손놀림은 너무나도 빠르게 초식을 교환하고 있는 관계로 전 혀 보이지 않았고, 실내 가득히 그러한 살벌한 검광(劍光)과 그림자가 부유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장면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비세를 판단한 것인지 흑의장한이 일순 멈칫하더니 번쩍 신형을 창 밖으로 날려서 도주하기 시작했고, 당연한 것처럼 악채릉이 그 뒤를 빠르게 뒤따르기 시작했다. "멈춰랏!" 악채릉의 고함소리는 앙칼지면서도 아름다운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도주하는 사람이 상대의 멈추라는 소리에 신형을 멈추고 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 다. 일단의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의 신형은 일순간 너무나도 빠르게 창 밖으로 아득하게 사라 져서 보이지 않았고, 실내는 다시 기이한 정적 속에 휩싸였다. …… 제4장 정원의 석상(石像) 문인천상은 조금 전에 두 사람이 면전에서 험악하게 격전을 벌이다가 날아나가고 그 부산 물로 서재의 전체가 온갖 쓰레기와 같은 찢겨져 나간 서책들로 뒤덮여 버렸는데도 역시 아 까처럼 그 자리에 안장서 표정 또한 변화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본다면 그것의 대부분은 심한 우울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조금 전에 악채릉은 거의 결사적으로 흑의장한을 제압할고 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를 추 격해 간 그녀는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실은 악채릉은 예상 외로 잠시 후 에 금방 창문을 통해서 다시 돌아왔으며, 그렇다고 해서 흑의장한을 이미 잡은 것도 아니었 다. 그럼 그녀는 일부러 흑의장한을 놓아 준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흑의장한을 추격하는 일보다는 차라리 다른 흉수가 문인천상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돌아와서 그를 보호할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실로 그러한 면모가 그녀의 총명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 문인천상은 악채릉이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그 우울한 표정을 고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보 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다소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를 향해 악채릉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어 말 했다. "미안해요! 내가 다소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당신이 당하실 뻔했었군요." 문인천상은 그제서야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새 담담히 웃는 것이 적어도 실성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멀쩡하지 않았소?" (……?) 악채릉은 그의 시선이 기이하여 은연중 자신의 기분이 어색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주위 를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저 때문에 이곳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니 당신이 원한다면 배상해 드릴 용의가 있어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부자인데 이런 작은 서재쯤 마음에 둘 것 같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 오." 악채릉은 문인천상이 그렇게 나오자 정작 자신의 처지가 더욱 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이때 서재의 열려져 있는 문으로 늙은 하인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더니 문인천상을 향해 공손히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소나마 어색한 기분을 덜 수가 있었다. "소주인(少主人)님! 주 총관(周總官)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마차를 보 내겠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장원 내의 사람들은 문인천상을 문인 공자(聞人公子)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는 데 이 늙은 하인이 그를 소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역시 과거에 문인천상의 선친인 문인운룡을 모시던 습관이 붙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금산반 주운양은 문인 운룡이 죽은 이후에 스스로 총관이 되어서 장원 내의 일을 모조리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었 는데 따라서 주 총관이라고 하면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인 연후에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알겠소. 내가 이곳에서 이와 같은 위협을 당한다면 차라리 그들을 따라가는 것도 좋은 일 이겠지. 낭자는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나 하지 않겠소?" 뒤의 말은 물론 악채릉을 향해 한 말이었다. 악채릉은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답답하던 차에 즉시 대답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 하기 시작했다. …… × × × 밖의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몇 개가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으며 노을이 짙게 물들어서 사위가 온통 황금빛의 벌판으로 화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 문인천상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혼자서 천천히 정원을 거닐더니 이윽고 하나의 작은 연못의 앞에 이르러 마치 석상(石像)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악채릉은 무의식중에 그의 뒤를 따르면서 공연히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있었는데, 이윽고 그 가 계속해서 노을빛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자 혹시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실은 그러한 그녀의 생각은 한낱 스스로의 착각에 불과한 것 같았다. 석상처럼 움 직이지 않아서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문인천상은 잠시 후에 문득 고 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어느새 아주 부드럽고 온환한 기색이 되어서 조용한 음성 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노을빛이 아름답지 않소?" ……! 세상에는 아름다운 노을광채를 묘사하는 형용구가 많을 뿐만 아니라 악채릉도 여태까지 그 러한 말들을 수도 없이 들어 왔던 터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기에 지금처럼 그녀의 마음을 울리는 말은 아직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악채릉은 스스로 격정이 치밀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으나 이내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왜 당신은 나에게 그 흉수에 관해서 아직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는 거죠?"문인천상은 노을 을 등지고 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러한 일들은 당연히 낭자가 알아서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묻지 않았던 것 이오. 그런데 막상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다소 궁금해지는군요. 대체 아까 나의 서재로 침 입해 들어왔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소?"악채릉은 노을빛에 눈이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떠서 그를 바라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달아났어요." 문인천상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데도 당신은 그를 뒤쫓지 않았다는 말이오?"악채릉은 미리 준비했던 말을 읊어 대기라도 하듯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나는 그를 뒤쫓는 것보다는 당신의 안전을 생각했던 거예요. 그자에게 만일 일행이 있었 다면 내가 그자를 뒤쫓는 사이에 당신은 아주 위험해졌을 것이예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형을 돌리고 옆으로 걸음을 옮겨가면서 산책을 하는 듯한 모 습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일찍 되돌아온 것이로군. 병법에 의하면 그것을 가리켜서 조호이산지계라 고 하는 것이지." 말과 함께 문인천상은 다시 혼자서 걷기 시작하여 한참이나 연못의 주변을 맴돌다가 이윽 고 한의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고요한 연못의 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저녁노을의 빛은 갈수록 강렬해져서 마침내 어느 한 순간에 절정에 도달하 다가 이윽고 붉은 기운이 거무스레하게 변하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땅거미와 함께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광경은 마치 인생사의 무상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는데, 문인천상이 바라보는 맑은 연못의 물 위에는 그러한 변화가 그대로 비치고 있었 건만 그것을 바라보는 문인천상의 표정에는 정작 어떤 동요도 없어 보였다. 그는 겉으로는 연못의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기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곳을 응 시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악채릉은 그러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이 그와는 전혀 어울릴 수가 없는 낯선 이방인과도 같은 느낌을 받고있었다. …… 점차 사위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 희미 해질 상태가 되었는데, 그렇게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문인천상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인지 앉아 있는 그 자세에서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연못의 물을 바라보고 있었고, 악채릉 역시 나름대로 침묵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마치 한 번 입을 다물면 다시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처럼 이 침묵은 깊고도 깊어서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골을 파고 게다가 가슴에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는데, 정 작 그렇게 침무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자 오히려 더욱 더 이러한 침묵은 깨기가 어렵다는 것 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스스로 이러한 침묵은 괴로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어이없게도 그 러한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만일 한 명의 늙은 하인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두 사람 은 다음날의 아침이 밝을 때까지 그런 자세로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소주인님. 이쪽으로 음식들을 내오도록 할까요?"마치 착각처럼 문 인천상은 그제서야 비로소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늙은 하인을 바라본 뒤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악채릉을 향해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나야 상관이 없지만 이분 악 낭자는 엄연히 우리집의 손님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슬을 맞으면서 식사를 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악 낭자, 우리 그만 안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앞의 말은 늙은 하인을 향해서 한 말이었고 나중의 말은 물론 악채릉을 향해 한 말이었다. 악채릉은 이 순간에 어둠 속에서 맑은 광채를 발하는 문인천상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흡 사 자신의 마음이 그 광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충동에 가볍게 흠칫하며 입을 열었 다. "당신이 그렇게 저를 생각해 주시니 고마운 일이군요."문인천상은 몸을 일으켜서 누각의 안 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고마운 것은 오히려 나요. 당신이 나를 위해 몸소 손을 써 주었으니 말이오." (……?) 누각의 안에는 이미 휘황한 황촛불들이 가득하게 밝혀져 있었다. 문인천상이 늙은 하인의 뒤를 따라서 안으로들어가자 악채릉 역시 묵묵히 그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섰다. …… × × ×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저녁때의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들도 역시 진귀한 것들 투성이고 또 한 훌륭하며 푸짐하기 짝이 없었다. 만일 이것이 열 사람 정도가 먹는 것이라면 별다른 문 제가 없겠으나 고작 문인천상과 악채릉 두 사람이 조금씩 먹고 마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함께 사양하지 않고 먹기는 했지만 보복심리 때문인지 악채릉은 그러한 것을 보고 이 부 호의 자제들이 누리는 지나친 환락에 대해서 역겹다는 마음이일었다. 그녀의 심정이 그렇거나 말거나 문인천상은 여전히 조용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친 다음에 이 번에는 그녀에게 알리지도 않고 서재의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악채릉이 이미 그에게 일일 이 동의를 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악채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자신도 서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다음에 문을 닫고 앞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부득이 당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빼앗을 수밖에 없겠군요. 아까 당했었으니 알겠지만 밤중에는 특히 위험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옆에 붙어 있을 수 밖에 없겠어요." 분명히 아까 이곳을 나갈 때에는 그야말로 어지럽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어느새 이곳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서 마치 아까의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악채릉은 심지어 서재 안의 모든 서책들도 하나같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가히 이곳의 하인들이 문인천상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피부 로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악채릉이 서재의 안에 있는 의자 하나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자 이윽고 문인천상이 서책을 읽고 있던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과 같은 미인이 밤새도록 옆에 같이 있어 준다면 아마도 천하의 남자들 가운데 마다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나는 여기에서 계속 책을 읽을 것이니 당신은 이곳에서 편 한 대로 행동해도 좋소."기실 악채릉은 그야말로 지극히 뛰어난 미모를 소유하고 있는 소 녀였지만 이곳에 이르러서는 전혀 그러한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득 문인천상의 말을 듣고는 다소 흐트러졌던 자세가 바로잡히며 수줍은 느낌이 일어났다. (내가 미인이라구?) 악채릉은 잠시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굴리다가 이윽고 의자를 들고 일어나서 문인 천상의 앞에 이르러 의자를 내려놓고 그 위에 앉은 다음에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그런 것을 물어봐도 되나요?""……" 문인천상은 마악 다시 서책의 내용에 몰두하려다가 그녀의 그와 같은 질문을 받고는 고개 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당연히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소."악채릉은 이 방 안에서 그의 시선이 가까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자 왠지 기분이 어색해지고 안색이 붉 어지는 것 같았으나 금세 그러한 기분을 쫓아 버리고 미소하며 말했다. "그럼 좋아요. 우선…… 당신은 열두 살 때 집을 떠나서 공동파에 가서 다년간 생활했다고 는 하나 정작 배운 무공은 거의 없다죠? 음…… 그러한 것은 물어보나 마나일 것이고…… 다시 묻겠어요. 당신은 그 주 낭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문인천상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다가 눈살을 다소 찌푸리며 되물었다. "주 낭자라니, 청매 말이오?"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말했다. "그야 주 낭자가 주완청 낭자밖에 더 있겠어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청매는 아름다운 여자이고 성격도 그만하면 괜찮으니 나중에 필시 좋은 배필을 만나서 잘 살게 될 것이오." 악채릉은 그 말에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당신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말인가요? 소문에 의하면 그녀와 당신은 조만간 에 정혼할 사이라고 하던데요?" 문인천상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비단 그녀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원하지 않는 것이오." 악채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건 어째서 그렇다는 거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나는 선친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장차의 앞일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오. 나와 같은 사람이 감히 그녀와 같은 여자와 맺어질 수가 있겠소?"악채릉은 순간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려고 했으나 문득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주 낭자는 하늘의 거위고기이고 당신은 지상의 못난 두꺼비라는 것인가 요? 그래서 당신은 감히 그녀를 넘볼 수가 없는 것이겠죠?"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청매가 하늘의 거위고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내가 못난 두꺼 비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소." 악채릉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주 낭자에 비해 저는 어떻죠? 하늘의 거위고기라고 말할 만한가요?" 악채릉은 문득 이 질문을 하고나서 금방 후회를 했고 마치 자신이 그에게 청혼을 하고 있 는 것 같아서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러나 문인천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태도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당신도 역시 그렇지는 않소. 하늘의 거위고기라고 하면 지상의 사람들은 감히 넘볼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 당신은 내 앞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 어찌 그와 같다고 말할 수 가 있겠소? 당신은 말하자면 지상의 거위고기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오." 악채릉은 다소 정색을 하고 있다가 그가 자신을 지상의 거위고기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마 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좋아요. 당신은 제법 사람을 추켜세울 줄도 아시는군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보아하니 무공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대체 공동파에 있었던 수년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며 보냈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보아하니 지금 나를 심문하려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한 가지 잘못이 있는 것 같은 데 대체 어째서 내가 무공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오?" 악채릉은 그가 도리어 되물어오자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거야 당신이 수년 동안 공동파에 있으면서 거의 무공도 익히지 못했으니 그것이 결정적 인 증거가 아니겠어요? 호호, 당신은 혹시 공동파에서도 지금처럼 책을 읽으면서 학문이나 연구하는 책벌레가 되었었던 것은 아니었나요?대체 무공에 비해서 학문이 뭐가 낫다고 그 러는 것이죠?"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무공도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진실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희망과도 같 은 것으로 감히 그 가치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오."악채릉은 즉시 반발심이 치밀어서 소 리쳐 물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공을 펼쳐서 당신의 목을 베어 버린다면 당신은 그래도 인간의 희망 운운하겠어요?" 말과 동시에 악채릉은 느닷없이 등뒤에 메고 있었던 장검까지 뽑아서 문인천상의 목에 검 날을 들이대며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악채릉이 겨누고 있는 장검은 비록 보검은 아니었지만 오래도록 갈고 닦은 것이어서 푸르 고 투명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이 상대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악채릉이 느닷없이 지나칠 정도의 행동을 하며 거북하게 장검을 목에 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안색 하나 변화시키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학문에 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 무공 자체가 쓸모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오. 즉, 지금이라도 악 낭자가 나에게 곤란한 행동을 하게 된다면 나는 그야말로 두 손을 번쩍 들 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악채릉은 비록 정색을 하고 쏘아보았으나 그가 잔잔하게 웃으며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검을 겨누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절로 웃으며 장검을 다시 거두어 검집 속에 집어넣은 다음에 말했다. "당신이 그와 가이 생각한다니 앞으로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군요.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당신이전혀 겁이 없다는 사실이예요. 만일 군자다운 배짱으로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라면 과거에 죽은 당신의 선친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까 봐 두렵 지도 않나요?" "……" 선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이제까지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고 있었던 문인천상의 안색이 문득 급격하게 흐려졌다. 악채릉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경솔하게 그 얘기를 꺼낸 것을 내심 후회하였으나 기왕에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냉정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주시 했다. 문인천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낭자는 나의 이러한 행동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오?"악채릉은 고개를 가로저 으며 대답했다. "비록 당신의 행동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소문에 의하면 당신의 선친 은 당시 무공이 그리 높지 못한 상태에서 호위무사도 별로 거느리지 않고 만불곡을 찾아 가다가 그렇게 당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보아하니 지금 당신의 무공은 선친보다 오히려 부 족해 보이는데 그러고서도 그토록 태연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약간 무모한 행동이 아니 겠어요?"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겁게 대답했다. "나는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오. 과거에 선친께서도 비록 그와 같은 변을 당하셨으 나 기실은 신념을가지고 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괴롭지는 않으셨을 것이오." 악채릉은 내심 답답하다는 듯이 다소 언성을 높였다. "역시 당신은 독선적인 서생에 불과하군요! 당신은 그때의 일이 오직 당신의 선친 본인에 게만 해당되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의 선친이 죽은 이후에 당신의 가문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당신의 모친은 이 년 후에 화병을 얻어서 돌아가시게 되었으며 당신 또한 심하게 방황하지 않았나요? 그것을 어찌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어 요?"문인천상은 그 말에 묵묵히생각하는 듯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 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알고 보니 낭자는 우리 가문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요? 과거의 그와 같은 일 들을 시시콜콜히 다 알고 있다니." 악채릉은 순간 안색이 절로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 사실 그녀는 일순간에 너무나도 흥분한 나머지 미리 생각지도 않았던 말까지 모조리 말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원래 그녀는 이렇게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기이하게 도 문인천상의 앞에 서게 되면 공연히 마음이 흔들리고 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잠시 당황한 마음을 추스리다가 이윽고 약간의 변명조가 섞인 음성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의 경호를 맡기로 하였는데, 그와 같은 일들을 미리 알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문인천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선친의 일에 관해서는 유독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어서 간혹 이렇게 되는 것이니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악채릉은 자신의 난처한 상황이 지나가게 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그와 같은일에 흥분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당신은 최소한…… 최소한 흥분하는 것을 떠나서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냉정하 게 돌이켜보고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문인천상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허 공을 바라보았다. "해결점이라고? 거기에 다른 해결점이 있을 수가 있겠소?"악채릉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 다. "물론 해결점이라고 하면 선친의 복수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복수를 하는 데 있어서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라는 얘기예요. 말하자면 당신은 다시 화를 당하지 않도 록 하기 위해 좀더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이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직시하며 이렇 게 물었다. "실례지만 낭자는 대체 얼마 동안 나를 호위해 주기로 되어 있는 것이오?"악채릉은 그가 느 닷없이 그와 같은 질문을 해 오자 약간 당황해져서 생각을 굴리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의 선친의 복수를 하는 데 있어서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마도 내 가 당신을 호위하는 것은 그러한 기간 동안이 될 것이예요. 거기에 관한 얘기는 이미 우리 아버님과 당신의 그 총관과의 사이에 모든 얘기가 되어 있 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문인천상은 숨을 길게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따라서 낭자도 일을 마치게 되면 즉각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고 이곳을 떠 나가버릴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그의 어조에서 왠지 쓸쓸한 느낌을 전해받고는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당신과 같은 사람은 훌륭한 학식과 용모를 갖추고 있고 또한 재산이 많으니 어디 서든 나와 같은 계집아이는 구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 당신이 그와 같은 얘기를 한다는 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군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고?" 문인천상은 그녀의 얼굴을 한 차례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오히려 나와 같은 사람이 가장 고독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군. 최소한 당신과 같은 재색과 무공을 겸비한 여자는 쉽게 구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말에 기이한 여운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왠지 싫지 않은 기분이었 으나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호호호! 그런 말을 들으니 마치 당신이 나에게 미련을 두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실은 당신의 말뜻은 바로 나는 떠날 사람이니 신변에 관해서는 그렇게 시시콜콜하 게 물어볼 것은 없지 않느냐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그렇소." (……!) 악채릉은 다소 안색을 변화시키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기어이 이 한 가지만큼은 당신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어요. 대체 당신의 선친과 그 주운양 등과는 어떤 인연이 있어서 친해지게 되었던 것이죠?" 제5장 마차 속의 암중인(暗中人) 문인천상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거에 나의 선친께서는 장사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나신 적이 있었는데 당시 녹림의 도적 떼들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 부근을 지나던 숙부들이 선친의 위험을 보 고 달려들어서 구해 주었던 것이오. 그 이후로 선친께서는 숙부들을 자신의 의동생으로 생 각하시고 장원 내에 거주하도록 하였던 것이오." (……) 악채릉은 잠시 묵묵히 듣고 있다가 문인천상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알고 보니 그 일은 너무나도 평범하여 특이한 데는 하나도 없는 것이로군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가 있는 일이오."악채릉은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 었다. "하지만 농서삼걸( 西三傑)이 장원 내에 거주하게 되어 오히려 당신의 선친께서는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겠죠? 이를 테면 그 이후에는 어떤 녹림의 도적들도 감히 당신의 선친을 건드리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예요. 아! 그런데 대체 어째서 그 날은 당신의 선친이 혼자서 나서게 되어서 변을 당했는지 모르 겠어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당시 장사를 하는 일에 있어서는 선친께서는 당연히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다니셨던 것 이나 돈황의 부근에 만불곡(萬佛谷)이라는 곳이 있어서 특이한 현기(玄機)를 내포하고 있다 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그것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다만 가볍게 길을 떠나셨던 것이오."악채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받았다. "제가 듣기로는 나중에 흉수가 그분의 지도를 빼앗았다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그 만불곡의 일은무림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겠군요? 그러나 당신의 선친은 다만 그것을 학문적인 입장 에서 고찰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변을 당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참, 그 만불 곡이라는 곳은 정말로 있기는 있는 곳인가요?"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만불곡은 원래 깊은 산 속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나 근래에 들어서 많은 사람 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돈황에 가면 누구라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알려져 있다고 하오. 나 도 실은 그곳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소."악채릉은 문인천상이 만불곡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는 말에 다소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뜨며 말했다. "당신도 거기에 가 본 적이 있다고요? 그래 그곳은 어떤 곳이었죠? 그야말로 신비롭고 기 이한 곳이었나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곳은 그저 많은 불상들을 조각하여 새겨 놓은 하나의 평범해 보이는 계곡에 불과했소. 사람에 따라서 그 불상들을 보고 어떤 현기를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다 른 것은 하나도 없었소."악채릉은 다소 심각하게 아미를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소문을 전해 듣기로 당신의 선친께서는 그 만불곡의 내부에서 변을 당하여 쓰러져 있었다 고 하니 아마도 그 흉수가 신비롭고 기이한 물건들은 모조리 가지고 가 버린 모양이로군 요. 그리고 농서삼걸은 나중에야 돈황의 부근을 샅샅이 뒤져서 당신의 선친의 시신을 찾아 서 모셔왔다고 하죠?"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낭자도 이제 앞으로 만불곡에 가면 그곳의 풍경을 구경할 수가 있을 것이오." 악채릉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선친의 몸에는 월영인(月影印)이라는 장력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러 한 사실은 매우 불가사의한 것이예요. 대체 누가 그와 같은 마공(魔功)을 연성하여 당신의 선친을 해쳤을까요?" "……" 문인천상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대답하지 않았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주운양의 말에 의하면 천화궁(天花宮)의 사람들 가운데의 하나가 그와 같은 짓을 저질렀 다고 하니 앞으로 가서 확인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고…… 당신의 어머니인 단목산 산(端木珊珊)은 당신의 선친이 돌아간 이후에 이 년 동안이나 마음의 화병을 앓다가 돌아 가셨다는데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기억이 생생하겠죠?" 문인천상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오." 악채릉은 잠시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듣기로 당시 당신의 선친께서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주운양 등이 장원 내의 살림을 도맡아서 할 때에는 당신의 어머니도 막대한 재산이 있는 곳을 몰라서 그저 재산의 일부만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해요. 혹시 당신은 선친이 남겼 던 재산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다소 피곤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낭자에게 그러한 일에 대해서까지 모두 대답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그가 다소 짜증을 부리자 안색이 붉어졌으나 웃으며 대꾸했다. "이것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묻는 것이지 나의 사적인 일로 묻는 것이 아니니 당신은 그 렇게 화를 내실 필요가 없어요. 그럼 좋아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는데, 당신은 지 난 수년 동안 집을 떠나서 공동팡 머물렀었는데 혹시 지금도 당신은 공동파의 제자인가 요?" 문인천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비록 공동산에서 몇 가지의 무학을 배우기는 했지만 공동파의 제자는 아니오. 그러나 공동산에서 무학을 배웠기 때문에 공동파와 무관하다고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오." 악채릉은 손뼉을 치며 말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공동파와 연관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공동파에서는 당신의 일에 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공동파 의 장문인인 곡허자(谷虛子) 도장께서 당신의 일에 그토록 무관심할 수가 있겠어요?" "……" 문인천상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자 악채릉 은 다시 말을 이었다. "공동파의 절학이라고 하면 우선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과 칠상권(七傷拳), 그리고 복마 검법(伏魔劍法) 등이 있다고 할 수가 있는데, 당신은 대체 그 가운데에서 어떤 무공을 배웠 죠? 그 가운데에서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구요? 그럼 공공권(空空拳)이나 현명신장(玄冥神 掌), 삼음오공조(三陰蜈蚣爪) 같은 무공들은 배우셨나요? 그것도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결국 당신은 공동파의 정식제자도 아니니 당신은 비록 아는 체하더라도 그들은 당신을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인천상은 열심히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공동파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그 흔한 추수장(抽髓掌)이나 회풍장(廻風掌) 따위의 무 공도 배우지 않고 다만 다른 종류의 무학을 조금 배웠을 뿐이오. 내가 그런 사실에 대해서 도 상세하게 말해 줘야 하는 것이오?"악채릉은 눈빛을 빛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당신이 만일 다른 무공을 배웠다면 지금 그것을 나에게 잠깐 보여 줄 수가 있나 요?" 문인천상은 이에 마지못한 듯이 의자 우에 앉은 채로 오른주먹을 느릿하게 허공으로 내뻗 었다. 그런데 그 수법은 처음에는 느릿했지만 이어 마지막에 가서는 급격하게 빨라지고 또 한 빠른 변화를 보이는 것이 마치 주먹이 살아서 절묘한 재주를 부리는 것 같았다. …… 문인천상이 잠시 그와 같은 권법을 펼쳐 보이고 나서 다시 손을 거두자 악채릉은 잠시 생 각하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의 그 수법은 알고 보니 공동파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않는 낙안권(落雁拳)이라는 것이군요. 그 무공은 사실 일류의 권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동파의 수많은 무학들 강누 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무학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공동파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는 동 굴들이 많고 숨어 사는 기인도사들이 많아서 여러 갈래의 무학들이 탄생되었던 것이나 지 금의 그 무학은 결코 방문좌도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 악채릉은 마치 자신의 무학 지식이 방대하고 치밀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다시 그의 얼 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의 수법을 보아하니 제법 동작의 절도가 있고 또한 초식의 흐름을 타고 있어서 부족한 내공만 보완한다면 그런 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겠군요. 하지만…… 사실은 그와 같은 무공은 지금의 현실에서 어떤 도움이 될 수는 없는 것이예요." 악채릉이 그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인천상은 문득 신형을 일으켰 다. (……?) 악채릉은 느닷없이 그가 신형을 일으키자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는데 그녀를 향해 문인천상 은 포권하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그만큼 성의를 보였으면 당신이 알아야 할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충족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따라서 나는 이제 그만 침실로 돌아가서 쉴까 하는데 혹시 낭 자께선 나에게 달리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소?" 악채릉은 그가 이처럼 냉정하게 선을 그어 버리자 왠지 안색이 붉어져서 다소 당황한 표정 으로 대답했다. "예…… 물론 제가 더 할 말은 없어요. 그리고 제가 당신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가서 호위 를 해줄 수도 없겠지요?" 문인천상은 말을 받아 되물었다. "그럼 낭자는 역시 거실에서 주무시겠소?" 악채릉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잠을 자는 일을 생각할 수가 있겠어요? 저는 비록 당신을 따라 침실로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밤새도록 당신을 지켜야 하니 잠을 잘 수는 없을 거예요." 문인천상은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말을 마치자 문인천상은 주저없이 서재의 밖으로 나가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 악채릉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가벼운 숨을 불어쉬며 거실로 향 하기 시작했다. …… × × × 악채릉은 거의 뜬눈으로 거실의 푹신한 의자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보통사람들이라면 그렇 게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게 되면 졸린 눈이 되어 부석부석한 얼굴이 되겠지만, 악채릉은 간간히 의자 위에 앉은 채로 운기조식을 취하여 내식을 운행시켰었기 때문에 오히 려 아침녘에는 그녀의 눈빛은 더욱 맑게 빛나고 안색은 뽀얀 안개막이 피어오르는 것 같이 투명한 광채를 발산시키고 있었다. 실로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그녀와 같은 사람들의 신체는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달 라서 설사 삼사 일이나 일주일 정도까지 잠을 자지 않더라도 견딜 수가 있는 힘이 있는 것 이었다. 현관의 문틈으로 새벽의 여명의 뿌옇게 스며들기 시작하자 이윽고 거실의 내부에도 그러 한 새벽안개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듯한 무렵에 문인천상은 마침내 다시 침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룻밤을 다시 편안하게 보낸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한 그대로였고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악채릉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지켜 준 결과일 것이다. "함께 산책이나 하지 않겠소?" 일신에 다시 전보다는 다소 엷은 하늘색의 비단 장삼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그는 그저 지 나가는 말투처럼 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악채릉의 대답을 들어 보지도 않고 그냥 현관의 밖 으로 나가 버렸다. 악채릉은 이미 냉정한 마음을 회복하였기 때문에 그의 그러한 자기 위주적인 행동에 대해 서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가 뒤를 따라서 현관의 밖으로 나갔다. …… 이미 밖에는 훤하게 날이 밝아서 새벽안개 속에서 나뭇잎들이 저마다 울긋불긋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문인천상은 많은 정원수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넓은 정원 속에서 천천히 조용한 걸음걸이로 산책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이 정원이 제아무리 넓고 온갖 종류의 볼것들이 모여 있다고는 해도 매일 저렇게 산 책을 하다 보면 금방 눈에 익고 질리게 되기도 하는 법이건만 지금 문인천상이 산책을 하 는 모습은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어서 아마도 그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라기보다는 밝아 오는 새벽의 안개 속을 산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점차로 더욱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새벽안개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가 흩어 지고 있었는데, 바라보니 문인천상의 전신은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이 그 가운 데에 흡수되어 함께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악채릉은 어제는 비록 그의 뒤를 가깝게 뒤따랐으나 오늘 아침에는 그저 누각의 현관 앞에 조용히 서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공연히 그의 뒤를 따라가서 그의 산책을 방해하 거나 혹은 자신이 그로 인해서 정신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기실 그렇게 새벽안개 속에 조용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 또한 백색의 의삼과 잘 조화를 이 루어서 마치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처럼 환상적으로 보일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한참 동안 정원을 몇 번이고 돌아다니며 산책을 하다가 이윽고 나중에는 어제 저녁때 앉아 있었던 그 연못 앞의 바위 위에 앉아서 멍하니 명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대략 한 시진 가량의 시간이 흘렀는데, 악채릉은 비록 무공을 연성하여 정 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한 곳만 바라보고 서 있자니 다소 지루한 감을 느끼게 되었 다. 기실 그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지금과 같은 실전적인 임무를 맡았던 것이며 불과 얼마 전까 지만 해도 다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무공을 배우며 스승으로부터 질책을 듣던 신녀문의 여제자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실로 그와 같이 발랄했던 그녀가 지금과 같이 딱딱하고 지루 한 일을 해내려니 자연 권태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악채릉은 느닷없이 다소 요란한 마차 소리가 나서 그쪽으로 고개 를 돌려보니 한 대의 다소 호화스러운 느낌을 주는 사두마차가 누각이 있는 쪽을 향해 다 가오고 있었다. (……?) 악채릉은 이내 어제 저녁에 하인이 말했던 대로 주 총관이 마치를 보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마차는 누각의 앞에 이르러 그 마차를 몰고 있 던 마부가 마부석에서 내려오더니 이렇게 공손히 말하는 것이었다. "공자님! 주 총관과 다른분들은 이미 출발하여 장원 내엣 계시지 않는 상태이고, 소인더러 공자님을 모시고 그분들의 뒤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동안 빠르게 뒤쫓으면 될 것 이니 소인은 공자님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모든 준비를 끝내시고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 겠습니다."이 마부는 다소 말이 좀 많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마부는 그녀 가 아닌 그녀의 뒤를 향해 공손히 말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기이하게 생각하여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그녀의 뒹는 문인천상이 조용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마부의 말을 듣고 있었 다. 아마도 그는 그녀가 마차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다가온 모양이었는데 연청색의 비단 장삼이 이미 훤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을 받아서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아내 고 있었다. × × × 문인천상은 악채릉과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마친 다음에 세수를 간단하게 하 고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간단한 차림으로 밖으로 나와서 악채릉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이내 마차를 몰아서 달리기 시작했고, 문인천상과 악채릉은 마차의 안에 앉아서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 이 마차는 아까 겉으로 보기에도 호화로워 보이더니 역시 안으로 들어와서 보기에도 구조 가 훌륭하여 비단 다른 마차들과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 의 최고의 안락함과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마차들과는 달리 이 마차의 내부는 바닥이 편편하게 되어 있었고 칸막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는 하나의 넓은 침상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마차의 내부에 침상이 있다 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실 누구라도 이렇게 거의 진동이 없는 마차의 내부에 타 게 되면 편안하게 눕고 싶을 것이고, 아마도 이 마차의 구조는 그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새롭게 고안된 것 같았다. 침상의 형상이나 재질은 하나같이 최고급의 것을 사용한 것이었고, 문인천상과 악채릉은 일단 그 침상 위에 앉고 나자 이내 스르르 눕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문인천 상이라는 사람은 원래가 그와 같은 편안한 침상 위에서 생활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별로 특이할 데가 없는 것이었고, 악채릉은 또한 문인천상을 의식하여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 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설령 이보다 열 배나 안락한 침상이 있다고 해도 눕지 않았을 것이었다. 따라서 손님이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이 특별한 마 차의 내부에서 두 사람은 도리어 기분이 어색해지고 마음이 긴장되게 되어 딱딱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마부는 이곳 내부와 두터운 휘장으로 단절된 마부석에서 말없이 연신 채찍을 휘두르며 마 차를 몰고 있었는데, 악채릉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계속되자 이윽고 하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게 되었다. 이 문인천상이라고 하는 사람은 얼핏 느끼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기실 한 번 침묵하기 시 작하면 도무지 끝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에 있어서는 그녀가 양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 마차는 매우 특이하게 생겼군요. 당신은 늘 이런 마차를 타고 다니나요?" 문인천상은 계속해서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그와 같은 질문을 받고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와 같은 마차를 처음 타 볼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거의 타지 않소." (……?) 악채릉은 잠시 의아해 하다가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당신은 장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 니 그렇겠군요. 이 마차는 주운양이 특별히 고안하여 당신을 위해 보낸 것이겠죠?" 문인천상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며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낭자는 당금 강호의 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악채릉은 그가 문득 그와 같은 질문을 하자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러한 지루한 침묵을 깨기 위해 어떤 말을 해야 하나 하고속으로 어렵게 궁리를 하고 있었 는데 그가 그와같이 물어 오자 잘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소한 당금 강호의 소식에 관 해서는 그보다는 그녀 자신이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강호무림의 일 가운데 어떤 것들을 알고 싶으시죠? 당신에게는 특별히 강호무림에 관한 취미가 있는 건가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나에게는 그와 같은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호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 다소 흥미롭다는 것을 직감하는 식견은 있소."악채릉은 그가 느닷없이어울리지 않게 우스개소리 를 하는 것을 보고 덩달아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음…… 그렇다면 우선 강호의 개략적인 상황을 이야기한 다음에 차례로 나아가는 것이 좋 겠군요. 당금 강호무림의 가장 거대한 세력들이라고 하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주팔패(神 州八覇)의 무리들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신주팔패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알고 있지는 못하오." (……) 지금 이 순간 문인천상이 가볍게 미소하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고 멋드러진 것이어서 악 채릉의 가슴에 묘한 파문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악채릉은 다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보았으나 차라리 그가 항상 이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금세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문인천상의 대답을 상기하고는 정색을 하고 입을 열어 다시 말했다. "신주팔패는 바로 당금의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고 신비로운 무학의 일가(一家)를 이룬 여덟 개의 세력들을 말하는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그들이 나타난 시기가 하나같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예요. 따라서 과거에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서 명성을 떨치던 구파일방(九派一幇)은 근래에 이르러 그들의 세력에 밀려서 명성이 크게 퇴색하여 가고 있는 실정이죠." "……" 문인천상은 묵묵히 다소의 미소가 섞인 듯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는데, 악채릉은 그의 의도 를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즉, 당금의 천하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는 중원의 천륭무가(天隆武家)를 비롯하여, 천 산(天山)의 일월신교(日月神敎), 황산(黃山)의 성수곡(聖手谷), 대설산의 성모궁(聖母宮), 동 영(東瀛)의 검총(劍塚)과 막북(幕北)의 도막(刀幕), 남황(南荒)의 태양마교(太陽魔敎)와 북해 (北海)의 현현각(玄玄閣)……" 문인천상은 그녀가 일일이 나열하는 이름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다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자르며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그 가운데에는 고묘파(古墓派)라는 것은 없소?" (……?) 악채릉은 나름대로 열심히 강호의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문인천상이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다가 대답했다. "고묘파라고하는 것은 과거 전진파(全眞派)가 있었던 시절에 종남산에 위치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당금의 종남파(終南派)가 융성한 이후에 그 문파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어요. 헌데 왜 갑자기 그와 같은 것을 물으시는 거죠?" 문인천상은 그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눈짓으로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 악채릉은 이 문인천상이 알고 보니 자신을 희롱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소 기 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일단은 그의 눈짓에 따라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바라 보니 느닷없이 그의 발 옆에 마치 옥수수의 수염과도 같이 생간 검고도 길쭉한 물체가 보 이는 것이 아닌가!악채릉은 처음에는 너무나도 기이하여 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 다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사람의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이었던 것이었다. 당시는 남자나 여자나 머리를 길게 길러서 상투를 틀거나 뒤로 묶고 다녔었는데, 이 머리가 길다는 것만으로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악채릉은 그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에 문득 거기에서 고묘파 운운한 것은 바로 지금무덤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침상의 아래에 숨어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아마도 문인천상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다가 그와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은근히 그녀에게 알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제 저녁때에 악채릉은 문인천상에게 지나치게 태연하고 배짱이 심하다고 말했었는데, 지 금에 이르러 문인천상의 심리를 생각해 보고는 악채릉은 문득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제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처럼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발견하게 되면 금세 태연해지기가 어려운 법인데, 문인천상은 비단 마음을 태연하게 가라앉혔을 뿐만 아 니라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던 것이었으니, 그러한 표정이 얼마나 교묘하였으면 악채릉 본인조차도 처음에는 전혀 그가 그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것들을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지금 침상 아래에 숨어서 문인천상을 노 리고 있는 이 암중인(暗中人)이야말로 그야말로 재수가 너무나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는 교묘한 수작을 부려서 미리부터 침상의 아래에 잠복하고 있다가 문인천상과 악채릉이 안심을 하고 있을 무렵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손을 쓰려고 했 었을 것이나, 그야말로 재수가 없게도 자신의 기다랗게 기른 머리카락이 그만 침상의 밖 으로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천하에서 가장 배짱이 두둑하다고도 할 수가 있는 문인 천상에게 발견되고 말았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생각은 일순간에 스치고 지나간 것에 불과하였고 악채릉은 이내 본연의 임 무를 잊지 않고 즉시 소리없이 등뒤의 장검을 뽑아 들고 그 암중인의 머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기실 비록 재수가 없었기는 해도 이 암중인 역시 그녀의 이목을 속이고 이제까지 숨어 있었을 만큼 일신의 무공이 녹녹치 않은 것이어서 악채릉이 마악 다가서는 순간에 벌 써 그러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대로 침상의 윗부분을 뚫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암중인은 일신에 검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고 얼굴에도 다만 두 눈만을 내놓은 흑의장한이었는데, 그는 일단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검을 펼쳐서 문인천상의 면상을 향해 눈부신 살초(殺招)를 전개했다. 부아앙! 흡사 가죽부대가 일시에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음향이 들리면서 문인천상의 면전에는 마치 거대한 검기(劍氣)가 해일처럼 일어나는 것 같은 광경이 벌어졌는데, 악채릉은 이 암중의 인물인 흑의장한이 먼저 발각되었으면서도 이렇게나 빠르게 움직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 하고 있다가 이윽고 뒤늦게야 그자의 검초에 맞서가며 문인천상을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했 다. 해일처럼 일어난 검기 속으로 이내 눈부신 백색의 검기가 폭죽처럼 펴져나가며 분분히 무 수한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았는데, 확실히 악채릉의 무공은 그 흑의장한보다도 다소 우월 하여 그녀가 일단 검초를 전개하자 마차의 지붕이 한꺼번에 터져나갈 것 같았고 흑의장한 의 검세를 완전히 누를 수가 있었다. 흑의장한은 상대의 검세가 무시무시하자 실로 뜻밖이라는 듯이 급속하게 뒤로 물러났고, 악 채릉은 쉽게 놓아 줄 수가 없다는 듯이 추격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미 텅 비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흑의장한이 빠져나온 침상 아래에서 느닷없이 다시 한 명의 흑의장한이 위로 솟구쳐 오르면서 장검을 휘두르며 문인천상의 면전 을 엄습해 드는 것이 아닌가!(……!) 이들 흑의장한들의 검법은 확실히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치 먼저 구름이 자욱 하게 깔리고 그 뒤에 한 줄기의 섬광이 작렬하는 듯한 무서운 기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한 명의 흑의장한을 추격해 가다가 뒤늦게야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비록 그녀의 무공이 탁월하다고는 하나 다시 몸을 돌이켜 문인천상을 구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 다. 아직도 멍하니 침상의 한쪽 부분에 걸터앉아 있는 문인천상을 향해 그 흑의장한의 필살(必 殺)의 검초식은 빠르게 정수리를 향해 파고들고 있었는데, 악채릉은 그 순간에 마치 문인 천상의 머리가 그 악랄한 검초식에 의해 파괴되는 듯한 착각에 절로 아찔한 심정이 되었다. 한 명의 살수가 있었다면 다른 한 명의 살수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했어야 하 는 것인데, 실로 이와 같은 어이없는 사태가 된 것은 그녀의 강호 경험이 미숙했기 때문이 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일순 잿빛의 그림자가 가득하게 일어나는가 싶더니 붉은 선혈이 허 공으로 확, 하고 뿌려졌다. 제6장 의문의 흉적(兇敵) 악채릉은 문인천상이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장검 까지 떨구며 외마디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아악!" 그러나 뒤에 기이하게도 주위가 조용하여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보니 어이없게도 눈앞에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 문인천상. 당연히 정수리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상하게도 전혀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하게 아까의 그 자리에 앉아서 미소를 띄고 있었으며, 오히려 지금 피를 뿌리고 있는 사람은 느닷없이 나타났던 그 흑의장한이었는데 바로 그의 장검이 들려 있던 오른쪽 팔이 어깨부터 깨끗하게 잘려나가 피를 콸콸 뿌려대고 있었다. (……?)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흑의장한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악채릉은 혹시 문인천상이 우연히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금 방 알 수가 있었다. 마차의 내부에는 다시 한 명의 사람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 회의노인(灰衣老人). 악채릉은 아까 마지막 순간에 잿빛의 그림자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는 데, 그것은 기실 착각이 아니라 바로 그 회의노인이 나타나는 광경이었던 것이었다. 회의노인은 허리춤에 한 자루의 장검을 차고 문인천상의 바로 옆에 공손하게 시립하고 서 있었는데, 악채릉은 문득 그 노인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그 회의노인은 바로 아까 누각에서 문인천상의 시중을 들던 많은 늙은 하인들 가운데의 한 사 람이었던 것이었다. 악채릉은 당시 그저 무의식중에 늙은 하인들의 얼굴을 몇 번 보았을 뿐이었는데, 실로 그들 가운데 이러한 무학의 고수가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상황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 흑의장한이 느닷없이 살수를 전개하여 문인 천상을 향해 덮쳐들자 바로 그 순간에 회의노인이 빠르게 나타나서 눈부신 쾌검(快劍)으로 그자의 한 팔을 잘라 버렸던 것이었다. 지금 보아하니 흑의장한이 뻣뻣하게 서서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회의노인이 다시 혈도를 제압한 것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흑의장한의 무공도 상당한 경지의 것이었는데, 실로 그가 나타나서 장검을 휘두르는 그 찰나의 순간을 가르며 검을 발출하여 그자의 팔을 절단하고 혈도까지 제압한 회의노인의 무공은 상당한 것이어서 결코 악채릉 그녀의 아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대체 회의노인은 이제까지 어디에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문인천상을 위기로부 터 구해 준 것이었을까?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의 옆에 바닥이 구멍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그 회의노인은 미리 문인천상 등이 마차에 오르기 전에 마차의 밑에 매 달려 있다가 느닷없이 바닥을 뚫고 나타났던 모양이었다. 악채릉은 그 회의노인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에 그들 하인들이 문인천상에게 보내는 지대한 충성심에 대해서 다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로 그와 같은 충성을 바치는 능력있는 하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그토록 태연하게 행동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악채릉은 아까 문인천상을 염려하여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처음의 흑의장한이 마차의 휘장 을 젖히고 달아나는 것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한 일이 없다고 생각되어 다소 씁쓸 한 기분이 되어 문인천상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헌데 그 순간에 갑자기 회의노인이 크게 경악성을 내질렀다. "아니, 이런 놈이!" (……?) 악채릉이 다시 크게 놀라고 의아한 심정으로 빠르게 다가가 보니 회의노인은 지금 그 혈도 를 제압한 흑의장한을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악채릉이 보기에도 흑의장한의 드러난 두 개의 눈두덩이 부근이 이미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악채릉은 이미 집어들고 온 장검으로 그자의 안면의 천조각을 들어 보인 후에 그자의 얼굴 이 완전히 변색되기 시작하고 그자가 이미 숨을 거두었음을 알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 었다. "극약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끊었군요." 여태까지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바라보고만 있던 문인천상도 이때는 안색이 다소 변 해서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대체 이들은 어떤 무리들이길래 이토록 잔인하고 악독하다는 말인가?"일반적으로 다른 사 람들 극악무도하게 죽이는 사람은 잔인하다고 할 수가 있겠지만,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도 쉽사리 끊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더 악독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악채릉이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하는데 이때 문득 마차의 휘장이 들리면서 전혀 낯설어 보 이는 흑의노인(黑衣老人) 하나가 한 손으로 흑의장한의 허리춤을 집어들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이자도 역시 제압당하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흑의노인이 보여 주는 흑의장한의 모습으로 보아 그자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에 악채릉과 싸우다가 도주했던 그자가 분명했다. 그자의 얼굴도 이미 극독에 중독되어 숨이 끊어진 채 푸르죽죽하게 변모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대체 이 느닷없이 나타난 흑의노인은 또한 누구라는 말인가?악채릉은 평소에 총명하 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지금 느닷없이 펼쳐지는 상황의 변화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지 못하 고 멍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녀를 보고 문인천상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이 두 사람은 나의 선친께서 가까이하던 심복들이었는데, 과거에 선친께서 돌아가시 자 그분의 복수를 다짐하며 장원 내에서 숨어 지내던 분들이오. 비록 이분들의 과거의 명 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분들은 이미 그러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주방장인 화노(火老) 와 정원사인 엽노(葉老)로 불리우고 있다오." 악채릉은 문득 눅가에서의 음식들이 대단히 훌륭했었던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문인천상이 항상 거닐곤 하던 정원의 나무들은 유달리 잘 손질되어 있었는데, 전에 는 그러한 것들을 무심코 지나쳐 버렸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속에 숨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악채릉은 아직 주방장을 본 적이 없으니 가끔 얼굴을 보던 회의노인이 바로 정원사인 엽노 인이고, 지금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허리에 한 자루의 칼을 차고 있는 흑의노인이 바로 주방장이라는 화노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까 악채릉은 흑의장한을 그만 놓쳐 버리고 말았는데, 그자를 흑의노인 화노가 금세 잡아 온 것으로 보아 그의 무공 역시 그녀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악채릉은 처음에는 이 문인가의 장원이 이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지만 지금은 감히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와호장룡의 철옹성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문인천상은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는 악채릉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분들은 원래 나의 지시를 받지도 않았는데도 그와 같이 행동한 것이었으니 악 낭자는 행 여나 내가 낭자를 속였다고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오. 그건 그렇고…… 낭자는 혹시 이 사 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소?"악채릉은 속으로 이 문인천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두 명의 흑의장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 었다. "나는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아마도 이들은 강호상에서 이름이 나지 않은 사람들일 것 같 아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만일 얼굴만으로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면 구태여 극독을 삼키고 자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오. 이들이 자결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것일 테니 까." 회의노인 엽노와 흑의노인 화노는 이때 각기 옆에 있는 흑의장한들의 품속을 뒤져서 소지 품들을 찾아내고 있었는데, 겨우 몇 개의 은자 부스러기만 찾아내었을 뿐 다른 것들은 아 무 것도 찾을 수가 없자 문인천상이 이를 보고 악채릉에게 다시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강호상에서 전문적으로 남의 청부를 맡아서 일을 해주고 돈을 벌 어먹는 살수들인 것 같은데 낭자는 이들이 어떤 조직에 가담해 있는 것인지 생각해 낼 수가 있겠소?" 아까의 흑의장한들의 검초식 등으로 보아 지금 문인천상의 판단은 예리하고도 올바른 것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악채릉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호상에는 그러한 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같이 은밀하게 활동을 하고 거의 흔적을 남 기지 않기 때문에 금방 생각나지 않네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나중에 차차 생각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 소. 나의 의숙이 보낸 이 마차에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들이 미리부터 들어가서 있을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오." 악채릉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다면……"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생각하기에 혹시 이 마차도 가짜가 아닌가 하는 것이오."순간 악채릉을 비롯한 엽노 와 화노가거의 동시에 마부석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려 갔다. 이 마차가 가짜라면 말할 것도 없이 마부도 가짜일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악채릉 등은 미처 흑의장 한 등의 일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여 그와 같은 이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인천 상은 오히려 너무나도 태연자약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악채릉 등이 마악 마부석에 이르렀을 때 비록 마부는 여전히 말의 고삐를 잡 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점차로 그의 상체는 뒤로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부의 전신은 이미 극독에 중독되어 숨이 끊어지고 시커멓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는데, 그것은 바로 그 마부가 얼굴에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쓰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로군요. 그는 왜 달아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엽노가 시신을 치우고 화노가 재빨리 말의 고삐를 잡아서 마차가 제대로 나아가게 하는 것 을 보며 악채릉은 의아한 표정으로 뒤따라 나온 문인천상을 향해 물었다. 문인천상은 눈짓으로 엽노에게 그 세 구의 시신들을 처리하게 한 다음에 대답했다.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오." 악채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고요?" 문인천상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비록 달아나고 싶었지만 달아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오. 실로 사람을 그와 같 이 만들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잔악스러운 짓이오. 나는 대체 누가 나에게 그와 같은 잔 악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소."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당신은 그 전에 남과 원수를 맺은 일이 없었나요?"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 었다. "나는 수년 동안 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어찌 남과 원수를 맺을 시간이 있을 수 가 있었겠소?" (……) 이때 시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렸던 엽노가 경신술을 펼쳐서 돌아와 다시 문인 천상의 옆에 섰다. 엽노는 기실 수년간이나 정원사의 일을 해 온 사람이어서 그와 같은 시신들을 처리하는 것 은 일도 아니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저 장력을 몇 번 날려서 구덩이를 파고 나무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장소에 시신들을 묻어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 마차는 마부가 자결을 하는 통에 다소 속도가 떨어져서 느릿하게 달리고 있었는 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토록 빠르게 일을 해치우고 돌아온 엽노를 보고 악채릉은 내심 감탄하는 마음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에게는 그와 같은 분들이 계시니 저는 이제 쓸모가 없겠군요?"악채릉의 말에 엽노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이다. 우리는 소주인님을 은밀하게 보호해 드려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소주 인님의 곁에는 항상 낭자께서 계셔 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헌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죠?" 화노가 비록 마차를 대신해서 몰고 있기는 했지만 그와 같은 얘기를 듣자 일순 저마다 멍 한 표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마부가 달아나지 않았던 것은 마차를 좀더 오랫동안 몰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은 일행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며, 또한 그 목적지는 이미 거의 다 온 것이 아닐까?일행은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려서 장원으로 되돌아가려고 생 각하고 있었지만 왠지 그러한 행동은 다소 늦은 감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가 이윽고 좁은 모퉁이를 돌아서 빠져나가는 순간에 마치 작은 분지와 도 같이 넓어진 길의 끝부분이 굵은 통나무나 바위 등으로 완전하게 막혀 있는 것을 일행 은 볼 수가 있었다. 기실 마부는 마차의 안에서 거의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점을 이용하여 성 안으로 향하지 않 고 방향을 틀어서 마차를 산중으로 몰았었던 것이었다. 문인천상과 악채릉, 그리고 엽노와 화노 등은 흑의장한 등에게 신경을 쓰느라 미처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화노는 즉시 마차를 정지시킨 다음에 큰 음성으로 소리쳐 말했다. "웬놈들이냐!" 그때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암벽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던 사방 의 절벽 속에서 느닷없이 무수한 암기(暗器)와 화살들, 그리고 흑의장한들이 튀어나오기 시 작했다. 우르르릉! 일시에 천지가 거짓말처럼 시커멓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사람 심리의 허를 찌르는 이러한 급습은 그야말로 일행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족했고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사방에서 느닷없이 급작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암기들조차 다 피하기 어려운 판국에 그 뒤를 이어 살벌하게 덮쳐드는 흑의장한들의 공격을 당해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악채릉 혼자서 문인천상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당하고 말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문인천상의 곁에는 엽노와 화노라는 절정의 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상황을 반 전시켰다. 마치 비오듯이 쏟아지는 암기들은 비록 강호의 일류고수들이라고 해도 질리게 하겠지만 이들 절정고수들의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옆에 서 있다가 즉시 장검을 눈부시게 휘둘러서 마치 거대한 검막과 도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암기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고, 화노와 엽노는 자 신들의 소주인이 무사한 것을 보자 이내 장검과 칼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흑의장한들을 향해 사납게 맞서가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한 순간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천지가 일시에 개벽을 하듯이 혼돈스럽고 격렬하 며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악채릉은 검법이 탁월하여 사방에서 날아오는 암기와 화살 등의 공격을 제거하면서도 다소 간의 여유가 있어서 장내를 살필 수가 있었는데, 엽노의 무공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 아주 빠른 쾌검식(快劍式)이었고 화노의 무공은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는 도법이었다. 악채릉은 그들의 무공이 상당히 특이하여 대체 어느 파의 무공일까 하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쉽게 어느 파의 무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흑의장한들은 얼핏 보기에도 무려 십수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무공은 이미 죽은 자들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아서 비록 엽노와 화노가 좌충우돌하며 견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점차로 이쪽으로 밀리는 형국이었고, 따라서 악채릉은 이제 잠시 후면 자신도 나서서 두 사람을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때였다. 느닷없이 허공에서 자색의 노을같은 기운이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나더니 마치 무지개가 펼쳐지듯이 현란한 광망(光芒)을 뿌리며 흑의장한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으악!" 그것은 마치 천상의 신장(神將)이 하강하여 음악한 귀졸들을 여지없이 무찌르고 있는 광경 과 아주 흡사했다. 십수 명이나 되는 흑의장한들은 한꺼번에 서너 명씩이나 그 무지개와 같 은 현란한 검기(劍氣)에 맞아서 죽음을 당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무지개와 같은 검기의 속 에 마치 매화(梅花) 무늬를 닮은 기운이 파도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보고 악채릉은 일순 기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버지!" 그렇다. 자색의 휘황한 검기를 허공 가득히 뿌리고 있는 사람은 희미한 백색의 그림자를 종횡으로 길게 끌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악채릉의 부친인 화산일검 악불범이었 던 것이었다. 이른 바 최절정의 진산신공(鎭山神功)인 화산파의 자하신공(紫霞神功)과 그것으로 인해 펼 쳐지는 매화검형삼십육식(梅花劍形三十六式)이라는 검법의 가공스러움은 마치 신기와도 같 은 것이었다. 악불범은 나타나자마자 자신의 무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벌써 십여 명의 흑 의장한들의 팔다리를 끊어 놓거나 목숨을 취하였으며, 이윽고 암기나 화살의 공격이 끊어 지고 흑의장한들이 공포에 질려서 주춤하는 찰나에 장검으로 검기를 일으켜서 그자들의 혈도를 짚어 놓았다. 말하자면 혼란스러웠던 장내는 악불범이라는 최절정의 고수 하나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평 정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급격하게 돌변하자 흑의장한들 가운데에는 공포심을 누르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달아나려고 사방으로 신형을 날리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순간 다시 절벽 의 양쪽 위에서부터 주운양과 상장풍이 각기 성명절기(盛名絶技)들을 발휘하며 그자들의 목 숨을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장내에 있었던 흑의장한들 가운데에는 달아난 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는데, 이윽고 주운양과 상장풍 등은 문인천상 등이 있는 장내에 이르렀다. 이때는 기실 악채릉과 엽노 등은 싸울 상대가 사라져서 그저 멍하니 병기를 거두고 장내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엽노 등은 주운양 등이 한 사람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모조리 도 륙하는 것을 보고 내심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주운양 등은 이미 장내에 내려서서 먼저 문인천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조카! 나는 자네가 흉적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따라갔다는 말을 듣고 급히 조사를 하고 뒤쫓아왔네만 혹시 어디 부상이라도 당하지 않았는가?"주운양의 그러한 표정에는 그야말로 문인천상이 혹시라도 부상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나 하는 진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엽노와 화노는 조금 전에 잔인하게 흑의장한들을 도륙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었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이 일어서 문인천상의 뒤로 슬그머니 피해 버렸다. 문인천상은 물론 아무 곳도 다친 곳이 없이 멀쩡한 상태였는데 주운양의 질문에 담담히 미 소하며 대답했다. "저는 아무 곳도 다친 곳이 없이 몸이 아주 편안합니다. 제가 착각을 해서 쓸데없이 의숙 을 이리로 오시게 만들었군요?" 주운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그저 자네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신명을 바친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일세. 하물며 이까짓 수고야 구태여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일세."문인천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때 상장풍은 악불범 등과 함께 금방 사로잡은 흑의장한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문득 그 가운데 상장풍이 놀란 괴성을 내질렀다. "아니, 이럴 수가! 형님, 이들은 모조리 자결을 하고 말았소이다!"……? 주운양은 그 말에 흡사 놀란 기러기처럼 신법을 발휘하여 그쪽으로 달려가서 흑의장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문인천상 등도 걸음을 옮겨서 그쪽으로 가서 살피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 흑의장한들도 모조리 극독을 삼켰는지 숨이 끊어진 채 육신이 녹아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 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살수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빨 속에 극독을 숨겨 가지고 다 니는 경우가 많은데, 만일 자신들이 제압을 당하게 되면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즉시 이빨 속의 독약을 깨물고 자결을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심정은 같을 수가 없어서 예외라는 것도 있겠는데, 공교롭게도 상장풍이 말했던 바대로 혈도가 제압되었던 흑 의장한들은 이미 모조리 목숨을 끊은 후였다. 일단 그렇게 목숨이 끊어진 다음에는 설사 대라신선이 하강을 한다고 해도 다시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문인천상의 일행을 급습했던 일단의 흑의장한들은 한 순간에 하나도 남 김없이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었는데, 이를 보고 주운양은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자들 가운데 최소한 하나라도 살아 있어야 정체를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이렇게 되다니 실로……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악채릉이 보다 못해 말했다. "만약 당신들이 달아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단서를 찾을 수도 있었 던 것이 아니었나요?" 주운양은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아하니 이와 같은 무리들은 극악무도하여 결코 살려둘 필요가 없는 자들이오. 나는 당시 이와 같은 결과를 내다보지 못하고 그랬던 것이나, 내 자신이 그와 같은 사악한 자들을 제 거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소."(……) 악채릉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주운양은 이어 문인천상에게 입을 열어 물었다. "조카, 자네는 혹시 누구에게 미움을 사거나 혹은 원한 관계라도 맺은 일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문인천상은 그의 질문이 아까의 악채릉의 질문과 비슷했기 때문에 다소 웃으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아직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운양은 순간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혹시 그자들이 먼저 우리에게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악채릉이 물었다. "어떤 자들 말이죠?" 주운양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짧게 부르짖었다. "대막 천화궁!" …… 주운양의 입에서 대막 천화궁의 얘기가 흘러나오자 일순 장내의 사람들의 안색은 일제히 크게 변했다. 만일 대막 천화궁이 미리부터 작정을 하고 그들 일행을 노리고 있는 것이라 면 그 문제는 간단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운양은 장내의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다시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아주 중대한 것이니 우리는 아직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잠시 더 두고보 다가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합시다."기실 무공에 있어서는 악불범이 가장 높은 상황이 었지만 그와 악채릉은 손님에 불과했기 때문에 지금의 사태는 주운양이 이끌어가고 있었 다. 악불범은 주운양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도 그저 무심한 표정을 지을 뿐으로 좋다거나 싫 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주운양은 일행의 분위기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즉시 상장풍 등과 함께 흑의 장한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단서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로 그 흑의장한들은 기이한 데가 있어서 비단 하나같이 몸에 신표를 남겨 두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그들이 사용했던 암기나 화살 등도 그저강호상에서 흔히 쓰이는 평범한 것이었고, 심 지어 문인천상 등이 속아서 타고 왔던 그 마차 또한 겉으로는 특이해 보이나 기실은 대부 분이 평범한 목재로 만들어서 위장한 것에 불과했다. 일행은 그렇게 흑의장한들의 시신들을 커다란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묻어 버리고 마차도 처 분해 버린 뒤에 이윽고 다시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주운양은 문인천상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는 자네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사람들을 풀어서 자네가 타고간 마차의 행방 을 찾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따로 떠날 준비를 해놓으라고 하였네. 아마 지금쯤이면 그들은 성 안의 한 주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곳으로 가면 될 것이 네." 문인천상은 담담히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숙께서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문인천상은 무공이 미약한 서생에 불과했기 때문에 마차가 부서지자 이제는 그 마차를 끌던 말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엽노와 화노는 이미 함께 숙의하여 부서진 마차의 재목들 을 이용하여 하나의 작은 교자를 만들었고, 두 사람이 앞뒤로 교자를 들고는 문인천상에게 오르도록 했다. 문인천상은 비록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오직 자신만이 신법을 펼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자 위에 올랐다. 이윽고 일행이 신법을 펼쳐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엽노와 화노도 즉시 교자를 들고 신법을 펼쳐서 뒤를 따랐는데, 주운양 등은 그들의 신법이 결코 자신들의 신법에 뒤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기이하게 생각하는 표정들이었다. …… 제7장 다섯 명의 노괴물(老怪物)들 난주성의 성내 번화한 거리에는 그야말로 성내에서도 가장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있는 거대 한 주루 하나가 있었다. 일행이 그 남창주루(南昌酒樓)에 도착했을 땡는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무렵이었는데도 거 대하고 호화로운 주루 일이층이 이미 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주운양은 일행을 이끌고 주루의 삼층으로 올랐는데 그가 원래부터 예약을 해놓은 듯이 점 원들이 나서서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이윽고 삼층에 이르자 예상대로 주완청과 주씨 형 제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서 공손하게 일행을 맞이했다. 이곳 삼층은 비록 크기가 아래쪽의 일이층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기실은 더욱 화려하여 최 상급의 연회석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고, 그러한곳에 더러 문인천상의 눈에 익지 않은 사 람들이 보이기는 하나 한눈에 보기에도 그들은 바로 주운양의 일을 도와주는 무사들이어서 쉽게 주운양이 이 삼층 전체를 통째로 빌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했다. 주운양은 주씨 형제 등의 영접을 받고 나서 문인천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우리는 자네의 일을 신경쓰느라 아직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점심식사도 할 겸해서 겸사겸사 이 주루를 빌렸던 것이네. 자네는 내가 과용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의숙의 마음대로 하십시오."주운양은 그와 같은 문인천상의 말을 듣자 일순 매우 기분이 좋은 듯이 웃으며 사람들을 모두 자리에 둘러앉게 했다. 그리 고 이윽고 점원들이 아래층에서 음식들을 무수하게 날라오기 시작하자 스스로 술잔에 술을 따라서 높이 쳐들며 흥에 겨워 소리쳤다. "우리의 이번의 출정(出征)은 대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니 설령 그 가운데 다소의 희생이 있거나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해도 어찌 두려움을 품겠는가! 자, 여럽ㄴ 모두 함께 한 잔씩 하는 것이 어떻겠소?" 주씨 형제들과 함께 있던 호위무사들은 제법 그 숫자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리쳐 동조하며 일제히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좋습니다!----" 호위무사들 가운데에서 한 장한이 문득 일어서서 소리쳤다. "우리의 주 대인님이야말로 그야말로 천하의 영웅호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오! 이번에 대의를 위하여 힘찬 거보(巨步)를 내딛으시니 그러한 의기(義氣)는 실로 하늘도 감동할 것 이외다!" 보아하니 그 장한은 타고난 아부꾼인 모양이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나서 들고 있던 술잔을 남김없이 비워 버리자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주 운양은 다소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의 옆에 화산파의 장문인도 계신데 내가 어찌 영웅호걸을 자칭할 수가 있겠소? 다만 여러분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하하, 불초는 부끄러움을 부릅쓰고 여러분들에게 한 잔을 권하겠소이다. 자! 모두들 마음껏 먹고 마셔 주기를 바라오!" 주운양의 말이 떨어지자 호위무사들은 다시 한 번 더 소리쳐서 응답을 한 후에 이제는 그 야말로 주저없이 탁자 위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점원들은 계 속해서 쉴새없이 진귀한 음식들을 날라오고 있었건만 그들 호위무사들의 먹성은 실로 대 단하여 잠시라도 탁자 위에 머무는 요리들이 없었다. 기실 이런 훌륭한 주루의 삼층에 올라와서 진귀한 음식들을 맛보는 것은 일반 사람들은 평 생을 가도 이루기 어려운 호사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은 설령 지금 배가 터진다 고 해도 일단은 마음껏 먹고 볼 것이었다. 지금은 아직 대낮이고 일행은 이제부터 먼길을 떠나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는 주운양 이 수하들에게 그와 같이 퍼마시게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문인천상은 그 러한 일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은 입구와 가까운 탁자 하나를 차지하여 점원들이 가 져온 요리들을 조금씩 맛보면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주루의 입구에까지 그를 교자에 태워 가지고 왔던 엽노와 화노는 마치 그를 호위라도 하듯 이 양쪽의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악채릉은 비록 가끔씩 문인천상을 향해 시선을 보내기 는 했으나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악불범과 마주 앉아서 식사를 들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두 명의 주씨 형제들이었는데, 그들은 아까 악채릉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녀를 시종일관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심지어 그들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인 주완청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주운양이 수하들과 질탕하게 먹고 퍼마시고 있는 것이었지만, 다른 쪽에서는 또다른 기묘한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기둥이 다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일었다. 문인천상 등은 처음에는 아마도 저 술을 퍼마시고 있는 호위무사들이 너무나도 흥에 겨운 나머지 술단지와 같은 물건들을 내던져서 그와 같은 소리가 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 였으나 기실은 그렇지 않고 소리는 엉뚱하게도 아래층인 이층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이층 에서 일어난 소리가 이곳 삼층에까지 그렇게 크게 들렸던 것이라면 아마도 대단한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술을 마시고 있던 호위무사들도 한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아 래층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서 이번에는 마치 울먹이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너, 너희들이 그렇게…… 그렇게 우리들을 대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를 그와 같이 대접하 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 괴상한 소리는 아주 늙수그레하면서도 그 야말로 극도의 비통에 가득차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혹시 그 사람이 지금 누군가에게 심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그 사람은 너무나도 슬 픔에 겨운 나머지 제대로 말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늙은 사람을 그와 같이 만들다니 아무리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필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기실 술이라고 하는 것은 용기가 없던 사람에게도 다소나마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비열한 사람들에게도 영웅심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 대부분의 호위무사들은 그러한 울음소리 에 가까운 괴상한 소리를 듣게 되자 즉각 눈빛을 빛내며 관심을 표명했고, 그 가운데 더러 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이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에 이르러 아래층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기실 처음에는 어떤 상황을 뇌리 속에 그리면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정 작 눈으로 그곳의 광경을 보게 되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층 의 상황은 애초에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곳에는 아주 괴이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서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 으며 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층의 사람들은 삼층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 이 한 마디를 하고 한 가지 행동을 할 때마다 심한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혹시 가면에 가발을쓰고 있는 연극배우들이라는 말인가? 결코 그런 것 같 지는 않았다. 최소한 그들의 놀라운 무공은 감히 연극배우가 흉내낼 수가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 다섯 명의 노인(老人). 일견하기로 그들의 얼굴이나 체격은 하나같이 비슷비슷하여 혹시 다섯 쌍둥이가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었는데, 또한 공교롭게도 그들의 나이도 비슷하게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키도 크고 깡말랐으며 얼굴에는 주름살이 아주 극심하게 많았으며 머리 는 백발이었는데, 다만 두 눈만은 하나같이 천진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오직 그들 가운데 서로간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특이한 표정들이었는데, 하나 는 즐거운 표정이고 하나는 매우 화난 표정이며 또 하나는 슬픈 표정이고 또 하나는 지극 히 멍청해 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주 소심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원래 사람이라고 하면 기분이 항상 같을 수가 없어서 하나씩 때로는 즐거워하기도 하고 때 로는 화도 내는 법이건만 그들은 기이하게도 그러한 표정들이 하나씩 굳어져 버린 듯한 얼 굴이었다. 비단 얼굴뿐만 아니라 그 음성이나 태도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렇게 표정과 아주 똑같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들 다섯 사람들 가운데에서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사람은 바로 그 슬픈 표정 을 하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가 누구에게 심하게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는 지금 점원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점원은 지금 마치 넋을 잃은 듯이 노인이 양어깨를 잡고 흔드는 대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 는데, 보아하니 그의 뒤편에 있는 기둥이 믿을 수 없게도 움푹하게 들어간 것이 그의 몸이 기둥에 부딪쳐서 조금 전과 같은 굉음을 일으키며 그와 같이 된 것 같았다. 그 슬픈 표정의 노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은 지금 그가 건장한 점원의 몸을 허공에 들 어올리고서 마치 종잇장처럼 한참이나 흔들고 있는데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었는데, 점원의 몸을 내던져서 기둥을 그와 같이 망가뜨려 놓은 괴 이한 능력은 젖혀두고라도 틀림없이 핍박을 당하고 있는 쪽은 점원 쪽이었다. 그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은 계속해서 점원의 몸을 흔들어 대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느릿하게 말을 해대고 있었는데, 실로 그럴 때마다 그야말로 비통하고 슬프기 짝이 없는 목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실로 처음으로 이곳에 왔는데…… 네가 그야말로 우리를 업신여기고 이와 같 이…… 이와 같이 대하다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나는 정말 로 어떻게…… 해야 할지……"마치 귀신과도 같은 작태를 보다 못해 호위무사들 가운데의 하나가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점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봐! 저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점원은 이문인가의 무사들이 대단히 위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다가와서 공손하게 대답해 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 여섯 사람이 조금 전에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리가 없어서 합석을 하라 고 하니까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저 장가(張哥)에게 비어 있는 자리를 빨리 마련해 내라고 저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삼층이 예약되었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죠." 사람들은 점원이 여섯 사람이라고 말하자 다섯 명의 노인들만 생각하고 있다가 다시 그쪽 을 내려다보니 지금 그 다섯 명의 괴상한 노인들의 뒤쪽에는 대략 십사오 세 가량의 나이 어린 아주 예쁘고 깜찍하게 생긴 홍의소녀(紅衣少女) 하나가 다소 오만하고 차가운 표정 을 하고 서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소녀는 원래 그야말로 보기 드물게 잘생긴 용모 를 가지고 있어서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사람이었는데, 워낙에 앞에 있는 다섯 명의 노 인들이 괴이하여 오히려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었다. 홍의소녀는 일신에 아 주 값비싼 비단옷을 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와 의복에 호화로운 보석들로 장식하고 있어서 한눈에도 아주 귀한 집의 소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실로 그러한 고귀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가 그러한 괴상한 노인들과 한 일행이라는 것 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아무튼 최소한 주루라고 하는 곳은 아무나 와서 시비를 걸 수가 없 는 곳이므로 처음에는 점원들이 쉽게 생각하고 달려들었다가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주루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 가 하는 문제가 더욱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장방으로 보이는 비단 화복을 걸친 중년인하나가 그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의 앞으로 가서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어 말했다. "저희 주루의 아이들이 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군요. 하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감 히 귀인들을 몰라 뵙고 그랬었던 것이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장방은 그야말로 주루 등지에서 일해 오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보통의 손님이 와서 난동을 부리게 되면 강경하게 힘으로 몰아 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러나 어떤 일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어서 이런 장사를 하면 서도 감히 거슬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었다. 만일 그러한 것을 일일이 가려내 어 상대하지 않았다면 장방은 오늘까지 오랫동안 직위를 누릴 수가 없었을 것이고 또한 이 주루도 그렇게 안정 속에서 번창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보아하니 이 다섯 명의 노인들은 일견하기에도 백발에다 나이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고, 또한 한 사람이 건장한 점원을 아주 건장한 점원을 아주 가볍게 내던져서 기둥에다 박아 넣고 그럼에도 점원이 커다란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실로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노인들을 마치 뒤에서 부리고 있는 듯한 저 홍의소 녀는 그야말로 대가집의 귀한 소녀 같아서 장방은 실로 심장에 바람이 나지 않은 이상은 감히 강경하게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즉, 장방은 이 방면에서 그야말로 잔뼈가 굵었다 고 할 수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 상대에게 가장 비위를 맞춰 주면서도 자신의 체 면을 잃지 않는 말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실 장방의 그와 같은 경험에서 나온 고심의 말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이어서 장 방은 실로 천하에 이러한 괴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재수 가 없게 되었던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장방이 나서서 그와 같이 말하자 문득 한쪽에 서 있던 다른 네 명의 노인들 가운데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이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귀인(貴人)?…… 귀인이라고? 우리들을 어떠헥 귀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오직 한 사 람 진 소저(眞小姐)만큼은 그렇게 불리울 수도 있지만 우리들 다섯 사람들은 그저 다섯 명 의 노괴물(老怪物)들이라고불리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 점원녀석은 벌써 나이가 스무 살 도 넘은 것 같은데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또한 그가 우리 다섯 명의 노괴물 들을 몰라보았다고 하는 말도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니?…… 실로 …… 실로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리들 다섯 사람들은 한평생 남에게 결코 너그러 운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멍청한 표정의 노인의 말은 그저 중얼거리듯이 한 말이었지만, 그 음성은 마치 깊고도 깊 은 번뇌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옆에서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시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단지 그 멍청한 표정의 노인뿐이었다면 괜찮았겠으나 이때 그것을 보고 다시 그 옆에 서 있는 화난 표정의 노인이 느닷없이 나서서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가 뭐가 그리 이상하고 잘못이라는 말이야? 우리는 빨리 진 소저를 자리 에 모셔야 하는데 도대체 너희들은 그러한 사실을 잊었느냐? 도대체 이렇게 rptr해서 시간 만 끌어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게야?"그 화난 표정의 노인의 말은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동 료들을 향해 하는 말인 것 같았고, 또한 진 소저라는 사람은 바로 그들의 뒤에 서 있는 홍의소녀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쉽게 추측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 화난 표정의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뇌성벽력이 일시에 내리치는 것 같아 서 일순간에 주루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의 그 여운마저 지릉지릉 울리 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 정신이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실로 그토록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이 늙은 노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장방은 그 소리를 듣고 나자 마치 일순간에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서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어 말했다. "예예예! 빨리 노…… 노인어른들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합죠. 소, 소인이 틀림없이 그것 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어서……"장방은 너무나도 커다란 목소리에 놀랐기 때 문인지 말을 하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중에는 어서, 하는 소리를 되풀이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알고 보니 어느새 그의 뚱뚱한 몸뚱이가 그 화난 표정의 노인의 손에 의해 번쩍 들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화난 표정의 노인은 원래 장방과는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장내의 사람들 가운데 대체 그가 언제 다가가서 장방의 허리춤을 잡아서 들어올린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 갑자기 번쩍 하는 순간에 화난 표정의 노인이 이미 장방의 허리춤을 잡아서 마치 종이장처 럼 가볍게 공중에 들어올리고 있었는데, 장방은 느닷없이 그러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눈 알이 크게 튀어나오고 식은땀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비록 처음에는 웃고 있었으나 비단 그 노인의 신법이 괴이하게 빠를 뿐만 아니라 무려 이백 근은 나갈 것 같은 장방의 몸뚱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는 노인의 괴력 에 놀라서 저마다 크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었다. 화난 표정의 노인은 그러한 주위의 분위기는 상관하지도 않고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부릅뜨 고 장방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녀석아! 너는 나의 말을 듣지도 못했느냐? 나는 진 소저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너는 우리 다섯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느냐?" 장방은 얼굴 전체에 식은땀을 흘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여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어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것……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인어른들의 자리를 마련해 드린다면 자 연히…… 자연히…… 그……" 순간 화난 표정의 노인은 다시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뭐가 같다는 게야? 만일 네가 진 소저의 자리를 마련한다면 우리는 그저 진 소저의 옆에 서서 시중을 들어야 할 것이다. 네놈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 사람들은 그제서야노인의 목소리에 적응이 되어서 그런 대로 그의 말뜻을 생각하게 되었는 데 순간 가볍게 놀랐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저 다섯 명의 노인들이 그저 홍의소녀와는 같 은 일행일 것 같았는데, 실상 화난 표정의 노인의 말대로라면 그럼 그들 다섯 명의 괴상 한 노인들은 모두가 그 홍의소녀의 수하들이라는 말이 아닌가! 세상에 누가 있어서 그와 같은 수하들을 둘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아무도 그 홍의소녀의 집안에 대해서 추 측할 수가 없었다 제8장 문인천상(聞人天翔)을 찾는 소녀 장방은 내심으로는 그래도 용기를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말했던 것이었는데 노인이 즉시 그 와 같이 고함을 치자 넋이 나간 듯이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빛은 창백했다가 시뻘겋게 변하는 등의 썩은 돼재의 간과도 같은 색깔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그것을 보고 홍의소녀의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즐거운 표정의 노인이 문득 가 볍게 나무라듯이 입을 열었다. "둘째! 그런 아이에게 그렇게 고함을 쳐서야 되겠는가? 자네는 늘상 그처럼 ㅗ함을 쳐대기 때문에 내가 항상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빨리 그 아이를 내려놓도록 하게. 그렇지 않 으면 음음…… 그녀석은 그만 오줌을 싸고 말겠네." 이 즐거운 표정의 노인의 얼굴은 마치 희극배우와 같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는데, 특히 나중에 그가 오줌을 싸겠다고 말하자 좌중의 사람들은 다시 참지 못하고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도 즐거운 표정의 노인이 그 다섯 사람의 노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맏이인 듯 둘째라고 불리운 화난 표정의 노인은 이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장방을 내려놓고 말았다. 장방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한동안 바닥에 내려져서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는데, 그래도 자신의 위치를 상기한 듯 그들 다섯 명의 노인들을 향 해 포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 고맙소…… 하, 하지만 우리……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아이를 이제 그만…… 내려놓아 주지 않으시겠소?" 그 말에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없던 소심한 표정의 노인이 빠르게 장방의 곁으로 달려와 서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되물었다. "너는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말로 자리를 내주겠느냐?" 이 소심한 표정의 노인은 그야말로 눈동자가 매우 불안하게 쉴새없이 움직이고 손과 발도 항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허둥거렸고, 지금도 마치 장방이 혹시나 거짓말을 하여 자신들이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으로 그의 머리속은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비록 무심코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그러한 행동을 보자 일시 에 자신들조차 마음이 크게 초조해지고 어수선해지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물며 이 장방은 몇 사람의 노인들을 상대하고 나자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번 뇌 속을 헤매다닌 것 같기도 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다시 그와 같은 노인에게서 말 을 듣게 되자 즉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즉시 저분 진…… 소저분께 자리를 마련해 올리겠습니다." 소심한 표정의 노인은 그 말을 듣자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동안 장방의 얼굴색 이나 눈빛 등을 살펴보다가 이윽고 불안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슬픈 표정을 하 고 있는 노인을 향해 입을 열어 말했다. "셋째형! 그는…… 정말로 소저께 자리를 마련해 올리겠다고…… 하는데?"그 소심한 표정의 노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더듬거리다가 겨우겨우 이어지고 있어서 이를 듣고 있는 사 람들은 마치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실 그 다섯 명의 노인들은 서로에게 이미 익숙해졌는지 그러한 상대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이 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슬픈 표정의 노인은 소심한 표정의 노인의 말을 듣고 잠시 흔들던 손길을 멈추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점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소 주저하며 말했다. "그럼 이만 이녀석을 놓아줄까?" 그러한 평상적인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 슬픈 표정의 노인의 음성은 마치 크게 비통한 듯 한 슬픔으로 떨리고 있어서 실로 그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행동 등은 오래 전부터 습관으 로 굳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장방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이러한 기회를 놓칠세라 즉시 다가가서 간절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제발…… 그래 주시면 소인이 사례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드시는 음식은 모두 소인이 부담 하는 것으로 합죠. 그러니 어서…… 어서 그 아이를 풀어 주십시오!" 그 말에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던 멍청한 표정의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중얼거리듯 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서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인데 네가 사례를 하겠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원래 사례라고 하는 것은 음…… 감사하게……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 생각한다는 뜻이 담겨져…… 아무튼 안된다…… 우리는 결코 돈이 없어서 얻어먹으 러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야……" 장방은 그야말로 넋이 구천으로 달아나고 흡사 자신이 십팔 층의 지옥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은 고통과 번뇌를 느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괴상한 사람들과 떨어지고 싶었으며 게다가 한시라도 빨리 이 기상한 사람들이 나가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들이 음식값을 계산하고 말고는 상관할 상태가 아니었다. 다행히 그 슬픈 표정의 노인이 즉시 들고 있던 점원을 풀어 주었고, 다른 점원들이 달려 들어서 그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장방은 부근의 점원들에게 빨리 여섯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지시를 내리고는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이번에 몸무게가 치소한 열 근은 빠지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었다. …… 장방이 사라지고 점원들이 서둘러서 여섯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주자 장내를 흥미롭게 바 라보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재미있는 장면은 지나가 버린 듯했다. 그러나 워낙에 그 다섯 명의 노인들의 행색이 괴이했기 때문에 그곳을 구경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주루의 점원들은 이미 호된 꼴들을 당했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제법 괜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탁자 하나를 비워서 여섯 사람에게 안내해 주었다. 장내의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여섯 사람들은 천천히 그 앞에 이르렀는데, 아 니나 다를까 정말로 그 깜찍하고 귀엽게 생긴 홍의소녀가 우선 상석에 자리하자 나머지 다 섯 명의 노인들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그저 그녀의 좌우에 시립하고 늘어서 있는 것이었 다. 이어 점원들이 빠르게 온갖 음식들을 부지런히 날라와서 앞으로 어떤 잡음도 생기지 않도 록 정성을 다하기 시작했는데, 그 홍의소녀는 혼자서 그 많은 음식들을 조금씩 맛을 보면 서도 좌우에 서 있는 다섯 명의 노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그야말로 오만하고 냉정하 기 짝이 없어 보였고, 그 다섯 명의 노인들 가운데 더러는 매우 배가 고픈 듯이 입맛을 다 시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지만 역시 감시 나서서 음식을 먹으려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 데,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조금 전의 그 가공스러웠던 모습들과는 달리 매우 가련하고도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홍의소녀는 오직 자신만 배를 채울 뿐 그 다섯 명의 노인들을 굶길 작정이라 는 말인가? 아니었다. 이윽고 홍의소녀가 요리들을 조금씩 골고루 맛을 본 뒤에 식사를 끝 낸 듯이 옆에 놓인 물수건으로 입을 닦자 마치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다섯 명의 노인들 은 비호처럼 신형을 날려서 각자의 자리에 앉은 다음에 정신없이 음식들을 퍼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의 그들의 모습은 매우 애처롭고 가련해 보이기도 했으나 지금의 그들의 모습은 그 야말로 가증스러울 정도로 철면피하고 십 년은 굶어서 게걸스러운 아귀(餓鬼)들처럼 보였 다. 누구라도 이러한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미처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그만 머리가 돌아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아까는 그래도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둘째니 셋째형이니 하면서 서로간의 위치를 존중해 주는 듯하더니 지금은 그야말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있으면 위아래를 생각하지 않 고 서로 먼저 집으려고 비호처럼 손과 입을 놀리고 있었으니 그러한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딱 벌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과 함께 있는 그 홍의소녀는 그들의 그와 같은 아귀같은 광경들을 보면 서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고, 다섯 명의 노인들이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 동 안에 손과 입술을 훔치고 나서 간단하게 화장을 하는 듯하더니 근처에 있는 점원 하나를 불 러서 이렇게 물었다. "이봐요! 여기에 문인가(聞人家)의 대장원이 있다고 하던데 당신은 그곳을 알고 있나요?" 주운양의 호위무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술을 마시는 본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장 내의 상황이 워낙에 기이하여 평생에 다시 보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간혹 술자리로 달려 가서 술을 퍼마시고 음식들을 들고 와서 구경하곤 했었는데, 물론 그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는 강 건너의 불 구경하는 듯한 것이었고 결코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튀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뜻밖에도 그 홍의소녀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 인가의 대장원 운운하자 일순 가볍게 놀라서 저마다 얼굴을 돌아보며 의아해지게 되었다. 대체 저 괴상한 사람들과 문인가의 대장원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은근히 고개를 돌려 주운양을 바라보니 그 역시 홍의소녀의 말을 듣고는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 고 있는 표정이었다. 말하자면 주운양 등도 전혀 저 괴상한 사람들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었다. 주루의 점원들은 이미 충분하게 그들 여섯 사람에게 질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홍의소녀의 질문을 받은 그 점원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잠시 위층을 의식하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 어 공손히 대답했다. "물론 소인은 그곳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지요. 아마도 마차를 불러서 타고 가시면 불과 반 시진이면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께서는 지금 즉시 그곳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점원의 나중의 말은 위층에 있는 주운양 등을 의식하고 한 질문이었다. 기실 문인가는 과거에는 대장원이라고 불리웠고 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일단 전대 의 주인인 문인운룡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에 주운양이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하고부터 는 거의 이렇다 할 거래가 없어서 대부분의 가업이 쇠퇴하고 대장원이라는 이름에도 걸맞 지 않아서 근래 들어서 사람들은 대장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었다. 홍의소녀가 그런데 도 굳이 대장원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니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가 문인가의 사정에 대 해서 밝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홍의소녀는 점원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우리는 일단 몇 가지 사실을 조사하고 나서 그곳으로 가 볼 생각이예요. 당신은 그런데 그곳에 새로운 주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이 홍의소녀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런 거침없이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순진하고 강호 의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점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소인은 주 총관님이 계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주인이 생 겼다는 소리는 모르겠습니다." 기실 문인천상은 집에 돌아와서도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고 또한 주운양이 그가 돌아온 사 실을 굳이 대외에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서 자연 이 점원이 문인천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점원의 표정에 거짓이 없는 것 같아서 홍의소녀는 문득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자서 나직하 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정말로 소문대로 다른 곳으로 이미 장가를 가 버린 것일까?" 겉으로는 아주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이 아름다운 홍의소녀는 그 순간에 문득 아주 쓸쓸 하고 괴로운 듯한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원래 미인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강하게 공감을 주기가 쉬운 것이어서 점원은 이 제까지 그녀를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그러한 표정을 보자 왠지 마음이 약해지고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서 불쑥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소저께서 문인가의 장원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다면 위층에 그곳의 사람들이 단체 로 식사를 하고 계시니 그곳으로 가서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실 주운양 등은 그 여섯 사람들이 다소 수상쩍은 냄새가 풍기기는 해도 중대한 일을 앞 두고 있는 시점이고 또한 그들의 무예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 때문에 체면불구하고라도 이번 에는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실로그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그 점원이 선심에서 우러나온 한 마디를 하는 바람에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그들에게 노출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식사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던 다섯 명의 노인 들이 언제 그러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점원의 말이 마악 끝나는 순간에 음식을 향해 내뻗던 손길을 멈추고 거의 동시에 허공을 향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 그 다섯 명의 괴상한 노인들의 신형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삼층의 주루에 이르렀다. 삼층의 난간에모여서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던 호위무사들은 느닷없이 그들이 삼층으로 올 라오자 마치 예고되었던 괴물들의 출현을 보는 것 같아서 일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비록 아까도 그들의 무공을 보기는 했었지만 지금 느닷없이 마치 깃털처럼 이층에서 삼층으로 단숨에 빠르게 날아올라온 그 신법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놀라운 절기였다. 게다가 마악 놀라서 흩어지려는 호위무사들 가운데의 한 사람을 붙잡고 예의 그 즐거운 표 정의 노인이 입을 열어 급하게 묻는 것이었다. "문인가의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이때 그 즐거운 표정의 노인의 안색은 그렇게 급하게 질문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역시 무 엇이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한 기색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잡혀서 질문을 받 고 있는 호위무사는 그의 그러한 얼굴을 보게 되자 도리어 웃음이 나오기는커녕 극심한 공 포감을 느끼게 되었고, 금세 너무나도 놀라서 바지에 오줌이라도 쌀 것 같았다. (……) 호위무사가 주운양이 있는 쪽을 은근히 주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수하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있던 주운양이 그제서야 보다 못해 몸을 일으켜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선 다섯 명의 노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한 다 음에 입을 열어 말했다. "실례지만 무슨 일로 문인가의 주인을 찾는 것이오?" 다섯 명의 노인들은 드디어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자 유심히 주운양의 용모와 체격을 살피 다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네가 바로 문인가의 주인이냐?" "너는 보아하니 문인가의 주인이 아닌 것 같은데 어서 가서 주인을 데려와라!" "웬 녀석이냐?"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실례지만무슨 일로 문인가의 주인을 찾는 것이오 하고 묻고 있는 것이오?" "그러는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주운양은 처음에는 비록 제법 엄숙하고 정중한 예의를 차리고 다가갔던 것이지만 느닷없이 그와 같은 여러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는 일순 정신이 다 멍해지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질문을 받게 되면 정신이 없게 되는 것이지만, 게다가 이들 다섯 명의 노인들은 음성과 표정들도 제각각으로 정신없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만일 눈앞의 이 사람들이 무공이 형편없는 강호의 하류도배들이었다면 주운양은 즉시 그들 의 질문을 무시하는 한편 수하들을 시켜서 보기 좋게 쫓아 버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실로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아서 만약 그가 이 노인들에게 무례하게 대하기라도 하면 혹시 자 신들이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기 때문에 주운양은 비단 그들을 전혀 무시할 수가 없 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 하나하나의 질문에도 신경을 기울여야만 했다. 주운양은 여태 강호를 수십 년간이나 종횡하면서 실로 지금처럼 어처구니가 없고 곤란한 상 황은 처음으로 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과연 수십 년간 굴러먹은 무림의 노강호답게 그는 잠시 후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여 역시 정중하게 대답했다. "나는 문인가에서 지금 총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주운양이라고 하오. 강호의 동도(同道)들 은 송구스럽게도 불초에게 금산반이라는 별호를 불러 주고 있소이다. 만일 여러분들께서 문인가의 주인을 찾는 이유를 말씀하시면 불초가 그 사람을 여러분들과 대면하게 해 드릴 수가 있소이다."주운양은 교묘하게도 그 다섯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거의 다 한 번의 말로 써 대답해 준 것이었다. 글나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은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산 너머 산이라는 표현은 실로 이러한 경우에 적당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다섯 명의 노인들은 주운양 의 말을 뜨자 다시 입을 열어 저마다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말할 수가 없으니 너는 어서 주인에게 안내하기나 해라!""너는 겨우 총관에 불과한 데도 감히 그와 같은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빌어먹을 너는 감히 우리에게 그와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이냐?""당신의 말은 틀렸소. 금산 반 주운양이라고 하는 이름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못하고 또한 우리에게 겁을 줄 수도 없는 것이오. 그렇거늘 우리에게 일단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는 것이오. 당신은 설마 우리 다섯 명의 노괴물들이 무섭지도 않다는 말이오? 그것은 실로…… 실로 위 험하오……" "미, 믿을 수가 없다. 너는 총관이면서도 마치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혹시…… 혹시 너는 이미 주인을 제거하고 대신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니냐?" 주운양은 비록 아까는 그래도 다행히 일일이 그 뜻을 생각해서 대답해 줄 수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다섯 사람들의 말뜻이 아주 다양하고 난처하게 하는 것들이 많아서 일 일이 그 대답을 해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은 한꺼번에 그와 같이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말했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 다. 주운양은 한동안 얼굴이 벌겋게 되어 머뭇거리다가 실로 이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 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정신을 차리고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배들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잘 알겠소이다. 그러나 불초는 미거하여 여러분들께서 한꺼번에 말씀하시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죄송하지만 여러분께서는 한 사람씩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주운양은 일단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만일의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 미치 대책을 강구해 보기도 했다. 과연 주운양의 그러한 말은 제법 효과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멈추고 그 첫째라는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이 혼자서 입을 열어 말했다. "너는 정말로 우리를 너의 주인에게 안내해 줄 수가 있느냐?"노인의 표정은 비록 웃고 있었 으나 그것을 보고 결코 따라 웃을 수가 없다는 것을 주운양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오."이때 악채릉 등은 무의식중에 아래층을 주시하고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 그와 같은 대화의 내용을 듣고 문인 천상을 찾기 위해 은근히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만 안색이 가볍게 변하고 말았다. 기이하 게도 문인천상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던 그 두 명의 노인들의 모습 또한 주루 내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다섯명의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문인천상 등은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악채릉은 그만 의아함을 참다 못해 옆에 있는 한 명의 호위무사에게 그들의 행방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호위무사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그분께서는 조금 전에 볼일을 본다고 하고서 작은집으로 가셨소이다."작은집이라고 하 면 다름이 아니라 뒷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이 만약 소변을 보기 우해서 뒷간으로 갔다면 호위하는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구태여 슬그머니 두 명의 노 인들을 모두 대동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악채릉은 문인천상이 그와 같이 슬그머니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내심 기이함을 느꼈 으나, 기실 그녀가 남자의 뒷간으로 찾아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문인천상이 일부 러 일행을 피해서 달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잠시 기다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더 두고보기로 했다. 그 즐거운 표정의 노인은 그러한 장내의 사람들을 차례차례 하나하나 빠르게 둘러본 다음 에 다시 고개를 돌려서 주운양에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반드시 이유를 말해야만 우리를 너의 주인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하느냐? 혹시 너는 우리를 놀리려는 것이 아니냐?" 주운양은 이미 이들 다섯 명의 노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문인천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정작 그 문인천상이 다섯 명의 노인들을 보자마자 도망치듯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주운양은 그것을 보고 혹 시 문인천상이 이들과 모종의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만일 어떤 묵은 빚이 있지 않고서야 문인천상과 같은 사람이 마치 꽁지가 빠져라 하고 그들을 보자마 자 달아날 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와 문인천상과의 관계를 확실 하게 알지 못하는 한은 우선 시간을 끌며 상대의 신분이나 알아두고 상황을 보아 가며 대처 하려는 속셈이었다 제9장 괴사기문(怪事奇聞) 주운양은 원래 이곳에서는 가히 일파의 수뇌와 맞먹는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 금은 이 다섯 명의 괴상한 노인들에게 마치 무명소배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 므로 은근히 울화가 치밀어서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며 대답했다. "불초가 감히 노선배들을 놀릴 수가 있겠소? 다만 본가의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이 고 또한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아야만 불초가 여러분을 주인에게 안 내해 줄 수가 있다는 것이오."이때 다섯 명의 노인들 가운데 소심한 표정의노인이 슬그머니 나서면서 물었다. "혹시 너의 주인은 성씨가 문인(聞人)가가 아니냐?" 순간 화난 표정의 노인이 나서서 소심한 표정의 노인에게 면박을 주며 소리쳐 말했다. "다섯째! 너는 갈수록 멍청하게 변해 가는구나! 대체 문인가의 주인이 문인가가 아니라면 그럼 우리들처럼 도씨(渡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겠느냐?"소심한 표정의 노인은 그 말에 초 조해하던 표정을 더욱 소심하게 수그리고는 그래도 가만히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간 신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나는 그러니까 그 주인이 문인의 성씨에다가 이름이 천상(天翔)이라는 사람인가 하고 물 으려던 것이었소." 주운양은 그들 다섯 사람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자 은연중 심리적인 부담감이 줄어든 상태 였는데 소심한 표정의 노인의 말을 듣고는 미소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우리 장원의 주인의 이름은 틀림없이 문인천상이라는 공자가 맞소이다. 그러나 그분은 방 금 전에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대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안된 일이외다." 헌데 그때였다. 느닷없이 다섯 명의 노인들의 옆에서 웬맑고 싸늘한 소녀의 음성이 쩌렁하 게 울려퍼졌다. "흥! 그 따위 거짓말을 하지도 말아요! 당신들의 주인은 이미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하고 다 른 곳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에 나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어 째서 당신들만 보이고 그는 보이지 않는 거죠?"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다름 아닌 그 깜찍하고 아름답게 생긴 홍의소녀였다. 홍의소녀는 기실 다섯 명의 노인들이 신법을 펼쳐서 위로 올라간 뒤에 자신도 뒤따라 신법 을 펼쳐서 위로 올라왔던 것인데, 사람들은 다섯 명의 괴상한 노인들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미처 그녀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몰라 보았던 것이었다. 이 홍의소녀는 아까 이층에 있었을 때에 내려다보기에도 지극히 예쁘게 보이더니 지금 가 까이에서 바라보니 이목구비가 더욱 또렷하고 아름다운 귀여운 어린 소녀였다. 주운양은 실로 이와 같이 아름답게 생긴 소녀가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홍의소녀 의 어조에 울음이 섞여 있고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가득한 것을 보고 내심 기이하게 생 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이 어린 소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문인천상과 사랑하는 사이일 것 같지는 않 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커다란 빚이 있어서 그를 찾아왔다는 말인가?) 주운양은 우선 문인천상이 이들을 피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좀더 분명하게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정색을 하고 홍의소녀에게 물었다. "혹시 소저는 우리 주인과 어떤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그러자 홍의소녀는 즉시 두 눈에 눈물을 가득히 흘리면서 소리쳐 대꾸했다. "그래요! 나는 그와 이미 원한을 맺은 거예요. 그가 만일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나는 그 가나를 무시한 대가로 반드시 원한을 갚고야 말겠어요!"주운양은 홍의소녀가 무슨 그와 같 은 행동이니 무시했느니 혹은 원한을 갚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필시 여기에는 어떤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아주 신중한 표정을 하고 홍의소녀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이 만일 복수를 하시겠다면 그것은 불초로서는 말릴 수가 없는 노릇이오. 그러나 가 능하면 불초는 주인과 여러분을 화해시키고 싶은 것이오. 따라서 일단은 여러분들의 성함을 알아야만 하겠는데, 여러분께서는 죄송스럽지만 불초에게 성함을 가르쳐 주시겠소?" 주운양은 비록 속으로는 이 사람들과 문인천상과의 관계를 더 캐어 보고 싶었지만 눈앞의 이 다섯 명의 노인들의 성품이 괴이하여 언제 발작할지 알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홍의 소녀 역시 지나치게 흥분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감히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우 선은 이 위기를 넘기도록 하여 나중에 문인천상에게 은근히 물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미처 주운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다른 네 명의 노인들도 즉시 서로에게 질세라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비록 다른 것이야 침묵을 지키고 양보할 수가 있지만 이름을 말하는 것에 있 어서는 조금도 양보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도멸선(渡滅仙)이고 다섯째이다!" "나는 도수선(渡輸仙)이고 넷째이다!" "나는 도훼선(渡毁仙)이고 셋째이다!" "나는 도패선(渡敗仙)이고 둘째이다!" "나는 도상선(渡傷仙)이고 첫째이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를 가리켜서 도액오선(渡厄五仙)이 라고 부른다!" 다른 말에 있어서는 즐거운 표정의 노인이 먼저 말했었지만 이번에는 소심한 표정의 노인 이 재빠르게 먼저 이름을 말했기 때문에 그 순석 거꾸로 되었다. 그 소심한 표정의 노인은 다른 말은 비록 늦게 말할 수가 있어도 도저히 이름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선두를 남에게 내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원래 다소 긴장되고 굳어진 얼굴로 장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와 같은 말들을 듣게 되자 저마다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도(渡)라는 성씨는 있 을 법하겠지만, 그러나 이름에 무슨 선(仙)이니 상(傷)이니 패훼수멸(敗毁輸滅)이니 하는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기문(奇聞)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도액오선이라는 별호 에서 알 수가 있듯이 이들의 사부쯤 되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 준 모양이었다. 확실히 생각해 보면 그들의 별호나 이름은 그들의 성품이나 태도, 행동거지 등과 기묘하게도 부합되는 점이 있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굴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비슷비슷한 것이니 이들 다섯 명의 노인들은 세상에 드물게도 다섯 쌍둥이일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주운양 등은 일찍이 도액오선이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대체 이들이 어 느 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자신들이 말한 바에 의하면 즐거운 표정의 노인이 도상선(渡傷仙)이고 첫째요, 화난 표정의 노인이 둘째인 도패선(渡敗仙), 그리고 슬픈 표정의 노인이 셋째인 도훼선(渡毁仙)이며, 멍 청한 표정의 노인이 넷째인 도수선(渡輸仙)이요, 소심한 표정의 노인이 제일 막내인 도멸 선(渡滅仙)이라는 것이었다. 주운양은 비록 겉으로는 감히 내색할 수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조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는 데, 이윽고 그가 홍의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홍의소녀 역시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름이 진아라(眞阿羅)예요. 그러니 당신은 나를 진 소저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주운양은 두 눈에 교활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알고 보니 진 소저이셨구려! 만일 불초가 주인을 뵙게 디면 그 즉시 소저에게 그 소 식을 가르쳐 드리기로 약속하겠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서로간에 좋은 결론인 것 같 소. 그런데 소저께선 앞으로 어디에 묵으실 생각이시오?" 홍의소녀 진아라는 잠시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으니 아무래도 당신들은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우리 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당신의 도움 없이도 당신들의 주인을 찾아갈 수가 있을 거예요. 그것이 차라리 나을 거예요. 다만 당신들은 앞으로 그에게 우리에 대해 서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바래요. 그럼…… 우리는 이만 가겠어요!" 홍의소녀 진아라는 그야말로 성격이 냉정할 뿐만 아니라 세속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가겠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정말로 신법을 펼쳐서 훌쩍 아래층으로 뛰어내 려가 버리고 말았다. 주운양으로서는 귀찮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었던 만큼 그녀의 그러한 행동은 내심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비록 상당히 괴이하 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주었으나 정작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던 도액오선이 그 우스꽝스 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주운양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던 것이었다. 아까 그들이 이층에서 삼층으로 올라오던 신법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들의 무공은 가히 짐 작할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실로 지금 주운양을 포위해 가는 그들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빠르기 짝이 없었다. 주운양은 비록 그들이 떠난다고 해서 다소의 방심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 나름대로 경 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 도액오선이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마악 피하려고 했으나 기이하게도 이미 그의 신형은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팔과 두 다리가 이미 도패선, 도훼선, 도수선, 도멸선 등에게 각기 하나씩 잡혀 있었고, 남 은 인물인 도상선은 그의 면전에 이르러 한 수를 더하려고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배워서 점혈공부를 터득한 강호인들은 결코 이렇게 세속의 사람들이 사 용하는 끈으로 결박하거나 붙잡는 따위의 수법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주운양은 그저 자신이 팔이나 다리를 붙잡힌 것일 뿐인 것 같은데도 전혀 사지를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 을 느끼고 실로 이들의 무공이 기괴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미 사지가 붙잡혀서 전혀 공력을 사용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뒤를 이어 도상선 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굴욕감과 함께 절망감이 치밀어서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에 사방에서 도상선을 향해 덮 섯는 사람들이 있었다. "멈춰랏!" 물론 그들은 철장무적 상장풍과 화산일검 악불범, 그리고 악채릉과 주완청, 주씨 형제들을 비롯한 호위무사들이었는데, 조금 전만 해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여 다소의 마음을 놓고 있던 그들은 일순 주운양이 사로잡히는 몸이 되자 즉시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덤벼드는 것 이었다. 우선 호위무사들을 비롯하여 주운양의 자식들과 악채릉 등은 사방에서도패선 등의 사 인을 향해 병기를 뽑아들고 공격해 들어갔고, 상장풍과 악불범은 함께 도상선을 향해 짓쳐 들어 갔다. 뭐니뭐니해도 역시 지금의 상황에서 일행 가운데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악불범이었으 므로 일단 그의 공격이 개시되자 장내에 자색의 검기가 물결처럼 일어나며 매화무늬를 닮 은 강기( 氣)가 파도처럼 도상선의 면전으로 덮쳐드는 것 같았다. 원래 도상선은 주운양의 지척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가 주운양을 제압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악불범의 공격이 급격하게 쇄도해 들었기 때문에 주 운양을 제압하는 데 손을 쓰게 되면 도리어 악불범에게 당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주운양 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즉, 주운양을 직접 구하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상선을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주운양에게 손을 쓸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주운양 을 구하는 결과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외라는 것이 있었다. 당연히 손을 거두고 악불범의 공격에 대응할 것으로 생각했던 도상선이 의외에도 한 손으로는 여전히 주운양의 전신대혈 을 제압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악불범의 검세를 막아 갔던 것이었다. 이 악불범은 이미 최절정의 경지에까지 검술을 연마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장검은 이 미 신병이기나 다름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인데, 설마하니 그것과 맨손으로 부딪치려는 도상 선의 손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는 말인가?악불범의 자욱한 검세가 도상선의 전신을 에워싸는 순간에 주위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필시 도상선의 전신이 그 막강한 검기에 의해 서너 토막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실 결과는 달랐다. 자색의 무지개 같은 검기가 자신의 몸을 에워싸는 순간에 도 상선의 좌수가 기이하게 호선을 그리면서 악불범의 신형을 향해 내뻗어졌는데, 그 순간에 쾅, 하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자욱한 검세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악불범의 신형이 뒤로 쿵 쿵쿵 서너 걸음이나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장법으로 예리한 검기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도상선이 그저 한 손으 로 악불범과 같은 최절정의 고수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해서 낯빛 이 변했다. 바로 그 순간에또 하나의 신형이 마치 튕겨지듯이 뒤로 물러나와 바닥에 뒹굴었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상장풍이었다. 이 상장풍은 횡련공을 연마한 몸에도 철장공이라는 특수한 장법을 터득하여 그 위력이 막강 하였는데, 정작 정통으로 도상선의 어깨를 가격하였음에도 도리어 스스로 내상을 입고 반 탄력에 의해 밖으로 튕겨져 나갔던 것이었다. 실로 그와 같은 인물들이 그러한 꼴을 당했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 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악채릉을 위시로 하여 주씨 남매들은 뒤로 튕겨져 나와 간신히 바 닥에 구르는 것을 면하였고, 그들과 함께 공격했던 많은 호위무사들은 대부분이 비명을 내 지르며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 가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뒤의 도액오선의 행동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공격이 실패하여 패 퇴한 다음에 그들은 즉시 주운양을 그 자리에 세워 놓고 아까의 자리로 신법을 펼쳐서 돌아 갔는데, 일행을 향해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신법을 펼쳐서 홍의소녀 진아 라가 내려간 쪽으로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일 너희들이 우리들을 우습 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도액오선이 느닷없이 주운양 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일까? …… 도액오선이 마치 귀신처럼 사라진 이후에 악불범은 이윽고 창백해진 안색으로 검은 피를 한 모금 토했고, 주씨 남매들은 즉시 주운양에게 달려가서 그가 비록 전신의 대혈이 제압되어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전신에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주씨 남매는 내심 크게 안도하는 표정들이었지만, 주운양이 그와 같이 완벽하게 제압되었다는 사실에 왠지 은근히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알고는 악불범은 두어 번 내식을 조절하여 내상을 진정시킨 이후에 주운양의 앞에 다가가서 혈도를 풀어 주려고 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이 혈도는 내가 풀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도액오선이 악불범보다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도상선 이 제압한 점혈수법을 악불범이 해혈할 수가 없다고 해도 그다지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주씨 남매는 악불범이 해혈할 수가 없다고 말하자 더욱 안색이 변해서 초조해하는 표정들이 었는데, 그것을 보고 악채릉이 부친을 향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쩌죠?" 악불범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보아하니 그들이 제압한 혈도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 니 우리는 우선 이곳을 떠나서 마차를 타고 가면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악불범의 말은 가장 상황에 적합한 대책이라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은 누가 뭐라고 지시하지 안하도 스스로 알아서 자리를 파하고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때 생각보다 심한 부상을 입지 않은 상장풍도 몸을 일으키게 되어서 수하들을 지시하기 시작했고, 주씨 형제들이 주운양을 안고 내려가는 것을 선두로 하여 일행은 빠르게 썰물처 럼 주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악불범이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다소 뒤에 처져서 내 려가고 있었던 악채릉은 문득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낯익은 복장의 사람 하나가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만 안색이 변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에 뒷간에 가겠다고 말하고서 사라졌던 문인천상이었던 것이었다. 실로 방금 전의 그 난리가 이를 테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면 느닷 없이 태연하게 다시 나타난 그의 행동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어디로 갔는지 문인천상의 주위를 바싹 따르던 엽노와 화노도 함참을 찾아봐도 보 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악채릉은그만 의문을 참을 길이 없어서 그의 옆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 어 물었다. "아니, 대체 당신은 그 동안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죠? 그리고 당신의 그 두 명의 늙은 하인들은 둘 다 어디에 있는 거예요?"문인천상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음 악 낭자로군.` 하고는 미소하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이미 말했다시피 뒷간에 다녀온 것이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나를 찾았었다 고 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엽노와 화노는 내가 잠시 일이 있어 서 다른 곳으로 보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악채릉은 그가 너무나도 쉽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실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그의 얼 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니, 그럼 당신은 그 사람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그 질문에 다소 걸 리는 것이 있는 듯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말하자면 나는 그들과는 솔직히 구면이오. 하지만 그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었기 때 문에 겸사겸사 뒷간으로 갔었던 것이오. 나는 내가 자리를 피하면 그들이 그냥 물러갈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그와 같이 난리가 나게 될 줄은 몰랐소." 악채릉은 그가 그와 같이 솔직하게 말하자 더욱 속으로 의심이 생겨서 생각하다가 다시 질 문을 던졌다. "당신은 혹시 그들 때문에 엽노와 화노를 보냈던 것은 아닌가요? 그리고 도대체 당신과 그 귀신같은 노인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죠?"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엽노와 화노를 보냈던 것은 확실히 그들과 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가 있소.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살다 보면 여러 그지의 비밀스러운 것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오. 나는 아 직 낭자에 관해서 거의 묻지 않았는데 내가 실로 그러한 내용까지 말해 줘야 하겠소? 내가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 낭자의 일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물론 관계가 있어요. 만일 앞으로 그들이 우리의 앞에 나타나서 당신을 노리게 된다면 내 가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내가 장담하건대 그들은 다시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염려하는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낭자는 그들에 관해서 알지 않아도 될 것이오." (……!) 문인천상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악채릉은 일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능력으로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문인천상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면 구태여 문인천상에게서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라고 강요할 명분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먼곳을 바라보다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 원래 이러한 사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도 주씨 형제 등은 주운양의 지시를 받아 서 문인천상 등을 태워 가지고 갈 마차들을 여러 대나 주루의 근처에 준비시켜 놓고 있었 다. 그러던 것이 이제 주운양이 혈도가 제압되어 한 마디의 마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그야 말로 시기적절하게 사용하게 되었는데, 일행은 여러 대의 마차와 말 등을 타고 잠시 후에 빠르게 주루를 출발하여 난주성 내의 대로를 질주하여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난주성의 서북쪽의 성 밖으로 계속해서 달리다 보면 이윽고 거대한 사막지대와 접하게 된 다. 일행이 목표로 하는 돈황 일대와 대막의 천화궁 무리들이 있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는 그러한 사막지대를 지나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매우 고된 여정이었기 때 문에 처음에는 다소간의 취기가 가시지 않아서 기분에 들떠 있던 사람들도 점차로 정신을 차리고 앞쪽에서 밀려드는 모래바람을 덜 맞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말고삐를 바싹 쥐게 되었다. 문인천상은 악채릉과 단둘이서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특수하게 개조된 마차의 안에 타고 가 게 되었는데, 아마도 주운양이 있는 마차에는 대부분의 중심인물들, 그러니까 악불범을 위 시로 하여 상장풍과 주씨 남매 등이 모조리 타고서 주운양을 보호하고 장차의 앞일을 논의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기실 문인천상도 신분상으로는 앞으로의 일에 관한 토론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것이었으 나, 원래가 그 자신이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앞으로의 일은 그들 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악채릉과 함께 다른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문인천상이 속아서 탔었던 마차는 비록 호화로운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기능을 위주로 해서 급히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구조나 장식들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고, 혹은 조잡한 느낌을 주거나 삭막해 보이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밖에는 지금 메마른 모래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 오기 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이 마차의 내부에는 그러한 모래바람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러나 삭막한 느낌은 비슷하여 마치 마차의 내부 전체가 모래먼지로 서걱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인천상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푹신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생활하던 사람이었는데, 실로 그 러한 곳에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기실 더욱 불편한 것은 냉랭하게 마 음을 도사려 먹고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여자와 함께 침묵을 유지하고 앉아 있는 일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 악채릉은 비록 내심으로는 크게 문인천상에게 화가 나 있으면서도 자신의 임 무상 어쩔 수가 없이 그의 옆에 목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문인 천상의 옆에 엽노와 화노도 없는 상황이고 하니 그녀가 제아무리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인 것이었다. 제10장 무학(武學)의 경지(境地) 문인천상은 한참 동안 마차의 휘장에 와서 부딪치는 스산한 모래바람의 소리를 듣고 있다 가 이윽고 계속해서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녀에게 입을 열어 말을 걸었다. "악 낭자! 나는 전에 당금의 강호상황에 대해서 낭자에게 듣다가 말았던 것 같은데, 괜찮다 면 지금 그 얘기를 마저 해주지 않겠소?"악채릉은 문인천상과 얼굴을 대하지 않은 채로 허 공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이내 그를 주시하며 되물었다. "혹시 당신은 나에게 또다시 그와 같은 장난을 치려고 하는 것인가요?"악채릉의 말에는 가 시가 돋혀 있는 것 같았으나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도 그저 담담히 미소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낭자도 알다시피 당시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와 같은 편법을 썼던 것이오. 물론 낭자가 그 일로 기분이 상했었다면 그것은 미안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기 실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이 그와 같은 얘기를 나누기에 적합할 만큼 다소 무료한 시간이 아니겠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강호인이라면 의당 강호의 사 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즐긴다고 하였으니 나도 오늘은 낭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번 쯤 그와 같은 강호인들의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오."(……!) 악채릉은 내심으로 다소 화가 나서 안색을 차갑게 굳히고 있었던 것이었으나 문득 문인천 상의 그와 같은 얘기를 듣게 되자 웬일인지 안색이 풀어지고 실소가 절로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 자신이 문인천상의 앞에서 그와 같은 냉랭한 표정 을 하고 싶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악채릉은 마치 자신의 심리적인 동요를 감추기라도 하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쉽게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낯짝 또한 매우 두 꺼운 편이로군요. 여자들은 그렇게 두꺼운 사람들에게 원래 맥을 못 추는 법이지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주겠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저는 이미 당신에게 승복하고 말았으니 감히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 지요." "……!" 문인천상이 조용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악채릉은 잠시 숨을 돌린 다음에 눈빛을 빛내며 본 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미 말했었듯이 당금의 강호상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五大世家)를 제외하고도 그들보다 오히려 더욱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신주팔패라는 무리들이 있어요. 그들은 말하자면 중원과 서역, 대설산, 동영, 막북, 낭황, 북해 등지에서 거대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 는 신비한 세력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실상 그 신주팔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터 득하고 있는 무예들은 우리 구파일방 등의 무학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이 사실이예요." 문인천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로 인해서 당금의 구파일방의 세력이 퇴색하기 시작하고 강호무림의 판도가 변화되기 시작하는구려. 하지만 만일 그와 같은 가공할 세력들이 그렇게나 많이 존재하고 있다면 저마다 강호를 제패하려고 야망에 부풀어 있을 것인데 어째서 당금의 무림에는 마 치 그들의 존재조차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한 것이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그들 여덟 개의세력들이 서로 기이하게 정족의 균형을 이루면서 자신들의 구역 내에서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죠. 서역의 일월신교가 천산 일대에서만 활동을 하고, 또한 동영의 검총이 중원을 침범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그러한 그들간에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규율에 의해서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예요. 저는 아직 그 상세한 내막을 잘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만든 중심적인 힘은 바로 천륭무가(天隆武家)에 있다고 해 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바 중원의 거대한따은 지대가 평탄하고 기후가 온난하며 토질이 비록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하니 누구라도 그곳을 취하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며, 의당 그곳을 점유하고 있는 세력은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 게다가 보아하니 신주팔패의 세력 들 가운데 가장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고……"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조하며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천륭무가의 당대의 주인인 백무검(白武劍)은 신주팔패의 수뇌들 이 서로간의 힘을 겨루는 회합에서 단연 우승을 차지하여 다른 일곱 세력의 주인들이 승 복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고 하죠. 당금에 이르러 천륭무가는 날이 갈수록 그 힘이 강대해져 가고 있어서 앞으로도 다른 칠 패의 무리들이 감히 넘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들 해 요."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러나 중원무림은 원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설마하 니 그들이 천륭무가에게 그 자리를 순순히 내주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물론 구파일방의 사람들도 성인이 아닌 바에야 자신들의 세력이 침식을 당하는데 좋아할 리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원래 무공으로는 결코 천륭무가를 당할 수가 없는 데다가 천륭무 가 역시 과거에 명성을 누렸던 구파일방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직접적인 강호 활 동을 자제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는 것이예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구파일방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약해져 가고 명성도 퇴색되어 가자 마침내는 천륭무 가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예요."문인천상은 잠시 묵묵히 생각하다가 다 시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천륭무가는 가장 효과적으로 중원무림을 제패한 것이 아니겠소? 그것은 말 하자면 가장 교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악채릉이 말을 잘랐다. "그들에게 교활하다는 말은 옳지 않아요. 왜냐하면 만일 천륭무가에서 무림의 공도(公道)를 무시하거나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었다면 구파일방에서는 비록 힘이 부족하다고 해도 함께 연합하여 그들을 타도하려고 했었을 것이예요. 그러나 그들의 행사가 매우 정의롭고 또한 가히 중원을 대표할 만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구파일방에서는 스스로 그들의 수하 에 들어가게 된 것이예요." 문인천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수하에 기꺼이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파일방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오, 아니면 당신 네들 화산파 등의 일부를 두고 하는 말이오?"악채릉은 일순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인 것 같 아서 얼굴을 다소 붉히며 대답했다. "물론 구파일방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예요. 예를 들어 소림사와 무당파는 천륭무가에 동조하지도 않고 그저 요즈음은 거의 봉문(封門)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강호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그리고…… 우리 화산파에서 비록 그들의 수하에 들어갔다고 는 하나 여전히 그들에게서 일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이예요." 문인천상은 다소 탄식하며 말했다. "아마도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라고 해서 다 같은 지위와 명성을 누렸던 것은 아니기 때문 에 소림과 무당파를 제외한 다른 문파들은 차라리 이번의 변화를 달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러나 기실 그 힘이 지나치게 강대하면 무엇이든 속이지 못할 것이 없는 만큼, 나는 비록 당금의 천륭무가에서 정의를 행하고 평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지만 혹시나 하는 우려를 하게 되는 것이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며 자신있게 말을 받았다. "당신은 결코 그러한 우려를 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당금의 무림은 가장 정의로운 힘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것이며…… 실로 그러한 것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공인된 것 이기 때문이죠. 저는 앞으로 중원무림이 크게 발전하고 창성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어요." 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러한 것이 개인의 행복과 어떤 연관이라도 있다는 말이오?"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중원에 정의를 행하는 가장 굳건하고 위대한 힘이 탄생되었다면 그것으로 일반 사람 들은 안심하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것은 이를 테면 과거 전설에 나오는 성인들의 정치와도 같은 것이죠. 물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다소간의 희생이 따를 수도 있지만, 결과에 비하면 그러한 것들은 아무것 도 아니라고 할 수가 있어요."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대체 신주팔패의 무공은 어떤 것이길래 과거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구파일방조차도 전 혀 맥을 추지 못한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무공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다소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고작 공동파의 무공을 조금 아는 정도이니 신주팔패의 무공에 대해서 전혀 짐작이 가지 않겠군요. 좋아요! 제가 그 얘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악채릉은 이미 기분이 상당히 좋아져서 언제 토라져 있었냐는 듯이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내면의 어떤 신념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기대하겠소!" 문인천상이 짐짓 포권하며 말하자 악채릉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별로 기대할 것도 없으니 저는 간단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어요. 일반적으로 강호의 일류고수라고 하면 일류급에 해당되는 내공과 절기들을 십 성 이상 성취하고 있는 사람들 을 가리키는 것이예요. 그들의 무공 수법은 가히 정묘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죠."문인천상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듣자니 일류고수는 공력이 일 갑자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고 하던데 그럼 그 얘기는 틀린 것이오?" 악채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류급의 절기들을 십 성 이상 성취하기 위해서는 대략 일 갑자의 내공이 필요한 법이니 그 얘기도 실은 틀린 것은 아니죠. 기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공력을 높이는 방법이 다 각도로 연구되어 공력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원래 그 일 갑자라는 말 자체가 육십 년간을 쉬지 않고 연마한 공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겨우 일 갑자 의 공력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만 해도 그리 많지 않았죠." 악채릉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더듬는 사이에 문인천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절정고수나 최절정고수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더러 있기는 했지만 그 수준이 매우 낮아서 당시에는 일류고수와 서로 혼동하여 함 께 부리기도 했죠. 그러나 점차로 무학이 발달하고 그 수준이 향상되어 당금에 이르자 절 정고수와 최절정고수의 정의도 달라지게 된 것이예요. 절정고수는 말하자면 절정급에 해당 되는 내공과 절기들을 십 성 이상 성취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최절정고수는 역시 최 절정의 신공절예(神功絶藝)들을 십이성 성취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죠."문인천상은 다소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하며 물었다. "그렇게 무학이 점차로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면 그럼 과거에 명성을 떨치던 소림사와 무당 파의 무공들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이삼류의 무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오?" 악채릉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비록 무학을 연성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고수들도 늘어나게 되어 수준 이 향상되었지만, 근복적으로 무학의 이치라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에 정통적이었던 것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역시 정통적인 무학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죠. 다 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무학의 편법이 많이 생겨나고 보다 쉽게 연성할 수 있는 구결들이 많이 발달하게 되어 과거부터 지나치게 정통적인 길을 고집하던 소림사 등의 무학은 점차 로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들은 그만큼 어렵고 시간도 또한 엄 청나게 많이 소모되는 것들이니까요." 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신주팔패와 같은 무리들이 나타난 것은 무학 방면에 있어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오?" 악채릉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가 없어요. 비록 그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과거에도 역시 그와 같 은 수준의 무학을 터득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는 것이니, 다소 무림고수 의 숫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무학상의 발전이 있었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 죠."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 신주팔패의 사람들이 연성했다는 무공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들이오?" 악채릉은 웃으며 생각을 해보다가 대답했다. "속된 말로 말하기를 일류고수는 일 갑자의 공력을, 그리고 절정고수는 이 갑자의 공력을 쌓은 사람이며, 최절정고수는 삼 갑자의 공력을 쌓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들 하죠. 그 얘기들은 기실 거의 틀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일리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다만 그 정의에 있어서 다소간의 착오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느닷 없이 최절정고수의 한계를 벗어나는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강호에서 는 대체 그 경지를 뭐라고 부를까 하고 한때 고심했었죠."문인천상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래 뭐라고 부르게 되었소?" 악채릉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간단해요. 결국 최절정의 경지마저 초월하는 경지, 즉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들이니 초절정의 고수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죠. 그런데 유독 이 초절정의 경지에 있어서 는 다른 경지와는 달리 내공의 성취 조건이 보다 명확하게 정해지게 되었어요." 문인천상은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악채릉은 담담히 미소하며 대답했다. "이른 바 초절정의 경지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일단 공력이 육 갑자의 경지에 이르러서 대 주천(大周天)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타동하고 마음과 진기가 서로 교통하는 심검(心劍)이 라고 하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초절 정의 고수라면 그 공력이 최소한 육 갑자 이상은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기실 공력은 육 갑자라도 그 능력은 십 갑자에 달한다고 해요." 문인천상은 일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공력이 육 갑자에 달한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 능력은 게다가 십 갑자에 달한 다고 하니 정말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겠구려!"악채릉은 공감을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공력이 육 갑자이지만 능력은 십 갑자에 달한다고 하는 것은 물론 일반 사람들의 척도에 의해 계산된 것이지만, 아무튼 마음과 진기가 서로 교통한다고 하는 심검의 경지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것이예요. 그러나 물론 공력이 육 갑 자에 이르렀다고 해도 무조건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죠. 아니 오히 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초절정의 문턱에서 생사현관을 돌파하 지 못하고 주화입마를 당하거나 혹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하니 초절정의 고수가 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이죠. 저도 아직 그러한 경지는 쉽게 상상할 수가 없는 실정이예 요." 이 악채릉은 기실 화산파의 장문인의 딸인 동시에 무산 신녀문의 진전을 이었다고 할 수가 있으니 어려서부터 듣고 알게 된 그녀의 이러한 지식은 비교적 정확한 것일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바로 신주팔패의 사람들의 무공이 바로 그 초절정의 경지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오?" 악채릉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래요. 물론 그 세력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핵심세 력들의 대부분이 그러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하니 감히 감히 기존의 세력들이 당해낼 수가 있겠어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호상에서 최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겨우 삼 갑자의 내공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들은 십 갑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한 마리의 호랑이와 한 마리의 토끼가 싸우는 격이 되겠군."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금에 있어서 신주팔패 가운데 중원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곳은 천륭무가와 황산의 성 수곡(聖手谷), 그 두 곳뿐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기실성수곡은 하나의 세력이라기보 다는 은자의 계곡가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강호상에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만일 중 원에 천륭무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방의 육 패가 한꺼번에 그 엄청난 무예로 중원을 노리게 될 것이므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되겠죠. 제가 천륭무가가 중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말은 그러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문인천상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구파일방이 천륭무가를 인정하게 된 배경에도 그러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오."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천하가 평화롭게 되면 나 역시 기쁘게 될 것인데 어찌 마음에 들지 않아 하겠소? 그런데 …… 무학의 경지에는 그 초절정의 경지 이외에는 없는 것이오?"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초절정의 경지 이후의 경지라면 아마도 선인(仙人)이 되는 초인(超人)의 경지가 있을 거 예요. 그러나 그 이후의 경지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듣지 못해서 잘 알지 못해요. 사실 천하 게 제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와 같은 초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무학을 연성한 사람이 대체 얼 마나 있겠어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는 것이니 제아무리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마도 그러한 경지에까지 오른다고 하는 것은 전설에만 나오는 얘기일 것이오."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인천상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원했던 대강의 얘기가 끝났으니 당신은 지금 만족하시나요? 구파일방과 오 대세가의 얘기는 당신도 이미 들은 적이 있을 것이고, 나 역시 특별하게 해줄 말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략하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나에게 일찍부터 한 가지의 의문이 있었는데, 당신을 비롯하여 당신의 선친은 그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무공을 높일 수가 있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죠? 일반적으로 돈이라는 것은 귀신이라도 부릴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겉으로는 어렵게 보이지만 정말로 무공을 배우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문인천상은 그 질문에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낭자의 그와 같은 의문은 실로 당연한 것이오. 그러나 원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환 경에 처하게 되면 보다 편해지고 싶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비록 알고는 있어도 정 작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오."악채릉은 눈빛을 빛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무학을 배우는 것은 원래가 고통을 자초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당신의 선친께서는 비록 마음은 있었으나 미처 그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했었다는 말이군요? 물론 무공도 배 우고 장사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도 없었을 것이고요? 그러나 당신은 어떻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천천히 그 문제를 생각해 볼 작정 이라오. 낭자가 원한다면……" 악채릉이 말을 자르며 물었다. "내가 원한다면 당신은 무공을 배울 생각이라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한숨을 내쉬며 다소 기이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기가 어려운 것이오. 만일 낭자가 특별히 나를 위해 어떤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 나는 기꺼이 배울 용의가 있소."악채릉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원래 강호상에서는 자신의 제자가 아니면 절학을 전수하지도 않는 편인데 당신은 감히 저 에게 성의를 봐서 배워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군요. 그러나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 또한 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무공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을 것이므로 일단 한 가지 제가 가르쳐 보기로 하겠어요. 당신은 지금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요?"문인천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공을 배우는 데에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마음이오?"악채릉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 무공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의 자질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 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성취 속도가 좌우된다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보아하니 당신은 지금 마음이 아주 차분하여 무공을 배우기에 적합한 상태인 것 같으니 제가 지금 즉시 한 가지를 가르쳐 보도록 하겠어요." 말과 함께 악채릉은 느닷없이 공력을 끌어올려 우장을 앞으로 천천히 내밀더니 급속하게 장영(掌影)을 여러 개나 일으키며 빠른 변환(變幻)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백색의 인어가 거친 격랑의 물 속에서 눈부신 재주를 부리듯이 다소 느린 듯하면서 도 빠르게 전개되는 악채릉의 우장의 손놀림은 처음에는 하나의 장영을 일으키더니 이어 그 러한 장영이 하나씩 늘어나서 모두 여섯 개의 장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윽고 시간이 갈수 록 더욱 더 그러한 장영이 그녀의 손바닥 사방에 달려 있는 수레바퀴와도 같이 점차로 뚜 렷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장영이 뚜렷해지기 시작함에 따라서 그 장영에서 뻗어나오는 기운 의 세력 하에 있는 공간이 넓어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앞에 앉아 있는 문인천상 의 얼굴뿐만 아니라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공력을 전개하지 않고 다만 초식만 전개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했다. "……!" 문인천상은 한참 동안 그 여섯 개의 장영이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이 윽고 악채릉이 짧게 호흡을 토하고 손을 거두자 자못 흥미롭다는 듯이 입을 열어 물었다. "매우 아름다운 초식이구려. 헌데 그것은 화산파의 절학이오, 아니면 신녀문의 절학이오?" 악채릉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비록 화산파와 신녀문의 양대절학들을 배우기는 했지만 신녀문의 절학은 감히 타인 에게 전수할 수가 없는 것이고 화산파의 절학 역시 문하의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전수 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문인천상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절학은 어느 문파의 것이오?"악채릉은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문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화산파의 무공이예요. 다만 옘은 절학에 해당되는 것 이 아니라 강호상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무공으로 육합장(六合掌)이라고 하는 거예 요. 그러나 다만 강호에 알려져 있는 것은 비교적 껍데기에 불과한 쓸모없는 부분이고 지금 제가 펼친 것은 알멩이가 깃들어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문인천상은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화산파의 무공이기는 하지만 절학은 아니고 게다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 져 있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도 되는 것이라는 말이군요." 악채릉은 말을 받아서 즉시 보충해 주었다. "비록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기는 하나 내가 지금 가르쳐 주려는 것은 아직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심오한 부분이기 때문에 결코 누구에게나 함부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예요." 악채릉은 혹시 문인천상이 자신이 전수하려는 육합장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까 봐 굳이 그와 같이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기실 어떤 무공이건간에 배우는 사람이 흥미를 가 지고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서 진전이 크게 차이를 보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실은 강호하류의 무림인들이 육합장이라는 것을 펼치는 것들을 더러 보기는 했는데, 실로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보지 못했었소. 그들이 펼치는 것은 다만 손바닥을 맹렬하게 전후좌우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는 것이었는데, 지금 낭자가 펼치는 것에는 여섯 개의 손그림자가 나타나다니 실로 기이한 일이오." 악채릉은 그가 솔직하게 대답해 주자 미소하며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원래 이 육합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화산파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정통적인 절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예요.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과거에는 화산파 하면 우선 육합장이 떠오 를 정도였으니 아마도 그 위치를 짐작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미 말했다시피 이 무공 역시 심오한 것은 설사 소림사의 어떤 절기들보다 못하지 않은 것인데, 다만 너무나 도 정통적인 무공이라서 연성하기가 어려울 뿐만 안라 그 위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 해서는 많은 노력과 공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금에 이르러서는 우리 화산파에서 거의 익히지 않는 것이 되었죠. 결코 그 수준이 낮기 때문은 아니예요."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 다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과거의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치게 고전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이 과거의 것을 다시 한 번 고찰하여 그 심오한 부분을 현재에 응용하게 된다면 이 는 그야말로 옛것을 더욱 새롭게 한다는 말과도 통하는 것이 되는 셈이로군." 악채릉은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의 마음에는 거의 욕심이 없어서 그야말로 무공을 터득하는 데에는 가장 적 합한 상태인 듯하군요. 그와 같은 말을 담담하게 할 수가 있다는 자체가 이미 욕심이 거의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이 육합장은 원래가 특히 마음을 맑게 가지고 시작해야 하는 일부의 무공들 가운데의 하나예요." 말과 함께 악채릉은 이어 육합장의 구결들을 문인천상에게 구술로써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이 육합장에는 원래부터 장력을 운용하기 위한 특별히 다른 내공심법이 딸려 있다. 악채릉 은 그 내공심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고 나서 해설까지 꼼꼼하게 가르쳐 준 다음에 이 윽고 본격적인 육합장의 초식 해설에 들어갔다. 기실 이 육합장의 육합(六合)이라고 하는 것은 전후좌우 사방과 천지 상하를 가리키는 것 으로, 무학의 요결에 있어서는 한 순간에 그 여섯 개의 방위(方位)를 충족시키고 또한 그 방 위의 순서에 따라서 변화해 간다는 것인데, 실로 그 이치는 얼핏 간단한 듯 보여도 기실은 아주 난해하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하나의 손그림자 속에는 여섯 개의 방위로 변화하는 흐름이 있고 그 변화하는 손그림자가 모두 여섯 개가 모여서 더욱 거대한 육합의 변환을 형성하며 그것들은 작은 하나의 손그림 자 속에서부터 거대한 방위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에 변화해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치는 마치 주역에 나오는 팔괘나 육십사괘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과 흡사하여 설 령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정작 그것을 손으로 펼쳐내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만일 공력이 부족하게 되면 비록 자질이 훌륭하다고 해도 펼칠 수가 없는 것이며, 혹시 그러한 경고를 어기고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장법을 펼치려고 한다면 특수한 내공심법이 흐트러지 게 되어 주화입마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가고 있었고 모래바람은 역시 계속해서 불어 오고 있었지만,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현실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 문에 자칫 심한 권태감에 젖게 되기가 쉬운 것이었는데, 이제 악채릉이 무공을 가르치고 문인천상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것을 듣고 있으니 그러한 행동은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적 절하고 효과있는 일인 것 같았다. "아마 당신이 비록 지금 그러한 모든 변화를 이해할 수가 있다고 해도 공력이 부족하기 때 문에 정작 시원하게 펼쳐내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그러나 실로 당신이 이러한 무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것은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일 것이예요."오랫동안 초식의 운용을 설명한 후에 그와 같은 말로 악채릉이 끝을 맺자 문인천상은 문득 웃으며 입을 열어 물었다. "낭자는 혹시 지금 이미 그 장법에 통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악채릉은 그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실로 이와 같은 무학은 그 근본이 우주의 질서에 대해서 착안한 것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고 해도 갈수록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비단 저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의 아버님조차 아직 이 장법을 완벽하게 터득했다고 말할 수 가 없는 것이예요."문인천상은 물었다. "그렇다면 이 무학은 바로 초절정의 무학이라는 말이오?"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실 이 육합장은 강호에서 가장 하찮은 무학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 로는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어서 그야말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야 마음의 무공으로 그것을 모두 시전해 낼 수가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이른 바 강호상에서 가장 정통적인 무 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가 이와 비슷하게 초절정의 무학들인 셈이예요. 그러나 기실 그것을 터득하기가 실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이 어려워서 구파일방에서는 설령 무학이 있 다고 해도 신주팔패의 무리들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죠."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신주팔패의 무학들은 이것들보다 터득하기가 쉬운 것이라는 말이오?"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어려운 것이겠지만, 그들은 각기 나름 대로 그 험난한 벽을 넘는 방법을 마련해 놓은 것이죠. 그들의 무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따 라서 제각기 특이한 자질을 갖추고 특이한 경로를 거쳐야 하는 것인데, 우리들 평범한 사람 들로서는 역시 그와 같은 길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만일 할 수가 있었다면 모두가 그 신주팔패의 무학들을 배우려고 했었을 것이예요." 문인천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만약 어떤 사람이 구팔일방의 초절정의 무학을 완전히 터득하게 된다면 그들의 무학 을 누를 수가 있겠소?" 악채릉은 눈빛을 빛내며 대답했다. "공력의 차이가 문제가 되겠지만 만약 공력의 수준이 비슷하다면 우리의 이 정통적인 절학 은 오히려 그들의 무학을 누를 수가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그들의 무학은 편법을 사용하 여 터득한 것이기 때문에 단점을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제11장 전대(前代)의 비사(秘事) 그때 문득 마차의 한쪽 휘장이 들리면서 뿌연 모래먼지와 함께 한 사람의 둥글둥글한 얼 굴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문인천상과 악채릉이 다소 놀라서 바라보니 그는 다름 아닌 주운양이었다. 아마도 밖에서 계속해서 불어 오는 모래바람과 휘장이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마차가 삐걱 이며 움직이는 소리 등으로 악채릉의 청각이 다소 마비된 상태였던 데다가 문인천상에게 지 나칠 만큼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운양이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미처 눈 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인천상 등이 다소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주운양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 아 주시한 다음에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 두 사람이 정답게 얘기를 나누며 잘 지내고 있군 그래. 조카, 그래 여행을 하는 데 불 편한 점은 없었는가?" 문인천상은 그제서야 이 주운양이 얼마 전에 전신의 혈도가 제압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불편한 점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의숙께서는 이제 몸이 괜찮아지셨습니까?" 주운양은 문인천상이 자신이 제압당했던 일을 꺼내자 다소 얼굴을 붉히면서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바로 조금 전에야 비로소 혈도가 풀렸다네. 그 다섯 명의 노괴물들이 얼마나 능력이 무섭던지…… 비록 다시는 그들과 상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그러나 나의 몸은 믿을 수 없게도 아주 멀쩡하다네.""그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문인천상은 포권하며 짐짓 말하자 주운양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이 끄덕이며 답례하고는 다시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염려해 주었다니 고마운 일이네. 그런데……대체 자네는 그들과 무슨 관 계가 있는 것인가?"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일전에 그들과 남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복잡하고도 미묘한 인연을 맺게 되었었는데, 당시에도 몰래 자리를 피했었지만 저는 도저히 그 얘기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일 잠시 시간이 더 흐르게 되면 그때는 의숙께 그 얘기를 해드릴 수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 다." 주운양은 그 얘기를 듣다가 다소 실망하는 눈빛이었으나 눈빛을 굴리다가 체념한 듯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말하기가 난처하다면 내가 감히 강제로물어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젊어서 한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와 같은 일을 가지고 오래도록 감추 어두고서 혼자서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이네. 원래가 고민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 어야 줄어든다고 하지 않던가?" 문인천상은 주운양이 나름대로 상상하여 두루뭉실하게 상황을 뭉뚱그려서 말하는 것을 보 고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의숙께서는 어째서 거기에 그러고 서 계신 것입니까? 기왕 이면 안으로 들어오셔서 저희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운양은 지금 다만 둥글둥글한 머리만을 마차 안으로 내밀은 상태였는데 문인천상의 말 을 듣자 즉시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나도 실은 그러고 싶지만 원래 내가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자네들에게 잠시 후면 숙 박할 곳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었네. 나는 비단 자네들이 오붓하게 얘기 를 나누는 자리에 끼이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잔와 나의 대 화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세." 말이 끝나자 주운양은 아까 나타났을 때처럼 머리를 느닷없이 움직여서 휘장 밖으로 사라 져 버렸다. 그것은 마치 호방덩어리 하나가 나타났다가 불시에 사라지는 것과도 같아서 실 로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켰지만 지금 마차의 내부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 었다. 주운양이 사라지는 그 짧은 순간에 휘장의 틈새로 밖의 날이 이미 상당히 저물어서 불그 스레한 석양이 사위에 깔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곰곰히 앞일을 생각했다. 그 러고 보니 이 마차 안에도 어느새 희미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주운양은 너무나도 멀쩡하게 회복되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 고, 그러한 주운양의 움직임은 향후의 상황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마차에서 주운양이 사라져 버린 이후에 잠시 마차의 내부에는 침묵이 깃들기 시작하고 있 었는데, 문인천상은 잠시 후에 비로소 상념에서 벗어나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악채릉 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낭자가 나에게 그와 같은 심오한 무학을 가르쳐 주었으니 나는 무엇으로 그 고마운 일에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악채릉은 다소 안색이 굳어져 있다가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그 육합장은 당신이 연마한 낙안권에 비해 더욱 심오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예요. 낙안 권은 비록 특이한 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정통적인 심오한 이치가 부족하다고 할 수 가 있지요. 만일 당신이 나중에 공력을 더욱 높이 쌓고 그 육합장을 익숙하게 전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면 실로 그 장법 하나로도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게 될 거예요. 하지 만…… 기실 착안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신이 나중에라도 돈의 힘으로 무공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무공은 얼마든지 얻을 수가 있게 될 거예요. 하물며 저는 목적이 있어서 전수한 것일 뿐인데 은혜라고까지 말할 수가 있나요?"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그렇지는 않소. 최소한 낭자는 나에게 굳이 그와 같은 무공을 전수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굳이 심력을 소모해 가면서도 나에게 그와 같은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나를 향한 착 한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오. 그러니 주저 말고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 만 말해 보시오."악채릉은 문인천상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금세 안색을 발그레하니 붉히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지금은 별로 원하는 것이 생각나지 않으니 음…… 나중에 생각나면 한 가지 부탁을 꼭 들어 주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고 또한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한 가지의 부탁만큼은 내가 필히 들어드리기로 하겠소."(……!) 이때 문인천상의 눈빛은 저녁의 노을빛이 휘장의 틈으로 스며 들어와서 그런지 실로 기이 하고 고아한 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악채릉은일시 그것을 보고 다소 넋을 놓은 채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는데, 다음 순간 자신 의 행동을 깨닫고는 얼굴을 심하게 붉히고 고개를 숙이며 매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반면 그녀의 눈빛은 숙여진 고개 아래에서 매우 복잡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실 전에도 문인천상의 용모가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렇게 오랫동안 그와 한 마차를 타고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더욱 친해져 버린 것 같았다. 비록 그와 같은 인연이 설령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그녀와 문인천상은 함께 맺어질 인연이 아닌 것이며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들이 그 밖에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내심 도리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운데 침묵의 시간이 계속되자 마치 무거운 물체가 자신을 한꺼번에 억누르는 것 같았고, 혹은 마음이 매우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춰섰다. …… × × × 모래바람은 아직도 세차게 불어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일행이 마차를 멈춰세운 지역은 제 법 거대한 돌산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만큼은 바람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어서 다소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본래 낮에는 다소 더운 듯한 느낌을 주었었는데, 이제 해가 지고 나자 이곳의 날씨는 마치 엄동설한과도 같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문인천상은 두터운 겨울옷을 가지고 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일행들이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 련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마차의 안에 타고 있었는데, 이윽고 호위무사들 가운데의 하나가 와서 임시숙소가 모두 마련되었다고 알려 주자 그제서야 비로소 마차의 밖으로 나와서 악 채릉과 함께 천막들이 쳐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원래 사막지대에는 모래바람이 심하게 일어서 밤 사이에도 계곡이었던 곳이 거대한 모래산 으로 변하는가 하면 거대한 모래산이었던 것이 반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함부로 아무 곳에나 천막을 치고 숙소를 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 호위무사들이나 주운양 등은 사막지대와는 인접한 난주성의 일대에서 잔뼈 가 굵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러한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아주 적당한 위치에 숙소 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실로 이러한 자리에 마련된 숙소라면 밤새도록 모래가 산처럼 날 아와서 쌓인다고 해도 거의 걱정이 없을 것이었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일행은 난주성의 남창주루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며 환락에 젖었었 는데 지금은 춥고 삭막한 땅에 이르러 호위무사들 가운데 추워서 옷을 몇 벌이나 껴입고도 모자라서 얼굴까지 천조각으로 덮어쓴 사람들도 있었다. 악채릉은 자신의 임무를 강하게 의식했기때문인지 항상 문인천상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 었는데, 지금도 역시 문인천상을 따라서 임시숙소로 만들어진 천막들 가운데 가장 큰 곳으 로 들어섰다. …… 그 커다란 천막의 안에는 예상대로 악불범과 주운양, 그리고 상장풍이 천막의 내부에 모닥 불을 하나 피워 놓고 마련된 자리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마침 지금 모닥불의 위에는 한 마 리의 돼지고기가 몇몇의 호위무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리는 가운데 통째로 노랗게 구 워지고 있었고, 주운양 등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는 상태였다. 하루종일 모래바람을 마시고 나서 이렇게 아늑한 자리에 둘러앉아서 노랗게 구워진 돼지고 기를 안주삼아 술 한 잔을 들이키게 된다면 그야말로 가장 진미일 것이요 상황에 걸맞는 만 찬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아까는 주운양이 혈도가 제압되어 있어서 모두가 하나같이 정신이 없이 출발했었는데, 대 체 어느새 이와 같이 준비를 할 수가 있었는지 신통한 노릇이었다. 문인천상과 악채릉이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주운양이 이를 먼저 알아보고 즉시 반색하며 큰 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어서 오게, 조카! 그래 오늘 이 험한 여정에 함께 따라오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가? 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이리로 와서 앉아 술이나 한 잔 하세!" 문인천상은 기왕에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비어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악채릉은 이때 자신의 부친인 악불범의 근처에 다가가서 앉았는데, 악불범의 안색이 이미 평온할 뿐만 아니라 그도 역시 한 잔의 술을 들어 천천히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기쁜 표 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이미 내상이 다 나으셨군요?" 악불범은 조금 전까지는 다소 딱딱한 표정이었는데, 이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어조로 그와 같이 묻자 절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들의 무공이 비록 대단했었지만 내가 입은 내상은 기실 별것이 아니었으니 너는 너무 걱 정할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내상을 입은 사람은 술을 마실 수가 없는 법인데 악불범이 지금 태연하게 앉아 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의 내상이 완치되었다는 뜻이었고, 게다가 직접 그와 같은 말을 부친에게서 듣게 되자 악채릉은 이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로 다행잉요. 그런데 대체 그 도액오선의 무공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죠? 저는 아직 맨손으로 감히 아버지의 장검을 막아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었는데, 그 사람들은 정말로 그 렇게 하고도 손가락 하나 베이지 않았잖아요." 악불범은 딸의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을 보고 잠시 무거운 기색으로 생각을 떠올리는 듯하 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그 노인이 전개했던 무공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장법의 일종으로 보 였는데, 그는 나의 장검이 자신의 몸에 도달하기 전에 마치 그물과도 같은 경력(勁力)을 사 용하여 나의 장검을 봉쇄하는 한편 바로 그 순간에 나의 검기를 흡수하여 반탄력을 일으키 는 수법으로 나를 튕겨냈었던 것이었다. 실로 그와 같은 무공은 말로는 하기 쉬워도 실제 로 시전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는데, 대체 그가 무슨 방법으로 그와 같은 수법을 펼 쳤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무공을 본 적이 없어서 대체 어느 파의 무공인 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악채릉은 문득 고개를 돌려 문인천상의 얼굴을 한 차례 바라본 연후에 다시 부친을 향해 입 을 열어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무공은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겠군요?"악불범은 잠시 생각 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생각해 보기에도 그들은 실로 천하에 드문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기인(奇人)들이 분 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 경지는 아마도 초절정의 경지는 못되고 그저 그에 버금하는 경지는 되겠지. 헌데…… 그들이 사용한 무학은 너무나도 심오막측한 것이어서 한눈에 보 기에도 초절정의 무학으로 보였다." 악불범은 이어 마치 그 당시의 상황을 상기하는 듯이 멍한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이윽 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술잔은 비어 있었다. 마치 갈증이 난 사람처럼 술병을 집으려고 할 때에 그것을 본 악채릉이 눈치빠르게 웃으며 술병을 집어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이미 그와 같은 고생을 하시고 내상이 완치되셨으니 이번에는 소녀가 한 잔 따라 올리도록 하겠어요!" 말과 함께 악채릉이 비어 있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자 악불범은 이내 그것을 들어 마시 고 아직도 부족한지 스스로 다시 한 잔을 따라서 마셨다. …… 악씨 부녀가 그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문인천상은 한쪽에 앉아서 노랗게 구워 지고 있는 통돼지고기를 바라보다가 주운양으로부터 하나의 술잔을 건네받게 되었다. "자! 한 찬 하세! 자네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기실 오늘과 같은 날 은 자네와 같은 사람도 술을 한 잔 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문인천상은 주저없이 그 술잔을 받았고 이어 주운양이 직접 나서서 술을 따라 주자 이내 그것을 천천히 들고 음미하듯이 마 시기 시작했다. 그 술은 제법 오래 묵은 귀한 죽엽청(竹葉淸)이었는데, 진한 술향기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 다 가슴속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술은 이런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배와도 같은 것일 것이었다. 문인천상이 그렇게 술잔을 손바닥으로 데우면서 천천히 술을 마시고 있는 사이에 주운양 은 다시 몸을 일으켜서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날이 시퍼런 비수를 꺼내들고 마악 구워지고 있는 통돼지의 앞으로 다가가서 가슴 부위의 살을 몇 조각 잘라서는 우선 악불범에게 갖다 주고 문인천상과 상장풍의 앞에도 골고루 갖다준 다음에 자신은 남은 고기조각을 들고 비 수로 고기조각을 잘라서 입 속에 집어넣고 씹으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천막의 내부에는 다소 찬 기운이 스며들기는 했어도 중앙의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서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고, 게다가 술향기가 진동했으며, 특별히 불려와서 고기를 굽는 호 위무사들의 솜씨는 제법 훌륭한 것이어서 구운 고기의 맛도 매우 좋은 것이었으므로 아주 그럴싸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미 통돼지구이가 거의 다 구워졌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은 잘 구워진 부위를 몇 조각 잘라 서 다시 여러 사람들의 앞에 갖다놓은 다음에 물러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운양이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비워낸 다음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석년에 우리 문인운룡(聞人雲龍) 대형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돌아가셨을 적에 내가 이를 갈 면서 실로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라고 맹세했었는데, 참으로 오늘과 같이 우리가 정 말로 그 길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었네. 솔직히 나는 감개가 무량하다네. 조카, 지금 자네의 심정은 어떠한가?"문인천상은 술잔을 들어 술을 음미하며 마시다 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 려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번에 가능하면 인명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주운양은 안주삼아 고기를 베어서 입 속에 넣고 씹으면서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나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네. 나도 비록 희생자가 많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문인운룡 대형의 은 혜를 입어 왔고, 또한 내가 아까 주루에서 아이들에게 다소 즐길 수 있게 하였네만, 자네는 내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에게 최후의 기쁨을 주자는 것이었네." 문인천상은 남은 술잔 속의 술을 마저 비워내며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의숙께 맡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운양은 마악 술잔을 들어 마시다가 일순 문인천상의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다가 다시 술잔을 기울여 다 마셔 버리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조카가 그렇게 나를 믿어 준다니 나는 그야말로 모든 하는 일에 힘이 솟을 뿐만 아니라 마치 천하를 얻은 듯하네. 만일 이번의 일이 끝나게 되면 나는 장원의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것이지만 지금 자네의 얘기를 들으니 그 총관의 일을 한 이삼 년쯤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나는걸?그건 그렇고 나는 솔직히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네."문인천상 은 손수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서 비어 있는 술잔 속에 술을 따르면서 고개를 돌려 물었 다. "어떤 의문입니까? 의숙께서 물으시면 제가 성의껏 대답해 드리지요."주운양은 즉시 하하하, 하고 헛웃음을 흘리고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이야 많고도 많지. 그 도액오선이라는 노인들의 정체나 무공 에 대해서도 그렇고, 아니 그 얘기를 다시 하게 되면 내가 창피스럽고 낯이 뜨거워지게 되니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하세. 게다가 그 살수집단에 대해서도 아직 단서를 잡지 못했으 니 괴이쩍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러나 그 모든 의문들은 기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저절 로 풀리게 되겠지만, 오직 이 한 가지의 의문만은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이야?""……" 문인천상이 담담히 미소하며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자 주운양은 한 차례 헛기침을 흘린 후 에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늘상 노심초사하여 자네에게 선친의 유물을 고스란히 돌꿱ㄹ고 노력하고 있는 실정이네. 그런데 기실 지금에 이르러 내가 관리하고 있는 돈은 그다지많지가 않다 네. 물론 내가 무림인이어서 사업 수완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기도 했겠지만, 과거 자 네의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우리의 장원은 명실공히 대장원이라는 명성이 드높았었는 데 지금은 겨우 장원이라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일세. 자네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 다고 생각하는가?" 문인천상은 술잔을 들어서 술을 한 모금 입 속에 넣고 돌리다가 삼키고는 웃으면서 주운 양을 향해 말했다. "의숙께서는 저의 선친께서 따로 재산을 보관하셨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군요?" 주운양은 손바닥으로 옆에 놓인 탁자를 가볍게 후려치며 소리쳐 말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 자네의 선친이 살아 계셨을 때에는 문인 가의 재산은 기실 이곳 난주성 일대에서도 견줄 자가 없었을 정도였네. 그런데 막상 자네의 선친께서 돌아가시자 금방 문인가의 재산이 이삼 류의 부호로 전락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 으니 그 어찌 이상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문인천상은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몇 년 전에 어머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필시 선친께서 따로 남기신 재산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었지요. 따라 서 근래에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있지만 아직 그곳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주운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그 재산의 행방에 대해서 자네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문인천상은 웃으며 대 답했다. "저는 선친께서 그와 같은 많은 재산을 남겨 주셨다면 필시 저에게 모종의 암시를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생각나지 않아도 나중에 조용히 그 일에 관해 서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 아마도 어떤 성과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 주운양은 잠시 문인천상의 얼굴을 꿰뚫을 듯이 깊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웃으며 고개를 끄 덕이고 말을 받았다. "하긴 지금은 그다지 급한 상황이 아니니 나중에라도 그 재산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겠지. 나는 필시 그 재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네." 문인천상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게 되기는 바랍니다." 주운양은 이에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을 높이 치켜올리며 소리 높여 외쳤다. "자자! 어서 한 잔씩 하세! 오늘 같은 날에 그와 같은 문제로 시간을 끌게 되면 술맛이 전 부 달아나 버릴 것이니 일단은 그 얘기는 접어두고 오늘 우리 취하도록 한 번 마셔 보도록 하세나!" 말과 함께 주운양이 즉시 술잔을 비우고 고기를 안주삼아 집어먹자 문인천상은 역시 미소 하며 따라서 술잔을 기울여서 한 모금의 술을 들이켰다. …… 중앙의 통나무로 불을 지핀 모닥불은 여전히 기세 좋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술향기는 더 욱더 진해지는 것 같았는데, 뒤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상장풍은 딱딱한 표정으로 시종일 관 말이 없었고, 악씨 부녀 역시 그저 술을 따르고 마시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 을 뿐 대화가 없었다. 주운양은 술을 따라서 한 모금의 술을 더 마신 다음에 술잔을 내려놓고 문득 악채릉의 얼 굴을 바라본 다음에 기이하게 웃으며 문인천상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자네가 특별히 뛰어난 인재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처럼 여복이 많은 사람일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네. 원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만일 인연이 된다면 그것도 상관이 없겠지. 하하하! 어쨌든 내 자네에게 먼 저 축하를 보내는 바이네."문인천상과 악채릉은 즉시 주운양의 그 소리가 바로 자신들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겸연쩍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특히 악채릉의 표정은 불빛을 받아서인지 더욱 불그레하니 상기되었는데, 문득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악불범이 다소 싸늘한 음성으로 주운양을 향해 물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주운양은 싱글벙글하며 마치 기분이 매우 좋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나의 저 조카는 내가 나의 그 못난 딸인 청아와 맺어 주려고 벼르고 있었던 사람이 었지요. 그는 용모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신랑감이기 때문이었 죠. 그러나 아직 혼사를 정하지는 않고 있었는데, 만일 악씨 집안에서 먼저 인연이 닿아서 그와 혼인하게 된다면 그것도 매우 좋은 일이지요. 남녀간의 일이라는 것은 원래가 다른 사람들이 말릴 수가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악불범은 즉시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의 딸의 얼굴을 바라본 다음에 다시 고개를 돌려 주운 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딸은 이미 십수 년간이나 내가 곱게 키워 왔기 때문에 결코 그와 같은 난잡스러운 짓을 하지 않을 것일세!" 주운양은 싸늘한 악불범의 눈초리를 보고는 문득 두려운 듯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저는 다만 아까 마차 속에 함께 있는 두 분이 워낙에 다정하게 보여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원래가 그와 같은 일을 하면서 서로가 친근해진다 고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는 다만 농담삼아 한 마디를 했던 것뿐이니 악 대협께서는 굳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 악불범은 이에 주운양을 향해 뭐라고 다시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고는 술잔을 들 어 마시며 묵묵히 생각에만 잠겼다. 문인천상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조금씩 술을 마시고 있었고, 악채릉 은 다소 창백해진 얼굴이었는데, 주운양은 다소 경직된 좌중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이 술잔을 들어 비우고 크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오늘은 정말로 혼쾌하게 마시는군! 그러나 오늘같이 좋은 날에 나의 막내 의형제인 임 아 우가 일이 있어서 떠났기 때문에 함께 자리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네." 그가 말한 임아우라는 사람은 바로 다름이 아닌 농서삼걸의 막내인 청망검 임옥룡을 가리 키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주운양은 그렇게 말한 다음에 이례적으로 술잔을 들고 가서 상장풍에게 직접 술을 따라서 술잔을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형제가 요 근래에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한 번 모여서 마음놓고 마시지도 못하는 군. 하지만 이번의 일이 끝나게 되면 한 번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세!" 상장풍은 이제까지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즉시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아서 마시고는 ` 예, 형님` 하고는 비어 있는 술잔을 되돌려 주운양에게 건네주고 다시 술을 따라 올렸다. 헌데 그때 느닷없이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12장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다 "불이야!" 밖에서 느다없이 들려온 그와 같은 소리는 실로 좌중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곳 사막지대는 비록 기온이 낮고 찬바람이 불고 있기는 하지만 공기가 매우 건조하여 일 단 한 번 마차 등에 불이 붙기만 하면 순식간에 타 버리게 되기 때문에 많은 재산피해를 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소 거나하게 취한 것 같던 주운양은 그 소리를 듣자 즉시 안색이 대변하여 신형을 밖으 로 움직였고, 상장풍과 심지어 악불범까지도 그 뒤를 따라서 천막의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서는 연신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나 음성 등이 들려오고 있었고, 아마도 방금 전에 나 간 세 명은 불이 나서 타오르고 있는 천막 쪽으로 달려간 것 같았다. …… 문인천상은 자신도 뒤따라 나가 볼까 하고 생각했으나 이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 라고 생각하고는 반쯤 일으켰던 신형을 다시 주저앉히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남아 있는 술을 천천히 계속해서 마시기 시작했다. 비록 밖에서는 연신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 오고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따뜻한 모닥불 이 타오르고 있었고 향기로운 술이 있으니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이 커다란 천막의 내부에는 따라서 문인천상과 그를 보호하는 책무를 맡고 있는 악채릉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악채릉은 이상하게도 이와 같은 곳에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이 약간 상기되고 반짝이는 시선으로 문인천상의 옆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 조용한 천막의 내부에 한 줄기의 쉬잇! 하는 소리와 함께 검고도 가느 다란 물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문인천상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 밖에서 들려 오는 소음에 비해 그 소리는 워낙에 미미한 소리였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 빨랐기 때문에 만일 악채릉이 이 순간 문인천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미처 그러한 사 실을 모르고 있을 뻔했다. 악채릉은 느닷없이 그러한 광경을 대하게 되자 더없이 놀라운 표정이었고, 문득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문인천상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워낙에 그 암기의 속도가 빨랐을 뿐만 아니라 악채릉이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그녀의 몸이 문인천상의 뒤쪽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그 검고 길쭉한 암 기는 문인천상의 뒷머리로 파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악채릉의 두 눈에 일순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으며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이 잠 시 주춤하는 순간에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암기가 가까스로 문인천상의 머리를 맞추지 못하고 밖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원래 악채릉이 신형을 날렸을 때에는 습관처럼 등뒤의 장검을 뽑아 들고 있었는데, 다급한 순간이 되자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을 내던져서 암기를 쳐냈던 것이었다. 암기는 따라서 맥없이 한쪽의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예상대로 길쭉한 강침(鋼 針)이었고 끝부분이 검게 변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극독을 발라 놓은 것이 분명 했다. 만일 그것이 그대로 문인천상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면 물론 문인천상은 설사 대라 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아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악채릉은 한 순간의 위기가 지나가자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다소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주위를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내던졌던 장검 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아까와 똑같아 보이는 암기가 다시 날아들었으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대여섯 개나 분산되어 날아오는 것이었다. 쉭쉭쉭! 그 암기의 목표는 다름 아닌 문인천상의 전신이었다. 문인천상은 이 순간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암기의 목표가 되고 있는 것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한 채 고개를 돌리며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번에는 따라서 암기들이 빠르게 그의 가슴과 하복부, 그리고 허벅지 등을 겨냥하게 되자 악채릉은 일순 크게 놀라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첫 번째의 암기를 쳐내기 위해 장검을 내던졌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지금 장검이 없었 으므로 그저 맨손으로 극독이 묻어 있는 암기들을 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암기들의 속도는 너무나도 빠라서 도저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무의식 적으로 신형을 날려 문인천상의 앞의 가로막았다. 다음 순간 퍽퍽퍽! 하는 예리한 소음과 함께 백색의 의삼이 펄럭이며 악채릉의 전신이 암 기에 의해 관통되는 것 같았는데, 순간 천막의 밖에서 어! 하는 나직한 외침이 들려 온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에악채릉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번쩍 신형을 날려 장검을 집어들었고 방금 전 에 목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향해 공격해 갔는데,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그야말로 비호같이 빨랐다. 그것은 기실 그녀의 절정고수라는 위치가 결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 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기실 조금 전에 그녀는 암기에 맞은 것이 아니라 경황중에서 도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그것에 경력을 주입시켜 마치 철판처럼 단단하게 만든 다음에 암 기를 받아내었던 것이었다. 겉옷이 벗겨진 그녀는 따라서 지금 간편한 속옷 차림이었지만 강호의 여인답게 부끄러워하 지 않았으며, 도리어 백색의 투명한 나삼이 펄럭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 에서 하강한 백의선녀(白衣仙女)의 모습과 흡사했다. 백색투명한 그녀의 속옷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이어서 여지없이 그녀의 아름다운 상체의 굴곡을 드러내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야해 보이기는커녕 무서운 여신장(女神將)과도 같았다. 악채릉의 신형이 날아가는 순간에 이미 상황의 허실을 짐작했는지 그쪽에서도서너 명의 흑 의장한들이 나타나서 각기 병기를 뽑아 들고 그녀를 향해 대적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에 천막의 문이 와락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악채릉은 그 순간에 이미 서너 명의 흑의장한들과 치열하게 어우러져 격전을 벌이고 있었 는데, 뜻밖에도 다른 쪽에서 문인천상을 노리며 다가드는 또 다른 흑의장한이 하나 있었다. 그 흑의장한은 눈빛이 매우 낯익었는데 바로 바름이 아니라 장원의 누각에서 처음으로 문인 천상의 서재에 침입해 들어왔던 바로 그 장한이었다. 방금 전에 천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주운양이었는데, 그는 느닷없이 흑의장한이 나타나서 문인천상을 향해 덮쳐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즉시 품속에서 금 으로 만들어진 산반을 하나 꺼내서 대적해 갔다. 그 흑의장한은 뜻밖에도 주운양이 나타나서 문인천상에게 다가갈 수가 없자 즉시 장검을 휘 둘러서 주운양에게 급속하게 공격해 들어갔다. 이 주운양의 산반은 비록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부분부분은 정가이 섞여 있는 것이 어서 결코 단단하기가 강철에 못지 않았다. 깡!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림과 동시에 흑의장한의 장검과 주운양의 산반이 정통으로 부 딪치는 순간에 두 사람의 손끝이 그 진동으로 인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고, 흑의장한의 장검의 끝이 부러져서 허공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그런데 이 장검의 파편은 무의식중에 부러진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흑의장한이 고의적으로 주운양의 산반과 부딪쳐서 부러뜨려 날려 보낸 것 같았다. 검조각은 상상 밖의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는데, 그것이 노리고 있는 상대는 주운양 이 아니라 뜻밖에도 문인천상이었다. 문인천상은 이때 느닷없이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 대해서 어리둥 절한 표정을 짓고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의 자세가 워낙에 허술한 것이었기 때문에 필시 그 검조각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것에 가슴 부위가 격중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자색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며 마치 뱀의 혓바닥과도 같이 날름거리 는 길쭉한 기운이 옆에서 느닷없이 한 자 이상이나 뻗쳐나와 그 검조각을 퉁겨냈다. 다름이 아니라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와 같은 가공할 검망(劍芒)을 일으킨 사람은 악불범 이었는데, 이 순간 주운양과 대적하고 있던 흑의장한은 악불범의 그와 같은 검술을 보게 되자 놀랐는지 즉시 몸을 돌려 천막의 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악채릉과 서로 어울려서 격전을 벌이고 있던 흑의장한들도 즉시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악불범과 함께 따라서 천막 안으로 돌아왔던 상장풍이 악 채릉이 그자들의 뒤를 추격해 가는 것을 보고 즉시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쪽에서는 흑의장한의 뒤를 악불범이 허공에서 신형을 유연하게 선회시키며 그대로 추격 해 가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주운양은 잠시 멍하니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짧은 경악성과 함께 악불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알고 보니 그놈들이 불을 질러서 우리를 유인했었던 것이로군!"…… 그리하여 천막의 내부에는 다시 문인천상 혼자서만 남게 되었는데, 다소 멍한 표정의 그가 보기에는 조금 전의 그러한 광경들은 마치 도깨비 장난과도 같은 혼란스러운 한 순간이었다 고 말할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은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도 천막의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신형을 움직였다. 그러나 마악 그의 신형이 천막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천막의 문이 열려지며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외에도 그들은 바로 다름 아닌 주완청 등의 주씨 남매였다. 주완청을 제외하고 주원헌, 주원학 등의 주씨 형제는 각기 서슬 푸른 안색을 하고 산반과 장검 하나를 꼬나들고 있었는데, 주완청 역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소 핼쑥하게 질린 얼 굴로 다급하게 문인천상을 향해 물었다. "방금 전에 이곳에서 흑의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죠?" 문인천상은 그들이 주운양 등을 걱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흑의인들 이 장검으로 찢고 달아난 구멍과는 다른 쪽에 나 있는 역시 그와 비슷한 천막의 찢어진 구멍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곳으로 갔소이다." 주완청은 잠시 그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어 문인천상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상 오라버니께서는 왜 이곳에 혼자 계시는 거죠?"문인천상은 어이없어서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소. 아마도 내가 쓸모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소."(……!) 주완청은 잠시 멍하니 문인천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아까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모닥불은 거의 다 타서 벌겋게 숯불만 남기고 있는 상태였다. 주씨 형제도 연달아 한숨을 내쉬더니 품속에서 각기 비수를 꺼내서 구워진 통돼지의 살코 기를 조금씩 떼어서는 한쪽에 앉아 각자가 술잔에 술을 따라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주완청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어 말했다. "상 오라버니는 전에 듣기에 이미 수년간이나 공동파에 머물렀었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렇 게 무공이 허약한가요? 우리는 이번에 당신의 선친의 복수를 하러 가는 것이지만 이러다가 는 오히려 선친의 복수는커녕 자신의 몸이 위태롭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보 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것 같아요. 자! 그렇게 우두커니 서 계시지만 말로 잠시 그쪽에 좀 앉으세요. 이제는 저와 얘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우세요?" 문인천상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이 주완청은 지금은 청색의 비단 장삼을 아름답게 걸치고 있었는데 머리의 한쪽에는 옥으 로 만들어진 조화까지 달고 있어서 한층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문인천상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윽고 한 쪽의 자리에 주저앉자 손가락을 들어 흐트러진 머릿결을 매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요즘 그 악 낭자와 매우 친하다고 하죠? 실로 그와 같은 아름다운 낭자가 항상 곁 에서 떠나지 않고 보살펴 주니 그야말로 좋지 않은가요? 당신은 혹시 나중에 그녀와 혼인 이라도 할 생각은 아니겠죠?"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감히 그와 같은 꿈을 꿀 수가 있겠소?" 주완청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그러니까 비록 혼인을 하고는 싶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로군요? 그렇죠? 제가 아무리 멋을 낸다고 해도 결코 그녀의 아름다움에 비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 문인천상은 겸연쩍은 표정이 되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제까지 말이 없었던 주씨 형제들 가운데 맏이인 주원헌(周元獻)이 양손에 들린 한 자루의 비수와 하나의 산반을 각각 주시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문인 형제! 설령 우리 가문의 사람들이 그대를 위해서 그야말로 불철주야로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은 돌아오는 것은 장원을 떠나는 것밖에 없지 않겠소? 형제는 대체 이와 같이 열 성적으로 노력하시는 우리 아버님을 위해 어떤 보상을 해줄 생각이오?" 문인천상은 주원헌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나는 기실 얼마든지 그와 같은 보상을 해줄 능력이 있소. 그것은 귀하들께서도 이미 잘 알 고 있을 것이오." (……!) 둘째인 주원학이 뒤를 이어 입을 열어 말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문인가에 숨겨진 보물이 있다고 하던데 그와 같은 얘기는 사실 헛소 문에 불과하겠지?그렇지 않소?"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보물이야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오. 그건 그렇고 두 분은 처음부터 그와 같은 얘기를 하시니 이는 혹시 나의 재산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오?" 순간 주원헌이 거의 신경질적으로 비수를 들고 있던 좌수를 휘저었다. 마치 파리를 쫓는 듯 한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 한 번의 움직임에 그의 손아귀에 들려져 있던 비수가 허공을 가 르며 빠르게 문인천상의 면전으로 엄습해 들기 시작했는데, 문인천상의 안색이 가볍게 굳 어지는 순간에 다행히그 비수는 그의 몸에 맞지 않고 귀 밑을 스치면서 날아가 천막의 기 둥에 탁, 하는 소리를 내며 꽂히고 말았다. 주원헌은 그것을 보고 신형을 벌떡 일으켜서 입 속에 집어넣은 고기조각을 질겅질겅 씹으 면서 비수를 회수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완청이 미소와 함께 문인천상을 향해 말했다. "저희 두 분 오라버니들에게 그와 같은 얘기를 하지 말아요. 그분들은 앞으로 뻗어나갈 인 재들인데 비단 그와 같은 재산에 욕심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다소 거칠어서 상 오라버니처럼 그렇게 얌전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마치 그 말에 동조하기라도 하듯 둘째인 주원학(周元鶴)은 양손에 들고 있는 비수와 장검 을 일순 챙챙챙, 하고 소리내어 부딪쳐 보였다. 한쪽에서는 요란한 쇳소리가 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인의 싸늘한 시선이 기이한 표정으 로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비록 비수를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살벌하고도 난처한 분위기였 다. 바로 그때 주원헌이 마악 천막의 기둥에서 비수를 뽑아드는데 느닷없이 밖의 사방이 훤하 게 밝아 오며 요란하게 외치는 함성 소리가 울려 왔다. "불이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순간주씨 남매는 일제히 안색이 돌변하여 신형을 움직이며 천막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 다. 문인천상도 그들의 안색이 느닷없이 뻣뻣하게 굳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뒤따라서 걸어가 밖을 내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불바다였다. 화르르르륵! 삭막하고 어두운 밤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이 불길은 비록 화려해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공포의 기운이었다. 문인천상 등이 앉아 있었던 그 커다란 천막을 제외하고는 사방에 있는 대부분의 천막들이 한꺼번에 시뻘건 화마(火魔) 속에 휩싸여서 검은 연기로 삽시간에 화해 가고 있었으며, 심 지어 한쪽에 세워 놓은 마차와 말들에게까지 그 불길은 옮겹붙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아까 처음에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만 해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입이 절로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게 되었다. 사방에서 불길이 동시에 이와 같이 거대하게 일어나다니 이것은 틀림없이 누군가가 고의 적으로 불을 지른 것일 것이었다. 워낙에 세찬 바람의 힘을 입고 타오르고 있는 불길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진화될 가망이 없 어 보였고,또한 실제로 그 불들을 끄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인천상 등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용광로와도 같이 뜨겁게 달아오른 불길 속 에서 함께 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신이었다. 그 시신들은 아마도 이 불길을 일어나게 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행일 것이었고 틀림없이 전부가 이곳의 호위무사들이었던 사람들의 것이었다. 마치 그러한 추측을 확인해 쥐라도 하듯이 이때 뜨겁게 일렁이고 있는 파도와도 같은 화마 속에서 일단의 흑의장한들이 빠르게 나타나서 사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것 을 본 주원헌이 크게 분개하며 마악 그쪽으로 신형을 날리려고 했으나 순간 주완청이 그의 손을 잡아서 제지했다. 그리고는 주완청은 눈짓으로 문인천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즉 지금 여기에 문인천상이 있으니 그들이 그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자리를 떠 나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주원헌은 이에 마지못한 듯이 신형을 멈추었고, 옆에 있던 주원학도 은근히 문인천상을 밉 살스럽게 주시하며 발을 심하게 굴렀다. 문인천상은 이때 너무나도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넋을 놓고 있었지만, 그의 위치는 그야말 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고, 앞으로 갚을 수도 없는 무거운 빚을 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주운양은 이번에 많은 돈을 들여서 모든 준비를 갖춰 가지고 출정하였는데 설사 그와 같은 모든 물자들이 한꺼번에 소실된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가 데리고 왔던 수십 명의 호위무사들 이 대부분 죽음을 당한 것 같으니 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네 사람이 모두가 천막의 앞에 서서 사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저 멀리 밖에서 한 줄기 의 웅후한 휘파람소리가 들려 오더니 몇 개의 인영(人影)이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사이를 헤치고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그들은 다름이 아닌 그 흑의장한을 추격해 갔던 악불범 과 주운양 등이었는데, 일순 일행의 앞에 이르러 장내의 엄청난 광경을 보고는 하나같이 넋을 잃은 듯한 멍한 표정들이었다. 이미 흑의장한들은 그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즉시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 버린 지 옛날이었 다. "이럴 수가! 이와 같은 상황이 되다니!…… 이럴 수가!……"평소에 달변이기로 이름난 주운 양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보게 되자 그저이럴 수가라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는 데, 악불범은 안색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뒤를 이어 다른 쪽에서 다시 두 사람의 신형 이 날아와 일행의 앞에 내려섰다. 다름 아닌 그들은 바로 다른 쪽의 흑의장한들을 추격해 갔었던 악채릉과 상장풍이었다. 악 불범과 주운양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역시 흑의장한들을 추격해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것 을 보니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역시 장내에 도착하자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엄청난 광경을 바라보고 한동안 넋을 잃 어버리고 말았다. …… 한참 동안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윽고 화마의 기세가 점차로 급 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이 타고 나서 더 이상 탈 만한 물건이 없 어졌기 때문인 것이었다. 이곳의 기후는 그야말로 건조하고 바람이 불어서 탈 만한 물건은 삽시간에 타 버렸고, 화마도 순식간에 소멸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윽고 마치 거짓말처럼 화마가 급격히 사라지고 그저 사방에 뜨거운 불씨만이 식어 가기 시작하자 일순 주운양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정말로죄를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해쳤으니…… 나는 차라 리 이 순간에 목숨을 끊어서 그들에게 사죄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상장풍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주운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 형님이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자결을 하실 것이 뭐가 있겠 습니까? 이들은 대의를 위해 충성을 바치다가 죽어 간 것이니 형님께서 각기 그들의 가족 에게 위로금이나 전달해 주면 될 것입니다."그러자 주운양이 문득 벌컥 화를 내며 상장풍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이들은 원래 나와는 수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에도 충의를 잃지 않고 이곳까지 따라와 주었지. 그렇거늘 나의 잠시의 불찰로 이들이 하나같이 고혼(孤魂)이 되었는데 그까짓 위로금을 천 냥이나 만 냥 정도 주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 는가? 나는 설사 그들의 가족을 평생 돌보아 준다고 해도 항상 가슴에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일세!"말과 동시에 주운양은 급기야는 큰 소리를 내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주완청이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어 주운양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는 지금 그렇게 많은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실 이 일은 아버지가 저 상 오라버 니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뜻밖에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저 사람들에게 보상해 줄 책임은 아버지가 아니라 상 오라버니에게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거 예요. 원래 그들은 문인가의 장원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 주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주운양은 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나는 비록 총관이지만 기실 전대부터 문인운룡 형님의 은총 을 받고 의형제가 된 것이기 때문에 문인가의 일은 곧 나의 일인 것이다. 게다가 내가 실 수로 적도들을 뒤쫓다가 기습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설사 나의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이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주도록 할 것이다. 너는 다시는 그런 얘기를 꺼내지도 말아라!" 주완청은 그래도 지지 않고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집을 전재산을 털어서 육족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아마 턱없이 모자라 게 될 거예요. 대체 그 부족한 십만 냥이나 이십만 냥이라는 거금은 어디에서 구할 작정이 죠?" "……" 주완청의 말이 그처럼 이치에 맞는 듯하자 주운양은 더 이상 딸을 제지하지 않고 눈물도 그 친 채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형님! 공연히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조카도 있는 상태이고 하니, 만일 그가 양심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자신만이 나 몰라라 하고 팔짱 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선친의 숨겨 놓은 재산이 있 다고 하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책임분담을 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이 상장풍은 원래가 말수가 적은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말이 유창하고 사라정연하여 그 어떤 달변가에 못지 않은 것 같았다. 주운양은 일순 그 말을 듣고 매우 심하게 갈등을 일으키는 듯이 깊이 한숨을 몰아쉬다가 느닷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아니야! 나는 그까짓 약간의 위로금으로 이미 죽은 나의 모든 형제들을 우롱할 수는 없네. 차라리 내가 지금 죽어서 깨끗하게 형제로서의 우의를 다하자는 것이네..!" 제13장 백면서생(白面書生)의 탈을 벗다 순간 상장풍은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냉랭하게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나는 여태 형님을 천하의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하고 모셔 왔으니 이제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형님은 겨우 한낱 소심하고 책임도피밖에 할 줄 모르는 졸장부에 불과하였구 려! 나는 매우 실망했소이다!"주운양은 아주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상장풍의 그와 같 은 엉뚱한 말을 듣고는 즉시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아니, 혹시 내가 자네에게잘못한 일이라도 있다는 말인가?"상장풍은 여전히 냉랭하게 웃으 며 대꾸했다. "형님은 물론 나에게는 아주 잘 대해 주신 분이죠.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문인운룡 그 형 님의 복수를 포기하고 작은 의리에 묶여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소심하 고 책임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나는 그래도 형님이 이미 죽은 형제들을 대신해서 대의 속에 살면서 문인운룡 형님의 복수를 위해 전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 데 무척이나 실망했소이다!" (……!) 주운양은 상장풍의 말을 듣고 일시마음속에 심한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 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눈빛을 빛내며 상장풍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아우! 미안하네. 내가 잠시 너무나도 소심하게 소의에만 집착하여 생각했었군 그래! 아마 이미 죽은 형제들도 내가 끝까지 문인운룡 형님의 원한을 갚아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일 세. 나는 하마터면 일을 크게 그르칠 뻔했는데 자네가 순간 바로잡아 주었군 그래. 아우! 자네의 두 눈에는 이 형님이 그야말로 어리석어 보이겠지?" 그러자 이제까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상장풍이 일순 길게 한숨을 내쉬고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주운양의 두 손을 마주잡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으 며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미안하오! 내가 형님의 뜻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 이오. 그러나 어찌 형님의 소심하고 어리석은 졸장부가 될 수가 있다는 말이오? 천하에 오 직 형님만이 진정한 진정한 영웅호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미 죽은 형제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형님이야말로 그 자격이 있기 때문 이오. 오로지 죽일 놈은 이제까지의 형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감히 그와 같은 말을 했던 이 못난 동생이니 형님께서는 바라건대 어서 일장으로 이 동생의 목숨을 취해 주시오!" 주운양은 상장풍의 그 말에 다시 한 번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었네.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그와 같이 죽겠다는 소리는 하 지 말도록 하게!" 이어 상장풍의 손을 놓고 주운양은 드디어 문인천상의 앞에 이르러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카! 자네도 들었겠지만 나는 이미 목숨을 살려서 문인운룡 형님의 복수를 다하기로 작 정하였네. 자네는 혹시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나?"이때 문인천상은 매우 무거운 표정으로 멍 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주운양이 그렇게 물어 오자 이윽고 깊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번의 일에 특별히 실망할 리가 있겠습니까?"주운양은 눈빛을 굴 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도 역시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네. 우리는 비록 이와 같은 상태 가 되었어도 역시 문인운룡 형님의 원한을 반드시 해결하기로 하세." "……" 문인천상이 가만히 듣고 있자 이어 주운양이 그의 소맷자락을 이끌면서 말했다. "자!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앞일을 차분히 논의해 보기로 하세. 밖의 어러한 상황이야 더 이상 바라본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지 않겠는가?" 문인천상이 마지못한 듯이 주운양에게 이끌려서 천막의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문득 주완청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우선은 이번의 사태에 대해서 책임분담을 하겠다는 상오 라버니의 확답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요?"주운양은 그 말에 자신의 딸을 노려보며 소 리쳤다. "내가 이미 그런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미 문인운룡 형님의 원한을 갚기로 약속한 이상 나와 이 조카는 한 몸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찌 그와 같은 구차한 금전적인 얘기를 할 수가 있겠느냐? 자! 조카, 우리 어리석은 계집 아이의 말 따위는 상관하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술이나 마시도록 하세!" 마지막의 말은 물론 문인천상을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인천상이 그가 이끄는 손길을 가볍게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잠깐! 나는 비단 지금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어야 할 말이 있소." (……?) 주운양은 그가 자신의 손길을 뿌리치자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게 무엇인가? 어서 말해 보게!" 문인천상은 이미 자신의 얼굴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살벌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 답답한 기운을 불어내기라도 하듯이 한숨을 내쉬며 천 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여러분이 나에게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소. 그러므로 일단은 이 얘기를 확실하게 해두지 않을 수가 없구려. 나는 아까 선친의 재산을 마치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얘기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처럼의 여러분의 기대감을 무산시 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린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소." …… 문인천상이 말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은 장내의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일 시 사위가 일제히 얼어붙고 있는 것 같았다. 일순 주운양이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난 또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 줄로 알고 놀랬지. 그래 겨우 그런 금전적인 얘기였나? 내가 이미 그와 같은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고 하지 않았는가?" 문인천상은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나는 일단은 이 얘기를 확실하게 해두지 않을 수가 없겠소이다. 과거에 나는 모친께서 살아 계실 적에 그분에게 선친의 재산에 대해서 여쭈어 본 적이 있었 소. 과거에 선친께서는 많은 돈을 가지고 계셨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와 같이 재산이 줄 어들었느냐고 말이오. 그러자 모친께서는 이와 같이 대답하셨소. 당신 선친께서는 돌아가시 기 전에 느닷없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치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초초하게 돈을 물 쓰듯이 가져가더라는 것이었소. 그래서 하루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니 선 친께서는 그 많은 돈을 이미 천하의 자선단체에 골고루 가져다 주셨다는 것이었소." 순간 비명과도 같은 주완청의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그처럼 많은 재산을 느닷없이 자선단체에 갖다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실은 그렇게 생각했었소. 그런데 모친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그 당시만 해도 선친께 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전재산을 노리고 자신의 목숨을 취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었던 것 같다는 것이었소. 선친께서는 적어도 자신은 죽어도 자신의 재산만큼은 호락호락 흉수에게 내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또한 아마도 자신에게 재산이 사라지게 된다면 흉수가 자신을 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인지도 모르오."주운양이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구태여 만불곡으로 갔었다는 말인가?"문인천상은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시 모친께 이렇게 물었었소. 어째서 선친께서는 그와 같은 많은 재산과 많은 호위 무사들을 거느리고 계셨었으면서도 그 흉수에 대항하지 않고 도리어 재산만 내다버렸느냐고 말이오. 이에 대해 나의 모친의 말씀은 기이하였소. 당시 선친께서는 모든 재산을 거의 다 버린 이후에도 늘상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어째서 흉수에게서 아직 아무런 손길도 없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오. 따라서 결국 선친께 서는 초조한 마음을 참다 못해 한 가지의 결단을 내리셨다는 것이오."주운양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결국 만불곡으로 갔었다는 말인가?" 문인천상은 그의 질문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당시 선친께서는 우연히 손에 들어오게 된 만불곡의 지도를 생각하셨을 것이고 한 번 그것 으로 시험을 하여 흉수의 행동을 떠보자는 것이었을 것이오. 만일 흉 수가 선친이 혼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쓰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편안한 마음올 살아가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소. 당시 만불곡의 지도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 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선친께서는 그와 같이 목숨을 걸고 단신으로 가셨던 점이 다 소 이상하지 않소?" …… "따라서 나와 나의 모친은 당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소. 선친께서는 그 당시 당신의 우수 한 능력으로 흉수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결국에는 그와 같은 행동밖에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필시 그 흉수는 선친께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가공할 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모친께서는 선친의 원한을 항상 잊지 못하시고 결국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내가 나중에 집을 몰래 뛰쳐나가 숨어지내게 되었던 원인도 기실 알고 보면 그 암중의 거대한 흉수를 의식해서였소. 그러다가 나는 수년이 흘러서 이제 흉 수가 나를 의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오." 주완청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결국 당신에게는 숨겨진 그 재산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다소 싸늘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소." 주완청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많은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하면 어째서 그 이름이 진작에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문인천상은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도 만일 자선단체에 한 번 기부를 해보게 되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원래 자선단체라고 하는 곳은 밑빠진 독과 같아서 설령 많은 돈을 기부받는다고 해도 표시가 나 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기부받는 일을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소." …… 화마가 한 차례 휩쓸고 간 사방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지만 지금 이곳 주위에는 공기 가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으며, 게다가 문인천상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망 치가 되어 정을 두드리며 여지없이 그 얼음을 깨뜨려 부숴 버리는 것 같았다. 주운양은 잠시 무수하게 안색을 변모시키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인천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나 나는 그다지 많은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닐세. 그저 그 많은 재산은 다 필요 없고 그저 이번의 피해보상을 해줄 수 있을 만큼인 일천만 냥 정도의 은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네." 문인천상은 이에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일천만 냥의 은자라구요? 지금 저의 수중에 있는 돈은 겨우 은자 일만 냥이나 될 듯 하고 누각에 남아 있는 돈까지 전부 계산한다고 해도 겨우 십만 냥의 은자를 넘어서지 않 을 것입니다. 저는 기실 열두 살 때 제법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갔었지만 수년의 세월이 흐 르는 동안에 거의 탕진해 버리고 말았었지요. 만일 의숙께서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에서 한 오만 냥쯤 달라고 하신다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주운양은 안색이 무겁게 변해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만 냥의 은자는 필요가 없네." 문인천상은 다소 냉랭하게 웃었다. "핫핫! 오만 냥의 은자는 푼돈이라고 해서 싫어하시는군요. 강호의 백성들이 그저 은자 한 두 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나 하십니까? 제가 이미 말씀드렸 다시피 저의 선친의 원수는 기실 능력이 대단한 사람인 것입니다. 의숙께서는 바라시는 바 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그 복수를 하는 일은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인천상의 지금의 말은 기실 상대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아마도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여기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주운양은 무거운 표정으로 한동안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면서 다 소 싸늘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돈황으로 복수를 하러 가는 것은 결코 여기에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네! 자네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러한 점은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네!" 말이 끝나자 주운양은 일순 몸을 돌리더니 혼자서 천막의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 문인천상의 처지가 보다 확실하게 알려지고 주운양이 그렇게 문득 천막의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일순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살벌하게 마치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악불범이 문득 입을 열어 악채릉에게 말했다. "너는 어서 그를 데리고 남은 천막으로 가서 쉴 수 있도록 해주어라!"악불범이 말한 그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문인천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주완청을 비롯하여 상장풍 등은 지금 문인천상으로 인해 크게 노화가 끓어올라서 참을 길 이 없었는데, 문득 그와 같은 악불범의 말을 듣고는 다함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들로 서는 자신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든 문인천상을 그대로 편히 쉴 수 있ㄷ록 보내준다는 것 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완청 등과는 달리 악채릉은 마치 부친의 지시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즉시 나 서서 문인천상의 손을 잡고 그를 한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천막 이외에는 모든 천막들이 소실된 것으로 보였는데 악채릉이 문인천상의 손을 잡고 천막의 뒤쪽으로 돌아가자 뜻밖에도 거기에 아직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천막들이 몇 채나 건재하고 있었다. 악채릉은 그 천막들 가운데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하나의 작은 천막을 택해서 그를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 × × × 그야말로 무서운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을 한 순간에 헤치고 나온 것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문인천상은 마땅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어야 할 것이건만 기이하게도 여러 사람들 앞에 서도 처음부터 담담했던 그의 표정은 역시 지금 천막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조금도 달라진 기색이 없이 담담해 보였다. (……) 악채릉은 어두운 천막의 안으로 들어서자 일단 천막의 내부에 촛불을 밝혀 놓고 문인천상 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침상 위에 침구를 깔아 준 다음에 실내의 한쪽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 위에 주저앉더니 그 이후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염치불구하고 침상 위에 걸터앉아서 신발을 벗고 마악 누우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악채릉을 향해 물었다. "아니, 당신은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렇게 앉아 있을 작정이오?"악채릉은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대꾸했다. "왜요? 제가 이렇게 옆에 있으니 잠을 자기가 불편한가요?"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 로저었다. "낭자와 같은 사람이 옆에서 지켜 주고 있는데 내가 불편해질 리가 있겠소? 나는 다만 이제 는 나를 이렇게 열심히 위해 줄 이유가 없어졌을 것이고 또한 낭자도 가서 잠을 자야 할 텐데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오." 악채릉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다소 자조어린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안한 마음이 드신다고요? 이번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상은 내가 당신을 보호해 야 하는 임무도 역시 끝나지 않은 것이예요. 따라서 내가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나에게 달리 가서 쉴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신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문인천상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 윽고 몸을 뒤로 벌렁 뉘어 침상 위에 누워 버리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좋소. 나는 임ㄴ 잘 테니 당신은 갈 테면 가고 있으려면 있고 마음대로 하시오!" 말과 함께 문인천상은 즉시 침상 위에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더니 이윽고 정말 로 요란하게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금방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잠이 든 시 늉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악채릉은 마음이 매우 심란해져 있었는데 문득 그와 같은 그의 요란하게 코고는 소리를 듣 게 디자 웬일인지 마음이 다소 편안하게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성 난 파도와도 같이 거센 격랑을 일으키는 마음속의 거대한 번뇌가 갑자기 기이하게도 그 코 고는 소리에 의해 다소 평화롭게 진정되기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이 악채릉은 원래가 다소의 결벽증이 있다고 할 만큼 매우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반대로 더러운 것은 상당히 혐오하는 성품의 소녀였는데, 어째서 느닷없이이와 같은 사람의 짓궂은 코고는 연극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하게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악채릉은 기실 이 문인천상을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욱 고결하고 섬세하며 조용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와 같이 코고는 연극을 할 줄은 몰랐 다가 그와 같은 전혀 뜻밖의 일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떠올리게 되 었다.……사람이란 자신의 내면의 번뇌가 심해질 때에는 저절로 그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 이 일어나는 법이어서 악채릉은 일단 마음이 부드러워지자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서 한 동안 미소하는 얼굴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문인천상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소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의 코고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문득 기이하게 생각하다가 슬그머니 웃고 말았다. 그와 같은 연극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오래도록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 지 나지 않아서 다시 잠들지 않은 정체를 드러내고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의 그녀로서는 그다지 그가 눈을 뜨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도 지금의 이 상황이 다소 우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인천상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악채릉은 잠시 후에 문득 두 눈을 가볍게 휘둥그래 뜨게 되었다. 제14장 간악(奸惡)한 흉심(兇心)들 금방이라도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킬 것으로 알았던 문인천상이 그 코고는 소리가 점차 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숨소리가 깊어지고 조용해지면서 정말로 깊은 잠에 빠져 버 리고 만 것이 아닌가! 악채릉은 이미 내공수련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저 숨소리만 들어도 그가 정말로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완전하게 구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악채릉은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되자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오히 려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내 우스운 기분이 들게 되었다. 이 다 소 까다롭게 보이는 문인천상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앞에 두고 코고는 연극을 하다가 그만 잠들어 버린 사실은 그야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엉뚱한 일이었지만, 어쨌든간에 그러므로 인해 편안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의 옆에서 호위를 서야 하는 그녀의 심리적인 부담이 줄 어들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 악채릉은 한동안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띠우고 어느새 깊이 잠들어 가고 있는 문인천상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잠시 후에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다소 높 은 허공으로 던지며 깊은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표정은 처음에는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무겁고 어두워지는 등 변화를 계속해서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이 흘러서 실내를 어슴푸레하게 밝히던 촛불이 드디어는 아래 부분까지 다 녹아서 사라지게 되었고, 바로 그 순간에 악채릉이 마치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듯이 신형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몸을 일으킨 그녀는 꺼져 가는 촛불을 다른 것에 옮겨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이미 깊이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문인천상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의 얼굴에 뒤집어 씌워진 이불을 가볍게 들추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촛불이 완전히 꺼져서 실내는 일시에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변했으므로 도무지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문인천상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악채릉은 그 가운데 무엇을 확인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순간에 느닷없이 오른손가락 을 빠르게 움직여서 마치 물기를 털듯이 지풍을 날려서 소리없이 문인천상의 전신의 혼수혈 을 일제히 제압하는 것이었다.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그녀의 무공에는 거의 실 수가 없었고 또한 지금은 이불을 들 추고 나서 혈도를 점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의 악채릉의 손속은 완벽했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문인천상이 세상없어도 얼마간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 하고는 즉시 걷혀진 이불을 다시 단정하게 잘 덮어 주고는 조용히 걸어서 천막의 밖으로 사 라지기 시작했다. …… 이 늦은 시각에 악채릉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그런데 마악 그녀가 천막의 문을 나서는 순간에 다시 천막의 안에서는 실로 귀신도 예측하지 못했었을 것 같은 일련의 변화 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 문인천상! 이미 악채릉에 의해서 깊은 잠이 든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 또한 그녀의 지풍에 의해 전신 의 혼수혈까지 완벽하게 제압당했던 그가 느닷없이 느리게 쉬던 숨을 멈추더니 눈을 떴던 것이었다. 실로 지금의 그의 눈빛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눈빛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신령의 눈 빛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을 정도로 신비롭고 기이한 것이었다. 그렇다! 기실 이 문인천상은 비단 일신에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는 구름 속에 숨은 신룡과 도 같은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이 이미 극한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목상 도장(木桑道長)을 통해 공동파( 派)로 돌아와서 공동파를 위해 힘을 써 달라는 공동파의 장문인 곡허자(谷虛子)의 부탁을 받았었지만, 그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드디어는 주운양 등과 함께 강호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기실 일신에 거의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경지의 무학을 소유하고 있었 지만 나름대로의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이제까지 마치 백면서생(白面書生)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 왔었다. 그가 구태여 악채릉과 같은 소녀의 호위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 등이 그것의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문인천상은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서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일단 가볍게 눈을 뜨자마자 신형을 느릿하게 움직여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허공에 둥실 떠올라서 스르르 밖을 향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원래가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은 허공을 떠다닐 수가 없는 법인데, 그러한 상식 마저 초월한 신법을 펼치고 있는 이 문인천상의 지금의 모습을 보았다면 악채릉은 아마도 놀라서 기절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문인천상은 어느새 간단하게 천막의 밖으로 나가서 순식간에 허공 높은 곳에 이르러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 허공에 떠올라 있는 그의 발 아래 에 거대한 구름과도 같은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그가 극상승의 경공술을 펼치 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이름을 말하자면 연대구품(蓮臺九品)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기운이 발 아래에서 일어서 신형을 떠받쳐 주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마치 그 사람이 구름을 타고 있는 것 같이 발 아래에 거대한 구름이 형성되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 문인천상이 높은 허공에 떠올라서 주시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에 천막 을 벗어난 악채릉이 가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돗은 다름 아닌 예의 그 커다란 천막이 있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때 악채릉이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노라니 문득 여러 개의 천막들 사이에서 두어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별안간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그들은 다름 아닌 주완청을 비롯한 주씨 남매들이었는데, 악채릉은 그들이 느닷없이 나타 나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는데도 마치 이미 알고 있었기라도 한 듯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 으로 신형을 멈추었다. …… 그곳은 커다란 천막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서 그 커다란 천막 속에서 흘 러나오는 밝은 불빛이 비춰져서 그들의 신형이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주완청이 먼저 다소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후에 악채릉을 향해 입을 열어 다소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악 소저, 보아하니 항상 바쁘시군요? 그 문인천상이라는 녀석이 그렇게도 좋으신가요? 평 소에는 그녀석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으려고 하더니 지금은 웬 바람이 불어서 한밤중에 어디로 가는 거죠?" 주완청은 자신의 곁에 있는 두 오라비를 의식한 듯 겉으로는 존칭을 쓰고 있었지만 말끝 마다 비아냥거려서 ㄷ저히 그냥 뜨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평소에는 문인천상 의 앞에서 상 오라버니라고 상냥하게 불러 주던 그녀가 이제는 문인천상 그녀석이라고 거칠 게 불러대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물론 높은 허공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그야말로 대낮보다도 훤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미 그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안색을 변화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묵묵히 아래쪽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지금 문인천상의 몸 아래에는 짙은 구름이 형성되어 있어서 비록그는 아래쪽을 내려다볼 수 가 있지만 아래쪽의 사람들은 설사 대낮이라고 해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가 없는 상황 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악채릉은 주완청이 실로 심하게 모욕적인 말로써 그녀를 대했지만 그러나 의외에도 제법 침착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입을 열며 대꾸하고 있었다. "주완청! 나는 아직 너를 만난 지 얼마 디지 않는 상태이지만 그다지 너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 네가 만일 너의 두 오라비를 믿고 있다고 해도 일단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기 우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싶다!" 주완청은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싸늘하고 고요한 태도에 다소 기가 질린 듯이 팔짱을 풀고 한숨을 내쉬며 변명하듯이 입을 열어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이 틀림없이 나의 올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와 같은 녀 석에게 너무나도 깊이 빠져 있는 것 같으므로 그런 말을 했던 거예요. 원래 우리 모두 같은 편으로 서로 도와야 하는데 이와 같은 말다툼을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요?" 악채릉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제멋대로 지껄이는구나! 네가 만일 너의 두 오라비와 합공을 하 여 나를 이길 수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오산이었다고 내가 미리 말해 두겠다! 나는 비록 사전에 너의 두 오리비들 가운데 하나와 혼인을 하도록 약속되어 있는 사람이 지만 아직은 정식으로 정혼을 한 사리도 아니고 너의 올케도 아니다. 그런데 네가 감히 나 에게 그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만일 내가 지금이라도 크게 화가 나게 된다면 너희들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냉랭하게 말하는 악채릉의 전신에서 일순 차가운 무형의 살기가 흘러나오자 주완청은 즉시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하고 두려운 듯이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보고 이제까지 뒷짐을 지고 묵묵히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주원헌이 악채릉을 향해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악 소저, 나의 누이가 그대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은 확실히 잘못이오. 그녀는 감히 당신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하다니 문책을 당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소저의 지금까지의 행동에서도 다소간의 문제점이 있었다는 것 을 시인해야 할 것이오." 악채릉은 주씨 형제의 첫째인 주원헌이 그와 같이 말하자 다소 싸늘한 기색을 누그러뜨리고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는 확실히 그 동안 당신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었다는 것을 인정하겠엉. 우 리는 사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혼인의 약속이 웃어른들 사이에서 맺어져서 비록 이번에 처음으로 만났었다고는 하지만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내가 좀더 당신들에게 관심 을 기울여 주었어야만 했었을 것이예요. 그러나 나는 미처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이 처음일 테니까요." 주원헌은 악채릉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자 미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저께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이미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고 생각 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상관도 없소이다. 우리가 소저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마음이지 행동이 아니외다."악채릉은 즉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의 마음이 잘못되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죠?" 주원헌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다음에 입을 열어 말을 계속했다. "원래 우리는 두 사람의 혼사 문제는 비단 근래 들어서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가끔씩 거론되기도 했던 것이었소. 그것은 즉 문인가의 전재산을 모두 흡수하고 우리 아버 지가 관리하게 된다면 높으신 분들이 그 지위를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구파일방 가운데 의 한 곳과 우리 가문을 사돈 관계가 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소. 그것은 강호의 장래를 설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뿌리가 되는 것이므로 틀림이 없는 내용이었소. 그런데 기실 우 리 아버지가 수년 전에 문인가의 전재산을 모두 흡수하지 못하자 지금에 이르러 혼사 문제 가 정식으로 거론되게 되었던 것이오." "……" "문인가의 그 어린 녀석을 잘 구슬려서 남은 재산을 모조리 토해내게 만들어야 하고 또한 그녀석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야 하는데 그 일을 당신의 부친인 악 대협께서 도와주시기 로 하면서 당신은 자연스럽게 나와 혼인을 하게 되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던 것이오. 사 실 알고 보면 당신은 결국 문인가의 커다란 재산을 이어받게 되는 나의 부인이 되는 것이므 로 그다지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닐 것이오." 악채릉은 이때 다소 멍한 표정으로 그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주원헌은 그녀가 자신의 얘 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고 기운이 나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긴 그야 물론 그 전재산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관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겠 지만, 하하, 원래가 그 문인가의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당신도 이미 들었겠지만 나의 부친께서는 그 어린 녀석에게 무려 은자 일천만 냥이나 달라고 하셨었소. 틀림없이 그것도 가장 적게 잡은 금액이었겠지. 내가 만약 그것을 관리하게 되면 대락 일 이 할은 나의 몫이 되는 셈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일할이라고 해도 무려 은자 일백만 냥이나 되는 것이니 어찌 부자가 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당신네 화산파가 비록 많은 제자 들이 있고 전통이 있는 문파라고는 하나 실로 그와 같은 많은 돈을 만질 수는 없었을 것이 오."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그 숨겨진 재산 얘기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 아닌가요? 문인 공자도 그렇게 말했고 모두가 그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요?"주원헌은 그 말을 듣자 잠시 안면을 크게 일그러뜨리면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이윽고 한숨을 크게 내쉬며 대답했다. "사실 거기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문인가의 곳곳을 수색하 게 되면 반드시 숨겨 놓은 재산이 어느 정도는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한 그 어린 녀석이 아까 거짓말을 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나는 이번에 반드시 우리가 거대한 재산을 취하게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오. 아니 설사 우리가 그 어린 녀 석에게 재산을 조금도 얻지 못하게 된다고 칩시다! 우리의 혼인은 이미 높으신 분들이 위 에서 결정하신 사항인데 아무려면 어떻겠소? 우리 아버지가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내가 거 지의 아들이 된다고 해도 그대는 그 거지의 며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악채릉은 그 말에 심한 모욕을 느끼는 듯했으나 다소 감정을 억눌러 참으려 대꾸했다. "나는 돈 때문에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아니니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주원헌은 이에 기세가 올라서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혼인은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겠구려! 핫핫, 소저는 이 번의 일에 대해서 높으신 분들이 갖는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시오? 돈? 핫핫핫, 천 만에! 그것은 아니오. 그분들은 이미 천하에서 많은 돈을 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다 소의 돈도 중요하지만 가장 바라는 것은 이번의 일이 가장 은밀하고도 명분있게 처리되었 으면 하는 것이라오. 따라서 내가 단정하지만 비록 우리가 이번에 돈을 흡수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높으신 분들에게서 버림을 받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즉 그것은 우리는 앞으로 행복하게 혼인을 해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오." 말이 끝나자 주원헌은 매우 의기양양해져서 마치 이미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능글맞은 시선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 악채릉은 찬바람에 백의(白衣)를 휘날리며 그러한 주원헌의 시선을 받고도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았으며, 대신 주완청이 다시 나서서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악 언니, 내가 아까는 정말로 철없이 떠들어서 미안했지만 저는 정말로 언니가 저의 올케 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것은 제가 언니를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 예요." 주원은은 그것을 보고 매우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옆에 서 있는 주원학을 돌아보며 한 마디를 했다. "학(鶴)아, 헌데 너는 왜 계속 그렇게 말없이 서 있기만 하느냐? 이분 악 소저는 이제 앞 으로 너의 형수가 되실 분인데 마땅히 너도 한 마디쯤의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핫핫 핫, 네가 만일 너의 형수를 보고 나에게 질투가 난다면 나는 나중에 신형을 써서 너에게 제법 근사한 신부감을 마련해 주기로 하겠다. 네가 만약 맏이로 태어났었다면 이 일은 거꾸 로 되었겠지만 이미 기왕에 내가 맏이 태어난 것이니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니냐?"악채 릉은 주원헌이 그와 같이 거칠고 저속한 얘기를 하자왠지 절로 얼굴이 붉어져서 난처한 표 정이 되었다. 주원학이 이에 가볍게 화를 내며 말했다. "형님! 나는 비단 질투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수될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소. 형 님께서는 내게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실로 너무나도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오?" 주원헌은 아우가 대들었으나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대꾸했다. "좋다, 좋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고 치지. 그러나 너는 어째서 그렇다고 하면서 아직도 너의 형수될 분에게 한 마디의 인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냐?"주원학은 그 말을 듣자 잠시 머뭇 거리더니 이윽고 악채릉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생이 잠시 앞으로 형수되실 분에게 결례를 해드려서 미안하오. 앞으로 지속적인 지도 편달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악채릉은 이에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나는 아직 그대의 형수가 된 것은 아니니 그와 같은 인사를 차릴 것은 없어요. 그보다 나 는…… 당신들이 아까 말했던 나의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점에 관해서 그 까닭을 듣고 싶어 요." 악채릉은 비록 여태까지 긴 얘기를 들었지만 정작 그 대답은 시원하게 듣지 못했었기 때문 에 다시 물어본 것이었다. 그 말에 대해서 주원헌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소저, 그와 같은 말은 신경쓰지 마시오. 나는 이제는 다시 그와 같은 말을 하지 않겠소. 이 미 소저는 나의 안사람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나는 아 무래도 상관이 없소이다."그런데 이때 주원학이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 었다. "아니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나중에 두 분이 혼인을 하더라도 중요한 사항이 될 것 같으 므로 일단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이외다."주원헌이 주원학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학아! 너는 이미 내가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을 했는데 어째서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냐? 너는 혹시 나의 좋은 일에 훼방을 놓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냐?" 주원학은 그래도 지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오! 내가 어째서 이처럼 훌륭한 형수님을 모시게 되는 것을 싫어하겠소? 하지만 나는 만일 형님께서 혼인식을 올리고 난 이후에도 악 소저께 그와 같은 의심을 품고 있는 상황이 라면 차라리 지금 말을 해서 따리조 밝혀 놓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이를 테 면 악 소저께서 오늘 낮에 마차 안에서 그녀석과……" 순간 주원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발 닥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비록 주원학이 그 때문에 말을 도중에 중단하기는 했어도 이미 악채릉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대강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악채릉은 안색이 싸늘하게 변해서 물었다. "혹시 내가 마차 안에서 문인 공자와 이상한 짓을 했을 것이라는 말인가요?" 주원학은 악채릉이 자신을 향해 그와 같이 물어 오자 이미 자신이 그와 같은 얘기를 꺼냈 던 잘못이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런 말은 아니올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아까 오후에 슬며시 악 소저가 타고 계셨 던 마차의 뒤에 숨어서 안을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소저께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소저께서 유달리 그 어린 녀 석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고 다시 그녀석에게 화산파의 무학까지 전수해 주었다는 사실입니 다.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말이지요."악채릉은 순간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넋나간 듯이 말했다. "당신들이 감히…… 숨어서 보고 있었다고요?" 이때는 이미 쏟아진 물이라고 생각했는지 주원헌도 말리지 않고 있었는데, 주원학이 다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것은 솔직히 소저께서도 우리를 나무라실 일이 아닙니다. 기실 소저께서는 이미 어제부 터 그 어린 녀석과 함께 있었는데, 우리 형님께서는 장차 소저의 남편이 되실 사람으로 어 찌 한 번쯤 두 사람의 사이를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저께서는 실로 우리를 나무라 실 일이 아니라 바로 그런 친근한 태도를 보이셨던 자신을 책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마도 당시 마차가 모래바람 속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이들 주씨 남매들이 마차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악채릉은 일순 주원학에게서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미안한 마음 대신에 오히려 내심 깊은 곳 에서 문득 분노의 불길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기실 당시 그녀의 마음이 상당히 문인천상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도를 벗어 나는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설령 악채릉이 거기에서 마음을 절제하지 않고 문인천상에게 순결이라도 바쳤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들이 감히 그것을 책할 자격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악채릉은 마치 자신에게 고이 간직되었던 소중한 추억이 추악한 자들에 의해 산산히 짓밟 혀 버린 것 같은 느낌에 그야말로 전율했다. 비록 당시에는 그런 심정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 생각해 보니 차라리 이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순결을 그에게 바치지 않은 것 이 한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악채릉은 문득 현재의 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한 번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지 금 자신이 결코 감정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내심탄식하며 입을 열었 다. "나는 결코 아무 것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어요. 설사 마음속으로라도 그랬어요. 그러니까 내가 구태여 그와 같이 자신을 책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요?" 주원학은 조금 전에 악채릉이 크게 경악하고 분노하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감히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러나 이때 문득 주원헌이 냉랭하게 안색을 굳히면서 악채릉을 향해 싸늘하게 입을 열었 다. "당신과 나의 혼사는 이미 어쩔 수 없이 결정된 것이오. 그런데 구태여 그와 같이 나약하 기만한 책벌레 녀석을 끝까지 마음에 두고 있을 필요가 있겠소?" 악채릉은 마음이 냉랭해졌다. "그래 당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죠?" 주원헌은 잠시 생각하다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다만 당신이 이 자리에서 그 어린 녀석이 후레자식이라고 세 번만 큰 소리로 말해 준 다면 다시는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악채릉은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냉소하며 말 했다. "당신은 나를 잘못 보았어요. 나는 결코 이제까지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지만 또 한 남을 함부로 비방하지도 않는 사람이예요. 문인 공자…… 그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들이 제거해야 할 적이예요. 아마도 내가 언젠가는 그를 제거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예요. 그러 나 기실은 그의 성품은…… 당신들보다는 훨씬 훌륭해요. 나는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지 만 차라리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괴로운지 몰라요. 이거이 나의 마음이예 요. 당신은 앞으로 이 일을 가지고 어른들에게 떠들어서 문제삼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도 록 하세요!" …… 악채릉의 말은 매우 비장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마을 하고 나서도 그녀의 전신에서 무형의 살기가 물씬물씬 풍겨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주원헌은 그 기세에 다소 압도되어 교활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저께서 그와 같이 양심에 꺼리는 것이 없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오. 기실 내가 조 금 전에 요구한 것은 장난에 불과했소. 소저께선 신경쓰지 마시고 잊어 주시면 고맙겠소. 사 실 말이지…… 소저는 일 때문이었지만 그 어린 후레자식과 함께 이미 하루 밤낮을 보냈었 는데 내가 그와 같은 확인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겠소? 하하하…… 소저! 이제 제발 노화를 푸시오. 소저께서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갑자기 우리들의 사이가 멀어진 느낌이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앞으로 한 가족이 될 사람들이 아니겠소?" 악채릉은 주원헌의 그 말을 듣자 원래는 그들이 서로 짜고서 그녀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던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주완청은 처음에 운을 떠보고 주원헌은 달래며 주 원학은 사안을 제기하고 그 뒤를 이어 주원헌이 마무리하는 식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기실 이 주씨 남매들의 부친인 주운양은 그다지 무공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세력가도 아니 었는데도 높은 사람들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으니 그 가운데에는 주운양의 처세 능력이 뛰 어난 점이 돋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원인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주씨 남매들이 그만큼 교활하다는 것은 부친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는데, 악채릉은 그러한 그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자 마치 독사들의 시선을 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전신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기왕에 그녀는 마음 을 정했고 상황이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숨을 내쉬며 대 꾸했다. "당신들이 다시 그와 같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나는 이미 대세에 순응하기로 결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들의 뜻대로 될 거예요. 당신들이 나의 청백(淸白)을 의심하지 않는다 면 내가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어요?"이에 주완청이 매우 기쁜 표정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언니! 언니의 그와 같은 마음은 우리 주씨 가문과 언니네 화산파에 동시에 커다 란 복을 가져다줄 것이예요. 우리 주씨 가문은 앞으로 화산파라는 배경을 얻게 되는 것이 고 또한화산파는 높으신 분들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는 것이고, 게다가 다른 막대한 이익도 함께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자, 언니! 우리 여기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잠시 자리를 옮겨서 함께 다과라도 나누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악채릉은 이미 이들 남매들에 대해서 심하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주완청이 자신의 손을 잡아 서 한쪽으로 이끌자 그녀는 이내 그 손길을 가볍게 뿌리치며 다소 냉정한 표정으로 대꾸했 다. "아니야! 나는 지금 즉시 우리 아버님을 뵈어야 하기 때문에 그대들과 한가하게 얘기를 나 눌 수가 없는 실정이야. 그런 얘기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지. 지금은 아직 상황 이 불확실한 때이기도 하니 우리는 그때 다시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악채릉이 손길을 뿌리치자 주완청은 다소 멈칫하다가 안광을 차갑게 빛내며 소리쳐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우리는 앞으로 한 집안 사람들이 될 것이 아닌가요?"그러나 악채릉은 이미 신형을 움직여서 커다란 천막 쪽을 향해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고, 그러한 주완청의 얘 기에도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희미하게 내비치는 천막 속의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백색의삼을 걸친 모습은 얼핏 몹시 초 췌하게 느껴져서 마치 어둠 속을 심하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 어두운 하늘의 상공 위에서 문인천상은 조용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이제까지의 그와 같은 광 경들을 다 보고 난 뒤에 이윽고 악채릉이 그 커다란 천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을 보고서야 비로소 시선을 돌려 신형을 다른 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실 말하자면 오늘밤 그에게는 조금 전의 그러한 광경들을 지켜보는 일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 문인천상이 지금 경공술을 전개하여 어두운 상공 위를 소리없이 가르며 나아가는 광경은 얼핏 생각하기에도 보통 사람들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구름과도 같이 생긴 기류는 여전히 그의 발 아래에서 파도처럼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토록 그의 신 형이 빠르게 공간을 이동해 가고 있는 상태인데도 당연히 생겨나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그 흔한 파공음조차도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천막들이 있는 곳에서 떠나온 지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시녕이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대체 그가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쉽게 파악할 수가 없게 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와 같이 빠르 게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인천상 본인은 틀림없이 자신의 목적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다시 그렇게 얼마 동안 나아갔을 때 문득 바람이 멎고 조용한 기운 이 흐르는 작은 야산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문인천상은 그 야산들의 가운데쯤에 작은 분지와도 같은 공지가 있고 또한 그곳에 지금 작은 화광(火光)이 출렁거리고 있는 것 을 목격하고는 서서히 신형을 멈춰세우기 시작했다. …… 바야흐로 그가 목적하던 장소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 화톳불. 작은 공지와도 같은 땅 위에 마른 장작더미를 가득 쌓아 놓고 불을 질렀기 때문에 바람이 거의 일지 않는 조용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화광이 크게 충천하여 마치 거대한 뱀의 혓바 닥처럼 무서운 불길의 기둥이 이러지러 출렁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다소 건조한 느낌을 주는 가을철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거대한 불길은 자칫 심한 산 불을 일으키게 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그와 같은 불길을 일으킨 사람들은 조금도 그러한 사태를 염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공자의 한쪽 옆에는 그 사람들이 마치 작은 산과도 같이 마른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불길 을 더욱 일으키기 위해 불길 속에 장작들을 마구 던져넣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의 태도는 다분히 신경질적인 점이 엿보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거 우리가 그녀석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크게 불 을 질러 놓는다고 해도 혹시 전혀 소용이 없는 일이 아닐까?" 사람들 가운데 몹시 화가 난 듯한 표정의 노인 하나가 마침내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손에 들려 있던 마른 장작 하나를 저 멀리로 내던져 버리며 입을 열어 내뱉자 바로 그 노인의 반 대편에서 역시 불길 속을 향해 마른 장작을 던지던 아주 슬픈 표정의 노인이 다소 울먹이 며 말을 받았다. "둘째형!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여태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반드 시 잠시 후면 이곳에 나타나게 될 것이오. 게다가…… 둘째형이 방금 전에 말한 그녀석이라 는 말은…… 으으, 그것은 정말로 있을 수가 없는 말이오. 그는 비록 나이는 일지만 엄연히 우리의 주인(主人)인데 어떻게 감히…… 감히 그녀석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겠소?"그 노한 표정의 노인은 슬픈 표정의 노인이 처음 입을 열 때에는 안색이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나중 에 자신이 말한 그녀석이라는 말에 대해서 따지고 들자 이내 더욱 화가 치밀어오르는 듯 이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차마 자신이 말했던 그녀석이라는 말에 대해서 옳다고 우길 수가 없었던지 잠시 참으면서 생각하다가 다시 소리쳤다. "뭐라구? 그가 여태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겨 본 적이 없다구?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그는 벌써부터 나타나겠다고 하고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우리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냐? 설마…… 설마하니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노한 표정의 노인은 일시 분노했던 기운을 한꺼번에 내쏟아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중간중 간에 말까지 다소 더듬게 되었다. 그렇다! 기실 바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 전에 난주성의 남창주루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도액오선 등이었던 것이다. 제15장 분심이용(分心二用)의 요결(要訣)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도훼선이 다시 엉엉 우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대꾸했다. "둘째형의 그와 같은 말은 또 틀린 것이오. 그는…… 그는 기실 오늘밤에 만나자고 그랬 지 그우리와 자정이 되기 전에 만나자고 하거나 혹은 자정이 지난 다음에 만나자고 하는 등의 구체적인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소. 따라서 그가 오늘밤 날이 새기 전에만 나타나면 되는 것인데 어째서…… 어째서 둘째형은 반드시…… 반드시 그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 는 것이오? 오히려 잘못은 불과 몇 시진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그와…… 그와 같은 불 평을…… 불평을 늘어놓는 둘째…… 둘째형에게 있지…… 있지 않겠…… 않겠소……" 이 도훼선의 말은 평상적인 말을 하는 데에는 거의 더듬지 않는 것이었으나 일단 그 어조가 지극히 슬픈 듯이 잦아들 때에는 그야말로 듣기 어려울 만큼 더듬어서 더욱 더 슬픈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화난 표정을 하고 있는 도패선은 원래가 급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는 데다가 자신을 추궁하 는 그와 같은 듣기 어려운 말을 듣게 되자 마침내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이윽고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빌어먹을! 알았다구, 알았어! 나는 셋째 네녀석의 목소리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어! 빌어 먹을! 어쩌자구 그토록 심하게 징징 짜고 우는 것인지…… 확실히 너의 말대로 그 우리 주 인에게도 잘못이 없지만 나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저기에 있는 두 녀석이 우리에게 잠시 공갈을 친 것 같단 말이야. 그녀석들은 마치 그가 자정이 되기 전에 나타날 것처럼 말을 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찍부터 이와 같은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는……" 이 도액오선은 기실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억지고집들도 강한 사람들이었는데, 도패선은 생각하기에 말로서는 도저히 셋째인 도훼선을 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슬쩍 도훼선의 말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을 걸고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도패선이 그와 같은 말을 하면서 은근히 노려보고 있는 불길과 다소 떨어진 쪽에는 각각 일신에 흑의와 백의를 걸치고 있는 두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문인천상의 주위를 호위하며 따르던 장원의 하인들로 도액오선에 게 문인천상의 말을 전하기 위해 떠나갔던 엽노와 화노였다. 이 엽노와 화노는 그저 한쪽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도패 선이 자신들을 향해 화살을 돌리는 것을 보고 이때는 감히 방관할 수만은 없어서 흑의노인 화노가 즉시 입을 열어 느릿하게 대꾸했다. "허허, 우리는 아까 그저 오늘밤에는 소주인께서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일 뿐이 었지 결코 그와 같은 암시를 남기지는 않았었소이다. 그와 같은 일은 이미 저 셋째분께서 도 인정하고 있는 바가 아니오? 다만 여러분께서는 좀더 진중하지 못하고 소주인님을 한시 라도 빨리 뵙기 위해 그와 같이 불을 크게 놓고 있는 것이나…… 허허헛! 실로 소주인님께 서는 만약 자신이 나타나실 때라고 하면 아주 작은 모닥불을 피워 놓는다고 해도 여러분들 을 찾아내지 못하실 분이 아니오." …… 이 화노의 말은 정말로 조금의 거짓말도 들어 있지 않았고 게다가 경우에 어긋나는 점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전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말일고 해도 그 말은 일단 크게 화가 나 있는 도패선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족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도패선은 일순 화노의 말을 듣고 그의 말 가운데에서 어떤 허점이라 도 찾아내려는 듯이 시뻘개진 얼굴로 잠시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이윽고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서 어느새 화노의 앞에 이르러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공중으로 높이 치켜드는 것이 아 닌가! "뭐라고? 우리가 진중하지 못하다고? 빌어먹을! 이녀석이 그래 우리들을 우습게 봤군 그래! 이봐 셋째! 자네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작정인가? 이녀석이 감히 우리에게 진중하지 못하다는 감히…… 감히 그 따위의 심한 말을 할 수가……" 도패선은 나중에는 도저히 분을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더듬거렸다. 화노는 이때 도패선의 한쪽 존에 공중 높이 쳐들려서 그야말로 시뻘겋게 변한 낭패한 기색 으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장부는 죽음을 당할지언정 모욕을 당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그가 그러 한 상황에서도 잠시 참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소주인인 문인천상의 낯을 생각했기 때 문일 것이었다. 실로 이 도액오선이라는 다섯 명의 늙은이들은 마치 천둥벌거숭이처럼 도무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화노는 비록 간신히 참고는 있었지만 그의 우수는 어느새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자루에 가 서 닿고 있는 상태였는데, 도훼선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그 슬픈 어조로 대꾸했다. "둘째…… 둘째형, 그는…… 그는 결코 우리를 우습게 생각한 것이 아니오. 사실…… 사실 우리는 그 주인이 곧 나타난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지나치게 흥분하여 서둘 렀던 점이 있었소. 그가 진중하지 못하다고 한 말은 사실인데 어째서…… 그가 우리를…… 우리를 우습게 생각했다는…… 것이오……"도패선은 비록 도훼선의 말을 듣기가 싫었지만 혹시나 그의 입에서 자신을 변호해 주는 말이라도 나올까 하여 얼굴을 찡그리고 끝까지 듣 고 있었는데, 역시 나중의 말에도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얼굴을 다시 시뻘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다섯째, 너는…… 너의 생각은 어떠냐?" 다섯째인 도멸선은 역시 한쪽에서 장작을 하나씩 불길 속으로 던져넣고 있다가 문득 그와 같은 질문을 받고는 크게 놀라서 움찔한 기색이 되었다. 기실 도멸선은 특별히 도패선을 두 려워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시 도패선의 그와 같은 거칠은 질문을 받고 들고 있던 장작을 엉뚱한 곳으로 날려 버린 도멸선은 안색이 극히 초조하게 변해서 움찔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형님…… 둘째형님의 말씀은 옳은 것이오. 사실 그 후레자식과도 같은 두 녀석은 즉시 혈 도를 제압해서 나무꼭대기에 매달아 놔야 할 것이오."비록 무슨 이유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지만 도패선은 일시 그와 같은 동조하는 말을 듣게 되자 크게 득의양양한 기색 이 되었다. "크하하하핫! 이 후레자식들을 나무에 매달아 놔야 한다구?"일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앙천 광소와 함께 크게 소리친 도패선은 이어 고개를 돌려 다시 화노를 바라보고는 음침하게 웃 으며 소리쳐 말했다. "흐흐흐, 이봐! 너도 들었느냐? 나의 모든 형제들이 지금 너희들을 모조리 나무에 매달아 놔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감히 이 일에 대해서 대항할 생각이라도 있단 말이 냐?" 이 무렵 강호상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욕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후레자식이라는 말이었 다. 그 말은 상대의 부모를 모욕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쉽게 노화를 일으키곤 했었는데, 이 화노는 비록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노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푸른 힘줄이 돋을 만큼 힘을 주어 잔경련을 일으키 며 짧은 한숨과 함께 더불어 입을 열었다. "나는 솔직히 나이도 여러분들보다는 적게 먹었고 또한 무공이 형편없이 부족하니 그와 같 은 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을 것이며 정말로 나무에 매달리게 되어도 좋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바로…… 바로 소주인님의 전령사자와도 같은 사람들인데 감히 당신들이 우리를 이와 같이 모욕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소주인님을 모욕하는 것이 되지 않겠소? 나 는 다만 그 일이 두려울 뿐이외다." 이 화노는 확실히 늙고 매운 생강처럼 노련하게 자신의 처지를 알고 상황에 필요한 말을 적 당하게 할 줄을 알고 있었다. 화노는 비록 수년간이나 하인의 일을 해 왔지만 이미 그 전 에 오랫동안 강호상에서 굴러먹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자들이 양심이 있다면 자신의 말에 할 수 없이 손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노의 그와 같은 생각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었지 지금과 같이 기이한 상황에서 만난 괴상한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화노가 그와 같이 말하자 도패선은 일시 화노의 얼굴을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다음 순간 음침하게 웃으며 느릿하게 그를 향해 남지 한 손을 내뻗었다. "뭐라구? 감히 너희들과 같은 녀석들이 우리 주인의 전령사자라고 자칭할 수가 있단 말이 냐?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나중에 우리 주인에게 벌을 받는다고 해도 흐흐흐, 상관하 지 않을 것이다." 화노는 이 도패선이 자신의 말을 듣고는 손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것을 보고 일순 경악했다. 기실 전날에 주운양이 남창주루에서 도액오선에게 혈도를 제압당했을 때에 이 엽노와 화노 는 일단 문인천상에게서 모종의 지시를 받고 난 다음에 한쪽에 인밀하게 몸을 숨기고 유심 히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무학이 놀라움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주운양이 그렇게 당했듯이 한 번 이들에게 혈도를 제압당하게 되면 꼼짝없이 몇 시진 동 안이나 시체처럼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문인천상의 지시를 받고 확실하게 도액오선과 문인천상을 만나게 해주어야 할 위치의 그들로서는 도저히 나무에 매달리게 되어 그와 같 은 일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도패선이 손속을 펼치려고 하자 화노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즉시 우 수에 잡고 있던 칼을 칼집에서 발출하여 순간적으로 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광경은 마치 일순간에 흔들리던 화노의 허리춤에서 검은 도광(刀光)이 물샘틈도 없는 그 물처럼 펼쳐져 나와 도패선의 전신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씌어 가지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이 화노는 문인가의 하인으로 들어가서 생활하기 전에는 특이하게도 패도적인 위력보다는 마치 검법에서 보듯이 현란한 변화를 일으키는 도법을 터득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성명적하 으로 삼고 있었는데, 과연 그 도법의 위세는 평범한 것이 아니어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능란한 무예임을 느낄 수가 있게 했다. 도패선은 이때 비록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여유있게 공격해 들어가 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화노의 도법이 워낙에 변화막측하게 펼쳐져 나오자 일시 감히 태만하 지 못하고 나아가던 손속을 멈추며 주춤하는 것 같았다. 아니 기실 말하자면 이보다 조금 전에 도패선의 좌측에서 느닷없는 푸른 빛깔의 검광(劍光) 이 마치 섬전(閃電)처럼 일어서 도패선의 옆구리로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다 름이 아니라 그 느닷없는 쾌검의 주인은 바로 엽노였다. 도패선은 비록 화노의 도법이 현란 하기는 해도 뒤를 이어 엽노가 갑작스럽게 옆에서 쾌검으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손길을 옆으로 돌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엽노의 그 쾌검은 비록 화노의 도법보다 다소 늦게 발출되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먼저 상 대의 옆구리로 쇄도해 들어갔다. 엽노는 원래 한쪽에 조용히 앉아서 가능한 한 도액오선 등의 행동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으 려고 작정하고 있었으나 지금과 같이 도패선이 직접적으로 두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하는 수 없이 화노의 공격에 손발을 맞추어서 기습적으로 도패선의 옆구리를 공격 해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물론 엽노의 이러한 공격은 상대를 살해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저 가능하다면 상 대에게 부상을 입혀서 자신들을 방위하려는 것이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비록 엽노 등의 생 각이 그러하다고 해도 상대인 도패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그저 약간의 부상을 당하는 것 이라도 용납할 수가 없는 입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실로 이 순간의 상황은 아주 공교롭게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양쪽으로부터 일시적 으로 공격을 받은 도패선은 부상을 입지 않고는 쉽게 그들을 제압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선 도패선은 한 손으로 화노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위하기 위 한 것으로 지금의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화노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어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나머지 한 손으로 두 곳의 공격을 모두 해소시켜야 하는 것인데, 일단 엽노의 쾌검을 피한다고 해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화노 의 공격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또한 반대로 이버에는 화노의 공격을 봉쇄하려고 하다 가는 여지없이 엽노의 쾌검에 의해 옆구리가 관통되게 될 것이었다. 도패선이 만일 화노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저 신법을 펼쳐서 두 사람의 공격을 피하는 일이야 간단할 것이겠지만, 지금은 손에 들고 있는 화노 때문에 신법을 펴치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손을 쓰자니 엽노 때문에 곤란해질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화노와 엽노는 이미 무수한 강호의 경험을 겪었었기 때문에 공격을 해 가는 동안에 절로 자 신들이 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더욱 전력을 다하게 되 었다. 그러나 기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느닷없이 벌어진 공교로운 상황은 어이없게도 당사자인 도패선이 애초부터 노리고 있었던 회심의 작품이었음에랴 어찌 그들이 미리 알 수가 있었 겠는가? …… 화노의 현란한 도광이 마치 그물처럼 내리덮어씌울 듯이 하고, 엽노의 쾌검이 마치 먹장구 름 속을 꿰뚫는 한 줄기의 전광(電光)과도 같이 도패선의 옆구리로 파고들었을 순간, 도패선 은 처음에는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내 화노를 제압해 가던 손길을 거두어서 엽노의 장 검을 맞이해 갔다. 그렇다면 혹시 그의 머리나 전신은 마치 무쇠와도 같이 단련되어 있어서 화노의 그와 같은 모서운 위력이 담긴 칼을 맞고도 멀쩡하게 견딜 수가 있다는 말인가? 실은 그것이 아니었 다. 이 도패선의 손속은 얼핏 보기에도 매우 둔하고 느린 듯하였으나 기실은 아주 빨라서 손을 움직인다고 느껴진 순간에 이미 어느새 엽노가 노리고 있는 옆구리 부근에 이르러서 장검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순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엽노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며 그의 장검이 중간 부위에서 마치 엿가락처럼 우그러지고 끊어져 나갔는데, 그것은 이 도패선의 손바닥이 장검의 검날보 다도 견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그의 손속이 괴이할 정도로 빨라서 능히 쾌검을 펼 치고 있는 엽노의 장검의 옆면을 잡아서 공력을 주입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 었다. 이미 자신의 장검이 그와 같은 형편없는 모양으로 변해 버렸는데 그 장검의 주인인 엽노의 몸이라고 온전하게 성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장검이 심하게 우그러져서 끊어져 버 리는 순간에 이미 그의 신형은 심한 공력의 반탄력에 내상을 입어서 입 속으로 한 줄기의 선혈을 내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에 화노는 일단 도패선의 손과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된 것이므로 자신의 수십 갈래 의 도초의 변화 가운데 다만 한 가지라도 당황해 하는 그의 몸에 격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느닷없이 그의 가슴에는 마치 만 근이나 되는 거석이 일 시에 내리누르는 듯이 무거운 중압감이 느껴지면서 기운이 빠지고 의식이 몽롱하게 녹아들 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 그렇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화노의 멱살을 잡고 있던 그 한쪽 손이 느닷없이 무형의 기운 을 발출하여 화노의 전신의 혈도을 일시에 제압해 버렸던 것이었다. 기실 그와 같은 일은 누구나 생각하기 쉬운 일에 불과했으나 이 화노 등은 너무나도 다른 손을 의식하고 고정관념에 매여 있어서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치를 망각하고 착오 를 범했던 것이었다. 만일 학문을 배우는 데 있어서 착오를 범했다면 다시 한 번 그 문제에 대해서 도전해 볼 기 회를 갖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강호상에서의 실전에서는 물론 그와 같은 착 오는 왕왕 치명적인 것이 되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었 다. "윽……!" 제딴에는 안간힘을 다해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했었으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 는 한 줄기의 미미한 신음소리가 화노의 입 속에서 흘러나왔다. 이어 그의 물먹은 솜과도 같이 힘이 없어진 육신이 전신의 혈도가 제압당한 채로 허물어지듯이 엽노의 쓰러진 육신 위에 떨어져 내려 버리고 말았다. 화노와 엽노는 그제서야 실로 이 괴상한 노인들의 성격은 비로 괴이하지만 그 무공이 정말 로 믿을 수 없이 고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이미 때가 늦은 감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도액사선 등은 이미 미리부터 그와 같은 결과를 내다보고 있었다는 듯이 표정에 아무 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아까부터 그러한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도패선이 두 손을 툭툭 털고 나서 매우 득의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문득 이제까지 말이 없던 맏이인 도 상선이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둘째야, 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와 같은 호기를 다부리는구나! 그러나 기실 그들 은 말 그대로 우리의 주인의 하인들이기 때문에 우리로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 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는 일시적인 노화를 참지 못하여 그들을 그와 같이 만들었으니 …… 아아, 우리는 대체 무슨 낯으로 주인을 다시 대한다는 말이냐? 원래 우리는 이와 같 이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과연 우리가 주인을 다시 만나게 디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 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논해 보았어야만 했을 것이다."도상선의 얼굴은 항상 즐겁게 웃 는 표정이어서 얼핏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심각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 제법 그의 입에서 무거운 얘기가 흘러나오자 왠지 그가 정말로 맏이다운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때 역시 한쪽에서 장작을 던지며 묵묵히 장내를 바라보고 있던 도수선이 다소 멍청한 표 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꺼냈다. "실로 그와 같은 말은…… 그와 같은 말은 맞는 것 같소. 둘째형이 실수를 했다는 것은… … 그것은 원래 무공을 과시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추한 몰골만을…… 몰골만을 보인 셈이 오. 음, 그러니까 둘째형은 어째서 내부에 충격을 주어서 혈도만을 제압하려고 생각했으면 서도 그 쾌검을 쓰는 녀석의 내장을 뒤흔들어서 내상을 입게 하였느냐는 말이오. 게다가 그 칼을 쓰는 녀석의 얼굴도 성치 못해 보이는데, 이것은…… 그러니까 이것은…… 분심 이용(分心二用)의 요결에 있어서…… 그러니까 그 요결에 있어서 잘못을 범한 것이오…… 아니 아니지…… 그것은 둘째…… 둘째형이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요…… 따라서 그 와 같이 웃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더욱…… 더욱 멍청한 일이오…… 나는…… 나는 그러니까……"도패선은 도수선이 멍청한 표정으로 끝도없이 중얼거릴 것 같자 그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쳐서 그의 말을 잘랐다. "빌어먹을! 좋아! 내가 잠시 실수를 했다고 치자. 그런데 기왕에 이녀석들이 이 지경이 되 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다섯째! 네가 이녀석들을 나무에 매달자고 했었으니 이제 이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을 것이 아니냐? 어서 손을 써 보아라!"도패선은 확실히 도멸선이 가장 만만한 상대인 모양이었다. 자신이 가장 곤란한 상 황에 처하게 되면 주저없이 그 책임을 도멸선에게 전가시키고는 했는데, 도멸선은 과연 조 금도 반항하지 못하고 매우 초조하고 두려운 기색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애써서 대답하는 것 이었다. "나는 그럼 비록 능력은 없지만…… 능력은 없지만 공력을 주입시켜서 그녀석들의 내상을… … 내상을 치료해 보기로 하겠소." 도멸선은 일단 그와 같이 말한 이후에도 그 소심한 성격이 살아나서 일일이 주위를 살피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지를 조심스럽게 파악해 본 연후에 천천히 쓰러 져서 한꺼번에 포개어져 버린 화노와 엽노의 옆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기실 자신의 공력을 주입시켜서 다른 사람의 내상을 치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 니고 또한 자신의 갈고 닦은 공력의 일부를 다소나마 소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으나, 이 도멸선은 도패선이 거의 강요를 하다시피 지시를 하 자 두려움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도액오선은 결코 착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단 도멸 선이 그와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자신들의 책임이 줄어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고, 묵묵히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면서 은근히 기뻐하고 있는 눈치였 다. 그런데 마악 도멸선이 화노와 엽노의 곁에 이르러 손을 쓰려고 하는 순간 뜻밖에도 느닷 없이 한쪽에서 맑고 짤랑짤랑하는 소녀의 음성이 들려와서 그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잠깐 멈춰요! 일단 그와 같이 된 것은 그들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어째서 바보처 럼 그들의 내상을 치료해 주려고 하는 것이죠?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해 왔었 기 때문에 여태까지 우리를 고생하게 만든 문인 대가(聞人大哥)의 시종들을 본보기로 고통 스럽게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저는 차라리……" 그 음성의 주인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전날 도액오선과 함께 주루에 나타났었던 진아라라는 홍의소녀였다. 그녀는 지금 다른 한쪽에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평탄한 바위 위에 두터운 털가죽을 하나 깔고 앉아 있었는데, 장내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이윽고 길게 끌던 말을 이어서 계속했다. "차라리 지금 내상을 입은 이들을 한 번 불길 속에 던져 보자는 것이예요. 원래 우리는 지금까지 불길을 크게 일으켜 왔었는데 그것이 허망하게 사라지게 된다면 안 타까운 일이 아니겠어요? 게다가 그들은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다소 얼마 동안 불길 속에 들어가 있는다고 해도 그저 살가죽만 조금 그을릴 뿐이지 정작 생명에 지장을 주지는 않게 될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멋진 생각이 아니겠어요?" 진아라는 일단 그 말을 마치고는 흡사 가장 훌륭한 제안을 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것이 라는 자신을 하고 있는 듯이 오만한 듯한 시선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16장 꼬마숙녀의 정적(情敵) 화노와 엽노는 물론 이 순간에 전신의 혈도가 제압되어 있거나 심한 내상을 입고 있어서 몸 을 움직이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귀는 뚫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진아 라의 말을 모두 듣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결같이 경악하고 공포감에 질려서 내심 생 각했다. "실로 저 작은 아가씨는 얼굴도 아름답고 목소리도 예쁘지만 마음만은 마치 사갈과도 같아 서 도저히 그 생각을 추측할 수가 없는 것이로구나. 하긴 그와 같이대단하지 않은 계집아 이라면 감히 그와 같은 다섯 명의 노괴물들을 거느릴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화노와 엽노는 그 소녀의 말이 그저 철없는 계집아이의 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다섯 명의 그 노괴물들이 다소 그녀를 설득하여 다른 방도를 찾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실로 세상에는 예외가 있는 것이어서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의 앞에 괴이한 성품의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 었다. 당연히 진아라의 의견에 대해서 반대를 표시할 것으로 생각했던 그 도액오선은 다음 순간 반대는커녕 일제히 얼굴에 공손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옳 으신 말씀입니다. 실로 진 소저의 말씀은 하늘과도 같은 것이니 누가 감히 거역할 수가 있 겠습니까? 즉시 분부대로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그것은 도액오선 가운데에서도 맏이인 도 상선의 말이었다. 게다가 마치 그러한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도멸 선은 즉시 두 손을 뻗어서 각기 한 손에 한 사람씩 화노와 엽노를 집어들고는 거대한 불 길이 아직도 허공 높이 솟구치고 있는 화톳불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 이 화노와 엽노는 기실 문인가에서 하인의 노릇을 해 오면서 여러 가지의 일을 두루 해 보았던 상태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실로 그들은 오늘 자신들이 마치 꼬치에 꿰뚫려 진 고기덩어리처럼 불길 위에 올려져서 구워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였다. 조금 전에 그저 옆에서 관망하듯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 화톳불은 마치 거대한 난로처럼 그 들의 몸을 따스하게 덮혀 주었던 것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그 화톳불 은 그야말로 그들에게는 악마의 불길이 넘실거리는 지옥의 화마(火魔)나 다를 것이 없었다. 화노와 엽노는 그야말로 설마하고 있다가 그와 같은 일을 정말로 당하게 되자 실로 일순간 에 크게 경악하고 공포심에 짓눌려서 두 눈이 밖으로 튀어나와 버릴 것만 같았다. ……! 도멸선은 기실 성격이 매우 소심하여 일단 두 사람을 홧톳불의 곁에 데려가기는 했으나 감 히 쉽게 결단을 내려서 두 사람을 불 속에 던지지 못하고 주저하며 망설이게 되었다. 이때 는 장내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멸선은 마음이 초 조해지고 불안해진 나머지 느닷없이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화노와 엽노는 다시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풍기 시작했고, 틀림없이 도멸선이 다시 자신들을 원래의 자리로 다시 데려갈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그들의 그와 같은 기원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도멸선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다 못한 도패선이 그의 옆으로 다가들더니 즉시 두 사람의 몸을 집어들어서 그 거대한 불 길 속에 내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으악!) 엽노는 워낙에 과묵하고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화노는 비록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아혈이 제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두 눈만 찢어질 정도로 부릅뜨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을 당하고 있는 두 사람은 실로 귀신같이 괴상 한 도액오선 등을 내심 극도록 원망하고 저주하며 뒤이어 찾아오게 될 엄청난 열기와 그 고통을 생각하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 그런데 기이하게도 다음 순간에 두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내던져진 불길 속에서 뜨거운 열 기와 무한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도액오선이 그들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것은 그저 단순한 장난에 불과했던 것으 로, 일단 그들의 신형이 불길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에 다시 무공을 사용하여 신형을 되돌 려 놓아 주었다는 말인가?그것은 아니었다. 실로 그 두 사람을 불길 속에 구워 버리려고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서 지금 도액오선의 표정들도 하나같이 넋나간 듯한 것이었다. 화노와 엽노는 이미 자신들의 신형이 조용히 땅바닥에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그 토록 맹위를 떨치며 타오르고 있었던 화톳불도 흔적없이 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 로 안색이 변해서 고개를 돌려보다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소주인님께서 오셨군요!" 그렇다. 바로 문인천상이 그들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 나타나서 비단 거세게 타오르던 화톳 불을 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내상도 한 순간에 기적처럼 말끔히 치료해 주고 그 들을 땅 위에 조용해 내려놓아 주었던 것이었다. 지금 화톳불이 타고 있었던 자리 부근에 조용히 내려서 있는 문인천상의 얼굴을 보고 화노 와 엽노가그토록 반갑게 환성을 지르고 있는 이유도 알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 안 수모를 받고 있던 자식들이 이윽고 능력이 있는 부모를 만나게 된 심정일 것이었다. 이 순간에 도액오선 등이 문인천상을 향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에 단숨에 화톳불을 꺼 버리고 홀연히 흔적없이 나타나서 화노와 엽노를 구했던 그 놀라운 무공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제법 오랜만에 보고자 했던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멍청하 게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었다. …… 문인천상은 엽노와 화노가 잠시 양쪽의 표정을 살피며 머뭇거리고 있고 또한 도액오선 등 의 표정이 쉽게 바뀌지를 앉아서 이 침묵의 순간이 오래도록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이윽 고 하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는군요. 그래…… 여러분이 굳이 나를 찾아서 이렇게 은 거처를 떠나온 것은 혹시 무슨 볼일이 있어서입니까?"도액오선은 그 질문을 받자 이윽고 저마다 입을 열어 말하기 위해 입술을 가볍게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서로 말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던 그들이 정작 문인천상의 질문을 받게 되자 절 로 두려운 듯이 목을 움츠리고 말을 입으로 내뱉지 못하고 도로 삼키는 것이었다. 도액오선이 다시 침묵을 유지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이 미소하며 다시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하는데 문득 한쪽에서 진아라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들은 모두 나 때문에 이번에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예요. 아니 사실은 문인 대가…… 당신 때문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거예요."문인천상은 비록 처음에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막상 입을 열자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아라(阿羅), 너도 그 동안 잘 지냈느냐? 혹시 그 동안 공동파의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지는 않았느냐?" 진아라는 문인천상이 자신의 말에는 전혀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소 눈 살을 찌푸리다가 대꾸했다. "공동파의 사형 사백들은 전혀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들은 저에게 한 가지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죠."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자 문득 기이한 예감을 느낀 듯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니 그건 대체 뭐냐?" 진아라는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문인 대가께서 이미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셨다는 소 식이죠. 그것 이상의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어요? 저는 바로 그러한 소식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이 다섯 분의 호위를 거느리고 이곳에 온 것이었죠." 문인천상은 기실 도액오선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얘기를 전날 목상 도장에게서 듣게 되었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곡절이 그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터였는데, 지금 진아라의 그와 같은 얘기를 듣고는 일순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훤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지극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아라에게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아니, 내가 정말로 장가를 갔었다면 너는 도대체 이곳에 와서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말이냐?" 진아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문인천상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다가 이윽고 아미를 찌푸리며 냉 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는 물론 무공이 당신보다 못하니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가 있겠어요? 다만 문인 대가 와 혼인한 그 여자는 아마도 이제는 나의…… 나의 정적(情敵)이 분명할 것이니 앞으로 내 가 잘 대해 주든 아니면 못살게 혼내 주든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문인천상은 진아라가 어이없게도 정적이라고 하는 말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일순 더욱 어 이가 없어졌으나 이내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하하, 어쨌든 네가 무사하게 지냈다니 그것으로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당신들은 정말로 아라의 뒤를 따라서 이번에 강호에 나오게 된 것이오?" 처음의 말은 진아라를 향해 한 말이었지만 나중의 말은 물론 다시 도액오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 말이었다. 이 도액오선은 마침 막상 문인천상을 만나게 되자 마음이 크게 긴장이 되어 초조하게 내심 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생각을 굴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문인천상이 느닷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자신들을 향해 물어 오자 금세 말문이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그 가운 데에서 도상선이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이…… 이미 아시다시피 우, 우리는…… 진 소절ㄹ 보호해야 하는…… 보호해야 하는 임 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우리는 비록 진 소저에게 여러 가지로 설 득을…… 설득을 해보았지만 그러나 어쩔 수가…… 어쩔 수가 없었소이다." 화노와 엽노는 한쪽에서 내심 고소한 표정으로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실 지 금 문인천상의 앞에 서 있는 도액오선의 행동은 다소 기이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기실 이 들 도액오선은 하나같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또한 하나같이 놀 라운 무예를 소유하고 있어서 세속의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않고, 게다가 모든 일을 제멋대 로 처리하는 것이 마치 천둥벌거숭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뇌괴물들이었는데, 지금 느 닷없이 문인천상의 앞에 서자 마치 호랑이 앞에 서 있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늘상 가지고 있는 특유의 표정마저도 잊어버리고 있는 상 태였던 것이었다. 이 화노와 엽노는 얼마 전에 문인천상의 기이한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복하지 않았 었다면 대체 천하에 이와 같은 노괴물들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좀 처럼 믿으려고 하지 않았었을 것이었다. 도상선이 어렵게 겨우 말을 마치고 나자 그 옆에 서 있던 도패선이 이윽고 참지 못하고 말 을 받아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공동파의 그 어린 녀석들이 감히…… 감히 진 소저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우리 는…… 우리는 할 수 없이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것이오. 주, 주인(主人)께서는 부디 이해해 주시오!" 이 도패선은 성격이 매우 급한 사람이어서 그와 같은 말을 하는 데도 목소리가 커서 마치 상대를 윽박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강호에 나오게 되었다는 얘기는 나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소. 하긴 이미 기왕에 나온 것이니 난들 이해하지 않고서 어쩌겠소?"……! 문인천상의 입에서 이해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순간 이제까지 매우 초조한 표정을 보이 며 크게 긴장을 하고 있었던 도액오선의 태도가 별안간 달라졌다. 화노와 엽노는 옆에서 그들의 표정이 매우 겁에 질려서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순식간에 환하게 변해서 득의양양하게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 역시 이들 도액오선은 마 치 원숭이와 비슷하여 도저히 그들의 심리를 추측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액오선 가운데에서 가장 성격이 소심하여 마치 금방이라도 죽음을 당할 것처럼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던 도멸선이 즉각 펄쩍 뛰어 웃으며 소리쳐 물었다. "정말이오? 주인께서는 정말로 우리에게 어떤 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오?" 문인천상은 이미 이들의 성격과 그 심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향해 미소 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당신들은 이미 기왕에 강호에 나오게 되었으니 잠시 동안 강호 구경을 한 뒤에 아라아 함께 공동산으로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오."도멸선은 이 순간 매우 기분이 좋아서 환 하게 웃고 있었으나 문득 문인천상이 얼마 후에는 다시 공동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자 이내 다소 풀이 죽어 버리고 말았다. 문인천상은 물론 한평생을 한 곳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좀더 강호에서 떠돌며 놀고 싶어하 는 그들의 심리를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워낙에 그들은 성격이 특이하고 세인들의 이목을 모으기에 충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이번에 공동파에서 구태여 이들을 강호에 내보낸 것은 문인천상을 유인하자는 술 책이었던 것이었다. 이때 도수선이 문득 입을 열어서 문인천상에게 물었다. "혹시…… 이러한 질문을 해도 되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그러나 이…… 이 일은 워낙에…… 워낙에 중대한……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 말은 말하자면 우리의 주…… 주인께서……" 이 도수선은 원래가 멍청하게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문인천상을 만나게 되자 더욱 멍청 하게 변한 모양인지 말을 하는 것이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횡설수설하게 중얼거리 고 있었다. 이에 도패선이 보다 못해 소리쳐서 말을 자르고 물었다. "우리의 주인께서 어쨌다는 말이냐? 도대체 말을 좀더 빨리 할 수는 없느냐?" 도수선은 원래가 정신이 흐릿하여 말을 하는 것도 빨리 할 수가 없었는데 느닷없이 도패 선의 그와 같은 고함소리를 듣게 되자 일시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모두 잊어버린 듯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고 멍한 눈알을 디룩디룩 굴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말이 없던 도훼선이 그 광경을 보고 예의 그 슬픈 듯한 음성으로 느릿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둘째…… 둘째…… 둘째형, 그는 원래가…… 원래가 그와 같이…… 그와 같이 정신이 흐 릿한데…… 둘째…… 둘째…… 둘째형은 어째서 그에게 그와 같은 말을…… 말을 하는 것이 오? 만일…… 만일…… 만일 내가 둘째…… 둘째형에게 그와 같이 말을…… 말을 한다면 …… 한다면 좋겠소?…… 우리는 모두 하나씩의 결점을 가지고 있는…… 있는데 둘째형이 유독…… 유독 그와 같이 넷째를 나무란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공평치 못한 일이…… 일이 아니겠소?" 이 도훼선의 말은 비록 그 말의 속도가 도수선보다는 다소 빠르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욱 심 하게 더듬고 있었고, 게다가 거기에 실로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진한 슬픔의 기운 이 담겨져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심한 부담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도패선은 더 군다나 성격이 워낙에 급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극심하게 가슴이 답답해져서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은지 일순간 가슴을 치더니 자신의 두 귀를 양손가락 으로 틀어막은 뒤에 한쪽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도훼선은 그것을 보더니 이어 도수선을 향해 입을 다시 열었다. "네…… 넷째…… 넷째야! 너는 이제…… 이제 상관…… 상관하지 말고 어서 하고…… 하 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하도록 해라. 원래…… 원래가 사람이 자기가 하고…… 하고…… 하고 싶은…… 싶은 말을 하지…… 하지 못한다는 것은……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어서…… 으으…… 으으으, 어서 말을…… 말을 해…… 해 보아라 ……"옆에서 듣고 있던 화노와 엽노는 비록 성격이 도패선만큼이나 화급한 것은 아니었지 만 실로 지금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야말로 얼마나 답답한지 속에서 불길이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도훼선은 그 간단한 말을 오래도록 질질 끌어서 더듬거리며 심한 감정을 섞어서 말을 하다가 이윽고 마지막에 가서는 정말로 눈물을 줄줄 흘릴 듯이 징 징거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보고 견디다 못해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그 끝도 없이 말을 길게 흘려내는 혓바닥을 뽑아 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실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세 명의 노괴물들이나 진아라, 그리고 심지어 문인 천상조차도 전혀 도훼선의 말에 답답해 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도수선은 원래 아까 자기가 하려고 하던 말을 도중에서 잊어버리고 말았으나 조금 전에 도 훼선이 워낙에 느릿하게 말을 하면서 다시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자 불현듯 그 하려던 말이 다시 생각나게 되었다. 따라서 도수선은 도훼선을 향해 고개 를 끄덕여서 대답한 다음에 이윽고 다시 문인천상을 향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 니다…… 나는 원래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잠시 잊었었으나 지금은 …… 지금은 또렷하게 기억할 수가 있습니……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지금부터 저의 말씀을, 아니 질…… 질문을 드리자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께서는……" 이때 진아라가 나서서 짧게 말을 자르고 물었다. "문인 대가께서 어쨌다는 거죠?" 기실 그녀는 워낙에 이들과 오랫동안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성격에 익숙해져서 그다지 이상할 것도 거북할 것도 없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 도수선이 질문을 하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자신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중간에서 말을 자르고 급한 마음에 물 었던 것이었다. 도수선은 이에 말을 잠시 중단하고 힐끗 진아라를 옆으로 돌아보더니 이윽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서 문인천상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지…… 지금…… 지금 진 소저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저는…… 저는 말을…… 좀 더 빨리하도록 하겠습…… 하겠습니다. 주…… 주인께서는 이것을 이해…… 이해해…… 주 시기를 바라…… 바라…… 바라면서 그럼 이제부터…… 이제부터 본격적인 질문을…… 질 문을 하겠습…… 하겠습…… 우리 주인께서는…… 호…… 혹시…… 호…… 혹시…… 그… … 그러니까 바로…… 그……" 지금 이 도수선은 평소보다도 더욱 심하게 말을 더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심각한 말 을 하는 것처럼 뻔한내용을 느릿느릿하게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만성이 되어서 참을 수가 있다고 하지만 한쪽에서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있었던 화노와 엽노는 동시에 크게 심마(心魔)에 사로잡힌 듯이 안색이 끊임없이 일 그러지고 두 주먹이 쉴새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도수선의 말이 점차 로 더욱 가늘어지고 떨리기 시작하자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이윽고 그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말을 자르며 입을 열어 물었다. "나는 이미 대강 당신이 질문을 하려는 내용을 알고 있소. 그러니 당신은 공연히 나를 의 식하지 말고 편안하게 얘기해도 좋소. 혹시 당신이 나에게 물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이미 혼인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오?"도수선은 이때 문인천상에게 겨우 한 마디의 질문을 하려다가 얼굴에 식은땀을 질펀하게 흘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문인천상의 말이 끝나자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우리도 사실 그 일이 알고 싶은 것이라오. 진 소저를 따라오기는 했으나 그러 나…… 우리도…… 우리도 궁금해서…… 궁금해서 오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오. 그와…… 그 와 같은 질문을 해드려서 미안…… 미안하오." 기이한 것은 이때는 아직도 어느 정도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덜한 것이어 서 실로 도수선이 조금 전에 그처럼 심하게 말을 더듬었던 것은 바로 문인천상을 의식했 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화노와 엽노는 내심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대체 이 문약해 보이는 문인천상에게 어떠한 능 력이 있는 것이길래 이들이 그야말로 오금도 못 펴고 있는 것인가 하고 불가사의하게 생 각하기 시작했다. 문인천상은 도수선의 말에 일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다가 되물었다. "여러분은 공연히 복잡하게 추측을 하고 의심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가 확실하게 대답 을 해주겠소. 과연 한 사람이 혼자서 혼인을 할 수가 있겠소?" 순간 도액오선은 하나같이 크게 의외인 듯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도상선이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정말로 아직 장가를 가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아직 장가를 갈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벌써 혼인을 했었을 리가 있겠소? 아마도 공동파의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잠시 속인 것일 것이오. 대체 여러분은 그 얘기를 누구에게서 들으셨소?"도상선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바로 현명자(玄冥子)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고, 진 소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 오. 빌어먹을! 그녀석은 우리들을 속인 것이로군! 하지만 그 공동오로( 五老)는 본파의 장문인을 중심으로 뭉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사실 어쩔 수가 없는 입장이라오." 기실 이 도액오선은 표면상으로는 공동파의 제자들과 다르지만 결국에는 공동파의 제자들이 라고 할 수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물론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잘 생각했소. 여러분은 비록 그들에게 한 번 속아넘어가기는 했지만 기왕에 강호에 나온 것이니 그저 잠시 강호 유람을 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강호상에서 한 번 만나서 회포를 풀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이때 도액오선은 하나같이 내심 분개하여 안면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문인천상의 얘기를 듣 자 그 가운데 다소 성격이 가볍고 소심한 도멸선이 즉시 표정을 환하게 풀며 말했다. "맞소, 맞소! 우리는 사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계곡을 벗어날 수가 없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이렇게 강호에 나와서 주인을 볼 수가 있게 되었으니 나는…… 나는 차라리 그들이 고마워서 껴안고……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오……" 도멸선은 일단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서 문득 자신이 혹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것이 아 닌가 하고 크게 우려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은근히 고개를 숙였다. 허나 다행히도 남은 도액사선은 결코 그를 나무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따라서 도멸선이 실 로 드물게 득의하여 다시 고개를 쳐들고 뭔가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느닷없이 한 쪽에서 날카로운 진아라의 목소리가 들려 와서 주위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 버리고 도 멸선을 다시금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어떻게 우리가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죠? 우리는 이미 그것에 대한 거의 확실한 증거까지 보았었는데 그 한 마디의 말로 우리가 속아넘어갈 줄 아나요?" 제17장 만불곡(萬佛谷)의 이야기 문인천상은 담담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진아라를 바라보고는 기이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아라! 그러면 너는 내가 차라리 혼인을 했었기를 바란다는 말이냐?"(……!) 진아라는 잠시 안색을 이리저리 변화시키면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눈빛을 반짝 빛내면서 느닷없이 신형을 날려 문인천상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마 그랬으면 저는 틀림없이 죽어 버리고 말았을 거예요.실은 저도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 이 진아라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제법 무공의 기초가 튼튼하여 신법이 안정되어 있었고 유연하였으며, 신법을 펼치는 광경 역시 용모에 어울리게 아름답기 짝이 없어서 누구라도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절로 한 번쯤 안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조용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는데, 문득 그녀의 얼굴을 보니 뜻밖 에도 구슬같은 눈물이 두 뺨으로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왠지 가슴이 철렁하 는 느낌이 들었다.문인천상은 그러나 여전히 담담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 우선 그녀의 눈물 을 소맷자락으로 가볍게 닦아주고 이어 그녀를 부드럽게 품속에서 밀어낸 다음에 한쪽에서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엽노와 화노를 향해 다가갔다. "그래…… 이번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소? 혹시 어디 다친 곳이라도 없소?" 엽노와 화노는 문인천상이 자신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와서 부드러운 말을 건네자 일순 가 슴 깊숙히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어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인드리야 그저 소주인님을 위해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대의 영광이므로 약간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까짓 늙은 폐물들의 상처쯤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 습니까?" 엽노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화노가 평소의 불길같은 성미를 누를 길이 없어서 일순 속에 있 는 얘기를 한 것이었다. 기실 조금 전에 두 사람은 하나는 전신의 혈도가 제압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심한 내상 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문인천상이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여 일순간에 두 사람의 제 압된 혈도와 내상을 각기 해소시켜 주었었기 때문에 지금은 두 사람은 아주 멀쩡한 몸이었 다. 화노는 원래 아까 불길 속에 던져질 때에는 극도로 분개하여 도액오선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있었으나 그간에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 당신의 솟구쳤던 감정이 많이 누그러지고 게다가 도액오선이 순진하게도 문인천상의 앞에서 그처럼 쩔쩔매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인상 이 많이 좋아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앞으로 그와 같은 꼴 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선을 그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시 조금 전의 일을 들먹이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물론 그와 같은 화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에 미소 한 뒤에 도액오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아직 잘 모르고 있겠지만, 기실 이 두 분은 나의 선친의 주변을 돌보아주시던 분들로서 지난 세월 동안 지조를 잃지 않으시고 장원 내에서 하인의 일을 해 오시며 가업 의 명맥을 지켜 오셨던 것이오. 따라서 이분들은 나의 커다란 은인들인 것이니 만일 이와 같은 분들을 놀라게 해드린다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있을 수가 있는 일이겠소?" 도액오선 가운데의 도패선이 즉시 그 말을 듣자 신형을 날려서 화노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의 일은 내가 잘못했소. 당신은 어서 나를 쳐서 복수를 하시오!" 이 도액오선은 그야말로 하는 짓들이 하나같이 괴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의 신분 이나 명예 따위도 거의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화노는 이미 그렇지 않아도 문인천상이 자신들을 지나칠 정도로 추켜세워 줬기 때문에 기 분이 완전히 풀려 있는 상태였는데, 도패선이 그와 같은 무공에도 불구하고 즉시 격의없이 고개를 숙이고 죄를 받겠다고 나오자 감히 더 이상 그를책할 수가 없었다. "흥! 당신들은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사람들이로군! 하지만 우리는 그저 당신들이 앞 으로 다시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 어찌 감히 복수를 할 수가 있겠소?" …… 화노 등이 그와 같이 말하고 도리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도패선은 그냥 고개를 들기도 뭣해서 잠시 장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도수선이 그것을 보고 어색한 장내의 분위기를 해소시킬 겸해서 문인천상을 향해 웃으면서 입을 열어 말했다. "주인! 잠깐 잊고 있었는데 아까 보니까 주인의 무공이 아주 놀랍게 변했던데 그렇다면 이 미…… 이미 주인은 그 무공들을 모두 성취한 것이오?"문인천상은 빙그레 미소하며 대답했 다. "나는 간신히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소. 헌데 그보다…… 지금 나에게는 그다 지 많은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니 어서 우리의 앞일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진아라가 문인천상의 품속을 벗어나서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안 색을 변화시키고는 즉시 물었다. "우리를 하루 빨리 공동산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대들은 아마도 기왕에 강호에 유람을 나온 셈이니 다시 서둘러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 지가 않을 것이오. 나 역시 구태여 여러분의 마음을 구속시켜 가면서 그렇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다만 여러분이 좀더 강호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나를 도와 줘야 하는데, 여러분은 그럴 의향이 있소?" 도액오선은 일순 그 말을 듣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급하게 안색을 바꾸며 엄숙 하게 소리쳤다. "하겠소!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주인께서 시키신다면 무조건 하도록 하겠소!" 진아라도 잠시 멍하니 듣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쳐 물었다. "아니, 대체 그 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죠?" (……) 문인천상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집중되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금방 대답하지 않고 문득 무심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검은 구름들이 밤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문인천상은 이들이 기왕에 강호에 나온 이상은 설령 그가 빨리 돌아가라고 말한다고 하더 라도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쳐들어서 흘러가는 어두운 하늘의 검은 구름들을 바라보는 문인천상의 얼굴은 마치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도액오선 등에게 어떤 할 일을 부여해야 하는가를 지금부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 이윽고 그 이후로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서 문인천상이 도액오선 등의 무리들과 헤어져서 혼자서 그가 잠자던 천막으 부근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예상했던 대로 악채릉이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천막의 주위를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 "아니, 알고 보니 여기에 와 있었군! 헌데 왜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밖에 나와서 서 성이고 있는 것이오?" 문인천상은 일부러 바깥쪽의 천막으로부터 걸어가서 악채릉의 얼굴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 러 천막의 모퉁이를 돌아서 신형을 드러내고는 그렇게 큰 소리로 짐짓 소리쳤다. 이때는 아직 천막의 주위에 심한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악채릉은 미처 그의 발자국 소 리를 듣지 못하고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아챈 듯이 일순 깜짝 놀라서 그가 서 있는 쪽으로 신형을 돌리고는 다소 멍한 표정이 되어서 한동안 바라보다가 마치 꿈결에 잠꼬대를 하고 있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이 돌아왔군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기이하여 마치 탄식을 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혹은 반 가워 하고 있는 듯하기도 한 복잡한 것이었지만 개의하지 않고 짐짓 한숨을 불어쉬며 피 곤하다는 듯이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렇소! 아, 내가 아까 잠을 자다 보니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당연히 옆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낭자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물론 낭자가 흉적에 게 당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러나 일단은 밖으로 나와 보았는데 문득 그쪽에 낭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달려가 보니 웬걸! 낭자는 보이지 않고 또한 천막이 있는 곳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오! 나는 그제서야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만…… 혹시 밤중에도 사막의 신기루가 있는 것이오?"(……) 악채릉은 문인천상이 짐짓 줏어넘기는 말을 듣고 있다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이 윽고 대답했다. "사막의 신기루는 낮에만 있는 것일 거예요. 나는 사막에 사막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아 마도 당신은 바람소리에 현혹되었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당신이 무사히 길을 찾아 서 돌아오게 되어서 기뻐요."문인천상은 그녀가 일단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뒤에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뒤에 바람의 방향을 생각하여 이곳으로 되돌아오려고 마구 헤매게 되었는데 다행 히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오. 그런데 대체 낭자는 아까 어디에 갔었던 것이오?" 악채릉은 기이하게 맑은 시선으로 문인천상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대 답했다. "나는…… 아버님을 뵈러 잠시 갔었던 거예요." 악채릉은 기실 자신이 정확하게 혈도를 제압해 놓았던 문인천상이 벌써부터 일어나서 움직 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을 법하였으나 아마도 지금의 이 현실을 자 신의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다지 의문을 갖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소?" 문인천상은 그녀의 매우 복잡해 보이는 시선을 얼핏 바라본 뒤에 그저 무심한 듯한 태도로 먼저 걸음을 옮겨서 천막의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촛불이 꺼져 있었던 천막의 내부는 지금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촛불이 밝혀져 있어서 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촛불은 불을 밝힌지 이제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악채릉이 그 커다란 천막의 안에서 돌아온 것도 그다지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 다. 문인천상은 다시 그 침상 위에 걸터앉으며 뒤를 따라서 천막의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는 악채릉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밖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천막을 비웠다는 얘기를 이미 다른 사람드에 게 알린 것이 아니오? 하하, 나는 사실 이 얘기가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창피 한 놀림을 받게 될까 봐……"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한 차례 슬쩍 건너다보더니 자신의 의자 에 다시 앉으면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직 누구에게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내일 아침에 계속해서 돈황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을 보았으니 당신은 그렇게 아세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하긴 이미 의숙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을 했었으니…… 하지만 그에게 정말로 그러한 뜻이 있는 것일까?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까?"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다소 몽롱해 보이는 시선을 주시하며 왠지 싸늘해 보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운양에게 그러한 뜻이 있건 없건간에 이미 그들이 그렇게 결론지었으니 당신은 다른 이 유를 달 필요가 없이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될 거예요."악채릉의 그와 같은 말은 이제까지 와는 달리 어떤 강요하는 기운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소. 이제는 나에게서 돈을 얻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하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나는…… 나는 그저 의숙이 하라는 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고……"…… 문인천상은 마치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그렇게 말하고 난 뒤에 이윽고 아까처럼 이불을 들 추고 침상 위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럼 나는 이만 피곤해서 잠을 잘 테니 당신은 알아서 쉬시오."이어 이번에는 전혀 코를 고는 연극도 하지 않고 문인천상은 이내 숨소리를 고르게 하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 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문인천상이 숨소리를 가늘게 하여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문득 그 의 손을 잡으며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은 물론 다름 아닌 악채릉의 손길이었다. (……!) 문인천상은 일순 놀라서 눈을 뜨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는데, 어느새 악채릉은 의자 에 앉은 채로 그가 누워 있는 침상의 옆에 다가와서는 백옥같이 희디흰 섬섬옥수로 그의 한 쪽 손을 잡아서는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문인천상의 손은 기실 천하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곱고 완벽한 남자의 손이어 서 쉽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는 정도였는데, 그러나 역시 여자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나 긋나긋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악채릉의 두 손은 그야말로 한 점의 흠집도 없이 백옥처럼 깨끗하여 부드러워서 마치 양지유를 바른 듯이 뽀얀 윤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설령 지금 촛불이 실내를 비추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문인천상은 그 한없이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느낌으로 미루어 도저히 그녀가 검법을 극치에 달하도록 연마한 무림의 고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문득 실내에는 미미한 바람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문인천상은 그 속에서 짙은 처녀의 유향(幽香)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다름 아닌 악채릉의 체취일 것이 며, 문인천상은 문득 그 가운데 가슴이 다소 울렁거리는 것 같은 감각을 맛보았다. 남자가 소녀에게서 그러한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과거에 문인천상은 기실 이보다 더욱 가까이에서 그녀와 함께 얘기를 나누었던 적도 있었는데 어째서 지금 이토록 삭막한 천막 속에서만이 그와 같은 기이한 처녀의 체취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서로간의 감정이 빚어내는 기이한 현상인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일순간 이 악채릉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 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녀는 지금 마치 물막이 뽀얗게 피어오른 것 같은 물기 젖은 두 눈으로 그저 망연히 자신이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문인천상의 한 손을 응시 하고 있었는데, 보기에는 전혀 그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처녀의 방향에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가라앉힌 다음에 이윽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악 낭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소? 나의 손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인데 어째서 그와 같이 열심히 내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오?""……" 악채릉은 그 말에 이윽고 한 차례 문인천상의 한 손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문득 천천히 침 상 위에 다시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본 그 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의외에도 매우 냉정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제 오늘밤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앞으로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날이 밝게 될 것인데 당 신은 차라리 잠을 자지 않고 저와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어요?" 날이 밝기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문인천상도 물론 이미 알고 있기는 했 다. 문인천상은 악채릉에게 조금 전에 잡혔던 손을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 윽고 다른 손을 그 손과 깍지를 끼고 위로 젖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어 되물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자는 것이오? 그리고 대체 우리에게 지금의 상황에서 나눌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이 있겠소?" 악채릉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면서 대답했다. "예를 들어서 아까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얘기나 혹은…… 다른 얘기들, 이를 테면당신은 전에 만불곡에 가 봤었다고 나에게 말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가능하다면 지금 그곳의 얘기 를 자세히 듣고 싶어요."문인천상은 다소 귀찮은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앞으로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 아니오? 구태여 지금 과 같은 장소에서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말이오?"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정시하더니 다 소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과 같은 장소가 뭐가 잘못이라는 거죠?" 이어 뒤를 향해 가볍게 오른손을 움직이더니 무형의 장력을 날려서 뒤쪽에서타오르고 있었 던 촛불을 꺼 버리는 것이었다. ……! 촛불의 불빛에 의해 은은한 분위기가 느껴지던 천막의 실내는 따라서 즉시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돌변하고 말았다. 비록 그와 같은 음산한 어두운 분위기도 지금은 악채릉과 같 은 천하의 미소녀가 바로 가까이에 앉아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은밀하고 달콤한 느낌 을 자아낼 수가 있는 것이지만, 문인천상은 매우 의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악채릉은 마치 그러한 모든 문인천상의 상상이 하나같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 이라도 해주듯이 역시 쌀쌀한 음성으로 입을 열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이제는 보다 얘기할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할 수가 있겠죠? 보다시피 이제 날이 밝자면 얼 마 남지 않았고 또한 나는 이렇게 계속해서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니 따라서 나는 구태 여 지금 무료한 김에 그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예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어둠 속에 백색의 그림자처럼 잠겨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어 대꾸했다. "좋소! 하지만 아까의 그 상황은 이미 나도 직접 보고 알고 있는 것이고 또한 누구나알고 있는 일이니 굳이 그러한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시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겠소? 게다가 만불 곡의 일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전에도 약간 설명했던 바가 있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우리 들이 가서 보게 되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절로 알게 될 것인데, 구태여 그러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소?" 악채릉은 어둠 속에서 아미를 살짝 찌푸리더니 되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죠?"문인천상은 어이가 없 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당신은 그 사이에 사람이 변해서 마치 잠시라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숨이 막 혀 버리는 사람이 된 듯하구려. 하지만 기실 대화라고 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교류의 전부 는 아닌 것이오. 실로 때로는 침묵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하기도 하는 법이니, 우리 는 쓸데없이 필요없는 대화를 하기 위해 심력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전과 같이 침묵을 유지하며 잠을 자거나 하는 것이 어떻겠소?" 악채릉은 이에 흥! 하는 싸늘한 냉소를 터뜨리더니 이윽고 잠시 생각을 굴린 후에 다시 말 했다. "당신의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와도 같아서 막히는 바가 없군요. 하지만 비록 아까의 일 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당신으로부터 그 만불곡에 관 해서 듣고 싶어요. 나는 원래가 궁금증이 생기면 참기 어려워하는 성질이 있고, 게다가 우리 가 비록 돈황으로 간다고 해도 반드시 그 만불곡의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니까요."문인천상은 더욱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그 얘기를 들어야 하겠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이에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문인천상은 내심 어처구니가 없어서 생각했다. (그와 같은 얘기는 실로 듣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일부러 듣기 위해서 사정을 해와도 굳이 말하고 싶어지지 않는 것인데 그녀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것을 강요하는 입장이구 나!) 그러나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일지언정 간혹 그러한 방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때가 있는 법이었다. 문인천상은 잠시 기억을 되살리는 듯하다가 이윽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좋소! 그렇다면 말하기로 하지. 그러니까…… 내가 이미 말했던 대로 그곳은 은밀하게 위치 하고 있는 평범해 보이는 계곡이었는데, 그 계곡의 좌우의 석벽에는 실로 무수한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었소. 나는 수년 전에 집을 나서서 사방으로 방황하며 돌아다니다가 그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곳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 내부를 조사해 보기도 했었으나 결국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소." "……" 악채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뭔가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것이었고 도무지 문인천상의 얘기를 듣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나문인천상은 이미 시작한 얘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따라서 나는 결국 그 무수하게 새겨진 불상조각들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 조각들은 실 로 특이한 점이 있어서 수백 수천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각의 형 상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소. 그것들은 크기도 각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것이 석벽에 조각되어 있었지만 더러는 바닥의 돌부리에 조각되어 있기도 하고 혹은 하나의 완 전한 신상(身像)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들도 있었소. 말하자면 그 계곡 전체에 온갖종류의 불상조각들이 모여 있다고 할 수가 있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그러한 불상들의 형상에 몰두 하게 되자 마치 계곡의 위쪽에 조그맣게 열려 있는 하늘에도 역시 그와 같은 불상들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될 지경이었소. 말하자면 만불곡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나는 나중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와 같은 놀라운 조각들을 완성시켜 놓은 것인가 하고 경이롭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오.""……" 악채릉은 여전히 다소 복잡한 눈빛으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고, 비단 문인천상에게 그 만불곡에 관해서 질문을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 속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 때문에 굳이 그에 게 그와 같은 만불곡의 얘기를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그 이후에 심신이 지치고 피곤해질 때까지 그곳에 주저앉아서 생각에 잠겨 보았는데 결국 뭔가 신비로운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깨닫는 바는 없었소. 따라서 나는 그 다 음에 만불곡을 떠나서 공동산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오. 낭자, 듣고 있는 것이오?" 문인천상은 비록 그녀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하고 말을 끝내면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악채릉은 즉시 눈빛을 빛내면서 상념에서 돌아오더니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것 이었다. "물론 나는 듣고 있어요." 문인천상은 느닷없이 악채릉이 그와 같이 말하자 낯두껍게 태연히 대답할 줄을 모르고 있 었다가 그만 내심 어이가 없어서 담담히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문인천상 은 다시 입을 열어서 물었다. "이제 만불곡의 얘기도 끝났고 한데 앞으로 그와 같은 얘기를 더 해야 하는 것이오? 비록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그만 쉬고 싶은데…… 낭자는 이제 그만 나의 편리 좀 봐 주지 않겠소?" (……!)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싸늘한 음성을 토하면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이었다. "흥! 당신이 무슨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군요. 누가 뭐 당신의 그와 같은 듣기 싫은 얘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다고 했나요? 터무니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나는 이제 당신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마음대로 자고 싶으면 자고 쉬고 싶 으면 쉬도록 해요!"문인천상은 악채릉의 말씨가 갑자기 싸늘해졌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다시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기왕에 던져진 말이었으니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었고, 문인천상은 이내 생각을 거두고 정 말로 이불을 덮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정말로 마음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 의 일이라는 것은 정말로 알 수가 없는 일인 것이었다. 잠시 후 점차로 잠 속으로 빠져 들 어간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문득 그는 서늘하고 미끄럽기 짝이 없으며 게다가 부드럽고 탄 력이 넘치며 인어처럼 퍼덕이는 물체 하나가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감촉을 느 끼고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 제18장 청백(淸白)한 여인(女人)의 순결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처음에는 이것이 혹시 꿈속에서 벌어지고 있 는 것이며,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실은 말하자면 결코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현실은 그야말로 꿈보다도 더욱 기이하고 놀라우며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해할 수가 없는 느닷없는 것이었으니,--- 악채릉! 한없이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부드러운 꿈틀거리는 물체가 문인천상은 혹시꿈속에서 느끼고 있는 전설의 인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으나 그것은 인어가 아닌 사람이었고 틀림이 없 는 여자였다. 바로 악채릉이었던 것이었다. 악채릉은 지금 전신에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알몸이었던 것이었 다. 비록 이불 속이었지만 수줍은 그녀의 알몸은 어둠 속에서 은은한 백색의 광채를 발하며 그 순결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 문인천상은 느닷없이 악채릉이 알몸으로 자신이 누워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와 버리자 그 야말로 정신이 혼돈스럽고 마치 넋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놀라운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던 처녀의 유향은 이미 가까이에서 한껏 강렬하 게 그의 지각을 몽롱하게 마비시켜 놓고 있는 듯했고, 게다가 그녀의 서늘하고 부드러우며 탄력적인 아름다운 육신은 간간히 그의 신체와 부딪칠 때면 마치 전율하는 듯한 뜨거운 불 길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의 가슴은 따라서 이미 대부분이 혼미해지고 답답한 가운데 뜨거운 가마솥처럼 불 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 같았으며, 항상 맑게 개어 있기만 한 것 같았던 그의 이성은 일순간 그 뜨거운 기운에 휘말려 욕망의 화산으로 변해 가기 시작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인천상은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원래 특질이라는 것은 바로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하거나 번뇌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일단 눈을 뜨는 순간에 이미 그의 이성은 서늘하게 맑아져 있었다. (……) 잠시 동안 마음을 평정시킨 다음에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악채릉은 그의 옆에 반듯하게 누 운 채 눈을 내리감고 다소 긴장된 듯이 급격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백옥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기다란 속눈썹의 아래 희미한 잔영을 드리우고 마치 화려한 꽃잎 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가슴의 답답한 기운을 몰아내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숨을 몰 아쉰 다음에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악 낭자! 나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심정이오. 남자가 여자의 알몸을 마다할 리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이유를 알고 나서 다음 행동으로 옮 겨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악채릉은잠시 묵묵히 말이 없었다. 이 순간에 그녀는 그저 약간 호흡이 흐트러졌을 뿐 눈꺼 풀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한 광경은 마치 그녀가 지금 잠이 들어 있는 것 같 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잠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명백한 일 이었다. 문인천상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의 몸은 물론 천하에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또한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가 있는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저 나를 여자를 탐하는 호색한 으로 본다고 하는 말밖에 안되는 것이 아니겠소?" (……) 그때 문득 악채릉의 입술이 열리면서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이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당신이 호색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게다가 당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예요. 나는 다만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순결을 드리는 것이니 당신은 아무런 거 리낌도 갖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요."말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마치 잠을 자는 듯이 입 을 다물었다. 문인천상은 그 얘기를 듣자 가슴속에서 다시 한 번 격렬한 육체의 욕망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으나 이내 그것이 사그러들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명분에서 이러는 것이오? 이유가 없는 것이라면 명분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 소?" 악채릉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어요. 나는 다만 오늘밤에…… 오늘밤에 나의 첫순결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러는 거예요."문인천상은 눈빛을 가볍게 빛냈다. "당신은 그렇다면 충동적으로 이러는 것이라는 말이오?"악채릉은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충동적으로 이러는 거예요." 문인천상은 다소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일은 결코 충동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당신은 아직 모르 고 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가볍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나는 물론 그러한 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란 때로는 알 고 있으면서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예요." 문인천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한 행동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한 모양 이로군. 하지만 대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와 같은 일을 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 오? 이와 같은 일을 해서 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오?" 악채릉은 길게 한숨을 들이쉬더니 대답했다.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나요?"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원하는 것이 없다는 그와 같은 말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당신에게는 아마도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오."악채릉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 이유를 알기를 원하나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만일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도 참을 수가 없게 될 것이오." (……)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예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대답에서 어떤 특별한 이유를 듣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 는 순간에 다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악채릉의 대답은 다분히 상식적이고 또한 맥이 빠지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인천상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것은 이유가 될 수가 없소. 당신이 만일 나를 사랑해서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라면 구 태여 이럴 것이 아니라 보다 올바른 경로를 밞아서 나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수도 있었을 것이오. 나로서는 오히려 그쪽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설마하니 모르고 있다는 말이 오?" 악채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과 나의 사랑이 나중에 혼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예요." (……!) 문인천상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혹시 당신의 부친께서 우리의 혼인을 반대하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나는 믿을 수가 없는 심정이오. 게다가……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인데도 이와 같은 행동 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소. 혹시 당신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문득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당신에게 짚히는 바라도 있나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당신의 태도는 그러니까…… 확실히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우리들이 오늘밤을 지내고 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오늘밤에 굳이 나에게 몸을 바치려는 것이 아니겠소?" "……" "게다가 우리가 아직 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 도달하지 못했는데도 당신이 이렇게 하려는 것은 아마도…… 당신의 신상에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구려." …… 악채릉은 문득 듣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정말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와 오늘밤을 함께 보낼 수는 없겠나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당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와 하룻밤을 함께 하고 싶은 것이오?"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얼굴을 정시하며 대답했다. "내가 당신과 하룻밤을 함께 하고 싶은 것은 진심이예요."문인천상은 눈살을 길게 찌푸렸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정말로 오늘밤을 보낸다고 해도 무슨 즐거움 이 있겠으며 또한 어찌 마음이 개운하겠소?"(……) 악채릉은 잠시 그의 얼굴을 정시하며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불어쉬며 싸늘 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아마도 당신은 나 같은 계집은 마음에 차 지 않는 모양이죠?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요……"말과 함께 악채릉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벗겨지며 어둠 속에서 그녀의 현란한 나신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기운을 뿌리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그 모습을 보자 문득 표정이 다소 냉막하게 변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다소 일 그러진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기 때문에 일순 그녀는 다소 멈칫한 표정으로 그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에 문인천상은 느닷없이 양팔을 뻗어서 그녀의 알몸을 안아 버렸다. …… 악채릉은 갑자기 어이가 없는 일을 당하게 되자 다소 나신을 경직시키는 듯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이죠?" 문인천상은 문득 냉막했던안색을 풀며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런 뜻도 없소." "……?" 악채릉은 즉시 말을 받아서 무슨 대꾸라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나신은 어느새 그의 품속에 깊숙히 안겨들어 있었으며, 그의 입술은 그녀의 앵두같은 입술을 누르 며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 이 문인천상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일단 그녀의 입술을 누르기 시작하자 그 야말로 열정적인 입맞춤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더욱 뜻밖의 일을 당하여 놀라고 당황한 심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내 그 열정 적인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서 정신이 크게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에 그녀는 즉시 입술 을 떼고는 물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요? 당신은 분명히 원하지 않는다고……"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자 했던 것이 오. 그러나 당신이 말해 주지 않겠다고 하니 내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겠소? 나는 사실 그 이유가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소.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오." "……" 지금 문인천상의 표정은 조금 전에 언제 냉막하게 변했었냐는 듯이 지극히 부드럽게 펴져 있었고, 그의 한없이 깊어 보이는 두 눈에서는 조용하고 완화한 사랑의 기운이 넘쳐 나오 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양손은 지금 그녀의 나신을 부드럽게 껴안고 간혹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사랑 스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남자의 손길이 와서 닿는 것이지만 악채 릉은 전혀 거기에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눈부시도록 준미수려한 그의 얼굴을 잠시 망연히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마치 자신의 영혼 이 그의 두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서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그의 품속으로 안겨 들기 시작했다. 원래 이것은 그녀가 결심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 × × 악채릉은 분명히 첫경험이었고 게다가 순결이 파괴되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그야말로 열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마치 그녀는 자신의 순결한 육신 으로 최대한의 쾌락을 문인천상에게 선사하려고 결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문인천상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녀가 그와 같이 열정적으로 대해 주는 것이 나쁠 리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간혹 다소 찌푸린 듯한 그녀의 얼굴을 대할 때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 어서 의도적으로 매우 부드럽게 이끌어 주었다. 기실 이 방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누구 라도 배우지 않아도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이리라. 악채릉은 상당한 고통이 있었을 것이지만 가능한 한 문인천상이 많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 도록 오랫동안 쉬지 않고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리고 마치 자신도 어떤 쾌락을 느 끼는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은 그러는 가운데 어김없이 흘러서 잠시 후에는 서서히 밖에서 새벽의 여명이 밀려들 기 시작했는데, 두 사람은 이미 천막의 내부가 훤해질 때가 되었는데도 계속해서 서로의 몸을 껴안고 있다가 이윽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서로 떨어졌다. …… 악채릉은 즉시 몸을 일으켜서 옷을 하나씩 걸치기 시작했고 문인천상 역시 옷을 입기 시작 했는데, 두 사람은 이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의 시간을 보냈다. 악채릉은 옷을 완전히 입은 다음에 전처럼 예의 그 의자를 한쪽에 가져가서 걸터앉아 말없 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고, 문인천상은 나름대로 침상의 한쪽에 앉아서 아까 악채릉이 몸 을 일으켰을 때에 붉은 앵혈이 묻어 있던 순결의 흔적을 그녀가 스스로 치웠던 것을 상기 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침묵의 시간이 소리없이 흘러서 이윽고 천막의 밖에서 밝은 아침의 햇 살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악채릉이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마치 석상처럼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서로 친한 척하지 말아야 하는것이 아니오?"악채릉은 이미 얼굴에 가득 하게 떠올랐던 홍조를 가라앉히고 싸늘하고도 백옥같이 냉랭한 기색을 되찾고 있는 중이었 다. 그녀는 마치 허공 속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소 낯설은 듯한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어 되물었다.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죠?" 문인천상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 정도는 알 수가 있기 때문이오. 나와 당신의 하룻밤의 사랑 은 남 모르게 이루어진 것이기때문에 비단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제까지 우리들이 이루고 있었던 그러한 부드러운 마음조차 앞으로는 나타내지 말 아야 한다는 것이오. 만일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당신이 나에 게 그와 같은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었을 것이오." 악채릉은 잠시 그의 얼굴을 차가운 시선으로 탐색하는 듯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 덕이며 말을 받았다. "당신은 제법 어리석지는 않군요." 문인천상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그 말을 받았다. "아마도 내가 어리석었다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게다가 첫순결 을 주지도 않았겠지……" "……" 문인천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혹시 후회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그 말에 일순 냉랭한 얼굴에 가벼운 조소의 표정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후회라고요? 당신은 혹시 내가 후회를 한다고 말한다면 지금이라도 나를 당신의 정식부 인으로 받아 주기라도 할 것인가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주어없이 즉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비단 그러한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나의 부인이 되어 달 라고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소." 악채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요? 과연 나와 같은 여자가 당신과 같은 부잣집 귀공자의 부인이 될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말은 진심에서 하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주저없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물론이오. 나는 지금이라도 이미 돌아가신 선친의 이름에 대고라도 맹세할 수가 있소. 당신 은 비단 용모와 신체가 지극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건강과 능력을 지니고 있고 게다가 가장 중요한 마음이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니 내가 한평생 동안 반려자로 맞이하여 사랑 하며 살아가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 악채릉은 묵묵히 문인천상의 말을 들으면서 그다지 듣기 싫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 윽고 다소 싸늘한 표정으로 떠올리며 대꾸했다. "당신은 글공부는 하지 않고 그와 같은 여자에게 아부하는 방법만을 배운 모양이로군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문인천상은 그 말에 가벼운 탄식을 터뜨렸다. "내 이미 그럴 것을 알고 있소. 따라서 내가 지금 감히 당신에게 청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오? 아마도…… 당신의 부친은 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또한 당신을 보다 훌륭한 곳으로 시집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그 말에 다소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대수롭지 않은 사람은 아니예요. 오히려 당신은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할 수가 있 는 사람이죠.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나를 당신보다 나은 곳에 시집보내려는 것도 아니고… … 나는 아마도 한평생 시집을 가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문인천상은 일시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한숨을 내쉬며말했다. "그렇군. 당신이 시집을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나 때문이겠지. 나는 그야말로 당신의 일생에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방해자에 불과한 것 같구려. 하지만 나는…… 나는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오."악채릉은 문인천상의 말에 갑벼 게 웃으며 대꾸했다. "대체 무엇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죠?" 문인천상은 태연한 표정으로 즉시 대답했다. "보다시피 나는 이미 당신의 첫 번째 남자이고 또한 진정으로 사랑을 나눈 지아비가 아니 겠소? 따라서 나는 이후로 어떤 욕을 먹게 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고 오히려 자랑스럽 다는 말이지." 말과 함께 문인천상은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켜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악채릉은 겉으로 그만 피식, 웃고 있다가 그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금 방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고는 말했다. "당신은 아까 했던 약속을 잊었나요?" 문인천상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안을 것처럼 다가오다가 문득 그 소리를 듣고는 다소 놀라 서 신형을 멈추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무슨 약속을 말이오? 아아…… 앞으로는 우리는 서로 친한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말이 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그저 우리 두 사람밖에는 없는데 다소 그 약속을 어긴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문인천상은 그렇게 말하며 만면에 웃음기를 떠올렸으나 악채릉은 그것을 보고 반대로 얼굴 에 살얼음과도 같은 냉기를 피워 올렸다. "당신은…… 그래서 감히 지금 나에게 수작을 부리겠다는 것인가요?"문인천상은 그녀의 태 도가 의외로 완강한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수작?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당신을 사랑해 주려는 것인데 어찌 그것을 수작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소? 지금 나는 당신을 희롱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오." 말과 함께 문인천상이 더욱 가까이에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서 어 루만지자 악채릉은 더욱 싸늘한 냉기를 풍기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감히 계속 그와 같은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당신이 나에게 감히 그와 같은 짓 을 함부로 할 수가 있는지 두고보겠어요!"문인천상은 일시 그 냉랭한 태도에 전신이 가볍게 긴장으로 굳어 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앞으로 다 가들어서 자세를 낮추더니 그녀의 몸을 힘차게 안아 버리고 말았다. 악채릉은 그와 같이 느닷없이 깊은 포옹을 당하자 금세 한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으나 이어 표정을 서릿발처럼 굳히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만일…… 만일 지금 즉시 이 손을 풀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출수를 하겠어요! 비록 당 신이 형편없는 모양이 된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나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더욱 그녀의 상체를 열정적으로 껴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까지 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출수하시오. 나는 차라리 당신의 손에 당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소. 나는 당신 의 손에 죽게 된다면 풍류귀신이 될 것이고, 또한 당신의 영원한 첫 번째의 서방님이 될 것이니 나로서는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오."(……!) 악채릉은 순간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려 문인천상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그의 말을 듣고는 그만 참지 못하고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악채릉은 따라서 차가운 표정 을 하고 문인천상에게 엄격하게 대하려고 했었으나 그 순간 그러한 의도가 산산히 무산되 어 버리는 것을 의식해야 했다. 문인천상은 웃으면서 공력을 흐트러뜨리는 그녀의 입을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입맞춤하고 깊이 껴안아서 한동안 애무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는 원래는 당신이 나를 싫어하면서도 순결을 바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를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 악채릉은 일단 엄격한 기색이 풀어진 이상 다시 일부러 그와 같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 서 그저 웃으며 문인천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마치 뿌연 물막과도 같은 기운이 선연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느닷없이 천막의 문이 옆으로 확 젖혀지며 한 사람이 고개를 들이밀고 기이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두 분은 아주 재미가 좋으시군! 하지만 그런 재미도 잠시 멈추시고 밖으로 나오셔야 하겠 소. 지금 밖에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으니……"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원헌이었다. 악채릉과 문인천상은 느닷없이 그가 나타나서 소리치는 것을 보고 다함께 크게 놀라는 표 정이었으나, 특히 악채릉은 자신이 전번에 마차 안의 일을 엿보인 데 이어서 지금도 주의 를 게을리하고 있다가 이와 같은 작자에게 또다시 이와 같은 광경을 들킨 것을 크게 어이가 없어 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는데, 반대로 주원헌은 아주 음침하고 악독한 표정으로 악채릉을 쏘아보며 말을 잇고 있었다. "흐흐흐, 나는 그래도 악 소저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는데 그래 이와 같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다니 다체 어찌된 일이오?" 문인천상은 즉시 멋적은 듯이 손을 풀고 한쪽에 물러섰는데 악채릉은 주원헌의 그 말을 듣 자 안색을 차갑게 굳히면서 대꾸했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라고요? 대체 당신이 나의 무엇인데 감히 그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거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의 일은 내가 결정해요. 감히 당신이 다시 이와 같이 나서서 간섭을 한다면 나는 결코 가만히 듣고 있지 않을 거예 요." 주원헌은 일시에 질투심이 폭발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두 눈에서 흉악한 광채를 발하고 있 다가 느닷없이 악채릉으로부터 그와 같은 얘기를 듣고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한동안 넋나간 듯이 바라보다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대꾸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군…… 당신이 그와 같은 말을 한다면 나도…… 나도 다 생각이 있는 것이오. 내가…… 내가 이 일을 그냥 묵과할 것으로 생각하시오? 결코…… 나는 가만히 있 지 않을 것이오!" 원독이 서린 듯한 표정으로 그와 같이 소리치고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주원헌의 말을 듣고 는 악채릉은 일시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제19장 웃음 속에 칼이 숨어 있다 문인천상과 악채릉은 이윽고 함께 천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그 심했던 모래바람은 잠잠해져 있었고 태양은 어느새 하늘 위에 둥실 떠올라서 사방 을 훤하게 비추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그 햇살이 다소 따가운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아직 은 아침이라서 주변의 공기가 제법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주원헌은 이미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가 있었던 천막의 주위는 대체적으로 조용했으나 이윽고 두 사람이 걸음을 옮 겨서 천막 사이를 돌아서 나가자 과연 커다란 천막의 앞쪽에 제법 푸짐한 음식들을 차려놓 고 한창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식사를 하는 무리들 가운데에는 물론 악불범이나 주운양 등이 섞여 있었고 조금 전에 물러갔던 주원헌 등도 섞여 있었으나,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그 가운데 제법 십여 명 이나 되는 호위무사들이 왔다갔다하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변을 당했는 줄 알았었는데 그래도그 가운데에는 성하게 살아남은 사 람들이 제법 되었던 모양이었다. …… 문인천상이 고개를 앞쪽으로 돌려서 어젯밤에 화재를 당했던 쪽을 바라보니 이미 그곳은 대 부분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시신들 또한 대부분이 처리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어제 저녁과 달라진 점은 그저 천막의 숫자가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없는 것처 럼 보였다. 왜냐하면 지금 커다란 천막의 앞쪽에서 무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주운양 등의 표정은 어젯밤과는 달리 매우 밝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인천상은 혹시주원헌이 이미 그들에게 가서 자신과 악채릉과의 사이를 노골적으로 폭로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바라보니 다행히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그쪽으로 다가가자 주운양이 먼저 그들을 알아보고는 즉 시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아! 조카, 어서 오게! 간밤에는 그래 잘 잤는가?" 주운양은 어젯밤에는 실로 아주 불쾌한 얼굴을 하고 천막 속으로 사라졌었는데 지금은 대 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그런 기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태도가 전보다 더욱 친절해진 것 같았다. 주운양은 자신이 나서서 손수 호위무사들에게 두 사람의 식사를 차려 오라고 지시한 다음 에 이윽고 그 음식들을 두 사람의 앞에 놓아 주며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간밤에는 자네도 놀랐었겠지만 실은 나도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네. 그래서 실은 본의 아니게 생각지도 않던 얘기들이 마구 입에서 튀어나오게 되었지. 자네가 나의 심정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것들은 이해하고 그만 잊어 주게나! 핫핫, 오늘은 아침 일 찍이 돈황을 향해 출발을 계속하기로 하였네. 그러니 우선은 속을 든든하게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자, 어서 들게나!"문인천상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이어 그가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악채릉 역시 그의 옆에서 천천히 음식들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주운양은 비록 표정은 밝았지만 안색에는 취기가 여전하였으며 게다가 지금도 음 식은 거의 들지 않고 술과 안주만을 먹고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가 가까이에 와 있자 그에게서 술냄새가 진동하여 마치 그 냄새만 맡고도 금세 취할 것 같았다. 기실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강호상에서 보면 오히려 더욱 많은 술을 마시기 마련이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은 일반사람들과는 달리 쉽게 취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체력이 달리거나 몸이 망가지지도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주운양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말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악채릉은 고개를 숙이고 얌전하게 묵묵히 문인천상의 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문인 천상이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주원헌 등은 다소 음산한 시선으 로 계속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인천상은 공연히 그들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가 않아서 즉시 시선을 거두고 식사를 하며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곳은 바로 주운양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고 있는 방향이어서 문인천상은 다시 그와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주운양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마악 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기율여서 술을 마시려 다가 문인천상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보고는 손을 도로 내리고 얼굴 가득히 웃음 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마도 오늘 계속해서 나아갈 일이 걱정되는 모양이군. 그러나 그 걱정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보다시피 저기에 있는 무사들이 어젯밤의 그 난리 속에서도 살아 남았고, 게다가 우리의 마차나 물품 등도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네. 내 무엇보다도 자네 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지. 아니 뭣하면 자네에게서 약간의 은자를 건네받 아도 되는 것이고…… 안 그런가? 핫핫핫!……" 문인천상은 이미 주운양의 말투에서나 사람들의 태도에서 출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제가 한 은자 오천 냥쯤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선 필요한 것들만 구입하고 다 른 것들은 나중에 사람들을 보내서 은자를 가져오게 한 다음에 구입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주운양은 손 안에 들려 있는 술잔 속의 술을 단숨에 마셔 버린 다음에 안주도 먹지 않고 껄 껄 웃으며 대답했다. "좋도록 하지! 그러나 아직은 나에게 약간의 은자가 남아 있는 상태이니 조카가 돈을 내지 않아도 될 것일세.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내가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 문인천상은 묵묵히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고개를 숙이고 다시 식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주운양이 그를 향해 일부러 다가와서 이렇게 다시 묻는 것이었다. "자네…… 혹시 어젯밤의 그 도적들에 대해서 걱정되지는 않나?"문인천상은 음식을 먹다 말 고 고개를 돌려서 되물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습니까?" 주운양은 다소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음…… 어제 자네도 보았겠지만 그 장검을 부러뜨려서 상대를 공격하는 수법은 바로 단천 비검술(斷天飛劍術)이라고 하는 것일세. 바로 대막의 천화궁에서 전해내려오는 수법이었는 데, 따라서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겠나? 다름이 아니라 그 천화궁의 놈들이 우리가 나타난 것을 알고 미리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네." "……" "물론 놈들이 이미 눈치를 챘으니 우리로서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우리 는 앞으로 상당한 경계를 하고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네. 특히 놈들은 사막에서의 싸움에 능하기 때문일세." "……" "우리는 어젯밤에 놈들이 자네를 노릴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어찌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었겠나? 하긴 우리가 일단 놈들의 뒤를 쫓아서 천막을 떠났었던 것이 실수였네. 우리는 그놈들을 하나라도 잡아서 현재의 천화궁의 상황에 대해서 파악하려 고 한 것이었지만, 핫핫, 그러나 놈들은 워낙에 사막에서는 여우와도 같은 놈들이어서 우리 는 그만 놈들을 놓치고 말았고, 놈들은 그 사이에 우리의 뒤로 돌아와서 그 만행을 저지르 고 있었던 것일세." "……" "그러나…… 생각해 보면 놈들이 구태여 그와 같은 수법을 쓴 것은 말하자면 진실한 무학 에 있어서는 저기에 계신 화산파의 악 대협 등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린 것이 라고 할 수가 있겠지.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자네의 주위를 항상 보호하고 또한 놈들의 속 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이대로 돈황까지 전진해서 자네의 선친의 원수도 갚을 수가 있 게 될 것일세. 그렇게 되면 말이야…… 핫핫핫, 우리는 한 번 장원에서 거대하게 잔치를 베풀어 보세나!" 주운양은 이때 어젯밤에 그렇게도 떠들어 대던 호위무사들의 장례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그 일은 이미 처리된 것일까?문인천상은 그 일에 관해서 물어 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어서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대꾸했다. "만일 선친의 원한을 해결할 수 있다면 잔치를 하는 것이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주운양은 이에 불쑥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핫핫, 그런가?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얘기가 제법 통하는 모양이군. 사실 말이지 어젯밤의 그 얘기는 술취한 김에 나온 헛소리들이었고, 나는 지금은 그저 앞으로 자네의 선친의 복수 를 하고 나서 자네를 명실공히 장원의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계속해서 총관의 일을 맡아보 며 살고 싶은 마음일세. 나는 사실 나이도 이미 많아졌고, 게다가 따로 벌어 놓은 재산도 없는 상태이니 평생 자네의 밑에서 총관의 일이나 하고 싶은 것일세. 설마하니 자네는 나 를 쫓아내지는 않겠지?" 문인천상은 슬그머니 그에게 잡힌 손을 빼며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의숙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주운양은 이에 상당히 만족스 럽다는 듯이 껄껄 웃어젖혔다. "고맙네! 내가 보기에 이번의 일정은 우리가 조심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 을 것이고 또한 기필코 복수를 하고서 장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서 사업을 해 나가며 가업을 크게 한 번 일으켜 보도록 하세나. 그 것이 나의 남은 소원일세!""……" 주운양은 일단 거기까지 얘기한 다음에 문득 손짓을 하여 자신의 자식들인 주씨 남매들을 불렀다. 주씨 남매들은 마침 거의 식사를 마치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주운양이 손짓 으로 부르자 원독에 가득찬 시선을 거두고 즉시 이쪽으로 달려와서 공손히 읍을 했다. 주운양은 술을 한 잔 따라서 마시고는 즉시 그들을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얘들아! 내 아직은 너희들과 이 조카를 정식으로 인사를 시키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결코 그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이 조카의 밑에서 계속 해서 총관의 일을 맡아 보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너희들도 그를 주인으로 알고 따라야 한다 는 것이다. 자! 어서 주인나으리에게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문인천상은 주운양의 그와 같은 엉뚱한 말을 듣고는 일시 어이가 없어서 손을 내저으며 말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분들은 저보다도 나이가 위이신데 어떻게 저에게 그런 호칭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운양은 이미 결정한 일인 듯이 막무가내였다. "나이에 관계없이 주인은 주인인 것이오. 조카는 더 이상 말하지 말게. 자, 너희들은 어서 공손히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주원헌 등은 그러자 이내 주저없이 문인천상을 향해 각기 공손히 마치 주인을 대하는 것처 럼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특히 주원헌은 아직도 문인천상을 향한 눈빛에 운독이 올라 있 었는데도 역시 겉으로는 그와 같은 절을 공손히 하고 있었다. "저희들이 주인나으리를 뵈옵니다!" 문인천상은 느닷없이 그와 같은 큰절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함께 허리를 굽 혀서 답례하고 말았다. 그리곤 당황해져서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오. 내가 감히 어떻게 여러분들의 인사를 받을 수가 있겠소이 까? 그러지 말고 우리는 서로 친구로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주운양은 이에 옆에서 듣고 있 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되는 말씀이오. 험험! 나는 원래 조카를 사위감을 목적으로 나의 저 딸년을 조카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었으나 저 아이는 원래 그런 복이 없는 것인지 무뚝뚝하여 일을 그르치고 말았소. 따라서 조카는 그저 저 아이들을 하인처럼 생각하면 되는 것이네." 이어 주운양은 다시 자신의 자식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은 뭣 하느냐? 어서 앞으로 너희들의 주인나으리가 되실 분에게 한 마디씩 올리지 않고?" 주완청이 약삭빠르게 이에 먼저 나서서 문인천상을 향해 기이하게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어 말했다. "상 오라버니, 아니 이제는 주인나으리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저는 사실 주인나으리가 매우 좋았는데 저의 재목이 나으리의 부인이 될 재목이 못되는가 봐요. 그 점은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선 나으리가 앞으로 우리의 주인나으리가 되셔서 부자가 되실 것을 생각해 보면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만일 그때가 되면 저는 설사 첩으로밖에 되지 못한다고 해도 나으리를 유혹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 지금 장내에서 정작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러나 문인 천상은 실로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대접을 받게 되자 일시 할말도 잃고 얼굴이 벌겋 게 되어 멍하니 말을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주원학도 한 마디를 했다. "주인나으리! 앞으로 사업이 잘 된다면 소인도 장차 나으리의 총관직을 이어받을 수 있도 록 은총을 내려 주시면 고맙겠소. 물론 나의 저 동생인 청매가 나으리와 잘만 된다면 나는 나으리의 처남이 되는 것이지만, 흐흐…… 감히 그러한 것을 바랄 수야 없는 일이 아니겠 소? 그저 앞으로 많은 은총을 내려 주실 것을 바라는 바이오이다." 문인천상은 너무나도 황당한 그들의 얘기에 대해서 그저 멍하니 듣고 있다가 나중에 고개 를 끄덕이는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원헌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 역시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더니 음침한 음성으 로 입을 열어 말했다. "흐흐, 주인나리! 기실 아까 그 일은 나의 본의가 아니었소. 나는 원래 나으리의 하인에 불 과한 만큼 오로지 나으리가 잘 되기를 바라기만 할 뿐이오. 어떠한 일이든간에 나으리가 잘 되기만 하면 소인은 그저 만족이니 앞으로 잘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오이다."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 과연 그가 악채릉에 대해서 정말로 잊을 수가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은 너무나도 지나치게 나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구려. 나는 만약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말을 잊지 않겠소." …… 이윽고 주씨 남매들이 모두 아까의 자리로 물러가자 주운양이 술을 따라서 다시 한 잔을 들이킨 다음에 문인천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오직 자네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또한 열심히 자네를 보필할 것이네. 하하, 자네는 앞으로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매사가 다 잘 되어 갈 것이네. 그것은 자네의 복 이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지. 자! 그만 얘기할 것이니 자네는 좀더 먹고 마시도록 하게나!"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주운양이 다른 곳으로 물러가 버리자 문인천상은 문득 마치 무거운 거적을 벗어젖힌 기분이 들었다. …… 그때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뒤쪽에서 상장풍이 서 있다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 지금 그 상장풍의 옆에는 악불범이 하나의 의자 위에 앉아서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상념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원래는 그의 의복은 깨끗하기 이를 데가 없는 백삼이었는데 지금은 사막의 모래바람에 시 달려서인지 다소 누르스름하게 변해 있어서 그것을 걸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크게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악채릉도 마침 공교롭게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문인천상이 바라보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 × × × 일행은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에 곧장 천막을 거두고 마차를 정돈하여 길을 떠나기 시작했 다. 문인천상은 역시 일찌감치 주운양의 권유에 의해 가장 좋은 마차의 안에 올라타게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이내 마차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일행이 출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악채릉은 지금도 마차 안에서 그의 맞은편에 함께 타고서 묵묵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문인천상은 기실 그녀가 지금 은근히 공력을 끌어올 려서 주위의 상황에 대해서 청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훤하게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문인천상이 이 악채릉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한 점의 거짓도 깃들어 있지 않는 사실 그대로라고 할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은 잠시 수심에 잠긴 듯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대로 맹숭맹숭하게 앉아 있기가 뭣한 생각이 들어서 이윽고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나는 사막의 날씨라고 하면 무조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날씨 는 제법 신선하고 좋은 편이로군. 오늘 아침의 날씨는 좋지 않소?" …… 악채릉은 문인천상이 질문을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뭔가 듣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듯이 잠시 멈칫했을 뿐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다시 말했다. "당신이 나와 얘기를 나누고싶어하지 않는다면 나도 구태여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 소. 사실 이곳의 상황은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니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안고 있는 것이 보다 적당할 것이오."악채릉은 비록 밖의 상황에 대해서 심하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그와 같은 말에는 고개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미를 심하게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 것인데, 기실 이곳은 완전히 밖과 차 단되어 있어서 누구도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악채릉은 싸늘하게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정말로 능청스럽군요. 내가 정말로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것 같은가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문인천상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만일 당신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은 아마도 나의 품속에 안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 오. 나는 설마하니 당신이 계속해서 신법을 펼쳐서 나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소." 악채릉은 그 말에 두 눈에서 싸늘한 광채를 발하며 말했다. "내가 정말로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 같은가요?" 문인천상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미 말했지 않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당신의 첫남편이고 또한 풍류귀신이 되는 것 이라구." 말과 함께 이미 그는 신형을 움직여서 그녀의 옆자리에 다가와 있었다. (……!) 악채릉은 일순 흠칫한 기색이 되어 신형을 날리려고 하다가 이윽고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 해 보더니 문인천상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은 결코 쓸 데없는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또한 너무 심하게 장난하면 안된다는 것이예요. 만 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저는 정말로 밖으로 나가서 마차의 지붕 위에서 가도록 하겠어 요." 문인천상은 이때 이미 그녀의 몸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그녀의 백옥같은 볼에 입맞춤을 하 고 난 뒤였다. 그는 악채릉의 말이 끝나자 어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응, 하고 대답을 하고는 이어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어서 올리더니 이윽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는 본격적으로 애무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악채릉은 이때 문인천상이 대답은 하면서도 그와 같이 심하게 장난을 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다소 아미를 찌푸렸으나 이내 포기한 듯이 눈을 감고 그대로 몸을 내맡겨 버렸다. 하지만 기실은 그녀는 그 순간부터 공력을 사용하여 주변의 상황에 대해서 청력을 집중시 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 순간 문인천상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비록 자신의 몸을 문 인천상이 애무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누군가가 마차의 주위에 와서 엿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주의깊게 이목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이 악채릉은 이미 문인천상에게 여인의 고귀한 첫순결을 바친 후였고 게다가 매우 마음으 로 사랑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이어 문인천상 이 더욱 노골적인 애무를 하기 시작하자 결코 거부하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간혹 다리를 조금씩 벌려서 그의 손길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비록 그녀는 정신을 맑게 하고 주위의 상황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였으나 역 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애무를 받게 되자 황홀한 기분이 되게 되었고, 절로 흥분하여 함 께 화합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악채릉은 경장차림이었던 것을 백색의 아름다운 긴 치마로 갈아입은 후였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우선 그녀의 속에 입은 작은 바지와 고의를 아래로 조금 끌어내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는데, 비록 악채릉은 아직 방사에의 즐거움에는 익숙하지 못했으나 그와 같은 애무에는 이내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게 되어서 마침내 입 속으로 음, 하는 신음 소리를 발하게 되었고, 이어 문인천상이 깊숙히 입맞춤을 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황홀경에 젖어서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껴안으며 한껏 그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었다. …… 외부와 차단된 마차 안에서의 애무와 입맞춤의 시간은 길었고 또한 농밀했으며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악채릉은 일단 황홀경에 들어가게 되자 전혀 외부의 상황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고 부 끄러움도 잊은 채 한없이 그의 품속으로만 파고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가능하면 신음 소 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입맞춤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그녀가 그를 열 렬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마치 때로는 그녀는 더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러 한 갈망하는 마음들이 일기 시작하자 문인천상은 문득 그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며 욕망을 절제하고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기 시작했다. 기실 문인천상도 아까부터 외부의 상황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지금과 같은 상 황에서 비록 누군가가 이곳을 엿보고 있지 않다고는 해도 사랑하는 여인과 이러한 곳에서 그러한 은밀한 사랑의 행위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악채릉은 처음에는 황홀경에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속으로 계속해서 파고들었으나 이윽 고 문인천상이 계속해서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 주지 않자 심한 갈망을 느낀 듯이 어 쩔 줄을 몰라 하다가 이윽고 문득 문인천상의 의도를 대강 눈치챈 듯이 정신을 차리며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흘리는그 눈물은 몹시 처연해 보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녀는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시집을 가지 않아요. 나는…… 만일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도 당신의 뒤를 따라갈 거예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이고 또한 어디로 따라오겠다는 말이오?" 문인천상이 가만히 듣지 못하고 웃으면서 그와 같이 물었으나 악채릉은 다시 눈을 감고 고 개를 문인천상의 품속에 묻은 뒤에 말없이 계속해서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기 시작했다. × × × 아침에는 바람이 잔잔하고 기온도 서늘한 편이더니 이윽고 정오가 가까워지자 점차로 모래 바람이 일어서 강하게 마차의 휘장을 때리기 시작하고 내리쬐는 태양의 기온도높아져서 마 차의 내부는 점차로 찜통과도 같이 더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실 이 마차의 밖으로 나가면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게 되기 때문에 더욱 더위를 느 끼게 되어 있다는 것을 문인천상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머리를 써서 더위를 피하려 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계속 악채릉의 알몸과도 같은 치마 속의 하체를 애무하며 그녀의 몸을 껴안고 있었는데, 물론 그의 신체는 더위를 타지 않는 것이었지만, 이 악채릉 의 몸은 순음기공(純陰氣功)을 절정의 경지에까지 연마한 상태였기 때문에 거기에서서늘 한 기운이 느껴졌으므로 기본좋게 피서를 하는 데는 그만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악채릉은 아까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다가 문득 잠이 든 듯이 계속 잠자코 그러고 있었는데, 문인천상은 이미 그녀가 잠을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으므로 한참 동안 그녀가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묵묵히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만 하고 있다가 이윽고 점차로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보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사람들이 어디에서 잠시 마차를 멈추고 쉬어가겠군. 나는 언제까지나 이 렇게 있고 싶은데 어쩔 수가 없이 우리도 남들의 눈치를 봐야 하겠소." 악채릉은 이윽고 눈을 뜨고 여전히 얼굴을 문인천상의 가슴에 묻은 채로 공력을 귀에 모아 어 주위의 상황을 살피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며 입을 열어 말을 받았다. "당신도 남들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다 있나요?" 그녀의 두 눈은 이미 눈물의 흔적이 사라져 ㅂ리고 맑고 부드러운 광채만이 흐르고 있는 상 태였다. 문인천상은 그녀의 그러한 아름다운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나는 원래 한 부잣집의 도령이었는데 어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습관이 들 지 않을 수가 있겠소?" 악채릉은 다소 몽롱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문득 문인천상이 손가락 으로 아랫도리의 어느 곳을 건드리자 일순 깜짝 놀라서 급히 그의 목을 껴안고 위로 솟구 쳐 오르며 숨을 할딱거리다가 이어 고개를 그의 목 뒤로 숨기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랑해요! 나는 조금 전에야 당신이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저의 목숨보다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이러한 저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겠죠?" 문인천상은 그녀의 아름다운 엉덩이를 치마 속에서 한 차례 부드럽게 애무해 준 다음에 이 윽고 내렸던 고의와 작은 바지를 올려서 입혀 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애하고 있소." 악채릉은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당신은 저를…… 저를 이해하고 사랑해 주실 건가요?" 문인천상은 새처럼 가냘프게 떨고 있던 그녀의 상체를 내려서 그녀의 입술에 깊이 입맞춤 을 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설령 당신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 할 것이오." (……) "사랑해요……" 악채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감히 그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그와 같은 말을 흘려낸 다음에 즉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숨기고 말았다. 바로 그때 문득 천천히 달리던 마차가 느닷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섰고, 뒤를 이어 앞쪽에서 마부가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문인 공자님! 점심때가 되어서 잠시 쉬어 간다고 하니 일단은 마차에서 내리시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요?" …… 한창 사랑의 감정 속에 젖어 있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소리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 과도 같아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에 족했다. 문인천상은 잠시 멈칫하다가 여전히 자신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악채릉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일단은 몸을 일으켜서 나가 봐야 하지 않겠소?"악채릉은 그 말을 듣자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나는……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나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데 그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 (……) 악채릉은 비록 나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만의 밀회하는 장면 을 엿보는 것은 더욱 원하지 않았다. 이윽고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새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신은 울보로군. 하지만 그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어디 당당한 강호의 여인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소?" 악채릉은 소매를 들어서 눈물을 닦으며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눈물이 많아요. 그러나 사실은 전에는 눈물이 많지 않 았는데 당신을 사랑하게 되니 이렇게 눈물이 많아지게 되는군요." 문인천상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던 그녀의 몸을 안아서 다시 바닥에 내려 준 다음 에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죄인인 셈이로군.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많이 울게 만들었다는데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이어 문인천상이 그녀의 한쪽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자 악채릉은 즉시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는 장난기가 다분한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대꾸했다. "당신은 감히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뺌을 할 것인가요? 이 커다란 대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요?"문인천상은 그저 무심결에 듣고 있다 가 일순간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표정의 변화가 재미있어서 킥, 하고 웃으며 다시 손가락질을 하며 말 했다. "물론이예요.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눈물이 많아지게 되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것인가요?" 문인천상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악채릉은 킥킥, 하고 거푸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당신이 지나치게 잘생겼기 때문이예요. 음…… 앞으로 강호에 나가게 되면 수 많은 여자들이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줄을 서게 될 것인데 내가…… 내가 기분이 좋을 리 가 있겠어요?" 악채릉은 웃다 말고 자신의 얘기를 생각해 보고는 문득 왠지 마음이 정말로 무거워지는 듯 이 수심에 찬 표정을 하게 되었다. 문인천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이 울었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만일 당신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면 나는강호에 나가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오? 나는 기실 당신이 우리가 혼인 을 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악채릉은 다소 수심에 차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피식 다시 웃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게 그거라는 말씀이예요. 이를 테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니겠어요? 색 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니…… 아 그러니까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죠." "색즉시공 공즉시색?" 문인천상은 일시 악채릉이 횡설수설하며 내뱉는 말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어 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악채릉은 킥, 하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 "예로부터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요점은 마음을 비워야 한 다는 것이죠. 음음,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두고 우리 밖으로 나가요." 말과 함께 악채릉은 정말로 마차의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신형을 움직였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겨우 두 발자국도 내딛기도 전에 그녀는 문득 신형을 멈추더니 다시 그를 향해 신형을 돌려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더니 소리없이 마구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제20장 사막(沙漠)의 쇠고기국 문인천상은 처음에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나 이윽고 잠시의 시간 이 흘러도 그녀가 눈물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못난 울보로군. 하지만 비록 나야 괜찮다고 해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 람들이 우리 사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소?"악채릉은 그제서야 눈물을 멈추고 울음 섞 인 음성으로 얼굴을 그의 품속에 묻은 채로 대답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라고 해요." 문인천상은 사랑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다시 입을 열어 말 했다. "하지만 그들은 혹시 마차의 부근의 와서 우리의 모습을 훔쳐볼지도 모르는데?" 악채릉은 고개를 가볍게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흥! 볼 테면 얼마든지 보라고 그래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고개를 들어서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래 이제는 도무지 겁나는 것이 없어졌다는 말이오? 하지만 나는 지금 다소 배가 고픈 편인데 점심을 거를 수야 있겠소?"(……) 악채릉은 그제서야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배가 고픈 것을 한 번 정도는 참아서는 안된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이 만 나가도록 해요." 악채릉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소맷자락을 들어서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밖으로 신형을 돌려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악 악채릉이 밖으로 걸어나가려고 마차의 휘장을 걷어올린 순간 이미 마차의 앞 에는 한 사람이 써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주운양이었다. ……! 지금 밖에는 다소 심한 모래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고 그 모래바람 속에서 주운양은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가 이윽고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밖은 이렇게 바람이 심하니 조카는 차라리 안에 그냥 타고 있다가 음식을 가져 오거든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네. 음…… 지금은 별다른 위험도 없고 하니 악 소저가 대신 음식을 가져가는 것도 괜찮겠지."문인천상은 마악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 며 주운양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니 고맙습니다." 주운양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이미 말했듯이 자네가 편안하게 여행하기를 바라는 것이네.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바람이 들어가면 좋지 않으니 휘장을 내리고 잠시 기다리도록 하게. 음, 악 소저!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음식을 가져오도록 하십시다!" (……) 악채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운양의 말대로 마차에서 내려서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운양은 이어 문인천상에게 웃음을 보인 후에 손수 마차의 휘장을 내려 주고는 악채릉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마차들이 여러 대가 둥그렇게 바람을 막으면서 모여 있는 곳의 중앙에는 지금 언제 설치한 것인지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고, 어느새 그 안의 국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견하기로도 그것은 맛좋은 쇠고기국인 것 같았는데, 호위무사들이 연신 바닥에 불을 지피 고 그 가운데 더러는 가마솥 속의 국물이 눌어붙지 않도록 휘저으며 그야말로 구수하고 군 침이 절로 도는 냄새를 풍기는 가운데, 상장풍이나 주씨 남매들, 그리고 악불범 등은 이미 그 호위무사들이 조금씩 떠 주는 국물을 마시면서 그 둘레에 늘어서 있는 중이었다. 주운양의 인도를 받아서 악채릉은 말없이 그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는데, 이윽고 호 위무사 하나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쳐들고 웃으며 물었다. "아! 악 소저이시군요. 실로 이 쇠고기국의 국물맛이 기막힙니다요. 혹시 악 소저께서도 우선 한 그릇 맛을 보시겠습니까?" 악채릉은 자신과 함께 다가온 주운양이 이미 앞으로 달려들어서 게걸스럽게 국물을 떠서 마 시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나중에 먹겠어요. 빨리 음식이나 주세요."그 호위무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하긴 악 소저와 같으신 분은 우리들과는 달리 고결하신 분이므로 이러한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법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요? 이제 거의 다 끓어서 고 기도 푹신하게 익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상을 차려 드리겠습니다요." 호위무사가 이윽고 바닥의 불을 치우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릇들을 가져와서 국을 뜨기 시작 하는 것을 보고 악채릉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때 주운양은 원래 아침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는 데다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대서 속이 허전하였으므로 쇠고기국을 그야말로 걸신들린 듯이 먹고 마시고 있는 것이 었는데, 그러한 광경을 보자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이 이제까지 그저 맛을 보는 정도로 조 금씩 국물을 마시거나 고기조각을 뜯던 사람들도 이윽고 저마다 앞으로 달려들어서 게걸스 럽게 음식을 먹고 마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매우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 라 호탕한 느낌까지 주어서 국을 뜨던 호위무사들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런 것을 보고 눈살 을 찌푸리지 않았다. 이를 테면 강호의 도상에서 종횡하는 무림인들의 호탕한 기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 한 것이라는 것은 은근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장냉서 여자라고는 악채릉과 주완청 등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주완청은 이미 자신의 오빠들과 함께 어울려서 신나게 국물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고, 다만 음식을 먹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악채릉과 서너 명의 호위무사들에 불과했다. 악채릉이 입고 있는 눈부시게 새하얀 백색의 의복은 이러한 황량한 모래바람 속에서 고결 한 느낌을 불러일으켜서 차라리 그녀는 그런 게걸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나서서 국물 속을 뒤지고 음식을 퍼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호위무사들이 상을 차리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먼저 악불범에게 상을 차려 주고 나서 두 번째로 악채릉에게 약간의 식은 밥과 만두, 그리고 고깃덩어리를 푸짐하게 올려 서 국물과 함께 상을 차려서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헤헤, 이런 황량한 사막에서는 좋은 음식은 구경할 수가 없고 그저 이런 정도로 만족해 야 하는 것이지요. 비록 맛은 어떨지 몰라도 소저께서 즐겁게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 호위무사는 특별히 악채릉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마음이 훈훈해지는 덕담까지 해주고 있 었다. 악채릉은 조용히 미소하며 그 작은 쟁반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마악 그녀가 신형을 돌려 쟁반을 들고 마차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에 이때 느닷없 이 한 가지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주완청이 이제까지 제법 숙녀답게 얌전하게 국물을 마 시다 말고 갑자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오라비인 주원학을 향해 이렇게 소리쳐 말했던 것이 었다. "앗! 둘째 오빠! 얼굴이 갑자기 왜 그렇죠?" ……? 느닷없이 터져나온 경악성이었기 때문에 한창 신나게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있던 사람들은 일단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이 순간 주원학은 주완청의 질문을 받고는 도리어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쨌다고 야단이야, 청매?" 주완청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다시 소리쳤다. "오빠의 얼굴이…… 오빠의 얼굴이 언제…… 언제 그렇게 변했죠?"주원학은 그제서야 자신 의 얼굴을 한 번 만져 보고는 어딘가 이상을 느꼈는지 안색이 대변해서 그녀를 향해 되물었 다. "내 얼굴이 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게냐?" 주완청은 크게 답답하다는 듯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빠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어요!" ……!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일순 맛있게 먹고 있던 것도 중단하고 안색이 대변했다. 주원학은 일시 아연하여 자신의 얼굴을 만지다가 이윽고 주완청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놀 라서 소리쳐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청매 너의 얼굴도 새까맣게 변한 것 같은데? 대체…… 대체 이게 모두 어찌 된 영문이지?" 그렇다! 지금 느닷없이 벌어진 사태는 능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순간 주완청과 주원 학뿐만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주원헌과 심지어 주운양 등의 얼굴마저 거무스레하게 변색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불범은 이미 한쪽에서 선 채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고, 주운양은 안색이 대변하여 손가 락으로 고기국의 국물을 찍어서 맛을 보더니 이윽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모두 중독된 것이다!" 주원헌이 놀라서 급히 그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그 고기국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주운양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대답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국물 속에는 독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다함 께 지금 중독되었는데 그것 외에 어디에 독이 들어 있었겠느냐? 말하자면 무색은 아닐지 몰 라도 무미무취의 독인 것이다."주원헌은 안색이 급변하여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누가 이와 같은 독을 풀었을까요?" 주운양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듣기로 대막에도 독전갈 따위의 독물들이 있고 독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틀림 없이 이것은 천화궁의 놈들이 수작을 부린 것일 것이다. 그러나…… 대체 우리들이 모두 보 고 있는 가운데 누가 국물 속에 독을 집어넣었을까?" 주원헌이 대답했다. "비록 흉수가 있다면 그럴 기회가 많이 있었겠지만 감히 우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러 지는 못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가장 처음에 가마솥에 국물을 앉힌 사람이…… 조 심하십시오!" 바로 그때였다. 주원헌이 말끝을 흐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호위무사들 가운데의 하나가 번 개같이 신형을 움직여서 주운양을 향해 일권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그 호위무사의 솜씨는 이미 상당한 경지의 것임에 분명했다. 아무래도 그자는 이미 주운양 등이 중독이 되어서 거의 반항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운양은 그것을 보고 이내 분노하여 소리쳤다. "네놈이 바로 첩자였구나!" 이 주운양은 비록 중독이 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직은 강호의 절정의 고수다운 저력이 남 아 있었다. 그는 일단 호위무사가 바람처럼 휘둘러 오는 폭풍같은 주먹의 공격을 슬쩍 옆 을 피한 다음에 쌍장을 휘둘러서 그대로 그 호위무사의 어깨를 가격해 버렸다. 퍽! 흡사 가죽부대가 터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위력이 있는 장력 인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호위무사는 즉시 반대편으로 훌쩍 날려가서 입 속으로 피를 화살처럼 내뿜으며 그대로 모래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입 속에서 피를 내뿜고 있는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주운양은 중독된 가운데 무리하 게 공력을 사용한 관계로 안색이 더욱 검게 변하고 입 속에서 검은 핏물을 토하고 있었는 데, 주완청이 급히 다가들어서 부축하자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혹시 놈이 달아날까 봐 전력을 다해서 반격하였는데, 그 바람에 애써 찾아낸 첩자녀 석이 죽어 버리고 말았구나. 아아,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주완청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이미 중독이 되신 상태이기 때문에 그처럼 공력 조절에 실패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예요.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시고 어서 운기조식을 하시도록 하세요." 주운양은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고 있었으면서도 고개 를 옆으로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지금은 운기조식을 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 대부분이 중독이 된 상태인데, 놈 들이…… 놈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니 곧이어 천화궁의 놈들이 몰려들지 않 을까 걱정리로구나. 아아, 내가 미처 이런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다니!" 주운양은 자신의 몸이 거의 다 죽어 가는 상황인데도 그와 같이 일행의 상황에 대해서 걱 정하고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그랬는지 마치 주운양의 그러한 장탄식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이때 사방의 모래 속에서 느닷없이 흑의장한들이 무수하게 나타나 일행을 공격하 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주원헌 등의 사람들은 즉시 나서서 반격을 하려고 했으나 중독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무력했다. 그나마 악불범만이 그래도 제법 무공을 발휘하고 있기는 했어도 그 역시 중독이 되어서인지 시원시원하게 무공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른 사람들은 연신 밀려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설상가상으로 일행과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던 문인천상이 타고 있었 던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아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주운양은 이때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의 운신을 하지 못하고 주완청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 데 그러한 광경을 보고는 즉시 소리쳤다. "앗! 마차를 놓쳐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문인 공자가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설령 목숨 을 바치더라도…… 악 소저! 어서 이쪽의 일은 그만두고 마차를 따라가서 나의 조카를 구 해 주시오!" 아마도 이들 흑의 장한들의 무리는 미리부터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 습격을 시작 한 것이 분명했다. 악채릉은 그렇지 않아도 장검을 뽑아서 흑의장한들을 상대하고 있다가 마차를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주운양의 그와 같은 외침을 듣게 되자 더욱 신법의 속도를 높여 서 마차를 추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에서는 연신 병장기의 부딪치는 소리, 거칠게 내뱉는 욕설과 처절무비한 비명 소 리, 그리고 주운양이 크게 독려하는 소리 등이 끊임없이 들려 오고 있었다. …… 제21장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쓰다 문인천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마차를 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마부가 바뀌었는지 마차가 빠르게 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의 능력으로는 이런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는 처지였으나 그는 일단은 상황을 두고보기 위해 그저 잠자코 마차가 달리는 대로 놔두고 그저 아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거의 한 시진 정도나 달렸을까 느닷없이 마차의 앞쪽에서말들이 울부 짖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이윽고 마차가 거칠게 급정거를 하는 것이었다. ……! 기실 이 사막 지대는 비록 그 거대한 대막과 같이 험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들이 달리 기에는 힘이 드는 곳이어서 일단 말들이 마차를 끌고 한 시진 동안이나 질주하게 되자 나 중에는 그 힘이 다하게 되어 쓰러지고 만 모양이었다. 마차는 게다가 거칠게 정거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한쪽의 바퀴가 모래더미 속으로 파묻 혔는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게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마차의 휘장이 쉴 새없이앞뒤로 펄럭이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비록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또한 자리가 좋지 않고 거칠기는 해도 일 단은 앞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나게 될 사람들을 기다리며 잠시 동안 그렇게 좀더 앉아 있기 로 했다. 과연 그가 그렇게 작정을 하고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로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때 문인천상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악채릉 바로 그녀였다. (……!) 악채릉은 일단 휘장을 조금 젖히고서 고개를 들이밀고는 문인천상이 아직도 안에 타고 있다 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휘장을 젖히고 아예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버렸 다. "당신은 정말로 대담하군요. 그것은 진정한 용기인가요, 아니면 겉모습뿐인 만용에 불과한 것인가요?" 지금의 악채릉의 어조는 다소 시비조의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어렵게 마차를 추격해 오느라 어지러워진 의복과 머리결의 사이로 그녀의 눈빛은 깊은 안도와 사랑으로 밝게 빛나고 있 었다. 문인천상은 여전히 마차의 의자 위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고 미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질문 에 대해 되물었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 것 같소?" 악채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하며 대답했다. "저는 기왕이면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사실은 당신의 생각이 틀렸소." 악채릉은 다소 의외인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결국 당신은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조용히 웃 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나의 이러한 행동은 용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만용도 아니오. 그저 평상시의 일상적 인 행동일 뿐이오." 악채릉은 잠시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다가 문득 킥, 하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일상적인 행동이라구요? 당신의 말은 정말로 재미있군요."말과 함께 악채릉이 다시 걸음을 옮겨서 그의 앞으로 다가오자 문인천상은 그녀의 허리를 안으려고 두 손을 내밀다가 문득 멈칫하고 말했다. "당신은 갑자기 무섭게 변했구려." 문인천상은 문득 그녀의 옷깃에 약간 묻은 핏방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악채릉도 일순 그러한 문인천상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다소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그를 향 해 물었다. "당신은 이제 나와 같은 사람이 싫어졌나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손을 내밀어 얼른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그녀를 자신 의 무릎 위에 앉힌 다음에 깊은 입맞춤을 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설사 당신이 지옥에 갔다왔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문인천상이 입맞춤을 하자 악채릉은 일순 다소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오히려 더욱 열정 적으로 그의 목을 껴안으며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입맞춤은 길고 길었으되 황홀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어떤 비장한 슬픔 같은 여운이 흐르 고 있었고, 그 가운데 억제하지 못할 사랑의 갈망이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것 같 았다. 악채릉은 마침내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숨을 할딱거리기 시작했으나 이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그의 품곡에 얼굴을 묻고는 가쁜 숨을 천 천히 몰아쉬고 가라앉히면서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문인천상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계속해서 부드럽게 애무해 주었으며, 이윽고 그녀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이 자리는 비록 바람을 막아 주기는 하지만 왠지 삭막한 느낌을 주는구려. 우리는 이 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악채릉은 그제서야 다소 상기된 안색으로 고개를 들며 웃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그러한 생각을 하다니 당신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래요, 우리 어서 밖으로 나가요!" 그런데 마악 그녀가 신형을 움직여서 문인천상의 무릎 위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순간에 갑 자기 그녀의 안색이 크게 돌변하게 되었다. 무심코 고개를 아래로 숙인 순간에 느닷없이 문인천상이 지금 앉아 있는 자리의 아래쪽에서 거의 아무런 기척 없이 시퍼런 검날 하나가 불쑥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 만일 이때 악채릉이 눈길이 공교롭게도 우연히 그 검날을 발견하고 또한 그녀의 무공이 그 토록 고강하여 임기응변이 신속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다음 순간에 문인천상의 몸은 그 검날에 의해 육신이 꼬치처럼 꿰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악채릉은 제법 동문들간의 비무를 통해서 실전적인 무예를 연마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빠르게 솟구치는 걸날을 본 순간에 미처 놀라는 자신의 마음도 아랑곳할 사이도 없이 즉시 문인천상의 몸을 안고 위로 솟아 올랐다.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던 검날은 그리하여 간일발의 차이로 허공만을 베게 되었던 것이었 는데, 다음 순간에 그 아래쪽에서 시뻘건 핏물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악채릉이 한 손으로 문인천상의 허리를 감고서 솟구치는 순간을 이용하여 다른 한 손으로 등뒤의 장검을 뽑아서 신속하게 그 아래쪽을 베어 버렸던 것이었다. 비록 그 아래쪽의 사람이 비명을 지르지는 않 았지만 그러나 핏물이 그렇게 배어 나올 정도라면 상당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악채릉은 일단 문인천상의 몸을 안고 위로 솟구치면서 그 암살자를 베어 버린 후에 이미 허 공에서 이 마차의 내부가 지금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지극히 위험하기 때문에 한시라 도 빨리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입구쪽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누구라도 이런 곳에서 습격을 받게 되면 사방의 휘장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지 구태여 입구쪽으로 나가려고 신경을 쓰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악채릉이 구태여 입구로 해서 나가려고 하는 것은 기실 그러한 상직적인 사고방식의 허를 찌르는 것 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입구에 내려서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장검을 휘둘러서 휘장을 베어 버 렸을 때에 훤하게 뚫려 버린 공간 속으로 마치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하듯이 뛰어 들어오며 덮쳐드는 하나의 흑의인영이 있었다. --- 흑의 장한. 과연 주운양이 천화궁의 무리들이라고 말했던 자들이었는데, 이제까지 보았던 것처럼 그들 의 복장은 한결같이 동일했고 그 무예도 제법 놀라운 결지에 있는 것들이었다. 악채릉은 한 손으로는 커다란 문인천상의 허리를 휘어감아서 가볍게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묻은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문득 결사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향해 덮쳐들고 있 는 흑의장한의 공격을 보는 순간에 그녀의 안색이 다소 창백하게 변했다. 그것은 이미 그 녀의 공력이 탈진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의 혐오스러운 일면을 사랑하는 사람 에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흑의장한은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왠지 득의한 기분이 들어서 더욱 맹렬하게 병 기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는데, 마악 그자의 병기가 문인천상의 옆구리를 거칠게 쓸어 가는 순간에 일순 환상과도 같은 백선(白線)이 짧은 호선을 그렸으며 맹렬하게 파고들던 병기가 맥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한 점의 비명도 없이 그자의 육신이 가슴 부위에서 붉은 선혈을 내쏟으며 바닥으로 거꾸러지고 있었다. (……!) 다시 한 사람의 목숨을 취한 악채릉은 다른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문인천상의 몸을 안고 밖으로 훌쩍 신형을 날렸으며 이어 사방에서 마치 까마귀떼처럼 날아드는 흑의장 한들과 마주쳐야 했다. 이들 흑의장한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일류의 경지를 넘어선 것들이었 기 때문에 악채릉은 문인천상을 한 손을부축한 상황에서 다소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일순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 찰나 그녀의 장거미 마치 환상처럼 사방으로 휘돌아가며 백색(白色)의 무수한 꽃송이를 날리는 것 같은 검화(劍花)를 피워내기 시작했는데,"으악!" 누군가으 짧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사방으로 선혈이 점점이 뿌려지고 그 백색의 검 화에 휩쓸린 흑의장한들이 다소 주춤하여 분분히 뒤로 물러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악채릉의 검술은 과연 놀라운 경지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비록 그녀의 검술이 절 정의 경지에 올라있는 것이기는 해도 지금 다소 물러선 흑의장한들이 그녀의 검화에 입은 상처는 그리 깊지 않은 경상들이 대부분이었고 게다가 상처를 전혀 입지 않은 사람들도 몇 명이나 됐다. 악채릉의 무공이 비록 놀랍지만 한 손으로 문인천상을 부축하는 상황에서 무 려 십수 명이나 되는 흑의장한들을 모두 물리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악채릉의 백색의 검화가 한 순간 찬란하게 피어 올랐으나 다음 순간 모래바람에 불어와서 그것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려 놓았고, 이어 상처를 입지 않은 수명의 흑의장한들이 그 순간 을 노리고 급격하게 두 사람을 향해 병기를 휘둘러 왔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가 죽지 않으 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살벌한 혈전의 현장이었다. 악채릉은 몸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의 검화가 모래바람의 강한 회오리에 밀 리게 되자 다시 정확하게 그것을 전개할 수가 없었고, 모름지기 그러한 절정의 검법은 아 주 정묘하게 펼쳐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검법이 흐트러지게 되어 뒤를 이어 덮쳐드는 흑 의장한들의 공격을 모두 다 막을 수가 없었다. 악채릉이 잠시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들 흑의장한들의 기세는 반대로 더욱 살아나서 전력을 다하게 되었고, 일류의 경지를 넘어서 있는 그들의 전력을 다한 합공은 실로 무시 무시하여 일시에 하늘을 온통 병기의 그림자로 뒤덮는 듯했다. …… 악채릉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이미 자신의 능력 밖의 상황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공력 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두 눈 가득 크게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다소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원래 조금 전에 다가온 그 강력한 힘을 가 지고 있는 회오리 모래바람은 처음에는 악채릉의 공격을 무산시켜 버리더니 이번에는 다시 그녀를 공격하고 있는 흑의장한들의 공세를 뒤흔들어서 맥없이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닌가! 마치 작은 태풍의 눈과 같은 기류가 형성되어 흑의장한들이 허공에서 분분히 낙엽처럼 흔 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일순 크게 긴장하고 있던 악채릉이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지금 만일 이 회오리를 이용하여 신형을 위로 솟구친다면 지금의 난관을 벗어나는 데에 있 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로 지금과 같은 실전의 상황은 촌각의 상황 변화에 따라서 생사가 좌우되는 것인 만큼 결 코 넉넉하게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악 채릉은 즉시 결단을 내려서 신경을 솟구쳐 올랐으며, 마치 태풍의 눈 갠 같이 생긴 회오리 는 과연 그녀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아서 오히려 그녀는 아래쪽으로부터 막강한 부력을 받 아서 허공 높이 솟아 오르게 되었다. 악채릉은 물론 그렇게 솟구쳐 오르는 동안 자신의 특유의 산화검법(散花劍法)을 전개하여 허공에서 때 아닌 회오리를 만나서 당황해 하고 있는 흑의장한들을 휩쓸어 버렸는데, 그와 같은 광경은 마치 백색의 광채가 위로 솟구치며 분분히 사방에 붉은 혈화(血花)를 흩뿌리 고 있는 것 같아서 모래바람 속이라고 해도 아주 선명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 이 산화검법이라고 하는 것은 여인이 펼치기에 적당할 뿐만 아니라 허공에서 경신술을 펼 치는 데 있어서도 훌륭한 도움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악채릉은 일단 검법을 펼쳐서 흑의 장한들을 물리친 이후에도 계속해서 검법을 펼쳤으며 그것에 의해서 방향을 잡아서 허공을 가르고 한참이나 날아갔다. 평소에 그녀는 산화검법을 펼치면서 이십여 장을 날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회오리바람의 부력까지 받아서인지 무려 삼십 장 가까이나 단숨에 날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악채릉 등을 공격했던 흑의장한들은 비록 그녀의 검법에 의해 중상을 입은 것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일시적으로 혼이 날 만큼 놀랐을 뿐만 아니라 가벼운 경상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쉽게 그녀의 뒤를 쫓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이제까지 아까와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그녀의 한쪽 손에 들려서 함께 날아가 고 있었는데, 악채릉이 휘두르는 장검의 검화가 무수한 광채와 압력을 일으키고 있는 순간 에 그는 다소 느긋한 감정이 되어서 사위를 둘러볼 수가 있었다. 기실 마차가 멈춰섰던 장소인 이 부근은 바로 사막지대 가운데에서도 드물게 솟아 있는 암 봉의 남쪽 방향이었다. 암봉은 비록 거칠고 황량하여 나무나 풀 등이 전혀 자라고 있지 않 아 보였지만, 그러나 간혹 동굴들이 여기저기에 뚫려 있는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이 거대한 암봉도 앞으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면 필시 바위가 모래로 변하여 사라 지게 되겠지만 아직은 근방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돌산임이 분명했다. 지금 바람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그 돌산의 앞으 로 다가가게 되자 회오리바람의 기세게 급격하게 약화되어서 두 사람의 신형이 점차로 지면 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악채릉은 이미 돌산으로 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지 금 이렇게 지면에 내려서게 되어도 그다지 적들의 추격을 심하게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가 마악 문인천상과 함께 지면에 발을 내딛는찰나 느닷없이 어디에 선가 다시 한 명의 흑의장한이 나타나서 살벌한 기세로 그녀를 향해 공격해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악채릉은 우선 자신이 미리 주위를 살폈을 때에는 없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사 실과 이자는 이제까지의 다른 흑의장한들과는 다른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 다. 아니 이 흑의장한의 무공이나 행동거지는 어딘가 그녀의 눈에 익은 것이기도 했다. 흑의장한은 두 사람의 앞에 이르러서 말없이 장검을 휘둘러서 마치 검은 교룡이 꿈틀거리는 것과도 같은 검기(劍氣)를 뿌려내며 사방을 압도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기실 이자는 바로 가장 처음에 문인천상의 누각에서 습격을 해 왔다가 달아났던 그 흑의장한이었던 것이었다. 비록 이제까지 두 사람을 습격했던 흑의장한들의 무예가 고강하기는 했어도 지금 이자의 무 공은 그자들의 무공보다도 훨씬 고강하여 가히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가 있을 정도였 다. 악채릉은 우선 장검을 휘둘러서 흑의장한의 공격을 해소시키고 신형을 날려 옆으로 피하면 서 염두를 굴렸다. 실제로 그녀가 단독으로 겨룬다고 한다면 이 흑의자한에게 이기지는 못 한다고 해도 지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한 손에 문인천상이 들 려 있는 상태이고 또한 그녀가 눈앞의 이 흑의장한과 대결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게 되어 나 머지 다른 흑의장한들까지 와서 포위하게 된다면 대체 그자들을 모두 무슨 수로 감당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절로 아득한 심정이 되면서 악채릉은 순간 이를 악물고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눈앞의 흑의장한을 향해 반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가 펼치는 검법은 그야말로 시간을 절약하기위해 자신의 안전도 돌보지 않고 상대만을 공격하는 동패구상의 검법이라 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정도의 검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자신의 전신을 수비하면서 삼 푼이나 닷 푼쯤 공격을 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지금처럼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수비는 하나도 없이 공격만을 퍼붓는 수법은 말하자면 사파(邪派)의 검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 이고 또한 다르게 말하자면 구명절초(救命絶招)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검법은 정도의 검법이 아니기 때문에 정작 극치에 도달한 검법의 달인을 만나게 되면 오히 려 더욱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게다가 설령 그들이 아니라고 해도 처음에는 다소 위력 을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점차로 그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었다. 악채릉의 검법은 원래 우아하고 선명하며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 이 순간에 펼치 는 그녀의 검법은 지극히 독랄하고도 패도적이며 사악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흑의장한은 느닷없이 악채릉이 이렇게 적극적인 공세로 나오자 다소 당황한 듯이 머뭇거리 다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자신의 몸이 마침내하나의 바위벽에 닿 아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어 버리자 일순 두 눈에서 독랄한 광채를 발하며 그 자 신도 맹렬한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검법은 이 순간에 서로 비슷해져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상대의 급소만을 노리며 결사적으로 덤벼드는 것이었기에 마치 두 마리의 굶주린 호랑이가 서로 할퀴며 싸 우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광경을 자아내기 시작했는데, 그저 짧은 순간에도 수십 번이나 생 사의 순간이 오가고 간신간신히 서로의 장검이 몸을 비켜나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원래 격전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가 험악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이 싸움은 그러한 보통의 싸 움보다도 훨씬 살벌한 것이어서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아찔아찔하게 만들었다. ……! 삽시간에 마치 귀기어린 듯한 무시무시한 검광이 사방으로 난무하며 주위가 그러한 검기의 와중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원래 순수한 무학의 경지를 놓고 보자면 악채릉은 결코 흑의장한에게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게다가 그녀가 배운 무공들이 하나같이 강호의 가장 정통적이고도 위력적인 검법이라고 할수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비교하자면 악채릉이 다소 앞선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악채릉은 한 손으로 문인천상을 안고 있었고 비록 자신의 몸은 신경쓰지 않아 도 문인천상의 몸은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조급하고 전혀 자신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는 검법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안고 싸우는 상 태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에 반해서 흑의장한은 지금 마음이 조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날렵하고 표홀한 악채릉 의 검법의 특성과는 달리 패도적이고 거칠은 자신의 검법의 특질과 비슷하게 닮은 검법을 펼치고 있는 꼴이기 때문에 더욱 더 상승세를 타고 있는 꼴이어서 점차로 악채릉을 압도해 가고 있었다. 단지 한 가지의 변수라고 한다면 흑의장한이 다소 몸을 사리고 있는 반면에 악채릉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간혹 흑의장한이 승세를 잡았다가도 일단 악채릉이 악독하게 나오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하곤 한다는 것이었는데, 문득 흑의장한은 그와 같은 일이 거푸 일 어나게 되자 마침내는 가슴에서 불길이 일어나게 되어 참지 못하게 되었다. 기실그는 상황으로 볼 때에는 결코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었는데, 일단 상대가 무리하게 공격해 들어와서 거의 부상을 당할 상황인데도 수비를 하나도 하지 않는 것이 울화가 치밀 게 되어서 그만 승부를 내고 싶은 악독한 마음이 일게 되었던 것이었다. 실로 그러한 심리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 을 것이었다. 한두 번을 양보했는데도 상대가 경우없이 무리학 계속해서 무모한 공격을 해 온다면 끝까지 그와 같은 양보를 계속해서 해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마침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실날같은 틈새를 잡아서 승세를 이룩한 흑의장한은 이윽고 악채릉이 자신의 공격하에 반드시 피해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뒤늦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보고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갔다. 아까는 혹시 그녀에게 어떤 비장의 수법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지 금도 비록 결심을 굳히기는 했어도 일단은 그와 같은 것을 의식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다소 어이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흑의 장한의 장검이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시켰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아무런 수법도 쓰지 못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악채릉은 일시 어깨가 관통당한 통증으로 인해 더 이상 공격할 수가 없어서 오른손의 장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깨에서 마치 분수와도 같 은 핏줄기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란 사람은 오히려 흑의장한이었다. 그는 악채릉의 백색의 상의가 온통 그녀 자신의 핏물로 인해 시뻘겋게 물드는 것을 보고 한 동안 자신의 장검을 회수하는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장검을 겨우 회수 하며 다소 넋나간 듯이 번뇌에 가득찬 눈빛을 했다. 바로 그 순간에 악채릉은 우수에 들고 있었던 장검을 세차게 흑의장한의 면전으로 내던져 버렸다. 비록 상처를 입은 탓에 그 위력이 강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중상을 입은 팔로 그와 같은 행 동을 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게다가 그 흑의장한은 다소 복잡한 심사가 되어 서 넋을 잃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마치 암기처럼 날려간 그 장검은 그를 크게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그리고 일단 흑의장한이 정신을 차리고 급히 날아오는 장검을 쳐내고 다시 마음을 수습하 여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그 악채릉이 일종의 고육지계(苦肉之計)로써 흑의장한으로 하여 금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여 놀라게 만들고 다시 그 사이에 신형을 날려서 달아나는 수법을 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대체 악채릉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 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제22장 백색(白色)의 장인(掌印) 악채릉이 문인천상의 몸을 안고 흑의장한의 앞을 피해서 달아난 곳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눈앞에 우뚝 치솟아 있던 암봉의 어느 한 동굴 속이었다. 악채릉은 일단 흑의장한으로 하여금 정신을 놓고 있게 한 다음에 그 허를 찔러서 쉽게 추 격하지 못하게 만들고 나서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신형을 날려 그곳을 벗어난 이후 에 마치 한 줄기의 바람처럼 단숨에 동굴의 안으로 들어섰는데, 단단하고도 거대한 하나 의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진 그 암봉의 곳곳에 뚫려 있는 여러 개의 천연동굴들 가운데의 하 나인 그 동굴은 일견하기로도 생각보다 그 깊이가 깊고 또한 구불구불 기묘한 형상을 이루 고 있는 곳이었다. 악채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장 다시 신형을 날려서 삐죽삐죽 솟아나온 종유석들과 석 순들의 사이를 헤치고 구불구불한 동굴 속으로 거침없이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수십 장을 들어가서 다소 평탄한 공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자 이내 그곳에 신형을 멈추 고는 문인천상을 바닥에 내려주고 길게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 문인천상은 이제까지는 혹시라도 악채릉에게 방해가 될까 봐 말없이 숨을 죽이고 그녀의 행동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는데, 드디어 몸이 자유로워지자 주위의 동굴의 내부가 입구쪽 에서 스며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해서 제법 아름답고 환상적인 형상과 무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둘러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은 비록 다소 삭막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대로의 운치가 있고 게다가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드는군. 넓은 사막 한가운데에 이와 같은 돌산이 있다는 것도 사실은 기이한 일일 것이고…… 그런데 당신의 그 상처는 혹시 너무 심한 것이 아니오?" 악채릉의 어깨에 나 있는 상처에서는 지금은 비록 아까처럼 피가 솟구치고 있지는 않으나 역시 아직도 계속해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는 상태였고, 그로 인해서 원래는 백색이 었던 그녀의 나삼이 지금은 완연한 선홍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장검에 의해 어깨가 관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다시 그 어깨를 사용하여 상당 한 무리가 왔을 텐데도 악채릉은 다만 숨을 고르고 있을 뿐 전혀 지혈조차 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인천상이 조용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창백한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너무 심한 것은 아니예요. 나는…… 나는 괜찮아요." 문인천상은 문득 그녀가 다시 빈 오른팔을 약간 움직이자 금세 굵은 핏물이 줄줄이 흘러내 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피를 쏟는 것은 좋지 않으니 이제는 그만 지혈을 하도 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 악채릉은 잠시 망설이며 생각하다가 이윽고 왼손을 빠르게 놀려서 상처 부위의 혈도를 점 혈하여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한 다음에 왼손으로 새삼스럽게 비어 있는 등뒤의 검집 을 풀어내면서 입을 열어 말을 받았다. "당신의 몸은 괜찮나요? 이곳이…… 이곳이 당신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예요. 우리는 이곳 에서……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도록 해요."문인천상은 그녀의 상처 부위의 피가 완전히 지혈이 된 것을 보자 이윽고 미소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아까의 그 흉적들은 정말로 잔인무도하더군. 나는 혹시 당신이 그 흉적에게 심하게 당하 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소. 그래…… 우리가 이곳에 숨어 있는다면 과연 그들 의 추격을 피할 수가 있을까?"악채릉은 등에서 풀어낸 검집을 한쪽의 바닥에 내려놓고 문 인천상의 뒤를 따라서 하나의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다소 고통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내식 이 이미 진정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정도 참을 수가 있었으므로 다소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통하는 비상출구를 알고 있어요. 그들 은 아마도…… 아마도 감히 그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할 거예요."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자 얼굴 가득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아주 다행이구려. 그런데 기왕이면 이곳에서 쉬지 않고 곧바로 그 출구로 나가 면 편할 것인데 어째서 이곳에서 쉬려고 하는 것이오? 그들이 혹시 이곳까지 쫓아와서 우 리가 출구로 나가지 못하게 하지 않겠소?"악채릉은 왠지 기이한 광채가 흐르는 시선으로 문인천상의 조용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그 출구가 워낙에 멀고도 험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약간 쉬 어 가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감히 우리가 그곳으로 가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주 다행이오. 나는 당신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하하, 어쨌든 우리가 이와 같은 장소에 함께 있게 되다니 실로 운치가 있는 일이 아니겠소?" 악채릉은 문인천상의 얼굴을 정색을 하고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저와 함께 이곳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드나요?"문인천상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물론이오. 이곳은 정말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괜찮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구려. 하지만 지금 밖에는 그 흉적들이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것이니…… 실로 그러한 점만 없다면 우리 는 오붓하게 이곳에서 즐길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소?" 악채릉은 두 눈에 야릇한 광채를 발하며 대답했다. "당신은 너무 그런 걱정을 하지 마세요. 잠시 후면 우리는 조용학 서로가 한몸이 되어… … 한몸이 되어 영원히……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거예요."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자 일순 눈 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앞으로 나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앞으 로 나의…… 나의 부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오?"악채릉은 기이하게 웃으며 생각하다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 생각하다가 일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입을 열어 말했다. "하하,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신의 그 말은 마치 나와 함께 이곳에서 죽자고 하는 말 처럼 들리는군. 허나 설마하니 그런 말은 아니겠지?"악채릉은 야릇한 눈빛으로 생각을 굴리 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예요. 저는…… 저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인데 하필이면 당신과 함께 죽고 싶겠어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군. 이번에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돈황으로 가는 일은 그만 포기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성대하게 혼인식을 치르도록 합시다. 지금에 이르러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일은 처음부터 확실히 무리였던 것 같소." 악채릉은 일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럼 아까의 그런 흉적들을 용서해 주자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담담히 웃다가 대 답했다. "물론 그들도 좋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 하나하나의 원한을 모두 해결 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두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게 될 것이오. 따라서 그들은 주모자가 아닌 한은 그냥 놔둘 생각이오."(……) 이때 문득 동국의 밖에 흑의장한들이 이미 도달하여 수색을 하기 시작했는지 인기척이 다 소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악채릉은 그것을 듣자 이내 다소 안색이 변하여 문인천상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서…… 어서 이곳에서 잠시 눈을 좀 붙이도록 하세요."문인천상이 이미 그와 같 은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에 다소 놀라서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곳에서? 앞으로 적도들이 쳐들어올 것인데 내가 이곳에서 차마 잠을 잘 수가 있겠 소?"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나도 한숨 자고 싶지만 적도들을 막아야 하는 것이니…… 당신은 설마하니 저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죠?" 문인천상은 그녀가 부탁이라고까지 말하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이 되물었다. "좋소. 하지만 당신의 그 몸으로…… 적도들을 막을 수가 있겠소?"악채릉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래봬도 마음은 아주 강골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러한 상처쯤은 아무런 걱정도 없어요. 제가 틀림없이 안전하게 그들을 막을 테니 당신은 그저 안심하고 잠이나 주무세 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실은 나중에 당신의 그 상처가 도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이라도 약이 있다면 그 상 처에 금창약이라도 발라 두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악채릉은 흑의장한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문득 미소하 며 대답했다. "그럼 당신이…… 당신이 저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시겠어오?"말과 함께 악채릉은 품속에서 하나의 연지처럼 빨간 약이 들어 있는 약병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자 문인천상은 주저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다가들어 그녀의 어깨 부위를 헤쳐서 자신의 옷을 찢어서 핏덩어리들을 닦아내고는 상처 부위에 그 연지와 같은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 연지와 같이 생긴 약은 실로 신기한 효험이 있는 것이어서 바르자마자 이내 붉은 거품 이 일어나더니 상처 부위가 벌써부터 아물어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악채릉은 살며시 눈을 감고 문인천상이 자신의 몸의 앞뒤에 골고루 약을 발라 주는 것을 느 끼고 있다가 이윽고 그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자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이제 당신은 그만 주무세요."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당신의 부탁이라니 그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다시 보니 이곳에는 그다지 잘 곳이 마땅하지가 않군. 내가 어디에서 자야 할까?"악채릉은 그가 말한 부탁이라는 말을 문 득 다시 생각해 보다가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린 듯이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어 말했다. "잠깐 쉬는 것이니 어디에서 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나의…… 나의 부탁을 하나 더 들어 주시겠어요?"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당신의 부탁이라면 하나가 아니라 열 가지라도 들어 줄 수가 있지. 그래 지금 당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를 한 번 힘차게 안아 주세요. 그것이 저의 마지막 부탁이예요."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자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당신의 몸은 그와 같이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더군다나 힘껏 안아 달라는 것은 다 소 무리가 되지 않겠소?" 악채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의 몸은 이미 내식을 순환시켰고 게다가 당신이 약까지 발라 주었으니 아무런 무리도 없을 거예요. 다만 당신의……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가 있다면 나는 금방이라도 나을 것 같은데 설마하니…… 설마하니 당신은 나의 이 마지막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죠?" (……) 문인천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원래 나를 위해 당신이 그렇게 곤란을 겪고 게다가 상처까지 입게 되어서 가슴이 미 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괴로웠소. 하지만 당신의 부탁이라니 나는…… 나는 당신의 뜻대로 해주겠소. 만일 상처 부위가 아프거나 하면 즉시 말을 하도록 하시오." 말과 함께 문인천상은 앞으로 다가들어 악채릉의 몸을 다소 세차게 안아 주었고 이어 그녀 의 입술에 깊숙히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때 다소 악채릉의 전신에 고통 때문인지 미미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악채릉의안색은 창백하여 거의 핏기가 없는 것 같았는데, 이 순간에 문인천상이 눈을 뜨고 바라보니 그녀의 두 눈은 감겨져서 눈꼬리 부위가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 다. 문인천상은 혹시 그것이 어깨의 고통이 너무나도 심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고, 이내 그것을 생각하자 마치 자기 자신의 머리속까지 그 고통 속에 파 묻혀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단순한 마음속에서 일어난 착각이 아니었다. 이내 그의 머리속이 혼미하게 변하더니 점차로심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악채릉은 바로 그 순간에 문인천상의 혼수혈을 은밀히 제압했던 것이었다. 일순간에 문인천상의 몸이 마치 혼절한 듯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 악채릉은 즉시 그의 몸을 부축하여 바닥에 천천히 눕히며 내심 중얼거렸다. (편안하게 주무세요. 만일 당신이 깨어났을 때에는 저와 함께 다른 세상에 태어나 있을 거 예요!) 악채릉은 그렇게 생각하자 그야말로 참았던 눈물이 마치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 끼고 문인천상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이 순간 마치 오열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동국 속의 바람은 숨 을 죽이고 있었고, 아까부터 들려오던 흑의장한들의 인기척은 이 순간에 정지되어 왠지 괴 괴하고 기이한 정적을 이루고 있었다. …… 한참 동안 소리 죽여서 오열하고 있던 악채릉은 이윽고 문인천상의 옷차림을 단정하게 해 준 다음에 너무나도 많이 울어서 벌겋게 된 얼굴로 신형을 일으켰다. 문인천상은 이 순간에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이 고르고도 조용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있는 중이었다. 악채릉은 다시 한 번 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갤ㄹ 전면으로 돌려서 다소 싸 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들은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아요." 그러자 조용하던 동굴 속에 느닷없이 십수 명의 흑의장한들이 떼거지로 나타나며 그 가운 데 아까 악채릉과 단둘이 겨루었던 그 흑의장한이 앞으로 나서서 정중하게 포권하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악 소저! 불초가 아까 그와 같은 상처를 입혀 드렸던 것은 결코 고의가 아니었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알고 보니 소저께서는 이와 같은 복안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었구려. 만일 그와 같은 일을 미리 조금이라도 귀뜸을 해주셨었다면 불초는 결코…… 그와 같은 무례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오. 아무튼 다시 한 번 용서를 비는 바이오." 악채릉은 그 말에 대해서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이런 상처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으니 당신은 구태여 그와 같은 용서를 빌 필요도 없 고 또한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다만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해서 들었다가 우리 아버지께 전해 주기를 바래요."흑의장한은 그 말을 듣자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즉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혹시…… 혹시 악 소저께서는 부친께로 돌아가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 오?" 악채릉은 잠시 문인천상의 얼굴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나는 보다시피 여기에서 이분과 함께 죽게 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부디 우리 아버지께 가서 나의 이 소식을 전하고 또한…… 또한 이 불효여식이 아버님의 부탁을 들어 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설사…… 설사 저승에 가서라도 당신에게 고마워 할 거예요." ……! 흑의장한은 잠시 멍하니 악채릉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아니, 악 소저! 혹시 지금 하시는 말씀이 사실이오?" 악채릉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사실이예요. 설마하니 내가 이런 일에 대해서까지 당신에게 농담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요?" 흑의장한은 그녀의 말을 듣자 다소 못마땅하다는 부분이 있었는지 즉시 두 눈에서 가득 흉 광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소저께서 자살을 결심하셨다는 것은 실로…… 실로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오. 그리고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모두가 소저의 자유 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없는 노릇이고,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보다 확실한 결말을 보 게 해달라는 것이오."악채릉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은…… 지금 즉시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말인가요?"흑의장한은 음침하게 웃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물론 소저를 믿고 있는 바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오. 예를 들어서 소저가 저 어린 녀석을 데리고 달아나게 된다면 그 결과를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소?" 악채릉은 정말로 이런 강요된 상황 하에서 문인천상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매우 화가 나서 소리쳐 말했다. "당신은 마치 지금 내가 시체가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군요. 만이 내가 지금이라도 생 각을 돌려서 돌아가서 아버지께 당신의 일을 말씀드리게 되면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처신하 려고 그러는 거죠?" 흑의장한은 그러나 마치 지금과 같은 말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음흉하게 웃으며 태연하 게 대꾸했다. "흐흐흐! 지금의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저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오? 말하자면 소저는 이미 그 어린 녀석과 정분이 나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 있는 상황인데 여기에서 이렇게 죽는다고 해서 누구에게서라 도 동정을 받을 수가 있을 것 같소? 흐흐흐! 나는 이미 소저에 의해 내가 수년간이나 공 을 들여서 키운 수하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수저를 제거하고 싶 었던 것이오." …… "따라서 지금 내가 너를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워서 저 어린 녀석과 함께 제거해 버린다면 누구라도 감히 나에게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흑의장한은 처음에는 비록 소저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크게 득의한 심정이 되어서 함부로 반말을 썼다. (……!) 악채릉은 그 말을 듣자 매우 어이가 없는 심정이 되었다. 알고 보니 이 흑의장한은 아예 처음부터 그녀를 어떤 구실을 붙여서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실로 지금과 같은 상황과 구실은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니겠 는가? 악채릉은 설마하니 이와 같은 상황이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가 내심 크게 화 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이 감히…… 감히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다니! 당신은 설마하니 내가 이 미 좋이호랑이로 변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요?"말과 더불어 그녀는 즉시 좌수를 들어서 일장을 가격했다. 악채릉이 이미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다가 내갈긴 그 백색의 장인(掌印)은 상당히 위력적 인 것이었고 또한 지극히 쾌속하게 날아갔으나, 이때 그 흑의장한은 이미 그와 같은 악채릉 의 공격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음침하게 웃으며 신형을 좌우로 급히 움직였다. 그의 신형은 좌측으로 움직이는 듯했으나 우측으로 움직였고, 그러는 사이에 마치 바람개비와 같 은 환영이 줄지어 길게 일어나 순식간에 깨끗이 악채릉의 공격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확실히 악채릉이 생각하기에도 상상 외의 흑의장한의 무공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다소 기이한 일은 바로 그 흑의장한이 보법을 펼쳐서 악채릉의 공격을 피한 이후에 느닷없이 일어났는데, 그 백색의 장인은 일단 흑의장한이 그것을 피하자 덧없이 허공을 스쳐서 날아가 버리는 듯했으나 악채릉이 가볍게 좌수를 휘젓자 이내 마치 끈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도중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틀더니 안심하고 있는 바로 그 옆의 다른 흑의장한 의 안면을 거세게 후려치는 것이었다. 퍽! 그 흑의장한은 정말로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다 가 느닷없이 쾌속하기 짝이 없는 일장에 당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뼈골이 한꺼번에 부서지는 듯한 격렬한 격타음과 함께 입 속에서 피를 내뿜으며 뒤로 벌렁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백홍장력(白虹掌力)이로구나!" 우두머리인 그 흑의장한은 처음에는 간단하게 생각했다가 뜻밖에도 악채릉이 전개한 것이 바로 무산 신녀문의 절학 가운데의 하나인 백홍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소 경악한 외침을 발했다. 그 백홍장은 바로 일단 장력을 쏟아낸 이후에도 그것을 좌우로 조종할 수가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백색의 무지개가 걸린 듯하여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인 신녀문의 절학이었다. 기실 그러한 절학은 많은 내력을 소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채릉은 이제까지 숨기고 있다 가 흑의장한에게 시위할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그 흑의장한은 물론 무공의 수위가 이미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쉽게 그러한 이치를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순간 놀라서 신형을 펄쩍 뛰워 올렸다가 천천히 내려오며 자신의 수하 하나가 얼굴에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소리쳤다. "네년은 과연 아직 한 가락이 남아 있구나! 그러나 과연 심한 부상을 입은 네년이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가 있을지 두고보겠다! 나는 반드시 네년을 죽여서는 그 시체를 강간하 고 또한 까마귀의 밥이 되도록 들판에 내다버리겠다." 흑의장한의 그와 같은 욕설은 그야말로 여인에게는 최대로 잔악스럽고 가증스러운 욕설이라 고 할 수가 있었다. 아니 아마도 그것은 비단 말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흑의장한의 태 도로 볼 때 나중에 사실로 드러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악채릉은 이때 심한 진력을 소모하여 숨을 몰아쉬며 내식을 고르고 있었는데, 흑의장한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일순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절로 시선을 옆의 문인천상에게 보냈다. 문인천상은 이 순간에도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고른 숨결을 토하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 악채릉은 그러한 문인천상의 얼굴을 잠시 망연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서 흑의장 한에게 다시 말했다. "당신의 생각은 제법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타협할 수가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래도 일개 화산파의 사람인데 당신은 나중에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 이라고 확신하고 있단 말인가요? 게다가 만일 내가 최후의 힘을 다해서 당신들과 싸우게 되 면 당신들 가운데 몇 명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예요. 나는 원래 죽을 사람인데 구태여 당신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요?" 악채릉은 생각해 보니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노화를 터뜨리고 흥분을 한다고 해도 조금 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문인천상의 몸조차 유린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크 게 마음을 억제하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말은 흑의장한에게 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수하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었다. 흑의장한이야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겠지만 자신의 수하들이 듣고 있는 것을 생 각해 볼 때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인 것이었다. 이때 그 흑의장한은 지극히 교활하여 우선 자신의 수하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려서 악 채릉을 협공하게 한 다음에 자신은 나중에 그녀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미처 흑의장 한이 악채릉의 곁에 이르기도 전에 그녀가 그와 같은 말을 하자 흑의장한이 일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 겠다는 말이냐?" 악채릉은 이에 잠시 생각한 후에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미 아까 말했던 바 그대로예요. 다만 거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당 신들은 동굴을 떠나면서 동굴의입구를 무너뜨려서 누구라도 우리들의 시신을 훼손하지 못 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만일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당신에게 내가 알고 있는 무 공들 가운데 몇 가지를 가르쳐 주겠어요. 만일 당신이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백홍장력을 배 우고 싶다면 나는 그것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어요." 제23장 진실(眞實)된 사랑의 길 무공을 배운 강호인에게 있어서 생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은자도 귀중한 것이기는 하지 만 기실은 그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공이라는 것일 것이다. 당 금의 강호 무림에는 비교적 많은 무공들이 전파되어서 널리 실용화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 직도 더러 유명한 기인의 무공비급에 세상에 나타나면 여지없이 피를 부르게 되는 것은 바 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 흑의장한은 악채릉이 자신의 백홍장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자 즉시 두 눈에 탐욕에 가득 찬 빛을 떠올렸으며 이내 즉시 물었다. "네가 그것을 조금도 틀리지 않게 가르쳐 준다고 누가 보장할 수가 있겠느냐?" 악채릉은 다소 쓸쓸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인데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겠으며 또한 무엇을 아끼겠어 요? 당신이 굳이 의심을 하겠다면 할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나의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와 같은 속임수를 쓰지 않을 거예요." 흑의장한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일단 이 동굴을 무너뜨리고 나가게 되면 네가 다시 다 른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달아나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 악채릉은 그를 향해 되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죠?" 흑의장한은 그녀를 향해 음침하게 웃더니 일순 매우 음탕한 표정으로 그녀의 전신을 훑어 보며 대꾸했다. "흐흐, 역시 결론은 하나다. 나는 이미 신녀문의 무공은 정말로 네가 정확하게 가르쳐 준다 고 해도 감히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욕심은 갖지 않기로 했다. 그저 아 까 말했던 대로 너희 두 년놈들의 시체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 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설령 네가 다른 제안을 한다 고 해도 나는 일단은 그 어린 녀석의 시체를 보지 않고는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흐흐흐 ……" …… 흑의장한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면서 자신의 수하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에 다시 웃으며 말 을 이었다. "사실 말이지…… 우리는 네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네년의 발가벗은 육신은 어떻게 생겼 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흐흐흐, 네년이라면 비단 껍질째 입 속에 넣는다고 해도 비린내 하나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시체가 된다고 해도 그야말로 천상의 선녀와 도 같아서 극락의 쾌락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네년을 죽인 다음에 혼자서 즐기 고 시체를 내다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네년의 시체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이니 우선 내가 먼저 일을 끝낸 다음에 나의 저 아이들에게 차례로…… 흐흐흐, 즐거운 맛을 보게 할 것이다.너희들은 그 다음에 이곳에 곱게 묻어 주도록 하지!" 흑의장한의 수하들은 일단 우두머리의 시선을 보자 이내 그자의 의도를 알게 되었으므로 이윽고 그자의 말이 끝나자 즉시 다함께 으흐흐! 하는 음소를 흘리면서 악채릉의 전신을 훑어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에 악채릉은 일순 자신이 수많은 흑의장한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 면서 더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만일 평소라면 그녀는 결코 이것의 십분지일에 해당되는 모멸감을 느끼더라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순 옆에 누워 있는 문인천상을 생각하자 그녀는 지금의 상 황에서 결코 포기하여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생각한 후에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당신의 나의 몸을 유린하려고 생각하지만 기실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알고서 그러는 것인가요? 나는 기실 어려서부터 무공을 배우려고 지나치게 고생 을 해 왔기 때문에 죽는 것만큼은 다소 편안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예요." 이에 흑의장한은 일순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너는……너는 독을 복용하겠다는 말이냐?"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처연하게 웃었다. "천하에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둘 수가 있는 독약이 있는 법이지요. 나는 항상 오늘과 같은 최후를 의식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독약을 이빨 사이에 숨겨 가지고 다니는 거 예요." …… "게다가 나는 오늘 같은 상황을 맞이하여 설령 육신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싶어도 당신들 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라도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예요. 당신들은 결 국 나의 몸을 어쩔 수가 없을 것이고 게다가 나중에 이 일이 탄로나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인 데 과연 구태여 고집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요?" 흑의장한들은 악채릉이 독약을 복용하겠다는 말을 듣자 저마다 눈을 휘둥그래 뜨고 안색이 변했다. 특히 우두머리 흑의장한은 비록 그녀가 이빨 사이에 독약을 숨겨가지고 다닌다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수하들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네가 만약 그렇게 독약을 복용하겠다면 구태여 우리와 협상할 필요도 없을 것인데 어째서 너는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냐?" 악채릉은 안색이 초췌하게 변해서 처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기왕에 죽는 몸이니 모든 일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싶은 것이지요. 당신이 정말로 고 집을 부리겠다면 나는 이미 할 말을 다했으니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흑의장한은 악채릉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잠시 생각하며 교활하게 눈빛을 굴리다가 문 득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 네가 이곳에서 반드시 죽는다는 확증을 보여 준다면 우리는 너의 생각대로 타협을 해줄 수가 있다. 너는 그럴 수가 있겠느냐?"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이 내가 이곳에 있는 문인 공자를 죽이게 된다면 당신들은 나를 믿어 주 겠군요. 당신들도 내가 문인 공자가 죽은 이후에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흑의장한은 잠시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하다가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좋다! 네가 정말로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시원하게 그 어린 녀석을 죽여 줄 수가 있다면 우리도 보다 적극적으로 타협해 줄 수가 있겠지. 흐흐……"악채릉은 그 말을 듣고 흑의장한 의 수하들을 둘러보았는데 과연 그들도 이제는 자신에게 음욕을 품지않고 협상을 하려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기왕에 우리는 죽을 것이니 비록 시기가 좋지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길이 두 사람의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길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자 악채릉은 이내 고개를 돌려서 문인천상을 바라본 다음에 좌수를 천천히 그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 문인천상은 이때에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고, 그의 얼굴에는 지금의 상황 과는 전혀 다른 온화한 미소마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악채릉은 장력을 이용하여 전혀 상대에게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심맥을 끊어 버리는 수법 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좌장을 이용하여 그 수법을 펼치려고 무의식중에 문인천상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문인천상의 얼굴에 마치 후광처럼 어리고 있는 은은한 노을같은 기운을 보자 왠지 가슴이 크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마친 매우 낯설고 도 고귀하여 결코 자신이 해쳐서는 안되는 사람의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악채릉은 순간 무의식중에 좌장에 끌어올렸던 공력을 풀어 버리게 되었는데, 다음 순간에 흡사 꿈에서 깨어나듯이 다시 평범해 보이는 문인천상의 얼굴을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 다. (내가 이 무슨 쓸데없는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마지막 순간인데 그까짓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일까?)동시에 그녀는 다시 좌장에 진력을 모으며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장력을 발출하지 못했다. 마악 장력을 발출하려는 순간에 문득 그 녀의 뇌리에 환영처럼 과거에 부드럽고 편안하게 대해 주던 문인천상의 모습과 그 미소가 떠올랐던 것이었다. 악채릉은 그 미소를 일단 뇌리에 떠올리게 되자 차라리 자신의 가슴을 후려칠 수는 있어도 도저히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취할 수는 없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저기에 있는 자들과 싸워서 문인천상의 목숨을 보존해야만 하는 것일까? 악채릉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서 흑의장한들을 돌아보다가 일순 그들의 두 눈에서 하나 같이 흉악한 살광을 발출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아니야! 내가 비록 힘을 다한다고 해도 결코 그들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두 사람 의 시신을 바르게 보존하는 것이…… 그 길만이 최선이야!) 악채릉은 아직 문인천상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상태로 비록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두 사람을 위해서 그의 목숨을 취해 주는 것이 유익하다고 결론짓고는 재차 문인천상의 얼굴 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마악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공력을 발출하여 문인천상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그의 고귀해 보이는 얼굴을 보게 되자 섬광처럼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일까? 그는 차라리 시신을 옳게 보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명예롭게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까? 아아! 나는 지금이라도 그를 깨워 서 그가 원하는 결말을 물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제아무리 좋은 방법을 취한다고 해도 그는 내가 자신도 모르게 일을 처리한 것을 알게 되면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일순 그와 같은 생각들이 연달아서 뇌리 속을 스쳐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이내 안색이 복잡하게 변하며 손끝마저 가늘게 떨게 되었다. 그렇다! 기실 그녀가 문인천상을 죽이려는 것은 방법은 비록 다르다고 해도 역시 그를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친과 사문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차라리 문인천상의 원수 나 다름이 없는 존재라고 할 수가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그녀는 문인천상을 사랑하게 되어 서 자신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또한 그로 인해서 일찍이 그에게 순결까지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실로 그와 같은 행동은 문인천상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가 택한 자기변명조의 행동이었지 결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행동이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정말로 그를 사랑하여 행동을 취한 것이라면 차라리 그를 그 추악한 음모 속에서 희생되는 것을 구해 주어야 하는 것이며, 지금과 같은 행동은 그저 부친과 사문을 위한 행동이고 자신이 함께 죽어 주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감상일 뿐 이고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악채릉은 비로소 이 순간에 자신이 문인천상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악적과도 같은 짓을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원래 그녀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기분으로 연인과 부친의 사이에 서서 양쪽을 둘다 만족시 키는 방향을 찾았다고 오산하고 있었으나 기실 이와 같은 방법은 비록 사문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몰라도 문인천상에게는 통한의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며 오로지 그 녀 자신의 감상적인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악채릉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문인천상이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머리끝이 쭈뼛하게 일어서는 느낌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청음에는 부친의 편에 서 있었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점차로 문인천상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이성이 미처 감성의 뒤를 따 라가지 못해서 이미 문인천상을 사랑하는 시점에서 그대로 애초에 그와 원수지간이었을 때 의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했고 또한 그 빠른 변화에서 마치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람은 이른 바 때때로 처지가 달라지게 되는데, 실로 그럴 때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애초에 그를 그러한 음모에서 구해 주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그에게 모든 사실을 가르쳐 주어서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어야만 했다. 아니 지금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속 이고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도저히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내가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즉시 그를 깨워서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 을 하고 최소한 그가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알도록 해주어야 한 다. 최소한 그에게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마음의 자세라도 갖도록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 이 아닌가?) 악채릉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안돼! 하고 소리치며 문인천상 의 가슴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왜 나에게 손을 쓰지 않는 것이오?" 느닷없이 맑고도 부드러우며 온화한 기운이 섞인 지극히 낯익은 음성이 그녀의 귓전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 악채릉은 이 순가에 그야말로 기절할 것 같이 크게 놀랐다. 아마도 그녀가 일찍이 겪었던 그 어떤 놀라운 상황들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결코 이 한 번의 놀라움에 비길 수가 없을 것 이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문인천상의 음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급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미 문인천상은 눈을 떠서 조용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악채릉은 순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관념과 사고방식 등이 한꺼번에 무너져서 뒤엉켜 버리는 것을 느끼면서 깊고 어두운 혼돈 속으로 방황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당…… 당신은 자지…… 자지 않고 있었나요?" 문인천상은 조용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꾸지 않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원래 자지 않고 있었지만 그대가 원했기 때문에 잠시 자고 있는 척했던 것이오." (……) 그때 문득 악채릉의 뇌리에 전날 그녀가 분명히 전신대혈을 제압하여 놓았었음에도 천막을 떠나갔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악채릉은 문득 어두운 심층 밑바닥에서부터 어떤 울긋불긋한 빛깔의 기운이 밀려드는 것 같 은 기분을 느끼며 왠지 눈물이 글썽거렸다. "알고 보니…… 알고 보니 당신은 자지 않고 있었군요. 저는 기뻐요! 하마터면 저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뻔했었거든요." 문인천상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마음을 돌리지 않았소?" 악채릉은 마치 그 미소에 감염되기라도 하듯이 따라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저는 여태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정말로 염치가 없는 계집아이이 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와 같이 염치없는 짓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너무 그렇게 부담을 가 지지 마오." 악채릉은 매우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럼 당신은 지금 저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인가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오." (……?) 악채릉은 일시 다소 믿기지 않아서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당신은 아마도 모든 사실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저는 사실 당신을…… 당 신을……" 문인천상은 문득 그녀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죽고 싶어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소." 순간 악채릉은 그만 너무나도 깊이 격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치밀어서 일시에 그의 품속 에 엎드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나는 설마하니 당신이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그녀는 이미 문인천상 이 그간의 모든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 고 사랑하고 있어서 결코 자신을 해치려고 했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고 오히려 그녀의 진심을 이해해 주었던 것이었다. 누구라도 이렇듯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 게 되면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와 같은 것들을 느낌으로 알 수는 있어도 일순간에 그녀는 대체 문인천상 이 무슨 능력이 있길래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까지 방관하고 있었는가 하는 데까지 미처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마악 그녀가 마음의 정리를 하면서 점차로 그러한 의문을 느끼 기 시작할 무렵에는 드디어 뒤쪽에서 예의 그 음침한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했던 것이었 다. "흐흐흐, 정말로 노는 꼴이 가관이군! 그렇게도 죽기가 싫다는 말인가?"물론 그 음성은 바로 다름이 아닌 흑의장한의 음성이었다. 그들은 이미 악채릉의 태도를 보고 작정을 한 탓인 지 어느새 그들의 주위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악채릉은 그 소리를 듣자 그만 안색이 싹 변해서 신형을 벌떡 일으켜서 소리쳤다. "너희들은 비록 우리를 죽일 수가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너희들 몇 명 쯤은 우리와 함께 지옥으로 가야 할 것이다!"악채릉은 이미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비록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문인천상과 함께 이곳에서 최후의 힘까지 다 발휘하여 싸우다가 죽을 결심을 했던 것이었다. 흑의장한들은 이미 그렇지 않아도 두 눈에 살기를 띠고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와 같 은 소리를 듣게 되자 이내 다소 주춤하며 전신의 공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들의 숫자가 비록 많다고는 해도 정작 그들 개개인의 목숨은 역시 하나밖에 없으므로 지금 악채릉 등과 함께 지옥에 가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서 그 우두머리 흑의장한은 더욱 음흉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흐흐흐! 우리는 원래부터 너의 그 무공 따위에 욕심을 갖지 않았었다. 다만 어쩌나 하고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흐흐, 이제는 나는 네년을 제압해서 껍질을 벗겨서 흐흐흐흐…… 그 야말로 그 맛이 기막히겠군."흑의장한은 마치 잠시 후의 일을 상상하는 듯이 혀를 길게 내밀어 입술을 축이면서 지극히 음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악채릉은 순간 이미 공력을 일으켜서 그자를 향해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록 아까는 갖은 모멸감을 다 느꼈어도 참을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듣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미 죽음을 결심한 그녀 에게는 오로지 그러한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가 있었다. 우수의 옷소매가 펄럭이는 순간에 이미 그녀의 좌수에 예의 그 검집이 들려졌고, 이내 그것 은 폭죽과도 같이 흑의장한의 면전으로 무수한 검화(劍花)를 뿌려대며 화려한 검무(劍舞) 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흑의장한 역시 말을 하던 도중에 이미 그러한 기미를 눈치챘으며 일단 거뫄의 예봉을 피하 기 위해 흐흐흐흐, 하고 음침하게 웃으며 신형을 허공에 떠올렸고 이어 그야말로 그 맛이 어쩌구 하는 말을 하면서 역시 장검을 뽑아 들어 검기를 발출시키며 다가오는 악채릉의 초 식에 대응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 일반적으로 한 자루의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장검에 비해 검집이라는 것은 비단 날카롭지 도 않을 뿐만 아니라 딱딱하지도 않아서 장검에 닿으면 쉽게 베어질 것이기 때문에 감히 그것으로 장검에 대항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하지만, 기실 그것은 하류무사들에게나 적용되 는 말이었지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두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악채릉의 검집은 이미 강한 진력을 주입시켜서 마치 쇠막대기처럼 딱딱해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흑의장한의 장검과 몇 차례 부딪쳐서 쩡쩡, 하는 소리만 들려 올 뿐 베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단 독기를 품고 검법을 전개하기 시작한 악채릉의 검집에서 발출되는 검화는 실 로 하늘에서 말 그대로 무수한 꽃을 뿌리고 있는 것 같아서 흑의장한은 감히 방심하지 못 하고 처음에는 그저 자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검막을 펼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왜냐하 면 만일 악채릉의 검화 가운데 하나만 몸에 맞아도 실로 안개처럼 체내에 스며들거나 마치 예리한 검날처럼 살갗을 베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 검법에 있어서는 악채릉 이 다소 우세한 것이 입증되었다. 흑의장한은 처음에는 검막을 빽빽하게 펼쳐서 그런 대로 악채릉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 었으나, 이윽고 악채릉이 자신의 부상이나 과도한 진력의 소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서 운 절초들을 펼쳐내기 시작하자 마침내 흑의장한은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한 걸음씩 뒤 로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악채릉의 검법은 점차로 몰아지경에 들어가게 되어 더욱 더 오묘해지고 검기의 폭이 넓어 져서 동굴 내부의 모든 종유석들과 석순들을 하나하나 모두 부수며 백광을 그 안에 가득 채우게 되었고, 흑의장한은 일단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더욱 검세가 축소되어 달아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만일 이 동굴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었다면 그 흑의장한은 아마도 그냥 동굴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동굴은 형세가 구불구불하게 이루어져 있는 천연의 동굴이 었고 드디어 뒤로 몰리다가 동굴의 벽에 등이 부딪치게 된 흑의장한은 마침내 궁리하다가 문득 한 가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얘들아! 어서 그 어린 녀석을 죽여 버려라!" 그렇다. 악채릉도 일시적으로 격분하여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었지만 흑의장한 역시 너무 나도 심하게 몰리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 문인천상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금방이라도 흑의장한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것처럼 쉴새없이 공격을 취하던 악채릉은 금세 그러한 흑의장한의 말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만 깜짝 놀라서 초 식을 중단시키고서 급격히 신형을 뒤로 날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설사 다음의 한 초 식만 전개하면 흑의장한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역시 그와 같이 초식을 중 단하고 신형을 날렸을 것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역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문인천 상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악채릉은 일순간에 자신이 잠시 지나치게 격분하여 문인천상을 위기로 빠뜨린 것을 생각하 자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이 괴로운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신형을 날리면서 제발이지 아직 문인천상이 무사하여 그녀가 제때에 그를 구할 수가 있게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전개되는 것이 아닐까? 악채 릉이 마악 신형을 날리는 순간에 이미 대기하고 있던 흑의장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을 세우기 위해 빠르게 문인천상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고, 다소 멀리서 악채릉이 보기에도 이 미 때가 늦어 있었다. 제24장 믿을 수가 없는 현실(現實) 장한들의 숫자는 대략 십오륙 명이나 되었는데, 우선 그 가운데 가장 민첩하고 상황 파악 이 뛰어난 대여섯 명의 장한이 미리부터 우두머리 흑의장한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가 거 의 동시에 문인천상의 전신을 노리고 덮쳐들고 있었다. 이때 문인천상은 다소 태연한 표정으로 어느새 일어나서 서 있었는데, 일순간에 다가드는 그 대여섯 명의 공격은 마치 거대한 광풍폭우와도 같아서 일거에 그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만 같았다. 아니 설령 그자들의 병기가 문인천상의 살갗 속으로 쑤시고 들어가지 않 는다고 해도 일단 그들의 우람한 허우대가 들이닥치면 그렇지 않아도 다소 깡마른 듯한 면 모를 보이고 있는 문인천상의 신체는 더욱 납작하게 변할 것이고 덕분에 키도 더욱 크게 될 것 같았다. 악채릉은 비록 순간 눈을 크게 뜨고 그쪽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지만 차마 그 다음의 순간 을 볼 수가 없어서 그만 눈을 감고 신형을 그 자리에 멈춰서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잠시 후에 문인천상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동굴의 사방벽을적실 것을 상상하며 과연 그녀가 그를 깨운 것이 정말로 잘한 일이었을까 하는 회의에 젖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그러한 파육음이 들려 오지 않아서 크 게 의아한 심정으로 눈을 뜨고 바라보니 뜻밖에도 당연히 문인천상의 몸을 깔아 뭉개고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대여섯 명의 장한들이 기이하게도 모두 그의 주변에 멍청한 표정 으로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악채릉은 비록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간의 사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최소 한문인천상이 아직도 태연한 표정으로 그 장한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의 중앙에 서서 미 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그 장한들의 가공할 합공이라면 설사 자신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인 데도 전혀 무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문인천상이 일순간에 그들을 제압하고 무사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이 순간에 믿을 수가 있을까? 결단코 그것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 다. 그리고 비록 악채릉뿐만 아니라 이 순간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와 같은 광경 을 보고 놀라고 있었는데, 나머지 십여 명의 장한들도 잠깐 동안 크게 경악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행동은 기실 다른 사람들보다 빨랐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에게 놀라움이 적었기 때무이 아니라 실은 어떤 중압감이 느껴졌기 때 문이었을 것이었다. 악채릉 등이 미처 놀라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 이미 그 십여 명의 장한들은 정신을 차리고 번쩍 신형을 날렸으며, 각기 최대한의 무공을 발출하여 공간을 온통 도광과 검기로 가득 채우고 문인천상의 면전으로 덮쳐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력 이때쯤의 일이었는데, 그 조금 전에 합공을 했었던 대여섯 명의 장한들은 한 순간에 뒤로 벌렁 넘어가 버렸다. 그들은 틀림이 없이 문인천상에 의해서 혈도가 제압당한 것이었 다. 나중의 십여 명의 공격은 따라서 공교롭게도 그들 대여섯 명의 장한들이 뒤로 넘어가서 피 해 버린 그 공간을 헤치고 문인천상의 전신을 향해 덮쳐 들었는데, 실로 그 공격은 마치 하늘과 땅과 사방에서 일시에 마귀들이 달려드는 것과도 같아서 문인천상의 태연해 보이는 몸은 비록 전신이 천참만륙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고슴도치가 되는 것은 면할 수가 없어 보였다. (……!) 악채릉은 실로 아찔한 심정이 되었고 차마 그 최후를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내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그 광경을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이하게도 그녀의 그러한 기대와 불가사의한 느낌은 이내 사실로 드러났 으며,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싱거워서 이상할 정도였다. 십여 명의 장한들의 공격이 면전에 이르자 문인천상은 마치 산보나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태 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저 가볍게 우수를 들어 올려서 파리라도 쫓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저었는데, 다음 순간 마치 눈부신 무형의 광채가 파도처럼 일어나서 사방으로 번져나간 것처럼 아찔한 느낌이 들더니 순간적으로 그 십여 명의 장한들도 역시 멍하니 자신들이 가 지고 있던 평기를 힘없이 들고는 아까처럼 문인천상의 주위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다만 아 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아까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지 못하고 모두 다 걸려서 쓰러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 악채릉은 실로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다시 바 라보곤 했다. 심지어 그녀는 이것이 혹시 꿈속의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몇 번이고 자 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단코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악채 릉은 처음에는 감히 인정할 수가 없었으나 이윽고 점차로 시간이 지나게 되자 그것을 확신 하게 되었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잠시 몽롱하게 과거의 추억으로 젖어드는데 느닷없이 그녀의 목 앞으 로 한 자루의 장검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흐흐흐! 거기에서 멈춰라! 네가 만일 조금 이라도 움직인다면 이 계집의 목숨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흑의장한의 음성이었다. 그러니까 악채릉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 겨 있는 동안에 흑의장한은 일순 사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급히 생각을 굴려서 우선 교활하게 그녀를 제압하고 보았던 것이었다. 뜻밖에도 고강한 무예를 소유하고 있는 문인천상의 무예가 제아무리 고강하다고 해도 자신이 일단 악채릉을 제압하고 있게 되면 역시 마음대로 다룰 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악채릉은 자신이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일을 당하고 나서 실로 어처 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급히 목숨을 걸고서라도 흑의장한에 게 대항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그녀의 전신은 마혈이 흑의장한의 손에 의해 제압되는 바 람에 뻣뻣하게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 이미 악채릉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기 때문에 흑의장한은 아주 득의한 표정이 되어서 문인 천상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문인천상은 이때 조용한 시선으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흑의장한의 복 면으로 가린 얼굴을 보자 느릿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셋째의숙, 구태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흑의장한은 이제까지 매우 득의양양해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와 같은 문인천상의 말을 뜨 고 나자 다소 안색이 변했다. "너는…… 너는 그럼 나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 나는 바로 다름 아 닌 그 임가(林哥)이다!" 흑의장한은 일단 자신의 신분이 탄로가 나자 오히려 더욱 대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얼 굴에 씌워져 있었던 복면을 벗어 버렸다. 그의 얼굴은 준수한 용모의 사십대 중반의 중년 인의 모습이었는데, 그 가운데 콧날이 얄팍하고 눈빛이 음침해 보이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 다. 그렇다! 기실 그 흑의장한은 바로 다름이 아닌 주운양의 의형제요, 같은 농서삼걸 가운데의 가장 막내였던 청망검 임옥룡(林玉龍),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전에 문인천상은 바 로 그가 어디에 갔는지를 주운양에게 물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가 지금과 같이 복 면을 하고 마치 살수와 같은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임옥룡은 기실 자신과 문인천상과의 대면이 거의 없어서 그가 몰라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자신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를 보이자 그만 감추고 있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다시 그를 향해 그 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 "과거에 나의 선친께서는 당신들에게 매우 잘 대해 주셨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그와 같이 배 신을 하는 것이오?" 임옥룡은 싸늘한 눈빛으로 문인천상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가 음침하게 웃으면서 그의 질 문에 대꾸했다. "흐흐흐, 너는 비록 제법 어디에서 무공을 좀 배워 오기는 한 모양이다만, 그러나 정말로 모든 사실들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해서는 안되는 것이지. 흠…… 우리가 너의 죽은 아비에게서 다소의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러한 것들은 작은 일이었 고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이해할 수가 있겠느냐?"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비단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당신들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도 있는 사람이오. 만약 그렇 지 않았다면 나는 일찍부터 손을 썼을 것이오. 다만…… 거기에는 지금 당신이 악 낭자를 그대로 풀어주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되는 것이오." 임옥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핫! 나 보고 이곳을 떠나라구? 네가 무슨 초절정의 고수라도 된다는 말이냐? 나도 웬만큼은 하는 사람이니 만큼 너는 결코 내 손에서 무사히 이 계집을 살릴 수가 없을 것이 다. 내가 너의 그 달콤한 속임수에 속아서 너에게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문인천상은 그 말에 문득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처럼 당신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에게 최후의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려는 것이오. 모든 것을 떠나서 당신에게 만일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라면 지금 즉시 그녀를 풀어 주고 속죄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임옥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너는 그야말로 너의 아비를 닮아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고 있구나. 네가 말한 그 양심이라는 것이 혹시 배를 채워 준다고 하더냐? 오히려 너의 아비는 그것을 자랑하다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현실과 타협할 줄만 알고 있었다면 흐흐,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따라서 나는 오히려 너에게 말 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 계집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부터 세 번을 세는 동안 즉시 자신 의 혈도를 찍고 투항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임옥룡은 실제로 하나! 하고 소리를 높여서 외쳤다. 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도 조금도 초조해 하는 기색이 없이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투항을 하지 않소.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데 과연 그 러한 이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임옥룡은 그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둘! 하고 소리쳤다. 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 마디를 했다. "당신은 지금 중대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인데 앞으로 후회할 짓을 하지 말도록 하시오. 나 는 다시 이와 같은 기회를 주지 않겠소."그런데,"흐흐흐, 누가 후회할지는 네가 겪어 보면 알게 될 것이 아니냐?"임옥룡은 말과 함께 즉시 우수에 들고 있던 장검을 슬쩍 움직여서 잔 인스럽게도 이미 상처를 입은 악채릉의 어깨 부위를 찔러 가는 것이었다. 기실 그는 한 번 악채릉을 죽여 버리게 되면 자신이 살아날 길이 막막하게 될 것이므로 일 단은 그녀의 한쪽 팔이라도 잘라내어 위협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그러한 생각은 대단한 착오였을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처 그의 장검이 악채릉의 어깨 부위에 닿기도 전에 이미 하나의 아름 다우면서도 힘차고 부드러운 손이 그 장검의 검신을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 임옥룡은 설마하니 그런 일이야 있을라고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되자 일순 마치 기절할 것 같이 놀랐다. 그리고 놀란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혈도가 제압되어 있는 악채릉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일순간에 다가온 문인천상의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법에 경악했다. 일반적으로 임옥룡은 이미 검술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어서 단순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바로 그러한 극히 찰나의 틈을 타고 다가와서 장검의 검신을 잡아 버렸으니 어찌 놀라고 불신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악채릉과 임옥룡은 심지어 문인천상이 다가오는 모습이나 그림자도 보지 못해서 마치 그가 원래부터 자신들의 앞에 서 있었던 것 같은 환각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환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마치 그러한 사실 을 인식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일시 악채릉의 전신혈도가 느닷없이 시원스럽게 풀려 버렸 고, 문인천상은 전혀 손을 쓰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도 이미 임옥룡의 전신의 혈도가 제압 되어 심어저 그는 말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악채릉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문인천상은 이미 어느새 자신이 잡고 있던 장검을 다시 임옥룡의 검집 속에 꽂아 주고 나서 조용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 는데, 악채릉은 왠지 그 미소를 보게 되자 느닷없이 가슴이 크게 두방망이질을 하고 현기 증이 느껴지며 얼굴이 붉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짝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의 심정과도 흡사한 것이었으나 도대체 그녀의 마음속에 어째서 느닷없이 그와 같은 심정이 솟아오르게 되었는지 그것은 그녀 자신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악채릉은 너무나도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며 뛰는 것 같아서 감히 말을 못하고 시선을 내 리깔게 되었는데, 이윽고 그녀를 향해 문인천상이 느릿하게 예의 그 음성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소. 내가 그 동안 굳이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부디 나무라지 마시기 바라오. 악 낭자가 원한다면 이제는 모든 얘기 를 해줄 수가 있게 되었소."(……) 악채릉은 그의 시선을 받고 또한 그의 한없이 강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게 되자 그야말로 햇빛에 눈부셔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처럼 더욱 더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쯤 그녀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고 안 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러한 분위기는 싫은 것이 아니어서 마치 황홀경을 헤매고 있는 것과 같이 끝없는 기쁨을 그녀의 마음에 심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그녀를 향해 다시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도록 합시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일단 이곳을 벗어게 되면 장원으로 돌아가서 혼인식을 올리는 것이오."(……!) 악채릉은 원래 깊고 깊은 사랑과 행복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인천상이 혼인식을 올리자는 말을 하자 그것을 들은 그녀의 가슴은 마치 무거운 쇠망치에 심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안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이윽고 시선을 들고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혼인식은 안돼요! 다른 것은 모두 괜찮지만 그러나 혼인식만은…… 혼인식만은 절대로 안 돼요!" 문인천상은 이에 다소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녀가 혹시 부친의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앞으로 나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의 용서를 베풀 생각이고 또한 당신의 부친에게도 모든 것을 따지지 않을 생각이오. 만일 그렇게 된 후에 그대의 부친이 반대를 하거나 아니면 그대가 역시 반대를 한다면 그 것은 나로서는 할수가 없는 노릇이오." 악채릉은 문인천상이 다소 섭섭한 듯한 표정을 짓자 즉시 그의 품속으로 달려들어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으며 속삭였다. "저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예요. 다만 한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제발 그 이유는 묻지 마시고 앞으로 저를 그저 친구처럼 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문인천상은 순간 왠지 그늘이 어리는 그녀의 태도에서 기실 그녀에게 뭔가 무거운 짐이 지 워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함께 마음이 무거워졌다. 실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까지 그럴 정도라면 가히 그녀에게 지워져 있는 사슬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 는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더 이상 그것에 관해서 들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구태여 그런 얘 기를 오래도록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문인천상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고 다른 손으로는 이미 뻣뻣하게 굳어 버린 임옥룡의 몸을 잡아들고는 밖을 향해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손에 의해 제압되었던 그 십수 명의 장한들은 아직도 혼절한 듯이 쓰러져서 도 무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악채릉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몸이 문인천상 등과 함께 허공에 떠올라서 전혀 파공음이나 공기의 압력 등을 느끼지도 않고 스스로 미끄러지듯이 나아가고 있는 것을 깨 닫고는 마음속으로 문인천상의 무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문 인천상은 여전히 그 조용한 신색이었는데 전혀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그들은 동굴의 입구를 마악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에 문득 생각난 듯이 악채릉이 입을 열어 말했다. "잠깐만요! 잠시 내려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어요."그런데 문인천상은 전혀 신법을 법추 지 않은 채로 문득 그녀를 향해 미소하며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혹시 이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기실 악채릉은 이미 동굴 밖에서 장검을 잃어버렸었기 때문에 장검을 도로 찾으려는 생각 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문인천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미는 손을 보니 그 손 안에는 어느새 그녀의 장검이 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악채릉은 이미 그 장검과 함께 오랜 세월을 보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장검을 못 알아보는 일 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문인천상이 그렇게 빨리 그녀의 장검을 먼 거 리에서 찾아서 줄 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혹시 그의 요술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도무지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측량할 수가 없다는 생각 이 드는 것이었다. 어쨌든 악채릉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장검을 받아서 자신의 좌수에 들고 있었던 검 집에 끼워서 등뒤에 차며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참, 아까 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해놓으신 거죠?" 악채릉은 말과 함께 한쪽에서 문인천상의 손에 들린 채로 따라가는 임옥룡의 얼굴을 힐끗 주시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동굴 속에 남겨져 있는 그의 수하들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 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이에 대해서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혈도가 제압되어 아마도 내일 이맘때쯤이나 깨어나게 될 것이오."악채릉은 다소 의 아한 표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하지만 혹시 그들이 혼절하고 있는 사이에 날짐승들이나 들짐승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해 치지는 않을까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심성이 맑고 선량하여 얼마 전에 자신을 크게 모욕했던 그자들까지 염 려해 주는 것을 보고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런 것은 이미 내가 알아서 입구를 막아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소."(……) 악채릉은 자신은 전혀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아까 문인천상이 입구를 나올 때에는 이미 그 입구를 봉쇄해 놓았다고 하자 도무지 어떻게 한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이내 그 러한 얘기에 대해서는 그냥 믿기로 했다. 지금의 상황에서 보다 근원적인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한 그러한 얘기를 듣게 된다고 해도 결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즉시 그 근원적인 사실에 대해서 문인천상에게 묻고 싶 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임옥룡이 비록 전신의 혈도가 제압되었다고는 하나 귀는 열려 있는 상 태로 한쪽 옆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참고 그러한 질문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 번의 사건은 문인천상에 의해서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의 승리로 결말지어 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인천상은 그러한 악채릉과 임옥룡의 몸을 각기 한 손씩을 이용하여 잡고는 허공으로 높 이 떠올라서 아주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 사막에는 으레 녹지대가 간혹 형성되곤 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녹지대가 있기 때문에 사 막을 지나는 상인들이나 무림인들이 그곳에 들러서 목을 축이고 또한 맑은 물을 공급받아 서 다시 기운을 회복하고 길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녹지대가 사막의 곳곳 에서 늘상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막이 있는 곳에는 재수좋은 사람들을 반기는 그러한 녹지대들이 있을수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이 악채릉과 임옥룡을 동반하고 허공을 날아서 당도한 곳도 바로 그러한 녹지대 들 가운데의 하나였으며, 그가 두 사람이 놀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 하여 허공을 날아서 그곳에 도착한 것은 물론 심하게 갈증이 나서 목을 축이려는 것이 아 니라 보다 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옥룡과 악채릉이 내심으로 또 다른 이유에서 놀라고 있는 점만 봐도 능히 그러한 중요성 을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녹지대는 그곳을 만나는 사람에게 맑은 물과 휴식이라는 거대한 행복을 가져 다 주는 사막 속의 복지(福地)가 아니라 오히려 무서운 살기와 거칠은 악기(惡氣)가 꿈틀거 리고 있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던 것이었다. 만약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이 우연히 이곳을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재수에 옴 붙은 격이라 고 할 수가 있겠지만, 지금 문인천상은 두 사람을 동반하고 오히려 그곳으로 찾아가고 있 는 것이었다. 제25장 통나무집 속의 사람들 녹지대라고는 하지만 중앙에는 비록 하나의 제법 커다란 호수가 있었지만 지금 그 호수를 둘러싸고 울창하게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은 푸른 잎들을 가진 것이 아니라 벌써부터 서리맞 은 것처럼 잎사귀를 모두 떨구어서 앙상한 늦가을과도 같은 정취를 보여 주고 있었다. 호수의 주변에는 그래서 누런 잎사귀들로 가득차 있었고 간간히 바람에 나뭇잎들이 휘날려 서 허공을 맴돌곤 했는데, 바로 그 아래쪽 유난히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고 호수와 인접해 있는 자리에 일견하기로도 무려 수십 채나 되어 보이는 통나무 가옥들이 줄지어 늘 어서 있었다. 이러한 외진 녹지대에 그와 같이 많은 집들이 들어차 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기 실 그보다 더욱 기이한 일은 그 통나무집들의 전면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 이 흉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들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들의 팔뚝이나 어깨에는 마치 무쇠처럼 강인한 근육질이 똘똘 뭉쳐져 있 는 것 같았고 게다가 마치 화등잔처럼 빛나고 있는 그들의 눈빛에서도 결코 녹녹치 않은 무림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모두 십여 명이나 되는 그들은 바깥쪽을 향해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병장기를 뽑아든 채 예의주시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비록 수십 채나 되는 통나무집의 숫자에 비해서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어 쨌든 그들의 태도 등으로 보아 이곳 녹지대에는 은연중 살벌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문인천상은 일단 소리없이 그 녹지대의 상공에 이르러 아래쪽을 주시한 다음에 이윽고 어 느새 주위의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나무숲 속으로 몸을 은신하여 수십 채의 통나무집들 가 운데 가장 견고하고 커다랗게 지어져 있는 통나무집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록 주변에서 십여 명이나 되는 장한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 세 사람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알지 못했다. …… × × × --- 커다란 통나무집의 내부. 그곳은 보아하니 주거용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또는 우 두머리의 지휘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인 것 같았다. 아직 그다지 춥지 않은 계절인데도 넓겨 트여 있는 내부의 중앙에는 커다란 난로가 장작불 에 의해 시뻘겋게 활활 타오르고 있ㅇㅆ고, 그 후끈한 열기 속에서 술과 안주를 먹고 마 시거나 떡과 과자 등의 간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나무의자들이 난로의 주위로 제법 쓸모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내부의 한쪽에는 지휘자의 침실로 사용되었던 것 같은 작 은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위로 제법 견고하게 깎아서 만든 나무조각상들이 조 화있게 늘어서 있었으나, 그러한 것은 지금이 순간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난로의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의자 위에 앉아서 멍하니 난로불을 바라보거나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그들은 전혀 눈앞의 그 뜨거운 장작불의 열기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지금 지나치게 심리 적으로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조용히 앉아서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고 있었던 주운양이 느닷 없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뒷짐을 지고 난로의 주위를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초조 한 표정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매우 호쾌한 인상을 하고 있었던 그의 얼굴은 이 순간에는 많은 술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날카롭게 긴장되어 있는 듯했고 술기운은 조 금도 깃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한쪽에 앉아서 떡과 과자를 조금씩 장난하듯 떼어먹고 있던 주완청이 그것을 보고 마침내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아버지, 도대체 무얼 그리 초조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거죠? 이번 일이 성사되는 것은 조 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예요. 도대체 거기에 어떤 변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죠?" 주운양은 문득 신형을 멈칫하더니 이윽고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번의 일에 어떠한 변수도 생길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만일 거기에 어떤 변수가 생겨나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 면……" 주완청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만에 하나 어떤 변수가 벌어지게 된다면 우리들이모조리 출동해서 그녀석을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주운양은 눈을 부릅뜨더니 난로의 장작불을 뚫어지듯 응시하며 대꾸했다. "나는 차라리 무식하게 그 어린 녀석을 죽여 버리지 않은 걸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주완청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다 그럴 만한 대비책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좀더 기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셋째숙부로 하여금 그자를 죽이도록 한 것이 아닌 가요? 게다가 만일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악 소저가…… 설마하니 악 소저가 그녀석을 도와서 일을 저지를 리는 없는 것이겠죠?" 말과 함께 주완청은 슬그머니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방의 입구에 앉아 있는 악불범의 눈치를 살폈다. 악불범은 이제까지 거의 무심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으나 이윽고 주완청의 말을 듣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 딸은 결코 그런 아이가 아니다!" 주완청은 싸늘한 악불범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와서 닿자 금세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시 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사실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상태예요. 그러나 여자의 마음이라는것은 상황에 따라서 많이 변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은 그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만전을기했다고 할 수가 있지 않겠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주운양은 악불범의 눈치가 다소 냉랭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도 그 악 소저는 결코 그럴 분이 아니시다. 게다가 나는 이미 셋째와 더불어 많은 수하들을 보냈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도 무슨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어린 녀석은 무공을 할 줄 모르니까 말이야." 주완청은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안색을 펴며 말했다. "그렇다면 실로 아무런 근심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로군요. 대체 아버지는 무엇을 그렇게 초조하게 생각하시는 거죠?" 주운양은 밖을 초조하게 주시하며 대답했다. "나는 비록 그 일이 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어긋났을 경우에는 좋지 못한 결과를 크게 불러올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좀더 적극적으로 제거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 다. 사실 말이지 나의 셋째는 행동이 다소 굼뜬 편이어서 지금이라고 해도 결코 그다지 늦 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지." 주완청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어서 다시 저쪽으로 가셔서 좀더 술과 안주를 드시고 계세요. 저는 공연히 술을 마시다 말고 취하지도 않은 채 서성거리는 사람을 보게 되면 가슴이 흔들거려 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거든요. 제가 그럼 한 잔 따라 드릴까요?" "좋다!" 주운양은 그만 자신의 딸의 강권에 못 이겨서 아까의 그 자리로 돌아가서 앉게 되었고, 다시 딸이 권하는 술잔을 받게 되었다. 주운양은 그 술잔을 기울여서 술잔 속의 술을 단 숨에 다 마셔 버리고는 역시 딸이 집어 주는 안주를 입으로 받아먹고는 질겅질겅 씹어먹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이나 낮에는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것들보다 훨씬 좋지 않은 안주와 술을 먹고 마셨는데도 상관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수하들이 정성을 다해서 차려다 준 안주를 대하 고 있는데도 그 안주를 씹는 것이 마치 모래를 씹고 있는 것처럼 그 맛을 알 수가 없었다. 주운양은 그러한 것이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문 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애초에 너무 지나치게 ㅁ리를 굴리는 것이아니었는데…… 그저 쥐도 새도 모르 게 죽여 버리고 거짓소문을 내 버리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만일 그렇게 되어 서 나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위의 사람들이 아예 나를 원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구태여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셋째는 대체 무엇 을 하고 있길래 아직도 전혀 소식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내심 길게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주운양은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실내에 들어와 있는 수하들 가운데의 하나에게 어서 밖으로 나갓 소식을 알아보게 하고는 다시 연신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 술은 역시 수하들이 애써서 구입해 놓았던 아주 질 좋은 여아홍(女兒紅)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십여 년이나 묵어서 그 빛깔이 아주 고울 뿐만 아니라 맛도 기막힌 것이어서 대부분이 경사를 치를 때 쓰곤 하는 술이었는데, 주운양은 역시 그 술에도 다만 쓰디쓴 느낌만 받 을 뿐 향기롭다는 느낌을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 주운양이 주완청의 시중을 받아 가며 술을 계속해서 마시고 있을 무렵에 한쪽에서는 주원헌 등이 상장풍과 함께대좌해서 문득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둘째숙부님, 둘째숙부님이 보시기에는 그 문인천상이라는 어린 녀석은 대체 어떤 녀석인 것 같습니까? 과연 그놈에게도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다른 능력이라는 것이 있었을까요?" 상장풍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주원헌의 질문을 받고는 술잔을 내려놓고 심각 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과거에은 그녀석이 별볼일이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왠지 뭔 가 한 가락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주원헌은 일순 눈빛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 한 가락이라는 것은 대체 뭡니까?" 상장풍은 두 눈을 들어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뒤에 대답했다. "원래 그녀석의 아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다소 있었기는 했지만 자수성가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그럴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녀석은 요즘 들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말이야. 우리는 다소간의 의견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녀석은 너무나도 맥없이 우리의 의도대로 따라오더라는말이야. 그래서 나는 혹시 그 반대로 녀석에 게 어떤 다른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원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사실 그러한 생각은 누구나 할 수가 있을 것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하고 생 각하고 있습니다. 그녀석은 원래 다소간의 바탕은 있었다고 해도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천 하를 떠돌면서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이제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그 어떤 능력을 얻게 되었다 고 말할 수가 없는 일이죠. 생각해 보십시오. 대체 놈에게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 까?"…… "저는 차라리 녀석이 자신에게 어떤 능력도 없으면서 반반하게 생긴 점을 이용하여 여자 나 유혹하고 게다가 마치 무슨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녀석 이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거만하게 구는 태도를 보아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둘째숙 부께서도 보셨겠지만 바로 오늘 아침에만 해도 우리들이 조금 추켜세워 주니까 그야말로 좋아서 얼굴이 벌겋게 변했던 것을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상장풍은 조카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그 말을 인정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놈이었군!"옆에서 듣고 있던 주원학 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도 빠질 수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가 어젯밤에 연극을 꾸몄던 것은 사실 그다지 성공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었죠. 녀석은 당시 왠지 경계를 하는 것 같았고 끝내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을 불지 않았으 니까요. 아니 정말로 그러한 보물이 없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희한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인 오늘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주원학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문득 고개를 돌려 상장풍에게 질문을 던졌다. "둘째숙부께서는 혹시 그 날 아침에 저희 아버지께서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 고 우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셨었는지 아십니까?"상장풍은 묵묵히 들으면서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라서 마시려다가 주원학의 그와 같은 질문을 받고는 다소 흠칫하게 생각하다가 대 답했다. "음…… 혹시 그것은 그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주원학은 웃으면서 대답했 다. "하하, 그저 안심시키기 위해서 아부를 했다면 상대편인 그어린 녀석도 사람인 다음에야 능 히 그와 같은 눈치를 알 수가 있는 것이죠. 하하, 그러나 이미 아시겠지만 우리 아버지께서 어젯밤에 그녀석에게서 도저히 은자를 얻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시자 금방 태도 를 바꾸시지는 않고 오늘 아침에 이르러 그녀석을 죽여 버리기로 결심을 내리시고 오히려 그녀석에게 그토록 심한 아부를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상장풍은 생각하 는 대로 대답했다. "그것은 일단 상대를 안심시키고 난 뒤에 보다 용이하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주원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워낙에 기본적인 골격이라고 할 수가 있으니 누구나 생각할 수가 있는 노릇이죠. 저희 아버지께서는 기왕에 녀석을 은밀하게 제거하려고 생각하셨으므로 그와 같은 계책을 생각해 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께서 심지어 저희들에게까지 그녀석에게 절을 하도록 시킨 것은 그녀석이 비록 다소간의 눈치를 채더라도 다시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도록 이중의 술책을 쓴 것입니다. 즉 녀석은 비록 자신이 우리들의 주인나리가 되는 것 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죠." …… "하하, 당시의 그녀석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녀석은 당시에 비록 액면 그대로 말을 믿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기분은 다시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은 바 로 그렇게 기분이 좋아졌을 때에는 약간의 방심을 하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효과적으로 놈을 처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놈은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녹림의 도적들을 만나서 변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하하,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저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 놈의 마차에 접근하여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상장풍은 고개를 끄덕 이며 긴 얘기를 듣고 있다가 이윽고 술잔을 비우고 안주 하나를 집어들고 감탄한 듯이 말했 다. "흠, 정말로 놀라운 계책이었군! 나는 미처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자네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네. 자네들은 어린 나이에도 그와 같은 일을 훤하게 내다보고 있 다니 혹시 육도나 삼략이라는 병법서라도 읽은 것이 아닌가?" 상장풍이 말을 끝내고 안주를 입 속에 넣고 꾸역꾸역 씹기 시작하자 주원학은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비록 그와 같은 병법서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는 조금 파 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강호상에서 산경험을 했었기 때문이죠. 실로 그러한 살아 있는 경험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지식이고 또한 유사시에 임기응변의 계책을 생각하도 록 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저희들은 저희 아버지에 비하면 그러한 방면에 있어서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비록 무공은 그다지 걸출하다고 말할 수가 없겠으나 그러한 지략(智略)에 있어서는그야말로 천하에서 그다지 뒤 떨어지는 편이 아니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희들은 따라서 저희 아버 지를 일대의 영웅(英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면 힘만 내세우고 지략은 뒷전 에 두는 수가 많은데, 기실 지략이야말로 실로 우수한 힘이 아니겠습니까?" 주원학은 길게 열변을 토했으며 상장풍은 계속 안주를 집어먹으며 그저 고개만을 끄덕끄덕 해 보였다. 주운양은 이때 비로소 많은 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뱃속이 뜨끈뜨끈해 오는 것이 바야흐로 취하는 기분이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쪽에 악불범이 멀쩡하게 앉아 있는 상태에 서 아들의 추켜세우는 말은 다소 지나친 감히 있다고 생각하여 입을 열어 그것을 제지하려 고 했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입구에서 한 사람이 빠 르게 달려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소 안색이 변해서 그러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 집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흑의복면을 하고 있는 장한이었는데, 한쪽 팔이 이미 잘라 져 나가서 간간이 피를 떨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초조한 기색으로 소리치며 부복했던 것이었다. "주 나으리께 아룁니다. 저희들은 셋째나으리의 분부를 받잡고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변고가 발생하여 아직 놈을 죽이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 느닷없이 흑의장한의 그와 같은 보고를 받게 되자 이제까지 매우 초조하게 상황을 알고 싶 어하던 실내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놀라서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특히 주운양의 경우 마치 조금 전에 느꼈던 그 불길한 예감이 사실로 드러나는 듯하여 간담이 다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던 것이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주운양은 마침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신형을 벌떡 일으키 며 소리쳐 그 흑의장한에게 물었다. "뭐라구? 대체 무슨 변고가 발생하였다는 말이냐? 어서 속시원히 자세하게 말하지 못하겠 느냐?" (……) 그 흑의장한은 그 말에 다소 움찔하여 한쪽에 앉아 있는 악불범을 은근히 바라보더니 고 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실은…… 실은 악 소저께서…… 악 소저께서 변심(變心)을 하셔서 저희들은 곤란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뭐라구?" 이번에는 다시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되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악채릉의 부 친인 악불범이었다. 그는 일순 매우 놀라서 신형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쳐서 흑의장한에게 다그쳤다. "이 죽일 녀석! 어서 사실대로 불지 못하겠느냐?" 흑의장한은 악불범이 그와 같이 노하여 소리치자 그만 공포감에 질려서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이 하였으나 이내 공손히 말을 이었다. "소인의 말은 사실이옵니다. 만약 소인이 거짓말을 하였다면 그야말로 악 대협께 천참만 륙을 당해도 억울함이 없을 것입니다. 실은…… 소인의 이 한쪽 팔도 그 악 소저가 끊어 놓 은 것입니다." 흑의장한은 말끝에 자신의 말을 입증시키려는 듯이 자신의 팔이 잘려나간 한쪽 어깨를 가 리켜 보였다. 그 어깨에서는 피가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어서 팔이 잘려나간 것이 틀림이 없었으므로 사 람들은 일시 무거운 안색으로 침묵했다. 실로 이와 같은 흑의장한이 감히 자신의 팔 하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악불범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 악불범이 잠시 멍하니 서서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을 보고 이윽고 주운양이 눈빛을 기이하 게 빛내며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아직 확실한 얘기를 들은 것도 아니니 우리는 좀더 얘기를 들어 봐야 할 것이오. 게 다가 악 소저가 그와 같이 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니 나는 결코 그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이다.""……" 악불범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운양은 이에 다소 득의하게 웃으며 흑의장한을 향해 다시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이놈! 어서 사실대로 자세하게 불지 못하겠느냐?" 이때 주운양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만일 변고의 원인이 다만 악채릉 때 문이었다면 아무리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저 모두가 한 차례 달려가서 손을 쓰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오히려 안심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흑의장한은 기실 역시 강호상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위인들 가운데의 하나로서 상황 판단 에 능했고 머리를 교활하게 굴릴 줄 알았다. 비록 악불범이 무공으로는 가장 강하다고는 하나 지금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주운양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내 주저 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소인 등은 셋째나으리의 분부를 받잡고 마차를 정지시킨 이후에 즉시 안으로 들어가서 놈을 제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악 소저께서 나타나시더니 우리들을 향해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죠. 저희들은 비록 영문을 알 수가 없었지만 감히 대항할 수가 없어서 셋째나으리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지금 장내에는 조용한 가운데 장작불이 거세게 타오르는 소리만이 투다다닥, 하고 들려 오고 있을 뿐이었는데, 난로의 후끈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반쯤은 얼어붙어 버린 듯이 냉랭한 표정으로 흑의장한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이에 흑의장한은 더욱 용기를 내어 음성을 높이면서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셋째나으리께서 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것은 필시 악 소저께서 무슨 다 른 계책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일 것이라고. 따라서 저희들에게는 다만 그놈이 눈치채지 못 하게 악 소저를 공격하는 척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설마하니 악 소저께서 저 희들에게 정말로 악독무비한 살수를 전개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희들은 합공을 하 였는데 악 소저의 살수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흑의 장한은 다시 슬쩍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악불범의 얼굴을 훔쳐본 다음에 다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따라서 드디어 셋째나으리께서 나서서 그놈에게 살수를 펼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순간에 다시 악 소저께서 나서서 셋째나으리를 막아서더니……"흑의장한이 잠시 말을 머뭇거리고 있자 주원헌이 듣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소리쳐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흑의장한은 비록 무공으로는 주원헌보다 높았지만 그가 주운양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역시 공손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악 소저께서는 셋째나으리께서 차마 살수를 펼 치지 못하고 물러서는 순간에 장검을 날려서 셋째나으리를 해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러나…… 셋째나으리께서는 순간 겨우 그 장검을 막아내셨고 악 소저는 그놈을 데리고 동 굴 속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실로 뜻밖의 결과에 대해서 무거운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주운양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흑의장한에게 말했다. "동굴 속으로 숨어 버렸다구? 그렇다면 아주 달아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그 흑의장한은 머 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그동굴은 막다른 동굴인 것 같아서 셋째나으리께서는 점차로 동굴의 안으로 수색해 들어가면서 우선 소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주인나으리께 말씀드리라고 하셨고 셋째나으리께 서는 나중에 그놈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흑의장한은 바로 익옥룡이 동굴의 안으로 수색해 들어오기 전에 가장 부상이 심하다고 판단되어 우선 상황을 알려줄 생각으로 보냈던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 주운양은 잠시 듣고 나서 생각하다가 오히려 다소 밝은 표정이 되어서 악불범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보아하니 나의 셋째가 머지 않아서 그 어린 녀석의 목을 가져 올 것이 거의 확실 한 것이로군. 그 와중에 사람을 보낼 여유까지 있었다니 그것은 그가 그다지 불리하지 않 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소? 아! 물론 악 소저는 틀림없이 다른 까닭이 있어서 그녀석을 동굴 속으로 데려간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있소. 아마도 녀석에게 정말로 재산이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려는 것이었겠지." 악불범은 다소 냉랭한 표정이 되어서 생각하다가 싸늘한 냉소와 함께 대꾸했다. "모든 일은 한 사람의 말만을 들어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는 다시 거론하기로 합시다."주운양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소 어 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핫핫,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다만 지금 이 시각에 우리는 한 가지 상의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소이다. 비록 우리는 그렇게 믿는 바이지만 혹시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보장이라 도 있지 않는 것이니 일단은 우리가 지금 셋째아우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해야 할 것이 아 니겠소이까?"악불범은 잠시 생각하다가 역시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좋소!" 그것을 보고 주완청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소리쳐 물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거기까지는 제법 먼 거리인데 지금 우리가 출발한다고 해서 셋째숙부에게 정말로 어떤 도움이 될 수가 있을까요?"주운양은 미소하며 자신의 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해 주었다. "물론 당장의 도움은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일단 우리가 그 근처에 도달하게 되면 외부의 적들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한 만일의 경우에 쉽게 대처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 냐? 이 사막이라고 하는 곳은 그다지 쉽게 달아날 수가 있는 곳이 아니란다." 주완청은 어느 정도 부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어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다시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악채릉에 대한 이쪽의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때 미처 주완청이 입을 열기도 전에 어디선가 한 줄기의 기이한 음성이 들려와서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 제26장 다섯 명의 엉뚱한 고인(高人)들 주운양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딸인 주완청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즉시 입을 열 어 대꾸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주완청은 입을 다문 채 아주 괴이쩍은 듯한 시선 으로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주운양은 그제서야 비로소 주완청이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고, 방금 전의 그 소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주완청의 음성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 어조가 또한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그녀의 말을 흉내내고 있다고나 할까? 아주 늙수구레한 음성으로 마치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처럼 울려나오는 그 말소리는 그야 말로 속이 다 뒤집어질 정도로 괴이쩍은 것이었지만, 주완청의 말하는 어조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묘사해 내고 있었다. 주운양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엉뚱한 목소리를 듣게 되자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소 곤혹스 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부근에는 그의 세력들만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상태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실내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조금 전의 그 괴이쩍은 음성을 발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얘기는 밖에서 울려 들어온 것이었다는 말일까?밖에서 울려 들어온 것이었음에도 그 얘기는 마치 눈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 왔기 때문에 주운양은 대체 어떤 고인(高人)이 나타나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놀라며 안면을 굳히고 크 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 순간에 밖에서 다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하는것이었 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냐? 설마하니 너도 그녀석에게 그와 같은 미련 이 있다는 말이냐?" 이상한 것은 그 음성은 조금 전의 그 음성과는 달리 빌고 똑같이 늙수구레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간드러지지 않아서 남자의 말을 흉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밖에 나타나서 장난을 치고 있는 고인은 한 명이 아니라는 말인가? 과연 이때 그 뒤를 이어서 조금 전의 간드러진 음성이 마치 여자처럼 까르르 웃으며 말을 받는 것이었다. "호호호, 정말로 웃기지 말아요! 내가 그얼간이 바보녀석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하늘도 웃고 말 거예요. 큰오빠, 나는 단지 그녀석이 혹시 정말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 른다는 것이죠. 우리가 만일 그러한 재산을 모르고 그녀석을 죽여 버리게 된다면 억울한 노릇이 아니겠어요?"……! 느닷없이 마치 도깨비처럼 그와 같은 음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심지어 악불범 등까지 하나같이 크게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비단 밖에서 음성을 안으로 선명하게 보내고 있는 재주가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사실 그러니까 지금 이통나무집의 밖에 는 십여 명의 장한들이 주의깊게 보초를 서고 있는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그들이 그렇게 아 무렇게나 떠들어 댈 수가 있다는 것은 이미 보초들이 누군가에게 제압을 당한 이후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실로 악불범이라도 글ㄴ 보초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겠지만, 지금 실내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그와 같은 일을 해냈다는 것은 가히 경악할 만한 사건인 것이었다. 주운양 등은 이제 마악 임옥룡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출발을 하려다가 뜻밖에도 느닷없는 일을 당하게 되어일순 크게 불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가장 경악할 만한 사실은 그 조작해 낸 듯한 괴이쩍은 음성들이 기실 은 주운양 등의 귀에 매우 익은 듯하기 때문에 일시에 간담이 덜컥 내려앉고 등줄기에 소름 이 오싹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뜻밖의 사태는 너무나도 괴이하고 또한 공포스러운 것이어서 누구라도 처음에는 감히 쉽게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남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허허허, 너는 정말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일 정말로 커다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면 확실히 우리에게는 억울한 노릇이겠지. 이제까지 투자해 온 노력들이 아까울 정 도일 테니까. 그러나…… 이미 어젯밤에 우리 아버지와 악 대협 등이 함께 논의하는 자리 에서도 그와 같은 얘기가 오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인 즉, 설사 그녀석에게 그 많은 돈이 있다고 해도 앞으로 그녀석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으니 쉽게 우리가 그 돈을 차지 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만일…… 만일 우리가 그 재산을 굳이 차지하려고 한다면 어 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 그러나 기실 우리가 이번의 일에 있어서 재산을 차지하 는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우리는 재산을 포기할지언정 기밀을 누설하는 일이 생길 소지가 있는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너 는 알겠느냐, 청매?" (……) 주완청은 이제까지 그래도 애써서 태연한 척하고 듣고 있었으나 자신의 이름이 직접 거론 되기 시작하자 그만 안색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기실 조금 전부터 시작된 그 얘기는 바로 얼마 전에 주씨 남매 등이 이곳에 마악 도착하여 주위를 거닐면서 은밀하게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와 같은 대화를 엿들어서 그것을 다시 곧이곧대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인지, 아니 도대체 어떤 자가 그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혹스러웠고 또한 극 심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천연덕스러운 그 대화는 계속되었고 게다가 이번에 들려 오는 음성은 이제까지 아 직 한 번도 들려 오지 않았던 다른 남자의 어조였다. "혹시 청매 너는 그 어린 녀석에게 접근하여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여 마침내 그 재산을 송 두리째 가로채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여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아니예요. 저는…… 하기는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설사 그에게 몸을 바치는 한이 있더 라도 손해가 없을 것인데,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비록 얼간이에다 바보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소심하여 나의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고 말았 어요. 사실 말이지…… 그는 만일 우리 가문과 그러한 관계가 없었다면 한 번 사귀어 보 고 싶은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다른 남자가 놀려대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그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냐? 너는 혹시 그에게 재산 을 구실로 몸을 바치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 너는 지금 그자식이 사라지게 되어서 매우 섭 섭하겠지?" 여자가 다소 화를 내며 대꾸했다. "천만에요! 나는 그렇게 멍청한 여자가 아니예요. 그는 비록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가 있는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바보 멍청이에다 얼간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죠. 내가 미쳤다고 그런 녀석에게 몸을 바치나요? 호호호…… 하기는 그는 가히 어떤 여자라도 그러 고 싶을 정도의 미남자였기는 했어요." 다른 남자가 놀려대며 다시 말했다. "그것 봐라! 그러길래 내가 너에게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한 것이 아니냐? 너는 혹시 그의 침실에까지 놀러갔었던 것은 아니냐?"여자가 대꾸했다. "둘째오빠! 웃기지 말아요! 나는 다만 한 멍청하고 못생긴 남자의 침실에는 들어가 보기는 했죠. 그런데 그 남자의 아랫도리가 얼마나 볼품이 없는 녀석이 달려 있던지, 호호호……" 그때 내심으로 혹시나 하고 참고 있었던 주완청이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자 리를 박차고 장풍으로 통나무벽을 부수며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덮쳐 갔다. 펑! 일순 통나무 조각이 위맹한 장력에 의해 부서져 나가는 가벼운 폭음과 함께 그 나무조각들 이 허공으로 풀풀 날아서 마치 눈송이처럼 실내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대로 주완청은 밖으로 뚫고 나갔던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벽에 부 딪친 것처럼 그 순간에 다시 튕겨져서 바닥에 심하게 뒹굴고 있었다. 주운양은 그것을 보고 혹시 자신의 딸이 다친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여 신형을 움직이 려고 했으나 워낙에 지금의 상황이 좋지 못한 것 같았고, 또한 주완청의 부상이 생각보다 는 우려할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신형을 멈춰세우고 말았다. (……) 주완청은 비록 거세게 뒤로 튕겨져서 바닥에 뒹굴게 되었으나 그다지 심한 내상을 입지 않 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 신음을 하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은 하지만 왠지 심하게 붉어져 있었고 그녀의 두 눈에도 원독이 충만한 기색이 가득한 상태 였다. 실내의 한쪽 통나무 벽면이 주완청의 장력에 의해 부숴져서 휑하니 뚫려서 그곳을 통해서 바람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소리의 주인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여전히 계속 되는음성만이 들려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른 남자의 말소리였다. "빌어먹을! 그래서 청매 너는 그 어린 녀석의 아랫도리를 직접 구경하기라도 했다는 말이 냐?" 여자의 음성이 말했다. "호호,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둘째오빠의 그녀석은 큰오빠의 것보다도 훨씬 못한데 감히 상 오라버니의 것과 비교를 할 수가 있겠어요? 듣자니 그 악 소저도 기실은 상 오라버니의 그 아랫도리에 반했다고 하더군요!""뭐, 뭣이…… 가, 감히 뭐라구?" 다른 남자가 다소 심하게 흥분하는 듯하여 이어 첫 번째의 남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 오기 시작했다. "청매, 학 동생, 지금 이곳은 낯익은 곳도 아니니 혹시 우리의 말을 엿듣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는데 그와 같은 쓸데없는 말을 해서야 쓰겠어? 우리는 이제 그만 다른 얘기를 하도록 하자구." 여자의 음성이 반발했다. "아니예요. 이곳은 이렇게 사방이 훤하게 트여 있는데 누가 감히 우리가 작은 소리로 말하 는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구태여 다른 얘기를 하지 말고 계속햇 그 얘기를 하도록 해요!" 다른 남자가 매우 화난 음성으로 떠들었다. "그 어린 녀석은 아까 우리가 마치 중독된 것처럼 떠들어 대고 있을 때 실제로 정말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크흐흐! 그 어린 녀석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난리냐? 청매, 너는 실로 앞장서서 그와 같은 연기를 감쪽같이 해냈지 않느냐? 우리는 마차가 떠난 뒤에 감쪽같이 일 을 처리하여 모두를 속일 수가 있었지만 가장 멍청하게 속은 놈은 바로 그 얼간이 같은 어린 녀석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음성이 말했다. "흥!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둘째오빠의 연기가 가장 형편이 없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요? 하마터면 우리는 그 때문에 마각을 드러낼 뻔했었다는 것을 아마도 아직 모르고 있겠지요? 호호호, 마치 그 형편없는 아랫도리……" 다른 남자가 더욱 화가 난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의 아랫도리가 형편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너는 아예 그녀석과 실컷 즐기지 어째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느냐? 너는 계속해서 형은 좋고 나는 귀찮다는 말이냐?" 여자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이예요. 큰오빠의 것은 확실히 둘째오빠의 것보다는 훌륭하다고 할 수가 있죠. 사람은 우선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그때 처음의 남자가 끼어들어 다소 나무래듯이 말했다. "청매, 그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해서야 되겠어?" 여자는 말했다. "흥, 그거야 나의 둘째오빠가 분수를 모르고 쓸데없이 질투를 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까 그렇죠. 나는 그저 멀쩡하게 가만히 있는데 하필이면 나를 건드리는 사람이 잘못인 것이죠. 아…… 대체 지금쯤이면 그 상 오라버니는 이미 죽음을 당했을까요? 아마도 그 악 소저가 나서서 방해하지 않을까요?"처음의 남자가 말했다. "음…… 저기에 사람이 오는군. 우리 얘기는 그만하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사람 들이 기다릴 테니……" …… 들려 오던 얘기는 거기까지 이어지다가 문득 끊어져서 다시 들려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음성의 주인들에 대해서 놀라고 의아함을 가지고 있다가 이윽고 그 대화를 듣고 나서 그 괴이함에 놀라서 점차로 안색이 갖가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비록 지금 그와 같은 연기를 해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해도 그 대화 가운데의 주인공들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주씨 남매의 대화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상장풍 등은은근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주씨 형제들을 바라보았고, 주씨 형제는 역시 나름대로 안색이 시뻘겋 게 변하여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기실 그들은 가능하다면 그 대화를 도중에서 중단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으나 일단 주완청이 당하는 광경을 보고는 그것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스스로의 행동을 시인하는 결 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서서 그와 같은 대화를 모조리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주씨 남매는 비록 교활하고 더없이 악독하기는 했으나 의외에도 자신들의 음란한 생활 이 적나라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자 그만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고 이내 그 수치 심이 분노로 변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조금 전에 그들의 대화를 그대 로 폭로한 그 음흉한 사람들을 갈가리 찢어 놓아도 성이 차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실 장내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을 느끼고 있느 사람은 바로 주 운양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한 가지의 일에 너무나도 집착하여 미처 자식들을 돌보지 못하 고 그와 같은 음란한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던 사실에 대해서 후회가 치밀어서 마치 가슴을 에이는 듯했다. 주씨 남매 등은 비록 수치감에 얼굴을 붉히고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음탕한 생활에 젖어 서 바르고 그른 일에 대한 판단력마저 잃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다만 지금 재수가 없어서 그와 같은 일을 폭로당했기 때문에 나중에 실력을 키워서 지금 그 내용을 들은 자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게 되면 자신들의 명예가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힘이 곧 정의인 것이었다. 주운양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전혀 옳고 그름을 분별하 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악독할 수가 있었어도 일단 자식 들의 일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자 가슴이 크게 쓰라리고 어떤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 다. (……) 주운양은 이때 혹시 악불범이 입을 열어서 자신들을 조소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심정 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 었다. 그와 같은 무심한 듯한 태도는 비록 다소나마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 도 마치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나중에 화근이 되어 거대한 불행을 몰고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악불범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주운양의 일가가 있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 에 주운양은 지금이라도 즉시 악불범을 제거해 버리고 싶었으나 역시 그러한 일은 어렵고 도 어려운 일일 것이고, 게다가 지금은 우선 밖에 있는 그 사람들을 상대해야만 하는 입장 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러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사람들은 들려 오는 말소리가 끝난지 상당히 시간이 흘렀으나 누구라도 먼저 신형을 움직 이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누구라도 먼저 신형을 움직이게 되면 거대한 저주스 러운 부정을 타게 되어 영원히 그것을 벗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을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 했다. 아니 기실은 주씨 형제 등은 지금 다소 얼굴이 붉어지기는 했지만 분노하여 그 목소리의 주 인들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이내 그들이 구태여 찾지 않아도 그들의 앞으로 나타날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묵묵히 악독한 눈빛을 빛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문득 전혀 움직일 것 같지도 않게 무거운 정적 속에 짓눌려 있던 출입 구가 소리없이 서서히 열리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일단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하 는 것이었다. ……! 사람들은 실내에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을 보자 다함께 안색이 크게 변했으나 다소 넋나간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러나 기실은 그들 모두의 표정은 전혀 의외라는 마음은 없었고 비록 놀라고 절망스럽기는 하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던 바라는 생각이 충만하고 있었다. 그렇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불시에 나타나서 느닷없는 짓을 학 다시 실내로 들어선 사람 들은 바로 도액오선(渡厄五仙) 등이었던 것이었다. 이 순간 도액오선의 뒤에는 여전히 예의 그 진아라라는 홍의미소녀와 엽노, 화노가 뒤따르 고 있었는데, 주운양 등은 화노와 엽노가 도액오선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함 께 어떤 무서운 예감을 느낀 듯이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화노와 엽노가 도액오선과 함 께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문인천상이 그들과 한패라는 말이고, 즉 그러한 말은 결과적으로 한 가지의 끔찍한 결론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인천상이 그렇다면 이들과 한패였다는 말인가?) 주운양은 일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자 마치 끔찍스러운 현실의 상황이 눈앞에 훤하게 보이는 듯하여 전신을 마치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었다. 문인천상이 도액오선 등과 한패라 면 결코 자신의 생각대로 그토록 무기력하게 희생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 직 확실한 결과를 임옥룡에게서 보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이번의 계획은 자신들이 오히려 완벽하게 패배한 것일 것이며, 전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이 이제 곧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문인천상은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하고 주운양은 생각해 보았다. 만일 어떤 절대적 인 자신감이 없다면 이들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나타날 리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 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그러한 현실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도훼선이 아주 슬픈 듯한 음성으 로 실내의 사람들을 향해서 입을 여는 것이었다. "흐으 흐으 흐으, 너희들은 그야말로 훌륭하고도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대로 포식하고 있는 중이로구나. 우리들은 사실 지금까지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는데, 지금…… 지금 이곳은… … 이곳은 이처럼…… 이처럼…… 따뜻…… 따뜻하고…… 또한…… 또한 그와 같이 많은 음 식들을 감히 우리…… 우리에게……" 지금 도훼선이 하고 있는 말은 매우 더듬거리는 말이었지만, 기실 그의 음성이 깊은 울음 소리에 젖어서 마치 그가 심하게 흐느껴 울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울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측은한 심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때로 는 동정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도훼선의 두 눈에서는 결코 어떠한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실로 그의 그러한 울음섞인 음성은 듣는 이들로 하 여금 구역질이 날 만큼 가증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는 그 말을 듣다 못해 정말 로 구역질을 하려고 웩웩거리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도훼선뿐만 아니라 이 도액오선은 각기 실로 추악하기까지 한 결점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 었기 때문에 만일 그들의 무예가 그토록 광하지 못했다면 미처 강호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 에 혹은 그 다음이라도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거나 짓밟혀 죽게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실 이들 도액오선의 무학은 천하에 그 유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며 고강 하여 누구라도 감히 그들에게 거슬리는 말이나 눈치를 보일 수가 없는 일이었고, 나중에 는 그들의 가증스러운 추악한 결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대악마의 숨결 정도로 느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마치 그와 같이 지금 실내에서 그와 같이 떠들어대는 도훼선의 말을 듣고 나서 누구라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감히 아무도 싫어하는 내색을 보일 수가 없었고, 다만 주운양이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떠올려 보이며 입을 열어 말을 받았을 뿐이었다. "다시 노선배님들을 뵙게 되는군요. 이건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 자주 뵙게 되다니…… 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노선배님들께서 원하신다면 이 곳의 모든 음식들이나 은자들은 하나같이 노선배님들의 것이죠. 저희가 감히 내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주운양이 그렇게 말한 것은 다만 지난번에 크게 당했었기 때문에 이 번에는 그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심정으로 한껏 그들을 높여 주어 보았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도훼선은 말을 하다가 말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고, 나머지 대다 수의 사람들도 일제히 크게 놀라고 흥분한 기색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뭐라구? 그…… 그게 정말이냐?" 성질이 가장 급한 도패선은 심지어 너무나도 마음이 조급한지 신형을 앞으로 기울여 다리 를 덜덜 떨며 두 눈 가득 음식에 대한 탐욕이 가득찬 채로 소리쳐 묻는 것이었다. 제27장 환상(幻像)의 일수(一手) 주운양은 비록 전날에 이들의 심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가 심하게 당했었으나 일단 그와 같은 태도들을 보게 되자 혹시 그러한 단순한 심리를 이용하면 자신들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실 이 도액오선은 오랫동안 산 속에서 쳐박혀서 살아 왔고, 따라서 그곳에는 음식들이 그다지 풍부한 편이 아니어서 늘상 마음속으로 허기에 시달리다가 이윽고 강호에 나와서 그야말로 맛좋은 음식들을 무진장 대하게 되자 일순간에 눈이 뒤집히며 식탐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었다. 원래가 그들의 생각은 비교적 단순한 것이어서 일단 그와 같은 탐욕이 치 솟아오르게 되자 나중에는 가끔 그러한 욕구를 참을 수가 없을 때가 많아지게 되었다. 주운양은 즉시 교활하게 생각을 굴린 다음에 허리를 굽히면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요. 이제 곧 소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드리겠습니다요." 이어 주운양은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서 주씨 형제에게 소리쳐 말했다. "너희들은 대체 뭘 하느냐? 어서 많은 훌륭한 음식들을 가져다가 이분들을 대접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는 말이냐? 만일 이분들을 지금 대접하지 못한다면 필시 나중에 후 회하게 될 것이다." 기실 주운양은 이제 문인천상에게 잡히게 될 것이고 일단 그렇게 되면 이곳의 음식들도 결 코 그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는데, 도액오선은 일시 식탐에 눈이 어두워서 사 리분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그는 그것들로 짐짓 인심을 크게 쓰는 척하는 것이었 다. 주씨 형제는 원래 자신들의 음탕한 마각이 드러나게 되어 몸과 마음이 다소 굳어져 있는 상 태였는데,주운양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문득 그의 의도를 슴다고는 즉시 발빠르게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단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치 이제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뻔뻔 스럽고 사악한 얼굴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주씨 형제가 신법을 펼쳐 가면서 빠르게 많은 음식들을 탁자 위에 가져다 놓고 물러가자 주운양은 즉시 그것들을 도액오선에게 들이밀면서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어서 드십시오! 옛말에도 먹고 죽은 귀신은 보기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여러분 들과 같은 노신선(老神仙)들께서 굶고 계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죠." 도액오선은 원래부터 음식들을 보고 환장을 하여 그야말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다시 거기에 주운양의 말을 듣게 되자 실로 입 안에 군침이 철철 흘러넘치게 되어서 그 먹 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식탐에 빠져서 정신력이 둔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기실 오랫동안 살아 온 늙은 생강과도 같은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마악 달려들어서 음식을 먹으려고 하다가 일 단 신형을 멈춰세우며 그 가운데 도멸선이 먼저 말했다. "혹시…… 혹시 이 음식들에는 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이 도멸선은 도액오선 가운데 에서 가장 의심이 많은 소심한 사람이었는데, 일단 그의 그러한 말을 듣게 되자 다른 사람 들도 안색이 변해서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가 절반 정도로 즉시 줄어들게 되었다. 주운양은 원래 교활하고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즉시 그와 같은 눈치를 알고는 앞으로 나서서 많은 음식들 가운데에서 제법 맛있어 보이 는 구운 통닭의 뒷다리 부분을 찢어서 집어들고는 입으로 가져가서한 번 베어서 옆으로 길 게 고기조각을 뜯어내서는 우적우적 씹어대며 말하기 시작했다. "노신선들께서 정히 의심이 가신다면 소인이 먼저 이렇게 죄송스럽게도 시식을 한 다음에 안심이 되시면 드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실……"여기까지 말하다가 주운양은 목이 잠 기는지 꿀꺽, 하고 입 안에 씹고 있던 고기조각을 그대로 삼켜 버린 연후에 다시 즐거운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는 통닭의 뒷다리의 고기조각을 입으로 길게 뜯어내어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음식들은 노신선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와 같은 소인들을 위해 서 호아송하게도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하하…… 이토록 맛이 있는 것이지만 전혀 독이 들 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소인 등이 비천하다고 해도 설마하니 자 기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기야 하겠습니까요?" 주운양은 일단 거기까지 말하고 씹고 있던 음식물을 맛좋게 삼킨 다음에 다시 마치 게걸스 러운 듯한 태도로 통닭 뒷다리의 고기를 정신없이 마저 뜯어먹기 시작했다. 기실 이곳의 수하들은 주운양 등이 모처럼 들른다고 하자 그야말로 그의 눈에 들기 위해 갖 은 재주를 다 부려서 온갖 종류의 음식들을 만들어 놓았었고, 그 분량은 주운양 일행이 한 사흘은 먹고도 남을 만한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단 주운양 등이 이곳 을 떠나간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잔치를 벌이거나 아니면 아예 이고에서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서 음식을 그처럼 풍성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는데, 도액오선 등이 한눈에 보기에도 그것들은 하나같이 절로 군침이 돌게 하는 진귀한 요리들이 분명했 다. 주운양은 실제로는 이미 많은 음식과 술을 마신 뒤여서 배가가득차 있었으므로 그처럼 일개 통닭구이가 맛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연기를 하는 데 그야말로 일가견이 있는 그였 기에 그의 통닭을 맛있게 먹는 듯한 연기는 한 순간에 독이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던 도 액오선의 마음속의 우려를 깨끗하게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욱 더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켜 주게 되었다. …… 도액오선 등은 주운양이 통닭을 뜯어먹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자 마치 자신의 하나밖에 없 는 음식을 그가 먹어 버리고 있는 것 같은 안타깝고도 초조하며 안절부절 못해 하는 표정 으로 군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다가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서 저마다 손을 내밀려고 했 다. 이미 음식들에 독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그들의 손길을 막을 수 있는 장 애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때 다시 맏이인 도상선이 문득 입을 열어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주춤하게 만들 었다. "음음, 음식도 훌륭하고…… 그리고…… 인심도 좋구나. 하지만…… 하지만 네가…… 네가… …" 도상선은 원래 그다지 말을 더듬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억지로 욕구를 참아내기 위해 서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것을 보고 주운양은 기다리기가 다소 지소한 나머지 급히 물었다. "소인이 혹시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도상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치 그는 그 말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것 같은 초조하고도 다급한 모습이었다. "그, 그렇다…… 나, 나는…… 아, 아니지, 너는…… 너, 너는 우리에게 노…… 노신선이 라고…… 이라고 했…… 했……"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했기 때문인지 도상선의 말은 나중에 가서는 계속 맴돌며 무슨 뜻인지 잘 알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주운양은 눈치빠르게 즉시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급히 다시 물었다. "혹시 제가 말씀드렸던 그 노신선이라는 아호(雅號)가 불쾌한 기분이 드셨다는 말씀이십니 까?" 주운양은 지금 아직 나타나지 않은 문인천상이 실내에 나타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려는 것이었다. 도상선은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말뜻을 쉽게 이해해 주는 주운양이 매우 인상좋게 보인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렇…… 그렇다. 우리는 사실…… 사실…… 노…… 노…… 노……"도상선은 마치 심하게 오줌이 마려워서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아주 초조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연신 노자만 연발했다. 주운양은 그것은 그가 너무나도 먹고 싶은 욕구에 강렬하게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생각하다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노신선이 아니라 다섯 분의 노괴물(老怪物)이라고 불러야 옳다는 말씀이시로군 요? 그럼 그렇게 불러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이 도액오선의 말을 정말로 끝까지 듣자면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가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주운양은 기실 마음 깊이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전에 그들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게 되어서 그 와 같이 말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상선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주운양의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치는 것이었다. "그, 그렇다! 기실 우리는 바…… 바로 성질이 못…… 못되…… 못되먹어서 감히 그와 같… … 같은 칭호를 받을…… 받을 수가…… 수가 없고 차…… 차라리 노…… 노…… 노괴… … 노괴물…… 노괴물이라고 불…… 불러…… 불러야 하…… 하는……" 주운양은 기실 전번에 도액오선에게 한 번 심하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돌발적 괴상한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결코 도상선의 손에 조금이라도 맞고 싶은 생각 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지금은 결코 자신이 피해서는 안되는 상황인 것 같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대로 피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참고 도상선의 손길을 받기로 하였는 데, 그는 내심 그와 같이 참으면서 다만 그의 손길이 겉보기처럼 가볍기를 염원하고 고대 하고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도상선의 손길에 얻어맞은 어깨는 일순 마치 빠개질 것 같이 아파 왔고, 그 것은 바로 도액오선이 서로간에 비슷한 공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들끼리 그와 같이 툭 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화되어 버려서 마치 다른 일반 사람들도 그들 의 그렇게 툭 치는 손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 던 것이었는데, 그러한 이유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다시 도상선이 시간을 끌며 말을 더듬 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는 심하게 짜증이 치밀어서 모든 일을 그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이 일을 포기학 되면 이후에 나타나게 될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 해 보고는 이내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도액오선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하하하! 여러분께서는 알고 보니 이 맛좋은 음식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로 군요? 그렇다면 우선 이것들을 치웠다가 소인이 나중에 모두 먹어치우는 수밖에……" 주운양이 짐짓 탁자를 치우려는 듯이 그것을 들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문득 도액오선이 하나같이 번쩍 신형을 날려서 그가 들고 있는 탁자를 한 손으로 내리눌렀고, 그로 인해 주운양은 마치 갑자기 만 근이나 되는 힘이 밀려드는 듯하여 그만 탁자를 바닥 에 다시 내려놓게 되었다. 도수선이 문득 그를 향해 입을 열어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 이렇게 선심을 베풀…… 베풀고 있는…… 있는 것이냐? 호…… 혹시 …… 호…… 혹시 이것으로 우리의 약점을 잡…… 잡아…… 잡아서 혀…… 협박…… 협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 아니냐?"도수선은 말을 더듬느하고 한 마디의 말을 겨우 완전하게 했 다. 주운양은 이때에는 이미 그 심학 더듬는 말에 질리고 또 질려서 그야말로 이제는 그 소리 를 듣기만 해도 정신이 울렁울렁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이를 악물고 참고는 겉으 로는 그저 처연하 안색을 하면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러분은 너무나도 의심이 많으시군요. 저는 실로 저번에도 여러분에게 잡혀서 혈도가 제 압되었었는데 지금 대체 무슨 배짱이 있어서 여러분들을 협박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지 금 여러분을 대접하려는 것은 다만 여러분들께서 놀라운 무공들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존 경하는 마음이 들어서 사심없이 한 번 마음껏 대접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액오선은 주운양의 말을 듣고 나자 제법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계속해서 주저주저했다. 특히 도멸선은 가장 성격이 소심하여 욕구를 참지 못하고 손을 슬그머니 앞으로 내뻗었다가는 얼른 다시 손을 움츠리고 하는 동작을 빠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된다면 이것은 혹시 무슨 기이한 무공을 겨 루는 광경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도액오선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고 욕구를 애써서 참느라고 안면이 일그러진 채 불룩불룩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성질이 급한 도패선은 차마 눈으로 보게 된다면 참을 수가 없어질 것이라는 듯이 두 눈마저 질끈 감고 있었으니 어찌 살벌하게 보이지 않겠는가!주운양은 그러한 광경을 보자 도무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는 자신의 계책이 상공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문득 한 가지 기묘한 생각을 떠올린 뒤에 그것을 즉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마치 실수한 척하면서도 음식을 그들에게 넘겨 주려는 것이었다. 기실 이들 도액오선은 매우 음식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으나 가장 음식을 먹 지 못하는 이유들 가운데의 하나는 바로 그 다섯 명이 서로 상대방을 의식하고 결코 먼저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운양은 마침내 눈치채게 되었던 것이 었다. 이 도액오선이 그렇게 한 번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데에는 틀림없이 다른 기이한 이유가 있을 것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주운양에게는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오직 머리에 떠 오른 대로 즉각적으로 행동에 임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주운양은 즉시 두 손으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가득 집어들고 도액오선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으신 모양이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이 제가 이 모든 음식들을 다 먹어치우는 수밖에 없겠군요."실로 이 주운양은 강호상에서 온갖 짓을 다 해 보면서 살아 왔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이 이렇게 음식을 가지 고 별별 연극을다 하는 짓은 또한 처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주운양은 일단 말을 그렇게 하면서 두 손에 가득 들고 있던 음식들을 마치 한꺼번에 자신 의 입 속으로 쳐넣을 것처럼 움직였는데, 따라서 그의 양손에 들려 있었던 음식들은 그의 가슴 앞 부위에서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게 되었고, 공교롭고도 기이하게도 바로 그 순간에 느닷없이 한 손에 들려 있던 큼직한 쇠고기 요리가 덩어리째로 주운양의 앞쪽에 서 있는 도패선의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 물론 그것은 암기무예가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주운양이 일부러 자신의 성명절기를 발휘하여 마치 실수한 척하고 은연중에 고깃덩어리를 날린 것이었으며, 게다가 도패선은 도액오선 가운데에서도 가장 성질이 급하여 그 성질을 이용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 여 일부러 그를 택해 그쪽으로 고깃덩어리를 날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도액오선은 이때 당연하게도 주운양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다만 그 가운데에 서 그 당사자인 도패선만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가 그와 같은 고깃덩어리의 공격을 일 순간에 받게 되었다. 주운양은 일단 그렇게 하고 나서 마치 고깃덩어리가 날아간 것이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였던 것처럼 어! 하는 외침을 발했는데, 다른 도액사선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도패선도 일순간 크게 놀란 표정으로 감고 있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기실 지금 그가 눈을 감고 있다고 해도 눈앞의 상황을 알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며, 게다가 주운양의 고깃덩어리가 제아무리 빠르게 날아간다고 해도 결코 그를 상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당사자인 도패선을 비롯하여 나머지 도액사선이 크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는 이유 는 그 암기가 바로 군침을 돌게 만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라는 데에 있었다. 도액사선은 그 음식이 느닷없이 도패선의 얼굴로 날아가자 일시에 경악과 억제할 수 없는 당혹감과 시기심을 느꼈고, 도패선은 나름대로 경악과 동시에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기쁨과 함께 격렬한 갈등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니 기실은 그 순간에 보다 격렬하 고도 더욱 복잡한 감정의 변화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는 일이었다. 도패선은 일순간에 도대체 이 날아오는 음식덩어리를 입으로 받아 먹어야 하느냐 아니면 손으로 잡아야 하느냐 하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 안면을 꿈틀꿈틀거리다가 이윽고 포기한 듯 이 계속해서 눈을 뜨지 않았고, 나머지 도액사선은 그에 반해서 도저히 그가 혼자서 그와 같은 행동을 차지하는 것을 묵과할 수가 없다는 듯이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들이었다. 비록 지금 도패선이 그 음식을 받아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집어먹은 것이 아니 라 눈을 감고 있는데 음식이 절로 날아들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숙명적인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므로 도패선이 설사 그것을 모른 척하고 받아먹더라도 결국 그에게 어떤 책 임이 전가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들 도액오선은 비록 형제지간이라고는 하나 기실은 거의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난 다 섯 쌍둥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여 형제라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남남과 도 같은 경쟁심이 있었던 상태였는데, 지금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가 뼈에 사무치는 상황 이었는데 어찌 도패선이 운좋게 그것을 받아먹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제28장 멍청한 늙은이의 왕고집 아니나 다를까 역시 생각대로 도액사선은 마악 도패선의 입 속으로 음시이 들어갈 순간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그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손을 쓴 사람은 가장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던 도멸선이었다. 주운양은 역시 내심으로 미처 음식이 도패선의 입가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이 손을 쓰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는데, 한 순간에 도멸선이 참지 못하고 손을 앞으로 내뻗 자 즉시 그 뒤를 이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머지 세 명이 손을 쓰기 시작하였는 데, 이미 경험해 본 일이기도 하지만 실로 그들의 무공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드러 나게 되어 일순간에 내뻗쳐져서 서로 얽히고 풀어지며 흩어지는 손그림자의 모습은 마치 번개처럼 쾌속하게 눈부신 환영(幻影)을 그려내는 것과도 같았다. 일반인은 아마도 전혀 그와 같은 손그림자도 볼 수가 없을 것이고 심지어 주운양도 그 손 그림자들의 변화하는 모습에 대해서 전혀 파악할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비록 그렇기는 해 도 주운양은 이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만족한 듯이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일순 팍, 하는 소리가 미미하게 일어나며 한 순간에 그 고깃덩어리가 네 조각으로 찢어져서 각기 도액사선의 입 속으로 들어갔으며, 도패선은 내심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그와 같은 것을 알고는 즉시 눈을 떠서 둘러보다가 도액사선이 이미 그 고기조각들을 입 속에 깨끗이 감춰 버리고 지극히 흐뭇한 표정으로 우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참 을 수가 없다는 듯이 두 눈에서 번쩍 노화의 광망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이 순간에 네 사람을 상대해 봐야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머 뭇거리더니 즉시 앞으로 달려들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두 손으로 잔뜩 쥐고는 정 신없이 퍼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비단 도액사선뿐만 아니라 장내에서 이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도상선이 양볼을 크게 불룩하게 만들면서 맛좋게 음식을 씹어먹다가 느닷없이 그와 같은 광 경을 대하고는 소리쳐서 말했다. "둘째야, 너는 지금 분명히 먼저 음식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냐? 나중의 책음은 분명히 네가…… 네가 지겠지?" 이 도상선은 입 속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고 있게 되자 너무나도 흐뭇한지 그렇게 더듬거 리던 말도 이제는 제법 유창하게 흘러나왔다. 지금의 도상선의 말은 실로 나머지 세 사람의 심정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어서 그 들의 표정은 아주 말할 수도 없는 즐거움으로 넘쳐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자신들이 책임 을 모두 도패선에게 전가시키고 마음놓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먹을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도패선은 도상선의 말을 듣고 있다가 보기 드물게 화를 내지 않고 아주 여유 있는 태도를 지으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웃…… 웃기지 마시오! 가장 먼저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누군데?"……? 도액사선은 그 말을 듣고는 일시 크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이윽고 다시 도상선이 대표 로 질문했다. "누구긴 누구냐? 그건 바로 네가 아니냐?" 도패선은 그 말에 여전히 음식을 입 속에 마구 쑤셔넣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신들이 지금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은 무엇이오? 그건 바로 음식이 아니었단 말씀미오?" (……!) 도액사선은 순간 그말을 듣자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기실 그들은 도패선에게 공짜 인 음식이 자신에게도 공짜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빼앗아서 나누어 먹었으나 실제로 그것은 그들에게는 공짜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도수선이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군…… 둘째형은 가만히 있다가 음식을 먹도록 강요받은 것이었지만 우리는 의도적 으로 음식을 먹은 것이니 이 음식이 어찌…… 어찌 저 음식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가 있으랴 ……" 역시 도수선도 일단 음식이 입 속에 가득차게 되자 더욱 말이 더듬어지지 않고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은 입 속에 두 개의 주머니가 있어서 만약 하나의 음식을 위한 주머니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나머지 말을 하기 위한 주머니도 쓸모가 없어지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자신들에게 오히려 책임이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도액사선은 일시에 안 색이 마치 오색의 빛깔처럼 울긋불긋하게 변했지만, 하나같이 심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그들의 움직임이 즉각 눈부시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왕에 자신들이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도패선이 먼저 많이 먹고 있는 것에 뒤지 지 않게 되기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음식을 먹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실로 이 도액오선의 식욕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도패선이 게걸 스럽게 퍼먹고 있는 자리에 나머지 도액사선이 함께 번개처럼 끼어들어서 가세하기 시작하 자 마치 그 주위에 온갖 음식물들이 펄펄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그들의 양 손은 쉬지 않고 빠르게 각기 음식물들을 집어서는 번갈아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는데,통 닭과 같은 것들도 마치 뼈도 씹지 않고 삼키는 것처럼 쉴새없이 입 속으로 집어넣고 삼키 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탁자 위에는 음식물들이 마치 산더미와도 같이 쌓여져 있었으나 그들이 달려들기 시작한 이후에는 금세 줄어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장내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도액오선의 놀라운 식성에 대해서 경악하면서 바라보고 있었지 만, 주운양은 오히려 다소 흐뭇한 시선으로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실로 그가 바라던 대로 된 것이었으며, 비록 도액오선이 지금 너무나도 먹는 일에 몰두하여 그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는 것이 흠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이제 곧 그들이 탁자 위의 음식들을 모조리 먹어치고 나게 되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리라고 판단하고 있었 으므로 그것도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실로 이 도액오선은 그야말로 다섯 명의 노괴물이 아 니라 다섯 명의 아귀와도 같아서 그 많은 음식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울 것 같지 않은가! 헌데 바로 그때 주운양으로서는 다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한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와 도 액오선의 음식물들을 잡던 손길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봐요! 당신들은 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우리 오라버니께 그토록 주의를 들었는데도 그와 같이 행동을 하다니…… 당장 먹는 것을 멈추고 이리 오지 못해요?!"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도액오선의 뒤에 서 있었던 진아라라는 홍의미소녀였 다. 주운양은 너무나도 다급하게 모든 생각을 굴리다가 보니 미처 그녀의 존재를 유의하지 않 았었기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하자 이내 내심으로 이런 빌어먹을! 하고 소 리치고 말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제 상황이 주 운양의 처지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이제 와서 도액오선이 손을 멈추게 된다고 해도 그에게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도액오선은 확실히 그 진아라의 존재에 대해서 약간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그녀가 입을 열자 마치 기계처럼 손을 멈추고 입 속에 음식물을 잔뜩 집어넣은 상태로 엉거 주춤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진아라가 양손을 허리 위에 올려놓고 다소 오만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다시 도액오선을 향 해 말했다. "대체 당신들은 오늘 여기에서 일을 할 건가요 말 건가요?"나이 어린 일개 소녀가 그와 같 이 백발의 노인들을 꾸짖는 광경은 다소 어이가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워 낙에 아름답게 생겼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깜찍하게 느껴졌다. 도액오선은 진아라가 그와 같이 사납게 몰아붙이자 일순 하나같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안 절부절하지 못하더니 이윽고 도상선이 다소 변명조로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우…… 우리는 물론 이…… 일을 할…… 할 것이오. 하지만 하…… 하……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미……" 도상선은 아까 유창하게 말하더니 지금은 그야말로 심하게 더듬는 것이 아까 이전보다도 훨씬 더해진 것 같았다. 진아라는 일순 눈살을 가볍게 찌루리며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당신들은 오늘의 일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먹는 일에만 열중하겠다는 말인가요?"도상선은 진아라의 말이 들려 오 자 그야말로 쩔쩔 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안색이 즉시 썩은 돼지의 간처럼 거무 튀튀하게 변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닝. 우리는…… 우리는…… 일을 하…… 하겠소……"진아라는 이에 깜찍스러운 두 눈을 키켜 뜨고 한 차례 도액오선을 천천히 노려보는 듯하다가 이윽고 다시 말했다. "그럼 어서 입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모두 뱉아 버리고 일을 시작하도록 하세요!" 도액오선은 그래도 입 안에 다소나마 음식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었 는데, 진아라가 그나마 즉시 뱉아 버리라는 마를 하자 이내 안색들이 커다란 실망감으로 거무죽죽하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일견하기로도 그들이 진아라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듯이 즉 시 엉거주춤하며 탁자 앞으로 다가서더니 이윽고 입 속에 들어 있는 음식물들을 다시 마 지 못해서 뱉어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그들의 심정은 마치 죽고 싶은 상태라도 되는 것처럼 안면이 크게 일그러지 고 전신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기까지 했는데, 게다가 그 가운데 도멸선은 겉으로는 뱉어 내는 척하면서 입 안의 음식물을 거의 씹지도 않고 절반 가량이나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 는 것이었다. ……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입 안의 음식물들을 모조리 치워 버린 도액오선은 드디어 본격적인 일 을 하기 위해 다소 무겁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천천히 주운양 등의 앞에 섰다. 원래 그들은 처음부터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었던 것이었는데, 그만 주운양의 술책에 속아서 음식을 먹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도액오선의 맏이인 도상선이 우선 진아라의 눈치를 슬쩍 살핀 다음에 이윽고 한쪽은 웃고 있으나 다른 한쪽은 무거워 보이는 그러한 괴이한 얼굴을 해가지고 주운양을 향해 엄숙하 게 입을 열었다. "험험, 그러니까…… 너는, 아니 너희들은 어서…… 어서 항복해라. 이…… 이상이다." 항상 실실 웃고 있는 도상선으로서는 실로 보기 드물게 엄숙한 어조였다. 사실상 그 엄숙한 어조는 듣는이로 하여금 더욱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괴이쩍은 것이었지 만, 그 말의 내용만큼은 장내의 사람들을 모조리 일시에 얼어붙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주운양은 미리 그와 같은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으나 일단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되자 왠지 몸 이 굳어지는 것을 의식하며 일부러 크게 미소를 지으며 도상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신선께서는 지금 저희들에게 항복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도상선은 그가 웃는 것을 보자 왠지 꺼려지는 것이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여서 대답했다. "그…… 그렇다. 워…… 원래 우…… 우리는 주인(主人)…… 주인에게서 너희들을 감시…… 감시하라는 지시를 바…… 받았으니…… 그…… 그러니…… 그러니까 다…… 당연히 너희들을…… 너희들을 감시했을 것이고 또…… 또한…… 나…… 나중에 너희…… 너 희들을 잡아…… 잡아두는 거…… 것이 마…… 마땅하…… 하지 않겠느냐?" 도상선은 일단 현실에 접하게 되자 다소 마음이 긴장되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하게 되었는데, 주운양은 듣는 입장에서 상당히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 얘기를 다 들어 주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저희들을 잡으려는 것은 원래는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여러 분들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어서 저희들을 잡아가십시오. 저희들은 결코 반항 하지 않겠습니다." ……? 주운양의 말에 주씨 남매 등은 다소 놀랐지만 도액오선 등은 일순 왠지 이상하다는 듯이 멍하니 서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도상선이 다시 말했다. "너는 정말로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생각이냐?"놀랍게도 도상선은 이 순간은 전혀 말을 더듬지 않았다. 보아하니 주운양이 이들을 주루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들은 그렇게 심하게 더듬지 않았었으므로 비록 이들의 더듬는 버릇은 습관적인 것이기는 해도 상황에 따라서 변화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주운양은 이 순간에 감히 그러한 생각으로 한눈을 팔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미소를 떠 올리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소인은 그저 조금 전에 노신선들께서 존경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서 갖은 음식들을 대접해 드렸던 것뿐이었는데 어찌 그와 같은 일로 치사스럽게 목숨을 구 걸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주운양이 그것을 빌미로 목숨을 구걸했었다면 도액오선은 차라리 마음이 편하여 제멋 대로 행동하게 되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주운양이 그와는 반대로 마치 정인군자처럼 전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테니 잡아가라고 하자 오히려 도액오선이 마음이 불편해지게 되었다. 주운양의 말대로 그저 거리낌없이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제압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같지만, 기실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왠지 꺼려지는 마음에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 문에 도저히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도상선이 잠시 머뭇거리자 주운양은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더니 앞으로 나서서 자신 의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면서 이렇게 말을 더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빨리 저를 제압하지 않는 것입니까? 소인은 이미 노신선님들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추호도 반항하지 않겠습니다."도상선은 주운양이 게다가 반항하지 않겠다 고까지 하자 더 이상 손을 쓸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실 주운양은 자신이 아무리 손을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와 같이 과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내민 것이었으나, 한창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도액오선에게는 그러 한 현실 파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마치 결정적인 치명타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 다. 그 순간에 교활하기라면 부친에게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주씨 남매들 역시 앞으로 나서서 상장풍과 함께 도액오선을 향해 두 손의 내미는 것이 아닌가! 지금 실내에는 수하들은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자는 멍청하게 한쪽 구석에 박혀 있 었고, 단지 악불범만이 아직 아까의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도액오선은 눈앞에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날 잡아가슈 하 는 듯한 태도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이미 자신들이 주운양의 음식을 먹어서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저히 제압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에 고개를 돌려서 진아라에게 말했다. "진…… 진 소저…… 소저…… 우리…… 우리는 도저히…… 도저히……"진아라는 이미 그렇 게될 줄 알았다는 듯이 아미를 곱게 찌푸리며 소리쳐 말했다. "그들을 제압할 수가 없다는 말인가요?" 도상선을 비롯한 도액오선은 그 말에 하나같이 그 늙은 머리를 길게 힘없이 아래로 떨구었 다. "그…… 그렇소……" 그것은 마치 이제는 어쩔 수가 없으니 대신 자신들을 잡아먹으시우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 이 없었다. 괴상하기만 한 이들이 이렇게 멍청하게 변모할 줄은 몰랐었기 때문에 진아라는 일순 크게 어이가 없어 하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서 한쪽으로 물러서세요!"……? 도액오선은 틀림없이 이제 진아라의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느 닷없이 그와 같이 쉽게 용서해 주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자 고개를 들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다시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일제히 한쪽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주운양은 이제 도액오선이 자신들에게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을 보자 내심 희 색이 만면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진아라가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으므로 대 체 요 조그만 계집아이가 어떤 수를 쓰려고 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진아라는 일단 장내의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주운양 등의 앞에 다가선 이후에 즉시 고개를 돌려 화노와 엽노를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나의 부탁을 들어 줄 수가 있나요?" 화노와 엽노는 이제까지 그저 뒷전에 서서 묵묵히 장내의 돌아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 는데, 그야말로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어지러움조차 느끼고 있던 중이었 는데, 느닷없는 진아라의 질문을 받게 되자 절로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무, 물론 우리는 명령대로 따르겠소." 진아라는 그 말을 듣자 앵두같이 작은 붉은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더니 즉시 하얀 손 가락을 들어서 주운양 등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그럼 어서 지금 즉시 그들을 제압하도록 하세요!" 주운양 등은 기이하게도 이 작고 귀여운 계집아이가 대담하게도 두 명의 사람들을 시켜서 자신들을 제압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얼씨구, 하고 부르짖으면서도 열심히 이 난 관을 벗어날 방도를 생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노와 엽노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진아라의 말을 따르는 것이 주인인 문인천상을위하 는 길이라고 판단하고는 즉시 빠르게 신형을 날려서 우선 주운양부터 제압해 버리려고 마 음먹었다. 그들은 이미 조금 전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이 주운양이 실로 극도로 교활하다 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이 화노와 엽노의 무공은 주운양과 상장풍의 무공에 비해서 그다지 뒤진다고 말할 수 가 없는 상태였고, 게다가 나머지 주씨 남매 등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화노가 먼저 주운양을 향해 날아갔고 엽노는 상장풍을 향해 신형을 날렸는데, 이때 주운양 은 열심히 뇌리를 굴리고 있다가 이윽고 화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오히려 그의 앞으로 풀썩 넘어지며 길길이 소리를 지르고 몸을 뒹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아아악…… 어서…… 어서 나를 죽여다오!"주운양은 이때 교묘하게도 화노가 성 급하게 앞으로 달려들어서 앞을 가리고 있는 사이에 앞으로 쓰러졌기 때문에 그러한 광경은 마치 그가 화노에게 심하게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실은 화노는 전혀 그의 몸에 손을 대 보지도 못한 상태였고, 게다가 나중에 뒹굴고 있는 주운양의 몸을 향해 공격을 하 려고 했으나 주운양이 뒹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교묘하게 전신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 에 그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화노는 따라서 주운양의 간악스러움에 실로 가증스러움을 느끼며 즉시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어 도법을 전개하여 단숨에 공격해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주운양이 다시 미친 듯이 몸을 굴리며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자 문 득 화노의 앞으로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한 사람이 막아서는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사람은 바로 도상선이었다. (……) 화노는 일순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다가 도상선을 향해 물었다.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나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오?"도상선은 아직도 계속해서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주운양의 얼굴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아주 딱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치명적인 살수를 입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에게 다시 살수를 가할 수가…… 수가 있겠느냐?" 도상선은 일단 이곳의 분위기에 적응이 되기 시작하자 보다 말을 더듬는 것이 완화되어 가 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화노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이미 치명적인 살수를 입었다고? 그것이 그의 연극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도상선은 그 말에 잠시 다시 고개를 돌려 주운양을 내려다보았으나 그는 원래 고집이 센 사 람이었기 때문에 설령 주운양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고집을 부릴 것이었으 므로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화노에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지금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수법에 당한 것이었지 결코 연극을 하 는 것이 아니다." 이 분근착골이라는 말은 기실은 도상선이 자신의 말을 변명하기 위해서 둘러댄 말에 불과 했지 전혀 주운양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는데, 주운양은 그 말을 듣자 마치 정말로 분근착골의 고문 수법에 당한 사람처럼 더욱 심하게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하 는 것이었다. 도상선은 조금 전에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도 혹시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고 있었는데 주운양의 태도가 달라지자 이내 그것 보라는 듯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화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 이 화노는 이미 일전에 도액오선에게 극심하게 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도상선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는 정말로 이 미치광이와도 같은 도액오선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가증스러움을 느끼며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이 되었지만 그만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진아라가 다소 새파란 안색으로 화가 나서 다가와서 도상선에게 소리쳤다. "이것 봐요! 당신은 정말로 나의 일에 방해를 할 건가요?"도상선은 진아라가 다가들자 다시 풀이 매우 죽어서 안색을 거무스레하게 변화시키며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 이…… 있겠소? 나는…… 나는 다…… 다만……"도상선은 마음이 불안해 지자 다시 심하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진아라는 답답한 생각이 들어서 즉시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고 없고간에 나는 지금 당신들을 옆으로 비켜나라고 했지 나의 일에 끼어들 라고 했던가요? 당신은 정말로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귀찮게 끼어들어서 나의 적이 되 려는 것인가요?" (……) 주운양은 옆에서 이러한 대화를 비명을 지르면서도 명확하게 듣고 있었는데, 실로 이 작 은 계집아이가 생각보다는 지극히 맹랑하며 똑똑하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보다 결정적인 방 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상선은 진아라가 그와 같이 말하자 금세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마치 안색이 학질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창백해져서 대답했다. "적이…… 적이 되다…… 되다니 이…… 이…… 이것은 도…… 도저히 이…… 이…… 있을 수가…… 없는…… 이……" 도상선은 이때 너무나도 마음속의 충격을 강하게 받은 나머지 심하게 말을 더듬어서 겨우 한 자씩밖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아라는 그 더듬는 말이 답답해서 즉시 다시 말을 잘랐다. "나는 당신이 나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두고볼 수가 없는 사람이예요. 만약 당신이 지금 옆 으로 비켜서지 않겠다면 나와 함께 일장의 격투를 벌여야 할 거예요." 진아라의 지금의 그 말은 실로 끔찍한 말이었는지 나머지 도액사선의 안색도 크게 변모하 고 도상선의 전신은 이미 심하게 흔들리다 못해서 마침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도상선이 그렇게 안색이 질려 있으면서도 아직도 계속해서 자리를 비켜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진아라는 일순 더욱 크게 화가 나서 아미를 높게 치켜세우고는 소 리쳤다. "좋아요! 당신은 그럼 나와 함께 싸우겠다는 말이군요?"그러자 도상선은 겨우 힘겹게 고개 를 가로젓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그럴 수가…… 나…… 나는 차라리 진 소저…… 진 소저의 손 아래 죽음…… 죽음 을 당하고 싶은…… 것이오……" 이번에는 도상선은 그다지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또한 셋째인 도훼선도 아니었지만 그의 어조가 상당히 비장하게 울려나왔다. (……) 진아라는 그만 그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져서 할말을 잊고 말았다. 기실 도상선이 지금 차라리 진아라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할지언정 그 자리를 물러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갑자기 인간성이 풍부해져서 주운양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서 라도 보호해 주려고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실제로 말하자면 이 도상선은 다른 도 액사선들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겉으로는 진아라의 말에 순종을 하고 그의 말에 쩔쩔 매고 있는 듯이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지만 일단 계속해서 그와 같이 추궁을 당하게 되자 엉뚱하게도 그러한 오기가 발 작하게 되어 그만 목숨을 걸고 버티겠다고 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 도액오선은 원래가 괴상한 성질의 소유자들이었는데 일찍부터 어쩔 수가 없는 이유로 인 해서 철저하게 진아라의 명령에 복종하고들 있었지만 기실은 하나같이 속에 좋지 못한 불평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아라는 일순간에 그와 같은 사람의 심리적인 이치에 대해서 확연하게 다 파악할 수는 없 는 일이었지만, 도상선이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중대한 시점에서 자신의 명령에 거역하고자 하자 그만 생각이 막히고 멍하니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이때 주운양이 신음을 하고 전신을 크게 뒤틀며기회를 잡았다 싶어 소리쳐서 도상선에게 말했다. "노…… 노신선, 나는…… 으으…… 나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도상선은 그렇지 않아도 내심 감정적으로 그와 같이 말해 놓고는 혹시 자신이 크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주운양의 그 말을 듣고는 마치 핑계거 리를 찾은 듯이 반가운 생각이 치밀어서 고개를 돌리고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란 것이 뭐요? 나는…… 나는 반드시 당신의 말을 들어 주겠소!" 주운양은 자신의 말을 들어 주겠다는도상선의 확약을 듣고는 문득 다른 요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밀어 올랐으나 이내 그와 같은 생각을 꾹 눌러 참고는 애처로운 표정 을 한껏 흉내내어 말했다. "노신선께서는 실로 정의의 협사(俠士)이자 인자(仁慈)하기 짝이 없으신 분이구려. 따라서 나는 굳이 노신선께 이러한 부탁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소. 부디 나를 일장에 때려 죽여 주시오." 도상선은 기실 그다지 주운양의 현실에 대해서 감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순 그 말에 다소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다시 물었다. "아니, 어째서날더러 당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오?" 도상선은 일단 진아라에게 그와 같이 말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득이 지금은 주운양의 말대 로 인자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와 같이 반쯤 올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 다. 주운양은 몹시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지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노신선들께서 저희들의 목숨을 원하고 계시는 상태이니 아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서 죽고 싶은 심정뿐이기 때 문이오." 제29장 상황이 반전(反轉)되다 도상선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고개를 옆으로 내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주운양은 일순 크게 움찔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서 의아해 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나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계속해서 겪으라고 하시는 것이오?" 도상선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비단 당신을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혈도를 풀어 주겠소." 도상선은 즈금 사실 사태의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일단 자신이 말한 일에 대해서 고집을 부리기 위해 마치 잣니이 정인군자나 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서 주운양의 화술에 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진아라는 이미 멍하니 생각에 잠겨서 아직 냉정하게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 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운양은 결코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즉시 크게 감격한 듯이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천하의 성인(聖人)이 분명하구려. 혹시 당신은 조금 전 에 내가 음식을 대접해 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오? 만일 그렇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니 부디 그만두어 주시오." 도상선은 비록 원래는 이 주운양을 좋아하지 않았었으나 지금은 마치 자신의 최면술에 걸 린 듯하여 크게 감동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나는 오직 좋은 뜻에서 당신을 구하려는 것이오." 이때 주운양은 너무나도 자신의 해야 할 말에 골몰하는 나머지 자신이 비명을 질러야 한다 는 사실에 대해서 잊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상대인 도상선 역시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 어 미처 그런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주위에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 괴이하 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의 변화에 대해서 다소 호기심이 깃든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주운양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을 받았다. "아아, 그렇다면 실로…… 실로 당신은 그야말로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 해 하강한 성인이 분명하구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나의 혈도를 풀어 주겠다고 했소? 나의 혈도에 어떤 이상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도상선은 다시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바로 그…… 분근착골의 혈도가 제압…… ㅈ압당한 것이 아 니라는 말이오?" 원래 아까는 주운양은 정말로 분근착골의 수법에 당했다고 위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실 그 방법은 너무나도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마각을 드러내 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방법을 조금 달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주운양은 문득 다시 크게 몸을 뒤틀고 신음소리를 발하면서 대답했다. "나의 이병은 기실은 분근착골과도 비슷한 어마어마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원 래는 분근착골은 아니오." 도상선은 기실 지금은 자신의 망상 속에 도취되어 있기는 해도 처음부터 주운양이 분근착골 수에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훤히 잘 알고 있었다. 그 분근착골수는 금나수법의 일종인데 일단 그것에 당하게 되면 무서운 고통에 시달리게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흔히 고문 수법 으로 많이 사용해 왔었으나, 무학의 경지가 이미 최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도상선이 한눈에 그와 같은 수법의 진위를 구별하지 못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주운양이 느닷없이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는 병의 원인이 분근착골이 아니라 고 말하자 혹시 그의 말이 정말로 사실인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어서 도상선은 즉시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 병은 대체 어떤 것이오?" 주운양은 도상선의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하는 것을 쉽게 눈치채고는 즉시 염두를 굴리면 서 대답했다. "음음…… 병명은 일찍이 듣기는 했었으나 나의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지금 기억나지는 않 소. 그러나…… 그 당시 그 성수곡(聖手谷)에서 오셨다는 의원께서 나의 이 병이 결코 치료 할 수가 없는 불치의 병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아아, 나는 영영 가망이 없소. 그러니 노 신선께서는 어서 나를 일장에 때려죽이고 나의 시체를 그대의 주인에게 갖다 바치기 바라 오."도상선은 느닷없이 성수곡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소 멍한 눈빛이 되더니 고개를 갸웃거 리며 말했다. "성수곡이라고?…… 그곳에서 온 의원이었다면 틀림없이 신의(神醫)였겠군." 기실 성수곡은 신주팔패의 하나로서 화타와 편작이라는 고대의 신의들을 능가하는 의술을 소유한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주운양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그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이었지 만, 도상선은 이제는 그의 얘기가 진실 그대로라고 믿게 되어서 심각하게 중얼거리게 되었 던 것이었다. 도상선이 그와 같이 말하자 주운양은 이에 편승하여 보다 도상선을 믿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눈물을 뚝뚝 떨구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신의였다뿐이겠소? 원래 그 신의는 하루에도 삼음절맥이나 구음절맥에 걸린 불치의 절맥 증을 가진 환자들을 무려 열 명이나 치료하는 사람이었는데, 유독 나의 이 이름을 알 수 없 는 불치병에 대해서는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소. 아아…… 그는 이미 삼 년 전에 나의 수명이 겨우 삼 년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었는데, 아마도 지금…… 지금 그 병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보니 곧 그 불치병으로 죽으려는 모양이오. 나는…… 나는 이제 어쩔 수가 없이 죽게 되었으니 노신선께서는 어서 내가 죽기 전에 일장에 나를 때려죽여서 그 공으로 주인에게 총애를 받도록 하시오. 노신선은 내가 원래 존경하는 분이기 때문에 나 는 마지막으로 겨우 이와 같은 도움밖에는 드릴 수가 없는 것이오……" 주운양은 그 말을 마치자 일순 눈물을 마치 폭포처럼 흘리면서 전신을 마구 경련시키고 금 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심하게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원래 남자라고 해서 결코 여자보다 눈물이 반드시 적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이 주운 양은 어디에서나 눈물을 쉽게 흘릴 수가 있는 재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처음부터 슬 픈 듯한 연극을 하려고 작정을 했던 데다가 거기에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위난과 앞으로 만일 잘못되게 되면 나타나게 될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실로 너무나도 괴로운 느낌 이 들어서 더욱 실감나게 대성통곡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 주운양의 조금 전의 말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즉흥적인 말이었기 때무에 이치에도 맞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한 내용이었는데, 기실 도상선은 이미 주운양의 말에 어느 정도 솔깃해 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윽고 그가 그처럼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는 그만 일순간에 그것이 정말로 진실이라고 믿게 되기에 이르렀다. 도상선은 이미 판단력을 거의 상실하여 늙은 두 눈에 약간의 눈물마저 글썽이며 앞으로 다 가가서 주운양의 뒤틀고 있는 몸을 부축하더니 말했다. "나는 결코 당신을 죽엿 공을 차지하지 않겠소. 당신같은 사람을 감히…… 감히 누가 죽일 수가 있겠소? 나는…… 나는 오히려 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자를…… 그자를 죽여 버리겠소." 주운양은 그 말을 듣자 내심 매우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더욱 슬픈 표정 을 짓고 또한 더욱 고통스러운 몸짓을 하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아, 당신은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위대한 성인이었구려. 나의 목숨을 애써서 해치지 않겠 다니…… 으흐흑! 나는 실로 당신같은 사람을 보고 죽는 것만 해도 한평생의 보람이 있다 고 할 수가 있을 것이오. 하지만…… 하지만 구태여 다른 사람들은 해치지 마시오. 차라리 나의…… 나의 고통을 조금 덜어 주었으면 좋겠소." 도상선은 주운양이 아까부터 계속해서 그를 성인 운운하자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혹시 자신이 주운양이 말한 대로 성인이 아닐까 하고 망상에 젖어들게 되어 마음 이 크게 기쁘고 흥분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절로 입가에 흐흐흐, 하는 웃음까지 흘리게 되 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주운양이 자신의 고통을 덜어달라고 말하자 이제 자신은 성인인데 그까 짓 것을 해주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는 짐짓 엄숙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좋소.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이오?"주운양은 즉시 너무나도 고통에 겨워서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전신에 경련을 심하게 일으 키며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하는 척했다. "나의…… 이곳…… 이곳을 세 번만 강하게 내리쳐 주시오!"주운양이 손가락을 들어서 가리 킨 곳은 바로 그의 정수리가 있는 곳이었다. 도상선은 그것을 보자 다소 어리둥절하여 대꾸했다. "혹시…… 혹시 그곳을 때리게 되면 당신이 죽지 않겠소?"아까 주운양은 그 도상선이 그저 가볍게 툭 건드렸던 어깨가 마치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었었다. 물론 따라서 도상선 이 정말로 그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게 되면 말할 것도 없이 주운양의 머리가 터져서 뇌 수가 밖으로 퍼져나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가 정말로 도상선에게 맞 기를 희망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운양에게는 지금 한 가지 계획이 있는 것이기에 도 상선의 질문에 오히려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렇게 고통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당신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오……" 말과 함께 주운양은 일순 느닷없이 자신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서 곧장 그것으로 정수리를 세차게 후려쳐 갔다. 지금 극 들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그의 성명무기인 황금빛 산반이라는 것이었는 데, 그 산반에는 금빛의 수판알들이 무수하게 박혀 있었으며 이내 그것들이 주운양의 머리 통에 사정없이 박혀 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주운양의 그러한 행동은 진짜가 아닌 거짓으로서 나중에 도상선이 그것을 막아 주지 않는다면 끝부분에서 슬쩍 비켜나가게 하는 술수가 숨겨져 있는 것이었으나, 이미 주운양 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도상선은 주운양의 짐짓 과격한 듯한 몸짓을 보고는 그만 참을 길이 없어서 두 손을 내밀어서 그의 손을 붙잡게 되었다. 그러니까 도상선은 너무나도 깊은 망상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일시 판단을 정확하게 내리지 못하고 먼저 주운양의 한쪽 팔을 잡았다가 이내 다시 그 팔에 들려져 있는 산반을 다시 잡아서 그가 자결을 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이하게도 도상선은 목덜미가 갑자기 서늘한 것을 느끼고 그쪽으로 시 선을 돌리다가 그것이 다름 아닌 한 자루의 날이 시퍼런 비수라는 것을 알고는 다소 의아 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 비수를 잡고 있는 손은 바로 다름 아닌 주운양의 다른쪽의 손이었 던 것이었다. (……) 도상선은 너무나도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서 고개를 돌리고 주운양에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엇이오?" 이미 자신의 술수가 완벽한 성공을 거둔 것을 확신한 주운양은 그제서야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도상선은 이 주운양이 느닷없이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표정이 달라졌고 게다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으면서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자신의 살이 약 간 베어져서 실같은 피까지 배어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고개를 들며 따라서 몸을 일으키 며 다시 물었다. "아니, 어째서 이렇게 하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의 그 병은 그새 다 나았소?" 주운양은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뒤에 도상선에게 잡혔던 손을 빼내고 자신의 금산반 을 품속에 다시 갈무리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는 내가 정말로 그와 같은 지저분한 병에 걸려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미 그의 태도나 말투 따위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주운양은 이제 이 도상선을 제압하여 현재의 상황을 완전히 주도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 도상선은 다소 어이가 없어 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그와 같은 말은 모두가 거짓말이었다는 말이오?"주운양은 마치 언제 눈물 을 흘렸냐는 듯이 싸늘하고도 사악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거의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네놈은 흐흐흐, 당장에 목이 잘려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말에 순순히 따라야 할 것이다!" 말과 함께 주운양은 다시 시선을 도상선에게 보내며 일부러 비수의 예리함을 시험해 보기 라도 하듯이 슬쩍 움직여 목 밑의 살갗을 베었다. 그러자 도상선의 목 밑에서는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 비수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기운은 일시에 그 흘러내리는 피를 얼려 버리기에 족한 것 같았다. 기실 아까 주운양이 금산반으로 시선을 유인한 다음에 도상선이 혼몽한 틈을 타서 급습한 무기인 이 비수는 그가 오래 전부터 구입해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주운양은 늘상 금산반만을 사용해서 별호마저 금산반으로 될 정도였는데, 이제 그 비수를 사용하게 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을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목 밑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도상선은 그제서야 일순간에 모든 망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는 데, 원래가 두려움이 많은 편인 그는 자신의 목이 한 자루의 비수에 의해 제압당해 있는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안색이 대변해서 전신을 벌벌 떨어대기 시작했다. "너는…… 너는 정말로 나를…… 주…… 죽일 새…… 생각이냐?"주운양은 도상선이 정말로 무한한 공포감에 질려 있는 것을 보고는 한 손을 들어서 이마 위의 땀을 훔쳐내며 흐뭇해져 서 음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물론 네가 얌전하게 있고 또한 너의 그 동료들이나 주인들이 나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른다 면 나는 너를 해치지는 않겠다!" …… 주운양은 더욱 공포감에 질려서 아무런 소리도 못하고 있는 도상선을 다시 보지 않고 즉시 손가락에 공력을 일으켜서 그의 전신 혈도를 몇 차례 단단하게 점한 다음에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나머지 도액사선과 진아라 등을 바라보며 크게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들은 능히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서 짐작할 수가 있겠지? 만일 이 멍청한 늙은이를 살리려고 한다면 너희들은 반드시 나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진아라 등은 이때 즉시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지만 그야말로 멍청하고도 어이없게 도상선이 당하게 되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주운양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한동안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당신이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이죠?" 주운양은 음침하게 웃으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너희들이 지금 즉시 자신들의 혈도를 제압하고 나에게 굴복 하는 것이다. 흐흐, 나는 부득이 이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으나 만일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을 고이 살려 주도록 하지." 진아라는 주운양의 그와 같은 공언을 믿을 수는 없었으나 일단은 도상선이 그에게 제압되 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코 함부로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주 운양이 좀더 이용하기 위해 당장에 도상선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만약 그녀를 초조하 게 만들기 위해 그의 팔 하나라도 끊어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나중에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차라리 문인 대가의 말대로 그저 주위에서 감시만 하고 있을 것을 대체 무엇 때문에 저와 같은 사람들과 이 큰일을 감행하려고 했었을까?……)진아라는 이제까지 그야말로 곱게 자라 와서 처음으로 이런 곤경을 맞이하게 되자 순간 도액오선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으 나 이윽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엇때문에 나와 같은 어린 아이를 무서워하여 그와 같은 수법을 쓰고 있는 거 죠?" 주운양은 다소 긴장하여 상대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문득 진아라의 어린 아이다운 말을 듣게 되자 음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물론 너와 같은 어린애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나이가 많고 늙은 잡것들 을 귀찮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운양은 아까는 도액오선을 가리켜서 무슨 노신선들이니 혹은 성인이니 하고 한없이 추켜 세웠었는데, 지금은 고작해서 잡것들이라고 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히 그의 지금의 위 치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되어 누구라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진아라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어린 사람은 구태여 스스로 자신의 혈도를 제압할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요?" 주운양은 진아라가 은근히 자신의 심리를 유도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흐뭇한 심정에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흐! 바로 그렇다고 할 수가 있겠지. 너와 같은 어린 계집아이는 필요없고 그저 다만 저 네 명의 늙은이들과 다시 두 명의 늙은 하인들만 스스로 자신의 혈도를 제압하면 되는 것이다." 진아라는 기실 자신이 남아서 시간을 좀더 끌어서 문인천상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고, 주운양은 지금 문인천상의 능력이 어떤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 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아라는 내심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혹시라도 주운양의 마음이 변하게 될까 봐 즉시 고개를 돌려서 자신의 일행들에게 소리쳐 말했다. "당신들은 들었나요? 그렇다면 어서 스스로 혈도를 제압하여 굴복을 표시하도록 해요!" 이때 화노와 엽노는 하나같이 심하게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 은 데 대해서 도액오선에게 구역질과 가증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시 진아 라가 그 도상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스스로 굴복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 고는 일순 크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만약 문인천상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 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로 도상선의 목숨과 자신들 의 목숨을 교환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화노와 엽노뿐만 아니라 도액사선 역시 생각이 그들과 별로 다르지가 않아서 지시를 내린 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들이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진아라는 문 득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쳐 다시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로 나를…… 나를 지쳐서 죽게 만들 생각이란 말인가요? 좋아요! 당신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내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러나 당신 들은 우리 오라버니의 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예요. 그분께선 만일 이와 같은 사실을 아 시게 되면 과연 여러분들을 좋아하게 될까요?" ……! 확실히 문인천상을 애써 들먹인 진아라의 말은 상당한 효과가 있어서 처음에는 결코 그녀 의 말에 따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화노와 엽노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 며 하는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스스로 손을 움직여 자신들의 혈도를 제압하는 모습 들이었다. 그러나 실은 그렇게 효과가 있는 말이라고 해도 정말로 효과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또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법이었으니, 바로 남은 도액사선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화노와 엽노가 이미 스스로의 혈도를 제압하고 났고 이제 그들만 남게 되자 사람들의 시선 이 자신들을 향해 쏠리는 것을 의식하고 도액사선 가운데의 도훼선이 할 수 없다는 듯이 변명조로 이렇게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소. 원래…… 원래가 저 맏이는 너무나도 욕심이 많아서 항상 음식이 있어도 혼자서만 가로채서 먹었었고 또한 다른 잘못은 너무나도 많아 서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오. 그러므로…… 그러므로 그는 지금 응분의 보답을 받고 있는 것일 것이오."…… 사람들은 그 대답이 엉뚱한 거에 대해서 일순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알고 보니 그 도액사 선은 도상선이 잡혀 있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차라리 그가 죽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닌가! 제30장 믿기지 않는 결과 진아라은 그래도 설마하니 그들이 그렇게 대답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느 닷없이 그와 같은 대답을 듣게 되자 매우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아니, 그는 바로 당신들의 친형제인데 감히 그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나요?" 도훼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막무가내로 대꾸했다. "예로부터 응분의 보답을 받게 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 하늘의 뜻을 어떻게 거스를 수가 있겠소?" …… 장내의 사람들은 이제 그 도액사선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상황이 크게 뒤바뀔 것이기 때문 에 실로 괴이쩍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으로 거의 숨도 쉬지 않은 채 긴장하여 그들의 대 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진아라는 도훼선이 그와 같이 대꾸하자 더욱 안달이 나서 소리쳐서 말했다. "누가 공자님의 말씀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은 하늘의 응징도 아닌 것이니 어서 나의 말대로 스스로의 혈도를 제압하도록 해요!" 진아라가 워낙에 강하게 소리쳤기 때문에 도훼선은 문득 찔끔하여 뒤로물러섰으나 뒤를 이 어서 도수선이 나서서 입을 열어 말했다. "실로…… 실로 진 소저께서는 지금 잘못된 판단을 하고 계신 것이오. 만일 우리가 저…… 저 못난 맏이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힘을 합친다면 능히 여기에 있는 모든 녀석들을 모조 리 제압할 수가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오? 실로 그와 같이 굴 복하는 것은……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오." 진아라는 그 말을 듣고서 실로 이들 도액오선에게는 서로간의 형제애도 없다는 것을 훤하 게 알게 되었다. 지금 그들은 마치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제압당하는 것을 기피하는 것 같이 보이나 기실은 마음이 치졸하고도 좁아서 그들 스스로가 제압당하는 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강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변명들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는 진아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소리쳤다. "뭐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거예요. 대체 당신들의 형제가 저렇게 잡혀 있는데 그것을 돌보 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만을 연명해서 대체 무슨 영광이 있다는 거예요? 지금 그는 우리가 굴복하면 저 맏이의 목숨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어서 모두들 순순히 굴복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진아라는 마지막의 말은 고개를 돌려서 주운양을 향해 한 것이었다. 주운양은 이때 아직도 그 예리한 비수를 도상선의 목에 들이대고 있었는데, 도상선은 이미 공포감에 질려서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여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것을 한 차례 더 살핀 연후에 주운양은 진아라의 말에 대답했다. "흐흐흐, 물론이다! 나는 만약 너희들이 나에게 굴복한다면 그야말로 손끝 하나 다치지 않 게 하고 보내 주도록 하겠다!" 이 주운양의 얘기는 물론 믿기 어려운 것임은 물론이었다. 지금 그는 비록 겉으로는 아주 태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은 정말로 저 도액사선들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매우 초조해지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진아라의 질문에 즉시 흔쾌하게 거들 어 주었던 것이었다. 진아라은 그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서 도액사선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이제 알겠나요?" 도수선이 이에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 그건 소저께서 잘못 보신 것이오. 그는…… 그는 욕심이 많아서 결코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소? 우리는 그보 다는 차라리 역시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나을 것이… …" 진아라는 그만 얘기가 길어지게 되자 일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즉각 허리춤에서 마치 풀 잎처럼 흐늘흐늘한 연검(軟劍)을 하나 뽑아 들더니 이윽고 그것을 진력을 주입시켜서 빳 빳하게 만든 다음에 자신의 목 부위에 갖다대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당신들은 현명하니 그와 같이 행동하는군요. 하지만 나는 도저히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나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내가 죽고 나서 당신들은 마음대로 행동하도 록 해요." …… 진아라은 이어 마악 그 장검으로 자신의 목을 베려는 듯하다가 이윽고 잠시 멈칫하더니 고 개를 들어서 다시 한 번 도액사선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이래도 정말로 나의 말을 듣지 않겠나요?" 사람들은 진아라가 나이에 비해서 심지가 아주 강하고 또한 결단력있게 일을 해결해 나가 는 것을 보고는 하나같이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판단이 옳은것인지 그 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접어두고서라도 말이었다. 이때 도액사선은 느닷없이 진아라가 장검의 꺼내서 자신의 목에 겨누는 것을 보고 하나같 이 크게 경악하여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심지어 그들 가운데의 몇 사 람은 금방이라도 신형을 날려서 진아라의 장검을 빼앗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몸을 움직이 려고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크게 주저하여 나서지 못하고 안색만 멍 해지고 있었는데, 진아라가 마악 자결을 하려다가 다시 한 번 그와 같이 말하자 이윽고 그 가운데에서 도수선이 길게 탄식을 발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실로…… 소저…… 소저의 말은 다소 어리석은 데가 있으나 가장 영웅다운 말이라고 할 수 가 있소. 우리는 소저가 죽게 되면 살아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말을 듣고 얼 굴을 들 수가 없으니 아! 이는…… 이는…… 이는…… 정말로 옳은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소저의 말에 따르기로 하겠소. 너무…… 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말과 함께 도수선은 정말로 자신의 우수를 들어서 지풍을 발출해 내어 스스로 자신의 전신 대혈 을 제압해 버렸다. 비록 그가 나중에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해서 안색이 새하 �섟� 변하기는 했었으나 그와 같은 용단을 내린 기세는 제법 훌륭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진아라는 그 말을 듣고 일순간 가슴이 크게 찡하여 울려 오는 느낌이었는데, 이어 도훼선 도 웃으며 그녀를 향해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흐흐흐, 네…… 넷째가 나의 선수를 빼앗아가 버렸군.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더 고집을 부 릴 수는 없지. 소, 나는 항복이오……"실로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도 어떤 분위기에 편승하기 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도수선이 먼저 말하고 자신의 혈도를 제압하자 도훼선이 그 뒤를 따랐고, 이어 나머지 도패선과 도멸선이 그 뒤를 따라서 역시 자신들의 혈도를 제압 했던 것이었다. …… 진아라는 따라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복 부위까지 올렸던 연검을 진기를 회수하며 탄식을 하고 아래로 늘어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상장풍과 주씨 남매 등이 주운양의 눈짓으로 빠르게 신형을 날려서 이제 마악 혈도를 스스로 제압한 도액사선의 곁으로 각기 다가들더니 품속 에서 비수를 꺼내서 그들의 목을 겨누며 음침한 음성으로 득의의 광소를 날리는 것이 아닌 가! "핫핫핫! 세상에 이런 멍청한 바보들이 또 있을까? 실로 그 문인천상이라는 어린 녀석은 정 말로 멍청하여 이러한 수하들을 두었으니 그야말로 오늘이 제삿날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핫핫핫! 둘째숙부, 과연 우리 아버지의 지략이 천하에 으뜸가는 것이 아니겠소?" 그것은 주원헌의 말이었는데 상장풍은 그 말을 듣자 일순 고개를 끄덕이며 음침하게 덧붙 이는 것이었다. "흐흐흐, 바로 그렇다! 너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힘이 없어도 이와 같은 놀라운 무공을 지닌 늙은이들을 제압했으니 그야말로 천하의 어떤 영웅들보다도 못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지. 으흐흐흐! 그나저나 이거 정말로 믿기지 않는 결과인걸?" 주씨 남매 등이 서로가 살벌하고도 득의한 웃음을 터뜨리며 비수를 목에 바싹 들이대자 도 액사선 등은 일순 그야말로 혼이 달아나는 것처럼 놀라서 안색을 새하얗게 물들이더니 급기 야는 전신을 덜덜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는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먹었어도 기실 무서움을 타는 것이나 행동들은 겨우 삼척동자나 다름이 없어 보였는데, 대체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상승의 무공을 터득할 수가 있었는지 실로 의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진아라는 한쪽에 서서 그와 같이 금방이라도 공포에 지쳐서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도 액오선의 표정을 보고는 일순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끼며 주운양을 향해 다시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아까 그들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을 번복 하고 저렇게 심하게 대할 수가 있나요?"주운양은 지금 그야말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대사 가 극적으로 반전이 되어 아주 희희낙락할 수가 있는 상황이 되게 되자 만면에 득의한 웃 음을 가득 떠올리고 있었는데, 진아라의 질문을 다시 받게 되자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뭐라구? 핫핫핫, 천하에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너처럼 어리석은 계집아이는 다시 없을 것 이다. 만일 저 네 명의 늙은이들의 말처럼 했더라면 나는 아주 곤란해질 뻔했었는데 네가 오히려 나의 일을 도와주다니…… 흐흐흐, 좋아! 네가 나의 일을 도와주었으니 일단 너는 잠시 제압하지 않기로 해주지. 그러나 저 늙은이들은 이미 수많은 나의 수하들을 해쳤을 것인데 내가 그들을 가만히 살려줄 것 같으냐?" 진아라는 기실 주운양의 그러한 속셈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었지만 도상선을 구하기 위 해 지금까지 애를 썼던 것이었는데, 막상 그와 같은 말을 주운양에게서 듣게 되자 절로 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내 소리쳐 대꾸했다. "당신은 그야말로 염치가 조금도 없군요. 당신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나요?"주운양은 음침하 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늘? 으흐흐…… 그까짓 것이 나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는 말이냐? 나는 오로지 나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누가 감히 나에게 재앙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냐? 계집아이야, 원래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위선자들이 일부러 자신들의 생각을 옹호하기 위해 서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대체 저 허공으로 되어 있는 하늘 이 무슨 작용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진아라는 내심 약이 크게 올라서 다시 대꾸했다. "하지만 하늘이 재앙을 내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천하에 당신들의 사악한 행동을 응징하게 될 사람이 있을 거예요." 주운양은 진아라가 이번에는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하자 더욱 흥미롭다는 듯이 징그럽게 웃 으며 말했다. "흐흐흐! 사람이라구? 흔히 말하는 난세의 영웅 말이냐? 그러나 으흐흐, 바로 그 영웅이 오 히려 나의 편이라면 어쩔 것이냐? 으흐흐흐, 정말로 우습지 않느냐?" 진아라는 안색이 굳어져서 다시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오직 하나뿐일 것이라고 생각하나요?"주운양은 진아라의 다소 창백 해 보이는 새하얀 얼굴을 음흉하게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웃으며 대꾸했다. "으흐흐…… 이를 테면 그러니까 문인천상, 바로 그자식과 같은 사람 말이냐?" 진아라는 문득 그 말에 안색이 다소 밝아져서 고개를 쳐들고는 자신있게 말했다. "맞아요. 나의 그 문인 대가께서는 실로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어서 능히 천하의 악한 사람들을 물리쳐 버릴 거예요." 주운양은 진아라의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즉시 물었다. "뭐라구? 그 애송익 능력이 무한하다구? 핫핫핫, 그래 그 애송이가 능력이 있다면 지금 이 부근에 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이냐?" (……)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요. 틀림없이…… 지금쯤 이 부근에 도착하셨을 것이예요."주운양은 진아라의 말을 듣 고는 문득 안색이 지극히 음산해져서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그를 불러 보지 않겠느냐?" 진아라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꾸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만일 당신이 우리 오라버니를 보고 싶다면 직접 불러 보는 것 이 좋지 않겠어요?" 주운양은 이에 잠시 안색을 여러 차례 벼화시키다가 이윽고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 하기 시작했다. "문인천상! 네놈이 이미 이곳에 이르렀다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을 것이니 이제 그만 나타 나는 것이 어떠냐? 만일 네놈이 지금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작은 계집아이를 그냥 놔둘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주운양의 음성은 일시에 다소 멀리까지 울려나갔다. 조금 전에 잠시 다른 짓을 하던 사람들도 일시 그 음성을 듣고는 정신을 긴장시키고 누군가 가 나타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잠시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비단 어떤 목소 리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도 나타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 주운양은 매우 긴장된 듯한 표정을 하고서 공력을 귀에 집중시켜서 주위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역시 장내에 누구도 나타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드디 어 안색을 편하게 풀며 진아라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으흐흐, 아마도 너의 그 문인 대가라는 녀석은 아직 이곳에 당도하지도 못했거나 아니면 비록 이곳에 올 수가 있었어도 나의 이 놀라운 지혜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만 혼비백산 을 하고 달아난 모양이다. 흐흐흐, 너는 그래도 너의 그 오라비라는 녀석에게 기대를 걸 수 가 있겠느냐?""……" 진아라는 내심 설마설마하고 있었는데 주운양이 부른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문인 천상의 기척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순 점차로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불안해지 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럴수록 더욱 그럴 리가 없다고 내심으로 강하게 부인을 하면서 입을 열어 주운양 의 말에 대꾸를 하려고 하는데, 문득 그 순간에 느닷없이 누군가가 그녀의 뒤쪽에서 이렇게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감히 아라의 말이 틀렸다고 말을 하느냐?" ……! 이때 장내의 사람들은 이제는 다소 맥이 풀린 듯한 기분으로 진아라 등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약간 어수선해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음성은 그러한 어수선한 분위기를 헤치고 너무나도 분명하게 부드러운 어조로 사람들의 귓전에 들려 왔다. 진아라는 그 음성이 매우 낯익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저 도액오선의 한 사람의 음성이거나 아니면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의 한 사람의 음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마악 입을 열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장내의 시선이 급격하게 그녀의 뒤쪽으로 집중되더니 하나같 이 흡사 귀신에게라도 당한 것처럼 놀라서 멍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 심지어 그것은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주운양도 마차가지였는데, 그가 갑자기 엉뚱한 모습 을 보이는 것을 보고 진아라는 이것도 혹시 어떤 술책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은근히 경계 심을 가져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혀 어떤 술책인 것 같지가 않아서 다소 망설이다 가 끝내는 자신도 빠르게 뒤로 고개를 돌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하고 그저 슬쩍 뒤돌아 보았을 뿐이었는데, 과연 어느새 그 입구에는 아무런 기처도 없이 새로 세 명의 사람들이 마치 땅 속에서 솟아나기라도 하듯이 나타나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진아라는 그 세 명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앙에 서 있 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문득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잠시 멍하니 눈을 둥그 렇게 뜨고 있다가 느닷없이 기뻐서 소리를 크게 지르게 되었다. "문인 대가!" 그렇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통나무집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바로 말할 것도 없이 문인천상과 그 일행들이었던 것이었다. 진아라는 그야말로 위급했던 순간에 문인천상을다시 보게 되자 그야말로 기쁨에 넘쳐서 당장에 달려가서 그의 품속에 안겨서 그 기쁨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문득 다음 순 간에 지금 문인천상의 손에 한 손을 잡힌 채 그의 옆에 조용하게 서 있는 악채릉의 모습을 보고는 다소 흠칫하여 신형을 멈칫거리고 말았다. 왠지 그 순간에는 기쁨이 어디론가 흔적 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흡사 가슴을 예리한 것으로 찌르는 듯한 맹렬한 냉기가 치밀어 올 라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것이었다. …… 이때 문인천상은 느닷없이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면서 신형을 멈칫거리는 진아라에게 부드러 운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에 이윽고 주운양에게 고개를 돌려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 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도 보았었지만 지금은 왠지 많은 시간이 흘러간 듯한 느낌이 드는 구려. 그래, 그 동안 잘 있었소?" 이미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이제는 정식으로 주운양을 의숙이 아닌 남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주운양은 문인천상이 뜻밖의 순간에 소리도 없이 나타났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놀라 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다가 이윽고 창백하게 변한 안색을 지우고 그 얼굴 에 다시 음산한 기색을 가득 떠올리며 입을 열어 대꾸했다. "나는 물론 잘 있었지. 흐흐흐, 네놈이 어떻게 해서 다시 이곳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네놈이 이곳까지 올 수가 있었다는 데에 새삼 경의를 표하 는 바이다." 지금 말할 것도 없이 문인천상의 좌우에는 악채릉과 임옥룡이 마치 목석이나 되는 것처럼 무표정한 태도로 각기 서 있었는데, 주운양은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서도 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의아해 하며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문인천상은 마치 그러한 그의 심리를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담담히 웃으면 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혹시 이 결과에 대해서 믿기지 않아 하는 것이 아니오?"주운양은 아직 임옥룡 등이 어떤 상태로 문인천상과 함께 나타난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득 문인천상 의 말을 듣고는 이미 그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내심으로 더욱 놀라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이내 겨우 마음을 진정시켜서 안면에 더욱 음산한 흉소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그래…… 확실히 의외이기는 하지. 그러나…… 흐흐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미리 이와 같은 상황을 우선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벌써부터 네놈이 어떤 숨 기고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드디어 지금 이와 같 은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자, 네놈은 우선 나에게 잡혀 있는 수하들을 구해내야 하지 않겠 느냐?"주운양은 말과 더불어 마치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여던히 자신의 비수에 의해 목줄기 가 겨누어져 있는 도상선의 얼굴을 다시 힐끗 바라보며득의한 흉소를 머금었다. 문인천상은 그의 말에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주운양의 얼 굴을 향해 물었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바는 무엇이오?" 주운양은 이 문인천상도 이제 어쩔 수가 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 라고 생각하자 이내 득의만면하여 흉소를 날리면서 대답했다. "흐흐흐, 나는 우선은 서로간의 포로를 교환하자는 말을 하고자 한다. 너의 포로 두 명과 나 의 포로 두 명을 그대로 맞바꾸면 되겠지?"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제압되어 있는 사람들을 풀어 주자는 말은 당연한 것이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 이 원하는 대로 따를 생각은 없소. 말하자면 원래 당신의 포로는 그 한 사람에 불과했었는 데 억지로 일곱 명이 되었던 것이 아니오?"주운양은 문인천상이 자신의 의도대로 쉽게 움직 여 주지 않자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너의 이 수하들을 돌보지 않을 생각이냐?"문인천상은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 다. "그렇지는 않지만 나는 당신이 이제라도 여태까지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을 모두 순순히 풀어 주기를 바라고 있소.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나는 결코 이제까지의 잘못에 대해서 책벌을 내리지 않을 생각이오." 제31장 월영인(月影印)이라는 무예 주운양은 문인천상의 표정이 의외로 지극히 태연할 뿐만 아니라 조금도 조급해 보이지 않 고 또한 오히려 자신을 용서해 주겠다는 말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동안 어이가 없 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물었다. "너에게 과연 나를 책벌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말이냐?"문인천상은 미소함 대꾸했다. "당신이 정히 믿기지 않는다면 할 수가 없는 일이오. 나는 다만 당신에게 아직 약간의 양 심이 남아 있는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려는 것이고, 아울러 당신의 이 의동생은 나의 그와 같은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 는 바이오."주운양은 잠시 생각하다가 임옥룡의 뻣뻣한 모습을 힐끗 바라본 뒤에 음산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네가 어쩌다가 그와 같은 수확을 올리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더러 지금 너의 그와 같은 거짓말을 믿으라는 말이냐?" 문인천상은 담담히 대꾸했다. "설령 당신이 그와 같은 사실을 믿지 못하더라도 일단 당신에게 양심이 남아 있어서 나에 게 미안한 마음을 느낀다면 능히 모든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게 될 것이오." 주운양은 음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후후훗! 네놈은 그야말로 웃기는 말을 하고 있는구나. 내가 만일 멍청하게도 그와 같은 짓을 하려고 했었다면 아예 그와 같은 일들을 시작하지도 않았었을 것이다. 흐흐흐, 너는 그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고 어서 이 늙은이들을 구할 생각이나 해야 할 것이다." 문인천상은 이에 조용한 음성으로 동문서답식의 말을 했다. "나는 이미 한 번의 기회를 주었으니 당신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기를 바라겠소." 주운양은 안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그가 들고 있던 비수 로 도상선의 목덜미를 가늘게 그으면서 말했다. "좋아, 좋아! 네놈이 감히 그와 같이 배짱을 부리겠다면 우선 이 늙은이부터 각을 뜬 다음 에 우리 다시 협상을 시작해 보기로 하지."주운양이 들고 있던 그 비수는 실로 극도로 예리 하여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도상선의 목줄기를 얕게 베었으며, 따라서 도상선은 자신의 목 줄기에 가느다랗게 혈흔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을 보고 마치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이 시 꺼멓게변한 얼굴 가운데의 두 눈을 튀어나올 듯이 크게 부릅떴다. 기실 도상선은 문인천상이 나타나자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하고 내심 어느 정도 마음의 여 유를 되찾고 있는 상태였으나 주운양이 그와 같이 하자 그 느껴지는 공포감은 이미 그의 인내력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서 그 비수를 멈춰요!" …… 느닷없이 커다란 소리를 질러서 주운양의 행동을 멈추게 한 사람은 바로 다름이 아닌 악채 릉이었다. 그녀는 일단 주운양이 깜짝 놀라서 비수를 멈추는 것을 보고는 이윽고 앞으로 두 어 걸음 걸어나와서는 자신의 부친인 악불범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입을 열어 말했 다. "소녀가 아버님을 뵈어요!" 이때 사람들은 임옥룡이 제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그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는데, 느닷없이 그녀가 제압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여기에 무슨 상상 못할 곡절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악불범도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이윽고 자신의 딸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더니 길게 한숨을내쉬며 말했다. "너는…… 그에게 제압당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냐?"악채릉은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아버님. 하지만 설령 제가 반항을 했었더라도 결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예 요." 악불범은 다소 살기어린 시선으로 문인천상의 얼굴을 힐끗 노려보더니 이윽고 눈살을 찌푸 리며 다시 물었다. "그의 능력이 실로 그렇게나 뛰어난 것이었다는 말이냐?"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 다. "예, 아버님. 그는……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이 일을잘못 생각했던 것이예요." 악불범은 두 눈을 번쩍 빛내며 일순 두 눈에서 화광과도 같은 광망을 내뿜으며 참을 수 없 는 노화를 삭이기라도 하듯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잘못 생각했다고?…… 그렇다면 너는…… 너는 지금 나에게 굴복을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 이냐?" 악채릉은 부친의 화가 난 모습을 보자 그만 두 눈에서 눈물을 주르르 흘려내며 대답했다. "그의 능력은 뛰어나서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시 는 것이 현명할 거예요. 하지만 만일 아버님께서 굳이 굴복하지 않으시겠다고 한다면 저는 역시 아버님을 따를 거예요.""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악불범은 혼자 그와 같이 어이없는 듯이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다시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 려 악채릉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너는 아직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는 말이냐?"악채릉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대답했다. "예, 저는…… 결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예요. 설사 죽더라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아버님, 부디 저를 믿어 주세요!"헌데 이때 한쪽에서 도액오선 가운데의 한 사 람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었던 주원헌이 크게 분개한 듯이 소리쳐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네가 저 문인천상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버렸다는는 것 을 이미 확신하고 있다. 어찌 뻔한 일을 또 다시 속이려고 하느냐?" 주원헌은 이때 너무나도 심하게 흥분한 나머지 들고 있었던 비수에 힘을 주게 되어서 그 비 수에 목이 겨누어져 있었던 사람인 도패선의 목줄기에 가느다란 혈흔이 생겨나게 되었다. 도패선은 이에 혈도가 제압되어 아무런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으나 내심 크게 경악했고 아 울러 주원헌이 다시 더욱 분개하여 자신의 목을 잘라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없이 빌고 또 빌어야만 했다. 심지어 이때 주원헌뿐만 아니라 주원학과 주완청 등도 주원헌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으므로 함께 나서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서 꾹 눌러참고 있는 눈치였다. 주원헌은 실로 그 일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나서서 그와 같이 말하 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악불범이 지금의 상황에서 당연히 자신의 말을 인정해 줄 것을 내다보고 그와 같이 자신있게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의외에도 악불범은 주원헌의말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 더니 악채릉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음…… 좋다! 너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로구나. 나는 너를 믿도록 하겠다. 혹시 지금 너에게는 다른 어떤 방법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냐?" 악채릉은 내심 놀라고 기뻐서 눈물을 닦으며 되물었다. "그럼 아버님께서는 저의 생각대로 굴복을…… 해주실 것인가요?"악불범은 그녀를 향해 미 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는 그야말로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어찌 내가 그와 같은 부탁 을 마다할 수가 있겠느냐?" 이어 악채릉이 재삼 기쁨의 눈물을 뿌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인천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자넨 조금 전에 용서를 빈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인가?" 문인천상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악 대협께선 혹시 저에게 용서를 비실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악불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는 지금 즉시 자네에게 용서를 해주기를 바라고 또한 앞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것을 맹세하는 바이네. 게다가 가능하면 나의 딸의 죄도 용서해 주 었으면 하네."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악 대협께서 그와 같이 용서를 비셨으니 이미 그 죄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리고 악 낭자의 죄는 제가 이미 용서를 하였으니 신경쓰실 것이 없습니다." …… 장내의 주원헌 등은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서 눈을 휘둥그래 떴으나 이내 악불범이 정말로 용서를 빌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들이었다. 그들 은 설마하니 악불범이 그와 같이 나약하게 상대에게 굴복을 하리라고는 미리 짐작하지 못했 었다는 듯한 기색들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장내에서 일단 악불범이 그와 같이 처신하자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 었던 양쪽의 대세가 급격히 문인천상의 쪽으로 기운 것 같은 느낌을 그들은 배제할 수가 없 었다. 게다가 주운양은 한동안 멍하니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두 눈에서 악독한 흉 광(兇光)을 발출시키며 이빨을 뿌드득 갈더니 문인천상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문인천상, 나는 지금 저 악 대협처럼 용서를 빌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나는 이제부터 내가 잡은 포로들을 하나씩 죽여 버릴 테니 너는 그들을 구하고 싶으면 구하고 마 음대로 해라!" 이어 정말로 주원학을 향해 이렇게 다시 소리치는 것이었다. "학아! 너는 어서 그 늙은이의 목을 잘라라!" 일순간 긴장되었던 장내에 걷한 피의 회오리가 불어닥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주원학은 이때 이미 어떠한 결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즉시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이 들 고 있던 비수를 들어서 그 도훼선의 목을 향해 흉맹하게 베어 갔다. 헌데 그때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믿을 수 없게도 이미 제압되어 있는 도훼선이 그대로 오 른주먹을 빠르게 날리더니 비수를 휘두르고 있는 주원학의 아래턱을 맹렬하게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퍽! 흡사 아래턱의 뼈가 일시에 부서져 나가는 것과도 같은 격렬한 소리가 들려 옴과 동시에 주 원학의 육신은 비수도 떨어뜨린 채 입 속에서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뒤로 날려가 통나무 벽에 거칠게 부딪쳐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는 주원학의 부서져 버린 입 속에서 나중에야 흘러나왔으며, 그것은 이 순간에 도저히 자신들의 눈을 믿을수 없어 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 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아니 기실은 여러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한가롭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사이도 없이 잠깐 사이 에 조금 전의 그 일과도 같이 여기저기에서 퍽퍽퍽!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오기 시작했 는데, 실로 그럴 때마다 믿을 수 없게도 주원헌과 상장풍 등의 신형이 마치 급살이라도 맞 은 사람들처럼 일격에 당하여 턱이나 팔다리가 하나같이 부러지거나 하여 날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 사실 그와 같은 광경을 기분좋게 바라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이 느닷없는 상황의 변화는 일시 번갯불이 번쩍하고 천둥을 내리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 진 것이어서 두 눈이 절로 휘둥그래지게 만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문인천상이 은밀하게 도액오선의 제압되었던 혈도를 일시에 풀어 주 었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고, 그 운용이 그야말로 시기적절하다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실로 이와 같은 절묘한 사태의 반전을 이루었던 것이었다. 이제 마악 혈도가 풀려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화노와 엽노가 바라보니 이미 도액오 선은 하나같이 그 지옥과도 같은 사슬에서 벗어나서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와 반대의 입장에 처한 주운양 등의 처지는 그야말로 느닷없이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듯이 참혹 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가장 최초에 참변을 당했던 주원학의 경우만 해도 이미 아래턱이 완전히 부서져서 비명도 제대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상장풍과 주완청 등의 모습도 각기 주먹으로 가슴 을 얻어맞고 손을 집어던져져서 심한 내상을 입거나 다치거나 했었는데, 기실 뭐니뭐니해 도 그 가운데에서 가장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주운양 본인과 그의 맏아들인 주원헌이 었다. 주운양이야 처움부터 도상선을 괴롭혀 왔던 것이었으니 그에게 심하게 당하는 것이야 당연 한 일이겠지만, 주원헌은 아까 악채릉 때문에 본의 아니게 화를 내어 비수에 힘을 주는 바람에 도패선에게 상처를 입혔으므로 도패선은 너무나도 놀라고 공포감에 젖어서 바지에 오줌을 찔끔 싸고 있다가 마침내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되자 그 급한 성질에 그만 주먹을 휘 둘러 주원헌의 아랫도리를 힘껏 내질러 버렸던 것이었다. 이 남자의 아랫도리는 상당히 중요한 급소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보통사람들은 그저 가볍게 얻어맞아도 심하면 죽음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이 주원헌은 무공을 연성한 덕택에 비록 즉각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상징이 일시에 무참하게 터져 나가고 그 속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치게 되자 일시에 마치 기절할 듯이 고통을 느끼게 되어서 전혀 비명도 못 지르고 그저 죽음에 직면한 듯이 몸만 경련을 일으키며 뒤틀고 있는 중이었다. 실로 그와 같이 당하게 된 것은 다소 심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주운양의 경우도 결코 그에 못지 않은 것이어서 지금 연신 전신을 뒤틀며 심하게 고통을 겪고 비명을 지르고 있 는 중이었다. 문인천상은 이 주운양에게 가장 신경을 써서 우선 그의 비수를 치워 준 다음 에 도상선의 혈도를 풀어 주었으므로, 도상선은 우선 신형을 움직이며 빠르게 손을 놀려서 주운양의 혈도를 제압한 다음에 즉시 정말로 분근착골의 수법을 펼치게 되었고 이내 그의 비수를 빼앗아 들고 자신이 당했던 것을 화풀이하기라도 하듯이 주운양의 전신에 무수한 혈흔을 그어 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주운양은 처음에는 전신에 무수한 개미떼가 혈관 속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무서운 고통 속 에 시달리다가 이내 도상선의 그와 같은 잔인한 복수를 대하고는 너무나도 공포스러워서 그 만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문인천상은 이제 주운양 등을 완전히 제압했으므로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손을 들어서 도액오선의 행위를 중단시켰으나, 그 가운데 이 도상선의 손놀림은 이미 지극히 빠른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어서 어느새 주운양의 전신의 살갗을 갈갈이 베어 놓고 나서 얼굴마저 거북이 등짝처럼 만들어 놓은 뒤였다. 문인천상은 미처 예상치도 않게 그들이 그렇게 심하게 당하게 된 것을 다소 안스럽게 생각 을 했지만 이내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일일이 그들 닸 명의 혈도를 제압하여 임옥룡과 함 께 한쪽에 세워 놓도록 도액오선에게 지시했다. 이들 주운양과 임옥룡 등의 여섯 사람들은 이미 문인천상에게 기이한 수법으로 혈도를 제 압당해서 평상시의 행동은 할 수가 있으나 무공은 펼칠 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는데, 이윽고 도액오선이 그야말로 번개같이 빠르게 그들의 신형을 한쪽에 옮겨 놓는 것을 보고 는 문인천상은 주운양의 앞으로 다가가서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이미 마지막의 기회를 주었었기 때문에 당신은 아마도 지금은 유감이 거의 없을 것이 오. 이제는 모든 계획이 틀려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텐데 그만 이제까지의 일을 모두 자백하는 것이 어떻겠소?"주운양은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 이제 겨우 공포 감에서 다소 벗어났으나 아직 악독한 기운은 남아 있어서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 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대사를 실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모든 일을 자백 할 것 같으냐? 너는 차라리 우리를 깨끗하게 죽여다오!"그러자 도상선이 앞으로 나서서 문 인천상에게 다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 저녀석이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술수입니다. 그럴 때에는 바로 죽여야 하는 것이며, 소인이 바로 그것을 뒤로 미루었다가 그와 같은 일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도상선은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일을 겪었었기 때문에 실로 죽여 달라는 얘기만 들어도 그와 같이 질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악채릉은 부친인 악불범과 함께 밖으로 나갈까 하다가 이윽고 문인천상 등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곁으로 다가와서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진아라와 화노, 엽노는 역시 다른 한쪽에 서 있었는데, 문인천상은 그러한 사람들을 한 차 례 천천히 돌아보며 주운양의 말을 받았다. "내가 과연 당신들을 소원대로 깨끗하게 죽여 줄 것 같소? 당신들이 만약 아직도 죄를 뉘 우치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차라리 여기에 있는 이 다섯 사람에게 당신들의 처리 를 맡길 것이오." 비록 주운양은 도액오선을 한때 이용하여 승세를 잡기는 했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어 려웠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의 얼굴만 봐도 질리는 기분이었고, 게다가 그를 비롯한 나머 지 다섯 명의 사람들은 조금 전의 도액오선의 살벌한 솜씨를 보았었기 때문에 결코 자비스 러워 보이는 문인천상의 앞을 떠나서 그들의 앞에 서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문인천상과 도액오선을 비교하자면 마치 하늘의 신선과 지옥의 마왕과도 같은 차이 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주운양은 비록 처음에는 흉악한 기운이 발작하여 그와 같이 함부로 내뱉었으나 이내 문인 천상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즉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내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면서 대꾸했다. "좋소, 좋아! 그렇다면 내 지금부터 솔직하게 당신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면 될 것이 아니 겠소? 흠……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무엇으 더 숨기겠소?" "……" 문인천상이 대꾸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듣고 있자 주운양은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다 시 말을 이었다. "사실 말이지……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이 두 명의 아우들과 함께 짜고서 당신의 선친을 살해하고 그 재산을 전부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이오. 물론 당신의 선친은 내가 실해했고 또한 이번에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일도 모두 나의 계획 하에 이루어 진 일이었지."문인천상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에게 일월신교의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재간이 있었다는 말이오?"주운양은 눈빛을 기이 하게 빛내면서 대꾸했다. "아, 그거야 누구라도 그와 같이 꾸며 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그때 비록 월영 인(月影印)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그것과 비슷하게 꾸며 낼 수는 있었던 것이오. 그리고 구 태여 그와 같이 일월신교의 무공을 흉내낸 것도 바로 당신이 감히 복수를 꿈꾸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까닭이었소."문인천상은 이에 문득 조용히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월영인을 비록 터득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대강 알기는 하겠 구려. 묻겠는데 대체 그 월영인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는 무공이오?" (……) 주운양은 문인천상의 그와 같은 질문을 받자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상대가 설마하니 그와 같이 속속들이 물어 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심 다소 당황해진 것이었다. 이어 문인천상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도액오선을 바라보려는 듯하자 주운양은 마음이 뜨 끔하여 즉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하, 당신은 과연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었군. 나는 솔직히 정말로 패배를 시인하오. 그렇소. 사실 말이지 이 모든 계획은 내가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 월영인도 내 가 꾸며낸 것이 아니었소. 원래 당신의 선친을 살해한 사람도 따로 있었고 또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받고 있는 입장이오." 문인천상은 안색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고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 원흉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주운양은 일순 한쪽에 서 있는 악씨 부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문인천상을 향 해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우리를 주기려면 지금 즉시 죽이시오! 원래 그와 같은 기밀을 누설하게 되면 우리 들은 당연히 죽게 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그와 같은 짓을 하겠소?" 주운양은 이때 말과 함께 지극히 악독한 기색을 떠올렸는데 그것은 결코 죽는 한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조금 전에 나에게 다른 원흉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럼 그와 같은 일들은 기밀을 누설한것이 아니라는 말이오?" 주운양은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조금 전에 내가 말한 그 일은 사실 이제까지의 상황을 조금만 돌이켜서 생각해 본 다면 능히 알 수가 있는 일이었소. 따라서 내가 일부러 말해 준 것이었는데, 그까짓 말이 무 슨 기밀이 되겠소?" 문인천상은 담담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들은 정말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겠 다는 것이오? 당신들이 그처럼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않고 낯 두껍게 나온다면 나는 다시 말하지만 결코 좋게 대해 줄 수가 없는 것이오." 주운양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음흉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면 그분들이 반드시 우리를 구해 주시거나 아니면 우리의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너는 아느냐? 실로 그분들의 능력은 하늘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의 목숨은 나중에 참혹하게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흐흐흐! 비록 너희들에 의해서 우리가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해도 지옥에서 너희들이 더욱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 게 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주운양은 이제는 다시 악감이 치받쳐서 악독한 음성을 거칠게 내뱉고 있었다. (……) 제32장 주루에서 일어나는 풍운(風雲) 문인천상은 여전히 묵묵히 주운양의 악에 받쳐 있는 소리를 다 듣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도액오선에게 말했다. "밖에 마차를 준비시켜서 이들을 모두 태우고 우리집으로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이때 그 말을 듣고 도상선이 다소 놀라서 물었다. "아니, 이 나쁜 놈들을 이대로 곱게 마차로 모신다는 말씀입니까?"문인천상은 담담히 웃으 며 대답했다. "일단 장원으로 데려간 다음에 이후의 일을 논의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들을 감시하는 일은 다섯 분에게 맡기도록 하겠소."도액오선은 기실 자신들이 아직 문인천상에게 이렇다 할 일을 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까는 오히려 그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구했 었기 때문에 이제 그로부터 그와 같은 부탁을 받게 되자 절로 신이 나게 되어 다시 두말하 지 않고 몇 사람은 급히 밖으로 나가서 마차를 찾아보고, 또한 더러는 일찌감치 주운양 등 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은 등의 일을 부산하게 해내기 시작했다. 원래 그 통나무집의 내부와 주변에는 많은 장한들이 있었으나 일찍이 도액오선들에게 혈도 가 제압되어 한쪽의 건물 속에 감금되어 있었거나 조금 전에 주운양 등이 당할 때 혈도가 제압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으므로, 문인천상은 다시 그들을 해치지는 말고 무공을 폐지하 는 선에서 살려 주어 도망하게 하라고 시켰다. 이 돕은 녹지대는 기실 임옥룡 등이 장한들을 수련시켰던 곳이었는데, 이제 문인천상에 의 해 완전히 평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일단 그렇게 지시를 내린 다음에 이윽고 여전히 한쪽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 는 악씨 부녀에게 다가가서 그 가운데 악불범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아무래도 화산파로 돌아가시려면 난주성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실례지만 이 번에 저희 장원에 함께 가셔서 잠시 쉬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악불범은 이미 그에게 용서를 빌기는 했어도 기실 이전의 잘못한 일에 비해서 너무나도 미 약한 사과라는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조금 전에 주운양 등이 마치 개처럼 도액오선 등에 게 이끌려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져 있었는데, 다행히도 문인 천상이 앞으로 다가와서 그와 같은 부탁을 해주자 훨씬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즉시 정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린ㄴ 죄인이나 다름이 없는데 감히 공자의 부탁을 저버릴 수야 있겠소? 감사히 그 부탁 에 응하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문인천상은 포권하며 답례한 다음에 슬쩍 거의 무표정한 기색으로 서 있는 악채릉의 얼굴 을 돌아본 연후에 신형을 움직여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 통나무집의 밖에 이르니 도액오선이 바쁘게 유령과도 같은 신법을 펼쳐서 이리저리 움직 이며 떠날 준비를 하기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문득 진아라와 함께한쪽에 서 있던 화노와 엽노가 은근히 다가와서 문인천상에게 낮은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소주인님, 정말로 저 화산파의 사람들을 그냥 풀어 주실 생각이십니까?"문인천상은 두 사 람의 뒤를 따라온 진아라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뒤에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는 이미 그들을 용서하겠닥 했는데 어떻게 한 입에 두 말을 할 수가 있겠 소?" 화노는 이에 다소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저들은 주인님을 살해하는 일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식언 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인데 구태여 그런 악인들에게 공자님께서 예의를 다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문인천상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하고 또한 식언을 밥먹듯이 한다고 해도 우리까지 그들 과 같은 행동을 할 필요는 없는 법이오. 게다가 나는 이미 과거의 일을 대부분 잊어버리기 로 했으니…… 그것은 바로 과거의 일이라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돌이켜 봐 도 소용이 없고 도리어 불행만을 자초할 수가 있기 때문이오." 엽노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소준인께서는 이제부터 복수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불필요한 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악인들을 응징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오. 저들은 기실 그 하수인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대강 용서해 줄 생각이고, 다만 그 원흉 들에게 있어서는 보다 강력하게 대처할 생각이오." 엽노는 그 말을 듣고 동조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인님의 그와 같으신 생각은 실로 자비로우신 것이고 현명하신 것입니다. 실로 소주인 님께서는 돌아가신 주인님의 좋은 점을 이어받으셨군요. 그럼 이번에 장원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즉시 원흉을 찾아 활동을 개시하실 생각이십니까?" 문인천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당장에 원흉들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고, 우선은 숨겨 져 있던 보물들을 찾아서 가업을 다시 일으키도록 해야 하겠소." 순간 화노가 크게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뜨며 물었다. "아니, 그럼 돌아가신 주인님께서 남기셨던 보물이 정말로 있다는 말씀입니까?"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더러 과거의 얘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느끼게끔 하기도 했지만 기 실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소. 일단은 그 얘기를 밝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 게 하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선친께서는 그 모든 재산을 자선단체 에 갖다주었던 것이 아니라 은밀히 감추어두고 후일을 위해 대비해 놓으셨던 것이었소. 나 도 기실은 이번에 장원에 돌아와서야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재산의 분량은 아마도 과거의 십중팔구는 될 것이오." ……! 화노와 엽노는 원래 문인가의 장원에서 살아 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문인천상의선 친이 살아 있었을 때의 재산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이었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런데 이제까지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던 그 재산이 아직도 무려 그것의 십중팔구는 남아 있다고 문인천상에게서 듣게 되자 실로 크게 놀라게 되었다. 기실 그들은 그 동안 문인가의 장원엣 하인으로 행세하며 살아 오는 동안에 장원이 크게 기우는 것을 보고는 매 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그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솔직히 나는 아직 사업에 대해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매우 걱정하여 일을 도와 줄 수 있 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바로 두 분께서 그 일들에 적격일 것 같은 느낌이 드오. 두 분께서는 바로 선친과 함께 일을 해 오셨던 분들이기 때문이오. 따라서 부 탁을 드리고자 하는데, 두 분께서는 혹시 각기 집사와 호위총관의 직위를 맡아서 우리들의 장원을 이끌어낙ㄹ 생각은 없으시오?" 화노와 엽노는 놀라고 있다가 그러한 문인천상의 부탁을 듣고는 일순 안색이 대변해서 눈 이 휘둥그래졌다. 화노가 거듭 놀라서 즉시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감히 저, 저희들이 그와 같은 중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분께서 하실 수가 없닥 한다면 아마도 천하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 을 것이오.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리건대 두 분께서는 부디 그 집사(執事)와 호위총관(護衛 總官)의 직위를 맡아서 장원을 이끌어 주시겠습니까?" …… 화노와 엽노는 원래 문인천상의 선친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저 많은 호위무사들 가운데의 하나에 불과했을 뿐 집사나 총관이라는 직책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지금 느 닷없이 그와 같은 직책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보자 마치 평생의 소원을 풀게 된 기분 이 되었다. 기실 그들은 유독 그쪽의 방면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설사 일국의 임금이 되 라고 해도 사양할 것이지만 항상 눈여겨보아 왔던 집사나 총관의 일은 은근히 하고 싶었던 일이었던 것이었다. 실상 이 화노와 엽노는 근래 들어 자신들의 능력이 별볼일이 없다고 생각되어 이제는 쓸쓸 히 은퇴나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 가고 있었던 중이었는데, 문인천상으로부터 느닷없이 그와 같은 부탁을 받고 보자 마치일국의 재상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되었다. 한동안 그들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도 기뻐하며 정신을 놓고 있다가 문 득 문인천상이 아직도 조용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복는 일제히 그 자 리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원래 그들은 이미 이 소주인인 문인천상의 능력이나 인품 이 지극히 훌륭하여 존경스러워 하고 있었는 데다가 이제 그가 무려 두 번씩이나 그와 같은 부탁을 해 오자 그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소주인님, 아니 이제는 우리들의새로운 주인님이 되셨으니 앞으로는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저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은혜를 갚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문인천상은 즉시 그들의 손을 각기 하나씩 잡아서 일으켜세워 주며 미소하며 입을 열어 말 했다. `여러분은 이미 저의 일을 많이 도와주셨었고 게다가 앞으로 장원의 일을 도맡아서 하게 되면 수고로우실 것인데 오히려 제가 두 분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 럼 앞으로 화노는 집사가 되시고 엽노는 호위총관이 되셔서 장원에 도착하게 되면 사람들을 부리는 일이나 장원을 꾸미고 호위하는 일 따위에 대해서 전적으로 맡아 주십시오. 그 비 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저에게 말씀하시면 제가 원하는 대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평소에 거의 말이 없던 엽노도 매우 감격한 듯이 한 마디를 했다. "주인님, 저희들은 원래 이대로 강호에서 물러나서 폐물이 되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 고 있었는데 이제 주인님께서 이렇게 중용해 주시니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앞으로 신명을 다 받쳐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그들의 말을 들은 뒤에 품속 에서 은표다발을 꺼내서 그들에게 각기 은자 이천 냥씩을 나눙 주며 다시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니 우선 장원에 도착할 때 까지는 이것으로 비용을 쓰시도록 하고 또 나머지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다시 저에게 말씀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두 분께서는 즉시 그 다섯 사람과 함께 힘을 합하여 떠날 준비를 해주시고 또한 저 화산파의 사람들이 타고 갈 마차는 따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 다.""명심하여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평소에 거저 그와 같은 돈을 주었다면 그들은 즉시 사양할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자 신들의 일에 쓰이는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엄숙한 표정으로 각기 이천 냥씩의 은자를 받아서 소중학 품속에 보관했다. 그리고는 즉시 문인천상에게 다시 인사를 올린 다음에 신형을 날려서 도액오선이 한창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 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는 그들의 어깨가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했으나 이제 장원의 중책을 맡은 상 태인지라 은근히 그들의 의기는 하늘마저 뚫을 수가 있을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실로 그들은 무공은 비록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해도 가장 성실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기 때문에 이번의 돌아가는 일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 진아라는 다소 멍하니 화노와 엽노가 일을 하기 위해 달려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문인천상의 앞에 이르러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오라버니의 관심의 대상이지만 유독 저만큼은 오라버니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죠? 저는 이제 공동산으로 혼자 서 돌아가야 하나요?" 문인천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너에게는 한 가지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곁에 있으면서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인데, 하기는 네가 싫다면 그것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 진아라는 문득 그 말을 듣고 생각하다가 절로 기쁜 생각이 들어서 즉시 그의 품속으로 뛰 어들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받았다. "아니예요. 앞으로 저는 반드시 오라버니의 곁에서 방해하지 않고 또한 좋은 말동무가 되 어 드리도록 하겠어요." 기실 도액오선과 화노와 엽노가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진아라를 자신의 곁에 두고 보호해 주려는 것이었다. 진아라는 물론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 었지만 그저 문인천상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단숨에 승 낙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잠시 후에는 엽노와 화노의 주도하에 떠날 준비가 모두 완료되어 일행은 모두 대 여섯 대의 마차에 올라타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길을 떠나기에 앞서서 도액오선이 이미 통나무집을 모조리 헐어 버리고 그것들로 통쾌하게 불을 질러 버렸음은 물론이었다. 일행의 가장 앞쪽에는 엽노와 화노가 마차 하나를 타고서 일행의 길을 인도했고, 두 번째에 는 도액오선 등이 두 대의 마차에 주운양 등을 싣고 그들을 감시하며 타고 있었고, 이어 중 간의 마차에는 녹지대에서 얻은 각종의 물건들을 싣게 되었으며, 그리고 악씨 부녀는 그 다 음의 마차에 탔고, 문인천상은 진아라와 함께 가장 뒤에 있는 마차에 올라타서 가게 되었다. 이때 녹지대에 있었던 장한들 가운데의 상당수가 뜻밖에도 마차를 몰며 방향을 인도해서 일행과 함께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물론 엽노와 화노가 뒤늦게 쓸쓸하게 떠나는 장한들을 불러모아서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행이 녹지대를 떠난 것이 대략 늦은 오후쯤이었는데, 이윽고 그들은 한참이나 마차를 달려서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어느 쉬어갈 만한 작은 현성에 도달 하게 되었다. …… × × × 일행이 난주성 밖에 위치하고 있는 장원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하룻밤을 묵어가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단 그 작은 현성에 들어가게 되자 엽노와 화노는 문인천상의 허락 을 받아서 먼저 앞으로 나아가서 그 현성에서 가장 커다란 객점의 상방들과 별채를 하나 빌려 놓았다. 상방들은 자신들과 도액오선 등이 쉬어 가게 할 곳이었고, 물론 별채는 문인 천상을 위한 곳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어 객점과 딸려 있는 주루에도 알려서 일행이 도착하게 되면 즉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일행은 그 덕분에 객점의 많은 하인들의 영접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서 곧장 주루의 탁자들을 차지하고 식사를 할 수가 있게 되었 다. 원래 그 시각은 저녁때이기는 했지만 이 지역의 객점들은 행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 이고 또한 행인들은 대부분이 저녁때는 보다 일찍 식사를 하는 습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 행이 그곳에 들어갔을 때에는 비교적 그 주루의 내부가 한산한 편이었다. 주루는 물론 일층으로 되어 있었고 그 내부가 생각보다 넓은 편이었는데, 일행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끄러운 소음을 일으키면서 여러 개의 탁자들을 차지하고 앉아서 나오는 음 식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이윽고 점원들이 음식들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그 것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에 주루 안의 분위기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물론 지금 그러한 시끄러운 소음을 발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이 아니라 도액오선이었는데, 그들은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빨리 음식을 가졍라고 성화였고, 이제 음식이 나 오게 되자 그것을 서로 달려들어서 집어먹으려고 아우성인 것이었다. 화노와 엽노는 기실 그러한 것을 미리 생각하여 문인천상 등의 자리는 따로 옆에 마련해 놓 기는 했지만, 정작 정말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절로 안색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생각해 보면 이 도액오선은 말하자면 철이 덜 든 어른들과도 같아서 그야말로 다루기가 곤 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인인 문인천상의 체면을 있는 대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었는 데, 점원들이 미처 음식들을 상 위에 펼쳐 놓기도 전에 무섭게 달려들어서 그것들을 요절 내 버리고, 이어 마치 아귀처럼 다른 상 위의 음식들도 한결같이 먹어치우는 그들의 행위는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주운양 등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 버리고 이어 악씨 부녀의 음식에도 손을 대더니 이윽고 심지어 문인천상의 탁자로 가져가는 음식들까지 거칠게 손을 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주운양 등은 포로이기 때문에 감히 음식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입장이고, 또한 악씨 부녀 역시 점잖아서 말이 없었지만,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는 엽노와 화노의 가슴은 노 화가 불길같이 치밀어서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그들의 따귀를 한 차례씩 갈겨 주고 자리에 앉혀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인천상은 옆에서 자리에 앉아서 담담하게 미소하며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 보고 있는 눈치였고, 도액오선은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번에는 각기 품속에서 주먹 만한 황금덩어리들을 꺼내들더니 탁자에 올려놓고 쾅쾅 두들기며 소리소리를 지르며 빨리 음식들을 가져오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이었다. 엽노와 화노는 기실 아까 그들 도액오선 등이 녹지대에서 장한들이 도적질을 하여 모아 놓 았던 돈들을 무수하게 노략질하여 품속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었는데, 지금 뻔뻔스럽게도 그 것을 사용하는 것을 보자 그야말로 화가 나서 머리끝에 연기가 솟아 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속으로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원래 이미 도액오선에게 심하게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제 도액오선은 누구 도 자신들을 간섭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크게 득의하여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저 마다 주방으로 달려가서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 실제로 주방의 점원들이 음식들을 이렇게 제때에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원래 그들의 능력 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도액오선의 먹성이 그만큼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가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한 사람이 열 명의 분량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 같았는데, 엽노 와 화노는 고작 이삼십 명 분의 음식을 주문했었다가 금방 도액오선에게 그것들이 거덜이 나고 지금과 같은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엽노와 화노는 일찍이 자신들이 주루에 들어와서 이토록 주인의 체면을 깎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는데, 도액오선이 이제까지 아무런 쓸모가 없이 엄청나게 음식들만 축내고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고 내심의 노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제발이지 누가 좀 그러한 자들을 혼을 내주었으면 하고 절절하게 바라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 두 사람의 마음에 감응을 받았던 것일까? 느닷없이 주루의 한쪽에 서 신형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빌어먹을! 이 주루 전체가 모두 저희들이 전세를 낸 것인가? 시끄러워서 도저히 참을 수 가 없군! 이것들 봐! 빨리 그 주방에서 나오지 못하겠나?"…… 도액오선은 기실 주인인 문인천상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그다지 나무라지 않고 있었으 므로 매우 신이 나고 득의하여 마음껏 음식들을 먹을 생각으로 주방으로 쳐들어갔던 것이었 는데, 느닷없이 그와 같은 소리를 듣게 되자 하나같이 다소 놀라서 신형을 멈추게 되었다. 혹시 그들은 누군가가 문인천상의 지시를 받고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 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악 그들이 우르르 다함께 밖으로 나와서 살펴보니 그저 주루의 한쪽 구석진 자리 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웬 낯선 젊은 사나이 하나가 몸을 일으켜서 자신들을 노 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일단 문인천상이 자신들을 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 도의 한숨을 불어쉰 그들은 하나같이 그 사나이를 바라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을 하기 시작 했다. "아니, 아니, 저…… 정말로 저기에 있는 저 어린 녀석이…… 저녀석이 감히 우리에게 나오 라고 호…… 호통을 친 것인가?" 사실 말하자면 이 도액오선은 너무나도 음식에 굶주려 있는 상태였고 또한 아까 낮에 녹지 대에서 그 먹고 싶었던 음식드릉ㄹ 마음껏 먹지 못했었기 때문에 내심으로 크게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은 성격이 엉뚱하여 결코 그러한 심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편이 었는데, 따라서 자연적으로 주루에 들어오게 되자 그러한 소란을 부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어떤 나쁜 의도가 깃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문인천상도 그것을 보고 굳이 제지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었던 것이었다. 도훼선이 먼저 그와 같이 반쯤 우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쳐 말하자 이내 도패선이 그 말을 받아서 다시 거칠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그렇지 않다면 어떤 후레자식이 그와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는 말인가? 음, 다 른 후레자식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저 후레자식이 그랬던 것이 틀림이 없는 일이야." 원래 사람이란 자신의 욕망에 민감한 편이어서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탐하는 일을 방해받게 되자 절로 크게 반감이 일어서 욕설을 퍼붓게 된 것이었다. 도상선이 다시 말을 받았다. "하지만 저 어린 녀석의 주위에는 제법 그럴 듯한 녀석들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다른 녀석들은 일어서지 않고 그녀석만 일어서 있을까?"도수선이 멍청한 표정으로 다시 그 말을 받아서 대꾸했다. "그건…… 그건 아무래도 그녀석이 가장…… 가장 힘이…… 힘이 세기 때문에 그러는…… 그러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 제33장 전대미문(前代未聞) 도수선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자 도멸선이 자신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나서서 입을 열어 말했다. "아냐, 아냐! 반드시 덩치만 크다고 해서 다 힘이 세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지금 밖에 서 음식을 먹고 있을 그 돼지같은 녀석들도 덩치는 크지만 힘은 형편없는 것이 아니야?" 도멸선이 말한 돼지같은 녀석들이라는 것은 바로 마차를 몰고 왔던 장한들을 가리키는 것 이었다. 도수선이 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오히려 덩치가 커다란 사람은 가장 힘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 그러니까 저녀석보다는 그 뒤에 앉아 있는 계…… 계집이 더욱 히…… 힘이 센 것이 아닐 까?" 도패선이 이에 다소 화가 나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계집은 역시 계집이고 남자보다 힘이 더 강할 수는 없는 거야. 나 는 여태 계집이 남자보다 더욱 힘이 세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 도수선은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를 테면 아까의 그 돼지같은 녀석들보다 우리의 진 소저가 더욱 무공이…… 무 공이 뛰어난 것이 아니겠소? 그…… 그러니 둘째형은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아니 되는 것이오. 그…… 그것은 곧 우리의 진 소저가 계…… 계집이 아니라는 말이…… 말이 아니오?" 도패선은 도수선의 말에 의해서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증거가 나오게 되자 즉시 얼굴을 시 뻘겋게 물들이며 다시 소리쳤다. "어쨌든 계집은 남자보다 힘이 강할 수는 없어!" 도수선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둘째형은 결국 진…… 진 소저를 계…… 계집이 아니라는 말을, 말을 하고 있는 것이…… 것이라…… 라는 마…… 말이오?"도패선은 소리치며 얼버무리려고 했었으나 도수 선이 집요하게 자신의 잘못된 말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화가 나서 다시 생각나는 대로 소리쳐 말했다. "그거야 알 수가 없지. 사실은 진 소저가 남자인지도 모르는 일이지…… 누가…… 누가 그 녀의 옷을 벗겨 보았던가?" 말과 함께 도패선은 은근히 진아라를 의식하여 시선을 그쪽으로 보내 보았다. 원래 그는 고집을 부리기 위해 그와 같은 말을 했던 것인데 혹시 진아라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진아라는 보아하니 다소 얼굴이 붉어진 듯하여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엽차를 마시 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도패선은 이에 다소 안심을 하며 고개를 다시 눈앞의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이때 도수선이 다시 지겹게도 그의 말끝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지…… 진 소저의 옷을 버…… 벗겨 보…… 보아…… 보아야만 바…… 반드시 그녀가 여 ……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 있는 것은 아…… 아니오. 마…… 말하자면 그녀…… 그녀의 가슴…… 가슴이…… 다…… 다소 불룩…… 불룩하게 튀어나와 이…… 있으므로 그녀는 여…… 여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오." 도패선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다시 말을 잘못하여 진아라에게 신경이 쓰이고 있는 상황 이었는데, 도수선이 계속해서 그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더욱 화 가 치밀어서 대꾸했다. "너는 가슴이 불룩 튀어나와야 여자라는 말이냐? 가슴이 불룩 튀어나온 것은 남자도 있을 수가 있고 여자도 있다. 저기에 있는 저 여자를 봐라. 그녀는 지금 보아하니 가슴이 진 소 저보다 훨씬 튀어나왔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째서 그렇다는 말이냐? 그녀의 가슴은 그럼 가짜라는 말이냐?"도수선은 기실 이 도패선이 툭하면 자신의 말에 끼어들곤 하여 완력으로 거칠게 나오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었기 때문에 아예 지금 이와 같은 약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이겨 보려는 것이었다. 도수선은 다시 말했다. "그…… 그녀…… 그녀의 가슴은 가짜…… 가짜일 수도 있는…… 있는 것이오. 둘째…… 둘 째형은 언제 그녀…… 그녀의 옷을 버…… 벗겨…… 보…… 보았던 적이…… 있소? 세상에 는 가…… 가짜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오."지금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잡아서공격하 기 위해서 그야말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이었는 데,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의도는 결코 상대방에게 져서는 안되며 반드시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늘어져서 궁지에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패선은 도수선이 자신의 말의 꼬투리를 잡아서 가짜일 수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니야, 가짜가 아니다!" 도수선이 역시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둘째…… 둘째형은 호…… 혹시 그녀…… 그녀의 남편이라도 되는 것이 아니…… 아니오?" 도패선은 느닷없는 질문에 눈을 휘둥그래 뜨며 가로저었다. "아니다. 나는 아직 장가를 가지도 않았는데 어…… 어떻게 그와 같은 마누라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냐?" 도수선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 그녀가 저…… 젖가슴이 가…… 가짜가 아니…… 아니 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오? 그…… 그것은 실로 오로…… 오로지 둘째…… 둘째 형이 그녀의 남편이기 때문에 바…… 밤중에 그녀의 오…… 옷을 벗기고 나서…… 그리고 또한 그녀의 저…… 젖가슴을 마…… 만져 보…… 보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오."도패선은 도수선의 그러한 얘기를 듣게 되자 잠시 멍하니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 정말로 그런 것일까? 아니 나도 모르게 이미 장가를 갔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요 사이는 기억력이 너무나도 희미하기 때문에…… 그런데 대체 어째서 반드시 저…… 젖가슴 을…… 그녀…… 그녀의 젖가슴을 만져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냐? 그…… 그것은 그냥 보기 만 해도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란말이냐?" 도패선은 처음에는 다소 태연하게 말을 시작했었는데 문득 여자의 젖가슴 얘기를 하게 되 자 다소 흥분이 되는지 말을 심하게 더듬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구태여 거기에 그녀의 젖가슴이라는 말을 첨가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가 흥분하여 말을 심하게 더듬는 광경은 실로 추악하리만큼 이상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소리를 질렀던 그 사나이가 어느 틈엔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싶었는 데 그 말소리를 듣고 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듯이 다시 탁자를 내리치며 욕을퍼붓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건 도저히 참고 들을 수가 없는 인간 말종들이로군! 게다나 나이를 많이 쳐 먹은 것들이 저 모양이니 대체 어디에서 굴러먹다 날아 들어온 말똥들이라는 말인가?" 기실 생각해 보면 그 사나이가 약간 화를 내게 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지금 백색의 장삼을 걸치고 있는 그 사내의 앞에는 바로 두 사람이 함께 자리하고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도패선과 도수선은 느닷없이 그 가운데의 홍일점(紅一點)인 홍의여인(紅衣女人)을 가리키며 이제까지 무슨 젖가슴이 어떻구 하는 따위의 음담패설을 늘 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백의사내가 만일 그 홍의여인 등과 같은 일행이라면 그 여인을 두고 함부로 찧고 까부는 것을 보고 누가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비록 도수선과 도패선이 지나치게 나이를 먹은 노인들이어서 그들의 얘기가 어떤 음심이 있어서 하는 얘기로 들리 지는 않는다고 해도 역시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러나 백의사내는 일단 자신이 그와 같이 말을 꺼내고 나면 도수선 등이 알아서 자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기실은 그 두 사람은 결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 금 도수선과 도패선은 서로간에 심한 말싸움이 벌어져서 설령 옆에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 떨어지게 된다고 해도 그 말싸움을 멈추지 않을 기세인 것이었다. 도패선의 질문에 도수선이 즉시 대답했다. "무…… 물론이오. 둘째형은 그럼 밤에…… 밤에도 분명하게 젖가슴이 가짜……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가려낼 수가 있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은 그저 손으로 만져…… 만져 보아 야만 알 수…… 알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오." 도패선은 의아한 듯이 다시 물었다. "대체 손으로 만져서 무엇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냐?" 도수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손으로 만지면 무…… 뭉클한 거…… 것이 손 안에 잡힐 것이…… 것이 아니겠…… 아니겠 ……" 그때 도수선은 문득 말을 하다가 말고 도중에서 말을 멈추고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것은 바로 아까 욕을 퍼붓던 그 백의사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 하나를 도수선에게 내던졌었는데, 우연치 않게 그것이 도수선의 머리에 맞아서 미미한 통 증을 주고 바닥에 떨어졌던 것이었다. 원래 이 도수선은 지금 워낙에 말싸움을 하는 데 정신을 쏟고 있었던 관계로 그와 같은 나 무젓가락이 날아오고 있었어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그 나무젓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맞추어서 정신을 멍하게 만들자 일시 머리속이 혼란스럽게 되어서 잠시 말을 더 이 상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도패선은 도수선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도 그것은 그의 특징이기 때문에 별로 이 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이 이 여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었으므로 앞서의 질문에 대해서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하필이면 밤에…… 밤에 보아야 한다는 것이냐? 낮에 볼 수도 있지 않느냐?" 도수선은 잠시 정신이 멍해져 있다가 이윽고 그 얘기를 듣고는 다시 정신이 돌아오게 되어 서 즉시 대꾸했다. "그…… 그렇다면 둘째형은 으…… 음탕하게도 낮에 그녀의 오…… 옷을 벗겨 놓고서 그녀 의 그…… 그것을 보았다는 말이오?" 도패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때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녀의 그…… 그 젖… … 젖가슴을 보려고 했다면 낮에 보았을 것이다. 왜냐…… 왜냐하면 낮에 보는 것이 밤에 만지는 것보다 훨씬 확실할 테니까."기실 비록 지금 이 주루에는 손님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이들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음탕하고도 천박하며 유치하여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과도 같았고, 또한 해괴하기 짝 이 없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도패선과 도수선은 각기 그러한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 의 말이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되면그야말로 아주 득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 다. 지금도 도패선이 그 말을 하고 만면에 아주 득의한 표정을 짓고 있자 도수선이 이에 지지 않고 다시 소리쳐 말했다. "하지만 둘째형은 그때 보았던 것이오? 과연 저 여자가 둘째형의 마누…… 라였던 것이 확 실하오? 나는 믿을 수가…… 없소!" 도패선은 아까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으나 도수선의 말을 듣고는 즉시 거칠게 소리 쳤다. "아냐, 틀림없어! 그녀는 나의 마누라일 것이 거의 확실해!"도수선은 이제 자신에게 거의 할 말이 없어지게 되자 다소 울상이 되어서 궁리끝에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 그것도 믿을 수가 없소. 둘째형은 기억…… 기억력이 뛰어나지 못 하…… 못하지 않소?" 도패선은 이에 다소 어리둥절해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하긴 그렇지만…… 나는 왠지 저 여자가 나의 마누라였던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드는 것 이다. 만일…… 만일 저 여자의 젖가슴이 정말로 가짜가 아니라면 그것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냐?" 처음에는 젖가슴이 가짜 진짜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 마누라 운운하게 되었으나 이제는 오 히려 뒤바뀌어 마누라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젖가슴의 진위 여부가 거론되고 있는 것 이었다. 실로 그와 같이 혼란되고 정신없는 대화 속에서도 그들은 오직 한 치 앞만을 보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에 도수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 그렇소. 하지만 무슨 수로 그녀의 젖가슴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는 말이오?" 도패선은 역시 그 점이 난관이라는 듯이 잠시 안면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그건 바로 우리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녀는 바로 눈앞 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왜 직접 확인하지 못하겠느냐?"이때 주루의 구석진 자리에서 더러 남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다른 손님들도 이 두 명의 괴상한 늙은이들이 여자의 젖가슴을 확 인해 보겠다고 하자 일순 저마다 호기심이 치밀어 올라서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 자의 젖가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옷을 일단 벗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패선과 도수선은 이미 자신들의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나 어떤 세속적인 예의범절 따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도 않고 있었다. 도수선이 즉시 말을 받았다. "하지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소. 만일 그녀가 정말로 둘째형의 마누라…… 마누라 라면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녀를 대할 것이오? 나는 그와…… 그와 같은 젊은 형수…… 형수를 보고 도저히 인사를…… 인사를 할 수가 없는 심정…… 심정이오." 기실 도수선이 도저히 인사를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질투심이 섞여 있는 말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패선은 즉시 그러한 도수선의 심리를 파악해 내고는 크게 득의하여 한쪽 에 있는 비어 있는 탁자의 위를 쾅, 하고 내려친 다음에 소리쳤다. "뭐가 할 수가 없다는 말이냐? 한 번 하면 하는 것이지! 자, 어서 나를 따라가서 확인해 보 러 가기로 하자!" 도패선은 이어 도수선의 한쪽 손을 잡아서 끌고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선은 이에 하는 수 없이 엉거주춤 도패선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구경꾼들이 일시에 크게 소리를 죽여서 웃고는 은근히 멀찌감치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실로 이와 같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해괴한 사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죽어도 원통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상선을 비롯한 나머지 도액삼선도 물론 그들의 뒤를 은근히 따르고 있었는데, 도패선은 문득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왠지 득의한 생각이 들어서 한 차례 커다랗게 너털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도패선은 그렇게 하고 나서 드디어 예의 그 탁자의 앞에 이르렀는데, 이미 그 백의사내는 화가 나서 신형을 일으켜세우고 있었고, 그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홍의여인과 현의(玄衣)사 내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 서 식살ㄹ 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는 문득 그들이 이 도패선 등에 비해서 조금도 못하 지 않은 기이한 사람드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보통의 여자라면 아까 도패선 등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큰소리로 떠들어댈 때 이미 참을 수가 없어서 달아나거나 아니면 무슨 짓을 했었을 것이었는데, 이들은 오히려 도패선 등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니 어찌 평범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 가? 다만 똑같이 비범하다고 해도 도패선 등은 마치 악귀와도 같이 기이하다고 하면 그들은 마 치 신선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는데, 도패선 등이 앞에 다가서자 이윽고 그 백의 사내가 참지 못하고 두 눈에서 노화가 떠오른 광망을 발산시키며 소리쳐서 물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여기에 왔느냐?" 도패선은 그가 지나치게 귀찮게 나서서 소리치자 눈살을 크게 찌푸리며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는 저 여자를 만나 확인하려는 것이다!" 백의사내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다시 소리쳐 물었다. "너희는 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말이냐?" 도패선은 계속해서 그가 귀찮게 굴자 그의 얼굴을 정시하며 이녀석을 한 대 갈겨 줄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대꾸했다. "나는 다만 그녀의 젖가슴을 보려는 것이다." 백의사내는 그 말을 듣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눈을 험악하게 부릅떴다. "뭐라고? 너희 늙은이들은 혹시 미치 것들이 아니냐?" 도패선은 이때 은근히 손이 자꾸만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백의사내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다시 대꾸했다. "어째서 우리가 미쳤다는 것이냐?" 백의사내는 큰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은 감히 백주에 아녀자의 가슴을 보겠다고 했으니 그것이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 겠느냐? 그것이 대체 사람이 할 도리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도패선 등은 백의사내가 갑자기 사람의 할 도리 운운하면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자 일시 대 체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이제까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식사만을 하고 있던 홍의여인이 고개를 쳐들 더니 백의사내를 향해 입을 열어 말했다. "백호(白虎)! 그들은 나에 대해서 뭔가 궁금한 점이 있는 모양인데 왜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지? 사실 그들에게 다른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 어?" 이 홍의여인의 용모는 그야말로천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것 같았다. 나이는 대략 삼십 세 정도로서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야말로 불그레하니 윤기가 흐르고 또한 화사한 기운 이 넘쳐 흐르고 있어서 유달리 매력이 있게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러한 여자가 그와 같이 대담하고도 태연하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 라운 일이었는데, 그녀는 다시 조용한 시선을 옮겨서 도패선을 향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다신들은 혹시 그렇게 나의 가슴을 보고자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도패선이 즉각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나의 마누라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오."사람들은 이때 내심 속으로 은근히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문득 그 말을 듣게 되자 저마다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 홍의여인은 이에 다소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는지 홍옥과도 같은 얼굴을 더욱 붉게 물 들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혹시 마누라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요?" 도패선은 생각나는 대로 대꾸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소. 나는 사실 요사이 기억력이 너무나도 희미해져서 내가 도대체 혼 인을 했던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이오."홍의여인은 그 말에 더욱 얼굴을 화사하게 물들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마누라를 찾겠다는 거죠?" 도패선은 대답했다. "그것은…… 만약에 당신의 젖가슴이 진짜라면 나의 마누라인 것이오."홍의여인은 이에 일 순 당혹한 표정을 짓다가 안색을 다시 붉히며 말했다. "나의 가슴은 비록 진짜이지만 그러나 나는 결코 당신의 마누라는 아니예요. 그러니 어서 당신들은 그만 돌아가 주세요." 도패선은 마악 뭔가 될 듯하다가 그녀가 느닷없이 그렇게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결코 이대로는 물러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즉시 말했다. "아니오. 당신은 틀림없이 나의 마누라일 것이오!" 사람들은 도채선이 이와 같이 심하게 우기자 다시 참을 수가 없어서 폭소를 터뜨렸다. 홍의여인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크게 웃고 떠들자 다소 겸연쩍은 듯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 다.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들은 결국 나의 가슴을보아야 하겠다는 말인가요?"도패선은 그녀의 말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물론이오. 나는 완력을 사용할 것이오." 홍의여인은 그 말에 마치 놀란 토끼처럼 몸을 움츠렸다. "안돼요. 당신은 결코 그러지 말아요. 나는,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이 홍의여인은 알고 보니 도패선의 습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 도패선이 워낙에 고집이 강하기 때문에 뒤로 뺄수록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게 된 다는 것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패선은 과연 그 순간의 심리적인 격동을 참지 못하고 즉시 강제적으로 홍 의여인의 면전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 도패선이 느닷없이 행동을 개시하여 앞으로 달려들자 홍의여인은 일순 그것을 피하려는 듯 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쪽으로 움츠렸으나 이내 유감스럽게도 뒤의 의자에 몸을 부딪치게 되 어 오히려 그녀의 몸은 앞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그 바람에 이내 그녀의 신형은 앞으로 고꾸 라져 버릴 듯했다. 도패선은 그녀를 잡기 위해 달려들다가 일순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문득 뭉클한 느낌이 있어서 바라보니 느닷없이 자신은 그녀의 젖가슴 부 위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기실 도패선은 비록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어도 아까 여자의 젖가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어느 정도의 흥분을 느꼈었는데, 지금 그렇게 정말로 젖가슴을 만져 보게 되자 비록 옷 밖에서였지만 거기에서 커다란 흥분을 느끼게 되 어서 정신이 다소 몽롱한 느낌이 되었다. 그로 인해서 그가 다소 손에 힘을 주었던 것일까? 홍의여인은 일단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 은 면한 듯이 몸을 일으켰으나 이내 자신의 젖가슴이 아픈 듯이 손을 가져가며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아, 안돼요. 어서 이 손을 빨리…… 놓으세요!" 홍의여인은 이때 자연히 도패선과 상체가 가까워지게 되어서 말을 했을 때에는 그녀의 얼 굴이 도패선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는데, 도패선은 비록 상대가 손을 놓으라고 하 고는 있었지만 문득 그 소리를 듣게 되자 마치 그녀가 대신 사랑해요! 하고 속삭이는 것과 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신이 멍해지고 아득한 쾌감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느닷없이 손목 부위가 심하게 저려 오며 도패선은 일순간에 마치 전신이 마비되어 버린 듯이 뻣뻣하게 굳어져 오는 것이 아닌가!(……!) 도패선은 그 순간 그러한 느낌으로 인해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 었는데, 문득 앞을 바라보니 홍의여인은 그 순간에 그의 면전에서 기이하고도 싸늘한 표정 으로 웃고 있었다. "호호호, 아직도 나를 마누라로 생각학 있나요, 이 멍청한 양반아!"그렇다. 바로 그녀는 조금 전에 도패선을 유혹하여 그가 정신이 혼란해지는 순간에 빠르게 손을 써서 그의 전신대혈의 맥문을 제압하여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홍의여인이 그와 같이 말하고 나서 다시 순식간에 지풍을 날려 도패선의 전신의 대혈들을 모조리 제압해 버리자 도패선은 안면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뭐라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이제는 말을 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도패선은 따라서 몇 번 두 눈을 껌뻑거리다가 자신이 지금 이 홍의여인에게 제압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아까부터 이 홍의여인이 평범하지 않은 듯하다고 내심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말 이렇게 되고 나니 실로 이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이때 도수선은 순식간에 제압당한 도패선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는데, 순간적으 로 도패선이 멍하니 제압이 되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크게 어리둥절해 하다가 자신도 모 르게 신형을 날려 홍의여인을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홍의여인을 공격하게 되면 도패선도 구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과거였다면 그는 도패선이 위기에 처하든 말든 그저 뒤로 물러나서 팔짱을 끼고 구경 이나 하려고 했었겠지만, 바로 얼마 전에 그 녹지대의 통나무집에서 도상선이 제압당하여 그 험한 꼴을 당하게 된 이후부터는 그들 동료들의 위기가 곧 자신들의 위기와 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즉각적인 행동을 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34장 뜻밖의 놀라운 고수(高手)들 도수선은 말할 것도 없이 다시 그와 같은 살벌하고도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 은 것이었다. 이 도액오선은 이미 최절정의 경지를 벗어나 있는 무공을 터득하고 있는 데다가 이렇게 도 수선이 한 번 정신을 차리고 신형을 움직이게 되자 그야말로 그의 주위에는 구름같은 환영 이 겹겹하게 일어나는 듯이 놀라운 무예가 그 선을 보이게 되었다. 상대는 고작 남의 허점을 틈타서 암수를 펼친 여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수선의그러한 공격 은 이내 효과를 발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았다. 이 도수선의 무공은 비록 다른 도액사선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만 그래도 그가 자 신하고 있는 무예는 바로 검법이라는 것이었다. 도수선은 이때 수중에 장검이 없었기 때문 에 손가락으로 장검을 대신하여 홍의여인에게 검법을 펼쳤으며, 따라서 이내 홍의여인의 전 신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환영같은 검기(劍氣)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대로 맥도 못 추고 쓰 러지고 말 것 같았다. 그런데 미처 도수선의 그러한 검기가 홍의여인의 면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때 이제까지 묵묵히 탁자 앞에 앉아서 음식을 들고 있던 현의사내가 느닷없이 신형을 벌떡 일으키며 우 수를 들어서 도수선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고, 이어 다른 쪽에 서 있던 그 백의사내 역시 도 수선의 뒤쪽에서 주먹을 위맹하게 휘드르며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 이 순간에 도수선은 약간 신형을 주춤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망설이게 되었 다. 실로 이 도수선은 비록 평소에는 생각이 많아서 커다란 실수가 별로 없었지만 그러나 그 생 각이 빠르지 못해서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지금 그가 계속해서 홍의여인을 공격해 들어가게 되면 틀림없이 홍의여인을 쓰러뜨리고 도 패선을 구할 수가 있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일 그러다가 옆과 뒤쪽에서 공격해 들어오 는 두 사람의 합공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면 오히려 그것은 도수선이 스스로 제압당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기실 그가 도패선을 구하지 않고 몸을 돌려 그 두 사람에게 신 형을 쓰게 된다면 도패선이 완전하게 제압이 되게 되어 전과 같은 상황을 만들게 되는 소 지가 많은 것이었다. 도수선은 한 순간에 그러한 두 가지의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망설이게 되었으며 이내 그는 도패선을 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로 하고 계속해서 홍의여인을 한 손으로 공격해 들어갔으 며, 이어 다른 손으로는 합공해 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일시적으로 운무(雲霧)와도 같은 검기의 벽(壁)을 형성해서 방어해 갔다. 이 도수선이 연마한 그 검법은 바로 팔만사천검법(八萬四千劍法)이라고 하여 천하에 유래 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하고 위력이 뛰어난 검법이었는데, 그 검법 가운데에는 그 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큼의 놀라운 초식들이 많이 있었지만 도수선은 고작해야 거 기에서 기초 부분만을 터득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그가 펼치고 있는 검법은 그가 아직 완 전하게 터득하지 못한 부분의 검초였다. 기실 그가 한 순간에 망설이게 되었던 것도 바로 그 검초가 완전하지 못해서 그랬었던 것 이었는데, 일단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두 손으로 각기 다른 초식들을 전개할 수 있게 하는 그 어려운 검초를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 일단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결단을 내리고 그와 같은 검초를 도수선이 전개하자 일순 다 소 안심하고 있는 듯하던 홍의여인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도수선은 비록 자신의 몸에서 무리한 진기의 운용으로 인해 기혈ㄹ이 들끓기 시작하는 것 을 느끼고 있었지만 홍의여인의 그러한 표정을 보게 되자 이내 자신의 공격이 성공할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다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도수선의 손가락으로 펼쳐 낸 검기가 마치 무 형의 그물같은 막을 형성하고 홍의여인의 전신을 에워싸자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것 같 았는데, 느닷없이 홍의여인의 눈빛이 번쩍하더니 마치 안개처럼 그녀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 져서 어느새 일 장 밖에서 도패선을 잡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도수선은 이에 매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별로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던 홍의여인이 그와 같은 신법을 펼쳤다는 것이 정말로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수선은 일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한편으로 즉시 홍의여인의 뒤를 따라가서 그녀를 재차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또 한 가지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도수선은 기실 자신이 펼쳐내었던 그 검 초의 위력이 매우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위력이 분산되었어도 능히 뒤의 두 사람의 협공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때 그저 거칠게만 보이던 백의사내 의 주먹에서 은은한 금빛의 기운이 돌면서 도수선의 그물과도 같은 검기의 벽을 여지없이 부수며 들어왔고, 도수선이 그것에 매우 놀라서 경각하는 순간에 이번에는 오른손가락을 놀리던 현의사내의 그 손가락에서 마치 실처럼 가느다란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와서 마치 거미줄처럼 그의 전신을 에워싸 버리는 것이 아닌가!(무섭구나!) 그 두 가지의 무학들은 도수선이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었고 또한 상상불허 의 가공할 위력들이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도수선은 일순 그와 같이 부르짖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일단 그 가운데에서 백의사내의 그 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권법의 위력은 너무나도 막강했기 때문에 도수선은 우선 그것을 방어하려고 공력을 일으켰는데,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맥을 잃고 고목이 넘어가듯이 그대로 뒤로 벌렁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현 의사내의 지력에 당하여 일순간에 전신의 대혈이 제압되었던 것이었다. 도수선은 그야말로 그렇게 놀라운 무공들에 당하게 될 줄을 몰랐었기 때문인지 그만 두 눈 이 휘둥그래 떠져 있었다. ……! 도패선과 도수선의 행동을 구경하기 위해 뒤따라왔었던 나머지 도액삼선은 그러한 광경을 보자 일순 매우 놀라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윽고 뒤늦게 홍의여인을 향해 행동을 개시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홍의여인이 있는 쪽으로 신형을 움직였는데 이미 그 순간에는 현의사내 와 백의사내가 도수선을 제압하고 난 뒤여서 도상선 등이 달려들자 다시 그들을 맞이하여 각기 한 명씩 상대하여 어우러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도상선은 백의사내와 격돌하게 되었 고, 도멸선은 현의사내와 대결하게 되었으며, 도훼선은 다행히도 그 사이를 빠져나가서 아직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홍의여인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도액삼선은 비록 도수선 등이 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암습에 의한 것이거나 합공에 의 한 것이었으므로 만일 자신들이 그들과 일 대 일로 대결하게 된다면 결코 질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않았다. 도액삼선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조급한 사람은 도훼선이었는데, 그는 아까 홍의여인의 신 법이 교묘한 것을 보았었으므로 일단은 그것을 의식하여 그녀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으 려고 처음부터 자신의 자랑하는 절기를 펼쳐서 홍의여인을 제압하려고 했다. 기실 이 도훼선이 자랑하는 절기는 바로 천불수(千佛手)라는 금나수법(擒拿手法)으로, 그것 은 비단 금나수법뿐만 아니라 온갖 장법의 변화와 권법의 변화까지 망라하고 있는 신비로 운 절기(絶技)였다. 도훼선은 그 절기를 아직 도수선과 마찬가지로 기초 부분밖에 터득하지 못했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훼선의 쌍수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홍의여인의 주위에는 일순 무수한 손그림자로 가 득차 버리는 것 같았고, 그 환상과도 같은 무형의 기운에 의해 홍의여인의 가냘픈 몸은 그 대로 여지없이 제압을 당할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 홍의여인은 비록 도패선을 잡고 있었으나 아직 그를 인질로 사용할 만한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때 홍의여인은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오히려 도훼선의 앞으로 다가들더니 두 개의 다리를 들어서 무수한 발차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원래 이 발차기라고 하는 것은 일단 하나는 바닥을 딛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에 차례차례 해야 하는 것이었고, 게다가 그 위력에도 역시 한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 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의 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홍의여인의 발차기는 비단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상불허의 가공할 위력이 그 안에 숨어 있었다. 홍의여인이 일단 발차기를 시작하자 마치 그녀의 두 다리가 동시에 허공에 떠올라 있는 것 처럼 무수한 다리의 환영(幻影)이 파도처럼 일어나서 도훼선의 손그림자에 맞서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 다리의 환영은 믿을 수 없게도 도훼선이 펼쳐낸 손그림자의 숫자에 비해 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력이 더욱 막강하여 도훼선의 손그림자를 오히려 압도해 가는 것 이었다. ……! 도훼선은 내심 설마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도 놀라서 눈 을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비록 지금 홍의여인이 여유를 갖지 못해서 도패선을 인질로 사용할 수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실로 이러한 젊은 사람들이 무공을 자신들에게 못하지 않을 정도로 연성했다는 것 은 그야말로 믿기가 어려운 일인 것이었다. 기실 이 도액오선은 어려서부터 기연을 만났고 또한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점차로 공력 이 높아졌던 것이었는데, 대체 이들은 어떻게 하여 이렇게 높은 경지의 무학을 터득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긴 우리 주인이 그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 는 일이지만……) 도훼선은 내심 생각을 굴리면서 가능한 한 빨리 도패선을 구하기 위해 더욱 공력을 크게 일 으키는 한편으로 그와 동시에 더욱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가 이러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었다. 이때 도훼선이 홍의여인과 점차로 무섭게 격돌하기 시작하는 동안 한쪽에서는 도상선과 도 멸선이 각기 백의사내와 현의사내를 맞이하여 두 무리가 되어서 치열하게 싸우며 돌아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들의 주된 절학들이 서로 비슷비슷하여 더욱 어지럽게 돌아갈 뿐 만 아니라 또한 공교롭게도 그들의 무학의 능력도 서로 비슷비슷하여 그야말로 호적수들 이 되어 있었다. 백의사내가 금빛이 은은하게감도는 기이한 위력의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도상 선은 변화막측한 장법(掌法)을 사용하여 대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반야장(大般若掌)이라 는 것이었고, 비록 백의사내의 권법과 같은 강맹한 위력은 나오지 않고 있었으나 강약을 포함한 기오막측한 변화로 오히려 약간 백의사내를 위축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으 며, 현의사내가 기이한 위력의 지법을 사용하고 있는 데 반하여 도멸선도 역시 쌍수에서 펼 쳐지는 지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겉으로는 그 현란한 변화가 비슷하기는 해 도 도멸선의 지력이 보다 허약한 느낌이 들어서 뒤로 약간씩 밀리고 있는 추세였다. 기실 장내에서 지금과같은 느닷없는 격전이 벌어지게 된 것은 잠깐 사이에 전개된 상황이 어서 갑자기 놀라운 광경을 맞이하게 된 구경꾼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 작했고, 또한 지금은 점원들이 날라온 음식들을 앞에 두고 마악 식사를 하려고 하고 있었 던 문인천상의 일행들은 그러한 광경을 보고 매우 놀라서 미처 수저를 들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악씨 부녀는 한쪽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으나 엽노와 화노는 외히려 도액오선이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고, 진아라는 이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 어 문인천상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대체 저 사람들의 무예는 어떤 것이죠? 저토록 놀라운 무예를 연성했다니 대 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맞은편의 자리에 앉아서 조용한 시선으로 장내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 보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그녀에게 돌려서 미소하며 대답해 주었다. "글쎄…… 저들의 무예는 사실 나도 처음으로 구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온 거인지는 앞으로 두고봐야 확실히 알게 되겠지."지금 장내의 상황은 비록 홍의여인 등이 어떤 수단을 부리기는 했어도 애초에는 도패선 등이 말썽을 부려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쉽게 나서서 일에 끼어들 수가 없었고, 다만 지금은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지 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비록 상황이 좋지는 않으나 도액삼선 이라면 그들 세 명의 젊은 남녀들을 상대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느닷없이 뜻밖의 변화가 장내에 생겨났다. 도훼선과 도상선이 이제 겨우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하는 무렵에 느닷없이 한쪽 구석에서 한 명의 청의(靑衣)사내가 다가 오더니 갑자기 홍의여인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는 도훼선을 향해 황금빛을 발하는 기이한 위력의 장력(掌力)을 발출하며 이내 그 격전의 와중으로 뛰어들어서 홍의여인의 손에서 도 패선을 받아들고는 얼른 다시 밖으로 뛰쳐나왔던 것이었다. 홍의여인은 그렇지 않아도 도훼선에게 다소 밀리고 있던 상태였는데 그러한 결과로 다시 기 세를 회복하게 되었고, 그에 반해서 도훼선은 도저히 그 청의사내가 돼선을 들고 빠져나가 는 것을 저지할 수가 없었으므로 크게 경악하여 손발이 일시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뛰어난 젊은 고수들이 계속해서 생겨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으 며, 사실 그는 내심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체 우리의 주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길래 아직 우리를 구해 주지 않고 있는 거야?) 마치 도훼선의 그러한 생각에 따르기라도 하듯이 문득 다음 순간에 누군가의 소리치는 소 리가 들려 와서 그로 하여금 정신이 멍하게 만들었다. "너희들은모두 손을 거두어라!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이 두 늙은이의 목숨은 즉시 하나씩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문인천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방금 전에 그와 같이 소리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에 도패선을 들고 빠져나갔던 그 청의사내였는데, 이때 기이한 것은 지금 그의 옆에는 용모가 준수하고 신태비범해 보이 는 한 명의 백의청년(白衣靑年)이 이미 어느새 도수선을 빼돌려 가지고 한쪽에 놓아 두고는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다른 쪽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모양이었는데, 사람 들은 청의사내의 음성을 듣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한 가지 기이한 일을 느끼 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 백의청년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도상선과 한참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사내도 비슷한 백색장삼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으나, 실로 기 이하게도 지금 이 백의청년의 의복에서는 그야말로 눈부신 서광(瑞光)과도 같은 기운이 일 어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물론 자세히 보니 그 청년이 지금 걸치고 있는 의복은 상당히 깨끗한 것이었고 또한 고급 의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했으나, 무슨 보석으로 일일이 박아서 만든 것이 아닌 다음 에야 실로 그와 같이 눈부신 느낌을 준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실로 그러한 특유한 기질 때문에 백의청년의 모습은 흡사 군계일학(群鷄一鶴) 처럼 주루의 내부에서도 가장 돋보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바로 그가 청의사내 등과 같은 일행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더욱 기이한 일인 것 같았다. 도상선과 도훼선 등은 이때 비록 자신들이 다소간의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청의사내가 도패선과 도수선을 인질로 삼 아서 그와 같이 소리치자 할 수 없이 몇 차례의 공격을 퍼부어 상대를 주추하게 만든 다음 에 뒤로 훌쩍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일단 청의사내가 도패선이나 도수선 중의 한 사람을 죽이고 나면 그들이 제아무리 상대를 제압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청의사내는 지금 도패선과 도수선을 바닥에 앉혀 놓고 자신의 쌍수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 었는데, 도훼선은 이미 그의 장법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실로 그의 그 한 쌍의 손바닥이 무 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비록 도상선과 도훼선은 자신들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 게 물러설 수가 있게 되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인 도멸선만큼은 오히려 자신이 심하게 몰 리기 시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손을 거두고 물러설 수가 없었고, 그 현의사내 역시 자신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 쉽게 손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일 이 싸움이 정식으로 계속되었다면 그 현의사내는 최소한 일천 초식이 지나야만 도멸 선을 제압할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때 도멸선은 점차로 마음이 초조해져 가고 있었고, 게다가 도패선과 도수 선이 위기에 처해 있고 또한 도상선과 도훼선이 손을 거두고 물러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더욱 엉클어지고 혼란스러워져서 갈수록 손발이 어지러워지게 되었는데, 일순간 그는 너무 나도 마음이 초조해진 나머지 허둥대다가 그만 쓰러져 넘어가 있는 탁자에 걸리고 마는 실 수를 범하게 되었는데, 다음 순간 그가 급히 신형을 바로 세우는 순간에 문득 그의 전신 이 찌르르 하고 울리면서 흡사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 도멸선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게도 도패선 등을 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 신이 현의사내의 손속에 의해 제압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 도상선과 도훼선은 도패선과 도수선에 이어서 이제는 도멸선까지 그와 같이 제압을 당해서 함께 한쪽에 앉혀지는 것을 보고는 일순 더욱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원래 도액오선은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거의 패배하지 않아서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운 것 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며 살아 왔던 것이었는데, 오늘 이 주루에서 우연치도 않게 적수 를 만나서 패배를 하게 될 줄이야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얼마 전에 그들은 비록 주 운양에게 제압을 당하기는 했었지만 그것은 기실 교묘한 술수에 의해서 당한 것이었으므로 지금과는 상황이 아주 다른 것이었다. 제35장 호생지덕(好生之德) 도액오선은 비록 정식으로 정정당당하게 겨룬다면 그다지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면 눈앞의 청의사내가 마치 주인처럼 공손히 모시고 있는 저 백의청 년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순간이라고 할 수가 있었 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사내는 일단 포로 가운데 도멸선까지 합류시킨 다음에 고개를 들어서 도상선과 도훼선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어서 스스로 혈도를 제압하고 항복해라!" (빌어먹을……) 도상선은 그 말을 듣자 이내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면서 내심 오늘은 그야말로 재수 가 좋지가 않은 날이라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늘 벌써 두 번째로 혈도가 제압 당하는 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과거 도액오선은 이미 백년을 넘게 살아 오면서 누구에게도 그와 같은 수모를 겪지 않았었 는데, 오늘 불과 하루 사이에 그러한 일을 두 번이나 겪게 된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고, 또한 매우 공교롭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도상선은 은근히 문인천상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본 뒤에 그 청의사내를 향해 웃으면서 이 렇게 입을 열어 대꾸했다. "우리…… 우리는 그냥 이렇게 서 있으면 안되겠소? 비록 혈도를 제압하지는 않더라도 일 단은 혈도를 제압당한 것처럼 아무런 짓도 하지 않겠소."청의사내는 그 말을 듣자 일순 상 당히 화가 나는 듯이 크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실로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유있게 농 담을 할 수가 있는 도상선 등이 심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상대들이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애써 참는 눈치였다. 청의사내는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이 노인들을 놀라게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 는 듯하다가 이윽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음침하게 미소를 떠올리며 한 손을 들어서 마 침 그의 눈앞에 있는 도패선의 머리에 얹는 것이었다. "물론 여러분들은 아직 자유의 몸이니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는 것이오. 그러나 만일 그렇 게 할 경우네는 이 사람들의 목숨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말과 동시에 청의사내의 그 오른손바닥에서는 느닷없이 은은한 황금빛의 기운이 감돌았는 데, 놀랍게도 그 순간에 도패선의 백발의 머리털이 깨끗하게 잘려나가며 그 잘려나간 백발 의 머리카락은 전혀 흔적도 없이 한 순간에 녹아 버리고 이어 깨끗하고 허여멀건 대머리만 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이러한 사실에 비단 당사자인 도패선도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것 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도상선 등도 크게 경악했다. 청의사내가 그와 같이 한편으로는 말 을 하면서도 아주 깨끗하게 도패선의 머리를 상처 하나 없이 잘라낼 수가 있다고 하는 것 은 이미 장법의 수단이 자유자재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록 그는 지금 그저 도패선의 머리카락을 잘라낸 것에 불과하였지만 만일 그가 마 음이 변해서 느닷없이 도패선의 목이라도 싹뚝 잘라내게 되면 그야말로 어디에다 하소연할 곳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일단 그렇게 도패선의 머리를 잘라낸다고 해도 아직 그 들에게는 두 명의 포로가 더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도상선 등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 리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도상선은 따라서 혹시라도 그 청의사내가 도패선의 머리통을 건드릴까 봐 두려워하여 즉 시 소리쳐서 말했다. "알겠소! 우리는 순순히 제압을 당할 테니 그만 손을 멈추시오!"말과 동시에 그들은 각기 우 수를 들어서 지풍을 발출했다. 그런데 이때 실로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라고 할 수가 있는 광경이 벌어졌다. 멍청하기 짝 이 없어 보이던 도상선과 도훼선이 일순 자신들의 손으로 혈도를 제압하려는 듯이 지풍을 발출하다가 마치 그 자리에 쓰러지는 척하면서 거의 동시에 신형을 쾌속하게 움직여서 바 로 그 옆에 서서 조용히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백의청년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실 이것은 두 사람이 다섯 쌍둥이의 두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로간의 의사가 통했 기 때문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으며, 다름이 아니라 비록 도패선 등이 꼼짝없이 잡혀 있기는 하지마 보아하니 그들 두 사람이 백의청년을 제압하기만 한다면 아무 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한 순간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들 이 아무리 세 명의 포로를 가지고 위협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주인을 잡고 있게 된다면 이것은 오히려 이쪽에서 승기를 잡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세 명의 포로의 목숨보다도 자신들의 주인의 한 목숨이 훨씬 중요하게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결국 도상선 등의 생각이 아직 단순한 것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에 불과한 일이었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상대방도 그러한 이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야만 했던 것이고, 또한 그 백의청년의 무공에 대해서 미처 가늠해 보지 못한 것도 하나의 실수의 원인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도상선과 도훼선이 뜻밖에도 약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순식간에 신형을 날려서 백의청년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데도 당연히 매우 놀라서 백의청년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어야 할 청 의사내 등이 전혀 얼굴에 놀라는 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근한 조소의 빛을 떠 올리며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도상선과 도훼선은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보자 일순 왠지 크게 불길하다는 예감이 들었지 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격을 도중에서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기왕에 하던 공격을 전력을 다해서 펼쳐 가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그들 두 사람이 공격해 가고 있는데 무사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도상선은 자신의 장기인 대반야장 가운데에서 가장 위력이 강하게 연마한 초식으로 공격 해 갔고, 도훼선도 역시 천불수 가운데에서 자신이 연마한 가운데 가장 위력이 있는 초식으 로 공격해 들어갔으며, 그러자 일순간에 백의청년의 주위에는 마치 해일과도 같은 기세가 바람처럼 혹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하고, 안개와도 같은 무수한 기운이 편린처 럼 무수하게 빈틈없이 사방에서 에워싸서 쇄도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 그 끔찍하고도 무서운 환상과도 같은 가공 할 무공의 위력에 경악하여 눈을 부릅뜨게 되었고, 아직도 그 가운데에서 태연한 기색으 로 서 있는 눈부신 자태의 백의청년의 모습이 순식간에 갈가리 찢겨져서 날려갈 것 같은 착각에 가슴을 졸이게 되었다. 하지만 물론 그러한 착각은 결국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고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도상선과 도훼선이 그와 같은 거대한 공세를 일으키며 공격해 들어가자 일순 백의청년은 잠시 태연히 서 있는 듯하더니 이윽고 우수를 들어서 두 사람을 향해 마치 파리를 쫓고 있는 듯이 가볍게 휘저었던 것이었다. 이때 어느새 그 백의청년의 오른손에는 작고도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는 소검(小劍)이 들려 져 있었는데, 그 작은 소검이 가볍게 허공을 휘젓게 되자 느닷없이 거기에서 우르르르릉! 하는 굉음이 울려나오며 마치 태산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위력의 기운이 그대로 빠르게 두 사람의 면전으로 파고들며 금세 두 사람이 발출했던 두 가지의 기운들을 흔적도 없이 무산 시켰던 것이었다. (……!) 도상선과 도훼선은 이것을 보자 그만 순간적으로 대경실색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앞으로 거대한 기운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지만 그만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로 그와 같은 상상을 불허하는 위 력의 검법은 그들 도액오선이 아직 구경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만일 그것에 사람이 맞게 된다면 설사 그 사람의 몸이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즉시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도상선과 도훼선은 이 순간에 비로소 청의사내 등이 조금 전에 왜 그와 같은 조소 를 얼굴에 떠올렸는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에게 제압이 된다면 틀림없이 생명을 좀더 연장시킬 수가 있겠지만 무엇 때문에 사서 백의청년에게 덤벼들어서 죽음을 자초하는가 하는 식의 비웃음이었던 것이었다. 실로 지금 이 백의청년은 자신에게 덤벼들었다는 하나의 이유를 핑계삼아 이 두 사람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고, 또한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 은 사실일 것 같았다. 그러나 기실은 그것은 사람들이 워낙에 급한 나머지 한 사람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지만, 만일 그 당시에 이 사람을 생각했었다면 도상선 등은 그리 절망하지 않 았었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손속에 사정을 두시오!" 느닷없이 은은하고도 조용해 보이는 음성이 어디에선가 들려 오더니 마악 도상선 등을 제 거하려는 백의청년의 앞을 웬 한 명의 준미수려한 약관의 서생이 가로막고 나타나는 것이었 다. ……! 사실을 말하자면 백의청년이 마악 도상선 등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는 찰나에 그 서생은 마 치 거짓말처럼 느닷없이 그 사이에 나타났었기 때문에 이 백의청년은 비단 공격을 거둘 생각도 없었지만, 기실은 공격을 거둘 여유도 없었을 것이었다. 백의청년은 느닷없이 웬 서생이 자신의 앞에 믿을 수 없는 신법으로 나타나서 말하자 다소 경악하여 눈을 크게 뜨게 되었지만, 이내 감히 자신의 검법을 맨몸으로 받으려고 달려들다 니 이게 웬 미친놈인가 하고 생각하며 얼굴에 냉소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에 그 서생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장난을 하듯이 오른손으로 동그랗 게 조그마한 원을 그리더니 이윽고 다시 그 오른손을 가볍게 휘젓자 이내 백의청년의 그 무서운 공세가 마치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이내 그것이 어느새 가공할 위력 으로 백의청년의 가슴을 향해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으악!" 비록 그 백의청년은 신형을 뒤로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에 느닷없이 공포에 젖은 듯한 경악의 비명성을 발했다. 그리고 이어 입 속으로 시뻘건 핏줄기를 한바탕 쏟아 내더니 번쩍 신형을 날려서 흡사 그 자리에 꺼려 버리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고 명암이 뒤바뀐 그러한 사태의 변화는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 가 히 경악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청의사내 등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앗, 소공자(小公子)님!" 백의청년이 순식간에 피를 거의 한 사발이나 쏟아내고 급히 달아난 이후 그들은 크게 놀라 서 그와 같이 부르짖더니 이윽고 각기 신형을 날려서 번개같이 주루의 밖으로 사라져 버리 는 것이었다. ……? 비록 도액오선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지금까지의 사건의 전개에 대해서 알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문인천상은 도액오선의 모습을 보고는 청의사내 등이 너무나도 급하게 백의청년을 쫓아가느라 도패선 등에게 조금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음을 알고는 먼저 우수를 가볍게 휘저어서 그들의 혈도를 풀어 준 다음에 다시 신형을 날려서 그 백의청년 등을 추격해 가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문득 한 사람이 문인천상의 곁으로 다가오며 이렇게 입을 열어 말하 는 것이었다.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생각하시게! 실로 그와 같은 사람들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함부로 해쳐서는 아니되네." (……?) 문인천상은 일순 그 얘기가 자신을 향해 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 려보니 과연 거기에는 한 명의 전신에 궁때가 가득하게 흐르는 중년서생(中年書生)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를 바라보며 미소하고 있었다. …… 문인천상은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그 중년서생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 궁때가 가득 히 흐르는 중년서생의 용모가 뭔가 매우 특이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중 년서생은 비록 일신에는 매우 꾀죄죄하고 때가 덕지덕지 묻엇으며 낡아서 거의 다 해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다소 먼지가 묻어 있는 듯한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기운이 번져나 오고 있었고 또한 그의 두 눈에서는 신비로울 정도로 맑은 빛이 스며나오고 있었던 것이었 다. 말하자면 이 중년의 선비는 비록 매우 가난하여 옷을 사 입을 돈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학문이 이미 경지에 이르러서 지혜의 빛이 그 얼굴에 드러날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는 것 같 았던 것이었다. 따라서 문인천상은 비록 자신이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와 같은 선비를 만나게 되자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일게 되었고, 백의청년의 뒤를 쫓아갈 생각을 이내 그만두고 그를 향해 포권하며 입을 열게 되었다. "실례지만 귀하의 존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 중년서생은 그 질문에 미소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란 그 마음이 훌륭하면 그만이지 이름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천(千)씨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네." 제36장 인연(因緣)이 있다면 만나리 천하에 천씨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많 은 것도 아니었다. 문인천상은 상대가 천씨라고 소개하자 미소하며 다시 말했다. "바로 천 선배님이셨군요. 그런데…… 실례지만 조금 전에 선배님께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 신 것은 무슨 뜻이 있으셔서 그런 것인지 소생에게 다시 한 번 들려 주시겠습니까?" 중년서생은 그 말에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말한 대로일세. 하늘의 호생지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만인을 위해서 가끔 씩 훌륭한 인재들을 내보낸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매우 신태비범하고 두 눈에 정 기(正氣)가 열 있으니 해쳐서는 안될 것이라는 말이네." (……)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선배님께서는 미리 저의 생각을 간파하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 중년서생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어떤 잘못이라도 범했다는 말인가?"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 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어찌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호생지덕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대자비의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저는 다만 제가 그들에게 몇 가지의 사실을 물어 보려고 하는데 선배님께서 굳이 잡으시니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년서생은 그 말에 일시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문인천상의 얼굴을 바라 보다가 이윽고 다소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아마도 내가 자네에게 커다란 실례를 한 것 같군. 나는 원래 그 청년의 얼굴 만을 보고 생각을 했었던것인데, 자네의 얼굴에는 과연 살기가 어려 있지 않군. 이거 내가 혹시 자네의 커다란 일을 망쳐 놓은 것이 아닌가?" 문인천상은 그가 선선하게 잘못을 시인하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큰 일이 망가졌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인데 다시 생각해 봐야 무슨 이득이 있겠습 니까? 다만 저는 기왕에 선배님과 같은 분을 뵈었으니 함께 술이나 한 잔 했으면 하고 바 라는 것입니다." "술?" 중년서생은 일시 눈을 휘두윽래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윽고 문인천상의 의도를 파악한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그렇군. 자네는 역시 나와 술을 한 잔 할 만한 사람이네. 자, 그럼 내가 오늘 한 잔 사도록 하지."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술은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중년서생은 문득 그의 옷차림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는 돈이 많을 것이니 술을 한 잔 사는 것도 전혀 부담이 없겠지."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저는 선배님께 이렇게 한 잔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 할 것입니다." 중년서생은 그 말에 껄껄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자네가 오늘 나에게 지나친 금칠을 하는군. 하지만 굳이 자네가 사겠다고 하니 내가 어디 자네의 술을 한 잔 얻어 마셔 볼까?"중년서생이 그렇게 수락을 하자 문인천상은 이어 그를 한쪽의 비어 있는 하나의 탁자로 안내했다. 엽노와 화노는 일찌감치 그러한 광경을 보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얼른 점원들을 불러서 그쪽으로 술과 안주를 가져다 드리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각기 탁자를 앞에 두고 마주보고 앉자 중년서생이 문득 문인천상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어느 정도의 학문을 닦은 모양인데 그럼 우리 음식이 나올 때까지 약간 의 학문에 관한 얘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 음…… 자네는 혹시 인간의 대도(大道)에 대해 서 생각해 둔 바라도 있는가? 이를 테면 공자의 사상이나 노자의 도덕이론 등에 대해서 어 떻게 생각하나?"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한 뒤에 미소하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들의 말에는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중년서생은 문인천상의 대답이 불분명하자 다소 눈살을 찌푸리더니 대꾸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공자의 현실 참여의 사상과노자의 무위자연적인 은거생활을 둘다 찬성한 다는 말인가?"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것이 어떤 사상이든간에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면 일단은 한 번쯤 은 재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께서는 혹시 다른 의견이라도 계십니까?" 중년서생은 문인천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나는 사실 그 두 가지의 사상을 하나로 혼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네."문인천상은 의아해 하 며 물었다. "두 가지의 사상을 하나로 혼합하신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중년서생은 다소 심 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를 테면 무위자연적인 상태에서의 현실 참여라는 것이네. 즉, 말하자면 공자의 현실 참 여 사상은 그 대표적인 덕목이 인(仁)이라고 하지만, 대체 현실의 세상에서 정말로 그 인 을 실천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오로지 산 속에 묻혀서 현실의 세상을 도외시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일단 무위자연적인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현실 참여에 접목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세!" "……!" 문인천상이 묵묵히 듣고 있으면서 잠시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중년서생은 다시 그를 향해 질 문을 던졌다. "자네는 나의 그러한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가?"문인천상은 고개를 들어 미소한 뒤에 대답했다.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년서생은 이에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일리가 있다고? 역시 자네의 눈에는 별볼일이 없는 것이라는 말인가?"문인천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별볼일이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훌륭한 제안이라고 해도 일단 그 내실이 없다면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내실이라는 것은 역시 대자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년서생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말한 방법에는 대자비의 마음이 없을 것이란 말인가? 수행에 의해 무위자연의 도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그와 같은 마음이 없겠는가? 내가 굳이 무위자연의 도 를 현실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누군가가 천하의 만민을 위해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우선 다른 것을 젖혀두 고라도 대자비의 넓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는 내실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 대자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수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행자는 모두 그러한 대자 비의 마음이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자비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수행자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온갖 신통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신선(神仙)들이라고 해도 모두 대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 니지 않겠습니까?" (……) 중년서생은 잠시 묵묵히 문인천상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윽고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비록 대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만민을 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만민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자네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사실 천하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대자비의 마음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또한 그들은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단은 자비심을 배운 다음 에 살아 가라고 권유한다면 그들은 결코 그것에 응하지 않을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선배님 의 그러한 질문에는 왠지 쉽게 대답할 수가 없군요." 중년서생은 그 말에 일시 껄껄 웃었다. "알고 보니 자네는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제법 논리가 정연한 편이로군. 피할 때는 적당히 피할 줄도 알고. 핫핫핫, 내가 자네와 같은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가치가 있 는 일었던 것 같네." 이때 점원들이 마악 술과 안주들을 그들의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물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중년서생은 이윽고 술병을 들어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그 술잔을 들어서 는 단숨에 비운 다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 의아 해 하며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째서 벌써 일어나시는 것입니까?"중년서생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자네가 말했던 대로 자네가 사 주는 술을 한 잔 마시게 되었네. 그렇게 했으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 "핫핫핫, 세상의 사람들은 구태여 쓸데없는 구속과 격식에 빠져서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 가 고 있는 것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항상 필요한 일만을 하는 법이네. 우리가 일단 함께 자 리를 하고 얘기를 나누었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술까지 마셔야 할 것은 뭐가 있겠는가? 자, 그럼 우리는 다음에 만나기로 하세!" 문인천상은 일순 그의 소탈한 태도에 더욱 감복하여 뒤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주루의 밖으 로 걸어 나가는 그의 뒤를 향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다시 만나는 날이 있겠습니까?" 중년서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을 하며 이내 주루의 밖으로 휑하니 사라져버리고 말았 다. "만나는 것이야 서로 인연(因緣)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지……"(……) 문인천상은 한참 동안 사라져 가는 중년서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진아라 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라버니,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문인천상은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글쎄…… 아마도 세외고인(世外高人)일지도 모르는 일이지."진아라는 그 말에 샐쭉해져서 혀를 불쑥 내밀었다. "흥! 오라버니는 항상 무슨 비밀을 지니고 계신 분인 것 같애. 항상 내 질문에는 글쎄…… 하고 속을 보이시지 않으니 말이야.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처럼 속에 비밀을 많이 접어 두고 사시는 걸까?" 문인천상은 그 말에 미소하며 동문서답식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표정을 짓다가는 습관이 되어서 시집도 못 가게 될 것인데, 그래도 좋 다는 말이냐?" 진아라는 즉시 대답했다. "흥! 나는 이미 오라버니께로 시집을 가기로 작정을 했는데 그런 쓸데없는 신경을 무엇하 러 쓰나요? 설마 오라버니가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문인천상은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런 습관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네가 어찌 나에게 시집을 올 수가 있겠느 냐? 만일 내가 너와 혼인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바로 할아버지와 어린애가 혼인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라고요?" 진아라가 눈을 휘둥그래 뜨자 문인천상은 당할 수가 없다는 듯이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버 렸다. 그런데 문인천상이 마악 도액오선의 근처에 이르렀을 때 문득 그 주위에서 괴이하고도 좋 지 않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혈도가 풀려서 멀쩡하게 돌아온 도수선 등이 머리가 시원스럽게 깎여서 대머 리가 되어 버린 도패선을 가운데에 두고 다시 뭐라고 열을 올리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 고 있었다. 이때는 점원들이 제법 많은 음식들을 날라와서 그들의 탁자 위에 쌓아 놓았으나 그들은 기이하게도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계속해서 도패선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이에 도패선은 절로 얼굴이 붉어져서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문인천상은 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의아해져서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아니, 여기에 다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그러자 왠지 도패선은 더욱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었고, 마치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도훼선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일은 생겼으나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으니 골치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사자는 아예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어떻게 그 일을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인천상은 내심 더욱 의아해져서 다시 물었다. 이에 도수선이 나서서 설명해 주기 시작했 는데, 그 사정은 대강 이러했다. 이 도패선은 아까 그 청의사내가 자신의 머리를 모두 잘라 버릴 때에 그만 너무나도 심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어서 그만 바지에다 큰 것을 실례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사태가 해결되 고 나서 사람들이 자꾸만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도 도패선은 계속해서 자신은 결코 실례를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자신이 실례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 면 나중에 실로 나머지 도액사선에게 무수하게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로 이 도액오선이 어떠한 인물들이던가? 도수선을 비롯하여 도훼선 등이 나서서 음식을 먹는 것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도패선이 실례를 한 것에 대해서 추궁 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옆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그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어 쩔 수 없이 우겨대는 도패선의 상황도 실로 딱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 그의 처지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사가 끝 났으니 차례로 안으로 들어가서 쉬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는 자신은 먼저 미리 예약을 해 놓은 별채로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 × × 이미 밖의 정경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여서 밤이 깊게 무르익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문인천상은 엽노와 화노의 인도를 받으며 주루를 나서서 별채로 향했는데, 문득 진아라가 그의 뒤를 따라와서 한쪽 팔에 매달렸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와 함께 별채에서 자도록 하겠어요."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귀찮게 나와 한 방에서 자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지. 별채에는 좋 은 방이 많이 있을 테니까." (……) 진아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할 테니 나를 별채에서 내쫓지만은 말아 줘요."문인천상은 웃으며 말 했다. "나는 원래 너를 좋아하는데 왜 내가 너를 내쫓겠느냐?"(……) 이 별채는 비록 시골의 객점에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멋을 갖추고 있었고 가옥의 구조나 장식물들이 깨끗하고 운치가 있어 보였다. "따로 음식을 이곳으로 보내 드릴까요?" 문인천상이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화노가 그렇게 묻자 문인천상은 고 개를 가로저으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신경쓰지 말고 두 분은 주루의 자리가 파한 다음에 그 화산파의 사람들의 방을 신경써 주시고 편히 주무시도록 하십시오."화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겸 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참, 주인께서는 이제 저희들의 주인이 되셨으니 앞으로는 그와 같이 말을 높이지 마시고 하대를 해주십시오. 저희들은 그래야만 마음이 편합니다."하지만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분은 이미 나의 친인과도 같은 분들인데 어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나는 별 로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데 오히려 두 분은 너무나도 그 일에 마음을 쓰시는군요. 저는 편 한 대로 하겠습니다." …… 화노와 엽노가 물러가자 이윽고 문인천상은 별채의 소청에 들어가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 내는 홍촛불 아래의 실내를 둘러보면서 탁자 앞에 앉아서 진아라에게 말했다. "아라! 사실 네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도 별로 너를 돌봐 줄 시간도 없으니…… 그래 그간에 특별히 나에게 불만을 느꼈던 점은 없었느냐?" 진아라는 탁자 앞에 안지 않고 선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는 별로 불편했던 점은 없었어요. 다만 오라버니가 나에게 소홀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 을 알고 계시기만 하면 저는 서운하지 않아요."문인천상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야말로 어떤 말보다도 무서운 말이구나. 좋다.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 아라. 만일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힘써서 이루도록 해주마."(……)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저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뿐이예요. 만일 어떤 소원이든간에 오라버니께서 들어 주시겠다 고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말씀드리겠어요."문인천상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다 가 대꾸했다. "만일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고 또한 내가 능히 할 수가 있는 일이라면 승낙을 해주도 록 하마." 이에 진아라는 즉시 눈빛을 밝게 빛내며 말했다. "그 일은 결코 도의에 어긋난 일도 아니고 또한 오라버니께서 능히 하실 수가 있는 일이예 요. 정말로 승낙을 하시는 건가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어서 무슨 소원인지 말해 보아라!" 진아라은 이에 매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그것은 바로 제가 오라버니께 시집을 가는 가예요. 오라버니는 이미 승낙을 하 셨으니 장차 저를 배우자로 맞이해 주실 것이죠?"(……)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이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된다." "……!" 진아라는 그의 말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이 안색을 파랗게 물들이다가 이윽고 길게 숨을 내 쉬며 물었다. "왜…… 왜 안된다는 것이죠? 그건…… 그건 도의에도 어긋나지 않고 또한……" 그런데 문인천상이 문득 그녀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진아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이미 너도 알고 있다시피 너의 돌아가신 부모들께서 너를 안심하고 도액오선에게 맡겼을 때에는 역시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바라는 바가 있으셨을 것이다. 즉 그것은 너를 앞으로 잘 자라나게 하여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는데, 따라서 너는 나에게는 마 치 친동생과 같은 것이고 결코 혼인 상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네가 재산을 원한 다면 나는 네가 시집을 가게 될 때에는 나의 전재산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친동생과 같 은 것이라고요?" 진아라가 일시 다시 충격을 받은 듯이 눈물을 글썽이자 문인천상은 다시 그녀를 향해 말했 다. "그렇다. 그러니 너는 좀더 다른 소원을 말하는 것이 어떠냐?"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 득 화가 나서 대꾸했다. "좋아요. 저는 방금 생각났는데…… 저의 무공을 오빠처럼 높게 해주세요. 호호, 그런 일은 하실 수가 없나요?" "아라!……" 문인천상이 달래듯이 말하자 진아라는 두 손을 들어서 눈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다 소용없어요! 제가 무슨 돈이 탐이 나서 오라버니와 혼인을 하려는 것인 줄로 아나요? 나는 결코 오라버니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어요! 돈도 무공도 다 필요가 없다는 말이예 요. 내가 그렇게 싫으시면 나를 버리시면 될 것이 아니예요?……" 말과 함께 진아라는 문득 신형을 돌려서 한쪽의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 얼른 뒤따라가서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이내 마음을 돌리고 계속 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 진아라는 부모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공동산에서 공동파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래도 구김살이 거의 없이 자라 왔는데, 지난날 문인천상이 공동산에 가서 얼마 동안 머무르는 사이에 함께 지내다가 정이 들고 말 았던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물론 이 진아라가 정마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문인천상은 아직 자신의 처지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감히 귀여운 여동생과도 같은 진아 라를 어떻게 자신의 반려자로 삼아서 고생을 시킬 수가 있겠는가? 문인천상은 따라서 나중 에 좋은 청년을 만나게 되면 그녀에게 청혼을 하도록 하여 두 사람을 혼인시키고 따로 재산을 떼어 주어서 한평생을 여유롭게 살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 아마도 진아라는 건넌방으로 뛰어들어가서 소리를 죽여서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새 잠이 들은 것인지 기척이 들려 오지 않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잠시 동안 그렇게 앉아서 깊은 상념에 잠기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서 소청의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안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안방의 문은 약간 열려져 있었고 또한 그 내부에는 이미 점원들이 켜 놓고 간 것인지 한 자루의 굵은 홍촛불이 타오르면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무심코 하는 동작으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다음에 다시 문을 닫고서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침상 위에 몸을 눕히려고 했다. 그런데느닷없이 그 침상 위에 한 사람 이 조용히 걸터앉아서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인천상은 다소 놀라 는 표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당신은 언제 이곳에 왔소?" …… 제37장 천륭무가(天隆武家) 지금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바로 악채릉이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창문을 통 해서 들어온 모양이었는데, 이미 그 창문은 잘 닫혀져 있는 상태였다. 문인천상이 그렇게 묻자 그녀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이면서 대 답했다. "그녀를 곁에 두게 되니 이제는 제가 보기가 싫어졌나요?"지금 악채릉이 그녀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진아라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말과 함께 문인천상이 그녀의 손을 잡아서 몸을 일으켜 안으려고 하자 이내 그녀는 그 손을 가볍게 뿌리치더니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이 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저는 오히려 별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살려고 하는 것이죠?" 문인천상은 이내 그녀의 손을 뇌두고 이제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미소하며 입을 열 어 대답했다. "당신은 오늘 갑자기 질투심이 많은 여자가 된 것 같군. 그래 여동생을 대하는 마음과 배 우자를 대하는 마음과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당신은 아직 모른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나를 배우자로 생각하고 있나요?" 문인천상은 즉시 그녀의 두 뺨을 잡아서 깊이 입맞춤을 한 뒤에 입을 열어 말하고 다시 입 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이오……" (……) 악채릉은 처음에는 다소 몸과 마음이 굳어져 있어서 그의 입술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내 그 녀는 그 열기에 휩싸여서 더욱 적극적으로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두 사람은 잠시 후에 너무나도 사랑의 열정에 취한 나머지 함께 침상 위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데 악채릉은 문득 그렇게 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게 되어서 문인천상의 품속에서 빠 져나와서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안돼요…… 나는 지금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문인천상은 침상 위에 누운 채로 그녀의 한쪽 다리를 애무하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오?" 이때 악채릉은 이미 다시 깨끗한 백색의 의삼으로 갈아입은 상태여서 아름답기 짝이 없었 는데, 일순 그의 손길을 느끼고는 몸을 가볍게 흠칫했으나 이내 편안한 마음이 되어서 구 태여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그녀의 몸을 더욱 깊이 애무해 가기 시작하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오? 혹시 그것은 내가 당신을 배우자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점차로 몸이 뜨거워지고 수치감이 들어서 몸을 움츠리게 되었으나 안색이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그래요. 만일 당신이…… 당신이 정말로 나를 배우자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일을 하나도 남 김없이 가르쳐 주어야 해요." (……) 문인천상은 이내 그녀가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를 파악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또 무슨 얘기라고…… 그런 얘기야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 그건 그렇게 당신의 몸은 좀 어떻소?" 문인천상의 손길이 그녀의 다리를 따라서 속치마 속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더욱 얼굴을 붉 히며 그의 손을 슬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이러지 말이요. 나의…… 나의 몸은 이제는 괜찮아요. 그리고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 니고…… 어서 그 얘기를 해주세요." 문인천상은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밀어내자 이내 몸을 일으켜서 다시 그녀의 옆자리에 앉 았으나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당신의 몸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면 나에게 달리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오." 악채릉은 그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싫지는 않았으나 자신 의 목적을 생각하고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저의 몸은 이제는 좋은 외상약을 발라서 거의 아물어 가고 있는 중이니 정말로 걱 정할 필요가 없어서…… 어서 그 얘기나 해주세요."문인천상은 그제서야 정색을 하고 그녀 에게 물었다. "대체 어떤 얘기를 해달라는 말이오?" 악채릉은 말했다. "당신께서 저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 그러니까 공동파와의 관계와 당신이 공동파 에서 얻은 무공들, 그리고 도액오선과 그 작은 계집아이 등에 관해서 얘기해 주세요." 문인천상은 그녀의 말에 조목조목 필요한 부분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말 을 받았다. "보아하니 당신은 이미 많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군. 그러나 사실 나도 그 얘기는 거저 해 줄 수가 없는 입장이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나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나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가라니? 나는 다만 당신이 내가 의아해하는 사항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로 말해 주기만 을 바라고 있는 것이오." 악채릉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의 얘기를 공평하게 교환하자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다고 할 수가 있소." 악채릉은 물었다. "그럼 지금 당신이 듣기를 바라고 있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죠?"문인천상은 대답했다. "내가 듣기를 바라는 것들은 우선 당신의 비밀에 관한 일들과, 그리고 이번 사건의 원흉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밖의 상황들이오."악채릉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나의 비밀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겠나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이 며 대답했다. "당신은 나의 배우자나 다름이 없는 사람인데 어째 내가 그런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것은 당신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사정이 있어서 그와 같은 얘기는 해줄 수가 없어요. 이미 그 말은 전에 당신에게 말 해 드렸던 것이 아니었나요?" 문인천상은 되물었다. "그렇다면 나의 얘기는 들어도 좋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머지 않아서 당신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예요. 그러므로 당신은 굳이 나의 얘기를 들 을 필요가 없을 거예요." 문인천상은 다시 되물었다. "그럼 그러한 당신이 구태여 나의 얘기를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다는 말이오?" (……) 악채릉은 이에 묵묵히 한참이나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그럼 좋아요. 나는 나의 비밀에 관해서는 말할 수가 없지만 그 대신에 한 가지의 사실을 알려드리기로 하죠.그러면 되지 않겠어요?"문인천상은 물었다. "그럼 어떤 얘기를 대신해서 해주겠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이를 테면…… 아까 주루에서 도액오선과 함께 싸움을 벌였던 그 사람들의 신분 같은 것이 죠." 문인천상은 이에 다소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럼 당신은 그 백의청년의 신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대꾸했다. "만일 당신이 나의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드리 도록 하겠어요."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소. 기왕에 당신의 비밀에 대해서는 들을 도리가 없는 것 같으니 우선 그 얘기나 듣도 록 합시다. 그 얘기를 들려 주면 나의 얘기를 모두 해주도록 하겠소." 이에 악채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다가 이어 말했다. "그들은 바로 천륭무가(天隆武家)에서 온 사람들이예요."문인천상은 이에 놀라서 다시 물었 다. "아니, 천륭무가라면……? 바로 중원의 그 천륭무가 말이오?"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로 그 신주팔패 가운데의 첫 번째인 천륭무가이죠. 그리고 기실 당신의 선친을 제거한 원흉 집단 역시 천륭무가예요." "……" 문인천상은 악채릉이 일시에 자신의 원수에 대해서 말해 주자 잠시 멍하니 말없이 앉아 있 었다. 악채릉은 그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당신은 저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요?" 문인천상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당신의 말은 사실이오?" 악채릉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어요? 사실 저도 이번에 천륭무가의 지시를 받고 아버지와 함께 주운양 등을 도와주러 왔었던 것이었죠. 천륭무가는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지 고 있는 문파이기 때문에 주운양 등이 그토록 믿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문인천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나도 그쪽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 해 볼 때 왠지 그쪽으로 의심이 갔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대체 아까의 그들이 바로 천륭무 가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어째서 그런 것이오?" 악채릉은 웃으며 대답했다. "기실 천륭무가에서는 내가 전에 은근히 얘기를 했듯이 천하를 자신들의 세력으로 두기 위 해 거대한 계획을 짜고 있는 중이예요.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돈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고, 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을 털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당신 의 선친의 집도 포함되었었던 것이예요. 물론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성공하여 많은 돈을 구 할 수가 있었지만 당신의 선친은 상당히 영리하여 쉽게 당하지를 않았죠. 따라서 천륭무가 에서는 이번에 다시 우리를 보내서 만일 돈을 찾을 수가 없다면 기밀의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당신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강호상에서 정의의 집단으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비리가 드러나게 되면 비록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해도 강호인들의 비난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예요. 따라서 그들은 이 일의 기밀을 유지하는 일이 워낙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를 보냈지만 다시 보다 믿음직스러운 사람들을 은밀하게 뒤쫓게 하였는데, 기실 아까 당신이 보았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죠." 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들은 대체 누구였소?" 악채릉은 대답했다. "그 백의청년은 바로 현재의 천륭무가의 가주인 백무검(白武劍)의 손자요, 소가주인 백검남 (白劍南)의 아들인 백운기(白雲麒), 백 소공자이죠. 그리고 그 나머지 한 명의 여자와 세 명의 사내들은 바로 그 백 소공자의 주위를 호위하고 다니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고 해 서 각기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라고 불리우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천륭무가의 팔대절학(八大絶學)이라고 불리우는 무학들 가운데에서 하나씩을 연성하였는데, 그것은 즉 금삽수(金揷手), 쌍류금(雙流金), 여영수형퇴(如影隨形腿), 일선지(一線指)이죠." 문인천상은 아까 그들이 무공을 전개하는 광경을 보았었기 때문에 대강은 그 무학의 유형 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백의청년이 전개했던 무학도 역시 천륭무가의 것이었소?" 악채릉은 대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펼쳤던 것은 바로 천륭무가의 팔대절학 가운데에서 가장 위력 이 강한 무극검해(無極劍解)라고 하는 것일 거예요."(……?) 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아까의 그 중년서생은 어떤 사람이오?" 악채릉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잘 몰라요. 아까 그와 당신이 서로수인사를 나누지 않았나요? 그는 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던가요?" (……) 정말로 악채릉은 그 천가라는 중년서생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혹시 천륭무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 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악채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요. 가장 확실한 것은 아까 그 백운기(白雲麒), 백 소 공자가 사대천왕을 데리고 나타났던 것은 바로 도액오선을 비롯한 당신들을 죽이려고 했었 던 거예요. 아마 우리도 제거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다만 그들은 아직 당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었던 거죠. 참, 당신은 그때 그 백 소공자를 죽인 건가요? 그는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 아니었나요?"문인천상은 고 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며, 기실 그다지 깊은 중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소. 그건 그렇고…… 그 렇다면 대체 그 천륭무가에서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월영인을 전개하여 나의 선친을 살해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오? 그 월영인은 이미 알다시피 일월신교의 독문의 무학이 아니오?" 악채릉은 그 말에 오히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은 좀 딱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군요. 실로 천륭무가쯤 되면 그와 같은 무공을 배 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일월신교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포섭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 나요? 만일 당신이라면 그와 같은 기밀을 요하는 일에 그들의 무학을 사용할 것 같은가 요?" 문인천상은 다소 놀라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월영인을 사용했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고개를끄덕였다. "그래요. 이미 그에 대한 얘기는 천륭무가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일이죠. 원래 일 월신교는 일명 마교(魔敎)라고 해서 그 악명이 천하에 퍼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마교 의 마공(魔功)을 사용하여 당신의 선친을 살해하게 되면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게다가 복잡하고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누가 감히 일월신교를 상대로 복수를 하려고 생각이나 하겠어요? 당신과 같은 실력자라면 또 모르지만."문인천상 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은 실력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겠지……" 악채릉은 웃으며 말했다.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을 보니 당신은 그리 바보는 아닌 모양이로군요?"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바보라고 할 수가 있소?" 악채릉은 다시 웃으며 물었다. "아니, 그건 어째서죠?"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당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뻔했었으니까." (……?) 악채릉은 일순 크게 의아해 하다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어처구니가 없어 하며 물 었다. "아니, 도대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말한 원흉이 바로 천륭무가라는 그 말 말이오. 나는 이제야 그렇지 않다는 이유를 찾게 된 것이오." 악채릉은 더욱 어이가 없어 하며 물었다. "그럼 그 이유라는 것은 무엇이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되물었다. "우선 당신의 얘기부터 듣고 봅시다. 다시 말해 주시오. 당신의 얘기는 사실이었소, 아니면 거짓이었소?" 악채릉은 일시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일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여태 나의 말을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믿고 있는 척했군요? 당신은 사실 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로군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물론 당신을 사랑하지만 워낙에 이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그저 단순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은 더러 나를 속이기도 했던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당신에게 속이는 것이 없어요. 내가 나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 려는 이유도 사실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나요?" 문인천상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밤도 나와의 사랑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쪽의 그 이익을 위 해 나의 얘기를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오?"악채릉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일순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두 눈을 직시하며 되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내가 다만 당신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문인천상은 의아해졌다. "아니, 그럼 당신은 나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온 것이었다는 말이오?"악채릉은 그만 심하게 억울하고 가슴이 아파 오는 것 같아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대답했다. "나는 사실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당신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아내려고 온 것이예요.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아가지고 돌아간다면 우리의 행동이 다소 편해질 것 같기 때문에…… 하 지만 내가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 문인천상이 묵묵히 바라보자 그녀는 울면서 다시 말했다. "나는 사실 정말로 당신을 사랑해요. 천하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은 아버 지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를 좇는 것은 도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문인천상은 문득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나의 말대로 나와 함께 혼인을 하면 되지 않겠소?"악채릉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앞으로 당신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어질 것인데, 언제라도 그때까지는 당신에게 붙어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나는 따라서 아버지의 지시를 핑계로 하여 당신에게 이렇게 왔던 거예요. 만일 내가 당신 을 보고 싶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나는 지금 사실 당신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은 정말 나의 마음을 모르겠나요?" (……) 문인천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한 손을 잡으며 심각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그 말이 사실이었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의 말대로 천륭무가가 바로 당신의 선친을 살해한 원흉이예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지시를 내렸었겠어요? 이것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 었던 것으로 틀림이 없는 사실이예요. 만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앞으로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또한 영겁토록 겁화(劫火) 속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문인천상은 악채릉이 그와 같은 끔찍스러운 맹세까지 하자 그만 탄식을 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틀림이 없는 사실이구려. 하지만 내가 방금 전에 생각한 이 의문은 사실 기이한 것이오." 악채릉은 물었다. "당신이 느낀 의문은 어떠한 것이었죠?" 문인천상은 천천히 긴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신은 아까 천륭무가에서 세력을 넓히기 위해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하지만 실은 그와 같은 얘기는 일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오. 물론 당신들은 그들에게서 어떤 세뇌를 받 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던 그것은 다소 이상한 감이 있는 것이오." 악채릉은 그 말을 듣자 일순 거기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 리며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상하다구요? 뭐가 그렇게 설득력이 없다는 거죠?"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원래 천륭무가에서 만약 세력을 넓히려고 한다면 그저 한 번 깃발을 세우고 나서 천하의 뜻있는 부자들에게 협조를 구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광명정대하게 많은 돈을 모집할 수가 있을 것이오. 아니 그 외의 다른 좋은 방법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며, 구태여 한꺼번에 그렇 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그런데 그들은 천하의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목적으로 그와 같은 많은 돈을 천하에서 일시적으로 은밀하게 사악한 방법으로 거두어들였으니 그것은 어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소? 그 일은 오히려 잘못하면 크 게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문파에서 그러한 어이가 없는 모험을 할 리는 없는 것이오. 그렇지 않겠소?"악채릉은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다는 거죠?"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내 말의 결론은 그러니까 두 가지로 집약될 수가 있소. 즉 하나는 원흉이 천륭무가가 아 니었다는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만약에 천륭무가가 원흉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들에게 다 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오."(……) 악채릉은 묵묵히 한참 생각하다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흉인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예요."문인천상은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천륭무가에서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대체 그 이유는 어떤 것 이었을까?" 악채릉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럼 천륭무가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하면 그들을 응징할 것인가요?"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나는 물론 선친의 죽음을 묵과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일단은 천륭무가에 가 봐야 할 것이 오. 하지만 만일…… 만일 그들의 의도가 좋은 것이었다면 가볍게 일을 처리할 것이고, 또 한 의도가 나빴다고 해도 역시 앞으로 좋게 해 나갈 문파라면 역시 가볍게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오. 하지만 만일 그 두 가지의 경우 가운데 하나라도 포함되지 않는다면 나는 조금 무겁게 일을 처리할 것이오." 악채릉은 다시 물었다. "당신이 지금 말하는 무겁게 처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죠?"문인천상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소. 그것은 그때 가 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오."(……) 악채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렇겠군요. 나는 당신이 그때 가서 좀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게 되 기를 바래요. 그건 그렇고…… 이제 당신은 나에게서 두 가지의 대답을 충분히 들었을 테 니 이제는 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차례가 아니겠어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물었다. "그럼 당신은 다시 듣기를 원하는 내용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해 주겠소?"악채릉은 대답했 다. "내가 듣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모두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바로 당신과 공동파와의 관계이고, 둘째는 당신의 무공의 근원, 그리고 셋째는 바로 당신의 수하 들인 도액오선의 내력과 그 작은 아가씨의 내력이예요. 당신은 물론 이 세가지의 얘기를 나에게 성실하게 말씀해 주시겠죠?"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 제38장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문인천상은 악채릉을 향해 다시 물었다. "내가 어떤 얘기부터 해주었으면 좋겠소?" 악채릉은 대답했다. "순서대로 얘기해 주세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럼 차라리 내가 열두 살 때 집을 떠나서 천하를 떠돌기 시작했을 때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군. 당신도 이미 내가 열두 살 때부터 천하를 떠돌기 시작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 아니오?" 악채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은 그때 주운양의 흉계(兇計)를 미리 알고 있었나요? 아마도 그래서 잠시 달 아났었던 것이었겠죠?"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시 잘은 모르젬도 아끼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비록 내가 그녀를 매우 아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행동까지 했다고 하 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오? 자! 그러한 일은 이제 지나간 것이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 소?" 이에 악채릉은 내심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반발을 하려다가 문득 그와 맞닿아 있는 부분 에서 극렬한 쾌감이 번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절로 입이 딱 벌여졌다. "아아…… 당신은 정말……" 문인천상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뭐가 어쨌다는 말이오?" 악채릉은 마치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겨우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로 짓궂지만 그러나……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 는…… 사람이예요. 정말……" 방 안의 홍촛불은 가끔씩 파도처럼 흔들렸으며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 × × × 다음날 아침부터 엽노와 화노는 가급적이면 빨리 장원에 가기 위해 서둘렀고, 따라서 일행 은 아침식사를 일찍 끝내고는 곧바로 다시마차를 타고 남쪽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 했는데, 엽노와 화노가 이미 마른 음식 등을 준비해서 점심식사를 마차 안에서 대강 때우 게 했기 때문에 일행은 이윽고 점심때가 조금 지난 오후 무렵에 드디어 문인가의 장원에 다 시 돌아가게 되었다. 며칠 전에 비해서 장원 내의 모든 것들은 거의 변한 것이 없고 그대로인 것 같으나 기실 요 며친간의 변화는 수년 사이에 가장 격심했던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일단 장원 내에 도착하자 엽노와 화노에게 즉시 사람들을 인솔하여 손님들을 편안하게 모시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자신은 또한 주운양 등을 이끌고 장원 내의 가 장 커다란 대청으로 가서 주운양에게 그간의 장원 내의 상황과 사업 관계 등을 캐묻기 시 작했다. 주운양은 이미 자신들의 처지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판단한 듯이 그러한 사항 에 대해서는 있는 대로 술술 불어대는 편이었고, 문인천상은 한쪽에 따라와 있는 화노에게 그것들을 일일이 받아 적으라고 했다. 그렇게 일단 장원 내의 대소사에 대해서 인수인계가 끝나게 되자 문인천상은 주운양 등을 대청의 지하실에 가두어 놓게 한 뒤에 문인천상은 모든 일들을 화노와 엽노에게 일임한 다 음에 악씨 부녀를 상방으로 안내해서 쉬도록 해주고 이윽고 자신은 도액오선과 함께 전에 머물던 누각으로 향했다. 그 누각에는 많은 하인들이 모여들어서 다시 장원을 되찾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표정들 이었고, 미리 엽노와 화노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열렬하게 환영을 하는 모습들 이었다. 진아라는 이때 다소 어색하고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전날 밤에 문인천상이 우 려했던 바와는 달리 오늘 아핌부터 그녀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가끔씩 문인천상 에게 공손히 말을 걸기도 하고 계속해서 그의 뒤를 따르면서 도액오선과도 간혹 즐거운 대 화를 나누기도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의 혼자 있을 때의 표정만 아니라면 오히려 그녀에게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엽노와 화노는 그야말로 열의가 대단하여 일단 장원에 돌아오게 되자 동분서주하여 신형을 움직이며 장원을 새롭게 정화시키기에 힘을 다했는데, 문인천상은 오늘은 모두가 편안하게 쉬도록 하고 내일 정오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성대한 주연을 베풀라고 지시했 다. 엽노와 화노는 이에 과거 주운양 등이 사용했던 건물들을 새롭게 개조하고 뜯어고치며 새 주인인 문인천상이 기거하기에 편리하게 분위기를 바꾸는 모양이었는데, 문인천상은 내심 그들의 열의에 매우 만족한 느낌을 받으며 도액오선, 진아라 등과 함께 누각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일찍이 문인천상은 다시 엽노와 화노를 불렀는데, 이미 그의 옆에는 진 아라가 따르고 있었고, 도액오선은 어젯밤에 너무나도 많은 음식을 먹고 또한 술에 대취하 여 아직도 골아떨어져 있는 중이었으므로 보이지 않았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두 사람이 그렇게 인사를 공손하게 올리자 문인천상은 웃으며 답례했다. "두 분께서도 편안하게 잘 주무셨습니까?" 화노가 대답했다. "저희들은 어젯밤에는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 거의 잠의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잠을 편안하게 잔 것보다 열 배는 행복한 기분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문인천상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장원의 일을 맡아 보시는 일이 그렇게도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골치가 아 플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꺼번에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면 건강을 해치는 수가 있을 것이니 앞으로는 쉬어가면서 하시기 바랍니다." 화노와 엽노는 즉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명심해서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문인천상은 이제는 성실한 충복으로 변한 두 노인들을 미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그 들을 향해 입을 열어 물었다. "참, 내가 지금 무슨 이유로 두 분을 갑자기 불렀는지 알고 계시오?"화노와 엽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혹시 오늘 낮의 연회에 특별히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문인천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낮의 연회는 두 분이 알아서 준비하십시오. 저는 그 일 때문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일을 보여 드리기 위해 두 분을 불렀던 것입니다."화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희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입 니까?"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마악 대답하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서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진아라 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라, 너는 혹시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문인천상는 이때 표정이 과 거와는 달리 매우 침착하고 차분하여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는 묵묵 히 듣고 있었으나 이윽고 문인천상이 묻자 즉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것은 혹시 선친의 보물을 다시 찾으시려는 것이 아닌가요?"(……!) "아니,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진아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만 약간 생각을 해보니 그럴 것 같았으므로 말씀드렸던 거예요. 헌데 그것이 맞는 말이라니 다행이로군요." 문인천상은 진아라의 태도가 다소 변한 것을 보고 잠시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이윽고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실로 너의 말과 같이 나는 지금 선친께서 남기신 보물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서 함께 가 보도록 하자!" 말을 마치자 문인천상은 먼저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아라와 두 노인은 즉시 그 뒤를 그림자처럼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 문인천상은 바로 며칠 전에 걷던 길을 통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 길은 바로 풍우정(風雨亭)으로 가는 길이었고, 바로 그곳에서 문인천상은 처음으로 악씨 부녀를 만날 수가 있게 되었었다. 실로 그렇게 해서 이번의 사태는 급전직하로 달라지게 되 었던 것이었지만, 아무튼 오늘 문인천상이 느닷없이 다시 그 풍우정으로 향하고 있는 이 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선친의 유물을 찾기 위함인 것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의 단풍나무들은 더욱 시뻘개진 잎을 드러낸 채 안개 와도 같은 이슬방울들을 머금고 있었고, 오늘 아침의 이 새벽공기는 유난히 상쾌한 것 같 았다. 문인천상은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는 이들이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잠시 걷 다가 이윽고 왼손으로 진아라를 그리고 오른소느로는 두 노인을 한꺼번에 잡고는 순식간에 신형을 날려서 그 풍우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 풍우정(風雨亭)! 그 정자는 늘상 보아도 오랫동안 풍상에 시달린 듯이 스산해 보이고 또한 고색창연하며 혹은 가장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는 곳이었다. 과거 문인천상의 선친은 특별히 이 보잘것이 없어 보이는 풍우정의 부근의 경치를 매우 좋 아하여 가끔씩 들르곤 했었다고 했고, 게다가 그 풍우정이라고 씌어 있는 현판의 글씨도 역 시 문인천상의선친이 직접 지어서 쓴 글씨였다. 문인천상은 우선 세 사람과 함께 풍우정의 앞에서 신형을 내려세우고는 풍우정의 앞에서 과거의 선친의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한 현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신형을 돌려 다시 걷 기 시작했다. 선친이야 항상 호화로운 다른 건물들에 비해서 유난히 꾸밈이 없는 이곳을 사랑하고 이 부 근의 경치를 즐겼다고는 하지만, 문인천상은 정작 이 풍우정에는 별로 관심이 일지 않아서 거의 와 보지 않았었다. 그는 며칠 전에 악씨 부녀와 첫대면을 하기 위해 풍우정에 올라갔 었던 것이 아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풍우정과의 인연 가운데의 하나일 것 같았다. 그러나 기실 다시 말하지만 비록 풍우정에는 그가 별로 오르지 않았었지만 실상 이 부근의 지형에는 다소 익숙한 상태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부근에 과거 선친이 남겼다는 그 많은 재산들이 묻혀 있는 것이었다. 과거 수년 동안 주운양은 문인가의 장원 전체를 거의 뒤지다시피 하면서 그 재산을 찾아보 았으나 설마하니 그것이 이 부근에 있을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 은 과거의 문인천상의 어머니나 혹은 어릴 때의 문인천상도 마찬가지였으며, 실제로 그가 이곳에 보물들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근래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문인천상은 일단 장원에 돌아오게 되어서 자신의 무학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면서 장원의 내부를 둘러보게 되었었는데, 바로 그때 우연히도 선친이 남겼던 그 많은 재산의 숨겨진 위치를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 화노와 엽노는 느닷없이 문인천상이 그 혼탁하고 작은 호수의 앞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저마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문인천상은 주저없이 호수의 앞에 이르러 마치 물을 밟고 걸어가는 것처럼 허공을 미끄러져 나아가서 어느덧 그 작은 호수의 중앙에 이르렀는데, 진아라와 두 노인이 호숫가 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인천상은 문득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 아래쪽을 향해 우 수를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실로 기인한 일이 벌어졌다. 그 혼탁한 호수의 중앙 부위가 마치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처럼 물이 둥글고도 움푹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게 다가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엇 그 움푹 들어가 있는 호수의 중앙 부위에 문득 하나 의 작은 연꽃과도 같은 물체가 나타나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진아라 등은 호숫가에서 간신히 그와 같은 물체를 주시할 수가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 연꽃은 살아 있는 식물이 아니라 바로 정교하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화인 것 같았 다. …… 진아라 등이 고개를 길게 위로 빼며 저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이때 느닷없이 문인천상이 다시 그들을 향해 공력을 일으켜서 그들의 몸을 사뿐히 자신의 곁으 로 옮겨 놓았다. 진아라와 두 노인은 따라서 금세 문인천상과 같이 허공에 둥둥 떠 있게 되어 아래쪽을 보다 자세하게 바라볼 수가 있게 되었는데, 확실히 보니 그 연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짜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의외로 그 형상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채로 문득 진아라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보기에 보물은 어디에 있을 것 같으냐?"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럼 이 호수의 바닥에 그것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헌데 그 순간의 일이었다. 문인천상과 세 사람의 신형이 거의 동시에 아래쪽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혼탁한 호숫물과 가까이에 이르자 느닷없이 그 움푹 들어간 호 숫물의 가운데가 다시 작고도 둥글게 들어가서 네 사람의 몸에는 물이 다가오지 못한 채 다 시 네 사람의 신형은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네 사람은 마치 한 덩어리의 커다란 공기막에 휩싸인 것처럼 되어서 호수의 물 속 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화노와 엽노는 이제까지도 문인천상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불가사의한 능력에 심하게 놀 라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그들의 몸이 전혀 물에 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숨쉬기도 그야말 로 바깥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편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제40장 금원보(金元寶)가 들어 있는 가방 문인천상과 세 사람은 이윽고 호수의 아래의 더럽고도 미끄러운 바닥에 이르렀는데, 문인 천상은 그곳에서도 흡사 허공에서와 같이 자유롭게 세 사람과 함께 움직였다. "저곳이로군요?" 진아라가 문득 소리쳤다. 원래 그 인공으로 만들어진 연꽃의 아래쪽에는 길고도 질긴 실처럼 가느다란 줄이 일직선 으로 커다란 암벽 위에 매달려 있었는데, 진아라는 지금 그 줄이 매달려 있는 매우 단단해 보이는 바위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일견하기로도 그 줄은 비록 가느다란 것이지만 매우 튼튼하여 어떠한 일이 있어도 쉽게 끊 어질 것 같지 않아 보였는데, 자세히 바라보니 지금 그 줄은 바위면에 깊숙이 박혀 있는 둥글게 구부러진 쇠막대기의 중간에 단단하게 매어져 있었다. 실로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몰 라도 얼핏 보기에는 상당한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져 있는 것 같은 구조였다. 하지만 이 호수의 더러운 바닥에는 그것 이외에는 별다른 어떤 특이한 점이 엿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대체 문인가의 보물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말일까? 엽노와 화노 등이 다소 의아해 하고 있는데, 이때 오히려 문인천상은 진아라와 그들을 돌 아보며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아라, 만일 네가 이곳에 보물을 숨겨 두고자 한다면 어느 곳이 가장 적당하겠느냐?"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쇠막대기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가서 한 번 움직여 보아라!" (……?) 진아라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궁리를 해 보다가 이윽고 그 쇠막대기의 앞으로 가서 그 둥 글게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약간 힘을 주어서 비틀어 보았다.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 으므로 이번에는 공력을 상당히 주입시켜서 그것을 좌우로 돌려 보았는데, 여전히 그것은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진아라는 그것을 보고 일순 다소 놀랐다. 실로 그녀의 공력은 비록 절정고수의 대열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능히 일천오백 근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한낱 이렇게 팔뚝보다도 훨씬 가느다란 쇠막대기가 설령 움 직이지는 않더라도 조금도 휘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쇠막대기의 표면에 검푸른 기운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으므로 진아라는 문득 의아해 하며 문인천상에게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이것은 혹시 현철(玄鐵)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현철은 비록 일반사람들에게는 귀하다고 할 수가 없지만 병기를 만드는 데 있 어서는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이니 실제로는 값비싼 재료라고 할 수가 있다. 너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일부러 그와 같은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물에 녹이 슬지 않도록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니 이젠 좀더 비밀에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느냐?"진아라 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이어 그녀는 다시 그 쇠막대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기도 하고 혹은 잡아당기거나 밀거나 해 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이번에는 그 쇠막대기를 놓고 그 커다란 암벽을 이리저리 흔들거나 돌리고 혹은 밀쳐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전 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에,"잘 모르겠는데요?" 말과 함께 진아라가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문득 문인천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당겨 보아라!" (……?) 진아라는 물론 조금 전에 그것을 당겨 보았으며 그것이 다만 당기거나 밀거나 할 때 약간씩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밖에는 알 수가 없어서 그만두었었는데, 진아라 가 즉시 그 쇠막대기를 잡고 앞으로 당기자 이번에는 문인천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좌측으로 한 바퀴 돌리고 난 뒤에 밀고 이어서 우측으로 한 바퀴 돌린 다음에 밀 어서 끝까지 가게 한 다음에 이어 그 위치를 원래대로 잡아당겨 놓아라." 진아라는 이 단순하게 보이는 쇠막대기에 그와 같은 복잡한 기관이 얽혀 있는 줄은 몰랐다. 아까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었으나 이윽고 문인천상이 하라는 대로 하자 전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쇠막대기는 빙빙 잘도 돌아가며 움직였는데, 틀림없이 만든 지가 오래되었을 것이고 또한 이렇게 물 속에서 있었는데도 그와 같이 기관이 부드럽게 움지기고 있다는 것은 실로 그것을 제작한 자의 솜씨와 정교함을 엿볼 수가 있게 하는 것 같았다. …… 이윽고 진아라는 문인천상이 말한 대로 그것을 좌측으로 돌려서 밀고 이어 우측으로 돌려 서 끝까지 민 다음에 다시 중간쯤 잡아당겨서 원래의 위치대로 해 놓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분명히 틀림없이 작동을 시켰는데도 아직 이렇다할 기관이 작동하는 흔 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 진아라가 의아해 하며 문인천상을 향해 물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 바위를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로 해 보아라!" (……?) 진아라는 이 혼탁한 물 속에서 이와 같이 복잡하고 정교한 기관장치가 만들어져 있었을 줄 은 미처 짐작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감히 그러한 복잡한 기관장치의 순서를 파악해 낼 수가 있겠는가? 과거 문인천상의 선친은 어떤 방법으로 이 안에 들어와서 기관장치를 움직였을까 하고 생 각해 보니 틀림없이 그것도 수월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이미 기관장 치를 움직이는 수법에 훤하게 익숙해져서 안으로 잠수해 들어오자마자 불과 얼마 지나지 않 아서 문을 열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번에는 그 보물동굴의 문이 나타나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아라가 우선 그 거대한 바위를 뒤쪽으로 밀었더니 아까는 전혀 꼼짝도 하 지 않았던 것이 부드럽게 일정한 거리로 물러났고, 이어 그것을 우측으로 한 바퀴를 돌리 고 다시 앞으로 잡아당겨서 좌측으로 돌린 다음에 다시 앞으로 잡아당기고 마지막으로 그 것을 원래의 위치에 밀어놓자 이내 짐작했던 대로 기관이 작동되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이 는 것이었다. 콰콰콰…… 지금 이곳은 물 속이므로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이지만 만일 물 밖에서 듣는다면 전혀 소리 를 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전혀 알아차릴 수도 없게 될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일순간 그 커다란 바위가 가벼운 울림과 함께 천천 히 뒤쪽으로 물러나더니 그 비어 있는 자리에 느닷없이 찬란하고도 휘황한 빛살이 넘쳐 나 오는 작은 동굴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아마도 문인천상의 선친이 이 보물동굴의 위치를 이 혼탁한 호수의 아래로 정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만일 맑은 물 밑에 그것을 설 치했었다면 자신이 그 동굴의 입구를 열었을 때에는 그 충천하는 보물의 광채가 밖에도 알 려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호수의 물은 온통 흙탕물이나 다름이 없기 때 문에 그러한 빛이 새어나갈 염려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 이 작은 동굴은 틀림이 없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호수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 음에도 그 안의 작은 석실과도 같은 공간에는 전혀 물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었다. 진아라 등이 바라보니 그 문과도 같은 입구의 천정에는 내부의 천정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주먹만 한 보석들이 박혀져 있었는데, 틀림없이 그 가운데에는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한다는 전 설의 벽수주(酸水珠)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호수는 실로 더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이 보석의 동굴은 아주 깨끗하기 짝이 없어서 마치 온갖 보석으로 휘황하게 장식을 한 것 같았는데, 문인천상은 잠시 그러한 광 경을 바라보다가 세 사람을 이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온갖 보석이나 보물들이 가득하게 쌓여져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석실의 한쪽 구석에 가득하게 쌓여 있는 진열된 금원보(金元寶)들이었으며, 그것들은 사방 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시피 한 보석과 보물들의 빛을 받앗 노을과도 같은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곳의 재산은 헤아릴 수가 없어 보였다. 문인천상은 우선 한쪽의 벽면으로 가서 그쪽에 만들어져 있는 벽장의 서랍을 잡아당겼는 데, 그 서랍의 안에는 많은 금표(金票)들이 깨끗하게 다발로 묶여져서 들어 있었고, 또한 다른 서랍에는 은표(銀票)들이 깨끗하게 묶여져서 들어 있었으며, 게다가 다른 서랍들에는 기타의 문서나 증표 등의 중요한 물건들이 따로따로 차곡차곡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실로 그러한 광경을 보아도 과거의 문인천상의 선친이 얼마나 이곳을중요하게 생각했었는가 를 짐작할 수가 있게 했다. 아마도 그곳 벽장 속의 재산은 기실 이곳 석실 내부의 온갖 황금이나 보석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가 될 것이 틀림이 없었다. 진아라가 한참 동안 내부를 살피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정말로 이곳은 휘황찬란하군요! 대체 돈으로 치자면 얼마나 될까요?"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전날에 나는 다소 심심하기도 해서 한동안 이곳의 재산을 헤아려 보았었는데 대충 헤아려 보니 그 액수는 사백만 냥 정도 되는 것 같았다."진아라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황금으로 말인가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에 비단 진아라뿐만 아니라 이때 한쪽에서 감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구 경하고 있는 화노와 엽노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황금 사백만 냥이라면 물경 은자 로 치면 일억 냥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억 냥이라고 하는 액수는 가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며, 사람이 한평생 아무리 헤프 게 쓴다고 해도 결코 다 쓰지 못할 금액인 것이었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틀림없이 문인 천상은 그 서랍 속에 있는 귀중한 문서나 증표 등의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물품들은 전혀 계산에 두지도 않았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에 주운양이 문인천상에게 은자로 일천만 냥이나 요구했었는데, 실로 그것은 일리가 있는 얘기였으며 문인가의 재산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었던 일이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문인천상은 서랍 속에서 은표 다발들을 꺼내서 화노와 엽노에게 건네주었는데, 그 것들은 놀랍게도 액면가 은자 백 냥 짜리 은표가 백 장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는 것이 모두 백 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두 합해서 계산을 하면 무려 은자 일백만 냥에 해당되 는 금액이었는데, 또한 그것들은 강호상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산서은호(山西銀號)의 것 이었다. 화노와 엽노가 그것을 보고 그만 놀라 안색이 변해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어째서 이 많은 돈을 모두 저희에게 주십니까? 이것은 당연히 주인님께서 보관을 하셨다가 저희들에게 비용에 따라서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엽노도 한 마디를 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 돈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앞으로는 당연히 그대들이 써야 할 비용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내가 일일이 그 비용 을 대주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 돈은 기실 오랫동안 피폐되었던 장원을 보수하는 데 있어 서 여러분이 재량껏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내가 얼마간 장원을 떠나게 되 면 내가 일일이 여러분에게 그 비용을 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 주는 것이오."… … 화노와 엽노는 그 말을 듣자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을 하고 다시 입을 열지 않았는데, 기실 은 그 돈에는 문인천상이 그들에게 수고의 표시로 내리는 상금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 들은 느끼고 있었다. "그럼 명심하여 잘 보관하고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화노와 엽노가 자신들의 의 복을 벗어서 그 은표 다발들을 단단하게 잘 싸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이윽고 자신이 쓰고 자 하는 비용을 금표로 약간 꺼낸 다음에 서랍을 닫아 놓고 이어 진아라에게 웃으며 말했 다. "이제 우리는 그만 나가 봐야 할 것이니 너도 어서 이 가운데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서슴 치 말고 가지도록 해라." 진아라는 조금 전부터 석실의 내부에 있는 무수한 보석들과 보물들을 찬찬히 유심하게 살 펴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 말을 듣자 미소하며 대답했다. "저는 사실 저번에 오라버니께서 많은 돈을 주고 가셨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돈이 남아 있으므로 이런 것들이 거의 필요하지 않아요. 다만 이곳에 들러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간다면 약간 섭섭할 테니 그저 여기에 있는 이거 하나만 들고 가도록 할까요?" 말과 함께 진아라는 손을 뻗어서 하나의 작고 납작한 가방과도 같은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 것은 백 냥 짜리 금원보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는데, 그 내부에 금원보는 모두 열 개가 들어 있었으므로 계산을하자면 황금 일천 냥이 되는 셈이었다. 이 황금 일천 냥은 비록 적지 않은 액수이지만 조금 전에 화노와 엽노가 받은 금액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액수일 뿐만 아니라 이런 곳에서 얻은 물건 치고는 그다지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좋다. 그럼 어서 나가기로 하자!" 문인천상은 이어 자신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세 사람과 함께 호수 위로 떠올라서 허공을 지나서 풍우정의 앞쪽에 내려섰다. 호수의 물은 다시 원래처럼 합쳐졌고, 다만 그 위에 미미한 파문만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조용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진아라는 문득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난 듯이 문인천상에게 물었다. "참, 이제는 앞으로 저곳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인데, 만일 누군가가 욕심을 품 고 저곳으로 들어간다면 어쩌죠?" 문인천상은 이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미 조금 전에 밖으로 나오면서 그 기관장치를 조금 바꾸어 놓았으니까. 아마 누구라도 나의 허락 없이는 쉽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될 것이다." ……? 잠시 후에 일행은 다시 빠르게 허공을 가로질러서 누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일행이 누각으로 돌아가자 도액오선은 어느새 일어나서 누각의 밖으로 나와서 그들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정원의 누렇게 말라 가는 잔디밭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윽고 문인천상이 세 사람을 잡고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다가 다시 화노가 옷으로 만들 어진 작은 보따리를 등에 메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약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도상선 이 질문을 던져 왔다. "그, 그건 혹시 돈이 아니냐?" 이들도액오선은 비록 멍청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 모 양이었다. 화노와 엽노는 문득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되자 왠지 심히 불안한 마음이 되어서 도상선을 향해 대꾸했다. "이것은 돈이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사사로이 쓸 돈이 아니고 장원의 일에 쓸 돈인 것이니 눈독을 들이지 마시오." 도상선은 그 말에 문인천상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다시 화노를 향해 말했다. "혹시 그 가운데 우리에게 조금만 나누어줄 수가 없는 것이냐?"화노는 그가 드디어 그 흉측 한 마각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내심 화가 치밀어서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들에게 줄 돈은 하나도 없소. 원래 당신들은 그 통나무집에서 이미 많은 돈을 노략질 하지 않았소?" 도상선은 그 말에 다소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너…… 너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 그것은 놈들을 모두 쫓아내고 나서 그… … 돈들도 모두 태워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부득이한 일이었다." 화노는 드디어 도상선의 약점을 잡게 되자 그간의 불편했던 심사를 풀기라도 하듯이 다시 말했다. "부득이한 일이었다고요? 하하, 그렇다고해서 반드시 그 돈을 당신들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 까? 대체 당신들이 그 통나무집에서 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 주인님 께 귀찮은 결과만을 초래한 것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감히 그와 같은 돈을 당신 들이 가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재주는 곰이…… 곰이……" 화노는 문득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을 엉뚱한 사람이 가지는 격이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그 말이 문인천상을 곰이라고 격하시키는 것 같아서 약간 더듬거리며 말을 끊어 버리고 말았 다. 하지만 도상선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말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문인천상의 눈 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다시 대꾸했다. "그…… 그것은 원래 우리 주…… 주인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시…… 실은 그 액수가 너…… 너무 작았었기 때문에……"이에 화노는 다시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은자로 따지면 십만 냥이나 되는 액수가 그래 적은 돈이라는 말입니까? 당신들은 원 래부터 돈을 그렇게 쉽게 생각했었습니까?"도상선은 이에 다소 놀라서 안색이 더욱 시뻘개 졌다. "어, 어떻게 그 액수를 미…… 미리 알고 있는 것이지? 시…… 실은 우리는 지금쯤 주인님 께 그 돈을 드리려고……" 말과 함께 그가 문인천상을 은근히 바라보자 이에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 돈은 나에게 줄 필요가 없으니 여러분이 마음대로 쓰도록 하시오."그 말에 도상선 등의 도액오선은 하나같이 내심 크게 안도하는 표정들이었고, 화노와 엽노는 그저 웃으며 가만 히 있었다. 이제 도액오선이 그들의 돈을 탐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서 였다. 이윽고 화노와 엽노는 물러가고 문인천상은 도액오선, 진아라 등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연 락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엽노가 달려와서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주인님, 대청 안에 연회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였을 것이니 서서히 납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 엽노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지극 히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직책도 호위총관이기 때문에 문인천상과 늘상 가깝게 지내게 될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물었다. "그 지하실에 감금해 놓았던 죄인들도 데리고 나왔소?"엽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산파의 사람들은 모셔 왔지만 그 사람들은 아직 주인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었기 때 문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러나 우리가 함께 그곳에 도착한 이후에 총관은 지하실로 가서 그들도 데리고 나 와서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엽노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예.알겠습니다." ... 제41장 마음에 접어두고서…… 도액오선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을 연회가 준비되었다고 하자 절로 마음이 급해져서 문인천상보다 먼저 신형을 날려서 대청으로 가 버렸다. 문인천상은 좌측에는 진아라를 대동하고 우측에는 엽노를 대동하고서 대청으로 향했는데, 기실 그 대청은 각종의 연회를 열기 위해 특별하게 지어 놓은 넓은 실내였다. 문인천상이 두 사람을 대동하고 대청의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서 화노가 하인들을 지휘 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가 이윽고 반색을 하며 공손히 맞이했다. "주인님,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청의 앞쪽에는 길쭉하게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탁자의 뒤쪽으로 악씨 부녀와 도액 오선 등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문인천상이 다가가자 악불범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문인천상에게 예의를 차려 왔다. "공자 덕분에 하룻밤을 잘 지냈으니 고맙소이다."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답례했다. "별 말씀을……" 이어 악채릉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다소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 볼 뿐이었다. "악 낭자도 잘 잤소?" 그러자 "저는 별로 잘 자지 못했어요." 악채릉은 힐끗 그의 옆에 서 있는 진아라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 문인천상은 다만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자리인 주인석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이 연회의 자리는 비록 거창하고 훌륭하게 꾸며졌으나 기실 그 손님은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약간 주위가 썰렁한 느낌이었다. 진아라마저 문인천상의 좌측의 자리에 앉고 나자 이윽고 하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서 음식 들을 날라오기 시작했는데, 도액오선은 기실 아까부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즉시 환장을 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주인인 문인천상의 앞으로 가는 음 식들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해도 다른 쪽으로 가는 음식들은 모조리 그들의 차지였는데, 그 들이 제각기 신법을 발휘하여 하인들이 날라온 음식들을 서로 잡기 위해 주위를 혼란스럽 게 만드는 동안에 엽노가 이미 문인천상이 지시했던 대로 지하실에 가두어 놓았던 주운양 등의 여섯 사람을 데리고 대청의 안으로 들어와서 비어 있는 자리에 각기 앉도록 했다. 이때 주운양 등은 하룻밤을 지하실에서 잠을 자게 되자 그야말로 안색이 초췌해져 있었는 데, 문인천상을 보고도 전혀 아는 체도 하지 않았고, 그러나 하나같이 묵묵히 엽노가 지시 해 주는 대로 이끌려서 자리에 앉더니 이윽고 날라온 음식들을 조용히 집어먹기 시작했다. 과거 이 대청의 주인의 행세를 하며 살아 왔었던 그들의 생활에 비하면 실로 처량해지는 모습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인천상은 묵묵히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들이 마음껏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말을 걸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리고 악불범을 향해 입을 열어말했다. "혹시 지난 밤에 불편한 점이 없으셨습니까?" 이때는 화노가 직접 마련한 성내의 무희(舞姬)들이 대청의 안쪽에 나타나서 즐거이 춤을 추 고 있는 중이었다. 화노는 이 밖에도 일종의 연극과 같은 놀이도 준비했는데, 그러한 모든 일들을 짧은 시간 내에 그가 준비한 것은 그의 숨은 능력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일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악불범은 술을 마시고 있다가 문인천상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잘 지냈다고 말하지 않았소?" 문인천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우선 한 잔을 올릴 테니 받아주십시오."악불범은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의 미심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문인 공자께서 권하는 술인데 내가 받지 않을 수가 있겠소?"문인천상은 그가 자신이 권하 는 술잔을 받아서 즉시 단숨에 비우는 것을 보고 미소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때 악불범은 느닷없이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자! 나는 이제 약속대로 공자의 연회에 참석하여 술을 마신 것이니 이제는 떠나가도 되겠 소?" (……?) 이 악불범의 느닷없는 말에 비단 옆에 있던엽노뿐만 아니라 주운양 등과 심지어 도액오선 등도 다소 놀랐다. 문인천상은 이에 다소 흠칫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악불범이 줄곧 자신에게 정말로 굴복하 지 않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아직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잠시 더 머물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이에 악불범은 포권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실은 그러고 싶은 심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별로 여유롭지가 않아서 그럴 수 가 없는 형편이외다. 그러므로 공자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음을 이해해 주시오." 문인천상은 악불범이 그렇게 나오자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음을 느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는 악채릉에게 고개를 돌려서 물 었다. "낭자도 지금 떠날 것이오?" 악채릉은 이때 다소 놀라고 당혹한 듯한 표정이어서 미처 부친의 이러한 결심을 알지 못했 던 것 같았으나 문인천상의 질문을 받고는 이내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이예요. 내가 아버지를 따라가지 말아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요?" 문인천상은 다소 흠칫하여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나는 당신만은 이곳에 좀더 남아서 놀다가 갔으면 하고 바라오."악채릉은 이에 웃으며 다 시 대꾸했다. "만일 그런다면 당신은 나에게 이 장원의 귀부인 자리라도 줄 생각인가요?"문인천상은 고개 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의 마음은 항상 같은 것이오. 나는 정말로 그대와 혼인을 하여 살고 싶은 마 음이 있소이다." (……) 악채릉은 그 말을 듣자 일순 두 눈에 심한 갈등의 빛을 보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이 결연한 빛을 보이며 말했다. "미안하군요. 하지만 저는 결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당신의 그러한 마음은 앞으로 마음속에 접어두고서…… 잊지 않도록 하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말과 함께 그녀는 부친보다 오히려 먼저 걸음을 옮겨서 대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악불범 역시 그와 같은 광경을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싸늘하게 안 색을 굳힌 후에 문인천상에게 말했다. "어쨌든 호의는 매우 고마웠소.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오." (……) 문인천상은 다소 무거운 표정이 되어서 두 사람을 대청의 밖까지 배웅했다. "낭자! 우리가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소."문인천상이 그렇게 말하자 일순 악채릉은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급히 고개를 돌려서 장원의 밖을 향해 빠르 게 신법을 펼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악불범의 신형은 그 뒤를 따랐고, 이어 두 사람의 모습은 문인천상의 시야에서 아득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문인천상은 비록 두 눈에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시선을 뗄 수가 없는 듯이 한동 안 악씨 부녀가 사라져 버린 길목을 향해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로그때 느닷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는 사람이 하나 있었 다. (……!) 문인천상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바로 진아라였다. 문인천상이 바라보자 그녀는 가볍게 조용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더니 이렇게 입을 열어 말 하는 것이었다. "오라버니의 마음이 아프신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가 앞 으로 오라버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겠어요."문인천상은 그녀의 표정이 매우 신중해 보이고 또한 침착해 보이며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는 듯한 것을 보고는 절로 미소하며 물었다. "네가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겠다고? 하하, 네가 과연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느냐? 나는 오직 네가 스스로 잘 성장하기만 하면 만족할 것이다."진아라는 이에 다시 말했다. "사실은 제가…… 제가 너무 그 동안 철없이 굴어서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이 제부터는 앞으로 좀더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오라버니께서 저를 좋아하시 게 만들 거예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 이상 내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자, 이제 다들 기다릴 것이니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문인천상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진아라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대청으로 돌아가자 도액오선 등은 이미 절반쯤 취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거의 난장 판이 되어 있었고, 주운양 등도 어느새 식사를 대강 마쳤는지 손을 들어 천천히 술과 과자 를 집어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청의 한복판에서는 지금 한창 연극이 벌어지고 있었고, 문인천상이 자리에 다시 앉자 화 노가 다가와서 그에게 작은 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주인님! 지금 밖에는 성 안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축하를 하기 위해 몰려 들어왔는데, 지금 그들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 문인천상은 그것이 바로 화노가 일부러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한 것 임을 눈치챘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 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화노가 우선 만나 보도록 하고 나는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예……" 화노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다음에 물러갔다. 이에 문인천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아직도 천천히 술을 따라서 마시고 있는 주운양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들은 어젯밤에는 고생스럽지 않았소?" 주운양은 이때 온갖 상처를 입은 얼굴에 취기가 올라서 눈빛이 희미한 상태로 입을 열어 대 답했다. "고생이라고? 허헛……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 소?" 이 주운양은 과거에는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술을 마셔도 거의 취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 저 조금씩 마시고 있는데도 이미 거나하게 취하여 발음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주원헌은 아직 아랫도리의 상처가 낫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주저앉아 서 음식만 조금씩 먹는 모습이었고, 주원학은 그나마 턱을 심하게 다쳐서 고기 등은 전혀 먹지 못하고 국물만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상을 입은 채 아 직 치료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장풍은 그 거무스레하던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가장 몸이 멀쩡한 주완청과 임옥룡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서 묵묵히 과자를 먹거나 술을 따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가장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공력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서 기 운을 잃고 맥없이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무공을 연성한 무림인으로서 공력을 잃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비록 완전히 공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상황으로 보아 그들의 모습이 초췌하게 변모한 것은 수긍이 가 는 일이었다. 문인천상은 옆에서 진아라가 곤손히 따라 주는 술을 술잔으로 받아서 천천히 들고 마시면 서 문득 다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바로 내일 여러분 모두와 함께 다시 이 장원을 출발하여 어디론가를 향해 가고자 하 오. 당신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아시겠소?"주운양이 문득 술잔을 멈칫하다가 내리며 되물었 다. "그곳은 어디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선친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가는 것이오." 주운양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이미 그 원흉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말이오?"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으 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 당신들에게 그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묻고자 하는 것이오. 아직도 당신은 그 원흉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소?" 주운양은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기울여 서 그 속의 술을 남김없이 다 마셔 버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만일 내가 그 얘기를 해준다면 당신은 나에게 어떤 것을 해주겠소?"문인천상은 잠시 생각 하다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당신들을 치료해 주는 것은 물론이요, 다시 공력을 회복시 켜서 놓아줄 것을 약속하겠소." 주운양은 비어 있는 자신의 술잔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이오? 내가 그 말을 해주는 것은 나에게는 상당한 모험이 될지도 모르는데?" 문인천상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일백만 냥의 은자를 더 주는 것을 조건으로 하겠소." 문인천상의 그 말에 비단 주위의 사람들만 놀란 것이 아니라 심지어 주운양 본인도 크게 놀 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일순 술이 다 깨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어디에서 그 많은 돈을 구한다는 말이오?"문인천상은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나에게는 선친의 유물인 재산이 있었소." 주운양은 그 말에 매우 놀라며 두 눈에서 악독한 광망을 쏟아내며 음침하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당신은 결국 나에게 거짓말을 했었던 것이로군?"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 로저었다. "당신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나 기실 나는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니오. 다만 당시에 재산이 있는 것을 가르쳐 줄 수가 없어서 비슷하게 둘러대었던 것인데 당신들 이 그만 거기에 착각을 했던 것이었소. 말하자면……" …… "나는 다만 내가 열두 살 때의 어머님의 말씀을 얘기해 주었던 것이었는데 당신들은 그것 을 나의 현재의 생각으로 착각했던 것이며 또한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오. 나 는 기실 얼마 전에 이곳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선친의 유물을 찾게 되었었으니 그것은 거짓 말이 아니었던 것이오."주운양은 듣고 있다가 이윽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백만 냥이라는 돈은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해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닌데 네가 원수와 같은 나에게 그 많은 돈을 주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기실 당신은 나를 증오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은 않소. 나는 기왕이면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나는 당신이 만 일 내가 그 원흉을 잡는 데 있어서 협조를 해준다면 나는 내가 어렸을 적에 장원에서 가지 고 나갔던 금액인 백만 냥의 은자를 당신에게 돌려줄 의향이 있는 것이오. 사실 당신은 당 시 우리 모자에게 비록 겉으로라도 제법 잘 대해 주었었기 때문이오." 주운양은 듣고 있다가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너는 꼭 너의 선친과 같이 그런 자비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구나. 좋다! 네가 그와 같이 많은 돈을 주겠다니 나로서는 불만이 있을 리가 없지. 다만 만일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나는 그 얘기의 진위를 구별하기 위해서 일단은 당신들과 함께 그곳에 가 봐야 하는 것이오. 내가 그곳에 가서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당신들의 말만 믿고서 그 많은 돈을 줄 수가 있겠소?" "흐흐, 역시 그렇겠지……" 주운양은 음침하게 웃다가 문득 다시 말했다. "좋다! 나야 뭐 똑같이 절박한 위기의 상황이라면 일단은 그와 같은 돈에 한 번 목숨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일백만 냥의 은자라면 가히 귀신도 부릴 수가 있는 큰 돈 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너는 지금 나에게 그 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가 있느냐?" 문인천상은 되물었다. "당신은 나에게 진실을 말할 용의가 있소?" 주운양은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그들이 우리를 좋아할 리 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독 수를 가할 수도 있는 것이지. 하지만 만약 우리가 네게 그 얘기를 한다면 그들은 비록 우리 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작은 희망이라도 있는 셈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러한 모험을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나는 원래 돈 때문에 이러한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문인천상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원래 내가 그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마음 이 사라졌다는 말이오?" 주운양은 음침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나는 커다란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너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지만 나의 능력으 로는 너를 어쩔 수가 없는 일이고, 게다가 그들이 너에게 독수를 가하는 일은 나의 소관이 아니므로 일단은 그것에 관해서는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좋은 사람 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이익만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지금 은자를 보기를 원하는 것이오?" 주운양은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문인천상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품속에서 네 장의 황금 전표를 꺼내 서는 그의 앞에 내보이며 말했다. "자, 이 황금 사만 냥이면 되지 않겠소?" 문인천상이보여 준 금표는 하나같이 액면가 황금 만 냥짜리였다. 게다가 그것들은 역시 하나같이 신용도가 높기로 유명한 산서은호의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주운양은 눈을 떠서 확 인을 하고는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제43장 공동파( 派)로 여인의 용기는 대부분이 오만과 편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특히 이 주완청의 경우는 더욱 심한 타격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완청은 이내 입술을 깨물며 말을 받았다. "불쌍하게 생각한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날의 나와의 정분에 대해서 아직은 미련을 두고 계시는군요. 그렇지 않다면 나를 그렇게 특별히 불쌍하게 생각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이 주완청의 입을 계속열게 하는 것은 사갈보다도 지독한 그녀의 악랄한 마음씨인 것 같았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이 당신과 같은 상태라면 그들도 역시 불쌍하게 생각할 것이오. 나는 과거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소."주완청은 그 말에 반발을 하며 신형을 벌떡 일으켰다. "과거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요?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그런데 이때 주완청이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그녀의 기다란 치마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녀의 눈부시게 새하얀 동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녀는 그 청록색의 치마 속에 비단 젖가리개뿐만 아니라 고의마저도 하나도 입 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청록색의 치마는 잠시 그녀의 버들가지와도 같은 가느다란 허리에 머물렀다가 이윽고 애무를 하듯이 스르르 허벅지를 타고 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 이제 열여덟의 나이인 그녀의 나신은 그야말로 한창 물오른 빛을 발하고 있었고, 청순한 요 염함을 가득 내포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다소 커다랗게 치솟은 그녀의 두 개의 젖가슴 은 마치 두 개의 밥그릇을 뒤집어놓은 듯이 둥글었고, 그 가운데의 젖꼭지는 붉은 빛이 었으며, 게다가 허리를 지나서 가느다랗고 탄력이 넘치는 두 개의 다리 사이의 신비림은 동물적인 색정(色情)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주완청은 문인천상에게 마치 보라는 듯이 그 두 개의 다리를 약간 벌리고 똑바로 섰으며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과거 우리는 그래도 제법 다정한 오누이간이 아니었나 요? 나는 비록 당신을 속이기는 했어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다고요. 그러한 사실은 당신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은…… 당신은 저의 이 몸이 갖고 싶 지 않나요?"문인천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나는 기실 당신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안아 보았었고, 또한 그러한 몸에도 집착 되지 않았었소. 지금 당신의 몸은 그저 내가 보기에는 다만 겨우 추하지 않을 정도에 불과 한 것일 뿐인데 내가 미혹될 것 같소?"주완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남자는 비록 못생긴 여자라 해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나 의 이 몸은 그다지 못생긴 편도 아니니…… 제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 이러는 것은 아니예 요. 그저 저의 순결을 당신이 입증해 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문인천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순결이 입증된다는 말이오?" 주완청은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한 결론이 아니겠어요? 당신이 나의 몸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으로 저의 순결 여부가 판가름이 나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저는 사실 남들에게 저의 몸이 순결하지 않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참으로 괴로웠어요." 문인천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나는 당신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당신이 나에 게 와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오. 당신은 어서 옷을 입는 것이 좋겠 소." 주완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결코 옷을 다시 입지 않겠어요. 당신이 만약 이 자리에서 달아나 버린다면 나는 소 리를 지르고 말 거예요. 사람들은 당신에게 뭐라고 하겠어요? 악 소저가 가 버리자 여자 생각이 나서 나를 불러다가 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 "나는 결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예요. 당신의 정실의 자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 아마 당신의 정실은 그 작고 아름다운 진 소저가 차지하면 되지 않겠어요? 나는 비록 나 이는 그녀보다 많지만 앞으로 그녀를 착실하게 언니로 모시면서 살 것을 맹세하겠어요. 저 는 비록 전에는 어쩔 수가 없이 당신을 속이게 되었었지만 이제는…… 이제는 결코 당신 을 속이지 않겠어요. 내가 원래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을 속이겠어요?"문인 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결코 당신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어서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 주완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차라리 저를 죽여 버리고 나서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는 결코 지금 방을 나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어서 나의 순결을 확인해 주세요. 자! 당 신은 설마하니 나를 피하지는 않겠지요?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이 알몸에도 무관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말과 함께 그녀는 허리를 자극적으로 흔들과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그녀는 최대의 무기를 동원하였고 얼굴에는 가능한 한 최대의 색정적인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 문인천상은 이때 침상 위에 걸터앉은 채였는데, 주완청이 다가오자 그야말로 짙은 색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문인천상은 침상 위에서 주완청의 말대로 달아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제 곧 그녀의 벌거벗 은 하체가 그의 면전에 도달할 것 같았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당신의 순결을 확인해 달라고요?" 어디선가 한 줄기 맑고도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 주완청은 천천히 문인천상의 앞으로 걸어가다가 느닷없는 음성을 듣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 려보았는데, 한 명의 나이 어린 소녀가 방문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안색 이 크게 변해 버렸다. 그렇다. 갑자기 나타나서 주완청의 행동을 제지시킨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진아라였 던 것이었다. 그녀가 조금 전에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었는데, 주완청은 이미 무공을 상실당했기 때문에 미처 그녀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진아라는 이때 우유빛이 감도는 비단나삼을 단정하게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잠옷이었으므 로 아마도 잠을 자다가 말고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틀 전에도 그녀는 이와 비슷한 광경을 자아냈었던 것이었으나왠지 지금의 그녀의 눈빛은 격동에 흔들리거나 혹은 분노한 빛도 없이 그저 조용한 기색이었고 은은한 기품이 배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주완청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일순간 매우 놀랐으나 이윽고 다시 요란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아, 누구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나의 언니가 될 사람이었군 그래. 진 언니! 나는 이제부 터 이분을 남편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진 언니가 정실이 되고 나는 첩실이 되어 함께 잘 살 아 보기로 해요. 호호호, 자 거기에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잊조으로 오도록 해요!" (……) 진아라는 주완청의 말에 일순 묵묵히 듣고 있다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대꾸 했다. "당신은 정말로 수치도 모르는 사람이로군요. 당신은 벌거벗은 것을 남에게 알리는 것을 자 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것만 보더라도 당신은 결코 순결한 처녀의 몸이 아니예 요." 주완청은 그 말에 다소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어 지지 않고 대꾸했다. "호호, 그렇다면 언니는 틀림이 없이 순결한 처녀이겠지?"진아라는 그 말에 다소 안색이 붉 어지게 대꾸했다. "당신과 같은 줄로 알아요? 나는 물론 아직 남자의 경험이 없어요."주완청은 그 말에 눈빛 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아아, 그래? 그렇다면 잘됐군. 이분은 우리의 순결성을 의심하는 모양이니 지금 아예 그것 을 증명해 드리는 것이 어때 우리 둘이서 오늘남을 이분과 함께 보내게 된다면 기분도 좋 을 거야." 진아라는 냉랭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당신에게 언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짓을 하고 싶지 도 않아요. 다만 한 가지 순결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죠." 주완청은 희한하다는 듯이 물었다. "순결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고? 그게 대체 무엇이지?"진아라는 한 차례 문인천상의 얼굴 을 바라보더니 이어 주완청의 얼굴을 직시하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도가의 사문에서는 굳이 관계를 갖지 않아도 그 순결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전 해지고 있지요. 그것은 우선 눈썹이 살결에 달라붙어 있거나 혹은 허리가 똑바르고 혹은 목 이 가늘며 혹은 뒷등이 똑바른 등의 조건을 갖춘 여자는 처녀라고 할 수가 있는데, 당신 은 보아하지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군요. 따라서 당신은 처녀가 아니예요."(… …?) 주완청은 그 말을 듣고 일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윽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보아하니 그대는 그러한 도가의 잡다한 학문에 능통한 모양인데, 그러나 기실 그 러한 것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나는 아직 처녀인데 그대의 그러한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억울하겠어?" 진아라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철면피와도 같군요. 게다가 이와 같이 벌거벗고도 수치심을 모르고 있으니 설령 아직 육체적으로 순결하다고 해도 정신적으로는 음탕하고도 더러운상태일 것이니 어찌 순결하다고 할 수가 있겠어요? 당신은 마음의 순결이 육체적인 순결보다도 오히려 중요하 다는 것을 모르나요?"주완청은 그 말에 다소 안색이 변했다. "그대…… 그대는 어째서 내가 그와 같이 음탕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오라비들과 어 떤 장난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것이 음탕하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 서 정말로 순결한 여자가 어디에 있겠어? 여자란 자라기 시작하면서 으레 호기심도 갖게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또한 오줌도 누게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 만약 전혀 그 물건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면 세상에 순결한 여자가 어디에 있겠어?"진아라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와 같은 이유에서 당신을 음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은 어렸을 때에 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만 일단 나이가 들고 성인의 때가 되면 몸을 잘 보존하고 또한 마음을 순결하게 가꾸어서 결코 더렵혀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성인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육신을 함부로 굴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희로 즐기기까지 했고, 또한 마음 은 더욱 순결하지 않아요. 그러니 감히 순결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어요?"주완청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말했다. "좋아, 좋아. 그렇다면 내가 순결하지 않다고 치지. 그러나 과연…… 과연 우리 여자들은 반드시 순결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이 생겨나 있는 것은 어쨌든 즐길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순결하지 않다고 해서 여자들은 전혀 어떤 대우도 받을 수가 없 다는 것일까? 그런 여자는 정말로 남자를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일까?" 진아라는 그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꾸했다. "당신의 말은 억지 변명에 지나지 않아요. 만일 당신 스스로 순결하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 가 있는 일이고 당신 스스로 음탕하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음탕한 여자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 말에 주완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지금 즉시 그대의 정랑을 사랑해 보이겠어. 나는 따라서 순결을……" 바로 그때 마악 신형을 문인천상에게 돌리려던 주완청은 문득 갑자기 날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전신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문인천상이 그녀의 혼수혈을 제압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인천상은 진아라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악독한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어떠한 논의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계속 말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진아라는 그 말에 그의 얼굴을 정 시하며 물었다. "하지만 만일 제가 오지 않았었다면 오라버니께서는 어떻게 하실 뻔했던 거죠?" (……) 문인천상은 그 말에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문득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불렀던 것이 아니냐?" 진아라는 문득 놀라며 물었다. "저를 부르셨었다고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의 말소리가 공연히 잠을 자고 있는 너의 귓전에 그토록 생생하고 크 게 들렸을 것 같으냐?" (……!) 진아라는 그 말에 문득 느끼는 것이 있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살그머니 안색을 붉히며 생 각했다. (알고 보니 오라버니께서는 일부러 나를 부르셨던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오라버니께 필요한…… 사람이란 말인가?)일순 진아라의 마음에는 깊은 황홀감이 용솟 음쳤으나 이내 그녀는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었다. 그녀를 향해 문인천상은 이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그녀의 옷을 입혀 가지고 끌고 가서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에 밖에 있는 엽노에게 거처로 데려다 주도록 하라고 해라." "예……" 진아라는 일순 문인천상이 자신을 은근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내심 매 우 기뻤으나 만일 그것을 내색하게 되면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파랑새처럼 생각 되어 조금도 내색하지 못하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에 주완청의 알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그녀의 옷을 들고 밖으로 걸어나가고 말았다. …… 문인천상은 조용히 아까의 그 자리에 앉아서 방문이 조심스럽게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있었 는데, 문득 그의 시선이 복잡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다음날 아침 일행은 화노와 엽노의 배웅을 받으며 아침 일찍이 장원을 마차로 출발하기 시 작했다. 이번에는 천륭무가로 가는 것이어서 과거와는 달리 사막지대로 가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 려 기름진 땅인 중원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마차를 달렸 겨우 십 리도 채 못 갔는데도 벌써 그곳의 단풍이 그다지 완연하지 못한 것 같았고 또한 날씨도 따 뜻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일행은 모두 세 대의 넓고 커다란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는데, 문인천상이 진아라와 함께 앞쪽의 마차를 타고 있었고, 도액오선이 주운양 등을 감시하며 두 개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도액오선은 오랫동안 길을 가면서 간혹 주운양 등과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었는데, 이윽 고 일행이 그 한달여의 기나긴 기간 동안 여행을 하는 동안 그다지 심한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일은 길을 가던 도중에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천하에서 세 력을 떨치던 천륭무가가 느닷없이 멸망을 했고, 또한 사방에서 신주육패가 중원으로 세력을 펴기 위해서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증거로 일행은 곳곳에서 일월 신교(日月神敎)라는 거대방파의 무리들을 볼 수가 있었고, 또한 그들의 만행이 스쳐 지나간 흔적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일월신교라는 것은 일명 마교(魔敎)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흡성 대법(吸星大法)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원기를 빼앗는다는 것인데, 그들이 지 나간 자리에는 그 기운을 빼앗겼기 때문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람들의 시체가 늘어가기 일쑤였다. 일행은 처음에는 천륭무가의 멸망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내 그것을 사실 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확인하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 는데, 이윽고 그들이 천륭무가의 본거지라는 중원의 숭산(崇山) 태실봉(太室峯)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폐허가 되어 버린 채 뒹굴고 있는 천륭무가의 잔해(殘骸)를 그들은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 천륭무가는 그 동안 신주팔패의 공격으로부터 가주가 무공을 발휘 하여 막아 왔던 것이었는데, 얼마 전에 그 가주가 갑자기 몸이 좋지 않게 되어서 그 신주 칠패의 주인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서 목숨을 잃게 되었고, 따라서 천륭무가는 그 신주칠패 의 주인들에 의해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의 진상은 확실히 규명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고, 게다가 세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사실로 믿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일행은 일단 그렇게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문인천상은 일단 천륭무가의 터전을 확인하게 되자 이윽고 다시 장원으로 되돌아가기 위 해 마차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윽고 그들이 마차를 돌려서 다시 장원이 있는 쪽으로 얼마쯤 나아갔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일행의 앞길을 막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일전에 문인천상에게 와서 도액오선 등의 일을 알렸었던 공동파의 목상 도장(木桑道長)이었다. 도액오선과 진아라 등은 이미 그 목상 도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색을 하며 맞이했 다. 문인천상은 그를 불러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그런데 목상 도장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지금 본파의 장문인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십니다. 문인 공자께서는 빨리 저의 공동파로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실 그 동안 소식을 올리지 못했던 것도 알고 보면 본파에서 변 고가 있었기 때문에……"문인천상은 변고라는 말에 다시 물었다. "대체 어떤 변고라는 것이오?" 목상 도장은 대답했다. "일월신교가 본파를 침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와중에서 장문인께서는 고전을 하시다 가 주화입마에 들게 되신 것이지요." (……) 기실 문인천상은 비록 공동파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공동파와는 인연이 많아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결코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공동파의 장문인 은 제법 그와 생각이 통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곡허자(谷虛子)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문인천상은 문득 그 가운데 어떤 흑막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으나 우선 일단은 그쪽으로 가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일행에게 공동파를 향해 마차를 서둘러 서 몰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일행이 다시 얼마를 채 가지 않아서 문득 그들의 앞에 다시 한 가지의 놀라운 상황 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주운양 등의 참혹한 주검이었다. 기실 주운양 등은 원래 천륭무가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천륭무가가 멸망하여 존재하지 않 는 것을 보고는 문인천상에게 부탁을 하여 그만 자신들을 풀어 달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인 천상은 그만 생각끝에 그들을 모조리 풀어 주고 또한 혈도를 풀어 주어 공력을 원래처럼 회복하게 해주었었는데, 당시에 좋아서 떠나갔었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이러한 황야(荒野)에 서 죽어서 버려져 있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주운양 등은 전신이 무수한 병기에 찔려서 죽음을 당한 후였고, 주원헌 등도 마찬 가지였으며, 가장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람은 바로 여자인 주완청이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무수한 윤간을 당하고 나서 여인이 중요한 부위를 철저하게 유린당하여 죽게 된 것 같았 다. 얼핏 보기에는 이러한 참혹한 주검들은 어떤 원한맺힌 자의 복수 같기도 하고 혹은 녹림도 적들의 만행 같기도 해 보였다. 그러나 문인천상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것들이 결코 원한 맺힌 사람의 복수나 녹림도적들의 만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렇게 꾸미려고 했지만 그 솜씨와 그 수준에 대해서는 문인천상의 눈을 속일 수가 없을 것 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들을 이처럼 철저하고도 참혹스럽게 살해한 것이었을까? 문인천상은 그러한 의문을 느끼면서 문득 다시 그러한 불길한 예감이 공동파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더욱 마차를 빠르게 몰아서 공동파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 일행은 비록 계속해서 마차의 말을 갈면서 쉬지 않고 마차를 달렸으나 그래도 그들이 공동 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거의 보름이나 지난 뒤였다. 이때는 이미 늦가을도 지나서 공동산에는 흰눈이 두텁게 쌓이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일행 은 공동파로 향하는 도중에 역시 무수한 일월신교 사람들을 보았고 또한 그들의 만행을 목 격해야만 했다. 문인천상은 비록 쉽게 그들을 제지할 수가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어쩔 수 가 없이 그들의 만행을 보고도 그냥 스쳐서 마차를 달리게 했다. 그리하여 일행은 드디어 공동산의 심처(深處)에 위치하고 있는 공동파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는 이미 눈이 많이 내려서 공동산 전체가 하얗게 변해 있었을 무렵이었다. 이상하게도 일행이 공동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일월신교의 무리들의 공격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스산해진 공동파의 분위기와 장문인이 빠진 공동오로( 五老) 가운데의 공동사로가 나와서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하는 광경들 뿐이었다. "장문인은 지금 어디에 있소?" 문인천상이 그렇게 묻자 공동오로 가운데의 둘째인 신탄자(神彈子)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 히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장문인은 지금 폐관(閉關)중이십니다." (폐관중이라고?) 눈앞의 그 신탄자는 커다란 체구에 대머리에다 다소 거뭇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 로 등뒤에는 철로 된 거문고를 하나 메고 있었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루며 음공(音功)에 능 하고, 또한 철비신수(鐵臂神手)라는 무공에 능하여 공동파에서 최고 배분인 오로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이는 일흔 살도 넘었으나 체구가 건장하여 한쪽에 서 있는 도액오선에 비교하니 마치 장년의 사람과도 같았다.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한 후에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어서 장문인이 폐관하고 있는 장소로 안내해 주시오!""예, 소사숙조(少師叔 祖)님!……" 공동사로는 거의 동시에 대답을 하고는 앞장서서 바삐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기실 과거 공동오로는 태사조(太師祖)였던 복마산인이 공동파의 사람들에게 문인천상을 자 신의 수제자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라고 지시를 내렸었기 때문에 공동사로는 지금 이렇게 그 에게 호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아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문인천상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또한 도액오선도 오랜만 에 공동산으로 돌아와서 즐거운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으며, 장문인인 곡허자의 수제자인 목상 도장은 이미 스승의 상태가 걱정되어 급히 일행보다도 먼저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 × × × --- 거대한 동굴(洞窟). 사실 말하자면 이 산의 전체는 동굴들이 무수하여 흡사 벌집과도 같이 동굴들이 여기저기에 뚫려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모든 수백 개의 동굴들 중에서도 유독 이 동굴만큼은 특 별한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공동파에서 장문인이나 조사가 폐관참수를 할 때에 사용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우선 그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 제44장 동굴 속의 주화입마(走火入魔) 공동오로의 둘째인 신탄자가 문득 큰소리를 내서 외쳤다. "대사형! 소사숙조께서 오셨습니다!" 신탄자의 우렁찬 음성은 사방의 동굴 속을 한없이 울리면서 무수한 메아리를 불러일으켰으 며 한참이나 지나서야 사라졌다. 만일 동굴 속에 누가 있다면 설사 잠을 자고 있다고 해도 틀림없이 그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커다란 그 동굴 속에서는 잠시의 시간이 지나도 거의 아무런 대꾸도 들려 오지 않는 것이었다. …… 게다가 신탄자는 잠시의 시간이 더 흐른 연후에 문득 문인천상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이렇 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사숙조님, 이제 들어가시죠." 문인천상은 이에 의하애하며 되물었다. "아니, 혹시 동굴 속에 지금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오?"신탄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사형께서 혼자 계시지요." 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오?" 신탄자는 이에 다소 미소를 떠올리더니 대답했다. "대사형께서는 늘상 이러한 식입니다. 그러니 우선 소사숙조께서 안으로 들어가 보시면 아 시게 될 것입니다." (……?) 문인천상은 문득 매우 기이한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 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공동사로의 뒤를 따라서 묵묵히 안으로 걸 어들어갔다. …… 그 커다란 동굴은 그다지 안으로 깊게 이어지지 않았는데,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곧장 끝 부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행은 공동사로가 앞장을 서고 문인천상과 진아라 등이 뒤따르는 식으로 그 동굴의 안쪽 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갔는데, 이윽고 동굴의 가장 안쪽에 하나의 돌침상이 놓여져 있었 는데 바로 그 위에 한 사람이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누워 있었고, 그 앞에는 지금 바로 얼마 전에 먼저 이곳으로 날아 들어왔었던 목상 도장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광경 을 볼 수가 있었다. (……!) 문인천상은 비단 이 동굴의 내부에 다른 사람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이 왠지 매우 낯익어 보인다고 생각하여 자세히 그곳으로 시선을 던지다 가 문득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한 명의 평범한 촌로(村老)를 연상시 키는 수더분한 용모의 노도인(老道人)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공동파의 장문인인 곡허자, 그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목상 도장은 곡허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문인천상이 다가오자 얼른 몸을 일으 켜서 그를 맞이하였는데, 문인천상은 그 곡허자의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공동사 로에게 물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아까는 장문인이 폐관참수한다고 말하지 않았었소?" 신탄자가 고개를 숙이며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실은…… 지금으로부터 한달쯤 전에 일월신교가 나타나서 본격적으로 본파를 공격하기 시 작했었는데, 느닷없이 본파의 대사형은 이렇게 주화입마를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본파 제자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다만 폐관참수한다고 둘러대었던 것이었습니다." 문인천상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일월신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오?" 신탄자는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그 일월신교는 지금쯤 육반산(六盤山)의 어귀에 정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무리는 기실 한달 전쯤부터 본파에 침입하기 시작했었는데, 요즈음 들어서는 웬일인지 공격도 뜸하고 자주 공동산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문인천상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장문인이 주화입마를 당했다는 말이오?"바라보니 곡허자의 얼굴은 비록 시체와 같지는 않으나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고 또한 푸르뎅뎅한 기운이 어려 있어서 절로 음산한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문인천상은 이 곡허자가 지금 비록 혼절해 있는 것이지 만 아직은 호흡을 하고 있고 또한 심맥도 거의 정상대로 뛰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 다. 신탄자는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저희들은 아직 그 원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원래 대사형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거의 한달 이 가까워 오는 상황이온데 저희들이 목상에게 시켜서 소사숙조님을 모셔오라고 하였던 것 이었습니다." 문인천상은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혹시 장문인이 주화입마를 당했을 만한 어떤 단서라도 없었소?"신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 저희 대사형께서는 적도들과 격렬한 격투를 벌이시고 나서 본파에 돌아오셔서 일단은 이곳으로 참수를 하러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실로 그때까지는 대사형의 몸은 다소 피로하기는 했어도 전혀 이상이 없는 듯했었기 때문에 대체 어찌된 영 문인지 저희들도 알 길이 없습니다." 문인천상은 이번에는 남은 공동삼로인 현명자(玄冥子)와 목령자(木靈子), 그리고 고홍자 (孤鴻子)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시 장문인이 이곳에 있었을 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누구였소? 그리고 그 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었소?"현명자는 염소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다소 마른 듯한 선비풍의 늙은 도인이었고, 목령자는 그보다도 더욱 깡마르고 길쭉한 몸을 가진 사 람이었다. 그의 피부도 다소 거무스레했으나 신탄자와 같은 윤기는 흐르지 않고 있었고, 다 만 나무껍질과도 뻣뻣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홍자는 키가 작고 몸매가 뚱뚱하며 얼굴이 붉었는데, 그의 불그레한 두 눈에서 연신 광망이 번뜩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실로 성격이 급한 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의 질문에 현명자와 목령자는 가만히 있었는데 고홍자가 마치 금방이라도 입을 열 듯이 입을 달삭거렸는데, 신탄자가 그것을 보고 옆에서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날 대사형의 곁에 있었던 사람은 바로 이 장문제자인 목상이었고, 그리고 그러한 일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저와 이 고홍자였습니다."(……) 문인천상은 가볍게 고홍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쪽에 시립하듯이 공손히 서 있는 목상 도장을 향해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은 그때 장문인이 이렇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였소?"목상 도장이 이에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의 사부님께서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셨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안전 을 지켜드리기 위해 이곳에 함께 따라 들어왔었는데, 여늬때와는 달리 사부님의 표정이 매 우 엄격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외에는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문인천상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의 사부이신 장문인은 느닷없이 쓰러져서 저렇게 되었다는 말이오?" 목상 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부님께서는 그날 이곳에 오시자마자 한동안 운공조식에 들어가셔서 무척이나 힘을 쏟으 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한쪽에 서서 사부님의 운공조식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부님께서 운공조식에서 깨어나시더니 저를 부르시면서 이 렇게 말씀하셨습니다."문인천상은 물었다. "장문인은 그때 무슨 말을 했었소?" 목상 도장은 대답했다. "사부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저에게 지금 빨리 가서 둘째사숙님을 모셔오라는 말씀이셨습니 다." "둘째…… 신탄자 도장을?" 문인천상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신탄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목상 도장은 이어서 다시 말 하기 시작했고, 문인천상의 시선도 그쪽으로 다시 옮아갔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사숙님들을 모시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망극하게도 사 부님께서는 저와 같은 모습으로 쓰러져 계셨습니다. 제자는 처음에는 누구에게 기습을 받 으신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으나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목상 도장의 상황 설명은 끝났다. 하지만 지금 말한 목상 도장의 상황 설명은 그저 평범하 기만 한 것이어서 얼핏 거기에서 무슨 단서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문인천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의 일을 뇌리에 떠올린 듯이 입을 열어 목상 도장 에게 물었다. "참, 아까 장문인이 운공을 하다가 말고 당신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당시의 장문인의 얼굴 표정은 어떤 것이었소?"목상 도장은 지금 나이가 환갑에 이르러서 백 발이 성성한 노도장이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최소한 배분이 하나 더 높은 것이기 때문이 마치 어린 동자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목상 도장은 문인천상의 질문을 받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대 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의 사부님의 얼굴 표정이 다소 이상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기쁜 듯 혹은 황홀한 듯, 그것도 아니면 왠지 수심에 차 계신 듯하기도 하고, 혹은 웃고 계신 듯도 하고…… 아무튼 그 안색은 다소 붉은 듯하셨습니다." …… 사람들은 일시 목상 도장의 말을 듣고 나자 다소 멍한 표정이 되어 아연한 듯한 기색을 보 였다. 그렇다. 기실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심마(心魔)라는 것이겠 지만, 일단 그것에 걸리게 되면 어떤 착각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게다가 자신이 원하지 않 는 일을 하기도 하며,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없이 걸어다니기도 하다가, 이윽고 마침내 는 주화입마의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목상 도장의 그와 같은 설명을 듣 게 되자 문득 하나같이 곡허자가 운기조식을 너무나도 무리하게 하던 나머지 심마에 빠지 고 말았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우선 이 목상 도장의 말에 진실성이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실로 이 목상 도장은 용모가 단정하고 기색이 중후하며 눈빛이 광명정대한 기질이 있어서 결코 이런 사건을 두고 거짓말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목 상 도장의 말은 사실이었다는 결론인데, 문인천상은 잠시 그것에 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 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한달이나 지난 일이라서 어떻게 그와 같은 기억을 그토록 정확하게 떠올릴 수가 있겠소? 혹시 그 기억은 잘못되었던 것이 아니오? 아까는 운공조식을 하기 전에 장문인의 심사가 매우 좋지 않은 것 같았다고 하지 않았소?" 목상 도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것은 아마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는 기실 당시의 사부님의 표정이 너무나도 기 이하고 또한 느닷없이 그러한 심부름을 시키셨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서 지금까지 그러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문인천상은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느닷없이 그렇게 변모하고 게다가 안색까지 붉어졌었다니……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로군 그래." 이어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목상 도장을 향해 다시 물었다. "참, 그런데 아까 신탄자 도장을 부르러 갔었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올 때에는 다른 사람들 도 함께 왔다고 들은 것 같았는데 그것이 사실이오?"목상 도장은 문인천상의 예리한 지각에 내심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제자가 둘째사숙님의 처소에 갔었을 때에는 이미 이분들 세 분 사숙님들 께서도 그곳에 함께 계셨었지요. 그래서 모두 함께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연히 그곳에 함께 있었다고? 그것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하나라도 그냥 보낼 수가 없을 것이니 다소 공교롭다고 해야 하겠군?"이에 신탄자가 웃으면서 입을 열어 말을 받았다. "사실 아까도 얘기하려고 했었지만 그 일은 아는 사람은 저와 다섯째였는데, 다섯째는 속 의 생각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에 셋째와 넷째에게 그 일을 알리게 되어 서 그들 모두는 당시 저의 방에 모여서 대체 장문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논하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질이 나타나게 되자 모두들 한꺼번에 장문인에게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혹시 장문인이 어떤 일을 상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문인천상은 묵묵히 그 얘기를 듣고 있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대가 이 동굴의 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장문인이 그 지경이 되어 있었 을것인데 차후의 일은 그대가 알아서 했었겠구려?"신탄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저는 사질 등을 대동하고 이곳에 이르렀었는데, 그때는 이미 대사형께서는 지금과 같이 혼절하시어 호흡이 불규칙하고 맥박이 미약하며 전신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상 태였습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대사형을 깨워서 그 의견을 듣고 싶었으나 대사형께서는 쉽 게 깨어나시지 않자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윽고 저의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인천상은 그의 말을 자르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우선 장문인을 급한 대로 이곳에 이렇게 눕혀 놓고 나서 이러한 사실을 일체의 비밀로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오?"신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저희는 비단 장문인의 일이 알려지게 되면 제자들에게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상대편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사기를 올려 주는 계기가 될까 봐 차라리 사숙조 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문인천상은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왔으니 이 일을 비밀에 붙이지 않고 발표하겠다는 말이오?" 신탄자는 대답했다. "이제 사숙조님께서 오셨으니 저희들은 당연히 사숙조님의 분부에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숙조님께서 이 일을 발표하라고 하시면 저희들은 마땅히 이에 따르겠습니다." 문인천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이 일은 아직 그 원이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니 비록 내가 있다고 해 도 당분간은 계속해서 비밀로 해두는 것이 좋겠소. 그것이 보다 이 사건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유리한 상황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오." …… 문인천상은 곡허자의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신탄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간에 환자에게는 적절한 조치들을 취해 주었소?" 신탄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그저 가끔씩 살펴볼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들을 파견해서 지키고 있는 상태이며, 또한 어떤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에 쉽사리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소사숙조님께서 한 번 상태를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문인천상은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곡허자의 늘어져 있는 한 손을 잡고는 그 맥문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곡허자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야말로 차디 찬 것이었는데, 문인천상은 그 맥문을 짚어 보는 순간에 일순 시선이 기이하게 변모했다. ……! 신탄자가 그 광경을 보고는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문인천상은 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아직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 잠시 더 상황을 두고봐야 하겠소. 혹시 그간에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소?" 신탄자는 기대했던 문인천상이 희미한 태도를 보이자 다소 실망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그간에 별다른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문인천상은 이에 곡허자의 손을 놓고는 몸을 일으켜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무튼 좀더 시일을 두고보면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합시다."…… 문인천상이 앞서서 동굴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하자 공동사로와 도액오선, 그리고 진아라 등이 뒤를 따랐고, 이어 목상 도장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에 남았다. 동굴의 밖에 이르자 문득 이제까지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었던 현명자가 문인천상을 향해 공손히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장문사형께서 다시 회복하게 되실 가망성은있는 것입니까?"문인천상은 그의 얼굴 을 마주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왔으니 일단은 안전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상황은 언제 변할지 알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좀더 명확한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소. 그리고 그 시기 도 빠를수록 좋을 것이며, 게다가 기왕에 지켜온 비밀은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이오." 말과 함께 문인천상은 문득 신형을 돌리더니 스스로 걸음을 옮겨서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현명자 등은 일순 문인천상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일단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 문인천상은 공동파의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공동파에서 머무를 수도 있었으나 원래 자신이 처음에 이곳에 도착했었을 때부터 도액오선 등이 살고 있었던 그 계곡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억이 있었으므로 그는 차라리 그곳에서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편안 하게 묵기로 했다. 도액오선 등은 다시 자신들이 구속의 계곡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다소 불안한 듯한 눈치였 으나 이내 집으로 돌아온 느낌을 받은 것인지 즐거운 표정들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마 도 그러한 다소 들뜬 기분은 진아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실로 몇 달만에 그들은 집 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진아라는 근래 들어서 더욱 모습이 변화하여 행동이 항상 절제되어 있었고, 또한 감정의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저 조용하고 침착한 모습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지금도 문 인천상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저 조금도 들뜬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살아 왔던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로 동굴들이 무수하게 뚫려 있는 한 암벽의 갈라진 틈새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밖에서 얼핏 바라보면 그저 안이 막혀 있는 천 연의 작은 동굴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일단 그 안에 들어서게 되면 하나의 커다랗고 넓은 바위가 나타나고 마치 암벽과도 같이 생긴 그 바위면을 돌아서 나아가게 되면 마치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작은 동굴로 접어들게 되어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작은 동굴 의 안으로 들어가서 서너 개의 구비를 돌게 되면 바로 그 은밀한 계곡의 입구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 계곡. 그 계곡은 아직 지어진 이름도 없었거니와 그 크기도 매우 작아서 마치 거대한 산의 중심 에 생겨나 있는 하나의 커다란 광장과도 같았는데, 그것이 지하의 광장이 아니라는 증거 는 바로 계곡의 천정에서 마치 우물의 꼭대기처럼 작은 구멍이 뚫려져 빛이 찬란하게 스며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계곡에는 야산이나 커다란 나무들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부를 흘러가는 시원스러운 계 류와 폭포수, 그리고 온통 기암괴석들로 주를 이루는 작은 돌산들과 작은 키의 나무들이 풍 경의 전부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마치 거대한 장원에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아름다운 기암괴석의 정원과도 같은 아담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계곡의 지하에서는 더러 따 뜻한 물이 솟아나와서 내부의 온도를 알맞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동굴을 지나서 계곡의 앞에 이르게 되면 이미 문인천상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진법이 펼쳐져 있어서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었고, 이미 익숙한 그 진법을 헤치고 안으 로 들어가면 시원스럽게 흘러내리는 시냇물과 그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기암괴석의 돌산에 각기 위치하고 있는 두 개의 견고한 석옥(石屋)들이 보였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것들 은 도액오선과 진아라의 거처들인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겨울철이기에 아무런 식물들도 자라고 있지 않은 것이지만, 아마도 따뜻한 봄 날이 오게 되면 이 광장의 내부에는 오색의 꽃들이 앞을 다투어서 피어나고 온갖 싱그러운 풀내음으로 환상과도 같은 아름다운 정경을 자아내게 될 것이었다. …… 제45장 공동파( 派)의 자중지란(自中之亂) 그리고 계곡의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인공으로 만들어진 작은 동굴이 나타나게 되는데, 실로 그 동굴이야말로 문인천상이 기거하던 곳이었고 또한 과거의 복마산인이 무 학을 남겼던 무학동(武學洞)이었던 것이었다. 그 무학동의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여러 개의 석실들 가운데 몇몇 군데는 문인천상이 이 미 배운 바가 있는 무학의 구결들이 깨알같은 글씨체로 빽빽하게 새겨져 있어서 문인천상 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무공을 연마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도액오선은 일단 안으로 들어서게 되자 저마다 신이 나서 얼른 신형을 날려서 자신들의 거 처로 날아갔고, 문인천상은 중앙에 길게 흐르고 있는 시냇물의 앞에 이르러서 잠시 움직이 지 않고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뒤에서 진아라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었다. "식사 준비가 끝났어요, 오라버니!" (……?) 문인천상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나의 밥을 다 지어 놓았다는 말이냐? 그래 너도 이미 그러한 일을 다 배웠으냐?" 진아라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미 혼자서 살아 왔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이미 익숙한 걸요? 다만 반찬이 입맛 에 맞을지 알 수가 없어서……"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만일 네게 밥을 얻어먹을 수가 있다면 그 맛이야 어찌 따질 수가 있겠느냐?" 진아라는 그 말에 웃으며 먼저 신형을 돌려서 그를 안내했다. "그럼 어서 저를 따라오세요!" …… × × × 진아라가 혼자서 살아 가고 있는 그 석옥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하나뿐인 돌정자와 비슷 해 보이지만 기실은 그 내부에 다시 동굴을 뚫어 놓아서 많은 석실들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 놓은 곳이었다. 그곳은 원래 진아라가 부모와 함께 살아 가던 곳이었으므로 공간이 상당히 넓었었는데, 지 금은 진아라가 혼자서 그러한 공간을 쓰고 있는 것이었고, 무척이나 정결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진아라는 문인천상을 그 동굴의 앞에 위치하고 있는 멋들어진 돌정자로 안내했는데, 이미 그곳에는 작은 탁자 위에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문인천상은 물론 과거에 더러 진아라에게 음식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으나 그때의 기억은 희미했고 지금 그 음식들을 보니 최소한 그때보다는 훨씬 정갈해진 느낌이 들었다. "도액오선은 굶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서 이런 복을 누려서야 되겠느냐?" 문인천상이 탁자 앞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 위에 앉으며 그와 같은 말을 하자 진아라는 다 소 웃으며 대꾸했다. "그들도 지금쯤은 밥을 해먹고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나 다를까 과연 저쪽에서 느닷없이 기이한 밥타는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또한 서로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가 울려나오더니 이어서 쩝쩝거리는 소리가 뒤를 있는 것이 아닌 가. "과연 그렇군." 문인천상은 웃으며 수저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비록 그다지 맛깔스러운 풍미는 없어도 맛이 담백하였으며 아주 정갈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어서 먹기에 조금도 부담이 가지 않았다. 진아라는 문인천상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그 앞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실로 그 태도는 조용하고 정숙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러 한 태도는 결코 꾸며낸 것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과거에 진아라는 다소 철부지와 같았고 또한 오만한 기질이 있었는데, 일단 강호에 나가서 몇 달이라는 세월 동안 풍상을 겪게 되자 그만 느닷없이 이렇게 깊이 있고 정숙한 숙녀로 돌변한 것이었다. 비록 그녀의 나이는 아직 열다섯 살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행동거지는 스 무 살 먹은 성숙한 여인과도 같았고, 게다가 그전보다도 훨씬 크게 커서 이미 어른의 티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인천상은 과거에 귀여운 진아라를 이곳에서 보았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성숙한 그녀 의 모습을 대하게 된 것을 생각하고 문득 절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이제는 이 총명하고 도 맑은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는 진아라가 사춘기의 늪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문인천상의 미소하는 모습을 보고는 진아라가 문득 의아해 하며 질문을 던졌다. "오라버니, 무슨 일인데 그렇게 웃으시나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나는 일전에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당시에 나에게 시집오 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절에 가서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했었지? 하하하, 그때의 너와 지 금의 너는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아서 웃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제는 사춘기에서 벗어나 있 는 것이겠지?"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의 생각은 요며칠간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어요. 저의 마음은 편안하고 즐거운 편이고 또한 조용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사춘기를 벗어나서 인생을 보다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건전하게 보게 딘 것이 아니냐? 너는 나이에 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사춘기를 극복해 낸 셈이다." 진아라는 웃으며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오라버니께서도 사춘기를 겪으셨던 적이 있었나요?""나?" 문인천상은 일시 눈을 휘둥그래 뜨다가 이윽고 잠시 생각을 한 다음에 조용한 음성으로 대 답했다. "나는 원래 그와 같은 가문의 참화를 겪었었고 또한 그로 인해서 한때 심하게 방황을 했었 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 당시의 상황이 나의 사춘기였다고 말할 수가 있었겠지. 하지만 일단 이곳에 들어오고부터는 전혀 그러한 감상에 젖어 있을 사이가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이다." "……" 문인천상은 비록 맛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그 담백하고도 정갈한 음식 솜씨 때문에 보 통 때보다 훨씬 많은 밥을 먹게 되었고, 벌써 두 그릇의 밥을 해치우고 다시 빈 밥그릇을 내밀면서 진아라에게 다시 미소하며 입을 열어 물었다. "나는 네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모할 줄은 몰랐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생각해 보니 문득 한 가지의 궁금증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기분이다. 그것은 바로 네가 과연 지금의 냉철 한 마음으로도 나와의 혼인을 그토록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 하하, 그거야 너는 물론 마음이달라졌을 것이지만……"(……) 문인천상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엽노와 화노에게 장원을 떠나면서 일전에 뭐라고 말을 했는지 아느냐? 만일 내가 이번에 강호에 나와서 변을 당하게 된다면 그 장원의 모든 재산을 너에게 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강호에서 변을 당하게 되면 너는 장원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주인이 되고 편안하게 살아라. 좋은 남자를 만나서 혼인도 하고…… 그런데 너는 혹시 그 보물동굴의 출입하는 법을 알고 있느냐?" 진아라는 차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저는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해요. 오라버니께서는 정말로 그곳에 다른 장애물을 설치하셨었 나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나는 틀림없이 누구도 쉽게 그 안에 들 어가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만일 네가 나에게 그 비결을 듣게 된다면 역시 쉽 게 출입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이 어떤 비결인지 알겠는냐?" 진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얘기를 해주지도 않았는데 네가 미리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 면 그곳을 그렇게 들어가기가 힘든 고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일이겠고…… 그곳을 들어가 는 비결은 그 기관장치의 작동을 이곳의 입구에 설치해 놓은 그 진법의 주된 흐름과도 같 이 하면 되는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있겠느냐?"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방법대로 그 기관장치를 작동시키면 된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 바위는 또 어떻게 작동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 그와 같은 기관장치를 한 순간에 바꾸어 놓을 수가 있었지요?"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바위를 움직이는 수순은 역시 그 역순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마하지(摩訶指)를 사용했었기 때문인지. 너도 이 마하지의 뛰어난 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지 않느냐?"진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랬군요. 하지만 저는 오직 오라버니께서 무사히 장원으로 돌아가셔서 모두가 평안하게 잘 살게 되기를 바래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그 말을 받았다. "너의 그러한 말만으로도 고마운 생각이 드는구나." (……) 이어 문인천상은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 수저를 놓았다. 오랜만에 정결한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웠기 때문에 그 포만감으로 인해 이곳의 청결한 기운이 심신에 가득하게 들어 차는 것 같았다. 진아라는 잠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어 하나의 쟁반에 찻잔과 찻주전자를 올려 가지고 다 시 나오는 것이었다. 진아라가 공손하게 차를 따라서 그에게 찻잔을 건네주자 그는 한 손으 로 그것을 받아서 조금씩 음미하듯이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향기가 실로 맑고 그렇게 깨 끗할 수가 없었다. 원래가 이곳의 물이 워낙에 좋은 데다가 정성을 기울여서 적당한 온도 로 차를 끓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향기로운 맛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리라. 문인천상은 실로 어느새 이러한 차를 끓이는 솜씨까지 익힌 진아라에 대해서 내심 다소 감 탄을 하면서 차를 두어 잔이나 마셨다. 진아라는 그의 앞에 있다가 계속해서 찻주전자를 들어서 찻물을 따라 주다가 문득 입을 열 어 문인천상에게 말했다. "실은…… 저에게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는데 오라버니께서는 그 궁금증을 풀어 주시겠어 요?" 문인천상은 이미 그녀에게 이와 같은 고급스러운 대접을 받고 나자 뭐든지 보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는 즉시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진아라는 잠시 생각한 뒤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아까 전의 그 일이예요. 저도 아까 동굴에서 장문인의 모습을 보았었고 또한 오라버니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설명을 들었었는데 도무지 어찌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가 없 었어요. 게다가 마지막의 오라버니의 말씀은 뭔가 의미심장한 것 같았는데 역시 아무리 생 각해 보아도파악할 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문인천상은 그 말에 다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은 일단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하게 느껴지겠지만 기실은 매우 간단한 이치인 것이 다. 아라, 너는 아까 그 동굴에서 장문인의 모습을 보고 그가 정말로 주화입마에 당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었느냐?"(……?) 진아라는 그 말에 문득 크게 놀라서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아니, 그럼 그는 전혀 주화입마에 들지 않았었다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잠시 미소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기실 그러한 이치는 유심히 생각해 보기만 해도 능히 쉽게 알아차질 수가 있는 것 이었다. 우선 그 신탄자가 동굴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큰 소리로 외쳤었는데 그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고, 또한 장문인은 이미 한달 동안이나 그와 같은 상태로 있었닥 하는데, 비록 그의 몸이 다소 마르기는 했지만 날짜에 비해서 그의 몸이 너무나도 멀쩡하다는 것이 이 상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일단 그의 손을 잡고 진맥을 해보니 더욱 확실하게 그것을 알 수 가 있게 되었다." 진아라는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장문인의 몸은 멀쩡했었나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몸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가 있었지. 필시 다른 사람들도 진맥을 해보았을 것이니까 그러한 점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진아라는 더욱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일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 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일단은 모든 사실이 거짓인 이상은 나와 같은 사람 의 눈은 속일 수가 없는 법이다. 즉 그들은 오히려 내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랬 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진아라는 놀라서 물었다. "알게 되기를 바랬었다고요?" 문인천상은 이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히려 되물었다. "너는 장문인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연극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게 다가 수제자로 하여금 나를 불러오게 하고서 말이다."진아라는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끝내 알 수가 없게 되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바보인가 봐요. 정말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생각나지가 않네요."문인천상는 웃으며 말 했다. "그것은 너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쉽게 그런일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너 는 일부러 자책할 필요는 없다." 진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마음은 더러워서 그런 일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인가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마음은 텅 비어 있다. 그러니 더럽고 깨끗한 것들도 모두 포용할 수가 있는 것이지 만, 기실 그 가운데에는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니 바로 그러한 이치 때문에 나는 오 히려 훤하게 일을 꿰뚫어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그것이야말로 가장 맑고 깨끗한 마음이 아닌가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사실 가장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은 걸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걸림 이 없게 된다면 마음은 허공과도 같이 맑아서 모든 것을 비추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러한 면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이 있지만 네가 하루빨리 그러한 이치를 깨우치기를 바 라고 있다."진아라는 웃으며 다시 물었다. "제가 바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라버니의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비록내가 너에게 그러한 것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싶다고 해도 만약 내가 무슨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너에게 가르쳐 줄 사람도 없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너는 가능하면 하루빨리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진아라는 묵묵히 문인천상의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이렇게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오라버니께서 돌아가신다면 저는 반드시 오라버니의 뒤를 따르고 말 거예요!) 문인천상은 그녀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장문인이나를 불러 놓고 그와 같은 연극을 했던 것은 나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아라는 다시 화제가 공동파의 일로 넘어가게 되자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입을 열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직접 만나서 말하지 않고 그와 같은 수단을 부렸던 것일까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는 나에게 직접 말로 하지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진아라는 잠시 생 각해 보다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그는 일파의 장문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결코 사적인 일로 그와 같은 거창한 연극을 벌이 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래 사적인 일에는 비교적 담백한 성품이었으므로 나에게 따로 부탁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결국 그가 그처럼 제자들을 동원하면서까지 나에게 연극을 한 것은 필시 공동파 에 어떤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한 것일 것이다." 진아라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당시 장문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었다고 했으니 과연 공동파에 무슨 좋지 않은 변란 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대체 어째서 그러한 일들이 오라버니께는 말할 수가 없는 일이 라는 것이죠?" 문인천상은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오히려 되물었다. "아라, 너는 공동파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냐?"진아라는 잠시 생각 하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오라버니를 한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 그들은 나를 일단은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테면 나를 이용 가 능한 보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나를 자신들의 동료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만 현실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지 나에게 어떠한 미련이나 동질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즉 나는 나이며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서 로 상부상조하는 친근한 사이라고나 할까?" 진아라는 물었다. "그것이 대체 지금의 현실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거죠?"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 답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비록 나를 소사숙조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기실은 그들의 마음속에는 내 가 공동파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이 강렬하게 심어져 있는 것이며, 따라서 공동파의 수 치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외부인인 나에게 감히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진아라는 물었다. "공동파의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죠?"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이를 테면 장문인 등이 좋지 못한 짓을 했었거나 혹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 나서 반목하고 있는 일 따위의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을 검토해 본 결과 그것은 역시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그러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진아라가 다시 물었다. "일월신교가 침공해 오고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요?"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일월신교는 이미 마교로 소문이 나 있는 문파이고 또한 그 세력이 막강하기 짝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 어째서 수치스럽다는 말이냐? 차라리 그것은 정파인 들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며, 그런 일에는 틀림없이 나를 쉽게 공공 연히 이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반드시 상황이 자중지란을 나타낸다고 하시는 거죠?"문인천상은 대답했 다. "그것은 물론 확실히 입증된 것이 아니라 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필시 나의 판 단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까 목상 도장의 말에 의하면 장문인은 그에게 신탄자를 데려 오라고 시켰다고 했었는데, 너는 그 얘기를 듣고 너무나도 공교로운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 느냐?" 진아라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은 늘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우선 말하자면 장문인은 자신이 동굴 안에 들어가서 수련을 한다는 사실을 신탄자와 고홍 자에게 알렸던 것이었는데, 고홍자는 성격이 급하여 비밀을 오래 가지고 있지를 못하고 그 얘기를 다른 두 명, 그러니까 현명자와 목령자에게 발설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 은 신탄자의 거처에 모여서 그 일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목상 도장이 거기 에 때맞추어 나타나서 장문인의 지시를 알렸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계획된 행동인 것 같지 않느냐?" 진아라는 대꾸했다. "그러니까 장문인이 일부러 그런 사실을 신탄자와 고홍자에게 알렸다는 말인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원래 장문인은 그 당시 매우 심각한 심정으로 동굴 속으로 들어갔었을 것이 뻔한 일이었고, 따라서 그 중대한 상황에 대해서 구태여 현명자와 목령자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 은 분명한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고홍자에 게 그 사실을 말해서 그러한 사실을 앞서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알게 했다. 그러한 사실 은 그 두 사람에게 장문인의 변고를 우연히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진아라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장문인은 어째서 그러한 사실을 그 두 사람에게만 우연히 알리려고 했었을까요?"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물론 그것은 분명히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시 장문인은 자신의 그러 한 모습을 두 사람에게 보여서 좋지 않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기로 삼으려고 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고 문득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면…… 일부러 그들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려고 한 것이었다면 결국 그들이 좋 지 않은 무리들이라는 말인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까 장문인이 운기조식을 마친 다음에 그와 같은 이상한 표정을 했었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아라는 물었다. "그 이유는 뭐죠?"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그 하나는 그의 적도들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보다 완벽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다른 하나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진아라가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다시 그녀에게 입을 열어 물었다. "너는 아까 목상 도장이 장문인이 처음에는 표정이 매우 좋지 못했으나 ㄴ중에는 밝아졌었 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진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의 이유가 있을 뿐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않 았으나 그로 인해서 수련을 결심하게 되었고 게다가 운기조식이 끝나게 되자 표정이 밝아 졌다는 것은 오직 그가 내상을 입었거나 아니면 누구로부터 만성지독을 당했었기 때문이라 고 할 수가 있는데, 그는 그러한 수련을 비밀스럽게 했고 또한 사람을 의식했던 것이니 그 것은 역시 그가 만성지독에 중독되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46장 음모(陰謀)와 계책(計策) 문인천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운기조식을 하고 나서 그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은 진짜이든 연극이든간에 오직 그러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싸움을 하다가 자신이 만성지독에 중독된 것을 알았었을 것이고, 이내 운기조식으로 그것을 해소한 다음에 마치 자신이 운기조식을 잘못 해서 심마에 빠진 것처럼 보이려고 했었음이 분명했다." 진아라는 물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것으로 성공을 했나요?"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그는 이제까지 신탄자와 서로 짜고서 그와 같은 연극을 해 왔으며 이제까지 무려 한달이 나 시간을 끌어 왔으니 그것은 성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비록 그가 만전 의 준비를 다하기는 했어도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었다." 진아라는 놀라서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죠?"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그는 일단 심마에 빠진 것처럼 해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했었으나 그가 실제로 운기조식에 성공을 했었기 때문에 그는 얼굴색이 그렇게 붉어졌던 것이었다. 그는 그 순간에 비록 표 정은 고칠 수가 있었을지 몰라도 얼굴빛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의 모습은 음독(陰毒)에 당하여 주화입마를 당한 증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만일 그가 정말 로 음독에 의해 주화입마를 당하려는 순간이었다면 그의 얼굴은 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긋불긋했어야 할 것이다." "……" "그는 나중에는 공력을 끌어올려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위장할 수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미처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해서 중독 증상이 치료된 불그레한 안색을 드러내게 되었고, 목상 도장은 비록 그가 원하는 바를전하기는 했으나 원하지 않던 그러한 부분까지 함께 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현명자 등이 이제까지는 속아서 행동을 해 왔을지는 몰 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은근히 신탄자 등에 게 그러한 암시를 주었던 것이다." 진아라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들이 쉽게 그러한 이치를 파악할 수가 있었을까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믿고 있는 것 같아도 기실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주위 를 살피는 것이 여전히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들은 오늘 반드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 진아라는 놀라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설령 오늘 그와 같은 일을 알게 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 아니겠어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코 그렇지가 않다. 너는 현명자 등이 내가 나타났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이유가 뭐 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장문인이 일부러 나를 불렀으며 또한 일월신교가 느닷없이 공격을 중단하고 멀찌감치 물러가 버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 진아라는 문인천상의 계속되는 질문에 잠시 넋이 달아난 듯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 을 열어 말했다. "저는 알 수가 없어요. 저의 머리는 정말로 멍청한가 봐요."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아까 한동안 생각했던 것이고 너는 이제 마악 하려는 것이니 잘 생각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장문인이 구태여 나를 부르고 또한 일월신교가 느닷없이 멀찌 감치 물러가 버린 이유는 바로 이 공동파에 어떤 보이지 않는 다른 거대한 힘이 있기 때문 인 것이다. 장문인이 만약 그러한 힘이 없었다면 당장에 현명자 등을 제압했을 것이지 구태 여 나를 부르고 그와 같은 연극을 하지 않았었을 것이며, 게다가 일월신교와 같은 무리들 이 그렇게 순순히 뒤로 물러서지 않게 되었었을 것이다."진아라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당금의 공동파는 지금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길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는 말인 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장문인이 지금 그와 같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파의 일을 나에게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고다른 한 가지 이유는 그 거대한 암중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그의 그러한 노력은 그야말로 현명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이었다."진아라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도 그 장문인이 매우 현명하고 마음씨도 좋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대체 어떤 현 명한 점이 있었다는 거죠?"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원래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명자 등은 일단 일월신교가 나타나서 공동파를 삼키려고 하자 그 거대한 세력과 연합을 했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어떤 이권을 약속받았었음이 분명할 것 이다.그들은 일단 장문인이 일월신교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면 갑자기 나 타나서 힘으로 공동파를 차지하려고 했었겠지. 하지만 장문인은 그러한 사실을 이미 알아 차리고 나서 스스로 주화입마에 걸린 척했던 것이다. 그것은 따라서 상황을 아예 바꾸어 놓 았다." "……" "현명자 등은 일단 장문인이 그렇게 되고 나자 생각을 돌리게 되었고 굳이 일월신교와 맞 설 것도 없이 암중의 인물들을 내세워서 그들이 공동파를 차지하려고 획책했었을 것이고, 바로 그러한 결과로 일월신교가 그 암중의 세력의 저지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 암중의 세력은 일월신교마저도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니 틀림이ㅣ 없이 신주칠패 가운데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진아라는 물었다. "그럼 현명자 등은 자연스럽게 장문인의 직위를 물려받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겠군 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가 암중의 그 거대한 세력과 연합을 한다면 당금의 공동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내가 왔어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그저 장문인이 완전하게 죽어 버리기를 손꼽아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실로 인내심이 있게 지금 까지 기다려 온 것이었는데, 아마도 좀더 시일이 지나게 되면 직접 장문인을 살해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진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보니 장문인은 당시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던 상황에서 이렇게 오래도록 공동파를 보존하여 당신에게 다움을 청할 수가 있게 했었군요? 하지만 그 현명자 등은 이제 장문인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틀림없이 그들은 정말로 장문인이 연극을 하고 있는가를 확인한 다음에 제거하려고 할 것 이다. 아마도 비밀에 붙여지기는 했었지만 공동파의 제자들이 은연중 장문인이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니 그가 이번에 장문인을 죽인다고 해도 전혀 의심을 받지 않게 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암중의 인물을 내세워서 이번에 아예 문파를 뒤엎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진아라는 물었다. "장문인 등은 이미 그러한 일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을까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 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특히 이번에 날 부른 것은 바로 그 가운데의 하나일 것이다."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 암중의 세력이 신주칠패의 하나라면 대체 어떤 곳일까요?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그들을 상대하시는 것은 다소 위험하지 않겠어요?"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곳인지는 직접 봐야 알게 되겠지만, 아마도 나에게 그다지 커다란 위험은 없을 것이 다." (……)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기다리는 것이다." 진아라는 의아해 하며 다시 물었다. "기다리는 것이라고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다시 말했다. "원래 대낮에는 흉수는 잠시 남들의 시선을 피하는 법이다. 한밤중에는 그야말로 어둠이 가려 주고 있으니 그 어떤 흉악한 일을 하는 데는 적격이 아니겠느냐?" 진아라는 그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알고는 말했다. "아, 그럼 밤중까지 기다린다는 말씀이시군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는 일단 저녁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한 군데 가야 할 곳이 있다. 그곳으로부터 오늘밤의 사건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것이다. 너는 그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곳은 바로 장문인이 있는 그 동굴이 아닐까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현명자 등은 필시 오늘밤에 장문인의 연극 여부를 확인하고 혹은 확인하지 않고 죽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제거하려고 할 것이고, 따라서 장문인의 입장으로서는 일단 무슨 방법으로든간에 행동을 취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실로 거기에는 치밀하고도 무서 운 두뇌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며, 공동파의 미래가 그 순간에 달리게 될 것이다."(… …) 진아라는 그 말에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가다듬다가 문득 문인천상에게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장문인은 혹시 오라버니껫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을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서 알고 있을까요?"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의해서 오늘밤의 행동이 달라지게 되겠지. 그러나 그는 우선 최소한 내가 그의 의도를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또한 오늘밤에 그들의 행동을 지켜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나를 의식하며 행 동하게 될 것이다."진아라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을 보내서 미리 그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려 주면 더욱 확실하지 않 을까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 현명자는 이목을 그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틀 림없이 그들의 조그마한 움직임도 포착할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이 알리는 것은 오히려 역 화과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이므로 그들은 일단은 다소의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알리지 않고 행동을 감행하게 될 것이다. 바로 거기에 통솔자로서의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한 법이 다."(……) 진아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오늘 밤에는 도액오선과 함께 가게 되나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그들이 그곳에 가게 되면 다소의 도움은 되겠지만 이번의 일은 기밀을 요하는 일이 기 때문에 다문 우리 두 사람만 가면 될 것이다. 너는…… 너는 조용한 성격이니 내가 너 를 이곳에 떼어놓고 가기가 뭣해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너는 그곳에 가더라도 일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진아라는 다소 놀라며 물었다. "그것은 뭐죠?" 문인천상은 대답했다. "그곳에 가게 되면 비록 모든 사항을 알고 있다고 해도 결코 아는 체를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아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런 일이었군요. 저는 원래 그런 일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런 말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헌데 어째서 그것은 안된다는 것이죠?" 문인천상은 진아라에게 되물었다. "너는 그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진아라는 대답했다. "그들은 저와는 동문사형제지간이 아닌가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너에게도 실은 도액오선과 마찬가지로 동문의 대접을 해주기는 하 지만 역시 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남처럼 여기듯이 나의 옆에 있는 사람들인 너희들을 하나같이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동문 운운하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그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 기실 진아라는 이미 어느 정도 공동파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경원시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 로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제가 그와 같은 말을 해서는안된다는 것인가요?"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의 일은 비록 깨끗하게 정리된다고 해도 역시 공동파의 수치스러운 반역의 일이기 때 문에 그들은 결코 남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 서 우리가 공연히 그들이 눈 밖에 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겠느냐?" 진아라는 그제서야 문인천상의 말뜻을 깨닫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알겠어요." 문인천상은 미소했다. "실로 너처럼 이해가 빠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도 너는 머지 않아서 훌륭한 숙 녀가 될 것이니 그때는 내가 살아 있다면 책임지고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 주도록 할 것 을 맹세하마!" (……) 진아라는 그 말에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것을 보고 문인천상은 다시 비어 있는 찻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진아라는 마악 찻물을 따 르려다 말고 이미 찻물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음을 알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시 가서 얼른 데워 오겠어요!" 그러자 문인천상이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다. 나는 이미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그만 나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 진아라는 이에 고개를 돌리고 잠시 걸어가는 문인천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 이번의 일이 끝나면 오라버니의 장원에 가서 모두 함께 살기로 해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는 물론 찬성이다." …… × × × 문인천상은 모처럼 오랜만에 석동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당시에 살던 석실의 안으로 들어갔 고, 이어 그곳에서 오랫동안 참선에 잠긴 이후에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진아라는 이미 밖에서 단정한 하늘색의 옷차림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러 한 모습은 실로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원래 그녀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저 깜찍하고 귀여운 느낌밖에 주지를 않았었는데, 지 금은 그야말로 여인으로서의 사랑할 만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용모 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이 달라졌고, 게다가 그로 인해서 그 녀의 전신에서 맑고 조용한 기품이 우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렸는가?" 문인천상이 묻자 진아라는 약간 수줍은 듯이 조용히 웃더니 대답했다. "저는 장문인이 먼저 죽어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나서 약간 일찍 왔던 것이예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가 죽게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어 그가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진아라는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와서 함께 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마악 계곡의 입구를 벗어나려는 순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다섯 개의 신 형이 번쩍 나타나더니 그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니, 두 사람은 우…… 우리를 놔두고 어디를 가…… 가려고 하는 것이지?" 진아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잠시 산보를 하러 가는 길이예요. 당신들은 설마하니 훼방을 놓지는 않겠죠?" 도상선이 슬슬 웃으며 대꾸했다. "사…… 산보? 그…… 그거 재미있겠는데?" 진아라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고 또한 그들에게 알린다면 일이 또한 어떻게 나빠지 게 될지 알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돼요. 우리는…… 우리는 지금 중요한 볼일이 있기 때문에…… 만일 당신들이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지 않고 여기에서 놀게 된다면 제가 오늘밤에 술을 한 단지 가져다 드리겠어 요." 그 말에 도패선이 성질 급하게 소리쳤다. "술 술? 그…… 그거 좋겠는데?" 기실 도액오선은 이번에 강호에 나가게 되어 술을 배웠고 따라서 이제는 술이라고 하면 사 족을 못 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되패선이 일단 그와 같이 말하자 다른 도액사선도 감히 다시 말을 못하고 신형을 움츠리 게 되었고, 다시 따라오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기는 도액오선에게 있어서 이 두 사람은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호기심이 일기는 해도 감히 지시를 어길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이에 진아라와 함께 입구를 지나서 작은 동굴을 빠져나와 밖으로 향했다. …… × × × 문인천상은 일단 밖으로 나오자 진아라의 한 손을 잡고는 즉시 신형을 허공으로 띄워 올려 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실 그것은 뒤따르는 도액오선 등을 따돌리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는 도액오선이 비록 겉 으로는 그처럼 말을 하기는 했으나 기실 자신들의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쫓아오리라는 것을 훤하게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인천상이 일단 그렇게 허공에 솟아오르자 마침 주위가 알맞게 어두워지고 있어서 도액오 선이 설사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인천상이 허공에 올라서 잠시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도액오선이 동굴 밖으 로 슬그머니 나오더니 이윽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의 흔적을 열심히 찾기 시작하 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은 그것을 보고 즉시 신형을 빠르게 옮겨서 허공을 지나서 아까 낮에 보았었던 그 동굴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그 동굴은 이제 점차로 짙은 어둠 속으로 휩싸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인천상과 진아라가 허공 위에서 내려다보자 그 동굴의 앞에는 지금 바로 목상 도장이 조 용히 서서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보아 아직 그곳에는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문인천상과 진아라는 구름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편안한 심정으로 일이 벌어지게 되 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인천상은 문득 자신이 잡고 있는 진아라의 손끝이 가늘게 떨 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소 놀라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어 물었다. "추우냐?" 기실 지금 진아라가 입고 있는 옷은 겨울철에 입기에 알맞은 것이 아닌 길고 헐렁한 치마 에 불과했고, 게다가 공력이 비록 다소 있기는 하나 이렇게 추운 공중에서 오래도록 있게 되자 절로 추위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 진아라는 안색을 다소 파랗게 물들이고 있다가 순간 문인천상의 손끝에서 부드럽고 따뜻 한 기운이 물밀듯이 밀려들자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문인천상은 미소하며 다시 물었다. "뭐가 아니라는 말이냐?" 진아라는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저는 참을 수가 있어요. 공연히 제가 오라버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해드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문인천상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나는 조금도 번거롭지 않으니 너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문인천상은 진아라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계속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다 시 말했다.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나 같은데 내가 어찌 귀찮게 생각하겠느냐?" 그런데 문득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문인천상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순 간 그녀는 소리 죽여서 눈물을 떨구고 있는 것이 아닌가!문인천상은 이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아서 놀라서 물었다. "아니, 너는 왜 그렇게 우는 것이냐?" 진아라는 이에 얼른 눈물을 닦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제가 너무나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울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울지 않으려고 했었 는데…… 앞으로는 결코 울지 않겠어요."(……!) 문인천상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말했다. "너는 결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소질도 있는 것인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냐?"진아라는 대답했다. "저는 원래 오라버니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여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과 노 력하였어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는 거예요. 항상…… 항상 저 의 목표는 멀게 느껴지기만 하고……"문인천상은 문득 그녀의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려다가 생각을 돌리고는 다시 말했다. "너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아마도 그것은 머지 않아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네가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실 그 목표가 거의 다가왔다는 예감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가지거라." 진아라는 고개를 다시 숙이며 대답했다. "예……" 문인천상은 왠지 그러한 모습이 매우 처연하게 느껴져서 다시 말했다. "네가 만약 정녕 마음이 괴롭고 고단하다면 나에게 의지하도록 해라. 나는 그야말로 너의 오라비가 아니냐?" 진아라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마치 움직이는 인형처럼 스르르 상체를 기울여서 그의 품속으로 몸을 기대 왔다. (……!) 문인천상은 비록 자신의 말이 이렇게 몸을 기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 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진아라가 그의 품속으로 기대 오자 그는 문득 크게 처연한 느낌이 들어서 부드럽게 그녀의 상체를 안아 주고 말았다. …… 제47장 마귀(魔鬼)의 현신(現身) 진아라는 일단 문인천상이 그녀의 몸을 안아 주자 그야말로 마치 두려운 사냥꾼에게 쫓기다 가 날아든 사슴처럼 계속해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문인천상은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보게 되자 다소 흠칫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그녀의 두 눈에 아직도 이슬같은 눈물방울들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져 있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그녀 를 밀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그 얼마나 순결하며 청초하고 아름 다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인가! 진아라의 얼굴도 매우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실로 그녀의 마음속의 향기였고, 문득 문인천 상은 그러한 그녀의 향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게 되자 정신이 아득하게 취해 오는 것을 느끼 게 되었다. 문인천상은 비록 천하의 그 어떠한 독한 술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향기를 맡고는 일순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로 그녀의 두 눈은 얼마나 깊고 처연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녀의 작고 도톰한 입술은 얼마나 붉게빛나고 있는 것일까?(……!) 문인천상은 문득 무의식중에 그녀의 그러한 붉은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유 혹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크게 놀라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었다. 바로 그때 아래쪽에서 갑자기 느닷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므로 문인천상은 일단 진 아라를 안은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아래쪽의 동굴의 앞쪽에 는 느닷없이 공동오로의 둘째인 신탄자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 목상 도장은 이때에도 아직도 그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그 신탄자를 보게 되자 즉시 공손하게 예의를 다해서 절을 올렸다. 신탄자는 이에 그 절을 받는 둥 마는 둥하더니 이내 동굴의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한 참이나 시간이 지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인천상이 그곳의 동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의 귓전에 한 사람의 음성이 맑게 들려 왔다. "정말로 그들은 적들이 장문인을 노릴 것을 염려하여 엄밀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로군요. 하 지만 저 신탄자 한 사람으로 과연 적들을 방어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아라의 음성이었다. 이제 진아라는 눈물을 닦고 맑은 고운 눈빛으 로 아래쪽을 바라보며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장문인을 보호할 것으로 생각했던 신탄자가 이때 느닷없이 동굴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푸대자루와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 그는 아까는 맨손으로 들어갔었는데 대체 동굴 속에서 무엇을 들고 나온 것일까? 목상 도장은 그가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듯이 그저 아까처럼 공손 히 예를올릴 뿐이었다. 신탄자는 이에 다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에는 그 푸대자루를 어깨에 메고서 신법을 펼 쳐서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려가기 시작했다. 그쪽은 아까 그가 나타났던 방향과 다른 쪽 이었고 또한 깊고 황량한 산중으로 들어가는 방향이었는데, 대체 그는 무엇을 가지고 어디 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신탄자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문인천상은 허공에서 진아라와 함께 천천히 그 뒤를 따르 기 시작했는데, 일견하기로도 그 신탄자의 신법은 공동오로의 하나라는 명성에 부끄럽지않 게 매우 빠르고 신속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신탄자가 신법을 날리기 시작한 지 백여 장도 채 가지 못했는데, 문득 그의 뒤쪽에서 은밀하게 허공을 가르며 느닷없이 세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쾌속하게 움직이며 신탄자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대체 그들은 누구라는 말인가? 진아라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허공 위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놀라서 문인천상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이미 동굴의 부근에 숨어 있다가 신탄자가 행동을 개시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로군요?"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는 그들이 누구누구인지 알겠느냐?" 진아라는 잠시 세심하게 검은 그림자들의 모습을 살피다가 대답했다. "저기에 달리고 있는 세 사람 중의 하나는 길고 깡마르게 생겼고, 또한 다른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하게 생겼으니, 그들은 바로 목령자(木靈子)와 고홍자(孤鴻子)가 분명하군요. 그리 고 말할 것도 없이 앞서서 달리고 있는 저 사람은 바로 현명자(玄冥子)가 틀림이 없겠죠?" 문인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아까는 고홍자가 아직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라고 느꼈으나 벌써 현명 자의 편으로 기울어 버린 모양이다." 진아라는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현명자가 장문인에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겠군요? 물론 오라버니께서 계시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설사 장문인이 다시 깨어나서 무공을 펼친다고 해도 그들을 당 할 수가 없을 것인데, 대체 저 신탄자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저들도 어째서 장문인은 놔두고 신탄자만을 뒤쫓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 진아라는 문인천상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 물었다. "저 푸대자루 안에 장문인이 들어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요?"문인천상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앞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서 신탄자는 상당한 거리를 날아왔는데도 여전히 신법을 늦추지 않 아서 그의 신형은 마치 메뚜기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어둠을 가르고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 다. 하지만 이 순간에 그의 신법은 왠지 많이 둔화되어 있었고 게다가 은근히 뒤를 살피고 있 는 것 같아서 누군가가 나타나게 되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누구에게 미행당하는 것을 꺼 려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때 뒤에서 은밀하게 추적하고 있던 미행자들은 신탄자의 신형이 느려지게 되면 따라서 신 법을 늦추고 혹은 신형이 빨라지게 되면 신법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여 그 뒤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문득 신탄자의 신형이 어느 계곡의 공지와도 같은 부근에 이르러서 거의 신형을 정지시키고 자꾸만 의도적으로 뒤를 살피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소 주저하다가 그들은 일 제히 신형을 앞으로 날려서 그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탄자는 그들 세 명이 느닷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들은 역시 예상대로 현명자와 목령자, 그리고 고홍자 등이었는데, 사방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과 계곡 공지의 바닥에 쌓여 있는 눈들이 하늘의 별빛을 받아서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순간에 그들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현명자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신탄자의 퇴로와 진로를 막아선 다음에 그가 푸대자루를 메 고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순 냉랭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둘째사형, 이미 사태가 결정되었는데 구태여 그와 같은 연극을 할 필요가 있겠소?" 신탄자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어리둥절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연극?…… 연극이라고? 너, 너희들은……?" 현명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들고 있는 푸대자루 속에는 장문인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 소. 게다가 당신들은 이미 우리들이 뒤따라 올 것을 예상하고 우리를 여기까지 유인했던 것이 아니오?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속시원히 털어놓고 대사를 결정짓는 것 이 어떻겠소?"신탄자는 그 말에 더욱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 여기에 장문인이 들어 있다고? 내가 너, 너희들을 여기까지 일부러 유인했던 것이라 고?" 현명자는 그의 연극이 자못 우습다는 듯이 싸늘하게 냉소를 하며 대꾸했다. "그렇소. 우리 사형제들은 이미 수십 년간이나 함께 살아 오지 않았소? 그러므로 나는 불 과 약간의 행동만 보아도 당신들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가 있는 것이오." 신탄자는 이에 문득 화가 나서 대꾸했다. "수십 년간이나 함께 살아 왔다고? 의리를 배신한 너희들이 감히…… 감히 그와 같은 얘기 를 입에서 뱉을 수가 있다는 말이냐?" 현명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시세를 알아야 하는 것이오. 이미 시세가 그렇게 된 것인데, 거기에 반기 를 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소? 우리는 비록 당신들을 배신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 만 시세를 따르기 위해 어쩔 수가 없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오." 신탄자는 이에 크게 분노한 듯이 대꾸했다. "너희들은 그저 편리한 대로 시세라고 말을 하는구나. 실로 그와 같은 것이 인심이었다면 그것은 무슨 가치가 있었겠느냐? 정말로 너희들과 같은 사제들을 두었던 것이 나의 수치스 러운 점이다." 현명자는 그 말에 다소 노한 듯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당신이 우리를 사형제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역시 당신들을 사형제로 여기지 않으 면 되는 것이오. 만일 당신들이 지금 즉시 마각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체없이 공 격하도록 하겠소!" 신탄자는 그 말에 다소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현명자를 향해 말했다. "네가 만약 어째서 우리가 너희들을 여기까지 유인해 왔을 것인지 그 이유를 말할 수가 있 다면 나는 사실을 말해 주겠다." 현명자는 그 말에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보아하니 당신은 그 애송이 소사숙조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내가 미리 말해 두지만 그는 오늘밤에 결코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나타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드리겠소. 흐흐흐! 따라서 내 일단은 당신의 소원을 들어 주기로 하지. 그러니까……" …… "당신들은 일단 오늘밤에는 어쩔 수가 없이 우리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또한 무사하기 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일단은 장문인과 함께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최 후의 일전을 벌여 보기로 작정한 것이오. 그러니까 결국은 장문인의 주화입마는 여태까지 꾸민 연극이었다는 것이지."신탄자는 그 말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 연극이었다고? 그…… 그럴 수가 있겠느냐?" 현명자는 이에 다소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당신은 지금 계속햇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면서 대화를 끌어서 시간을 연장시키려는 모양인 데, 나는 비록 그러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최소한 두고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 두시 오. 자!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당신들이 아직도 우리를 속일 수가 있는 것인지 두고보 겠소!"말과 함께 현명자는 미리 대기하고 있었는 듯이 우수를 들어서 신탄자가 메고 있는 어깨 위의 푸대자루를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이때 현명자의 장심에는 마치 푸른 보석을 박아 놓은 듯이 푸른 광채가 일어나는 듯 그러 한 기운이 마치 동전의 크기처럼 일어나고 있었는데, 일순간 그곳으로부터 마치 뜨거운 물 이라도 일시에 얼려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한기(寒氣)가 일어나더니 번쩍하는 광채를 발하며 푸대자루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신탄자는 이에 다소 놀라면서 즉시 자신의 시커멓게 변한 우수를 들어서 그 푸른 광채가 도 는 장력을 물리치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핫핫핫……" 일진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 오더니 다음 순간에 신탄자가 들고 있던 그 푸대자루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더니 그 속에서 한 사람이 느닷없이 날아 올라서 허공을 두어 번 선회하더니 이윽고 바닥에 소리없이 내려서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닌 현명자 등이 예상했던 대로 이제까지 주화입마에 들어 있었다 고 연극을 해 왔었던 장문인인 곡허자(谷虛子)였다. 곡허자는 예의 그 깡마른 몸으로 기척도 없이 신탄자의 옆에 내려서서 싸늘하게 빛나는 시 선으로 현명자 등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비록 그간에 몸은 형편없이 말랐을지라도 그의 두 눈의 안광은 더없이 형형하여 오히려 진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곡허자는 잠시 현명자 등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현명자의 얼굴을 냉랭하게 주시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셋째, 나는 그 동안 자네에게 그다지 섭섭하지 않게 해주었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오늘 은 나에게 그와 같은 현명신장(玄冥神掌)을 발출하다니 유감이로군. 과연 자네의 그 현명신 장은 과거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증대되었네. 혹시 자네가 그들로부터 받은 혜택 가운 데의 하나가 그런 것이 아니었나?" 여기에서 곡허자가 말하는 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문인천상이 말하던 예의 그 암중 의 세력들을 말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현명자는 뜻밖에도 정말로 장문인인 곡허자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런 것들을 당신들은 알 필요가 없는 것이오. 다만 오늘은 당신들의 일진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소."곡허자는 현명자가 자신에게 그와 같은 불 경스러운 언사를 쓰자 매우 불쾌한 표정이 되어서 냉랭하게 대꾸했다. "너는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해 왔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너의 생각대로 될까?" 현명자는 싸늘하게 조소하며 말했다. "그것은 앞으로 두고보게 되면 알게 될 것이오. 자,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선은 서로 가 일장을 교환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의 이 일장을 받으시오!" 말과 동시에 현명자는 다시 우수를 내밀어서 신중하게 곡허자를 향해 내뻗었다. 그러자 다 시 아까와 같은 푸른 광채의 동전만한반점이 나타나서 싸늘한 광채를 발출시키더니 그 푸 른 광채의 무리가 마치 일련의 구름처럼 곡허자의 면전을 향해 밀려가는 것이었다. 비록 그 것은 아까와 같은 현명신장이 분명했지만 지금의 그 장력은 아까보다도 수배는 신중하고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곡허자는 일순 그것을 보자 우장을 앞으로 내뻗어서 무수한 원을 그리는 듯한 움직 임을 보이더니 다시 천천히 내뻗는 것이 아닌가!일순 그가 만들어낸 무수한 원형의 고리와 도 같은 기운이 현명자의 현명신장과 부딪치자 느닷없이 그 현명신장이 그러한 고리 속으 로 갈가리 찢겨져서 들어가 버리더니 이윽고 그것들은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서 곡허자의 손짓에 따라서 다시 현명자의 면전으로 덮쳐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현명자는 일순 그것을 보자 안색이 크게 일변했으나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크게 신형을 날 려서 신형을 솟구친 다음에 이윽고 되돌아오는 장력을 피해서 몸을 내려설 수가 있게 되었 다. 곡허자는 일단 현명자의 장력을 파해한 다음에 이윽고 미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을 걸었 다. "너의 그 현명신장은비록 상당히 발전되기는 했지만 역시 나의 이 공공권(空空拳)에 비하 면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 현명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냉소하며 대꾸했다. "당신의 그 호법장문무공은 확실히 나의 현명신장을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소. 그 러나…… 나는 당신들이 다만 그 이유만으로 우리를 어쩌지는 못한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 고 싶소." 곡허자는 이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이어 한쪽에 다소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는 고홍자 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나는 자네만은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고홍자는 내심 매우 초조하게 서 있다가 그의 말이 떨어지자 즉시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 꾸했다. "미, 미안하게 됐소." 곡허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네. 사람이라는 것은 한 번 정 도는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이번에는 자네에게는 특별히 죄를 만회할 수 있 는 기횔ㄹ 주려는 것일세. 자,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부터라도 그들에게서 탈퇴하여우리 공동파를 위해 애써 주지 않겠는가?" 곡허자의 그 말에 고홍자는 일시 망설이는 듯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고 여태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던 목령자가 느닷없이 고홍자를 향해 입을 열어 말 했다. "다섯째! 자네가 만일 마음을 돌리게 된다면 앞으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 는 것일세.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도 이미 그들의 능력을 보았지 않은가?" 고홍자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소. 나는 이미 결정했으니 아무런 소리도 마시오."이어 그는 곡허자를 향해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게 됐소. 나는 이미 결정했으니 다시 나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마시오." 곡허자는 그 말을 듣고는 일순 싸늘하게 냉소를 피워 올렸다. "자네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구태여 나에게 미안할 것은 없네. 자네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패퇴할 것 같은가? 나는 다만 자네를 조금 생각해서 그와 같은 기회를 주었었던 것뿐이었 는데, 실로 자네가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나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다니 알고 보 니 자네는 철면피의 이중인격자였군." "……" "만일 자네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그와 같이 양쪽을 저울질하며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며 힘이 강한 쪽에 달라붙지도 않았었을 것이네. 앞으로 나는 다시 자네와 같은 사람 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하지도 않을 것이네." 곡허자는 고홍자의 안색이 일순 푸르죽죽하게 변모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끝낸 다음 에 이윽고 다시 현명자에게 말했다. "셋째, 아무래도 자네가 이 일의 주동자이겠지? 이제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 까?" 현명자는 한쪽에서 음침한 표정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웃으며 대 꾸했다. "확실히 당신의 말대로 이번의 일은 내가 주동한 것이 틀림이 없소. 원래 당신은 전대의 장문사부로부터 장문인의 직위를 인계받고 나서 호법무공 등을 따로 배워서 가장 강력한 고 수가 되었지만, 우리 사형제들에게는 조금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었소. 둘째 사형이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었소." 곡허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너희들에게 그 호법무공을 가르쳐 주어야만 했었단 말이냐?" 현명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원래 그러한 무공들은 장문인만이 익힐 수가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 세대는 변화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는 비단 옛날의 사람들처럼 죽어서 지내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활개를 펴고 살고 싶은 것이오. 그래서 이 길을 택한 것이니 당신들은 가히 원망하지 말기를 바라겠소." 곡허자는 그가 드디어 흉심(兇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보고는 싸늘하게 냉소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좋다. 너는 그런 대로 시원시원하게 말을 하는 녀석이로군. 다섯째보다도 낫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과연 너희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로 우리를 이길 수가 있을까?" 현명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우리들이 숫자로는 우세하지만 정말로 싸움을 하게 되면 당신들 두 사람을 이길 수 가 없게 될 것이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번에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았었다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오지도 못했었을 것이오."말과 함께 현명자는 느릿하게 뒤쪽을 향해 우수를 휘 저었다. 헌데 그때의 일이었다. 전혀 그들 이외에 누구도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느닷없 이 희미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사람의 윤곽을 갖추고 나타 나는 것이 아닌가! ……!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놀랐을 뿐만 아니라 경악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게 다가 위쪽의 하늘에서 바라보고 있던 진아라마저 크게 경악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리 보 아도 그들 이외에는 없었는데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마귀(魔鬼)가 현신(現身)하는 것 같은 사이(邪異)한 모습으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보자 일순간 크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역겨 울 것 같은 가증스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대체 사람이 구름처럼 흩어져 있다가 그것이 모여서 다시 사람처럼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환각(幻覺)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공 포심을 주는 것이었고, 게다가 가장 경이로운 것은 바로 그들이 현명자 등이 크게 믿고 있 었던 신비의 암중인들이라는 점과 신주팔패의 하나들일 것이라는 사실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등장에 대해서 크게 놀라서 정신을 크게 일깨우고 주시했는데, 이윽고 주 위에서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 신비의 검은 그림자들은 모두 셋이나 되는 것이었다. …… 제48장 가공할 마귀(魔鬼)의 혈겁(血劫) 그 세 사람의 신비인들은 키가 크고 용모가 다분히 이국적일 뿐만 아니라 각기 특이한 생 김새를 하고 있는 이남일녀(二男一女)였는데, 하나는 얼굴이 음침한 흑의중년인(黑衣中年人) 이었고, 다른 하나는 음탕한 느낌을 주는 금발의 흑의여인(黑衣女人)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서 있는 한 사람은 나이는 이제 약관을 조금 벗어난 듯하지만 음침한 눈빛에 용모 가 상당히 수려하게 생긴 흑의청년(黑衣靑年)이었다. 그런데 그들 삼 인은 중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지 일단 아무런 말도 없이 현명자의 지시에 따를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곡허자는 잠시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소 허탈한 모습으로 현명자를 향해 물 었다. "그들이 바로 그 현현각(玄玄閣)의 사람들인가?" 이 현현각은 원래 신주팔패의 하나이며 북해(北海)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무리들이었다. 현명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원래 당신도 이러한 것을 알고 내가 만성독약을 투입시키자 즉시 그와 같은 연극 을 하기 시작했었던 것이 아니오?" 곡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그러한 확신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러한 확신이 나의 망상이 기만을 바래 왔다." 현명자는 음침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망상도 거짓도 아니며 그저 엄연한 현실일 뿐이오!"곡허자는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다. 그래서 너는 이제 나에게 그들을 이용하여 살수를 펼치겠다는 말이냐?" 현명자는 음침하게 대꾸했다. "내가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계시는 것이오?"곡허자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더 니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너는 그렇다면 우리의 소사숙조께서 이 부근에 와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는 말이냐?" 현명자는 음침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나는 이미 당신의 무공이 최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소사숙조의 무공도 상당히 높은 것일 것이고. 그러나 내가 이제야 말씀드리자면 이들의 무공은 바로 초절정(超絶頂)의 것이라는 점이오."--- 초절정의 무학. 그 소리를 듣자 곡허자는 이제까지 태연하게 있던 안색을 크게 변모시켰다. 이른 바 초절정의 무학이라는 것은 일전에 악채릉이 문인천상에게 말했었듯이 내공이 육 갑 자의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이지만 심검(心劍)을 사용할 수가 있어서 그 능력은 십 갑자의 경지를 넘어선다는 가공스러운 무학의 경지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와 같은 무학의 경지가 있기는 하지만 천하에 과연 그와 같은 무학을 터득한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것 이었기 때문이었다. 곡허자의 무학은 이미 최절정의 경지에 올라서 노화순청(爐火純淸)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겨우 삼 갑자의 공력에 의한 무공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들과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게다가 문인천상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저들 삼 인이 이 미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라면 혹은 그가 상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 닌가!곡허자는 그와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초조해 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 위를 계속해서 둘러보았으나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구름 두 어 송이뿐이었다. 실로 그 구름 가운데의 하나에 문인천상 등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곡허자 는 이윽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소식이 없자 가벼운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네가 오늘은 승리를 한 것 같다. 넌 어서 그만 손을 쓰는 것이 어떠냐?" 곡허자는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필요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에 현명자는 즉시 음침하게 웃으며 흑의청년 등을 향해 가볍게 우수로 신호를 보냈다. 순간 그 흑의청년이 기이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더니 이윽고 우수를 전면으로 가볍게 밀 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실로 믿을 수가 없는 환상과도 같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흑의청년은 처음에 는 그저 마치장난을 하듯 허공을 향해 일장을 밀어냈는데, 흡사 백색의 광채와도 같은 그 장력이 허공의 중간에 이르러서 느닷없이 멈칫하더니 이윽고 마치 빛살처럼 수십 수백의 갈 래로 갈라져서 느닷없이 곡허자와 신탄자의 면전으로 극쾌하게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이때 곡허자 등은 비록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파의 장문인답게 최후를 마치기 위해 전신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일순간 그와 같은 무수한 기운들이 마치 바늘처럼 예리하고도 강력하게 자신들의 전신의 혈도를 향해 파고드는 것을 보고는 경악하여 신형을 움직이며 장력을 발출시켰다. 그런데 이때였다. 비단 그들이 신형을 움직여서 피할 시간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게 다가 그들이 발출한 장력마저 그러한 바늘과도 같은 기운에 닿게 되자 마치 일시에 얼음이 녹아 버리는 것처럼 거짓말과도 같이 스러져 버리더니 다음 순간에 그 바늘과도 같은 강력 한 기운들은 무서운 위력으로 그들의 전신대혈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아악!" "흑!" 신탄자와 곡허자는 거의 동시에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원래 그들은 일파의 종주급의 신분으로 설령 심장이 도려내어지는 일이 있다고 해도 체면 상 비명소리를 지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와 같은 비명을 지르고야 말 았다는 것은 실로 가볍게 펼친 듯한 흑의청년의 한 수가 그만큼 가공스러웠고 또한 무한한 고통을 유발시키는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 실로 이 싸움은 너무나도 형편없이 쉽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현명자는 미리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 흑의청년이 너무나도 쉽게 두 사람을 제압해 버리는 것을 보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박수를 치며 말했다. "핫핫핫, 역시 세 분의 무학은 신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오. 내 반드시 약속했던 대로 실행할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해 드리겠소!" 이어 현명자는 전신이 제압당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마치 전신의 혈도가 무수한 바늘에 찔리고 있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곡허자와 신탄자의 앞으로 다가가더 니 이윽고 득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은 나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소. 특히 장문사형은 더국 그러했고. 하지만 이제 당신들은 나에게 위협의 소지가 있는 것이니 지금 즉시 완전히 제거해서 후환을 남기지 않 도록 해야 하겠소. 그만 잘 가시오!"말과 함께 현명자의 우수가 예의 그 푸른 동전만한 반점 을 일으키며 현명신장을 곡허자의 정수리를 향해 내뻗었다. 아까 곡허자는 공공권으로 그의 현명신장을 격퇴시켰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전신의 혈도가 제압당해 있어서 비단 그와 같은 무공을 펼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공력조차 끌어올릴 수가 없었으므로 현명자의 장력에 당해서 뼈골이 부서지거나 아니면 그의 전신이 새하얀 얼음조각으로 변할 것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실로 느닷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갑자기 그렇게 태연하게 장력을 발 출시키던 현명자의 신형이 마치 급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펄쩍 뛰더니 뒤로 주르르 밀려 나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현명자의 입 속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지독하게 창백한 안색으로 보아 그는 한 순간에 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곡허자와 신탄자는 한 순간에 자신들의 전신의 고통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느끼고 즉시 고개를 돌려 보았는데, 어느새 그들의 주위에는두 사람이 기척도 없이 늘어나 있었다. 물론 그들은 문인천상과 진아라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 기실 이렇게 문인천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예정되어 있는 반전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 세 명의 흑의인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한 순간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딱 벌리더니 이윽고 소리도 없이 세 방향에서 가공할 속도로 문인천상을 향해 덮쳐 들기 시작했다. 실로 그와 같은 광경은 오직 마계의 악령(惡靈)이 공포스러운 기운을 휘몰고서 가공스러운 속도로 한 사람을 향해 덮쳐들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았 다. 일순 세 사람의 신형이 지면에서 솟아올랐다고 느껴진 순간에 이미 그들의 신형은 세 방향 에서 문인천상의 지척에 이르러서 가공할 위력의 무학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 는 장력(掌力)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지력(指力)이었고, 게다가 나머지 하나는 무한한 변화 가 내포되어 있는 종합적인 무학이었다. 곡허자 등은 비록 최절정의 고수였지만 그 순간에 그러한 사정을 일일이 파악할 수가 없었 고, 오직 일시에 문인천상의 주위가 어두운 마력의 그물 속으로 완전히 갇혀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공포스러운 느낌을 맛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면 즉시 그 악령의 위력 앞에 녹아서 사라질 것 같았던 문인천상의 얼굴 속의 미 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는데, 곡허자 등이 본 것 은 그저 그가 오른손을 느릿하게 우측으로 그었다고 생각되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인천상의 움직임이 느렸던 것은 결코 아닐 것이었다. 그것이 느리게 보였던 것은 오직 곡허자 등의 상상이며, 다른 사람들의 동작에 비해서 느리게 보였 으나 이미 그것은 일순간에 상대들의 무학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인천상의 우수가 느릿하게 좌에서 우로 긋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에 곡허자 등은 그 가공스럽던 어둠의 사악한 기운이 마치 그물이 베어지듯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별빛이 창창하게 빛나는 하늘이 나타나는 것을 언뜻 보았다. 그것은 마치 악마(惡魔)의 힘이 파괴 된 것 같은 절대적(絶對的)인 영감과 느낌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아악!" 지극히 짧은 비명소리와 한 방울의 피를 보았다고 느껴진 순간에 이미 싸움은 끝이 나 있었 고, 그러한 싸움은 기실 곡허자 등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는 가공할 수준의 일순간에 끝이 나는 것이었다. …… 생각대로 문인천상은 아까의 그 자리에서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조용한 표정 으로 서 있었고, 예의 그 세 명의 흑의인들은 그의 주위에 하나같이 일자로 서서 전신이 굳어져 있었다. 곡허자는 일견하기에도 이미 그들의 전신의 무공이 폐쇄되어 비록 죽지는 않을지라도 앞 으로 더 이상 무공을 펼칠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문인천상은 이때현명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현명자는 지금 바닥에 주 저앉아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 기실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 터득한 나름대로의 지식에 의해 가치관을 설정해서 살아 가고 있는 것이지만, 그보다 훨씬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한 만일 그러한 것을 직접 보게 된다면 정말로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현명자도 자신의 야망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었지만 지금 스스로의 판단에착오가 있었다 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니 도저히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문인천상이 천천히 옆에 서 있는 조용한 표정의 진아라를 돌아보는 순간에 이미 곡허자와 신탄자는 번쩍 신형을 날려서 목령자와 고홍자를 제압해 버리고 있었다. 곡허자는 이어 내 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현명자마저 안전하게 제압한 이후에 문인천상의 앞으로 와서 공손히 포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사숙조께서 늦게 나타나시는 바람에 하마터면 이 노도의 가슴이 한꺼번에 튀어나올 뻔 했었소이다. 무량수불……" 문인천상은 진아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다시 돌려서 미소하며 곡허자의 말 에 대꾸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 × × × 문인천상은 이어 공동파의 장문인인 곡허자와 함께 육반산에 위치하고 있던 일월신교의 무 리들을 제거하였고, 이윽고 천하에 널리 펼쳐져 있는 신주팔패의 무리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동파의 정예들을 이끌고 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출정에는 진아라를 비롯하여 도액오선 등이 모두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천하에 신 주팔패의 무리들을 응징할 수 있는 세력들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거대한 성과를 올려 가기 시작했다. 실로 천하는 넓었고 또한 신주팔패의 세력은 응징을 해도 해도 정말로 끝이 없는 것 같았 다. 공동파의 일행은 먼저 일월신교의 근거지인 서역(西域)의 천산(天山)으로 가서 그 뿌리를 제거한 다음에 이윽고 무산 신녀문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안주해 있는 성모궁의 전초 등 을 멸망시키고, 게다가 일월신교의 작은 세력들을 초토화시키면서 남하하여 현현각(玄玄閣) 과 검총(劍塚), 도막(刀幕) 등의 세력들을 제거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리는 워낙에 거대하여 쉽게 제거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그 근거지가 알려지면 문인천상이 그 우두머리들을 제거했고 이어 공동파의 사람들과 도액오선 등이 나머지의 처 리를 맡았다. 그런데 기실 천하는 넓고 또한 그들 일행의 힘은 별로 크지 못해서 그렇게 활동을 하는 데 에만도 일행은 거의 일년 반이나 되는 세월을 소모해야 했고, 따라서 천하는 거의 신주칠 패의 세력에 의해 혈우천하(血雨天下)로 돌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비록 문인천상과 공동 파의 사람들에 의해 천하의 한 부분이 그러한재앙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재앙인 것 같이 여겨졌다. 이미 구파일방이라는 말은 사라졌고 천하에는 공동파 이외에는 그저 신주팔패의 세력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천하의 무림암흑기(武林暗黑期)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피가 산천을 가득하게 적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 무렵에 천하에는 느닷없이 한 줄기의 기이하고도 밝은 서광(瑞光)과도 같 은 소식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백의맹(白衣盟)--- 이미 사라졌다는 천륭무가의 자리에 새롭게 세워진 천륭무가의 후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그 힘이 드디어 탄생되어 천하를 악마들의 수렁으로부터 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천하의 강호인들은 이에 매우 격동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에 문인천상은 공동파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의맹의 총단(總壇)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 천하는 이제 느닷없이 나타난 백의맹으로 인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하에서 악마와도 같은 겁란을 일으키던 신주칠패의 세력들이 일순 주춤하고 각처에서 백의맹의 사람들에 의해서 패퇴되는가 하면, 점차로 천륭무가를 중심으로 한 정협 지사들의 세력이 거대하게 넓혀지기 시작하고, 이내 그 동안 순수한 뜻을 품고 있었던 많 은 강호인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실 그곳에 당도한 문인천상의 눈에 비친 백의맹의 모습은 일반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그러한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불과 이 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과거에는 철저하게 폐쇄되었었던 그 천륭무가의 자리에 백 의맹의 총단은 웅장하게 세워져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문인천상은 비로소 그 건물 의 지하에 오래 전부터 부서지지 않고 건재하고 있었던 천륭무가의 지하건축물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어 그곳의 뇌옥(牢獄)에 수감되어 있는 악채릉을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으니, 이때 악채릉은 이미 임신을 하여 배가 만삭이 되어 있는 몸이었다. 문인천상과 헤어진 이후 이미 이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물론 그 뱃속에 있는 아이는 문인천 상의 아이가 아님은 물론이었다. 따라서 문인천상은 악채릉과 함께 수감되어 있는 그녀의 부친 악불범을 구출해 내었으나, 이내 그 두 사람은 스스로 자결을 하여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허망한 생 의 종말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원래 악채릉은 진심으로 문인천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화산파의 모든 제자들 과 원로들의 목숨과 장래가 천륭무가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에 악채릉은 처음 부터 체결되어 있었던 천륭무가의 소공자 백운기(白雲麒)와의 혼약을 파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악채릉은 일단 전날에 악불범과 함께 천륭무가에 돌아간 다음에 정식으 로 백운기에게 파혼을 신청했으나 그녀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내 그녀는 그에 의해서 몸을 짓밟히게 되었고 그것이 수십 차례나 계속되는 동안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일단 그녀가 아기를 갖게 되자 백운기는 즉시 그녀를 버려서 뇌옥에 수감시켜 버렸 고, 이내 화산파의 모든 것을 몰수해 버렸으며 그녀의 부친도 함께 수감시켜 버렸던 것이었 다. 이러한 비극적인 일파와 한 여인의 비운의 종말은 실로 참혹스러운 것이었으며, 악채릉은 악불범과 함께 자결하여 죽어 가면서 현 백의맹이 바로 다름이 아닌 위선자들의 집단인 천 륭무가의 후신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기실 이미 그러한 이치는 문인천상이 생각하기에도 명백한 것이었다. 원래 그는 자신의 부 친이 월영인(月影印)에 의해 죽어 간 원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미 누군가가 말해 주었던 일월신교의 한 배반자에 의해 천륭무가의 사주를 받고 저질러진 일이 아니었 다. 오로지 그것은 천륭무가가 일월신교와 짜고서 저지른 일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월영 인을 펼칠 수 있는 일월신교의 제자들을 천륭무가에서 몰래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당시에 그럴 필요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결국 이 천륭무가와 신주칠패는, 아니 백의맹과 신주칠패는 둘이 아닌 오로지 하나라는 결론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천륭무가는 신주칠패의 힘을 이용하여 그들과 결탁을 하고 중원무림을 쓸어 버린 연후에 다 시 가공의 거대한 무림제국(武林帝國)을 건설하려고 했었던 것이었다. 문인가의 장원 등의 돈을 필요로 했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으니 실로 공포스럽고도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악마(惡魔)의 계획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 제49장 대단원 문인천상은 일단 그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서 천륭무가와 신주칠패의 가공스러운 거대한 음 모(陰謀)에 대해서 확인한 연후에 이윽고 그 수뇌들이 한 곳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자리를 알게 되었고, 즉시 현장에서 그들을 제거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문인천상은 그들을 하나같이 폐인으로 만들었고 앞으로 전혀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 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차라리 죽음보다도 참혹한 형벌일 것이며, 앞으로 그로 인해 서 강호는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 같았지만 기실은 문인천상의 뇌리에는 무공이 폐쇄되어 있는 천륭무가의 가주 백무검(白武劍) 등을 앞에 두고 보면서도 왠지 마음이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순간에 느닷없이 그의 면전에 홀연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처럼 나타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여덟 명의 사람들--- 아니 신선(神仙)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바로 신주팔패의 모체가 되었던 천하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자처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최초로 신주팔패라는 신비로운 단체를 만들어 놓 았었고, 당시에는 이미 깊이 은거하여 신주팔패의 주인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로 이들의 나이는 대체 몇백 살이나 먹은 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무학은 이미 악채릉이 전에 말했었던 인간 최후의 단계인 초인(超人)의 경지에 이 르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문인천상은 이내 그들이야말로 지금까지 거대한 천하의 혈겁을 뒤에서 조종해 왔었 던 근본적인 원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게다가 그들 가운데의 절반 가량은 이미 그 가 지난 이 년 사이에 가끔씩 만나고 부딪쳤었던 사람드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당 혹한 심사가 되었다. 아니 실로 가장 놀란 것은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요 자칭 세외팔선(世外八仙)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의 첫 번째로 꼽히고 있는 천수자(天隨子)라고 불리우는 천륭무가의 시조가 바 로 다름이 아닌 일전에 주운양 등을 제압하여 장원으로 돌아오던 길에 주루에서 만났었던 그 천씨(千氏) 성을 가졌다는 궁상맞은 옷차림의 중년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의 천수자는 그러한 과거의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고 그야말로 신선과도 같은 풍채에 아름 답고도 고요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놀라며 안색을 변화시키고 있는 문인천상을 향해 이렇게 말해 왔다. "너는 지금 매우 놀라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기실은 이 일은 우리가 모두 계획한 것 이었으니 너는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문인천상은 이미 눈앞의 이 여덟 명의 늙은이들의 무공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으므로 차분 한 심정이 되어서 대꾸했다. "당신들은 어째서 이와 같은 일들을 꾸몄던 것이오?" 천수자가 말했다. "내가 이미 너에게 말했었지만 우리는 지금 천하의 더럽고 추악한 자들을 모조리 쓸어 버 리고 우리들이 직접 다스리는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 어서는 내가 이미 너에게 말해 주지 않았느냐? 물론 너는 당시에 반대를 했었지만." 문인천상은 다시 말했다. "당신들은 이러한 일에 무슨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시오?"천수자가 말했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대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앞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 들을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켜서 나름대로의 완성된 인간들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문인천상은 그 말에 다소 분개하여 말했다. "당신들은 과연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소? 당신들처럼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 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인간들을 위해 완벽한 인간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당신들의 이러한 계획은 모두가 하릴없는 욕심들이 아니오?" 천수자는 그 말에 일순 의외로 노한 듯이 두 눈에서 황금빛의 섬광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대꾸했다. "좋다! 기실 이것들은 우리의 욕심이라고 해 두지. 사실상 인간들의 목숨이야 정말로 파리들 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느냐? 오히려 파리들은 비록 더러우나 천하를 어지럽히지 않고 살 아 가고 있지만 인간은 얼마나 추악한지 천하를 그야말로 망가뜨려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 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을 다시 개조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문인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러한 일에는 찬성할 수가 없소. 인간은 비록 온갖 번뇌 속에서 시달림을 받는 것 이지만 그 근본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아니오?"천수자는 냉소했다. "나는 너의 그러한 생각 때문에 너를 우리의 계획 속에 집어넣지 않았던것이다. 이제 너는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가 너를 이제까지 죽이지 않았던 것은 신주팔패가 비록 우 리들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지만 그들 역시 완벽하게 신성한 존재가 될 수가 없기 때 문에 너에게 그들을 제거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들의 목숨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너도 이제 죽어 줘야 하겠다." 문인천상은 문득 과거의 일들을 순식간에 회상해 보고 나서 한쪽에 쓰러져서 죽음을 기다 리고 있는 신주팔패의 주인들을 힐끗 응시한 후에 천수자에게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이에 천수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확실히 너의 무학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기는 하다. 너의 무학은 우리들의 예상을 뛰어넘 는 것이었고 게다가 너의 공력은 이미 정확하게 십 갑자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이미 우리들의 공력은 하나같이 육십 갑자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니 네가 제아무리 날뛰어 봐도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어 그는 마치 파리라도 잡는 것처럼 가볍게 문인천상의 전신을 향해 우수를 가볍게 휘저 었다. 무한대에 가까운 거대한 위력의 황금빛 광망이 휘몰아쳐 오고 있는 순간에 문인천상은 문 득 어처구니가 없게도 깊고도 깊은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신주팔패의 주인들을 자신이 해치지 말 것을 그랬다는 생각을 하 게 되었고, 이내 다시 과거에 참혹하게 죽었던 주운양 등의 표정과 행적들을 세세하게 떠 올렸으며, 이어서 언젠가 보았던 그 만불곡(萬佛谷)의 헤아릴 수 없는 불상(佛像)들의 표정 들을 뇌리 속에 떠올렸다. 문인천상은 그 가운데 그야말로 대략 사나흘의 시간이 흘러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는 데, 기실은 그 순간은 지극히 짧은 찰나에 불과했고 일순간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그의 마음과 몸에서는 이제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기이한 힘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실 힘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고 그저 해탈(解脫)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그의 눈앞에 서 있었던 천수자 등의 세외팔선은 기력이 다하여 삽시간에 늙어 가고 백 골(白骨)로 화해 죽어서 소멸되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 이제 비로소 그가 바라던 천하의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저 앞에서 이제는 열일곱의 성숙한 숙녀가 되어 있는 아름다운 그의 여인 진아라가 도액오선과 함께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대미(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