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 대달마 서장 #1 09/18 17:13 209 line 大 達 摩 -- 夜 雪 綠 序章 첫번째 이야기 --劍 (1) 검(劍), 검은 만병지왕이다.. 무기는 각기 고유한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삼척의 검이랴말로 현묘한 造化, 무궁한 運法, 다양한 氣勢, 심오한 領域 들로 하여 유사 이래 무중제일기로 꼽혀 왔다.. 그래서, 완벽한 검의 조화를 일컬어 사람들은 劍精이라 하였다. 검정(劍精) 이것은 검의 최고단계이자, 무인(武人)으로서 오를수있는 최고영역이라고 할수있다.. 빼어난 자질과 불굴의 노력.. 그리고, 삼화취정(三花聚頂),오기조원(五氣朝元)의 내력 뒷바침이 없이는 결코 이 룰수 없는 꿈과 신화의 경지.. 무림 일천년사에 있어 이 검정의 영역에 이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검정이 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편입된다는 것과 같은 얘기였다.. 하지만, 인간의 그칠줄 모르는 욕망은 이 무변추상적인 검정의 개념을 구체화시키 고 단계화 시켜자신들의 앞에 펼쳐놓았으니... 오백 년 전... 이땅에는 공전절후의 피보라가 휘몰아 쳤다. 정(正)과 사(邪), 두개의 세력이 서로의 우위를 위해 벌인 일대의 거대한 싸움으로써, 대전(大戰)이 시작된지 일년만에 무려 일만의 사상자를 내는 초유(初有)의 대 혈겁을 빚어냈던 것이다. 피와 피! 아비규환의 소용돌이가 만 이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끝나질 않자, 당시, 대륙각지에 군림하던 삼십육인의 정사파 초거두들이 한자리에 회동하게 되었 다. 그리하여 , 이 진천동지의 협성괴걸들은 칠주야를 거듭한 회동 끝에 다음과 같은 엄청난 규약을 발표하게 되었으니..... 一 , 천년을 이어온 정사양도의 무의미한 싸움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의미의 무 예를 인증하기 위해 이 땅에 무원측검대(無願測劍臺)와 불망대의 두곳을 만들기 로 한다.. 一 , 무원측검대는 검정을 뽑기 위한 규약이다. 一 , 정사양도는 각 도애서 검정의 재목이라 인정되는 자를 언제든지 무원측검 대에 올릴수 있고 , 一 , 어느 한쪽에서 검정이 탄생되는 날 , 그 검정일도에 영원한 지배권을 넘긴 다. 一 , 검정의 단계는 모두 육 단계로 하되, 추규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다. 一 , 무원검측대와 불망대의 장소는 중원의 정중앙인 숭산 태실봉으로 하고 , 一 , 그 관리는 정도의 소립파와 사도의 일향문이 번갈아 맡도록 한다. 一 , 검정이 되기까지의 육단계에는 누구든 도전할수 있다. 一 , 각 단계에 선발된 자는 일년 이내에 다음 단계에 도전할수 있다. 一 , 무원검측대의 심측원은 삼십육명을 원칙으로 하고 그 자격은 백년 이상의 내력이 있으며 정도 백사십오개와 사도 백삼십구개파의 장문인이 인정하는 전대 배분의 면숙으로 하여 그 이름을 삼십육노화진으로 한다. 一 , 삼십육노화진은 정파 십팔인 , 사파 십팔인으로 하여 사망등으로 인한 결 손시에는 전체가 동의하는 자에 한해 충원한다. 一 , 무원검측대 제단계의 합격여부는 삼십육노화진에게 완전히 일임된다. 一 , 제 오단계에 해당하는 검군(劍君), 검후(劍后)의 고수가 정사 어느 도에서 건 먼저 나왔을 때는 먼저 나온 도에서 일년의 기한을 두고 상대 도에서 동등한 자격의 고수가 나오기를 기다려 준다. 一 , 그러한 자가 종내 없을 때에는 그 자를 검정으로 한다. 천년을 이어온 고질적인 정사양도의 싸움을 종식시키자는 엄청난 발상, 그 방법을 무예일도에 두어 정사가 각디 검정에 이를만한 고수를 키운다는 얘 기인데....... 추규에 명시된 검정이 되기위한 육단계란 다음과 같다. 제일단계 무진사(武進士), 무예의 선비. 한 종류의 검예, 또는 무예를 최소한 팔성까지 연성 수련한 자, 무원검측대가 있는 태실봉 첨성곡내에 설치된 한개의 관문을 넘어야 하고, 이어, 삼십육노화진의 삼분지일에 달하는 십이인의 동의를 얻는 자. 무원검측대가 탄생하고 오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士)자가 정교하게 금박된 한 개의 노란 휘장을 자신의 무기에 다는 것은 만 천하 청년무인들의 첫번째 꿈이요 희망이 되었다. 이 무진사는 천하의 어떤 문파를 가거나 곧 정중한 사범의 대우를 받게 되고, 하나, 무원검측대에서 노란휘장을 받을수 있었던 사람은 오백성상 동안 구천육백오십 일명에 불과했다. 두 번째 무탐화(武探花) 무예의 명인 한 종류의 무예를 십성이상 완전 통달하고 , 삼십육노화진 중 과반수에 달하는 십팔인이상의 동의를 얻은자, 역대 이래로 무탐화의 위에 오른자는 모두 일천구백오십삼명이었다. 그 중 . 당대에 생존한 이는 모두 오백팔명으로서, 이미, 한 문파를 이루거나 무림의 거봉으로서 지대한 명성을 펼치고 있는 위치, 이들의 이름은 무원검측대 동쪽에 기록되어 영원히 세인들의 기럭에 남게 된 다. 세번째 단계 무향(武香) 무예의 달인 무예의 새로운 일가를 일으킬만한 조화를 지녔다고 인정된 자, 삼십육노화진 중 이십사인 이상의 동의를 얻는 자, 무원검측대가 개설된 이래 이 무향의 위에 오른자는 모두 일백칠면이었다. 이 중, 이십사명이 당대에 생존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신화로 불릴정도로 막강한 명성을 구축하고 있다. 네번째 무종(武宗) 단 두명, 역사상 무종의 위에 오른 사람은 단 두명이었다. 또한 그 두명은 모두 당대에 탄생한 인물들이었다. 백인불(百刃佛)자초상인(紫草上人) 신검무영(神劍無影) 무황(武皇) 우도(禹道) 백인불 자초상인은 무림명문 소림이 배출시킨 일대의 기승이다. 당금에 이르러 소림사는 가히 괄목할만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백인불과 같은 항렬의 고수만 해도 무려 아홉명을 해아리고 있는 터, 이 중, 백인불은 가히 정도가 탄생시킨 불세출의 기재였다. 그는 비단 소림파의 칠십이종 절예를 모조리 통달했을뿐 아니라, 역근(易筋),세수(洗修)의 두 신공에다 소림 고유의 대반야현공을 개량 융합하여 양심여의공(兩心如意功)이란 전무후 무한 신공을 개발하여, 세인들로부터 소림의 시조 달마가 다시 현신했다는 말을 듣고 있는 대고수 하나, 그는 무원검측대의 제오단계인 검군에 도점했다가 내리 두 번의 패배를 맛보기 도 했다. 반면에, 신검무영 무황 우도는 명문대파가 아닌 유일한 천민출신의 인물, 그는 나이 사십에 일약 무종의 지위를 얻어, 연후, 스스로 무황성을 지어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휘하에는 그야말로 당대의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즐비하고 그 중 무향의 위를 지닌 자가 두명, 무탐화의 위를 지닌자가 열다섯명, 무진사의 위를 지닌이는 무려 일백팔명이라 했다. 구대문파나 팔대세가 일문일방삼곡삼궁사산(一門一幇三谷三宮四山)조차 넘볼수 없는 막강세력의 무 황성---------- 이곳은 비명문계열의 기예, 괴예, 마예가 모두 운집한 곳이다. 검정으로 이르는 마지막 단계 ----------검군 ----------검후 그가 남자라면 검군의 칭호를 여자라면 검후의 칭호를 받는다. 도대체가...... 필설로서는 형용이 될수없는 무예의 최고 신역--- 무원검측대에 설치된 일백팔개의 관문을 넘어야 하고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무예를 스스로 창안하여 삼십육노화진 전체의 동 의를 얻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고수는 유사 이래 단 한명도 없었다. 그 경지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검군, 검후가 그럴진대 그 최후단계인 검정의 영역이야 오죽할 손가? 어쨌든... 제 오단계의 검군, 검후가 될수있다는 것은, 크게는 , 천년을 두고 이어온 정사의 싸움에서 자도(自道)의 영원한 승리를 이룰 수 있 음이며.. 작게는 , 그 자신이 이 땅에 다시는 누구도 이룰수 없는 최고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다 는 것.... ---------검군, 검후를 탄생시켜라 ! 이것은 오백년 동안 무림을 지배해 온 무서운 약속이었다. 시대와 시대를 풍미하던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무수하게 무원검측대를 명멸해 갓다. 봄날 비바람에 날개가 찢겨 죽는 나비처럼.... 한 계절의 영화에 몸을 불사르는 꽃처럼... 혹은, 한 줄기 유성처럼, 그 모든 것이 정녕, 화려한 기(技)와 기(氣)리 촌각속에서 한 조각 편운 같은 명예를 쫑아 부나비처럼 명멸하는 하무군상의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해도... 오늘도 고독한 무인들은 백포로 검날을 닦고..... 한 잔의 싸구려 화주로 타는 가슴을 달랜다.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한 자(者) 신이라 불리우기 위해... 검정(劍精)..... 그 위대한 이름이 이글거리는 고봉의 정상을 위해.... [야설록] 대달마 서장 #2 09/18 17:21 101 line 序 章(II) 두 번째 이야기 - 劍(二) 어둡고 슬프다. 까닭없이 슬프다. 손, 그 소녀의 손은 희었다. 어둠이 서려든 그 손은 어찌나 흰지 얼음같을 정도다. 소녀는 춤을 추고 있었다. 무원검측대의 위에 발을 지지는 순단부터 소녀와 소녀의 검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사악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소녀의 얼굴은 투명했고 소녀의 얼굴은 꽃잎처럼 붉었다. 치렁치렁한 긴 흑발을 흩날리며 가을하늘처럼 시리고 차가운 그 시선과 행여 마주치기라도 할치라면, 아아............... 마치 북풍의 설원에 고독히 피어난 얼음꽃 마냥 보는 이의 가슴을 그대로 촉 촉히 적셔냈다고 한다.. 그녀는 분명 인간의 껍질을 썼으되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던 한번의 마주침으로 영혼마저 빨려드는 듯한, 아예 이 세상의 질서를 송두리채 허무는 그런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 숭산의 침성곡! 무언검측대 위로는 하나의 놀라운 외침이 터트려졌다. -----검후가 탄생했다. 무림이 뒤집혔다. 아예 발칵 뒤집혔다. 들을 땐 무심히 들었어도...... 듣고 난 뒤의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의 하던일을 계속하지 못했다. [그게......... 오오.......... 그게 도대체 사실이란 말인가?] 검후!! 검후가 드디어 오백년 역사위에 탄생한 것이다.. 대명 영락 십오년, 흰 눈이 솜털처럼 대지 위로 내려앉고 있던 날의 일이었다.. ------사선녀(邪仙女) 경설(瓊雪) 나이: 십칠세 출신: 서장 오밀랍궁 내력: 만검패왕문,백마수라전,지옥열혈부 외 사파 일백오십사개파 공동전인 약력: 무림출도 첫해 검후의 위에 승좌, 일명: 흑옥지예(黑獄之藝) 주위를 파닥이는 새파란 인광으로 온통 뒤덮은 채 암청의 광휘로 이글거리는 마영지옥화(魔影地獄火)속에서 섬전인 양 사위로 폭사되어 나가던 마라대구식 그것은 이미 무예가 아니었다. 한 줄기 요사스러운 환상같은.... 귀역의 신초요, 어둠의 마검이었다. 백 이십 세 이상의 전대고인으로만 이루어짐 삼십육노화진들은 시무가 시작되 는 순간부터 끝날때까지 굳은 석상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측검대 위의 검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탄식을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중얼 거렸다고 하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우리는 그녀의 무예를 논할 자격이 없다] 탐스러운 함박눈 아래.... 당년 십칠세의 검후는 그 하늘을 우러러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한 차례 웃어 보였다고 했다. 사선녀(邪仙女) 경설(瓊雪). 사파는 환호하고 정파는 침묵했다. 유사이래 사파는 정파에 비해 전통적으로 열세였다. 사파는 그 고유의 성격 탓으로 단결하기가 어려웠다. 허나, 정파는 무림맹을 수십번도 다 만들정도로 무서운 단결력을 과시했던 것. 하지만, 사선녀 경설의 출현은 무서운 하나의 근심점이 되었다. 그녀는 이익을 앞세우는 사파인들에게 마땅히 뭉쳐야할 하나의 팔 다리의 명 분이 되었다. 음산 마라평에 거대한 흑옥의 궁전이 세워졌고 사해의 사파거두들이 속속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다. 제일대 불망대주이며 일년이 지나고 나면 자동적으로 검정으로 봉해질 십칠세 소녀의 발에 그들은 입을 맞추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녀는 사파최고의 대부가 되고.... 그녀를 공동으로 키운 일백오십사개파 중 가장 세력이 강성한 오대사파의 장문 인을 그 핵심으로 하는 사파역사상 전무후무한 초강의 연합체가 은밀히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음산의 흑옥마궁으로부터 일천 마리의 전서구가 대륙각지의 명문정파를 향해 날아 오르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야설록] 대달마 제 1 장 09/19 18:54 262 line 第一章 出道蓮 피, 이월의 흐린 햇살아래 섬뜩하리만큼 붉은 한줌의 핏물, 핏물은 흰눈이 쌓인 깊은 산길로 촘촘히 새겨지고 있었다. 희디힌 눈밭에 핏물은 닿기 무섭게 가래침처럼 엉겨 붙곤 했다. [헉...........헉............] 한사람, 검은 죽립을 쓴 탓으로 그 용모는 알아볼길이 없으나, 일신에 엷은 잿빛 승포를 걸친 이, 목에 걸린 채 쉴새없이 흔들리는 염주알이 그가 비사의 제자임을 말해 주는 듯, 입과........ 가슴패기에 아예 구멍이 뚫리다시피 한 퀭한 상혈로부터 피는 그칠 줄 모르 고 끊임없이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아니, 그는 걷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 죽음보다 더한 사명감으로 그의 걸음을 저렇듯 처절하게 인도한단 말인가? 이제 산길은 끝났다. 대신, 화강암을 깍아 만든 아득한 돌계단이 그의 앞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돌계단의 아득한 끝으로는 하나의 웅장한 절 처마가 보이고 있었다. 승인의 떨리는 손이 계단의 턱을 움켜갔다. 돌연, 그의 입 밖으로 핏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좌악! 모래와, 그리고 더 흰 눈 쌓인 돌계단 위로 확 핏물이 번진다. 태양, 잔인한 이월의 태양, 승인의 가물거리는 시선이 장천의 얼음처럼 차가운 태양을 마주 보는가 싶었 다. [검군....... 우리의 검군이....... 탄생하셨.......다.......] 무슨 말일까? 한 소리 알수 없는 중얼거림과 더불어 그의 얼굴은 자신이 뱉아놓은 핏물 위 로 퍽하고 처박히고 말았다. 대명(大明), 영락칠년 이월의 일이었다. [가슴 부위의 상흔은 백골음시장에 의한 부패현상이고, 그 밖에 우측 다리에서 상문투골정과 혈천미리표가 발견되었읍니다. 아미타불.... 사파의 수법입니다] 딸랑딸랑 한 줄기 미풍이 절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을 휩쓸어가고 있었다. 깊은 연륜이 서린 동공 하나가 흔들리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견, 고뇌가 안개처럼 서린 연갈빛의 동공이다. 처마 위로는 시린 달빛이 은가루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문득, 동공의 임자로부터 한 소리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은 대체적으로 우리보다 조금씩 빠르다. 한순간의 늦음으로 하여 우리는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계인, 빛발도 선명한 아홉개의 계인, 한 쌍의 눈썹은 눈처럼 흰데다 귀 밑까지 흘러내린 용모는 고귀한 인상을 준 다. 갈대꽃같은 백염은 가슴 앞까지 치렁치렁하고...... 일신에 걸친 홍색의 법의가 위풍을 더하는 한 명의 노승 노승은 법당마루에 단정히 앉아있고, 그의 옆에는 백옥같은 승포의 단아한 중년승인이 조용히 시립해 서 있었다. 노승의 시선이 느릿하게 중년승인을 향했다. [무화(無花), 사파의 독수를 입은 그 젊은 아이가 가져온 소식이 무엇인지 아 는가?] 무화라고 불리는 중년승인은 유아독존의 기품이 역력한 노승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되오나... 대사막(大沙漠) 옥허궁(玉虛宮) 검군의 출관이 임박했음을 알리 는 소식이 아니온지.....] 노승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번쩍 피어올랐다. [그것을 자네가 어찌 아는가?] 중년승인은 겸연쩍은 듯 웃으며, [벌써 그러한 소문이 오래 전부터...] 노승은 고요히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백염 새로 한 줄기 탄식이 새어나왔다. [검군... 삼백년동안 제 오단계의 고수를 키우기 위한 무예를 만들어 왔으며 다 시 이백년 동안 그 무예의 재질에 합당한 자를 골라 키운 우리이다. 마침내 오 백년이 지난 오늘에야 우리는 그가 검군이 될수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니...] [..........] [비록 사파의 검후보다 두달 정도 늦긴 했으나 그리 비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헌데......] 노승의 누빛이 번쩍 떠졌다. [그토록 극비에 붙여졌던 일이 어찌 외부에 누설될수가 있었단 말인가? 어찌 항간에 소문이 퍼졌으며 그 소식을 가져오던 우리측의 고수가 사파에게 공격을 당할수 있었단 말인가?] 무화는 황송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노승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이는 바로 사파에서 우리측에 세작(細作:첩자)을 두고 방대한 정보망을 구축 하고 있다는 얘기..... 무화, 이것을 보라.] 하나의 두루마리가 내밀어졌다. 마치, 피칠을 한 듯 붉은 두루마리였다. [사파의 사선녀 경설이 검후의 위에 오른 후 한날 한시에 정파 백오십구대파 에 보내온 서신이다. 그것을 읽고 너의 생각을 말해 보라.] 두루마리에는 여간한 시력을 가지고는 알아볼수도 없을만큼 빽빽한 글씨가 새 겨져 있었다.] <존의 , 소림방장 친전, 본좌는 금번 외람되게도 검후의 위에 오르게 되었던 즉, 여러 선배재현의 질책을 얻기 위해 명년 원단을 기하여 개명대전을 열기로 하였으니, 삼가 존보를 디디시어 천박한 자리를 빛내 주시기 앙망하나이다. 장소는 숭산 불망대로 하였읍니다. 검후 경설 경배> [아미타불.....] 무화는 서찰을 다 읽고난 후 나직한 불호를 외쳤다. [일년이 지나면 검후는 자연 검정(劍精)으로 봉해지고 이 땅의 지배자가 되 는 것..... 경설은 그때까지 홀로 제오단계 검후의 자리를 고수함으로서 또다른 검군이나 검후가 정파에서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군 요.] [바로 보았다. 무화.] 방장실 옆의 인공연못에는 엷은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달빛이 빙면을 투과하여 하얀 빛기둥을 만드는 것을 바라보며 노승은 말을 이 었다. [우리측 검군의 출관은 이제 두달 앞으로 박두했다. 이 사실은 사파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마땅히 그들은 검군이 무원검측대까지 이르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공작을 다 펴오게 되리라.......] [마라평 흑옥마궁에선 벌써 엄청난 규모의 살수단을 파유했다는 정보가 있으 니..... 아미타불......] [.................] [무화.] 노승의 현기증이 일도록 연륜깊은 시선이 장공의 한월을 고요히 우러렀다. [정파의 수뇌라 일컬어지는 구대문파는 이 일에 한가지의 안배를 두었다.] [그게 무엇이오이까?] [각파의 심혈이 기울여진 젊은 정예 한명씩을 오래 전부터 키워온 것이다.] 순간, 무화의 두 눈에 가벼운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났다. 자신으로 말하자면 눈앞의 고승을 이십이년동안 그림자처럼 모셔온 처지, 이제는 장령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신분인 것이다. 헌데, 그런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젊은 정예란 도대체......? [사파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내일부터 구대문파에선 일제히 자파의 정예를 선 발하기 위한 회의가 열릴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키워왔던 정예들은 대 사막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소림에도.... 그러한 인물이..... 있읍니까?] [있다.] 노승의 시선이 무화를 정시했다. 그 얼굴에 처음으로 엷은 웃음이 번졌다. [나는 정히 소림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을만한 무기(武器)하나를 만들었노니. ... 이 무기는 여타 문파의 무기보다 좀 더 특수한 것.....] [무기....... 이오이까?] [내일 회의가 열리기 시작하는 대로 너는 길을 떠나라. 신분을 감추고 극비리 에 떠나는 것으로 하도록.... 내일부터 무화는 폐관에 들어간 것으로 하겠다.] 무화는 다급히 물었다. [어디로, 어디로 갑니까?] [남원(南院) 소림남원 보광사(寶光寺).] 노승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곳의 자초사백에게 무기를 달라고 하여라....] 한소리 장중한 불호가 얼어붙은 뜰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阿彌陀佛...................... 南無觀世音菩薩.......... [기재! 사파의 그 엄청난 방해와 척살을 뚫고 검군을 모셔올 수 있는 기재란 한 마디로 지혜롭고 용맹하며, 슬기로움과 뛰어난 무예를 더불어 소유한 그런 자여야 하오. 또한 여타 팔대문파에서 선발된 기재들과 비견해 보아도 조금의 부끄럼이 없는 그런 자여야하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한 마디로 근엄무쌍했다. 두 눈은 도박에 임한 도박사처럼 빛났고, 입술은 무모한 결단은 용서치 않겠다는 듯 굳게 다물려 있었다. 표정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수양과 심오 한 경륜을 표출해 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의 사각모양의 탁자였고, 길이 삼장여의 긴 탁자 주위에 학 무늬가 새겨진 노란 방석을 깔고 앉은 십인 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들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들의 이마에는 몇 십년의 고행이 없고서는 얻을 수 없는 아홉개의 계인이 찍혀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깨끗이 빤 흔적이 여력한 주황의 가사와 자단의 귀한 염주, 뿐인가? 단상의 정면에 의연히 놓인 것은 세상에 희귀한 녹옥의 불장이요, 선방아래 계단에는 열두명의 사미승들이 숨소리 하나 없이 무릎을 꿇고 있으 며 송림이 우거진 선방 주위의 그늘에는 팔뚝에 용문신을 새긴 강철같은 근육의 무승들이 수백명이나 겹겹이 포진 하고 있는것이니..... 십년의 고된 수련이 없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용문신의 무승들에게 둘러쌓여, 한두 개도 아니고 아홉개나 되는 계인을 이마팍에 찬연하게 새겼으며, 평생가야 한번 면상을 우러를 수 있을둥 말둥한 이런 고승들이 한꺼번에 십 여 명 씩이나 떼지어 앉은 이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두말하면 잔소리! 천하 십만 불자들의 신망과 외경의 성지이며, 대륙 백만무인들이 꿈의 보고로 우러르는 한 곳, 성지 대소림사가 아니고서야........ 이토록 근엄하고........ 위엄무쌍한 광휘가 기녀얼굴에 쳐바른 분처럼 휘황현란한 곳이 또 어디 있으 랴? 하지만, 계인이 아홉개든 스무 개든, 성지가 아니라 하늘의 극락이라 한들 풀리지 않는 문제라는 것은 정녕 할수 없다. 고승들은 격론을 벌이고 있었으며........ 고승들은 이 한가지 난제로 하여 하루 한나절이 꼬박 저물도록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납이 생각키로는............] 청담(靑潭), 소림 장노원의 주지직을 삼십년 간이나 맡고있는 소림서열 제삼위 고승의 입 이 침중하게 열렸다. [아무래도 검군을 영접하는 이런 큰 일은 예의바르고 지혜로운 이가 맡아야 소림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리라고 보오이다. 그롱게 본다면 수행원의 이 대제자인 옥불(玉佛)이 가장 적임자일 것이오.] 공야원의 홍진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불이라면 능히... 그는 연전에 황제께서 본사를 방림하셨을 때, 황재를 보필 해 온 세명의 한림학사와 무려 다섯시진을 막힘없이 담론하여 천하를 놀라게 하였으니 그런 지혜야말로 이런 큰일에 적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요.] 순간, 평소에도 과격하기로 소문난 무행원 주지 벽뢰상인이 불호를 외우는 둥 마는 둥 노호를 터뜨렸다. [사파는 유례없는 대단합을 이루었소! 그들이 이번에 파유한 대규모의 척살 단 또한 가히 가공할 힘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오! 무예는 분명히 지혜에 앞 서오! 이 일에는 옥불보다는 소림후기 중 제일인자로 꼽히는 화불(火佛)을 보내 야할것이오!] 다시, 달마원의 백곡상인과 지객원의 현해상인이 벽뢰의 말에 동조하는 의사를 표명 했다. 갑론을박, 엎치락 뒤치락.......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십만 불자의 태두이며..... 남(藍),자(紫),청(靑),홍(紅),황(黃),벽(碧),백(白),현(玄),회(灰),비(翡)의 소림 십색대장로의 수뇌인 남령대상인은 백팔염주를 어루르며 담담하게 선방 밖의 노을을 마주보았다. 결과와 관계없이........ 이 회의는 앞으로 이레를 더 계속하게 될 것이다. (무화는 잘 가고 있을까?) 노승은 조용히 웃으며 인자한 시선을 격론에 여념이 없는 그의 여덟사제를 향 해 던지는 것이었다. 노을 아래...... 숭산의 마지막 길목인 불자령을 막 넘어서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머리엔 검은 죽립을 깊이 눌러쓴 승인, 바쁘게 걷던 걸음이 문득 멈추어졌다. 승인은 삿갓을 들어 저 멀리 아스라히 멀어지는 소림의 일천 고루불각을 우러 러 보았다. [한림학사들을 놀라게 한 지혜의 옥불이나... 소림역사상 최강이라는 화불.... 그런 이들조차 안중에도 두고 계시지 않으니.....] 승인은 노을을 힐끗 바라본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들의 지혜와 무예를 합친 것보다 더 강한 무기가 어떤 것인지..... 나는 도저 히 짐작조차 할수 없구나.....] 그 옛날, 삼장이 천축의 불경을 찾아 떠나듯...... 승포자락을 펄럭이며 걸어 내려가는 그의 등 뒤로 노을은 선명한 진홍의 빛 을 말없이 더 해가고 있었다.. [야설록] 대달마 제 2 장 09/20 20:18 181 line 第二章 寶 光 寺 소림남원 보광사---- 이 땅에 선종불교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달마의 삼대제자인 무해는, 호남땅 장사성으로부터 백여리 가량 떨어진 형산 기슭을 행려하다가 준일봉 아 래에서 야숙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앞에는 달마가 현신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보광은 어디나 하나리니, 밝은 물은 남으로 흘러 다시 북쪽으로 향하도다. 잠에서 깨어난 무해는 꿈의 뜻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계곡의 한 곳에서 찬란한 보광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홀린듯 그곳으로 다가 선 무해는 보광이 다름아닌 한 개의 장방형을 한 바위 에서 솟구치는것임을 알았다. 헌데, 기이하게도 바위의 주변에는 용,호,표,사,학의 다섯영물이 솟구치는 보광을 빙 둘러 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해가 다가서자 영물들은 홀연히 사라졌으며, 바위 위로는 보광의 두 글귀가 환상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그 순간, 무해는 일찌기 자신이 알지 못한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즉, 보광이란 불법을 가리킴이요, 맑은 물이란 바로 선종의 교리를 말하는 것, 남류복향북(南流復向北)이란 싯귀는 곧 북쪽의 숭산으로부터 시작된 교리가 남 쪽으로 흘러왔다가 다시 북향함으로서 만천하가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는 뜻일지니.. 연후, 형산의 이름모를 계곡에 놓인 하나의 반석을 초석으로 하여 한 채의 절이 지어 지게 되니 이름하여 보광사다. 세인들이 남소림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처음에는 불전 세 채에 불당 하나의 초라한 규모였으나, 해를 더할수록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여 당대에는 구십구 채의 고루불각에다 일 천의 승려를 거느리게 됨으로써, 숭산의 소림사, 아미산의 금정사와 더불어 중원 삼대사찰의 하나로 꼽히게 되 었던 것, 이곳의 주지는 숭산본사의 장로급의 지위요, 기백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다한 기승, 괴승을 배출하였던 바, 그 후, 소림본사의 방장이 되었던 고승만 해도 다섯 명에 이르고 있었다. 각설하고--- 본시 유명한 보광사라 하지만 당대에 와서 이 유서깊은 사찰은 더더욱 유명하 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빛나는 이름 때문이었다. 백인불(百刃佛) 자초상인(紫草上人). 무도에 입문하여 한 초식이라도 휘둘러 본 이치고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 을까? 무종(武宗)---- 역대 이래 검군,검후의 바로 아래단계인 제사단계 무종까지 이르렀던 최초의 인물, 정파가 낳은 최고의 인재이며, 달마의 현신이라고까지 추대됐던 당대의 천하제일인, 보광사 출신이긴 했지만, 그가 소림의 이십 육대 방장이 될 것임을 의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검군의 위에 도전하여 거푸 두번을 패퇴한 후로 그는 변했다. 준수하고 예의바르며 단아한 성품이었던 그가, 포악하고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인물로 돌변했던 것이다. 뿐인가, 주지에 육림, 승려로선 불가침의 성역인 여색까지 마구 질퍽됐던 것이니, 이를 보다 못한 소림의 수뇌부는 세차례의 경고 후, 자초상인의 차대장령직을 박탈하고 그를 소림남원으로 좌천시켰다. 좌천시킬때의 그의 직위는 불문 역대사상 전무후무한 태상주지란 직급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오십세 허나 좌천되고 나서도 자초상인의 무례방자함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으며 끊임없이 고기를 뜯고 줄기차게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유명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천하제일인이었다가 주색잡기에 빠져 버린 일대고승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휘이잉........ 모진 바람이었다. 강남은 본시 사계절의 구분이 따로 없는 곳, 겨울에도 비가 오고 꽃이 피는 곳이 강남이다. 허나, 오늘 강남의 중엽인 호남땅 장사평엔 드물게도 이른 아침부터 습한 모래바람이 휘몰아오고 있었다. [쯧쯧..... 웬놈의 날씨가 이 모양인고?] [북쪽의 추위가 또 기승을 부리는 모양일새.....] 번화한 거리엔 일찍부터 인적이 드물었다. 사실, 이런 날씨엔 일찌감치 문닫아 걸고 마누라 엉덩이나 두들기며 더운 술 한 잔 쪽이 낫다. 낙천적인 강남인들답게 한산한 거리 끝쪽으로 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먼 길을 달려온 것일까, 쓰고 있는 죽립위로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은 승인, 짚고 있는 죽장이 그의 어깨 위로 불고 있는 사풍(沙風)만큼이나 우울했다. 승인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한 개의 주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삐이꺽.... 문이 열리자 훈훈한 훈기가 피부로 확 밀려 들었다. 앉은 채 곰방대를 뻐끔뻐끔 물고있던 중노(中老) 하나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 키며 거품처럼 웃음을 웃으며 물었다. [헤헤... 이거 스산한 날씨에 길을 떠나셨던가...?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구료, 손님.] 큰 성의 주루답게 잘 꾸며진 실내였다. 전청의 중앙에서 화로를 끼고 있는 표객차림의 두 무사 외앤 사람이 없었다. 승려는 고기를 넣지않은 안주를 주문한 후, 바람에 언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때, 이미 거나하게 주기가 오른 표객 중 한 사람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 스승에 그 제자라 이걸세. 스승이 술을 쳐먹는 동안 제 자는 계집질을 하러 다니는 판이니, 에잉.....] 다른 표객이 말을 받았다. [그래도 보광사하면 날고 기는 고승들이 즐비한 곳이지, 소림의 하원이라곤 하 지만 웬만한 방파와 그 성세가 맞먹지 않은가?] [이를 말인가. 자초와 그 일당들만 제외한다면 아니할 말로 덕망있는 고승들의 총집합처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입에 침을 튀기며 말을 이어가던 두 표객은 문득 옆에 선 장대한 그림자 하나 에 놀라 시선을 들었다. 방금 무심히 보아 넘긴 승려가 그들의 옆에 선 채 웃고 있었다. [아미타불... 죄송하오만 두 분 시주께서 말씀하신 자초와 그 일당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읍니까? 빈승은 그 보광사에 입적하고자 들어서던 길이라 호기심이 당기는구료.] 경계의 표정을 짓던 두 표사, 하나, 승려의 마지막 말을 듣자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하하... 사실 그 보광사에 대해서라면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지요.] 중노가 소채등을 날라 오고 승려가 접대용으로 시킨 술 두병이 상위에 얹히자 마삼이라는 이름을 밝힌 우측의 표객이 떠벌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함부로 말을 하긴 했으나 자초상인은 사실 소림불사의 장로들과 같은 항렬인 나이 팔십 세의 고승이시오. 한때는 무원검측대 무종의 위에 올라 천하제일기 승으로 만천하의 존경을 받기도 하셨던 분이오. 헌데, 검군에 도전했다가 내리 두번을 패퇴하고 이곳 보광사로 내려온 후, 그는 아예 파계에 가까운 생활을 근 삼십년이나 이어왔소.] [그 일은 빈승도 아오이만 그의 일당들이란 누구를 말함이오?] 표객 마삼은 한 모금의 술을 꿀꺽 들이킨 후, [자초를 스승으로 모시는 네 제자가 있소이다. 각각 공륜(空輪),풍운(風雲),수경 (水鏡),도솔(道率)의 법호를 쓰는 그들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하듯, 하 나같이 중 답지 못한 중들이오.] [흐음!] 이번에는 우측의 표객 우이(牛二)가 입을 열었다. [그나마 첫째인 공륜화상은 그중 가장 나은 편이오. 나이 사십에 소림의 기예 팔종을 달통하고 그 무예가 심히 광측하여 사부가 왕년에 누리던 영광을 재현 할지도 모르는 대목감이외다.] 마삼이 거들었다. [뿐인가? 사실 사부 자초나 사제들이 저지른 말썽을 혼자 다 뒤치닥거리 해내 는 일대의 효승이지. 그 우직한 충성심은 뭇 민간에까지 본받음이 되고 있는 터이지.] [그런데요?] [문제는 둘째 풍운화상부터란 말씀이오. 풍운은 좋게 말하자면 무승이고, 나쁘 게 말하자면 싸움패요. 그는 도무지 참을 인(忍)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위인이외 다.] [성격이 사나운 모양이군요.] [인근 불량패의 다리몽둥이 하나쯤 부러뜨리기는 예사고 주루 하나가 박살났다 하면 풍운이 반드시 거기 있소. 일전에는 구의산의 도적떼 사십 팔 명과 단신 으로 싸워 그들을 모조리 쳐죽였단 말이오. 도적떼를 없앤 것이야 칭찬받을만 해도 그 잔인한 손속을 어찌 부처를 모시는 불자의 것이라 할 수 있겠소.] 승려는 소채를 집어 입 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수경화상은 어떤 인물이요?] [그가 또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위인인 것이.... 그는 불자의 몸이면서도 결코 불경은 읽지 않소. 그가 탐독하는 것은 모조리 기문에다 방문의 요사스러운 술 법이라 하오.] [요술......] [사람을 모아 불리를 전파할 때도 그는 불법을 말하지 않소. 세상의 악은 힘으 로 구제해야 한다는 둥, 불가는 큰 힘을 가지고도 분단장한 새색시처럼 무기력 한 세월을 보내 왔다는 둥의 괴변일색이외다.] 표객 우이가 말을 받았다. [풍운과 수경도 괴상하지만 사실 도솔화상만큼 괴상하지는 않지. 풍운과 수경은 최소한 주색은 입에 대지 않는단 말씀이오. 한데 이 도솔이란 땡중은 술마시 는 것이 하루의 일과고 반반한 계집을 찾는 것이 그 취미이오.] 마삼은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그 뿐이면 괜찮게, 그의 도박은 호남땅에서 아무도 따를 자가 없을 지경이고, 그 능구렁이 같은 화술은 가히 장의,소진을 엎었다 뉘을 지경이지. 듣자하니 이 작자는 또 무예는 아예 한 초식도 제대로 못휘두르는 무능한이라더구만.] 마삼은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풍운,수경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한다고 치겠소. 하나 도대체 나는 도솔 같은 술 주정뱅이요, 도박장이요, 호색한을 엄숙한 불가에서 왜 그냥 놔두고 보는지 이 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요!] [야설록] 대달마 제 3 장 09/21 18:40 257 line 第 三 章 時 到 來 불전은 안개와 낙엽속에 파묻혀 있었다. 강남땅 고산의 기후는 가을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지천의 낙엽속에 거대한 산사는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무화는 새벽 독경을 끝내고 대웅전 앞 마당으로 내려섰다. 어제 모래바람이 심했고....... 산수리나무,자작나무,단풍나무,옻나무가 밤새 서걱서걱 마른 잎 부빔을 하더니 또 한 아름씩 낙엽을 지워 버렸다. 보료를 깐 듯 뜰을 덮고 있는 낙엽에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무화는 천천히 걸어 계곡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가 섰다. 장삼의 넓은 소매 사이로 싸늘하게 밀려드는 한기, 팔 백년 전----- 고승 무해가 잠을 청했을 계곡의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불타는 숲이 끓는 몸을 부끄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낙엽송들이 황갈색 단풍잎을 나부끼며 눈을 뜨는 숲의 바다아래, 장강의 한 자락인 귀래하가 형산줄기를 비단처럼 감고 도는 것이 보였다. 나룻터가 보이고 장씨라는 성의 사공이 살고 있는 초가가 보였다. 보광사 소림의 한 자락이면서도 소림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백 리 내로는 무림인은 말할것도 없고 일반 인가조차 찾을수 없는 소림사에 비 해, 바로 산 아래 사공이 사는 집을 두고 그의 배로 세속과 오고가는 보광사였다.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여 만객만인이 허다하게 득실거리는 소림사였지만, 형산 외딴 곳 섬이나 다름없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비래봉 정상에 숨다시 피 세워진 보광사였다. 소림사가 귀족적이요, 영웅적이라면, 이곳 보광사는 서민적이요, 한인적이라고나 할까, [사부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절의 어느 한 곳에 소림사를 대표할 만한 무기가 있다고 하셨다. 아미타불... 그 무기란 무엇을 말하는 겐가...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희대에 드문 보물을 말하심인가..........] 이때 돌연, 사각........ 사각........ 한소리 귓전을 파고드는 미세한 둔음에 무화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 보광사 특유의 회색승포를 걸쳤으며 언뜻 보아 사십정도의 중년인으로 보이는 그 마당을 쓸만한 지위가 아닌 듯 한데도 법당, 선방들에서부터 한 개의 티끌도 빠뜨리지 않고 천천히 비질을 이어 나간 다. 쓸어도 쓸어도 떨어지는 낙엽 하지만, 비를 든 그의 자세는 정갈하고 깨끗해 보였다. 허구한날 읊고읊는 간경처럼 쓸고 쓰는 빗자루질도 그 밖의 모든 일상이 실폐에 실을 감고 그것을 풀었다 다시 감 듯 되풀이되는 단조로움 그 질서의 반추를 승려는 무심히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비질 속에 감추어진 정갈하고 강렬한 힘을 느끼는 순간, 무화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공륜!] 승려의 비질이 뚝 그쳤다. 그의 시선이 처음으로 무화를 향했다. 그제서야 승려의 얼굴이 비로소 여명 속에 드러났다. 네모반듯하고 뚜렷한 얼굴의 윤곽, 시선은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꿰뚫을 듯하고 힌쌍의 네모지고 큰 귀가 관대하고 포용력있는 대인의 품격을 말해 주는 듯, 승려는 이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옥불, 화불과 더불어 환우삼신승으로 일컬어지는 무화스님이지요?] 두 손이 햇살을 끌어 모으듯 합장되어진다. [공륜이 미처 영접을 못한 것을 용서하시기를...... 아미타불.......] 무화는 유쾌해졌다. 사소한 비질이긴 했으나..... 자초의 뒤를 이어 보광사 제일의 무승으로 불린다는 공륜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토록 강렬한 예기를 지닐수 있으랴! [갑자기 찾아든 소승이 오히려 더..... 빈승은 자초사백을 배알하러 왔소이다.] 공륜의 얼굴에 한 줄기 난처한 빛이 서렸다. 허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이리 따라 오시지요.] 중원제삼의 사찰은 과연 그 규모가 엄청났다. 소림에 비하면 그 삼분지 일에나 미칠까 싶었지만 하나하나 독립된 불각등은 오히려 더 크고 웅대한 감이 있었다. 연무장에선 웃통을 벌거벗은 무승들이 질서정연하게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유명한 나한십팔권이다. 자세와 연식은 같았지만 그 속에는 일견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의 파괴력이 숨어 있었다. 무화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부두럽고 유연함을 그 위주로 하는 나한십팔권이 저토록 강맹해 보이다니 무 엇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이때, 한 사람이 언뜻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일백여 무승의 앞에는 높이 일장여의 석단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우뚝 선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승려, [아침도 못 먹었단 말인가? 두부 따위나 쪼개고 있겠다면 계속 그 따위로 주먹 을 휘둘러라!] 나이는 이제 삼십을 갓 넘겼을까. 햇살 아래 드러난 근육이 마치 강철같다. 두 손을 턱하니 갖다 붙인 허리는 호랑이처럼 날렵하고, 표범의 등에 용의 눈 을 가진 사내, 마치, 쇠꼬챙이처럼 사방으로 뻗은 수염이 그의 위맹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풍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 특이한 인상의 인물이라면 아무리 기억력 이 나쁜 사람이라도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초의 둘째 제자...... 도적때 사십 팔 명을 한 손으로 개패듯 때려 잡 았다는 그 풍운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내재된 힘이 분수처럼 밖으로 밖으로 솟구치는 자라고 느껴졌다. 언뜻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이내,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오만함이 또 그렇다. (부드러운 나한십팔권이 저토록 강맹하게 보이 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초강으 로만 뭉쳐진 자다......) 앞서 걷고 있는 공륜의 넓은 등을 힐끗 바라보 고 난 무화는 걸음을 재촉하며 담담하게 웃었다. [보광사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최소한 무원검측대의 세번째 단계인 무향까지 바라볼수 있는 재목들이다..... 몇 개 인가의 전각과 불각을 돌고나자 길은 위 로 뻗기 시작했다. 작은 소로였다. 길 우측은 빽빽한 수림이었고 길 좌측으로는 일렬로 심어진 대나무 잎새 사이 로 귀래하의 비단 같은 물결이 저 아래 보이고있었다. 상쾌한 공기가 무화의 허파꽈리를 자극해 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홀연 길은 끝나고 대신 한채의 아담한 누각 하나가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누각은 벼랑의 끝에 세워져 있었다. <고불루(孤佛樓)> 괴상한 이름의 누각 안엔 한 명의 거대한 체격을 지닌 노승이 대자로 뻗어 있 었다. 코고는 소리가 십 장 밖까지 들려왔다. 노승의 허름한 승포자락 옆에는 서너 개의 술병들이 나 뒹굴고 있었다. 공륜이 난처한 얼굴로 무화에게 눈길을 던져왔다. [아미타불..... 역시 주무시고 계시니......] 무화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선경에 한몽이시니 깨울 수야 없지요. 빈승은 이곳에서 기다리겠읍니다.] 무화는 근처의 편평한 초지를 골라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 공륜은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본 후 누각의 디딤돌 아래 공손하게 시립해 섰다. 댕........... 댕............ 댕.............. 조과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해가 동천을 환히 밝히는가 싶더니 그물 같은 빛살을 사위로 흩뿌려낸다. 한 시진은 족히 지났을 게다. 문득, 개구리처럼 네 활개를 있는대로 펼치고 나선 노승이 끄응 길게 기지개를 켰다. 무화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노승은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앉기 무섭게 그가 찾아 쥔 것은 술병, 병을 입에 대기 무섭게 술은 무섭게 바닥이 난다. 거푸 네 병의 술을 모조리 비우고 난 후에야 노승은 끄윽 트림과 함께 시선을 누각 아래 아득한 귀래하로 던졌다. 앉은 키가 웨만한 사람 키만한 노승이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심인가? 사해를 한눈에 넣듯 시선을 풀어넣고 이월의 햇살이 빛나는 청회색의 자연을 저렇듯 바라봄은 이때, 공륜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사부님, 숭산 본사의 무화스님이 오셨읍니다.] 거푸 두번의 여쭘이 있었는데 거대한 등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 소리 중얼거림 [속욕(俗慾)에 잠이 들어 잠시 부처를 잊었구나. 속세의 역정이 나의 살을 주리 게 만든다.....] 무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 개의 자옥불상(紫玉佛像)을 꺼내 누각의 위로 올린 다음 정중히 합장 배례를 올렸다. [삼가 후전 무화가 자초사백을 배알하오.] 아무 거동도 없었건만 홀연 누각위로 올려진 불상이 스르르 노승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틀림없군.] 무슨 말일까? 한 소리 알수없는 중얼거림에 이어 노승의 시선이 천천히 무화를 향했다. 그 깊은 연륜의 동공이 무화의 눈과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무화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겁없이 늙은 소림의 땡중들이 차대방장으로 꼽고 있다는 애송이가 바로 너인 가?] 거대한 종이 귓전을 왕왕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화는 시선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공연한 헛소문이 사백의 심기를 어지럽혔나 봅니다. 무화는 장문의 전갈을 지 니고 왔읍니다.] [남령이 무슨 전갈을 주었단 말인가?] 사형이라곤 하나 장문인의 법호를 함부로 부르는 것은 분명히 금기이다. 귀에 거슬리는 광동 발음의 하대도 그렇다. 하나, 거대한 산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노승 자초에게는 그런 것들이 더할수 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무화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장문인께서는 자초사백님에게 무기 하나를 받아 오라고 하셨읍니다.] [무기......?] 공륜은 얼핏 사부의 신색이심상찮은 것을 느꼈다. 표정은 별반 변한것이 없으나 그 얼굴 한쪽에 감돌기 시작한 한 줄기 광휘! (저것은........) 이십 년 전이던가의 검군에 도전하는 길을 떠나실 때 얼핏 사부의 얼굴에서 저와 같은 광채를 보았 었다. 그리고, 그 길을 돌아온 이래 사부 자초는 검 대신 술병을 잡았을진대..... 오오.... 분명히 그 광채다. 너무 눈부셔 마주 올려다 볼 수조차 없던, 신념과 자신으로 뭉쳐진 인간이 아니면 표출해낼 수 없는 그 광휘요, 모습이었 다. [종즉적시도래(終卽適時到來: 마침내 때가 이르렀는가)......] 노승 자초의 시선이 힐끗 공륜을 향했다. [몽둥이를 하나 가져 오너라.] 공륜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근처에서 굵은 소나무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왔다. [그것으로 평상 아래에 있는 술병을 모조리 깨라.] 순간, 공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누각 아래엔 술병이 수백개나 쌓여 있었다. 그것을 깨라함은 그가 이십 년 간이나 즐겨오던 술을 절연하겠다는 뜻이 아닌 가? 꽝! 꽝! 와장창! 술병이 부숴져 나가기 시작했다. 폭죽 터지듯 깨져 나가는 항아리의 파편과 술줄기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노승 자초는 느릿하게 하늘을 향해 노안을 우러렀 다. [걱정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탄식하고 번민하는 인간의 고통을 일찍 제하 지 못한 나의 박득(薄得)을 한(恨)하여 왔으나.....] 퍽! 퍽! 백 여덟,백 스무병의 술단지가 공중에 파편을 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가벼이 씨앗을 날리듯 흩어지고 싶은 내 살의 속태움을 나도 어찌할 수 없었거니.......] 퍽! 퍽! [동(動)이 정(靜)으로 돌아서게 하여 법도에 눈뜨게 함이 진정한 이치라면.... 홍 역처럼 앓고난 후의 면역 또한 어찌 귀하다 하지 않으랴... 아미타불... 비로소 정토로 귀의할 때가 이르렀도다.] 이르렀도다의 말과 마지막 백 아흔 두병째의 술항아리가 깨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그가 말했다. [넷째가 지금 어디 있는냐?] 넷째 도솔, 술에 미치고 색에 환장하고 도박에 삶을 걸어 보광사 전체가 고개를 젓는 희대 의 파계승, 공륜은 얼떨떨하여 대답했다. [어제 저녁 배를 타고 나가더니.....] [요즘도 절 아래 나룻터의 장사공집 봉녀와 노는가.....] [그것도 시들해졌는지 장사성 내 홍화거에 자주 나타난다고 하더이다.] [그곳에는 누가 있느냐?] [백씨라는 과부가 한명 있지요.....] 처녀에다 과부라...... 무화가 검미를 가볍게 찌푸릴 때 노승 자초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귓전을 들쑤셨다. [그 놈이 어디에 있건 한 시진 내로 찾아오너라!] 대달마 제 사 장 09/23 15:20 394 line 第 四 章 鬱 金 香(울금향) 우삼, 그는 푸줏간의 주인이다. 그는 매우 선량하고 착했으나 한 가지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흠이었다. 술을 깨고 난 아침은 머리가 멍하기 마련이다. 보광사의 도솔과 먹었던 술이었다. 그 와중에 무슨 내기인가를 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침부터 손님이 매우 많았다. 그는 벌써 우육(牛肉) 일곱 근과 압육(鴨肉) 서른 근을 팔았다. 막 냉수 한 사발을 들이키고 다시 주문이 들어온 우육을 자르고 있었을 때 느닷없이 길 건너 장부자집 주방장이 사납게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그는 어리둥절한 시선의 우삼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내팽개쳤다. [우삼! 이게 오리고기인가? 네 입에서 까마귀고기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 성을 갈겠다.] 또 한 사람이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동문 아래의 오대인댁 하인이었다. [개고기와 소고기도 분간 못하는 푸줏간 주인이라니! 우리 댁 마님께서 개고기 라면 거품을 물고 구토한다는 것을 알고 부린 수작이냐?] 우삼은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까마귀 고기에다 개고기란 말인가? 이때 돌연, 그는 다급히 뒷쪽의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로 달려갔다. 그는 멍하던 머리가 일시에 맑게 개이는 느낌이었다. 아니, 비단 개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질퍽질퍽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창고는 어두웠다. 우삼은 불을 밝혔다. 사방의 모습이 일시에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 [헉!] 우삼은 넋을 잃었다. 고기,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곳엔 까마귀와 참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벽에 붙여진 큼직한 쪽지 하나, <약속대로 고기를 모조리 다 가져가오. 어제 우시주는 내기에서 졌으나 끝까지 당당했소....... 삼가 경의를 표하며 우선은 개와 까마귀라도 팔아 푸줏간의 명예를 이어가길 바라오.> [도솔........] 우삼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솔, 그 술벌레와 술시합을 하다니, 아아........ 우삼은 분명히 선량하고 착하다. 다만, 그는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면 탈인 것이다. 홍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 밖 십 리 지점, 산길의 주위로는 나무도 우거졌다. 주르륵..... 뱃속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아침에 마나님상을 올리다 슬쩍 집어먹은 그 육편이 탈을 일으키고 있었다. 홍란은 달음박치듯 숲 속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다급히 치마를 걷고 속곳을 끌어내렸다. 즉시, 내장의 끝부분에서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어지러울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홍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배설의 쾌감보다도 누가 근처를 지나가지나 않을지, 어서 일을 보고 이곳을 떠 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미친 듯이 뇌리를 휘몰아쳤다. 하지만, 내장의 끝부분은 야속할 정도로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었다. 이때 돌연, 희고 가늘어 마치 여인의 것 같은 손 하나가 불쑥 홍란의 머리에 얹혀졌다. 다음 순간, 그 손은 쭈그린 홍란을 그대로 눌러 앉혔다. 철벅! [아악!] 홍란은 거품을 물었다. 그녀의 귓전으로 나직한 웃음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하.......] 명랑하고 탄력있는 웃음소리, [도솔.........] 도솔(道率), 오오...... 도솔!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장사성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이름을 들으면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이 이름에 의해 한 번이라도 곤두박질쳐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으로 새로 이주해 오거나 장기간 숙박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이름부터먼 저 외어야했다. 쿠당탕! 와당탕! 쿵! 꼬랑지에 불이 붙어 미친 듯 달려나가는 말 위에 거품을 물고 매달린 외지의 무사나....... 줄줄이 물 새는 동이를 이고 천연덕스럽게 걷는 아낙네를 보면 사람들은 끌끌 혀를 차곤 했다. [도솔이로군.] 도솔, 모든 말썽과 소란의 근원인 괴상한 승려 하지만, 사람들은 혀를 차고 웃기는 했을지언정 도솔에 대해 진정으로 험담을 하는 이 는 없었다. 사람들은 기이할 정도로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왜 그를 미워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것이 었다. [모르오.] 그렇다. 사람들 또한 왜 자신들이 도솔을 미워할 수 없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도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주루 한 채의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주막, 향나무로 만든 이쑤시개를 가지고 다니는 점잖은 양반들이 드나들 곳은 못되 고, 하루 벌어 입에 풀칠을 하고, 유병을 사달라고 조르는 자식새끼의 머리를 하루에 한번씩 쥐어박는 그런 사 람들이 애용할만한 주루였다. 자연, 주루의 환경은 매우 비청결했다. 서너 개 놓인 탁자는 옷자락만 닿아도 그냥 기름이 묻어나고, 주방에서 흐른 물과 음식 찌꺼기로 질퍽이는 흙바닥으로는 더러운 똥개가 꼬 리를 살랑이며 그것 들을 함아대고 있었다. 노을녘의 주루는 한산했다. 방, 아마도 평소에는 주모가 잠을 자는 곳일 개딱지만한 방에서 엉키듯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한량 하나와 기녀들이 있었고, 이미 어디서 한잔 걸쳤는지 이들 은 매우 취해 있었다. 그리고, 구석 쪽에 앉은 두 사람이 주루 안에 있는 손님의 전부였다. 두 사람, 마주한 채 앉은 얼굴들이 자못 심각했다. 그들의 손에는 도박의 일종인 검패의 팻장이 쥐어져 있었다. [펴 봐.] [네가 먼저 펴] 둘 다 나이는 십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좌측의 소년은 짐승가죽으로 만든 한개의 피의로 상체만 적당히 가린 소년이었 다. 말 할 때마다 턱살까지 흔들리는 뚱뚱한 체구 머리에 두른 백건에 꽂힌 닭털이 이채롭다. 검패 손에 들린 검패의 팻장은 홍검 이 흑검 이 의 쌍검을 가리키고 있었다. 썩 좋은 끗발이랄 순 없었지만 그리 나쁜 끗발이랄수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앞에 앉은 자의 손을 힐끗 향했다. 마치 여인처럼 희고 섬세한 손가락 팻장을 모두어 쥐듯 감춘 손목을 엎고 있는 것은 기이하게도 승포자락이었다. 승포를 거슬러보니 자단의 염주를 두른 목이 있었고 그 목 위의 머리는 빛나는 대머리였다. 승려, 그는 바로 승려였던 것이다. 한 손에는 팻장 또다른 한 손에는 술병을 든 이 괴상한 승려는 콧등을 찔끔하 며 꿀꺽 한 모금의 술을 마셨다. 그의 얼굴은 매우 못 생겼다. 뺨에는 나다 만 것처럼 듬성듬성했으며 코 또한 보기 흉한 들창코였다. 하나, 그에게는 기이하게도 한 줄기의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그를 눈여겨보게 되고 두번 세번 보다 보면 사실 그가 그리 못생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느닷없이 하나의 손이 두 사람의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이 손은 매우 투박했다. 마디가 굵고 피부가 거칠했다. 누가 보든지 이 손은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손의 임자는 분명히 여자였다. 그녀는 비단 놀라울 정도로 뚱뚱했을 뿐 아니라 또한 놀라울 정도로 투박한 손 으로 한 그릇의 소 채 그릇을 들고 있었다. [흥! 술은 한 병 마시는 주제에 안주 값 안드는 이따위 소채만 찾고 난리인감?] 탕! 소채그릇은 탁자가 온통 뒤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놓여졌다. [이크!] 여자는 찬바람이 일도록 홱 몸을 돌렸다. 두 줄기 시선이 황급히 여인의 엉덩이를 쫓았다. 사실, 그것은 엉덩이라기엔 너무 둔탁하고 모양없는 그저 몸통과 다리 사이에 있으니 엉덩이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런 살덩이에 불과했지만 그 엉덩이를 쫓는 두 줄기 시선에는 타는 듯한 정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흐음! 자고로 자기아내보다는 남의 아내가 좋고 남의 아내보다는 싱싱한 처 녀가 싱싱한 처녀보다는 남자 맛을 속살 깊숙히 감춘 과부가 더 좋은법.] [마르고 홀쭉한 여자와 정액을 나누는 친구는 시궁창에나 처박히리라. 살집이 풍만한 여인일 수록 정감 또한 풍만한 법이니.....] [아아.........] [저 백씨는 볼수록 귀엽군.] 귀여운 백씨는 주방문을 통과하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귀여울 정도로 뚱뚱했으므로 장정 두 명이 나란히 통과하고도 남 을만한 주방문을 정면으로는 도저히 지나갈수 없는 것이다. 몸을 바둥거리다시피 옆으로 빼야 간신히 그녀는 문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정면으로 끙끙거려본 후에야 옆으로 다시 빠져나가곤 했다. [저건 애교지. 자신의 몸에 대한 신념이요 신앙이야 저 신앙이 하늘을 감동시켜 문을 넓혀 주기라도 한다면.] [너의 부처님께 권고해 보지 그러나. 저 예쁜 가슴에 문에 대한 분노를 심어주 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지. 언젠가는 문을 때려 부술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이 주루에 오는 사람들은 두 배는 빨리 술과 밥을 먹을 수 있을텐데.....] [벗이여 이제는 누가 저 귀엽고 아리따운 여인을 차지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결판을 내릴 때가 되었다.] 슈파앗! 파앗! 서로의 패가 빛살같이 뒤엎어졌다. 순간, 뚱보소년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듯 묘하게 일그러졌다. 승려의 패 홍검 일, 흑검 일, 홍편 일, 흑구 일, 그리고 왕패 하나, 그것은 검패의 최고 끝발인 오천왕이었던 것이다. [이의 없겠지?] 승려는 씩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뚱보소년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좋아, 졌어 그런데 너는 저 사나운 주모를 어떻게 손에 넣을 생각이지?] [무쇠가 왜 꺽어지는가를 생각해 보라. 적어도 부처님을 시험하려고 덤빌 땐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아미타불.....] 이때 돌연, 여인 하나가 승려의 앞을 스쳤다. 아까부터 방에서 떠들어대던 일당 중 한 기녀였다. 측간이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헌데 이때, 승려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기녀가 그의 앞을 스쳐 지날때 그의 그 부분을 툭 건드리고 지났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것이 분명했다. 기녀는 자리에 앉고 나서도 젖가슴이 삐죽 튀어나온 앞섶을 가릴 생각도 않고 승려를 가리키며 까르르흐드러진 웃음을 날렸다. [살다보니 저토록 매력적인 중을 다 보는구먼? 볼수록 멋진데? 스님, 날 좀 봐 요. 기왕 술에다 고기까지 자시니 나 같은 인생 무시하진 않겠소? 걸래쪽보다 더럽다고 침 뱉겠소? 호호...... 이리 좀 오시구료..... 이런 천한 계집에게 자비 를 베푸시는 게 스님의 도리 아니예요?] 옆에 있던 사내가 몽롱한 눈을 들어 승려를 바라보더니 헤벌쭉 웃었다. [아암, 그래야지. 세상에 경험보다 좋은 명약이 어디 있으랴? 높은 스님이 되려 면 경험의 폭을 넓혀야지. 어이, 땡중 이리 와 보시오.] 그는 오지 않으면 요절이라도 내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손의 정권은 굳은 살이 불끈불끈 베인 개 평소에는 힘께나 자랑하는 자 같 았다. 남은 계집 하나가 거푸 거들었다. [정말 훤하게 잘도 생기셨네. 코를 보니까 그것도 클텐데 중질하긴 아까운 인물 이군요.]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뚱보소년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할까... 도솔의 이름을 모르고 이 장사(長沙)에서 술을 마시는 위인들이 있을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승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술을 주겠다니..... 이렇게 고마울데가.....] 공륜은 침중한 얼굴로 홍화거의 문을 밀었다. 말이 홍화요. 거(居)지 조금 힘만 주어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주루다. 그는 이런 곳이나 드나드는 넷째 사제의 고약한 취미를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 었다. 그런 넷째 사제를 이런 중요한 시기에 불러오라는 사부의 명령은 더더욱 이해 할수가 없었다. 삐이꺽...... 십 년, 아니, 십 일 년쯤 전이었을 게다. 사부 자초의 손에 술병대신 매달려 산문을 들어서던 조그만 소년 하나, 주위의 녹음보다 더욱 창백한 얼굴이며,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하고 흰 백삼의 여운..... 한쌍의 맑은 눈빛이 자신을 향하며 귀엽게 조아리던 그 모습, [대사형이시지요? 도솔이 처음 뵈어요.] 눈빛을 제외하곤 잘 생긴곳이라곤 단 한곳도 없는 그 소년의 모습을 공륜은 오 랫동안 잊지 못했다. 소년이 초식 하나를 가지고 한 달이고 두 달을 헤메어 문인들에게 비웃음을 당 할때도 그만은 홀로 소년을 비호해 주었으며, 소년이 출가한 몸으로 술과 여자를 탐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만은 그런 소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소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둔했다. 무예는 익히면 익힐수록 잊어 먹었으며,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도맡아서 저지르고 다녔다. 불경을 익혀야 할 시간에 살짝 빠져나가 취해 자빻져 있는것은 예사요, 향을 올리며 온 여보살의 방에 뱀이나 개구리를 집어 넣어 까무라치게 하기도 여러번이었다. 그리하여, 이년 전 소년이 불상을 엎어놓고 그것을 깔고 앉아 술을 마셨던 좌불대역(坐 佛大逆) 사건을 일으킨 뒤로는 마침내 공륜까지도 소년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이 다. 그때 공륜은 스승 자초에게 말했었다. [더 이상 두고 보시는 것은 본사를 위해서나 도솔 자신을 위해서나 이로울 것 이 하나도 없으리라.] 스승 자초는 말없이 웃으며 말했다. [큰 일을 할 아이이니 놔두도록 해라.] 큰 일, 그 큰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공륜은 그리 오래 생각해 보지 못했다. 헌데, 오늘의 일과 그 큰일이란 것은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주루의 문이 열렸다. 도솔이 틀림없이 여기 있다는 보고를 받은 공륜은 성큼 앞으로 발을 들여놓았 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발은 돌처럼 굳어들고 말았다. [끄윽.........] 거나하게 풀린 눈, 두 다리는 쭈욱 앞으로 뻗은 채 방 벽에 턱하니 기대어 앉은 자세, 도솔은 인간이 앉을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발 끝에는 장한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한쪽 눈엔 피멍이 들고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오른 모습이다. 그는 엎드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머리위에는 두 명의 여자가 새끼줄에 대롱대롱 메달려 있었는데. 그녀들은 놀랍게도 모두 일신에 실오라기 하나 골치지 않은 나신이 아닌가? 축 쳐진 유방과....... 한번도 햇빛을 쐬지 못해 푸르스름한 허벅지 새를 창문 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화살처럼 꿰뚫어 가고 있었다. 도솔이 히죽 웃으며 사내를 향해 말했다. [내가 누군가?] 사내는 황급히 대꾸했다. [천하의 도솔 스님이십니다.] [틀렸다. 나는 너의 조부다.] [그렇습니다. 소인의 조부님이십니다.] [황삼(黃三).] [손자가 명을 기다리십니다.] 도솔은 꿀꺽 한 모금의 술을 넘긴 후, [개자식이 인간을 조부로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너는 개자식이다.] [소인은 개새끼입니다.] [짖어 보아라.] [컹컹.....] [너는 염소다.] [음메에....] [너는 생쥐다.] [찍찍......] 입술을 오므려 쥐소리를 내며 바닥을 설설 기는 사내를 바라보며 도솔은 씩 웃 었다. 그는 천천히 한 모금의 술을 마신 후, 시선을 매달린 두 여자를 향해 던졌다. [남부에서는 저 야들야들한 여인의 속살로 만두를 빚는 일도 있다 하더라만... 그야말로 운치없는 위인들이 아닌가? 여체는 그저 보는 게 좋아.] 키득키득 웃음을 참고 있던 한쪽의 뚱보소년이 말했다. [여자를 그냥 보고만 있는게 좋다니.그런 엉터리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겐가?] [아미타불.....] 도솔은 한 병의 술이 다시 바닥난 것을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여자란 조금 추켜주면 금방 오만해지지 마련이지. 그리고는 매우 빨리 허영심 으로 남자를 괴롭히는 게야.] [어떤 허영심 말인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다소 다루기 어려워지는 그런 것들이지. 하지만, 그것을 지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야. 여자는 그런 반격에 대해 수천 가지의 변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야.] [골치 아프군.] 도솔은 히죽 웃으며, [여자들은 흔히 책략을 쓰지. 남자를 휘어잡기 위한, 또는 남자를 영원히 자기 옆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 말이야. 그 보잘것 없는 책략속에 숨어 있는 온갖 애 정을 추측할 수 없는 사내라면 아예 여자를 생각하지도 않는 게 좋아.] [너는 그런 골치 아프고 허영심 많은 여자를 이미 겪어 봤다는 예긴가?] [이것 봐, 천돈(天豚) 겪어보고 나서야 그것이 그랬다는 것을 아는 정도는 누 구든 할 수 있어. 나 도솔이 다른 사람과 틀린 것은 남들이 잘 모르는 것을 대 게 알고 있다는 것이지.] 여자들은 몸을 비틀고 있었다. 비록, 수 배명의 사내가 그녀들의 배 위로 올랐다고 쳐도 한 낱 술안주 삼아 낯선 사 내의 시선이 몸을 샅샅이 함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인것이다. 그녀들이 참을 수 있든 말든 도솔의 시선은 끈적하게 그녀들의 몸을 훠고 지났 다. 술 한 모금에 거무스레한 보라색의 젖꼭지를, 또 한 모금에 마른 버짐이 피어있는 허벅지 안쪽을, [꿀꺽.] 다시 한 모금에 하늘거리는 다리 새로 힐끗 쏘아져 들어온 모습, 순간, 도솔의 몸이 흠짓했다. 그는 마시던 술병을 자리에 내려놓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은 운도 좋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났다면 조금도 회개할줄 모르는 너 희들을 정말로 안주 삼아 구워 삶고 싶어졌을 텐데.] 그는 좌측에 메달린 여인의 엉덩이를 비명이 나오도록 철썩, 두들긴 후, 성큼 앞으로 나서며 한 손을 번쩍 쳐들었다. [대사형! 이곳엔 웬일이시오.] 뚱보소년 천돈은 흠짓 문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있다. 한 손엔 방편산을 짚고 턱하니 버티어 선 위엄에 찬 중년승인 하나, 바로, 보광사 제일의 무승이라는 공륜선사가 아닌가? 공륜은 흐늘흐늘 걸어 나오는 도솔의 모습에 눈살을 깊이 찌푸렸다. 하나, 그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찬바람이 일 듯 몸을 돌렸다. [사부께서 찾으신다. 따라 오라.] 도솔은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고는 그 뒤를 따랐다. 뚱보소년 천돈이 급히 외치는 소리가 두사람의 등뒤로 매달려 갔다. [도솔, 오늘의 권리는 포기하는 겐가?] 도솔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멍청한 녀석, 너는 정말로 그녀의 위로 올라 보겠다는 건가?] 히죽 웃음이 뒤를 잊고, [아서라. 그 순간부터 너는 사흘이 못가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말 했잖나? 여자, 그리고 꽃은 그냥 보는것이 좋다고 말이야.] 대달마 제 오 장 09/24 22:42 316 line 第 五 章 滴 天 人 [짐작컨데 사타가 검후를 키워내고 우리가 검군을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거의 동시에 일이었을 것이다.] 동혈(洞穴) 들어가는 입구의 너비는 약 이 장 정도, <연기혈(練機穴)> 이곳은 바로 기라성처럼 명열해 갔던 보광사의 고승들이 무예를 수련하던 곳이 었다. 동혈된 구불구불 삼십여 장이나 안으로 뻗어 있었으며, 양쪽의 벽에는 엄숙한 불화나 탱화가 새겨지거나 걸려 있었다. 또한, 염여나무 피의 석실이 나란히 뚫린 외에 동혈의 끝부분에는 거대한 석전이 자 리잡고 있었다. 석전(石殿), 높이 십여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돌기둥과 전면에 조각된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이 특별히 시선을 끈다. 마애불의 앞에는 지금 네사람이 앉아 있었다. 최상석에는 노승 자초 한 칸 아래로 무화와 풍운의 모습이 보이고 그리고 또 한사람, 일신에 걸친 것은 백색의 승포, 이십 오륙 세 가량의 나이에 안색은 하얗다 못해 푸르기까지한 청년승인, 그는 마치 해골처럼 말랐다. 승포는 그리 큰 것이 아닌데도 헐렁헐렁했고 소매자락 새로 들어난 손은 강시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그 손에는 한 권의 낡은 채자가 들려 있으니....... 수경(水鏡), 노승 자초의 세째 제자인 수경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모습을 할 수 있겠는 가? 말을 한 사람은 노승 자초였다. 무화는 공손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풍운과 수경은 술주정뱅이 사부의 변한 모습에 두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노승 자초는 거대한 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때 무화가 물었다. [하오면, 사파에서는 검후를 정파에서는 검군을 키워내게 된 것이 어떤 약도에 의해서오이까?] [아니지. 그것은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을뿐 사전에 어떤 약조가 있었던 것은 아 니다.] [검군이나 검후가 있다는것은 사실상 무림의 경사입니다. 헌데 그것이 그토록 감추어지게 된것은 어떤 것이온지.....] 노승 자초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석전의 천장을 올려다 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 을 열었다. [오백 년 전 무원검측대가 세워진 이래 정사의 묵은 싸움은 사실상 종결이 되 었다. 하나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어 왔다.]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 하오면?] [상대쪽에서 검군이나 검후의 제 오단계 고수가 나온 듯 하면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오백년동안 우리는 다섯 명의 검군후보와 세 명의 검 후후보를 잃었고 또한 사파의 검군후보 넷을 척살했다.] 삼인의 얼굴에 동시에 놀란 빛이 스쳐 지났다. [그런 일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 정사의 양 계보에는 겉으로 거의 조직이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두 개의 조직이 있으니 우리쪽의 이름을 천년맹(千年盟)이라 하고 서파의 조직을 지옥련(地獄聯)이라 한다.] [천년맹...... 지옥련......] [지옥련은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우리쪽은 무원검측대의 십팔노화진과 각 파의 대장문들이 맹에 속해 있다.] 수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했다. [그 분들의 지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맹내의 지위는 이급고수 정도랄까? 나 또한 이급 정도에 속해있고 제일사범의 자리에 있다.] 삼인은 부르르 몸을 떨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놀랍다 못해 끔찍한 일이었다. 각파의 대장문이요, 십팔노화진이라면 이 땅의 최고기인으로 받들어지는 터, 헌데, 그런 인물들이 겨우 이급에 불과하다면 그 외의 인물들 즉 천년맹을 실질적으 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대체 그 어떤 인물들이란 말인가? 이때, 무화가 급히 떠오르는 것이 있어 급히 물었다. [하오면 구대문파에서 은밀히 키운 검군영접의 정예도 천년맹에서 지휘하는 일 입니까?] [바로 그렇다.] [그럼 본 소림사에서 키워낸 무기란?] 바로 그때 저벅...... 저벅....... 밖으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쪽으로 쏠렸다. 석전의 입구에는 수경이 설치해 놓은 용화대석진(龍華大石陳)이 있었다. 인영은 보이지 않고 발자국소리만 잠시의 시간을 울리더니, 돌연, 땅에서 솟아 나오는 두 사람이 석전의 안에 나타났다. 근엄한안색의 중년승인과 온 얼굴에 공포자국이 가득한 소년승인 하나, 바로 공륜과 도솔이 아닌가? 공륜은 상석의 노승 자초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후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반면에, 도솔만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무화의 칼날같은 시선이 도솔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났다. 그의 두 눈에 가벼운 실망이 떠 올랐다. 그는 사실 소문이 자자한 자초의 넷째 제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 사부 남령상인이 말했던 무기가 바로 그가 아닐까 하고 생각도 했었다. 하나, 일견해 보기에도 도솔의용모는 너무 평범했다. (지극히 나쁜 관상이다... 미래에 액운만 가득할 뿐 영웅으로서 갖추어야 할 어 떤 광채도 없구나....) 무화의 두 눈에 나타난 실망을 빠르게 읽고 난 노승 자초는 담담히 웃었다. [솔아, 본사의 무화스님에게 예의를 드리도록 해라!] 도솔은 다급히 무화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합장의 예의도 모르는 자라..... 무화는 씁씁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무화이오.....] 이 때, 노승 자초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 뒤를 이었다. [솔아, 본래의 모습으로 사형들께 인사를 올려라.] 순간, 무화를 비롯한 공륜 풍운의 눈에 가벼운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시선을 손에 들린 책에 던지고 있던 수경의 얼굴도 번쩍 쳐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보더니 일제히 도솔을 향했다. 도솔은 즉시 몸을 쭉 폈다. 순간, 후두둑....... 하고 가슴과 함께 그의 몸이 장대하게 늘어났다. 이어, 얼굴을 한 차례 쓰윽 문지르니, 그 속에서는 놀랍게도 뛰어나게 영준하고 늠름한 기상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보라! 얼굴은 공들여 빚은 듯 단아하고 해맑은 얼굴에 주사를 칠한 듯 붉디붉은 입술 고즈넉한 콧날에 새하얀 미간을 검처럼 가로지른 한 쌍의 검미..... 뿐인가!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그의 한쌍의 눈이었다. 북극의 동토에 얹힌 겨울하늘처럼 시리고 투명한 광채에 정대함이 안개처럼 서린 눈동자는 보면 보는대로 상대의 혼을 빼는 듯, 도솔, 그는 아름다웠다. 돈많고 할일없는 마님들이 본다면 치마에 오줌을 싸며 까무라칠 일세의 미승이 었다. 무화등의 사인은 아연실색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솔이 그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리자 공륜을 그제서야 망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구나. 도솔이 이토록 영준한 사내대장부일 줄이 야......] 무화는 감탄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상(相)의 인피의 상이었구나. 저 진면목이야말로 인중지룡의 호상이로 다.... 무골, 근골 어디 한 군데 빠짐이 없다. 다만 인룡의 상으로 보아 여난이 엿보이니 그것이 옥의 티로구나.....) 이때 노승 자초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저 아이가 바로 소림이 키워낸 특수한 무기이다. 지금까지 너희들에게도 이 아 이의 진면목을 숨겨온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노승 자초는 도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이 서전 안을 한 바퀴 돌아 네 사형들에게 보여드려라.] 무엇을 보여 주라는 걸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솔은 허리를 쭉 펴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석전을 한바퀴 돌았 다. 노승 자초의 시선이 공륜을 향했다. [공륜, 뭐가 좀 보이느냐?] 공륜은 더듬거렸다. [글쎄요. 걸음걸이가 가볍고 풍류남아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이외엔 별다른 것은 모르겠읍니다.] 노승 자초는 담담하게 웃으며 다시 명령했다. [좋아, 솔아 그럼 다시 한번 걸어 보아라.] [예!] 도솔은 힘주어 대답한 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때 돌연, 그의 일신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보라! 스스슷..... 분명히 본체는 그 자리를 걷고 있으련만, 한 줄기 환상처럼 본체로부터 솟아 나오고 있는 또 하나의 도솔! 본체와 솜털하나 어김없이 많은 그 환체란 본체의 앞에 스르르 몸을 세우더니 또 한 반대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순간, 무화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넋을 잃은 양 중얼거렸다. [양심여의공(兩心如意功)......] 오오.... 양심여의공! 역근, 세수의 두신공에다 소림 고유의 대반야현공을 개량융합하여 만들어졌다는 전설의 신공! 노승 자초 외에는 그 누구도 펼칠수 없다는 이 신공은....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본체외에 생긴 환체는 본체와 똑같은 힘을 가지며, 이합(離合)이 자유롭고 탄흡(彈吸)에 반진(反震)의 묘용(妙用)이 무궁무진하다 하였다. 석년에 자초는 이 양심여의공으로서 검군의 위에 도전하였다. 아..... 그는 이 신공을 반도 다 펼치지 않고 무원검측대를 내려 왔으며, 그 자신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탓으로 아직까지도 그 일은 사람들에게 풀수 없는 의문으로 남아있는 터였다. 어쨌든, 도솔의 본체와 환체는 각기 반대쪽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들의 걷는 모양은 제각기 달랐다. 한 쪽이 온건하며 위무가 있어 보인다면..... 다른 한쪽은 날렵하고 표홀하여 마치 자객의 거동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두 영상은 스르르 하나로 합쳐져 우뚝 선 도솔로 돌아 왔으니..... 이때, 풍운이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저것이 정녕 한 초식을 가지고 두 달을 헤메던 그 도솔이란 말인가?] 그는 무예에 미친 사람이다. 자연, 양심여의공이 얼마나 익히기 어려운가를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헌데, 보광사의 무예사범인 자신이 십년을 공들여도 익힐 수 없었던 그 어려운 신공 을 도솔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펼쳐내는 것이 아닌가? 무기! 그는 자연 소림이 자랑할만한 무기였다. [저것은 도솔이 익히고 있는 많은 무예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무화가 다급히 물었다. [도솔 또한 천년맹의 사람이오이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도솔은 매우 특수한 임무를 띄 게 된다. 천년맹 내에서도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불과 다섯 명 정도. 또한 앞으로 이 일은 극비에 붙여져야만 한다.] 중인들은 일제히 노승 자초를 향해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들은 도대체 이번 일이 그토록 신비로운 까닭이 무엇인가고 묻고 있었 다. [천년맹과 지옥련은 각기 정사를 대표하고 있지만 그 방대한 세력에도 불구하 고 천년맹은 늘 지옥련에게 뒤지고 있다. 사파의 검후가 먼저 출현하고 검군의 출관이 탄로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 [즉, 지옥련에는 우리로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막강한 조직이 하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조직은 최고의 정보망을 갖추고 우리의 일거일동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자연 이번의 정예선발에 우리는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다.] 노승 자초의 시선이 느릿하게 허공을 향했다. [솔아, 너의 속가명이 무엇이냐?] [구양조운(歐陽照雲)입니다.] [좋다. 조운, 너는 오늘 이시각부로 소림의 승적에서 파문된다!] 순간, 중인들의 얼굴에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양조운 또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부.....] 노승 자초는 한 줄기 탄식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솔아, 너에게 사부가 주(酒)와 색(色) 화(話), 도(賭), 그리고 사파의 무예까지 가르친 것이 무슨 까닭이라고 생각하느냐?] 구양조운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를 상대함에 있어 그들을 먼저 알고 얕은 계략에 넘어감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무엇이냐?] 순간, 구양조운은 가볍게 머뭇거렸다. 노승 자초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탄생했으나... 만약 사파에서 여자인 검후가 탄생했을 경우.... 바로 그 경 우를 대비하여 오늘의 도솔이 만들어진 것이다. 검후가 탄생치 않았다면 도솔 또한 영원히 도솔로 묻혀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무화 등의 사인은 자초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서로를 마주보았다. 자초의 말이 이어졌다. [싸움을 끝발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번의 싸움은 천 년 정사의 존망 이 걸린 일이니.... 도솔의 임무는 바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심장을 유린 하는 일인결사(一人決死)의 임무이다. 하나 이 임무는 절대 무공으로 임하는 것 이 아니다.] 순간, 무화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혹시, 사백님은 도솔사제로 하여금 사파의 검후 경설을 가까이 하여.... 그녀를 정으로 묶어 놓도록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았다. 궁극적인 목표는 도솔로 하여금 검후를 아래로 알게 하는 것이 다. 이는 무림에 닥쳐올 미증유의 액겁을 미리 막을 수도 있는 것.... 허나 남녀 가 사랑을 하는 장소라는 것은 마치 전장과도 같아서 그 형세가 천변만화한 것 이니...] [.......] [이미 모든것에서 한발짝 늦어 기세를 빼앗기고 있는 정파의 슬픔이트여지는 가 않는가하는 것은 오직 도솔 한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아아.......] 미남계! 천년정파의 미남계! [사파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현소림에선 옥불이나 화불이 소림정예로 출발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조운은 홀로 험난한 강호로 던져진다.] [.........] [이 원대한 거사를 미리 발설함은 바로 무화, 공륜, 풍운, 수경의 세 사형이 십 칠세의 어린 사제를 도와 너희들에게 남겨진 미래를 훌륭히 헤쳐나갈 수 있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순간, 무화등은 황망히 그 자리에 부복하며 외쳤다. [사부님의 말씀 목숨을 바쳐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되었다.] 노승 자초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색 포단 뒤에서 봇짐 하나를 꺼내어 구양조운의 앞으로 던졌다. [검군의 출관은 두 달 앞으로 박두했고 구파의 정예 또한 이미 출발했다. 한시 가 급하니 너도 떠나도록 해라.] 만감이 담긴 사부와 제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구양조운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몸은 일으켰다. 그는 노승 자초를 향해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대례를 올렸다. [만수무강하십시오. 사부!] 노승 자초는 빙긋 웃었다. 웃으며 그는 빙글 몸을 돌렸다. [녀석......] 임무가 성공해도 그는 다시는 사문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보는 길인지도 몰랐다. 덜컥! 분신처럼 아껴온 제자의 발걸음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 소리가 아주 들리지 않을 때까지 노승 자초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그날 밤....... 노승 자초는 보광사의 수목과 화초를 돌보았다. 풀잎 하나 꽃잎 하나까지 그는 다듬고 물을 주고 어루만졌다. 달빛이 그의 등 뒤로 내려앉고 있었다. 새벽 여명이 뿌옇게 터올 때까지도 그의 호미질 소리는 계속됐다. 대달마 제 육 장 09/26 21:24 344 line 第 五 章 夜 別 離 [대장, 어디로 간다고?] 거의 허물러져 내릴 듯한 고옥이었다. 한 두 채도 아니고 수십 수백 채나 된다. 좁디 좁은 골목과....... 수십 갈래로 뻗은 그 골목 새로 개딱지처럼 늘어서 붙은 판자집들, 골목은 하나같이 질퍽한 흙탕길이었고, 햇빛을 받지 못한 탓으로 눅눅히 습기찬 담벼락 사이사이에는 앙상한 아이들 이 손가락을 빨며 서 있었다. 장사성 북문로, 일명 악인촌이라고도 한다. 해택받지 못한 자들....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이 더 많은 자들이 습지의 버섯처럼 모여있는 곳 이곳에도 도둑이 있고 사기꾼이 있다. 기생이 있으며 창녀가 있다. 그리고 도솔이라는 법명의 구양조운과 그 일당들이 있었다. 여러명의 소년들이었다. 더러는 앉고 더러는 섰으며 근처의 나무담에다 단검던지기를 하는 녀석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려대는 놈도 있었다. 구양조운은 한 개의 무너진 탁자 위에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소년들을 하나씩 훑고 나갔다. 유석(劉石), 사기꾼이다. 그의 화술이 얼마나 능란한가 하는 것은 악인촌 전체가 다 안다. 그가 한번 입을 열면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사실로 믿어버릴 정 도다. 당천(唐天), 도둑놈이다. 그는 바로 옆에 스쳐 지나는 사람의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는가를 눈깜빡 새에 알 수 있었다. 삼중, 오중의 두꺼운 금고라 해도 그가 마음먹어서 열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는 오십년 전 투도의 제일인자였다가 두 다리가 잘려 버린 공묘의 수제자였 다. 천돈(天豚), 화약 이 세상에 화약과 폭약을 이놈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대 화약제조의 제일인자 였다. 그의 어머니는 폭약매설 제조의 달인이었으며 그의 세형들은 황궁의 화약 기술자였다. 만약,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온 가족이 참수당하거나 유배만 가지 않았어도 그는 지 금쯤 나라의 화약창에 있어야 할 인물이었다. 대종(垈鍾), 상인이다. 그는 악덕 상인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엿 하나를 두 개 세 개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지금의 그는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어 판다. 그 종류는 여인의 머리를 빗는 참빗부터 골동품까지 다양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자본이 없음을 한탄했다. 자본만 있으면 중원제일의 대부호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의 밤낮없는 넋두리 였다. 그러나, 자타가 분명히 공인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교지(嬌芝), 그녀는 기녀였다. 성 안 대춘루의 일급기녀였다. 그녀는 예쁘고 약삭빨랐다. 세상을 오십년 아니라 백 년을 산 능구렁이라해도 한 번 그녀에게 걸리면 녹 아들지 않는 놈팡이가 없었다. 그녀는 악인촌이 낳은 꽃이었다. 그 자태와 교태는 그녀를 장사성 제일의 기녀로 만들었다. 어쨌든, 소년들의 얼굴은 침통했다. 그것은 구양조운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그의 민들민들하던 대머리는 한 개의 영웅건으로 깊숙히 감추어졌다. 일신에는 낡았지만 깨끗한 백색무록을 걸치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길다란 봇짐을 메고 있었다. 그는 먼길을 간다고 했다. [대장.] 목판에다 단검던지기를 하고있던 유석이 시선을 던져왔다.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소년이었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 말해 줄수 없나?] 구양조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매우 먼 곳이야.] [우리도...... 가면 안될까? 그저 대장이 없으면 심심할 거 같아서.] [그건 안돼.] [왜 안된다는 거지?] [그곳은 위험해. 산다는 것도 보장할 수 없어.] [대장은?] [내가 늘 보고 싶었던 넓은 세상이다. 난 그곳으로 가는 것이 즐거워.] 무심히 앉아 잡초를 뜯고 있던 천돈이 퉤 가래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의 뚱뚱한 턱살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길, 혼자 재미보겠다는 수작이지 뭐.] 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당천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래. 이 악인촌은 이제 지겨워. 썩은 냄새, 시뻘건 눈의 어른들 욕지거리와 싸움 따위들...... 나도 그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 구양조운의 시선이 힐끗 대종을 향했다. 그는 체구가 남달리 크고 손 하나가 솥뚜껑만한 위인이었다. [대종 너도 그런가?] 대종은 코웃음을 터뜨리며 볼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사성은 모두 구두쇠요 노랭이만 모였다. 이 따위 조잡한 성에는 조금도 미 련이 없어.]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열망이 가득찬 시선들이 그의 얼굴로 부딪쳐왔다. 구양조운은 오랜 후에야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두고는 씩 웃었다. [좋아. 나도 너희들과 헤어지긴 싫다. 이렇게 하지. 나는 지금 가거니와 너희들 은 이곳에서 일년만 더 있어.] [일년 이라고?] [그래, 일 년 뒤 무창의 황학루에서 만나는 거야.] [황학루?] [너희들이 해야할 근사한 일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 소년들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일 년, 까짓거 사기 몇 번 더치고 물건 몇 번 훔치고 가짜 몇 개 더 팔면 된다. 유석, 당천, 천돈, 대종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웃으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좋아, 대장!] 구양조운은 마주 웃으며 휙 자리에서 뛰어내렸다. [아버지를 만나 봐여겠다. 그럼 일 년 뒤에 보자.] 이때, [잠깐대장!] [왜?] 유석이 신비롭게 웃으며, [교지는 안 만나 볼 거야? 그냥 간다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려 들걸?] 삐꺽...... 싸리문은 열리는데 먼지부터 났다. 구양조운은 검미를 찌푸렸다. [또 굶고 계신 건가?] 그는 손바닥만한 마당 한쪽의 방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탯마루 얼마나 오래 됐는지 누런 똥빛깔에다 너덜너덜 구멍이 뚫린 창호지 새로 그림 자 하나가 어뜻 비쳤다. 십 년 만에 오는 집이었다. 구양조운은 봇짐을 마당에 내려놓고 들고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 속에선 약간의 쌀과 만두, 술병, 그리고 고기가 나왔다. 그는 둘둘 옷소매를 걷어 붙이더니 우물가로 가 쌀과 고기를 씻었다. 이어, 주방으로 들어가 먼지가 한 치는 쌓인 솥을 꺼내 쌀을 얹히고 고기를 구웠다. 고기가 익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주방에는 빈 술병이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뒹굴고 있었다. 구양조운의 얼굴에 씁씁할 웃음이 피어올랐다. [밥도 좀 자시지.... 밤낮 술만 드시는가?] 그는 콧날을 힘주어 문지르고는 서둘러 상을 차려 들고 나왔다. 벌컥! 방문이 열리자 먼저 마른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그리고 한 사람, 봉두난발의 머리가 얼굴에 대부분을 가린 탓으로 그 나이는 제대로 분간할 수 가 없다. 다만 우뚝한 콧날과 수북한 구렛나룻으로 하여 그가 오십줄에 다다른 장년의 사내 임을 짐작케 할 뿐, 허름한 회포(灰布) 앙상한 손가락, 방문을 등지고 정좌한 그는 마치 돌 같았다. 구양조운이 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그는 시선조차 돌려보지 않았다. 방벽에는 무수히 많은 두루마리와 족자들이 걸려 있었다. 그것들은 심지어 천장 구석구석까지 빽빽히 붙여져 있었으므로 조각난 벽지처 럼 보였다. 두루마리나 쪽지에는 하나같이 검식이 그려져 있었다. 사내는 사람과 검이 함께 그려져 있는 그 조잡한 그림에 넋을 뺏기고 있었다. [아버지.] 구양조운의 입에서 나직한 부름이 있었다. 두 번, 세 번의 부름 뒤에도 대답이 없자 구양조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내 의 앞으로 돌아갔다. 순간, 그의 두 눈에 커다란 경악지색이 번뜩 스쳐 지났다. 보라! 사내의 입가에 실낱처럼 가늘게 흘러 맺힌 한 줄기의 핏물을, 구양조운은 다급히 사내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뛴다. 분명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다시 사내의 완맥을 짚었다. 오랜 후에야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너무 굶어 원기가 상했다..... 굶어서 기절이라니... 아버지 답군.] 그는 사내의 등 뒤로 돌아가 앉아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는 진기를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양조운의 이마에 몇줄기 땀방울이 맺혔을 즈음, 문득 사내의 몸에 미미한 파랑이 일었다. 구양조운은 천천히 손을 떼고 물러나 있었다. 등을 돌린 사내의 입에서 모기소리처럼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아냐?] [예, 아버지.] 구양조운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며칠 굶으시더니 입맛도 변하셨나요? 아버지 좋아하시는 돼지고기예요.] 순간, 사내의 눈에 번쩍 빛이 일었다. 그는 미친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아귀처럼 상을 향해 덤벼들었다. 우적우적........ 아작아작........ 밥은 어디로 넘어가고 고기는 어디로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 음식을 집고 입에 넣고 그것을 씹는 세 가지 동작이 범벅이 된 통에 보는 이 의 눈까지 어지럽다. 백패서생(百敗書生) 구양천(歐陽天) 악인촌에선 취노야라고도 불리운다. 삼십년 전 녹슨 철검 하나를 둘러 메고 강호에 나타났던 구레나룻의 미청년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백번 싸워 백 번을 졌다. 그는 무공광이었다. 하지만, 그는 싸울 때마다 졌고 질 때마다 또 싸웠다. 그는 아예 지기 위해 싸우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늘 지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히 여겼다. 이 엉뚱한 사내는 강호의 삼척동자도 아는 최하류의 검법, 삼재검법만을 사용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현 무림의 무예측정단위인 무원검측대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것도, 그따위 하류무공으로는 가히 올려다 볼 수도 없으리만큼 높은 무예의 달인만 을 골라서 싸웠던 것이니...... 이 괴상한 사내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봉술의 명인인 천봉무적 금화 의 천봉보였다. 그곳에 그는 피붙이 하나를 안고 나타났으며 구초만에 패한 후 먼 황야로 피붙이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인물이 되었던 것인데 [쩝쩝, 짭짭.] 문득, 미친 듯이 고기를 쑤셔넣던 백패서생 구양천의 동작이 멈칫했다. 고기를 한 웅큼 쑤셔넣은 탓으로 불투명한 어조로 말했다. [자초 땡중은 무엇을 좀 가르쳐주더냐?]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배웠지요. 양심여의공까지요.] [밑천까지 털었군. 그 대가로 너에게 뭘 시켰겠지?] [예.] [쩝쩝 자초 땡중이 시킨 일이라면 말리진 않겠다.] 구양조운이 말했다. [아버지의 삼재검법은 진전이 좀 있나요?] 순간, 꿀꺽꿀꺽 술을 들이켜 가던 구양천의 행동이 뚝 멈춰졌다.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허무의 여울이 깊게 패인 웃음이 그 뒤를 이었다. (인세최고의 검법..... 무지한 속세인들이 하류라 칭하는 신비무쌍의 검법.... 그 하나를 위해 나는 여인도 삶도 버렸노니........) 허나, 그러한 감상의 기분은 언제 나타났느냐는 듯 눈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구양천 은 이내 본래의 돌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네 나이 올해 몇 살이냐?] [십 칠 세지요.] [열 일곱이라.... 벌써 그렇게 되었군. 나는 네 어미에게 네가 십 팔 세되는 해 에 너를 그녀에게 보내기로 약속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구양천의 시선이 힐끗 구양조운을 향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으냐?] [조금.] [너는 그녀를 닮았다.] 무심한 어조였다. 그리고 짤막한 한 마디였다.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다시 뒤를 이었다. [너에게 줄 것이 있으니 일 년 뒤에 다시 오도록 해라. 나에게 들렀다가 그녀 에게 가라.] 탕, 빈 술병이 탁자에 놓였다. 구양천은 빙글 몸을 돌리더니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참으로 괴이한 부자가 아닌가? 아들은 십 년 만에 집을 왔는데 밥 한끼 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무언의 축객령을 내리고 있다. 허나, 구양조운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밥상을 들고 나왔다. 말끔히 설거지를 하고 집 안팎을 문지르고 닦기 두 시진 쯤 걸렸을까? 내려 놓았던 봇짐을 등에 멘 구양조운은 방 안의 구양천을 향해 큰 절을 올리 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때 구양천은 여전히 아들을 등지고 있었다. 허나, 자세히 보자면 그가 두주먹을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벅...... 저벅......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마당을 지나..... 삐꺽...... 싸리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앉은 채로 맹렬히 몸을 돌렸다. 아들의 건장한 뒷모습이 힐끗 보였다. 일순, 겉잡을 수 없는 기침이 그의 목구멍을 타넘어 왔다. [욱....... 쿨룩!] 아들이 들을세라 다급히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손가락 세로 섬연한 핏물이 번져 올랐다. 아들의 몸이 멈칫했다. 하나, 그는 그대로 걸음을 이어 느리하게 사라져갔다. 아들의 어깨 위로 달빛이 번지고 있었다. [쿨룩....... 쿨룩........] 구양천은 참았던 기침을 봇물처럼 토해내며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잡았다. (녀석도... 나를 진맥한 후 몹쓸 병임을 알았을 게다..... 이미 고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도.... 녀석은 굶어서 의식을 잃었다고 미리 일부러 중얼거렸을 것 이다.) 구양천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 컸구나.... 놈! 그녀가 보면 얼마나 기뻐할까.....] 구양천은 휘청 문턱을 짚고 섰다. 은가루 같은 달빛이 희끗희끗 백발이 보이는 그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려왔 다. [일 년뒤.... 네게 인세최고의 검법을 주마.... 헛허.... 내 허무한 삶을 모조리 쏟아부은 그 몹쓸 검법을...... 네게 주마......] 구양조운은 언뜻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차례 긴 심호흡을 했다. 연후, 그는 성큼성큼 악인촌의 긴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장사성은 강남의 대도답게 늦은 시간인데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구양조운이 막 대도로 나섰을 때 그를 알아본 사람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도솔이다!] 순간, 거리엔 가벼운 소동이 일었다. 황급히 문을 걸어 잠그는 주루며 보따리를 싸는 행상에 달음박치듯 몸을 숨기 는 한량들로 어수선해졌다.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도솔은 갑니다! 도솔은 이 성을 떠나오!]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빼꼼히 내밀어졌다. [저게 무슨 말일까?] [저 거짓말이 정말일까?] 구양조운은 더욱 밝게 웃으며 외쳤다. [내가 가는 것이 여러분은 싫소? 박수를 치시오. 만약 이 말이 끝날 때까지도 박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성에 남도록 하겠소!] 순간 요란한 박수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도솔을 웃었다. 웃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역사를 통틀어 바깥으로 나가는 입신청년이 이렇듯 큰 환송을 받은 예가 어 디있으랴? 구양조운아 조운, 너는 이 박수를 너에게 거는 기대로 생각해야 될 것이다.] 하나의 창백하고 흰 얼굴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온 것은 바로 그 때, 짙은 화장이긴 했으나 일견하기에도 그 미모가 유향처럼 빛나는 소녀, 얼마나 급했던지 발은 아예 맨발이다. 그리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두 눈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눈물이 그렁그 렁한 이 소녀는 교지였다. 대달마 제 칠 장 09/29 07:40 407 line 第 七 章 悲 戀 風 달빛아래........ 계집아이는 쿨럭쿨럭 울고 있었다. 토담벽의 엷은 온기는 그곳에 기대앉은 계집아이를 겨울의 시린 한기로부터 따뜻하게 해 주지 못했다. 계집아이가 기댄 벽 안에선 그녀의 엄마가 헤픈 웃음을 흘리며 사내들에게 술 을 따르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기가 졌다. 손가락에 소금을 찍어 함아보고 우물의 얼음을 깨서 몇 사발이고 냉수를 들이 켜 봤지만 고픈 배는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를 찾아온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낯선 남자들의 입에 넣어주는 육편 조각을 보고 침을 삼킨 게 무슨 죄란 말인 가? 그녀의 엄마는 계집아이를 사람들 앞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때렸다. 콧등에 개기름이 자르르한 사내들은 박수를 치며 웃고 그 중, 한 사내가 음흉하게 웃더니 계집의 엄마에게 커다란 은덩이 하나를 던져주고 는 계집을 옆 방으로 끌고 갔다. 방문이 닫힐 때 계집아이는 그 엄마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 주대인이 수고해 주신다면 그래도 조것이 살집 하나는 실팍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계집아이는 이제 겨우 민숭민숭하던 젖가슴이 조금씩 도도라지고 판판한 엉덩 이가 막 벌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내의 손이 치마를 끌어내리는 순간은 뱀이 스치듯 소름이 끼쳤다. 계집의 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아랫도리가 빠개지는 듯한 지옥 같은 고통이 그 뒤를 이었다. 아아.... 엄마의 웃음과 사내들의 기름때 낀 얼굴.... 냄새나는 벽지.... 피로 얼룩지던 아랫도리...... 계집아이는 기다시피 그 저주스런 현장을 울며 빠져나왔다. 지금도 방 안에선 사내들의 웃음이 뒤엉켜 들려 나오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비수를 꺼내 들었다. 달빛 아래 비수는 소름끼치는 청록빛을 번뜩였다. [밉다. 엄마........ 미워..........] 그 비수가 막 그녀의 목을 찔러갈 때! 느닷없이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계집아이의 팔을 쳐 칼을 떨어뜨렸다. 그 희고 가는 손가락 끝에는 평소 골목의 대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조운이 서 있었다. 늘 웃던 그가 냉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죽을테면 죽어.] 그가 비수를 주어들고 계집아이를 겨누었다. [이 골목 안엔 슬픈일들이 많다. 너보다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많아. 그래도 다 살아. 함부로 죽는다는 것은 비겁한 짓이야.] 달빛이 은가루처럼 부숴지던 그 얼굴은 얼마나 눈부셨던가.....? 그 뒤로 조운은 계집아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골목 안의 어떤 아이도 계집아이를 건드릴 수 없었다. 장사성의 건달들이 계집아이를 건드렸을 때, 몇 명이나 되는 그들의 속으로 홀로 뛰어들어 묵사발이 되도록 조운이 얻어 터졌을때, 계집아이는 피범벅이 된 조운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지 마! 죽지 마, 조운! 난 네 색시가 될테야!] 계집아이는 기녀가 되었고 조운은 산사의 중이 되었지만 오랫 동안 계집아이는 악인촌의 꽃으로 조운은 악인촌의 왕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투자한 세월만큼 서로를 사랑했다. 귀래하의 물결에도 달빛은 은빛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먹어, 너 주려고 감췄던 술이야. 금릉의 금존청이래.] 가슴에 안겨온 여체는 참새처럼 할딱이고 있었다. 벗은 상체로 강남 이월의 후덥지근한 습풍이 몰려왔다. 누운 채 천천히 독한 금존청을 한모금 넘긴 구양조운은 품에 안긴 교지를 내 려다 보았다. 독했지만 술은 향기로왔다. 교지도 향기롭다. 그녀는 숨죽야 울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양손으로 그녀의 턱을 받쳐 들었다. [울지 마.] 눈물이 은가루처럼 반짝이는 눈 자위에는 쓴 웃음이 감돌았다. [네가 날 이렇게 길들여 놓구선.] [그래서 앙탈이라는 거야?] 교지의 몸이 구양조운을 덮치듯 눌러왔다. 가슴패기를 멍들도록 꼬집던 구양조운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앗!] [흥! 아픈 줄도 아내? 남 마음 아픈 줄도 모르고 멋대로 떠나겠다고 결정한 주제에.] 그녀가 그의 입을 깨물었다. 너무 크게 벌려서 콧등까지 삼켜 버렸다. 혓바닥이 마구 입가를 어지럽혔다. 침이 섞이고 꽃입을 깨무는 새콤함이 감돌았다. 어둠 속에서 사그락사그락 옷이 맨 살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교지는 가벼운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상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련만 얘 앞에선 늘 부끄럽다. [어마 귀뚜라미가 우는가 봐.] [이렇게 큰 귀뚜라미를 봤어?] [못된 귀뚜라미야.] 구양조운의 몸이 조용히 교지를 눌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배에 와닿는 차가운 손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언뜻 배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물기 젖은 공기 속을 날아다니는 꽃가루 냄새 교지는 현기증을 느끼며 구양조운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여자의 그곳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양손으로 교지의 가슴을 손바닥 가득 담은 구양조운의 피가 아래로 몰렸다. 모세혈관이 터질듯 부풀었다. 그의 가슴에 교지의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해파리처럼 번졌다. 그녀의 깊은 곳으로 그가 들어섰다. 구양조운은 거대한 문어를 연상했다. 사람 하나의 몸뚱이기보다 더 큰 다리가 흐느적거리며 덮쳐왔다. 한 번 흡반에 밀착된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고 온몸의 피가 몽땅 빨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으음......] 한 소리 신음소리와 함께 내부에 뿌듯이 고이는 구양조운의 액체를 느꼈다. [가져가.] 한 개의 옥패였다. 정 중앙에 정교하게 새겨진 쌍학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귀래하에서 자란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귀래하로 돌아온데. 그 패를 보고 늘 날 생각해.] [술과 바꿔지지 않는다면.] [핏!] 사그락사그락..... 숲에서 귀뚜라미소리가 요란했다. [북쪽은 추울거야.] [그렇겠지. 이월이니까.] [일년은 너무 길어.] [금방이야. 일 년 후 황학루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옥지화가 피어있을 거다. 가 야겠어.] 구양조운은 번뜩 몸을 일으켰다. 신비롭게 빛나는 여체가 눈 아래 누워 있었다. 그는 매우 빠르게 옷을 입었고 매우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잘있어.] 어둠속에서 구양조운은 말했다. [아버지를 부탁해.] 여자가 몸을 일으키는 기색이 느껴졌다. 구양조운은 걸음을 빨리했다. [조운!] 부르지 마라, 지(芝). [조---운!] 떠돌이 무사 아버지를 따라 나이 한 살에 악인촌으로 들어와..... 칠 세에 불가에 몸을 담아 그것을 나의 업보로 여겼더니..... 열 일곱의 나이로 드넓은 세상을 나가게 되었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십칠 년..... 한 소리 낭랑한 낭송이 어두운 야공에 울려 퍼졌다. 꽃 아래 한독 술을 놓고, 홀로 앉아서 마시노라. 잔들자 이윽고 달이 떠올라, 그림자 따라 두 사람일세. 달이 술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만 나를 따라 다녀도, 달과 그림자를 데불고서, 함께 즐기는 이 기쁨이여, 내 노래하면 달도 거니는 듯, 내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르라. 깨이면 함께 즐기되, 취하면 모두 흔적이 없어, 길이 이 情을 서로 맺아, 오는 날 銀河에서 또 만나리....... -------먼저 소림본사로 가라. 남령 대장문방장을 만나 뵈오면 별도 지시가 있을 것이다. 일천여 개의 고루불각들은 태고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불문성지 대소림을 오는 사람은 세가지에 놀라게 된다. 그 첫번째는, 천여의 수효를 헤아리는 불각들이 절경의 요소요소를 차지한 절묘한 모양이 오, 그 둘째는, 오대에 걸쳐 불가수양을 닦아가는 방대한 승려의 수다. 그 셋째는, 불가나 불문에 관한 것은 단 하나의 빠짐도 없이 모아진 것같은 어마어마한 경전이니........ <장경각> 이 하나의 푯말이 보일 때부터 구양조운의 가슴은 벌써 두근거리고 있었다. 불가에 인연을 맺은 이 치고..... 칠십이종의 소림비종무예와 일만의 장서가 비장되어 있다는 이 장경각을 바라 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안으로 드십시오.] 본래 구양조운을 아는 사람은 본사 내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거기다가 이제 정식으로 파문된 처지...... 모든일은 매우 은밀히 진행됐다. 삼대제자라곤 하나 나이가 사십도 족히 되어 보이는 중년승인의 합장을 받으 며 구양조운은 성큼 새벽여명이 일렁이는 장경각의 재단을 딛었다. (시주란 말은 역시 어색하군.....) 장경각은 너비 약 이백여 장의 대전이 삼층으로 쌓아진 거대한 불각이었다. 열 여덟 개의 행각계단을 오르면 본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예비관문이란 하나 의 긴 보도의 문과 마주하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복도의 양벽 속에는 장님스님들이 수십명이나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안으로 들어서는 자의 걸음소리, 옷자락 휘젓는 소리, 숨소리 등을 듣고 그가 불문의 제자인지 아닌지를판별하게 되며, 아니라는 판정이 내려지게 되면 그 즉시 수십개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기관이 발동하게 된다고 했다. 지금도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두 명의 흑의승려들이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며 구양조운은 짐짓 엄숙한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이어, 걸음걸이 또한 벌레를 죽이지 않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불가 특유의 후약보로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복도는 아득할 정도로 길었다. 바닥은 향나무 판자로 되어 있었으며 양쪽의 벽엔 스님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 속에장님스님들이 있는가 싶어 벽을 향해 열심히 한쪽 눈을 찡긋거리던 구양조운은 그 그림이 호형십팔권과 비슷한 용호표사학의 소림오비권임을 이내 알아냈다. 이 소림오비권은 달마가 창안한 소림의 가장 기초적인 무예였다. 누구나 입문하는 즉시 배우는 초보무예였다. 허나,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그것이 지금은 마치 무궁한 현기가 담긴 비학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과연........ 과연........) 장경각에 있는 것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한낱 소림오비권이 이럴진대 그 위의 무수한 기진현학들은 두말하여 무엇하 랴? 복도가 막 구부러지고 있었다. 무심히 구부러지는 곳으로 몸을 돌려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돌연, 윙, 구양조운은 한 소리 맹렬한 파공음이 귓전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기관이 발동했나? 제기랄! 내가 술이나 마시는 땡중이었음을 장님스님들이 알아 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급류용퇴! 마치, 물이 밀려나듯 주욱 뒤로 물러난 구양조운의 시선 속으로 세 인영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장님도 아니었고 기관도 아니었다. 다만, 벌거벗은 웃통이며 그 가슴에새겨진 용의 문신이 눈을 어지럽혀 왔다. 그들은 각기 제도, 방편산, 비발을 든 세명의 승려였다. (상좌삼승.......?) 들은 적이 있다. 장경각은 소림의 하나의 특수조직이며 문파의 원로인 각주 아래 상좌삼승,팔 대금강승 십팔나한불의 막강한 수비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비로울 정도로 높은 무예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상좌삼승은 당시 각내에 거주하고 최소한 칠종 이상의 기예를 익히고 있 다고 했다. [나는......] 구양조운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헌데 이때, 상좌삼승은 무쇠같은 표정을 한 채 말없이 그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 오는 것 이 아닌가? 휙휙! 슈파악! [내 말을 들어 보라니깐!] 공격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찌익...... 불과 삼초도 지나기 전에 구양조운의 옷소매 하나가 찝겨져 나갔다. 이렇게 되자 구양조운은 바짝 오기가 치밀었다. (내놈들이 상좌면 상좌지, 이 따위로 사람을 취급하냐?) 순간, 그의 몸이 갑자기 유령처럼 빨라졌다. 전후좌우, 상하팔방 그의 신형이 뿌연호선을 남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좌수가 갈구리처럼 구부러지더니 상좌삼승 중 가장 좌측의 용비승을 찍 어갔다. [재룡십팔해?] 용비승은 한 소리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뒤로 굽힘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비발을 맹렬히 쳐냈다. 휘잉! 비발이 쏘아오는 속도는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거기다가 또 어지러운 회전으로 커다란 곡선까지 그리고 있었다. 하나 순간, 왼발 등으로 오른발 등을 찍은 구양조운은 날렵하게 몸을 솟구치더니 비발의 뒤에 사쁜 내려섰다. 섰다 싶은 순간 그는 그것을 좌우의 용화 용제 두 승려에게 차보내며 한편으론, 맹렬히 몸을 날려 용비승을 거듭 덮쳐갔다. 그의 손끝으로부터 기이한 변화가 피어 올랐다. [신공탐주!] [과룡입산!] [화룡도인!] 찍고 거두고 휘돌리는 동작! 이는 바로 소림의 절예 중에서도 극히 익히기 까다롭다는 제룡십팔해가 아닌 가! 용비승은 크게 놀란 빛으로 황급히 몸의 위치를 열 다섯 번이나 바꾸고서야 간신히 구양조운의 공세를 피해낼 수 있었다. 허나, 이때는 이미 구양조운은 그들의 머리를 넘어 저만큼 몸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이때다. [아미타불.....] 한 소리 장중한 불호와 더불어 어둡던 주위가 환해졌다. 복도는 이제 끝이 난 것 같았다. 수십 개의 야광주가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는 가운데 정면에는 붉은 글씨로 불(佛)자가 새겨진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고, 한 개의 김이 무럭무럭 나는 화로를 앞에 놓고 두 명의 노승이 자두색 포단 위에 장중하게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구양조운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아미타불....... 불영선하보에 능공상천제와 제룡십팔해 모두가 훌륭하다.] [과연 자초사형의 진전인다운 임기응변이었으니.....] 좌측의 노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조운 만나서 반갑구나!] 황색법의에 홍색의 가사, 이와 같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 노승은 바로 십만불자의 태두이며 소림제이십육대방장인 남령대상인이었다. 그 옆의 노승은 장경각주 회양상인이었다. 구양조운은 남령상인을 일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삼가 제자 구양조운이 장문인을 뵈옵니다.] [예의는 거두라.] 남령대상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우수를 쳐들었다. 순간, 한 줄기 무형의 기운이 솟아 나와 무릎을 꿇으려는 구양조운의 몸을 받쳤다. 구양조운은 아무리 힘을줘도 더 이상 무릎을 꿇을 수가 없자 감격을 금치 못 하며 다시 몸을 폈다. 바로 이때 남령대상인은 또한 내심 몹시 놀라고 있었다. 그는 처음엔 가볍게 육성의 공력을 펴서 구양조운을 받쳤다. 헌데, 갑자기 한 줄기 놀라운 반탄지력이 솟아나자 황망히 팔성으로 공력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양심여의공의 여력인가? 과연 놀랍구나. 나이 십칠세에 이런 성취를 이루었 으니 이후의 진전이야 두말하여 무엇할꼬......?) 남령대상인의 인자한 시선이 구양조운의 준수한 얼굴을 향했다. [상좌삼승과 단신으로 겨루어 이겨낼 수 있는 자는 소림을 통틀어 봐도 열 손 가락에 꼽힐지경인 것... 아미타불... 조운아, 네가 소림의 후기지수로 선택되었 던 까닭을 아느냐?] 구양조운은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삼십 년 전, 자초는 정파 최초로 검군에 도전을 하셨더니 라. 그곳에서 그는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양심여의공을 선보이게 되었다.] [..........] [일반적으로 무림에는 환영술이라 하여 두개 세개의 그림자로 나뉘어지는 술 법이 있으되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에 불과할 뿐 힘은 낼 수 없 는 것.....] [.........] [거기에 비해 양심여의공은 두 개의 환영과 실체가 똑같은 힘을 낼 수 있는 일원이체의 신비지공이니 우리는 양심여의공이 검군의 위에 실로 합당함을 믿 어 의심치 않았다.] 구양조운이 검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사부께선 왜 중도에 시무를 중단하셨읍니까?] [아미타불.......] [자초사형은 도중에 양심여의공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결함을 발견하셨던 것 이다. 일반적으로 신공이 팔성의 수위를 넘게 되면 몸의 혈관이 진동하게 된다. 양심여의공은 그런 현상이 특히 심하여 팔성으로 한시진 이상 시전하게 되면 혈관이 진동을 못 이겨 터지게 되는 것이다.] 구양조운의 얼굴에 서늘한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났다. [그런 일이......] [자초 사형은 그 일로 몹시 고전을 하셨다. 그는 사파의 눈을 피하기 위해 파 계승의 행색을 취하며 한편으론 꾸준히 신공의 결함을 보완하시었다....] 자초는 오랫 동안 양심여의공의 결점을 보완할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혈관이 진기에 의해 진동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팔성이상의 공력으로 오랫동안 싸우게 되면 힘이 탈진되고 운기조식으로 피로 를 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양심여의공은 실낱처럼 미세한 모세혈관까지 진기를 불어넣어 몸의 잠재력을 격발시키는 신공이었으므로 그러한 현실이 더욱 심했다. 약초나 영약, 기타 그 어떤 기진이보로도 모세혈관을 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자초는 서책을 뒤적이다가 한 가지 위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육양산맥(六陽散脈). 기이한 하나의 혈맥. 인간은 삼백육십의 대맥과 수십만에 달하는 세맥으로 그 피를 운행한다. 헌데, 백만 인 중에 한 명 꼴로 육양산맥이란 특별한 체질을 타고 나는 사람이 있 다. 그것은 말하자면 주맥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체질의 사람은 멀리 뛰어도 놀라지 않고 숨을 참고도 물 속에서 오래 견딜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다!] 양심여의공에 있어 주맥이 하나 더 있어 준다는 것은 검객이 칼없이 싸우다가 칼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었다. 자초는 극히 은밀히 사람을 풀어 천하에서 육양산맥의 체질을 지닌 사람을 찾 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칠 년 뒤--- 드디어, 자초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전인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양조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칠 세 때--- 느닷없이 집을 찾아 왔던 거대한 노승 하나, 그는 아버지와 내리 이레 동안 술을 마셨고 그리고 자신은 노승의 팔을 잡고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니... [결국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남령대상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소림이 너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너는 양심여의공을 이미 팔성이나 수련하였 고 좋은 인연을 만난다면 자초사형을 능가하는 성취를 보일 수 있을 것이기 때 문이다. 조운, 너는 비단 사파교란의 정예로 선발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검군과 함께 이 무림을 영도해 가는 대들보가 되어야 한다. 비록 형식상 문파에서 제 명은 하셨지만 그 모든 것은 무림의 흥복이요, 소림의 자랑이라 할 것이니.....] 돌연, 그그긍...... 두 노승의 뒤에 있던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소림은 천 년 래로 비장되어 있던 달마의 비전을 너에게 개방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보름동안 너는 이 안의 모든 책을 마음껏 보고 연구하는 한편 장경각 삼층의 무고에서 마음에 드는 무기 하나를 고르도록 하라!] 대달마 제 팔 장 09/30 23:38 318 line 第 八 章 素 手 藝 쿵 ! 문이 닫혔다. 구양 조운은 주춤 장경각 안으로 한 발을 디뎠다. 퀘퀘한 책 냄새가 콧털을 간지럽혀 왔다. 주위는 사람 키 두배만한 높이의 서고가 수 백개가 빽빽이 들어찬 거대한 공 간 이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를 보아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아 아.............. 천하 불경의 성지요, 요람인 대장경각! 서고 사이사이의 회랑에는 오 보 간격으로 유등이 밝혀져 있었다. 장경각의 일층과 이층은 불경이나 기타 경전을 소장하는 곳이라 했다. 무예에 관한 것은 삼층에 있었다. 삐거덕....... 삐걱...... 천년의 신비처럼 계단은 낡고 소리가 났다. 이층에 이어 삼층 티끌 하나없이 거울처럼 매끄러운 삼층의 나무바닥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왔 다. 삼층의 서가들은 모두 주홍의 단청이 입혀져 있었다. 구양조운은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가장 가까운 서가로 다가섰 다. <대반야현진 기일.> <명옥대불수> <미륵삼천해> 그 어느 것을 봐도 심장이 쾅쾅 소리내어 뛸 마큼 기묘한 기공현학들이었다. 구양조운은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가와 서가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만 했다. 이렇게 말로만 듣던 기공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자신이 천하제일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말고 그는 주춤 몸을 세우고는 무엇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곳..... 소림칠십이비종 외에도 불문제열의 기예들이 최소한 삼사백 종이 있는곳이다. 그 하나하나의 기예는 말할것도 없이 심오박대하고 현측난해하여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이십 종을 채 다 못 익히게 되는 것, 백 년의 세월을 투자해도 그럴진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보름이 아닌 가? [선별해서 보아야겠군..... 우왕좌왕하다간 아무것도 못하고 말 것이다.] 그는 우선 역근과 세수 이경을 갖다 놓았다. 이 두 종의 비급은 양심여의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므로 꼭 봐 둘 필요가 있 었다. 이어, 자신이 가장 즐겨쓰는 금나수법인 제룡십팔해의 비급과, 금나수법의 다른 종류들인 미륵삼천해와 옥류금나절을 모으고 다시, 불영선하보와 탄지비행, 능공상허 등의 경공에 대한 비급을 모아들였다. 연후, 탄지신통, 광한지, 미공십팔류의 지법을 한데 모으니... 이것들만 해도 근 이십여 종에 달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무예를 보면 그의 취향을 알 수 있다. 구양조운은 어려서부터 금나수, 지법, 경공등에 흥미를 느꼈다. 장법이나 권법, 각법도 그런대로 좋았지만 양심여의공의 십사결안에 유사한 묘용이 있으므로 크게 매력을 못 느꼈다. 특히, 구양조운은 검도창 류의 무기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검 일도에 삶을 걸고 보내온 불우한 일생에 대한 무의식 적인 반항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삼층의 한 구석에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것인지 모판위에 심겨진 황경고 석균 이 있었다. 그것들은 몇개만 따 먹어도 충분히 허기를 메꿀 수 있었다. 구양조운은 침식을 잊고 비급에 몰두했다. 그는 본래 무예를 매우 좋아했다. 산에 가서 놀거나 성내를 들어가거나 그 무엇을 하는 것보다도 무예가 더 좋 고 재미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노승 자초를 따라 보광사에 들어온 지 일 년쯤 지난 나이 여덟 살 때부터였다. 노승 자초는 매일 밤 자정에만 그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밤새, 혼자 무예를 연마하고 낮에는 사형들 틈에 끼어 멍청이짓을 했다. 그것은 사부의 엄명이기도 했으려니와 이미 배운 무예를 낮에 또 배운다는 것 은 이를 데 없이 지루한 일이었으므로 구양조운은 자의로도 멍청이짓을 했던 것이다. 구양조운의 진도는 노승 자초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그는 한 마디로 무예를 배우기 위해 탄생한 아이였다. 선천적인 무골인 육양산맥에다가 그의 아버지는 어린 구양조운을 아예 약초로 키우다시피 했다. 그는 밥은 굶어도 약초는 사다가 어린 구양조운을 먹이고 씻겼으므로 후천적 인 무예의 기반까지 닦아졌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바탕에다 자초의 해박한 지식이 곁들여진 무예의 기초를 가진 구양조 운은 가히 놀랄만한 속도로 비급을 독파해 나갔다. 역근경과 세수경 이것은 모든 내공무예의 기초를 이루는 비급이었다. 달마무예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심여의공은 이 역근, 세수를 바탕으로 열 네 개의 구결로 나누어져 있는 것, 밀고, 깨고, 자르고, 튀고, 꺽고, 치고, 부수고, 흐트리고, 빨아들이고, 퉁겨내고, 부드럽고, 강하고, 흔들고, 휘돌리는 십사결. 양심여의공의 첫단계가 바로 이 내공과 초식의 무궁무진한 조화인 여의십사식 에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마음을 두 개로 나누는 양심의형이며, 세 번째 단계는 마음이 일면 몸도 따라 이는 수미반륵정령기 이다. 이 세번째 수미반륵정령기는 십성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 간신히 펼칠 수 있는 것, ---- 역근, 세수의 최고근간은 마음에 있다. 마음이 일면 법도 따라 일고, 마음이 죽으면 법도 따라 죽는 것이 최대내공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구양조운의 양심여의공은 팔성 정도의 경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 위로는 아무리 수련해도 진도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기분이 들긴 했어도 궁극적인 깨달음은 없었 다. 역근, 세수의 두 진경과, 대반야현공, 금강대승신공, 범천만불등을 모조리 외워두는 것으로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시간은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열흘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구양조운은 내공, 금나수법, 경공, 지법을 거의 다 외워 넘기고 있었다. 그는 제룡십팔해가 현묘하긴 하나 투박한 것에 초점을 두고, 대신, 부드러운 미륵삼천해와 옥류금나절을 사이사이에 가미시켜 강유의 조화를 이 루는새로운 금나수법을 탄생시켰다. 이름 또한 금룡십팔해로 바꾸었다. 경공과 지법 방면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특히, 전래되어 오던 탄지신통에다, 백 장 밖에서도 상대를 맞출수 있는 미공십팔류를 융합시켜 파괴력과 거리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지법을 만들어 낸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 었다. 이름은 그대로 미공십팔류로 두었으며, 만약, 소림의 승려 중 누구든 지금 이 자리에 와 구양조운의 성취를 목도한다면 거 품을 물고 실신이라도 할 것이다. 하나, 구양조운은 여전히 만족치 못한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실내를 거닐기 시작했다. 많은 비급들이 시선속으로 쏘아왔다. 이때, 구양조운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뚝 멈춰졌다. 푯말, 하나의 푯말, < 방문외도비급지처, 사파마도에는 크게 다섯 부류의 흐름이 있다. 그 첫째는 마류로써 지옥지공의 흐름이 있고, 그 둘째는 사류로써 혈마지공의 흐름이다. 그 셋째는 패류로써 철혈지공의 흐름이 있으며, 그 넷째는 방류로써 귀원지공의 흐름이다. 그 다섯째는 유류로써 소수지공의 흐름이 있으니.... 이곳에 유류의 소수무예를 진열함은 참고로 삼아 마도와 대항할 때 유용하 라는 뜻이다. 제삼대방장 요료. > 방문외도의 오 개 흐름, 푯말의 아래에는, ---소수산공, ---소수지, ---유향미리보, 의 세개 비급이 꽂혀 있었다. 구양조운은 언뜻 이번에 검후의 위에 오른 사선녀 경설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떤 흐름의 인물일까? 사파의 공동전인이니 어쩌면 오 개 흐름을 일신에 모조리 지니고 있을지도 몰 랐다. 하나, 구양조운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유한 흐름은 절대로 외부에 전달되지 않는다. 그 중, 하나인 소수지공이 이곳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선녀 경설은 한 개 흐름이 수뇌일 것이다. 그녀는 그 흐름을 고도로 발전시켜 나머지 흐름을 모두 휘하로 거느리고 그 영수로 추대된 것일 게다. 그렇다면.........? [이것을 익혀두는 것은 나중에 그녀를 상대함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좋 아, 마침 시간이 남았던 참이다.] 그는 즉시 소수지공의 세 권 비급을 빼들었다. 손, 왼손, 어둠을 가르고 솟아오른 은어처럼 희고 가늘다. 아니,기이할 정도로 창백했다. 파파파팟! 단지 뻗어졌을 뿐이련만 주위의 공기는 무섭게 파동하고 있었다. 파팍! 돌연, 한 권의 책이 먼지처럼 부숴져 나갔다. 그 먼지 또한 휘말리듯 사라졌다. 창백한 손의 중지와 식지가 쭉 펴졌다. 순간, 아무 소리도 없이...... 한 줄기 흰선이 쭈욱 공간을 뻗어나갔다. 그 선은 십 장 밖의 청석에 화살이 꽂히듯 푹 꽂혔다. 실낱 같은 구멍이 청석에 생겼다. 다음 순간, 퍽! 하고 청석은 먼지 날리듯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굉장하군.]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공력을 거두었다. 소수산공을 거두자 즉시 그의 손은 본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왼손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손..... 너는 이제 소수의 것이다. 앞으로의 너는 마요, 사라 불리지 않을 것이 다. 어디까지나 선한 이름으로 칭송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준 다...] 소수지공, 정파와 사파의 무예는 그 진기운행이 틀리다. 비단, 진기운행이 아니라 전개순서까지 판이하게 다른 계열의 무예를 사 일 안에 속 성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대답은 조각난 책과 청석이 대신해 주고 있었다. 소수유혼이라고도 한다. 돌풍처럼 무림에 나타나 정파로부터는 경의를, 사파로부터는 선망을 받는 무 서운 괴객, 소수지겁이라고도 불리는 무림사의 한 전기가 소림중지 장경각의 한 귀퉁이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일이 아닌가? 하나 아직은 먼 뒷날의 얘기........... 정면의 통풍구로부터 한 줄기 흐린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뿌연 먼지가 빛 속을 둥둥 떠다녔다. 십 사 일째 아침이었다. 구양조운은 빛살이 기둥처럼 팔을 뻗친 마루를 지나 구석쪽으로 걸어갔다. 붉은 띠가 가로놓인 너비 오 장여의 평상이 하나 보였다. 그 위에는 일견해 보기에도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들이 놓여 있었 다. 검(劍), 도(刀), 창(槍), 부(斧), 편(鞭) 등의 십팔반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선(扇), 사(梭), 필(筆), 종(鐘), 패(佩) 등의 외문무기들도 있었다. 구양조운의 시선이 언뜻 반야선이란 푯말이 쓰인 한 개의 부채에서 멈추어졌 다. 불가에선 부채를 쓰지 않는다. 부채나 우산따위는 속세에서나 쓰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이 부채는 묘한 감응을 불러 일으켰다. 부채의 살은 투명한 백옥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안개가 한 겹 둘린 듯한 옥기 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부채를 집어들었다. 쫘악! 부채가 펴지자 한 줄기 그윽한 단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구름을 타고 등좌한 등운석존의 모습이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 면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고 늘어나기만 하는 특수한 지질이었다. 구양조운은 이 반야선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부채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이때, 어디를 어떻게 만졌던지 돌연 부채에 미미한 진동이 일었다. 순간, 슈팍! 팍! 팍! 구양조운의 시선 속으로 건너편 벽에 사 꽂히는 열 두 개의 옥 살이 보였다. 바로 부채의 살이었다. 헌데, 도대체 언제 그곳까지 날아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가공할 빠름, 시전한 자가 그 빠름을 모르니 상대는 오죽하랴? 구양조운은 걸어가 옥살을 다시 뽑았다. 그것을 본래의 자리에 끼어 맞추고는 부채의 아랫부분에 있는 돌출구를 다시 눌러 보았다. 슈팍! 파파팍!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도 그것이 어떻게 솟구쳐 나갔는지는 여전히 보지 못했다. [놀랍도록 빠르군. 지척에서 공격한다면 아무도 피해낼 수 없을 것이다....] 구양조운은 반야선에 대해 지대한 흥미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 하루를 이 괴상한 무기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는 이내 여러가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부채의 살은 모두 스물 네 개였다. 아래 돌출부의 조작여부에 따라 살은 하나부터 스물 네개까지, 즉, 하나를 쏠 수도 있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쏠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부채에 공력을 주입시켜면 허공에 뿌연 등운석존의 환영이 나타나곤 했다. 공력을 높일 수록 석존의 환영은 더 많아졌으며, 구양조운의 지금 공력으로는 최고 열 두 개까지 환영을 표출시킬수 있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반야선의 옥살에 강력한 탄기가 있어서 구부릴 수도 있었으며, 그것을 앞당기도록 구부리면 찰칵 소리와 함께 손목에 채이는 옥환으로도 변 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진기하고 보배로운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구양조운은 즉시 양심여의공의 여의십사식을 반야선에 융합시키는 연습으로 들어갔다. 열 세 개의 구결 모두 가능했다. 또한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를 들어, 여의십사식의 흡자결을 반야선으로 펼치면, 열 두 개의 등운석존이 영롱하게 피어올라 일제히 두 손을 끌어들이는 모양이 되는 식이었다. 슈파악! 파악! 다시...... 열 날흘째의 날이 저물고, 드디어, 약정한 십 오 일째의 날이 밝았다. 구양조운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타오는 햇살에 번쩍 눈을 떴다. 통풍구로 소림사의 부분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새벽 무예수련에 임하는 승려들의 머리 위에도 햇살이 퉁겨 오르 고 있었다. 거대한 전각과 누각 등을 묵묵히 바라보던 구양조운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 다.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천천히 밖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돌연, 파파팟! 휘리링....... 한 소리 기이한 음향과 더불어 느닷없이 장경각 삼층의 바닥으로 뽀얀 운무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몽롱한 인연 한 줄기가 나타났다. < 一券 끝> 대달마 제 구 장 10/01 21:49 412 line 第 九 章 總師 白佳露 처음엔 보이지 않았다. 하나, 이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본 순간 구양조운은 크게 놀란 빛을 떠올 렸다. [저것은........?] 나타난 물체, 그것은 정말로 인의 영이었다. 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체는 바로 사람과 한 치의 어김도 없이 같아 보이는 나무 목상이었다. 헌데, 비록 나무조각이로되 그 모습이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저토록 아름다운 껍질을 쓴 여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구름결처럼 하늘하늘하고 폭포수처럼 너풀거리는 수발, 고즈넉한 콧날에 신비로운 호선의 입술, 약간 야윈 듯 보이는 갸름한 얼굴이긴 했으나 그 전체적인 조화는 가히 속세 를 벗어난 듯 탈속하고 오연한 것이 아닌가? 어쨌든, 그것이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구양조운은 순간 중대한 고민에 봉착했다. 이 미녀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이곳은 성지소림의 장경중지. 나는 새도 넘나들수 없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는 곳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 목상이 나타나다니, 그것도 마치 최고절정의 신법자처럼 불쑥 나타나다니, 무림제문파가 서술된 백문총기에보면 강호제문파 중 배교란 문파가 있다 하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근 오백 년 전만 해도 가히 비조하락의 위세를 떨치던 방파라 하였다. 배교는 전통적으로 주술, 요술등의 제반 술법이 강성한 문파였는데, 고유한 그 술법중에 천리이환공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시술자가 스스로 만든 목각인형으로 몇천 리 밖이고 자신의 모습을 보낼 수 있는 놀라운 술법으로써, 보내고자 하는 곳과 유사한 지형을 만들고 그 위에 인형을 세운 후, 신경(神 境)에 달한 강력한 정신력을 일으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천 리 밖에 떨어진 피시술자와 영감이 통하면 마치 마주앉아 말하듯 선명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였다. 하나, 이러한 천리이환공을 비롯한 배교의 제반술법 등은 워낙 그 익히는 과정이 험 난하고, 또한 고도의 의지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절기들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고, 당금무림에 이르러선 아예 멸문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 다. 한데, 그러한 배교의 최고정신술법이 느닷없이 오백 년의 너울을 벗고 구양조운의 앞에 나타난 것이니.... 이러한 까닭을 알 리가 없는 구양조운은 그저 어리둥절의 연속이다. 그리하여, 미녀상의 붉은 입술 새로 한 소리 맑고 영롱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을 땐 그는 아예 귀신에 홀린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구양소협을 뵙게 되어 다행이예요....] 구슬이 그르듯 듣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구양조운은 황망히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소녀는 천년맹의 수좌총사인 백가로라 해요. 소협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소 협을 매우 잘 알고 있어요.] [천년맹.....? 수좌총사........?] 구양조운의 두 눈에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신비의 천년맹 그것도 수좌총사라는 높은 신분의 인물이 드디어 그의 앞에 흔적을 보인 것이 다. 하나, 구양조운의 얼굴에서 놀란 빛은 이내 사라졌다. 그는 맑고 정대한 시선으로 미녀상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천년맹의 말과 뜻은 익히 듣고 있었소, 한데 총사께서 이렇듯 분신을 나타내 고 또한 나를 알고 있다 말함은 어떠한 뜻이오?] 무표정한 미녀상이 말을 받았다.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하겠어요......] 말은 미녀상의 입술로부터 비롯되고 있지 않았다. 꿈결에서 들려오듯 멀고 아련한 음향과 함께 구양조운의 영혼으로 직접 스며 오는 것 같았다. [천년맹은 지금까지 귀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어요. 신승 자초께서 직접 훈육을 담당했으니 귀공의 모든 것, 옷 한벌부터 무예 한 초식에 이르기까지 본맹은 할 수 있는 한 갖가지 편의를 제공했어요.] [.....!] [이제부터 귀공이 해야 하는 역할은 어쩌면 정파의 총수인 검군보다도 더 중 요한 것이 될지도 몰라요. 하나, 앞으로 본맹은 이제 어떠한 편의도 제공할 수 없어요. 귀공은 자신의 임기응변에 의지하여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가야만 됩니 다.] 구양조운이 물었다. [연락도 안된단 말이오?] [물론 안돼요. 지옥련에는 백인귀두라는 무서운 정보초식이 있어요. 이것은 백 인의 최고수뇌가 한데 합쳐 있는 것으로써 세상의 어떠한 일도 그들의 이목을 속일수는 없어요.] [백인귀두?] [소녀가 이렇듯 천리이환공의 술법을 쓰는 것도 그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이지요.] [흐음!] [이제부터 귀공이 명심해야 할 것은 첫째 귀공은 여하한 수단을 동원해서든 지옥련 안으로 깊숙히 침투해야 합니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야 해요. 맹이 길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백인귀두의 이목에 언젠가는 걸릴 것 같아 이러한 고육적 인 방법을 택했어요.] [......] [둘째, 지옥련으로 침투한 후 귀공은 정파사람들 본맹까지 합하여 정파와 대적 을 불사하거나 살상하여도 무방합니다.] [.......!] [셋째, 우리가 이곳에 소수의 무학을 남겨놓은 것은 귀공에게 참조를 시키키 위함입니다. 사도에 입문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예요.] [.....!] [마지막으로 앞으로 사도에 입문하여 왼손 무명지에 보라색 옥환을 낀 사람이 있거든 급할 때 도움을 청하세요. 본맹에서의 귀공의 신분은 무방 총영반입니 다. 서열 삼십위 안에 드는 높은 지위이니 귀공의 신분은 그 손목에 채인 반야 옥반이 대신해 줄 거예요. 그럼 귀공의 무운을 진심으로 빌며... 다시 만나길 바라겠어요.....] 휘르릉..... 마치 한줄기 환상처럼 미녀상은 사라졌다. 금실금실 맴돌던 몽연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구양조운은 묵묵히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목에 채여진 반야선 반야옥환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반 총영반이라......]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누각의 아래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작은 통풍구로 스며든 흐린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추어 가고 있었다. [비명 일호!] 지옥 끝에서 들려오는 듯한 스산하고 굉렬한 목소리였다. 어딜까? 사방은 가히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이었는데, 빛도, 생명체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임에 분 명했다. 허나, 인간이 만든 공간이 이토록 클 수 있을까? 위를 올려다 보면 하늘처럼 아득하고 동서남북 팔방 어디 쪽이고 막히거나 시 야를 거슬리는 곳이 없다. 바다를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이와 같은 일망무제의 공간이 없을 것이다. 허나, 바닥은 돌이었다. 요철 하나 없이 거울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바닥이었다. 그 돌바닥이 마치 평원처럼 펼쳐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역행하고 거대한 공간에 언제부턴가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다. 그는 아예 위부터 아래까지 모조리 검은 빛 일색으로 중무장을 한 위인이었 다. 복면도 검고 헐렁한 장포도 검었으며 신고 있는 신발도 검었다. 그는 마치 하나의 석상처럼 호흡조차 죽인 채 부복하고 있었다. 이때, [비--명--일--호--] 또 다시 귀를 도려내고 싶을 마큼 괴이한 음성이 일망무제의 공간에 아득하게 울려퍼 졌다. 순간, 묵의인의 몸에 비로소 인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엎드린 몸을 더욱 깊숙이 숙이며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명 일호 하명 기다리오!] 공손하다곤 하나 이상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 그는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일부러 목소리를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묵의인의 목소리가 중간 저 너머로 아득히 사라질 무렵 돌연, 그가 엎드린 정면 십 장 어림에서 한 개의 거대한 입상이 스르르 몰려왔다. 그그긍...... 오 장 높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것은 시선만 닿아도 부르르 소름이 돋을 정 도로 흉측한 악귀상이었다. 지옥역사의 울퉁불퉁한 근육에 날름대듯 솟아오른 세 개의 사두, 그 중, 중간의 뱀머리 위에는 놀랍게도 인간의 머리가 하나 달랑 얹혀 있었다. 몸은 악귀상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 그 얼굴은 마치 분칠이라도 한듯 희었다. 사안처럼 길게 째진 눈에는 검고 동자는 간 데 없고 흰자위만 휘번뜩였으며, 입술 또한 피를 머금은 듯 붉었다. 그 입술이 스산하게 열렸다. [위대한 사파의 영광을 재현하라!] 묵의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지옥련은 영원하라! 삼가 연맹 산하 정탐분맹 특수제사당 소속 비명 일호가 제구분맹주를 뵈오!] [특수제사당은 최고의 세작기관이며 금번 대훈련에서 발군의 노력으로 특급수 련자가 된 그대의 노고에 치하를 보낸다.] [본 맹주의 치하에 감사드리오!] [하여 본 분맹에선 그대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로 하였으니.....] [......!] [검군을 영접하기 위한 정파 구대문파의 아홉 정예가 길을 떠났다. 그들은 곧 무산 천년맹 총본산에서 소정의 시험을 거친 후, 사십 일 뒤로 박두한 검군의 출관에 임하게 될것이다....] [.....!] 불을 뿜는 듯한 어조가 뒤를 이었다. [이제 비명 일호는 그들 중 하나로 잠입하여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방해하고 교란하라! 검군척살을 떠난 삼군의 척살단을 배후에서 원조하라! 이 것이 그대에게 맡겨진 임무이다!] 툭! 하나의 두루마리가 묵의인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안에 그대가 변장할 인물에 대한 상세한 내력이 있다. 즉시 떠나도록!] [존명!] [무운을 빈다.] 스르르.... 돌연, 묵의인의 아래에 있던 돌바닥이 느릿하게 갈라지더니 그의 몸을 삼켰다. 그는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그그긍..... 십여 장 밖에서 또 하나의 악귀상이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나찰의 모양, 맨 위에는 역시 분칠을 한 듯 흰 얼굴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나찰의 입이 열렸다. [천년맹에선 이번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는 모양이군... 우리의 막강한 정보 망으로도 겨우 아홉 중 하나의 정체밖에 밝혀내지 못했으니...] [큽큽.... 그 모든 것은 시간문제.... 천년맹은 이번에 우리가 파유한 척살단 을 정면상대할 강력한 조직을 그 아홉 애송이를 중심으로 결성할 모양이다. 허나, 발버둥쳐봐야 우리의 정보망은 벗어나지 못해. 보라, 벌써 소식이 들어오 고 있다.] 공중으로..... 섬뜩한 피빛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구파정예 두 번째 인물, 점창파 여장문인, 능파옥연 이벽군.> <이월 이십 일 신시 현재 위치. 섬서성 용천현 남동 오십 리 지점 통과.> <즐겨먹는 음식, 매운 후추국수, 연와탕, 소채.> <성격, 정열적, 오만, 자부심 충만, 점창이 낳은 백 년래 최고기재.> <현재 생리중.> [뜻밖의 인물..... 장문인의 직접출도라..... 천년맹은 이번에 분명히 심혈을 기 울이고 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검군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하나 역시 우리보다는 한수 아래......] 이때 돌연, 그그긍...... 구구구..... 거대한 공간의 이곳저곳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악귀상들이 솟아오르 기 시작했다. 다양하기 이를데 없는 모양, 각종의 짐승 형상을 한 연두상이며, 팔한, 팔열지옥을 수호하는 열귀들의 끔찍한 형상, 그 수는 도합 백 개, 높이 오 장이나 되는 악귀상들이 백 개나 난립한 모양을 상상해 보라! [큽큽.... 백이귀두는 지상최강의 정보조직......] [하늘 위의 일도 우리를 속일 수는 없나니.....] [정파의 멸망이 다가왔다!] [정탐분맹 백인귀두를 모르는 한 그들은 영원히 이길 수 없으리라!] [큽큽....] [클클....] 공간, 이 거대한 공간도 이들이 만들어낸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을 역행하고 신을 조롱하는 형상까지 만들 수 있는 이들이 하지 못할 일 이 도대체 그 무억이랴? 백 개의 사악한 두뇌가 모아진 지상최강의 정보조직 백인귀두, 스산한 사기가 피어오른다. 하늘을 꿰뚫고 있다. 신이 통곡하고 있었다. 화다닥..... 타오르는 것은 모닥불이다. 모닥불 위로는 한 마리의 기름진 토끼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비단, 토끼 뿐 아니라 하늘하늘한 불꽃은 그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도 더불어붉게 물들여 내고 있었다. 헌데, 언뜻 보기에도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다. 안면은 잔뜩 얽을대로 얽어 여기저기 움푹움푹 패인 곰보였고, 좁은 이마에 나다 만 듬성듬성 한 눈썹, 거기다가 보기 흉하도록 굵고 너털너털한 입술이라니..... 불빛의 음영은 나이 십칠팔 세 가량의 그의 용모를 더욱 더 추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비록 용모는 추악해도 그의 옷차림만은 몹시 세련되어 보였다. 그래서, 하연 백의무복 위로 역시 흰색의 털옷을 걸친 그의 세련된 옷차림을 이벽군은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추면소년의 오른 손목에는 한얀 백옥으로 만들어진 옥환이 들려 있었다. 중의 신분이 아닐 텐데도 가슴에 걸친 백옥의 염주가 특이하다. 이벽군은 그를 잠시 눈여겨 본 후, 시녀 천련이 옷과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 주는대로 몸을 맡겼다. 이곳은 섬서 대파산 근교의 한 사당이었다. 밖에는 거의 눈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이었다. 이벽군은 눈이 다 털어지자 시종무객인 냉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놈들은 아직도 따라오고 있는가?] 왼쪽 뺨에 긴검흔이 나 있는 냉막한 얼굴의 중년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길에는 발자국이 있읍니다. 추적해 올 것입니다.] [흥! 이 눈길을 그냥 간다면 그 놈들은 대점창의 고수들이 그들을 두려워 한 다고 여길 것이다.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한다.] 이때, 한 소리 투박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설마 그 문을 열어 놓고 누구를 기다리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믿소.] 말을 한 사람은 바로 구석의 추면소년이었다. 이벽군은 그를 힐끗 바라보고 난 후 시녀 천련에게 눈짓을 했다. [사당의 문을 닫아라.] 쿵! 추면소년이 굽는 토끼고기 냄새가 사당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기를 이리저리 뒤집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익었군. 하마터면 너는 불구이가 아니라 얼음구이가 될 뻔했지만.] 그는 토끼의 다리부분을 쭉 찝더니 이벽군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쩝쩝......] 먹어 보라는 소리도 없다. 누군가의 입에서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이벽군 등은 눈길을 해치고 오느라고 지금 몹시 허기가 져 있었다. 여행경험이 많지 않은 그들은 마른 건량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소 명문대파의 지존으로서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친 그녀가 어찌 배고픈 내 색인 들 할 수 있으랴. 이벽군은 짐짓 냉혼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비를 걸어오는 그 놈들은 도대체 어느 일파인가?] [모르겠읍니다. 단순한 건달들은 아닌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이때 돌연, 와당탕! 사당문이 부서지듯 열리더니 검은 물체 하나가 안으로 휘익 날아 들어왔다. 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던 시녀 천련이 찝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물체, 그것은 놀랍게도 피가 뚝뚝 흐르고있는 말머리가 아닌가? 순간, 냉혼의 몸이 박차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누구냐?] 이어, 차차창!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듯한 금속성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이벽군은 아미를 깊게 찌푸렸다. 말은 바로 그녀의 애마였다. 또한, 이렇게 말머리를 잘라 보내는 것은 사파 특유의 도전수법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쪽의 추면소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런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쩝쩝....... 짭짭.......] 여전히 토끼고기를 뜯기에 여념이 없는 그, 이벽군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가슴을 쭉 펴고 사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눈보라는 많이 그쳐 있었다. 띄엄띄엄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는 가운데, 냉혼은 지금 묵의인 하나와 맹렬히 검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차차창! 그리고, 사당의 앞에는 십여명이 둘러서서 그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다. 여러 명의 묵의인들에 둘러 싸여 커다란 고목나무의 등걸에 오연히 앉아 있는 준수한 미청년 하나가 가장 돋보였다. 일신에는 비단장삼, 등에는 한 자루의 검을 메고 있다. 허나, 그 눈동자가 쉴 새없이 구르는 것으로 보아 일견하여 심기를 많이 사용하는 자라는 인상을 풍겼다. 헌데, 흑의미청년의 검에 달린 하얀 수실을 보는 순간, 이벽군은 아미를 더욱 깊이 찌푸리고 말았다. (무탐화.......? 좋지 않다.......) 무탐화, 명인 칭호를 들을 수 있는 무원검측대의 두 번째 단계, 무원검측대의 제위는 무기에 다는 수실의 색으로써 구분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일단계, 무진사는 노란색. 제이단계, 무탐화는 흰색. 제삼단계, 무향은 자주색. 제사단계, 무종은 녹색. 제오단계, 검군, 검후는 황색. 그리고, 마지막 검정은 금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흰색 수실의 무탐화는 당금무림에 모두 오백 팔 인이 생존해 있다 하였으 니..... 챙! 창! 냉혼은 묵의인과 거의 비등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약간 우세하다곤 하나 그가 점창파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로 볼 때 저러한 모습은 몹시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장내를 한 차례 둘러보는 것으로써 이벽군은 재빨리 상황판단을 내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냉엄하게 열렸다. [냉혼, 물러나시오!] 순간, 냉혼은 급히 다섯 초식을 묵의인에게 퍼부운 후, 빙글 몸을 돌려 이벽군의 옆 에 사뿐 내려섰다. 이벽군의 아름다운 시선이 흑의미청년을 향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이토록 많은 수하들을 대동하고 본좌의 뒤를 쫑는 귀 공의 저의는 무엇이오?] 흑의미청년은 싱긋 웃더니, [용서하시구료. 아름다운 여장문인, 소생은 사백이라 하오만 이미 나이는 과년 하고 주제에 눈만 높다 보니 그 동안 변변한 가정 하나 꾸미지 못했소이다.] [........!] [지나다 무심결에 본 장문인의 자색이 하도 뛰어나 명문대파인 점창파와 한 판 원한을 불사 하고서라도 장문인을 소생의 안방으로 모실까 하고......] 말꼬리가 슬그머니 흐려진다. 주위에 서 있던 묵의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냉혼과 시녀 천련은 발끈했다. 중요한 임무를 띠고 비밀을 유지하려 했으니 망정이지, 어디 평소의 이벽군을 저런 놈팡이가 시선이라도 마주칠 수 있었으랴? 강호의 아홉 개 큰 문파 중 하나인 대파의 여장문인으로서 정녕 참기 어려운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이벽군은 화를 내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신가? 보아하니 무원검측대에 이름까지 새긴 명인 무탐화의 신분인 모양 인데 본좌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오. 그렇잖아도 본좌는 무원검측대가 궁금하 던 차였으니 이 기회를 실력 측정의 기회로나 삼아야겠소.] 마땅히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지 않음은 그 수양의 정도를 알려준다. 사백의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 허나, 그는 즉시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점창의 회풍무류사십팔식이 무림의 일절임을 익히 들어왔소. 기꺼이 상대해 드리리라.]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말을 맺었다. [하지만, 거 장가란 거 한번 가기 힘든 거로구료.] 대달마 제 십 장 10/03 19:09 351 line 第 十 章 深 山 怪 樓 물론 장가는 가기 어렵다. 하나, 입을 멋대로 나불거려 놓고서 산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휙! 쌔액! 쐐! 회풍무류사십팔식! 일식은 전중후의 삼변이 있고, 팔 백년전의 일대거객 형우자가 바람에 날리는 버들잎을 보고 창안했다고 하 는 정종십대비검의 하나 아미의 난피풍검법과 더불어 무림이대난검으로도 불리우는 회풍무류사십팔식 의 위력은 과연 뛰어났다. 패액! 팩! 능파옥연 이벽군의 환상적인 검식 앞에 흑의청년 사백은 허둥지둥 잔뜩 수세 에 몰렸다. 그는 염왕표검법을 펼쳤으니 전후좌우로 파고드는 이벽군의 능파검에 기겁하여 다시 혈영검법으로 바꾸어 야만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의 준수한 얼굴은 분노로 푸르뎅뎅해졌다. 자신으로 말하자면 산하 십이분맹 중 화맹으로 지칭되는 검분맹의 젊은 기수 가 아닌가? 더군다나 일전에 무원검측대의 무탐화에 당당히 등위하여 맹의 산하조직인 혈검대의 제 일통령으로 승급한 처지였다. (계집..........?) 사백의 두 눈에서 자욱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내리 삼검을 쳐낸 후 휙 이장 뒤로 물러나더니 검을 발 앞의 땅에 푹 하 고 꽂았다. 연후, 쌍수를 지그시 앞으로 뻗으니.. 이벽군의 의아한 시선을 안고 사백의 몸에서 느닷없이 한 줄기 묵연이 뭉클 피어 올랐다. 그 묵연은 사방으로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가더니 눈 깜빡할 새에 이벽군의 몸 까지 휙감았다. 일시, 먹물같은 어둠에 처하게 된 이벽군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마.........?] 순간, 어둠 속에서 사백의 싸늘한 괴소가 터져나왔다. [핫하.... 계집, 이제야 무서움을 알았느냐? 환마는 바로 본좌의 사부이시다!] 놀라운 일, 환마! 이 무림에 그들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이미 오십 년 전의 일이었다. 혈(血), 환(幻), 백(白), 검(劍), 도(刀), 권(拳), 비(飛), 요(妖)의 환우팔마(還宇八魔), 이 중, 막내인 요는 최근에야 팔마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고 하는데...... 무림의 늦은 고수들은 환우팔마를 일컬어 마계오류의 하나인 방류 귀원지공의 유파라고 하였다. 마도내에서도 오류의 무예는 가히 전설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환우팔마는 한마디로 무공에 미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한 분야에서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분야마다 비무하여 죽인 고수들이 무려 일백인 씩에 달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있다. 오죽하면 염왕시상면 팔마불시상면이라 하였겠는가? 헌데, 이미 십 사년간 무림에 흔적이 없던 팔마의 후예가 이런 한적한 산골에서 모 습을 나타낼 줄이야....... 지금, 사백이 펼친것은 묵령대혼이라는 환마의 성명절기였다. 어둠! 사위는 그저 어둠! 그 속에서 소리없이 찔러오는 칼날 적은 보이지 않고 그 적에게 이쪽은 환히 보이는 무서운 신공이었다. 이벽군은 일시 난세에 쳐했다. 어둠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칼날에 그녀는 등골에 식은땀이 베일 지경 이었다. 장외의 냉천과 시녀 천련 또한 잔뜩 손에 식은땀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이 몹시 험난한 지경에 쳐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저 먹물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떤 것이다. 이때, 싸움이 벌어지건말간 아까부터 토끼고기를 뜯기에 여념이 없던 추면소년이 느 릿하게 밖으로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쯧쯧....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어디..... 오랜만에 미식을 즐기고 있던 차에 흥이 다 깨지고 마는군......] 냉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헌데 이때, 막 말을 내뱉으려던 그의 입이 주춤 얼어 붙었다. 오오...... 보라! 추면소년의 뒤로 둥둥 떠서 따라오는 물체를.... 그것은 바로 추면소년이 태우고 있던 모닥불이 아닌가? 재 하나 흐트러짐 없이 마치 개가 주인을 따르듯 떠오는 그것이란 도대체.....? 냉천이야 입을 벌리고 있건말건 추면소년은 눈밭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모닥불 또한 그의 앞에 스르르 내려 앉았다. [쩝쩝.......] 추면소년은 연신 토끼고기를 뜯으며 중얼거렸다. [저건 마치 늑대가 개에게 물리고 있는 격이로군...... 쩝쩝........ 그럴 땐 비홍관일의 일식이면 좋을텐데.........] 냉천은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을 추면소년과 묵령대혼의 어둠을 번갈아 보았다. (그에겐 과연 저 먹물 같은 어둠이 보인다는 겐가 뭔가.......) 한편 이때, 이벽군은 이벽군대로 사백은 사백대로 놀라고 있었다. 이 묵령대혼은 일종의 강기막으로서 외부의 말이 안으로 들어올 구 없는 것은 물론 안의 굉음도 밖으로 울려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추면소년이 중얼대는 말을 들었으며, 이것은 그가 이들보다 월등히 공력이 높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벽군의 초식이 무의식중에 비홍관일의 일식을 쳐갔다. 사백의 우측 옷자락이 찌익 하고 찢겨 나갔다. 사백은 소름이 우스스 돋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황망히 물러났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것이...... 도깨비 같은 놈이로구나!) 그는 다급히 십성 전공력으로 묵령대혼의 강도를 높이는 한편 환마의 최대절기인 묵령삼식을 전력을 다해 펼쳐냈다. 순간 휘잉--- 어둠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어둠이 마치 햇살처럼 수천 조각으로 나뉘어져 이벽군의 전신을 쏘아오기 시작했다. 이벽군의 옥용이 일순 싹 변했다. 사태는 다급했다. 허나 그녀는 전신을 쏘아오는 이 무지막지한 공세를 막아낼만한 아무런 수식 도 떠오르지 않았다. 실로 절대절명의 순간, 문득, 추면소년이 고기를 입에서 떼더니 중얼거렸다. [요사스러운 수법..... 눈이나 가리고 아웅하는 저런 수법을 어찌 무예라 하겠는가?]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 무섭게 우수가 쭈욱 앞을 가리켰다. 순간, 타오르고 있던 장작 하나가 그의 손짓에 따라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슈슉! 그것은 단숨에 묵령대혼 속으로 스며 들었으며..... 다음 순간, 픽! 픽! 하는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 짙던 어둠이 산산히 조각나기 시작 했다. 휴르릉....... 풍사가 걷히듯 어둠이 걷혔다. 그리고, 사백의 낭패 어린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살기어린 시선으로 추면소년을 쏘아보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사나운 어조 로 외쳤다. [쳐라!] 허나 주위를 둘러선 흑의인들은 묵묵부답, [뭣들 하는게냐?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추면소년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끌끌 혀를 찼다. [혈도가 짚인 위인들이 어찌 움직일까...... 보기보단 한심한 위인이로군......] 점입가경이라더니....... 흑의인들은 과연 나무토막처럼 선 채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도대체 추면소년은 무슨 수법으로 그들을 점했단 말인가? 사백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회의에 찬 시선으로 추면소년을 힐끗 바라본 후, [나는 믿지 않는다.] 한 소리 대갈과 함께 더불어 가장 가까운 곳에 선 흑의인의 혈도를 해혈수법 으로 쿡 짚었다. 순간, [어이구!] 혈도가 짚인 흑의인은 그 혈도가 풀리기는 커녕 꼼짝도 못하고 선 채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을 터뜨렸다. 사백은 급히 그가 아는 모든 해혈수법을 다 동원했다. 허나, 흑의인의 비명은 오히려 더욱더 커져 그의 자존심을 사납게 짓뭉게 버리는 것 이니..... 충혈된 사백의 시선이 힐끗 추면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는 바드득 이를 갈며 원한에 사무친 어조로 외쳤다. [석명 석 자나 듣자!] 추면소년의 얼굴에 싱긋 웃음이 번졌다. [구양조운 소수문의 구양조운이오!] 순간 사백을 비롯한 중인들의 얼굴에 크게 놀란 빛이 스쳐 지났다. 오오....... 소수문! 소수지학!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전설적인 마계오류의 하나이며, 이미, 강호상에서 오백 년간이나 실종되었던 신비의 문파요 무학이 아닌가? 사백은 쿵쿵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난 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다. 구양조운! 오늘은 일진이 사나웠던 것으로 치겠다.] 그는 휙 몸을 날리며 [다음에 만날 땐 지옥련의 이름으로 응징하리라!] 지옥련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순간 무심하던 추면소년 구양조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가벼운 변화가 일었다. 바로 그때 홀연, 슈파악! 한 줄기 핏빛 혈점이 공중에 반짝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혀를 날름대는 독사처럼 찬연한 불꽃으로 변하더니, 어쩌고 저쩌고 할 새도 없이 단숨에 사백의 몸을 휘어 감았다. [으아아악!] 한 소리 스산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연맹칙 제구조 이항 문파의 이름을 누설한 죄.....] 파파파팍! 재! 사백의 몸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이벽군 등이 얼떨떨하여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슈와악! 이번에는 하나의 백영이 또다시허공으로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추면소년 구양조운이었다. 그는 단숨에 허공으로 이십여 장이나 솟구쳐 오르더니 대붕처럼 몸을 뒤집어 의문의 혈영이 날아간 곳을 향해 아득히 사라져 갔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을 사납게 파고 들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아녀자가 살아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지...... 그 하나는 집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것이고 그 둘째는 보호해 줄만한 남자를 찾은 것..... 내가 보기엔 당신들은 검군 영접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집에 가서 애나 보는 것이 좋겠군.....] 순간, 이벽군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저 자가 그들이 길을 떠난 목적을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맙소사! 이 목소리는 전설의 육합전성이 아닌가? 무사 냉천이 넋을 잃듯 중얼거렸다. [무영격공점혈에 육합전성신공....... 거기다가 소수의 후예라니...... 아아! 사파에는 저 수많은 인재들이 쏟아져 나오는구나. 만약 저 자가 사파의 대열 에 합류하게 된다면 저 한사람을 상대하는 데만도 우리는 진땀을 빼게 될 것이 다.] 이벽군의 서늘한 봉목도 허공을 더듬듯 구양조운이 사라져 간 곳을 향했다. 점창의 꽃이라고 했다. 명문정파의 그 숱한 미장부들이 던지던 찬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더니.... 집에 가서 애나 보라구? [구양...... 조운.........] 이벽군은 웃깃을 스며드는 이 말의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씁씁한 웃음과 함께 느릿하게 신형을 돌렸다. [가자.....] 주루---- 거듭 눈을 씻고 봐도 그것은 분명한 주루였다. 그것도 청홍의 단청에 붉은 옻칠을 한 난간이며 그래서, 더 희어 보이는 대리석 돌계단 등으로 이루어진 이를 데 없이 화려한 주루였 다. 주루가 화려하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마는 중요한 것은 이 화려한 주루가 깊은 산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올라와도 힘겨울 깊은 산 속에 저 거대한 목재와 대리석은 어떻게 운반해 왔으며.... 도대체 누구에게 술을 팔겠다고 한 겨울에 폭이 일장이나 되는 주기를 펄럭이 고 있단 말인가? [괴이한 일이로군] 구양조운은 중얼거렸다. 제기랄! 사백을 죽인 한 줄기 희끗한 혈영을 쫓다가 놓쳐버린 것이었다. 그는 주루를 힐끗 바라본 후 깨끗이 눈이 쓸린 대리석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 다. 삐걱! 문이 열리자 더운 온기가 왈칵 얼굴로 끼쳐 왔다. 동시에 영롱한 교성이 그의 귓전을 두드려 왔다. [어서 오세요.] 선녀처럼 하늘하늘한 나삼을 걸친 다섯명의 소녀가 일렬로 선 채 그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점입가경이로군. 대리석 주루에 미녀들이라..... 나는 혹시 여우굴에라도 들어 온 것이 아닐까?] 소녀들은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겨 보이더니 전망이 좋은 창가로 그를 안내 했다. 손님은 그 혼자 뿐이었고 난간 아래로 계곡이 그림처럼 펼쳐진 자리였다. 숯불이 곱게 피어 오르는 손화로 하나를 탁자위로 올리며 한 소녀가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나요?] 구양조운은 장향이 물씬한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좋은 향기로군. 운남의 천사향을 쓰시오?] [어마!] [데운 술 한병하고 가벼운 안주로......] [소압육은 어떻겠어요?] [좋군!]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소녀가 물러가자 구양조운은 화로에 손을 쬐며 창 밖으 로 시선을 던졌다. 창을 흔들고 지나는 겨울 삭풍소리 눈은 이미 그쳤다. 흐린 하늘을 인 거대한 설산이 시선을 가로막아 왔다. 대파산이었다. 소림을 떠난 지 이미 보름째 그동안 화복 성서 일대를 누벼 보았으나 별무성과, 그는 지옥련의 그림자로 보지 못했다. 오늘의 그 혈영을 놓친 것은 그래서 더 아쉬움을 가져왔다. [바다에 빠진 모래알 하나를 줍는게 낫지.......] 그래도 사라진 혈영은 구양조운이 내뱉은 소수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본거지로 돌아가 열심히 입을 나불재는 선전효과를 기대해 보는 것은 어 떨까? 이때 돌연 구양조운의 두눈에 언뜻 한 줄기 이채가 스쳐 지났다. (선전....... 선전이라.......? 그렇군!) 번개처럼 뇌리를 스친 하나의 생각 그는 지금 사라진 소수문의 행세를 하고 있다. 백인귀두의 치밀한 정보망을 감안하여 이름도 본명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가 백패서생의 아들이라는 것과 신승 자초 의 제자였다는것쯤은 능히 파악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구양조운이 바라는 바였다. 그래야만 그가 지금은 파문을 당한 처지이고 거기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다는 각본을 꾸밀 수 있을 것 아닌가? 문제는 그런 것을 소문만 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늘 아래 소문을 가장 빠른 시간에 효과적으로 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무원검측대.] 무원검측대! 그렇다. 이곳만큼 소문과 구설이 빨리 오르내리는 곳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소수의 신분으로 무원검측대에 도전하는 거다...... 아예 발칵 뒤집어 놓는 다.......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를 알아 보게끔 하는 거다........) 골똘한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문득 시킨 술과 안주가 나왔다. 주문을 받아갔던 미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술을 따라왔다. 쪼르르..... [호호..... 많이 드세요.] 따라지는 술을 무심히 바라보던 구양조운의 두 눈에 돌연 한 줄기의 기광이 번뜩 스쳐 지났다. (연화청....? 열하가 아니면 구할수 없다는 귀한 술이 아닌가....?) 술을 따르고 물러가려는 미소녀의 손등에 구양조운의 손이 재빠르게 얹혔다. [기왕 따른 것...... 자리가 끝날 때까지 있어 주면 어떨까?] 미소녀는 눈을 곱게 흘겼으나 싫지는 않은지 그의 옆에 사르르 몸을 앉혔다. [어딜 가나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시나요?] [여자가 매력적일 때만!] [호홋..... 말도 잘 하시는군요.] 구양조운의 얼굴에 짖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말 뿐이 아니지. 밤일은 더욱 잘하지.] 미소녀의 입에서 기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까르르 흐드러진 웃음을 터뜨리며 고사리 같은 주먹으로 구양조운의 어깨를 두드려 왔다. 가슴을 사르르 녹일 듯 착착 휘어감기는 애교다. 구양조운도 따라 웃었으나 웃는 한편 그의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 다. (걸음걸이며..... 말투 하나같이 세련되고 여유가 있다. 규칙적인 훈련을 거친 여자다.) 그 밖에도 주루는 여러가지로 수상한 점들이 드러났다. 일하는 남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며, 장사가 너무 안된다는 것 이 주루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드러날 수록 구양조운 의 심중의혹도 커져 갔다. 허나,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주흥은 무르익어 갔다. 주약이라고 이름을 밝힌 미소녀의 선창에 이어, 구양조운의 낭랑한 노래가 이어졌다. [술잔 기울이니 해지는 줄을 몰라 어쩌자고 꽃은 떨어져 옷깃을 덮는가? 거나히 취한 채 달을 밟고 가노니 새는 길을 찾고 인적은 끊겼구나......] 이백의 자유 실로 호방하기 이를 데 없는 풍류객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셈인데 기이하게도 노랫소리는 차츰 잦아드는가 싶더니 조환인적희의 마지막 귀절이 끝나기 무섭 게 구양조운의 몸은 그 자리에 쿵하고 엎어졌다. 순간, 생글생글 웃던 주약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취선밀을 반 시진이나 견디다니 대단한 사내로군.] 그녀는 냉엄한 얼굴로 엎어진 구양조운을 힐끗 바라본 후 찬바람이 일도록 몸 을 일으켜 세웠다. [옥으로 쳐넣어라.] 짤막한 대답과 함께 덜컹! 구양조운의 탁자 밑바닥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더니 그의 몸을 삼켰다. 대달마 제 십일 장 10/05 21:48 276 line 第 十一 章 女 人 天 下 어떤 시간들이 지난 걸까? 툭! 툭! 이마에 와닿는 섬뜩한 감촉에 구양조운은 번쩍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느낀 사실은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는 누운 채 천천히 진기를 운행해 보았다. 단전으로부터 치솟는 한 줄기 기운이 느껴졌다. 공력이 상실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가벼운 안도를 느꼈다. (제길! 취선밀이었어........) 취선밀, 이것은 독이 아니라 일종의 독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정이었다. 말하자면 술의 정화라 할 수있는 것으로 아무리 체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이 취선밀을 한 방울만 마시게 되면 사흘은 깨어나지 못하는 것, 구양조운은 술을 마실 때부터 내심 주의하고 있었다. 허나, 그가 주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독이었다. 스승 자초에게서 사파의 수법에 대한 일천여 종의 실전수련을 거친 그는 세상 의 어떤 독이라도 해독해 낼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해독이 아니라 제독을 할 수 있다고 쳐도 취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 는가? (멋지게 한 방 맞았군......... 강호는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곳이로구나.....) 구양조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누운 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단숨에 진기를 삼주천시키고 난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먼저, 하나의 철책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위도, 옆도, 사면이 모조리 철책이며 바닥은 두꺼운 쇠철판, 너비는 한 일장이나 될까말까?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지금 마치 사냥당한 짐승처럼 두꺼운 쇠철책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는 느리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때 [깨어났다!] [소년이 깨어났어!] 왁자하니 소란스러운 여인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석실, 이곳은 하나의 조그만 석실이었다. 그리고 구양조운이 갇힌 철책주위로는 서너 명의 소녀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하나같이 빼어난 미모 섬연한 몸에 두른 것은 한 장의 투박한 짐승가죽이었다. 심산에 호화로운 주루도 괴상하더니 이번에는 또 짐승가죽을 두른 계집아이들 이란 말인가? 구양조운이 멀뚱멀뚱 두 눈을 뜨고만 있자 소녀들은 까르르 흐드러지게 웃고 나더니 서로의 얼굴들을 쳐다보았다. [어때?] [무공으로 결정하자.] [좋아!] 무슨 말일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난 그녀들은 이내 두 명씩두쌍으로 갈리더니 느 닷없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슈파앗! 파팟! 일이 이렇게 되자 어리둥절해진 것은 구양조운이다. 그는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를 알수 없었다. 이 여자들은 밥을 매우 많이 먹은 나머지 그 힘을 풀 데가 없어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지금, 그녀들이 서로를 향해 펼치는 초식은 그리 현묘하다 할 순 없어도 거의 사생 결판에 가까운 초식들이었다. 거기다가 왼쪽의 한 쌍은 아예 검까지 들고 싸우고 있었다. 어쨌든 그 전후 원인이야 어떠했던 간에 이 기이한 싸움은 매우 불안했다. 긴 다리가 쭉쭉 뻗어 올라갈 때마다 늘씬한 각선미와 더불어 분홍빛 속곳으로 가리워진 은밀한 그곳이 들썩들썩 비춰지곤 했다. 뿐인가? 거친 호흡 새로 흔들리는 젖가슴이며 꼬옥 다문 앙증맞은 붉은 입술이라니, 승패는 쌍방이 다 오십여 초를 넘어갈 무렵에야 가려졌다. 두 다리가 유난히 고르게 빠진 소녀와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의 소녀가 각각 승리를 거두었다. 헌데, 그녀들은 각기 상대를 물리치기 무섭게 또다시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며 덮쳐가는 것이 아닌가? 이번의 초식들은 아까보다 더욱 험하고 사나왔다. 구양조운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아예 팔배게를 한 채 느그시 싸움을 구경하 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붙잡고 고민해 봐야 머리만 아파진다. 일을 저지른 것이 저들이니 기다리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일의 윤곽이 드러나 게 되리라. [그건 그렇고 이 싸움은 매우 재미있군.] 구양조운은 평생 여자와 싸워본 적이 없다. 그것이 아무리 큰 손해를 가져온다 해도 그는 상대가 여자라면 피식 웃으며 돌아서고 말곤 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가 싸울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기껏해야 누가 빨리 옷을 벗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백개의 콩을 누가 먼저 맛있게 볶을 수 있는가....... 하는 정도로 상상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에서야 여자도 싸울 수 있으며 그 싸움이란 것이 매우 박진감 넘친 다는 것을 발견했다.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싸움은 다리가 예쁜 소녀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의 초식은 매우 영민하고 재빨랐으며 또한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구양조운은 삼 초 내로 승부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야앗!] 한 소리 비단폭 째지는 듯한 교성이 터져나온다 싶더니 다리가 예쁜 소녀의 검이 허공을 조각냈다. 순간, 푹! 보름달 같은 얼굴의 소녀 어깨에서 분수 같은 핏물이 쭈욱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손으로 어깨를 감싸안은 채 황급히 주춤 물러났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졌어. 내가 졌어.] 다리가 예쁜 소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검을 거두웠다. 이어, 그녀는 둔부를 흔들며 살랑살랑 철책 앞으로 다가왔다. [어때요?]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최고요. 그 솜씨로 두부찌개를 만든다면 매우 잘할수 있을거요.] 허나, 그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 소녀의 검이 그의 목 밑으로 들이밀어 졌기 때문이다. 구양조운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오?] [당신은 생각이 있나요?] 구양조운은 어리둥절했으나 [생각이 있다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소?] 순간, 소녀들의 입에서 까르르 흐드러진 웃음이 터져나왔다. 싸움에 진 세 소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은 채 밖으로 걸어나갔다. 탕! 석실의 문이 닫히자 소녀는 생긋 웃더니 가슴 앞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툭! 툭! 기다렸다는 듯이 터질 듯 팽만한 처녀의 예쁜 젖무덤이 봉곳하니 모습을 보였 다. 구양조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당신은 지금.....?] [성격도 급하군요. 옷은 다 벗어야 할게 아녀요?] 한쌍의 서늘한 봉목에 떠도는 열정 옷이 스르르 매끄러운 다리를 타고 내린다. 그제서야 구양조운은 그녀가 말한 생각이란 것이 무엇을 뜻했던가를 알아챘 다. 그것은 바로 정사였던 것이다. 또한, 소녀들이 느닷없이 싸움을 벌였던 것도 구양조운과 정사를 할 우선권을 가리 기 위했던 것이었던 게다. 맙소사! 일반 백성들의 세계에선 여인이 낯선 남자에게 수족만 보여도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목숨을 끊는 세상이 아닌가? 비록, 구양조운은 성인군자가 아닐지 모른다. 그는 또한 많은 여자와 접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옷을 벗기는 여자와 옷을 벗는 여자에 대해 남자가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르 다. 그것도 짐승처럼 싸우고 난 뒤 홀라당 옷을 벗어던진 여자는 더더욱 그렇다. 구양조운은 다시 머리가 혼란해졌다. 그는 이렇게 공격적이고 진보적인 여자들이 이 세상에 있으리라곤 비단 생각 해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철컥! 철책의 고리를 따기 위해 눈부신 나신이 다가왔다. 공들여 키운 흔적이 역력한 예쁜 몸이었다. 양 다리로 뻗어 허리로 패여 들어간 호선이 섬뜩한 성적 충동을 불러 일으킨 다. 바로 그때, 석실 중앙부에 매달린 조그만 종이 명쾌한 소리를 터뜨려냈다. 딸랑........... 딸랑............... 순간, 막 철책의 문을 열려던 소녀의 몸이 주춤했다. 그녀의 아미가 깊게 찌푸려졌다. [하필이면 이때.....] 그녀는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다시 빠르게 벗었던 옷을 걸쳤다. 이어, 그녀는 구양조운을 힐끗 흘겨보며 빠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부터 곡주님을 만나야 해요. 당신의 못 생 긴 얼굴에 적선이나 할 셈이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 할 수 없군요.] 매끄러운 몸이 짐승가죽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보며 구양조운은 한 줄기 탄식 을 터뜨렸다. 그가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도대체 이 알수 없고 괴이하고 신비로운 곳의 이름이 무엇 이오?] [여인곡.] 타는 듯한 정열은 어디 갔는냐는 듯 냉엄한 얼굴로 몸을 돌린 소녀가 말했다. [대파산 여인곡, 가장 자유스럽고 활기에 찬 여인들이 모여사는 곳이예요.] 대파산 여인곡, 대파 칠십구봉 어는 골짜기에 선녀 같은 여인들이 모여살았다. 그녀들은 이슬을 마시고 풀잎을 먹고 살며, 벌거벗은 채 아름다운 수족을 나풀거리며 산야를 훨훨 날아다녔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섬서의 남자들은 대파산 주위 백 리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이 여인들은 남자만 보면 요괴로 돌변한다 했다. 남자를 잡아다 그 정혈을 다 빨아내고 노예로 혹사시켜며 그러다 죽으면 죽은 살로 만두를 빚는다고 했다. 한 줄의 요사스러운 전설 이것은 오랫동안 섬서성에 내려온 전설이었다. 쩔그렁........ 쩔렁........ 양 손발에 채인 것은 무거운 쇠사슬이었다. 소녀들은 구양조운에게 쇠사슬을 채워서 석실을 나왔다. 그녀들은 구양조운에 대해 매우 안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취선밀에 한 번 중독된 사람은 사흘을 취해 일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가 무인이라면신경이 마비되어 열흘 동안 무예를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양조운의 공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왜 공력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취선밀이 좀 약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 원인없는 결과란 것이 어디 있으랴? 이 모든 것은 희대의 신공, 양심여의공의 묘용 때문이었다. 이 신공은 애초에 익히기가 힘들지만 일단 익히고 나면 그 자체가 살아 움직 인다. 즉, 굳이 진기를 끌어 올리지 않아도 이성 정도의 여력은 늘 체내에 도사리고 있 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외부의 돌연한 침해에 대해 신속하게 반응을 할 뿐 아니라, 몸 속에 들어온 취선밀의 강한 취기가 신경을 파고드는 것을 강력히 억제해 주었던 것이니..... 어쨌든 공력이 멀쩡한 구양조운에게 쇠사슬이란 썩은 새끼줄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소녀들이 하자는 대로 그냥 몸을 맡기기로 했다. 무원검측대로 가는 것은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다. 그는 그 전에 이 신비로운 여인집단의 정체를 파헤쳐 보고 싶었다. 저벅저벅......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곳은 인공으로 만든 기다란 통로였다. 매끈한 벽면의 중간 중간엔 유등이 걸려 있었고 이따금씩 남녀의 성희를 묘사 한 자극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지하세계다...... 산 위에 있던 호화주루는 이곳으로 들 어오는 입수 중 하나일 것이다. 여자들의 힘만으로 어찌 이런 거대한 세계를 만들수 있었을까?) 차 반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통로는 끝나고 거대한 공지가 눈앞에 드러났다. 이때 돌연, 무심히 걷고 있던 구양조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엇을 본 것인지..... 그는 이를 데 없이 크게 놀란 듯 두 눈까지 부릅떴다. 공지, 그것은 언뜻 보아도 반 마장은 될 듯싶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공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절벽 위였는데 그 아래쪽엔 무수히 많은 인영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헌데 보라! 말로만 듣던 지옥의 아수라장이 바로 이런 것일까? 뱀이 꿈틀대는 듯한 채찍자국이 무수한 벌거벗은 상체 앙상한 팔다리에다 광채를 잃은 두눈, 발목엔 커다란 쇠고랑을 차고 무거운 돌을 힘겹게 끌고 있는 사내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음습하고 축축한 공기, 그리고 쉴 새없이 터져나오는 비명과 돌과 땅, 쇠와 쇠가 마찰되는 거북스런 소음 비명은 바로 돌을 끌고 있는 몇백 몇천인지도 모를 사내들의 입에서 터져나오 고 있었다. 그 중간중간엔 짧은 짐승가죽 치마를 걸친 묘령의 소녀들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살과 피가 한꺼번에 솟아오르곤 했다. 헌데, 더더욱 기이한 것은, 거대한 공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수라장의 바로 옆에 있는 또 하나의 광경이 었다. 높이 일 장여의 대나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그곳에서는 엉뚱하게도 천 국의 모습이 벌어지고 있었다. 잘 가꾸어진 초지에 맑은 물이 찰랑이는 인공연못들 흰 대리석 위에 엷은 나삼 하나를 걸치고 편안히 누워있는 사내들, 향료와 술병을 든 소녀들이 그 사이를 웃으며 누비고 있었고, 온갖 진귀한 음식이 가득한 상들이 향기로운 음식 냄새를 피워올리고 있는 것 이니.... 하나의 같은 공간에서 어찌 이토록 상반된 광경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옥에서 혹사당하는 사내들에 비해 천국의 사내들은 그 수효가 훨씬 적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구양조운의 옆에 서있던 소녀 하나가 차고 냉엄한 음성을 내뱉았다. [이곳에선 능력만이 우선해요. 천국에 들어서건 지옥에 들어서건 그건 당신의 능력에 달렸어요.] 대달마 제 십이 장 10/07 14:50 446 line 第 十二 章 怪 女 熱 女 그 곳은 하나의 거대한 대전이었다. 대전의 전면에 놓인 높이 일장 가량의 대위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엔 웅장한 금박 글씨가 쓰여 있었다. < 여 인 곡 (女 人 谷). > 지금, 대의 좌우에는 자유 분방한 색깔의 나의를 일신에 걸친 소녀들이 죽림처럼 빽 빽히 서 있었다. 그 수는 약 오십여 명, 산 위의 주루에 있던 소녀들과 같은 차림새였으며, 이러한 나의(羅衣)는 여인곡 내에서도 상층의 계급에 속하는 것 같았다. 다시, 그 뒤론 일률적으로 짐승가죽의 피의를 입은 소녀들이 은도를 비스듬히 빗겨 들고 있었다. 아무리 못 잡아도 일천은 족히 될 듯한 숫자다. 이 신비조직의 규모는 뜻밖에도 방대한 것 같았다. 많은 인원이 모여 있는데도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구양 조운을 이곳까지 데려온 소녀들은 그를 대전의 가운데에 세워놓고 여인 들 속으로 들어가 엄숙히 섰다. 이때 돌연, 징....... 징.......... 하고 은은한 징소리가 울려퍼졌다. 다음 순간, [ 곡주님께서 납시오. ] 하는 긴 외침과 함께 네 명의 백의소녀가 걸어 나오더니 휘장의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 중, 가장 좌측의 소녀는 바로 산 위의 주루에 있던 주약(朱藥)이었다. 구양조운은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주제파악이나 할 일이지..... 그렇잖아도 못 생긴 얼굴이 더욱 추하게 변한다. 주약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바로 그때, 가볍게 계곡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휘장 뒤로 섬세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순간, 대청이 떠나갈 듯한 외침이 공손히 시립해 섰던 소녀들의 입에서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 곡주님을 영접하옵니다! ] 그림자는 가볍게 손을 저어 보이더니 자리에 앉았다. 주약이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와 보였다. 흰 치마를 펄럭이며 대 위에 우뚝 선 모습은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한 등운선 녀의 자세를 연상시켰다. [ 본곡 대례 제오조에 의거, 지금부터 무단 입곡인 구양조운에 대한 입곡대전을 실시한다! ] 무단입곡이라니?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주루를 차려 놓고 억지로 취선밀을 먹여 붙잡아 온 것은 그럼 누군가! 주약의외침이 이어졌다. [ 구양조운에게 해취주를 먹이라! ] 해취주, 취선밀의 취기를 없애는 해독제를 탄 술이리라. 무리 중에서 피의소녀 한 명이 걸어나와 쟁반에 받친 자색의 술잔을 구양조운 에게 내밀었다. 구양조운이 그것을 단숨에 마시자 그녀는 구양조운의 발에 걸린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철컹! [ 이것은 안 풀어 주나? ] 구양조운은 손을 내밀며 씩 웃어 보였으나 소녀는 냉담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주약이 다시 냉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 구양조운! ] 구양조운의 시선이 힐끗 그녀를 향했다. [ 본곡은 능력이 있는 자를 존중한다. 지금부터 그대에게는 세 가지의 관문이 주어지거니와 통관이면 본곡 귀빈의 예우를 받게 될 것이요, 불통관이면 노예의 대접을 받게 된다! ] [...............] [ 그대는 깊이 생각하여 좋은 결과를 가지게 되길 바란다! ]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무엇이 통관이고, 불통관인가? 나가고자 마음먹었다면 이 따위 여인곡쯤 이미 수십 번도 더 나갔을 것이다. 헌데, 멋대로 붙잡아 들인 후 귀빈이요, 노예라면 이는 바로 의원이 죽어가는 환자 를 앞에 놓고 죽겠는가 살겠는가 묻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 그야말로 제멋대로군. 좋아 나는 너희들의 장난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보아주겠다! )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구양조운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거 재미있겠구료. 어서 시작해 봅시다. ] 주약의 손이 번쩍 쳐들렸다. 순간, 줄지어 서 있던 무리의 끝에서 이십여 명의 피의소녀가 걸어 나왔다. 그녀들은 거대한 철판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구양조운의 앞에다 가뿐히 내려 놓았다. 철판의 길이는 삼 장 가량, 판의 위에는 거무튀튀한, 주먹만한 돌들이 수백 개나 놓여 있었다. [ 제일관 소철상보(燒鐵上步)! ] 소철상보, 달구어진 철 위를 걷는다 라는 뜻이니....... 주약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녀들은 돌 위로 부싯가루를 던졌다. 순간, 기이하게도 팍하는 소리와 함께 새파란 불꽃이 일어나더니 이어, 돌이 발갛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혈화석이란 것으로서 티끌만한 불씬만 가까이 해도 스스로 타는 돌이 다. 탈 때의 온도는 보통 세배에 이르로 가히 용암과도 같으니 시자(試者)는 즉 시 포기해도 무방하다! 단, 세 걸음만 걸어도 통관한 것으로 인정하겠다.] 피의소녀들은 긴 밧줄을 들고 철판의 양쪽에 나뉘어 섰다. 아마도, 시자가 철판 위를 걷다가 의식을 잃을 경우를 대비한 것인 듯, 조용한 침묵 속에........ 히죽히죽 웃으며 구양조운은 철판의 앞으로 다가섰다. 살갗을 태울 듯 무서운 열기가 왕창 전신으로 끼쳐왔다. 하나, 그는 조금도 망설임도 없이 그 위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지지직..... 즉시, 살이 타는 섬뜩한 둔음과 함께 느끼한 노린내가 피어올랐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삼엄한 고통이 전신을 휘몰아쳤다. (욱!) 구양조운은 다급히 희대의 신공 양심여의공을 끌어올렸다. 제칠절 이자결 다가오는 힘은 흐뜨러뜨리고 이미 부딪힌 힘은 분산시킨다. 설사 천 근 무게의 바위가 덮쳐온다 해도 그 방향을 틀어낼 수 있는 묘결! 즉시, 발바닥을 타고 오르던 열기가 확연히 사라졌다. 따끔거리던 아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없어졌다. 두 걸음, 세 걸음째 드 모습을 숨죽여 지켜 보고 있던 여인곡의 여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 다.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녹여대는 가공할 혈화석이 아닌가? 헌데 보라! 온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마치 북풍한지에 알몸으로 내팽개쳐 지기라도 한 듯 부들거리며 걷고 있는 저 희한한 사내의 모습을 [으...... 춥다....... 추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판의 옆에 대기하고 있던 피의소녀 하나가 고개를 갸우둥거리며 혈화석 위 로 발을 내디뎌 보았다. 순간, [꺄악!] 그녀의 입에선 비단폭의 찢겨 나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의 시선 속으로 이미 반이나 익어버린 그녀의 발이 쏘아져 들어왔다. 혈화석은 건재하여 조금의 이상도 없다! 이상이 있는 것은 바로 저 괴상한 사내인 것이다. 이때, 구양조운은 이미 철판을 다 지나 내려서고 있었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는 철판의 앞에 쭈그려 앉더니 손으로 혈화석 을 쓰다듬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상해..... 이렇게 차고 시린 돌을 주약인가 하는 여자는 뜨겁다고 말했단 말이야. 그것도 몹시 뜨거운 것처럼 말했거든..... 거짓말을 한 것은 이 돌일까...... 그녀였을까.......] 주약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다급히 앙칼진 어조로 외쳤다. [제이관 소철상부!] 이번엔 또 뜨거운 철을피부위로 올려 놓는다는 얘기인가? 대열의 선두, 그 계급이 높아 보이는 오십여 명의 나의소녀들 중 한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 왔다. 그녀는 몹시 괴상하게 생겼다. 피부는 우들우들, 두들두들한 것이 마치 악어껍질을 보는 것 같고, 두 눈은 개구리처럼 툭 불거져 나온 극추의 몰골이었다. 그녀는 구양조운의 앞에 우뚝 서서 그를 노려 보더니 돌연, 뚝배기 깨지는 듯 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해괴한 사술따위로 눈을 현혹시키는 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다. 두 번째 관 문, 소철상부에서는 그대가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기 바란다.] 신공 양심여의공을 사술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양심여의공은 신승 자초 이래 삼십여 년 동안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며, 신승 자초의 시절에도 완전히 펼쳐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구양조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이 그런 사술 밖에 없으니..... 하나, 이번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 소.] [흥!]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나의소녀는 철판 위의 혈화석을 가리켰다. [저것을 각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는다. 오래 견디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나의소녀는 서슴치 않고 아직도 지글지글 타오르는 혈화석을 집어 들더니 자 신의 손바닥위에 올려 놓았다. 치지직....... 즉시, 살이 벌겋게 익어들어 갔으나 나의소녀는 오히려 요사스럽게 웃으며 품 속에 서 곰방대 하나를 꺼내더니 태연히 불을 붙였다. [푸우!] 그녀가 내품은 담배연기가 구양조운의 얼굴에 확 끼쳐왔다.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그 자리에 턱하니 정좌하고 앉았다. 그는 태연히 혈화석을 두 개 집어들더니 그것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 았다. 치지직...... 섬뜩한 고통, 그는 이번엔 신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맨몸으로 버티어 보기로 했다. 고통은 살인적이었다. 그의 이마 위로 순식간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으며 나의소녀를 향해 오히려 씩 웃어 보였다. [그 곰방대 좀 빌려 주겠소?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지만 그냥 있자니 심심해 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 보던 주약의 아미가 깊이 찌푸려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허벅지는 손바닥보다 훨씬 여리고 약한 곳, (거기다가 소추는 각피공을 익혀 웬만한 열한은 느끼지도 못하건만..... 오히 려 기세에 있어 저 자에게 밀리고 있구나.......) 그녀는 나직한 탄식을 터트리며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 그만! 통관을 인정한다! ] 순간, 무리 속에서 가벼운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세 개의 관문, 지금까지 제이관 이상을 통과한 자는 없다. 주약의 말과는 달리 제일관만 통과해도 여인곡의 귀빈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통례였다. 헌데, 구양조운은 그 어려운 관문을 두 개나 웃으며 통관한 것이다. 이때, 주약의 냉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 구양조운! 제삼관에 임하겠소? ] [ 당연한 일이 아니오? 그럼 나보고 노예가 되란 얘긴가? ] [ 좋소. 제삼관문 거상지투, 본곡의 거상신녀(巨像神女)와 대적 하여 그녀의 공격을 십초(十招)이상 피할 수 있어야 해요. ] [ 단 십초? ] 구양조운은 어이없다는듯 툴툴 웃었다. 십초(十招)라니, 이 아이들은 장난이라도 하고 있는 겐가?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거상..... 인가 하는 여인은 몹시 사랑스러워질 것 같구료. 지금 어디에 있 소?] [ 저기 오고 있어요. ] 쿵! 쿵! 느닷없이 대전의 땅이 부르르 울리고 있었다. 주약의 흰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무심히 시선을 던지던 구양조운은 어리둥절한 빛을 떠올렸다. [ 어디.......? ] 하나, 채 다 흘려 나오다 말고 얼어붙고 마는 말, 쿵! 쿵! 거대한 흰 기둥 두 개, 아니, 기둥으로 보였던 그것은 바로 사람의 다리였다. 회의에 찬 시선을 천천히 들어 보노라면............... 오오.... 도대체 저게 뭔가? 우둘투둘.......... 투둘우둘.......... 밀가루를 수천 개나 잔뜩 부풀려 놓은 듯한 거대한 물체,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은 물체의 아득한 끝, 아마도, 사람들이 얼굴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콩알처럼 박힌 두 눈과 코 때문이었다. 그리고 입, 맙소사! 코끼리 열 마리가 나란히 서서 들어가고도 남을만큼 크다. 손가락 하나가 구양조운의 몸 크기만한 이 괴물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거상(巨像)이라고.....? 신녀라고.....? 어디로 봐서 이 괴물이 여자란 말이냐? 허린지 뭔지에 들린 저것이 치마인가? 굶주린 백성 백 명이 저 안에서 비를 피할 수 있을게다............. ) 생각은 길고, 행동은 짧다. 거상신녀는 우뚝 선 채 가슴을 그림자처럼 두들겨대더니, [ 크아아____! ] 귓청이 멍멍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구양조운을 향해 덮쳐 왔다. 그 거대한 몸에 비해 그녀의 동작은 가볍고 빠르기 이를 데 없었다. 집채만한 발바닥이 구양조운을 짓밟아 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녀의 행동이 이렇게 빠르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지라 멍하니 서 있다가 하마터면 발밑에 밟힐 뻔했다. 쾅! 그야말로 옷깃 하나의 차이로 무시무시한 맹공을 피한 그, 숨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또 우악스런 손이 그를 움켜쥐어 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최대의 속도였는데도 손은 그의 발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구양조운은 주약이 말한 십초의 의미를 알았다. 거상신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거기다가 또 그 몸이 비정상적으로 컸으므로, 아무리 신형을 빨리 움직여 본다 해도 그것은 마치 부처 손 안에서 든 손오공 처럼 그녀의 세력권 내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양조운이 이초(二招)나 가볍게 피해내자 거상신녀는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쫘악! 그녀의 손끝에서 채찍 하나가 뱀의 혀처럼 날름대며 솟아 나왔다. 말이 채찍이지, 두께는 커다란 나무를 방불케 한다. 만약, 저 채찍에 정통으로 얻어 맞는다면 파리채 밑의 파리처럼 납짝해지고 말 것 같았다. 쌔애액! 구야조운의 발끝에서 불영선하보(佛影仙霞步)가 펼쳐졌다. 십이성 전공력이었다. 슈팍! 그런데도 순간 그의 좌측 어깨에서 한 줄기 혈막(血幕)이 푹하고 피어올랐다. 인두에 데인 듯한 통증이 전신을 휘몰아쳤다. 아까 제이관을 통과할 때 허벅지의 데인 상처가 신법을 방해하고 있었다. 구양조운의 검미가 꿈틀했다. ( 무자비한 계집! ) 그는 차륜맹전(車輪猛轉)의 신법(身法)으로 구르듯 뒤로 물러난 후 우뚝 몸을 세웠다. 그의 입에서 우렁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 묻노니 나도 공격을 할 수 있는가? ] 불문의 사자후(獅子吼)가 실린 음성이었다. 막 다음 공격을 가하려던 거상신녀의 몸이 주춤할 정도로 이 목소리는 우렁찼다. 주약은 급히 한 손을 들어 거상신녀를 제지시킨 후, 구양조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공격을 해도 무방해요. 할 수만 있다면. ] 지금까지 피하기에도 급급한 주제에 어찌 공격을 하겠느냐는 비웃음이 그녀의 어조에 숨어 있었다. 구양조운의 입가에 한 줄기 냉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드디어 화가 치민 것이다.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냉막한 웃음과 함께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 본시 여자와 싸우지 않는 것을 스스로의 계(戒)에 포함시켜 왔거늘 오늘 나는 그 계를 깨뜨리리라! 나의 잔인함을 탓하지 말라! ] 그는 빙글 몸을 돌려 거상신녀와 마주 섰다. 거상신녀는 히죽 웃고 있었다. ( 일수(一手)만 휘둘러도 중상을 입고말 잔인한 손속의 계집! 그 괴물 같은 손 아래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피를 흩뿌렸으랴! 용서하지 않는다! ) 한 순간, 그의 몸이 맹렬하게 땅을 박찼다. 슈팍! 한 줄기 위맹한 장풍(掌風)이 거상신녀의 복부를 쳐나갔다. 펑! 웬만한 고목은 그대로 부러져 나가고 말 위력! 하나, 거상신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파리 한 마리가 건드린 정도의 반응도 그녀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되튀어 나온 반동으로 구양조운이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검미가 짙게 찌뿌러졌다. ( 과연 괴물이다. 피하지방이 마치 용수철처럼 충격을 흡수해 내는구나. 장력 이 아니라 검으로찔러도 소용이 없으리라..... ) 쌔액! 거상신녀의 무시무시한 채찍이 다시 그를 휩쓸어 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그 채찍을 마주쳐 나갔다. 채찍이 몸을 강타하려는 순간, 그의 몸은 돌연 한 자정도 사뿐히 떠올랐다. 동시에, 쇠사슬에 묶인 그의 쌍수가 일제히 뻗어나깠다. [ 파자결(破字訣)! ] 아아....... 파자결! 양심여의공 제일공, 여의십사식(如意十四式) 중 제일결(第一訣)! 순간, 윙윙윙_______- 그리 크진 않으나 귓전을 멍하게 하는 파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공간에 피어 오른다 싶더니 거상신녀의 가 슴을 강타했다. 푸학! [끄악!] 거상신녀의 몸이 튕기듯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쾅! 지축이 찌르르 울린다. 소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분분히 흩어졌다. 대 위에 서 있던 주약의 섬세한 몸도 파르르 떨렸다. 놀람으로 옥용이 일그러진 채 그녀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저럴수가......] 그녀는 거상신녀가 타의에 의해 나뒹구는 것은 난생 처음 본 것이다. 거상신녀가 어떤 괴력의 소유자인가 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그녀였으므로 놀 람은 더 컸다. 이때, 휘장 뒤에서 영롱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 하나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주총관, 저 사내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신비의 여인곡주이리라. 주약은 공손히 대답했다. [구양조운이예요.]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내심 또다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비여인곡의 여총수 냉엄하고 신비로운 그녀가 언제 뭇 사내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던가? 아무리 준수하고 무예가 뛰어난 사내라도 벌레보듯 무관심하던 그녀였다. 헌데, 그런 그녀가 저토록 추악한 사내의 이름을 직접 물어온 것이니..... 한편 화가 날대로 난 구양조운은 이때 공격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발로 땅을 구르며 공중으로 둥실 떠오른 후 쌍수를 안으로 가볍게 끌어 들이는 시늉을 했다. [흡자결!] 여의십사식의 제팔결 여의십사식은 뒤로 갈수록 그 위력이 더 커진다. 스승 자초는 제십결 이후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이 아니면 쓰지 말라고 충고 했었다. 주춤 몸을 일으키던 거상신녀의 몸이 흠칫하더니 앞으로 주르르 딸려 왔다. 마치, 사람이 산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딸려 오지 않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몸을 바둥거리는 거상신녀를 싸늘하게 노 려보던 구양조운은 그녀가 삼 장여의 거리를 두게 되자 폭팔하듯 앞으로 솟아 나갔다. 그는 단숨에 거상신녀의 머리 위로 튀어 오르며 동시에 양손의 쇠사슬로 그녀의 목을 휘어 감고는 공중으로 더 높이 솟아 올랐다. [끄악!] 쇠사슬이 거상신녀의 목을 깊숙히 파고 들었다. 신녀는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그녀의 흰자위가 까뒤집히고 있었다. 소녀들은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누가 보든 이미 거상신녀의 패배는 확실했다. 다만, 저런 상태로라면 그녀가 언제 죽는가 하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주약은 검미를 깊이 찌푸리긴 했으나 문인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하진 않았 다. 어차피 목숨을 건 싸움,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당사자들의 문제였다. 구양조운은 공중에 둥둥 뜬 채 거상신녀의 고통에 찬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 다. 커다란 입술 새로 한 줄기 핏물이 비치고..... 흰자위가 더 많아진 눈은 애원하듯 그를 바라본다. 거대한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구양조운의 입에서 냉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살고 싶은가?] [끄......... 끄으..........] 사력을 다해 거상신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구양조운은 허공을 한 차례 우러러 보더니 다음 순간 씹어 뱉듯 말을 내뱉었 다. [제기랄! 미우나 고우나 여자는 여자다! 나는 나의 계를 어길 수 없구나.] 촤르륵..... 쇠사슬이 풀렸다. 휘청 거상신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형용할 수 없는 빛이 그 시선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그루의 거대한 고목이 무너지듯 그녀의 몸은 그 자리에 엎어져 버렸다. 쿵! 기절한 것이다. 구양조운은 계단을 밟고 내려오듯 공중으로부터 느릿하게 땅으로 내려섰다. 능공허보의 절대신법이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도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이 기적을 믿지 않으려는 듯 침묵은 길고도 지 루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문득, 무리들 속에서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짝! 다음 순간 박수는 박수를 이어 번지고....... 마침내는 거대한 박수의 소용돌이가 온통 대전을 뒤덮으니..... 와르르...... 주약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구양조운에게 그윽한 시선을 던졌다. [축하해요. 구양조운은 본곡의 귀인이 되셨어요. 그리고.......] 구녀의 붉은 입술이 젊은 초강자를 향해 나풀거렸다. [거상신녀을 살려 주신데 대해 본곡의 이천 제자를 대신해서 감사드려요. 그대 와 본곡의 우정이 영원할 수 있기를 빕니다.] 말을 맺고 난 그녀는 대 아래의 한 피의소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소협에게 처소를 마련해 드리도록, 처소는......] 이때 문득, 그녀의 귓전으로 여인곡주의 실낱같은 음성이 스며들었다. [규옥헌으로 하도록, 함부로 대우할 수 없는 사람이니......] 순간, 주약의 옥용엔 형용할 수 없는 놀람의 빛이 나타났다. 규옥헌, 규옥헌이라니? 그곳은 바로 여인곡 내에서도 성지로 일컬어지는 곡주의 처소가 아닌가? 곡주는 구양조운을 처소까지 불러 무엇을 어이하겠다는 것일까? 한 줄기 슬픔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휩쓸어 가고 있었다. 대달마 제 십삼 장 10/08 14:12 377 line 第 十三 章 미녀의 조건 [아.... 아얏! 아아.......] 돼지 멱따는 소리 그것도 유난히 목청나쁜 돼지가 멱을 딴다면 이런 소리가 나올 수도 있을 것 이다. 주약은 눈을 하얗게 흘기며 아랫도리에 천 하나를 걸친 채 엎드려 있는 구양 조운의 등을 .......... [으윽!] [흥! 엄살장이 같으니!] 상처는 심했다. 양발바닥은 잔뜩 물러터져 있었고, 허벅지의 살은 반이나 패여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주약은 정성껏 상처를 다듬고 백포(白布)를 감고 있었다. 일반 문인(門人)들을 시켜도 될 일이었지만 총관(總官)이란 지고한 지위에 있 는 그녀가 손수 자원하여 시작한 일이었다. [바로 누워 봐요.] 구양조운은 끙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똑바로 눕혔다. 주약은 그의 허벅지 상처에 천을 대기 시작했다. 일에 열중하여 구양조운의 눈빛이 자신의 몸을 훑고 있는 것도 모르나 보다. 이 응큼한 사내의 시선은 주약의 엉덩이를 향하고 있었다. 등진 채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탓으로 둔부의 곡선은 얇은 옷 새로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슬쩍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져 갔다. 순간, 주약은 움찔하는 빛이었으나 가볍게 몸을 틀었을뿐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조운의 손이 조금 더 대담해졌다. 치마자락을 들치고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린 것일까? [악!] 놀람에 찬 주약의 얼굴이 홱 들려졌다. 구양조운은 물러나는 그녀의 손을 빠르게 낚아채고는 품으로 끌어당겼다. 여인의 몸은 힘없이 그의 가슴위로 무너졌다. [안돼요.] [왜?] [안돼요.] [그럼 날보고 이런 방에서 쓸쓸한 밤을 보내란 얘긴가?] [당신의 침소는 곡주님의 거처로 정해졌어요. 곡주님은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이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다. 허나 이때, 구양조운의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을 틀어막는 바람에 그녀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우읍!] 입술은 입술대로............ 왼손은 주약의 좌반신을, 오른손은 그녀의 두툼한 둔부를 쓸어 내려갔다. 사내의 혀가 마구 밀고 들어 왔으므로 주약은 일시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암록(暗綠)의 깊은 늪으로 송두리째 빠져들듯...... 공간도, 시간도 없이 그냥 둥둥 몸이 떠오르고 마는듯..... 주약은 사력을 다해 구양조운의 가슴에 손을 댔다. 이어, 힘껏 그 가슴을 떠밀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황급히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흥! 이제보니 아주 몹쓸 사람이로군요.] 구양조운은 씩 웃었다. [욕망에 거짓을 가르치기 싫은 탓이오. 잘못이 있다면 지나치게 정직한 탓 이랄까.] 주약은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아프다는건 순 거짓말이야. 두 번 아프다간 아예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겠군요.] 주약은 빙글 몸을 돌렸다. [어서 따라와요, 늦었어요.] 바람을 일으키듯 걸어막 문고리를 잡던 그녀의 몸이 주춤했다. 추수(秋水)처럼 맑고 서늘한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이제까지 몇 명의 여자를 그런 식으로 농락했지요?] 구양조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히죽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헤아릴수 없소. 다만 이토록 달콤하고 그윽한 입맞춤은 당신이 처음이었다는 것을 장담 할수 있소.] [곡주님께선 성격이 몹시 괴퍅하셔요. 당신은 그 분을 만나서 절대로 반말을 하거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해서는 안돼요.] 스르르...... 방문이 열렸다. 두 명의 화의소녀(花衣少女)가 들어서는 구양조운을 향해 무릎을 끓고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방 안으로 한 발 들이다 말고 힐끗 주약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곡주의 처소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주약을 향해 구양조운은 히죽 웃어 보였다. [곡주가 아니라 당신의 침실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순간, 주약의 두볼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쿵! 문이 닫혔다. 구양조운의 건장한 뒷모습은 문 안으로 사라졌다. [내가 왜 이럴까...... 바보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웠다. 주약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사내...... 처음 볼 땐 저렇게 못 생긴 사람도 있는가 싶었다. 두 번 볼땐 그리 못 생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세 번째 보았을땐 여러가지 매력이 함께 발견되던 기이한 사내..... 주약은 씁슬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쨋든, 그는 이제 그녀로 부터 한 발짝 멀어졌다. 곡주가 그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그의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기도 했다. 분홍빛 휘장, 녹색 심지의 화촉(花燭), 화수가 놓인 용봉침대에 연갈빛의 자개문감, 이곳은 여인의 방이다. 그것도 침실이었다. 구양조운은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털 나고..... 여자의 방은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화려한 방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허나, 곡주로 짐작되는 여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무릎을 끓고 있던 두 명의 화의소녀가 몸을 일으키며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천비(賤婢)들을 따라 오세요.] 그녀들은 방의 한쪽에 쳐진 휘장을 향해 먼저 몸을 돌렸다. 화의라곤 하나 속이 훤히 내비치는 얇은 나의다. 자연, 옷 속에서 꿈틀대는 여인의 신비로운 곡선이 틀에 박듯 드러났다. 그녀들은 두 쪽의 풍만한 엉덩이에 놀랍게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괴상한 곳...... 이곳의 여인들은 한마디로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구나..... 거기다가 자연스런 정사와 방탕도 허용이 되는 모양이다. 또한 주약처럼 소녀의 청순함을 지닌 여인도 있으니 이야말로 요지경이 아닌 가......) 휘장 뒤는 엉뚱하게도 벽이었다. 좌측의 소녀가 벽의 한쪽을 누르자, 스르르...... 그곳에선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문 안은 하나의 어둡고 긴 통로였다. 음산한 바람이 불어대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뚜벅 뚜벅...... 계단은 습하고 읍침했다. 꺼질 듯 말 듯한 유등이 이따금씩 걸린 것 외엔 죽음 같은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여인곡주, 박쥐를 어깨에 얹고 검은 옷을 발 끝까지 늘어뜨린 노파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음산한 공간에서 살 리가 있겠는가? 한 시진...... 아니, 두 시진쯤 흘렀을까? 마침내 계단은 끝났다. 두 개의 벽걸이 횃불이 빠지직 소리와 함께 타오르고 있는 모퉁이를 돌자, 세 며의 나녀가 제각기 자유분방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거대한 조각동상과 높 이 일 장 정도의 석문이 하나 보였다. 구양조운을 안내해 온 두 소녀는 석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연후, 고개를 조아리며 청아한 교성으로 외쳤다. [구양소협을 모셔 왔읍니다!] 순간, 그그긍...... 소리와 함께 누가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석문이 저절로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어, 한 소리 물처럼 그윽한 음성이 그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안으로 들어 오세요.] 듣는 이의 마음에 사정없이 잡아끄는 듯한 매혹적인 목소리, 구양조운의 두눈에 한 줄기 이채가 언뜻 스쳐 지났다. (이 목소리는.......? 이럴수가? 신비의 여인곡주가 설마하니 묘령의 소녀란 말인가?) 그는 한쪽의 선정적인 동상을 힐끗 바라보고 난 후, 이내 성큼성큼 석문 안으 로 걸어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시선을 가로막아 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쿵! 하고 석문이 다시 닫히는가 싶더니 한 줄기 불꽃이 어둠 속에서 환상처럼 피 어올랐다. 주위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심히 주위를 둘러보던 구양조운의 몸에 순간 가벼운 진동이 일었다. 석실, 이곳은 생각했던대로 하나의 석실이었다. 헌데, 일파의 지존이 머무는 곳이라기엔 너무 거리가 먼 구조, 보라! 사방의 벽엔 단 하나의 장식도 없다. 오로지 있는 것이라곤 탁자 하나와 전면이 트인 일단의 문갑하나,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했고 높은 창틈으로 흐린 빛이 스며들고 있는 삭막한 실 내인 것이다. 탁자 위와 아래엔 구겨버린 종이더미가 수북했고 언뜻 보기에도 매우 정교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지도 한장이 펼쳐져 있었 다. 벽, 좌측 벽 앞으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그림은, 한쪽은 지옥 속에서채찍과 중형에 시달리고 있는 수천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고, 다른 한쪽은 천국에서 한가로이 술을 마시며 누워있는 수천 사내들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구양조운이 보았던 공지의 그 모습이었는데...... 구양조운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기만 하자 인영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 했다. 비로소 그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여인, 긴 흑발은 어둠처럼 검고 짙은 빛으로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졌고, 역시 검은색의 장포가 발끝까지 드리워져 있다. 얼굴에 한 개의 면사를쓰고 있는 탓으로 그 용모는 알아볼 길이 없으나 장포 세로 드러난 손의 섬세함이며 목에서 어깨로 흘러내린 정교한 호선 등이 그녀가 보기드문 미녀임을 대신 말해 주는 듯, 헌데 지금 그녀의 발에는 괴이하게도 아무리 못 나가도 삼사백 근은 족히 되어 보 이는 쇠뭉치 두개 가 달려 있었다. 기이한 일,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눈앞의 여인은 틀림없는 여인곡주였다. 그런데, 이 지하세계에선 유아독존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왜 수인처럼 쇳덩이를 차고 있는 것일까? 여인곡주의 시선은 이내 다시 벽화를향했다. 한 소리 냉엄하면서도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면사 속에서 흘러나왔다. [본곡은 선대로부터 문인들에게 최고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어요. 마음대로 산 다는 것...... 남자의 그늘에서 뛰쳐나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본곡의 취지에요.] [........!] [문인의 대부분은 남자에게 버림 받았거나 어떤 연유로든 남자에게 의지하여 살 수 없게 된 한(恨)이 있는 아이들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위해 세상을 어지럽힌다거나 휘젖는 일은 없었어요. 당신이 공지에서 보았던 사내 들은 모두 제발로 들어와 지나치게 색을 탐한 자들이예요.] 비로소 구양조운의 입이 열렸다. [그럼 천국 같은 낙원의 사내들은?] [그들은 본곡을 수호하는 무사들이지요. 절대의 한계는 없어요. 무사도 태만하 면 노예가 되고 노예 또한 성실하면 무사가 될 수 있어요.] 구양조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 수는 없지만 곡주의 상세한 설명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소. 헌데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는 까닭이 무엇이오?] 여인곡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녀는 문득 한 줄기 탄식을 터뜨렸다. 탄식, 아아....... 하늘이 일시에 어두워지고 날던 바람이 숨을 죽이는가? 구양조운이 일찌기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씁쓸한 탄식에 이어 여인곡주 의 말이 이어졌다. [이대에 걸쳐 왔던 본곡은 지금 심각한 위경에 처해 있어요.] 말과 함께 돌연 구양조운의 머리 위로 팔랑팔랑 한 장의 쪽지가 떨어져 내렸 다. 구양조운은 여인곡주를 힐끗 바라본 후, 쪽지를 받아 들었다. 핏빛 지편, 종이보다 더 짙은 빛의 붉은 글씨가 빽빽이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곡주 귀전, 본맹은 금번 총맹주로 정식취임하신 검후의 취지를 받들어 대륙의 대화합을 도모하게 되었소. 그 위대한 작업의 일환으로 귀곡을 맹의 섬서분타로 모시고자 하니 이달 말 일 까지 회답을 주시기 바라오. 지옥련, 제구분맹 호맹 제일분맹주, 염라혈공 배위.> [지옥련..........?] 구양조운의 두 눈에 이채가 번쩍 일었다. 쇠신발이 닯도록 찾아 다녀도 없더니 이렇게 쉽게 만나질 줄이야...... 거기다가 아무리 검후라곤 하지만 엄연한 여인의 몸인 사선녀 경설이 총맹주 까지 승좌했다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사파는 완전히 하나로 뭉쳐 총력매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고, 또한, 그 동안 정체를 숨겨오던 지옥련이 공공연히 이름을 밝히고 나온다는 것은 그 들이 정파무림에 던지는 정식도전장이요. 천하패권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거 이라곤 생각해도 될것이다. [지옥련은 사파 일천 오백여 파가 연합한 가공할 집단이예요. 그것은 크게 십 이분맹으로 나뉘어지는데 호맹이란 지부분맹이라고도 불리우는 분타조직을 총 괄하는 곳이예요. 그 쪽지는 호맹이 보낸 것으로써 본곡을 자신들의 분타는 삼 겠다는 심보예요.] [흐흠...... 만일이면 바로 내일.......?] [정오예요.] 구양조운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곡주의 생각은 어떻소?]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유지예요. 사생결단의 각오로 싸울 생각이예요.] 여인곡주의 시선이 천천히 구양조운을 향했다. 보는 이의 마음을 꿰뚫는 듯 차고 시린 눈빛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당신은 본곡이 생긴 이래 볼수 없었던 최고의 고 수예요. 우리는 당신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지옥련과 말이오?] [조건은 세가지예요.] [맙소사! 세 가지 아니라 삼백 가지라도 목숨이 없고 나면 무슨 소용이겠소?] 구양조운은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허나, 여인곡주는 그가 겁먹은 표정을 짓건 말건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첫째 조건은 본곡의 내부를 드리는 것이예요.] 내부, 이곳에 내부가 있고, 외부가 있단 말인가? [이 계곡 비부는 선대가 찾아낸 곳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곳이 천년 전의 귀곡자 은거했던 귀곡별부라는 것 정도예요.] 순간, 구양조운의 시선에 언뜻 이채가 일었다. 귀곡자(鬼谷子), 이는 바로 고대 기관장학, 역리점복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사람이 아닌가? [이 귀곡별부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난측하여 우리가 쓰고 있는 터는 전 체규모의 반에 불과해요. 나머지 반은 금지로 규정하여 일체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는데 그 반을 당신에게 드리는 것이 첫번째 조건이예요.] [흐흠!]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흥미가 당기고도 남을만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근대에 유행하는 모든 기관진식, 장치, 역리, 기문의 대시조가 남긴 전인미답 의 유지를 탐험하는 일인 것이니..... 여인곡주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 조건은 당신을 본곡의 태상공봉으로 모시는 것이예요. 공봉은 곡주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같은 권한과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태상공봉.......?] 구양조운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나를 그렇게 잘 보아 주셨다니 뜻밖이오. 지옥련의 침습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늑대 대신 호랑이를 끌어 들이는 것은 아닐지......?] [세상의 일은 반의 영감과 반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죠. 당신이 그렇고 안 그렇 고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정했어요. 나는 그저 그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할 따 름이예요.] 향기로우면서도 냉엄한 꽃이랄까. 우아함과 요염함 그리고, 어둠 속의 야화처럼 보이지 않는 교태가 일신에 서리서리 맴돌고 있는 소녀, 구양조운은 비로서 그녀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충분히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세 번째 조건은......] 이때 구양조건이 다급히 여인곡주의 말을 막았다. [잠깐, 그 세 번째 조건은 내가 말하면 안되겠소?] 여인곡주의 차고 시린 두 눈에 가벼운 의아함이 스쳐 지났다. 허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승낙하시겠소?] [이미 문파의 수뇌로 모시기로 한 분입니다. 무엇을 못 들어 드리리까.] [좋아.] 구양조운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내 조건은 당신이 그 쓰고 있는 면사를 벗는 것이오.] 여인곡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이내 담담한 읏음으로 바뀌었다. 구양조운, 그의 조건은 너무 쉬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의례히 여자에게 내걸 수 있는 조건까지도 각오하고 있던 터 였고, 또한, 그것을 세 번째 조건으로 내걸려고 마음먹고 있기도 했었다. 헌데 고작 면사를 벗으라니 여인곡주는 천천히 손을움직여 먼저 발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철컹....... [문파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직면하여 스스로 사치를 버리고 있었어요. 하 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말과 함께 여인곡주는 쓰고 있던 면사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눈, 인간의 눈이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면 지금 구양조운의 눈 을 보면 된다. 그는 놀라고 있었고...... 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아아! 인간이 지니고 표출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어디까지일까? 여인곡주 그녀는 아름다왔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무슨 우물을 보는 것 같았다. 뽀얀 우유빛 안개라도 한 겹 둘린 둣 정결하고 해맑은 옥부에..... 보라! 백옥처럼 밝은 이마며, 먼 하늘의 초생달처럼 흰 아미, 그 아래의 두 눈은 추수처럼 잔잔하고 서늘하며 보석이라도 박아놓은 듯 초롱 한 한 쌍의 봉목은 또 어떠한가? 끝이 약간 뾰족하여 오만한 듯도 보이는 고즈넉한 콧날과,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뚝뚝 들 듯한 아름다운 호선의 조그마한 입술 구양조운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들을 많이 안다. 장사성의 소꼽친구인 교지만 해도 남정네들이 눈이 불을 켜는 미녀였다. 허나, 눈앞의 이 여인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보름달과 반딧불을 비교하는 격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니..... 여인곡주는 천천히 탁자 쪽으로 걸어가 밑에서 한 병의 술을 꺼냈다. 그녀는 여걸답게 병째 몇 모금 꿀꺽꿀꺽 마시더니 화사한 웃음과 함께 병을 구양조운에게 내밀었다. [우리의 성공을 의미하는 뜻에서......] 구양조운은 단숨에 병을 바닥낸 후, 긴 한숨을 내쉬고는 탄식어린 어조로 입 을 열었다. [애석하군, 애석해.....] [무엇이 그렇다는 거죠?] [나는 원래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위인이오. 그런데 당신같은 미인을 만났 으니 이제 불에 뛰어 들라면 어련히 뛰어들지 않겠소?] [그게 뭔가 애석하다는 건가요?] [그럴 줄 알았으면 세번째 조건을 내 볼에 당신의 달콤한 입술이 와 닿는 것 으로 했을것이란 얘기요.] 말이 끝나기란 전이다. 향긋한 숨결하나가 구양조운의 볼을 스쳤다. 구양조운은 얼씨구나 황급히 두 팔을 벌렸다. 허나 여인곡주은 빙글 몸을 돌려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나가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겉으론 따뜻한 보여도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예요. 여자는 그런 사람의 몸엔 잘 안기지 않아요. 오늘은 그만 주무시도록 하세요.] [야설록] 대달마 제 십사 장 10/09 15:19 281 line 第 十四 章 鐵 無 雙 구양조운이 여자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실험용(實驗用)이요, 다음 하나는 애정용(愛情用)이란 얘기다. 이것은 그가 자라난 환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우선, 그는 인생의 패배자들이 모여 사는 악인촌(惡人村)이란 매우 특이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기꾼과 도둑, 기생, 협잡꾼, 도박꾼들이 얼키고 설킨 그 세계에선 남녀의 정 사(情事)야 말로 밤낮을 가리지않고 벌어지는 행사요, 아이들의 눈요기거리이기 도 했다. 정사도 부부가 벌이는 그런 단순한 정사가 아니라, 이웃집 남자와 이웃집 여자, 강간(强姦), 윤간(輪姦)따위의 패륜적이고 부도덕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가난에 찌든 여인네들이 만두 한 조각에도 아랫도리를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 모든 것들은 그에게 정사가 남여의 신성한 약속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도 구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었던 것인데...... 이어, 보광사의 자초 밑에서 보낸 십년수업 기간 동안, 수업과목에 포함되어 있던 풍류생활은 그런 그의 생각을 현실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 십세때, 매를 맞아가며 양심여의공의 초보단계를 입문(入門)하던 그때, 스승 자초는 구양조운이 무예를 수련하던 동굴에다 한 달 식량과 더불어 기녀 한 명을 강제로 넣어 주었다. 동굴을 밖으로부터 봉한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창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이 스물거리던 나이랄까? 허나, 사실 여자란 동물에 대해 딱히 모를 것도 없던 때였다. 악인촌에 있을 땐 어린 계집아이를 데려다 놓고 노란 솜털도 돋지 않은 그곳 을벗겨 보거나, 훌렁훌렁 옷을 벗고 길바닥에서 욕통을 내놓고 목욕을 하는 아낙네들의 굵은 젖통을 싫증 나도록 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들여 보내진 기녀는 그때와는 여러모로 의미가 달랐다. 그녀는 엄연한 의미에서 그의 것이었다.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을 수도 만질수도 있는 것이었다. 둘은 아예 알몸으로 지냈다. 어른들 처럼 완벽한 교접은 아니었지만 여자를 안고 뒹굴어 보기도 하고 신비 로운 여체의 곳곳을 눈이 시리도록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 한달 동안 구양조운에게는 양심여의공을 삼성까지 수련해야만 하는 과정이 숙제로 주어져 있었다. 처음엔 무공이고 뭐고 그저 여자와 같이 있는것이 좋았다. 여자의 어느곳을 간지르면 그녀가 자지러지는가 하는 것과, 매끄러운 기름기 흐르는 그 몸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깨알이 쏟아지도록 재 미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승의 엄중한 문책을 떠올린 그는 보름도 못가 무예 수련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자는 종내 그의 수련에 방해가 되었다. 초식 대신에 예쁜 여체가 뇌리를 아른거린 것은 둘째치고라도, 애써 상념을 억제하고 몰두를 할라치면 어느 새 옆에 다가와 숨결을 토해내는 그녀 땜에 무공은 만리밖으로 달아나곤 했던 것이다. 뿐인가? 여자는 시시때때로 그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녀는 웃어야 할때 울었으며, 울어야 할때 웃었다. 지금 기분이 이럴것 이다 짐작 할라치면 정반대의 기분으로 헤실거리기도 했 고, 여름날 장마날씨처럼 오만 가지의 변덕으로 죽끓듯 그를 괴롭혀 왔다. 결국, 그는 무예수련에 실패했고 스승으로 부터 혹독하기 이를데 없는 문책을 당해 야만 했다. 그후로도, 구양조운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매우 많은 여인과 접촉을 했다. 한 명의 여인을 거칠때 마다 그는 그녀들이 지니고 있는 모순과 정체를 비례 하여 하나씩 경험할수 있었다. 그 모든 날들이 지난 지금, 대체적으로 그는 여자들을 경멸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와 접촉해도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않았다. 실험대상이라는 내정한 시선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교지조차 그 범주에 속한다 할것이다. 겉으로는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그 속은 돌처럼 굳어있는 사내..... 겉으로는 따듯하고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그 속은 냉철하고 차가운 이성(異性) 으로 가득한 사내............... 과연, 노승 자초는 사파의 검후를 상대하기 위한 정파의 무기로 가장 적절한 사내를 고른것이다. 그리고, 여인곡주 단유경(端柔瓊)은 그런 그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핫하... 만약(虎盟)의 제이분맹주(第二分盟主)께서 직접 오신것을 안다면 저들 은 거품을 물고 기절이라도 할것 이오.] 은은한 힘이 암중에 서린 목소리였다. 말을 한 사람은 세모 눈에 염소 수염을 기른 중년사내였다. 앙상하게 마른데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것이 천성적인 모사(謨士)꾼의 형상, 그의 옆에는 한 명의 비단 흑의를 걸친 청년이 조용히 걷고 있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예사인물이 아니다. 칼날 같은 검미에 한쌍의 빛나는 호안(虎眼), 표범처럼 날렵한 허리에는 한 자루 철검(鐵劍)을 찬 그, 분명히 무예를 익힌 고수인데도 태양혈(太陽穴)이 밋밋하고 눈의 정광이 밖으 로 새어나오지 않으니 이는 바로 내공이 최상승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반박귀진 (返搏歸眞)의 경지가 아닌가? 청년의 뒤로는 다시 한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청년과 비슷한 이십 오륙세가량의 나 되 그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다 르다. 일신에는 낡디낡은 폐포(弊袍), 발에는 한 켤레 초혜를 신었으며 가슴에 두 자루 검을 품은 사내...... 냉혹한 눈초리, 깡마르도록 앙상한 몸이며 마치 한 자루 검을 연상케 하는 자다. 앞서 걷는 청년의 시종 무객인 듯, 청년과 두 걸음의 보폭을 두고 그와 한치의 어김도 없이 걷고 있다. 앞서 걷고 있는 삼인의 뒤로는 십여 명 정도의 흑의인들이 절도있는 보폭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걸친 흑의의 가슴에 새겨진 포효하는 대호(大虎)의 무늬가 이월의 활 햇살아래 스 산하게 빛난다. 제이분맹주 어쩌구한 중년사내의 말을 들은 흑의미청년 철무쌍(鐵無雙)의 얼 굴에 흐릿한 웃음이 스쳐 지났다. [정노사(鄭老師)는 그런 말씀으로 소생을 부끄럽게 하는 구료.] [헛허.....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소. 철분맹주!] 중년사내는 한 소리 장탄식을 터뜨리며, [나는 철분맹주께서 우리 호맹의 제이분맹주로 영전해 왔다는 말을 처음 들었 을때 몹시 놀랐소이다 그려. 이는 바로 연맹(聯盟)내의 암투가 극에 이르고 있 다는 증거이니...] [.........!] [상부는 아마도 철혈신궁(鐵血神宮)의 철가육형제(鐵家六兄弟)를 견제하려는 뜻임이 분명하오. 철가육형제의 다섯째 서열인 철분맹주를 호맹으로 내려보낸 것도 그런 저의가 있었을 것이오.] 흑의미청년 철무쌍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을 애써 말할 필요는 없소. 정노사, 나는 총맹주를 존경하고 있소. 내 말은 직분에 최선을 다할 뿐이오.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가 가는 여인곡은 어 떤 곳이오?] 이때, 그들의 시선속으로 저멀리 한 개의 거대한 계곡이 보였다. 입구는 사람 하나가＝탯革비집고 들어갈 만큼 좁았다. 허나, 아득히 뻗어나간 산세로 미루어 엄청난 규모의 계곡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파산 여인곡은 종남(終南), 무당(武當), 무산(巫山)을 면하고 있는 섬서(陝 西)의 요충지이지요.] [..............] [대외적으로 익히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세력이란 것은 어느 정도이오?] [소림, 무당 등의 구대문파에는 못 미친다해도 정파의 대문파와 거의 맞겨룰 만한 세력이오이다.] [흐음!] 중년사내 정노사, 일명 귀지선(鬼智仙)이라고도 불리우는 그는 거듭 말을 이어 나갔다. [또 한가지 본맹이 그곳을 눈여겨 보게 된것은 그곳이 바로 천년전의 귀곡자 가 은거했던 귀곡별부(鬼谷別府)가 아닌가 하는 짐작 때문이오.] [귀곡자? 기문(奇門)의 시조(始祖).............?] [그렇지요. 만약 짐작이 맞는다면 이는 맹의 일대쾌거가 될것이오. 전설에 의 하면 귀곡별부에는 귀경총람(鬼經總覽)과 무수진경(戊隨眞經)이 있다하오.] [귀경총람..............? 무수진경...............?] [귀경총람은 한마디로 기관진식, 장치방학(裝置傍學), 성진역리(星震易理), 의법 독의(醫法毒意)등의 모든 기문(奇門)지식을 집대성한 것이고 무수진경은 신비로 운 고대검법(古代劍法)의 정화가 수록된 것이오이다. 이 두가지는 가히 무림십 보(武林十寶)에 들어가는 보물들이오.] 계곡의 입구에는 네명의 피의소녀(皮衣少女)들이 긴 장창을 들고 우뚝 서 있 었다. 그녀들은 철무쌍 일행이 다가서는데도 시선 한번 흐트리지 않았다. (엄격한 훈련을 받은 여인들이로군.........) 귀지선(鬼智仙)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운후, 품 속에서 배첩(拜帖) 한 장을 꺼내어 건노다. <지옥련 제구분맹 호맹, 제이분맹주 철혈서생(鐵血書生) 철무쌍 제일총사 귀지선 경천 배상!> 가장 선두에 서 있던 피의소녀 하나가 배첩을 받아 들더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안을 향해 신호 화전을 하나 쏘아 보냈다. 그리고는, 역시 시큰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들어 가세요.] 설사 소림사의 장문인이 본다 해도 까무라쳐 놀랄만한 이름의 배첩이었다. 헌데, 아무리 무식한 수문지기라곤 하나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귀지선 경천은 비록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심 석연지 않음을 감출수 없었다. 그런데, 이 석연치 않음은 그로부터 꼬리를 물고 비롯되었다. 곡은 짐작대로 과연 거대했고 군데군데 산봉우리만큼이나 규모가 큰 바위들이 난립하고 있어 말할 수 없이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바위 새로는 작게는 시냇물이요, 크게는 강같은 계류들이 용솟음치고 있었고, 호로병 모양으로 뚫린 절 땅이 맞닿는 곳엔 수백 개의 동 굴들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짐승가죽 하나로 상하를 가린 채 날씬한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는 피의 소녀들 은 여기저기 바위 뒤나 강가 혹은 거대한 고목 그늘에 유령처럼 서 있곤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철무쌍 일행에게 손톱만한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거나 어쩌다 시선이 닿아도 무심하게 돌려지기 일쑤였 다. (영접을 나오는 자도 없단 말인가.......?) 이때, 몸매가 날씬하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녀 하나가 십장 밖의 거대한 계류를 천천히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랍게도 물 위를 둥둥 떠서 걷고 있었다. 귀지선 정천의 눈썹이 크게 찌푸러졌다. (복장으로 보아 곡주는 아닌 듯 한데...... 일개 수하가 무력담수의 경공이라..... 여인곡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었던가?) 그를 비롯한 지옥련의 고수들은 사실 여인곡의 방대한 경치와 신비로운 분위 기에 크게 압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물을 걸어오는 미녀가 발에 조그만 판자조각을 달고 있음을 그들은 발 견하지 못했다. 이것이 싸움이라면 그들은 이미 기세면에서 크게 뒤지고 있는 것이다. 미녀는 이쪽편의 수면에 이르자 물을 박차고 뛰어 올라 일행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이며, [주약이예요. 마중이 늦은 점을 용서하세요.] 한 쪽에 서 있던 철무쌍이 두 손을 가볍게 마주잡아 보였다. [감히 귀곡의 곡주를 뵙고자 하오.] 사파인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바른 예절이 아닐 수 없었다. 주약은 그를 한 차례 힐끗 바라본 후 빙글 몸을 돌렸다. [따라 오세요.] 어떤 동굴로 들어온 것인지 기억할 수는 없다. 거기다가 동굴은 마치 거미줄처럼 살벌한 미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 마장을 걸어 들어온 것 같은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귀지선 정천은 동굴로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오랜 후에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 자체가 구궁팔괘의 진식이로군...... 귀곡자의 귀곡별부가 틀림없다.] 이때, 느닷없이 가는 풍악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을 파고 들어왔다. 걸음을 옮겨갈 수록 풍악소리는 더 가까와졌다. 어디선가 연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중인들은 앞서가는 주약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으나 주약은 아무 기색도 없이 빠른 걸음만 계속 이어가고 있을 뿐, 그렇게 다시 반다경을 걸어 나갔을까? 홀연, 한 개의 모퉁이를 돌아서기 무섭게 눈부신 광채가 중인들의 시선을 쏘아왔다. 동시에, 떠들썩한 소음이 귓전을 들쑤시고 들렸다. 광장, 이곳은 한 개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그 끝이 아득하도록 크고 웅장한 광장에는 지금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주연 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라! 전체광장을 꽉 채운 빽빽한 음식상을........ 아무리 못되도 이삼백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음식상에는 지금 천여 명의 남 녀가 둘러앉아 주연을 즐기고 있었다. 와글와글...... 부글부글...... 뿐인가?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악대가 흘려내는 곡조는 천상의 선율인 듯 그윽하기 이 를 데 없었고..... 화기애애한 기운에 장내의 허공을 감돌고 있는 것은 한 줄기의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철무쌍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쏠렸다. 정면의 높은 단상, 그곳에는 지금 광장의 어떤 것보다도 더 화려하고 거대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 었고, 천명속에 섞여 있다 해도 번쩍 눈에 뜨이고 말듯한 일남일녀가 그 앞에 웃으 며 앉아 있었다. 남! 헌앙하고 준수하다. 햇살처럼 밝고 정대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피부는 투명하도록 맑고 그래서 더 붉은 입술의 오연한 조화여..... 시리도록 흰 백의에 가슴에는 한 대의 백옥염주를 건 그. 이 아름다운 미소년의 옆에 바싹 붙어 있는 소녀는 또 어떠한가? 별빛인 양 차고 시린 한 쌍의 봉목에, 꽃잎처럼 붉은 입술 새로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가지런 하고 흰 치아를 보라! 가히 천향지색 보면 보는대로 그 시선의 자유마저 빼앗고 마는 희대의 미녀였다. 그들은 지금 다정하게 웃으며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일행이 들어섰는데도 장내의 아무도 이들을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 었다. 마치, 지나가는 벌레를 보듯 무심한 태도였다. 앞서 걷던 주약이 얼떨떨한 철무쌍 일행을 뒤 걸음으로 정면의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귀지선 정천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해괴한 일이로군. 여인밖에 없을 줄 알았던 이 여인곡에 웬 사내들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단상의 사내는 또 누굴까? 언뜻 보기에도 영풍이 만연하니.... 오 늘의 일은 아무래도 흉다길조로다....) 주약이 단상위의 미소년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미소년의 시선이 힐끗 철무쌍 일행을 향했다. 그와 철무쌍의 시선이 공중에서 불꽃튀듯 얽혔다. 미소년의 얼굴에 고요한 한 줄기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우수를 번쩍 쳐들었다. 순간, 징......... 징........... 장내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징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그토록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시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야설록] 대달마 제 십오 장 10/10 17:23 272 line 第 十五 章 素手와 鐵血 미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철무쌍 일행을 정시하며 단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본곡의 즐거운 정례연회일이오. 이런 좋은 시각을 때맞춰 찾아온 객들 은 뉘신가?]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나 순간 철무쌍 등은 귀전이 멍멍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크게 안색이 변색했다. (고수!) 귀지선의 시선이 힐끗 뒷쪽을 향했다.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수행흑의인 중 이인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 중 일인은 두 손으로 휘황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금합을 받쳐들고 있었는 데, 그가 그것을 소중히 바닥에 내려놓자 다른 흑의인이 극경의 태도로 그 금합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솟구쳐 나오는 보기(寶氣)!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두 개의 거대한 깃발이었다. 두 흑의인은 각기 하나씩의 대를 꺼내어 길게 조립한 후 그 위에다 기를 달았 다. 연후, 그것을 바닥의 청석에다 쿵 하고 꽂으니, 좌측의 것은 피빛 바탕에 금색수실의 글씨 <지옥련 제구분맹 호맹.> 우측의 것은 남색 바탕에 역시 금색수의 글씨 <군림천하.> 천하가 곧 눈 아래라는 듯 자못 도도하고 당당한 기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귀지선이 성큼성큼 걸어 양기의 가운데에 우뚝 섰다. [본인은 지옥련 지부분맹 호맹의 제일총사 직을 밭고 있는 귀지선 정천이오. 일전에 보낸 첩문의 회답을 받고자 본맹의 제이분맹주를 모시고 왔소.] 순간, 미소년의 입꼬리에 한 줄기 냉소가 스쳐 지났다. [호오..... 자못 거창한 이름들이구료. 그렇잖아도 내 도대체 지옥련인지 지옥구렁텅인지 하는 작자들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지.] 말과 함께 그의 우수가 가볍게 내둘렸다. 다음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옥배 하나가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쏘아낸 살 같은 기 세로 철무쌍의 이마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쐐액! 귀지선 정천은 눈깜짝할 새에 자신의 귀 밑을 스쳐 지난 검은 물체에 흠짓 몸 을 돌렸다. 하나의 목상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던 폐포인의 눈이 처음으로 번쩍떠졌 다. 하나, 정작 당사자인 철무쌍은 태연자약, 그는 움직이려는 수하들을 한 손을 들어 제지하며 가볍게 손을 뻗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짓쳐들던 술잔은 그의 벌린 손바닥 위에 사뿐히 놓였다. 철무쌍의 서글서글한 시선이 단상의 미소년을 향했다. [잔은 있으되 술이 없으니......] 미소년은 싱긋 웃으며 다시 우수를 가볍게 내둘렀다. [마음대로 가져다 드시오.] 이번에 다시 술병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술병은 철무쌍의 머리 위 공중에 뚝 멈춰 서더니 저절로 천천히 기울여져 잔에다 술을 채웠다. 또르르...... 철무쌍은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킨 후, 가볍게 손을 휘저어 술병과 잔을 돌려 보냈다. 잔은 고요히 원 위치에 놓여지고 병은 그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른후 스르르 내려 앉았다. 설명으로는 길었으나 이 모든것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들, 서로 잔과 병을 쳐내고 주고 받은 그 속에 깃든 것은, 허공섭물(虛空攝物)보다도 한 차원 높은 무예인, 강기로서 물체를 조절하는 운기조물(運氣調物)의 신공들! 거기다가, 대접인수(大接引手)와 격공연주(隔空然酒)의 묘기가 곁들어지니 보는 이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릴수 밖에, 두 사람은 이 한 수로서 서로의 기량을 시험해 본 것이 틀림없었다. 결과는 백중지세였다. 하나,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지선 정천은 이 순간 심장이 떨어져 나갈 정 도로 놀라고 있었다. 철무쌍,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이번에 사파대연합회의 기치 아래 모여든 천하의 거효마웅(巨梟魔雄)중 에서도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전설의 마계오류 중 패류(覇流) 철혈(鐵血)의 무예의 달인! 성숙해(星宿海) 철혈신궁(鐵血神宮)으로부터 내려온 철가육형제중 다섯째로서, 처음에는 십이분맹의 하나인 대외공격 표맹(豹盟)을 맡았으나 원체 그 지모와 무예가 뛰어난지라 연맹의 상부에서조차 두려움을 느끼고 호맹의 한직(閑職)으 로 좌천시킨 괴물중의 괴물인것이다. 오늘의 이곳에도 그는 사실 유람삼아 나온것 이었다. 귀지선 정천이 바람이나 쏘이라고 권한 일이기도 했다. 헌데, (그런 그와 백중지세라...... 저런 고수를 나는 왜 들어보지 못했을까.....) 이때, 철무쌍의 두는에 한 줄기의 기광 서렸다. [오늘 나는 뜻밖에도 고인(高人)을 만났군.] 그는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나서며, [철혈의 문인인 철무쌍이 삼가 고인의 사문내력을 듣고자 하오!] 철현! 이 한 마디에 미소년의 얼굴에는 가볍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의 얼굴에서 놀란 빛은 떠오를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다. 대신, 그는 잔뜩 비웃음이 서린 어조로 비양거리듯 말했다. [철혈은 그 문인(門人)을 잘못 두었군. 기껏 남에게 협박편지나 보내는 그 정 도의 심보로 철혈운운하고 있다니................] 모욕의 말, 바로 그때, 철무쌍의 뒤에 서있던 폐포인의 시선이 처 의 미소년을 향했다. 아니, 향한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허공을 밟아 나가고 있었으며, 밟아나간다 보이자 그의 검은 어느새 미소년의 목을 겨누고 있는것이 아닌가? 중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삼십여장의 거리다! 하나! 도대체가 이 순간 저 폐포인의 몸놀림은 그러한 거리와 공간의 제한을 아예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으니..... 폐포인의 눈빛은 회색이었다. 그것도 끝없이 암울하고 깊어 보이는 무저의 동공이었다. 감정없는 야수의 눈빛을 한 채 그가 말했다. [주공에게 무례한 자는 모두 죽는다.] 듣는이의 내장을 훑어낼듯 건조하고 기분나쁜 목소리, 하나, 주위의 놀람과는 아랑곳 없이 미소년은 히죽 웃었다. [누가 말인가?] [누구든.] [그런 썩어빠진 검으로 나를 찌를 스 있다고 생각하나?] 폐포인의 검이 앞으로 조금 뻗어졌다. 순간, 미소년의 옆에 붙어있던 그림 같은 미소녀의 얼굴에 가벼운 공포의 빛 이 서렸다. 검은 미소년의 목으로부터 정확히 한 방울의 핏방울을 흘려냈던 것이다. 미소년의 시선이 새파란 청광을 발하는 검신을 따라 폐포인의 손을 향했다. 손, 가볍게 뼈마디가 불거진 섬세한 손가락, 피부는 안의 혈관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그러한 피부로 하여 손은 마치 검자루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소년은 폐포인을 올려다 보며 히죽 웃었다. [사람 꽤나 죽인 손이로군. 몇명이나 죽였나?] 폐포인의 동공에 한 순간 섬뜩한 녹색의 귀화가 일었다. 다음 순간, 그는 힘껏 수중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악!] 옆에 있던 미소녀의 입에서 놀람에 찬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허나 이때, 폐포인은 자신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고 있음을 느꼈다. 의례히 손 끝에 닿아와야 할 검이 무엇인가를 찌른 묵직한 감촉이 없었다. (이럴수가........?) 그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검, 검이 자신을 속일 리가 없다. 그가 마음먹어서 찌르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때, 기울어지고 있는 그의 옆구리로 둔한 통증이 뚫고 들어왔다. [욱!] 우두둑........ 자신의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 수백 개의 바늘로 찔리고 있는 듯한 섬뜩한 둔음과 함께 그의 몸은 단하로 사 납게 굴러떨어졌다. 쿠당탕! [웩!] 먹은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단 한대 맞은 것이 이렇게 아프다니, 아플 수 있다니! 폐포인은 이를 악물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모발이 하늘을 향해 곤두서고 있었다. 미소년은 대위에 선 채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내려다 보는 저 시선 속에 깃든 것은 경멸인가? [와악!] 짐승 같은 한 소리 부르짖음과 함께 그의 몸이 청석가루가 일도록 땅을 박찼 다. 슈팍!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더 빨랐다. 하늘을 두 족 낼 듯한 무지개 같은 검광이 그 뒤를 이었다. 쐐애애액!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철무쌍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러졌다. (언제나 냉정하던 철혼이 저렇게 흥분하다니, 저 자의 심기에 휘말린 것이다. 저렇게 되면 이미 오할의 승산이 사라지게 된다.) 이때, 미소년은 천천히 우수를 내밀고 있었다. 흰 소맷자락에 반쯤 덮인 손등, 헌데, 본래도 매우 흰 손이긴 했지만 이 순간 그의 손은 마치 밀납처럼 창백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의 혈관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창백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순간, 철무쌍과 귀지선 정천의 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부르르 떨렸다. [저것은 .........?] 철무쌍은 말을 다 이을 새도 없다는 듯 공중으로 폭사되어 나갔다. [그만둬!] 폐포인 철혼도 미소년의 몸이 투명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소수지예!) 하나, 솟구쳐 가던 검의 기세는 이미 멈출수가 없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미증유의 거력이 그의 몸을 휩싸오고 있었다. 언뜻, 주공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 것도 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폭음, 꽝! 꽈르르! -------손, 희디흰 한쌍의 손 만년의 동토에 서리서리 맺힌 죽음의 저주인가? 흰 눈위에 피어난 소화(素花)의 아픔인가....... 손은 희고 창백하며..... 손은 차고도 어두우니....... 이 하나의 손을 일컬어 마계 제오의 무예, 소수라 일컫는도다........ ------ 가슴은 뜨겁다! 억눌려 온 활화의 기운을 잉태하여 삼라의 천하에 횃질러진 지옥의 겁화여! 가슴은 뜨겁고 더우며....... 가슴은 만화의 정열일지니........ 이 더운 가슴을 일컬어 마계 제삼의 무예, 철혈이라 하도다! 꾸꿍! 꽈꽈꽈! 흰 손이 내뻗어내는 눈이 멀 듯한 창백광! 철무쌍의 주먹으로부터 휘둘러나온 핏빛 권화! 우르르........... 쿠쿠쿵! [아악!] [욱!] 소녀들은 휘몰아쳐 오는 미증유의 강기에 추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뒹굴어갔 다. 즐비하던 음식상이 공중으로 치솟았으며...... 그 거대한 대청이 흙먼지를 떨구며 우르릉대고 잇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았다. 바람에 떠받친 깃털인 듯 공중에 정좌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공간을 웅웅 떨어 울리던 두 개의 목소리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말했으면 오지 않았을 텐가?] 두 사람의 몸은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윽고, 좌중을 휘몰아치던 모든 풍사가 완전히 가라앉을 무렵, 그들의 발도 땅에 닿았다. 철무쌍이 말했다. [형제여, 왜 이런 심산에 은둔하고 계시는가?] 미소년은 씩 웃으며, [그럼 세상 밖엔 좋은 일이 있단 말이오?] [핫하......] 철무쌍은 호탕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읍의 예를 취했다. [이달 보름, 철모는 정식으로 형제를 모시고자 하오. 소수와 철혈은 천년 전부 터 남이 아니었으니 더불어 장안의 경치를 돌아봄이 어떠하오?] 미소년은 한쪽에 엉거주춤 선 폐포인 철혼을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 다. [기꺼이.] [핫하.] 철무쌍은 껄껄 웃으며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이곳은 알고 보니 형제의 땅이었다! 나 철무쌍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이 좋은 날을 기하여 향후 대파산 백 리 이내로는 하마은검(下馬隱劍)하여 예의를 차리 도록 하라!] 기가 거두어지고...... 철무쌍은 손을 흔들며 수하들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미소년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계곡 밖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철무쌍의 모습이 아득히 사라지는 동안에는 몇 번이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뜻밖에도 소수의 제자를 만났다는데 대해 매우 흡족해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아까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소녀의 시선이 힐끗 미소년을 향했다. [도대체 무슨 심보죠? 당신은 왜 자신이 마계의 전설적인 오대세가 중 하나인 소수문의 전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죠?] 미소년은 씩 웃었다. [언제 말할 기회라도 주었던가?] 웃는 그의 입가로 돌연 실낱 같은 핏물이 내비쳤다. [어맛!] 미소녀의 놀람에 천 시선을 끌어 안고 그의 몸은 느릿하게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야설록] 대달마 제 십육 장 10/11 16:13 334 line 第 十六 章 秘 洞 奇 緣 [천하의 거두들이 모인 곳이니....... 지옥련은 어쩌면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거대한 암투의 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철무쌍이 단독으로 만나자고 제의해 온 것도 그런 안목에서 풀이해 보자면 나를 자신의 세력으로 이용하려 는 속셈인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심장부까지 뚫고 들어갈 좋은 기회가 아닌가..... 분열이 있다면 그 분열을 철저히 이용하면 된다.] 똑! 똑! 물방울이 듣고 있었다. 거대한 종유석군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었다. 손에 든 화섭자가 아니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칠흙같은 어둠이련만..... 횃불아래 드러나는 오지의 비경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로왔다. 마치, 물가의 연화대같은 형상에다 화용, 수용을 한 온갖 진기한 형상의 암군들, 그런 거대한 천연조각의 신비가 이미 이 마장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검군 영접의 일은 어찌 됐을까? 아무리 정파의 기재들이 합류한다 해도 철무 쌍 같은 고수가 두셋만 합세한다면 그들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지옥련에는 철무쌍 같은 고수들이 얼마나 있는 것일까?) 이때, 옆구리로 따끔히 번진 아픔에 구양조운은 다급히 비명을 질렀다. [악!] 그의 옆에선 여인곡주 단유경이 삐죽하게 입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가 사납게 꼬집은 것이다. [흥! 도대체 이상한 사람이군요.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가 싶어 온갖 보약을 먹 여가며 치료해 놨더니 이곳으로 들어오자고 난리를 치고......] [흐흠?] [막상 또 이곳으로 들어오니 두 마장을 걸어 오도록 딴생각이니 당신의 마음 이란 것은 들쑥날쑥 고무공처럼 생기기라도 했던가요?]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무슨 말씀을.... 나는 줄곧 당신의 예쁜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었소. 어두우니 당신을 통 볼수 있어야지.] [흥! 응큼한 수작!] 이번에는 그의 배로 주먹이 한 대 제빠르게 틀어 박혔다. [욱!] 고사리 같은 손치고는 이를 데 없이 매운 주먹이었다. 구양조운은 배를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한 장의 양피지가 떨어져 내렸다. [엉뚱한 생각말고 빨리 길이나 찾아봐요.] 투덜투덜...... 무슨 여자가 손만 닿으면 송충이라도 만진 듯 주먹질인가 주먹질이...... 양피지는 일견해 보기에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듯한 낡은 지도였다. 지도 위에는 붉고 검은 줄이 종횡으로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다. [이거야 원 귀곡자 선생께선 악취미를 지니셨군. 이게 지도인가? 애들낙서지.] 향긋한 장향과 함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지도의 한 편을 짚어왔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이쯤이예요. 어린 아이처럼 투덜대지 말고 빨리 확인 해 봐요.] [오긴 제대로 온 것 같군.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제부턴 길이 없소. 보라구.] 횃불이 앞쪽을 비추었다. 과연 길은 끝나 있었다. 아득한 어둠, 끝이 없는 낭떠러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우측으로는 시커멓게 입을 벌린 연못이 하나 있었다. 허나, 지도에는 분명히 길이 표시되어 있다. 그것도 검은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단유경은 옥수로 이마를 짚고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문득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두보의 시에 보면 현수는 목마름이 없다는 귀결이 있어요. 자고로 물은 검은 색을 뜻했으니 지도의 흑선은 바로 물길을 뜻함이 아닐지?] 그럴 듯한 해석이라고 여겨졌다. 그들은 이미 지하 수백장을 내려온 참이었다. 어찌나 길이 어둡고 험한지 이곳까지 오는데만도 꼬박 하루가 걸렸던 것인 데...... 앞쪽의 낭떠러지는 아무리 달려봐도 길이 없었다. 이 웅대한 지하세계의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듯 한없는 어둠으로 깊이 움츠리 고 있을 뿐, 하지만, 연못이란 것은 말이 연못이지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깊은 심 연이 아닌가? [어서 들어가 봐요, 응?] 횃불 아래 요염하게 빛나고 있는 단유경의 얼굴은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오. 당신의 일천 문인들도 지하 수백 장 아래의 심연에 빠 져 죽은 당신의 시체만은 건지지 못할것이오.] [뭣! 그럼 이곳까지 와서 그만 둘 건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유경은 그의 등을 탁 떠밀었다. [어! 어!] 구양조운은 버둥거리며 별볼일없이 십 장 아래의 심연으로 빠져 들었다. 단유경도 까르르 흐드러진 웃음을 날리며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풍덩! 첨벙! 심연의 물은 벼가 시릴 정도로 차고 서늘했다. 구양조운은 물에 빠지기 무섭게 머리를 밑으로 하고 잠영의 자세를 취했다. 어릴 때부터 귀래하의 밑바닥까지 샅샅이 해친 그로선 헤엄이라면 자신이 있 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더듬어 보니 단유경은 이미 은어처럼 물을 헤치고 밑으 로 쏘아져 내려가고 있었다. 어둠 속의 꽃처럼..... 스르르 꺼지듯 사라지는 여체의 모습이 일순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좋아......]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진기를 한 올 끌어올려 몸을 보호함과 동시에 맹렬히 밑을 향해 물을 박찼다. 슈욱! 부글부글....... 거품이 인다. 아득한 어둠이었다. 얼마 안가 구양조운은 앞서가던 단유경과 몸을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문득, 그녀의 손이 그의 한 쪽 팔을 잡아왔다. 그녀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담대한 척 하지만 여자라 할 수 없군......) 그건 그렇고 이 심연의 끝은 어딜까? 아무리 진기로 몸을 보호한다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두 시진 정도 다시 올라가야 하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내려가는 한계가 한 시진이란 얘기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 그의 곁에 바짝 붙다시피 물을 헤쳐가던 단유경이 잡고 있던 손가락을 구부리 더니 그의 손바닥에다 빠르게 글을 써 나갔다. --그런데 그 철무쌍과 일 장을 맞부딪친 후 당신은 왜 그리 오래 참았지요-- 느닷없는 말, 구양조운은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피식 웃었다. 그도 그녀의 손바닥에 글을 썼다. --그때 내가 그의 껭 낫摸師 철 무쌍을 그리 쉽게 물러가지 않았을 것이오. 그는 금방 다른 방도를 생각해 냈을 것이오-- --그가 그렇게 강한가요?-- --일장을 부딪히는 순간 나는 마치 숨이 막힐 것 같았소. 그가 그렇게 강하리 라곤 나도 미쳐 상상치 못했지-- --당신들은 같은 마계오류의 인물들인데 왜 그리 차이가 나지요?-- 구양조운은 픽 웃었다. --상세한 것은 말할 수가 없으나 어쨌든 나는 소수 무예를 익힌 지 얼마되지 않소. 거기다가 지니고 있는 다른 무예는 쓸수 없어서 사용치 않았소. 하지만 그런 무예를 다 쓸수 있었다손 쳐도 겨우 백중세나 유지했을 것이오. 그는 틀 림없이 강하오.-- 단유경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글을 써왔다. --당신은 정말 신비로운 사람이예요. 하지만 마도의 인물이라곤 아직도 여겨 지지 않아요.-- 한시진 쯤이 지난 것 같았다. 허나, 심연은 여전히 그 바닥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시 올라갈 것인가 계속 내려갈 것인가...... 결정은 빠를 수록 좋았다. 구양조운은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단유경은 어둠 속에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연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하나 있었다. 그 물이 계속 흐르는데도 수면 이 넘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가 물이 새어 나가는 통로가 있다는 얘기......) 구양조운은 문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온 이상 뿌리를 뽑고야 말리라! 그는 움켜쥔 단유경의 손에 바짝 힘을 주고는 지금까지보다 두 배는 빠른 속 도로 물을 박찼다. 단유경은 움찔하는 눈치였으나 반대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소용돌이! 그것이 무서울 정도로 강한 흡인력의 소용돌이라는 것을 안 것은 거의 호흡이 턱에 받쳤을 무렵이었다. 우우웅...... 과과과...... 지옥의 문인가? 끝없이 맴돌며 검은 포말을 일으켜대는 거대한 물줄기! 밀려드는 섬뜩한 공포로 주춤 몸을 세운 두 사람을 그 소용돌이는 사정없이 삼켜 왔다. 쿠쿠쿠! 온몸이 빙글빙글 미친 듯이 맴돌아 갔다. (끝장이다!) 아득한 심연의 나락 속으로 마음까지 가라앉고 있었다. 단유경은 번쩍 눈을 떴다. (이곳이 어딜까?) 천장, 종유석이다. 심연으로 빠져 들기 전 지나왔던 지하세계에서 본 것과 같은 종류였다. 헌데, 단유경은 시선을 쏘아오는 강렬한 빛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았다. (눈부시다...... 이게 무슨 빛일까?) 이때 문득, 그녀는 의당 있어야 할 한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단유경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운!) 그녀의 시선 속으로 생소한 장면들이 쏘아져 왔다. 공간 이곳은 사방 이백여 장쯤 되어 보이는 넓은 공간이었다. 사방의 벽은 천연에 인공을 가미시켜 훌륭한 조형을 이루었고 그 사이사이엔 각종의 진귀한 구슬이 박혀 허공에 영롱한 채색 무늬를 드러내 고 있었다. 공간의 구조는 몹시 신비롭고 그 하나하나가 이곳을 만든 이의 정성을 엿보게 했다. 그 밖에 저쪽 벽 앞엔 하나의 거대한 석상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엔 갑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뇌정 투구 그리고, 세 개의 손에 커다란 검을 든 흉악한 몰골의 장군상, 이는 바로 서천의 하늘을 지배하는 벼락과 천둥을 인세에 내려보낸다는 벽력 성군이 아닌가? 이 흉측한 석상의 앞에 단정히 정좌하고 앉은 한 사람을 보는 순간, 단유경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로 구양조운이었던 것이다. 단유경은 그녀로부터 반 장은 떨어진 곳에서 찰랑이는 벽연을 향해 다가섰다. (이곳으로 올라온 것일까? 그 무서운 소용돌이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니.... 참 으로 천우신조로구나.....) 거울 같은 수면에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고 난 단유경은 자신의 몸을 무심히 비춰 보다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몸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그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섬연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옷에 외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없었다. [이봐요!] 몇 번을 거푸 불러도 대답이 없다. 단유경은 정좌하고 앉은 구양조운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단유경은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그의 무릎을 사납게 걷어찼다. 퍽! [어이쿠!] 구양조운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단유경을 바라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언제 깨어났소?] [흥! 아주 깨어나지 않았으면 싶었나요?] [핫하....... 또 시비인가? 나는 좀 바쁜 일이 있으니......] 그는 말을 잇다 말고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것을 먹든 아니면 이 책을 보든 소일하고 있구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풀릴 것도 같은데.......] 무엇이 풀린다는 건지...... 말을 섭게 그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책! 그가 던져 준 것은 한 권의 두꺼운 책이었다. 무심히 책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단유경은 순간 섬세한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귀경총람(鬼經總覽)!> 오오...... 귀경총람! 이는 바로 귀곡자가 남긴 두 개의 개세비급중 하나가 아닌가? 맙소사!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전설의 귀곡별부란 말인가? 노란 양지 바탕에 새겨진 귀경총람의 네 글자를 홀린 듯 바라보던 단유경은 구양조운이 가리켜 보였던 곳을 향해 다시 시선을 던졌다. 거대한 벽력성군의 왼쪽다리 옆, 그곳에는 지금 버섯 같기도 하고 조약돌 같기도 한 기이한 식물이 잔뜩 돋아 나 있었다. 단유경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무심리 바라보다가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것은......?] 버섯 모양의 높이 두 치 정도의 누런 식물 천년석균 그것은 바로 천년석균이었다. 천하의 의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이 세가지 있다. 그 첫째가 백 년 이상된 하수오요, 그 둘째가 햇빛이 들지 않은 곳에서 자란 삼백년 이상의 황정,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이 천년석균인 것이니..... 이 세 종류는 모두 죽었던 혼을 살리고 만병을 치유하는 희대의 신물로 꼽히 는 것들, 그 중에서도, 천년석균이란 태고의 동굴 속에서만 자라는 것으로서 도저히 인간의 발길이 미칠 수 없는 음습한 오지에서 자라는 영물이었다. 또한, 설사 찾았다 해도 뽑기 전에 빛을 쏘이면 그대로 시들고 마는지라 보통 사람 들은 평생을 가도 보기 힘든 보물 중의 보물인 것인데...... 이 희귀한 천년석균이 이곳에는 아예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분명히 빛이 비추이고 있는데도 시들지 않고 있었다. 그 밖에도, 너비 이백여 장의 이 공간은 여러가지로 신기한 것이 많았다. 우선, 사방의 공기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으며, 어디 한 군데 통풍구라곤 보이지 않는데도 호흡에는 조금의 불편함도 없고 오 히려 몹시 신선한 공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뿐인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바위 같은 것도 자세히 보니 반 각만 앉아 있어도 몸의 내 력을 증진시킨다는 온옥이요, 사방의 벽에 박힌 구슬들은 하나만 가지고도 일개 성을 살 수 있는 야명주였 던 것이니...... 한 마디로 이곳은 전체가 보물이었다. 그 어는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보배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헌데, 구양조운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벽력성군을 올려다 보는 외엔 그대로 돌덩이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단유경은 그를 잠시 눈여겨 보고 난 후, 수중의 귀경총람을 한두번 들춰 보았다. 복잡하고...... 어지럽다. 진(陣), 의(醫), 독(毒), 장(裝), 관(關), 점(占), 역(易)......... 이 많은 책들을 어찌 한 사람이 집대성할 수 있단 말인가? 단유경은 서너 장 들추다 말고 귀경총람을 내려 놓았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별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천년석균을 하나 따서 먹어 본다. 새콤하면서도 종내는 달콤한 여운이 입안에 맴돌았다. 단유경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천년석균을 여러 송이 따모았다. 그래서 여자라 하던가? 희대의 비급보다는 눈앞의 음식을 좀 더 맛있게 만들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먼저하는 그녀였다. 석균을 스무 송이쯤 벽수가로 모아놓고 난 그녀는 천천히 석전의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은 귀곡자가 살던 곳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필경 좀 더 많은 음식을 좀더 색다른 방법으로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불꽃이 튀는 부싯돌 두 개와, 하얀 백온옥 사이에 고인 우유 같은 뽀얀 액체, 그리고, 이름모를 백색의 좁쌀만한 꽃이 군생하여 핀 조그만 화원을 발견하고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반 각 뒤의 일이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다놓은 천년석균을 정갈히 씻기 시작했다. 일개 문파의 지존으로서 그녀가 언제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있으랴! 허나, 단유경을 즐거웠다. 왜 즐거운지? 라고 자신의 가슴에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감정이 마음을 사르르 적시는 것이다. 이때다. 문득, 단유경은 물 속에서 새파란 두 개의 광채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그녀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오지 중의 오지....... 인적은 커녕 벌레 한 마리 제대로 살지 않는 이런 곳에 있긴 무엇이 있겠는 가? 헌데 바로 ㄳ 무엇인가가 빛살처럼 단유경이 씬고 있던 천년석균 하나를 날카롭게 채어갔 다. 단유경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수면에 미미한 파랑이 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주춤 물러나던 그녀의 두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촤아악! 느닷없이 수면을 뚫고 솟아나온 한 개의 물체 [크아아악!] 오오..... 저것이 도대체 뭔가? 보라! 두 눈에는 시퍼런 빛이 철철 일어나고...... 어깨라곤 했지만 그것은 비늘이 숭숭 덮인 징그러운 어깨요. 어깨를 깃점으로 두 개의 머리통이 혀를 날름대는 저것! 사람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 괴물을 보는 순간 단유경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 을 터뜨렸다. <二卷 끝> [야설록] 대달마 제 십칠 장 10/12 18:58 323 line 第 十七 章 鬼 谷 神 藝 [아아악!] 비명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구양조운은 앉은 자세 그대로 솟구쳐 왔 다. 그는 휘청 쓰러지려는 단유경의 몸을 황급히 부축한 후 앞을 향햐 놀람으로 가득찬 시선을 던졌다. 두 개의 머리, 머리는 분명히 사람의 얼굴인데..... 그것도 한쪽은 준수한 남자, 한쪽은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인데, 그 입으로부터 나불대는 것은 뱀의 혀다. 뿐인가? 이 머리는 하나의 몸통에 붙어 있었다. 물을 타고 솟아오른 이 몸통은 길이가 삼사 장에 달하는 거대한 구렁이의 몸 통이 아닌가? 인면혈해사(人面血海蛇)! 만해술기(萬解術記)는 인면혈해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천년 이상 먹은 교룡이나 이무기 등은 일반적으로 깊은 심해나 심연에서 그 음성(陰性)을 기른다. 이들은 천 년의 세월 동안 암수의 생식기능이 감퇴되어 그 자웅을 분간할 수 없게 되며, 이러한 중성의 영물들은 본능적으로 생식하고자 하는 심성을 가지 게 된다. 이들은 타동물의 정액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생식이 가능하며, 만약, 인간의 정액을 섭취하였을때는 거의 인간과 흡사한 유형의 괴물을 탄생 시킬 수도 있게 된다. 이를 인면혈해사라 하며, 정상적인 교접이 아닌 생식이 까닭으로 대개는 기형이 탄생하게 된다..... 만해술기의 지적대로 앞의 인면혈해사 또한 그러한 비정상적인 교접으로 하여 탄생한 이두기형사가 틀림없었다. 어쨌든-- 구양조운은 황급히 단유경을 한쪽의 바위 밑으로 피신시킴과 동시에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괴물과 대치해 섰다. 저러한 괴물은 십중팔구 괴력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었다.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될것이다. 이때, 크아악-- 석전이 온통 무너져 내릴 듯한 괴음에 이어 인면혈해사의 거대한 몸뚱이가 그 를 향해 사납게 덮쳐 들어왔다. 그 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랐다. 구양조운은 다급히 소수지학의 유향미리보의 보결을 밟아 십성 전공력으로 솟 구쳐 올랐다. 슈욱! 거의 머리칼 하나 차이로 인면혈해사의 거대한 몸통이 스쳐 지났다. 헌데 이때, 직선으로 스쳐 지나는 줄 알았던 괴물의 꼬리가 갑자기 휙 말려 올라가는 것 이 아닌가? 이러한 경우는 상상도 해 볼 수 없었으므로, 순간, 구양조운은 몸전체로 뱀꼬리를 얻어 맞고 이 장이나 밀려나고 말았다. [악!] 비명은 가슴을 조이고 있던 단유경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었다. 쿠당탕! [제기랄!] 매케한 독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맡는 즉시 쓰러질 만큼 역한 독향이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인면혈해사가 다시 짓쳐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검을 질끈 움켜쥐었다. 그는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십여 장이나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 역시, 그의 발을 한 치 정도의 차이로 인면혈해사의 시뻘건 사신이 스쳐 지났다. 괴물의 꼬리가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구양조운은 한 소리 낭랑한 기합과 더불어 그 꼬리를 힘껏 내리쳤다. 쾅! 그러나 마치 두꺼운 철판을 때린 듯한 금속성과 함께 그의 칼은 내리칠 때보 다 더욱 빠른 속도로 튀어 올랐다. [욱!] 그 반탄력이 너무 거세었기네 구양조운은 다급한 신음과 함께, 급히 몸을 날려 바닥에 내려선 후 동굴 벽에 몸을 기대었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저려왔다. (요물의 몸통은 도검으로도 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 인면혈해사는 구양조운의 일검에 흉성이 발작한 듯 두 얼굴 네 쌍의 눈에서 시뻘건 혈광이 뻗어 나왔다. 마치, 지옥의 나찰 같은 모습이었다. (저것이다. 얼굴...... 얼굴은 비늘이 없으니 전력을 다해 일검을 편다면.....) 구양조운이 열심히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돌연, 인면혈해사의 입이 벌어지더니 그 속으로부터 시퍼러죽죽한 독액이 실처럼 가 늘게 뻗어왔다. 구양조운은 급히 유향미리보에 불영선하보를 섞어 몸을 날렸다. 파팍! 인면혈해사의 독액에는 무서운 힘이 담긴 듯 조금 전까지 구양조운이 기대어 섰던 석벽엔 세치 깊이의 구멍이 뚫렸다. 기이한 싸움, 요물은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고 사람은 그것을 피한다. 갈수록 인면혈해사의 공격은 치열해졌다. 인면혈해사는 독액 뿐 아니라 긴 몸뚱이를 마구 휘둘러 수중을 진탕시키니, 구양조운은 실처럼 가는 독액을 피하랴, 사방으로부터 조여드는 압력을 피하 랴 정신없이 몸을 돌리고 뒹굴고 뛰어 오르고 날렸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구양조운의 두 눈이 번쩍 불을 토했다. 으아....... 떠오른다. 의식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그의 시선 속으로 뛰어 들어온 벽력성 군의 모습! 세 개의 손에 들린 거대한 검! 그 미묘한 자세! 본시,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검이라면 머리를 설레설레 저어오던 그였으나, 그 삼수삼검을 보는 순간부터 그의 심혼을 온통 휘어 잡았다. 알 수 없이 아련히 가슴을 적셔오던...... 엄청난 위용의 자연과 접했을 때의 떨리는 영혼처럼 그렇게 벅차오르는 가 슴.... 그러나..... 검식은 뚜렷한 전개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그 후의 오묘함을 결코 깨달아 낼 수 없었다. 헌데, 인면혈해사가 몸을 둘로 나누다시피 하여 마치 대전이 무너져내릴 듯한 독액 과 꼬리의 합공을 가해 오는 순간, 느닷없이 그 중 첫번째 검식이 떠오른 것은 뭔가! 안개처럼 모호하던 그것이 무지개처럼 선명하게 노도처럼 격렬하게 그의 뇌리 를 휘몰아 치고 있었다. [파앗!]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눈부신 검광을 그어내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뽀얀 검막에 싸였다. 그것은 마치 조금의 틈도 없는 백색 원구를 방불케 했다. 다음 순간, 뽀얀 검막이 구양조운의 허리 어림에서부터 부채살이 퍼지듯 찬란한 벽광과 함께 십팔방으로 폭사되는거 싶더니, 그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비단 같은 한줄기 광망으로 변해 폭사되어 나갔다. 빠르다. 너무 빠르다. 비록 인면혈해사는 천고의 영물이긴 했으나 이 빠름에는 어찌해 볼 방도가 없 는 듯, 번쩍! 빛이 일기 무섭게 인면혈해사의 좌측 사내 얼굴에 구멍이 뻥 뚫렸다. 크악! 구양조운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앞으로 뻗었던 손을 재빨리 뒤로 잡아챘 다. 순간, 하나의 구멍을 뚫고 날던 검이 멈칫하더니 휭 하고 한바퀴를 선회하며 이번에 는 인면혈해사의 뒤통수를 찔러갔다. 퍽! 검은 정확히 인면혈해사의 우측 여인 얼굴의 뒤통수에 날아가 박혔다. 박혔을 뿐 아니라 검은 계속 팽이처럼 선회하며 요물의 뒤통수로부터 앞 이마 까지 뻥 뚫고 구양조운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크어어악! 인면혈해사는 불에 데기라도 하듯 펄쩍 뛰어 올랐다. 그것은 몇 번 미친 듯이 바닥을 꿈틀대더니 이윽고 긴 몸통을 힘없이 땅에 축 늘어뜨려다. 죽은 것이다. 인면혈해사의 아름다운 옥용, 백설같이 흰 이마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금방 바닥을 홍건하게 적셨다. 구양조운은 천천히 검을 거두어 한쪽의 단유경을 힐끗 바라보았다. 단유경은 지금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검법........] 도대체가 그런 신비로운 검법을 생각은 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극쾌와..... 원막의 극변이 있는가 싶더니, 그 다음은 검술의 최상승이라는 이기어검이 아니었는가? 거기다가 무쇠보다도 강한 요물의 표피를 두부처럼 부숴내는 극강의 파괴력, 극쾌, 극변, 극강, 삼박자의 완벽한 조화, [그 검법도...... 소수문의 절예인가요?] 구양조운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싱긋 웃었다. [아니오.] 그는 한쪽에 우뚝 선 벽력성군을 가리켜 보이며, [저 사람이 가르쳐 주었소. 세 손에 들린 검 하나하나가 모두 검식이오. 헌데 그 변화가 너무 어려워 해맸더니 간신히 그 중 하나를 풀수 있었소. 아직도 그 뒤의 두 검식은 모르겠소.] 단유경의 회의에 찬 시선이 벽력성군을 향했다. 손은 손이고, 검은 검이다. 저 안에 무슨 검식이 있고 변화가 있단 말이가? 그녀는 아무리 눈을 부릎떠도 그 속의 조화를 알 길이 없자 한 줄기 탄식을 터뜨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본래 마음도 없었지만..... 역시 보물이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로구나. 그가 발견했다는 삼검식은 바로 귀곡별부의 이보 중 하나인 무수 진경일 것이다....] 무수진경(戊隨眞經)! 고대검법의 신비로운 정화가 수록되었다는 희대의 비급, 그것이 비급이 아니라 하나의 동상일 줄이야...... 단유경은 한쪽으로 걸어가 귀경총람을 들고 와 구양조운에게 내밀었다. [나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 별부의 주인은 당신인 것 같으니 이것도 마저 보도록 하세요.] 구양조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봤소. 내용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당신이 보시오.] 순간, 단유경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농담이예요? 사백 장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내가 깨어날 그 짧은 시간 동 안에 보고 기억했다구요?] [기억하려 했던 건 아니었소. 그저 기억이 되어 준 것 뿐이오.] 단유경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자 구양조운은 씩 웃더니 빙 글 몸을 돌려 몇 발자국 걸어갔다. 이어, 그는 서너 발자국 걷다 말고 또 다시 단유경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순간, 단유경의 봉목이 놀람으로 휘둥그레졌다. 저 사람이 누군가? 약간 야윈 듯 보이는 얼굴에 세 가닥의 염소수염, 젊고 준수한구양조운은 간데없고 근엄하고 냉정해 보이는 한 명의 중년수사 가 대신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중년수사는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하며 낭랑하게 웃어 보였다. [귀곡문의 귀곡선생이요. 소저께서는 귀경총람을 펴서 아무 곳이나 지적해 주 시오.] 목소리마저 다르다. 단유경은 놀람과 경악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얼떨결에 책을 펴들고 한곳을 지 명했다. [귀원신기전과 오행대라멸혼진이란?] 중년수사는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술술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귀원신기전은 태극을 그 축으로 하고 이, 사, 팔의 횡수 변화를 근거로 하는 것이오. 금적, 방적의 묘용이 있고, 오행대라멸혼진이란 오행을 선으로 삼아 음 양을 대소 칠십이변으로 나눔을 말하오.] [족이풍질에 임하여 마땅히 써야 할 의약의 재료는?] [소합원의 종합약제를 만들어 써야 하오. 백출, 침향, 백단향, 서각, 맥아를 잘 게 빠아서 주사 가루와 섞으면 되오.] 도무지 막힘이 없다. 임의로 서너 군데나 지명해 보았건만 진의독장관점역에 어느 한군데 서툼이 없는 것이다. 십이대 조상이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본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 보라. 구양조운이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올 때까지도 단유경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구양조운의 얼굴에 특유의 웃음이 번졌을 때에야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 으며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내가 어쨌단 말이오?] 단유경의 시선이 구양조운을 정시했다. 촉촉히 젖어있는 듯한 매혹적인 눈길이었다. [단언할 수 있어요. 당신을 적으로 삼게 되는 사람은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예 요.]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연못을 향해 몸을 돌렸다. [천년석균은 비록 많이 있지만 오래 먹으면 반드시 질릴테니..... 이젠 그만 돌아가는게 좋겠소.] 말을 잇다 말고 그는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이 난 듯 그 자리에 뚝 걸음을 멈 추었다. [잊은 게 있군.] 그는 다시 빙글 몸을 돌려 단유경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어, 느닷없이 그녀의 허리를 채어 잡더니 그 몸을 자신의 앞으로 바싹 끌어 당겼 다. 하늘의 별이 내려와 자리한 것일까? 여인의 두 눈은 별빛처럼 영롱하고 맑은 광채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속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싶은 순간, 구양조운의 입술이 우악스럽게 단유경의 작고 아름다운 입술을 덮었다. 잠시의 망설임이 있었다. 하나, 이미 그녀의 섬섬옥수는 구양조운의 목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이는 그에게 몸을 허락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일진저..... [바람둥이라면서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 안해요.] [왜?] [대개의 여자는...... 바람기 있는 사내에게 마음이 끌리나 봐요......] 사르륵..... 사륵....... 매미가 허물벗듯 단유경이 일신에 걸치고 있던 옷이 떨어져 나갔다. 구양조운은 그녀의 빛나는 동체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이어, 그녀의 우유빛 목덜미에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갖다댔다. 순간, 단유경의 입에선 숨넘어 갈 듯한 교성이 터져나왔다. 마치 매끄러운 기름이라도 발라둔 듯, 구양조운의 입술은 그녀의 흐물흐물한 나신 위를 미끄러지듯 타고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어깨와 겨드랑이를 거쳐 따뜻하고 뭉클한 젖가슴과 그 위의 돌기....... 그의 입술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미풍처럼 은은했다. 격렬한 입맞춤의 뒤엔 작고 빨간 사랑의 흔적이 피부위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 냈다. 단유경은 한 가지의 신비지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를 구양조운이 지날 때 마다 몸을 한없이 떨며 열락의 교성을 터뜨려 냈다. 몸이 둥둥 뜨고 있다고 단유경은 생각했다. 또한, 나신은 지금 백화가 만발하고 그 향기가 하늘 끝까지 진동하는 나는 화 원 위를 떠다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음...... 아아...........] 이 신음은 왜 자꾸 터져나오는 걸까? 부끄러워! 그가 경박하다고 욕할지도 몰라. 몸이 터질것 같아....... 비라도...... 가는 빗줄기라도 한 줄기 내려 주었으면....... 젖무덤을 지나 허리의 능선을 타고 둔부에 이른 손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여인이 가장 여인답게 보이는 부분, 물론, 볼록한 앞가슴이나 얄팍한 허리 또한 여인의 상징이려니와, 그 중에서도 남자의 본능을 가장 말초적으로 자극하는 부분이 이 둔부가 아닐 까? 여자는 남자를 볼때 머리 끝부터 시작하여 밑으로 훑어 내려간다. 그러나 남자는 그 반대라고 한다. 단유경의 그곳이 젖어있음을 확인한 구양조운은 반쯤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옷 을 벗었다. 단유경은 그의 끈끈한 애무가 남긴 여운에 아직도 가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 다. 바닥에 멋대로 흩트러진 수발과....... 뱀처럼 꿈틀대는 여체의 율동은 기이한 감동을 구양조운에게 주었다. 그것은 교태로운 몸짓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몸을 후비며 살아가는 인간 모두의 처절한 몸짓이 었다. 저 희고 매끄러운 섬섬옥수, 지금은 남자의 몸을 껴안지 못해 안달이 난 저 손은, 계속 음식을 짓기도 하고 아이를 달래기도 하며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기 도 하는 손이었다. 또한, 보일 듯 말듯 벌려진 은밀한 비소는 무엇을 말함인가? 여인들은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앞다리를 맞붙이는 조심스런 동작을 예의의 기본으로 안다. 저 벌린 다리와 평소의 맞붙인 다리 사이에는 여인의 부끄러운 모순, 갈등 그 모두가 앙증스럽게 숨겨져 있는 것이다. 정숙과 음란, 도덕과 퇴폐, 그리고 사랑의 유희..... 단유경은 소용돌이치는 열락의 와중에서 사르르 두 눈을 떴다. 마치, 황금빛의 창날 같은 보석의 광채가 그녀의 시야에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 문득, 단유경은 그 황금창날이 하복부를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뜨거웠다. 그리고,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다. 단유경은 뱀처럼 매끄럽운 교구를 구양조운의 몸에도 찰싹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의 목에 두른 팔에다 바싹 힘을 주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십팔 장 10/13 16:55 271 line 第 十八 章 劍을 사 주게 무원측검대! 무림...... 그 광토에 발을 딛고 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사는 자들의 영원한 이상향-- 정사의 묵은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탄생한 것이라곤 하나, 수백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무원검측대는 그대로 세인들의 꿈과 희망의 장소 가 되고 말았다. 산악에 묻혀 있던 무명검수가 하루 아침에 천하의 주목을 받는 고수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되고, 인정받지 못하더 무예가 천하의 조종으로 떠받들려 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며.... 아무리 콧대높은 명문대파라 해도 이 무원검측대 출신고수들의 무기에 달고있 는 갈백자녹황의 수실 앞에서는 한 수 양보를 하게되는 판이었으니........ 오늘, 지금 이 시각도 어느 산촌 어느 소읍에선 부모처자에게 손을 흔들며 무원검측 대로 떠나는 수업자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언젠가는 무원검측대에 오를 꿈으로 부푼 채 무예연마에 박차를 가하는 홍안 의 미소년도 있을 것이다. 무원검측대는 숭산 태실봉에 있었다.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과는 산봉 세개를 사이에 둔 거리로서, 산허리의 성불평에 오층의 높이로 대는 우뚝 서 있었다. 수백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원검측대의 주변으로는 거대한 촌락이 형성되었 다. 무원검측대를 관리하는 정사양도 고수들이 기거하는 와호장과 무원검측대에 도전하는 각계의 고수들이 묵는 천룡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선악촌이 촌락을 이루는 구성 요소였다. 그 하나하나를 상세히 살펴보면, 먼저, 와호장은 정파의 불심보와 사파의 지옥보로 나뉘어진다. 정파의 구대문파와 사파의 십대종가가 각기 문파의 정예를 선발하여 관할함으 로써, 대의 관리보수, 무객의 도전접수를 총괄하게 된다. 와호장의 산하기관으로는 지객당, 연반당, 천로당등이 있으며, 이들 기관은 정 사양도의 고수들이 같은 숫자로 나서서 일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천룡부란----- 도전고수들의 숙소인 이곳은 크게 네 등급으로 나뉘어진다. 가장 하위인 무진사에 도전하는 고수들은 등룡방에, 그 다음 무탐화 위는 백운방, 무향의 위나, 정사파 장문인 십 인의 천거를 받은 자는 신무방,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인 무종이상의 위는 교국방이란 곳에 머무는 것이다. 특히, 교국방은 이백 년 전 기관건축의 일대명인인 천기자가 손수 설계건축한 곳으 로서, 온 정원에 만발한 국화군(菊花群)도 천하에 다시 볼 수 없는 명품이요, 진경이 라 하였다. 네번째 선악촌, 처음에 이곳은 그저 소수의 무인을 상대하는 반점 겹 잡화상들 서넛이 있던 곳에 불과했다. 헌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무원검측대가 중원의 명소로 등장하게 되고, 도전하는 도전고수 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유랑까지 다니게 되자 자연 수많은 상인들이 이곳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원검측대가 있는 성불평과 마주 보이는 양 중턱에 하나의 거대한 상읍이 만 들어 지게 되니...... 이름하여 선악촌! 이곳에는 반점이 있으며 주루가 있고 객점이 있다. 심지어는, 기루와 도박장까지 있었다. 인구 일천이 상주하고 기거하게 된 이곳을 놓고 하남성부에선 이 선악촌을 정 식 촌락으로 인정하는가 안 하는가 문제로 골머리까지 앓았다 한다. 어쨌든, 때는 바야흐로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한 춘삼월 호시절---- 아직은 서늘한 바람을 안고 봄은 분주히 수양나뭇잎에 물을 올리고 있었다. 왁자지껄....... 와작북작....... 거리, 크고 복잡하다. 바로 뒤는거대한 원시림인데 이 깊은 산 속에 마치 요술처럼 이토록 번잡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거리로 들어서는 일주문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하남성 화북부 낙양현 선악촌> 자못 거창한 거리면을 힐끗 보고난 그는 천천히 거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이는 이제 십 칠팔 세나 되었을까? 언뜻 보기에도 그 수려영명함이 천만 인 속에서도 번쩍 뜨이는 미소년, 유생인가? 일신에는 백색 유삼을 걸쳤고 그 목에는 백옥의 염주가 걸려 있다. 유삼자락 새로 힐끗 드러난 손은 연약하고 흰 것이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어 보였다. 미유생은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각도를 거닐어 갔다. [칼을 가시오, 칼을! 무사나리들! 무원검측대에 등위 하시고자 한다면 본점의 천연숫돌로 멋지게 한 번 칼을 문질러야 할 것이오!] 입에 침을 튀기며 길가는 무사들을 호객하고 있는 대장간 주인....... 여기저기 버티고 서서 정신없이 절을 해대는 반점의 점소이들....... [사천! 사천의 요리를 한 푼에!] [광동해물탕이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릅니다!] 뿐인가? 길 한쪽의 나무그늘에 주저앉아 조용히 검을 닦고 있는 무사에, 얘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자못 신기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촌아낙네들, 이때, [왓하하...... 저것 좀 보게나!] [핫핫.........] 거리 한쪽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건들건들 걷고 있던 미유생의 시선도 힐끗 그쪽을 향했다. 먼저,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로 나부끼는 깃발이 하나 보였다. 그곳에는 삐뚤삐뚤한 악필의 글귀가 제멋대로 쓰여 있었다. < 검을 파오. 단, 마음이 맞는 자에겐 그냥 줌.> 그는 한 명의 노인이었다. 흰색인지 회색인지 그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때국물낀 수염에, 얼마나 빨고 기워댔는지 너덜너덜한 회포, 발가락이 툭 불거진 초혜에다 비뚤어진 망건 등은 절로 눈빛이 찌푸려졌다. 거기다가 막상 그가 판다는 검은 또 희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검, 때묻은 자주색 포단 위에 놓인 그것은 완전한 것도 아닌 반토막난 것이었다. 검신은 두껍고 둔해 그것으로 무엇을 자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정도였 고, 그나마 검신에는 더덕더덕 녹이 슬어 있었다. [왓하하..... 저것도 검이라고........] [글쎄 말이네. 부엌식칼로 쓰래도못 쓰겠군.] 매검노인은 사람들이 뭐라든 히죽히죽 웃으며 주위를 가느다란 실눈으로 살피 고 있었다. 그러다 언뜻 한쪽의 미유생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놀람의 빛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하나, 그는 이내 히죽 웃으며 성큼성큼 유생을 향해 걸어왔다. [공자, 이 검을 사시구료.] 느닷없는 말, 미유생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인장, 소생은 검이 필요치 않........] 말을 잇다 말고 불현듯 노인의 꾀죄죄한 몰골에 시선이 닿는 그,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사겠소. 그 검은 얼마요?] 매검노인은 히죽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펴들었다. 고추가루 묻은 입술 새로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미유생이 물었다. [열냥.......?] 매매의 화제는 특별한 단서가 붙지 않는 한 은자를 말한다. 하나, 매검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백...... 냥..........?] 그것도 아니란다. [설마 노인장은 천 냥을........?] [십만 냥이오. 이 아래로는 단 한 푼도 깍을 수 없소.] 떡! 입벌어지는 소리 일개 성을 그냥 사고도 남을 거액이 아닌가? 허나 뜻밖에도 미유생은 담담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좋은 가격이로군. 그 검이 정말 명검이라면 그쯤은 되어야 올바른 값이긴 하 오.] [암암, 과연 나는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지.] [그 검의 이름이 무엇이오?] [단장검 한 번 베면 사람의 내장까지 훑어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해서 생긴 이름이지.] 순간, 주위를 둘러서 있던 중인들의 입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놀랍군!] [노인장, 사람의 내장이 아니라 개미발가락 하나라도 그 검으로 부러뜨릴 수 있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서!] 이때다. 돌연 사람들의 비웃음을 일축이라도 하듯 매검노인의 앞으로 느닷없이 한 개 의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휘황찬란한 광채가 사람들의 시선을 찔러왔다. 물체, 그것은 놀랍게도 속세에선 평생가야 단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야명주가 아닌 가! 동시에, 한 마디 무표정하고 냉막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그 검은 우리가 사겠소.] 사람들의 놀람에 찬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먼저, 두 개의 소름끼치는 가면이 중인들의 시선 속으로 쏘아졌다. 하나는 나무가면, 또 하나는 철가면, 목면구는 피처럼 붉은 피칠을 한 야차의 형상이었고 철면구는 푸르뎅뎅한 나찰의 형상이었다. 일신에 걸친 것은 각기 발끝까지 내려오는 붉고 푸른 장포, 대낮에도 그들의 몸과 목소리에선 스산한 음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 다. 이 괴이한 면구인 사이에는 다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백의, 한 갈래로 땋아내린 긴 머리, 그는 소녀였고 소녀는 몹시 평범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 평범한 얼굴에서 잠시 눈길을 돌리고 있자면 이 얼굴이 그리 평범한 것만 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보면 소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운 면이 눈에 뜨이도록 나타났다. 그리하여, 거듭해 보고 있노라면 아예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눈길조차 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니..... [그 단장검을 사겠단 말이오.] 백의소녀 좌측의 목면구가 말했다. 분명히 여인의 목소리이되 귀를 잘라 버리고 싶도록 거북한 소리였다. 매검노인의 두눈이 거슴츠레해졌다. [왜?] [좋은 검이니까] [어째서?] [좋게 보이니까] [무엇이?] 순간, 목면구의 두 눈에서 싸늘한 살광이 솟구쳐 나왔다. [늙은이, 구차한 목숨을 빨리 없애고 싶은가?] 매검노인은 히죽 웃었다. [아니지.] [그럼 왜?] [나는 다만 당신들에게 팔고 싶지 않을 뿐이오.] [어째서?] [쯧쯧...... 그래서 애들 앞에선 냉수도 못 마신다지. 내가 백 년이나 탐구하여 개발한 질문법을 어느 새 배워버렸군. 대답할 가치도 없다.] 끌끌.... 혀를 차며 매검노인은 다시 미유생을 바라보았다. [젊은이, 나는 내 검의 값을 대폭 인하하기로 했네.] 미유생은 흥미로운 빛으로 말을 받았다. [어떻게 하시려오?] [보아하니 자네는 허우대만 멀쩡할 뿐, 주머니 속은 텅 비었을 것 같으이.] 말을 하며 고의인지 우연인지 매검노인은 발 아래의 야명주를 툭 차냈다. [노인장께선 잘 보셨소. 나는 사실 은자 열 냥으로 육개월을 버티어야 할 형편 이오이다.] [옳거니! 그럼 식사는 대개 무엇으로 하는가?] [장춘면 류의 면으로 떼우지요.] [장춘면이란 말인가? 자네의 입은 너무 고급이군.] [친구는 나를 속여도 위장은 나를 속이지 않소. 비단 속이지 않을 뿐 아니라 평생 봉사를 해 주오. 그런 위장에는 대우를 잘 해 주어야지요.] [쯧쯧.... 위나 여자는 자고로 허술히 해 주어야 해. 잘해 주다간 평생 허리를 펼 날이 없을 걸세. 그런 면에서 자네는 식사를 온면 정도로 낮추도록 하게.] 무슨 말들일까? 워낙 빠르게 오고가는 말인지라 누구 하나 끼어들 틈도 없다. [동전 서른 닢의 장춘면을 열닢의 동전으로 낮추묜 하루 세끼, 매일 육십닢의 이윤이 남을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나는 이 검을 은자 열냥에 팔도록 하겠네. 대금은 하루에 육십 닢씩, 열 엿새 뒤에 갚도록 하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검노인은 검을 안기다시피 미유생에게 던져 주었다. 이어, 빙글 몸을 돌린다 싶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인파들 새로 사라져갔다. 중인들은 이 일이 너무 괴이하여 얼떨떨한 시선들을 주고 받았다. 은자 십만 냥을 마다하고 고작 열 냥에 검을 팔다니, 그것도 열 엿새 뒤의 이자로 말이다. 목면구의 몸이 들썩했다. 매검노인의 뒤를 쫑으려는 것이리라. 한데 이때, 백의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손을 저었다. [놔두어요.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니.......] 그녀의 시선이 힐끗 미유생을 향했다. 미유생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얼른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전형적인 풍류공자의 형상, 백의소녀는 싸늘한 비웃음을 입꼬리에 피워 올리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돼지에게 진주를 줘봐야 그것의 가치를 알 리가 없으니.......] 철면구와 목면구도 미유생을 한 차례 싸늘하게 노려본 다음 몸을 돌렸다. 흥미로운 일을 기대했던 중인들은 일이 의외로 싱겁게 끝나자 투덜대며 몸들 을 돌렸다. 미유생은 수중의 철검을 힐끗 내려다 본다. 비록, 논 투성이의 검자루는 비교적 훌륭한 문형이 새겨져 있었다. 그 끝에 단장의 두 글자가 보였다. 노인은 이것을 그에게 판 것이 아니라 거저 주었다. 노인의 이러한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 거일까? 미유생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자주색 포단째 검을 옆구리에 찬 다음 다시 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은 그가 아니라 노인이 벌여놓은 것이다. 답답한 것은 노인이지, 그가 아니었다. 미유생은 힐끗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춘삼월의 오묘로운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디 외상을 파는 곳은 없을까......? 새순이 피어 오르는 이런 시각에 술을 먹지 않는 자는 시궁창에나 처박히리 라..... 그의 서늘한 두 눈이 주기(酒旗)를 찾아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십구 장 10/14 19:00 287 line 第 十九 章 두 개의 술잔 부운각 선악촌의 끝에 이 부운각은 있었다. 한 채의 거대한 누각, 누각이라기보다는 아예 광장에 가깝다. 아스라한 절벽을 위로 하고 푸른 삼월의 하늘을 머리에 인 이 누각에 미유생 이 나타난 것은 해도 귀영처럼 저물기 시작되는 유시 무렵이었다. 이미 어디에서 거나하게 한 잔 걸친 것일까? 비틀비틀...... 그는 보는 이가 안타까울 정도로 휘청이고 있었다. 부운각은 무원검측대를 오르는 접수장소다. 이곳을 거쳐야만 절벽 건너편의 성불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노을녘인데도 부운각 위는 온갖 병기로 중무장한 무림인들로 벅적거리고 있었 다. 미유생이 휘청이며 다가서자 부운각 앞에서 한담을 나누던 네 명의 낭인무사 들이 눈살을 깊이 찌푸렸다. [잠깐 친구.] 막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디디던 미유생의 눈 앞으로 한 자루의 장창이 가 로막혔다. [친구도 무원검측대에 도전하려는건가?] 미유생의 취안이 힐끗 창을 겨눈 낭인무사를 향했다. [그렇소.....] [그 몸으로?] [꺼억........ 내가 어떻다고 그러는가.......?] 낭인무사의 얼굴에 야릇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몇 단계로 도전하시려는지?] [무종.] 순간, 네 명의 무사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배꼽을 잡고 웃었 다. [핫하하........] 미유생은 히죽 웃고는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무사 하나가 막으려 하자 낭인무사는 싸늘하게 웃으며 그를 잡았다. [놔두시오. 성스러운 무원검측대를 어지럽히는 저런 미친 놈은 따끔하게 혼이 좀 나봐야........] 이때, 막 다음 말을 이으려던 그의 입이 얼어붙듯 굳어 버렸다. 그의 두 눈은 부릅떠진 채 미유생의 발끝을 향하고있었다. 다른 무사들 또한, 무심히 그쪽을 바라보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헛?] [저럴수가!] 보라! 비틀거리는 걸음, 그 걸음이 떼어질 때마다 계단에 움푹움푹 패이곤 하는 족혼 아무리 못되도 한 치는 족히 되어 보인다. 다른 것도 아닌 무쇠보다도 더 단단하다는 청석에 한 치의 두께이니 이는 물 경 일백여 년의 공력이 없어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네 낭인무사의 놀람에 찬 시선을 등에 메달고 미유생은 거각의 위로 발을 디 뎠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네 무사를 향했다. 심각한 시선이었다. 순간, 네 무사는 찔끔하여 황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바꾸었다. 미유생은 그런 그들을 향해 혀를 질끔 내밀었다. 그는 보는 이가 민망스럽도록 서너 번이나 혀를 입술 밖으로 내두른 후에야 킬킬 웃으며 몸을 돌렸다. 누각은 거대한 목조건물이었다. 반들반들한 송판을 깐 바닥, 도대체 이 바닥을 깔려면 몇 천 그루의 소나무가 필요했을까? 누각의 입구에는 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네 사람, 한 명은 승인이요, 다른 세명은 도인이다. 승인은 앉아서 수북한 두루마리를 뒤적이고 있었고, 세 도인은 누각의 입구에 위세당당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의 뒤로는 다시 이십여 명의 백의무사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아마도, 무원측검대를 관할하는 와호장의 정파측 고수인 듯, 앉은 승려는 이들의 수뇌인 것 같았다. 나이는 한 삼십 정도, 산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거대한 몸집과 종탑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다. [사문내력은?] 수뇌다운 위엄과 오만이 전신에 이글거리는 승려의 앞에는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고, 승려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그의 대꾸하는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기어들고 있었다. [와...... 왕옥산 칠살채.........] [성함은?] [구인........] [파는?] [사파....... 계열........] [제 몇 단계로 도전하겠소?] [이, 일단계...... 무진사급......] 승려는 사내를 힐끗 바라본 후 다시 두루마리를 들치며 짤막한 목소리로 말했 다. [구소협은 안내하라!] [옛!] 뒤에 서 있던 백의무사 하나가 사내를 한쪽으로 안내해 갔다. [다음!] 미유생은 싱긋 웃으며 터덜터덜 탁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로부터 술냄새가 왈칵 끼쳐들자 승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위인은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조차 올리지 않은 채 그는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온 사람은 사문을 말해 주시오.] 미유생은 히죽 웃으며 탁자의 위에 턱하니 걸터 앉았다. [사문은 없소.] 이 무례방자한 행위에 두루마리를 뒤적이던 승려의 행동이 뚝 멈추어졌다. 그러나, 그는 지그시 노화를 눌러 참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성함은......?] [..........] [성함은?] [..........] [파벌은?] [..........] [도전하는 단계는?] 싱글벙글 웃으며 묵묵부답이던 미유생, 돌연, 승려의 네 번째 질문이 끝나자마자 날벼락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오명, 이놈! 사숙이 왔는데도 태도가 그 모양이냐?] 순간, 붓대를 빙글빙글 돌리던 승려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미유생의 얼굴을 힐끗 일견하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숨도 못 쉬고 기립 해 섰다. [넷, 넷째 사숙!] [흐음! 그래도 얼굴은 알아본다 이거렸다?] [도대체 사사숙께선.....] 주위의 사람들은 영문을 알지 못해 두 눈을 멀뚱멀뚱 떴다. 승려 오명, 그는 보광사의 이대제자였다. 즉, 소림본사로 치자면 삼대의 항렬이니 공륜, 풍운, 수경보다는 한 항렬 아래 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특히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넷째 사숙 도솔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땡초중이며, 파계승이라고, 하나, 오명만은 넷째사숙의 다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삼 년전..... 아니, 사 년전인가 보다. 시주를 얻으려 갔던 장사성내에서 오명과 그의 동문 오혜는 당시 악명도 드높 던 강남삼흉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보광사 입문 삼년째에 불과한 오명들이 그들의 상대가 안된 것은 말할것도 없 고, 그들과 시비가 붙어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아 동문 오혜는 아예 실신하 여 쓰러지고, 그 또한 빈사상태까지 이르렀던 것, 이때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바로 도솔이었다. 도솔은 떡반죽이 되다시피 한 오명 등을 보자 늘 비실거리던 실없는 얼굴에 한 줄기 무서운 살기를 떠올렸다. 그로부터 삼초가 지나기도 전에 강남삼흉은 모조리 팔다리가 부러진 채 개울가에 처박히고 말았다. 무예라곤 단 한 초식도 모른다던 넷째사숙이 펼친 그 엄청난 신기에 오명은 입을 쫙 벌렸으며, 놀람에 찬 그의 얼굴을 향해 넷째사숙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살아가다 보면 하고싶지 않은 일도 해야할 때가 있어. 나는 오명, 네가 이 비 밀을 영원히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 그때 오명은 알았다. 넷째사숙 도솔이야말로 진면목을 숨기고 살아가는 무서운 잠룡이라는 것을, [사....... 숙님........ 그 동안........] [물론 잘 지내고 있었다.] [파(破)........] 문(門)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오명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미유생 구양조운은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것봐. 이제 넌 나와 상관이 없어. 내 소식은 너도 들었겠지?] [예.] 주위의 사람들은 갈수록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호랑이 같은 오명화상을 길들인 고양이처럼 만드는 미유생의 정체는 무엇 인가? [알고 있다면 됐다. 그런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은 지우고 내가 부르는대 로 받아 써!] [예.] [첫째, 사문은 소수문이다.] 순간, 중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위의 시선들 또한 일제히 쏠렸다. 소수문! 소수문이라니? 하나, 구양조운은 사람들이야 놀라건말건 태연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이름은 구양조운, 파벌은 사파, 도전단계는 무종.] 글을 이어 나가는 오명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아...... 소림은 눈이 멀었다. 어찌 이런 인재를 사파로 던져준단 말인가......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간신히 기입을 끝냈다. [그럼, 안내해라.] 백의무사 하나가 빠르게 나서려고 했다. 오명화상이 고개를 저으며 붓을 놓았다. [내가 모시겠다.......] 누각은 거대했다. 그것은 크게 사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무진사관. 무탐화관. 무향관. 무종관. 의 네곳이다. 각 관의 앞에는 맞은편 성불펴을 잇는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다리는 관마다 틀렸다. 즉, 무진사관 앞에는 다리의 모양을 모두 갖춘 목교가 놓였고, 무탐화관 앞에는 너비 세 치의 외나무 다리가, 또한, 무향관에는 엄지손가락 굵기만한 쇠줄이 하나 달랑 놓였을 뿐이고, 무종관에는 머리칼처럼 가는 연사가 하나 걸려 있었다. 각 단계를 신청한 사람은 이러한 다리들을 건너가야 그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허나, 다리의 밑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나락이요, 공간에 사시사철 모진 돌풍 이 휘몰아친다. 정상적인 다리를 건넌다고 해도 오금이 저릴 판인데 쇠줄 하나, 실 하나로 이 어진 무향, 무종관의 다리는 얼마나 탐닉하겠는가? 구양조운과 오명은 무종관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춰섰었다. 저쪽의 무진사관 앞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무탐화관만 해도 사오십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무향관 앞엔 오륙 인 정도, 무종관엔 구양조운 혼자 뿐이었다. 쉬잉-----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려 왔다. 관문엔 백옥의 술병과 옥배가 탁자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관문을 통과하는 도전고수를 위한 것입니다. 사숙님도 한 잔 드십시오.] 오명이 따르고 잔을 받은 구양조운은 또 한 잔을 따라 그에게 건넸다. 망설이는 오명을 향해 구양조운은 씩 웃어 보였다. [천하의 도솔이 준 술이라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것이다. 함께 들자.] 오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줄기 탄식과 더불어 쭉 잔을 들이켰다. 구양조운도 마셨다. 그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난 후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봐, 오명. 자네와 내가 들고있는 빈잔이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의 운명일 세.] 오명의 놀란 눈빛이 구양조운을 향했다. 구양조운의 두 눈에 한 줄기 신비로운 광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사문의 보호로 살아온 알맹이를 우리는 지금 전부 다 마셔버렸 다......] [........]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 속을 채워가야 하는 거야. 아무도 잔을 채 워줄 수는 없다.] [사숙......] [언젠가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 [하고 있읍니다.] [좋아, 인생에서 때로는 하고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는 것...... 열심히 사세, 오명. 자네는 자네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는 노 력으로......] 구양조운은 히죽 웃으며 남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는 빙글 몸을 돌려 무종관의 연사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뒷등...... 웬일일까! 노을이 타오르는 그의 뒷등이 이렇게 눈부시다고 느껴지는 것을, 오명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구양조운의 뒷등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당신은 옳을 겁니다........ 언제나 옳으시오...... 당신이 왜 그 길을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명만은 당신을 믿소....... 이 한 잔의 술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으리다........) 구양조운의 발이 연사위로 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딛기는 디뎠는데....... 제기락! 실 하나를 딛고 무슨 수로 이백 장의 절벽을 건너 간담? 능공허보, 허공을 평지처럼 걷는 이 신법은 어떨까? 허나, 허공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에 대항하는 이상의 공력을 일으켜야 하고, 그렇게 되면 공력의 소모가 너무 커 채 쓰기도 전에 진기가 고갈되고 말 것이 다. 잠자리가 물을 찍는 청정점수와 갈대잎 하나에 몸을 의지하는 일위도강, 등평 도수는 어떨까? 하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실이다. 아무리 가벼운 신법도 결국은 지탱해 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저것 섞어버리면 건너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소위 소수문의 후예라는 내가 아닌가? 지옥련의 친구들이 어딘가에 숨어서 눈에 불을 켜고 있을텐데 그런 식으로 허 덕이며 넘을 수야 있나! [좋아,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구양조운은 연사 위로 휙 몸을 날렸다.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돌연, 그의 머리 위로, 육안으로는 거의 분간할 수 없는 한 줄기 희끗한 몽영이 스 르르 솟아 올랐다. 구양조운은 그대로 실 위를 걸어나가고 있는데, 순식간에 그 몽영은 아득한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양심여의공! 그 중에서도, 제이단계 본체와 환체로 나뉘어지는 양심의형이 펼쳐진 것이다. 슈슈슉! 실 위를 걷고 있는 것은 환체였다. 이 환체는 본체와 똑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한 가지 틀린 것이 있었다. 본체는 체중이 있으되, 환체는 체중이 없다는 것, 양심의형의 환체는 실 위가 아니라 먼지 위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이니...... 부운각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양조운을 향해 쏠리고 있었 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 장 10/15 19:34 312 line 제 이십 장 無願測劍臺 [으윽!] 돌연, 허공으로 솟아오른 구양조운의 본체는 가슴이 쥐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으로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고통은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져가고 있었다. 양심여의공, 제일단계, 여의십사식까지는 괜찮았다. 하나, 이단계 양심의형을 펼치노라면 그는 늘 이러한 통증을 느꼈다. 본시, 몸 속의 진기를 일반 신공보다 세배는 빨리 움직여야 하는 양심여의공은, 그래서 특히 혈관의 진동이 심하다. 신승 자초가 이 신공수련을 그만둔 것도 그의 정순한 공력으로도 한시진 이상 펼치면 혈관이 터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아직 팔성의 수위 밖에 이르지 못한 구양조운임에랴....... 만약, 그가 육양산맥의 특이한 체질이 아니었다면 이 신공을 펼칠 엄두도 내지 못했 을것이다. 지금, 그의 내공수위로서 이 양심의형을 버틸수 있는 시각은 불과 반각이었다. 무원측검대의 시험을 앞두고 이러한 양심여의공을 펼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 이었다. 하나, 앞으로 벌어질 지옥련과의 일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모험은 충분히 벌일만한 가치가 있었다. 구양조운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환체는 바람처럼 연신 위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허공으로 떠오른 본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그는 한 손으로 통증이 이는 가슴을 억누르며 황급히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 다. 비룡번신에 풍륜맹전. 분광환영에 유운요일. 운룡구현에 비홍충천. 순식간에 수십 개의 신법들이 그의 전신으로부터 눈부시게 쏟아져 나왔다. 뒤틀고, 솟고, 뻗고, 박차고, 돌고, 오르고, 내리고....... 하늘엔 노을이 빛나고 있었다. 노을은 일종의 역광이다. 사람의 시선 속으로 사선으로 비쳐든다. 일식에 백 사십 번의 회전을 거듭하는 구양조운의 희대의 신법과 노을은 완벽 할 정도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허공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가슴이 빠개지는듯 아파왔다. 숨이 가쁘고 진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불과 삼십여 장, 구양조운은 백 서른 번째의 신법을 펼치며 입가에 가늘게 맺힌 선혈을 모두 문질러 닦았다. 이제 이십 장! 힘을 내라, 조운! 너의 어깨에는 대정파의 천년운명이 걸려 있다. 십 장! 스승 자초는 말했었다. 어떤 일이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될 때, 한 번만 더 박차고 일어나 보라고. 그 한 번이 너를 사지로부터 구해낸다고. 슈파파팍! 슈슉! 어떻게 다시 합체를 했을까? 환체를 거두고 땅에 발을 디뎌을 때 구양조운은 현기증이 핑 도는 것을 느꼈 다. 그는 비틀 몸을 가누며 힐끗 뒤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제서야 건녀편의 군중들이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와아----] [와----] [최고다!] 오명화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거대한 고송이 십여 그루 솟아오른 아래, 높이 오 장여의 석비 하나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에 하얀 백의를 걸친 소녀하 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백의소녀는 구양조운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생긋 웃으며 그 자리에서 날아 갈 듯 절을 올렸다. [무종관에 입관하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소녀는 천향입니다. 와호장 지객당 소속으로써 앞으로 대협을 모십니다.] 구양조운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거 뜻밖의 미녀가 아닌가? [가슴이 예쁜 아가씨로군. 이거 만나서 반갑소.] 천향은 그가 자신의 가슴을 직시해 보자 사르르 얼굴을 붉히며 옆의 석비를 가리켰다. [방명비에 서명을 하세요.] 구양조운은 힐끗 석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과연, 비의 앞면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그 수는 모두 백 인쯤 될까? 적힌 이름은 하나같이 낯익은 것들이었다. 무당의 삼백 년 전 기재 천연자를 위시하여 당종무예의 달인이라 일컬어지던 대라마황. 점창검파의 이대장령인 형우자 등, 하나같이 무림사에 찬연한 족적을 남긴 협성괴걸들. 그렇지만, 역대를 통해 무종에 이른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다. 검후로 오른 사선녀 경설과 스승 자초, 그리고 무황 우도. 스승 자초의 이름은 비의 아랫쪽 일흔 두번째 자리에 적혀 있었다. <백인불 자초상인.> 구양조운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그는 시종 비의 앞으로 다가가 손수 식지를 꼿꼿히 세워 쇄지공의 힘으로 춤 추는 획을 그어 나갔다. 파파팍! <소수유혼 구양조운.> 소수유혼, 왜 갑자기 그런 호가 떠올랐을까. 눈깜짝할 새에 한 치 깊이로 새기고 한 걸음 물러나는 구양조운의 귓전으로 천향의 찬탄어린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놀랐어요. 대협께선 무예 뿐 아니라 서체에도 일가견을 이루셨군요.] [이 호가 어떻소?] 천향은 대답 대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펴들었다. [최고가 될 거예요.] 처소로 안내한다며 그녀는 섬연한 몸을 돌려 세웠다. 이때, 문득 구양조운은 자신의 이름 위에 쓰여진 이름을 발견했다. 그것도 판 지 얼마 안된 듯 하얀 돌가루가 서체의 끝에 묻어 있었다. <신수궁 패옥신녀 감려연.> [신수궁이라.........?] 앞서 걷던 천향이 종알거렸다. [어제 오늘은 정말 이상한 일이예요. 일 년 가야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무종관 에 벌써 두 사람이나 올라 왔어요.] [흐흠!] [어제 오후에 온 신수궁 일행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예요. 패옥신녀를 수행한 두 사람은 소름끼치는 가면을 썼는데.......] 구양조운은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어 급히 물었다. [혹시 목면구와 철면구가 아닌가?] [맞아요. 이미 보셨군요. 저는 신수궁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지만 와호장의 두 분 장주님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대경실색하며 맨발로 그녀들을 마중했어요.] [........] [삼십 년 전엔 가히 패도의 위력을 펼쳤던 문파래요. 특히 그 면구를 뒤집어 쓴 사람들은 과거엔 목부인, 철천랑이라 불리우던 사람으로써 강호인들이 이름 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던 대살성들이었대요.] [...........] [이제 신수궁이 다시 무림에 나왔으니 한 차례 풍파가 일 거라고들 했어요.....] 선악촌 거리에서 만났던 백의소녀가 언뜻 뇌리를 스쳤다. 이때 돌연, 눈앞이 갑자기 팍 트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탑루하나가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 어왔다. 오오........ 실로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 보라! 아득히 펼쳐진 푸른 대평원 뒤로 하나의 거대한 석산이 솟았고, 그 산에 기대듯 세워진 오십여 장의 탑루들! 하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탑이 아니었다. 각층은 이백여 장은 족히 될 너비였고, 그 바닥엔 붉고 푸른 천이 두텁게 깔 려 있었다. 또한, 층마다 각기 다른 갈백자록황의 색이 칠해져 노을 아래 신비로운 채광이 사위 로 번져 오르는 모습....... 한데 한 가지 기이한 것은, 각층의 탑루와 접한 석산에는 똑같은 높이로 다섯 개의 동굴이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무원측검대의 관산이예요.] 천향이 그쪽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도전고수들은 일단 저 관산으로 들어갑니다. 저곳에는 각 단계별로 마련된 관 문이 있어요. 무종관은 모두 삼관이지요.] [그럼 관문을 통과해야 대로 오를 수 있겠군.] [그래도 관문을 통과하는 동안 삼십육노화진의 엄밀한 심사가 있게 되요. 사실 상 통관하는 동안 거의 판가름이 난다 해요.] 저편으로........ 다시 하나의 황금빛 누각이 쏘아져 들어왔다. 금(金),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는 색, 불망대이리라. 검군이나 검후가 되어야 오를 수 있는 곳...... 아아........ 오백여 성상 동안 이 땅 위에서 유성처럼 명멸해 갔던 영웅협객들의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난다. 그 어떤 세월을 돌고 돌아 나는 이 자리에 서게 되었던가? 구양조운의 주먹이 꼭 움켜쥐어졌다. 영웅의 피가 그의 혈관을 휘돌아 갔다. 하늘엔 땅거미가 고즈넉히 깔리고 있었다. <매검노인으로부터 받은 단장검의 검자루를 좌로 세 번, 우로 일곱 번 비트시 오.>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요, 서명이라곤 단 한 줄도 보이지 않는 쪽지, 맨 끝에 일곱 개의 별이 그려진 이 쪽지는 소두육을 담은 음식그릇 밑에서 나 왔다. 방, 이곳은 한 채의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황제의 침방인들 이렇듯 화려하랴. 바닥에 깔린 융단은 평생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월명국의 자단피요, 사방 벽면에는 찬란한 보옥, 심지어, 탁자에 놓인 식기마저도 취곤옥으로 만든 옥기였으니....... 구양조운은 즉시 식사를 중지하고 아까 낮에 매검노인이 던져 주고 갔던 간장 검을 꺼내었다. 그는 쪽지가 지시한 대로 검자루를 좌로 세번 우로 일곱번을 돌렸다. 순간, 덜컹! 가벼운 둔음과 함께 검자루 안에서 정교하게 말린 두루마리 하나가 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두루마리엔 섬세한 여인의 필체가 빽빽히 적혀 있었다. <그간 몸성히 안녕하셨는지........ 백가로가 삼가 인사드려요.> 백가로, 이는 바로 천년맹의 수좌총사가 아닌가? 마치, 아내가 유형중인 남편에게 하듯 온유롭고 다감한 어조였다. 헌데, 그녀는 구양조운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어찌 알고 있었을까? <지옥련으로 침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원측검대라는 데에 총영반과 소녀 의 생각이 일치할 것으로 믿었어요. 이제, 총영반의 실력이라면 십중팔구는 네 번째 무종이 되실 수 있으리다. 지옥련에서는 그런 총영반에게 반드시 손을 뻗쳐올 거예요. 이 달 보름 장안에서 만날 철무쌍도 필시 속셈을 지니고 있으리다.> 귀신이 곡할 일...... 구양조운은 백가로라는 여자에 대해 문득 형언할 수 없는 놀람을 느꼈다. 도대체, 지하세계 여인곡에서 벌어진 그 일을 이 여자는 어떻게 알고 있단 말 인가? <하지만, 그들은 또한 과거 백패서생의 아들이었고 신승 자초의 제자였던 총영반에 대 해 의혹을 풀고자 할 것이예요. 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해 올지도 몰라요. 그 모든 것은 결국 정파와 대적하게 되는 것이니..... 일전에 한 번 간언한바 있지만 충후한 총영반께서 지키지 않으실까 염려되어 거듭 말씀 드립니다. 반드시 정파와 대적하세요. 여기, 정파 내에서도 능히 죽여야할 자를 적어 보내니 참고하도록 하세요.> 그 아래에는 생살부란 이름 아래 사람들의 이름이 쭉 적혀 있었다. 그 중엔, 몇 번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정파의 대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이레 뒤면 검군께서 맹으로 합류하세요. 지금까지 소강상태이던 천년맹과 지옥련의 싸움이 정식으로 표면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어요. 총영반의 눈부신 활약이 자못 기대됩니다. 내내 총영반의 무운을 빌어요. 그럼 다음에 또............ 백가로.> 서체의 밑엔 추신의 제목과 함께 다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가는 곳마다 연풍이 일고 낙화 분분하니 미래의 여난을 어찌 감당할는 지.......?> 자못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구양조운은 빙그레 웃으며 내심 한 번도 보지 못한 백가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렇게 머리가 좋으니 그 머리통은 남보다 두 배는 클테고..... 서정적인 필체로 보아 나이는 내 또래이거나 조금 많은 듯, 안 보이는게 없고, 안 들리는게 없는 모양이니 눈이나 귀가 유난히 크지 않을 까? 결국, 괴상한 모양의 괴물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구양조운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생살부, 어느 세계에나 암적인 존재들은 있다. 그런 자들은 이 기회를 빌어 제거하는 것은, 첫째, 구양조운의 위장을 완벽하게 하고, 둘째, 먼훗날에 발생할 정파 내의 우환을 미리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묘계, (이런 여자는 안 좋아, 기분나쁠 정도로 머리회전이 빠르거든, 이런 여자와는 절대로 만나지 말고 살다 만나게 되더라도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이 좋을 게야.......) 파지직....... 두루마리는 삼매진화에 의해 한 줌 재로 변했다. 구양조운은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풀지 못한 난제가 있을 때의 그의 특유한 버릇, 이때 문득, 그의 걸음이 뚝 멈추어졌다. 해사한 얼굴로 한 줄기 밝은 광채가 스쳐 지난다. [그렇군!] 순간,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맴돌았다. 그러자 보라! 해맑은 용모의 미소년은 간데없고 느닷없이 나타난 중년유생 하나, 세 가닥의 염소수염과 쭉 찢긴 듯한 호안이 자못 위엄스러운 모습이었다. [귀곡서생 양운..........] 그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빙글 몸을 돌렸다. 동시에, 착! 우측에 감겨있던 반야선이 둥실 피어올랐다. 한들한들 부채를 부치는 그 모습은 이미 중년유생이 아니라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추면청년으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불마공자 구운.......] 구양조운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이제 무림에는 소수유혼 구양조운, 귀곡서생 양운, 불마공자 구운의 세사람이 동시에 날뛰는 모습을 보게될 것이다..........] 그는 생각할 수록 우습다는 듯 피식 실소를 흘렸다. [지옥련은 어리둥절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게고....... 천년맹의 백가로도 의혹에 사로 잡히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 하고 싶은 것을 나름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일거일동이 남에게 다 드러난다는 것은 그리 유괘한 일이 아니거든.........] 이때 돌연, 구양조운은 느닷없이 몸을 엄습해 오는 가벼운 한기를 느꼈다. 그의 두눈으로 한 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한기(寒氣), 무예인이란 계절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다. 추위도 그렇고, 더위도 그렇다. 헌데 추위라니? 그는 주위를 한 차례 휘둘러 본 후 천천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일 장 10/16 17:14 267 line 第 二十一 章 魔功과 少女 달빛, 그리고, 스산한 목면구와 철면구, 한 채의 아름다운 누각 앞에 유령처럼 선 이들은 바로 신수궁의 대살성이라는 목부인과 철천랑이었다. 멀리서 보자니 이들은 마치 하나의 나무토막 같다. 구양조운은 편안히 팔배게를 하고 누운 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흙의 감촉이 등판으로 전달되어 온다. 그가 누운 곳은 몇천 몇만 송이인지도 알 수 없는 국화밭이었다. 매화 외엔 다른 꽃은 찾아볼 수도 없는 이른 춘삼월에 이 무슨 국화인가 싶을 정도로 꽃은 만발했고, 달빛 아래 은은히 번지는 향기는 싱그럽고 달콤했다. 구양조운은 누운 채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코끝을 찡긋했다. 한기, 그가 느꼈던 고수자의 감응이 아니면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그 한기 는 틀림없이 저 누각으로부터 풍겨나고 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두 사람이 잠도 안 자고 누각을 지키고 있는 것과 이 일은 무관한 것일까? 구양조운은 피식 웃으며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이거 참 탈이거든. 안되는 줄 알면서도 호기심이 한 번 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다말이야......] 목부인은 문득 어둠 속에 힐끗 드러나는 한 줄기의 인영을 보았다. 그녀가 철천랑을 돌아 보았을 때 철천랑은 이미 그 인영을 향해 짤막하게 외 치고 있었다. [누구냐?] 순간, 대답대신 한 낭랑한 낭송소리가 울려왔다. [옛 동산에 버들잎 파릇할 제, 봄 들어 부르는 노래 더욱 서러워라. 강 위엔 초승달 더욱 밝고나. 지난 날 옛 궁에 비치던 달이거니.......] 이백의 소대람고(蘇臺覽古) 소리에 이어 한 사람이 달빛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월광 속의 선인인 양 유유히 걸어 나오는 그, 중년유생, 세 가닥의 수염과 우수에 든 십여 송이의 국화가 멋갈스럽다. 그는 하늘을 한 차례 우러러 보더니 긴 탄식을 터뜨려 냈다. [한광교교..... 춘색만연...... 야운소슬하나 아쉽게도 한 잔 술이 없구나......] 철천랑이 다시 물었다. [유생, 당신은 누군가?] 중년유생의 시선이 한곳 철천랑을 향했다. 하나, 그는 엉뚱하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허어.... 어디서 목소리는 들렸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일꼬?] 순간, 철천랑의 무쇠면구 속에서 한 줄기 강철처럼 냉혹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놈!] 번쩍! 그녀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꺼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중년유생의 목 밑까지 이르렀다. 무섭도록 쾌속한 신법! 이어, 검은 장포자락 속으로부터 희고 깡마른 손이 기이한 각도로 튀어 나왔다. 설사, 짐작하고 있다손 쳐도 도저히 피해낼 수 없는 해괴한 각도의 금나수! 이때다. 중년유생의 몸이 홱 원을 그렸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놀랍게도 철천랑의 공격을 가장 효과적으 로 피해 냈다. [허어....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웬 요괴들이 이토록 날뛰는가?] 그는 미끄러지듯 이 장 밖으로 주르르 물러섰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국화송이를 사방의 땅에다 어지럽게 꽂기 시작했다. 괴이한 행동, 철천랑은 순식간에 열 한 개의 꽃을 주위에 박아 놓고 싱긋 웃고 선 중년유생 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무서운 기세로 그를 향해 짓쳐들었다. [무슨 괴상한 짓이냐?] 중년유생은 껄껄 웃으며 마지막 하나 남은 국화꽃을 비검 수법으로 휙 던져냈 다. [바로 이런 짓이오.] 참으로 괴이한 일, 그의 비검수법은 매우 단순했으나 또 다시 철천랑은 공격을 멈추고 그것을 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가며 비룡퇴보의 식으로 황급히 피해냈다. 슈욱! 국화꽃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일장 밖의 땅에 꽂혔다. 팍! 그 한송이가 땅에 꽂히는 순간, 목부인과 철천랑은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 보라! 느닷없이 칠흙처럼 캄캄해지는 주위, 누각이며 국화밭, 그리고 사람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대신,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괴물들이 괴성을 터뜨리며 사방을 난무하는 것이 아닌 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가니 이번에는 또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앞을 가 로 막는다. 다시 한 걸음에 불볕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이 나타나는가 하면, 질겁하여 몸을 돌리기 무섭게 천근 만근의 말발굽이 전신을 짓밟아오는 것이 니.... 오오....... 하늘이여! 이게 도대체 꿈이오리까 생시오리까? 바로 그때, 중년유생은 능글맞게 웃으며 누각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목부인과 철천랑은 지금 열 두송이의 국화꽃 안에서 우왕좌 왕하고 있었다. [대연역후미괴진의 위력은 과연 좋군...... 두 마리의 암캐를 저리 가두어 둘 수 있다니........] 귀곡별부에서 본 귀경총람에 수록되어 있던 수백 개 기진의 하나였다. 이렇게 위력이 클 줄은 몰랐다. 문에 가까이 다가서니 한기는 더욱 거세졌다. 슬쩍 주렴을 들쳤다. 이곳의 구조도 그가 있는 곳과 같은 구조였다. 한기는 끝쪽의 상방이 진원지인 것 같았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중년유생은 근처에서 대젓가락 하나를 집어 문 틈으로 슬쩍 집어 넣었다. 철컥! 굳게 닫혔던 문이 빼꼼이 틈을 보였다. 왈칵 전신으로 끼쳐오는 한기,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중년유생은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두 눈으로 한 줄기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방 안엔 기이하게도 가구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의 화려함에 비추어 본다면 이를 데 없이 괴이한 일, 또한, 사방의 벽, 바닥은 모조리 성애 낀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중년유생이 딛고 있는 곳만 해도 거의 한 치 두께의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기다가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방의 한가운데,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얼음이 가장 두텁게 언 불룩한 면의 위에 앉아있는 한 명의 소녀였다. 소녀가 앉아 있다는 것이 뭐그리 놀랍고 대단할까 마는, 중요한 것은 이 소녀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동그란 어깨에 조롱박을 두 개 엎어놓은 것 같은 젖가슴, 정좌하고 앉은 자세인지라 그대로 드러난 치부로 창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통과해 가고 있었다. 얼음과....... 창백한 살결의 미소녀,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 나체소녀는 바로 중년유생 구양조운이 선악촌에서 만났던 그 백의소녀였다. 그녀는 지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듯 구양조운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휘둥그렇게 뜬 그 눈속에 떠올라 있는 것은 놀람, 당황, 분노, 조급함, 그런 것들...... 구양조운은 빠르게 그녀의 처지를 알아 차렸다. 움직이기는 커녕 입도 벙긋하지 못한다. (운기중이었던 게로군.......) 그는 짐짓 한 손을 눈 위에 대고 주위를 휘둘러 보는 시늉을 했다. [흐음, 어째 이 방엔 아무도 없을까?]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 나체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녀라고 어찌 저 사내가 볼 건 다 보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그가 못본 척 하자한 귀퉁이로 사르르 가벼운 안도가 스며드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돌연 자신의 몸에 가벼운 이상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전신이 자지러지는 듯한....... 최초에는 현기증! 이어, 재채기를 할 때처럼 모공 구석구석으로부터 간지럽게 번져오르는 살심이었다. 억누르려 하자 그것은 마치 폭죽 터지듯 치솟아 올랐으며, 순간, 소녀 감려연은 섬세한 몸을 떨고 말았다. (주화입마......?) 한편 이때, 구양조운은 구양조운대로 놀라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며 무심히 던졌던 벽면의 그림인데...... 그것이 다름아닌 무화(武畵:무예초식의 도형등을 그린 화폭)이며...... 그 무화의 이름이 구천현음한빙공(九天玄陰寒氷攻)일 줄이야! --구천현음한빙공!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천하의 백대신공을 서술한 기문방람록에 수록된 한 귀절을 보면........ --구천현음한빙공은 태음의 극한무예이다. 이 무예를 십성의 경지로 익히게 되면 온몸이 한기로 충만되어 앉은 풀을 얼 리고 닿는 나무를 응고시킬 수 있다. 또한 장력을 뿜어 백보 밖의 물체를 빙결시키는 위력이 있다. 하나, 공력을 익히는 도중 외부의 침해를 받거나 하게 되면 무서운 주화입마의 현상 에 빠지게 된다. 구천현음한빙공의 주화입마는 일반 신공의 주화입마와 다르다. 극음의 기운이 혈관을 잘못 깃듬으로써 인성을 마비시키고 사악한 심훼가 만 들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사악한 심훼는 육체의 잠재력을 격발시켜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고 무서운 마 성을 가지게 되니..... 그렇게 해서 격발된 힘은 가히 인간의 상상을 벗어나는 엄청난 것이 된다. 무릇, 구천현음한빙공을 익히고자 할 때는 상기의 사실을 유의하여 인적이 없는 곳 을 수련지로 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차!) 구양조운의 몸이 빙글 돌려졌다. 이를 데 없이 다급한 기세! 하나 이때, 소녀 감려연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악귀인가? 산산히 창날처럼 허공으로 솟아오른 머리칼, 핏빛 혈광이 솟구쳐 나오는 두 눈과 희다 못해 연청빛 창백함으로 물든 옥체, 파파파팟! 두 발은 바닥에서 반 치쯤 떠올라 있는데, 전신에서 억제할 수 없도록 솟구치는 힘으로 인하여 바닥의 얼음이 사방으로 튀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이미 사악한 심훼의 마성이 격발하고 말았단 말인가?) [크아악---!]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소름끼치는 괴성에 이어 모골을 섬뜩하게 하는 사기를 휘몰고 감려연의 나신 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와당탕! 쿠당! 두 개의 그림자가 뒹굴 듯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목부인고 철천랑이었다. 그들은 한쪽의 구양조운은 일견하는 둥 마는 둥 감려연을 바라보다가 비명을 터뜨렸다. [공주님!] [공주.......] 그들은 말을 내뱉을 새도 없다는 듯 다급히 감려연을 향해 다가서려고 했다. 헌데 이때, 감려연이 가볍게 좌수를 흔들었다. 파리를 쫑듯 무심한 동작, 그러나 순간, 쐐액! 귓청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몽롱한 백연이 그녀의 손 끝에서 피어오르는가 싶 더니 [악!] [아악!] 다급한 비명을 터뜨리며 두 사람은 다가설 때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퉁겨 나 갔다. 와장창! 문짝이 그대로 부숴져 나갔다. 입 밖으로 울컥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몰라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럴수가.....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야.........] 구양조운은 지그시 공력을 끌어 올리며 다가오는 감려연을 노려 보았다. 그 아름다운 옥용를 온통 뒤덮고 있는 악마의 기운...... (내 잘못이다....... 반드시 원상복귀시켜야 한다.) 이때, 둥둥 떠서 다가오던 감려연이 다시 우수를 쭉 내뻗었다. 쐐액! 섬뜩, 한기가 전신을 휘몰아왔다. 구양조운은 이를 악물고 팔성의 공력으로 대불천력을 후려쳤다. 슈팍! 가죽공이 터지는 듯한 둔음이 일었다. 구양조운은 비릿한 선혈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 오는 것을 느끼며 쿵쿵 두 걸 음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감려연의 신형은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느릿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불과 일 장의 거리다. 구양조운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이번에는 십성의 전공력으로 불가의 진산절학 인 쇄비장을 후려 쳤다. 쿠쿠쿠...... 비석을 가루로 만드는 무예였다. 그것은 십성의 공력이었다. 그의 장공은 감려연의 가슴을 강타했다. 꽝! 그러나, 이번에는 걸음조차 멈춰지지 않는다. 저 요괴는 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구양조운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피어올랐다. (가히 금강불괴의 지경이로구나..... 보통 수법으로는 안된다..... 올 테면 오라. 인간의 능력이 결코 마보다 약하지 않음을 보여 주리라........ 나는 네가 나보다 더 머리가 좋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스르르...... 일곱 자의 거리, [크흐흐.........] 목부인과 철천랑은 자신들의 상처를 잊고 이 무서운 혈투를 지켜 보고 있었 다. 쉴 새 없이 전신으로 밀려드는 한기, 또 한기........ 그녀들의 망연한 시선 속으로 느릿하게 손을 쳐드는 감려연의 모습이 쏘아져 들어왔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이 장 10/17 17:15 273 line 第 二十二 章 關 門 펑! 와당탕! 목부인과 철천랑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친구, 자신들은 일 장에 나가 떨어지는 저 엄청난 힘을 두 번이나 막아내기에 한 가 닥 하는 친구로 여겼더니....... 감려연의 손이 쳐들리기 무섭게 맥없이 나가 떨어진다. 그것도 아예 피를 사발로 뿜으며 개구리처럼 몸을 파르르 떨기까지 하는구 나..... 구양조운은 소맷자락으로 입가의 피를 쓰윽 문지르며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호신강기도 소용없었다. 일장을 얻어맞는 순간 마치 수십 개의 칼에 한꺼번에 찔리는 것 같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다시피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거리는 여섯 자, 또 다시, 쐐액! 몽롱한 냉연이 쏘아져 왔다. 이번에는 더 빨랐다. 구양조운은 휙 몸을 날리는 척하며 옆구리를 슬쩍 비워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마음이 변하여 다급히 엉덩이 쪽을 내밀었다. (기왕 맞을 거, 엉덩이가 훨씬 낫다......) 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꽝! 구양조운은 일장이 그의 엉덩이에서 작렬하는 순간, 쏘아낸 살처럼 튕겨 나가는가 싶더니, 와르르....... 한쪽 벽을 송두리째 허물며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피, 머리가 깨진 걸 게다. 한 줄기 핏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제길...... 이래서 안되는 사람은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니까.) 어찔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힐끗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 불과 다섯 자, 손을 내뻗으면 닿을 거리다. 감려연의 손이 다시 느릿하게 쳐들리고 있었다. [크흐흐.........] (역시 느려졌다. 요괴가 방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대 맞아준 것이 주효했다.....!) 감려연의 손이 머리 끝까지 쳐들렸다가 사납게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지금까지의 그 어느 것보다 더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전을 떨었다. 목부인과 철천랑은 자신도 모르게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끝났다!) 한데 이때, 느닷없이 구양조운은 몸이 양쪽으로 쭉 늘어났다. 아니, 두 개로 갈라졌다. 양심의형! 이미, 좌측의 구양조운은 쌍수를 맹렬히 내뻗고, 쾅! 우측의 구양조운은 손쪽의 반야선을 복원시켜 맹렬히 쳐내니...... 쌍수에서 솟구친 새파란 광채는 여의십사식의 진자결이요, 휴르릉....... 섭선 끝으로 피어오른 등운불존의 상은 여의십사식의 참자결! 슈파파팟! 순간, 번쩍하는 새에 진자결을 두들겨 맞은 감려연의 몸이 주르르 밀려났다. 연이어, 무쇠도 가르는 참자결이 그 가슴을 강타했다. 쾅! 감려연의 입 밖으로 한 줌의 핏물이 솟구쳐 나왔다. 아마도 적지않은 타격을 입은 듯, 기회를 놓칠세라 구양조운은 몸을 빙글 돌림과 동시에, 우측의 환체에게 소수지공을 쏘어내게 하고, 파지직....... 자신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대갈과 더불어 허리춤의 단장검을 펼쳐냈 다. 슈파앗! 백색원구의 검풍! 이어, 공간을 쪼개는 듯한 일섬묵광 귀곡별부의 벽력성군상에 숨겨져 있던 뇌정대삼식의 제일초 검식이었다. 뻥! 콰콰쾅! [끄아악!] 한 마디로 가공할 기공절초의 행렬이었다. 목부인과 철천랑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들은 살아 생전 저런 신비로운 무예를 본 적이 없다. 비단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구양조운은 방 저쪽 구석까지 나가 떨어진 감려연을 향해 황급히 달려샀다. 그는 황급히 그녀의 심장에 귀를 갖다댔다.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힘의 조절 탓으로 별다른 상처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구양조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려연은 넋을 잃은 듯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꼬리에 한 줄기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용서하시오. 그런 뜻은 없었소.......] 감려연은 대답 대신 눈물을 주르르 흘려냈다. 구양조운은 묵묵히 그녀를 내려가 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목부인과 철천랑이 달려왔다. [공주!] [공주님!] 감려연은 느릿하게 얼음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구성...... 구성까지 익혔던 신공이었다. 바닥의 차디찬 한기가 볼을 적셔 왔다. (나쁜 놈....... 결코 용서하지 않을테야.......) 허나,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는 오히려 구양조운에게 감사를 해야 했다. 구천현음한빙공이란 일종의 순음무예다. 즉, 일생 순결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나무토막 같은 뻣뻣한 몸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신공이 완성됐다 한들 그런 삶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만약, 오늘밤 구양조운이 이곳을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일생을 후회속에서 지내 게 됐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인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말건 정원의 수만 종의 국화는 달빛 아래 부지 런히 그 향기를 퍼나르고 있었고, 구양조운은 방에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호기심 따위로 여자의 방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은 시궁창에나 쳐박히리라...... 살아 생전 그런 친구들을 보게 된다면 머리통을 부셔서라도 막아야 한다...... 암, 그렇구말구.] <제 일관 허영난분(虛影亂紛)> 이 안에는 한 개의 가공한 진식이 설치되어 있다. --천멸귀혼강시진. 이라 이름하는 것으로써 그 사악함과 폭렬성은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 진은 오백 년 전, 사제(邪帝)란 인물에 의해서 무림에 한 번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것을 단 한 번 펼쳤을 뿐이다. 그 안에서 이천 명의 무림고수가 단번에 몰살했으니 그 위력이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얼키고 설킨 진세는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강시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사람을 절명케 하고 두 눈의 녹광은 정신을 미 혹하니.......... --무종관은 모두 삼관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관문은 갈수록 험해지지만 그 하나 하나의 어려움 또한 해아릴 수 없어요. 언제든지 불가항력의 상황이라고 여겨질 땐 그 신호화선을 쓰세요. 즉시, 관문은 정지되고 대협은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삼십육노환진은 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대협의 일거일동을 예의주시하게 됩니다. 부디, 대협의 무운을 빌어요....... 무종관, 일천 개의 돌계단을 오른 끝에 이 무종관의 입구는 있었다. 황금글씨의 거대한 현판, 우뚝 선 채 묵묵히 현판을 바라보던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한쪽의 기관을 눌 렀다. 순간, 쿠르릉...... 한 쪽 벽면이 양쪽으로 쫙 갈라져 나가며 허영난분의 푸른 인광 글씨가 보였 다. 그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으며 구양조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석벽은 그의 몸을 삼키고 나서 다시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관 안으로 들어선 구양조운은 즉시 신공을 돋우어 주위를 예리하게 살폈다. 먹물 같은 공간, 그리고, 한 줄기 비릿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그 냄새는 몹시 역겹고 독기서린 것이었으나 구양조운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 다. 구양조운은 안력을 최대한으로 돋우었다. 순간,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놀람의 빛이 번뜩 스쳐 지났다. 대전, 그가 있는 곳은 한 개의 거대한 대전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전의 바닥에는 죽은 지 수백 년도 더 되어 보이는 목내이 (木乃伊:미이라)가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수는 줄잡아도 백여 구, 그러고 보니, 구양조운의 전후좌우에도 목내이는 수없이 널려 있었다. 구양조운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는 암암리 공력을 손에 갈무리하고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이때였다. 돌연, 석고로 만든 흰 천 속에 쾡하니 뚫려있던 목내이들의 동공에서 푸르스름한 인 광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더니 구양조운을 향해 일제히 맹렬하게 덮쳐 왔다. 키키키....... 크크크....... 하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구양조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낭랑한 일갈과 함께 좌장을 앞으로 쭈욱 뻗어냈다. 순간, 꽈아앙! 하고 한줄기 감청빛 기류가 목내이를 향해 맹렬히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의 장력은 목내이들의 몸 앞 이 장쯤에서 돌연 증발해 버렸다. 바다가 모래를 삼키듯 흔적은 전무했다. 구양조운은 내심 크게 놀랐으나 빙글 몸을 돌리며 재차 장력을 쏘아냈다. [소수산공!] 소수산공! 이 희대의 마학은 모두 세 초식으로 나뉘어진다. 제일초 혼광혈(魂狂血)! 제이초 사이절(邪而絶)! 제삼초 섬광류(閃光流)! 지금 펼쳐진 것은 혼광혈의 수법이었다. 수천 개의 꽃잎이 맴돌 듯 환상적인 폭장! 쏴아아.........! 허나, 일장에 산도 허물수 있는 이 거력은 이번에도 역시 목내이들의 한 자 앞에서 증발하고 말았다. 구양조운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이미 목내이들의 부수(腐手)는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있었다. 찌이익----! [귀영표!] 구양조운은 유향미리보의 제일변 귀영표를 밟아 섬전처럼 쏘아 나왔다. 그러나, 간일발의 차이로 그의 옷자락은 길게 찢겨져 나갔다. 구양조운은 허공에서 풍차처럼 몸을 선회시켜 이십여 장 앞에 뚝 떨어져 내렸 다. [기이한 일이로군. 장력이 왜 사라질까? 저들의 몸에 흡력이라도 있단 말인 가?] 목내이들은 첫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빙글 몸을 돌리더니 기이한 대형을 형성 했다. 이어, 다시 질풍처럼 구양조운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순간, 구양조운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언뜻 스쳐갔다. 그는 국화꼭 가지 하나로도 천고의 절진을 만들어 내는 재주를 지니게 된사 람이다. 대형, 자연히 그는 목내이들의 대형이 일편 무질서한 듯도 하지만 엄격한 규칙을 지 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은 오열을 짓고 사우에 칠열의 대형이니..... 그렇군. 이는 바로 제갈무후의 팔진도가 아닌가?) 구양조운은 눈앞까지 닥쳐온 목내이들의 공격을 피해 번쩍 몸을 날렸다. (한데, 그 위에다 칠성과 구궁의 역방위를 세워 눈가림을 했군. 이것이 천멸귀혼강시진이란 말이지.......) 팔진도, 이것은 병가에 따라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대개 천(天), 지(地), 풍(風), 운(雲), 용(龍), 호(虎), 조(鳥), 사(蛇)의 여덟 모양으로 나타난다. 목내이들은 막 세번째의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가운데에 사십 명이 한 일 바탕에 충(蟲)의 형상을 하고 그 주위를 나머지 육 십 명이 삼 면을 둘러싸니......... 이른바 풍진의 형세, 구양조운은 입가에 한 줄기 냉오한 웃음을 띠었다. 그는 즉시 덮쳐오는 목내이를 향해 마주 쏘아 나갔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가 뛰어든 곳은 팔방 중 이방(離方)이었다 이즉사문(離卽死門)이라. 스스로 사문으로 뛰어 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나 다음 순간, [탄자결!] 쩌렁한 폭갈과 함께 성스러운 불존상이 허공에 아로 새겨졌다. 슈르릉! 순간, 크악! 카칵! 귓청을 찝는 듯한 괴성과 함께 목내이들의 몸이 사방으로 퉁겨 나갔다. 마치 폭죽이 터지듯 사방으로 휘날리는 아수라장의 순간이 지나고 나자 주위 에는 이내 쥐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 앉았다. 구양조운은 섭선을 비스듬히 내려든 채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한가로와 보였다. 사문(死門), 본래, 팔진도란 적을 생문으로 유인하여 단숨에 사문으로 바꾸는데 그 묘용이 있었 다. 자연히, 사문보다는 생문 쪽에 강병이 배치되는 법이니 구양조운은 그것을 역으로 이 용하여 단숨에 진을 부숴버린 것이다. 천멸대혼강시진, 구양조운은 대망의 무종관 제일관을 이렇게 통관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삼 장 10/17 17:16 329 line 第 二十三 章 武宗의 길 제이관, 기관 안에는 또다른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삼십육노화진이 있을 것이며, 또한, 구양조운의 전속시녀인 천향이 목소리만으로 들어설 때마다 상세한 설명을 해 주곤 했다. 지금,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세 개의 문이었다. 그것은 각각 백, 홍, 흑의 색을 띠고 있었으며 세 문의 위에는 거대한 핏빛글 씨가 섬뜩하게 쓰여 있었다. <만음멸혼처.> [세 문 중에 백문은 삶의 문이예요. 홍문은 고독의 문이며, 흑문은 죽음의 문 이니 대협은 셋 중 하나를 선택하여 들어가도록 하세요.] 천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양조운은 이미 흑문의 문고리를 열고 있었다. 영웅이란 본래 자부심이 강한 법이다. 그리고, 늘 가장 강하고 위험한 것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구양조운의 모습이 문 안으로 사라진 허공에 문득 천향의 힘없는 중얼거림이 피어올랐다. [험한 곳이지요. 이 삼관을 통과한 사람은 소림의 자초상인과 무황 우도 뿐이 예요....... 부디.........] 중얼거림의 끝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으로 매듭지어졌다. 한편, 관 안으로 들어선 후 구양조운은 안력을 바싹 돋우었다. 어둠, 늘 그랬지만 안은 어둠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그때 돌연, 퍽! 하고 한 줄기 새파란 귀화가 어둠 속에 피어올랐다. 그것을 필두로 허공에 무수한 귀화가 나타나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귀화의 무리는 몹시 공포스러운 느낌을 주었으나 구양조운은 그 빛을 빌어 주 위의 것들을 조금씩 살필 수 있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있는 곳은 한 개의 별다른 장식이라곤 보이지 않 았다. 다만, 방의 한쪽에는 여러 종류의 악기들이 대위에 질서있게 놓여 있었다. 대와 진열된 악기의 종류는 일견해 보기에도 수십여 종류, 구양조운은 예리한 시선으로 그곳을 살피다가 그 중 백옥으로 된 피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때, 돌과 돌이 마찰되는 듯한 기음과 함께 갑자기 대전의 중앙부분에서 해골이 하 나 불쑥 튀어 나왔다. 동시에 허공에 넘실거리던 귀화들이 한데 모이더니 해골의 위에 몇 자의 글씨를 형성 했다. 그 내용인 즉, <용기 있으면 해골을 좌로 세 바퀴 돌려 봐라.> 구양조운은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좌수로 허공을 격하여 진기로써 해골을 세 바퀴 돌렸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크크........ 카카........ 소름끼치는 음향과 함께 대전의 한쪽이 쫙 갈라지더니 수십 구의 백골들이 덜 그럭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해골들은 하나같이 품에 금(琴), 적(笛), 소(簫), 고(鼓) 등의 악기를 하나씩 안고 있었다. 괴이한 일은 계속됐다. 백골들은 대전의 한쪽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안더니 제각기 악기를 연주하 기 시작한 것이다. 후르릉........... 휘리링........... 구양조운은 여러가지에 능통한 사람이다. 무예는 말할 것도 없고 의술에 기관진식, 그리고 음률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미 나름대로 대가의 경지를 터득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는 백골들의 연주에 흥미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는 체내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감각을 느끼게 되 었다. 먼저, 뱃속이 무엇에 쏘이듯 뜨끔뜨끔 해지더니, 동시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 다. 구양조운은 내심 크게 의아했다. 하나, 이미 사태는 손쓸 여지가 전혀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휘리링, 휘르릉........ 몸이 무기력해졌다. 들고 있는 옥피리조차 한없이 무거운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구양조운은 치미는 기혈을 이기지 못하고 한 모금의 선혈을 왈칵 토해내고 말 았다. [우욱!] 구양조운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공력, 어떠하든 공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허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백골들이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마음(魔音)은 사람의 기혈을 흐트러 뜨리고 나 아 가서는 세포조직 하나하나를 부수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었다. 휴르릉........ 휘리링....... 이때, 구양조운의 뇌리 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오....... 이것을 내가 왜 미처 생각을 못했던가? 수미반륵정령기!) 수미반륵정령기(須彌盤勒精靈氣)! 양심여의공의 세 번째 단계, 십성의 수련이 아니면 펼칠 수 없는 이것, 수미반륵정령기는 바로 양심여의공의 정화였다. 이 신공은 비단 파괴, 공격의 묘용 뿐 아니라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는 요상의 묘도 있었다. 또한, 수미반륵정령기로 들어가는 초보입문단계가 바로 이 요상결이었다. 하나, 그 동안 구양조운은 이것을 익혀볼 엄두도 못냈다. 모자라는 공력 탓으로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뿐 아니라, 이것을 익히려면 첫째 자신의 몸을 고통스러운 처지로 만들어 놓아야 하기 때 문이었다. 일천 년전 석종께서 고행으로 대각을 이루었듯........ 고통! 이것이야말로 수미반륵정령기의 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다. 하지만, 어디 인위적으로 그 고통이란 것이 만들어지는가? 구양조운은 몇 번이나 이것을 익히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런데 오늘....... 개미가 창자 내부를 물어 뜯으며 다니고, 누군가가 펄펄 끓는 물과 얼음물을 번갈아 붓는 듯한 고통이 몸을 후벼내는 이때, 구양조운은 그 고통에 편안히 전신을 내던졌다. 이어, 수미반륵정령기의 구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이 몸이 누구의 것도 아니요, 이 마음 또한 누구의 것이 아니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왕래하니 끝없는 혼돈뿐이더라......] 돌연, 고통 속에서 한 줄기 시원한 기운이 단전 부근에서 피어올랐다. 그 기운이 대혈을 스칠 때마다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곤 했다. 구양조운은 크게 용기를 얻어 그 자리에 단정히 정좌하고 앉았다. [동과 정은 태주를 기다리고..... 순과 역은 여전히 윤회하니.......] 백골들의 연주소리가홀연 높아졌다. 하나, 구양조운의 귀에는 이미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지고무상한 심법의 도리 만이 그의 전신을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석상처럼 굳어 있던 구양조운의 얼굴에 햇살처럼 밝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전신으로 담담한 백광이 자욱하게 스며 나왔다. 백광에 휩싸인 그의 모습은 이를 데 없이 경건해 보였다. 구양조운은 조용히 들고있던 옥적을 입에 대었다. 순간, 도저히 이 세상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부드러운 피리소리가 허공으로 흩 어졌다. 삘릴리....... 삘리....... 구천 하늘을 조용히 스쳐 가는 여름날 청계백운이런가? 아니면, 깊고깊은 산 속, 이끼낀 바위 틈을 경건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인가? 한 줄기 바람인 것도 같은 이 소리는 단숨에 백골들의 마음을 압도했다. 삘릴리...... 삘리......... 흐흐흥.......... 휘이잉........... 마음이 차츰 그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반면에, 구양조운의 피리소리는 더할 수 없이 낭랑하게 드높아졌다. 그때 돌연, 소고를 치고 있던 백골 하나가 와르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 피리, 금 등을 타던 백골들도 앞을 다투어 허물어졌다. 쾅...... 콰르르........ 쿠쿵........ 잠시 후, 온통 귀기와 마음으로 넘실거리던 대전에 쥐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 앉았다. 구양조운은 낭랑히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몸이 공력도 끌어올리지 않았는데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구양조운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반야선을 쭉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순간, 파앗! 그 끝에서 등운불존의 상이 선명하게 피어 올랐는데 그 윤곽은 이를 데 없이 선명했으며, 또한, 광채는 만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작렬하듯 아예 눈이 멀어버릴 정도였다. 이것은 최소한 그의 양심여의공이 구성의 경지까지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것 이니...... 수미반륵정령기의 제일단계! 고통 속에서 얻은 이 기공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과거의 신승 자초를 능가하는 성취가 아닐 수 없었다.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허공을 걸어 내려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삼관, 제삼관을 향하여! 허물어져 수북히 쌓인 백골들 위로 그의 발걸음소리만이 덧없이 들려왔다. 넓디넓은 공간, 그러나, 사방 이백여 장 정도의 드넓은 공간에는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 었다. 사면의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은 붉은 핏빛 일색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무물 상태와 더불어 그것은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천장엔 조그만 유등 하나가 매달려 흐릿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이때, 구양조운의 시선 속에 괴이한 몸체 하나가 쏘아져 들어왔다. 뭐랄까? 그것은 떡반죽을 해놓은 듯한 주먹만한 크기의 물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떡반죽이 아니었으며 앞면엔 눈으로 짐작되는 것이 붙어있기도 한 생명체였다.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공간에 있는 유일한 물체, 구양조운은 두 눈에서 기광을 발하며 느릿하게 그것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 다. 이때 돌연, 카악! 소름끼치는 괴성과 함께 물체가 갑자기 쏘아낸 살처럼 구양조운을 향해 부딪 쳐 왔다. 구양조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좌우의 섭선을 앞으로 쭈욱 밀어냈다. 순간, 촤악! 소리도 경쾌하게 덮쳐 오던 괴물은 여지없이 두 토막으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 다. 한데, 분명히 두 토막이 난 이 괴물은 몸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살아나는 것 이 아닌가? 거기다가, 잠깐 사이에 괴물은 두 배의 크기로 불어났다. 구양조운은 가볍게 놀란 빛으로 빙글 몸을 선회시키며 다시 두 줄기의 칼 같 은 선풍을 괴물에게 쏘아보냈다. 촤악!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 네 토막이 난 괴물은 좀전 보다 더 커졌으며 갈라지기 전보다 더 왕성한 활력 을 보였다. 이미, 수박만한 크기로 변한 네 마리의 괴물은 귀청을 찢을 듯한 괴성을 지르며 쏜 살같이 구양조운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러왔다. 구양조운은 황급히 귀영표의 신법으로 멀찌막이 몸을 물러섰다. 동시에, 이번엔 거의 팔성 정도의 진력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박자결!] 순간, 파파팟! 새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네 줄기의 선풍이 회오리치듯 네 괴물에게 몰려갔다. 팔성의 여의십사식 박자결은 집채만한 바위도 깨뜨린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야산 정도는 단숨에 평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극렬한 위력이 있 었다. 그러나, 괴물들에겐 이 필사절명의 신초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칼로 물을 베듯, 괴물들은 다시 여덟 개로 갈라지고 몸통은 조그만한 바위만하게변해 버린 것 이다. 괴물들의 몸이 커질수록 몸에서 풍겨나는 역한 비린내도 더 강렬해졌다. 더우기, 그들이 한 번 몸을 날릴 때마다 강풍이 몰아치는 듯한 세찬 경기가 주위를 소 용돌이쳐 왔다. 구양조운은 일신의 공력이 이미 백독불침지경은 아니라 해도 거의 근사치에 이르러 있었다. 한데, 그런 그가 괴물들의 비린내에 약간의 현기증이 일 정도이니 이 독성이야말로 가히 짐작가는 일이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이들이 슬쩍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그 즉시 닿는 사람은 몸이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괴물들의 행동은 마치 섬전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구양조운은 소수문 유향미리보 제일, 이권 중의 귀영표, 마환영을 십성 공력으 로 펼쳤다. 그의 몸은 한 줄기 희뿌연 백영으로 변했으며 순식간에 장내는 선과 선이 어 지러이 얽히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크악! 칵! 휘휙! 느끼기네 이미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구양조운은 마음 한 구석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감히 초식을 펼칠 수 도 없었다. 어떤 힘이든 몸에 닿기만 하면 이 괴물들은 더 크고 더 복잡하게 늘어나니 말 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듯 무작정 피할 수만은 없을 일이 아닌가? 아무리 그의 공력이 높다 해도 결국에 가서 먼저 지치는 쪽은 그일 테니까...... 바로 그때, 잠시 그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한 마리 괴물이 그의 옷깃을 슬쩍 스치고 지나 갔다. 순간, 치이익....... 뜨거운 쇠가 물에 담기는 듯한 소음과 함께 그의 옷자락은 이미 반이나 시꺼 멓게 타버렸다. 구양조운은 크게 놀라 급히 뒤로 몸을 퉁겼다. 한데, 그가 몸을 퉁기자 마자 강한 반탄력이 그의 신형을 가로막았다. 괴물들은 어느 샌가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 범위를 축소해 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강맹한 장력을 쳐내려다 멈칫 손을 거두었다. 보나마나 그의 장력에 힘입어 괴물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늘어난 것이 아닌 가? 실로 진퇴양난지세! 이때였다. 문득, 구양조운의 뇌리를 섬전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괴물들은 상처란 것을 절대 입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들을 통째로 소멸시키는 수 밖에 없다. (불! 불이구나!) 구양조운은 즉시 반야선을 손목으로 거두었다. 이어, 그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들었다. 순간, 파아앗! 하고 다섯 줄기의 시뻘건 불기둥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쭈욱 뻗어 나왔다. 이것은 몸 속의 순수한 진력으로 이루어진 극열한 삼매진화였다. 다음 순간, 카악! 카악! 괴물들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극열의 진화가 닿자 그들의 몸에서 노오란 연기가 솟아나왔다. 하나 그것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불사의 괴물들은 한 줌의 핏물로 녹아버리고 말았다. 구양조운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본래, 삼매진화란 전신공력을 극도로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오랫 동안 십성의 공력으로 펼쳤으니 그의 몸인들 어찌 온전하랴! 허탈한 시선 속으로, 돌연, 한 줄기 해맑은 광휘가 스며 오르고 있었다. 이어, 한 소리 수십 명이 외치는 듯한 창노한 음성이 공중에 쩌렁하니 울려 퍼졌다. [무종관 정식통과---!] 그렇다. 구양조운은 드디어 무종관 제삼관을 모두 통과한 것이다. 빛은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어, 거대한 대전 하나가 구양조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사 장 10/17 17:17 311 line 第 二十四 章 第二의 高手 원형의 대전, 둥근 원을 그리듯 거대한 타원형의 계단이 수십 개나 층층이 놓여 있었고, 그 상부에는 갖가지의 자세를 취한 무예입상들이 수백 개나 놓여 있었다. 사방의 벽과 천장에는 가히 몇천 몇만인지도 모를 용봉황촉의 불길들...... 그리고, 이러한 성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기라도 하듯 온통 흰 백발과 백염에 파묻힌 삼십육인의 노인이 있었다. 그들은 계단의 좌우에 넓게 포진하여 앉아 있었는데, 좌측의 십팔인은 용이 새겨진 백의를, 우측의 십팔인은기린이 새겨진 흑의를 입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일신에서 풍기는 탈속하고 장엄한 위풍이 가히 구름 같으니...... 그렇다. 천하무림 꿈의 장소인 무원측검대의 공증인이자, 이 시대 최고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십육노화진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기품, 이런 예기를 지닐 수 있으랴. [구양조운!] 커다란 외침이 있었다. 구양조운은 성큼성큼 걸어 대전의 중앙에 놓인 높이 한 자 가량의 대 위에 올 라섰다. 수없이 많은 불길들이 그의 얼굴 위로 명멸해 오고 있었다. 삼십육노환진 중에서도 가장 앞쪽에 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백, 흑의 아마도 흑백도의 수뇌인 듯 보이는 이들의 앞에는 각기, <심인대활불.> <흑옥마제.> 의 명패가 놓여 있었다. 심인대활불. 아미 출신의 불문대조종, 홍황의 가사에 턱 밑까지 늘어진 백미가 자애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승이었다. 그의 옆에 앉은 자, 흑옥마제, 들리는 풍문으로는 지옥련 내에서는 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라 했다. 일신에 걸친 옷은 청포. 성성한 백발에 흰 수염이며....... 매부리 코에 움푹 패여진 눈동자를 가진 노인, 한데, 그 눈동자가 가히 가관이다. 조용히 뜨고 있을 땐 서늘한 벽광이 흐르고 있을 뿐이지만, 잠시라도 시선을 바꾸는 찰나엔 소름 끼치도록 냉혹하고 잔인하게 번뜩이는 것이다. 구양조운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이 흑옥마제였다. [귀공은 소수문의 문인이 틀림없는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귀공이 제일관에서 썼던 무예는 소수문의 삼대절학에 속하는 소수산공과 유 향미리보였는데..... 맞는가?] [그렇소.] [썼던 공력 정도는?] [팔성.] [제이관의 만음멸혼을 격파한 신공과 제삼관의 선법 또한 소수문의 무예인 가?] 구양조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문의 무예이고 소수문의 무예와 융합을 시켰을 뿐이오.] 흑옥마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심인대활불을 향해 정중히 두 손을 모아 보 였다. [질의가 끝났소.] 이번에는 심인대활불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구양조운의 무예 중에 불문의 무학이 깊이 배어있는 느낌 이었소만...... 혹시 불가에 몸을 담은 적이 있소이까?] 구양조운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 자초상인의 문하였소이다.] 순간, 심인대활불을 비롯한 삼십육노화진 전체의 얼굴에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신승 자초.......?] 상반된 표정들, 놀람에 이어 정파 십팔노화진의 표정이 암울하게 변해 갔다면, 사파 십팔노화진의 얼굴엔 담담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심인대활불이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린 것과 흑옥마제가 웃으며 입을 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이제 그만 표결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삼십육노화진 전체 숫자 중 삼십 인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역대 이래로 세 사람밖에 통관 못한 무종의 위 이긴 하지만........] 그는 주위를 휘둘러 본 후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웬지 오늘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구료. 그렇지 않소?] 무림이 뒤집혔다. 아예 발칵 뒤집혔다. [자네 들었나?] [들었지?] [오오..... 실로 놀라운 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 첫번째의 놀라움은 삼월 초이틀의 역무종사! 소수유혼 구양조운, 당대 제사의 무종으로 탄생한 인물, 그는 삼십육노화진 중 사파 십팔노화진 전원의 찬성, 정파십팔노화진 사인의 기권 이인의 반대로 하여 총 서른 표의 찬성을 얻어 당당 무종의 위에 올랐다. 헌데, 놀랍게도 그는 과거 신승 자초의 제자이자 백패서생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닌가? 정파는 분노하고 사파는 싱긋 웃는다. 아아.......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정파의 무신과도 같은 존재인 신승 자초의 제자가 변 절을 하다니! [스승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자라더구먼.] [주색에 도박이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더군......] [흐흥! 그런 주제에 파문당했다고 사파로 변절이란 말인가?] [퉤퉤! 더럽다!] 사람들은 그래서 소수유혼 구양조운을 역무종이라 불렀다. 그것이 무림에 몰아친 첫번째 놀람, 헌데, 두 번째 놀람은 더더욱 컸다. 그로부터 채 나흘이 더 지나기도 전에, 이 땅에는 세 명의 무종이 더 탄생했던 것이다. 맙소사! 오백 년 세월 동안 겨우 세명을 탄생시킨 무종이 사오 일 새에 일곱 으로 늘어났단 말인가? 당대 제오의 무종, 패옥신녀 감려연, 신비문파 신수궁의 차대후계자, 신수십대기학에 구성의 구천현음한빙공으로 삼십육노화진 삼십 일 인의 찬성 을 얻음. 삼십 년 만에 다시 무림에 나타난 신수궁이 천하에 던지는 찬란한 도전이었 다. 당대 제육대 무종, 귀곡서생 양운, 제삼대 귀곡문주를 자칭하는 자, 가히, 신기에 달한 기문의 칠대방학과, 일초 뇌정검식으로 삼십육노화진 삼십 이인의 찬성을 얻음. 당대 제칠대 무종, 불마공자 구운, 그는 못 생겼다. 그러나, 그의 몸에선 놀랍게도 정파 이십 삼 개파, 사파 열 일곱 개 문파의 절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진기의 운용과 전개순서가 판이한 정사파 무예가 한 사람의 몸에서 그것도 동 시에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은 무림사에 일찌기 없던 기이한 일이었다. 삼십육노화진은 이 일을 두고 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사실, 불마공자 구운의 무예는 그 앞의 일대부터 육대무종에 비해서 떨어지는 처지 였다. 하나, 그 다양한 무예와 복잡한 변화는 충분히 무종으로서의 위엄에 손색이 없는 것 이 아닌가 하는 것이 논쟁의 요지였다. 논쟁은 무려 세시진 동안 계속 되었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삼십 인의 찬성을 얻어 제칠대무종으로 뽑히게 된 것이니....... 무종시대! 무종의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과연, 제사대부터 칠대의 무종들이 정사의 어느 도로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을 놓고 사람들은 격론을 벌였으며, 이들의 움직임이 향후의 무림을 가늠할 것이라고 말들을 했다. 한데, 감히 그 누구도 상상해 볼 수 없었던...... 지금까지 벌어진 그 어떤 일보다도 더욱 놀랍고 경악스런 일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이레 뒤인 삼월 십삼일, 잔뜩 흐린 하늘로부터 가는 실 같은 이슬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고 있던 시 각이었다. 외침! 숭산 성불평으로부터 터진 하나의 외침! ---검군, 검군이 탄생하셨다. 피 묻은 옷, 역시 피 묻은 검..... 그리고 한 명의 아름다운 청년, 아아...... 온통 피로 물든 백여 무사의 전송을 받으며 그가 대로 올랐을 때,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하늘과 땅은 일시에 침묵해야만 했다. 한 자루의 검.... 전설의 신검 막사검이라고 했다. 서리서리 밟혀 오르는 검결은 그대로 하나의 춤이요. 무지개처럼 솟구치는 검광은 이미 술이 아니라 예였다. 그 속에 깃든 불꽃 같은 정기와 하늘에 사무치는 거력을 뉘라서 알지 못했을 손가? 불과 열 초식이 펼쳐졌을 때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으며, 눈부신 검광이 열 일곱 번째의 검결을 밟아나갈 때...... 바로 육십 일 전 검후 경설이 그러했듯...... 삼십육노화진은 입을 벌리고 탄식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검군이다..... 검군의 탄생이다..... 우리는 저 무예를 논할 자격이 없다....] 독인행, 정파 일백 사십 개 파의 공동전인, 대막 유황보 출신, 이 거인은 피묻은 검을 우러러 하늘을 가리켜 보인 후 그야말로 엄청난 말을 터뜨려 냈다. ----사파는 치졸하고 협잡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일만 삼천의 사파척살대를 만났으며...... 그중, 오천을 죽이고 오천을 살상해야만 했다. 그 와중을 회오리치듯 죽어간 정파동도의 수, 삼천! 이제 나 독인행은 그 시산혈해를 뚫고 이곳까지 이르도록 전지한 하늘의 이름 으로 고하노니, 명년 원단 날, 사도 지옥련의 검후와 천년숙원을 놓고 일전을 결할 것을 엄숙히 선포하노라 ---!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검후 경설이 정파를 향해 터뜨려 냈던 원단의 개명대전에 일침을 가하는 말이 요. 오백 년째 지하조직으로만 뿌리를 내려왔던 천년맹과 지옥련의 정체가 백일하 에 드러나는 말이었다. 천년맹! 휘하고수 십만의 정파대조직, 조직의 구성은 극비로 되어 있으며, 신승 자초, 무황 우도 등의 고수가 맹내에서 차지하는 서열이 겨우 오십 위 안에 들 정도이며, 십팔노화진이 이급상 정도의 고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것만 해도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실신할 지경인데..... 지옥련! 이곳은 또 어떠한가? 휘하고수 십오만, 사파 일천 오백개 파의 연합조직, 조직은 십이분맹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수뇌부는 바로 전설의 마계오류의 인물들이라는 것! 현존무림의 최고마두라 해도 이곳에선 불과 이삼 류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자고일어나니 천하가 송두리째 바뀐 격이었다.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을 좋아해야 하는 건지, 그 반대인 건지도 알 수가 없었 다. 다만 한가지, 드디어, 무림은 무섭도록 팽배하기 시작했다는 것, 천 년 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섭고 엄청난 혈겁이 바로 코앞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 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 그 모든 것은 극렬한 위기의식으로 사람들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봄날....... 나비는 꽃을 찾아 날고...... 유성은 하늘을 날고....... 그래, 검을 든 자들의 세계에도 기어코 무슨 일이든 벌어지려나 보다..... 三月 十五日 장안, 호평루는 인구 만호의 대도 장안에서도 이름난 주루다. 특히, 낙타혹으로 만드는 삼사타봉의 요리는 중원제일의 진효로 소문이 나 있는 터, 헌데, 지금 호평루의 지배인인 호장방은 끓는 솥 안의 개미처럼 안절부절하고 있었 다. 그의 초조한 시선은 이따금씩 주루 이층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하곤 했다. [어이구! 가슴이 타는구나.......] 너비 삼백여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주루엔 기이하게도 손님이라곤 그 두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장안의 대부호이자 세력가인 철대인이 호평루를 통째로 세낸 날 이기 때문이다. 장안땅의 반은 그의 것이다. 장안 백성 전체가 그를 알고 있으며, 장안성주와 터놓고 반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화근이라면 조금더 벌어볼 욕심으로 약속시간인 미시까지 손님을 받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철대인이라는 한마디에 다른 손님들은 두 말 없이 자리를 비워 주었는데 저 거머리 같은 두 인간만이 끝끝내 버티고 앉아있는 것이다. 특히, 저 왼쪽의 계집애처럼 생긴 백의무객은 성질까지 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이미 퇴루를 권고하는 점소이 두 명을 떡반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칵! 기름물에나 튀겨 죽어라!] 이때, 저벅저벅..... 느닷없이 밖으로부터 질서정연하기 이를 데 없는 발자욱소리가 울려왔다. 순간, 호장방은 안색이 싹 변했다. [철대인.......] [이렇게 귀찮게 구는 까닭이 뭐지? 너는 벌써 나를 사흘째 따라 다니고 있다. 거기다가 이젠 술까지 못 마시게 하나?] 술잔 위엔 검이 가로놓여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의 잔에다 검을 들이대고 있는 감려연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감려연은 씩 웃으며,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어떡해요! 난 가진것이라곤 몸밖에 없으니 당신이 술 로 돈을 축내고 있는 걸 보자면 가슴이 조마조마하단 말예요.]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흰 백의, 흰 피풍, 긴 머리를 한 갈레로 땋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렸고, 손에는 역시 흰색의 장갑을 꼈다. 온통 흰빛 속에 파묻혀 마치 유난히 피부가 고운 토끼처럼 보이는 그녀를 바 라보며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알 수 없군, 알 수 없어. 천하인들이 꿈에도 갈망하는 무종의 위에 올라 그 앞길이 훤히 트였는 데도 고작 주정뱅이 남자의 뒤나 따라다니겠다고 고집이라 니.......] [알 수 없는 건 정작 당신이예요. 사흘 새에 세 명의 다른 사람으로 분장해 모 조리 무종의 위에 오르는 전무후무한 일을 벌이더니 그 놀라운 실력으로 고작 지옥련의 사람이나 만나겠다니...... 이는 신을 희롱하는 행위예요.] [지옥련이 어떻다는 말인가?] [물론 천년맹도 좋다는 말은 아녜요. 당신이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 하 는거는 모르겠지만 아예 무림의 역사를 바꾸고자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구양조운은 히죽 웃었다. [졸졸 뒤를 밟아 그런 것을 모두 알 수 있었으니 대단한 연구결과로군. 그래서 결론은 이런 식으로 방해나 하며 줄기차게 따라 다녀야겠다는 건가?] 감려연의 얼굴에 사르르 웃음이 피어올랐다. 가슴이 아련히 저려올 만큼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빚이 있어요. 타문파의 비밀을 엿보는 것은 죽음에 해당하니, 목숨의 빚을 지고 있는 거예요..... 난 그 빚을 받기로 했어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빚을 독촉해야겠지요.] 구양조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단단히 걸렸군..... 너 같은 여자는 처음봐.] 그러면서도 사뭇 냉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그 빚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이때, 촤르륵...... 아래쪽 주루입구의 주렴이 걷혀 오르더니 일진의 무리들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호장방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오 장 10/17 17:18 354 line 第 二十五 章 天下가 싫으시오? 들어서기 시작한 무리들의 수는 뜻밖에도 많았다. 또한, 일사불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이십 인 남짓되는 금의무사들, 그들은 두 줄로 나란히 걸어 들어와 주루를 반으로 가르듯 우뚝 섰는데, 하나 같이 태양혈이 불룩하고 안광이 형형한 것이 외가의 고수들인 듯, 이어,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폐포, 초혜에 두 자루 검, 냉막무심한 표정 속에 깃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얼려붙일 듯 싸늘한 살기인 가? 철혼, 이 자는 바로 과거 철무쌍을 따라 여인곡에 나타났던 철혼이었다. 그는 칼날 같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시선이 주루 이층의 두 사람에게 닿았을 때, 한 쪽의 호장방은 아찔하여 황급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는 철혼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안다. 세도가 철대인의 오른팔이며...... 철대인의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정적들이 이 냉혹한 검수의 손에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일전에는, 호장방과 똑같은 처지에 놓였던 한 주루의 장방이 그에게 대들다 채 두 마디 도 다 내뱉지 못하고 몸이 두 동강나기도 했었다. 호장방은 절로 몸이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려왔다. 헌데 이때, 뜻밖에도 철혼은 아무 말도 없이 수하들을 향해 한 손을 휘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스무 명의 금의무사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더니 사방의 창과 입구를 엄밀하 게 봉쇄했다. 동시에, 여덟 명의 장정들이 둘러멘 교자 하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교자였다. 봉황의 무늬가 새겨진 등받이 의자에 오연히 기대어 앉은 자, 나이 이십 오륙 세 가량의 미장부, 그가 나타나는 순간, 호장방을 비롯한 호평루의 점원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해 보였다. [삼가 철대인을 뵈옵니다!] 철혼은 교자를 멘 장정들에게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해 보였다. 허나 이때, 미장부 철무쌍은 이층을 힐끗 올려다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려라, 손수 걸어 오르겠다.] 쿵쿵! 감려연은 이층으로 막 발을 내딛는 철무쌍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창한 위인이로군. 지옥련의 인물치고는 인물도 매끈하다.) 그러나, 구양조운은 그가 오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예 술독을 입에 대고 부어 내리고 있었다. 철무쌍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핫하..... 사대무종, 그간 안녕하시었소?] 순간, 구양조운은 싱긋 웃으며 먹던 술독을 바닥에 팽개쳤다. 와장창! [나는 또 당신이 오늘의 약속을 이미 잊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술의 파편이 비단옷으로 마구 튀겨 오른다. 하나, 철무쌍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다가와 구양조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걱정하고 있었소, 구양형. 이렇게 무사히 와주시어 다행이오.] 그는 껄껄 웃으며 어느 새 일어나 이층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감 려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데 이 분 형장께선 뉘시오?] 구양조운이 채 뉘라고 말하기도 전에 감려연이 냉랭한 눈초리로 말을 받았다. [본관은 소수문의 수석호법 감연이오. 지금은 문주를 보필하고 있소.] [오오...... 미처 몰라뵙고.......] 분주히 인사말이 오간다. 구양조운은 자못 오만한 태도인 감려연을 힐끗 바라본 후 씁쓸하게 웃었다. (제멋대로군. 도대체 수석호법 같은 엉뚱한 직위는 어디서 떠올렸단 말인가? 나는 저 괴상한 계집애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피해를 볼 것이다......) 미리 마련되어 있던 거대한 연회석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이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산해진미가 줄을 이어 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곰발바닥으로 만든 요리, 홍파능장, 몸을 보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자양강장 음식 하초동충, 입맛 돋우는 각종 약초로 만든 나복화, 비닐이 맛있는 시어요리, 그리고 호평루 특산인 낙타혹으로 만든 삼사탕봉, 호장방은 아예 허리를 굽힌 자세로 한껏 상냥한 목소리가 되어 철무쌍을 향해 말했다. [오늘 식단은 식욕이 떨어져 몸이 축나기 쉬운 계절이라 정력에 좋은 음식만 으로 식단을 차렸읍죠.] [수고했군.] 금덩어리 하나가 호장방의 앞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쿠! 헤헤.......] 그는 한쪽의 구양조운을 힐끗 바라본 후 뒷걸음질로 자리를 물러났다. (뉘댁 공자인지 대단한 신분인 모양이다...... 나는 철대인이 누군가를 향해 존대하는 것을 처음 보는군.......) 어쨌든, 상은 휘어지도록 차려졌다. 이어, 사르락사르락 치맛단 끌리는 소리와 함께 청초하지 이를 데 없는 미녀가 다섯 명이나 나타나 주석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핫하..... 장안 제일의 음식에 장안제일의 미녀들이오. 구양형과 감호법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소!] 미녀! 구양조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으나, 감려연은 내심 콧등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코웃음을 터뜨렸다. (지저분한 위인 같으니, 여자를 보더니 입이 아예 찢어지는군......) 거기다가, 음식이란 것도 징그럽기 이를 데 없다. 특히 그 삼사타봉인지 하는 것은 칼로 쭉 째자 안에서 살아있는 새우가 꿈틀 꿈틀 기어나와 감려연은 하마터면 구토까지 할 뻔 했다. 그녀는 발딱 몸을 일으켜 한쪽의 창가로 다가가 기대어 섰다. 저멀리 장안성의 웅대한 광경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왔다. 하늘엔 구름......... 마음엔 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십성의 직전에서 신공완성을 좌절시킨 저 원수 같은 사내의 뒤를 왜 따라다니 고 있는지....... 처음엔 뭔가 그에게 보복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몇일이 지나자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사내라는 생각에서, 그러나 지금은....... 감려연은 피식 고소를 붉은 입가에 매달았다. (일생 동안 한 번쯤 분별을 잃지 않는 여자란 아무도 없다.....) 한편, 좌중의 주흥은 이미 거나하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십여 순배의 술이 정신없이 오고간 후, 문득, 철무쌍이 시중들던 여인들을 물러가게 했다. 주위의 경계가 빈틈없는지 돌아보고 올 것을 철혼에게 지시하고 난 다음에야 그는 구양조운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구양형, 당금무림의 정세를 어찌 생각하시오?] 심각한 어조의 말, 구양조운은 싱긋 웃으며, [그거야 두말해서 무엇하겠소. 두 산봉이 양립하고 있는 쌍봉천하랄까......] [구양형은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생각하시오?] [양쪽에 다 인재가 우글거리니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겠으나......] [어렵겠으나?] [굳이 말한다면 검후의 지옥련이라고 할까?] 철무쌍의 눈이 번쩍 빛을 토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구양조운은 빙그레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내가 그쪽에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어이없는 말, 자신의 자랑을 자신이 하고 있다. 철무쌍 또한 어이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주루가 떠나갈 듯한 대 소를 터뜨렸다. [핫하....] 웃으며 그는 엄지를 꼽았다. [천하의 소수유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 나는 이보다 더 속시원한 말을 지 금까지 어디서건 들어본 적이 없소!] 구양조운도 싱긋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 친구..... 제법 괜찮다. 나의 내력을 다 알고 있을것이면서도 교묘히 자신의 영역 속으로 끌어가고 있 다......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친구다. 거기다가 호탕한 성격이니........ 이런 자가 내겐 필요해. 철무쌍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연맹내에는 사실 많은 문제점이 있소......]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느..... 지옥련의 조직비밀이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옥련! 이곳은 한 마디로 전사파의 정수가 총집결한 곳, 먼저, 검후 경설을 중심으로 하여 바로 밑으로 신비의 양대호법이 있다. 마신과 사신! 이들이 어떤 내력의 인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지닌 바 무예가 검후와 비교하여 일초반각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전 설적인 무인이라는 소문만이 파다할 뿐, 또한, 검후의 주변에는 자나깨나 그의 신변을 호위하는 무서운 친위조직이 있었다. 마맹, 십이분맹의 하나, 일명, 감찰분맹이라고도 한다. 검후의 호위 외에도 이들은 연맹 내의 모든 감찰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므로, 유일하게 혈의를 입는 이들을 지옥련의 고수들은 염황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 밖의 분맹조직이란, 정탐분맹 용맹, 지부분맹 호맹, 연맹의 총무를 관할하는 일월맹, 재정, 금전을 관할하는 금은맹, 특수공격조, 화맹, 그리고, 대외공격의 표맹, 사맹, 저맹, 후맹과 호성수비의 사자맹, 특수연락, 첩장양성의 열혈맹등이 있었다. [비록 조직은 열 두 개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으나 정작 연맹을 이끌어 가는 큰 물결은 다섯 개이오.] [흐음, 마계오류..........?] [그렇소. 소수문을 제외한 마류 지옥문, 사류 혈마평, 패류 철혈신궁, 방류 귀 원곡의 마계사류와 전래해 오던 고유 사파세력의 오대세력이 상호견제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오.] 오대세력! 그 중추적인 인물들을 살펴 보면, 지옥신룡 옥세계 마류 지옥문의 실질적 총수, 검후 경설의 사형이기도 한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옥련의 핵심고수였 다. 그는 한마디로 완벽한 인간상이었다. 이제 나이 스물 일곱인 그는 지옥문의 팔십팔종 절예를 달종했을 뿐 아니라, 그 용모가 수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옥 같은 얼굴엔 늘 봄바람 같은 웃음이 감돌고 아무리 비천한 신분의 사람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그는, 온천하의 꽃다운 소녀들이 꿈속에서 그리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감찰분맹 마맹의 맹주이자, 일만 지옥군단의 총령, 혈군, 사마우, 사류 혈마평의 총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 그는 혈마무예를 십성달통하여, 휘하에 백개독문이 연합한 특수공격의 만수신문을 거느리고 있기도 한데...... 혈군은 일 년 중 그 모습을 보이는 날이 사나흘에 불과했다. 그것도 마지 못해 내비치는 것이며 그 외엔 혈마비궁에 틀어박혀 고작 무예에 만 심취해 있다고 한다. 그가 웃는 것을 본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대외공격 사맹의 맹주, 요마 모용혜 환우팔마! 염황시상면 팔마불시상면의 문구를 가진 팔마의 막내, 방류 귀원곡의 실질적 맹주, 뇌살적인 미모, 나이 다섯 살에 사서오경을 통달했다는 그녀는 지금 지옥련 재정에 관하여 모 든 일을 맡고 있었다. 재정의 금은맹의 맹주이자 일명 검분맹이라고도 불리우는 특수공격조 화맹의 제팔맹주, 철혈서생 철무쌍, 패류 철혈신궁의 철마육형제중 다섯째, 그러나 사실상 철혈신궁의 총수, 그 위인됨이 호방하고 쾌활하여 많은 지기를 거느리고 있다. 그의 형제들과 함께 대외공격의 표맹을 맡고 있었으나, 최근에 맹주직을 대사형에게 물려주고 지부분맹 호맹의 제이맹주이자 대외 일 천분타의 총분타주, 무량뇌 제갈천, 지옥련 최고의 신비조직이자, 최대병기인 백인귀두의 수뇌, 고유 사파세력의 총수이며, 사파십팔노화진의 우두머리인 흑옥마제의 사숙이다. 하나, 그 나이는 불과 이십 세, 그는 마계오류 외의 사파인들이 조직한 용맹, 일월맹, 저, 후, 사자, 열혈, 육맹 을 사실상 총관할하고 있다. 검후 경설, 지옥신룡 옥세계에 이어 지옥련 제삼인자의 지위라고 공공연히 얘 기될 정도, 하나, 정작 그에 대한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는 문약한 서생이었다. 그 무공이 어찌되는지는 검후 외엔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는 그 많은 직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글이나 읽고 산책이나 하는 것으로 소일 하고 있다 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장막에 가리워진 인물....... 이외에도, 사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지옥신룡 옥세계의 특별지도를 받고 그야말로 극강 무적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옥군단, 만독, 만수, 만충의 총집결처인 신비의 만수신문, 또한, 사파 일백 오십 개 파의 장문인들이 정예직을 맡고 장문인에 버금가는 배분의 사람들이 이룬 지옥연의전 등, 이외에도 열거한다면 하룻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지경의 고수들이 기라성처 럼 늘어선 곳이 바로 지옥련이었는데....... [지금 지옥련에는 지금까지 열거한 오대세력의 암투가 가공할 정도로 진행되 고 있소. 사실 우리는 정파의 천년맹과 싸우는 것보다 내부의 암투에 더 신경 을 써야할 지경이오.] 구양조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의 얼굴은 가볍게 굳어 있었다. 지옥련, 상상보다 훨씬 엄청나고 방대하다. 그는 세삼 그의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실감했다. 지옥련은 곧 사파전체였다. 철무쌍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형제들은 본시 성숙해 일대와 이곳 섬서까지 기반을 두고 있는 대호족 가문의 출신이고 우리는 사파중흥의 열망을 안고 지옥련의 대열에 참가했소.] [........] [하나 결과는 거듭되는 실망 뿐, 이대로 나간다면 지옥련은 진정한 사파인들의 요람이 아니라 이권에 충혈된 눈을 한 늑대들의 암투장이 될 것이오.] [잘은 모르겠지만......] [구양형!] 문득,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얽혔다. 철무쌍의 강인한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구양형을 연맹에 정식으로 천거를 했소.] [.......?] [허락도 받지 않고 한 일이 오만...... 구양형 같은 인재를 놓친다는 것은 사파의 크나큰 손실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부디 도와 주시오! 구양형만이 지금 의 지옥련을 정화할 수 있소!] 구양조운은 담담하게 웃었다. [철형은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고 계시구료. 나는 그런 거창한 인물이 못되오. 그저 술잔이나 함고 여체나 만지며 한 세상 유들유들하게 살아가는 한량인 것 이오.] [구양형! 대세는 구양형을 기다리고 있소! 천하가 싫으시오, 구양형?] [.........] [소제는 이미 구양형과 총좌의 대면을 주선해 놓았소. 총좌께서도 구양형의 일 에 몹시 관심을 보이셨소!] 순간, 구양조운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 스쳐지났다. 총좌, 검후 경설을 말함이리라. 그는 천천히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드디어...... 한 발짝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거푸 한 잔의 술을 더 들이킨 후에야 히죽 웃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총좌는 상당한 미인이라던데...... 사실이오?] [핫하....... 그야 이를 말이겠소. 구양형이 어떤 미녀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총좌야말로 인세의 최고미녀라 할 것이오.] 한쪽의 감려연이 입술을 삐죽이는 것이 보였다. 구양조운은 그녀를 힐끗 바라본 후 호탕하게 웃었다. [자고로 인생의 삼락을 대호서(對好書), 대호경(對好景), 대호인(對好人)이라 하였으되 나의 유일한 낙은 미녀를 구경하는 것이오. 오늘 철형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었으니 이것을 마다하고 내 어찌 인간이라 불리울 수 있으랴? 한마 디로 구양조운은 철형말씀을 승낙하오!] 이날, 호평루의 술은 바닥이 났다. 바닥이 나고도 모자라 인근 삼개주루의 술까지 모조리 동이 났다. 그 술을 단 두 사람이 마신 것이라는 호평루 점원들의 얘기는 아무도 믿지 않 았다. 그날 호평루 이층으로 배달되어 간 술은 자그마치 서른 세 항아리였기 때문이 다. 두두두........ 노을 속으로 두 사람이 달려가고 있었다. 문득 한 사람이 말했다. [주공께선....... 그 자를 정말로 신임하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이 잠시의 침묵 후 말을 받았다. [왜.......?] [아무래도 그자의 출신이 걸립니다. 그는 정파의 대두인 소림의 제자였으니까 요. 천 년세월 동안 소림은 여러번의 기적을 창조해 냈읍니다.] [그럼 그 외에 다른 방안이 있었는가.......?] [.......] [후후...... 우리는 연맹 내에서도 가장 약한 세력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밖에 없지. 살고 싶다면.......] [그래도.......] [염려하지 말라, 철혼. 그 자에 대한 의혹은 연맹이 대신 풀어 줄것이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느닷없이 사파로 전향한 그를 의심하고 있다.......] [그렇....... 읍니까.......?] [그리고.......] 가벼운 탄식, [웬지 나는 그가 좋다. 좋아졌다....... 설사 그가 나의 적이라 해도 나는 그가 좋아졌을 것이다.......] 우두두....... 말은 달린다. 그 경쾌한 말굽음은 이내 노을 속으로 꺼져갔다. <三卷 끝> 이제 딱 절반이 끝났군요... 무리를 한 번 해봤읍니다.. 갑자기 내공을 사용했더니 현기증이 나는게... 주화입마에 빠졌나봅니다. 집에있는 만년삼왕을 달여 먹고 공력을 일주천 한 후에 다시 쓰죠. 내일은 없을 거고.. 모레쯤이면 다시 한장정도가... 저는 굉장히 재미있게 봤는데 한장씩 보니까 보시는 분은 내용이 잘 이어지지 않아서 재미없을 것 같네요... 그게 제일 안타깝읍니다.... 그럼 낭중에 모두 다 올린후에 한번 봐 보세요.. 아마 여러분의 머리속에 괜찮은 무협으로 남아있는 작품일겁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육 장 10/19 16:33 306 line 第 二十六 章 原始林 속의 奇陣 호수, 그것은 이를 데 없이 방대한 호수였다. 이곳은 대륙의 변방 음산대맥의 일천 산봉이 난립한 곳으로서, 산과 산의 안에 이렇듯 엄청난 호수가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호수의 건너쪽에 있는 방대한 원시림이었다. 북방의 기후로 보아 저 기이한 형태의 거목들은 자생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인공적인 것이었다. 하나, 그것은 거의 완벽한 자연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뿐이랴? 호수의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것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사면을 빙 둘러 원시림을 두르고 있었다. 게다가 호수의 수면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눈앞에 내민 다섯 손가락도 보이 지 않을 만큼 자욱한 안개, 그리고, 섬뜩한 암청빛 수초군과 뾰족한 암초더미였다. 실로 가공할 절험절지가 아닌가? 따라서 수초와 암초,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이 호수를 해치고 원시림 저쪽에다 배를 갖다 댈 수 있 으랴! 설령, 물길을 잘 알아 수초, 암초, 안개를 헤치고 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있다손 쳐 도........ 호수의 중간중간에 도사리고 있는 백 팔 군데의 매복과, 이백 군데의 기관진식만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작동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호수를 순식간에 평지로, 또는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슈우욱! 한 개의 화전이 건너쪽 아스라한 원시림으로 쏘아 올려간 후에야 배는 출발했 다. 삐걱........ 삐걱.......... 배는 낡디낡았다. 하나, 배를 모든 사공의 조타 솜씨는 매우 훌륭했다. 마치 노는 그의 팔이요, 배는 그의 몸인 양 익숙한 솜씨,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뭉쳐진 팔뚝을 묵묵히 바라보던 구양조운은 시선을 뱃전 아래의 수세로 던졌다. (한낱 사공이 태양혈이 우뚝하고 신광이 범연치 않으니 이로서 능히 지옥련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구나..... 이 지형적인 여건만 해도 설령 천군만마가 쳐들어 온다 해도 도저히 뚫어낼 수 없을 것이다.......) --호수를 다 건너가면 안내인이 마중을 할 것이오. 우리 쪽에서는 소제의 넷째 사형이 나올 것이고, 아마도, 무량뇌 제갈천의 용맹에선 한 사람 정도가 나올 것이오. 혹시 약간의 시험이 있다 해도 개념치 마시오, 구양형! 감려연은 반대쪽의 뱃전에 기대어 흐르는 물결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술이 없는 게 아쉽군.] 감려연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철무쌍과 마신 술냄새가 아직도 나는데 술타령이라니..... 이 호수 속으로 아예 뛰어들지 그래요. 아주 따끔한 술을 마실 수 있을 테니......] 우우우....... 크크크....... 소리, 안개 속에선 정확지 않은 간격을 두고 괴이한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오곤 했 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음성이었으나.......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발음이었는지라 마치 짐승의 부르짖 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괴이한 목소리,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묵호라고 부르는 이 죽음의 호수 위에서만 통용되는 암 호였다. 백 팔 곳의 매복마다 그 암호는 제각기 틀리며 또한 매일 바뀐다. 만일, 어떤 사람이든 그 중 한가지 암호에라도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즉시 염라대왕 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철비위, 대외공격조 표맹의 제사맹주, 그는 지금 시종 하나 거느리지 않은 채 나룻터에 우뚝 서 있었다. 거뭇한 구레나룻으로 미루어 열혈적인 성격인 듯 그는 잠시의 기다림도 참아 지지 않는다는듯 나룻터의 목판 위를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빙글빙글 맴돌고 있 었다. [이런, 제기랄!] 그의 시선이 옆에 선 한 사내를 향했다. [나는 오사제의 말을 별반 믿지 않소, 그렇지 않소? 사실 무종 따위야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내일이라도 따낼 수 있는 것인데 오사제는 그런 것이 뭘 그리 대단하다고 난리를 피는지 모르겠소!] 사내, 흑의, 가슴에 한 개의 용수가 새겨져 있다. 냉막한 얼굴에 앙상하게 마른 몸매, 입고 있는 흑의도 주채치 못하겠다는 듯 그의 어깨는 꾸부정하니 휘어 있었 다. 용맹 제구십구호,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그는 백인귀두의 일인이었다. 그는 호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철무쌍 호맹 제이맹주의 말은 곧 금옥과도 같소. 반드시 한 명의 뛰어난 인재 가 연맹에 오고 있다고 생각하오.] [흐흠!] 철비위는 코가 떨어져 나갈 듯한 냉소와 함께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오사제 철무쌍을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그다. 하나, 그가 존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사제이지 오사제가 보낸다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는 그런 작자를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 심히 불쾌하지 이를 데 없었다. 이때, 그의 시선 속으로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는 배 한 척이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 다. 원시림은 깊고도 깊었다. 구양조운은 무릎까지 빠져드는 낙엽과 온통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걸으며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숲의 모든 것들, 즉, 거목과 잡나무, 수풀과 암석, 땅을 나뒹구는 조그만 돌맹이 하나하나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오십 장 간격을두고 유령처럼 나타나 말없이 행선로를 지시하는 안내인이 아 니라면,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반쯤이라도 벗어난다면 이 숲은 눈깜짝할 새에 가공 할 절진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또한, 그것은 아무도 피해낼 수 없을 것이다. 원시림 자체가 곧 거대한 하나의 진이요, 그 진은 다시 일흔 두 개의 작은 소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니, 각 소진을 지키는 진법자들 조차도 자신의 진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 다. 비밀 속에 또 비밀, 그리고 다시 비밀로 가리워진 마절기진의 원시림, 뉘라서 이 진의 발동을 감히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때, 구양조운은 문득 앞서서 걷고 있던 철비위와 용맹 구십구호의 신형이 연기처럼 꺼진 것을 발견했다. 신법의 조화가 아니다. 그 어떤 다른 신법이라 해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진법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감려연의 놀란 표정과는 달리 구양조운의 얼굴엔 싱긋 웃음이 스쳐 지났다. (흐흥! 애초에 나룻터에서부터 시큰둥하던 네 놈들이다. 이제 나를 시험해 보 겠다는 건가?)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잖아도 아까부터 흥미를 가지고 예의주시해 오던 원시림의 진법이 아닌 가? 그는 정좌하고 앉은 채 땅에다 무엇인가를 스윽 쓱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철비위는 십여 장 밖의 수림에 몸을 숨긴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제딴에 또 무엇을 한다고 땅에다 어지러운 낙서람...... 나는 소림사고 소수문이고 간에 기문에 조예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설사 약간의 조예가 있다손 쳐도 어찌 두뇌의 신인 용맹맹주께서 직접 설치한 이 거대한 진 을 깨뜨릴 수 있으랴....... 그렇지 않소?] 하나, 용맹 구십구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구양조운을 주시하고 있을 뿐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다경쯤 지났을까? 홀연, 구양조운이 싱긋 웃으며 앉아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군...... 이 거대한 진은 모든 것이 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줄기는 오행대멸진이고 그 속에 역팔진 역구궁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기묘한 속임수 다.....) 그는 껄껄 웃으며 주저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따위 것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내 어찌 귀곡자를 황천에선들 뵈올 수 있으 랴..... 따라오라, 여연!] 그의 걸음이 기묘한 보폭을 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가다간 옆으로 빠지고, 빠진다 싶으니 다시 전진한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모두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감려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때, 거침없이 진을 헤쳐가던 구양조운은 문득 가슴 속으로부터 장난기가 피어 오 르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이 나를 시험하려 했으니 난들 너희들을 시험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냐.....) 구양조운은 즉시 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진의 요소요소를 가볍게 바꾸기 시작 했다. 역으로 되어 있는 바위를 정으로, 정으로 되어 있는작은 나무를 역반으로..... 한편으론 걷고 한편으론 바꾸기를 순식간에 백여차례, 순간, 미세한 원시림 안은 일시에 커다란 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본시, 진이란 종잇장 한 장 만큼의 변화만 있어도 전체가 헝클어지고 변화를 일으키기 마련인 것, 한데, 종잇장 하나도 아니고 단숨에 일백여 곳이나 변화가 일었으니 그 진이 어떻게 되랴? 나무에 올라있던 진법자 하나는 밑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불시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괴성이 귓청을 두드려오는 바람에 거품을 물 고 실신해 버렸다. 길을 걷던 진법자 하나는 느닷없이 웅덩이가 눈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머리를 쳐박고 뒹굴고, 또다른 진법자는 뒤르 쫓아오는 괴수들에게 쫓겨 구만 리 밖으로 달아났다. 이 같은 다급한 상황은 철비위와 용맹 구십구호도 마찬가지, 그들은 느닷없이 눈앞이 암흑처럼 캄캄해진 후, 이어, 팔팔 끓는 유황굴과 열사의 사막, 뼛속까지 얼려 붙이는 얼음구덩이를 차례대로 경험해야만 했다. 입고 있던 옷은 물론 헝클어지고 찢겨나가고, 두 눈은 놀람과 경악으로 잔뜩 충혈되니....... [진! 진을 철회하라!] [진을 거두라!] 하나, 각 소진의 진법자들도 사실 대진의 변화는 모르고 있었다. 설령 안다손 쳐도 이제 진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 판이하게 변해 버렸다. 우당탕! 쿵당! [아악!] [윽!] 아수라장이 된 숲 속 밖에선 구양조운이 한가로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하나 그의 얼굴은 지금 웃음을 참느라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두두....... 가슴에 일월을 새긴 일월맹의 문도들과, 용맹의 십여 고수가 말을 몰고 나타났다. 그들은 구양조운과 그 옆의 감려연을 쳐다보는둥 마는둥 말등을 박차고 진 안 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동이 정지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두 시진 뒤, 헝클어진 머리, 찢겨져 나간 옷, 얼룩진 얼굴을 한 철비위와 용맹 구십구호는 휘청이며 숲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이를 부드득 갈며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하나, 어느 한곳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들은 살기 대신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구양조운, 그는 한쪽의 바위에 기대어 누운 채 주위가 떠나갈 듯 드르렁드르렁 코를 곯 아대고 있는 것이다. 기인, 젊은 기인이었다. 오백만 평, 지옥련의 흑옥마궁은 오백만 평의 땅 위에 세워져 있었다. 원시림을 벗어나기 무섭게 시선 속으로 쏘아오는 하나의 거대한 광경, 거성, <흑옥마궁> 보기만 해도 절로 위압감을 느낄 듯한 거대한 편액의 아래, 천신인 양 우뚝우뚝 몸을 세운 이십여 명의 묵의경장무사들, 잔뜩 부라린 그들의 시선을 피해 두께 다섯 자의 어마어마한 철문 너머로 힐 끗 시선을 던지며, 넓고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과 그 위의 숲처럼 빽빽이 세워진 건물들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누각이며, 대전, 전각과 정자들, 도대체 그 수효가 얼마인지는 아예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장엄한 위용이요, 웅휘한 기풍인가? 그렇다. 이곳이야말로 바로 천하사파의 구심점이며, 그 휘하 문파는 십만을 헤아리는 지옥련의 총본산 흑옥마궁인 것이다. [궁은 모두 외궁, 중궁, 내궁으로 나뉘어져 있소......] 철비위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구양조운에 대해 화가 치밀 정도로 감복했다. 자연 그의 말투는 친형제를 대하듯 투박한 가운데 온유로움이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러한 내외중의 구분은 바로 지옥련 내에서 십이분맹이 차지하는 지위를 말 하는 것이다. 즉, 내궁에는 검후 경설의 일파인 마맹이 있다. 그 다음 중궁에는, 용, 화, 표, 사, 저, 후의 내외공격 열맹(列盟)이 있고 마지막 외궁에 일월, 열혈, 호, 사자, 금은맹이 있는것이니...... 마맹이 최고서열의 분맹이요, 금은맹이 최하서열의 분맹이었다. 또한, 지옥군단, 만수신문, 지옥연의전등의 방계조직들은 궁의 동서북 삼면 외곽에 특별포진하고 있었다. 말을 듣고 있던 구양조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듣자하니 금은맹의 맹주는 요마 모용혜이며 그녀는 연맹에서 극히 주요한 서 열의 인물이라 하던대 어찌 최하서열의 맹을 맡고 있소?] 철비위는 껄껄 웃으며, [요마맹주는 희대의 재녀이오. 총좌에 비해 조금의 떨어짐도 없을 정도이고 그 녀는 금은맹과 동시에 제삼서열의 화맹 제팔맹주도 겸직하고 있소.] [........] [제팔맹주라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우팔마의 서열 때문이고, 그녀는 실 질적으로 두개 맹을 동시에 맡고 있는 것이오.]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즐비한 지옥련에서 이 개 맹주직을 동시에 맡고 있는 여자라........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수백 개의 전각, 누각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다시 금방 산이 나타나고 산인가 하면 들이요, 들인가 싶으면 맑은 계류, 아마도 이 흑옥마궁은 아무리 못되도 그 안에 이십여 개의 산을 품고 있는 것 이리라. 그저 어렴풋이 거대한 성곽을 여나무개나 지나왔으니 중궁쯤 들어섰는가 보 다....... 라는 짐작이 있을 뿐, 이때, 돌연, 하나의 계곡을 돌아 나가기 무섭게 눈앞에 거대한 성 하나가 쏘아져 들 어왔다. 일천여 개의 옥계단, 그리고, 그 옥계단의 꼭대기에 아득히 걸린 거대한 현판, <연맹 내궁.> [이곳이 바로 연맹의 핵심인 내궁이오. 규정상 철모는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 니 총좌와의 대면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빌겠소. 그리고 감호법은 나와같이 이 곳에 남읍시다.] 순간, 감려연은 발끈하여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구양조운이 껄껄 웃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지상최고의 미녀를 만나는 것이니 감호법은 방해를 말아 주시오. 나는 삼각관 계는 원치않소.]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칠 장 10/21 17:21 331 line 第 二十七 章 劍后 瓊雪 철저한 몸수색, 옷깃, 몸 안은 말할 것도 없고 이빨 속, 머리카락 안까지 파해치다시피 한 몸 수색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밭, 구중심처란 말이 있다. 내궁 안으로 들어와서도 도대체 몇백 몇천인지도 모를 누각, 전각등을 지나고, 다시, 기수이화가 그림처럼 심겨진 하나의 야트막한 능선을 지나고 나서야 이 밭은 있었다. 참으로 엉뚱한 밭, 지금까지 구양조운이 걸어온 모든 길은 내외 중궁을 막론하고 모조리 황궁을 방불케 하리만큼 화려하고 세련된 것들이었다. 헌데, 흑옥마궁의 가장 깊숙한 이곳에 웬 밭인가? 밭에는 이제 막 잎을 피우고 있는 사과나무가 수십 그루나 정갈하게 심겨 있 었고, 그 한쪽에 유난히 향기가 짙은 수선화가 영롱한 백, 황, 등홍의 꽃잎을 자랑하 며 수천 송이나 만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밭의 끝으로 하나의 커다란 목옥이 있었다. 이 목옥은 대나무가 그림처럼 둘린 가운데 맑은 연못위에 떠 있었다. 목옥 위로 흰 구름이 한가롭게 떠가고 있었다. 허나, 이 아름답고 소박한 목옥이 바로 모든 이들이 꿈에서나마 그리는 부와 권세의 상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구룡신거. 지옥련 총좌, 검후 경설의 거처인 이곳은, 또한, 선택받은 자들의 집결지이기도 하다. 소속총원 십만조직의 모든 음모와 위계, 그리고, 결정이 내려지는 심층부 구룡신거, 사흘에 한 번씩 지옥련 최고수뇌부의 회의인 삼일연의가 벌어지는 곳도 바로 이곳이며, 이 구룡신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전체를 통틀어 여덟 명에 불 과했다. 그 여덟 명이란 바로, 검후 경설, 지옥신룡 옥세계, 무량뇌 제갈천, 요마 모용혜, 혈군 사마우, 철혈서생 철무쌍, 마신, 사신, 의 팔인, 속칭 지옥팔룡이었다. 이무리 세가 출신의 사파 일류무인이라 해도 지옥련에 처음 들어오면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지부에 파견되어 문파간의 알력이나 분규를 해소하거나 뒤치 닥거리를 하는 잡무부터 시작하여,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게 된다. 그것이 끝나면, 천년맹의 정파조직과 겨루는 일선에 소속되어 여러 부문에 걸쳐 전공이 인정 된 후에야 겨우 음산의 흑옥마궁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이 장중하고도 냉엄한 총본산 안에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권모술수와 음침 한 파벌투쟁이 있고, 그 격렬한 싸움에 이기는 자만이 구룡신거를 들어설 수 있었다. 지옥팔룡들은 모두 그런 냉혹한 현실을 거친 사람들이며, 마지막 하나 남은 구룡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오늘 이 시간도 십만 사파인 들은 머리통이 터지도록 싸우고 있는 것이니........ 구룡신거! 꿈의 처소....... 모든 부와 권세의 집결처....... 오묘로운 햇살이 연기처럼 스미고 있는 복도였다. 구양조운은 비단나삼을 걸친 한 명의 시녀의 뒤를 따라 먼지라곤 한 올도 보 이지 않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왼쪽은 사과나무와 수선화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창이요, 오른쪽은 팔룡의 집무처로 보이는 몇 개의 방들과 대청이 있었다. 허나, 그거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고 복도는 완벽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우유빛 벽과 진홍빛 마루가 끝까지 이어진 이 복도를 처음 걸어가는 사람은 차단된 미로로 헤매어 들어온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검후 경설의 거처는 복도의 맨 끝에 있었다. [총좌님과의 면담시간은 일각이예요. 들어가세요.] 삐걱...... 문이 열리자 수선의 향기가 끼쳐왔다. 짙은 향기였다. 벽에 걸린 당대의 산수화가 시선에 들어오고, 대나무 문갑과 그 위에 놓인 붉은 화병이 보였다. 방 중앙에 드리워진 대나무밭과 한 자루 고색창연한 검이 걸린 단궤도 있었 다. 그 검에 달린 황색의 수실을 보는 순간, 구양조운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황색수실, 저것은 바로 무림 최고영역에 속하는 제 오단계 고수의 표식이 아닌가? 딱! 딱! 밭 뒤에선 꽃가지를 자르는 가위소리가 단조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 밭 뒤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흐릿한 그림자 하나, 손으로 꽃가지를 들고 조용히 그것을 쳐나가는 섬세한 인영, 이쪽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구양조운은 싸늘하게 웃으며 앞에 놓인 방석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어, 책상다리를 한 채 시선을 오연히 창 밖으로 던지니........ 네가 안보니 나도 안 본다는 식의 태도, 창틈으로 봄의 춘풍이 스며들고 있었다. 보광사 아래 귀래하에선 가재도 참 많이 잡았다. 해가는 줄 모르고 잡고 또 잡아 구부린 허리가 아파 언뜻 몸을 펴면 코끝을 스쳐 지나곤 하던........ 아아........ 그리운 봄의 향기여........ 구양조운은 허파꽈리를 간지르는 춘풍을 음미하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니까. 네가 지금 이렇게 오만을 부리고 있을 때냐? 구양조운, 내가 너라면 이런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 다못해 그녀의 발이라도 미친듯이 함아줘야 사문과 무림이 원하는대로 그녀를 아내로 맞을 수 있을 게 아니냐?) 이때 문득, 누구나 입는 청의가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깨끗한 청의로 감싸인 하나의 몸, 문갑위에 잘 다듬어진화병을 놓는 섬세한 동작, 들어갈 곳, 나올 곳 어디 한 군데 모자라거나 남는 곳이 없다. 허리를 타고 뻗어내린 예쁜 둔부와 한 겹 비단으로 감싸인 앙증맞도록 귀여운 발, 여자를 보는 눈이 높은 구양조운조차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이 몸은 이어, 방 한쪽으로 조용히 걸어가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범랑이 얹힌 조그만 손화로를 들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걷어올린 것일까? 발은 이미 걷혔고 보통 여자와 조금의 다름도 없는 한 명의 소녀가 눈앞에 앉 아 있었다. 그 아름답고 예쁜몸에 비추어 용모는 평범하다. 용모만으로 따져 본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구양조운이 알고 있는 어떤 소녀보 다도 평범할뿐 아니라 그를 이곳까지 안내해 온 시녀보다 못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 위엄은 앞에 앉은 이를 단연 압도할 뿐 아니라, 그녀의 몸 주위로 성스러운 한 겹 막이 둘려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뿐인가? 소박한 가운데 깃든 단아하고 탈속한 자태며, 동작 하나하나에 보이는 태산처럼 무거운 예기, 장중함....... 그렇다. 검후! 자타가 공인하는 지상최강의 여인이며......... 십만인의 위에 홀로 우뚝 선 지고무상의 존재, 검후가 아니고서야 이 하늘 아 래 누가 또 이러한 기품을 지닐 수 있으랴? 검후 경설은 화로에 올려진 범랑에 가볍게 손을 대보더니 찻잔에다 범랑의 뜨 거운 물을 보였다. 이어, 찻물을 가볍게 젓는가 싶더니 희고 맑은 손이 잔을 구양조운의 앞으로 내밀었 다. [철무쌍, 철맹주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하나예요.] 듣는 이의 폐부까지 시원해지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였다. 시선과 시선이 정면으로 얽혔다. 검후 경설의 눈은 물처럼 고요했다. 그 시선은 가슴 속으로 깃들어 오는 사념은 일념이라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무도자다운 무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득도한 고승에게서나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나이 이십도 채 이르지 않아 이리한 성취를 보이다니...... 구양조운은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그런 철맹주의 추천을 받은 귀공자인지라 안팎으로 어수선해지고 있는 연맹 에 좋은 힘이 되리라 생각해요.] [과찬의 말씀이오.] [귀공의 부서는 이미 결정해 놓았으니 안내를 받도록 해요.] 그녀의 서늘한 시선이 구양조운을 정시했다. [그 밖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구양조운은 마음 속으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 아내가 되어 주시오!) 허나, 그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없소. 총좌의 성의에 감사드리오.] [다시 볼 수 있게 되길........] 사르르....... 아름다운 몸, 그러나, 한 치의 틈도 없는 몸이 반대쪽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상큼한 수선향 만이 덧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우습군......] 이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이 한 순간을 위해 그와 그의 사문은 십 칠 년을 기다려 왔던가? 청춘을 송두리채 건 그 긴 인고의 세월에 비한다면 이 한 순간은 얼마나 짧고 덧없는 찰나의 인연인가? 시녀는 이미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귀공은 금번 연맹에 입맹하여 금은맹 산하 천전당 부좌 겸 산동지부 분타주 로 임명되었소. 연맹서열 제사백구십이위의 직위이오. 축하하오.] <구양조운 나이: 십 칠 세 문파: 소수문 별호: 소수유혼 출신: 장사성 동남가(東南街) 내력: 백패서생 구양천을 부친으로 둠. 모친의 내력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세가의 규수인 것으로 추정됨. 나이 칠 세에 소림하원 보광사 입문, 우둔한 재질로 하여............> [잠깐!] 날카로운 외침이 일었다. 한 개의 태사의에 깊숙히 몸을 묻고 있던 청년, 낯빛은 밀납처럼 창백하다. 옷차림은 단정한 가운데 기품이 엿보이고, 그러나, 일신에선 형용할 수 없는 사기가 물씬 풍긴다. 냉면수라 형위, 감찰분맹 마맹의 수석감찰, 마맹주 지옥신룡 옥세계의 오른팔이다. 이미 반박귀진의 지경에 이른 고수자인가........ 그 몸에선 무인의 냄새라곤 조금도 풍기지 않는다. [재질이 우둔하다고....? 용맹이 가설한 진식을 종횡무진 드나들고 소수문의 기계를 완벽하게 터득한 그가 재질이 우둔하다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그의 앞에 시립해 선 채 공손히 두루마리를 읽어 나가던 중년인의 몸이 주춤 했다. [그것이........] [또 있다. 무종의 위를 얻고도 연맹에 가입한 의사가 불투명해! 무황 우도처럼 일가를 이루어도 마땅한 사람이 왜 하필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는 가?] [.......] [그가 소림에서 우둔해 보였다는 것은 일부러 그랬거나 누가 감싸준 것이 틀 림없다. 그렇다면 그래야만 했던 까닭이 무엇인가?] 현위는 탁자를 거세게 두드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당! 마맹 휘하 제사감찰당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오당이라 불리운 중년인은 우렁찬 어조로 외쳤다. [연맹 내의 반역세력을 축출하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불순세력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구양조운은 요주의 인물이다. 제사감찰당의 총력을 동원하여 그의 출신과 내 력에 감추어진 비밀을 캐도록! 또한 그에 대한 면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 것! 이 모든 것에 대한 보고서를 매일 올리도록 하라!] [맙소사! 최하위급 금은맹, 그것도 당주도 아닌 부좌......? 산동지부 분타주 에다 서열 사백구십이위라고?] 철비위는 노갈을 터뜨리며 탁자를 꽝 하고 내려쳤다. [이것들이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있는 거냐?]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그는 병째로 술을 집어 들더니 단숨에 내장 속으로 와르르 부어 넣었다. 표맹 본보, 깊숙한 대전이었다. 거대한 원탁의 탁자를 빙 둘러앉은 사람은모두 일곱, 구양조운, 감려연이 보였고, 철혈서생 철무쌍과 철비위도 있었다. 그리고 삼인, 최상석에 근엄하게 앉은 중년도인은 철혈신궁 철가육형제의 맏이인 철극노였 고, 마른 몸매에 눈매가 날카로운 중년무사는 둘째 철인계, 앉은 키가 선 사람 키보다 더 커 보이는 장대한 청년은 셋째 철대뢰였다. 철비위의 소란에 이어 둘째 철인계가 얄팍한 입술 새로 가라앉은 음성을 흘려 냈다. [다섯째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직위가 내려진 것을 연맹이 구양소협을 시험하는 의도라고 짐작되오. 구양소협의 출신과 내력이 다분히 상부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소.] 셋째 철대뢰가 우렁우렁한 목소리 토해냈다. [이형의 의견에 동감이오. 총좌가 탄 차를 직접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구양소협을 소협히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이오.] 철비위가 코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천전당이요, 산동지부인가? 흥! 천전당의 본부가 산동지부에 있긴 하 지만 그곳은 한 마디로 연맹의 쓰레기들이 가는 곳이요. 그곳의 문란한 기강은 상하가 따로 없고 연맹에서도 그곳은 아예 내팽개친 지 오래이오. 이는 고의적 으로 우리 형제들을 우롱하는 처사가 틀림없소.] 이때, 묵묵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철무쌍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형은 너무 흥분만 하지 마시오. 근자에 들어 천년맹과의 싸움이 표면화됨에 따라 군자금 및 제분맹의 비용 탓으로 금은맹의 역할이 새로이 중요시되고 있 소. 특히 천전당은 금은맹의 실질적 임무를 수행하는 곳으로소 구양형이 그곳 의 부좌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소.] [어떤....?] [그 첫째는 구양형 같은 강력한 인물을 보냄으로써 천전당의 중요성을 대외에 인식시키고 천년맹과의 상권 겨룸을 통해 구양형을 시험하는 이중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오.] [흐음!] [셋째는 천전당의 현 당주와 연관되었다고 생각하오.] 말을 잇던 그의 시선이 상석의 첫째 철극노를 향했다. [큰 형님은 현재 천전당주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철극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지금은 술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었지만 그는 바로 지옥상인 전화입니다.] 순간, 중인들의 얼굴엔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지옥상인......? 오십 년 전의 중원제일거부........?] [그렇지요. 수하들의배신으로 오십 년 전의 천하상권에서 소소성(笑笑城)의 금대야에게 크게 패한 후 어린 딸 하나를 안고 연맹으로 투신 해 온것입니다.] [오오......] [연맹에서는 구양형을 그에게 보냄으로써 그를 자극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철무쌍의 시선이 천천히 구양조운을 향했다. [구양형, 괜히 소제가 경망되이 나서서 일을 어렵게 만든 것 같소.] 구양조운은 싱긋 웃었다. [천만에! 철형의 도움에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소. 사실 지금 나는 그 천 전당에 몹시 호기심이 쏠리오.] 그는 술을한 모금 천천히 마신 후, [사내가 뜻을 펴는데 어찌 질고 험한 길을 가리리오. 나는 이 일을 인생수련의 한 척도로 삼고자 하오.] 말을 함에 조금의 과장도 없고, 행동은 무겁고 침착한 가운데 정히 눈빛을 끄 는 단아함이 있다. 철가육형제의 첫째 철극노는 내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땐 별로 탐탁함이 없더니 이렇듯 직접 마주보니 해맑은 관상이요, 기품 어린 태도로구나. 다섯째는 어디서 저런 인재를 알아 보았을까? 머지 않아 연맹의 핵으로 떠올릴 자다......) 이때, 촤르르...... 내전의 주렴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일진의 향긋한 내음이 중인들의 콧속으로 스며 들었다. 한 명의 섬세한 그림자가 소반을 받쳐들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아........ 그 섬연하고 아름다운 자태란! 여인! 두 눈은 흑진주처럼 검다. 살포시 내려깐 속눈썹이며 투명한 피부, 꽃잎을 하나 베어문 듯 붉은 입술과 관능적인 콧날의 조화여! 이 경국의 가녀는 소리 하나없이 장내로 걸어 들어와 소반에 얹힌 음식그릇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철무쌍이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구양조운을 바라보았다. [구양형! 이 아이가 바로 우리가 보석처럼 아끼는 막내 난음이오. 이리와서 구 양형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소녀 철난음은 얼굴을 귀밑까지 붉히며 구양조운을 향해 고즈넉히 허리를 굽 혔다. [대인을 뵈옵니다.] 그렇잖아도 그녀가 들어설 때부터 넋을 빠뜨리다시피 하여 감려연의 눈총을 받고 있던 그, 황망히 두 손을 맞잡는가 싶더니 말까지 더듬는다. [구...... 구양이오.] 그의 얼떨떨한 태도에 좌중의 중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핫하........] [자고로 영웅의 철담을 녹이는 것은 미녀의 홍조라더니......] 이어지는 웃음과 웃음, 좌중에서 유일하게 웃지 않는 사람은 바로 감려연 뿐이었다. 그녀는 반신경질적으로 눈앞의 닭다리를 잡아 으적으적 씹어대기 시작했다. (흥! 줏대라고는 모기눈꼽만큼도 없는 남자! 여기서 저 모양이니 검후 앞에선 또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저 넋을 잃은 입에다 이 닭다리나 쳐넣어 버렸으 면.....)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팔 장 10/23 19:47 281 line 第 二十八 章 달빛 遊戱 한 잔의 술은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나 보다. 누군가 방 안에 들어와 있다고 느낀 것은 방의 촛불을 끈 뒤였으니까, [여연인가?] 한 줄기...... 축축한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 끄는 탄식이 말의 뒤를 이었다. [함부로 불을 껐어요.....] 구양조운은 힐끗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두 눈에 가볍게 놀란 빛을 스쳐보냈다. 달빛 아래..... 몽롱히 드러난 하늘하늘한 나신이여...... 보라! 치렁치렁한 어깨를 드리운 흑발은 뽀얀 우유빛 살결로 하여 더 검어 보이 고..... 그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어깨는 백옥인 양 탐스럽다. 투명한 달빛이 더욱더 선명한 음영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젖가슴은 또 어떠한 가? 인간의 살결이 저렇듯 탄력적이며 싱그러울 수도 있을까싶은 젖무덤 위에 수 줍게 올라 앉은 유두가 차라리 애처롭기조차 하다. 배꼽, 알맞게 살찐 아랫배와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호선의 은밀한 조화, 그 모든 아름다움을 떠받치고 있는 두 다리는 어둠 속에서 은어의 비늘처럼 퍼덕이니...... 고요히 선 자세는 아름답다 못해 한순간 성결하기조차 한 냄새가 피워 올리는 것이 아닌가? 어디를 어떻게 보는 것은 보는 이의 자유다. 그러나, 이 나신은 놀랍게도 상대가 보고난 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자유까지 처절하게 박탈하고 있었다. [왜 그런 모습을......?] 어둠 속에서 구양조운이 말했다. 나신은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옮겨 섰다. 그 바람에 그윽한 육향이 어지럽게 방 안에 피어올랐다. [의외신가요?] [조금은.......] [여자는 함부로 옷을 벗지 않아요.] [벗고난 후엔 누구나 그런 말을 하고 싶어지는 법이오.] 여인, 철난음의 얼굴에 원망스러운 빛이 번뜩 스쳐 지났다. [누구에게나 그런 투로 말씀하시나요?] [예외가 있을 까닭이 없소.] [저는...... 남자 앞에서 처음으로 옷을 벗었어요.] [.....] [오늘 이후로 누구 앞에서도 벗지 않을 거예요.] 호소하듯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조용히 빛나는 미녀의 눈빛..... 하나, 구양조운은 냉정하게 시선을 돌려 침상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가더니 털썩 몸 을 눕혔다. 그는 비록 정인군자는 아닐지 모른다. 금욕주의자도 아니며 여자와 살을 섞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자가 치마를 벗고 알몸으로 춤춘다고 해서 무턱대고 그 몸을 끌어안는 박약 한 의리의 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빠의....... 뜻이오?] 분명한 어조가 들려왔다. [제 뜻이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소?] 비릿한 살내음이 가까와졌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나신은 침상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소녀는 약간의 관상학을 익혔어요. 아까 오셨을 때 문틈으로 대인의 얼굴을 엿보았지요.......] [.......] [대인은 천하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오를 귀인의 상입니다. 여인의 몸으로서 어찌 이토록 귀하신 분을 모시고 싶다는 작은 열망을 지니지 않을 수 있으리 오?] 돌연, 구양조운은 침상 아래의 철난음을 사납게 나꿔챘다. 휘익--- 그는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받쳐 올렸다. [나는 매우 많은 여인을 알고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철난음의 얼굴에 어둠 속에서 흰 선이 그어졌다. 웃음이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하게 된다면?] 그녀의 얼굴이 구양조운의 가슴에 파묻혀졌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가벼운 떨림이 허리를 안은 손끝으로 전달되어 왔다. [모르겠어요......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삶 중에 진정하게 확실한 것이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못견딜 것 같아요. 이런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도 같았구요......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이부자락 위로 별빛이 눈부시게 번지고 있었다. 별빛 내려앉은 입술이 시리도록 붉다. 구양조운은 자신이 위로 올랐다. 여자를 밑으로 자신이 위로 올랐다. 가만히 여인의 눈동자를 들여다 본다. 그 속에서.......... 별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부서지고 있었고, 시간의 파편이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문득,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허파꽈리가 살살 건드려지는 것처럼 이 웃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우수워서 웃고, 나중에는 서로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며 웃었다. 그리고, 둘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서로의 몸을 침대가 삐꺽거리도록 탐닉해 가기 시작 했다. 여인의 피부는 입술이 녹아들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퐁! 돌이 빠져들자 수면 위는 둥근 파장이 소스라치듯 번져갔다. 감려연은 나무그늘에 기대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가의 눈물을 찍어 냈다. [나쁜 자식..........] 그러나, 나쁠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정당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인 것이 다. 생각할수록 서럽다. 이러지 않아도 될 것을..... 이런 곳에 이런 모습으로 이런 생각과 함께 앉아 있지 않아도 될 것을....... 퐁! 흔들리는 수면.......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마음....... 철난음과 자신의 신세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다만, 그녀는 용기가 있고 자신은 그 용기가 없을 뿐...... 문득, 슬픔의 여울이 깊게 패인 한 가닥 씁쓸한 웃음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조 용히 번져갔다.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가..........?] 월광교교하고 명월수려한........ 좋은 밤이다. 돈, 돈이 없이 움직여지는 세상을 보았는가? 만두 한 조각을 먹어도 돈이다. 까짓거, 밀농사를 지어서 빠아다 만들어 먹으면 될 게 아닌가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밀씨는 하늘에서 떨어지나? 밀씨 한 알을 사도 돈이다. 칵 안 먹고 죽어버리면 될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죽는다고 돈 안드냐? 시체를 싸는 염포 한 조각도 돈이다. 손가락 하나 묻힐 땅도 돈인 것이다. 제기랄! 그래서 인간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조상도 팔아먹고, 마누라도 팔아먹고 자기자신까지 팔아먹는 것이 돈이다. 무엇인가의 필요에 의해..... 자기가 잡은 사슴과 남이 잡은 물고기를 바꾸는 것이 인류최초의 물물거래였 다면, 그러한 거래를 조금 더 편안히 하기 위해 돌조각으로 화폐란 것이 만들어 졌 다면........ 돈으로 인간을 사고, 돈으로 삶을팔아대는 수천 년 후에의 만행을 그들은 어 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땅을 치고 통곡을 할지....... 아니면 참 재미있게 되었다고 박수를 치고 있을지....... 어쨌든 그런 조상님들의 심사는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금은맹, 연매의 재정, 상업, 물자보급, 총괄조직, 사당팔향십팔단삼십육지단의 조직, 총원, 정금무사 이천 오백, 예하무사 육천, 총 팔천 오백 명, 맹주, 요마 모용혜, 부맹주, 팔비흑룡 당기, 분맹수석감찰 소혼요희 석명주, 상기 삼인의 삼두체제, 총본부흑옥마궁 외궁 제십이성, 실무본장, 산동성 제남부, 실무본장주 지옥상인 전화, 연맹력 사백 구십 이 년 삼월 이십 오 일, 산동지부 분타주 겸 천전당 부좌로 구양조운 발령, 장원, 이 장원의 구조는 일견해 보기에도 매우 괴이했다. 산동오도의 하나인 제남부 동남 삼십 리 길, 관도로부터 반 마장 가량 떨어진 숲 안에 이 괴이한 장원은 있었다. 크고 거대하다. 태산의 한 갈래인 적천산의 반을 거의 다 차지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장원의 색은 모조리 검은빛 일색, 담도 검고 건물도 검고, 지붕도 검고, 대문도 검다. 그 대부분은 강철이었다. [쓸만한 곳이다.] 세 사람, 구양조운, 감려연, 그리고 냉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의 사내 하나, 감려연은 여전히 백색무복의 남장차림이었고, 사내는 바로 철무쌍의 호위인인 철혼이었다. 구양조운은 저멀리 보이는 검은 건물을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러한 지세를 일컬어 포란지세라 한다. 알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서 산수가 해맑아 사람의 기운을 맑게 하지.] 감려연은 시커먼 철덩어리 같은 건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풋 미간을 찌 푸렸다. [별로...... 그렇게 맑은 곳 같지 않군요.........] [맑지 않다면 맑게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은가 철혼?] 철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나오기 전 대존 철극노가 한 말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이마가 맑고 눈빛이 투명하니 장차 귀히 될 사람이다. 너를 그에게 보냄은 또한 철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 목숨을 바쳐 보필하도 록 하라--- 장원이 가까와졌다. 거대한 흑철색의 문, 헌데, 그 웅장한 위용에 비해 그 흔한 현판 한 조각 보이지 않는다. 수문위사도 없었다. 넓은 뜨락 안으로 들어가 봐도 마찬가지, [온다는 연락이 있었을텐데 마중나오는 사람도 없단 말인가?] 감려연의 볼메인 중얼거림에 답하기라도 하듯 돌연 어디선가 가벼운 함성이 귓전을 꿰뚫어 왔다. 그 소리는 누각들이 밀집해 있는 군루의 뒷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구양조운 등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친 후, 봄햇살이 안개처럼 번져있는 너른 뜨락을 가로질러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하 기 시작했다. 여나무 개의 저각을 돌아 나갔다 싶을 때, 갑자기 미미하게 울려오던 함성이 드높아졌다. [와아----!] [와----!] 그리고 하나의 광경, 연무장, 이곳은 아무리 못해도 너비 이천여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넓은 연무장이었 다. 지금, 그 연무장에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엉크러지다시피 둘러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만든 원 안에선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의 무사가 맨손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었다. [잘한다! 박혼!] [쳐라, 쳐! 합명! 나는 네 놈에게 은자 열냥을 걸었단 말이다!] 퍽! 퍽! 구양조운의 검미가 깊이 찌푸려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일까? 비무를 하는 것으로 여기자니 싸움이 지나치게 격렬하고, 관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헝클어진 자세들, 눕거나, 서고, 앉고, 기댄 채 저마다 입에는 술병을 달고 눈들은 잔뜩 충혈되 었다. 뿐인가, 테두리 밖에선 마작패에다 검패, 골패 등의 도박기구가 난무하는 것이니...... [맙소사!] 감려연이 망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격투기를 벌여놓고 도박들이구나...... 그것도 벌건 대낮에......] 그렇다. 상황은 뻔했다. 옷차림으로 보아 천전당의 고수들이 틀림없는 저 작자들은 지금 직무를 내팽 개치고 엉뚱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천 명의 사람 중에, 옆에 와 선 세 사람조차 알아차리는 이가 없는데 적이 와 서 불을 지르건, 도륙을 하건 알게 무엇인가? 구양조운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날아가 박혔다. 대열의 중앙, 노인, 일신에는 낡은 갈포를 걸쳤다.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 곤드레만드레인데다, 새빨간 코를 주억거리며 관전하다가 웃고, 웃다간 졸고, 졸다간 또 마셔대는 그, 소맷자락의 당주의 직인이 선명하니 있는 바로 천전당주, 지옥사인 전화가 아 닌가? 그는 아예 술에 쩔은 것처럼 보였다. 마신 술은 반은 입 밖으로 침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오랫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윽고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가자.] 그밖에도, 어처구니 이를 데 없는 상황들은 여러곳에서 발견되었다. 대들보에 기대어 코를 골며 늘어져 자는 자, 십 장 밖까지 술냄새를 풍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자, 어떤 숲이 무성한 정원을 지날 땐 감려연이 얼굴을 노을처럼 붉히기도 했다. 숲속에선 듣기 민망할 정도로 적나란한 남녀의 기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 이다. [한심하군.] 그렇다. 정말로 한심했다. 천하에서 이보다 더 기강이 해이하고 문란한 문파를 또 찾을 수 있을까? 거기다가 또 한가지 기이한 것은, 도대체가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나 무기를 들고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검 한자루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 한심하고 지저분하고 기분나쁜 곳에서....... 만약, 그나마도 송유천을 만나지 못했다면 구양조운 일행은 울화통이 터져 죽기라도 했을 것이다. [야설록] 대달마 제 이십구 장 10/25 12:43 252 line 第 二十九 章 밑바닥부터 올라라 그는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쾅! 쾅! 쾅! 도장이 찍혀 나가는 소리가 연발로 터져 나오고 있었고, 이른 봄의 한기를 덮히는 열기라 방을 자욱이 감돌고 있었다. <본청> 이라고 쓰인 대청을 들어섰을 때의 일이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서류더미 속에서 그는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의아함과 놀람, 이어, 그런 표정들은 담담한 웃음으로 변하더니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구양조운 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신임부좌님이시지요? 삼가 제일관사 송유천이 인사드리오.] 감려연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곳으로 들어온 이래 처음 만나는 사람다운 사람이로군.....] 한 차례의 가벼운 인사치례가 오고간 후, 일행은 좌석이 그럴싸하게 놓인 옆방으로 안내되었다. 송유천이 직접 차를 내왔다. [일이 너무 바빠 미처 마중도 못했읍니다.] 평범한 얼굴, 허나, 유달리 빛나는 동공을 지닌 청년이었다. 거문고 현처럼 흰 입술의 단아한 윤곽이 시선을 끌었다. 구양조운은 차를 한모금 마신 후, [그 서류들은?] [오늘 내로 결재가 끝나야하는 것들이지요. 내일이면 또 저만큼의 일거리가 밀 어 닥칩니다.] [그럼 당신 혼자 천전당의 임무를 모두 맡고 있단 말이오?] [달리 할 사람이 없으니...] 구양조운의 눈에 한줄기 이채가 번뜩 피어 올랐다. [부하들은 다스릴 수가 없었소?] 송유천이 조용히 그를 정시해 왔다. [마음만 먹으면 다스릴 수도 있읍니다.] [그런데?] [좀 더 큰 물결이 일기를 기다렸읍니다.] 침착한 목소리, 말 속엔 조리가 있고 행동은 천하지 않다. 수양이 엿보인다. 이때, 감려연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나섰다. [한 가지만 묻겠소! 도대체 이곳이 무림의 문파요, 불한당들의 집합처요?] 순간, 송유천의 단아한 얼굴에 씁쓰레한 웃음이 번졌다. [다 보셨읍니까?] [보다마다! 나태하고 게으른 것은 그렇다 쳐도 무기조차 하나도 안들고 있으 니 도대체 적이라도 쳐들어 오면 어떻게 하려고..........?] [무기는 다 팔아 치웠읍니다.] 세 사람은 입을 떡 벌렸다. 무기! 무인이 무기를 팔아 치우다니? 송유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쪽 벽에 드리워진 휘장을 젖혔다. 그곳에선 무엇인가가 빽빽히 적힌 커다란 백포 하나가 나왔다. 송유천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보시는바와 같이 금은맹은 크게 사당으로 나누어집니다. 본 천전당과 천행, 천조, 천역의 사당을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본 천전당은 맹내의 교역, 상업, 대 부를 도맡아보는 실무본장입니다. 천전당주가 실무본장주라고 불리는 것도 그 러한 이유 때문이오. 나머지 삼당은 천전당을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했읍니다. 즉 금은맹의 핵심은 바로 본 천전당이라는 얘기입니다.] [흐흥! 그런데......?] [문제는 현당주인 지옥상인 전화께서 부임해 온 다음부터 생기기 시작했읍니 다.] 지옥상인, 그는 천하제일의 거부요, 거상이었다. 만약, 소소성 금대야와의 천하당전에서 패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불 리우고 있었을 것이다. 허나, 없는 자가 있기는 쉬워도, 있던 자가 없어졌을 때는 견디기가 어려운 법, 싸움에서 대패하고 어린 딸 하나를 안고 이곳으로 온 그는 변했다. 그는 유능한 수하를 무차별 박대했다. 공연히 트집을 잡고 중인들 앞에서 뭇매를 주기 일쑤요, 대낮에는 기녀들을 불러다 질탕 술과 도박으로 낮밤을 지새웠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천전당이 벌여들이는 수익금으 마구 남용하고 흩뿌리고 다니기까지 했던 것이니.... 당대의 기강은 극도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알짜배기 인재들은 나머지 삼 당으로 제각기 뿔뿔히 흩어져 가고, 맡고 있던 교역, 상업, 대부의 업무는 천행, 천역, 천조당에 모조리 다 뺐겼다. 뿐인가, 문인들은 의욕을 잃고 겉잡을 수 없이 타락하기 시작했으며 맹으로부터 물자 도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설상가상 격으로 연맹에서도 이 천전당을 갱생불가의 조직으로 낙인을 찍고 죄를 저지른 쓰레기같은 자들을 무차별 이곳으로 내몰다시피 수용하게 되니.... 무기나 기물을 몰래 빼내다 팔아먹는 건 그래도 점잖은 축에 들었다. 며칠 전엔 현판까지 누군가가 떼다가 팔아 버렸다. 한마디로 건물을 팔아 넘기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할 지경인 것이다. 송유천은 한 줄기 탄식과 더불어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근자에 이르러 금은맹의 중요성은 연맹 내부에서도 새롭게 인식되고 있읍니 다. 예년에 볼 수 없던 많은 투자와 인재들이 맹내로 흡수되고 있읍니다.] [.......] [천년맹과의 대전이 임박함에 따라 재정적인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 까닭 입니다.] [흐음!] [그러나 본 천전당에는 지금까지 아무런 혜택도 없었읍니다. 비직이 이곳으로 부임해 온 이래 지금까지 연맹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단 하나 뿐입니다.] 구양조운이 물었다. [그게 뭔가?] [바로 부좌입니다.] 구양조운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하지 말라, 송관사. 천명의 적과 싸우는 일은 자신이 있어 도 천명의 불한당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이 없다.] 이때 돌연, 한 소리 냉엄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해 주셔야 합니다.] 얼음굴에서 나오는 목소리인들 이처럼 찰까,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일제히 향했다. 대청의 문가에 역광을 받고 서있는 한 섬세한 인영이 보였다. 소녀, 희미한 얼굴이긴 했으나 반듯한 이목구비, 그리고 쪽 고른 사지에 윤기있는 피부를 지녔다. 다만, 흉이라면 그 얼굴에 지나치게 표정이 없고 싸늘하다는 것 뿐, 그녀는 무엇인가 큰 보따리 하나를 등에 메고 있었는데 구양조운의 시선이 이 르자 느닷없이 그를 향해 대례를 올려 왔다. 어리둥절해진 구양조운, 그는 가볍게 한 손을 휘저어 경기를 발출하며 황망히 말했다. [소저, 그대는 누군인가?] 미소녀는 돌연 한 줄기 온유한 힘이 밀려오며 더이상 몸을 굽힐 수 없자 일성 탄식을 터뜨려 냈다. [절을...... 다할 수 있게 해주세요.] 송유천이 다급히 말했다. [그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구양조운은 그를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공력을 거두었다. 미소녀의 몸이 엎어지듯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삼가 전화의 여식, 전이화가 부좌를 뵈어요.] 순간, 구양조운의 얼굴에 번뜩 이채가 스쳐 지났다. 전화, 이는 바로 지옥상인을 일컬음이아닌가? 그가 뭐라고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미소녀 전이화는 이고 있던 보따리를 와르 르 바닥으로 쏟아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수백 권은 넘어 보이는 책이었다. 언뜻 보이는 제목만 해도, <구해상경!> <상본해경!> <경사총람!> 등의 상경계통의 어려운 책들이었다. 헌데, 이 책들은 기이하게도 겉장들만 있을뿐 속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송유천의 나직한 전음이 구양조운의 귓전으로 스며왔다. [그녀는 나이 일 세 때부터 상서를 읽기 시작하여 이미 수백 권을 독파했읍니 다. 책의 속알맹이가 없는 것은 그녀가 아예 내용을 송두리채 외운 후 한 장 한 장 씹어 삼켰기 때문입니다.] 구양조운의 고개가 끄덕여질 새도 없이 전이화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명의 불한당이라고 했으나 그들 태반은 능력있는 자들입니다. 검을 팔아 술 을 마신 자도 있으나 집에서 굶고 있는 처자를 먹인자도 있읍니다. 이 모든 죄 는 못난 아비의 죄이니......] 절규하듯 처절한 어조, [부디 부좌께서는 이 천전당을 마음속 깊이 궁휼히 여기시어 구제하시기를! 마음이 썩어가는 자들과 마음이 떨어져 있는 자들을 더불어 구해주시길...... 이 기회를 팔 년이나 기다려 온 전씨 가문의 한을 돌보아 주세요!] 천하제일거부에서 졸지에 술중독자가 되어버린 부친을 보며 살아온 여심이었 다. 이마가 땅에 떨어져 피가 솟구치는 것도...... 감려연의 두 눈에 맑은 이슬이 피어 오르는 것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구양조운은 그런 그녀를 오랫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의 얼굴에 문득 한 줄기의 웃음이 싱긋 피어 올랐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천 명의 폐인 속에 두 명의 의인이 있다. 천 명을 다 버려도 이 두 명은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구양조운의 몸이 천천히 일으켜 졌다. 기우는 햇빛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도 솔직이 이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사흘뒤, 강소성 서주부, 강소제일거부인 대보금적의 대보장엔 이른 아침부터 엄격한 출입통제가 있었 다. 높이 삼 장의 거대한 장문 앞에는 수백 명의 흑의무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 고 있었고, 장문의 위엔 한개의 붉은 교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기, 삼각의 모양에 정교한 채색나비가 새겨진 너비 두 자의 혈기, 이 한 자루의 혈기가 바로 한 여인의 독문표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그 여인이 바로 지옥련의 핵심인물이며...... 연맹 내 이개 맹을 동시에 관할하는 환우팔마의 막내 요마 모용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뿐인가? 이 대보장이 바로 지옥련 금은맹의 강소지부이며 천행단의 총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예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 오늘 아침 이곳에선 금은맹의 극히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요마 모용혜의 주재 아래, 부맹주 팔비흑룡 분맹 감찰총감 소혼요희의 삼역과, 휘하 천행, 천역, 천조의 삼당이 모여 금은맹의 생사를 결할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천년맹의 상경조직은 바로 금대야의 소소성입니다. 소소성은 휘하에 비 단, 차, 운송, 무역, 토지, 전장, 요식업, 관외목장, 표국등 구대가업으로 중원상 권의 약 팔할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천행당주 독두금왕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근자에 천전당의 뒤를 이어 사당 중 가장 큰 위세를 펼치고 있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그 구대가업의 하나를 집중공략한 후 여세를 몰아 하나씩 무너뜨려 나가는 연형의 책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둥근 원탁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 졌다. 천역, 천조당주의 위로 두 사람, 검은 수염에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 부맹주 팔비흑룡, 화사(花蛇)처럼 요염한 미모의 중년미부, 분맹감찰총감 소혼요희,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최상석에 한 명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헌데, 오오...... 도대체 그 모습이란! 어둠 속에서 꽃이 피어 난다면..... 눈발 위에 한송이 설화가 피어난다면..... 붉고 현란한 암향속에 매화처럼 냉연한 기질이 서렸다.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단 한번의 마주침으로 영혼마저 빨려드는 듯한...... 하늘이여! 이 세상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저 사악한 아름다움을 도대체 어찌하 란 말입니까? 요마 모용혜, 그렇다. 검후 경설과 쌍벽을 이룬다는 신비의 미녀 요마 모용혜가 아니라면 그 누가 또 이러한 사미 요물을 지닐 수 있으랴? 그녀의 얼굴은 종내 무표정했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 보지도 않는다. 질식할 듯한 아름다움 속에서 그 흰손은 품에 안긴 한마리 백묘를 조용히 쓰 다듬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비직은 여러 차례의 정보를 수집한 바.....] 천행당주 독부금왕은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연맹내 서열은 고작 사백 이십위다. 그런 처지에 연맹서열 제사위의 하늘같은 고수를 눈 앞에 놓고 있으니 그의 가슴이 어찌 떨리지 않겠는가. 이때 돌연, 몹시 경미한...... 그러나 틀림없는 비명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어이구!] [으윽!] 천행당주의 얼굴이 순간 싹 돌변했다. 그는 오늘의 호위를 위해 휘하의 핵심고수 오백을 모조리 풀어 놓았다. 그만한 경비라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떼거지로 몰려 온다해도 겁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비명.... 비명이라니...... 그의 몸이 퉁겨 오르듯 벌떡 일어난 것과...... 와장창! 문을 부수다시피 두 개의 그림자가 안으로 쏘아져 들어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 장 10/28 17:04 431 line 第 三十 章 天錢堂의 부랑아들 울퉁불퉁............ 울긋불긋............ 풍차처럼 굴러 들어온 두 사람은 바로 문 앞을 지키던 두 명의 무사였다. 이미, 쓰러져 의식을 잃은 그들의 얼굴은 마치 잘 부풀러진 밀가루 반죽을 연상케 했다. 이어, 부서진 문조각을 밟고 두 사람이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뚜벅 뚜벅...... 한치의 어김도 없는 같은 보폭의 네 발자국, 앞의 두 발이 멈춰지자 뒤의 두 발도 멈춰섰다. 방 안의 휘황한 조명이 비로서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앞에 선 자, 햇살처럼 맑고 투명한 얼굴에 한쌍의 신비롭고 유현한 동공을 지닌 미소년, 뒤에 선 자, 냉막의 표본 만년빙굴을 뒹굴다 온 듯 냉막함이 무서리처럼 전신에 내려앉은 흑의무사, 이들은 바로 구양조운과 철혼이 아닌가? 장내의 사람들은 요마 모용혜를 제외한고는 모조리 일어나 있었다. 부맹주 팔비흑룡의 입에서 침중한 어조가 새어 나왔다. [소년, 그대는 누군가?] 구양조운은 휘휘 손을 내저으며 싱긋 웃었다. [아아..... 너무 그렇게 험상궂은 얼굴은 하지 마시오. 내 수행인의 손속도 지나쳤지만 아무리 사정얘기를 할래도 검부터 휘둘러대니 어쩔 수 있었겠소?] [나는 지금 네가 누군가 묻고 있다. 꼬마야.] 구양조운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지금 그 말은 내게 한 것이오?] 팔비흑룡은 싸늘하게 웃으며, [그럼 이곳에 너 말고 꼬마가 또 있단 말이냐? 나는......] 허나, 그의 말은 채 다 이어지다 말고 얼어붙듯 굳어 버렸다. 그는 구양조운이 어느새 그의 눈 밑에 이르러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억!] 그는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사람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구양조운의 키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늙은이.] 팔비흑룡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꼬......] 짝! 물러나는 그의 뺨에서 불똥이 튀었다. [또 말해 봐라, 늙은이.....] [너..... 너는......] 파파팍! 이번엔 삼장이 그의 검은 수염을 뒤흔들었다. 이렇게 되자 팔비흑룡은 노여움보다 오히려 섬뜩한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그는 도대체 상대의 손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으므로, 허나 그는 이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평생 얼굴을 들고 사람을 대할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의 구 대후손까지 비웃음이 될 것이다. 순간, [어헝!] 방이 온통 허물어져 내리는 듯한 폭갈과 더불어 그의 쌍장이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두 개, 세 개... 단숨에 여덟 개로 불어나는 손그림자! 팔비마령장! 그것도 십성의 전공력이다. 하지만, 채 한 초식을 다 펼치기도 전에 그는 복부에 무서운 통증을 느꼈다. 수십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찔러오는 듯한 격통이었다. 그의 허리가 새우처럼 구부려졌다. 무기력한 몸, 휘청이는 다리, 그리고, [왜액.... 웩.......] 내장 속에 든 오물이 모조리 목구멍을 타 넘어오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 설명으로는 길었으나 이 모든 일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것들, 요마 모용혜를 제외한 모든 중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팔비흑룡, 왕년, 흑산일흔두채의 총수였으며...... 지옥련 서열 제백일위의 고수, 그런 절대고수가 단 일초에 고목처럼 무너진단 말인가? 남들이야 놀라건, 춤을 추고 있건 아랑곳 없다는 듯 구양조운은 태연한 걸음 으로 요마 모용혜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어, 그의 우측 발이 이제까지 팔비흑룡이 앉아 있던 의자 위로 턱하니 얹혀졌다. [소생은 천전당 부좌 구양조운이오.] 그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천전당이 금은맹에 속해 있소? 안 속해 있소?] 비로소, 백묘를 쓰다듬고 있던 가늘고 흰손가락이 그 동작을 멈추었다. 요마 모용혜의 시선이 처음으로 구양조운을 향했다. 채색나비처럼 사이로운 그 시선과 접하는 순간 구양조운의 두 눈에 커다란 물 결이 일었다. (억!)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는 처음 본다. 그는 지금까지 여인곡의 단유경을 최고의 미녀로 쳐왔다. 검후 경설의 청초함만이 그녀와 자웅을 결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헌데,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현란한 이 아름다움은 또 뭔가? 얼음처럼 투명한 살결 탓으로 더 붉어 보이는 입술이 꽃잎처럼 나풀거리고 있 었다. [왜 그런 것을 묻죠?] 입술이 나풀거린 것만 보였을 뿐, 그 입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구양조운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발로 바닥을 디디기 무섭게 그는 발작적으로 머리를 뒤흔들었다. 어릴 때, 남들 다 입는 설날의 때때옷이 그토록 입고 싶었었다. 그것을 입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허나, 그는 종내 그 때때옷을 입을 수 없었다. 그에겐 때때옷을 만들어 줄 엄마도 없었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줄 아버지 도 아니었다. 어린 구양조운은 발광을 하듯 울었다. 눈이 퉁퉁 붓고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오도록 울었다. 울고 울며 그는 깨달았다. 울수록 자신에게는 손해만 볼 뿐이라는 것을, 이런 류의 욕망은 되도록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눈앞의 소녀에 대한 욕망을 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고, 머리를 흔드 는 순간 욕망은 사라졌다. 특유의 신비로운 담담함으로 돌아온 그는 요마 모용혜를 똑바로 정시했다. [소생이 그런 것을 왜 묻는지, 맹주는 알면서 묻고 있소, 모르면서 묻고 있 소?] 처음부터 구양조운의 변화를 주의깊게 살피던 요마 모용혜였다. 구양조운의 초인적인 극기가 문득, 그녀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옥용으로 한 줄기 환상처럼 아름다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알면서 물었어요. 천전당은 분명히 금은맹에 속해 있어요.] [그런데 왜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소?] [사무착오였나 보죠.] [왜 물자를 보급하지 않소?] [호송경로에 문제가 있었을 거예요.] 구양조운의 두 눈에 신광이 일었다. [그런데 왜 천전당이 할 일을 천행, 천역, 천조 삼당이 하오?] 순간, 삼당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요마 모용혜는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제까지 했다면 오늘부턴 안하게 될 거예요.] [좋소, 맹주의 협조에 감사드리오.] 돌연, 요마 모용혜가 사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직도 허리를 구부린 채 구토를 하고 있는 팔비흑룡의 목에서 하나의 표찰을 가볍게 뜯어냈다. <금은맹 부맹주 인.> 그녀는 황금빛의 고리 모양을 한 표찰을 구양조운에게 내밀며, [오늘부터 당신은 이것을 사용토록 해요.] 이번에는 삼당주 뿐 아니라 한쪽의 소혼요희까지 안색이 변했다. 이는 바로 구양조운을 부맹주로 승격시킨다는 말이 아닌가? [아울러 오늘 하려던 회의의 모든 대권도 당신이 이어 받도록 해요.] 대권! 천년맹 소소성과의 상전(商戰)을 말함이리라! 즉, 금은맹의 모든 지휘권이 구양조운에게 일임된다는 뜻이었다.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말래도 할 일이오.] 요마 모용혜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좋아요.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생겼군요.] [........!] [천 명의 불한당들이 길들여지는 모습과 그 천 명의 길들여진 정예가 벌이는 멋진 한 판의 연극! 물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겠죠?] 도대체 이 여자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는 그렇다 쳐도 미래까지 환히 들여다 보고 있다. 구양조운은 자못 떨떠름해졌다. 그는 퉁명스런 어조를 내뱉았다. [구경오시오.] 이어, 그는 빙글 몸을 돌려 걸으며 삼당주를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각당의 주력을산동지부로 보내시오. 자신들은 처소에서 근신하고 있도록!] 이미 서열 백일위까지 단숨에 치솟아 오른 자의 말이다. 삼당주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여 보였다. [분부대로......] 구양조운의 완강한 뒷등은 단숨에 문 앞까지 이르렀다. 이때 돌연, 요마 모용혜의 교성이 다시 그 뒷등에 부딪쳐 왔다. [잠깐!] 구양조운의 시선이 힐끗 그녀를 향했다. 순간, 슈팍! 허공을 가로지르는 최단 직선거리의 물체 하나, 그가 날아드는 것이 한 자루의 얇은 비도임을 알아 차렸을 땐 이미 그 비도는 그의유건을 자르고 지나고 있었다. 파악! 구양조운은 식은땀이 등을 촉촉히 적셔오는 것을 느꼈다. 이 비도의 방향이 한 치만 낮았어도 자신은...... 요마 모용혜의 요염한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숙녀를 찾아올 땐 좀더 점잖게 오도록 해요. 또다시 문을 부수고 온다 면 그 천마표는 불행하게도 당신의 얼굴을 뚫게 될 거예요.] 한 번 치고, 한 번 받았다. 일승일패였다. 요마 모용혜의 무예수준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수확이었다. 지옥련 서열 제사위의 고수, 이것을 기준삼아 연맹 극상부 고수들의 무예수준을 측정해 낼 수 있지 않은 가? 그러나, 결과는 놀라움 쪽이 더 많았다. 구성의 양심여의공, 소수의 무학과, 반야선, 뇌정검식 등의 절학을 일신에 두루 섭렵하여, 향년, 스승 자초의 성취를 이미 훨씬 능가하고 있는 구양조운보다도 그녀는 한 수 위였던 것이다. 그녀가 이럴진데 제삼, 제이, 그리고 제일의 검후 경설은 도대체 어떤 지경의 무예를 지니고 있을손가? 검후를 향해 다가가는 모든 계획은 좀 더 조심스러운것이어야 했다. 한 번의 실패는 영원히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다. 一, 술과 도박, 격투기를 즉시 중지할 것! 一, 각자의 임무에 태만하지 말 것! 一, 잠을 자지 말 것! 一, 조직 내의 모든 건물을 깨끗이 청소할 것, 一, 상기 사항을 어기는 자는 참수함! 부좌 구양조운의 이름으로 이러한 포고문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천전당의 문 인들은 코웃음을 쳤다. [흐흥! 목을 벤다고?] [이 작자가 어린 나이에 돌아 버렸군, 그래.] 포고문은 그들이 비웃건 말건 아랑곳 없이 사흘의 간격을 두고 거푸 세 번이 나 발표되었다. 연후, 구양조운이 부임해 온 지 보름 만에 세 명의 목이 참수되어 장문 앞에 걸렸을 때, 문인들은 반신반의했다. [다른 일이겠지.] [그럼 설마하니 청소를 안 했다고 목을 벤단 말인가?] 그러나, 그 다음날에 여섯 개의 목이 걸렸다. 또 그 다음 날엔 여덟 개의 목이 매달렸다. 이렇게 도합 열 일곱의 목이 걸리고 난 날 아침, 천전당의 문인들은 경악했다. [정말....] [정말 베는구나!] 대다수의 문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술병 대신, 빗자루를, 팻장 대신 걸레를 황급히 들었다. 하지만, 소수의 문인들은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미친 놈들! 목을 벤다고 청소를 해? 이리 와, 이리 와. 나는 그 어린 놈이 백 명을 한꺼번에 벤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 다음 날, 백 명의 목이 다시 장문 앞에 걸렸다. 팽운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상기된 어조로 외쳤다. [여러분! 구양조운은 우리를 아예 씨를 말리려 하고 있소! 우리가 도대체 이곳 에서 급전을 한 푼 받고 있소, 먹을 것 제대로 먹고 있소? 처자가 굶어 죽어가 도 쌀 한톨 얻어본 적이 있소? 그동안 이 빌어먹을 곳을 지켜온 것만 해도감 지덕지 해야할 판인데 오히려 그런 우리의 목을 베다니? 갑시다! 그 어린 애송 이를 쳐 죽입시다!] 도합 칠십 구 명이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겠다는 고집센 위인들, 횃불과 횃불을 이어 들고 대낮처럼 밤을 밝히며 그들은 구양조운의 처소를 에 워쌌다. 목을 베이는 협박에 질려 빗자루와 걸레를 들었던 칠백여의 문인들은 그 모습 을 멀찌감치 서서 묵묵히 지켜 보고만 있었다. 허나, 그들의 일신에선 여차하면 합류를 불사하겠다는 듯 팽팽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三月 十九日 저녁의 일이었다. 구양조운은 시를 읽고 있다. 바로 앞마당에서 횃불과 살기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데도 정작 그의 얼굴 은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꽃도 곱고, 사람도 곱다. 섬연한 옥수는 그대로 향기로운 꽃잎이 되고, 그 숨결은 꽃향기처럼 보는 이를 취하게 하도다. 묻노니, 여인이여, 꽃과 여인을 뉘라서 같다고 말할손가? 세상사 모두 잊고 한옥에 살렸더니, 오늘은 꽃조차 숨죽이고 여인의 교태를 지켜 보는구나...... 오히려 초조한 것은 철혼, 감려연, 송유천, 전이화였다. 세 개의 방문과 창문 앞에 선 그들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번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칠백 대 오의 싸움이 벌어질 판이 아닌가? 팽운은 무리의 선두에 우뚝 선 채 누각 안의 구양조운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구양조운! 썩 나와서 목을 드리우라! 억울하게 죽은 동료들의 원혼을 위로하 리라!] 구양조운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누가 억울하게 죽었는가?] [이놈! 청소 안 한다고 목을 벤 것이 그럼 잘한 일이냐?] 구양조운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걸어나왔다. [문파는 위계질서가 으뜸이다. 팽운, 네가 언제 당주를 당주취급, 부좌를 부좌 취급을 한 적이 있더냐? 그런 것이 싫으면 나가버리면 될 게 아닌가? 못 나가 고 엉덩이를 비벼대고 있는 것은 그래도 이따금씩 들어오는 돈에 대해서 국물 이라도 있을까..... 바라는 것이 아닌가?] 구양조운이 다가오자 팽운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구양조운의 말은 그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없어서인가? 하긴 그렇기도 하겠 지, 넓은 땅이요, 썩은 냄새가 물씬나는 친구들이요, 도박을 하든, 싸움을 하든, 계집을 강간하든 누구 하나 말릴 사람이 없다. 이렇게 좋은 놀이터를 두고 나 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원통하고 서럽겠지?] [이...... 이........] 팽운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돌연, 수중의 철퇴를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 왔다. 유성진천! 꽝! 천 근 바위를 박살내는 무쇠덩이가 구양조운의 몸을 강타했다. 헌데 보라! 박살은 커녕 오히려 철추가 내려칠 때보다 더욱 빠르게 퉁겨 오르는 것이 아 닌가? 순간, 구양조운의 얼굴이 한 줄기 서리라도 뒤덮히듯 냉막해졌다. [어떤 것으로든, 하늘이 번개를 사용해도 좋다. 내 몸에 티끌만한 상처라도 낼 수 있다면 내가 죽겠다. 그렇지 않거든 네가 죽어라!] 팽운은 철추를 신경질적으로 버리더니 뒤에 선 한 사내의 손에서 구십 근 거 부를 빼앗듯 움켜 들었다. 이어, [와악---!]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과 함께 구양조운의 이마를 무지막지하게 도끼를 내리쳤다. 허나, 캉! 이번에도 도끼는 무엇에 퉁겨 나기라도 하듯 퉁겨나갔다. 뿐만 아니라, 팽운의 몸까지 주르르 밀려나갔다. 그의 손아귀가 파열되어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호신강기! 그러나, 저토록 완벽한 호신강기는 처음 본다. (저럴 수가......? 부좌의 무예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구나..... 저 나이에 저런 성취를 이루다니) 팽운은 아예 이성을 잃고 말았다. [으와아아아악---!] 비명인지, 고함인지..... 그는 닥치는대로 동료의 손에서 무기를 뺏아 들고는 구양조운의 몸에 무차별 가격하기 시작했다. 챙! 캉! 낫, 도끼, 차앙! 팍! 삽이며, 죽창, 박달나무 몽둥이에다 무쇠솥까지, 우당탕! 쿠당! 그러나, 상대는 마치 우뚝 선 산과 같았다. 아무리 찌르고, 베고, 찔러도 그것은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이왁!] 쩡! 한 개의 도끼날이 부러져 나갔다. 동시에, 팽운의 몸도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헉! 헉!] 숨찬 호흡이 그의 터진 입술 새로 물푸레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한 자루의 단검이 툭 떨어져 내렸다. [사내끼리 한 약속이다. 죽어라.] 검, 빛나는 검, 팽운의 떨리는 손이 부들부들 그 검을 움켜잡았다. 구양조운은 오히려 뒷짐을 쥔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팽운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스쳐 지났다. [부좌..... 그토록 강한 무예를 지니고도...... 참고 계셔 주었는가..... 헛.... 허.....내가 어리석었다........] 그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시선이 힐끗 동료들을 향했다. 순간, 그의 시선이 힐끗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내려 박았다. 바로 그때다. 돌연, 난동을 주도했던 칠십 팔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 칠백 명, 천전당 문인 모두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엎어지는 것이 아닌가? [부좌! 팽운을 용서하소서!] 챙! 느닷없이 날아온 한 줄기 지풍에 검은 자루째 부러져 나갔다. 철혼이 그를 향해 한 손을 쳐들고 있었다. 그가 지풍을 쏜 것이다. 팽운은 파르르 몸을 떨더니 구양조운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고 싶은가?] [죽여 주시오, 부좌!] [.........?] 뒷짐을 진 구양조운은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개죽음이다. 나중에 사내답게 죽을 기회를 주겠다.] [부좌!] 구양조운은 하늘을 한 차례 우러러 보고 난 후 천천히 누각 안으로 걸음을 옮 겨가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맹으로부터 무기가 수송되어 올 것이다. 팽운, 네가 문도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순간, 팽운을 비롯한 팔백 문도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무기? 무기가 온다고?] 한동안 얼떨떨하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던 그들, [너희들 모두에게 임무가 맡겨질 것이다. 천전당은...... 부활되었다.] 구양조운의 마지막 한 마디가 떨어지자 온통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함성이 문도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와아-----!]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팽겨치는 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자...... 아무 말도 못하고 동료의 손을 꽉 움켜쥐는 자....... 불한당, 천고의 불한당으로 낙인 찍혀 어둠을 벗해야 했던그들....... 그래서 스스로 내뿜는 독기로 점점 더 몸을 썩혀가던 그들......... 그들에게 드디어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송유천과 전이화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철혼도 냉막한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감려연도 웃으며 누각 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빠꼼히 열린 문 틈으로 구양조운이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푸훗!] 감려연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며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막았다. (당신이란 사람은 도대체......) 이렇듯 모두 기쁨으로 충만하여 웃고있는 이때, 홀로 한 그루 나무그늘 아래서 울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지옥상인 전화, 벌컥벌컥...... 술이 흐르는가....... 눈물이 흐르는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눈물이란 꼭 슬퍼야만 흘러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일 장 10/29 18:30 366 line 第 三十一 章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勝利의 條件 대저, 고대 중국의 큰 교역물로는 비단, 차, 곡류, 금은등의 보석류와 골동품, 그리고 전장과 표국업을 뽑을 수 있다. 이것을 칠대교역업이라 일컬으며, 그 밖에 반점, 주루 등의 요식업과 기루같은 윤락업도 성행하긴 했으나 대개 영세업에 그치지 않았다. 구양조운,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중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송유천, 전이화, 철혼, 감려연, 팽운등과, 그리고, 한 명의 궁장을 한 눈부신 미녀를 비롯하여, 화사한 미모의 소녀 하나와 다섯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헌데 실로 놀라운 일, 궁장을 한 미녀는 바로 신비여인곡의 곡주 단유경이었고, 소년, 소녀들은 구양조운의 고향친구들이 아닌가? 사기꾼 유석, 도둑놈 당천, 화약제조자 천돈, 악덕상인 대종, 기녀 교지, 이 소년들은 감려연이 직접 데리고 왔다. 감려연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의 생김새는 너무 특이하여 백 장 밖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고, 이들 또한 감려연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환호를 지르며 제각기 하던 일을 내 팽개치며 따라 왔다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나는 대장이 일 년 씩이나 기다리게 하지 않을 줄 알았다니까!] [야,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 출세군! 그 휘하 부하가 자그마치 팔천 명이라니 말이야!] 거기다가 이들이 오고 나서도 자못 사람들의 넋을 빼 놓기에 충분했다. 온 장원이 떠들썩 하도록 뛰고 뒹구는가 하면, 서른 명이 사흘 먹을 음식을 단 한끼에 뚝딱 해치우기도 했으니까, 그런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토록 조용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일종 의 기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소년들은 지금 꼼지락거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어젯밤 구양조운이 했던 말 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은 더 큰일을 위한 연습에 불과하다. 하겠다는 마음과 열기를 가지고 덤벼라! 장난조로 나오는 놈은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축출이다. 헌데,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저 단유경이라는 절세미녀, 저토록 예쁜여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녀는 아름다왔고, 그런 여인이 사흘 전 홀연히 백여 명의 미녀군단을 거느리고 장원으로 들어섰 을 때 사람들은 거의 혼이 달아날 뻔까지 했다. 그녀들은 연무장에 일제히 기립하여 구양조운에게 문파의 존장을 뵙는 예를 올렸고, 구양조운은 근래에 볼 수 없도록 크게 웃으며 두 팔 벌려 그녀들을 맞이했던 것이다. 하나, 미녀도, 구양조운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탓으로 사람들은 도저히 저 괴상 한 미녀군단의 정체를 짐작해 낼 수 없었던 것인데....... 어쨌든, 장내에 앉은 십사인의 어깨 위로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그 침묵을 깨고 구양조운이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우리가 상대해야할 소소성은 천하의 상권을 사분지 삼이 나 장악하고 있소. 이것을 부수자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송유천이 말했다. [아무래도 칠대교역업부터 파고 들어가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반점, 주루도 상당수 소유하고 있읍니다만 역시 칠대교역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요.] 대종, 어릴 때부터 돈만 있으면 천하의 상권을 자신의 손에 쥐어 보겠다던 이 꼬마 악덕상인이 말을 이었다. [나도 소소성을 알고 있어, 대장. 그 중에서도 다차업은 그들이 가장 크게 벌 리고 있는 장사야. 역시 그쪽이.....]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차.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또 있을까?] 우선, 말을 시켜놓고 그 중의 적합한 의견을 골라 다시 의제로 이끌어 간다. 구양조운의 이런 지도력은 단연 돋보였다. 한쪽에 묵묵히 앉아있던 전이화가 입을 열었다. [차는 기국, 청천백석, 매화, 산사자, 용봉벽향 등 여러가지가 있어요. 소소성에 차만을 취급하는 천련방이란 곳이 있는데 이 천련방에선 오직 기국만을 취급하 지요.] [기국이라....] [사실 다차 중에는 엉터리 조작품이 많아요. 이런 것들은 대개가 허름한 싸구 려 집에서 팔리거나 난매를 하게 된답니다. 허나 천련방에선 중원 각처에 자파 의 차만을 파는 점포조직을 가지고 오직 기국 하나만은 고가로 판매해요.] 송유천이 번쩍 시선을 빛냈다. [그렇다면 그 점포조직을 우리가 인수할 수 없을까?] [불가능해요. 천련방에서 이 점포조직에 고수를 파견해 감시를 하고 있는 데다 계속하여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탓으로 그것을 인수하기는 극히 어려워요.] 구양조운은 묵묵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중인들의 의견이 분분해지자 그는 입을 열었다. [됐소, 그 정도면 충분하오. 우리의 목표는 장사가 아니라 파괴, 당신들은 먼저 천련방의 점포조직 가운데 가장 허술한 경영내용을 가진 점포를 찾아내시오. 그곳을 통해 실마리를 풀어봅시다. 거사는 내일! 일제히 전조직을 동원하시오.] 밤, 스르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도 지옥상인 전화였다. 탁자에 몸을 기대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구양조운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주!] 지옥산인은 피식 웃더니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게. 갑자기 우스워지니까?] 역겨운 술냄새가 왈칵 끼쳐왔다. 구양조운은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차라도 드시렵니까?] [싱거운 차는 무슨..... 술이나 있으면 줘.] 한 병의 죽엽청을 그는 숨도 안 쉬고 단숨에 들이켰다. [또 없나?] [수하를 부르겠소.] [없으면 그만 둬. 한 병 마시니 갈증이 좀 가시는군.] 전화는 빨간 딸기코를 쓰윽 문지르더니 권하는 자리를 마다하고 바닥에 주저 앉아 벽에 비스듬이 기대었다. 빨간 홍촉 불빛이 술에 찌든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낮에 자네가 하던 말을 우연히 들었네.] 구양조운은 싱긋 웃으며, [치졸하다고 여기셨읍니까?] [아니, 아주 좋아. 소소성의 주력은 바로 차야. 요즘은 사람의 입맛이 좋아져서 웬만한 객점까지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겨냥한 것은 대세를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다.] 전화의 눈에는 취기대신 미미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과거의 저 눈에는 아예 신광이 폭사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어.] 구양조운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이번의 거사에는 필시 금은맹의 전력이 투입될 걸세.] [그렇소. 천행, 천역, 천조당에서 이미 주력이 출발했소이다.] [바로 그거야. 계획이 아무리 좋다해도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일세. 그런데 천전 당의 망나니들과 그들이 뭉쳐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구양조운의 몸이 흠칫했다. [흐흠!] 전화의 말은 그가 모르고 있던 맹점을 찔러온 것이었다. 그렇다. 사람이 일만 아니라 십만이 있은들, 또 거사계획이 아무리 좋은들 무엇하겠는가? 하부조직이 신경세포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헛일이 되고 마 는 것이다. 전화는 히죽 웃었다. [출전하기 전에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야 해. 소소성은 견 고한 조직이다. 그들이 돌이라면 우리조직은 쇠가 되어야 하네. 그것이 일의 법 칙이란 거지.....] 그는 휘청 몸을 일으켰다. 이어 문 밖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기 시작했다. 구양조운은 급히 그를 불렀다. [노선배!] 전화의 몸이 주춤 섰다. 그러나 시선은 둘러보지 않았다.다 [.......] [남아서 소생들을 돌보아 주시오. 노선배의 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오!] 문득, 전화의 입에서 툴툴 가랑잎처럼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흘흘......] 그는 맥빠진 어깨를 더욱더 늘어뜨리며 걷던 걸음을 계속 잇기 시작했다. [이제 일은 젊은 사람들이 해야돼. 늙은 사람은 필요가 없다. 자네는 매우 뛰 어난 두뇌들을 만났으니 그들을 잘 활용해 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자네가 날 선배로 여긴다면 내 처소로 술이나 듬뿍 보내 주게.......] 구양조운은 창가에 서서 오랫 동안 전화의 늙은 뒷모습이 느릿하게 어둠 속으 로 빨려드는 것을 지켜 보았다. 늙은 생강이 역시 맵다. 그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구양조운은 첫 출전부터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다. 그날 밤, 그의 밤에는 밤이 꼬박 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출전일! 아침부터 대지엔 봄비가 파릇하니 흩뿌려지고 있었다. 광장,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서 있다. 헌데, 그 중 칠천여 명은 모두 비를 피하느라 천막 속에 들어가 있는데, 오직 대열 중앙의 천여 명만은 빗속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바로 천전당의 문인들이었고, 그 속엔 송유천, 전이화, 팽운 등도 보였 다. 빗물은 이미 그들의 옷을 축축히 적셔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모두 하나같이 석상처럼 무표정했다. 구양조운은 높은 대 위에쳐진 차일 속에 서 있었다. 철혼, 감려연과 다섯 소년들이 그의 뒤로 시립해 있었고, 단유경은 차일의 끝 쪽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요마 모용혜, 그녀는 시종 하나 거느리지 않은 채 오늘 아침에 왔다. 그녀는 지금 구양조운과 나란히 붙어 선 채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대는 매우 아는 여자가 많군요, 부맹주.] 그녀의 시선이 한 쪽의 단유경, 교지를 슬쩍 훑어 지났다. [그것도 모두 미녀들만, 천하의 미녀들을 모조리 거느려 볼 생각인가요?] 구양조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사적인 말은 나중에 하시오. 오늘은 중요한 날이오.] 요마 모용혜는 짐짓 봉목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군요, 옳은 말이예요. 헌데 이 대열은 도대체 언제 출발하지요.] [아직 때가 안되었소.] [오늘이 아닌가요?] [오늘이 될 수도...... 내일이 될 수도 있소. 아니면 영원히 출발할 수 없을지도 모르오.] 요마 모용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군요?] [두고보면 알 것이오.]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루한 침묵이었다. 쏴아아.....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졌다. 짐작컨데 저빗속에 선 자들은 속옷도 흠뻑 젖었으리라! 요마 모용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저 일천 천전당의 고수들을 심혈을 기울여 맹훈련시킨 것으로 아는데.....] [........] [그런 정예들을 저렇게 빗속에 내버려 둘 생각이예요? 비도 오래 맞으면 병이 들 수 있어요.] 구양조운은 여전히 무표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거든 비를 맞지 않게 해 주구료.] 요마 모용혜는 생긋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장내를 향해 교성으로 외쳤다. [검사들은 우선 비를 피하도록 하라!] 순간, 대열중에서 한 사람이 빠른 기세로 달려 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천막을 향해 막 달려가다가 문득, 대열 속에서 뛰는 것은 자신 혼자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구양조운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구양조운의 냉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연당, 너의 옷은 잘 다려져 있군. 싸움에 임한 사람이 옷에 비가 젖는 것을 줄곧 신경쓰고 있었던가?] [부, 부좌!] 구양조운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한 사람의약병이 백 명의 강병을 약하게 만든다. 연당 너의 아내와 자식은 우리가 돌보아 주겠다.] 쨍! 선두에 서 있던 팽운의 검이 날카로운 예광을 발하며 솟구쳐 나왔다. 연당은 그를 힐끗 바라본 후 체념을 한 듯 고개를 푹 떨구었다. [면목이 없소.....] [잘가라, 연당.] 슈팍! 피가 빗물 속으로 자욱이 번졌다. 구양조운은 느릿하게 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떨어져 나간 연당의 목과 몸을 거두어 정돈한 후 빗속에 우뚝 섰다. 빗발치듯 그의 옷깃 속으로 빗물이 스며 들었다. 이때 돌연, 서쪽 천행당의 천막 속에서 한 사람이 주춤주춤 걸어나오더니 천전당의 옆에 섰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 천조, 천역당에서 몇몇 사람들이 걸어나와 빗속에 서기 시작했다. 이어 또 한사람, 또 한사람...... 너도나도 천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조에서는 아예 천막을 송두리채 거두기도 했다. 비장한 기운이 빗속에 선 고수들의 머리 위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요마 모용혜의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가볍게 굳어들었다. (기이한 일.... 아까는 산만해 보이던 진용이 지금은 마치 타오르기 시작한 불덩어리 같구나..... 설마하니 구양조운은 이같은 때를 유도하여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구양조운의 완강하고 튼튼한 뒷등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철무쌍의 배경을 등에 업고 입맹한 그저 그런 자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당당한 패기도 믿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호기라 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요마 모용혜는 한 줄기 신선한 두려움이 가슴을 휩쓸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무서운 자다.) 둥둥둥......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한 대열들이 서서히 장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서막! 서막이 열린다. 이는 바로 오백 년 내로 정사간에 처음으로 벌어지는 대전의 서막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최대한으로! 하다못해 신화가 안에 있는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말라! 기회는 단 한번으로 족하다! 두 번째 기회는 기회가 아니라 죽음이다. 형제들이여! 한 번의 기회로 소소성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허물지 못하면 그곳에서 죽어라! <이상과 같은 보고를 올리며 요마 맹주께서 구양조운을 맹내서열 백일위로 천거하였음을 첨부합니다. 감찰부 수석감찰 형위 경배.> 화르륵! 얇은 종이는 불기가 닿기 무섭게 오그라들 듯 사라졌다. 검후 경설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 창가로 조용히 다가섰다. 파아아...... 창문에는 빗방울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어지럽게 창문을 때려대는 빗방울은 마치 미친 사람이 사방에다 물을 뿌려대 는 것 같았다. 봄비 치고는 벌서 이레째 내리는 비였다. 미끄러지는 듯 창을 타고 내리는 빗방울 아래 한 마리의 나비가 있었다. 날개가 젖은 듯 나비는 날지 못라고 다만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헐덕이고 있 었다. 검후 경설은 창을 열어 주었다. 나비는 퍼덕이듯 안으로 날아들어 방바닥에 힘없이 늘어졌다. 문득, 경설의 두 눈에 한줄기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아름다움은 봄날 나비의 혼과도 같은 것....... 젊은 날 또한 가을바람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것...... 내 젊음은 지금 어디에서 비에 젖어 헐떡이나.....] 지금은 무예를 연마해야 할 시간이다. 허나, 경설은 엉뚱한 보고문을 읽었고 다시 사치스러운 감상에 몸은 맡기고 있었다. 한 사내, 덜렁대는 듯하면서도 속이 깊어 보이던 사내, 왜 그에 대한 보고문을 읽고 싶어하는지 자신의 마음을 경설은 모른다. 늘 세속을 떠나 있으며...... 다만, 무한히 높은 가치를 향해 정진하고자 하던 마음이 아니었던가? 검 한 자루에 바친 청춘이요, 삼척의 광채에 의지해 살아온 삶이었다. 그 외의 것을 그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의 그녀는 때때로 위기의식을 느끼곤 한다.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잡아 당기는 명예와 권세, 그리고 십팔 세의 가슴에 당기는 세속의 유혹...... 경설은 지그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방 한쪽에 놓인 검을 들었다. 스르릉........ 거울처럼 투명한 검신에 그녀의 얼굴이 담긴다.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난 검이 좋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이 까칠한 감촉..... 순간을 그어가는 상쾌한 여운..... 마음에 새겨지는 무상의 도리..... 경설, 세속에 미련을 갖지 마..... 중요한 것은 결코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슈파팟! 한 줄기 무지개 같은 검광이 뒤를 이었다. 소녀, 또 한명의 소녀, 일신에는 담황빛 화의를 걸치고 허리에는 은빛 대를 질끈 동였으며 머리는 궁 형으로 틀어올렸다. 아름다움, 그녀는 결코 한 나라를 기울이고 꽃이 부끄러워 몸을 숨길 정도의 미모를 지 닌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결했다. 그 성결함은, 머리를 쓰다듬는 사소한 동작에조차 폭발적으로 피어 오르는 것이며, 어떤 사람이든지, 설사, 지금 막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골백번 문지르고 나온 사람이라 해도, 이 소녀를 보는 순간, 자신의 영육이 한없이 초라하고 더럽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명은 이 소녀에게 천년맹 수좌총사 백가로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지금, 백가로는 섬연한 아미를 살풋 찡그린 채 탁자에 턱을 고이고 앉아 있었다. [하필이면 재정의 금은맹으로 발령이 났는가....... 이것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구양조운은 단 분초라도 빨리 지옥련의 핵심 위치로 올라야 할 사람이었다. 그래야 검후와 무엇을 어떻게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백가로가 예상한 구양조운의 위치는 감찰분맹 마맹 쪽이었다. 그런데 금은맹이라니? 그는 도대체 상술에 대해 단 하나라도 아는 것이 있을까? 금은맹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 출신으로 하여 그는 결코권력의 상층까 지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계획은 어긋나고 만다. 답답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상술의 재인을 그의 곁으로 보내 주고 싶었지만 백인귀두의 이목 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어림도 없는 일, 백가로는 탄식을 터뜨렸다. 터뜨리며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일은 사람이 꾸미되 그 성사는 하늘이 한다.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이 장 11/03 12:38 334 line 第 三十二 章 무너지는 笑笑城 점포조직, 천련방에 가맹하고 있는 고급 차 가게를 세인들은 현다거라 부르고 있었다. 중원에 있는 현다거의 수효는 자그마치 만여 채, 그 중에서도, 항주에 있는 옥강현다거는 그 거래규모가 크기로 유명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곳이었다. 사시경, 옥강현다거의 이대가주인 장건은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총집사인 오광이 따라 들어섰다. [가주님, 문제는 아주 심각하오이다. 천련방에선 지금 차값을 정신없이 독촉하 고 있소. 만약, 이달 말까지 해결이 안 된다면 본가는 문을 닫아야 하오.] 장건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 감았다. 그는 근래 태호의 명기인 추려단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천련방에서 봄에 풀어놓은 오천 냥의 차값조차 그는 그녀의 거처인 화훼루에 처넣었던 것이다. 대금은 반 년 치가 밀려있다. 이대로 나간다면 오광의 말마따나 이대째 전승되어 오던 옥강현다거는 문을 닫고야 말게 될 것이다. 장건은 취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 봐야지, 어떻게든....] 그가 문을 나서자 천련방에서 파견한 감시자가 신광을 번뜩였다. 그는 늘 검 한 자루를 품고 있는 얼음조각 같은 자로 이름은 연운이라 했다. 이 무렵 장건의 정부인 추려단의 화훼루에는 한 명의 점잖은 백의중년인이 와 앉아 있었다. 워낙, 단아한 기품의 사람이라 추려단은 쥐죽은 듯 술만 따를 뿐, 아무 말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송유천이라는 이름의 청년과 대작하고 있던 백의중년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일전에 자네가 들여놓은 그 차 이름이 뭐라고?] 차의 얘기가 나오자 추려단은 자연 이들의 얘기에 흥미를 기울였다. 송유천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기국이지요. 최상품입니다. 그 놈의 차맛을 알려면 들국화 한 냥에 구기자 세 냥 그리고 단아를 다섯 냥, 지마 반 되를 볶아 채를 쳐서 말린 후 조금씩 섞어 드셔야 참맛이 납니다.] [오오..... 그런가?] 추려단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국차에는 송화다식이 또 제격이지요. 봄소나무의 송화를 가루로 만들어 저 은 후 휘휘 저어 보았을 때 물밑에 가라앉은 것이 없이 깨끗한 것이어야 해요.] [.......!] [연후 맛을 보아 아무런 잡됨이 없으면 그것으로 간단히 조병을 만드는 거예 요. 기국차와 같은 귀한 차와 아주 어울립니다.] [핫하..... 자네는 차에도 매우 일가견이 있었군. 부러우이.] [별말씀을.... 이때, 백의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떤가 송노제, 일전에 돈을 빌려 준 그 사람은?] 대부라는 말이 나오자 추려단은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숨마저 죽이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송유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되었읍니다. 그는 구양대야께서 돈을 대부해 준 덕분으로 구족이 목숨을 건 졌다며 일전에는 구양대야 앞으로 선물까지 보내왔읍니다.] [그래, 잘되었군.] 이때,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추려단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외람됩니다만.... 혹시 구양대야께선 대부업을?.....] 이 말에 송유천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추려단, 아직 모르고 있었던가? 구양대야로 말할 것 같으면 금릉에 본을 두고 전국에 열 개의 지국을 가지고 있는 대원전장의 가주님이시라오.] [대원..... 천첩도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말을 잇다 말고 추려단은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순간, 백의중년인과 송유천은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추려단, 이게 무슨......] [한 사람을 구해 주세요. 그 분은 천첩의 먼 친척오라비 뻘 되는 분으로 이번 에 큰 곤경에 처했어요.] 이어, 그녀의 입에서 옥강현다거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눈물까지 흘리며 한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백의중년인은 침울한 표정이 되 었다. [송노제, 옥강현다거란.......?] [최근 들어 부채를 가득 안고 있는 곳입니다. 타 전장에서도 그곳의 내용이 알 차지 못하다고 돈 빌려 주기를 몹시 꺼려하고 있지요.] [흠.......] 백의중년인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추려단,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내가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옥강현다거 에 있는 차를 내게 팔면? 황금 만 냥어치라도 사도록 하겠으니.....] 순간, 추려단은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해선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처.... 천첩이 오라비에게 이 일을 여쭙겠어요......] 장건은 그렇잖아도 뚱뚱한 체구에 비지땀을 뻘뻘 흘렸다. 지금, 그의 창고에 저장된 차는 모두 만 이천여 냥...... 차는 한 냥에 금 한 냥이니 황금 일만 이천 냥이면 그는 이 곤경에서 넉넉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련방의 규칙은 엄했다. 만약, 그러한 수요의 차를, 그것도 현다거가 아닌 곳에서 구경도 할 수 없는 기국이 유출되어 나간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는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 날 길이 없게 되리라. [도, 도대체 그만한 수효의 차를 어디다......] 백의중년인은 장건의 회의에 찬 말에 빙그레 웃어보였다. [아시다시피 나는 전장을 경영하는 몸이요. 거기다가 이번엔 표국까지 개설해 생각인데 그 차들은 전장의 종사자 및 표국의 표사들에게 선사를 할 생각이 오.] [아......] 장건은 연신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소, 소생이 허락한다 해도 본가엔 천련방에서 파견한 고수가 있읍니다. 그를 어떻게.....] 순간, 백의중년인의 얼굴에 신비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이 승낙만 한다면 그외의 일들은 내가 다 책임지기로 하겠소. 당신은 이 일의 가부만 표시해 주시오.] 장건은 힐끗 추려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추려단은 빨리 승낙하라는 눈짓을 그에게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보내고 있 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장건은 엎드린 자세에서 머리를 바닥에 쿵! 쳐박으며 말했다. [좋읍니다! 장건은 대인의 분부를 따르도록 하지요.] 백의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창 밖을 향해 나직한 어조로 외쳤다. [철혼은 밖에 있느냐?] 순간, 힘찬 대답과 함께 물건 하나가 스르르 방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물건, 땅에 살포시 놓인 그것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장건과 추려단은 다급히 비명을 내질렀다. [헉!] [아악!] 그것은 놀랍게도 천련방의 고수, 연운의 목이었던 것이었다. 백의중년인의 입이 열리며 담담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물건은 내일 밤, 인수해가도록 하겠소. 대금 또한 그 자리에서 지불하리라.] 백의중년인이 만 이천 냥의 차를 인수해 간 열흘 후, 낙양, 금릉, 연경, 개봉부 등의 대도에선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기국차, 천련방에 가입한 현다거가 아니면 구경해 볼 수도 없었던 이 비싼차가 시중의 다점에 마구 진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도 현다거보다 반이나 싼 가격인 은자 다섯 냥에...... 가게 앞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각처의 현다거는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으며, 천련방과 천 련방의 총타가 있는 무창에서는 그들의 항의가 빗발치듯 쇄도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천련방의 총책임자, 그는 곤룡적수란 외호로 무림에서 쩌렁한 명성을 떨치던 이호란 인물이었다. 지금,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한 그의 앞엔 천련방의 구대집사들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물건이 유출되다니!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니고 수천 냥의 차가 말이다!] 곤룡적수의 폭갈에 구대집사 중 한 사람이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그, 그것이...... 아마도 이것은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타......] [말도 안되는 소리! 이 천하에 누가 감히 천련방과 맞선단 말인가? 열흘 내로 원인을 규명하라! 또한, 시정에 나도는 기국차를 급히 회수하도록!] [그, 그게 저어....... 잘 않내놓으려고 할 것입니다만....] 곤룡적수는 탁자를 맹렬히 내려치며 폭갈을 터뜨렸다. [두 배, 세 배의 값을 주고라도 회수하란 말이다! 이 멍청이들아!] [천련방에선 분명히 차를 회수하려 들 것이오. 세 배의 값을 불러야 하오.] 구양조운의 말에 송유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나 많이......] [두 배로 하고자 하겠지. 그때 팔아 치우는거요.] 이때, 대종이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장, 그렇게 힘들여 얻은 차를 왜 도로 팝니까?] 구양조운의 얼음 같은 얼굴에 한 줄기 신비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두 배면 이미 판 것을 빼고도 황금 이만 냥이 들어온다. 이번엔 그것으로 전 국의 현다거에서 꾸준히 기국차를 사모으지, 그것을 다시 시장에 풀고.......] 순간, 전이화가 탁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천련방에선 다시 그 차를 회수하려 들테고.... 이번엔 세 배의 값으로 다음엔 네 배로 되팔면 결국, 그들은 자신의 차를 자신이 사들이는 이 중의 타격을 입게 되겠군요!] 그렇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다 보면 누에가 뽕잎을 파먹 듯, 이쪽에서는 돈 한 푼 안들이고 상대의 재력을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중인들은 감탄 어린 시선으로 눈부신 듯 상석의 구양조운을 바라보았다. 저 오만한 빙인의 머리에서 나오는 계략은 실로 귀신도 곡을 하고 도망갈 정 도가 아닌가! 구양조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팽운.] 순간, 팽운은 공손히 몸을 일으켰다. [분부 기다리고 있읍니다.] [그대는 이제부터 전국의 다농가를 돌아다니며 가장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해 놓으시오.] [다농가입니까?] [그렇소, 천련방에선 기국차사건에 정신이 팔려 그쪽엔 필경 소홀할 것이오. ㄳ할 때, 다른 곳과는 절대로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읍니다.]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의 찻잔으로 시선을 던졌다. [각처의 현다거에선 이번 일로 큰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전이화!] [예!] [현다거들과 은밀히 접촉을 하도록..... 그들에게 최고의 조건으로 기국차를 대줄 것을 약속하라. 또한 천련방에선 더이상 기국차를 생산해 낼 능력이 없음 을 상기시키도록.] [알겠읍니다.] [그 시기는 찻잎이 무르익는 오월, 그리고 가맹점포의 이름은 소수방으로 한 다.] 폭풍, 차업계에 대폭풍이 불었다. 기국차는 아무 곳에서나 발견되었다. 천련방에선 그것을 수거하기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으며, 그러하느라고 소비 한 돈은 근 황금 백만 냥에 이르렀다. 설상가상격으로, 각처의 현다거에선 기국차를 전혀 팔지 않았다. 아무데서나 은자 다섯 냥으로 팔리는 기국차를 금 한 냥에 내놓으면 팔리겠느 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기국차를 팔지 않아도 생계를 보장해 주겠다는 구양조운 계 의 내조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주된 돈줄인 현다거가 일체 장사를 않으니 현다거의 재정은 휘청거렸다. [큰일입니다! 전 농가에서 일채 다엽을 팔지 않겠다고 합니다!] [차를 만들 수가 없읍니다! 재고도 없읍니다!] [시정의 차를 더 이상 사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곤룡적수 이호는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 들어오는 비보에 넋을 잃고 말았다. 끝장이었다. 천련방의 재정은 어긋날대로 어긋나 이제는 어떻게 수습해 볼 도리도 없었다. 달도 몹시 밝은 초추의 달밤. 그는 예리한 검을 자신의 복부 깊숙이 쑤셔넣었다. 운명, 자신을 이렇게 만든 운명을 한탄하면서..........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기나 했다는 듯이, 전국의 현다거들은 일제히 현다거의 간판을 떼었다. 대신, 다른 이름의 기와 간판이 높이 매달렸는데, 그것은 바로...... <소수방!> 신룡방. 이곳은 전국에 흩어진 여든여 개의 신룡표국을 관할하는 소소성 표국업의 총 본국이었다. 어느날 돌연, 이곳으로 신룡표국 남창지국에서 보낸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여섯 개의 보물 청탁자가 있음. 그는 그것을 황제가 계신 금릉까지 운반해 주길 원하고 있으나 결정을 못내 리고 본국으로 보냄.> 전서구가 도착한 지 사흘 후, 신룡방의 웅장한 대문으로 이십여 명의 호위표사들에 둘러싸인 한 대의 마차 가 들어섰다. 이루 말할 데 없이 호화로운 마차.... 귀한 남목으로 대를 하고 자향단으로 차일을 둘렀으며, 주렴에 매어달린 조그마한 구슬 하나만 해도 큰집을 통째로 사고 남을 정도였 으니 그 화려함이야 두말 하여 무엇하랴! 마차의 문이 열렸다. 이어, 그 안에선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는데 순간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사내는 청수하기 이를 데 없는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그 풍도는 마치 임풍옥수 하듯 하였고, 이제 나이 이십 가량의 소부는 해와 달이 빛을 잃을 정도로 찬연한 미소를 지 녔으니..... 이들이 걸을 적마다 향기는 십 장 밖까지 진동했다. [틀림없이 황족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게나. 저 소부가 허리에 찬 노리개는 일생에 한 번 보기 힘든 곡옥일세 그 려.] 두 사람은 즉시 귀한 손님만을 접견하는 빈헌청으로 안내되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총국주께서 곧 나오실 것입니다.] 시녀가 차를 놓고 물러간 잠시 후, [핫핫........] 낭랑한 대소와 함께 일신에 금의를 걸친 오십 가량의 중로가 안으로 걸어 들 어왔다. 수염이라고는 없는 얼굴에 부리부리한 한쌍의 눈이 절로 비범한 인물임을 느 끼게 하는 위인, 바로 무림에서 철장경혼이라 불리우는 신룡표국의 총국주인 것이다. 그의 옆에는 앙상한 몸매의 볼품없는 노인이 한 사람 따르고 있었다. [핫핫.... 이거 귀빈을 오래 기다리게 하였소. 소생은 철장경혼 노현이오.] [주영표라 하오.] 한차례의 분분한 인삿말이 오간 후 주영표라 신분을 밝힌 중년인은 품속에서 조그만 금낭을 꺼내들었다. [이번에 본인은 이 물건을 황궁으로 운반하고자 하오만.....] 철장경혼은 주영표를 힐끗 바라본 후 금낭을 조심스럽게 ㄳ 이어, 안의 물건을 쏟아내보니 그곳에서 담담한 취광의 옥두꺼비 한 마리와 다섯 알 의 보주가 쏟아져 나왔다. 철장경혼은 자줏빛 포단위에 놓인 그것을 옆의 노인에게 밀어보냈다. [허노인이 좀 보아주시오.] 허노인이라 불린 백발노인은 본래 두 눈에 광채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보석이 눈앞에 놓이자 그의 눈에선 타오르는 듯한 광채가 쏘아 나왔다. 그는 먼저, 흰 손수건을 꺼내어 옥두꺼비를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리저리 두려가며 살펴보길 십여 차례, 이어, 허노인이 나머지 다섯 알의 백청홍황녹 오색보주까지 다 살펴보는데 무려 한 시진의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그는 마지막 한 알의 보주를 내려놓고 전혀 억양이라곤 없는 어조로 입을 열 었다. [틀림없소.] 짤막한 한 마디, 철장경혼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가격은?] [벽옥섬여는 황금 오십만 냥, 그리고 피독, 피수, 피사, 피화, 피한의 오주부는 각 백만 냥씩 도합 오백 오십만 냥이오.] 황금 오백 오십만 냥, 철장경혼은 입을 쩍 벌렸다. 일생을 도산검림에서 뒹굴어 온 그였지만 아직까지 이렇듯 엄청난 금액은 상 상조차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황금 오백 오십만 냥.....] 중년이, 주영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철장경혼을 지켜보고 있었다. 철장경혼의 표정이 몇 번을 거듭하여 변해갔다. 놓칠 수 없는 장사가 아닌가! 제대로 호송만 된다면 신룡표국은 단숨에 오만 오천 냥의 막대한 금액을 벌게 될 것이다. 만약 물건을 분실한다면....... (그럴리야 없지. 소소성을 등에 업고 있는 본국이다. 감히 누가 본국의 물건을 강탈하고자 하랴.....) 이윽고, 철장경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본국은 대인의 표물을 맡도록 하겠소.] 주영표는 싱긋 웃으며 품 속에서 두툼한 가죽주머니를 하나 내놓았다. [이것은 한 알이 만 냥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구슬이오. 본인은 호송비 전액을 이 자리에서 지불하겠소.] 철장경혼은 껄껄 웃으며 가죽주머니를 받아 안을 열어 보지도 않고 집어넣었 다. [안심하시오, 대인. 본국은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주영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한 장의 두루마리를 내놓았다. [본인이 신룡표국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워낙 물건이 귀중한 것인지라.....] 두루마리...... 그곳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약서, 본 신룡표국은 벽옥섬여와 오보주를 금릉까지 호송한다. 하나, 그 물건을 도중에 분실하였을 시에는 가산으로써 손해를 배상한다.> 즉, 표물 분실 시에는 표국과 여든 네 개의 지국 전체가 타인에게 양도된다는 내용의 각서인 셈이다. 철장경혼이 각서에 서명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쳐 약서의 한쪽에 국인 까지 찍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삼 장 11/06 21:36 402 line 第 三十三 章. 사랑은 하지 않는다. 밀실, 탁한 공기속에 구양조운을 비롯한 금은맹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공간엔 조용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때 돌연, 스르르.....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사람이 유령처럼 안으로 들어왔다. 인영, 오오.... 그는 놀랍게도 아까 신룡표국에서 보물을 감정했던 허노인이 아닌가? 허노인은 상석의 구양조운을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이어, 자신의 얼굴을 한 차례 쓰윽 문지르자, 그곳에선 엉뚱하게도 대종의 얼굴이 나타났다. 구양조운의 무심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허노인의 죽음을 눈치채지 않겠나?] [그의 시체는 완벽하게 처리했다. 또한 그의 집에 분맹의 수하를 매복해 두어 서 아무 염려도 없어.] [좋아, 너는 당분간 이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 허노인으로 행세하도록 해라.] 그렇다. 구양조운은 소소성을 무너뜨리는 두 번째의 표적으로 신룡표국을 삼았다. 이어, 신룡표국의 전문적인 보물감정가인 허노인을 바꿔치기하여 가짜 벽옥섬여와 오보주를 진짜인양 위장하고 그것을 다시 강탈함으로서 신룡표국을 일거에 무 너뜨릴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송유천!] 순간, 좌측의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던 송유천이 몸을 일으켰다. [분부,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이번 표물을 뺏는일은 그대에게 맡긴다. 화약의 천돈과 철혼을 데리고 가라!] [알겠읍니다.] [전이화, 팽운.] 전이화와 팽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계획해 오던 모든 일을 한꺼번에 터뜨리자!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소소 성 전체를 뒤흔들어라!] [존명!] 폭풍! 중원의 상계에 일대폭풍이 불었다. 중원상업의 팔할을 점유하고 있는 소소성의 오른팔 격인 다차의 명문 천련방 이 일거에 무너지더니, 이번에는 또 중원제일의 신룡표국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황금 오백 오십만 냥 가치의 표물, 총국주 철장경혼 노현이 직접 운송하고 가던 이 표물이 강탈당한 것이다. 철장경혼 노현은 소호의 호변에서 즉사했다. 또한, 그를 수행하던 백여 명의 표사들도 남김없이 전멸했다. 신룡표국, 여든 두 개의 지국을 가지고 쩌렁한 명성을 휘날리던 이 대표국이 하루아침에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놀라운 일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천하의 골동품 중 사분지 삼을 거래하고 있던 만고방이 자고 일어나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서천에서 교역을 하고 돌아오던 소소성 휘하의 교역망이 일제히 열하의 모래 속에 뼈를 묻었다. 전율! 사람들은 전율했다. 천하제일의 재력과 상권의 소유자인 소소성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늘의 태양과도 같은 소소성에 이처럼 가공할 위세로 덮쳐들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흐음.....] 침실의 열기는 질탕했다. 여인의 교성은 사내의 애간장을 서리서리 녹이는 듯하고 뱀처럼 꿈틀대는 여 체는 그대로 꿀이 되어 흐르는 듯..... 여인은 벌써 몇 번이나 까무라쳤다가 깨어났다. 이미 남자를 아는 성숙한 여체는 용광로처럼 타오르기만 하고, 이윽고, 사내의 몸이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여체의 위에 축 늘어졌다. 여인은 그런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겨 보이며 그의 가슴팍을 힘껏 꼬집었다. [억!] [흥! 도대체 이렇게 여자를 녹이는 침상기술은 어디서 배웠지요? 휘하에 미녀 들만 잔뜩 거느리고 다니니 내가 여인곡에서 나와보지 않았다면 당신이란 사람 은 아예 천하의 미녀들을 모조리 수레에 싣고 다녔을 거예요.] 키들키들.... 사내의 웃음이 여인의 귓전에 부딪쳤다. [유경, 질투하는 건가?] [핏! 질투는 무슨 질투! 당신은 질투를 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예요.] [오오! 이거 너무 사나워졌는걸?] [그 요마인지 하는 여자와는 어떤 관계지요?] [상전과 부하의 관계지.] [교지는?] [소꼽동무고.] [흐흥! 감려연은? 그는 여자지요?] [이거 못 속이겠는걸? 그녀는 친구야. 무원측검대에서 알게 됐지.] [놀랍군요. 소꼽동무에 친구에다 상전까지 모조리 여자로 거느릴 수 있다니 요.] 구양조운은 씩 웃으며 그녀의 귓볼을 가볍게 깨물었다. [이제 곧 출전할 남편에게 이렇게 바가지나 퍼안길 건가?] 단유경은 피식 웃으며 못 이기는 척 그의 품 속을 파고 들었다. [이제는 또 어디로?] [숨돌릴 틈도 주지 말아야지. 소소성의 본진이야.] [본진? 천년맹의 고수들이 우글거릴 텐데요?] [적을 잡자면 그 머리를 베야 해.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한 거지. 소소성만 이 뛰어난 상술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줄 거다. 진짜 싸움은 이번이야.] [위험할 텐데.....] [그렇지 않다, 유경.나는 이미 그를 상대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단유경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난 털에 달콤한 입술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물었 다. [왜..... 천년맹과 싸우지요......?] [.......] [당신의 지금까지의 행적은 너무 기이해요. 무원측검대의 무종이 되더니 이번 에는 또 지옥련의 하부조직..... 그 다음에는 또 뭐지요?] 단유경의 가슴을 스치던 구양조운의 손이 멈칫했다. [........] [당신은 마치 당신과는 무관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요. 영혼과 육체가 각기 다른 길을가는 것 같아요.] 문득, 단유경은 맞붙어 있다 구양조운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씁쓸한 여운이 깊게 패인 웃음이 구양조운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어려운 걸 묻는군.] [.......] [네가 물었던 것들은 어릴 때부터 고민시켜 온 문제들이다. 그러나 모르겠어! 그런 골치아픈 문제들은 생각지 말자구!] 구양조운은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민첩하게 옷을 꿰어입었다. 연후, 단유경의 이마에 옷을 입을 때와는 달리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그의 동작은 금방 깨질지도 모르는 유리그릇을 만지듯 조심스러웠으므로 단유 경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구양조운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걸음은 조금 허둥대는 듯이 보였고 무엇엔가 쫓기는 것 같았다. 문이 닫히고 다시 어둠이 스밀 때까지 단유경은 꼼짝도 않고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알 수 없는 사람...... 무슨 멍에를 그토록 무겁게 지니고 다니나..... 그 강함 속에 일부러 허둥대는 걸음을 감추려 하나......] 키워진자! 나는 다만 키워진 자인 것! 내 아비의 삼척 검을 이어받는 도구가 되기 위해! 한 여인의 마음을 끌고 그녀를 소유하는 완벽한 도구가 되기 위해! 헌데, 빌어먹을 무림을 위해! 내 청춘, 내 삶 따위는 모르는 게 좋다. 다 멋지게 살순 없잖아? 만인의 위에 서서 휘광을 받는 자가 있다면 나처럼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 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사랑을 하지 않아! 결코 마음을 주지 않아! 내가 성공하면 무림이 구해진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구할 그 무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여인의 손을 잡고 말없이 초야로 묻혀야 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것은 묻지 마라! 나도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다! 만약 끝내 알고 싶어 날뛰는 자가 있다면 그가 하늘의 신이라 해도 나는 용서 하지 않겠다. <소소성주 금대야 귀전, 오는 보름날 귀성을 찾아 뵙도록 하겠소. 금은맹 부맹주, 구양조운!> [역시 이번 사건의 배후는 지옥련이었다. 거기다가 이 구양조운이란 자는 제사 대무룡이 아닌가?] 대청! 으리으리하고 휘황찬란하다. 난간까지 금으로 도금을 한 곳은 이 하늘 아래 소소성밖엔 없을 것이다.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대청에는 지금 자단탁을 마주하고 십여 인이 빙둘러 앉아 있었다. 최상석에는 일신에 금포를 걸친 육십대의 비만한 노인, [이들이 이러한 도전장을 보내는 것이 무슨 까닭이라 생각하는가?] 소소성의 본산총관 직을 맡고있는 미륵산수 공해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 다. [필시 최후의 일전을 결심한 것으로 여겨지오이다. 더우기 구양조운이 상대의 핵심이라면 몹시 상대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짐작되오.] [이유는?] [그가 지옥련에 몸을 담은 것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아마도 본 성과의 대 전은 그에게 맡겨진 첫번째 임무일 가능성이 크오. 어떤 사람이든 최초의 임무 에는 전력을 투입하기 마련임으로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오이 다.] 총계를 담당하는 신전수사가 말을 이었다. [동의하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하였으니 구양조운이 이렇듯 큰 소리를 치는 것은 필시 믿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흐음!] [보름이라면 이제 열흘 남짓 남았으니 본성은 기존의 매복세력 위에 초강경의 매복을 더함으로서 이 일에 대비함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좋소. 본좌의 생각으로는 먼저 총맹에 이 일을 알리고 연후......] 소소성의 수뇌부가 회의를 거듭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각, 성의 제일관문이라 할 수 있는 외성에선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십사부의 부주인 독목태세는 마침 대청에서 그의 부하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 다. 하루의 일을 모두 마치고 취침을 앞둔 가벼운 한 잔이었다. 바로 그때, 무하 한 명이 명첩 한 장을 그에게 공손히 바쳤다. 명첩에는 그저 구양이라고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독목태세는 눈썹을 찌푸리며 수하들에게 말했다. [구양이 뭐냐?] 그러나, 수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마주볼 뿐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독목태세는 귀찮다는 듯이 명첩을 휴지처럼 내던졌다. [쫓아보내!] 하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만나기를 거절한 사람은 벌써 안으로 들어서 고 있었다. 이것은 몹시 기이한 일이다. 문 밖에는 무공이 뛰어난 수하가 적어도 삼사십 명은 있었을 텐데...... 독목태세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대뜸 일어나 들어온 사람을 노려 보았다. 서생, 훤칠한 키에 검은 흑발, 그리고 냉막한 목소리, [여기가 소소성인가?] 독목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왔소?] [금가늙은이는 안에 있는가? 그는 어디에 있나?] 순간, 독목태세는 안색이 일변했다. 금가! 감히 성주를 늙은이라 호칭하다니? 그의 안색이 변하자 주위의 수하들은 분분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쨍! 창! 허나 이때, 슈파악! 파팍! 그들의 무기가 채 다 뽑히기도 전에 대신 그들의 이마에는 비표 하나씩이 어 느 샌가 박혀 있었다. 이 비표는 창 밖에서 날아 들어온 것들이었다. 동시에, 서생의 그림자가 훅 연기처럼 꺼졌다. 독목태세는 자신의 앞으로 아름다우리만큼 희고 섬세한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 일초는 별로 절묘한 것도 아니었고 변화가 심한 초식도 아니었다. 그러나, 독목태세는 그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피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올려내지 못했 다. [악!] 독목태세의 비명을 처절했다. 그는 이제까지 이렇게 아프게 맞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비틀 몸을 가누는 그에게 이번에는 복부 쪽으로 다시 강철같은 주먹 하나가 틀어 박히고 있었다. 독목태세는 허리를 휘청거리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방금 먹은 술과 요리 를 모조리 토해내고 말았다. 괴서생의 냉막한 목소리가 그의 엎어진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금가 늙은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다.] 독목태세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의..... 의사청에 계십니다.] 바로 그때, 문 안으로 십여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들어섰다. 그런데 보라! 이들은 바로 송유천, 전이화, 팽운등의 천전당 대두목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서생은 바로 구양조운이리라. 일렬로 쭈욱 늘어서는 수하들을 향해 구양조운은 뒤로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선봉은 내가 선다. 사방의 팔천 고수들을 일제히 풀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신형은 한 줄기 연기처럼 앞으로 쭈욱 폭사되어 나 갔다. 마치 폭풍 같은 신법이었다. 팽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송유천을 쳐다 보았다. [어째 그리 기분이 좋으신 것 같지 않군요? 이곳까지 오는 닷새 동안 한 번도 웃는 것을 보지 못했읍니다.] 송유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법도 난폭해졌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소.....] 전이화가 다급히 말했다. [빨리 고수들을 발동시켜 부좌님을 돕도록 해요! 저 상태로는 무슨 짓을 저지 르실지 몰라요!] 돌연, 소소성주 금대야의 앞에 굳어 있던 여덟 개의 장군옥입상 중 가장 좌측의 것 이 번쩍 빛을 발했다. 장군옥입상은 이른여든 개의 매복과 연결된 여섯 개의 큰 기관을 말한다. 이것에 불이 들어온다는 것은 외적과 침입을 뜻했다. 그러나, 금대야는 담담한 시선으로 주위를 들러보며 말했다. [웬 피라미가 야밤에 멋모르고 뛰어 들어온 모양이군.] 제팔상에 불이 들어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강호의 혈기왕성한 젊은 흑도들이 가끔 이런 짓을 저지르곤 했다. 금대야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열흘 뒤의 지옥련 내습에 관한 방어계획의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헌데 이때, 팍! 느닷없이 일곱 번째 입상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재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제육상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미륵산수 공해가 놀람에 찬 어조로 외쳤다. [이건 도대체 인간이 아니라 폭풍이 휘몰아쳐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관문통과 는 커녕 그냥달려온다 해도 이보다는 느릴 것이다.] 말을 잇는 동안에 다시 제오상과 제사상의 불이 토하고 있었다. 팍! 팍! 중인들의 얼굴에 얕은 두려움이 안개처럼 깔렸다. 관문과 관문의 사이는 무려 삼백 장이다. 그들은 두 다리의 인간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으리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 도 없었다. 질식할 듯한 침묵을 뚫고 신전수사가 짐짓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제삼관문은 바로 총맹의 백총사가 직접 교시하여 내려보내신 염라쇄비대진이 오.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후, 우리는그의 싸늘한 시체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외다.] 염라쇄비대진! 천년맹에 의해 만들어진 이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강한 위력의 진법이었 다. 백팔나한진, 구궁현천검진과 더불어 정파의 삼대진법으로 꼽히기도 하는 이 진법은, 역사상, 역구궁, 역십육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써, 일단 이 진 안에 빠지게 되면 끝없는 환상과 지옥 같은 공포에 시달려 끝내는 온몸의 기력이 탈진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 진법들은 힘을 흡수하는 묘한 기운이 숨어 있어 그 어떠한 보검으로도 진 세를 파기할 수 없다 하였으니...... 슈파악! 돌연, 수십 명의 청의인들이 공중으로 메뚜기처럼 날아올랐다. [염라!] 동시에, 주위의 땅이 미친 듯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 속에서는 지축을 흔드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쇄비!] 하늘로 떠오른 자들은 팽이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서고를 향해 쉴 새 없이 손 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묘한 발판이 되는 듯 이들은 오랫 동안 허공에 떠 있을 수 있 었으며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반면에, 땅은 마치 수백 마리의 두더지에 의해 파헤쳐지듯 풀썩풀썩 풍사가 피어 오르 니..... 구양조운은 치달리던 몸을 세우며 힐끗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공중의 고수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거대한 인간그물을 형성한 채 그를 향해 쏘아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땅을 향했다. 땅! 땅이 마구 요동을 친다. 그 속엔 비장의 절예를 숨긴 고수들이 그를 향해 마구 육박해 오고 있는 것이 다. 하늘과 땅의 연합진세! 이 순간의 위용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 소리는 온통 하늘을 주저않힐 듯하고 뻗어 나오는 힘은 지축을 단숨에 허 물어 버릴 듯 하다. 구양조운은 좌수를 번쩍 쳐들어 하늘과 땅을 향해 각기 강맹한 일 장을 쳐냈 다. 파아앗! 허나, 기이하게도 그의 강맹한 장력은 적도들의 일 장여 앞에서 저절로 스르르 소멸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신, 이루 말할 수도 없이 거대한 암경이 그를 향해 질풍처럼 밀려 들어왔다. 문득, 구양조운의 얼굴에 한 줄기 싸늘한 웃음이 걸렸다.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진법..... 천년맹은 너무 자만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빌어 경종을 울려야겠구나......] 돌연, 그의 몸이 용수철이 튀듯 쭈욱 솟구쳐 올랐다. 순간, 그는 몸으로 한 줄기 밝은 보라색 광채를 꽃처럼 피워 올렸다. 그것도 잠시, [섬전류!] 굉렬한 한 소리 외침과 보라색 광채는 두 갈래로 나뉘어지더니 제각기 하늘과 땅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파파팟! 순간, 무서운 기세로 덮쳐오던 염라쇄비대진이 일순 멈칫했다. 물실호기라! 구양조운은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둥실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의 몸으로부터 순식간에 정사의 수십종 절학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벨 듯 퉁기듯 열 손가락을 가볍게 오므려 내어 철석이라도 꿰둠을 듯한 연기 성선 미공십팔류가 회오리치고, 구비구비 휘감는 듯한 수법에 여의십사식의 타자결, 박자결이 혼을 빼놓는다. 뿐이랴! [혼광혈!] [사이절!] [섬전류!] [소수무영지!] 한 수법, 한 초식에 서리느니 개세의 기학절공들! 이는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절대절명의 탈명무학들이 아닌가! 콰콰쾅! 우르릉...... 치치직...... 광풍노도! 온천하가 일시에 뒤집히듯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력이 빈 공간에 자욱하게 피 어올랐다. 염라쇄비진! 이 진법은 확실히 고금에 보기드문 기절진법임에는 틀림없다. 허나, 개미떼가 아무리 질서를 갖춘들, 삼라만상이 제아무리 오묘한 조화를 갖춘들...... 어찌 대자연의 광풍노도를 이길 수 있으랴! 이것은 애초에 싸움으로 성립이 되질 않았다. 불나방이 장작더미 속으로 몸을 던지듯 엄청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아아악!] 한 사람이 터뜨린 것일까? 비명의 여운은 길고도 길었으며, 핏빛 혈막이 그 뒤를 처절하게 수놓았다. 백여 명의 몸에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핏물! 잘려진 팔과 내장 부스러기, 살점 등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땅 속에선 사람들의 잘려나간 머리통이 개구리처럼 튀어올랐다. 피! 천하는 이 순간 핏물 하나로 얼룩지는 것 같았다. 팍! 제삼상이 불을 밝혔다. 순간, 소소성의 수뇌부들은 헉하고 다급한 숨을 들이마셨다. <四卷 끝>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사 장 11/11 16:27 335 line 第 三十四 章 갈 증 우르릉..... 하기(夏期)에 남해 일대를 강타한다는 거대한 태풍인들 이럴까. 팍! 제이상에 불이 들어왔을 때, 대전은 온통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리고 있었다. 집기가 뒤흔들리고, 쩍--- 쩌억--- 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팍! 드디어 제일상에 불이 들어왔다. 바로 그때다. 느닷없이 쿠당탕 문이 열리더니 아니, 부서지더니 피투성이의 한 무사가 안으 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제...... 제일 방어선이.....] 장한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않았다. [윽!] [윽!] 비명과 함께 다시 두 명의 장한이 벽을 꿰뚫고 날아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장한은 사람들이 어쩌고 저쩌고 할새도 없이 곧장 방을 가로지르더니 건너 편 벽에 가 화살이 박히듯 쿡 박히고 말았다. 벽에 사람이 부딪치면 머리통이 깨지거나 몸이 부서지는 것이 상례다. 몸이 틀어 박힌다는 것은 던진 자가 거기에다 진기를 주입했다는 얘기, 사람들은 소름이 오싹 끼쳐 왔다. 도대체 어떤 공력이 저런 위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소소성의 수뇌부들은 침중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한사람이 나타났다. 일신엔 백의를 걸치고 목엔 하나의 백옥염주를 건 미소년, 그는 너무 느닷없이 나타났다. 어떻게 보니 그는 마치 땅 속에서 솟아오른 사람 같았다. 순간, 좌중의 미륵신수와 신전수사가 두 눈을 힐끗 마주치더니 돌연 상하로 나뉘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왔다. [죽어라!] [야핫!] 미륵신수의 우수에서 솟아나온 것은 도끼! 허공에 자욱한 포물선을 그어오는 이 도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소리보다 도끼는 먼저 상대의 얼굴을 찍어 내리고 있었다. 뿐인가, 그 새로 교묘히 스며든 채 쏘아오는 신전수사의 탈명비전! 허나, 미소년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한 손을 가볍게 끌어 들이고, 다른 한 손은 여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순간 보라. 쿵! 미륵신수는 거대한 도리깨가 머리를 찧어내린 듯 그 자리에 목까지 푹 파묻혔다. 반면에, 신전수사는 허공으로 퉁겨 오르더니, 꽝! 옥으로 만들어진 대전지붕을 뚫고 어디론가 날려가 버렸다. 금노야는 안색이 아예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미소년은 여세를 몰아 가볍게 쌍수를 사방으로 퉁겨냈으며, 그 간단한 한 동작에 남아 있던 고수들은 모조리 이마에 사발만한 구멍이 뚫 린 채 뒤로 엎어져 갔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하다! 이런 희대의 고수는 가히 꿈 속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춤 물러나는 금노야의 얼굴 위로 미소년의 싸늘한 시선이 틀어 박힌다. [구..... 구양조운.........?] [........!] [당신은 분명히 보름날에 온다고......] 미소년 구양조운의 얼굴에 냉랭한 웃음이 걸렸다. [천년맹은 너무 태만하다. 철없는 오만을 부리고 있다...... 적이 한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단 말인가? 내가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이다. 이것보 다 더 확실한 약속이란 세상에 없다.] 파아---- 와---- 비명과....... 화광이 사방에서 충천하기 시작했다. 피다, 촤악! 대전의 바깥 창을 적시고 있었다. 금노야는 후들후들 떨다가 그 자리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구양조운은 더이상 그를 상대할 것도 없다는 듯 빙글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바깥에서 벌어지는 대살육의 장을 향해 늑대처럼 뛰어들었다. 금노야는 소소성의 정문에서 수십 개의 창에 관통당한 채 매달려 죽었다. 죽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 빠르다! 이 한마디였다. 이제....... 지옥의 발이 지난 하늘에는 뽀얀 여명이 터오고 있었다. 싸움은 끝났다. 일방적인 승리였다. 팔천이 와서 적 오천을 죽이고 오천을 살상했다. 구양조운은 발 끝에 밟히는 핏물을 밟으며 느릿하게 한쪽의 거목 아래로 걸어 갔다. 금은맹의 문인들은 숨 죽이고 사방에 선 채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느릿하게 한 손을 나무둥지에 기댔다. 피냄새가 새벽바람에 실려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당신은...... 당신은 마치 당신과는 무관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요..... 영혼과 육체가 각기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돌연, 꽝! 구양조운의 주먹이 거목을 사납게 후려쳤다. [그것이 어쨌단 말이냐? 누가 뭐래도 나는 옳다!] 송유천이 주위를 향해 크게 손을 휘둘러 보였다. 순간, 금은맹의 고수들은 서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장내에는 송유천, 전이화, 팽운, 감려연, 그리고 악인촌의 다섯 친구들만이 남았다. 구양조운의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들도 가라. 나는 사흘 후에 맹으로 돌아가겠다.] 감려연이 다급히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부맹.....] [이말이 떨어질 때까지도 가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들을 베겠 은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구양조운은 휘적휘적 다른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눈 깜짝할 새에 새벽 여명 속으로 사라졌다. 송유천이 일성 탄식과 함께 말했다. [그토록 명랑하시던 분이 저렇게 갑자기 웬일인가..... 너무 변해 두려울 정도로구나.......] 전이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맹주는 오늘 무려 백 명이나 베어냈어요. 그것이 가슴에 걸리는 것이 아닐 까요?] 팽운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 그럴 것이오. 그러나 부맹주께서 그렇게 선봉을 서지 않으셨다면 어찌 오늘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 이루어졌겠소? 이제 부맹주는 흑도의 영웅 이 되셨소! 사흘 뒤엔 웃으며 맹으로 돌아오실 것이오!] 허나, 감려연은 내심 홀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걸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유 중의 극히 작은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무엇인가가 그를 괴롭히고 있어...... 지금까지 그는 뒤는 안 보고 앞만 본 채 달려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 을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다. 아아...... 도대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무었일까.......?] 세병의 술로 단숨에 입을 틀어막고 나서야 구양조운은 가슴이 좀 편해지는 것 을 느꼈다. 그는 벽에 천천히 몸을 기대고는 다시 네 병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곳은 소소성의 주청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사방에는 술병과 술독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불에 타거나 창검에 찔려죽은 시체들이 눈에 띄었다.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은 축축했다. 구양조운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그러나 거푸 술을 마셨다. 이때다. 돌연, 그는 코 끝을 스미는 한 줄기 그윽한 장향을 맡았다. 이어, 짤랑짤랑한 교성이 뒤를 이었다. [축하주치곤 너무 쓸쓸한 축하주로군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 구양조운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밖으로부터 뻗어오는 역광 속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몹시 얇은 비단이었으므로 몸의 굴곡이 투명하게 드러나 보 였다. 아름다운 몸이다. 설사, 천상의 미녀라 해도 저토록 아름답고 빼어난 몸매이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뇌살시키고 마는 사미로운 몸매의 여인, 그녀는 바로 천하제일미 요마 모용혜였다. 구양조운은 그녀를 힐끗 일견하였을 뿐 이내, 시선을 돌리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다가 오지 마시오. 나는 지금 옆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 잡아먹고 싶으니까.] [잡아 먹는다고요?] 요마 모용혜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몹시 놀랍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구양조 운의 앞에 털썩 남자처럼 앉았다. 핏물이 질펀하니 배인 바닥이다. 그녀가 입은 백의는 금방 붉은 물이 들고 있었다. [재미있군요. 당신에게 그런 취미가 있었나요? 하긴 아까의 당신은 마치 염왕 의 사자 같더군요.] 구양조운은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아예 술독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가슴 위에 올려놓고 기울이기 시작했다. 술은 반은 입으로, 반은 가슴으로 흘렀다. 요마 모용혜는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 본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 문득 한 줄기 그윽한 정염이 스쳐지났다. 참으로 이상한 사내, 물론 준수하긴 했지만 천하에 짝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잘 생긴 것은 아니다. 잘 생긴 걸로 말한다면 지옥신룡 옥세개나 무량뇌 제갈천이 훨씬 잘 생겼다. 그런데도, 이 사내에겐 여자의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건 이 사람에게 머릴 싸매고 덤벼드는 주위의 여자들만 봐도 잘 알수 있어......) 단유경이라...... 하던가? 오만하고 자존심이 드센 여인 같았다. 오랫 동안 남을 다스려 온 자 특유의 기질이 그녀에겐 있었다. 감려연, 여자다. 틀림없는 여자다. 그것도 무공수위가 거의 극한에까지 이르러 있는 신비로운 여고수였다. 직감으로 알 수 있다. 거기다가 근지, 기녀라고 했다.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이고, 가슴 속으로 세상을 증오하고 있는 그런 여자 일 것이다. 오만한 여자, 무예가 높은 여자, 천한 계층의 여자, 이런 여자들은 대개 남자를 사귀지 않는다. 어쩌다 사귀어도 깊이 정을 주지 않는다. 헌데, 구양조운에겐 그 세 부류의 여자가 다 따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요마 모용혜의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나풀거렸다. [같이 대작해 드려요?] 순간, 구양조운의 몸이 일으켜졌다. 그는 성큼성큼 문쪽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 앞에 우뚝 서선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나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말투, [나가라구!] 요마 모용혜는 살레살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원호를 그으며 사방으로 향기를 나풀거리는 것을 보 고 구양조운은 쾅 문을 닫았다. 철컥! 문이 잠겼다. 그는 서서히 요마 모용혜를 향해 다가오기 요마 모용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녀의 앞에 우뚝 몸을 세웠다. 그는 여자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이어, 쫘악! 하고 여자가 걸친 웃옷을 찢어 내렸다. 우유빛처럼 뽀얀 어깨와 가슴의 시린 속살이 드러났다. 구양조운은 거푸 여인의 속옷에 손을 댔다. 순간, 요마 모용혜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막으며 교구를 스르르 뒤로 물렀다. [내가..... 벗을 께요.] 구양조운은 희미한 빛살 아래 선 그녀를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요마 모용혜는 반듯이 선 채 천정을 우러러 보았다. 거미줄이 낀 천정, 바닥은 시체, 그리고 피, 그녀는 물론 처녀가 아니다. 지금의 지위까지 이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미색을 십분 활용했다. 많은 사내들이 그녀의 도구가 되어 주었다. 그 도구들과 잠을 잘 땐 대개 좋은 방이었다. 상아침상과 용봉촛대, 화수의 비단이불, 때론, 호박색의 달콤한 합환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화려한 곳에서도 그녀는 결코 자신이 옷을 벗을 적이 없었다. 사내들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노예처럼 그녀의 옷을 벗기곤 했다. 헌데, 지금은 이토록 누추한 곳에서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편했다. 그녀는 일찌기 느껴볼 수 없었던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스르르---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치맛자락이 그녀의 대리석 같은 두 다리를 아쉬운 듯 휘감으며 밑으로 떨구어져 내렸다. 은밀한 부분만을 살짝 가리운 나신, 이 알몸을 쳐다보기조차 눈시릴 정도다. 그대로 보고 있자니 마치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을 흙발로 딛고 올라 선 듯한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요마 모용혜는 여기까지 옷을 벗긴 후의 사내들의 한결 같은 반응을 알고 있 다. 두 눈에 경악과 탐욕의 빛을 아울러 담고...... 그러나, 모용혜가 풍기는 성결함에 놀란 양심이 마음 속에서 격렬하게 외치는 소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그러다 탄식, [용서 하시오..... 용서 하시오.....] 를 중얼거리며 그녀의 몸 위로 오르곤 하는 것이다. 그 반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 모용혜는 세상의 남자들이 똑같은 생 리, 똑같은 심장을 가지고 잇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지기까지 했던 것인데.... 사내, 눈 앞의 사내만은 틀리다. 보라, 그는 앉은 자세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그 눈빛은 담담히 자신의 나신 을 향해 있는 것이다. 요마 모용혜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옷을 벗으며 이렇게 부끄러워지긴 난생 처음이다. 마지막 남은 헝겁조각을 떼어내는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알몸, 허리는 한 웅큼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가는데다, 그 위의 두 개 유방은 마치 잘 익은 수밀도를 쪼개어 엎어놓은 것처럼 탄력적 이고 탐스러운...... 쭉 고르게 뻗어내린 다리는 길고도 탄력이 있었으며 전신의 피부에는 자르르 백옥빛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이 빛나는 나신은 구양조운의 몸을 향해 놀란 기러기처럼 뛰어들었다. ---네 몸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군. 도대체 몇 명의 남자나 거친 거지? ---푸훗! 처녀인 척 할렸더니 당신도 이 방면엔 전문가로군요. 하지만 그런 뭇 사내들과 당신을 비교하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아요. ---왜? ---난 열 다섯 살에 동네의 늙은 부호에게 시집을 갔어요. 나보다 훨씬 큰 아들 딸이 우글대는 그런 집이었지요. 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후훗..... 어쩌다 길에서 마주친 그 늙은이는 소름 끼치도록 징그러웠었거든요. 시집가기 전 날, 나는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 나왔지요. 그런 늙은이에게 주기 전에 처녀를 아무나 마주치는 젊은 사람에게 주어 버릴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그러다 걸린 게 술주정뱅이였지요. 물방앗간 옆이었어요. 그 밤의 물소리.... 취한의 술냄새.... 아랫도리의 아픔..... 그것이 내가 겪은 최초의 남자였어요...... ---흐흠! ---우습죠? 그때부터 난 남자를 존중해 본 적이 없어요. 이용가치가 있거나, 내 쾌락을 위해서만이 남자는 존재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왜? 여자가 말했다. 사내의 콧등을 흰 손가락으로 퉁기며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바로 구양조운이란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예요.] 구양조운은 불현듯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원래 피곤을 모른다. 피곤이란 무인의 최대의 적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성결한 미체를 앞에 놓고 갑자기 피곤을 느끼다니..... 두 사람은 알몸으로 꼬박 사흘을 뒹굴었다. 사내는 마치 여인의 자궁에다 정액을 난사하지 못해 미친 사람 같았고.... 여인은 자신을 거쳐간 몇 번째인지도 모를 이 사내에게, 그러나 종내 순결을 바쳤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오 장 11/13 12:38 317 line 第 三十五 章 幽靈軍團의 誕生 ---상신, <연맹서열 백 이위, 금은맹 부맹주겸 산하 천전당 부좌및 산동지부 분타주, 소수유혼 구양조 운의 승급에 관한 건, :상기인은 금번 천년맹 소소성과의 상전에서..... 중략....... 서술한 바와 같은 실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안으로는 연맹의 사기를 북돋우고 밖으로는 연매의 이름을 드높이 날렸기로 이에 상기인의 승급을 정히 신청하나이다. 금은맹주 모용혜.> ---서하, <연맹승급위원회 결의 서하, 성명: 구양조운! :본 위원회에서는 상기인의 전공을 면밀히 분석한 바 상신이 분명 정당 하며 승급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바 상기인에게 다음과 같은 직위를 서하한다. 직위, 지옥군단 군단부통령및 오군총수, 연맹서열 이십 일위.> 유월에 접어들자 무림의 정세는 몹시 어지러웠다. 천년맹과 지옥련의 세력다툼은 공공연 해졌고, 항주 일대에선 천년맹 산하 유룡방의 오천 정예와 지옥련 검분맹 화맹의 혈마 가 거느리는 육천 고수가 맞붙어 도합 구천의 사상자를 내는 엄청난 일도 벌어 졌다. 천하는 완전히 두 갈래였다. 천년맹과 지옥련 외에 세번째 세력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초야에 은거하고 있던 기인마두, 입신의 꿈에 불타는 청년고수들이 속속들이 하산하여 양대세력에 합류했다. 오월 현재의 두 세력의 균형은 거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다. 그런 와중에서 세인의 입을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여섯 개의 이름이 있었으 니..... ---이군이뇌이살(二君二惱二殺)! 이 바로 그것이다. 신주육환(神州六環)! 먼저 이군이란, 검군 독인행, 검후 경설, 을 말함이고...... 이뇌란, 천외신년 백가로, 무량뇌 제갈천, 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은 정사의 대표적인 두뇌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살, 사살 소수유혼 구양조운, 정살 천년십사절, 소수유혼 구양조운, 그는 근자에 들어 가히 경악적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지옥련에 있다는 것은 비단 천년맹의 불행이었을 뿐 아니라 정파무림 전 체의 불행이었다. 사신, 천살성 등의 수많은 외호와 더불어 불리우는 그는, 그의 특수하게 훈련된 수하들과 더불어 소소성과의 대전을 포함하여 일곱 번 의 큰 싸움에서 천년맹의 고수들을 아예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가히 지옥련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다. 반면에 천년십사절! 이들은 근자에 들어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정파의 특수공격조였다. 인원은 십 사인! 흰 열네필의 백마에...... 눈처럼 흰 백의와 같은 색의 피풍, 흰 복면을 하고 가슴에 선명한 혈룡을 새긴 이들, 이들이 이르는 곳에 사파의 피가 튀었다. 이들은 이미 지옥련의 열네개 분타를 괴멸시켰으며 대외공격 제사분맹인 후맹 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불법을 수호하는 천왕과도 같은..... 공포의 천년십사절...... 어쨌든, 검군과 검후의 정식대결일인 명년 원단을 일곱 달 앞두고 강호무림은 갈수록 치열한 전쟁터로 변하고 있었따. 이것은, 원단의 양대거두 대전을 앞두고 조금 더 자파의 세력을 확보하려는 일종의 세 력적이었다. <도대체 사람 못 죽이고 죽은 조상이라도 두었나요? 우리는 요즘 당신 한 사람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너무 심한 공격은 삼가하세요. 당신이 소소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바람에 우리는 지금까지 아침밥을 굶 고 있단 말예요. 백가로.> 화르륵......... 삼매진화로 서신을 불태우고 난 구양조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 갔다. 짙푸른 녹음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연무장에선 그의 수하들이 땀을 흘리며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 속에 팽운의 모습이 보이자 구양조운은 씩 웃었다. 자신이 금은맹을 떠나 지옥군단으로 오게 되었을 때, 그의 앞길에 무릎을 꿇고 데려가 줄 것을 간청하던 구백 명이었다. 그래도 구양조운이 홀로 지옥군단으로 자리를 옮기자 과거 천전당의 구백 정 예들은 아예 단식투쟁을 벌였다. ---구주(舊主)의 곁으로 데려가달라! 는 것이 그들의 단식 이유였다. 지옥련의 수뇌들이 나서고 마지막엔 검후까지 나섰으나 그들은 끝내 막무가내 였다. 그리하여, 결국 구백 명 전체가 고스란히 구양조운의 휘하로 이전을 하게 되 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일명 유령군단이라고도 한다. 지옥군단 내의 또 하나의 군단, 천전당의 구백 정예와 여인곡의 일백 고수를 합친 구양조운은 아예 새로운 조 직을 만들게 되었으니..... 총수 구양조운, 총감 단유경, 총순찰 감려연, 군사 송유천, 부군사 전이화, 감당당주(監堂堂主) 팽운, 형당당주(刑堂堂主) 철혼, 무당당주(務堂堂主) 유성, 그리고, 오향십이단의 조직, 지옥련 내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다섯 개의 해골이 수놓인 오해신기를 그 신표로 한다. 유령군단! 이들은 가히 폭풍의 핵이었다. 나가면 나가는 대로 승승장구요. 오해신기가 펄럭이면 적은 이미 전의를 상실 하고 만다 하였으니..... 수뇌 구양조운의 용맹과....... 휘하 수뇌부의 치밀한 전략...... 비를 맞으며 하루종일 서 있을 수 있는 일천정예의 무서운 의지가 그들을 이 러한 무적군단으로 만든 것이리라! 어쨌든, 지옥련에 입맹하는 청년무인들의 첫번째 희망처가 바로 이 유령군단이었다. 지옥련에서 가장 강대한 조직이 무엇인가고 물을 때도 사람들은 서슴없이 유 령군단을 꼽는다. 그래서, 유령군단은 갈수록 조직화 되고 있었고, 지옥련 최고의 조직으로 뻗어나고 있 는 것이다. 새로 입단을 원하는 희망자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시녀 천향이 들어와서 공손히허리를 굽혔다. [본단의 옥총령이 뵈옵자는 전갈을 보내 왔어요.] 구양조운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간다고 여쭈어라.] 그는 읽던 서류를 접어두고 입던 옷차림 그대로 숙소를 나섰다. 유월의 양광은 제법 따가왔다. 부지 일만 평의 그늘그늘엔 유령군단의 수하들이 군데군데 누워 편안한 휴식 들을 취하고 있었다. 이 유령군단을 처음 들어서는 사람은 사실 그 방만한 분위기에 크게 놀라고 말 것이다. 사방에 보초를 서는 초병이라곤 하나도 없고 모조리 자기 할 일들을 한다. 무예를 연마하고 싶은 자는 무예를, 나무를 깎고 싶은 사람은 나무를,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온갖 취미까지 지겨워진 자는 아예 잠을, 상관이 지나가도 가볍게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인사의 전부다. 그러니, 이토록 규율 잃은 조직이 천하에 또 있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진저..... 하나, 이런 것들은 바로 구양조운의 절대적인 방침이었다. 무사가 힘을 쓸 때는 전쟁터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의 시간은 모조리 휴식! 전쟁터에서의 한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체력을 극상의 상태로 조절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방만한 듯 보이는 이 조직이 사실은 늘 막대한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일급비상이 내려지면 저 나른하던 눈동자들에 초롱초롱 광채가 돌고, 나가서 싸우매 필승이라는 유령군단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양조운은 수하들의 가벼운 목례를 받으며 천천히 군단을 벗어났다. 그의 군단은 검후 경설의 구룡신거와 난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자연, 지옥신룡 옥세개의 본군성을 가자면 구룡신거가 저만큼 내려다 보였다. 구양조운은 구룡신거가 보이는 한 그루의 소나무 아래에 느릿하게 몸을 세웠 다. [구룡.......] 지금은 팔룡 뿐이다. 그 구룡의 서열에 끼는 것이 지금의 구양조운의 목표였다. 구룡신거 안에 그의 회석이 마련된다는 것은 검후에게 접근하는 최후의 길까 지 간 것이 된다. 그리고, [너는...... 내 아래가 된다.] 커다란 목옥, 구룡신거를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바라보던 구양조운은 빙글 몸 을 돌렸다. 그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의 유령군단엔 최근 이십 일 동안 별다른 임무가 없었다. 오늘은 아마도 하나의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지옥신룡 옥세개, 그는 매우 호화로움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의 용모는 매우 준수했다. 지옥련 제이인자에 어울리는 위엄이 그 준수함에 가세하여 그는 늘 눈부실 정 도로 아름다왔다. 그의 본군성은 지옥련 내에서도 가장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삼천 개의 장미꽃잎을 탄 미수욕을 하며 연경의 일류 요리사 십 인이 만 드는 극미성찬을 먹는다. 그의 호화로운 처소에는 늘 십여 명의 미녀들이 있었 고 그 미녀들은 또한 한 달마다 갈리는 것이니....... 인간이 권세를 얻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가장 훌륭한 해답을 지닌 사람 은 바로 그일 것이다. 대리석과..... 운남의 오석, 그리고 수십 종의 희귀한 보물로 가득 찬 그의 방에서 옥세개는 구양조운을 맞았다. [어서오시오, 구양총수. 기다리고 있었소.] 검은 비단 장삼, 용문흑건에 가슴에는 하나의 패옥을 단 이십 칠팔 세 가량의 미장부, 그는 어항 속의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말로는 어서 오시라면서 구양조운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하던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가 기르는 물고기는 식인어였다. 던져주고 있는 먹이는 잘게 썬 우육, 얇은 나삼을 걸친 시녀 하나가 살랑살랑 차를 내왔다. 차는 천하에도 귀한 용봉벽향이다. 구양조운이 한 잔의 차를 다 마셨을 때에야 옥세개는 느릿하게 허리를 폈다. [뭔가를 기른다는 것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오.] 그는 천천히 한쪽 벽을 향해 다가갔다. [특히 저놈들은 워낙 먹이타박이 심해서 이대로 나가다간 내 살마저 떼어 먹 여야 할 판이오.] 그그긍! 단추가 눌리자 벽은 스르르 양 쪽으로 갈라졌다. 지도, 그 벽 안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상세하기 이를 데 없는 지도였다. 지도는 방대했고 방대한 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원의 지리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라 해도 이 지도 하나만 있으면 작 은 읍의 주루까지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옥세개는 구양조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싱긋 웃어보였다. 가슴이 섬뜩해질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 동안 구양총수를 비롯한 연맹고수들의 헌신적인 활약으로 하여 우리는 실 로 많은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소.] [......] 옥세개의 흰 손가락이 지도를 짚어나갔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강남에 지부다운 지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는 것이오.] [........] [하여 연맹은 이번에 강남의 한 지역에 거대한 강남총타를 하나 지어볼 계획 을 세웠소.] [좋은 생각이구료.] [핫하..... 그 장소를 두고 사실 우리는 고민을 해왔지요. 그러던 중 한 곳의 아주 적절한 곳이 떠올랐소.] 옥세개는 뒷짐을 쥐고 지도의 앞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이곳을 점거하게 된다면 천년맹에 막대한 정신적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의 싸움에서도 계속 유리한 위치를 점령할 수 있을 것 이오. 혹시 생각나는 곳이 없소?] [글쎄.......] [남부정도의 우두머리이며 남부 백 삼십 개파의 맹주, 거기다가 불문무학의 새 로운 경지를 개척해 가는...... 이래도 모르시겠소?] 순간, 구양조운은 심장이 떨어져 나갈만큼 놀랐다. (이 자는 설마.......?) 옥세개는 빙긋 웃으며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호남성...... 장사부, 성 밖 오십 리길..... 귀래하! 아아...... 보광, 소림하원 보광사...... [이번 일은 본 연맹이 강남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됨과 동시에 구양총수 개 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오. 진심으로 구양총수의 무운을 비오.] 옥세개는 말과 함께 구양조운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의 예를 취해 왔다. [이번 일은 그에 대한 마지막 시험이다! 형위, 이번 일까지 그가 무사히 해낸 다면 나는 앞으로 네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 옥세개의 앞에는 냉면수라 형위가 공손히 서 있었다. 한 가닥 껍질을 뒤집어 쓴 듯 무표정한 얼굴, 감찰분맹 마맹 제사감찰당 감찰부주,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그의 손가락 끝에 죽어갔다. 그가 눈독을들여서 파헤쳐 내지 못한 비밀을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에 대한 모든 조사가 끝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때 확실한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형위의 무서운 점은 그가 결코 속단을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열이면 열 전부의 증거가 손에 잡혀야만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노린 상대가 단 한 마디라도 변명할 수 있는 건덕지를 남겨둔다는 사실 을 그가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누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면 그 상대는 이미 완벽한 파멸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때, 옥세개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래서......? 그의 비밀을 밝혀낸다면 그것이 만약 그에게 불리한 것이라 면......?] [마땅히 처단합니다.] 탕! 옥세개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것 봐, 형부주! 무림에서 자네나 나의 이름을 아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 아 나? 지옥련 하면 사람들은 의례히 구양조운을 떠올린단 말이야! 그는 이미 지 옥련의 표상이요. 흑도의 영웅이다! 우리가 만든 영웅을 우리가 매장시켜야 한 단말인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사람 중에 저는 포함되지 않읍니다. 저로 하여금 이 일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제 직위를 박탈하시는 것 뿐입니다.] [듣기 싫어! 구양조운이 이번 보광사 건 까지 성공하면 그는 완벽한 흑도의 거물이 된다. 그땐 자네도 어쩔 수 없어!] [죄송합니다.] 형위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이어,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옥세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돌연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고지식한 놈!] 그는 탁자 위의 과일을 하나덥썩 베어 물었다. [형위.....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몰라...... 이제 와서 구양조운의 내력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가 설사 적의 첩자라 한들 무슨 목적을 품고 연맹에 들어왔다 한들...... 우리는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면 되는것이다. 그는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는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용하고 하다가 더이상 이용할 게 없는 자가 결국 지게 된다....... 알겠나 형위! 인생을 살아 가는데 적과 친구의 구별을 너처럼 해버린 다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그것이 바로 너와 나의 차이다.....] 이어, 의자에 몸을 묻고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다 그는 갑자기 탁자 위의 단추를 눌렀다. [계집애들을 들여보내라.] 그가 기분을 푸는 방법은 여자다. 실제로, 옥세개는 거의 모든 음모를 다 여자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꾸며냈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육 장 11/21 19:35 344 line 第 三十六 章 忿 怒 [도솔? 그 망나니 중 도솔이 이곳에 왔단 말인가?] [틀림없이 그라네, 헌데 말이야 그는 놀랍게도 장군이 되어 있었어.] [장군이라고?] [아, 글쎄 도솔은 먹물처럼 검은 오추마를 타고 입성 했는데..... 그 뒤에는 놀랍게도 수천의 병사들이 따라온 거야. 시커먼 흑의에다 머리에는 검은 태를 두르고 가슴에는 다섯 개의 해골을 수놓은 무시무시한 병사들이었다네.] [오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병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왔다던가?] [듣자하니 보광사를 공격하다더군.] [보광사? 자신의 사문을?] [흥! 과거에 축출당한 원한이라도 갚겠다는 얘기겠지, 그래도 끌리는 구석이 있는 놈이 었는데 이젠 아주 변해버린 모양이야.] [그럴 수가.....] [그 놈은 자신의 집에도 들르지 않았어. 그저 집 앞에 말을 세우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냥 말배를 박차고 달려가 버렸다네.] [들어가지도 않고.] [글쎄 말이야.] [나쁜 놈! 천하에 나쁜 놈!] [에구,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렇게 변하는지..... 말세다, 말세야.....] [이것도 음식이라고 가져 왔느냐?] 돌연, 한소리 폭갈과함께 음식을 담은 접시가 허공을 갈랐다. [으아악!] [까악!] 반점에 앉아 음식을 먹던 식객들이 돌연한 일에 놀란 비명을 터뜨렸다. 그는 험상궂게 생긴 대한이었다. 그의 양옆에는 역시 덩치가 우람한 두 대한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흐흐.... 이것들이 흑살채의 호법 어르신들을 우습게 보는구나. 해동삼살이라면 울던 어린 아이도 울음을 그치거늘......] 식객들은 해동삼살이란 이름을 듣자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이들은 근자에 들어 장주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은 자들이었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인명살상을 물론, 백주대로에서도 길가는 아녀자를 붙잡고 추행을 서슴치 않으니 그 흉맹이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무림이 어지러울 때 날뛰는 쥐새끼 같은 자들의 좋은 표본이랄 수 있었다. 어쨌든, 식객들은 해동삼살이란 말에 슬금슬금 탁자를 떠나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 했다. 이때 돌연, 접시를 날리고 큰소리를 치던 해동삼살의 첫째 대살의 퉁방울 같은 두 눈에 광채가 스쳐 지났다. 그의 눈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려던 새콤하게 생긴 미녀의 모습 이 비쳤던 것이다. 여인은막 계단을 내려서다 말고 대살과 눈이 마주치자 얼어붙듯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버렸다. 대살은 음탕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여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인은 맑은 눈에 공포의 빛을 가득 띄운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대...... 대협..... 살려주세요......] 대살은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살려주지, 살려주고 말고, 그전에 우린 해야할 일이 있다.] 말이 끝나는 순간, 대살은 여인의 몸을 홱 나꿔채고는 걸친 옷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찌이익...... 옷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눈부신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옷 밖으로 툭 삐져나온 나긋나긋한 젖가슴은 몸이 짜릿할 정도로 고혹 적이었다. [흐흐.....] 대살은 여인을 순식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만들고는 그녀 를 마루바닥에 쓰러뜨렸다. 여인은 몸을 바들바들 떨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아, 백주에 추행이라니.....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면서도 누구하나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헌데, 주루의 구석에는 본래 매우 괴이한 일행이 한무리 앉아 있었다. 이남사녀, 이들은 창가에 앉은 한 흑의미소년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별반 얘기도 없이 묵묵히 주반을 들고있던 터였는데....... 느닷없이 소동이 벙어지자 창가의 미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오 인의 시선이 일 제히 그쪽으로 돌렸다. [나쁜 놈들......] 나이가 그 중 많아 보이는 아름다운 미녀가 아미를 살풋 찌푸렸다. [송군사, 해동삼살은 지옥련의 어느 분타 소속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송군사라 불리운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말을 받았다. [아마도 창주분타인 것으로....] 이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가장 어려 보이는 미소녀가 발딱 몸을 일 으켰다. [내가 버릇을 고쳐 줘야지.] [지매.] [괜찮아요. 교지는 이런 놈들 다루는 법을 잘 알아요.] 교지! 그렇다면 이들은 바로 구양조운 일행이었던가? 그렇다. 좌중의 인물들은 바로 구양조운, 송유천, 단유경, 감려연, 전이화, 그리고 교지 의 육 인 이었던 것이다. 이때, 해동삼살의 이살과 삼살은 바둥거리는 여체를 보며 가가대소를 터뜨리 고 있었다. 대살은 황급히 여인의 몸 위로 덮치고는 아랫도리를 까내렸다. 이어, 그가 막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 문득, 대살의 시야에 조그맣고 예쁘장한 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발은 눈부시게 흰 소산화를 신고 있었다. 대살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먼저 검은 비단 옷이 시선에 들어왔다. 흑의 속에 감싸인 섬세한 여체의 곡선을 타고 오르다 보니 개미허리처럼 가는 세류요가 보였다. 그리고 봉긋한 굴곡과 빙기옥골의 목덜미, 마지막으로...... 돌연, 대살의 두 눈이 경악으로 흡떠졌다. 여인의 얼굴, 그것은 실로 시리도록 아름다운 절세의 미안이 아닌가? 이 얼굴에 비해서 지금 밑에 깔고 앉은 미녀의 얼굴은 쳐다보기조차 싫어지는 것이다. 대살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눈을 비벼봐도 여인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대살의 눈빛은 곧 경악에서 음탕함으로 바뀌었다. [흐흐......]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밑에 깔려있던 여인을 발로 내질러 버리 고는 미소녀 교지 앞으로 다가왔다. 교지의 싸늘하던 안색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 올랐다. 대살은 그 미소를 대하는 넋이 달아나고 혼이 녹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대살은 슬며시 교지의 허리를 껴안았다. 교지는 반항은 커녕 대살의 몸에 달콤한 미소와 함께 사르르 안겨들었다. 대살은 교지의 체향이 코속을 스며들자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는 다급히 손을 들어 교지의 앞섶을 헤치고 젖가슴을 더듬으려 들었다. 교지는 섬섬옥수로 대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구슬이 구르듯 교성으로 속삭 였다. [당신의 형제들이 봐요.....] 말과 함께 그녀는 어깨 너머로, 이미 넋을 잃고 있는 이살과 삼살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살과 삼살은 그녀의 교태에 혼이 달아난 듯 주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고개를 돌려보던 대살이 눈썹을 찡그리며 폭갈했다. [네놈들이 감히?] 이살과 삼살은 이미 교지의 교태에 넋이 빠져 있었던지라 마구 고함을 질렀 다. [꿀은 대형 혼자 찾아 먹으라는 법이 있소?] 대살의 눈썹이 찡긋 치켜 올라갔다. 순식간에 그의 두 눈에 얼음 같은 살기가 떠올랐다. [흐흣.... 이것들이 이젠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구나.....] 대살은 그의 품에 안겨있던 교지를 고이 한쪽 탁자에 내려 놓은 후 홱 몸을 돌렸다. [오늘 네놈들은 각오해라!] 이살과 삼살은 찔끔했으나 탁자에 요염하게 앉아있던 교지의 걷어 올려진 치 마 새로 살짝 비치는 허벅지를 보고는 쨍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우리도 이제 참을만큼 참았소. 싸울테면 싸워 봅시다!] 이렇게 되자, 대살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한소리 폭갈과 함께 두 사람에게 덮쳐 들었다. 이살과 삼살도 황급히 검을 들어 마주쳐갔다. 순식간에 방 안엔 살벌한 검풍과 장풍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 일개 여인 때문에 이십 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던 의형제들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교지는 탁자에 요염히 앉아 말없이 해동삼살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다. 살벌한 싸움판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달콤한 미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싸움의 형세는 비등했다. 원래, 이살과 삼살의 공력은 대살에 비해 한 수 뒤떨어지는 것이나 이대 일의 싸움인지라 비등한 세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제 싸움은 그 절정을 치닫기 시작했다. 세 마두가 전개해 내는 초식은 한수 한수가 치명적인 살수였다. 펑! 펑! 파파팟! 내실의 집기가 마구 부서져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지는 옷자락 하나 날리지 않고 있었다. 세 마두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그녀가 일개 아낙네가 아닌 호신강기까지 익 힌 무림의 고수인 것을 알았으련만...... 순간, [야앗!] [타앗!] 폭갈과 함께 맹렬히 싸우던 세 마두의 몸이 그 자리에서 뚝 멈춰섰다. 그들은 최후의 절초를 펼쳐 냈으며, 대살의 쌍수는 이살과 삼살의 가슴을 깊숙이 꿰뚫고 들어가 있었다. 반면에, 이살과 삼살의 검은 대살의 복부를 헤집고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공통된 것은 세 마두의 눈이 모두 개구리 눈알처럼 툭 불거져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녀를 놓고 싸우다가 서로 상잔하고 만 것이다. 교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달콤한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그녀는 교구를 탁자에서 살며시 일으키며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더러운 잡귀들... 너희들은 내 손을 더럽힐 자격도 없다.] 순간, 서로 상잔한 세 마두의 몸은 그제서야 기우뚱하고 쓰러졌다. 꽈당! 한 줄기 피비린내가 좌중을 휘돌았다. 이때 돌연, 위잉-----! 한소리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한 줄기 백영이 폭사되어 오더니 교지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육십 정도의 나이에 일신엔 백포를 걸쳤는데 안색이 기이할 정도로 창백 했다. 그가 나타나자 송유천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솟았다. [억! 구유활강시! 저 노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구유활강시, 실로 어마어마한 이름이다. 백 년 전의 희대의 마두! 구유활강시는 자신의 회혼극마강시공을 익히기 위해 백명의 임신부를 죽였던 대마두인 것이다. 아무도 그의 비위를 거슬리지 못했다. 이 마두는 강시공을 절정까지 터득하며 금강불괴까지는 못돼도, 그와 버금가 는 강체를 가지고 있어 도검이 통하질 않았다. 게다가, 회혼극마강시공은 슬쩍만 스쳐도 몸이 녹고 마는 패도의 마공인 것이다. 교지는 구유활강시가 누구인지 몰랐던 탓으로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보더니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게 볼 일이라도 있나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구유활강시는 올빼미가 울부짖는 듯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너는 나이도 어린 듯한데 수법은 지독히도 잔인하구나. 이 아이 들은 나의 제자들이니 너는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교지는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자?] [큽큽..... 어떻게 죽고 싶은지 말해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는 아이야.] 자욱한 녹색광망이 쾡한 두 눈에서솟구쳐 나온다. 그의 쳐든 우장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송유천, 단유경 등은 잔뜩 긴장하여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구유활강시의 우장에서 묵광이 번쩍이더니 흑운 같은 기류가 비릿한 내음과 함께 교지에게 쏘아져 간 것과, 지금까지 창 밖만 쳐다본 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던 구양조운의 몸이 솟구 쳐 나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이었다. 그는 그대로 구유활강시의 독장을 맞받았다. 펑! 순간, 구유활강시는 뒤로 세 걸음이나 주르르 밀려났다. 하나, 구양조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구유활강시의 창백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구양조운은 그런 그를 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당신의 회혼인지 뭔지하는 강시공은 이름만 거창하지, 나뭇가지 하나 부러뜨 리지 못하겠군.] 구유활강시는 그의 조롱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이번에는 십이성 전공력으로 회혼극마강시공 을 쳐왔다. 쐐앵! 그 위세가 얼마나 엄청났던지 오 장 밖의 송유천 등이 분분히 물러서야만 했 다. 허나, 구양조운은 여전히 태연자약, 그는 냉소를 머금은 채 몰려오는 강기를 바라보다가 돌연, 섬전처럼 몸을 날려 강기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순간, 뚝! 하는 둔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중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바라보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구유활강시는 한 팔로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고 있는데, 구양조운의 한손 에 들려있는 것은 바로 도검도 안들어 간다는 구유활강시의 한 팔이 아닌가? 구양조운도 표정이 전혀 없는 눈길로 구유활강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썩은 나뭇가지처럼 약한 손이로군. 이런 손으로 어찌 강호를 누비고 지 금까지 살 수 있었을까?] 이어, 그는 장난이라도 치듯 들고있던 구유활강시의 팔을 획 내던졌다. 순간, 팔은 육안으론 분간할 수도 없는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 구유활강시의 창백한 이마에 정통으로 박혔다. [으아악!] 또 한 차례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팔은 구유활강시의 이마를 뚫고 뒷통수까지 튀어 나왔다. 구유활강시는 이마를 부여잡고 몇 차례 비틀거리다, 고목이 무너지듯 쓰러져 죽어버렸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구양조운은 가타부타 한 마디 말도 없이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 다. 중인들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고독, 고독한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 보기를 좋아한다. 하늘은 그들이 느끼는 고독의 원천이므로,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고독자는 더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구양조운은 오랫 동안 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귀래하,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 온다는 귀래하의 전설대로 그는 돌아왔다. 다만, 그의 사문을 멸하기 위해...... 그의 수뇌진들은 제각기 구양조운의 뒤에 흩어져 있었다. 어떤 자는 나무에 기대인 채로, 또 어떤 자는 강가에 앉아 멍하니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기도 하고, 하나, 어떤 자리에서든 강건너 보광사의 푸른 기왓장을 볼 수 있었다. 뎅...... 뎅........ 뎅......... 낙조의 종소리가 그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감려연은 아까부터 한 그루의 나무에 기대어 앉아 구양조운의 뒷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는 최근들어 매우 잔인해졌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벽력탄처럼 그는 웅크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감려연은 그에게 강렬한 연민지정을 느낀다. 그가 벌이는 살인행각조차 고독의 몸부림처럼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떨까...... 자신의 사문을 멸하기 위해 와 선 저 가슴은 어떤 고독으로 물들고 있을까..... 이때 돌연, 묵묵히 서 있던 구양조운의 입에서 한소리 짤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유석.] 순간, 사기의 천재 유석의 시선이 화들짝 그를 향했다. [내일 아침 보광사로 정식통보해라. 문파를 비우고 떠나라고, 열 두 시진의 시 간을 주며 그대로 행치 않을 땐 유혈극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해라.] [대장, 대장은 정말로.....] [당천.] 투도의 천재 당천이 몸을 일으켰다. [수하 오백을 데리고 뗏목을 만들어라. 팔천이 일제히 타야 할 뗏목이다.] [대장.....]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준비를 하고 있도록, 공격시간은 모레 정오다.] 바로 그때, 송유천, 전이화, 팽운 등이 느닷없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총수! 속하 등은 못합니다!] 쩌렁쩌렁한 외침, 구양조운의 몸이 느릿하게 돌려졌다. 그의 무표정한 시선이 타오르듯 엎드린 수하들을 향했다. [그건 무슨 뜻이냐?] 송유천이 이마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비록 탈문이라곤 하나 이는 천역지행이오! 수하된 몸으로 어찌 주군이 천하 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보고만 있으리오? 수하 등은 못합니다!] 구양조운의 시선이 안으로 무겁게 젖어 들었다.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내가 언제 너더러 내 삶을 대신 살아 달라고 하더냐?] [.......] [내가 언제 나의 고통을 너희들이 대신 앓아 달라고 말하더냐? 부하된 자로서 상사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천역이 아니고 올바른 일이더냐?] [총수!] [닥쳐! 공격은 모레 정오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 명령은 변할 수 없다!] 그는 말을 끝맺기 무섭게 성큼성큼 다른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하루가 흘렀다. 예상대로 보광사는 구양조운의 말을 일축했다. 보광사의 현 주지인 대천선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겨룰 것을 선포했다. 그는 과거 구양조운보다 한 년배 아래의 인물이었다. 공격일을 하루 앞둔 밤..... 구양조운은 오랫 동안 헤엄을 쳤다. 밤의 강물은 찼다. 그러나, 구양조운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죽음처럼 고요하게, 암청색 물살을 헤쳐 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는 밤새도록 헤엄을 쳤다. 미친 물고기처럼, 그리고, 검붉은 태양이 눈앞에서 불쑥 솟아 올랐을 때에야 그는 유령군단의 진영이 있 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약,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는 지구 끝까지라도 헤엄쳐 갔을 것이다. 그 또한 해가 영원히 떠오르지 말 것을 종내 기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칠 장 11/26 14:44 303 line 第 三十七 章 八萬四千字의 神功 쿠궁! 오백 개의 뗏목, 푸른 창파 위로 둥실 떠올랐다. 햇살 아래 철석이라도 베어내고 말 듯한 창검의 광채가 난무하고..... 선두의 오 개 뗏목에 일제히 메달린 다섯 개의 해골을 수놓은 오해신기는 바 람에 펄럭이니..... 금비늘처럼 반짝이는 정오의 태양 아래 죽은 듯 정적 어린 귀래하의 푸른 물 을 가로지르는 수백 개의 뗏목이 빚어내는 장관을 어찌 다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선두의 뗏목에는 구양조운이 우뚝 서 있었다. 철혼의 호위를 등에 업고 무심히 팔짱을 끼고 선 그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고..... 시선은 말없이 뗏목의 양쪽으로 갈라지는 물살에 고정되어 있다. 억겁인가..... 바로 일수유 전인가....... 이 강을 건널 때마다 장사공은 늘 구성진 뱃노래를 불렀었다. 어허야.... 어허디야..... 바람부는 가을이라 물든 나뭇잎이, 춤추듯 날리어서 물 위에 떨어지네. 머리에 수유꽃 꽂은 여인을 만나거든, 오늘 벌인 잔치에 취해 누웠다고 말해 주게. 어허야 어허디야...... 청춘은 늙고 마음은 구유인가. 잠들어 깨어보니 저승이 바로 저기로다...... ---이것 보오, 도솔. 나도 한창 때는 끝발 꽤나 날렸었지. 장강의 푸른 물에 아름다리 대목들을 싣고 오늘은 장춘이요, 내일은 오주땅이 라. 술집 계집들은 그저 나만 보면 치마에 오줌을 질질 갈겼으니까--- ---핫하...... 거 치마에 오줌싸는 얘길랑 백 번도 더 들었으니까. 봉녀는 잘 있소? ---이 사람! 내 딸을 탐내지 말게나. 잠 안들면 등에 태워 재우고 밀축 위에 쌀 한 쏘태기 같이 하아얀 쌀알만 먹이고 키운 년이란 말씀이야. 땡중에겐 시 집 안 보낼테니까 아예 마음도 먹지말게--- [청춘은 늙고 마음은 구유인가.... 잠들어 깨어보니 저승이 바로 저기로다....] 암청색 물 위로 자신의 모습이 더욱 짙은 어두움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쇠하는 자기 육신의 내면을 보듯 구양조운은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끝없는 번뇌가 얼음으로 식어내려 끝내는 죽음의 단단한 고체로 뭉쳐진다면, 어깨에 멘 한 자루 단장검이 문득 업고처럼 그의 마음을 번뇌 속으로 끌어 당 기는 것이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다. 익을대로 익은 여름, 자신의 열 여덟 나이로 저물어 간다. 은편을 뿌린 듯 새하얀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정갈한 물빛보다 투명해져 자꾸만 높이 달아나고 있었다. 영겁이나 해탈의 참뜻도 저 하늘 안에 있는 겐가? (자신에게 묻는 것은 이제 그만..... 오늘의 결과를 누군들 예측치 못했으랴 .... 스승도 나를 알고 있었은 것이다. 다만 생각하기 두려웠을 뿐..... 자! 검을 뽑아라. 구양조운! 인간은 늘 자신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동물이 아닌 가!) 이때 돌연, 주위가 느닷없이 가볍게 소란스러워졌다. 구양조운은 꿈에서 깨듯 시선을 들었다. 저멀리...... 보광사 처마보다 더 높은 산봉 위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몸은 본시 컸다. 허나, 이 순간은 더욱 커 보였다. 마치 온 하늘을 두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괴상한 사람의 모습이 시선 속으로 가득 담겨져 오는 순간, 구양조운은 마음 속으로 한소리 비명을 내질렀다. (스승님!) 신승 자초는 묵묵히 강바람에 승포자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확인할 순 없었지만 분명한 느낌이었다. 구양조운의 눈가로 문득 한 줄기 이슬이 뿌옇게 차올랐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는 것도 느끼지 목한 채 그는 버럭고함을 내질렀다. [제 일진 공격!] 싸움은 서전부터 치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광사 승려들은 성으로 오르는 강변에 생사진을 치고 철혼이 이끄는 제일진 의 유령군단 고수들과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벌였다. 차앙! 창! 병장기의 금속음은 십리 밖의 강을 울렸고, [아악!] [윽!] 사지가 토막난 시체들이 귀래하강가를 온통 피빛으로 물들여 갔다. 하원이라곤 하나 대소림의 위엄을 뉘라서 모르랴..... 천 년의 유구한 역사에..... 소소의 선원이라기보다는 신비하고 심오한 무학의 원류로써 더 이름이 높은 곳, 갈대 하나를 타고 중원에 들어선 달마대사가 면벽구년 후에 창안한 역근경과 세수경은 중원에 유수한 내공의 바탕이 되고, 또한, 용호표사학의 모양을 보고 창안한 소림오권은 중원에 유구한 기문절초의 바탕 이 되지 않았으랴. 무림의 태산북두요, 종주격인 소림사와의 대전은 과연 쉽지 않았다. 철혼의 제일진! 사상자 일백, 팽운의 제이진! 사상자 구십, 소림제일방어진 오백승 전멸. 이어. 송유천과 전이화가 거느리는 제삼진과 유석, 천돈, 대종이 거느리는 제삼진과 합류한 일, 이진은 미친 늑대들처럼 산 위를 향해 치솟아 올라갔다. 구양조운은 맨 끝에 쳐진 채 느릿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단유경, 감려연이 거느리는 특수공격조 일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눈앞에 서 있다고 느낀 바로 그때, 승려, 그는 장사공의 오두막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장대한 몸집, 수북한 구레나룻, 구양조운의 두 눈에 언뜻 한 줄기 이채가 스쳐 지났다. 오명, 그는 바로 무원측검대에서 그와 한 잔 술을 나누어 마신 오명화상이었던 것이 다. 구양조운이 시선에 들어오자 오명화상은 그 자리에서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대례를 올려왔다. [삼가 오명이 사숙님을 뵈오.] 구양조운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아직도 나를 사숙이라고 부르느냐?] 오명은 장대한 신형을 일으키며 팔구십 근은 족히 나가보이는 항마봉으로 땅 을 쿵하고 찍었다. [오명이 죽는 날까지 사숙님은 사숙님이오! 한 잔 술에 담긴 심오한 뜻을 오 명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소.] 드물게도 구양조운의 입꼬리에 희미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허나, 그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도 더욱 빨리 사라졌고 대신 냉막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너의 생각은 무었이냐?] 오명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때의 빈 잔에 오명이 채운 것은 충절과 협의였소. 사숙님이 잔에 채우신 것 은 무엇이오?] [그런 것을 얘기할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다, 오명!] [사숙님은 변하셨구료!]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아직도 말할 때가 안되었느냐?] 오명의 퉁방울처럼 부리부리한 시선이 구양조운을 향해 부릅떠졌다. 그는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이 산 속에 사숙님의 적수가 될 자는 아무도 없소. 오명은 충절로써 사숙님의 살검을 막고자 하오.] 돌연, 구양조운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얼음처럼 투명하여 안의 혈관까지 들여다 보이는, 언뜻 보기에도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는 얼굴, 그는 한손을 느릿하게 쳐들었는데 그 손까지 얼굴처럼 극투명으로 변하는 것 이 아닌가?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던 단유경과 감려연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저럴수가.... 그의 소수무학은 이미 초극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한 달 전만 해도 저토록 완벽한 소수공이 아니었다...... 아아..... 인간이 이토록 빠르게 무예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는가? 이는 가히 기적에 가까운 성취로구나......) 허나, 어찌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나며, 있지도 않은 일에 소문이 돌겠는가? 이는 바로 구양조운 자신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단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그는 요마 모용혜의 신기에 가까운 비검수법을 보고난 후 내심 충격을 받았었 다. 자신의 무예에 대한 비탄의 의미도 그 안엔 숨겨 있었다. 스승 자초가 천하제일인으로 숭앙받던 것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했다. 무예는 그 동안 끝없이 진보했고 발전하여 어느 새 자초의 무예를 이류로 전 락시켜 놓았던 것이다. 구양조운은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무예연마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중점적으로 파고든 것은 만고의 신비무예로 일컬어지는 역근, 세수의 두 기공이었다. 양심여의공의 바탕이자 천하내공의 원류! 그는 차츰 역근과 세수 속에 그야말로 막대한 진리가 숨어 있음을 느끼게 되 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겉함기 뿐이었고, 한구절 한구절 파고들 때마다 천 년 전의 달마가 지녔던 거력이 새록새록 피 어 오르곤 했던 것이다. 역근, 세수는 모두 일만 이천 구절, 팔만사천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 방대한 분량을 맨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되새기고 풀이해 나갔 다. 지금까지 풀어낸 것이 모두 이천오백자, 그전에도 그는 무공 방면에 있어 가히 경이적인 진보를 보였다. 전래해 오던 소림무예의 위력을 배가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양심여의공의 여의십사식을 팔푼의 진전을 보았다. 양심의형을 이미 펼치고도 세 시진을 끄떡없이 견딜 수 있게 되었으며, 최후단계인 수미반륵정령기는 무려 십푼의 성취를 보았다. 거기다가, 소수문학의 숨은 이치를 발견하여 극성까지 익혀낸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이 니.... 불과 한 달의 세월이련만...... 그 한달전의 구양조운과 지금의 구양조운을 더불어 비교한다는 것은 비단 어 이없는 일일뿐 아니라 무서운 오해였다. 역근, 세수! 구양조운은 지금 바야흐로 팔만사천자 속에 숨은 기적의 경지까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치달려 가고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전신이 얼음처럼 투명하게 변한 채 구양조운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오명, 일초를 양보한다. 그 이후로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니 최선을 다하도 록 하라.] 오명화상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도 주르르 눈물을 흘려냈다. [사숙.....] 수중의 항마불을 수평자세로 겨누니 이는 바로 불존이 심마를 이겨내는 형상 의 가람연불봉의 자세, 순간, [파앗!]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폭갈과 더불어 그의 철봉이 쐐액 허공을 덮었다. 봉끝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리며 가리키는 방향마다 예리한 경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온다. 구양조운의 미간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스쳐 지났다. (녀석, 가람연불봉의 최고경지다. 많은 진보가 있었구나....) 그냥 놔둔다면 삼사년 내로 소림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될 터였다. 그러나, 구양조운은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항마봉의 끝이 그의 옷깃에 닿으려는 찰나 그의 몸은 무엇에 끌리기라도 하듯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오명, 용서하라!) 연후, 그의 몸은 다시 앞으로 폭풍처럼 폭사되었다. 마치 고무줄이 뒤로 당겨졌다가 뻗어나가는 듯한 형세! 그의 흰 손이 온유롭게 허공을 갈랐다. 유부로부터 솟아올라 삼라의 혼을 앗아가는 한 줄기 귀영인 양..... 하늘을 거역하고 지하로 숨어 들어가는 마신의 꼬리에서 타오르는 창백한 역 화인 양..... 손은 음유롭고 손은 섬쾌했다. [윽!] 짧은 비명이 있었다. 오명의 거구가 일순 바람빠진 고무공처럼 그 자리에 스르르 허물어지기 시작 했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사발만한 구멍이 등 뒤까지 뚫려 있었다. 흐릿한 시선 속으로..... 그의 소사숙이 웃으며 술잔을 내밀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있었다. ---우린 이제까지의 삶을 다 마셔 버렸다. 사문의 보호, 의지, 어리광...... 그런 것을...... 이 잔에 무엇을 채우는가 하는 것은 이제부터의 우리 의지에 달린 것이 야......--- 오명은 피식 웃었다. 웃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당신은 분명히...... 이 오명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오..... 시간이 있다면...... 내 삶 중에 단 일각을 아꼈더라면 그 이유를 들을 수도 있었을텐데.....) 쾅! 그의 이마가 땅을 박았다. 그 이마는 땅을 반이나 파고 들었갔다. 구양조운은 엎어진 그를 묵묵히, 그리고 오랫 동안 내려다 보았다. 그러던 한 순간, 그의 눈가로 언뜻 한 줄기 이슬이 스쳐 지났다. 그는 그런 것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자에게 두 술잔에 채울 삶이 따로 있겠나...... 무림! 제기랄 개새끼들! 그 따위 무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이토록 가슴아픈 희생을 강요한 단 말인가? 오명..... 미래의 이 땅에 이름 석 자나마 남아줄 것인지 모를 삶을 살고 있다네. 갈수록 힘겹고...... 갈수록 견디기 어려워지는군..... 내세에는 빌어먹을 검 따위는 집어 치우는 농부로나 태어나 버리세...... 그때가면 나도 내 잔의 삶을 말할 수 있으리니...... 지금의 내 잔에 채워지는 것은 다만 허무와..... 고독일지도 모르지...... 흘흘...... 나를 용서하게..... 오명....... 무적의 유령군단은 고전하고 있었다. 보광사엔 뜻밖으로 고수자들이 많았다. 철혼과 막상막하의 혈전을 벌이고 있는 보광사 주지 대천선사가 그랬고, 송유천, 팽운과 겨루고 있는 대경, 대종선사가 그랬다. 그들의 몸에서는 불문의 기학들이 가히 숨쉴 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탄지신통을 비롯하여, 백보신권, 항마십삼장 등의 기공들은 백전의 고수인 철혼등을 당황하게 하기 에 충분했다. 넓은 대웅전 앞마당에는 지금 유령군단과 보광사 승려들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대웅전 앞엔 한 명의 거대한 노승이 앉아 있었다. 앉은 키가 다른 사람의 선 키보다 더 크고, 일신에선 그대로 불존과 같은 깊은 연륜의 위엄을 풍겨내는 이, 거기다가, 이따금씩 뜨이는 실눈 새로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낄만큼 아련한 신 광이 폭사되어 나오곤 하는 것이니...... 그렇다. 신승 자초! 석년의 천하제일인인 그가 아니고서야 누가 또 이러한 위엄을 뿜어낼 수 있겠 는가? 장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 쌍의 싸움은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펑! 펑! 챙! 창! 이때 돌연, 휘익! 느닷없이 어디선가 세 개의 미세한 녹영이 솟구쳐 왔다. 순간, 신승 자초의 감겨있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녹영! 너무 빠르다. 그로서도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는 빠름이었다. 동시에, 장내의 싸움이 누가 시키기라도 하듯 뚝 그쳤다. 중인들은 의아한 시선을 번뜩이다가 순간 입으로 다급한 신음을 삼키고 말았 다. 보라! 주춤 그 자리에 멀어져 가고 있는 대천, 대경, 대종의 세 승려들, 그들의 목에 꽂힌 한 잎씩의 푸른 나뭇잎을, 비화적엽, 꽃잎을 날리고 나뭇잎을 날려 사람을 살상시킬 수는 없다. 허나, 아예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나뭇잎을 날려 세 고수를 일시에 즉사시키는 그 런 비화적엽을 그들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죽음처럼 고요해진 장내의 정적을 밟고,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심팔 장 12/02 00:27 411 line 第 三十八 章 師父, 師父여..... 언젠가도 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술에 만취했다가 깨어 나셨을 때나..... 선잠에서 막 몸을 일으키셨을 때..... 밝음 속에 살아나고 있는 아래 계곡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저 모습을,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불타는 놀이 끓는 몸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시각... ... 낙엽송들이 황갈색 단풍빛을 나부끼며 눈을 뜨는 숲의 바다 아래, 실배암 같은 귀래하가 산자락을 감고 도는 그런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당신..... 이윽고, 신승 자초의 시선이 느릿하게 막 하나의 계단을 딛고 선 저 멀리의 제자를 향 했다. 연륜 깊은 노승의 동공 깊숙한 곳에 찰나와도 같은 반가움이 스쳐 지나고..... 허나, 겉으로는 여전히 득도의 무심 그대로인 채, 홀연, 그의 장대한 신형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불존의 이름으로 고하노니 나를 따라올 용기가 있느냐?] 구양조운은 가타부타 한 마디 말도 없이 번쩍 몸을 날렸다. 유성 같은 두 줄기 신형이 햇살 퍼덕이는 허공을 빛살처럼 갈랐다. 중인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들은 한 모금의 진기에 저렇듯 멀리 날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 로 알았고, 인간이 지닌 능력의 무한함에 대해 두려움과도 같은 경외를 느꼈다. 피아를 막론하고 모든 동작이 일시에 뚝 그쳤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눈꺼풀 하나 깜짝임 없이 고무줄처럼 뻗어나가는 붉고 흰 두 선을 쫓기 시작했다. 신승 자초는 산정에 발을 디딘 후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제자가 자신과 백 장 정도의 거리가 벌어졌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제자의 무공수준이었다. 헌데 보라, 구양조운은 이미 어느 틈엔가 십 장 밖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아니라, 오랫 동안의 진기운행으로 약간 숨이 찬 자신에 비해 그는 호흡 하나 흐트러 짐이 없었다. 신승 자초는 얼굴에 밝은 웃음이 스쳐 지났다. [상상도 못할 무예의 발전이 있었구나. 이미 스승을 능가했다.] 구양조운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무공만 뛰어나면...... 무엇합니까.......] 짤막한 말이었지만 한편으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기도 했다. 신승 자초는 껄껄 웃었다. [너는 혹시 후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구양조운은 침착하게 물었다. [무엇을 후회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후회하고 있다는 얘기냐?] 구양조운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오랜 후에야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핫하..... 좋아, 좋아. 나는 과연 제자를 잘못 키우지 않았군.] 신승 자초는 자못 유쾌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 도솔아! 오라. 오랫만에 한번 통쾌하게 겨루어 보자!] 도솔, 이 정겨운 이름에 구양조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부, 못하겠소!] [핫하..... 그럼 내가 하지.] 신승 자초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쌍수를 쭈욱 뻗더니 다시 홱 잡아끌었다. 순간, 구양조운의 몸이 그의 쪽으로 쭈욱 딸려나갔다. (여의십사식의 흡자결!) 다시, 신승 자초의 우수 끝에서 한 줄기 보라색 광채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비의 소림지예, 탄지신통이었다. 보라색은 탄지신통의 극한을 의미했다. 구양조운은 탄식을 터뜨렸다. [사부......] 펑! 가슴에 둔한 통증이 스며왔다. 구양조운은 다섯 걸음이나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신승 자초의 얼굴이 냉엄하게 얼어붙었다. [못난 놈!] 그의 손에서 재차 흡자결이 뻗어나왔다. 쭈욱 딸려오는 구양조운의 가슴에 이번에는 나한십팔권의 복호탄마의 일식이 작렬했다. 쿠쾅! 이번에는 열 걸음, 입 안이 달작지근해지더니 입술 새로 한 줄기 실처럼 가는 핏물이 흘러나왔 다. 신승 자초는 공중으로 거구를 붕 띄우며 폭갈을 터뜨렸다. [이 머저리 같은 놈, 들어라! 이번에도 초식을 펼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로 떨어져 머리를 부딪고 죽고 말리라!] 슈파악! 무지막지한 압력이 쏟아져 내려왔다. 구양조운의 주위의 땅에서 회오리치듯 풍사가 피어올랐다. 여의십사식의 파자결이었다. 돌연, 구양조운은 머리를 발작적으로 내돌렸다. 이어, [와악!] 한 소리 짐승 같은 부르짖음과 함께 그의 쌍수가 폭풍처럼 공중으로 솟아올랐 다. 슈파악! 교묘한 이(移)의 흐름이 파(破)를 흐트러뜨린다. 동시에, 이(移) 속에서 타(打)가 느닷없이 솟아 나오더니 신승 자초의 우측어깨를 강타 했다. [흡!] 신승 자초는 순식간에 허공에서 몸의 위치를 열 여덟 번이나 바꾸며 휘르르 떨어져 내렸다. [이놈 봐라?] 내색은 안했지만 어깨가 부르르 저려오고 있었다. 그는 이런 통증은 삼십 년 만에 처음 느껴본다. [좋아!] 노승은 즉시 대소를 터뜨리며 구양조운을 향해 질풍처럼 짓쳐 들어왔다. 구양조운 또한 스승의 장영 속으로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박(撲)!] [진(震)!] 슈파악! 퍼엉! 순식간에 얽히고 설키는 붉고 흰 인영들! 보라! 일초일식에 쏟아지느니 가히 일생을 통틀어 한 번 보기도 어려운 희대의 기초 절식들! 어떤 때는 느리게 일초가 뻗어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한꺼번에 백여 개의 초식들이 선풍처럼 휘물아쳐 나간다. 뿐인가, 무기라곤 쇠붙이 하나도 들지 않았는데 마주치는 손 끝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귓청을 찝을 듯한 금속성, 산 아래의 군웅들은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신승 자초의 장엄하고도 웅위한 기풍에 넋을 앗길라 싶으면, 구양조운의 명쾌 하고 표홀한 기세에 다시 혼이 달아난다. 간신히 그 잃어버릴 뻔한 혼령을 붙잡아 놓을까 싶을 땐 또, 두 사람이 일시에 펼치는 황홀한 기학묘공의 행렬에 얼이 빠지고 마는 것이닫 다. 그것은 이미 술(術)이 아니었다. 예(藝)요, 도(道)였다. 송유천이 불현듯 망연자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헛 살았다. 헛 살았어...... 저것은 마치 신의 세계 같구나.... 인간이 어찌 저렇듯 완벽할 수 있을 손가.] 그것은 한쪽의 단유경과 감려연도 마찬가지, 그녀들은 구양조운이 저렇듯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단유경은 비로소 그녀의 정인이 지닌 엄청난 무예에 벅찬 환희를 느꼈고, 한쪽의 감려연 또한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같은 무종이라도 천양지차이다..... 나는 그의 무예를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었구나..... 저 실력이라면 열 명의 내가 덤빈다 해도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쿠쿵! 콰쾅!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바 로 신승 자초였다. 십성의 전공력으로 비공을 펼치면, 별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삼류초식으로 막 아낸다. 허점이다 싶어 파고 들어가보면 어느새 함정이고, 함정이라 여겨져 짓치지 않으면 다시 실수(實手)로 변해 몰려오는 것이다. 허와 실이 바로 하나요, 정과 동이 실타래처럼 엉켜 나오는 무예의 최고경지! 신승 자초는 눈앞의 이 경세고수가 진정 구양조운인가 싶어 몇번 눈을 껌뻑거 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번 천번 뜯어봐도 이는 바로 자신이 오줌을 받아가면 키운 그 녀석이라! 불현듯, 신승 자초는 가슴 속으로부터 한 줄기 웃음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 웃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 개의 손이 한꺼번에 겨드랑이를 간지르고 있는것 같았다. 투들툴르..... 그는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 입꼬리를 말려 올리며 시작된 웃음은 이내 가가대소로 변했다. [왓하하하.......] 장하다, 조운! [크핫하하하!] (이 녀석은 날 봐주고 있어..... 그래도 스승이라고 내 늙은 몸을 염려해 주고 있는가....?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내고, 청색은 남색으로부터 나왔으나 그 빛이 더 짙으니....... 조운 이녀석, 정말 장하다! 내 더 무슨 여한이 있을 손가!) 신승 자초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는 마지막 남겨진 일이 있었다. 쿠쿠쿠! 갑자기 맹렬해진 그의 공세에 구양조운은 가볍게 놀란 빛으로주춤 물러났다. 신승 자초는 틈을 놓칠세라 몸을 바짝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연이어, 솟구쳐 나오는 보제옥룡인의 손그림자, (내 허리가 빈다. 이녀석은 허리를 향해 반드시 가벼운 일장을 밀어올 것이 다.) 구양조운의 검미가 쫑긋하더니 과연 좌수를 비스듬히 뻗어 신승 자초의 허리 에 가벼운 일장을 쳐냈다. (내가 이것을 피하면 녀석은 여유를 얻어 지금까지와 같이 또 멀찌감치 도망 갈 것이다. 내 어찌 네 손으로 나를 베어 평생의 업고를 지고 살게 하랴....? 이것이 스승으로서 네게 주는 마지막 베품이니.......) 팍! 돌연, 신승 자초의 몸이 날벼락처럼 퉁겨나갔다. 구양조운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약한 일장에 스승의 몸이 저렇게 튀어나갈리가 없다. 그렇다면? 찰나지간 그의 몸이 흙을 박찼다. 슈욱! 이때, 그는 보았다. 스승의 칠공으로부터 자욱이 뻗어나오는 핏물을, [사부!] 신승 자초는 장력이 닿는 순간 몸을 뒤로 날리며 스스로 심맥을 끊어버린 것 이다. 피, 푸른 하늘과 그래서 더 붉어보이는 한줌의 피보라, 찌이익! 구양조운의 손은 막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가는 신승 자초의 옷자락 하나를 간 신히 찢어 가졌을 뿐이다. 신승 자초의 거대한 몸은 시퍼런 귀래하 속으로 장엄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매우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스승 법몽대사가 떠오른다. 집중산에의 오랜 고행을 거쳐 나고 죽는 생사를 초월한 상태에서 오직지계 (持戒)로 청정하신 법몽대사, 한 포기의 풀을 가리키며, 이 연약한 생명 속에 부처님이 있다고 설법한 그 참 가르침이 새롭게 귓전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낳고....... 자신은 또 구양조운을 낳았다. (윤회.......) 푸학! 바람에 가벼이 씨앗을 날리듯 육의 속태움을 그대로 따라감인가....... 일대의 거성! 무림사 한 귀퉁이에 찬연한 종적을 남긴 거성을 이렇게 죽었다. 살아 생전 별의 광채는 그리도 찬연하고 빛났는데도..... 그 별을 삼킨 벽수는 일체의 말이 없다...... [쳐라!] 철혼의 냉랭한 외침이 죽은 듯한 정적을 깨뜨렸다. 순간, [와아---]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함성과 더불어 유령군단의 고수들은 늑대가 토끼를 덮치듯 보광사 화상들을 향해 덮쳐갔다. 보광사 화상들은 신승 자초의 죽음에 넋이 빠져 있다가 고함소리에 다급히 제 장신을 차렸다. 화상들은 급히 계도와 방편산을 분분히 치켜 들었다. 이때, 대궁전 앞에 서있던 대자(大字)항렬의 마지막 고수, 대지선사가 크게 외쳤다. [모든 제자들은 마귀들과 다투지 말고 좌선하여 심악을 물리치라!] 화상들은 느닷없는 대지선사의 말에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그 뜻을 깨달았다. 한쪽은 기세등등하고 한쪽은 완전히 사기가 죽었다. 살아서 사도들의 연습상대로 희롱당하느니 불승다운 의기로 장렬히 열반하자 는 뜻이 아니겠는가? 승려들은 분분히 들었던 무기를 집어 던지고 섰던 자리에 조용히 정좌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무한극대한 불가의 심오한 경법이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삼계유식........ 심생심멸.......]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으윽!] 유령군단의 고수들이 아무런 대항도 않고 있는 보광사 승려들의 목을 무우 베 듯 마구 자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논리.......... 일리제평...........] [아악!] [으악!] 승려들의 낭랑한 선창은 군승들의 목이 떨어져 나갈수록 더욱 처절하게 높아 져 갔다. 고수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그런 승려들을 무심히 베어냈다. 한쪽으로 물러나 산정의 구양조운을 향해 올라가면 단유경 등 심인수뇌부들은 그 모습을 돌아보다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안 좋군.........] 송유천의 말을 전이화가 받았다. [이미 말릴 수 없어요. 저 상태에서 말린다면 심마의 위험이 있어요.] 살인의 열락, 함부로 말릴 수 없다. 아예 처음부터 못하게 하는 것이 최대의 방법이다. 아아.......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의 모든 알음알이가 마음하나에 달린 것이며......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다룬다면 곧 평안한 심신을 이룰 수 있다는 불법은 덧 없이 공중을 떠돌고....... 그 뒤를 이어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가 조그만 내를 이루기 수 시진, 드디어, 보광사 경내에서 승복을 입고 숨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한 사람, 대웅전 앞에 오연히 정좌한 대지선사를 제외하고는....... 그는 득도와도 같은 무심한 시선으로 주위의 참상을 둘러보더니 한 줄기 장탄 식을 뱉어냈다. [업보로다.....] 그는 시산혈해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아래 계곡을 내려다 본다. 사해를 한눈에 넣듯 시선을 풀어 놓고 햇살이 빛나는 암록빛의 자신을 오랫 동안 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자신의 천령개를 맹렬히 후려쳐 갔다. 퍽! 피가...... 튀었다. 두두두...... 열세필의 말, 모조리 희다. 그것은 눈처럼 희었다. 십사기는 단숨에 귀래하 강변까지 폭풍처럼 휘몰아쳐 오더니, 이어, 말을 세우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다는 듯 말등을 박차고 열 네 명의 백의인들 이 물 위로 날아 내렸다. 쉬이이....... 백색복면에 흰 피풍을 펄럭이며 형체없는 유령인 양 수면을 스쳐가는 그들, 등평도수도 아니다. 수면으로부터 반 치쯤 둥둥 뜬 채 무릎관절 하나 굽힘없이 솟아 나가는 이들 의 신법은 바로 백년의 내력이 없고는 불가능하다는 무력답수가 아닌가? 뒤이어...... 뱃길로도 일각이 족히 넘는 귀래하의 물길을 그들은 단숨에 뛰어 넘었다. 강변에 즐비하게 널린 시신과토막난 사지, 그리고 말라붙은 핏물이 그들의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선두백의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뿔싸! 늦었구나!] 장사공의 오두막, 산길, 숲길 그 어디에도 시체들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보광사의 산문이 저 멀리 보일 때에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비위를 엎어놓기도 했다. 파파팍! 십 사인의 백의인들은 산문 앞으로 후르르 날아 내리다 말고 일제히 얼어붙듯 동작을 멈추었다. 아아........ 보라! 지옥의 아수라장인들 이렇듯 처참할 수 있을까? 흩어져 나온 내장과 피 조각난 사지, 그리고 그 주위로 몰려들고 있는 조류와 벌레떼들...... 피비린내는 하늘에 사무치고 넋을 잃은 육신들은 바람에 덧없이 부유하나 ......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이토록 잔인한 살상을 두눈 뜨고 볼 수 있을 손가! 휘이이이........ [너무 잔인하다.........] 문득, 선두백의인의 입에서 넋을 잃은 듯한 망연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는 미미한 떨림이 이는 손으로 자신의 복면을 벗어들었다. 순간 드러나는 얼굴, 반듯한 이목구비며 청수한 기품의 중년승인, 오오....... 그는 바로 무화, 소림의 후기지수 무화승인이 아닌가? 이어, 남은 십 삼인도 차례대로 복면을 벗어들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공륜이 있고, 풍운이 있으며 수경이 있었다. 뿐인가! 나머지 십 인의 고수들 또한 정도 구대문파의 빛나는 후기지수들! 무당 상청부관주 옥소신검 엄화! 아미의 기승 태을신승, 점창의 여장령 능파옥연 이벽군, 종남의 팔황일개세 합곡, 황산의 천유검룡 육방, 곤륜의 백의신협 양옥, 청성의 감리신도, 나부의 나부성녀 종리수연, 개방의 표향이개 선개와 악개, 총 십 사인, 이미, 무림에 지대한 명성을 떨치고 있거나 미래의 영도자로 인정받고 있는 젊은 고 수들, 천년십사절, 이들이 바로 정파천년맹의 비밀병기라는 정살 천년십사절인 것이다. 이때, 공륜, 수경, 풍운의 얼굴은 마치 넋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공륜은 휘청 한 걸음 나서다 대천선사의 시신 앞에 이르러 털썩 무릎을 꿇었 고, 수경은 부옇게 흐려오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우러렀으며, 풍운은 산문의 거대한 나무기둥을 쿵하고 쳤다. [이.... 새끼...... 그래도...... 이럴 수 있냐........?] 구양조운의 역할을 아는 이들 사 인이 그럴진데 그 역할을 모르는 나머지 사 람들은 어찌하랴. 무당의 옥소신검 엄화는 수중의 송문검을 쨍하고 뽑아들더니 쩌렁한 어조로 외쳤다. [내 살아 생전 구양조운과 한 하늘을 같이 이지 않겠다!] 다른 사람들 또한 젊은 악마 구양조운에 대한 적의를 마음 속 깊이 새기는 눈 치였다. 이때, 무엇인가를 쉴 새 없이 살피던 개방의 선개가 급히 한쪽을 가리켰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보시오!] 시, 이 한 줄의 칠언절구는 대웅전 앞마당의 거대한 청동향로에 새겨져 있었다. 天長地久有盡時, 幽恨緣緣無絶期, 召命如恨千秋歲, 白雲追心萬里行, 하늘과 땅은 끝이 있으되, 이 내 한은 끝이 없구나, 소명의 한은 천추에 사무치니, 빈 마음만 흰구름따라 떠돌도다. 그 아래에는 구양 탄서의 정관이 있었다. 무화는 오랫 동안 그 싯귀를 바라보다 문득 한 줄기 탄신과 함께 더불어 중얼 거림을 흘러냈다. [정녕 하늘의 뜻이 이렇다면 어찌 막을 수 있었으랴...... 형제들, 이 일은 깊이 마음에 두지 말라. 그 보다도 우리가 맡은 막중한 임무를 먼저 생각해 보 자......]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비장한 어조로 다시 이었다. [천년십사절의 사활을 걸고 맡겨진 이번의 임무! 백인귀두! 사파최고의 두뇌조 직인 백인귀두를 부수는 것! 그 동안 정파는 이 사악한 두뇌집단으로 인하여 엄청난 피해를 거듭 입어 왔으니...... 이 땅에 다시는 오늘과 같은 비극이 없도록 하기 위해 촌각을 아껴 그들을 부수어 내야 할 것이다.] [연명!] 십 삼인의 비장한 결의에 찬 얼굴을 일일이 둘러보고 난 무화는 힘차게 고개 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가자!] 휘휘휙! 열 네개의 백영은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허공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누가 남긴 것인가? 산문 앞 어귀에 세워진 목비 하나가 새삼 바람에 서러웁다. <여기 삼가 보광사 일천의승 잠들다.> 소림하원 보광은 이렇게 무너졌다. ........ [야설록] 대달마 제 삼십구 장 12/04 12:46 275 line 第 三十九 章 劍과 男子 <지옥련 연맹특령 제구호, 금번 연맹연공평의회에선 하기와 같은 사항을 발표한다. --- 기(記), 성명, 구양조운, 직책 지옥군단 부통령겸 오군총수, 서열 제이십 오위, 상기인을 연맹 대호법및 후맹맹주로 추서함과 동시에, 그에게 공의 직위를 내리고 연맹 제 구 위의 서열을 공인한다. 연맹연공평의회 회주 경설 백.> 연맹대호법 및 후맹맹주! 서열 제구위! 전 지옥련이 경악했다. 유사 이래 이토록 빠른 승급이 있었을까? 입맹 육 개월 만에 사백 구십 이위의 서열에서 구 위의 서열까지 뛰어오를 수 있다니! 서열 구 위! 이것은 바로 그동안 공석으로 남아있던 지옥구룡의 자리에 구양조운이 정식으 로 끼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검후 경설의 구룡신거 안에 그의 자리가 마련되었음을 말하는 일이가도 했다. 명실공히 지옥련은 이제 구룡체제로 정식 출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했읍니다. 그것도 무섭게 변했읍니다. 화목하던 성격이 침울하게 변한 것은 물론 끼니조차 걸러 몰골이 해골처럼 변했읍니다.] 검후 경설은 꽃을 사랑한다. 그 중에서도, 수선을 특히 사랑했다. 이것 저것 꽃 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만은 그녀는 수선만 보면 몸 속의 피가 맑게 뛰노는 것을 느끼곤 했다. 수선은 늦겨울에 핀다. 삭풍과 엄동, 한설을 이기고 피는 드문 꽃 중의 하나다. 그러한 극기가 경설은 좋다. 황량한 바닷가에서 아무 영양없이도 자생하는 끈질긴 생명력이 또 좋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삶은 이 수선을 닮은 것이 아닐까? 여름인데도 만발한 수선화군 속에서 시종일관 목검영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 다. [그의 옆에 서면 이 삼복더위 속에서도 냉기가 감돕니다. 그 시선은 마치 얼음 조각 같고 멀리서 보자면 그의 주위에 한 겹의 푸른 인광이 들린 것 같으니 도 저히 사람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수선의 향기가 살랑살랑 코 끝을 간지럽힌다. 검후 경설은 그 향기 끝으로 코를 대어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련한 옛일이 망각의 표피를 해집고 스물스물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섬에서 자랐다. 바위와 파도와모래와 그리고 수선, 수선은 융단처럼 무더기로 피곤 했다. 하루 종일 검 한 자루와 씨름하다 피곤에 지친 몸을 모래사장에 눕히노라 면..... 노을 속으로 고요히 피어 오르곤 하던 상큼한 수선향..... 그럴 때면 까닭없이 눈물이 솟곤 했다. 그녀는 늘 혼자였따. 부모도 형제도 몰랐다. 철이 들 때부터 옆에 있어준 검을 빼고는 그녀는 사무칠 정도로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 검을 휘두르곤 했다. 검은 그녀의 친구였고, 부모였고 연인이었다. [더 하명 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검후 경설은 화들짝 꽃잎에서 얼굴을 뗐다. 그녀는 공손히 시립해 선 목검영을 힐끗 바라본 후 살레살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하늘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검후 경설은 그 노을을 온몸으로 받으며 천천히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그녀의 내부에 있는 비상신호가 떨어질 듯한 경보를 울려대고 있엇따. 남자의 생각을 한다는 것..... 더우기, 첫눈에 시선이 끌린 남자의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검도수업에 그보다 더 큰 장애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생각한다. 그의 거처가 못내 궁금하고 그의 소식을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을 경 설은 수시로 발견하는 것이다. 정원의 폭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정원을 왔다갔다 맴돌던 경설은 다섯 번째의 왕복이 막 시작되었을 때, 돌연 옥용을 발딱 치켜들었다. (가자! 가서 부딪치는 거야. 부딪쳐서 깨뜨리는 수 밖엔 없다. 이 정관을 깨지 못한다면 나는 끝내 수업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십팔년의 생애에서 남자의 거처를 찾아가기는 처음이다. 사형 옥세개나, 가장 친한 철무쌍의 방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저멀리, 유령군단의 본진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가슴이 가볍게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겉으로 보는 그녀는 여전히 오만하고 차가왔다. 북극의 빙점에 오연히 버티고 선 여왕과도 같은 천부의 오만이 그녀에겐 있었 다. 진영에는 사람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절대자유, 절대휴식을 표방하는 유령군단답게 정문에 조차 단 한사람의 초병 도 보이지 않았다. 노을이 보석가루처럼 깔린 군단의 연무장을 경설은 재빨리 가로질렀다. 수십 채의 거대한 석조 건물들에는 이제 막 불들이 켜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한 채의 초라한 초옥을 향해 경설은 걸었다. 참으로 기이한 사람..... 연맹에서는 서열 구위의 신분에 어울리는 극화의 숙소를 그에게 주었다. 백인귀두 용맹이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황궁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헌데, 그는 그런 좋은 숙소를 마다하고 이와 같은 엉뚱한 풀띠집을 지어 지내고 있 는 것이다. 그는 보광사를 멸문하고 돌아온 후 이 초옥을 지었다고 한다. 아무의 힘도 빌리지 않고 홀로, 거기서부터 그의 엉뚱한 기행은 시작되었다. 우선, 그는 이십여 명이나 할당된 시녀들을 모조리 쫓아버리고 일체의 식사를 자신 이 직접 했다. 듣자하니 그가 먹는 식사란 것은 풀뿌리나 나뭇잎이고, 어쩌다 돼지고기나 몇 점 구워먹는 극히 검소한 식사라고 했다. 거기다가 그는 또 유령군단이며 후맹 등의 모든 업무를 때려 치우고 엉뚱하게 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매일 수백 장의 화폭이 그의 거처로 들어갔으며, 먹고 자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할당하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막해진 것도 그의 변화 중의 한 요소다. 사람들은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지 모른다. 유령군단 자체부터가 사람들에게는 신비였다. 그들은 그들의 수뇌가 저렇듯 괴행, 기행으로 삶을 점철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기고 여전히 승리했다. 보광사 이후의 대소 다섯개 싸움을 그들은 모조리 승리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무도 그의 괴행을 탓할 수 없게 되었다. 삐꺽...........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내부는 협소했고 간결했다. 반대쪽 창틈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역광 때문에 경설은 잠시 문가에 서 있다가 주위가 눈에 좀 익어오자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 하나, 의자 하나, 침상 하나, 문갑 하나, 그것이 실내에 있는 집기의 전부였다. 한쪽에는 온통 찢거나 그리다 만 화폭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그림이란 것 도 대개가 그려지다 만 미완성의 것이었다. 반대쪽으로는 매우 간결한 취사도구가 보인다. 시커멓게 그을은 솥과 크고 작은 그릇 하나씩, 그리고 대나무 젓가락도 하나 보였다. 그는 없었다. 경설은 잠시 망설이다 방 가운데의 탁자에 교구를 앉혔다. 가벼운 후회가 그녀의 마음을 적셔갔다. 만나서 필히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구양조운은 그녀에겐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연맹의 총좌요, 윗사람다운 위엄 어린 어투로 안부라거나 무 엇을 말한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 속에 쌓이고 있는, 아니 확대되어 가고 있는 그의 그림자가 지워지거나 없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몇 마디 말로 그녀의 검도수업이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 일취월장 진보할 수 있단 말인가? 최초의 만남 이후 그녀의 생활은 기이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휘두르는 검 끝에 그의 얼굴이 피어올라 소스라친 것도 여러번의 일이요, 노을속의 무심속에 묻혀 있다 그의 생각을 하여 깜짝깜짝 놀라기도 여러번이 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설은 지금도 구양조운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여타 남자에 비해서 뛰어나다 곤 생각지 않는다. 그의 용모는 지옥신룡 옥세개보다 떨어지며 그의 지혜는 무량뇌 제갈천보다 못하다. 그의 기백은 철무쌍보다 못하며 그의 무예는 혈군 사마우에게 뒤지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천하에 짝을 찾을 수 없는 기재요, 만천하 소녀들이 꿈에서조차 그리는 이상형의 남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조석으로 마주쳐도 여전히 얼음처럼 투명하고 맑게 뛰놀수 있는 혈관이 아니던가? 문득? 경설은 붉은 입술 새로 한소리 나직한 탄식을 흘려냈다.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겐가..... 내 마음 나도 알수 없구나......] 이때 돌연, 삐꺽...... 문이 열리더니 하나의 긴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졌다. 순간, 경설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림자가 바로 구양조운임을 알아보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지금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가를 맹렬히 후회했다. 그러다, 헌데 오오...... 설마하니 저 사람이 구양조운이란 말인가? 그는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보라! 긴 흑발은 어깨 아래까지 드리워져 흔들린다. 두 눈은 퀭하니 패여 들어간 채 가슴이 서늘할 만큼 냉랭한 광망을 내뿜고 있 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얼굴윤곽으로 하여 유난히 우묵해 보이는 코와 주사빛 선홍 의 입술, 잘 균형잡혀 있던 몸은 얼마나 말랐던지 입고 있던 장포가 다 헐렁헐렁해 보 인다. 검, 그는 마치 한 자루 검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잠시 문가에 서 있었다. 검후 경설은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오연히 앉은 자세 그대로 물처럼 고요 하게 웃어 보였다. [임자도 없는 방에 들어와서.....] 구양조운은 그녀를 힐끗 바라본 후, [오셨소?] 짤막한 한 마디 말을 내뱉는 둥 마는 둥 방구석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손에 돼지 뒷다리쯤으로 보이는 고깃덩어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마치 검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다. 경설은 결코 자신의 미모 따위를 인생의 척도로 삼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 여인의 자존심은 가볍게 상처를 입고 말았다. 구양조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에다 들고 있던 고기를 팽개치더니 취사도구 쪽으로 다가가 무엇인가를 딸그락거렸다. 그가 꺼낸 것은 한 개의 잔이었다. 잔은 이가 빠져 있었고 또한 결코 깨끗하지 못했다. 그는 그곳에다 한쪽의 식은 찻물을 주르르 따라 경설에게 불쑥 내밀었다. 경설은 무심히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시다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그는 이것으로 차를 마셨던 것은 아닐까? 다행히 구양조운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직 완성되다 만 화폭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다. 그림! 아버지와 아들이 십개천의 황량한 벌판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네 다리가 묶인 제법 무던히 큰 개가 막대 위에 거꾸로 매달 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다. 개는 거의 그을린 모양으로 모닥불은 사위어지고 가느다란 불꽃이 바람에 하 늘거렸고 개의 몸체에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며 연기로 인해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살기와 욕망으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것을 노려 보았다. 거의 회색빛인 아버지의 머리와 검은 아들의 머리는 뿌우연 먼지 바람으로 흩 어졌으며 그들의 머리 너머로 말라빠진 들판의누우런 잡초와 우중충한 하늘에 한 점 저녁기운이 우울하게 감돌고 있었다.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에 그들의 낡아빠진 옷사이로 검붉은 살이 드러났고 실 개천은 그들의 때끼인 발가락 사이를 지나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림은 스산하고 음산했다. 경설은 오랫동안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넋을 잃고 있는 듯한 구양조운의 등 뒤로 그녀의 목 소리가 닿아갔다. [왜 삼일구룡연의에 한번도 참석을 안하지요?] [.....] 묵묵부답, 오랜 후에야 구양조운의 입이 열렸다. [유령군단이 잘못하고 있는 일이라도 있소?]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럼 후맹이....] [그들도 매우 잘하고 있어요.] [그럼 됐잖소.] 무미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들은 회의를 하시오. 나에게는 그 회의결과를 말해 주기만 하면 되오. 나 는 당신들이 부수라는 것을 무엇이든 부수어 왔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연맹에 불만이라도 있는 듯한 말투로군요.] [그런 건 없소.]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쪽의 돼지고기를 집어 작은 소도로 그것을 뭉텅 뭉텅 자르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가보시오.] 파르르...... 불꽃이 진하게 피어 올랐다. 두꺼운 돼지고기는 고치처럼 꿰어 그 불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그 앞에 웅크린 그의 모습이 고독하기 이를 데 없다. 경설은 들고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은 매우 쓰고 달았다. 그것은 구양조운이란 사람만큼 독특한 것이었고, 어쩌면, 이 사람은 그가 타는 차처럼 매우 쓰고 매우 차가운 물 같은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 경설은 말없이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려 왔다. 포만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곳곳에 앉아있던 유령군단 무사들의 의아한 시선이 온몸에 닿아왔다. 허나, 경설은 그 사실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역시...... 오기 잘했다........)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그와의 사이에 분명한 한계가 생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가 고독하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고독해 보지 않은 자는 타인의 고독을 모른다. 그 고독이 본래 그의 것이든 타의에 의해 생긴 것이든 고독하다는 것은 경설 의 마음을 흔들만한 분명한 이유가 될 수 있었고, 그로하여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막연한 욕망으로 그를 향했던 것이 아니었다 고 자위할 수 있었다. 멀리, 자신의 처소에서 비추어지는 한 줄기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이 며칠 동안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삭막하고 괴로운 십팔세 소녀의 눈빛이 이미 아니었다. 경설은 비로소 자신이 검후라는데 대한 뿌듯한 긍지를 느꼈다. 그녀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야설록] 대달마 제 사십 장 12/05 12:49 357 line 第 四十 章 暴 風 나는 회의에 빠져 있다. 그래도 검후를 차지해야 하는가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도록 유도하여 그 철부지 마음을 데리고 무림에서 사라짐 으로써 무림에 불고 있는 혈풍을 종식시킨다는 엉뚱한 환상을 나는 그래도 고 집해야 하는가고...... 그 환상은 나의 스승을 죽이고 내 사문을 멸했다. 그들은 우습게도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죽어갔다. 도대체! 죽고 난 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한 푼도 쥐어지지 않는 대의란 것에 개개인의 삶은 허무하게 파괴되어도 좋은 것이란 말인가? 잠들면 악몽을 꾼다. 깨어도 어차피 이 따위 삶은 악몽이다. 차라리 나에게 검후를 유혹하지 말고 그 가슴에 검을 찌르라고 말하라! 삼척 검에 혼을 불태우며 장렬히 죽어버리라고 하라! 그것이 진정 사나이다운 길이며.... 명문대파의 떳떳한 대의라고 나에게 말해 달라! 이제 더 이상..... 그런 환상은 대의라 외치지 말라...... 나는 다음날도...... 그리고, 또 다음날도 구양조운의 목옥을 찾아갔다. 스스로 내 마음에게 다짐을 시키는 의미에서...... 완벽하게 그를 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아아,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를 쉽게 친하게 했던 것은 우리 두 사람의 영혼을 황폐케 했던 묵은 고독 의 상처, 지울 수 없는 현란한 고독 탓이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삶을 쫓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에 집착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있어도 철저하게 자기 생각만 하는 개체에 불과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들을 편안케 하고 쉽게 접근하게 하여 오랜 우정의 사이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저 사람을 이성으로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는데서 오는 방심과 같은 그런 편안함, 그는 늘 지저분하고 작은 목옥에 처박혀 있었다. 언제 어떤 시각에 느닷없이 들려도 있는 사람, 내가 가면 언제나 있는 그사람, 그것이 내가 간직하게 된 작은 행복이었으며 유일한 것이었다. 내가 그의 목옥으로 들어가면 그는 늘 첫날 마셨던 것과 같은 차를 내준다. 그리고 똑같은 무뚝뚝한 음성을 내뱉는다. [물이 없어서 미안하오.] 그러나, 그 무뚝뚝함 속에 거친 우정이 담긴 것을 나는 언젠가부터 느끼게 되었다. 섬세하게 마음을 보듬어오는 미사려구보다 그런 투박한 정이 훨씬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내가 한가한 날이면 우리는 가까운 산으로 나가리를 즐겼다. 그는 대호법이고 나는 총좌이니 같이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다. 하나 본다 한들 상관도 없었다. 우리는 정직했고 최대한 서로에게 솔직했으니까. 우리들의 관계는 각기 제 생각에만 골몰하고 말수가 적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초조해 하거 나 애쓰지 않아도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존중했다기 보다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심산의 유적, 쏟아지는 햇살 고요하고괴괴한 산봉의 능선을 멍하니 바 라보곤 했다. 그러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그는 내 시선보다 더 멀리 막연히 바라보고 있거나, 나무를 뛰어오는 원숭이 떼를 바라보거나 아무 말없이 쿨쿨 잠들어 있거나 했다. 때때로 우리들의 눈이 마주치면 우리들의 눈은 똑같은 공허 때문에 가슴 밑바 닥이 뻥 뚫려 있는 것조차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무서운 발견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선의 마주침조차 피하곤 했다. 가까운 호수로 나갔고 조금 먼 대초원으로 나갔다. 그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거나...... 우리는 애써 손잡지 아니했고 애써 무관심하지도 아니했고, 섣불리 사랑하지 도 아니 했다. 지쳐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휜 달빛이 있었다. 달빛은 우리를 그저 비추고 있었고 달빛 속에서 그와 나는 창백하게 헤어졌 다. 우리들은 헤어지기를 연연해 하지도 않았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지도 아니 했다. 그것들은 서서히 나를 치유시켰다. 내가 다시 혼자 설 수 있도록 일으켜 주었다. 그와의 만남은 결코 화려하지는 아니 했다. 그것은 은은한 것, 잔잔한 것, 고요한 것, 회색이나 잿빛 같은 것, 내 생애에서 이토록 순수하고 아름답게 승화되어 있었던 적이 있을까? 이제 나는 그를 마음 속 깊이 좋아한다. 가지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고 느끼는 존재, 그리고, 나는 다시 검을 잡았다. ----연맹 대순찰의 패를 드릴테니 각 분타의 감찰을 겸해서 유람이라도 하고 오세요.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난 후 정식으로 대세를 논하도록 해요. 한 달 정도의 기한이면 좋을 거예요. ...... 그것은 검후 경설의 제의였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구양조운은 말없이 행장을 꾸려서 그 날로 지옥련의 문을 나섰다. 팔월의 폭염도 이제 거의 저무는가 싶은 팔월 스무 닷새날의 일이었다. 폭풍, 그것은 무림인들을 경악케 하고도 남을 만한 대폭풍이었다. 지옥련, 이 사상최대 사파조직의 지부분타들이 도처에서 정신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월 스무 여드레날, 용문산의 용문지부 흑해조룡 여수를 비롯한 칠십 오명의 목이 지부 정문에 나 란히 걸린 것을 필두로 해서...... 그제는 양주지부의 천기절독 고양이 그의 방에서 목없이 시체로 발견되고, 어제 아침엔 또 서주지부의 창술명인 당익이 그의 창에 가슴이 꿰뚫려 죽었 다. 자고 깨면 지옥련의 거두들이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는 무서운 일이 근 열흘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지옥련에서도 크게 당황하여 지부분맹 호맹 철무쌍을 우두머리로 하여 조사단을 급파했으나 흉수의 행적은 구름을 잡듯 그저 묘연이라! 이 무서운 도살인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열 두번째 분타주의 목이 떨어졌을 때였다. 신양지부 마라신장은 그의 침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침실벽에는 핏빛 혈서 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천역지인들을 베어 가노라! 불마공자!> 불마공자! 이는 바로 제칠대무종의 이름이 아닌가? 헌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날 또 벌어졌다. 신양으로부터 오백 리나 떨어진 유주지부의 독검 화악이 비명에 쓰러지더니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문구가 그의 방에 남겨졌던 것이다. <의인 불마의 행적을 따라 거듭 심판을 내리노라! 귀곡서생!> 오오...... 귀곡서생! 이는 또한 제육대무종의 이름인 것이니......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 두명의 신비고수들은 지옥련의 전분타를 아예 아수라장 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이들이 베어낸 지옥련 고수들은 분타주 스물 하나와 분타고수 일천 오백! 지옥련으로서는 실로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부랴부랴 연맹의 절정고수들을 각 분타로 급파하여 지키도록 함과 동 시에, 환우팔마의 검분맹을 총 출동시켜 두 고수의 뒤를 추적케 하였다. 그러나, 불마공자와 귀곡서생은 마치 그림자는 있되 실체는 없는 것 같았다. 천리 밖에 있는가 싶으면 지척에서 출몰하고 지척인가 싶으면 어느 새 오백 리 밖의 분타가 박살난다. 불마공자! 귀곡서생!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다 나타나는가? 이들은 왜 지옥련을 이토록 무섭게 닥달해 나갈까?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의문이었다. 햇살이 수면을 비치니 물 속의 모래알까지 말갛게 시야에 들어왔다. 넓디넓은 동정호의 서쪽 호변, 호수엔 물구경을 나온 유람선들이 이리저리 부유하고, 호변엔 산책 나온 선남 선녀들이 유유히 거니니 그 모습이란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 호변의 한쪽에 아까부터 한 사람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묵묵히 서 있었다. 울퉁불퉁한 추악한 얼굴, 일신에는 백의를 걸쳤으며 멀리서 보기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못생긴 추 면청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선은 호면에 꽂힌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이때다. 문득, 그의 입술 새로 한 소리 나직한 침성이 흘러나왔다. ---베고 베고 또 베어도 심중의 허전함은 풀리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인간인가...... 구양조운, 그는 바로 불마공자의 신분으로 역용하고 있는 구양조운이었다. 지옥련은 나온 이래 그는 실로 종횡무진한 활약을 벌였다. 동서 천리를 제 집 안방처럼 누비며 초토화시킨 분타의 수, 이미 스물 다섯, 그가 이토록 신비한 활약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양심여의공의 힘이었 다. 이미 그는 양심여의공의 제이단계 양심의형을 거푸 여섯 시진 동안 펼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즉, 대순찰의 신분으로 어느 한 분타를 들어서면서, 그의 환체는 그로부터 수 백 리밖의 또 다른 분타를 박살낼 수 있었다는 얘기...... 실로 완벽하고도 기묘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활약은 그토록 통쾌해도 마음은 종래 석연치가 않다. 그것은 분명히 애초에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다. 남쪽에서부터 호수를 스쳐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한 차례 뒤흔들고 지나 쳤다. 이때 돌연, 느닷없이 조그만 나룻배 하나가 구양조운이 있는 쪽으로 무지막지한 속도로 다가왔다. 그 배는 순식간에 호변에까지 이르렀다. 이어, 배의 안에선 머리를 두 갈래로 내려땋은 십 육칠 세 가량의 청의소녀가 폴짝 뛰어 내렸다. 무슨 일인지 그녀의 얼굴엔 다급한 빛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호변에 내려서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 돌연, 청의소녀는 종종걸음으로 구양조운을 향해 다가섰다. 구양조운의 무심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청의소녀는 다짜고짜 그의 앞에 넙죽 절을 올리더니 울먹이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리! 나리 혹시 이 가까운 곳에 의점(醫店)이..... 아씨가...... 혹시 나리께선 의술을 모르시나요.......] 소녀의 말은 도대체 두서가 없었다. 구양조운은 일순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너는 몹시 당황하고 있구나. 무슨 일인지천천히 얘기해 보거라. 그래야 내가 알께 아니냐?] 청의소녀는 여전히 울먹이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씨와..... 아씨와 저는 이곳에 유람을 나섰는데...... 갑자기 아씨가 쓰러지셨어요...... 지금 막 열이 오르고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아요.....]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소녀는 자기 주인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다가 주인이 갑자기 급병으 로 쓰러지자 다급하여 무턱대고 호변으로 달려나온 모양이었다. 구양조운은 잠시 청의소녀를 바라보다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약간 의도를 알고 있으니 나와 함께 가보도록 하자. 너는 어서 길을 안 내하거라.] 순간, 청의소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얼굴을 펴며 웃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아아..... 소선은 몹시 운이 좋군요. 뜻밖에도 이런 곳에서 의수를 만나게 되다니요!] 구양조운을 의원으로 오인한 듯한 말이었다. 청의소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서돌러 구양조운을 호변에 놓인 배로 이끌 었다. 배, 그 배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을 이룬 호화선이었다. 구양조운은 소녀의 주인이 이러한 호화선을 타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배 안에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구양조운은 의아한 생각에 앞서가는 청의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넓은 배에 사람이라곤 너와 네 주인밖에 없느냐?] [아씨는 원래 번거로운 것을 몹시 싫어하세요. 그래서 항상 저와 둘이서만 유 람을 나오신답니다.] 선창의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개의 호화로운 방이 나타났다. 청의소녀는 구양조운을 데리고 그 중 제일 끝방으로 들어섰다. 구양조운은 무심코 안으로 들어서자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규방, 이곳은 여인이 처소로 사용하는 곳이 듯 들어서자마자 여인 특유의 방향이 사 정없이 코를 찔러왔다. 뿐만 아니라, 방은 몹시 우아하고 품위있게 꾸며져 있어서 일견해 봐도 이 방을 사용하는 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저 분이예요.] 청의소녀는 방의 한쪽을 가리켜보이고 난 후, 슬며시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의 한쪽에는 분홍빛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휘장 새로 여인의 누워있는 모습이 은은히 시야에 비쳐 들었다. 몹시 답답하고 힘들어 보이는 신음성이 휘장 새로 흘러나왔다. [으음.......] 구양조운은 신음소리만 듣고도 이 여인이 지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그는 망설임없이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이어, 조심스런 동작으로 휘장을 들췄다. 여인, 여인은 일신에 속히 환히 들여다 보이는 망사의만을 걸치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투명한 망사 새로 무르익은 여체가 환히 내비치자 눈썹을 찌푸렸 다. 여인은 그를 향해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으음.....] 구양조운은 사정없이 콧속을 파고드는 그윽한 체향에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돌아누운 여인의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여인, 낯익은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놀랍게도 점창파 유사 이래 최초의 여장령인 이벽군이 아닌 가? 이때 돌연, 잠자듯 누운 채 미미한 신음만 흘리고 있던 이벽군의 입에서 보다 크고 고통 스러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구양조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을 새도 없이 멈칫하고 말았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 이벽군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그를 향했는데..... 시선, 아아, 그 시선이 어찌 예전에 그가 알고 있던 이벽군의 아름다운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눈자위는 붉게 충혈되었고,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는 밝고 영롱하기는 커녕 기이한 색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놀라기에 앞서 크게 의아해졌다. 이때, 무기력해 보이던 이벽군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리에서 튀어 일어났다. 교수로 구양조운의 목을 감아오며 색정 어린 목소리를 터뜨렸다. [으음.... 나...... 나 좀.....] 구양조운은 선 자리에서 빙글 몸을 돌려 이벽군의 눈길을 피해냈다. 연후, 싸늘한 눈초리로 이벽군을 주시했다. 이벽군은 구양조운이 자신의 뜻대로 붙잡혀 주지 않자 까르르 미친 듯한 교소 를 터뜨렸다. 그러다 돌연, 재차 몸을 날려 구양조운을 향해 사납게 덮쳐갔다. 그녀의 신법은 형용할 수 없이 빨랐지만 구양조운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는 단지 가볍게 어깨를 흔드는 동작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해낸 다음 문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소선! 소선! 밖에 있다면 어서 이리 들어오너라! 나는 네게 물어볼 것이 있 다!] 그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밖으로 나갔던 소선이 의아한 기색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에 벌어진 상황이 몹시 놀라웠는지 짤막한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어, 놀람이 가득한 두 눈으로 구양조운을 바라보았다. 이때, 이벽군은 다시 그를 향해 득달같이 덮쳐들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이번엔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선 채 그녀의 손길이 그의 가슴 앞까지 이르도록 기다 렸다가 돌연 유령처럼 스르르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이어, 재빨리 그녀의 혼혈을 가볍게 짚었다. 순간, 이벽군의 입에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답답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고목이 쓰러지듯 구양조운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한쪽에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선은 놀란 외침을 내질렀다. [나리! 나리는......] 구양조운은 이벽군의 몸을 부축한 채 냉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요점만 간단히 얘기하도록 하자. 이곳에 오기 전에 너와 너의 주인은 무슨 일을 겪었느냐?] 소선은 그의 말에 머뭇거리기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구양조운은 빠르게 다시말을 이었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네 주인의 병세가 괴이하여 알고자 하는 것 뿐이니 어서 말하도록 해라.] 소선은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 난 후,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떼었다. 우리는 중대한 사명을 띄고 출도한 천년맹의 사람들이예요. 우리는 일단의 괴 이한 무리들을 쫓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역습을 당했어요. 소저는 워낙 그 상세가 다급하여 제가 먼저 모시고 나온 것이예요.] 구양조운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이벽군, 그는 구대문파 정예의 일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남은 정예들은.......? [너도 천년맹의 사람인가?] [재육점창지단 소속이예요.] 서녀 소선은 말을 맺고난 후 지그시 구양조운을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태도! 구양조운은 일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우수를 불쑥 내밀었다. 우수 손목에 채인 기병 반야선의 광채가 흐린 햇살 아래서 뽀오얗게 빛났다. [소선 그대는 이 물건을 알아보는가?] 소선은 무심히 그 옥환 모양의 기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처음에는 의아함, 이어, 그 의아함은 이내 눈녹듯 사라지고, 대신 타오른 것은 극도의 놀람과 경악, 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며 구양조운을 올려다 보더니 느닷없이 그 자리에서 털 썩 무릎을 꿇었다. [삼가 비직이 대맹 총통령을 뵈옵니다.] 백가로는 말했었다. 그 옥환은 연맹이 수여한 그의 신분을 알리는 것이라고, 총통령, 이는 바로 천년맹 극상 이십위 안에 드는 요직이 아닌가? 구양조운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그곳은 이곳에서 약 반 시간 가량 걸려요. 만위탄이라는 곳이예요.] [좋다. 너는 밖에서 이각여만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연후 나를 그곳으로 안내 하도록.] [존명, 받듭니다.] 소선은 말과 함께 그를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여 보인 후, 놀란 기러기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第 四十一 章 만남과 죽음 이벽군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또한, 호흡은 몹시 불규칙한 것이 그대로 나둔다면 금방이라도 혈관이 터지고 맥이 끊겨 죽고말 것 같았다. [강력한 미약이로군.]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난 구양조운은 빠른 걸음으로 침상으로 다가가 이벽군을 그 위에 눕혔다. 그러자, 눕히긴 눕혀 놨으되 그 뒤의 일을 생각하니 난감하기만 했다. 일반적으로, 미약이란 그 시술자만이 해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가 이벽군에게 미약을 전개한 자를 찾아내어 해약을 얻느다손 쳐도 왔다갔 다하는 사이에 이미 이벽군은 정염을 이기지 못해 혈관이 터져 죽어버릴 것이 아닌가? 구양조운은 방 안을 끓는 솥 안의 개미처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쩐다.....?] 그러기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이때 이벽군의 전신은 아예 불덩어리처럼 시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아마도 미약의 약효가 극에 치달은 듯...... [으으음.......] 돌연, 방 안을 맴돌기만 하던 구양조운의 몸이 뚝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은 곧장 침상의 이벽군을 향해 있었는데 그 시선 속에 어떤 확고한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그 성사는 하늘에 있다.......] 나직이 중얼거리고 난 구양조운은 이벽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옷을 날렵하게 벗기기 시작했다. 이벽군은 본래 투명한 망사의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망사의가 벗겨져 나가자 이내 얼음처럼 매끄러운 여인의 속살과 분홍빛 속옷 이 드러났다. 구양조운은 비록 희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 무공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여인의 나신은 무심냉막한 그의 마음을 절로 흔들리게 만들었다. 무르익은 젖가슴을 가린 분홍빛 젓가리개와, 최후의 비소를 가린 조그만 헝겁 조각마저 그의 떨리는 손에 의해 벗겨져 나갔다. 순간, 드러나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전라의 여체! 보라! 구름결같이 보드랍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분홍빛 침상 위에서 해초처럼 흐느 적이고, 늘어뜨린 사지는 폭발적인 유혹의 향을 물씬 풍겨냈다. 우유빛 막이라도 한겹 돌린 듯 뽀얀 목덜미 아래 탐스럽게 솟아오른 가슴의 윤기는 어떠한가? 아직 사내의 손길을 모르는 육봉 위의 연보라빛 꼭지는 수줍음으로 파르르 몸 을 떨고 있었다. 앙증맞도록 가는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호선과 희고 긴 다리는 어둠을 차 고 오른 은어처럼 한없이 신선하고 그윽한 미태를 자아내니..... 이를 일컬어 청정순백한 빙기옥골지신이라 하였던가? 어쨌든, 이 교태롭고 황홀한 나신 앞에 선 사내는 그 다음에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잊을 듯 망연한 시선으로 나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돌연, 미동도 않고 누워있던 이벽군의 전신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혈관이 파열되기 직전의 현상이 아닌가? 넋을 잃고 있던 구양조운은 대경하여 황망히 그녀의 혼혈을 풀어주었다. 순간, 이벽군의 몸이 그 자리에서 한 자나 풀썩 튀어 오르더니 뼈가 없는 듯한 사지 로 구양조운의 몸을 휘감아갔다. 구양조운은 나직한 탄식과 함께 그녀의 몸을 마주 안았다. [아아..... 어..... 어서...... 나......를.......아아.....] [........!] 구양조운은 뱀처럼 휘감겨 드는 그녀의 교구를 안은 채 침상에 쓰러졌다. 이벽군, 그녀의 몸은 이미 성숙할대로 성숙해 있었다.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용모는 그녀를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천상의 선녀 처엄 보이도록 만들었다. 구양조운은 자신의 입술로 슬며시 이벽군의 꽃잎을 문 듯 촉촉히 젖어오른 입 술을 눌렀다. 그의 가슴속에는 한 줄기 욕망의 불길이 슬며시 타올랐다. 그리고, 그 불길은 이내 그의 살을 태우기라도 할 듯 뜨거운 열기로 변해 전신을 소용 돌이쳤다. 춘풍, 느닷없이 방 안엔 후덥지근한 춘풍이 사납게 몰아쳐 왔다. 올려졌던 휘장도 부끄러워졌는지 살며시 내려져 두 사람의 벌거숭이 몸을 감 추어 주었다. 시체, 관도의 정중앙에 놓인 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시체였다. 이 시체는 얼굴이 박살난 채 땅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구양조운은 몸을 굽혀 시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 다. [흔히 볼 수 없는 고수로군. 놀라울만한 외가공력이다......] 또다른 사람의 몸에서 흘려진 것인 듯한 핏자욱은 관도 옆의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구양조운은 느릿하게 시체를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로 그의 눈에 뜨인 것은 이제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청년 두 명과 백 발이 성성한 노인의 시체였다. 이들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바위 틈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는데 구 양조운은 노인의 가슴 새로 불쑥 나온 조그마한 삼각기에 가볍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 그것은 뒷면에 날아오를 듯한 네 마리의 용이 새겨진 몹시 눈에 익어 보이는 것으로써 바로 곤륜장교만이 지닐 수 있는 신물이었던 것이다. [곤륜파의 용검수사......] 두 청년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구양조운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이번엔 청수한 면모의 중년수사와 일견하여 몹시 아름다운 용모의 중년부인이 었다. 그들은 발가벗겨진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중년수사는 손에 한 자루의 금필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절명필, 이 사람은 바로 공동파의 필절심절이 아닌가? 말할 것도 없이 이 부 인은 그의 아내인 부용선자.....] 조금 더 나가자, 이번엔 여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서로 얽힌 채 엎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구양조운의 두 눈에서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개방, 이 쓰러진 사람들은 남루한 옷에 허리엔 매듭을 한 개방의 문인들이었던 것이 다. 구양조운의 몸이 돌연, 쏘아낸 사라처럼 앞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숲 속에서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어린 아이 두 명이 살짝 뛰어 나왔다. 그들은 이제 나이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와 소년이었는데 두 아이는 길목 을 막고 선 채 구양조운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저씨는 어딜 가시나요?] 구양조운은 이들의 돌연한 출현에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얼굴에서 사라지고 냉막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온 아이들이냐?] 두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구양조운을 행해 다가왔다. 이어, 구양조운의 두 팔을 나누어 잡으며 어리광 부리듯 말했다. [저희는 그렇잖아도 몹시 심심하던 참이었어요. 아저씨는 저희와 함께 놀아 주 실 건가요?] 말과 함께 두 아이는 잡고 있던 구양조운의 두 팔을 양쪽에서 힘껏 잡아 당겼 다. 천근의 바위를 잡아 당기는 힘이다. 피! 피가 튈 것이다. 상대는 두 팔이 단숨에 뽑힌 고통에 몸을 휘청일 것이고 그 틈에 두 아이의 발은 그의 복부를 꿰뚫고 창자를 흐뜨러뜨린다. 이 수법은 이들이 이미 여러 번 썼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건데 그들은 이 수법을 지금까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동남동녀의 안색이 싹 돌변했다. 믿을 수 없게도 구양조운의 팔은 뽑아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손만 자석에라도 붙은 듯 그의 손에 철썩 달라 붙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어.....?] [이 이게.....?] 동남동녀는 서로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후, 돌연, 각자 발을 들어 장홍홍천(長虹紅天)과 화권수회법으로 구양조운의 단전혈을 찔러왔다. 악독한 수법이었다. 만약 이 발길에 차인다면 영락없이 복부가 터져 죽게되고 말리라/ 구양조운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악독한 수법이로군.] 말이 끝나는 순간, 퍽! 퍽! 하고 두 아이의 발이 정통으로 그의 단전혈을 내질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구양조운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며 두 아이는 자신들의 발이 그 의 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동남동녀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제서야 이들은 자신들이 개세의 고수를 만난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 아저씨!] [아저씨!] 구양조운은 짐짓 처연한 표정을 짓는 이들을 향해 싸늘하게 웃어 보이며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십악동자, 십탕옥녀, 백인귀두의 서열 아흔 아홉 번째인 너희들의 이름을 나 는 이미 듣고 있었지.] 백인귀두! 사파제일의 두뇌조직! 이 조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수뇌인 무량뇌 제갈천부터가 그랬다. 하나, 구양조운은 이미 지옥련의 핵심서열로 올라있는 인물, 그는 언젠가 검후 경설의 입에서 이 백인귀두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음 을 기억해 냈다. ----백인귀두는 백 사람이 이루고 있는 조직이예요. 그것은 크게 두 개로 나뉘어 지죠. 문귀인(文貴人)과 무귀두(武鬼頭)가 그것이예요. 문귀두는 모두 칠십 칠인으로서 바로 모든 정보를 통괄하고 제어하며 지시하 는 두뇌예요. 이들은 마치 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칠십 칠인의 두뇌를 연결시킬 수 있 는 신비로운 점이 있어요. 즉, 아무리 사소한 계략이라도 일흔 일곱 명의 지혜가 모아지게 되는 거예요. 반면에, 삼십 삼 인의 무귀두는 그들 문귀두에게 필요한 정보를 모집하는 손발의 역할 을 해요. 이들은 그 하나하나가 놀라운 무예를 지녔으며 그 무예를 바탕으로 문귀두가 원하는 어떤 정보라도 거의 완벽하게 수집해 낼 수 있어요. 하지만, 두 개의 문무기관은 어느 한쪽이라도 없으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요. 그것이 백인귀두의 최대단점이예요. 구양조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십악동자와 십탕옥녀의 안색이 거듭 변했다. 그들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돌연 미친 듯한 웃음을 터뜨렸 다. [하하...... 우리를 알고 있다니.....] [깔깔..... 살려둘 수 없는 자!] 순간, 숲 속의 이곳 저곳에서 이들의 웃음과 똑같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수십 명의 동남동녀가 나타났다. 이들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벌거벗은 알몸들이었다. 그 가슴에는 일률적으로 동풍(童風)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우수에는 붉은 수실의 단검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그들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은 채 순식간에 구양조운의 앞에까지 다가왔다. 이어, 그의 몸을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동풍이 이니 동풍이 따라 이네, 이 동풍은 혈풍이니 어린 아이를 울리지 말라. 어린 아이를 울리면 무서운 일이 벌어지네. 천하는 핏빛으로 온통 뒤덮이고 만다네....... 사내 아이들은 계속 이 노래를 불렀다. 계집아이들의 몸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데다 수줍을 줄을 몰랐다. 아무리 어린 아이지만 여인의 굴곡을 갖취가는 그 몸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자 구양조운은 심중으로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울고, 웃고, 노래하고, 떠들고....... 그러다 돌연, 계집아이 하나가 까르르 흐드러진 교소를 터뜨리며 둥실 허공으로 몸을 뛰웠 다. 순간, 그녀의 좌우에 서 있던 사내 아이 두명이 재빨리 들고 있던 검을 그녀의 몸을 향해 힘껏 던졌다. 검은 정확히 계집 아이의 가슴 한복판에 나란히 꽂혔다. 다음 순간, 계집아이가 입을 활짝 벌리니 그곳으로부터 시커먼 독혈이 자욱이 쏟아져 나 왔다. [사중극혈!] 아아! 사중극혈, 이것은 평소에 독을 음식으로 섭취하는 독인들이 죽음으로써 펼치는 독문의 제일마공이었다. 이것은 시전할 때 외부로부터의 강렬한 충격이 있어야하며, 한 번 펼치고 나 면 시전 자는 죽는다. 그러나, 그 위력이야말로 전무후무한 것이어서 어떠한 물체든지 이 독에 스치기만 하 면 즉시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구양조운은 한눈에 이 독공을 알아보았다. 그의 몸에 붙어 있던 십탕옥녀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댔다. [잘한다! 죽여! 나는 죽어도 상관없어! 깔깔.......] [마성.] 구양조운은 이들의 마성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것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거기다가, 이들은 또 하나같이 독물을 음식으로 섭취하는 독인의 몸이 아닌가? 구양조운은 빙글 몸을 돌리며 매달려 있던 십탕옥녀를 허공으로 쳐냈다. 순간, 십탕옥녀의 몸은 그 소녀가 뿜어낸 사중극혈에 정통으로 명중되어 그 즉시 피 시식하는 기음과 함께 녹아버리고 말았다. 동남동녀, 백인귀두 중 제 구십구로 삼월동풍방을 이루고 있는 이들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 아이가 떠오르면 두 자루의 검이 그 아이의 가슴에 꽂히고, 이어 자욱이 뿜어져 나오는 독혈! 구양조운은 십악동자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허나, 그는 그 다음 아이들은 차마 어쩌지 못했다. 벌거벗은 몸, 천진난만한 웃음, 아아, 도대체 이 아이들에게 어찌 장을 쳐내고 검을 휘두를 것인가? 그가 망설이는 도중에도 동남동녀들은 공격을 계속했다. [하하.......] [호호호......] 괴이한 웃음, 그리고 허공을 난무하는 독혈들! 이때 돌연, 휙! 휙! 하고 옷자락이 휘날리는 파공음과 함께 장내로 세 줄기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 다. 그들은 뒤어들기 무섭게 요사스러운 아이들을 향해 사나운 기세로 검들을 휘 둘러 냈다. 퍼억! 파악! [아악!] [아아악!]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피를 흩뿌리며 나뒹굴었다. 나타난 사람들은 온몸에 피칠을 하듯 흠뻑 피를 뒤집어 쓴 삼인의 백의인들이 었다. 헌데, 그 중 선두에 선 자를 본 순간 구양조운의 두 눈으로 커다란 격동의 빛이 스 텨 지났다. [사형, 무화사형......?] 순간, 막 한 아이를 검으로 베어내고 난 신수백의인의 신형이 주춤했다. 그는 힐끗 구양조운을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얼어붙듯 몸이 굳어버렸다. [넌......] 무화! 아아..... 도대체 얼마만의 만남인가?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순간 만감을 담은 채 교차했다. 이때, 무화는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휘젓고 나더니 구양조 운을 향해 급히 말했다. [사제! 일이 다급하다! 우리는 구파의 전력을 동원해 백인귀두의 무귀인들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히려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어서 숲 안으로 들어 가 주게! 구파의 정예가 모조리 몰살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구양조운은 무화승인을 지그시 한 차례 바라본 후 맹렬히 땅을 박찼다. 슈우욱! 빛! 한 줄기 빛살, 땅에 제멋대로 널브러진 시체는 갈 수록 많아졌다. 그 중엔 나부파의 철심노인과 공래파의 검신같은 절정의 고수들도 끼어 있었 다. 슈유욱! 이 발은 왜 이리도 더딘지..... 숲 안에 사방 백여 장의 공지가 하나 있었다. 구양조운이 그곳에 당도한 것과 찢어지는 듯한 한소리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으아악!] 피! 자욱한 혈막 속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숲의 공터엔 일견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고 또한 무수히 많 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구양조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지금 목에서 피를 내뿜으며 땅을 향해 쓰러지고 있는 한 승려의 얼굴만이 그 의 망막에 쏟아져 들어왔을 뿐이다. [사형! 삼사형!] 삼사형, 구양조운은 세째 사형이니 이는 바로 수경화상이 아닌가? 수경은 자신의 몸이 누구에게 안겨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자...... 누구의 품이기에 이렇게 따뜻한 걸까...... 흐릿하게 두개 세개로 겹쳐지는 얼굴, 안간힘을 쓰듯 두 눈에 힘을 모아본 후에야 얼굴은 간신히 하나로 모아졌다. 순간, 수경화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 [사형! 나요!] 수경화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녀석..... 다행히..... 나는 너를 만나는군.....] [사형!] [제기랄! 풍운도 죽었어. 놈은 날 보고 밤낮 책벌레라고 비웃더니 제놈이 먼저 죽고 만거야.... 도..... 솔...... 너도 내가 책만 읽는 것이 싫었나.....?] 눈앞이 흐려져 온다. 구양조운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오........] [사실 풍운의 말도 옳아..... 내가 무공쪽으로 조금만 더..... 신경을 썼어도 이렇게 허무하게는...... 우욱!] 돌연, 수경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구양조운의 얼굴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난..... 널...... 안다....... 네 고통을...... 네 아픔을....... 그러나 도솔...... 부디 이렇게 죽어가는 우리의 뜻을 외면하지..... 말라...... 핫하........ 저기 사부님의 웃는 무습이 보이는 구나......] 쿡! 그의 고개가 부러지듯 밑으로 떨구어져 내렸다. 죽은 것이다. [사........형............] 난세의 호승 수경, 천하제일인 신승 자초의 문하로 입신하여 축복받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렇 게 죽고 마는가? 구양조운은 눈물을 흘리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다만, 수경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을 굳세게 끌어안는 시선 속으로 암울한 귀광을 번뜩이듯 피워올렸을 뿐, 이윽고, 그는 느릿하게 그리고 몹시 완만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활활 타오르는 시선이 전면을 향했다. <五卷 끝> 第 四十二 章 容恕 할 수 없는 하늘 사람들, 먼저, 시선 속으로 빨리듯 한 사람이 쏘아져 들어왔다. 공륜, 그의 가슴에는 톱니바퀴같은 철륜 하나가 반이나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는 지금 한 그루의 노송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어 구양조운을 향해 웃고 있 었다. 웃는 얼굴은 정녕 창백했으나...... 그 웃음속에 담긴 것은 어린 사제에 대한 무한한 신비의 빛, (대사형...... 당신마저도.....) (괜찮아. 난 괜찮아. 이까짓 쇠붙이에 내가 죽을 사람인가......? 그건 그렇고 이 빚이나 좀 갚아주게나..... 빌어먹을! 백인귀두는 생각외도 강했단 말이야......) 그의 주위로는 온통 혈의처럼 변한 백의를 걸친 천년맹의 고수들이 우울하게 서 있었다. 그들 중에 멀쩡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검이나 기타 병장기로 그들은 간신히 후들거리는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대사형의 가슴에 꽂힌 철륜 새로 보일 듯 말 듯 비치고 있는 선혈을 힐끗 바 라보고 난 구양조운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천천히 전면을 향했다. 다시 사람들, 삼십인 쯤 될까, 제각기 붉고 푸른 갖가지의 옷을 걸치고 있다. 나이도 약관에서부터 고희까지 다양했고 들고 있는 무기 또한 참으로 각양각 색이다.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들의 몸 주변으로는 한 줄기의 기이한 사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기는 마치 녹색귀화가 그들의 몸 주위로 몰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인귀두! 이들이 바로 사파최고의 정예조직인 백인귀두의 삼십삼무귀인인 것이다. 구양조운은 천천히 어깨위로 단장검을 풀어 들었다. 그는 보는 이가 신경질이 날 정도로 완만하게 검의 단추를 끌렀고, 어어 거무 튀튀한 반토막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삼십삼무귀인의 선두에 서있던 흑포노인 하나가 음산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소년, 너는 누군가?] 구양조운은 여전히 자신의 검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한기가 오싹 끼칠 만큼 냉막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마공자, 살견도부라고도 하지.] 순간, 제각기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삼십삼무귀인의 시선이 일제히 구양조운을 향했다. 그들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더니 돌연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들을 흘려냈다. [큽큽....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더니.......] [켈켈.....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군?] 흑포노인 또한 냉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사로 귀도도 만나서 반갑소, 불마.] 그의 옆에는 먹물같은 묵의에 세모꼴의 수염을 기른 노인이 서 있었다. [제구로 천수묘인이오.] 다시, 우측에 서 있던 음흉한 외모의 채의중년인이 말을 받았다. [제십사로 도제이오.] 이어, 삼십일인은 한 명씩 자신들의 성명을 쭉 말해 나갔다. 제십오로 혈편마영..... 제십육로 표심거부..... 제십구로 혈영제군..... 하나같이 일대를 풍미하던 거살마웅들, 구양조운은 천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그 초점은 아무 곳에도 맞춰져 있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시선은 허공에 그냥 둥둥 떠있다는 게 옳았다. [좋은 일이로군..... 죽은 사형의 목과 바꿀 서른 한 개의 목숨이라..... 또 있는지 모르겠소. 억울한 그의 혼백에다 제물로 바쳐질 작자들 말이오.......] 이 말에 삼십삼무귀인은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평생을 도산검림에서 굴러 온 역전의 고수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 짙은 피비린내의 공포를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삼십삼무귀인은 서로의 얼굴들을 힐끗 바라본 후, 수중의 병기들을 힘차게 꼬 나쥐었다. 이어,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폭갈이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혈편무적!] [대전만분!] [철도광풍!] [야행박혼!] [잡문만겁!] [......!] [......!] 제각기 다른 서른 셋의 외침! 이어, 그들의 몸은 환상처럼 허공을 가르며 구양조운을 향해 덮쳐왔다. 혈편마영, 그는 무적삼십육편을 펼쳤다. 이것은 육육은 삼십육, 한 초가 각각 여섯 개의 변식이 있는 것으로서 마치 사막에 광풍이 휘몰아치듯 굉렬한 기세를 그 으뜸으로 한다. 표심거부, 그는 쇠주판이란 기형무기를 바탕으로 한 역천만겁살수를 폈다. 역천만겁살수는 총 네개의 수법으로 나뉘어지며 그중에서도 수백 개의 주판알 을 일시에 날려 보내는 비폭류가 그 으뜸이었다. 귀도, 그는 광풍팔십이도류를 펼쳤다. 이것은 따로 특이한 변식은 없으나 무거운 철도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대해의 파도가 억겁의 세월을 휘몰아치듯 상대방을 도의 속으로 몰아넣는 수법이었다. 천수묘인, 그는 천변만분의 암기수법을 그 위주로 했다. 그의 야행십절수란 수법 안엔 천하의 모든 암기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한 번 이 수법에 걸려들면 대라신선이라도 살아 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뿐인가, 삼십삼인이 지닌 제각기 다른 특기의 무예들이 한순간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것이니..... 보라, 무기와 무기가 공간을 가르는 소리는 귓청을 찢을 듯 하고, 삽시간에 파란 하늘을 까맣게 덮어버린 암기와 몸에서 쏟아져 나온 경풍은 산 이라도 허물 듯 했다. 쌔액---쌔! 쉬익---휙! 무림이 생긴 이래 한 사람을 향해 이토록 가공할 살수가 펼쳐진 적이 있었던 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런 대공세는 구양조운의 지척에까지 다가들었다. 슈슈슈...... 파파팟! 그런데도 구양조운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적도들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지금 발 밑을 향해 있었다. 수경사형의 싸늘하게 식은 시신, 한때는 웃고 떠들며 숨결을 토하던 육신이 지금은 저리도 초라하게 땅을 나뒹 굴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누가 이 애달픈 죽음을 보상할 것인가? 최초의 한자루 혈편이 구양조운의 가슴을 조각낼 듯 쏘아져 갔다. 숲 그늘 사이로 피로 물든 무화사형의 모습과 이벽군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 순간, 용이 울부짖는 듯한 용음이 구양조운의 입술을 뚫고 냉엄하게 터져나왔다. [타앗!] 철편을 종이 한 장 차이로 가슴 옆으로 흘려보낸 그의 몸이 둥실 허공으로 떠 올랐다. 동시에, 단장검으로부터 한 줄기 영롱한 묵광이 허공에 신룡의 그림자처럼 억겁의 수 를 놓기 시작했다. [혈한면면!] 아아..... 느닷없이 왜 이런 이름이 떠올랐을까? 구양조운이 펼친 것은 바로 귀곡별부의 벽력성군에게서 얻은 뇌정삼식의 제일 초였다. 파파팟! 안개처럼 뿌연 백색월구의 검막! 그 뽀얀 검막은 이어 그의 허리 어림에서부터 부채살이 퍼지듯 찬란한 백광과 함께 십팔방으로 폭사되었다. 순간, 그를 향해 짓쳐들던 삼십일무귀인은 경악으로 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움직임, 한 줄기 묵광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일제히 세상만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들이 용트림하는 듯한 것이 아닌가! 수만 마리의 용이 허공을 난비하고 맹수의 포효와 바다짐승의 외침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들이 한꺼번에 쓰러지는가 하면 억만 개의 풀잎과 꽃잎 이 허공을 난무했다. 마치, 바위의 한쪽 끝이 예리한 칼에 위해 베어져 나가듯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몸 에서 풀석하고 짙은 핏물이 피어올랐다. [으아악!] [으악!] 날던 자, 뛰던 자, 서던 자들이 몽땅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팔과 다리와 몸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붉디 붉은 선혈을! 이치적으로 따져볼 때 여기까지 펼치고 보면 구양조운은 더이상 펼칠것이 없 어야 한다. 뇌정삼식의 남은 두 초식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봐도 이해되어지지 않던 것 들이었으므로, 그러나..... 오오, 빌어먹을! 하필이면 사형의 죽음 앞에서 그 신비의 검초의 뜻이 선연하게 떠올라 줄게 뭔가? 구양조운은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한 줄기 굉렬한 외침을 들었다. ---마음을 숨기지 말라! 참된 검도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음이라!--- [제이검식..... 참회분루!] 아아...... 뇌정삼식의 제이검식. 이름하여 참회분루! 만산이 일제히 허물어지고, 다섯 개의 대해가 하늘 끝까지 격랑을 휘말아 올 린다. 폭풍이 돌연 대지를 휩쓸어가고, 땅은 일시에 그 종적을 잃고 말았다. 검식이 시전되는 순간, 이번엔 가운데의 칠팔 인의 가슴에서 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으아악! 으악!] [아악!] 만근의 화약이 터져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듯 임자 잃은 팔다리와 수급 들이 공간을 덧없이 난무했다. 공륜의 핏기잃은 얼굴에 한 줄기 빙그레 웃음이 스쳐 지났다. [우리..... 구대문파의 오백정예가 못한 일을 네 한자루 검이 해내는가.....? 이 녀석...... 정말 장하다.] 그의 눈가로 뿌연 눈물이 고여 들었다. 웃고 울며..... 스승 자초가 그를 저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보광의 마지막 생존자 공륜..... 그의 목이 느릿하게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태어난 흙위로 쿡하고 박혔 다. 이때, 단숨에 삼십삼무귀인의 반수 이상을 검하고혼으로 만들어 버린 구양조운으 가 몸은 팽이처럼 선회하며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보라, 저 아래 땅위를 목적도 없이 부유하고 있는 군상들, 죽음과 삶의 의미도 모른 채 덧없이 입씨름에 열중하고 있는 무리들, 공륜은 땅에 목을 묻고...... 그 위 하늘은 베면 피라도 밸듯 붉다. 문득, 하늘 한구석이 구양조운의 시야에 비쳐왔다. 그 하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제삼..... 천폭지열!] 하늘, 하늘을 본 적이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 것, 그러나, 또한 늘상 움직이며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지배하는 가장 크고 가장 넓은 존 재, 천폭지열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지막 검식, 즉 하늘 그 자체였다. 꽈르릉! 빛, 보는 이의 눈을 단숨에 멀릴 듯 강렬한 수만 갈래의 광채! 이것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거꾸로 솟는 폭포와도 같은 핏기둥과 함께 삼십삼무귀인의 남은 자들이 합창 이라도 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쿠르릉..... 쾅쾅! 피가 뒤엉킨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폭음은 대지를 찌르릉 울렸으며 사방 오십여 장 근처의 나무들은 뿌리채 뽑혀 허공을 날았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닥친 듯 광렬한 기세! 솟아 오른 먼지가 다시 가라앉는 데는 무려 반각의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모든 풍사가 지는 듯 그 흔적을 감추고 난 후, 구양조운은 공터의 한쪽에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넓이 십여 장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가 패여 있었고, 그 속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진 시체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군웅들은 공터로부터 십여 장 가량 떨어진 곳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 구양조운이 펼쳐낸 세 검식을 보았다. 차라리 보지않는 것만 못했다. 그들은 그러한 검식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아직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으며, 그 검식은 그들을 벌레처럼 초라한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아무리 무공의 길이 끝이 없다지만 이...... 이건......]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 우리는 지금 혹시 또하나의 검군이 탄생 하는 것을 보고있는 것이나 아닌지.....] 구양조운은 단장검에 베인 핏물을 닦아 갈무리한 후, 느릿하게 공륜의 시신 앞으로 다가 갔다. 그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대사형의 차가운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울고..... 계셨소..... 죽음의 순간에도 당신은 이 못난 사제의 성취를 기뻐해 주셨단 말이오..... 바보 같은 사형.....) 무화가 그의 옆으로 와 섰다. 구양조운은 시선도 돌려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이래도 우리는 환상을 쫓아야 합니까......?] 무화는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환상이라고 생각하나?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사제. 그런 것에 생존의 참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불가능에 도전하고..... 불꽃처럼 산화하고.....] [이들의 삶은 누가 보상해 줍니까......] [아미타불..... 아무도 해주지 않으니 그들 자신만이 스스로를 보상받을 뿐이네.] [냉정하시군요.] [아미타불.....] 무화는 울고 있었다. 그의 눈시울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구양조운은 탄식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안다. 알면서도 해본 소리다. 그는 하늘을 한 차례 고요히 우러러 본 후, 돌연 자신의 머리칼을 한줌이나 잘라냈다. 그는 그것을 무화의 손에 쥐어 주었다. [가겠소, 사형.] 두발을 자름은 맹세의 의미, 또한,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기약..... 구양조운의 몸이 느릿하게 석양 속으로 묻혀 들기 시작했다. 이벽군이 파르르 떨며 주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나, 그녀는 이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소리죽인 오열이 그녀의 떨리는 입술 새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보내고 돌아서서 고대에 다달으니, 산천은 끝닿은 델 알 길 없어라. 저문 날 새들도 깃을 찾아 오는데, 떠난 이는 쉬어간 흔적도 없구나....... 第 四十三 章 陰 謀 무량뇌 제갈천은 영산홍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화단 앞에 고요히 서 있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백의장삼, 단청의 허리띠 끝에 달린 주옥의 노리개가 아침햇살에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자세로 묵묵히 영산홍의 화엽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가지다. 왜........? 자신의 조직에 틈이 생기고 있는가? 이레 전엔 자신의 말초기관이랄 수 있는 오호십육방의 오백여 고수가 무너지 는 참변을 당했다. 또 그제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삼십삼무귀인이 몰살을 당했다. 그 타격은 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하나, 제갈천은 사실 그것을 그리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조직이란 것은 다시 만들면 되고...... 무예의 고수는 다시 키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벌어진 틈은 어찌하나? 어디에 틈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계란에 조그만 틈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비록 전체에 비하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 틈은 결국 계란 안의 노른자위를 모조리 쏟아내게 하고 말것이다. [구양조운.....] 그의 심중에 도사린 가장 큰 지옥은 바로 그다. 그가 오던 그 전날 내보냈던 수하가 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주의 대상입니다. 허와 실이 분명치 않고 그 마음이 드러나지 않읍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설사 그것이 맹의 일과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반드시 의심의 대상 에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 구양조운이 맹을 나간 직후부터 사고가 생기기 시작했다. 제갈천은 이것은 우연한 일이라고 보지 않았다. 각 지부의 분타가 무너질 때 설사 그가 무너진 지부분타의 천 리 밖에 있었다 해도 그는 반드시 의심을 해봐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제갈천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올 때가 되었는데.....] 이때 돌연, 화단 저쪽에 두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선두에 선 자는 마치 햇살을 보듯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공자, 그는 손에 한 개의 새장을 든 채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옥세개, 그는 바로 마맹의 지옥신룡 옥세개였다. 옥세개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오는 또 한사람이 있다. 일신으로부터 구름 같은 냉막함을 피어 올리고 있는 자..... 그가 또한 마맹 감찰제사당 부주 형위임을 알아본 순간 제갈천은 상쾌하게 웃 었다. [역시 오는군....] 옥세개는 느린듯 했지만 매우 빠르게 제갈천의 옆까지 이르렀다. [안녕하시오, 제갈공.] 제갈천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인 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셨는지......] 옥세개는 껄껄 웃으며 수중의 새장을 들어 보였다. [이 새가 어떻소?] 제갈천은 유심히 새를 바라본다. 새는 구관조다. 오색의 깃털과 주황의 부리, 뻗어내린 날개깃 등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상한 점은 발견못하겠소?] 제갈천은 더욱 시선을 모아본다. 이때, 그는 한가지 기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구관조는 인공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날개깃의 안쪽부분 깃털이 거의 반이나 잘려나가 있었다. 외관상으론 필요없는 깃털이 제거되어 더욱 빛나고 아름다워 보인다. 하나, 이 새는 날 수 없을 것이다. 안쪽 깃이 반이나 잘린 새가 어찌 날겠는가? [허허..... 인형 같은 새로군요.] [재미있지 않소?] 옥세개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새를 한 마리 잡아 보시지 않겠소?] 순간, 제갈천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그런 새를 발견하셨소?] [함부로 날으려는 새지요. 둥지를 잘못 찾아온 새이오. 이 새는 형부주가 발견 했소.] 제갈천은 한쪽의 형위를 힐끗 바라본 후, [올가미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마련했소. 하지만.....] 옥세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마련하지 않았다면 제갈맹주가 반드시 마련했을 올가미이기도 하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직이 폭소를 터뜨렸다. [핫하....] [핫하......] [그 새는 지금 어디 있소?] 여전히 웃음을 거품처럼 문 채로 옥세개가 말했다. [총좌를 만나고 있소.] 쿠당탕! 백가로는 의자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안돼!] 무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구양조운이 잘라놓고 간 머리칼을 막 그녀에게 보인 참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 본다. 아무리 큰일을 마주친다 해도 늘 물처럼 고요하고 얼음처럼 투명한 태도를 유 지할 수 있던 그녀였다. 헌데, 지금은 마치 도살 직전의 돼지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다람쥐 챗바퀴 돌듯 맴돌기 시작했다. [아아..... 어찌 이리 무모할 수가..... 도대체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이런 엉터리 같은 행동을......] 그녀의 중얼거림에 담긴 뜻을 무화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백가로! 그녀는 무려 반 각이나 빙글빙글 방안을 맴돌았다. 이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를 만났을 때의 특유한 습관이었다. 문득, 그녀의 발길이 그 자리에 뚝 멈춰졌다. 그녀는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 뒷쪽으로 늘어진 금황백녹적의 줄로 시선을 더 졌다. 그녀는 그쪽으로 빠르게 다가가더니 그 중, 가장 좌측의 금줄을 잡아당겼다. 순간, 무화의 동공 깊숙이 한 줄기 놀람의 빛이 번뜩 스쳐 지났다. 다섯 개의 줄, 저것은 천년맹의 중요고수를 소집할 때 쓰는 신호줄이었다. 적색은 맹의 총관급 이상, 그리고, 금색은 맹의 최고고수들인 오대장로를 소집하는 줄이었다. 무화가 알기로는 이제까지 저 줄은 한번도 당겨진 적이 없었다. 검군을 모셔오기 위해 회의를 소집할 때도 두 번째 단계인 황색 줄이 당겨졌 을 뿐이다. 그로부터 반다경의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섯 개의 백색구름이 대전 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 구름들은 대전에 이미 놓여있던 다섯 개의 방석 위에 나란히 내려 앉았는 데....... 보라! 구름의 위에는 놀랍게도 다섯 명의 인자하고 온후한 백발노인들이 정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인들은 귀 밑까지 휘늘어진 백미에 파묻히다시피 한 눈을 들어 백가로를 향 했다. [총사, 무슨 일이라도 계신가?] 이때 돌연, 한 명의 영준한 백의무사가 안으로 바람처럼 뛰어 들었다. 먼길을 갑자기 달려온 듯 머리 위에는 황진을 뒤집어 쓴 그는 장내의 장중한 분위기에 잠시 얼떨떨하니 서있다가 이내 백가로의 앞으로 정중히 대례를 올려 왔다. [대설산의 묵양이 총사를 뵈오.] 백가로의 초조함이 물든 눈망울이 그를 향했다. 대설산은 검군이 수하들을 키우고 있는 곳이다. 묵양은 그의 오른팔이었다. [검군께선 급히 정예무사 이천을 파유해 달라고 요청하셨읍니다. 매우 황망한 일이니 선처를 바란다고 하셨읍니다.] 이천의 정예,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 백가로는 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싹 무시하더니 오대장로를 향해 시선을 던 졌다. [소녀는 이번에 맹 전체에 일급의 출동태세를 갖추고자 해요.] 일급을 출동태세, 천년맹의 맹약에 수록되어 있는 가장 신속하고 완벽한 공격태세다. 이 령(令)이 내려진 동안에는 맹 외로 흩어진 모든 무사들이 다 보귀하여야 한다. 또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맹 외로 나갈 수 없으며, 검을 안은 채 잠 을 자야하는 것, 즉, 언제든지 진군의 북소리가 울리면 즉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말하는 것이었 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화는 몹시 의아해졌다. 검군이 군사를 요청하는 이 마당에 그녀는 오히려 봉쇄령이나 다름없는 일급 출동태세를 말하다니? 천년맹에서 검군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도대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묵양은 말할 것도 없고 수양이 이백 년의 수위에 이른 오대장로도 자못 얼떨 떨한 듯 했다. 수좌장로인 천극선옹이 물었다. [무슨 일이 총사로 하여금 그런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소?] [구양총통령이 있을 서두르고 있어요. 그는 지금 검후와 단숨에 승부를 내려는 것이 틀림없어요.] 순간, 바람도 없는데 천극선옹의 탐스러운 배미가 푸르르 떨렸다. [그런 일이......?] 남은 사대장로도 몹시 놀란 듯 격동에 찬 표정을 떠올랐다. 그들은 황망히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회의란 의제가 나오면 그에 대한 찬반토론과 해설이 진행된 다음 표결이 붙여 지는 것이 상례다. 헌데 이순간, 오대장로는 시선을 마주칠 시간도 없다는 듯 일제히 외쳤다. [총사의 제안을 오장로는 정식으로 수락하오! 아울러 제일급의 정보태세를 총 출동시킬 것을 첨부코져하오!] 무화와 묵양은 얼떨떨하다 못해 멍청해졌다. 일급출동태세만 해도 천년맹 총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일텐데...... 거기다가 또 하루경비만 해도 황금 일만 냥이 소모되는 일급정보태세를 첨가 하다니! 기적, 그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십일월의 황량한 벌판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네 다리가 묶인 제법 무던히 큰 개가 막대 위에 거꾸로 매달 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다. 개는 거의 그을린 모양 모닥불은 사그러지고 가느다란 불꽃이 바람에 하늘거 렸고, 개의 몸체에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며 연기로 인해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살기와 욕망으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거의 회색빛인 아버지의 머리와 검은 아들의 머리는 후끈한 먼지바람으로 흩 어졌으며, 그들의 머리 너머로 말라버린 들판의 누우런 잡초와 우중충한 하늘에 한점 서 녘기운이 우울하게 감돌고 있었다. 불어오던 스산한 바람에 그들의 낡아빠진 옷 사이로 검붉은 살이 드러났고, 실개천은 그들의 때끼인 발가락 사이를 지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점이오.....] 짙은 계곡이었다. 바람이 일고, 파괴적인 물소리가 있고, 끝없이 유적한 물의 정적, 그리고, 이름모를 꽃들이 있었으므로 경설은 이곳을 유난히 좋아했다. 두 사람은 계류 근처의 흰 모래사장 위에 앉아 있었다. 구양조운의 뒤로는 예의 그 음침한 화폭이 세워져 있었다. 경설은 구양조운의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의도를 생각해 봐야 했 다. 그들의 사이를 무관하게 하지 않게 하려는 저의를, 불현듯 어제의 일이 떠올라 왔다. 구양조운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얼마나 기뻤던가? 그녀는 한달음에 그의 목옥으로 달려갔었다. 하나, 목옥은 어두웠고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구양조운은 그 어둠 속에 말없이 누워있었고, 그녀가 다가서자 그는 단 한 마 디의 말을 내뱉았다. [추워.] 아아.... 그 한마디가 그렇게 폐부를 찌르도록 아프게 할 줄이야.... 경설은 엉겹결에 그의 머리를 두 팔 안에 껴안았다. 그것 뿐이다. 내 따스한 가슴에서 내 맑은 가슴에서 이루어졌던 포옹, 그것이 유죄란 말인가, 계곡을 흐르는 소리에 뒤엉켜 구양조운이 말했다. [당신은 저 그림의 뜻이 알고 싶지 않소?] 경설은 고개를 흔들려고 했다. 우리들은 깊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알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곤란하게 하리라. 그녀는 불현듯 달아나고 싶어졌다. 나는 아무 도움이 못되어요. 제발 예기하지 마세요...... 구양조운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음성은 아듯한 듯 하면서 자르르 정확했다. [저것은 바로 나의 모습이오..... 아비의 모습이오.... 나는 이 얘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소. 한 비참한 부자의 얘기를, 꿈과 현실을 끊임없이 방황하며 끝내 인간이라 불리우지 못했던 두 사람의 얘기를, 내 아비는 하나의 목표 외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소. 나까지도 그는 포기했소. 그는 어린 나를 앞 에 앉혀놓고 술을 마시길 좋하했고, 술 한 잔에 나를 한번 쳐다보는 그 눈빛이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슬퍼 나는 무릎의 감각이 없도록 꼬박 앉아있곤 했 소.......] 햇살이 그의 단아한 얼굴을 비추어 온다. 구양조운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진실을 얘기하는지, 허위를 얘기하는지..... 검후를 유혹하는 사명감인지, 자신의 내부를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건지.... 아아...... 도대체 자신은 왜 이자리에 앉아 있는지! 다만, 어제 경설의 가슴이 그토록 따뜻했던 것과..... 자신의 얘기가 스스로에게 안겨주는 뿌리깊은 고독에 빠져 말을 잇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그녀와의 승부다! 나는 허위를 말하지 않으리.... 있는 그대로 네 예쁜 동체에 부딪쳐 가리..... [저 들판의 개고기 맛은 내겐 쓴 쓸개와도 같았소.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처음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소. 나는 저때 아비의 살 기찬 눈동자를 따르기 위해 내가 겪었던 가장 분한 일을 머리가 터지도록 떠올 리고 있었고, 그의 고독에 장단을 맞추기 위해 한 겹 속옷을 벗어 일부러 추위 에 떨었소.... 그 이후의 내 삶을 나는 저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저 이후로 끝내 남을 위해 살아야만 했소....... 그것이 싫어 나는 밤낮 히죽히죽 웃었댔고, 그 웃음은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소..... 하지만 이젠 웃을 기력도 없소. 난....... 지쳤소. 난 솔직이 당신을 모르오. 모르는 당신 앞에서 난 이따위 너절한 얘기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오. 그 이유가 무 엇이겠소....?] 경설은 끈끈하게 기어 오르는 그의 목소리와 번들대는 눈을 두려움으로 바라 보았다. 그녀는 역시 그의 고백을 듣지 말아야 했다. 그의 고민을 그녀는 이해해줄 뿐,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양조운의 시선이 흐르는 물을 향했다. 그가 말했다. [나의 아내가 되어 주시오. 그것이 이유요.] 뒤통수를 불시에 얻어 맞았다. 그것은 구양조운도, 경설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내뱉은 순간, 구양조운도 자신이 그 한마디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를 아득하도록 깨달았다. 사명감이 아니었다. 그 말은 바로 그가 마음 속 깊이 감추어 놓았던 말이었다. 경설은 이미 입술까지 가져간 야외용 건량을 도로 내려 놓을 형편이 아니었 다. [잠깐만, 이것 먹고 얘기해요.!] 그녀는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허나, 그녀는 끝내 그 건량을 먹을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는 것, 그의 추위가 바로 그녀였다는 것을 그녀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본 적이 있었 을까? 경설은 벌떡 몸을 일으켜선 계류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구양조운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향해 도리질했다. [안돼요.....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왜?] [전 늘 친구의 우정으로 지내고 싶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게...... 이유의 다일까?]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다만...... 검을 사랑해요..... 제발.....] 구양조운이 툴툴 웃었다. [검이라.... 그것은 실로 훌륭한 이유가 되지요..... 소저.] 그는 예상 외로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냉혹한 유령군단의 총수가 이미 아니었고, 다만 패배자처럼 보였다. 경설은 그가 그토록 절망한다는 것이 불현듯 참을 수 없어졌다. [당신.... 그러지 말아요. 전 친구로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으니 언제든지 목옥으로 놀러갈 거예요.......] 구양조운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아니, 올 필요없어. 내 마음이 이상해질테니까.] 순간, 경설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그녀는 타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단정(斷情).....? 아아.... 얼마나 경건하고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당신과의 우정이었는데.... 나는 아무 준비도 없는데 당신은 그저 떠나려는구나...... [왜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없나요?] 경설은 애원했다. 차라리 호소였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헤어지지 않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한 채 하산하기 시작 했다. 하늘은 파아란 보석 같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기분좋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의 종속적인 군신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갑자기 정든 얼굴이 팔이 잘리듯 떨어져 나간다. 경설은 어쩔줄 몰라서 먼지바람이 이는 산길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쾅쾅 패주고 싶었다. 바보, 바보, 바보 같은 사람, 사랑한다고 왜 얘길 못하는 거지요. 희망이 완전한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제게 희망을 주세요. 나비의 날개같은 가벼운 휘망을,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황혼, 돌아보면 캄캄한 암흑의 미래가, 우리를 놀라게 하잖아요. 무언가 확실한 것을 얘기해 주세요. 비록 내일 세계가 뒤바뀐다고 해도, 언약해 주셔야만 해요. 쓰러져 가는 초가집 마당이라도, 그대를 위해 해바라기 열 두 그루를 심겠다구요. 제게 불멸의 애정을 고백치 못함은 무엇때문인가요. 애정이 변할 것이 두려우세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사랑은 찰나에 빛나는 불꽃, 모든 고난과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서, 얘기하세요. 절 사랑한다고...... 第 四十四 章 紅 痕 [벗어! 그 따위 옷 몇 조각 걸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거지?] 목옥에서 차를 마시고 싶다고 제의한 사람은 바로 경설이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의 실책이었다. 그 한 마디만 아니었어도 구양조운은 그녀를 영원히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평범한 한부로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그의 목옥으로 돌아와 차를 마셨다. 그 차 속에는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약이 타져 있었던 것이다.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몸을 안아 침상으로 내동댕이 쳤다. [벗으라고!] 그의 눈이 바로 시선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경설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토록 원한다면 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안돼요.....) 그것은 그녀가 순결을 대단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래된 몸의 관습이었다. 여자는 있는 것을 그대로 보호하는 본능이 있다. 그녀에게는 그 뿌리 깊은 본능에다 결코 미쳐버릴 수 없는 예리한 이성이 복 합되어 있는 것이다. 예리하고 투명한 이성,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도리어 악조건에 부딪히면 부딪칠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더욱 뚜렷해지고 더욱 맑아져서 그녀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뇌리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경설은 알고 있다. 그녀가 지키려는 것이 황금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돌일 수도 있고, 돌보다 더 무가치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뿌리 깊은 몸에 밴 습관 그것 때문에 발버둥대고 있는 것이 다. 경설의 강렬한 반발 때문에 구양조운은 주춤 물러섰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노려 보았다. 그 눈에는 증오가 불타고 있었다. 목을 누를 것 같은 심각한 증오, 아아.... 차라리 내가 그의 손에 의해 죽을 수만 있다면, 느닷없이..... 구양조운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순식간에 알몸으로 변했다. 경설은 질실할 것 같았다. 하나, 그 와중에서도 구양조운의 몸은 아름다왔다. 그의 몸은 잘 발달된 근육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설은 터무니 없이 강렬한 공포를 느꼈다. 저 아름다운 육체는 그녀에겐 독약과 같았다. 나는 저 육체에 취하여 온갖 걷잡을 수 없는 나락에 빠지리라. 나는 나 자신을 깡그리 소멸시키리라. 대리석처럼 맨들거리는 구양조운의 단단한 팔이 꽉 죄어 들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세차게 빨아왔다. 그 입술은 이미 경설의 달콤한 입술 위로 포개버렸다. 경설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마치 바람빠진 고무공처럼 힘이 빠져 버림 을 의식했다. 그녀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으며 그의 몸에서 녹아 흐르는 촛불이 되었다. 그녀는 이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정해진 운명처럼...... 모태에 갇히기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듯...... 그녀의 눈앞에 안개가 끼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별이 은하수처럼 쏴 소리내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몸이 되어 있었고, 그의 혀는 그녀의 입 속으로 침입해서는 그녀의 것과 밀착되었다. 예기치 못한 통증이 복부의 아랫쪽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경설은 까무라쳤 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뜨거운 결합력을 지니고 부딪쳐 오는 것, 그녀는 해체당했다. 그녀는 산산이 분해되었다. 그의 얼굴에 솟아 오르는 땀, 그리고 통증도 그녀를 완벽하게 마비시켰다. 그녀는 기진맥진했다. 내 정신은 어디로 달아나 버렸을까? 나의 빈 껍질은 달아 오르는 그와 함께 호흡을 하고, 내 두 팔은 그의 온몸을 뜨겁게 끌어 안고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 했다. 정말로 무엇이든.... 그것이 설사 먼 옛날 그녀가 먹었던 콩 한 조각이라 해도,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깊숙한 곳에 뿌듯이 고이는 그의 액체를 느꼈다. 촛불이 꺼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걱정했었어. 아무것도 더 나아지진 않으리라고, 단지 계단을 한 칸 더 올라갔다는 것 뿐이야. 그리고 보다 죽음 앞에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이겠지. 그 흔한 일상사 중의 한 부분을 체험했다는 것...... 감동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있다면 야릇하게 가슴 저미는 슬픔, 또는 그 부분에 남아 있는 통증...... 속곳을 적시게 하는 출혈, 거북해져 버린 얼굴 모습, 흐트러진 머리카락, 구겨 진 옷 그런것들이야. 경설은 그녀의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벌벌 떨며 정신없이 달려드는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떨리고 이렇게 무서운 공포가 닥치리라곤 감히 상상해 보지 못했다.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아무리 웅크려 봐도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은 커녕 정신만 또렷해 와서 작은 먼지의 미동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상태인 줄 알았더라면 한번쯤은 그의 품을 박차고 나오 지 말걸 그랬다. 희망이 깡그리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품이 춥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등너머로 보이던 사막의 맑고 고요한 잿빛 하늘이 그녀를 두렵게 했었 다. 뼈 속 깊이 외로워 떨고 있는 이 고독감...... 문신처럼 평생 남아 있을 이 상처..... 돌연, 경설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 한쪽의 줄을 잡아당겼다. 비로소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솟구치고 있었다. 그녀가 줄을 당기지 않았어도 이미 육인은 구양조운의 목옥을 둘러싸고 있었 다. 지옥신룡 옥세개, 무량뇌 제갈천, 요마 모용혜, 혈군 사마우, 철혈서생 철무쌍 그리고 형위의 육인, 그들은 유령군단의 고수들을 깨우지 않게 하기 위해 수하들은 군단 밖에 배치 시켰다. 떠오는 새벽의 여명 아래..... 그들은 구양조운의 목옥 앞에 일렬로 우뚝 섰다. 지옥신룡 옥세개의 붉은 입술 새로 한 소리 냉혹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형위, 그를 불러내라.] 형위는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그때, 덜컹! 하고 문이 벌떡 열렸다. 이어, 구양조운의 훤칠한 신형이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찰랑한 흑발 새로 신비롭게 빛나는 그의 동공이 사람들을 하나씩 훠어 나 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한쪽의 철무쌍에게 닿았을 때 철무쌍은 땅으로 눈을 깔았다. 구양조운은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시오?] 형위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총수, 당신을 체포하오.] 구양조운의 단아한 얼굴에 한 줄기 의미 없는 웃음이 걸렸다. [이유는?] [연맹에 대한 반역행위이오!] 순간, 번쩍! 구양조운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구양조운은 코 아래 와 앉아 있었다. [무슨 증거로 그런 말을 하나?] 그의 얼굴에 한 줄기 흰 선이 그어졌다. 웃음이었다. 하나, 형위는 순간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생 동안 이토록 공포스러운 얼굴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형위는 사력을 다해 얼어붙은 가슴을 가라앉히며 냉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빙벽.] 순간, 어둠 속으로부터 네 개의 검은 인영이 느릿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제각기 몸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는데 장내에 이르자 그 중 선두에 흑의인이 물체 하나를 쿵 하고 내려 놓았다. 물체, 그것은 하나의 비문이었다.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들이 쓰여 있었으니....... 天長地久有盡時, 幽恨緣緣無絶期, 召命如恨千秋歲, 白雲追心萬里行, 오오...... 이는 바로 보광사 멸문 후, 절 마당에 써놓았던 시가 아닌가? 구양조운은 그것을 힐끗 바라본 후 무표정한 어조로 말했다. [저 시가 어쨌단 말인가?] [이미 총수의 필적과 대조까지 끝냈읍니다. 직접 쓰신 것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네.....] 순간, 형위의 입가에 한 줄기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연맹최대의 적인 보광사를 멸한 대공훈을 당신은 한이라고 말했읍니다. 또한 소명은 당신이 받은 임무를 일컫고 백운이란 자고로 소림의 상징..... 그 백운을 따른다 함은 즉 소림의 뜻을 따른다는 말이기도 한 것, 총수 이 시는 반시입니다.] [자네는 비약이 심하군.] 형위는 묵묵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두번째의 흑의인이 하나의 물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피칠을 하여 잘 보존한 사람의 머리였다. 구양조운이 그 머리가 바로 구유활강시라는 것을 알아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루에서 아녀자를 희롱하던 해동삼살의 사부로써 구양조운에게 맞아죽은 자, [이 사람을 총수께서는 물론 아시겠지요.] 구양조운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형위..... 사람을 손가락 하나로 죽여온 자..... 그는 상대가 변명하는 것을 용납치 않기 위해, 두겹, 세겹의 완벽한 증거를 들 이대는 인물이다. 그가 왔다는 것은 곧 구양조운이 빠져나갈 퇴로가 이미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말했다. [.......] [같은 맹의 사람을 교칙 하나없이 때려죽인 일을 총수는 설마 부인하시지 않 겠지요?] 구양조운은 하늘을 우러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형위를 향하여 돌려지며 빙긋 웃음이 떠올랐다. [형위, 그렇게 하나하나 하지 말고 아예 한꺼번에 해보게, 자네의 훌륭한 솜씨 를 보고 싶군.] [이렇게 순순히 인정해 주시니 형모는 진심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를 드립니 다.] 세 번째 흑의인이 나섰다. 그의 손에는 하나의 낡은 승포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구양조운은 보지 않아도 그것이 바로 스승 자초의 것이며, 또한, 자신의 옷장 깊숙이 감춰놓았던 것임을 알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남의 옷장도 꿰뚫어 보는 재주도 있군 그래.] 네 번째 흑의인이 장내로 툭 던져낸 것은 놀랍게도 단장검이었다. 구양조운은 가볍게 놀라는 빛과 함께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거야 정말 당할 재간이 없군....... 그 검은 또 어디서 찾아냈나?] 형위는 고요하게 웃으며, [그 말씀은 바로 그 검이 스물 다섯 개의 지부와 삼십삼무귀인들을 죽인 검임 을 인정하시는겁니까?] 순간, 옥세개와 제갈천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커다란 경악지색이 떠올랐 다. 불마공자! 이미 무림에선 후기최고고수요, 어떤 자는 공공연히 천하제일인이라 떠들고 다니는 절대의 고수! 헌데, 그가 구양조운의 분신이었단 말인가? 혈군 사마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나, 요마 모용혜는 야릇한 광채가 이는 눈빛으로 구양조운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냈다는 데서 오는 상처입은 자존심..... 그런 자존심이 빚어낸 약간의 미움과, 그러나 또 자신의 몸을 소유한 자에 대 한 연민이 함께 피어 오르고 있었다. 철무쌍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헝클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하나는 삭막한 세상에서 다시 지기를 잃어야 한다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여동생의 놀라와할 모습이었다. 그 날...... 여동생 철란음이 구양조운의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을 때, 철무쌍은 백여 장 밖의 동백나무 그늘에 서서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빠들 손에 큰 녀석이 아닌가? 그는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었고 또 그것을 믿었다. 헌데, 이제 그녀가 만나야할 불행과 업보는 또 얼마나 기구한 것인가.....? (불쌍한...... 것.....) 한 순간, 구양조운과 옥세개의 시선이 허공의 한 지점에서 맹렬히 부딪혔다. 옥세개는 싱긋 웃었다. [섭섭하오, 구양형!] 그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체포하라!] 문득, 어둠의 한구석에서 실처럼 가는 빗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웬지 흐린 하늘이었다. 비는 그녀가 뿌릴 수 없었던 눈물 같았다. 그녀는 그녀의 걸음에 온몸의 중량을 내맡겼다. 몸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경설은 눈을 감았다. 다시는 뜨지 않을 것처럼 꼬옥 감았다. 빗속을 뒹굴어도 좋다. 이 이상 내게 무엇이 남아있고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가까우리. 빗물이 나를 안아준다면 나는 그 속에 파묻히리. 그녀가 막 능선에 올라섰을 때..... 저 멀리 가고 있는 한 무리의 행렬이 보였다. 선두는 분명히 구양조운이었다. 그는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번호/명령(H,F,B,P,T,W,DD,GO,HI,Z,X) >> 도서관 [담당자-최용진(poodori)] () 제목 : [야설록] 대달마 제 사십사 장 #4425/4504 보낸이:김범준 (kles ) 12/17 14:11 조회:984 17/21 촉촉히 젖어가는 노송의 그루터기에 기대어 경설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 았다. 그녀의 눈빛은 무표정했다. 거기엔 결박당한 자에 대한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그녀는 결국 날고 싶어했다. 또다시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경설은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엄청난 고문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문이었고, 상상해지지도 않는 고문이었다. 구양조운의 비명은 연 이레나 돌벽을 메아리쳤다. 그의 앞에는 늘 형위와 스산한 흑의를 걸친 대한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늘 쇠몽둥이나 그밖의 각종 쇠붙이를 난폭하게 구양조운의 몸에다 꽂 번호/명령(H,F,B,P,T,W,DD,GO,HI,Z,X) >> 도서관 [담당자-최용진(poodori)] () 제목 : [야설록] 대달마 제 사십사 장 #4425/4504 보낸이:김범준 (kles ) 12/17 14:11 조회:984 18/21 거나, 박고 비틀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말해라! 네가 이곳에 위장하고 들어온 진정한 까닭을!] 온몸이 온통 분해되는 듯한 그 고통 속에서 기이하게도 구양조운은 줄기차게 한 여인의 모습만을 떠올렸다. 경설....... 눈처럼 희고 베꽃처럼 순수하며 그 모든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여자...... 설사, 이 모든 파멸이 그 고운 흰 순에 의한 것이라 해도 구양조운은 그녀가 보고 싶었다. 다시 껴안고 난폭하게 성기를 들이대고 싶었다. 철가시가 촘촘히 박힌 쇠막대가 온몸을 샅샅이 훑고 파내렸을 때, 구양조운은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마음을 이미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형위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윽박지를 때마다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사랑해.] 형위가 칼로 자신의 살점을 하나하나 도려낼 때도 그는 말했다. [사랑해.] 그 이레의 고문 동안...... 구양조운이 말한 것은 사랑해의 한 마디와 비명 뿐이었다. <고(告), 전 연맹대호법 구양조운은 본시 소림의 제자로서 짐짓 사파문도를 가장하고 본 맹에 입맹하여 그동안 연맹의 분열에 온갖 획책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의 직책을 교묘히 이용하여 연맹에 막대한 타격을 입 혔고, 체포된 후에도 조금도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음으로서 이에, 연맹평정회는 그 에게 사형을 고하는 바이다. 사형은 구월 초하루, 연맹 대연무장에서 오체분시형으로 공개실시 한다. 총좌 경설 백> 온 몸이 무너져 내렸다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 조각 걸레조각처럼 널부러진 채 구양조운은 중얼거렸 다. 업보다..... 죽음조차 사치스러운 내게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스승과 사형의 시신이 채 식지도 않은 이때에 사랑의 밀어를 쉴새 없이 속삭 여 대는 꽃뱀같은 육신이여..... 이는 내가 정녕 받아야 할 업보와 고통이다...... 핫하...... 이제 죽는구나....... 이렇게 죽어가는 모양이구나......... 애초 내것이 아닌 삶이기에 무슨 여한이 있고 미련이 있으랴마는....... 아버지! 오직 한 분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읍니다........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단 한 번이라도 머리를 쓰담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싶읍니다....... 늘 피를 토하고...... 토할 것이 없으면 삶이라도 토해야 직성이 풀리는 당신..... 아니었던가........ 허나....... 인간의 허울을 쓰고 태어나 염치좋게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자에게는 정녕 자비로운 당신이셨읍니다. 이제 아들은 정식으로 고백합니다. 당신의 곁을 떠나있든, 안 떠나있든...... 우리가 서로를 원했든, 아니든...... 이나마의 삶이나마 누렸던 당신의 은혜에 마음 속 깊이 우러나는 감사를 드립 니다..... 구양이라는 성을 가지고 당신의 아들일 수 있었다는데 비로소 무한한 자랑을 느낍니다....... 아버님 그럼 안녕히....... 당신의 깨어진 밥솥이 아니라면 이 아들은 정녕 웃으며 죽을 수 있으련만...... 第 四十五 章 구양조운의 자랑스런 용사들인 유령군단에는 일체의 외출이 금지되었다. 군단의 주변으로는 이만의 군사들이 엄중 배치되었고, 용맹, 마맹의 서른 명 고수들이 나와 밤낮으로 그들을 면밀히 감시했다. 유령군단의 고수들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허나, 이따금씩 울타리 밖을 쏘아보는 그들의 시선 속에는 증오가 이글거리고 있었 다. 이 문제는 연맹 내의 중요한 난제로 등장되었다. 군단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었다. 그런 화약을 가슴에, 그것도 심장부에 묻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부담 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八月 二十九日, 유령군단 의사청, 야심한 시각인데도 청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상석에는 단유경과 감려연, 거대한 원탁을 중심으로 송유천, 전이화, 철혼, 팽운, 유석, 천돈, 대종, 교 지, 당천 등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침중했고 장내에는 죽음처럼 어두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단유경이었다. [이제.... 총수의 사형 일자는 불과 사흘 뒤로 박두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런 방책도, 묘책도 구하지 못하고 있어요. 허 나, 이제는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 할 때예요.....] 그녀는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정도무림의 사도이며.... 천년맹의 극히 중요한 서열을 지닌 인물.... 이런 사실들은 모두 우리에게 생소한 것들이예요. 더욱이 이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 사도의 고수들이니 비록 그대들이 총수를 주군으로 모셨다 하나 나는 그 대들이 자의대로 행동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아니면 떠날 기회는 없어 요.] 순간, 팽운이 분연한 어조로 외쳤다. [총감님의 그 말씀은 너무도 무정하오! 우리는 갈 수 없소이다! 이유는 없소. 굳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주군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오.] 천전당, 소외받던 자들...... 그들에게는 인간다운 감정을 가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또 가지려고 노력 하지도 않았다. 허나, 그들이 만난 사람은 바로 구양조운, 잔인하고 냉철한 외양 속에 불꽃같은 정열과 다정을 숨기고 있는 가장 인간다 운 사람,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은 구양조운을 통해 인간의 삶을 다시 배웠다. 그 커다란 배움의 앞엔 죽음도 다만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단유경은 코 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입술을 한껏 깨물어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며 고개르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총수의 구출계획을 짜도록 해요.....] 바로 그때다. 느닷없이 장내로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말, [그 일에 나도 끼이면 안 될까요?] 순간, 중인들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서 크게 놀란 시선을 던졌다. 인영, 도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일까? 밖에는 지옥련의 이만 고수, 안에는 유령군단의 일천 고수가 버티고 있지 않 은가? 뿌연 어둠 속에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 선 섬연한 자태, 그녀는 바로 철란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의문에 찬 시선을 던졌다. 지옥련의 핵심인물인 그녀가 이곳에는 왜 나타났는가? 철란음은 한줄기 나직한 탄식을 터뜨리더니 살레살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진심으로 당신들을 돕고 싶어요....] 단유경이 싸늘하게 말했다. [왜죠?] 철란음은 초점 잃은 동공으로 말했다. [사랑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이유를 말하겠어요.....] 사랑! 그녀는 너무 자연스럽게 이 말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특히! 감려연은 한쌍의 샛별같은 눈동자로 그녀의 전신을 빠르게 ㅎ어내렸다. 그녀는 갑자기 가볍게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넌..... 늘 용기가 있군.... 그날 밤도, 그리고 오늘도.... 난 그런 네가 부 럽다.....) 그녀는 이내 싱긋 웃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내가 보증하겠어요.] 사람들은 그녀를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이내, 자리가 마련되고 그 자리에 몸을 앉히기 무섭게 철란음은 품 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 그것은 바로 지도였다. [이것은 연맹의 모든 비밀통로를 표시한 것이예요. 이 지도만 있으면 그 분이 있는 뇌옥까지 곧장 들어갈 수 있어요. 우리는 이 지도를 이용하여.....] 八月 三十日, 돌연, 심야의 죽음 같은 어둠을 꿰뚫고 수십 줄기의 화전이 공중을 갈랐다. 졸듯, 말듯 유령군단을 포위하고 있던 이만 고수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보라, 비오듯 쏟아지는 화전에 이어 메뚜기떼처럼 솟구쳐 나오는 일천의 고수들! 부릅뜬 두 눈에선 혈광이 이글거리고, 서려든 검날에선 폭풍같은 살기가 들이닥친다. [와아----!] [주군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자!] 이만 고수들은 허둥지둥 유령군단의 고수들을 맞았다. 그러나, 마치 노도와도 같은 기세! 일천이 휘몰아내는 폭풍에 이만 고수는 정신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뎅...... 뎅...... 뎅....... 급한 경종이 심야의 고적을 어지럽게 깨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잠자리를 박 차고 뛰어 일어났다. 바로 그 시각, [이곳이예요.] 거대한 석문이었다. 열 명의 고수들은 일제히 힘을 모아 맹렬히 장력을 쏟아냈다. 쿠쿠쿵! 쾅! 뽀얀 풍사 속으로..... 거대한 지하뇌옥의 전모가 드러났다.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던 입구의 수옥 위사들이 온 얼굴에 경악의 빛을 떠올 린 채 뛰어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철란음의 손에서 수십 접의 한광이 솟구쳐 갔다. 순간, 분분히 무기를 뽑아들던 십여 명의 수옥위사들은 이마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 러져 갔다. [으악! 악!] [끄악!]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같이 영롱한 옥호접이 꽂혀 있었다. [빨리 안으로!] 단유경 등은 그녀의 신비로운 암기수법에 탄성을 발하며 뇌옥의 안으로 뛰어 들었다. [뇌옥의 범위가 워낙 방대하니 두 조로 나뉘어 찾아 보도록 해요!] [으악!] [억!]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잡아 넣겠다고 이토록 거대한 뇌옥을 만들었을 까! 뇌옥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그 동안 죽인 무사들만 해도 근 삼십여 명, 시간을 끈다는 것은 유리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유경 등은 조금씩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돌연, 하나의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다 말고 그녀와 감려연은 주춤 몸을 세우고 말았 다. 보라, 통로에 일렬로 늘어서다시피 한 십여 명의 사람들, 이는 바로 공포의 감찰분맹의 혈의고수들이 아닌가? 감찰분맹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그 무예가 신비하도록 높았다. 단유경과 감려연은 이내 긴장에 찬 시선으로 황급히 무기들을 뽑아들었다. 헌데 기이하다. 그들 혈의고수들은 멀뚱멀뚱 서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감려연이 가볍게 쳐낸 일장에 이들은 놀랍게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맙소사!] [이것은 시체.....] 시체들이 쓰러지자 한 사람이 그 뒤로 나타났다. 그를 묵도하는 순간, 두 소녀는 아득한 절망감이 온몸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 꼈다. 요마, 그녀는 바로 요마 모용혜였던 것이다. 늘 화사하던 그녀의 용모는 웬지 초췌해 보였다. 그녀는 두 소녀가 주춤 서 있기만 하자 가늘고 흰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 다. [당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저기에 있어요.] 손가락 끝, 통로의 벽 아래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조운!] [총수!] 그렇다. 도대체 피로 목욕을 한 듯 시뻘건 핏빛 일색인 저 사람은 바로 구양조운이 아 닌가? 두 소녀는 다급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봉목에 그득히 차오르는 것은 눈물...... 맙소사! 마치 잘 다져진 고깃덩이요, 걸레조각이다. 단유경은 파르르 입술을 떨며 그의 몸을 깊숙히 끌어안았다. 피로 물든 이마에 살풋 향기로운 입술이 가 닿는다. (불쌍한 사람.....) 그녀는 오열을 삼키며 구양조운의 몸을 안은 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이 감려연을 향했다. [연매.......] 순간, 감려연의 몸이 흠칫했다. 연매라니? 그렇다면 이 여자는 자신의 본면목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단유경이 묵묵히 구양조운의 몸을 감려연의 품으로 안겨주었다. [단총감, 이것은......] 단유경의 눈물 젖은 얼굴 위로 한 줄기 화사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연매는 매우 오래 그를 기다려 왔지요...... 나는 이미 그와 후회없는 사랑 을 했어요. 이젠 당신 차례...... 인 것 같아요......] [그러나....] [연매, 그 동안 당신이 그를 늘 따뜻하게 보살펴 준 것에 대해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연매는 사랑스럽고 귀여우니..... 그는 틀림없이 연매를 좋 아하게 되 거예요........] 부딪치는 시선 속으로 따뜻한 정염이 눈꽃처럼 새하얗게 흐른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요마 모용혜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겨가 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로구나..... 어째서 세상의 아름답고 착한 여자들은 모두 그를 좋아할까?] 그렇다면 나는......? 모용혜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예외지..... 난 결코 착하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내겐 벅 찬 행운이었어.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있지만 역시 주는 것이 좋다..... 난생 처음 좋아 해본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해. 혜아야.... 혜, 너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 그녀의 모습이 아듯한 통로 저편으로 사라져 갈 즈음, 돌연, 삐익--- 삑! 수십 가닥의 날카로운 호각음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동시에, 푸다닥..... 타닥..... 급박하기 이를 데 없는 발자국 소리가 뒤를 이었다. [잡아라!] [쫓아라!] 단유경은 힐끗 감려연의 몸에 안긴 구양조운을 바라보았다. 비록, 헤지고 다치긴 했지만 마치 잠자듯 평온한 얼굴이다. 단유경의 얼굴에 달콤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유경은 더 이상 같이 못 가겠군 요.... 안녕, 조운......) 그녀는 앞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수없이 많은 창칼이 언뜻 시선 속으로 쏘아져 왔다. 돌연, 그녀의 몸이 구름처럼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연매! 반대쪽으로 달아나요!] [단총감!] 감려연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을 뒤로 하고 단유경의 가녀린 몸은 무리들 속으 로 어느덧 유령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한 줄의 시구를 읊듯, 그대 이름을 부르곤 했지. 행여 먹빛이 마를까 눈물로 적시던 종이..... 이 눈물 마른다는 날 언제인지, 기다리다 타버린 가슴 슬프고도 슬펐다네. 다가오네. 어두운 죽음의 시간, 차가운 흙으로 몸은 뒤덮이고, 스산한 바람만이 내 넋을 스치리라. 허나, 님이여! 잊지는 마옵시오. 죽음과 삶 그 훨씬 이전에, 아름다웠던 날의 우리를, 행여 잊지는 마옵시오..... [헉헉......] [허억......] 철란음과 감려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갔는지 모르겠다. 그녀들은 단둘이 거의 필사적으로 지옥의 아수라장을 뚫고 나왔다. 이미 몸 곳곳엔 여러 개의 상흔이 흉측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감려연이 안고 뛰던 구양조운을 지금은 철란음이 안고 있었다. 비, 천하에는 뽀얀 우막이 가득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흑옥마궁을 나온 것은 알겠는데..... 빗줄기는 갈수록 더 거세어지고 종내엔 제대로 눈도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었 다. 어디로 가야 하나..... 철란음은 잠시 망설였다. 지옥련의 이목은 천하에 뻗어 있다. 그들이 어디를 간다고 해도 지옥련은 끝내 그들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허나 가야 한다. 심장이 터지고 그 조각이 바닥에 널브러져도 가야 한다. 이때 돌연, 철란음은 무심히 앞을 바라보다 그만 얼어붙듯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빗 속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 오오! 그 시선은 바로 다섯째 오빠 철무쌍의 것이 아닌가? 철란음이 걸음을 멈추자 감려연도 멈추어 섰다. 철무쌍은 석상처럼 버티고 서서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철무쌍은 항상 깔끔했다. 그의 옷차림이나 풍모는 언제 어디서나 깨끗하고 고아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몰골은 전일의 당당한 풍모는 간 곳 없이 누추하기 짝이 없는 모습 이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철란음은 문득, 가슴 속이 촉촉히 젖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계속 따라 오셨나요?] [그렇다.] 철무쌍은 애써 웃었다. 허나, 늘 얼굴에 떠올라 주던 웃음은 오늘 따라 껍찔을 씌운 듯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저는......] 철란음이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가겠어요.] 철무쌍은 그녀의 품에 안긴 구양조운을 힐끗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란음.] [......!] [너는 스스로 가는 것이냐? 아니면 구양조운을 따라가는 것이냐?] 철란음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허나, 그녀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그녀의 붉은 입술 새로 야무진 어조가 새어나왔다. [둘 다예요] [헛허.....] 철무쌍은 가을 낙엽처럼 황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비켜섰다. [너의 뜻을 알겠다. 가거라! 이것은.....] 그의 시선이 비 퍼붓는 밤하늘을 향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해 준데 대한 오라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오빠.....] 철란음은 교구를 파르르 떨더니 번쩍 몸을 날렸다. 그녀는 끝내 철무쌍을 돌아다 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이 자리에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 같았다. 철란음과 감려연의 모습은 이내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아득히 파묻혀 간다. 쏴아아.... 철무쌍은 그 모습을 오래도록, 매우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 소리 허탈한 중얼거림이 빗 속으로 번졌다. [억만 금의 금은보화를 등에 지어 보내야 하는 것이 오라비이고.... 네 몸 하 나 행복하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오라비이련만..... 녀석..... 너도 이제 는 다 컸다는 겐가......?] 쏴아아...... 후두두...... 억겁의 세월을 휘몰아 갈 듯...... 이 비는 사흘을 계속 내렸다. 도주하는 자의 발자국을 지우는데 빗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은 두말할 나위 조차 없다...... 第 四十六 章 自然에 사는 者 시간, 시간이란 흐르는 것이다. 육 개월, 일백 팔십 일의 시간, 이 시간은 매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허나, 이 육개월 동안 무림에는 매우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혈풍! 그야말로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피의 대소용돌이! 구양조운이 두 소녀의 품에 안겨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직후, 천년맹은 지옥련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지옥련은 무원측검대의 규약을 지키지 않는다. 이에 대정파는 사마외도의 집합체인 그들에게 정식으로 대전을 선포하노라! 대륙도처, 십팔만리 광토 어디에서나 엄청난 싸움들이 시작됐다. 사실상 정도와 사도가 총망라되어 있는 두 거대집단의 하늘은 바로 무림전체 의 하늘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라! 전래해 오던 일천여개의 정사문파들이 모조리 아수라장에 뛰어든 광경을! 최초 육 개월 간의 싸움은 검군 독인행과 백가로가 이끄는 천년맹의 우세로 이끌어졌다. 지옥련은 그 석 달 동안 가히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대외공격조 후맹과 저맹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강력한 상부집권층에서 세 명의 맹주와 백 칠십 명의 수뇌조직, 그리고 일만 오천의 무사를 유실했다. 아예 지옥련 자체가 그대로 분리해 버리는가 싶었다. 허나, 대전이 시작된 지 사개월째인 십이월의 어느날, 지금까지 진행되던 싸움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뀌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검군 독인행, 천년맹의 구심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젊은 영웅이 척살당한 것이다. 경악! 검군 독인행은 지옥련의 가장 큰 분타조직인 형산남궁을 손수 지휘하여 멸한 후 그 궁에 머무르며 다음 진군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와 그의 수하 오천을 하룻밤 새에 일만의 대군이 포위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름아닌 지옥신룡 옥세개의 지옥군단! 사실상 지옥련 내의 최대공격조인 이들은 지난 석달 간의 싸움에서 단 한 번 도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지옥련내의 핵심수뇌부인 지옥팔룡도 마찬가지다. 백가로는 일찍부터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수차에 걸친 엄밀한 조사를 했으나 그들은 전혀 오리무중이라! 헌데, 그런 그들이 일시에 검군의 앞에 나타났고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 일 줄이야....... 형산남궁, 검군 독인행의 신위는 가히 가공했다고 한다. 만 사흘 동안 그는 이천 일백을 베고 자신은 백 서른 두 개의 상흔을 입었다. 다시 사흘이 지나는 동안 그는 일천의 고수를 베었으며 몸에 사백 오십 군데 의 상처를 더 입었고..... 그리고 최후의 이레째, 드디어, 무림의 미래영주이던 그는 온몸에 서른 다섯 개의 화살, 열 두 자루의 창, 스 물 네 자루의 검을 꽂은 채 그가 태어난 땅을 향해 엎어져 갔다. 대정은 몰락하고....... 대사는 환호를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천년맹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옥팔룡이 거느리는 지옥군단은 거의 무적의 위세를 과시했다. 무당산 상청궁이 불타고 곤륜의 옥허전이 무너지는 사태가 속출했다. 그리하여, 대전이 시작된 지 육개월 되던 해에 지옥련의 총좌, 검후 경설은 다음과 같은 폭탄 선언을 하였으니...... ---이 싸움은 무의미하다. 본래 무원측검대의 규정대로 나는 검후의 자격으로서 향후 한달 내로 천년맹 측에서 천거하는 한 사람의 고수와 겨루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여, 이기는 자를 무조건 검정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무림의 영원한 패권을 넘김으 로써 무림의 분규를 종말짓도록 하자!--- 승낙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일, 안하면 스스로 사파에 굴복하는 꼴이요. 그렇다고 하자니 도대체 누가 검후와 싸울텐가? 때는 새로운 해의 이월 초닷새, 이제 검후가 약정한 대결의 기한은 불과 보름을 앞두고 있었다. 눈, 눈은 이미 사흘 전부터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흰빛 일색, 낙양성의 큰길 모퉁이에 돌연 죽립을 깊이 눌러쓴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몹시 총총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곤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몹시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사각...... 사각...... 그의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거리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윽고, 급한 걸음을 옮기던 그는 한 커다란 장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조심스럽게 장원의 문고리를 두들겼다. 탕! 탕! 소리가 울려퍼진 잠시 후, 철문의 한쪽에 조그만 구멍이 생기더니 한쌍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혼세탁진!] [천년광명, 빨리 문을 여시오.] [귀하는 누구신지?] [소림십팔호!] 장원의 문이 열리자마자 죽립인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외팔이 노인이었다. 그는 장원의 한 누각을 가리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리로 가보시오] 죽립인은 누각을 들어가기 앞서 죽립을 벗고 몸에 묻은 눈을 툭툭 털었다. 중! 놀랍게도 그는 이마에 계인이 시퍼런 중이었다. 승인은 눈을 다 털고 난 후 그 자리에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제자 대현이 사존을 뵈옵니다.] 순간, 안에서 묵직하고 침중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서 안으로 들라!] 방의 중앙에는 팔선탁이 있고 그 주위엔 지금 두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일남일녀, 그 한쪽은 일견하기에도 미모가 빼어나게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소녀요, 다른 한쪽은 고희의 노승,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대현화상은 두 눈에서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 다. [총사와 사존은 기뻐하소서! 드디어 찾았나이다!] 순간, 미소녀와 노승의 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르르 떨렸다. 노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가.... 어떻게 찾았느냐?] [곤륜삼호, 사호가 우연히 여랑산중을 헤매는데 대연봉 아래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보았다 합니다.] [대현, 그게 정말이냐?] [곤륜삼, 사호도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하니 틀림없을 것 같 습니다.] 순간, 노승은 부르르 몸을 떨며 미소녀를 바라보았다. [총사, 드...... 드디어.....] 미소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두 눈에 찰랑찰랑 보이기 시작한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사내는 춤을 추고 있었다. 아니,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왼손에 한 자루의 뭉퉁한 반동강이 난 검이 들려 있었고 그의 오른손엔 명경처럼 맑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두 개의 검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헌데, 본시 천하에는 매우 많은 검법이란 것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매우 많은 무예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제각기의 고유한 질서를 가지고 원년무림의 천통이란 것을 이어왔을 것이다. 허나, 이 순간 사내의 쌍수에서 펼쳐지는 검식을 매우 괴이했다. 좌수의 검식은 거세고 강렬한 가운데 한 줄기의 폭풍 같은 힘이 숨어 있었고 우수의 검식은 담담하고 오묘한 가운데 음유롭기 이를 데 없는 힘이 숨어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의 판이하게 다른 검식은 완벽한 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보라! 쌍검이 춤을 추듯 하늘을 가리키면 그 하늘이 그대로 빛을 잃고 만다. 땅을 가리키면 만물이 생동하는 생동력이요, 공간을 가리키면 대폭풍 같은 거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서리서리 검결을 밟아오르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예요, 도 라 할것이 니..... 한 순간, 두 자루 장검이 미묘하게 호선을 그리며 엇갈리는가 싶더니 그의 몸과 함께 폭풍처럼 공간의 한곳을 솟구쳐 올랐다. 산! 사람과 검이 부딪쳐 간 곳은 천야만야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봉이었 다. 슈파파앗! 온 천하를 단숨에 뒤엎을 듯 어마어마한 빛의 행렬! 번갯불을 토하듯 하늘은 일시에 어두워지고 존재하던 모든 광휘는 색깔을 잃 고 말았다. 검기는 정녕 하늘에 사무치고 검광은 대지를 반토막내니.... 다음 순간, 쩌억...... 오오! 봉오리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아니, 그렇게 보일 정도의 거력이 검끝에서 솟아나온 것이리라! 쿠쿠쿠..... 소녀, 백가로는 오래 전부터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보았다. 분명히 보았다. 구양조운의 몸이 허공을 날고..... 마치 빛의 신처럼 태양 같은 광휘를 흩뿌려내는 것을, 그리고 산봉 하나가 그대로 조각나 버리는 것을, 그녀의 서늘한 봉목으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위대한 사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잊고 그 자리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이월의 땅이었다. 살얼음이 엷게 배인 땅은 무릎에 칼을 쑤시는 듯한 통증을 안겨왔다. 구양조운은 천천히 두 자루의 검을 거두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가로쪽을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고 성큼성큼 다른쪽 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가로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냥 따른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그를 따라왔다. 강철처럼 단단한 땅에 긁힌 그녀의 무릎에선 금방 피가 배어 나왔다. 그 피는 그녀의 하얀 치마를 번지듯 적셔갔다. 이때 문득, 앞서 걷던 구양조운의 몸이 그 자리에 뚝 멈추어졌다. [왜?] 순간, 백가로는 오열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총통령! 무림을 구해 주세요! 무림은 실로 바람 앞에 등불형세라! 하나 그 무림을 구할 사람은 바로 당신 하나밖에 없어요. 백가로가 이렇게 간청해요.] 그녀의 음성은 간절하고 애련했다. 허나, 구양조운은 못들을 것이라도 들었다는 듯 다시 산길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 다. 그는 일견해 보기에도 과거의 구양조운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바위처럼 무거운 침착함이 있었고...... 그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질은 탈속하고 고아한 것이 도저히 인간세상에서 범 인들과 어깨를 마주대고 살아가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필시, 그 동안에 성취가 있었다면 대성이 있었으리라! 백가로는 한줄기 탄식을 터뜨렸다. 저만한 성취를 가지고도 무림을 나오지 않았다면 그 심중이야 두 말하여 무엇 하랴! (그는 달관했다..... 자연 속에 파묻혀 세속을 잃어 버렸다..... 저 사람은 과거의 구양조운이 아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이어, 이미 헤어져 벌건 속살이 들여다 보이는 무릎걸음으로 그의 뒤를 황급히 따랐 다. 이곳은 매우 깊은 산이었다. 여량산, 그리고, 대연봉 아래 송림이 백리를 뻗은 숲 속으로 한 채의 예쁜 초옥이 있었다. 구양조운은 성큼성큼 그 초옥의 울타리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까지 따라오는 동안 백가로는 매우 놀라운 일들을 많이 보았다. 구양조운이 길을 걸을 때 그의 어깨에는 산새가 내려 앉았다. 그의 발치로는 다람쥐나 토끼가 장난치듯 따랐으며, 길가에서 마주친 오소리 한 마리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뿐인가? 그는 길옆의 모든 수목과 초옥, 하다못해 풀뿌리 하나까지도 세심한 신경을 기울여 관찰하고 보살폈던 것이니..... 자연! 삼라의 대자연과 완벽히 어울려 사는 자! 그래서, 어깨 위로 내려앉는 산새를 보다듬는 그 손은 그토록 눈부셨으며..... 꺾인 나뭇가지를 걷어 올리고 붙들어 주던 그 동작은 그렇게 경건해 보였던 가? 쿵! 초옥의 문은 완강하게 닫혔다. 그것은 마치 구양조운의 마음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백가로는 일성 장탄식과 더불어 초옥의 문 앞에 단정히 정좌했다. (그래도 무림은 구해야 한다.......) 그로부터 그녀의 몸은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겨울의 산곡은 춥다. 어느 누구라도 이런 추위 속에 반 시진만 있는다 해도 꽁꽁 얼어붙고 말게 되 리라! 그러나, 아무리 삭풍이 몸을 두둘겨 와도, 한파가 휘몰아쳐도 그녀의 몸은 미동도 하 지 않았다. [저 소녀는 누군가요? 저렇게 그냥 두다간 얼어 죽고 말 거예요.] [천년맹의..... 백가로죠..... 한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철란음과 감려연이 제각기 한 마디씩 내뱉는 것을 들으며 구양조운은 빙글 몸 을 돌려 누웠다. [그녀의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간섭한다면 다시는 얼굴을 보 지 않겠다.] 철란음과 감려연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들은 창가로 다가갔다. 하얀 성애 새로 미동도 않고 있는 백가로의 모습이 보였다. 힐끗 그 모습을 보았다 뿐...... 그녀들은 애내 자신들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혼날까봐 말은 안했지만..... 그래도 추울거야.....] [이따 나가서 이불이라도 덮어주자.] 날은 이미 저물어 창 틈으로 별빛이 스며든다. 구양조운은 그 별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다섯 달째, 악인촌에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백골 뿐이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뼈는 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그 뼈 새로 당신이 평생을 몸바쳐온 삼재검법의 정수가 적힌 두루마리가 있었다. 그 한줌의 유골을 안고 그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또한 그때의 일...... 무림, 온통 환멸과 증오로 가득한 곳, 그 무림에서 그는 아버지와 스승과 세 사형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이젠 더 이상 마땅하게 잃어줄 것도 없었고...... 설사 잃어 줄 것이 있다 해도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스런 두 여인,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빚어내는 작은 행복과 맞바꾸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범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 백가로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밤에 두 여인이 덮어준 이불조차 꽁꽁 얼어붙어 있다. 허나, 구양조운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틀..... 이제 그녀의 얼굴은 거의 시체처럼 푸르둥둥하게 변해 있었다. 심장은 뛰고 있는지 마는지 기복이 없었다. 구양조운의 시선이 처음으로 오랫 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 셋째날--- 벌컥! 문이 열렸다. 구양조운이 들고나온 것은 하나의 바둑판이었다. 그는 그것을 백가로의 앞에다 턱 하니 내려놓고는 그 앞에 앉았다. 순간, 굳게 감겨져 있던 백가로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걸로 승부를 내자. 네가 이기면 네 뜻대로 하고 내가 이기면 내 뜻대로 한 다.] 백가로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허나, 얼어붙은 근육 탓으로 웃음은 뺨근육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리는 것에 불과했 다. 딱! 딱! 미명 속에서 괴이한 대국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바둑을 두어 나가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백가로는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매우 신중하게 두었다. 허나, 구양조운은 그녀가 착점하기 무섭게 자신의 돌을 놓곤 했다. 딱! 딱! 다시 문이 열리더니 감려연과 철란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들은 손에 각기 나물소쿠리와 빨래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들 고 있는 바둑판을 바라보는 둥 마는 둥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목옥이 아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르렀을 때, 문득, 철란음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바둑을 말리고 싶었다, 려연!] 감려연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두!] [그런데 왜 말리지 않았지?] 감려연은 길가의 나무둥지를 툭 쳤다. [너는 왜....?] [나야 그냥......] [나두야!] 두 소녀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려연, 너는 왜 나물소쿠리를 들고 나왔어? 겨울에도 나물이 있단 말 야?] [네가 든 빨래바구니는? 여량산의 얼음은 깰 수가 없어.] [후훗..... 난 솔직이 당황했어.] [나두!] [그는 산을 나갈 거야.] [그래! 나갈 거야.] [백가로가 그의 무쇠같은 마음을 녹였어.] [그보다 무림에는 그가 할 일이 아직 많아.....] [슬프지 않아?] [넌?] 두 소녀는 다시 서로를 마주보다 피식 웃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감려연은 다시 그의 뒷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는 말을 했고, 철란음은 우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 싫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구양조운은 틀림없이 밖으로 나갈 것이다. 바둑판을 들고 나왔을 때부터 그의 결심은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잘해.....] [그래 잘해!] [그런데 그가 못하는 유일한 한 가지가 뭔지 알아?] 감려연은 피식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뿌연 여명이 가득 타오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알고 있어. 그것은 바로 그가 바둑의 바 자도 모른다는 거야....] 第 四十七 章 再 會 [오오..... 들었나, 들었나?] [무엇 말인가?] [검후! 지옥련의 검후에게 도전하기 위해 구양조운이 다시 무림을 나왔다네.] [구양조운? 제사대무종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 그가 어찌 검후에게 도전 을 하는가? 그 또한 지옥련의 사람인데.] [아닐세, 아니야. 실제 그의 신분은 놀랍게도 천년맹의 총통령이었다네. 과거 의 그는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다는 거야!] [오오.... 그렇다면 그는 바로 정파가 내놓은 비밀병기란 말인가?] [불마공자와 귀곡서생이 바로 그 한 사람의 분신이었다는 걸세! 지금 무림은 발칵 뒤집혔어. 모조리 무원측검대가 있는 숭산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거야. 숭 산 근처의 십대 도읍의 객잔들이 모조리 바닥나고 그것도 모자라 숭산 계곡 계 곡에는 사람들로 뒤덮여 아예 나무를 볼 수 없다네!] [오오..... 도대체 그 비무날이 언제인가?] [이 사람! 바로 내일이야! 이 승부에서 이기는 자가 무예의 최고단계인 검정 이 되는 거라네!] 부글부글....... 바글바글..... 끊는 것은 사람들이다. 비단, 사람들일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무인들이다. 천하의 모든 무림인들이 다 모여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무원측검대가 저멀리 바라다 보이는 성불평 건너 계곡에는 아예 발디딜 틈도 없이 빽빽했다. 성불평에는 검고 흰 옷을 걸친 수천의 무사들이 양쪽으로 장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비무 하루 전, [결과는 어찌 될까?] [글세.... 구양조운이 강하다곤 하나 검후에겐 힘들지 않을까?] [모를 일이지...... 구양조운은 여전히 신비의 고수가 아닌가? 그의 능력이 사실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결과야 어찌 되든 내일의 일전이야말로 이제까지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없 을 대결전이 될걸세.] 바로 그 시각, 구양조운은 화북평의 초입에서 막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방원 십만 평의 방대한 평원, 한 사람, 그 평원을 등진 채...... 일신에는 피처럼 붉은 혈의를 걸친 햇살처럼 해맑은 풍도의 한 인물이 그의 시선을 파고들고 있었다. 구양조운으로서는 결코 낯설지 않은 인물...... [옥세개.....] 혈의인, 그는 바로 지옥신룡이라 일컬어지는 지옥련 팔인수뇌부의 한사람인 옥세개였 던 것이다. 구양조운을 바라보는 옥세개의 두 눈에 언뜻 한 줄기 한광이 스쳐 지나갔다. [오랜 만이오. 구양형.] [그렇구료.] [나는 총좌의 명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중이오. 구양형을 기다리고 있었 소.] 구양조운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옥형이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지금 막 했소.] [과연 구양형은 예나 다름없이 시원시원하구료. 헌데, 혹시 대접이 소홀하지 나 않았는지.....?] [옥형의 말씀은 감당키 어렵소. 한 사람을 위해 지옥군단 십이분맹을 모두 출 동시킨 것은 전례에 없었던 일.... 내게는 과분한 영광일 뿐이오.] 십이기(十二旗), 구양조운이 서 있는 평원의 주위 십이방위에는 열두 개의 깃발이 죽음의 사신 처럼 흐느적거리고 있고..... 그 십이기의 뒤로는 무려 일만여에 달하는 무사들이 귀광을 번뜩이며 유령처 럼 도사리고 있었다. 인의 벽을 연상시키는 물샐틈 없는 포진! 더구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오로지 살상을 위한 도구로만 키워진 살인병기이 니...... 옥세개의 입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미소였다. 잔인한 살소! [나는 혹시나 구양형을 실망시켜 드릴까 불안했던 터..... 이제 안심하고 구 양형의 무운을 빌겠소.] [고맙소.] 구양조운은 담담히 대꾸한 후 주위를 한 차례 쭉 둘러보았다. 일만 대 일, 그러나, 구양조운의 표정은 믿을 수 없게도 물처럼 고요하다. 마치 인세를 초월한 듯한 태도..... 그는 서서히 단장검을 뽑아들어 비스듬히 앞으로 향해 겨누었다. 나는...... 그 동안 무엇을 보았는가? 자연, 이것들에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렸는가? 보자, 보자꾸나...... 다시 한 번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것들을 보자꾸나.... 문득, 일만여의 지옥군단 십이분맹 고수들이 펼치는 대공세가 공기를 싸늘하게 갈라 놓기 시작했다. 슈파팟! 파아앗! 우두두........ 먼저, 뽀얀 황진을 피워올리며 그를 그대로 밟아 뭉개기라도 하겠다는 듯 맹렬히 치 달려오는 일진의 기마대! 말은 모조리 철마요, 기마수들은 길이가 일장이나 되는 긴 창을 수평으로 겨 누고 있었다. 구양조운의 얼굴이 석상처럼 무표정해졌다. 이어, 그는 한 줄기 빛살처럼 그들을 향해 스며 들어갔다. 하늘, 하늘은 무한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또한 끝이다. 하늘을 흉내낼 수는 없다. 닯을 수도 없다. 그저, 하늘을 본 뒤의 한 줄기 느낌이 있을 뿐이다. 순간, 구양조운의 단장검이 아무런 파공성도 없이 허공을 싸늘하게 갈랐다. [으아악!] [아악!] [크아악!] 검! 검이 춤춘다. 선명하여 아름답기조차 한 묵광이 한 차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비명은 끝도 없이 터져나왔다. [아아악!] [끄윽!] 허공에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몸서리쳐질 만큼 선명한 빛깔의 혈막, 또 혈막! 목을, 가슴을,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사람과 사람들! 이것은 마치 일종의 도살 같았고..... 이 도살은 길고도 길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서녘하늘로부터 핏빛 노을이 밀려들고 있었다. 노을, 구양조운은 노을을 사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작렬하는 밝디밝은 섬광을 그는 사랑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운명과도 같지 않은가? 타오르다 타오르다 못해 자신의 몸까지 불꽃으로 태우고 마는..... 그래서 그는 노을을 사랑했고 자신의 운명도 사랑했다. 다시, 그의 검이 허공에 긴 호선을 그었다. 검, 그것은 자연을 알고 천년세월을 벤 검이었다. [으아악!] [으으윽!] [흐윽!] 보라! 노을에 물든 하늘을 유유히 스쳐가는 일엽편운, [아악!] 계곡의 바위 틈에 꽁꽁 얼어붙었던 계류, [으윽!] [아아악!] 억겁의 세월동안 도도히 웅크린 채 대지를 지켜본 거산, [크----악!] [크으윽!]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숱한 신비와 겁륜을 끌어안고 흐르던 강, [끄윽!] [크악!] 순식간에 아귀처럼 짓쳐 들던 기마대는 전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옥신룡 옥세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 자......) 그가 알고 있던 구양조운이 아니다. 저 무예! 그가 알고 있던 인간의 무예가 아니다. 옥세개는 문득 한줄기 두려움이 가슴을 선선히 휩쓸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런 것을 털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이, 제삼의 공격!] 우두두..... 와아아..... 지옥련의 공격은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공을 조각낼 듯 날아드는 수천 개의 철륜 일월륜! 쇠깃이 달린 비차에, 이름도, 종류도 알 수 없는 수천의 대암기군! 뿐인가? 땅을 찢으며 뻗어오는 것은 지폭유성이요. 권결에 거부, 혈편, 마극 등! 허나, 구양조운은 그들을 보는 듯 마는 듯 고요히 노을을 올려다본다. 아직도 모르는가? 그래도 모르는가?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진 까닭을...... 그 이유를...... 네가 네 형제를 살상하고 네가 네 살을 찢어가는 무모한 살륙의 세월을! 그는 피식 웃었다. [한낱 불나비 같은 우리의 미친 삶을.] 한 순간, [야핫!] 온 평원을 쩌렁하게 울리는 대갈과 더불어 그의 몸이 유령처럼 공중을 치받고 올랐다. 다음 순간, 섬광! 마치 만 개의 태양이 일시에 폭발한 듯한 섬광이 공간을 자욱이 수놓았으며, 그 속에서 피어오른 수만 송이의 검화는 소나기처럼 중인들의 머리를 내려덮 었다. 비명은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수십 명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아아아악!] 이어, 마치 거꾸로 흐르는 폭포수처럼 튀어오르는 혈폭, 그것은 일순 노을을 자욱이 가릴 정도로 처절한 아름다움을 공간 가득히 피워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종내 피는 보이나 보다. 노을이 꺼지고 이미 어둠이 대지에 내려 덮인 지 오래..... 이미, 두 다리로 땅을 버티고 선 채 숨을 쉬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모조리 죽거나 얼이 빠져 도주한 것이다. 대신, 시체는 평원을 산으로 만들고 피는 풀밭은 강으로 만들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엇을 치겠다거나 하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휘두른다. 왜? 검이 손에 쥐어져 있으니까..... 구양조운은 느릿하게 검을 거두었다. 이미 넋이 구만 리 밖으로 달아난 채 멋대로 검무를 추고 있는 작자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다. 오히려 죽은 사람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구양조운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지옥신룡 옥세개, 그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구양조운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그는 구양조운을 향해 검끝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휘두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미수 목욕에 광동천계탕으로 삶을 이어가던 오만한 자신과...... 평원은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 평원을 구양조운은 끝내 천천히 걸어 건넜다. 그리고, 평원의 끝에 우뚝선 사람 하나를 그는 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검후 경설이었다. 終 章 사 랑 내 사랑의 아픔을 지니었건만 그 아픔 그리지 말라 하고, 내 이별의 독약을 맛보았건만 그 독약 말하지 말라 하도다. 멀리도 세상을 헤매인 끝에 한 사랑을 골랐건만, 그 사람 이름을 말하지 말라 하도다. 그녀의 발길에 이슬로 내리는 내 눈물도, 말하지 말라는 듯이 흐르는도다. 간밤엔 그 입이 하는 말을 내 귀로 들었건만, 그 말도 나더러 되내이지는 말라는 듯하였도다. 왜 그대는 나를 잊고 입술을 깨물었던가? 왜 그대는 내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대와 헤어지고도 나는 헤아리지 말라는 온갖 괴로움을 섬기었도다. 그대, 그렇게 창백한 눈으로 서 있을 때는..... 경설은 창백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그렇게 서 있었다. 한밤중에 소스라쳐 깨곤 했다. 적막한 공기가 그녀를 덮쳐 눌렀고 갑자기 썰렁해 보이는 방 안을 둘러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발작적으로 그녀의 뇌리를 강타하던 사실 하나,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그녀는 미친 듯 일어나 앉아 울곤 했다. 서럽게 서럽게 울곤 했다. 그런데, 불현 듯 이렇게 그와 마주 서고 보니..... 경설은 분명한, 새로운 자신을 보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눈부심을, 아름다움을, 눈빛보다 순결함을...... 이 평원과 이 밤과 무엇보다 구양조운 이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눈부시게 빛 나는 순결함을..... 그는 그 자리에 서 있는데, 그는 까딱도 하지 않는데...... 자신은 전신이 순결하게 타오르는 빛덩어리가 되어서 그를 향해 날아오름 을.... 아아.... 인정하고 있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사랑이었음을! 두 사람은 오랫 동안 마주보고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경설이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비무를 보이게 하는 것이 싫었거든요.] 그것은 바로 당신에 대한 내 순결을 더럽히는 거라구요, 하고 그녀는 마음속 으로 덧붙였다. 구양조운은 싱긋 웃었다. 그로선 보기 드물게도 밝은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너무 시간이 이른데? 우리의 비무는 내일이 아닌가....] 경설의 창백한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래요. 내일이예요.....] [그 내일까지 당신은 무엇을 할 생각이오?] [당신과 있고 싶어요.] 구양조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경설이 말했다. [애인이 되어서요.] 사냥꾼이 원행시 임시거초로 사용하는 것인 듯한 오두막은 비어 있었다. 그 한쪽에는 약간의 취사도구와 식량도 있었다. 경설이 식사를 준비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장만하고 그러기 위해 한 마리 토끼처럼 사방 을 뛰어 다녔다. 구양조운은 모닥불을 피웠다. 마른 짚을 가져다 자리를 만들었다. 설익은 고기 열 점에 보리밥, 식사는 조촐했으나 두 사람은 즐거웠다. 마른 짚더미 속에서 한 병의 술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은 하나의 행운 처럼 여겼다. 소녀의 볼이 발갛다. 수줍음, 약간의 훌, 그리고 모닥불의 온기....... 그런 것들, 소녀는 사내의 몸에 기대어 앙증맞도록 작고 흰 양손에 모아쥔 술잔을 들어 독한 액체를 조금씩 넘겨보는 것이다. [씨..... 이런 걸 남자들은 왜 마시나 몰라요.....] [바로 너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만났을 때, 정신을 가누기 위해서지. 술이 없 었다면 남자는 이미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칫!] 소녀가 머리를 약간 젖혀 사내의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으므로 그녀의 상큼한 머리카락내음이 기분좋게 콧속으로 스며 들었다. [괜히 해 보는 말이라 여겨지면서도 당신의 칭찬은 듣기 좋아요. 또 칭찬할 거 없어요.] [있지.] 사내는 소녀의 몸을 빙글 돌려 안았다. 그 바람에 소녀가 들고 있던 술잔이 쨍그랑 하고 부숴졌다. 사내는 쏟아진 술보다 더욱 붉은 소녀의 입술을 가까이 하며 속삭이듯 말했 다. [이 입술이야.] [으읍!] 가벼운 떨림이 여체에 일었다. 사내는 손끝으로 전달되어 오는 신선한 떨림을 음미하며 그녀의 교구를 으스 러지도록 껴안았다. 소녀의 팔이 그의 목에 휘돌려졌다. 문득, 예전의 억지 교합때 있었던 고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부숴져도 좋다. 검후.....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싫어, 싫다! 이는 내 삶 중에 최초로 자신에게 하는 은밀한 약속이야.....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한 자들의, 하나 이제는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열 망에 불타는 두 사람이어선가.... 모닥불 아래 복숭아빛으로 물든 그녀의 아름다운 동체가 드러나고..... 그 동체 위로 사내의 몸이 실렸을 때, 그들은 불에 덴 듯한 강렬한 쾌락을 느 꼈다. 손과 손이 얽히고...... 몸과 몸이 부딪치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고..... 너는 바로 사랑..... 그리고 이제는 마침내 우리..... [사랑해요..... 아아..... 사랑해요......] 휘이잉....... 차가운 북풍이 그들이 누운 오두막을 휩쓸어 지나고 있었다. 소녀는 참으로 격렬하게 온몸으로 사내에게 부딪쳐 왔고..... 그리고, 한 마리 귀여운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서 그의 젖을 만지며 쌔근쌔근 잠이 들 었다. 바람은 갈수록 거세어졌다. 햇빛도 없고 흐린 하늘이다. 두 사람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후 경설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냉혹한 도도함이 깔린 얼굴이었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두 개 계파의 영수....... 무예와 무도의 두 달인..... 하나 뿐인 검정의 자리를 더불어 바라보는 그들...... 하늘이 인간의 운명을 희롱하는가? 아니면, 하늘조차 이들을 시기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공존하며 살 수 있는 여건이 서로에게 하나도 없었다. 문득, 검후 경설의 붉은 입술이 무심하게 나풀거렸다. [시작할까요?] [시작하지.] 구양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먼저......] 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맹렬한 경풍이 서로에게 쏘아져 나갔다. 콰쾅-----! 최초의 접장! 이어, 무림의 역사를 온통 뒤바꿔 놓을 어마어마한 싸움은 드디어 그 장을 열었다. 쿠쿵! 콰콰콰------쾅------! 보라! 순식간에 경기에 휘말려 솟아 오른 풍사는 자욱히 하늘을 뒤덮었다. 경력과 경력이 맞부ㄷ쳐 솟구치는 소리는 땅을 그대로 허물 듯하고..... 장장권권에 펼쳐지느니 세상에선 이제까지 구경해 볼 수도 없었던 신기막측한 기공이요, 신공들이라! 구양조운, 그가 펼치는 것은 불선 양도의 장점이 융합된 양강지공이요, 검후 경설, 그녀가 전개하는 것은 사파방문의 신묘하고도 쾌첩한 음유지공, [타앗------!] 구양조운의 쌍장에서 장엄한 보랏빛 강기가 푹 솟구쳐 나갔다. 소림의 진산비예, 반야진기가 아니라면 천하에 또 어떤 신공이 이런 중후함을 보일 것인가? 검후 경설은 고운 아미를 치켜올리며 춤을 추듯 어지럽게 양손을 떨쳐냈다. 숨쉴 틈도 없이 연거푸 펼쳐지는 열 여섯의 장초식, [수라십육풍!] 뻐억...... 쿠쿠쿵-----! 가공할 경력이 부딪치는데도 두 사람은 서로 물러나기는 커녕 서로를 향해 맹 렬히 짓쳐들었다. 구양조운의 신형이 팽이처럼 빙글 돈다. 동시에, 그의 일신상에서 폭풍우처럼 쏟아져 나오는 오종의 광세기학들, [파옥수!] [금룡탄기!] [대운참마수!] [태극무상장!] [항마팔장!] 쿠쿠쿠------ 콰콰콰------ 장강대하 처럼 도도한 장력이 물밀 듯이 밀려간다. 순간, [호호호........] 낭랑한 교소와 함께 질세라 쌍수를 튕겨내는 검후의 자태, [금사혈장!] [역천마장공!] [번천대라참!] [혼령개신공!] [사극인혈수!] 쾅! 쾅! 쿠쿠쿵! 구양조운은 자신이 쳐낸 경력이 무형의 탄력에 의해 무섭게 되돌아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유향미리보의 구결을 밟아 아슬아슬하게 경력의 범위를 벗어났으 나....... 찌이익! 유령처럼 뒤따란 온 검후의 마종금나에 걸려 소맷자락이 날카롭게 찢겨 나갔 다. 구양조운은 불끈 오기가 치솟았다. [질쏘냐!] 두 차례 몸을 회전하며 손길을 피해내는 바람으로 우수를 쭉 펼쳐내니..... 파아앗---- 마치 실같이 가는 은빛 광채가 빛살처럼 치솟아 나왔다. [미공십팔류!] 검후 경설은 가슴이 섬뜩하여 황급히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으나 이미 소맷 자락엔 세가닥 구멍이 뚫려 나간 뒤! [좋은 수법이군요, 구양조운.] 콰쾅! 조금의 양보도, 일수의 후퇴도 허용되지 않을 필생의 접전! 기다림, 기다림만큼 지루하고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또 있을까? 기다림은 도박이다. 도박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도박이다. 주사위를 던져 보라! 하나부터 여섯까지의 숫자, 이것은 최소한 여섯 까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그렇지 않다. 오던가, 오지 않던가의 두 가지의 가능성밖엔 없는 것이다. 숭산 태실봉, 많은 사람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그들이 펼쳐낼 유사이래 가장 위대한 싸움을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두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왜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많은 인간들 속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쾅! 쾅! [윽!] 입 밖으로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이 솟아 나왔다. 솟아 오르는 혈막 속에..... 검후 또한 피를 토하며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채 옷은 갈기갈기 걸레쪽처럼 찢겨 나갔다. 그 새로 흐르는 선혈은 마치 이들이 핏속에서 뒹굴다 나온 혈인처럼 보이도록 만들었으니...... 구양조운은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슥 문질러 닦으며 웃었다. [이런 식으로는 천초에 일천 초식을 더해도 승부가 나지 않겠군.] 검후 또한 웃으며 말했다. [최후의 승부를 가름하잔 말인가요, 조운?] 이때 돌연, 삐익------삑! 기기익! 소름끼치는 괴음과 함께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땅이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경동과 강기에 진동되다 못해 금이 가고 부숴 지기 시작한것이리라. 기기긱------! 두 사람은 지그시 서로를 노려보며 검을 뽑아들었다. 검후는 천주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극강한 공력을 주입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발 아래서 금이 가던 균열이 저절로 멈춰지고 있었다. 구양조운은 검을 수평으로 뉘여 들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때다. 막 한 모금의 숨을 내쉬고 또 들이키려는 찰나에 돌연, 가공할 살기가 폭풍처 럼 밀려왔다. [윽!] 구양조운의 숨결이 막혀버렸다. 검후의 선기에 휘말린 것이다. 살기폭풍은 가공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가 싶더니 살갗마저 마구 갈라지기 시작했다. [으윽!] 절대절명! 검후의 고요히 서 있던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이 느릿하게 구양조운을 향하기 시작했다. 순간, 구양조운의 몸이 무엇에 밀리기라도 하듯 휘청 뒤로 굽어졌다. 그의 좌측 가슴 부위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심장으로 이어지던 몇 개의 혈관이 강맹한 진동으로 끊어져 버린 것이리라. [으윽!]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만약, 이 땀방울이 눈 속으로 흘러들어가리라도 한다면...... 설마하던 우려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개의 땀방울이 그의 좌측 눈으로 또르 르 흘러들어왔다. 설상가상 적으로, 그가 딛고 있던 지반이 돌연 푹 꺼져 나갔다. 순간, [하앗!] 검! 허공을 가른 검후의 검! 구양조운은 온 하늘이 일시에 찬란한 은빛 광채로 뒤덮이는 것을 느꼈다. 파파팟! 그것은 완벽했다. 그리고, 구양조운은 이토록 완벽한 검세가 하늘 아래 존재하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신의 은혜로움이 있어 저는 당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갈망하듯이 저도 행복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불면의 날들과 고통과 불행의 가시 끝에서 눈물겹게 행복이 피어나기 에...... 행복을 갖는 순간은 위대한 은혜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될 행복을 갖게 됩니다. 저는 모릅니다. 우리들의 혼례식이 얼마나 성대해야 하는지를..... 우리들의 혼례식에 하객이 얼마나 올 것이며, 제가 입을 혼례복은 얼마나 아 름다운 것이며, 우리가 뿌려야 할 것들은 또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를...... 저는 당신과 빈 사당에 들어가려 합니다. 신은 우리들의 머리 위 가장 가까이에 계시고 우리들은 지상의 가장 높은 곳 에 있게 될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거지소년은 황제의 침상에서 자도 용서를 받는다고 합니다. 가난한 우리 두 사람이 신의 발치에서 손을 잡게되는 것을 누가 비난하겠습니 까? 설혹 그 자리에서 죽게 한다 해도 행복할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그것을 바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저와 만나는 기쁨, 제가 당신과 만나는 감동 때문에..... 당신의 아내가 되기 이전에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이 고개를 돌리고 듣지 않으시려고 해도 저는 말하겠어요. 제가 혼례 후 당신의 것이 되면, 저는 형체도 없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맙니 다. 하지만, 당신이 제 것으로 되면, 저는 당신의 아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들어 주세요. 저도 예전엔 한 인간이었습니다. 당신과 똑같이 생각할 줄 알고, 행동할 줄 알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 습니다. 보세요. 저는 완벽한 한 개체를 마악 버리려 하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을 통하여 생각하고, 당신을 통하여 말하며, 당신과 함께 슬퍼하고, 당신과 함께 즐거워 하려고 합니다. 하물며, 제 뼛속에서 자라날 아기도 이러할 것입니다. 당신의 피가 제 피로, 저의 피가 아기의 피가 되며, 당신의 살이 제 살과 섞 여 아기의 살을 형성할 것입니다. 여자가 사랑을 할 때의 눈을 똑바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없다면 보아 주세요. 저는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이 그윽하고 슬픈 눈을...... 그러나 한없이 신비한 눈을...... 여자가 갖는 사랑의 눈은 깊은 애수를 담은 눈이며, 진정한 애정은 끝없는 괴 로움과 함께 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한 인간을 드리려고 합니다. 당신은 한 인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환한 눈으로 보시고, 환한 귀로 들으시고, 환한 머리로 생각하신 끝에 저를 소유하심이 분명하십니다.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되려합니다. 이 순간 하늘 아래에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사랑 뿐, 그외 우리를 괴롭히던 온갖 것들, 욕망의 덩어리들을 일체 배제합니다. 금은보화도, 명예도, 권력도......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품, 제 사랑은 세상을 좁협습니다. 당신만이 전 우주가 되었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을 탈취하지는 않겠어요. 당신이 사랑하시면 저는 여기에 남아 있겠지만, 당신이 저를 미워하시면 저는 달아나겠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저를 버릴 수 있지만 저는 당신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에게서 놓여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저를 싫어할 때 뿐입니 다. 여자가 남자의 품에서 용해되는 성질이라, 여자에게 한 가지 권리만을 주세 요.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파랑새는 저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에게 가지 않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파랑새는 진실로 원하고 필요호 하는 사람에게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줍 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하도록 만들진 마세요. 당신이 들어 주지 않는다면 영원히 안으로 안으로 굽는 꼽추가 될지 모릅니 다. 재앙이나 화가 싫다고 해서 당신을 피해간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제 얘기를 들으신 후 제가 미워지면 제 손을 잡는 것을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여기에 서서 또 기다릴 것입니다. 저를 알고 그의 손으로 제 손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을..... 그러나, 당신은 제 얘기를 들으시고 제 손을 잡아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손에 입맞추 고 무릎을 꿇겠습니다. 당신이 제 머리를 안으시고 제 이마에 순결한 입맞춤을 하여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품에서 맑을 눈물이 되겠습니다. 여자가 남자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듯이..... 모든 고백을 신처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세요. 당신의 꽃은 당신이 사랑함으로서 빛이 납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탈취하지는 않겠어요. 사랑은 샘물처럼 제 스스로 우러나는 것이기에..... 은빛 거품이 소스라치는 해변가에 아스라한 전율이 온몸을 줄달음치는 한 순 간, 구양조운은 뇌리를 스쳐 지나는 영감이 스키는대로 쭉 검을 내밀었다. 검, 이 검은 그리 빠르지도 않았다. 몹시 단순했다. 허나, 이 검은 지금까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아니, 인간 모두가 지니고 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완벽하게 베어 낼 수 있었다. 쿠쿠쿠----- 콰콰콰----- 우루릉----- 폭음은 폭음을 이어 천 리를 내닫는다. 그리고, 이 폭음은 바로 검을 위해 살아온 한 순수한 소녀와, 남을 위해 살아 온 한 응큼한 남자가 서로 지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소리이기도 했다.... 숭산 태실봉, 존경하는 십만 무림인 여러분! 당신들이 기다리는 두 사람은 종내 오지 않습니다! 애초에 기다림부터 없어야 했습니다. 검정! 이 이름은 바로 여러분 모두가 만들어 낸 환상이니까요..... 한 가지 몹시 궁금한 것은...... 구양조운이란 이 사내, 강호를 종횡무진하면서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정액을 퍼부 어 넣은 그 숱한 미녀들을 그 후에 도대체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을 향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검을 휘둘러 왔던 그 사나운 마지막 마누라는 도대체 어떻게 거느리고 살았을까........? < 大 尾 >